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룰루레몬 스토리

by Casey,Riley 2022. 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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칩 윌슨 지음 / 예미
이 책은 요가 팬츠로 세계 애슬레저룩의 선두 주자가 된 룰루레몬 창업자인 칩 윌슨의 자전적 회고록
이자 룰루레몬의 성공과 실수 이야기이다. 저자는 자신이 요가를 하면서 요가복에서 느꼈던 불편함에
서 그치지 않고, ‘고객은 어떻게 느낄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누구나 입어서 편안하고, 입고 싶은 옷을
만들겠다는 집념으로 룰루레몬을 작은 의류 회사에서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시켰다고 말한다.

룰루레몬 스토리
칩 윌슨 지음

▣ 저자 칩 윌슨
칩 윌슨은 기업가이자 자선가이다. 젊은 시절에 레저 스포츠 의류 업체를 경영했던 경험과 요가에서
얻은 영감을 기반으로 룰루레몬 애슬레티카를 창업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고, 기능성 의류 분야와 기업
문화의 혁신가로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칩 윌슨은 룰루레몬의 외형적인 성공뿐 아니라 제품보다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리더십과 경영 철학으로 유명하다.


▣ Short Summary
스포츠 시장에서는 남성 의류가 대세였고 그 어느 누구도 여성 스포츠 의류에 대해 생각하고 있지 않
을 때, 캐나다 출신의 칩 윌슨이 1998년에 밴쿠버에서 시작한 룰루레몬 애슬레티카는 여성 스포츠 의
류 시장에 주목했고 기능성과 패션 감각을 갖춘 요가복을 만들었다. 아울러 룰루레몬은 ‘32세 콘도 회
원권을 가지고 여행과 운동을 좋아하고 패션에 민감한 전문직 여성’인 슈퍼걸을 타깃으로 미적 감각과
건강한 에너지를 담은 비즈니스 철학과 기업 문화를 만들면서 세계적인 브랜드로 성장했다.
참고로 룰루레몬에서는 모두가 특별한 이름으로 불린다. 룰루레몬이 타깃으로 하는 여성은 ‘슈퍼걸’이
고, 고객은 ‘게스트’, 매장을 담당하는 직원은 ‘에듀케이터’이며, 지역 사회에 재능을 기부하는 데 기여
하는 운동선수는 ‘앰배서더’이다. 또 룰루레몬에는 따라붙는 별칭과 수식어도 많다. ‘요가 의류업계의
샤넬’, 언제나 에너지가 넘치고 활동적인 룰루레몬 버티컬 스토어는 ‘스타벅스’, 시대를 앞서 나가며 혁
신을 거듭하는 기업 이미지는 ‘애플’ 그리고 창업자 칩 윌슨은 ‘스티브 잡스’로 비교되며 화제가 되고
있다. 그런데 이 모든 이름과 수식어가 바로 룰루레몬이라는 브랜드를 설명한다.
이 책은 요가 팬츠로 세계 애슬레저룩의 선두 주자가 된 룰루레몬 창업자인 칩 윌슨의 자전적 회고록
이자 룰루레몬의 성공과 실수 이야기이다. 저자는 자신이 요가를 하면서 요가복에서 느꼈던 불편함에
서 그치지 않고, ‘고객은 어떻게 느낄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누구나 입어서 편안하고, 입고 싶은 옷을
만들겠다는 집념으로 룰루레몬을 작은 의류 회사에서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시켰다고 말한다.
한편 룰루레몬은 다른 스포츠 브랜드가 성장에만 집중할 때 본질적인 기능과 가치, 직영 매장을 통한
고객과의 직접적인 소통에 충실했다. 그래서 룰루레몬은 고객 한 사람, 한 사람의 경험과 느낌을 가장
잘 이해한다. 그리고 이렇게 쌓인 고객 소비 패턴 빅 데이터를 통해 인체에 가장 편안하고 기능에 충
실할뿐더러, 신체의 감각과 주관적인 감정까지 고려한 인체 공학적인 의류를 만들어 왔다. 그래서 비
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룰루레몬을 한 번 경험해 본 고객들은 지갑을 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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룰루레몬 스토리

▣ 차례
창업자의 개인 비전이자 룰루레몬의 기업 비전
창업자와 룰루레몬이 함께 추구한 핵심 가치
이 책을 쓴 이유
프롤로그: 서핑, 스케이트보드, 그리고 스노보드 시대가 막을 내리다
1장 캘리포니아에서 캘거리로
2장 겨우 19살에 내 집을 갖다
3장 ‘와인처럼 근사한’
4장 웨스트비치 경영
5장 시장의 변화
6장 동업
7장 스노보드 시장의 성장
8장 역경의 시간들
9장 포커스 그룹 마케팅
10장 룰루레몬의 탄생
11장 1998년의 세계
12장 룰루레몬 성장하다
13장 버티커 리테일 비즈니스
14장 루온 원단
15장 목표와 문화, 그리고 인재 개발
16장 토론토
17장 또 다른 성장들
18장 패밀리 비즈니스
19장 미국 시장을 향해
20장 기업 가치
21장 경영진 교체
22장 주식 상장
23장 밥 미어스가 떠난 후
24장 크리스틴과의 갈등
25장 이사회와의 마찰
26장 지표로 입증할 수 없는 것
27장 속이 비치는 요가 팬츠
28장 충격 수습
29장 치명적인 인터뷰
30장 탈 진실
31장 차기 CEO
32장 스티브 잡스를 이해하다
33장 승자는 언제 카드를 접을 줄 안다
에필로그: 나의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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룰루레몬 스토리

