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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대한 예의

by Casey,Riley 2022.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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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에 대한 예의
 


        사랑하는 당신께
  창밖은 칠흑처럼 깜깜합니다.  멀리서 밤길을 달리는 차 소리가 다가오다가 
사라졌습니다.  아마도 인적이 드문 길에서 무척 속력을 내었나봅니다.  제 
등줄기가 그 차소리를 따라서 쭈욱 굳어오다가 다시 편안해집니다.  혹여라도 
당신이 오시나 했었나봅니다.  당신은 바쁜 사람인데 말이에요.  
  지금 막 청소를 마쳤습니다.  그릇들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옷장 속의 옷들을 
차곡차곡 개어놓고 먹다 남은 냉장고의 음식들도 버렸습니다.  빨래하는 내 
손이 안쓰럽다면서 당신이 손수 골라주셨던 하늘색 세탁기 속에 들어 있는 
빨래는 어떻게 하나, 생각하다가 사실은 조금 혼자서 웃기도 했습니다.  
왜냐구요?  빨래라니요.  사실 이 밤중에 내가 쓰던 물건들을 정리하면서, 
그것도 이웃에서 행여 누치챌까봐 조심조심 그릇들을 챙기고 내 삶을 
정리하면서, 그러면서 빨래라니요...  그런 자신이 조금 어처구니도 없고 그랬기 
때문에 웃었던 겁니다.  하기는 그보다 더 우스운 일은 그 다음에 생겨났습니다.  
저는 세탁물을 뒤졌지요.  쿰쿰한 냄새가 나는 빨래 속에서 당신의 팬티와 
런닝셔츠를 발견하고 그것을 손으로 문질러 빨았습니다.  언제나처럼... 하기는 
그 옷을 손으로 빨기 전에 대야를 챙기고 비누를 꺼내들면서, 저를 비난 하던 
한 친구의 말을 떠올렸습니다.  중독이라구요...  제가 당신을 위해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고 요리를 하는 것, 그녀는 그런 일들을 중독이라고 불렀습니다.  제가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일에 중독되어 있다나요...  하지만 그 친구가 
무어라 하든 저로 말하자면 당신에 관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소중해지는 
마음입니다.  "그것도 중독이야."  그 친구는 말했지요.  그래요, 그래서 웃음이 
나왔습니다.  웃으면서 문득 생각했습니다.  드디어 담담하구나, 하고 말이에요.
  지금 저는 당신과 늘 마주않아 있던 식탁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잠시 고개를 들어 보니 집안이 윤이 납니다.  냉장고 손잡이에 붙은 
알루미늄판이 거울처럼 반짝입니다.  싱크대 구석이나 가스레인지 아래에 낀 
때는 너무 오래되어서 애를 먹기도 하였습니다만, 철수세미로 문지르고 
문질렀더니 겨우 제 빛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이마의 땀을 닦아가며 그것들을 
윤내다가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겼던 것도 사실입니다.  지난 세월들을 이렇게 
닦아낼 수만 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더랬습니다.  많은 눈물과 땀방울을 
흘려서라도 처음처럼다시 윤이나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말입니다.  잠시 저는 수세미를 손에 든 채로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대체 왜 
이러고 있는지 그 이유를 몰랐습니다.  그것도 중독일까요...  아닙니다.  
중독이라니요...  당신에 대한 제 사랑을 그런 식으로 표현하는 건 싫습니다...  
잘 생각이 나지는 않지만, 그래요, 습관이라는 말이 좋겠지요...  별로 마음에 
드는 단어는 아니지만 중독보다는 병적으로 들리지 않아서 좋은 것 같군요.  
  이야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버렸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늘어 놓자고 
펜을 든 것은 아닙니다.  
  오늘 오후엔 백화점에 다녀왔더랬습니다.  정말 오랜만의 일이었지요.
  어제까지는 도저히 틈이 나지 않았더랬습니다.  어제는 당신도 아시다시피 
김장을 했거든요.  절여놓았던 배추를 물에서 건져 소쿠리에 받쳐 물기를 
빼놓고, 커다란 무를 씻어서 채를 썰었습니다.  그러고는 멸치젓을 달여서 
한지에 받쳐 즙을 걸러내놓고 갓하고 미나리도 다듬어 씻어놓았습니다.  며칠 
전에 까놓은 마늘을 절구에 빻고 김칫속을 버무렸습니다.  일을 마치고 보니 
벌써 경울의 짧은 해가 졌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생각했었습니다.  올 
겨울 내내 당신하고 이 김치를 먹겠구나, 하고 말이에요.  멸치다시를 낸 물에 
잔치국수를 삶아 넣고는 볶아놓은 쇠고기 고명과 시금치 웃기를 얹고 이 김치를 
얹어 먹으면 문득 겨울밤도 훈훈해지고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구나...  저는 조금 들떠버렸었나봐요.  당신의 회사로 전화를 
걸어버렸으니까요.  당신은 또 늦으시겠다고 했습니다.  내 귓가에 들려오는 
당신의 목소리 너머로 또다른 전화벨 소리가 울리고 컴퓨터의 프린터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그리고 이어서 당신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겨우 말했습니다.  "김장을 했어요...  열 표기를 담갔어요.  배추가 아주 
달아요."  "정말 피곤하다니까..."  저는 머뭇거렸습니다.  그리고 미안하다고 
말했습니다.  당신을 피곤하게 하는 제가 정말 미웠습니다.  당신은 괜찮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다시 한 번 말했습니다.  
저는 정말 나쁜 여자인가봐요.  당신은 괜찮다고, 바쁘니까 그냥 끊자고 
하셨습니다.  괜찮다는 당신의 말에 용기를 내어서 저는 말했습니다.  굴이 
싱싱하길래 조금 샀어요.  사태도 조금 샀어요.  보쌈을 좋아하시잖아요.  
된장하고 고추장을 섞어 배춧국도 끊였어요...  오늘 저녁은 꼭 집에 와서 
드세요...  아닙니다.  당신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하셨지요?  말을 다 마치기 전에 
뚜우뚜우 소리가 들렸습니다.  당신이 끊으신 건가요?  아닙니다.  그저 전화가 
끊겼을 거예요.  우리 집 전화는 당신의 회사 다이얼만 돌리면 이상하게 고장을 
일으키곤 하니까요.  당신이 그러셨잖아요.  당신 회사의 전화 상태가 좋지 
않다고...  저는 어제 밤 열두시가 되어서 보쌈을 먹었습니다.  돼지고기 사태를 
, 마치 아몬드처럼 길쭉하게 모양도 예쁘게 빠진걸로 정육점에 부탁해서 
한근이나 사두었었는데 그걸 삶아서 다 먹었어요.  살이 찌려나봅니다.  당신은 
살이 쪄도 절 사랑하신다지만 전 살찐 여자는 싫어요.  언젠가 텔레비젼에서 
결혼과 함께 은퇴했다가 살이 잔뜩 쪄서 돌아온 탤런트를 두고 당신은 
말씀하셨죠.  정말 보기 싫군...
  아닙니다.  전 살이 찌지 않도록 노력해왔어요.  당신과 함께한 지 삼년이 
지났지만 전 아직 처녀 때 스커트를 입을 수 있거든요...  그래요, 오늘은 
백화점에 갔었어요...  스커트를 한벌 샀어요.  비둘기색 개버딘이에요.  처음에 
한 번만 드라이를 해주면 그 다음에는 손빨래를 해도 된대요.  세일이 끝나서 
한산한 매장을 뱅글뱅글 돌면서 검정 카디건도 한벌 샀습니다.  흑진줏빛 
블라우스도 한벌 사고 공단으로 만든 리본이 달린 자주색 구두도 한 켤레 
샀습니다.  그러고 나서 자주색 꽃 무늬가 화려한 스카프도 하나 사려고 했는데 
그만 지갑이 텅 비었더군요...  그동안 당신이 주신 반찬값을 조금 아껴서 
모아두었던 돈을 모두 찾았거든요.  저는 매장에 있는 아가씨에게 그건 다음에 
와서 사겠다고 말했습니다.  꼭 사고 싶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했습니다.  물건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쓰는 상투적인 핑계처럼 보이려고 
일부러 별로 미안한 표정도 짓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한 여자가 와서 그 
스카프를 만지작거렸어요.  단발머리를 하고 헐렁한 청바지를 입은 채 유모차를 
끌고 있던 그녀의 손 위로 그 스카프를 넘겨주었을 때, 마치 그  스카프가 
가시덤불로 짠 거친 직조물처럼 제 가슴을 스쳐가는 것 같았습니다.  여자는 
그것을 목에 둘러보고 결국 그것을 샀습니다.  저는 다른 스카프를 고르는 
척하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아닙니다.  유모차에 앉아서 빤히 저를 
바라보던, 토끼 모양의 목도리를 두른 아이의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닙니다.  
당신이 지난달에 제가 모은 적금을 다 가져가셨다는 걸 이야기하려는 것도 
아니구요.  아닙니다.  그게 아닌데 글이 왜 이렇게 써지는지 모르겠어요.  그저 
제 느낌을 숨김없이 당신에게 이야기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래요, 집으로 
돌아온 저는 새로 산 옷들을 옷걸이에 잘 걸었습니다.  바라보니까 참 
좋았습니다.  저걸 입고 어딜 가까 생각도 했습니다...  그런데 갈 곳이 
없었습니다.  제게는 저런 차림으로 갈 곳이 없어요.  대리점도 
그만두었으니까요.  저는 그래서 혼자서 그 옷을 입어보았습니다.  구두도 
신었어요.  방안의 장판이 구둣굽에 상처입을까봐 조심조심 걸어도 보았습니다.  
저는 지금 그 옷을 입고 이 글을 씁니다.  이렇게 좋은 옷을 입어보기는 정말 
처음입니다.
  우리가 처음 만나던 무렵에 저는 정말 촌스러웠지요.  당신이 그러셨잖아요...  
보따리만 들려놓으면 영락없이 서울역 앞의 갓 상경한 소녀 같다구요...  사실은 
뒤돌아보기도 싫은 시절입니다.  오빠 등록금 대기가 빠듯했어요.  제가 살던 그 
소도시에 있던 여대 앞엔 나가보지도 않았지요.  너무나 입고 싶은 옷이 많아서 
언제나 그 거리를 피해다녔답니다.  저 여대생들은 대체 돈이 어디서 나서 
옷가게에 걸린 옷들을 저렇게 잘도 살 수 있을까, 그런 생각도 더는 하기 
싫었던 스물한살, 그때 나의 삶은 언제나 귀에서 아린 겨울바람 소리가 
났습니다.  그때 당신이 당신이 내 앞에 와주셨지요.  당신은 제가 근무하던 
잡화점에 면도기를 사러 오셨습니다.  출장을 왔는데 그만 면도기를 빼놓고 
왔다고 말씀하셨는데 사실은 그때 당신에게선 벌써 애프터 셰이브 로션의 
향취가 나는 것만 같았습니다.  당신은 신용카드를 내미셨지만 우리 가게에선 
그때 신용카드를 받지 않았지요.  당신은 몹시 당황해하셨습니다.  전 당신에게 
그냥 맘에 드는 물건을 가져가시고 대금은 다음에 내 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당신은, 서울에서 오신 당신은 웃으며 말씀하셨어요.  날 어떻게 믿느냐고 
말이지요.  모르겠어요...  그저 당신은 믿을 수 있는 분 같았습니다.  그러니 
혹시 그게 운명은 아닐까 하고 저는 그후 내내 생각했습니다.  다음달에 다시 
그 도시에 오신 당신으 제게 말했지요.
  "아가씨, 서울로 취직하고 싶지 않아?"
  그래요, 서울로 가고 싶었습니다.  그래요, 다시금 기억이 살아납니다.  마치 
오래 덮어두었던 책장을 넘기는 것처럼 선명하게 말이에요...  제가 
스물한살이던 그때 그 소도시에서 집으로 가는 길에 작은 성당이 있었습니다.  
그 성당의 마당에는 성모상이 서 있었습니다.  저는 신자는 아니었지만 그 
성모상을 지나치면서 늘 빌었습니다.  아아, 나를 이곳에서 탈출시켜주세요.  
누군가가 와서 내 삶을 뒤흔들게 해주세요...  저는 한 번쯤 내 귓가에도 
살랑거리는 봄바람이 스치기를 기다렸습니다.  예쁜 옷을 입고 영화 구경을 
가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을 받고 싶어...  나에게도 그럴 권리는 있잖아? 
누군가게에 그렇게 대어들고 싶기도 했던 날들이었습니다.  그때 당신이 내게 
물어주셨던 겁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솟았는지 모르겠어요.  얼굴도 붉히지 
않고 저는 말했습니다.  저를 서울로 데려가주시겠어요?
  저는 당신의 전화번호를 들고 서울역에 내렸습니다.  이 세상에서 나를 
도와줄 사람은 당신 한분뿐이었어요.  공중전화를 들고 당신의 전화번호를 
누르는데 그 전화의 꼬불거리는 줄이 마치 제가 이 세상에서 붙들고 있는 
유일한 줄, 이런 표현이 괜찮다면 마치 탯줄처럼 느껴졌습니다.  당신은 
어머니이고 저는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기인 듯이 말이에요.  만일 
당신이 그 전화가 이어진 그 선의 끝에계시지 않으면 숨이 턱하고 막혀버릴 
듯이 겁이 났었지요.  당신은 거기 계셨습니다.  오래전에 예정된 운명처럼요.  
그리고 저는 당신 친구의 전자대리점에 취직했습니다.  당신은 자주 대리점에 
오셨어요.  가끔 절 데리고 나가 양식을 사주시기도 했지요.  처음 포크와 
나이프가 여러개 있는 식탁에 앉았을 때 제가 얼마나 당황스러웠는지 당신은 
모르실거예요.  그것들은 내가 다른 세계로 가기 위해 거쳐야 할 관문처럼 식탁 
위에 버티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당황하는 제게 무척 친절하셨습니다.  그리고 맥주를 몇잔 드시고 
저를 빤히 바라보셨지요.  제가 예쁘다는 말을 하실 때 떨리던 당신의 입매를, 
그 입매의 괴로운 듯한 뒤틀림을 저는 아직도 기억합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기혼자였고 한 아이의 아빠였음을 저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아이의 아빠이며 한 여자의 남편인 당신...  여기서 그만 당신과의 만남을 
끝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다른 이들이 이미 이루어좋은 생애에 
끼여드는 건 옳지 않다고 다짐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도망치려고 하면 할수록 
꼭 그만큼의 끌어당김이 내 마음속에서 자라났습니다.  저는 언제나 그 
자리였습니다.  
  그래요.  그 자리를 맴돌던 제게 어느날인가는 또 당신이 다가왔습니다.  우리 
대리점 사장님인 당신 친구분하고 당신하고 또 한 친구분-당신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친구라고 말했습니다-들이 모여서 갈비를 먹기도 했지요.  그때 우리 
대리점 사장님이 저를 보고 당신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좋은사람...
  또 한 친구분도 말했습니다.
  "이놈 정말 좋은 놈이에요."
  그 며칠 후인가 당신이 제게 여행을 제의하셨을 때 제가 당신을 따라나선 
것은 아마도 그 말 때문이었습니다.  좋은 사람, 좋은 남자...  나는 사람들이 
어떤 여자를 가리킬 때 좋은 사람이라고 하는 말의 뜻을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당신의 제의를 무겁게 받아들였습니다.  좋은 남자라는 말을 믿었습니다.  
그것도 당신하고 어렸을 때부터 함께였던 사람들이 한 말을 제가 어떻게 믿지 
않겠습니까...  대천 바닷가에 엷은 주황색 노을이 깔릴 때, 그 노을이 
바라다보이는 횟집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당신은 지금 별거중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곧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을 것이고 그리고 괴롭하고요...  당신 
아내의 의심증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남자인 당신을 당신의 
아내는 끊임없이 의심하고 있다고요.  직장을 여러번 옮긴 것도 그 아내 
때문이었다고요.
  도망가고 싶은 의무감과 당신 쪽으로 끌려가고 싶은, 팽팽히 이어진 내 
마음의 망설임이, 그 팽팽한 현이 제 가슴속에서 툭, 끊어져버렸습니다.  
의처증에 걸린 남자의 아내를 저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건 저의 
어머니였습니다.  제가 중학교 때였던가요, 사료값도 안 되는 값으로 소를 
팔아버린 후 아버지에게서 도지기 시작한 그 병...  한 사람이 한 사람을 
터무니없이 의심할 때 오는 불행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저였기에 당신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뜬눈으로 새운 제 귓가에 밤새 파도소리가 
들렸습니다.  내 귓가에서 처음으로 겨울바람이 사라졌습니다.  저는 당신의 
목에 팔을 두르고 말했었지요.
  "전 당신에게 좋은 여자가 되고 싶어요."
  그래요, 그 밤에 당신이 먼저 잠드셨을 때 저는 혼자 다짐했습니다.  좋은 
여자가 되겠다고 말예요.
  당신은 저를 자주 찾았습니다.  저는 당신의 속옷도 빨아드리고 머리도 
잘라드렸습니다.  머리를 자르려고 목욕탕에서 커다란 보자기를 두르고 앉은 
당신의 모습은 천진한 소년 같았습니다.  저는 다시 한 번 다짐했습니다.  이 
사람을 악마 같은 부인으로부터 구해드리자고요...  당신을 위해서라면 지옥 
끝까지라도 뛰어들겠다고요.  아아, 정말이지 내 몸 하나 부서져서 당신을 구할 
수만 있다면...  하고 생각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이목 같은 건 조금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내게 좋은 분이셨으니까요.  당신은 정말 좋은 
남자였습니다.  
  그리고 일년 후 우리는 산부인과로 갔지요...  의사는 경고했지요, "세 번이나 
이러시면 다시는 아이를 가질 수 없습니다" 하고 말이에요.  당신은 
울먹이셨습니다.  미안하다고 내 손을 잡고 몇번이나 말씁하셨습니다.  저는 
울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이해했으니까요.  당신 부인이 아이를 낳고 난 후 
의심증이 생겼지 때문에 당신은 아이가 두렵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그렇게 
될까봐 무섭다고 하셨습니다.  전부인하고의 상처가 너무 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당신을 이해했습니다.  오히려 내 뱃속에서 세 번째나 
꿈틀거리는 이 생명들에 대해 더 집착이 생기기 전에 없애버리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그것이 당신의 사랑을 잃지 않는 방법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당신은 괴로워하셨습니다.  당신을 원망하지 않느냐고 묻기도 하셨습니다.  내가 
고개를 저었지만 당신은 믿지 않으시는 눈치였습니다.  제가 마취에서 덜 
깨어나 힘이 없었던가봐요.  저는 더 힘차게 고개를 저어드릴 수 있었는데 
말이에요.
  당신은 그 며칠 동안 회사에 휴가를 내고 저를 간호해주셨습니다.  제 건강은 
이미 엉망진창이었습니다.  대리점도 그만두고 늘 누워야 했었으니까요.  그러던 
어느날인가 제가 기운을 좀 차리자 당신은 제 손을 이끄셨습니다.  우리는 
강변으로 드라이브를 나갔지요.  봄볕이 강물 위로 쏟아져내리고 벚꽃이 흩어져 
휘날렸습니다.  저는 당신의 옆좌석에 앉아서 차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봄볕을 
쬐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좋으냐고 물으셨습니다.  저는 이마에 손을 
짚었습니다.  햇볕이 너무 강렬해서였습니다.  내 인생의 겨울바람 소리는 
당신을 아게 된 후 사라졌지만 이 화사하기만 한 봄볕은 어쩐지 저와 어울리지 
않는 것만 같아서 겁이 났습니다.  내 행복감이 이 봄날의 꽃이파리처럼 그저 
흩날려버릴 것만 같아서 저는 두려웠던 겁니다.  하지만 당신은 강변이 잘 
내려다보이는 까페에 차를 세우셨고 우리는 그리로 들어가 싫토록 봄 강물을 
바라보았습니다.
  점심을 먹고 화장실에 다녀오는 길에 당신은 그 집의 토분항아리에 가득 꽂힌 
패랭이꽃 다발 앞에 서 계셨습니다.  저 역시 아까부터 그 황토색 토분에 가득 
꽂힌 연보라색 패랭이꽃다발을 누여겨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꽃은 참 
아름다웠습니다.  엄지손톱만한 수백의 꽃송이들로 이루어진 패랭이꽃 다발...
  자리로 돌아온 당신은 물으셨습니다.
  "저 꽃이 조화일까 진짜일까?"
  우리는 함께 꽃을 바라보았습니다.  꽃은 완벽한 자태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연보랏빛은 진줏빛 광택을 발하고 있었고 잔디잎새 같은 연초록 이파리는 
알맞게 늘어져 있었으니까요.  당신은 조화 같다고 하셨고 저는 진짜 패랭이꽃 
같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내기를 걸었습니다.  당신은 제게 물으셨습니다.
  "왜 진짜라고 생각하지?"
  저는 머뭇거렸습니다.  그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사실은 
아까부터 그 꽃에서 눈을 떼지 못하면서 저는 그 아름답기만 한 꽃의 아랫부분, 
그러니까 토분과 맞닿은 언저리에서 시들어 누렇게 된 이파리를 하나 발견했던 
겁니다.  조화라면 그런 걸 만들 필요가 없었겠지요.  시퍼렇게 살아 날뛰는 
것만 만들어도 되 테니까요.  하지만 그건 가짜입니다.  살아 있는 것에는 
분명히 생채기가 있습니다.  촌에서 자란 사람은 누구나 그걸 알고 있습니다.  
들꽃이나 나무에도, 새나 강아지나 들고양이에도, 하다 못해 구르는 돌멩이까지 
살아 있는 것은 반드시 생채기를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나는 그걸 
설명해드리고 싶었지만 당신이 웃으실까봐 겁이 났습니다.  터무니없다고도 
말씀하실 것만 같았어요.
  당신은 고개를 갸웃하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알 수가 없군."
  우리는 말을 멈추고 꽃을 바라보았습니다.  거의 완벽에 가까운 
모습이었습니다.  당신은 궁금해서 못 견디겠다는 듯 토분 어저리에 있는 
누렇게 시든 이파리를 집어내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생각을 겨우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당신은 웃으며 말씀하셨습니다. 
  "이건 그저 우연히 끼여든 불순물일 뿐이라구."
  그러고 보니 그런 것도 같았습니다.  당신은 좋은 생각이 있다면 주인 모르게 
패랭이꽃 한송이를 집어내셨습니다.  패랭이꽃은 진줏빛 광택을 입힌 듯 
으느은하게 빛났습니다.  비단으로 만들어진 꽃 같았습니다.  당신은 잠시 
궁리하더니 그 연한 연보라색 꽃이파리를 손톱으로 누르셨습니다.  그것이 
가짜꽃이었다면 당신의 손톱 밑에서 구겨졌다가 다시 펴지겠지만 진짜꽃이라면 
다시는 예전처럼 꽃이파리를 펼 수 없겠지요...  아아, 그런데 그것은 살아 있는 
꽃이었습니다.  당신의 손톱 끝에는 금방 푸른 물이 들어버렸고 당신의 
손아귀에 있던 패랭이꽃은 푸른 즙의 덩어리가 되어 사라져버렸습니다.  뭉개진 
꽃은 다시는 고개를 들지 않았습니다.  그제서야 당신은 낭패한 표정을 
지으셨습니다.
  우리는 그날 해가 질 무렵 노을을 마주보며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운전을 
하시는 당신의 손톱 밑에 푸른 패랭이물이 아직도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불길한 징조였을까요?  저는 그후로도 오래오래 그것을 생각합니다.  그것은 산 
것을 짓이긴 벌이었을까요?  당신은 저의 집에 발길이 뜸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밤마다 제 가슴속에 패랭이꽃이 피었다가 짓이겨져 푸르게 
물들었습니다.
   그리고 가끔은 비가 내렸습니다.  제가 세들어 사는 집의 낡은 한옥기와 
위로도, 너무 오래되어서 얇은 꺼풀이 일어나는 나무로 된 저의 창틀 위에도 
비는 내렸습니다.  당신의 아내가-아,내,라는 말을 쓰기가 힘이 듭니다.  아내가 
그분이니 저는, 저는 당신의 무엇이 되는 겁니까?  당신은 어찌하여 제게 단 
하나의 이름도 허락하지 않으셨나요?-저를 찾아온 날도 그랬습니다.  제가 문을 
열었을 때 그분은 낡은 감색 우산을 쓰고 계셨습니다.  그분의 눈동자가 제 
눈과 마주쳤습니다.  바라보시는 눈빛이 어찌나 서글프던지 저는 눈길조차 
돌리지 못하고 멍청하게 그분의 동공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분은 끝내 제 
방안으로 발길을 들이지 않으셨습니다.  그제서야 그분의 눈 아래에서 귓가까지 
검푸르게 덮인 기미자국을 저는 볼 수 있었습니다.  입매가 선명해서 자존심이 
센 분이라는 건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만 그분은 저를 한참이나 바라보시다가 
말했습니다.
  "집이 경매로 넘어가게 생겼다고 전해줘요."
  그분의 눈매가 왜 그렇게 슬퍼 보였을까요?  저는 덜덜 떨면서 그분이 딛고 
선 땅위에서 그분의 흰 카바 위로 튀어오르는 빗방울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빗방울 속에 흙탕물이 튀기고 그분의 낡은 구두코는 질퍽하게 젖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가셨습니다.  이 말을 당신께 이제서 전해도 될까요?  그분은 
가시기 전에 다시 말했습니다.
  "아가씨도 돈을 떼었나?"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에요, 제가 드렸어요" 대답하고 
싶었지만 그분의 말이 제 입을 막았습니다.
  "정신차려요.  그 인간은 악마야."
  그날도 당신은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요, 이제사 다 고백할랍니다.  
저는 그 길로 뛰쳐나가서 당신의 회사 앞으로 갔습니다.  어떻게 당신의 오랜 
친구가 하는 말과 당신의 아내였던 사람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 그렇게 다를 
수가 있단 말입니까.  저는 당신이 좋은 사람이라는 말에 제 일생을 걸었는데 
이제사 당신의 아내라는 사람이 불쑥 나타나서 당신이 악마라고 하다니요...
  퇴근하는 당신은 낯선 여자와 함께 계시더군요.  저는 밤 열두시 반 종로 3가, 
알전구가 늘어진 그 많은 포장마차의 대열 속에 당신들 둘을 두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당신들은 몹시 취해 있어서 제가 그 곁을 스치고 지나가도 아무 
기척도 느끼지 못하시더군요.  그래요, 저는 그날 밤부터 잠들지 못했습니다.  
천개의 눈을 가지고도 제가 가진 보물을 지키기 위해 한 개의 눈은 감지 않고 
부릅뜬 전설 속의 용처럼 눈을 감지 못했던 겁니다.  아무리 눈을 감아도 제 
마음 속의 한눈은 퍼렇게 눈을 뜨고 제가 사는 집 밖의 좁은 골목길과 큰길가의 
버스정류장과 아스팔트 위를 샅샅이 뒤지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당신은 어떤 
여자와 함께였습니다.  당신은 거기서 다른 소녀에게 포크와 나이프를 쥐는 
법을 가르쳐주고 당신은 거기서 한 여자에게 돈을 받아내고 또 거기서 당신은 
패랭이꽃을 짓이겨서 그 여인의 눈 아래에서 귀밑까지 파란 꽃물을 들이고 
계시더군요.
  처음에 저는 몹시 울었습니다.  당신이 오신다는 전화를 받고 부랴부랴 장을 
보고 상을 보아두었지만 당신의 얼굴을 보면서, 당신이 제가 끓인 생태찌개를 
땀을 뻘뻘 흘리면서 다 드시는 모습을 보자 그만 참을 수가 없었던 겁니다.  
당신은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남자는 달라, 마음이 없어도 여자를 만나고 이빨을 쑤시고 그리고 잠을 잘 수 
있어... 그럴 때 남자들은 좋은 줄 알아?  남자도 괴롭다구...  하지만 그게 
남자야.  여자들은 그럴 수 없지...  그게 남녀의 차이야.
  그래요, 저는 당신의 말을 믿었습니다.  저를 보면 알 수 있었으니까요.  저의 
엄마를 보아도 알 수 있었습니다.  당신의 아내를 보아도 알 수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여자는 사랑하는 남자가 아니면 자지 않습니다.  그래요... 떼를 쓰듯 
제가 반박하자 당신은 또 말씀하셨습니다.
  창녀들은 다르지... 걔네들은 그런  여자의 속성 때문에  희생되는 여자들이야.  
그러니까 여자도 아니지.
  당신은 울고 있는 저를 따뜻하게 안아주셨습니다.  그러고는 말씀하셨지요.  
이 세상에서 내가 사랑하는 건 너뿐이라고, 여자를 만나고 술을 마시고 함께 
자는 건 그저 아무 일도 아니라고...  그건 사랑하고는 분명 다른 일이고 저를 
보면 애처로워서 견딜 수가 없다고요.  제가 울면 당신 가슴이 너무나 
아프다고요.
  저는 그때나 지금이나 추호도 당신의 사랑을 의심해본 일이 없습니다.  
남자니까 그러실 수 있다는 것도 이해합니다.  물론입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이 순간까지 제 생을 걸고 맹세할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다.  그 사실도 의심해본 일이 없습니다.  다만 남자를 
가리켜 좋은 사람이라고 말할 때 그것이 여자를 가리켜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다는 걸 알지 못했던 것뿐입니다.
  이제 새벽이 오려나봅니다.  언젠가 당신과 함께 가서 보았던 연극의 한 
장면처럼 창밖이 푸르게 변해갑니다.  깊은 강물처럼 그윽하게 푸른 빛입니다.  
저는 이제 이 글을 마쳐야 합니다.  그리고 떠나야겠지요, 아침이 오기 전에.  
그래서 방안으로 비춰드는 보자기만한 햇빛에도 선명하게 드러나게 될, 
이끼라도 낀 것처럼 검푸른 제 얼굴의 기미가 보이기 전에 말이에요.
  사랑하는 당신, 이 글의 서두에서 제가 말씀드린 제 친구는 제게 그랬습니다.  
당신을 떠나라고요.  그래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 친구에게 이야기를 
꺼내기 훨씬 전인 맨 처음부터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당신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요.  사랑했기 때문에, 이미 운명이라고 느껴버렸기 
때문에, 그리고 어떤 기약의 징표처럼 제 얼굴에 돋은 검푸른 기미 때문입니다.
  저는 당신께 애원했었습니다.  술에 취해 가끔씩 찾아오는 당신 앞에서 
울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건 저뿐이고, 다른 
여자는 그저 다른 여자일 뿐, 아무 의미도 아니라고...
  사랑하는 당신.
  어렸을 때 할머니가 해주셨던 이야기가 생각이 나요.  옛날 옛날에 어떤 
여자가 살았답니다.  그 여자에게는 글공부를 하는 남편이 있었는데 남편이 늘 
과거에 떨어지는 바람에 살림은 너무나 가난했답니다.  그러던 어느날 남편은 
비장한 각오로 서울로 시험을 보러 떠나고 여자 혼자 집을 지키고 있었답니다.  
그날 밤, 그 여자를 사모해오던 동네 머슴이 그녀의 집으로 뛰어들어 여자를 
안으려 했답니다.  여자는 몸을 더럽히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했답니다.  
은장도로 가슴을 찌른 거지요...  서울로 가던 그녀의 남편은 어떤 주막에서 
깜빡 잠이 들었습니다.  꿈속에서 아내가 나타나 말하기를 "몇날 몇시 어떤 
주막에 가면 아무개라는 이름의 수험생을 만날 것인즉 그 나그네와 붓을 바꾸어 
가집시오" 했답니다.  꿈에서 깨어난 남편은 길을 가다가 아내가 꿈에서 일러준 
대로 어떤 주막에 당도해 아무개라는 나그네를 찾으니 그 나그네가 있었습니다.  
신기한 마음에 그 나그네와 하룻밤을 새우면서 과거준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장난삼아 붓을 바꾸자고 했답니다.  이미 친하게 된 그들은 붓을 
바꾸었고 부인의 예언대로 남편은 과거에 급제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할머니는 말씀하셨습니다.  정말로 진심을 다해 원하는 일이 있다면 
죽어서라도 그 뜻이 이루어지는 거라고요.  살아 있었다면 그 부인은 남편을 
도울 수 없었을까요?
  사랑하는 당신.
  언젠가는 책을 하나 읽었습니다.  다리에서 강물을 향해 몸을 던지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정신과 의사의 말에 의하면 그들의 대부분은 
신발을 벗어놓고 강물로 뛰어드는데, 그들이 벗어놓은 신발은 언제나 그들이 
떠나온 육지를 향해서 벗어져 있다는 거였어요...  저는 그 구절을 읽다가 잠시 
멍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왜였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신발을 그쪽으로 
벗는다는 건 그의 온몸을 그쪽을 향해 비틀었다는 이야기가 되겠지요.  그들은 
바라보았을까요?  떠나기 전에, 영영 이별하기 전에 그들이 걸어왔던 삶이 묻은 
그곳을...  하지만 말입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혹시나 그들이 몸을 비틀었던 
것은, 그리하여 그들이 살았던 육지를 향해 신발을 벗어놓게 만든 것은 혹시나 
희망이 아니었을까 하고.  그들의 구두코는 육지를 향해서가 아니라 사실은 
희망을 향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고요.  만일 그들이 죽기 전에 바라본 그 
지나온 삶에 대한 한오라기의 희망이 남아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런데 희망은 그들이 이미 살았던 육지에만 있어야 하는 건가요?  깊고 푸른 
강물은 정녕 절망이기만 할까요?
  새 구두가 좀 발에 끼이는군요.  방금 저는 공단으로 만든 리본이 달린 
자주색 새 구두를 벗어서 당신이 늘 웃으며 들어오시던 문 쪽으로 
돌려놓았어요.  이제 좀 발이 편안합니다.
  버스정류장 앞에 있는 소희약국에서 다행히 저를 믿고 약을 주었습니다.  
제가 지난 한해 동안 꾸준희 약을 사갔기 때문입니다.  행여 그분들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당신이 배려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방을 뺀 돈은 아주 
작겠지만 당신의 아내에게 전해주십시오.  저는 이 순간까지도 내내 당신 
아내의 얼굴이 선명히 떠올라 마음이 아픕니다.  그분에게 전해주십시오.  제가 
사죄하고 있다고요.  저는 한때 그녀가 어리석다고, 너무 어리석어서 악마가 
되었다고 착각했었습니다.  그걸 사죄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비키니옷장 
밑바닥에 모아둔 돈이 약간 있습니다.  당신의 바바리가 낡은 것 같아서 하나 
장만해드리려고 했던 것이니 주저 말고 좋은 것으로 골라 사세요.  그러고 나서 
전화를 반납하고 가재도구를 정리하면 제 장례비는 나올 겁니다.  집에는 
알리지말아주세요.  그 시절은 죽음을 걸고서라도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고 나면, 제 방값이 당신의 아내에게 가고 당신이 새 바바리코트를 
고르고 제가 한줌 흙으로 뿌려지고 나면, 저는 아마도 뻑뻑한 구두를 벗은 발이 
편안해지듯 편안해질 것입니다.  그 편안함으로 저는 늘 당신의 등뒤에 
있겠습니다.  어느날 길을 걷다가 문득, 또는 소녀를 만나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하는 법을 친절하게 가르쳐주시다가 문득, 그도 아니면 누군가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려다가 문득 등뒤에서 짓이겨 진 채로 한줌 즙으로 화해버린 
검푸른 기운이 느껴지시면 제가 왔다고 생각하세요.
  오래도록 생각했지만 제가 당신을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제가 당신의 
괴로운 남자됨에서 당신을 구해드릴 수 있는 길은 오직 이것뿐입니다.  
할머니의 옛얘기 속의 정절 깊은 여인처럼 저도 당신을 지키고 싶으니까요.  
당신이 제게 생전에 베풀어주셨던 그 사랑을 잊지 않은 채로 저는 푸릇푸릇하게 
이 대기에 스밀 것입니다.
  사랑하는 당신, 그러면 안녕히.
  <1993, 샘이깊은물 12월호>

        꿈
    첫째날 오후 1시 30분
  우리는 이미 좀 늦어 있었다.  토요일 오후여서인지 빈 택시가 영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합승손님으로 인해서 조금 돌아간다는 운전사의 
말을 듣고도 우리는 주저하지 않고 택시에 올랐다.  나이가 오십줄에 마악 
접어들었을까, 하와이식 남방셔츠를 입은 운전사는 합승으로 우리를 태우자마자 
길음삼거리에서 곧장 정릉으로 통하는 사잇길로 접어들었다.  아마도 우리보다 
먼저 탄 앞자리의 아낙이 그리고 가는 모양이었다.  이런 일이야 한두 번 겪은 
바도 아니었지만 길은 좀 위태로워 보였다.  거의 사십오도 각도나 되는 
경사에다 길이 좁아서, 차가 지나칠 때마다 훌라후프를 하거나 고무줄을 하던 
계집아이들이 길가에 납작하게 붙어서서 불안한 눈동자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연탄을 넣어두기 위해 길가에 세워둔 낡은 캐비닛과 배춧단을 실은 
리어카들, 그리고 길에서 방으로 바로 연결되어 있는 남루한 주택의 알루미늄 
방문 겸 대문들이 거의 충돌할 듯 말 듯 차창을 휙휙 스쳐 지나갔다.  손잡이를 
잡고 있는 내 손에서 벌써 땀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그는 우리보다 먼저 탔던 손님을 내려놓고 곧바로 카세트를 밀어넣었다.  
처음에 우리는 그것이 그냥 운전기사들이 자주 듣곤 하는 흘러간 가수들의 
메들리 테이프인 줄 알았다.  하지만 잠시 후 흘러나오는 여자의 허스키한 
목소리른 낯익은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노래라곤 거의 도레미도 배워보지 
못한 듯한 여자의 목소리는 음정도 박자도 제멋대로였다.  그런데 운전사는 그 
노래를 따라부르며 추억에 젖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뒷자리에 나란히 
앉은 박과 나는 어이가 없어서 서로 마주보고 잠깐 웃었다.  아마도 요즘 
노래방에서 자신이 부른 노래를 녹음을 해주기도 한다는데 그런 종류의 것인 
모양이었다.  생각은 틀리지 않았는지 여자의 노래가 끝난 다음에는 
빰빠라밤밤밤바바...  하는 팡파르가 울려나왔다.  1993년도에 대한민국에 살면서 
노래방이라는 곳에 한 번이라도 가본 일이 있는 사람은 아마도 그것이 노래가 
끝난 후 점수가 나타나기 전에 나오는 음악이라는 걸 알 것이었다.  이어서 
남자의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원더풀, 원더풀, 아빠의 청춘...  브라보, 브라보 아빠의 청춘...
  운전기사는 카세트에서 흘러나오는 것과 똑같은 목소리로 노래를 따라불렀다.  
좁은 골목길에서 거의 충돌할 듯 마주치는 봉고차들을 요리조리 피하기 위해 
핸들을 휘이익 휘이익 돌려가면서, 또 한편으로는 브라보, 브라보 노래를 
따라부르면서 운전사는 물고기의 창자 속처럼 가늘고 가파른 골목길을 
오르락내리락 차를 몰아갔다.  골목길도 참을수 있었고 곡예하듯 차를 요리조리 
몰아가는 것도 그런대로 참을수 있었지만 끝없이 이어지는 그 노래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참기가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차가 급하게 왼쪽으로 몸을 틀어 
오른쪽으로 상체가 기울 때마다 온몸의 신경들이 우르르 오른쪽으로 몰려서는 
비죽거리며 비져나오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옆자리의 박은 입술을 꼭 앙다문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자 비로소 그가 작곡가라는 생각이 났다.  몇 년 전 
내가 참여한 적이 있는 영화일 때문에 처음 인사를 나누었을 때 그는 미국에서 
재즈 음악을 전공하고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자신을 소개했었다.  그는 
전문대학의 강사로 나가면서 영화 음악을 작곡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가 
미국에서 작곡해 왔다는 음악을 듣고 곧 그의 음악을 좋아하게 되었다.  쉽지만 
통속적이지 않은 음악, 나는 그가 작곡한 몇편의 음악들을 카세트 테이프에 
녹음해서 가끔 듣곤 했는데, 음반을 내놓게 됐다고 기뻐하는 그를 본 지 거의 
일년이 지났건만 그는 여태 아무 소식도 가져오지 않고 있었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남의 글을 읽을 때 맞춤법이 조금만 틀려 있으면 글의 내용과 
상관없이 그 틀린 철자가 자꾸 눈에 거슬리던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그가 
택시기사가 틀어놓은 저 소음, 그러니까 음악을 잘 모르느 내가 들어도 음정도 
박자도 틀리는 이상하게 육감적인 저 노랫소리들을 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박은 여전히 그 자세였다.  나는 그 이상한 소음을 좀 
참아보기로 했다.  음악을 전공하는 그도 참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해 보기로 했다.  저 허스키한 젊은 여자는 아마도, 
아무리 생각해도 아내는 아닐 것이니, 그렇다고 딸이나 조카이지도 않을 것이니, 
그저 삶에 상처입은 여자와 일상에 진친 늙은 남자가 정말 사랑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런데 저들은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을 몰라서 노래방엘 
갔던 것이고, 평소엔 쑥스러워서 할 수 없었던 고백을 노래로 하고 있는 
것이라고, 누구 말마따나 남이 하면 스캔들이고 자기가 하면 비련이라는 생각 
같은 건 집어치우자고...  저 음악은 귀에 거슬리다 못해 이제 속까지 부글부글 
끊어오르게 하고 있지만 그래도 좀 다르게 생각해보자고...  저 운전기사는 
오죽하면 이 물고기의 뱃속 같은 골목길을 곡예하듯 달려가면서 저렇게 
추억어린 표정을 짓고 있을까, 하고 말이다.  소설가라면 입체적으로 사람을 
바라보야야 한다고 어떤 점잖은 평론가도 내게 충고하지 않았던가.
  -죽도록 사랑해놓고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해...  남자아 남자, 남자의 약속이 
미워요오오오...
  하지만 생각은 생각이었고, 운전사의 난폭한 운전을 참아내면서 음이 안 맞는 
노래와 여자의 육감적인 콧소리를 듣고 있으려니까 짜증은 바야흐로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다.  화가 나는 건 나는 거였고, 듣기 싫은 소리는 듣기 싫은 거 
아닐까.  내가 아무리 소설가이고 인간의 생을 입체적으로 그려내야만 한다 
해도, 변호사라고 매일 교통법규를 지키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그래서 
화가 나는 마음이라도 서로 좀 나누어볼까 하고 박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나는 그가 미국을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가끔 술자리에서 그는 80년대초에 도망치듯 미국으로 갔다는 말을 잘도 
해댔는데 나중에야 그가 광주 출신이라는 것을 알아낸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이상했어요.  80년대초에 한국에 있을 때 나는 생각했지요.  독재자 니들이 
아무리 나를 제약해도 빼앗아갈 수 없는 것도 있다고 말예요.  예를 들면 우리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이나 상상력 같은 것들, 꿈들...  한데, 아니었어요.  
미국에 간 지 6개월쯤 지나고 나서 나는 내가 한국에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상상을, 생각을 그리고 꿈을 꾸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됐지요.  그건 무선운 
발견이었어요.  혹시 이해 할 수 있으세요?
  하지만 공부를 마치고 8년 만인 89년에 그는 그곳에서 곧 보장될 안락한 
생활를 뿌리치고 돌아왔다.  광주를 저지른 자가 아직 통수권좌에 앉아 있는 
나라에 말이다.  꿈조차 다르게 꿀 수 있는 나라를 두고 왜?
  택시를 타기 전 박은 내게 한달 동안이나 피아노를 만지지도 못했다는 말을 
털어놓았었다.  그런 말을 할 때 그의 얼굴이 하도 어두워 보여서 하마터면 
나는 왜요?  하고 물을 뻔했었다.  그러면 안되는 거잖아요 하고 물을 뻔도 
했다.  그러나 나를 자제케 한 것은 나 역시 몇 달동안 한줄의 글도 완성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래도 아직은 컴퓨터 위에서 피아노 
치듯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쓰고 또 지우고 또 지우고, 그리고 마지막에 다 
지워진 컴퓨터의 검은 화면에 명멸하는 커서만 바라보는 일...  마치 너는 할 수 
있어, 없어, 있어, 없어...  하듯이 명멸하는 그 커서... 그런데 그는 피아노엔 손도 
안 댔단다.  그가 치는 피아노 소리는 나처럼 Delete라는 단추를 누르지 않아도 
허공 속으로 지워져가는 것이었는데 그는 왜 손도 대지 않았을까.
  한낮의 골목길에도 차들이 밀리고 있었다.  마주치는 차를 피해주고 다시 
올라갈 때마다 차는 가볍게 진저리를 치면서 뒤로 밀렸다가 다시 출반하곤 
했다.  우리는 그 아슬아슬함 때문에 둘 다 차창 위에 달린 손잡이를 
구명대처럼 부여잡고 앉아서 이제 흥에 겨워 못살겠다는 듯한 남녀의 발악적인 
이중창을 견디고 있었다.  이중창 속에는 간간이 여자의 교태스러운 웃음소리가 
섞였고, 이어서, 아이 그러지 마, 하는 것 같은 콧소리도 들렸다.
  -소쩍꿍새가 울기만 하면 떠나간 우리 님이 오신댔어요, 소쩍꿍 소쩍꿍...
  박수소리, 웃음소리, 발을 구르는 소리...  소쩍꿍새가 한창 울고 있을 때 박이 
아주 천천히 말했다. 
  -아저씨, 우린 여기서 좀 내리고 싶은데요.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운전사가 볼륨을 줄였다.  소쩍꿍새가 저만치 
사그라들었다.
  -뭐라구요?
  -내려달라구요, 우린 내리겠단 말입니다.
    박은 이를 악무는 듯이, 그러나 여전히 낮은 소리로 말했다.  내가 
투덜거리는 운전사에게 요금을 지불하고 나서 돌아보자 그는 골목 뒤편으로 
들어가 몹시 토하고 있었다.  지갑을 챙기다 말고 나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나왔다.  박이 손수건으로 천천히 입가를 닦으며 내게로 다가왔다.  
겸연쩍은 그의 표정이 억지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나는 토하느라 그의 눈가에 
맺힌 눈물방울이 눈꼬리로 사그라드는 것만 보고있었다.  나는 박이 택시에 
두고 내린 작은 배낭을 그에게 건ㅇ다.  그는 마치 웃는 것처럼 입술을 가볍게 
뒤틀며 배낭을 받아들었다.
  -택시가 있을까요?
  내가 시계를 들여다보며 묻자 박은 잠시 망설이더니 대답했다.  
  -조금만 걷고 싶은데요.
  그래서 우리는 아슬아슬한 비탈길을 천천히 걸었다.  가끔 맹렬한 속도로 
차들이 지나갈 때면 아까 우리가 차창 안에서 보았던 계집아이들처럼 길 옆으로 
납작하게 붙어서면서 택시 안에 탄 사람들을 바라보기도 했다.  노파가 택시 
앞좌석을 꼭 붙든 채로 지나가고 트럭이 배추, 양파 하는 확성기를 울리면서 
우리 앞을 스쳐 지나갔다.
  -어젯밤에 술 드셨어요?
  납작하게 붙어서서 차를 피하는 중에, 얼굴에 화색이 좀 돌아온 그가 내게 
물었다.
  -왜요?  술냄새가 나요?
  -예...  글쓰는 사람들하고 마셨나보죠?
  그는 딱히 할말도 없다는 듯, 말했다.
  -글쎄요, 아닐 거예요.  소쩍새들하고...
  내 입에서 왜 소쩍새라는 말이 튀어나왔는지 모르겠다.  택시를 내리기 전에 
들리던 소쩍꿍새라는 노래 때문이었을까?
  잠시 후 우리는 다른 택시를 잡아탈 수가 있었다.  젊은 운전사는 라디오를 
켜놓고 있었는데 거기서도 물론 유행가가 흐르고 있었다.  내가 박에게 물었다.
  "저기요, 왜 우리는 그 기사한데 테이프를 멈추라고 말을 하지 못했을까요?"
  박이 그제서야 그게 이상하다는 듯 잠시 웃더니 택시 안의 스피커에서 울리는 
가수의 노래를 들으며 말했다.
  "그래도 프로페셔널이 좀 낫군요."

