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영화,리뷰,

바다 위에도 길은 있으니까

by Casey,Riley 2022. 8. 8.
반응형

전소현, 이선우 지음 / 현대지성
이 책은 태평양을 오가며 LNG를 실어 나르는 배 위에서 3등 선박 기관사로 일하고 있는 저자의
이야기를 담았다. 중학생 시절 자기 이름보다 전교 1등으로 불리던 저자는 수재 집합소 상산고에
입학하지만 낮은 성적으로 좌절한다. 그 후 아빠의 권유로 한국해양대학교에 입학하게 되고 그것
이 인생을 바꾼 선택이 된다.

바다 위에도 길은 있으니까
전소현, 이선우 지음

▣ 저자
전소현 - 여객선 승무원도 아니고 어부도 해녀도 아니지만 천생 뱃사람인 건 확실하다. 1년 내내 인터
넷도 잘 터지지 않는 바다에서 기계가 뿜어내는 먼지와 소음에 둘러싸여 전기와 수도를 만드는 것부터
오수 처리까지 해내야 하는 3등 선박 기관사로 일하고 있다.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으레 그렇듯 의대
진학을 꿈꾸었지만, 세상에, 이 땅에 이렇게 공부 잘하는 애들이 많았던가? 결국, 시원하게 수능을 말
아먹고 이름도 생소한 한국해양대학교에 입학했다. 그 길로 선박 기관사라는 항로를 발견했고, 바다에
와서야 비로소 내 길을 조금씩 찾아가고 있다. 이 책이 당신만의 바다와 당신만의 항로도 찾아 주기를.
그럼, ALL STATION STAND BY! BON VOYAGE!
이선우 - 특별한 목표는 없었지만 공부는 열심히 해서 학창 시절 내내 우등생이었다. 덕분에 명문대에
입학했지만 첫 수강 신청부터 충격을 받았다. 수많은 과목 중 듣고 싶은 게 없었다. 졸업하고 나서도 마
찬가지였다. 하고 싶은 일이 없었다. 그렇다고 가만있을 수는 없어서 남들처럼 취직하고 결혼도 했다. 일
상을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그냥 아줌마가 되어 있었다. 항상 열심히는 살아왔는데 행복하지 않았다. 그
러던 어느 날, 우연히 바다 위에서 차곡차곡 꿈을 이루어 가는 소현을 보았다. 그 순간 신기하게도 갑자
기 글이 쓰고 싶어졌다. 이 책을 기획하고, 소현과의 인터뷰를 진행하고, 한 자 한 자 써 내려가면서 그
간 품었던 의문들이 서서히 풀렸다. 글은 잊고 있었던 꿈, 진짜 나를 찾아 주었다.

▣ Short Summary
“너, 책 써 볼 생각 있어?” 2021년 3월, 내가 던진 한마디로 이 책의 긴 여정이 시작됐다. 당시 소현
은 거의 1년 가까운 승선 생활을 마치고 한 달간의 짧은 휴가를 받아 쉬고 있었고, 나는 적당한 글감
을 찾고 있었다. (모든 일에는 타이밍이 있는 것 같다.) 브런치 작가 신청에 합격한 후 가끔 글을 올리
고 있었는데 뭔가 허전했다. 일상적인 이야기 말고 특이한 글을 써 보고 싶었다. 내가 아이 엄마다 보
니 주변에도 아이 엄마들뿐이었다. 나이도 그렇고 한창 육아의 절정기를 지나고 있어서인지 만나는 사
람도 아이 엄마, 대화 소재도 전부 육아와 교육이었다. SNS로 만난 이웃 중 가끔 책을 내는 분들이 있
었는데 90% 이상이 육아 관련 도서였다. 거기서 탈피하고 싶었다. 학창 시절부터 남들과는 다른 길을
가고 싶어 했던 성향이 있었는데 그것이 발동한 이유도 있었다.
살면서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총동원해도 원하는 소재를 찾을 수 없었다. 사실 좀 지쳐 있던 그때 소
현을 만났다. 휴가 나온 소현과 마주 앉은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내가 찾던 소재를 소현이 갖
고 있구나! 그래서 보자마자 물었던 것이다. 나는 글 쓰는 걸 좋아하지만 소현은 어떤지 몰라 조심스
러웠다. 내가 아무리 쓰고 싶어도 소재의 주인공이 원치 않으면 이 프로젝트는 성사되기 어려웠다. 내
가 글 쓰는 채널을 소개하고 최종 목표는 종이책을 출간하는 것이라고, 다소 보장되지 않은 장밋빛 꿈
까지 덧붙여 설명했다. 그런데 몇 마디 얘기하지 않았는데 소현이 흔쾌히 승낙했다. “너무 좋아요. 저
사실 책 내고 싶었거든요.”
서로 마음을 확인한 우리는 그날부터 발 빠르게 움직였다. 그때는 소현이 휴가 나온 지 벌써 두 주 정

