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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논리시작 오류끝

by Casey,Riley 2022.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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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리시작 오류끝
  3. 지혜편



  
         차례

  논리는 지혜롭다

  하나: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둘:왜 논리가 필요한가
  셋:올바르게 정의내리기
  넷:사람은 누구나 오류를 범한다
  다섯:연역추리의 형식적 오류
  여섯:연역추리의 비형식적 오류

  베스트 저서
  Prinzip and Methode in Philosophie Wonhyos
  "Der Weg zur Meditation", "베르그송의 삶의 철학", "철학에 이르는 길", "왜 
철학을 하는가", "사회철학의 문제들", "청소년을 위한 철학에세이", "젊은 여성을 
위한 철학에세이", "대학생을 위한 철학에세이" 외

    논리는 지혜롭다

  일러두기
  이 논리 시리즈의 제1권과 제2권을 다 읽은 독자는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표현하는 것'이 무엇인지 상세히 알았을 것입니다.
  논리적 생각은 수학적 생각과 비슷하므로 실은 매우 단순합니다. 단지 오랜 세월 
동안 우리들이 감정 넘치는 삶을 살아 왔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논리가 낯설고 
어렵게 생각될 뿐입니다.

  이 논리 시리즈 제3권에서 여러분은 이미 습득한 지식을 가지고, 논리적 사고에 
필요한 요소들을 접하면서 논리 전체를 재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논리적 생각, 
개념, 판단, 추론 그리고 오류에 관한 문제 등이 제 3권의 주요 내용입니다.

  이미 앞에서 연역추리와 귀납추리에 관해서 자세히 알았기 때문에, 이 책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또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오류론'을 접하는 데 
있어서 여러분은 큰 어려움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 가지 오류의 문제를 대하 때 연역추리와 귀납추리의 내용을 대조하거나 
아니면 기억을 되살린다면 오류 문제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현재 우리들 각자와 사회 그리고 나라는 아직도 합리적, 논리적 사고에 익숙하지 
못 합니다. 사회에서 평등과 정의 그리고 공정함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두 말 할 
것도 없이 합리적, 논리적 사고가 필연적입니다.

  논리적, 합리적 사고를 삶에서 실천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사람만이 자연을 
지배하고 자신의 삶을 체계적으로 이끌어 나갈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논리적 사고를 철저히 행하는 사람만이 논리의 세계를 극복하여 
논리를 초월하는 예술과 종교의 세계에 성공적으로 접근할 수 있습니다.

    하나.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1. 생각하는 방법

  사람이 무엇인지에 관하여 정의한 말들이 많이 있습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인간은 말할 줄 아는 존재이다."
  "인간은 의심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다."
  "인간은 웃을 줄 아는 동물이다."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는 동물이다."
  이들 여러 가지 정의들 가운데서 가장 사람의 특징을 잘 들러낸 것은 역시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다"라는 정의일 것입니다. 사람은 생각합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생각하고 남도 생각하며 나아가서 나와 남 전체까지도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이 지극히 유치하거나 또는 생각이 매우 모자라는 사람을 일컬어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이니 "골이 텅 빈 인간"이라고 부릅니다. 확실히 사람이라면 누구나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그렇지만 아무렇게나 생각하면 그것이 모두 생각다운 생각이 될 수 는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릇된 생각보다 올바른 생각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올바른 생각이 
보다 바람직한 이론과 실천을 세우며, 나아가서 이론과 실천의 일치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 올바르게 생각하는 것인지 바로 
그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사건이나 대상을 검토하고 분석하며 종합하는 태도가 없으면, 합리적 내지 논리적 
생각은 불가능합니다.
  부분과 전체를 함께 보며 동시에 비판적,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올바르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올바르게 생각하기 위해서는 어떤 대상이나 일이든 철저히 검토하고 
분석하며 종합하여야 합니다. 이러한 방법은 경험적 개별사실로부터 어떤 일반 
원리에 도달하든 아니면 어떤 일반 원리를 개별 사실에 적용하든 간에 두 경우 모두 
똑같이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올바르게 생각하기 위해서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우리들의 
생각에서 선입견 내지 편견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의 생각은 사실 
수많은 편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편견을 하나씩 저거 하다 보면 우리는 결국 
올바른 생각에 도달할 것입니다.
  이제 편견이 무엇이고 참다운 앎이 무엇인지 그리고 편견을 벗어나서 참다운 
생각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는지 철학자 플라톤과 베이컨을 인용하여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희랍 철학자 플라톤의 대화편 "국가론" 제 7권 나오는 동굴의 비유는 편견(그릇된 
생각)이 무엇이고 올바른 생각 내지 참다운 앎이 무엇인지 일목요연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동굴의 비유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모두 똑같이 동굴 안쪽의 벽을 향하여 묶여 있어서 그들은 동굴 
입구 쪽으로 시선을 돌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등뒤로는 동굴 저만치 불이 
타오르고 있습니다. 이 불과 동굴 입구 사이에는 여러 가지 길을 통해서 수없이 
많은 대상들이 널려 있습니다. 이 대상들은 불빛에 반사되어 사람들 앞에 있는 
동굴의 벽면에 희미한 그림자를 던집니다.
  사람들은 손과 발이 묶여있기 때문에 가까스로 고개를 조금 움직여 단지 벽면의 
그림자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림자를 참다운 것으로 생각하고 그림자의 
모습을 탐구하는 것이 바로 학문의 과제라고 여깁니다.
  그렇지만 만일 묶여있던 사람들 중의 한사람이 우연히 손과 발의 사슬을 끊고 
자유로운 몸이 되어 동굴을 떠나게 된다면 그는 그림자를 더 이상 사실로 여기지 
않고 대상을 직접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이제 그는 동굴입구를 빠져나와 햇빛 쏟아지는 대지 위에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면서 강한 햇빛에 잠시 아무것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는 곧 동굴 안에서 
본 것이 참다운 대상이 아니며 동굴 안의 불빛도 참다운 빛이 아닌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는 동굴을 떠나와 찬란한 태양광선을 체험하고 가장 참다운 빛을 알게되고 이 
빛을 통하여 현실의 참다운 모습을 바라봅니다.

  이상과 같은 동굴의 비유에서 우리가 간단히 알 수 있는 것은 동굴 안에서의 
생각은 그릇된 생각이라는 것, 그리고 동굴 밖에서의 생각은 올바른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동굴 안에서의 생각은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편견 내지 
선입견입니다. 편견을 벗어나면 우리는 올바르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현실생활에도 동굴의 비유와 유사한 것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군대에 
가기 전에 청년은 군대생활에 관해서 여러 가지로 듣고 읽어서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막상 군대생활을 체험하게 되면 이전에 자신이 가졌던 생각이 
대부분 잘못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직장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취직시험에 처음으로 합격한 사람은 새로운 
기대감에 벅차 마음이 설레입니다. 그러나 막상 직장생활을 시작하면 그는 전에 
자신이 가졌던 직장생활에 대한 생각이 대부분 그릇된 것이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영국의 경험론 철학자 베이컨은 올바르게 생각하기 위해서는 우상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가 말하는 우상은 그릇된 생각이 원인이 되는 편견 또는 
선입견입니다.
  베이컨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편견을 크게 네 종류로 봅니다: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 등이 곧 그릇된 생각을 생기게 하는 네 가지 
원인들입니다.

  #1 종족의 우상:인간은 어떤 것이든 인간 중심적인 관점에서 고찰하고 평가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베이컨은 인간의 본성에 깃들어 있는 이러한 편견을 버려야만 
객관적 진리가 가능하고 또한 그것을 올바르게 생각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사춘기 소녀를 떠올려 볼까요? 마음이 여립니다. 남의 작은 상처만 보아도 마치 
자신이 당한 것처럼 가슴 아파합니다. 늦가을 산길을 걸으며 소녀는 모든 생명이 
시들어 가는 것에 대해 참을 수 없는 고뇌에 젖어 듭니다.
  뒹구는 한 잎의 낙엽. 시들어 색깔이 변한 코스모스 꽃잎. 소녀는 모든 것이 
서글프게만 느껴져 끝없는 상념에 잠깁니다. 
  "정처 없이 뒹구는 저 낙엽은 얼마나 고독하고 쓸쓸할까. 아무도 반겨주는 이 
없이 바람 부는 대로 아무 곳이나 흘러가야 하는 운명이 아닌가?
  시들어버린 코스모스 꽃은 또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자신의 청초하고 아름답던 
모습을 다 잃고 저토록 초라해진 자기 모습을 보면 얼마나 서글플까?"

  소녀뿐만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생각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이솝우화를 비롯한 대부분의 우화들의 경우, 인간 중심적 견지에서 쓰여진 
것입니다. 우리들은 외로운 별, 기운 센 폭풍우, 즐거워하는 꽃 등 사물이 마치 
인간이기라도 한 듯 우리편에서 사물을 말하는 습관에 길들여 있습니다.

  인간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이러한 편견의 예를 잠시 살펴봅시다.

  예 1) 거북이에게서 인내심을 배워야 한다 왜냐하면 거북이는 말없이 매사를 
천천히 행하기 때문이다.
     2) 장마가 끝나자 찬란한 태양이 솟았다. 햇님의 방긋 웃는 모습을 보니 한층 
기분이 유쾌하다.

  #2 동굴의 우상:플라톤의 "국가론"을 보면 '동굴의 비유'에 처음 등장하는 
사람들은 동굴 쪽으로 앉아 있고 모두 쇠사슬로 묶여 있습니다. 그들은 불빛에 
희미하게 반사된 동굴 벽의 그림자를 참다운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각 개인은 모두 주관에 충실하고 자신의 주관적 앎을 확실한 것으로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욕심쟁이 개 이야기가 있습니다.

  개가 먹음직한 고기 덩어리를 물고 냇물이 흐르는 다리를 지나가다가 아래를 
쳐다보았습니다 저 아래쪽에 웬 개가 큼직한 고기 덩어리를 물고 일그러진 얼굴로 
자기를 노려보는 것이었습니다. 개는 갑자기 욕심이 나서 저놈을 혼내주고 고기도 
뺏을 마음으로 으르렁 하고 크게 짖었습니다. 짖는 순간 그만 고기 덩어리마저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또 다음 예문, 계용묵의 '백치 아다다'를 읽어봅시다. 이 글에서 우리는 아다다의 
어머니가 장애인에 대한 주관적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질그릇이 땅에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는데, 마당에는 아무도 없다. 부엌에 쥐가 
들었나? 샛문을 열어 보려니까, 
  "아 아 아이 아아 아야!"하는 소리가 뒤란 곁으로 들려온다. 샛문을 열려던 
박씨는 뒷문을 밀었다.
  장독대 밑, 비스듬한 켠 아래, 아다다가 입을 헤벌리고 넓적 엎더져, 두 다리만을 
힘없이 버지럭거리고 있다. 그리고 머리 편으로 한 발쯤 다가선 깨어진 동이 조각이 
질서 없이 너저분하게 된장 속에 묻혀 있다.
  "아이구테나! 무슨 소린가 했더니 이년이 동애를 또 잡았구나! 이년아! 너더러 
된장 푸래든 푸래?"
  어머니는 딸이 어딘가 다쳤는지 일어나지도 못하고 아파하는 데 가는 동정심보다 
깨어진 동이만이 아깝게 눈에 보였던 것이다.
  "어 어마! 아다아다 아다 아다아다..."
  모닥불을 뒤집어쓰는 듯한 어머니의 음성을 또다시 듣게 되는 아다다는 겁에 질려 
얼굴에 시퍼런 물이 들며 넘어진 연유를 말하여 용서를 빌려는 기색이나 말이 
되지를 않아 안타까와한다.
  ...
  "이년까타나 끝이 세누나! 시켠엘 못 가겠으면 오늘은 어드멘든디 나가서 뒈디고 
말아라, 이년아! 이년아! 아, 이년아!"
  어머니는 눈알을 가로 세워 날카롭게도 흰자위만으로 흘기며 성큼 문턱을 
넘어선다.
  아다다는 어머니의 손길이 또 자기의 끌채를 감아쥘 것을 연상하고 몸을 겨우 
뒤재 비꼬아 일어서서 절룩절룩 모퉁이로 피해 가며 어쩔 줄을 모르고 일변 고개를 
좌우로 둘러 주변을 살피며 아연하게도,
  "아다 어 어마! 아다 어마! 아다다다다다!"
  하고 부르짖는다. 다시는 일을 아니 저지르겠다는 듯이, 그리고 한번만 용서를 
하여 달라는 듯싶게.
  그러나, 사정 모르는 체 기어이 쫓아간 어머니는,
  "이년! 어서 뒈데라. 뒈디기 싫건 시집으로 당장 가거라. 못 가간?..."
  그리고 주먹을 귀 뒤에 넌지시 얼메고 마주선다.
  순간, 주먹이 떨어지면? 하는 두려운 생각에 오싹하고 끼치는 소름이 튀해논 
닭같이 전신에 돋아나는 두드러기를 느끼는 찰나, '턱'하고 마침내 떨어지는 주먹은 
어느새 끌채를 감아쥐고 갈지자로 흔들어댄다.
  "아다 어어 어마! 아 아고 어 엉마!"
  아다다는 떨며 빌며 손을 모은다.
  그러나 소용이 없다. 한 번 손을 댄 어머니는 그저 죽어 싸다는 듯이 자꾸만 
흔들어 댄다. 하니, 그렇지 않아도 가꾸지 못한 텁수룩한 머리는 물결처럼 흔들리며 
구름같이 피어나선 얼크러진다.
  그래도, 아다다는 그저 빌 뿐이요, 조금도 반항하려고는 않는다. 이런 일은 거의 
날마다 지나 보는 것이기 때문에 한 대야, 그것은 도리어 매까지 사는 것이 됨을 
아는 것이다. 집에 일이 아무리 밀려 돌아가더라도 나 모르는 체 손 싸 매고 
들어앉았으면 오히려 이런 봉변은 아니 당할 것이, 가만히 앉았지는 못했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천치에 가까운 성격은 무엇엔지 힘에 부치는 노력이 있어야 
만족을 얻는 듯했다. 시키건 안 시키건, 헐하나, 힘차나, 가리는 법이 없이 하여야 
될 일로 눈에 띄기만 하면 몸을 아끼는 일이 없이 하는 것이 그였다. 그래서 집안의 
모든 고된 일은 실로 아다다가 혼자서 치워놓게 된다.
  ...

  "백치 아다다"에서 어머니는 장애자인 아다다를 극도로 미워하고 구박합니다. 
아다다는 시집에서도 구박덩어리입니다. 사람들은 장애인을 정상인으로 생각하지 
않는 보통 편견을 가지고 있으므로 장애인에게 무관심하거나 아니면 장애인을 
기피합니다. 심한 경우에는 아다다의 어머니처럼 장애인을 학대하기까지 합니다. 
헬렌 켈러 여사나 스티븐 호킹박사와 같은 사람을 생각하면 장애인도 정상인보다 더 
훌륭한 인간이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야말로 인간의 
주관적인 동굴의 우상입니다.

  *베이컨이 지적하는 '동굴의 우상'은 각 개인이 동굴과 같은 우물 속에 갇혀서 
'우물 안 개구리'가 되면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어렵기 때문에 주관적 편견을 
제어하여야 한다는 의미에서 언급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널리 퍼져있는 지방색에 대한 감정 또는 출신학교에 대한 편견은 
모두 '동굴의 우상'에 해당합니다. "평안도는 풀밭의 호랑이, 함경도는 하와이, 
강원도는 감자바위, 경상도는 문둥이, 전라도는 개똥쇠, 충청도는 멍청도..." 
등등으로 말하는 것은 분명히 '동굴의 우상'에 속합니다. 학력이나 출신학교에 대한 
편견과 아울러 지방색에 대한 편견을 없애지 못 한다면 합리적 사고와 행동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3 시장의 우상:말이나 글, 곧 언어가 생각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생기는 편견이 
있습니다. 마치 장사꾼들이 왁자지껄 말로 떠들면서 시장에서 거래를 좌우하는 
것처럼 언어가 생각에 잘못된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속담에도 "말 
한마디가 사람 살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언어를 그릇되게 사용하면 엄청난 편견이 
빚어집니다.
  또 "침묵은 금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선 말 잘못하면 손해본다는 뜻이 있고 
다음으로는 말이 행동에 앞서기 쉬우니 조심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사실 말 잘하는 사람치고 실천에 있어서 확실한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을 수 있습니다. 실제 행동은 하잘 것 없으면서 말만 번지르르 
늘어놓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또 "아 다르고 어 다르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등의 말을 
합니다. 인간의 매사에 언어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잘 지적하는 
표현들입니다.

  어떤 청년이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고 깨달음을 배우기 위하여 선가의 어떤 고승을 
찾아갔습니다.
  "스님, 괴로운 이 세상이 하잘 것 없는 것임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스님에게 
깨달음을 배우고자 합니다."
  고승은 눈을 지긋이 감고 있었습니다. 한참 그러고 있다가 굵은 음성으로 
한마디하는 것이었습니다.
  "너 밥 지을 줄 아느냐?"
  "제가 깨달음을 배우기 위해서 스님을 찾아왔는데 웬 밥은요?"
  "엣끼 이놈!"
  스님은 고함소리와 함께 대짜 고짜 지팡이로 청년을 내리쳤습니다.
  "지금 내가 배고프다."
  이 한마디를 남기고 고승은 자리를 떴습니다. 그 순간부터 청년은 나무하고 마당 
쓸고 밥하며 허리 꼬부라지게 일했습니다. 그러기를 3 년이 지났습니다. 청년은 
마음을 굳게 먹고 고승에게 다시 한번 애걸하기로 작정했습니다.
  "나는 남자가 해서는 안 될 일을 3 년이나 했어. 이젠 스님도 내게 깨달음이 
무엇인지 가르쳐 줄 것이 틀림없어."
  청년은 어느 날 고승 앞에 구부리고 앉아 제법 기운찬 음성으로 말을 꺼냈습니다.
  "스님, 저는 꼬박 3 년간 스님의 수발을 들었습니다. 저로서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렇게 말하자 고승의 입가에는 비웃음이 감돌았습니다.
  "누가 너더러 내 수발하라고 했더냐? 그래, 할 말이 무엇이냐?"
  "스님, 3 년간 지났으니 깨달음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시오."
  "어허 고얀 놈!"
  이번에도 고함과 함께 청년은 지팡이로 세게 얻어맞았습니다.
  "나는 지금 배고프니라."
  고승은 이 한마디를 남기고 자리를 떴습니다. 이날 이후도 청년은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서 했습니다. 다시 3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청년은 이번에야말로 
사생결단을 내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나는 오로지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6 년이란 세월을 고스란히 스님에게 바쳤어. 
농사를 지었어도, 아니 장사를 했어도 이렇게 열심히 했다면 지금쯤 나는 
떵떵거리고 살 수 있을 거야. 이번에도 스님이 깨달음을 가르쳐 주지 않으면 스님 
곁을 떠날 수밖에. 내가 떠나면 스님도 엄청나게 불편하겠지.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이 깨달음이 뭔지 가르쳐 주겠지."
  어느 오후, 청년은 다시 고승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입을 
떼었습니다. 
  "스님 제가 스님을 모신지 어언 6 년이 되었습니다. 저는 스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이젠 깨달음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셔야겠습니다."
  "깨달음이 무슨 물건이드냐? 깨달음 자체가 없으니 가르쳐 줄 것도 배울 것도 
없느니라."
  "스님, 이놈을 놀리시렵니까? 제발 깨달음을 가르쳐 주십시오."
  "이눔아, 네 밥짓는 솜씨가 그게 무엇이냐? 밥도 제대로 짓지 못하는 놈이 
깨달음은 또 웬 깨달음이란 말이더냐?"
  고승이 지팡이를 집어들자 청년은 또 맞을 것 같아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청년은 산을 내려갈까 말까, 수 없이 망설이다가 남은 힘을 다 해서 고승을 다시 
모시기로 했습니다. 청년은 한결같이 고승을 섬겼습니다.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청년은 더 이상 깨달음이 무엇인지 고승에게 묻는 일이 없었습니다. 청년도 나이가 
들어 장년이 되었습니다. 고승이 열반한 후 많은 스님들은 나이 든 청년을 고승의 
후계자로 섬기게 되었습니다.

  시끌벅적한 시장한 가운데서 상인들이 말 한마디로 돈을 버는 것처럼, 청년도 
처음엔 스승의 딱 부러진 말 한마디를 기대했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진리가 
한마디의 말로 그 의미를 다 전할 수 있는 것일까요? 오히려 은은한 행동 속에 답이 
있는 건 아닐지요. 스승은 청년에게 그것을 알려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언어의 
감옥에 갇혀 있으면 시장의 우상을 버릴 수 없습니다.
  말장난을 마치 참다운 이야기인 듯이 여기거나 또는 언어를 단지 이기적인 
수단으로만 여긴다면 '시장의 우상'이라는 편견에 사로잡힙니다. 

  #4 극장의 우상:이 편견은 무대 이에서 벌어지는 선입견을 말합니다. 배우들은 
실제 인물을 흉내내어 그들이 마치 실제 인물인양 연기합니다. 우리들의 생각에도 
이와 비슷한 경향이 있습니다. 남의 생각을 전혀 비판하지 않은 채 마치 내 것 인양 
주장한다면 커다란 편견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예 1)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했으니 너 역시 너 자신을 알지 않으면 
안된다.
     2) 성경에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하였다. 나는 마음이 가난하니 
복이 있다.

  좀더 상세히 말하면 플라톤은 인간에게 본래부터 있는 이성에 의하여 편견을 
제거함으로써 올바르게 생각하기를 주장하였습니다. 이에 반하여 베이컨은 경험의 
입장에서 우선 편견을 제거한 다음 참다운 생각에 해당되는 모든 경우를 분석하고 
종합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들 두 사람 이외에도 동서고금을 통하여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상가들이 
그릇된 생각을 제거하고 올바르게 생각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제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방법들은 종합적으로 말하자면 그것들은 
체계적인 생각이나 합리적인 생각 또는 논리적인 생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릇된 생각이란 결국 질서와 체계를 도외시한 생각이므로 이치에 맞지 않는 
생각입니다. 올바른 생각이란 이치를 따지고 논의함으로써 이치에 어울리는 합리적 
생각입니다.

    2. 설악산과 설악산 지도:구체적인 생각과 추상적 생각

    *구체적일수록 복잡하다

  전람회에 가서 그림이나 조각을 보면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구상작품이고 또 하나는 추상작품입니다.
  서양화를 보더라도 미켈란젤로, 르노아르, 세잔느 등의 그림은 얼른 이해가 
갑니다. 그들의 그림에서는 인물이나 풍경 등이 사실 그대로 아니면 사실과 
유사하게 묘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피카소, 칸딘스키, 샤갈 등이 추상화를 
보면 말 그대로 추상적이어서 뭐가 뭔지 통 감이 안 잡힙니다. 추상화는 감상하는 
사람이 자유롭게 미적 감정을 동원하여 나름대로 이해하면 족하다고 하긴 해도 
도대체 무엇을 그렸는지 감도 잠을 수 없는데 이해를 한다는 것은 더더욱 힘듭니다.

  우리는 대체로 추상이라는 말 자체를 낯설어 하며 멀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구체적이라는 말이나 사실적이라는 말은 우리와 매우 가깝다고 
생각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설악산은 생각해 보십시다. 나는 철마다 설악산을 찾습니다. 산다운 산, 아름다운 
그러면서도 웅대한 자태가 항상 날 반기는 듯 합니다. 대관령을 넘어 아니면 
미시령이나 한계령을 넘어 또는 진부령을 넘어 철이 바뀔 때마다 설악산을 찾아간 
회수가 마흔 번도 넘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설악산 전체 덩어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또 설악산 구석구석이 어디에 붙어  있고 어떻게 생겼는지 아직도 알지 
못합니다.
  나는 직접 구체적으로 설악산은 수없이 찾아갔으면서도 구체적인 경험은 너무나도 
복잡하고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비약이 있지만 쌀 한 말을 쏟아놓고 쌀알을 전부 
세어보라고 한다면 감히 누가 그 일을 하겠습니까? 아무런 설계도나 청사진도 없이 
철근이나 시멘트 등의 토목공사 재료만 가지고 한강다리를 놓으라고 한다면 과연 
한강다리를 시공할 사람이 있을까요?
  통계수치라든가 컴퓨터에 의한 계산도 없이 국가의 일년 예산을 편성하라고 
한다면 또 어느 누가 그럴 수 있다고 답하겠습니까?