    전날 밤 11시 40분
  어제 초저녁에는 갑작스러운 비가 내렸다.  남쪽으로 난 베란다에서 쏴아 
하는 빗소리가 들리는 것을 시작으로 뒷베란다에서도, 서쪽으로 뚫린 
목욕탕에서도 빗소리가 밀려들었다.  목욕탕 창으로 내다보니 멀리 인수봉의 흰 
이마가 마악 구름 속으로 들어가는 참이었다.  나는 투명하고 날카롭고 긴, 비의 
창살에 갇혀 있는 것 같았다.  글을 써보려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가 말고 
부엌으로 나오니 집안이 엉망진창이었다.  우선 쌓여 있는 설거지감부터 손을 
대려다 말고 앞치마를 입은채로 나는 그냥 맥주캔을 따버렸다.  그러니까 비 
때문이었다.
  나는 빗소리에 갇혀서 멍하니, 개수대에 쌓여 있는 설거지 그릇들과, 식탁 
한켠에 수북한 쓰레기 봉투들과, 찌그러진 채 나뒹구는 맥주캔의 수를 세고 
있었다.  세면서 닥쳐오는 마감날짜를 걱정하고 있었다.
  -삼세번입니다.  두 번 빵꾸를 내셨으면 이젠 그만 좀 주시죠.
  ㅡ들은 개가 좋은 작품을 숨겨놓고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처럼 
말했다.  사실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그들이 잘 알면서도 말이다.
  -그래야겠조.  저도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해요.
  나는 대답했었다.
  -그러셔야죠.
  그들도 동의했다.  그러니 문제는 이제 컴퓨터 앞에 앉아서 쓰기만 하면 된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전화벨이 울린 것은 그때쯤이었다.  
자주 어울리던 문인들이 모여 있다면서 한 시인이 짓궂은 목소리로 집앞 술집의 
이름을 대는 것이었다.
  밖에는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우산을 펴고 빗속으로 한발짝을 
내디뎠다.  빗소리는 이제 우산 위에서 두두두두 울리고 있었다.  걸어가면서 이 
밤에 수유리까지 와서 술을 마시며 내게 전화를 건 시인을 생각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내가 일하던 작은 운동단체에서 함께 일했던 그는 얼마 전 
꽤 급진적인 문학단체에 몸담았다가 징역을 살고 나온 일이 있었다.  나는 그가 
남을 위한 일에, 특히 그것이 궂은일일 때에 빠지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잊혀져간 문인의 임종을 지키고 나서 문인들에게 연락을 취해서 문인장을 
치러준 것도 그였고, 후배들이 구속되기라도 하면 꼭 한 번씩은 면회를 가고 
책을 넣어주는 것도 그였다.  나역시 그의 후배라는 특권을 가지고 있어서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그에게 달려가곤 했었다.  나는 이제까지 그가 내 
앞에서 화를 내는 것을 본 일이 없었다.  아니, 딱 한 번 있었다.  화를 
낸다기보다 언제나 웃고 있던 그의 입가에서 미소가 싹 가시는 순간을 말이다.  
그건 어떤 술자리에서 문학평론가이자 대학교수인 그 또래의 한 남자가 그에게 
물었을 때였다.  그는 시인과 함께 대학원에 다녔으나 시인은 뛰쳐나왔고 그는 
교수가 된 사람이었다.
  -어때요?  그만 복학하시죠.  생계도 그렇고요.  ...부인이 어렵게 
일하신다는데...
  내가 한 번도 글을 발표해보지 않은 잡지에 글을 기고하고 있던 낯선 
문인들이 일제히 그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 말에 별 악의가 담겨 있지 않은 
것이 틀림없었지만, 대학원에 복학하는 것도, 그래서 교수가 될 자격을 얻는 
것도 절대로 나쁜 일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더더구나 질문을 받은 것은 
시인 자신이었지만 내 얼굴이 먼저 굳어져버렸다.  마치 질문을 받은 것이 
나였던 것처럼 나는 그 낯선 평론가에게 모욕감을 느꼈다.  그건 말이죠, 그건...  
그렇게 간단히 물어보면 안되는 건데요, 당신이 뭐하는 사람인지 나는 모르지만,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지만... 그게 아니란 말예요, 그게... 물론 나는 
입을 열지 않았고 시인은 잠시 후 그냥 씨익 웃고 말았다.  나는 그때 우리가 
1993년을 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시인을 처음 만난 것이 
대학 4학년 때인 1984년이니 벌써 십년이나 흘러가 있었던 것이다.  십년이란 
건 간단한 세월이 아니었다.  특히 젊었던 우리들에게 그 십년이란 세월은 
그랬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간단하다.  짧고 간결하다.  십년 새 우리는 
간결해져버린 것이다.
  -복학하시죠.
  -그래보지요.
  그런 그를 나는 요 며칠 전 인사동의 한 단골술집에서 만났다.  여주인이 
내게 와서 그를 좀 어떻게 해보라는 말을 건넸다.
  -벌써 이박삼일 동안 여기서 술을 마시는 중이야.  ...집으로 보내봐.  집에서 
기다리는 사람 생각도 해야지.
  마주앉았을 때 그의 눈에서 희미하게 무언가가 빛나고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짓이야, 형...  하고 튀어나오려는 말을 붙잡아준 것은 아직도 빛나고 있는 
그 희미한 빛 때문이었다.  화장실에 가려는지 일어서려다 휘청거리는 그의 
팔을 내가 잡았을 때 그는 도로 자리에 주저앉아 마른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그의 얼굴은 곧 울음이라도 터질것같이 보여서 나는 덜컥 겁이 났다.
  -형, 이제 자기 자신도 좀 생각해.  애들도...  자꾸 남 생각만 하다 보면 
자기는 누가 챙겨?
  주제넘은 말참견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나는 물었다.  묻는 나를 
바라다보는 그의 눈에서는 아직도 그 희미한 빛이 빛나고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희미할 뿐이었으므로 나는 내 질문이 장난이 아니란 것을 표시하기 
위해 굳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는 어린아이처럼 깔깔 웃었다.
  -우리 마누라가 챙기지...  우리 마누라가...  재밌지?
  그는 정말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임마, 너 시궁창에 빠져본 일 있냐?  난 있다.  ...물이 생각보다 뜨듯하데.  
...그 기분 너는 모를 거다.  ...더는 더러워질 수 없는 느낌, 더는 모욕당할 수 
없는 평화...  그건 좋은 거야.  그리고 거기서부터 정말 우리는 시작하는 거야.
  나는 그가 낸 세권의 시집을 모두 읽었다.  모두가 그렇고 그런 옳은 
말씀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박삼일 동안 술에 절어서 
집에도 안 가고 잠도 안 자고 술만 마시는 그가 내뱉은 그 말이 내 가슴으로 
와서 닿았다.  나는 처음으로 그가 정말 시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 나는 또 생각하고 말았다.  정녕 이런 시궁창 같은 고통이 있고 난 
후에라야 우리는 시작할 수 있는 것인가...
  집앞의 술집에 들어서자 시인이 손을 들어 나를 반겼다.  벌써 오년째 같은 
소설을 고치고 있는 소설가와 안경을 쓴 평론가가 함께였다.  
  -문학사 정차장이 너 소설 안 준다고 투덜거리던데...  좀 썼어?
  시인이 물었다.  나는 오년째 같은 소설을 고치고 있는 소설가를 바라보며 
자신있게 대답했다.
  -아니!
  내 대답이 하도 의기양양해서인지 사람들이 함께 웃었다.  나도 웃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그들의 미소 뒤에, 그들의 미소가 막 
거두어지려는 찰나에 그들의 얼굴위로 떠오르는 상흔들...  나는 미소가 아니라 
미소 뒤에 그들에게 공통적으로 떠오르고야 마는 그 상흔들을 자꾸 보는 내가 
싫었다.  이런 걸 또 느끼려고 열두시가 다 된 시간에 빗속을 걸어온 것은 
아니었다.  어색한 기분 때문에 나는 안주바구니에 담긴 멸치만 축내고 있었다.  
자기는 마누라가 챙겨주니까 자신은 다른 사람을 챙겨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시인이 빈 멸치바구니를 놓칠 리가 없었다.  그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다 말고 
잠시 낭패한 표정을 짓더니, 생각을 바꿨는지 나비넥타이를 맨 웨이터를 불러 
아주 어눌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저씨, 여기 멸치만 조금 더 주실래요?
  -하나 더 시키세요. 멸치값이 요즘 아주 비싸거든요.
  그러면 그러죠, 뭐.  하고 사람 좋은 시인이 말하려고 하는데 내가 불쑥 
끼어들었다.
  -멸치값이 뭐가 비싸요?  오늘 시장에 가니까 천원에 세 바구니나 주던데...
  웨이터의 얼굴이 험악해지려는 순간 시인이 탁자 밑으로 가만히 팔을 뻗어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올랐어요.  멸치가 얼마나 비싼 줄 알아요?
  웨이터는 험악한 눈초리를 거두지는 않았지만 손님에게 최대한의 자제심을 
발휘하니까 그리 알라는 듯 다시 말했다.
  -안 비싸다니까요.  마른안주 한 접시에 팔천원이나 받으면서 그깟 거 좀 못 
줄 이유가 뭐예요?
  -이 아줌마가 술집에 와서 이게 무슨 소리야!
  웨이터가 다시 말했다.  그는 폭발하는 듯했다.  하기는 그도 피곤할 
것이었다.  열두시가 넘어도 창문을 검은 커튼으로 가리고 늦게까지 장사를 
하는 주인 때문에, 말도 안되는 주정을 하는 손님들 때문에, 멸치만 더 달라는 
얌체 같은 우리들 때문에 말이다.  시인은 이제 내 손을 힘을 주어 잡고 있었다.  
나는 시인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그 손을 뿌리쳤다.  
뿌리치면서 갑자기 팽팽한 저의가 내 아랫배를 긴장시키는 것을 느꼈다.
  -아줌마?  그래요.  아줌마가 술집에 와서 안주 비싸다는 소리 했어요.  
비싸지도 않은 멸치 한줌 갖고 비싸다고 거짓말하는 당신한데 따지는 거예요.  
왜요?  뭐가 잘못됐어요, 아저씨?
 결사적인 싸움이라도 한판 벌일 듯이 대어드는 내 얼굴을 몸으로 막으며 
시인이 마른안주 한 접시를 시켜버렸다.  그러자 나를 노려보던 웨이터가 
참아준다는 얼굴로 사라졌고, 시인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그래?  요즘 무슨 일 있니?  ...그만한 일로 목숨 걸 거 뭐 있어?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뱉은 목숨이라는 단어가 
내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았다.  그 말은 참으로 오래된 말인 듯이, 마치 슬픈 
전설이 배어 있는 듯이 느껴졌던 것이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좀 겸연쩍기도 
했으므로 나는 그냥 그가 따르는 맥주만 마셨다.  물론 아무 일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요 몇 달째 화를 내고 있었다.  왜 당신 글에는 전망이 없느냐고 
무심히 묻는 착한 독자들에게도 화가 났고, 내 글을 빨리빨리 읽어치우는 
평론가에게도 화가 났었다.  아니다.  완성되지도 못한 글들이 내 컴퓨터에 잔뜩 
들어 있는 것도 화가 났고, 그 글들을 불러내서 Delete 단추를 누르면 내가 며칠 
밤을 뒤척거리며 써놓은 글들이 일초도 안 되는 순간에 지워지는 것이 화가 
났으며, 더구나 그 글들을 지워놓고도 전혀 후회가 되지 않는 것에 결정적으로 
화가 났었다.  웨이터에게가 아니라 나는 그냥 무작정 화가나 있었던 것이다.  
시인은 가방을 뒤적여 작은 수첩을 꺼내들었다.
  그 수첩의 앞장에는 어딘가에서 곱게 오려내 풀로 붙인 듯한 싯구가 있었다.  
그는 손가락으로깨알같이 잔잔한 그 글씨들을 하나하나 짚어나가기 시작했다.
  -봐라, 이게 성 프란체스코의 기도란 거다, 임마.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용서받기보다는 용서하며...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반질반질 벌써 손때가 묻어버린 그 시인의 수첩 앞장이 내 눈에 와서 박혔다.  
그는 대체 언제부터, 얼마나 자주 저 앞장을 펼치고 일일이 손으로 글귀를 
짚어가며 저 구절을 ㅇ어주었을까 생각하니 콧등이 무거워졌고 이내 
시큰해졌다.  나는 그가 들이미는 수첩에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외면하지 말아, 이놈아.  이게 진리야!
  -무슨 진리가 그렇게 많아?  해탈했어?  형은 해탈해버린 거야?  시궁창에 
코박고 전도사같이 웅얼웅얼 기도하면서 해탈할 거야!
  내가 분위기를 깬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술자리에서 쓸데없이 분위기 깨는 
인간들을 가장 혐오하고 있었지만 나는 소리를 버럭 지로고 말았다.  시인이 
어색하게 입술을 훔치며 수첩을 닫았다.  그래서 나는 그냥 화를 내기로 했다.  
나는 이제 싫어져버린 것이었다.  서로 빙빙 돌려 말하기, 결정적인 사항들, 
예를 들면 생계는 어떻게 해? 라거나, 아직도 진행되는 그 재판 끝났어? 라거나, 
형이 그 운동단체에 기금을 내기 위해 저당잡혔던 집문서는 찾았어라거나, 형이 
끌려가던 날 중풍으로 쓰러진 아버님은 요즘 어떠셔...  하는 말들은 절대로 
내뱉지 않고...  서로서로 모른 척하기, 그래서 술자리에서는 재미있는 
말만하기...  서로 같은 상처를 지니고 있다는 내색은 절대로 안하기...  성 
프란체스코의 기도가 싫었던 것이 아니라, 해탈하고 싶어하는 그 시인의 
몸부림이 싫었던 게 아니라 말이다.  나는 시인을 외면하고 오년째 같은 소설을 
고치고 있는 소설가가 주는 잔을 받았다.  노동현장에서 수배를 받으면서 쓰기 
시작했다는 소설, 고치다 보니 이미 역사소설이 되어버린 노동소설을 쓰는 그는 
우스운 말로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의 
말에도 억지로 웃지 않았다.
  결국 분위기는 나 때문에 깨져서 우리들은 묵묵히 술만 마시다가 세시쯤 
술집을 나왔다.  비는 그쳐 있었다.  비에 젖은 텅 빈 아스팔트 위로 나트륨들이 
뿌옇게 어리고 있었다.  용산이요, 구의동이요, 사람들이 택시를 타고 사라지고 
나서 나와 시인 둘만 남았다.
  -...미안해요, 형...
  -괜찮아 임마, 다 그러면서 사는 거니...  포장마차 가서 한잔 더 할까?
  -아니...
  시인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하더니 우리 집까지 날 바래다주겠다고 
천천히 앞서 걸었다.  나도 그를 따라 나트륨들이 비 젖은 아스팔트 위로 
어리는 길을 걸어갔다.  가로 등에 비친 가로수 이파리에서 맑은 빗방울의 
여운들이 뚝, 뚝 떨어져내렸고 멀리, 비 그친 국립공원 숲속에서 소쩍새 
울음소리가 들렸다.
  -형, 소쩍새를 본 일이 있어요?
  -아니...  소쩍새는...  몰래 울잖아...  다른 새들 다 잘 때, 밤에만...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나는 소쩍새를 본 적이 있었다.  비가 
부슬부슬 뿌리던 난, 약수통을 달랑 들고 산으로 향하는 길에, '북한산의 
동물자원'이라는 게시판에 소쩍새는 부엉이와 나란히 사진으로 앉아 있었다.  
통통한 부엉이 옆에 앉아 있었기 때문일까, 나는 왠지 소쩍새가 저주받은 
부엉이처럼 느껴졌다.  이제 더는 부엉부엉 울지 못하고, 인간의 자음과 
모음으로는 더 흉내낼 수 없는 소리로 목을 쥐어짜며 꾸르륵 꾸욱꾹 우는 새...  
아마도 몰래 접근해서 소쩍새를 찾아낸 사진작가가 그를 찾아내고 플래쉬를 
터뜨리는 찰나, 소쩍새는 정확히 렌즈 쪽을 보고 있었는데, 나는 그 소쩍새의 
눈빛에서, 저주라는 단어가 함축하고 있을 법한 모든 말들, 그러니까 영원한 
갇힘, 풀어내지 못하고 쌓여만 가는 슬픔, 원망까지도 뚫고 나올 듯 아직도 
치밀어오르는 어떤 꿈...  같은 것들을 공연히 느끼고는, 왠지 비가 부슬부슬 
뿌리는 한적한 산길이 무서워져서 약수도 뜨지 않고 그대로 집으로 돌아와버린 
적이 있었던 것이다.
  침묵하며 우리 집 앞까지 와서 그는 내게 악수를 청하고는 껑충한 뒷모습을 
보이면서 사라졌다.  내 손에 아직 남아 있는 그의 손의 여운이 딱딱하게 
느껴졌다.  수배도 해제되었고 조사도 받았고 재판도 끝났지만, 게다가 밤 
세시까지 술을 마셨지만 그는 온몸의 긴장을 다는 풀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그가 어쩌면 집으로 돌아가기 저네 정말로 혼자 포장마차에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어쩌면 또 이박삼일 동안 술을 마실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저주받은 것처럼 다는 부드러워지지 않는다.  다는 풀어헤쳐지지 못하는 
것이다.  아마 그는 딱딱한 손으로 연필을 들고 성 프란체스코의 기도문이 적힌 
수첩을 꺼내서 깨알같이 메모를 할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죽는 날까지 시를 
쓸 것이었다.  왜냐하면,

    첫째날 오후 6시 20분
  김감독은 속도를 좀 줄였다.  벌써 다섯 번째 검문소였다.  헌병이 우리 
일행을 쓰윽 훑어보더니 가라는 손짓을 했다.  운전대를 잡은 김감독이 기어를 
바꾸어넣으며 속력을 냈고 우리는 더 북쪽을 향해서 달려나갔다.  의정부와 
포천 시내에서 생각보다 길이 많이 막혔기 때문에 우리는 또 늦어 있었다.  
가끔 우리 둘을 불러내서 낚시터로 네리고 가곤 하는 낚시광인 김감독은 좋은 
포인트를 놓칠까봐 초조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박과 나로 말하자면 그저 아무 
생각이 없었다.  머리를 짧게 깎은 수양버들이 차창을 스쳐가는 길에서 담배만 
피우고 있던 박이 새삼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그런데 대체 왜 이렇게 검문을 하는 거지요?"
  "우리가 젊으니까요."
  "그것도 그렇겠군요."
  그들은 선문답 같은 이야기를 간결하게 주고받으며 잠시 하하 웃었다.
  차창 곁으로 트럭이 천천히 언덕길을 오르고 있었다.  무엇을 그렇게 많이 
실었는지 푸른 비닐에 덮여 있는 내용물은 보이지 않았지만, 트럭은 우리 차를 
비껴 뒤로 멀어져 갔다.  김감독의 차는 이제는 거의 생산되지도 않는 
고물형이었지만 트럭보다는 그래도 나은 모양이었다.  트럭을 가볍게 스쳐 
오르막길을 다 오르고 나서 우리 차는 322번 지방도로 접어들었다.  낚시터가 
이제 가까워진 것이었다.  우리는 낚시가게 앞에 내려 지렁이와 케미라이트와 
라면을 샀다.  돌아보니 박이 캔맥주를 한아름 가지고 와서 계산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비포장길로 접어들어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긴 여름해가 먼산 위에 떠 
있었다.
  한탄강 지류인 그 강가는 언제 와도 좋았다.  마치 태초에 누군가가 
쇠스랑으로 긁어놓은 듯한 가파른 절벽들이 서 있고 그 아래로 잔잔한 물이 
푸르렀다.  토요일치고 한산한 편이었다.  자리를 잡고 나자 김감독이 서둘러 
낚싯대를 폈고, 박이 가지고 온 텐트를 강가 한쪽에 설치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과 여러 번 이곳에 왔지만 낚시를 한 일이 없었다.  그건 처음에 낚시터로 
따라오자마자 김이 가르쳐준 대로 지렁이를 꿰면서부터였다.  낚시의 뾰족한 
바늘이 지렁이의 몸을 관통했을 때 지렁이는 온몸을 동그르르 말았다.  내 
손끝으로 딱딱한 긴강감이 분명하게 전달되어왔다.  지렁이 자신은 아마도 그게 
저항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지렁이가 불쌍하다든가, 그건 잔인하다, 
그런 생각 때문에가 아니라 나는 그냥 지렁이의 그런 본능적인 저항들, 
결과적으로는 소용이 없는, 그래서 결국은 무모한 본능적인 저항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묵살해버리는 그 행위가 싫었을 뿐이었다.
  -그러면 대체 뭐하러 따라오는 거예요?
  언제나 낚시터에서 한켠에 않아만 있는 나를 보고 한 번은 김감독이 물었지만 
나는 그저, 라고 대답했다.  그후로 언제나 나는 낚시터에 오면 한켠에 앉아서 
맥주를 홀짝이며 그들이 낚시하는 것을 구경하곤 했었다.  하지만 그들은 
낚시를 갈 때마다 나를 불러내곤 했다.  한켠에 가만히 앉아만 있는 내 모습이 
이제는 그들에게도 그냥 익숙한 모양이었다.  나 역시 끼어들지 못하고 그저 
한켠에 앉아 있는 것에는 익숙했다.  예를 들어, 여자친구들과 동창회에서 만날 
때 남편에 대한 이야기, 시댁 이야기, 그리고 아이 이야기를 하며 깔깔거리다가 
가끔 그들이 나를 바라보았을 때, 그들의 눈빛에는 그러니까 이혼한 너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도 실례가 안 되겠지 하는 배려가 담겨 있었지만, 언제나 그럴 
때마다 나는 굳어지기 시작했었다.  아무 생각 없이 같이 웃고 있었을 
뿐이었는데, 갑자기 웃는 내 얼굴이 서걱거리는 드한 느낌들...  그럴 때 나는 
그들이 그어놓은 금 밖에 있는 사람이었다.  금밖에 밀려난 사람은 그러니 입을 
다물고 한켠에서 조심스레 웃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가끔 깊은 밤, 내게 
전화를 걸어오기도 했다.
  -미치겠어, 정말 이혼하고 싶어...  글세 우리 영미 아빠가 말이야...
  글을 쓰다가도, 라디오를 들으며 혼자 차를 마시다가도 그들의 전화를 받으면 
나는 그들의 결혼생활 속으로 끼어들었다.  함께 웃고 울고 그리고 
이야기해주고...  그럴 때 분명 나는 그들의 금 안에 있었다.  하지만 전화를 
끊고 나면 나는 다시 금 밖으로 밀려나왔다.  내가 금 밖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내게 전화를 건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같이 금 안에 있는 
친구들, 예를 들어 행복한 결혼생활을 자랑하는 친구에게 그들은 고통을 
호소하지는 않았었다.  아마도 내게는 하지 않는 즐거운 이야기들을 서로 
나눌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러고보니 어린시절 동네에 비행기 모양의 
놀이기구를 리어카에 싣고 오던 아저씨가 생각이 났다.  우리들은 그가 
나타나면 일제히 엄마에게 달려가 어렵게 십원씩 타내가지고는 그 놀이기구를 
타러 몰려갔다.  하지만 잠시 후, 그는 나를 번쩍 들어 놀이기구 밖에 
내려놓았다.  
  -안되겠구나 얘야, 너 또 저번처럼 멀미할라.
  더 타고 싶다고 떼를 쓰는 때도 있었지만, 나는 대개는 순순히 포기하곤 했다.  
실제로 멀미가 입안 가득히 몰려나와 있던 때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나는 그 리어카의 금 밖에서 아이들이 비행기 모양의 그 놀이기구를 
타고 빙글빙글 돌아가는 걸 구경했다.  순미는 무수운 듯이 입을 꼭 다물고 
있고, 숙자는 입을 헤벌린 채로 좋아서 죽을 지경이고...  경식이는 부웅부웅, 
정말 비행기처럼 소리를 지르고 있고...  금 밖에 서서, 하지만 금 언저리를 아주 
떠나지도 못하고 우두커니 서서 친구들이 탄 비행기에 파란 페인트가 조금 
벗겨진 것을 보는 일, 모형비행기 하나하나마다 씌여 있는 필리핀이라든가 
월남이라든가 태국이라든가, 우리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나라의 지명을 읽는 
일, 만일 내가 멀미를 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그 안에 들어가서 모형비행기가 
오르내릴 때의 짜릿한 재미만 기억해냈을 것이었다.  그러나 내 기억 속에는 
그런 것 대신, 나를 빼놓고 모형비행기를 타던 친구들의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 풍경과 그들의 표정, 지켜보고 있던 내 모습까지 말이다.  그래서 
그 시절을 회상하면 나는 언제나 그들과 함께 비행기를 타보기라도 한 듯이 
즐겁기도 한 것이다.  한 번은 순미처럼 무서운 듯이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내 
모습도 있고, 또 한 번은 좋아서 죽을 지경인 숙자처럼 타보기도 하고...  나는 
어쩌면 그때부터 소설을 쓰고 싶어했던 것은 아닐까.  영원히 술래가 된 것처럼 
금 밖을 서성이면서 그들이 그것을 타는 모습을 지켜보기...  그리고 그들처럼 
해 보는 것을 상상하기...  그래서 밖세 서 있는 자의 쓸쓸함과 안에 있는 
자들의 복닥거림을 엮어내보기...  그런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바로 
소설쓰기가 아니었을까?
  "...소설 한 권 읽고 이렇게 저 자신의 아픈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는다는 것이 
바보 같은 일이겠지요.  ...남편은 학교 선배였습니다.  제가 일학년 때 이미 
시위 주동을 해서 제적을 당했습니다.  사랑은 아마 제가 그의 약혼자로 등록을 
하고 옥바라지를 하면서부터였나봅니다.  그는 그 시절 젊은이라면 누구나 
그랬듯이 석방되고 나자 노동현장으로 떠날 준비를 했습니다.  사실을 
이야기하자면 저는 그가 자랑스러웠던 겁니다.  그래서 저는 내 자신이 하고 
싶었던 노동운동을 그에게 미루어놓고 대신 그가 노동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동물 외판원에서부터 서점 점원까지 
안해 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가 해고당한 후에는 그가 다니던 공장 앞에 
분식집을 차려서 회사 근처에 갈 수 없는 대신 제가 노동자들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첫아이를 유산한 것이 그 무렵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년 전 어느날 그는 느닷없이 큰 회사에 취직을 해버린 
겁니다.  이제 우리는 신도시에 분양받은 28평짜리 아파트에 삽니다.  아침이면 
그는 넥타이를 매고 출근을 합니다.  처음에 저를 만났을 때 그는 말했습니다.  
옳다고 믿는 걸 버리는 건 죄악이야...  취직을 하면서 그는 말했습니다.  좀더 
장기적으로 봐야해...  그런데 요즘 그는 말합니다.  올 여름엔 동남아로 한 번 
떠나보는 게 어떨까...  가끔 출근하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의 
뒷덜미를 낚아채고는 발아하듯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물어내, 내 세월, 
죽은 우리 애 물어내...  내가 가졌던 꿈 물어내!  ...하지만 저는 정녕 그를 
미워해야 합니까...  날마다 같은 일상이 반복됩니다.  아침에 남편을 출근시키고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나면, 설거지하고 집안 치우고...  하지만 저는 가끔씩 
중얼거려봅니다.  사랑이라든가, 행복이라든가, 그도 아니면 희망 같은...  이제는 
제게서 너무나 멀어져버린 그런 단어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그런 것들을 
버려가는 과정일까요.  하지만 당신의 책은 내게, 내가 그런 사실을 잊고 
살아가고 있다는 바로 그런 걸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조금씩 소설 공부를 
해나가고 있습니다.  저도 소설가가 될 수 있을까요.  ...가슴속에서 버둥거리는 
할말이 너무 많습니다."
  가끔씩 집이나 출판사로 배달되는 편지에 사람들은 그런 글귀를 보내오곤 
했다.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그녀들이 왜 이런 글을 내게 써 보냈을까, 하고 
나도 그녀들처럼 생각했다.  그녀들 입에서뿐만 아니라 내 입에서조차 그런 
말들은 사라진 지 오래가 아니던가.  그런데 그들은 말한다.  당신의 글은 내가 
그런 사실을 잊고 살아가고 있다는 바로 그런 걸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하고.
  일전에 소설을 쓴다는 후배가 작품을 가지고 나를 찾아온 적이 있었다.  
작품에 대해 좀 이야기를 하고 나서 내가 물었다.
  -방송국 구성작가 일을 하면 생활은 넉넉할 텐데 뭐하러 소설쓰려고 이 
고생이니?
  그녀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선배님은 잡문 써서 돈 잘 버는 사람이 그럼 부러우세요?
  그녀는 조금의 의심도 갖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그 글이 잡문이라면, 
그렇다면 소설은 본문이라는 말일까...  웃음이 나왔지만 바라보는 후배의 
얼굴이 하도 진지해서 나는 그냥 입을 다물고 말았다.
  해가 절벽의 끝에 손톱처럼 걸려 있었다.
  "특별히 예민한 찌니까 대어 한 마리 낚겠네요.  매운탕 준비난 좀 해주세요."
  김감독이 긴 찌에 케미라이트를 끼우며 말했다.
  이제 어둠이 내리면 그는 저 녹색으로 빛나는 케미라이트 찌에 온 신경을 
모으고 앉아 있어야 할 것이다.  밤이 내리는 저 물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아마 저 케미라이트 찌만이 그에게 전해줄 것이니까 말이다.  
붕어가 살금살금 다가와 일밀리미터쯤 미끼를 건드린다 해도 예민한 찌는 춤을 
춘다.  그걸 보면 사람들은 알아차린다.  붕어가 조금씩 건드리고 있구나... 
붕어가 일미리리미터를 건드리는 진실과 그것이 일밀리미터의 움직임이라는 
진실을 알아차리는 그 사이에는 그 움직임의 열 배 스무 배로 춤을 추어야 하는 
찌가 있다.  무엇이 변했을까, 사람들은 어떻게 삶을 바꾸었을까.  십년 사이...  
아주 적은 일들이 일어났을 뿐이다.  자가용으로 출근하는 사람들이 늘어서 
길이 더 막히게 되었고, 신문의 일면기사의 주제가 바뀌게 되었고, 가끔은 
노래방에 가고, 자주는 불집에 가서 좀 덜 정치적인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고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십년이 지난 지금에 나는 춤을 추는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열 배, 스무 배 비틀거리다가 시궁창에 빠져서는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정말 시작이 아닌까, 하고.  그러면 나는 묻고 싶어지는 것이다.  
뭘?  대체 뭘?
  어둠이 내리면서 발밑에서 찰싹이던 물결 소리도 잦아들었다.  사방이 
고요해지기 시작했고 동쪽 하늘은 희미한 은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나는 
어둠이 내리면 내릴수록 더 화해져오는 케미라이트 찌를 바라보며 여전히 
한켠에 않아 있었다.  
  "보름달인가."
  김감독이 중얼거렸다.

    첫째날 밤 9시 45분
  보름달이었다.  비탈마다 저희들끼리 모여 한줌씩 피어 있는 개망초 꽃들이 
환하게 보이는 아름다운 밤이었다.  하지만 박과 김은, 둘 다 거의 입질조차 
받지 못하고 있었다.  원래 달이 밝으면 고기가 잘 잘히지 않는다는 상식을 
주워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건 좀 심한 것 같았다.
  "참 찌가 말뚝이네, 말뚝."
  김감독이 발밑에 담배를 비벼끄며 말했다.  나는 담배를 하나 물고 수면 위를 
바라보았다.  달빛이 호수 위에서 잘게 부서지고 있었다.  사방이 환해서 나와 
떨어져 앉은 박이 고개를 좀 치켜들고 노래를 흥얼 거리는 모습까지도 잘 
보였다.
  김감독은 부지런히 떡밥을 갈아끼우고 또 끼우고 있었다.  언젠가 우리를 
처음 낚시에 데리고 가서 그는 말했었다.
  -말하자면 낚시는 기다림입니다.  기다리면 고기는 와요.
  내가 보기에도 그는 기다림에 능숙한 사람이었다.  내가 각색을 해준일이 
있는 90분짜리 영화를 무려 2년 동안 찍어댔던 사람이었다.  크랭크 인만 
해놓고 제작자가 갑자기 돈이 없다고 해서 일년, 그 다음엔 주가가 오른 주연 
여배우가 개런티가 적은데다가 대학을 못 다닌 자신의 열등감을 자극하는 
영화라고 연속 펑크를 내는 바람에 일년...  그래서 내가 써준 시나리오의 반도 
못 찍은 그 영화를, 주가가 오른 주연 여배우의 명성만 믿고 제작자가 
개봉해버렸다.  그때 극장 앞에서 그는 몹시 충혈된 눈으로 사람들과 악수를 
하고 있었다.
  그 시간 이후로 삼년이 지났건만 그는 여전히 시나리오를 들고 고치고 또 
영화사를 기웃거리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관객동원이 적었던 영화를 찍은 
감독을 다시 채용해줄 제작자를 만나기는 어려웠다.  영화관에 잠시 
머물러보았던 나는 그가 무슨 말을 들었을지 짐작이 갔다
  -예술?  그거 좋지...  그렇다고 지금 이 판에서 설마 예술하자는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겠지?
  물론 그가 삼년 도안의 공백을 가지게 된 데에는 내 탓도 좀 있었다.  내 
소설을 영화화해보겠다고 그는 나를 어떤 영화사 사장 앞에 데리고 간 적이 
있었다.  사장이 말했다.
  -물론, 저번에 우리가 영화화했던 그 유명 교수의 밤의 여관은 다르죠.  
막말루다가, 문장도 안되는 소설이잖아요.  저도 대학물 먹은 놈인데 그거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그건 유명해요...  간판 좌악 붙여놓으면 지나가던 
리어카꾼도 알아본다 이겁니다.  물론 선생님 작품이 문학성, 뭐 그런 거야 
있겠지요.  하지만 작품표가 그 작품의 반밖에 안 되는 건 이해하셔야 돼요.
  그가 문학성, 뭐 그런 거야 하고 말했을 때 나는 일어나서 그 자리를 
뛰쳐나오고 싶었다.  당신 작품이 별로 훌륭한 것이 못 된다고 말했으면 
뛰쳐나오고 싶다는 충동까지는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김감독이 연신 담배만 
피우면서 초조하게 나를 바라보다가 힘없이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나는 
그냥 그 자리에 앉아서 사장의 말을 다 들었다.
  -방송국에선 더해요.  이번에 선생님 또래 작가 것은 아마 한 권에 백오십 
받았다죠?  그게 근수로 달아서 판 거지 뭡니까.  우린 적어도 그렇게는 
안합니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운 채로 나는 생각했다.  
뭐하러 쓰나, 뭐하러 고치나, 경기라도 들린 것처럼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또 
고치고, 또 지우고 다시 써보고...  혼자 수유리까지 와서 이 짓을 하고 있나...  
그렇게 쓴 걸 들고 가서 돈 몇푼-물론 내게는 몇푼이 아니었지만-더 
받아보자고, 그래서 잡지에 연속 펑크를 내는 바람에 밀린 적금도 붓고 빚도 
갚아보자고, 정말 그러려고 문학성, 뭐 그런 거야...  그런 소리를 듣고 와야 
하나?  그런 소리를 듣고도 내 또래의 작가는 자신의 책을 팔았나?  그도 
나처럼 생각했겠지.  집으로 돌아와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어쩌면 울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제, 문제는 리얼리즘이 아니라, 돈이 되었나, 그런가...
  물론 작품료가 결정되기도 전에 그 사장은 거대한 액수를 주고 들여온 외화의 
흥행 실패로 부도를 내버렸으므로 일은 거기서 끝났다.  하지만 그래도 그는 
기다린다.  그는 쓰고 또 고친다.  그리고 가끔 밤늦게 우리 집에 전화를 거는 
것이다.
  -여가가 어디냐구요?  글세 여기는 도대체 어딜까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는 것도 있습니다.  뭐냐구요?...  하하, 한마디로 쫓겨났다 이겁니다.  
마누라가 애들 피아노 가르쳐서 번 생활비만 축내는데 뭐 잘났다고 
큰소리치겠습니까.  보십시오 작가 양반, 저 그냥 벗기는 영화 할랍니다...  그도 
아니면 유치한 사랑 이야기라도 찍을랍니다...  아니죠, 요즘은 섹스 코미디가 
유행이랍니다.  그거 할랍니다.  두고 보세요, 전 합니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그런 작품을 찍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는 떡밥을 갈고 
있는 것이다.  그는 너무 환해서 고기가 잡히지 않는 이 보름밤에 월척이라도 
기다리는 것인지 모른다.
  그때 갑자기 먼 산쪽이 환하게 밝아지면서 온 산이 찌렁찌렁 울렸다.  술에 
적당히 취한 얼굴로 노래를 흥얼거리던 박과 떡밥을 갈고 있던 김과 그리고 
내가 일제히 시선을 하늘에 던졌다.
  조명탄이었다.  마치 축포라도 터뜨리는 것처럼 하늘이 환해졌고 불빛들이 
부서져서 검은 하늘 위로 천천히 흩어져내리고 있었다.  우리가 지나쳐왔던 
가까운 군부대에서 포격훈련을 하는 모양이었다.  다시 조명탄이 터졌다.  
그리고 포성.  산은 포성이 한 번 울릴 때마다 포성보다 오래 울었고, 산의 
울음소리는 절벽이 이어진 강 언저리를 따라 길게 흘러갔다.  김이 나싯대를 
늘어뜨린 채 허탈한 얼굴로 울고 있는 산과, 울음소리에 뒤척이는 긴 절벽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어, 혹시 전쟁이 난 건 아닐까요?"
  박이, 자신을 바보 취급하지 말아주었으면 좋겠다는 어투로 천천히, 그러나 
상당히 실제적인 두려움이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김이 피식하고 웃었다.
  "보기보다 겁이 많으시군요.  훈련이에요.  군대 있을 때 가끔 밤에 포격훈련 
해봐서 알지요."
  그래도 박은 안심이 되지 않는 눈치였다.
  "그렇다면 혹시 잘못해서 이리로 포탄이 날아오는 건 아닐까요?  재수가 
없으면...  혹시라도."
  김이 하하, 웃다가 다시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죠.  재수가 없으면 무슨 일은 못 당하겠습니까.  그러니 와서 
소주나 한잔 합시다."
  우리들은 아예 낚시를 포기하고 둘러앉아 깡통째 데운 참치 안주에 소주를 
마셨다.  말하자면 그들 모두 나처럼 한켠으로 밀려난 것이었다.  지글거리며 
끊는 참치깡통을 우리 앞으로 밀어주며 김이 소주를 따랐다.
  "그런데 김감독님, 영화 왜 안 들어가세요?"
  박이 물었다.  김은 소주를 박에게 건네며 피식 웃었다.
  "왜냐구요...  글쎄...  얼마 전에 어떤 영화학교에서 나보고 강연을 좀 
해달라고 하더군요.  가서 이야기를 하고 나오는데...  참 그랬어요.  난 
학생들에게 어떻게 하면 좋은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 하는 이야기를 
해주었거든요.  다들 참 열심히 들습디다.  하지만 강의를 마치고 난 다음에 
나는 내가 결정적으로 글러먹었다는 걸 알았어요.  막말로 요번에 깐트에서 
그랑프리 탄 작품을 그대로 베껴서 충무로에 나가보세요.  제작자들은 아마 
말할 거예요.  어디서 이렇게 돈도 안되는 시나리오를 들고 왔어..."
  제 말이 우스웠는지 그는 혼자서 웃었다.  우리들은 웃지 않았다.  그는 
담배를 물며 아직도 포성이 울리는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차라리 그림을 그렸더라면 좋았을 뻔했어요.  그러면 아무도 사주지 않아도 
혹시 내게 재능만 있다면 자식새끼들은 먹고 살 거 아닙니까.  제작자가 자금을 
대주지 않는 한 내 머릿속에 세계를 감동시킬 만한 영화가 한 편 들어 있다 
해도 내가 죽으면 그걸로 끝입니다.  아니죠, 죽기 전에 이미 끝이죠.  그런데 
박형은 왜 음반 안 내세요?"
  화살이 제게로 돌아오자 박은 좀 당황하는 듯하더닌 갑자기 큰 소리로 
웃었다.
  "할 거예요.  인기가수들 녹음 때문에 스케줄이 자꾸 뒤로 밀려요...  곧 하게 
되겠조...  그런데 글쓰는 사람들은 좋겠어요, 종이하고 연필만 있으면 되니까 
말이죠.  게다가 출판사 사장들은 그래도 트였잖아요?  그런데 왜 요즘은 소설 
발표 안하세요?"
  마치 돌아가면서 소견발표라도 하는 시간처럼 그들이 내게 물었다.  나는 포
성보다 길게 우는 산을 바라보면서 잠시 머뭇거렸다.  왜냐하면요, 왜냐하면...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출판사 사장이 장사 안되는 작품이라고 딴지를 거는 것도 아니고, 유명 작가
들 때문에 내 소설이 안 실리는 것도 아닌데 왜...  나는 갑자기 그들에게 미안
해졌다.  박의 말대로 자본주의사회에서 소설은 가장 원가가 싸게 먹히는 예술
일 수도 있었다.  역으로 자본가들을 향해 마음놓고 비판을 해댈 수도 있는 것
이다.  하지만 나는 문득 아까 우리가 차를 타고 오던 길에 본 그 무거운 트럭
을 생각했다.  낑낑거리며 오르막길을 오르고 있는 트럭...  우리 차기 가볍게 그 
곁을 스치는 동안 트럭은 겨우겨우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무거워서 정말 미안
하다는 듯 오른쪽으로 비켜서서 조심조심 앞으로, 아니 앞으로 나가는 것이 아
니라 뒤로 밀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 같던 그 트럭...  짐을 너무 많이 
실은 탓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적재정량보다 너무 많이 욕심을 부렸는지도 
모른다고.  아니다,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다.  그래선 나는 농담으로 대처하기로 
했다.
   왜냐하면 우린 소쩍새들이거든요... 
  잘은 모르겠지만 들은 일이 있다는 얼굴로 박이 하하, 웃었고 김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나로 말하면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돌연한 감정이었다.  웃던 박이 입술을 천천히 다물었다.
   죄송합니다. 
  나는 천천히 말하고 일어나 먼저 텐트로 들어왔다.  대체 왜 이러는건지 나도 
알 수 없었다.  침낭에 얼굴을 묻자 내 목구멍에서 자음과 모음으로 표현할 수 
없는 꺼억꺽 소리가 밀려나왔다.  일제의 감옥에서 죽었던 어떤 시인의 말대로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정말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을까.  그 
시인은 말했다.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 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다.  
바람이 자꾸 부는데... 펄럭이는 텐트자락을 훤하게 밝히며 밖에서는 연신 
조명탄이 터졌고 그리고 포성이 들렸다.  그러고 나면 포성소리보다 오래오래 
산도 따라 울었다.

    둘째날 새벽 5시 2분
  우리들은 쫓기고 있었던 것 같다.  도서관 앞을 달려가는데 같이 도망치던 
친구가 바람처럼 뒤로 끌려나갔다.  돌아보니 그는 검은 옷을 입은 다섯 명에게 
둘러싸여 입을 틀어막히고 있었다.  모퉁이를 돌자 세워놓은 자동차가 보였고, 
요란한 총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자동차를 향해 뛰었다.  
  -어서 타!
  시궁창에 빠져서 군화를 신은 사람들에게 등을 짓눌린 채로 시인이 외쳤다.  
내가 올라타자 차는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전혀 운전을 할 줄 몰랐다.  
그런데 차는 움직이고 있는 것이었다.  다시 모퉁이를 돌자 가파르고 높은 
계단이 나왔다.  나는 사십오도나 되는 각도의 오므막계단으로 차를 몰아붙였다.  
차는 올라가고 있었다.  나는 운전을 할 줄 모르는데, 아아, 어쩌자고 이 가파른 
길을, 길도 아닌 계단을... 어디로 가야 하죠? 어디로? 내가 묻자 오년 동안 같은 
글을 고치고 있는 소설가가 다시 대답했다.
  -표지판을 좀 보렴...
  나는 표지판을 보고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핸들을 꺽었다.  나는 운전을 전혀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차는 달리고 있었다.  이번엔 거의 구십도의 
경사였다.  나는 죽을 힘을 다해 엑셀레이터를 밟았다.  차는 그저 떨어지지 
않은 채 제자리걸음이었다.  하지만 언제 떨어져내릴지 모르는 일이었다.  
떨어져서 시궁창에 처박히게 될지 모른다.  나는 죽음보다 그 시궁창이 더 
무서웠다.  그 떨어지는 맹렬함, 이것이 추락이구나 생각하면서 떨어져내려야 
하는 그 순간을 인정해야 하는 그것이 두려웠다.  기를 쓰고 액셀레이터를 
밟아대면서 문득 여기가 어딜까 나는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맙소사, 나는 
표지판 위로 차를 몰아왔던 것이다.  길이 아니라, 길을 표시해놓은 표지판 
그위로...  
  깨어보니 텐트 밖이 푸르스름했다.  악몽을 꾼 모양이었다.  또 시작이구난 
하는 생각도 들었다.  가끔씩 연달아서 나는 이런 종류의 악몽을 꾸곤 했다.  
어떤 날은 악몽을 꿀까봐 무서워서 잠자리에 들지 못하는 날도 있었다.  꿈 
자체가 무서운 게 아니라 그 반복이 두려웠다.  갑자기 나는 낯선 나라에 서 
있고 사람들은 내가 알 수 없는 언어로 이야기하고 있을 때, 여보세요 여기가 
어디죠, 전 어디로 가야 하나요, 난 여기로 오겠다고 한 번도 생각해본 일도 
없어요...  전혀 통하지 않는 언어로 혼자 중얼거리는 꿈...  길이 멀고 가파르고 
험한 꿈, 그중에서도 특히 많이 반복되는 것이 운전에 관한 꿈이었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다만 떨어져내리지 않으려고 죽을 힘을 다해 올라가는 꿈...  하지만 
오늘의 것은 그중 최악이었다.  표지판으로 차를 몰고 가다니...  물론 현실의 
나는 운전을 할 줄 알았다.  차를 몰고 고속도로로 나가본 경험도 있다.  그런데 
꿈속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나는 전혀 운전을 할 줄 모른다...  전혀...
  옆자리에서 박이 코를 골고 있었다.  연이틀째 술을 마신 탓이었는지 속이 
몹시 쓰렸다.  위장이 수세미가 된 채로 푸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시계를 들여다보며 텐트 밖으로 나왔다.
  사방에서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풍경는 하얀 안개의 망사 속에서 아주 
포근해 보였다.  강은 쉴새없이 안개를 피워올리고, 나는 나른한 그 안개에 싸여 
있었다.  그렇다면 밤의 포성은, 주책처럼 울어버린 내 모습은 모두 
꿈이었을까...
  안개가 덮인 새벽의 고요 속에서 작게 파문 이는 물결 소리가 들렸다.  김은 
낚싯대를 던지고 나서 나를 보더니 손짓을 해댔다.  엔간한 사람이군, 생각하며 
가까이 다가가자 그는 구수한 냄새가 나는 커피잔을 내게 내밀었다.
   안 주무셨어요? 
  내가 커피를 위장약과 함께 삼키고 나서 물었다.  그는 찌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씨익 웃었다.
   꿈을 꾸다가 금방 깼어요. 
   꿈이오? 
  내가 묻자 그는 낚싯대를 낚아챘다.  초릿대 끝이 휘이익 소리가 나도록 
휘어지고 있었다.  큰놈인 것 같았다.
   거 보세요, 기다리면 고기는 온다고 했잖아요.  뜰채를! 
  나는 엉거주춤 뜰채를 집어들었다.  그는 용을 쓰고 있었다.  힘을 쓰며 
낚싯대를 세우고 수면을 응시하는 그의 얼굴은 아주 비장해 보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 마치 물속에 숨어 있다가 튀어오르는 작은 새처럼 안개 어린 
수면에서 찌가 퉁겨져나왔다.  뜰채를 들고 있는 나를 향해 김이 낭패한 얼굴을 
지어 보였다.
   수초에 걸렸어요...  큰놈이었는데... 
  그는 낚싯대 끝에 달려나온 검푸른 수초더미를 떼어내며 허탈하게 말했다.  
낚시바늘까지 부러뜨리고 고기는 도망을 간 모양이었다.  허탈한 표정이었지만 
김은 찬찬히 부러진 바늘을 떼어내고 새로운 바늘로 채비를 바꾸며 말했다.
   꿈에 말예요.  갑자기 깡패들이 달려오더니 수배자를 내놓으라는 거예요.  
무조건 도망쳤조.  가다보니까 또 깡패들...  밤새 도망치는 꿈이었죠.  원래 
꿈을 잘 안 꾸는 편인데...  난 수배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도 못한 
사람인데...  참 이상도 하지. 
  이상한 일이라는 그의 말이 끝나기 전에 또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안개를 뒤흔드는 것 같은 비명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처음엔 그것의 
발신지가 어딘인지 알 수 없었으나 곧 그것이 우리 텐트 안에서 박이 지르는 
소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김이 갈아끼우고 있던 바늘을 팽개치고 텐트로 
달려갔다.  나 역시 일어나 텐트로 갔다.
   무슨 꿈을 그리 요란하게 꿔요? 
  가까이 다가가자 텐트 안으로 들어간 김의 소리가 들리고 중얼거리는 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그쪽도 그저 꿈이었는 모양이었다.  
   이상한 일이네요...  귀국한 이래 처음이에요.  미국 간 초기에는 가끔 
그러기도 했는데... 
   나와서 커피 한잔 해요.  이게 다 고기가 안 잡히는 탓이야... 
  김과 박이 텐트 밖으로 나왔다.  박의 얼굴은 몹시 해쓱해 보였다.  서둘러 
내가 버너에 불을 피우고 커피를 끊여 내밀자 박이 그것을 받아들고 이마의 
땀을 닦았다.  
   동갑인 고종사촌이 그때 죽었거든요.  난 그저 소식만 들었댔는데...  왜 그 
장면이 마치 영화처럼... 
  박은 눈을 깜빡거리며 담배를 피워물었다.  꿈...  미국에 가서 그는 다른 꿈을 
꾸었다고 했다.  지리상의 거리가 멀어지면 꿈조차 달라질 수 있다는 걸 그는 
알았다고 했다.  그런데 그는 돌아왔다.  돌아와서 인기가수에게 녹음순서를 
자꾸 밀리면서 한달째 피아노엔 손도 못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는 고작 
따라온 낚시터에서 포탄소리 때문에 낚시를 망치고, 그리고 십몇년 전에 
잊었다고 생각한 일을 악몽 속에서 다시 만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정말 
이상했다.  꿈을 잘 안 꾸는 김이 꾼 꿈과 십몇년 전의 일을 다시 만나는 박과 
최악의 악몽을 꾼 나...
   가만, 혹시...  포탄소리 때문은 아닐까요? 
  김이 낚시바늘을 바꿔 끼우는 것도 잊어버리고 말했다.
   포탄소리가 왜요?  두 분도 같은 꿈을 꾸셨나요? 
  박의 질문을 들은 김이 정말?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을 때,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싸늘한 새벽 냉기가 내 옷속으로 파고드는 
것만 같아서 나는 단추도 없는 앞자락을 자꾸만 여몄다.
   정말 이상한 일이군요. 
  박이 다시 가볍게 진저리를 치며 말했다.
  
