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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요약본)척화냐 개화냐 조선의 마지막 승부수

by Casey,Riley 2022.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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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조선 역사의 끝자락이라고 할 수 있는 개화기 오십여 년을 다룬다. 저자들은 병인양요와 신미
양요를 거쳐 강화도 조약을 맺고, 갑신정변과 동학 농민 운동을 지나 대한 제국이 세워진 뒤 일제에
국권을 빼앗기는 한일 병합 조약 체결까지의 기간 동안 조선의 운명을 바꾼 사건들이 왜 일어나게 되
었는지 그 사건이 일어나게 된 전후 사정을 설명하면서, 우리에게 역사적 교훈을 생각하게 한다.

척화냐 개화냐 조선의 마지막 승부수

▣ Short Summary
역사에 ‘만약’이란 게 있었으면 어떨까? 일찌감치 세계의 흐름에 눈과 귀를 열고 정세를 파악하고 있었
더라면, 또 세도 정치 없이 나라가 안정되어 있었더라면, 나라 문을 일찍 열고 근대 문물을 받아들였
더라면, 신분제를 빨리 없애고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켰더라면 등등 의견이 끝이 없을 것이다. 그런
데 그렇게 생각하면 백여 년 전 실패한 역사의 교훈에서 오늘의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조선의 끝자락이라고 할 수 있는 개화기 오십여 년의 역사적 교훈 역시 마찬가지다. 잘못된 조약을 맺
어 백성들이 도탄에 빠진 것도,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로 무역을 허락해 경제가 파탄 난 것도, 강대국
눈치를 보다가 이권을 죄다 빼앗긴 것도, 지금 우리에게 처절한 교훈을 준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교
훈을 주는 건 외교 분야일 것이다. 청나라와 러시아, 일본과 미국 등 세계열강에 둘러싸여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지 못하다 일본에 강제 병합된 게 불과 백여 년 전이고, 광복의 기쁨을 누린 건 채 백 년
이 되지 않는다. 지금 국력, 경제력, 국방력 등이 그때와 몰라보게 달라진 건 사실이지만, 외교 관계는
다르지 않다. 지금도 중국과 러시아, 미국과 일본에 둘러싸인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조선 역사의 끝자락이라고 할 수 있는 개화기 오십여 년을 다룬다. 저자들은 병인양요와 신미
양요를 거쳐 강화도 조약을 맺고, 갑신정변과 동학 농민 운동을 지나 대한 제국이 세워진 뒤 일제에
국권을 빼앗기는 한일 병합 조약 체결까지의 기간 동안 조선의 운명을 바꾼 사건들이 왜 일어나게 되
었는지 그 사건이 일어나게 된 전후 사정을 설명하면서, 우리에게 역사적 교훈을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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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화냐 개화냐 조선의 마지막 승부수

▣ 차례
프롤로그 - 척화냐 개화냐, 그것이 문제로다
서양에서 불어오는 개항의 바람
개방 압력에 대처하는 한ㆍ중ㆍ일의 방식
척화를 부른 네 가지 사건
어디로 가야 하나, 갈림길에 선 조선
조선의 문을 강제로 연 강화도 조약
개화기를 뒤흔든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민중으로부터의 개혁, 동학 농민 운동
척화파와 개화파, 그들은 누구인가
신문물 충돌의 현장
대한 제국으로 가는 길
새 나라인 듯 아닌 듯, 대한 제국
조선 왕실 삼인방의 어설픈 변명
조선의 눈과 귀, 정보 통신 제도
신문물의 홍수 속에서 휘청이는 사람들
급변하는 사회에 스며드는 조선인
조선의 마지막, 한일 병합
에필로그 - 파란만장한 조선의 끝자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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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화냐 개화냐 조선의 마지막 승부수

