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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건강주역탐구

by Casey,Riley 2022.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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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은?
  내일 아침 불편한 마음을 가져오너라!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배용균 감독의 영화 제목인 선문의 1천 7백 가지 선문답 '
공안, 화두'의 하나다. 동쪽으로 간 것은 인도 쪽에서  본 것이요, 이 칼럼의 제목처럼 서쪽
에서 왔다고 표현한 것은 중국 쪽에서 봤으니 그렇다. 그 말이 그 말인데 보통은 '달마서래
의' 공안이라 한다. '뜰 앞의 잣나무'란 답으로 유명한 '조주'라는 매우 유명하고 탁월한 선
사가 있었는데, 그는 1백 20세까지도 천하를 횡행하면서 선문답을 뿌리고 거두고 다녔다 한
다. 달마는 인도 왕족의 왕자였는데 더 이상 인도가 정법을  받아 지닐 그릇이 아님을 알고 
중국으로 건너온 선문의 초조이다. '소림사'가 그의 최초 거주지였는데 그것은 그가 9년 동
안 오직 침묵으로 벽만 쳐다보고 참선을 했다던 곳이다. 눈이 오던 날. 푹푹 쌓이는 눈을 넘
어서 '혜가'라는 무사 출신의 장수가 찾아왔다. 달마는 선정에 깊이 빠져 내다보지도 않았는
데 그는 합장을 한 채 눈이 목까지 쌍이도록 서 있었다. 이윽고 눈을 떠 돌아본 달마.
  "웬놈이냐?!" "법을 구하고자 왔습니다" 달마 왈, "중국놈들  의심 의혹이 많아 가르칠 수 
없다. 정히 진리를 배우고 싶거든 내게  믿을 만한 신표를 보여라." 즉시 혜가는  팔을 칼로 
후려쳐서 잘라냈다. 팔을 달마에게 바쳤으니  비로소 혜가는 첫제자로 입문을 허락  받았다. 
그 피가 떨어진 눈 위에서 연꽃이  피어났다는 전설적이나 끔찍 애틋한 사제지간의  일화가 
있다. 어느 날. 혜가 : 스승님 심히 마음이 불편하오니 마음을 편하게 하여 주십시오. 달마 : 
오냐! 마음을 편하게 하여주마! 내일 아침 내게 오너라! 그러나  조건이 있다. 너의 그 불편
한 마음을 꼭 가져와야만 한다! 혜가 : 알겠습니다! 혜가는 다음날 아침 일어나 급히  그 불
편함 마음을 챙겨서 스승께 나아가고자 했다. 그러나 그 불편한 마음은 어디론지 없어져 버
렸다. 약속대로 스승 앞에 나아갔다.  달마 : 그래 불편한 마음을  잘 간수했다 가져왔느냐? 
혜가 : 아무리 찾아보아도 그 불편한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달마 : 내가  이미 너의 마음을 
편하게 했나니라!
  내가 이미 마음을 편하게 했다는 소식을 독자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하는데 동양의학의 
기본관이 이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불편한 마음을 나누어 부면 초조, 우울, 짜증, 시기, 질투, 
산란, 불안, 놀람, 공포, 슬픔, 원한, 살기, 광기, 열등감 등등인데 이는 모두가 부정적 마음에
너지의 변화이다. 그러나 깊이 살펴보면 불편한 마음은 부정뿐  아니라 긍정이 너무 심하여 
욕심이 너무 강해도 일어난다. "나는 그녀를 긍정한다." "예쁘고 지성적이고 제법 가문도 있
고, 재산도 괜찮다." 긍정에서 호감으로 다시 애정에서 욕심으로(내것으로 소유),  요컨대 소
유하고 싶다! '불편한 마음'은 이때부터 출발한다. 소유는 불행 위주의  상상의 공포나 긴장
을 유발시키는데 바로 안락이나 행복을 위한  소유욕 그 자체는 불안, 초조, 불편한  마음의 
어머니다. 현대는 정말로 불편한 마음의  연속선상에 있다. 기술븡강(기가 오르지도  못하고 
내리지도 못한다). 이때 쓰는 한약으로는 '향부자'라는 명약이 있긴 한데...
  불행의 시작과 비교
  흔히 쓰는 '상대적 빈곤'이란 이런 경우, 즉 비교해서 오는 불행감, 불편함인데... 못  먹고 
못 입는 절박한 상황에서 느끼는 인간의 최소한 신체 유지에  필요한 욕구는 '절대적 빈곤'
이라 불리우는 간절한 요구이다. 그러나 먹고 살 만한 데도 느끼는 상대적 빈곤감은 무엇인
가? 콱! 치미는 울분, 울화, 한방 용어로 기울이라 표현되는 정서적 스트레스 말이다. 비교... 
우리는 '비교'라는 심리적 악마의 횡포를 깜박깜박! 까먹고 산다. 옛날 별볼일 없는 놈이 졸
지에 고급 승용차로 호텔 뷔페나 먹고 다닌다. 학교 다닐 땐 나보다 한 수 아래였는데...  그
때에는 우리 아버지가 친구 아버지보다 높았었는데... 자! 학교 다닐 대는 과거다. 과거의 그
는 현재의 그보다 못했다. 그런데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나'보다 못한 것 같다. '나았었다!'
바로 이것이 비교다(시간의 비교). 그의 아버지는 나의 아버지  아래... 즉 그는 그의 아버지
다. 나는 나의 아버지라는 동일시 형식의 아주  웃기는 공식을 성립시키고는... 그의 아버지, 
내 아버지까지 비교해서 나의 오늘날 치미는 열등의식을 어떻게든지  회복시키려고 한다(에
고의동일시 비교). 좋다! 나도 이를  악물고 돈 벌어야지! 미래! 미래의  나는 그 친구 기를 
팍! 죽이는 나는 꿈이고 꿈은 희망이며 희망은 유토피아이고 유토피아는 성공이다... 그러나 
그때가지 나는 노력해야 한다. 허리띠 졸라매고 나는(별볼일 없는 현재이나) 미래를 위해서 
뛰어야 한다. 채찍질하자(고행). 머리를 써야한다(통밥). 줄을 잡아야 한다(백그라운드). 매스
컴을 타야 한다(홍보). 미래의 내(꿈)가 기필코  되어야 하다. 그러므로 오늘을 희생시킬 수
밖에 없다. 내일을 위해서... 내일은 아마 또 더 좋은  내일을 위해서, 아마도 영원히 만족할 
만한 성공을 얻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쉰다는 것은 우매한 것! 휴식이라니... 아
까운 시간! 시간! 시간!
  돈! 돈! 돈!
  오기와 경쟁심이 치받친다. 가끔 스스로에게  동정심이 생겨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뭐?! 
애인이라니? 낭비일 뿐! 아!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선택적으로 우아,  고상, 섹시한 여인을 
고를 수 있다. 한국의 50만 명이나 되는 호스티스를 보라! 인생 60 잡고 열 살씩 나누면 각 
한 세대 10년마다 6분의 1 곱하기 3,000만은 500만. 2, 30대가 호스티스 적격 나이라면(물론 
이제는 십대까지 마구 뛰어든 난장판이라지만...) 2, 30대의 약 5백만 중  2백 5십만 명이 여
자, 확률적으로 다섯 명 지나가면 다섯 중 한 명은 그쪽 경험있는 여자라는 통계?!  그중(돈
주고 살 수 있는) 예쁜  여자(물론 지성적 발달에 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는 얼마나 많을 
것인가? 제법 반반한 여인을 찾으려면 싸롱으로! 그러나 현재는 한번  호기있게 돈 좀 써보
려고 룸싸룽인가 요정인가 무엇인가 한번 가볼라치면 처음부터 게임도 안 되는 월급쟁이 아
닌가? 새침떼고 앉아 있다가 약 3만 원을  팁이라고 받는 이유도 잘 모르겠지만 그나마 그 
정도는 쩨쩨하다는 식의 눈치하고는 쯧쯧... 5만원! 10만원! 20만원! 80만원! 백만원! 천만원! 
억! 억! 왔다갔다하는 곳에서...
  감히 뱁새가 황새를 좇다가는 가랑이 찢어진다더니... 못생기고  거드름피우는 골이 텅 빈 
땅딸이 졸부 친구가 큰소리 빵빵치는 그곳, 그에게 장안의 일류 미희가 굽신거리는 이유는? 
바로 돈 아닌가? 돈! 돈! 그는 바로 화류계의 핵심을  파악한 도사! 그러니까 여자는 돈, 선
거는 돈, 부패는 돈(이미 꽉 박혀버린 자기 최면).  돈만 만들 수 있다면 그저 최고다! 사랑
마저도 돈으로 당장 살 수 있는데... 우선은 돈! 그것부터 챙겨야지! 돈 벌려면 돈 있는 부자
에게 잘 보여야 하니까 '아부'를 안 할  수 없고... 돈 없는 친구는 저리로 가라!  시간 낭비
다! 나의 꿈에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은 방해꾼일 뿐!  우정이나 의리는 뭐 말라 비틀어진 거
냐? '애정' '우정' 좋아하다가는 맨 돈 쓸 일 투성이지, 벌 일은 거의 확률이 없으니까...
  참사랑이나 참건강이나
  이 시대. 최초의 무의식적 비교가 싸늘한 무관심과 경멸로 변할 수밖에 없는 성공의 야심
의 시대. 사나이 대장부의 삶은 진정코 어디서  찾을 것인가? '불편한 마음'은 불편한 관계
를 낳고 이러한 관계가 너와 나를 갈라놓고 있다. 거북이의  털이나 토끼의 뿔처럼 본래 없
는 것을 마치 있는 양,  허상을 만들어 불편하고 괴로운 번뇌의  마음을 인정하고 그날그날 
살고 있다. 마음 편하게 하는 방법은 곧 '불편한 마음을 깨닫는 일'이다.
  참사랑의 실천은 사랑이 아닌 것을 배제할 때에 저절로 드러나는 것인데... 시기, 질투, 의
혹이나 견주는 마음 등을 쉬면 저절로 사랑의 여신은  미소를 보낼텐데... 억지로 사랑을 만
들어 내거나 사고 파는 천한 행위에서부터 인위적인 상상을 등장시켜 그 개념을 논하는, 제
법 그럴싸한 철학적 분석마저도 '사랑', 진실 그 자체는 아니다. 건강도 마찬가지다. 마음과 
육체의 결함 등등 불건강한 질병의 요소를 제거할 때 즉시 드러나는 것이 참건강이다.
  신언사판 : 참된 판단을 가진 남자.  아쉽다! 그는 분명히 장부여, 군자다.  옛말에 남자를 
보는 네 가지 눈이 있다는데 그것은 신, 언, 서, 판.  첫째는, 그의 신체가 균형이 있어야 한
다. 둘째는, 말에 조리와 명분이 뚜렷해야 한다. 셋째는 글 다듬는 솜씨가 가히 사람을 감동
시킬 수 있어야 한다. 넷째는 판단하는 능력이다. 엇갈린 사물의 선과 악을 잘 분별하여  그 
쓰임새를 조화롭게 운영하는 남자. 이 네 가지 중 제일은 곧 '판'이다. 판단은 곧 지혜다. 생
각이 일어나기 전을 '중'이라 하고, 일어나서 그 조화를 맞추는 것을 '화'라 한다(공, 맹자). 
한 생각이 웃음이요, 눈물이다, 즉 기분이다. 기가 분(나뉜다)하여서 기쁨과 슬픔이 있다. 기
분을 내는데 '음'과 '양'이 있고, 그 음양 기분을 그때그때 잘 맞춰내는 남자는 분명 사나이
다. 초상집 가서 웃어버리는 남자, 결혼식에서 우는 남자... 특별한  사연이 없는 한 그는 또
라이다. 즉 그 기분이 그 환경에 맞지 않았다!  추한 남자의 삶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때와 
장소에 걸맞지 않는 기분을 내는 사람이다. 슬프고 기뿐 기분을  잘 융화시킬 수 있는 사나
이는 곧 근본의 '기'를 아는 자다. 기가 분하기 전, 나뉘기 전의 상태를 깨달아 아는 남자는 
언제나 바른 기를 사용할 준비가  이미 갖추어진 사나이 중의 사나이다.  바로 현장을 사는 
사나이. 어제 기억의 노예가 되지  않는 그이는 미래의 도취된 환상  때문에 오늘을 놓치지 
않는다. 순간을 살되, 번쩍 깨어 있는 삶을 아는 대장부가 가장 건강한 사람이며 구태여  병
원 신세 질 필요도 없고, '달마가 동쪽으로 간 뜻'을 잘 파악한 장부 중의 대장부다.
  쌍금탕과 정도령
  쌍화탕 + 불환금정기산 = 쌍금탕이다.  쌍화는 곧 조화이다. 기가  조화로운 삶은 쌍화의 
생이다. 게다가 '불환금정기산', 즉 금하고도 바꿀 수 없는 바른 기운이라는 뜻의 정기는 곧 
판단의 지혜가 무르익은 바른 마음을 말한다. 치우치지 않는 마음, 고집 없는 인격, 분리 의
식에 물들지 않는 평화의 기를 정기라 일컫는다. 정도는 정기다. 민족 역사의 유언비어적 구
세주인 '정도령'은 '정도령'이다. 즉 바른 도,  바른 정기의 소명감으로 실천하는 사람을 지
칭한다. 정도령이 나타나면 세상이 구제가 된다. 특히 지금  같은 말세기적 혼란의 시대, 에
이즈 같은 괴질이 난무하는 세상에는 꼭 사이비 종교가 판을 친다는데... 여기저기에서 메시
아, 미륵블, 정도령이 마구 출몰한다. 가정, 사회, 나라를 마구 좀먹는 사이비 종교의 특성은 
맹신을 강요하는 법이다. 그러나 정도령은 안에 있다! 생활 속에 있다! 금과도 절대 바꿀 수 
없는 불환금정기의 뜻과 잘 조율된 기타줄같이  오묘한 소리를 내는 쌍화의 감각을  터득한 
자만이 이 세상을 구제할 수 있다. '정도령', 즉 바른  도덕의 명령도 남몰래 실천하는 그이
는 모든 여인의 왕이요, 천하의 주인공이다.
  임포턴스 시대
  사람을 돈으로 나누어 없는 자가 천시 받는 세상. 카페나 룸싸롱에서 후한 대접과 푸대접
으로 분리되는 이유를 빨리 깨달은 사람은 그 원인이 기실 지갑의 무게와 정비례함을 안다. 
그래서 자꾸 남자의 삶을  위축시키는데 심지어 이렇게  주눅이 들어 '임포턴스(성불능)'에 
이르기도 한다. 정도의 덕이란 '윤리적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기죽지 않는 삶을 도덕적 
생이라 한다. 왜냐? 정기는 금하고도 바꿀 수 없는데, 그것이 돈에 눌리면 신축 자재한 능력
을 가진 도덕인데 어찌 그까짓 황금의 비교에 팍 짓눌려 오직 축소만 될까 보냐? 마음이 축
소되니 남성의 심볼도 위축되는 비극이  일어나지 않는가? 서양의 물질문명과 유물적  사고 
방식은 큰 것은 능력과 직결이 되어있다.  큰 것은 큰 곳과 작은 것은  작은 곳과의 만남을 
상호 조화되어 도덕이라 한다. 소위 '속궁합'의 속사정은 마음과  마음의 만남을 말한다. 이 
성적인 차원 역시 사이즈와 사이즈의 만남이 아닐 것이 분명하다.
  천당의 숟가락과 유방
  '비뇨기과'에서 은밀히 별별 기괴한 방법으로 남성을 조각하거나  키우는 이를 결코 장부
라 불러줄 수는 없지 않은가? 유방을 주사해서 부풀리고,  처녀막을 재생시켜 눈 속이는 방
편도 추하기는 마찬가지다. 유방은 젖의 원산지다. 젖은 내면의 꿀을 공급하는 주유소의  호
스 같은 곳... 주는 곳, 주는 것, 베푸는 일이 담당이 유방이다. 모든 남성의 휴식처는 그러한 
유방의 마음을 가진 여성의 도덕 안에서다. 유방을 몰려놓고  돈 내놓으라는 갈취요구형 간
부는 저절로 유방의 기능이 위축된다.  매일 달라고만 하는 여성은 유방이  설사 산만 하다 
해도 남성의 일생 괴로움이다. 젖=삶의 기름, 주유소와  호스. 보라! 남성의 상징은 젖에 있
지 않고, 젖과 같이 주유할 수 있는 그 호스에 있다! 남성의 젖은 퇴화되었지만 상대적으로 
여성의 퇴화된 부분에 주유소가 있지 않는가? 속된 말로 조 + ㅈ 혹은 ㅅ... 너무나 같은 것
은 두 군데에서 '하얀 정' '하연 피'가 나온다는 점이다. 하얀 피는 젖의 다른 말이다.
  하얀 피는 하얀 정과 같다. 피보다 더욱 정제된 정은 흰색이나 젖 역시 빨간 포도주를 증
류시켜 정제한 백포도주를 상상하면 고급 피, 윤활유이다. 가장 불이 잘 붙는 생명의 연소를 
돕는... 어떤 때 나오는가? 이는 생명의  신비와 활력을 주는 마음에서 나온다. 주는  마음은 
희생의 마음, 밀알처럼 썩어가는 마음을  말한다. 어머니의 젖에 흘러가는 영양은  하루하루 
어린이의 피가 되고 살이 된다. 사나이의 심볼에서 방출되는  수억의 원소는 생명을 잉태하
게 된다. 주는 마음 없이  '수캐'처럼 '말'처럼 욕정만을 채우려는 사나이는  그것이 있어도 
있는 것이 아니다. 생명의 신비는 자신의 불태움에서 이루어진다는  진리를 꼭 알아야 하는
데...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면 여성은 위로 주고 남성은 아래로  준다. 아래로 배설한다고 생각
하는 남성은 성의 도덕을 잘 모르는  패륜아다. 여성을 '요강', '변기'정도로 생각하거나 코
를 푸는 '크리넥스'정도로 여긴다면 그는 남성의 기능을 다하는 자가 아니다. 이 시대에 잘
못된 성교육 중 하나는 바로 정액의 낭비다. 적당한 배설은  몸에 좋다는 식의 추한 교육은 
이 '정'을 배설물 정도로 여기는 무의식적 천시 현상을 불러일으켜 왔다. 석탄이나 다이아몬
드는 같은 탄소의 결정체로 본질은 같다. 다이아몬드를 원하는  사람이 지상에서 석탄을 없
앤다면 매우 어리석은 일이 아니겠는가? 남성의 '정'은 석탄이요,  '정'의 낭비는 모든 수행
자나 종교계에서는 철저히 절제하게 되어 있다. 그런 이유를 오늘날 너무 잊고 있다. 숯이나 
석탄을 내 버리고서 다이아몬드를 얻을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남성은 은밀히 주어! 이것이 아래에 주는 통로를  만든 자연의 섭리다. 서로 주는 마음끼
리의 만남을 도적이라 한다. 여성은 은밀히 받고 드러내  놓고 주어라! '지옥의 숟갈' '천당
의 숟갈'은 크기에 있어서 길기는 마찬가지란다. 기다란 삽 같은 숟갈을 지옥에서는 자기만 
퍼먹으려 하니 그 길이가 거슬려서 입에 잘 와 닿지  않는다. 그러나 천당에서는 아주 화기
애애하게 서로 적당한 거리에서 상대방의 입에 퍼  넣어주고 있다고 한다. '서로 적당한 거
리'에서 마냥 '서로 퍼주고 싶어하는 삶'이 참다운 남성, 여성의 성도덕이다. 이렇듯 은밀히 
주는 삶이 못 되고 마구 은밀히 뜯어내는  제비족 류의 생활이 되어서야 어디 남성 삽숟갈 
도덕 문화를 빵점이라 아니 하겠는가? 물고, 핥고,  빨고, 헐떡이면서 자신의 정욕을 채우기 
급급한 선비나 군자가 있다는 말 들었는가? 그런 현모양처가 있다던가? 적당한  거리의 '천
당의 삽'은 위대한 성문화을 낳을 것이며 가정의 화평을 몰고 올 것이며  지구촌의 안녕 질
서를 보호할 것이다.
  '알파' 우주인의 놀람
  왜냐? 모든 정신병의 99.999퍼센트(?  약간 과장)는 모두 성의 황폐함 또는 욕구불만에서 
왔다는 통계가 웅변으로 증명한다. 저 멀리 '알파' 우주계에서 외계인이 이 지구 마을을 어
느 날 방문하고는 깜짝 놀랐다. 길거리 포스터의 대부분이 남녀의 벌거벗은 누드며, 위로 아
래로 옆으로 눈을 감고 뜨고, 입을 오므리고 벌리고, 머리를 흐트렸다 단정하게 했다 등등... 
알고 보니 전부 성문화인데 음악도 듣고 보니 역시 그렇고...  그런데 가장 연구 안 하는 명
제가 또한 성문화임을 보고는 놀랄 수밖에...
  사회면에서 성폭행, 인신매매, 싸롱문화가 번쩍번쩍  자주 스치는 기사로 보아 이  문제의 
심각성이 분명한데도 서로 입을 다물고만  잇다. 기껏해야 음담패설, 외설의 형태로  남자들 
셋이 술에 만취되어서 마지막 화제로 등장한다든가? 부인들 계모임의 끝부분에서 나오는 만
발된 Y담 이야기 등은 너무나도 추하게 꼴불견을 연출한다. 그중 놀라운 것이 한국이 그 몽
지몽매 황폐함이 더욱 심한데... 부모가 자녀와 더불어 솔직하게 성문제를 의논하는 집이 거
의 없다는 사실... 그러고도 도덕의 윤리를 이야기하며 위선적인 생을 살아가고 있는  현실... 
도덕은 곧 성의 이해와 직결된다. 너무 까놓고 드러내어도  그 신비로움의 맛이 없어지기도 
하지만 분명히 왜곡된 '삽질'은 피해야 하며 독자 여러분은 그 선봉에 서서 원인 규명 실상
의 이해를 도와줘야만 한다. 외국 사람이 동양에서 놀라는 것이  딱 두 가지 있다는데 하나
는 일본의 경제대국의 팽창이고, 또 하나는 한국이 그러한 일본을 아주 가까이 두고도 가장 
시시하게 경멸하고 있다는 점이란다. 놀라운 한국  민족?! 한때는 우리 민족문화를 말살 당
하고도 분한 줄 모르더니, 바로 옆의 눈부신 발전에도 자극 받을 줄 모르는 이상 감각적 이 
민족의 지성이 가깝고도 난해한 성문제를 언제쯤이나 진실로 승화시킬 수 있을런지...
  
    빠빠라기 신종질환
  빠빠라기 신종질환 1(빠빠라기 : 정신세계사에서 출간된 동명의 책제목 속의 원주민 추장
이 현대인, 문명인을 일컫는 말)
  날개 달린 틈바구니(아파트)는 크기도 크다.  들어갈 때 큰 날개, 번호표  붙은 작고 빠른 
날개를 거쳐 들어가면 그 가운데 또 몇 개의 날개를 밀어야 내 방에 들어갔다. 컴퓨터가 있
다. 거기에는 많은 숫자가 있다. 길고 넓적한 키보드를 두드리면 내가 알고 싶은 정보는  순
시간에 나타난다. 빨리 가는 길은 철로 만든 상자에서 그림자 사람이 나타나서 가르쳐 준다. 
빨리! 자! 출근한다. 그리고 그곳을 직장이라고 한다. 하루종일 바삐 남의 이야기를 받아 적
어주는 반복되는 일이 그의 직업이다. 생각만 하면 대신 신속하게 두드려주는데, 얇은  나무 
껍질 같은 종이에 개미 같은 점이  곧 그의 작업이다. 그러나 이제는  퇴근이다. 빨리! 집에 
간다! 날개가 많이 달린 틈바구니로 가자! 그곳에서 빠빠라기의 식구들이 기다린다. 먹는다. 
그러고는 상자에서 비추이는 그림자들이 찡그리고 웃는 대로 같이  울고 웃는다. 날씨도 미
리 아는 빠빠라기가 그림자로 나와 가르친다. 비가 온다? 내일은 머리 위에 쓰는 둥근 집을 
가지고 나가야지. 정말로 조그마한 상자는 별것을 다 알린다. 옆에 있는 난초의 화분도 상자
에서 다 얘기한다. 한 번도 물 줘 본 일 없는 식물을 그  상자에서는 "..." 다 가르친다. '아! 
그렇구나!' '난초는 그런 물건이로구나!' 조금 있다가 빠빠의 아기를 가르친다.
  '이렇게...' '저렇게...' '아! 그렇구나!' '아기는,  자식놈은, 마누라는, 이런 거로구나.'  '아! 
배웠다!' 그림자 사람이 그 상자 안에서... 안다! 알 것 같다. 그러니 실제 자기의 부인을, 아
기를 유심히 살펴본 일이 없을 수밖에... 구름을 본다. 잘 모르겠다. 다시 상자를 비튼다.  그
러면... '구름은...' 이제는 구름을 안다... 어떤 의사가 나무에 풀을 주고 있는 환자의  속에서 
호스를 탁! 가로채서 그의 머리에 뿌리고  가버렸다. "물은 당신에게도 필요해!" 충고.  마른 
나무는 물을 주어 살리듯이 건조한  사람의 병은 물을 보충시킴으로 치료할  수 있다. 모든 
현상의 원인은 단순한 데 있으므로 해결책 또한 단순한 곳에 있다. 현대문명인 속칭 빠빠라
기라 칭하는 사람들은 복잡하고 어려운 곳에 꼭 무엇이 있다는 막연한 신념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고 있는데, 진리는 의외로 단순하면서  명쾌한 데 있는 것이다. 빠빠라기들은  거창한 
기계를 동원해서 검사하고, 이상한 숫자를 나열해서 비교해 대면서  결국은 신경성 또는 원
인 불명이라고 단정지어 버린다. 환장 빠빠라기 또한 자기가  마치 신비하고 위대한 질병에 
걸린 것처럼 떠벌리고 다닌다. 건성피부병 환자, 키는 1미터 80, 체중은 40킬로그램(약간 과
장)... 삐쩍 마른 나무와 같은 체질(양체질), 화초에 물을 주는 정도로는 어림도 없고 오히려 
풀장에 빠뜨려 흠뻑 적셔져도  시원치 않은 체질... 그  원인은 과연 어디에?! 빠빠라기들은 
수많은 서적 속의 지식만 알 뿐, 실제 원인과 치료방법은 모른다. 그들은 바쁜 생활  속에서 
어찌 빨리 적응할까 하는 생각 끝에 자신은 경험과 관찰을 해 볼 시간이 없다면서 소위  대
중매체를 통해 모든 것을 인식하며 살아간다. 의학 백과사전을 뒤적여 그것을 줄줄 외고 다
니면서 그런 지식이 없는 사람을 시대에 뒤떨어져 바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겠느냐고 바꾼
다.
  빠빠라기들은 무조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더 빨리 알아야  하고, 더 빨리 출세해야 하
며, 빨리 가고 빨리 오려고 한다. 그들은 매일매일 '빨리' 때문에 고민하고 '빨리'가 이루어
지지 않으면 결국 병이 생기고 만다. 그들은 병이 나면  바쁜 의사 빠빠라기에게 빨리 고쳐
달라고 아우성을 친다. "나는 빨리 병이 나아서 빨리 일해야  한다..." 게다가 일마저 완전히 
분업화되었다. 집을 짓기 시작한다. 너는  물만 길어와라! 또 너는  시멘트만 날라와라! 왜? 
그것이 능률적이고 효율적이니까... 일 년 365일을 똑같은 일만 한다. 그게 곧 직업이라는 거
다. 기계화되어 버린 사고 방식에 젖어 있는 현대인 빠빠라기는 말한다. "사람이  어떻게 그 
많은 일을 다할 수 있어? 각자 분야를 정해서 그것  하나만 잘하면 되는 거지..." 물긷는 사
람은 그저 물만 길어오면 된다고 생각한다. 분업화된 생각과 삶 속에서 우리는 지나칠 정도
로 너의 일과 나의 일을  분리시켰으며 육체적 정신적으로 전체성을  잃어버렸다. 팔운동을 
하는 직업은 팔만 발달되고, 두뇌를 활용하는 사람은 육체의  기능을 망각해 버림으로 전체
성과 거리가 먼 생활을 하게 되었다.
  건강은 전체성의 회복에 있는데도 말이다. 영어로 Whole은 전체성이라는  뜻인데, Hole은 
곧 신의 성스러움이 아닌가? 신성, 즉 불성이야말로 최고 건강의 상징인데, Hole이 Whole에
서 파생되었다는 그 의미를 깊이 음미해 봐야 할 시대가 아닌가 말이다.
  빠빠라기 신종질환 2
  현대문명인 빠빠는 아침마다 종이(신문)를 머리에 꾸겨넣는다. 하늘의 구름도 보고 바람도 
직접 보고 맛보지 않는다. 뭉텅이 글자의 예보와 철상자의 무감동한 말을 참고 삼는다. 주로 
살인이나 폭력, 사기꾼들의 등장 무대인 뭉텅이 종이를 소중히 외우고는 나가서 사회생활에 
뒤지지 않을세라 서로 아는가 확인한다. 지난 일요일에 사다 심은 소나무가 다행히 잘 자란
다든가, 뒷산의 약수터가 하나 더 생겼다든가 하는 것을 화제 삼았다가는 망신을 당하기 십
상이다. 사람마다 같은 골목을 보아도 각도가 달라 보이는 게 다를텐데, 눈빛은 흐릿하고 한
결같이 빨리 잊어야 할 끔찍한 사건들을 못 잊고 아예  외우고 다닌다. 저녁에는 큰 사진이 
움직이는 어두 침침한 방(극장)으로 들어가서 사진 속에서 사람이 쏘아 죽이고 칼로 도려내
어도 팔짱을 끼고, 전혀 말릴 생각 없이 숨을 죽이고 본다. 머리에 들은 지식은 전부 악지식
뿐 선지식은 사라졌다. 가끔 대선지식인 위대한 영혼의 소유자가 나타나서 빠빠들을 가르쳐
도 소용없게 되었다. 나쁜 지식의 빠빠들이  행복할 리 없다. 그러므로 서로 원망하게  되는
데... 가끔 "내 탓이오! 내 탓이오!" 하는  운동도 벌어지는데, 이것도 오로지 "내 탓!"이라고 
함으로써 조금 선한 척하는 데 불과하다. 행복이나 사랑은 메뉴같이 글자로만 외는데, 왜 음
식도 차림표 종이만 씹어먹지 않는지 모를 일이다. 이 빠빠의 지구촌 한구석 한국의 빠빠라
기들... 슈퍼마켓과 구멍가게의 진열장에는 라면과 인스턴트 식품이 동이 나버렸다. 지난  여
름 수마가 이 땅을 뒤흔들고 지나갔을 때... 소위  '사재기(?)'가 극성을 부린 것! 얼마 전에
는 '기름값 몇 퍼센트 인상'이라는 발표가 있어 한국 빠빠의 특기가  또 한 번 발휘될 기회
가 있었는데... 석유 가게 한 종업원의 말인  즉, 배달주문을 받고 석유를 싣고 가보니  기름 
탱크가 가득 차서 더 넣을 여지가 없는 데도 사서 쟁여놓으려고 성화를 부려 진정 꼭  필요
한 사람들에게는 돌아갈 여분이 없었다는  것이다. "나만 살면 되지, 다른  사람들까지 신경 
쓸 여유가 어디 있어? 나도 잘 살기 힘든 세상인데..."
  이것이 한국 빠빠들의 자화상이 아니고 누가 감히 부정할  수 있겠는가? 이렇듯 '나'위주
의 생각, 곧 '에고이즘'을 낳았는데 빠빠는 자신의 에고 확대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며 투
쟁을 하고 있다. 다른 이보다 더 잘 먹고, 더 잘 입고, 더 잘 살기 위해 밤낮으로 싸우는 전
사가 되어버리지 않았는가! 또한 남보다 잘 사는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지키느라 
온 신경을 곤두세우며 빼앗기지 않으려 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조금 더 나은 위치를 차
지하려 애를 쓰고 있다. 옛날에 어떤 주인이 몸종을 데리고 길을 가는데 몸종이 동전 한 닢
을 주워서 주머니에 넣었다. 주인은 그 장면을 보고도 못 본 척 시치미를 떼고 어떻게 하면 
그 동전을 빼앗을까 궁리를 하다가 한 계책을 생각해 냈다.
  주인은 소리를 벽력같이 지르면서 감히 몸종 주제에 주인의 앞에서 걸어간다고 야단을 치
자 종은 얼른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주인은 더욱더 화를 내며 "네가 나를 감시하는 감시꾼
이냐? 왜 자꾸 뒤를 따라오느냐?" 고 호통을 쳤다. 어쩔 줄 몰라 하던 종은 앞도 뒤도 아닌 
옆에서 서서 걷기 시작했다. 주인은 또 눈을 부릅뜨며 주인과 같이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
느냐고 꾸짖으니 어찌할 방법을 몰라 주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볼 수밖에... 그런데. 혼낸  속
셈은 바로 다른 것. 속담에 아흔 아홉 섬 가진 자가 한 섬  가진 사람의 것을 빼앗아 백 섬
을 채우고 싶어하는 것이 욕심이라더니 그는 지금 한국 빠빠의 세태를 그대로 풍자해 주는 
좋은 예다. (채근담)에 이르기를 '초연한 늙은 학은 비록 굶주린다 하더라도 마시고 먹는 태
도에 여유가 있으니, 닭이나 오리가 부산을 떠는 것처럼 다투지 않으며 의젓한 소나무는 늙
은 고목이 되더라도 제 모습을 지니고 있으니, 복숭아가  살구나무처럼 눈부신 채색을 다투
지 않는다'고 했는데... 우리가 치르고  있는 과보와 앞으로 치러야  할 업보는 과연 어떠할
까? 현재를 보면 과거도 알 수 있고, 미래 또한 알 수 있다고 옛 성현들은 말씀하시지 않았
는가? 나만 잘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으려 목숨까지 경시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나만이즘(Namanism?)으로 옆에서는 굶어 죽을지언정 나만 잘살면  된다는 사고 방식이 다
락방을 꽉 채울 만큼 사재기를 하게 만들었지 않는가?!
  이렇듯 욕심을 부리는 이들은 육체적, 영적으로 지나친 성취를  한 대가로 냉병으로 시달
리게 될 것이다. 또한 열심히 챙겨도 흡족한 마음이 들지 않고, 뜻대로 되지 않으면 화가 치
밀어 열병으로 시달리게 된다. 욕심의 기름 없이 분노의  불은 탈 수 없는 법! 한국 빠빠라
기들조차 에고이즘이 팽배해져 있는 작금, 모든 에너지는 활활  타올라 열병이 만연하게 되
어버렸는데... 치유의 방법은 어디에 있을까? 눈부시게  발달된 과학문명으로 인해 치료방법
도 다양하겠지만, 그 많은 쇠붙이에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분노와 욕심이 비춰질 수는 
없지!
  빠빠라기 신종질환 3
  따르릉! "선생님! 저희 아버님을 잃어버렸습니다." "아버님을 잃다니 돌아가셨단 말씀입니
까?" "그게 아니구요..." 거슬러 올라간 이야기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일주일쯤 전 할아버지
가 갑자기 쓰러져 일어서지도 못하고, 대소변도 못 가려 병원엘 갔더니 중풍 증세라면서 그
냥 퇴원을 시키더라는 것. 그리하여 필자가 소개한 후배 한의사의  왕진 치료를 받은 뒤 벽
을 짚고 겨우 일어설 수 있을 만큼 되었다는  이야기는 전에 들었었는데... 지팡이를 의지하
고 오후 다섯 시쯤 문제의 할아버지가 필자의 한의원을 찾아왔다. 의외로 병의 진전이 좋아 
환자와 보호자는 치료를 받고 싶었던 것. 할아버지를 먼저 치료하고 나자 보호자인 아들 자
신도 진찰을 원했다. 문제의 발단은 아들이 치료를 받고 30분쯤 후 나가보니 할아버지가 사
라진 것이다. '밖에 바람 쏘이러 나가셨나 보다'하는 단수한 생각으로 이들은 찾아나섰겠다. 
이글 첫머리에 벨소리는 다음날 아침에 온 문제의 전화였는데, 할아버지가 실종되었다는 것 
아닌가? 경찰서, 보호소 심지어는 정신병원까지 연락을 취해  봤지만 그로부터 이틀간 전혀 
소식을 알 수가 없었다. 환자 가족과 한의원 식구들도 편한 마음으로  잠 못 이룬지 3일 만
에 전라북도 부안에서 연락이 왔다. 할아버지를 찾았다는 것.
  지팡이에 의지해서 겨우 몸을  움직이던 할아버지가 어떻게 부안까지?!  알고보니 부안은 
할아버지의 고향이었고, 실제 그분이 발견된 곳은 경기도 오산이었다. 그것도 놀라운 일임에
는 틀림없는 일. 돌아온 할아버지의 얘기를 들어보니... 한의원 대기실에서 바람을 쏘이러 밖
으로 나갔는데 창문이 없는 빌딩인지라 아래층까지 내려갔다가 길을 잃었단다. 잠실 지하철 
역까지 내려간 할아버지는 이리 헤매고 저리 헤매며 당황하여 의식적 판단이 아닌 무의식적 
사고에 이끌렸다. 어서 빨리 더 깜깜하기 전에 자신이 갈  수 있는 집으로 가야겠다고 생각
한 곳은 아들이 치료받고 있는 한의원도 아니고, 당신 아들집인 경기도 구리시도 아닌, 육신
과 마음의 고향, 부안이었다. 길을 잃었다고 암담해 한 당시 잠실역에서 가장 가깝다고 판단
한 곳이 바로 고향 부안이었다니...
  불편한 몸을 이끌고 오롯이 부안을 향해 열심히 걷기도 하고 길가는 사람이 동전을 주면 
동전만큼 차를 타기도 해서 오산까지 내려갔단다. 거기서부터 빨리  걸어 어서 집에 가야겠
다는 생각은 간절했지만 오산의 어느  건물 앞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정신을 잃어가면서도 
입에서는 전북 부안군 무슨면 무슨리를 계속 중얼거려 발견한 사람이 고향에 연락을 준 것
이었다. 집에 돌아온 할아버지의 소식은? 지팡이마저 필요 없을 만큼 건강이 좋아졌다는 것
이다. 맞을 중 바람 풍, 중풍은 한번 맞으면 완전 쾌차가 좀처럼 힘이 드는 건데?! 할아버지
는 과연 어떻게?! 근래에 와서 노인들뿐 아니라 젊은 빠빠라기들에게도 예고 없이 찾아드는 
중풍! 바깥 바람 많이 맞았다고 오는 것이 결코 아닌  중풍... 입이 돌아가고, 손발이 마비되
고 심지어는 전신까지도. 그럼 그 원인은 어디에??
  작은 반닫이 하나를 닦고 닦아 윤을 내며 만족해하던 엄마 빠빠라기들은 외국산 가구들로 
온 집을 가득 채우고는 만족을 모른다. 심지어 몇 십만원짜리 속옷을 입어도 마음은 불만투
성이다. 이루지 못한 욕망에 마음의  바람이 휙휙 불며 타오르는 분노의  마음 바람은 바로 
악마적인 중풍의 원인이 아닌가? '나는 왜 하는 일이 이렇게 하나도 잘 되질 않아?'하는 비
교의 마음도 마찬가지 중풍의 괴수요, 이제 차를 타고  거들먹거리는 이웃이 눈꼴시어 피가 
머리끝까지 솟구치는 것도 중풍의 두목이요, 대학에 척척 붙는 남의 자식 보면 충혈된 눈에 
열만 치받치는 것도 그 중풍의 원흉이다. 그런데 이 기적의 할아버지는 길을 잃은 3일 동안 
심신의 휴식처 고향집 부안만을 향해 그저 일구월심 오롯이 마음을 통일시켜 순일 무잡하게 
일심으로 정진하셨으니 그 정성이 통했던 것 아니겠는가? 무의식에까지도 침투해 있는 고향
이야말로 봉양하고 있는 자손의, 현실적으로 가까운 집보다 심리적으로는 훨씬 더 가까웠던 
것이다. 문제는 육체적 물리적 거리가 아니라 마음의 거리에 있지 않았겠는가?
  가장 가깝고 친근하고도 사랑과 휴식이 있고 자연의 싱그러움이 있는 마음의 고향을 갈구
한 이 할아버지는 육신은 비록 고향까지 못 갔어도 마음의 간절함으로 이미 고향을 다녀온 
셈이 되었다. 그러자 신통하게도 그  난치의 중풍이 씻은 듯 나아  이제 노인정으로 지팡이 
없이 활기차게 나다니신다니... 참 의사노릇 하다 보면 알다가 모를 일이 하나 둘 아닌데 이 
경우는 정말 신비한 충격을 준다. 자! 빠빠라기들이여! 썩은 공기와 비교  경쟁에 물들은 문
명 빠빠들이여! 중병을 두려워 말고 마음의 고향을 하나씩 간직하심이 어떠하실는지... 그곳
은 빛과 사랑이 넘치는 신유의  자기 치료가 있는 곳이요, 내면의  신령스러운 의사가 숨어 
있는 묘법연화의 세계가 아니겠는가? 물질적 약이나 의술에만 의존하는 빠빠라기들은 기도, 
명상이나 참선 등을 콧방귀  대상쯤으로 여기고 있겠지만, 보라!  순순한 어린아이 같은 이 
할아버지의 기적을! 염력의 위대함을! 관두자! 그래도 여전히 빠빠는 이럴 게다. '부안!' '부
안!'을 열심히 외면 나도 병이 낫지 않을까? 못난 빠빠들은 아마 이럴 것이다. '나의 고향이 
부안이 아니어서 억울하다!' '할 수 없다.' 마음은 안 보고  땅만 보는 꼴이 없다고 뉘 단정
하겠는가?
  빠빠라기 신종질환 4
  빠빠라기들은 잘도 싸운다. 그들은 위대한  신의 이름으로 성전을 벌인다. 전쟁터에  나갈 
때 그들은 기도를 한다. 전능한 신은 나를, 우리 국가를 보살펴 주신다는 추한 신념을  가지
고... 자비와 평화를 설하다 간 성스러운 영혼의 소유자를 전쟁의 신으로 둔갑시킨다. 허벅다
리에 꽂는 주사기를 개발하여 적국의 화학미사일 피해를 예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
은 아군과 적군으로 갈라친 최초의 의식분열을 의논하지 않는다. 아니! 의논할 필요조차 없
다. 내가 믿는 신의 이름만이 최고의  의지처이므로, 이름이 다른 신을 믿는 자들은  죽어도 
싸다고 어릴 적부터 교육시킨 빠빠의 마음은 이미 커서는 굳을  대로 굳어 있다. 같은 사람
의 머리에 핵폭탄을 쏟아 부어도 매우 정당하다. 적은 나쁜 사람이므로...
  전쟁이 일어난 당사자들 이외의 국가들은 무사히 전쟁터를 탈출한 자국 국민들의  함박꽃 
같은 웃음을 신문에 크게 보도하고 좋아한다. 며칠 있으면 전쟁의 먼지를 뒤집어쓸 것이 뻔
한데, 오늘은 안심하다. 오히려 실전을 TV에서  보게 된 최초의 장면이라고 신나서 설명하
는 아나운서 빠빠도 있다.
  의사 빠빠는 제법 의로운 척하고 발간 십자가 마크를 달고 전쟁터를 뛰어다닌다. 아군 저
군을 안 가리고 치료해 준다는 명분으로... 그러나 왜  싸우는지의 근본 원인을 병균 밝히듯 
연구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골치 아파한다. 부러진 다리나 총 맞은 가슴을 치료하는 데 급급
해서, 안 부러진 다리나 싱싱한 가슴을 그대로 보존하는 길은 모색하려고도 아니한다.  종교
가 갈라놓은 빠빠의 전쟁. 색깔이 갈라놓은 빠빠의 전쟁.  사상이 갈라놓은 빠빠의 전쟁. 의
사도 예술가도, 정치가도, 종교가도 무책임하다. 각 나라의  교육이 증오와 원한의 유산만을 
물려주는 독한 것이 되어버린 지금 누가 그 원인을 솔직하게 인정하겠는가? 누가 그 해결책
을 제의하겠는가?
  누군가가 그 근본을, 진실을 밝혀야 한다. 빠빠의 어리석음은 이제 최고에 다다랐다. 빠빠
의 지도자를 믿는 이유는 사실 모른다. 아무도 그 이유를... 소위 철학, 종교,  정치의 리더들
은 집단 개인주의를 조장한다. 비교, 경쟁, 우월  의식의 조장으로 이기는 자, 지는 자  모두 
교만과 울분으로 병이 생기기 되어 있다. 당뇨, 중풍 등 성인병의 원인은 무엇인가? 교육 부
재의 현실이 낳은 비극이 곧 빠빠의 현대병이다. 보릿고개의  가난했던 시절은 비록 전염병
은 많았어도 고혈압, 당뇨는 없었다. 그때 한국 의사 빠빠들은 고혈압 환자 하나만 발견되면 
서로 싸우다시피 만나보려 애썼다. 고혈압 환자를 만나 그것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굉장
히 드문 관계로... 그러나 이제는 아빠, 엄마, 형제 빠빠 중 하나는 고혈압이요, 당뇨요, 알레
르기성 무슨병 등 연구 과제가 즐비하니, 참으로 행복한 의사 빠빠들이다(?). 연구하기 좋으
니까(?).
  빠빠라기 신종질환 5
  유식이 병! : 학식은 필히 가져야 돼! 학식이 없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야! 수단과 방법
을 가리지 말고 유식의 근원인 대학엔 꼭 들어가야 돼! 부모 빠빠,  스승 빠빠, 자식 빠빠들
은 제정신을 못 차리고 대학(큰 학문의 길)을 향해 매진하고 있다. 대학이라는 참뜻도 망각
한 채... 옛날 우리나라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한 토막이다. 어느 산골마을에 사는  사람이 
한양에 사는 양반 사위를 보게 되었는데, 그 사위는 서당엘  많이 다닌 아주 유식한 사람이
었다. 신부 가족들은 유식한 사위를 맞이하게 되었다고 동네사람들의 부러움까지 받으며 의
기 양양한 혼례식을 치렀겠다...! 신부집에서는 연일 잔치를 치르며 즐거워하였다. 하루는 밤
이 깊었는데 큰 소동이 신랑신부의  방안까지 들려왔다. "호랑이 한  마리가 산에서 내려와 
장인을 잡아갔으니 속히 사람들을 깨워  뒤따라 오시오" 라는 말을  남기고, 신부의 동생은 
호랑이의 뒤를 쫓아가고 있었던 것... 이 말을 들은  신랑은 동네사람들을 향해 소리를 지르
며 나오기를 요청했다.
  원산지호가 자근산래하야 오인장인을 착거래하니 유총자는 지총래하고 유창자는 지창래하
고 무총무창자는 개지장하고 속속래하라. 즉, '먼 산 호랑이가 가까운 산에서부터 와서 나의 
장인을 잡아갔으니 총이 있는 사람은 총을 가지고 오고, 창이  있는 사람은 창을 가지고 오
고, 총도 창도 없는 자는 모두 몽둥이를 가지고 빨리빨리 나오너라'이런  뜻의 말을, 유식하
여 한문으로만 밤새 떠들고 다녔기에 동네사람들이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그랬으니 장인은 
유식한 사위 덕에 영영 못 돌아오고 말았던 것! 그런데 더욱 기가 막힌 일이 또 있었으니... 
고을 사또가 장인을 죽게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한양 신랑을  감옥에 가두어버린 것이다. 그
때 신부가 면회를 와서 서로 안타까운 마음을 나누며 손을 잡으려고 팔을 뻗었으나 닿을 듯 
말듯 서로의 손끝만 스칠 뿐이었다. 그때 유식이 또 한 번 실력을 발휘했는데...
  여수가 단하거든 오수가 장하거나 오수가 단하거든 여수가 장할 것이지  '너의 손이 짧거
든 내 손이 길거나, 내 손이 짧거든 너의 손이 길 것이지'라는 말을 한문으로 읊는 것을 본 
신부는 기가 막힐 수밖에... 하여튼 유식한 그 신랑도 장인도 잃고, 감옥살이까지 하게  되었
는데...
  인과응보 : 우리는 왜? 진실한 마음보다는  유식한 사람이 되고자, 많은 졸업장을 갖고자 
이렇게 아귀다툼을 벌이는 것인가? 물론  유식한 것이 꼭 나쁘다거나,  졸업장을 많이 가진 
것이 반드시 좋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마음의 기본을 잃고  무엇이 중요한지 생각도 
해보지 않으면서 그 열기가 너무 지나치기 때문에 그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무슨 일이든 문
제를 해결하려면 그 근원부터 살펴봐야 하는데... 우리는 왜?  대학을 꼭 보내려거나 가려고 
할까? 좀더 나은 직장, 좀더 좋은 위치에 서려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편안한 생활, 행복한 
삶을 향해 달리는 것인데... 행복, 편안함은 어디에 있는가? 부정한 방법으로 자식을  입학시
켜 놓고 마음 졸이는 부모 빠빠의 마음은 과연 편안할는지... 큰 학문을 가르치는 자신의 위
치를 망각하고 좀더 안락한 생활을 위해 둥그런 쇠뭉치(돈)를 손에  쥔 스승 빠빠들의 마음
은 또 어떠한가 말이다... 갓 태어난 아장아장 걷는 자식을  놓고 참다움, 선행, 사랑을 가르
치는 부모들은 사라지고 '1 + 1 = 몇 개'라는 식의 지식만 주입시켜 부모  빠빠라기들이 지
식 만능주의 세계를 만들어버렸다. 아는 것이 많은 세대이기에 병도 많을 수밖에... TV에서 
위암에 대해 설명하면 들은 지식으로 꿰어 맞춰 위가 조금만 쓰려도 위암이 아닌가? 근심하
여 마음의 병부터 유발시킨다.
  낙이불음 애이불상 : 또 행복하게 살기 위해 달려온 길들이 도리어 불행을 초래하지는 않
는지... 대학에 붙은 빠빠들은 즐거워서 어쩔 줄 몰라 한다. 그러나 즐거움도 지나치면  병이 
되는 법... 너무 좋아서 정신을 잃은 학부모 빠빠도 있었다는데, 그것은 경락의 흐름이  극단
적으로 흘렀기 때문이다. 또한 낙방한 빠빠들은 반대로 실망, 괴로움에 지쳐 자리에 눕는 경
우가 허다하다. 이 두 경우 모두 극단에 치우쳐 마음 상하고 몸 망가뜨리는 결과를  낳았다. 
동양의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중용은 건강이요, 치우침은 병이다.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는 극단을 좋아하는 스스로 병을 만들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공자
님께서도 '즐거워하되 너무 음탕하지 말고, 슬퍼하되 마음이 상할 정도로 슬퍼하지 말라'는 
중용의 도를 말씀하셨는데, 오늘의 학부모, 학생 빠빠들에게도 합당한 가르침이 아닐런지...
  빠빠라기 신종질환 6
  조급증이 병! : 얼마 전 태국에서 한 승려가 본인의  진찰실을 찾아왔는데... 한국말이라고
는 한 마디도 못했지만, '빨리빨리'라는  말은 잘한다고 했다. 이유인즉, 우리나라  사람들이 
동남아시아에 관광을 가서 퍼뜨려놓은 거란다. 식당에 가서도 빨리빨리. 호텔에 가서도 빨리
빨리. 공원에 가서도 빨리빨리. 어른도 빨리빨리. 아이도 빨리빨리. 여기 옛이야기가 있다.
  어떤 노인네가 외동딸을 금지옥엽으로 키워놓고, 시집을  보내지 못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노인의 마음에 꼭 맞는 총각을 수년간 찾아봤지만 모두 허사였고, 앞으로도  나타
날 것 같지 않아 더욱 근심이  쌓여만 갔는데... 그러면 그 노인의  마음에 드는 신랑감이란 
어떤 조건을 갖춰야 했길래 그다지도 구하기가 힘들었을까? 그 조건인즉, 성격이 아주 급한 
사람이었던 것. 사내가 느리고 느긋하면 큰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한 노인은 성질 급한 사
람만 찾다가 귀한 딸을 노처녀로 만들어버렸는데. 그러던 어느 날 주막에서 기가 막히게 마
음에 드는 사윗감을 발견하게 되었다. 주막집 뒷간(화장실)을 우연히 지나고 있었는데 한 젊
은이가 일을 보려고 허리끈을 풀다가 갑자기 허리춤에 칼을  꺼내는 것이었다. 놀라서 가만
히 지켜보았더니...
  허리끈이 잘 안 풀어지니까 그것을 싹뚝! 잘라버리는 게 아닌가! 노인은 기쁜 마음으로 '
저 총각이야말로 내 사윗감이구나!'생각하고 그의 뒤를 따라가서  혼인 날짜를 잡자고 했으
니, 청년왈, "날짜를 따로 잡을 게 뭐  있습니까? 급한데 오늘 해치웁시다." 청년의 이와 같
은 대답에 더욱 마음이 흡족한 노인은 그날로 혼례를 치르고 딸을 성질 급한 총각에게 주었
겠다. 그날 밤 신방을 꾸며주고 노인은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데 갑자기 신방에서 신부의 
비명 소리가 들리는 게 아닌가? 끙끙거리는 소리와 울음소리가 범벅이 된 신방으로 뛰어갔
더니, 커다란 몽둥이를 든 신랑이 신부를 두들기고 있는 것이었다. 그 연유를 물었더니...
  여자가 한 집안에 시집을 왔으면 생남생녀를 해야 도리를  다하는 것일진대, 자녀를 낳지 
않아 대가 끊기게 생겼으니 나가라고 몽둥이 찜질을 하는 것이란다. 급해도 유분수지! 혼인 
첫날밤에 아이 낳지 않는다고 성화를 부렸으니... 하여튼 성질 급한 사윗감 고르다가 낭패를 
당한 노인은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는데... 우리는 과연 비웃어 넘길 자격이 있을까! 구정연
휴 민족의 대이동이 있던 날.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고 싶은 마음은 모두가 같았는데, 고속도
로는 그 이름을 무색케 하기에 충분했었다. 그 상황에서도 또  한 번 급한 빠빠라기들이 이
기주의가 발동을 했는데... 분명 '노견 주행 금지'라는 간판을  '노견 주행 허가'라는 표어로 
읽는 빠빠들이 그 얼마며, 중앙선을 넘어 질주해 앞에서 끼어들기를 한 빠빠들은 또 없었던
가? 많은 사람들이 고속도로 위에서 조금씩 진행하는 것을 기다리고 있는데 위급할 때나 쓰
는 노견을 쏜살같이 달려와서  끼어드는가 하면, 휴게소 근처에서는  그곳에 들르는 것처럼 
당연하게 노견으로 달려 들어와 쉬지 않고 앞으로 끼어들었던 빠빠들이 또 몇이었던가 말이
다. 급하다 급해! 이것이 빠빠라기들의 특성이 되어버렸고, 그래서 현대를 화의 시대라 칭하
는데.
  빨리 빨리를 한의학적으로 말하면 화로 표현을 할 수 있는데, 불기운이 많은 세대가 받아
야 할 과보를 우리는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구정연휴 동안만 해도 빨리 빨리의 빠빠들은 
천여 건의 교통사고에 백여명의 사상자를 냈다고 한다. 또한  이 조급한 성격은 인체내에서
도 영향을 미쳐 빠빠들의 병은 갈수록 화병 질환이 늘어가고  있는 설정이다. 그 증거가 바
로, 노인들에게만 오던 중풍이 20대의 활기찬 청소년에게 까지 번지고 있으며, 난시로  인한 
안경을 낀 어린 학생들이 날로 늘어가며, 뒷목이 뻣뻣하고 골이 빠개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
는 빠빠라기들이 늘어가고 있는 것인데 이 모두가 빨리 빨리의 조급함이 그 원인인 것이다.
  조급한 마음의 소유자들은 자신의 욕구대로 되지 않으면 화가 머리끝까지 치켜 올라가고, 
마음먹었던 것이 이루어지면 또 너무 좋아서 열이 머리까지  올라가 뇌혈관이 터지고. 상기
된 열은 눈을 침침하게 하며, 뇌세포까지 파괴시켜 기억력도 점점 상실되는 결과를 낳고 있
는 실정이 아닌가? 열로 인해  망가진 몽뚱이를 끌고 다니는  빠빠라기들이여. 좋아도 너무 
좋아하지 말고, 화가 나도 지나치게 화를 내지 말며 느긋함, 기다리는 마음,  조심성, 양보하
는 마음을 가져보심이 어떠하실지... 또한 혼인식 첫날밤에 자식 없다 한탄하는 청년과 같은 
빠빠들이요! 우물가에 가서 숭늉 찾는 조급함을 가진 빠빠들이여! 숨 한번 들이쉼이 어떠하
실런지! 저 어리석은 말법  시대의 전쟁 도발은 아주  나쁜 징조이며, 거기에 부화뇌동하는 
성급한 마음의 빠빠들은 두 번째의 악마적 징후가 아닌가? 모든 살생의 근본이 곧 이 불 같
은 마음이 아니고 무엇이랴!
  빠빠라기 신종질환 7
  업병 : 지구는 많은 별들의 간섭을 받고 있다. 태양의 자외선, 적외선 등... 필요한  양만큼 
걸러내주는 여과기능을 소위 오존층이라 불리우는 대기권의 가장 밖에서 한다. 이것이 얇아
지거나 헐거워지면 커다란 구멍이  생기고, 그 구멍을 통하여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지구를 
통과하는데, 지구촌의 생태계를 뒤흔들어놓는다. 실제 남극과 북극에 뚫린 구멍은 대륙 만한 
오존층 구멍인데 전 세계 과학자들은 경악하고 있다. '프레온'가스 종류가 이곳을 파괴하는 
주요 범인인데, 폭발성 비행체 등이나 무스 등의 혼합가스성 물질에서 나온다고 한다.  이것
은 즉각 인간의 신체에도 변화를 일으키는데, 아마도 알려지지  않은 괴이한 증상이 나와도 
그 원인을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 문명 빠빠들은 어서 지구를 탈출하기 위해 비행체를 만들
자고 야단일테고, 다른 혹성을 침략, 점령하려고 음모를 꾸밀 것이다.
  더 오래 차분히 쓸 수 있는 지구를 이리저리 흔들어 그 삶의 균형을 깨뜨리는 이유는  무
엇일까? 소위 '자연정복 망상'에 취한 문명 빠빠들의 무지 때문이다. 자연을 정복한다는 정
복욕은 오직 인상에 집착한 인간 위주의 교만 때문이다. 그나마 인간끼리도 분열 없이 잘살
지 못하고 툭하면 전쟁이다.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의 자연파괴 학대행위는 수백만의 굶주
림을 해결할 수 있는 기름을 바다에 내버리고, 몇 년 걸려야 진압할 수 있다는 사막 유정의 
화재를 만들어냈다. 그 손실은 천문학적이니... 있는 자연도  잘 활용하지 못하고, 적의 손에 
넘기기보다는 아예 없애 버린다. 무생물 기름이 무슨 죄가 있다는 말인가?
  기름을 제 할 일 하게 만들고, 식물로 하여금 꽃 피고 열매 맺는 기능을 다하게  하고, 사
람으로 하여금 성장하여 천수를 누리게끔 하는 자연스러움이  사라진 시대. 자르고, 태우고, 
죽여서 만드는 인재가 천재보다 더 무섭지 않은가! 하늘의 번개도 잠깐이요, 홍수나 가뭄도 
주기가 있다. 저 사막의 기름 먼지가 하늘을 덮고, 문명 빠빠들의 과학실험으로 만든 오존층
의 파괴는 '신종질환'의 예고편이다. 자! 앉아서 연속 상영될 끔찍한 본 영화를 기다릴 것인
가? 지금이라도 참회해야 할 것인가? 건강식품 몇 개 외워서 나을 지구촌이 아니요, 조깅으
로 회복되거나 몇 가지 호흡법으로 좋아질 땅이 아니다. 공업을  나누고 있는 모든 이가 참
회해야 자멸을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이가...
  교육 부재 문명 : 환갑잔치에서 한잔 얼큰히 잡수신  오늘의 주인공 할아버지께서는 너무 
기분이 좋았다. 지난 설움도 한낱 꿈이요, 많은 축하객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는  오늘이야
말로 아니 놀고 무엇하랴? 덩실덩실 춤을 추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갑자기 쓰러져버린 것이
다. 좌측 반신을 못 쓰는 소위 중풍이 온 것이다. 기가 막힐 일이다. 길흉 대소사가 다 이렇
게 맞물고 돌아가는가? 화를 내다가 쓰러져 오는 예는 많으나 즐거워하다가도 병이 침범하
니 건강의 수호로 의외로 어렵다. 양극단을 벗은 성성적적 한 열반의 터득만이 참다운 의지
처가 아닌가? 아기 빠빠의 교육을 담당해야  할 어른 빠빠조차 알지 못하고 당하는  질병을 
어찌 어린이가 감당하랴?
  어른들의 무지로 인한 어린 빠빠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겨라!'의 승부욕을 일찍
부터 가르쳐서 동심을 물들이고, 열등의식을  확고하게 넣어줘서 우리집은 '없는  집'이라는 
단상을 가르쳐 번뇌를 주고, '의심 없이 맹신하라' 교육해서 멍청이를 만들어, 믿어야 할 것
을 의심해서 혼란을 나누어줄 뿐이다.  먹어보지 않은 것을 권할 수  없듯이 먼저 어른들이 
참다운 지혜 음식을 섭취해야 한다.  '병으로 인한 화보다 약으로 인한  앙화가 더 많다.'옛 
성인의 말씀인 데 차라리 잘  모르면 내버려두는 것이 더 낫다는  말이다. 잘못된 지식으로 
약을 잘못 투여하면 그냥 둬서 나을 병이 더 도지게 된다. 교육으로 인한 마음 공해가 심각
한 이때 차라리 내버려두는 자연 방임이 나을 것 같은  세태가 아닌지... 어른 빠빠 따라 하
다가는 전쟁이나 배우고, 중풍, 당뇨 성인병 밖에 더 얻겠는가? 차라리 자연스럽게 어린  빠
빠의 영혼을 놓아줘보자. 스스로 터득하는 길이 오히려?!
  빠빠라기 신종질환 8
  진정한 아름다움 : 환자  대기실에서 요란스런 중년부인의 음성.  "빨리 들어오라니까. 왜 
그러고 있어?" 잠시 후. 시꺼먼 선글라스를 낀 아가씨  빠빠가 부인 빠빠의 뒤를 따라 진찰
실로 들어왔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백사장도 아닌 진찰실에서 좀처럼  안경을 벗으려는 
기색이 보이지 않는 아가씨 빠빠. 이유인즉. 대학시험에 덜커덕 붙어준 딸이 고마워서  쌍꺼
풀 수술에 거금을 투자했는데. 선글라스를 벗은 아가씨의 얼굴은  이만저만 볼썽 사나운 것
이 아니었다. 눈두덩이는 퉁퉁 부어 있었고, 누런 진물이 하얀 붕대를 물들여놓은 상태였다. 
부인과 아가씨 빠빠의 소원은 흉터를 남기지 않고, 빨리 예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 옛 성
인께서 말씀하신 우화 한 토막. 옛날에 어떤 사람이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
다. 다른 곳은 모두 나무랄 데가 없이 예쁜데 코가 추하게 생겨서 마음에 들지가 않았다. 어
느 날 그는 길거리에서 아름다운  코를 지닌 어떤 여인을 보자  한 계책을 생각해냈다. "저 
여자의 코를 베어다 내 아내의 코에 붙여놓으면 집사람은 세상에서 찾아보기 힘든 절세 미
인이 되겠구나!" 곧바로 길 가던  여인의 코를 베어 가지고  집으로 달려가서 의기양양하게 
아내를 부르며 좋은 선물을 하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좋은 선물이라는 남편의 말에 궁금한 아내가 황급히 대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자, 그는 부
인의 코를 싹둑 잘라버리고 그 자리에 다른 여인의 코를 가져다 붙어놓았다. 재빠르게...  그
러나 그 코가 제대로 붙어 있을 리가 없었으니. 못났지만 튼튼한 코마저 망가뜨려놓는 어리
석음을 범하고 말았던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아름다움에 대한 열망은 여전한가 보다.  단지 
다른 점이란 칼로 코를 싹둑 자르는 어리석은 남편 대신 거금의 돈을 주어 발달된 과학문명
에 아내, 딸을 맡기는 남성 빠빠라기들이 많아졌다는 것. 요즈음 길거리의 많은 여성 빠빠라
기들. 모두자 잘(?)생겼다는 느낌. 노오란 머리카락! 오똑한 코!  앵두 같은 입술! 흡사 서양
배우들을 보는 듯한 착각마저 일으키게 만드니! 참 모두들 잘생겼다고  말해주고 싶은데 개
성이 있다는 말은 아끼고픈 마음. 조금 전 종로에서 본 얼굴과 같은 얼굴이 명동에도,  잠실
에도, 광화문에도... 마치 기계로 찍어낸 듯한 얼굴들.  아름다움의 가치를 어디에 두고 있는
지. 쌍꺼풀이 있는 눈? 오똑한 코? 늘씬한 몸매? 아니면.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여 샘물처럼 
솟아오르는 생명력을 지닌 여인?! 여사서에 이르기를 여성의 네 가지  행실을 강조한 바 있
는데 첫째가 덕행, 둘째는 말씨, 셋째는 용모, 넷째는 솜씨다. 여기서 말하는 용모란  얼굴이 
잘 생기고 고운 것이 아니고, 정갈하여 단정하게 몸과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남
과 비교하는 정갈하지 못한 마음을 가지고 남보다 좀더 잘생겨지고자 외모를  뜯어고치기에
만 여념이 없으니 건강한 아름다움이라는  말을 아끼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덕행은 고사하
고... 빠빠의 문명은 눈두덩이에 금을 그어 쌍꺼풀을 만들 수는 있을지언정 눈동자의 빛깔마
저 심오하고 맑게 그리고 그윽하게 바꿀 수는 없으리라.
  잘생긴 쌍꺼풀 속의 눈자위는 오직 탐욕, 갈등, 분노의 마음들만이 득시글득시글 하지  않
는가? 비교하는 마음은 분노를 일으키고, 분노는 화를  만들어 치솟으면 눈동자는 충혈되고 
광채를 잃으며 시력까지 저하시켜 예쁜 쌍꺼풀 위에 커다란 안경을 올려놓게 될 수도 있다
는 것. 증오와 시기 질투의 눈빛을 감출 수 없이... 아! 회칠한 무덤 같은 이 세상. "잘생겼건 
못생겼건 이 몸뚱아리는 언젠가 소멸된다는 것을 깨달아 알면 이 세상의 인연이 저절로 휴
식하고, 무심한 경지를 깨달아 들어가게 된다"고 (채근담)은 가르친다. 이 시대!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을 좋아하는 빠빠들이여! 인위적인 시대여! 이 육체는 허망하여 곧  사라질 존재요. 
이 육체 속에 숨어 있는 한 물건이 만드는 숱한 생각과 사념들은 영원히 그대 곁에서  떠나
지 않음을 기억하심이 어떨런지... 부모 원망이나 하고 얼굴을 뜯고 싸바르는 사악한 생각과 
어리석은 교만심은 다시 퉁퉁 부은 눈두덩이를 가진 존재로 윤회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
는가? 아니! 못생겨도 좋으니 인간으로 재생함이야 축복이렷다. 눈 튀어나온 동물이나 귀신
이 어디 한둘인가? 그 세계에 내가 안 태어난다는 보장도 없는 육도의 흐름 속에서 형체를 
받는 원인이 되는 미세한 한 생각을 깨달아 미치지 못하고 오늘도 부침하는 지구촌의 무지
몽매한 빠빠들이여.
  (능엄경)에 세존의 이런 말씀이 있으니 유방, 눈, 코보다는  정을 수술하라는 뜻으로 경고
장이다. 아닌아! 일체 중생이 실은 본래 진정하건마는 망견으로 인하여 망습이 생기고 이것
으로 말미암아 내분과 외분이 나뉘었느니라! 아닌아!  내분이라 함은 모든 애욕의 염착함으
로 망령된 정이 생기고 쌓여 쉬지 않으면 능히 애욕의  물을 내느리라. 그러므로 중생이 마
음에 진수성찬을 생각하면 입에 침이 괴고, 옛사람을 그리워하거나 원망하면 눈물이 흐르고, 
재보를 탐욕하여 마음으로 침을 흘리고, 음행할 것에 애착하면  남녀의 성기에 애액이 흐르
나니라. 아닌아! 여러 가지 애정이  비록 다르나 물이 흘러 맺힘은  마찬가지다. 어두워져서 
우둔하게 되나니라. 정이 많고 상이 적으면 횡생에 들어가서 중하면 모군이 되고 경하면 우
군(깃털 축생)이 되나니라. 정이 더 많아 칠정삼상이 되면 수륜을 빠져 내려가 화제에 나는
데 맹렬한 화기를 받아 몸이 아귀가 되고 항상 불이 타며 물도 몸을 해하여 먹지도  마시지
도 못하고... (이하 생략)
  빠빠라기 신종질환 9
  입후보 : 잘살던 시골 빠빠 동네의 고민이다. 동창생도 나왔고, 사돈도 나왔다. 게다가 옆
집 가게 주인도... 의리와 우정이냐? 가문의 체통이냐? 이웃사촌의  정이냐? 혼란에 빠진 시
골빠빠들은 슬글슬금 눈치를 본다. 마음 결정하기도 그렇지만 다 잃기는 싫다. 차에도  부속
이 2만 가지라는데 인간관계야 말해서 무엇하랴? 동창도 긴요하고, 사돈도 필요하고, 이웃도
없어서는 안 되는데... 뽑을  '선'의 선자인가? 선거야말로  두통거리다. 누가 '심장이냐?'를 
뽑자는 것인가? 누가 '엔진이냐?' 준부가 중심이란다. 전부가 머리란다.  손발 노릇은 안 한
단다. 누군가 분명히 떨어져야 하는 비극적 만남의  투쟁은 '꼭 이래야 하나?'를 생각지 않
을 수 없다. 불과 몇 표 차로 낙방한 후보자 빠빠는 화병으로 누울 것이 자명하고, 처음부터 
뻔한 싸움을 자청했던 후보자는 두고두고  멍청이로 불릴 것이다. 아슬아슬한  차이로 이긴 
승리자는 조마조마하다 병 걸릴 것이며, 압승을 거둔 승자 역시 거만하여 도취하다 병 걸릴
지 모른다. 성인을 투표해서 뽑는 일은 없다. 성인은  인가로 내려왔다. 진리를 다수결에 의
해서 투표할까 겁이 난다.
  자기 분수를 모르고 무조건 다 내가 명령할 수 있는 두뇌를 가졌다고 나서다니 과연 손발
은 누구인가? 모두 다 잘났다고, 혹은 나만 일꾼이라고 내세우니 묵묵히  제 할 일 하는 사
계절이 웃을 일이다. 하여간 경쟁하는  빠빠는 누가 행복한가도 투표에 의할  것이다. '내가 
더 행복합니다.' '아닙니다, 내가 더...' 외치는 행복의원  후보자는 입에 침을 튀기고... 쌍나
팔 같은 차에 고성능 마이크로 '행복은 내가!'를 고래고래... 진실로 향기 나는 꽃은 그냥 향
내가 날 뿐이다. 행복한 냄새는 그냥 풍겨 나올 뿐, '내가 더'라는  말이 붙을 때는 내가 날 
뿐이다.
  선불장 : 조사를 투표에 의해 선출한 일이 있던가? 옛 이야기. 석상 스님의 시자 구봉 스
님은, 스승 '석상'의 입적 후 주지스님이 다수의 힘, 대중의  뜻에 의해 조실의 뒷자리를 잇
는 행동을 보자 단호히 물었다. 도휴거헐거(도란 쉬어가고 쉬어가며) 일념만년거(한 생각 만
년같이 하며) 한회고목거(찬 재와 고목같이 해가며) 고묘리향로거(옛 사당의 향로같이 하며) 
일조백련거(한 가닥 흰 실 가듯 하라) 이런 시가 있으니. '무엇을 밝혔는가? 어른, 석상스님
의 뜻을 이르시오!'하자, 주지스님은 '다만 일색의  일을 밝혔노라!'했다. 구봉 스님은 '돌아
가신 석상 큰스님의 뜻은 꿈에도 못 보았다'  부정하였으니, 주지는 이 많은 대중을 불러모
으고는 향 사르는 사이 단상에서 앉은 채 죽었다. 많은  대중은 구봉의 처사를 괘씸하게 여
겨 생사의 자유를 얻은 주지의  가르침을 막은 구봉 선사를 원망했다.  그러자 구봉은 죽은 
주지의 등을 쓰다듬으며 '그렇긴 해도 석상 선사의 뜻은 꿈에도 못 보았다'타일렀다.
  자! 선실을 선불장이라 했는데 부처를 어찌 뽑겠는가? 그리고 무슨  일을 석상 선사의 그 
시에서는 밝혔는가? 모든 도의 입후보자는 조사선 문중의 부처 뽑는 공안 관문이 곧 선불장
임을 내걸고 응시해야 했던 옛 사람의 가풍을...
  빠빠라기 신종질환 10
  아주머니 한 분이 아들인 듯한 20대 중반의 청년빠빠를  데리고 진찰실 문을 두드렸다. "
요새 통 기운을 못 차려요. 군대 제대하고 복학을 했는데 학교 다니기가 힘드는지..." 외형상
으로 그 누가 봐도 '건장하다'싶은 아들을 두고 하는 아주머니의 말이다. 특별히 아픈 곳은 
없느냐는 필자의 질문에 답하던 학생의 호소는 밤새 잠을 못 이루다가 새벽 네다섯 시가 되
어서야 잠깐 눈을 붙일 수가 있단다. 또한 대화 도중 청년은 힐끔힐끔 어머니를 쳐다보는가 
했는데 자세히 보니 고개가 약간 옆으로 돌아가 있는 것이  아닌가. 보호자를 잠시 나가 있
게 하고 얘기를 계속해 나가던 중 청년의 고민거리가 터져 나왔다.
  사귀던 여자 친구가 있었는데 군대에 갔다 와보니 다른 데로 시집을 가 버렸더란다. 입대
하던 날 배웅까지 나와서, "기달릴 테니  잘 갔다 오라"고 철석같이 약속을  해놓고... 그 후 
친구들과 만나 얘기를 하다가도 옆에서 여자빠빠들이 모여 있으면 자신을 흉보는 것 같아서 
자꾸 신경 쓰여 그  쪽으로 고개가 돌아가곤 한다는데.  그때부터 고개가 삐딱해졌다는 것! 
거기다가 그런 자신의 태도가 혐오스러워  견딜 수 없다는 것. 밤이  되어 잠자리에 누우면 
낮에 있었던 여자들의 쑥덕거림. 그것에 연연하여 벗어나지 못하고 신경 쓰는 자신의  태도. 
이 모두가 잠 못 이루게 하는 원인이었다. 아무리 잠을 청해 봐도 정신은 더욱더 또렷또렷!
  여기 장기에 나오는 예화 한 토막. 자신의 그림자를  두려워하고 발소리를 싫어한 나머지 
그것을 떨쳐버리기로 결심한 사람이 있었다. 그의 머리에 떠오른 방법은 그것으로부터 도망
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달리기 시작했다. 열심히. 그러나 달리면 달릴수록 새로운 발소
리가 늘어만 가고 그림자는 계속 그를 따라왔다. 이 모든  재난이 자기의 달리는 속도가 아
직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라 생각한 그는 잠시도 멈추지 않고  더욱 빠르게 달렸겠다?! 그리
하여 마침내 힘이 다해 쓰러져버리고 말았다. 그늘 속으로만  걸어 들어갔어도 그림자는 사
라졌을텐데... 자리에 가만히 앉아만 있었어도 발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을 것이고...  이 
시대 빠빠들 불면증의 원인은 결국 잠을 자야겠다는 집착에서 온다. 결국 기억하기 싫고, 잊
고 싶은 것으로부터의 도망은 잠을 청하는 것이었는데... 원하면 원할수록 잠은 더욱 달아나
버린다. 마치 그림자를 피해 달리는 그 사람처럼...
  맹신 암기 빠빠문명시대 : 키는  160센티미터, 몸무게 80킬로그램. 한방에서 형성기쇠,  즉 
겉모습은 성한데 기운은 약해진다는 체질의 뚱뚱한 빠빠. 마치  1톤까지 물건을 실을 수 있
는 타이탄 트럭이 3, 4톤씩 물건을 실은 것과도  같으니, 그러면서 자랑스러운 듯 말하기를, 
"매일같이 2년간 건강에 좋다는 구연산을 먹었는데 왜 이렇게 몸의  기운은 더 없어지느냐" 
하소연을 하였다. 아하. 이 빠빠 선생  병의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었으니.  몸에 좋다 하니 
자신의 체질은 보지 않고 그저 습관적으로 구연산을 복용한 결과! 구연산의 시디신 맛은 사
람의 몸에 수기를 증가시켜서 더욱 뚱뚱하게 하는 것인데도... 저축력의 증가와 함께. 비대함
은 소비성보다 저축성이 강한 체질 아닌가? 제아무리 과대포장된 구연산 선전의 약효라 해
도 신맛의 '에센스'인 그 본질은 수렴과 저축성의 증대효과이다. 살이 찌는 대로 내버려두는 
것보다 신맛을 계속 섭취하는 것은 더욱  나쁘다. 어디 구연산뿐이랴?! 맹신적인 지식의 남
용 사례는 이 암기 위주의 문명 빠빠가 저지르는 최대의 비극이다.
  (주역)정자의 서문에, '역은 번역야니 수시교역 하야 이종도'라 하였다. 즉 주역의 본뜻은 
변화이니 '수시로 때에 따라 변해 바꾸는  것으로 도를 삼는다'는 뜻이다. 고지식한 암기의 
틀에서 벗어나 응용이 자재해야 한다는 명제는 시급하다. 매운  맛은 발산되니 마른 사람에
게 독이요, 신맛은 거두니 뚱뚱한 사람에게 독이 아닌가? 약은 곧 독이니 어찌 신중하지 않
을래야 않을 수 있겠는가? 마른 사람은  신맛이 약이요, 뚱뚱한 사람은 매운  맛이 약될 수 
있다. 기바 동자에게 문수보살이 말했다. '약이 꼭 되는 풀을 가져오너라.'천하 명의 기바는 
세존 당시 가장 빛나는 명의였었다. 부처님을 뵈옵고,  '저 분은 심의왕이시고, 나는 육체병
의 왕이다'했던 기바. 문수보살에게 한 줄기 풀을 뽑아 바쳤다. 그의 눈에 약  아닌 풀이 어
디 있었으랴?! 수업 당시 그의 스승이, '전인도를 다니며 약이 안 될 풀을 구해 오너라'부탁
하자, 아무리 찾아다녀도 기바 그의 눈에는  약 아닌 풀이 없음을 고백하게 되었다.  기꺼이 
스승은 인가를 내리고, 미래의 의성이라 칭찬을 받은 기바 동자. 그러나 문수보살은  기바의 
풀을 잡고는 '이것이 곧 독이니라'하셨으니, 천하 기바의 심장도 섬뜩했으리라.
  형편없는 지식은 말할 것도 없지만 갈고 닦은 지식이라도 그 선과 악을 낱낱이 알아야 지
혜로 승화될 수 있다. 문수보살의 뜻은 어디에 있었을까? '약 되는  풀을 가져오너라!'의 그 
약은 무엇이며, 기바의 풀을 보고 '독'이라 하신 그 독은 무엇인가? 시비가 밝지 않으면 문
득 속으리라.
  빠빠라기 신종질환 11
  추장 빠빠 발광기 : 문명 빠빠들의 추장들은  웃긴다. 옛날의 추장들은 몸소 앞에 나서서 
지휘도 하고, 전쟁시는 창과 방패를 손수 잡고 최전선에서 그 용맹을 보여주었다. 지금의 추
장들은 연설이나 하고 전쟁시켜 놓고  골프, 낚시, 수영하러 들로  바다로 나가지는 않았다. 
옛날 추장이 보면 까무러칠 일이다. 몸소 나가서 부딪치지 않고도 어찌 왕 노릇을 할 수 있
는지 의아해 할 것이 뻔하다. 싸울 때에는 적에게 오히려 유리할 것이 뻔한 조름끈(넥타이)
을 목에다 주렁주렁 매단  부하들과 회의만 계속하고,  철상자(TV)에서 나타나는 사람들의 
말과 의견을 보고 듣고, 긴 끈이 달린  수세미 같은 기계를 귀에 대고 들으며 말하곤  한다. 
오직 하는 일은 '싸워라'명령 내리는 일 뿐이며, 손수 싸우는 일은 결코 없다.
  학생 빠빠들은 공부 안 하고 이상한 두건을 쓰고 불병을 던지고 , 같은 민족 젊은 빠빠는 
몽둥이로 패고 고추냄새 연기나는 파인애플 같은 것을 던지고 야단이다. 이 싸움을 시킨 나
으리 추장과 그 부하들은 불병과 연기 앞에 나와 직접  지휘하는 일이 없다. 누가 대장인지 
전혀 알 수 없고 불쌍한 젊은 빠빠들만 다치고 죽어간다. 그래도 각 편의 추장들은 직접 나
서지는 않고 조름끈을 단정히 목에 졸라 메고는 방안에서 쑥덕쑥덕 회의만 한다. 젊은 학생 
빠빠들은 '추장 물러나라'고 자신의 몸에다 이상한 물을 부으면서 불지르고 자살을 한다. 평
소에 멀거니 쳐다보고 있던 부모 빠빠는 어느 날 자기 자식이 죽는 것을 보자 피가  거꾸로 
올라 흥분한다. 갑자기 추장의 반대편이 되어서 외친다. 부모 빠빠도 이상하다.
  자식이 매일 싸우는 현장에 나가는 그곳이 바로 학교임을 잘 알면서도 큰 학교에 들어갈
수록 이름이 난다고 부추기며 싸움지옥에 자식을 집어넣는 데 온갖 정성을 다 기울인다. 심
지어는 같이 혈안이 되어 밤도 세워가면서 글자를 익히는 아들 딸을 도와주었는데 쌈터 학
교에 들어간 후로는 학교 근처에도 안 가본다. 불명을  맞고 고추연기를 맡아보려고는 전혀 
안 한다. 사랑이 있다면 진작에 말렸어야 하는데, 누군가 죽을 것이 뻔한 무서운 싸움을  하
는데도 자기 자식만 안 죽으면 그저 멀건히 쳐다만 본다. 힘센 추장이 하는 일이니까,  또는 
추장이 되고 싶어하는 다른 추장 지명자가 하는 일이니까  하고 내버려둔다. 옛날 추장들이 
보면 우스운 일이 바로 요즘의 문명 빠빠 추장되기 시합인데.
  옛날 시험은 추장과 추장이 부락민 앞에서 한판 승부로 결정한 다음 이긴 자가 추장이 디
면 그것으로 모든 부락이 그를 좇는다. 그런데 문명 빠빠  추장 지망자는 직접 나와서 싸우
지를 않고 앞장서서 진두 지휘하지 않고, 뒤에서 하얀 옷  위에 조름끈을 맨 모습으로 몽둥
이를 주거나 몸에다 불지르는 등으로 젊은 빠빠를 조종한다. 직접 또는 간접으로... 추장들보
다 훨씬 더 오래 살 수 있고 고귀하고 아름다운 젊은 빠빠들이 애꿎은 희생을 하게 만든 어
른 빠빠들은 어떤 머리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살 날이 더 많이 남은 어린  빠빠를 죽여서 곧 죽을 늙은 빠빠의  권력과 재산을 지킨다. 
참 이상한 일 아닌가? 옛날 장군과  추장의 용맹과 현장 지휘는 사라진  지 오래다. 이상한 
불이 번쩍거리는 기계 앞에서 톡톡 두드리는 것 하나만으로 어린 아이든 부녀자든 늙은이든 
한꺼번에 박살내버리는 불바다를 만드는 문명 빠빠들의 싸움도 그렇다. 옛날 진짜 전사들은 
아이 여자 없는 들판에서 힘을 겨루고 말았다. 그리고 창 하나에 한 사람 정도  죽어나가고, 
많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 얼마나 자신의 힘도 소모해야 하는지를  잘 알았다. 피를 보고 힘
쓰고 겨루다 보면 왜 이 짓을 해야 하는지 빨리 반성도 했다.  지금 문명 빠빠들은 불빛 스
위치들을 글자 겨루다 보면 왜 이 짓을 해야 하는지 빨리 반성도 했다. 지금 문명 빠빠들은 
불빛 스위치들을 글자 찍듯이 누르면 힘 하나도 안들이고 수십만 형제들은 못 알아보게 죽
일 수 있음을 자랑한다. 귀는 음악을 들으면서 즐거웁게 남이 죽어가는 장면을 보는 빠빠도 
있다. 그런 과학자 빠빠와 추장 빠빠들도 자기 식구가 죽을 때는 눈물을 흘린다. 비통해  한
다. 아마 이들에게도 약간 남은 감정은 있는가 보다. 차마 죽일 수 없는 마음이 자기 자식에
게는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긴  하지만, 그 반면에 추장에  도전하는 자식이나 친척들에게는 
용서가 없어진다. 심지어 추장자리 때문에 부인이나 자식도 끔찍이 죽이는 빠빠도 있었으니 
말이다. 이러한 이상한 짓거리의 싸움이 끝나고 나면 의사 빠빠들은 바쁘다. 꿰매고, 붙이고, 
자르는 등 부상자 치료하기 바쁘다.  매우 바빠서 일손이 달리다 보니  의사 빠빠들 수입이 
자꾸 올라가게 된다. 목에다 힘을 주게 되어서 으쓱 하게  되자 여자들은 의사 빠빠와 결혼
하고 싶어하게 된다. 의사 빠빠들은 오늘 수술한 젊은이가 왜 그렇게 끔찍하게 불구가 되었
는지 추장들에게 항의하지 않는다. 그저 주어진 일이라고 알고 일한다.
  이 짓을 안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잘 생각 안 해본다. 싸움 없는 세상을 꿈꾸는 것
이 어리석다고 생각한 의사 빠빠는 깊이 생각지 않고 썰고, 꿰매고, 붙이고, 자르는 일을 묵
묵히 한다. 추장들은 똑같이 하얀 옷 위에 목조름끈을 매고 오늘도 회의를 한다. 다음  싸움
은 누구와 할까...?
  
