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수호신으로 존중받던 백수의 제왕 한국 호랑이는 호돌이와 수호랑으로 그려질 만큼 한국
인이 사랑하는 동물이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한반도 자연환경에 서식하는 순수 한국 호랑이
개체를 볼 수 없는 지경이다. 이 책은 이러한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는 마음에 많은
사료를 토대로 쓴 소설이다.
착호갑사 이필신
▣ Short Summary
한국인이 호랑이에 대한 우호적인 감정을 갖는 것은 신화와 속담의 영향이 크다. 고조선 건국신화에서,
금기를 지키지 못해 인간으로 변신하지 못한 호랑이에서부터, 『삼국유사』의 후백제 견훤의 유아기 수
유 전설까지, 호랑이는 항상 인간 주변을 떠나지 않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래서 조상들은 호랑이를
범이라는 애칭으로 부르기도 하고, 산신령(山神靈), 산군(山君), 노야(老爺), 대부(大父)로 높이기도 했
다. 한반도에 호랑이가 많았던 것은 먹이사슬이 튼튼한 산악지대가 국토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독특
한 지형의 영향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 호랑이 멸종은 일본이 자행했다. 일본의 제1차 침략 임진왜란(1592~1597)과 제2차 침략 일제
강점기 동안, 일본은 의도적으로 한국 호랑이 사냥에 나섰다. 일본은 한국 호랑이가 조선 정기와 관련
이 있다고 생각해서 멸절에 나선 것이다. 35년의 일제 강점 이후, 수천 마리의 야생동물이 희생당했고,
한국 호랑이를 비롯한 몇몇 종은 절멸 단계에 이르렀다. 일제 강점기 전까지만 해도 한반도에서 흔하
게 볼 수 있었던 야생동물들이 아예 자취를 감춘 것이다. 일제 강점이 가져온 비극이다.
한반도 수호신으로 존중받던 백수의 제왕 한국 호랑이는 호돌이와 수호랑으로 그려질 만큼 한국인이
사랑하는 동물이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한반도 자연환경에 서식하는 순수 한국 호랑이 개체를 볼
수 없는 지경이다. 이 책은 이러한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는 마음에 많은 사료를 토대로 쓴
소설이다.
▣ 차례
1장 / 2장 / 3장 / 4장 / 5장 / 6장 / 7장 / 8장 / 9장 / 10장 /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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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호갑사 이필신
착호갑사 이필신
이성민 지음
1장
“이동욱 교수님. 정말로 호피가 맞겠죠?”
윤상중 회장은 내 입에서 어떤 말이 떨어질지 궁금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회의실 바닥에 펼쳐놓은 호피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거대한 크기의 흰색 호랑이 가죽이었
다. 얼핏 보아서 길이가 2미터 1, 20센티미터는 족히 될 듯했다.
“말씀하신 것처럼 백호(白虎)의 호피네요?”
흰색 호랑이 가죽은 나도 처음이었다. 나는 아무리 백호라도 호랑이 특유의 얼룩이 조금이라도 있
지 않을까 하는 예단을 했었는데, 잡티 하나 없는 순백색이었다. 흰색 밍크 껍질을 벗겨다가 이리저리
뜯어 맞춰 백호 가죽이라고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믿어지지 않는 것은 백호라는 사실뿐이 아니었습니다. 400년이 훨씬 넘은 호피인데, 이렇게까지
깔끔하게 관리되었다는 것이 그저 놀라울 뿐입니다.”