    셋째날 새벽 3시 00분
  자다가 나는 깨어났다.  악몽은 꾸지 않았다.  집앞 골목의 방범등 불 및 
때문에 방안의 윤곽이 잘 드러나 보였다.  화장품이 어지러이 놓여 있는 화장대, 
달력 그리고 벽에 걸린 일정표...  마감일이라고 쓴 날짜에는 붉은 사인펜으로 
X표가 그려져 있었다.  나는 주섬주섬 일어나 책상 앞으로 갔다.  아직도 
위이이잉 소리를 내며 컴퓨터가 돌아가고 있었다.  어젯밤에 낚시터에서 돌아와 
글을 쓰려고 낑낑대다가 그냥 잠들어버린 일이 떠올랐다.  그런데 왜 컴퓨터를 
꺼놓지 않았을까...  마감일은 지났지만 나는 아직도 쓰려고 한단 말일까?  무슨 
글을 더 쥐어짤 거라고 생각했길래 나는 이것을 꺼놓지도 않았단 말인지, 
그렇다면 컴퓨터는 내가 잠이 든 동안에도 계속 모터를 돌려가면서 커서를 
깜박거리고 있었단 말일까?
  책상 위에는 편지가 놓여 있었다.  이번에는 인천이 발신지로 되어있는 편지...  
나는 그것을 집어들었다.
   저는 한 대학에서 총여학생회장직을 맡고 있는 여학생입니다.  선생님 글을 
읽고 나서 다시 한 번 대체  무엇을 할 것인가 에 대해서 오래 생각했습니다.  
가끔 선생님 또래의 선배님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차라리 그때는 얼마나 
행복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어떤 학자의 말대로 그때는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어내던  그런 
시절은 아니었을까 하고 말입니다.  밤 세시, 제 방 창밖으로 아직도 별은 
빛나지만...  별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않습니다.  멀고 희미하게 반짝이고 
있을 뿐.  이제 저는 제가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것이 
혼돈입니다.
  추신. 지금 곰곰 생각해보니 저는 이제 겨우 스물두살입니다. 
  나는 편지를 책상서랍에 집어넣었다.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밤 세 시...  
무엇이 이 밤에 독자들로 하여금 얼굴도 모르는 내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게 
하는지, 무엇이 후배로 하여금 소설이야말로 잡문이 아니라고 그토록 결연히 
선언하게 하는 것인지, 대체 무슨 허깨비가 노동소설을 쓰던 그 소설가로 
하여금 오년째 같은 소설을 고치고 또 고치게 하는지, 시궁창에서라도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속삭이게 하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더구나 잠에서 깨어난 
나를, 마치 너무나 중요한 일을 하지 못하고 깜빡 잠이 들었던 사람처럼 
허둥지둥 일어나게 해서 컴퓨터 앞으로 밀어붙이는 것일까...  이 밤, 이 캄캄한 
밤 세시.
  나는 다시 컴퓨터를 마주보았다.  길쭉하고 네모난 커서는 연신 깜박이면서 
내게 말하는 듯했다.  길을 찾아봐, 찾을 수 있다, 없다, 있다, 없다, 
있다없다있다...
  나는 의자를 돌려 깜박이는 커서를 외면하고 읽다 만 책을 집어들었다.  때로 
글쓰기가 힘겨울 때 글읽기처럼 쉬운 도피는 없었다.  몇 달전에 사놓고 반쯤 
익은 책은 그런대로 편안했다.  하지만 구호야말로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세대들이 있다는 글귀가 불현 듯 눈에 들어왔다.
   문학주의와 운동주의에서 갈등하느라고 그나마 여유가 있었던 유신세대도 
아닌, 살육과 절망의 광주세대 의 이야기를, 4.19세대인 평론가는 6.25세대이자 
월남세대인 한 노작가와의 대화를 통해 간결하게 적고 있었다.
  -살육과 절만뿐인 세대거든요...  광주세대에겐 문학이란 무조건 타기해야 될 
것이지요.
  나는 급하게 책을 덮었다.  정말 살육과 절망만이 가득 찬 글을 읽고 난 
위처럼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언젠가 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말한 적이 있었다.
  -예, 저는 81학번입니다.  우리가 입학했을 때 이미 광주는 끝나 있었지만 
우리는 한 번도 광주를 끝낼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저희는 
광주세대라고나 할까요.  ...지난 십년, 우리에게는 참 많은 일들이 
일어났더랬습니다.  하지만 이제 저는 그만 80년대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나는 그때 아마 감히, 생글거리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자 한 소녀가 울었다.  
술자리에서 우연히 만난, 통일의 꽃이라 불리는 그녀는 내가, 그녀의 오빠이자 
나의 동기였으며 군대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한 청년의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울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를 우러러보던 다른 후배들이 갑작스러운 그녀의 
울음에 몹시 당황하고 있었다.  그녀는 말했다.
  -감옥에서 나와보니 아무도 오빠 이야기를 하지 않아요.  난 다들 오빠를...  
이제는 고만 잊은 줄만 알았는데...
  나에게 있어서 그녀는 눔물을 떨구던 그 순간에 피어나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이제는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으려는 오빠를, 오빠의 죽음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더욱 꽃인지도 몰랐다.  눈물을 떨구고 피어나는 꽃...  
언젠가 그녀도 잊혀질지 모르지만, 잊혀져서 간결하게 정리될지도 모르지만, 
잊혀졌다고 해서 꽃이, 꽃이 아닌 것은 아니었다.  꽃잎이 지고 나서도 뿌리와 
줄기와 싱싱한 이파리가 남아 있는 한, 아니, 그 이파리마저 지고 흰눈에 덮여 
줄기의 형체조차 의미한 겨울날에도 우리가 장미를 장미라고 부르듯이 말이다.
  멀리서 소쩍새의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천천히 다시 
컴퓨터를 마주보았다.  몰랐던 것이 아니었다.  일전에 내게 편지를 보내온 한 
주부의 말처럼 가슴속에는 쓰고 싶은 것들이 버둥버둥거리고 있었지만 그것을 
꿰어나갈 삶을 나는 찾지 못하고 있었다.  글이 아니라 내 삶이 엄망진창인 
것이다.  내가 정말 화를 내고 있었던 것은 내 글에 대해서가 아니라 내 삶에 
대해서였다.  그러니 우리는 정말 살육과 절망에 가득 차 있던 세대들이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구호를 예술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고작 한줌의 멸치 
때문에 레스토랑의 보이와 결사적인 싸움이나 벌이려고 하고, 죄없는 시인에게 
버럭 소리를 질러댔던 걸 생각하면 그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나의 꿈이 
경고했던 것처럼 나는 길을 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길을 표시해놓은 표지판 
에서 내려와 길을 가기 시작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제작자 때문에 영화를 
찍지 못하는 감독도 아니고, 인기가수 때문에 녹음이 밀리는 작곡가도 아닌, 
소설가인 내가 말이다.  표지판 위에 그림으로 그려놓은 매끄러운 표지가 
아니라 진짜 길, 울퉁불퉁하고 가파르고 힘겨운 진짜 길을, 내가 걷기 전에 이미 
그 길이 살육과 절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해도,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길이라면 길 아닌 곳으로 도망치지 말고, 타박타박이라도 걸어서 넘어가야 
하는지도 모른다.  진짜 길을 가는 사람에게 표지판은 더 이상 악몽이 아니라 
밤하늘에서 빛나는 별의 지도가 될 테니까 말이다.
  나는 마치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의 걸음걸이처럼 조심스럽게 천천히 두 손을 
자판 위에 놓고 두드려보았다.  어쩌면 며칠 후 또다시 자다가 벌떡 일어나 
Delete라는 단추를 누를지도 모르겠지만, 누르기만 하면 머리가 모자라는 충실한 
하인처럼 컴퓨터는 일초도 안 되어서 이 모든 걸 지워버릴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는 시작해보는 것이다.  내가 꾸는 그 악몽 같은 꿈들, 꿈에서 
깨어나도 괴로운 90년대의 사람들, 그리하여 이제 90년대라는 금 밖에 서서 
나는 다시 들여다보는 것이다.  우리의 꿈조차 지배하면서 아직도 건재한, 
추억보다 선명하게 남은 배경들, 헤쎄를 익고 김동리도 읽고 바르뜨와 
바슐라르도 읽었지만 구호가 바로 작품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살육과 
절망만이 가득한 그 때, 그 배경에 서 있던 그들, 젊었던 그들, 젊었던, 그들에 
대하여...  정녕 그것은 그저 꿈을 꾸던 사람들에 대한 꿈일 뿐일까.
<1993, 창작과비평 가을호>