    초심음양동작론
  명분론 : 기껏해야 운동이라면 부모에게서 고교합격 기념 상품으로  얻은 일제 탁구 라켓
을 자랑스럽게 지니고 단기간 코치 받은 정도요, 태권도장, 아니 옛날에는 청도관이라  불리
웠던 도장에 불과 2주정도 다니다 맨발과  맨살의 도복, 그리고 찬 마루의  섬뜩함 등을 못 
견뎌 포기했던 필자요, 고등학교 시절 할 수 없이 끌려 다니던 유도 시간, 국사  선생님께서 
손수 프린트해서 나주어 주신 요가 포즈 흉내, 대학시절 덜덜 떨며 기어올랐던 백운대, 인수
봉, 도봉산 선인봉의 바위타기 A코스, B코스 등의 기억(물론 곧  고소 공포증으로 그만두었
지만) 정도를 떠올리는 필자다. 이제 겨우 40 좀 넘은 나이이고, 무리한 경연  끝에 얻은 풍
치로 이빨이 다 흔들거리는 의생 주제에 무슨 기초체력 단련이 있었겠으며, 기본 동작이 몸
에 배었겠는가? 다만 동양의학자로서 그럴싸하게 이 글이  제목을 '초심음양동작'이라 붙였
을 때는 그만한 사연이 있음을 주지해 주시기  바란다. 공자님께서도 대저 '명분을 먼저 세
우라'하셨거늘 이 글의 주 대의명분은 음양철학의 생활체육적 이해, 혹은 마음과 육체의 음
양상대적 조율연습이라 생각해본다. 왜 케케묵은 음양, 음양이라는 단어를 강조할까? 이것이 
체육, 건강, 행복 등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유럽 태권도의 대부 S 사범 :  이 글을 쓰기 불과 며칠  전 필자는 부산에서 S씨를 만나 
밤새워 토론하고, 같이 하루 종일 서울로 올라오면서 또 대화를 나누었다. 현재 독일에서 살
고 있는 S선생은 한국인으로서 유럽 태권도계의 대부로 알려진 유명한 분이다. 최초에는 광
부로 취직하여 건너간 독일을 중심으로 차차 이 민족의 태권도를 펼쳐나가 독일정부 수석사
범을 역임하는 등, 눈부시고 피나는 활동으로 많은 제자들이  유럽 전역에서 태권도 코리아
를 빛내고 있는 민족 무도교육의 장본인인 것이다. 필자와는  수년 전부터 동양철학적 사유
방식의 뜻이 맞아 자유로이 각자의  의견을 털어놓고 논의하는 사이다.  무술인과 의술인의 
만남은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동양사상의 날카로운 해부와 흡수에  있어서 S사범
의 통찰력은 아주 예리했기에 서로 배울 점이 많았다. 자!  S사범이 왜 음양철학을 깊이 파
고들어갔을까?
  운동으로 발달된 근육과 아예 생활화되어 버린 체육감각은 아마 어느 누구보다도  충실히 
실천해 왔다 자부하는 태권도의 대부께서  말이다. 무릇 초심자는 자칫하면 맹신하기  쉽고, 
숙련된 사람은 후배들에게 솔직하지 못한  법이다. 이 사범의 솔직한  견해로는 철학관점이 
없는 운동과 무술은 오히려 해독이 될 수도 있다는 요지인데.  이 글에서 내가 주장하는 주
된 내용이 바로 이 점이다. 모든 체조, 운동, 체력단련, 경기수련 등의 동작은 약도  되고 독
도 된다는 말이다. 힘찬 수련과 강도 높은 훈련의 반복으로 세계 정상을 다투던 그 분은 어
느날 회의와 절망에 빠졌다. 그러고는 태권도, 아니 모든 무도의 근원과 목적, 수련이  방향, 
모든 단련의 의의, 방법 등을 고전에서부터 출발하여 세차게  밀고 나아가 탐구하기 시작했
다. 서양의 어려운 의학 코스 대학도 수료해 가면서 말이다. 눈물겨운 멸시의 눈초리는 서양
과학 만능에 젖은 주위의 오해였고, 굳은 머리와 아픈 몸과의  투쟁은 듣는 이로 하여금 경
탄을 자아내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태권도의 올바른 체계화를 시도하는 그는 미쳤다면 미친 선구자인데 이는 필시 그의 솔직
성과 민족주의적 자부심으로 뭉쳐진 열정 때문이 아닐까?  왜 S사범은 수십 년의 체력단련
과 경기대전 끝에 극도로 피로해졌으며, 심지어 허리의 통증까지  느끼는 병적 현상까지 얻
었을까? 물론 무리해서 온 현상이겠지만 다른 이유는 없을까? 한번 추리해 보자.
  강과 약 : 강한 것과 약한 것은 우주의 상대적 성질이다. 강함은 언제나 유연함을 기본으
로 해야 하고 약함은 강함을 의지해야 한다. 그런데 무조건 강경일변도의 수행은 사람을 굳
게, 경직되게 만들었던 것이다. 혹 태권도의  동작과 쿵푸의 강과 약의 대표적 예가  아닐런
지? 문외한인 필자가 보기에는 태권도와 쿵푸에 각각 이미  강과 약이 섞여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이론적인 방향으로 보아  뻣뻣하고 강한 동작은 태권도  쪽이요, 유연하고 부드러운 
동작은 쿵푸쪽으로 보여진다(각자의 특징상 장단점도 없지 않겠다).
  약과 독 : 아침에 겨우 눈  비비고 일어나 졸린 상태에서 갑자기 충격을  주는 조깅 등의 
운동은 꼭 약이 될까? 조깅이 한동안 약이 된다고 떠들썩하더니만 어느 미국 의학박사 말에 
조깅이 심장마비의 원인이라고는 하는 세상이다. 태권도, 쿵푸, 조깅, 테니스, 배드민턴, 축구 
등의 스포츠가 다 독이란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약이라 할 수는 
없다. 내게 맞는 운동, 나의 체질적 소양에 적합한 수련, 나이와 성별에 따른 선택적 지혜가 
없다면 그 좋은 체육교육과 수련은 독이 될 수도 있는 얘기다.
  불완불급 : 강함은 양이요 남성적이요, 약함은 음이요  여성적이다. 사관학교 생도들의 절
도 있고 규격 있는 행진 및 포즈는 남성적이요, 부드러운 곡선과 하느적거리는 동작으로 이
루어진 춤은 여성적이다. '차렷!'자세의 긴장성은 남성적이요, '편히 쉬어!'의 여성적 자세는 
느슨하게 풀어준다. 누구나 다 차렷의 긴장을 계속할 수도 없고, 너무 '쉬어'의 이완 자세를 
오래 가지면 맛이 없는 법이다. 이제 건강의 조율사인  독자 여러분께서는 너무 긴장되지도 
너무 이완되어 느슨하지도 않은 기타줄 같은 중용의 상태를 창조하는 지혜를 터득해야 하겠
다. 불완불급, 느슨하지도 급하지도 않게 조율된 기타줄 상태야말로 가장 소리가 잘 나는 묘
한 중도 아니겠는가?
  승화된 동작 : 급하고도 열렬한 마음으로 세계 최고의 체력을 단련하겠다고 서둘렀던 S사
범님의 경험을 통한 종합적 의견은 이렇다. 태권도 자체가 이 민족의 전통과 지혜의 산물인 
만큼 이 안에는 선조들의 유산이 다 담겨 있을 것입니다. 분명히 경기나 승부, 공격  방어의 
방법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제어할 수 있는 힘을 육체적 동작을 통해 얻어 마음까
지도 평화, 행복감을 느낄 수 있게 구성되었을 것입니다. 경기 위주의 단련은 자칫하면 승기
만을 길러 강한 면을 강조하게 되다 보니 결국은 음양의 조화가 맞지 않아 질병을 얻게  되
죠. 일생 가야 싸움 한번 안 하고 지내는 사람에게 꼭 공격과 방어의 투쟁적 요소를 주입시
킬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보다는 전체적이고 조화로운 운동의 동작을 통해 마음과 몸의 희
열과 각성 등을 얻게 하여 진정한 수도의 방편으로 승화시켜야 합니다.
  동양철학의 음양관은 제게 많은 의미를 던져주었습니다. 빠른 동작(양)은 느린 동작(음)과 
짝이 맞아야 그 힘이 더하고, 위로 솟는 동작(양)은 아래로 처지는 동작(음)과 만나야 그 중
심을 잃지 않고, 공격적 동작(양)은 방어동작(음)과 어우러져야 완전하고, 사람 따라 몸이 차
고 비대하고 뚱뚱한 사람(음인)은 빠르고,  위로 솟구치고, 발산하여 공격적인  동작 위주로 
권유하는 것이 대체의 기본 도리이고, 몸이  가벼워 마르고 열이 있는 체질(양인)에는  느리
고, 아래로 가라앉는 무거운 동작과 거두어들이는 자세와 방어적인  형 위주로 가르쳐야 한
다고 생각합니다... 자! 심지어는 사람의 성격에  따라서도 그 동작의 처방이 달라야 한다는 
상대성 진리의 깨우침은 곧 활달한 지성의 산물이 아닐까? 이러한 사색적 정리는 바로 우리 
동양철학의 사유체계에서 오는 것이다. 그 분께서 일찍이 필자의 저서 (동양의학혁명)을 독
파한 후 시도했다는 동양철학과 무술과의 접목  시도는 충분히 나를 놀라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J선생의 경직증 : J선생은 40대 중반의 여성이다. 아주 특이한 삶을 살아온 나의 환자였는
데, 매우 오랜 세월을 군 간호장교로 지낸 분이었다. 온몸,  특히 근육과 피부 부분 등 경직
화 현상의 특이한 증상으로 고생한  이유는 무엇일까? 강직하고 굳센,  오직 남성적인 면이 
강조되는 군생활의 쫓기는 긴장의 시간과 의무와 조직적 체계의 압박감은 마음과 몸을 경직
화 시켜 버린 것이다. 부드럽고 유연한 여성적 체질에 적당한 강함은 약이 된다. 그러나  너
무 지나쳤던 J선생이 아주 높은 계급으로  제대한 후에도 그 경직 증상이 악령같이  그녀를 
쫓아다녔다.
  제3의 통로, 경락 : 동양의학상으로 볼 때 인간의 마음엔 통로가 있다. 우리가 기분이라는 
말을 쓰는데 이는 보이지 않는 마음을 뜻한다. 의식과 감정의  희한한 길이 있는데 이를 경
락이라 부른다. 이 경락은 결코 X-레이상으로  보여질 수는 없지만, 우리가 즐겁고, 슬퍼하
고, 믿고 의심하고, 알고 모르는 심리적 현상이 분명  있듯이 경락은 존재한다. 이 경락체계
는 이미 웬만한 무술인들은 상식적으로  알고 있으며, 실은 많은 부상  치료에 활용에 하고 
있다. 약간은 가공적이고 환상적인 무협소설에도 자주 등장하곤 한다. 경혈은 곧 경락의  길 
중에서 가장 예민한 점이다. 비유하면 기차레일은 경락이요, 기차역은 경혈인 셈이다.
  이 경락은 12에서 20개가 있는데 매우 신비스러운 우리의  내부 흐름이다. 혈관, 신경, 림
프관 계통 이외에 육안으로 안 보이는 제3의 통로가 존재한다는 말에 서양의학계는 얼마나 
놀라는지 모른다. 이제는 인간의 영성 육체 외의 유체 등을 인정하기 시작한 서양과학 문명
인들도 열심히 연구하고 있는 경락의 체계이다(독일에는 동양의학 저서가 거의 다 번역되어 
있다. 한국의 (동의보감)까지 말이다. 대단한 학구열이다). 각설하고. 이 경락에 바로 음양철
학이 있다. 열두 개이든 스무 개이든 꼭 짝수이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음양경락 : 반은 음이고, 반은 양경락이라는 것이다. 여섯 개는 음경락, 여섯 새는  양경락
인데 J선생의 경우는 여섯 개의 양경락인 남성적 경락이  너무 강하게 발달되어 있었고, 여
섯 개의 여성적인 음경락이 쇠퇴하여 있었다. 집중적으로 여섯  개의 음경락을 자극하여 그 
음에너지를, 즉 음기를 보충하여 준 후부터 서서히 모든  조직이 부드러움을 찾아가기 시작
하였다. 무려 2년 이상 치료받고 있는 것을 보면 얼마나 무서운 음양의 불균형적 질병 현상
인지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동양의학에서는 음양 에너지간 상호 균형의 파괴가 곧 질병이
라 보고 있다.
  심신의 창조적 조율사 : 자! 동작에도 음양관 있는 선택을 침술에도, 지압에도, 약의 처방
에도 골고루 살펴야 마땅한 음양의 지혜이다. 깊은 고질병을  얻은 후에야 비로소 전문가에
게 의존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다. 많은 유명한 스타  체육인들이 고질병으로 고생하기도 하
는 이 시대에 과연 지혜로운 선택은 무엇이겠는가? 조기 생활체육 교육을 통해 건강하고 활
력찬 이 나라 지구촌을 만들려는 가상한 뜻과 더불어 초심자는 특히 자신의 체질과 습성에 
맞는 동작을 개발 연구, 또한 변화시켜야 한다. '초심음양동작론'이라는 글의 명분은 지고한 
행복으로 가는 동작의 철학적 연구이다. 암기, 주입, 강요, 맹신, 권위적인 의식화 교육이 아
닌 직관, 경험, 의심, 자발, 창조적인 의식혁명을 통해서 탐구해 가는 길이야말로  진정한 심
신의 조율사가 되는 첩경이라 믿기 때문이다.
  
    잃지 않게 하소서! (스승 혜암 대선사 입적 5주기를 맞아)
  '아아! 님은 가셨습니다!' 만해의 글귀가  아니어도 실감나는 어휘였고, 어휘입니다.  가신 
님을 오게 하시옵고... 의식의 방랑은 끝없이 출렁였고 또 출렁입니다. 가만히 앉으면 졸음이
요, 뛰고 분주하다 보면 산란과 야심입니다. 가까이는 한 환자도 깊이 사랑해주지  못하였고 
멀리는 '아뇩다라 삼약삼보리'의 꿈을 희미하게 했습니다. '암'조차도 '네 멋대로 할라면 해
라!' 내팽개친 공포의식의 해탈을 경험한 어떤 골수암 수술 환자의 영웅적 투병수기 소식에 
찔금찔금 놀라는 가련한 의사입니다. 님께서 항상 잃지 말라던 '공안'의 공들임은 유일한 자
부의식이요, 뿌듯한 성취감을 주지만 20년 반복 탁마를 명령하신  님의 질타에 이제 동감이 
갈 정도로 자아의식의 뭉침인 별 볼일 없는 자를 알아냈습니다. 발원하오니. 대저  성스러움
이 족쇄요, 인류를 예의나 염치로 구속함을 못 면하였으니 저희 도반으로 하여금 잃지 말게 
하소서, 태초의 소박함과 여유와 자연스러움을...
  삶을 기뻐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저희들에게 잃지 말게 하소서.  선택에 물들지 않은 마음
을... 외물에 미혹되어 방향이 엇갈리고, 크게는 본성을 잃고 있사오니 잃지 않게 하소서! 애
써 고상한 척하면서 세속과의 다름을 드러내는 '증상만'을 경멸하는 힘을 잃지 않게 하소서. 
신랄한 비평으로 사회의 어둠을 힐책하며 불만을 토로하는  무리의 교묘한 '에고'를 조롱할 
수 있는 마음 잃지 말게 하소서. 효도나 충성이니 의리, 믿음 등을 내세워 자신의 수양과 남
의 교화를 이루어 잘난 체하고 싶어하는 지도자 망상의 입을 초월할 수 있는 힘을 잃지  말
게 하소서.
  나라와 나라의 통일이나 분산을 논하고, 공명을 중시하여 상하 예절을 주장하고 천하치법
을 내세우는 수법의 교활한 광대 무리를 손끝으로 튀길 수  있는 지혜를 잃지 말게 하소서. 
수풀 속에서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자 고요히 낚시하는 자의 한적함에 동요되는 생각의 날카
로운 주사를 잃지 말게 하소서. 심호흡, 체조, 곰이나  새의 몸놀림을 익혀 신체를 단련하거
나 특이한 식물과 약물을 즐겨하여 장수하려는 자의 충동을 비웃을 수 있는 담력을 잃지 말
게 하소서. 애쓰지 않고도 절로 고상하며, 인의에 기대지  않아도 절로 수신하며, 공명에 의
지 없이 절로 다스리며 강 바다가 아니어도 저절로 한가하며,  수련 없이도 장수할 수 있음
을 잃지 말게 하소서.
  무엇을 보존하며 지키는지 무엇을 타협할지 무엇을 떠나게 할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미워할지를 아는 맘 잃지 않게 하소서. 장수, 부귀, 행운, 몸의 안락, 맛있는 음식, 화려한 장
식, 색욕의 만족, 즐거운 음악이 없다 해서 괴로워하는 형체적 만족의 근심을 제어할 수  있
는 수행력 잃지 말게 하소서.
  앎의 탐구란 목표를 자기가 알 수 없는 경지에 두는 것임을 기억하는 힘을 잃지 말게  하
시고, 배울 수 없는 것을 배우며, 실천할 수 없는 것을 행하며 변론할 수 없는  것을 변론할 
수 있는 심장을 잃지 말게 하소서. 요컨대 본심을 잃지 말게 하시옵고, 하늘의 쾌락과  지옥
의 고통이 오직 지나가는 환술임을 관조하는 눈을 잃지 말게 하소서. 귀로 듣지 않고,  혀로 
말하지 않고, 피부로 접촉하지 않는 진리를 잃지 않게 하시옵고, 홀로 우뚝 서서 천상천하의 
주인되신 제불 조사의 경지를 잃지 않게 하소서. 아아! 님은 가셨습니다!
  후사를 부탁하시면서 가신 뜻을 오늘도 완성치 못하고 주저주저하는 제자의 불충을  참회
드리옵고, 깊은 곳 아니면 뵐 수 없는 님의 뜻을 살펴보니 너무 겉도는 수도인  이었습니다. 
'간 바 온 바 없다'라고 싸늘히 왼 제자는 오직 무정함의  무심을 도에 가깝다 스스로 칭찬
하고, 눈물 애착 없이 보낸 스승님의 열반에  절로 대단한 상근(부처의 가르침을 깨닫는 뛰
어난 능력과 자질 또는 그런 능력과 자질을 갖춘 사람)이 아닌가 착각했습니다만... 한 치의 
땅, 터럭만큼의 사업과 하찮은 인연을 탐착하여 끈끈하게도 땅에서  발이 떨어지지 않고 있
습니다. 면목 없는 이 제자의 흠향을 받아주시옵고 잃으려 해도 잃을 수 없는 것을 알게 해
주신 은혜에 감읍하옵나이다.
  잃은 것은 본래 얻을 때부터 감지하게 하시고 잊거나 잃거나 하지 않게 하시올 그 남산일
발화의 소식을 모두 접하게 하소서. 잃지 않게 하소서.
  경년 음력 3월 30일
  혜 문인
  금오 합당 부망배

  I(-)인의 장단점 : 이는 의혐심의 소유자이고 한데 불의한 것을 그냥 넘기지 않으며 언제나 약자 편에 서서 행동하며 명리에 초연하다. 몸이 민첩하고 순발력이 좋고 가끔은 엉뚱한 풍자, 유머, 해학 등을 구사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거나 웃겨준다. 위대한 코미디언이나 개그맨이나 어려운 난세의 강력한 리더쉽을 지닌 인물 중의 I(-)인의 스타일이 등장한다. 권력의 부패를 신랄히 꼬집고 국민의 아픔을 대변하는 등의 활약이나 무사정신적 활동 등이 그 예다. 음식은 좀 시고 달게 먹어서 항상 열에 들떠 있거나 마르기 쉬운 체질적 약점을 보완하고 쓰고 더운 종류는 피해야 한다. 특히 담배가 해로운 독이 됨을 명심할 체질이다. 열대성 기후가 오히려 좋지 않고 습성 기후에 한 대성이 섞여 있는 듯하면 아주 좋아하는 체질이므로 거주 환경도 그에 맞추는 것이 좋다. 성격이 공격적이어서 입이 항상 거칠 수 있으므로 구설수에 오르기 쉬우나 비난의 언어 구사를 신중히 하지 않으면 송사나 큰 힘에 걸려 뜻을 펴지 못하는 수가 왕왕 있다. 돌아서면 지나간 분노나 격정을 잘 잊어서 남자답다는 평을 듣는 대신 치밀한 사고력의 부족으로 엉뚱한 데에서 실수를 잘한다. 즉 '건망증'의 소유자라고나 할까?
  균형감각 : 인신(호랑이, 원숭이)의 해에는 조심해야 하며, 특히 그 해 여름의 신체리듬을 경계해야 하며 당뇨, 눈의 피로, 피로, 만성 편두통, 열성 피부염, 체중감소, 협심증 등의 화열성 질환에 아주 약하다. 남도 잘 혼내지만 자신의 반성 채찍도 극심해서 너무 긍정적 에너지를 죽이는 경향도 있다. 아울러 쾌락주의적 행위에 대한 혐오감도 대단해서 지나치게 윤리적일 수도 있으나 스스로 괴로움을 자초하는 형이기도 하다. 적당한 '약'은 꼭 필요한데 쓴맛, 톡 쏘는 맛만 남자답다고 좋아하고 '단맛'은 여자들이나 먹는 것으로 남성들은 위험하다. 신이 주신 맛은 섭취할 필요가 있는데 만약 단맛을 제거한다면 지구는 폭팔할지 모른다. 
'완충지대'의 설정이 곧 단맛인데 백약의 독을 완화시키는 감초가 그 예다. I(-)인의 신맛과 단맛을 잘 절충 섭취해야 한다.
  상과 벌 : 요컨대 건강은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병법의 고전인 (육도삼략)을 가르치신 강태공의 정치이론을 보면 '상은 소치는 목동에까지 이르고 벌은 왕후장상에 미칠 수 있게 하라.' 즉 상벌의식 중 벌 의식이 곧 소양지기인데 이는 상 의식과 중용을 이루어야 한다. 부귀교만에 사용할 소양상화의 기운이지 그렇지 않아도 어렵고 기가 죽어 있는 빈천인에 쓸 기가 아닌 것이다. 앞의 궐음인은 소양인과 좋은 짝이니 유식과 무식이 서로 어울리고 귀한 이와 천한 사람이 손잡는 것은 태평성대의 징조이다. 재벌은 권력가와 혼인함보다 긴 세월의 안목으로 보아 자손번영을 위해 낮추어서 인연 맺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 아닐까? 너무 강하면 부러질 수도 있는 것이다.
  중용과 자연으로 회귀 : 소양인의 광택은 희고 붉은색인데 이 색이 지나쳐서 거칠어지면 위험한 징조이니 급히 마음의 평정을 회복해야만 살 수가 있다. (예기)의 첫머리에 '천한 사람의 단점도 보고 원수진 사람이라도 그의 장점을 볼 줄 알라'는 말이 있다. 원한 잘 품는 I(-)인은 특히 남의 단점을 잘 보는데, 가깝고 애정 있는 사람의 단점만 보고 미운 사람의 결점을 들추지 않아야 스스로 마음이 편안할 것이다. 하기사 이 교훈이 어디 I(-)인에게만 국한될 것인가? 요즈음 풍욕이 성행한다. 수풀 속의 가벼운 산보는 특히 I(-)인에게 효험이 많다. 웬만한 알레르기성 피부염은 며칠 동안 깊은 산 속 텐트생활로 치유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역시 자연을 최고의 의사로 믿는 것이 바람직하다. 땅, 바람, 물, 햇빛, 공기 등등의 요소가 갖추어진 곳은 곧 회복실로 생각해도 무방하다. 귤, 키위, 모과, 산수유 등 신맛의 과일은 모두 한결같이 '바람'이 많은 곳의 산물이다. '바람'을 통제하면 그 열매의 맛이 시어지지 않는다. '바람'의 통풍이 필요한 I(-)인은 교제를 넓혀서 지우의 장점을 읽어야 한다.
  선지식과 악지식 : 평생 동안 '악지식'만을 넣고 다니는 이가 있다. 공자의 말씀에 '과거의 나쁜 기억만 외고 있는 자는 죽어도 좋다'는 뜻의 교훈이 있다. 인간 존재는 선악의 반반합성이다. 타인의 나쁜 결점 기억만 잔뜩 넣고 다닌다면 그 운명도 그대로 될 수밖에 없다. '심보가 고약하다'는 옛말은 심포라는 지식 저장 창고 같은 무형의 장부에 악지식만 넣고 다니는 자를 뜻한다.
  목적과 방법의 불분리 : 혁명주의자, 특히 폭력을 통한 개혁론자들은 명심할 것이 있다. 목표가 아무리 정당해도 목적은 '폭력없는 사회'지만 달성 방법이 폭력이라면 그 결과는 결국 폭력일 수 밖에 없다는 말이다. 방법과 목적의 분리는 도처에서 보여지는 악성논리인데 이는 힘있는 자나 복수심 가득 찬 이들이 모두 발로 차버려야 할 마약 같은 것이다. 방법과 목적의 불분리를 주장하면서 이제 태음, 양명, 소음, 태양, 궐음, 소양의 여섯 가지 체질론을 끝맺는다. 미흡한 부분은 훗날 다시 손질하기로 하고 이 졸고가 이 나라 건강의 증진에 도움이 되는 동양심리 의학적 제언으로 인식된다면 조금이나마 옛 선성과 금생의 현명한 스승 여러분께 다소간 은혜를 갚았다 자위하고 싶다.
  
