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각별히 그리스인들과 페르시아인들이 무슨 이유로
싸웠는지 밝히기 위해 탐구의 결과를 발표 (히스토리
에스 아포덱시스) 한다
고대 그리스의 통치자들이
신탁을 받던 델포이 신전
오흥식 지음
역사
헤로도토스 (B.C. 484~425?)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토스
역사의 아버지 1)라 일컬어지는 헤로도토스(Herodotos, 기원전 484년~425년?)에 관해서는 사실 정확
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대강 알려진 것으로 헤로도토스는 이오니아 지방과 인접해 있는 할리카르나
소스(지금의 터키 보드룸) 명문가에서 태어나 나중에 당쟁에 휘말려 망명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
다. 그는 특히 여행을 많이 했는데,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에 걸친 긴 여행을 하고, 이를 통해 세계
적인 넓은 시야를 갖게 됐다는 것 정도가 알려져 있다.
10세기 경에 출간된 《스다》 사전에는 비교적 구체적인 사실들이 언급돼 있다. 그에 따르면 헤로도
토스의 아버지는 릭세스, 어머니는 도리오였으며 테오도로스라는 형제와 당시 유명한 서사시인이었던
파니앗시스를 종형제로 두고 있었다고 한다. 출생지인 할리카르나소스는 카리아 지방의 그리스 식민
지로 기원전 10세기 경에 그리스 본토인 펠레폰네소스 반도에 있는 아르고리스 지방의 옛 도시 트로
이센으로부터 온 이주민이 건설했다.
생년월일 역시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대략 페르시아 전쟁이 한창이던 기원전 490년에서 480년 사이
라는 것이 정설로 알려졌다. 비극작가였던 에우리피데스와 거의 동년배인 셈이다. 그가 태어날 당시의
지도자는 여왕이었던 아르테미시아 1세였다. 그후 그의 아들(혹은 손자)인 리그다미스가 독재를 일삼
아 반란이 일어났고, 헤로도토스는 거기에 연루돼 사모스 섬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종형제로 전해지는
(다른 곳에서는 숙부라고 하기도 한다) 파니앗시스가 이때 목숨을 잃었다.
첫 번째 시도는 좌절됐지만, 다시 일어난 반란으로 리그다미스의 독재가 끝나고 민주정이 시작됐다.
기원전 454년 초에 할리카르나소스가 델로스 동맹에 참여한 것으로 보아 두 번째 반란이 일어난 것은
그 즈음으로 추정된다. 오랜 망명에서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헤로도토스는 곧 여행을 시작한다. 그 기
간 등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거의 10여 년간 근방을 비롯, 굉장히 넓은 지역을 여행한 것으로
전해진다.
페르시아 제국의 대부분 지역을 방랑했고, 이집트로 가서 남쪽의 엘레판티네(아스완)까지 내려갔으며,
리비아, 시리아, 바빌로니아, 엘란 왕국의 수사, 리디아 및 프리지아도 방문했다. 또한 헬레스폰토스
해협(지금의 다르다넬스 해협)을 따라 비잔티움까지 올라갔고,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로 가서 북쪽으
로는 도나우 강 너머까지, 동쪽으로는 흑해의 북해안을 따라 스키티아까지 여행했으며, 돈 강 유역을
지나 좀더 내륙으로 들어갔다.
특히 아테네에서는 상당히 오랫동안 머물렀으며 그 문화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페리클레스 통치기
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던 아테네에서 그는 많은 문화 및 정계 인사들과 친분을 나눴다. 특히 유명
1) 헤로도토스를 역사의 아버지(pater historiae ) 라고 처음으로 부른 사람은 기원전 1세기 로마 최고의 문호 키케로
(Cicero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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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사
한 비극작가인 소포클레스와 친밀했으며 《역사》에 보이는 문학적 소양 역시 아테네의 문화 분위기
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444년경 헤로도토스는 아테네가 중심이 되어 이탈리아 남부에 식민도시를 건설하는 일에 참
여하기 위해 투리로 떠난다. 기원전 6세기 말에 멸망한 고도(古都) 시발리스의 유적지에 새 식민도시
를 건설하는 일이었는데, 당시 아테네의 통치자였던 페리클레스의 발의에 의한 것이었다. 그의 《역
사》에 언급된 마지막 사건은 기원전 430년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그후 언제 어디서 그가 죽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역사》에서 펠레폰네소스 전쟁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전쟁이 한창이던 기원전
431년부터 몇 년 동안은 아테네에 머물렀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런 사실로 그의 사망시기를 기원전
430년 이후이리라 짐작할 뿐이다.
《역사》 이야기
헤로도토스의 고향 할리카르나소스는 카리아 지방의 그리스 식민지였다. 아버지의 이름이 카리아계
고, 어머니의 이름이 그리스계인 걸로 봐서 그는 혼혈이었던 걸로 추정된다. 고향은 도리스계였지만
기원전 5세기경에 이미 이오니아어로 쓰인 비문이 발견될 정도로 북방이었던 이오니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렇게 여러 민족과 문화가 혼합된 지역에서 자란 헤로도토스가 자유분방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던 것은 당연하다. 게다가 이오니아는 인류사상 처음으로 과학적인 관찰 및 사고방식을 창출해낸
이오니아의 영향을 받았으니 더 말할 나위없다. 헤로도토스는 본토 그리스인의 고집스런 중화사상도
없었고, 평생 이민족과 접촉하고 여행을 즐겨 편견없이 자유롭게 사고했다.