척화냐 개화냐 조선의 마지막 승부수

프롤로그 - 척화냐 개화냐, 그것이 문제로다
‘제목 : 통상 수교 거부가 옳았을까요, 개화가 옳았을까요? / 보낸 사람 : 만장이 / 받는 사람 : 멍 박
사님 - 멍 박사님, 안녕하세요? 저는 파란중학교 2학년 만장이라고 해요. 박사님께 좀 어려운 질문을
드리려고 해요. 조선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불과 삼백여 년 만에 일본에게 또다시 침략을 당해서 망하
잖아요. 도대체 왜 그런 일을 당한 거예요? 그때 조선 입장에서는 통상을 강력히 거부하면서 끝까지
외국 세력을 막는 게 옳았을까요? 아니면 적극적으로 외국 문물을 받아들이는 게 이득이었을까요? 모
쪼록 명쾌한 해설로 저의 지적 갈증을 해소해 주시길 바랄게요.’
하, 난감한 질문이군. 기우는 조선의 운명을 막기 위해 ‘척화가 옳았냐, 개화가 옳았냐?’ 이게 궁금하
단 말이지? 나도 이 문제로 고민했는데, 결론을 못 내리고 있지 뭐야. 이럴 땐 역사 전문 인공 지능
로봇인 알파봇과 함께해야겠지? “알파봇?” 하고 불렀지만 답이 없어 문자를 주고받았다.
[멍 박사] 좀 어려운 질문이 들어왔어. [알파봇] 뭔데요? [멍 박사] 조선 시대 말, 통상 수교 거부가
옳았는지, 아니면 개화가 옳았는지 그게 궁금하대. 나 때는 ‘통상 수교 거부’ 같은 말 안 쓰고 그냥 ‘쇄
국 정책’이라고 했는데 말이야. [알파봇] ‘통상 수교 거부’로 용어 정리된 게 언젠데요? [멍 박사] 그렇
지? 그건 그렇고, 이야기 구성을 어떻게 해야 할까? [알파봇] 그야 뭐……, 조선이 어쩌다 문을 여느
냐 마느냐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지부터 알아봐야죠. 그러고 나서 조선 사람들은 그때 어떤 생각
을 했는지, 또 어떻게 대처했는지 설명하면 되지 않겠어요? 그 당시 백성들의 입장도 짚어 보고요. [멍
박사] 역시! 넌 소중한 내 동료이자 명석한 연구자야. 난 구글을 준대도 너랑 바꾸지 않겠어!

서양에서 불어오는 개항의 바람
먼저, 개항 이전 조선 안팎의 사정을 살펴볼게. 개항이라는 건, 말 그대로 항구를 개방해서 외국과 교
류를 한다는 뜻이야. 그런데 그때 조선은 중국 외에는 딱히 교류하는 나라가 없었어. 굳이 꼽자면 가
끔씩 통신사를 보내던 일본 정도? 그렇다면 조선에 개항의 바람을 불러일으킨 15세기 서양의 사정은
어땠을까? “알파봇, 조선의 개항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나라는 어디야?”
에헴, 가장 먼저 살펴볼 나라는 포르투갈이에요. 포르투갈은 인도와 인도네시아를 거쳐 중국의 마카오
까지 진출했어요. 결국 포르투갈의 대항해는 유럽 여러 나라들이 아시아로 눈을 돌리게 만드는 출발점
역할을 했지요. 그러니 조선의 개항에 큰 영향을 미친 셈이랍니다.
그런데 그 당시 포르투갈이 세계사에 끼친 영향력은 제법 컸지만, 아무리 그래도 에스파냐만은 못할
거예요. 에스파냐는 포르투갈이 인도 항로 개척에 열을 올리자 이탈리아 출신 모험가인 콜럼버스를 후
원했어요. 그때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비스듬히 가로질러 도착한 곳이 쿠바 옆, 바하마 제도의 한 섬이
었답니다. 사실은 거기가 아메리카 대륙이었던 거예요! 그 후 에스파냐 사람들은 남아메리카 대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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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화냐 개화냐 조선의 마지막 승부수