    건강으로 가는 주역탐구
  황제의 꿈
  전쟁과 기아, 질병 이 세 가지는 의사가 꼭 막아야 할 흉사이다. (내경)의 가르침에 '대의는 천하의 병까지 고치고, 소의는 신체의 질병만 고친다'했다. (내경)의 저자는 황제인데 곧 왕이자 의학에 도통한 인물이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주역의 달통자이기도 하다. 그도 한때는 방탕하여 15년을 여색과 산해진미, 술 등으로 몸을 망쳤었다. 정신이 혼미하고 피부가 까칠해지며 입이 쓰고 머리가 맑지 못하여 정사가 귀찮아졌다. 자신이 쾌락에만 탐착한 나머지 일을 그르쳤는데 크게 후회하여 반성한 다음-. 약 15년 간 오로지 나랏일에만 전념하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열중한 때문에 또 몸을 그르치게 되었다. 입이 타면서 산란한 마음과 함께 말을 안 듣는 수족의 병은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졌다. 이기나 이타행이나, 괴로움의 원인은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궁궐 한쪽의 구석진 데 움막을 짓고 고요히 홀로 거처해 보았다. 검소한 의식 생활과 함께... 일체 사람을 멀리하고 지낸 지 3개월 되던 날 황제는 꿈을 꾸었다. '화서국'이라는 나라를 가보았는데, 그 나라는 지배자가 없고 모든 것이 자연에 일임되어 있었다. 백성들은 욕망을 몰라서, 무엇이나 자연 그대로 좇고 있었다. 생을 즐길 줄도 모르고, 죽음을 싫어할 줄도 몰랐다. 그래서 요절하는 사람이 없었다. 자기를 위할 줄도 모르고 남을 소외할 줄도 몰랐다. 그러기에 애증이란 것이 없었다. 남을 배반할 줄도 모르고, 남의 비위 맞출 줄도 몰랐다. 그러기에 이해란 것이 없었다. 아무도 사랑하고 아끼는 감정을 지니지 않고, 두려워하고 꺼리는 생각을 지닌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곳 사람들은 물에 들어가도 익사하는 법이 없고, 불에 뛰어 들어도 뜨거운 줄을 몰랐다. 무엇으로 베거나 때려도 상처가 안 나고 아프지도 않았고, 긁어도 아프거나 가렵지 않았다. 하늘을 땅처럼 걸어다니고, 침대에 누운 듯 허공에서 잘 수도 있었다. 구름이나 안개도 시야를 가리지 못하고. 뇌성도 그 청각에 혼란을 주지 못했다. 물론 미추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산이나 골짜기를 걸어도 넘어가는 일이 없었으니, 자유자재인 것이었다. 꿈에서 깨어난 황제는 크게 깨닫는 바가 있었다. 천로, 역목, 태산계의 세 대신을 불러 말했다. "나는 석 달 동안 한가히 있으면서, 마음과 몸을 고요히 가라앉혀, 몸을 보존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았으나, 그 방법을 알아내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지친 끝에 잠이 들어, 이 같은 꿈을 꾸기에 이르렀다. 이제야 진실한 도는 의식적으로 구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것을 확실히 알고 확실히 터득했건만, 그대들에게 이야기하려 하니까 말이 잘 되지 않는다." 그로부터 28년동안, 천하는 아주 잘 다스려져서, 거의 화서국 같이 되었다. 그리하여 황제가 돌아가자, 백성들의 울음은 2백여 년이나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이상은 (열자)에 나온 이야기이다. 이해와 애증으로 가득한 지구촌의 전쟁놀음에 놀아나서야 어디 단군의 이화세계의 명분에 맞는 한민족이라 할 수 있겠는가? 포용심을 잃은 강대국이나, 표독해진 약소국이나 이제는 막 갈 대로 가는가 싶다. 노자의 말씀에 '강한 나라는 약한 나라가 존재하기 때문에 강할 수 있는 것이므로 강국은 약소국을 떠받들어주어야 한다' 설파했다. 이제 한민족은 힘의 강약에 있어서도 그 중용을 잃지 말고 세계를 질서 잡는 조율사가 되어야 한다. 종교적 민족주의가 깊이 배경이 된 듯도 하고, 이권을 얻고자 하는 탐욕과 체면유지 등의 복잡한 명분으로 얼룩진 걸프전쟁의 해결사로서 감동적 충고를 해줄 수 있는 큰 의사는 없을까?
  질병은 진리의 무지에서...
  영국인 의사 '맥도널드 베인'은 천계의 성자에서 지도를 받게 된다. 인간의 질병에 대한 확고한 통찰의 말씀을... 전쟁의 황폐함과 질병의 엄습을 예방하기 위해 여기 인용해 본다.
  '자네를 둘러싸고 있는 혼란의 원인은 그 밑바닥에 있는 생명의 원리를 깨닫지 못하는 데에 있다. 이러한 어리석음 때문에 훌륭한 두뇌를 가진 사람들까지도 인간 그것 속에서 작용하고 있는 생명의 법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수학의 법칙이 존재함을 부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일 것이다. 진리와 진리의 법칙이 존재함을 부정하는 것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사람은 진리와 법칙을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진리 그것만이 무엇인지는 말할 수 없다. 오직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만을 알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진리는 수학을 다루고 이용하듯 우리가 쓸 수 있는 것이다. 조화된 음악에는 참된 음계가 있지만 거기에는 그릇된 음계라는 것은 없다. 그릇된 음계라는 것은 다만 잡음일 뿐이며 그런 것은 조화가 아닌 것이다.' '자, 질병이 모두 어떤 원인들의 결과이고 자연의 법칙을 어기거나 무시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임을 자네는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무지, 공포, 사랑의 결여 곧 사랑을 주는 힘의 결여, 끊임없이 사랑을 받으려고만 하는 자아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생겨난다. 병은 육체와 마음이 그 본래의 리듬을 잃었음을 나타내는 현상이며, 동시에 그것은 본래의 리듬을 되찾으려는 처절한 싸움이다. 바꾸어 말하면, 만약 사람이 자연의 법칙을 무시하고 마음의 평안을 잃어 허둥댄다면, 마음의 주의는 나타나는 증상에 쏠리게 된다. 왜냐하면 육체가 신경을 통해 그 증상을 마음에게 알리면 마음은 육체가 느끼는 것의 포로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마음은 육체를 그 증상에서 구해 내려고 애쓰게 된다. 그리하여 육체의 원자들을 휘저어 놓고 결국은 고통이나 불쾌감이 오게하는 것은 마음이 육체를 구해 내려는 싸움이다. 이런 이치를 알 때 싸움은 멎는다.
  마음은 육체의 느낌을 의식하고, 그 느낌이 어떤 '병'으로서 마음에 기록되며, 거기에 어떤 병명이 붙으면 마음은 그 병명에 사로잡히고, 더구나 그것이 어떤 불치의 병이라 하게 되면 마음은 그대로 그것을 받아들여 부담은 더더욱 커진다. 그러나 실은 병의 원인 자신의 참모습에 대한 무지와 자연의 법칙을 무시한 데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 그때는 그 무거운 부담이 사라지며, 대 생명인 한얼이 마음을 변성시켜 육체는 자연의 완전한 작용에 순응하게 된다. 병인 것을 알고 있는 것은 자아뿐인 것이다. 얼은 병이라는 것에 대하여는 아무것도 아는 바 없다. 이기심, 빼앗고 받기만 하는 마음, 탐욕, 미움, 적의, 인색, 완고, 난폭은 자아의 것이며, 이것들이 거의 모든 병의 원인이다.
  비인격적이며 치우침 없는 한얼은 그런 부덕에 대하여는 아는 바 없다. 따라서 치우침 없고 비인격적인 것이 신유이다. 비인격적으로 되면 될수록 사랑이 깊어지고 친절해진다. 왜냐하면 사랑은 비인격적인 것이며, 사랑은 용서요, 치유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신이며, 사랑은 무릇 반작용이 따르지 않는 완전한 작용의 바탕이다. 진리에 따라 이끌어줌으로써 병자는 고통이 한때의 것이고 스스로 지어낸 것임을 깨닫기 시작한다. 무릇 나타나는 현상은 한때의 것이며, 한때의 것은 그저 끊임없이 유동하고 그 자체의 근거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밖의 무엇인가에 사로잡히는 것은 무지한 자아뿐이다. 실재는 이 무지한 자아와는 전혀 다른 것, 실재야말로 완전하고 비인격적인 참 나이다. 만약 병이 실재라면 그것은 고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실재는 불변이기 때문이다. 자아는 공포를 품고 있기 때문에 남들이 뿜어내는 암시를 받아 공포 속으로 더욱 깊이 빠진다. 죽음에의 공포가 인류라는 한 가족에 스며 있는 여러 가지 괴로움의 원인이다. 그러므로 이 공포를 떨치는 것이 가장 중대한 일인 것이다.' - 맥도날드 베인, (히말라야를 넘어서) 정신세계사.
  분열의식의 통합 태극사상
  분열증후군의 거대한 몸살은 곧 전쟁이고, 작은 징조는 몸과 마음이 병고이다. 전쟁의 원이야 두말할 것도 없이 분리의식의 조장이지만, 분열증의 혼란한 마음과 그로 인한 어지러움증, 상기증, 혹은 체증과 같은 기울증 등은 모두 고통을 만들어낸다. 불열의 증상은 수천만 가지인데, 예를 들어 간추려 보자. 첫째는 이상과 현실의 차이에서 오는 정신분열이요, 둘째는 목적과 방법의 틈에서 느끼는 시간적 분열이요, 셋째는 나와 남의 비교에서 오는 파괴적 경쟁의식 분열이요, 넷째는 숙명적으로 태어난 성의 차별에서 오는 생리적 분열감이요, 다섯째는 삶과 죽음의 단절의식에서 오는 망상분열증이다. 첫째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오는 정신 분열은 교육의 허구성에서 그 원인이 발견된다. 교과과정이나 가정의 교육에서 가르치는 내용의 유토피아나 윤리 도덕성과 권선징악 등의 관념이 현실적으로 여지없이 무너져버리는 사회악의 충격에서 오는 분열증이다. 있어서는 안 된다고 배워온 각종의 악이 실제로 범죄영화 이상으로 실제 존재하고 있고, 그 행위자가 바로 자기에게 이상향을 가르쳐 주었던 선생이나 가계 지도자라는 데 청소년은 충격을 받게 된다. 모범 부재시대의 상황이 연출되는 비극인데, 꿈과 현실의 간격이 크면 클수록 자기 꿈의 실현에 의문을 가지게 되고 포기, 집착으로 일관하게 된다. 반복적인 정신병원의 입원과 퇴원보다는 솔직한 교육을 통해 인간의 자기집착 개인주의 성향을 일찍부터 일깨워 주지시키고, 에고이즘의 타파가 곧 교육의 본질임을 가르쳐주었다면, 과연 현실 적응에서 오는 정신분열이 이다지도 심했을까?...
  분열증 소고 : 시간의 분리의식이나 성의 차이에서 오는 괴로움 등은 아주 미묘한 분열증을 일으키는 데 거의 무의식적으로 침투되어 있는 괴로움이다. 청소년 시기의 이상과 현실의 차이에서 오는 분열증은 뚜렷한 병증으로 구별되기가 쉬우나, 인간사회에 모두 전염되어 있는 미래를 향한 야심의 충동질은 어쩔 수 없을 정도이다. 오늘의 별볼일 없는 자기와 미래의 훌륭해져야 할 나의 희망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시간이 필요하다. 마음의 시간의식 문제인데 심리적인 시간적 공간의 과정은 좀더 위대해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러고는 그 노력의 과정은 꼭 필요한 인내처럼 괴로움을 미화시킨다. 현재 과정의 괴로움은 미래의 성공을 위해서 필요하다. 이는 모든 교육사회의 그럴듯한 전제이다. 이래서 생긴 시간의 분열은 아예 합법화되어 버려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교육은 과정도 즐겁고 결과도 즐거워야 한다. 그러나 훌륭한 자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커다란 야심을 품으라고 가르친다. 태극사상은 목적과 방법의 분열없는 일심의 사상이요, 내혁 즉 자신의 내부를 혁명하자는 가르침이 숨어 있다. 태극이 음약으로 분열되고 다시 사상 팔괘로 나뉘어진다고 평면적 각도로 파악한 것같이 보이는 주역체계지만, 알고 보면 다양한 개성의 혼합을 설명하고자 한 것이다.
  태극심왕 사상 : 태극사상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심왕을 일깨워준다. 신성은 불성이요, 도이다. 누구나 다 왕이다. '왕이 될 것이다'가 아니다. '왕처럼 되어라'도 안 된다. 태어날 때부터 누구나가 다 왕적인 존재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누구처럼 되어라'를 가르친다. 스스로 열등의식을 느끼는 불쌍한 피교육자는 목표를 설정하고는 매진하기 시작한다. 교육자는 가정의 부모일 수도 있고, 형제요, 사회의 교사들인데 스스로 못다 한 꿈마저 얹어주며 더욱 야심을 부채질한다. 마음의 평화라든가 행복 같은 것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채... 태극은 무극이다. 양극이 없으니 무슨 출발과 도착지가 있을 리 없다. 이러한 측면에 있어서는 모두가 내면의 심왕을 다 가지고 있다. 그러나 비교에 의한 열등의식은 언제나 자신을 높이 보이기 위해 별스러운 노력을 다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은 정신병자가 되든지 야심적 정치가가 되는 길밖에 없다.
  우월의 증명방법 : 썩은 야심가 정치인 무리는 어찌 보면 가장 열등한 의식에서 출발한다고 한다. 야심은 현대심리학에서도 열등감에서 비롯된다고 증명하고 있다. 아예 미쳐버려 '내가 수상, 대통령이요!' '바로 나만이 왕'이라 주장하는 길은 지름길이다. 아주 쉽다. 대신 그는 정신병원에 수용된다. 그러나 그는 그 착각을 즐기며 살아간다. 로이드(Lloyd George)는 영국 수상이었다. 전쟁 중 등화관제 시간에 산책하다가 경보 사이렌을 들었다. 조지 수상의 집은 꽤 멀리 있었고 이제는 내일 아침까지 꼼짝할 수 없는 처지였다. 가장 가까운 집의 문을 두드려 주인에게 통사정을 하였다. "나는 로이드 조지 수상이오. 하룻밤만 재워주시오. 그렇지 않으면 경찰이 잡아갈 것이오." 그러자 집 주인은 그의 멱살을 잡고, "조용히 해라! 소란 피우지 말라. 잠은 재워준다. 그러나 매맞고 싶지 않거든 조지 수상이라고 떠들지 말라." 조지 수상이 문을 두드린 곳은 정신병원이었던 것이다. 그곳에는 세 명의 조지 수상을 자처하는 정신병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밤새 꼼짝없이 입 다물고 있을 수박에 없었다. 진짜 수상은 그 세 명의 로이드 조지 수상 망상 정신병자들의 열띤, 자기만 수상이라는 증명 토론을 들어야만 했다. 갑자기 이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우월한 인간이라고 선언해 버리면 되는 쉬운 길이 정신병자의 길이다. 신라시대의 눈물겨운 향가가 있다. 백수광부의 죽음이다. 평생을 강가에서 살면서 '나는 왕이 될 거야'를 읊어대던 백수광부는 어느 날 강에 빠져 자살하였다. 백수광부, 즉 흰머리의 미친 남편, 그의 아내는 지아비의 시체를 붙들고 노래를 하다. 아마도 이는 왕권과 귀족에 대한 부러움이 사회에 만연되어 있을 때이고, 모르긴 몰라도 권력 중심의 상하 분열의식이 낳은 정신분열의 시대 징조일 것이다. 뭐하러 '저 나라에 가서 왕이 될 거야'를 읊는가? 확실히 미쳐서 '나는 왕이다' 할 일이지.
  건강한 참 종교성 회복은 분열증후군의 약
  샤르트르는 그의 논문에서 말했다.; '사실을 알린다는 것은 그 자체가 평화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어차피 당장 그렇게 되지는 않더라도, 그것은 격한 감정 대신 객관적인 지식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주역이 요구하는 마음과 육체의 평화와 더불어 지구촌의 안녕을 리드하는데 필요한 자각을 위해서 다음의 인용으로 이 장을 대신하고자 한다.
  미치는 일은 우월한 인물이 되는 지름길이며, 정치는 우회로이다. 그러나 둘 다 같은 목적지에 이른다. 세상이 온전하고 정상적으로 되기 위해서는 이 두 유형의 사람들. 미친 자와 정치인들이 다 치료되어야 한다. 둘 다 병들어 있다. 다만 한 사람은 멀리 돌아가는 길을 택한 것이고 한 사람은 지름길을 택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잘 기억하라. 미친 자가 정치인보다는 덜 해롭다는 것을. 미친 자는 단순히 그의 우월성만을 주장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것을 증명하려고 괴로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치인은 그것을 증명하려고 애를 쓴다. 그리고 그 증명의 대가는 아주 비싸다. 히틀러는 무엇을 증명하려고 했는가? 그는 자기가 가장 우월한 최고의 뛰어난 종족 아리안(Aryan)이라는 것이었다. 만일 그가 단순히 정신 병자였고, 지름길을 택했더라면 세상은 더 좋아졌을 것이다. 그러면 2차 세계대전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정치인은 더욱 위험스럽다. 왜냐하면 그들은 실제 증거를 가진 정신병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 속에 열등감을 숨기기 위해 뛰어다니고, 목이 터져라 외치고, 목표에 도달하고, 온갖 수단과 모략을 써서 마침내 그것을 성취하는 정신병자들인 것이다. 열등하다고 느낄 때마다 인간은, 자기가 열등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거나 단순히 자신의 우월성을 믿도록 스스로에게 최면을 건다. 그리고 이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미친 자는 종교적으로 될 수 없다. 따라서 에고가 강한 자는 어떻게 해서든 정치인이 될 것이다. 어떤 직업을 선택하든 그 분야에서 그들은 정치인 노릇을 할 것이다. 내가 정치라고 말할 때 내가 의미하는 것은 에고간의 싸움, 살아 남기 위한 투쟁이다. 나의 에고가 너의 에고와 싸움을 하게 되면 그때 우리는 정치인이 된다. 내가 누구의 에고와도 싸우지 않을 때 나는 종교적인 인간이다. 우월해지려고 노력하지 않을 때 나는 우월하다. 그러나 이 우월함은 열등감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열등하다는 느낌'의 사라짐이다.
  여기 우월함의 다른 유형이 있다. 이 우월성은 열등감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열등감의 사라짐, 열등감의 부재라고 할 수 있다. 비교하지 않는 것이다. 비교하지 않을 때, 그대 어떻게 열등감을 느낄 수 있겠는가? 거기에 비교의 대상이 될 아무도 없다면, 그대가 지상에서 유일한 인간이라면 그대가 열등하다고 느낄 수 있을까? 아니다. 그때 그대는 열등할 수 없다. 그대 위에 아무도 없으니까, 우월하다고 선언할 필요도 없다. 그대 아래에도 아무도 없으니까. 그때 그대는 우월하지도 열등하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말한다. 이것이 곧 영혼의 우월함이다. 꽃들은 자신을 남과 비교하지 않는다. 장미는 장미대로 독특하고, 이름 없는 풀꽃은 풀꽃대로 독특하다. 각자 최선을 다해서 피어날 뿐, 비교하지 않는다. 비교할 때 그대는 핵심을 놓친다. 과녘에서 빗나간다. 그대는 항상 다른 사람을 주시할 것이다. 어떤 두 사람도 똑같을 수가 없다. 모든 개인은 고유하고, 모든 개인은 우월하다. 그러나 이 우월성은 비교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대는 우월하다. 왜냐하면 그대는 다른 무엇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월성이 그대의 본성이다. 거기 야심이 없기 때문에 그것은 비정치적이다. 그는 이미 증명되었기 때문에 새삼 증명할 아무런 것이 없다. 그는 이미 선언되었기 때문에 새삼 선언할 아무런 것이 없다. 그의 존재 자체가 그 증명이고 선언이다. 그는 존재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다. 따라서 이것을 기본적인 법칙으로 기억하라.
  그대가 종교 안에서 끊임없이 비교를 한다면 그대는 정치 속에 있는 것이다. 그대는 종교 속에 있지 않다. 이것이 곧 왜 모든 종교가 정치적으로 되는가 하는 이유다. 그들은 줄곧 종교적인 용어를 쓴다. 그러나 뒤에 감추어진 것은 정치이다. 무엇이 회교인가? 무엇이 힌두교이고, 무엇이 기독교인가? 무엇이 불교인가? '무엇이 유태교이고, 무엇이 이슬람교인가?(필자 삽입)' 그들은 모두 종교라는 이름으로 정치를 하는 집단, 정치조직이다. 그대가 기도하러 사원에 갈 때 그대는 단지 기도하는가, 혹은 비교하는가? 종교 안에서 비교는 불가능하다. 그대는 단순히 기도한다. 그리고 기도는  그대의 내적 존재가 된다. 그것은 비교되어지는 외적인 무엇이 아니다. 이 비교할 수 없는 기도, 비교할 수 없는 명상은 모든 존재와 고유한 우월성으로 그대를 이끌어갈 것이다. 장자는 말한다. 야심을 갖지 말라고. 왜냐하면 야심을 통해서 그대는 항상 열등한 채로 남아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야심을 떠나라. 그래서 그대 고유의 우월성을 얻으라. 그것은 본질적인 것이다. 그것은 새삼 증명되거나 획득되어질 필요가 없다. 이미 그대는 그것을 소유하고 있고 그것을 획득했다. 그것은 이미 그곳에 있다. 그것은 이미 그곳에 있다. 그것은 항상 그대와 함께 있으며, 그것은 언제나 그대와 함께 있을 것이다. 그대 존재가 바로 우월함이다. 그러나 그대는 그곳에 어떤 존재가 있는지를 모르고 있다. 그대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고 있다. 그래서, 그대의 정체를 찾는 데에 그대가 남보다 우월하다는 점을 찾고 증명하는 데에 그토록 많은 노력이 기울여지는 것이다. 아아, 그대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고 있다. 그대가 한번 그것을 알기만 하면 그때 거기에 더 이상 문제가 없다. 그대는 이미 우월하다. 그리고 우월한 것은 그대뿐이 아니라. 모든 것이 우월하다. 모든 존재가 우월하다. 왜냐하면 신은 하나, 존재계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거기 더 이상 열등한 것도, 우월한 것도 존재할 수가 없다. 야심이 사라진 마음, 야심이 버려진 마음은 이것을 깊이 깨닫는다. -라즈니쉬, (장자), 예하.
  남녀가 없는 태극사상 : 똑같이 생긴 뱀 두 마리의 남과 여를 구별하는 방법이 있다. 비단 보로 위에 놓으면 그냥 특성이 나타난다. 특별하게 도통하지 않는 수놈이라면 아무래도 암놈보다 더 움직이게 되어 있다. 수놈은 더 동적이라는 말이다. 무극이 동해서 양이요, 무극이 정해서 음이다. 양동 음정은 수놈과 암놈의 결정적 특성이다. 남은 양의 능이 있고, 여는 음의 능이 있다. 남은 동하는 괴로움이 있고, 여는 정하는 괴로움이 있다. 성의 분리에서 오는 분열증은 정말 심각하다.
  칼 마르크스가 재산의 공평한 분배를 주장하고 나선 것은 절대적 빈곤의 시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상대적 심리적 빈곤은 좀더 추구해야 될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인데 상대적으로 자신이 빈곤해 보이는, 그 이면에는 좀더 나은 음식과 쾌적한 환경을 가진 자에 대한 비교의식도 있다. 그러나 더 깊이 추구해 보면 프로이트가 주장한 대로 성의 충동이 인간을 지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힘, 권력의 추구가 전부라고 본 니체의 연구는 사실 그 다음의 얘기다. 첫째, 자본의 안정, 살림의 기본 등이 보장되는 신체리듬의 충족 뒤에는 둘째, 감성의 만족을 찾게 되어 있는데 이의 연구가 너무 부족한 한국의 현실이다. 이니 지구촌의... 성이 다름으로 해서 오는 무의식의 핍박감, 우울증은 특히 사회적으로 불순시 되어 있는 성 의식구조 때문에 자꾸 지하로 숨는다. 숨다 못 해 간접 표출시켜 보는 것이 예술을 빙자한 카타르시스인데 이것이 오히려 진실을 왜곡시킨다. 그래서 환상을 키워나가게 되고 이 환상과 현실의 격차를 메울 길이 없어서 방황을 한다. 똥, 오줌을 같이 싸는 형제, 부모에게서 느끼는 환멸감은 어딘가 있을 것만 같은 이성의 신비를 창출해 내고 스스로 도취된다. 한편, 모든 간접적 성문화 예술이 음식의 메뉴와도 같아서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갈증을 채워주는 일이 결코 쉽지가 않다. 미래의 인기 있는 무엇인가 되어 보이겠다는 야심 뒤에는 어쩌면 위대한 인물이 되어서 이성으로부터 관심을 끌기 위함도 포함되어 있는지 모른다. 성이란 무엇인가? 오늘도 짜증 부리는 자식의 무의식은 무엇인가? '유명 메이커 운동화에, 고급 책상에, 스탠드에, 독방에, 침대까지 해주었으면 되었지!' '야! 우리 때는 단칸방에 콩나물시루 같은 데에서...' 큰소리로 혼을 내지만 청춘 남녀 자식들은 마냥 불만이다. 아마 아버지가 좀더 유명인사가 아니라서 비교하고 있는 못난 열등분자 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부분은 은근히 이성을 갈망하고 또 거꾸로 잘못 보이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다. 성의 분리는 의존성을 낳는데 이 지구촌의 의존성이 아주 큰 구속이어서 두려움도 준다. 싸구려 상품화된 성을 돈 주고 사려는 매춘문화는 아주 쉽게 이성의 간격을 메워보려는 시도인데, 어느 날 육체적으로 다른 구조라는 이유만으로는 무조건 상대를 인정할 수 없음도 안다. 어처구니없는 이성간의 의식 차이, 소유욕, 비열한 야심, 거만함, 비겁함, 종교적, 정치적 분리의식 등을 발견하고는, 단지 음양의 육체적 결합말고도 상당히 많은 부분의 텔레파시 주파수를 맞추어야 된다는 결론을 얻을 때에는 이미 늦은 경우가 많다. 의식이 다른 부부가 결혼이라는 사회적 제도권 속에서 묶여지고, 또 그로 인한 아늑함, 이익, 명에 등이 온몸을 휘감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위선적 삶은 자식들에게 불행과 지옥의 표본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의심을 가져보는데 과연 결혼이라는 개념은 무엇일까?
  암의 원인은 배우자와의 불화
  스트레스의 질병과 질병의 예측 : 강한 스트레스를 빚어낼 만한 사건을 당한 뒤에 어떤 질환을 앓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많은 의사들은 오랜 세월에 걸친 경험을 통해 관찰하였다. 즉 심리적 갈등을 경험한 뒤에 발병한다고 이야기되고 있는 궤양, 고혈압, 심장병, 두통 따위 같은 병뿐 아니라 전염병이라든가 요통, 또는 사고 같은 일들이 증가된다는 사실에 주목해 온 것이다. 이와 같이 많은 의사들이 경험적으로 알게 된 것을 과학적으로 뒷받침하려는 시도가 워싱톤 의과대학의 토마스 홈즈 박사 등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들은 생활현장에서 경험하는 스트레스의 양과 심리적 동요의 정도를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했다. 홈즈 박사와 라헤 박사 두 사람은 스트레스를 빚어내는 사건에 각각 특정한 수치를 정한 척도표를 고안했다. 이에 의해 생활현장에서 경험하는 하나 하나의 사건의 스트레스값을 가산함으로써 그 사람이 체험하고 있는 스트레스의 종합가를 판정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이 스트레스 척도표를 다음에 소개한다. 배우자의 사망 100, 이혼 73, 배우자와의 별거 65, 형무소에 입소, 및 감옥생활 63, 가족 한사람의 사망 63, 부상 혹은 질병 53, 결혼 50, 실업 및 해고 47, 배우자와의 관계 회복(재결합) 45, 퇴직 45, 가족의 건강상의 변화 44, 임신 40, 성생활의 문제 39, 가족 수의 증가 39, 사업상의 변화 39, 경제상의 변화 38, 가까운 친구의 사망 37, 전직 36, 부부 싸움 빈도의 변화 36, 1만 달러 이상의 차용 31, 저당잡힘 30, 직책의 변화 29, 자녀의 자립 29, 처가식구와 다툼 29, 현저한 업적(상을 받는 등) 28, 배우자의 취직 및 실직 26, 자녀의 입학, 졸업 26, 생활환경의 변화 25, 습관의 변화(술, 담배끊기) 24, 상사와의 언짢은 일 23, 근무시간 및 조건의 변화 20, 전거(신축, 이사 등) 20, 전학 20, 레크레이션 습관의 변화 19, 신앙생활의 변화 19, 1만 달러 이하의 차용 17, 수면 패턴의 변화 16, 가족 모임의 빈도와 변화 15, 식사습관의 변화 15, 휴가 13, 크리스마스 등의 계절 12, 법률상의 가벼운 위반행위 11. -칼 사이몬튼, 마음의 의학, 정신세계사
  이 척도표는 일상적으로 우리들이 체험하는 스트레스로 가득 찬 사건의 거의 모두를 망라하고 있다. 즉 아내의 죽음, 이혼, 실직과 기타 이른바 고통 및 즐거운 경험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남녀는 자력처럼 이끌리는데 한때는 그렇지만 왜 지고한 영적인 행복을 서로 나누지 못할까? 자녀는 번민하고 괴로워한다. 아주 심각해 하다가는 어느 날 시대의 관습대로 어쩔 수 없이 아버지 어머니처럼 살게 되고 또 자식들에게 비슷한 말을 한다. '커보면 알게 될 거다!' 그러나 실제 성은 커보면 알 것이라는 단순 연령 비례적 의식 각성의 명제가 아니다. 믿거나 말거나 남녀의 탄생의 책임은 각자 스스로에 있다는 티벳의 비밀경전의 말이 있다. X, Y 염색체 운운하는 부모 결정적 논리에 익숙한 이 시대는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인용해 본다.
  이 윤회 존재로 떨어지느라고 탐욕에 미치는 사람들이라거나, 마음으로라도 윤회의 미계로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아! 생각만 해도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이며 몸서리쳐질 일이겠는가! 아! 정신 차릴지로다.-혹은 '구루'의 가르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이 꼴이 되어서 윤회의 험한 깊고 깊은 수렁 속으로 떨어져 들어갈 것이오. 그러고는 끝도 없고 견딜 수도 없는 고통을 겪어야 될 것이오. 이 같은 운명 속에서 영겁의 앞날을 신음하기 전에 내 말에 귀를 기울이도록 하오. 그리고 내가 천도해 주는 이 모든 가르침을 마음속에 새겨 간직하도록 하오. 미혹이라거나 반발을 일으키는 감정을 단호하게 거절하시오. 그러고서 내가 그대에게 제시해 주려고 하는 자궁 입구 봉쇄 방법의 한 가지를 외도록 노력하시오. 자궁 입구를 봉쇄하시오. 그러고는 반대 것을 생각해내시오. 열심성과 순수한 사랑이 필요한 때요. 되풀이해서 알려주어 왔듯이 질투를 버리시오. 그리고 '구루, 부모'에게 명상하시오. 앞에서도 말했듯이 만약 장차 남자로 태어나기로 되어 있다면 어머니 쪽엔 매혹의 감정, 그리고 아버지 쪽엔 매혹의 감정, 그리고 어머니 쪽엔 반발이 생길 것이오. 이 모두가 질투의 감정과 함께 그대 앞에 차츰 나타날 것이오. 이때를 위하여 심원한 가르침이 있소. 오! 기품 있게 태어난 이여. 매혹이라거나 반발이 생길 때, 다음과 같이 명상하시오. '정신 차릴지로다! 나는 웬일로 이 같은 사악한 까르마의 존재가 되었단 말인가! 지금까지 윤회의 굴레 속에서 방황하고 있었던 것은 매혹과 반발이 원인이었구나. 만약 내가 앞으로도 이같이 매혹과 반발을 느끼고 나간다면 나는 무한한 윤회 험로의 방랑자가 될 것이다. 그 속으로 깊이깊이 가라앉아 들어가면서 영겁의 세월 동안 불행한 고해 한 바다 속에서 신음할 것이로다. 정신 차릴지로다. 나를 위하여! 이후부터는 결단코 매혹이라거나 반발에 의해서는 행동하지 않으련다!' 오! 기품 있게 태어난 이여. 미혹되지 말고 들으오. 그대의 마음을 한 초점에 집중시키고 이 결심을 보존하도록 하오... -(사자의 서). 경서원. 참고로 사저의 서는 죽은 후 49일 간의 영혼천도 이유와 그 과정을 상세히 밝힌 티벳의 비밀경전.
  협력자로서의 이성 : 남녀가 분리되는 책임이 스스로에게 있다면 모든 얘기는 달라진다. 물론 위의 예화는 가설 윤회사상에 근거한 것이지만 더욱더 놀라운 것은 (삼계론)에 보면 이 우주의 어느 세계 이상부터는 남녀간의 성 분리가 없다 하니 정말로 남녀가 없는 세계가 있다면 애증의 고통이 없을 것은 분명하다. 범부로서는 믿기 어려운 얘기지만. (성경)에도 '하늘나라에는 시집 장가 가는 일이 없다'고 단언한 예수의 말씀이 있는 걸 보면, 모든 종교적 탐구의 극치는 애욕의 번뇌로부터 벗어나는데 그 목적이 있음을 확실하다. 여하튼 이 사바세계의 뭇 생류에게 성별의 차이에서 오는 괴로움은 숙명인데, 인류는 이 성 문제를 해결하는데 총력을 기울여 다양한 방법을 모색, 계발해야 한다. 룸살롱 문화에서부터 카바레, 대학의 미팅, 예술가의 나체화, 포르노비디오, 술, 마약복용 등 이르기까지 성의 질곡과 압박에서 벗어나 보려는 몸부림이 제법 고급스러운 해결과 저질스러운 배설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문제는 성의 만남이 가져다줄 것 같은, 실제로는 잘 만나진 이성간에서 나타나는 행복과 희열에의 갈망이다. 이 갈망하는 마음은 무엇일까? 애증에 눈물 흘리는 마음은 또 무엇인가? 무의식적으로 성을 갈망하는 데는 실로 완전해지고 싶은 희망이 숨어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불완전한 두려움에서 완전하고 싶은 충동이 성의 밑바탕이다.
  도서관에 책 읽으러 가는 것은 찬성하는 부모나 교사가, 이성교제를 금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책 읽어 유식해져 성공하려는 욕망은 내버려둔다. 성공=행복이라면 꼭 책 읽어서 행복해지라는 법은 없지만 가장 안전한 길이기 때문이다. 비 체험적이긴 하지만 간접체험을 통해 지식의 누적과 기술 축적 연마가 가져오는 권위와 삶의 안정을 가져오는 책에는 안전하다. 책은 배반하지 않는다.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다. 배고파하지도 않고 자존심 상해하지도 않고 비교하지도 않는다. 빼보면 언제나 그 자리에서 맞아주는 검은 활자 무생물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 때로는 자기가 인식한 대로 조종해 볼 수도 있고... 책의 지식인은 가장 '안전빵'의 길을 택했다. 스승을 택한 지식인은 예외이다. 알고 보면 활자는 감정이 없기 때문에 나의 소유로 금방 둔갑된다. 저자보다는 저자의 책을 즐겨 읽는 이면에는 저자와의 인간관계가 싫기 때문이다. 굽신거리고 묻고 틀렸다는 말을 들어야 하는 것은 에고의 출혈이다. 책은 에고의 출혈이 없다. 그러나 같은 지식인이라도 스승 밑의 제자는 다르다. 제자는 부단히 자기 시간을 바쳐야 한다. 스승의 담배, 술 심부름도, 심지어 술집의 외상 술값도 책임져야 할지도 모른다. 스승의 부인, 자녀에게도 예의를 다해야 한다. 스승 눈에 벗어나면 절대로 전달될 수 없는 지식은 자기의 포기 순종 헌신이 뒤따라야 전수된다. 그러므로 제자의 길은 자기포기의 피흘림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책은 아주 쉽게 지식을 전달한다. 멋대로 자기 상상까지 덧붙이면 더 큰 책을 쓸 수도 있다. 이러한 활자문화가 연애를 어렵게 만들었다. 그래서 성도 책부터 시작하는 데 큰 허물이 있다. 관념으로 무장된 이성의 인식은 사물을 그대로 보지 못하고 오직 이성의 대상으로만 생각한다. 환상과 경멸의 순환은 이성 교제를 숱한 실패로 몰고 간다. 조건 지워진 남녀음양이 없는 세계로 안내하는 인도자, 협력자로서 충실히 이해해 간다면 단순히 성의 대상이 아닌 여러 가지 단점과 장점의 종합체인 애인의 참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남녀 성기 구조의 차이와 피임법 등으로 무장된 성교육은 오히려 삶을 조건 지워 버린다. 호기심의 만족이 성은 아니며, 아기의 출산이 목표가 아니다. 이성은 분명 숙명이지만 성욕은 자기발견의 무의식적 충동이다. 성욕을 무시하면 행복의 갈구도 무시되어야 한다. 도서관과 음식점이 폐쇄될 수 없듯이 감성리듬의 개화 장소도 잘 발전시켜 주어야 한다. 건전한 이성교제는 상대를 꼭 이성으로만 인식하지 말고 전인격체로서 인정하는 교육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렇다고 당당히 군림하는 자세도 없다. 상대 앞에서 모든 사념, 조건, 사회적 체면, 자기 위치 등등이 사라져 비교 당하지 않고 한 인간으로서 인정받고 싶은 것이다. 이성은 음양의 특성을 물리적, 심리적으로 나누어 가졌지만 본질적으로는 하나이다. 그 하나임을 서로 자각하게 하는 사다리의 연출이 각각의 사명이자 헌신이다. 춤문화, 예술문화 등으로 간접 카타르시스 되는 성의 승화는 인류가 숙제로 풀어야 할 필연적 과제라 아니할 수 없다. 음과 양, 반쪽 에너지 편중현상의 실제 이해와 더불어 음양 이전의 태극의 상황에 대한 명상적, 철학적, 자기고찰적, 깊은 교육적 진단이 필요한 지구촌이다. 더욱 더 성폭력의 부작용이 나타나기 전에... 더욱 더 마약문화의 어두움이 덮이기 전에...
  상하명분 부동설 : 괘는 건괘요, '천' 즉 하늘이라는 뜻이다. 양의 중의 양이요, 왕과 위엄, 강함의 상징이다. 그러나 그 위치는 낮을수록 좋다. 건천 괘가 위에 있고 곤지 괘가 아래 있으면, 64괘 중 가장 흉한 괘 중의 하나인 '천자비'괘가 되는데 이는 당연한 위치, '하늘은 위' '땅은 아래'를 표시했는데도 불구하고 부정적인 뜻인 '비'라는 명칭을 달아 나쁜 징조로 보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거꾸로 '지천태'는 '클 태'로 표시하여 길한 상으로 보았으니 (주역)의 오묘한 사상이 이에 있다. (좋다! 싫다! 생각해 보자!)에서도 피력했지만 수화의 괘상도 이와 비슷한 설명을 한 바 있다. 화가 위에 수가 아래 있는 괘상. 화수미제는 수화기제에 비해 불길한 것임을 말이다. 화수미제 괘상은 더운 불은 불대로, 찬물은 물대로 각각 노는 괘다. 곧 중심이 파괴되어 그 생명이 없으니 화가 아래 있으면 자동적으로 수화가 오르고 내린다. 이로 보아 사람의 위인 머리는 차야 하고 아래인 배는 더워야 하는 생리적 구조가 적당한 것이다. 두한족열(머리는 차고 다리는 더워야 한다)의 원리는 바로 이것에서 나온 것이고, 다른 말로 복무열통 두무냉통(배는 더워서 아픈 법 없고, 머리는 차서 아픈 법 없다)의 이론도 이것에서 비롯된다. 하늘의 양과 땅의 음이 비록 위 하늘, 땅 아래 같아도 같이 되면 양은 위로 본래 뜰 것이고, 음은 아래로 그 성질 따라 가라앉을 것이 분명하다. 천지부와 같이 되면 중심이 없고 위태로운 지경이 된다. 유연하고 부드러운 음덕이 위에 있고, 강하고 씩씩한 양덕이 아래 있으면 같이 순환이 되어 활동이 자연 안전할 것이다. 대체로 윗사람은 음덕을 지니고 여성적이어야 하고, 아랫사람은 양덕으로 남성적이어야 할 것이다. 여성적인 것이 상위라면 남성들이 기분 상하겠지만 남성이 살려면 여성이 있어야 하는 것은 천리다.
  석가모니가 진리를 깨닫고 나서, '이것이 있으메 저것이 있다. 저것이 있으메 이것이 있다. 이것이 생하메 저것이 생한다. 저것이 생하메 이것이 생한다'라고 소위 상대성, 불교용어로 상의성 진리를 갈파하셨다. 대입하면, 하늘이 있으메 땅이 있고 남자가 있으메 여자가 있고 찬 것이 있으메 더운 것이 있고 천한 것이 있으메 귀한 것이 있고 꼴찌가 있으메 일등이 있다. 등등 모든 상대적인 맞물림을 응용할 수 있다. 물론 거꾸로도 되는 말이듯이 여자가 있으메 남자가 있다. 우월망상에 젖은 남성이 존재하는 것은 여성이 있음으로서다. 요즈음 일부 여성들은 남성을 타파하고 싶어하지만 남성을 타파하면 여성도 죽는다. 상호의존적 철리를 깜박 잊고 사는 이 진리망각 문명 지구촌은 식물과 동물의 공존도 파괴한다. 식물이 있으므로 동물이 있다면 마구 자연파괴를 해도 되겠는가 안되겠는가 묻는 것이 어리석다. 모름지기 위의 왕은 여성적이어야 한다. 곤의 덕은 유순함을 특징으로 하고 겸손함을 그 용으로 한다. '과인'의 '과'자는 '부족할 과'이다. 항상 옛 임금들은 '과인이 덕이 부족하여...' 등의 말을 사용하였다. 윗사람은 낮은 마음을 쓰는 것이 제일이며 온유해야 하는데 강경일변도로 나가는 명령은 위 아래를 모두 강하게 하여 부러지는 일밖에 없다. 그렇지 않아도 강한 혈기의 아들 딸을 지도하는 윗사람은 유약한 듯해야 한다. 쇠파이프 대신 수수깡을, 박달나무 방망이 대신 고무풍선 막대기로 가르쳐야 할 윗사람이 오히려 초강경을 지시한다면 중심의 원을 그릴 수 없음이 자명하다. 상하는 결국 한몸이지만 각기 명분이 달라야 한다. 물과 기름이 섞이면 불꽃이 안 일듯이 그 직분의 분기점이 다를 것은 달라야 한다. 설사 아랫사람이 강하고자 하여도 윗사람은 약하고자 해야 한다. '대의는 천하의 병을 고친다' (내경)의 간절한 말인데 이 사회 이 나라 지구촌은 중병이 들어도 단단히 들었다. 강대국의 윗사람 부인조차 적국 윗사람의 교수형을 보고 싶다는 끔찍한 인기용 발언을 쏘아대고, 가까이는 유약한 아랫사람, 초강경한 윗사람의 한국 사회를 보면 천하의 병이 심각해도 한참 심각하지 않은가?
  심정부침 : 이 나라 3대 의성은 허준, 이제마, 사암 도인이시다. 동의보감, 사상의학, 오행침법을 나란히 개발한 선조들은 각기 그 독특한 개성으로 민족의학을 꽃피웠다. 선승이었던 '사암'은 그저 바위굴 속에서 닦았다 하여 사암이다. 그의 행적은 없고 치료경험의 예만 손으로 손으로 전해 내려왔는데 그 서문에 이런 말씀이 있다. '심칠정부침 의자 의야.' '칠정, 즉 희, 노, 애, 락, 애, 오, 욕의 뜨고 가라앉음을 살핀 연후에라야 의사로서 뜻을 얻었다 할 수 있다'하셨다. 감정의 파악 없이는 의사 노릇 할 수 없다는 뜻일진대 심리적 관찰을 선행하라는 가르침 아닌가? 그래서 '이심치심' 즉 마음으로 마음을 치료하는 심의를 옛 사람은 최고로 했다. 알고 보면 세계 4대 성인 및 모든 거룩한 현자들은 모두 심의인 셈이다. 예수 사랑, 부처 자비도 심의의 처방이요, 스크라테스의 '이데아'의 세계나 공자의 '중용'의 도리나 다 심의로서 내준 마음약들이었다. 실험실의 화학약품으로 마음을 마비하거나 환각적 약물복용에 자신의 번뇌를 씻는 것은 의타적 방법이요, 자신 있는 문화인의 도리는 아닐 것이다. 교육이 분석적, 과학증명적으로 되다보니 육안 파악 문화만 제일로 치고 안 보이는 마음 문화를 우습게 보는 결과를 초래했다. 과학자가 실험에서 세계를 콩가루로 만들 수 있는 폭약을 개발하면 그 공로로 일생 잘 먹고 지낼 수 있는 세상이다. 마음속에 사랑과 동정과 연민이 있다면 어떻게 살상무기를 연구하는데 그렇게 시간을 소비할까? 독한 찌꺼기나 쇳물이나 화공약물이 흘러나와도 상관없이 산업공장을 가동시켜서 외화 획득을 하면 훈장을 주었다. 그만큼 우리는 급했다. 마음보다는 몸, 자연보다는 공장, 수양보다는 기술로 치닫는 사상의결과는 참혹할 뿐이다. 돼지고기 잘 썰고, 찌고, 볶아서 제품 잘 내놓는 수백만의 기술자를 다합쳐도 돼지 한 마리를 만들어낼 수 없지 않은가?
  생명에 대한 신비와 외경 사상은 사라졌고, 이용과 살육으로 멍들어온 문명시대다. 꽃씨 하나 제대로 못 만드는 비창조적 인간 주제에 베고, 자르고, 태우는 파괴의 신은 잘도 자처한다. 이제 칠정의 움직임을 차분히 관조할 때다. 가속도 붙어 마구 치닫는 속도문화 열병은 중심을 잃었다. '마음을 마음으로 치료한다'는 이심치심의 전수는 옛이야기의 전설로 되었고, 공자는 골치 아픈 윤리 도덕가가 되어버렸으며, 소크라테스는 이상을 좇는 비현실적 철학가로 둔갑되고, 예수는 거대한 종교집단의 우상적 권위자로 잘못 인식되고, 부처는 앉아서 졸고 있는 몽상가로 매도되는 이 시대다. 처방 없는 것처럼 보이는 참교육 부재의 이 시대는 적어도 성인의 법을 귀감으로 삼는 시늉이라도 해야 한다. '땅에 넘어진 자는 땅 짚고 일어난다'는 옛말같이 마음 잘못 써서 오는 모든 질병과 사회악은 마음에서 짚고 일어나야만 한다. 주역의 중심은 태극에 있는데 이는 음양의 조정능력이다. 어두운 음적인 마음과 밝은 양적 기분의 조화를 비롯하여 욕심과 분노, 쾌락과 고통, 질투와 선망, 공포와 즐거움 등으로 점철된 마음의 세계를 조절하는 능력이 곧 태극의 마음이다. 태극기의 중심에 있는 태극 마크를 국기로 내건 뜻과 좌우상하에 건천괘, 곤지괘, 감수괘, 이화의 네 괘를 시설한 의지는 무엇인가? 건곤의 강약과 수화의 음양을 잘 조율하라는 뜻일 게다. 태극의 마음으로써...
  분리의식의 산물인 전쟁과 진리에의 무지로 인한 질병, 독점욕의 부작용인 기아는 종교적인 구제 사명이다. 전쟁이 끝났지만, 상처는 크고 원한에 찬 마음은 미래의 전투를 준비한다. 평화란 단지 전쟁의 부재기간일 뿐이요, 인류의 역사는 잠정적 전쟁 준비기간인 가칭 평화시와 전쟁의 순환에 불과하다. 오만한 모습의 승리자는 전술의 탁월함을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노자의 말씀에 '군대는 흉기'라 하셨다. 흉기는 얼른 거두어 손을 씻고 미안한 마음으로 희생자의 영혼을 위로해야 한다. 그런데 갖가지 자랑을 일삼아서야... 전쟁의 도발은 교육에 있다. 최면적 교육은 마음의 고집스러운 편견을 만든다. 종교적 분리주의는 그 해독이 엄청나서 신의 이름을 전쟁의 마왕으로 둔갑시킨다. 신의 이름으로 죽이면 더욱 거룩하게 포장되는 양심이다. 게다가 각 나라는 다투어 상혼을 발휘하여 전쟁 폐허 복구사업의 주문을 받으려고 난리들이다. 희생자인 무고한 양민들이나 패자 승자 모두 희생군인의 위령제를 의논하거나 제안하지는 않는 채... 나라라는 이름으로 치러진 전투는 그 얼마이며 사상, 피부색, 종교의 명분으로 피차가 나뉘어 이상이 굳어 일으킨 그 파괴는 얼마인가? 하루 8억 달러씩 들어간 전쟁비용(다국적군)을 합하면 전 세계 난민, 기아 선상에 허덕이는 인구를 충분히 먹이고도 남을 것이요, 걸프 만에 부어버린 기름 용량은 가히 천문학적 숫자이며, 그 공해를 다시 원위치로 회복시키는 데는 10년이 걸린단다. 쿠웨이트의 유정에 붙은 불은 끄는 데 2년이 걸린다니 이 지구인의 어리석음은 참 끝도 없다. 승리의 도취를 얻기까지 문명파괴와 시간 퇴행적 손해를 치러야만 항복한다는 말인가? 악의 응징은 필요하다. 그러나 방법이 폭력적이면서 평화를 추구하는 것은 거짓이다. 이제는 누구나 힘을 추구할 것이다. 더 나은 병기의 개발과, 전술의 공부와, 교묘한 살생의 방법론을 인류는 공부할 것이다. 더 큰 전쟁의 학습에 불과한 이번의 싸움에서 오는 각 나라의 각성은 오직 군비강화일 것이 분명하다. 자동차는 무정물이지만 달리고 싶어하듯이 무기는 만들어 놓으면 쓰고 싶어진다. 군비강화에서 오는 민족주의적 힘의 추구는 언젠가 꼭 전쟁을 유발시키고야 말 것이다.
  이긴 자는 무기를 수치스러워하고, 패권을 휘두르지 말아야 할텐데... 어디 징조가 그러한가? 승자에 대하여 으스스한 암시적 공포가 저절로 느껴지는 각국은 이제 '비굴한 아첨이냐, 강한 자기실력 배양이냐'를 놓고 고민할 것이다. 복종과 타협을 통해 힘의 신질서를 숭앙하여 폭력을 호도해서는 안 된다. 이제 세계는 도의 덕을 나타내야 하는 때다. 겸손하고 유약한 강자의 미덕을 발휘하여 부득이 휘두르는 총칼을 부끄러워한다면 멋진 지구촌이 되어질 징조이다. 그러나 승전을 빙자하여 요구, 주문, 압력 등을 일반사로 삼는다면 웃기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 분명하다. 정반의 논리는 필연적이라서, 꼭 반대급부의 세력을 만들게 되며, 다시 세계는 힘의 냉전 시대로 접어들 것이다. 게다가 종교적 반골정신까지 가미되면 극단으로 갈 것이다. 세존께서는 석가족의 국민이 피해 받는 전쟁을 막아보려 세 번씩이나 진군하는 적군 코앞의 그늘 없는 뙤약볕 아래 앉아 계셨다. 왕의 적개심을 결국 돌리지 못해 일어난 석가족의 최후의 전쟁시에 세존은 '절대 무기를 들어 같이 맞싸우지 말라!'가르치셨다. 한탄하시되 '정업은 어쩔 수 없구나!'하시며... 장렬하게 업을 치렀던 석가족은 최후까지도 무기를 들지 않았다. 국민의 고통을 보다 못한 한 대신은 적국의 왕에게 간절히 부탁했다. "내가 물 속에 있는 동안만은 사람을 죽이지 말아 달라!" 이를 허락 받자 그는 연못 속으로 뛰어들 때 큰돌을 몸에 꽁꽁 매었다. 살생을 중지하고 한참을 기다려도 떠오르지 않아 적국의 왕은 시체를 꺼내어보았다. 그도 인간인지라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성문을 열어 문을 일부러 터주었지만 석가족은 비폭력 무저항으로 남문으로 나간 저는 다시 동문으로 들어가고, 서문으로 내쫓긴 자는 다시 북문으로 들어왔다는 눈물겨운 이야기... 감동 없는 이 시대-. 석가세존의 비저항 시나리오는 업을 씻는 자기 이익도 있지만, 후세인에게 모범을 보이자는 뜻이 깊이 숨어 있지 않았을까? 이 석가족 멸망의 원인도 알고 보면 사소한 것이 씨가 되었다.
  세자비로 석가족의 공주를 요구한 나라에 속임수로 하녀를 보낸 것이 화근이 되어, 어느 날 하녀에게서 태어난 왕자가 엿듣고 보니 자신의 비천한 출생을 궁녀들이 비아냥거리며 수군거리지 않는가? 이를 안 왕자는 훗날 왕이 되어 석가족의 속임수에 앙갚음을 하게 된 것이다. 무서운 인과가 아닌가? 이 지구촌의 교육을 보자! 어려서부터 '여호와' 이외에는 다 적이라고 가르친 것은, 종교적 민족주의를 혹시 가르친 것은 아닌가? 이름 명 자에 끄달려 증오의 귀신을 삼고 지구를 얼룩지게 하는 신들의 전쟁은 '여호와' '알라'가 다 한껏 비웃으실 게다. '저 인천교에 불과한 XX쟁이'라 조소하는 법사가 세뇌시키는 지구촌의 사찰은 무슨 징조란 말인가? 일찍이 '주일학교'를 다니는 어린 영혼은 예수님의 위대한 사랑보다는, 사탄과 같이 살고 있다는 저주 의식을 배우고 있지는 않는가? 일찍이 '룸비니동산'을 다니는 어린 영혼은 부처님의 위대한 자비보다는, 마군과 같이 살고 있다는 저주 의식을 배우고 있지는 않는가? 일찍이 '탈무드학교'를 다니는 어린 영혼은 여호와의 위대한 창조보다는, 파괴병과 같이 살고 있다는 저주 의식을 배우고 있지 않는가? 일찍이 '알라교실'을 다니는 어린 영혼은 알라신의 위대한 통찰보다는, 우매함과 같이 살고 있다는 저주 의식을 배우고 있지는 않는가?
  택화혁 : 이 시대는 모든 곳에서 혁명을 요구한다. 개혁이 필요하다는 말은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다. 물러난 N장관의 TV인터뷰에서도 개혁의 필요를 역설했다. 그러나 '어디서부터'시작해야 할지 갈파를 잡지 못한다는 실토도 사실이다. 혁명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까? 바깥의 구조적 모순을 개혁하면 안의 마음이 바뀔까? 안의 마음을 내혁 하다 보면 밖의 어지러움이 정리될까? 주역의 괘상이 8곱하기 8은 64인데 그중 '혁'을 나타내는 '택화혁'이 있다. 못 택과 불 화가 합친 택화혁 괘상이다. 태택은 상이고 리화는 하이다. 상괘와 하괘의 복합은 무엇을 뜻할까? 자못 난해한 괘의 풀이이며 공자님께서도 세 번이나 (주역)의 가죽끈을 끊어뜨렸다는 이 경전의 해석은 다양하다. 필자 나름대로 유심 유물적으로 분석함은 비록 독단의 허물을 면치 못했으나 주역의 해독의 근본 목적이 인간의 각성과 진리교화에 있음을 잊지 않으려 한다. 혁은 유물적으로 '가죽'의 의미로도 쓴다. '가죽'의 질감과 강인함은 원형을 잘 단련시킴으로써 만들어진다. 택괘는 인체 내부의 제3통로 태음경력을 관장하는데 이 태음의 뜻은 비의 경락과 폐의 경락을 뜻한다. 특히 중앙토에 해당하는 비장 경락은 '사' '의'등 사고 작용을 주관한다. 가, 불가, 긍정, 부정의 결정을 내리기 전에 깊이 사색하는 힘을 만드는 경락이 태음경락인데 정사로 작용하면 건강이요, 사사로 나타나면 질병이다. '사무사'를 말씀하신 공자의 교훈을 기억해 보면 생각의 삿됨은 아주 치명적인 악이라 할 수 있다. 정사와 사사의 차이는 무엇인가? 아마도 택화혁의 괘상 중에 리화의 아랫불로 확 태워버려야 할 것은 사사, 즉 삿된 생각일 것이다. 비장경락의 주관인 중앙토의 '사'는 '비주사'라 하여 동의학 고전에 잘 나타나 있다.
  간주노, 폐주비, 심주회, 신주공과 더불어 각 장부와 마음과의 관계를 드러낸 옛 의성들의 예지를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분노=목, 기쁨=화, 슬픔=금, 두려움=수로 나누어 목화는 동적인 것, 금수는 정적인 것과 양과 음의 기운으로 파악했다. 음양이 있어 양극단을 이루는데 그 음양 가운데 충화지기가 있어 중앙토라는 개념으로 설정하였따. 물질로 나타내면 수와 화의 음양 가운데 습의 상황이 존재하는데 '태음은 습토'라 하여 태택괘는 축축한 습의 개념과 함께 토의 대표적인 오행을 가진다. 수증기, 안개 등의 어중간한 상태는 차갑게 하여 물로 변하기도 쉽고, 덥게 하여 바로 기화시키지도 쉬운 중간자적 표현이다. 마음으로도 '좋다', '싫다'를 결정하기 전, 선택일보 전의 상태를 '생각'이라 표현하지 않는가? 혼사 문제를 예로 들어보자. 권력 있는 집안을 선택할까?(A집안) 재산 있는 집안을 선택할까?(B집안) 물론 권력과 재산이 다 있으면 오래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A 집안은 돈이 없고, B 집안은 권세가 없다. 욕심은 물론 A+B의 대상인데 세상에는 이 모든 것을 골고루 갖춘 인물이 없는가 보다. 이때의 갈등, 선택 이전의 번민이 곧 생각 사의 짙은 병적 형태이며, 이런 갈등의 번민을 오래 끌면 끌수록 태음경락의 작용이 굳어져 심한 '기불승강'의 삿된 울기가 쌓이게 된다. '묵은 갈등, 의혹을 지혜의 불로써 태운다.' 이는 혁명의 뜻이다. 원하는 것이 더 복잡하게 많아져서 권세와 재물 말고도 고학력과 미모까지 원한다면 아마 그 갈등은 더욱 심화될 것이 뻔한데, 바로 사사의 원인은 다양한 욕망 추구에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사사=갈등=의혹=번민...으로 번져 가는데 최초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이것저것 다 원하는 욕심에 그 원인이 있다는 말이다. '이로 상징된 지혜의 불로 명군은 무엇으로 상징된 묵은 갈등을 해소한다.' 이것이 곧 택화혁의 의미가 아닐런지... 화는 이라고도 표현한다. 한방에 '청리자감탕'이 있는데 '이' 즉 화를 맑히고 '감' 즉 수를 보충한다는 '음허화동(폐결핵 종류로서 체중 감소를 수반하는 소모성 질환)'에 쓰이는 성약이다. 즉 청화보수의 작용이 있는 보음지제인데 이와 화는 동격이다. '이는 수려하다'는 뜻도 있지만 말 그대로 이별의 뜻이 강하다. 이별은 헤어짐이다. 변화의 화다. 물에서 기로의 전환이다. 불이 없으면 기화작용이 어렵듯이 에너지화의 기본은 불로 시작된다. 유형의 물질을 소화시키는 힘도 열이다. 이는 물질의 죽음이자 신령스러운 기운의 탄생이다.
  '혁'은 변혁인데 물질의 죽음을 뜻하니 곧 육의 사망이요, 영혼 부활의 시작이다. 체제의 변화는 '혁'이 아니요, 오직 물리적 힘의 전이 현상일 뿐이다. '탄생'의 의미다. '나'의 죽음, 즉 무아의 현현은 곧 혁이니 이는 내혁을 뜻한다. 내혁한 마음엔 갈등이 없으며, 갈등이 없으므로 빛나고 편하다. 인체의 군주지관인 심장이 밝고 편해야 전체 12경락이 편하다. 그러므로 동양의학 고전에 '심에서는 신명이 출한다'했다. 신명 나는 마음이 나오는 '혁'의 과정은 곧 '혁'의 빛남과 같다. 또한 질긴 가죽 같아서 면면히 연속되어 끊어지지 않는다. 지혜의 광명이 세세손손 막히지 않도록 지도자는 길을 터야 한다. 이는 백성을 교화육성하는 기본 사상이다. 이 시대의 말세적 증후군인 암의 창궐은 무엇 때문인가? 모두가 사사의 결과이다. '석가'가 제시한 팔정도의 첫머리도 정견, 정사...로부터 출발한다. 바른 견해와 바른 사유는 도의 근본이다. 중앙 네거리의 교통정리가 엉망이면 사방의 순환이 막힌다. 그림과 같이 중앙토의 비 기능은 교통순경의 직능이다. 모든 명의는 기혈의 순환을 도모하고, 큰 의사인 왕은 민심의 교류를 뚫었다. 없는 자와 있는 자, 귀한 자와 천한 자, 유식과 무식 등등 서로 상대적 계급간의 소통을 도모했다. 있는 자 더욱 있어지고, 없는 자 더욱 없어지면 중앙의 기가 증발되어 유기체인 나라나 지구촌은 멸망하게 된다. 즐거운 자는 즐겁고 화나는 자는 더욱 화가 난다면 쾌락적 흥분성의 열이 맥박을 가동시켜 맥박수가 120-150으로 올라 죽을 것이요, 분노의 중풍성 화가 머리를 강타하게 되면 뇌혈관이 터져 죽게 될 것이 분명하다.
  양극간의 조화를 이루는 중앙토의 조절작용이 아주 중요한데 이를 명철한 지혜로 조정해야 함이 혁의 뜻이다. 해묵고 찌든 갈등은 과감히 청산하고, 정도 실천의 지성의 불로 바른 생활을 유도해 나감이 '택화혁'의 기본 뜻이 아닐까 거듭 밝힌다. 그럴듯한 혁명론자들이 세상 뒤집어 엎어보았지만 변소에서 향수 뿌리는 격이니, 이는 아예 변소에서 나옴만 못한다. 혁명은 초월이지 앞면에서 뒷면으로 뒤집는 것이 아니다. 폭력으로 백성을 다스리거나, 더구나 폭력으로 혁명하자는 논리는 일종의 복수극이요, 원한 파급의 불길한 방법인 만큼 참으로 생을 사랑하신 옛 성인의 한탄하시는 바 아니겠는가?
  지뢰복 : '지뢰복' 혹은 '부'의 괘상은 동짓날의 기운을 상징하기도 하는데, 이는 첫 효만이 양의 상징으로서 모든 음기 가운데 호로 일양이 생함을 말한다. 비록 동자가 춥지만 그 가운데 양기가 나오면서 봄을 예고하니 부흥의 징조이다. 거꾸로 하지의 괘상은 맨 아래의 음의 상징 하나뿐으로, 하지가 덥기는 하지만 벌써 일음의 기운이 싹트고 있다. 우주 순환의 천리로 보면 영원한 상승의 양기도 없고, 영원한 하강의 음기도 없다. 음극즉양이요, 양극즉음이다. 지뢰복의 아래 뢰는 인체에 있어서는 담경락에 속하며 소위 소양상화의 출처에 속한다. '담'을 단순히 간 가운데 있는 '쓸개'라는 기관으로 인식한다면 곤란하다. 소화기관의 탱크 역할로서 단백질과 기름의 분해 효소가 나오는 정도로 인식한다면 한의학의 경락체계를 너무 모르는 소치다. '쓸개 빠진 놈'이라 말할 때 우리는 그 어떤 마음의 용심이 부족한 사람을 비꼬아서 말하지 않는가? 담은 '중정지관'이라 하여 바로 그 중도를 잃지 않게 하는 유심적 기능의 경락으로서 넷째 발가락을 지나는 엄연한 유체생리적 기관이다. 더구나 상화는 소양이라 표현하여 '족소양담경'이라 통칭하는데 '서로 상' '불 화'의 합성어인 상화의 뜻은 매우 중요하다. '자존심', '오기' 등의 주체적 사고 능력이 배제된 인물을 '쓸개 빠진자'라 하듯이 담은 인간의 독립자존적 자주심에 해당한다. 기생적 의타성 성분의 인간은 언제나 대담하지 못하다. '담력이 부족하다'이 뜻은 무엇인가? 곧 용기, 의로움, 주체성, 한번 죽을 각오 등 투혼의 결여를 말한다. 지는 '곤'이라고도 한다. 좋은 의미로 부드러운 여성적 모성을 뜻하지만 나쁘게 작용하면 곰살 궂은 악에 해당한다. 매사에 너무 긍정적 칭찬만 일삼는 모성은 자식을 유약하게 키운다.
  엄부의 질책이 없는 유약함은 곤괘의 나쁜 발전이다. 그러므로 소양지기의 날카로운 담력으로 유약함을 징벌해야 한다. 그래야만 부흥한다. 이것이 지뢰복의 깊은 의미다. 뇌는 번개와 같이 오는데 괘는 진뢰라고도 한다. 한번 크게 '오기'를 내어 큰 분심을 내어 자신의 나약, 나태를 꾸짖어 큰 발심을 하면 부흥할 것이다. 담기능이 향상되어 대담한 마음을 쓰고 보면 절로 부하가 따르게 되니 곧 장군의 용심이다. 또한 소양상화는 바깥의 충고이니 나를 키워주는 고언은 달게 받아야 한다. 졸장부가 감언에 속아 대사를 그르치니 소양경의 담은 그 내용물이 비록 쓰나 몸에 이롭다. 오죽하면 웅담의 힘을 빌려서 기를 기르려 했을까? 이는 곰의 대담무쌍한 기를 취하고자 함이니 만물의 영장으로서 심히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웅담을 크게 채취하고자 곰을 수개월 송곳으로 찔러서 화나게 만들어 죽여보면 정말로 곰 쓸개가 크다고 한다. 간특한 인간의 지혜라 아니할 수 없지만 어쨌든 담은 용기와 의분심 등의 오기와 관계가 있다. 고이 자란 곰은 아무리 커도 웅담이 자그맣다는데 인간도 너무 '오냐 오냐' 키우다 보면 쓸개 빠진 자가 되지는 않을런지...
  
      제2장 본래 없는 질병과 건강
    종이 방학
  여백은 활자를 기다린다. 그러나 여백은 가끔 여백인 체로 있고 싶어한다. 마음의 여백은 마치 수면과 같아서 언제나 소중하게 보호해야 한다. 여백이 없는 마음은 불건강이요, 질병 그 자체이다. 많은 인식과 감정과 숱한 이론과 법은 마음의 여백을 장식한다. 그러나 하루쯤은 터엉 빈 채 남겨놓을 수 있지 않겠는가? 자! 종이에게도 방학을...
  
    담양 가는 길
  광주에서 담양 가는 길목 왼쪽에 월산초등학교강 있다. 흰 매화가 만발한 교정은 뒤에 대숲이 있어 더욱 멋지다. 온통 대나무숲인 담양 가는 길은 한 뼘만 서울 땅에 옮겨두고 보아도 그 절개가 빛날 것이다. 공장이 안 들어선 전라도의 소나무는 그 빛이 더욱 푸르르다. 먼 훗날 산업체로 꽉 차게 되면 오늘의 풍치를 꿈같이 그리리라. 속아도 스스로 한참 속은 도시 산업문명의 속임수. 물 한컵을 얻으려 생수를 사듯, 공기 한움큼 마시려면 산소 마스크를 사야 하리라. 초등학교 뜨락에는 국화 싹이 올라오고 대나무와 매화꽃이 있는 정경.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학교인데도. 난초만 안 보이지 매란국죽의 사군자가 거지반 있는 시골. 전원. 자연. 이제 앞으로는 전설로 남으리라. 그러고는 공장 근처에 통닭 튀김집, 맥주홀, 카바레가 생기고, 뒷방에서는 고스톱과 포카가 벌어지리라. 변화와 생기 없는 공장문화여! 재미를 인위적인 데에서 찾으리라. 이제는 대나무도 시멘트 모조품으로 만드리라. 매화꽃도 플라스틱으로. 그려서 찍어내는 국화와 난초를 역겹지만 봐야 하리라. 소나무는 누렇게 퇴색해 가고 굴뚝에서는 연기가 펑펑 나오리라. 안산. 경기도 신도시 안산의 앞바다에서는 바람이 신나게 불어온다. 갯벌이 유별나게 많은지라 '무슨 찌린내가 나는가?' 의심했지만 눈을 들어 건너다보니 하늘로 치솟은 거대한 시멘트 연통에서 검은 마왕같이 치솟는 그을음. 찌린내가 아니라 썩다 썩은 폐수 냄새가 아닌가? 인천 앞바다에 커다란 배가 수십 척 떠 있는 모양은 어떤가?
  그러고는 그 기름투성이의 바닷물을 펌프 호수로 빨아올려 수족관의 생선에 공급하고 있는 것은? 환한 네온사인 속에서 행복하게 살 한 점, 두 점, 술과 함께 들고 있는 가족의 파티는 어떤가? 눈이 한쪽에만 붙은 괴어, 지느러미가 내리 붙거나 울통불통해진 뼈를 지닌 기이한 물고기가 접시에 올라와 복수를 한다. 인간의 태아도 사자가 오그러진 모습, 반은 동물의 모습, 얼굴 없는 귀신의 형상 등으로 원수를 갚는다. 2천 6백여 공장의 폐수가 설사 잘 걸러져 낙동강을 흘러나간다 해도 그 물이 어디 산 물인가? 상추를 기름물에 푹 삶았다가 깨끗한 물에 헹구어 놓으면 어디 그게 상추인가? 진 다 빠진 물과, 혼탁해진 공기는 잘살고자, 편리하고자 만든 산업사회의 발전에 들인 비용의 수억만 배를 들어도 회복하기가 어렵다. 비틀어 꺾어놓은 팔을 제 아무리 우수한 기술로 원상복귀 시켜도 성한 것만 할까?
  싸아! 달콤한 매화꽃 내음에 때 이른 벌이 어느덧 윙윙거리는 초봄. 매화 냄새에도 재채기가 나는 도시인은 오늘도 방황하고 있구나! 주저주저하고 있구나! 저주받을 문명을 떠날까 말까?
  
    팔문팔답
  첫째 물음 : 이 우주간에 첫째가는 물건은 무엇이며 질병의 괴로움을 퇴치하되 영원히 없애려면? 답 : 그것은 삼성하반월이니 별 셋 밑에 반달이다.(나옹선사 말씀 중) 또한 질병은 몸이 있으므로 생기니 몸이 없으면 병도 없는데 몸이 없으려면 태어나질 말아야 한다. 안 태어나는 방법은 한 번도 태어난 일, 죽은 일 없는 물건을 깨닫는 수밖에 없다. 그만 질문을 쉬고...
  둘째 물음 : 어째서 남자 여자라는 상대가 있으며 결혼의 의미는 무엇인가? 답 : 남녀가 없어 시집 가고 장가 가는 일이 없는 곳이 있는데, 서로 도와서 그곳에 도달하는 작업을 성실히 수행함이 결혼의 참다운 의미이다. 실상은 남녀가 본래 없는데 양전기와 음전기와 음전기적 두 가지 마음의 집착으로 남녀가 나뉘었다. 한 생각의 망상으로 남녀가 나뉘는 바람에 반쪽의 삶에서 합해야 완전해지는 추구를 서로 맹렬히 하나 상호의존과 구속의 공포는 자칫 두터운 업을 더 쌓기 쉬운 허물이 많다. 각자 내면으로 깊숙이 들어가야...
  셋째 물음 : 시간의 초월이란 도대체 어떤 뜻으로 쓰이는 말인가? 답 : 시간의 개념상 두 가지가 있는데, 즉 물리적 시간과 심리적 시간이다. 버스를 타고 일정한 곳에 도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왜 없겠는가? 문제는 출발과 도착의 중간에서, 즉 목표까지의 도정에서 느끼는 심리적 지루감, 초조감, 달성의욕 등을 말하는데, '시간'의 초월이란 이러한 심리적 '권태감', 즉 '아! 빨리 왜 안 가나?' '심심해'등등의 번뇌적 상황을 관조하는 것이다. 인생을 돌이켜보거나 앞을 내다보거나 '왜 오늘은 옛날 같지 않지?' '오늘은 쥐어짜더라도 미래에는 행복해야지' 등등, 자꾸 과거심, 미래심으로 치닫는 비교의 마음을 시간적 슬픔이라 하고 죽은 마음이라 한다. 너무나 즐거운 일에는 자연히 시간이 흐르는 것을 잊게 된다. 초조하게 자꾸 들여다봐지는 시계는 심리적 시간의 표출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시간을 잊어 즉각 즉각 살고 현재에 동참하는 것은 매우 어렵기는 하나 실천해야 할 행복의 명제이다. 특히 규칙과 시간의 노예인 이 문명시대의 두뇌는 장차 필히 해방되어야 한다. 일(직업)이 곧 취미인 사람이라면 그는 거의 시간의 해탈자임이 틀림없다고나 할까?
  넷째 물음 : 몰두, 즉 집중과 명상의 차이점은? 답 : 명상은 깨어 있음이고, 집중은 고도의 몰두 현상이다. 비유하면, 운전중 기사가 골똘히 어젯밤 부부싸움의 원인을 분석하고 연구하고 있다면, 그 차의 운전 상태는 가히 신뢰스럽지 못하다 할 수 있다. 백미러까지 수시로 살펴가면서 엔진의 소리로 진단도 하고 브레이크, 엑셀러레이터, 클러치를 면밀히 작동시키고, 도로도 살피고 승객의 분위기도 민감히 파악할 수 있는 각성된 기사가 모는 차는 안전하다. '나는 오직 엔진 오일의 개발에 전념하겠다!'의 프로 정신이 집중과 몰두의 산물이라면, 전체를 작동하는 완벽한 운전을 행하는 운전사의 역할은 명상이다. 마음은 전체적으로 깨어 있되, 부분적 몰두 연구의 산물인 발전적 용심이 필요하다. 물론 먼저 주가 될 것은 명상 공부부터이지 결코 집중 훈련이 아님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다섯째 물음 : 명상이 주는 건강에의 도움은? 답 : 영향은 절대적이다. 예를 들어 수면 현상을 보자. 천하 없는 즐거운 일도 언젠가는 피로하게 마련인데, 열 가지 일 다 제쳐놓고 우선 잠부터 보충시키고 그 다음 삶을 영위하지 않는가? 명상이 어찌 수면보다 못하겠는가? 예민하게 깨어 있는 작업은 수면조차 주시할 수 있는 자가 객관화 작업이다. 아무리 바빠도 오줌, 똥 마려우면 그것부터 해결해야 한다. 명상이 대, 소변 해결하는 것만 못 하겠는가? 비워버리는 작업 이것은 재충전이니, 곧 건강 에너지의 원천이다. 산해진미 등, 최고의 맛을 다 본 후에는 혓바닥을 깨끗이 물로 헹구어내야 다음의 맛을 즐길 수 있다. 어찌 명상이 물보다 못할까 보냐? 담담한 마음으로 되돌아와서 분주히 사용했던 마음을 씻어야만 다시 의식 감정의 흐름 맛을 정확히 느끼고 판단할 수 있음이 분명하다. '깨어 있음(예민), 비움(휴식), 담백함(무정). 이 세 가지는 명상의 추춧돌이며, 건강의 지름길이라 단언할 수 있지 않겠는가?
  여섯째 물음 : 약이 안 되는 풀 이름 한 가지만? 답 : 어떤 풀 이름을 대도 틀린다. 왜냐? 약이 안 되는 풀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 뒤집어 얘기하면 모든 식물이 다 약이 된다. 보는 눈이 없어서 약이 아니라고 여길 뿐이다.
  일곱째 물음 : 마악 잠이 들려 할 때 숨을 내쉬는 것으로부터 잠이 시작되는가? 들이쉬는 것으로부터 잠이 시작되는가? 답 : 내쉬는 숨부터 잠은 시작된다. 잠은 의식의 배설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혹시 마지막 죽는 순간은 어떤 호흡부터 시작될까? 그건 가봐야 한다. 잠은 아주 예리한 사람이라면 경험으로 조사할 수 있지만 죽음은 오직 한 번의 경험이지 않은가? 잠들 때 정밀히 깨어서 주시하면 호흡 상태를 증명할 수도 있지만 죽을 때는 딱! 한 번 죽으니 그때 가서 관찰해야 할 일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죽음의 순간, 자신의 호흡을 응시할 내관의 힘은 평소 수면까지도 주시하는 습관에서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여덟째 물음 : 비에 젖지 않는 물건은? 답 : 일찍이 성월 대선사께서 '일성장저출운래 : 한 소리 긴 파리가 구름으로부터 나온다'라 하셨다.
  
    유심론적 한방치료 1
  올바른 양생의 근본은 이럴까 저럴까 의혹하여 심한 사랑 분별하는 그 분별을 놓는 데서 출발한다. 혹하므로 공상이 생긴다. 모든 질병은 탐욕과 분노에서 생긴다. 지나친 탐욕은 냉병을 일으키고 지나친 분노는 열병을 불러들인다. 몸이 차면서 비대한 사람 치고 욕심 적은 이가 드물다. 몸이 더우면서 수척한 사람 치고 분노심이 적은 이가 드물다. 이 극단의 두 마음은 모두가 질병의 뿌리가 된다. 예를 들면 입술을 모으고 숨을 들이쉬면 입안에 차가운 기운이 생기듯이 모든 취하고자 하는 기운은 차가움을 수반한다. 남녀간에 서로 애욕의 정이 생기면 자연히 남녀의 두 근에 애수가 판다. 무릇 취하고자 하는 마음은 그것이 형상화될 때는 물을 수반하며 심하면 냉기를 수반하게 되는 것이다. 차갑고 아픈 냉통의 감각까지 질병이 진행되었다면 무엇인가를 사랑하여 취하고자 하는 마음을 지나치게 누적시켰던 결과이다. 대체로 욕심의 대상은 형상 없는 데 대한 욕심과 형상 있는 데 대한 욕심으로 나눌 수 있다. 형상 없는 데 대한 욕심의 대표는 명예욕, 권력욕이다. 형상 있는 데 대한 욕심의 대표는 재물욕과 성욕이다. 가장 마지막까지 지속되는 것은 가장 굳은 재물욕이며, 성욕은 그 부드러운 감촉을 위하고자 함이니 재물보다는 덜 지속되며, 형상 없는 명예나 권력에 대한 욕심은 비교적 빨리 나타났다 없어졌다 한다. 그러므로 그 대상에 따라 그 취하고자 하는 기운도 다르겠지만 근본은 탐욕에 있다. 스스로 마음을 움직여 구하여 탐한 마음을 잘 조절하면 곧 양생의 대도이다. 마음에 거스르는 일이 있으면 누구나 다 충격을 받는다.
  충격을 받으면 저절로 열이 나는 것은 정신의 세계나 물질의 세계나 마찬가지이다. 충격의 열을 하루하루 쌓아가다 보면 저절로 상기가 되면서 더러는 어지러워지고 습관적으로 투쟁적인 분심이 솟을 것이다. 이 분노심의 점차적인 누적은 대단히 아픈 열병이나 현기증을 수반하는 질병이 된다. 이 탐욕과 분노는 종이의 양면과 같아서 탐욕으로 인하여 분노가 생기는 상대적인 관계가 생긴다. 물론 거꾸로 분노로 인하여 탐욕이 생긴다는 역이론도 성립된다. 인간이 애당초 마음에 욕심이 생기어 그 무엇인가를 취하고자 하므로 뜻에 맞으면 만족하지만 욕심만큼 충족되지 않았을 때는 그 역현상인 분노심이 생기게 된다. 분노심의 특징은 파괴하려는 것이다. 즉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여, 없애려는 경향으로 움직여나가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극단의 탐욕과 분노의 조절은 양생의 대도이다. 양생이라 함은 죽지 않고 오래 장수하여 연명하는 길만이 아니고 살되 무병하고 건강하며 평화롭게 사는 길을 말한다. 천하를 얻었다 한들 자신의 정신과 건강이 균형을 잃었다면 그 기쁨을 수용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대의라면 사회의 병도 과감히 고칠 수 있어야 한다. 인류가 천재지변이나 전쟁이나 질병, 갈등에 시달리고 있다면, 대의는 더 큰 안목으로 참다운 이치를 관찰하여 능력껏 해결하여야 할 것이다. 어지러운 전란이 일어나서 난세가 되었는데 자기의 손 아래 떨어지는 환자나 치료하고 있다면, 이는 소의이다. 전쟁이 일어난 원인을 알아서 그 원인을 제거하기에 앞장선다면 그 자세가 곧 대의의 자세이다.
  전쟁의 부산물로 나타나는 숱한 질병은 전쟁만 없으면 곧 없어지게 될 병들이기 때문이다. 이 전쟁도 인간이 일으킨 것이고 한 인간의 마음에서 출발한 것이다. 한 인간의 마음에서 일어난 살기가 인간의 마음에서 출발한 것이다. 한 인간의 마음에서 일어난 살기가 인간의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파되어 천하를 뒤덮는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요컨대 어떠한 전쟁, 질병, 고통도 근본은 한 인간의 마음에서 출발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떠한 난세라도 근본은 한 인간의 어지러운 마음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렇게 되어 그것이 세력을 얻으니 시대가 살육의 시대도 되고 음란의 시대가 된다. 마음의 음기가 양과의 조화를 잃고 홀로 쌓여 독해진다면, 그는 이미 살인자의 소질을 기르고 있는 것이다. 마음의 양기가 음과의 조화를 잃고 홀로 분분히 날뛰면 그는 이미 음란의 소질을 기르고 있는 것이다. 음양으로 치우친 것은 아니지만 애매한 마음만 길러내다 보면 그는 이미 세상을 혹할 소질을 기르고 있는 것이다. 모든 전쟁, 갈등, 혹란의 근본이 한 사람의 살기에서 출발하듯이 평화나 건강의 근본도 한 사람의 마음에서 출발한다.
  