    *추상적일수록 단순하다.

  애쓰고 설악산을 찾지 않더라도 설악산 안내책자나 지도를 펴놓고 보면, 설악산이 
바로 어디쯤에 있고 흔들바위가 어디에 있는 지 그리고 소금강이 어느 만치에 있는 
지  상세히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지성의 힘에 의해 생각합니다. 지성적 생각이란 바로 추상을 말합니다. 
감각경험은 카메라의 렌즈를 통해서 맺힌 상과 같습니다. 그러나 지성적 생각은 그 
상을 다시 한번 걸러서 버릴 것은 버리고 챙길 것은 챙김으로써 추상합니다.

  구체적인 연못이 있다고 합시다. 우리들이 연못을 알 때 이미 우리는 연못을 
추상합니다. 즉 연못의 크기, 물 색깔, 연못 주변의 환경, 연못의 용도 등을 추려서 
연못의 뼈대만 정리합니다. 그리고 그 이외의 잡다한 것은 모두 버립니다.
  현실 세계의 복잡한 연못(구체적)은 일단 추상되면 연못의 뼈대만 갖게 되어 매우 
단순한 틀로 남습니다. 학문이란 바로 구체적 현실을 추상에 의하여 단순화시키는 
지성작업입니다. 예컨대 추상된 연못의 뼈대를 틀 삼아 그 틀을 현실에 적용하여 
우리는 진짜 연못을 만들 수 있습니다. 지성의 산물 중에서 가장 고도로 추상된 
것은 다름 아닌 논리학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학문들 가운데서 가장 추상적이고도 
단순한 것은 논리학과 수학입니다. 구체적인 생각의 뼈대와 틀만 골라내고 나아가서 
생각과 생각 사이의 관계를 추려 내고 기타 상상이나 물음 또는 감정 등을 제외하면 
곧 논리적 생각, 논리적 추리가 성립합니다.
  실제의 건물에 비하여 건축설계도는 매우 단순합니다. 설계도는 건물 자체가 
아니라 건물의 틀만 추상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설계도는 건물 자체가 아니라 
건물의 틀만 추상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설계도를 가지고 우리는 구체적이며 
복잡다단한 재료들을 이용하여 실제의 건물을 쉽사리 만들 수 있습니다.
  인간의 추상작업은 (가) 인간으로 하여금 대상 전체를 명백히 파악하게 
해줌으로써 대상을 뜻에 맞게 이용하게끔 하고, (나)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대상의 
원리를 파악하게 해주며, (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과 세계의 참다운 의미라든가 
인간과 세계에 관한 근원 원리에 접근 가능하도록 해줍니다.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구체적인 생각은 우리들로 하여튼 눈에 보이는 현실을 
붙잡게 해주는 반면에 추상적인 생각은 현실의 전체 모습과 아울러 현실의 원리를 
파악하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구체적인 생각과 추상적인 생각 두 가지는 모두 삶을 
윤택하게 해주는 가장 중요한 인간의 능력입니다.

    3. 부분과 전체를 보는 눈

  흔히들 동양사람은 종합능력이 뛰어나고 서양사람은 분석능력이 뛰어나다고들 
말합니다. 이 말을 뒤집어 보면 동양인은 분석능력이 약하고 서양인은 종합능력이 
뒤떨어진다는 말이 됩니다.
  우리 나라의 청자나 백자 또는 사찰의 건축양식을 보면 그와 같은 말이 어느 정도 
타당한 면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고려나 이조시대의 도공들은 일일이 
계산하고 따지며 도면을 그려서 청자나 백자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오랜 경험을 
바탕 삼아 빼어난 직관력에 의하여 도자기의 전체를 종합적으로 통찰함으로써 
찬란한 청자와 백자를 구어 냈습니다.
  그런가 하면 서양인들은 꼼꼼히 따지고 계산함으로써 자동차와 비행기 그리고 
컴퓨터와 인공위성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문제는 전체를 종합적으로 볼 때 부분을 분석하는 
것을 소홀히 하기 쉽고 그런가 하면 부분의 분석에만 너무 매달릴 경우 전체를 
종합적으로 보는 안목을 상실하기 쉽다는 사실입니다.
  부분에만 분석력으로 집중할 경우 전체를 바라보는 눈을 그르치기 십상입니다. 
매사에 있어서 문제가 생길 경우 문제를 분석하며 동시에 종합할 수 있는 사고력을 
가져야만 문제가 원만하게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입니다.
  예컨대 최근에 커다란 문제로 부각되고 있는 환경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경제적 
효율만 생각한다든가 특정한 생산 산업의 발달만 고려한다면 서로 다른 분야들간에 
마찰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고 그 결과 해결하기 어려운 공해문제가 발행합니다.
  그러므로 산업공해를 줄이고 환경을 보전 내지 재생시키기 위해서는 산업전체의 
조화를 반드시 염두 해 두어야 합니다.
  그와 같은 생각은 바로 합리적인 생각에서 비롯됩니다. 범위를 좁혀서 말한다면 
논리적인 생각입니다. 질서와 체계를 가지고 부분을 분석하고 전체를 종합하는 
생각이 곧 논리적인 생각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모든 부분이 체계적으로 질서있게 자리잡기 
위해서는 논리적 생각이 기본적으로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합니다.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들

  1. 인간을 정의하는 여러 가지 말들 중에서 가장 적절한 것은 어떤 것입니까?

  2. 분석적인 생각의 예를 들어봅시다.

  3. 종합적인 생각의 장점과 단점을 각각 지적해보십시오.

  4. 편견과 참다운 생각은 어떻게 구분됩니까?
 
  5. 청자나 백자를 만드는데 있어서 주로 작용하는 생각은 어떤 종류의 
생각일까요?

  6. 자동차나 컴퓨터와 연관된 생각은 주로 어떤 종류의 생각입니까?

    둘. 왜 논리가 필요한가

    1. 논리적 생각

  우리는 주변에서 흔히들 다음처럼 이야기하는 것을 듣곤 합니다.

  "너는 왜 매사에 덜렁거리고 일 처리를 엉망진창으로 하느냐?"
  "우리 사회는 가정이나 학교나 직장이나 모두 질서가 없단 말이야. 사회에 정의가 
실현되려면 무엇보다도 질서의식이 싹터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 나라 사람들은 각자가 이기주의에 젖어 자기 멋대로 생각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어디에서든 질서나 체계를 찾아보기 힘들단 말이야."

  이러한 대화들이 암시하는 사실은 무엇일까요? 이 대화들을 마주 대할 때 
우리들은 일상생화에서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는데 있어서 다분히 질서나 체계를 
염두에 두지 않고 즉흥적으로 살아가는 자세에 익숙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말들은 우리들이 얼마나 즉흥적인지 잘 알게 해줍니다.

  "어? 중간시험이 이틀 밖에 안 남았네. 또 벼락치기를 해야겠군."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 이런 노래도 있잖아? 젊었을 때 
실컷 노는 거야."
  "저 친구 좀 봐. 아직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녀석이 나이 많은 사람에게 대어 
들다니, 이거야말로 말세가 아닌가? 젊은이는 무조건 나이 먹은 사람을 존경해야만 
이 땅에 예의 범절이 바로 설 수 있어."
  "어디까지나 여자는 땅이고 남자는 하늘이지. 도대체 여자가 잘났다고 저렇게 
바락바락 남자에게 감히 대어들다니? 제아무리 남녀평등을 외쳐도 다 소용없는 
짓이야."

  위의 예들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들이 이치를 논하고 따지기에 앞서서 
습관이나 관습에 흠뻑 젖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앞에서 나열한 예들을 꼼꼼히 
살펴보면 우리들은 다음과 같은 점들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가. 느낌(감정)이나 직관은 논리와 상관없다.
  나. 논리적 생각은 우선 합리적 대화를 위하여 필요하다.
  다. 논리는 학문을 공통되는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기본조건으로서 필요하다.

  만일 어떤 남학생이 한 여학생을 죽도록 사랑하면서도 자기가 왜 그 여학생을 
그토록 사랑하는지 꼭 집어서 표현할 수 없다고 합시다. 대부분의 경우 사랑의 감정 
역시 이치를 따져서 논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런가 하면, 내가 단풍 짙게 물든 내장산을 앞에 놓고 산이 아름답다고 
직관한다고 합시다. 이 경우 어떤 사람이 나에게
  "왜 그리고 어떻게 내장산을 아름답다고 직관합니까?"
  라고 묻는다면, 아마도 나는 정확히 이치를 따져서 적절한 답을 제시하기가 몹시 
힘들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들은 합리적 대화에 익숙하지 못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남존여비라든가 나이 먹은 사람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의 강요 등은 합리적인 대화를 
불가능하게 합니다. 이치를 차근차근 따지고 논하는 것을 좀스럽다거나 째째하다고 
여기는 풍조가 모든 사람들에게 배어 있습니다.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훈련이 잘 
되어 있으면 매사에 있어서 이치를 분명히 따짐으로써 잘못된 것을 고치고 잘된 
것은 한층 더 갈고 닦음으로써 사람들 사이의 합리적 대화를 풍요롭게 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서 논리적 생각은 모든 학문의 기본적인 조건입니다. 얼핏 생각하기에 
문학이나 신학 등은 이치를 논하지 않아도 되는 학문같이 여겨질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들 역시 학문인 한에 있어서는 학문의 질서와 체계를 위하여 이치를 
꼼꼼히 따지고 논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희랍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학을 일컬어 학문 일반 또는 철학의 예비학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도움말:논리 또는 논리학이라는 말의 뿌리는 희랍 말 로고스(logos)라는 말에서 
왔는데 logos는 말, 단어, 이야기, 명제, 법칙, 계산, 숙고, 의견, 이성 등 여러 가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 여러 가지 뜻 중에서 오늘날에는 주로 법칙, 이성 등의 
의미로 로고스가 풀이되고 있습니다.

    2. 논리학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논리적인 생각을 필수적으로 동반합니다. 예컨대 물건을 
사고 팔 경우 아무렇게나 돈을 계산하지 않고 이치에 맞게 헤아립니다. 버스나 
지하철을 이용할 때도 역시 멋대로 아무 버스나 또는 지하철을 기분 내키는 대로 
타지 않고 목적지로 향하는 차를 이치에 맞게 탑니다. 
  원시사회나 아니면 문명이 덜 발달한 곳에서도 논리적 생각의 싹은 여전히 
있습니다. 6.25가 끝난 후 시골에 가보면 오늘날과 같은 포장도로나 신식 주택이 
없고 흙먼지 나는 신작로와 초가집들이 정겨운 모습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어렸을 
무렵, 우리는 신작로와 내를 건너 콩밭을 가로질러 친구네 집으로 놀러가곤 했지요. 
우리는 별 어려움 없이 걸어 갈 수 있는 곳이면 모두 길로 생각했습니다. 사실 
어디나 길 아닌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지금은 우리나가 세계의 교통난이 제일 심하고 또 교통사고도 제일 많은 나가 
됐습니다. 서울의 교통상황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걸어갈 수 있는 곳은 어디나 
길이라고 생각했던 우리들 앞에 빨간 불, 파란 불이 생기고 횡단보도도 생겼습니다. 
질서와 체계에 대한 훈련이 잘 안됐던 우리들은 서양식의 도로교통에 대해서 낯설지 
않을 수 없었으며 또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현대사회는 특히 논리적인 생각 없이는 적응하기 어렵습니다. 논리적인 생각을 
체계적으로 취급하는 학문을 논리학이라고 합니다. 논리학은 말과 글에 질서와 
체계를 가져다줍니다. 우리는 어떤 대상을 대할 때 그 대상에 대하여 판단합니다. 
판단은 말이나 글로 표현됩니다. 판단에는 의미 있는 판단과 무의미한 판단이 
있습니다.

  예 1) 아, 서글픈 내 운명이여!
     2) 의지가 강한 사람은 성공한다. 나는 의지가 강하다. 그러므로 나는 성공할 
것이다.

  위의 예에서 첫 번째 문장은 감탄문입니다. 감탄문은 감정에 의해서 성립하는 
문장이고 결코 논리적 사고의 표현이 아니므로 무의미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문장은 논리적 사고에 의해서 이루어진 의미 있는 판단입니다. 논리학은 
인간의 사고 전체를 취급하지 않고 논리적 사고만을 다룹니다. 논리적 사고가 
무엇인지 밝혀지기만 한다면 자연히 논리학이 무엇인지도 분명해질 것입니다.
  논리적 사고란 이치를 따지며 거슬러 올라가는 사고, 곧 추리적 사고입니다. 
다음의 두 가지 예를 살펴봅시다.

  예 1) 모든 삶은 사랑한다.
  최진실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최진실도 사랑한다
  2) 고양이는 동물이다.
  최진실도 동물이다.
  그러므로 최진실은 고양이이다.

  위의 두 예는 모두 논리적 사고, 곧 추리적 사고에 의해서 형성된 판단형식입니다.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논리학은 추리의 정확성을 문제로 삼습니다. 첫 번째 예는 
추리의 정확성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예는 추리의 형식에 이상이 없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추리의 정확성을 어기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의하여야 할 또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논리학은 추리의 심리적 
과정이나 절차를 관심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모든 사람은 사랑한다. 나는 사람이나. 그러므로 나도 사랑한다."
  라는 추리에서 논리학이 핵심적으로 다루는 것은 추리가 정확한가 아닌가, 곧 
추리가 타당한가 아닌가의 문제입니다.
  심리학이나 문학에서는 어떻게 사랑하는지 그리고 사랑이 무엇으로 변하는지 등 
사랑의 과정이나 절차가 매우 중요합니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만나면서 이해하고 
관심을 가지며 서로 공감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런가하면 모성애도 있고 
형제애, 동포애, 인류애를 위시하여 종교적 사랑도 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사랑의 
요소들을 분석하기도 하고 사랑하게 되는 과정과 절차를 냉철하게 기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논리학에서는 외부의 자극이 뇌에 전달되어 어떤 감정이나 개념이 
어떻게 생기는가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문제되지 않습니다. 논리학은 명제(또는 
문장)들로 구성된 논리적 추리의 정확성만을 문제로 삼습니다.
  논리학이 무엇인지 쉽게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은 산수의 예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산수 역시 논리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컨대
  "5+7=12"는 일종의 판단이며 추리입니다. 산수는 수식으로 표현된 논리적 
추리라고 한다면 논리적 판단은 언어(말이나 글)로 표현된 논리적 추리입니다.
  요사이 국민학생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사람이 대하는 컴퓨터 언어 
또한 가장 대표적인 논리적 언어이며 이 언어에 의해서 논리적 판단이 형성됩니다.

  *도움말:우리는 문장이나 언명 또는 명제를 거의 비슷한 뜻으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모든 문장이 명제나 언명은 아닙니다. 문법의 형식만 갖추면 문장이 됩니다. 
그러나 문장 가운데서도 참과 거짓을 가질 수 있는 문장만 명제나 언명이라고 
합니다.

    3. 논리적 명제는 서술적 명제

  논리학이 취급하는 문장은 논리적 명제입니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논리적 명제는 
서술적 명제입니다. 다음의 예들을 잘 살펴봅시다.

  예 1) 선거철이 되면 물가가 오른다.
  2) 열심히 시험공부를 하면 성적이 좋아진다.
  3) 사랑이란 무엇인가?
  4) 아, 나의 미래여!

  앞의 두 가지 예문은 서술적 명제이고 이들 명제의 참과 거짓을 가릴 수 
있습니다. 서술적 명제는 항상 일정한 주장을 포함합니다. 우리들은 그러한 주장이 
명제 안에서 논리적으로 타당하게 표현되고 있는 지 아니면 부당한 지 가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논리적이지 못한 문장들도 있습니다. 그러한 문장들은 아무런 주장도 
포함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의문문과 명령문 그리고 감탄문은 논리적 명제에서 
제외됩니다.

  예 1) 논리학이란 무엇인가?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2) 잠자는 시간을 줄이고 최선을 다해서 공부해라.
  사랑을 위해서는 목숨도 바쳐라
  3) 오, 저 아름다운 장미!
  아, 인생이여!

  위의 예들은 각각 의문문, 명령문 그리고 감탄문의 예들입니다. 의문문, 명령문 및 
감탄문의 문장들은 논리적 명제가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문장들에서 
우리는 참과 거짓을 가릴 수 없습니다. 다음의 서술문(서술적 명제)에서 우리는 
명제의 참과 거짓을 가릴 수 있습니다.

  예 1) 너 아프니?
  2) 공부 열심히 해라.
  3) 산다는 건 정말 멋져!

  위의 세 문장들이 거짓이다 또는 참이다라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참과 
거짓을 가릴 수 있는 문장이 바로 명제나 언명이며, 논리적 추리는 곧 명제나 
언명으로 구성됩니다.

  *도움말:의문문, 명령문, 감탄문 등의 문장은 참과 거짓이 가려지지 않으므로 
'무의미하다(meaningless)'고 말하고 이에 반하여 서술적 명제는 참과 거짓이 
가려지므로 '유의미하다(meaningful)'고 말합니다. 논리학의 대상은 유의미한 
명제입니다.

    4. 논리적 추리

  앞에서 우리는 의미 있는 명제만이 논리학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습니다. 다음과 같은 말들을 잘 살펴봅시다.

  "오, 이런!"
  "저럴 수가!"
  "아이고!"
  "빌어먹을!"

  위의 말들은 단순한 느낌만을 전달합니다. 위의 말들에서 우리는 결코 참과 
거짓을 가릴 수 없으므로 그러한 말들은 논리적으로 무의미합니다. 따라서 위의 
말들은 논리학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참과 거짓을 가릴 수 있는 서술적 명제가 바로 논리적 명제이고, 논리적 명제들이 
모여서 논리적 추리를 구성합니다. 다음의 예들을 살펴봅시다.

  예 1) 오늘은 일요일이다.
  오늘은 일요일이 아니다.
  2) 나는 시험에 합격하였다.
  나는 시험에 불합격하였다.
  3) 오늘은 일요일이거나 일요일이 아니거나이다. 그런데 오늘은 일요일이 아니다. 
따라서 나는 학교에 가야만 한다.
  4) 나는 어제 치른 시험에 합격했거나 아니면 불합격하였다. 그런데 오늘 아침 
대학에 가보니 나는 불합격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후기대 입시를 준비하거나 아니면 
재수해야만 한다.

  앞의 두 가지 예는 의미 있는 명제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위의 두 가지 예는 의미 
있는 명제들로 구성된 논리적 추리입니다.
  어떤 전제들로부터 결론을 이끌어 낼 때 우리는 그러한 작업(또는 행위)을 
논리적으로 타당한 추리와 논리적으로 부당한 추리로 구분합니다. 전제들로부터 
결론이 옳게 이끌어질 때 그러한 추리는 논리적으로 타당한 추리입니다. 이와 
반대로 이끌어질 경우 그와 같은 추리는 논리적으로 부당한 추리가 됩니다.

  예 1) 모든 사람은 이성적이다.
  공자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공자는 이성적이다.
  2) 모든 사람은 성욕을 가진다.
  공자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공자는 성욕을 가지지 않는다.

  위의 예에서 첫 번째 것은 논리적으로 타당한 추리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 예는 
논리적으로 부당한 추리입니다.

  *도움말:논리적 추리를 구성하는 것은 논리적 명제들입니다. 논리적 명제들은 
각각 전제와 결론의 역할을 담당합니다. 그리고 전제는 다시 대전제와 소전제로 
구분하여 소전제는 둘 이상도 가능합니다.

  예 1) 모든 인간은 증오한다(대전제)
  나는 인간이다(소전제)
  그러므로 나는 증오한다(결론)
  2) 모든 동물은 식욕을 가지고 있다(대전제)
  개는 동물이다(소전제)
  메뚜기는 동물이다(소전제)
  그러므로 개와 메뚜기는 식욕을 가지고 있다(결론)

  우리들은 논리적 추리에 있어서 대전제와 소전제의 논리적 관계를 통해서 결론을 
추리합니다.

    5. 추리와 추론

  우리들은 상상, 추리, 추론 등의 낱말을 거의 비슷한 뜻으로 사용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상과 추리와 추론을 정확히 구분하라고 물으면 정확한 
답을 빨리 찾아내기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논리학에서는 상상과 추리 그리고 추론을 분명히 구분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상상은 다분히 감정의 산물이며 비약이 심합니다. 특히 예술활동에 
있어서, 곧 음악, 미술, 문학 등의 창작에 있어서 "상상의 날개"가 필수적이라는 
말을 많이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상상이라는 낱말은 논리학에서 제외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논리적 상상'이라는 말은 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추리와 추론은 둘 다 논리적이기 때문에 추리와 추론을 혼동하기 
쉽습니다.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절차나 과정은 추리라고 합니다. 따라서 추리가 일단 
마무리된 후 그 결과가 말이나 글(언어)로 표현되어 제대로 형식을 갖추면 그것은 
추론입니다.

  그렇지만 어떤 주장들이 다른 주장의 바탕이 될 경우 그와 같은 논리적 추리를 
언어로 형식화하면 그것은 논리적 추론이 됩니다. 주장은 각각 명제로 표현되기 
때문에 추론은 두 가지 이상의 명제로 이루어집니다.
  추론을 잘 살펴보면 전체의 형태는 전체의 형태는 전제와 결론으로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앞에서도 잠시 지적한 일이 있지만 추론에서 전제는 
둘 이상일 수 있고 결론은 하나입니다. 전제는 대전제와 소전제로 구분되며 
소전제는 다시 둘 이상일 수 있습니다.

  예 1) 모든 사람은 명예욕을 가진다(대전제)
  그 신부는 사람이다(소전제)
  그러므로 그 신부는 명예욕을 가진다(결론)
  2) 모든 학생들은 시험 전에 불안감을 맛본다(대전제)
  피군은 학생이다(소전제)
  고양은 학생이다(소전제)
  그러므로 피군과 고양은 시험전에 불안감을 맛본다(결론)
  추론에서 전제는 원인에 해당하며 결론은 결과에 해당합니다. 우리 속담에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원인이 있으면 꼭 결과가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결과는 반드시 어떤 원인으로부터 생긴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보면 추론이란 아무렇게나 내뱉는 말에서 성립되는 것이 아니고, 특정한 
원인으로부터 결과를 도출해내는 증명의 형식을 지닙니다. 그렇다면 추론에 있어서 
논리학의 할 일은 무엇일까요? 
  원인으로부터 결과가 옳게 도출되었는지 아니면 도출과정이 잘못되었는지를 
밝히는 것이 바로 논리학의 할 일입니다. 즉 전제로부터 결론으로의 추리과정이 
옳은지 아니면 그른 지를 따져보는 것이 논리학의 할 일입니다.
  우리는 추론을 말할 때 흔히 삼단논법과 같은 연역추론을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와 같은 
삼단논법은 연역추론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연역추론에서는 전제로부터 결론이 
필연적으로 도출됩니다.
  그러나 추론에는 연역추론 이외에 귀납추론도 있습니다. 경험적 사실이나 경험적 
자연과학에서는 전제로부터 나오는 결론이 필연적일 수 없고 대체로 통계적입니다. 
귀납추론에서는 전제로부터 '아마' 결론이 도출될 것이라는 확률적 내지 개연적 
주장이 성립합니다.

  예 1) 이 사과를 먹어보니 달다.
  저 사과를 먹어보니 달다.
  그러므로 다른 사과를 먹어도 달 것이다.
  2) 이 회사의 김양은 못생겼다.
  이 회사의 오양은 못생겼다.
  그러므로 이 회사의 다른 여사원들도 못생겼을 것이다.

  위의 추론들은 귀납추론입니다. 귀납추론에서 전제로부터 도출된 결론은 "아마... 
일 것이다."라는 형식을 지닙니다. 앞에서 특정한 전제에서 결론을 이끌어내는 
증명형식을 취하는 것이 추론이라고 했고 논리학의 할 일은 그러한 증명이 옳게 
되었는지 아닌 지를 살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와 같은 증명이 옳게 외었을 때의 
추론을 타당한 추론이라고 부르고, 증명이 잘못되었을 때의 추론을 부당한 
추론이라고 합니다.

  *도움말:연역추론을 지배하는 것은 우리들의 순수한 사고형식입니다. 따라서 
연역추론은 수학, 철학, 신학 등에서 주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귀납추론을 지배하는 
것은 감각경험입니다. 귀납추론은 주로 경험적 자연과학에서 사용됩니다.