이런 배경은 그의 저술에서도 잘 드러난다. 페르시아인을 비롯, 바빌론, 이집트, 스키타이인의 관습을
기술할 때도 공정하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쓰고 있다. 고대에 창작된 최초의 위대한 이야기체 역사서
인 《역사 Historiae》(《페르시아 전쟁사》라고도 함)의 서두에서 헤로도토스는 이렇게 말한다. 각별
히 그리스인들과 페르시아인들이 무슨 이유로 싸웠는지 밝히기 위해 탐구의 결과를 발표(
, 히스토리에스 아포덱시스) 한다 (I.1) 하지만 소위 페르시아 전쟁을 기록하겠다고 하면서도 그
것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동방의 여러 민족의 역사나 민속, 지리 따위를 상세히 언급하고 있다.
이런 서술 방식은 동방의 역사를 다뤘던 헤카타이오스 같은 로고그라포이(산문작가, 서사시 작가 에
포포이오스)과 비슷하지만 산문작가들을 최초의 역사가라고 말하지 않고 헤로도토스를 최초의 역사가
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 헤로도토스 저작의 가치가 있다. 산문작가들은 듣거나 읽어서
알게 된 동방 여러 나라의 역사를 그들의 책 속에 기록했지만, 그것은 비판정신을 가지고 진위의 여
부를 따져 진짜로 일어났다고 판단되는 것을 기록한 것은 아니다. 산문작가들은 동방역사를 그리스인
들에게 전한 전달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헤로도토스가 산문작가들처럼 동방을 두루 여행했지만, 그의 글은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라
탐구의 결과(
, 히스토리에스 아포덱시스) 로 나온 것이다. 그는 보고 듣고 읽은 것
을 단순히 전달한 것이 아니라 사실을 알아내려고 애썼던 것이다. 사건에 대한 진실을 도무지 알아낼
수 없을 경우에는 상반된 자료들을 병기하기도 하며, 증거가 충분하지 않은 경우 판단을 유보하거나
자신의 추측을 추측이라고 밝히며 기록한다. 실제로 일어났던 일을, 또는 사실을 구명해내려고 애쓴
다.
헤로도토스가 역사의 서두에서 두 민족이 전쟁을 벌이게 된 원인을 찾아내고자 저술하게 됐다고 기
술했는데, 그 원인을 찾기 위해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정확히 알아야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것 외에도 구비전설, 설화, 풍문 등을 모두 담고 있다. 이같은 태도의 기본 원칙은 이
것이 믿기는 사람은 이집트인의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될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내가 취하고
있는 원칙은, 각각그이 사람이 말하는 바를 들은 그대로 서술하는 것이다. (제2권) 혹은 내 의무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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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지고 있는 것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전적으로 믿어야 할 의무가 내게 있
는 것은 아니다. 이런 나의 주장은 본서 전체에 걸쳐 적용될 것이다. (제7권)
하지만 헤로도토스의 책에서 오늘날의 역사책과 같은 일관된 사관 등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듯 하다.
책 곳곳에서 설화나 신탁 등을 지나치게 길게 인용하고 있는 것을 봐서 그는 여전히 신탁이나 예언의
진실성을 아주 솔직하게 믿고 있었던 듯 하다. 하지만 이것이 《역사》의 매력을 반감시키지는 않는
다. 오히려 두꺼운 책을 아주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재미있는 이야기로 만들어준다.
▣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이 책의 내용은 저자 스스로 책 앞에서 밝히고 있듯 그리스와 페르시아가 어떤 원인에서 전쟁을 하
게 됐는가 하는 내용에 중점을 둔다. 본격적인 서술은 최초의 역사적 인물인 기게스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리디아의 왕 기게스는 리디아의 왕위와 왕비를 함께 수중에 넣는다. 하지만 그 후손인 크로
이소스에 이르러 그 패권을 페르시아에게 빼앗긴다. 동방에서 페르시아에 세력을 키워나가고 있었다
면 서방에서는 그리스가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성장한다. 이오니아의 여러 도시의 반란에 아
테네가 가담하고 사르디스를 파괴하면서 페르시아와 그리스는 적대적인 관계로 접어든다.
다리우스 통치기에 페르시아는 그리스를 공격하지만 유명한 마라톤 전투에서 패전함으로써 정복이
좌절되고, 그 다음 통치자인 크세르크세스가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한다. 이 책의 뒷부분은 크세르크세
스의 그리스 원정이 주요 내용을 이루는데, 살라미스와 플라타이아 전투, 작은 전투로 미칼레 전투,
세스토스 함락 등이 다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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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읽기
제 1권
서두에서 헤로도토스는 강국들만이 아니라 약소국에 대해서도 똑같은 비중으로 기술하겠다고 말한
후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왜냐하면 일찍이 강대했던 나라 대부분이 오늘날에는 약소국이 됐고, 우리 시대에 강대
하게 된 나라도 전에는 약소국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번영이 결코 오래 계속
되는 것은 아니라는 이치를 알고 있는 나로서는 대국도 소국도 똑같이 다루면서 서술해
가고 싶다(I.5).