윤 회장 입장에선 자신이 구입한 호피가 진짜 호랑이의 가죽인지 궁금해하는 것이 당연했다. 크기
도 크기이려니와, 바로 엊그제 제작한 호피처럼 보존 상태가 완벽했다. 게다가 말로만 듣던 백호라는
사실도 꺼림칙하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제 어머니께서 아내에게 결혼 선물로 사주신 밍크코트가 있습니다. 34년 전에 결혼을 했으니, 밍크
코트도 그즈음 제작된 것이겠지요. 그런데 겨우 34년 전에 제작한 밍크코트를 지금은 아내가 입지 못
합니다. 적당한 습도 관리를 못했기 때문에, 입기만 하면 가죽이 찢어지는 것입니다. 수선만 서너 차례
맡겼다가, 요즘에는 아예 수선을 포기했습니다. 어머니께서 아내에게 해주신 결혼 선물이라 버릴 수도
없어서, 요사이는 아예 옷장에 걸어놓기만 하는 형편이지요. 과학기술이 발전된 요사이에 만든 밍크코
트도 이 모양인데, 400년 전에 만든 호피가 지금까지 말짱하다는 것이 저로서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습
니다.”
“마감 상태도 좋은데요. 이런 마감 기술은 일본에서 들여온 호피 중에는 처음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이상한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윤 회장님의 백호 호피는 저희 집안에 전해져오는 호피 두 점과 마감
방식이 똑같습니다. 호피 마감을 같은 사람이 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솜씨가 놀랍도록 닮았습니
다. 윤 회장님은 이 호피가 일본에서 제작된 호피라고 하셨는데, 그게 사실일까요? 혹시 일제 강점기
나, 그 이전에 조선에서 만든 호피를 몰래 일본으로 빼내간 것은 아닐까요?”
내 감정평가에, 윤 회장은 단호하게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아닐 겁니다. 분명히 일본에서 400년 전에 제작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이 호피를 판
매한 다니구치 요스케 상이 가문의 명예를 걸고 보장하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인들이 그렇게 이야기하
는 경우가 흔치는 않잖습니까? 그렇게 이야기할 정도라면, 정말이겠지요. 그런데 그건 그렇다고 치고,
도대체 마감 상태가 어떻다는 것입니까?”
“호피의 솔기 마무리를 할 때는 약품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호랑이 가죽이 보통 두꺼운
것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약품으로 호피 끝이 갈라지지 않도록 처리합니다. 장인들은 그런 마감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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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심을 바른다’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이 호피에는 심을 바른 흔적이 없습니다. 그 대신 쌈솔을 했습
니다. 쌈솔이란, 시접을 싸 넘겨서 박는 기술인데, 호피를 강제로 말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호피가 바느
질이 가능한 정도로 굳기가 딱딱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바느질을 한 것입니다. 이 정도의 쌈솔질을
하려면 적어도, 석 달 이상 매달려서 호피를 제작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쌈솔질에 들어간 정성입니다. 눈이 돌아갈 정도로 놀라운 바느질 솜씨입니
다. 재봉틀이 아닌 손바느질로 일정한 간격으로 촘촘하게 쌈솔을 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여길 한 번
보십시오. 솔기 간격이 재봉틀로 박은 것처럼 촘촘하지요? 이건 남자의 바느질 솜씨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차분한 기술입니다. 그렇다고 두껍고 억센 호피의 바느질을 여자가 했을 리는 없으니, 도대체
이런 기술을 가진 장인이 누구였는지 참으로 궁금할 뿐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호피를 여러 차례
제작해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솜씨라는 사실입니다.”
나는 호랑이의 두골을 만지면서,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눈을 감은 채로 호랑이의 생전 모습을 상
상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땅바닥에 펼쳐져 있는 호랑이의 껍질에 생기가 들어서는 것 같았다. 한 장의
껍질로 남아있던 호피에 근육과 골격이 갖춰지는 기분이 들었다. 힘없이 늘어져 있던 사지골에 생기가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착지한 앞발과 뒷발에 숨어있던 발톱이 날카롭게 삐져나왔다.