떼 지어 몰려갔어요. 금과 은을 마구 캐내 막대한 부를 쌓았지요. 에스파냐의 성공을 지켜본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앞다투어 벤치마킹(?)을 했어요. 그 바람에 바닷길이 유럽의 배들로 복작복작해졌지요.
에스파냐가 개척한 바닷길을 통해 대항해의 바람이 머지않아 동아시아, 아니 조선까지 불어닥치기 시
작했으니……. 그야말로 나비 효과가 대단했다고나 할까요?
한편 조선의 개항에 큰 영향을 끼친 나라가 하나 더 있어요. 네덜란드예요. 1500년대 후반, 네덜란드
선박 한 척이 일본에 표류했어요. 그 당시 일본은 에도 막부 시대였는데, 이 일을 계기로 네덜란드와
수교를 하게 되었답니다. 에도는 지금의 ‘도쿄’를 가리키고, 막부는 ‘군사 정권’이라는 뜻이에요. 음, 에
도 막부는 도쿄를 중심으로 한 군사 정권쯤 되겠네요. 일본은 네덜란드를 통해 선진 문화와 기술을 전
해 받았어요. 그걸 바탕으로 훗날 조선을 침략했으니, 네덜란드의 영향도 무시하지 못하겠지요?
아무리 그래도 조선의 개항에 영국보다 더 큰 영향을 끼친 나라는 없을 거예요. 영국은 1600년대 엘
리자베스 여왕 때부터 1800년대 말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이르기까지 이백여 년 동안, 온갖 방법이란
방법을 죄다 동원해 지구촌 최강의 제국이 되었어요. 한편 그 당시 영국은 중국에서 마시는 차를 수입
했는데, 인기가 너무 많은 나머지 은화가 중국으로 계속 쏟아져 들어갔어요. 그리고 그 바람에 무역
적자가 생기자, 이를 해소하기 위해 인도에서 재배한 아편을 중국에 가져가 몰래 팔았어요. 당연히 중
국은 아편 밀매를 금지했지요. 그러자 아예 중국으로 쳐들어가, 인류 역사상 가장 비열한 전쟁이라고
불리는 ‘아편 전쟁’을 일으켰답니다. 그리고 그 전쟁에서 승리해 막대한 배상금을 받았을 뿐 아니라,
중국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그게 조선과 무슨 상관이냐고요?
영국은 중국까지 제압하고 나자 전 세계에 걸쳐 거대한 영토를 거느리게 되었어요. 이제 식민지를 지
키는 데 혈안이 되었지요. 특히 러시아가 만주와 한반도로 내려오는 걸 극도로 경계했답니다. 그러다
1885년에 영국이 조선의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령했어요. 러시아 해군을 견제하기 위해 자기네 해군
기지를 설치하려는 속셈이었지요. 이후 결국 청나라의 중재로 이 년여 만에 철수를 했는데, 그 일을
빌미로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입김이 더욱더 강해졌다고 해요. 그 결과 호시탐탐 조선을 노리던 일본
과 부딪쳐 청일 전쟁이 일어나는 계기로 작용했답니다. 나중에 영국은 일본이 조선을 집어삼키는 걸
묵인했어요. 이러니 영국이 조선에 끼친 영향이 크다고 볼 수 있지요.
그런데 아무리 영국이 조선의 개항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해도 프랑스만 하겠어요? 조선에 통상을 요
구하면서 군함을 동원해 대포를 쏜 첫 번째 나라거든요. 조선은 강화도에 침입한 최초의 서양 국가인
프랑스를 멋지게 물리쳤어요. 이 사건을 ‘병인양요’라고 해요.
그럼 정리해 볼까? 알파봇이 전해 준 이야기의 핵심은 두 가지야. 첫째, 조선에 불어 닥친 개항의 파
도는 주변 나라에서 일으킨 게 아니라 오백여 년 전 유럽의 서쪽 끝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에서부터 일
렁이기 시작했다. 둘째, 그 거대한 파도를 네덜란드와 영국, 프랑스가 조선으로 이끌고 왔다. 여기서,
잠깐! 그렇다면 이토록 복잡한 상황에 처한 조선을 강제로 개항시킨 나라는 어디일까?