한 인간이나 한 국가의 번영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그 번영이 히브리스를 야기시키고 곧 신의 네
메시스를 불러올 것이기에. 헤로도토스는 수많은 나라의 흥망성쇠도, 즉 인간의 역사의 추이라는 것
도 히브리스- 네메시스 개념으로 단순화시켜 파악하고 있다. 2)
우선 할리스강(오늘날의 키질이르마크 강) 서쪽에 위치한 리디아 제국의 크로이소스 왕이 히브리스로
말미암아 몰락한다. 그 왕은 이오니아의 그리스인들을 정복해 조공을 강요하거나 혹은 우호 관계를
맺은 최초의 이방인으로,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그 왕에 의해 그리스인들은 처음으로 자유(自由)를 빼
앗기게 됐다(I.6).
헤로도토스는 크로이소스의 왕가가 어떻게 개창됐는지 말한다. 크로이소스의 5대조 선조인 기게스는
왕의 일개 시위로서 왕위를 찬탈했다. 그가 새로운 왕이 돼도 되는지 리디아의 사람들이 신에게 물어
본다.
신탁은 기게스를 리디아의 왕으로 인정했기 때문에 기게스의 왕권은 확고해졌다. 다만
델포이의 무녀는 기게스의 5대손에 이르러 헤라클레스 가문(=왕위를 찬탈 당한 가문)의 보
복이 행해지게 되리라 부언했지만, 리디아의 국민도, 역대왕들도 이 예언이 실현될 때까지
는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I.13)
크로이소스에 이르러 리디아는 번영을 맞는다. 그는 그리스의 현인 솔론을 왕궁에 초청한 후, 이 세
상에서 가장 행복한 자가 자기라고 생각하면서 솔론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자가 누구냐고 질
문을 한다. 솔론이 다른 사람들의 이름을 말할 뿐 그를 거명하지 않자 화가 난 크로이소스는 아테네
에서 온 손님이시여, 그렇다면 우리의 번영이 당신에게는 대단치 않게 생각돼 보통 사람들의 번영과
도 견줄 바가 못된단 말이요? 라고 언성을 높인다. 그러자 솔론은 저는 신을 이해하고 있는데, 신은
질투심이 강하시며 인간을 괴롭히기를 좋아하십니다(I.32) 라고 말하면서 떠난다. 지나친 번영은 신의
질투를 사게 되며 그것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사람의 번영 자체가 신의 질투를 사는 것은 아니다. 솔론이 크로이소스의 궁전
을 떠난 후 헤로도토스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그러나 솔론이 떠나자 신으로부터의 큰 징벌이 크로이소스에게 떨어졌다. 필자(=헤로도
토스)가 생각하기로는, 크로이소스가 사람들 중에서 자신이 가장 행복하다고 생각했기 때
문인 것 같다(I.34).
2 ) 김진경, 〈
아이스킬로스와 헤로도토스〉, 《
서양사론》 13호(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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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로도토스는 번영으로 인해 그 사람이 품게 되는 생각 때문에 신의 질투를 사게 된다고 생각했다.
지나친 자신감에 빠진 크로이소스는 리디아와 페르시아의 경계인 할리스강을 건너 페르시아로 침입했
으나, 기원전 546년 페르시아에게 멸망당하게 된다.
헤로도토스는 크로이소스의 몰락을 오만에 대한 신의 징벌로 설명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기게스의
온당치 못한 왕위찬탈에 의해 이미 예정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기게스는 자신의 죄과를 자신의 대에
치르지는 않았지만 그의 5대손을 통해 치르게 된 것이다.
정해진 운명은 신조차 피할 수 없는 것이다. 크로이소스는 5대 선조(=기게스)의 죄값을
치른 것뿐이다. 그는 헤라클레스 왕가의 일개 시위의 몸이면서 여자의 반역에 가담해 주
군을 시해하고, 주군 대신 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지위에 올랐던 것이다. (I.43)
크로이소스의 몰락에는 크로이소스 자신의 탓만이 아니라 선조의 죄업도, 아마도 더 크게, 한 원인으
로 작용했던 것이다.
이오니아인들은 리디아가 페르시아에 정복되자 곧 키로스에게 사자를 보냈다. 크로이소스에게 예속
돼 있을 때와 동일한 조건으로 키로스를 따르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키로스는 예전에 자신이
이오니아인에게 사자를 보내 크로이소스에 대해 반란을 일으켜 줄 것을 요청했을 때에는 들어주지 않
더니, 일이 끝난 지금에 와서 자신을 따르려 하는 것을 못마땅해했다. 결국 키로스는 사모스 섬을 제
외한 이오니아 지방을 모두 평정한다.
제 2 권
헤로도토스는 키로스의 부왕인 캄비세스의 이집트 침입 건을 계기로 삼아 기원전 ?세기 이집트의 첫
파라오 민(=메네스)으로부터 기원전 7세기에 이르는 이집트의 역사, 지리, 풍습 따위를 소개한다. 나일
강 악어의 습성이라든가, 미이라 제조법, 기자에 있는 대(大)피라미드에 관해 기술하기도 한다. 그는
이집트는 나일강의 선물이라는 널리 알려진 말을 한다.