         인간에 대한 예의
  데스크가 변덕을 부린 것이 이해가 갈 만큼 이민자는 확실히 매력적인 
여자였다.  그녀가 한국에 오면 거처하곤 하는 경기도 남쪽의 어는 어름으로 
찾아갔을 때 그녀는 막 아침산책에서 돌아오고 있었다.  키가 일미터 
오십오센티쯤 될까, 생머리를 질끈 하나로 묶고, 풀을 먹이지 않은 부드러운 
아이보리색 광목바지에 가지색 순모스웨터를 풍성하게 걸친 그녀는 들꽃들이 
싱싱하게 피어나는 마당에 서 있었다.  변덕이 심한 봄날씨가 이러지고 있던 
무렵이었다.  며칠은 마치 초여름처럼 성급하게 더워서 그저 별 생각 없이 
재킷을 잡지사에 걸쳐놓고 블라우스 차림으로 취재에 나섰던 것인데, 차에서 
내리자마자 섬뜩한 한기를 품은 바람이 사정없이 몰아쳐와서 그 집 울타리 한 
켠에 서 있는 라일락의 보랏빛조차 입술이 파랗게 질린 것 같게 느껴졌다.  집 
뒤쪽 가까운 골짜기의 뽀얀 봄빛도, 생나무울타리 한켜에 선 수양벚나무의 환한 
빛, 산목련나무의 눈부신 백색, 겹벚나무의 소박한 분홍빛조차도 아직 차가운 
봄바람 앞에서 그저 가엾이 떨고 있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 나무들 앞에서 
우리를 맞이하는 그 나무들보다 키가 작은, 왜소한 몸집의 이민자는 마치 그 
바람 속에서 혼자 피어난 들꽃같이 꿋꿋하고 맑아 보였다.  바람과 봄날의 
변덕스런 한기와 그리고 마흔여덟의 나이 조차도 어쩌면 그녀를 비켜가게 하는 
재주를 가진 것처럼, 그녀의 첫 인상은 뭐랄까, 독특하고 어쩌면 신비했다.  
그건 그녀가 우리-사진기자와 나-를 맞아들였던 마치 동화에서나 나올 것 같은 
아주 독특한 통나무집이 주는 인상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넑은 나무마루는 
오래도록 들기람이라도 먹인 듯 은은하게 검정고동색으로 빛나고 있었고, 
지금은 불이 꺼진 벽난로 위에는 그녀가 그린 그림이 놓여 있었다.  
서너살배기의 여자아이가 둥그렇고 푸른 지구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그림이었다.  내가 어거주춤 서서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는 동안 이민자는 
향기가 아주 독특한 차를 내왔다.  무슨 들풀을 짓이겨놓은 것같이 쌉쓰름한 
맛이 느껴지는 차였다.
  한 한달 동안 이 차만 마시고 지낸 적이 있어요.  인도에서요...  저의 명상 
스승이셨던 마가호타 미르혼지께서 직접 만들어주신 거죠.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우리에게는 거친 직조의 결이 도톨도톨 느껴지는 무명방석을 내어 놓고 그녀 
자신은 맨발로 마룻바닥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그제서야 나는 가방 속에서 
취재 수첩을 꺼내들었다.  그제서야 수첩을 꺼낼 만큼 나는 그 집과 그녀의 
독특한 분위기에 압도당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스승이라는 분의 성함이...  하고 말하다가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책을 읽지도 않고 찾아온 건가, 하는 
기자로서의 예의 없음에 대한 의아함 같은 게 그 눈빛 속에 담겨 있어서 나는 
황급하게 덧붙였다.
  저, 책을 읽었는데 스승 이름이 금세 떠오르지 않네요.  익숙한 이름이 
아니라서...  죄송합니다.
  마, 가, 호, 타...  미, 르, 혼, 지.
  머뭇거리는 나를 향해 스승의 이름을 말하면서 그녀는 마치 석굴암의 불상에 
새견진 것처럼 엷고 환한 미소를 띄었다.  나는 그녀가 스승의 이름을 발음하는 
동안 고개를 숙이고 그것을 취재수첩에 적으면서 내 스승도 아닌에 그 괴상한 
이름을 내가 외울 게 뭐야, 하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괜한 생각이었을까.  
취재수첩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가 나를 향해 아직도 짓고 있던 
그 미소 속에 사람을 꿰뚫어보는 힘이 느껴져서 나는 좀 무안해졌다.
  이미지도 없이 이름만 강요하는 것 같네요, 내가...  어떻게 말이라는 것으로 
그를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녀는 나의 무안함을 다시 꿰뚫어보듯이 말했다.  말소리는 따뜻했고 표정은 
부드러웠다.  그때 그녀의 표정은, 만일 표정이라는 것을 이렇게 분류해도 
좋다면 뭐랄까, 식물성분의 냄새가 나는 것이었다.  파초잎에 파르르 바람이 
불어가는 것 같고 그 위로 비가 내리는 것 같은 표정, 넓은 뜰 가운데 혼자 서 
있어도 그것으로 모든 것이 이미 충족된 모습이라고나 할까.  나는 내가 그녀의 
이국생화레 대해 괜스레 거부감을 가지고 온 것을 후회했다.  작고 가느다란 
눈매, 납작하지도 높지도 않은 코, 얇은 입술.  그녀도 나와 같이 그저 
한국인이었다.  나는 쌉쓰름한 냄새가 풍기는 차를 얼른 마셨다.  스승이 
인도사람이든 미국사람이든 그녀는 이제 고국에 돌아와 있는 것이다.
  나는 다음 질문을 하기 위해 고개를 들다 말고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조금 
웃어보였다.  그러자 그녀는 내 빈 잔에 살포시 차를 따르는 것이었다.  두 손을 
내밀어 고손하게 그녀가 내 잔에 차를 따르는 것을 바라보면서 나는 문득, 
앙상하게 마른 그녀의 품에 안기면, 저어 산다는 게 뭐지요, 라고 물을 수도 
있을 것 같은, 그러면 그녀는 그저 나의 머릴 쓰다듬어주고, 그러면 나는, 
그래요 살고 싶어요, 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 같은 느낌을 가졌다.
  그랬다.  그녀에게는 분명 어떤 힘이 있었다.  뭐랄까, 자신의 존재만으로도 
이미 충만하 사람이 가지는 어떤 힘...  데스크가 그녀의 개인전에서 그녀와 
만나고 돌아온 후, 사무실은 마치 인도의 명상터처럼 변했다.  술자리에서는 
그저 이제는 늙어버린 낭만적인 문학소년 같고, 사무실에서는 웬만큼 강심장이 
아닌 기자들의 눈물을 쏙 빼놓을만큼 카리스마적인 노련함을 가지고 있는 그는, 
마치 무엇에 취한 듯 열띠게 그녀의 그림과 그녀의 명상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고, 취재와 마감과 월급봉투와 글쓰기에 지쳐 있던 기자들은 담배를 
피우거나 필자에게 전화로 원고를 독촉하거나, 기사를 쓰고 있던 원고지를 
구겨버리다가도 데스크가 전해주는 이민자의 삶의 방식에 은밀하게 귀들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스물하나의 나이로 대한민국 국전 대상, 대학 졸업 후 도미, 뉴욕에서 큰 
성공, 이어 도불하여 전시회 연달아 성공, 소더비 경매장에서 그림을 거래시킬 
수 있는 유일했던 한국화가...  어느날 성공과 성취의 허망함을 깨닫고 인도로 
여행 떠남...  스승 마카호타 미르혼지 밑에서 사사...  삼년간 인도 전역 맨발로 
방랑...  아프리카 스케치여행, 어느날 킬리만자로의 눈 덮인 봉우리가 
바라다보이는 한 사파리에서 야영중 불현 듯 깨달은 바 있어 다시 돌아와 
고국에 정착.
  꿈같은 이야기군.
  빈정거리기 잘하는 기자가 그녀의 내격을 등자마자 불쑥 내뱉었지만, 그 
빈정거리므이 의도에 대해 나 자신도 인정하지 않는 바는 아니었지만, 정말일까 
하는 생각 또한 없지 않았다.  말하자면 어떤 용감무쌍한 자유인에 대한 동경 
같은 것, 마감을 끝내고 동료기자들과 얼큰한 술자리에서 파해 집으로 돌아올 
때, 문득 길거리에서 서서 바라보면 모든 거리는 어둡기만 하고 그럴 때, 내가 
지금 대체 무엇을 하며 사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들 때, 어떤 자유, 어떤 방랑, 
어떤 초월, 어떤 꿈의 실현, 그런 것들에 대한 호기심이랄까 그런 것들이 내 
안에서 꿈틀거렸다는 말이었다.
  그 달에 화제가 되는 책을 선정해서 그 작가를 인터뷰하고 책의 내용을 
소개하는 6페이지짜리 기사를 맡고 있는 나에게 데스크가, 이번에는 권오규 
선생을 한달 뒤로 미루고 우선 이민자를 취재하라고 변덕을 부렸을 대, 나는 
사실은 조금 망설이긴 했었다.  권오규라는 사람을 이미 취재해놓은 이유도 
있었지만 그녀의 이국생활이 왠지 내게 거부감을 준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들에도 불구하고,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내가 순순히 그 제안을 
받아들인 것도 어쩌면 그녀가 데스크에게 전해주어 이제 나에까지 엷게 
묻어버린 그 희망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그 희망이 오랜 독신생활과, 길지 않은 
여성지 기자생활과, 나에게는 그토록 오래처럼 느껴졌던 쓸쓸함의 시간들을 
다르게 채색해 줄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는 그런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사진기자에게 건네받은 권오규 선새의 네가필름과 이미 그를 취재해놓은 
수첩과 그가 쓴  인간에 대한 예의 라는 책을 한꺼번에 누런 봉투 속에 집어넣고 
매직펜으로 6월호용이라는 글씨를 써놓은후, 이민자를 취재하기 위해 이곳으로 
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 독특힌 그녀의 통나무집을 나서서 그 집 앞에 세워둔 
취재차에 올라타고 멀리 바람 부는 산에 피어난 가지가지 파스텔빛 산매를 
배경으로 서 있는 그 통나무집을 바라보았을 때, 그리하여 나도 이런 집에서 한 
번 살아보고 싶다고 생각하던 바로 그때, 문득 내 가슴속 깊은 곳에서 오래도록 
잠자던 슬픔 하나가, 마치 잡동사니로 범벅이 된 땅을 뚫고 머리를 내민 
열무싹처럼 고개를 디미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왜 열무싹 같은 슬픔이냐 
하면...  그렇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대답을 할 수가 있을 것 같다. 열무싹을 
떠올린 것은 최근 옮긴 집 뒤뜰에 작은 텃밭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심한 
어느 휴일날에 나는 꽃삽을 가지고 땅을 한 번 일구어보았는데, 그것은 
땅이라기보다 거의 쓰레기장에 가까웠다.  잔돌 큰돌이 무수하게 섞여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비닐이나 과자봉지, 나중에는 굳은 시멘트덩어리 까지 
나왔던 것이다.  잔돌이나 비닐본지라면 몰라도 시멘트덩어리라면 꽃삽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 없어서 그만 포기할까 하긴 했었다.  하지만 꽃삽을 들고 
돌아서는데 잡동사니 땅과의 싸움에서 맥없이 밀려난다는 생각이 별로 유쾌하지 
않았고, 좋다, 그럼 이왕 시작한 일이니 내친김에 끝까지 가보자는 생각을 하고 
나서 나는 내 허리까지 오는 커다란 삽을 사왔다.  일단 그 삽으로 시멘트를 
들어내고 퇴비를 주긴 했지만 아직도 잔돌이 많고 모래가 많이 섞인 땅이라 
씨앗을 뿌려도 자랄까 싶었다.  그래서 그저 손해보는 기분으로, 정말 재미삼아 
시장화원에서 열무씨앗이라는 걸 사다가 뿌려두었더랬는데, 식목일이 지나자 
날씨까지 차가워졌다.  며칠 동안 나는 뒤뜰에 가서 혹시라도 이제나저제나 
싹이 나오려나 기다렸지만 퇴비를 머금어서 약간 거무스래해진 흙만 보일 뿐 
싹이 돋을 기미는 그야말로 싹도 보이지 않았다.  섭섭한 마음은 있었지만 너무 
이른 봄날에 씨앗을 뿌린 내 탓이겠지 생각하고 지내던 차였는데, 바로 며칠 전 
그저 죽어버린 줄만 알았던 씨앗들이, 아직도 돌과 비닐이 남아 있는 그 
잡동사니 땅을 뚫고 녹두 알만한 새싹을 내밀었던 것이다.
  나는 요즘 잡지사로 출근하기 위해 집을 나설 때마다 싹들을 둘러보고 나올 
만큼 열무싹들에게 열중해 있었다.  그러니 가슴속에 생각지도 않게 불쑥 
솟아오른 어떤 것에게, 열무싹처럼이란 비유를 스스럼없이 붙일 수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슬픔이 고개를 들었다는 것 같은 느낌은 왜였느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그것은 왜냐하면...  하고 말꼬리를 흐리다가, 어쩌면 슬픔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나는 고개를 저어버렸을 것이었다.
  그저 하필 차에 올라타고, 한 시간의 취재 끝이었지만 벌써 친근하게 
느껴지는 그녀의 파초 같은 얼굴을 바라보면서 손을 흔들었을 때, 그때 내 
머릿속으로 지난번에 내가 취재를 했던, 하지만 지금은 책이 잘 팔리는 
이민자를 위해 다음달로 그 기가사 미루어질지도 모르는, 권오규 선생이 출소 
후 거처한다는 그 삼양동 구불구불한 골목길 끝, 어는 허름한 한옥의 문간방이 
떠올랐을 뿐이었다.  한 서너 평 되는 마당엔 얇은 시멘트가 발라져 있고 그 
한켠엔 촌스러운 철쭉과 꽃 피지 않은 군자란이 파란 플라스틱 화분에서 자라고 
있는, 마당에 가느다란 수도꼭지가 있고 재생고무로 만든 벽돌색 대야가 
아무렇게나 널려져 있는, 검정색깔의 수채화물감에 물을 많이 타면 나타나는 
듯한 검은 그늘이 엷게 드리워진, 그 한옥 문간방이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러니까 그게 왜 슬름이냐고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이 꼬치꼬치 
물어본다면 나는 그만 할말이 없는 것이었다.
  자유는 나의 의상, 명상은 나의 끼니...  이 우주도 나를 가둘 수는 없다.
  돌아오는 길에 제목은 벌써 떠올라주었다.  괜찮은 제목 같았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제목이 이렇게 쉽게 떠오른다는 것은 좋은 징조였다.  
사실 권오규라는 사람을 취재하고 삼양동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내려올 때 나는 
막막했었다.  그저 막막했다고밖에는 할 수 없는 것이, 스물여덟의 나이로 
무기수가 되었던 그가 이제 출옥한 지 이년만에 그동안 감옥에서 쓴 편지들을 
묶어 책을 펴냈다고 해서 그것을 대체 무슨 말로, 어떻게 기사를 쓰기 시작해야 
하는지 대책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목은 물론 앞글도 본문도 도무지 
캄캄이었다.  이민자를 취재하러 선뜻 나섰던 것은 잘한 일 같았다.  그렇지 
않다면 이번 달에도 또  쫑순이  기자가 될 판이었다.
  선배, 어쩔 거야.  이번 달에 이민자씨 건으로 할 거야?
  사진기자 내게 물었을 때,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던 나는 그래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는 데스크가 이번 달에는 다른 여성지하고 인터뷰하지 말라고 이민자를 
단단히 구워삶아놓은 모양이던데...  요즘이야 그런 게 특종이지 뭐.  문민정부가 
출범한 마당에 웬 장기수?...  안 그래, 선배?
  왜 그렇게 말을 길게 하지?
  내가 물었다.  무언가, 그렇다, 이왕 변명을 해놓은 터이니 이번에도 열무썩 
같은 것이라고 하자, 불쑥 열무싹 같은 의구심이, 아니다...  의구심이란 것은 
열무싹같이 파릇파릇한 것은 아니다.  슬픔이라면 몰라도.  그러니 그저 
단순하게 표기해보기로 하자.  그러니까 나는 그의 말이 왠지 비야냥처럼 
들려서 그렇게 묻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두 다리를 쭉 뻗고 의자 뒤로 몸을 
젖히며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그냥 나도 이 판을 떠나야 할까 싶어서...  그냥 내가 그렇다는 이야기야.
  어디로 가려고...?
  글세...  어디로 갈까.  인도?  아프리카?  뉴욕?  그도 아니면 파리?...  
명상이나 하면서 생각해보지 뭐...  나에게도  그 무언가가  떠올라주겠지.  
젠장할...
  다 좋은데 젠장할이란 말은 왜 붙이니?
  그 말이 이런 경우에 꼭 맞으니까, 젠장할...
  꼭 그렇게 세상을 비뚜로 볼 거 뭐 있어?  이제 구원으로 가는 길은 우리에게 
꼭 하나가 아니어도 좋잖아?
  무언가 더 말을 이을 듯 잠시 망설이다가 사진기자는 무거운 가방을 
뒷자석으로 던져놓고 눈을 감아버렸고, 나도 더 말하지 않고 고속도로를 달렸다.  
사실은 사진기자가 눈을 감지 않았더라면 구원이라든가 길이라든가에 대해 불쑥 
말해버린 자신에 대해 몹시 나처해져서 내쪽이 오히려 그를 외면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그와 나는 죽이 잘 맞는 편이었다.
  하지만 나는 사진기자처럼 그저 그녀와의 만남을 그런 한마디로 치부해버리고 
싶지만은 않았다.  그녀가 그 마당에 서서 들꽃같이 맑게 서서 웃었을 때 
나에게는 어떤 용기 같은 게 솟은 까닭이었다.  혼자라도, 앞으로 더 많이 혼자 
있는다 해도 괜찮을 것 같은 기분, 그러니 이제 밤에 집에 혼자 들어선다 해도 
냉장고에서 싸구려 포도주병을 꺼내 홀짝거리며 마시거나, 아니면 밤도 늦은 
시간, 너무 밤이 깊어서 라디오도 끝나고 창문 밖의 트럭소리도 사라졌을 때, 
전화기 앞에서 이 밤에 누가 깨어 있지는 않을까, 깨어 있어서 나하고 이야기를 
두런 두런 나눌 수는 없는 것일까 궁리하다가, 그저 700으로 시작되는 오늘의 
운순에 전화를 걸어놓고 우두커니 그것을 듣고 있는 대신, 아까 이민자가 
가르쳐준 명상을 해볼 수도 있는 것이다.  몸을 조이는 모든 것을 다 
풀어버리고-될 수 있으면 알몸이면 더 좋다고 그녀는 말했다-반가부좌나 
가부좌의 자세로 앉는다.  그런 다음 단전에 힘을 주고 호흡을 시작한다.  모든 
우주의 기가 코를 통해 기도를 거쳐 뱃속으로 내려갔다가 단전에 고이는 들숨, 
이번에는 단전으로 모여든 나쁜기가 뱃속을 지나 기도를 거쳐 입으로 뱉어지는 
날숨.  중요한 것은 숨을 느끼는 것이라고, 그저 숨을 느끼는 것이라고 그녀는 
말했던 것이다.  아까 이민자 앞에서 서투르게 웃으며 흉내내었던 그 호흡을 
혼자서라면 정말 발가벗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들, 그런게 
들었던 것이다.
  잡지사에 도착하니 모두들 식사를 하러 나가고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나는 
사진기자에게 점심을 내겠다고 말했고 사진기자는 거기에 동의했다.  가방을 
의자에 놓고 지갑을 찾아 들려고 했을 때 권오규 선생에 대한 취재가 담긴 누런 
봉투가 바닥으로 떨어져내렸다.  집어두고 나갈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조금 
귀찮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그저 가방 속에서 지갑만 찾아 달랑 겨드랑이에 
끼고는 사진기자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올아탔다.  사진기장가 일층이라는 
버튼을 누르고 나서 내게 말했다.
  사실은 말야, 아까 왜 물어봤느냐면, 그 때 우리 삼양동으로 찾아갔을 때 그 
집 사진틀 속에 있던, 그 흑백사진 말야...  한 사람은 처형 당하고 한 사람은 
옥사했다던가...  그 사람들 사진을 찍을 걸 하는 생각을 했었거든.  이번 달에 
기사가 나갈 거면 내가 오늘이라도 가서 그 사진들을 좀 찍고 싶어서...
  사진기자는 크게 신경쓰지 말라는 듯 시큰둥하게 말했지만 내내 생각에 잠겨 
있는 표정이었다.  나는 혹시 그가 내가 권요규의 자료들을 떨어트리고는 
그것을 집지도 않고 나온 것을 보았나, 하는 생각을 했다.  아니면 갑자기 이런 
말을 할 까닭이 없지 않을까 싶었다.  아니다.  나는 왜 작꾸 요즘 들어 
사람들의 말을, 이것이 혹시 비아냥은 아닐까 생각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재킷 주머니에 두 손을 밀어넣고 엘리베이터의 숫자가 변하는 것만 바라보았다.
  하기는 그의 말대로 사진이 있었다.  몹시 화창한 봄날이었다.  삼양동 
주택가로 들어섰을 때 어는 집 담장 너머로 서 있던 벚꽃이 꽃잎을 팔랑팔랑 
떨어뜨리고 있는 바람에 사진기자가 내게 포즈를 취하라고 농담을 건네기도 
했던, 그런 아주 화창한 날이었다.  하지만 올라갈수록 골목은 좁아졌고, 벚나무 
같은 것은 더 보이지 않았다.  그저 복덩방문 앞에 내놓은 축 늘어진 
게발선인장 따위가 눈에 띄었을 뿐, 삭막한 시멘트덩어리의 골목이 이어졌다.  
그래서였는지 우리가 삼양동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걸어올라가 권오규라는 
사람이 거처한다는 집에 들어 갔을 때는 봄날이고 뭐고 그저 땀만 흘러싸.  
사진기자는 연방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내었다.  벨을 누르가 거의 이십년 동안 
권오규란 사람의 옥바라지를 했던, 그의 동생이 대신 나와 우리를 대청으로 
안내했다.  기억이란 건 이상한 것이다.  그때는 사실 시멘트로 바른 그 집 
마당에 놓여 있던, 파란 비닐화분에 담긴 철쭉이랑, 꽃이 없는 군자란을 나는 
눈여겨보지 않았었다.  엷은 검은색의 그늘 따위도 그저 시원하다고 느꼇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민자 화백의 집을 나서서 차에 올라타고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을 때 나는 왜 거기서, 땀을 흘리는 사진기자라든가 머리가 좀 벗어진 
권오규의 동생이라든가, 부엌에서 우리에게 커피와 사과를 날라오던 그의 
계수는 삐고, 재생고무로 만든 낡은 대야와 가느다란 수도꼭지만을 떠올렸던 
것일까.  어쨌든 우리들은 대청에 앉았다.  권오규란 사람의 동생은 자신의 형인 
권오규가 병원에 갔다며 몹시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우리에게 명함을 
한 장 내밀었다.  거기에는  한국도기통상 대표이사 권오원 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도기통상이 뭐하는 뎁니까?
  그저 지나치는 듯이 내가 묻자, 권오원이라는 사람은,
  남대문에 있는 조그만 그릇가게예요...  제 이름이 오원인데 거창한 기업체의 
사장이겠습니까 뭐...  하고, 우리가 자신을 거창한 기업체의 사장이라고 
생각할까봐 조바심이라도 난다는 듯한 얼굴로 허허 웃으며 말했다.
  명함은 집어넣으시지요 뭐...  
  그는 여전히 얼굴이 벌개서 말했다.  도기통상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쓴 것이 
부끄러운 건지, 사실은 그것이 조그만 그릇가게여서 부끄러운 건지, 그도 아니면 
자신의 이름이 오억이 아니고 오원이라고 부끄러워하는 건지, 아무튼 그는 
우리가 그 명함을 들여다보고 있는 게 거북하다는 듯 머리를 연신 만져가며 
쑥스럽게 말했다.  쑥스러워하지 않아도 되는 일에 하도 쑥스러워하는 그가 
민망스러워서 우리도 얼른 명함을 주머니에 집에넣었다.  그렇게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아도 될 텐데 하는 생각도 들긴 했었다.  그러면서 그때 명함을 
넣고 무심히 시선을 돌리다가 그 사진을 발견했던 것이었다.  낡은 한옥의 
대청에는 늘 그렇듯이 낡은 사진틀이 걸리고 그 안에 작고 빛바랜 사진들이 
들어 있었다.  나란히 앉아 찍은 사람은 아마도 그들의 어머니와 아버지 같았고, 
그 부모님의 커다란 사진 앞에 작은 사진이 두 장, 반명함판의 크기로 끼워져 
있었다.  내 시선이 그곳에 머물자, 권오규의 동생이 말했다.
  ...저분은 그때 형님이랑 같이 재판을 받고 사형당하신 이문수 선생이시고 
저분은 고문 때문에 옥사하신 황문철 선생님이십니다.  형님이 감옥에서 
간직하고 계셨다가 제게 저 사진을 부탁하셨더랬지요...  가족들도 뿔뿔이 
흩어지고, 그래서 저희 집에서 제사를 모시고 있지요.
  나는 그가 말하는 사진들을 올려다보았다.  사형을 당했다는 이문수라는 
사람은 검정 양복을 입고 있었다.  사각이 반듯한 얼굴에 부리부리한 눈, 
황문철이라는 사람은 그보다 좀더 나이가 들어보였다.  그는 검은 두루마기 
차림이었는데 얼굴이 갸름하고 눈매가 얇삽했다.  처형을 당하고, 그리고 내장이 
터져나가도록 당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옥사를 했다는 그들...  만일 그런 설명이 
없었다면 나는 그저 그것이 그들의 숙부들쯤 될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권오원의 설명을 들으면서 나는 그들의 이름을 취재수첩에 적었다.
  딴 이야기 같지만...  사실 나는 죽은 이들의 사진에 익숙하지 못하다.  우리 
집은 제사를 모실 때도 사진 같은 것은 쓰지 않아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렇게 죽어서 사진으로 남은 친구들이 내게는 있었다.  가끔 앨범을 
펼쳐놓고, 나는 나와 함께 사진을 찍어 그 앨범속에 한실절을 기록했으나, 
지금은 이 지상에 없는 친구들의 수를 가만히 세어보기도 했다.  성당의 
주일교사 일을 같이 하다가 대학 일학년 엠티에서 물에 빠진 여학생을 구하고 
스스로는 빠져나오지 못해 죽었던 친구, 군대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동기, 
어두운 심야극장에서 심장마비로 죽은 선배...  한 친구는 자취방에서 목을 
매었고 또 한 후배는 최루탄에 맞아 쓰러졌다.  또 한 친구는 끌려가서 고문을 
당하고 돌아와서는 정신병원에 들어갔다가 아파트 십층에서 뛰어내렸고 또 한 
선배는 새벽까지 후배들과 술을 마시다가 달려오는 택시에 치여 그대로 
죽어버리기도 했다.  그리고 또...  한 남학생이 있었다.  그는 곱슬머리칼을 
하고 있었고 웃으면 보조개가 들어가는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일단 노래를 
시작하면 그 목소리가 너무나 턱없이 커서, 술집에서 자주 우리를 쫓겨나게 
했던...
  살아 있었으면...  그들은 모두 무엇을 할까.
  어쩌면 지금쯤 넥타이를 매고 회사 지하다방에서 후배를 만나거나, 저녁 
동창회모임에 프라이드를 끌고 나타날 것이겠지만, 만일 살아 있었다면 다른 
많은 친구들처럼 나는 그들과 오래 떨어져서 서로 별로 궁금해하지도 않고 
살아갈지도 모르겠지만 이상하게도 가끔 그들의 어굴이 눈에 밟혔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들의 이십대가 고스란히 놓인 1980년대, 내가 죽고만 
싶어, 죽고만 싶어, 하고 중얼거리며 죽지 못하고 빠져나온 1980년대의 한 
길거리에서 우리와 함께 달리다가 고꾸라졌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기 
때문이었다.  고꾸라진 그들을 두고 나 혼자 달려나와 그 긴 터널을 
빠져나와버렸다는 생각, 그래서 어두운 곳만 보면 혹시 여기에 그들의 주검이 
파랗게 누워 있는 건 아닐까 겁이 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권선생님께서는 많이 불편하신가요?
  한동안 괜찮으셨더랬는데 약한 감기에도 저렇게 힘들어하시는군요...  
아무래도 감기균도 감옥 속의 것이 좀 순한 모양입니다.
  그는 별로 우습지도 않은 농담을 하고는 아주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그 
웃음 속에는 젊은 기자들을 오래 기다리게 하는 미안함을 어떻게든 덜어주려는 
서투른 의도가 엿보여서 우리도 할 수 없이 그를 따라 웃었다.  사실은 좀 
멋쩍었고 지루했다.  잠시 후, 그의 아내가 깍은 사과와 커피를 내왔다.  우리는 
화창하다 못해 덥기까지 한 봄날에 그집 대청에 앉아서 들쩍지근한 커피를 
마셨다.  
  저 방이 형님이 쓰시는 방이에요.
  인터뷰할 대상이 없어서 침묵하며 사과만 베어먹고 있는 우리들에게 몹시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동생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가 가리키는 곳은 
권오규가 거처하는 문간방이었다.  엷은 미색 한지가 훤히 비치는 그런 한옥식 
미닫이방이었다.
  원래는 저 방이 여닫이문이 달린 방이었죠...  형님이 출옥하신 지 얼마 안 
돼서예요.  원래 세를 주었던 방을 내보내고 나서, 그 방에 가구를 좀 들여놓고 
형님을 저기 거처하시게 했었죠.  피곤하니까 쉬시라고 하고 우리는 방문을 
닫고 잠이 들었는데 다음날 아침, 형님이 일어나시지 않았는지 방에서 별 
기척이 없어요.  얼마나 피곤하실까 싶어서 형님을 깨우지 말기로 하고선 저는 
가게로 나가고 애엄마도 볼일이 있어서 밥상을 마루에 차려놓고 밖으로 나갔죠.  
우리가 그때 가게를 한창 수리하고 있던 때라, 경황이 없어서 밥상 위에 쪽지를 
써놓고 나갔더랬어요.  아침은 밥을 드시고 점심은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시켜서 
드시라고, 중국집 전화번호를 적고 우리 집을 그곳에 알려주는 방법을 적어놓은 
거지요...  그런데 그날 오후 네시 넘어서까지 집에 아무리 전화를 해도 전화를 
안 받아요.  이상한 생각에 제가 집으로 뛰어왔지요...  밥상도 그대로고 형님도 
보이지 않았어요...  정말 별의별 생각이 다 든 건 말도 마세요...  그때 형님 방 
쪽에서 쾅, 쾅, 쾅, 문두드리는 소리가 나요...  깜짝 놀라서 방문을 열어보니까...  
형님이 땀이 범벅이 된 얼굴로 절 바라보시더라구요...  아니 형님, 왜 이렇게 
문을 두드리세요. 나오시지 않구, 하니까...  그제서야 형님이 당황해하시면서 
말씀을 못하세요...  나중에 알아보니까 장기수들이 출옥하면 그런 일이 많다는 
거예요...  생각해보세요...  이십년 동안 갇혀 있다 보니까 스스로 안에서 방문을 
열 수 있다는 걸 잊어버리신 거죠...  아침도, 점시도 거르시고...  형님은 안에서 
계속 문을 두드리셨던 거예요...  나가는 기척이 들리는 것 같으니까...  혹시나 
혹시나 하다가 문을 두드렸더 거죠...  세상에...
  동생은 붉어진 눈시울을 내리깔며 담배를 집어들었다.  듣고 있던 사진기자가 
카메라 렌즈를 만지작거리며 작게 기침을 해댔다.
  인간의 몸뚱이를 가둬두는 게 사실은 그렇게 무서운가봅니다.  일있기 전에 
형님은 럭비선수시기도 했는데...  감옥에서 운동을 하시고 단전호흠도 
하셨다고는 하지만 지금은 너무 약해지셨어요...  길을 걷다가도 자꾸만 
깜짝깜짝 놀라셔요.  감옥에서 혼자 일곱, 여덟 걸음 걷고는 뒤돌아서서 일골 
발짝 또 걷고 하던 버릇이 아직 남아 있는거죠...  처음엔 화들짝 놀라시면서 
걸음을 멈추시길래 저희는 어디 몸이 아프신가 했어요.  형님은 조금 쉬었으면 
하시더군요.  저희로서는 시내구경을 시켜드리려던 거였는데...  그것도 알고 
보니까 그런 버릇 때문이었어요.  이십년 동안 바라보았던 감옥의 벽이 
눈앞으로 화악 달려드는 것 같은 환영을 보시는 거죠...  형님이 나오시긴 
했지만 이미 몸속에 들어와버린 그 벽을 허물려면 얼마나 세월이 더 필요할지...
  사진기자는 마당 한켠에 있는 재생고무로 만든 붉은색 대야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사과를 베어먹었다.
  권오규는 우리가 찾아간 지 한 시간 남짓 후에 나타났다.  계수가 대문을 
열어주자 그 대문에서부터 대청까지의 몇미터도 안 되는 거리를 헐레벌떡 
뛰어오는 것이었다.  권오규는 얼른 대청으로 올라서며,
  미안하군요,  젊은이들한테...  오시라고 해놓고.  라고 말하며 손수건을 꺼내 
이마의 땀을 닦았다.
  이상우 선생이라고 빨치산이셨던 분이 얼마 전에 출옥을 하셨는데 고만 오래 
못 넘기실 것 같아서 말이에요, 병원에 가는 길에 혹시나 하고 전화를 해보니까 
역시 그러시더군요...  그래, 큰 병원에 모셔다 놓고 오는 길입니다.  이거 
너무나 미안하군요.
  아주버님도...  몸도 편찮으신데 그러다가 더 병나면 어떻게 하시려구 
그러세요...  그런 건 이제 좀 젊은 사람들한테 맡기세요...  감기는...  병원에 
가셨어요?
  권오규에게 인삼차를 내오며 그의 계수가 말을 거들었다.
  아닙니다.  난 괜찮아요.  약이나 좀 지어먹지요...  감기쯤이야 뭐...  그 
이상우 선생이 남쪽에 무슨 가족이라구 있어야지 말예요...  그렇잖아도 장기수 
후원회 젊은이들이 왔습디다.
  그는 우리들을 않혀놓고 계수씨와 오래 말을 한 게 미안하다는 듯 겸연쩍게 
웃었다.  웃는데 그의 눈가에 잔주름이 깊게 몰려들었다.  이상했다.  감옥에서 
이십년을 보낸 사람이 대체 언제 웃을 시간이 있었길개 저 사람의 눈가에는 
저토록 오랜 세월을 웃었던 흔적이 팬 것일까.  나는 권오규의 눈가에서 시선을 
떼어 두 사람을 마주보았다.  나란히 앉은 형제의 얼굴, 동생 쪽이 오히려 
나이가 많아보였지만, 동생쪽은 머리가 벗어지고 몸이 비대한 편인데 권오규는 
얼굴이 좀 갸름하고 마른 편이었지만, 만일 그 둘이 나란히 앉아 있지 않았다면 
닮지 않은 형제라고 생각했을 사람들이겠지만 그들은 닮아 있었다.  뭐랄까, 
그들의 얼굴에는 그들이 가만히 있을 때는 숨어 있던 어떤 아이들의 모습이 
웃음을 땔 때마다 튀어나오는 것 같은 공통점...  차를 몰고 가다가  막 수업을 
파한 국민학교 앞 횡단보도에 멈추어설 때 와아 뛰어가는 아이들의 모습이...  
세상에, 그건 또 무슨 해괴망측한 상상력인지.  오십이 다 된 두 노인네 형제의 
모습에서 신발주머니를 덜렁덜렁 흔들며 뛰어가는 아이들, 한 이학년쯤 된 
아이가 그래도 제가 형이라고 한 일학년쯤 되어 보이는 동생의 손을 꼬옥 
붙들고 뛰어가는 그런 얼굴을 느끼다니...  나는 얼른 터무니없는 상상에서 
깨어나 기자로서의 일을 생각했고 권오규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그는 연한 
하늘색 와이셔츠 윗주머니에서 작은 돋보기를 꺼내 쓰고 내 명함을 들여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때, 그가 월간 여성 기자라는 내 명함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을 때 나는 상상에서 깨어나 이상한 기분에 다시 사로잡혔었다.
  이십년 동안 옥살이를 한 그에게, 방문을 안에서도 열 수 있다는 걸 잊어버린 
그에게 대체  월간 여성 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가 언제 한 번 그걸 
읽어보기라도 했으며, 앞으로도 이런 책을 읽기라도 할 것인가 말이다.  나는 
이제는 다만 너무 늙어버린 그 두 형제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집을 나섰다.
  삼양동을 내려오는 내 취재수첩에는 그저 이문수와 황문철이라는 이름이 
처형, 옥사라는 글씨 옆에 나란히 적혀 있을 뿐이었다.  보통 작가를 인터뷰하고 
내려오는 길에는 이것저것 문안들이 떠오르게 마련인데 이상하게 제목도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저 사람 오십이 다 된 지금 장가는 어떻게 갈 것인지, 
책이 그리 많이 팔리지도 않는다는데 생계는 어떻게 할 것인지...  몸도 안 
좋다면서 다른 장기수들 뒷바라지나 하면서 평생을 살 것인지...  그런 
기사화되기 힘든 생각들만 떠올랐었다.
  엘리베이터는 일층에 도착했다.  우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었다.  점심은 
뭘 먹을까 하면서 빌딩의 현관문을 여는데, 바람이, 마치 오랜 시간을 고여 
있다가 문을 여는 우리에게 한꺼번에 달려들기라도 하는 듯이 불어왔다.  
이상한 날씨였다.
  날씨가 왜 이러지...  가만, 봄에도 태풍이라는 게 부나?
  사진기자와 나는 똑같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색깔에도 무게를 달수 있다면 
너무나 무거운 육중한 회색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이상하게 섬뜩한 느낌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꼭 금방 하늘이 무너져내릴 것 같다...
  나와 같이 하늘을 올려다보던 사진기자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렀다.  늘 
렌즈나 사진기나 필름 등을 넣고 다니던 그의 무거운 가방이 없어서인지 그는 
휘청대는 것처럼 보였다.
  오늘이 강경대 이주기잖아.
  그는 바람을 피해 가슴을 웅크리고 걸으며 빠르게 말했다.
  오늘이...?
  꼭 이십년 전 일 같지...?
  우리들은 설렁탕집에 들어가 수육을 시켜놓고 반주를 한잔씩 했다.  
사진기자도 나도 별 말을 하지 않고 소주를 한병이난 비웠다.  다시 거리로 
나왔을 때 사진기자가 발그레한 눈가를 찌푸리며 웃었다.  
  내가 만일 말야, 선배, 지금 이 바람 속에서 어떤 울음소리를 듣는다면 
말이야, 구슬프고 억울하고 그런 소리를 듣는다면 선배는 나보고 또, 미친놈 
그러고 말겠지?
  그는 말을 마치고 먼지가 입으로 들어갔는지 침을 뱉었다.  나는 나보다 키가 
십오 센티미터나 큰 그의 어깨에 힘겹게 어깨동무를 했다.  
  아니, 대신 이렇게 말할걸.  너 그렇게 살다간 오래 못 버틴다.
  그래, 그것이 정답이야.
  그가 대답했고, 우리는 1991년 사월의 대학 정문 앞에서 쇠파이프에 맞아죽은 
강경대가 죽은 지 이년 되는 날에, 소주 한병의 취기에 얼떨떨하게 젖어서, 
바람이 부는 길거리에 서서 피들피들 웃었다.
  발치에 떨어뜨렸던 권오규에 대한 자료들을 집어올리다가, 나는 그 봉투 
속에서 한뭉치의 자료들을 발견했다.  도서관에서 20여 년 전의 그의 
공소자료들을 찾아낸 복사물이었다.  나는 여기저기에 기사를 쓸 때 인용하기 
위해서 붉은 줄을 쳐놓았었다.  공소장에 따르면 권오규의  일당 들은 
 지식인.언론인.종교인에게 드리는 글 이라든가  민중의 길 이라는 유인물을 
통해서 학생들의 데모를 배후 조종하고 북쪽의 상투적 대남비방 구호인 
 매판족벌   자본주의적 착취  등의 구호를 사용하여 북한 공산주의자들을 이롭게 
하고, 유신정권을 군사독재정권일라고 규정하여, 노동자.농민을 박정희정부를 
전복하고 공산혁명을 세울 수 있는 주요세력으로 설정하여 폭력혁명를 
구상하고, 각목.화염병 등을 준비하여 데모를 유혈화하는 준비를 한, 구제받을 
수 없는 공산혁명의 찬동세력들이었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그를 무기징역을 살게 한 죄들이었다.  더구나 그는 그 당시 이미 
학교를 졸업한 사회인의 신부으로 평생을  공산혁명 에 몸바치기로 한 전업적 
혁명가로서 후에 형집행정지로 석방된 학생신분의 다른 사람들과도 구분되었다.  
  강경대가 죽은 91년에 비하면 참으로 격세지감이 느껴졌다.  유인물과 
화염병이 무기징역 선고의 절대적인 증거가 되다니...
  어떻게 할까, 정말 권오규라는 사람을 다음달로 미루나, 이민자를 그대로 
실어버리나 생각을 하면서 나는 자료들을 덮었다.  바람은 여전히 뿌옇게 
창밖에서 불어젖히고 있었다.  마감상황이 적힌 상황판에는 이미 완성된 
기사들에 빨간 동그라미들이 쳐 있었다.
  머리 좋은 아내가 펼치는 섹스 체위, 알뜰살림 총집합, 남편의 바람기 이렇게 
잡는다, 간암 이겨낸 극적 투병기...  그리고 이 달의 책 취재란에는 이민자의 
이름이 적히고 그 옆에 독촉이라는 체크가 되어 있었다.  오늘 아침, 부랴부랴 
취재를 떠나기 전까지 분명 그 자리에는 권오규라는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나는 아직 이민자를 이번 달에 싣겠다고 정식으로 데스크와 의논한 
일이 없었다.  아까 내가 권오규에 대한 자료를 누런 봉투에 넣고 
6월호용이라고 써놓았음에도 불구하고 기분이 좀 묘했다.  하지만 지금 와서 
그걸 데스크에게 따지자고 해도 권오규든 이민자든 내게 어떤 생각도 잘 
떠오르지 않는 상황이어서 나는 그저 취재수첩을 덮어놓고 담배만 연방 두 대를 
피워댔다.  두 번째 담배를 막 끄려는데 급사아이가 전화가 왔다고 알려왔다.
  전화기 속에서 들리는 것은 뜻밖에도 강선배의 목소리였다.  그는 좀 
쑥스러운 듯한 말투로 지하다방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전했다.
  나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오후 2시가 막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강선배가 
연락도 없이 왜 찾아왔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의 떠들썩한 이혼 
소실을 먼발치에서 전해들었을 뿐, 요 몇 년 동안 나는 그를 만난 적이 없었다.
  기다려도 엘리베이터는 올라오지 않았다.  1,2,3,4...9라고 적인 숫자판 옆에 
FULL이라는 불이 켜진 채였다.  엘리베이터가 오르락내리락하는 동안 나는 
여전히 바람이 미친 듯이 불어가는 여의도의 거리를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그러자 불쑥, 벌써 오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 이 잡지사의 사장인 
외삼촌의 주선으로 계약직 기자가 되었을 때, 나는 가계부를 만드는 일을 
했었다.  그때는 아직 거리마다 건조한 햇볕이 쨍쨍한 가을날이었다.  일년 동안 
사용할 가계부 포맷을 만들고 가계부의 모서리마다 집어넣을 요리며 알뜰살림 
힌트며, 그도 아니면 마이 카 상식을 만드는 것이 나의 일이었다.  그때 어두운 
자료실 한켠에서 슬라이드 필름으로 보관되어 있는 요리들을 찾아내면서 나는 
생각했었다.  대체 이곳 사람들은 어쩌면 저렇게 밝은 얼굴을 하고 있을까, 
어쩌면 그들은 조금의 죄의식이라든가 조금의 미안한 얼굴이라든가 그런 것들이 
없는 것일까...  어떻게 날마다 샐러드나 과일안주에 맥주를 마시고, 어떻게 
저렇게 비싼 옷을 자랑삼아 입고 다닐 수가 있는 것일까.  나는 슬라이드 
환등기를 켰다.  슬라이드는 찰칵, 찰칵 돌아갔고 찰칵, 찰칵 돌아가는 
슬라이드가 환하게 불을 밝히며 스파게티 미트 소스며 사우샌드 아일랜드 
드레싱을 얹은 야채샐러드며 소시지 양상추 샐러드찜 같은 그림들을 보여줄 
때마다 슬라이드의 번호를 열심히 적어서는 가제본된 가계부 갈피에 
끼워놓았었다...  나는 대체 어쩌자고 여기서 이런 낯선 이국 음식의 슬라이드를 
찾고 있는 것일까.  그들이, 내가 사랑한다고 외치던 그들이 대체 이런 음식을 
먹어는 보았을 것이며, 아니면 지금이라도 혹여 먹고는 있을 것이며 그도 
아니면 죽는 날까지 마이 카를 타고 알뜰하게 살림을 꾸리며 이 음식들을 먹을 
수도 있을 것인가.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볼펜을 놀려 그런 요리들의 
고유번호를 적으면서도, 마치 내가 그 가계부의 한켠에 죽고만 싶어, 죽고만 
싶어...  라고 쓰고 있는 착각을 느꼈었다.  강선배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아마도 
그 무렵이었을 것이다.
  그때도 강선배는 건물 지하 까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그곳을 
빠져나온 지 거의 삼개월 만이었다.  그는 변장을 위해서였는지 파마를 하고 
검은 테의 안경을 쓰고 있었다.  그는 피곤하다는 표정을 하고 있다가 나를 
보자 얼굴을 펴며 조금 웃었다.  파마기가 아직도 서투르게 남아 있어서 
제멋대로 뻗쳐 있는 머리.  하지만 그 무성하게 뻗대는 머리칼과는 달리 까칠한 
잔주름이 잡히는 얼굴이 어두운 조명 아래서도 잘 보였다.  날마다 얼굴을 
마주보고 보아왔던 잔주금이면서도 그의 얼굴에서 피어나는 그 까칠한 잔주름이 
마음에 밟혀서 나는 마주앉자마자 그의 앞에 놓여져 있던 물잔을 들어 얼른 
마셨다.
  그래, 괜찮니?
  그는 아주 조심스레 물었다.  그가 왜 조심스럽게 나에게 묻고 있는지 그 
이류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 단지 그것 때문이었을까, 나는 그저 얼른 시선을 
내리깔았다.  아니에요.  사실은 죽고만 싶어요...  미안해요, 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것조차 너무 상투적인 말 같아서 나는 그저 입을 다물고 시선을 
여전히 내리깐 채로 고개만 끄덕였다. 
  바로 찾아오려고 했는데 너한테 오히려 부담이 될 것 같아서...  왜 우리에게...  
말하지 않았었니.  니 사정을 설명하고 그리고 모두를 안심시킨 다음에 나갈 
수도 있었는데...
  그는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왜냐하며 내가, 그가 그래, 괜찮니 하고 
물었을 때부터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던 내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로 울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 눈물의 의미는 지금 생각해봐도 뭐라고 딱히 
꼬집어낼 수 없는 것이긴 했다.  다만 나는 그때 울면서 생각했었다.  내가 
도망쳐나온 것은, 내가 저녁거리를 사러 시장에 간다고 말하고 도망쳐나온 것은 
당신들이 옳았기 때문이에요.  옳은 당신들에게 무슨 말로, 가령 예를 들어 
아버지가 갑자기 아프시다거나, 집안이 기울어서 내가 지금 당장 돈을 벌지 
않으면 안돼요라거나, 갑자기 병이 나서 죽을 것만 같아요,라는 핑계도 없이 
그곳을 나올 수가 있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막막했기 때문이에요...  라는 
생각...  그들이 옳았기 때문에 운 것은 아니었지만...  그랬다...  날마다 
조마조마한 그 시간들이 싫었다.  수배자들과 함께 자고 먹고, 방 밖에서 
경찰차라도 지나가는 소리라도 나면 온몸의 신경들이 쭈뼛쭈뼛 서는 그 느낌들.  
등사물을 나르거나 책을 가방에 숨겨가지고 거리에 나설 때, 전경이라도 보이면 
가슴이 미친 듯이 방망이질치던 그 순간들이 지긋지긋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단지 그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 싫음을 견디다 못해 그저 그곳을 
도망쳐나왔지만 내가 도망쳐 향했던 이곳은 그렇다고  싫지 않은 곳 은 
아니었다.  그곳에서는 다는 종류의 싫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를 들면 
신문을 펴면 재빨리 주식값이 적혀져 있는 난만 보고 마는 사람들이 있고, 값이 
뛰어오른 아파트를 팔고 값이 더 뛰어오른 아파트를 장만하는 사람들이 있고, 
자동차를 바꾸고, 맥주를 마시며 어젯밤 그네들과 잠자리를 한 하룻밤 연인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대고...
  바보 같은 자식은...
  그는 피식 웃으며 겨우 눈물을 그치는 나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쳐주었었다.  
그날 나는 급한 약속이 있다며 떠나가는 그에게 그날 받은 월급봉투를 
내밀었다.  그는 월급봉투를 들여다보고는 거기서 만원짜리 지펴 다섯 장을 
꺼내 자기 주머니에 넣었다.
  이젠 됐지?...  너무 죄책감 가질 필요 없다.
  그는 말했다.  그가 남기고 간, 아직도 만원짜리 지폐가 많이 남아있는 
월급봉투를 쥐고 나는 그가 사라지는 여의도의 빌딩가를 그를 따라 몇발짝을 
따라 걸었었다.
  햇살이 환하게 부서지던 가을날이었다.
  들어가봐라...
  네.
  어서 들어가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계속 따라가는 나를 안쓰러이 돌아보던 그의 
얼굴.  바람도 불지 않던 날에 제멋대로 뻗치던 그의 머리카락...  그렇게 
여의도의 빌딩가를 좀 걷가가 나를 돌아다보며 그는 담배를 물고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지었었다.
  저기...  어차피 알게 될 텐데 말을 하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윤석이가...  
지금 병원에 있다.  ...중태다...
  ...한 남학생이 있었다.  그는 곱슬머리칼을 하고 있었고 웃으면 보조개가 
들어가는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일단 노래를 시작하면 그 목소리가 너무나 
턱없이 커서, 술집에서 자주 우리를 쫓겨나게 했던...
  나는 바쁘다며 떠나가는 강선배를 붙잡고 아무 곳이나 보이는 데로, 수배중인 
그의 처지를 생각해서 될 수 있으면 어두운 곳으로 그를 끌고 들어갔었다.  
양주.맥주라는 간판이 붙은, 조금만 더 밤이 이슥하면 아가씨들이 칸칸이 막힌 
곳으로 남자손님들을 따라 들어가는 곳.  대낮부터 들어서는 그와 나를 보며 
마담이 이상한 눈초리를 보냈다.  우리들은 일부러 칸막이 속에 들어가 나란히 
자리를 하고 앉았다.  마치 대낮부터 사람을 나누기라도 하는 연인들처럼...  
아니다.  그건 우리들만의 생각이었을지도 모른다.  마담은 아마도 그렇게 
어리숙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낮부터 칸막이가 쳐진 술집에 들어서는 
청춘남녀들은 그렇게 굳은, 그렇게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 길을 가다가 난데없이 
매라도 맞은 듯 망연한 그런 표정은 짓지 않을 테니까...
  맥주를 두어 병 시켜놓고, 그야말로 말라비틀어진 마른안주를 시켜놓고, 
마담이 하품을 하며 사라지는 것을 보고 난 다음에야 나는 그에게 물었었다.  
그제서야 말이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는 맥주를 연방 두 컵을 마셨다.
  임투중에...  사장이 영 말이 통하지 않으니까...  마지막 교섭을 하려고 몸에 
신나를 뿌리고 들어갔었나봐.  ...그래도 이 사장이 영 막무가내니까...  그 
사장이 그 지역에서 악덕업주로 유명한 놈이건든.  그래서 제 몸에 신나를 
뿌리고 교섭하다가 사장에게 라이터를 내 몸에 들이대서 불을 붙이겠다.  그런 
말을 하려고 했나보지.  ...그런데 휘발된 신나가 그...  사무실 속에 퍼져 있었고 
라이터불을 켜자마자 몸으로 불이...  사장도 중태야.  ...오늘 석간에 기사가 
났던데...
  그는 윤석의 용태를 걱정하며 남은 맥주도 다 마시지 않고 자리를 떠났었다.  
나는 남은 맥주를 마저 마시고 사무실로 돌아가면서, 그러니까 스파게티 미트 
소스며 사우샌드 아일랜드 드레싱을 얹은 야채샐러드며 소시지 양상추 샐러드찜 
같은 요리들은 찾기 위해 사무실로 들어오는 길에 신문을 샀다.  그의 기사는 
사회면 맨 귀퉁이에 다섯 줄로 나와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그의 사망 
소식을 나는 조간에서 읽었다.
  나는 윤석과 함께 다섯 달쯤을 살았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노동현장에 
배치를 받지 건에 윤석과 다섯 명의 남학생들을 우리 집에 묵게 해주었던 
것이었다.  한 번은 술을 먹은 윤석이 내게 술잔을 던진 일도 있었다.  그를 안 
지 얼마 안 되어서의 일이었다.  그는 내게 술잔을 던져놓고 내가 얼굴에서 
소주를 다 닦아내기도 전에 제가 먼저 눈물을 터뜨렸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의 형은 공장에서 일하다가 손이 잘린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공장 식당에서 
일을 하는, 저애가 어떻게 대학엘 들어왔는가 놀라울 정도로 가난했던 후배였다.  
그는 울면서 말했다.
  누나가 뭘 알아...  누나는 몰라...  가난...  이라는 거...
  다른 기억도 있다.  그가 나의 아파트에 처음 도착하던 날, 아마도 내가 
보리차를 끊이려고 주전자를 가스레인지에 올려놓으려는 참이었을 것이다.
  누나, 수도꼭지에서 이렇게 더운물이 나오는데 뭐하려고 물을 끊여요?
  사람들이 와와 웃었다.  나는 솔직히 그때 충격을 받았었다.  더운물이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집에 한 번도 살아본 일이 없다니...  보리차랑 온수를 
구분하지 못하다니...  그의 말대로 나는 아는 게, 책에서 읽은 거 빼고, 
최저임금 숫자말고, 아는 게 없었다.  만일 첫날 그에게서 받은 충격이 없었다면 
나는 술잔을 내게 끼얹은 그와 두 번 다시 말도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끼얹어 내 얼굴에서 뚝뚝 떨어지는 소주를 닦아내면서 사실은 나도 울고 
싶어졌다.  내가 부모님이 사주신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게 미안했고 뜨거운 
물이 펑펑 나오는게 미안했고 그의 형의 잘린 손이, 그의 어머니가 공장 
식당에서 하루 열여섯 시간을 일하시면서 그의 대학등록금을 대는 게 가슴 
아팠다.  하지만 미안해하고 가슴이 아픈 거 외에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저 그가 스스로 화를 풀 때까지 기다려보자고 
생각했었는데 다음날 그가 먼저 내 방문을 두드렸다.
  다섯 명의 후배들이 내 집에서 살고는 있었지만 나는 그들과 함께 행동할 
일은 거의 없었다.  대충 짐작을 할 뿐, 서로의 일들에 대해 묻지도 않았고 
알려고 해서도 안되었던 상황이었다.
  내가 문을 열자 그는 한여름에 일찍 나오는 새파란 인도사과를 한알 들고 서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갑자기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얼굴을 
붉히더니 오래 연습을 한 신인배우처럼 말했다.
  저기, 사과 드세요...
  비죽이 내다보니 다른 네 명의 학생들이 웃으며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빠듯한 계획 속에서 모처럼 사과를 사다 먹는 모양이었다.  나는 사과를 
받아들고 겨우 고마워, 하고 말했다.  그건 진심이었다.  나는 그가, 먼저 사과를 
하는 그가, 명색이 선배인 내게 사과를 하는 그가, 빠듯하고 배고픈 나날의 일상 
속에서 제가 먹을 사과 한알을 내게 건네준 그가 고마웠던 것이었다.
  그 작은 싸움과 사과 한알의 화해를 통해서 우리들은 친해졌다.  나는 그들과 
함께 식사를 자주 했고 가끔은 삼결살을 사다가 건네며 그들의 젊고 왕성한 
식욕들을 안쓰러워하기도 했었다.  그들이 우리 집에서 떠나던 날, 떠나서 
노동현장으로 가는 날, 우리들은 마지막 만찬을 함께 했었다.  그는 또 턱없이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나 이미 떠났다고
  기나긴 죽음의 시절 꿈도 없이 누웠다가
  나 이미 큰 강 건너
  떠났다고 대답하라...
  저 깊은 곳에 영혼의 외침
  더 험한 곳에 민중의 뼈아픈 고통
  내 작은 이 한 몸 역사에 바쳐
  싸우리라 사랑하리...
  이번에느 쫓아낼 술집 아주머니도 없었지만 내가 아파트에서 쫓겨날까봐 
걱정이었을 만큼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컸다.
  누나, 나랑 악수 한 번만 해요.
  수줍은 손이었다.  뺄 듯 뺄 듯하다가 그는 내 손은 꽉 움켜잡고 나를 한참 
바라보았다.
  미안해요, 누나.  나는 사실은 이전에서 참 속좁은 가난뱅이 고학생일 
따름이었지만 이젠 아니에요.  ...이젠 정말로 그렇지 않아요.  누나, 믿으시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웃으며 천천히 내 손을 놓았다.
  저어, 꼭 다시 뵙고 싶어요...  우리...
  그가 다시 말했을 때 고개를 끄덕였지만 나는 우리들이 다시 만날 가능성에 
대해 거의 생각지 않았었다.  네가 끌려가든 내가 끌려가든 우리들은 기약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잖니, 그렇게 말할 뻔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이렇게 망연한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나는 그저 그들이 노동현장으로가서 건강하고 씩씩하게 살아주기만을, 그래서 
부끄럽지 않은 젊은 날을 보내기를 바랐었다.
  강선배는 그 뒤로 한 번 내게 전화를 걸었었다.  우리는 죽어버린 윤석의 
이야기를 하지도 못했다.  강선배 역시 수배라는 상황 때문에, 나는 또 가계부를 
만드느라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지도 못했었던 것이었다.  다만 전화를 어서 
끊으라는 듯 삐이삐이 공중전화의 경고음이 들릴 때, 그러고 나서 정말이라는 
듯 전화가 끊겨버리는 그 사이, 아주 급박한 목소리로 강선배의 목소리가 
들렸었다.
  오늘 혼자서...  묘지에 갔었다...
  강선배와 나는 그후로는 연락을 하지 못했었다.  그가 구속이 되었다는 
소식이 들렸었고 그가 이혼을 했다는 소식이 들렸었고 그가 아버지 집으로 
들어갔다는 소식...  강선배는 아직도 모른다.  신입생이었던 시절, 삼학년이었던 
그를 내가 얼마나 사모했었는지를.  헤어지는 무렵 윤석이가 나를 몰래 
사모했던 것처럼 나는 강선배를 사모했었다.  어리숙하게 눈을 반짝이며 앉아 
있던 우리들을 모아놓고,
  말이야, 별거 아니야.  싸우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작은 
일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은 아주 큰 문제가 작게 드러난 것에 지나지 않아.  
...우리는 바로 그것들을 향해 싸움을 시작하는 거란다.  ...우리 주변 우리 내부, 
사소하게 보이는 작은 일들부터 청소를 해나가는 거...  알겠니? 라고, 선한 
눈매를 어글거리며 웃던 그를, 그 작은 일을 가지고 싸우다가 감옥에 가고, 
재판정에서 하얀 한복을 입고 교도관에게 입이 틀어막힌 채 질질 끌려나와 우리 
모두를 울게 만들던 그를, 윤석이 내게 소주를 끼얹었을 때, 윤석이와 나를 
번갈아가며 달래던 그를...  노동자가 되고 역시, 중학교만 졸업한 노동자하고 
결혼을 했던 그를 말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오년 후의 그를 만나러 간다.  
사소한 일 가지고 몰숨 걸 필요 뭐 있어, 라고 말한다는 그를, 아버지가 
경영하는 버스회사의 사장이 되었다는 그를, 딸을 둘 낳고 살던 노동자하고 
헤어진 그를, 그와 헤어진 후 정신병원에 갇힌, 중학교만 졸업한 노동자의 
남편이었던 그를.
  오년 동안 변한 것은 그만이 아니었다.  까페도 변해있었다.  그때 어둑어둑 
달려 있던 까페의 늘어진 조명등은 천장에 매달린 작고 환한 조명으로 바뀌고 
구석구석 칸막이 속에서 만지면 먼지가 묻어나올 것 같던 의자들은 널찍한 
소파로 변해 있었다.  이상했다.  늘 들락거리는 지하 까페의 변화를 나는 왜 
그를 오년 만에 만나는 지금에서야 깨닫는 것일까.  나는 실내를 자꾸만 
돌아보았다.  그가 앉아 있을 법한 구석자리에는 손님이 아무도 없었다.  나를 
먼저 알아본 것은 그였다.  그는 녹두색의 실크잠바를 입고 까페 한가운데 놓인 
의자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검은 안경는 날이 선 금테로 바뀌어 있고, 
서투른 파마 때문에 엉성하던 머리는 가지런히 돌아와 있었고, 그는 살이 좀 
붙어 있었다.
  몰라보게 변했네...
  내가 말했을 때 그는 그런하, 하고 웃었다.  그의 얼굴에는 이제 까칠한 
잔주름이 피어나지 않았다.  오년 전의 그는 까페에 들어가면 언제나 구석진 
자리를 찾고 했었다.  수배를 받던 무렵부터 그의 습관이었다.  나는 그가 
아직도 그 습관을 가지고 있다고 왜 생각했을까.  그가 나의 이름을 부르고, 
구석자리를 기웃거리던 내가 돌아보며 그를 발견했을 때, 나는 갑자기 그가 
까페의 한가운데 자리가 아니라 세상의 한가운데 앉아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내가 그토록 저주했었고, 그가 변혁하고 싶었던 세상의 한가운데 
말이다.
  사실은 결혼을 하게 됐다.  요 근처에 거래처가 있어서 지나가다가 네 생각이 
나서 청첩장이라도 전해주려고...
  그는 쑥스럽게 웃으며 주머니에서 금박이 박힌 청첩장을 내밀었다.
  그런데 너 아직도 낮술 마시고 다니니?...  나이가 몇인데...  
  그가 웃었다.
  아직...?  그래, 내가 아직도...  하는 게 있네...
  내가 신기해서 말하자, 그는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잠시 침묵이 
계속되었다.  오년 전에 그와 함께 마셨던 맥주가 생각났다.  그때도 환한 
대낮이었다.  맥주.양주라는 간판이 붙은 컴컴한 룸살롱 같은 데서 우리는 술을 
마셨었다.  마치 연인처럼 보이게 하려고 나란히 앉아, 마담이 하품을 하며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서야 죽은 윤석의 이야기를 했었다.  그런데 윤석인 죽고 
선배는 사장이 되고 우리는 이제 낮술 이야기만 하는 것이다.
  강선배는 작게 기침을 하고 나서는 오년 만에 만난 후배에게치곤 너무도 
평범한 이야기들을 두런두런 해나갔다.  나도 그에게 두런두런 답했다.  만일 
오년 전의 우리들이었다면, 설사 그때의 나는 날마다 이상하고 긴 이름의 
서양요리들의 슬라이드를 찾으면서 죽고만 싶다고 생각하고 있긴 했지만, 
아마도 오늘 같은 날 나는 70년대 초반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의 
주모자였던 권오규란 사람의 이야기를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무기징역을 
받고 그의 동료들은 혹은 사형선고를 받고, 내장이 터져나갈 정도의 고문을 
받고, 그중의 하나는 사형이 집행되고 그중의 하나는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를 
하고, 그러고도 그는 살아남아서 스물몇살의 청년이 오십이 다 되어 출옥한 
이야기 말이다.  출옥을 한 후에도 감옥에 갇혀 있었던 이십몇년간의 습관 
때문에, 밖에서 누군가가 방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방문 안에서 제 스스로 문을 
열 줄 모르고, 길을 걷다가도 마치 감옥의 벽이 그에게 달려드는 것만 같은 
환각에 흠칫흠칫 놀라 서는 바람에 같이 걷던 사람들이 함께 가슴이 내려앉는 
슬픔을 맛보고, 그런 그의 이야기 말이다.
  그러면 강선배와 나는 애꿎은 은하수담배만 피워대면서 서로 붉어진 눈가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몰라 코를 훌쩍여가면서,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이긴다, 왜냐하면 우린 옳으니까, 진리를 한 번 알아버린 사람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라는 말을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아까 오전에 전화했더니 취재갔다고 하더구나, 바쁘니?
  강선배는 나의 침묵이 조금 거북해졌는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으응...  마감이니까요.
  나는 물만 마시며 그를 어색하게 바라보았다.  이 어색힘.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이 아직도 자리를 잡지 못하고, 오년 전에 있었던 우리 사이의 반가움이 
구석진 곳으로만 찾아드는 것 같은 어색힘...  그러나 꼭 죽음이 아니라 해도 
사실 이런 만남이 이별은 아닐까.
  급하게 취재 갔었어.  이민자라는 사람의 집에.  이번에 책을 냈는데..
  아아, 이민자.
  강선배가 입을 열었다.  그가 이민자를 알다니, 뜻밖이었다.  데스크가 그녀의 
책이 그토록 베스트 셀러라는 칭찬을 한 것이 조금 이해가 갔다.
  이번에 아버지가 그 여자 그림을 한점 샀어.  알고 보니 우리 집안하고 먼 
일가야...
  그래애...
  그와 나는 이민자를 안다는 공통점을 겨우 발견하고 서로 눈이 마주치자 
웃었다.
  취재 잘하고?...
  그저.
  내 마누라 될 사람이 그 여자 명상법 사다 놓고 요즘 연습한대.  좋다고 
읽어보라고 나한테도 한 권 줬는데 아직 못 읽었다.  ...바빠서 통 책을 읽을 
시간이 나야 말이지.
  그도 모처럼 나온, 이 어색한 부위기를 무마시켜주는 이민자의 이야기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서둘러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만나보니까 어때?
  ...글세, 뭐랄까, 독특했어.
  독특해?  어떤 점이?
  그 집엔 강아지가 있었거든...  그 강아지는 하루 종일 연못가에 놓인 돌에 
코를 박고 가만히 앉아 있어.  내가 강아지가 왜 저러느냐고 물었더닌 이민자 
화백이 대답하데.  강아지요?  아아...  강아지는 명상을 하는 중이에요.  
...재미있길래 내가 물었지.  무슨 명상이오.  ...그러자 그녀가 대답했어.  
...글쎄요, 이런 거겠죠.  물속에 고기가 있네...
  그가 식어버린 커피잔을 들다 말고 푸우, 하고 웃었다.  나도 따라 웃었다.  
나는 감사했다.  오늘 만일 권오규의 집에 갔었더라면 삼양동에, 골목길이 
구불구불한 그 허름한 한옥의 그 그늘진 문간방에, 시멘트로 발라진 서너 
평짜리 마당이 있고 그 마당엔 파란 비닐화분에 담겨진 촌스러운 철쭉이 있고 
재생고무로 만든 대야가 널브러진 그 집에 갔었더라면 강선배와의 어색함을 풀 
수가 없었을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그와 둘이 앉아서 이미 죽어버린 
윤석이라거나, 권오규의 투옥과 고문과 청춘에 관해서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아니, 그건 나의 지나친 비약일까.  ...그러나 그렇다 해도 까페의 한가운데 
자리에서 녹두색의 하늘거리는 실크잠바를 입은 그와 마주앉아서, 이제와서 
나는 그런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시계를 보더니 일어서서 찻값을 지불했다.  언뜻 흘겨본 그의 지갑 
속에는 몇장의 파난 지폐가 삐죽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나는 그가 혹시라도 
내 월급봉투를 내밀었던 그날을, 그것을 다 준다 해도 그들을 도망쳐나왔던 내 
죄책감을 다 씻을 수 없을 것 같았던 그 가을날을 기억하고 있을까, 그도 
아니면 윤석의 묘지에 홀로 다녀왔던 그리고 내게 전화를 걸어 울먹였던 
그날들을 가끔은 생각하고 있을까, 잠시 생각했지만 곧 웃음을 띠고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가 약간 어색해하며 내 손을 잡았다.
  주차장까지 그를 배웅하고 다시 칠층에 있는 사무실로 올라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나는 그의 결혼식을 상상해보았다.  케이크가 
잘라지고 얼음으로 만든 조각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그곳, 그곳에 모일 우리의 
옛 동료들을 말이다.  아마다 많은 사람들이 올 것이었다.  컴퓨터 회사의 
사장이 된 선배, 전임자리를 얻은 동기생들, 시집을 가서 애기를 둘씩이나 낳은 
친구들...  하지만 오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아직도 수배중인 후배와 
아직도 감옥에 있는 선배와 그리고 버얼써 죽어버린 친구들...
  한 친구가 술자리에서 그렇게 물었었다.
  우리들은 말이야, 우리들은 저 팔십년대를 결국에라도 말이야,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러자 다른 친구가 말했다.
  벗어나지 못하면 어쩔 거야.  이제사...
그러자 어떤 친구가, 전과자라는 낙인 때문에 대기업을 포기하고 지금은 작은 
컴퓨터 회사에 다니는 어떤 친구가 머리칼을 부비다가 말했다.
  ...나는 아냐, 니들 다 그래도 나는 아냐...  왜냐하면 나는 아니니까...
  우리들은 몹시 취해서 그 자리를 파했었다.  그 친구들도 강선배의 결혼식에 
올까?
  엘리베이터는 좀처럼 내려오지 않았다.  나는 생각을 바꾸어 계단 쪽을 
택했다.  어둑어둑한 비상구 계단을 천천히 올라가면서 권오규 선생의 <인간에 
대한 예의>라는 책과 사진기자가 건네준 그의 네가필름과 처형당한 사람과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한 사람의 이름만 달랑 적힌 취재메모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취재조차 할 수 없는, 바보같이 죽어버린 윤석과, 그런 사람들...
  나는 왜 이민자에게 갔었나?  전혀 좋아하지 않는 데스크의 청탁을 왜 그렇게 
쉽게 받아들였을까.  받아들여서 권오규란 사람의 책을 다음달에 소개해도 
좋다고 나는 왜 생각하나.  ...그건 작은 일이니까.  내가 권오규 선생을 이번 
호에 싣든 이민자를 이번 호에 싣든 세상은 어쨌든 그렇고 그렇게 돌아갈 
테니까?  ...나는 벌써 팔십년대를, 내 이십대가 고스란히 놓여 있는 그 
팔십년대를 벗어날 걸까.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감옥에서 풀려난 사람은 
풀려난 사람들이고...  잡지를 읽는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그런 이야기는 
좋아하지 않으니까.  그건 이젠 철 지난 유행이니까 그래서?
  나는 권오규란 사람의 이름을 선배들이 등사한 팸플릿에서 보았었다.  줄을 
치고 필기를 하면서 그들의 운동의 허점과 오류와 그 아나키스트적인 발상을 
비판했었다.  대체 몇십명의 비밀결사가 독재정권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생각한 
70년대적 순진함이여...  그가 내게 미친 영항은 고작 그것뿐이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무수히 투옥되고 죽어가고 하던 때에도 그저 감옥에 앉아 있었을 
뿐이었다.  그 때문에 박정권이 무너지지도 않았고, 그 때문에 전두환씨가 
백담사로 간 것도 아니고, 그 때문에 문민정부시대가 온 것도 아니었다.  그는 
팔십년대에 고스란히 이십대를 보낸 우리들에게 대체 무슨 영향을 끼쳤단 
말인가...
  윤석은 신중하지 못했다.  그는 일당 칠백원을 올리기 위해 제 몸에 불을 
지르는 짓을 저질러버렸다.  신나가 휘발성이 있다는 걸 왜 잊어버렸단 말인가.  
 ...그러고도 그 회사의 일당은 오르지 않았었다.  사장은 살아났고 그는 죽었다.  
그의 어머니는 아직도 공장의 식당에 나가실 것이다.  ...그리고 나는 가계부를 
만들면서 잠시 손을 놓고 멍하게 앉아서 바보 같은 것, 바보 같은 것 
중얼거렸다.  그가 끼친 영향은 고작 그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이 대망의 구십년대에 이민자는 다를 수 있다.  그녀는 적어도 
내게 명상하는 방법을 일러줄 수 있다.  모든 외로운 사람들, 잠 못 드는 
사람들, 혼자라는 생각에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아니에요,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만 해도, 이 우주 속에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라고 당당하고 담담하게 말해줄 수 있다.  그래서 그녀와 희귀한 
냄새가 나는 차를 마시노라면, 그래, 혼자서라도 잘살아보는 거야 하는 용기를 
얻을 수도 있다.  그래서 용기를 얻으러 나는 이민자에게 갔었나?
  무언가 잡을 것이 없을까, 이렇게 허허로운 때에.  술자리에서조차 운동가요는 
더 이상 부르지 않는 이때에, 요즘 인천하고 부평하고 울산에서는 말이야...라고 
더 이상 말하지 않는 이때에, 누가 수배를 다했는지, 누가 아직 감옥에 남아서 
이 차가운 봄날의 냉기를 견디고 있는지 관심이 없는 이때에, 운동?  너 아직도 
그런 거 이야기하니, 하고 말하면 웃음보가 터지는 이즈음에.  ...무엇이 옳고 
그른가가 아니라 무엇이 좋고 무엇이 싫은가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이때에.  
...아내 있는 평론가가 출판사 여직원에게 임신을 시키고, 결혼식 청첩장을 
돌리던 작가가 술집여자 스무 명과 번갈아 잠을 잔 걸 자랑하고...  누가 
누군가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고 입으며, 사실은 그건 동구권이 무너졌기 
때문이었어, 라고 너무나 진지하게 대꾸하는 이때에 제발이지...라는 마음 하나 
품고 나는 이민자에게 갔었던가.  그런가?...
  너는 도망친 사람이니 입을 다물라고 누군가가 말한다면 나도 입을 다물지도 
모르지만, 무서워서 도망친 비겁자라고 욕한다면 진심으로 그들에게 나의 
비겁함에 대해 사죄할 용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나 역시 팔십년대의 
아들이며 딸이었다.  팔십년대의 아들이며 딸들은, 어떤 상황이라 하더라도 
옳으면 승리하다는, 아아, 너무도 단순했지만 너무도 굳게, 결국은 정의가 
승리한다는 믿음을 먹고 자란 사람들이었다.  ...루카치를 교지에 실었다는 
이유로 강제징집을 당하는 선배를 보면서, 학내시위 사실을 학교 신문에 
실었다는 이유만으로 구속된 친구를 보면서, 누군가 작은 정의를 위해 싸우고 
나면 뒤에 오는 이들은 좀더 큰 정의를 위해 싸울 수 있다는 신념, 우리들의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을 거라는 신념을 배웠던 사람들이었다.  그랬던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동구권을 빼고 나면 정말 한숨과 체념과 방탕과 그런 
것들만 남았던 것인가?  그런가...
  감옥에서 이십년 동안 그저 앉아 있던 권오규의 모습이 떠올랐다.  가난한 
가방을 달랑 들고 그림공부를 하러 뉴욕으로 떠나는 이민자의 모습도 보였다.  
비밀결사를 다 결성하기도 전에 체포되는 권오규.  ...그 무렵 뉴욕에서 그림을 
그리는 이민자.  ...감옥에 앉아 있는 권오규.  ...인도를 맨발로 방랑하는 이민자.  
...감옥에서 일곱 걸믕 걷다가 뒤돌아서서 다시 일곱 걸음 걷는 권오규.  
...아프리카의 눈 덮인 킬리만자로가 보이는 사파리에서 불현 듯  그 무엇인가  
깨닫는 이민자.  ..그래도 감옥에 앉아 있는 권오규.  ...지겹도록 이십년 동안 
앉아만 있는 권오규.  ...무엇을 견디려고, 무엇을 기다리려고 그저 앉아 있는 
권오규.  ...화염병를 들고 뛰던 강선배, 휴지뭉치를 들고 코를 풀며 따라가던 나.  
...일당 칠백원을 올리려다 죽어버린 윤석이.  ...그저 싫어서 도망친 나.  까페의 
한가운데 앉아 있더 강선배, 흙이 된 윤석이와 낮술, 엉망진창인 나. ...그런데 
오늘은 바람이 분다.  사진기자는 강경대가 맞아죽은 지 이주년이 되는 
날이라고 말했다.  하필이면 오는 강선배는 나를 찾아와 청첩장을 내밀고 
하필이면 오늘 바람이 분다.  나는 사진기자의 말대로 조그맣게 입술을 
오므리고 혼자 중얼거려보았다.
  젠장할...  마감인데 어쩌란 말이야...
  영화를 본 일이 있었다.  주말의 명화 시간에.  지금은 제목도, 출연했던 
배우도 떠오르지 않는 영화.  ...이차대전중, 다섯 명의 특수 요원들이 나치의 
댐을 폭파하러 떠난다.  다이너마이트를 한 손에 쥐고 다른 손에는 어머니의 
사진을 쥔 젊은이들.  그들은 죽으로 가는 것이었다.  적의 댐과 자신들의 
운명을 같이 파괴하러...  상사는 말한다.  우리의 임무를 생각하면 죽음이 무슨 
두려움이랴.  사실은 그 상사를 뺀 나머지 젊은이들은 꼭 죽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댐 속에 들어가서 다이너마이트를 폭파시킨다.  그리고 쓰러진다.  
나는 그들의 죽음에 애도를 보낼 마음을 자기기 시작했다.  ...어서 댐이 
무너지고 물줄기가 솟구쳐내리고, 그들 역시 그 물줄기에 휩쓸리는 그 장엄한 
광경이 펼쳐지기만 한다면...  그런데 영화는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잠시 
후, 그들 젊은이들은 댐 속에서 깨어난다.  그들은 기절 했을 뿐이었다.  그들이 
깨어나는 것을 지켜보던 상사가 웃는다.
  망할 자식들...  이 거대한 댐이 다이너마이트 몇 개로 폭파될 줄 알았던 
거냐?  이제 우리가 구멍낸 자리에 물이 스며들고...  그리고 댐은 바로 그 
구멍난 틈으로 스며드는 이 강의 물줄기가 무너뜨리는 거야...  자, 얼른 일어나!  
여기를 빠져나가자.
  아까 마신 소주의 취기가 그제서야 뭉게뭉게 올라왔다.  얼굴이 화끈거리면서 
계단이 아물아물거렸다.  나는 잠시 난간에 두 손을 짚고 너무 늙어버린 
노인처럼 잠시 서 있었다.  그러니 이제 마지막으로 열무싹 이야기를 좀더 
해야겠다.  이민자의 통나무집을 나서면서 내가 느꼈다는 열무싹 같은 
슬픔이라는 것은 사실은 거짓말이었다.  슬픈 거면 슬픈 거고 열무싹이면 
싹이지 열무싹 같은 슬픔 같은 건 애초부터 없었다는 말이다.  나는 이민자를 
결코 권오규만큼 사랑할 수 없다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녀가 사실은 
더 매력있고 더 재미있는 시간을 내게 내주었지만, 권오규의 동생은 지루했고, 
권오규는 내가 다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고리타분한 이야기만 한 것도 
사실이었지만 나는, 미안하다, 나는 그들의 지나온 삶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필십년대에 이십대를 고스란히 보냈듯 그들이 보냈던 이십대를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내 삼십대가 다가오듯이 그들의 삼심대와 그들의 
사십대를 시궁창 냄새가 풍겨오는 듯한 우리의 정치사와 함께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이제 정말 열무싹 이야기를 하기로 하겠다.  이건 
정말인데, 나는 오늘 아침에 먹다 남은 차찌꺼기 모은 것을 그 열무싹이 뿌리 
내린 흙에 뿌려주고 그것을 다른 흙으로 덮었다.  땅이 너무 척박해서 
그것이라도 비료를 주어야겠기에...  나는 빌었었다.  ...날씨가 더 무더워져서 이 
차찌꺼기들이 빨리 썩기를, 썩어문드러져서 거름이 되기를...  나는 그걸 
바라면서 아직 차가운 봄하늘을 올려다보았었다.  그들이 썩지 않으면 그들은 
열무싹과 아무 상관이 없을 테니까...  파릇파릇한 어떤 싹도 틔울 수 없을 
테니까...  그저 막막하기만 하던 권오규의 기사 첫머리가 그제서야 내 머리에 
떠올랐다.
  여기, 시대와 역사와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켰던 한 사람이 있다.
  나는 천천히, 낮술에 취하는 몸을 조심스럽게 가누며 칠층이라는 안내판이 
붙은 계단으로 올라섰다.  멀리 데스크가 하품하는 모습이 보였고 나는 그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1993, 실천문학 여름호>