룰루레몬 스토리
칩 윌슨 지음

캘리포니아에서 캘거리로
아메리칸드림 / 캘거리에서의 고생담
내 인생의 초반을 돌이켜보면, 태어나서부터 내 손으로 기업을 일으키기까지 삶의 전체를 관통하며 나
를 성장시키며 이끌어 온 키워드들이 있다. 다른 사람들도 각자의 삶의 키워드가 있겠지만, 나의 경우
에는 사업체를 운영하시던 외조부모님 경영 방식, 부모님의 빠듯한 재정 형편,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나
서 캐나다의 앨버타주에서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미국과 캐나다의 이중 국적, 그리고 무엇
보다도 체육 활동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 등을 들 수 있다.
부모님 두 분은 유타주에 있는 브리검 영 대학교를 다니며 서로를 알게 되어 결혼을 했다. 나는 1955
년 4월에 태어났고, 1957년에 여동생 노엘이, 1960년에 남동생 브렛이 태어났다. 두 분이 처음 만난
것은 20대 초반이었는데, 계획에 없던 임신으로 서둘러 결혼했고, 이왕이면 잘해 보고 싶었겠지만 서
로 소통하는 데 서툴렀다. 게다가 헤어나기 힘든 재정적 압박이 있었다. 아무튼 부모님이 고군분투하
는 상황에서도 우리는 많은 사랑을 받으며 자라났다.
수영 선수 생활
가정의 경제 사정을 고려할 때 수영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아주 훌륭한 활동이었다. 필요한 장비는
수영복과 고글뿐이었고, 하고 싶을 때는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절실히 원했지만 살 수
없었던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마음에 드는 수영복이었다. 당시 캘거리에서 구할 수 있는 수영복 브
랜드는 스피도뿐이었는데, 모두 한 가지 색상의 디자인뿐이었다. 그런데 11~12살 무렵, 나는 수영모
임에서 전혀 다른 수영복을 보았다. 다양한 꽃무늬를 연상케 하는 디자인이었다. 너무 갖고 싶어서 그
걸 입은 아이에게 어디서 샀느냐고 물어보았다. 그 아이는 “텍사스”라고 대답했다.
갖고 싶어도 사지 못하고 참는 것은 내게 익숙한 일이었지만, 나는 그 수영복을 꼭 갖고 말겠다고 결
심했다. 어머니는 잠시 생각하고 나서 내가 좋아하는 수영복이라면 다른 아이들도 좋아할 것이라며 대
량으로 싸게 구매하여 다른 아이에게도 판매하면 이윤이 남을 것이고, 그러면 내 수영복을 살 만한 비
용은 마련될 것이라고 얘기하셨다. 나는 이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한 개에 13달러에 여러 벌을 구매
해서 두 배 정도 되는 가격으로 팔았다. 작지만 강렬한 성공이었다. 그 일을 통해 구매, 배송, 판매 등
의 개념에 눈을 뜨게 되었다.
부모님의 이혼
서로 맞지 않는 상대임을 확인하고 갈라선 부모님은 각자 완벽한 파트너를 새로 만나 재혼하셨다. 재
혼으로 인해 부모님의 재정 상황도 바뀌었다. 어머니는 프랭크 콘래드라는 지질학자와 재혼했는데, 그
에 따라 우리의 생활 수준도 달라졌다. 우리는 캘거리에서도 상류층이 거주하는 지역인 마운트 로얄로
이사했다. 이웃들은 모두 부유했고, 윤리에 아주 엄격한 사람들이었다. 나는 새로 사귀게 된 친구들의
부모님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그리고 이 친구들이 나를 두 팔 벌려 환영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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룰루레몬 스토리

겨우 19살에 내 집을 갖다
앨버타 대학교 / 알래스카 송유관 / 문명 세계로 돌아오다
나는 집에서 200마일 떨어진 에드먼턴에 있는 앨버타 대학교에 입학했다. 대학 2학년이 끝나갈 무렵,
나는 내가 운동 말고는 다른 일에 별로 열정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남은 인생을 무엇을 하며 살
아야 할지도 막막했다. 그러던 어느 날 캘거리에서 돌아오는 에드먼턴 공항에서 친구의 어머니를 만나
게 되었다. 그녀가 나에게 말했다. “나는 알래스카로 가는 중이야. 남편이 알래스카 유전 송유관 5개
구역 중 하나의 프로젝트 관리자란다. 네가 미국인이 아니라서 유감이다.” 그녀는 한 마디 덧붙였다.
“네가 미국인이고 원하기만 한다면 거기서 일할 수 있는데 말이야.” 그런데 친구의 어머니는 모르고
있었지만, 나는 미국 국적도 가지고 있는 이중 국적자였다.
대학 2학년을 마치던 날, 나는 알래스카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고, 얼마 후 송유관 공사장에서 일
하기 시작했다. 나는 영하 30도의 온도에 크레인의 정상에 올라가 다른 크레인과 연결하는 고공 인양
노동자로 일했다. 처음에는 여름 한 철만 일하고 가을 학기에 학교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캘거
리에서는 여러 일을 전전해도 시간당 3.5달러밖에 못 벌었지만, 그곳에서는 13.5달러를 받을 수 있었
다. 결국 나는 18개월 만에 송유관 현장을 떠났다. 그때까지 내가 번 돈은 15만 달러 정도였다.
캘거리에 돌아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새집을 구하는 일이었다. 여러 집을 둘러봤지만, 그 가운데 가
장 오래되고 볼품없는 건물에 눈길이 가 그 집을 샀다. 그리고 집이 결코 좋은 집은 아니라고 생각했
기 때문에, 나 자신에게 주는 선물로 메르세데스 벤츠도 한 대 구입했다. 그러나 집은 낡아서 유지하
는 데 많은 돈이 들어갔다. 자동차도 고급 자동차라 별것도 아닌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차량 대리점을
통해 독일에서 부품을 공수해 와야만 했고, 그 때문에 해결하려면 수백 달러의 비용이 들었다. 나의
첫 두 가지의 소유물로 얻은 이러한 경험은 훗날 사업하는 데에도 큰 교훈이 되었다. 이후 나는 고장
이 잘 나지 않고 유지 비용이 많이 들지 않는 혼다 시빅과 같은 차량을 선호하게 되었고, 앞으로는 든
든하게 지어진 집만 살 것이라고 스스로 다짐했다.

‘와인처럼 근사한’
대학 졸업 / 캘리포니아 랩 쇼츠 / 취업
1976년, 경영대학 2학년 과정을 마치고 나니 교수님들은 내게 경영대학이 나와 맞지 않는 것 같다고
조언했다. 내가 회계학 과목을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공은 경제학이었고 회계학 때문에 골치
아프기는 했지만, 다른 과목은 거의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았다. 1979년 말쯤, 나의 대학 생활은 끝
났고, 은행에는 8만 5천 달러가 남아 있었다. 나는 그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했다.
과거 여러 차례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캘리포니아에서 답을 찾았다. 1979년 가을, 샌디에이고에 사
시는 할머니를 뵈러 가는 길에 나는 오션 퍼시픽이 제작한 스트리트 스타일의 코르덴 재질의 서핑 쇼
츠(이 책에서는 운동용 반바지를 쇼츠라고 표시함)와 서핑을 하지 않을 때 입을 만한 후드티를 보았다.
또 젊은 여성들이 끈의 한쪽을 묶고 아래로 늘여 다시 뒤에서 묶는 랩 쇼츠(Wrap shorts)를 입은 것을
보았다. 나는 매년 캘리포니아를 방문했기 때문에, 이것이 그전에는 볼 수 없던 새로운 유행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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룰루레몬 스토리

