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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세계사의 중심축이 이동한다

by Casey,Riley 2021. 1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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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마키 도시아키 지음 / 사람과나무사이
이 책은 경제사를 중심으로 오랜 기간에 걸친 세계의 변모를 정리해서 보여준다. 저자는 인류는
총 3번의 글로벌리제이션을 경험했다면서, 그 중 제2차와 제3차에 주목한다. 그 두 차례의 글로벌
리제이션에 세계사의 중심축이 형성되고 작동해온 주요한 맥락과 크고 작은 집단과 민족, 국가의
거대한 부와 권력이 만들어지고 이동해온 과정을 통찰할 수 있게 해주는 열쇠가 들어 있기 때문
이라 말한다.

세계사의 중심축이 이동한다
다마키 도시아키 지음

▣ 저자 다마키 도시아키
오사카에서 태어나 도시샤대학교 문학부 문학과를 졸업했다. 동대학원 박사 과정을 중퇴하고, 교토산
업대학교 경제학부 강사를 거쳐 조교수로 근무했다. 이후 「북유럽의 상업과 경제 1550~1815년」이라
는 제목의 논문으로 오사카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경제사학을 전공한 그는 현재 교토산업
대학교 경제학부 경제학과에서 교수직을 맡고 있다. 주요 저서로『근대 유럽의 탄생-네덜란드와 영국』,
『해양제국 번영사』, 『유럽 패권사』, 『‘정보’ 제국의 흥망-소프트파워 500년사』, 『선생님도 모르
는 세계사』, 『선생님도 모르는 경제 세계사』, 『물류는 세계를 어떻게 바꾸는가』 등이 있다.

▣ Short Summary
아시아는 5,000여 년 인류 역사의 초반 상당 기간을 경제적으로 유럽보다 우위에 있었다. 예로 세계 6
대 문명 중 경제적으로 가장 번영을 누린 문명은 중국의 황하 문명이었다. 다른 지역과 달리 중국에는
중앙 집권적 통일 왕조가 이어졌고, 국가가 적극적으로 경제 정책에 관여해 단일시장이 형성되었기 때
문이다. 참고로 진시황은 ‘반량전’이라는 화폐로 거대한 중국의 경제통합을 이루어냈는데, 이는 유로화
를 매개로 경제 통일을 달성한 유럽 연합 모델보다 무려 2,000년 이상 앞선 성취였다.
경제적 패권이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넘어가게 된 것은 대항해 시대에 이르러서였는데, 포르투갈ㆍ에스
파냐 등으로 대표되는 유럽이 뱃길을 통해 전 세계에 진출하며 부를 축적하는 동안 중국을 비롯한 아
시아는 안주하고 있었던 반면, 유럽은 구텐베르크 활자혁명ㆍ종교개혁ㆍ산업혁명 등을 거치며 세계 패
권을 거머쥐었고, 이후 그 패권은 제1ㆍ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손에 완전히 넘어갔다.
이 책은 경제사를 중심으로 오랜 기간에 걸친 세계의 변모를 정리해서 보여준다. 저자는 인류는 총 3
번의 글로벌리제이션을 경험했다면서, 그 중 제2차와 제3차에 주목한다. 그 두 차례의 글로벌리제이션
에 세계사의 중심축이 형성되고 작동해온 주요한 맥락과 크고 작은 집단과 민족, 국가의 거대한 부와
권력이 만들어지고 이동해온 과정을 통찰할 수 있게 해주는 열쇠가 들어 있기 때문이라 말한다.
참고로 제1차 글로벌리제이션(Globalization)은 160만 년 전~25만 년 전 기간 호모에렉투스가 유라시
아대륙으로 퍼져나간 사건이며, 제2차 글로벌리제이션은 7만 년 전 호모사피엔스가 아프리카대륙을 나
와 세계 각지로 뻗어 나간 일이다. 그리고 제3차 글로벌리제이션은 15세기에 시작된 대항해 시대에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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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의 중심축이 이동한다

럽인들이 배를 타고 세계 곳곳으로 원정을 다니며 막강한 힘과 부를 축적했던 사건을 말한다.

▣ 차례
서문 - 한눈에 살펴보는 세계 경제 패권의 역사
PART 01 인류 역사에서 ‘아시아 우위 시대’가 길게 이어진 이유
1. 인류의 탄생
2. 문명의 전파
3. 농경 생활로 불거진 문제
4. 중국의 융성
5. 당에서 원으로 - 더욱 발전하는 중국
PART 02 유럽은 어떻게 세계를 제패했나
6. 고대 지중해 세계
7. 중세 유럽과 이슬람 세계
8. 이탈리아에서 포르투갈로 - 유럽의 무역 변화
9. 대서양 경제 형성과 유럽의 대두
10. 정보의 비대칭성이 적은 세계로 - 구텐베르크 혁명의 의미
11. 패권을 차지한 네덜란드와 유럽 경제의 발전
PART 03 아시아, 오랜 잠에서 깨어나다
12. 하나가 된 아시아 바다
13. 영국과 유럽 대륙의 공업화
14. 축소된 세계와 영국의 역할
15. 전신이 영국의 패권을 일구다
16. 미국이 주도한 20세기
17. 전후 아시아의 재부흥에서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까지
찾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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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의 중심축이 이동한다