    유심론적 한방치료 2
  한 사람의 마음이 평안하므로 그 마음이 전파되어 세상에 평화의 기운이 감도는 것이다. 천하를 평화롭게 하는 일과 사회의 빈곤과 질병을 없애는 것은 대의의 사명이다. 한 사람이 평안하므로 가족이 평안하고 가족이 평안하므로 이웃이 평안하고 이웃이 평안하므로 국가가, 천하가 평화롭다. 내 마음이 평안하므로 어떠한 악심에 물들지 아니한다. 악심이 없으므로 악한 병이 없게 된다. 모든 문제의 근본은 의사 자신의 양생으로부터 출발한다. 양생 잘한 의사로 인하여 수많은 환자가 양생 잘 할 것이다. 스스로 살펴보아 마음의 음양이 너무 치우치지 않아서 나도 양생하고 남도 양생하며 나아가 천하를 양생하는 것이다. 대도의 실천은 다른 이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도가 아니라 오직 자신의 진심을 찾아서 응용이 자유자재하여 그 덕을 드러내어 펼치는데 있다. 마음의 본체로 본다면 참도 없고 거짓도 없다.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다 포함하는 것이 곧 마음이므로 이것은 참이다. 분별하는 것은 이미 본체에서 멀어진 것이다. 무분별, 무작, 무위는 거의 본체에 가까운 표현이다.
  즉 '있다 없다' 하는 상태의 유무를 초월한 이름지을 수 없는 것이 진심이다. 만질 수도 없다. 예나 지금이나 앞으로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있는 것이다. 선악, 생사, 미추, 우열, 명암 등의 일체 상대적인 세계가 없다. 이것이 사람마다 모두 지닌, 진심이 본래 가진 덕이다. 이 묘한 덕을 잘 개발하여 사용하여 나가되 진심으로만 사용해야 할 것이다. 거짓된 마음은 스스로 고통이고 남에게도 고통이다. 거짓된 마음은 인류의 질병의 시초이다. 거짓된 마음은 거스르는 마음이다. 순화하는 마음이 아니다. 자연의 섭리와 순환에 순종하고 따르는 마음이 곧 진심이다. 즉 양의 시절에는 양다운 마음이 진심이다. 음의 시절에는 음다운 마음이 진심이다. 천시는 사시로 구분되고 하루는 밤낮으로 구분되고 남녀로 구분된다. 봄에는 봄다운 마음을 쓰는 것이 진심이며, 여름에는 여름다운 마음을 쓰는 것이 진심이며, 가을에는 가을다운 마음을 쓰는 것이 진심이며, 겨울에는 겨울다운 마음을 지키는 것이 진심이다. 낮에는 낮다운 마음을 쓰는 것이 진심이며 밤에는 밤다운 마음을 쓰는 것이 진심이다. 남자는 양다운 마음을 쓰는 것이 진심이며 여자는 음다운 마음을 쓰는 것이 진심이다. 춘하에는 양다운 마음을 쓰고 추동에는 음다운 마음을 가지는 것이 진심이다.
  봄, 여름에는 천지에 양의 기운이 충만하므로 마음을 발양하여 분수에 넘치지 않게 즐거워하며 기뻐할 것이다. 이렇게 천기와 같이하여, 특히 살기라든가 비통한 마음이나 공포에 마음을 나누지 말 것이다. 가을, 겨울에는 천지에 음의 기운이 작용할 때이므로 마음을 수장하여 조심하여야 할 것이다. 이렇게 천기와 같이 하여 특히 지나친 교만이나 음란한 마음, 초조한 마음을 나누지 말 것이다. 살기나 비통한 마음이나 공포심은 양기를 상하게 하므로 만물의 생장을 방해할 것이니 부득이 처벌할 일이 있거든 가을, 겨울에 가볍게 처리할 것이다. 지나친 음란이나 초조한 마음과 교만심은 음기를 상하게 하고 만물의 수장을 방해할 것이니 부득이 생색을 내야 할 일이 있거든 봄, 여름에 가벼이 드러내야 할 것이다. 봄, 여름과 낮과 남자에게는 양실병이 많을 것이며 음허병이 많을 것이다. 가을, 겨울과 밤과 여자에게는 음실병이 많을 것이며 양허병이 많을 것이다. 봄, 여름과 낮과 남자에게서 약간 양기가 성한 것은 병으로 볼 수는 없으며, 가을, 겨울과 밤과 여자에게는 음기가 약간 지나친 것은 병으로 볼 수 없다.
  그러므로 봄, 여름과 낮과 남자의 경우에는 음악으로써 양실을 교정하고, 혹은 양약으로써 양허를 도와주는 경우도 있다. 가을과 겨울의 밤과 여자의 경우는 양악으로써 음실을 교정하고, 음허를 도와주는 경우도 있다. 봄, 여름과 낮과 남자에게 양약을 쓰는 것은 천시에 따라 생장의 기능을 거들어주는 것이고 음악을 쓰는 것은 지나침을 교정하는 것이다. 가을, 겨울과 밤과 여자에게 음악을 쓰는 것은 천시에 따라 수장의 기능을 거들어주는 것이며 양약을 쓰는 것은 지나침을 교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천시와 운기에 순응하여 마음과 섭생을 조절해 나가면 언제나 진심을 잃지 않고 양생의 묘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의도입문
  음양 : 음양을 어렵게 얘기하지 말아야 한다. 구구이 문자와 지식에 집착하여 현란하게 학설을 나열함은 이로움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분란만 조장하여 유파의 독선과 자만이 생길 것이다. 한 마음 밝으면 양이요, 한 마음 슬프면 음이다. 한 마음 선하면 양이요, 한 마음 약하면 음이다. 한 마음 알면 양이요, 한 마음 모르면 음이다. 한 마음 기억하면 양이요, 한 마음 잊으면 음이다. 한 마음 더우면 양이요, 한 마음 추우면 음이다. 한 마음 들뜨면 양이요, 한 마음 침울하면 음이다. 한 마음 깨어나면 양이요, 한 마음 잠자면 음이다. 예를 들자면 한이 없지만 요컨대 양의 근본은 마음에 맞는 쪽으로 흐르면 일컬어 붙일 수 있는 이름인 것이다. 음은 마음에 맞지 않는 경우 부를 수 있는 칭호이다. 사람이 어떠한 대상에 부딪혔을 때 마음에 맞는 다면 그는 이미 양인이요, 마음에 맞지 않는다면 이미 그 순간 음인인 것으로, 음이 순하게 작용함을 음덕이라 하고 양이 순하게 작용함을 양덕이라 한다. 마음에 맞는다 할 수도 없고 맞지 않는다 할 수도 없을 때의 기운을 충화지기라고 한다.
  충화지기가 역하면 혼돈된 마음이 생하고 순하게 작용하면 중화의 묘한 덕이 생하게 되는데 음이 지나쳐 균형을 잃거나 양이 지나쳐 균형을 잃으면 병이라 일컫는다. 이것은 인체에 고통을 주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면목의 마음은 음, 양, 충화지기 그 어느 것도 아니면서 그 어느 것도 다 포함되고 있는 것이다. 지혜로운 의사는 이러한 마음의 양면에서 한쪽으로 치우친 것을 명확히 분별하여 치병의 기초를 닦아야 할 것이다. 단지 초근목피나 약의 이름만 많이 외면 능할 바 있겠는가? '마치 칼만 수집해 놓고 칼 쓰기를 안 배우는 경우와 같다' 하겠다. 지나치게 병명에 의존하여 처방하거나 스승이나 혹 다른 이의 치험례를 들고 맹신하여 음양의 구분 없이 비방인 양 사용한다면 참으로 한심한 일일 것이다.
  오운육기 : 오행과 육기를 유심적으로만 전개하되 부조화된 상태의 오행과 조화된 상태의 오행으로 나누어보았다. 한 마음이 어지러우면 목의 실조이며, 한 마음이 초조하면 화의 실조이다. 한 마음에 의심 있으면 토의 실조이며, 한 마음이 슬퍼하면 금의 실조이다. 한 마음이 두려워하면 수의 실조이며 한 마음 즐거워하면 목의 덕이라 할 수 있다. 한 마음 환희하면 화의 덕이라 할 수 있고, 한 마음 올바로 사색하면 토의 덕이라 할 수 있다. 한 마음 자비스러우면 금의 덕이라 할 수 있고, 한 마음 조심하면 수의 덕이라 할 수 있다. 마음이 맞되 그 즐거움이 지나치지 않으면 양의 덕이 생기고, 곧 그것에서 목화의 덕이 생기는 것이다. 마음에 맞지 않되 그 싫어함이 지나치지 아니하면 음덕이 생기고 곧 그것이 금수의 덕과 일치하는 것이다. 토의 덕은 곧 충화지기의 덕이니, 충화시키려는 마음의 세력이 온유함을 말한 것이다. 육기 역시 이러한 방법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한 마음이 탐욕하면 한기라 할 수 있으며 한 마음 권태하면 습기라 할 수 있다. 한 마음 방탕하면 서기라 하고, 한 마음 우치하면 조기라 할 수 있다. 한 마음 분노하면 화기, 분주하면 풍기라 한다. 이상은 풍한서습조화의 육기가 실조된 상태를 비교한 것이다.
  한 마음 고요하면 풍기가 순화될 것이다. 한 마음 청정하면 한기가 순화될 것이다. 한 마음 조심하면 서기가 순화될 것이다. 한 마음 정진하면 습기가 순화될 것이며, 한 마음 지혜로우면 조기가 순화될 것이다. 한 마음 자비로우면 화기가 순화될 것이다. 이상은 육기의 실조된 상태로 변했을 때의 마음을 비교한 것이다. 즉 마음이 산란한 이는 풍병에 걸리기 쉽고, 마음이 탐욕스러운 이는 한병에 걸리기 쉽다. 마음이 방탕한 이는 서병에 걸리기 쉬우며, 마음이 나태한 이는 습병에 걸리기 쉽다. 마음의 분노가 심한 이는 화병에 걸리기 쉽다. 다시 역으로 얘기하면, 마음이 고요한 이는 풍병이 없을 것이다. 마음이 청렴한 이는 한병이 없을 것이다. 마음에 조심성이 있는 이는 서병이 없을 것이다. 마음이 부지런한 이는 습병이 없을 것이다. 마음이 지혜로운 이는 조병이 없을 것이며, 마음이 자비로운 이는 화병이 없을 것이다.
  어지러운 증상이 많은 이는 마음이 고요하지 못함을 반성할지언정 무조건 약의 효력에만 의지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몸이 찬 사람은 지나친 욕심을 반성하여 가며 약에 의지해야 하며 몸이 너무 더운 사람은 마음의 방면함을 억제해야 할 것이다. 몸이 비대하여 습병이 심한 사람은 마음의 권태로움을 반성하여 약에 의지해야 한다. 몸이 지나치게 건조한 사람은 적당히 골고루 흡수하는 지혜가 부족함을 반성하여 가며 약에 의지해야 할 것이다. 상기가 잘 되는 이는 자비심을 길러가면서 약에 의지해야 할진대 마땅히 의사는 이에 대응하여 상품의 치우침을 관찰한 후 대중 치료를 행하여 그 지나침을 다스려야 한다. 풍서화병은 대체로 음약으로 다스리고, 한습조병은 대체로 양약으로 다스리면 별 과오는 없을 것이다.
  정도 : 요약하면 의사나 환자나 이미 자기의 마음속에 병도 있고 약도 있다. 이치는 그렇다지만 어찌 누구나가 다 스스로 병을 다스릴 수 있을까? 때로는 부자 같은 극약도 필요하고, 세상이 태평하면 비교적 병이 완만하여 인삼이나 지황 정도로 잡아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근본적인 구병 방법은 마음의 순화가 기초를 이룬다 하겠다. 왕왕 환자는 중증까지 온 과정은 까맣게 잊고 의사에게 조속한 치료를 요구하며, 의사는 지나친 책임감과 욕심에서 독극약을 무분별하게 사용하여 일을 그르치니, 피차에 불행한 현상이다.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고 오히려 간단하고 명백하고 담담한 데 있다. 자꾸 사려 분별하여 본성에서 멀어짐은 안타까운 일이다. 차라리 의, 약사로서는 약방문을 조금밖에 못 욀망정, 음양, 표리, 한열, 허실만은 분별하여 병을 서서히 잡아주는 것이 떳떳할 것이며 환자 치료의 최선책이라 본다. 성품이 급한 사람이 오거든 마음을 느슨히 하여 음적인 약을 생각해볼 일이다. 그러나 의자된 사람부터 마음이 결여되어 있다면 무슨 재주로 환자의 심기를 관찰할 수 있을까? 차라리 병을 더하게는 안 하겠다고 겸손한 자세로써 처방을 낸다면, 무난한 생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언제나 우리는 옛날의 대도에 견해를 같이할 수 있도록 자꾸 연구해야 하겠다.
  
    심의가일침 1
  '나는 육체병의 왕이요, 세존께서는 심의왕이시다!' 부처님을 만나 뵙고 나온 '기바'동자는 혀를 내둘렀다. 해부, 생리, 병리, 약리에 이르기까지 육체의 비밀을 모조리 섭렵했기에 세계 최고의 의술을 달통한 기바는 일찍이 은사로부터 전수 받은 의학에 자부심이 대단했던 터. 그러나 부처님을 마음병의 왕이시라 찬탄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제법 선시같은 유행가사 한마디. '세 치 가슴속 열어 보여도 사랑은 보여줄 수 없고, 봄이 되면 나뭇가지에 꽃이 피어도 그 가지 속엔 꽃이 있던가.' 누가 마음을 보여줄 수 있을까? 그러나 뉘 안 보이는 마음을 부정하리오? 동양의학에서 분류하는 의사의 등급 그 첫째가 심의이다. 식의, 약의, 즉 식이요법과 약을 잘 쓴다 해도 마음으로써 마음을 치료하는 심의에 못 미친다. 이심치심(마음으로써 마음을 치료한다)의 비법은 조계종의 어원이 된 조계산에 주석 하셨던 육조 혜능 대사의 부촉에도 잘 나타나 있다.
  마음의 중용 즉 중도의 묘한 뜻을 잃지 않게 하라는 가르치심인데. '만약 어떤 사람이 너에게 법의 뜻을 묻되 있음을 물으면 없음으로서 대하고 무를 물으면 유로서 대하고 범(범속함)을 물으면 성(거룩함)으로 대하며, 성을 물으면 범으로 대하여 두 도가 서로 인하여 중도의 뜻이 살아나게 하라.' 법보단경.
  요컨대 마음의 평화로 안내하는 길이 심의의 사명인데 행복, 즉 참건강은 중에 있으니 양 극단을 피한다. 말법시대가 되니 마강법약하여 흑백론적 극단주의가 판을 쳐서 유자(있는 자)는 오직 있는 놈과 친하고, 무자(없는 자)는 없는 놈과 패거리를 짓고 있으니 부익부 빈익빈이 되었다. 부자와 가난한 계급의 상호 교통은 커녕 부르주아 타도의 프롤레타리아 혁명론의 폭력공산주의 이념이 강화되어 있지를 않나, 게다가 싸늘한 자본주들의 교만과 냉혈동물 같은 경멸 또한 비열한 폭력에 불과하다. 육조의 분부대로라면 '있는 자와 없는 자는 서로 의지하여 둘이 서로 의존하게 하라. 그리하여 유와 무, 미와 추, 성과 범, 선과 악, 유식과 무식, 어두움과 밝음, 남자와 여자, 현명함과 어리석음, 강함과 약함 등등이 상호 의존하는 인연이 되어 중도의 화평을 살아나게 하라'는 뜻일텐데 전혀 현실은 그렇지 않으니 말세 중의 상말세가 작금 지구촌의 실태라 아니할 수 없다. 의학의 기본은 건강인데, 근육질 강한 임이 건강이라면 사자나 곰에게 건강을 물어야 하지 않을까? 역기나 아령으로 잘 단련된 체격 속에 감추어진 마음으로 내뱉는 사이 비성 기도(?).
  "오! 주여! 저 사탄의 후예 우상숭배자들을 남김없이 벌하소서! 영원히 꺼지지 않는 게헨나(지옥)의 불길에 빠지게 하소서!" 쿵푸나 태권도로 잘 뭉쳐진 단전에 힘주고 안 보이는 마음으로 내뿜는 사이비 기원(?). "나무관세음보살! 저 마군들의 후예 인천교에 불과한 하근기의 교인들! 무간지옥에나 빠지게 하소서!" 종교로 똘똘 의식화되어 피차를 나누어놓고, 시시비비로 먹칠된 마음을 가진 근육질은 건강이 아니라 병 중의 악질 병이 아닌가? 분리의식 없는 마음이야말로 진짜 건강! 사부대중의 등불인 불법대해는 이거다! 저거다! 의 고집스러운 편견을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므로 총명한 심의왕의 후손인 불자들은 실생활에서도 마땅히 절대주의적 망상을 없애야 한다. 송이버섯, 상어간유, 알로에, 죽염, 초란, 로얄제리, 작설차, 커피, 야채생즙, 산삼 등 음식, 건강식품, 약에 이르기까지 '무조건 절대로 끝내준다' '어떤 병이든지 절대적으로 낫게 해준다'는 식의 법은 없다는 것을... 아! 마음조차 극단을 피해 중심을 잡아야 하는데 육체가 뚱뚱한 사람이 축축한 습지의 미끌미끌한 버섯을 먹어서야 어디 이거... 또한 열이 많아 눈이 충혈되고 두통이 있는 사람에게 인삼, 산삼 등을 먹여서야... '뚱뚱하거든 건조한 것, 열이 있거든 찬 것, 이도가 서로 인하여 중도의 뜻이 살아나게 하라.'(금오단경(?)) 만고불변의 상대성 진리를 모르고서야 어찌 '심의왕의 제자'라 하겠는가? 마음과 육체가 어디 둘이던가?
  
    심의가일침 2
  복차무불유
  너희들 유학인 연각 성문이 금일에 회심하여 대보리인 위없는 묘각에 나아가려 할 새, 삼매와 비파사나를 닦을 적에 미세한 마사가 생기는 것을 알지 못하나니, 음마나 천마, 귀신이 붙거나 도깨비를 만날 적에 마음에 분명히 알지 못하여 도적을 잘못 알고 아들인 양 여기기도 하고, 또는 그 중에서 조금 얻고 만족하다 하면 제4선천의 무문비구가 '성과를 증하였노라' 허망하게 말하다가 하늘의 과보가 끝나 쇠하는 모양이 나타날 적에 '아리한도 후유신을 만난다'고 비방하다 아비자옥에 떨어지는 것과 같이 되리라. 능엄경 단편일람, 동국역경원 능엄경 주해(운허 큰스님 주)
  이는 수행자의 공부과정에서 나타나는 미묘한 마사를 경계하심이니 모두가 색, 수, 상, 행, 식의 오음 변화이다. 비유하면 혀로 맛본 크림맛이 곧 혓바닥의 본체로 아는 것 같으니, 중생의 모든 병이 이와 같이 전도된 착각에서 온다. 아픈 경계를 느끼는 감각의 주인공은 혓바닥이고 아픔은 쓴맛이라 가정하면, 쓴맛은 혀의 대상이지 곧 본질은 아니다. 쓴맛만 보다 보니 그에 혀의 본 맛으로 알고 중독되다 보니 모든 것이 쓰게 보일 뿐 다시 찬 냉수로 헹구어내고 보면 달고 신맛도 다 아는 혀 아닌가? 혀라면 모름지기 맛을 다 분별해야 하고 마음이라면 모든 식을 잘 분석해야 한다. 내가 '안다'고 하면 모를 때의 나는 누구이며 내가 '모른다'하면 알 때의 나는 누구인가. 눈이 '빨갛다'보면 푸를 때의 눈은 무엇인가? 종교인은 모름지기 병을 관하여 깨달음으로 변신해야 하는데 다음의 인용으로 대신한다. 화두금강이 여래의 앞에 합장하여 불의 발에 정례하고 사뢰었다.
  "저는 오랜 겁 전에 탐욕의 성품이 많았나이다. 불이 출세하시니 이름이 공왕이시라 음욕이 많은 사람은 맹렬한 불더미가 된다 하시면서 저로 하여금 백해와 사지의 차고 더운 기운을 두루 관하라 하시었나이다. 신기한 광명이 속으로 엉기면서 음란한 마음이 변화하여 지혜화가 되었으며, 그때부터 여러 불이 저를 불러 '화두'라 하였사오니 저는 화광삼매의 힘으로 아라한을 이루고 큰 서원을 발하여 부처님네가 성도하실 적마다 저는 역사가 되어 마원을 항복받나이다. 불원통을 물으시니 저의 큰 지혜의 광명을 내어 무상각에 으뜸과 제일이 되겠나이다."
  잘만 관하면 음욕이 곧 지혜의 광명도 되는가 보니 보살경에 '탐욕이 곧 보리심'이라는 말도 이해가 가지 않는가? 병자들의 쌓인 업이 두터워 스스로 주체하기 힘들고 스스로 관할 힘이 없어 그렇지 어떠한 독이라도 변화할 전환점인 부처의 가피를 얻으면 무불유할 것이다. 즉 '낫지 않음이 없을 것'이니 (능엄경) 복차무불유라! '능엄경을 먹은즉 낫지 않음이 없으리라!' 그런데 '아난아! 알아라! 말법시대에 있어 출가 수도하는 척하면서, 음욕을 찬탄하고 마의 권속이 되게 하며 스승과 제자가 서로 음과 음으로 전하며, 이러한 사정들이 사람의 심부를 매혹하여 죽은 뒤에는 반드시 마민이 되어 정변지를 잃어버리고 무간지옥에 떨어지게 하리라...' 호된 경고의 말씀이 계시니 애욕은 욕심으로 인정하는 솔직함이 낫지 않을까? 유마거사께서 '직심이 도량이라' 하셨거늘 이 지구촌의 수행자들은 차라리 자신의 탐욕과 분노를 인정하고 정밀히 관찰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아무리 묘한 낙이라도 그곳에 안주처를 얻은 양 허망한 사견으로 인도한다면, 무상법칙에 따라 낙은 고로 변하고 견혹의 과보는 과보대로 치러야 하리라. 끔찍한 일.
  있어야 할 자리 : '매경한고 발청향' '매화는 춥고 매운 겨울을 지나야 맑은 향을 토한다.' 대충 이런 뜻의 글이 있다. 겨울 지난 이른 봄의 산수유 꽃 냄새도 정말 일품이다. 수선화, 매화, 산수유... 이들 꽃의 향기의 특징은 톡 쏘는 데 있으니 겨울의 억제함 속에서 단련된 맛이다. 약간 독한 듯하면서도 싸아한 향 내음은 달콤한 맛도 배경으로 깔고 있다. 누군가 꺾어버린 산수유꽃 한 가지에 봄은 이미 성큼 다가왔건만, 있어야 할 자리를 잃은 꽃이 불쌍하다.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은 꽃가지도 슬프지만 사람의 위치에는 더욱 한심함을 금할 수 없다. 본래 음양의 상대적 관점으로 삶을 관조해 낸 동양철학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상대, 절대의 말장난인 의식분열로 몰고 간 학문이 아니다. 태극은 곧 심왕이요, 부처요, 열반이요, 신이다. 남녀, 음양이 있을 리 없고, 사랑, 미움이 존재하지 않는다. 등불은 높이 걸어야 하듯이 법은 높은 곳에 올려져야 하는데, 비법, 사법이 우상화된 작금의 모든 종교계를 한탄한다. 이 나라뿐 아니라 전 지구촌의 종교계는 진리보다는 비진리를 숭배하고 있다. 힘, 돈, 매력의 스타들이 심왕보다 더 높고 행복을 주는 약이라고 아우성친다. 곧 사라지거나, 좀 길게 가거나 무상한 거점에 자신을 확보하려고 기를 쓰다가 얻은 이는 지키기에 바쁘고, 못 얻은 이는 질투가 나서 안달이다. 거점 확보는 자신을 스스로 속임이요, 만들어낸 십상이다.
  내가 멸도한 후에 보살이나 아라한들을 시켜 응화신으로 말법중에 태어나서 가지가지 형상으로 윤전하는 이를 제도케 할 적에 혹 사문, 거사, 왕, 재상, 동남동녀와 음녀, 과부, 간사한 도적, 도살자, 육류 판매자가 되어 그들과 일을 같이하면서 불승을 칭찬하여 그들의 몸과 마음으로 하여금 삼매에 들어가게 하되, 끝끝내, '내가 참말 보살이며 참 아라한이다'말하여 불의 밀인을 누설하여 말학에게 경솔히 말하지 말게 하거니와, 다만 죽을 적에 가만히 유언할 수는 있다 하였거늘 감히 어찌 중생을 혼란하여 대망어를 할까 보냐. 내가 비구들을 가르치되 '직심이 도량이라'하여 사위의의 일체 행동 중에 조금도 허망하여 가식됨이 없게 하였거늘, 어떻게 상인법을 얻었노라 자칭하겠는가? 마치 궁핍한 사람이 제왕이라 망령되어 자칭하면 주살을 당하거든, 하물며 법왕을 어떻게 망칭하겠느냐? 인지가 참되지 못하면 과보가 비뚤어지거늘 부처의 보리를 구하려 하여도 배꼽 씹는 사람과 같으리니 어떻게 성취할 수 있겠느냐? 비구의 마음이 활줄 같으면 모든 것이 진실하여 삼매에 드는데 마사가 영원히 없으리니 이 사람은 보살의 무상지각을 성취하리라 내가 인가하노라.
  이상은 (능엄경) 말씀인데. 노파심 간절하신 세존의... 그런데 '나는 얻었다!', '끝냈다', '도달했다'는 자만심을 일으킨 주인공은? 나는 '봤다!' 하지만 보는 놈을 어찌 보며, 얻었다는 신념을 가지지만 그 신념을 내는 놈을 어찌 얻어 가지는가? 얻어 가진다면 외부에서 온 것이니 본래 나는 아니요, 조작된 것이니 가진 것은 잃을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듣는 놈을 들을 수 없고, 말하는 놈은 말할 수 없으니, 관음보살 무설설 남순동자 불문문이라니...
  
    심의왕
  돌팔이 심이 난처 고백기
  팔의론 : 팔의론이 있는데 소설 (동의보감)에 아주 잘 표현되어 있다. "고금의 의서에 무불통지하고 보하고 사하는 의술을 통달하고도 의원으로서 더 이상 갖출 무엇이 있단 말씀이온지...?" "사랑이다" 유의태의 대답이 짧았다. "사랑이라니요?" "과거 공부를 시키다가 말고 왜 사랑타령이오니까." 오씨의 목소리가 끼여들었을 때, "병들어 앓는 이를 불쌍히 여기고 동정하는 마음." 어미에 단호한 울림이 느껴졌다. "위엄 세우지 않고 다정하게 굴면 종당에는 약값을 깎으려 기어붙는 것이 병자들의 심성올시다." "의원의 신세를 지면 아무리 독하고 가난한 이라도 밥 한술은 먹여주는 터이니 병자의 빈부를 왜 굳이 따지려들꼬." 잠시 도지가 방만하게 웃는 소리가 났고, "그럼 의원은 흙 파먹고 삽니까?" 하는 오씨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 유의태 앞에 술상이라도 놓여 있었는지 돌연 탕! 손바닥으로 술상을 치는 소리가 났다. "의원도 의원 나름. 고을마다 의원을 자처하는 자가 별처럼 깔렸으되 병자를 긍휼히 여기는 의원은 많지 않아." "긍휼?" "병들어 앓는 이를 불쌍히 여기고 동정하는 마음!" 허준의 뇌리에 유의태의 시퍼런 눈빛이 순에 잡힐 듯이 보였다. 이미 목소리가 자식을 공부시키는 부정을 담은 게 아니었다.
  "의원으로 자처하는 허구많은 부류 중에도 여덟 가지 의원이 있다. 능히 네가 그 여덟 가지 의원의 부류를 알 수 있느냐?" "모릅니다." "붓을 들어라." "왜오니까." "적으랄밖에." "그것도 취재 시험에 나오는 문답이온지?" "나오지 않아도 의원이라면 평생 가슴속에 담아두어야 할 조목인즉." 허준이 자신도 모르게 주위를 돌아보았으나 붓도 종이도 있을 수 없는 남의 방 문 앞일 뿐이었다. 약재창고에 지필묵이 있었으나 달려갈 여유가 없는 걸 깨닫자 허준은 귀를 바짝 방문 쪽으로 열었다. "여덟 가지 의원 중 그 제일을 심의로 친다. 심의란 대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늘 마음이 편안케 하는 인격을 지닌 인물로 병자가 그 의원의 눈빛만 보고도 마음의 안정을 느끼는 경지로서 그건 의원이 병자에 대하여 진실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가짐이 있고서야 가능한 품격이다."
  "마음 심 자 심의오니까." 방안의 도지가 기록하며 묻는 소리가 났고 허준도 심의라는 글자를 입안에 뇌었다. "둘째가 먹을 식 자 식의, 병자의 병세를 판단함에 항상 정성이 모자라며 병자가 말하는 병병만 기억하고 약을 지어 먹이는 자다." 허준이 또 뇌었다. '식의.' "셋째가 약 약 자 약의, 이 부류도 스스로 병자의 성색을 판단하여 병의 경중을 찾아내려 않고 병자가 구술하는 대로 약방문에 의지해 약을 짓되 병이 조석으로 성쇠가 있는 법과 병자의 근력과 내장의 허실까지를 비교하지 않고 병자가 아프다고 호소하는 부위의 약만 마냥 먹이며 차도를 기다리는 자다."
  '심의, 식의, 약의.' 허준이 마른 침을 삼키며 유의태의 한마디 한마디를 뇌리에 새겨갔다. "넷째는 또 무슨 의원이오니까?" "넷째가 어두울 혼 자 혼의, 병자가 위급해 하면 저도 덩달아 허둥대고 병자가 쓰러져 잠들면 저도 궁둥이 붙이고 앉아 눈만 뒤룩거리며 오로지 비싼 약 팔 궁리만 일삼는 자다." 도지가 무엇이 연상되는지 혼자 깔깔거리는 소리가 났고 유의태가 가차없이 말을 이었다. "다음이 미칠 광 자 광의로, 병자란 제 고통을 호소하는 것이 항상 과장된다는 걸 모르고 오로지 병자의 말만 듣고 매운 약을 함부로 지어 먹이는 자다. 다음이 망의라 부르는 자로 병자의 고통보다 병자의 의복을 보아 약값을 많이 내는 인가 아닌가에 더 관심이 있고 또한 밤중에 찾아오면 문구멍으로 내다보고 행색이 가난하면 따돌리기 일쑤인 자로 낮에 찾아가도 병자의 마르고 부한 것조차 보지 않으며 오로지 전에 누굴 무슨 약으로 고쳤다는 것만 증험 삼아서 비싼 약이 잘 낫는다고 우기는 자다. 다음이 사의, 이 속일 사 자 사의는 오로지 의원의 행색만 흉내내며 스스로 안 아픈 이도 찾아다니며 병을 보는 체 하다가 그저 제가 꾸미는 한 가지 약으로 만병통치라 우기는 자이다."
  "그런 놈 많지요, 마지막은 무슨 의오니까?" "마지막이 죽일 살 자 살의다. 춘하추동 계절이 바뀌는 이치와 생명이 살고 죽는 이치를 알지 못하며 하물며 아파 고통받는 이를 보고도 함께 아파하는 마음이 없고 나아가 남은 지은 약방문에 일일이 '이다 아니다' 요란을 떨어 제 이름만 파는 자다." "결국 본받을 만한 의원은 심의 하나뿐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저마다 의원이노라 행세할지라도 이 세상이 진실로 기다리고 바라는 의원은 오로지 한 부류의 심의뿐이다." 이은성, (동의보감 상권), 창작과 비평사
  자! 이제는 심의의 증거를 불경에서 찾아보자. 인도의 전설적 명의 기바는 기실 세존과 동시대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가 어느 날 석가모니를 뵙고 장시간 요담(?)을 마쳤겠다? 친견실을 나오면서 하는 말... '나는 육체병의 왕이요, 세존께서는 심의왕이시다!' 물론 찬탄, 외경, 놀라움의 발언이 틀림없으리라. 이래서 부처님이 심의왕이라 불리워지기도 하는데... '마음 고쳐 먹어라!' 이 한 마디처럼 기분 나쁜 말이 없는데 꼭 하고 싶은 충고를 환자 비위 거스를까 무서워 못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딱 한 번 달리 생각하면 나을 수 있는데 그 말 했다간 침 치료도 거부하고 약마저도 안 드실 분위기의 환자...
  이것 참! 문제 중의 문제이다. 무의식세계까지도 적어도 다 까뒤집힐 각오로 병원을 찾아야 하는데 예의범절, 체면, 수치 등을 고려하는 의사 병자의 위선이 방해가 된다면? '직심이 도량이라!' 솔직한 마음이 도 닦는 자리! 그러나 필자의 소견으로는, '직심이 곧 치병소라!' 강력 주장하고싶다. 심의왕 세존께서는 이미 숙명, 타심통을 익히신지라 빤히 상대의 심리적 동기를 읽으신다. 그러나 환자의 의사나 같이 비슷하게 미혹된 이 사바세계에는 서로 솔직한 대화가 필요하다. 느슨하게... 다른 신통보다 숙명, 타심을 먼저 기도하는 이 무능한 의생의 심정은 잘 이해 못 하시리라. 입이 타고 눈이 뻘개져 두통을 심히 호소하는 장면에 빨리 진통해열제 투여가 급하긴 하다. 허나 다음날, 다음날, 또 오는 그 증상은???
  "부인! 저..., 누구를 증오, 시기, 질투하는 일 혹은 원한 품은 사건, 저..., 예를 들면 곗돈 떼어먹혔다든가, 증권회사 권유 믿었다 팍 쌌다든가, 남편이 몰래 낳아놓은 아이가? 아니면 반장선거에서 자식놈이 딱 한 표 차로 떨어졌다든가?" "..."
  "돈이야 뭐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나왔나요, 뭐? 짊어도 못 자고 가지요? 댁을 방문한 그 아기도 알고 보면 부처요, 몰래 숨어산 그 여자의 고통은 오죽했겠어요? 이해! 이해! 어린 나이에 학생에게 명예심을 키우시려 반장 출마시키셨나요? 남 이겨서 얻은 영광의 과보는 패자의 눈물의 댓가 아닙니까? 인과를 아셔야..." "아니! 설교, 설법하는 거예요? 그런 거 원장님보다 제가 훨씬 더 잘 알아요! 그렇게 마음 잘 잡으면 제가 뭐하러 약 타먹으러 오겠어요? 그게 어디 쉬운 일입니까? 내가 뭐 성인군자로 됩니까?" "저어! 부인..." "시끄러워욧! 빨리 치료나 해주시고 약이나 잘 달여놓아요. 빚 받을 시간 약속해 놓고 왔다니까요! 오늘 안 가면 그 X년은 말이죠! 잘됐다 핑계대고 돈 안 준다 뻐팅길 거예요!"
  "저어어! 부! 부! 부인..." "아유! 알았어요! 담부터 열심히 절에 나갈게요! 이제는 요! 지금은 바빠요 바빠!" 그러고는 속으로, '아휴! 절에 가나 병원 오나 설법! 그저 설교! 그저 마음 마음! 저들도 잘 못 추스르면서...' 아! 유의태, 허준 선생님이시여! 이 가련한 의생은 도대체 팔의 중 어디에 속하게 되나이까? 모쪼록 굽어살피옵소서!
  
    마음의 엔진오일
  엔진오일 점검 방법엔 대충 네 가지가 있다고 들었다. 레벨 게이지상에 검은 색으로 나타날 경우 카본의 희석으로 오일이 오염된 경우로 보면 되는데, 말하자면 오일의 윤활 작용이 어렵게 되는 원인이 카본 즉 피스톤 부분이 숯과 같이 되어버린 연소 불순물의 섞임이다. 둘째, 붉은 색에 가까우면 가솔린이 희석된 경우이니, 어째서 섞였는가 살펴봐야 할 것이다. 엔진오일과 연료가 섞여 오일의 점도가 떨어질 것은 뻔하고 어딘가에서 압축가스 등이 새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셋째, 우유색이라면 냉각수가 섞인 것이데, 수냉식 오일냉각 구조라면 어딘가 구멍이 뚫렸던지, 처음부터 오일 팬 부분에 물이 있었던지 의심해 보아야 하겠다. 넷째, 회색이라면 연소생성물이 혼합되어 버린 것인데, 정밀하게 봐야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오줌을 조심스레 관찰해 보면 대개의 병을 짐작할 수 있다. 오줌 색깔이 검붉은 빛, 심지어 아예 검은 자주빛으로 나오면 정말 불순물이 섞인 것이다. 제대로 신장에서 걸러내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 과로로 인한 피로물질의 누적인 만큼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하는데, 특히 지나친 긴장과 공포의 스트레스를 풀어야 한다.
  희망과 낙관의 태도가 필요한데, 동양의학의 오색론에 보면 검은 색은 공포와 관계 있고 신과 연관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자! 검은 오줌을 경계하고... 빨간 오줌이야 물론 피가 섞여 나오는가 의학적으로 검사해야겠지만 그전에 본인이 지나친 쾌락을 의심해야 한다. 너무 지나친 오락과 음주와 방사는 즐거움의 열을 일으켜서 그 열이 피의 흐름을 망동시켜 피가 오줌에 섞이는지도 모르지 않는가? 마음의 동함이 신체를 움직여 질병을 일으키는데 심은 화요, 희인지라 지나친 희희낙락은 기가 늘어져 질병이 온다고 옛 경전에는 씌어 있다. 자! 빨간 소변을 두려워하시라... 소변이 너무 많으면 이것도 문제요, 냉각수 섞인 오일 같아서 몸이 차지는 않는가 조사해야 한다. 최근 냉음료수의 과다한 섭취는 없는가? 아니면, 싸늘한 원한의 마음과 우울한 마음은 없는가 심각하게 자기 심정을 진단해 보아야 할 것이다. 차분히 가라앉은 마음이야 더할 수 없는 약이지만 표독하게 독한 음독의 생각은 신체의 흐름을 방해한다.
  아래는 덥고 위는 차야하는데 하초가 지나치게 차가우면 이것은 특히 50대 이후의 남자에게는 큰일이 아닐 수 없다. 근무의욕 상실과 더불어 나태, 권태감이 밀려오는데 잘 살펴야 할 조짐이다. 자! 너무 투명한 오줌도 조심! 희뿌연 침전물이 있는 소변이나, 아예 쌀뜬물 같은 것이 섞여 나오면 정말 빨리 조처를 취해야 한다. 동의에서는 '백탁' '유정' 등이라 하여 뿌연 오줌의 종류가 제법 있는데 말 그대로 혼탁해졌다면 잘 가라앉아야 할 것이 아닌가? 음식도 잘 가려서 너무 진한 맛을 즐기지 말고, 마음도 갈등에서 탈출해야 한다. 이것저것 다 쫓다가는 하나도 성취할 수 없는 법인데, 이 욕심 저 욕심 다 붙어서 번뇌가 쌓인다. 놀러도 가고 싶고, 사장집에 인사도 가야 하고, 골프도 치고 싶고, 룸싸롱에도 가고 싶고, 정치도 하고 싶고, 재벌도 되고 싶고... 차차 덩치 커가는 욕심에 산란한 마음과 육체는 모든 흐름에 갈피를 못 잡아 혼탁한 소변을 내놓는다. 소변은 소변 길로... 대변은 대변 길... 피의 갈 길은 제 갈 길로... 이것저것 섞이다 보면 마치 물과 기름이 섞이면 연소가 안 되듯, 인간의 생명력도 사그라들게 마련이다. 자! 탁한 오줌은 빨리 치료!
  
    마음의 유막
  슬랩(Slap) 현상과 스틱(Stick) 현상의 두 가지는 피스톤과 실런더 사이에서 일어나는 두 가지 극단적 병적 마찰이다. 피스튼과 실린더의 간극이 너무 클 때, 상하운동의 동력 행정시, 피스톤이 실린더 벽을 치는 현상인데, 간극의 차이가 너무 심하면 연소실의 압축 가스가 새서 블러바이(Blow-by) 현상이 나타나 동력저하, 기름 과소비의 원인이 된다. 거꾸로 간극이 너무 좁을 때는 말할 것도 없이 지나친 열팽창으로 스틱 현상(소결현상)이 나타나는데 그냥 늘어 붙어버리게 된다. 피스톤과 실린더의 적당한 간격에는 유막이 형성되어 상호 마찰운동이 적당해야 하는데 이 유막의 파괴로 마찰저항이 생겨서 동력손실을 가져온다.
  이 적당한 간격. 나와 남과의 관계상 중용은 기막힌 상호 유막현상이다. 매끄럽게 돌아가는 중화의 마음은 곧 알맞은 경계를 만들어 건가한 인간관계를 가지게 된다. 쉽게 밀착했다가 서로 원망하고 헤어지는 인간관계의 스틱 현상은 그 얼마이며, 너무 적조하게 소원하다가 오해하는 사이는 또 얼마인가? 특히 가족간의 친밀성은 오히려 스틱 현상에 가까워 그 매끄러움을 잃고 있다.
  지나친 기대감은 곧 배신감으로 다가오는데, 남편과 아내는 일찍부터 실망한 채 살아간다. 과분한 짐을 자식에게 지워 걸머지게 하지만, 유능하고 지혜로운 남의 아이보다 못해 보여 불안하다. 그러다 보니 노골적으로 짜증을 내게 되고 짜증과 분노가 중용의 유막을 파괴하고야 만다. 엔진의 과열로 삐걱거리는 가정은 숱하게 많다. 그러나 각자의 기대치를 조금씩 줄여나가는 현명함을 터득한 집은 드물다. 훌륭하게 잘된 표본에 비교하자면, 사실 비교하고 있는 나도 별 수 없지 않은가? 마음의 적당한 경계마찰을 형성하는 유막은 비교 당하지 않는 마음임을 명심하자.(경게마찰 : 유막 형성의 가장 이상적인 마찰 상태를 지칭하는 용어)
  
    마음의 냉각수
  엔진오일도 126도가 넘으면 유막의 형성이 불가능하다. 85도가 이하가 적당한데 엔진오일도 냉각장치가 필요하다. 공기로 냉각시키는 종류와 물로 하는 것 두 가지가 있는 모양인데... 화가 끊으면 피도 끊는다. 끊는 피는 더 이상 피의 작용이 불가능한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고혈압 환자는 코피도 터지고 눈, 코, 입 등에서 출혈이 되는 수가 있다. 대부분 속 썩은 다음에 그렇다. 머릿속이 터지면 불구자가 되거나 아예 의식불명으로 사망하기도 한다. 끊는 피. 분기 탱천한 마음. 맑은 공기를 먼저 마시러 나가자! 시원하게 창자까지 시린 약수나 깨끗한 계곡물을 들이키러 가자! 그러고는 한 생각을 돌이켜야... 마음도 냉각이 필요하다. 외부의 공기나 물은 물질을 식히지만 마음을 가라앉히지는 못한다. 역시 마음은 마음으로 식혀야 그 역학관계가 맞는다. 어떻게 식히는가? 들뜬 마음의 관계가 경솔한 아들, 이리저리 광분하여 혈안이 된 복부인 엄마, 사업계획과 한탕 야심을 불끈 쥔 아버지, 허벅다리와 가슴을 아슬아슬하게 드러내는 끼 많은 딸... 어찌 마음을 침착하게 고요하게 잔잔하게 할까나? 마음의 냉각요법만 개발되면 에이즈도 치료될 것 같은 이 지구촌. 우리는 두려움이 없어졌다. 두려움, 공포는 순간 춥고 으슬으슬한 느낌을 준다. 추워도 좋다. 좀 오싹해도 좋다. 경거망동의 들뜬 마음과 사치, 음탕, 방종의 마음에는 마음의 냉각수, 찬물을 쫙 끼얹어야 한다. 그것은 곧 무서움! 두려움! 반성! 조심성! 긴장성! 세밀함! 정밀성! 등등이다. 서릿발 같은 위엄과 날카로운 지성의 회복은 이 괴질의 말세에 특효방인 마음의 냉각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본래 없는 질병과 건강
  건강해지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은 누군가? 조용히 지난 삶을 반조해 보면 활력 있게 건강하다고 자부할 수 있었던 날은 과연 며칠이나 될까. 두통, 몸살, 소화불량 등등, 현대인들은 잦은 병치레를 겪고 있다. 심지어는 암이나 에이즈 같은 불치병에 대한 공포심으로부터 받고 있는 스트레스는 또 얼마나 대단한가?
  공포로 얼룩진 순간 순간들도 역시 병든 순간 순간들이 아닐까? 도대체 건전, 건강의 개념이란 무엇인가? 초조감에 시달리는 순간부터 느슨한 안도감을 느끼는 평화의 시간까지 어느 곳에다 병적임과 아님을 긋는 선을 만들까? 안도감은 과연 건강함인가? 괴로울 때 급히 편안함을 구하기 시작하지만, 평안의 상태는 미래의 고통을 부르는 신호가 아니던가? 음악을 선명히 들으려면 귀를 어둡게 하여 정적감을 느낀 후에라야 가능한 것이다. 색깔을 뚜렷이 보려면 눈을 캄캄하게 한 후라야 사물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맛을 즐기려면 냉수로 혓바닥을 가셔야만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의식작용을 환히 이해하려면 마음을 비운 후에라야 가능한 것이다.
  소위 건강한, 활력 있는 상태를 세밀히 살펴보면 의욕과잉형일 뿐이다. 병적 상태는 의욕의 상실된 에너지가 배설된 허탈임이 분명하다. 모두가 여래의 열반에서 보면 돋아난 뿔일 뿐. 의욕적인 것이 곧 비의욕적인 것의 어머니다. 질병의 남편이 건강이며, 건강의 아들이 질병이다. 괴상한 촌수의 관계라 혼동이 오겠지만 이는 모두가 육체가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상대적 현상이다.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보왕삼메론)의 첫머리를 왜 이것으로 출발했을까? 건강은 즉 탐욕의 형님이다. 탐욕은 곧 질병의 아버지다. 필자는 건강에 대해 장담하는 청장년을 만날 때마다 가소로움을 금치 못한다. 속으로 내일이나 모레쯤 진찰실에서 만날 기약을 예감하니까. '강한 것은 부러지기 쉽다.' '살아 있음은 대체로 부드러움이요, 죽음은 뻣뻣함이다.' 사실 사체보다는 생체가 훨씬 유연하지 않은가?
  목에 힘 주고 뻣뻣하여 '나는 건강하다'라고 외치는 이런 사람은 기실 죽음에 가까이 있는 사람이다. 그런 부류는 병이 와도 크게 온다. 모진 고통의 시련이 오고 나서야 한소식 깨달음이 온다. '아! 역시 나도 병이 드는 존재로구나, 늙은 존재로구나!' 가장 젊고, 영화와 부귀를 누릴 적에, 누구든지 가차없이 작용하는 늙고 병든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기는 쉽지가 않다. '나만큼은 예외!'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요망사항일 뿐이다. 왜 병이 드는가? '태어났기 때문!' 이것은 오직 성인만이 갈파한 원인론이다.
  병의 원인은 세균에 또는 기후에 있다는 등의 얘기를 자주한다. 이는 마치 변소에 들어앉아서 냄새의 원인은 똥에 있다고 주장함과 마찬가지다. 변소에서 뛰쳐나가면 맑은 공기가 절로 있게 마련인 것을. 질병을 건강식품으로, 약으로, 수술로 또는 침술로 고쳐서 건강하게 살아보겠다는 것은, 변소냄새를 향수 뿌려서 잊어보겠다는 투와 같이 않은가? 필자 같은 의생 노릇은 향수나 뿌려주는 화장품업자에 불과한 것이다. 부끄럽다! 똥 냄새와 잘 어우러진 향수냄새가 어찌 청청한 무색 무취의 청아한 공기를 당하겠는가? 권위자, 박사의 건강론이나 길가 돌팔이의 학설엔 그만 귀를 기울이자. 제발! 똥의 종류에 따라 향수 제조업자도 많이 나타나게 된다. 이제는 지겹다. 변소를 벗어나자! 변소에서 문 잠그고 하는 법이 아닌, 문 열고 나오는 법을 공부하자. 다시는 육체 없고 태어남이 없는 피안의 세계는 어디에 있는가? 의심에 이르러 정을 잊고 마음이 간절한 곳에 금 까마귀 야밤 삼경에 하늘로 사무쳐 날아보자.
  
    내면으로의 여행에서 획득되는 참된 건강
  김포공항에 10분 만에 한 대씩 비행기가 뜨고 내려도 오히려 비좁다고 야단들인 현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웃지 못할 해외관광의 바지저고리 부대가 벌이는 한판의 해프닝들은 쓴 웃음이 절로 나게 하지 않는가? 옛말에 귀한 자식 여행 자주시키라 했는데, 아마도 그 깊은 뜻은 다른데 있지 않을는지... 돈을 풍족히 들고 나가 쾌락을 찾아 돌아다니는 여행에서 무슨 창조성이 있겠으며, 모험과 미지의 신빙성, 호기심, 두려움 등등의 신선한 충격들이 이 시대 관광여행에서 찾아질 수 있을까? 여행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도전과 아는 세계로부터 탈출의 복합된 교차점에서 존재하는 인간의 행위이다. 아는 것은 끈질기게 인간을 지루하고도 따분하게 만드는데, 실로 인류는 이 지식의 추구에 쓸데없는 정력을 낭비하고 있다. 지식과 정보의 홍수, 이론과 추구 등은 대단한 마력을 지닌 악마의 근성에 불과하다. 그저 행복이라 느껴질 수 있는 행복관에의 지식 때문에도 마음은 쉽게 교란이 되고 만다.
  여행을 안전하게!? 안전의 추구가 과연 행복이랄 수 있겠는가? 여행 조차도 여러 가지 정보를 입수하고 나서, 시간표를 짠 후 시행을 한다. 행정부의 시계 같은 관리들 모양으로... 그야말로 여행을 안전하게 실시하고 있다. 그런 여행에서 모험심 가득한 의미 있는 여로의 기대는 할 수 없다. 연습 없이 볼 수 있는 지혜가 곧 여행자의 자유로운 여행이다. 누적된 지식과 기억의 찌꺼기가 우리의 신선한 영감을 파괴함과 동시에 삶을 지루하게 한다. '지루함이 곧 질병'이라면 여행은 그 치료법 중 최고의 명약이다. 산천경계 구경나서는 운수납자의 만행을 최고의 명약이 아니라고 누가 감히 부정하겠는가? 그렇게 하여 점차 폭도 넓어져서 해외에 이르기까지 그 영약을 넓혀간다면 이야말로 불로장생의 약이다. 역설적으로, 그러니까 알고 보면 우리가 불로장생 하지 못하는 이유는 여행을 못 하는 데 있고, 여행을 못 하는 까닭은 형편이 여의치 못한 호주머니 사정에 있다. 그러므로 돈 없는 사람은 아예 불로장생을 포기해야 한다?! 포기할 수밖에 없을까? 만약 실제로 여행에서 얻는 신선감, 즉 지루함으로부터의 해방을 그렇게 많은 경비와 모험과 시간을 소비해야만 얻을 수 있다면 지극히 비경제적이면서도 불공평한 우주의 섭리가 아니겠는가? 우주의 섭리가 돈만이 최고의 희열을 알 수 있고, 외로이 산 속에서 수도를 하는 수행자가 그만한 희열을 알 수 없을까?
  돈의 발생 이후 돈의 가치는 권력, 곧 힘과 같다고도 하는데 정말 그렇게도 좋은 것이라면 세존께서는 왜 버리는 모양의 연극을 한바탕 연출하셨을까? 돈 없이 여행을 할 수 있다거나, 성적인 사랑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신선한 희열을 얻을 수 있다면 이야말로 가장 경제적인 방법이며 지름길일 것이 아니겠는가? 인도 첫 요가수행자는 과연 누구였을까? 들은 얘기지만 그는 사랑에 빠졌던 인물이었다고 한다. 연인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공포에 마음이 짓눌리기 시작했다. '이 즐거움이 저 연인에게 의존하여 생기는데, 과연 나의 연인은 항상 내 옆에 있어줄 수 있는가? 세상에 죽지 않는 생명이 없었는데, 죽음이 갈라놓을 것이 뻔한데, 그때의 이별의 고뇌를 나는 감당할 수 없다.' 그 요가수행자는 대단히 솔직하고 민감한 사람이었음이 틀림없다. 길거나 짧거나 죽음이 갈라놓는 이별은 피할 수 없고, 어차피 의존성은 공포를 수반하게 된다. 의존되어진 즐거움에는 잃을지도 모르는 두려움을 함께 갖고 있다. 겉으로야 아닌 척하지만 실제로 모든 힘(권력, 금력)을 가진 자들은 은근히 두려움을 함께 갖고 있다.
  여행에 꼭 의존해야만 하는 활력의 되찾음은, 수도하는 사람이 지향할 바가 못된다. 일찍이 노자는 '방구석에 앉아서 천하의 일을 훤히 안다'하셨다. 그 요가수행자는 역시 그럴 수 있는 힘을 갖고자 자기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나 스스로 기필코 의지하지 않는 즐거움을 발견해서 저 사랑스러운 그대에게도 가르쳐 주리라!' 드디어 그는 성취했다. 연인에 의지하지 않는 커다란 환희를! 아마도 그의 연인도 성취시켜 주었으리라. 이것이 요가수행의 출발이었다는 설도 있다. 여하튼 우리 내면 속으로의 여행은 무궁무진한 보물찾기, 탐험의 묘미가 있다. 그런데 오늘도 여행 떠나게 돈 달라고 손 벌리는 자녀들... 마치 해외여행 가는 행위만이 이 시대를 앞서가는 삶으로 착각하고, 스스로 비교해 내어 우울해하는 엽전 근성. 모두 벗어버리자! 가장 적은 투자로 최대의 성과를 올릴 수 있는 경제 원칙에 걸맞는 자신 속으로의 여행을 떠나자! 비교하는 마음을 선뜻 내던지고 고요하게 스스로를 반조해 보면, 우선은 거미줄 이상으로 기막히게 얽혀 있는 의식 구조를 발견하게 되리라. 처음에는 말이다. 그러나 밝아져 가면 묘한 건강의 느낌이 다가오고 그런 경지에 도달하면 병도 스스로 치유하는 능력이 생긴다. 소위 신유 능력이 창조되는데, 모두가 다 내적 여행의 산물이지 결코 방랑자의 소유가 아니다.
  동양의학 입문 첫날, 병아리 예과 1학년 (의학개론) 첫 강의 시간이었다. 수염이 허연 노교수께서 칠판에 그린 것이 바로 아래에 그린 원상 하나다. 모든 동양의학도가 수천 년 탐독해 온 이천 선생의 저서인 의학서 (의학입문) 의 첫 페이지에도 이런 원이 있으니 건강의 개념을 미루어 짐작 할 수 있을 듯하여 소개하며 도움이 되길 바란다. 선천도. 후천도. '삶을 잘 양생코자 하는 자가 이것을 깨달아 알게 되면, 곧 자연히 분노를 징계하고 탐욕을 막아서 수는 승하고 화는 강하여 사귀니 태평하고, 사람을 구제하고자 하는 자가 원을 하나 밝히면 자연히 사물을 판별하고 방법이 정하여져서 침체한 질병이 단번에 회복된다. 이것을 이 책머리에 둥글게 그려서 글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도 편리하게 하고, 책을 열면 숙연하여 지극히 간단하고 쉬워서 참맛을 보아 특별한 취미가 있게 한 것이니라'

    참선이 정신건강에 미치는 영향
  참선 수행이 무엇인 제대로 아는 불자라면, 정신의 건강을 따로 의논할 필요가 없음을 감지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정신은 정신 그 자체가 병이요, 마음의 존재 자체가 불건강이니만큼 건강한 정신, 쇠약한 정신을 논한다는 자체가 넌센스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세상의 희론 즉 정신분석학이니, 심리적 치유니 하는 말장난 자체가 유치하다. 이에 세상은 곡해를 바로 잡고, 선의 정신적 자유를 드러내고자 한다. 우리가 흔히 '정신이니 마음이니'하는 표현을 쓰는데 이는 본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본마음이야 어디 마음이라 말조차 붙일 수가 있겠는가? 세존 말씀에 "누군가가 거울을 보다 자신의 머리를 잃어버렸다고 착각하고는 울면서 돌아다녔으나, 실은 울고 있는 그 입을 달고 있는 머리가 없어졌을 리 만무하지 않은가."
  정신이 '불안하다', '초조하다', '괴롭다', '슬프다', '들떴다', '침울하다' 등등이 여러 가지 정신병적 증상을 약과 더불어 정신과 의사와의 상담, 또는 명상을 통하여 치료하고자 하나 왜 초조, 불안, 번뇌를 느끼게 되는가? 필자는 의아해 한다. 왜 정신을 고치러 병원에 가는지, 과연 정신을 뜯어고치면 건강해지는지, 그 작업이 가능하기나 한지. "눈에 갖가지 색깔이 비춰 보인다. 비록 무지개색으로부터 수만 가지 빛에 이르기까지 분별하기는 하나, 보는 눈 자체가 색깔일 리는 없다. 비록 혓바닥이 달고 쓰고 맵고 짜고 시고 떫은 등의 맛을 보기는 하나 혓바닥 자체는 이러한 맛 그 자체가 아니지 않은가." 눈이 색이 아니므로 천 가지 색을 비추고, 혀가 맛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에 백 가지 맛을 느낀다는 말이다. 마음의 근본이 초조, 불안, 갈등, 공포를 느끼지만, 일찍이 한 번도 본 마음은 초조 불안 갈등 공포 그 자체인 적이 없었다. 마치 거울이 만물을 비추듯이 그저 번뇌와 즐거움, 쾌락과 고통의 정신 현상을 감지할 뿐이다. 불안한 기분을 느낀다는 그 주인은 불안이 아니오, 비록 제4선천의 선정의 쾌락, 희열을 느낀다 해도 주인은 그 희열과 동일이 아니다.
  우리는 흔히 동일시 현상의 노예가 되고 만다. 어떤 사람도 매운맛 쓴맛을 맛보되 자체가 쓰다 맵다고 인정하지는 않으면서, 괴롭다 즐겁다 하는 정신 현상만큼은 '내가, 내 마음이 괴롭다' '내 마음이 즐겁다'고 표현하기를 서슴치 않는다. 어째서 내가 곧 외로움과 같을 수 있는가? 나는 괴로운 맛을 오늘 느끼고 있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어째서 내가 즐거움과 동일시될 수 있는가? 어떤 근본 물건이 즐거운 상태를 경험하고 있다는 말이 옳다. 만약 내가 본질적으로 '내가 괴롭다'라는 결정적 존재라면 어째서 처음 태어나서부터 항상 괴롭지만은 않았고, 때로는 즐거움이 있어 왔는가? 기실 구름처럼 즐거움과 괴로움이 왔다갔다하지 않았던가? 그것을 어떻게 항상스러운 나라고 지칭할 수 있는가? 전도된 망상도 이만저만한 착오가 아닐 수 없다. 독자 여러분께서는 분명히 이 사실을 인식하셔야 미래 엉터리 정신분석가에게 속하지 않는다. 자! 마음이 괴로워 의사에게 간다. 마음이 비난과 억울함과 부정적인 생각으로 꽉 차서 의사를 찾았다. 의사왈. "과거에서 혹시 즐거웠던 추억은 없으십니까? 이제부터 즐거운 생각을 기억하시고 상상하세요." "자, 이제부터 매사를 긍정적이고 희망적으로 생각하십시오. 활기찬 미래는 희망적인 생각으로부터 나옵니다. 좀 더 웃으시고..."
  이따위 상담을 정신 치료라 한다. '언 발에 오줌누기'란 이런 경우에 쓰는 적합한 속담이 아닐까 싶다. 괴로움을 즐거움으로 향하게 해보았자, 근본 에너지는 마찬가지이다. 전기가 붉은 등에 흐르면 붉은 빛, 푸른 등에 흐르면 푸른빛이 나온다. 우리 인체는 두 가지 등을 다 지니고 있게 되어 있다. 전기를 꺼버리지 않는 한 언젠가는 즐거움의 푸른등에 흐르던 전기가 필히 붉은등으로 가게 되어 있다. 누가 부정적인 에너지를 긍정적으로 바꾸면 정신병이 낫는다고 하는가? 이는 눈속임이요, 일시적 미봉책일 뿐이다. 붓다께서 여러 가지 단계의 중생에게 근기따라 설법하시되, 그 근본 종자는 일찍이 다른 바 없었다. "세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는데 그 하나는 희망이 없는 사람 즉 오직 절망뿐인 사람이요, 둘째는 희망이 있는 사람이요, 셋째는 희망마저 초월한 사람이 있다"하셨다. 희망마저도 초월하지 않으면 우리는 진실로 자유로울 수 없다. 왜냐하면 절망과 희망은 동전의 양면 같아서 항상 같이 붙어 다니기 때문이다. 세존께서, 아니 시방삼세 성인들이 입이 쓰도록 강조하신 것은 희망, 희열, 즐거움의 정신이 아니다. 희망, 절망을 초월한 절대적 자아를 설하셨다.
  정신병으로 미친 사람이나 멀쩡한 자에 있어서나 이미 한치 한푼도 오차없이 똑같은 한 물건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신 것이다. 묵묵히 앉아서 침묵의 의미를 깨달았다 해도, 깨달은 놈은 침묵 그 자체가 아니요, 갑자기 황홀한 법열을 체험했다 해도 체험하는 놈은 법열 그 자체가 아니다. 정신이 불건강하여 불안하거나, 차분히 가라앉거나 모두가 헛것이요, 참다운 나는 아니다. 참나에 대한 확철한 인식을 이루면 그는 항상 구름 위의 하늘에 있어서 내려다보이는 구름이 모두가 다 아래에 있으니 의심할 바 없이 변함 없는 참나, 바로 하늘이다. 그러나 미혹한 중생들이 구름 밑을 서성거리며 어쩌다 맑은 하늘을 보면서 환호하고 구름 낀 날은 괴로워하니 번뇌가 수시로 교차할 뿐이다. 마음의 즐거움과 괴로움이 도무지 참나에 걸림이 되지 않는 것은 마치 창공에서 구름을 내려다봄과 같다. 정신이 불건강하다 건강하다 떠드는 것은 마치 구름이 검다 희다라는 차이를 놓고 흰 구름이 최고라 떠드는 것과 같다. 영재 이건창의 시를 음미해 보자. 운부재하천상정 해탁무서일정장 '구름이 아래 떠 있으니 하늘 항상 고요하고, 바다 터져 서쪽 없으니 날이 항상 길어라.' 필자는 단연코 (참선이 정신건강에 미치는 영향) 따위의 제목을 헛소리라 규정짓는다. 선은 정신도 물질도 아닌 바로 이 글을 읽는 그 주인이라는 것을 재삼재사 확인시켜 주는 것뿐이다. 하기사 재삼재사 확인하거나 말거나 이미 일상생활에서 써왔고 쓰고 있고 앞으로 써나갈 것이 명확하지만... 참다운 임자가 무엇인지 깨닫고 보면 모든 생령이 다 이미 깨달았다. 깨닫지 못한 측에서 공연히 성인과 범부, 정신병자와 아닌 자 등등을 구별할 뿐이다. 바로 구별, 비교, 선택 등의 분리의식 자체가 제법 똑똑한 척 해도 구름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원인임을 눈치챌 줄도 모르고... 참선수행 따로없다 묘한경지 탐구마라 정신건강 찾지마라 찾는놈은 못찾는다.
  
    밖에서 잃은 것은 안에서
  한 사람이 꿈을 꾸었다. 매우 가난한 그는 천 리나 되는 먼 곳에 다리가 있는 꿈을 꾸었는데, 중요한 것은 그 다리 밑에 엄청난 보물이 있다는 내용... 한번 꾸고 나서는 엄두가 안 났다. 거기 갈 차비조차 없이 가난한 이 사람은 "설마?" 하고 지워버렸다. 그런데 선명하게 또 그 환상을 꿈에서 보았다. 보물의 위치도 더욱 확실하게... 그래도 미심쩍고 두렵고 실수하는 것이 두렵다는 등의 핑계로 출발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의 세 번째 꿈은 너무 강력했다. 아예 보물의 숫자와 찬란한 종류까지 나타내 보이면서 "가거라! 가거라!" 계시의 목소리 같은 것이 들리는 것이 아닌가? 드디어 출발할 수밖에 없지 않았겠는가? 정말! 천신만고 끝에 천리 밖에 도착했다. 도중의 갈등, 포기, 의혹은 대단했지만 끈질기게 뿌리치고 갔다. 꿈에서 본 다리가 그대로 있었는데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신념과 희열과 계시의 정확성에 스스로 감탄하면서 다리 근처로 다가갔다. 그런데 다 똑같은데 한 가지가 꿈과 달라서 헷갈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다리 밑을 한 순경이 서성거리며 지키고 있는 점 말이다. 하는 수 없이 다리 위아래를 왔다갔다하면서 보초 순사가 사라지길 기다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가질 않는 그 경찰이 아닌가? 궁금해하는 것은 그 순경 쪽도 마찬가지였다. 저 젊은이가 계속 어정거리는 것은 눈에 거슬렸다. 사실은 자살방지 순찰중인데 아무래도 그가 자살을 시도할 것만 같았다. "여보! 여보! 당신 뭐하는 거요?" 순경은 불러서 물었다. 이 젊은이는 머뭇거리다 실토했다. "사실은..." 다리 밑에 엄청난 보물이 숨겨져 있다는 말을 들은 순경은 배꼽이 빠져라 웃어제꼈다. 배꼽이 빠졌다... "여보! 나도 그와 똑같은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 당신과 비슷한 사람이 자는 침대 밑에 보물이 엄청나네 숨겨 있는 꿈을 꾸었소! 혹시 침대가 '이러저러'하게 생기지 않았소?" 이 사람은 깜짝 놀랐다. 정말 자세히도 자기 침대 모양을 아는 것이 아닌가? 얼른 그는 집으로 돌아와 자기 침대 밑을 파보았다. 그랬더니 정말 그곳에는 엄청난 보물이 묻혀 있었다. 라즈니쉬, 강의 수피즘.
  이상의 수피 예화가 주는 교훈을 검토해 보자. 우리의 참건강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다. 수천 억의 재산이라도 이부자리에 누워서 똥, 오줌 받아내야 하는 중풍, 반신불수 환자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돈을 활용하는 에너지는 곧 건강이다. 천리 만리 좋은 의사와 약을 찾아 헤매지만 알고 보면 나의 내면에 이미 건강의 보물이 있다는 뜻이다. 육체가 강건하고 힘이 센 것이 건강하다 오해하면 곤란하다. 강력 엔진에 차체 견고한 힘센 자동차도 운전사의 난폭함이나 음주운전 습관에는 사고가 나게 되어 있다. 더욱이 미묘한 유기체인 인체는 단 한 한 번의 운전의 실수(운전사=마음)로 파괴될 수 있다. 마음이 운전사인데 마음의 건강이 곧 최고의 건강이며, 안으로 가까운 곳에서 먼저 자기를 정립시키는 작업이 건강의 유지법이다. 바로 내 침대 및, 즉 바로 매일 쓰는 마음 가운데 보물이 있다.
  마음을 비워야 : 충남 서산에서 올라온 한 환자 이야기... 우측이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되었는데 이유인 즉슨... 평소 보기 싫어하던 사람을 길가에서 만난 즉시 우측이 마비되어 오더란다. 보기 싫어하는 마음, 미워하는 마음의 잔재는 어떤 조건이 성숙해서 그 대상을 접촉할 때 크게 작용한다. 뇌신경을 압박한다. 얼굴 근육이 돌아간다. 이거야말로 치유해야 하는 경우가 아닌가 말이다. CT 촬영에서부터 침 치료까지 부산을 떨지만 몇 년째 잘 안 낫는 고질이 될 줄이야. 증오 없는 마음... "마음을 비운다!" 실천하기 어려우나 참 좋은 말이다. 빈 마음의 삶이 사나이의 역할이다. 그는 결코 아프지 않다. 마음의 건강은 곧 마음의 상대적 작용(애착과 증오)을 초월했다는 뜻이다. 서로 상대하는 적대관계의 승부심에서 비교 경쟁심이 일어나고 증오, 시기, 질투가 생긴다. 적어도 나만큼은 일등을 해야 한다. 누가 2등이 되고? 당연히 너는 2등, 나는 일등... 자아의식, 에고의식이 강하지 않은 사람은 추한 경쟁심이 없다. 우리 지구촌의 모든 사회구조는 이상한 형태의 '자아'를 형성시킨다. 그래야만 사회를 쉽게 조정하고 조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구체적으로 자아에 관심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승부나 점수 따위엔 별 관심이 없다. 학교에서 돌아와 즐겁게 말할 수 있다. "엄마! 아빠! 나 또 떨어졌어요." 이 같은 어린이다운 삶이 사나이의 삶이다. 그는 질병의 희생이 되지 않는다. 탐욕의 길은 배운 추한 사내의 삶은 돈과 권력과 명예를 향한 돌진의 길이다. 돈과 권력으로 으쓱해진 에고는 모든 병의 원인이다. 자꾸 키울수록 위가 올려보이는 사람의 부귀공명은 끝없는 자기학대와 분발이 필요하다.
  어느덧 심장은 엔진 과열로 불타고 헤드라이트의 필라멘트와 퓨즈조차 끊어지고, 이제는 브레이크조차 안 들어 어디에서 쉬고 냉각을 시켜야 할지 혼란이 와서 휴식을 기약할 수가 없다. 그래 마냥 마구 달리는 차... 브레이크가 고장난 차 같은 저돌적 사내의 야욕적 질주가 당뇨, 고혈압 등의 원인이다. '암'은 이제 끝장난 차라는 증거일 뿐이다. 적당히 브레이크를 잡을 줄 아는 사나이는 결코 말세기적 괴질에 시달리지 않는다.
  예방의학 : 사거리에서 좌회전 신호등도 안 켜졌는데 휙 훑어보는 이유는? "교통순경을 관찰." 그러다가 쏜살같이 좌회전을 했는데, 나무 그늘에서 교통경찰이 덜미를 콱 잡는다. "아니! 뭐야! 당신은?! 민주경찰은 예방경찰이야, 예방을 위해 보이는 데 있지 왜 함정단속이야! 왜!" 오히려 대드는 운전기사... 잘났다! 마찬가지다, 우리의 건강도... 법규 어긴 차에 함정단속으로 대응하는 모든 병균도 에누리 없이 불법 신체운전자게에 침범하게 되어 있다. 체질에 맞추어 금지하고 허락하는 약물이나 식품이 있다. 충고도 있다. 경고장도 있으니... 그러면 그것을 이해하여 주시기 잘 지켜주어야 한다. 자! 나는 몸이 차다. 맥주만 먹으면 설사가 난다. 다음날 근무 의욕 감퇴가 온다. 그런데 공복의 약수가 몸에 좋다는 말을 들었다. 약간 미심쩍기는 하지만 T임파구의 '권위자'가 좋다 하니 한번 마셔볼까나? 그것도 욕심 내서 세 바가지씩! 결과는 뻔하다. 설사 중의 물설사를 한다. 먹기만 하면 무조건 물로 나온다. 배가 무척이나 아프다. '권위자'가 얘기했으니 다음날도 또 마신다. 또... 또... 이것을 '어리석음'이라 아니할 수 있겠는가? 사람은 각기 다르다. 개성의 산물이다. 자기 육체에는 자기 스스로의 세포시계가 있다. 스스로의 반응보다 '권위자'의 말을 맹신하여 몸을 망치는 경우는 너무 많다.
  뚱뚱한 친구가 담배를 칼같이 끊었다. 게다가 밥과 음료수는 더 많이 먹는다... 차라리 밥과 음료수, 과일을 끊지... 오히려 담배가 그에게는 쓰기 따라서 약이 될 수도 있다. 이판사판으로 피워대는 마른 사람의 끽연을 보면 황폐한 사막이 떠오른다. 담배는 건조하고 매운 음식이다(양적인 약). 건조한 사람(양인)에게는 매운 것이 좋지 않다. 뚱뚱한 사람(음인)에게는 미끌미끌하고 지방분, 수분 함유량이 많은 것이 좋지 않다. 이러한 단순한 계율이 건간을 좌우한다. 조깅 등의 과격한 운동 후에 흘리는 과다한 땀은 오히려 마른 사람에게 좋지 않다. 수영 후의 아이스크림은 뚱뚱한 이에게 나쁘다. 땀을 내야 할 비대인! 수분, 신맛, 단맛을 많이 취해야 할 수척한 사람. 이것이 단순한 율법이다(음양 상대성 이론). 지렁이, 살모사, 굼벵이를 배 나온 사람이 먹는 삶은 죽음의 삶이다. 매운 담배, 아구찜, 겨자, 후추 등은 오히려 배 나온 사람에게 좋을 수 있다. 요컨대 건강은 기타의 조율과 같다. 너무 죄도 늦춰도 중용을 잃어 건강을 상한다. '마른 이는 좀 보충하고(허는 보), 뚱뚱한 사람은 좀 덜어낸다(실은 사).' 이것이 건강의 단순한 조율이다. 게다가 성격까지 잘 조율할 수 있다면 그는 곧 사나이 중이 사나이다. 비록 줄이 없는 거문고지만 마음의 현을 잘 조절한다면 그는 도인의 부류에 속한다.
  정력유감 : 정은 희다. 피는 붉다. 백포도주는 붉은 포도주보다 더 귀하고 비싸다. 맛있다. 정제된 알코올이다. 흰 정은 피보다 더욱 엑기스화된 고급 연료이다. 옥탄가가 높은 휘발유는 곧 정이다. 60숟갈의 음식이 한 방울의 피요, 600방울의 피가 한 방울의 정이다. "적당한 배설은 몸에 좋다!" "수음은 결코 몸에 해롭지 않다!" 잘못된 의학상식이 난무하고 있다. 순간의 '오르가슴', 10분의 1초 정도의 '짜릿'을 위해 낭비하는 체력 소모는 대단하다. 약간의 단백질, 탄수화물밖에 없다는 분석적 연구는 우리에게 정을 천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보라! 그 안에 모든 유전자가 포함되어 있지 않은가? 한 번에 2에서 5억개의 정자가 죽으며 보통남성(미국인)의 경우 일생동안 5천 회 이상의 방사를 하며 그 양은 약 4캘런인데(50년대 킨제이 보고서) 한 남성이 일생동안 방사하는 양은 5,000회 곱하기 3cc는 15,000cc라는 계산. 일생동안 보통 한 남성이 1조의 생명도 낳을 수 있는 정자를 방사한다. 지상 40억 인구의 200배도 넘는 씨알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모든 남성은 이론상 수소 원자폭탄보다 더 강력한 성에너지 폭약고를 갖고 있다. 참된 에너지를 보존하지 못하는 사람은 삶은 죽은 삶이다. 성에너지의 승화와 전환은 아주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이다. 마구 쏘아버린 연약한 '시스터 보이(Sister boy)' 같은 부류의 중성적 남성이 늘어나고 있다는 보고는 우리를 우울케 한다. 오줌 줄기가 센 것을 싸나이의 정력으로 삼을까? 사이즈가 큰 것을? 횟수와 시간? 술 마시고 도취된 후 떠벌리는 사내들의 허풍은 도무지 거짓 정력의 남발일 뿐이다. 오줌 줄기가 세었으면 하는 사람은 산딸기를 실컷 잡수시라! 복분자... 산딸기의 학명이다. 매우 코믹한 동양의학의 명명법인데 중국인 특유의 과장이 엿보인다. '어떤 사람이 산에 가서 길을 잃었다가 이름 모를 열매를 따먹었다. 내려와 소변을 보았더니 소변항아리가 넘어졌다.' 항아리가 엎어져 복분자라 이름지었는데... 복분자, 오미자 등을 '불임증'등에 사용하기는 한다. 그렇다고 마구 산딸기 주워먹어 소변 줄기의 힘이 세어진다면 정력이 비례해서 좋아지는 것일까? 사나이의 참 정력이란 '센 것', '큰 것', '오랜 시간'에 대한 집착성이 아니다. 정은 에센스다. 엑기스다. 최고의 정제된 심기의 기력을 말한다. 집중된 고도의 정신 능력, 혹은 반짝 깨어 있는 마음의 힘을 정력이라 한다. 절대 헌신의 힘과 성취욕, 끈기 등을 정력이라 한다.
  석탄과 다이아몬드는 다같이 원소가 C다. 탄소이다. 그러나 차이는 엄청나다. 석탄의 다이아몬드화 작업은 모든 도가의 숙제다. 폭발력을 잠재하고 있는 정액은 석탄이다. 어마어마한 광채의 창조적 남성은 다이아몬드다. 모든 성인의 머리 위에 빛나는 후광은 석탄이 승화된 '다이아'의 빛이다. 석탄을 천하다고 코풀 듯 내버리면 다이아몬드를 기약할 수 없다. 조잡하고 거칠고 헐떡꺼리는 성욕, 정욕은 석탄이다. 그것은 어느 날 수천 도 수만 도의 열과 세월을 거쳐 다이아몬드, 즉 금강석으로 변신을 할 수 있는 재료이다. 부디 독자는 석탄을 다이아라 우기지도 말 것이며 그렇다고 마구 내버리는 우를 범하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다이아몬드의 빛나는 광채는 석탄 같은 정욕 없이 빛나지 않는다. 그러나 정욕에서 끝나는 인생은 불쌍하다. 그것이 사랑이라 우기고 집착하고 시기 질투 소유하고 잃을까 두려워한다. 혼란과 어둠과 폭력과 난장판의 세상은 밝은 정력으로 승화되어야 하다. 연꽃은 진흙에서 나와 찬란한 꽃을 피운다. 진흙의 이 세상은 휘황찬란한 사랑의 만끽을 위한 연료공급처다. 사랑은 연기 없는 불꽃인데, 작금의 사랑타령은 고약한 고무 탄 냄새의 독가스 풍기면서 핥고 빨고 붙고 하는 등 공해가 너무 심각하지 않는가? 참으로 정력적인 영웅과 쾌남의 탄생이 아쉬운 시절이다.
  
