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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구하기

by Casey,Riley 2022. 10.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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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교양 교육이 어떻게 우리의 인생을 바꾸는지, 소외되어 온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위대한 책들
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려준다. 도미니카 공화국 출신 미국 학자인 저자는 플라톤, 아우구스티누스,
프로이트, 간디 등 4명이 어떻게 자신의 삶에 깊은 영향을 미쳤는지를 서술하면서, 교양 교육을 체험
한다는 것이 무엇이고, 그것이 왜 여전히 한 사람의 인생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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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오세벨트 몬타스 지음

▣ 저자 로오세벨트 몬타스
도미니카 공화국의 산골 마을에서 태어나 열두 살에 미국으로 이주해 뉴욕 퀸즈에 정착했다. 지역 공립
학교에서 2년 동안 이중 언어 교육을 받고 공립 고등학교에서 4년을 보낸 후 컬럼비아 칼리지에 입학했
다. 학부생일 때 위대한 저서 읽기 프로그램인 컬럼비아 코어 커리큘럼을 통해 서구의 고전들을 접했다.
이 경험은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고 직업을 결정지었다. 그는 컬럼비아에서 영문학ㆍ비교 문학 박사 학
위를 취득했으며, 나아가 2008년부터 2018년까지 컬럼비아 코어 커리큘럼 연구소 소장을 역임했다. 현
재 컬럼비아 대학교 미국학 연구소 선임 강사이자 저소득층 고등학생들에게 기초 텍스트를 통해 서구의
정치적 전통을 소개하는 ‘자유와 시민 정신’ 프로그램 대표이다. 뉴욕시에서 살고 있다.


▣ Short Summary
1937년 이후 컬럼비아 칼리지 학부생은 누구나 코어 커리큘럼, 이른바 ‘위대한 저서 읽기 프로그램’을
거쳤다. 흔히 ‘코어’라 일컫는 이것은 『일리아드』를 시작으로 고대부터 현재까지 문학과 철학, 윤리학
과 정치학, 미술, 음악, 과학을 망라해 지정된 도서를 읽고 토론하는 필수 공통 학습 과정으로, 학습량
이 엄청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엄격하기로 소문난 프로그램이다. 그러나 코어를 경험한 이 학교의 많
은 동문은 이것을 자신의 인생을 바꾼 강좌로 손꼽으며 홍보 대사를 자처하곤 한다.
‘코어’의 핵심은 명교수의 명강의가 아니다. 다양한 전공과 이력을 가진 교수들은 대화의 조력자일 뿐,
수업의 주축은 20명 정도로 이뤄진 구성원 각자의 활발하고 집중적인 참여다. 신입생의 경우에는 매주
4시간씩 같은 진도로 읽은 책들을 놓고 동급생들과 대화하도록 떠밀리는 상황이 처음에는 어색할 수밖
에 없다. 그러나 심오한 질문 세례도 지속적으로 받다 보면 자극이 되고, 동떨어진 존재처럼 느껴지던
고대의 저자도 친숙하게 다가오는 순간이 온다. 그렇게 몇 주 몇 달이 지나는 사이 학생은 서서히 스
며들듯 스스로 중심을 잡고 역사와 세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설정하는 방식을 구축해 나간다. 이것
이 1년간 이어지면서 지식은 주입식이 아닌 탐구와 성찰의 공유 과정을 통해 축적되고, 공통의 지적
경험은 다른 배경 출신인 학생들이 상호 차이를 초월해 대화할 공통의 어휘를 찾게 된다.
코어 커리큘럼 같은 이른바 ‘교양 교육’을 통해 인생의 궤적이 바뀌고 풍요로워진 청년 중 한 사람이
바로 이 책의 저자 로오세벨트 몬타스다. 낯선 세상에서 발 디딜 곳이라도 찾으려 필사적으로 몸부림
치던 이 남미 소년은 주워들은 지식이 없었기에 오히려 아무런 선입견 없이 위대한 저자들을 대면할
수 있었다. 그에게 아우구스티누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프로이트와 간디는 저 먼 세계의 위인들이
아니다. 그들 역시 세상에서 자기 존재를 이해하려 애썼고, 물질적 제약에 구애받지 않는 인간의 존엄
성과 탁월성의 끈을 집요하게 붙잡으려 했으며, 세상의 편견과 정면 승부를 벌이고, 진리를 향해 끊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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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이 실천하는 극기를 몸소 실천한 인간들이다. 그들은 몬타스의 대화 상대이자 스승이었다. 따라서
우리 또한 어떤 텍스트와의 조우, 어떤 스승과의 대화를 통해 어떻게 변화할지 모른다.
이 책은 교양 교육이 어떻게 우리의 인생을 바꾸는지, 소외되어 온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위대한 책들
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려준다. 도미니카 공화국 출신 미국 학자인 저자는 플라톤, 아우구스티누스,
프로이트, 간디 등 4명이 어떻게 자신의 삶에 깊은 영향을 미쳤는지를 서술하면서, 교양 교육을 체험
한다는 것이 무엇이고, 그것이 왜 여전히 한 사람의 인생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 일깨워준다.

▣ 차례
서문: 사례
1 나 자신에게 다시 관심을 돌리다 - 성 아우구스티누스
2 성찰하는 삶 - 소크라테스,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 약간
3 무의식과 화해하다 - 프로이트
4 진리가 신이다 - 간디
에필로그: 요점
감사의 글

찾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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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에게 다시 관심을 돌리다 - 성 아우구스티누스
1992년 1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읽고 있던 컬럼비아 학생은 나만이 아니었다. 사실 1학
년 전교생이 1년짜리 서구 문학 고전 읽기 필수 과정인 교양 문학 강좌의 일환으로 같은 주에 그 책을
읽고 있었다. 내가 속한 교양 문학 그룹의 학생 22명은 이 책을 비롯해 다른 ‘위대한 저서’들에 관한
얘기를 나누기 위해 월요일과 수요일마다 2시간씩 모이곤 했다. 우리 선생님은 내가 그의 교양 문학
수업을 신청할 무렵 이미 나이가 지긋했던 전설적인 영문학 교수 윌리스 그레이였다.