세계사의 중심축이 이동한다
다마키 도시아키 지음

인류 역사에서 ‘아시아 우위 시대’가 길게 이어진 이유
인류의 탄생
인류의 탄생 과정: 현재 최초의 인류는 아프리카 중북부에서 발견된 사헬란트로푸스 차덴시스로 700
만~600만 년 전에 살았다고 추정된다. 이후 인류는 다른 생물과는 확연히 이질적인 진화 형태를 거쳤
다. 어떤 생물이나 진화한다. 그러나 인류 진화의 속도는 다른 생물과 비교해 유독 빨랐다. 사헬란트로
푸스 차덴시스에서 호모사피엔스까지 불과 700만 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출아프리카: 인류는 아프리카에서 출발해 세계 각지로 진출했다. 이 책에서는 이를 성서의 ‘출애굽’에
서 따온 ‘출아프리카’라는 용어로 설명하고자 한다. 호모에렉투스는 아프리카의 기후가 한랭해지자 아
프리카를 벗어나기 시작해 유라시아 대륙의 몇몇 지역으로 이주했다고 추정된다. 이를 인류 최초의 글
로벌리제이션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이 시기의 글로벌리제이션은 세계 각지에서 인류 진화로 발전하
지도 않았고 후대에 영향을 미치지도 못했다. 유라시아 각지로 이주한 호모에렉투스는 서서히 멸종했
으므로 현생 인류가 호모에렉투스에서 직접 탄생했다고는 볼 수 없다.
현생 인류인 호모사피엔스는 두 번에 걸쳐 출아프리카를 단행했다. 첫 번째는 15만~10만 년 전이고,
두 번째는 7만~5만 년 전이다. 이 출아프리카로 인류는 말 그대로 세계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바로
인류의 두 번째 글로벌리제이션이다. 호모사피엔스가 주도한 글로벌리제이션이야말로 인류 역사에 어
마어마한 영향을 미쳤다. 인류의 인구는 출아프리카를 거쳐 현재 76억 명을 넘어섰다. 생물의 역사에
서 예나 지금이나 이 정도로 급격하게 개체 수가 늘어난 종은 없다.
유럽인의 ‘재발견’: 15세기 대항해 시대부터 시작된 제3차 글로벌리제이션은 아프리카를 벗어나 세계
각지로 흩어진 인류를 유럽인이 ‘재발견’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따라서 제2차, 제3차 글로벌
리제이션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처음 두 번의 글로벌리제이션은 주로 육로로 이루어졌고 세 번째
글로벌리제이션은 해로로 이동하며 발생했다. 제3차 글로벌리제이션을 주도한 유럽인의 세계 ‘재발견’
은 가난한 유럽인이 부유해지기 위해 세계무대로 진출할 수밖에 없었던 데서 생긴 현상이다.
문명의 전파
6대 문명: 세계사 교과서에서는 흔히 ‘4대 문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
스, 황하 문명을 말한다. 여기에 양자강 문명, 아메리카 대륙의 고대 문명인 메소아메리카 문명을 더해
6대 문명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 책에서는 6대 문명을 대상으로 삼았다. 6대 문명이 발전하는 동안
에도 출아프리카 행렬은 이어졌다. 일반적으로 출아프리카 현상은 인류가 남미 대륙 남단에 도달하면
서 끝났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나, 태평양의 섬처럼 아직 인류의 발길이 닿지 않은 지역도 남아 있
었다. 정착하는 사람들이 문명을 형성하는 한편, 출아프리카 현상이 계속되었고 끊임없이 이동하는 사
람들도 있었다. 그러므로 문명의 전파는 출아프리카와 동시에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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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경 생활로 불거진 문제
인류는 농경을 선택했다: 수렵 채집민이 6대 문명 같은 문명을 경험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마도 농
민은 까마득한 세월에 걸쳐 수렵 채집민이 도달하지 못한 생활수준을 경험했을 것이다. 즉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농민의 생활수준은 수렵 채집민을 따라잡지 못했고, 질병이 큰 폭으로 늘어났을 것이다. 그
런데 사람들은 왜 먹고살기 편한 수렵 채집을 포기하고 힘들게 일해야 하는 농경을 택했을까? 이는 인
류사 최대의 수수께끼 중 하나다. 그 수수께끼를 풀 실마리가 출아프리카에 있다. 인류는 아프리카를
나와 여러 지역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만일 인류가 어느 한 곳에 터를 잡고 살지 않는다면 출아프리카
는 영원히 계속되어야 했다. 그래서 아프리카를 떠난 현생 인류는 언젠가 한 곳에 정착할 수밖에 없었
는데, 아프리카에서처럼 나무 열매를 따 먹고 동물을 사냥하던 생활이 더는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므
로 출아프리카야말로 정착 농경 생활을 하게 만든 원인이 아니었을까.
중국의 융성
중국 경제는 어떻게 융성했을까?: 6대 문명 가운데 메소아메리카 문명은 다른 문명과 고립되어 있을
뿐 아니라, 성립 시기도 비교적 늦다.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는 오리엔트라는 하나의 문명권을
형성했는데, 이 오리엔트에서는 다양한 국가가 난립했고 전쟁이 끊이지 않아 통일 국가가 생겼다 멸망
하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했다. 한편 인더스 문명 또는 인도 문명도 비슷한 상황에서 장기간에 걸쳐 하
나의 통일 국가를 이루지 못했다. 반면 황하 유역에서는 일찍부터 통일 국가가 완성되었고, 통일 왕조
는 중국 경제라는 무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할을 도맡았다. 다시 말해 근세나 근대 유럽과 마찬가지
로 국가 주도로 경제 성장이 이루어졌다. 이때까지 양자강 유역은 그 권역에 편입되지 못했다.
하 왕조에서 전국 시대까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왕조는 하(夏) 왕조였다. 하 왕조의 뒤를 이은 은
(殷)은 서기전 1550년경~서기전 11세기에 존속한 왕조로 여겨진다. 은의 뒤를 이어 서기전 11세기에
주(周 또는 西周) 왕조가 세워졌다. 서기전 770년에 주가 낙읍(洛邑) 천도를 계기로 춘추전국 시대에
접어들었고, 중국은 500년 이상 이어진 전란의 시대에 돌입했다. 그러나 춘추전국 시대를 단순히 전란
의 시대로만 보면 중요한 경제 발전을 간과하게 된다. 이 시대에는 철제 무기가 보급되었고, 철제 농
기구와 우경이 널리 퍼져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었다. 또한 농업과 수공업이 활발해지며 청동 화폐가
도입되었다. 아무튼 춘추전국시대 중국에서는 괄목할 만한 경제 발전이 이루어졌다. 춘추전국 시대를
통일한 나라는 진(秦)이다. 이미 중국 경제는 세계적 관점에서 봤을 때 수준이 높았으며 탄탄한 경제적
기반을 물려받은 진은 중국의 경제 수준을 한층 키워 놓았다. 진나라의 왕 정(政, 서기전 247~221년
재위)은 법가 사상에 바탕을 두고 중국을 통일했다. 이후 도량형과 문자, 화폐까지 통일했다. 그리고
중앙 집권적 군현제를 채용해 단순한 왕이 아닌 ‘황제’의 지위에 올라 우리가 아는 이름인 시황제(始皇
帝, 서기전 221~서기전 210년 재위)라 칭하게 되었다.
당에서 원으로 - 더욱 발전하는 중국
수나라 제도를 계승한 당: 618년 당나라 건국은 고종 이연(618~626년 재위), 태종 이세민(626~649년
재위) 부자가 이루어냈다. 당은 정치와 경제 체제 모두 수나라가 닦아놓은 토대를 그대로 이용하는 행
운을 누릴 수 있었다. 위진 남북조, 수나라와 마찬가지로 당은 율령제를 채택했다. 쉽게 말해 ‘황제가
토지와 백성을 지배한다’는 사상을 체계적인 제도로 완성한 것이다. 세제는 조용조제와 균전제를, 병제
로는 부병제를 택했다. 그리고 관리 등용 제도로 수와 마찬가지로 과거제를 실시했다. 이는 상당히 중
앙 집권 국가의 모습을 갖춘 것으로, 같은 시대 유럽에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당
은 수가 건설한 대운하 덕분에 화북과 화남 경제권을 통합할 수 있었고, 이로 인해 대운하 변에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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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은 변주의 지위가 상승했다. 당시 당나라 수도 장안은 인구 백만이 거주하는, 유라시아 대륙을 통틀
어 가장 규모가 큰 도시이자 수많은 외국인이 드나드는 국제 도시였다.
원대의 중국 / 경제 성장과 역참제: 1206년 칭기즈칸이 건국한 몽골 제국은 급격히 판세를 키워나가
유라시아 대륙 중앙부를 차지한 대제국으로 성장했다. 몽골 제국은 수많은 전쟁을 치르는 한편 경제
성장을 촉진하는 제도를 마련하는 데에도 소홀함이 없었다. 경제를 발전시키려면 국가는 도로를 비롯
한 교통망을 정비해야 한다. 교통망은 경제학에서 말하는 공공재인데, 몽골 제국은 공공재를 매우 효
율적으로 공급했다. 쿠빌라이 칸 시절의 역참제를 잠시 살펴보자. 몽골에서는 수도를 중심으로 주요
도로를 따라 40킬로미터마다 민가를 참(站)으로 삼고 관령에 따라 여행하는 관리와 사절 등에게 말과
식량을 제공하게 했다. 참은 필요한 물자뿐 아니라 사람을 제공해 시중들 의무가 있었고, 토지세를 면
제받았지만 말을 제공해야 했기에 경제적 부담이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역참제는 수도를 중심으로 유럽과 아시아를 아우르는 규모로 정비되었다. 제국 내의 교통이 안전하고
편리해지자 이슬람 상인이 대상(隊商)을 이루어 육로 무역이 활발해졌다. 마르코 폴로도 역참제가 없
었더라면 대도까지 찾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튼 역참제는 20세기에 시베리아 철도가 개통할 때까
지 유럽과 아시아를 가장 빠르게 오가는 정보 전달 통로 역할을 했다. 이를 통해 몽골 제국의 지배자
들이 상업 활동, 나아가 정보 전달을 얼마나 중요하게 인식했는지 가늠할 수 있다.
팍스 몽골리카와 유라시아 상업 발전: 1246년 쿠빌라이 칸은 대도를 수도로 정하고 1271년에 국호를
원으로 고쳤다. 1266년에는 카이두의 난이 발생했는데, 이 반란은 1301년까지 이어지다 카이두가 이
끄는 대군이 패배하며 카이두가 사망해 종말을 맞았다. 카이두의 반란을 끝으로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 몽골의 평화)가 찾아왔다. 유라시아 대륙의 상당 부분이 원의 지배 하에서 안정을 찾았고,
동서 교류가 활발해지며 상업이 발전했다. 그리고 몽골 제국이 만든 평화는 지중해 무역의 증가로 이
어졌고, 지중해 무역은 인도양과 동남아시아 무역으로 이어졌다. 유라시아 대륙의 상업이 아시아 바다
(인도양ㆍ동남아시아)와 통합되어 더욱 큰 상업 네트워크를 실현한 것이다.