적어도 지각 있는 자라면 설사 예비 지식이 없다 하더라도 한 번만 보면 알 수 있는 바
지만, 오늘날 그리스인이 배로 왕래하고 있는 이집트 지역은 이른 바 나일 강의 선물이라
할 만하다(II.5). 3)
제 3 권
페르시아 왕 캄비세스의 이집트 정복, 사모스 섬의 독재자 폴리크라테스와 이집트 왕 아마시스 사이
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폴리크라테스 일화에서도 그의 히브리스- 네메시스적 역사관이 잘 나타나 있
다. 사모스 섬의 지배자 폴리크라테스의 성운은 이집트 왕 아마시스의 주의를 끌기에 충분했다. 이에
불안을 느낀 아마시스는 폴리크라테스의 행운이 갈수록 더 성대해짐을 보고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서
사모스로 보냈다.
3 ) 이집트는 나일강의 선물 이라는 말은 고대로부터 널리 사용된 말이며, 특히 헤로도토스의 선배인 헤카타이오스가
이미 그의 《
이집트사》에서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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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시스가 폴리크라테스 전하께 한 말씀 올립니다. 친교를 맺은 동맹국이 행운을 누리
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 것은 기쁜 일이긴 합니다만, 신들이 질투심이 많다는 걸 잘 알고
있는 소생으로서는 전하의 지나치게 성대한 행운이 즐겁지만은 않습니다(III.40).
기원전 520년, 페르시아의 계략에 빠진 폴리크라테스는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제3권의 후반부에는
캄비세스의 죽음과 다리우스의 등극, 다리우스에게 조공을 바치는 나라들(이에는 아라비아와 인도도
포함된다)과 다리우스의 초기 치세가 기록돼 있다.
제 4 권
다리우스는 흑해 지방인 스키티아를 침공하려고 계획했다. 스키티아는 목초와 물이 풍부한 평원이고
아주 많은 하천이 흐르고 있다. 특히 목초들은 다른 지방의 목초보다 가축의 담즙 분비를 촉진시키는
작용이 강하다. 스키티아가 숭배하는 신은 제우스, 게아(땅의 신) 등이고, 왕족은 포세이돈에게도 희생
을 바친다. 목재가 부족해 고기를 삶을 때는 짐승의 뼈를 태운다. 전쟁을 할 때는 처음 죽인 적의 피
를 마시고 살해한 적병의 머리를 가져와 머리 가죽을 벗겨 손수건을 만들기도 한다. 다리우스는 스키
티아를 공격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이오니아인 등을 이용해 진격했다. 한편 다리우스는 리
비아로의 진격도 준비하고 있었다. 리비아는 유목인으로 고기를 먹고 우유를 마시지만 소고기는 먹지
않는다. 리비아의 복식에서 그리스 신상의 의상인 아이기스가 유래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집트를
출발한 페르시아군은 바르케를 9개월에 걸쳐 포위하고 공격로로 지하도를 팠지만 공격했지만 모두 격
퇴당하고 말았다.
제 5 권
기원전 499년 이오니아의 그리스인들은 밀레토스의 아리스타고라스를 중심으로 다리우스에 대해 반
란을 일으키게 되는 경위를 기술하고 있다. 아리스타고라스가 아테네에 도착한다.
아테네인은 아리스타고라스에게 설복돼 군선 20척을 이오니아인에 대한 원군으로 파견
하기로 의결했고... 이 함대 파견이 그리스와 페르시아 사이에 벌어진 불행한 사건의 발
단이었다. (V.97)
그러나 이오니아 반란은 즉각 페르시아인들에 의해 진압된다. 그런데 인용문에서도 언급됐듯, 아테네
와 스파르타가 이오니아 반란에 군대를 보냈다는 사실은 다리우스로 하여금 후에 이오니아의 반란이
재연될 것을 미리 막고자 그리스에 침입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다리우스는 그리스 본토의 도움 없
이는 이오니아가 반란을 일으킬 수 없다고 보아 예방전쟁 차원에서 그리스에 침입하게 된 것이다.
제 6 권
이오니아 반란에 관한 기술이 계속된다. 기원전 492년 그리스 북부인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를 침공
한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는 남쪽의 그리스 도시국가들에게도 사신을 보내 항복의 증거로 흙과 물
을 바치라고 했고 많은 폴리스들이 이에 따랐으나,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거부했다. 그러자 기원전 490
년 다리우스는 (마르도니우스를 지휘관으로 임명해) 가 600척의 전함과 대병력을 파견했다. 그러나 아
테네의 유능한 장군 밀티아데스는 마라톤 평야에서 페르시아군을 꺾는다. 페르시아군은 본국으로 철
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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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사
제 7 권
기원전 480년 그리스에 대한 페르시아의 왕 크세르크세스의 친정(親征)이 여담 없이 집중적으로 기술
돼 있다. 왕위를 계승한 크세르크세스는 부왕의 그리스 침공 실패를 자신이 이루기 위해 철저히 준비
한다.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의 대왕 크세르크세스는 그리스 원정의 감행 여부를 놓고 고심하고 있
었는데, 원정을 만류하는 대왕의 숙부 아르타바노스는 다음과 같이 간언한다.