개방 압력에 대처하는 한ㆍ중ㆍ일의 방식
조선과 이웃한 청나라와 일본은 서양의 개방 압력에 어떻게 대응했을까? 먼저 청나라는 서구 여러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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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화냐 개화냐 조선의 마지막 승부수

라에 문을 연 뒤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어. 함풍제의 후궁이었던 서 태후는 아들이 황제 자리에 오르
자 권력을 쥐락펴락하는 데만 골몰했지. 음, 그렇다고 개혁의 움직임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야. ‘양무
운동’을 통해서 서양 기술을 도입하고 근대적 군대와 무기를 갖추기 시작했거든. 다만 중국의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기술만 도입했기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어. 반면에 일본은 달랐어. 천황을 지
지하는 젊은 무사들이 힘을 모아 막부를 타도해 버렸지. 그러고 나서 1868년에 어마어마한 개혁을 실
시했는데, 그걸 ‘메이지 유신’이라고 불러. 일본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싹 다 바꾸어 나갔어. 몸통은
그대로 유지한 채 서양 기술만 배우려던 청나라와 달리, 모든 면에서 서구를 따라 하려 했거든. 그렇
게 서구의 제도와 문물을 발 빠르게 받아들인 덕에 부강한 나라로 서서히 바뀌어 갔지.
그때 조선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나름대로 개혁을 하기 위해 노력했어. 청나라와 일본에 각각 영선
사와 수신사를 보내 어느 나라를 모델로 삼을지 정하려고 했거든. 하지만 불행하게도 명성 황후와 민
씨 일가가 모든 권력을 틀어쥔 채 수탈에만 열을 올리는 바람에 제대로 된 개혁을 시도할 수가 없었어.
그럼 한번 정리해 볼까? 그 당시 청나라와 일본 모두 강제로 개항을 당(!)했어. 중국은 영국에, 일본은
미국에 의해서 말이야. 하지만 개항 이후의 모습은 확연히 달랐지. 부분적인 개혁에 나선 청나라는 몰
락의 길을 걸었고, 전부 다 확 바꾼 일본은 근대화에 성공했으니까.

어디로 가야 하나, 갈림길에 선 조선
지금 조선 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어.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겪으면서 서양 세력을 물리치긴 했
는데, 일본이 집요하게 조약을 맺자고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거든. 그래서 긴급히 개화파 박규수 선생
과 척화파 최익현 선생을 모시고 조선이 과연 어떤 길로 가야 하는지 의견을 들어 볼 생각이야. “알파
봇, 두 분 좀 모시고 와야겠는데?” “이미 대기 중이세요.”
[멍 박사] 일본이 저토록 집요하게 조약을 맺자고 난리를 치는데, 조선은 이제 어찌해야 할까요? 비상
시국이니만큼 바로 토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지요. 먼저, 개항에 왜 찬성 또는 반대를 하는지 두 분의
의견을 들어 보겠습니다. 그다음에는 조선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얘기해 주십시오. 적극적으로 개항을
주장하시는 박규수 선생님 말씀부터 들어 볼까요? [박규수] 개항은 세계적 흐름이야. 다들 조약을 맺
어 문호를 개방하고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는 세계사적 전환점에 서 있지. 부국강병으로 가는 첫 단추
라고나 할까? 개항이 아니고선 지금 조선은 살길이 없네. [멍 박사] 개항이 부국강병이다, 이런 말씀이
시군요. 그럼 최 선생님은 왜 개항에 반대하시나요? [최익현] 개항은 망국 첩경입니다. 망국으로 가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란 얘기지요. [멍 박사] 최 선생님, 그렇게 생각하시는 근거가 뭔가요?
[최익현] 개항이란 게 통상을 하자는 것이지 않소? 통상을 하자면 서로 물건을 사고팔아야 하지요. 그
런데 우리나라 물건은 우리 땅에서 나는 걸로 한정되어 있고, 저들이 만드는 물건은 대량 생산으로 만
든 사치스러운 것들이오. 게다가 저들의 요구는 끝이 없소. 매번 맞춰 주지 않으면 화를 내며 약탈하
거나 짓밟을 것이오. 지금 개항을 하면 몇 년 못 가서 나라가 망할 게 뻔하오. 이러한 시국에 박 선생
님께서 주상 전하께 개항을 해야 한다고 종용을 하고 계시니, 정말로 실망스럽습니다. [박규수] 허허,
참 딱하네그려. 나도 일본이 통상을 구실로 무력을 행사한다면 당당히 물리칠 것이네. 십 년 전에 평
양에서 있었던 제너럴셔먼호 격퇴를 보지 않았나? 미국 상선에 불을 질러 버리라는 명령을 내린 사람
이 바로 날세. 부당한 압력은 물리쳐야 마땅하지만, 개항은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라네. 그것이 세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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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화냐 개화냐 조선의 마지막 승부수