내가 그레이 교수의 수업을 듣게 된 건 수강 신청 줄을 서 있다가 내 앞의 어떤 학생이 하는 얘기를
우연히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형도 컬럼비아에 다닐 때 그레이 교수의 교양 문학 강좌를 들었다
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그것이 자기 인생을 바꿔놓았다고 하더라.” 대학 입학 책자에는 내가 동급생들
주변에 있는 것만으로도 많이 배우게 될 거라고 적혀 있었다. 어쩌면 그것이 그 말의 의미였는지도 모
른다. 그리하여 나는 2번 연필로 ‘OMR 카드’에 적당한 동그라미들을 채웠고, 첫 수업 교재로 지정된
『일리아드(Iliad)』의 처음 여섯 권을 진득하게 읽기 시작했다.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 아카이오이족에게 헤아릴 수 없이 많
은 고통을 안기고, / 숱한 영웅들의 굳센 영혼을 하데스에게 보내고, / 그들의 육신은 개들과 온갖 새들
의 먹이가 되게 한 그 파괴를. / 인간들의 왕인 아트레우스의 아들과 / 고귀한 아킬레우스가 처음에 서
로 다투고 갈라선 그날부터 / 이렇듯 제우스의 뜻은 이루어졌도다.’
이미 대여섯 번은 읽었는데도 그날 오후 위의 문장은 도통 낯설어 보였다. 여신, 하데스, 영웅, 영혼,
육신, 개, 분노를 어떻게 노래한단 말인가? 파괴는 또 어떻고? 분노에 관해, 파괴에 관해 노래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는 걸까? 분명 그렇겠지. 시인은 “여신이여, 그러면 제가 듣겠나이다.”라는 뜻인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언어로 쓰인 3,000년쯤 전의 목소리에서 내가 무엇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이걸 읽고 거기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한다 한들 도대체 무슨 가치가 있을까? 틀림없이
아주 유명하고 박식한 분일 우리 교수님은 이 이상한 시에 관해 과연 어떤 통찰을 전달하려는 걸까?
한 쪽 한 쪽 읽을 때마다 끊임없이 쏟아지던 이런저런 질문은 곧 해답을 찾든지, 아니면 적어도 내 무
지가 어느 정도인지 점진적으로 자각하는 데 한 자리를 차지할 터였다.
교양 문학 강좌의 모델은 1919년 존 어스킨이 컬럼비아 칼리지에 만든 제너럴 아너스라는 과정이었다.
이 과정은 매주 문학ㆍ철학ㆍ역사 분야의 고전 한 권 읽기로 이뤄진 집중적 비학제 과정이 학부생들한
테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에 바탕을 뒀는데, 잠시 중단되었다가 1932년 자크 바전 등에 의해 ‘중요한
저서들에 관한 콜로키움’이라는 명칭으로 부활했다. 향후 몇 년 안에 확연해질 이 과정은 소수의 최우수
학생들에게 국한되었던 제너럴 아너스 과정보다 더 민주적이고자 하는 열망을 담고 있었다.
제너럴 아너스 과정에서는 25~30명의 학생으로 이뤄진 여러 그룹이 수요일 밤마다 만났고 ‘서로 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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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는 성향 때문에 선정한 강사 2명’이 각 그룹을 지도했다. 제너럴 아너스의 한 그룹을 가르친 이들은
마크 반 도런과 모티머 애들러였다. 애들러는 당시 예일 대학 법학대학원 학장 로버트 허친스에게 이
위대한 저서 아이디어를 소개했다. 허친스는 여기에 푹 빠졌고, 1929년 시카고 대학 총장이 되자마자
애들러를 데려와 학부 교과 과정에 위대한 저서 읽기 프로그램을 개설했다. 그리고 1937년 컬럼비아
는 학부 교과 과정의 정점으로서 오직 가장 진지하고 야심 찬 칼리지 학생들만 받아들였던 ‘중요한 저
서들에 관한 콜로키움’을 1학년 공통 필수 과정으로 전환하는 과감한 조치를 단행했다.
참고로 나는 고등 교육 기회 프로그램, 즉 HEOP를 통해 컬럼비아에 입학했는데, 이는 대학들과 제휴
해 재정적 도움과 학업 수준 미달이라는 혼합 기준에 부합하는 학생들에게 학자금 - 도서 구입을 보조
하는 현찰 지급 포함 - 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나는 두 기준에 부합했다. 그런 학생들 중 한 명
으로, 나와 내가 속한 30명가량의 HEOP 학생 집단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교양 문학 강좌였다.
많은 세월이 지난 후, 나는 이 과정을 가르치기 위해 컬럼비아에 왔다. 처음에는 대학원생으로, 다음에
는 대학원을 갓 졸업한 계약직 교수로, 나한테는 9월엔 HEOP 학생들을 가려내는 게 보통은 쉬운 반
면, 이듬해 5월이 되면 이들이 눈에 별로 띄지 않는다는 점이 놀라웠다. 서구현대문명개론의 교수로서
나는 HEOP 학생들의 발전을 면밀하게 흥미를 갖고 계속 관찰했다. 2학년이 끝나갈 무렵이면, 그들은
학문적 세련미란 측면에서 나머지 학생들과 구별되지 않는 경향을 보인다. 그리고 졸업한 그들과 마주
치면 그들이 HEOP 학생이었는지 아닌지가 기억나지 않을 때도 있다.
아무튼 나의 대학 생활 첫해의 1월 말에 교양 문학 강의 계획서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차
례에 이르렀다. 『고백록』은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기독교로 개종하는 여정 이야기다. 그는 어떤 방법
으로 신이라는 존재에게 말을 걸 수 있을지 궁금해하며 여러 쪽에 걸쳐 정교하게 『성경』 인용구를 엮
으면서 책을 시작한다. 그에게는 자신의 계획 - 이미 알고 계시며 그에게 표현력 자체를 내려주신 신
에게 자신이 도대체 어떻게 해서 그분한테 다가가게 되었는지 설명하겠다는 계획 - 에 대한 진심 어린
불안이 있다. 그가 태어나기도 전의 이야기에서 이러한 영점(zero-point)은 마치 아우구스티누스가 자
신의 얘기를 시작하지도 못한 채 제자리에서 뱅글뱅글 돌고 있는 것처럼 동어 반복과 역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내게는 깊은 인식의 열쇠인 연약함과 진실함도 있다. “누가 주님을 제 마음속으로 오시게
하여, 제 마음을 사로잡으시는 것입니까?” “제가 주님께 어떤 존재이기에, 제게 주님을 사랑하라고 명
하시고, 제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노하시는 것입니까?”