    6. 추론의 타당성과 부당성

  우리들이 옳게 추리하는 지 아니면 옳지 않게 추리하는 지를 알기 위해서는 
추론의 타당성과 부당성을 가려내는 일이 필요합니다. 논리적 추론은 전제와 
결론으로 이루어지며, 전제와 결론은 논리적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논리적 관계가 
제대로 이루어진 추론은 타당한 추론이고 그러지 못한 추론은 부당한 추론입니다.
  고대 희랍의 궤변철학자들은 부당한 추론을 마치 타당한 추론처럼 주장한 
대표적인 사람들입니다. 고대 중국이나 인도에도 부당한 추론의 형식이 제기되어 
논리 문제가 발달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그러한 움직임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예컨대 "흼 날은 말이 아니다", "흰 돌은 돌이 아니다"와 같은 명제는 고대 
중국에서 논리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서 주장된 것들입니다.
  우리는 가까운 주변에서 자주 부당한 추론을 대할 수 있습니다. 부당한 추론은 
명백하지 않으므로 논쟁의 여지가 많지만 형식은 그럴 듯 하므로 항상 문제거리가 
됩니다.

  기형이는 대학 2학년에 재학 중입니다. 기형이는 1학년을 마친 후 군에 입대하여 
꼬박 2 년 넘게 군생활을 충실히 하고 제대했습니다. 종석이는 기형이와 같은 대학 
같은 학과에 다니는 3학년 학생입니다. 두 사람 사이는 최근에 와서 매우 
나빠졌습니다. 그 동안 여러 차례 티격태격하다가 며칠 전에는 드디어 주먹질까지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기형씨, 제아무리 군대를 제대하였다고 해도 우리과 행사에서는 학년이 
우선입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말이 있다는 것 알지요? 그러니까 
우리과에서는 기형씨가 어떻든 나를 선배 대접해야 합니다."
  "종석씨, 이거 정말 사람 열나게 만드네. 내가 재수한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고 
또 예비역이라는 사실도 다 알고 있어요.
  종석 씨가 제아무리 삼 학년이라고 해도 대학은 학번을 따지는 거요. 알만한 
사람이 왜 그래? 당신보다 내가 세 살 더 많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데 당신보고 
선배 대접을 하라니 나 원 참 기가 막혀서.
  학과가 먼지요, 아니면 인생이 먼저요? 누가 누구를 선배 대접해야 하는지 
한심해서 죽겠구만."
  두 사람은 말이 거칠어지고 감정이 격해져서 치고 받는 지경까지 이르렀던 
것입니다. 각자가 자기 주장은 옳고 상대방의 주장이 틀리다고 생각하면 의견충돌이 
생깁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심한 경우, 추론이 마치 타당한 것처럼 사람들이나 사회에 
받아들여질 때 혼란이 생기고 사회는 퇴보하기까지 합니다.
  부당한 추론의 예는 허다하게 많습니다. 남녀가 죽느니 사느니 잠시도 떨어져서는 
안 될 것처럼 꼭 붙어 다니다가 어느 한 쪽이 변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남자는 
여자에게 "아직도 죽도록 사랑하지만 내 몸이 아프니 당분간 만나지 말자"고 간곡히 
애원하는 듯 명령합니다. 그런가 하면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고 오래전에 
세상에 알린 배우들도 있습니다.
  부당한 추론은 우선 우리의 생각에 혼란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다음으로는 우리의 
실생활의 방향을 상실하게 합니다.
  우선 간단한 예와 함께 추론의 타당성과 부당성을 살펴봅시다.

  예 1) 모든 학생은 죽는다(참)
  모든 남학생은 학생이다(참)
  그러므로 모든 남학생은 죽는다(참)
  2) 만일 네가 100억원짜리 빌딩을 가진다면 너는 부자이다(참)
  너는 100억원짜리 빌딩을 가지고 있지 않다(참)
  그러므로 너는 부자가 아니다(거짓)
  3) 모든 여인은 아름다운 몸매를 가지고 있다(거짓)
  아름다운 몸매를 가진 모든 여인은 미인이다(거짓)
  그러므로 모든 여인은 미인이다(거짓)

  첫 번째 예에서는 대전제, 소전제 그리고 결론이 참이며 추론도 또 한 참입니다. 
두 번째 예에서는 각각의 요소명제들은 모두 참이지만 추론은 부당합니다. 왜냐하면 
비록 "네가 100억원짜리 빌딩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할지라도 너는 얼마든지 
부자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권력욕이 강하고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인물들이 
대중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참다운 요소명제들을 사용하면서 그릇된 
추론을 교묘히 사용하는 예가 흔합니다.

  서양 철학사를 통해서 부당한 추론을 마치 타당한 추론처럼 사용함으로써 보편적 
사유를 의심하고 감각경험의 사실에 충실하고자 했던 대표적 경향은 희랍의 
궤변철학자들인 프로타고라스, 고르기아스 등에 의하여 대변됩니다.
  위의 예들 중 세 번째 예에서 각각의 요소명제들은 비록 거짓일지라도 추론은 
타당합니다. 만일 우리들이 어떤 추론에서 전제들만 보고 그 추론이 타당하다거나 
부당하다고 판단한다면 그러한 판단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결론만 
보고 그 추론이 타당하다거나 아니면 부당하다고 판단하는 것 역시 잘못된 
것입니다.
  추론의 타당성이나 부당성은 어디까지나 전제들과 결론의 논리적 관계에서 
성립합니다. 다시 말해서 각각의 요소명제들의 참과 거짓의 연관 속에서 추론의 
타당성과 부당성이 이야기될 수 있습니다. 즉 대전제와 소전제 및 결론의 참과 
거짓이 우선 결정되어야만 그것들의 논리적 관계를 통해서 추론이 타당한 지 아니면 
부당한 지의 여부가 결정될 수 있습니다. 이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다음의 예를 
살펴봅시다.

  예 1) 홍수가 나면 물가가 오를 것이다(참)
  물가가 올랐다(참)
  그러므로 홍수가 났다(거짓)
  2) 진급하면 봉급이 오를 것이다(참)
  봉급이 올랐다(참)
  그러므로 진급하였다(거짓)

  첫 번째 예에서 물가가 올랐다고 해서 반드시 홍수가 났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두 번째 예에서도 봉급이 올랐다고 해서 반드시 진급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넓은 의미에서 타당한 추론을 건전한 추론이라고 말하고 부당한 추론을 
불건전한 추론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좀더 상세히 말하면, 각각의 요소명제가 모두 
참이고 타당한 추론이 건전한 추론입니다. 그렇다면 건전한 추론의 경우 결론이 
참이면 추론은 항상 타당합니다. 

  *도움말 1:요소명제란 추론을 형성하는 각각의 명제들, 곧 대전제, 소전제 및 
결론을 말합니다.

  예:요소명제들
  모든 사람은 이성적이다(대전제)
  나는 사람이다(소전제)                             
  그러므로 나는 이성적이다(결론)

  *도움말 2:희랍의 소피스트들(궤변철학자들)은 부당한 추론을 내세운 대표적인 
사람들입니다. 몰론 고대 인도의 인명론이라든가 중국의 명가 등에서도 논리적인 
관점에서 "흰 말은 말이 아니다", "흰 돌은 돌이 아니다"등과 같은 궤변을 
제시했지만, 사회, 변화를 부정하기 위한 증명을 제시하였습니다.
  물론 제논은 사회,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증명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순수한 논리적 의도에서 증명을 제시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훗날 제논의 
증명은 궤변으로 판정 났으며 소피스트들은 제논의 증명방식을 이용하여 형식에 
있어서 유사한 추론을 사용하였지만 그들의 추론은 출세나 돈벌이를 위한 것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제논은 사물들의 다수성의 대한 4가지 반대 증명 그리고 운동에 대한 세 가지 
반대 증명을 제시하였습니다.

    (가) 사물들의 다수성에 관한 네 가지 반대 증명

  1) 만일 존재하는 것이 다수라면 그것은 무한하게 작으며 동시에 무한하게 크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무한하게 크다는 것은 모순이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것은 
여럿일 수 없다.
  2) 만일 존재하는 것이 다수라면 그것은 수적으로 유한하며 동시에 수적으로 
무한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수적으로 유한하며 동시에 무한하다는 것은 
모순이다. 따라서 존재하는 것은 다수일 수 없다.
  3) 만일 모든 사물들이 공허한 공간 안에 있다면 모든 사물들 자체는 공허한 
공간과 똑같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사물들 자체는 공허한 공간이 아니므로 
공허한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4) 만일 옥수수 한 푸대가 있어서 흔들면 낱낱의 옥수수와 옥수수의 각 부분은 
똑같은 소리를 낸다.

  위의 예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합니다. 첫 번째 예에서 
존재하는 것이 여럿이라면 그것은 한편으로 무수하게 많은 작은 것들이어야 한다는 
주장이 성립합니다. 그런가 하면 이와 반대로 그것은 무수히 많은 최대한의 큰 
것들이어야 한다는 주장도 성립합니다. 따라서 존재하는 것은 여럿이 아니라 오직 
하나라는 추론의 타당성을 결국 주장하게 됩니다.
  두 번째 예에서는, 존재하는 것이 여럿이라면 그것은 헤아릴 수 있을 정도로 
유한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성립합니다. 그러나 또한 존재하는 것이 여럿이라면 
그것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무한하여야 한다는 주장도 성립합니다.
  세 번째 예는 공허한 공간을 부정함으로써 공허한 공간에 널려있다고 생각되는 
사물의 다수성을 부정합니다.
  네 번째 예는 세 번째 예와 비슷합니다. 옥수수들의 소리와 옥수수의 각 부분의 
소리는 하나라고 조장함으로써 여러 소리(다수의 소리)를 부정합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첫 번째나 두 번째의 예는 감각의 신빙성에 반대함으로써 그리고 
세 번째와 네 번째의 예는 공간을 반대함으로써 사물의 다수성을 부정합니다.

    (나) 운동에 관한 세 가지 반대 증명

  1) 한 물체는 무한한 공간을 차지하므로 운동은 부정된다.
  2) 아킬레스는 자기 앞에 있는 거북이를 결코 따라잡을 수 없다.
  3) 날아가는 화살은 정지하여 있다. 왜냐하면 화살은 날아가는 매 순간 일정한 
공간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예는 어떤 물체가 항상 자신에게 알맞는 공간을 지니고 있으므로 언제나 
그 자리에 있고 움직이지 않는다는 주장입니다.
  두 번째 예는 번개처럼 빨리 달리는 희랍이 신 아킬레스가 달리기의 출발점에서 
거북이보다 뒤에 자리잡고 있다가 경주를 시작하면 결코 거북이를 추월할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이것은 첫 번째 예와 똑같은 내용을 가집니다. 아킬레스와 거북이는 
언제나 자신의 공간을 가지고 있으므로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예 역시 첫 번째 및 두 번째 예와 유사한 내용을 가진 것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제아무리 날아가는 화살이라도 자신의 공간을 가지고 있고 이 공간 자체는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화살은 날아가지 않는다는 추론이 성립합니다.

  제논의 사물의 다수성에 대한 반대는 완전한 이성적 사유와 존재를 동일한 것으로 
보고 감각이나 현실 세계를 무시하는 데서 생깁니다. 그리고 제논의 운동에 대한 
반대는 '흐름'으로서의 시간을 무시하기 때문에 생깁니다. 제논처럼 모든 것을 
공간화하면 운동은 무의미해집니다.

  또, 소피스트들은 프로타고라스와 고르기아스의 대표적인 궤변(부당한 
추론으로서의)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 1)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프로타고라스).
  2) 우리들은 어떤 것의 생성이나 존재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전혀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다. 그래도 만일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알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우리들이 
그것을 알 수 있다면 그렇다고 해도 그것은 전달 불가능할 것이다. 왜냐하면 말이란 
사태와 하등의 공통된 것을 소유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부당한 추론은 우리들의 사고력을 흐리게 할뿐만 아니라 
사회, 정치적으로 대중을 속임으로써 특정인의 이기적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될 염려도 있습니다. 부당한 추론을 마치 타당한 추론처럼 주장할 
경우 우리들은 판단의 오류를 겪게되며 나아가서 현실의 행동을 그르칠 염려가 
많습니다.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들

  1. 질서와 무질서에 관하여 토론해봅시다. 또한 질서의식이 무엇인지 생각하여 
봅시다.

  2. 대화와 지꺼림의 차이가 어떤 것인지 지적하여 봅시다.
 
  3. 논리가 무엇인지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해 봅시다.

  4. 느낌이나 직관이 논리와 상관되는 지 그렇지 않은 지를 말하고 또 그에 대한 
이유를 제시해 봅시다.

  5. 합리적 대화가 왜 필요한 지 근거를 제시하여 봅시다.

  6. 논리적 생각이 학문의 기본 조건일 수 있는 이유를 말하여 봅시다.

  7. 논리적 사고의 성격을 설명해 봅시다.

  8. 논리학과 심리학의 차이는 어떤 점이 있을까요?

  9. 명제란 무엇을 말합니까?

  10. 의문문, 명령문, 감탄문 등이 논리적 명제가 아닌 이유를 말하여 봅시다.

  11. 추리와 추론을 구분해 봅시다.

  12. 요소명제란 무엇을 말합니까?

  13. 연역추론과 귀납추론의 차이를 말하고 각각의 예를 들어봅시다.

  14. 타당한 추론과 부당한 추론의 구체적 예를 들고 그것들의 차이를 말해 
봅시다.

  15. 건전한 추론은 어떤 것입니까?

  16. 궤변철학자들(소피스트들)의 부당한 추론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 지 말해 
봅시다.

    셋. 올바르게 정의내리기

  일반적으로 논리를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를 일컬어 개념과 판단의 추리라고 
합니다.
  "금년의 대학 입시문제는 너무 어려웠기 때문에 비록 내가 어느 정도 열심히 
준비했다고 할지라도 나는 불합격할 것이 분명하다"라는 추론형식을 보더라도 이 긴 
명제는 다음의 세 가지 판단으로 분해됩니다. "나는 금년 대학입시를 위하여 열심히 
준비하였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불합격 할 것이다. 왜냐하면 금년의 대입문제는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첫 번째 판단을 다시 분해하면 그것은 
"나", "금년", "대학입시", "불합격하다"등의 개념들이 남습니다. 이 개념들이 
추론에서 얼마만큼 적절하고 분명하게 사용되었는가에 따라서 논리적으로 타당한 
판단 그리고 타당한 추론의 성립여부가 결정됩니다.

  이상의 사실로 미루어 보아 논리적으로 정확한 추리를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선 개념이 올바르게 사용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명제를 옳게 구성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옳게 추리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개념의 
사용이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한다고 합시다. "악은 선이 부족한 상태이다. 왜냐하면 
선은 인간의 완전한 행동의 성질임에 비하여 악은 불완전한 행동의 성질이기 
때문이다." 이 추론은 크게 보아 악에 관한 추론입니다. 동시에 이 명제는 악에 
관하여 정의 내리고 있습니다.

  정의 내린다는 말은 어떤 개념의 뜻을 분명하게 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우리들이 판단하고 추리할 때 어떤 개념의 뜻을 분명하게 정하지 못한다면 애매한 
구절의 오류라든가 여러 가지 뜻의 오류 등을 쉽사리 범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생각과 행동에 혼란마저 초래할 우려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선 명사가 어떤 것들이며 또한 한 걸음 더 아나가서 올바르게 정의 
내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정확히 알아야만 논리적으로 타당한 판단과 추리를 행할 
수 있습니다.

  *도움말:논리학에서는 판단 또는 명제의 기본요소를 개념이라고 부르지 않고 
명사(term)라고 부릅니다. 명사를 정확하게 사용 할 줄 알면 올바른 판단과 추리가 
가능합니다.

    1. 명사란 무엇인가

  우선 다음의 예문을 살펴봅시다.

  서울이나 뉴욕 등의 도시에는 대학과 회사가 많다. 대학이나 회사에는 사람이 
많고 그들은 일과가 끝나면 제각기 집으로 간다. 요란하게 도시를 달리는 
자동차들은 빨간색, 흰색, 검은색 등 다양하다.
  도시는 살아 숨쉬는 생물의 사회이고 결코 무생물의 집단이 아니다. 도시의 
사람들은 부모와 자식, 선생님과 제자, 은인과 원수 등 다양한 인간관계 안에서 
복잡한 삶을 이끌어 가고 있다.

  이 예에 나오는 명사들의 성격을 분명하게 밝힐 수 있다면 우리들은 명사의 
성질이 어떤 것이며 또한 명사가 어떻게 나뉘어지는 지를 쉽사리 알 수 있습니다. 
위의 예를 분석함으로써 우리는 아래와 같이 명사를 분류할 수 있습니다.

  1) 단일명사와 일반명사:
  유일한 하나의 대상을 가리키는 것을 단일명사라고 합니다. '서울', '뉴욕'은 
단일명사입니다. 그렇다면 '이 논리학 책을 쓴 철학교수', '금년에 가장 적게 팔린 
철학책' 등도 역시 유일한 대상이므로 단일명사입니다.
  그런가 하면 '도시'는 일반명사입니다. '사람', '집', '생물' 등도 역시 
일반명사입니다.

  2) 집합명사:
  일반명사는 집합명사와 구분됩니다. 위의 예문에서 '대학', '회사'는 
집합명사입니다. 하나 하나의 대상이 여럿을 이루고 그것이 다시 하나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경우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 집합명사입니다. 
'군대', '국회'등도 역시 집합명사입니다. 그러나 '대학생', '회사원', '군인', '국회
의원' 
등은 일반명사입니다.

  3) 구체명사와 추상명사:
  구체적으로 언제나 보고 만질 수 있는 것, 곧 참다웁게 있는 것들인 '사람, 
'자동차', '도시' 등은 구체명사입니다. 그렇지만 '빨간색', '흰색' 등과 같이 사물의 
성질을 나타내는 것은 추상명사입니다.
  사물의 성질이나 상태를 나타내는 것들, 예컨대 '요란함', '정의', '선', '아름다
움' 
등도 역시 추상명사입니다.

  4) 긍정명사와 부정명사:
  지금까지 우리는 명사들을 어떻게 명확히 사용할 수 있는 지를 알기 위해서 서로 
대비되는 명사의 성질을 살펴보았습니다. 명사가 사용되는 전체 관계 안에서 
명사들은 서로 대비되는 입장에 있을 때 분명한 뜻을 가집니다.
  따라서 한 명사는 대비되는 쌍에 따라서 독특한 성격을 가집니다. 예컨대 학생은 
대학이라는 집합명사에 대해서는 일반명사이지만, 연구라는 추상명사에 대해서는 
구체명사입니다. 그런가 하면 학생은 '학생이 아닌 젊은이'라는 부정명사에 대해서는 
긍정명사의 위치를 가집니다.
  '생물', '유의미', 등은 긍정명사임에 비하여 '무생물', '무의미'등은 부정명사입니
다.

  5) 절대명사와 상대명사:
  우리는 명사를 절대명사와 상대명사로 구분하여 볼 수도 있습니다. 위의 예에서 
대학, 회사, 도시, 생물 등은 어떤 다른 것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지 않고도 
독립적으로 생각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식, 제자, 원수 등은 각각 대비되는 또 
다른 명사들을 전제로 해서만 뜻을 가집니다. 자식, 제자, 원수 등에 대비되는 
명사는 부모, 선생님, 은인 등이고 이것들을 일컬어 상관명사라고 합니다.

  사물이나 대상을 지시하는 명칭이나 구절을 우리는 명사라고 합니다. 또한 사물의 
성질이나 상황을 가리키는 명칭도 역시 명사입니다. 명사들이 모여서 판단을 이루고 
판단들이 모여 추리를 형성합니다.

  *도움말:명사가 단일한 것인지 일반적인 것인지 또는 집합적인 것인지 등을 
알아야만 명사들을 모아서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또한 명사가 
구체적이냐, 추상적이냐 아니면 긍정적이냐, 부정적이냐 또는 절대적이냐 
상대적이냐를 명확히 알아야만 올바른 판단을 만들 수 있습니다.

    2. 외연과 내포의 의미

  앞에서 우리는 정확한 판단을 구성하여 올바르게 추리하기 위해서는 명사(term)의 
분명한 의미를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하여 명사가 단일한지 
아니면 일반적인지, 구체적인지 또는 추상적인지 등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명사의 정확한 뜻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가) 명사가 가리키는 대상들의 
집합이 어떤 것인지, (나) 명사가 가리키는 대상들의 특징이나 성질이 무엇인지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첫 번째 것을 명사의 외연(denotation)이라고 하고 두 번째 것을 명사의 
내포(connotation)라고 합니다.

  1) 명사의 외연

  외연이란 명사가 가리키는 대상의 전체 범위를 말합니다.

  예) 사람의 외연:인류전체
  짐승의 외연:소, 돼지, 호랑이, 늑대, 사자, 말, 개, 노루...
  꽃의 외연:민들레, 장미, 호박꽃, 개나리...

  우리들은 어떤 명사의 외연이 '가장 넓다', '넓다', '좁다', '가장 좁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명사가 가리키는 대상의 집합이 클 때 그 명사의 외연은 넓으면 그 
대상의 집합이 작을 때 명사의 외연은 좁습니다.

  예컨대 항구의 외연은 한국의 항구의 외연보다 넓습니다. 한국이 항구는 인천, 
부산, 목포, 진남포, 원산 등이지만, 한국의 외연은 세계 각국의 항구 모두를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다음의 여러 가지 명사를 주의해서 살펴봅시다.
  존재자, 생물, 동물, 포유동물, 사람, 한국의 성리학자, 격몽요결을 쓴 한국의 
성리학자.
  위의 명사들 가운데서 '존재자'의 외연이 가장 넓습니다. 왜냐하면 '존재자'는 
생물, 동물... 격몽요결을 쓴 한국의 성리학자, 모두를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격몽요결을 쓴 성리학자'는 외연이 가장 작습니다. 왜냐하면 '격몽요결을 쓴 
한국의 성리학자'는 오로지 이율곡만을 가리키고 다른 어떤 것도 포함되지 않는 
고유명사이기 때문입니다.

  2) 명사의 내포

  명사의 내포란 어떤 명사가 가리키는 대상의 특징이나 성질을 전부 합한 것을 
말합니다.

  어떤 명사의 뜻을 명확히 알기 위해서는 명사의 외연만 가지고는 안 되고 명사의 
내포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예컨대 "학교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하여 답할 
때 "학교는 국민학교, 중고등학교, 대학교입니다."라고 말하면 그것은 학교의 외연만 
말한 것으로 학교라는 명사의 의미가 분명히 드러나지 못합니다.
  학교의 외연과 함께 "학교란 일정한 제도 아래에서 배우고 가르치는 장소"라는 
내포가 첨가되어야 비로소 학교의 뜻이 분명하여집니다.

  3) 약정된 내포, 주관된 내포, 객관적 내포

  사람들은 지리, 역사, 문화, 사회적인 배경에 따라서 서로 다르게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사회정의'라는 명사를 놓고도 고대 희랍인과 근대 한국인은 
서로 달리 생각하며, 오늘날의 에디오피아인, 영국인, 독일인, 한국인도 그것을 서로 
달리 해석합니다.

  "사회정의란 오직 민족의 권리를 신장시키는 것을 말한다."
  "아니다. 사회정의란 한 국가에서 부정과 부패가 없는 상태이다."
  "사회정의란 인간의 평등과 공정한 경제분배가 실현되는 사회의 상태이다."

  이처럼 명사의 내포는 민족에 따라서, 집단에 따라서 또는 각 개인에 따라서 
주관적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주관적으로 해석하여 "인간은 속일 줄 아는 동물이다"라고 
말했을 때 그 사람은 자신이 주관적으로 아는 인간이라는 대상에 관한 특징 전부를 
열거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관적 내포는 객관적인 모든 
성질을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에 '명사의 내포'를 대변하기 어렵습니다.