백두대간 깎아지른 절벽 위에 버티고 서 있는 호랑이의 용자가 선연하게 그려졌다. 그림에서나 보
던 진짜 백두산 호랑이의 웅장한 자태였다. 전신에 생기가 들어선 호랑이는 천지사방이 진동하도록 엄
청나게 큰 소리로 포효를 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나는 주춤거리면서도 얼른 장
지골과 하지골을 곧게 펴며 도약하는 호랑이의 전신을 살펴보았다. 두골과 동골, 척추골을 일자로 날
렵하게 펼치는 호랑이는 그야말로 백두산신 풍모 그대로였다. 한반도를 뛰어 달리던 백색 호랑이의 용
자가 두 눈에 선명했다. 나는 숨을 쉬지도 못할 만큼 호랑이의 풍모에 압도되었다.
“손을 이리 줘 보십시오. 그리고 호피표면에 손을 내려놓고, 눈을 감고 호랑이의 모습을 한 번 상상
해 보십시오.”
나는 윤 회장의 손을 당겨, 호피의 두골 아랫부분을 만지게 했다. 쇄골과 견갑골이 상지대를 이루며
두골을 바치는 부분이었다.
“느껴집니다. 이 부분이 바로 사람의 어깨에 해당하는 곳이지요?”
정말로 느끼는 것인지, 호피를 통해 살아있던 시절의 호랑이의 모습을 연상하며 감동받고 있는 나
를 보고 분위기를 맞추려는 것인지, 윤 회장도 다소 들뜬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윤 회장의 손을 이
끈 내 손끝으로도 다시 한 번 호랑이의 생전 모습이 전해지고 있었다. 천 길 낭떠러지 위에 당당하게
버티고 서서 포효하는 호랑이의 생동감이 절절하게 전해져왔다. 높은 언덕을 단숨에 뛰어오르는 모습
도 느껴졌고, 야생에서 살아남기 위해 벌인 멧돼지와 고라니, 사슴과의 전투가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
았다. 껍질만 남은 호랑이의 근육과 골격기 살아 숨 쉬는 듯하여 전율이 온몸으로 일었다.
“호랑이의 기운을 느끼셨지요?”
“예, 느꼈습니다.”
“호피는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몸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나는 흐뭇한 표정으로 윤 회장에게 호피의 의미를 설명해주었다. 그것은 이제껏 호피를 감정해오면
서 가지고 있는 내 소신이자, 철학이기도 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는 말은 말 그대로 가
죽을 남긴다는 뜻이 아니다. 가죽 속에 담겨있는 호랑이에 대한 정보를 남긴다는 말이었다. 호피로 남
은 호랑이는 껍질이 벗겨진 한 마리 동물이 아니라, 한 시대를 풍미한 야생의 제왕의 역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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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호갑사 이필신
2장
“그런데 이렇게 대를 이어 호피를 관리해오던 다니구치 가문의 13대손 아키나리 상이 왜 호피를 팔
생각을 했는지 궁금합니다. 돈 때문은 아니었을 텐데요? 관리하는 일이 힘들었을까요?”
나는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윤 회장에게 물어보았다. 그러자 윤 회장은 미소를 지으며 시원하게 곧
바로 대답을 했다.
“자식이 없다고 하더군요. 다니구치 가문에서는 대대로 메이분도 상점을 이어온 장자들이 호피 관
리도 해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키나리 상은 아쉽게도 아들을 낳지 못했다고 합니다.”
일본 문화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나는 의구심이 들었다. 일본에는 양자 제도가 발전되어 있어서,
사위나 조카를 아들로 입적시키는 일이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13대를 이어온 호피 관리라면, 아마도
일본 내부에서도 관심이 집중될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대를 잇는 전통을 끊고, 다른 나라도 아닌 대한민국에 호피를 넘기겠다는 생각을 했다
는 것은 뭔가 곡절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피를 가져온 한반도로 다시 호피를 돌려주겠다
는 결심을 내리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 저도 그것이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다니구치 상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운메이(運命)
라고 하더군요.”
“운명이요?”