-2-

바다 위에도 길은 있으니까

도가 지난 시점이어서 앞으로 만날 수 있는 기간은 딱 2주뿐이었다. 소현은 배를 타면 인터넷이 불안
정해서 연락이 원활치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책을 다 쓴 지금은 그게 무슨 말인지 잘 알지만 처음엔
아니었다. 전 세계가 1초면 연결되는 세상에 연락이 잘 안될 수도 있다니? 하지만 소현은 그런 세상에
서 살았다. 어서 이 이야기를 글로 담아내고 싶은 생각에 몸이 달았다. 일단 너무 생소한 분야라서 스
터디가 필요했다.
소현의 직업을 듣고 내가 궁금했던 점들에 대해 이야기가 될 만한 소재를 찾으면서 일명 ‘사전 질문지’
를 작성했다. 하룻밤을 꼴딱 세워 작성했는데 써 놓고 보니 질문만 50개가 넘었다. 질문은 정말 다양
했다. 선박 기관사로 진로를 정한 이유처럼 책을 쓰기 위해 꼭 필요한 질문들로 시작해 생애 첫 항해
에 대한 기억, 일하다가 울었던 경험, 원래 바다를 좋아하는지, 바다에서 느낀 감성 등 디테일한 부분
으로 파고들었다. 누군가를 정식으로 인터뷰해 본 적이 없던 내가 책을 쓰려는 마음이 커서였는지 나
도 모르게 질문을 챕터별로 구성하고 있었다. 이렇게 처음 작성한 질문지를 바탕으로 책 내용의 80%
이상을 구성했다.
소현은 각 항목마다 정성스럽게 답변을 작성해 보내 주었다. 그걸 토대로 만나 2차 인터뷰를 이어 갔
다. 읽으면서 추가로 궁금했던 부분, 새롭게 생각난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선박 기관사의 세
계는 알면 알수록 흥미진진했다. 질문의 빈칸이 완성될수록 이거 이야기가 되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소현은 짧은 만남을 끝으로 다시 바다로 돌아갔다. 그때부터는 카톡이 열일하기 시작했다. 연락이 원
활치 않을 수 있다고 미리 양해를 구했는데 과연 사실이었다. 소재와 자료를 최대한 모아 놓은 다음
소현을 보냈지만 막상 쓰려니 물어볼 부분이 계속 생겼다.
질문을 하고 답을 받는 과정은 나의 일반적인 구애 수준이었다. 한 번 보내 두면 약 사흘 후에 답장이 도
착했다. 21세기 최첨단 시대에 무척이나 낭만적인(?) 소통 방법이었다. 카톡의 ‘1’자가 지워지길 하염없이
기다리고 기다렸다. 이 책은 그 긴 기다림의 산물이다. 처음엔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이유를 몰랐었는데
몇 꼭지 써 보니 원인을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처음에는 바다 위에서 일하면서 느꼈던 소현의 감성 위주
로 쓰려고 했는데 쓰다 보니 그게 불가능했다. 나는 소현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인공의 감성은 내 영역이
아니었다. 그래서 방향을 선회했다. 선박 기관사라는 직업을 ‘소개’하기로 한 것이다.
이 책을 쓰는 과정은 일반적인 글을 쓸 때와 완전히 달랐다. 내가 아닌 남의 이야기를 쓰는 게 이렇게
어려울 줄은 몰랐다. 나는 내가 소현이라고 생각하고 소현에게 나 자신을 ‘빙의’하기로 했다. 목차를
미리 작성해 놓고 글을 쓰려고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켜면 가장 먼저 눈을 감고 소현에게 빙의했다.
‘나는 소현이다. 나는 소현이다.’를 중얼거리면서. 아무 소용없을 것 같았던 이 행위가 한 달 정도 지나
고 나니 제법 큰 효과를 발휘했다. 눈을 감고 주문을 외우면 어느새 나는 소현이 일하는 소버린호에
탑승해 있었다.
남의 이야기로 책 한 권을 쓰고 난 지금에서야 알게 됐다. 이 책은 내 이야기가 아니지만 내 이야기이
기도 하다는 사실을. 이 책을 쓰면서 불안하고 흔들리는 나 자신을 만났다. 인생의 방향타를 잡지 못
해 방황하던 나를 잡아 줄 무언가를 애타게 찾았는데 뜻밖에 소현의 모습에서 내가 가고 싶었던 길을
발견했다. 그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나 자신을 믿는 자신감이었다.

▣ 차례

-3-

바다 위에도 길은 있으니까

프롤로그
1 바다가 나를 불렀다
뼛속까지 섬집 아기 / K-장녀의 방은 없었다 / 의대 사관 학교 상산고에서 뜬금없이 해양대로?
대가리 박아! / 수능 망쳤다고 인생이 끝나는 건 아니었다 / 지옥 같았던 여름 방학 해양 훈련
가슴이 터질 것 같았던 첫 항해 / 토하면서 수업하기 / 외국에서 연예인 되기
바이킹의 후예와 장보고의 후예 / 무너졌던 자존감을 세워 준 바다 / 남들 다 하는 건 재미없지!
2 바다의 심장을 만지다
슬기로운 의사 같은 선박 기관사 생활 / 선박 기관사가 대체 뭐 하는 직업이야?
화장이 뭔가요? / 기관실 소음 ASMR / 바다 위에선 타이타닉 보지 맙시다
30명 중 29명이 남자인 세상 / 돈을 모을 수밖에 없는 직업
선박 기관사의 일주일은 월화수목금금금? / 고소 공포증에는 금융 치료가 답이지
싱그러운 바닷바람은 개뿔! / 상사 옆집으로 퇴근합니다 / 해기사 버전 《기생충》
3 바다 위에서 살아가는 법
입영 열차 타고 떠난 그녀 / 바다 위에서 연애하는 법 / 유재석 안 부러운 부캐 부자
태평양 시계는 선장님 마음대로 / 파도를 넘나드는 주식 열풍 / 생리, 그 참을 수 없는 불편함
인생 책 『라틴어 수업』 / 부모님이 배에 오신 날 / 태풍이 불 때는 말입니다
러닝머신으로 서핑 해 봤니? / 강제로 아날로그 / 당연한 것의 소중함
무늬만 선박 기관사, 사실은 잡부 / 해적이 나타났다! / 망망대해에서도 아이돌은 끊을 수 없어
4 바다, 그 심연 속으로
스트레스받지 않는 비결 / 바다에서도 코로나는 피할 수 없다
진정한 뱃사람이 되려면 / 적도를 지나며 / 미치도록 그리운 스타벅스 커피
인종 차별도 막지 못한 기쁨 / 태평양의 밤하늘 / 죽은 영혼과의 조우
위대한 롤 모델, 여성 최초 기관장 / 나의 선택을 후회한 적 있었나
더 넓은 세상을 향하여
부록 Tip : 선박 기관사 되는 법
에필로그