  명사의 주관적 내포와 대비되는 것이 명사의 객관적 내포입니다. 어떤 명사의 
이미 알려진 성질과 함께 알려지지 않은 모든 성질을 포함한 것이 객관적 
내포입니다. 이러한 객관적 내포는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주관적 내포와는 전혀 
다릅니다만 사실상 객관적 내포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명사의 내포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선택하는 것은 명사의 약정적 내포입니다. 
우리는 어떤 명사의 외연에 속하는 대상의 필요하고 충분한 조건으로 나타나는 모든 
성질을 그 명사의 약정적 내포라고 합니다.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은 사람들의 약속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삼각형의 약정적 내포는 다음과 같습니다. "세 개의 직선으로 쌓인 평평한 도형." 
여기에서 '세 개의 직선으로 둘러싸인'은 삼각형의 필요조건이며 '평평한'은 
충분조건입니다. 말하자면 필요조건은 명사의 뼈대이고 충분조건은 뼈대에 덧붙인 
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명사는 외연과 내포 두 가지의 측면을 가집니다. 사람의 외연은 
인류전체이고 내포는 '이성적 동물', '정치적 동물'등입니다. 사랑의 외연은 '남녀간
의 
사랑', '인류애', '종교적 사랑' 등이고, 내포는 '인간 상호간의 관심과 배려와 
존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명사의 외연과 내포를 옳게 사용하여야만 명사를 올바르게 정의할 수 있다는 
사실이 위의 설명에서 분명히 드러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도움말 1:예외적으로 내포는 있되 외연이 없는 명사들이 있습니다. 드라큐라, 
봉황새, 용, 염라대왕 등의 명사들은 내포(성질)는 있더라도 실제로 적용되는 대상이 
없습니다.

  이들 명사는 현실에서의 적용대상이 없으므로 무의미하다고 불리어집니다. 
적용대상이 없다는 의미에서 무의미하지만 그러한 명사들은 삶에서 상징적으로 
의미심장한 뜻을 지닐 경우가 많습니다.

  도움말 2:명사의 외연과 내포는 일반적으로 서로 반비례 관계에 있습니다.

  "존재자, 생물, 동물, 포유동물, 사람, 미국의 배우, "사랑과 영혼"의 영화에 
주인공으로 출연한 여배우."

  위의 예를 자세히 볼 것 같으면 명사의 외연이 증대할 때 내포가 감소하고 반대로 
내포가 증대하면 외연이 감소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존재자'의 외연은 존재자 
이하의 모든 것들을 전부 포함합니다. 그러나 존재자의 내포는 단순히 있는 
것들이라는 성질만을 가리킵니다. 
  그런가 하면 '영화 "사랑과 영혼"에 주인공으로 출연한 여배우'는 외연이 고유한 
인물, 데미 무어에 한정됩니다. 그러나 내포는 분명하며 풍부합니다. 따라서 내포가 
증대하면 외연은 감소하고 내포가 감소하면 외연은 증대합니다.

  도움말 3:위의 예 '존재자, 생물, 동물,... 영화 "사랑과 영혼"의 주인공으로 출연
한 
여배우'에서의 과정은 외연이 점차 감소하고 내포가 증대하는 과정입니다. 이러한 
과정은 어떤 것이 점점 구체적으로 특수하게 되는 과정으로 우리는 이를 가리켜 
특수하게 되는 과정으로 우리는 이를 가리켜 한정(determination)이라고 합니다. 
이에 반하여 외연이 증대하고 내포가 감소하는 과정은 보편화와 추상화의 과정으로 
우리는 이를 가리켜 개괄(generalization)이라고 합니다.

  다시 한번 외연과 내포의 성격을 밝히자면, 외연은 명사가 해당되는 범위, 곧 
양(quantity)이며 내포는 명사의 특징이나 성질, 곧 질(quality)을 말합니다.

    3. 올바르게 정의내리기

  1) 정의란 무엇일까

  사람, 배, 사기꾼, 꿈, "사랑과 영혼"의 여주인공 등은 각각 어떤 뜻을 가진 
명사입니다. 명사의 뜻을 명확하게 해주는 일을 정의라고 합니다.
  정의에는 외연적 정의와 내포적 정의가 있습니다. 어떤 명사가 지시하는 대상의 
범위를(외연을)분명히 밝힘으로써 그 명사를 다른 명사와 구분해주는 것이 외연적 
정의입니다. 명사가 지시하는 대상의 성질을 밝힘으로써 그 명사의 뜻을 명확하게 
해주는 것을 내포적 정의라고 합니다.
  그러나 외연적 정의는 명사의 뜻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더라도 명사의 뜻을 
명확하게 해주지 못합니다.

  "고양이과 동물은 사자, 호랑이, 표범, 시라소니, 고양이 등이다."

  위의 예는 고양이과 동물의 외연만 전개하였습니다. 따라서 고양이과 동물의 
성질(내포)을 명확히 알기 힘들기 때문에 명사의 외연적 정의는 충분한 정의가 
못됩니다. 따라서 정의라고 우리가 말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내포적 정의입니다. 
사전에 나와 있는 명사에 관한 정의는 대부분 내포적 정의입니다. 그런가 하면 
구분과 분류는 외연적 정의에 속합니다.

  *도움말:우리는 인류를 황인종, 흑인종, 백인종, 등으로, 즉 유를 종으로 
분해합니다. 구분은 외연을 분해하는 것을 말하는데, 구분에서 우리는 유를 종으로 
분할합니다. 반대로 분류란 종을 유로 묶어 나가는 방법을 말합니다. 예컨대 풀, 
나무 등을 식물로 묶는 것은 종들을 유로 종합하는 분류입니다. 외연적 정의에 
대해서는 다음절에서 상세히 다룰 것입니다.

  2) 여러 종류의 정의들

  *본직 정의: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답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정의하여야 
합니다. 인간의 특징이나 성질은 무수히 많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라는 명사를 
명확히 지칭하지 않게 하여야 인간을 분명하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어떤 명사를 바로 그 명사이게끔 하고 다른 어떤 명사도 아니게끔 해주는 명사의 
본질을 종차(specific difference)라고 합니다. 종차 이외에 어떤 명사를 바로 그 
명사이게끔 해주는 것은 유입니다. 다음의 예를 봅시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

  위의 명제에서 정의되는 명사는 '인간'입니다. '동물'은 유개념이며 '이성적'은 
종차입니다. 본질적 정의란 유개념과 종차를 밝힘으로써 어떤 명사를 정의 내리는 
방법입니다."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에서 우선 정의되어지는 명사(인간)를 종으로 
가지는 유개념(동물)을 제시하고 다음으로 그 종(인간)을 같은 유개념에 속하는 다른 
종들(인간 이외에 다른 동물들)과 구별해 주는 종차(이성적)를 지적하여 이루어지는 
정의가 바로 본질적 정의입니다.
  그러나 본질적 정의를 옳게 내리기 위해서는 다음의 규칙들을 지켜야 합니다.

  1) 정의하고자 하는 명사의 본질적 성질을 정확히 지시하여야 합니다. 즉 
정의하고자 하는 명사의 유와 종차를 옳게 지시하여야 합니다 "인간은 두발을 가진 
동물이다"와 같은 정의는 잘못된 것입니다. 유개념(동물)과 종개념(인간)은 제대로 
제시되어 있지만 종차(두 발을 가진)가 옳지 못합니다. 두 발을 가졌다는 사실은 
인간을 다른 동물과 확실히 구분해 주는 본질적 성질이나 속성으로서의 종차가 되지 
못합니다.
  2) 정의되어야 할 명사가 정의하는 말에 나타나서는 안 됩니다. '원은 둥근 
도형이다', '미녀는 아름다운 여인이다', '사각형은 네모꼴이다', '우리 회사 사장님
은 
우리 회사 최고 경영자이다' 등과 같은 정의는 순환적 정의로서 올바른 정의가 되지 
못합니다.
  정의되어야 할 명사가 정의하는 말에 나타나면 그러한 정의는 순환적 정의가 되어 
정의하고자 하는 명사의 뜻을 전혀 명확하게 밝혀주지 못합니다. 
  순환적 정의는 결국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꼴이 되어 동의어반복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닙니다. 어떤 명사를 올바르게 정의내리기 위해서는 그 명사와 뜻이 같은 
다른 명사를 사용하여 의미를 명확하게 규명하여야 합니다. 이와 같은 정의를 
명시적 정의(explicit definition)라고 합니다.
  3) 정의는 너무 넓은 뜻을 부여해서도 안 되고 또 너무 좁은 뜻을 부여해서도 안 
됩니다. 예컨대 "인간은 생물이다"는 너무 넓은 의미의 정의이고 "인간은 슬퍼하는 
동물이다"는 너무 좁은 의미의 정의입니다. 올바른 정의의 범위가 정의하려는 
명사의 외연과 일치하여야 합니다. 예컨대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 또는 "인간은 
합리적으로 사고하는 동물이다"와 같은 정의는 인간에 관한 올바른 정의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4) 애매모호한 말이나 비유적인 말은 정의에 적절하지 못합니다.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다", "모든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와 같은 명제들은 표현이 애매하거나 
비유적이므로 이 명제들에서는 정의되는 명사가 옳게 정의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표현들이 문학적 가치를 가질지 몰라도 논리적으로는 적절하지 
못합니다.
  5) 긍정적으로 정의할 수 있는 경우에 부정적으로 정의하면 올바른 정의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학생은 노동자도 아니고 목사도 아니고 의사나 간호사도 아니며 군인도 아니고 
선생도 아니다."

  정의란 정의하려는 명사의 뜻을 명확히 하는 것이지만, 위에 예에서 보듯이 
정의되어야 할 명사의 뜻이 아닌 것만 나열해서 '학생'을 부정적으로 정의하고자 
한다면 그러한 노력은 헛된 것으로 끝나버립니다.

  그러나 어떤 명사가 본질적으로 부정적 의미를 가질 경우에는 부정적 정의가 
적절합니다.

  "홀아비는 아내와 이별하여 홀로 사는 남자이다."
  "과부는 남편이 죽어서 홀로 사는 여자이다."

  위의 예들은 부정적 정의가 적절한 경우를 보여 줍니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본질적 정의를 내리기 위해서 필요한 다섯 가지 규칙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들 다섯 가지 규칙을 재대로 지키면 본질적 정의를 올바르게 
내릴 수 있습니다.
  물론 본질적 정의가 논리적으로 가장 근본적인 정의이지만 본질적 정의를 내릴 수 
없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경우에 따라서 부차적인 정의를 내릴 때가 있습니다. 
부차적 정의에 해당하는 것들로는 유명적 정의, 발생적 정의, 기술적 정의, 대표적 
정의 등이 있습니다. 앞으로 이들 각각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합시다.

  *유명적 정의:어떤 명사를 단지 재해석할 경우 그러한 재해석은 오로지 이름만을 
바꾸어 정의내리는 것, 즉 유명한 정의(nominal definition)라고 합니다.

  "대통령 중심제 국가에서 대통령은 그 국가의 통치권자이다."
  "주식회사는 주주들에 의해서 성립되는 회사이다."

  어떤 명사를 이해하기 쉬운 다른 명사로 대치해 내리는 정의가 바로 유명적 
정의입니다. 위에 예에서 대통령에 대한 정의나 주식회사에 대한 정의는 모두 
대통령과 주식회사를 재해석한 것의 지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유명적 정의는 부차적 
정의로서 순환적 정의와 거의 동일합니다.

  *발생적 정의:정의되어야 할 명사의 발생이나 성립조건 또는 과정을 열거함으로써 
내리는 정의가 발생적 정의입니다.

  "이성간의 사랑이란 남자와 여자가 사귐과 이해 및 관심, 배려, 존중을 통해서 
생기는 감정이다."
  "눈물은 극도의 고통이나 슬픔 또는 기쁨과 같은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나는 
생리학적 분비물이다."

  위의 예에서 사랑이나 눈물의 정의는 발생이나 성립조건 또는 과정을 근거로 하여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의는 발생적 정의(genetic definition)입니다.

  *기술적 정의:발생적 정의가 불가능하며 종차도 없는 명사가 있을 때 우리는 그 
명사가 가리키는 대상의 성격만을 있는 그대로 나열하여 기술합니다. 이러한 정의를 
기술적 정의(descriptive definition)라고 합니다.

  "진실이는 키가 작고 얼굴이 둥굴납작하며 코에 살이 적고 눈이 똥그란 
처녀이다."
  "영수네 개 메리는 털북숭이이며, 다리가 짧고 통통하게 살이 찐 멍청이 같은 
개다."

  이상의 예들은 기술적 정의에 속합니다.

  *대표적 정의:우리는 스스로의 체험을 통하여 알 수 있는 단순한 의식의 사실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체험할 수 있는 경우나 체험한 사물을 제시하여 정의 내릴 
수 있는 명사들이 있습니다.

  "나는 성희와 다년간 사귀면서도 사랑이 무엇인지 잘 몰랐어. 그러나 이번 여름 
동해안에 우리 식구와 성희네 식구가 놀러갔을 때 성희와 나 사이에서 새롭게 싹튼 
느낌이 참다운 사랑이라는 것을 체험했어. 내가 아플 때 내가 보인 관심 등 모든 
것이 합쳐서 맑은 사랑의 느낌을 체험하게 했어."

  사랑뿐만 아니라 기쁨, 슬픔, 고통, 쾌락, 향기, 색깔, 맛 등을 우리는 체험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기쁨은 첫 아들을 얻었을 때의 감정이다", "슬픔은 
대학입시에 떨어졌을 때의 느낌이다", "빨간색은 장미꽃의 색깔이다", "아픔은 발을 
삐었을 때의 느낌이다" 등은 대표적 정의(definition by type)에 속합니다.

  도움말:일반적으로 정의라고 하면 본질적 정의를 말합니다. 그러나 본질적 정의가 
불가능하거나 부적절한 경우 부차적 정의를 내립니다. 부차적 정의로는 유명적 정의, 
발생적 정의, 기술적 정의, 대표적 정의가 있습니다.

  3) 구분과 분류

  지금가지 우리는 어떤 명사의 뜻을 정확히 규정하기 위한 내포적 정의를 
살펴보았습니다. 앞에서 살핀 것처럼 어떤 명사의 내포(특징이나 성질)를 규정하여 
그 명사의 뜻을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 내포적 정의입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명사의 외연(범위)을 한정하여 그 명사를 다른 명사들로부터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바로 외연적 정의입니다. 외연적 정의는 구분(division)과 
분류(classification) 두 가지로 나뉘어집니다.

  *구분:유를 종으로 분할하는 것이 구분입니다. 올바른 구분에 의해서 어떤 명사의 
의미가 명확해 집니다.

  예) 인류는 황인종, 흑인종, 백인종, 홍인종으로 구분된다.

  유를 종으로 분할한다는 것은 명사의 외연(범위)을 분해하는 것을 뜻합니다. 위의 
예에서 '인류'는 유개념이고 '황인종, 흑인종,...'은 종개념입니다.
  그러나 올바르게 구분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사항에 항상 주의하여 
합니다. 그렇지 못할 경우 옳지 못한 구분을 행하게 됩니다.
  
  1) 구분할 때 오직 하나의 구분기준에 의하여 구분하여야 합니다. 예컨대  
"인류는 백인, 흑인, 미개인, 원시인, 문명인이다"와 같은 정의는 두 가지 구분기준에 
의존하기 때문에 옳지 못한 정의입니다. 피부색깔이거나 아니면 문화수준 두 가지 
중 하나의 기준을 택하여 인류를 정의하여야 올바른 정의가 가능합니다.
  2) 종개념들은 전분 제시되어야 합니다. "학생은 국민학생과 중학생이다"에서  
국민학생과 중학생 두 가지 종개념만 제시되고 고등학생, 대학생, 대학원생은 
열거되지 못하였습니다. 어떤 명사(유개념)를 명확히 규정하기 위해서는 종개념들이 
남김  없이 열거되어야 바른 정의가 가능합니다.
  3) 구분의 기준은 가능한 한 종개념들의 본질에 의존하여야  합니다. "인류는 
황인종, 흑인종, 백인종, 홍인종이다"의 명제에서 유개념(인류라는  명사)은 인간의 
본질을 지닌  황인종, 흑인종...등은 구분의 결과 생기는 부분들이기 때문입니다.

  도움말 1:외연적 정의에 있어서 유개념을 피구분체(divisible totality)라고 하고  
종개념들을 구분지(members of division)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인류는  황인종, 
흑인종, 백인종, 홍인종이다"에서 유개념 인류는 구분될 전체이고 황인종, 
흑인종...등은 구분의 결과  생기는 구분의 부분들이기 때문입니다. 

  도움말 2:구분지의 수에  따라서 구분은 이분법(dichotomy), 삼분법(trichotomy),  
다분법(polychotomy)으로 나뉘어집니다.

  예) 인간은 정신과 육체로 되어 있는 존재이다(이분법).

  인간의 정신은 예술, 종교, 철학의 과정을 통하여 완성된다(삼분법).

  원소는 수소, 질소, 탄소, 인, 납, 구리, 철...등이다(다분법).

  *분류:분류는 구분과 정반대로 종개념들을  유개념으로 묶어 나가는 방법입니다. 
자연적 분류와 인위적 분류는 분류의 대표적 예입니다. 다음의 예들을 봅시다.

  예) 생명을 가진 존재자들 가운데 감각을 가지고 운하는 것은 동물이고, 
영양섭취하며 번식만 하는 것은 식물이다(자연적 분류).

  도서관에 있는 책들 중에서 플라톤이나 칸트, 마르크스나 뉴턴  등의 저서는 
서양서로 그리고 공자, 맹자, 순자, 퇴계, 율곡 등의 저서는 동양서로 분류된다. 
그리고 서양서는 저자명을 알파벳 순서로 분류하며 동양서는 가나다 순서로 
분류한다(인위적 분류).

  위의 예를 보면, 생물의 외연을 일정한  표준, 곧 동물과 식물에 의해서 
나누었으며  또한 책의 외연도 일정한 표준, 곧 동양서와 서양서 등에 의해서 
나누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생물'이나 '책'의 외연은 완전한 조직과 체계를 
갖춘 것으로 정돈됩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내포적 정의와 외연적 정의는 어떤 명사의 뜻을 명확하게 
규정하는 논리적 작업에 속합니다. 명사의 정의가 올바르게 내려져야 판단도 올바를 
수 있고 따라서 추론도 정당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런들 어떠리, 저런들 어떠리"라던가 "대강 대강 해치우는 것이  
장땡이다"등의 사고방식은 버리고 논리적이며 합리적인 생각을 철저히 익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합리적이며 논리적인 생각이  우리들의 사고와 행동에 
질서와  체계를 가져다주며, 나아가서 가치있는 미래를 예견할 수 있는 힘을 가져다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들

  1. 단일명사와 일반 명사의 예를 들고 차이점을 지적해 봅시다.

  2. 일반명사와 집합명사는 서로 어떻게 다릅니다?

  3. 구체명사와 추상명사의 예를 둘씩 들어봅시다.
 
  4. 긍정명사와 부정명사의 예를 들고 차이점을 말해 봅시다.

  5. 절대명사와 상대명사의 예를 들어봅시다.

  6. 부모와 자식, 선생과 제자 등에서 상대명사와 상관명사에 해당하는 명사들을  
지적하여 봅시다.

  7. 외연은 어떤 명사가 지시하는 대상의 범위 전체를 말합니다. 짐승과 꽃의 
외연을  말하여 봅시다.

  8. 항구와 한국의 항구가운데 어떤 것의 외연이 더 넓을까요?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9. 명사의 내포란 어떤 명사가  지시하는 대상의 성질(본질)을 전부  합한 것을 
말합니다. 
내포가 외연과 다른 점을 말하여 봅시다.

  10. 약정적 내포, 주관적 내포, 객관적 내포들은 어떤 것들입니까? 일반적으로 
논리학에서 우리들이 내포로 택하는 것은 셋 중에서 어떤 것이고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11. 약정적 내포의 예를 본문에서 찾아봅시다.

  12. '인류전체는 이성적 동물이다"에서 인간의 내포와 외연을 가려내 봅시다.

  13. 외연과 내포가 반비례 관계에 있다는 말은 무엇을 뜻합니까?
 
  14. 한정과 개괄의 예를 각각 들어봅시다.

  15. 구분과 분류는 외연적 정의에 속합니다. 각각의 예를 들어봅시다.

  16. 본질적 정의와 부차적 정의의 차이는 어떤 것입니까?

  17.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에서 유개념, 종개념 그리고 종차를 찾아내시오.

  18. 본질적 정의를 옳게 내리기 위해서 지켜야 할 다섯 가지 규칙을 본문에서 
찾아봅시다.

  19. 이분법, 삼분법, 다분법은 구분과 분류 중 어떤 것에  속합니까? 각각의 예를 
들어봅시다.

    넷. 사람은 누구나 오류를 범한다.

    1. 오류란 무엇인가?

  우리들은 앞에서 부당한 추론과 타당한 추론의 예들을 살펴보았고, 왜 추론의 
타당성과 부당성이 발생하는 지도 알아보았습니다.
  부당한 추론은 오류를 범합니다. 오류란 간단히 말해서 잘못된 생각입니다. 
잘못된 생각은 옳지 못한 논리적 과정을 포함합니다. 만일 우리가 부당한 추론에서 
올바르지 못한 논리적 과정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미심쩍어 하면서도 그것을 
그대로 믿고 따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사고의 혼란에 휩싸이게 되고 
행동의 기준을 상실하게 됩니다. 다음의 예를 살펴봅시다.

  봉이 김선달이 먼 여행길을 떠났습니다. 여행길에 지치면 낯선 주막에 들러 
술타령도 하고 바쁜 길이 아니니 하루밤 잠도 청하였습니다. 물론 주막집 
여인네에게 꾀보자기를 풀어놓아 주모를 한껏 즐겁게 해놓은 대가로 공술과 공밥을 
먹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몇 년간 만나지 못해 소식이 끊긴 친구가 살고있는 
마을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오랜만에 친구와 회포도 풀 겸해서 일부러 친구가 사는 
집을 찾아갔습니다. 몇 년 전에 왔을 때는 제법 산뜻하던 초가집이 어느덧 헐고 
초라한 몰골이었습니다. 친구를 만나 손을 덥썩 잡았지만 친구의 얼굴은 수척하였고, 
옷차림새도 꾀죄죄했습니다. 친구의 부인 모습도 매우 남루했습니다. 친구는 
김선달에게 방에 들어가자고 하면서 겸연쩍어 하는 얼굴이었습니다.
  김선달은 짧은 시간 동안에 친구가 중병을 앓았다는 것, 그래서 가산을 탕진하고 
이제 겨우 회복중이라는 사실을 모두 듣고 갑자기 꾀를 내었습니다.
  "여보게, 이 마을에서 마음씨 고약하고 제일 부자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글세, 알부자가 몇 사람 있긴 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돈 많고 마음씨 
고약하기로는 항이리 장사 방서방일걸세."
  "방서방이라? 됐어."
  "자네 갑자기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인가? 마음씨 고약하고 돈 많은 사람을 
알아서 무엇에다 쓰려고 그러나?"
  "내게 다 생각이 있다네. 자, 이 개나리 봇짐은 여기에 놓고 잠깐 다녀오겠네. 
오늘밤은 자네와 함께 지내겠네. 저녁에 고기 안주에 찹쌀 막걸리로 회포나 
풀어보세. 아주머니보고 고기 삶을 물이나 끓이시라고 말해주게나."
  봉이 김선달은 이렇게 말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한두 차례 물어 항아리 장사 
방서방을 찾았습니다. 항아리 가게가 제법 컸습니다. 가게 한쪽 구석에는 값나가게 
생긴 자기그릇도 꽤 쌓여 있었습니다. 가게 뒷쪽으로는 넓은 터에 크고 작은 
항아리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방서방은 비스듬히 앉아 곰방대를 빨면서 
가게로 들어서는 봉이 김선달에게 힐끗 눈길을 주는가 하더니 반쪽 조는 눈을 하고 
땅바닥을 바라보았습니다. 김선달은 속으로 뇌까렸습니다. "옳지. 이놈, 오늘 너 
임자 만났다. 네가 그렇게 마음 고약하고 돈 많은 놈이라면 내가 상대해주마."
  김선달은 기침을 두어번 하고 말문을 열었다. 
  "주인장, 최고급품으로 작은 항아리 한 개만 주시지요."
  이 말에 방서방은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을 하고 긴 여행으로 남루해진 김선달의 
몰골을 연신 바라보면서 입을 떼었습니다.
  "우리 가게는 최상품만 취급하는 것을 아직 모르고 있군. 작은놈이라도 제법 
비쌉니다."
  "꼭 필요해서 그러니 얼른 최상품으로 작은 놈 하나 주시지요."
  방서방은 가게 뒷켠으로 가서 불거진 배를 뒤룩거리면서 단지보다 조금 
큰항아리를 한 개 가지고 왔습니다.
  "이 항아리는 원래 세 냥짜리지만 낯선 객이니 두 냥만 내십시오."
  김선달은 속에서는 심술이 났지만 속으로 뇌까리면서 두 냥을 건네주었습니다.
  '돼지같은 놈. 네 속을 내가 다 안다. 한 냥도 안 되는 것을 가지고 욕심을 
채우려고 세 냥이니 두 냥이니 하는 것을 내가 모를 줄 아느냐?'
  봉이 김선달은 방서방이 욕심꾸러기이고 돈이 많지만 게슴츠레한 눈빛을 보아 
영리하지 못하다는 것을 금방 꿰뚫어 보았습니다. 김선달은 항아리를 들고 얼마쯤 
가다 느티나무 그날에 앉아 곰방대를 빨았습니다.
  "이 더운 날씨에 항아리야, 너도 힘들고 나도 힘들구나. 하지만 친구와 회포를 
풀려니 어쩔 수 없구나. 항아리야, 제발 네 구실을 톡톡히 좀 해주렴."
  얼마 후 김선달은 항아리를 들고 다시 방서방네 가게로 왔습니다.
  "방서방, 내 생각이 잘못되어 되 왔소이다. 내 말을 잘 들어보십시오. 아까 내가 
두 냥을 방서방에게 드렸소. 그렇지요?"
  "아무렴요."
  "이 항아리는 두 냥짜리입니다. 그렇지요?"
  "아무렴요."
  "그렇다면 아까 내가 드린 두 냥이 있고 이제 두 냥짜리 이 항아리를 돌려 드리면 
모두 합해서 넉 냥이요. 이 항아리도 함께 드릴 테니 넉 냥짜리 항아리를 주셨으면 
합니다."
  "손님 말이 맞기는 맞는데 뭔가 이상합니다."
  "이상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자 얼른 넉 냥짜리 항아리를 빨리 주시지요."
  봉이 김선달은 이렇게 네 번을 반복하여 방서방으로부터 열여섯 냥짜리 항아리를 
산 다음에 좀 떨어져 있는 푸줏간에 가서 항아리를 같기고 고기와 술을 잔뜩 
샀습니다. 물론 친구와 밤새는 줄 모르고 회포를 푼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위의 예에서 김선달은 친구를 위한다는 마음을 가지긴 했지만, 옹기장사 
방서방에게는 그를 속이기 위해서 고의로 오류를 사용한 것입니다. 사실 이와 같은 
오류는 궤변입니다.
  고대 희랍의 소피스트들이 사용한 오류추론 역시 궤변(sophism)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런가 하면 사유의 혼란이나 부정확성으로 인하여 범하는 오류도 있습니다.