을 단번에 알아챘다. 나는 캘거리로 돌아가면서 여자 친구인 신디 윌슨에게 줄 선물로 쇼츠 두어 벌을
샀다. 돌아와서 그녀에게 쇼츠를 보여 주니 아주 좋아했다. 그녀의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쇼츠의 상품성을 알려 주는 첫 번째 긍정적인 신호였다. 처음에는 우리가 직접 만들어 볼 생각
이었다. 그러나 내가 나의 능력을 과대평가했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패턴을 자른 뒤 바느질을 해
보았지만, 사람들이 입고 싶을 만한 옷은 나오지 않았다. 나는 신문에 구인 광고를 냈고, 몇몇 여성들
이 지원했다. 지원자들에게 랩 쇼츠 10벌씩 제작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 결과를 기준으로 작업 숙련도
가 높다고 생각되는 사람 5명을 추려 냈다. 그 가운데 한 명은 다른 네 명보다 아주 탁월했다. 그녀의
이름은 조세핀 테라티아노였다. 이탈리아계 여성 재봉사였던 조세핀은 친척들과 함께 내 작업을 도와
주었다. 그들은 훗날 내가 이탈리아 인맥을 만드는 창구 역할을 하게 된다.
나는 조세핀과 그녀의 자매들의 도움으로 쇼츠 300벌을 제작했고, 송유관 현장 시절, 멘토처럼 가깝게
지냈던 빌리 오캘러한이 입버릇처럼 말하던 ‘파인 애즈 와인(Fine as Wine)’이라는 브랜드를 개발했다.
제작한 물량은 신디의 친구들을 통해 판매하는 한편, 캘거리의 좀 규모가 있는 백화점들을 찾아가서
이 쇼츠 판매에 관심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어느 백화점도 이 쇼츠가 팔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결국은 거의 재고로 남았다. 처음으로 재고 관리의 문제에 눈을 뜬 것이다.
많은 고민을 했지만, 가장 기본적인 판매 방법인 레모네이드 가판대 말고는 더 나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
았다. 계획은 간단했다. 캘거리 시내에 여름 3개월 동안 장소 사용료를 내고 근사한 목조 가판대를 설치
해 놓고 물건을 파는 것이었다. 이것은 재고 소진 계획인 동시에 내 평생 처음으로 직영 매장을 운영하겠
다는 계획이기도 했다. 신디는 일주일 걸려 목조 가판대를 만들었고, 주말이면 쇼츠를 팔았다.
나는 그 무렵 돔 석유라는 회사에 지원했고 현장 직원으로 고용되었다. 당시 내 연봉은 3만 달러였고, 25
살의 젊은이에게는 괜찮은 연봉이었다. 돔에서 일한 지 얼마 안 돼서 스콧 시블리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
었는데, 스콧 시블리는 나중에 나의 거래 파트너가 되었다. 그런데 돔이 좋은 직장인 것은 분명했지만,
근본적으로 송유관 현장에서 일하는 것과 같은 함정에 빠지고 있다는(인생을 돈과 맞바꾸고 있다는) 생각
이 들었다. 30살 이전에 창업한다는 목표를 떠올리니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분명해졌다.
사업 첫해
다시 봄이 왔고, 신디와 나는 다시 가판대를 열었다. 많은 수요를 확인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
지 않았다. 다행히 우리 가판대는 돔 타워 건너편 가까운 곳에 있었다. 하루가 마감되면 들어온 돈으
로 원단을 구입하고, 그 원단을 재단사와 재봉사들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90분 정도 수영을 하고, 배
부르게 먹고 나서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에 나는 일찍 일어나서 자전거로 두 시간 정도를 달려서 도시
반대편으로 가서 조세핀으로부터 완제품을 받아서 매장으로 배송했다. 그러고 나서 정장으로 갈아입고,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출근을 했고, 점심에 10km쯤 달렸다. 사업도 하고, 철인 3종 경기 출전도 준비
하고 훈련하던 그 시절은 참으로 에너지가 넘치는 멋진 시절이었다.

4장 웨스트비치 경영
재정 문제 / 사업 2년째 / 사업 3년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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룰루레몬 스토리

1980년, 우리 사업의 첫 여름이 끝날 무렵, 신디는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교에 진학해서 건축학을 전
공했다. 나는 겨울에는 가판대를 닫고 다음 시즌을 준비했다. 우리는 그 시즌에 5,500달러 정도 벌었
다. 나는 다음 시즌 제작을 위해 2만 달러어치 원단을 사야 했다. 나는 계속 돔 석유 회사에서 번 돈
을 웨스트비치에 투입하고 있었다. 할 수 없이 나는 조세핀에게 상품이 다 팔리면 이듬해 여름에나 비
용을 지불할 수 있는데 겨울에 재봉을 해 줄 수 있는지 물었다. 조세핀은 기꺼이 받아들였다.
1981년 봄으로 접어들면서 웨스트비치는 사업 규모를 조금 키웠다. 캘거리의 다른 곳에 가판대를 하나
더 설치하고, 에드먼턴에 할인 매장을 하나 냈다. (이것이 훗날 룰루레몬 특유의 팝업 스토어의 시초이다).
수요는 분명히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내 파트너는 이 신념을 공유하지는 못했다. 신디도 나도 각자 성
장할 영역이 달라 보였기 때문에, 우리는 사업적 관계는 물론 개인적인 관계도 청산했다.
1982년 여름에 나는 정식 웨스트비치 매장을 열었고, 고객들이 다른 의류 매장에서는 느낄 수 없는
독특함을 느끼도록 분위기를 만들었다. 한편 나는 캐시와 케이시를 채용했는데, 판매와 매장 관리를
위해서였다. 그들을 고용한 것은 면접, 교육, 인재 개발 등을 처음으로 경험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한편 내가 돔에서 친하게 지냈던 스콧 시블리는 1년 전에 밴쿠버에서 리처드 멜론이라는 사람과 새로
운 사업을 한다며 돔에 사표를 던지고 떠났는데, 스콧과 리처드는 소형 요트 사업을 벌였지만 신통치
않았다. 그래서 스콧은 회사의 현금 흐름의 숨통을 틔우려고 우리의 쇼츠와 티셔츠를 위탁 판매했는데,
그것이 주력 사업이 되면서 매장 이름도 ‘캘리포니아BC’로 바꿨다. 아무튼 밴쿠버에서는 그곳대로 웨
스트비치 의류에 대한 수요가 있었고, ‘캘리포니아BC’는 나의 가장 큰 홀세일 고객이 되었다.