전하께서도 잘 알고 계시는 바와 같이 동물 중에서 신의 번개에 맞아 죽는 것은 오직
눈에 띄게 큰 것들 뿐으로, 신께서는 그렇게 해서 큰 것들이 지나치게 우쭐거리지 않도록
하십니다. 작은 동물들은 조금도 신께 불손한 행위를 저지르지 않습니다(VII.10).
아르타바노스는 강대해져 번영을 맞고 있는 페르시아가 신이 페르시아 민족에게 정해주신 영역의 한
계를 넘어서다가 몰락할 것을 염려하고 있다.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의 대왕 크세르크세스가 그리스에 침입하게 되는 원인을 헤로도토스는 두 가
지 차원에서 설명하고 있다. 우선 VII권의 5- 11장에서 그는 소위 역사의 아버지답게 이오니아의 이반
을 도와줬던 아테네에 대한 페르시아의 복수라든가 페르시아의 영역을 더 넓히려는 대왕의 야심과 같
은 인간적 차원의 동기들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동기만으로는 대왕은 원정 여부를 결
정하지 못하다가 원정을 포기한다. 그런데 12장에서는 대왕이 왜 그리스 원정을 떠날 수밖에 없었는
가 초인간적 설명이 뒤따른다.
원정을 포기하기로 결정한 날, 그날 밤에 대왕의 꿈 속에 거대한 사나이가 나타나 원정을 결행할 것
을 지시하고 사라진다. 대왕은 그 꿈을 신이 보낸 것이라고 믿고 마침내 원정을 감행한다. 크세르크세
스는 헬레스폰트에 가교를 설치해 페르시아 대군을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건너가게 할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폭풍으로 말미암아 최초의 가교가 파괴되자 격노한 크세르크세스는 감독관을 참수하고 도망
노예에 대한 형벌로서 바다를 징벌한다. 그는 헬레스폰토스에 대해 태형 300대를 가한 후 한 쌍의 족
쇄를 채우고 낙인까지 찍는다.
그대는 위험하고 짜디 짠 강물이기에 아무도 그대에게 희생물을 바치지 않으리
라 (VII.35)
그리고 이렇게 선언한다. 헬레스폰토스는 강이 아니라 바다의 일부이므로 짠 강물이라 한 표현은
몽매라기보다는 미망에 사로잡힌 비정상적인 심리상태라 할 수 있을 것이다.4) 크세르크세스는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신이 그어준 경계인 헬레스폰트 해협을 건넌다.
예전에 다리우스가 그리스의 각 도시에 사자를 파견해 항복의 표시로서 흙과 물을 받아오도록 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빼고는 모든 도시들이 흙과 물을 바쳤다. 아테네는 다리우스의 사자를 처형 갱
에 집어넣고 스파르타인은 우물 속에 밀어넣었다. 그런데 스파르타에서는 위의 사건이 있은 후부터
오랫동안 좋은 점쾌가 나오지 않았다. 이런 사태에 곤혹을 느낀 스파르타인은 자진해서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칠 자가 있느냐는 공고를 냈고 두 스파르타인이 이에 응했다. 두 사람은 크세르크세스에게
로 가서, 스파르타에서 다리우스의 사자를 처벌한 데 따른 대가를 치르겠다고 자발적으로 나섰다. 두
사람이 페르시아의 수도 수사로 가던 도중 아시아 연해 지방 일대의 군사령관인 페르시아 사람 히다
르네스를 방문했다.
4 ) 김진경, 〈
헤로도토스에 있어서 역사의 원인〉, 《
서양사론》 16호(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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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다르네스는 두 사람에게 페르시아 왕의 신하가 돼 그리스를 지배해보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한다.
이 말에 대해 두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히다르네스 각하, 저희들에 대한 각하의 충고는 사태를 충분히 알지 못하신 데서 나온
것입니다. 각하께서는 한쪽 면에 대해서는 잘 알고 계시지만, 다른 한쪽 면에 대해서는 모
르고 계십니다. 즉 노예(奴隷)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이해하고 계시지만, 자유(自由)라
는 것에 대해서는 아직 경험한 일이 없으시기 때문에 그것이 단지 아니면 쓴지 모르고 계
십니다. 그러나 각하께서도 일단 자유의 맛을 알게 되신다면, 자유를 위해서는 창뿐만 아
니라 손도끼라도 들고 싸워야 한다고 우리에게 권하게 되실 것입니다. (VII.135)
크세르크세스의 그리스 침입 소식을 접하고 당황한 아테네인들은 어찌하면 좋을지 신탁으로 신에게
물어본다. 그러자 무녀는 다시 다음과 같은 신탁을 내렸다.
팔라스(=아테나 여신)가 아무리 애원하고 지혜를 발휘하여 탄원한다 하더라도,
올림포스에 계신 제우신 신의 마음을 움직이지는 못하리라.
하지만 나는 여기에서 재차 너희들에게 철석 같이 확고하게 말하리라.
케크롭스의 성역(聖域)(=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과 키타이론의 거룩한 골짜기가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이
적의 손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멀리 바라보시는 제우스께서는 아테나 여신의 간청을 들
어주시어
나무 성채로 하여금 그대와 그대의 자식들을 안전하게 지켜주도록 할 것이니.
그대는 육로로 육박해 오는 기병과 보병의 대군을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지 말고
적에게 등을 돌려 퇴각하라.