흐름이야. 언제까지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소리만 하고 있을 텐가? [멍 박사] 제가 정리해 보겠습니다.
박규수 선생님은 세계적 추세에 발맞춰 빨리 개항을 하되 여차하면 몰아내면 된다는 의견이시고, 최익
현 선생님은 조선이 아직 그럴 힘이 없으니 개항을 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시군요.

조선의 문을 강제로 연 강화도 조약
이렇게 개항을 하네 마네 하면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을 때, 강화도에서는 조선의 역사를 뒤바꿀 파
도가 밀려오고 있었어. 1876년, 일본군이 전함을 이끌고 강화도 앞바다에 떡하니 나타난 거야. 지난해
발생한 운요호 사건의 시비를 가리자나? 아, 운요호 사건이 뭐냐고? 1875년에 일본 군함 운요호가 강
화도에 접근했는데, 조선 수군이 포격을 가한 사건이야. 일본이 그 당시 사건의 진상과 책임을 묻겠다
며 반년 만에 전함 여섯 척을 앞세워 강화도에 나타난 거지. 한 대 얻어터지는 척하면서 돌아갔다가
잔뜩 무장을 한 채 떼로 몰려온 셈이야.
아무튼 강화도 연무당에서 조선과 일본 대표단 사이에 협상이 시작되었어. 일본 대표는 운요호 사건부
터 꺼내 들었지. “조선은 어찌하여 일본기를 단 운요호를 먼저 공격했소?” 그러자 조선 대표가 반박했
어. “일본 깃발은 보지 못했소. 접근하지 말라는 경고를 무시하니, 자위권 차원에서 대포를 쏘게 된 거
아니오?” 그런데 바로 다음 날, 일본이 본색을 드러냈지. “거두절미하고, 일본과 조선 두 나라 간의 조
약을 맺읍시다.” 조선 대표는 순간 벙쪘지. “갑자기 조약이라니요?”
그러는 동안, 일본은 어처구니없는 일을 벌였어. 바다에 떠 있는 전함에서 대포를 쏘며 긴장감을 조성
하질 않나, 회담장을 무장한 일본 군인들로 에워싸질 않나……. 가장 무시무시한 건 조선군 훈련장을
빼앗아서 한 사격 연습이었지. 최신식 무기인 기관총을 마구 쏘아 댔거든. 일본군이 드르르륵, 하며 총
을 쏘자 기관총을 처음 보는 조선 대표단은 뒤로 나자빠질 지경이었다나?
일본은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무력시위를 벌이면서 13개의 항이 적힌 조약서에 서명하라고 압
박했어. 서명을 빨리 하지 않으면 더 많은 함대를 불러 전쟁도 불사하겠다며 공갈 협박을 했지. 결국
조선 대표는 십여 일 만에 울며 고추냉이 먹는 심정으로 일본과 조약을 맺었어. 이것이 바로 조선을
개항하게 만든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불평등한 조약이면서, 훗날 조선의 문을 닫게 만드는 시작점이
된 ‘조일 수호 조규’야. 우리에게는 ‘강화도 조약’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지.
조약의 내용을 살펴보면 언뜻 괜찮아 보이는 말도 꽤 있어. ‘조선은 자주국이며 일본과 평등하다.’ 나쁠
거 없어 보이지? 그런데 일본의 속셈은 다른 데 있었어. 그때는 청나라의 입김이 조선에 아주 세게 작
용하고 있었거든. 그러니 위의 문구는 조선을, 자주독립 국가로 인정하는 게 아니라, 더 이상 청나라의
속국이 아니니 앞으로 신경 끄라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는 거야.
이외에도 ‘조선과 일본인이 자유롭게 왕래하게 하자.’라는 내용도 있었는데, 이건 두 나라 상인들이 서
로 장사하는 걸 허락한다는 뜻이야. 그 바람에 조선에서 생산한 곡물이 싼 가격에 일본으로 수출되었
고, 대량 생산된 일본의 공산품이 조선으로 쏟아져 들어오게 되었지. 결국 조선의 수공업은 강제로 문
을 닫을 수밖에 없었고,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졌어. 또 일본인이 조선에서 죄를 지어도 조선 관청에서
재판하지 않고 일본인이 재판을 하는 ‘치외 법권’을 인정하는 조항에다, 일본 배가 조선 해안을 자유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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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화냐 개화냐 조선의 마지막 승부수