-4-

바다 위에도 길은 있으니까

바다 위에도 길은 있으니까
전소현, 이선우 지음

1 바다가 나를 불렀다
의대 사관 학교 상산고에서 뜬금없이 해양대로?
소현은 어려서부터 똑똑했다. 또래보다 말을 빨리 시작했고 누가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한글을 혼자서
다 떼 버렸다. 능력은 학교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옛말처럼 하나를 가르치
면 열을 아는 아이였다. 특히 수학을 잘했다. 수학이 본격적으로 성적을 좌우하기 시작하는 초등학교
고학년부터는 전교 1등을 도맡아 했다.
타고난 머리만 믿고 게으름 피우는 일도 없었다. 성실함이 최고의 장점이라고 부모님도 인정할 만큼 한
순간도 허투루 보내는 법 없는 모범생이었다. 재능과 노력으로 무장한 소현에게 적수는 없었다. 이름보
다 ‘전교 1등’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더 많을 정도였다. 물론 그중에서도 수학은 가장 자신 있었다.
그러니 수재들의 집합소인 상산고에 원서를 넣은 건 당연했다. 상산고는 대치동에서 세 살부터 사교육
에 둘러싸여 준비한 아이들도 족족 떨어진다는 자타 공인 최고의 명문이었다. 강남 한복판이 아닌 경
기도 외곽 출신에 고액 과외 한 번 받아 본 적 없었지만 높은 성적으로 당당하게 상산고에 합격했다.
상산고는 ‘의대 사관 학교’로 불릴 정도로 졸업생 대부분이 의대로 진학한다. 부모님은 딸이 벌써 의사
라도 된 것처럼 기뻐했다. 자신감이 충만한 소현도 그대로 졸업해 의사가 될 줄 알았더랬다.
그런데 인생이 항상 그렇게 장밋빛일 리는 없었다. 1학년 첫 학기부터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강하
게 들었다. 성적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첫 시험부터 전교 꼴찌에 가까운 점수가 나왔다. 충격이었다.
몇 번이나 성적표를 다시 봤지만 세 자릿수는 그대로였다. 이럴 리가 없는데. 원래도 열심히 했지만
더는 열심히 할 수 없을 만큼 이를 악물었다.
기숙사 자습실 문은 제일 먼저 열고 들어가 제일 늦게 닫고 나왔다. 잠은 건강에 무리가 가지 않을 만
큼만 잤다. 그런데도 성적은 오르지 않았다. 무엇보다 가장 자신 있었던 수학 점수가 달랑 50점이었다.
정말 충격이었다.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자존심이 상했다. 잠 안 오는 약까지 먹어 가면서 공부했지만 바로 어제까
지 옆에서 게임하다가 시험 본 친구는 100점, 자기는 50점이었다. 이쯤 되자 자기 능력을 의심하기 시
작했다. 그 의심은 학교생활이 계속되면서 확신으로 바뀌었다.
어려서부터 머리 좋다, 똑똑하다, 수재다, 천재다 소리만 듣고 자라 자기가 정말 그런 사람인 줄 착각
했었다. 결국 머리가 좋은 게 아니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무리 노력해도 성적은 제자리였다. 노력의
문제가 아니라 타고난 머리의 문제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걸 인정하자 학교생활은 지옥으로 변했다. 중학교 때 수재로 이름을 날리던 언니가 특목고에 진학했