        무엇을 할 것인가
  걷다보니 저녁이었다.  고궁을 따라 길게 이어진 길에는 거의 인적이 없었고 
혜화동 로터리 쪽으로는 차들만 길게 늘어서 있었다.  해가 지는 무렵이면 늘 
그랬듯이 사물들의 윤곡이 뚜렷했다.  몇백년 전 쌓았을 고궁의 돌담 언저리, 
이끼 낀 기와의 까실까실한 결들까지 선명했다.  문득 눈을 들었다.  희끄무레한 
저녁하늘 사이로 앙상한 나뭇가지가 파들거리며 떨고 있는 게 보였다.  한때는 
무성히 이파리가 피어났었고 또 한때는 푸드득거리며 커다란 이파리를 떨구던 
나무들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미세한 바람결에도 몸서리를 치면서 그저 
파들거릴 뿐이었다.
  나는 가방을 고쳐메며 계속해서 걸었다.  아까 오후에 선배의 출판사에 들른 
이후로 나는 계속 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모든 약속들을 스스로 
취소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길 잃은 사람처럼 이 저녁거리가 낯설었다.  
늘 걷던 길의 버스정류장 팻말까지 그랬다.  갈 곳이 없었던 것이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만 다시 그의 생각이 났다.  그가 결혼을 한다고 
아까 출판사에서 누군가가 말을 꺼냈을 때무터 나는 계획했던 저녁의 일정들을 
혼자서 취소해버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정확히 말해서 그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마도 지금 이시간, 아마도 김교수의 
출판기념회에 참석해 있을 것이다.  별로 동의하지도 않는 그의 논문에 입에 
발린 치하를 보내고 사람들을 만나고 뷔페를 먹고, 어쩌면 쓸데없는 농담들을 
지껄이면서 거품도 싱싱한 맥주를 마시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 가, 결, 혼, 을 한다.
  이제 나는 아무도 건너지 않는 신호등 앞에 서 있다.  차들이 늘어선 길 
건너편에 서 있는 여자가 보였다.  스물이 좀 넘었을까, 시장에서 아무 생각 
없이 골라잡은 것 같은 허름한 파카에 무릎이 나온 바지를 입고, 그 여자도 길 
건너편에서 내 쪽에 있는 신호 등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나는 그 여자가 몹시 
불안해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나자 갑자기 지금 나와 
마주보고 서 있는 여자의 모습이 혹시나 환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모습을 하고 있는 여자를 나는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단발머리를 하고 
아무렇게나 골라잡은 파카와 무릎이 나온 바지를 입고저 길거리에 서 있던 
스물몇살의 여자.  지금 저 여자처럼 신호들을 바라보면서 파란불이 
들어와주기를 기다리고 있던 여자...
  그러자 이 세상의 모든 풍경들이 내 곁에서 지워져버렸다.  그리고 그 여자와 
나...  차들이 있는 한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그 여자와 나만이 이 
세상에 남았다.  그리고 이윽고는 그 여자도 지워져버리고 기억 속의 여자만 
남아 거기에 서 있었다.  머릿속에서 달력들이 거꾸로 팔락거리시 시작했고 
1986년 겨울이 되었다.
  그때 그 여자는 몹시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유난히 검은 눈동자는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고 온몸이 딸꾹질을 하듯 몇분 간격으로 가볍게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신호들이 바귀자 그 여자는 빠른 걸음으로 길을 건너 혜화동 
쪽으로 향해 갔다.
  이윽고 어떤 초라한 다방 입구에 다달았을 때 그 여자는 멈추어서서 가쁜숨을 
몰아쉬다가 다방으로 들어갔다.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은 그 여자의 낡은 
운동화가 닿을 때마다 삐그덕거리는 소리를 냈다.  삐그덕 거리는 소리가 혹시 
불길의 징조는 아닐까, 그 여자는 그 계단 중간에 서서 잠시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 여자는 조심스레 다방문을 밀쳤다.  그때, 1986년 겨울의 어느날에는 아직 
시간이 일러서 다방엔 아무도 없었다.  조심스레 창가에 자리를 잡고 나서 그 
여자는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간절하게 담배생각이 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여자의 주머니 속에서는 토큰 몇 개만 가련하게 짤랑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가 들어섰다.  불안하게 출입구를 응시하고 있던 여자의 
얼굴이 왈칵 화색이 번졌다.  그는 인조털이 달린 감색 체크무늬 반코트를 입고 
있었다.  그 반코트를 보자 그 여자는 설핏 고개를 숙여버렸다.  이제 와서 그의 
반코트를 보면서 눈물이 괴어버린 게 부끄러워서는 아니었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그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던 때문이었다.
  그는 그 여자의 앞자리로 와서 앉았다.  천천히 그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생각 탓이었을까, 그의 눈은 괴로워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여자처럼 그의 
눈동자도 몹시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여자는 가슴께에서 
무언가가 찍겨져나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그 여자는 남자의 시선을 피해 
낡으 탁자로 시선을 떨어뜨리면서 자기도 모르게 가슴 한구석에 제 손을 가져다 
댔다.  심장이 뚝, 뚝 피를 흘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다시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 여자는 설핏 웃었다.  마지막이라는 생각도 금기라는 생각도 그 
여자는 하지 않기로 했다.  마지막이라도 좋았던 것이다.  그가 여기 있고 나는 
또 여기 있고...  하직 우리는 함께다.  미소짓는 그 여자의 마음을 헤아린다는 
듯 그가 입을 열었다.
  -어젯밤엔 술이 과했던 것 같구나...  우리 둘 다...
  설핏 미소짓고 있던 여자의 윗입술이 얇게 뒤틀렸고 이어 선명하게 
일그러졌다.  술 째문이라고 그가 입을 열었을 때 알아차려야 했었다.  하지만 
그 여자는 그러지 않았다.  그건 마지막이었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그 
여자에게 용기를 주었다.
  어차피 모든 선을 넘어버렸다고 그 여자는 생각했다.  지금은 아침 세미나 
시간이었다.  말도 없이 빠져나온 그와 그 여자를 모두들 찾고 있을 것이었다.  
그 눈초리들, 쏟아져내릴 그 비판들...  가뜩이나 그 여자는 지금 사람들의 
따가운 눈초리를 받고 있는 처지였다.  하지만 그 여자는 제게로 달려들어 그 
여자를 상처입힐 그 모든 말들을 다 각오하고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그것이 , 
마지막이라는 생각보다 더 그 여자에게 용기를 주었다.  그래서 여자는 입을 
열었다.
  -난 목숨을 걸 수도 있어요.
  술 때문이라고 말한 그와 목숨도 걸 수 있다고 말한 그 여자의 눈이 다시 한 
번 허공에서 부딪쳤다.  그는 무슨 말인가 하고 싶은 듯했으나 바람 빠진 
것처럼 웃어버렸다.
  대학원을 그만두었을 때, 집을 뛰쳐나와 노동운동을 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그 
여자는 어머니와 아버지 앞에서 이해해달라고 말하며 시선을 떨구었었다.  남자 
앞에서 여자는 아직 시선을 떨구지는 않았다.  하지만 술 때문이었다는 그의 
말을 다시 생각하자 여자는 결국 시선을 떨구고 말았다.
  -...형은 참 비겁한 사람이군요.
  그가 말없이 주머니를 뒤적거려 담배를 꺼냈다.  그리고 그 여자에게 한 대를 
내밀었다.  담배를 받아들면서 그 여자는 어젯밤에 일어난 일들을 생각했다.  
그와 그녀에게 돌연히 찾아왔던 밤을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밤이 
돌연하게 찾아온 것이 아니라는 걸 그 여자는 알고 있었다.
  1983년의 어느 가을날, 낙엽이 지는 교정의 뒷숲에서 여학생들이 우수수 
우수수 강간을 당하고 다음날 벌어진 시위...  여학생들의 치마를 발겨놓고 
유유히 사라졌던 사복경찰들의 이야기가 흉흉하게 떠돌던 가을이었다.
  -산 자여 따르라!  산 자여 따르라!
  그는 도서관 유리창에 매달린 채로 소리쳤다.  물론 그는 끌려갔다.  그리고 
건너편 건물에서 유인물을 뿌리던 여자선배가 사복경찰들에게 쫓겨 건물 아래로 
떨어져내렸다.
  학생회관 뒤편에 숨어서 그 광경들을 바라보면서 엉켜쥔 주먹으로 눈물을 
틀어막고 서 있던 그 여자는 일년 후 대학원에 진학했다.  대학원을 그만두고 
집을 뛰쳐난온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 여자는 살아 있었고 살아 있는 
젊은이들의 갈 길을 알고 있던 탓이었다.  수천명의 살아 있는 젊은이들이 
택했던 감옥의 길을 그 여자도 가고 싶어했었다.  왜냐하면 감옥 밖에 있다는 
사실이 더 괴롭던 시절이었으니까.  이유는 단지 그것이었다.
  그 여자는 노동현장에 투입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  머리털이 나고나서 
그렇게 혹독한 공부는 처음이었다.  물론 그렇게 궁핍한 것도 처음이었다.  
하루분의 아주 작은 식량이 정해지고 하루분의 엄청난 양의 학습분량이 
정해지고 피워도 될 은하수 담배의 개수가 정해졌다.  그 여자는 학습에 
몰두했다.  그것은 힘겨웠지만 기쁜 일이었다.  하지만 그 기쁜은 오래가지 
않았다.  손질이 간편한 머리와 허름한 옷, 식물성분의 식사, 공동의 용돈, 
닥쳐올 나날들에 대한 구체적인 불안...  실제로, 모여서 공부를 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끌려간 동료들도 많았다.  여자는 제 선택에 대해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노동자가 된다는 일은 혹은 민중이 된다는 것은 너무 힘겨운 
일이었다.  적어도 이미 물질이 주는 쾌락을 맛본 여자에게는 그랬다.  하지만 
내색할 수도 없었다.  여자는 노동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과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뒤죽박죽인 채, 실마리를 풀 수 없는 혼돈을 혼자서만 싸안고 그해 
겨울을 맞았다.
  그리고 어느날 그가 그녀들에게 왔다.
  그는 그녀들을 지도하던 선배가 끌려간 이후로 그녀들에게 왔던 거였다.  
물론 그도 수배중이었다.  그 역시 언제 끌려갈지 모르는 상태였다.  그는 그 
여자의 얼굴은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 여자가 자신의 후배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여자는 그를 기억했다.  끌려가던 그가 외치던 
마지막 소리, 어쩌면 신파적인 대사처럼 보이기도 하는 말, 산 자여 따르라, 
라는 소리가 젊은 가슴에 비수처럼 꽂힐 수밖에 없었던 그 가을날들을 잊지 
않고 있었던 거였다.
  -김정석이라고 합니다.
  그가 간단히 자신을 소개했다.  물론 이름은 가명이었다.  그 여자도 가명으로 
자신을 소개했고 그들은 그렇게 다시 만났다.  공부를 하는 짬짬이 휴식시간이 
되면 그는 낡은 기타를 퉁겼다.  공부에 지친 그녀들이 그 주위에 동그랗게 
모여앉아 노래를 불렀다.  기타를 퉁기며 노래를 부르는 그를 보고 있자면 그 
여자는 문득 도서관에 매달려 있던 삼년 전의 그를 떠올리곤 했었다.  그때 
그는 분명 저런 모습은 아니었다.  그가 외쳤을 때, 외치면서 끌려갔을 때 그 
여자는 그가 그렇게 고운 저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건 몰랐었다.  부드럽게, 마치 
휘파람처럼 휘감기는 그의 낮은 노랫소리를 들으면서 그 여자는 왠지 가슴이 
아팠다.  그가 그저 외치는 자의 소리로만 남아 있었더라면 아마 가슴이 
아프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그 여자는 사담이 허용되는 시간이면 가만히 
그에게 이야기를 걸었다.  외치는 자의 소리와 낮은 휘파람처럼 휘감기는 
저음을 동시에 가진 그라면 그 여자의 고민을 안아줄 것만 같았다.  이해하고 
독려하고, 그러고 나서 강철처럼 그 여자를 단련시켜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그렇게 했다.
  누군가의 과거사에 대한 이야기는 서로에게 금물이었지만 그가 없을 때 
호기심이 많은 여학생 하나가 그의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우리 대학 삼학년 때 시위 말야, 그때 도서관 사층에서 짭새를 피하다가 
떨어진 언니 있잖아.  그 언니랑 결혼한대...  긍 너닌 그때 떨어진 상처 때문에 
지금 하반신마비가 되었는데 얼마나 열시히 활동하는 줄 아니?  참 잘 어울리는 
커플이야.  감옥에서 서로 편지를 몰래 교환하면서 연인으로 사귀기 시작했대...  
멋지지 않니?
  그리고 며칠 후 그녀들에게 그가 왔을 때 그는 새로운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선명한 배춧빛의 손뜨개 스웨터였다.  휠체어어 앉아서 저 스웨터를 뜨개질했을 
여자의 손가락이 떠올랐다.  둥글게 감은 배추색 털실이 풀려나가는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뜨개질이라면 그녀도 자신이 있었다.  후드가 달린 멋진 
카디건을 동생들에게 떠입힌 적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여자는 지금 
뜨개질을 할 수는 없었다.  더더구나 그를 위해 뜨개질을 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그에게 아무것도 줄수가 없었다.  무엇인가를 받지 못했을 때가 아니라 
주고 싶은 사람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을 때 사람은 가장 슬플 수도 있다는 걸 
그 여자는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깨달으면서 그 여자는 생각했다.  대체 
어쩌자고 이런 생각을 하는 거지?
  그러자 그 여자는 그제서야 아득한 나락으로 떨어지는 걸 느꼈다.  그 여자는 
아득바득 그 절망감과 질투심의 정체와 싸웠다.  대학원을 그만두고 집을 
뛰쳐나온 것은 결코 그런 식의 감정을 느끼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뛰쳐나오면서 아버지에게 뺨을 맞으면서도 당당하던 그녀가 아니었던기...  
새벽에 일어나 찬물에 손을 담그고 걸레를 빨다가도 눈물이 나왔다.  그 여자는 
생각을 잊기 위해 쏴아, 수도를 틀었다.  하지만 수도꼭지에서 쏟아지는 것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어처구니없는 감정의 격류였다.
  호기심이 많은 여학생이 다시 말했다.
  -얼마나 지독한 형인 줄 아니?  그 언니가 몸이 아파 누워 있어도 후배들과의 
약속시간이 되면 일어나 나오는 형이야...  저렇게 늘 웃고만 있어도 강철같은 
형이야...  그야말로 정석에서 단 한 번도 벗어난 일이 없는 사람이야.  그래서 
우리 모두 정석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지...  정석이 아니면 어떤 행동도 하지 
않거든...
  그랬다.  그는 절대로 흐트러진 적이 없었고 그렇다고 권위를 보이지도 
않았다.  말씨는 언제나 한 옥타브 낮은  라 음이었다.  물론 아주 높은 음까지 
올라가는 노래를 부를 때는 제외였지만 말이다.  만일 그녀들이 하고자 
열망했던 그 일에 정답이 있다면 그건 바로 그였다.  경제학, 철학에서부터 
역사, 문학에 이르기까지, 영어, 독어에서 일본어, 스페인어까지...  그는 그녀들을 
주눅들게도 했고 운동에 대한 열망에 눈뜨게도 했다.  그는 빛이었다.  
그녀들에게는, 아니, 적어도 아득바득 제 감정과 싸우느라 자꾸 그늘 속으로 
숨고 싶었던 그 여자에게는...
  그 여자는 감히 그가 그 여자만을 향해서 특별한 미소를 지어주기를 바란 
적이 없었다.  하지만 한 번 그는 그 여자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건 이런 일 
때문이었다.  며칠 밤을 지새우면서 세미나가 벌어지던 날 밤...  그는 드디어 
잠깐 쓰러졌다.  지독한 감기였다.  그녀들이 감히 큰 소리도 지리지 못하고 
그를 일으켜세웠다.  그는 창백한 얼굴을 찡그리며 가볍게 손을 저었다.  별 것 
아니라는 말이었다.  그는 누운채로 그녀들의 세미나를 들었다.  세미나가 
제대로 진행될 리가 없었다.  그 여자는 아까 그가 쓰러질 때부터 마음이 
뒤숭숭거려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발제도 건성으로 했고 그리고 내내 
그의 창백한 얼굴만 훔쳐보고 있었다.  세미나가 끝나고 누군가가 새벽거리로 
그의 약을 사러 뛰어나갔다.  그 여자는 그때 식사당번이었다.  그 여자는 어제 
장을 본 여학생들이 사다 놓은 대파의 흰뿌리를 잘라 깨끗이 씻었다.  그리고 
물을 한컵 냄비에 넣고 그것을 끊였다.  어렸을 때 지독한 감기에 걸리면 
할머니가 끓여주던 파뿌리 생각이 났었던 거였다.  새벽거리로 약을 사러 갔던 
여학생이 빈손으로 돌아왔다.  이제 그를 도와줄 사람은 그 여자밖에 없었다.
  그 여자는 파뿌리 삶은 물을 내밀었다.  이제서 무언가 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 여자는 들떠 있었다.  더구나 그 여자의 얼굴을 잠깐 동안이었지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나서 그는 그 여자에게 아주 특별하게 보이는 미소를 지었던 
것이다.  그 미소가 하도 눈이 부셔서 그 여자는 그 방안에 있는 그녀를 제외한 
다섯 명 여학생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린 것도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파뿌리 물을 다 마시고 났을 때, 그녀는 자신이 주시받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자꾸만 떨리는 입술을 지그시 누르며 그가 내미는 빈 대접을 받아들고 
부엌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녀에게 쏟아졌던 여학생들의 시선은 분명 
의혹이었다.  그 여자는 그때 그 조직내에서 심하게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비판받고 있던 중이었다.  얼마 전 한 여학생이 앓아누웠을 때 
그 여자는 한밤중에 약을 사러 나가는 것을 몹시 귀찮아하기도 했었다.  그때는 
분명 부엌에 항상 있었던 파뿌리 같은 건 생각하지도 못했었다.
  그 여자가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부엌으로 다른 여학생이 들어섰다.  
모임내에서 제일 나이가 많은 여자였다.  그녀는 그 여자를 바라보더니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했어.  정석이형은 곧 나을 거야...  난 다만 네가 동지애를 다른 
여자동료들에게도 나누어주었으면 해.
  그 여자는 그러자 떨리는 입술을 펴고 그것이 동지애였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여자도 그리고 나머지 그녀들도 그것이 동지애만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그 여자는 그 모임내에서 심한 차별을 받았다.  심한 차별이라고 
했지만 그건 차별이라기보다 격리였다.  예를 들어 다른 동료들이 살고 있는 
방으로부터 책을 전달받기 위해 몇 명이 외출을 해야할 때도 그녀는 
제외되었다.  왜냐하면 그 책을 중간에서 전해주는 일을 그가 할 때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 여자가 살고 있는 방이라는 공간에서 여섯 명이 모두 모여 
있는 시간이 아니면 그 여자는 그를 볼 수 없게 배려되었다. 가끔씩 상상력이 
뛰어나다거나 발제를 요령있게 한다고 그 여자를 칭찬하던 그의 입도 
다물어졌다.  그 여자는 그 조디 좁은 비밀방에서 여섯 명의 여학생들이 누워서 
잠이 들 때 혼자서 벽을 보고 깨어 있었다.  그러면 그 여자는 또 생각했다.  
대체 어쩌자고 내가 이러는 걸까?  곧 현장에 투입될 상황에서 이런 감정으로 
인해 동지들에게 누를 끼쳐도 되는 걸까?  모두들 사랑조차 버리고 이곳으로 
오지 않았던가...  모두들 보고 싶은 사람까지 보지 못하고 어떻게든지 역사를 
올바르게 책임져보자고 눈물을 참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 여자는 그 생각만으로 그녀들의 따돌림을 묵묵히 받아들였다.  그래서 
다음번에 다른 동료가 감기에 걸렸을 때 그 여자는 손수 장을 보아다가 
파뿌리를 끓여 그녀에게 내밀었다.  같은 방에 살던 동료들이 그녀에게 미소를 
보냈다.  하지만 여자는 그날 밤 혼자서 또 생각했다.  아아, 나는 혹시 
위선자가 아닐까...
  그리고 몇 달이 흘렀다.  그 여자에 대한 조직의 엄격한 배려도 조금씩 
누그러들었다.  그는 여전히 그 여자에 대해서는 완강히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가끔씩 눈길이 부딪쳤을 때, 아주 짧은 시간 허공에서 두 사람의 눈길이 
부딪쳤을 때 그 여자는 그의 눈길이 특별하다는 걸 느꼈다.  사랑을 해본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그 짧고도 긴 시간...  그 여자는 이제 그런 사실들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이제 곧 노동자가 될 것이었다.  사람들에게 더 이상 
누를 끼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 여자는 또 생각했다.  그건 정말일까.  
눈동자끼리 헝공에서 얽혔을 때, 그의 동공이 검고 크게 확대되어오는 듯한 그 
느낌...  그걸 확인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그 여자는 눈을 
내리깔고 그녀가 제일 애를 먹고 있는 자본론 공부에 몰두했다.
  어느날인가 그는 기쁜 듯이 그녀들을 찾아왔다.  돈이 생겼고 맛있는 것을 
사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몇 달 동안 채소와 싸구려 어묵으로 연명하던 
그녀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삼겹살이 구워지고 소주가 날라져왔다.  그녀들은 
오랜만에 낡은 기타를 꺼내들었고 그리고 토론이 아닌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놀기로 작정한 날이었으므로 모두들 유쾌했다.  그가 술을 마시는 것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대접에 따른 소주잔을 여섯 명의 그녀들에게 골고루 
돌렸고 그동안 알지 못했던 각자들의 고민에 고루 귀를 기울이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별로 말이 없던 사람이었는데 그날은 아주 우스운 이야기들도 꺼냈고 
힘든 생활과 긴장에 지쳐 있던 그녀들을 흐드러지게 웃게도 만들었다.  그 
여자도 오랜만에 커다란 소리로 웃었다.  그리고 행복했다.  그것으로 족했던 
것이다.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여기 있고 우리는 기필코 역사를 바꿀수 
있고 그리고 여기 빛나는 나날들을 모범적으로 사는 그가 있다.
  밤이 깊어지고 하나, 둘 술에 약한 그녀들이 작은 마루에서 방으로 들어가 
잠이 들었다.  밤 세시가 넘었을까, 작은 마루에는 그와 그 여자만 남아있었다.  
문득 그 여자는 그걸 깨달았다.  그와 그 여자의 눈이 오래도록 허공에서 
만났다.  그 여자도 그도 눈을 내리깔지 않았다.  눈길을 떼지 않는 채 그가 
물었다.
  -내일 종로에서 후배를 만날 일이 있는데 나가지 못할 것 같거든...  대신 
나거서 내가 다시 연락한다고 좀 전해주겠니?
  그가 말했다.  그 여자의 눈이 환희에 빛났다.  그 여자는 거의 한달이 넘도록 
시내구경을 하지 못했던 거였다.  그의 말은 그러니까 이제 그 여자의 
유예기간이 끝났다는 뜻이 되는 거였다.  약도를 확인하느라 그에게 다가앉은 
그 여자의 숙인 머리가 그의 앞이마에서 나풀거리는 머리카락과 맞닿았다.
  -가면 아마도 이런 전화가 올 거야.
  다음 말을 듣기 위해 그 여자가 착한 학생처럼 그를 응시했다.  그때 그가 
왈칵 손을 뻗어 그 여자의 팔을 당겼다.  아니, 어쩌면 그 여자가 먼저 그의 
품으로 안겨버렸는지도 모른다.  엉거주춤 포옹을 한 채로 그 여자는 
생각했었다.  내가 결국 저지르로 마는구나...
  그 여자는 남자의 배춧빛 스웨터에 그저 고개를 묻고, 그 스웨터를 뚫고 
나오는 그이 체온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 여자가 그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느낀 것은 단순한 환희는 아니었다.  휠체어에 앉은 여자가 짜주었다는 그 
배춧빛 스웨터...  그의 손길이 그 여자의 등으로 가만이 다가왔다.  그 여자는 
그의 배춧빛 스웨터에 얼굴을 묻은 채로 생각했다.  이래도 되는 걸까...  그가 
그녀를 천천히 떼어내고 두 손으로 그 여자의 얼굴을 감싸안은 채 그 여자의 
눈을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그 여자가 울음을 터뜨린 것은 그때쯤이었다.
  -잘못했어요.  사실은, 사실은...  형을 사랑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가 다시 그 여자를 안았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힘이 세었다.  그가 
말했다.
  -다 알고 있었어...
  그 여자가 눈물 젖은 얼굴을 그의 어깨에 비볐다.  배춧빛 스웨터, 휠체어에 
앉아 있는 그의 여자...  그러나 그도 그 여자도 서로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 여자는 그의 어깨가 움찔하고 굳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천천히 그 여자를 떼어내고, 이번에는 그 여자에게 
눈길을 돌리지 않은 채 가만히 집 밖으로 나갔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다.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그 여자가 그를 따라 집 밖으로 나갔다.  그는 두 손을 
바지주머니에 찌르고 캄캄한 어둠속에 서 있었다.

  -미안하다...  이러지 말자고 생각했었는데...
  그 여자는 어둠속에서 고개를 저었다.
  -...한번만 만나주세요.  저 사람들 있는 데서 말구...  그냥 뵙고 싶어요.  내일 
열시 요 앞 다방에서...
  -그 여자의 말을 듣는지 마는지 그는 입술만 욱신거리며 씹어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여자는 그날 밤 어둠속에 서 있는 그를 남겨두고 먼저 집으로 돌아
왔다.  불 꺼진 방에서는 그녀들 중 제일  나이가 많은 여자가 자지  않고 
깨어있었다.  집으로 들어간 그 여자는 아무 말 없이 이불을 덮고 언제나 
그랬듯 벽을 보고 누웠다.  긴 한숨소리가 나이 많은 여자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탁자 위로 커피가 날라져 왔다.
  그가 그녀에게 말했다.
  -어젯밤엔 술이 과한 것 같다.  우리 둘 다...
  그 여자가 다시 말했다.
  -난 목숨을 걸 수도 있어요.
  그는 설핏 웃으면 눈을 내리깔았다.  미소를 짓고  있는 그 여자의 입술이 얇
게 뒤틀렸고 이어 일그러졌다.  그가 담배를 내밀었다.  그  여자는 그가 내미는 
담배를 받아들었다.
  -무슨 말이든지 하려무나.
  그가 말했다.  여전히 그는 그 여자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지만 자석에 끌리듯 
다시 눈이 마주쳤다.  그 여자는 피를 뚝, 뚝 흐리는 듯한 자신의 심장을 
부여잡고 굳은 듯 앉아 있었다.  
그가 담뱃불을 내밀었다.  그 여자는 담뱃불을 순순히 받았다.
  -형, 참 비겁한 사람이군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술 때문이 아니잖아요?
  그는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그 여자는 마치 그가 도서관에 매달려 있다가 끌려갔던 그  몇해 전의 
가을처럼 입술을 틀어막고 그를 바라보았다.  인조털이 달린 감색  체크무늬 
반코트 속으로 배춧빛 스웨터가 보였다.  그들은 아주 오래된 연인들이고 
그녀는 그와 동시에 시위를 하다가 하반신 불구가 되었다...  둘은 감옥에서 
편지를 주고받으며 동지로서의 사랑을 키웠다.  그리고 그녀는 아직도 
그를 위해 뜨개질을 한다...  뜨개질이라면 그 여자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여자는 그를 위해 뜨개질을 할 수가 없다...  그러자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이번에는 그 여자의 머릿속으로 명확히 떠올랐다.  그저  
이렇게 마주 앉아 있어서  좋은 게 아니고 정말 마지막이란, 단어...  그가 
떠나든 그 여자가  떠나든 그건 마지막이었다.  그 여자는  울음을 
억누르려고 입술을 누르고 있었던 조그만 주먹을 입에서 떼어내었다.   
마지막으로 그 눈빛의 의미를, 그가 그 여자를 바라보았을 때 커다랗게 
확대되어 오는 동공의 의미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형,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단지 정말 이름을 가르쳐주세요.  그러고 나면 
더 떼쓰지 않을게요.
  -...김, 정, 석
  그가 천천히 말했다.  그는 끝내 그렇게 말했다.  여자의 콧날이  왈칵 시큰해
졌고 그리고 서러운 눈물이 맻혔다.
  -이름은 알아서 무얼 하겠니?  나는 그저 네가 알던 김정석이라는 사람이야...  
우리가 각자의 장에서 열심히 살아간다면 그걸로 족한 거야...   아마 다시 이런 
자리에서 만날 일은 없게 되겠지...  그래도 열심히 삼련 우린 만나는 거야...  내 
말 알아듣겠니?
  그 여자가 작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렇게 상투적으로 말하지 마세요...  그저 난 이름을 알고 싶었을 뿐이에요...  
동지로서의 이름을 원하는 게... 아니었는데...  
  여자가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그의 눈에  확 붉은 기운이 몰려들었다.  하지
만 그는 그 여자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았다.  마치  입술로 다 할 수 없는  그 
어떤 진실을 그녀에게 전달해주고야 말겠다는 듯이 그의 눈길은 집요해 보였다.  
그 여자도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입술로 말할 수 없는 어떤 진실들을 
해면처럼  하나도 남김없이 빨아들이겠다는 듯했다.  그리고 그 여자는 말했다.
  -잘못했어요.  다...  제 잘못이에요.
  그리고 그들은 다방을 나왔다.
  그는 그 여자를 더  돌아보지 않고 버스정류장을 향해  걸었다.  그러자 다시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여자는 굳어진 입술로 그를 불렀다.  
 몇발짝 걷던 그가 그 여자를 돌아보았다.  그들은 그렇게 몇발짝을 사이에 
두고 서 있었다.
  -오늘 시내에 있는 다방에 가서 형이 나오시지 못한다고 전하겠어요.
 어젯밤 그 포옹의 전조가 되었던 그 약속을 생각하며 그 여자가 말했다.  그가 
마른손으로 제 얼굴을 부볐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그가 말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다...  들어가봐, 모두 기다릴 거다...  다들 힘들잖니!
  그가 다시 발을 떼었다.  여자는 그를  잡으면 안된다고 생각했지만 이번에는 
더 큰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가 끝끝내 고집하던 정석이라는 이름...  
그는  돌아보지 않고 어깨를 움츠린 채 뛰듯이 걸어갔다.  그러고는 달려오는 
버스를 향해  달음질치더니 그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의 배기가스가 하얗게 
뿜어나오던 겨울날이었다.  그리고 그  여자가 그를 본 것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 여자는 그녀들이 살고 있는 방으로 돌아갔다.  그녀들은 말도 없이 사라졌
다가 다시 돌아온 그 여자를 차가운 눈초리로 맞았다.  그 여자  역시 냉랭한 
눈초리로 그들과 마주앉았다.  무거운 침묵이 그 방을 감쌌다.
  -너무 철없다고 생각하지 않아?  대체 이게 무슨 짓이야!
  성마른 여자 하나가 소리쳤지만 아무도 더 대꾸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 아침이 
지나갔다.
  며칠 후 그녀들을 지도해줄 새 선배가 왔다.  새 선배는 김정석이라는 사람이 
사정상 그녀들을 더 지도해줄 수 없게  되었다고 짤막하게 말하고 책을  폈다.  
그녀들은 일제히 그 여자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 여자는 눈을 책에 고정시킨 
채 몸을 떨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름 같은 건  순순히 가르쳐주지 않아도 좋았다.  다시 그에게 
안기지도 않을 것이고 겁도 없이 사랑한다고 말하지도 않을 것이고 그리고 
아침에 사라지는 일도 없을 텐데...
  그녀는 그 과정을 이수한 후 노동현장으로  배치되는 일에서 제외되었다.  
그리하여 그녀들이 제각기 다른 곳으로 떠나가 노동자가 되었을 때 그 여자는  
후배들이 모여 있는 다른 방으로 가야했다.  거기서 다시 한 번 재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그들은 말했다.  하지만  그 여자는 거기서 공부에 몰두하지 
않았다.  그  여자는 어느날 저녁거리를 사러  간다고 그 방을 빠져나와 다시는 
그들과 합류하지 않았다.
  돌아온 탕자처럼 집으로 돌아간 그  여자는 며칠 후 혼자서  강릉 이모집으로 
갔다.  하루 종일 바닷가를 거닐다가 밤이면 돌아와 잠을 잤다.  
겨울바다에서조차 사람들은 모두 짝지어 있었다.  둘 혹은 셋...  혹은 여섯.
  어느날 바닷가를 지치도록 걷던 여자는 털썩 백사장에 주저앉았다.  누구하고
라도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목숨을 걸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었지.  그래, 분명히 그렇게 말했고  난 정
말 그럴 수도 있었을 거야.  그렇지만 일상을 걸 수는 없었어.  자잘한 나날들을 
건다는 건 목숨을 거는 일보다 더 힘들었어.  나의 미래...  나의 젊은날...  
젊음을 건다는 건 미래를 거는 일이고 일상을 건다는 건 언제까지 이어질지도 
모르는 삶을 거는  거잖아...  목숨을 거는 일이 차라리 쉬웠을 거야...  
하지만 나는 정말 목숨이라도 걸고 싶었었나?
  어떤 남자가 그 여자 곁으로 다가왔다.  묻지도 않았지만 그는 자신이 대학원
생이며 서울에서 바람을 쐬러 혼자 온 여행객이라고 소개를 했다.   다만 그가 
그 여자가 다니던 대학원 이름만 대지 않았다면 그 여자도 대충 그렇게 
믿어버렸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둘은 바닷가에서 술을 마셨다.  그는 회를 샀고 그 여자는 소주를 마셨다.  
그가 머뭇거리며 여관으로 그 여자의 손을 잡아끌었을 때 그 여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따라나섰다.  하지만 그가 불도 끄지 않고 그 여자의 몸을 
끌어당겼을 때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면서 그 여자는 불현 듯 배추색 
스웨터를 생각했다.  그 여자는 상처입은 짐승처럼 그의 어깨를 강하게 
밀쳐냈다.  당황한 남자가 다시 그 여자를 끌어당겼지만 여자는 벗었던 코트를 
입었다.  가짜 대학원생이 그녀의 뺨을 연거푸 후려쳤다.
  부풀어오른 뺨을 매만지다가 그녀가 대답했다.
  -미안해요.  아깐 죽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따라온  거예요.  하지만 
갑자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죽으려면 당신하고 하룻밤  자는 것쯤 
정말 아무 일도 아니겠지만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니까 가고 싶어요.  절 
보내주세요.
  가짜 대학원생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욕설을 
퍼부었다.
  밤바닷가로 뛰쳐나온 그녀는 그때까지 아무렇게나 풀어져 있던 목도리를 꼭꼭 
여미며 이모집을 향해 걸어갔다.  흰 이빨을 드러낸 파도소리만 그녀의 귀에 
철썩였다.   그 여자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내면서 걸었다.
  -스물네살짜리 여자가 스물다섯살짜리 남자를  사랑했어.  그뿐이었어.  그게 
죄야?  공부방에 여학생들과 같이 않아서 고기가 먹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지.  
그것도 죈가?  남루한 파카에 무릎이 나온 바지 말고 예쁜 치마를 입고 싶다고 
생각도 했어.  그도 아니면 수배자들과 나란히 앉아서 혹시라도 끌려갈까봐, 
끌려가서 성고문이라도  당하게 될까봐 벌벌 떨었어.  그것도 비겁한건가?  
대체 그게 무슨 큰죄인 거지?  ...아니야,  그도 아니면 이름 한 번  
가르쳐달라고 말했어.  
가명말고 진짜 이름...  대체, 대체 그게 무슨 죄엿다는 거야?...  난 당신의 진짜 
이름이 무언지 아는데...  사실은 당신이 도서관에 매달려 있다가 끌려가던 
그날부터 벌써 알고 있었는데...
  그에게 그런 말을  했어야 했다.   무식하게, 일자무식하게  대들어야 했었다.  
그러고는 얼굴을 바꾸고, 희극을 연기하다가 갑자기 비극을  연기하는 배우처럼 
얼굴을 바꾸어서 그 여자와 자고 싶어하던 가짜 대학원생에게 말해야 했었다.
  -그래도 우리에겐 지켜야 할 것들도 있어.  니 눈에는 우습게  보이겠지만, 무
모한 결벽증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우리의 무기야.  그것마저 
없다면 돈도 없고 힘도 없고 핍박당하는 우리가, 거대한 뿌리를 가진 이  
역사의 왜곡에 대항해서 대체 무얼가지고 싸우겠니?  사랑마저도 버리고 가야할 
길이 있다는데 누가,  누가 감히 그를 나무랄 수 있겠니?
  그 여자는 그해 겨울이 끝날 무렵 집으로 돌아와 대학원에 다시 등록을 했다.
  그리고 1987년 그 여자는 수배자 해제 명단에서  그의 본명을 읽었다.  그 여
자는 그 여자가 감옥보다도 괴로운 곳이라고 생각하던 대학원에 다니면서 
교수집에 세배도 가고 논문도 쓰면서 석사를 마치고 박사과정에 등록했다.  
그러는 동안 동구권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고 그리고 그 여자가 한때 
몸담았던 조직의 그 사람들이 모두 끌려갔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리고 또 한 
겨울이 지나자 소련연방이 해체를 선언했고 그가 폐결핵 2기가 되어서 고향으로 
내려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런 소식을 전해준 것은 감옥에서 나온 그의 
후배였다.  후배는 그 여자의 동네에서 우유대리점을 열고 있었다.  딱히 
대학원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있던 그 여자는 가끔 후배의 우유대리점으로 
가서 남산만큼 배가 부른 후배의  부인과 우유를 마시며 사는 이야기들을 하곤 
했었다.  어느날인가 후배가 그 여자에게 말했다.
  -혹시 정석이형이라고 불리던 사람을 아세요?
  우유를 마시던 그 여자가 잠시 동작을 멈추었다.  삼키려던 우유가 하얗게 엉
긴 채로 목구멍을 틀어막는 것 같았다.
  후배가 다시 물었다.
  -87년인가 수배해제되고 나서 그 형이 여기 놀러왔었어요.  그째 정화씨를 요 
앞길에서 봤다고 하더군요.  내가 우스갯소리로 동네 처녀라고, 자주 놀러온다고 
말했어요...  그러고 나서 그 형이 우리 집에 자주 왔었죠.  ...가만, 그러고 보니 
희한하게도 정화씨랑은 마주친 적이 없네.  한 번은 마누라랑 나랑 둘이서  
영화구경을 갔다가 술도  한잔 먹고  새벽에야 돌아왔는데...  셔터가 내려진 
우리 대리점 앞에 그 형이 앉아 있겠죠.  술이 잔뜩 취해서 하는  말이, 발이 
가길래 그냥 종로에서부터 걸어왔다고 하더군요, 안됐어요, 폐결핵이라는데...   
조직은 다 깨지고...  술 먹고 다니지 말라고 내가 그렇게 충고를 해도 안 
들어요...  그 형 결국 고향으로 내려갔어요.  사촌형님이 골프용구점을 
차렸다는데 거기서 일을  도와줄 건가봐요...  원래 집도 가난하고...  이번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나봐요.
  우유대리점을 경영하던 후배는 말을 하다 말고 허공에 시선을 던졌다.
  -그 형...  참 빛나던 사람이었는데...  약삭빠르게 일찍 빠져나온 우리들만 
이렇게 무사하군요.
  그 여자는 한 번도 골프용구점에 가본 일이 없었다.  그래서일까, 그곳에서 일
하는 그의 모습은 아무래도 떠오르지 않았다.  자가용을 탄 사람들이  와서 
달걀만한 골프공을 고르고 골프대를 만져보고...  그럴 때 그가 지을 표정을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다만 닫혀진 셔터 앞에서, 새벽도 아직 먼 캄캄한 
밤중에, 닫혀진 셔텨  앞에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은 선명하게 떠올랐다.
  왜였을까.
  그 여자는 , 아무렇게나 골라입은 파카에 무릎이 나온 바지를 입은 그 여자는 
아직도 길 건너편에서 이쪽을 향해 서 있었다.  나도  그녀를 향해 서 있었다.  
다시  머릿속의 달력이 펄럭이며 1992년이 가고 있음을 알려주었고, 그러자 
밀려 있는 자동차들의 매캐한 배기내음과 거리의 성마른 소음이 들려왔다.
  나는 그 여자가 아직도 서 있는 길 건너편의 붉은 신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잠깐 회상 속에서 떠올렸던 그 시절의 그 여자는 설사 시간이 좀 
걸린다하더라도, 아무리 이 겨울의 어스름 속에 떨면서 서  있는다 해도 곧 
파란  신호등이 들어올 거라고, 그래서 모든 차들을 멈추게 하고 길 건너편에서 
이쪽 편으로 자신을  안전하게 걸어가도록 만들어줄 거라고 믿고있었다. 하지만 
요즘의 나는 아무것도 믿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영영 파란불을 들어오지 
않을지도 모르고, 그리고 이 자리에 그대로  언제까지나 서 있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나는 길을 건너기를 포기했다.  어차피 방향도 없는 길이었다.   나뭇가지들이 
그 봄날과 여름날의 무성한 이파리들을 떨구고 그저 파들거리며  서 있었다. 
봄날이 오면 그 나무에 다시 잎이 돋을지도 나는 알 수 없었다.  아니, 그보다 
더 봄이 올는지에 대해서도 알수 없었다.  나는 원시인들처럼 혼돈에 
빠져있었다.  밤이 오면 그들은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고 했다.  그 밤도 
지나고나면, 밤을 견디어낸 자들에게는  아침이 온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가, 결, 혼, 을, 한, 다.
  사복경찰들에게 쫓기느니 차라리 지구의 중력에 몸을 맡기기로 결정했던 그녀
하고...  날개도 없이 추락을 택했던 그녀하고,  그리하여 그날 이후 다시는  두 
발로 땅을 딛지 못했던 그녀하고...  그녀는 아직도 그를 위해 뜨개질을 
하고있을까.
  -자식...  참 좋은 녀석이었는데, 결핵 고치기는 했는지...  하기는 서로 나이가 
꽉차기도 했지...  그 자식, 87년인가 수배해제되기  전에 헤어진다 어쩐다 
소란을 피우더니 결국 결혼을 하는구만...  어때?...  정화 너도 물론 올거지? 
그나저나 넌 왜 결혼을 안하는 거야.
  그의 결혼 소식을 전해준 선배는  사람들을 향해 떠돌다가 나를  향해 명함을 
한 장 내밀었다.  
금박도 선연한 그의  명함에는 재벌기업의  기획실장이라는 직함이 박혀있었다.  
나도 곧 전임자리를 맡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때  그 방에서 배운 
지식을 활용해 나는 <1930년대 소설에 나타난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논문을 썼고 그것으로 박사학위를 받을 예정이었다.  우리들은 별로 놀라운 
표정을 짓지도 않았다.  그 출판사에 모인 옛 시절의 동지들은 서로 쑥스러운 
얼굴로 명함을 건네고 그리고 공룡이 다니던 시절의 이야기를 했다.
  -맘모스들이 쿵, 쿵 쓰러져 얼음 속에 갇혔대.  글세 몇만년이  지났는데도 
하나도 상한 데가 없대잖아...  파랗게 얼어서...  그 둥그렇고 날카롭던  상아도, 
허공을 향해 치켜뜬 눈매도 모두 다 그대로라는 거야.  얼어붙은 붉은 피까지...  
밀매꾼들이 그 맘모스를 발견해서는 상아만 가져다가 판다는 거야.  그게 돈이 
되니까...  그리하여 맘모스의 치켜뜬  눈동자하고 얼어 붙은 붉은 피만 영원히 
지하에 갇히는 거지.  돈이 되는 상아만 빼고...
  13년 동안 감옥에 있다가 출옥한 선배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하하 웃었
다.  웃다가 그는 후배들보다 먼저 일어섰다. 우리들보다 십몇년  전부터 
반독재운동을 해온 그는 후배들과의 자리를 이제 거북해하곤 했다.  한 번은 
가려는 그 선배를 붙잡았더닌 그가 쑥스러운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명색이 선배인데 니들한테 맛있는 거 살줄 돈도 없고...  미안하구나...
  사라져가는 선배의 뒷모습을 나는 한참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의 등은 
벌써 굽어 있었다.  
  나는 천천히 걸어가며 1986년의 그 다방을 찾았다.  창경원을 지나 돌담이 
끝난 곳에서 스무 발짝쯤 더 걸러가면 작은 골목에 있던 다방.  그 다방은 이제 
노래방이 되어 있었고 보랏빛과 노란빛의 네온사인이 간판 주위에서 천박하게 
번쩍이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거기에 서 있었다.  그 다방이 노래방 간판으로 바뀌어서가 
아니었다.  그런 일들이야 흔해서 더 이상 상처가 되지 못했다.   다만 나는 
네온사인 같은 종류가 아닌 빛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빛은 폐결핵에 걸리고,  
골프용구점의 점원이 되었다.  그 빛을 위해 뜨개질을 하던 여자는 아직도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감옥에서 나온 남자는 우유대리점을 차리고, 화려한 
민주투사였던 노선배는 다만 저녁을 사줄 돈이 없어서 후배에게 굽은 등을 
보이며 사라져가고...  우리들은 모여앉아 금박글씨가 선연한 명함을  건네며, 이
제 영원히 박제된 맘모스의 이야기만 하는 것이다.  그러자 내 눈앞으로  얼음 
속에 갇혀 있는 치켜뜬 맘모스의 눈매가 떠올랐다. 한때는 따뜻했으나  이제는 
얼어붙어버린 붉은 피가  보이고, 그러자 또 누군가가 말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약삭빠르게 일찍 빠져나온 우리들만 이렇게 무사하군요.
  나는 어두워져가는 초겨울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우리들은 이제 겨우, 겨울의 입구에 서 있을 뿐이었다.
  <1993, 문예중앙 봄호>

        무거운 가방
    1
  아내는 저녁세수를 마치고 소파에 파묻히듯 앉아  있었다.  퇴근이 늦어서 늘 
파김치가 되어 돌아오는 아내였지만 요즘의 그녀는 생기발랄해 보였다.  
현관문을 열고 가볍고 작은 핸드백을 던지듯 내려놓으며 일을 그만두고 싶어 
미치겠어,라고 말하던 버릇도 없어졌다.
  그건 아마 그보다도 먼저 아내가 변한 탓이리라.
  "오랜만에 차라도 마실까?"
  아내는 신문을 집어들다 말고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내의 목소리에 콧소
리가 섞인다는 것은 그녀가 지금 아주 행복해 있다는 이야기도 된다.
  그는 아까부터 그의 낡은 아파트로 내겨다보이는 강을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
다.  아니, 강을 내려다보고 있다고 했지만 실상 강은  그저 밤처럼 어두울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아내가 물으면 강을 보고 있어, 그렇게 
말할 참이었다.
  강변을 따라 긴  길이 이어지고 노란색  나트륨들만 강  위로 비치고 있었다.  
지난 여름 태풍이 불었을 때 한을 품은 여인처럼 검은 머리칼을 나부끼던 
수양버들도 그저 잠잠했다.  밤이 늦어서인지 차들의 소리도 멎고 어디선가 
늦게까지 잠을 못 이루는 사람이 켜놓았을 법한 라디오 소리가 시름시름 
들려오고 있었다.  가끔 그  소리를 덮으며 택시들이 쌀쌀하게 지나쳐 가버렸다.  
아내의 목소리가 한 번 더 들렸을 때서야 그는 겨우 아내를 돌아보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차 마시자고 물었는데."
  그는 아내 앞에서 잠시 당혹감을 느꼈다.  마치 주제넘은 파티에 끼여든 사람
처럼 갑자기 어색했고 눈길 둘 바를 몰랐다.
  "왜 그래?  요즘 들어오히려 더 지쳐 있는 것 같아..."
  "내가 그래 보이나?"
  그는 반문했지만 내심으로 가슴 한구석이 뜨끔했다.   아내는 역시 눈치가 빠
른 여자였다.  그와 아내가 벌써 7년째 함께 살고 있다는 점 때문만은 아니다.
  "전에 합격증 받아오던 날도 그래.  꼭 떨어진 사람 같은 얼굴을 하구 말이야.  
옆에 지나가던 아주머니가 나보고 뭐 잘못됐냐고 묻는데 창피해서 혼났어."
  아내는 신문을 가만히 접어두고 그의 등뒤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그의 등뒤
에서 그를 안았다.  
그는 손을 뒤로 뻗어 아내의 팡릉 어루만지면서 얇은 잠옷  안으로 감추어진 아
내의 익숙한 살결을 잠시 상상했다.
  아내는 그의 등 복판에 얼굴을 묻고 따뜻한 입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우리 처음 이 집 보러 왔을 때 생각나?"
  아내는 그의 등에서 얼굴을 떼고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땐 참 어떻게 버텼나 몰라.  다시 시작하라면 못할 것 같애."
  아내는 그녀가 얼마나 힘들게 그와의 결혼생활을 지켜왔던가를 은근히 과시하
는 듯했다.  조강지처, 술지게미와 쌀겨로 연명했던 시절을 잊지 말라고 
강요하는 것만 같다.  그는 거기서 생각을 멈추었다.  아내의 말마따나 지쳤기 
때문이었을까.  그는 요즘 자꾸 아내에 대해 비뚤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고시를 공부하는 동안 아내가 백화점에  취직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의 생활이 몹시 힘겨웠으라는 것은 그로서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언젠가 아내가 근무하는 백화점에 가서 모조 진달래 속에 싸인 마네킹을 
우두커니 올려다본 일이 있었다.  에스컬레이터를 내려오던 아내가 멀리서 그를 
발견했다.  그는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아내는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떠밀려내려온 에스컬레이터에서 벗어나더니 빠르게 그에게 말했다.
  "빨리 나가!  나 모른 척하구 건너편 다방에서 기다려!"
  아내가 검정물을 들인 그의 허름한 옷을 부끄러워했다는 걸 그는 나중에야 알
았다.  방금 양잠점에서 나온 듯한 아내의 동료들이 수군거리며 그 곁을 지났다.  
아내는 그들을 향해 그녀가 치장시켜놓은 마네킹처럼 애매하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것을 빼놓는다면 아내는 참으로 나무랄 데 
없는 여자였다.
  그가 계속해서 고시에 실패하는 동안에도 군소리 한마디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이차시험에 연거푸 떨어져 일차부터 다시 시험을 봐야만 했을 때 남쪽의 
고시원으로 그를 데려다주면서 그녀는 말했다.
  "날 부끄럽게 하지 말아줘."
  그가 까칠한 수염을 쓰다듬으며 잠시 침묵하자,
  "내 말은 당신이 적어도 자신과의 싸움에서 질  만큼 나약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라는 거야."하고 말했다.  입을 다무는 아내의 눈빛에는 막 전장으로 
떠나는 장수처럼 결연한 의지가 엿보였던 걸 그는 아직도 기억한다.
  그것은 아내의 방식이었다.  그에게는 거의 말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는 아
내가 전국을 수소문해서 알아놓은 가장 좋은 고시원에 가야  했고, 아내가 
오라고 전화를 하면 서울로 잠시 돌아왔다.  새로 나온 좋은 헌법책도,  다달이 
나오는 월간 고시 잡지도  아내가 부쳐주었다.  
속옷조차 색깔에 신경쓰는 아내는 고시원이  있는 절 밑의 여관에서  함께 밤을 
지샐 때면 그가 자신이 개어놓은 순서대로 속옷을 입지 않았다고 가볍게 
신경질을 부리기도 했다.
  어쨌든 아내는 백화점에서도 이미 능력을 인정받고 있는 전문 코디네이터였으
므로 그는 샤워를 마치고 나오면 아내가 새로 가지고 온 회색이나 남색의 러닝 
팬티 세트로 갈아입었다.  곧 잠자리에 들어서면 어차피 벗어던질 것이었지만 
그는 아내의 말에 따랐다.
  그는 기분 나쁘지 않을  만큼 살며시 아내를 떼어놓고  창을 열었다.  갑자기 
공장의 스위치를 올린 것처럼 무자비한 자동차소리가 달려들었다.  바람이 
아니라 소리가 달려드는 것 같았다.  가스불을 켜려다가 갑자기 엄습한 바람의 
습격을 받은 아내가 가볍게 소리를 질렀다.  그는 얼른 문을 닫았다.
  그러자 아내가 다시 가스 스위치를 돌렸고 파아란 불꽃이 탁, 하는 소리와 함
께 붙여졌다.  아내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다시 회복한 얼굴로 투명한 
커피주전자를 불 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얼마 전에 드디어 고시에 합격을 했다.  총무처에 합격증을 받으러 갔을 
때 아내는 회사를 하루 쉬고 그를 따라왔다.
  버스를 타고 가며 아내가 말했다.
  "저 사람들이 알까?  자기가 고시합격을 했다는 걸...  재미있어.  이제 버스를 
타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을 텐데."
  합격증을 받아든 아내는 그것을 화려한 진달랫빛의 화선지로  테를 두른 다음 
액자에 끼워 결혼사진이 걸린 거실 옆에 걸어두고 날마다 바라보았다.
  아내가 출근한 후 그는 자신의 합격증이 들어 있는 액자를 떼어내버렸다.  자
신의 손가락이 마구 떨리고 있는 것을 그는 보았다.  갑자기 숨이 가빠졌고 
심장이 갈비뼈까지 팽창해서 뛰고 있는 것 같았다.  온몸이 심장의 고동소리에 
맞추어 경련을 일으켰다.   겨우 한 손으로 심장을 누르고 그는 재빨리 협상할 
단어들을 생각해냈다.   다가올 미래와 정원이 있는 집과 법의를 휘날리며 
날카롭게 연설하는 자신의 모습, 자신감과 정의감...  그러자 심장은 천천히 
줄어들었다.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엉거주춤 구부린 자세로 눈에 고인 눈물을 
닦았다.
  "우리 기획실장 있지, 글세 당신 고시 합격했다는 소릴 듣고 나보고 슬슬 그만
둘 생각이 없냐는 거야.  마치 내가 매니큐어나 말리고 앉아서  당신 덕 볼 
생각이라도 애초에 있었던 것처럼...  그 사람 말이야.  나한테 축하한다는 
소리도  한마디 없었다구.  한국사람들 그저 남 잘되는 거 배아파한다니까..."
  아내는 유자차가 든 병에 긴 스푼을 넣고 그것을 한움큼 떼어내면서 재잘대기 
시작했다.  
아내가 올려놓은 주전자에서 쉬잇쉬잇 물이 끊기 시작하고  아내가 반짝이게 
닦아놓은 찻잔들이 달그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들은 아내의 말소리와 
함께 얽혔다.   게다가 거대한 트럭의 소리가 이중으로 유리창을 흔들어대며 
그위로 덮쳤다.  굵고 가는 소리들이 엉킨 덩이가 그의 뇌를 꽉 틀어막는 것만 
같았다.
  "나 내일 어딜 좀 다녀와야겠어."
  그는 제 말소리가 지금 제대로 들리고 있는 걸까 스스로 생각하면서도 
아내에게 말했다.
  "어딜?  연수원 출근은 한달쯤 남았잖아."
  그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내가 주전자에서 쉬잇쉬잇 소리를 나게 
하는 가스불을 끄고 물을 따랐다.  달그닥거리는 소리도 멈추었다.  그의 뇌를 
틀어막는 소리의 엉킨 덩이들이 그러자 차츰 녹아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래!  친구들하고 만나서 이제  술도 실컷 마시고  그래.  그동안 
고생했는데...  그리고 머리도 
좀 잘라야 되겠다.  내일 점심때 나랑 외식하구 나서 내가 아는 미장원에 갈까?  
그 여자가 남자 머리 자르는 데도 센스가 있던데."
  아내는 유자찻잔을 그에게 밀어주며 말했다.  그는  더부룩히 자란 머리를 
쓸어올렸다.
  "그게 아니구 여행을 좀 다녀오고 싶어."
  아내는 찻잔을 입에 대다 말고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난 휴가 못 맡아...  우리 백화점 이번 바겐세일 끝나야 돼."하고 말했다.   
그가 말한 여행의 뜻을 그녀가 못 알아차린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의 
방식이었다.  그것은 그를 혼자 떠나보내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으며 내일이 
아니라 그녀가 휴가를 얻을 수 있는 날까지 날짜를 미루라는 것이었다.
  "친구녀석들이...  같이 가자구 해서..."
  그는 거짓말을 둘러댔다.  며칠 전 친구들이  스키장으로 놀러가자는 것을 
일거에 거절해버렸던 그였기 때문이었다.  아내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더라면  
실제로 그는 혼자서 어디론가 떠났을 것이다.  그러나 말이 나온 이상 그는 
그의 친구들과 떠나게 될 것이다.   한 녀석은 총각이지만 한 녀석은 아내가 
있고 아내는 내일 그 친구의 아내에게 전화를 할 것이다.
  "그래, 그렇게 해..."
  잠시 무슨 말을 할까 입술을 달싹이다가 아내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는 
찻잔을 내려놓고 한참을 앉아 있다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는 아무 말고 하지 않았다.