유럽은 어떻게 세계를 제패했나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이 아시리아 제국에 통합되며 오리엔트 세계가 탄생했고, 유럽은 독
자적인 문명을 보유하게 되었다. 유럽 문명은 지중해에서 태동했고, 지중해 세계의 주역은 고대 그리
스인, 페니키아인, 고대 로마인이었다. 그런데 지금껏 페니키아인의 중요성이 과소평가되곤 했는데, 지
중해 세계를 하나의 상업권으로 통합한 이가 바로 페니키아인이다. 한편 7세기 무렵 이슬람이 지중해
세계를 침입했다. 이슬람이 유럽에 들어옴으로써 지중해는 더 큰 이슬람 세계의 일부로 기능했다. 중
세 유럽의 세계는 이슬람 세력에 둘러싸인 보잘것없는 변방에 지나지 않았다.
한편 바이킹의 활약으로 유럽의 북구와 남부, 즉 북해와 발트해와 지중해가 하나의 상업권으로 통합되
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유럽의 경제 수준은 아시아에 비해 한참 뒤처졌다. 그러던 유럽에 상승 기운
이 형성되며 바야흐로 역전의 발판을 마련해갔다. 포르투갈이 희망봉을 돌아 아시아로 향하는 경로를
개척하면서부터 유럽은 맹렬하게 아시아의 뒤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 이탈리아가 향신료를
수입했다고 해도 동남아시아의 말루쿠 제도에서 아시아 상인, 이슬람 상인의 손으로 홍해까지 운송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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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의 중심축이 이동한다