그러나 처음 읽을 당시, 도입부를 지나고 얼마 되지 않아 아우구스티누스가 “내가 유아기에 저지른 죄
악”이라고 부르는 것을 묘사하는 대목부터 이해가 안 가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그 시기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인정하면서도, 어린아이들을 관찰해 자신의 유아기 죄악을 고백하는 데 필요한 정
보를 얻는다고 말한다. 그는 아기들의 “젖 달라는 탐욕스러운 울음”과 자신이 바라는 걸 얻지 못할 때
“몹시 분노하는” 데서 다른 사람이 “내 뜻대로 하도록” 만들겠다는 욕망에 불가항력적으로 이끌리는
병적인 의지, 죄악 본성의 흔적을 본다고 했다. “제게 복종하지 않는 어른들에게, 제가 원하는 것을 들
어주며 섬기지 않는 자유인들에게 분노하곤 했습니다. 그러면 저는 큰 소리로 시끄럽게 우는 것으로
그들에게 복수했습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이 부분을 처음 읽을 때는 아우구스티누스가 분명 기본적인 실수를 하는 것 같았다. 예컨대 계획적이
고 고의적인 것처럼 상징을 매개로 아기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의 일부일 가능성이 절대 없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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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습득 이전 유아들의 인지 과정 탓으로 돌리고 있으니 말이다. 아기는 추론하지 않는다. 선견지명
을 가지고 행동하지 않는다. 전자를 성취하기 위해 후자를 하지 않는다. 그냥 본능에 따라 자기 보호
프로그램을 실행할 뿐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개연성 없는 말을 왜 힘들어하는 것일까? 하지만 유
아기의 죄악에 관한 이 당황스러운 도입부의 반복적인 문구에도 불구하고, 『고백록』은 내게 엄청난 영
향을 미쳤으며, 몇 주 동안은 삶의 한 가지 가능한 방식으로서 기독교에 대한 내 의식을 되살리기까지
했다. 나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내 경험이 메아리치는 것을 여러 차례 발견했다. 그가 오랫동안 거
부하고 조롱하다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이 몇 년 전에 한 나의 개종을 상기시켰다.
암브로시우스 주교와 그의 관계는 나의 목회자가 된 에르네스토 세르반테스와 나의 관계를 떠올리게
했다. 젊은 시절 무시했던 기독교가 유일하게 가능한 버전은 아니라는 그의 발견, 부인하고 회의에 빠
졌다가 개종한 그의 점진적 변화, 그의 절실한 필요성, 지칠 줄 모르는 그의 지성, 채워지지 않는 그의
호기심…… 이 모든 것이 내게 깊은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아우구스티누스한테서 나와 아주 가까운 친
족 같은 존재, 내면생활의 종잡을 수 없는 뭔가를 이해하는 듯한, 그리고 그 진솔함과 열정으로 나를
무장 해제시키는 그런 작가의 존재를 인식하게 만들었다.
대학 신입생인 나는 낯선 내 삶을 파악하고 내가 처한 종잡을 수 없는 세상에서 발 디딜 곳을 찾으려
필사적으로 몸부림치고 있었다. 나는 고등학교 때 내가 복음주의 기독교로 이끌렸던 경위를 알아내려
애쓰는 한편, 그것이 제공하는 확실성과 정서적 원인을 힘겹게 내던지고 있었다. 내가 어떤 사람이고,
장차 어떤 사람이 될지 알고 싶었다. 아무튼 『고백록』은 대단히 개인적인 책이며, 언제나 은밀하게 속
삭이는 대화 속으로 막 걸어 들어가는 느낌을 준다. 이 책은 당신을 초대해 아우구스티누스와 그의 하
느님 사이의 마음 툭 터놓는 질문과 절박한 대화를 들여다보게 한다. 주체는 아우구스티누스 본인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되는 여정. 관심의 대상은 자기다.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자기 분석이다.
나는 아우구스티누스를 통해 예전에는 전혀 몰랐던 세상에 관해 알았다. 나는 나 자신에 관해, 그리고
진정으로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한 종류의 삶에 관해 알았다. 나는 아우구스티
누스를 통해 어쩌면 내가 미국에 올 때 가졌던 것과는 다른 무신론, 아니 어쩌면 더 높은 부류의 신앙,
진리에 온전히 충실한 마음의 토양에서 자라난 신앙을 위해 복음주의 신앙과 교회를 영원히 떠나야 한
다는 걸 알았던 것 같다. 어디로 갈지는 몰랐지만 나는 방향을 재설정했고, 왠지 명확해졌고, 그런대로
내 인생을 진짜처럼 여길 만한 조건을 알게 되었다. 나는 여전히 삶의 수수께끼들을 진솔하게 붙들고
씨름하는, 진리에 충실한 삶의 가능성을 봤다. 아우구스티누스를 통해 나는 진리를 향한 나의 가장 깊
은 갈망과 그 진리가 지닌 집요한 모호성에 관해 확대되는 인식의 화해 가능성을 봤다.
독자로서, 선생으로서 내가 아우구스티누스와 함께 살아온 지도 거의 30년이 되어간다. 처음 젖 달라
는 아기의 울음소리에 대한 그의 독단적인 판단이라 생각했던 부분도 지금은 다른 시각으로 보인다.
컬럼비아 코어 커리큘럼에서 내가 읽고 있던 다른 오래된 책들이 대부분 그렇듯 이따금 거슬리기도 하
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찰은 내가 처음 의심했던 것보다는 이치에 더 맞는다는 게 드러날 것이다. 영
혼이 철학적 사고를 향하도록 되돌린다는 생각은 우리의 동시대 교육 관행과 여전히 관련이 있는가?
이런 생각은 청년을 직업적 진로와는 상관없는 탐구와 성찰의 삶을 걷도록 아직도 움직일 수 있는가?