게 측량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내용도 담겨 있었지. 조선 법에 구애받지 않으면서 우리 영토 구석구석
을 탐사해 본격적인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겠다는 의도였던 거야. 그러니까 강화도 조약은 조선에는 하
나도 이득이 되지 않고, 일본에게는 조선 침략 계획의 첫 단추를 훌륭하게 채운 조약이었지.

대한 제국으로 가는 길
개항 이후 어떤 과정을 거쳐 대한 제국에 이르게 되었는지 한번 살펴볼까? ① 동학 농민 운동, 1894년
- 갑오년에 일어난 전라도 농민들의 ‘반봉건 반외세’ 운동이었어. 말이 너무 어렵다고? 다시 말하면,
사회를 개혁하고 외국 세력을 물리치자는 의미야. 처음엔 탐관오리를 처단하기 위해서 들고일어났는데,
더 나아가 낡은 제도를 없애려는 개혁 운동으로 발전했지. 이때 덜떨어진 조정에서 동학 농민군을 진
압해 달라면서 청나라에 군대를 요청하는 바람에 일본군도 덩달아 조선에 상륙하게 돼. 이게 조선의
운명, 아니 동아시아의 운명을 가르는 계기가 될 줄 누가 알았겠어?
② 청일 전쟁, 1894~1895년 - 청나라군과 일본군이 조선에 상륙하자 동학 농민군은 조정과 전주 화
약을 맺고 자진 해산했어. 그러자 조정은 청나라와 일본 군대에 나가 달라고 요구했지. 청나라와 일본
은 서로 ‘쟤네가 나가야 우리도 나갈 건데?’ 하는 식으로 버텼어. 그러던 중 일본군이 경복궁을 습격해
친일 인사들로 내각을 세우고, 청나라 함대를 공격하면서 기어이 전쟁을 일으키고 말아. 음, 청일 전쟁
이 일어난 거야. 조선 땅에서 외국 군대가 서로 맞붙어 싸우게 된 셈이지. 철저하게 대비한 일본군에
비해 준비가 덜 된 청나라는 이 전쟁에서 패한 뒤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잃게 되었어. 전쟁에서 승리
한 일본은 “조선은 내 거!”라고 선언하면서, 청나라로부터 랴오둥반도까지 얻어냈지.
③ 삼국 간섭, 1895년 - 그런데 국제 정세가 일본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았어. 일본이 랴오둥반도를 차
지하려는 순간, 러시아가 “잠깐!” 하고 제동을 걸었거든. 남쪽으로 내려오던 러시아로서는 랴오둥반도
를 일본에 빼앗기면 자신들의 계획에 큰 차질이 생길 것 같았겠지. 그래서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인
뒤, 일본에 ‘랴오둥반도를 반납하라.’며 간섭하고 나선 거야. 아직 어린 표범에 불과하던 일본은 막 삼
키려던 떡을 다시 뱉어 내야만 했어.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이런 상황을 만들어 놓고도 하릴없이 손
가락만 빨며 지켜보던 고종과 명성 황후의 머리에 그 순간 반짝! 하고 불이 켜졌다는 거야. ‘어? 일본
보다 러시아가 더 세잖아? 그럼 러시아와 손을 잡으면 되겠네?’ 그래서 러시아통들도 허겁지겁 내각을