동업
돔을 떠나다 / 3자 동업
1985년 4월 25일, 나는 30번째 생일 전에 달성하기로 했던 목표를 이뤘다. 돔 정유 회사를 그만둔 것
이다. 그때부터는 오로지 나 자신만을 위해 일하기로 했다. 그리고 남은 목표가 아직 하나 있다. 40세
에 은퇴하는 것이다. 40살에 은퇴하려면 웨스트비치를 좀 더 키워야 했다. 그런데 한 해 전부터 사업
의 중심이 서핑에서 스케이트보드로 옮겨지는 것 같았고, 스케이트보드 시장은 과거 서핑이 그랬던 것
처럼 앞으로 5년 정도 지나면 수십억 달러의 규모로 커질 것이 분명했다.
나는 동업자의 필요성을 절감하기 시작했다. 함께할 파트너가 없다면 머지않아 스케이트보드가 크게
유행하게 되었을 때, 더 많은 돈과 전문성을 갖춘 누군가로부터 추월을 당할 것이다. 공교롭게도 당시
스콧과 리처드 측은 매장에 비치할 옷을 계속해서 대규모로 주문하고 있었다. 1985년 여름, 우리는 함
께 힘을 합쳐 일하는 문제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1985년 9월, 나는 내 사업 지분의 66%를 리처드와
스콧에게 매각했고, 우리는 정식으로 동업자가 되었다.
웨스트비치는 이제 개인 사업체가 아니라 어엿한 기업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초창기에 우리 회사는 빠
르게 성장했는데, 사업 형태를 바꾼 덕도 컸다. 스콧은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우리는 원래 버티컬 리테
일 중심의 영업을 했지만, 홀세일 영업에 주력하기 시작했습니다. 칩은 캘리포니아의 자기 매장에 물건을
채워 넣는 것에 익숙했지만, 우리가 가세하면서부터 캐나다 시장을 겨냥해 홀세일 형태로 물건을 유통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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룰루레몬 스토리

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해 가을, 우리는 몬트리올에서 개최된 의류 관련 무역 박람회에
처음으로 참가했다. 그리고 우리는 이후 몇 년 동안 매년 몇 차례씩 일본, 라스베이거스, 뮌헨 등에서 열
리는 무역 박람회에 참가했다. 우리 물건을 유통해 줄 홀세일 파트너를 찾기 위해서였다.
밴쿠버의 재발견 / 플래그십 스토어 / 결혼
우리는 캘거리와 시애틀, 그리고 인스부르크에 매장을 냈고, 몇 년 후 휘슬러에도 매장이 생겼다. 각
매장에는 3~4명의 직원이 있었고 연간 수익은 백만 달러가 약간 넘었다. 이 정도면 괜찮은 수입이었
지만, 현금 유통이 원활하지 않은 홀세일 중심 영업으로 인해 빚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기는 힘들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웨스트 4번가에 위치한 우리의 밴쿠버 1호 매장 맞은편에 더 큰 직영 매장을 마련했
다. 웨스트 4번가의 확장된 새 매장에 큰 스케이트보드 경사로를 조성하면서 웨스트비치는 캐나다에서
가장 큰 스케이트보드 의류 공급 업체가 되었다. 내가 가판대에서 랩 쇼츠를 판매할 때만해도 이 정도
까지는 예상 못 했지만, 나는 꾸준히 유행에 관심을 가지고 몇 년 후를 내다보고 계획을 세우고 실천
해 왔다. 이것이 우리가 성장하는 방식이었다. 한편 나는 33살에 근사한 여성을 만났고, 결혼해서 예
쁜 아들 두 명을 갖게 되었다.
버티컬 리테일 매장을 늘리다
우리는 직영점과 자체 생산 방식의 경제적 이점이 얼마나 큰지 이해하게 되었다. 그렇게 되면 생산과 판
매에서의 모든 중간 마진을 없애고 더 나은 가격으로 더 나은 품질의 제품을 공급할 수 있을 것이다. 한
편 밴쿠버에서 본격적으로 웨스트비치 매장을 경영하는 중에도 나는 생산을 조세핀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생산 라인을 재정비해야 할 때가 왔다. 밴쿠버에는 대규모의 아시아 이민 사회가 조성되어 있었다.
그것은 숙련도가 높고 비용이 저렴한 재봉사와 재단사를 쉽게 만날 수 있고, 아시아 쪽의 해외 생산 공장
을 물색하기도 쉬운 환경이라는 의미이다. 조세핀과의 협력 관계를 정리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 그로
부터 몇 년 후, 내 재산이 좀 늘어났을 때, 나는 조세핀에게 1만 달러의 현금 금일봉과 함께 신발 한 상
자, 그리고 이탈리아행 일등석 항공권 두 장을 보냈다. 누가 보냈는지 밝히지 않았지만, 꼭 밝혀야만 알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에게 선물을 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집에서 만든 수제 쿠키 상자를 역
시 ‘익명’으로 받았다. 오래전, 조세핀의 집에서 즐겨 먹었던 바로 그 맛이었다.

스노보드 시장의 성장
계속되는 고비 / 스노보드 시장
어느 날, 나는 우리 사업이 중대한 고비에 놓여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핑이 그랬듯이 스케이트보드
도 여전히 인기는 있었지만, 언젠가는 정점을 찍고 사양길로 접어들 것이라는 느낌이 확 왔고, 나는
다음 유행은 스노보드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1988년에 들어서면서 나는 스노보드 시장이 본격적으로
열렸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동업자들과 직원들 앞에서 내 생각을 말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
은 변화를 꺼리기 때문에, 처음에는 반응이 좋지 않았다. 반발에도 불구하고 나는 직감을 믿었고, 열심
히 노력하며 회사를 이끌었다. 나는 일단 회사 이름을 웨스트비치 서프에서 웨스트비치 스노보드로 변
경했다. 브랜드 변경의 효과는 사업이 3배나 확장되는 결과로 나타났다. 봄과 여름에는 서핑과 스케이
트보드 관련 제품을 팔 수 있었고, 이들 제품의 비수기인 가을, 겨울에는 스노보드 관련 제품을 팔 수
있게 된 것이다. 특히 스노보드 의류 부문에서는 단숨에 세계 3위 업체로 뛰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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룰루레몬 스토리