우리는 그 안에서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그것을 길들일 방안을 찾을 수 있는가? 학
생의 영혼을 인간 미덕에 대한 탐구로 되돌리는 것이 고등 교육의 목표여야 할까? 이는 우리가 오늘날
대학에서 교양 교육의 위치를 논할 때 공방을 벌이는 문제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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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지의 교과 과정, 특히 모든 학생의 필수 교과 과정 부분을 설계할 때, 우리는 인간 본성에 관한 관
점과 그런 본성에 가장 적합한 교육에 집중한다. 만일 교육을 협의의 도구적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바꿔 말해, 그것을 훈련과 혼동한다면 - 우리는 근본적으로 오류를 범하게 된다. 교육이란 말 그대로
학생으로부터 이미 거기 있는 것을 끌어낸다는 뜻이며, 그것의 성공적 함양은 인간의 최고선(最高善)
성취를 나타낸다. 이런 의미에서 교육은 생계를 위한 교육이 아니라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한 교양
교육이다.
현재 교양 교육의 지배적 관행은 고전적인 학습 전통이 제시하는 인생 변화 프로그램의 희미한 그림자
다. 교양 교육 전문 실무자들 - 교수와 대학 행정가 - 은 교육의 근본 목적을 자신이 속한 기관과 직
업적 야망 안에서만 유의미할 뿐인 전문화한 학문적 추구보다 부수적으로 취급함으로써 자신의 활동을
변질시켜왔다. 그러나 참으로 진정한 의미에서 언제나 교양 학습의 핵심은 비물질적 재화(goods), 즉
인간의 덕이라는 최상의 개념을 구성하는 재화를 향해 감성과 지성의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다. 이런
원대한 개념을 염두에 두는 것, 그리고 거기에 수반되는 것이 무엇이며 그걸 어떻게 이뤄낼 것인가에
관한 지속적인 탐구가 교양 교육의 생존 방식이다.

성찰하는 삶 - 소크라테스,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 약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의 거인이다. 나는 고등학교 때 플라톤의 대화편은 즐겨 읽었지만, 아
리스토텔레스는 대학 1학년 때까지 접한 적이 없었다. 첫 만남은 그다지 잘 풀리지 않았다. 플라톤의
글이 지닌 매력과 아름다움이 내가 철학에서 기대하는 기준치가 되어버렸다는 게 한편으론 문제였다.
그 차이가 얼마나 신경을 건드릴 수 있는지 떠올리며, 나는 현대 문명 수강생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접할 차례가 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읽을 때 골판지를 씹는 기분이 들
수 있다고 경고한다. 아리스토텔레스한테 마법을 기대하지 말라는 얘기다.
한편 새내기 때 읽은 텍스트는 『시학』이었는데, 그것 역시 문제였다. 수업은 1학년 코어 커리큘럼 필
수 강좌인 교양 문학이었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끝나면 몇 달 후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책을 읽어야 했
는데, 강좌의 공식 독서 목록에 있지는 않았으나 윌리스 그레이 교수가 고대 그리스 희곡들의 홍수 속
에서 허우적대는 와중에 우리한테 『시학』을 불쑥 던진 것이다.
『시학』이 완결된 작품이라기보다는 강의 모음집이라는 사실을 감안했다면, 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현
학적이고 무미건조한 문체쯤은 아마 지나칠 수 있었을 터이다. 그러나 문체를 떠나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를 어처구니없게 만든 한 가지 특이한 주장이 기억난다. 그
는 “아름다움은 크기와 질서의 문제”라고 했다. 그 상스러움이 난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단지 찬성하
지 않는 게 아니었다. 그 발상이 불쾌하다고 생각했다. 아름다움을 구성 요소의 공식으로 환원할 수
있다는 생각을 용납할 수 없었다. 내게 그것은 생명이란 순환과 호흡의 문제라고 말하는 것과 같아 보
였다. 나는 아름다움은 반드시 분석을 초월하며 양으로 환원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와 나의 첫 만남이었다.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의 경우, 이야기는 완전히 달랐다.
드라마와 낭만과 천부적 재능이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우리가 지니아 스트리트의 아파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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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이사한 참이었는데, 우리 옆집에는 에스파냐어를 못하고, 따라서 우리와는 좀처럼 대화를 나누지
않는 친절한 노부부가 살았다. 그해 겨울 어느 날 저녁, 그 다정한 미국인들이 쓰레기 수거일에 맞춰
한 무더기의 책을 버렸다. 그것들을 몽땅 가져가고 싶었으나 너무 많은 데다 우리 집에는 책장이 없었
다. 게다가 내 영어 실력은 어른들 책을 큰 어려움 없이 술술 넘길 만큼 좋지 않았다. 결국 나는 양장
본 두 권만 집었다. 내가 습득해 아직도 소장하고 있는 두 권은 하버드 클래식 전집의 제2권과 제46권,
즉 『플라톤, 에픽테토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엘리자베스 시대 희곡 1』이었다.
고2 때 어느 날 나는 플라톤 책을 들고 ‘연구’ 생물학 수업 때문에 학교에 일찍 등교한 터였다. 복도에
앉아 읽다 만 플라톤 책을 보고 있는데, 마침 필리피디스 선생님이 지나갔다. 책의 반짝이는 종이가
눈길을 잡아끈 듯 그가 내게 다가와 뭘 읽고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말했고, 그는 기뻐했다. 부리부리
한 그의 눈에서 가르침의 열의가 불타오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에 대해 많
이 아는 듯했고, 그것에 관해 나한테 얘기해주고 싶어 죽겠는 게 분명했다.