제품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이탈리아로 운송하는 데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포르투갈 신항로
개척 이후 유럽은 유럽 선박에 상품을 싣고 아시아로 운송하게 되었다. 유럽은 해로를 통한 물류를 야
금야금 장악했고 대서양 경제 형성에 성공했다. 예로 서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를 신세계로 데려와 그
들이 플랜테이션 농업으로 사탕수수를 재배해 생산한 설탕을 내다 팔았다. 그렇게 대서양 경제 개발로
유럽에 설탕과 커피 등의 소비재가 수입되었고 유럽인의 생활은 한층 풍요로워졌다. 또한 유럽은 정보
의 비대칭성이 적고 시장 진입 장벽을 낮춘 사회를 만들었다. 유럽은 대외 진출과 함께 유럽의 상업
체제를 수출했다. 즉 유럽은 세계의 구조를 유럽에 유리한 방향으로 재편성했다.
이탈리아에서 포르투갈로 - 유럽의 무역 변화
선진 지역 이탈리아: 상업의 부활로 이탈리아는 유럽 경제를 앞에서 이끄는 선진 지역으로 거듭났다.
이탈리아는 금융업을 중심으로 상황에 따라 국왕에게까지 돈을 빌려주었다. 그리고 다른 나라보다 한
발 앞서 은행 제도가 발전해 세계 최초의 은행인 산 조르조 은행이 1407년 제노바에 창설되었다. 다
만 당시 이탈리아의 은행 제도는 오늘날과는 달랐다. 환전과 대출, 투자 기능은 크게 발전했지만, 금융
중개 기능(사람들이 맡긴 돈을 회사에 빌려주는 기능)은 발달하지 않았다. 또 이탈리아는 이른 시기에
해상 보험업이 발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확률 이론이 빠져 있어 발전에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은행법과 보험업 양쪽에서 이탈리아의 발전 자체에 결정적 한계가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즉 중세와 근세 이탈리아의 경제 체제는 근대적 체제로 발전하지 못했다.
유럽의 향신료 수입: 향신료가 동남아시아의 말루쿠 제도에서 인도양, 홍해를 지나는 기나긴 항로를
거쳐 이집트에서 이탈리아 선박으로 운송되었는데, 중세 이탈리아 번영의 상당 부분은 이 향신료 무역
에 의존했다. 하지만 향신료 시장으로서 유럽은 협소했고 더구나 유럽 내부에서만 운송을 담당한 이탈
리아의 역할은 세계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꽤 미미한 것이었다. 그러다 1498년에 포르투갈인 바스쿠
다가마가 희망봉을 돌아 인도로 항해하는 경로를 발견하면서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이제 이탈리아 대
신 포르투갈이 유럽 향신료 운송의 주역으로 부상했다. 포르투갈인은 이탈리아인과 달리 향신료를 직
접 자국 선박으로 말루쿠 제도에서 유럽까지 운송할 수 있었다. 포르투갈의 뒤를 이어 네덜란드, 영국,
덴마크 등이 후발 주자로 뛰어들어 자국 선박으로 아시아 상품을 수입했다. 이 부분에서 이탈리아는
눈에 띄게 뒤처졌다. 더욱이 유럽 각국은 점점 자국 선박을 이용해 자신의 제품을 아시아로 수출하는
길을 열었다. 아시아 해운업에 유럽이 참여하는 형세가 갖추어진 셈이다.
포르투갈 제국의 대두와 상인: 유럽과 아시아와의 접점을 만들어내는 역할은 이탈리아에서 포르투갈로
넘어갔다. 포르투갈은 인도를 비롯해 동남아시아에 식민지를 세웠다. 그러나 차츰 상당수의 식민지를
네덜란드와 영국에 빼앗겼고 아시아에서 포르투갈의 지위는 급격하게 곤두박질쳤다. 하지만 상인이 직
접 조직을 꾸려 포르투갈인은 상업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또 19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페르시아만
에서부터 마카오에 걸친 지역에서는 포르투갈어를 공용어로 사용했다.
대서양 경제 형성과 유럽의 대두
대서양 경제 형성의 초석: 유럽인은 유럽 내부에서 채굴되는 금만으로는 부족해 서아프리카에서 금을
수입해야 했다. 그런데 유럽인이 금을 얻는 데 있어서 이슬람교도인 베르베르인이 주도권을 쥐고 있던
사하라 종단 무역은 큰 걸림돌이었다. 강력한 이슬람 세력에 밀려 사하라 종단 무역에 참여할 수 없었
던 유럽인은 울며 겨자 먹기로 이슬람 세력에게서 금을 살 수밖에 없었다. 결국 아프리카산 금을 직수
입하려면 해로를 이용해야 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아프리카산 금을 확보하기 위한 유럽인의 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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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의 중심축이 이동한다