역경의 시간들
파산 위기 / 랜드마크 포럼 / 이혼
우리는 파산 전문 변호사를 찾아가서 파산 절차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아보았다. 웨스트비치는 거의
파산 직전에 있었다. 우리가 스노보드 관련 사업에 뛰어든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과거 서핑과 스케
이트보드 시장과 마찬가지로 공급이 수요를 압도하기 시작하면서 가격이 하락하고 있었다. 나는 스노
보드가 충분히 대중화되기 전에 발을 빼고 싶었다. 동업자인 리처드도 한 곳에 정착하고, 가족을 꾸리
고, ‘워라밸’을 찾고 싶어 했다. 그와 나는 여러모로 잘 맞지 않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효과적으로 의사소통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나는 리처드가 좀 독특한 수업을 듣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랜드마크 포럼이라
는 주말 워크숍 프로그램에 푹 빠져 있었는데, 몇 주쯤 지날 무렵, 나는 리처드의 심리 상태가 상당히
안정되고, 이전보다 훨씬 솔직해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리처드는 그 모든 것이 랜드마크 포럼에서의
경험 덕분이라며 우리에게도 그 코스를 수강할 것을 권했다. 우리도 회사를 잘 경영해 보고 싶다는 마
음은 같았고, 사업에 도움이 된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스콧과 함께 수강했다.
랜드마크 포럼은 과거가 현재를 어떻게 지배하는지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고 더욱 큰 목적을
가지고 인생을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열어 주었다. 또한 리처드와 스콧, 나는 모두 이 과정을 수강했
기 때문에, 서로의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할 수 있는 강력한 공감대를 갖게 되었다. 우리는 직원들에게
도 랜드마크 포럼을 수강하도록 했다. 나는 회사의 문화가 더 굳어져 폐쇄적으로 변하기 전에 이 포럼
을 회사 경영에 도입해야 한다고 생각을 했다. 그리고 훗날 룰루레몬에서도 그렇게 했다. 결과적으로
랜드마크 포럼 덕분에 우리는 나중에 웨스트비치를 충분히 괜찮은 값에 매각할 수 있었다. 그러지 않
았다면 우리는 자멸했을 것이고, 룰루레몬을 창업할 돈도 마련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편 나의 일과 잦은 출장은 이혼의 원인이 되었다. 슬프게도 이혼 후 4년 동안 나는 아이들을 거의
만나지 못했다. 이혼과 별거는 많이 힘들었지만, 전처와 대화를 통해 과거를 뒤로 하고 아들들을 최우
선 순위로 두는 의사소통이 가능해진 것도 랜드마크 포럼 덕분이라고 믿는다.

포커스 그룹 마케팅
스키 협회
우리의 성공에는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회사의 이름을 바꾸면서까지 회사의 정체성을 스노보드 회사
로 규정한 것도 중요한 원인이다. 결과적으로는 옳은 결정이었음이 확인되었지만, 동업자와 직원들을
설득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모른다. 새로 무엇이 유행하던 간에 모든 사람에게 새로운 비전에
동참하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임을 항상 염두에 두는 것이 옳다. 재무 담당자들의 입장에서는 성공의
가능성을 입증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새로운 생각을 과감하게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한편 스콧과 리처드, 그리고 나 사이의 의사소통은 과거보다는 훨씬 잘 이루어지고 있었다. 덕분에 우
리는 웨스트비치를 매각하자는 생각에 쉽게 합의할 수 있었다. 이때까지 나는 적어도 1만 시간의 경험
을 쌓았다. 지금까지 내가 웨스트비치에서 배운 동업과 직영 매장, 홀세일, 그리고 성실성 등에 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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룰루레몬 스토리

배운 교훈이 앞으로 다가올 나의 새로운 모험을 감당하기에 충분한 것일까?

룰루레몬의 탄생
전봇대에 붙은 포스터 / 요가 수업 / 새로운 영감
회사를 매각하여 손에 쥔 돈으로 나는 괜찮은 자동차 한 대와 키칠라노 지역에 있는 주택 한 채를 사
들였다. 물론 내 아들들이 다니는 데 적합한 학교도 알아보았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미래의 일을 알
수 없는 만큼, 몸의 건강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레슬링에서 철인 3종 경기, 수영, 스케
이트보드, 스노보드에 스쿼시까지 어쩌면 나는 내 몸을 지나치게 혹사시키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등 부위에 극심한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 통증을 해소할 만한 묘안을 찾아 헤매고 있을
무렵 전봇대에 붙은 요가 수업 광고 포스터가 눈에 띄었다. 얼마 후 나는 피오나 스탕이라는 요가 강사로
부터 요가를 배우면서 또다시 거부할 수 없는 창조적 충동을 느끼게 된다. 요가 수업 현장에는 나와 강사
외에도 5명의 수강자가 더 있었는데, 모두 18~28세 사이의 여성이었다. 그런데 한 달 만에 수강자 수가
6명에서 30명으로 늘어난 것을 보면서 과거 서핑, 스케이트보드, 스노보드에 이어서 어쩌면 요가가 또
하나의 거대한 유행의 중심에 서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는 수강자들이 입고 있는 땀에 젖고 헐
렁한 면 소재의 봉제 옷보다는 더 나은 옷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어느 날 요가 수업을 마치고 당시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요가 전문가인 피오나와 다른 수강자들
과 함께 요가 수련의 복장에 대해서 대화를 나눴다. 피오나는 자신이 입는 요가복이 ‘단스킨’이라는 브
랜드 제품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 회사 제품은 단이 얇고, 생산비를 절감하고 싶어서인지는 모르지
만 패턴도 사이즈보다 작게 잘렸다. 때문에 요가로 고도로 단련된 신체를 가진 사람들에게나 적합한
제품이었다. 마치 무용복처럼 몸을 한껏 구부리면 원단은 신축성 있게 늘어나 거의 전구처럼 빛이 나
듯 색이 밝아지고, 옷 속이 비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나는 우선 속이 들여다보이듯 비치는 문제를 해결해 보고 싶었다. 조금 더 두꺼운 원단을 사용하면 속
이 비치는 문제도 해결하고, 특히 여성 생식기 부근의 윤곽이 그대로 드러나는 문제를 해결하여 완벽
한 여성용 요가복을 만들 수 있다고 확신했다. 인조 섬유임에도 불구하고 인조 섬유가 아닌 면과 같은
느낌을 주는 기능성 원단을 확보한 다음 습기를 흡수하고, 냄새가 배는 것을 방지해 주는 기능만 추가
할 수 있다면 완벽한 하의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세상에 지금까지 없었던 요가 팬츠를 만들
수도 있겠다고 생각을 했다.