    2
  눈길이 닿는 곳까지, 하늘이 내려와 있는 곳까지, 사방이 온통 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다.  
그들은 차를 세우고 앞바퀴에 체인을 둘렀다.  체인의 아귀가 맞이  않아서 K는 
애를 먹는 것 같았다.  이제 스키장에 다가올수록 경사가  가팔랐고 운전이 
서툰 K는  체인을 끼워보는 것이 처음인가보았다.  함께 동행한 N이 끙끙대는 
K를 돕고 있었다.
  그는 차에서 좀 떨어진 곳까지 가서 소변을  본 다음 담배를 한 개비 물었다.  
춥다기보다는 아주 차가운 날씨였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가지에 쌓인 눈이 
빙수가루처럼 흩날렸다.  나무마다 눈이 쌓여 있어서 나무  색깔과 흰빛의 
명암이 뚜렷했고  길을 따라서 능선들이 점점 더 가팔라지면서 나무들이 
적어졌다.  차  지붕에 스키장비를 맨 빨간  스포츠카가, 이어 은색 세단이 
체인이 덜컹거리는 소리를 내며 그들 옆을  지나갔다.  아마도 동행인 
모양이었다.  그는 그 은색 세단 속에서 얼굴을 반쯤 덮은 선글라스를 낀 
긴생머리의 여자를 언뜻 보았다.  눈길이어서 차의 속력이 느리긴 했지만 그  
여자의 새빨갛고 도톰한 입술이  강렬하게 그의 머리에 남았다.  여행이니까, 
그는 생각했다.
  모퉁이를 돌아가는 은색 세단의 꽁무늬를 바라보며  그는 담배를 던졌다.  
바람이 산 아래서부터 하얀 눈가루들의 회오리를  일으키며 다시 몰려오고  
있었다.  그는 쥐색 파카 깃을 올리며 차로 돌아갔다.  K와 N이 시동을 
걸고있었다.
  그는 차에 올라탔다.
  차는 잠시 전진하더니 다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당황한 K가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차는 10미터쯤 뒤로 미끄러진 다음에야 멎었다.  K가 차에서 내려 
풀어진  체인을 다시 잡았다.
  "저새끼, 똥차 가지고 스키장 가잘 때부터 내가 알아봤다니까."
  소설을 쓰는 N은 차에서 내리더니 뚱뚱한 K의 뒤에 서서 놀리듯 말했다.  
그도 차에서 함께 내렸다.  N이 포켓에서 위스키를 꺼내 한모금 마시고  그에게 
병을 건넸다.  그는 위스키를 한모금 삼켰다.  마치 차가운  겨울바람이 
압축되어 병 속에  들어 있다가 그의 목을 타고 배로 내려가는 것같이 서늘한 
느낌이었다.
  "얌마, 이게 똥차냐?  니네 전셋값 빼도 못 사는 차다, 임마."
  부동산을 하는 K는 체인을 갈다 말고 일어서더니 가죽장갑을 벗고 이마에 
고인 땀을 닦았다.
  "여자들이 이 차 한 번 타는 게 소원인데."
  K는 아직 미혼이었다.  그는 몇 명의 여자들과 이 차에서 섹스를 했는지 우리
가 알면 놀랄 거라고 말했다.
  "농구팀이야 축구팀이야?"
  N은 요즘 들어 그의 상징이 돼버린 듯한  그 특유의 낵소적인 표정을 감추지 
않았으나 K는 아랑곳 않는 듯했다.
  "줄다리기팀이다, 임마."
  그들은 잠시 씁쓸하게 웃었다.  이렇게 셋이  어울리는 것도 아주 
오랜만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점점 어려워졌던  셋만의 술자리를 빼면 이런 
여행은  거의 십년 만이었다.  
  대학 3학년 땐가 K가 등록금 때문에 학교를 휴학하고 군에 가기 전, 함께  
배낭을 지고 설악산에 올랐던 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 늦가을, 미친 듯이 단풍이 타는 설악의 어는 모퉁이에 작은 텐트를 쳐좋고 
그들은 소주를 마셨다.  장엄하기까지 한 가을산 앞에서 그들은 참으로 작고 
가여웠다.
  "모든 게 허무해.  다 부질없어.  대체 누구를 위해 머리를  깎고 누르를 향해 
총을 겨누어야 하는 거지?  한 번 죽으면 그만이야!  투사고 개죽음이고 
필요없어!  죽는 건 다 같은 거야.  산다는 건 지지리도 가지각색이지만..."
  군대를 가지 직전이었으니  누구나 그런 심정이었겠지만  K는 거의 자포자기 
상태로 말했다.  
그와 N은 그 등산 내내 혹시 K가 산 아래 벼랑으로 몸을 던질까봐 밤마다 뒤척
이며 K의 거동을 살폈다.
  K는 살아남았다.  그는 군대에서 몇번 영창을 드나들다가 제대를 하더닌 아주 
다른 모습으로 그들 앞에 나타났다.
  부동산업에 뛰어들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어느정도 성공을 거둔 것
이다.  K는 이제 다른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산다는 건 다 같은 거야, 임마."
  자세한 내막은 말하지는 않았지만 K는  당시 시위가 빈발하던 빔민촌 지역의 
재개발 딱지를 사모아 나날이 번성하는 듯했다.  K는 자주 술을 샀고 술에 
취하며 가끔 울부짖었지만 다시는 죽는다는 말은 하지않았다.
  "살아남는다는 게 꼭 좋은 것일까?"
  그 무렵 습작을 포기하고 곧 노동현장을 떠나며 N은 말했다.  그리고 곧 N이 
구속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출감하자 N은 소설가가 되어 있었다.  그가 쓴 
소설은 노동자들의 정서를 잘 반영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으며 여러 잡지에 
다투어 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작년 여름, N은 노동현장에서 만난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서울 본가로 돌아왔다.  N은  그다지 정서가 안정되어 
보이지는 않았다.  그건 그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모두 제 갈 길로 떠났을 때 그는 지금의 아내를 만났었다.
  처녀시절의 아내는 물었다.
  "졸업하고 뭘 할 생각이지?"
  "되고 싶은 게 없다니 말이 돼?  법대에 들어올 땐 생각이 있었을거 아냐?"
  "두고 봐!  난 당신을 꼭 고시에 패스하게 만들고야 말겠어."
  아마도 마지막 말을 한 건 그녀가 더 이상 처녀가 아니었을 때의 일이리라.
  "잠깐만요. 이보세요, 아저씨!"
  길 저쪽에서 한떼의 여자들이 나타나 손을 흔들었다.  그와 일행이 멈칫해 바
라보니 세 명의 아가씨들이 이쪽을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파카에 목도리들을  둘렀고 키들이 좀 작았다.  눈
길을 오래 헤맸는지 종아리 아래까지 밀가루에 빠진 것처럼 흰눈이  묻어 
있었고 얼굴들이 파랗게 얼어 있었다.  
  "아저씨, 좀 태워주세요.  너무 힘들어서 못 걷겠어요."
  피란색 파카를 입은 여자가 그들 일행 중에서  제일 먼저 다가돠 말했다.  몹
시 숨이 찬지 그녀가 입을 벌릴 때마다 하얀 입김이 주전자에서 그렇듯 
쏟아져나왔다.
  "스키장 가는 길이에요?  근데 아저씨라니?  멀쩡한 총각들한테."
  체인을 대충 다 끼운 K가 뒤에 오는  아가씨들을 마저 살펴보며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파란 파카는 통통한 얼굴을 뒤로 젖히며  무엇이 재미있는지 웃었다.  곧이어 
도착한 껌을 씹는 노란 파카와 단발머리를 한 흰 파카도 함께 웃었다.  만일 
모두 다 파란 파카처럼 살이 좀 찐 아가씨들이었다면 K가 서둘러 그들을 
따돌렸겠지만, 다행히도 나머지 둘은 용모가 '준수한 편'이었다.  그들의 
입에서도 파란 파카와 똑같이 하얀 입김이 쏟아져나왔다.
  K는 총가가이라는 걸 강조하고 나서 그와 N에게 한 눈을 찡긋해 보였다.  그
와 N은 공범자라도 된 듯 잠시 웃었다.  그는 묻늑  그중에 단발머리를 한 
여자가 무거운 가방을 두 개 들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다른 여자들은 모두 
간편한 배낭을 지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낡은 가죽가방 두 개를 바라보았다.  
모조가죽이 닳아서  여기저기 본래의 색깔을 잃고 허옇게 바래 있었다.
  "아니, 뭣들 타고 왔어요?"
  N이 물었다.
  "시외버스를 타고 왔는데 술 취한 아저씨가 길을 잘못 가르쳐주었어요."
  파란 파카가 말하자 노란 파카가 껌을 씹으며 덧붙였다.
  "관광버스를 예약해두었었는데 아침에 얘가 꾸물거리는 바람에 차를 
놓쳐버리고 말았어요.  가방 챙기느라고."
  노란 파카는 단발머리를 지적하며 시외버스를 타고 온 것에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여자들은 자기네들끼리만의 의미가 있다는 듯 음흉하게 웃었다.
  "어쨌든 타요.  이것도 인연인데."
  그들은 함께 떠났고 이번에는 체인이 잘 감겼는지 차가 잘 달리기 시작했다.
  우연히 남녀의 숫자가 맞는다는 것은 이런 여행에서 그리 불유쾌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도 그들보다 함참은 어려 보이는 아가씨들  셋과 동행이 된다는 
것은  기분이 좋은일이리라.  K는 특히 싱글벙글한 얼굴이었다.  게다가 
그녀들은 좀 촌스러운  느낌이긴 했지만 젊은 그들 특유의 매격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어차피 정원을 초과해 탑승했으나 아무도 불편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뒷자리에는 그가 앉았는데 왼편으로 여자들 셋이  앉았다.  그와는 반대편 창
가에 앉은 단발머리 여자는 그 커다랗고 낡은 가방 두 개를 무슨 보물처럼 
싸안고 있었다.  그의 눈길을 의식했는지 그녀가 문득 그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이제까지 그가 보아온 것 중에서 가장 검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무안해져서 얼른 눈을 돌렸다.  하지만  다시 끌리듯 돌아보았다.  단발머리는 
그와 다시 눈이 마주치자 얼른 고개를 돌리더니 커다란 가방을 다시 껴안았다.
  "뭐하시는 아가씨들이에요?  학생들이에요?"
  아니라는 걸 누구나 느낄 수 있을  만큼 그녀들에게는 세련된 느낌이 없었다.  
 
그러나 N은 그냥 묻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 K만큼 N은 여자들에게 흥미가 
없었다.  벌써  유아원에 다니는 아이의 아빠인 그는, 그러나 남자들만이 떠나는  
이 여행에서 약간의 흥분을 느끼는 듯 했다.  그런 점에서 말한다면 그 역시 
그랬다.  아까 총각이라며 K가 눈을 찡긋했을 때 이미 그들은 공범이 된 
것이었다.
  "아저씨들은요?"
  노란 파카가 여전히 껌을 씹으며 되물었다.  높고 끝이 약간 갈라지는 목소리
의 느낌이 뭐랄까, 만만치 않은 느낌을 주었다.  "이놈은 땅부자고 이 뒤쪽은 곧 
판검사가 될 것이고 나는 소설을 써요."
  갑자기 여자들 셋이 일제히 웃었다.  K야 일찍 벗어진 머리에  기름진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 그럴 법했지만 그들은 그와 N의 행색을 보며 전혀 믿지 않는 
얼굴을 했다.
  "아저씨들이 그렇다면야 우린..."
  노란 파카는 잠시 웃더니, 
  "이쪽은 디자이너, 이쪽은 대학원생 그리고  저는 시인이에요."하며 다시 
깔깔댔다.
  남자들 쪽도 웃고 말았다.
  그들은 쓸데없는 농담을 지껄이면서 차를 달려 스키장 입구에 도착했다.
  
    3
  차를 주차시켰을 땐 이미 짧은 해가 저물고  있었다.  주차장 관리를 하는 
듯한 노인이 그들에게 와서 산 위쪽에 있는 산장까지는 눈길에 알맞는 
특별마차를 타고 가야 한다고 무뚝뚝한 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마차가 도착 
안했으니 잠깐 기다리라고 했다.  그들은 작은 벙커 같이 생긴 곳에 들어가서 
자판기의 커피를 나누어 마셨다.
  단발머리는 커다란 가방 둘을 여전히 놓지 않은  채 구석에 앉아 있었다.  
이런 곳이 자신에게 낯설다는 느낌을 감추지도 않는 표정이었다.  파란  파카나 
노란 파카라 은근슬쩍 주위를 돌아보며 세련되어 보이려고 애쓰는 것에  비하면 
참으로 촌스러운 느낌이었다. 
  그는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가지고 그녀에게 다가가 종이잔을 내밀었다.
  그녀가 그 검은 눈으로 다시 그를 돌아보았다.   그것은 전혀 방어가 되어 
있지 않은 눈이었다.  모욕에 대해서, 거짓말들과 가면에 대해 면역을 가지지 
못했던 시절이 그에게도 있었다.
  그는 문득 어색해져서 커피잔만 넘겨주고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밤이 되어서 깜깜한데 왜 산봉우리는 잘 보이지?"
  까마득한 어린시절 자신을 업고 가는 큰누나에게 그는 물었다.
  "으응...  그건..."
  큰누나는 그의 엉덩이를 훌쩍 들어올려 업은 자세를 바로하고는 말했다.
  "그건...  하늘에 하늘 아닌 것이 솟아 있어서 그래..."
  "하늘에 하늘 아닌 게 솟아 있으믄 이렇게 깜깜한데도 잘 보이나?"
  "그럼, 하늘이 아니니까..."
  그는 갑자기 무서워져서 누이의 목을 꽉  움켜잡았다.  하늘도 아닌데 하늘로 
머리를 치켜든 산이 그는 무섭고 가여웠다.
  그 누나도 패병으로 죽은 지 오래되었다.
  창밖에서는 한떼의 남자들과 여자들이 우르르 승용차에 올라타고 있었다.  
그들은 그의 일행들과는 분명 달랐다.  그들에게는 젊음의 냄새와는 또다른 
분위기가 엿보였다.  그것은 부유한 냄새였다.
  그들의 차가 하얀 배기가스를 뿜으며 떠나고 나자 그는 까칠한 턱을 한 번 
쓸었다.  그들에게는 이 스키장에서 묵는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그리고 
우리들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그는 문득 그들에게 아니, 그 자신에게 
무슨일인가  일어날 것만 같은 예감을 했고, 그것이 사실은 그 자신이 
무슨일인가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눈을 돌려 그의 
일행들을 살펴보았다.  K는 노란 파카와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으며 
파란 파카는 약간 두려운 듯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N이 담배를  붙여물면서 
그녀에게 무어라 짧은 말을 묻고 있었다.  그에게는 그들의 행동이 몹시 
주눅들고 피곤한 듯이 느껴졌다.
  서른이 넘으면서 그들은 언제나  만나면 피곤하다는 말을  했다.  치사하다는 
말, 더럽다는 말, 때려치우고 싶다는 말...  예전에는 물론 그들은 다른 말들을 
했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그는 이제 기억나지 않는다.
  "참 많이 변했네요."
  단발머리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는 자신에 대해 그리고 그와 K, 그리고 
N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그  말이 자신의 마음속을 
꿰뚫어보는 것 같아 순간적으로 깜짝 놀랐다.
  "제가 여길 떠날 때만 해도 승냥이가 울곤 했었는데..."
  단발머리의 말 속에는 스산한 추억이 배어 있었다.
  "여기가 처음이 아니가보군요."
  단발머리는 빨간색 목도리를 한 번 여미더니 고개를 숙이고 살풋 웃었다.
  "이곳이 처음이신가요?"
  그녀는 다신 눈을 들면서 그에게 되물었다.
  "네."
  그는 대답을 하고 담배를 물었다.
  "이런 곳은 저도 처음이에요."
  단발머리는 명랑하게 말하고 나서 어깨를 잠시 떨었다.
  "뭐 걱정되는 일이라도 있으세요?"
  단발머리가 다시 물었다.  그가 대답  대신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갑자기 붉은 기운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명랑하게 
울려나왔다.
  "아저씨 얼굴에 그렇게 씌여 있어요."
  그녀는 풋풋 웃었다.
  "그게 우습나?"
  그는 자연스레 반말로 물었다.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저씨는 아주 힘든 일을 마치고 났을 때 더  힘든 일을 미처 하지 못했다는 
걸 이제 막 깨달은 사람처럼 난처한 얼굴을 하고 있어요...  미안해요.  난 어떤 
사람의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이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생각하는 버릇이 
있어서..."
  그녀는 처음으로 벙어리장갑을 벗어서  손을 호호 불었다.   빨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볼에 그녀의 희고 긴 손가락이  가닿았다.  그는 문득 팽팽한  그녀의 
볼을 만져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는 천천히 호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왔어요, 마차가!"
  그들은 우르르 밖으로 몰려나갔다.  이미 날은  어두워져서 검은 산들의 윤곽 
뒤로 짙은 남색의 하늘만 걸려 있었다.  그도 피우려던 담배를 도로 넣고 
일어섰다.   그러고는 단발머리의 가방 하나를 들었다.  가방은 생각처럼 
무거웠다.  단발머리가 그를 빤히  쳐다보다가 남은 가방 하나를 들고 그를 
따라 마차에 올랐다.
  마차라는 것은 거짓말이었다.  그것은  기계였다.  개털모자를 눌러쓴 사내가 
그것을 운전하고 있었다.  산장이 있는 언덕까지 오르는, 그러니까 특별히 
설계된 눈길 전용차인 모양이었다.  그들이 마차라고 한 것은 그 내부가 마치 
공원에 있는 마차와 같은 구조이기 때문인 것 같았다.
  마차는 마치 헉헉거리는 것처럼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느릿느릿 산길을 
올랐다.  그는 몇번이나 이 미차가 저 눈길 아래로, 아까  그 주차장 근처의 
어둠과 추위 속으로 미끄러져 그를 다시 처박을 것만 같은 환상을 느꼈다. 
도시의 폐수와 자동차의 소음이 흐르는 그 어떤 곳으로 미끄러져버릴지도 
모른다.  그는 마차처럼 숨이 가빠오는 것을 느꼈다.  그의 이마에 식은땀이 
배어나기 시작했다.
  산장 입구에서 <알프스의 소녀>라는 동화에 나오는 것처럼 생긴 커다란 개가 
그들 일행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모퉁이를 돌자  갑자기 풍경이 
다른 모습으로 와락 다가왔다.  화려한 네온이 나타났던 것이다.  산은  네온의 
축제를 하고 있었다.  네온들은 가지가지 아름다운 빛깔로 명멸했으며 
디스코음악도 흘러나왔다.  흘러나와서 그들에게 이곳은 너희들이 떠나온 
곳과는 다른 곳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노란 파카의 입에서 경탄의 짧은 신음이 나왔다.  갑자기 여자들의 얼굴에 이
제까지와는 다른 광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스물두살이라고 그들은 말했다. 
그는 자신의  스물두살을 생각해보았다.  그 시절에 그는 언제나 모퉁이를 
두려워했었다.  언제나  보이지 않는 저쪽은 이쪽보다 더 나빴었으니까.  하지만 
보이지 않는  모퉁이 저쪽을 기다리던 친구도 있었다.  N같은 경우가 그랬다. 
그것은 보이지 않았기에 가능한 세계였다.
  "거봐!  내가 좋을 거라고 했잖아."
  노란 파카가 파란 파카의 한 팔을 부여잡으며  웃었다.  파란 파카도 함께 
웃었다.
  그들은 남자와 여자들끼기 헤어져 방을 정하고 잠시 휴식을 취한후, 산장 1층
에 있는 까페에서 다시 만났다.  단발머리는 맨 마지막에 나타났다.  그녀는 
여전히 그  무거운 가방 두 개를 들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녀가 왜 그  무거운 가방을 가지고 자꾸  나타나는지에 대해 
묻지 않았으므로 
그 역시 입을 다물었다.  젊은 연인들끼리 춤을 추기도 하였고, 한쪽 구석에서는 
한쌍의 남녀가 긴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  키스가 끝났을 때 긴 파마머리를 한 
여자가 아무 의미도 없이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도 팝콘은 집어먹으며 긴 
파마머리를 빤히 바라보았다.
  맹숭맹숭한 시간들이 흘러갔다.  K와 N은 이미 이 아가씨들에게서 흥미가 
없어져버렸는지 다른 아가씨들과 어울려 춤을 추고 있었고, 노란 파카는 
계속해서 껌만 씹고 있었지만 껌 씹는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나중에는 
몇분마다 한 번씩 딱, 딱  튀기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파란 파카는 술은 입에도 
대지 않고 두터운 손으로 팝콘을 집어  입에다 털어넣고 그것을 우적거리며 
씹었다.  그녀들 셋 모두 이곳에 온  것을 후회하는 눈치가 보였다.  그  징조는 
작은 맥주 한병 값이 4천원인 걸 보았을 때부터 완연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여자들이 몰려 있는 곳을 기웃거리던 펑크머리의 남자들이 그녀들  곁을 
맴돌다가 더  화려한 여자들에게 몰려갔다.  그가 민망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세  
여자들은 일제히 팝콘에 손을 뻗쳤다.
  그는 왜 이 여자들이 스스로도 어울리지 못하는 이곳에 왔을까 잠시 
궁금해했다.  그저 조촐하게 대천이나 만리포에서 겨울바다를 구경했다면 이런 
표정들은 하지 않았을 텐데.  그는 여자들을 위로해주고 싶어서 매점에 가서 
과자와 귤을 좀 사왔다.  여자들은 구석에 앉아 조용히 그것들을 씹었다.
  잠시 후에 단발머리는 머리를 한 번 쓸어올리더니 또 그  무거운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내일 뵙겠어요.  갔다 올게."
  "그래, 조심해서 갔다 와."
  그녀들은 단발머리에 대해서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이미 모든 이야기가 된 
눈치였다.  그는 단발머리를 따라 일어섰다.
  산장 현관을 나오자 찬바람이 기분좋게 그의 뺨에 불어왔다.
  "들어가세요."
  단발머리가 그에게 말했다.
  "어딜 가지?"
  그는 단발머리의 낡은 가죽가방 하나를 빼앗아 들었다.
  "집에요."
  단발머리는 말했다.  아주 무심한 말투였다.  그는 왜 그녀가 이곳이  많이 
변했다는 이야기를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이 가방 속에는 집으로 가져가는 
선물이 들어 있을까, 그는 무거운 가방에 대한 호기심이 뜻밖에 싱겁게 
풀리는가 싶어서 조금 섭섭했다.
  그들은 네온을 뒤로 하고 산길로 접어들었다.
  "가세요!  전 이런 밤길에 아주 익숙해요."
  "가는 데까지..."
  그는 왜 제 자신이 이런 길을 따라나섰는지 생각도 없이 그녀와 함께 걸었다.  
종아리까지 눈이 푹푹 빠졌다.  더구나 눈 때문에 길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익숙하게 눈길을 헤쳐나갔다.  그는 그녀의 발자국을 따라 발을 
내딛었다.
  
    4
  산길을 돌아 내려오자 벌판이 펼쳐졌다.  벌판이라고 해봤자 나지막한 
구릉이었지만 이번에는 좀 걷기가 쉬웠다.  그는 걸음을 빨리해서 그녀에게 
다가섰다.  힘든  산길을 빠른 보행으로 걸어왔기 때문에 그와 그녀  모두 뺨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녀가 갑자기 하늘을 올려다보며 하하 웃었다.  하얀 
입김이  별들이 반짝이는 밤하늘가로 퍼져나갔다.  눈 덮인 들판과 그와 그녀의 
하얀 입김 그리고 웃음소리...  그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아저씨, 결국 여기까지 따라오시고야 말았군요.   참...  저만큼 
미련하신가봐요.  이제 돌아가기에도 너무 먼데..."
  "그런 거 같군."
  그가 대답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음."
  그녀는 그가 들고 있는 그녀의 가방을 바라보았다.   둘은 잠시 그 눈덮인 
벌판에 서서 침묵했다.  가지에 쌓인 눈이 바람에 은가루처럼 흩날리고 있을 뿐, 
사방은 고요했다.  그들은 걷고 또 걸었다.  얼었던 뺨이 상기되면서  등줄기와 
겨드랑이에서 후줄근히 땀이 느껴지기 시작했고 그 다음에는 가방을 든 어깨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잠시 담배 한 대 피우고 갈까?"
  "그러지요."
  그는 담배를 피워물며 눈에 덮인 돌 하나를 찾아내 장갑을 낀 손으로 눈을 
털어내고 그녀를 앉혔다.
  그는 가방을 그 옆에 놓고 소변을 보기  위해 뒤쪽으로 올라갔다.  자심 
무거운 가방을 놓은 어깨가 그 무게의 사라짐에 적응하지 못해서였을까, 그는 
그만 야트막한 비탈에서 미끄러지고 말았다.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으나 다시 
일어섰을 때 그는 왼쪽 발목이 얼얼한 것을 깨달았다.  그는 발목을 절뚝이며 
소변을 보고 돌아섰다.   얼얼한 왼쪽 발목이 시큰거리면서 아파오기 시작했다.
  "어디 다치셨어요?"
  "응, 발목을 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으나 한발을 내딛다가 그는 비명을 지로고 말았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그녀는 그의 눈이 묻은 그 발목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듯 말했다.
  "괜찮아.  조금만 쉬지..."
  둘은 나란히 그 넓은  벌판에 앉았다.  움직이고 있을  때는 느껴지지 않았던 
바람소리가 그들의 
귀를 얼얼히 때리고 지나갔다.  땀을 흘렸던  등줄기가 식어가면서 한기가 
몰려왔다.  그의 뺨도 그녀의 볼도 차갑게 얼어가기 시작했다.
  "따라오시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녀는 미안한 듯 말했다.  그는  웃으며 그녀의 한쪽 어깨를 가만히  감쌌다.  
그녀의 등줄기가 쭈욱 선을 그으며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이 여자를 
안으려고 따라온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여자가 그렇게 느낄까봐 그는 좀 
걱정이 되었다.  여자는 뜻밖에도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벙어리장갑을 낀 
손을 마주잡고 속눈썹만  깜빡거리고 있었다.  여자에 대해서라면 그는 
거의 경험이 없었다.  아내 외엔 이렇게 가까이  있어보는 것도 이 여자가 
처음이었다.
  그러나 만일 그녀와 그가 이 눈 덮인 벌판에서 내일  아침 시체로 발견된다면 
아내가 무어라고 말할가.  그는 쓰잘데없는 상상을 잠시 하다가 지워버렸다.
  "아까 개네들, 제일 친한 친구들이에요."
  묻지도 않았는데 그녀가 그를 바라보며 말을 시작했다.
  "오늘 미장원 자리 계약을 했어요.  둘은 서울 오자마자 미용기술을 익혔거든
요.  나도 모아두었던 돈을 조금 냈어요.  내가 원한다면 공장 때려치우고 
오래요.  시다부터 시작하면 언젠가는 나도 조그만 미용실을 차릴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게 좋겠지요?  그건 장래성이 있으니까...  오늘 걔네들이 미장원 
자리 계약하는 걸 보고 눈물이 나올뻔했어요.  복덕방 아저씨가 길목도 좋다고 
했어요.  그동안 얼마나 고생들 했는데...   이제 우리한테도 좋은 날이 
오겠지요.  아저씬 정말 뭐하는 분이세요?"
  그녀가 그를 향해 얼굴을  돌렸다.  맑은 별빛이 쌓인  눈에 부딪쳐 뛰어올라 
그녀의 얼굴을 비추어주었다.  동그랗고 조그만 얼굴이 그의 시야에 환하게 
들어왔다.
  "뭐하는 사람 같아 보여?" 
  그녀는 잠시 웃었다.
  "아까는 믿지 않았지만 이야기하시는 걸 들으니까 아저씬  많이 배우신 분 
같아요...  우린 정말 검사나 소설가나 정말  부자들을 별로 본  적이 없거든요. 
사장들도  가난해요.  정말 부자인 사장은 얼굴도 못 봤구...  그래도 
잘모르겠어요."
  그 여자는 '정말'이라는 단어를 자꾸 썼다.  그가  웃었다.  오랜만에 웃는 
웃음이었다.
  "정말 검사님이신가요?"
  "아니."
  그는 장갑 낀 손으로 여자의 얼굴을 가만히 쓸어내렸다.  여자는 이번에는 
굳어지지 않았다.
  "그럼요?"
  "곧 그렇게 되겠지."
  그는 여자의 얼굴에 댔던  손을 치우며 말했다.  여자의  얼굴에 순간 실망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는 눈을 여러번 깜박거리며 잠시 침묵 속에 앉아 
있다가 말했다.
  "몇년 전인가 특근이 없는 날 시내에 나갔다가  어떤 남자한테 우산을 씌워준 
적이 있었어요.  
정거장에서 혼자 비 맞고 있는 게 하도 처량하길래...  그리곤 차를 마시러 갔죠.  
남자는 자기는 대학생이라면서 내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어요...   나는 
그남자가 하는 말을 하나도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알아들으려고는 굉장히 
노력했지만...  삼십분쯤 있다가  남자는 하품을 하기 시작했어요.  커피값을 
치르는데 나보고 내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몇번을 더 만났어요.  어느날 
나보고 뭐하는 사람이냐고 묻길래 방직공장에 다닌다고 했더니  그 다음엔 
연락이 없었어요...  참 멋있는 사람이었는데...  그런데 나중에 생각해보니까 
못생겼던 것 같애요.  콧구멍두 컸구...  또...  목소리도 나빴던 것 같애요."
  여자는 말을 마치고 나서 어깨를 으스스 떨다가  침묵했다.  저 여자는 왜 
나한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그는 일부러 딴청을 피웠다.
  "미안하군."
  그는 다시 딴청을 피우는 자신이 정말 미안해져서 그렇게 말했다.
  "왜요?  검사가 된 건 아저씨가  되고 싶어서 그런 것인데요, 뭐...   무언가가 
된다는 건 좋은일이잖아요.  나도 미용사가 되고 싶어요.  될 수 있을까요?"
  그는 대답 대신 찬바람을 가리기 위해 여자를 더 끌어당겼다.  여자는 
순응했다.  이 넓고 인적 없는 벌판에서 자신에게 아무런 방어태세도 취하지 
않는  그녀에게 그는 아까부터 이상한 흥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 대학생이랑 자봤나?"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런 말이 이 여자를 당황시킬 
수도 있다는 걸 그제서야 깨달았다.  같이 자든 그렇지 않든 그것이  도대체 
지금 이 시간에 이곳에서 무슨 문제가 될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그는 
상상했다.  눈밭에서의 정사.  그는 자신이 왜 갑자기 그런 생각들을 이 어린 
여자를 놓고 하는지  알 수 없어 먼저 당황하고 말았다.  어쨌든 아내는 그에게 
소중한 여자였다.  청춘의 아픈  시절을 모두 그녀와 함께 겪은  거였다. 하지만 
그는 여자를 안은 한쪽 팔을 풀어놓지 않았다.
  "여관엘 갔었어요.  근데..."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젓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얼마나 바보 같은지...  그 남자가 스커트를 벗기려고 하는데 겁이 
났어요.  생리가 시작되는 거 같기도 하고  그래서 잠깐 화장실에 갔다  온다고 
했어요.  다행히 생리가 시작되지 않았더군요.  다시 돌아왔더니 남자가 
돌아누우면서 그냥 자자고 했어요.   그래서 그냥..."
  여자가 웃었고 그도 따라 웃었다.
  "그러고선 방직공장에 다닌다는 말을 했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그 전이었어요...  갑자기 그 사람은 하품도 하지 않고 내게 자신은 
졸업하면 벌써 큰 기업체에 취직하기로 되어 있다고 했어요..."
  그는 그녀의 벙어리장갑 낀 손을 벗겨내고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녀의 
따뜻하고 작은 손가락 사이로 제 손가락을 끼워넣었다.  그녀의 손가락은 그의 
손이 파고들 때 손가락 사이를 벌리지 않으려고 잠시 저항했지만 곧  순응했다.  
보드랍고 작은 손이  그의 손 안에서 부드럽게 쉬고 있었다.  그는 그 순간 
무언가 뜨거운 것이  제 목구멍을 타고 입안으로 넘어온다는 생각을 했다.  
욕정도 아니고 슬픔도 아니고...  그는 구두에 묻은 눈을 탁탁 털었다.
  "인연이 없었던 거야.  사랑한다면 그런 것쯤 아무 문제가 안 되지."
  우울한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다가 그가 위로하듯 말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녀가 눈빛을 빛내며 물었다.
  "그러엄."
  "맞아요.  난 우리가 서로 통한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사람들은 
아니래요.  내가 여대생이었다면 그 사람이 날  그렇게 쉽게 넘보지  
않았을거래요...  그러니까 무시하고 얕본 거래요."
  "걸어볼까?"
  그가 일어섰다.  워낙 다리가 얼어 있어서인지 통증은 그런대로 참을만했다.
  "한 10분만 걸으면 돼요."
  그녀는 그가 들고 있던 가방을 빼았았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천천히 따라 
걸었다.
  "이 가방만 아니었다면 아저씨가 굳이 날 바래다주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앞서 걷던 그녀가 처지는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는 어쩌면 그렇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난 영리한 사람이 못 돼요...  친구들은 나보고 너무나 
어리석대요.  그 무거운 가방을 그렇게 들고 다닌다고..."
  그녀는 잠시 파카깃을 여미더니 다시 말을 시작했다.
  "처음엔 나도 이 무거운 가방을 일부러 들고 다니지는 않았어요...  서울 온 지 
3년쯤 됐을 땐가...  가정집 지하의 봉제공장에서 일했는데  아주머니가 얼마나 
좋은 사람이었는지...  눈물이 날 것같이 고마웠지요.  김치도 주고 밥도 많이 
퍼주고 이불도 깨끗했어요...  그 아줌마가 그러라고 해서 월급을 모두 맡겨  
계를 부었는데 추석때 집에  다녀오고 나니까 공장이 깜쪽같이 이사를 갔어요.  
사람들이 나보고 그랬어요.  넌 사람을 너무 턱없이 믿어버린다고...  하지만 
나는 그 아줌마가 니게 잘해줬던 것만 생각했어요.  나한테 못되게 굴고 돈을 
빼앗어버리는 것보다는 잘해주고 돈을 가지고 간  게 훨씬 낫잖아요?  얼마나  
나쁜 사람들이 많은데...  있을 곳도 없었고 그때서부터 친구집을 떠돌았지요. 
공장 기숙사에 들어가기도 했고...   친구집을 떠돌 때부터 가방을 가지고 
다니게 됐는데 친구가 언제 불편해할지 모르니까 늘 가방을 싸두었어요.  
떠날수 있게...  그후부턴 하루라도 내가 있는  곳에서 떠날 땐 이  가방을 
들고다니지 않으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게 됐어요.   몇번 가방을 가지지 
않고  떠나려고 노력했지만 집을 나서면서 버스를 타러 갈 때까지 내가 이래도 
되는 걸까, 이렇게  가볍게 걸어다녀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 때문에 곧 
달려가서 가방을 가져나와요.  무겁긴 하지만 난 이게 편해요...  가끔 
생각해보면 내가 얼마나 미련스럽고 어리석은가 싶어요.  하지만 사람이라는 건 
자기가 자신을 어쩔 수 없는 때가 있는 거잖아요?"
  그녀는 유치한 이야기를 커다란 철학적 발견이라도 되는 양 말했다.  그는 
그녀의 무거운 가방 두 개를 바라보았다.
  "한번은 버스를 타려고 줄을  서 있는데 어떤  아저씨가 내게 와서  말했어요.  
여긴 자기 구역이니까 다른 데로 가보래요.  바라보니까 그 아저씨도 무거운 
가방 두 개를 들고 있었어요.  아마 날 자신처럼 외판원으로 착각했나봐요. 
재밌죠?  하지만 반가웠어요.  나처럼 무거운 가방을 들고 다니는 사람이 또 
있구나 하고..."
  그도 잠시 웃었다.
  "왜 하필 스키장엘 왔지?"
  그녀의 얼굴이 잠시 우울해졌다.
  "걔들 손님들이 자랑을 했나봐요.  난 오는 길이니까 집에  가려구 왔구...  난 
돈 한푼두 안 냈어요."
  그는 이해했다.  그들은 생각했을 것이다.  언제나 스키장 다녀온  여대생들의 
머리 손질만 하고 있을 건 없잖아, 우리두 얘기에  끼여들자구,라든가 
여름휴가는 포기하지 뭐, 그건 이제 너무 통속적이잖아...
  그녀는 그의 생각과는 아랑곳없이 말을 이었다.
  "몇년 동안 집에 한 번도  못 갔거든요.  동생들이 얼마나  컸는디 보고도 
싶고...  하지만 새벽이 오기 전에 빠져나와야 돼요.  엄마는 내가 오기만  한 것 
가지고 반갑겠지만 돈 한푼 없이 어떻게 해요?  그래도 내가 맏딸인데..."
  그녀는 계속 말했다.  그녀가 든 무거운 가방 때문에, 그의 발에 잎은 상처 때
문에 그는 이제 그녀의 손을 잡을 수가 없었다.
  