    인삼, 소나무 그리고...
  금산에서 생삼을 사보자. 여러 가지가 널려 있는데 거뭇거뭇한 색의 흙이 묻어 있는 것, 황토색이 불그스레하게 묻어 있는 것 등 가지가지다. 750그램을 '한 채'라고 하여 기본 단위로 삼는데, 같은 4년근 생삼도 검은 흙 묻은 것과 황토색의 값이 다르다. 역시 땅의 본색인 주황의 땅색은 보기에도 그렇거니와 그런 흙의 인삼은 맛도 미묘하다. 땅의 정이 배어 있는 그 맛은 표현할 수가 없다. 진짜 송이버섯의 향내는 깊은 산 낙엽 떨어진 소나무 숲이 잘 발효된 땅 내음을 전한다. 인삼이 나는 땅은 단순히 비옥하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축축해도 안 되고, 너무 딱딱하게 건조해도 안 된다. 너무 척박하지도, 비옥하지도 않은 땅이 인삼의 땅이다. 영약은 역시 중용의 도를 안다. 신령스러운 인간도 역시 비옥한, 부유한 환경에서 나오지 않는다. 너무 야박하게 열등해서도 안 된다. 교만도, 열등도, 부유도, 가난도 아닌 그 중용의 마음을 실천한다면 그 미묘한 인품의 중도를 걷는 만병통치의 인물이 저절로 된다.
  급하지도, 느슨하지도, 게으르지도, 부지런하지도 않은 지인은 사회의 인삼이다. 어린 시절 선생님은 가르쳤다. 이 나라의 소나무를 보라.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저 나무. 이리 뒤틀리고, 저리 뒤틀려 제목으로도 못 쓰는 것. 자기 비하적이고 멸시적인 가르침은 미국산 쭉쭉 뻗는 소나무를 최고라 이르고, 능률지상주의를 가르쳤다. 인간 위주로 보아서 그것도 짧은 안목으로 본 탓에 그렇게만 보이는 줄을 교사조차도 몰랐다.
  소나무 위주로 생각해본다면 자신의 무용지물적 특징이 얼마나 고마운 것이랴! 인간의 가구나 관으로 쓰여져 이용 당하느니보다 삶을 보존하여 오래 장수할면 무용의 성질이 나을 것 아니랴?! 무용지용의 노자 말씀과 장자의 의견은 동양철학의 백미다. 그런데 이제는 자연스럽게 자란 소나무의 곡선과 자유분방성의 오히려 탐미적 취미가 되어 부잣집 정원에 장식으로 수백, 수천만 원씩 호가되어 팔려가고 있으니 웬일인가? 부잣집 정원에 보면 링거병 달고 칭칭 동여맨 소나무를 볼 수 있다. 마치 깁스한데다 주사 맞고 있는 입원환자같이... 소나무 자체의 쓸모도 이제는 여러 가지 각도에서 밝혀지고 있다. 산속에 살려놓고 그 안을 뛰어다니는 것이야 좋겠지만, 좋다고 공해도시에까지 데려다가 병들게 해놓고서 그 기를 다 죽여 어쩌자는 것인가?
  소나무의 운명도 이제는 교활한 인간의 손에 마냥 흔들린다. 이용가치의 선악 판단보다는 소나무에서 삶의 지혜를 배우는 편이 더 나을텐데. 두루두루 쓸모가 있으려면 중도의 터득이 지름길이요, 오래 살려면 쓸모가 없어야 함이 그 극치의 깨달음이다. 소나무와 인삼. 사시를 푸르러 춘하추동 오행의 기를 모두 다 머금은 소나무. 여름만 아는 매미가 아니요, 겨울만 아는 기러기가 아닌 전천후성 자립 의지는 소나무의 굳센 삶의 표본이다. 6년을 자라도 손가락 하나만 할까말까 한 정도만 자라는 산삼의 압축된 성장은 정의 극치다. 속으로 여물 대로 여문 산삼의 축적된 토의 정과, 소나무의 무위를 꼭 익혀야 할 동네가 이 지구촌인데...
  
    중음신의 여행
  49일 간의 중음신, 즉 'Bardo'의 방황을 믿는 종교인들이 있는 데. 사후의 세계에 대한 지식이 이 시대에 절실하다. 왜냐? 갑작스럽고 예기치 못한 죽음이 너무 많은 시대이기에. 소유했던 모든 것을 놓고 가야만 하는 아픔과 함께 사랑하는 이와 더 이상 접촉할 수 없는 이승과 저승 사이에 엄격한 간격이 있다는 진실을 미리 가르쳐주어야 한다. 전쟁으로 피멍이 진하게 들어서 이제는 그 상처가 얼마나 큰지를 실감하게 될 이 지구촌. 어떻게 된 후유증이!? 수십만의 전사자와 함께 2년을 꺼야 꺼지는 유정의 기름불과 바닷가의 기름세례(벗어나는 데 10년 걸린다는)란 말인가? 하늘은 구멍이 나서 오존층이 구실을 못해 태양광선 등을 제대로 걸러내지 못하고 있지를 않나? 말세론이 기승을 부리는 것도 아주 일리가 없지는 않은가 보다. 뭘, 말세가 온다는 무슨 년도까지 갈 필요 있을까? 지금이 곧 그때가 아닐는지... 괴질의 출현, 전쟁광들의 도박장인 이 지구는 상서로운 징조보다는 악의 예고편이 넘치고 있을 뿐이다.
  사랑하는 자녀들이 다시 이 끔찍한 땅에 또 태어나라고 교육시킬 필요가 있을까? 육체가 죽으면 약 49일을 방황하게 되는데 그 미묘한 체를 중음신이라 한다. 영화 (사랑과 영혼)의 주인공이 당황하듯이 누구나 우리는 사후의 지식 없이 죽으면 놀라게 된다. 분명히 죽어 있는 육체를 보고 있는 자신은 또 무엇이라는 말인가? 어떠한 물체도 통과되는 이 4차원 이상의 물건은 무엇이라는 말인가? 살아 있는 지구의 회복을 위해서는 자연 공해 방지도 중요하고, 전쟁의 예방도 꼭 필요하지만 이 중음신의 올바른 천도도 중요하다. 원한을 품고, 증오른 지니고, 애착을 끊지 못해 지구를 방황하는 유령의 장난은 곧 제대로 천도되지 못한 중음신의 소행이다. 섭섭한 죽음은 인간뿐 아니라 동물, 식물에까지 자행되어 지구를 겹겹이 감싸고 있는 악업의 굴레를 벗기 어렵게 되었다. 천태대사의 병인론에 보면 질병의 원인, 첫째는 지수화풍 4대 원소의 부조화, 둘째는 귀신의 병, 셋째는 업명, 넷째는 음식의 부절제 등을 꼽았다. 물과 불 그리고 바람에너지 등의 조화로도 많은 병이 치료되기는 하지만, 원인불명의 질병은 다 일종의 업병인데 귀신병도 역시 업병이다.
  모두가 생각의 쌓임에서 오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로 인해 마음이 무지해져서 사후의 공부는 팽개치고 막상 무상의 법칙에 의해 불시의 죽음을 맞았을 때는 무시무시한 중음신의 세계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최초로 나타나는 광채도 알 수 없고, 자신의 장례식 절차를 빤히 보고 있는 이유도 알 수 없어 혼란에 빠진다. 의사전달이 안 되는 당혹감에 무척 외로워지는 중음신은 홀로 와서 홀로 가는 진리를 뼈아프게 체험한다. 의탁할 곳 없는 무주고혼이 되어, 끝없이 방황하는 신세가 되어 떠도는 중음신은 살아 생전 익혀두지 않은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누구나 다 완벽한 형태의 신체로 부활되는 중음신 역시 미세한 나의 생각 분자의 쌓인 업신이 분명한데, 대부분의 모습이 살아 생전의 모습과 유사하다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거친 육체의 진동세계를 벗어난 이 미묘한 중음신은 물질세계의 장애를 느끼지 않고, 어느 것이나 통과할 수 있다고 한다. 의지처를 찾아나서 보지만 한 순간 착각으로 나귀나 모기의 뱃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 살아 생전 행한 종교적 수련기간에 비례하여 밝은 세계에 태어날 가능성이 높아지는데, 한순간 애착으로 어두워진 마음은 지옥 아귀 축생의 삼악도에 떨어지는 원인이 된다. 죽음의 예행연습은 질병의 예방과 함께 필히 익혀야 할 과제인데, 나 죽으면 누군가가 영혼천도를 해주겠지 믿는 어리석음은 버려야 한다. 성인 말씀대로 "연못의 돌을 떠올라라 떠올라라"주문 왼다고 돌이 떠오르지 않는다. 악업의 누적 속에 죽은 중음신은 꼭 악도의 길만 보게 될 것이니, 자기 스스로의 수행이 꼭 필요하다. 급사도 많은 이 세상, 죽음의 이해공부 또한 급하고 급하다. 아! 정말로 시급한 과제다.
  
    지옥 열람
  나 위주로 생각하는 것을 음이라 하고, 너 위주로 생각하는 것을 양이라 한다면, (능엄경) 말씀대로, 내분은 중생의 정상이니, 음이요, 외분은 중생의 갈앙하는 허상이니, 양이다. 세존의 설법 요지를 보면 진수성찬을 생각하면 입에 침이 괴고, 옛 사랑을 회고하거나 원망하면 눈물이 괴고, 남녀가 애정을 그리워하매 남녀 성기 2근에 애수가 괴듯 모든 정은 이와 같이 물을 수반하게 된다. 여러 가지 애정은 비록 다르나 물이 흘러 맺힘은 같다. 축축하니 오르지 못하고 스스로 떨어지니 이것이 곧 내분이다. 외분은 훌륭한 경계를 듣고 희망하는 것이나, 생각이 간절하여 멀리 따라가려는 것이 허상이니 승기를 낸다. 즉, 이것은 올라가려는 기운을 말하는데 계율을 지니면 몸이 경청하고, 마음으로 주문을 지니면 용모가 거룩 의연해지고, 선지식을 섬기면 신명을 가볍게 아니하메 초월한다.
  순상은 날으니 천상에 나고, 순정은 침몰하여 지옥에 나게 된다. 날으는 마음에 복과 지혜와 깨끗한 원력이 겸비하면 마음이 열리어 시방의 성인을 뵈옵고 정토에 왕생한다. 그러니 스승을 섬기는 마음이나, 자기 희생적 사랑의 마음은 남을 위함이 아니요, 곧 자신의 내분 정습을 외분의 승기로 바꾸는 종교적 명상작업이다. 정과 상이 5:5면 인간으로 태어나고, 순정이면 지옥에 나는데. 지옥의 습기에도 음양이 있다. 탐욕의 습관으로 흡취의 기운만 능하여 얼어터지는 한랭한 과보를 받는 양지옥이 있다. 나 잘났다는 만습인, 능멸하는 기운으로 받는 더러운 똥물지옥인 음지옥과, 너 죽인다는 진습으로, 반역하는 살기가 뭉쳐있는 주살의 지옥인 양지옥이 있다. 내 이익을 위해 유혹하여 끈이나 족쇄로 잡아 묶어 고문하는 간사한 사심의 지옥은 음지옥이요, 거짓으로 간특한 꾀를 내어 너를 저주, 비방함은 양지옥이니 풍륜지옥의 추락과 표류의 고가 그러하다. 내 것으로 잡아먹고 마는 원한의 음독은 마치 처절한 전쟁터 같아 쏘고 죽여 해하는 고통을 주는데, 너의 죄를 밝히겠다는 양적 악습인 견습은 서로 증명하여 죄악을 들추는 국문 등을 당하여 괴로움이 한량 없다.
  나의 죄를 덮어씌우는 왕습은 무고 비방하여 선량한 이를 핍박하는데, 그 과보로 벽력이나 깔려 죽는 고통을 받는 음지옥이 있는 반면, 너를 고발하여 소송하는 송습은 피차 솔직하지 못한 은폐, 숨김의 과보로 받는 죄업인데 지은 업을 낱낱이 진술하여 드러내게 되는 지옥이 있다. 이 모두가 나의 것이니 너 때문이니 하는 너와 나의 상에서 생긴 망상의 까르마지만, 실제로 마음은 곧 현상을 이루어 지상의 병고에 비유할 수 있을까? 심히 두려울 뿐이다. 삼가 이해를 돕기 위한 음양 분류 방편을 용서 바라며 자기성찰을 위해 한번 풀어보았을 뿐이다. 세세하고 정밀한 법문이야 직접 (능엄경)을 보시면서 느끼심이...
  
    사사소고
  불교사전에도 사사는 사대와 같은 용어로 쓰이는 것처럼 나와 있는데 4대 원소 지수화풍의 부조화는 질병의 원인이 된다. 그러나 네 가지 뱀은 그 어원이 다를 수 있다. 필자의 스승이신 혜암 대선사께서 생전에 강조하셨던 주장 가운데 하나 인데. 사사의 의문을 풀지 못해 여기저기 탐문하시다가 해인사에서 어떤 경전을 열람하시던 중 찾아내셨다는데... 안은 전간사 이는 오보사 비는 청라사 설은 적향사 라고 대충 기억되는데(일부 한자는 필자의 잘못 기록일 수도 있음). 그 깊은 뜻은 필자도 잘 모르지만 여하튼 사사는 안, 이, 비, 설, 사식의 위험스러운 집착을 말함이다. 그렇다면 눈의 집착은 무엇일까? 코, 귀, 혀는??? 눈이 하는 일은 보는 일이지만 보는 데 집착할까? 본다면 안 보는 것도 있을 것인데 안 본다면 과연 아무것도 안 보이는 걸까? 세존 말씀에 견상은 지대요, 윤습은 수대, 난촉은 화대요, 동요는 풍대라 하여 각각의 특성을 말씀하셨듯이 보는 작용의 명료하고 세밀한 법문을 나름대로 의논해 살펴본다. '본다'하지만 밝음을 보고 어두움을 본다. 기타 색 형 등... '안 본다'말하지만 사실은 안 볼 수는 없고 공을 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안 볼 거야!' 하지만 눈을 감아도 상상의 형이나 기억의 인식이 동하면 실제 보는 것이다. 안 본다는 생각으로 텅 빈 공을 보고 있어도 공을 보는 견정이 이미 동한 것이다. 진짜 안 볼 때 꿈도 생시도 아닐 때는 '나는 안 볼 거야'라는 심식의 출현 없이 '본다' '안 본다'가 아닌 다른 심식이다.
  그때의 꿈도 생시도 아닌 식이 깨달음이라면 깨어서 보는 순간 깨어질 깨달음이니 거짓이요, '보는 것' '안 보는 것'의 마음이 깨달음이라면 일어난 인식으로 본체를 삼으니 거짓 망상이 될 것이다. 깊은 수면은 '보는 것' '안 보는 것'의 피로를 푸는 상대적 약이긴 하나 깊은 수면 자체가 깨달음은 아니다. 봐서 피로한 안정 피로는 안 봐서 풀 수 있고, 보거나 안 보거나 다 깨어서 피로함은 꿈 없는 잠으로 해결할 수 있으나 이 양편으로 흐르는 흐름이 무상정등각은 아니다. 단맛, 쓴맛, 신맛 등으로 지친 혀는 냉수로 입가심하여 씻을 수 있다. 담미는 곧 맛이 있음의 상대적 약이니까. 그러나 혓바닥 자체를 쉬려면 맛없는 맛도 그만 맛봐야 한다. 물론 혓바닥 자체가 어떤 맛이 있을 리 없고... 보는 놈에 무슨 색과 공이 있을까? '꿈도 생시도 아닐 때 어느 곳에서 안심입명 하겠는가?' 옛 선사의 공안이 생각나는 오늘, 주제넘게 망령된 해석을 낸 죄가 작지 아니하다.
  
    대한민국 종교 진맥기
  남과 북의 이념도 이제 무용지물이 되어 가는 이때. 지나갔던 피 흘리는 전쟁터에서는 의사들이 찢긴 팔다리를 꿰기 바빴다. '도대체 왜 내가 이런 일에 종사해야 하는가?' 물어볼 사이도 없이 전쟁의 뒤처리나 하는 의사는 불쌍했다. 민족끼리도 쏘라면 쏴야 하는 군대 훈련은 무엇이며 사상의 분열은 어찌된 일인가? 미친 전쟁광들이 정신과 치료는 받지 않으면서 날뛰는 이 지구촌은 흔히 그들을 영웅시하곤 한다. 잘라내야 할 증상이 인위적 전쟁터에서 왔다면 의사는 마땅히 전쟁을 예방해야 할 것이다. 맑은 물, 공기, 적당한 운동 같은 미온적인 방편으로 질병 예방책을 충고하기 전에, 자연파괴 생명파괴의 전쟁을 미리 적극 경고, 예방해야만 한다. 종교가 전쟁을 만든다면 이는 더욱 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는데... 공산주의니, 자본주의니 알고 보면 잘살자고 내놓은 이념이지만 그런 적대 사상체계는 서양 것인데도 어리석게 이 나라는 대리전쟁을 치러냈다. 6. 25의 비극은 지구촌 분열의식을 대변한 머저리 한국민의 대리전쟁이었다. 만약 한 집안의 강한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로 티격태격 싸우고 으르렁거리면서 가장 섬세하고 약한 자식이 병을 앓게 된다는 말이 있다. 강대국의 경쟁추구에서 냉전은 약소국을 통해 대리전쟁을 조종하게 된다. 각기 자국은 쏙 빠지고 세뇌된 약소국이 서로 힘 겨루는 장터가 된다는 말이다.
  베트남 전쟁도 알고 보면 그러한 맥락에서 보면 이해가 된다. 정작 미국과 소련, 중국은 직접 부딪치지 않는다. 약하고 못난 민족을 통해 세력을 과시해 보고 시험해 보는 셈이다. 한반도는 사상의 시험장으로 대판 한판 붙은 경험이 남북에 있다. 같은 핏줄끼리 사상 무장된 권력자들이 사주 아래 피가 터지게 잘도 싸워댔다. 전생의 원수가 아니고서야 어찌 그럴 수가 있었겠는가? 이 나라 종교인들은 숙생의 원수끼리 만난 것이 틀림없다. '마군'들이 준 설움의 사례를 말하기 나쁜 이 나라 스님들의 한은 그 무엇이며, '우상숭배자', '사탄'들의 몰지각을 예 들기 바쁜 목사들은 증오는 또 무엇인가? 진정한 성직자의 한은 저 분열된 종교의식으로 인한 '전쟁의 우려'로 승화되어야 하고, 진정한 목회자의 증오는 나와 너의 선과 악을 교묘히 나누는 진짜 이단의 무리에게 퍼부어져야 할 것이다.
  이제 이 나라가 종교전쟁마저 대리로 치러내야 할 숙명을 가졌다면 성경에 예언되어진 말세의 고통은 이 민족으로부터 시작될 것이 뻔하다. 예수 천당은 곧 에덴동산으로 상징되어진 선악과 따먹기 이전의 아담과 이브의 천진무구한 무분별의 마음을 말한 것이요, 불교 열반은 곧 무아적정으로 상징되어진 나와 너 분리 이전의 응용 자재한 일심을 드러냈을 뿐 아닌가? '나는 불교다', '나는 기독교다', '나는 천주교다', '나는 유태교', '나는 브라만교', '나는 이슬람교'... 종교라는 약은 수없이 많은데, 이 약은 혹 잘못 쓰여 독이 되어 이 지구촌의 종교는 다 교주를 빙자하는 '아상확대 동일시의 망상'밖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 숱하게 치러낸 성전을 본다면 종교가 저지른 죄악상을 알 수 있지 않은가? 백골단과 학생의 그 흉한 투쟁을 누가 조정하는가? 데모 현장을 보면 사람 안 죽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과격한 살상의 냄새가 풍겨온다.
  강군 사건(강경대 학생 치사사건(91. 4))은 이미 예견된 수순이나 마찬가지다. 세력 대 세력의 마지막 투쟁장은 쇠파이프와 화염병이었듯이, 종교와 종교의 전쟁터가 이 나라의 교회나 절이 되지 않을까 두렵다. 하기야 같은 예수 문중이라도 갈라진 형제 운운하면서 싸우고 있고, 부처문중도 무슨파 무슨파 갈려 있는 나라꼴 아닌가? 신의 이름 아래 절에 불 지르고 불문의 혈기 뻗친 젊은이들이 교회를 부수기라도 하면 아마도 예수, 부처가 다시 되돌아보기도 싫은 종교전쟁의 지옥상을 연출하게 될 것이다. 이는 거의 극한 상황에 다다른 이 나라 종교인의 증오를 보고하는 소리다. 또한 넓지 못한 포용력의 불자가 저지를 만용일 경계해서이다. 진맥은 손끝에서 알지 심장에서는 잘 알 수 없다. 종교집단의 심장, 집행부는 잘 모르리라. 그러나 종교전투의 징조는 이 나라 도처의 말단 교회 사찰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 진맥으로 본 종교 전쟁의 예방책은 아주 간단하다. '상호인정'의 풍토를 기르는 것이다. 이 법 저 법 다 달라도 쓰기 따라 약이 된다. 하근기라 성경을 욕하지 말며, 우상숭배라 불경을 비방하지 말자. 성직자들의 '신도 빼앗기' 욕심과 '자파 세력 확장 의도'를 간파한다면 어리석은 맹신의 신도는 사라질 것이다. 이 법 저 법 다 달라 쓰기 따라 약도 독도 되는 법이다. '무유정법이 불법'이 아닌가? 모든 성인이 출세하셔서 몸을 나투는 화신은 다 보살의 방편이니 그 나라 그 시대 그 전통에 맞는 방편의 지혜였을 뿐이다. 비유의 천재, 쉬운 용어의 간략한 사용으로 낱낱이 천민까지 제도하신 예수의 뜻을 가장 잘 안 따르는 천주교, 기독교인은 그 얼마며, 쾌락의 포기, 고행의 무익함을 역설하시고, 파사현정 정신으로 과감히 계급타파를 주장하신 세존의 뜻을 가장 잘 안 따라는 불교인은 그 얼마인가?
  
    고로비동용
  옛길은 움직임을 허용하지 않는다.
  토하기도 하고 삼킬 줄도 아는 경주 토함산 석굴암 입구에 수광전이 있다. 수광전의 주련을 보면, 고로비동용 정연사가위 소림문하사 불의생시비. 옛 성인 길 움직임을 허용하지 아니했네. 정 따위의 속된 일은 본래 자기 위배할 뿐. 달마소림 문중사엔 시비할 뜻 전혀 없네. 아주 기가 찬 시가 걸려 있다. 부동심은 곧 만병 치료의 근원이다. 그래서 '불법엄엄존중 호리부동 철륜소' 즉 '불법이 엄하고 존중하여 털끝만큼도 움직이지 아니하여 쇠바퀴를 녹인다' 하였다. 털끝만큼도 움직이지 않을 수 있다면 쇠바퀴 같은 업도 녹일 수 있다. 무릇 백병이 다 동해서 생긴다. 즉 기분이 동하니 기분이 좋다, 나쁘다 양갈래 길로 나아간다. 기분이 썩 좋으면 좋을 것 같지만 좋은 기는 이미 본기에서 분화되어 나온 만큼 돌아갈 곳을 알고 좋아해야 한다. 너무 기쁜 나머지 흥분성 도취에 빠지면 100 150 200까지 뛰게 된다. 위험하지 않은가? 기분 나빠 열 받아서 150 200까지 뛰는 맥박은 중풍을 일으킨다.
  머리끝까지 치솟는 분노는 뇌혈관을 팽창시켜 터지게 할 수 있다. 반신불수, 졸도, 사망에 이르는 무서운 중풍은 곧 마음의 병이다. 맞을 중자 바람 풍자! 바람 맞았다. 이 바람은 마음의 바람이지 바깥바람이 아닌 줄 재차 명심해야 한다. 분노의 어찔어찔한 바람이 온몸을 스쳐갈 때 모든 기는 상승하여 내려올 줄 모른다. 내려가고 오르는 것이 건강인데 내린 기가 오르지 못해도 병이요, 오른 기 내리지 못해도 병이다. 가히 열병의 이 시대... 쾌락의 바람은 에이즈를 낳고, 핏대의 신경질은 화병을 유발시킨다. 누가 부동의 중도를 알겠는가? 흔들거리는 마음의 중간에 서서 성성하게 깨어 있는 덤덤한 마음을 터득해야 한다. 조금만 어두워져도 섬득 놀라는 겁쟁이, 야외의 숲 속 근처만 가도 무시무시한 상상을 하는 어린이, 천둥소리가 경기를 일으키는 등의 나약성은 이 문명세대의 현실이다. 게다가 오락성을 너무 추구한 나머지 들떠버린 이 세대는 그저 시계추같이 쾌락과 공포의 진동을 왔다 갔다 할 뿐이다.
  주시라든가 내관 또는 관조 등의 도풍스러운 말들이 어느덧 사라져가고 있다. 옛길만이 움직임을 허용하지 않음이 아니라 어제나 앞으로나 건강을 도모하려면 부동심을 익혀야 하겠다. 이는 억지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눌러버린 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고요히 자신을 좌조하는 상태의 공덕이다. 한 이야기가 있다. 침묵을 서원하고 수도원에 들어간 수도승들에게는 7년마다 딱 한번씩 수도원장에게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입문한 지 7년이 지난 한 수행승에게 원장이 물었다. "뭐! 할말은 없나?" 딱 한마디만 허용되었는데 그는 "침대가 너무 딱딱합니다!" 라고 말했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후 또 원장이, "할말은?" 그러자 "음식이 너무 거칩니다." 즉각 수도원장은 그를 내쫓았다. 14년 내내 침묵속에서 침대와 음식의 불만만 생각하면서 할 수 없이 지켜온 침묵이라면 이는 성스러운 부동의 침묵이 아니다. 적어도 14년의 침묵 후라면 '환희' '고요' '평정' 등의 찬송가가 흘러나왔어야 했다.
  이 수행승은 위대한 억제가일 뿐이었다. 억제는 부동이 아니다. 어느 누가 부동의 딱딱한 차렷 자세를 몇 날씩 유지할 수 있단 말인가? 부자연스러운 부동은 웃기는 넌센스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자연스러운 각성을 추구하는 종교성은 곧 건강으로의 지름길이다. 그것은 동양의학 최초 입문서인 (의학입문)이라는 유명한 책 첫머리에도 강조되어 있으니... 첫 페이지에 둥근 원을 하나 그리고는 선천도라 일컬었다. '이것 하나만 알면 침체된 질병이 대번에 낫는다 하였으니 수승화강(즉 물은 오르고 화기는 내려오는 것으로 순환이 잘된다는 의미)하여 마음이 절로 태평하다'하였다. 또... '이것 하나만 깨달으면 욕심을 징계하고 분로를 막아서 일자 무식인 사람도 알기가 쉽다'하였다. 옛 성인의 말씀이나 의술 원전의 가르침이나 어찌 그리 똑같을까? 공연히 약값이나 낭비하고 다니면서 원망의 말 투덜거리는 환자분들은 오늘부터 지그시 마음을 살펴볼 일이다. '고로비동용'을 외우시면서 시비를 방하착해 볼 일이다. 무언가 가슴에서 툭! 떨어지면서 묵은 체증이 확! 가실 것이다. 자! 어찌하면 움직임을 허용하지 않고 옛길로 들어설 것인가?
  
    안혈명
  바닷가 : 파도가 센 날은 무섭기 짝이 없다.  다음날 잔잔한 바닷가에는 많은 해초가 밀려와 있다. 귀까지 몽땅 다 붙은 미역의 뿌리에는 가끔 커다란 홍합도 붙어온다. 한 양동이 줍고 나면 굉장히 고마운 섭리를 느낀다. 약 30여 집 있는 해변 마을... 손톱 만한 방을 얻어서 토굴 같은 기분을 내어본다. 공짜로 주는 바다에게 나는 무엇을 해줄까? 해줄 일이 없다. 파도에 못 이겨 밀려온 몇 마리의 고기를 방생하는 정도 밖에는... 첫날 끊여 먹던 홍합국도 자제하기로 했지만 주인 할머니가 가끔 주는 해산물은 솔직히 맛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오징어 회무침과 소주 한 병을 해치우면서 자위한다.
  이미 죽어서 온 고기를 난들 어쩌랴? 하지만 어쨌든 맛이 붙어 있는 혓바닥은 간접살생의 조종자! 공짜로 주는 바다, 너무 크고 너무 많은 그가 필요한 것이 없어 보이나 해줄 게 없다. 사실은 비린내 나는 고기류보다 미역 데쳐 초고추장 찍어 먹는 맛이 얼마나 좋은가?
  계율, 친밀, 사랑 : 무한하여 어떻게 더하고 덜할 것 없는 바다는 슬며시 먹을 만큼의 선물을 놓고 의연히 지켜보고 있다. 공짜로 주는 바다에게 나는 뭐 해줄 것이 없나 생각해봐도 마땅하지 않다. 신세를 갚긴 갚아야 하는데... 보니 해줄 것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안 하는 것뿐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바다에 하지 말아야 할 것! 오줌 누지 말 것, 쓰레기 버리지 말 것, 산 고기 잡아먹지 말고, 그가 주는 것 외에는 가져다 쌓아놓지 말고... 그것도 소극적이다. 바다와 친밀하기로 했다. 물안경과 오리발을 걸치고 나서기로 했다. 그러다 보니 사랑스럽고 바다 속의 유정 무정이 다 귀하다.
  법해 : 나는 불법의 대해에서 밀려오는 양식으로 하루하루 근심을 달래며, 허기를 채우면서 살아왔다. 어느 날 법해의 오직 주기만 하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의연한 모습을 보고는 아연했다. 나는 이 법의 바다에 무엇을 더해줄 것인가? 더해도 더할 것도 없으며 망망해서 나를 필요로 하지 않으니 무능력한 것 같았다. 받기만 하고, 줄 수가 없다니... 기껏해야 더럽히지 않을까 조심해야 하는 존재... 그래서는 작다. 친밀하지 못하다. 그보다 더한 것은 법에 대한 사랑이 분명하다.
  법약 : 법! 역대 제불조사의 방법설은 최고의 명약이다. 의사가 안내하는 최고의 목표는 행복인데 무의식적 모든 중생의 본능은 이미 그것을 찾아 헤메고 있다. 목이 마르면 절로 물을 찾고, 추우면 불을 기대하고, 반쪽인 남자는 그 반인 여자를 그리워하고, 역시 모든 여는 남을, 어리석은 자는 지혜로운 사람을, 가르칠 자는 배우고 싶은 자를... 알게 모르게 충동적으로 평화를 찾아 헤맨다. 목적은 좋지만 방법이 올바르지 못해서 나무에서 고기를 구함이요, 칼로 흙을 배는 것 같다.
  나무에서 고기 구함 : 병을 낫고자 하면서 몸만 들여다보는 것은 나무에서 고기를 구함이다. 마음을 돌보지 않음은 아주 어리석은데 집의 단점을 꼭 집의 벽돌이나 대들보에서 찾아보려 하는 것과 같다. 사람이 꼭 들어가면 죽어 나오는 흉가가 있는데 모든 구조는 완벽히 멀쩡하다. 사진 찍어 보아도 깨끗한 구석인데 들어가면 죽어 나온다. 아하! 직접 들어가보자! 이상한 냄새가 난다. 독가스가?! 이것은 X-레이에 안 나온다. 자세히 살펴보니 미묘한 틈바구니 뒤에 큰 이무기가 썩어가고 있더라! 사람도 멀쩡하게 생겨 가지고, 뼈다귀 근육 살점은 온전한데 죽은 혼을 가지고 사는 이가 많다. 눈빛이 뱀 같고 악수하는 손에 진땀이 가득하다. 괴질인 중풍, 당뇨, 정신이상 분열로 시달릴 것이 분명하다. 그의 조종자 부모도 같이...
  칼로 흙을 뱀 : 병을 치유코자 하면서 이 의사 저 의사 찾아다니는 것은 마치 칼로 흙을 베는 것과 같다. 공력은 많이 드는데 자기 칼만 이빨 빠지고 닳아갈 뿐이다. 서산 대사의 (선가귀감)에 '외전을 익힘은 칼로 흙을 베는 것 같다'하셨다. 외도 환자는 누구인가? 오로지 의사에게만 매달리는 환자를 외도 환자라 한다. 집 안의 현명하고 정숙한 부인을 버리고 바깥으로 나돌면서 외도하면 이리 빨리고 저리 뜯기고 몸 상해서 망한다. 외도는 내심을 지키지 않는 데 있다. 내실의 부인이 표독한 악질이라 해도 외도로써 풀어야 할까? 부인을 견디기 힘들면 혼자 되는 수밖에 없다. 그것이 설사 힘들다 해도, 위안 받기 위해 밖으로 돈다면 그 동안 더 썩을 집안이며 설사 좋은 여자 만난다 해도 맞아들이기가 힘들 것이다. 외도 환자란 이와 같다. 밖으로 자꾸 돌아 명의, 비방이나 구하고 안으로는 전혀 자기 반성, 수양, 참회, 포기가 없는 사람이다. 내면으로 들어가면 정말 처음 마주치는 것은 독부일지 모른다. 그러나 끈질기게 들어가 보면 독부를 데리고 있는 내가 있다. 원래 독신이었던 '나'를 찾으면 자유가 온다. 그러면 그곳이 치유광명이 출몰하는 당처이며 최상의 의사선생이라는 말이다.
  안혈명 : '그러면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 '운재심산 월재천'(구름은 깊은 산에 달은 하늘에!) 옛날 견성한 이 백낙천의 (격의답)이라니... 친근하게 대하여 주시면서 이 법문을 일러주신 월하 방장 어르신네의 은혜를 기억한다. 일전 기행중 남쪽 석남사 주련의 휘갈긴 글씨 내용에 끙끙 앓고 있었는데, 학같이 고고하게 생기신 할아버지께서 수첩을 꺼내 적고 계셨다. 그저 반가운 마음에 매달려 알아내었더니, 촌방난폐 상의객 산조전명 차조인 만고관명 심상월 일조양진 세간풍 간화주중 안혈명 종자고락 수연청 혹 필자의 실수로 잘 못 적었는지 몰라 두렵지만 대충 들은 바 해석은 이렇다.
  촌의 삽살개는 어지럽게 짖어대어 항상 길손을 의심하고 산새는 앞에서 울어 이렇게 사람을 조롱하는구나 만고광명은 심상월이니 하루아침에 세간의 바람을 싹 쓸어버렸도다 부엌 가운데 불을 바라보니 눈이 충혈된 것이 맑아지고 이로 조차 세상의 이러쿵저러쿵하던 것이 인연따라 맑아졌더라. 부엌 가운데에서 뜨거운 불을 쳐다보고 있는데 어째서 충혈된 눈이 맑아지는가? 오늘의 의심이 아닐 수 없다. 이것도 바다에서 밀려온 미역이라면 안 먹을 수는 없으나...
  
    '아스피린'만도 못한 인간군상들
  동창 모임이라니, 창문이 같고 문이 같다 하니 우리가 도대체 무엇이 같다는 말인가? 생김새가 같나? 키가 같나? 생년월일이 같나? 취미가 같나?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2,3년쯤 되면 사실 같을 것이 하나도 없다. 전부 다른 가운데 그래도 고등학교 동창이 제일이라는데, 창문이 같다는 뜻은 그래도 고등학교 동창이 제일 한마음의 창문이 잘 열린다는 뜻일터인데... 초상집에서, 그것도 일 개월 전의 설움 많은 동창생의 상갓집에서... 두 분이 워낙 금실이 좋아서 그렇다는 위로의 인사말이야 어디 심금에 와 닿는 느낌이겠는가 만은 사실 별 신통한 문구가 구상되지 않는다. 가장 궁색한 말이 항상 상가에 가서의 언어인데 역시 오늘도 궁한 머리에 아쉬워한다.
  기막힌 일은 말로써는 묘사가 안 되는 법! 어물어물하면서 맞절하고 일어나 동창생들이 모인 방에 들어섰겠다. 고스톱은 한쪽 동창의 애경사에는 물귀신처럼 꼭 붙어 다니는 일제시대 변사 같은 전도사님의 열변... 두어 시간 내내 '죽음'에 대한 토론은 전혀 없었다. '어디로 가는지... 어디서 오는지? 돌아가신 분의 치적은 무엇이었는지? 운명의 순간 편안하셨는지. 우리는 왜 늙고 병들고 죽는가?' 그저 의무적으로 세워주는 밤인가? 서로 오고가는 품앗이인가? 옛날 네가 와주었으니 가고, 또 너희들이 와줄 때를 대비해서 미리 예금 삼아 가주는 것인가? 화제는 예의 그 전도사 동창생의 일방적인 떠들음만 쉼없이 맴돌뿐... '요새 중들이 어쩌구 저쩌구?' '예수 안 믿는 놈 지옥 간다.' '오늘 이 자리는 동창 중에서 제법 힘께나 쓰는 놈들만 나왔다.' 슬쩍 던지는 다분히 분위기를 의식한 정치적인 말. '하긴 교회도 썩을 대로 썩었어!' '말세가 왔다. 예수님 말씀대로!' 또한 펼쳐지는 장면 장면들, 모 대사, 모 회장, 모 장관, 모 유명 목사 등과 나란히 찍은 사진을 주욱 늘어놓는데, 거기에는 필자가 이미 열 번 이상이나 본 사진도 있었으니... 끌끌! 에고의 확대망상 동일시 현상들... 동창은 마음의 창문인 보는 눈이 한마음이어서 불평등한 차이나 비교가 없어야 할텐데, 힘깨나 쓰는 성공한 친구는 누구고 실패한 벗은 어떤 놈인가.
  예수 믿어 천당 가고, 안 믿어 지옥 가는 이런 종교적 우월망상으로 동문을 분리하는 저 의식 세계는 단 한 가지도 동문수학한 실감이 들지 않는다. 종교가 다르거나 같거나 서로 패거리 짓지 말고 화목할 것이며, 성공한 친구나 실패한 벗이나 두루 감싸서 이 문 안에서는 하나라는 느낌을 나누어야 할 것이 아닌가? 말세는 말세더라 이거다. 몇 명 안 남은 동창끼리에서도 천당 지옥 갈 놈이 있고, 있는 놈 없는 놈, 힘센 놈 힘없는 놈이 갈라지니 곧 이것이 말세의 풍조가 아닌가? 점잖게 앉아 있던 의사 선생 하는 말, "자네들! 아스피린 먹어봤나? 아스피린이 기독교인 불교인 가려서 해열시키던가? 쌍화탕이 높은 놈 낮은 놈 나누어 효과를 내던가? 예수, 부처님이 가르치신 뜻이 설마 아스피린보다 못하다는 뜻은 아니겠지?" 퍼뜩 생각나는 필자의 환자 두 사람. '새벽 교회 종소리 알레르기 피부염 환자!' '목탁 소리 과민성 알레르기 안면경련증 환자!'
  절을 향해서 저 사악한 사탄의 후예, 우상 숭배자라고 외치는 목사가 '목탁 알레르기'를 책임지려고 할까? 교회를 손가락질하면서 저 인천교나 믿는 예수쟁이들이라 매도해 버리는 법사가 '교회 종소리 피부염'을 뭣하러 골치 아파하겠는가? 마음 아프고 빠개지는 머리를 오늘도 같이 한탄하는 사람은 무책임한 종교 정치인의 따발총 연설 후유증 뒤끝만 처리해 대는 불쌍한 의사군상 뿐이다. 참으로 아스피린만도 못한 종교인들, 정치인들, 분리주의자들. 예수님이 오늘 이 거리를 지날 때 그들이 제일 먼저 못을 박을 것이오, 미륵부처가 이때 환생한다 해도 눈, 귀를 틀어막을 것이니 이를 어찌 할까?
  
    술 중의 술
  어린 시절, 막걸리를 받아오라는 어른의 심부름은 참 신나는 일이었다. 양조장의 시큼한 술찌거기의 향내도 좋으려니와 몰래 마셔보는 비밀한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술은 마시는 일에 대해 '세세생생 지혜의 종자를 끊어 버리고, 죽어서는 똥물 지옥에 빠진다'고 준엄한 경고를 내리셨다. 나는 부처님의 이러한 가르침에 가장 충격을 많이 받은 사람 중 하나이다. 애주가인 필자는 부처님 말씀에 처음 접하자 후들후들 떨며 식은땀까지 흘렸었다. 끊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더 힘든 이 술에 대해 한방의학에서는 어떻게 보고 있을까. (동의보감) 주문에 보면 '술은 혈맥을 유통시키고 위로 오르는 성질이 있으며, 조금 마시면 정신을 강화하고 지나치면 수명을 던다. 크게 덥고 크게 독하여 살충 작용을 하며 전염병을 예방하고 종기 등을 씻는 데 쓴다. 초독, 체독을 없앤다...'고 되어 있다. 잘 쓰면 약이요, 못 쓰면 독이 되는 이 술을 잘 쓰기란 참으로 어렵다.
  쓰기에 따라 약도 되는 이 술을 어째서 인간들은 퍼마시다 쓰러질지라도 계속 끝장을 내려고 할까? 술은 취하게 한다. 취하게 하는 것은 곧 어떤 생각들의 집착이 괴로워 잊고 싶기 때문이다. 수 없는 지식과 기억과 상상, 계획, 두려움, 불안 등등으로 얽혀진 채 살아가는 현대인은 무한히 고독할 수밖에 없다. 떨칠래야 떨쳐버릴 수 없어 자아의 일부분이 되어버린 복잡하고 혼란한 번뇌의 살림살이를 버릴 능력이 없다. 오직 술만이 그것을 잊게 해주는 것이다. 무아지경을 맛보기 위해 많은 손실을 감수해 가며 술을 찾는 이유로, 바로 나라고 하는 것이 남과의 상대 속에서 살아야 하는 만큼 이원성이 되는 것이며, 이원성은 그 자체가 괴로움이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마약인 이 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자꾸 더 늘어가고 있다.
  급격한 도회문명 속에 교묘하게 발달되어 가는, 비교하는 습관의 에고는 독한 술의 힘을 빌려야 겨우 잠깐 괴로운 나를 잊을 뿐이다. 짧은 순간의 무아지경이지만 이 순간이 현대인에게는 유일한 피난처요, 휴식처다. 나와 남의 비교란 어느 누구에게나 잠재적으로 깔려 있을 터이니 항상 관계라는 것은 피곤하다. '소위 남과 비교해서 내가 낫다, 못하다' 하는 생각이 곧 비교 속의 우월이나 열등 망상인 것이다. 비교는 결코 사랑일 수 없는 것임을 깊이 깨달을 때, 술의 필요는 저절로 없어질 것이며 두뇌의 대화 아닌 가슴의 소통이 이루어질 것이다. 나를 내세우지 않고 비교를 전혀 하지 않는 자유스러운 영혼끼리의 대화에서 오는 황홀과 기쁨이 곧 '술 중의 술'이 아닐까?
  나도없고 너도없는 감로주는 어데두고 빨간콧속 집을짓고 취생몽사 웬말인가?
  
    어느 부인의 실음
  실음. 음성을 잃었다. 말이 안 나오는 현상을 말한다. 말이 안 나오고 심한 허스키 현상을 일으키면서 겨우 귀를 대야 그 의미를 알 정도로 심각하다. 성대가 갈라지는 듯 통증이 심하다. 왜? 인후염이니 성대파열이니 병명을 붙여보지만 원인은 난초... 그놈의 난초... 그놈의 도둑... 아주 귀한 난을 선물 받았다. 애지중지 키웠는데 어느 날 그 난초의 반을 뚝 잘라간 난도둑이 있었단다. 그 현장을 마침 목격한 이 K부인은 그 도둑이 자기의 운전기사라서 더욱 기가 콱 막혀버렸다. 콱 막혀버린 기! 이것이 원인이었다. 그 이래로 지금까지 약 3주간을 여전히 말문이 막혀버렸다. 난초 도둑놈이 남기고 간 상흔은 너무나도 엄청나다. 귀한 것을 마음에 두면 이렇다. 귀하고 소중하고 아끼고 싶은 그 무엇을 지나고 소유하고 애착하고 있으면 그의 잃음은 곧 화병이다. X-레이도 소용없다. 기가 막히게 좋은 명약도 별 볼 일 없다. 목 쉬는 사람을 위한 고전적 명방이 있는데, 계란 흰자 한 개분 + 식초 한 숟갈(순수해야 함. 가령 현미식초 등) + 한 숟갈 정도의 약수. 일컬어 초란탕이라 명명해 본다. 이 두 가지를 계란껍질 안에 넣고 그림과 같이 가볍게 가열하면 흰자가 서서히 엉기기 시작한다. 완전히 익으면 곤란하다. 반숙보다 더 묽은 그때에 잘 섞어 서서히 목을 적시면서 천천히 넘기는 것이다. '초란탕'도 권유했으나 잘 듣지를 않는 이 부인의 울화병 증세는 필자를 아주 우울하게 한다. 환자의 심리는 병을 짊어지고 와서 지게를 부려놓고 병원 문턱에 짐 내려놓듯이 병을 내려놓을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한다. 알고 싶은 의학상식이란 고작해야 '초란탕'이냐, '구기자'냐, '지렁이'냐, '굼벵이'냐, '살모사', '개소주', '구연산', '죽염'... 이런 식이다. 단편적 지식은 차라리 모르는 것이 나을 때가 많다.
  식초 얘기가 나왔으니 시중에 유행하는 초두를 예로 들어보자. 식초 + 콩은 '초두'인데 이것이 마치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우겨대는 사이비 건강학자가 있다. 오로지 짠맛이 최고라는 주장이 있는 반면 짠맛을 적극 피하라는 충고가 병행하는 세상이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다. 맛은 있는 그대로 다 필요하다. 특히 어떤 특정한 맛만을 선택, 흡수할 때는 병적인 리듬을 조절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평범한 사람은 오로지 섞어먹는 것이 제일이다. 배추를 숨죽이는 데 '소금'을 쓴다. 사람의 기를 유연하게 숨죽이고 싶을 때 소금을 쓴다. 망초라는 엄청나게 짠 소금의 일종을 미친 사람의 기를 재우는 데 쓴다. 그러나 이미 기운이 너무 유약한 사람은 짠맛을 피해야 한다. 오히려 마르고 열이 있는 사람은 신맛을 섭취해서 탄력과 저축성을 길러야 한다. 거꾸로 비대한 과잉 저축성 체질은 신맛을 피해야 한다. 초두가 아무에게나, '당뇨' '고혈압' 심지어는 '변비' '빈혈'에 좋다고 한다.
  이러한 맹신적 사고 방식은 지식종사들의 허물이다. 지식종사들은 오직 암기의 도사들이다. '왜'가 없다. 그러므로 획일적이면서 사람의 체질을 보지 않는다. 무조건은 없다. 어떠한 약물이든지 꼭 '약'과 '독'의 양면성이 있다. 이렇게 자세히 조사해 보아도, 익혀두어도 소용없는 병이 있다. 바로 K부인의 실음, 실어 증상 말이다. 귀한 것에 허물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귀한 것에 대한 애착과 분별심이 있기 때문이다. "사모님! 그 도둑놈도 얼마나 아끼고 싶다면 그 난을 가져가겠습니까? 더 잘 키울지도 모르지 않아요? 귀한 자식 누군가가 더 잘 교육시킨다면 보내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생각을 고쳐먹어 보시죠!?" "글쎄요? 귀한 자식을 훔쳐간 도둑놈이 과연 교육자의 자질이 있는 놈일까요?" 아주 듣기 힘든 작은 쉰 목소리의 답. 순간 필자는 말문이 콱 막혔다. 목 쉬기 전에 쓸데없는 충고는 그만둬야지... 약이 무슨 소용이며 침이 무슨 혜택이 있겠는가? 이 K부인의 말을 돌려 받을 수 있다면 어떤 물질이든 써보겠지만... 그 마음! 마음! 충격! 쇼크! 울분! 고치기 어렵고 어려웁다. 그러고도 의사 약사보고 약만 가르쳐달라니 세상의 인심은 더욱더 근본을 외면하고 싫어한다. 우울한 환자를 보내고 다음 환자를 보니 또... 60대 사장님이 중풍으로 인하여 언어가 우둔해지고 반신불수가 되어 오셨더라... 늘그막에 퇴직금으로 경영해 본 작은 업체에서 받은 기가, 코가 막히는 사연이 즉슨... 말대꾸가 터무니없이 시건방지고 표독한 젊은 사원(아들뻘도 안 되는 손자뻘)과의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였으니... 과연 묘약은 무엇?
  
    벤 존슨의 약물복용과 수험생
  인간은 웃기는 동물이다. 올림픽에서의 이 참상을 보라! '좀 더 빨리! 좀 더 높이! 좀 더 멀리!' 좀 더! 좀 더! 같이 참여한 선수와의 경쟁에서 이기면 충분하지 않은가? 그런데 뵈지도 않는 과거 신기록 수립과의 경쟁, 또는 자기 기록과의 경쟁도 의식해야 한다. 학력고사 점수를 좀 더 많이! 요즈음 고 3을 둔 가정은 마치 올림픽 100미터 결승을 앞둔 매니저 코치와 같은 심정이다. 선수의 불안, 초조, 긴장은 이루 말할 것도 없고, 학력고사 출전 선수들은 벤 존슨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 아니 실제 벤 존슨 이상으로 약물을 마구 복용하고 있다. 우선 이기고 봐야 한다! 우선 학력고사 점수를 많이 따놓고 봐야 한다. 불행이 올지, 행복이 올지... 약물 복용의 후유증으로 암이 올는지, 궤양이 올는지 그런 것은 알 바 없다. 모든 것은 이긴 다음에 생각하자. 대학 들어간 후에 보자는 거다. 이긴 다음의 영광! 합격 후의 영광은 곧 행복으로의 티켓이다. 모든 방법의 악랄함은 오직 목적을 위한 수단이기에 정당화된다. 알약을 마구 퍼 마셔가며, 사설 독서실에서 공부하다 새벽 두 시 전에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 딸들을 언짢아하는 부모님들! '삼당사락?!' 이건 또 웬 표어인가? 세 시간 자면 당선이고 네 시간 자면 떨어진다. 세 시간 자는 정도라야 합격하는 대학은 과연 무슨 마술단지라도 가지고 있는가? 마치 결혼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줄 알고 골인한 부부가 곧 속았다는 것을 아는 것과 같다. 자기기만은 대학에도 해당된다. 과연 대학은 청소년의 자기학대적 고행의 결과로 쟁취해야 할 만큼 커다란 학문을 가르치고 있는가?
  '대학지도는 재명명덕, 재신민, 재지어지선...' 보라! 대학의 길은 밝은 덕을 밝히는 데 있으며, 지극한 선에 이르는 길이며, 날로 날로 백성을 새롭게 하는 데 있다고 했다. 알약에 중독된 흐리멍텅한 머리가 밝을 리 없고, 경쟁에 눈이 어두워 초조해진 마음에 덕이 쌓을 리 없다. 정말로 지극한 선은 비교가 없는 마음을 상징한다. 비교 없는 마음의 사랑은 고사하고, 옆집 앞집 학생들과 비교해 대는 부모에게 과연 예절과 선행을 가르칠 자격이 있는지? 집단적인 에고나 의식화에 힘입어 폭력도 불사하는 권력 기관이나 학생 운동이 과연 이 백성을 날로 날로 신선하게 새롭게 하겠다는 것인가? 벤 존슨을 마음껏 비우는 세계인은, 아니 우리 한국인은 과연 그에게 돌을 던질 자격이 있는지? 남보다 조금 빨리 달리는데 엄청난 이권과 명예를 주는 지나친 대접은 야심을 낳는다. 필연적으로 교활한 방법이 등장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나친 대접! 남보다 약간의 암기능력이 있다는 것은 무형의 지식을 섭취하는 지식욕이 좀 강한 것뿐이다. 마치 식욕이나 성욕이 강하듯이... 식욕이나 성욕이 강한 것은 하열하게 취급하고, 지식욕이 강한 거나 승부욕, 명예욕이 강한 것은 높이 쳐주는 어리석은 군중들이 곧 오늘의 벤 존슨을 만들었다. 대학 입학에 너무도 큰 영광을 부여하지 않는다면 구태여 기를 쓰고 경쟁할 리 없고, 달리기에서 일등 해도 공책이나 한 권 준다면 그 능력을 영광시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 제 아무리 빨라 봐야 말이나 타조를 따르겠는가? 인간이 좀 더 빨리, 좀 더 멀리... 이런 것을 추구하는 존재라면 새나 맹수를 지상 목표로 삼는 셈이다. 인간은 분명히 만물의 영장! 자, 무엇이 다른가? 지상 최고의 행복을 수용할 수 있는 깨어 있는 마음, 바로 이것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행복이 피나는 경쟁 끝에 온다면, 남을 제치고 이겨야만 얻는 것이라면, 꼭 누군가를 죽여야만 살 수 있다는 살생의 논리가 성립된다. 오늘도 승리자의 영광을 위해 수없이 죽어가는 패자들의 사인은 분명히 승부를 만들어 놓은 악습적 전통에 있다.
  뛰는 자는 뒤로 뛰어주어라! 수험생은 대학에 침을 뱉어라! 상주는 일이 없으면 공을 다투지 아니하고, 잘하는 것을 잘한다 하지 않으면, 스스로 못 하는 자가 스스로 비열해질 것이 없다. 비열한 것은, 선과 악을 비교하여 경쟁시키는 일이다. 일등과 꼴찌를 나누는 이 사바세계에의 풍토는 항상 독한 약물의 중독을 발생시키며, 또한 이 지구촌을 오염시켜 나갈 것이다.
  
    족심주의 비법
  '발바닥 한가운데에 머물러라!' 바로 그것이다. 무엇을 머무르게 하느냐? 마음을 그곳에 집중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이론적 배경은 무엇인가? 먼저 잠깐 소개했듯이 인간의 생리적 체계 중 12경락이라는 무형의 통로가 동양의학 체계에는 있다. 동양의학이라 해서 동양인에게만 있는 경락이고, 서양인에게는 없느냐? 아니다! 이것은 정식이 있는 모든 생명체에서 다 존재한다. 놀라운 것은 동물뿐 아니라 심지어 식물에게까지 존재한다(식물도 감정이 있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는 것이다. 서양인도 동물계의 한 부분에 속하니 틀림없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이라고 과학적 근거로서의 부당성을 지적하거나 말거나 있다!
  옛날 어느 목사가 설교 도중 신의 무한성, 가능성, 신비성, 위대성, 사랑 등을 설파하고 있었다. 어떤 과학자가 불쑥 일어나서 "당신은 신! 신! 하는데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어찌 그것을 믿고 증명할 수 있겠는가?" 했다. 목사가 그 과학자에게 "그럼, 당신은 당신의 부인을 사랑하십니까?" 묻자, "물론 사랑하죠?" 라고 과학자는 답했다. 목사왈, "그러시다면 그 사랑하는 마음을 내놓아보시고, 우리 앞에 보여주시죠!" 경락체계를 비웃다가 이제는 다시 눈을 돌려 그 신비함을 파헤치려는 최근 서양의학의 접근은,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떠한 흐름을 서서히 인정할 수밖에 없는 동향이리라. 진리란 인정한다고 존재하고 인정하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그러한 것이 아닌데...
  서양의 바이오리듬 학설이 최근 백 년 동안 활발히 논의되었다. 신체리듬(Physical Rh), 감성리듬(Emotional Rh), 지성리듬(Intellectual Rh) 각각 23일, 28일, 33일의 주기를 가지고 23 곱하기 28 곱하기 33은 약 58년이 좀 넘는(동양의 60년 환갑 주기와 비슷) 희귀의 큰 주기를 가진 이 학설. 이 리듬이 발견되기 전에는 과연 없었다는 말인가? 각설하고. 경락이란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의 감정 또는 의식작용의 통로이다. 감정 또는 의식을 눈으로 보려는 노력이 어리석을 뿐이지, 우리는 탐욕과 분노와 갈등과 오욕칠정과 수많은 지식 등 무형의 그 무엇을 간직하고 있는 마음의 존재이자, 오장육부를 가지고 있는 유형적 육체의 존재이다. 경락을 이해하려면 먼저 우리는 자기를 알아야 한다. 나의 심리적 진행 상황을 민감하게 깨어서 관찰하는 작업은 곧 경락을 이해하는 작업이다. 미세한 의식세계까지도 주시할 수 있다면 우리는 좀더 우주의 신비를 가까운 데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의 한 통로가 바로 발바닥부터 출발되어 있는 족소음신경이라는 유명한 경락이다. 용천이라는 대단한 이름을 가진 경혈의 출발점이 발바닥은 곧 족소음신경의 근원지다. 이 용천혈에 마음을 집중하면 어떻다는 말인가? 좀 과장해서 한마디로 '만병통치 경혈!' 이라는 말씀이다. 예부터 약장수치고 허풍과정이 안 센 사람 없다지만, 이 용천의 공력은 하늘과 땅을 뒤덮는다. 먼저 용천의 이름 자체가 셈이라는 데는 더 말할 나위가 없지 않겠는가? 용기! 비겁해지기 쉬운 이 시대의 모든 용기는 사된 만용으로 변하고 말았다. 신선하게 분출되는 용기는 차차 사라지고 있다. 비겁하다는 것은 곧 족소음신경의 에너지가 고갈되었다는 말이다. 신경하니까 해부학적인 신장(Kidney)이라고 독자 여러분께서는 혼동하지 마시길 바란다. 전혀 오줌 걸러내는 신장의 이미지와는 다르니까... 곧 이 경락의 역할이 인간의 용기를 불어 넣어주는 데 있다는 말인데, 그 용기를 죽이는 것은 곧 공포이다. 공포는 사람을 주눅들게 하고, 나약하게 만들고, 비겁하게 만들고, 치사하게 만들고, 의존적으로 만들고, 자주 독립심을 꺾고 사랑과 지혜와 신념을 사라지게 한다.
  두려움과 공포는 마치 차가운 듯하고 냉혹하고 싸늘한 어떤 기운을 수반한다. 공포의 '드라큐라'는 무더운 한 여름에 상영해야 흥행에 성공한다. 왜? 공포의 감정은 인간에게 서늘하고 오싹한 기운을 몰아다주므로... 죽음의 공포는 범인으로서 어쩔 수 없다지만, 이 시대는 필요없이 구석구석에 으스스한 공포가 스며 있지는 않는가? 안 느껴도 좋은 두려움이 가정과 사회에 만연되어 있지는 않는가? 그래서 너도나도 싸늘하게 인정이 메말라가고, 용기가 사라져가 왜소한 인간으로 전락하고 있지는 않는가? 이 시대의 선각자 크리슈나무르티 선생은 '공포로부터의 해방'을 절실히 주장했다. 바로 이 족심주가 공포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해방구역(?)이란 말이다. 좀더 전문적으로 말해서 소음이라는 뜻은 군화라는 말인데 화에는 군화와 상화 두 가지가 있다. 군화는 임금의 불이요, 상화는 재상의 불이라. 인간의 용심에 두 가지 뜨거운 감정적 현상이 일어나는데 하나는 기분이 좋을 때의 긍정적 흥분성 열이요(극단적인 것은 성적인 흥분시의 열 가지 포함), 하나는 분노나 공격 감정시의 부정적인 열이다. 소음은 곧 군화, 즉 긍정적 흥분의 에너지요, 주역 팔괘로는 이화의 괘상에 속한다. 태극기의 건곤감리는 건은 하늘이요, 곤은 땅이요, 감은 물이요, 이는 불이다. 바로 이 마지막의 이 괘상이 곧 족소음경락에 흐르는 에너지의 부호적 표현이다.
  인간에게 꼭 필요한 훈훈한 열뿐 아니라, 심지어 생식능력의 본체인 정의 생산공정이며, 감성리듬(Emotional Rh)의 본체로서 예술적인 충동의 원천지이기도 한 이 소음경락의 파손은 매우 중대한 위험일 수밖에 없다. 수없이 비교 당하는 그리고 비교해야만 하는 이 시대의 경쟁교육은, 인간의 지적인 기억능력만 비대하게 키워놓고, 감성적이고 정열적인 리듬은 파괴시켜 버리지는 않았는지... 그래서 우리는 용천의 샘이 고갈되어, 불균형한 건강을 그 업보로 받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오늘 두 발바닥 가운데 용천혈을 동시에 명상하면서(한쪽만 하는 것은 효과가 적음, 동시에 두 발바닥도 상상해야 함), 그곳에 집중적으로 나의 온힘을 다해 정신력을 집중시켜 보자. 마치 돋보기로 태양의 초점을 맞추듯이, 깊이 있게 은밀하게 연마하면, 갑자기 활활 타오르는 어떤 기운을 느끼게 되면서 미처 몰랐던 황홀한 체험과 함께 문득 신선의 묘약에 동참하게 되리라.
  