그날 홈룸(homeroom) 동안 나는 필리피디스 선생님의 교실에 들렀다. 어휘에 대해 질문할 게 있어서
였다. ‘gadfly’라는 단어가 무슨 뜻인지 알고 싶었다. 그는 나한테 뭔가를 설명하다가 방과 후 더 얘기
를 나누게 자기를 찾아오라고 했다. 나는 그렇게 했고, 그것이 향후 몇 년간 정말 많은 시간 동안 이어
질 온갖 학습 주제에 관한 방과 후 대화 연장의 시작이었다. 그와 나눈 대화는 대부분 내 이해를 완전
히 벗어났다. 그러나 나는 빽빽한 지적(知的) 논고에서 가능한 한 모든 것을 흡수했다. 참고로 대학에
지원할 시기가 왔을 때 컬럼비아에 넣어보라고 격려해준 사람도, 내가 자기소개서를 보여준 유일한 사
람도 필리피디스 선생님이었다. 그리고 졸업 학년이던 그해에 마치 예언적 통찰에 이끌린 것처럼 그는
크리스마스를 맞아 새로 출간한 로버트 페이글스의 『일리아드』 번역본을 내게 줬다.
소크라테스가 마치 램프를 문지르자 튀어나온 지니처럼 도로변의 그 책 더미에서 튀어나오다니 기묘한
뜻밖의 행운이었다. 플라톤의 소크라테스보다 더 다가가기 쉽고 강렬하고 중요한 교양 교육 입문은 아
마 없을 터이다. 그는 교사의 원형이요, 자유사상가의 원형이요, 성현(聖賢)의 원형이다. 내가 쓰레기
더미에서 구해낸 소크라테스 책은 낭만으로 가득하다. 청소년기의 내 심장이 어찌 그를 뿌리칠 수 있었
겠는가? 책의 세 가지 대화편, 즉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은 그의 재판에서 처형
까지의 시기에 걸쳐 있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배심원들 앞에서 자기를 변
론하는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그는 일흔의 나이에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도시에 새로운 신들을 불러
들였다는 죄목으로 법정에 끌려나왔다. 그리고 유죄가 인정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어지는 대화편 『크리톤』은 부조리한 재판으로 흘러갔다. 상황은 손쓸 수 없게 되었다. 소크라테스
가 자신이 종사하는 활동에 관여했다고 - 아무리 성가시다 한들 - 아테네인들이 일흔 살 노인을 사형
에 처하다니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소크라테스의 부유한 옛 친구 크리톤은 그를 탈옥시킬 준비를 하고
감옥에 있는 그를 찾아갔다. 아테네시 당국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태에 당황한 듯 보이고, 만일 소
크라테스의 친구들이 그가 아테네를 떠나도록 주선한다면 눈감아줄 태세다. 그리하여 크리톤은 사형
집행까지 단 며칠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소크라테스를 재빨리 빼낼 준비를 하고 그곳으로 갔다. 그
러나 소크라테스는 “아니네. 난 갈 수 없네.”라고 말한다. 그러고는 도망치는 것은 자신이 목표로 삼아
온 모든 것에 위배되는 일이며, 그가 살아온 모든 방식이 이 도시가 합법적으로 내린 사형 선고를 받
아들일 것을 요구한다고 주장한다. 크리톤한테는 완전히 좌절감을 안기는 충격적인 주장이다. 대화편
에서 그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소크라테스, 할 말이 없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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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구하기

마지막 대화편 『파이돈』은 소크라테스가 영혼 불멸을 거론하고, 그것을 논증하는 마지막 대화의 기록
이라 일컫는다. 그런 후 대화편은 “침착하고 편안하게” 독약을 마시고 누워서 조용히 죽어가는 소크라
테스에 대한 가슴 아픈 묘사로 마무리된다. 파이돈은 “이것이 우리의 친구,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이
들 중에서 가장 훌륭하고, 가장 지혜롭고, 가장 올바른 사람의 최후였습니다.”라고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나를 사로잡았다. 그의 대화 및 질문 방법은 내가 살고 싶었던 삶의 방식을 제시했다.
나는 소크라테스가 다른 젊은이들한테도 똑같은 영향을 미치는 것을 목도했다. 10년이 넘도록 매년 여
름 ‘자유와 시민 정신’이라는 컬럼비아의 프로그램을 통해 나는 이 대화편들을 이제 막 고3이 된 학생
들에게 가르쳤다. ‘자유와 시민 정신’ 프로그램은 3주간의 세미나를 중심으로 이뤄진 컬럼비아 기숙사
체험과 함께 시작되는데, 여기서 학생들은 첫 번째 주에는 고대 텍스트(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투키
디데스)를, 두 번째 주에는 계몽주의 텍스트(홉스, 로크, 루소, 제퍼슨)를 읽으며 보내고, 세 번째 주에
는 미국(에이브러햄 링컨, 프레더릭 더글러스, 마틴 루서 킹 주니어 등)을 들여다보며 지낸다.
수업을 듣는 학생은 전원이 저소득 가구 출신이며, 자신이 가족 중 최초로 대학에 다니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여름이 지나면 학생들은 졸업반 기간 동안 대학 지원서 작성 멘토로 봉사하는 컬럼비아 학부
생 한 명과 짝을 이룬다. 3학년 내내 그들은 격주로 캠퍼스에 와서 여름 세미나 토론 때 등장했던 관심
사들을 계속해서 공부하는 시민 참여 프로젝트 활동을 한다. 지금까지 300여 명의 학생이 참여했고,
그중 거의 100퍼센트가 대학에 등록했으며, 그중 다수는 대학원에 진학한다.
나는 매년 이 프로그램에서 학생들이 일종의 내면의 깨달음을 경험하는 것을 본다. 그들 대다수는 내
가 그랬던 것과 똑같이 소크라테스에게 반응한다. 나는 여름 수업에서 고등학생들과 『소크라테스의 변
론』에 대해 얘기할 때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성찰하는 철학자의 삶을 살라.”는 명을 신으로부터
받았다는 소크라테스의 말을 주목하게끔 한다. 자신과 타인들 성찰하기. 이것이 소크라테스한테는 철
학적 삶이다. 자신을 성찰한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 당신은 자신을 완전히 알지 않는가? 스스
로가 훤히 들여다보이지 않는가? 당신이 아직 모르고 있는 자기 자신한테서 무엇을 알 수 있을까?