력이 대항해 시대의 서막을 연 셈이다. 사하라 사막에서 이슬람의 손을 거치지 않고 유럽인이 직접 금
을 수입한다는 목표 하나만 앞세워 포르투갈의 항해왕 엔히크는 바다로 나갔다. 1415년,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대륙 북부의 세우타를 획득했다. 최초로 획득한 유럽 밖의 식민지였으며, 이를 계기로 유럽
의 제국주의가 시작되었다. 포르투갈은 1444년에 카보베르데, 이듬해인 1445년에 베르데곶에 도달했
다. 포르투갈인이 서아프리카 일대를 포르투갈령 기니(기니비사우)로 삼은 때는 1446년이었다. 1480년
에는 말리 제국 수도였던 통북투에 이르렀다. 이처럼 유럽은 바닷길을 통해 바깥 세계에 진출했고, 바
야흐로 유럽이 아시아보다 경제력에서 앞서는 계기를 마련했다. 유럽인은 유럽의 배를 타고 아시아로
항해해 상품을 수입했으며 시간이 지나자 아시아에 상품을 수출하게 되었다.
대서양 경제 형성과 노예무역: 16세기에 접어들면서 포르투갈을 중심으로 서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신세
계로 수송했고, 늦어도 17세기에는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노동자로 쓸 노예무역 형태가 완성
되었다. 노예무역은 16세기는 에스파냐령 아메리카 시대, 17세기는 브라질 시대, 18세기는 영국령 카
리브해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19세기까지는 여전히 브라질의 비중이 컸다.
대서양 무역에서 포르투갈의 역할: 포르투갈의 역할은 노예 수송에 그치지 않았다. 포르투갈령 브라질
에는 다수의 세파르디(이베리아반도에서 추방된 유대인)가 이주했다. 17세기 중엽 브라질의 일부가 일
시적으로 네덜란드령이 되자 이번에는 네덜란드의 세파르디가 이주했다. 그리고 세파르디 간에 전수된
설탕 제조법은 카리브해 네덜란드령은 물론 영국령과 프랑스령 서인도 제도로 퍼져 나갔다. 신세계에
서 대량으로 설탕이 생산된 것은 포르투갈의 사탕수수 재배법이 카리브해까지 전해진 이후부터다. 서
인도 제도에서 브라질에 이르기까지 대량의 사탕수수(설탕)가 재배(생산)된 배경에는 포르투갈 출신 세
파르디 유대인이 큰 역할을 담당했다.
영국의 독자성: 포르투갈령 브라질뿐 아니라 카리브해의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령 식민지에서도 설탕
을 수입했다. 대서양 세계는 설탕을 산출하는 설탕 수출 기지였다. 그러나 설탕에 만족할 영국이 아니
었다. 영국은 설탕은 물론 서인도 제도와 북미 남부, 나아가 브라질에서 노예가 재배한 면화를 본국으
로 수입해 면직물로 가공한 후 영국 선박에 실어 세계로 수출했다. 대서양 무역에서 이처럼 조직적인
체계를 완성한 나라는 영국이 유일했다. 영국은 이 체계를 통해 최초 공업 국가로 발돋움했다.
정보의 비대칭성이 적은 세계로 - 구텐베르크 혁명의 의미
정보의 비대칭성과 경제 성장: 정보의 비대칭성이 지나치게 커지면 시장은 원활하게 기능하지 못한다.
또 정확한 정보가 빠르게 전파되는 사회가 경제 발전에 적합하다. 즉 각각의 상인은 정보의 비대칭성
을 이용해 이익을 얻지만, 사회 전체로 봤을 때 이 비대칭성을 축소하지 못하면 경제 활동에 지장이
생긴다. 기업 활동과 경제 전체의 관계는 이러한 논의로 귀결될 것이다. 그런데 유럽은 정보의 비대칭
성이 적은 사회를 구축했고, 유럽 상인의 시스템을 유럽 밖의 세계로 수출했다. 유럽은 어떻게 정보의
비대칭성을 줄이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시스템을 전 세계로 확산시켜 정착시킬 수 있었을까?
구텐베르크 혁명: 인류는 수천 년 전부터 문자를 사용했지만, 초기에는 한정된 사람들만 읽고 쓸 줄
알았다. 한편 서양은 기본적으로 성직자가 문자를 독점했다. 수도원에서는 필사본을 작성했고 소수의
사람 사이에서만 유통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바꾼 인물이 요하네스 구텐베르크(1398~1468)다. 그가
발명한 활판 인쇄술이 세계를 뒤집어 놓았다. 구텐베르크의 혁명으로 소수의 사람이 지식을 독점하는
시대가 종말을 고했다. 문자 정보는 독점적 재산이 아니고 일반인이 보유하는 재산으로 전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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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의 중심축이 이동한다