-5-

바다 위에도 길은 있으니까

다가 낮은 성적에 충격을 받고 한 학기 만에 자퇴했다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나도 혹시 그렇게 되는
건 아닐까. 극도의 스트레스와 떨어진 자존감으로 하루하루가 고역이었다. 넉넉지 못한 살림에도 곧
의대에 진학할 딸의 모습을 그리며 열심히 뒷바라지하고 계신 부모님 얼굴이 떠올랐다. 여기서 포기하
면 안 된다는 생각과 더 이상 못하겠다는 생각 사이에 잠 못 드는 나날이 계속됐다.
항상 1등이었다가 전교 꼴찌가 된 심정이란. 가족에게도, 친구에게도 속속들이 털어놓을 수 없을 만큼
괴로웠다.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도 결과가 그렇다는 사실이 더욱 비참했다. 자존감은 끝없이 추락했고
시험 때마다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매번 쾌감과 희열을 선사해 마음 깊이 애정했던 공부에게 완
전히 배신당한 기분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단 한 번도 놓아 본 적 없었던 공부가 싫어지는 지
경에 이르렀다.
시험을 앞두고는 밥이 아예 입에 들어가지 않았다. 빈속인데 시험만 보면 토하고 양호실로 가기 일쑤
였다. 시험 시간에는 손이 덜덜 떨리고 앞이 하얘져 글씨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청심환을 달고 살
았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다. 우울증, 자퇴, 검정고시 같은 단어들이 자꾸만 머릿속에 떠올랐다
가 사라졌다.
결국 고등학교 3년을 그렇게 흘려보냈다. 그만두지도 못하고 잘하지도 못한 채. 전교생 대다수가 SKY
와 의대, 치대, 한의대에 진학하는 분위기 속에서 다른 학교를 선택할 자유조차 없었다. 안 될 걸 알면
서 울며 겨자 먹기로 성균관대 의대를 목표로 준비했다. 하지만 스스로 알고 있었다. 의사는 멀어진
꿈이란 걸.
너무나 예상 가능하게 수능을 망쳤지만, 그럼에도 절망했다. 학창 시절 내내 공부 말고는 한 게 없었
다. 특히 고등학교 3년 동안은 공부만 죽어라 했다. 노력하면 답이 올 줄 알았다. 하지만 결과는 그렇
지 못했다. 그 끝은 의대 원서조차 내지 못할 초라한 수능 성적이었다.
돌이켜 보면 간절함은 부족했다. 투철한 사명감이나 대단한 계기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공부 잘하니
까 당연히 의대를 목표로 했다. 의사가 적성에 맞을지, 의대에 진학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의사가
되기 전에 어떤 희생을 치러야 하는지는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래서 더 절망스러웠다. 미래에 대한
깊은 고민 없이 의사만 목표로 했는데 의대를 못 가게 되니 인생이 끝난 것 같았다. 전교생이 다 가는
의대에 못 간 소현은 낙오자, 루저였다. 대입이라는 거대한 전쟁터에서 만신창이가 된 패잔병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조차 몰랐다.
그때 아빠가 한 가지 카드를 내밀었다. 듣도 보도 못한 한국해양대학교였다. 의아해하는 소현에게 아
빠는 논리적 근거를 들어 그곳에 진학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첫째, 소현의 멘탈이 재수의 중압감
을 이겨낼 만큼 강하지 못했다. 둘째, 기약 없는 재수 생활을 뒷받침하기엔 집안 사정이 어려웠다. 셋
째, 한국해양대학교는 본인만 잘하면 졸업 후 취업이 비교적 보장돼 있었다. 넷째, 이과적인 성향과 잘
맞았다.
학원을 운영하는 아빠가 입시 정보를 알아보다 딸에게 딱 맞는다고 판단해 제안한 학교였다. 기대가 컸던
아빠를 실망시켜 죄송한 마음에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대학인지, 무슨 공부를 배우는 곳
인지, 나와서 어떤 일을 하게 되는지 전혀 모른 채로. 그리고 그 선택이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6-

바다 위에도 길은 있으니까

2 바다의 심장을 만지다
선박 기관사가 대체 뭐 하는 직업이야?
선박 기관사가 여러 면에서 의사와 닮았다는 이야기는 앞에서 했지만 그래도 무슨 일을 하는지 여전히
감이 오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준비했다.
선박 기관사는 이런 일을 합니다: 선박 기관사의 일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운영(Operating)
과 유지 보수(Maintenance). ‘운영’은 자신의 담당 기기를 기동하고 정상적인 기동 상태를 유지하는 것
이다. 소현은 발전기와 조수기 담당이라서 이 기기를 돌릴 일이 있으면 켜고 꺼야 할 때 끄는 역할을
한다.
기기 하나를 켜고 끄는 게 무슨 대수냐고 생각하겠지만 선박 내 기기 대부분은 컴퓨터처럼 전원만 틱
켠다고 켜지는 게 아니다. 시동 절차라는 게 있어서 관련 밸브들을 라인업 해 주는 등의 전문적인 작
업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해수를 담수로 만드는 조수기는 물을 생산할 수 있는 완벽한 상태에 오르기
까지 약 2시간이 걸린다. 해수 공급, 진공 형성을 위한 스팀 공급, 해수를 가열하기 위한 스팀 공급 등
세 가지의 라인을 살려야 하는데 조수기 온도를 올려 실제로 쓸 수 있는 물을 만들기 위한 컨디션을
맞추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쓴다.
또한 ‘유지 보수’가 있다. 기기도 사람처럼 지속적으로 관리를 해 줘야 한다. 주기적으로 내부를 소제
한다든지, 분해해서 검사한다든지, 구성 부품을 갈아 주는 등의 조치가 필요하다. 사람이 주기적으로
정기 검진을 받고 그에 따라 치료할 일이 생기면 치료를 받는 것과 같은 이치다.
유지 보수는 자체 시스템에 필요한 부분이 뜨기 때문에 이 리스트를 중심으로 작업을 짜서 한다. 리스
트에 뜬 것만 관리하는 건 아니다. 그 외에도 수시로 기기의 상태를 파악해야 한다. 어딘가 누설부가
생겼다든지, 갑자기 이상한 소음이 들린다든지, 평소와 온도나 압력이 달라지는 부분을 항상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이상 상황이 발생했을 때 바로 조치가 가능하다.
입출항 때는 더욱 바빠진다. 선박은 입항 시가 가장 위험하다. 항구에 들어가면서 배의 속도가 점점
줄어드는데 기기 상태가 항해 중과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에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해 기관부 전원이
기기의 컨디션을 주의해서 살펴야 한다.
배가 완전히 정박하면 화물 하역 작업이 이루어지고 그사이 기관부는 항해 중에 하지 못하는 정박 작
업을 하고 돌아가면서 당직을 선다. 또 화물 하역에 필요한 기기 운영도 해 줘야 한다. 지금 타고 있는
배는 2주마다 한국과 호주에 입항하기 때문에 이 작업을 2주마다 반복한다.
만 2년 동안 승선하면서 한 가지 깨달은 바가 있다. 선박은 경험치가 중요하다는 것. 물론 어느 정도
경험이 쌓이면 업무 능력이 올라가는 건 다른 직업군도 마찬가지겠지만 배는 특히 그렇다. 배에서는
체계적인 인수인계나 교육이 이루어지기 어렵다. 심한 경우에는 전임자 얼굴도 못 보고 교대되는 경우
가 있고, 다들 자기 할 일이 바쁘기 때문에 후임을 교육하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그래서 일하다가 모
르는 부분이 있으면 기기를 만든 회사에서 배부한 지침서나 과거 자료를 참고해 혼자 맨땅에 헤딩하듯