소크라테스한테는 내면으로 관심을 돌리는 게 먼저다. 그다음이 다른 사람들에 관한 탐구다. 아마 그
런 이후에야 우리는 다른 사물들에 대해 탐구하는 쪽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의 마음과 다른
사람들의 마음이 철학적 삶의 출발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아 탐구 과정에는 사색뿐 아니라 대화도
있다. 즉, 당신한테는 다른 이들과의 대화를 통해서만 알 수 있는 자신에 관한 정보가 있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근본적으로 철학적 삶에 대한 정당화다. 그는 유죄 선고를 받고 난 뒤 아테네
시민인 청중에게 이렇게 말한다.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없습니다.” 고등학교 때 이 부분
을 읽을 무렵 내 영어 실력은 소크라테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만큼 괜찮았다. 이는 단
지 옛날 그리스의 한 노인에게 일어났던 일만을 얘기하는 게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있던 바로 그곳
그때의 나 자신에게도 의미가 있었다. 그 책에서 내가 주워 담고 있던 것은 고대 그리스나 철학이 아
니라 내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한 내용이었다.
내게 1991년 새내기로 컬럼비아에 입학한 것은 곧 인종적 주체 - 그때까지 나한테는 완전히 낯선 것
이었지만, 캠퍼스를 거닐고 기숙사 식당에서 밥을 먹고 세미나실에 앉아 있는 동안 뭔가를 상징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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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구하기

인물 - 로서 나를 발견했다는 뜻이었다. 아이비리그 학교에 다니는 가난한 유색 인종이라는 나의 존재
만으로도 정치적 의미가 생기는 환경을 내가 파악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컬럼비아에 입학했을
때 나는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사회적으로 불우한, 억압받는 소수 집단의 일원으로 인식된다는 걸 몰
랐다. 컬럼비아에서 나의 존재가 ‘다양성’이라 불리는 것에 대한 제도적 책임의 증거라는 걸 몰랐다.
그런 것이 뭔지 알기도 전에 나는 정체성의 이런 모든 측면을 강제로 떠안았다. 이렇게 또 저렇게 나
는 갈피를 잃었다. 동급생 대부분한테는 말할 필요도 없이 뻔한 것들을 나는 알아듣지 못했다.
나는 곧 내가 어떤 사람이어야 하고, 무엇을 좋아해야 하고, 어떤 정치관을 가져야 하고, 어떤 학생 단
체에 가입해야 하고, 어떤 수업과 주제에 흥미를 가져야 하고, 어떤 정체성을 확인받을 필요가 있는지
와 관련한 기대치에 분노를 느꼈다. 교수진과 관리자들은 교묘하고, 유색인 동급생들은 서로 거리낌
없다는 차이가 있었을 뿐 나의 피부색과 인종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바탕으로 내가 취급받고
있다는 걸 맨 처음 인식한 곳이 바로 컬럼비아였다. 나는 지금까지도 내가 교수라고 하면 미국에 거주
하는 중남미학 전문가가 틀림없을 거라는 추정에 대꾸해야 한다.
교수인 우리도 학생들의 정체성과 그들 본연의 모습에서 충실하게 느껴야 마땅한 것들에 선입관을 가
질 때가 참 많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교양 교육은 그런 통념을 가볍게 무시하고 간파할 때에만 비
로소 이뤄질 수 있다. 과연 나는 누구이고 어디에 있는 것인지, 그 의미를 알아내려 애쓰던 청년으로
서 나는 플라톤의 책 속에서 내 정체성에 대해 진정한 확답을 받았다. 소크라테스가 확인시켜준 것은
도미니카 공화국 이민자로서 정체성이 아닌, 보다 근본적인 어떤 것, 즉 도미니카 공화국 공동체가 내
게 거는 기대뿐 아니라 컬럼비아 동급생들의 추정으로부터 나를 벗어나게 해주는 정체성이었다. 나는
소크라테스의 순수하고 지나치리만큼 감상적인 훈계를 마음에 아로새겼다. 그의 말은 내게 가장 가치
있는 삶의 방식이라 느껴지는 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진리가 신이다 - 간디
필독서 목록에 없는 읽을거리를 소개할 수 있는, 강사들에게 허용된 약간의 자유 재량권을 사용해 나
는 2008년 내 담당 서구현대문명개론 수업 시간에 간디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나만 이렇게 한 것은
아니었다. 한편 간디에 대한 나의 관심은 새내기 시절 근로 장학생 일터의 상사로 있던 수전 졸링한테
들은 얘기에서 촉발됐다. 수전은 자신이 무신론자라고 주장하는, 내 주변에서 만난 최초의 지인이기도
했다. 이 쟁점에 대한 나의 열렬한 관심을 알아챈 수전은 자신이 지금까지 신에 대한 믿음에 가장 가
까이 다가간 것은 내 나이 때쯤 간디의 『자서전』을 읽었을 때라고 했다.
내가 신입생 때 겪은 신앙의 상실을 막으려고 간디에 의지하지는 않았지만, 간디의 『자서전』을 읽어
야겠다는 생각은 계속 남아 있었다. 그런데 2007년에 가서야 그걸 시작할 수 있었다. 약 1년간 매일
명상을 하면서 이 작은 습관이 내 마음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하려 애쓰던 참이었다. 간디는 ‘서구’의
정치적 전통을 확장하는 하나의 방식으로서 내게 매력적이었다. 요컨대 나는 지적 과제인 동시에 명상
을 통해 내가 착수했던 내면 탐구의 확장으로서 그에게 끌렸다.
20년 전 소크라테스가 그랬듯 간디는 나를 사로잡았다. 어떤 이상을 밀고 나가는 데 그만큼 끈질기고
심지어 무모하기까지 한 인물을 나는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을 ‘진리’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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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허약과 영양실조 상태에 빠뜨리고 고립시키기 일쑤였지만, 내면에 불굴의 의지를 키워준 ‘실험’
을 통해 그것을 추구했다. 영적 성취를 향한 그의 불타는 열정은 일종의 광기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
가 그렇게 최근에 살지 않았고 그의 삶이 그렇게 철저히 기록되지 않았다면, 아무도 간디 같은 사람이
실제로 존재했었다고 믿지 않을 터이다. 간디는 만인의 감시에 완전히 노출된 채 아무런 비밀도 없이
공공연하게 알려진 생활을 하는 걸 자랑스러워했다. 그의 생활 양식 - 이슈람(힌두교도가 수행하며 거
주하는 곳)과 거리에서 살았다 - 은 근본적으로 대중에게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지치지 않는
글쓰기와 순회 연설로 자신의 내면생활을 가시화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우리에게 가장 은밀하게 자신
의 심리를 드러낸 고대의 저자가 아우구스티누스라면, 간디는 가장 결연하게 자신의 영혼을 만천하에
드러내려 했던 현대의 인물이다.