  1) 새는 난다.
  박쥐는 난다.
  그러므로 박쥐는 새이다.
  2) 새는 난다.
  타조는 날지 못한다.
  그러므로 타조는 새가 아니다.

  위의 오류추론들은 정확치 못한 생각으로 인하여 성립된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감정의 동요로 인하여 생기는 오류추론도 있습니다. 남녀 사이에 
또는 친구간에 아니면 형제간에 또는 서로 이익이 반대되는 사람들 사이에서 감정이 
복받치면 흔히 오류를 범하기 쉽습니다.

  1) 나는 여자를 싫어한다.
  너는 여자이다.
  그러므로 나는 너를 싫어한다.
  2) 이웃 마을은 우리 마음과 오랜 세월 원수지간이다.
  영순이는 이웃 마을이 처녀이다.
  그러므로 영순이는 우리 마을에 사는 나의 원수이다.

  이상의 오류추론들은 감정의 동요로 인하여 성립하는 것들이며 여기에 있어서는 
오류는 착오라고 일컬어집니다. 이와 같은 오류는 착오로 불리어지는 이외에 또는 
배리(paralogism)라고도 일컬어집니다.
  그러니깐 오류에는 크게 말해서 궤변과 배리의 두 종류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궤변은 추론하는 당사자가 상대방을 기만할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범하는 오류인 
반면에 배리는 추론하는 당사자가 생각의 혼란이나 감정의 동요로 인하여 스스로 
저지르는 오류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배리나 궤변 모두 부당한 추론을 
마치 타당한 추론인양 믿게 함으로써 우리들의 사고를 흐리게 하고 나아가서 삶의 
질서와 체계를 어지럽힙니다.
  오류를 제거하기 위해서 우선 우리는 정확한 추리방법을 철저히 익혀야 합니다. 
우선 우리는 정확한 추리방법을 철저히 익혀야 합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오류를 
제거하기 위하여 어떤 논리적 규칙을 소홀히 하였기에 오류를 범하는 부당한 추리를 
행하였는지 곰곰히 살피지 않으면 안됩니다. 

  *도움말:논리학에서 오류라고 할 때 이 말은 오류추리 또는 오류추론을 말합니다.

    2. 오류의 종류

  앞에서 우리는 추론을 연역추론과 귀납추론의 두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추론의 
절차 내지 과정인 추리로 역시 추론과 마찬가지로 연역추리와 귀납추리로 
구분됩니다.
  당연히 오류도 연역추리에 있어서의 오류와 귀납추리에 있어서의 오류로 
나뉘어집니다. 연역추리에 있어서의 오류는 다시 형식적 오류와 비형식적 오류의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형식적 오류는 논리적 오류라고도 하며 타당한 추리규칙이나 형식을 어길 경우 
생기게 됩니다. 다음과 같은 추리들은 형식적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1) 모든 여자는 인간이다.
  모든 남자는 인간이다.
  그러므로 모든 남자는 여자이다.
  2) 모든 소는 네 발을 가졌다.
  모든 소는 동물이다.
  그러므로 모든 동물은 네 발을 가졌다.

  연역추리의 형식적 오류를 자세히 알기 위해서는 삼단논법에 관한 기본지식이 
필수적입니다.
  연역추리에 있어서의 비형식적 오류는 논리규칙이나 형식과는 상관없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형식적 오류를 방지하기 위해 우리가 지켜야 할 규칙은 
형식추리에 있어서처럼 엄격한 형식과 다르기 때문에 그것은 소극적인 규칙들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연역추리의 형식적 오류를 분류한 최초의 철학자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여러 철학자들이 더 많은 형식적 오류들을 찾아내었습니다. 
그들은 동시에 여러 가지 비형식적 오류들을 발견하고 그러한 오류들을 방지하기 
위한 소극적 규칙들도 찾아내어 비형식적 오류들을 적절하게 분류하였습니다.

  연역추리의 비형식적 오류들의 예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죄를 범한 모든 사람은 감옥에 갇혀야 한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감옥에 갇혀야 한다.
  2) 전나무는 훌륭한 건축재료이다.
  이 성냥갑의 재료는 전나무이다.
  그러므로 이 성냥갑은 훌륭한 건축재료이다.
  3) 3과 6은 각각 홀수와 짝수이다.
  3과 9의 합은 9이다.
  그러므로 9 는 홀수이면서 동시에 짝수이다.

  이상의 오류들은 비형식적 오류의 예입니다. 비형식적 오류는 형식적 오류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엄격한 규칙이나 형식을 어긴 것은 아닐지라도 논리적 생각이 
철저하지 못하기 때문에 범하게 됩니다.
  비형식적 오류는 다시 언어로 인한 오류와 자료로 인한 오류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귀납추리의 오류에 관해서는 2권의 '귀납추리란 어떤 것인가'의 편에서 상세히 
다루었습니다. 귀납추리에 있어서의 오류는 영국의 경험의 경험론 철학자 베이컨이 
처음으로 다루었습니다. 베이컨 이후 영국의 경험론 철학자들인 로크나 밀 등이 
역시 귀납추리에 있어서의 오류를 다루었음을 배웠습니다.

  *도움말:일반적으로 비형식적 오류를 언어로 인한 오류와 자료로 인한 오류 두 
가지로 구분합니다. 그러나 자료로 인한 오류라는 표현이 알맞지 않다고 보아 그 
대신 부적합성으로 인한 오류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류에 관한 이론을 체계적으로 표시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오류
  1. 연역추리의 오류
  (1) 형식적 오류
  (2) 비형식적 오류
  #1. 언어로 인한 오류
  #2. 자료로 인한 오류
  2. 귀납추리의 오류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들

  1. 부당한 추론의 결과는 어떤 것들을 초래하는지 이야기하여 봅시다.

  2. 봉이 김선달과 항아리 장사 이야기에서 김선달의 추론 중 어떤 것이 오류인지 
가려내십시오.

  3. 궤변과 배리(또는 착오)의 차이를 말하여 봅시다.

  4. 오류의 종류를 크게 나누고 각각의 구체저긴 예를 들어봅시다.

  5. 언어로 인하여 생기는 오류는 어떤 것입니까?

  6. 자료로 인하여 생기는 오류는 어떤 것입니까?

    다섯. 연역추리의 형식적 오류

  앞에서 건전한 논리적 추론에 있어서는 결론이 참이면 추론도 참이고 따라서 
타당하다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논리적 추리가 규칙이나 형식을 제대로 지키면 
건전한 추리가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연역추리의 형식적 오류에 관해서는 이 논리 
시리즈의 첫째 권에 나오는 '연역추리는 어떤 것일까?'의 부분에서 낱낱이 
다루었습니다. 이곳에서는 바로 다음에 취급할 비형식적 오류와 단지 비교하는 
입장에서 형식적 오류가 어떤 것인지 정리하는 정도로 그치기로 하겠습니다.

  *부당하게 위치를 바꿀 때 생기는 오류:"모든 인간은 모든 이성적 존재이다."라는 
명제의 위치를 바꾸어서 "모든 이성적 존재는 모든 인간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동물이다."라는 명제의 위치를 바꾸어 "모든 동물은 
인간이다."라고 하거나, "모든 코스모스는 꽃이다."라는 명제의 위치를 바꾸어서 
"모든 꽃은 코스모스이다."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오류를 범합니다.

  종수와 성희는 고등학교 2 학년에 다니는 단짝입니다. 두 사람은 항상 남의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특별한 취미를 가지고 있으므로 틈만 나면 상대방의 헛점을 
노립니다. 그렇지만 종수와 성희, 둘이 만나면 서로지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막상막하일 수밖에 없습니다.

  "성희야, 어제 강남에 갔는데 일요일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더라.
  그런데 말이야, 남자는 많은데 남자다운 남자를 찾아보기 힘들었어."
  "종수 너 또 나를 궁지에 몰아넣으려고 무슨 묘수가 없나 노리고 있구나. 나는 
어제 명동에 갔었어. 명동에도 사람들이 들끓었어. 그런데 여자는 많은데 여자가 
없더라."
  "성희야, 모든 남자는 약간의 인간이지? 모든 남자가 모든 인간은 아니니까 
말이야."
  "아무렴, 네 말이 맞아. 그렇지만 '모든 남자는 인간이다.'라고 해놓고 '남자'와 
'인간'의 위치는 바꿔서 '그러니까 모든 인간은 남자이다.'라고 할 수 있는데 뭔가 
잘못된 것 아닐까?"
  "네가 말한 것은 '모든 여자는 인간이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여자이다'라고 
하는 것과 똑같아. 분명히 틀리긴 틀렸는데 어디가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찾아내려면 
시간이 꽤 걸리겠는데."

  이제 다음의 예를 보면서 어디에서 오류가 생기는지 꼼꼼히 살펴봅시다.

  1) 모든 인간은 두 발로 걸어 다니는 동물이다.
  모든 두발로 걸어 다니는 동물은 인간이다.
  2) 모든 여대생은 여성이다.
  모든 여성은 여대생이다.

  이러한 오류는 "모든..."과 "일부의..."을 혼동할 때 생깁니다. 예컨대 "모든 
장미는 식물이다."의 명제는 "모든 장미는 일부의 식물이다."라는 명제로 정확히 
표현되어야만 "모든 식물은 장미이다."라고 추리하지 않고 "일부의 식물은 
장미이다."라고 옳게 추리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경우의 오류를 부당환위의 
오류(fallacy of improper conversion)라고도 부릅니다.

  *부당하게 범위를 사용하여 생기는 오류:전제에서 "약간의..."로 표현된 
명사(term)를 결론에서 "모든..."로 표현할 경우 그러한 추리는 오류를 범합니다.

  1) 모든 인간은 동물이다.
  모든 쥐는 인간이 아니다.
  그러므로 모든 쥐는 동물이 아니다(오류).

  이 예에서 "모든 인간은 동물이다."를 보다 정확히 말하면 "모든 인간은 약간의 
동물이다."입니다. 그런데 전제에서 표현된 "약간의"가 결론에서 "모든"으로 
표현되면 그러한 추리는 오류를 범합니다. 위 예에  있어서의 결론을 정확히 
표현하면 "그러므로 모든 쥐는 모든 동물이 아니다."로 되므로 이러한 추리는 
오류를 범합니다. 비슷한 예를 몇 가지 더 살펴봅시다.

  1) 모든 장미는 식물이다.
  모든 잔디는 장미가 아니다.
  그러므로 모든 잔디는 식물이 아니다.
  2) 모든 남성은 인간이다.
  모든 여성은 남성이 아니다.
  그러므로 모든 여성은 인간이 아니다.

  *도움말:대전제와 소전제에 동시에 등장하는 용어를 중명사라고 부르고 그 이외에 
대전제에 있는 명사를 대명사 그리고 소전제에 있는 명사를 소명사라고 부릅니다. 
다음을 봅시다.

  모든 남성은 인간이다(대전제).
  모든 여성은 남성이 아니다(소전제).
  그러므로 모든 여성은 인간이 아니다.(결론).

  위의 예에서 "남성"은 중명사이고 인간은 대명사이며 여성은 소명사입니다.. 
앞에서 든 네 가지 예들에서는 대명사가 전제에서는 "약간의" 범위를 가지지만 
결론에서 "모든"의 범위를 가지므로 이 추리는 부당하게 사용함으로써 생기는 
오류입니다. 이들 네가지 예의 오류는 대명사부당주연의 오류(fallacy of illicit 
process of the major term)라고도 부릅니다.
  그런가 하면 전제에서 "약간의" 범위로 사용된 소명사가 결론에서 "모든"의 
범위로 쓰여질 경우 역시 오류가 생깁니다. 다음의 몇 가지 예를 봅시다.

  1) 모든 개는 꼬리를 가졌다.
  모든 개는 동물이다.
  그러므로 모든 동물은 꼬리를 가졌다.
  2) 모든 장미는 가시돋힌 잎이 있다.
  모든 장미는 식물이다.
  그러므로 모든 식물은 가시돋힌 잎이 있다.

  위의 예들 중에서 한가지만 자세히 살펴보기로 합시다. "모든 장미는 가시 돋힌 
잎이 있다. 모든 장미는 식물이다. 그러므로 모든 식물은 가시돋힌 잎이 있다."에서 
"모든 장미는 식물이다."는 정확히 말해서 "모든 장미는 약간의 식물이다."임에도 
불구하고 결론에서 "모든 식물은 가시돋힌 잎이 있다."고 한다면 오류가 됩니다. 
이러한 오류를 소명사부당주연의 오류(fallacy of illicit process of the minor 
term)라고 합니다.
  명사의 범위를 부당하게 사용함으로 인해서 생기는 오류는 대명사부당주연의 
오류와 소명사부당주연의 오류 두 가지가 있습니다.

  *도움말:추리는 대전제, 소전제, 결론으로 구성된 명제들에 의해서 성립합니다. 
그런데 대전제의 명사를 대명사, 소전제의 명사를 소명사 그리고 대전제와 소전제를 
매개하는 명사를 중명사라고 합니다. 다음의 예를 보면 확실해질 것입니다.

  모든 동물은 생물이다(대전제).
  모든 사람은 동물이다(소전제).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생물이다(결론).

  대전제의 생물은 대명사이고, 소전제의 사람은 소명사이며, 대전제와 소전제에 
동시에 있는 동물은 중명사입니다. 명사에 관한 상세한 설명은 '정언삼단논법'을 
다루는 부분에서 찾아보기 바랍니다.

  *네 개의 명사를 가짐으로 인하여 생기는 오류:정언삼단논법은 오직 세 개의 
명사를 가져야만 건전한 추리가 성립합니다. 만일 정언삼단논법이 네 개의 명사를 
가질 경우 그러한 추리는 반드시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1) 남성은 동물이다.
  여성은 생물이다.
  그러므로 여성은 동물이다.
  2) 모든 인간은 두 발을 가졌다.
  모든 식물은 탄소동화작용을 한다.
  그러므로 모든 식물은 두 발을 가졌다.

  위의 추리는 사실상 추리가 아니며 황당하기까지 합니다. 예컨대 "모든 연필은 
길다. 모든 뱀을 파충류이다. 그러므로 모든 뱀은 파충류이다. 그러므로 모든 뱀은 
길다."에서 우선 어떤 것이 대명사이고 소명사와 중명사가 어떤 것인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정언삼단논법의 추리에는 반드시 세 개의 명사만 필요합니다(대명사, 소명사, 
중명사). 그러나 위의 예들은 각각 모두 네 개의 명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각각의 예에서 전혀 결론이 나올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결론을 억지로 이끌어 
내려고 한다면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추리가 네 개의 명사를 가졌기 때문에 생기는 오류를 일컬어 네 개 명사의 
오류(fallacy of four terms)라고 합니다.

  *중명사부주연의 오류:건전한 추리란 중명사가 대명사와 소명사 사이에서 타당한 
매개역할을 할 때 가능합니다. 다음의 예를 봅시다.

  모든 동물은 생물이다.
  모든 사람은 동물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생물이다.

  위의 예에서 대전제의 "생물"은 대명사이고, "사람"은 소명사이며 "동물"은 
중명사입니다. 타당한 추리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중명사 "동물"이 대명사 "생물"과 
소명사 "사람"을 매개하여야만 합니다. 중명사 "동물"이 매개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전제나 소전제 어느 한 쪽에서 적어도 한번은 
"모든..."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류가 생기게 됩니다. 다음은 
오류의 예들입니다.

  1) 김양은 생물이다.
  고양이는 생물이다.
  그러므로 고양이는 김양이다.
  2) 모든 장미는 식물이다.
  모든 곰팡이는 식물이다.
  그러므로 모든 곰팡이는 장미다.

  이처럼 중명사가 대전제나 소전제에서 한번도 "모든..."의 범위를 가지지 않고 
사용될 때 생기는 오류는 중명사부주연의 오류(fallacy of undistributed middle 
term)라고 합니다.

  *두 전제가 모두 부정명제일 때 생기는 오류:정언삼단논법에서는 대전제와 소전제 
가운데서 적어도 하나는 긍정이어야만 건전한 추리가 성립합니다. 두 전제가 모두 
부정일 경우 아무런 결론도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결론을 이끌어낸다면 
오류를 범합니다.

  모든 금속은 생물이 아니다.
  모든 구리는 생물이 아니다.
  그러므로 모든 구리는 금속이다.

  *도움말:이 예에서 "모든 구리는 약간의 금속이다."라는 결론의 명제 하나만 보면 
타당한 것이지만 전체 추리과정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추리는 오류를 범합니다.

  1) 모든 개는 인간이 아니다.
  모든 새는 인간이 아니다.
  그러므로 모든 새는 개다.
  2) 모든 여자는 바위가 아니다.
  모든 남자는 바위가 아니다.
  그러므로 모든 남자는 여자이다.

  대전제와 소전제가 모두 부정일 경우 중명사는 매개역할을 상실합니다. 따라서 
논리적으로 결론을 이끌어낼 수 없으므로 추리는 오류를 범합니다. 이러한 경우의 
오류를 두 부정 전제의 오류(fallacy of two negative premises)라고 부릅니다.

  *결론을 부당하게 긍정하는 오류:대전제나 소전제 가운데서 어떤 한 전제가 
부정이면 결론은 항상 부정이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론을 긍정으로 하면 
오류가 생깁니다.

  1) 모든 인간은 식물이 아니다.
  모든 인간은 동물이다.
  그러므로 약간의 동물은 식물이다.
  2) 모든 돼지는 동물이다.
  모든 돼지는 풀이 아니다.
  그러므로 약간의 풀은 동물이다.

  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대전제나 소전제 가운데서 어떤 한 전제가 부정명제일 
경우 중명사는 대명사 아니면 소명사를 배제하게 됩니다. 따라서 대명사와 소명사가 
일치하지 않게 되어 결국 부정명제의 결론이 당연히 나오게 됩니다. 이러한 법칙을 
무시하고 긍정명제의 결론을 이끌어 내면 오류를 범합니다. 두 전제 중 한 전제가 
부정일 경우 타당한 추리의 예는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인간은 식물이 아니다.
  모든 인간은 생물이다.
  모든 그러므로 약간의 생물은 식물이 아니다.

  두 전제 중 하나가 부정일 때 결론을 긍정해서 범하게되는 오류를 부당긍정의 
오류(fallacy of illicit affirmation)라고 합니다.

  *도움말:부당긍정의 오류는 한 눈에 드러나는 오류이므로 우리들이 자주 범하는 
종류의 오류는 아닙니다.

  *부당하게 부정함으로 인하여 생기는 오류:대전제와 소전제가 모두 긍정명제일 
경우 결론이 만일 부정명지이면 그러한 추리는 오류를 범합니다. 대전제와 소전제가 
모두 긍정이면 대명사와 소명사 양자가 중명사에 일치하게 됩니다. 또 거꾸로 
똑같은 중명사에 일치하는 대명사와 소명사 역시 일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대전제와 소전제가 모두 긍정이면 결론도 긍정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결론이 부정일 
때 그러한 추리는 당연히 오류를 범합니다.

  1) 모든 세포는 살아 있다.
  모든 신경세포는 살아 있다.
  그러므로 모든 신경세포는 세포가 아니다.
  2) 모든 파충류는 동물이다.
  모든 거북이는 동물이다.
  그러므로 모든 거북이는 파충류가 아니다.

  이들 예에서처럼 대전제와 소전제가 긍정명제임에도 불구하고 결론을 부정명제로 
만들 때 생기는 오류를 일컬어 부당부정의 오류(fallacy of illicit negation)라고 
부릅니다.

  *두 전제가 모두 "약간의--"를 포함하는 특칭명제이면 어떤 결론도 도출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론을 만든다면 오류를 범합니다.

  이러한 오류에 관한 간단한 예를 살펴봅시다.

  1) 약간의 남자는 미남이다.
  약간의 청년은 미남이다.
  그러므로 약간의 청년은 약간의 남자이다.
  2) 약간의 여자는 미녀가 아니다.
  약간의 여대생은 미녀이다.
  그러므로 약간의 여대생은 약간의 여자가 아니다.

  대전제와 소전제가 모두 "약간의 --"로 된 명제(특칭명제)일 경우의 추리가 
범하는 오류를 두 특칭전제의 오류(fallacy of two particular premises)라고 
부릅니다.

  *두 전제 중 하나가 "약간의 --" 된 명제임에도 불구하고 결론이 "모든 --"로 
된 명제가 될 경우의 오류:

  두 전제 중 하나가 "약간의 --"이면 다른 하는 "모든 --"이 됩니다. 이 경우 
결론을 "모든 --"으로 하면 오류를 범합니다.
  그러나 이 때 우선 두 전제가 모두 긍정일 경우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약간의 여자는 미녀이다.
  모든 여대생은 여자이다.
  그러므로 모든 여대생은 미녀이다.

  다음으로 한 전제는 긍정이고 다른 한 전제는 부정인 경우를 예로 들어 
생각해봅시다.

  약간의 남자는 군인이다.
  모든 노인은 군인이 아니다.
  그러므로 모둔 노인은 남자가 아니다.

  위의 예를 든 것처럼 두 전제 중 하나가 "약간의--"로 된 명제인데 결론을 
"모든--"으로 된 명제로 추리한다면 그러한 추리는 오류를 범합니다. 이러한 
오류를 부당전칭의 오류(fallacy of illicit universal)라고 부릅니다.

  *전건을 부정하여 후건을 부정하는 결론을 이끌어낼 때의 오류:

  비가 오면 땅이 젖는다.
  땅이 젖었다.
  그러므로 비가 왔다.