-7-

바다 위에도 길은 있으니까

익혀 나가야 한다.
그래서인지 배 타는 사람들 사이에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어도 그냥
얼마간 타기만 하면 다 일할 수 있다는 것. 이런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가끔 담당자가 맡은 기기에 대
해 OJT(On Board Job Training)를 하기도 한다. 말 그대로 승선해서 일하는 데 필요한 지식을 다른 사
람들에게 교육해 주는 것이다. 동료 사관이나 선임의 OJT를 통해 부족한 부분을 어느 정도나마 보충
할 수 있다.
선박 기관사는 어디에나 있는 엔지니어의 일종이지만 선박에 필요한 기계들을 만진다는 점에서 전문성
이 돋보이는 직업이다. 자신을 대체할 수 있는 인력이 없다는 건 제법 뿌듯한 기분이다. 그런 점에서
선박 기관사의 자부심은 상당하다고 할 수 있겠다.
바다 위에선 타이타닉 보지 맙시다
마침 주말이라 다 같이 모여 영화를 관람했다. 오랜만에 로맨스 영화 좀 보자면서 누군가 《타이타닉》
을 틀었다. 바다 위에서 관람하는 《타이타닉》은 더욱 낭만적이었다. 잇몸 만개를 유발하는 달달한 장
면들이 지나가고 얼마 후 타이타닉호는 빙산에 부딪히며 좌초 위기를 맞았다. 화기애애했던 방 안의
공기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이미 봤던 영화지만 처음 보는 것처럼 손에 땀을 쥐었다.
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앵― 그때 갑자기 고막을 찢는 소리가 들렸다. 화재 경보였다. 소리가 들려오는
쪽은 기관실이었다. 사람들은 당황했다. 기관실에 문제가 생기면 선박은 물론 승선한 모두의 안전이
위태로워진다.
기관사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기관실 쪽으로 몰려갔다. 입구에서부터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정
신없이 내려가 ESCR의 문을 열었다. 뿌연 연기가 가득했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었다. 다른 곳도 마
찬가지지만 특히 ESCR은 전기를 비롯한 선박을 컨트롤하는 시설이 집합돼 있는 곳이기 때문에 불이
나면 정말 큰일이었다.
6개월간의 항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날을 딱 3일 남기고 있을 때였다. 말년 병장처럼 달력에 날짜
를 하나씩 지워 가면서 손꼽아 기다렸는데, 여기서 꼼짝없이 죽는 건가 하는 성급한 생각이 머릿속을
꽉 채웠다. 뉴스와 영화에서 봐 왔던 온갖 해상 사고 영상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눈길은 자기도 모
르게 구명조끼 보관함을 향했다.
내가 여기서 죽으면 엄마 아빠가 너무 슬퍼하실 텐데. 일단 살고 봐야 하지 않을까. 얼른 구명조끼부
터 걸친 다음 갑판으로 올라가서….
곧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감히 ESCR 안으로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때 사관들이 거침없
이 뛰어 들어갔다. 조금의 고민도 없는 움직임이었다. 그들의 모습이 연기 속으로 사라지고 한참을 나
타나지 않았다.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몇 분이 흘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기관실은 아수라장이었다.
연기 때문에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고, 사이렌은 쉴 새 없이 울려 댔으며, 점점 짙어지는 타는 냄새 때
문에 어떤 기계든 곧 폭발할 것만 같았다.