간디는 실제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를 움직이게 한 힘은 무엇일까? 그의 궁극적인 동기는 무엇이었을
까?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도 공동체 대표로 1890년대 중반 공직을 맡기 시작한 때부터 간디는 이런
질문에 대해 일관적이면서도 수수께끼 같은 다음과 같은 답변을 했다. 『자서전』 서두에서 말한 것처
럼 말이다. ‘내가 이루고 싶은 것 - 내가 지난 30년간 이루려고 애쓰며 갈망해온 것 - 은 자기실현, 신
과의 대면, 모크샤의 달성이다. 이 목표를 추구하며 나는 살고 움직이고 존재한다. 말하기와 글쓰기로
내가 하는 모든 일, 정치 분야의 내 모든 모험도 동일하게 이 목표를 향한 것이다. 그런데 나는 한 사
람한테 가능한 일은 만인에게 가능하다고 줄곧 믿어왔으므로, 나의 실험은 비밀리에가 아니라 공개적
으로 수행되었고, 나는 이 사실이 그것들의 가치를 손상시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간디가 독보적이고 매력적인 점은 바로 그의 성스러움,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의 성스러움의 세속성이
다. 그는 마하트마, 즉 ‘위대한 영혼’이었지만, 가장 세속적 직업인 변호사이기도 했다. 그리고 훨씬 더
세속적인 두 직업, 즉 저널리스트이자 정치인이었다. 현대에 이만큼 사회 참여적인 형태의 성스러움을
시도한 사람은 유례가 없다. 당신이 인간 삶의 발전 가능성 - 인간의 의지가 이뤄낼 수 있는 것, 그리
고 인간이 다다를 수 있는 수준 - 에 관심이 있다면, 간디는 반드시 흥미로울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
한 끊임없는 실험을 통해 그는 놀랍도록 독창적이고 심오하고 영향력 있는 삶을 빚어냈다.
간디에게서 주목할 만한 점 중 하나는 그가 완수하려고 착수한 거의 모든 일을 이뤄내지 못했다는 것
이다. 그의 대대적인 캠페인 - 불가촉천민 차별 반대,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통합, 국가적 신조로서
비폭력, 여성의 권리 부여, 도시화에 맞선 마을 생활 보존 - 은 혼재된 결과만 낳았고, 성공보다는 실
패에 가까웠다. 인도가 쟁취한 독립조차 간디가 추구했던 스와라지(자치)는 아니었다. 하지만 보다 깊
은 의미에서 간디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근본적인 어떤 것을 바꾸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30대 중반부터 간디는 모든 재산과 부를 처분하고 아파리그라하(무소유)를 다짐했으며, 인도에서 가장
가난한 수백만 국민처럼 살고 입고 이동하고 먹기로 했다. 결혼한 지 오래되었고 여러 아이들의 아버
지였던 36세에 그는 여생 동안 일체의 성욕 충족 행위를 삼갈 뿐 아니라 부단히 성욕 자체를 버리려
노력하는 브라마차리아(독신주의)를 맹세했다. 그는 인간은 물론이고 모든 종류의 생명체를 향한 아힘
사(ahimsa), 즉 비폭력의 엄격한 실천을 채택했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이력을 가난하고 박탈당한 이
들을 위해 바쳤다. 장기간 옥고를 치렀고, 극빈 상태를 겪었으며, 노골적 부당함에 맞서다 여러 차례
죽음의 문턱까지 갔고, 자신의 암살자에게 용서의 말을 내뱉으며 임종했다고 전해진다.
한편 간디의 『자서전』은 그를 유명하게 만든 저술 대부분이 아직 미래의 일이었을 시기에 쓰였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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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내게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계속해서 영향을 주는 식으로 내 사고를
자극했다. 1888년 18세의 나이에 법학을 공부하기 위해 런던에 도착한 후 그가 겪은 난관 이야기는 미
국에 온 직후 나와 내 친척들 다수가 경험한 일을 상기시켰다. 간디처럼 우리도 문화적 충격 속에서
새로운 문물에 어안이 벙벙해졌고 적응할 준비가 안 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세 가지 금욕을 굳게 다짐하며 어머니에게 런던 유학을 허락해달라고 설득한 터였다. 바로 육식과
음주와 여자였다. 그런데도 모드 바니아(인도 서부 구라자트주를 본거지로 한 상인 계급)라는 하위 카스
트 원로들의 여행 금지령에 부딪혔고, 유럽 여행의 대가로 무려 제명이라는 조치를 감수해야 했다. 하지
만 세 가지 서약은 그의 영국 생활에서 기본 틀로 자리 잡았다. 이윽고 이러한 서약은 나중에 채택할 다
른 서약들과 더불어 그가 자아실현은 물론이고 대중 동원의 주된 방법을 추구하는 도구가 되었다.
그는 아내와의 성관계마저 완전히 끊었던 남아프리카 공화국 시기를 저술하면서『자서전』에 이렇게 썼
다. “서약의 중요성이 이전의 어느 때보다 내게 커졌다. 나는 서약이 진정한 자유로 가는 문을 닫기는
커녕 오히려 열어준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식의 역논리가 간디 사상의 정수다. 그는 독신 서약을
제약이 아닌 해방으로, 자기 운신의 폭을 넓히고 자기 에너지를 공공의 봉사에 집중할 수 있게 해주는
길로 여긴다. 무소유 서약도 마찬가지로 이익을 위해 힘겹게 일하는 데서 그를 해방시키고, 그의 재산
을 위협함으로써 무릎 꿇게 만드는 국가를 비롯한 여타 권력을 무력하게 만든다.