    5
  그는 그녀와 함께 그녀의 집으로 들어섰다.  한  두어 칸 되는 슬래이트 지붕 
위에 쌓인 눈이 어둠속에서도 잘 보였다.  그녀가 먼저 걸음을  멈추고 
어둠속에서 희미한 옛집의 윤곽을 바라보았다.  그도 그녀 곁에섰다. 시큰시큰한 
발목의 통증과 함께 고향이 떠올랐다.
  아버지마저 돌아가신 것은 그가 세 번째  고시에 떨어졌을 때였다.  
죽어가면서도 아버지는 아내의 손을 놓지 않았다.
  "고맙구나, 아가야.  고맙구나, 아가야."
  그것이 아버지의 유언이었다.  땅을 팔고 빚까지  정리하고 나자 30만원이 
남았다.  그는 아내에게 말했다.
  "이게 아냐!  내가 가야 할 길을 이게 아닌 것 같아!"
  아내는 처음으로 몹시 슬픈 얼굴을 했다.
  "...당신은 할 수 있어요.  난 아버님하고의 약속을 지키고 싶어.  지하에서나마 
그분들이 기뻐하는걸 보고 싶어요."
  아픈 발목 때문에 그의 얼굴이  땀으로 번들거렸고 사지는 냉랭히  얼어 
있었다.
  "미안해요.  이쪽으로 오세요."
  그녀는 누가 들을세라 낮은 소리로 그를  잡아끌었다.  그리고는 집뒤로 
돌아갔다.  그는 그녀를 따라 뒤꼍의 방으로 들어섰다.  시골 방치고는 좀 넓은 
곳이었다.
  불기가 없어 냉랭하긴 했지만 우선 바람이라도 막으니  좀 살 것 같았다.  
그녀는 벽장을 열고 전기담요와 이불을 꺼냈다.
  "원래는 외양간이었던 곳이에요.  5년 전에 소를 판 다음에 아버지가 방을 
고쳤어요.  생각대로 비어 있네요.  여름엔 동생들이 쓰죠.  겨울엔 불을 못 
때고요...  이리로 좀 앉으세요.  제가 더운 물수건을 만들어가지고 올게요."
  그녀는 제 가방 속에서 수건을 하나 꺼내더니 가방을 다시  꼭꼭 챙겨놓고 
살며시 문을 열고 나갔다.  그녀가 나간 뒤  그는 이제 미지근해오는 
전기담요에  발을 넣고 앉아 있었다.  우선 추위와 한기가 가시자 다리의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문 밖에서 그녀의 기척 대신 바람소리만 회앵 
스쳐갔다.
  그는 이런 밤들을 겪은 적이 있었다.  절에 붙어 있던  고시원, 아내가 
돌아가고 난 밤이면 그는 혼자 바람소리를 밤새 들었다.
  아내가 도착한 날부터 돌아가는 날까지 그는  자신에게 묻곤 했었다.  
겨울이면 바닷가로 나가서 마른 생선들을 얻어다가 산골로 다니며 팔던 
어머니가 죽었다는 소식이 고시원으로 날아왔던 무렵이었다.
  "도대체 왜?"
  처음에는 꿈이었던 것이 첫 번 고시에 실패하고 나서는 열정으로 변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세 번때 떨어졌을 때 그는  그성이 오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는 점차 자신이 누군가를 단죄하고 판단하기에는 너무도 부족한 인간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오직 아내만이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는 열정을 가지고  그를 
부추겼다.  아내의 말을 듣고 나면 그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미래가 단지 
그가 문을 열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는 
불확실한 현재와 확실한 미래를  놓고 저울질하다가 아내와 타협했다.  이미 
올때 까지 왔고 돌아가기에는 너무 긴 세월이었다.
  다섯 번째 도전한 고시에서 마지막 3차시험을 치르고 나왔을  때 아내는 
빗속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얇은 바바리코트의 깃을 올린 얼굴이 몹시 
추워 보였다.
  "당신 정말 수고했어요.  난 이제 자랑스러워."
  그때 그는 아내의 얼굴을 보지 않았었다.  그는 마치 파출부가 몹시 
어지럽혀진 집안을 치우고 문을 나설 때 주인집 여자에게서 수고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모욕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웃었다.  그기분을, 그 
감격을 깨서는 안될 것 같은  엄숙함이 아내의 얼굴에 있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K와 N의 얼굴이 차례로 떠올랐다.  시위중에 숨져간 친구의 얼굴들, 은행원이 
된 친구들, 그들이 웃고 떠들고 출근하고 퇴근하고 고기를 먹고 이를 쑤시고 
여자를 만나고 하는 모습들이 환영처럼 스쳐갔다.
  잠깐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깨어나보니 발목의 통증이 희미하게 살아오기 
시작했다.  
그녀가 더운 물수건으로 그의 발목을 감싸주고 있었다.
  그는 상체를 일으켰다.  그녀가 벗긴 제 양말이 방 한구석에 놓여 있었다.
  "이제 좀 나을 거예요."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아끌어 이불 속으로 당겼다.  머뭇거리다가 결심을 한 듯 
그녀는 파카를 입은 채로 이불 속에 누웠다.
  그녀가 그의 귀에 동그란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조금난 누워 있다가 떠나야 돼요.  새벽이 오기 전에...   새벽에 들어오는 
버스를 타고 몰래 가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의 머리에서는 
오랫동안 벌판을 헤치고 온 자의 피곤한 냄새가 나른하게 났다.
  바람이 창호지 바른 문을 스치고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참 이상하네요.  왠지 아저씨하고 이런 자리에 아주 오래전부터 누워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이 방의 을씨년스러운 분위기, 모욕을  깨닫지 
못하는 젊은 여자.  
그는 그녀가 왜 자신이 그와 닮았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끌어당겨 길게 키스했다.   그녀의 혀가 주춤거리다가 
이내 뜨거워졌다.  그는 자신의 몸이 나른한 욕조 속으로 잠기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이어 불같은 열정이 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그는 동정의 소년처럼 
그것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는 거칠게 그녀의 몸 위로 올라갔다.  그녀의  흰 파카와 그의 회색 파카가 
서로 부딪쳐 새들이 날개를 부비는 것 같은 소리를 냈다.
  그는 그녀의 귀와 목에 부드럽게 키스하고 그녀의 파카를 벗겨내다가 문득 
동작을 멈추었다.  
  그는 다시 내려와 그녀의 옆에 누웠다.  그녀의 입에서 가느다란 한숨이 
흘러나왔다.
  "무슨 생각을 하셨어요?"
  한참 만에 그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는 말없이 그녀의  손을 잡아 쥐어서 
제 얼굴에 대었다.
  잠시 침묵 속으로 바람소리가 음산하게 파고들었다. 
   네 생각을 했어. 
  그가 말했다.  연수원에 출근하자마자 도덕적 스캔들을 일으킬 수는 없었다.  
친구들과 아내와 고시 합격통지서와 그런 것들을 그는 생각했던 것이다.
  다시 침묵이 지났다.  그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피웠다.
   내가 두렵지 않나? 
  그가 물었다.
   아니오. 
  여자가 단순하게 말했다.
   난 알아요.  사람들은 그렇게 나쁘지 않아요.  신문에는 매일 나쁜 사람들만 
나지만 신문에 안 나는 사람이 훨씬 많잖아요?  난 아저씰 처음 봤을 때부터 
나쁘지 않은 사람이라는 걸 알았어요. 
   돈 떼먹고 달아난 여자도 착해 보였다면서? 
  그가 집요하게 물었다.
   오죽했으며 그랬겠어요. 
  여자가 다시 단순하게 말했다.  그는 갑자기 힘이 빠졌다.  여자의 단순함이 
그에게 두려운 기분을 느끼게 했던 것이다.
   이름을 물어봐도 돼요? 
  그는 길게 담배연기만 내뿜었다.
   아니. 
  여자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그는 담배를 끄고 여자를 품에 안았다.  여자는 순순히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이름을 안다는 건 책임을 진다는 거야.  우린 아직 그럴 만큼 가깝지 
않잖아?  정말 내가 나쁜 사람인지도 모르고. 
  그는 말하면서 자신이 정말 나쁜 사람일까봐 겁이 났다.  하지만 여자는 
안심하는 것 같았다.  그는 상황이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다시 물었다.
   연애해보셨지요? 
   응. 
   언제? 
   대학 때... 
   정말 좋았겠네요. 
  그가 세 번째 고시마저 떨어졌을 때 아내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약병을 
내밀었다.  약병에는 빨간색과 파란색의 알약들이 어지러이 섞여 있었다.
   영양제예요.  파란 것은 강한 거니까 저녁때만 드세요. 
  그는 아내가 시키는 대로 그것을 먹었다.  이상하게 정신이 맑아지고 공부가 
잘되었다.  어느날 옆방에 있는 그 또래의 고시생이 놀러왔다가 그에게 말했다.
   허어 참, 형씨도 엔간히 다급했던 모양이오.  그래도 과하게는 하지 말아요.  
몸 망친 사람 많으니까...  나도 처음엔 그걸 먹어보려고 했는데 영 안 
좋습디다. 
  의아해하는 그에게 고시생은 말했다.  거기에는 경멸과 동정이 어려있었다.  
그는 섣불리 자신의 감정을 들키지 않으려는 자 특유의 웃음을 웃었다.
  다음 일요일 그는 읍내 약방으로 내려가 그 약에 대해 물었다.
   아니, 어디서 이걸 이렇게 많이 모으셨어요?  한 번에 두세 알 이상은 안 
파는 건데... 
  그 약은 각성제였다.  강제로 사람의 뇌를 깨어 있게 하는 약이었던 것이다.  
다음에 아내가 왔을 때 그는 파란 알약을 날짜수만큼 버렸다.  아내에게 
몇번이나 말을 꺼내고 싶었지만 그는 그 사실을 안다는 걸 말할 수가 없었다.  
아내도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으리라, 그는 그렇게 생각해버리기로 했다.
  다음에 면회를 왔을 때 아내는 그의 안색을 살폈다.  괜찮으냐고, 몸이 
아프거나 어지러운 증세가 없느냐고 자꾸만 물었다.  그는 아주 건강하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아내는 안심하는 듯한 얼굴을 했고 그 다음번 면회 때엔 
파란 약이 두 배로 더 많이 든 병을 내밀었다.
   이제 그만해!  제발! 
  하지만 그는 그 소리를 뱉어버리지 못했다.  그의 가슴속에서 출구를 찾지 
못한 비명소리가 메아리처럼 이리저리 울렸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왼쪽 
가슴을 눌렀다.  아내의 얼굴에 겁이 더럭 실렸다.
   정말 괜찮은 거예요? 
  그는 마치 사진기 앞에서처럼 어색하게 웃으며 왼쪽 가슴에서 손을 떼었다.  
아내의 얼굴에 괴로운 갈들이 잠시 어리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나서 결심을 
굳힌 듯 아내는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처럼 순진하게 웃었다.  잠든 아내의 
머리맡에 앉아서 그는 아내의 얼굴을 한참이나 들여다보고 있었다.  한 번에 
두세 알밖에 구할 수 없는 약을 구하려 아내는 얼마나 많은 약방을 돌아다녀야 
했을까.  그것은 애정일까, 집착일까, 아니면...
  이 단발머리의 여자도 작업장에서 그 약을 먹어보았으리라.  그는 그런 
기사를 읽은 적이 있었다.
   아저씨는 정말 훌륭한 분이세요.  남들이 평생을 걸려도 하지 못하는 걸 
하셨으니...  고시공부는 정말 어렵다던데. 
  그녀는 꾸민 듯한 명랑함으로 말했다.
   재미있는 이야기 해줄까?  고시원에 있을 때 말이야, 새벽 5시에 아침식사가 
시작되는데 사람들이 정확히 시간을 지켜 식탁에 앉지.  그리고는 15분쯤, 
식사가 끝나기 무섭게 각자 방으로 돌아가는 거야.  나도 체면상 겨우 일어나 
자리에 앉긴 했지만 졸음을 참을 수가 없었어.  아주 힘들었거든...  이러다간 
낙오될 것 같고 아주 초조했지.  그래 저 사람들은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나 
싶어서 하루는 남들 방을 몰래 엿보았지.  그랬더니...  아침식사를 마친 그들이 
모두들 방문을 닫고 들어가서는 책을 베고 쿨쿨 다시 자는 거야. 
  그녀는 한참을 웃었다.  나중에는 웃음소리가 새어나갈까봐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의 웃음소리 때문에 흔들리는 그녀의 몸이 그이 가슴을 
흔들어 그의 몸도 함께 흔들렸다.
   잠들면 안돼요, 아저씨. 
  그녀가 상기하듯 말했다.
   잠들면 안되지. 
  그도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의 체온에 의지해 잠들어버리고 말았다.
 
    6
  눈 쌓인 산골 마을엔 여느때보다 아침이 빨랐다.
  그녀의 집에서 제일 먼저 일어난 사람은 그녀의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뒷간엘 다녀오다가 아이들의 방에 작고 큰 운동화 두 켤레가 놓여있는 걸 보고 
의아한 마음에 살며시 방문을 열어보았다.
  그녀는 방문을 열고 몹시 놀랐다.  몇 년 만에 집에 돌아온 자식이 웬 낯선 
사내와 함께 잠을 자고 있는 것을 본 것이다.  어머니는 우선 방문을 소리 안 
나게 닫고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를 생각했다.  우선은 성질이 
깨어진 사금파리쪽같이 칼칼한 아버지가 나오기 전에 신발부터 치워야 했다.  
그녀는 여자다운 본능으로 우선 그 생각부터 했던 것이다.  그녀가 신발 두 
켤레를 들고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행각하고 있을 때 아버지가 방 밖으로 
나왔다.
   뭐하는 것이여?  누가 왔어? 
  아버지는 마당으로 나와 부엌에 들어가 냉수를 들이켜고 나왔다.  그녀는 그 
사이에 댓돌 밑으로 신발 두 켤레를 들이밀었다.
   아니에요. 
  어머니가 서둘러 둘러댔지만 아버지도 예가은 있는 법이다.  아버지는 다가가 
그녀와 그가 자고 있는 방문을 열어젖혔다.
   큰애가 지 친구를 데리고 와서 잔 모양이에요.  먼길에 피곤할 테니 깨우지 
마세요. 
  어머니의 다급한 목소리가 이어 들려왔을 때 여자는 깨어 있었다.  물론 
남자도 그랬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는 걸 깨닫기에는 시간이 좀 
걸렸다.  드디어 아버지가 방문을 열었을 때 그녀는 남자의 머리를 이불 밑으로 
집어넣었다.  짧은 머리를 한 키 큰 여자애야 흔한법이니 우선은 이불을 
사용하여 제 아버지를 속여야겠다고 그녀는 생각했던 것이다.
  더구나 아버지가 문을 열었을 때 그녀는 짐짓 피곤에 지친 듯이 몸을 
뒤척이며 신음소리까지 냈다.  아버지는 방문을 닫고 그대로 마당으로 내려섰다.  
   아니, 연락도 없이 웬일이여?  밤에는 들어오는 차가 없을 텐데...  눈길을 
걸어왔나? 
  이불 속에서 그와 그녀 두 얼굴이 나타났다.  갑자기 벌어진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와 그녀의 눈길이 
다급하게 마주쳤다.  
  여자는 무엇이 우스운지 입을 가리고 킥킥대며 웃기 시작했다.  상황이 
심각한 것을 알았지만 그도 웃고 말았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래두 찬 방에서 그게 뭐야?  더구나 친구까지...  여기 건넌방에서 재워.  
찬 방에서 자다가 풍맞을라! 
  다시 발자국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그를 다시 이불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는 
순순히 이불 속의 어둠에 묻혀 눈을 깜박였다.  일이 이렇게 되리라고는 전혀 
상상해보지 않았다.  이건 게임인 아닌데.  하지만 그녀는 백치처럼 웃고만 
있었다.
  발자국소리는 다시 멀어졌고 어머니의 입가에서 흘러나오는 신음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똑똑하게 들렸다.  어머니가 상황을 파악했다는 걸 그녀는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그러자 그녀도 상황이 심각한 것을 알았다.  하지만 
알았다고 해도 대책이 서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방 치워놨다! 
  아버지의 소리가 다시 들려왔을 때 그는 이불을 걷고 단정히 일어나 앉았다.  
결심을 한 듯했다.  그녀 역시 그럴 수밖에 없었다.  떨고 있는 그녀의 손을 
그가 잡았다.  그 여자의 눈에 안심한 듯한 빛이 감돌았다.
  다시 문이 열렸다.  아버지는 이불을 걷고 앉아 있는 두 남녀를 보자 일을 
다물지도 못했다.
   아부지... 
  아버지는 믿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았다.  혹시라도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건지, 파랗게 얼어 있는 어머니를 돌아보더니 다시 한 번 딸과 남자를 
쳐다보았다.
   아부지, 이상하게 생각 마세요...  저기, 저기... 
  딸이 입을 열자 그제서야 마법에서 풀리기라도 한 것처럼 아버지의 얼굴에 
핏기가 몰렸다.  이제 딸이 입을 열었으니 아버지가 무어라 대꾸를 해야 할 
차례였다.  하지만 이 자상하지 못한 아버지는 불행히도 말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다짜고짜 다가와 딸의 머리를 후려쳤다.
  어머니가 달려오고 동생들이 눈곱도 떼지 않은 눈으로 우르르 몰려왔다.  
아침을 짓던 이웃집 사람들까지 몰려오기 시작했다.  누렁이만 그 사람들 
사이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음식냄새를 맡으려 기를 쓰고 있었다.
   그게 아니에요.  아부지, 그게 아니고.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를 때리다 말고 방 한구석에 멀뚱히 서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넌 뭐하는 놈이냐? 
   전... 
  할말도 없었겠지만 그가 말을 하려고 하자마자 아버지의 억센 손이 그의 
뺨으로 날아왔다.  그는 묵묵히 맞고 서 있었다.  그녀가 둘 사이에 끼어들고 
어머니 역시 아버지 앞을 막아섰다.  그녀 아버지의 억센 손이 그녀의 얼굴로 
대신 날아들었다.  그는 여자를 밀어내고 아버지 앞에 섰다.
   자초지종은 따님이 말씀드릴 겁니다.  하지만 전 따님과 아무 사이도 아니고, 
중요한 것은 생각하시는 것처럼 책임질 만한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는 책임질 만한 일을 하지 않았다는 걸 강조해서 말했다.  책임질만한 일을 
하지 않았다는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것은 그녀의 가슴을 둔중하게 때리는 것 같았다.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칼 
사이에서 상처입은 듯한 눈이 번득이며 나타났다.  그는 그걸 의식했지만 그녀 
쪽을 쳐다보지 않고 방 밖으로 나가 신을 신었다.  하필이면 발목의 통증이 
더해져서 그는 절뚝이기 시작했다.
   뭐야, 이놈의 새끼!  내가 그 말을 믿을 줄 아니?  피가 펄펄 끊는 것들이 
한이불 속에서 밤을 지새고도 책임을 질 만한 일을 안했다니!  그 따위 
뻔뻔스런 변명을 해? 
  그의 뒤통수로 온갖 욕설이 흘러나왔다.
   이 뻔뻔스러운 놈! 
  그는 온 동네 꼬마들까지 보고 있는 가운데 그 집 밖으로 쫓겨났다.  그녀 
역시 그랬다.  어머니가 스웨터를 여미며 그녀를 쫓아나왔다.
   엄마... 
  그녀가 어머니를 붙들고 한참을 서 있었다.
   내 잘못이다.  이 에미 잘못이야. 
  무엇을 잘못했는지 어머니는 연방 그렇게 말했다.  일이 벌어졌을 때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은 그녀의 버릇이었다.  이제까지 그렇게 빌고 뉘우치면 
일단 상황이 생각보다 빨리 안정되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그 이상의 현명한 
말을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딸과 어머니는 서로 붙들고 서서 눈물을 훔쳤다.
   뭐하는 총각이냐, 응?  뭐하는 사람이냐? 
  딸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대신 그를 돌아보았다.  그는 그녀의 눈을 
피했다.  딸은 시선을 어머니의 털신으로 떨어뜨렸다.
   이리 좀 와봐라. 
  어머니는 딸을 데리고 몇발짝 뒷걸음질을 쳤다.  그렇다고 구석진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건만 그녀는 마치 먼 곳으로 도망이라도 친 것처럼 갑자기 태도를 
바꾸었다.  다정스레 딸의 헝클어진 머리를 빗질해서 넘겨주며 딸의 안색을 
살폈다.
   인사하려고 내려온 거여? 
   아니야. 
  딸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럼, 사귀는 총각이여? 
  딸은 이제 어머니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그래서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딸이 부끄러움 때문에 말을 못하는 줄 알고 
서둘러 미소를 지었다.
   아가, 니들이 손을 꼭 잡고 자고 있는 걸 봤을 때 나는 그 총각이 정말 너를 
아끼는구나 생각했다...  그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건 에미가 
아는 거다.  이번 일일랑 니가 잘 말을 해서 곧 정식으로 인사를 내려오너라, 
응? 
  딸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동생들이 달려와 그녀의 파카 꼬리를 
잡았다.  그녀는 울면서 어린 동생들의 머리를 일일이 쓰다듬어 주었다.
  그는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시선을 피해 담배를 물었다...  멀리 떨어진 집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같은 장소였지만 아침에 보니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낭만적이고 가슴 
설레던 밤의 풍경들은 이제 사라져버리고 스러져가는 빈집으로 불어가는 바람과 
초라한 행색의 사람들만이 보였다.  마치 꿈을 깨어보니 길바닥에서 자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것처럼 그는 모욕을 느꼈다.
  멀리서 울긋불긋한 파카가 보였다.  그녀의 친구들과 N의 모습이었다.  그는 
그들과 시선이 마주칠까봐 얼른 얼굴을 돌렸다.

    7
  그녀의 친구들은 이른 아침에 이곳을 떠났다.  서울에서 정보를 얻은 것보다 
스키를 대여하는 값이 훨씬 비쌌다.  한 사람 앞에 거의 2만원을 넘는 돈을 
투자해야 스키장비를 빌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곧 스키 타는 것을 
포기했다.  파란 파카는 노란 파카에게 계속해서 스키장에 오자는 제안을 한 
것을 화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런 곳에 와서는 안죈다는 걸 이제야 
깨달은 것이었다.  초대받을 수 없는 잔치에 온 것처럼 그녀들은 스키장 주위를 
배회했다.
  그래서 그녀들은 스키장 입구의 간이매점에서 핫도그만 잔뜩 사먹었다.
  막상 N이 스키장비를 대여해 신고 나왔을 때 그녀들은 벌써 다섯 개째의 
핫도그를 먹는 참이었다.
  바라보던 N이 그녀들에게 리프트를 태워주었다.  그것은 그녀들에게는 짜릿한 
흥분이었다.  N도 즐거웠다.  하지만 올라가고 나서가 문제였다.  그에게는 
스키라는 특권이 있었지만 그녀들에겐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들이 당황해서 
N을 바라보았다.  N은 슬그머니 눈을 피했다.
  산 정상에서 삐죽거리며 서성이다가 그녀들은 뒷길로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모른 척하던 N이 꼭대기에서 바라보니 그녀들은 거의 네발로 기며 
산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 곁을 스쳐 사람들이 매끄러운 곡선을 그리며 스키를 
지쳐나갔다.  리프트를 태워준 것을 이제서야 후회한대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당신들은 떠나면 그만이겠지.  돌아갈 곳이 있으니까.  언제든 돌아가 타협할 
곳이 있으니까.  그러나 우리에겐 처음부터 돌아갈 곳이 없었어.  이곳이 우리의 
출발지이자 종착지야. 
  지난 가을 하나둘씩 현장을 떠나는 인텔리 출신 운동가들을 보며 노동자가 
그에게 말했다.  떠나지 않았다는 것이 그런 자리에서 무슨 변명이 될 수 
있을까.
  변명하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다.  그도 서울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것이 
다행이었을까, 그는 그때서부터 단 한줄도 글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N은 다시 그녀들을 내려다보았다.  흰눈을 범벅으로 옷에 묻히며 그녀들이 
구르고 있었다.  N은 무거운 침을 삼켰다.
  N은 하는 수 없다는 듯 먼저 산 아래로 내려가서 그녀들을 기다렸다.  아주 
좋은 실력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N은 굴욕적으로 산길을 굴러내려오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다시 한 번 N의 목으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그녀들은 눈에서 
몇번을 굴렀는지 온몸에 눈을 묻힌 채로 걸어왔다.  N은 싱겁게라도 웃지 
못했다.  그녀들은 파아란 눈초리를 N에게 던졌다.  그것은 적의의 눈초리였다.  
스키장비를 빌릴 수 있었던 자에게 그렇지 못한 이들이 그런 눈길을 던지는 
것이다.  N은 갑자기 눈가가 시큰해졌다.
  그런 눈초리들로부터 평생 도망칠 수 있을리라고는 물론 생각하지 않았고, 
아직은 모색의 기간일 뿐 도망치는 것이라고도 생각하지는 않았었다.  그렇지만 
이런 휴양지에서 이런 가벼운 여행에서 이렇듯 아무렇지도 않은 장소에서 
이렇게 쉽게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그런 눈초리들과 마주치게 되리라고도 
생각하지 않았었다.
  여자들은 거칠게 눈을 털었다.
   미안해요. 
  그가 다가가 말했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우린 친구에게 가보겠어요.  새벽에 오지 않은 걸 보니 걱정돼요. 
  파란 파카가 그에게 들을 보이고 돌아서며 말했다.  노란 파카도 파란 파카를 
따라갔다. 
  그는 곧 스키를 벗어던지고 그녀들을 따랐다.  어제 걸어간 두 사람의 
발작국이 밤새 부는 바람에 얼어붙어 있어서 길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 사람 정말 믿을 만한 사람인가요?  갠 바보 같은 데가 있어서. 
  여자들은 스키장비를 벗어던지고 바보처럼 묵묵히 그녀들을 따라오는 N에게 
조금 화가 풀렸는지 담담하게 물었다.
  N은 여자들이 모처럼 입을 연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말을 풀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할말이 없었다.  N이 그를 괜찮게 생각하고 안하고 간에 
어차피 무슨 일긴가가 일어난 것은 사실인 것 같았다.  그는 비로소 요즘 들어 
제 자신이 누구도 믿고 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예전 같으면 그를 
두둔했겠지만 이제 그럴 수 없었던 것이었다.
  드디어 마을 어귀에 도착해 단발머리에 대해 물어보았을 때 그들은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
   왔지.  웬 남자를 끌고 와서 한이불 속에서 자는 바람에 지금 걔 집에서 
난리가 났다니까...  그저 시절이 나빠서...  애들 서울 보내고 나면 저렇게 
버린다니까.  참 큰일이여, 큰일... 
  개털벙거지를 쓴 초로의 사내는 되묻지도 못하는 그들을 버려두고 눈길을 
향해 걸어갔다.
  노란 파카와 파란 파카가 굳은 얼굴로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 바보 같은 게 또 당할 짓을 할 줄 알았어. 
  노란 파카가 먼저 투덜거렸다.
   남자가 여관비도 없었나?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파란 파카가 신경질적으로 말을 받았다.
   알잖아, 그 기집애가 번번이 멀쩡한 것들한테 속아넘어가는 거. 
  노란 파카는 언뜻 N에게 눈초리를 던졌다.  N은 노란 파카의 시선에 반발할 
수가 없었다.
   왜 자꾸 바보 바보 하는 거야?  걘 바보 같은 게 아니구 착한 거야. 
  파란 파카는 노란 파카가 낯선 남자 앞에서 친구를 낮추어 말하는 것이 
자존심 상하는 모양이었다.
   그게 그거지! 
  노란 파카는 단호하게 말했다.  파란 파카는 대꾸하려고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모퉁이를 돌자 마을이 나타났다.
  멀리서 절뚝거리는 그와 단발머리가 걸어오고 있었다.  마치 모르는 
사람들처럼 그들은 몇발짝쯤 떨어져 걸어오고 있었다.  단발머리는 여전히 
무거운 가방을 든 채였다.
  가능한 모든 상상이 N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어떻게 된거야? 
  친구에 대한 신뢰가 혹시 깨어질까봐, 혹시 사고가 일어났다면 그러나 그 
정도 사고는 그도 이해할 수 있다는 어투로 N이 그에게 물었다.
   모르겠어. 
  그는 N을 지나쳐 절뚝이며 걸어갔고 그 뒤를 무거운 가방 두 개를 든 
단발머리가 따라갔다.  여자들은 단발머리의 눈이 빨갛게 부어오른걸 보고 입을 
다물었다.
  긴 산길을 걸어 산장에 도착할 때까지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에 잠겨 서로 
한마디 말도 주고받지 않았다.

    8
  구름 사이로 뿌연 햇빛이 뿜어나왔다.  흐린 날씨이긴 했지만 그것이 
사람들에게 눈이 내릴 거라는 기대를 주었고 산장의 아침은 활기찼다.  단지 
다섯 명의 이 젊은 남녀만 짐을 싸가지고 시무룩하게 서 있었다.  영문을 
모르는 K만 투덜거리며 짐을 싸가지고 맨 마지막에 그들과 합류했다.
  마차가 오자 그들은 거기에 올라탔다.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K가 N에게 몇마디 물어보려고 했으나 N이 
가지는 무거운 분위기에 질려버렸는지 더 말하지 않았다.
  마차는 오라올 때보다 더 느리게, 더욱 헉헉거리며 산길을 내려갔다.  
개털잠바를 입은 운전수의 얼굴도 어제보다 더 까칠해 보였다.  가지마다 
얼어붙은 눈을 흩날리며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불었다.
  단발머리는 고개를 숙인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울먹이는 쪽은 파란 
파카였다.  파란 파카의 훌쩍임을 못마땅하다는 듯 흘겨보다가 노란 파카가 
신경질적으로 파란 파카를 툭툭 쳤다.
   왜 울고 그래?  초상났어? 
   내리겠어!  난 차라리 걸어갈 테야! 
  누군가가 자신을 건드리기를 바랐던 것처럼 파란 파카가 비명을 지르듯 
말했다.  마차를 운전하던 개털모자 운전수가 울음에 무슨 사연이 있다고 
느꼈는지 군소리 없이 마차를 세워주었다.  끼익끼익 쇠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나고 마차가 섰다.
  파란 파카는 땅에 발을 딛는 순간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모두들 침묵 속에 갇혀 있는 듯했다.  노란 파카의 얼굴이 발끈 들려졌다.  
그리고 그녀는 K와 N과 그를 차례로 훑어보았다.  하지만 아무도 노란 파카와 
눈을 부딪치려 하지 않았다.  두 손으로 머리를 싸맨 N의 눈이 잠시 그녀를 
스쳤지만 곧 고통스레 떨구어졌다.  이제는 노란 파카가 소리쳤다.
   나도 내리겠어...  차라리...  걷겠어! 
  노란 파카가 뛰어내리고 나서 마차가 잃었던 속력을 다시 내려고 했을 때 
입술을 씹고 있던 N도 뛰어내리고 말았다.
  파란 파카가 큰 소리를 내어 울고 있었다.  노란 파카는 여전히 껌을 
씹으면서 소매로 자꾸 눈가를 훔치고 있었다.  N은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묵묵히 그들과 함께 걸었다.  그리고 그들은 함께 느린 마치의 뒤를 따라갔다.  
올라올 때는 환락으로 들어서던 마차는 이제 마치 영구차처럼 보였다.
  이제 마차 안에는 K와 그, 그리고 그녀가 남았다.
  그들은 마치 마차의 느린 속력을 한없이 헤아리는 것처럼 덜커덩거리며 
실려갔다.
  K가 벗어진 머리를 연방 뒤로 넘기며 두 사람의 안색을 살피다가 살찐 
손으로 턱을 괴었다.
  친구들이 하나씩 내릴 때마다 조금씩 더 굳어지던 단발머리의 얼굴은 이제 
만지면 딱딱할 것처럼 경직되어 있었다.  다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입술만 
파르르 떨다가 다물어버리곤 하였다.
   날 하룻밤 노리개로 생각한 건가요?  그래서 내 가방을 나누어 들어준 
건가요? 
  천천히 그러나 또박또박 단발머리가 물었다.
  대답을 해야 할 그보다 먼저 K가 손으로 얼굴을 부비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와 그녀의 눈이 오랜만에 차가운 대기 속에서 부딪쳤다.
   아니야. 
  그는 천천히 발음했다.  가장 정확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모욕감 때문에 딱딱히 굳었다.  여자의 눈이 일그러지면서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날 사랑하나요? 
  이번에는 개털모자의 운전수까지 어이없다는 듯한 눈길로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K의 입에서 한숨이 더 크게 새어나왔다.  사랑이라니, 너무 흔해서 
낯설어버린 단어를 겁도 없이 뱉는 여자를 K는 이제 더 바라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대답하지 않고 눈길만 떨어뜨렸다.
   아저씨가 그랬죠?  사랑한다면 조건 같은 건 문제가 안된다고... 
  여자의 음성은 떼쓰는 듯한 것이었다.  그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기혼이야, K는 말하려다 말았다.  저런 부류의 여자들에게는 기혼이라고 
하든 미혼이라고 하든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K는 
이제 골치 아픈 두 남녀를 완전히 외면해버렸다.
   이제 우리는 다시는 만날 수 없나요? 
  여자는 다시 물었다.  그녀에게는 이미 이 산도 마차도 K도 마부도 모든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오직 그와 그녀 자신만이 이 세상에 남아 있는 듯 
느끼는 것 같았다.
   ...그래. 
  그가 무겁게 말했다.
  단발머리는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만 그 사실을 스스로 인정할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집요하게 
그 동작을 되풀이했다.
   아직도 내가 아저씨 이름을 알아서는 안되나요? 
  어디서 굴러먹었길래 이 아이는 이렇게 어리석은가, K의 살찐 얼굴에 짜증이 
다글거리며 몰려들었다.  K는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내 이름은 순임이에요.  이순임. 
  그녀가 절규하듯 소리쳤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K는 앉은 상태에서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운전수만 그녀를 돌아보았다.  마치 알아들었다는 
듯이 길가에 늘어선 나무들만 바람에 가지를 흔들었다.  그럴때마다 얼어붙은 
눈들이 은가루처럼 반짝이며 쏟아져내렸다.
  순임은 갑자기 큰 소리로 흐느끼기 시작했다.
  마차는 느린 속도로 지나갔다.  그녀의 흐느낌소리는 마차가 멎을 무렵 함께 
멎었다.
   시외버스 타는 데까지 같이 가시죠. 
  여섯 명이 다시 모였을 때 K가 무거운 분위기를 깨며 말했다.
   올 때 태워다주신 것만으로도 고마워요.  우린 우리끼리 가겠어요. 
  노란 파카는 울어서 붉어진 눈을 닦으며 말했다.  파란 파카는 고개를 숙이고 
운동화로 땅을 긁고 있었다.  그리고 순임은 그 무거운 가방 두 개를 아직도 
들고 있었다.
  그들은 그녀들을 설득하기를 포기하고 차를 주차시켜놓은 곳으로 갔다.
  K가 차를 출발시켰다.  날이 흐린 게 눈보라라도 한바탕 불어탁칠 
모양이었다.
  차가 체인을 달고 털털거리며 주차장을 빠져나와 한길로 들어섰을 때 멀리서 
앞서가는 그녀들의 모습이 보였고 이윽고 천천히 가까워졌다.  그리고는 드디어 
차가 그 곁을 스칠 때 그녀들이 일제히 차 쪽을 돌아보았다.
  그것은 깃발 같았다.  그렇다.  마치 깃발이 올려지는 것처럼 일제히 그녀들은 
돌아보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가슴속에 오랫동안 접어두었던 깃발 역시 
일어나 일제히 나부끼는 것 같은 착각을 그는 느꼈다.
  그는 아직도 무거운 가방을 들고 가는 순임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 겨울 산길을 지나 무책임한 세상으로 걸어들어가고 있었다.  3년 
월급을 떼먹고 달아난 사장 부인과, 염치를 모르던 대학생과 그리고 그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 눈을 희번덕이며 걸어 다니는 그 거리로, 버스를 타면 앉으려 
하고, 좀더 빨리 달려가려고 배를 가르고 오장육부를 떼어낸 공기처럼 가벼운 
사람들 틈으로...
   세워!  차 세워. 
  K와 N의 눈이 마주쳤다.  아까부터, 그녀들이 일제히 나부끼기 시작한 
깃발처럼 그들 돌아보았을 때부터, 그는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비명을 지르며 
울고 있었던 것이다.  걱정스러운 K는 변속기어를 올렸고 차는 좀더 빠르게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퉁이를 돌자 이제 그녀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1992, 한길문한 여름호>