나는 호기심이 일었다. 나는 이 세상에 나와 같은 일에 운명을 건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이 믿어지
지 않았다. 호피를 관리하는 일, 더 나아가 한반도의 호랑이를 보존하는 일에 인생을 거는 일을 개인
의 운명으로 받아들인 사람이 나 이외에 또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게 느껴졌다. 게다가 그 사람은 한국
인도 아닌 일본인이었다.
“다니구치 상은 분명히 운메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조선 백호와 관련된 일은 자신은 물론, 다니구
치 가문의 운명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묘한 일이었다. 윤 회장의 운명이라는 말에 갑자기 내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순식간에 심장을 타고 돌던 피가 가슴에서 펄펄 끓는 기분이 되었다.
“정말로 다니구치 상이 운명이라는 말을 사용하던가요?”
나는 윤 회장에게 다시 한 번 운명이라는 말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그러자 윤 회장은 고개를 끄덕
이며, ‘그렇다’는 대답을 해왔다.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대한해협을 사이에 두고, 조선 호랑이를 가
문의 운명으로 받아들인 두 집안이 있었던 것이다.
3장
“호피 관리를 위해서 강원도 태백산까지 올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호피를 등에 지고 앞장서는 나를 따르며, 뒤에서 윤 회장이 말을 걸어왔다. 윤 회장도 호피 관리에
필요한 도구를 배낭에 매고 지고 오는 터라, 진작부터 씩씩 소리가 나게 거친 호흡을 내뱉고 있었다.
“매달은 아니고, 일 년에 두 번만 오시면 됩니다. 봄과 가을, 택일을 해서 한 차례씩 오는 것입니
다.”
나는 뒤에 따라오는 윤 회장에게 들리도록 큰 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새벽 5시에 오르는 산길이라
서, 헤드랜턴을 켰지만 제대로 앞이 보이지 않았다. 순전히 감으로 가고 있었다. 봄과 가을에는 거의
한 달에 두 번 이상 찾아오는 길이라서, 눈을 감고도 지리를 훤히 파악하고 있는 터였다.
내가 관리하는 호피가 20피 이상이라서, 두세 피씩 모아서 함께 가지고 와도 철별로 십여 차례 가
까이 태백산에 올라와야 하는 것이다. 초여름으로 들어가는 5월에, 윤 회장의 백호 호피만 따로 가지
고 오게 된 것은 일본에서 4월에 질풍(疾風)을 맞았다는 다니구치 요스케 상의 2012년 호피 관리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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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이었다. 교토의 4월은 대한민국의 5월 정도의 날씨에 해당하므로, 나는 윤 회장이 백호 호피를 구
입한 3월부터 백호 호피의 대한민국에서의 첫 질풍맞이 시기를 5월로 잡고 있었다.
호피 관리에서 중요한 것이 바로 질풍맞이와 거풍이다. 매달 한 차례씩 해주는 거풍은 호피 보관
장소에서 늦은 오후부터 저녁 시간까지 호피를 응달에서 바람을 쏘여주는 것이어서 호피 주인이 혼자
해도 큰 문제가 없는 것이지만, 질풍맞이는 동이 튼 후에 거친 바람에 말리는 것이므로 매년 비슷한
시기에 같은 장소에서 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거풍과 질풍을 제대로 해주지 않으면, 제아무리 대단한 호피라도 곰팡이가 피게 되고, 가죽이 끈기
가 약해져서 쉽게 풀어져 내리게 된다. 이제 백호 호피는 매달 윤 회장이 스스로 거풍을 해야 하고, 1
년에 두 차례 5월과 11월에 이곳 태백산의 장군봉에서 질풍맞이를 해야 하는 것이다. 호피는 구입하는
것이 쉬울지 몰라도, 관리하고 보존하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호피를 갖고 있는
사람은 호피를 훼손하지 않고 다음 세대로 넘겨줘야 할 책임이 있다.