  위에서 '비가 오면'은 전건이라고 하고 '땅이 젖는다'는 후건이라고 합시다. 어떤 
추리에서 전건을 부정하고 또한 결론에서 후건을 부정할 경우 반드시 오류를 
범하는데 그 예를 살펴봅시다.

  봄이 오면 꽃이 핀다.
  봄이 오지 않았다(전건부정).
  그러므로 꽃이 피지 않았다(후건부정).

  이 추리는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봄이 오지 않아도 피는 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추리는 겉으로 보기에 아무런 오류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종류의 오류를 전건부정의 오류(fallacy 
of denying the antecedent)라고 부릅니다.

  *도움말:"늙으면 몸이 약해진다. 몸이 약해졌다. 그러므로 늙었다."처럼 "--이면 
--이다"의 대전제로 시작해서 이끌어내는 추론의 형식을 일컬어서 
가언삼단논법이라고 합니다.

  *후건을 긍정하고 또한 전건을 긍정할 때 생기는 오류:우선 이러한 오류의 예를 
살펴봅시다.

  운동하면 건강하다.
  건강하다(후건긍정).
  그러므로 운동하였다(전건긍정).

  이 예는 겉으로 보기에 타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만 운동을 했다고 해서 
반드시 건강할 수는 없습니다. 선천적으로 태어날 때부터 강단 있고 튼튼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술과 담배를 멀리하고 시간생활을 철저히 지킴으로써 건강한 
사람도 있습니다. 
  위의 예에서처럼 후건을 긍정하고 이와 아울러 전건을 긍정할 때 범하는 오류를 
후건긍정의 오류(fallacy of affirming the comsequent)라고 부릅니다.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들

  다음의 연역추리에 있어서의 형식적 오류들은 어떤 오류에 속하는지 
지적하십시오.

  1. 모든 인간은 두 발로 걷는 동물이다. 그러므로 모든 두 발로 걷는 동물은 
인간이다.

  2. 모든 군인은 용감한 사람이다.
  모든 용감한 사람은 군인이다.

  3. 모든 인간은 동물이다.
  모든 나비는 인간이 아니다.
  그러므로 모든 나비는 동물이 아니다.

  4. 모든 소는 꼬리를 가졌다.
  모든 소는 동물이다.
  그러므로 모든 동물은 꼬리를 가졌다.

  5. 붕어는 물고기이다.
  참새는 새이다.
  그러므로 참새는 붕어다.

    여섯. 연역추리의 비형식적 오류

  앞에서 우리들은 연역추리에 있어서의 형식적 오류들이 무엇이고 그 예로 어떤 
것들은 들 수 있는지 대강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추리의 일정한 형식이나 규칙을 위반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을 
정확하지 않게 사용했을 때 그리고 전제와 결론 사이에 하등의 논리적 관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심리적인 연관을 핑계삼아 추리할 때 비형식적 오류를 범합니다.
  우선 언어에 의한 오류를 살펴보고 다음으로 자료에 의한 오류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가. 언어에 의한 오류:

  말이나 글은 쓰는 사람과 사용하는 방법에 따라서 애매할 수도 있고, 또, 다양한 
뜻이 있을 경우 정확히 구분되지 않아서 오류가 생기기도 합니다. 여기에서는 
언어에 의해서 생기는 오류의 종류를 크게 여섯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1. 여러 가지 듯을 가진 말의 오류

  대부분의 단어들은 한가지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어떤 단어가 상황에 따라 
가지는 뜻을 명백히 가려서 파악하지 못하고 부정확하게 또는 혼란스럽게 의미를 
이해할 때 범하는 오류가 있습니다.

  60 년대 일입니다. 도시 변두리 작은 교회에 가면 젊은 목사가 목회를 하면서 
젖먹은 힘까지 다하여 커다란 목소리로 그러나 어딘가 어정쩡한 자세로 설교합니다. 
어쩌면 순진하게도 보입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목사의 능수 능란한 설교 태도와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젊은 목사는 한사람의 신자에게라도 확실한 신앙을 불어넣기 위해서 외쳐댑니다.
  "모든 죄인은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들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반드시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작은 교회당 안에 드문드문 남녀노소가 앉아 있습니다. 어떤 이는 경탄스런 
눈빛으로, 어떤 이는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또 어떤 이는 무표정한 모습으로 넓은 
목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목사의 주장을 추리형식으로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죄인은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모든 인간은 죄인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은 믿어야 한다.

  이 추리에서 문제가 되는 단어는 '죄인'입니다. 우리들은 죄인이라는 단어를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합니다. 남의 물건을 훔쳐서 체포된 사람은 범죄를 저지른 
죄인입니다. 그런가 하면 양심을 속이고 남에게 거짓말을 한 사람도 도덕적인 
측면에서 죄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가 로마병정에게 붙잡혀 갈 때 세 번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네델란드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아버지는, 키에르케고르가 어렸을 
때, 자신이 곤경에 처하자 하나님을 저주했습니다. 이 경우 베드로나 키에르케고르의 
아버지는 종교적인 의미의 죄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죄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추리할 때 '죄인'의 뜻을 애매하게 
사용하지 않고 정확한 의미로 사용하여야만 오류를 범하지 않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한 단어의 범위를 혼동할 경우 오류를 범합니다. 예컨대 대전제에서 
사용되는 단어의 범위와 소전제에서 사용되는 단어의 범위가 서로 다른데도 
불구하고 두 범위를 혼동하면 오류가 생깁니다.

  전나무는 훌륭한 건축재료이다.
  이 이쑤시개는 전나무이다.
  그러므로 이 이쑤시개는 훌륭한 건축재료이다.

  우리들이 흔히 "여자는 많은데 여자가 없어" 또는 "남자는 많은데 남자가 
없어"라고 말할 때도 같은 단어의 범위 또는 의미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한 단어의 
범위나 의미를 혼동해서 사용하기 때문에 오류를 범하기 쉽습니다.
  부모님이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자식들에게 야단칠 때 흔히 이렇게 야단칩니다. 
"너는 공부는 열심히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공부가 시원치 않다." "오늘 네가 
받아온 이 성적도 성적이라고 달랑 들고 들어왔니?" 공부나 성적 등의 단어는 여러 
가지 뜻을 가지고 있는데도 두리뭉실하게 섞어서 쓰면 듣는 사람은 대강 뜻을 
이해할 수 있어도 명백한 의미를 파악하기 힘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와 장소를 맞는 단어나 개념을 정확히 사용하는 습관을 길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는 높낮이, 강함과 약함 그리고 멀고 가까움 등에 연관된 개념을 
사용하면서 정확한 기준을 무시할 때 추리의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저 대학생은 영어실력이 모자란다.
  이 중학생은 영어실력이 뛰어나다.
  그러므로 이 중학생은 저 대학생보다 영어실력이 뛰어나다.

  위의 예에서는 '실력이 모자란다'와 '뛰어나다'를 비교할 정확한 기준이 
무시되었기 때문에 엉터리 추리가 되버렸습니다. 두 가지 또는 세 가지 서로 다른 
것을 비교할 경우에는 그것들을 비교할 수 있는 기준이 분명하여야만 추리의 잘못을 
피할 수 있습니다.
  높낮이에 관한 예를 살펴봅시다.

  저 구름은 낮다.
  우리 집은 높다.
  그러니까 우리 집은 저 구름보다 높다.

  그러면 이제 강하고 약함에 관한 기준이 애매하기 때문에 생기는 오류를 하나 더 
살펴보기로 합시다.

  저 청년은 힘이 약하다.
  이 젖먹이는 힘이 강하다.
  그러므로 이 젖먹이는 저 청년보다 힘이 강하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과 같은 종류의 오류를 일컬어 다의어의 오류(fallacy of 
equivocation)라고 합니다.

    2. 애매한 구절의 오류

  문장의 구절이 여러 가지 뜻으로 해석될 수 있어서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 어려운 
경우가 있습니다. 문장의 구절이 애매할수록 그 구절을 대하는 사람은 혼란에 
빠집니다.

  어떤 부인이 자식의 대학입시를 앞두고 소문난 점쟁이를 찾아갔습니다. 한두 시간 
기다리다 겨우 차례가 되어 염소 수염을 한 점쟁이 앞에 앉았습니다. 점쟁이는 째진 
눈을 날카롭게 뜨고 벌써 부인이 왜 왔는지 다 안다는 추로 퉁명스럽게 한마디 
내뱉었습니다.
  "잘못하다간 큰 낭패를 보겠군."
  부인은 이 한마디에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점쟁이를 쳐다보면서 부인은 황급히 
물었습니다.
  "과연 도사님은 듣던 그대로 쪽집게시네요. 지금 제 아들놈이 일류대를 
지원하느냐 아니면 이류대를 지원하느냐 기로에 서있습니다.
  일류대를 가자니 아슬아슬하고 이류대를 가자니 실력이 아깝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부인의 관상과 골상을 보아하니 아들의 일류대 합격은 어렵겠어."
  이 말에 부인은 안절부절 제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마음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쪽집게 도사에게 매달려야겠다는 일념뿐이었습니다.
  "도사님, 제 외아들이예요. 어떻게 얻은 자식이라구요..., 제발 일류대에 갈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방법이 있긴 있지만 부인의 뜻에 달렸지. 내 잘 아는 무당이 있는데 삼일굿은 
족히 치러야 하지. 하든 말든 그것은 부인의 마음에 달렸고..."

  위의 예에서 점쟁이가 한 말 "잘못하다간 큰 낭패를 보겠군"에서 "잘못하다간"과 
"큰 낭패를 보겠군"은 모두 애매한 구절입니다. 잘못하는 것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또 큰 낭패를 보는 일도 수 없이 많습니다.
  사랑을 잘못할 수 있고, 장사를 잘못할 수 있고, 공부를 잘못할 수 있고, 어른 
대접을 잘못할 수 있고...이처럼 무수히 잘못할 수 있는 것들 가운데서 무엇을 
어떻게 잘못할 지에 관한 언급이 없어 애매하게 "잘못하다간"이라는 구절을 
사용한다면, 그러한 추리는 오류를 범합니다. 게다가 "큰 낭패를 보겠군" 역시 
애매하기 짝이 없습니다.
  무엇에서 어떻게 실패한다는 정확한 지적 없이 "큰 낭패를 보겠군"이라는 구절을 
사용할 경우 역시, 그러한 추리는 오류를 범합니다.

  고대 희랍의 아테네에는 델피 신전이 있었습니다. 정치가나 철학자는 문제가 
생기면 델피 신전을 찾아가서 신의 말을 들으려고 했습니다. 델피 신전에는 늙은 
무당이 있어서 찾아 온 사람에게 신의 말(신탁)을 전했습니다.

  어느날 소아시아에 있는 리디아왕국의 크로에수스왕이 델피 신전에 찾아와서 무당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신이시여, 우리 나라와 페르시아가 장차 전쟁을 하면 어떤 결말이 생기겠습니까? 
제발 저에게 미래를 보는 안목을 가지게 해주십시오."
  "그대 크로에수스가 페르시아 왕국과 전쟁을 한다면 결국 강한 왕국이 멸망할 
것이니라."
  크로에수스는 이 신탁을 확신하고 페르시아와 전쟁을 벌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당시 페르시아 왕국만큼 강한 왕국이 없다고 믿었고 따라서 리디아와 페르시아가 
싸우면 신탁에 따라서 강한 왕국인 페르시아가 멸망하리라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쟁의 결과 크로에수스의 리디아 왕국이 패망하고 말았습니다. 

  이 신탁에서"강한 왕국"이란 리디아를 말하는지 아니면 페르시아를 말하는지 
분명치 않습니다. 애매한 구절을 사용할 경우 그러한 추리의 결과 우리는 그릇되게 
판단하고 따라서 혼란된 행동을 마치 참다운 것으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이처럼 
애매한 구절 때문에 생기는 오류를 애매구의 오류(fallacy of amphibody)라고 
합니다.

    3. 결합의 오류

  우리 속담에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우선 
부분에만 집착한다는 것을 뜻하고, 다음으로는 부분을 전체로 착각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비록 부분들은 참다울지라도 부분들이 합해서 된 전체는 참다웁지 못할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부분들이 참이라고 해서 부분들의 결합을 반드시 참이라고 주장할 
때 생기는 오류가 있습니다.

  1) 3과 9 는 홀수이다.
  12 는 3과 9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12 는 홀수이다.
  2) 5와 8은 홀수와 짝수이다.
  13은 5와 8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13은 홀수이면서 짝수이다.

  고대 희랍의 궤변철학자들(소피스트들)도 부분의 성질을 전체의 성질이라고 
주장하는 연쇄식을 제시했습니다. 그들은 한 오라기의 머리카락을 뽑는 것이나 두 
오라기의 머리카락을 뽑는 것이나 머리카락 전부를 뽑는 것이나 똑같지 않다고 
증명할 방도가 없으므로, 즉 한 오라기의 머리카락을 뽑는 것이나 머리카락 전부를 
뽑는 것이나 똑같으므로 한 오라기의 머리카락을 뽑으면 대머리가 된다고 
논증하였습니다.
  소피스트들의 추리가 범하는 오류를 '대머리의 오류'라고도 부릅니다. 그들의 
추리를 형식화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한 오라기의 머리카락을 뽑으면 대머리가 되는가?
  두 오라기의 머리카락을 뽑으면 대머리가 되는가?
  그러면 세 오라기의 머리카락을 뽑으면 대머리가 되는가?

  우리는 무의식중에 부분만 보고 전체를 판단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어떤 가정의 
한 아이가 말썽꾸러기일 때 "네가 개망나니이니 네 형제들도 보나마나 뻔하고 너의 
집 자체가 문제가 있다"라고 판단하기 쉽습니다. 또는 어떤 직장의 성실한 사원 한 
두 사람을 보고 그 직장의 사원 모두를 성실하다고 결론내리기 쉽습니다.
  이렇게 부분을 보고 부분들이 결합된 전체도 부분의 성질과 똑같다고 추리할 때 
범하는 오류는 결합의 오류(fallacy of composition)입니다.

    4. 분할의 오류

  일단 결합의 오류가 어떤 것인지 이해한 사람은 분할의 오류를 쉽사리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분할의 오류는 결합의 오류를 뒤집어 놓은 것입니다.
  불란서의 파리에 가 본 사람은 다 아는 것처럼 말 그대로 아름답습니다. 쎄느강을 
따라서 양옆으로 웅장하고도 우아하게 늘어선 건물과 아무리 걸어도 지루하지 않은 
거리. 그러나 더 아름다운 것은 파리의 여인들입니다. 파리에는 화장품 가게가 
우리나라의 카페보다 더 많습니다.
  옷차림은 물론이요 얼굴 화장도 각자 개성에 맞게 할 줄 아는 것이 파리의 
여인들인 것 같습니다. 언뜻 보기에 파리 여인들의 화장은 진하지도 연하지도 않고 
은은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파리의 여인들이 아름답다고 해서 한 사람 한 사람 개개인의 
여인이 각기 아름답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매부리코가 비정상적으로 불쑥 튀어나온 
여인, 짜리 몽땅하고 뚱뚱한 여인 등 그저 그렇게 생긴 여인도 많습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일류대학의 학생들의 성적이 전반적으로 뛰어나다고 해서 특정한 
학생들 개개인의 성적도 탁월하다고 판단하기는 힘듭니다.

  분할의 오류에 관한 구체적 예를 한 두 가지 살펴봅시다.

  1) 9 는 홀수이다.
  9 는 3과 6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3과 6은 술수이다.
  2) 현대 중공업은 회사이다.
  현대중공업은 사용자와 노동자로 되어있다.
  그러므로 사용자와 노동자 각각은 회사이다.

  이처럼 전체에 관하여 참인 것을 부분에 관해서도 참이라고 추리할 때 범하는 
오류는 분할의 오류(fallacy of division)입니다.

    5. 강조로 인하여 생기는 오류

  사람들이 오늘날처럼 상조오류의 홍수 속에 살았던 시절은 일찍이 없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신문이나 라디오 또는 텔레비젼에 쏟아져 나오는 상업광고는 
대부분 강조의 오류가 가져다주는 선전효과를 노리고 있습니다.

  "이 냉장고야말로 최첨단 공법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바로 당신을 위한 
것입니다."
  "올 여름을 시원하게 해 줄 아이스크림중의 아이스크림을 맛보세요."
  "라면 하면 바로 이 라면을 따라갈 라면이 또 있을까요?"
  "자동차라면 이쯤은 되어야지요. 이 자동차는 가격도 저렴합니다."

  이들 중 하나의 예만을 골라 분석해 보겠습니다. "이 냉장고야말로 최첨단 공법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바로 당신을 위한 것입니다."에서 '이 냉장고'를 강조하면 
다른 냉장고는 배제되고 또 '바로 당신을'을 강조하면 다른 모든 사람들은 제외되고 
오로지 당신만을 위한 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강조에 또 강조를 함으로써 광고는 
소비자를 매료시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나는 이번 여름에는 등산가지 않겠어"라고 할 경우를 
살펴봅시다. '이번 여름'이 강조될 때 내년이나 내후년 여름에는 등산갈 뜻이 있다는 
것인지 아닌지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등산'이 강조된다면 등산 말고 
수영이나 기타 휴가는 간다는 것인지 어떤지 분명히 알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막연함에도 불구하고 문장 가운데 하나의 말이나 또는 구절을 강조함으로 인하여 그 
말이나 구절이 다른 것보다 훨씬 쓸모 있고 중요한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 곧 
강조의 오류가 노리는 점입니다.

  공직자 재산공개에 관한 기사가 실린 신문기사가 있다고 합시다. 특정한 몇 
사람의 국회의원의 이름을 넣고 아무개 국회의원 실제 재산은 2백억원대라고 
헤드라인을 달았다면 이 역시 강조의 오류에 속합니다. 신문이나 잡지는 특정한 
문장이나 구절을 강조하려고 해당부분을 점이나 선으로 요란스레 장식하면서 
강조합니다. 대부분의 독자는 요란스런 활자의 치장에 현혹되어 내용을 자세히 보지 
않고 머리글자만 보고 지나치기 쉽습니다.
  우리들이 냉정하고도 정확하게 판단하지 못하고 무심결에 강조의 오류를 받아들일 
경우 우리는 어떤 주장의 본래의 의미를 보지 못하고 오직 강조된 부분의 의미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잘못을 범합니다.
  정치적 발언과 아울러 상업광고가 가장 자주 사용하는 추리의 오류는 바로 강조의 
오류(fallacy of accent)입니다.

    6. 비유 때문에 생기는 오류

  비유는 잘못 사용하면 말의 의미가 애매하게 됩니다. 특히 말의 문법적 의미와 
수사적 의미 그리고 논리적 의미가 뒤범벅으로 되어 비유의 뜻이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에게 전혀 다르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어봅시다.

  "너는 곰같은 남자야!"
  "뭐라고? 내가 그렇게 미련하게 생겼니? 날보고 곰같다고?"
  "왜 화를 내고 그래? 너는 꼭 반달곰같아. 오동통하고 귀여운 맛이 있으면서도 
힘이 세니까 곰같다고 한 것이야."
  "도대체 이해하다가도 못하겠구만. 사람을 놀리는 것인지 칭찬하는 것인지 통 
갈피를 못잡겠어."

  "전봇대같이 큰사람"이라고 할 때 관연 키가 굉장히 큰 사람인지 아니면 별 
특징이 없이 키만 큰 것 없는 사람인지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이처럼 비유를 잘못 
사용함으로써 의미를 애매하게 만들기 때문에 생기는 오류를 비유의 오류(fallacy 
of figure of speech)라고 합니다.

    나. 자료에 의한 오류

  앞에서 우리는 연역추리의 비형식적 오류 중 언어로 인하여 생기는 여섯 가지의 
오류에 관하여 비교적 상세히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자료에 의한 오류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자료에 의한 오류는 '유관성의 오류'라고도 부릅니다. 논리적으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 전제들로부터 결론을 이끌어 내면 당연히 오류를 범합니다. 이러한 추리는 
전제와 결론 사이에 전혀 논리적 유관성이 없습니다. 전제와 결론 사이에 단지 
'심리적' 유관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추리를 성립시킨다면 그러한 추리는 오류를 
범합니다.
  우리는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중앙집권적 정치 형태 안에서 
살아 왔으므로 수평적 사고보다 수직적 사고에 익숙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종할 
것인지 아니면 지배할 것인지를 늘 염두에 둡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인간의 
평등이라든가 사회의 정의 등과 같은 개념은 매우 희미하고 낯선 것들입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해서 우리들이 합리적 사고에 익숙치 못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단 문제가 발생하면 합리적 사고와 실천에 의해서 해결하려고 하기보다 돈이나 
권력의 힘에 의해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세는 결국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습니다.
  자료에 의한 오류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정확히 알고 그것들을 제거함으로써 
논리적으로 정확히 사고하는 습관을 기르는 자세가 요구됩니다.

    1. 위력에 호소하는 논증

  연역추리의 비형식적 오류 중에서 언어에 의한 오류는 말의 핵심을 혼란시키고 
애매하게 함으로써 발생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컨대 분할의 오류의 예로 "물은 
액체이다. 물은 산소와 수소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산소와 수소 각각은 
액체이다!"라는 추리는 전체와 부분을 혼동함으로써 결국 추리 자체가 혼란하게 
되어 오류를 범합니다.
  그러나 위력에 호소하는 논증은 논점을 흐려놓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사람이 
주장하는 논점을 억지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추리입니다. 그와 같은 추리는 
합리적일 수 없고 따라서 오류를 범하기 마련입니다
  아이들이 싸움하는 장면을 보면 대부분의 아이들이 위력을 호소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너 나한테 까불다간 혼난다. 너는 내가 유도 초단이라는 것을 모르지?"
  "쳇, 유도 초단이 뭐 그리 대단하다구. 나는 태권도를 5 년 동안 배우고 있어. 
나는 태권도 2 단이야. 초단은 2 단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해."

  "위력에 호소하는 논증은 힘을 정의라고 주장하면서 힘에 따르기를, 다시 말해서 
힘에 복종하기를 강요합니다. 이와 같은 논증을 일컬어 위력에의 논증(argumentum 
ad baculum)이라고 합니다.

    2. 사람을 끌어들이는 논증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 주장을 뒷받침 해줄만한 사람의 
직업이나 지위 또는 재산이나 경력 그리고 인품이나 사상 등을 끌어들이면 그와 
같은 논증 역시 오류를 범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종류의 추론은 논리적인 
타당성이나 부당성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끌어들이는 논증은 위력에 호소하는 논증과 비슷하며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 자주 대할 수 있습니다.

  용필이는 고전음악을 좋아하고 태지는 최신 유행하는 랩음악에 빠져있습니다.
  "용필이 형, 사람은 현대감각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현대는 모든 것이 빨리 
빨리 움직여야 해. 그리고 과거는 이미 사라진 것이야. 과거에 집착해보았지 얻을 
것이란 아무 것도 없어요. 
  지금은 정보시대예요. 모든 것이 눈 깜짝하는 순간에 바뀌고 말아요.
  전통, 전통하지 말아요. 불란서 철학자들로부터 시작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무엇인지나 아세요? 간단히 말해 해체주의예요. 과거에는 철학이나 문학이나 미술 
모두 영원한 본보기, 즉 불변하는 이상에 묶여 있었지요.
  불변하는 이상이 어디에 있어요? 나는 해체주의에 전적으로 동감이야. 지난날은 
자꾸만 깨뜨려 부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요 그것이 바로 발전이야.
  형은 랩음악은 음악도 아니라고 말하지만 내가 보기엔 형이 고전음악이라는 
감옥에 갇혀있는 것이 너무 안타까워."
  "태지야, 세월이 그냥 흐르고 사람의 나이가 아무런 뜻도 없는 줄 아니? 나는 네 
나이 또래의 아이들을 이해하지만 너는 우리 또래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니?
  너보다 나이 더 먹은 사람의 말은 귀 기울여 들어야하는 법이야. 너야말로 
시끄러운 소리에 맞추어 거의 본능적으로 발광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니?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도 들어보지 못했어?
  사람이란 어디까지나 이성적인 동물이야. 여유를 가지고 생각할 때 비로소 
고전음악도 가능한 것이야. 유행가야 제아무리 좋은 곡이라도 일 이년이면 생명이 
끝나지만 고전음악은 영원해.
  사상은 또 어떠니?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말했어.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했지. 또 석가모니는 '인연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참다운 깨달음을 
얻으라'고 설법했어. 그런가 하면 공자는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했어.
  우리 나라의 율곡이나 퇴계는 '혼자 있을 때일수록 더욱더 마음을 가다듬고 
신중히 처신하라'고 했다는 것을 너도 알고 있겠지?
  책도 고전을 읽으면 심오한 인생의 뜻이 담겨있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음악 
역시 고전음악이라야 인생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해준단 말이야."