    두통과 사시
  두통이 제일 두통거리다. 의사노릇에 난치환자처럼 열등감을 느끼게 하는 사람은 없다. 난치두통에 대해 알아볼까 하는데 믿을 수 없는 논리가 나와도 한번쯤 고려해 보시라는 금오의 충고 정도로 받아주시면... 크게 나누어 세 가지가 있는 머리의 통증인데, 태양, 소양, 양명이 그것이다. 주로 뒤쪽은 태양두통, 옆은 소양, 이마 앞면은 양명이다. 서양의 바이오리듬 학설에 신체, 감성, 지성리듬이 있다고 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이를 이용하기로 한다. 먼저 두통의 근본 원인을 열이라 한다. 아주 간명한 원리다. '두무냉통, 복무열통'이다. 즉 '머리가 차가워서 아픈 법 없고, 배는 뜨거워서 고통받는 일 없다'라는 것이다. 아주 특수한 경우를 빼고는 차게 하면 곧 치료법이 된다. '열'이면 다 같은 열인가? 아니다. 돈 떼인 후의 충격 화병, 마누라 바람나서 속 썩이는 열, 선거에서 떨어진 망신울화. 어찌 그 뜨거움이 같으랴? 다르다. 확실히 다르다! 다른 만큼 나타나는 부위도 다르다. 다른 만큼 나타나는 부위도 다르다. 이마로 오는 두통은 신체리듬의 불만 에너지가 상승한 것인데, 기초적인 의식주 문제에서 고민하는 중생들의 전유물이다. 처절한 생존경쟁, 뛰는 아파트 값, 부유층에 느끼는 상대적 빈곤감 등등은 양명두통에 가깝다.
  소위 쪽골 아프다는 편두통. 가장 난치병이지만 필자가 볼 때는 비교적 손쉽다. 아픈 반대쪽의 넷째발가락의 경혈을 적당히 자극하면 신기하게 사라지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곧 족소양담 경락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쓸개는 곧 분노와 직결된다. '오기', '살기'와도 관계한다. 지나치게 오기도 없는 사람을 '쓸개 빠진 놈'이라지 않는가? 오직 단백질 소화분비액이나 내보내는 소하기의 한 부분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참 대담하군!' 바로 족소양담경은 용기의 원천이기도 하다. 곰 쓸개를 크게 절취하려면, 곰을 화나고 놀라게 괴롭힌 다음 죽여서 꺼낸다는 실례가 증명이다. 요컨대 명예, 자존심 등의 손상이나 경쟁에서의 패배 굴욕감, 낙선한 쓴맛 등은, 곧 편두통의 원인이다. 성적 충동의 불만이나 배반감 등의 불은 무섭다. 감성리듬의 부조화는 후두통의 주된 원인이 된다. 쿡쿡 치밀어 오르는 정념의 불은, 알게 모르게 모든 세포를 태우고 다 말려 급기야는 상승하여 머리를 강타한다. 알코올의 더운 기운에 중독된 자도 후두통이 많다. 목뒤가 뻣뻣 뻐근한 것은 감기츼 초기에도 그렇다.
  그러나 만성 후두통 환자는 자신의 감성적 정열을 재조사해 보시라! 어딘지 모르게 억눌려 버린 성, 혹은 예술적 충동은 없는지. 로멘틱 무드를 너무 좋아하다가는 태양두통이 오신다는 얘기다. 아하! 마음이 곧 육체의 조정자 아닌가? 빗나간 예이긴 하지만 한 가지 충격적인 임상례가 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에 '환자의 비밀은 절대 보장해야 한다'고 있고, 필자도 꼭 그렇게 지키고 있지만, 사실 이런 사례는 환자 본인 역시 공개되어도 웃으리라 믿는다. 약 두 달 전 보약을 지으러 온 젊은 주부가 필자에게 오직 허약한 데 보충할 약만 원했다. 그러나 필자의 예리한(?) 첫눈에 포착된 것은 한쪽(왼쪽) 눈만 사시, 즉 속어로 '사팔뜨기'인 점이었다. 보약 상담은 젖혀놓고 질문했더니, 이 방면은 한의원 분야가 아닌 것 같아서 아예 묻지도 않았단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막 신경과를 다녀왔으며, 사진도 찍어보니 아무 이상이 없다는 판정이 나왔다고 한다. 물론 그 전에 안과부터 갔었고, 그쪽에서 원인을 못 찾고 신경과 쪽으로 의뢰했다는 얘기다. 눈이 '사시'가 된 것은 불과 일주일 정도였고 그전에는 멀쩡했다니... 귀신 곡할 일 아닌가? 조용히 상담을 요청하고 필자가 물은 사연은? "부인! 최근 누군가를 극렬하게 미워하여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증오 한 일이 있죠? 네?!" 고개를 푹 떨구는 부인의 눈가에 이슬이 맺힌 것은 약간 시간이 지난 후였다. "부인! 제 말 꼭 믿으시고 실천하셔야만 합니다. 우리가 눈을 흘기는 것은 대부분 미워할 때죠? 마음으로 흘겨보신 그 과보로 사시가 되었다면, 믿어주시겠습니까? 자세한 사연은 묻지 않겠습니다. 원한, 증오, 시기, 질투를 푸셔야 합니다. 눈은 흉해지고 화병이 생겨 두통, 시력장애, 식욕부진, 피부건조 등의 부수적 증상이 생긴답니다."
  백 퍼센트 수긍할 수야 없겠지만, 일단 그런 일이 있었고 또 그때에도 안 풀리는 중이었으니 '그런가?' 하는 정도로 돌아갔다. 근육 이완을 시키는 침 치료는 오직 일 회뿐이었다. 두 달 후인 얼마 전에 예의 부인이 왔다. 또 보약을 원했으며 '피아노 교습소'의 과로 때문에 등등... 그렇단다. "아니! 눈은?" 필자가 은근히 궁금해했던 환자였고, 그 뒤에도 연락이 없었고... "정말? 정상인데요!" 부인 말씀이 아주 태연했다. "글세 지나고 보니 선생님의 말씀이 맞는 것 같았어요. 마음 고쳐먹기로 했죠. 그런데 어느 나 아침, 처음 이 증상이 올 때처럼 뻐근하고 쓰라리더니 나 자신도 모르게 정상으로 돌아와 있잖아요. 그 말씀이 맞는 것 같아요!" 세상에 만상에... 성현께 감사! 임상 18년 만에, 대학 합해 24년 만에 이런 기적을 보다니! 혹자는 "나을 때가 되니까 그렇지 뭐" 하시면서 눈을 흘기시겠지만 그런 사람 '사팔'이나 되어라?! 특히 아기를 뱃속에 둔 임산부, 눈 흘기지 마시길. 아기가 사시 될라! 성인 말씀에 뿌린 대로 거둔다 하지 않던가.
  
    동일시망상증
  분노 : 일본 임제종의 선승 '방케이'의 제자가 물었다. "항상 저는 분노에 압도되어 버립니다. 어떻게 좀 자유스럽게 해주십시오." 방케이는 한참 동안 제자의 눈을 응시하였다. 제자는 그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땀마저 흘렸다. 갑자기 방케이는 커다랗게 웃고는, "내가 보니 자네 내부에 분노 같은 것은 안 보이네, 지금 좀 그것을 내게 보여줄 수 있겠나?" 제자는 "그건 늘 있는 게 아니라 느닷없이 찾아오지요. 지금 어떻게 그놈을 끄집어낼 수 있겠습니까?" 방케이는 가가대소하면서, "그렇다면 그게 너의 참본성이라 할 수 없지 않느냐? 참 네 것이라면 늘 너와 함께 있어야지! 분노가 너의 본성 중에 포함되어 있다면 내 눈에 왜 안 보이겠는가? 태어날 때나 죽을 때 너와 함께 있지 않는 그 분노라는 놈은 곧 네가 아니지!"
  자칭 네루 : 인도에서 있었던 일. '네루'라고 자칭하는 정신병자만 수용하는 병원이 있었다. '내가 곧 네루 수상'임을 자처하는 가난한 이발사가 드디어 퇴원하는 날이었다. 원장 간호사께 자신을 되찾게 해주어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두루 하던 차 마침 진짜 '네루'가 병원을 방문하였다. 원장은 급히 나가서 마중을 하였고, '네루'에게 마침 이 퇴원하는 환자를 인사시켰다. 원장, "자! 인사하시오! 이분이 바로 네루 수상이십니다. 그토록 당신이 그라고 우기던 네루란 말이오! 이발사 양반!" 반갑게 악수를 청하는 수상을 그저 한참 지그시 쳐다보던 이 이발사는 네루를 한 바퀴 빙 둘러보더니만 네루 뒤통수를 툭툭 치면서, "이 사람아! 자네도 나처럼 한 5년 이 병원에 입원하게 되면 그 증상이 나을걸세!"
  동일시 망상 : 자! 이상의 예화 두 편에서 보다시피 범부의 마음은 자신을 감정과 동일시하여 근심하며 싸우기도 하고, 어리석게도 자신을 위대한 그 무엇과 동일시하여 격상시켜 타인보다 우월한 존재임을 증명하려 애쓰고 있다. 나는 성질이 더럽다. 나는 왜 이 모양일까? 두드려 고칠 수는 없을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일어난 성깔도 문제지만 그 뒤의 자책이 대단하다. 대부분의 정신병 환자가 모두 자신을 감정의 그 무엇과 동일시하고 있다. 아니면 타인들이 그렇게 못을 박았던가... "저치는 불량해!" "그 여자?! 말도 마! 천하의 바람둥이야!" "그 법사?! 음흉해!" "아휴 저 속물들!" 멍청, 교활, 엉큼, 음탕, 추악, 조잡 등등의 저질스러운 성품과 인간의 본성을 동질이라 규정하는 이 같은 성악적 견해는 결코 정견이 아니다. 성품을 돌이켜 반조하여 깨닫는 순간 모든 업의 성이 본래의 나와 같지 않음을 아는데 이 참나는 모든 부처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담백한 물의 필요 : 비유하면 혓바닥을 제각기 가진 것이 누구나 평등하다. 그러나 너무 짠맛만 즐겨 오래 먹다 보면 '내 혀가 본래 짠가?'의심할 뿐이다. 이것이 미망 아니고 무엇인가? 마음도 인색하게만 굴다 보니 본마음마저 인색하다 착각하는데 실은 짠 마음이 청정한 본심을 덮었을 뿐이다. 원한 살기의 표독한 마음 맛이 본마음을 덮은 곳이 지옥이요, 허겁지겁 목마르고 허기진 마음 맛이 본심을 더럽힌 곳이 아귀요, 서로서로 잡아먹고 먹히우는 생각의 맛이 자성을 발라 싸버린 곳의 축생이요, 매사 경쟁 승부를 즐겨 이기고자 하는 승기가 각성을 흐리게 한 곳이 아수라요, 서로 의지하기를 좋아하여 무리짓고 떼를 지어 자신의 공포나 두려움을 도피하여 해결하는 업성이 불성을 가로막아 자재하지 못한 것이 인간계요, 희롱과 쾌락 향연의 꿀맛에 도취되어 자심의 본맛을 전도되게 하는 곳이 천당이다. 매운맛, 쓴맛, 짠맛, 신맛, 비린맛, 단맛의 경계가 다 내 혓바닥이 아니라 모두 객관의 맛일 뿐이다. 그러나 건강한 혀를 보존하려면 맹물로 입가심을 해야 하듯이 마음의 경계가 아무리 현란하게 오고 가도 그것들은 참 내가 아니라는 깨달음을 잃지 않으면 그것이 곧 담백한 물의 양치질 같은 수행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종교전쟁의 징조 : 특히 나와 그 무엇 위대, 신령, 성스러움을 동일시하는 과대망상의 심적 의지심은 인간계의 흔한 미혹인데. 민족의 우월성 증명부터 백색인종의 색깔 비교, 교만 망상, 사상적 선택, 자만에 이르기까지 별별 기이한 정신병적 증상을 연결하는 이 지구촌이니 남섬부주 사바세계의 인계이다. 종교계야말로 제일 먼저 벗어 던져야 할 동일시의 업인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신, 불, 교주 등을 업고 자아확대를 한껏 꾀하고 있으니 그 서로간 경멸의 독소가 대단하다. 모 신흥 종교에서는 예수는 8천, 석가는 9천에 있으며 자기네 교주가 10천에 머무른다 비교하는 교리를 떳떳이 가르친다. 그러므로 10천의 자식들이 9천, 8천의 자녀보다 잘났다는 거이다. 믿고 의지하되 바른 소견으로 신뢰해야 하는데, '예수는 신이요, 석가는 인간이니 아무리 노력해도 인간은 신이 될 수 없다. 고로 석가는 예수보다 한수 아래다. 당연히 신이 인간보다 나으니까! 피창조물이 창조주보다 나을 수 있는가? 이렇게 교묘 교리를 밀고 나가면 어리석은 이는 혹한다.
  거꾸로 '아무리 떠들어봐야 예수가 안내하는 천당은 육도 중의 천계일 뿐이니 부처님이 말하는 열반 해탈보다 훨씬 아래다. 사생육도를 벗어난 경지에다 감히 인천교의 교리 가지고 덤빌 수 있는가? 가르치면 무지한 불자들은 제법 으쓱한다. 그러나 깊은 속마음의 에고 확대의 마업은 피장파장 아닌가? 남은 것은 이론무장 전쟁뿐이요, 투쟁일 것이니 이는 모두가 동일시 망상의 소산이다.
  나는 누구인가? : 아! 신의 개념을 도입시켜 창조론을 만든 주인공은 무엇이며, 부처를 알고 믿는 놈은 어떤 놈인가? 이것이 높고 저것이 낮다 주장하는 놈은 이름만 바뀌었지 같은 물건 아닌가? 나는 무엇인가? 어쩌다 독일민족의 가발을 쓰고 태어난 히틀러는 독일국민의 신성함을 더럽히는 유태인을 다 죽여버려야 했으니 위대성 동일시의 민족주의 광증의 결과이다. 신의 이름 아래 성전을 벌이는 인간이나, 지방색의 선과 악에 물들은 사람이나 근본적 분리의식은 똑같다. 종교의 사명 중 가증 중요한 것은 참평등 교육의 직능인데 유아시절부터 세뇌공작을 각 종교마다 시켜놓아 특정한 소속 연대감의 동일시 집단 자아의식으로 마취시켜 놓았다. 타종교 교주나 교도나 의식 행위나 숭배상 등에게 일으키는 혐오, 능멸감의 배양은 마치 어릴 때부터 흑인 멸시 사상을 은근히 주입시키는 백인 가정의 교육풍토나 다를 바 없다. 미묘하게 "얘! 그런 집 애하고는 놀지 마라! 아버지가 날품팔이란다!" "너는 아예 불교인 아니면 결혼할 꿈도 꾸지 마!" "같은 예수 성도 자매끼리 아니면 절대로 결혼 허락할 수 없다!" "아니! 그걸 말이라고해? 우리집 핏줄에 코쟁이와 더럽게 혼인한 적이 있더냐? 어림도 없다."
  핏줄, 학력, 부귀, 권력, 지방, 민족, 사상, 색깔, 종교 등등과의 동일시는 참나를 가리고, 더 나아가서는 지옥보다 더한 지구촌의 참상을 불러일으키고 이 동일시로 인해 개인적으로 정신병으로 시달리게 되는 원흉임을 깨닫는 것이 참으로 시급하다. 1984년 필자의 사부이신 혜암 노선사께서 젊은 선객들에게 들려주신 한마디. '종교와 철학과 모든 과학이 인생의 문제를 해결 못 한다. 대해탈 대자유 대광명 이것을 깨달은 이라야'하시고는 길게, 할!!! 하시었으니...
  
    일원화 망상
  서양 제국주의적 발상은 종교나 의학계에도 그 영향이 미친 바 오래되어 해독이 심각하다. 간단하게 '내 것이 최고다' '내 쪽으로 하나되어 통일하자!'는 식이 그 특징인데 이는 골치 아픈 절대주의 신봉자들이 발명품, 곧 일원화 망상이다. 종교 통일, 의료 일원화 등의 그럴듯한 사상은 짐짓 선명성 경제성을 표방하는 듯하지만, 속사정을 알고 보면 힘의 논리에 불과하다. 어찌어찌 하다 보니 서양의학의 분석적 해부학의 학문 방법이 세상을 풍미하게 되었고, 기독교의 유일신 교조주의가 팽배하게 되었다. 본고장인 서양 유럽에서는 이미 자연철학의 도외시에서 온 산업과학 문명의 오류를 느끼고, 의학계가 오히려 유심적 자연식품 위주적인 탈출구를 찾고 있으며, 교조주의적 유일신 사상이나 마르크시즘은 이제 한물가고 있는데도, 무궁화 근역반도 남쪽의일부 몰지각한 무리들이 5천 년 역사 전통 동양철학관의 산물인 동양의학을 양의학과 합류시키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판소리가 비록 세계적으로 상식화되어 있지는 않지만 민족 고유의 문화 산물이듯이 한의학 역시 정신문화의 고유한 민족전통의 소산이 아니던가? '오페라'와 '판소리'의 일원화! '양복'과 '한복'의 통합! 얼마나 웃기는 발상인가? 양의학과 한의학의 일원화 계획은 아무리 명분이 그럴싸해도 기독교와 불교의 통일론같이 어리석은 병폐일 뿐이다. 예수 석가의 방편이 다른 것은 시대 상황이나, 근기따라 쓴 영적 처방인 때문이다. 몸이 더운 사람은 대황이라는 찬 약을 쓰고 찬 사람은 부자라는 더운 약을 쓰는데, 대황과 부자의 일원화가 묘한 비방이라고 주장하는 우둔함이 곧 의료 일원화 정책 처방이다. 양방의 발달과 필요성은 한방의 적합성과 같이 병용되어져 온 인류의 양대 의학계 흐름이었다. 기름은 그 순수성이 물과 섞이지 않아야 그 효용을 다할 수 있듯이, 종교나 의학이 인간 구제 방법의 목적은 같으나 각각 방편의 특수성이 보장되어야 함은 당연하다.
  같은 세존의 말씀이라도 모두가 다 열반적정의 법인을 목표로 하지만, 근기따라 (아함경)부터 (화엄경) 그리고 중국 도가와의 부딪침에서 나온 선문답에 이르기까지 그 특유의 향기가 있지 않은가? 불교인에게서 (화엄경)과 (아함경)의 일원화라는 착상이 애시당초 우습듯이 한, 양방 통합시도가 의료인에게 얼마나 넌센스인가는 말할 필요조차도 없다. 일부 의학계에서 '세계에서 이원화된 의학계는 우리나라 뿐이다'주장하는 모양인데 우리나라뿐만 송편이나 빈대떡, 식혜나 수정과를 케이크나 피자, 주스, 포도주와 일원화하자는 소리는 왜 안 하는지 모르겠다. 음식도 법이요, 의학도 법, 종교도 법이다. 무슨 법인가? 행복해지기 위한 법이요, 길이다. 그 도다. 쓰는 자의 전문적 소망과 깊이가 아쉬울 뿐, 따로이 일원이니 이원을 따져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정규 코스 6년, 대학원 박사 과정을 5년 이상 공부하거도 모자라 입산 수도하는 한의학도가 부쩍 늘어가는 판의 동양의학계인데, 의과대학의 한 부속 분야처럼 내과, 부인과, 소아과 같이 한의과를 분과 설정하고, 본과 1년부터 선택해서 공부하게 하겠다니 잘하면 한의학 멸살 정책이 되고도 남지 않겠는가?
  보사행정당국의 기본 인적 구조가 서양의학파 일변도이기 때문에 휘두르는 칼이면 더욱더 슬픈 일이다. 만약 기독교도가 행정당국의 책임자라면 불교와 일원화를 주장할까? 설마 그렇게 주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의학자는 반종교인이자 사제와 같은 성격의 직업이다. 양식있는 종교인들이라면 의학과 종교의 목적이 같음을 내심 인정하고 있을 것이다. 인간의 마음과 육체의 총화된 유기적 구조를 지닌 복잡한 동물인데, 양방이 유물적 과학관으로 조직, 해부학적 인간학에 접근했다면, 한방은 유심적 전우주적 발현의 실체로서 인간을 승화시킨 철학이 그 기초이다. 서투른 일원화 망상으로 인하여 인간 판단 기준의 편협적 유물관의 한국 의학계가 되어 그렇지 않아도 타락한 이 지구촌을 더 괴질로 몰고 가서는 안 된다.
  예수를 빙자하여 '예수이름이 아니면 하늘나라 갈 수 없다!'외치는 독선적 절대주의 망상이 이 지구촌의 영혼을 파괴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본뜻이 아니었다. 유일신 사상의 핵심은 예수만을 통한 하나님의 현현을 믿는 외통수 편견이 아니다. '나로 인하지 않고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의 그 나는 참나를 말하며 누구나 가지고 있는 영생불멸의 한 물건이 아니고 무엇인가? '양방으로 인하지 않고는 건강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외치는 그 존재의 한 물건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영생불멸의 한 물건이 아니고 무엇인가? '양방으로 인하지 않고는 건강으로 들어갈 수 없다!' 혹시 이런 광신적 다수 집단개인주의가 낳는 단선적 한, 양방 일원화 논리가 아닌지 심히 의심스럽다. 학다리가 길다고 참새다리에 붙여놓고 평등을 이룩했다 할 수 있는가? (화엄경)의 말씀 요지가 이러한데. 자! 종교예식도 일원화, 비구승과 신부, 목사의 일원화, 예불가, 찬송가, 성가의 일원화가 주장되지 말라는 법도 없는 세상인가 보다. 음식도 인스턴트 통조림으로 일원화, 의복도 일원화, 주사와 침도 일원화, 양약과 한약 일원화의 망상분자들이 날뛰고 있는 것은 또한 이 말법시대의 무슨 조짐이란 말인가?
  
    산후의 마음과 몸가짐
  아직도 아기 낳자마자 평소 다름없이 직장 가랴, 설거지, 빨래 등 찬물에 손 담가야 하는 부인이 많다는데 '산후풍'이니 뭐니 해서 너나 없이 잘 쓰는 병명도 익히 많이 들었을 터이다. '풍'자가 붙은 말이 허다한데 산후의 백 가지, 천 가지 변화된 증상에다 그저 풍을 붙였을 뿐이다. (동의보감)에 '풍은 선행삭변야'라 했으니, 즉 잘 행해 움직이고 수시로 잘 변하는 성품을 일컫는다. 몸의 증후만 잘 변할까? 아니다. 마음이 잘 변화하므로 몸도 천태만상 변화할 뿐이다. 아기에 대한 근심, 기쁨, 놀라움, '누구를 닮았을까?' '뭘 시킬까?' '무슨 재능을 타고났을까?' '딸이 아니라서...' '모유를 먹일까 말까?' '젖이 쭈그러들지 않을까?' '뱃가죽이 쭈글쭈글한테 이대로 남으면 흉해서...' '히프가 내려 앉아버리면?' 등등...
  중요한 생각에서부터 하찮은 불길감에 이르기까지 여인의 마음은 들끓는다. 이러한 마음으로 다져진 모성애는 사랑 없는 교육의 책임이며, 게다가 갑자기 얼떨결에 엄마노릇 하려니 마음만 분주하다. 이런 때일수록 모든 것을 쉽게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지혜가 필요한데. 몸의 걱정보다는 마음의 살핌을 너무 등한시하지는 않는지? 각설하고. 자! 이제는 생리적 변화를 살펴보자. 아기는 배설물이 아니다. 그러나 무엇인가 꽉 차 있던 것이 갑자기 나가고 나면 심한 허전함과 함께 몸과 마음의 공동 현상이 일어난다. 당연히 신체의 모든 부분은 빨리 수축하여 모든 기관의 늘어진 부분 부분을 거두어들여야 할 것이다. 자궁부분뿐 아니라 모든 조직이 이완된 상태에서 원위치로 팽팽해지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아울러 섭생의 지혜도... 첫째, 빨리 수렴을 시키려면 '신맛'이 중요하다. 둘째, 숱한 피와 양수 등의 체액 손실을 보충하려면 수기의 보충이 필요하다. 출산 직후에는 흔히 '이슬'이라 불리우는 남은 불순물을 부담 없이 내보내야 하므로 매끄러운 해초류 종류도 진액도 보충하면서 배설시켜야 한다. 미역국을 끓여 먹는 상식의 실천은 두 가지 이익이 있다. 진액의 보충과 나쁜 이물질의 축출인데 전통적인 민간방은 꼭 음미할 필요가 있다. 신맛은 사실 임신중에도 대부분 입덧을 하는 초기에 많이 당기는 맛이다. 왜 그럴까? 해삼장수들이 흐물흐물해진 해삼에 식초를 듬뿍 쳐놓으면 꼬들꼬들해지는 방법을 쓰고 있다. 마치 신선한 것처럼 위장하려고 이용하고 있는데, 실제로 신맛은 늘어진 것을 팽팽하게 하는 실력이 있는 맛이다. 배추의 섬유질을 숨 죽이려면 짠맛인 소금을 사용한다. 어느 누가 배추를 식초로 절이는 바보짓을 할까? 매운 맛은 기가 위로 오르면서 발산한다. 좀 유식하게 표현하면 (동의보감)에 '산수 신산 함연견'이라 씌어 있다. 즉 '산미(신맛)는 거두어들이고, 신미(매운맛)는 발산하고, 함미(짠맛)는 굳은 것을 유연하게 한다'는 뜻이다.
  임신 초기는 창조가 최고 왕성한 시기다. 본시 무였던 상태에서 머리, 몸통, 내장, 손발이 이제 막 생기려는 때에 소화제를 마구 먹는다면 어찌되겠는가? 형성되는 아기도 소화가 되어버리는(?) 끔찍한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임신중에 소화제나 매운맛을 금하는 이유는 모든 신체 형성에 지장을 주기 때문에 그렇다. 무엇이든지 부수고 흩어버리는 약성을 가진 약은 기형아 출산의 원인이다. 특히 화학약품 및 마약, 도수 높은 알코올, 매운 담배 등이 그렇지 않은가? 이것은 이미 세계적 통계가 증명하고 있듯이 심각한 주의 사항이 아닐 수 없다. 생리적으로 대부분 신맛을 원하는 이유는 바로 신맛이 수렴하여 거두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무심코 신맛을 원하게 되는 것임을 주지하기 바란다. 자! 임신중의 마음가짐도 그렇다. 부수고, 깨고, 자르고, 죽이는 생각을 하면서 건강한 태아를 가지려는 망상은 하지 말자! 출산 후의 조리도 마찬가지다. 텅 빈 내장과 늘어진 조직을 비교적 싱싱한 신맛으로 죄어주고 채워줘야 한다.
  산후에 매운탕에 겨자를 듬뿍 친 냉면이나, 생선초밥에 '와사비'를 듬뿍 발라먹거나 한다면 조직이 붕괴될 것 아닌가? 아주 비대한 산모를 빼놓고 매운 맛은 피하고 자연식품의 싱그러운 새콤한 맛을 위주로 섭취해 보자. 마음 씀씀이도 헤프게 나돌아다니거나 낭비하는 것보다 단속과 근검 절약식으로 닫고, 죄고, 여미는 것이 필요하다. 모든 부속이 헐렁헐렁한데 여기저기 몰고 다닌다면 그 차는 곧 폐차 처분을 받게 될 것 아닌가? '남자 아이는 60에서 70일, 여자아이는 100일을 근신하며 출입을 삼가라.' 허준 선생은 경계하셨거늘 살림상 그렇게까지는 못한다 해도 마음을 긴장, 정숙, 고요하게 해야 할 것이다. 또 산후에는 항상 떫은 음식을 피해야 하는데 이는 불순물의 배설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변비의 원인도 되고... '담배'좋아하는 여성이 날로 늘어가는데 뚱뚱한 체질은 쓰기에 따라 약도 되지만, 맵고 떫은 담배의 해독은 모유도 없앨 뿐 아니라 조직의 팽배함도 방해한다. 하기사 요즘은 어머니 젖도 말랐다. 약간 계몽이 되어서 모유를 먹이고 싶어하는 산모가 늘어나는 데도 불구하고 젖이 안 나온단다. 이상한 남자들이 기호 풍조를 쫓아 의상 모델용의 마른 나뭇가지 같은 여자로 변신하다 보니 인체에 적당한 수분도 고갈될 것이 뻔하지 않은가?
  젖은 흰피라고 불린다. 어쨌든 물이 변해서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물 없는 사막에서 무슨 아이스크림 타령을 하겠는가? 인체의 75퍼센트가 물이요, 지구의 4분의 3이 물이다. 수기의 보충은 산후의 시급한 명제다. 희랍이 미녀는 아랫배와 젖퉁이 아주 풍만한 상이었는데, 어머니의 덕성이란 어딘가 대지 같고 포용력 있고 풍성해야 하지 않을까? 아기가 무는 젖꼭지에 유방 모양 상할 것을 걱정하고, 나가는 모유에 내피가 줄어드는 것같이 생각한다면 자연의 섭리를 너무 무시하는 처사다. 감성리듬의 충족 부족에서 나중에 성폭행 등의 범죄성 아이가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자. 아기에게는 어머니의 심장 소리와 부드러운 살결을 일찍부터 충족시켜줘야 한다. 왜 '늦게까지 어미 젖을 빠는 애가 크게 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만족한 감성의 아이는 어머니의 자애 덕택이다. 화낸 후의 어머니 젖에는 그만큼 독소가 있다고 증명되었지 않은가? 부드러운 마음이 젖을 만드는 모성의 마음공장은 날로 황폐해 가고 있다. 맨날 죽기로 쌈질이나 하는 우유공장의 제품에 의존하고 사는 현실에서 무슨 텔레파시의 영적 인물을 기대할까? 지혜와 덕성의 모유로! 자! 그리고 하복부는 항상 따뜻하게! 아주 비대한 사람이 아니라면 약간 시게! 매끄러운 해초류로 진액 보충과 함께 불순물 제거를! 그리고 독한 음식을 피해 부드러운 수액을! 마음은 온화하며 정숙하게 여밀 것을... 그래서 어머니의 길 닦는 힘으로 산후 조리를 매듭짓자.
  
    라르고
  느리고 슬픈 헨델 작곡의 (라르고)는 새벽의 고속도로에서 동 터오는 아침과 함께 눈물을 자아내게 하고야 말았다. 밤을 새워 달려야 하는 시간의 속박과 약속의 질곡을 허무하게 느끼면서 질주하기만 하는 생. 경주 D대의 야간 강의와 연이은 서울 K대 특강을 즐기기에는 너무 피로한 체력이 아닌가? 우연히 사놓게 된 클래식 테이프를 틀었더니 씩씩한 행진곡과 느리고 장중한 라르고를 잘 엮어놓은 명작이어서 내심 즐거웠다. 빠르고 경쾌한 리듬과 느리고 애잔한 가락이 어찌하여 그리 잘 맞아 떨어질까? 그저 빨리! 빨리의 문화 속에서 속도의 노예가 되어버린 우리는 정숙하게 라르고를 감상해야 할 때가 아닌가? 라르고. 고향을 잊은 사람들에게 라르고. 미친 듯이 외치는 자에게도 라르고. 주르르 흘리는 방울방울의 눈물에 어느덧 초조감, 야심과 번뇌가 한줌의 재같이 날아가 버리는데... 마음의 조율이 너무 어려운 작금의 사회는 그저 로보캅 같은 헤비메탈 문화를 즐기고 있다. 메마른 심장은 허위를 음식삼아, 공기와 이슬과 시냇물, 수풀과 땅냄새를 멀리하기에 이르러 아파트와 백화점과 아스팔트에 중독이 되었다. 안전감과 편리함이 낳은 증발되어 버린 감성의 전염은 피로, 우울한 폐쇄성 고독감을 조장시킨다. 문명병은 세기말적 괴질을 불러오고야 말았다.
  스피드 경쟁과 함께 고속 지향성 문화는 화의 시대를 예고해 왔고, 실제로 '불의 심판'을 자초하고 있다. 이제 몰아닥칠 괴질은 어떤 형태일까? 첫째, 현저한 시력의 감퇴와 두통이 몰아닥친다. 둘째, 갑자기 조직이 붕괴되는 괴이한 증상이 온다. 셋째, 전염성이 심각하다. 넷째, 적개심으로 인한 심한 분열증이 나타나 사회질서 구조가 불안정해진다. 이 모두가 화열의 징조가 나타내는 징후이다. 맑고 차야만 잘 작용하는 머리의 기억 장치는 열로 인해 망가지고, 하부 조직인 배나 허리는 따뜻할 때 제 기능을 발휘하는데 긴장과 공포의 찬 에너지로 그 활동을 위축시키고 있지는 않는지... 예를 들어서 에이즈를 보아도 일종의 화병이다. 체중감소, 피부발진과 더불어 사망에 이르는 시간이 급속한 이 질환은 일종의 열병이다.
  세존께서 뜨겁게 달군 구리 기둥을 안고 괴로워해야 할 지옥의 고초를 설하셨는데 이는 욕화의 업보라 하셨다. 부드러운 영감의 교환이 배제된 말세의 헐떡이는 접촉의 마찰이 낳은 에이즈의 특성은 그 치료 해독이 거의 불가능하다. 후끈후끈 달아오르는 마음의 정열은 오음치성고가 아닌가? 주체하기 힘든 육식의 포만감은 끓는 욕정을 낳게 되었고, 삐뚤어진 성교육은 방자한 음탕을 방조하였다. 에이즈에게도 (라르고)의 눈물을... 간암도 화병이다. 분노의 과보인 간경화, 간경변, 간암은 지글지글 끓어오르는 울분과 질투가 그 원인이다. 신선한 풀잎의 아침이슬과 함께 씻어 버릴 청간의 맑은 바람은 없는가? 둘러봐도 모두가 비방 중상의 바람뿐이니 이제는 원수라도 그 장점을 봐야 할 때. (예기)의 첫머리에, '애이취기악 증이취기선'이란 글이 있다. '사랑하는 자의 나쁜 점을 보고 증오하는 사람의 장점을 취하라.' 간암에게도 (라르고)를... 심하게 조인 기타줄이 이제 막 끊어지려 하고 있다. 대학마저도 자기 패배주의에 물들어 있다.
  교수와 학생은 분열되어 상호 세력의 다툼으로 이기고 지는 게임을 연출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무슨 말을 해도 그 뒤의 속마음을 헤아리는 대화는 대학사회의 경험이 간특한 정치의 연습장 같다. '대학지도는 재명덕덕이다.' '대학의 도는 밝은 덕을 밝히려는 데 있다.' 고인의 가르침은 이제 휴지화되었다. 밝은 덕은 곧 (라르고)의 미덕을 아는 마음이다. 되돌아보아 자신에게서 구하는 자세는 교수 학생간의 지극한 명제이다. 골치가 뻐근한 논리의 장난이 대학 사회의 추구가 아닌데... 기묘한 논리로 자신을 합리화하는 병은 못난 정치에서 나타나는 작태인데, 대학의 기능이 정치 그것도 하급정치의 흉내나 내고 있어서야... 대학인이요! 교수와 학생이여! 재단이여! (라르고)에 귀를.. 전등불 아래 밤 열 시까지의 심야 강이실. 필자의 구두에는 노랑 빨강 파랑 흰색의 분필가루가 어지러이 묻어 있다. 죽비를 두드리는 박자에 맞춰, 사행시 수심치병가를 힘차게 낭송하는 백여 명의 K대 학생들. "이제 끝날 시간입니다!" 다같이 코와 배꼽을 일직선으로... 탁! 탁! 탁! 세  번 울리는 죽비 신호에 종교의 같고 다름없이 입정에 든다. 갑자기 깔리는 정적감. 무성한 말 잔치도 한갓 꿈이었지! 이 침묵이야말로 진짜 라르고!
  
      제3장 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은
    백지의 말
  말하는 놈은 말할 수 없고 보는 놈은 볼 수 없고 듣는 놈은 들을 수 없고 아는 놈은 알 수 없으니... 백지는 백지를 모른다. 활자는 활자 스스로를 알지 못한다. 인간이 뜻을 두어 말을 연결하는 가운데 사상이 생겼으나 진리는 결코 생각으로 알 수 없는 법! 자! 넓은 백지로 환원을!
  
    가정한방약성가 1
  옛날부터 내려오는 경험약초 있다지만 일일암기 하다가는 죽을때도 못다하오. 크게나눠 태란화습 출생근본 달라지고 지수화풍 사대원소 허허실실 온갖생명. 식물보다는 요점지혜 동물과는 다르나니 잘동하는 동물성품 못동하는 반대식물. 동물호흡 산소얻고 식물음식 탄산가스 동물배설 식물영양 식물배기 동물자양. 천기호흡 동물순환 자미흡수 식물개성 수천가지 입맛중에 다섯가지 맛의원소. 시고달고 맵고짜고 쓰디쓴맛 오미라네 달고신맛 태음궐음 맵고짠맛 양명태양. 소양소음 비록쓰나 음양구분 다르다네 매끄럽고 텁텁한 맛 음과양이 분별되고. 온갖맛에 음양있어 상호의존 분명하여 담담한맛 이수행기 십이경락 순환지제. 단과일은 비옥한땅 매운열매 건조한땅 맛을보아 산지알고 형상마저 잘살피소.
  매운약초 겨자후추 가래냉담 삭히우고 대추감초 화해지제 제반중독 풀어주네. 뚱뚱한이 꿀금하고 마른체질 후추불가 바꾸어서 생각하면 쓰기따라 약이되네 고추농사 배수제일 건조가을 햇볕필요 바나나는 비옥한땅 무더운곳 특산이네. 수험생이 수척하면 시고단맛 기억돕고 무거운몸 잠만자면 톡쏘는맛 깨는정신. 영양가와 칼로리만 주절대는 요리특강 상대적인 설명없어 잘차린상 때론독약. 비대인이 많은가정 기름진 것 왜올리며 가족모두 말랐는데 매운탕이 웬말이냐.
  
    가정한방약성가 2
  금기식품충고
  닭고기를 먹지마라 돼지역시 손대지마 술은물론 밀가루도 계저주면 금기하라. 돌아서서 생각하면 너무많은 금기식품 녹두숙주 무메밀 그이유가 무엇인가? 성인게서 금한 것은 아예육식 그했는데 육식채식 차이있어 가능하면 채식하소. 만물중에 동물식물 알고보면 상호조화 움직이는 동물성품 부동하는 식물성품. 산소호흡 동물이요 탄산가스 식물호흡 탄산가스 동물배설 산소배출 식물의일.
  서로서로 상부상조 틀림없는 짝을이뤄 동물괴름 식물이약 동의고를 정의약씨. 때론육식 필요한건 부득이한 구병방편 갈비가든 개고기에 통닭돼지 웬말이냐? 병을앓고 고통와도 진한음식 배채우네 어리석은 탐식주의 굶주림이 최고보약. 장을비워 씻어내고 모든독소 내보내면 신선하다 배고픈맛 순환통로 뚫어주네.
  옛날 화타라는 명의이야기. 광릉태수 진등이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지고 얼굴이 붉어지며 먹지 못하는 증세를 보였다. 화타가 진맥해 보고는, "부군의 위장에는 벌레가 있어 내저 장부의 종양이 되려는 것이니 '비린것'을 많이 먹어서 이렇게 된 것입니다" 하고는 즉시 탕약 두 되를 달여 두 차례 복용시키니 잠시 뒤에 세 되쯤의 벌레를 토하였는데, 머리는 붉고, 움직였으며 반쯤은 마치 산 생선회 같았다. 즉시 그 고통은 나았다.
  닭고기에 돼지고기 모두금한 깊은뜻은 가능하면 육식섭취 피하라는 교훈일세. 날개달린 조류들은 풍병재발 겁이나고 네발달린 가축류는 지방저축 근심되네. 술을금한 그이유는 불보듯이 뻔한이유 광증유발 최고독은 술밖에또 무엇있소. 살아서는 지혜끊고 죽어서는 똥물지옥 성인께서 구조정녕 충고한 것 기억하소.
  물론때로 약쓰는건 혈맥소통 위한 것을 마구남용 하다가는 패가망신 분명하오. 밀가루나 메밀음식 피부풍병 열병금기 녹두음식 무거우니 비대냉증 피해마땅. 숙주나물 콩나물에 고사리에 버섯음식 음습한곳 식물이니 뚱뚱한이 금한이유. 참새고기 오리요리 비둘기는 난생이고 지렁이에 거머리는 습생이라 생각하소. 날으는것 알고보면 어지러운 생각중생 축축한곳 좋아하면 미끌미끌 유연중생.
  동물식물 개성파악 매우세밀 관찰해서 마른사람 습지식물 뚱뚱한이 건조한풀. 음양관찰 잊지마소 대도부터 판단하소 권위자나 돌팔이에 속지말고 각자분별. 의식주의 선택비법 간명하게 조명하여 큰길만은 착오마소 자칫하면 중병얻네 식후복약 두통눈병 콧병입병 위로가고 공복투약 대장자궁 무릎관절 아래작용. 위와아래 순서있어 언제든지 조심하소 하초냉병 설사출혈 빈속냉수 경계하소. 먼저마신 냉한음식 트림없이 병이되어 수승화강 순환방해 신중하게 연구하소.
  
    가정한방약성가 3
  모유상실시대
  여자 성자이자 시인인 아바야르가 말했듯이 '엄마보다 더 좋은 사원은 없는 것'입니다. 부모들은 모든 아이에게 진리를 알게 하기 위해 바른 이 몸으로 삶을 체험할 기회를 주고 있습니다. 부모들 중에는 아이를 갖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고 이 사람들은 아이가 생기면 돌보려고 들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차라리 자기 애들보다는 식물과 애완동물들을 더 잘 보살핍니다. 아기가 와도 그냥 우유병만 하나 내밀지 그 애들을 위해 만들어진 모유조차 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신은 한 영혼이 자궁 속에 들어가진 모유조차 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신은 한 영혼이 자궁 속에 들어가도록 도우면, 그 순간, 누가 요구하지 않아도 엄마 가슴에 아기 먹을 젖도 함께 만드셨습니다. 지고한 어머니는 모든 것을 살피십니다.
  아기가 생기자마자 젖이 준비됩니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의학이라는 미명하에 처음 2, 3일간의 엄마 젖을 짜내러 버리고 아기에게 먹이지를 않습니다. 그 사람들 말로는 그 젖은 응고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응고된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만약 아기에게 깨끗한 젖을 먹이는 것이 좋다면 아기의 창자 속에 있는 마른 똥찌꺼기를 모두 배설해 버리게 합니다. 처음 하루, 이틀 신생아에게는 그런 젖을 먹여야 합니다.
  나는 엄마들에게 당신들이 누군가를 가리켜 "저건 내 애요" 하려면 엄마답게 행동하라고 말합니다. 아기의 재산을 훔치지 마십시오. 젖은 아기 것입니다. 아기 엄마의 것도 아니요, 아빠 것도 아닙니다. 미를 상실할까 하여 아기를 위해 신이 만들어주신 젖을 먹이지 않으려는 엄마들이 많습니다. 스와미사치다난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본다) 동국 출판사.
  팽팽하고 탄력있는 젖무덤은 매력만점 수술해서 늘리우고 모유마저 아끼누나. 뭇남자의 시선끌어 탤런트의 환상인가? 남편애무 즐기려는 쾌락탐내 그러는가? 히프살은 올려붙여 코도역시 높여붙여 쌍꺼풀에 군살제거 성형외과 법석만원. 탄력있는 마음잊고 육신애착 극심하여 사랑자비 연민정숙 좋은말은 사라졌네. 진찰실의 질문보면 "엄마젖을 주십니까?" 열중애들 그렇지만 여덞명은 우유라네. 젖먹는중 엄마심장 귀를대고 듣는순간 아기맘은 절로편해 명상신비 절로훈련.
  빨지못한 무의식은 불만되어 스트레스 담배골초 알고보면 잠재욕구 학자말씀. 유방암도 알고보면 이기심의 산물이요 조심없는 불각으로 모든괴질 생긴다오. 자동차의 기계보다 미묘섬세 이육체는 운전수가 현명해야 장수무병 누린다오. 급히몰고 뒤로몰아 전후미처 못살피면 작은사고 도랑박고 큰사고는 사람박살. 저만죽나 여럿죽인 주의없는 운전사고 알고보면 운전기사 깨어긴  아니한탓.
  자동차의 수억만배 귀중한건 아기건강 자연섭리 오묘한뜻 내팽개친 현대교육. 프라나라 불리우는 기호흡도 무시하고 자기치유 영한능력 까맣게도 잊었다네. 사량분별 마른지혜 모두놓고 맡겨보면 두두물물 있을자리 그럴만한 이유있네. 이몸주인 영혼각성 잡다지식 벗어나서 자연으로 돌아가세 무위진리 익혀보세. 내가취한 과학지식 알고보면 무지몽매 자연신뢰 몸맡기면 길게가는 밝은지혜. 지구촌의 평등평화 가정에서 시작하니 어미노릇 쉽지않소 부지런히 닦으소서.
  
    가정한방약성가 4
  이래도 계속 육식을?!
  고기 중에 제일 맛있는 고기는 '사람고기'라는 말이 있다. 이 식인종 사이에서는 유행도 가지가지. 그 중에 '등심(사람)이 맛이 있느니', '골수가 맛있느니', '혓바닥이다', '간이 좋다', '순대를 만들면!', '곱창이 맛있다', '허파볶음' 등등. 사람의 요리도 가지가지인데. 그 종류가 우리 먹는 고기요리만큼 다양한 것은 식인종이 이 지구촌에서 배웠기 때문이다. 배운 것을 보면 살짝 데쳐먹는 맛도 좋고(오징어 요리에서...), 약간 썩혀서(홍어 요리에서...), 인간 냉동실에 가보면 다리, 머리, 손, 내장, 부분마다 얼려놓아서 근수대로 도장을 팍팍 찍어놓고는 출하할 날만 기다리고 있는 이 고급 저장수법도 다 배운 솜씨다.
  거대한 굴뚝의 공장에서 짓바수어 이겨서 소시지를 만드는데 곱게 비닐 포장지에서 싸여서 나오는 것 보면 상표가 그럴싸하다.(XX표 인육소시지) 더 끔찍한 몬도가네식 동양의 중국, 한국 쪽으로 가면 태중의 아기를 통째로 인삼, 대추, 생강 등을 넣어서 푹 삶으면 정력에 좋다고 한다니 이는 돈아(새끼돼지) 요리에서 배운 솜씨. 가죽은 잘 정제해서 핸드백 구두류로 쓰고, 뼈는 잘 삶아 그 국물로 밥을 말아먹는데, 이것은 어디서 배웠을까! 물을 필요조차 없다. 식인종 도회지 부근에는 '갈비가든' 생긴 지 오래며, 뷔페에 가면 인간의 어떤 부분의 요리든지 다 먹어볼 수가 있다.
  쓸개같이 약으로 쓰이는 부분 부분은 약방에 가면 말려서 잘 보관되어 있다가 술에 타 먹으라 의약사가(웅담에서 배움) 권고한다. 족발요리는 주로 발목만 잘라 삶을 때 향료를 넣어 누린내를 없애는데 술안주로 인기가 좋다.(장충족발에서) 이 식인종 사이에서도 가끔은 채식을 하자는 운동이 벌어지기는 하지만 '체력은 국력!' 체력이 딸린다는 이유로 인육을 금할 수가 없다.(식물은 칼로리가 부족하다나?) 가끔 도로를 지나다 보면 철망 안에 사람을 가두어 도살장으로 끌고 가는데 그 철망 안에서도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서로 싸우는 모양을 보고 혀를 끌끌 차고 다니는 식인종들도 있다. 그나마 좀 지성이 있다고 하는 식인종이 그렇게 측은한 마음도 일으켜보지만 어쩔 수 없음에 눈을 감는다.(돼지 싣고 가는 타이탄 트럭에서...)
  인간이 한 일을 보면 받아야 할 과보를 절로 알 것인데 해도 너무 하는 살육의 지구촌이다. 먹지도 못하는 인간끼리 죽이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고기'에의 탐욕은 너무너무 심하다. 심지어 산사의 밑은 아예 영양보충 장소로 변해 있는데... 유명한 Y사 밑은 '건강원'이라는 간판이 즐비하다. 높은 산 영험한 은행나무 산자수명하고 널찍한 주차장 시설 등으로 관광 개발을 멋지게 해놓았단다. 그런데 건강원마다 수천 마리의 뱀을 고아 삶아... 절 밑에 유명한 산채나물 백반, 특산 막걸리 곡차 정도라면 풍치가 있겠지만 가든에 보신탕, 삼계탕, 토룡탕, 송어, 향어, 멧돼지, 토끼, 장어구이... 이제는 '뱀'의 대량 학살장으로 되었으니 절대 이런 업과 원귀의 작용의 병은 약만으로 안 된다는 사실을 강조... 강조... 하고 싶은 오늘이다. 필자의 예로, 우연히 친구 따라 생선회, 그것도 (팔팔 산) 싱싱한 것을 먹고 정초를 일주일 그르쳤다. 콱 송곳으로 찍고 난도질해서 쓰윽쓰윽 잘라내는 사이 그 통증과 저주와 공포 원한이 맺힌 고기 몇 점에 꽉 체했었는데 그 독이 만만치 않더라는 얘기다. 독은 막 잡은 고기에 다 스며 있는데 갑자기 경직된 갓 잡은 쇠고기는 약 7에서 8시간 후에나 식용으로 쓰인다는데 얼마나 아팠으면, 놀랐으면, 공포에 질렸으면 고기 근육이 위축되었을까?
  독자들만이라도 이제부터 가능하면 육식을 피하는 것이 어떨까? 직접 잡아죽이는 일은 하지 말자. 남을 시켜서도 하지 말자. 몇 사람 손을 건너서 주고받는 고기라도 깊이 생각해서... 사실 우리는 모두 살생의 간접 조종자인 셈 아닌가? 집에서 키우는 닭을 모가지 비틀어 삶아 털 뽑는 일을 어린이에게 시키지 말자. 죽은 닭과 개를 가슴 아파하는 어린이를 존경하는 사회는 될 수 없을까? 무심코 회를 먹다 횟집 부엌의 도마에 팔팔 살아 뛰는 고기의 반항을 보고, 질펀한 내장의 피를 보고 입맛 떨어져 하는 민감한 딸을 사랑하자. 산 새우가 살아 뛰지 않으면 맛이 없다고 투덜거리는, 루즈 예쁘게 바른 여인은 경멸해도 좋음! 이제 성인의 몇 말씀을 소개하면서 끔찍한 이 글을 맺는다.
  고기를 먹는 것은 '친척 아닌 상이 없다'고 본다. 일체 고기는 모두 부모의 고름과 피와 부정한 붉음과 흰 것으로 화합함에 의하여, 깨끗하지 못한 몸이 생긴 것으로 관찰할 상이니 그러므로 고기가 깨끗하지 못함을 관찰하여 응당 고기를 먹지 아니할 것이다. 고기를 먹으면 능히 색력과 입맛을 일으키게 하지만 사람은 탐착이 많아진다. 일제 세간에 신명이 있는 자가 각기 스스로 소중히 여기고 죽는 고통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목숨을 보호하며 아끼는 것은 사람이나 축생이나 다름없나니 이로써 관찰하건대 죽음이 큰 괴로움이 되며 두려워할 법이니 자신도 죽음을 두려워하면서 어찌 마땅히 다른 고기를 먹으리요.
  고기를 먹는 사람은 잠자는 것도 괴로우며, 일어날 때에도 또한 괴로우며, 만일 꿈속에 가지가지 나쁜 것을 보아도 놀라고 두려워서 머리털이 쭈뼛하여지고 마음이 항상 불안하리니 자비심이 없으므로 착한 힘이 없어지며, 만일 그 조용한 곳에 홀로 있어도 흔히 사람 아닌 것들이 그 편을 엿볼 것이며 호랑이와 사자도 또한 엿보다 그 고기를 먹으려고 하기에 마음이 항상 놀라고 두려워서 편안함을 얻지 못하리라. 육식은 몸의 힘 기르나니 힘으로 말미암아 삿된 생각으로 탐욕이 나기에 그러므로 고기 먹지 못하였네. 고기 먹음으로 탐심이 나며 탐심으로 미취 이루고 미취로써 애욕이 자라나서 생사를 해탈 못 한다네. 도를 닦은 이와 지혜롭고 부귀한 이는 모두 고기를 먹지 아니한 것이라네. 입능가경 제8권 차식육품.
  
    가정한방약성가 5
  내게 있는 진짜 히로뽕
  마구 번져가고 있는 마약문화(?) 이런 것도 문화라 이름 붙일 수 있을까? 이는 마약성 문명에서 피어난 독버섯인데... 특히 젊은 세대가 마약성 의약품이나 '히로뽕' '아편'류에 탐닉해 가는 방향은 무엇이며 왜 그럴까? 왜일까? 무엇이든지 '왜?'를 탐구하기 싫어하는 이 지구촌... '섹스에 왜 젖어들 수밖에 없을까?' 최근 발동된 열두 시로 술 파는 행위를 제한하는 법의 강권에 박수를 보내는 무력한 백성은 자기 주량 제한을 누군가 거대한 힘이 제약해 주기를 기다린 듯하다. '자율성' '자립성'은 건강 유지에  꼭 필요하다. 그러나 꼭 무엇인가 힘있는 의사에 의존해야 건강이 유지된다고 믿는 식과 같은 발상의 습관적 악덕 때문에 우스꽝스러운 행정력의 간섭을 국민 스스로 자초하고 있다.
  '밥을 배 터지게 먹지 말라!' '물을 숨막힐 정도로 마시지 말라!' 이것은 계율이 아니라 당연히 스스로 느껴서 아는 건강교훈이 아닌가? 자동차 엔진오일을 눈금 상한선 위까지 너무 많이 넣으면 속도가 나지 않고 배기가스가 새까매진다. 이유는 간단하다. '밥 많이 먹으면 행동이 둔해지듯이!' '오일도 적당히!' '술 많이 마시지 말라!' 이것이 어느 나라 행정부가 강조할 일인가? 스스로 알아서 잘 지켜야지... 그러나 할 수 없이 법으로 처벌까지 불사하면서 '술 적당!'을 강조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된 이유는. '왜?' 우리는 고주망태가 될 때까지 마실까? 그럴 수밖에 없을까? '왜?' 배가 터지도록 먹고 마셔서 뚱탱이가 되고 스스로 또 슬퍼할까? '왜?' 히로뽕을 마냥 오장육부가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맞을까? '왜? 왜?' 술=담배=히로뽕=과식=음란=권력욕 등등... 이는 다 같은 계통의 마약이 아닐까? 요컨대 여하한 방법으로든 실컷 추구하는 목적은 모두 행복해지고 싶은 것임에 틀림없다. 술, 담배, 마약, 섹스로... 이유는 이와 같이 간단하다. 술과 마약이 들어가면, 첫째, 생각이 비워진다. 지식으로부터 자유스러워진다. '잊고 싶다!' '불합리한 사회구조' '이해할 수 없는 경쟁' '도회지의 공해' '권력과 돈의 횡포에서 느끼는 상대적 위축과 빈곤감' 이러한 것으로 사회는 찌들어 있다.
  게다가 병폐 중의 병폐는 '공포!' '두려움!' 이것이다. 두려움으로 가두고 있는 교묘한 사회구조는 본능적으로 싫으나 의무적으로 행해야 하는 직업의식 같은 것을 사실화, 고착화시켜 송진과 같이 뇌리에 입력시켜 로봇을 만들어간다. 맑은 공기, 수풀, 바다, 이슬, 눈 덮인 산봉우리, 계곡의 물, 지방 특산물의 맛, 깊은 산중의 암자, 기이한 사투리, 모험심 깊은 여행 등... 이런 것은 진짜 히로뽕 중의 진짜 진짜이다. 시간을 주어도 오로지 '고스톱' '포커'판에 매달리거나, '담배연기' '소주' '맥주' '양주' '여자' '네온사인'과 '사우나'에서 피로를 풀어보려는 사람도 마약성 히로뽕 중독형이다. 변소에서 향수 뿌리는 장난이 바로 '카바레' '룸싸롱' '퇴폐 안마시술소' '저질 이발소'의 행복 추구인데 어쨌든 우선 주무르고 흔드는 곳의 공기가 너무 혼탁함을 인식해야 한다.
  서울의 표지판 중 기이한 풍속도의 하나 '오늘의 대기오염수치 XXX' 방귀 뀌고 뭉개고 앉아서 숫자로 셈하는 현실하고는 참?! 참! 천성이 출세해도 이 겁탁을 어찌할까나! 어찌할까나? 보라! 삶은 신비스러운 것! 인간 몸이 달리 대수로운가? 어째서 모든 부처가 인간계에서 성불을 기약하시는가? 인간계에서 가장 신비한 진리를 깨닫기가 좋기 때문인데... 딱 까 놓고 얘기하면, '인계=지옥'의 등식이 성립되는 이 지구촌이니 지옥중생 성불 쉽다고 설하신 부처는 역대로 없었다. 산자수명한 금수강산 이 옥토는 분명히 말대로 그러한데 날로 '히로뽕'이 난무하니 이는 분명히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문명세계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마약을 힘으로 다스리는 사람들도 어리석음을 빨리 깨달아야 한다. 그래도 마약을 사용할지언정 그들은 순진할지도 모른다. '왜?' 먹고 마시고 주사 맞고 그들은 자기 내면 속이나 환상에서 무엇인가 편안함이 있다는 것을 믿는 족속이다. 밖으로 죽이고 탐내서 남을 이겨서 유토피아를 발견하기에는 너무 착한 사람들일지도 모르지 않는가?
  칼과 총과 대포나 화학 가스를 개발하기 위해서 연구실에서 애꿎은 토끼, 쥐 심지어는 인간 실험까지도 감행한 역사가 있는 과학문명은 싸늘한 외향적 히로뽕 중독자일지도 모른다. '잠!' '수면!' 행복은 이와 유사함인데... 아무리 좋은 연인과의 사랑, 혹은 푹 빠진 취미나 야심의 성취도 피로하면 잠을 잔 뒤 다시 시도하고 즐기지 않는가? 잠조차 속으로 혼자 보충하는 진리가 이러할진대 인간의 진실한 평화는 내면의 휴식에서 에너지 공급을 받게 되어 있는 것임을 빨리 깨달아야 한다. 약물의 의존 없이 잠이나 삼매를 얻는 자만이 '의지의 공포'에서 자유롭고 많은 투자, 건강의 상실 없이 깨끗이 깨우칠 수 있다는 것을 주지하자. 자! 역대 부처 조사가 잠조차도 없었다 하는데, 이는 '잠'보다 더 좋은 삼매를 영적인 음식으로 섭취했다는 증거로 신뢰하고 수행해 보자! 그것도 다른 곳 아닌 바로 나의 은밀한 속살 가운데 존재함을 일깨운 것 이외 아무것도 없다. 이는 단언해도 좋다!
  밖으로 염불하나 히로뽕 찾으나 이는 비슷한 것. 빨리 안으로 안으로 대단히 의심스럽고 고통스럽더라도 나의 밀실로 들어가자! 그래서 각자 가지고 있는 '진짜 히로뽕'을 나누자. 이는 국법에 걸리지 않고 나라를 망하게 하지도 않고 세계를 오히려 부흥시키기도 하는 것! 원각산중 생일수 개화천지 미분전 비청비백 역비흑 부재춘풍 부재천 원각산중에 한 나무가 생하니 천지가 나뉘기 전에 이미 꽃이 만발했네 푸르지도 않고 희지도 않고 검지도 않으며 봄바람에도 없고 하늘에도 있지 않다. 선시. 이 푸르지도 희지도 검지도 않고 봄바람 하늘에도 존재하지 않는 이 원각일수는 나의 진짜 진짜 히로뽕이 어찌 아닐 수 있겠는가?

        건강으로 가는 주역탐구
금오

  
      개정판 서문
    그대가 경전을 읽는다 하니...
  전설의 삼황오제 신화의 주인공인 복화씨 작품이며 주나라의 문왕이 감옥에서 다듬었다고 알려진 주역의 역은 변할 '역'자일뿐 아니라 쉬울 '이'자이기도 하다. '귀신 잡는 주역'이라든가 공자님께서 세 번씩이나 주역의 가죽끈이 닳도록 읽으셨다는 어마어마한 이야기에 위축되실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두루 주자에 쉬울 이자로 해석하면 두루 쉬운 게 주역이기 때문이다.
  알고 보면 어렵게 만드는 마음이라는 괴물, 바로 이것은 우리들의 과거 기억의 집합체이자 미래의 환상을 만들어 내는 요물단지인데 까짓거 한번 이 마음을 내던져 버린다면 어려울 것도 없다. 그래서 의학 입문 첫머리에 둥글게 원을 그려 놓고 '주역을 배운 뒤에라야 가히 의학을, 즉 건강을 말할 수 있다'했으니 실로 원 안에는 아무런 괘상이 없다. 그리고는 '욕심과 분노를 절제하라'고 충고했으니 원으로 상징된 우리들의 본심은 주역의 어머니이다. 이것이 욕심을 낳고 분노를 낳지만 알고 보면 그 자체는 음과 양, 어느 것에도 극으로 치달리지 않아 하도 커서 태극이요, 양극이 없으니 무극이다. 주역을 이 둥근 원을 탐사하지 않은 채 공부하는 학자들을 단지 지식종사류의 공부벌레라 부르는 이유는 바로 그 현학의 허물 때문이니 쉬운 것을 어렵게 만드는 악취미 때문이다.
  요컨대 주역이 일명 세심경, 씻을 세, 마음 심의 뜻인 '마음 비우기 경전'이라 불리우기 때문에 이는 학문이 아니오, 도에 가깝다. 그러나 작금의 서양 분석 과학식의 심리구조 해부는 마음을 다스리는데 괴로움을 즐거움으로 치료하는 허물이 있다. 예를 들면 오늘의 고통을 과거의 즐거웠던 추억으로 인도하여 잊게 하려는 수작을 부리곤 한다. 아니면 가장 인류가 속기 쉬운 미래의 환상과 비젼 등을 가공으로 만들어 오늘을 잊게 하는 더욱 교활한 방법도 있다. 듣건대 이는 변소 안에 앉아서 향수를 뿌리는 격이요, 변소를 뛰쳐나가는 근본적인 발상은 아니다.
  그래서 필자의 주역 탐구는 매우 그 현학적인 요소가 결여된 바 무식함을 면치 못하나 오직 비교 없는 본질적인 마음의 거량에 힘을 썼으므로 이는 어찌 보면 너무 쉬워서 콧방귀가 나올 지경이다. 선 문중의 후예인 필자는 보일 시자 단순할 단자의 복합 글자인 선의 파자 풀이대로 선이란 그저 말 그대로 단순하게 보거나 보이는 요지가 그것이다. 우리는 단순하고 쉽게 있는 대로, 제법을 실상대로 보는 천진한 눈을 가져야 한다. 일컬어서 석가 세존의 법인 즉, 제행무상, 제법무아, 제법실상의 제일 마지막 실천적 요소인 '있는 그대로 선입관 없이 보기 운동'인 제법실상의 구현이 주역의 부활 운동이다. (건강으로 가는 주역탐구)는 64괘의 길흉을 따져 그 미래의 행, 불행을 점치는 데 있는 것이 아니요, 저 역사적으로 고명하신 새옹지마 일화의 주인공인 옛 중국 변방 요새의 늙은이와 같은 길흉화복에 무심한 도의 덕을 개발함이다. 이 덕은 필히 이웃이 있어 외롭지 않을지니, 공자께서 일찍이 '덕불고 필유린'이라 갈파하신 바이다. 베풀고 그 은혜를 주장하는 유치의 덕이 아닌 진짜 도덕은 바로 상없이 베푸는 무주상의 보시행에 근거를 두며,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성경에 근거한다. 비록 알아주지 않아도 그 도의 무심덕은 천지를 감화시켜 심지어는 돌조차도 머리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는 옛 선객의 설법을 근거로 한다. 그러므로 건강과 주역은 필수적으로 만나게 되는데 이 마음을 씻는 세심경의 길은 건강의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여기는 청주의 상당 산성... 옛날 고불 조주선사께서 '아재청주작일영포삼중칠근'이라 일갈하신 선문답의 일화가 생각나는 청주의 산꼭대기이다.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갑니까?'의 질문에 '내가 청주에 있을 때 삼베 적삼 하나를 만들었는데 그 무게가 일곱 근이더라' 응수하신 뜻은 너무 쉬워서 머리 굴리는 학자들에게 뜻으로 쫓아가다 보니 어려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로 들릴 뿐이다. 그러니 그러한 유위의 대가리로 무위, 즉 인위적 조작이 없는 한가한 무심의 천진을 알 리가 없다.
  필자는 회고해 보건대 최선보다는 차선을 사랑하여 일 저질러 놓고 수습해 온 인생임을 부끄러워한다. 최선은 무엇인가? 무위 즉 아무 일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더러운 성품을 타고나 큰 소리 뻥 쳐 놓고 뒷감당하기에 허덕거리는 유의의 조작된 인생이란 말이다. 이 책제목만 해도 그렇다. 주역부터 꺼내 놓고 큰소리 뻥쳐 놓고 뒷감당을 잘못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운명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실로 어렵다는 주역을 감히 건강과 연결시켜 대단한 비밀이라도 건네 줄 것처럼 기대감을 주지만 이 서문만 잘 읽으면 끝나는 필자의 소견임을 아신다면 영리한 사람은 빨리 눈치 챌 수 있는 내용이다. 오늘 모 한의대의 학생과 함께 찾은 청주의 산성에서 민속주 대출 술을 앞에 놓고 서문을 쓰는 중이다. 고마웁게도 글의 타자 작업은 이 친구가 대행하니 편리하기 그지없다. 어제 전라도의 모 한의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강좌에서 만난 나의 제자들은 밤새도록 개똥철학을 늘어놓다가 한 친구의 결혼을 축하하러 우르르 경상도로 내려갔다. 필자는 바로 대전에서 청주까지 이 학생과 같이 별 목적 없이 왔다. 왜냐하면 내일의 강원도 모 한의대의 특강까지는 제법 시간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 친구는 바로 어제 자신의 미래 반려자를 공항에서 이별하고 온 주인공인데, 외국 유학 열풍의 소용돌이 속에서 회자정리 즉'만난 자는 이별하고야 만다'는 사바세계의 쓰디쓴 약물을 소화시키고 있는 중이다. '이별은 죽음의 예행 연습이다'는 간밤에 필자가 말해 준 화두 같은 언질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좀더 단순해진다면 확실한 것만 챙길 수 있다. 다른 것들은 다 불확실하지만 죽는다는 것은 확실히 다가온다. 필연적으로 누구에게든지 아니, 어떠한 생명 세계에도 통하는 참다운 사실이다. 여기에 좀더 매끄럽게 다듬은 말로 색칠하자면 변하지 않는 이치는 '모든 것이 변한다'는 사실뿐이라는 결론이다. 그래서 주역의 역자는 오행의 행과 제행무상의 무상성과 상통하며 헤라클레이토스의 그 유명한 명언 '우리는 결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명제와 함께 동서 고금의 진리와 만나게 된다. 그러므로 예수의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말씀에 덧붙여 그 자유가 건강이라면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진리를 터득해야 하고 진리적 패러다임(Paradigm)을 설정하면 건강은 저절로 굴러 들어오게 된다.
  누가 감히 건강과 자유를 연결시키는 작업을 부정하겠는가? 우리는 건강을 위해서 별의별 지저분한 짓거리들을 서슴없이 해치우곤 한다. 정력이 건강의 바로미터인 줄 알거나, 근육의 강인함이, 혹은 허리의 날씬함이, 혹은 건강 식품의 선택이, 혹은 보약이, 혹은 값비싼 종합 검사가, 혹은 어떤 특수 동작이, 혹은 어떤 수행법 등등이...
  기라성과 같이 즐비한 건강법은 알고 보면 모두 이 주역의 '역'자 하나를 확실히 이해하는 곳으로 통한다. '모든 것은 항상됨이 없다'는 것 즉 만나면 헤어지고 산 것은 죽어 가는 변화 뿐 아니라, 헤어짐은 또다시 만남의 원인이요, 죽음은 생의 원인이 되는 순환론적 사고방식인 진리를 철저히 이해함은 그리 어렵지도 않다. 왜냐하면 사실을 외면 하지만 않으면 우리는 이 '변한다'는 진리를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내 앞의 저 젊은 친구는 '자기 사전에는 이별과 죽음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프로그램이 입력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나이를 더 먹는다는 것은 역시 많은 변화를 체험한 바, 어느 정도 주역에 달통해 있다는 뜻이기도 한다. 믿음과 배반, 유식과 무식, 흥망성쇠, 길흉화복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아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데 인간만이 어리석게 한쪽 면의 달콤함만 지속되기를 열망한다. 어리고 어리석은지고... 그래서 진리가 어려워지고 나를 강조하게 되고 너를 경시하게 되어 우리는 상호 공존의 도덕을 잊어먹어 왔다. 이는 당연히 승패 논리가 팽해하는 원인이 되어 인간 관계는 이기지 않으면 지는 관계로 발전해 왔다. 아니 영적으로는 오히려 퇴보해 왔다. 서로 같이 공존하여 상생하는 도덕은 어느덧 찾아보기 힘들게 되어 버렸다. 그래서 쉬운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어리석다고 하여 백치화 시켜 버리고 어려운 승부 전술적 머리를 굴리는 간사함과 교활함이 이 지구촌에 넘치고 넘쳤다.
  청소년은 이미 세뇌되어 머리는 승부로 꽉 차 있어 단순하게 되기에는 이미 늦어 버려 성인병이 이제 소년 소녀들에게도 넘친다. 소위 마음이 경직되어 나타나는 성인병이란 마음이 천진하고도 단순한 어린이들에게 나타날 이유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악화는 양화를 구축하듯 이제 복잡함이 쉽고 단순한 것을 이기게 되어 버렸다.
  (건강으로 가는 주역 탐구)는 '단순성의 회복'이다. 순진성의 개발이다. 요란한 건강 정보에 대한 맹신은 본질을 놓치게 만들어 내 자신 속의 천진무구한 무소유의 본성을 잊게 만들었다. 아! 좀 쉽게 살자 좀! 좀 쉽게 살수도 있으련만... 아! 도시인의 아니 전 인류의 비비 꼬여진, 게다가 헝클어진 삶을 보다 못해 오늘은 경전을 읽어보자. 그대가 경전을 읽는다 하나... 생전의 사부, 혜암 노선사께서 즐겨 읊으신 작자 미상의 선시가 문득 생각난다. 이로써 서문을 맺는다. 군독반야경(그대가 반야경을 읽는다 하나), 반야부재경(반야는 경전에 없도다), 경종반야출(경은 반야를 좇아 나왔으니), 반야독반야(반야가 반야를 읽는구나) 강연 여행 중 쓰다.
  