6장
우리가 탄 비행기는 어느새 한반도를 벗어나 대한해협을 건너가고 있었다. 나는 비행기 창문 밖으
로 내려 보이는 대한해협을 바라보았다. 일본인들이 겐카이나다(玄海灘)라고 부르는 것처럼, 대한해협
은 수심이 30m 이상 되어 검은 바닷속을 볼 수 없는 깊은 바다이다. 대한해협을 건널 때마다, 나는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에 패인 깊은 정서의 골은 대한해협의 영향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건너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게 만드는 대한해협의 두려움 때문에, 한국인과 일본인들은 대대로 서로에 대해서 오히
려 필요 이상의 불편한 많은 감정을 갖게 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을 해왔었다.
“한반도 이남에는 야생 호랑이가 이제 더 이상 서식하지 않겠지요?”
스튜어디스가 가져다준 비빔밥을 먹다 말고, 윤 회장이 내게 물었다.
“많이 아쉽지만, 사실입니다. 자연 상태의 한국 호랑이의 생존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것이 학계의 일
반적인 학설입니다. 한반도 가운데 남한 지역에서 가장 최근에 포획된 호랑이는 1921년 경북 경주 대
덕산 부근에 붙잡힌 수컷이었습니다. 북한 지역에서는 1964년과 1965년, 1974년과 1987년까지 각각
포획 기록이 있습니다. 평양 중앙동물원에서 보셨던 호랑이도 아마 그때 포획된 호랑이 가운데 한 마
리였을 것입니다. 학자들 말로는 한반도는 몰라도, 남한 지역에는 호랑이가 서식하고 있지 않을 것이
라고 하더군요.”
내가 이야기를 하자, 윤 회장은 한반도에 호랑이가 더 이상 서식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안타까운지
내 의견을 물었다.
“이 교수님께서도 그럼 한반도에 더 이상 호랑이가 살지 않는다고 믿으십니까?”
윤 회장의 질문에, 나는 뭐라고 답을 해야 할까 고민했다.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해야 할까 망설
여졌다. 그렇지만 윤 회장에게도 사실대로 말할 자신이 없었다. 또 그렇게 말한 뒤의 결과를 책임질
수도 없기도 했다.
“저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윤 회장이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저도 예전에 한반도 호랑이 생존 여부를 취재한 기자와 이야기를 나눴는데, 삼팔선이 생기면서 한
반도에는 호랑이가 서식할 수 없는 환경이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높이가 4미터도 넘는
철책을 호랑이가 뛰어넘을 수 없다고 하더군요. 게다가 심마니나 등산객들로 북적여서, 백두대간이 수
목이 울창하긴 해도 호랑이가 은폐하기에는 쉽지 않은 환경이 되었다고 하더군요. 정말로 안타까운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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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니다. 이 교수님은 호피를 관리하시니, 저보다 호랑이에 대한 애정이 더 많으실 텐데, 한반도 호랑이
가 멸종한 것에 대해서 가끔씩 답답한 마음도 드실 때가 있을 것 같습니다.”
나는 윤 회장의 호랑이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깊은지 실감할 수 있었다. 20억 원짜리 호피를 구하
기 위해 2년간 일본을 들락거린 열정은 우연한 것이 아니었다. 단순히 호피가 필요했다면, 몇만 원짜
리 벵골산 호랑이 가죽이면 충분했을 것이다. 윤 회장은 호피를 구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한반도
호랑이에 대한 간절함으로 호피를 구입한 것이었다.
“한반도에 호랑이가 서식한다고 단언할 수는 없어도, 한국 호랑이가 멸종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
다. 왜냐하면 극동 러시아 연해주의 야생 서식지에 살아있는 약 400마리 정도의 아무르 호랑이가 한반
도에 서식하던 한국 호랑이와 같은 아종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서울대학교 야생동물유전자원은행 연구진이 한반도에서 포획되어 반출된 100년 전의 호랑이 두개
골과 뼈 표본을 일본과 미국의 자연사박물관에서 찾아내서 시베리아 호랑이라고도 불리는 아무르 호랑
이와 유전자 염기 서열을 비교해보니, 100% 같은 호랑이였습니다. 서울대학교 연구진은 아무르 호랑
이의 활동 범위가 2,000km 라는 점을 감안하면, 과거에 극동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의 시호테알린 산
맥에서 활동하던 아무르 호랑이가 만주의 장백산맥을 거쳐, 함경산맥을 따라 백두대간으로 이동했을
것이라고 추론했습니다.