  위의 예에서 특히 용필이는 위대한 사상가들을 들먹이면서 고전음악이 
최신유행가보다 월등하나는 것, 즉 인생에 보다 깊은 의미를 가져다준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삶의 철학을 대변하는 사람입니다. 쇼펜하우어의 
아버지는 상당한 재산을 가진 무역상이었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청소년 시절 
아버지를 따라 인도 등 여러 곳을 여행할 수 있었습니다. 쇼펜하우어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많은 재산을 남겼습니다. 당연히 외아들인 쇼펜하우어가 재산을 몽땅 
물려받았습니다.
  쇼펜하우어에게는 어머니와 누이동생이 있었습니다. 쇼펜하우어는 물려받은 
재산을 어머니와 누이동생에게는 한푼도 나누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홀로 살면서 철학공부에만 몰두했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전혀 
만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재산을 물려받은 후 죽을 때까지 쇼펜하우어는 
푸랑크푸르트의 어느 거리에서 어머니와 한번 마주친 적이 있긴 했지만 아는 척도 
하지 않고 지나쳤다고 합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 나면 어떤 사람은 쇼펜하우어의 인간성이 되어먹지 못했으니 
그의 철학도 무가치한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판단은 
사람을 끌어들이는 논증으로서 정확한 논리적 추리가 아니므로 오류를 범합니다.

  "너는 비록 대학생이라고 하더라도 아직 사회에 대해서는 까막눈이나 마찬가지야. 
대학에서 강의나 책을 통해서 이론적인 것은 어느 정도 알겠지. 하지만 네가 한국의 
경제발전이니 사회개혁이니에 관해서 제아무리 떠들어도 그런 주장은 다분히 
이상적인 대학생의 주장에 지나지 않아."
  "당신은 사람들에게 양심에 따라서 살면 이 세상에 평화가 올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내가 알기에 당신은 무신론자가 아닙니까? 당신은 기독교도 
불교도 믿지 않고 오직 성실하게 살아갈 것만 고집합니다. 그렇지만 무신론자인 
당신이 제아무리 양심껏 살아야 한다고 사람들에게 호소해도 그와 같은 당신의 
주장은 무가치합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절대자 신을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늘 경계하여야 할 인물이야. 찢어질 정도로 가난하니까 마음이 
비뚤어져 있을 수밖에 없어. 게다가 별 세 개 출신이야. 한번은 폭행죄로 두 번은 
절도죄로 큰집에 세 번 씩이나 들락날락했다지 뭐야? 그러니까 그 사람은 인간성이 
잔인할 수밖에 없어. 너 앞으로는 절대로 그 사람과 가까이 하지 말아라."

  이상의 예들에서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이면 누구나 주관적 입장에서 
자신의 주장을 끝까지 밀어 부치려고 하며 또한 논리적으로 타당하든 부당하든 간에 
상대방을 납득시키려고 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주장이 타당하다는 것을 논리적 관계에서가 아니라 어떤 사람의 직업이나 
지위 또는 인간성 등을 끌어들여 밝히려는 논증을 사람에의 논증(argumentum ad 
hominem)이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논증은 논리적 타당성을 도외시하므로 오류를 
범합니다.

    3. 무지를 핑계로 삼는 논증

  삼국지에 나오는 수많은 군웅들 중에서 겉보기에 가장 성공한 사람은 조조입니다. 
조조가 이렇게 대성할 수 있었던 원인으로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난세를 
헤쳐나가는 그의 뛰어난 안목과 구름처럼 일어나 그를 도운 수많은 모사꾼들과 
장군들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조조가 형주땅을 피 흘리지 않고 손아귀에 넣기 위해 형주의 유포에게 보낼 말 
잘하는 사람으로 적임자를 찾고 있을 때 공융이 한 사람을 추천했습니다.
  "예형은 평원사람으로 학문이 깊고 신기한 말을 종횡으로 누비는 혀끝은 사람을 
찌르기도 하며 아무도 가까이 하려고 하지 않지만 고고한 성품으로 명성이 높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보내면 겁내지 않고 대임을 수행할 것이며, 결코 승상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조조의 부름을 받고 예형이 왔습니다. 조조 휘하의 문무백관을 한번 휘 둘러 보고 
예형이 말했습니다.
  "아, 인물이 없구나, 인물이 없어."
  그 말을 듣고 불쾌해진 조조는 가시돋힌 말로 힐문했습니다.
  "어찌 인물이 없는가? 내 휘하에 이렇게 즐비한 재사들과 명장들이 보이지도 
않는단 말이지? 잘 들어두게나. 먼저 이쪽의 순욱과 순유, 곽가, 정욱은 모두 지모가 
깊어 옛날의 소하와 진평도 미치지 못할 인재들이다. 다음 저쪽의 종료, 허저, 이전, 
악진 등은 용기에 있어서 아무도 못따르며 모두 천군만마를 호령하는 장수들이다..."
  예형은 그 말을 듣고 배꼽을 잡고 웃었습니다.
  "이번엔 내가 이들의 인물평을 해보겠소. 듣기 거북하더라도 과히 허물치마오."
  이렇게 말하면서 예형은 인물평을 시작했습니다.
  "순욱은 병자를 문안케 하거나 상가를 문상케 함이 제격이요, 순유는 묘자리를 
돌보게 하고, 정욱은 문지기를 시키는 것이 좋겠소, 곽가는 글을 쓰게 하거나 시를 
짓게하는 것으로 족하며, 장료는 북이니 징을 두드리게 하고, 허저는 우마나 돼지를 
기르게 하면 잘하리라. 이전은 편지 돌리는 배달부로 쓰면 어울릴 테고, 만총에게는 
술독을 맡기면 십상이겠소. 서황은 개백정이 적임이고, 우금은 등에 지게를 지워서 
담이라도 쌓게 하면 잘 하리라. 하후돈은 에꾸눈이니까 안의원의 약가방을 들고 
따라다니면 어울릴 것이요."
  같은 사람들에 대한 조조와 예형의 인물평이 이렇게 다릅니다. 한나라의 신하됨을 
자랑으로 삼고 있는 예형은 조조의 반역하는 마음을 뚫어보고 조조와 조조를 섬기는 
무리들을 통렬하게 힐난한 것입니다.
  조조는 속으로 화가 났지만, 애당초 말 잘하기로 이름난 야인이란 것을 전제하고 
불렀기 때문에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사람을 죽이면 자신의 도량의 좁은 
것만 드러날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조조는 예형을 골탕먹이고 비웃어주려고 일부러 주연에서 북치는 자리를 하나 
마련해주었습니다.
  며칠 후, 성대한 주연이 벌여졌을 때 예형도 악대에 끼여 있었습니다. 그의 북치는 
솜씨는 가히 일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입고 온 누더기 옷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조조가 그의 무례를 꾸짖자, 그는 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알몸이 되었습니다. 그는 
알몸인 채로 큰 소리로 대꾸했습니다.
  "하늘을 버리고 천자를 속이는 무례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몸을 있는 그대로 
보이는 무례 중 어느 쪽이 더 지나친가 생각해 보시오. 천하의 병사를 제대로 
예우하지 않고 북을 치게 하여 욕보이는 것은 참으로 소인배의 행동이 아니오?"
  만좌해 있던 여러 장수들이 더 참지 못하고 칼을 뽑아 그를 줄이려 하자, 조조가 
말리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는 곧 형주로 가서 유포를 설득하여 내 휘하에 들어오도록 하라. 그러면 
그대를 궁중의 학부에다 모시고 중용하리라."
  조조는 마음속으로 유포가 예형을 죽여주기를 바랐습니다. 골치 아픈 놈도 
제거하고 유포를 칠 명분도 생기기 때문입니다.
  예형이 형중에 도착해서도 그의 종횡무진하는 말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형주의 
유포는 속으로 귀찮은 놈이 왔다고 생각하여 황조가 지키는 성으로 예형을 보내 
버렸습니다. 예형과 더불어 술을 마시던 황조가 물었습니다.
  "학인, 지금의 조조 진영에는 누가 참다운 인물이라 할 수 있소?"
  "음, 어른으로는 공융이고 청년으로는 양수지요."
  예형은 거침없이 대답했습니다. 공융은 에형을 조조에게 천거한 사람으로 학식과 
인망을 갖춘 사람이고, 양수는 어릴 때부터 천재로 소문난 청년으로 뛰어난 머리 
때문에 여러 번 조조를 깜짝 놀라게 했지만 후일 조조의 미움을 받아 처형되고 마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소?"
  "그대는 말이지, 산신당의 귀신이겠지."
  "산신당 귀신? 그게 도대체 무슨 뜻인가?"
  황조가 다시 물었습니다.
  "아, 그건 말이야. 토민들의 제사를 받아먹고도 아무 영험도 없다는 뜻이지. 
말하자면 제물을 도적질하는 허수아비라고나 할까."
  "뭐라고. 이놈이!"
  황조는 발끈하여 칼을 뽑아 예형을 찔러 죽이고 말았습니다.
  조조는 예형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결국 혀의 칼로 자신을 찌르고 말았군'하며 
고소해 하였습니다.

  위의 예에서 예형은 절개의 인물로, 조조는 타협의 인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예형의 말 중에서 "아아, 인물이 없구나, 인물이 없어"라는 말은 무지를 핑계로 
삼는 논증의 일종입니다. 이 말은 "인물이 있다면 대어 보시오. 인물을 드러낼 수 
없다면 쓸만한 인물이 전혀 없다는 결론이 나오게 되오"라는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어떤 주장을 제시하는 사람의 추리가 모순된다고 할지라도 모순되는 점을 
상대방이 지적하지 못하는 무지를 핑계삼아 그 주장이 타당하다고 역설하는 것은 
무지를 핑계로 삼는 논증이며 그것은 오류를 범합니다.
  예형이 조조의 부하들을 하나 하나 들먹이면서 하잘 것 없는 역할에 적합하다고 
비웃는 것 역시 무지를 핑계로 삼는 논증입니다. 조조의 부하는 하나같이 쓸모 
없으니 쓸만한 재목의 부하를 지적해 보라는 것입니다. 예형의 주장은 만일 조조가 
쓸만한 재주있는 부하를 지적하지 못한다면 조조의 부하는 모조리 별 볼 일 없는 
졸개들이라는 것입니다.
  다음과 같은 예들은 모두 무지를 핑계로 삼는 논증으로 우리들의 생각과 행동을 
혼란하게 하고 심한 경우에는 심리적으로 우리에게 고통까지 안겨줍니다.

  영수는 작은 회사의 계장으로 진급하자마자 중고차를 구입했습니다. 운전면허 
딴지 얼마 되지 않아 조심운전에 온 신경을 다 쏟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교차로의 
푸른 신호등을 보고 교차로 안쪽으로 진입하는 순간 노란 신호등이 깜빡이는가 
하더니 빨간 신호등으로 바뀌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교차로를 건너자마자 
교통순경이 영낙없이 손짓을 하였습니다. 몇 마디 서로 다투다가 포기한 채 영수는 
삼만원 짜리 딱지를 떼었습니다.
  워낙 성격이 깔끔한지라 영수는 은행에 그 날로 달려가서 벌금을 납부했습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난 후 난데없이 경찰서에서 편지가 날아 왔습니다.
  "귀하는 언제 어디서 교통을 위반했는데 범칙금을 아직 납부하지 않았으니 
90일간 면허정지입니다. 당 경찰서로 와서 면허증을 반납하시오"라는 내용이 편지에 
적혀 있었습니다.
  영수는 여기 저기 전화해 보고 사무실과 집을 오락가락하며 범칙금 납부영수증을 
찾아보았지만 헛수고였습니다.
  영수는 일단 경찰서로 가서 담당 경찰관을 만났습니다.
  "저는 의도적으로 위반한 것도 아닙니다. 나중에 안일이지만 황색 신호등 일 때 
교차로의 반까지 차량이 진입했을 경우에는 신호위반이 아닙니다. 당시 제가 
교차로를 거의 다 건넜을 때 적색 신호등이 켜졌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때 교통법규 지식이 별로 없어서 제가 위반한 줄 알고 딱지 떼는 
것을 그대로 놓아두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날 곧바로 범칙금을 저희 회사 앞 
은행에 납부했습니다. 저는 분명히 기억합니다."
  담당 경찰관은 딱하다는 얼굴로 영수를 바라보았습니다.
  "당신이 범칙금을 납부했는지 안 했는지는 영수증만이 증명해줍니다. 한, 이 삼일 
더 시간을 줄 테니 꼭 영수증을 찾아 와요. 그렇지 않을 경우 이미 컴퓨터에 
입력되었으니 반드시 면허증을 반납해야 하오."
  영수는 허겁지겁 은행을 찾아가 대강 언제쯤 범칙금을 납부했는데 영수증을 
분실했으니 납부한 사실을 확인할 수 없느냐고 물었지만 은행원은 냉담했습니다.
  "영수증은 보통 2 년 이상 보관하셔야해요. 범칙금 영수증은 한은 본점으로 다 
갔어요. 그곳에 가서 찾아보면 되겠지만 정확한 날짜도 모르는데다 안다고 해도 
하루에 수만장씩 모이니 거의 찾을 길이 없을 거예요."
  영수는 앞이 캄캄했다.

  "영수증이 없으면 범칙금을 지불했다는 증거가 없소. 증거가 없으면 면허증을 
반납해야 하오"라고 할 때 이 역시 무지를 핑계로 삼는 논증입니다.

  "당신은 그날 그 시간에 분명히 고속버스터미널에 있었습니다. 아니라는 증거를 
댈 수 없지요? 저 여자분이 바로 핸드백을 도둑맞은 당사자입니다. 저분은 재빨리 
달아나는 당신을 분명히 목격했다고 합니다. 당신이 저분의 핸드백을 날치기하지 
앉았다는 증거를 댈 수 있습니까? 말로만 결백을 주장하지 말고 증거를 대요. 댈 수 
없다면 당신이 바로 범인입니다."

  과거에는 분명히 범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법관의, 무지를 핑계로 삼는 논증에 
의해서 멀쩡한 사람이 유죄판결을 받는 예들이 간혹 있었습니다.
  이처럼 반론을 제기할 때 또는 긍정할 때 확실한 증거를 제시할 수 없을 경우에 
무지를 핑계로 삼아 행하는 논증을 무지에의 논증(argumentum ad 
ignorantiam)이라고 합니다. 무지에의 논증이 오류를 범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이러한 논증 역시 상대방을 억지로 굴복시키기 위해서 주로 사용됩니다.

    4. 연민의 정을 불러일으키는 논증

  삼국지에 등장하는 미녀 초선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미인계란 미녀를 이용하여 적을 혼란에 빠뜨리는 계략인데, 고대 중국의 병법서인 
'삼십육계'에 나오는 책략중의 하나입니다. 이것은 적장에게 절세의 미녀를 선사하여 
마음을 혼란케 하거나 관심을 딴 곳으로 돌리게 하여 상대방의 전략을 약화시키는 
책략입니다.
  삼국지에는 여자들이 거의 등장하지 않지만 꽃같은 한 몸을 바쳐서 보은과 충절을 
함께 한 한 아리따운 처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막강한 무력을 앞세워 낙양에 입성한 동탁이 무쌍의 맹장 여포까지 손아귀에 넣고 
마음대로 국정을 주무르고 있을 때입니다. 뜻있는 우국지사들은 동탁을 제거하기 
위해 갖가지 계책을 도모했지만 번번이 발각되어 희생자만 자꾸 늘어났습니다. 원소, 
조조, 손견 등 정국의 영웅호걸들이 연합군을 구성하여 대항해 보았으나 그 역시 
실패하여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연합군을 피하여 장안으로 천도한 동탁은 
어마어마한 궁성을 지어 주지육림 속에서 호화판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일이 잘되면 천하를 차지할 것이고, 일이 안 되어도 이 미오성 안에서 안락한 
여생을 보낼 것이다."
  동탁이 호시탐탐 황제의 위치를 넘보며 대역적의 언사를 호언장담해도 누구 하나 
저지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조정의 백관들은 그저 엎드려서 목숨을 부지하기에 
바빴습니다.
  '동탁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고민 속에 원로 백관인 사도 왕윤은 번뇌로 
가득찬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열겹 스무겹의 경호에다 맹장 여포까지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고 있어서 동탁에겐 바늘구멍 만한 틈도 없었습니다.
  왕윤에게는 수양딸이 하나 있었는데, 수양딸 초선은 방년 열 여덟 살로 이제 막 
피어나는 꽃처럼 미모가 절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일찍이 왕윤이 요람 바구니와 
함께 저자거리에서 데려다 옥을 닦듯 여러 가지 학문과 기예, 가무를 익혀 악녀로 
장성시켰습니다. 초선은 그러한 왕윤을 흠모했고, 그의 수심 어린 얼굴을 대할 
때마다 친부모도 미치지 못하는 사랑을 베풀어준 양부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한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요즘 어르신께서 나날이 수척해지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아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목숨을 바쳐서라도 돕고 싶어요."
  왕윤은 초선의 결의에 찬 모습을 보고 미인계를 쓸 결심을 했습니다. 동탁을 
없애기 위해서는 그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너도 내 근심을 알 것이다. 동탁과 여포는 둘 다 주색에 빠진 금수같은 
놈들이다. 너를 보면 틀림없이 욕심이 동할 것이다. 두 사람을 이간시켜서 여포로 
하여금 동탁을 죽이게 하는 계략이다. 할 수 있겠느냐?"
  초선의 구슬 같은 눈물방울이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이윽고 초선은 고개를 들며 
단호하게 대답했습니다.
  "하겠어요."
  수일 후, 왕윤은 여포를 초대한 자리에서 초선을 불러냈습니다. 초선이 사뿐사뿐 
방안으로 들어서자 모란꽃의 그윽한 향기가 온 방안에 퍼졌습니다. '어쩌면 저토록 
아리따울까'라고 생각하며 여포는 넋을 잃고 황홀하게 초선을 바라보았습니다. 
초선은 계속 술을 권하였고 여포는 초선의 미색에 온통 정신을 뺏기고 있었습니다. 
이때 왕윤이 나섰습니다.
  "장군, 원하신다면 초선을 장군께 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그게 정말입니까? 이 은혜를..."
  "그럼 며칠 뒤 길일을 택해서 초선을 장군의 거처로 보내겠습니다."
  다시 며칠 뒤 왕윤은 동탁을 초빙하여 극진히 환대한 다음 초선에게 가무를 
시켰습니다. 은은한 주악 속에 소맷자락을 펼치며 춤추는 초선.
  "선녀란 바로 초선을 두고 하는 말인가 보오. 미오성에도 무수한 미인이 있지만 
초선이 만한 미인은 없소."
  동탁이 군침을 흘리며 초선의 미모를 칭찬했습니다. 왕윤이 답했습니다.
  "그럼, 초선을 동태사께 헌상하겠습니다. 가실 때 수레에 태워 가십시오."
  "고맙소. 고맙소"
  초선은 동탁과 함께 집을 떠났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여포는 끙끙 앓으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습니다.
  이튿날 아침, 동탁의 침소엔 해가 중천에 떠오를 때까지 휘장이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이윽고 침실의 창문이 열렸습니다. 창문 너머 얇은 잠옷을 걸친 초선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여포는 애욕으로 몸이 달아올랐습니다. 
  그때 초선도 창문 너머로 여포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초선은 여포에게 그리움을 
호소하듯 원망하듯 소리 없이 흐느끼고 있었습니다. 여포는 끓어오르는 질투심으로 
자꾸만 가슴이 미어지고 있었습니다.
  그 후 여포는 몰래 초선과 밀회하다가 동탁에게 들켜 미움을 받게 되는데, 그 
와중에도 초선의 양다리 걸치기 작전은 계속되었습니다.
  드디어 여포의 질투심과 분노가 극에 이르자, 왕윤은 여포와 함께 거사계획을 
세웠습니다. 동탁에게 황제자리를 물려준다고 속이고 동탁이 입궐할 때 참살하기로 
한 것입니다. 다음 날, 동탁의 수레가 중문에 도착하자 군사들이 동탁을 수레에서 
끌어내렸고 성난 여포의 창은 동탁의 목을 여지없이 찔렀습니다.
  "동탁이 죽었다."
  누군가가 소리치자 삽시간에 장안의 백성들은 거리로 뛰어나와 만세를 부르고, 
비대한 동탁의 배꼽에 심지를 박아 불을 켜놓고 밤새도록 춤을 추었습니다.
  그의 뱃가죽 기름이 얼마나 두꺼웠는지 불은 밤새도록 타올라서 다음날 
아침까지도 꺼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제일 먼저 미오성으로 달려간 여포는 미친 듯 초선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초선은 
어느새 자결하여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녀의 옆에는 하얀 천에 
정갈하게 쓰여진 시 한 수가 있었습니다. 여포는 그 시를 몇 번이나 읽고서야 
미인계에 넘어간 자신을 깨닫고 혼자 가슴을 쥐어뜯었습니다.

  위의 예에서는 왕윤과 초선 그리고 동탁과 여포의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습니다. 
양아버지 왕윤이 초선을 친딸처럼 키웠기 때문에 초선에게 동탁을 제거하는데 힘이 
되어달라고 하는 것은 연민의 정을 불러일으키는 논증입니다.
  전제들과 결론 사이에 하등의 논리적 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감정에 
호소함으로써 연민의 정을 불러일으킬 때 그러한 논증은 때로 논리적으로 타당한 
추리보다 더 강한 호소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논리적 관점에서 볼 때 
연민의 정을 불러일으키는 논증은 항상 오류를 범합니다.

  변호사들의 변론이 가끔 연민의 정을 불러일으키는 논증일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그와 같은 변론이 유명한 변론으로 평가받기도 합니다. 오래 전에 '검사와 
여선생'이라는 영화가 상영되어 관람객의 눈물을 흘리게 한 일이 있습니다. 
  피고는 담당검사의 국민학교 시절의 은사입니다. 피고인 여선생은 온갖 정성을 
다하여 학생들을 돌보며 일생을 교직에 바쳤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죄를 
범했습니다. 검사는 여선생의 과거 훌륭한 공적을 열거하며 관대한 처분이 
내려지기를 강변합니다.

  연민의 정을 불러일으키는 대표적인 논증은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베니스의 상인'에 등장하는 유태 상인 샤일록은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상인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법정에서 샤일록은 채무자가 빚을 갚지 
못한다면 빚에 해당하는 만큼 채무자의 살점이라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에 
대하여 채무자의 변호사는 유태 상인 샤일록이 차디찬 냉혈한이라는 것, 그가 
인정이라곤 눈꼽만치도 없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배심원과 판사의 연민의 정을 
불러일으킵니다.

  연민의 정을 불러일으키는 논증은 연민에의 논증(argumentum ad 
misercordiam)이라고 하며 이러한 논증은 논리적으로 언제나 오류를 범합니다.

  *도움말:연민을 불러일으키는 논증은 분명히 논리적으로 부당하여 오류를 
범하지만 우리들에게 인간의 현실사회가 반드시 논리적, 합리적으로만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이 말은 우리들이 논리적, 합리적으로 처리하여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영역의 
문제들은 다른 방법에 의해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컨대 도덕이나 예술 또는 종교의 많은 문제들은 논리를 뛰어넘는 다른 방법에 
의해서 해결 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일 철학자 칸트도 실천의 세계는 이론의 
세계보다 위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5. 여러 사람에게 의존하는 논증

  지금까지 우리들은 '위력에 호소하는 논증', '사람들을 핑계로 삼는 논증', 
'무지에의 논증',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논증' 등에 관하여 비교적 상세히 
살펴보았습니다. '여러 사람에게 의존하는 논증' 역시 앞의 논증 등과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비합리적인 추리에 의한 논증들은 일반적으로 합리적 근거를 결여 하지만 
사람들의 감정이나 기분에 호소함으로써 부당한 추리를 마치 타당한 것처럼 
꾸밉니다. 여러 사람에게 의존하는 논증은 뭇 사람들의 정서에 호소함으로써 논증이 
타당하다는 것을 억지로 주장하려고 합니다.