패권을 차지한 네덜란드와 유럽 경제의 발전
안트베르펜에서 암스테르담으로: 안트베르펜으로 남미에서 대량의 은이 유입되었고, 이로 인해 16세기
후반에 안트베르펜은 유럽 최대의 국제 상업 도시로 거듭났다. 그런데 많은 안트베르펜 상인이 암스테
르담로 이주했고, 그렇게 안트베르펜의 상업 기술이 암스테르담으로 이식되었다. 네덜란드는 발트해
무역에서 얻은 이익을 활용해 1609년 암스테르담에 대체 은행을 설립하고 외환 업무를 시작했다. 이
은행에서 북유럽 거래 대부분의 결제가 이루어지며 네덜란드에는 자동으로 자금이 유입되었다. 17세기
중엽 네덜란드는 황금시대를 맞이했다. 네덜란드가 유럽 경제의 패권(이 시점에서는 아직 유럽 내부에
머물렀다. 유럽 경제가 확대되어 세계 경제가 된 시점의 패권 국가는 영국임)을 차지할 수 있었던 데
는 발트해 무역과 그 이익의 큰 비중을 차지한 암스테르담 대체 은행의 공이 컸다.
네덜란드와 유럽의 경제 성장: 17세기 네덜란드는 유럽 경제의 중심이었고, 당시 암스테르담은 유럽
금융 시장의 중심으로 거액의 부가 축적되었다. 네덜란드는 일반인까지 공채에 투자할 정도로 투자가
보편적인 사회였다. 네덜란드인은 유리한 투자처를 찾아 네덜란드 국내보다 해외로 투자했는데, 암스
테르담은 상업 정보가 집중되는 곳이었기에 투자 정보도 얻기가 쉬웠으며, 네덜란드 정부의 권력이 약
해 네덜란드에 사는 사람들의 투자를 통제할 힘도 없었다. 한편 네덜란드는 영국을 주요 투자처로 선
정해 잉글랜드 은행이 발행하는 국채를 사들이기도 했는데, 네덜란드의 투자는 바야흐로 영국이 대영
제국으로 성장해 (세계 경제 전체의) 패권을 거머쥐게 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아시아, 오랜 잠에서 깨어나다
근세가 되자 인도양에서부터 동남아시아, 하와이 진주만에 이르는 바다가 느슨하게 통합되었다. 이 통
합에는 다양한 유형의 상인이 참여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은 집단은 이슬람 상인이었다.
유럽은 이윽고 아시아의 네트워크를 이용했고 아시아 바다의 유통망을 장악했다. 한편 중국은 조공 무
역 체제로 물류를 중시했는데, 이 체제가 중국 경제 쇠퇴의 주요 요인으로 작용했다.
한편 영국은 서인도 제도와 북미 남부 식민지에서 면화를 재배해 본국에서 완성품인 면직물로 가공하
는 체제를 형성했는데, 영국의 면직물은 기계를 이용해 생산했기에 수작업에 의존하던 인도산 옥양목
보다 생산성이 뛰어나 전 세계로 팔려나갔다. 그리고 영국은 증기선의 보급으로 세계의 시간 거리를
좁혔고, 전신으로 세계를 더욱 가깝게 만들었다. 참고로 세계 전신 관련 기기의 대부분은 영국제였고
유럽과 미국이 공업화에 성공해도 결제를 위해서는 영국제 전신을 이용해 런던에서 금융 거래가 이루
어져야 했다. 따라서 영국은 세계 경제가 발전하면 할수록 수수료 수입으로 이익을 벌어들였다.
그러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며 영국 중심의 체제가 붕괴한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경제적 이익
을 얻은 미국의 지위는 크게 상승했고,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미국은 세계를 주도하는 국가로 우
뚝 섰다. 참고로 미국은 국제기관과 다국적 기업을 이용해 차근차근 패권을 장악했다. 전후 세계에서
는 아시아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먼저 일본이 고도 경제 성장을 이룩했지만, 거품이 꺼지며 제자리걸
음을 해야 했다. 뒤를 이어 중국, 인도, 한국, ASEAN 각국이 부상했다. 그러나 원래 아시아가 유럽보
다 풍요로웠기에 전후 아시아 국가의 약진은 일종의 ‘재부흥’으로 보아야 한다. 이제 중국이 ‘일대일로
(一帶一路)’를 내세우며 세계를 장악하고자 나섰다. 그러나 세계 경제의 활동이 활발해지며 중국에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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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의 중심축이 이동한다