꾸렸지. 그 무모한 결정은 그렇잖아도 열 받은 상태인 일본을 제대로 자극하고 말았어.
④ 을미사변, 1895년 - 일본은 청나라를 물리친 보람도 없이 조선을 러시아에 내주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이를 막아야겠다는 생각에 눈엣가시인 명성 황후를 제거하기로 마음먹었지. 작전명
‘여우 사냥!’ 1895년 을미년 가을, 일본은 군대와 낭인들을 동원해 경복궁을 습격했어. 궁궐에 쳐들어
온 낭인들은 명성 황후를 칼로 베어 죽이고 말았지. 고종은 너무너무 화가 났지만, 분노보다 다른 감
정이 앞섰어. ‘궁궐에 난입해 중전을 죽일 정도면……, 나도?’ 바로 두려움이었어.
⑤ 아관 파천, 1896~1897년 - 고종은 경복궁을 빠져나가기로 결심했어. 늦은 밤, 고종은 아들인 순종
과 함께 여인으로 변장한 채 가마를 타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어. 이를 ‘임금이 아라사(러시아를
소리 나는 대로 옮긴 말) 공사관으로 피난 갔다.’고 해서 ‘아관 파천’이라고 불러. 그래도 한 나라의 임
금인데 남의 나라 공사관으로 도망을 쳤으니, 고종은 물론이고 나라 체면이 말이 아니었지. 그때 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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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화냐 개화냐 조선의 마지막 승부수

오는 간곡한 목소리………. “전하, 제발 궁으로 돌아오십시오.” 과연 누구 목소리였을까?
⑥ 독립 협회, 1896~1898년 - 백성들의 목소리지. 그 가운데서도 끈질기게 고종에게 궁궐로 돌아오
라고 호소한 단체가 있었어. 바로 독립 협회야. 아마 고종은 그때 무시하고 싶었을 거야. 그러고는 싶
지만 일본이 언제 자신을 해칠지 모르는데 어떻게 돌아가? 하지만 곰곰 생각해 보면 독립 협회의 호소
도 일리가 있었지. 결국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 더부살이를 한 지 일 년 만에 궁궐로 돌아왔어.
⑦ 대한 제국, 1897~1910년 - 고종이 환궁하자 개화파와 척화파가 어쩐 일로 일치단결해서 나라의
모습을 바꾸라고 요청했어. “칭제건원(稱帝建元)하셔서, 청이나 일본은 물론 서구 열강과 대등하고 독
립된 자주국임을 선포하십시오.” 간단히 말하면, 중국처럼 연호를 제정하고 왕을 황제라 부르자는 말
이야. 이렇게 해서 1897년 10월, ‘대한 제국’이 선포되었어. 러시아 공사관에서 돌아오라고 외치던 서
재필과 독립 협회가 청나라로부터 독립의 의미를 담은 ‘독립문’을 만든 것도 이 무렵이었어. 그렇다고
해서 대한 제국이 조선과 완전히 다른 나라냐고 묻는다면 확실하게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 왕이었던
고종이 그대로 황제가 되고, 신하도 땅도 정부도 그대로였으니까.