1998년의 세계
타깃 시장 설정
나는 경험을 통해 지금까지 거의 대중화되지 않았던 어떤 상품이 짧은 기간 동안 세 번 정도 내 눈에
띄면, 그것이 5~7년쯤 후에는 많은 대중이 찾을 정도의 붐을 일으키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98년 어느 날, 우연히 요가에 관한 기사를 읽었고, 우연히 누군가가 대화 중에 요가에 관해 이야기
하는 것을 들었고, 며칠 후에 전봇대에 붙은 요가 수업 광고를 보았다. 비슷한 시기에 이 3가지 사건
을 경험한 것 말고도 요가의 유행을 예측할 만한 근거는 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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룰루레몬 스토리

그해의 북미주 대학 졸업생의 60%가 여성이라는 것이다. 1998년 이전까지 북미 지역에서는 여성들은
취업하더라도 결혼하고 임신을 하는 24세 이전에 대부분 직장을 떠나고 취업 시장에서 사라진다는 고
정 관념이 있었다. 실제로 내 주변의 친구들 대부분이 그랬다. 하지만 나는 여성 교육이 북미 시장에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현상을 만들어 낼 것이라고 믿었다.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시장, 즉 24세 이상 35세 이하의 미혼, 혹은 출산 경험이 없는, 교육 수준이 높고, 미디어에 능통하고,
건강과 운동에 관심이 많은 전문직 여성 그룹이 등장할 것이라고 본 것이다.
요가의 효능 / 3배나 비싼데…
1998년, 요가복이 등장할 준비는 끝났다. 슈퍼걸들은 대학을 이제 막 졸업했다. 그들은 24살쯤 되었
지만, 머지않아 32세의 전문직 여성으로 성장할 것이다. 그들은 몸매와 건강을 유지하는 데도 상당한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요가는 몸의 균형을 유지하는 좋은 운동이었고, 경쟁하는 종목도
아니고, 아무데서나 할 수 있기 때문에 시간도 절약할 수 있었고, 정신 안정에도 도움을 주는 운동이
었기 때문에, 전문직 여성들의 필요에 아주 잘 들어맞는 운동이었다.
버티컬 리테일을 통해서만 판매될 우리 제품의 가격은 단스킨 요가복보다 3배나 비쌌지만, 품질만큼은
최고일 것이다. 나는 룰루레몬의 제품을 한 5년 정도 사용한 여성이라면, 우리 옷을 구입한 것이 자신
이 한 최고의 투자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우리의 옷은 헬스클럽이나 요가 수련장
밖에서도 입을 수 있도록 디자인되었다. 다시 말하면 운동하기 전, 운동복을 입은 채로 아이들을 학교
에 데려다주고, 쇼핑도 하고, 커피를 마시러 갈 수도 있었다.
포커스 그룹 / 회사 이름과 로고
나는 직영점을 통해서만 제품을 판매하기로 하고, 암리타 손디라는 여성을 고용하여 포커스 그룹을 구
성하는 것을 포함하여, 직영점 매장을 여는 일과 관련된 세세한 일들을 맡겼다. 우리는 포커스 그룹으
로 10명으로 구성된 10개의 팀을 구성했다. 그들은 모두 20~40세 사이의 여성이었다. 나는 키칠라노
해안에서 한 블록 정도 떨어진 내가 최근에 이사한 아파트에서 이들과 자주 모였다.
한편 지금도 나는 “회사 이름을 어떻게 지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는다. 그 답은 투표이다. 나는 애
슬레티칼리 힙과 룰루레몬 등 20개의 이름을 포커스 그룹에 선보였고, 나는 애슬레티칼리 힙이 압도적
인 지지를 받으리라 생각했지만, 놀랍게도 룰루레몬이 압도적인 표를 받았다. 그러면서도 포커스 그룹
참가자들은 애슬레티칼리 힙에서 사용하려고 했던 A자를 섬세하게 변형한 로고를 최고의 로고로 선택
했다. 그렇게 하여 룰루레몬 애슬레티카가 탄생했다.

룰루레몬 성장하다
1호 매장
1999년 3월, 룰루레몬 애슬레티카의 첫 매장이 열렸다. 애매한 위치에 있는 건물의 2층에 있었던 덕
분에 접근성은 떨어졌지만, 그래서 더욱 특별했다. 첫날 온 사람들은 포커스 그룹에 함께한 사람들과
그들의 친구들, 그리고 요가 관련 종사자들 정도였다. 첫 매장은 콘셉트 매장의 기능도 했다. 장차 다
른 곳에 또 다른 매장을 낸다면 이 매장을 표본으로 삼자는 생각이었다. 고객들과 디자인에 관해 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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룰루레몬 스토리