-8-

바다 위에도 길은 있으니까

문득 이 사실을 보고하지 않았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얼른 정신을 차리고 기관장님에게 연락했다. 상
황이 상황이니만큼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보고했는데 기관장님은 의외로 침착했다. 알겠다, 내려가 볼
게. 이 두 마디가 전부였다. 그 차분한 목소리는 듣는 사람까지 진정시켜 주는 효과가 있었다. 당황해
어쩔 줄을 몰랐다가 기관장님과 통화한 뒤부터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기관장님은 그로부터 딱 3분 뒤 전혀 동요 없는 얼굴로 기관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긴급한 상황임을
짐작할 수 있는 건 신발뿐이었다. 양쪽이 짝짝이였다. 그 상태로 기관장님도 연기 속으로 사라졌다. 잠
시 뒤 연기가 서서히 옅어지는 게 느껴졌다. 기관장님의 등장으로 마음이 안정된 덕분인지 타는 냄새
도 줄어든 기분이었다.
결국 발화원을 찾아내 진화에 성공했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긴박한 상황에서 동요 없이 문제를
해결하는 선배들의 모습을 보면서 저절로 존경심이 생겼다.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었던 위태로운 순
간이었지만, 위급 상황에서 상급자의 침착한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직접 눈으로 보고 배울 수 있었
던 소중한 경험이었다.
올라오니 《타이타닉》은 클라이맥스를 지나 끝부분을 향해 가고 있었다. 얼음장 같은 차가운 바다 위
에 둥둥 떠다니는 조난자들의 모습이 화면 가득 보였다. 누군가 조용히 리모컨을 들어 영화를 껐다.
더 보겠다는 원성은 들리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타이타닉》이 사랑 영화가 아닌 ‘조난 영화’
였던 것이다. 앞으로 《타이타닉》은 육지에서만 봐야겠다고 다짐했다.

3 바다 위에서 살아가는 법
해적이 나타났다!
험상궂은 얼굴, 살벌한 흉터, 거친 몸놀림, 현란한 칼 솜씨, 하얀 해골이 그려진 검은 깃발이 달린 해
적선. 해적 하면 떠오르는 모습은 대개 무시무시하다. 책이나 영화 속 해적은 무법자답게 거친 바다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약탈도 수준급이라 그 어떤 배도 적수가 되지 못한다.
배를 탄다고 했을 때 부모님은 해적을 걱정하셨다. 다른 부모님은 딸이 밤늦은 퇴근길에 치한을 만나
지 않을까 신경 쓰는데 소현의 부모님은 딸이 밤바다에서 해적을 만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먼 바
다로 나가니 왠지 해적의 소굴로 딸을 들여보내는 기분이셨던 것 같다. 다행히 배가 해적이 자주 출몰
하는 구간을 지나가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고 한시름 놓으셨다.
하지만 바다에 울타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해적이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그
래서 항해 중에는 갑판 위 라이트를 켜지 않는다. 해적의 표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입항을 했을 때
나 라이트를 켠다.
다행히 이 정도만 신경 쓰면 대부분 안전하지만 해적 구간을 지나는 배는 위험할 수 있다. 밤에는 불
빛이 절대 새어 나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마치 나치를 피해 다락방에 숨은 안네의 가족처럼 숨죽
인 채 조용히, 아무도 없는 것처럼 어둠 속에서 움직여야 한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용병을 태우는
경우도 있다. 해적선의 공격을 받았을 때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적 수당’을 따로 주는 배도
있다. 생명 수당인 셈이다.

-9-

바다 위에도 길은 있으니까

그런데 이 해적의 면면을 알고 보면 생각이 많아진다. 일단 그들을 과연 해적이라고 불러도 될지가 의
문이다.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의 조니 뎁처럼 무섭지만 멋질 거라는 상상은 말 그대로 환상에 불과
하다. 주로 못사는 나라 사람들이 한 푼이라도 뜯어내려고 덤비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보니 장비부터
시원찮다. 변변한 무기는커녕 타고 나온 배조차 저런 걸 위험해서 어떻게 타고 나왔나 싶을 정도로 폐
선 직전이다.
그 배를 타고 간신히 다니다가 여차저차해서 큰 상선을 발견했다 치자. 그들은 어서 노략질을 하고 싶
겠으나 몸이, 아니 배가 따라 주지 않는다. 어쩌다가 목표물을 발견해도 너무 느려서 따라잡질 못한다.
항해사들 말에 따르면 레이더망에 해적선이 잡혀도 당황하지 않는다고 한다. 어차피 배 엔진이 꺼져서
레이더망에서 알아서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웃기다 못해 불쌍할 지경이다. “해적이 나타났다!!!”
영화에선 이 한 마디면 바로 아수라장이 되지만 그건 영화일 뿐, 현실에선 그저 선속을 조금 높여 주기
만 하면 문제가 해결된다. 해적들이 그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서 스스로 나가떨어지기 때문이다.
몇 년에 한 번씩 잊을 만하면 소말리아 해적에게 인질로 잡혔다는 뉴스가 나와서 사람들을 식겁하게
만든다. 2011년 소말리아 해상에서 해적들에게 피랍된 삼호 주얼리호 선원들을 대한민국의 청해부대가
구출한 ‘아덴만 여명 작전’은 악명 높은 해적의 민낯을 보여 준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짠 내 나는 해적이 훨씬 많다. 소소하게 돈 뜯어내고 물건 훔쳐 가고. 기름은 물론 얼마나 없이 사는지
소화전에 붙어 있는 연결 호스까지 떼어 간다고 한다. 그들 나라에선 그것도 돈이 된다고.
그런 해적들이 나타난다고 해도 목숨에 위협이 될 일은 거의 없어 보인다. 오히려 쫓아오다가 엔진이
꺼져서 바다에 빠지는 건 아닌지 신경을 써 줘야 하나 고민이 될 만큼 안쓰럽다. 그런 해적들을 상대
로 해적 수당이라는 이름의 돈을 추가로 받는 게 미안할 정도로 무늬만 해적이지만, 그래도 언제 어떻
게 돌변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세상에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자나 깨나 육지에선 밤길 조심, 바
다에선 해적 조심.