윤 회장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6ㆍ25 한국전쟁으로 철책이 생긴 이후에 한국 호랑이의 이동 경로
가 제한되어, 아무르 호랑이가 한반도까지 이동할 수는 없게 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아무르 호랑이를 시베리아와 만주, 그리고 한반도를 서식지로 삼아 활동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아무
르 호랑이가 한국 호랑이인 셈이므로, 한국 호랑이 자체가 멸종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윤 회장은 내 말에 수긍하는지 깊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윤 회장에게 지나치게 강한 어조로 이
야기를 한 것은 아닌가 싶어 다소 송구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윤 회장은 한국 호랑이가 멸종하
지 않았다는 내 의견에 고무되었는지, 금세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7장
“혹시 윤 회장님, 가토 기요마사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우리나라에는 가등청정으로 알려져 있는 임
진왜란 때 왜장인데요.”
내가 가토 기요마사를 말하자, 윤 회장은 아는 것 같기도 하고, 모르는 것 같기도 한 듯 애매한 표
정을 지었다.
“글쎄요. 가등청정이라.”
윤 회장은 가토 기요마사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가토 기요마사는 임진왜란 때 함경도 지역으로 출병한 왜장입니다. 조선의 관군을 크게 물리쳤고,
선조의 아들들이었던 임해군과 순화군을 포로로 잡아서 일본으로 끌고 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가
토 기요마사가 조선 땅에서 한 것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그게 뭔지 아십니까?”
나는 윤 회장에게 물었다. 그러자 윤 회장은 가토 기요마사도 모르는데, 그 사람이 한 짓이 뭔지 알
겠냐는 듯이 고개만 갸웃 거렸다.
“글쎄요. 뭘까요?”
윤 회장에게 나는 손가락 두 개를 펴보였다.
“가토 기요마사가 호랑이를 두 마리나 생포해서 일본 땅으로 잡아갔습니다. 그리고 죽여서 가져간
호랑이도 여러 마리였습니다. 임진왜란을 통해서 조선이 입은 피해도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지
만, 조선의 호랑이를 멸절시킬 의도로 사냥했던 것도 결과적으로는 조선에 피해를 입힌 것으로 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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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호갑사 이필신
있습니다.”
내 말에 놀라서, 윤 회장은 눈을 크게 떴다.
“아니,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임진왜란 때 왜장이 조선의 호랑이를 사냥했다고요? 그게 사실입니
까?”
“혹시 경상도의 민요 가운데 ‘쾌지나 칭칭 나네’라는 노래를 들어보신 적 있으십니까?”
내가 이야기하자, 윤 회장은 음조를 실어서 노래를 불렀다.
“이런 노래 아닙니까? 쾌지나 칭칭 나네. 쾌지나 칭칭 나네.”
내가 웃으며 박수를 쳤다.
“맞습니다. 그 노래입니다. 그 쾌지나 칭칭 나네 라는 가사 가운데, 칭칭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내 물음에 윤 회장은 모른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칭칭은 바로 가등청정의 청정을 의미합니다. 노랫말을 제대로 풀어보면, ‘쾌재라 청정이 나가네’ 라
는 말입니다. 15만 명 이상의 왜병들이 조선에 침략을 했는데, 장수들이 얼마나 많이 참전했겠습니까?