간디의 시각에서 보면 “신을 만나기” 위해서는,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노력하다 죽을 각오를 해야 한
다. 서약은 이런 의향의 명시적 공표다. 그것은 마치 생명 자체보다 더 높은 가치에 오로지 헌신함으
로써 신의 계시를 위한 조건을 충족하는 것과 같다. 신은 죽음과 타협함으로써 만들어진 틈을 통해 인
간계에 들어온다. 이런 점에서 평안한 긴 수명이 인간 삶의 궁극적 목표여야 한다는 생각은 무신론 신에 대한 부정 - 이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죽을 의향이 있는 뭔가가 있냐고 나는 가끔 학생들
에게 묻는다. 나 자신한테도 이 질문을 던지기 때문에 그들에게 묻는 것이다. 진리에 대한 간디의 헌
신은 절대적이다. 그는 “말에서의 진실함” - 즉, 알면서 거짓을 말한다거나 진실을 그릇되게 전달하지
않는 것 - 뿐만 아니라 “생각에서의 진실함”도 추구한다. 그에게 진리 탐구는 내면의 정화가 필수였다.
그것은 이기심과 자기중심주의를 벗어버리는 정화였다.
진리는 무아(無我)를 필요로 한다. 사물을 사적인 의제 없이, 거기서 뭔가를 바라지 않고 응시하지 못
한다면 진정한 실체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심은 정도와 상관없이 왜곡된 렌즈로 작용한다. 바꿔
말해, 자신의 특권은 진리를 보는 데 근본적 장애물이다. 절대적 혹은 초월적 의미에서뿐 아니라 비교
적 상식적인 의미에서도 그렇다. 그에 따라 간디는 평생 세 가지 서약을 고수함으로써 자신에게 평범
한 생활 양식을 차단하려 했다. 바로 브라마차리아(독신주의, 행동뿐 아니라 생각에서도), 아파리그라
하(가난뿐 아니라 무소유도), 그리고 아힘사(비폭력. 행동과 말과 생각에서)이다. 빈번한 단식, 침묵 주
간, 식단을 과일과 견과류 그리고 동물성 필수 영양분 때문에 할 수 없이 양보한 염소젖으로 한정하는
등의 부차적인 결단도 진리 추구의 자기 정화에 대한 이런 다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는 1931년에 이렇게 선언했다. “진리의 바다에서 헤엄치려면 자신을 0까지 줄여야 한다.” 자아의 완
벽한 초월 - ‘0’이 되는 것 - 이 모크샤를 이룬다. “몸은 우리의 자아 때문에 존재한다. 몸의 완전한 소
멸이 모크샤다. 이 자아의 소멸에 도달한 자가 바로 진리의 표상이 된다.” 간디는 그런 특별한 헌신에
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상에 부응하지 못하는 것을 통감했고, 마하트마라는 명칭에 대한 거부를 거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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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명했다. 그는 자신의 부족함을 강조했지만, 또한 결연히 노력할 것을 역설하기도 했다.
한편 간디는 더욱 중차대한 사안을 되짚기 위해 이야기에서 조금 벗어나는 『자서전』의 여러 대목 중
한 곳에서 그는 “부, 권력, 명성이 인간으로부터 가차 없이 거둬가는 죄와 잘못의 대가는 얼마나 큰 것
인가?”라고 묻는다. 나는 - 내 학생들 다수도 - 간디의 글을 읽을 때마다 인류 전체가 아닌 ‘나’라는
특정 인간한테 그 질문을 던진다. 내가 누리는 어떤 부나 권력 또는 명성과 연관된 죄와 잘못의 대가
가 있을까? ‘죄’와 ‘잘못’이라는 용어가 간디한테 그랬던 것만큼 내게 같은 무게로 다가오지는 않지만,
그의 질문이 불러일으키는 많은 쟁점에서 나도 벗어날 수 없다.
나의 물질적 이익, 나의 직업적 성취, 나의 사회적 특권은 어느 정도까지 다른 사람의 착취, 소외, 배
제에 의존하는 것일까? 개인적ㆍ직업적 출세를 추구하면서 나는 어느 정도까지 사실이나 진실성 또는
자존심을 희생시킬까? 나는 어느 정도까지, 그리고 얼마나 자주 나의 정의감을 무너뜨리는 타협을 받
아들이고 있을까? 나는 어느 정도까지 타협한 삶을 살고 있을까? 그리고 그런 삶의 대가는 무엇일까?
나는 스스로의 처신 때문에 이런 의문을 제기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내가 품고 살아가는 가장 불편한
질문이다. 간디가 나에게 물으라고 강요하는 질문이다. 내가 나의 학생들 역시 간디의 책을 읽은 후 영
감을 받아 자문했으면 하는 질문이다. 그것들은 현대 문명의 한가운데서 교양 교육이 모든 개인에게 제
기해야 할 질문에 속한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에서 “지혜나 진리, 혹은 가능한 한 최상의 정신 상태에
대한 생각”은 거의 하지 않는 반면 “가능한 한 최대의 부와 명성과 특권을 소유하고픈 열망”을 가졌던
아테네인을 소크라테스가 꾸짖었듯이 말이다. 간디는 교양 과목의 해묵은 질문을 가지고 현대의 독자를
대면한다. 나의 물질적 이익 증진은 정신적 행복과 어느 정도까지 타협한 것인가?
물질적 이익과 정신적 이익 사이의 빈번한 제로섬(zero-sum) 경제는 우연이 아니다. 두 가지 추구 양
식은 불가분의 관계이며 흔히 양립할 수 없다. 예수가 말했듯이 “어느 누구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거나,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8세기 중국의 시인 두보 또한 이것을 잘 표현했다. ‘존재
의 이치를 찬찬히 살펴 / 그저 행복하게 즐겨야 할지니. / 무엇 하러 헛된 명성으로 / 이 몸을 얽어매
리오.’ 아무튼 개인적으로 간디는 내게 심오한 영성을 다시금 일깨워줬다. 그의 글을 읽기 시작할 무렵,
나는 명상 연습과 종잡을 수 없고 산만하지만 지속적인 불교 탐구를 시작했다. 나도 간디처럼 “인격신
(人格神)을 믿지 않는다.”고 말해야겠다. 그러나 그의 “비폭력이라 번역할 수 있는 ‘진리와 사랑의 영
원법’”에 대한 헌신은 내 존재의 가장 깊은 저곳에서 느껴지는 현실을 건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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