4 바다, 그 심연 속으로
스트레스받지 않는 비결
배를 타면서 육지에서는 몰랐던 것들을 정말 많이 보고 듣고 또 배웠다. 생소한 환경에서 살면서 청소
같은 습관부터 미래 계획까지 크고 작은 변화들이 생겼다. 배를 탄 후 사람이 환경에 얼마나 빨리 적
응하는지 몸소 체험하고 있다. 바다 위에 떠다니는 작은 도시 같은 배 안에서 의식주를 해결하며 출퇴
근하면서 점점 몸이 배의 사이클에 맞춰졌다.
군대에 다녀온 남자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군대에 가면 규칙적인 생활을 하느라 몸이 저절로 건강
해진다고. 실제로 기계처럼 돌아가는 생활 속에서 규칙적으로 생활하니 오히려 육지에서보다 더 건강
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또 배 안의 공기가 워낙 탁해 청소나 정리도 더 부지런히 하게 된다.
배 안에는 또래가 별로 없다. 배를 탈 때마다 조금씩 바뀌긴 하지만 아빠 연배의 아저씨들이 훨씬 많
은 편이다. 배 안에 속마음 터놓고 얘기할 상대가 한 명만 있어도 버틸 수 있다는 얘기를 많이들 하는
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6개월 넘게 한정된 공간에서 직장 상사와 24시간 붙어 지내야 하는 건 생각

- 10 -

바다 위에도 길은 있으니까

보다 훨씬 더 정신이 피폐해지는 일이다. 혹시라도 배 안에 자기와 맞지 않거나 자기를 못마땅하게 생
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배는 직장이 아니라 지옥으로 변한다. 내릴 수도 없고 출근을 안 할 수도 없으
니까.
꼭 그런 문제가 있지 않더라도 직장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풀 상대를 일로 엮인 사람 중에서 찾기란 거
의 불가능에 가깝다. 떨어져 있는 가족에게는 걱정할까 봐 말할 수 없고, 잘 만나지도 못하는 친구들
에게 매번 카톡으로 힘들다는 이야기만 털어놓는 것도 부담이다. 건너 들은 얘기로는 배 안의 불편한
인간관계를 견디지 못해 어렵게 들어온 직장을 그만두거나 심지어 자살한 사람도 있다고 한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빅터 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에서』(청아출판사, 2020)라는 책에서 나치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서
의 생활을 서술했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완전히 말살당한 채 배고픔과 강제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자신이 인간이라는 것을 한순간도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시궁창 오물을 뒤집어쓴 채 먹지도
씻지도 자지도 못하던 어느 날, 수용소 밖 하늘을 온통 핏빛으로 물들인 노을을 보면서 그는 ‘아름다
움’을 느꼈다고 한다. 그러면서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고.
나는 살아 있는 인간 실험실이자 시험장이었던 강제 수용소를 네 곳이나 전전했다. 거기서 어떤 사람
은 성자처럼 행동할 때 또 다른 사람은 돼지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았다. 사람은 내면에 두 개의 잠재
력을 모두 가지고 있는데, 그중 어떤 것을 취하느냐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그 사람의 의지에 달려 있
음을 알게 됐다.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와 배를 비교하는 건 아니지만 극단적인 선택을 한 누군가에겐 그렇게 느껴졌
을 수도 있을 것이다. 배라는 한정된 공간에 갇혀 지내려면 스스로 바꿀 수 없는 부분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기 위해 애를 많이 써야 한다. 누구도 배를 타라고 등 떠민 사람은 없었고, 배에는 육지에서 생
각할 수 없는 불편함이 있음을 알고 승선했다. 이론과 현실은 늘 다른 법이지만 그래도 아직은 이 현
실이 버거웠다.
하지만 주어진 환경과 상황을 탓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어차피 이 일을 그만둘 게 아니라면 어떻게
든 적응하는 건 자기 몫이다. 분노하고 실망하고 원망하며 시간을 보내면 거기에 쏟아부은 감정과 에
너지만 아까울 뿐이다. 그럴 시간에 오히려 스스로 바꿀 수 있는 부분에 집중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
다.
승선 첫 1년 동안 무수한 고뇌와 몸부림 끝에 소중한 깨달음을 얻었다. 이미 주어진 환경을 인정하고
빨리 받아들여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 이걸 깨닫고 나니 그 뒤부터는 주변 환경이 어떻다든가,
남이 어떤 상처를 준다 해도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빅터 프랭클은 강제 수용소라는 극한의 환경 속에서 매일 아침마다 자신의 몸을 가꾸었다고 한다. 이
를 닦을 수도 손을 씻을 물도 없었지만 몇 달 내내 감지 못한 머리라도 손가락으로 곱게 빗으면서 하
루를 시작했다고 한다.
상황을 바꿀 수 없다면 받아들여야 한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이 비법 역시 배를 타지 않았다면 몰