      초판서문
    도시에서 살아 남는 법
  취나물 망초나물 메나물을 살짝 데쳐 꼭 짜서 섞어 놓는다. 물론 비빔밥에 얹어 먹기 위해서다. 머위대는 껍질을 벗겨내고는 역시 삶아놓는다. 씀바귀는 숭숭 뜯어 초고추장에 무쳐놓고, 돌나물인가 돈나물은 그냥 묽은 초고추장에 버무려놓아도 좋고 물김치도 좋다. 열무를 듬성듬성 잘라서 김치 담그고 방아잎새를 띄워서 된장국을 끊여놓고, 딸기를 한 보시기 따놓고는, 토마토를 썰어 놓는다. 쑥튀김을 뉘 알랴? 이 기 막힌 바삭바삭한 맛을... 쑥을 그냥 뜯어 밀가루에 풀어 튀겨보면 못 보던 맛이... 자! 커다란 발우 그릇에 고추장을 한숟갈 듬뿍 넣고 취나물, 망초, 메나물, 머위대, 씀바귀, 돈나물, 열무, 방앗잎새와 된장을 넣고 썩썩 비빈다. 쓰윽 한 숟갈 입에 넣어 가다보면 채 골고루 비비기도 전에 반을 먹어 치우게 된다. 사이사이 토마토도 섞어 넣어본다. 딸기도 씹어가며...
  취나물 향기가 왼쪽 코에 풍기면 방아의 아릿한 냄새는 목젖에서 울린다. 머위대의 멀컹멀컹한 맛과 그 유독한 듯도 한 향기는 머리가 띵한 듯하고, 원두막 앞의 앵두꽃이 유난히도 많았던 걸 기억하며 꽤 많은 앵두를 꿈꾸면서 앵두나무를 지긋이 내려다본다. 백장미가 싱싱한 오늘 아침은 서투른 솜씨로 사진을 박아 보았다. 장미 이놈을 내려다보고, 옆에서도 보아가며 수선깨나 떨어가며, 셔터를 누르다 보니 금방 진력나는 내 마음은? 아서라! 웃통이나 벗자! 따가운 햇빛을 등줄기에 쏘이면서, 이로 인해 피부암이 생겼다는 머저리 같은 미국 육상 선수를 생각한다. 경기력 향상, 승부욕, 초를 다투는 경쟁심리의 발작이 곧 암의 원인인 줄도 모르고, 태양 땜에 암이 생겼다나?! 어리석도다! 어리석어... 쉬어라! 해앞에서! 뛰어라! 달앞에서! 바보들아! 천치들아! 뻐꾸기는 맹꽁이 소리와 어우러지고, 시원한 약수를 그릇 찾다말고 큰 주전자께 주둥이를 대고 마셔본다. 죽을 듯하던 계수나무 묘목은 이제 서로 키를 다투며 무성하게 자라고, 센바람에 뿌리까지 뽑힌 옆집 밭의 향나무에 비해 이쪽 향나무는 끄덕도 안 했음을 대견해 한다.
  서울로 살러 나갔던 날들이 어느덧 황폐해지고, 높은 빌딩들이 안쓰러워 보일 때 이제는 차머리를 돌리기조차 싫어지는 서울-서울-. 바퀴벌레처럼 끈질긴 콘크리트의 삶을 자랑하는 문명인들은 똑같은 신문과 방송의 뉴스를 아끼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 벌레같은 소식을 모르면 사람축에도 못 낀다지?! 아마? 한줄기 바람이 서늘하게 내려오는 검단산의 황류골은 비포장따라 제법 올라와야 하는 골짜기라서 사람도 드물다. 돈 없는 시골 사람들은 자위하하면서 혹은 반은 진심으로 '도로포장을 안 해야 돼! 서울사람 밀어닥쳐서 다 망가뜨릴 것이 뻔해! 하는 마을. 그러나 서울의 누구누구 회장댁 가족묘지가 가까이 있는 덕에, 이제 죽을 때를 짐작한 현명한 재벌 가족들이 수천만 원 들여서 콘크리트 도로를 만들었을 때는 싫지 않았던 동네 사람들- '역시 편하긴 편해! 그러나 묘지로 가는 포장된 길은 일부라서...' 아쉬워하기도 했던 뚝 잘린 반쪽 포장길... '잘됐어! 도로공사 다하면 서울 놈들이 들끓는다니까!' '괜찮아유!' 해놓고는 뒷소리는 사뭇 다른, 착할 뻔하다 만 사람들-. '하려면! 다하지! 젠장! 이왕하려면?!'
  도시인을 닮은 신경질적인 개가 물어뜯어 거지반 뿌리조차 없어질 뻔한 도시의 등나무를 이 골짜기 정자 앞에 옮겨심은 지 1년-. 쩍! 뽀개서 둘로 나눠 심었더니만 이젠 제법 줄타고 오르기 시작하는 등나무를 보자. 호미로 푹 찍어 '살려면 살고!' 캐다 심은 칡덩굴이 미루나무를 감고 올라 꼭대기에 이르른 것을 보자!.. 죽지 못해 사는 도시 사람들-. 엉거주춤-. '다 자식새끼 교육 때문인지 뭐!' 자발적이지도 않으면서 은근한 자신의 희생을 슬쩍 억울한 듯 자랑삼는 아버지들... 이제 세기말의 심리 해부의 마술사 '라즈니쉬'를 읽는다. 상처받고 있는 여성들-. 남성 내면의 여성과 여자 내부의 남자가 숨어 있음을 깨달아 그 두 에너지의 만남이 곧 참 오르가슴(Orgasm)이라... 그 커다란 느낌은 오히려 여성 쪽이 강한데... 미묘한 열등의식으로 남성은 여성을 거꾸로 핍박한다는 심리분석-. 여성해방이 담배와 청바지와 남성의 흉내에서 오는 듯 착각하는 여권 운동가들-. 그래서 정치에도, 전쟁터에도 나서야 한다는 여권신장 운동가들-. 힘을 얻기 위해 유일한 무기인 육체를 매혹적으로 가꾸는 정치성 매력...
  개처럼 졸졸 따라다니는 남성들에게 대줄 듯 안 대줄 듯 거리를 두는 책략적 매력전술-. 사랑조차 전술이 되어버린 섹스 전법의 포로가 된 여성과 남성-. 명상이란 '넌섹슈얼(Nonsexual)오르가슴' 이라는 라즈니쉬-. 성을 통하지 않은 오르가슴, 마하무드라-. 지루함과 거짓과 위선, 귄위, 핍박, 교활로 뭉쳐진 결혼제도. 창녀제도는 결혼제도의 부산물이라고 주장하는 반역과 독설의 성자 라즈니쉬-. 그를 읽는다. 그에 젖는다. 남자를 해부 당한다. 남성이 곳곳에서 피를 흘린다. 여성과 남성의 전쟁터가 되어버린 이 지구촌을 범범하게 바라볼 수 만은 없는 것 같기도 한데... 정오로 돌진하는 태양줄기에 등이 타면서 꼼꼼히 익는 냄새가 나는 듯-. 간밤의 이슬은 어느덧 타서 날아 공중으로 사라지고 잠자리 비행기가 허공을 뚫고 날아온다. '종이와 연필' 가지런히 놓아두고 산보를 나가보자. 그나마 사람이 없다면 홀딱 벗고 걸어보고 싶건만... 아까 농부가 경운기를 타고 올라간 기억이 난다. 아서라! 체면 유지상 바지는 입어야지! 용기도 없는 초라한 의생 금오는 남의 눈치나 보며 살아왔는걸, 뭐?! 체면치레나?! 발꿈치나 바짝 세워 올리고 걸어나볼까? 걷자! 걷자! 검단산 골짜기를...
  
      제1장 도시에서 살아남는 길
    사상의학이란 이런 것이다.
  체질은 변하지 않는 것인가.
  사상의학이라는 엄청난 명제는 현 한의학계의 최대 난제 중의 하나요, 실제로 사상의학의 창시자인 이제마 선생조차도 말년에는 그 어려움을 솔직히 시인하였을 정도의 체계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름이 아니라 그 만큼 인간의 질병이 복잡다단하고 난해하다는 암시이다. 좀더 쉽게, 좀더 간명하게, 좀더 인체의 신비를 도식적, 도표적, 분류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밝혀 내려한 조직적인 시도가 과연 합당한 것이었는지도 살피지 않으면 안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필자의 결론적인 의견은 유기체인 인간의 생리, 병리, 체질 등은 분석적으로 분류, 파악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결론이 성급한 것 같지만, 단순히 물질만이 아닌 정신과 육체의 정교한 고등 짜임새인 인간 구조는 그대로 낱낱이 각각의 훌륭한 개성을 지나고 있기 때문이다.
  의사의 고민은 바로 이 점에 있는데, 이 다양한 분화성 등을 어떻게 파악할 능률적인 방법은 없겠는가 하는 것이다. 독자들은 성급히 사상체질 분류의 지식을 습득해서, 과연 나는 어떤 체질에 속하는가 빨리 자신을 알고 싶어하겠지만, 필자는 섣불리 사상의학으로의 입문을 서두르는 것은 진리와의 만남에 장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천천히 그리고 정확하게 진리에 접근해야 한다. 조급성과 서투른 분류나 분석은, 이 세기의 가공할 만한 서양 물리학을 기반으로 해서 나타난 허구적인 인간 분석학을 낳았고, 나아가서는 물질과학을 기반으로 한 의학조차도 일부분을 제외하고는 인간의 생리, 병리를 오도시키고 있는 현실이다. 먼저 우리는 '체질이란 무엇인가' '체질의학이란 과연 어떤 발상법에서 나온 것인가'를 검토해야 한다.
  왜? 사람들은 그렇게도 자신의 체질을 알고 싶어할까? 그와 마찬가지로 의사, 의학자 모두가 체질의학을 연구하고 싶어할까? 일생 동안 끌고 다니는 자신의 몸조차도 타인(물론 권위자이기는 하지만)의 판단을 기대하는 심리 현상도 의아하지만, '오죽 자신을 아는 일이 어려우면 그럴까' 동정이 아니 갈 수 없다. 우리는 옛 아테네 '델포이 신전'의 신탁, '너 자신을 알라' 이 말씀을 좌우명 삼아 조사해 나가야 한다. 의학자도 환자의 체질 운운하기 전에 스스로 자신의 현상에 대한 치밀한 관찰이 선행되는 연구를 진행시켜 나가야 한다. 환자도 무조건 의탁적 사고 방식으로 자신을 분석해 주기를 바라지 말고, 스스로 자신의 육체를, 심지어는 심리적 진행 상황까지도 예민하게 지켜볼 수 있는 내면 성찰이 앞서야 한다. 환자의 체질도 모르는 의사, 모든 질병의 원인을 바깥으로 돌려버리는 환자, 이 두 가지는 모두 진실의 접근을 방해하는 암적인 요소이다.
  각설하고-. 사상이라는 언어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가? 이를 고찰하려면 먼저 우리는 동양 신비의 고전 (주역)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사상이라는 어원이 바로 (주역)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태극기의 한가운데 그려져 있는 바로 그 태극 마크에서부터 출발되는 '주역사상'의 통찰 없이는 사상의학의 소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태극은 사상을 낳고, 사상은 팔괘를 낳고 팔괘와 팔괘를 곱하여 육십사괘를 형성하는데... 태극기 가에 있는 네 가지 즉, 건, 곤, 감, 이의 괘상은 사상에서 한 번 더 분화된 팔괘의 일부분이다. 건곤은 하늘과 땅, 감리는 물과 불의 뜻이 포함되어 있는데, 팔괘와 태극의 중간에 위치하여 그 이름을 태양, 태음, 소양, 소음이라 호칭되는 이 사상의 개념에서 태양인, 태음인, 소양인, 소음인의 사상 체질 분류법이 나왔다는 이야기다.
  다시 이러한 모든 것을 도표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도표설명. 태극에서 음과 양이 나온다. 음에서는 태음과 소양이 나온다. 다시 태음에서는 곤(지),과 간(산)이 나온다. 소양에서는 감(수)과 손(풍)이 나온다. 양에서는 소음과 태양이 나온다. 다시 소음은 진(뢰)과 리(화)가 나온다. 태양에서는 태(택)와 건(천)이 나온다. 이런 순서로 표현되는 (주역)의 깊은 뜻은 이렇게 개화된 과학문명 시대에서도 파악될 수 없는 수수께끼이다. 최근 불고 있는 동양학의 재조명 바람은 서구 사회의 유행인데, 그들의 과학에 물들어 찌든 두뇌로써는 도저히 추리해 낼 수 없는 (주역)의 우주 관찰 시스템이다.
  단순히 하늘, 바람, 우뢰, 연못, 불, 물 등등의 요소를 우주의 구성 요소라고 인식했다는 식의 멸시적 사고는, 옛 성인들을 모독하는 발상이다. 적어도 동양 고대의 현명하신 성인들, 현인들의 가르침이라면 한번쯤 귀를 기울여 볼 만하며, 깊이 명상적 차원으로 음미해 볼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봐야 한다. (주역)의 기본 사상은 곧 진리의 갈파에 있는데, 진리란 과연 어떠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가?
  먼저 진리란 특성이 있어서는 안 된다. 보편 타당성이 있어서 두루두루 적용되지 않는 곳이 없어야만 한다. 또한 시간성도 초월해서 어느 때나 과거, 현재, 미래 모두 적용되어야 한다. 먼저 그 제일은 '주역'의 역자에서 보여지듯이, 변화의 성품은 곧 진리의 쓰임새이다. 변할 '역'자 그대로 모든 현상은 머무르지 않고, 변화해 간다는 '제행무상'의 탁월한 관찰법이 전제되지 않는 한 진리의 각성은 힘들다. 즉 우주 최고 진리의 첫째 명제는, '변하지 않는 것은 이 세상에서 하나도 없다는 그 이치만이 영원히 변할 수 없는 진리' 바로 이것이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는 '오직 영원히 변하지 않은 것은 영원히 있을 수 없다'는 사실뿐이라는 뜻이다.
  무슨 궤변 같은 이 말에 독자 여러분께선 심히 당황해 하실지도 모른다. 하나 진리는 어디까지나 진리다. 우리의 무의식적 소원이 항상 영원한 것의 실재를 믿고 싶어한다 해서 진리의 속성을 뒤바꿀 수는 없다. 그래서 성인께서는 무상의 진리를 설파하셨고, 동양철학에서도 역시 '역'을 먼저 주제 삼고 나온 것이다. 만약 이것을 깊이 마음에 아로새겨 적용시킬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체질조차도 무상의 원칙에 따라 변화할 수 있다는데 그 의견을 같이할 것이 아니겠는가?
  첫째 명제를 까먹고 분류적 논리에 맹신적으로 의존하다 보면, 어느새 나는 XX인, 너는 OO인이라는 고착적인 관념의 노예가 된다. 그리하여 무슨 음식은 해롭다, 이롭다, 무슨 약이 좋다, 나쁘다, 사람, 직업, 심지어 방향까지도 자신의 체질에 예속시켜 놓고 자승자박하는 이론의 노예가 되기 쉽다. 필자는 실제로 너무 많이 이런 서글픈 현상을 목격하고 있는 임상가이기에 충고를 드리고 싶다. 첫재의 명제는 모든 현상의 변화성, 무상성이다. 나의 몸과 마음도 이러한 진리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나의 몸과 마음은 모든 우주 자연 현상의 일부분일 뿐이다. 진리는 우주의 섭리인데 진리가 무상하므로, 우주의 축소 모델인 소우주인 인체 역시 무상성의 원칙대로 항시 변화할 것이 틀림없지 않은가?
  이와 같이 의외로 매우 단순한 사실의 정확한 인식을 토대로 체질의학 역시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그러므로 몸과 마음을 이렇다 저렇다 분류시켜 놓기 전에 '체질도 항상될 수는 없다'라고 소화시킨 상태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체질의학의 연구는 바로 이 가변적 가능성에 인식의 토대를 두고 나머지 부수적 현상을 관찰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 무상성과 짝을 이루는 두 번째 진리의 속성은 무엇인가? 이는 곧 상대성이다. 상대성!? 이는 아인슈타인만의 독점물이 아니다. 상대성은 그가 발견했기 때문에 그때부터 존재해 온 것이 아니라, 이미 태고적부터 상대성은 엄연히 존재해 온 진실이다. 아까 제시한 도표에서도 음과 양은 상대적이고 사상 분류에서도 태음과 태양이, 소양과 소음이 상대적이다. 하늘과 땅, 물과 불, 바람과 우뢰, 산과 못이 상대적이다. 또한 나와 너, 여자와 남자, 해와 달이 상대적이고, 유식과 무식, 빈부, 선악, 우열, 귀천, 미추 등등.
  사상체질은 선천적인가, 후천적인가.
  근대의학 개념으로는 유전학적 개념에 가까운 선천적이라는 개념은 사실상 불변의 이미지를 지니며, 후천적이란 인위적인 노력에 의하여 개선시킬 수도 있는 그 어떠한 가변의 가능성을 얘기한다. 앞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진리의 무상법칙에 의하면, 선천적인 어떠한 것, 즉 절대 불변의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 예를 들어 체질 의학을 이해해 보자. 자동차도 여러 가지, 디젤 엔진의 트럭, 버스와 고급휘발유 엔진의 승용차, 경주용차 등등이 있다. 자동차가 이미 트럭으로 결정되면 할 수 없이 운전사는 디젤유를 넣어야 한다. 어떤 운전사는 성격이 거칠어서 마구 차를 몰다가 차의 수명을 단축시키기도 하고, 온유한 성품의 운전사는 비록 고물이 된 차라도 오래 몰고 다닐 수 있다. 이 운전사의 성품은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수정될 수 있다. 그러나 차종은 이미 결정적인 것이다.
  이미 어느 정도 결정된 그 분수를 안다는 것이 바로 체질의학의 기본 교훈이다. 물론 차를 뜯어고치면 용도가 변할 수는 있지만, 대체적으로 그 차가 그 차됨의 속성을 그대로 이해해서 충분히 그 장점을 살리자는데 그 의의가 있다는 뜻이다. 후천적 요인의 수양과 지혜로운 섭생 없이는, 즉 이 육체를 운전하고 다니는 운전사인 마음의 조절 또는 절제력, 통제력이 없이는 아무리 고급 승용차를 선천적으로 물려받았다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부잣집에 태어나서 고급 승용차를 물려받았다 해도 개망나니 자식이 험하게 취중운전이나 하다 멸망한다면, 차라리 개인택시 하나라도 조심조심 잘 몰고 다녀서 늘그막까지 자식 손자 잘 보살피는 편이 바람직한 것은 뻔하다.
  사실 사상체질 의학적 관점으로 보면 완전 무결한 차도 없으려니와, 인간은 선천적으로 허와 실 양면을 가지고 태어나게 되어 있다. 이 관점에서 항상 문제를 삼아야 할 것은, 어떠한 성향의 체질인가가 문제이지 꼭 못을 박아놓은 결정적 허실론이 맞는가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가 바뀌면 그 허실도 바뀌는 것이다' 라는 크나큰 전제를 유념해 둘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마른 사람은 대체로 수분이 부족하기 쉽다. 그러므로 간단하게 그에게 권장할 식품과 금할 음식에 대한 충고를 할 수 있다. 평범한 예를 들어보자.
  건조한 체질 그러나 몸이 더운 체질의 금기 사항(약칭 DH형 : 필자의 가설)
1. 땀내는 일 : 사우나, 용광로 옆의 작업, 대장간의 노동 등 일체 불 근처에서의 작업, 한 여름의 과로 등으로 확대해석이 가능하다.
2. 분노의 경계 : 분노는 열을 수반한다. 고로 몸의 진액을 말린다.
3. 색욕의 경계 : 성적인 충동은 곧 열의 근원지이다. 고로 몸의 정액과 수기를 고갈시킨다.
4. 건조한 음식을 금함 : 담배(이는 몸을 건조하게 하는 것 중의 제일이다) 마른 나물, 강냉이, 튀밥, 건어물(쥐포, 노가리 등)
5. 독한 술 : 술이야 대체로 다 열적인 음료이므로 무조건 금해야겠지만, 그중 더욱 양주, 고량주, 소주 등의 알콜 농도가 진하면서 쓴 술은 아주 해로울 것이 자명하지 않은가? 술의 남용으로 열이 오르면 땀이 날 것이고, 감정이 격해지기 쉬워 잘 다투다 보니 말이 많아지고 화를 잘 내며, 게다가 옛부터 주색은 꼭 같이 붙어다니다시피 자칫하면 음탕한 화기가 몸을 감싸게 되어 술 깬 후의 후회 막급한 체력의 소모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 DH형의 체질이 부득이한 사정으로 술을 마셔야 한다면, 맛이 시고 수분의 양이 많은 과일주나 차라리 맥주가 어떨런지... 보리로 만든 맥주는 겨울의 기운을 많이 받아 약간 찬 성분이 있기에... 이 말 들으시고 그렇다고 합리화시켜 DH체질은 맥주나 과일주를 과음 또는 폭음은 금할 일이다.
6. 금기 약물과 음식의 맛 : 아주 덥거나 건조한 약성을 지닌 약물로 부자, 반하, 계피, 남성 등등 그리고 매운 음식일체(겨자, 후추, 고추 등등 모두).
  자! 현명하신 독자께서는 이 한 가지의 쉬운 보기를 통하여 눈치채셨으리라. 반대로 뚱뚱하고 몸이 냉한 체질(약칭 FC형)의 권장 사항과 위의 DH형의 금기 사항이 같을 수 있다는 것을...
  DH형에게 알맞은 권장 사항의 예를 다시 한 번 연구해 보자.
1. 진액을 보충시킨는 맛을 지닌 약물과 음식, 진액을 보충시키는 맛은 어떠한 것일까? 그 중 신맛을 제일로 치고 단맛, 짠맛의 순서이다. 아마도 매운 맛이 진액을 보충시킨다는 억지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일체의 신맛을 지닌 음식과 약을 섭취해야 할 것이다. 단맛과 함께, 살구, 사과, 모과, 산수유, 오미자, 식초, 레몬, 귤 등... 아쉬운 대로 습관적으로 먹으려면, 비타민 C 정제도 괜찮다. 생각난 김에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비타민의 과용으로 '과비타민증' 이라는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한 지 이미 오래다. 그중 한 가지 예로 동양의학의 단순 명쾌한 관점을 얘기해보자. 비타민 C는 맛이 시다. 맛이 시다는 사실은 그 신맛이 작용하는 보편적 진실의 현현을 먼저 탐구해야 한다. 해물 시장에서 해삼 장수 아주머니가 흐물흐물해진 그 놈을 팽팽하고 신선하고 딱딱하게 만들기 위해 진한 식초를 부어서 장난친다는 사실은 다 아는 사실이다. 우리는 꼭 전문가의 의견을 참조하기 전에, 스스로 판단하는 지혜를 지녀야 한다. 식초뿐 아니라, 우주 안에 존재하는 일체의 신맛은 수렴지기가 있다. 즉 거두어들이는 작용이 있다는 말이다. 산수신산, 신맛은 거두고 매운 맛은 발산한다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자꾸 많이 거두어들이면(?) 뚱뚱한 사람에게는 과연 신맛이 좋을까? 과연 어떤 체형이나 체질에는 비타민 C가 맞지 않으며, 쉽게 '과비타민증'의 반응을 나타낼 것인지, 지혜로우신 독자께서는 판단하셨으리라.
2. 호흡법과 긍정적인 사상 : 그중 단전호흡법이되, 약간 들이 쉬는 숨을 길게 하는 호흡법과 함께 만족할 줄 아는 정신수양을 말한다.
3. 식물성, 동물성 기름
4. 일체의 씨 종류
5. 습지에서 자라는 식물류
  흔히 고사리가 양기에 좋지 않다는 등의 속설이 난무함이 맞을까? 페니실린이 처음 지구에 등장하여 수많은 생명을 구해 줬다. 그러나 얼마 후 '페니실린 쇼크'가 도처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약은 곧 독'이라는 좋은 예인데, 획일적인 처방이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없다는 뜻이다. 즉 페니실린이 맞는 체질이 있고 안 맞는 체질이 있다는 고려를 먼저 할 수 있는 관점이 곧 지혜로운 묘관찰지의 경지이다. 서양 과학문명의 가장 취약점이 바로 단순하지 못한 분석적, 논리적 우주관이다. 그러다간 나무를 보는데 심취되어 숲 전체를 보지 못한다. 페니실린이 분명히 어떠한 염증을 유발시키는 균을 죽임을 알게 된 것은 '플레밍' 이라는 과학자가 우연히 푸른곰팡이가 세균의 배양을 억제하는 사실을 발견한 데에서 기인했다. 푸른곰팡이의 에센스(Essence), 즉 그의 정-가장 정제된 추출 물질-을 사용해 본 것이다. 그만큼 성분이 강력해졌는데 그만큼 독성도 역시 강해졌다. 추출된 페니실린에만 집착하면 자칫 습지에서 자라는 곰팡이의 전체 속성을 놓치기 쉽다. 습지의 왕인 곰팡이는 곧 모든 유기체에서도 습한 작용을 일으킨다는 결정적 가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곰팡이는 몸에 수분 저축이 많은 사람에게는 해로울지도 모른다'는 아주 간단한 의심조차 해보지 않은 것이 과학자들의 맹점이다. '뚱뚱하고 냉한 사람의 염증성 질환에는 페니실린이 맞지 않는다'는 단계적 논법의 결과를 이미 동양의학자가 알고 있다는 사실은, 의외로 진리는 간명하게 보아야 할 때가 있다는 점을 증명한다. 각설하고, 습지에게서 자라는 식물인 '고사리가 양기에 좋지 않다'는 속설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한다. 만약 비대한 체질이 고사리를 마구 먹어댄다면 어떨까? 습한 곳의 동물인 지렁이, 굼벵이 등등을 양기에 좋다고 마구 먹어댄다면 어떨 것인가? 상상에 맡길 수밖에. 모든 약은 상대적으로 작용할 때 빛이 나는 법이다. 고사리, 버섯 종류, 미나리 등은 마르고 열이 있는 DH형에게는 아주 좋은 양기 식품이다.
  양기란 화를 뜻하는데 기름이 없는 불이 어디 있겠는가? DH형은 다음 페이지의 그림 나와 같은 형이라서 불을 보존하려면 빨리 기름을 넣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곧 양기를 복돋우는 비결이다. 즉 음을 보충함이 곧 양을 보충시킨다는 이론이다. 성적인 흥분과 발기 능력이 곧 양기와 직결되는 듯한, 무지몽매한 대중들의 발상에 전혀 동조할 수 없다는 필자의 의견이다. 정확한 음양관을 훗날 다시 피력할 것을 약속한다. 다만 이 같은 두 가지로 예로 미루어 추측하시어, 앞으로 진행되는 체질론의 입문을 삼아주시기 바란다. 또한 가장 쉽고 단순하게 그리고 천천히 우리의 상식선에서 파악되어야 한다는 필자의 의견을 지켜봐 주시기를 바라면서...
  사상은 관상인가, 심상인가?
  옛말에 '관상이 골상만 못하고 골상은 심상만 못한다.'는 말이 있다. 관상, 골상이라 하면 대체로 선천적이니 만큼 보통은 운명론적인 성격을 지닌다. 그것을 얼마든지 바꿀 수가 있을까? 이것은 엄청난 문제이다. 그렇게 생긴 놈은 대충 그러한 생각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는 이론도 아주 틀리는 것은 아니다. 보라! 개는 개의 모양을 지니면서 특유한 성격을 지니고, 뱀은 자기 모양대로 뱀 특유의 성격을 지니지 않는가? 세존은 사생의 자부이시다. 사생은 곧 태, 난, 화, 습의 사생인데 전 중생계에는 대체로 네 가지 유형의 탄생 방법이 있다. 크게 네 가지 체질이 있다고 본다면 이는 어마어마한 불법의 체질론이다. 인간은 아무리 떠들어봐야 태생성 중생이다. 물론 알에서 태어난 고대의 신화도 있고 화신으로 나타나는 불보살이나, 옛날 임제 선사의 친구 보화 존자처럼 몸 그대로 변신하여 에너지화되어 사라져 천화했던 분도 계시지만... 어쨌던 대부분이 모태에서 10개월을 지낸 자궁의 산물인 태생이다.
  태, 난, 화, 습의 네 가지 유형 각각의 특성을 보자. 태생은 애정을 특징으로 하고, 난생은 난상(어지러운 상)을 특징으로 하고, 화생은 변화하여 이탈함을 주로 하며, 습생은 합하는 기운을 취한다고 세존은 증명하셨다. 고대 인도의 학설인 지수화풍 4대 원소의 비례로 보면 태생은 지기, 난생은 풍기, 화생은 화기, 습생은 수기의 편재되어 나타난 것으로 가설을 세워본다. 우리는 항상 어떠한 학설을 정립해 나갈 때 최초의 진리 원칙을 잊지 말고 전진해야 한다. '모든 것은 항상됨이 없으며, 나라고 주장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끔찍하게도 보편적으로 들어맞는 이 원리대로 보면, 태생은 언제나 태생일 수만은 없고 난생, 화생, 습생 역시 마찬가지이다.
  천상계나 지옥, 아수라의 부분적 유형인 화생류나, 인계 축생계의 일부에서 주류를 이류는 태생이나, 축생계의 대부분인 난생이나, 지렁이 등은 연체동물이나 아수라계 일부에서 나타나는 습생 같은 모든 생령들은 모두가 여섯 가지 육도 윤회를 하고 있지 않은가? 고로 인간 종류들이 들으면 섭섭할 얘기겠지만, 언젠가 우리도 알에서 태어날지, 이탈을 즐겨하는 천당 귀신세계 아수라나, 꼭꼭 합치는 즐거움을 누리다가 지렁이 같은 연체동물류로 태어날지 알 수 없으며, 거꾸로 이미 그러한 시절을 겪어왔는지도 알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무상하며, 꼭 이것이 나라고 주장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거꾸로 본다면 모든 생이 곧 나의 분신인 것이다. 깨달은 본심에 어찌 사생이 있으며 육도가 있겠는가만, 일으킨 숙업의 누적에는 분명히 사생 육도가 있지 않겠는가?
  전 중생이 대체로 네 가지 습기의 유형이라면, 그 각각을 훑어봄으로써 체질론의 힌트를 삼을 수도 있다는 필자의 가설 체계를 한번 들어보자. (화엄경)을 꼭 들추지 않아도, 모든 중생들의 성품 속에는 이미 모든 가능성이 존재해 있음을 눈으로 볼 수 있다. 남성과 여성에게는 각기 퇴화된 각각의 기관이 있다. 남성의 젖꼭지는 퇴화된 여성이며, 여성의 음핵은 퇴화된 남성의 상징이다. 절대적 남성, 절대적 여성은 없는 법이고, 그 퇴화된 증거로 보아 남성 가운데에도 여성이 숨어 있고, 여성 가운데에도 남성이 숨어 있기 마련이다. 확대해석하면 태생 가운데에도 난생, 화생, 습생의 가능성이 숨어 있고, 난생 등도 각각 역시 마찬가지이다. 인간만을 넷으로 나누기 전에, 전 중생계의 커다란 삶의 유형을 넷으로 살피는 것도 재미있다. 관찰상으로 가장 쉬운 것은 날개가 달렸는가, 안 달렸는가? 모체의 젖을 먹고 자라는가, 그냥 자라는가? 이탈변화(예 : 번데기-나방)를 하는가, 안 하는가 등등일 것이다.
  편의상 태, 난, 화, 습을 1.PC 2.EC 3.CC 4.WC라 약칭해 보자. 태생인은 PC 타입의 관상적 특징은(물론 전체 몸 현상 중 특징적 공통점이지만) 젖이 있을 것이고, 자궁은 물론 암놈은 생리(Menstruation)가 주기적으로 있을 것이다. 바로 이 PC 타입은 기본이 애정이라는 세존의 말씀이다. 정상이 많으면 곧 태생으로 태어날 확률이 많은데, 이는 대체적으로 입과 혓바닥이 발달되어 있다. 언어의 활용이 활발하고 접촉성 애무 주고 받기를 즐겨하고, 대체로 몸에 피부 또는 살결의 형성이 풍부하며 남근 여근이 비교적 뚜렷이 구분되어 있다. 또한 서로 만나서 마찰하는 성행위로써 종족 보존의 목적 달성을 시도한다. 서로 만나서 접촉하기를 즐겨하고, 의외로 교만하고 명예나 권력을 추구하며 공포가 많다. 난생인은 EC 타입은 관상으로는 털이 나는 짐승류에 해당하며, 심성으로는 어지러운 난상을 잘 일으켜 가만히 있지를 못하며, 마음이 잘 동하여 경망스럽고 조동 하는 경향이 있으며 공중날기를 좋아하는 종류가 많다. 화생인은 CC 타입은 몸이 변하기 쉬운 유질의 원소나 아주 미세한 에너지들의 집합체로써 이루어지거나, 날개가 달린 듯한 모습을 하며 신속히 변화하는 능력을 지닌다. 심상으로는 이탈, 변화, 초월하려는 속성을 가지며, 언제나 이 세상을 싫어하고 어떠한 영적인 것이나 초월적인 것 등의 존재를 믿고 그렇게 되려는 꿈에 산다. 습생인은 WC 타입의 관상은 유연성의 구조가 특징이며 대체로 뼈의 구조가 생략되거나 퇴화되어 있다. 습한 곳을 좋아하고 심상은 욕심이나 단합심 등이 강하다. 물론 이상의 네 가지 타입은 불설에 의한 것이지만 좁게는 인간계를 이 방식처럼 네 가지 타입으로 나누어본다 해도 필자의 이 가설은 참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마 선생의 사상의학과는 발상부터가 다르기는 하지만, 사실 사상이라는 말은 이제마 선생의 독특한 최초 발상이 아니라, (주역)의 2차 분화시 태음, 소양, 소음, 태양의 네 가지 괘상에서 유래한다. 참고삼아 필자의 가설체계를 도표를 보면 다음과 같다. 태극에서 몸통과 머리가 나오고 몸통에서는 안과 구가 나오며 안에서는 태음, 습생, 합상 순으로 나온다. 구에서는 소양, 태생, 정상 순으로 나온다. 머리에서는 이와 비가 나오며 이는 소음, 난생, 난상으로 나누어지고 비는 태양, 화생, 잡상 순으로 나누어진다. 이상과 같이, 대체로 분류가 가능한데 어디까지나 가설체계임을 인식하고 보아주시기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이와 함께 스스로가 어떤 체질인가를 자꾸 분류해서 나누어보려는 마음의 충동을 잘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본다. 사실은 이목구비가 정연하고 마음의 집착이 없는 사람은 어떠한 분류에도 속하지 않을 수 있다. 사상의 체질론에 물들지 않으면서, 전체적인 관찰을 공부하여 대해탈의 지견을 얻는 것이야말로 필자의 최종 목표이다. 왜냐하면 모든 인류의 최고 건강은 이 몸이 있는 한 불가능하며, 다시는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 열반의 경지에 도달해야 만이 비로소 질병과 늙음과 죽음이 없는 해결 장소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제자를 향한 마지막 자비의 말씀을 음미하면서 체질 분류로 분분했던 마음을 식혀보자. 장겁지소규 아금시획득 이도근경계 무진청량처 이지수화풍 적정불생멸 영제어우환 운하위아우. 오랜 겁을 두고 꾀하던 바를 나는 이제 비로소 얻었나니 모든 근의 경계를 이미 건너 다함 없는 시원하고 맑은 곳이네! 땅, 물, 불, 바람을 떠나 지극히 고요해 나고 멸하지 않아 영원히 걱정근심 버리었거니 어찌하여 나를 위해 슬퍼하는가? -마명보살, (붓타차리타), 고려원
  육식체질이 따로 있는가?
  우리 모두 독자들과 함께 지금까지의 대의를 복습해 보자. 모든 것은 진리를 벗어날 수 없고 우리의 체질론 역시 진리를 벗어날 수 없다. 진리는 무상이다. '향상된 것은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하에. '체질 역시 일생 동안 고정적으로 XX체질 OO체질이어서 불변한다'는 법은 없다고 확실히 인식해야 한다. 인생을 풍부하게 경험한 노인이라면, 이러한 무상관이 사실임을 체험을 통해서 스스로 잘 알고 있다. 다만 아직 젊고, 아직은 야심에 불타고 있는 청, 장년기에는 자신만은 예외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언제나 우리가 겸허하게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모든 것은 무상하다'는 탁월한 인식이다. 각설하고.
  우주는 크게 무생물과 생물의 두 가지로 분류된다. 곧 무생물인 공기, 흙, 불, 바람, 물, 바위 등등, 기세한의 세계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와, 생물 즉 의식작용이 있는 것으로 크게 나뉜다. 생물은 크게 동물과 식물로 나누어지는데 동물은 식물과 상호 보완작용을 해가면서 우주의 리듬을 창조해 나간다. 식물은 산소를 내어주고 동물의 배출 가스인 이산화탄소를 흡수하여 영양을 삼는다. 인간뿐 아니라 모든 동물의 생명 원천이 되는 산소는 곧 식물에서 내뿜는 배설물이다. 동물은 말 그대로 동적이며, 식물은 정적이다. 동물은 양적이고 식물은 음적이다. 동물은 움직이는 장점이 있지만 잘 쉬지 못하는 약점이 있고, 식물은 움직이지 않고 부동하는 장점이 있지만 움직이는 동적인 성분이 부족하다. 바꾸어 생각해보면 동물은 움직이는 괴로움이 있고 식물은 움직이지 못하는 괴로움이 있다. 태극은 음양으로 나뉘는데 하나는 움직이는 양이요, 다른 하나는 움직이지 않는 음이다. 양과 음은 서로 상호 보완작용을 하는데, 동물과 식물도 역시 상호 보완 작용을 하게 되어 있다. 동물은 식물에 의존해서 자신의 지나친 동적 기질을 다스릴 수 있으며, 식물은 동물에 의존해야 자신의 지나친 정적 기질을 조절할 수 있다. 그런데 보라! 동물 중의 많은 종류가 동물을 찢어 먹기를 좋아한다. 육식동물이 가지는 횡포와 광란은 참으로 가관이다. 그렇지 않아도, 동적인 동물이 자꾸 동적인 동물을 먹는대서야 참다운 조화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중에서 인간은 가장 잔인한 육식동물이다. 어떠한 동물이든 자신이 배고파야만 그 먹을 만큼의 살생을 해서 허기를 채운다. 먹지도 않으면서 살생을 하는 동물은 거의 없다. 사나운 호랑이, 사자라도 배부르면 눈앞의 사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그런데 인간은 배고프지 않아도 동물을 잘도 죽이고 게다가 같은 인간까지도 마구 죽인다. 웃기지도 않는 한심한 동물이다. 어느 날 개가 자꾸 쥐를 물어 죽인다. 그 개는 배가 고파서 죽이는 것도 아니고 그저 쥐를 죽이는 것이 마냥 재미나서 죽이는 것이다. 과연 이 개는 무슨 업인가? 이 개는 내생에 인간으로 태어날 징조의 개임에 틀림이 없다(?). 우리는 이제 체식의 이유를 알아야 한다. 동물은 식물에 의존하는 것이 원칙이다. 우선 필자 자신이 쓰고 있는 한약 재료에는 많은 동물들이 있는데 이는 부득이한 일이지만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고기를 먹지만 우리는 좀 비판받을 것은 비판 받아 보자. 다음의 기막힌 구절을 인용함으로써 필자의 의견을 대신하니 독자들은 이와 더불어 뼈저린 반성의 시간을 가져 보라.
  폭력은 신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폭력은 야만이다. 또 다음과 같은 간단한 진리에 사람들이 의문을 느끼지 않는 것은 인류 전체가 반쯤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대가 살아 있는 생명체를 죽여서 음식으로 만든다면, 멀지 않아 그대는 인간이란 존재 역시 쉽게 죽일 수가 있다. 그 차이가 무엇인가? 육식가와 식인종의 차이를 나는 알지 못한다. 사랑과 이해가 자비가 넘치는 사람은 채식가가 될 수밖에 없다. 또 나무들이 충분한 열매를 준다. 죽일 필요가 없다. 짐승을 죽이는 것은 농사짓는 방법을 모르던 과거의 수렵시대로부터 내려온 유물일 뿐이다. 마하비라(Mahavira)와 고타마 붓다는 인간이 살기 위해서 먹는 것이 아니라, 더 순수한 의식 상태로 성장해 가기 위하여 먹어야 한다는 데에 역점을 두었다. 육식을 하는 사람은 계속 무의식 상태에, 지상에 붙들려 있게 된다. 그는 의식의 하늘로 날아오를 수 없다. 그들은 함께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대는 더욱더 높은 의식 상태를 갖게 되는지, 아니면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조차 자각하지 못하게 된다. 단지 입맛을 위해서 사람들은 짐승을 죽인다. 불교 신자들이 육식을 하게 된 것은 작은 사건 때문이다. 붓다는 누구든지 구걸이나 탁발을 할 때 먼저 요구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모든 제자들은 매일 마을로 구걸을 떠나야 하는데, 누구라도 무엇을 달라고 요구해서는 안 되었다. 요구를 하면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무엇을 주는지 그것을 감사하게 받아야 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승려가 와서 붓다에게 말했다. "문제는 하나 있습니다." 붓다가 가르친 또 다른 규칙에는, 탁발 그릇에 사람들이 무엇을 담아 주든지 그것을 모두 먹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루에 한 번만 먹기 때문에 그다지 많은 양도 아니었다. 껌이나 담배 같은 것은 물론 없었으니까...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 음식은 신성한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너에 대한 존경심으로 준 것이다. 그러니 너는 그 음식을 버려서는 안된다. 그릇에 담긴 것은 어떤 것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 이 제자가 자기의 탁발 그릇을 들고 와서 말했다.
  "저는 궁지에 빠졌습니다. 제가 탁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까마귀 한 마리가 고기를 입에 물고 가다가 제 그릇에 그것을 빠뜨렸습니다. 그러니 어찌하면 좋습니까? 이 고기를 버려야 합니까? 그러면 아무것도 버리거나 남기지 말아야 한다는 스승님의 가르침에 어긋납니다. 스승님께서는, 음식은 우리의 생명이니 마땅히 존경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이 고기 조각을 먹어야 합니까? 그것 역시 고기를 먹지 말라는 스승님의 가르침에 어긋납니다." 부처님조차도 눈을 감고 이 제자에게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망설였다. 양쪽 모두 위험하다. 그것을 버려도 된다고 말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전례를 남기게 된다. 그러면 그들은 자신이 싫어하는 음식이 있으면 마음대로 내버릴 것이다. 또 그것을 먹어도 된다고 말하면, 사람들에게 고기 먹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 된다. 부처님께서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이렇게 말했다. 이런 종류의 사건은 매일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내 팔십 평생 동안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그러니 먹으라고 하는 것이 더 나으리라,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그 고기 조각을 먹으라고 말했다. 이것이 사람들에게 빠져나갈 구멍이 되었다. 그 후 불교가 아시아 전체에 전파되자 사람들은 이 사건을 근거로 삼아 고기를 먹기 시작하였다. 아시아의 모든 불교 신자들이 한 마리 멍청한 까마귀 때문에 고기를 먹게 되었다. 그들은 붓다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까마귀를 따르고 있다. 하지만 고타마 붓다와 마하비라는 인간 존재가 생명의 존엄성을 알고 동물을 죽이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하였다. -라즈니쉬, '예언자 강론' (또 다른 여인이 나를 낳으리라 1) 정신세계사. 요컨대 인간은 동물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전 우주적 조화의 리듬을 지니면서 채식으로 우리의 기존 체질을 전환시켜야 한다. 사상이니 음양이니 가릴 것 없이, 일단은 오로지 식물만을 음식과 약으로 생각하는 전제하에 식물, 음식, 약의 관찰 선별 방법에 대해서 각자 스스로 연구해 보도록 하자.
  이제마의 사상의학
  자! 여러분들은 이런 이야기가 있다면 어떤 판단을 내리겠는가? 어떤 처녀가 중한 병으로 이제마 선생을 찾아왔는데, 아무리 뜯어봐도 체질을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본래 부끄럼이 많아서, 본성이 어떤지 구별하기가 매우 어려웠던 선생은 비상수단을 쓰기로 하고 사람들을 밖으로 내보낸 후에 단둘이 있는 데서 옷을 한 가지씩 벗으라고 명하였다. 처녀는 의사의 명령이니 만큼 거역할 수 없어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한가지씩 옷을 벗기 시작했다. 결국에는 마지막 속옷만 남았는데 그것 마저 벗으라 하니까, 그녀는 어쩔 줄 몰라 쩔쩔 맸다. 그러다 겨우 일어서려는데 선생께서 홱! 옷을 잡아챘다. 이 처녀는 자존심과 수치를 참을 수 없어 악을 쓰고 반항을 했다. 아마 겁탈이라도 당하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 이러구러 하는 과정에서 그녀의 성품, 체질 등등을 알아챌 수 있었으므로 "옳다! 알았다! 이제는 옷을 입어라!" 하고는 그 처녀가 사상 체질 중의 소양인 체질임을 단정하고 후에 약을 써서 불치의 병을 고쳤다 한다.
  또 이런 일화도 있다. 어떤 환자가 괴질을 앓고 선생에게 치료를 받으러 갔는데 선생은 체질을 감별하기 위하여 글씨도 써보라고 하고 수족도 만져보곤 하였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사랑방 앞뜰로 데리고 나가더니 5, 6미터 되는 거리에 쌓아놓은 장작을 나르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세 번을 왕복하였다. 이 또한 그의 동작을 관찰하기 위함이니, 나중에 소음인 체질로 판정하고 그 체질의 약을 써서 괴질을 고쳤다고 한다. 이제마 선생이 환생하여 그와 같이 체질을 감별한답시고 환자를 치료한다면 지금쯤 감방에서-물론 강간미수나 불법무기 소지죄에 해당될는지? 아니면 정당 진료 행위로 무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자기 체질이나 관찰하고 있지 않았을까? 자뭇 궁금하기만 하다. 선생이 추구했던 독특하고도 기이한 행적들, 곧 약을 실험하기 위하여 깊은 산중에 가서 풀뿌리, 나무 열매 등을 채취하여 달여 먹고, 씹어 먹고, 중독이 되며 며칠 사경을 헤매기도 하고, 병을 앓는 자가 있으면 친히 찾아가서 괴상한 실험들을 해대면서 날로 연구를 거듭한 결과, 한국의학을 대표할 수 있는 독창적이고도 신비한 사상의학의 체계를 수립하게 된 것이다.
  탄생조차 이례적인 선생의 일화를 보자. 이제마 선생의 부친과 단골 주막집 주모의 따님과 얽힌 이 묘한 인연에서 태어나게 된 선생을 할아버지는 유독 좋아했는데, 그 전후는 이러했다. 어느 날 이제마 선생 할아버지의 꿈속에 어떤 사람이 탐스런 망아지 한 필을 끌고 와서, 이 망아지는 제주도에서 온 용마인데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 귀댁으로 끌고 왔으니, 맡아서 잘 길러달라는 부탁을 하고 가버렸다. 보니 망아지가 어찌도 탐스럽고 사랑스럽던지 어루만지며 기뻐하다가 깜짝 놀라 잠을 깨니 남가일몽이라. 꿈이 하도 신기하여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차에 밖에서 누가 찾는 소리가 들려 나가보니 강보에 싸인 갓난아기가 있는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조금 전에 현몽한 것이 떠올라 이 일은 우리 가문에 큰 길조라 생각하고 아무 말 없이 그 주막집 처녀의 아기를 받아들이도록 허락하였다. 그리고 꿈에 "제주도 말을 얻었다" 하여 제마라 명명하였던 것이다. 그는 비록 서자로 태어나 불우한 환경 속에서 성장했지만, 머리가 비상하고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사상의학을 발명한 동기는, 자신이 오랜 신병을 앓고 옛 고전에 의거한 여러 가지 약을 써도 낫지를 않자, 이때부터 기존 의학체계에 대한 순수한 의문과 정열을 가지고 참구한 결과, 인간은 각기 체질이 다르고 체질에 따라 진단, 치료 및 처방이 달라진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는 '내가 의학이 생긴 이래 5, 6천 년 후에 나서 옛 사람들이 기술한 저서를 참고하다가 우연히 사상인의 장부성리를 발견하였다'라고 함으로써 스스로 사상의학이 나온 동기를 밝히고 있다. 사상의학은 태양인, 소양인, 태음인, 소음인의 네 가지 체질로 분류되는데, 먼저 소음인은 비위가 허약하고 신장, 방광이 발달되어 상체보다는 하체가 실하지만 대체로 위와 아래가 균형이 잘 잡혀 있다. 얌전하고 침착하며 여자는 애교가 있다. 내성적이면서도 사교적이고 머리가 총명하며 인색하다. 이런 체질은 먹는 것이 소화가 잘 되고 대변은 굳고 잘 보며 건강한 사람이다. 음식은 닭, 염소, 명태, 고등어, 사과, 귤, 복숭아, 토마토, 시금치, 미나리, 양배추, 감자, 파, 마늘, 후추, 생강, 찹쌀, 조 등이 소음인 체질에 맞는다. 태음인은 간 기능이 발달하고 폐 기능이 부족하므로 허리가 발달되고 목덜미 위가 허약하다. 골격이 크고 키가 크며, 살이 비대한 사람이 많고 특히 손발이 큰 편이다. 몸에는 늘 땀기가 있고 활동을 하거나 하면 땀이 잘 흐른다. 찬밥을 먹을 때도 땀을 흘리는 사람은 대개 태음인에게 많다. 땀을 흘려도 건강에는 이상이 없고 도리어 신진대사가 잘 되므로 건강한 증거다. 성격은 겉으로는 점잖으나 속은 음흉하여 좀처럼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다. 마음이 넓을 때는 바다와 같고, 고집스럽고 편협할 때는 바늘구멍같이 좁다. 마치 소의 속성과 비유될 수 있으며, 음식은 쇠고기류가 가장 많고 배, 밤, 호두, 은행, 무, 도라지, 토란, 밀, 콩, 율무가 좋다. 소양인은 비 기능이 발달했고 신장 기능이 부족하므로 흉곽이 발달되고 허리 아래 관골부가 약하다. 상체는 실하고 하체는 가벼워서 걸음걸이가 빠르고 보기에 경솔하며 무슨 일이나 급하게 하는 경향이 있고 용두사미가 되기 쉽다. 여자는 신장 기능이 약하여 다산을 하지 못하고 남자는 양기 부족이 많다. 항상 밖의 일만 좋아하고 가정이나 자신의 일은 경솔히 여긴다. 판단력이 매우 빠르나 계획성이 적고 정의에 불타는 스티일이다. 더운 음식을 좋아하지 않으며 항상 비위에 열이 있으므로 겨울에도 냉수를 좋아한다. 음식은 돼지고기와 계란이 가장 좋고, 해삼, 게, 새우, 수박, 참외, 포도, 배추, 오이, 가지, 호박 등이 좋으며 보리, 팥, 녹두가 체질에 맞는다. 태양인은 거의 드문 경우인데 폐의 기능이 발달되고 간의 기능이 약하기 때문에 상부 목덜미가 실하고 머리가 크며, 보통 이마가 넓고 살이 비후하지 않으며 오래 걷지 못한다. 성격은 남들과 잘 소통하고 사교적이며 과단성, 진취성이 강하다. 새우, 조개류, 포도, 감, 메밀 등이 좋다. 이상이 사상의학의 진단 및 치료 체계의 요체이다. 이제마 선생은 인체를 크게 넷으르 등분하여 유심적, 유물적 관찰을 통해 체질 감별을 했는데, 본래 인체는 둘이든 넷이든 분리가 될 수는 없다. 체질을 떠들고 사상의학을 들추어봐도 그 떠들고 들추는 놈은 넷으르 나뉘는 물건이 아니다. 이제마 선생이 사상의학의 창시자라고 하는데 이제마 선생의 창시자가 누군지는 알지 못하지 않는가? 진정한 체질 감별은 체질 감별하는 놈이 누구인가를 알아내는 작업이다.
  자, 그러면 체질 감별하는 놈이 사상체질에 속하겠는가? 속하지 않겠는가? 만약 사상체질을 분류하는 놈이 태음인이라면 모든 것이 태음 쪽으로 보이지 않겠는가? 마치 푸른 안경 낀 사람이 세상을 푸르게 푸듯이. 누차 반복해 주장하듯이 차를 운전하는 사람이 차 그 자체는 아니다. 차의 개성에 맞게 운전할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는 오직 사상 이전의 주인공을 깨달은 자만이 가능하다. 다시 한 번 묻건대, 사상체질에 속하지 않는 주인공은 어떤 물건인가? '노원제처벽층층' 늙은 원숭이 우는 곳에 벽이 층층하더란다.
  이제마의 어록
  감기 해열제로 찾는 약 중에 아스피린이라는 약이 있는데 효험도 상당히 좋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자기의 현재 채질이 어떠한지는 전혀 무시하고 감기약으로 무조건 복용하게 된다면 어찌 될까? 물론 서양의학의 기존 이론 체계가 그런 것이니 만큼 왈가불가할 필요성은 느끼지 않는다. 반면 동양의학적 사고 방식으로 볼 때는 어떠한 약을 쓰던지 간에-심지어 감기약까지도-그 사람이 뚱뚱한지, 말랐는지, 열성 혹은 한성인지, 허한지 실한지, 심리적 상태가 불안한지 편안한지 등등을 고려해서 처방을 낸다. 이것이 체질을 중히 여긴 동양의학의 금자탑인 곧 동무 이제마 선생의 사상의학 이론이다. 이 사상의학의 출현 이래로 한국 한의학계에서는 선천적 체질에 대한 관심을 더욱 깊이 가지게 되었다. 요즈음 일부 논문들은 인체 실험을 할 수 없으니까 동물 실험을 주로 한다. 수없이 많은 반복적 실험과 정밀성에 대해서는 인정하겠지만, 설령 동물 실험이 백 퍼센트 성공했다 한들 우리 인체와 과연 꼭 같은 약리적 반응을 일으킬지 의문이 안 일어나겠는가?
  예를 들어, 한약 중에 파두라는 독성약이 있는데 인간이 먹으면 위험한 경지까지 가게 된다. 그러나 쥐가 먹으면 오히려 살이 찌는 반응이 나타난다. 동물 실험대로라면 쥐가 먹어서 살이 찌니까 우리 인간도 같은 반응은 보일 것이라는 성급한 결론은 웃기지도 않는 해프닝밖에 안 된다. 흔히 인삼 녹용이 보약이라고 한다. 그러나 인삼 복용 후 부작용이 날수도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삼은 열이 많은 약인데, 체질이 열성인 사람이 먹으면 더욱 악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상인 중의 소양인은 열이 많은 체질로 이런 체질의 산모가 몸을 보한 답시고 인삼을 정성스레 달여 먹어봐야 유즙이 오히려 나오지 않고 부작용만 초래하게 된다. 인삼은 소음인 체질이 복용하는 지혜가 정확한 체질 감별에 의한 치료법인 것이다.
  응용자재한 지적 감각의 개발은 매우 시급한 과제인데, 산에 불이 났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물론 물을 부어야 한다. 그러나 이래도 안 될 때가 있다면 모래나 흙을 뿌리는 방법이 오히려 더 효과적일 수 있다. 또 다른 방법은 맞불을 놓는 방법인데 극단적인 수단이다. 필자가 어릴 때 시골에서 삼촌들과 함께 나무를 하다가 잠깐 휴식중에 불을 쬐는데, 바람에 불이 옮겨져서 산에 불이 나게 되었다. 필자는 당황한 나머지 생각한다는 것이 고작 물로써 불을 꺼야 한다는 정도였는데, 물을 어디서 구해야 할지 걱정만이 태산 같아 그저 당황하기만 했었다. 그때 현장에 있는 모래를 사용하는 삼촌의 단순하고도 기발한 아이디어로 큰 불줄기를 잡았는데 미처 상상도 못 했던 필자의 무식함이 지금도 부끄럽다. 필자와 같은 일차원적인 사고를 하는 의사만 있다면 이 세상이 답답할 노릇이 아니겠는가? 융통자재할 수 있는 지혜로운 의사만이-환자도 마찬가지다-결국은 모든 질병을 정확히 볼 줄 안다. 또 만약 물이 넘치는 경우가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물을 불로써 말릴 수 있고 모래를 뿌려서 물을 빨아들일 수 있고 물꼬를 터서 물이 빠져나가게 할 수도 있고 바람으로 말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사소하게 넘어갈 수도 있는 현상들을 깊이 동찰해 보면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고 그 신비함은 좀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동양의학에서는 이러한 것들을 모두 체질의 음양, 허실, 한열과 관련 지어서 풀어나가고 있는데, 동의학을 터득하기란 매우 난해한 실정임이 솔직한 고백이다. 이와 같은 귀중한 이론 체계를 바탕으로 성립된 의학을 경험 의학이니 비과학이니 하는 것은 그릇된 편견임으로 밝혀두며, 그만큼 인간이 미묘한 소우주이기 때문에 탐구가 어려워지는 것이다. 깊은 명상과 관조의 수행 자세에서만이 터득할 수 있는 신비하고도 오묘한 마음과 육체의 온갖 변화들은 오직 지극한 성인만이 알아낼 수 있다. 동무 선생의 사상의학은 외형상의 신체적인 특징과 정신적인 심성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 인체를 관찰하였는데, 유심적인 문제에 주로 비중을 둔 것이 더욱 독특하다. 끝으로 그가 강조한 교훈적인 양생성을 간추려 보자.
  착한 사람의 집에는 선인이 모이고 악한 사람의 집에는 악인이 반드시 모인다. 선인이 많이 모이면 선인의 오장육부가 잘 활동하고 악인이 많이 모이면 악인의 심기가 억세게 왕성하니, 술과 여색, 재물, 권력(권위)을 좋아하는 집에는 악인이 모이는 까닭에 그 집의 효남, 효부는 병을 얻게 되는 것이다. 권모와 술수를 좋아하는 집은 여러 무리(붕당)들로 둘러싸일 것이니, 그 집을 패망하게 하는 자는 그 무리들이고, 재화를 좋아하는 집은 자손이 교만하고 우매할 것이니 그 집을 패망하게 하는 자는 자손인 것이다. 애교와 사치가 많고 나태하고, 성격이 급하고, 탐욕이 많으면 수명을 단축한다. 소박하고 검약하며, 근면하고, 매사에 조심하고, 경청할 줄 알면 수명을 연장한다. 주, 색, 재, 권은 예로부터 경계하여 네 담벼락이라 하고 감옥에 비교하였으니, 비단 일신의 수명과 한 가족의 화복이 이에 달려 있을 뿐 아니라 천하의 치란이 또한 여기에 있으니, 만일 천하의 주, 색, 재, 권으로 하여금 어긋난 가풍에 쏠리지 않게 한다면 거의 성인의 세상에 가까이 이르게 될 것이다.
  대체로 인간은 공경하면 반드시 오래 살고, 나태하고 게으르면 반드시 요절하며, 근검하면 장수하고, 헛되이 탐욕하면 반드시 일찍 죽는다. 굶주린 자의 창자가 갑자기 육식을 얻게 되면 창자의 기운이 흐트러질 것이다. 가난한 자의 골수에 갑자기 재물이 생기면 골력이 말라붙을 것이다. 굶주린 자도 편안히 굶주린다면 창자의 기운이 제대로 간직되고, 가난한 자도 마음 편히 가난하다면 골력도 제 구실을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음식은 능히 굶주림을 참아낼 수 있게 하며, 배부른 것을 탐내지 않는 것으로써 공경하고, 근력은 부지런히 노력할 수 있게 하며, 안일함을 탐내지 않는 것으로써 공경하고, 재물은 조심스럽게 결실을 얻을 수 있게 하며, 구차하게 얻는 것을 탐내지 않는 것으로써 공경해야 할 것이다. 어진 이를 질투하고 시기함은 천하에서 가장 큰 병이요, 어진 이를 좋아하고 선을 즐기면 천하에서도 가장 큰 악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병의 원인이 정신적, 심리적, 도덕적 타락 상태에서 기인된 것으로 보고, 치료 또한 정신개혁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일찍이 동무 선생은 갈파한 바다.
  선생은 평생을 청빈하게 살았는데, 그가 고원 군수로 부임할 당시 함흥에서 이백오십 리 길을 짚신 신고 단신으로 걸어서 갔다 하며, 또 민폐를 끼치는 일에는 고하를 막론하고 엄벌에 처하였다 한다. 그리고 만년에는 한약방을 경영했는데, 가난한 사람에게는 무료로 치료해 주며 사례를 받을 때는 좁쌀 한 되밖에 받은 일이 없다 한다. 선생의 무심성과 청렴결백 그리고 끊임없는 순순한 열정이 사상의학 같은 창조적인 지혜를 탄생시키게 된 것이 아닐까? 이 시내, 끊임없는 정보의 축적에 지친 이 시대에 창조적 작업을 또 누가 대신하겠는가? 무심을 터득하는 명상, 세상을 구제하겠다는 열정 어린 연민심의 두 가지를 다 터득한 자만이 가능할 것이다.
  