그러나 적과 전투에서 맞붙게 될 날이 오리니.
오오! 성스런 살라미스여,
데메테르의 선물5)이 파종될 때, 혹은 그것이 거두어들여질 때
그대는 여인네들의 자식들을 없애게 되리라. (VII.141)
신탁 사절이 귀국해 이것을 국민에게 보고하자 그 신탁의 진의를 둘러싸고 여러 의견이 나왔다. 그
중 한 일파는 신이 말한 나무 성채는 배를 가리킨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만사를 제치고 무엇보다도
먼저 함선을 정비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다만 나무 성채를 배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일파에게 장애가
됐던 것은, 델피의 무녀가 말한 신탁 중 마지막 행인 오오! 성스런 살라미스여, 데메테르의 선물이
파종될 때, 혹은 그것이 거둬들여질 때 그대는 여인네들의 자식들을 없애게 되리라는 구절이었다.
이 구절 때문에 나무 성채를 배로 해석하는 일파의 견해는 심각한 파탄지경에 이르게 됐다. 그것은
점술가들이 이 구절을, 아테네가 해전을 준비하게 되면 살라미스의 해역에서 패배를 겪게 되는 것은
아테네측일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때 아테네는 급격히 이름을 날리게 된 인물이 있었다. 테미스토클레스였다. 그는 점술가들
이 중요한 점에서 실수를 저질렀다고 말하고, 신탁의 구절이 진실로 아테네인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신탁은 그렇게 온건한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요컨대 적어도 살라미스 섬의 주
5 ) 데메테르 여신은 대지의 여신이니, 데메테르의 선물은 곡식을 말한다.
- 9 -
역 사
민들이 그 해역에서 최후를 거둘 운명에 있다고 한다면 오오! 비정한 살라미스여라고 말했을 것이
틀림없는 바, 올바른 해석에 따르면 이 신탁은 적을 가리키는 것이며 아테네인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
라는 것이었다.
그는 아테네인들에게 곧 해전 준비를 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테미스토클레스가 이와 같은 견해를
밝히자 아테네인들은 그의 주장이 점술가들의 의견보다 훨씬 낫다고 판단했다. 점술가들의 의견이란
해전을 준비하는 따위의 일을 하지말고 국토를 버리고 다른 곳으로 이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테미스토클레스의 주장이 채택됐다.
크세르크세스의 군대와 그리스 선봉대가 처음으로 마주친 곳은 테르모필레 고개였다. 그리스 선봉대
는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가 지휘하는 300명의 스파르타 정예병이었는데, 다른 그리스군은 그때 열
리고 있었던 올림픽 경기 때문에 조금 지체되고 있었다. 레오니다스가 좁은 고개인 테르모필레에 도
착했을 때 다른 폴리스들의 군대들이 합류해 약 7000명에 이르렀다. 그리스 선봉대는 페르시아 대군
과 장렬히 싸웠으나 패하고 만다. 헤로도토스는 테르모필레 전투와 관련된 비문을 다음과 같이 기록
하고 있다.
일찌기 이 땅에서 펠로폰네소스의 4천의 병사가 3백만 명의 적과 싸웠노라.
특히 레오니다스는 테르모필레에서 그리스군이 위기 빠진 것을 알고는 재빨리 후퇴시키고 자신과
300명의 스파르타군이 남아서 고개를 지키다가 모두 장렬히 전사한다. 그것을 기록한 비문도 헤로도
토스는 소개하고 있다.
나그네여, 가서 스파르타인에게 전하라, 우리가 조국의 명을 수행하고 여기에 누워 있다
고.
제 8 권
궁지로 몰린 그리스 연합군이 승기를 잡게 되는 살라미스 해전이 기술돼 있다. 테르모필레가 돌파
되자 페르시아군은 그리스 중부를 석권하고, 아테네로 진군한다. 아테네인들은 테미스토클레스의 제
안대로 전투병력은 함대에 모두 승선하고 부녀자는 인근 지역으로 피신시키고 아테네시를 포기한다.
페르시아 군은 쉽사리 아테네를 점령한다. 테미스토클레스는 해전으로 살라미스에서 결전을 벌여 마
침내 페르시아 함대에게 승리를 거둔다. 살라미스에서 그리스가 승리를 거두자 헤로도토스는 자신의
신탁에 대한 견해를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이제 나로서는 신탁에 진실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특히 다음과 같은 신탁의 문
구를 접하게 될 때는 실로 명백한 언어로 사실을 예언하고 있는 신탁을 결코 불신하고 싶지 않다.
빛나는 아테네를 파괴하고도 광기 어린 희망(엘피스)에 휘말린 적군이
바다에 면한 키노수라로부터 황금칼을 차신 아르테미스 여신의 성스러운 해변까지를 배
로 이을 때,
오만(히브리스)의 아들 욕망(코로스)이 한껏 부풀어올라
격렬한 분노에 자신을 내맡기며
모든 것을 다 삼키려 할 것이지만,
신의 정의(디케)가 그 욕망을 사그러지게 할 것이니라.
- 10 -
역 사
청동은 청동과 서로 맞부딪치고, 아레스6)께서는 피로 바다를 물들이실 것이다.