기하고,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생각이 깨어 있는 선수들에게 우리 제품의 장점을 알려서 ‘앰배서더
(Ambassador)’라고 부르는 홍보 대사로 삼자는 생각이었다.
한편 룰루레몬 의류에는 각각의 고유한 이름과 정체성을 부여했는데, 나는 제품마다 이름을 붙이면 고
객이 제품의 이면에 숨겨진 정신과 기술적 우월성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고, 자연스럽게 그들을 교육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처음 만든 팬츠 제품은 70년대를 연상케 하는 검은색 라
이크라 소재의 플레어 핏 팬츠였는데, 우리는 그것을 부기 팬츠라고 이름을 지었다. 그 특별한 디자인
의 팬츠는 여성의 엉덩이에 헐렁하게 걸쳐진 히피 스타일 벨트에서 영감을 받아, 약간의 디자인 요소
를 가미해 벨트를 장착한 그루브 팬츠(Groove Pants)로 발전되었다. 엉덩이가 움직이면 장착된 벨트도
움직인다. 처음에는 잘 팔리지 않았는데, 무릎까지 다리를 슬림하게 하고, 발목 부분을 좀 더 퍼지는
모습으로 디자인을 바꿨다. (이런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행동에 옮긴 디자이너는 섀넌 그레이였다. 미리
말해 두자면, 나는 몇 년 후에 그녀와 결혼했다.)
사람들이 더 오래, 더 건강하고, 더 재미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룰루레몬의 원래 비전이
었다. 내 마음속의 그림은 그렇게 간단했다. 그리고 일단 우리가 만든 옷을 한 번이라도 입어 보고 그 기
능성을 이해하고 피부의 감촉을 느껴 보게 되면, 누구나 단골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한편 계산상으로
는 하루에 구입 고객이 3~5명만 꾸준히 유지되면 손익 분기점은 맞출 수 있었다. 그러나 재고가 빨리 소
진되지 않는 것은 문제였다. 규모의 경제라는 요소를 고려할 때 스타일별로 500~2,000벌씩 생산해야 하
는데 그 생산비가 모두 재고로 묶이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판매가 더 늘어나지 않으면 다양한 스타
일을 제작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직영점 시스템의 문제였다. 성공하려면 더 많은 자본과 시간이 필요하
다. 왜 대부분의 기업이 직영점 방식의 영업을 하지 않는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룰루레몬에 관한 입소
문이 퍼지기를 기다리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매장 내 요가 수업
피오나 스탕은 론 잘코 체육관에서 여전히 요가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그곳은 실내 온도가 좀 낮아서
파워 요가 수업을 진행하기에는 불편했다. 나는 우리 매장에서 수업하자고 제안했다. 우리는 아침과
저녁 시간에 매장 내의 옷걸이들을 한쪽으로 옮기고 그곳에서 피오나가 요가를 가르칠 수 있게 했다.
그런데 피오나는 그 지역의 유일한 요가 선생이었기 때문에 요가를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은 우리 매
장에 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요가 수련장에서 의류도 판매한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들은 친구들
까지 데리고 와서 상품을 둘러보았다. 나는 여성들이 매장을 방문해 우리가 만든 요가 팬츠를 입어 보
면, 진심 어린 입소문이 날 것이라고 확신했다. 입소문은 룰루레몬을 확장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버티커 리테일 비즈니스
비용 증가 / 현금 고갈 / 새로운 선택 / 섀넌과 재키
초창기의 룰루레몬 애슬레티카가 손익 분기점을 넘기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때까지 직영점 운
영을 위한 비용은 계속 증가했다. 수입보다 지출이 많았기 때문에, 내가 어느 정도까지 적자를 감수할
수 있을지 따져 보아야 했다.
나는 과정의 아름다움을 중시했고, 룰루레몬도 그렇게 운영했다. 그러나 당시 가장 두려운 것은 룰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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룰루레몬 스토리

레몬의 현금 흐름이 개선되기 전에 내가 가진 돈이 바닥나는 상황이었다. 나는 막다른 길목에서 내가
가진 집을 담보로 최대한 대출을 받았다. 또 하나의 탈출구로 생각해 낸 방법은 동업할 투자자를 구하
는 것이었다. 당시 친구인 데이브 할리웰은 나를 도와 자문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나는 데이브에
게 동업을 제안했다. 그는 룰루레몬을 신뢰하지만, 시간을 달라고 말했다.
그러던 중 뜻밖의 생명줄을 잡게 되었다. 1999년 가을 룰루레몬을 창업한 지 6개월쯤 되던 무렵이었다.
2년 전, 우리에게 웨스트비치를 사들였던 모로우는 손실을 보고 회사를 윈드크레스트 파트너스에 매각
했다. 윈드크레스트는 플로리다주의 웨스트 팜 비치에 있는 회사였지만, 웨스트비치를 밴쿠버로 다시
이전하기로 했다. 그리고 내게 CEO 직책을 맡아 줄 수 있는지 전화로 문의해 왔다. 당면하고 있는 문
제의 완벽한 해결책을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그들로부터 받은 급여를 룰루레몬에 투입한다면, 우리의
품질에 대한 입소문이 충분히 퍼져 임계점에 다다를 때까지 견딜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웨스트비치의 제안을 수락했다. 내가 웨스트비치 운영을 위해 자리를 비워야 한다면, 내가 세운
비전을 대신 실행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다행히 그 무렵 섀넌 그레이라는 젊은 여성을 면접한 적이
있다. 나는 그때까지 여러 지원자로부터 수백 개의 디자인 포트폴리오를 받아 보았지만, 신축성이 큰
원단을 소재로 한 디자인을 제출한 것은 그녀가 처음이었다. 그녀는 남성과 여성 보디빌더들을 위한
무대 의상을 만들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14세와 18세의 두 남자아이와 함께 살아온 41세의 이혼남과
섀넌이라는 슈퍼걸이 만났다. 그녀는 당시 나이 24세로, 고학력자이자 뛰어난 스포츠 우먼이었고, 목
표가 분명하고, 운동과 의류 디자인에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섀넌을 만난 것은 내가 웨스트비치로 돌아가기 직전이었다. 나는 웨스트비치로 옮기기 약 1주일 전에
그녀에게 연락하여, 즉시 출근해서 일을 맡아 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섀넌은 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같은 시기에 나는 재키 슬레이터라는 여성을 채용했는데, 그녀는 처음에는 디자이너로 일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생산 과정을 맡았다. 재키와 섀넌은 자신들을 도와서 함께 일해 줄 사람들을 몇 사람 뽑
았다. 웨스트비치로 갈 아만다와 나는 그들에게 룰루레몬의 모든 것을 단기간에 전수해 주었다.

루온 원단
해고되다
내가 웨스트비치로 돌아가서 보니 일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웨스트비치의 CEO로서 내 앞에는 경영 방
향에 관한 몇 가지의 방안이 놓여 있었다. 하나는 유럽에 있는 기업을 선정해 웨스트비치의 상표권을
라이선스 방식으로 넘기거나, 아니면 유럽의 홀세일 영업을 완전히 중단하고, 직영점 체제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그 와중에 소유 구조의 변동이 있었다. 웨스트비치는 심스 스케이트보드와 합병되었다. 두
회사가 합병되고 나니 물류 창고 등 중복되는 시설과 부서 및 직책에 대한 정리 작업이 불가피했다.
연봉을 10만 달러씩이나 지급해야 하는 두 명의 CEO 중 한 사람도 정리해야 했다. 그게 나였다. 나는
이상한 방식으로 원래의 내 위치로 돌아온 것이다.
웨스트비치가 나를 해고하면서 내 연봉의 절반에 해당하는 두둑한 퇴직금을 지급했다. 정말로 꼭 필요
한 순간에 거액의 현금을 회사에 투입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룰루레몬에 올인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리고 마침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지면서 매출이 늘어났고, 이제 마케팅과 확장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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룰루레몬 스토리