    여섯 가지 체질론과 그 허실
  몸과 마음의 음양경락체계
  몸과 마음 : 우리 민족의 여러 가지 전통적 문화유산 중 한방의학의 철학체계는 다시금 깊이 재조명해야 한다. 이는 민족주의적 혹은 국가주의적인 집단의 이기주의적 발상이 아니라 범세계적인 평화와 이익을 위해서이다. 세계평화는 어떤 주의나 사상의 분쇄에서도 찾아야 되겠지만 '가까운 나의 몸을 어떻게 건강한 조건으로 유지할 수 있느냐' 는 명제 역시 더욱 중요하게 취급해야 한다. 건강한 상태의 '몸'은 사실상 육체의 개념뿐 아닌 마음, 즉 마음의 건강 문제이다. 몸과 마음은 같은 개념이면서 마음은 몸의 운전사 같은 존재이다. 의사 노릇은 '자동차 엔진의 과열 상태만을 차가운 물로 식혀준다'든가 '기름 떨어지면 주유시켜 주는 주유소 정도'라든가 '앞이 안 보이면 헤드라이트를 갈아 끼워주든가 혹은 배터리를 바꾸는 정도'라는 등의 유물적 사고 방식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심장이 고장나면 인공심장을 개발해 내고, 인공콩팥, 인공안구를 창조하는 데 힘을 쓰는 것을 보면 이 발상은 어느 정도 맞기도 한다. 그러나 계속 차를 과속으로 밝아대는 운전사의 정신적 교육은 누가 담당해야 하나? 지루하게 계속 엔진 식혀주는 일 또는 기름 붓는 일에 재미를 느끼는 의사는 없다. 좀 낭비 없이 브레이크도 유용하게 사용하는 운전사의 성품을 개발시켜 주는 역할이 오히려 근본적인 의사의 역할이 아닐까 싶다. 닥터(Doctor)는 도케레(Docere)라는 희랍어에서 유래했는데, 이는 '가르친다'는 뜻이다. '마음은 운전사요 몸은 자동차다.' 의사보고 몸의 부속에만 신경쓰지 말고 마음의 구조학적 생리적 특징도 연구하라고 권유한 것이 동양철학이다. 즉 마음과 몸을 같이 보는 관점이 동양의학의 기본 우주 인간관이다. 예를 들면 화난 상태에서의 운전은 맥박, 호흡을 빨라지게 한다. 70, 80, 90, 분노가 치밀어 오르게 되면 150, 200까지 맥박이 올라가 죽게될지도 모른다. 아마 자동차가 박살나기 전에 운전사부터 먼저 죽지 않을까 싶다.
  기분이 째지게 좋다! 좋은 기분은 곧 흥분으로... 신명이 나는 상태가 되어 맥박이 상승한다. 과연 이 상태의 운전은 안전할까? 걸핏하면 흥분하고 신명내는 운전사에게 나의 몸을 맡기신 싫다. 화나는 것, 좋은 기분 이것은 곧 마음의 극단적 두 가지 생리이다. 이것이 몸의 상태를 결정하는데 자동차의 경우처럼 축적되어 느리게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즉각 몸에 반영된다. '마음이 좋아야 몸이 좋아진다' 이것은 거짓말이다. 마음은 너무 좋지도, 너무 나쁘지도, 즉 너무 쾌락적이거나 너무 자학적, 고행적이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두 가지가 다 맥박을 상승시켜서 과속을 불러일으키고 엔진이 타고 기름을 일찍 고갈시키기 때문이다. 빠른 속도로 기름이 고갈되는 사람이 있다. 마치 '10킬로미터만 달리면 기름을 넣어야 한다' 하는 자동차 같은 사람이다. 기본적으로 기름 탱크가 작아도 문제지만 무식하게 많은 양의 기름을 한꺼번에 계속해서 태우고서야 다른 부속인들 고장이 없겠는가?
  성급한 사람은 2천 원어치만 넣고 급히 달린다. 분명히 얼아 안 가서 기름을 다시 넣어야 하는데 지금 당장 너무 급하다. 기름을 넉넉히 채우려 해도 기름 넣는 시간이 필요하다. 급하다고 빨리 가는 것도 아니고 남의 차 질주하는 것 보고 질투를 느낄수록 엔진은 더 탄다. 그럴수록 더 빨리 주유소 신세를 져야 할 것이 분명한데... 이 시대가 꼭 그렇다. 진찰실에서 보면 기름 붓는 시간도 빨리 줄여달란다. 자동차 기름이야 불과 몇 분이면 채울 수 있지만... 엔진의 기름에 해당하는 정의 저장은 만만치 않다. 링거 방을 떨어지듯 괴어서 그것이 어딘가에 저축이 되려면 수개월, 수년이 걸릴지 모른다. 정력은 누구나 탐한다. 양기도 무척 좋아한다. 정력을 협소하게 섹스의 능력이라 규정짓기는 곤란하나 설사 그 능력이라 해도 비유를 들면 등장의 기름과 불 관계이다. 기름도 없는데 심지만 확! 올려서 태우다가 심지만 타고 등잔도 과열로 깨진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유유히 휴식하면서 엔진을 식히고 주유하는 시간을 가질 것이다. 마음은 언제나 조급한 상태로 되어 있다. 마치 초조한 원숭이 같다. 마음을 쉬는 것은 몸의 재충전이다. 아무리 달리라고 되어 있는 자동차지만 그것은 쉰 다음의 얘기다. 녹슬 정도로 쉬어서 그대로 폐차되는 사람은 아마 이 시대에는 없을 것이다.
  특히 지식인 계층의 사람들은 몸을 쉰다고 마음마저 쉬는 것이 아님을 잘 체험하고 있을 것이다. 불면, 두통, 눈의 피로, 이명, 구고, 인건, 목현 등등의 마음에서 오는 증상은 가히 이 시대의 살인적 증후군이다. 마음의 구조 생리 그리고 극단적 마음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지극히 난해하다. 실제로는 너무 쉬워서 난해하다고도 하지만(잠을 잘 자는 사람에게 잠자는 것처럼 쉬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무슨 방법, 이론이 잠자는 데 필요할까). 경락의 음양과 인간의 3대 욕망, 동양의학의 마음 생리학체계는 경락체계라는 독특한 '유체생리학'이 있다. 육체 말고 유체가 있다. '유체생리학'은 우리의 의식 감성 체계의 생리학이고, 실제로 미묘한 광선과 같은 소립자로 구성되어 있는 또 하나의 숨어있는 조종자이다. 비근한 예로는 꿈의 활동이 곧 '유체'의 활동이다. 티벳의 인체 해부도에는 여자 심장이 오른쪽에 있다. 이를 서양의사들이 비웃었다. 그것은 유체생리학적 심장이기 때문에 남녀의 유체심장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경락체계는 유체의 통로이다', '즉 경락은 감정과 의식의 순환체계이다', '경락은 의식과 감정이 끊어진 시체에는 있을 리 없다', '당연히 경락은 육체의 눈으로 볼 수가 없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육안의 차원이고, 사실 느낌의 차원은 모든 사랑과 미움, 질투와 선망, 욕망과 야심 등을 수용한다.
  경락의 두 흐름, 즉 마음체계의 두 가지 특성은 곧 음경락과 양경락이다. 음적인 흐름은 욕심을 뜻하고 양적인 흐름은 분노를 뜻한다. 미세하게 얘기하면 음적인 흐름은 긍정적일 때의 상황이요, 양적인 흐름은 부정적일 때의 상황이다. 인식론적 표현으로 하면 '안다', '모른다'의 두 가지 의식의 흐름이 있는데 안다=음, 모른다=양이다. 사람의 크나큰 욕망의 세 가지 형태는 곧 바이오 리듬과 직결된다. 신체리듬과 감성리듬, 지성리듬으로 표현되는 서양의 3대 리듬 학설은 이제 약 1백년 된 아주 유치한 단계의 연구이다. 23일 주기의 신체리듬(P : Physical Rhythm), 28일 주기의 감성리듬(E : Emotional Rhythm), 33일 주기의 지성리듬(I : Intellectual Rhythm) 세 가지와 유사한 마음의 생리적 체계 구조적 발견이 곧 경락의 흐름이다. 단 동양의학에서는 P리듬의 만족과 불만족, E리듬, I리듬의 +적 -적 양면을 체계화시켰던 것이다. 물론 구체적으로 각 손가락, 발가락으로 흘러 내려가고 오고 하는 통로도 제시하고 있다. 신체리듬(P)은 만족이 되었을 때의 상황(태음경락), 불만족인 경우(양면경락)로 표현된다. 의식주 같은 기초적 안정에의 욕망은 당연한 흐름이며 필수적 심리상황이다. 만약 마음에 의식주의 만족감을 느낀다면 그는 태음경락의 통로에 기운을 많이 보내고 있는 것과 같다. 거꾸로 돈을 잃고 배고프고 허기지는 기를 느끼고 괴로워한다면 바로 양명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마음의 구조 중 제일 가는 기초는 태음과 양명의 구성인데, 이는 미묘하게 맞물려 돌고 있을 뿐 아니라 태음은 엄지 손가락과 발가락, 양명은 둘째 발가락과 손가락으로 그 에너지가 통과하고 있다. 엄지와 둘째는 서로 상반된 기를 흐르게 하면서 짝을 이룬다는 말이다. 앞에서 엄지와 둘째로 흐르는 태음과 양명이라 불리우는 '경락'의 무형 시스템을 소개했다. 아울러 소음과 소양의 대립되는 에너지 흐름의 통로가 또한 존재함을 밝히면서 조금은 까다롭지만 지성적인 독자를 위해 다시 한번 쉽게 풀어볼까 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도표화시켜 보면, 신체리듬(P)의 만족(태음경락, 태음+), 불만족(양명경락, 양명-)과 감성리듬(E)의 만족(소음경락, 소음+), 불만족(태양경락, 태양-)과 지성리듬(I)의 만족(궐음경락, 궐음+), 불만족(소양경락, 소양-)이다. 편의상 +는 만족, -는 불만족이다.
  이와 같이 인간에 두루 보편되게 존재하는 P욕망의 의식주 등 기본적 필요 욕망과 E욕망의 감성적 혹은 예술적 만족 추구 욕망과 I욕망, 즉 권력지식 추구 등의 지성적 무형 욕망의 추구 등의 제3의 순환체계인 경락의 흐름을 이룬다. 이로부터 인간의 만족과 불만 에너지를 대별하여 여섯 가지 유형의 병적 체질론을 유추해 낼 수 있는데, 태음인, 양명인, 소음인, 태양인, 궐음인, 소양인이 그것이다(사상의학의 태음, 소음, 소양, 태양의 구분과는 전혀 다름. 혼돈 말기 바람). 각각을 한번 살펴보기로 한다.
  A타입(Type) - 태음인(약칭P(+)인)
  태음인은 태음실인이라는 뜻인데, 양명허인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 P(+)인은 대부분 비대형이고 탐욕스럽다. 잠깐! 짚고 넘어가고 싶은 이야기. 이 여섯 가지 경락에 준한 체질 분류는 사실상 그 어느 체질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이 이상적인 음양화평지인이다. 한의학 용어 중에서 건강한 이미지의 표현을 찾는다면 음양화평지인 같은 멋진 표현은 다시 없다. 균형과 조화가 건강의 개념으로 등장하는 것이, 곧 동방의 건강 정의이다. 예를 들면 '프라이드' 자동차에 '코란도' 디젤엔진을 부착했다면 그 디젤엔진의 강력함도 오히려 병적이라 본다. 나이가 어느덧 60줄에 접어들었는데 맥박이 어떤 젊은이보다 강인하다면 이를 질병 발생 요인으로 본다는 것이 그 좋은 본보기이다. "할아버지! 차가 낡았으면 살살 몰고 다녀야지요, 아직도 마음은 청춘이시라 의욕이 넘치시지만 그것이 병이랍니다. 제발 보고 듣는 데 무심하시고, 못 본 척, 못 들은 척하고 여생을 지내세요. 이것 저것 간섭하고 과잉 의욕에 넘쳐 때로는 화를 내게 되죠? 그게 바로 중풍의 원인입니다. 조심 하셔야죠!"
  이는 필자가 진찰실에서 자주 충고해 드리는 말이다. 나이가 많아지면 맥도 비례해서 약해지는 것이 정상이다. 마찬가지로 체격이 섬세, 빈약한 사람은 그 체질의 주인공, 즉 그 육체라는 차의 운전사인 마음을 유연하게 항상 조심스럽게 운전해야 한다. 급히 엑셀레이터를 밟아대다가는 천수를 못 누린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균형과 조화가 제일인 것이다. 이 여섯 가지의 어느 곳에 편중하지 않은 체질을 최상으로 여기는 이유를 이해하여 주시기 바란다. 요컨대 체질론은 어떤 체질에도 속하지 않는 체질이 제일이요, 그렇게 완전한 초월체질로 인도하여 가는 것이 의상의 사명이다.
  P(+)인의 약점과 그의 보강 : P(+)인은 재물욕에 눈이 어둡기 쉬우며 재산 축적을 즐기고, 그러한 음적 쌓임의 과보로 게을고 둔탁하다. 특히 동산, 부동산 저축과 지킴에 대한 염려를 많이 하므로 두려움이 그런 쪽으로 많다. 만약에 땀이 안 나면 더욱 더 불길한데 비교적 날씨가 축축한 장마철에 질병이 많이 생긴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체중의 증가를 막아야 하는데 발한 요법이나 이뇨 요법과 더불어 단식 금식 요법을 병행하는 인내적 고행이 필요하다(특히 야간에는 불음! 불식! 밤은 음기가 왕성한 때이므로 더욱 음의 에너지가 쌓임). 재산은 공유하여 여럿이 즐기는 도구로서 인식하는 훈련이 필요한데, 사유 혹은 독식 같은 자아 강화의 관념을 탈피하지 않으면 불시의 재난으로 재물의 손실이 왔을 때 P(+)인은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하여 중풍 같은 화병에 꼭 시달리게 된다(무소유 정신의 필요). (동의보감)에 '비인다중풍(비대한 사람에게 풍이 많다)' 이라고 한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동맥경화 등으로 탄력이 없어 무엇인가의 손해나 손실로 받는 충격을 심장이 감당하지 못하는 경우가 비교적 많기 때문이다. 특히 단음식와 신음식은 좋지 않으며 약간 맵고 담백하게 섭취하는 것이 유익하다. 모든 동물성 지방 또는 활미성의 식품을 피해야 하는데 예를 들면 마요네즈 같은 것, 크림, 버터, 치즈와 더불어 해삼이나 뱀장어 같은 종류도 썩 좋을 리 없다. 오히려 암의 원인이 된다고 일방적으로 강조되고 있는 담배가 비대하고 습냉한 P(+)인에게는 약이 될 수도 있다.
  담배와 음양 : 차체에 또 한번 짚을 얘기 한마디 하면, 이 지구촌의 어리석음은 한결같이 절대주의의 남발에 있다. 최면적 절대주의에서 파생되는 맹신의 해독이 건강식품 또는 의약의 선택에 이르기까지 마구 내리 미치고 있다. 과학이라는 미명하에 홍보되는, 절대적 맹신인 선과 악의 흑백논리 말이다. 일례로 담배=암, 즉 담배는 나쁜 것, 물론 나쁘다. 그러나 '무조건 누구에게나 나쁘다' 라는 절대주의적 사고 방식은 버려야 한다. A체질에 나쁘다. 뒤집어 얘기하면 'B체질에는 좋을 수도 있다' 이런 식의 상대적 사유가 참으로 아쉽다. 동양의학 체계에서 보면 누구에게나 절대로 좋은 약이 없듯이 무조건 나쁜 약도 없다. 쓰이기 따라서는 독도 되고 약도 되는 이치는 그 약의 작용처, 즉 인간의 체질에 따라 변한다는 용약의 지혜가 동방의 탁월관찰법이다. 지렁이=양기에 좋다? 뱀 심지어는 굼벵이까지?... '돌팔이'성 사고 발상인데도 불구하고 실제로 지식층의 지성인마저도 부인이 달여주는 토룡탕(지렁이탕), 생사탕을 아무 의혹 없이 먹고 있는 현실이다. 한번 의심해 봐야 될 일이 아닌가? 다시 하나 더 일례를 들면 고추잠자리=양기약, 이것은 어떠한가? 누군가 훌륭하고 유혹적인 언변으로 고추잠자리가 양기 최고의 약이라고 최면 걸었다 해서 마구 먹을 것인가? 이것은 분명히 비전되어 내려오는 비밀방중의 환약 재료로서 흥양제로 쓰일 수 있다 (참새알과 더불어 기타 혼합해서 쓰인다). 지렁이와 고추잠자리 두 가지 모두 양기에 좋다 한다.
  이것은 간단한 음양론의 상식인데 P(+)인은 과연 양기-사실 이 양기라는 개념은 굉장히 광범위한데 우선 섹스의 발기 능력이라 상상을 하기가 쉽다. 여기서는 각자 좋도록 생각하자(뒤에서 다시 양기와 정력의 상관관계, 즉 정과 기의 한의학 개념을 얘기하겠음). 양기를 위해서 지렁이가 좋을까? 고추잠자리가 좋을까? 몸이 뚱뚱하고 냉한 P(+)인이 토룡탕, 생사탕을 먹고 양기가 더욱 더 형편없이 저하되는 것을 수없이 목격했고 또 상담도 받았다. 기본 정석도 모르고 불건강 또는 질병과의 한판 승부를 벌이려 하고 있으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 거꾸로 P(-)인 양명실인이 고추잠자리로 양기를 돋우겠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 어리석은 일임을 밝혀둔다. 습과 조는 상대요, 활(미끄러움)과 삽(꺼끌꺼끌함)도 상대이다. 고로 담배의 건조한 성분은 P(+)인의 병적인 습담을 제거해 줄 수 있다. (동의보감)에 있는 담배에 대한 약성을 선인들이 고찰해 놓은 것을 참고해 보자. 연초신열축장담 한독풍습살충감 순양선행선산 용어음체신효약양성기월이 다조다화급허다한지불의 혹다흡취도냉수일구해지즉성 약번민자용백당해지. 연초는 미신 성열하다. 장담(순환장애로 인한 유사한 담결림), 한독, 풍습을 몰아내며 살충도 감당한다. 약성이 순양이어서 선행 선산하므로 음체에 쓰면 신효하다. 만일 양성 기월하므로 다조 다화하고 기어하혀 다한한 데는 마땅치 않다. 혹 흡연을 많이 해서 취해 넘어지면 냉수 한모금을 마시면 풀려서 곧 깨어난다. 만일 번민하는 경우에는 백설탕을 복용하면 풀린다. 즉 냉한 음식에 체했을 경우에는 필요한 약이기도 하고, 건조하고 열이 있는 사람과 식은땀이 나는 사람에게는 해롭다. 이상은 (제중신편)이라는 조선시대의 유명한 한의약서에 밝힌 담배의 약성가이다. '니코틴' 운운하지 않아도 그 식물 또는 동물의 성품을 알아 선과 악을 판별해 내는 선인의 지혜는 놀랍지 않은가? 담배는 광해군 시절 일본을 통해 수입되었으므로 옛 경전에 분석되어 질 수 없었으나, 지혜로운 선인들은 어떠한 새로운 약초도 그 성분을 감별해 내었다.
  이와 같이 쓰기에 따라서는 만물이 약이면서 잘못 사용할 때는 독이 된다. P(+)인에게는 어느 정도 담배를 허용해도 괜찮으니 뚱뚱한 사람들은 지나친 죄의식에서 벗어나시기 바란다. 단지 마른 사람이 담배에 소주에 마늘에 북어포를 즐겨 피우고, 마시고, 먹는다면 이건 그대로 지옥행 특급을 자진해서 타고 있는 셈이라고 강력히 경고하는 바이다.
  P(+)인의 평소 습관적 오류의 지적과 시정사항(마음가짐까지...) : P(+)인은 술도 고량주, 소주, 양주 같이 액체 함유량이 적으면서 알코올 도수가 높은 편이(이왕에 끊지 못하는 술이라면) 낫다. 고혈압으로 열이 많은 P(+)인은 예외이다. 거꾸로 생각해보면 차가운 맥주나, 정종, 막걸리, 포도주 등등의 수분 함유가 많은 술 등은 P(+)인에게 이롭지 못할 것이 자명하다. 흔히 일식집에서 나오는 마즙(아주 미끌미끌한 것)은 산약이라 해서 중요한 한약제로 쓰이는데, 무분별하게 이런 활미의 식물을 섭취하는 것은 P(+)인에게 금기 사항임을 기억해야 한다. 파, 토란, 버섯(영지버섯은 제외), 미역, 묵, 우무, 굴, 해삼, 뱀장어, 돼지고기 등등 활성 음식은 이미 그러한 습담성의 축적이 거의 병적으로 실한 P(+)인에게 결코 이로울 리 없다. 나머지는 세밀하게 미루어 짐작해서 판단해야 하는데 실제는 대부분이 그저 좋다는 신념으로 기초적 음양관의 통찰조차 없이 마구 남용하지 않는가 싶다. 정신적으로 P(+)인은 조울중, 우울성 폐쇄 증상을 가질 수 있는데, 요컨대 자기 육신만의 안전을 위한 집착을 버리고 신체리듬의 배설통로를 열 줄 알아야 한다. '베푸는 정신, 배고픔도 아는 마음, 마음을 비운다는 것, 채찍질 할 수 있는 자기 성찰' 등은 P(+)인에게 꼭 필요한 마음가짐이다. P(+)인은 모름지기 미축의 해, 양과 소의 해에 조심해야 하며 그 해의 한여름 장마철에 가장 치사율이 높으니 만큼 운기학적 동양의 연별 리듬도 참고하는 것이 좋다. 결코 미신이 아닌 흥망성쇠의 계절과 매년 리듬의 교차는 위대하고 신성스러운 지혜의 결정체이니 만큼 차차 기회를 보아 합리성을 설명하겠다. P(+)인은 이사를 간다해 도 산 근처로 갈 것이며 물가는 당연히 피해야 하며, 배우자 선택은 자기의 반대 성품인 P(-)인과 만나는 것이 좋다. 벗은 같은 성품을 가진 사람끼리 만나 동업을 하는 것이 길하지만, 배우자는 항상 반대적 성품을 만나는 편이 낫다. 그래서 붕우는 유신이요, 부부는 유별이라 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P(+)인은 불필요한 잠마저 경계하여 밤에도 활동할 수 있을 정도의 깨어 있음, 즉 각성이 꼭 필요한 것은 영적인 음양리듬의 자연스러운 조화를 위해서이다.
  B타입 - 양명인(약칭P(-)인)
  앞에서는 주로 'P+인(태음인)'을 위주로 경락의 성질에 따라 분류되는 여섯 가지 체질의 가설체계를 소개했다. 다시 반복하여 소개하면 인간의 만족과 불만에너지를 대별하는데 서양의 바이오리듬과 결부시켜서, 1. P(+)(-)인 (신체리듬의 만족과 불만족) 2. E(+)(-)인 (감성리듬의 만족과 불만족) 3. I(+)(-)인 (지성리듬의 만족과 불만족)과 같이 여섯 체질로 나눈다 했다. A : P + 인 = 태음인, B : P - 인 = 양명인, C : P + 인 = 소음인, D : P - 인 = 태양인, E : P + 인 = 궐음인, F : P - 인 = 소양인. 동양의 오행사상이 있는데 가을은 금의 계절이다. 목화토금수의 5원소 변화론은 탁월한 전체 수용성 감각이다. 봄이 가면 여름 가을 겨울 다시 겨울 봄. 끊임없는 순환고리의 계절변화는, 생 장 화 수 장의 연속 고리와 같다. 태어남 자람 변화 거둠 숨는다. 목 화 토 금 수. 가을은 금기, 즉 살기의 계절이기도 하다. 이제 결실을 맺는 이유는 사실 한 생의 종말과 같은 뜻일 게다. 종자의 컴퓨터 안에 자신의 독특한 유전 정보를 입력한 나무는 조용히 겨울의 죽음 또는 동면을 기다린다. 대부분의 동식물이 가을, 겨울에는 위축되고 봄, 여름에는 번성한다. P(-)인인 즉 양명인은 바로 가을의 세력을 많이 가진 가을남자, 가을여자이다. 가을남자=양명인. 그는 예리하다. 매사에 총명하다. 기분에 끌리는 일이 없다. 자동차로 비유하면 브레이크 작용이 탁월한 차다. 자기절제, 준엄한 심판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너무 굳어 있어 덕이 없는 것이 특징이므로 사람이 주위에 모이질 않는다. 대체로 몸이 찬데도 불구하고 살은 오히려 마른 편에 속한다. 그러나 뼈의 발육 상태는 아주 좋아서 그만이다. 매운 음식이 결코 좋을 리가 없으며 오히려 마른 사람은 달고 신 편이 낫다. 거듭 강조하지만 동양의학적 소견은 항상 상대적이다. 전반부에서 취급한 담배마저도 음체질에게는 오히려 쓰기 따라서는 약이 되는데 거꾸로 P(-)인에게는 담배가 독약이 된다. 건뜻하면 "없는 놈이!" "나는 없다!" 하고 강조하는 사람은 우선 마음부터 P(-)인 체취를 풍긴다. 마음부터 "나는 좀 있다!" "나는 부자다!" 하는 태도는 유유한 에너지를 불러들여 P(-)인을 윤택하게 한다.
  정신적으로 한을 잘 품고 주로 산간지방의 체질이다. 국토의 4분의 3이 산인 한국 민족이 약간 이 P(-)인에 유사하다. 목소리는 항상 칼칼하게 쇳소리나 나는 것 같아 듣는 이로 하여금 총명하다는 느낌을 주나 약간 경계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양명인은 집으로 비유하면 기초 또는 골조 공사를 잘 해놓은 것과 같다. 불에 타더라도 기초 철근 골조가 남아 있으면 다시 지을 수 있다. 의외로 강인한 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호탕, 방탕, 쾌락에 물들지 않아 청렴한 선비를 연상케 한다. 대신 자기 열등의식 소외 갈등에 잘 빠지는 것은 한때 남의 비리를 지나치게 공격한 후에 오는 외로움이니 만큼 가능하면 비난을 삼기고 시비를 끊는 것이 처세에 유리하다. 가볍고 경쾌한 음악을 들어 기운의 완급을 조절해야 하며, 특히 묘와 유가 들어가는 토끼와 닭의 해에는 조심하고 가을에는 작건 크건 질병의 시기이니 항상 공복에는 따뜻한 물질부터 섭취해야 한다. 지나친 칼슘 섭취나, 차고 건조한 식품이 해가 되므로 따뜻하고 기름이 풍성한 음식을 자주 섭취해야 한다. 메뚜기, 가재, 게 등은 썩 좋은 음식이 되질 못하며 요컨대 모든 갑각류(딱딱한 껍질로 쌓인 종류)가 금기 식품에 가깝다. 권장할 만한 식물은 모든 기름을 지닌 식물의 씨(참깨, 들깨, 잣, 땅콩 등)가 좋으며, 혹 말을 많이 하여 인후가 건조할 때는 필히 신맛을 응용하여 유자차류를 따뜻하게 이용해 봄직도 하다. 동양의학 제3의 통로인 경락상에는 수양명대장경과 족양명위경의 두 경락이 너무 실한 대신 비장경락과 폐경락이 허하다.
  손과 발가락이 유난히 길거나 발달되어 있으며 신체의 골격에 비해 살이 찌지 않은 사람은 P(-)인이라 보아도 틀림없으며 미축, 즉 양과 소의 해에는 비교적 지내기가 수월하다. 매년의 리듬 역시 그 기본 운기가 변하는데 그 순서의 상징 부호가 갑을병정... 이다. 1년 안에 사계절이 있듯이 5년을 주기로 하여 다섯 단계의 기본 연별 리듬이 순환한다. 거기에도 약간의 법칙이 작동하는데, 어쨌든 허와 실의 반복 순환 리듬체계이다. 호수가나 강가나 바닷가에는 어떤 사람이 이사가면 길할까? 뚱뚱하고 냉한 사람은 불길한 것이 뻔하지 않은가? 당연히 마르고 열이 있는 체질의 사람에게 길지이다. 모든 풍수지리 학설도 알고 보면 상대적으로 해석해야 하는데 온갖 체질의 식구가 섞여 살다 보니 모든 요소, 바람, 태양, 땅, 물 등의 자연의 조건이 완벽하게 섞인 곳이 제일이다. 땅만 해도 그렇다. 인간도 피부호흡을 하듯이 지구도 숨을 쉬어야 하는데 자꾸 콘크리트, 아스팔트를 싸발라대니 숨쉴 구멍은 자꾸 한쪽으로 몰리게 된다. 흙 냄새 특히 가랑비 정도 내린 후의 흙 냄새는 이 P(-)인 체질에게는 아주 좋은 보약이다. 위의 그림을 참조해 보자. 지구는 회전운동을 한다. 그러므로 대기권(바람)을 형성한다. 지구는 회전할 때 남극, 북극 축의 양끝이 들어가게 된다. 쏙 들어간 부분에는 곧 아주 차가운 대기권과 함께 빙하를 형성하는 남북극권이 저절로 생긴다. 그쪽으로 빨려 들어간 찬 기운은 어딘가 밖으로 탈출해 나와야 하는데, 지구의 표피 전체로 열을 발산(화살표 방향)시킨다. 그래서 가장 더운 지방은 열대지방이 되는 법인데 사실 지구 안의 열이 가장 많은 숨을 내쉬는 장소가 바로 적도 부분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태양이 꼭 열을 준다면 높은 산에 올라갈수록 더워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지 않는가? 지구의 호흡을 막으면 AB의 방향으로 나가야 될 내열이 상하의 방향으로 탈출한다.
  위의 도표와 같이 열의 편재 현상이 일어나므로 북극, 남극의 빙하가 빨리 녹게 되고 그러므로 바닷물의 수위가 오르게 되어 지구는 육지를 자꾸 바닷속에 넣게 되고 있다. 화장 좋아하는 여성에게 이치에 맞는 부작용을 설명하여 보자. 피부호흡은 호흡의 커다란 요소이다. 첫째는 들숨 날숨의 폐호흡이요, 둘째가 곧 기 순환체계의 피부호흡이다. 만약 누군가의 피부 전체에 금속 도금을 해버리면 그는 곧 죽게 되어 있다. (설사 코로 숨쉰다 해도) 셋째가 영적인 흐름의 숨쉬기인 미세한 프라나(Prana) 호흡이 있다. 이것은 범인들은 거의 느끼지 못하는 제3의 호흡인데, 이마 정중앙에서 오고 가는 호흡을 말한다. 지구의 표피를 부단히 숨쉬게 해주지 않으면 그림 4와 같이 남, 북극으로 그 세력이 몰리거나 화산 폭발이나 지층 파괴, 지진 같은 재난을 몰고 오게 된다. 온통 진한 화장으로 피부를 덮어버리면 화장을 한 부분으로 피부가 막힘. 그림 6과 같이 주로 후두부 쪽으로 나가게 된다. 후두통과 열성 뇌막염 고혈압 증상과 비슷하다.(그림 6의 A) 약한 눈으로도 그 열이 방출되어 나와서 눈의 피로, 충혈과 더불어 뻣뻣한 후두부 감각과 정신의 불안정, 불명, 기억력 감퇴(건망증)을 몰고 온다.(그림 6의 B) 코로도 나가니 코가 건조하고(그림 6의 C), 입으로도 나가니 혓바닥이 쓰고 건조하다(그림 6의 D) 등등의 증상을 가지고 이 약국, 저 병원을 전전하고 다니지만 원인은 불명이라 한다.
  결론으로, P(-)인은 맨발로 흙을 밝고 다닐지어다. 게다가 산림 속의 산보라면 더 말할 나위 없고, 그저 한없는 대지의 은총을 누려야 하는데, 곧 땅이 P에너지, 신체 에너지의 총공급 장소임을 명심하시라는 말씀이다. 마르고 건조하고 수척한 P(-)인은 필히 태음습토의 기운을 얻어야 하는데, 대지와 같이 평등한 마음을 수행해 나가는 그 정성이 자신의 약점을 감싸주는 중심을 잡아주게 될 것이다. 요컨대 모든 치료나 건강의 회복은 잘 조율된 기타줄 같이 느슨하지도 긴장되지도 않는 중도의 묘한 경지로 안내하는 작업이니까...
  C타입 - 소음인(약칭E(+)인)
  E리듬 즉 감성리듬은 약 28일 주기를 가진다. 묘하게도 여성의 경도 주기와 일치하는데 주로 여성적인 민감성과 관계가 있다고나 할까? 인간은 분명히 양성적 동물이라, 남자라 해서 남성만의 에너지를 가진 것이 아니다. 여성 에너지가 남성의 속에서 굽이치는 것은 자연의 섭리이다. 알기 쉽게 성충동과 예술지향적, 심리적 흐름이라 표현했지만 아주 광범위하다. 정열, 불. 불은 자기를 희생하면서 남을 덥게 한다. 소음인(E+인)은 정열의 화신이다. 매사에 주지 않고는 못 베긴다. 그러므로 항상 주위를 신명나게 한다. 즐겁고 유쾌하고 로멘틱하게 하는 힘을 지닌다. 정신병의 상당한 경우 성의 불만에서 온다는 통계를 보면 은근히 이 문제를 금기시하면서도 알게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삶의 행, 불행을 좌우한다. 성(Sex)의 분리는 남과 여로 의식화되어 버려서 언젠가부터는 인간은 남녀 없는 대 오르가슴의 무아세계가 있음을 잊어버렸다. 끈질기게 서로를 갈구하는 이유는 남녀 각각으로서는 불행하기 때문이다. 불행하기 때문에 당연히 행복을 원하게 되고, 그 방법은 가지가지이지만 그중 이 감성리듬의 불행은 독특하다. 음란, 외설 등 섹스 산업의 번창은 바로 이 리듬의 부조화를 뜻한다. 일찍부터 감성의 조율을 공부하여 터득한 사람이 있다면 많은 부분의 시간 낭비를 덜 수 있을 것이다. 불에는 두 가지가 있다. 소음군화와 소양상화인데, 같은 불이 아니다. 소음은 흥분성(기분이 좋은)열이요, 소양은 분노성(기분이 나쁜)열이다. E(+)인은 몸이 대체로 덥다. 아마 피부에 발진이 잘 생길지도 모른다. 열이 많은 탓이다. 밤에도 이불이 덮길 싫어한다. 손바닥이 후끈거리며 발바닥도 꼭 내어놓고 자고 싶다. 발바닥 한가운데는 용천이라는 중요한 경혈이 있다. 
  용천혈 : 열두 개의 기차 레일 가운데 365역이 있는데 그 역을 경혈이라 하며 그 길을 경락이라 한다. 바로 발바닥 한가운데서 시작하는 경락이 소음군화를 조절하는 족소음신경락이다. 성은 생식과 관계가 있다. 족소음경락이 약하면 유정, 몽정, 발기불능, 조루증 등이 오는데, 바로 신은 단순히 콩팥이 아니라 원래는 '자지 신'이었다. 즉, 성과 꼭 관계가 있는 에너지의 흐름인데 결혼식 첫날 밤 전에 신랑을 거꾸로 매달아 놓고 발바닥을 후려패 주는 예식은 이 부분의 '마사지'에 해당하는 효과를 노린 것이다. 섬약해지기 쉬운 사람은 용천 이름 그대로 끊임없이 힘이 샘솟는 이 자리를 자주 문질러주면 좋다. 선천적이거나 후천적이거나 '소음경'이 발달한 사람은 용기가 있다. 모험심이 강하다. 미지에의 도전이 곧 창조의 동력인데 E(+)인은 모방을 좋아하지 않는다. 다만 지나치면 '방탕' '음란' '퇴폐'의 기운으로 잘못 쓰이는 수가 있으니 과다한 정열을 잘 승화시켜야 한다.
  과다한 정열-. 동양의학은 지나친 것도 병으로 본다. 잘 조율된 거문고의 소리가 건강의 평균이라면 소음인은 너무 죄어붙인 가락과 같다. 그래서 무모하고 또 실패의 상심을 자주 느낀다. 처음부터 빈손으로 태어났음을 상기하여 실패에서 교훈을 삼아야 한다. 남을 턱없이 잘 신뢰하여 '사기' 당하기 일쑤이나 한때 번창하는 영화는 대단하다. 왜냐, 화는 여름의 무성한 삶의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자동차의 엑셀레이터가 좋으면 속도감이 있으나 그만큼 위험하듯이 열병을 조심하고 브레이크에 해당하는 근신, 자중, 자기성찰 등이 꼭 필요하다. 의외로 돈에는 집착이 없으나 이성에의 집착이 강해서 '질투' '시기' '의혹' 등의 반작용을 가지고 있어 번뇌가 많다. 소유욕의 형태 중에 가장 끊기 어려운 것이 애욕, 정욕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부부의 성행위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E(+)인은 항상 자신의 정욕의 집착을 승화시킬 명상을 준비해야 한다.
  약물, 음식의 금기 : 인삼이나 부자, 생강 같은 더운 음식이나 약 또는 마늘, 부추, 달래 등의 신열한 음식은 금기 식품이다. '계피' '옻' 등도 금하는데 흔히 '옻닭' 먹고 두드러기 나는 사람은 E(+)인에 속한다. 조금만 술이 들어가도 눈의 충혈, 두통 등의 거부 반응이 오기 쉬운데 E(+)인은 이미 체내의 알코올 농도가 정상인보다 높기 때문이다. 피부발진, 체중감소와 더불어 엄청난 공포를 안겨주는 에이즈도 E(+)인에게 나타나기 쉽다. 남녀의 지나친 정욕의 탐닉은 임질과 매독성의 성병을 낳는다. 그러나 어쨌든 +, -의 합이니 만큼 죽을 병 까지는 안 갈 수 있다. +와 +의 만남에서 부비고 핥는 성행위의 문란은 자연의 징벌을 피할 수 없다. -와 -의 만남 역시.
  중용과 두한족열 : 에이즈의 예방은 소음군화의 적절한 예방에서 출발해야 한다. '즐거워하되 음탕하지 말라.' 낙이불음의 공자님 교훈은 꼭 맞는 말이다. 불은 꼭 필요하지만 지나치면 집과 재산까지 태워버린다. E(+)인은 여름을 조심하고, 오와 자의 해, 즉 말과 쥐의 해에는 특히 조심해야 하고 겨울 기운의 음기배양과 엄수와 부단한 자기극복이 요구된다. 참고로 다시 강조하는데 더운 기운은 아래에 있을수록 좋다. 주역의 괘상에서 감은 수요, 찬 것이다. 이는 화요, 더운 것이다. 수화의 위치가 수화 된 것을 길한 괘라 하고, 화수 같이 된 것을 불완전한 괘로 친다. 그 이유는 화는 스스로 오르고 수는 스스로 내리므로 수화가 생의 바른 활동을 상징하기 때문이다.(그림2) 그림 3의 수는 수대로 내려가고 화는 화대로 오른다. 중심을 형성할 수 없어 죽은 모양이다. 그러므로 사람으로 비유하면, 머리와 몸은 각각 차고 더운 것이 길한 것이요, 만약 반대가 된다면 불길한 징조이다. 경전에 늘상 두한족열을 주장했고, 복무열통, 두무냉통을 가르쳐(배는 더워서 아픈 법 없고, 머리는 차서 아픈 법 없다) 경계하셨다.
  뜨거운 가슴 차가운 머리 : 뜨거운 정열을 배, 가슴에 안고 냉철한 두뇌를 가진다면 이상적인데 자칫하면 E(+)인은 뜨거운 머리와 차가운 심장을 갖게 되어 위험할 수가 있다. 뜨거운 머리는 모든 기억 장치를 파괴하여 기억력을 없애어 총명을 잃게 하고, 차가운 심장은 타인에 대한 연민과 동정, 사랑이 결여되느니 만큼 사회생활의 원만성을 부족하게 만든다. E(+)인은 당연히 물과 친한 습관도 길러야 한다. 수액에서 풍기는 기도 좋은 약이다. 간단한 피부염은 실제로 깊은 산중에 하룻밤 보내고 나면 저절로 낫는 수가 있다. 성격이 조급한 관계로 단명하기 쉬우나 헌신과 희생의 미덕이 있는 E(+)인에게는 살얼음 디디는 기분으로 세상을 살라는 노자님의 교훈을 주고 싶다.
  D타입 - 태양인(약칭E(-)인)
  에이즈 예방은 태양경으로 : 태양은 하늘의 태양과 동일시하면 아니 된다. 전혀 개념이 다르니가... 태양한수의 개념인데 대양의 뜻으로도 풀이한다. 차고 물이 많은 의미는 정신적으로 어떻게 풀이될까? 왜 AIDS(유머풀이 : 아! 이제는 다 살 살았구나) 같은 불치의 병을 예방한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마음과 육체를 하나로 보는 심신일원론의 사고에 익숙하지 않은 과학문명시대에는 참 이해시키기 어렵다. 알고 보면 뻔한 것인데... 서양문명의 해독에서 가장 악질적인 것은 동양 전통의 일원적 사고나 순환적 사유 방식을 파괴한 데 있다. 음양관은 곧 상대적 관찰이며 그것이 태극이라는 전일 개념에서 나왔음이 그 상징이다. 자! 태양한수에 해당하는 태양경락이 실한 사람의 성격은 그 찬 것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찬것=전율=공포=긴장... 왜? 여름에 공포영화를 상영할까? 더위는 곧 추위로 이긴다. 추위를 느끼게 하려면 인간을 공포로 몰아넣으면 되지 않겠는가? 태양인은 곧 겁쟁이이다. 지나친 건강으로 손발에 찬땀이 수시로 나는 사람은 병적으로 태양경이 발달한 E(-)인이다. 그러나 그렇게 부정적인 쪽만 보는 것은 실례이다. 태양경은 근엄하고 위엄 있고 절제력 있고 조심, 정밀, 신중의 미덕을 간직한 경락인 만큼 대부분 쾌락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 현명하신 독자께서는 눈치챌 수 있듯이 에이즈가 음양쾌락의 산물, 곧 화열성 질환이니 바로 이 태양경락을 활발히 작동시키면 화열을 억제할 수 있다.
  남성위엄 부제시대 : 나가서 춤이나 추러 다니고, 화장을 진하게 하고, 보드라운 속옷을 탐하는 여인을 둔 남편이 근엄과 위신을 잃으면 그 가정은 문란해진다. 요즈음은 이 태양경락이 무너져버린 남성들이 수두룩한 것 같다. 여인의 음란을 죄어버릴 만큼의 힘있는 절제와 신중한 마음이 사라져가고 있다. 통계숫자에 보면 약 50-100만 명이 호스티스 부류라는데 이들의 고객은 분명 남자가 아니겠는가? 쓸개빠진 남성들이 (졸부 종류) 뿌리는 지폐는 날로 음란, 퇴폐를 조장하고, 쉽게 즐기면서 돈도 벌고 뽕도 따는 호스티스를 싫다 하는 통계가 없다. 오히려 조사 결과 '또 하겠다' '만족한다' 하니 좀 반반하면 이제 남자들은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기 시작한다. 그러면서도 저녁이면 빨려 들어가듯이 질탕하게 가서 뿌리고 탕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태양경의 망함 때문이다. 계율, 도덕, 절약, 정조관, 청정, 정숙, 근엄, 추상 같은 호령 등으로 상징되는 전통의 심덕은 몽땅 사라지려 한다.
  '불의 심판' 예방 : '불의 심판'을 예언한, 각 종교가 입을 모은 말세의 진정한 뜻을 하늘에서 불덩어리가 쏟아지고 바다가 끓고, 지진이 일어나는 것 등에서 찾으면 안 된다. 불은 마음의 불이다. 불은 색화 아니면 분노의 열이다. 이 마음의 불이 세지면 곧 말세의 징조다. '소돔과 고모라'의 천벌도 시초는 음탕에서 출발한 자업자득이었다. 적당한 불은 몸을 덥게, 안온하게, 유쾌하게 한다. 에이즈는 정말 끔직 하게도 다 태워버린다. 태양인의 장점을 이 시대는 강하게 살려야 할 때이다.
  접이불사 : '정액은 60방울의 피요, 한 방울의 피는 60 숟갈의 밥이다'라는 말이 있다. '접하되 사정하지 말라'를 강조하는 동양쪽의 가르침인데... "적당한 배설은 몸에 좋다!" "수음 행위도 괜찮다!", "코 풀 듯 풀어버리지 않으면 돌이 될지도(결석증) 모른다!", "사정하지 말라는 동양 고전, 인도 경전, 티벳 불교의 충고는 근거 없는 소리다!", "그럼 무슨 재미로 하냐?" 이와 같이 정을 아끼라는 말과 배설하라는 의견 등 갖가지 반대되는 의견이 상충하여 헷갈리는 이 시대이다. 단 한 가지, 인간은 분명 자연의 일부임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황제내경)의 양생법에 보면 자연에 순응하는 순리의 지혜를 강조하는데 봄, 여름은 양, 가을, 겨울은 음이다. 특히 겨울은 장의 뜻인데 감추고 저장하는 계절로 인식된다. 스프링은 누른 만큼 위로 튀긴다. 기름의 저장 없이 심지만 돋우는 등잔은 곧 가열, 파괴된다. 그림 2와 같은 상태에서 심지만 자꾸 돋우는 사람은 마치 자동차의 기름이 떨어져 가는 상태에서 기름 보충없이 계속 달리는 어리석은 이와 같다.
  허양발동즉사 : 가끔 노인이 갑자기 양기(성적인)가 왕성해져서 자랑을 하기 시작하는 수가 있다. "다시 회춘하는 것 같다" "끝내준다!" 첩을 두었으면..." 이때는 곧 돌아가실 징조이다(이는 허양의 발동이기 때문이다). 이를 비유해 보면 촛불이 마지막 탈 때는 '확!' 타고 꺼지는 것과 같다. 양기가 이상적으로 발양되는 폐결핵 환자(한의학 용어로 음허화동)는 곧 태양경의 부실 때문이므로 동양의학에서는 수기를 보충시키는데 전념한다. (즉 기름을 주유해 준다는 뜻) 겨울에는 저장의 시기인 만큼 고무권총(?) 쏘기 좋아하는 바람둥이나 색화 상승인은 제발 겨울만큼은 자중하시어 총알을 많이 장진해 놓으시라 충고 드린다. 인간이 자연의 정복을 노린 이래 받는 화는 이루 말할 수 없는데, 그 중에 이 성의 문란도 알고 보면 무지의 산물이다.
  '실수'를 즐겨라! : 태양인은 전체적으로 냉한 체질이므로 공복의 냉수(천하없는 약수라 할지라도)는 특히 금한다. 배를 덥게 함과 같이 근본적으로는 성격을 쾌활, 명랑, 사교적으로 해야 한다. 노래 못하는 자의식 때문에 야유회나 스탠드바에서 항상 듣기만 하는 태양인은 실패, 실수의 두려움이 너무 많다. "실수를 즐겨라!" 태양인에게 주는 교훈이다. 사람은 6세 이전에 이미 80퍼센트의 정보나 지식을 섭취하여 인격은 이미 그때 결정이 된다는 보고가 있다. 이는 그 어린 시절의 왕성한 호기심, 모험심, 실수를 의식하지 않는 마음 등에서 엄청난 마음의 에너지가 작동되었기 때문이다. 실패, 지적, 비난, 경멸, 조소, 망신으로부터 오는 수치감을 즐거워하라. 실패는 모험심의 산물이요, 창조의 어머니이다. 태양인이 주눅이 잘 드는 바람에 일생 하인, 비서 등의 피조장자에게 머무르기 쉽다.
  기타 주의사항 : 바다 해물이 좋다고 무조건 따다 먹다가 설사, 이질을 앓는 분이 있다. 어느 분은 굴을 한 양동이 먹고도 거뜬한데, 친구 따라 마신 생맥주 한 컵에 설사하는 체질도 있다. 후자는 태양인이므로 항상 먼저 더운 음식을 취한 후 찬 음식을 취해야 한다. 야뇨증이 있는 어린이를 자꾸 겁주고 긴장시키면 더욱더 오줌을 싼다. 오히려 그의 장점을 칭찬해 주면 자신감을 얻어 그 증상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야뇨증은 곧 족태양방광경의 경락이 너무 차게 되어 있으므로 자구 오그라붙게 혼을 내면 안 된다. 태양인은 용의 해, 개의 해에 특히 몸을 덥게 해야 하고 물가로 이사 가면 별로 이득이 없다. 양지바른 남향을 선택하면 길하고 인삼, 계피, 마늘, 부추, 양파, 생강 등의 더운 식물 등이 유효하며 쑥, 달래 등도 좋다.
  유붕자원방래 불연낙호? : 태양인은 매우 인색한 단점이 있는 반면, 장점은 항상 신중하고 저축의 힘이 있으므로 여간해서 망하는 일이 없고 남의 비밀을 잘 지켜주므로 우정이나 의리가 깊다. 결혼은 반대의 소음인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항상 타인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며 지나치게 독선적으로 외로움을 많이 타므로 자주 클럽 생활을 하여 사교의 감각을 기르는 것이 좋다. '친구는 몽땅 뜯어 먹으로 오는 놈' 이라는 구두쇠 사고를 버리고(많은 부자들의 사고 방식), '벗이 스스로 멀리서 오니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 라는 공자님의 즐거움을 익히시라. 음험한 사기심이나 질투심도 있으니 언제든지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면 이해가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E타입 - 궐음인(약칭I(+)인)
  서양의 직선역사관 : 음력으로 따지는 연별리듬 학설은 오운육기학이란 부르는 (내경)의 고전 학설인데 일종의 동양적 순환, 윤리 사고 방식에 그 초점이 있다. 서양의 사고는 일종의 직선적 논리인데 과거 현재 미래는 영원히 쭉쭉 뻗는 직선론이다. 그러므로 한때 같은 멤버였던 K교수 말마따나 갈구하는 미래의 행복과 유토피아는 과거 역사상 한 번도 있어본 적이 없다는 논리가 그것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공평한 재산분배가 이루어지는 공산주의 또는 마르크스주의의 '이상향'은 과거에 한 번도 있어본 적이 없다. '미래 언젠가에 있다!' 그러므로 오늘은 투쟁해야 한다. 싸워야 한다. 그러나 동양철학은 과거 지향적, 미래 지향적 극단이 아니다. 순환의 행복관은 과거도 아니고 미래 또한 아니며 그 중심을 깨닫는 데 있으니...
  유물적 분류의 의문 : 자본주의, 공산주의가 왜 등장하여 서로 좋은 방편이라 우겨댈까? 행복하자는 것이다. 행복하자는 데 목적이 있는데 그 행복이라는 개념을 '자본' '공산'이 라는 단어에서 느끼는 유물적 기준만으로 설정하고(재물, 토지 등) 소득만 공평하면, 이득이 많으면 행복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크게 보아 몽땅 유물적 사고 방식이다. 이런 분류 자체가 서양과학문명이 낳은 유물적 관점인데 인간을 오직 태음인, 태양인 즉 신체리듬적 의식주 만족지향적(식충적 돼지성) 판단에 근거했다는 말이다. 구소련의 어떤 축제에서 한 여인이 유방을 내어놓고 미친 듯이 흔들어 대는 장면이 TV에 방영돼었다. 소득 재분배, 부르주아 타도의 목적의식으로 저렇게 열을 내면서 흔들까(P-인의 특징), 즉 경락학으로 보면 양명열로 저렇게 광란할까 심히 의심스럽다. 그렇다! 그들에게도 감성리듬의 +, -가 있기 때문에, 그들 또한 탐미적 정열의 조정을 받는 전인격적 존재이다. 먹고 살 만하면 성이나 예술추구의 충동이 생기는데, 그 에술적 심미안이나 성적 만족감도 소득 재분배가 과연 가능할까? 그렇다고 '프로이트' 같이 무조건 성충동의 병적인 불만인을 이론화시킨 것도 극단이기는 하지만...
  기사년은 '궐음'의 해 : 이제 소개하는 궐음형은 심히 이해하기가 어렵다. 기사년은 60년 후에 다시 들어온다. 꼭 같은 형태는 아니지만 기사년의 공통된 리듬이 있는데 이는 마치 계절의 순환과 같다. 어김없이 봄에서 겨울이 흐른다. 다시 겨울에서 봄으로 흐른다. 겨울은 틀림없이 춥지만 매년 같은 느낌이 아니듯이 각 연도마다 봄의 기가 센 해, 여름, 가을, 겨울의 운이 각각 정한 해가 있다. 바로 기사년에 곧 궐음의 기가 매우 강했는데 바로 그해가 궐음인이 위험한 해였다. 복잡한 계산법은 (내경)의 (오운육기)편에 있으니 관심 있는 독자께서는 참조하여 익히시고, 비유하면 몸 더운 이는 여름에 흉하고 찬 사람은 겨울에 불길한 것과 같다.
 궐음의 개념과 비교의식 : 그러면 궐음의 개념은 무슨 개념인가? 이에는 봄, 풍, 동, 청색, 명예, 권력, 지식, 우쭐, 거만, 자존, 고집, 자아의식... 등등의 숨은 뜻이 있다. 예부터 대궐하면 크고 존엄하고 높은 위대한 왕의 거처를 칭한다. 인간의 3대 욕망 중 가장 미묘한 것이 바로 이 궐음욕인데 '누가 세냐?(권력의지)' '유식하나?(지식욕)' '유명하냐?(명예욕)' 등의 비교의식이다. 요컨대 에고(자아의식)의 강화인데 공자님께서 40대 장년은 싸움, 즉 궐음의 욕망을 조심하라 하셨다(노년에는 재물의 탐욕). 싸움은 비난이요, 깎아내림이요, 저주요, 힐난이요, 시기요, 질투 등의 변형된 형태인데 실은 뒤를 뜯어보면 자기 잘남의 증명에서 비롯된다. 이 궐음기가 가장 강한 정치의 세계가 무서운 투쟁의 장소로 되는 것은 당연하다. 특히 선거행사는 더욱더 상대방을 헐뜯는 상황이 심하게 노출되는데 이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내가 높고 네가 낮은 것을 공개적으로 증명해 보아야 하기 때문에 약점을 파헤쳐 뒤를 안 긁을 수가 없지 않겠는가? 선의 우측 손은 주역 괘상 무엇인데 손풍괘라 한다. 선거는 뽑는 장소인데, 비교 없이 뽑을 수가 있는가? 바로 '선거바람' 이라고 하는 말도 맞다. 인류가 하루 빨리 지고, 지선의 행복을 알려면 식색의 성품도 잘 깨달아야겠지만 마지막 이 손풍의 궐음 욕망, 즉 비교 우월 욕망으로부터 자유스러워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일찍부터 '소년이여, 야망, 야심을 가져라!'를 가르친다. 뭔가 '큰 것' '위대한 것' '역사에 기록되고 싶은 것' '한번 휘어잡아 보고픈 것' '싹! 한마디에 뜻이 관철되는 지존하고 센 자리...' '...' 등등을 탐하는 야심을 키워준다. 형제끼리도 비교한다. P(+), (-)적 가정은 돈많은 친척을 부러워 시셈하고, E(+), (-)적 가정은 예술로 유명해진 사람을 일찍부터 흠모해 대고 , I(+), (-)적 집은 어린시절 부터 '회장해라 반장해라 휘어잡아라 누가 일등이냐' 하고 교육시킨다. 누가 '많나' '잘생겼나' '세냐' 이 세 가지의 환상은 인간의 행, 불행을 교묘히 조작해 내고 있다. 애시당초 훌륭한 것의 확실한 개념은 잘 교화하였다면 빈부, 미추, 귀천이 투쟁은 없어졌을 지구촌이다. 명심하고...
  궐음인의 특징 : I(+)인인 궐음인은 교만, 거만하다. 안하무인이며 승부를 좋아하고, 내기를 즐기며 선거를 좋아한다. 세 사람만 모여도 회장 선거 하자는 타입이다. 은근히 내가 가장 앞장서야 한다고 믿고 있으며 '내가 아니면 이 세계를 누가 지도하겠는가' 하는 과대망상의 소유자이다. 게다가 진찰실에 와서까지도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려 드는 형이다. 예를 들면 "간계의 최고 권위자 모 박사를 아시나요?" "협회장 XX씨에게 진찰을 받은 경험이 있습니다" 등등 최고 최대 최신 등의 용어 구사를 잘하는 습관이 있다. 소위 에고 확대 동일시 현상이 강하다. 참 위험한 무형의 욕망인데 장점도 당연히 있다. 우선 자존심이 강해서 비굴한 짓을 하지 않는다. 의혐심의 소유자며 단체의 장으로서 책임감이 있다. 어려운 난세의 영웅이나 호걸은 대체로 I(+)인에 속한다. 의식이 총명하여 잘 잊는 일이 없고 해박한 지식으로 사람을 놀라게 한다. 반면 지나치게 윤리적이어서 감성리듬의 개발에 등한시하며, 분위기가 항상 딱딱하고 매사를 분석적으로 이론적으로 규정짓는 버릇 때문에 여성으로부터 지루하다는 평을 받는다. 왜냐하면 직관의 결여는 곧 지식, 암기 이론적 추리로 현상을 보는 데에서 오기 때문이다. 여자는 '이렇게 다뤄야 한다', 부하는 '요렇게!', 상사는 '저렇게!', 자식은 '이만저만하게!'... 등등 오로지 다루는 방법을 책이나 권위자적 이론에서 구한다. I(+)인은 '크리슈나무르티'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지식으로부터의 해방'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이 명제가 아주 중요하다. 삶은 도입식 기호로 나열할 수 없다. 사실 사람을 여섯 가지 체질로 나누는 이 작업도 잘못하면 분석적 오류에 빠질 수 있기는 하지만... 요컨대 인간은 여섯 가지 가능성을 모두 다 가지고 있는 만큼 I(+)인 뿐 아니라 이론의 집착병은 누구나 경계해야 한다. I(+)인은 신맛을 피하는 것이 좋고 특히 뚱뚱하면서 근육질이라면 더욱더 신맛을 경계해야 하며, 약간 쓴 듯하면서 더운 음식이 좋다. 쑥이나 익모초가 좋은 예이며 바람이 많은 지역은 좋지 않고 봄에 병변이 많을 수 있다. 격노하거나 초조하게 명성이나 권력을 얻으러 광분하면 중풍의 위험 또한 있다.
  잘 조율된 가야금의 현에서 아름다운 소리가 나오게 마련이다. I(+)인의 상태는 꽉 죄어진 타이트한 기타줄이 잘 나가는 듯하다가 탁 끊어지면 큰 병이 오는 허물이 있다. 적당히 느슨하게 이완시키는 명상을 실천해야 한다. 오죽하면 '현맥'이라 하여 I(+)인의 긴장된 맥을 활줄 잡아당긴 듯하다는 표현을 써서 풍이 징조맥이라 하였을까? 미래를 너무 점쳐서 알아보려 추리하지만, 미래는 모르는데 그 맛이 있으므로 '모르는 게 약' 이라는 속담도 일리가 있다고 믿고 자주 망각의 통로, 지식과 기억이 배설경로를 열어주어야 한다(요컨대 너무 아는게 병일 수 있는 체질이란 말). 뱀과 돼지의 해에는 아주 조심해야 하며 모든 지위나 힘이 높아지거나 강해질수록 유연해지고 겸손해야 몸을 보존할 수 있다. 강하면 부러지는 기사년의 독재자 '차우세스크'가 곧 궐음인의 잘못된 비참한 말로가 아닌가? 쓴 충고를 싫어하는 궐음인 유아독존형이 되기 쉬우므로 항상 자기 도취에 빠지는 허물이 있는 반면, 자신 있게 의지를 실천할 수 있는 집념을 가지는 장점도 있다. 장년기까지 건강하다가 하루아침에 쓰러지는 '건강자신 만만증'은 아예 시름시름 아파 가면서 조절의 지혜를 터득하는 '약골'만 못하다. 흔히 강골이라 불리는 근육형 체질이 I(+)인인데 지나친 자기과신은 금물이다. 마음이야 항상 푸른 봄, 여름을 원하지만 가을과 겨울의 음기가 있음은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생로병사의 법칙이다. (주역)에서 건뜻하면 원형이정의 덕이 나오는데 춘하추동의 사계절 덕성을 다 갖추면 길하다는 뜻이다. 전체성은 최고의 신성이며 가장 지극한 도를 얻고자 하는 사람이 추구하는 바이다. 비교에 의하여 나와 네가, 우리와 너희가 분리되어 우월 경쟁을 견주는 한, 전체성을 상실한다. 'Hole'이라는 단어, 성스러움은 'Whole'이라는 전체성에서 왔다는 말이 있다. 6분의 1에 해당하는 각 체질의 특성이 두드러지면 참으로 불행할 수밖에 없다. 사상의학에서 얘기하는 각 체질에 뚜렷이 속한 사람은 어딘가 잘못된 점이 있음을 주지해야 한다. 동양의학 고대경전 (내경)에서 주장하는 이상적인 '음향화평지인'을 소개하면서 궐음의 특성을 끝맺는다.
  음양화평의 사람은 체질 자체가 아무데도 치우침이 없으므로 그 성격에 있어서도 공평하여 거처에 안정하고 두려워함이 없으며 뜻이 한가하므로 마음이 평온하고 욕심이 적으므로 기꺼운 모양을 하여 완연히 혹시라도 남과 다투어 경쟁하려 하지 않으나, 본래 천진한 성품이므로 환경에 좇아 순리적으로 생활하는 때에 따라 변화하고 자신이 높은 위치에 거해도 겸손하고 급하게 서두름이 없어도 다른 사람들이 스스로 인격에 끌리어 변화되게 하니 마음을 바로하여 몸을 수양하므로 스스로 천하를 태평하게 할 수 있는 인물인 것이다. 그 형상은 평안한 듯 무거우며 급격히 하지 않고 존엄하면서도 겸허해 보이며 눈동자가 아름다워 화기가 넘치고 행동이 어지럽지 않으므로 누구나 대하여 본 사람이면 지성인이라 할 것이니 이것이 음양화평의 인체인 것이다.
  F타입 - 소양인(약칭I(-)인)
  체질론의 허구성 : 필자의 가설체계 여섯 가지 체질론은 소양인 이것으로 끝을 맺는다. 이 여섯 가지 체질론은 끝이 없는 인간의 분류 작업 중 또 하나의 가설로, 인간을 이해해 보려는 시도일 뿐 대단한 창조의 산물은 아니다. 다만 개괄적으로 인간의 심적 구조를 세 가지 욕망의 유형으로 파악한 후, 그의 만족과 불만에서 오는 기의 허실로 질병을 파악해 보려는 유심적 접근인 새로운 시도가 아닌가 싶다. 많은 전염병이 사라져간 이 개화 문명 시대에 더욱더 많은 '괴질'이 난무하는 이유는 '마음'의 문제에 그 혐의가 있을 수밖에 없지 않는가? 인간의 이해를 다각적으로 검토해서 시체 해부학적, 분석학적, 병리, 생리뿐 아니라 정서적, 지성 의식의 흐름과 감정의 문제에 대한 생리, 병리 역시 밝혀져야만 동양의학의 신비를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또한 천하없는 명제라도 불변의 진리가 가지고 있는 속성은 꼭 지니고 있기 마련이다. 사람을 체질론에 규정지어 네 가지, 여섯 가지, 여덟 가지, 열두 가지에 딱 맞추는 작업은 극히 위험하다. 설사 꼭 맞아 떨어졌다 해도 그 체질을 평생 유지한다는 암시적 최면 논리가 지배하면 숙명적 논리가 되어 버리기 때문에 위축된 인간의 심성을 유발시킬 수도 있다.
  무유정법 : '항상된 것은 결코 없다.' 즉 '무상성'의 진리는 항상된 진실의 법칙이다. '영원한 것은 영원히 없다.' 이것이 곧 영원한 법이다. '법'은 물 수 변 앞에 갈 거가 들어 있어 법 자체의 속성은 흐르는 것, 변해 가는 특징을 내포하고 있다는 파자 풀이 해설도 있다. 선가에 이런 말이 있다. '무유정법이 정법' 이다. '정한 법이 있지 않음이 곧 바른 법이다.' 즉 일정한 법을 고집하지 않는 사람은 바른 마음을 지닌 사람이라고 의역해 보기로 하자. 주역의 역도 '변할 역'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각설하고 이러한 체질론에 구애받을 것이 아니라 인간의 속성 중에 있는 다양한 욕구와 불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자신의 파악과 더불어 타인의 용서가 빠르지 않을까 싶다.
  용서심과 심칠정지부침 : 요컨대 공자께서도 군자의 일생의 할 일을 '서'라 하셨는데 이는 같을 여아 마음 심의 합한 글자 아닌가? 즉 마음을 같이하는 작업이야말로 건강한 지구촌이 되는 지름길이라 믿는다. 그렇게 하려면 몸의 구조 생리, 병리를 꼭 이해해야 하는데 금세기 최고의 성인 크리슈나무르타조차 모든 교육은 인간의 심리적 진행 상황의 파악, 이해에 있다 주장하셨다. 의학 역시 이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필자는 본다. '심철정지부침' 에서의 '칠정, 즉 희로애락애오욕의 뜨고 가라앉음을 살피라' 이 명제는 사암도인, 즉 조선조 사명당의 제자로 알려진 민족 고유침법의 창시자께서 서문에 간절히 권유한 것이기도 하다. 또 의자는 모름지기 '맥도 모르고 침통을 흔들지 말 것'이며 '자신의 칠정의 부침을 세밀히 살필 것'이것이 침술가의 두 가지 대법이다. 의자에는 소의가 있고 대의가 있다. 소의는 자기 몸 관리와 더불어 남의 육체적 질병을 고쳐주는 정도이지만, 대의는 사회, 국가, 인류 나아가 모든 생물 유정에 이르기까지 관심의 폭을 넓혀 가는 존재이다. 질병과 같은 불행은 어느 곳에나 있고 그 원인은 육체적, 환경적, 섭생, 전염적인 것 뿐 아니라 마음의 용심 문제에 그 절반 이상이 달려 있다
  비교에 의한 불행, 특히 욕심의 병리현상인 비교하는 마음은 결코 사랑이라 할 수 없다. '사랑'의 부재 현상이 곧 질병의 근본적 원인인데 오늘의 소양인은 이 비교에 의한 희생물이 되기 쉽다. 걸핏하면 비교하여 '나 같은 놈이 뭘...' '나가서 죽어버려야 해!' '엽전 근성은 할 수 없어!' '하여튼 한국 민족이란...' '못 배운 놈이...' '너무 못 생겨서...' 이것은 모두 열등의 교만이다. 열등감도 우월감과 같은 교만의 일종이라 강력히 경계한 고타마 붓다의 심리학적 분류도 있다. 일컬어 '상'인데 자기 비하상은 겸손과는 천양지차이다. 자존심의 회복과 자주정신은 I(-)인에게 필히 주사해 주어야 할 약인데 장점 또한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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