그런데 왜 유독 가등청정, 가토 기요마사만 민요 속의 주인공으로 등장할까요? 그만큼 한이 서려 있었
던 것입니다. 승전을 보고하기 위해, 다른 왜장들은 조선 관군이나, 양민의 귀를 잘라가거나 코를 잘라
가는 정도였지만, 가토 기요마사는 양민들의 시신을 호랑이를 잡는다는 명목으로 조선 천지에 흩뿌렸
던 것이지요. 그래서 당시의 사람들이 ‘쾌재라 청정이 나가네’라는 가사를 넣고 민요를 부를 생각을 했
던 것입니다. 치를 떨 만큼 분하고 원통하지만, 또 그만큼 무섭고 두려웠던 것이지요.”
“그럼, 이 교수님. 궁금한 것이 있는데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나섰던 이필신 선생은 그런
가토 기요마사의 행적을 알고 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호랑이를 잡을 수 있는 용기와 담력을 가진 분
이라면, 관군이 되어 가토 기요마사를 죽이거나, 왜병들을 물리치고 장렬한 전사를 했어야 하는 것 아
닙니까?”
내가 말한 내용에 격앙된 것인지, 윤 회장은 살짝 화가 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그런데 그다음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말하자, 윤 회장은 이건 또 무슨 소리냐는 듯이 내게 되물었다.
“잘 모르겠다니요? 나는 윤 회장에게 이필신 할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실종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
다.”
“임진왜란에 이어, 정유재란이 끝나고 나서, 이필신 할아버지가 사라지셨습니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갑사로 자원하셔서 호랑이를 잡으면서 적은 이필신 문집과 호보문이라는 유서, 그리고 갑사
가 입는 갑옷과 무기들을 집 앞에 놓고, 홀연히 사라지신 것입니다. 어디로 간다, 어떻게 할 것이다 라
는 내용도 없이, 그냥 잠종비적하신 것입니다.
그날 이후, 조선 땅에서 이필신 할아버지를 보았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부모님의 원수를 갚으셨다
는 말도 없고, 원수를 갚지 못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말도 없으셨습니다. 결국 이필신 할아버지
의 부인이셨던 경주 정씨 할머니는 하루아침에 과부가 되셨고, 아들 삼 형제는 아버지였던 이필신 할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관직에 나가지 않고, 조선 호랑이를 지키고, 호피를 관리하는 일을 가업으로
계승하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필신 할아버지의 가토 기요마사의 인육을 이용한 호랑이 사냥 이야기가 사실인지,
거짓말인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그렇게 해서 저희 전주 이씨 경령군(敬寧君) 파
의 이필신 할아버지 후계는 조선 호피 관리사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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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호갑사 이필신
8장
간사이 공항에서 한 시간 반 정도 차를 달려 다니구치 상이 경영하는 메이분도에 도착했다. 다니구
치 상은 12대째 와시만 팔았고, 기요미즈테라 도오리에서만도 6대째 와시 상점을 경영했다고 말했다.
기요미즈테라를 방문한 것이 수 차례였는데, 그 동안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 신기했다. 가게가 작은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아주 후미진 골목에 숨어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른 상점들처럼 적당한 크기
였고, 요란하지는 않지만 간판도 예쁘장하게 걸려 있었다. 눈길을 주려고 했으면, 진작 찾아서 들러볼
수 있는 상점이었다.
“말차를 좋아하십니까?”
다니구치 상은 작은 주전자에 물을 끓이면서 윤 회장과 내게 물었다. 윤 회장이 좋다는 듯이 고개
를 끄덕였다.
“도슈사이 샤라쿠(東洲齋寫樂)의 작품이지요?”
내가 벽에 걸린 풍경화를 보고 이야기하자, 다니구치 상은 깜짝 놀란 얼굴로 내게 물었다.
“도슈사이 샤라쿠를 아십니까? 대단합니다.”