동으로 돈이 모여드는 체제를 개발하지 않고는 중국이 가야 할 길은 아직 한참 멀다.
하나가 된 아시아 바다
갤리언선이 담당한 멕시코 은 수송: 중국은 세금에 필요한 은 운송을 에스파냐에 맡겼는데, 이는 고양
이에게 생선 가게를 맡긴 꼴로 물류 시스템을 경시한 처사였다. 그리고 이러한 중국의 태도는 훗날 중
국의 치명적인 약점이 된다. 아시아의 바다는 인도양이든 동남아시아든 이슬람 상인이 하나로 만들었
다. 그리고 태평양은 갤리언(Galleon)선이 하나로 묶었다. 아시아의 바다는 물류 측면에서 보면 아시아
인의 바다가 아닌 유럽인의 바다로 변모했다. 유럽인은 우선 유통망을 확보하고, 차츰 유럽산 상품을
아시아로 운송했다. 유통망 확보는 훗날 유럽의 승리로 이어졌다.
영국과 유럽 대륙의 공업화
시장 경제의 발전 / 대서양 경제와 면 생산: 근세 유럽에서는 거래소가 만들어지고 가격표와 상업신문
이 작성되며 시장 경제가 착실히 몸집을 불렸다. 이것은 그때까지 가계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생산과
소비가 시장 경제를 목표로 생산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시장 경제의 발전
이 공업화(산업 혁명)의 기반을 형성했다. 한편 대서양 무역은 기본적으로 서아프리카에서 신대륙으로
노예를 제공하고 신대륙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해 설탕을 생산하는 시스템이었는데, 영국은 여기서 만족
하지 않았다. 서인도 제도뿐 아니라 북미 식민지 남부에서 노예에게 면화를 재배하게 해 본국에서 면
직물 완성품으로 가공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이처럼 영국은 먼 신대륙에서 원재료를 조
달하여 면직물을 공장에서 생산하는 데 성공하면서 세계 최초의 공업 국가로 거듭났다.
유럽 대륙의 공업화: 영국이 물꼬를 트자 유럽 대륙에 공업화의 물결이 밀려들었다. 이에 대해서는 최
초로 공업화에 성공한 벨기에와 제2차 산업 혁명을 추진한 독일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벨기에의 공업
화에는-다른 유럽 국가도 마찬가지지만-철도가 큰 역할을 담당했다. 런던에서 외채를 발행하고 자금을
조달해 벨기에, 독일, 프랑스를 연결하는 새로운 교통로인 철도가 개설되었다. ‘철의 라인’으로 불린 이
철도는 거대 은행이던 소시에테 제네랄과 벨기에 은행이 후원했다. 이 두 은행은 제철, 석탄, 기계, 유
리, 아마 방적, 탄광 철도, 운하 등 새로운 분야에 수많은 주식회사를 신설, 개편했다.
유럽의 공업화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나라는 독일이다. 독일은 1834년에 독일 관세 동맹을 체결해 독
일 통일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했다. 그리고 철도 건설에 박차를 가했는데, 1872년에 이르면 철도 영업
킬로미터 수가 영국을 웃도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독일은 하천을 이용한 물길과 이 철도망을 이용한
육로로 전 국토가 하나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리고 독일에서는 화학 공업과 전기 공업이 눈부시게 발
전했다. 이는 면직물 공업을 중심으로 하는 영국 산업 혁명과 다른, 제2차 산업 혁명이라 부를 만한
괄목할 성장이었다. 19세기 말 독일에서는 고등공업 전문학교와 공과 대학이 발전했다.
한편 독일과 영국 공업화의 큰 차이는 식민지의 존재였다. 영국은 광대한 식민지를 거느리고 신세계에
서 수입한 면화를 본국에서 완성품으로 가공해 면직물로 수출하는 시스템을 형성했다. 그러나 빈약한
식민지를 보유한 독일은 영국과 같은 시스템을 구축할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중화학 공업에 투자했고
인공적으로 나일론 같은 합성 섬유를 개발했다. 아무튼 공업화로 이룬 혁신은 국경을 넘어 이동했다.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새로운 산업과 시장이 확대되며 진화해갔다. 일종의 시장 통합이 발생해
거의 모든 지역에서 일 인당 소득이 증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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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의 중심축이 이동한다

미국이 주도한 20세기
브레턴우즈 회의: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국의 승리가 확실시되자 전후 국제금융과 통화 체제를 결
정하기 위한 회의가 1944년 7월, 미국의 브레턴우즈에서 열렸다(브레턴우즈 회의). 참고로 제2차 세계
대전의 전장이었던 유럽 경제는 피폐해졌고, 브레턴우즈 회의는 세계의 주도권이 영국에서 미국으로
넘어갔음을 판정하는 회의였는데, 이 회의에서 국제통화기금(IMF)과 국제무역기구(ITO), 국제부흥개발
은행(세계은행, IBRD) 창설을 결정했다(ITO는 실현되지 못했다). 그리고 금 1온스를 35달러로 고정하
는 금 본위제를 채용했다. 달러와 연동해 각국 통화 교환 비율이 결정되는 고정 환율제도가 구축된 것
인데, 이는 미국 달러에 세계 경제의 기축 통화 임무를 부여한 것이다.
브레턴우즈 체제와 패권을 차지한 미국: 미국은 두 번의 세계 대전을 거치며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챙
긴 유일한 국가이기도 했는데, 이로 인해 전후의 미국이 압도적인 경제력을 지닌 국가로 등장했다. 그
런데 미국이 세계 경제를 지배하는 방법은 영국과 전혀 달랐다. 미국은 자국의 힘뿐 아니라 국제기관
을 이용해 세계 경제의 주도권을 장악하려 했다. IMF와 세계은행이 바로 미국이 패권을 차지하는 데
첨병 역할을 하는 국제기관이었다. 미국의 경제력이 압도적으로 강했기에 국제기관을 손바닥 위에 올
려놓고 주무를 수 있었다. 1946년에 세계 GNP의 절반 가까이를 미국이 차지했다.
IMF는 가맹국 경제에 간섭할 수 없지만, IMF에 가장 많은 금액을 출자한 국가는 미국이다. 반면 세계
은행은 국제연합의 독립기관이다. 그리고 IMF의 가맹국이 아니면 세계은행에 가입할 수 없다. 따라서
현실에서는 IMF의 힘이 세다. 또 세계은행 총재는 미국이 선출하게 되었다. 이처럼 브레턴우즈 체제는
미국의 패권을 상징하는 체제이며 이러한 기조는 지금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미국은 영국과 달리
광대한 식민지를 거느린 제국을 형성하지 않았다. 그 대신 이 나라는 전 세계에 군대를 파견해 미국의
정치 체제, 나아가 경제 체제를 유지하고자 했다. 그리고 미국의 다국적 기업은 이러한 미국의 보호막
안에서 세계 각지로 진출했다. 세계적인 다국적 기업의 대다수가 미국 기업이었다.
미국 쇠퇴의 시작: 1950~1973년의 미국 경제 성장률은 평균 2.2퍼센트였다. 프랑스는 4.0퍼센트, 독
일은 4.9퍼센트, 이탈리아는 5.0퍼센트, 영국은 2.5퍼센트, 일본은 8.0퍼센트였다. 당시 선진국 가운
데 미국이 가장 낮다. 물론 미국 경제의 규모가 워낙 컸기에 경제 성장률이 낮은 게 당연했다. 그러나
미국의 경제력이 저하되고 자본이 국외로 유출된 것은 사실이었다.
고정 환율제는 미국 경제가 압도적으로 강했기에 유지할 수 있는 제도였다. 당연히 미국 경제력이 약
해지면 이 체제는 위태로워진다. 그날은 느닷없이 찾아왔다. 1971년 8월 15일, 미국의 닉슨 대통령
(1913~1994년)은 고정 비율로 달러 화폐와 금의 태환을 일시 정지한다고 발표했다. 이 발표는 닉슨
쇼크라고 불릴 정도로 전 세계에 어마어마한 충격을 주었다. 이는 미국 경제가 힘을 잃었음을 보여주
는 사건이며, 통화 체제의 일대 변혁을 의미했다. 전후 세계를 형성한 IMF 체제의 종언이기도 했다.
게다가 미국 경제력 저하를 분명히 드러내는 사건이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석유 가격을 결정
하는 주체는 ‘메이저(majors)’라 불리던 미국을 중심으로 한 거대 석유회사였다. 세계 석유 시장을 쥐
락펴락하던 이들이 가격결정권을 잃어버리는 날이 왔다. 1973년 10월 6일에 제4차 중동 전쟁이 발발
하자 이를 계기로 석유 수출국 기구(OPEC) 가맹 산유국 중 페르시아만의 6개국이 원유 공시 가격을
1배럴 당 약 3달러에서 약 12달러로 올리겠다고 결정했다(제1차 석유 파동). 미국은 석유 가격결정권
을 상실했다. 이는 미국 다국적 기업의 패배였고 미국 패권의 쇠퇴를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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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의 중심축이 이동한다