루온
크리스마스가 코앞으로 다가오면서, 룰루레몬이 제공하는 사은품에 관한 기사가 등장하면서 많은 사람
에게 이야깃거리를 제공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한 기사는 섀넌이 버려진 플라스틱 병을 재활용하여
만든 브라에 대해 다루고 있었는데, 그 브라는 그해 크리스마스 최고의 히트 상품이 되었다. 브라는
우리의 주력 제품은 아니었다. 그러나 브라에 이끌려 우리와 인연을 맺고 우리 매장을 찾아온 고객에
게 우리 옷을 소개할 수 있었으니 브라는 완벽한 마케팅 수단이었다.
처음에는 양털 브라 한 개를 구입하려고 매장 문을 열고 들어온 고객이 우리의 주력 제품 하나쯤 더
사 가지고 나가는 일은 흔했다. 그사이에 우리는 마침내 우리 제품에 꼭 맞는 원단 개발에 성공하고,
나일론과 라이크라를 혼합한 루온이라는 원단 브랜드를 따로 만들어 냈다. 우리는 고어텍스 벨크로처
럼 루온에 대한 상표 등록을 마쳤다. 많은 경쟁자가 유사한 제품을 개발하여 사용할 수는 있지만, 제
일 먼저 상표를 등록하고, 상표의 카테고리를 먼저 규정해 놓으면, 우리 브랜드와 유사한 영역에 대한
일종의 범접하기 힘든 벽 같은 것이 형성되고, 우리 제품 이름이 같은 유형의 제품의 대명사처럼 통용
된다. 나는 룰루레몬을 의류 업계의 다른 기업과는 여러모로 매우 다른 기업으로 만들고, 다른 기업이
흉내 낼 수 없는 우리만의 독창적인 영역을 어떻게 구축할지를 계속해서 고민했다.

미국 시장을 향해
빅토리아 시크릿
2004년에 나는 빅토리아 시크릿으로부터 룰루레몬 인수에 관심이 있다는 편지를 받았다. 나는 회사의
여러 직원과 대화를 나눴다. 솔직한 대화가 오갔지만, 회사를 매각하는 것은 모두가 원하는 바가 아니
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우리는 현재 상황을 검토해 보았다. 사업
을 시작한 후 5년 사이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우리는 시장에서 성공했고, 경쟁 업체가 쉽게 진입하기
어려운 나름의 방어벽도 구축해 놓았다. 우리 브랜드는 혁신의 대명사로 인정을 받고 있고, 이미 세계
주요 국가에 상표를 등록해 놓았다. 그리고 제품 매출 이익률은 다른 업체에 비해 두 배 이상으로 큰
수익성을 누리고 있었다. 미국 기업으로부터 관심을 받고 있음을 피부로 느끼면서 성장 확대를 위해
국경의 남쪽에도 견고한 성장의 발판을 마련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세계로 / 브렛과 수잔
미국에 인맥이 있다면 미국 시장 공략에 분명히 유리할 것이다. 나의 남동생인 브렛은 캘거리에서 태어났
지만, 어머니와 재혼한 양아버지가 덴버에서 석유 사업을 시작한 10살 때부터 미국에서 자라났다. 나는
동생과 오랜 세월을 떨어져 지냈지만, 중요한 순간에 서로의 계획을 나누며 영향을 주고받고 있었다. 나
는 브렛에게 미국 최초로 룰루레몬 매장을 열 것을 제안했다. 그의 반응은 무조건 ‘OK’였다. 그렇게 해서
산타모니카 매장을 막상 열고나니 우리가 기대했던 것처럼 매출이 빠르게 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룰루레몬을 번화한 거리에 등장시켜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그 존재를 알려야 했다. 브렛
은 산타모니카 매장에 이어 다음 해에 뉴포트 비치에 매장을 하나 더 열었고, 이어서 샌프란시스코의
카우 할로우에 매장을 열었다. 카우 할로우 매장은 남부 캘리포니아를 벗어난 지역에 개설된 최초의
매장이기 때문에 그 중요성이 컸다. 참고로 캐나다 기업들이 미국에 진출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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룰루레몬 스토리

익히 알고 있었고, 룰루레몬도 쉽지는 않았다. 그러나 2004년이 지나면서 우리는 고비를 확실히 넘기
고, 미국에 뿌리를 내린 것 같다는 느낌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주식 상장
미국 회사가 되다
상장 과정의 마지막 단계는 룰루레몬을 공식적인 미국 기업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본사를
델라웨어로 정했다. 참고로 룰루레몬의 가치는 주식의 수요에 따라 결정된다. 그래서 이사회는 투자자
들에게 룰루레몬 주식에 대한 확신을 심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룰루레몬이 미국의 회사임을 내세
우면 투자자들은 자신들이 미국의 법률에 따라서 주주로서의 권리를 제대로 보호받을 수 있다고 생각
한다. 물론 이것은 나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캐나다의 법인세는 항상 미국의 법인세보다 낮았다.
(트럼프가 세법을 미국 기업에 유리하게 바꾸기 전까지는 그랬다.)
주식 상장
2007년 7월 27일 아침 9시 30분, 나는 뉴욕 나스닥 거래소 단상에 서 있었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버튼을 눌렀다. 드디어 우리 회사의 주식이 거래되기 시작했다. 룰루레몬 애슬레티카가 상장된 것이다.
주식 시장을 개장하는 벨이 울리자 18달러에서 거래가 시작된 우리 회사의 주가는 순식간에 주당 25
달러로 급등했다. 당초 협의된 대로 나는 회사의 지분의 30%를 소유하게 되었다.
보답
나는 직원들을 위해서도 뭔가 해 주고 싶었고, 타임스퀘어의 모든 전자 광고판 화면에 매장에서 일하
는 모든 직원의 사진이 떠오르도록 했다. 이러한 이벤트를 통해 나는 직원들을 다시 한번 하나로 결집
시키고 싶었다. 7월 27일은 또한 내가 몇 년 전, 직원들에게 했던 약속을 이행하는 날이기도 하다. 룰
루레몬의 규모가 지금보다 훨씬 작았을 때, 나는 직원들을 모아 놓고, 우리가 상장하면 회사 주식의
10%를 그들에게 주겠다고 말했다. 나는 그 약속을 지켰다. 이로 인해 30명 정도가 하루아침에 백만장
자가 되었다. 대부분 여성들이었다. (훗날 이들 대부분은 독립하여 각자 창업을 했다.) 우리 직원들은
우리가 뉴욕에 입성하고 상장까지 하는 역사적인 순간을 함께하고, 회사의 여러 주인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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룰루레몬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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