      절망을 건너는 법
    1 기차는 달린다
  기차가 서울을 떠났을 때서야  비로소 불안감이 밀려들었다.   혼자서 떠나는 
취재여행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정말 다시 긍을 쓸 
수 있을까 하는 의혹 때문이었다.  사실 지난 몇  개월 동안 나는 늘 불안해 보
인다는 염려를 받았다.  발작적인 신경질과 괴상스런 침묵, 그리고  무모한 발랄
함.  글을 쓰기 위해 그 모든 것을 각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을이 다 가도록 
나는 글 한줄 쓸 수 없었고 책 한  권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다.  계약금을 끌어
다 쓴 출판사 담당자의 협박어린 충고도 나를 움직이지는 못했다.
  대전에서 십오분간 쉬었다가 기차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역 구내에서 
뜨거운 우동을 먹던 사람들이 기차에 올라타서 자기의 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니 자리를 찾아야지."
  농촌여성을 취재하는 르뽀를 써달라는 부탁을 하러 전화를 한 선배가 용건 끝
에 따지는 듯한 음성으로 덧붙였던 것이 지난달이었다.
  "찾아야지."
  "말은 잘한다."
  "미안해, 언니.  나 아주 잘 있어.  단지, 글을 쓸 수가 없어.  써봤자 모두 인
간에 대한 절망만으로 가득 차게 될 것 같아.  그게 무슨 소용이겠어?"
  "..."
  "..."
  "그래, 절망하는 김에 밑바닥까지 가봐라.  그것도 괸찮지...  밑바닥까지 갔을 
때 그때 전화해."
  선배는 툭 뱉듯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뭇사람들이 그러했듯 어줍잖은 말로 
나를 위로할 때를 대비해서 준비해놓은 많은 반박들이  마음속에서 갑자기 꼬리
를 감추어버렸다.  이상스런 오기까지 생기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서울을 떠나고 싶다는 욕망이 아니었다면 다시  전화를 걸지는 않았을 
것이다.
  "가서 보고 느끼면 너한테도 도움이 될 거야.  모두들 얼마나 건강하게 살아가
고 있는지."
  개찰구에서 가방을 념겨주며 선배는 내 어깨를 툭툭 쳤다.
  나는 선배가 건네준 쪽지를 펴보았다.  전라북도  순창군 팔덕면 창덕리 순안
마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란  내가 농촌을 읽어낼 수  있을까.  그것도 단 
며칠 만에.  하지만 기차는 어쨌든 달리고 있었고  나는 이제 돌아갈 수 없음을 
알았다.
  "이젠 다시 돌아갈 수 없어요.   돌아간다 해도 또다시 같은  일이 반복될 거
야."
  나를 울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둘뿐이었다.  나의 어머니와 그리고 나의 
딸.
  나는 핏줄로 이어진 두 사람의 여성 중 한 사람 앞에서 기어이 울움을 터뜨리
고 말았다.
  "그래, 니가 알아서 해라.  이젠 나도  지쳤다...  그래, 엄마 세대와는 다르지.  
나도 너보고 이 에미가 그랬듯 꾹 참고 살라고는 말 안해."
  어머니는 울지 않았다.  내가 천진스런 딸아이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어머니
도 윗입술을 지그시 누르고 계셨다.
  "이혼할 용기가 있는 년이 울긴 왜 울어!  다시 시작해.  기죽지 말고."
  추수가 끝난 논에는 젖빛 갈대와 마른 바람 그리고 황량함이 가득 차 있었다.  
이젠 부딪쳐보는 수밖에 없었다.  기타에서 내려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순안까
지 가는 버스를 타러 순창터미널로 갔을 때는 이미 어두운 저녁이었다.  그러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어느새 나는 주눅이 들어 있었다.  서둘러 와버린 어둠 때문
이었고 낯선 거리의 낯선 말투들 때문이었다.
  터미널로 갔지만 순안마을까지 가는 버스를 타려면 두 시간은 더 기다려야 했
다.  차가 다니는 간격이 두 시간 바, 더구나 다음 버스가 막차였다.
  나는 가방을 메고 거리를 걸었다.  배도 몹시 고팠고 추웠다.
  정육점에 들어가 고기를 사고 시간을 때우기 위해  제과점으로 들어가 아이들
에게 줄 과자도 조금 사고 나서 우유로  빈속을 때웠다.  제과점 한구석에 있는 
어항 속에서 물고기들이 이리저리 헤엄치고 있었다.
  "난 당신한테 사육당하는 게 아냐!  당신이 당신을을 소중히 하는만큼 나한테
도 일이 소중해."
"여민이가 있잖아.  난 저 아이가 당신이 밤늦게 들어오도록 파출부 아주머니 눈
치만 보고 있는 걸 참을 수 없어."
  "제말 이러지 마.  아이는 다 제게 주어진 방식에 적응하면서  사는 거야.  내
가 놀러 다니는 거야, 춤바람 나서  카바레 다니는 거냐구!  날 용서할 수  없는 
건 여민이가 아니라 바로 당신의 그 알량한 봉건의식아냐?"
   내가 당신이 늦으면 얼마나 애를 태우는지 알아?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당신을 못 믿어서 그러는 게 아니잖아. 
   당신이 날 믿는다면 설사 내가 밤에 떼강도에게 윤간을   ㅎㄴ다 해도 
문제가 안돼!  왜 솔직하지 못하지?  여편네가 일한답시고 다른 남자들이랑 
어울리는 게 싫은 거 아냐!  집에 오면 남들처럼 보글보글 끓는 되장찌게도 
없고 썰렁한 방에 들어오기 싫다는 게 이유 아니야?  당신 우리 배고픈 
시절에는 내가 일하는 것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잖아. 
   여민이 때문이잖아, 여민이! 
   아니야, 여민이가 태어나기 전에도 떼강도는 있었고 그때도 난 밤 늦게까지 
취재를 다니곤 했어.  내가 싫은 건 당신이 좀더 당신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하다는 거야! 
  싸우던 것은 오히려 애정이 있을 때였다.  점차로 집안에서는 말소리가 
줄어갔고 아이를 매개로 한 대화 이외엔 우리는 그저 서걱거리는 얼굴로 
마주쳤을 뿐, 서로의 문을 굳게 걸어잠갔다.
  버스 시간이 대략 이십분 남은 걸 보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어 살 된 
아이가 엄마에게 안겨 제과점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이의 손에 
커다란 팥빵을 취어주면서 흐뭇한 얼굴을 했다.
  나는 돈을 치르고 제과점 문을 열었다.  내가 무심히 지나쳐온 낯선 많은 
간이역들처럼 나도 여민이를 잊게 될까.  나는 대합실로 들어섰다.
  이상하게도 대합실이 텅 비어 있었다.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귀퉁이 의자에 
않았다.  자꾸 시계를 들여다보았지만 시간은 몹시 느리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때 군인 하나와 젊은 남자 둘이 들어섰다.  군인이 내 오른쪽에, 갈색 
잠바의 청년이 내 왼쪽에, 그리고 나머지 이마에 흉터가 인ㅆ는 젊은이가 내 
앞자리에 와서 나를 돌아보았다.  열락없이 포위당한 꼴이었다.
   이곳 분은 아니신 거 같은디...  여자 혼자서 뭔 일이시오?  학색이오? 
  그들의 입에서는 독한 술내가 풍겨왔다.
  나는 대꾸하지 않고 자리를 빠져나갈 궁리를 하고 있었지만 비로소 실감이 
왔다.  그렇다.  이곳은 대한민국.  여자 혼자 다니기에는 지나치게 위험한 나의 
조국.
   좀 비켜주세요. 
  나는 그들을 빠져나와 무작정 승강장 쪽으로 도망치듯 나왔다.  그들은 더 
따라오지 않았다.  뜻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승강장에서 우글거리고 있었다.  몇 
달째 사람들을 기피하고 지내던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나는 순안이라는 팻말이 씌어진 줄 뒤에 섰다.  하교하는 고등학생들과 장을 
보고 돌아가는 사람들이 서로 인ㅅ를 나누며 떠들어대고 있었다.
   기집애 대학 보내서 뭘 혀.  고등학교까지만도 감지덕지제. 
  앞니가 뻐드러지고 키가 훌쩍 큰 여자가 여고생들과 말을 나누고 있었다.
   그래도 순임인 공부를 잘하잖아요. 
  그 여자의 입에서 긴 한숨이 아왔다.
   에미가 미꾸라지 팔아서 겨우 밥먹는디 대학은 무슨 대학. 
  버스가 왔고 나는 그들과 함께 버스에 올랐다.  앞니가 뻐드러진 순임이 
엄마가 내 옆에 않았다.  버스는 읍내를 빠져나가 불빛 하나 보이지 않는 
어둠속을 덜컹이고 기우뚱거리며 달려가기 시작했다.
   저어, 순안마을에 가려면 어디서 내려야 하나요? 
   아니고, 내가 그 마을에 사는디, 누구 집에 가는가? 
   저, 현이네 집에... 
   현이네는 왜? 
   취재왔어요. 
  여자는 반색을 했다.
   농촌 취재 나왔다니께 우리 집에도 다녀가요.  전에도 뭣이냐, 글을 쓴다는 
사램이 우리 집에서 이틀이나 자믄서 나랑 이야기허고 갔어.  헌데 소설은 안 
나오등만. 
  여자는 왠지 신이 나 있는 것 같았다.  순안마을에서 내려 마중 나온 현이 
어머니의 안내를 받아 가는 내 등뒤에 대고 그 여자는 또 소리쳤다.
   꼭 와야 혀.  모레는 일 안 나가니께. 
  하늘엔 별빛 하나 보이지 않았고 기온이 몹시 찼다.  어둠에 낯선 눈으로 
나는 더듬듯이 현이네 집을 들어섰다.  으레 그랬듯이 이방인을 향해 개들이 
미친 듯이 짖었다.
  나는 방안으로 들어가 가족들에게 인사를 드렸다.  서울 잡지사에서 연락을 
받고 모두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두 평 반이나 될까, 텔레비젼 한 
대와 경대가 놓인 간소한 방이었다.  중학교 이학년인 현이는 방바닥에 
도와지를 펴놓고 미술숙제를 하고 있었고, 그 동생들은 이 낯선 서울여자 
앞에서 부끄럼을 타는지 윗언니가 숙제하는 데만 눈길을 주고 있었다.
  나는 현이 아버지인 김만석씨에게 인사를 드리면서 직감적으로 이댁 식구들이 
나를 반기지 않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며칠이나 머물거냐는 물음에 
계획과는 달리 사흘 정도라고 우물우물 대답해버린 것도 그 때문이었다.
   우린 사실 아홉시 전에 자요.  그리고 새벽에 일어나지요.  그럴 수 있겠고? 
  김만석씨가 물었다.  나는 사실 밤에 글을 쓰고 아침엔 잠이 좀 많은 
편이었다.
   그래야지요. 
   그럼 내일 뵙시다. 
  김만석씨가 사무적으로 말했다.  아주 뚝뚝한 말씨였다.  나는 큰딸 현이와 
함께 작은방으로 들어섰다.  한 평 반쯤 되는 정갈한 방이었다.  이미 불을 
때두었는지 방바닥이 따뜻했다.  의외로 잠이 쏟아졌다.  아침에 집을 나선 것이 
아홉시 반이었으므로 천리도 못 되는 길을 근 열두 시간이나 헤매어 찾아온 
꼴이었다.
    2 비오는 날에는 흰옷을 입으면 안됩니다
  비가 퍼붓고 있었다.  시간은 이미 열두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해 봄과 
여름 사이 지긋지긋하게 비가 내리고 또 내렸다.  나는 우산을 펴들고 발을 
동동 구르며 차도 가장자리에서 열심히 손을 흔들어댔지만 택시들은 흙탕물만 
튀기고는 나를 지나쳐 버렸다.  그래서 겨우 택시가 잡혔을 때 나는 무조건 
올라타고 애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서울 근교의 한 읍에 살고 있었는데 
그곳까지 택시를 타고 가는 데는 만원이 넘는 돈을 지불해야 했다.  운전사는 
머리가 희끗희끗 오십이 넘오보였는데 눈살을 좀 찌푸리더니 차를 출발시켰다.  
비는 폭우에 가까울 정도로 펴붓고 있었고 불광동을 지났을 때는 거의 달리는 
차가 보이지 않았다.  운전사는 차를 몰다가 자주 나를 돌아보았다.
   허어, 이거 이런 날에ㅔ는 여자를 태우지 말랬는데.  흰옷 입은 여자는... 
  운전사가 안절부절하는 모습으로 여러 번 말을 되풀이할 때까지 나는 그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었다.  구파발을 지나 차가 논길을 들어섰을 때 
그는 또 말을 꺼냈다.
   요즘 세상이 아무리 개명했다고 하지만 이런 날은 왠지 집에 일찍 들어가고 
싶어요.  내 친구 중에 하나는 글세 비오는 날 머리가 길고 하얀 옷을 입은 
여자를 태웠는데... 
  운전사는 말을 계속했다.  여자가 가자는 대로 험한 산골 앞에 차를 세우고 
돈을 가져올 때까지 기다렸지만 여자는 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해 
들어가보니 그곳에 그런 여자는 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운전사가 분명히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고 말하자 문을 열어준 여인이 한숨 쉬며 말하기를 
오늘이 바로 내 딸의 제삿날이유, 했다는 흔한 이야기였다.
   아가씨, 좀 잘 않아보슈.  백미러로 잘 안 보이는 것 같은데... 
  나는 그제서야 내 몰골을 돌아보았다.  흰 남방셔츠에 흰 모시재킷, 그리고 긴 
생머리.  물론 밑에야 청바지에 운동화를 신었지만 나는 그가 정말로 ㄴ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사람이 그런 걸 
믿고 있다는데 웃을 수도 없었고 저는 귀신이 아니에요라고 이야기하기에는 더 
이상했다.  나는 백미러에 내 얼굴이 잘 비치도록 않아 그에게 자꾸 말을 
걸었다.  하지만 마음이 몹시 무거웠다.  이건 삶이 아니야.  어쩌면 여기 않아 
있는 건 내가 아니라 정말 유령인지도 몰라.  아침 여섯시부터 밤 열두시까지 
지치도록 일을 하고나면 남는 것은 남편과의 부딪침.
  차는 느릿느릿 달렸고 나는 귀신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이라고 하듯 파란 
만원짜리 지페를 그에게 내밀었다.  운전사는 겸연쩍은 듯 씩 웃었으나 나는 
이미 억지웃음을 지을 만큼의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파트 문 손잡이에 
열쇄를 필어넣었다.  예상대로 집은 어두었고 방안에는 남편이 딸아이를 데리고 
자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공부방으로 와서 책상 앞에 않았다.
  시나리오 작업을 하고 있던 나는 ㅁㄱ바지 일주일 동안 여관에 출근하고 
있었다.  남자작가들이야 감독과 함께 숙식하면서 글을 쓰지만 내가 여자라는 
점을 참작해 우리는 주로 다방 같은 곳에서 일을 했다.  그러나 진도는 
생각만큼 잘 나가지 않았다.  촬영개시일은 다가오고 있었고 감독은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도 않았다.  여관작업은 내가 제의한 것이었다.  여자작가를 
택했기 때문에 불이익을 당한다는 소리를듣고 싶지 않았던 나의 오기도 
작용했다.  연출부 세 명과 함께 여관에 들었지만 나는 거기서 잘 수는 
없었으므로, 아침에 그들이 잠이 깰 때 출근하고 밤늦게 퇴근하는 편법을 썼던 
것이다.  그날도 그랬다.  작가인 내가 차마 빠져나올 수가 없어서 머뭇거리다가 
열두시를 십오분 남겨놓고 일어섰을 때, 닫히는 여관방 문 뒤에서 누군가 
중얼거렸다.
   저 여자 남편도 참 대단하다.  나 같으면 저렇게 늦게 다니는 마누라 안 
데리고 살지. 
  그리고 높은 웃음소리들.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책상서랍을 열고 의미없이 지저분한 책상 속을 
뒤적거렸다.  툭 하고 편지가 떨어졌다.  미국에 유학중인 내 친구가 삼년 전에 
보내온 편지였다.
   민희야, 제발 우리 부모님을 좀 설득해줘.  설사 그가 이혼한 경력이 있다고 
해서 내가 그를 선택 못할 이유는 없어.  만일 부모님 말대로라면 우리는 
시장에 가서 제일 좋은 조건의 신랑감을 골라야 해.  하지만 너고 알잖아.  우린 
그저 다른 여자들처럼 그러려니 체념하면서 우리의 인생을 남편한테 얹혀살진 
말자고... 
  나는 편지를 읽다 말고 그 자리에 엎드렸다.  그날 아침 나는 거의 일년 만에 
그 친구의 국제전화를 받았었다.
   민희야, 나 이혼해... 
  그 친구의 남편은 자신이 먼저 박사학위를 받자마자 이 친구에게 학위를 
포기하고 같이 모국으로 돌아가기를 종용했던 것이었다.  그 고민에 대한 
편지를 받은 지 거의 이년이 지나 있었다.  가슴이 뻐근해지면서 통증 같은 
것이 느껴졌지만 내 눈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나는 빠져나오지 못한 슬픔이 
그저 내 어깨를 자꾸 삐그덕거리게 하는 것을 느꼈을 뿐이었다.
   저, 저... 
  누군가 나의 팔을 흔들고 있었다.  나는 거의 발작적으로 팔을 뿌리치고 
일어나 않았다.  잠깐 여기가 어디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내 앞에 옷을 단정히 
입은 현이가 않아 있었다.  현이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꿈을 꾸시는 것 같아서. 
  나는 벌떡 일어나 않았다.  시계를 보니 다섯시 사십분, 아직 동도 트지 
않았다.  방문 밖에서 분주히 오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나는 현이에게 어색하게 
웃어 보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집 대문이 열려 있었고 김만석씨와 그의 부인이 서울로 가는 트럭에 부지런히 
꿀통을 싣고 있었다.  한 박스에 일리터짜리 꿀통이 열두 개씩 들어 있는데 
그것을 트럭에 나르고 있는 것이었다.  안녕히 주무셨냐는 인사도 드릴 겨를 
없이 나도 그들이 하는 대로 꿀통을 날랐다.  현이 어머니는 꿀통 개수를 
체크하랴, 부엌에 드나들며 국을 끓이랴,첫차를 타고 순창 읍내로 통학하는 
현이의 상을 따로 차리랴 정신이 없었다. 
  꿀통 나르기가 대충 끝났을 때 나는 부엌으로 들어섰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아궁이와 가마솥이 놓인 부엌이었다.  민속촌에서 밖에는 나는 그런 부엌을 본 
기억이 없었다.  민속촌과 다른 것이 있다면 부엌 상단에 생뚱맞게 놓여 있는 
가스레인지 정도일까.
  아침식사를 마치고 아이들 셋이 제각기 학교로 갔다.  김만석씨도 작은 
트럭을 타고 읍내로 떠났다.  부엌에 수도가 없으므로 나는 그릇들을 모아 
마당으로 나왔고 거기서 쭈그리고 앉아 설거지를 했다.
  시린 손을 말리면서 툇마루에 앉아 있자니 비로소 마을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한 삼십여 호 되는 마을이었다.  그러나 그중 다섯 집 정도는 
빈집이었고 그나마 나머지 다섯 호 정도도 노인들이 혼자서 살고 있다고 했다.  
김만석씨 댁과 이웃하고 있는 네채의 집도 원래는 모두 빈집이었는데 그중 두 
채에 노인들이 며느리와 떨어져 들어와 있다는 것이었다.
  까치밥 몇 개를 남겨놓은 감나무 가지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푸르고 맑았지만 
인기척이 들리지 않는 한옥의 그늘에는 괴기스러운 침묵만 가득 차 있었다.  
노인네들 돌아가시고 나면 이제 몇집 안 남게 되겠지.  이곳에 오기 전에 
자료를 읽은 바에 의하면 정부는 우루과이라운드에 대비하기 위해서 농촌인구를 
오 퍼센트 이하로 줄이는 방안을 검코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일인당 경작 
면적을 확대하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내가 그 마을을 
돌아보았을 때 우리의 선대들이 한톨의 낟알이라도 더 얻기 위해 산비탈을 
오르내리며 자갈을 골라내고 개간해 놓은 밭은 잡초 무성하게 버려져 있었다.  
농사를 지을 사람이 없어서였다.  농촌인구의 고령화, 농업의 집단기계화를 
고려하지 않은 채 단지 숫자상의 인구를 줄이는 일이 경지면적을 확대하는 일인 
양 알고 있는 그들이 좋은 대학을 나온 유수한 농업문제 각료들이라는 사실이 
놀라웠다.  이곳에 온 지 열두 시간도 안 되는 나도 깨닫는 일을 그들이 모르고 
있다니.  그것은 내가 이땅의 관료들에게 기대를 가질 만큼 순진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안이하게 지시한 정책들이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의 삶을 훼손할 
것인지 걱정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잠시 휴식을 마치고 현이 어머니와 나는 갈퀴를 하나씩 들고 뒷산으로 
향했다.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것은 거개가 늙은 사람들이었다.  현이 어머니는 
이 마을에서 삼십대 주부가 자신과 이장 부인 둘뿐이라고 했다.  역설적으로 
이마을에는 장가를 못 가 속을 태우는 농촌 총각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처녀는 물론 남아 있는 젊은이라곤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왜냐고 나는 
묻지 않았다.  이 대한민국에서 그걸 물어볼 바보가 어디 있겠는가.
  내가 일을 하겠다고 대칼퀴를 손에 잡을 때부터 현이 어머니의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뒤숭숭한 살림에 군식객 하나 더 늘었다는 생각이 
어느정도 가신 모양이었다.  우리는 대나무갈퀴로 숲에 떨어진솔잎들을 긁어 
나뭇단을 만들었다.  그 나뭇단의 구조는 도회에서 자란 내게는 참으로 신기한 
것이었다.  우선 활엽수의 가지들을 낫으로 잘라 석 삼자 모양이 되게 놓은 
ㄷ음 그 위에 활엽수의 잔가지들을 얼기설기 놓고 다시 솔잎 긁은 것을 
올려놓았다.  소나무 이파리들은 갈퀴로 몇번 긁어주면 마치 잘 빗질된 짐승의 
털처럼 일렬로 잘 누워서 빠져 나가지 않았다.
  이 솔잎 긁은 것을 보통사람의 키만한 길이와 허리쯤 되는 높이로 쌓고 그 
위에 다시 활엽수의 잔가지를 놓고 밑에 깔아놓은 새끼줄을 들어 묶으면 되는 
것이었다.  성냥불 하나만 켜 대면 곧 타 없어질 것들이지만 하나하나 좀더 
예쁜 모양으로 배치하고 좀더 단단히 묶으려는 현이 어머니의 굵은 손마디가 
참으로 아름다워 보였다.
   였날에 나무꾼들이 이걸 장에 내다 팔 때는 더 예쁘게 묶으려고 했었지요. 
  어느새 볼일을 마치고 산으로 올라온 김만석씨가 말을 거들었다.  김만석씨는 
우리가 묶어놓은 것들을 산 아래로 날랐다.  나는 거의 힘든 일은 하지 않고 
갈퀴질만 했지만 허리가 몹시 아팠고 배도 고팠다.  나는 아침밥상에서 지레 
겁을 먹고 밥을 덜어놓았던 것을 생각하며 혼자 미소를 지었다.  대학 사학년 
때였던가, 여행중에 거제도에 있던 선배의 노모.  성의를 무시한다 생각할까봐 
그 밥을 다 먹고 배탈이 나서 여행의 마지막을 죽을상을 하고 다녔던 기억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밥의 양에 대해 공포를 가졌던 것은 그만큼 내가 
육체노동을 기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는지 몰랐다.
  잠시 후, 김만석씨가 무를 두 개 뽑아가지고 오셨다.  우리는 잠시 쉬기로 
하고 산비탈에 않았다.  올라올 때는 몹시 추웠는데 이제는 산위로 불어오는 
찬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김만석씨는 낫으로 무껍질을 벗겨 내게 
먹을 수 있겠는가를 물었다.  왜 먹을 수가 없겠는가,  나는 어른 발뚝보다 크고 
굵은 그 무를 다 먹어치웠다.
  마치 우리의 엤 농부를 연상시킬 만큼 자존심이 세어 보이는 딱딱한 태도와 
경계심-사실 이것은 내 상상에 비해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시골에 가본 경험이 
거의 없던 나로서는 여섯 살 무렵, 먼 친척 할머니 댁에서 내게 보여주었던 
환대를 기억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월은 이미 이십오년이 넘게 흘렀고 그 
세월은 이 시골사람들로 하여금 도회사람들에 대한 불신과 경계를 품게 하기에 
충분한 세월이었으리라-이 누그러지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산 아래로 
버스가 지나갔다. 이 마을에 버스가 들어온 지 겨우 오룩년.  그러니까 우리가 
팔육, 팔팔 어쩌구 하며 서진조국의 꿈을 끊임없이 강요당하던 그 무렵에도 이 
마을 사람들은 순창읍에서 이십여 리 길을 걸어다닌 것이었다.
   처음 시집올 때 광주 친정에서 담양으로 해서 택시를 타고 오는디 눈앞이 
깜깜하두마. 
  현이 어머니는 그때 일을 생각하는지 희미하게 웃으셨다.
   두 분 늘 이렇게 같이 일하시면 좀 지루하지 않으세요? 
  현이 어머니와 김만석씨는 잠시 서로 마주보더니 쓱스럽게 웃으셨다.
   왜요, 없으면 오히려 힘들고 허전하제. 
  김만석씨와 현이 어머니가 여자가 일을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싸우는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땅바닥에 자꾸 
의미없는 금만 그었다.
   아가씨는 농촌에 시집와서 살 마음이 있소? 
  김만석씨가 물었다.
   아뇨.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김만석씨도 현이 어머니도 놀라지 않았다.  
우리의 고향이었던 그 푸른 농촌이 이제 그들이 낳은 젊은이들로부터 버림받는 
것이 결코 땅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은 그들도 알고 있으리라.
  내려오는 길에 김만석씨의 포도밭에 들렀다.  재작년에 심었다는 포도는 
어려서 아직 가지들끼리 손잡지 못하고 있었다.  논농사 밭농사, 소 기르기까지 
실패하고 심었다는 이국의 포도나무 밭에서 김만석씨와 부인은 심각한 얼굴로 
이것저것 상의를 하고 있었다.
  나는 좀 떨어진 속에서 포도나무밭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포도는 재벌의 
포도주공장에 싼값으로 팔려갈 서이고 부자들의 만찬에 애피타이저로 오를 
것이다.  김만석씨와 그 부인은 저 포도주를 맛볼 수 있을까.  아마도 그들은 그 
시간에 미국에서 수입된 콩으로 만든 두부를 먹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포도밭마저 실패로 돌아간다 해도 이들은 이렇게 나란히 서서 다른 작물에 대해 
상의할 수 있을까.
  남편의 글은 과격하거나 시기상조라는 이유로 자꾸 되돌려져 욌다.  대신 
나의 글은 그런대로 무난하다는 평을 받으며 게재되곤 했었다.  한때 우리도 
저렇게 나란히 앉아 문학과 정의와 예술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를 격려했지만 그는 자꾸 슬럼프로 빠져들고 있었다.
  우리가 반대의 입장에 놓여 있었다면 파국이 왔을까.  하지만 그것이 모두 
그의 잘못은 아니었다.
   왜 억울하다고 하셨어요? 
  잠자리에 들었을 때 현이가 겸연쩍어하면서 내게 물었다.  내가 아침에 
억울하다고 잠꼬대를 했다는 것이었다.
   글세 난 안죽었는데 날 보고 누가 자꾸 귀신이라고 하잖아. 
   구신요?  왜요? 
   비오는 날 희옷을 입었거든. 
  현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느끼며 돌아 
누웠다.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이승을 떠도는 귀신들은 모두 머리를 길게 풀어 
세치고 소복을 한 여인네들이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우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이야기는 할머니에게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은 것이었다.
   여자들이 독하지.  니도 기가 세서 걱정이다.  여자는 그저 남편 하늘같이 
받들고 자식새끼들 보믄서 살아야 하는데. 
  할머니는 베갯머리에서 설핏 잠이 든 나를 바라보며 중얼거리곤 했었다.  
나는 할머니에게 반박하지도 않고 그대로 코방귀를 뀌곤 했었다.  첫날밤, 
남편에게 소박을 맞고 거의 이십년을 혼자 살다가 우리 할아버지의 재취로 
들어온 할머니에게 이니라고 방변할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어린 나이에도 
난ㄴ 그저 할머니 앞에서는 그렇다고 맞장구를 쳐주는 것이 조용히재닌 
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할머니는 결국 할아버지의 첫 번째 부인과 같은 병, 울화병으로 
돌아가셨다.
    3 불행한 여자의 행복
  그 집으로 들어섰을 때 나는 망연히 뒤를 돌아보았다.  나를 그 집에 
데려다주고 현이 어머니는 벌써 길 아래로 사라지고 계셨다.  집을 잘못 찾은 
것 같았다.  내가 들어선 집은 폐가 중의 폐가였기 때문이었다.  부서진 부엌의 
문, 마당 가득 쌓인 가구 부스러기들, 장독대가 있었으나 그것은 다른 빈집에서 
있었던 것이었다. 서둘러 현이네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그 집의 부서진 문을 
열고 키가 훌쩍 큰 여자가 나왔다.  그리고 반색을 하는 것이었다.  바로 순임이 
어머니였다.  그녀의 큰 입이 벌어지면서 뻐드러진 앞니가 나타났다.  맑은 
웃음이었다.  나는 이렇게 폐가 같은 집에 사는 그녀가 이렇듯 맑은 웃음을 
웃을 수 있을까 의아했지만 끌리듯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잡동사니들이 흩어져 있는 좁은 툇마루를 대강 치우고 나를 거기 앉게 하고는 
또 웃었다.
   꼴이 심란허제?  사는 게 심란하당께. 
  심란하다는 말은 아마도 집안이 어수선한 것을 말하는 모양이었는데 그 말의 
뉘앙스가 이 집의 분위기와 참 잘 들어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부엌 앞에 놓인 바구니에서 감을 하나 골라 내게 내밀었다.  내가 
툇마루에 걸터앉아 삐죽찌죽 감을 먹고 있는 동안 그녀는 고무다라이 속에서 
풀주머니 같은 것을 넣어놓고 맨발로 그것을 밟았다.
   내가 뭐하고 있는지 왜 물어보지 않는겨? 
  나는 사실 그 집의 모양새에 대해 거의 넋이 빠져 있었고, 이런 집에서 
미꾸라지를 팔아 어렵게 사는 그녀가 왜 저렇게 방실방실 웃어대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중이었다.  김만석씨 댁이 만속촌 같은 느낌이었다면 
이집은 아ㅖ 신석기시대같은 느낌이었다.
   뭐하시는 건데요? 
  나는 마치 국민학생처럼 그녁 하라는 대로 물었다.
   알아맞혀봐.  시큼한 건데.  남자들이 좋아하는 거. 
  술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 기괴한 분위기 속에서 그녀와 스무고개를 할 
생각은 없었다.
   몰러?  누룩 뜰 밀이여.  술 담그려고. 누가 부탁을 혀서. 
  그때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방안에서 기척이 났다.  사람의 소리라고 
하기에는 아주 낮고 쉰 ㅁㄱ소리였다.  이 집에 오기 전에 현이 어머니에게서 
이 집의 남편이 알콜중독자라는 말을 들었는데 저 목소리가 사람의 것이라면 그 
남편이리라.
   손님 왔응께 조용히 있어요.  나 밭에 갔다 올테니께. 
  그녀는 내게 한 눈을 찡긋하더니 나를 잡아끌었다.  커다란 고무대야와 
마부대를 들고 우리는 밭으로 향했다.
   처녀가 이런 데 혼자 오면 집에서 걱정들 안혀? 
   저 처녀 아니에요.  아이도 하나 있어요. 
  내가 철부지 아가씨가 아니라는 것을 밝히는 편이 이야기하기가 쉽겠기에 
그렇게 말했다.
   그럼 남편은? 
   서울에요. 
   왜 같이 안 오구? 
   잡지사 부탁으로 취재하러 왔는데요. 
   아아, 난 또 혼자 방황하러 왔는 줄 알았제. 
  시골 아낙의 입에서 나오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던 말이었다.  나는 픽 웃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왠지 그녀가 묘하다는 생각을 했고 가슴 한구석을 
찔리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순임이가 대학에 가고 싶어한다면서요? 
   아이들 셋이 모두 공부를 잘하니 걱정이제.  하지만 딸년 대학 보낼 돈이 
어딨어?  지는 장학금 받을 수 있는 데로 간다고 하지만... 
  말투는 어두웠지만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자랑스러웠다.
  나는 그녀를 따라 시커먼 결명자를 털었다.  좁쌀보다 조금 큰 알들이 우르르 
흩어졌다.
   우리 밭 꼴도 심란허제?  남들은 발써 다 거둬들였는데 어디 내가 시간이 
있었어야제...  아까 순임이 야그가 나왔으니 말인데, 지난봄에 순임이랑 같이 
핵교 댕기던 기집애 둘이 부산 신발공장으로 떠났어.  속으로 저것이 쟈들이랑 
같이 간다 그라믄 얼매나 좋을까 생각이 들더만...  내 한 번은 핵교 그만두라고 
했더니 글세 이것이 사흘 동안 밥을 안 먹더라구.  내가 졌제.  헌데 신랑은 
뭐해? 
   ...글써요. 
   그랴. 같이 글쓰고 좋겠네.  근데 연애했나봐? 
   그랬죠. 
  나는 내가 결혼했다는 말을 한 것을 후회했다.  그녀는 끊임없이 내게 물었다.  
아이는 몇살이냐, 지금 누가 보느냐, 남편이랑 사이는 좋으냐.
   고추가 시들었네요. 
  나는 결명자를 털다 말고 고추밭으로 갔다.  다 붉어지지 못한 고추가 그저 
약만 바짝 오른 채 시들고 있었다.
   놔둬, 따봤자 똥금이여.  우리 식구 먹을 것만 대강 땄어. 
  하지만 나는 고추를 땄다.  오랜 시간, 인간의 지혜와 노동이 뿌린 씨앗에 
대해 대지는 평등한 선물을 주고 있었지만 우리는 그것조차 다 거두더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거의 날이 어둑해졌을 때 나는 마대 가득 고추를 딸 수 있었다.  고추 딴 
것을 어깨에 지고 우리는 함께 그녀의 집으로 갔다.  국민학교 삼학년짜리 
막내가 돌아와 있다 그녀를 보자 달려와 짐을 받아들었다.
  나는 가려는 나를 억지로 잡아앉히며 꼭 저녁을 먹고 가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 알콜중독자 남편이 마음에 걸렸다.  술에 젖어 있는 사람이라면 낯선 
여자 앞에서 발작을 일으킬지도 ㅁ르는 일 아닌가.  나의 마음을 읽었는지 
그녀가 말했다.
   행패는 안 부려.  원재 저런 사람이 아니었어. 
  나는 묻고 싶었다.  아저씨와 이혼하고 싶은 생각은 안해보셨어요?
   아저씨 저러고 계신데 미운 생각 안 드세요? 
   밉제.  밉당께. 
  그녀는 또 웃었다.  밉긴 왜 미워하는 얼굴이었다.
   들어가, 찬데.  얼렁. 
  나는 하는 수 없이 장지로 안방과 통하는 아이들의 방으로 들어섰다.  열린 
장지문 사이로 순임 아버지의 가래 끓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 평 좀 넘을까, 
서까래에서 금방이라도 흙이 와르르 쏟아져내릴 것같은데 알전구가 휑뎅그레 
매달려 있고 흙이 드러나도록 좀 작은 비닐 장판이 깔려 있었다.  커다란 
쌀독과 이이들의 않은뱅이 책상이 하나 있을 뿐, 을씨년스러운 방이었다.
  그녀는 낡고 때묻은 이불을 내 무릎 위로 덮어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 고상한 거는 말로 다 못혀.  우리 둘째 녀석은 나가 길바닥서 났는디... 
  그녀는 마치 예친구를 만난 듯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아, 순창 시장서 시금치를 파는디 아가 나오려고 하는겨.  이십리 길을 걸어 
집으로 올 수도 없고, 그렇다고 길바닥서 낳을 수는 없고 혀서, 나도 모르겠다, 
읍내 산부인과로 달려갔지.  헌데 병원 문을 여는디 그만 그 녀석이 나와버린겨.  
난생 처음 병원 침대에 누워 호사스레 지냈제...  이 야그가 여러 책에 나왔어. 
  그녀는 방구석에서 소책자 몇권을 꺼내서 내게 보여주었다.  전북 여성농민회 
같은 단체들에서 낸 소책자였다.  알콜중독인 그녀의 남편을 부양하며 사는 
그녀의 이야기가 고난받는 여성의 표본으로 고통스레 그려져 있었다.  그런 
이야기라면 여러번 읽은 일이 있었다.  하지만 막상 그 주인공인 그녀가 
자랑스레 웃으며 그런 말을 꺼낼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었다.  더더구나 
나보다 더 행복한 얼굴로 살아갈 것이라고는.  나는 갑자기 할말이 없었다.
   저, 아저씨는 하루 종일 뭐하세요? 
   그냥 있제. 
  여러번 물었지만 똑같은 대답이었다.  그냥 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나는 다시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아무 짓도 안한당께.  그냥 하루 종일 누워 있다가 일어나고 또 눕고 그랴. 
   술은? 
   못 마시게 혀도 소용없어.  딱 끊어버리믄 되는디, 그라믄 될 텐디. 
   병원에라두...  아니면 여러 어른들이 지키고서 한 일주일간이라도 술을 못 
드시게 하면... 
   안돼.  그라면 저 냥반은 죽어. 
  나는 상식적으로 말해본 것이었으나 그녀는 뜻밖에 완강했다.  나는 갑자기 
그녀가 나를 향해 단단한 자물쇠를 채우는 것을 느꼈다.
   글세 우리가 이해 못하는 점이 바로 그거여.  술을 못 먹게 하믄 되는디 
사다준단 말이여...  젊었을 때 순임 아버지가 인물 좋아 바람을 좀 폈지.  순임 
어매는 그저 남편이 허튼 짓 안허고 집에 있는 것만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 같어. 
  현이 어머니의 말이 떠울랐다.  하지만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드디어 저녁이 준비되었고 나는 순임 아버지와 대면하게 되었다.  까맣게 
타들어간 얼굴, 초점 없는 눈동자.  한때는 건강했으나 바스러질 것처럼 마른 
몸.  막상 밥상을 대하고 마주앉자 오히려 쓰잘데없는 두려움 같은 것은 일지 
않았다.
   원래 술을 입에도 못 댔더랬는데, 뭣이냐, 그 노풍벼 땜시 빚지고 소키우다 
망하고 그 담부터 이렇게 되얐어. 
  안방 벽면 높은 곳으로 흑백사진이 걸려 있었다.  희고 맑은 얼굴, 감수성이 
예민해 보이는 눈.  순임 아버지의 사진이었다.  밥을 씹다가 갑자기 목이 
메어왔다.
  저 영민한 청년은 왜 이 값싼 소주에 제 몸을 버리는 늙은이가 되었는가, 
순임어머니는 왜 치매상태로라도 남편을 붙들어매놓지 않으면 안되는가, 
순임이는 왜 공부를 잘하는가, 공부를 잘하는 순임이는 왜 대학에 갈 수 없는가, 
순임이의 친구들은 왜 모두 신발공장으로 떠나 버렸는가, 왜 이곳에선 소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왜 콩밭은 포도밭이 되었는가, 왜 그는 나를 그토록 
자신 속에만 가둑 싶어했을까, 나는 왜 모든 걸 버리고 이곳까지 와 있어야 
했던가.
  나의 괴로움은 내가 그 모든 것의 대답을 알고 있다는 데 있었고, 그러면서도 
그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는 데 있었고, 또 내가 
순간적으로 포착한 절망을 아득하고 영원한 것으로 믿고 있었다는 데 있었다.
    4 절망을 버리고
  하늘은 아주 맑아 있었다.  버스는 아직 오지 않았다.
  우리는 마을 어귀에 서 있었다.
   그래, 사흘 묵고 나서 농촌에 대한 기사를 쓸 수 있겠어요? 
  김만석씨가 웃으며 물었다.
  나는 혼자서 고개를 저었다.  결코 쓸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아마도 쓰기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누가 우리의 이 아름다운 땅과 
마음을 황폐하게 했는지, 무엇이 우리 서로를 가두어 물어뜯고 할퀴는지.  나는 
적어도 이제는 내 머릿속에서 미리 만들어놓은 관념으로 사람을 재단하지는 
말아야 했다.  회피하지 않고 나가고 싶었다.
   내일은장날이라 마중 못허겠네.  시장으로 들를쳐? 
  어제는 생각해보겠다고 말했으나 나는 순임이 어머니에게 들르지 않기로 
결심했다.
  나는 갑자기 불행 앞에서 그녀가 그토록 행복해할 수도 있는가 하는 따위의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는지를 깨달었던 것이다.  내가 들르든 그렇지 
않든 그녀는 그녀의 방식대로 살아갈 것이다.  그녀는 행복했던 것이 아니고 
말할 수 없이 꿋꿋했던 것이다.  절망 따위의 말같은 건 그녀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방황하러 온 게 아니고? 
  어떻게 보면 시골 아낙이 뱉기에는 너무도 문학적인 말을 빝어놓고 결명자를 
쓱쓱 베던 그녀였다.
  그리고 버스가 왔다.
   참 감사했습니다. 
  읍내로 가는 할머니들이 올라타고 내가 맨 마지막에 탔다.  김만석씨 부부가 
오래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는 멀어져가는 순안마을의 모습을 보면서 이제 
다시 절망이라든가 하는 말은 결코 쓰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하지만 이제 그 절망을 버리고 어디로 가는지 알 수는 없었다.
  나는 서울로 가는 직행버스를 타기 위해 순창읍에서 내렸다.
<1991, 샘이깊은물 4월호>

      잃어버린 보석
    1
  생각해보자.  어느날 당신이 우연히도 당신에게 많은 빚을 진채 종적을 
감추어버린 사람을 만났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더구나 당신의 처지는 아주 
궁색하고 그는 빚진 돈의 백배, 천배를 가진 부자가 되어 있다면.  아마도 그의 
얼굴을 떠울릴 때마다 돈다발이 먼저 아른거릴 것이고, 당신의 마음은 그 
돈으로 누릴 갖가지 호사스러움으로 설렐 것이다.
  최만열씨의 경우가 바로 그랬다.
  아직 그의 수중에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곧 돌아오게 될 돈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최만열씨의 마음은 호기로워졌다.  이런 호기는 네 가구가 세들어 사는 
화장실에서 가장 먼저 나타났다.  예전 같으면 담배 세대를 피울 동안이라고 
마음을 먹고 들어갔다가도 뒷사람들의 독촉 때문에 피우다 만 담배를 꼬나문 채 
나와야 했던 화장실을 그는 요즘 한시간도 넘게 독차지하고 있었다.  눈치를 
보아가며 아침 일찍 학교로 달려가는 최만열씨의 아들이야 아버지의 
소행때문이니 그렇다 치고, 앙몌 눈살을 찌푸리며 공장으로 출근해 버리는 미스 
박과 마스 나도 또 그렇다 치고, 엉거주춤 배를 잡고 늦은 아침 시간을 
기약하는 황씨 마누라의 욕설도 그리 오래가지 않았지만, 전철역 앞으로 
조점을을 나가는 황씨에게는 돌변한 최만열씨의 태도가 더할 수 없이 분통이 
터졌다.
   헹님, 하루이틀도 아이고 이게 무신 일입니꺼?  하루 종일 화장실 한 번 
마음놓고 못 가는 이놈 신세 좀 봐조소 예? 
  하던 말은 이미 바뀐 지 오래였다.
   헹님, 문은 뽀수고 들어가기 전에 얼른 못 나오겠십니꺼?  오이야, 좋심더.  
내가 마 급한 김에 헹님 아궁이 가차이 똥을 싸삐도 너무 구리다 마소.  내사 
적기 묵고 가는 똥 싸는 놈 아입니꺼 예?... 참 세상 더럽다.  아, 돈이 
굴러들어오면 똥도 굵어지나부지.  하모, 배 터지게 많이 묵을 생각을 하니 
헛바람이 들어서 똥이 풍선맨쿠로 안 굵어지겠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는 황씨의 말이 들리는지 마는지 못 쓰는 캐비닛 
골조에 슬레이트를 살짝 얹은 화장실 안에서는 느긋한 최만열씨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곤 했다.
   다 됐다.  조금만 참아라.  동생이 조금만 참아.  내 돈만 받아내믄 이깟 
화장실이 문제계는가?  우리 집 방방이 수세식 화장실을 세워줄텐데... 
   아니, 그라믄 지금 저보고 헹님이 돈 받을 때까지 벤소 가는 걸 관두라 이 
말을 하시는 겁니꺼?...  내는 공꼬는 싫소.  그라고 헹님이 그 돈 받으믄 이 
동네를 희허니 떠삐지 무슨 일 났다고 방방이 화장실을 세우고 있겄십니꺼? 
   내가 이 동네를 뜰 때 뜨더라고 자네를 그냥이야 두고 가겠는가? 
   더 듣기 싫습니더.  후회마이소.  내사 더 몬 참겠으니께 바지 까내리고 팍- 
   참, 사람 성미도...  지금 나가네.  지금 나간다니까. 
  하지만 조그맣게 뚫어놓은 화장실 창문에서는 담배연기만 뽀글뽀글 
피어올랐다.
  한집에 살면서 밥만 따로 해먹었다뿐이지 한식구처럼 지내던 최만열씨와 
황씨는 이런 아침 사건으로 인해 틀어지게 되었다.  최만열씨로서는 이상하게도 
황씨의 핏대가 올라가면 갈수록 냄새나는 화장실 안에서의 호사스러운 공상이 
맛나지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누구 한 사람 평소보다 조금 일찍 일어나면 
해결될 일이겠지만, 하도 오래 절친하게 지낸 사이라 그랬던가 둘은 기이하게도 
비슷한 시간에 나오게 되었고 어김없이 최만열씨 쪽이 한발짝 일렀다.
  사이가 틀어지기는 아낙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낙들의 승강이는 화장실 
시비가 끝난 늦은 오전에 주로 이루어 졌는데 그 경위는 대충 다음과 같았다.
  최만열씨의 아내가 수돗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으면-방 옆에 조그만 부엌이 
있고 거기에 수도가 달려 있었지만 빨래는 손바닥만한 마당의 수도를 
이용한다-황씨의 아낙이 빨래가 담긴 대야를 거칠게 내려놓으며 말을 꺼냈다.
   아이구 지겨워라, 이놈의 팔자.  매일을 피나게 살아도 밤낮 그 꼴이 
그꼴이니. 
  그러면 최만열씨의 아내는 그런 황씨 아낙을 바라보며 느긋한 소리로 말한다.
   이 사람, 뭘 아침부터 지겨워 소리여.  그저 애들 건강하게 잘 크고 그러믄 
됐지...  참고 살믄 좋은 날이 다 오게 돼 있다구.         
  최만열씨 아내의 말투는 한결 여유로웠다.  그것이 좀 느릿하고 만사태평한 
최만열씨 아내의 원래 성격이었는데 요즘 들어 황씨의 아낙에게는 그것이 곱게 
들리지 않는 것이었다.
   좋은 날은 무신 좋은 날이 있겠십니꺼?  누구처럼 잃어삔 보석이 있는 것도 
이니겠구. 
   이 사람, 그건 무신 소리여.  형철이 아부지가 맨날 보석 보석 하지만두 내가 
그런 걸 믿나?  아, 보석이건 임금님 용상이건 내 손에 들어와야지...  요즘은 
그놈의 보석인지 뭔지 땜에 일 나갈 생각은 않구, 내가 속썩는 건 말두 
못핸다구. 
   아, 헹님이사 쪼매만 참으믄 좋은 날이 올 텐데 뭘 그러십니꺼.  내가 마 
그런 날이 온다는 기약만 있다믄 한달이라도 굶겠구마는...  그건 그라고 헹님, 
내사 어제 바삐 오느라 빨랫비누 떨어진 걸 깜빡 잊어삤는데 우짜지요? 
하면서 황씨 아낙의 손은 이미 최만열씨네 비누통으로 들어와 있었다.
마음씨가 좋고 퍼주기 좋아하는 최만열씨의 아내로서도 황씨 아낙이 몇주일째 
같은 말을 반복하며 얌체짓을 하는데는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아, 오늘은 일도 안 나가는데 얼른 내려갔다 오지 그랴.  정씨네 게게서 외상 
안하는 처지도 아님서. 
  황씨 아낙의 마음을 모를까보냐만 최씨의 아내는 그런 마음을 조금 
긁어주기로 작정하고 느린 말투로 말했다.
   아니 헹님, 제가 이 비누 쪼매 빌려쓰는 기 그리도 아깝습니꺼?  좋십니더.  
내사 빨래 안하믄 그만입니더.  기다릴 좋은 일도 없는 년이 옷은 빨아 뭐할꼬.  
누구사 주렁주렁 보석을 꿰찰 생각에 백옥겉이 휜 옷을 입고 접겠지마는...  참, 
종이 주인이 되믄은 칼로 형문을 친다카드만 옛말 그른 거 하나도 없다카이... 
하면서도 황씨 아낙은 비누를 문지르는 손을 재빨리 놀렸다.  이쯤 되면 최씨 
아낙은 어이가 없어졌다.  대꾸를 하려 하면서도 입만 달싹거릴 뿐 말을 못하는 
것이 벌써 그녀가 흥분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아니, 동상...무슨말을...그리하는가.  거시기...저어기  거시기...핏줄로 따지자면 
우리 형철이 아부지야 거시기...해주 쪽의 지주 집안인데...종이라니. 
  족보 이야기를 꺼내자는 것은 아니었지만 엉뚱하게 말이 나와버린 뒤였다.  
말을 마친 최만열씨의 아내는 아차 싶었다.  황씨네 식구들이 가장 아파하는 
곳을 건드린 것이다.  어떤 말로 이 일을 수습할까 생각했을 때는 이미 황씨 
아낙이 펄쩍 뛰어오른 뒤였다.  전쟁고아인 황씨와 자신의 부모가 머슴을 살던 
집에서 식모로 자란 황씨 아낙이었다.  예전 같으면야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으면서 빨래를 하자면 눈물바람 콧물바람에 시간 가는 줄도 몰랐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아니 헹님, 그라모 씨가 다르는 우리는 애초부터 이리 고생해도 싸다, 이리 
정해져 있다 이 말씸입니꺼? 
   아니 이 사람아, 내가 언제...내 말은...거시기 말인즉슨...그러니께 따져보자믄 
그렇다 이런 말이지...아, 그게 무슨 소용이 있다고 그랴. 
   헹님, 사람을 그리 괄시 마소.  지는 헹님이 그런 분인 줄 마 몰랐십니더.  
그저 우리 바깥양반이 최씨 아저씨를 큰헹님처럼 믿고 따르니 지도 그저 시댁 
식구거니 하믄서 예절 채리고 했지마는...하모, 머리 검은 짐승을 믿은 이년이 
어리석지 누굴 탓하겠노...세상 참 더럽다.  어느 년은 팔자가 좋아서 알라 
가졌다고 침대에 누버서 맛난 것만 집어처묵고. 
  끝의 말은 황씨 아낙이 일주일에 세 번 파출부일을 나가는 아파트 여자를 
가리키는 것이었지만, 그 여자가 애를 났다는 소리를 들은 게 벌써 여러 달 
전인데 주구를 빗대 누구를 욕하는 것인지 뻔한 일이었다.  이쯤 되면 최씨 
아낙의 얼굴도 붉으락푸르락해지는 것이었다.
   아니...동상, 내야 말루다 동상을 그리는 보지 않았는데...년이라니 어디에다. 
   와예, 지는 헹님 앞에서는 남 흉도 못 본다 이겁니까... 아이고, 내사 마 
무서버서 몬살겠구마.  상전을 모시고 사니. 
  황씨 아낙은 말을 마치고는 그 사이 알뜰히 빨아 짠 빨래를 대야에 담아 
횡하니 자신의 부엌으로 들어가버렸다.  뒤어 남은 최만열씨의 아내는 아직 
헹구지 않은 빨랫더미를 우두커니 바라보다가 비누를 들고 요리조리 살펴보며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빌어먹을 년, 무섭다면서 남의 비누는 왜 만날 빌려쓰누...  그놈의 보석인지 
뭔지가 기필코 사람을 잡고 말겨. 
    2
  홍범표 사장은 아까부터 자신의 집무실 밖에서 들려오는 최만열씨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의 비서인 미스 방이 최만열씨의 쓰잘데없는 말에 
대꾸를 그친 지도 오래건만, 최만열씨는 일단 찾아오기만 하면 비서실에서 뜸을 
들이며 그의 신경을 바싹바싹 돋우어놓곤 했다.  홍범표 사장은 가뜩이나 
골치가 아픈 요즘, 최만열씨 때문에 머리가 하얗게 셀 지경이었다.  그는 건너편 
장식장의 어두운 유리에 제얼굴을 비추어본다.  어젯밤 공장 근처의 호텔에서 
간부들과 밤을 새우고 바로 사무실로 나오느라 염색을 하지 못한 머리칼이 
허옇게 드러나 있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아침출근 전에 이발소에 들러 짧은 
치마를 입은 애들이 나긋나긋한 손으로 해주는 염색을 하면 좋으련만 알레르기 
체질인지 국산 염색약을 바르면 머리가 가려워 밤새도록 잠을 이이루지 못하니 
그럴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는 지난번 출장길에 일본에서 사온 시세이도 
염색약을 가지러 기사를 집으로 보내지 않은 것을 잠시 후회한다.
  그는 제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다가 무심코 책상 위로 손을 더듬는다.  담배는 
없었다.  그는 자신이 담배를 끊은 것을 새삼 깨닫고는 잔뜩 낯을 찌푸렸다.
   젠장, 뭐 되는 일이 있어야지. 
  그는 열린 창으로 보이는 찌뿌드드한 하늘을 바라보며 마른 세수를 했다.  
그가 담배를 끊은 것은 한달 전쯤의 일이었다.  가슴이 벌렁벌렁 뛰는 것이 
처음에는 회사일로 너무 신경을 써서 그렇거니 생각했었는데, 오랜만에 
마누라를 안았을 때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자 그는 심상치 않은 
느낌을 가지고 병원을 찾았다.  연줄을 대어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검사를 
마치고서 의사 앞에 않았을 때, 그는 덜덜 떨고 있었다.  의사는 버릇처럼 연방 
벗어진 머리를 쓰다듬으며 붉은 코에 잔쯕 주름을 잡고 있었다.
  -뭐, 별 이상은 없는 것 같습니다.  마음을 편안히 잡수시고요, 육십보다 
채식을 하시고요...  가끔 운동도 좀 하시고...  어쨌든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하시는 게 제일입니다.
  홍범표 사장은 일생을 통틀어 그토록 남의 말을 경청한 일이 일찍이 없었다.  
하도 열심히 의사를 쳐다보는 바람에 무안쩍은 의사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홍범표 사장은 자신의 눈길을 피하는 의사가 수상쩍에 여겨졌다.  장말 
자신에게 이상이 없다면 한마디로  정상이다 하면 될 것을 이것저것 토를 다는 
것도 이상했다.  더구나 박사의 코에 잡히는 주름이 늘 그렇다는 것을 모르는 
그로서는 그것도 몹시 불길하게 느껴진 것이었다.
  -박사님.
  그는 처량하게 의사를 바라보았다.
  -즈이 집사람을 오라 할까요?
  죽을병은 보호자에게만 알린다는 생각이 나서 그는 더듬더듬 물었다.
  -네?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릴 하고 있냐는 듯 의사가 되물었다.  그 바람에 그의 
코에 잡힌 주름이 더욱 깊어져 그의 얼굴은 더욱 심각하게 보였다.  
  나는 이제 죽는구나.  홍범표 사장의 심장은 영원히 멎어버릴 것처럼 쿵하고 
내려않았다.  아침부터 병원에 와서 줄줄이 기다리고 있는 환자들을 
새치기했다는 것도 잊은 채 그는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혹시 이상이 있으면 다시 오세요.  지금으로서는 정말이지 더 말씀드릴 것이 
없어요.
  의사는 이상한 환자를 다 보았다는 듯이 약간 짜증이 섞인 어투로 말했다.  
홍범표 사장의 얼굴은 몹시 침통해졌다.  그는 울고 싶은 기분을 억누르며 다시 
말했다.
  -박사님, 무슨 방법이 없겠습네까?  돈은 얼마든지 들어도 좋습네다.  ...제 
나이 이제 오십여덟입네다.  ...너무 아깝지 않습네까?  네?
  좀더 젊고 여유가 있는 의사였다면 이런 경우 상황을 알아차리고 웃음을 
터뜨렸겠지만 박사는 어제 이십년 만에 미국에서 귀국한 동창과 밤늦도록 술을 
마셨기 때문에 그저 만사가 피곤하고 귀찮을 뿐이었다.
  -아니, 그런 게 아니에요.  선생께서 그런 강박관념을 가지고 계신 게 
문제예요.  건강에 대한 지나친 관심이 오히려 건강을 해치는 구소 있지요.  
...어쨌든 선생에겐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그러나 홍범표 사장은 믿지 않았다.  남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다는 
것은 단신으로 월남한 이래 그가 지켜온 생활신조였다.  믿지 않아서 손해보는 
일은 거의 없었다.  의사는 아직도 나갈 생각을 않고 의심스러운 눈빛을 하고 
있는 홍범표 사장을 보자 짜증이 버럭 치밀었다.  자신의 명성과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이런 무식한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는 몹시 화가 나곤 했던 
것이다.
  -정 그러시다면 다른 병원에 가보시지요.  ...간호원, 다음 환자 들어오시라고 
해.
  홍범표 사장은 의사의 단호한 태도에 주눅이 들어 엉거주춤 일어섰다.  
내친김에 다른 병원에 가보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자  검사에 들인 많은 
비용이 아까워졌다.
  그는 나가려다 말고 다시 의사를 향해 되돌아섰다.
  -박사님, 제가 사업상 술 담배를 자주 하는 편인데 그거이 영향을 미칠 수도 
있습네까?
  -네에, 그럼요.  끊으십시오.  특히 담배는 심장에 아주 좋지 않습니다.
  의사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심드렁하게 말했지만 홍범표 사장은 그말을 가슴 
깊이 새겨들었던 것이다.
  문 밖에서는 아직도 최만열씨가 떠들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홍범표 사장은 
인터폰으로 미스방을 불렀다.
   네, 사장님. 
   일들은 안하고 웬 잡담들이야? 
   ... 
  알면서 그러냐는 듯 미스 방은 대답이 없다.
   내가 지금 골치가 아프니까 조용히들 하라고 해. 
   네, 사장님. 
  떨떠름한 목소리로 미스 방이 대답했다.
   참, 요즘 애들 부리기 힘들어서... 
  홍범표 사장은 중얼거리며 다시 책상위를 더듬었다.  아차 싶어 손을 
거둬들이면서 그는 미스 방에게 담배를 한갑 사오랄까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그는 한 번 했던 결심을 지키기로 했다.  담배를 끊은 이후로 심장을 훨씬 
나아진 것도 사실이었다.  그는 입맛을 쩍쩍 다시며 책상 위에 놓인 성인용 
캔디를 한알 입에 넣었다.
  사실 그는 담배를 끊는 데 남보다 더 큰 고통을 겪었다.  하필이면 이 무렵에 
양담배들이 가지각색으로 줄줄이 수입된 것이었다.  예전 같으면야 집에 
숨겨두고 야금야금 피우던 귀한 담배를 이제는 싼값에 어디서나 피울 수 있게 
된 것이 그에게는 말할 수 없이 큰 유혹이었다.  요즘 술집에서도 계산을 
마치고 나면 한 보루쯤 선사하기가 예사였다.  망설이고 망설이다 집에 도착할 
때쯤 그의 운전기사에게 선심쓰듯 내밀면 함박 벌어지는 운전기사의 커다란 
입도 그의 심기에 거슬렸다.
  다시 비서실에서 최만열씨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최만열.  살아서 다시 그를 
만나게 될 줄은 꿈속에서라도 생각해보지 않았었다.  지난 초봄 최만열씨가 
불쑥 그의 사무실에 나타났을 때 ㅎㅇ범표 사장은 하마터면 비명이라도 지를 뻔 
하였다. 하지만 그쪽에서는 이미 이쪽 사정을 파악하고 오래 기다려온 
모양이었다.
  -기억하시겠습니까?  나... 최만열이외다.
  파를르 떨고 있는 최만열씨의 거무죽죽한 입술을 보면서 홍범표 사장은 
자신도 모르게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물러서면서 그는 잠시 이 상황을 어떻게 
넘겨야 할 것인가를 궁리했다.  물론 그의 판단은 짧은 순간에 이루어졌고 그는 
자연스레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외쳤다.
 -아니, 이게 누군가...  사, 살아 있었구만.
  -그래...못 죽고...이렇게 살아 있네.
  최만열씨는 신문에서 그의 이름을 발견하고 그를 찾아오게 된 경위를 
떠듬떠듬 설명했다.
  그날 길 잃은 어린애처럼 울상을 하고 있던 최만열씨의 태도는 차츰 변하기 
시작했다.  최만열씨는 홍범표 사장의 사무실을 전세라도 낸 듯 드나들기 
시작했다. 하루종일 비서실에서 죽치기는 예사였다.  차츰 홍범표 사장의 
얼굴에도 싫은 빛이 노골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건만, 최만열씨의 태도는 
여전히 만사태평인 것 같았다.  어쩌면 최만열씨는 홍범표 사장에게서 끊기 
어려운 담배 같은 유혹을 느끼는 지도 몰랐다.
  홍범표 사장은 눈을 들어 장식장에 놓인 표창장을 ㅂ라다본다.  지난 겨울 
돈을 좀 써서 상공부장관이 주는 홀륭한 기업인상을 받은 것이 화근이었는지도 
모른다.  하필 그 기사를 보고 찾아도다니.  그로서는 난생 처음 받는 상이란 
생각에 축하연을 베푸느라 쓸데없이 돈이 들어간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배가 
아플 지경이었다.
  누군가 문을 노크했다.  홍범표 사장은 재빨리 벗어두었던 돋보기를 걸치고는 
서류철에서 아무 뭉치나 하나를 집어 열심히 들여다보는 시늉을 했다.
   바쁘지 않은가? 
  역시 최만열씨였다.  그는 성큼 들어서며 물었다.
   요즘 바빠서 정신이 없네. 
  홍범표 사장은 냉랭하게 말했다.  최만열씨는 소파에 앉아 태연스레 담배를 
피워 물었다.  홍범표 사장이 이 방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그토록 주의를 
주었건만 최만열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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