멀리 보시는 크로노스의 아드님7)과
고귀하신 승리의 여신 니케8)께서는 그리스 땅에 자유(自由)를 가져오시리라.
이렇게 바키스가 실로 명백히 예언하고 있는 이상, 나로서는 감히 신탁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또한 나는 다른 사람들의 비난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VIII.77)
크세르크세스는 그리스 침략을 단행하지만 그리스인들에게 패하고 만다. 헤로도토스는 강국의 침략
행위를 히브리스의 전형적 표현 으로 봤다.9) 상기 신탁에서도 그 개념이 잘 나타나 있다.
마침내 살라미스 해전이 시작됐고, 그때 다음과 같은 사건이 벌어졌다고 헤로도토스는 기술하고 있
다.
게다가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한 여자의 환영이 그리스군의 눈 앞에 나
타나 먼저 그리스 전군이 들을 수 있을 만큼 큰 소리로 꾸짖으며 고무 격려했다고 한다.
어리석은 놈들, 네 놈들은 언제까지 노를 거꾸로 저을 셈이냐? (VIII.84)
전투가 벌어지고 그리스군이 승리를 거둔다.
제 9 권
재차 그리스 남부에 침입하려는 페르시아 군과 결전을 벌여 페르시아 군을 그리스 땅에서 물러나게
한 플라타이아 전투가 기술돼 있다. 살라미스 해전에서 대패한 크세르크세스는 군대를 북쪽인 테살리
아로 일시 물렸다가 이듬해 다시 아테네로 침공해온다. 스파르타의 명장 파우사니아스가 이끄는 그리
스 연합군 10만이 플라타이아에서 페르시아군과 대치하게 된다. 마침내 그리스군이 승리를 거둔다.
▣ 더 깊이있게 알기 위하여
역사라는 뜻의 영어 단어 history 는 그리스어의 historia(
, 探究라는 뜻)에서 유래했다. 호머의
시를 보면, 소송사건이 히스토르(histor)에게 맡겨졌다는 말이 나오는데, 히스토르는 양측의 주장을 심
리해 무엇이 진실인지 결정했다. 히스토리아란 히스토르의 바로 이런 기능을 말한다. 역사의 목표가
과거를 심리해 역사적 진실을 탐구하는 것이라면, 그리스인들이 역사를 히스토리아로 부른 것은 당연
하다 하겠다.
역사라는 장르가 헤로도토스에 의해 갑작스레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몇 세기 전부터 이미 역사라는
장르가 예비돼 있었다. 19세기 후반까지 서양인들은 호머의 서사시를 고대 그리스인들의 상상력에 근
거한 신화로 생각했다. 그런데 1870년대 독일 사람 슐리만(Heinrich Schliemann)의 노력으로 트로이와
미케네가 발굴됨으로써 호머의 서사시에 사실성 또는 역사성이 포함돼 있음을 알게 됐다. 《일리아
드》가 기원전 1250~1240년 사이 10년간 실제로 벌어졌던 그리스와 트로이 사이의 전쟁을 소재로 삼
았음이 밝혀진 것이다. 《일리아드》는 그리스인들에게 종교적 경전으로서만 아니라 일종의 역사서의
역할도 했던 것이다.
6)
7)
8)
9)
아레스는 전쟁의 신으로, 로마에서는 마르스라고 하였다.
제우스를 말한다. 크로노스는 로마에서는 농업의 신으로 Saturna라고 불리웠으며, 영어의 Saturn이다.
니케는 승리의 여신으로, 영어에서는 나이키(Nike )라고 한다.
김진경. 〈
아이스킬로스와 헤로도토스〉, 《
서양사론》 13호.
- 11 -
역 사
역사라는 장르가 나타나기까지
신화나 호머의 서사시 같은 전승을 체계화하려는 노력은 기원전 700년 경 헤시오도스 등 소위 계보
(系譜)시인들을 등장하게 했다. 에우보이아 섬 출신 헤시오도스는 《신의 계보
, 테오고니
아》에서 신들의 계보만이 아니라, 신과 인간 사이의 혼인과 그 후손들의 계보를 연대기식으로 정리
했다. 특히 신과 인간 사이의 혼인으로 태어난 그 후손들의 연대기는 역사적 사실성도 지녔다. 그 후
손들이 바로 그리스 유명 왕가들의 왕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단군신화와 비교해 보면 신화와
역사의 차이, 신화에서 역사로 옮아가는 단계를 확인할 수 있다.
호머와 헤시오도스 모두 운문으로 글을 남긴 시인들이었다. 역사라는 장르가 나오기 위해서는 사실
을 전달하는 데에 적합한 산문(散文)의 출현이 전제조건일 것이다. 로고그라포이(logographoi)라고 불린
자들은 시인과 구분되는 사람들로 산문작가를 의미했다. 산문작가들 중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밀레토
스의 헤카타이오스(기원전 550- 475년)다. 그는 《세계 여행기》라는 괄목할 만한 저서를 남겼다. 이 저
서는 순수한 지리학적 지식을 넘어 각국의 민속과 역사를 많이 싣고 있으며, 특히 그리스인들에게 오
리엔트의 역사를 소개했으며 최초로 앗시리아, 메디아, 페르시아 군주정을 간략히 언급했다. 그는 지
중해와 흑해의 연안지방의 사람들과 나라에 대해 쓰고 있고, 가끔 인도와 페르시아 그리고 스키티아
같은 내륙지방에 관해서도 기술했다.