  다른 여러 사람들을 끌어다 대면서 자신의 주장을 타당성을 부여하고자 하는 논증 
역시 여러 사람에게 의존하는 논증입니다. 예를 들면 쿠웨이트 전쟁시 이라크의 
지도자들이 다수 군중 앞에서 미국의 만행을 규탄하면서 백성들의 적개심과 
분노심을 끓어오르게 한 것 또한 여러 사람에게 의존하는 논증입니다.

  만일 우리들이 논리적 타당성을 무시하고 오로지 여러 사람들의 편견이나 감정 
또는 여론에만 호소하여 논증한다면 그러한 논증은 오류를 범합니다. 여러 사람에게 
의존하는 논증은 비록 현실적 행동의 효과는 클지 몰라도 합리적 사고를 
벗어납니다.
  일반적으로 희랍인은 터키인에 대하여 악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어떤 사물이나 사태를 나쁜 것으로 희랍인들에게 전하려면 그것들이 터키인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면 희랍인들은 쉽게 믿어버립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사회에서는 어떤 일을 나쁘게 선전하기 위해서 지방색을 
들먹이면서 군중의 감정에 호소했던 일이 허다했고 지금도 그러한 경향이 다분히 
남아 있습니다.

  현대는 정보시대입니다. 선거자료든가 물가 또는 정부의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여론조사를 하는 것은 거의 상식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론이 강력한 
대통령을 원한다고 해서 대통령이 독재를 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한다면 이 또한 
여러 사람에게 의존하는 논증으로서 논리적 오류를 범합니다. 여러 사람에게 
의존하는 논증은 여러 사람에의 논증(argumentum ad populum)입니다.

    6. 숭상이나 존경을 끌어들이는 오류

  우리들은 주변에서 매우 유식한 사람들을 많이 대할 수 있습니다. 특히 나이 
지긋하고 한문에 통달한 노인 중에 유식한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은 중국의 
고전, 사서삼경에 나오는 구절이나 아니면 노자, 장자에 나오는 짤막한 구절을 
읊어댄 다음에 우리말로 다시 번역하면서 스스로 흡족해 합니다. 이들은 그렇게 
하여 우선 자신이 기쁨을 느끼고, 다음으로 자신이 그만큼 유식하니까 듣는 
사람들은 자신의 말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은연중에 강조합니다.

  1960 년대 초반의 일입니다. 서울의 어느 일류 여고 2 학년 여학생이 어떤 
국제적인 단체에 우리 나라 대표로 뽑혀서 미국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두 달 후 이 여학생이 김포공항에 도착했을 때 벌어졌습니다. 당시만 해도 
외국물 먹는 것은 특권층의 사람들에게나 가능했습니다. 그러므로 여고 2  학년 
여학생이 국제대회에 참가하고 돌아온다는 것 자체가 뉴스 감이었으므로 수많은 
기자들이 이 여학생과 인터뷰하려고 몰려들었던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김양은 자랑스런 한국여고생 대표로 뉴욕의 국제대회에 참석했습니다. 그 대회의 
성격과 김양의 활약상에 대해서 한 말씀 해주시겠습니까?"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아이 엠 쏘리. 저 지금 말이 잘 안 나옵니다."
  김양은 서양사람처럼 어깨를 흠칫거리면서 손짓과 발짓을 섞어 코맹맹이 소리를 
내었습니다.
  "저 미국서 영어만 쓰다가 갑자기 한국말 들으니까 한국말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여러분 용서해 주세요."

  인터뷰는 억지로 끝났지만 다음날 아침 신문에 이 여학생을 나무라는 기사가 실린 
것은 뻔한 일입니다.
  이 여학생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대화에서 병적으로 외국어 단어를 섞어서 쓰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상점이나 술집 간판들 가운데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외래어 가난들이 즐비합니다.
  사람들은 자칫하면 추리의 논리적 타당성을 벗어나거나 무시하는 경향이 많고 
따라서 오류를 범하기 쉽습니다.
  물론 서양인들 중에도 자신의 유식함을 과시하고 남들이 자신의 주장을 인정하게 
하기 위하여 라틴어나 희랍어 글귀를 줄줄 외어대는 소위 유식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특히 한글을 더 갈고 닦아야 할 우리의 입장에서 무턱대고 유행 
따라 외국어를 숭상하다보면 판단의 잘못은 고사하고 민족의 고유한 정신마저 해칠 
우려가 많습니다.

  사람들의 대화하는 모습을 주의해서 살펴보면 많은 수의 사람들이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려 한다는 것,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유명한 성현의 말씀이나 확실한 전통 
내지 권위 등에 상당히 많이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어느새 알게 됩니다.

  그러한 예들을 다음의 대화에서 살펴보기로 합시다.

  "배우고 때로 배운 것을 익히니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고 공자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모든 일을 제쳐놓고 오로지 배움에만 
매진하여야 합니다."
  "오스트리아 정신분석학자인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인간의 성격은 유아기에 모두 
결정된다고 하였다. 청소년이나 어른이 되어서 비뚤어진 성격을 제아무리 고치려 
해도 그것을 쓸데 없는 짓이다. 그러니 여러분은 자식들을 어릴 때 자식들의 성격이 
조화롭게 되도록 온 힘을 다 기울여서 자식들을 보살펴야 한다."

  "우리 나라의 전통은 예의범절을 가장 중요하게 여깁니다. 옛날부터 임금에게 
충성하며 웃어른에게는 효도하여야 하는 것이 우리의 전통입니다.
  전통과 권위를 무시하는 것은 짐승만이 할 짓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가장 
가치있는 것은 바로 예의범절을 소중히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디까지나 나라의 웃어른에게 충성심을 가지고 또 가정의 부모님에게 효심을 
가져야만 인간의 도리를 다하는 것입니다."

  물론 근거가 확실한 전통이나 권위 또는 전문가들이 내세우는 주장은 타당할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논리적인 타당성 여부에 대한 검토가 전혀 없이 권위나 
전통 또는 이름난 사람들의 주장을 무조건 끌어들여서 자기의 의견을 타당한 것처럼 
보이려고 한다면 그러한 추리는 숭상과 존경에 의존하는 논증이 됩니다. 그러한 
논증은 흔히 오류를 범합니다. 이와 같은 종류의 논증을 일컬어 숭경에의 
논증(argumentum ad verecundiam)이라고 합니다.

    7. 우연의 오류

  우리 속담에 "침묵은 금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일종의 일반적인 명제입니다. 그러나 "침묵은 금이다"라는 일반명제를 
하나 하나의 특수한 우연적 경우에 모두 적용하려고 한다면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우리들은 물을 액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물이 과연 영하의 조건에서도 
액체인가라고 묻는다면 우리가 가졌던 생각은 당장 깨져버리고 맙니다. 일반적인 
경우라고 해서 언제나 특수한 경우에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옛날에 읽은 동화책 속의 주인공은 매우 개구쟁이였습니다. 이름은 두수라고 
했습니다. 어느날 두수의 친구가 몹시 아팠습니다. 지독한 감기 몸살이었습니다. 
두수는 꿀과 조미료를 적당히 타서 몇 개의 작은 약병에 담아 친구에게 거르지 말고 
정해진 시간에 마시라고 했습니다.
  "이 약은 내가 평소 잘 알고 지내는 약방 아저씨에게 특별히 부탁해서 조제한 
것이야. 내가 가끔 아저씨를 도와 드리니까 이 약을 특별히 만들어 주셨어. 이 
약에는 인삼, 녹용, 감초, 후박... 등등 좋다는 약은 다 들어 있어. 그러니 네가 이 
약을 다 마시기만 하면 기운이 거뜬해지고 얼른 완쾌될 거야."
  두수의 말대로 친구는 3일 후 완쾌되어 두수에게 고맙다며 말을 걸었습니다.
  "두수야, 그 약 정말 신통하더라. 네 말대로 좋은 약은 다 들어 있나봐. 땀이 
비오듯하더니 이렇게 씻은 것처럼 가벼워졌어."
  "금방 죽을 것처럼 그러더니 언제 아팠더냐구? 그런데 말이야. 너에게 사과할 
일이 있어."
  "갑자기 사과는 웬 사과?"
  "그 약은 내가 만든 것이야. 물에다 생강 엑기스, 후추가루, 조미료 등을 적당히 
섞어서 만든 것이란 말이야."

  위의 경우 "거짓말을 하는 것은 죄악이고 두수가 거짓말을 했으니 두수는 죄를 
범한 것이다"라고 명확히 판단할 수 있는지 의문시됩니다.

  고대 희랍의 어떤 크레타 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시다. "크레타 사람들은 
모두 거짓말쟁이다. 거짓말하는 것은 죄악이다. 그러므로 크레타 사람들은 
죄인다."논증만 보면 형식에 있어서는 타당한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실상 이 
예는 약간 복잡합니다. 어떤 크레타 사람이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라고 
말했다면 그가 하는 말 또한 거짓말이므로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또 거짓말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죄악으로 받아들여지지만 특수한 
경우에는 거짓말이 오히려 선한 행동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오직 일반명제만을 고집하여 모든 경우에 적용시키려고 하여 예외의 특수한 
경우를 무시한 논증은 우연의 오류(fallacy of accident)를 범합니다.

    8. 뒤집어진 우연의 오류

  이 오류는 우연의 오류와 정반대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특별한 경우에만 
옳은 것을 확대하여 일반적인 명제로 보편화할 때 이러한 오류가 발생합니다.

  "자수성가해서 떼돈을 번 사람들이 있지? 그 사람들이 얼마나 돈에 인색한지는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야. 김포 황놀부 있잖아? 황놀부는 현금도 많고 땅도 많아서 
알부자이면서도 남을 위해서는 한 푼도 쓸 줄 모르는 자린고비야.
  황놀부는 바늘로 찔러도 피한방울 흘리지 않을 냉혈한이야. 그러니까 황놀부처럼 
자수성가한 부자들은 하나같이 모두 자린고비야."

  위의 예는 황놀부의 특별한 경우를 자수성가하여 돈 번 모든 사람들에게까지 
확대하여 적용하는 논증으로서, 뒤집어진 우연의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일반명제를 특별한 개개의 경우에 적용할 때 우연의 오류가 생기는 반면에, 
특수한 경우를 일반명제에 확대하여 적용할 경우에는 뒤집어진 우연의 오류(fallacy 
of converse accident)를 범하게 됩니다.
  
  *도움말:우연의 오류는 분할의 오류와, 그리고 뒤집어진 우연의 오류를 결합의 
오류와,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9. 그릇된 원인의 오류

  우리는 매일을 살아가면서 원인과 결과의 끊을 수 없는 고리를 확고하게 믿고 
있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일정한 원인으로부터 항상 일정한 결과가 
일어난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과관계로 인하여 자연과학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참다운 인과관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참다운 인과관계인 것처럼 
논증할 때 그릇된 원인의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우리 속담에 "까마귀 날자 배 떨어졌다"는 말이 있습니다. 까마귀가 날아간 것과 
배가 떨어진 것은 아무 인과관계가 없는데도 까마귀가 날아가자마자 배가 
떨어졌다고 해서, 배 떨어진 원인을 까마귀라고 보는 것은 그릇된 견해입니다.

  또 미개인들의 생활이나 미신에서도 그릇된 원인의 오류를 자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랜 가뭄 끝에 마법사가 주문을 하니까 비가 왔다던가, 아니면 
푸닥거리를 하거나 굿을 했더니 갑자기 병이 낫고 부자가 되었다던거, 하는 것들은 
원인과 결과가 전혀 상관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마치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처럼 논증하는 예들입니다.

  다음의 예들은 그릇된 원인의 오류를 잘 드러내 줍니다.

  일이 잘 되거나 또는 아주 나쁜 일을 경험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꿈 이야기를 
둘러댑니다. 
  "어제 돌아가신 할아버지 꿈을 꾸었네. 하얀 옷에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께서 
멀리서 나를 보며 은은히 미소짓고 계셨네. 그래서 오늘 자네를 만날 수 있었다고 
생각하네. 서로 헤어진지 20 년만에 친구를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큰 대도시, 
서울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은 기적이 아닌가? 참 할아버지 꿈이 용하기는 용해."

  우리들은 흔히 용꿈이니 돼지꿈이니 장례식꿈 등을 이야기하며 그런 꿈을 꾸고 
나면 그 다음 날 재수가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런가 하면 이빨 짜진 꿈이니 귀신 
꿈을 꾸면 그 다음 날 재수가 없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자 프로이드의 견해에 따르면 사정은 정반대입니다. 어떤 
욕망이 지나치거나 또는 모자라서 현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인간의 무의식은 
자신이 조화를 이루기 위하여 꿈속에서 욕구를 해소시킨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돼지꿈을 꾸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돼지꿈을 꾼 다음에 재수가 좋은 
것이 아니고, 반대로 꿈꾸기 이전에 어떤 욕망, 예컨대 돈에 대한 욕망을 채우지 
못했기 때문에 잠 자면서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돼지꿈을 무의식적으로 꿈꾸는 
것입니다.

  게다가 대부분의 꿈 이야기는 날조된 것입니다. 어떤 청년이 친구네 집에서 자고 
나서 오줌 싼 것을 부끄러워하면서도 용기를 내어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집 곧 부자되겠다. 실은 말이야. 어젯밤 내가 넓은 들판에 나가서 시원하게 
쉬했어. 금방 들판이 강으로 변하더니 강물이 철철 흘러 넘치는 것이었어. 그런데 
깨어보니 이렇게 이불에 지도를 그렸지 뭐야!"

  프로이드의 '꿈의 분석'에 의하면 잠자면서 오줌을 먼저 싼 다음 의식은 잽싸게 
마치 꿈 꾼 것처럼 이야기를 조작해 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꿈꾸고 났더니 
어쨌다고 하는 것은 꿈과 그 다음 사실과의 관계가 전혀 연관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습관적으로 그렇게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논증이 범하는 오류는 
그릇된 원인의 오류(fallacy of false cause)입니다. 

    10.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

  우선 다음의 예들을 살펴보고 선결문제요구의 오류가 어떤 것인지 알아보기로 
합시다.

  1) 모든 인간은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사랑은 모든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숭고한 감정이기 때문이다.
  2) 나는 절대로 남의 물건을 훔치지도 않았고 남을 속인 일도 없으므로 결백하다. 
왜냐하면 나는 결백하게 살도록 가정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며 또는 남들이 모두 나를 
결백하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위의 예들에서 "모든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사랑의 감정을 가지고있다"던가 "나는 
결백하게 살도록 가정교육을 받았다" 등과 같은 전제는 그 자체로 논란의 여지없이 
명백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부당하게 가정되어 있습니다. 즉 전제가 우선적으로 
명백한 것으로 나타난 다음에 어떤 결론이 나와야만 논증이 올바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선결문제요구의 오류(fallacy of begging the question; petito 
principii)는 부당한 가정의 오류(fallacy of undue assumption)라고도 부릅니다.

  또 다음의 예를 봅시다.

  1) 불경의 내용은 석가모니의 말씀이다. 왜냐하면 불경의 내용이 석가모니의 
말씀이라는 것이 불경 안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2) 이 약은 좋은 약이다. 왜냐하면 이 약은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이 약이 효과가 
크다는 것은 이 약이 좋다는 것으로부터 알 수 있다.

  위의 예들에서는 전제를 결론이 증명하여주고 또 결론을 전제가 증명하여주는 
형식이 보이지만 결국 참다운 증명은 없습니다. 이 역시 선결문제요구의 오류를 
범합니다. 특히 이와 같은 형태의 오류를 일컬어 순환논법의 오류(fallacy of 
arguing in circle; circulus in prodando)라고 합니다. 논증을 한답시고 해놓고 
결국 뱀이 제 꼬리를 물고 뱅뱅 돌아가는 것처럼 아무런 증명도 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순환논법입니다. 다음의 예들 역시 순환논법의 오류를 범합니다.

  "저 미인은 아름다워. 왜냐하면 아름다운 여자는 미인이니까."
  "대학입시 문제는 너무 어려워. 왜냐하면 문제 출제자들이 문제를 어렵게 내기 
때문이야."
  "인구밀도가 높아지면 사람들은 가난해 진다. 왜냐하면 경제적으로 빈곤해 지면 
인구밀도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11. 질문을 복합적으로 할 때 생기는 오류

  우리는 주변에서 "세 치 혀를 잘못 놀리면 패가망신한다"는 말을 간혹 들을 수 
있습니다. 말하는 것은 결국 생각의 표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몇 마디 말하는 
것만 보면 그 사람의 사람 됨됨이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고들 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를 체험하고, 체험한 것을 생각하며, 생각한 것을 
말과 글로 표현하고, 표현한 것을 이해합니다. 체험과 표현 그리고 이해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우리들의 삶을 가치있고 보람있게 성숙시켜줍니다.
  그러나 표현을 그릇되게 할 경우 우리들은 논리적 타당성을 잃고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질문을 복합적으로 할 때, 질문하는 사람은 답하는 사람의 허점을 노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질문이 복합적일 때 이미 정확한 하나의 답이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이 전제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살펴보면서 질문을 복합적으로 할 때 생기는 
오류가 어떤 것인지 알아보기로 합시다.

  예) 너 지금도 매일 아침 사과 한 개씩 먹니?

  이 물음에 대해서 "아니오"라고 답하면 이전에는 아침마다 사과 한 개씩 먹었다는 
이야기가 성립합니다. 그러나 만일 "예"라고 답하면 이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매일 아침 사과 한 개씩 먹는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 물음을 분석하여 보면 결국 "너 전에는 매일 아침마다 사과 한 개씩 
먹었니?"라는 질문과 "너는 요새 매일 아침마다 사과 한 개씩 먹니?"라는 질문 두 
가지로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질문을 복합적으로 할 경우 그러한 질문에 대한 답은 자연히 정확할 수 없으며 
따라서 복합적 질문은 암암리에 그 자체 안에 오류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다음의 
물음을 살펴봅시다.

  예) 너 아직도 네 아내를 끔찍하게 사랑하니?

  이 물음에 대해서 "아니다"라고 답하면 전에는 아내를 끔찍하게 사랑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뜻으로 이해되기 쉽습니다. 그렇지만 만일 "그렇다"라고 
답하면 전이나 지금이나 아내를 몹시 사랑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상대방의 한가지 질문이 논리적으로 타당할 수 없게 만들고 상대방에게 반론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드는 질문은 복합질문의 오류(fallacy of complex question; 
questionis duplicis)를 범합니다.

    12. 논점 부적절의 오류

  논점부적절의 오류는 말 그대로 추론의 핵심을 적절하게 건드리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오류입니다. 비록 전제와 결론이 얼핏 보기에 비슷한 점이나 연관성은 있는 
것 같지만, 서로 논리적 관계가 전혀 없는데도 불구하고 추론을 이끌어 낸다면 
논점부적절의 오류를 범합니다.

  예를 하나 살펴보면서 논점부적절의 오류가 어떤 것인지 알아보기로 합시다.

  법정에서 살인혐의로 기소된 피고에게 검사가 차가운 목소리로 심문을 합니다. 
"피고는 김여인이 살해될 당시 김여인 집 근처를 도망가다가 경찰에게 
체포되었지요?"
  "도망가던 것이 아니라 급한 일이 있어서 약방에 약을 사러 달려가던 
길이었습니다."
  "달려가나 도망가나 어딘가 빨리 가던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피고는 김여인과 
같은 동네에 살면서 김여인에게 가끔 돈을 꾸었고 최근에 꾼 돈을 갚지 못하자 수일 
전에 김여인이 다그쳤고 서로 심한 언쟁을 했지요?"
  "언쟁한 것이 아니라 며칠만 돈 갚을 날을 연기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김여인은 
안 된다고 했고 저는 제발 애걸한다고 한 두 차례 통사정했을 뿐입니다."
  "피고는 살인이 얼마나 비인간적인지 그리고 살인이야말로 인간으로서는 할 짓이 
아님을 잘 알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도한 행위가 바로 살인입니다. 피고는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지요?"
  "아무렴요. 하지만 그 이야기와 제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위의 예에서 우리는 검사의 추론이 논리적으로 타당치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제들과 결론이 전혀 논리적 연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전제들을 근거로 
결론을 이끌어 내려고 한다면 논점부적절의 오류(fallacy of irrelevant 
conclusion)를 범합니다.

  *도움말 1:우리는 일반적으로 논리적 훈련이 부족하므로 토론에 익숙하지 
못합니다. 몇이 모여서 토론하자고 해놓고는 각자가 자기 주장만 고집할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합리적 추리보다 감정이나 편견에 치우쳐서 추리할 경우가 
많습니다.

  많은 경우 여럿이 모인 회의가 상부의 지시사항 전달로 끝나거나 아니면 아무런 
결말을 얻지 못하고 중구난방으로 헛되게 끝나는 것은 논리적 내지 합리적 사고의 
훈련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도움말 2:앞에서 우리는 열두 가지의, 자료로 인한 오류들을 살펴보았습니다. 
논리적으로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전제들로부터 결론을 도출해 낼 때 추리는 오류를 
범하는데, 이것을 일컬어 자료로 인한 오류라고 합니다.

  자료로 인한 오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언어 이외의 오류에 속합니다. 그러나 
후일 제본스가 자료적 오류(material false)라는 명칭을 부여함으로써 이들 오류를 
한층 더 분명하게 구분하였습니다.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들

  1. 연역추리에 있어서 형식적 오류와 비형식적 오류의 기본적인 차이를 말해 
봅시다.

  2. 언어에 의한 오류와 자료에 의한 오류의 차이는 무엇이며 각각의 오류의 
종류는 어떤 것들입니까?

  3. 다음의 예들은 언어에 의한 오류들입니다. 각각 어떤 오류에 속하는지 지적해 
보십시오.
  1) 저 청년은 힘이 약하다. 이 젖먹이는 힘이 강하다. 그러므로 이 젖먹이는 저 
청년보다 힘이 강하다.
  2) 그대 크로에수스가 페르시아 왕국과 정쟁을 한다면 결국 강한 왕국이 멸망할 
것이다.
  3) 한 오라기의 머리카락을 뽑으면 대머리가 되는가? 두 오라기의 머리카락을 
뽑으면 대머리가 되는가? 그러면 세 오라기의 머리카락을 뽑으면 대머리가 되는가?
  4) 9 는 홀수이다. 9 는 3과 6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3과 6은 홀수이다.
  5) 이 화장품은 바이오 공법에 의해 제조된 것으로, 바로 당신의 아름다움을 위한 
것입니다.
  6) 김양은 전봇대처럼 큰 여학생이다.

  4. 다음의 오류들은 자료에 의한 오류들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오류들인지 
지적해 봅시다.
  1) 지도자가 결정한 세금이니 모두 세금을 성실히 납부하여야 합니다.
  2)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했으니 우리 모두는 그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3) 스승님 말씀이 양심을 가장 소중히 하라고 하셨어. 스승님처럼 인품이 고매한 
분도 드물어. 그러니 우리는 스승님의 말씀을 믿어야 해.
  4) 너는 내가 천재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내가 천재인 것은 
분명하다.
  5) 이 아이는 소녀가장입니다. 동생들의 허기짐을 덜어주려고 순간적으로 가게 
물건을 훔쳤습니다. 그러나 정상을 참작하여 훈방하여야 할 것입니다.
  6) 여러분, 이 사람이 범인이라는 확실한 물증은 없더라도 이 사람의 과거 행적을 
보면 며칠 전 강도사건의 진범임이 분명합니다. 
  7) 영어는 한글보다 모든 면에서 뛰어나다. 그러므로 특히 학문의 용어는 반드시 
영어를 사용하여야 한다.
  8) 가장 조화로운 것은 둥글다. 수박도 둥글다. 그러므로 수박은 가장 조화로운 
것이다.
  9) 자수성가해서 돈 번 사람들은 인색하다. 우리 삼촌은 자수성가하여 돈을 
벌었다. 그러니깐 우리 삼촌도 인색하다. 
  10) 나는 오늘 고스톱판에서 몽땅 잃었다. 왜냐하면 어제밤 내가 병든 개가 꿈을 
꾸었기 때문이다.
  11) 모든 사람은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태어날 때부터 사람은 
사랑의 감정을 지니기 때문이다.
  12) 저 미인은 아름답다. 왜냐하면 아름다운 여자를 일컬어 미인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13) 우리 고등학교는 시설도 부족하고 선생님 수도 모자랍니다. 그러니까 
이천년대에는 모범적인 고등학교로 개선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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