전후 아시아의 재부흥에서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까지
아시아의 재부흥: 역사적으로 보면 유럽에 비해 아시아의 경제력이 세다가 근세에 역전되고 현재는 아
시아가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이렇게 보면 아시아의 ‘부흥’이 아니라 ‘재부흥’이라는 표현이 옳
다. 다만 아시아의 재부흥은 미국이나 유럽이 만든 구조를 이용했고 독자적인 구조를 형성하지 못했다
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따라서 남들이 벌인 판에 뛰어들어 영리하게 일구어낸 성공이라는 점을 전제
로 하고, 어떻게 아시아가 다시 일어설 수 있었는지를 묻는 것이 중요하다.
떠오르는 아시아 / 중국의 일대일로: 아시아 경제는 1990년대에 들어서고 나서야 비로소 성장 궤도에
올라섰다. 중국, 인도, 그리고 ASEAN이 높은 경제 성장률을 기록했다. 다만 인도의 경제 성장률이
2015년에 8.01퍼센트, 2016년에 7.11퍼센트인데 비해, 중국은 각각 6.90퍼센트와 6.70퍼센트로 약간
낮다. 하지만 중국의 GDP가 아시아 국가 중에서 압도적으로 높다. 그러나 일인당 GDP는 2017년 기
준으로 74위(8,643달러)로 그다지 높지 않다. 그러나 국가 단위로 보면 중국 GDP는 현재 세계 2위를
달리고 있다. 어쨌든 중국은 과거에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였다.
따라서 중국이 다시 과거의 영광을 회복해가는 현상은 이상하지 않은데, 중국 정부의 재도약을 위한
정책으로 ‘일대일로(一帶一路)’가 있다. 2013년 시진핑 국가 주석이 ‘실크로드 경제 벨트’와 ‘21세기 해
상 실크로드’를 포함한 ‘일대일로’구상을 정식으로 검토했다는 점만으로도 일대일로가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포괄하는 물류 시스템 재구축 정책이라는 사실이 확실해 보인다. 이 정책이 성공하면 아마 유
라시아 세계의 물류가 육로와 해로에서 중국을 중심으로 통합될 것이다.
패권 국가의 시스템과 중국: 패권 국가란 ‘무엇이 옳은가?’, 다시 말해 ‘누가 정의인가?’를 결정할 수
있는 국가를 말한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자동’으로 수익이 들어오는 시스템은 패권 국가의 중요한 특
징이다. 세계 여러 나라는 적어도 국제적으로 거래하려고 하면 패권 국가가 구축한 시스템을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일대일로’로 중국은 패권 국가로 거듭날 수 있을까? 중국의 위안화는 지역적
통화로는 통용될지언정, 아직 세계 통화 역할은 하지 못하고 있다. IMF의 특별 인출권에서 차지하는
위안화 비율은 여전히 낮다. 그리고 중국은 현재 중진국으로 ‘중진국의 함정’이라 부르는 경제 성장률
정체기에 빠져 있다. 본래 중국은 저임금으로 세계의 공장 역할을 자처했으나, 중국이 가진 값싼 노동
력이라는 우위성이 현재 점점 사라지고 있다. 공장은 ASEAN과 인도, 방글라데시처럼 임금이 더 낮은
나라로 이동하고 있다. 중국은 ‘일대일로’로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려 한다.
‘일대일로’의 의미: 중국 경제가 현재 직면한 문제로는 내륙부와 연안부의 임금 격차와 공해 문제를 들
수 있다. 본래 ‘일대일로’로 이 두 문제 해결을 목표로 했어야 옳지만, 중국 정부의 현재 모습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의사가 없어 보인다. 이 부분이야말로 ‘일대일로’의 중요한 결점이다. 또 패권 국가란
경제 활동이 활발해지며 ‘자동’으로 이익을 획득할 수 있는 나라를 일컫는다. ‘일대일로’는 아무리 뜯어
봐도 이익을 창출하는 시스템 구축을 목적으로 한 정책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일대일로’ 정책
으로는 중국이 전 세계 주도권을 거머쥐지 못하리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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