다니구치 상의 말을 듣고, 윤 회장도 눈이 휘둥그레해져서 내 식견에 감탄했다. 나는 그다지 대단한
일이 아닌데 하는 표정을 지었다. 일반인들에게는 도슈사이 샤라쿠를 아는 일이 놀라운 일일지 몰라도,
일본 근세를 전공한 나 같은 사람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도슈사이 샤라쿠는 에도 시대 중기인 1794년 5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10개월간 145점의 유키요에
작품을 출품하고 홀연히 사라진 신비한 인물이다. 이름이 무엇인지, 어디서 태어났는지, 어떻게 사라
졌는지를 알 수 없는 인물인데, 그의 작품은 유럽의 인상파 화가인 빈센트 반 고흐에게까지 영향을 미
쳤다.
정조의 어명을 받고 김홍도가 쓰시마를 정탐하고 돌아왔다는 역사적 기록과 도슈사이 샤라쿠의 화
법이 김홍도의 화법과 유사하다는 주장으로 인해, 도슈사이 샤라쿠와 김홍도가 동일인일 것이라는 주
장이 한동안 있었다. 그런 유명한 인물을 일본 근세 전문가인 내가 모른다는 것은 말도 안 되었다.
그렇지만 나는 다니구치 상을 불쾌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도슈사이 샤라쿠와 김홍도의 연관성에
관한 루머를 내 입으로 꺼내지 않았다. 아무리 한국인에게 호피를 판매한 다니구치 상이라고 할지라도,
일본인은 어쩔 수 없이 일본인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래서 나는 공연히 불쾌한 자리를 만들지 않
으려고, 다니구치 상에게 더 이상 도슈사이 샤라쿠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생각을 했다.
그런데 도슈사이 샤라쿠와 김홍도의 연관성에 관해서 이야기를 꺼낸 쪽은 오히려 다니구치 상이었
다.
“도슈사이 샤라쿠도 사실은 저희 쪽입니다.”
다니쿠치 상의 말에, 윤 회장이 먼저 반응했다.
“저희 쪽이라니요?”
나도 다니구치 상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다니구치 상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싱긋 미소를 지으
며 대답했다.
“도라이진(渡來人)이지요. 조선에서 온 도라이진 말입니다.”
내가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다니구치 상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저희는 도라이진입니다. 조선에서 건너왔습니다. 도슈사이 샤라쿠도 조선에서 건너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가 조선의 화가 김홍도인지 아닌지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본인이 아닌 것만은 분명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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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호갑사 이필신
다. 그런 솜씨를 가졌다면 일본 내에서 동일한 계열의 작품이 공식적으로 발표한 작품 외에도 한 작품
이라도 더 남겨져 있어야 하거든요. 그런데 도슈사이 샤라쿠가 사라지면서, 그림까지도 완전히 사라진
것입니다.
일본에서 정착을 한 것은 아니므로 도라이진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일본으
로 건너온 조선인이라는 것이 저희 도라이진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입니다.“
“저희 도라이진이라고 표현하는데, 저희라고 하면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내가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질문을 하자, 다니구치 상은 덥힌 차완에 말차를 담아 건넸다.
“분로쿠의 역(役, 임진왜란)과 게이초의 역(役, 정유재란)을 통해, 조선에서 일본으로 끌려온 사람들
이 공식적으로 5만 명이 넘습니다. 지금처럼 이민을 한 것이 아니라, 강제로 납치되어 온 상황이었으
니,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기 전까지 도라이진들은 일본인들과 어울리지 않고 따로 살았습니다. 원래
도라이진은 5, 6세기에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을 뜻하지만, 일본에서는 분로쿠의 역에 조선에서 건
너온 사람들도 도라이진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저희 가문의 시조이신 다니구치 히스노부도 게이초의
역 직후에 조선에서 일본으로 건너왔습니다.”
나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다니구치 요스케 상의 이야기에 깜짝 놀랐다. 일본 사회에서 이민자들이
자신의 출신을 밝히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다니구치 상의 경우에는 이미 칠
십 노령에, 무남독녀 외동딸은 미국인과 결혼해서 해외로 떠난 터라 부담감은 덜한 편이겠지만, 그래
도 처음 만난 윤 회장과 나에게 선조가 조선인이라고 밝히는 것은 충격적인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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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호갑사 이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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