그리스인들은 그들에게 고대사나 다름없는 호머의 서사시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비판도, 새로운 고
대사를 쓸 마음도 먹을 수 없었다. 그들에게 호머의 권위가 엄청나게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문작가
들이 오리엔트의 역사에 관심을 갖고 기술함으로써 그리스인들은 비로소 자신의 현대사를 탐구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헤로도토스나 투키디데스의 역사서술은 그들 자신의 현대사다.
히브리스- 네메시스적 역사관
히브리스- 네메시스(
-
) 개념은 그리스인의 종교관에서만이 아니라 역사관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 개념은 헤로도토스를 비롯한 그리스 역사가들에게 기본적으로 깔린 역사관
이다. 기본적으로 인간이 유한(有限)의 운명을 지닌 한낱 덧없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때가 이르러 힘이 강대해지면 자신의 분수를 잊고 자기의 힘을 과신한 나머지 남을 경
멸하고 신을 경시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히브리스(오만)이며 이윽고 신이 내리는 아테(
, 迷妄)에 빠
져 신이나 인간에 의해 시행되는 네메시스(벌; 보복)를 받아 야욕은 좌절되고 자신은 파멸한다.10)
마찬가지로 민족 또는 나라가 전성기에 달하게 되면 그는 오만(히브리스)에 빠지게 된다. 헤로도토스
에 따르면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자는 없다는 것이다. 1권에 나타난 리디아의 크로이소스의 예에서 잘
드러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자신에게 주어진 몫보다 더 많은 것을 탐하는 것이 바로 히브리스
다. 신이 정해준 몫 이상의 것을 탐하는 것은 정의를 깨는 행위다. 더 얻으려는 욕심 때문에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게 돼 미망에 빠지고 그것은 결국 신의 징벌을 끌어들인다는 것이다. 나라나 민족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리스인들은 한 민족이 차지할 수 있는 땅의 범위는 한정돼 있으며, 그 경계는
강이나 해협 따위가 된다고 생각했다.
역사의 아버지 라 불리는 헤로도토스의 서술 속에는 신이나 초인간적 요소가 적지 않게 나타나 현
대의 독자들은 헤로도토스를 역사의 아버지라 부르는데 이견이 있을 수 있다. 또 역사의 아버지라는
의미는 무엇인지 의문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 현대인들이 역사라는 장르의 합리성, 인간중심적 특성을
지나치게 강조한다면 2천 수 백여 년 전 헤로도토스를 포함한 고대 그리스인들의 역사관을 이해하는
10 ) 김진경, 〈
아이스킬로스와 헤로도토스〉, 《
서양사론》 13호( 1972)
- 12 -
역 사
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역사관에는 인간적 측면과 초인간적 측면이 긴밀히
결합돼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원적 역사관은 어디서 연유하는가. 그것은 인간사에 대한 그리스인 특유의 사고방식에서 나
온다. 그리스인의 전형적인 사고방식을 담고 있는 그리스 비극의 구조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 그리
스 비극은 인간의 의지와 신의 의지 사이의 갈등이 근간을 이룬다. 그 갈등은 신의 승리로 끝나며 결
국 인간의 관점에서는 비극적으로 막을 내린다.
그리스 역사가에게, 역사의 초인간적 동인은 전성기를 맞은 뛰어난 인물이나 나라를 쇠퇴하게 하는
요인으로 역사에 개입한다. 쇠퇴를 면할 길은 없다. 헤로도토스의 히브리스- 네메시스 개념에는 성자필
쇠(盛者必衰)의 역사관이 잘 나타나고 있다. 왜 盛者는 쇠퇴를 맞이할 수밖에 없을까? 헤로도토스는
한 개인이나 한 나라의 지나친 번영은 신의 질투를 사게 되어 신의 징벌을 받아 멸망한다고 보았다.
그는 이를 조금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여 지나친 번영은 인간에게 오만을 가져와 신의 벌을 받게 된다
고 말한다. 번영을 맞이하고도 오만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자가 있는가. 없다. 그에 따르면, 아무리
덕이 많은 사람이라도 커다란 권력을 쥐게 되면 반드시 오만에 빠지게 돼 있다(III.80).
7권에서 페르시아의 왕 크세르크세스의 그리스 원정의 감행 여부를 놓고 벌이는 갑론을박에서 우리
가 눈여겨 봐야 할 것도 바로 이런 점이다. 헤로도토스가 원정의 궁극적 동기를 초인간적 차원에 두
고 있기는 하나 그런 동기를 말하기 전에 인간적 차원의 동기들을 상세히 거론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오늘날 독자들의 눈에는 역사의 아버지인 헤로도토스가 초인간적 차원의 동기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 못마땅할 것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그를 역사의 아버지라는 칭호에 걸맞지 않는 역
사가로 보기보다, 페르시아의 대 그리스 원정이라는 사건의 동기를 인간적 차원에서 다각도로 설명하
면서도 한편으로는 또다른 차원 즉 종교적 차원에서 파악하는 역사가로 보는 것이 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것이 고대 그리스인들의 인간사를 보는 독특한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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