- 11 -

바다 위에도 길은 있으니까

랐을 것, 바다가 선사한 선물이다.
미치도록 그리운 스타벅스 커피
“배에서 내리면 뭐가 제일 먹고 싶어요?” 배 안에서 선원들끼리 담소를 나눌 때면 으레 나오는 단골
질문이다. 대부분 대답은 비슷하다. 회나 곱창처럼 배에서는 잘 먹지 못하는 육지 음식들이 나온다. 하
지만 소현의 대답은 좀 달랐다. “저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요! 그 스타벅스에서 플라스틱 컵에 나오는 얼
음 달그락거리는 소리 나는 거 있잖아요. 그게 제일 먹고 싶어요.” 그러면 다들 뭔지 알 것 같다는 표
정으로 말한다. “뭔가 씁쓸한 대답이네….”
10개월이 넘는 승선을 마치고 인천항에 내리면 가장 먼저 스타벅스로 달려간다. 커피숍 메뉴판이래 봤
자 뻔한데 거기 적힌 커피 종류를 한 글자씩 음미하며 읽는다. 아메리카노, 카페라테, 바닐라라테, 돌
체라테, 프라푸치노……. 이렇게 하나씩 속으로 훑은 다음 계산대 직원에게 우아하게 말한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이요.” 아! 쾌감이 느껴진다! 이 말을 얼마나 하고 싶었던가! 주위에 사람만 없으면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큰 소리로 외치고 싶었다.
배에서도 하루 세 끼는 잘 먹고 있지만 커피까지 제공되진 않는다. 배 안에는 카페가 없다. 우리나라
에서 가장 많이 창업하는 아이템 1위가 카페라고 할 정도로 육지에선 블록마다 커피숍이 하나씩 있다.
집 근처에서도 1년에 새로 생기는 카페가 여러 군데다. 기존에 있던 가게가 빠지는 자리에는 거의 카
페가 들어오는 경우가 많다. 그 많은 카페가 다 장사가 되는 게 신기할 정도다. 장사가 되니까 들어오
겠지. 한국인의 커피 사랑은 참 대단하다.
하지만 바다에 나가 있으니 그 대열에 합류하기가 어렵다. 휴게실에 구비된 일회용 커피 혹은 커피 머
신을 가져온 동료의 커피로 아쉬움을 달래 보지만 아무리 유명한 커피 스틱이나 커피 머신에서 내린
커피라도 스타벅스 커피가 선사하는 색다른 2%를 커버해 주진 못한다. 테이크아웃한 플라스틱 컵에
든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배 안에선 거의 상상 속 엘도라도 수준이다. 육지의 스타벅스가 미치도록 그
리운 날이면 커피 향 진하게 풍기는 아메리카노가 담긴 컵 안에서 얼음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환청처
럼 귀에 들려온다. 인간은 어떻게든 환경에 적응하게 돼 있다는데 카페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만큼은 아
무리 해도 극복이 되지 않는다.
사실 육지에선 오히려 카페에 자주 드나들지 않았다. 남들처럼 어쩌다가 기분 전환 삼아 들르는 정도
였다. 사람은 공기처럼 늘 곁에 있는 것의 소중함을 모르고 지나치다가 그것이 없어진 후에야 가치를
깨닫는다. 배를 타기 전에는 친구들이 카페에서 만나자고 하면 “또?”라고 할 정도로 카페는 특별한 곳
이 아니었다. 하지만 망망대해 한가운데서는 그 시간이 눈물 날 정도로 그리웠다.
카페 한구석 소파에 자리 잡고 앉아 각자 취향별로 시킨 커피를 하나씩 입에 물고 깔깔거리며 수다 떨던
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테라스에서 바라보던, 별 새로울 것도 없었던 길거리 풍경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
다. 반쯤 남은 커피에 물을 채워 테이크아웃해서 돌아다니던 그 시간을 다시 마시고 싶었다. 스타벅스 커
피가 그립다기보다는 스타벅스 커피로 대변되는 당연했던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재미있는 건 한 달간의 휴가를 받고 육지로 올라온 일주일이 지나면 그 간절함이 반으로 줄어든다는
사실이다. 매일 두세 번씩 들르던 카페는 한 번만 가도 만족스럽고 어떤 날은 건너뛰기도 한다. 그러

- 12 -

바다 위에도 길은 있으니까

다가 휴가가 끝나 가고 승선 날짜가 다가오면 다시 미친 듯이 들른다. 마치 일 년 치 커피를 미리 마
시기라도 할 것처럼.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을 스타벅스에 갖다 바치는 기분이 들긴 하지만 1년에 한 달
만 마음껏 마실 수 있는 커피다 보니 아깝지 않다.
커피는 악마처럼 검고 사랑처럼 달콤하다는 말이 있다. 악마 같든 천사 같든 배 속이 찰랑거릴 정도로
커피를 들이붓고 승선해도 첫날엔 괴롭다. 스타벅스에 가려면 또다시 6개월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날만큼은 가족도 친구도 아닌 스타벅스에 앉아서 마시던 달그락거리는 아이스 아메
리카노가 제일 보고 싶다.

- 13 -

바다 위에도 길은 있으니까

반응형

'책,영화,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의 비밀지도  (0) 2022.08.08
보이지 않는 것을 팔아라  (0) 2022.08.08
룰루레몬 스토리  (0) 2022.08.07
되받아치는 기술  (0) 2022.08.07
다루기 힘든 아이 문제는 따로 있다  (0) 2022.08.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