새 나라인 듯 아닌 듯, 대한 제국
고종은 대한 제국을 세우기 전에 내각을 싹 물갈이했어. 친일파 인사들을 몰아내고 친러파 인사들로
꽉꽉 채웠지. 아무래도 새 나라를 세웠으니 변화를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거야. 그래서 ‘광무개
혁’을 실시해. 광무개혁의 기치는 ‘옛것을 근본으로 하되, 새것을 참조한다.’였어. 쩝, 아예 근본부터
갈아엎어도 모자랄 판인데……. 뭔가 절박함이 많이 부족해 보인달까? 그래도 광무개혁을 실시한 시기
는 꽤나 적절했어. 러시아와 일본이 서로 눈치만 보고 있던 때여서 대한 제국에 대한 간섭이 덜했거든.
하지만 개혁의 성과는 매우 미미했지. 군사 제도 개혁은 돈이 부족해서, 토지 제도 개혁은 상황 파악
을 제대로 못 해서, 경제 개혁은 외국 자본에 밀려서……, 등등의 이유로 실패만 거듭했거든.
그중에서도 제일 방해가 되었던 건 러시아 세력을 등에 업고 잇속을 챙기려는 수구파들이었어. 뭐, 고
종 역시 다를 바 없었지. 자신의 권력을 지키려는 욕심에 주구장창 수구파 의견만 들어주다가, 결국
개혁의 골든 타임을 헛되이 흘려 버리고 말았으니까. 그래도 근대 교육 기관인 학교와 전기ㆍ통신ㆍ의
료 등 최신 시설을 들여와 운영한 건 나름 괜찮은 선택이었어.

신문물의 홍수 속에서 휘청이는 사람들
우편이나 전신, 전화는 나라에서 적극적으로 들여온 근대 문물이에요. 행정 부서를 만들어 관리들이
업무를 담당했고, 새 관청을 여는 날에는 큰 잔치까지 열었지요. 그렇지만 백성들이 편리하게 이용하
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어요. 이에 반해, 백성들 사이에 급속도로 퍼진 근대 문물도 있었어요. 대부분
먹고, 입고, 자는 데 쓰는 물건들이었는데, 이런 물건들은 대부분 ‘양’자로 시작했어요. 여기서 ‘양’이란
서양에서 들어왔다는 뜻이에요. ‘양’자로 시작하는 물건들에는 무엇무엇이 있을까요?
개항 후 서양 사람들이 조선에 많이 들어왔어요. 보통 외교 활동을 하는 외교관이나 종교를 전파하는
선교사들이었지요. 이들은 처음에 조선의 전통 가옥인 한옥을 고쳐서 썼답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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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화냐 개화냐 조선의 마지막 승부수

면서 자기네 나라에서 각종 건축 자재를 들여와 건물을 짓기 시작했어요. 주로 서양식 공사관이나 학
교, 교회를 지었는데, 이런 건물들을 ‘양관’ 또는 ‘양옥’이라 불렀다고 해요. 또 서양에서 들여온 남자
옷은 ‘양복’, 여자 옷은 ‘양장’이라고 불렀어요. 양복과 양장을 갖춰 입으려면 모자와 지팡이, 구두 등
의 소품이 필요했어요. 이런 소품 중에 ‘양산’도 있었는데, 서양 우산이란 뜻이에요. 아, ‘양말’도 서양
에서 들여온 의상 소품 중 하나예요. 곧 버선을 대신하게 되지요.
사실 개항 후 외국에서 조선에 들어온 물건 중에 편리하지만 알맹이는 쏙 빠진 것들이 많았어요. 석유
등잔불만 해도 그래요. 예전에 사용하던 아주까리기름이나 쇠기름에 비해 연기도 덜 나고 오래 쓸 수
있어서 편리했지만, 아주 비쌌지요. 짚신을 대신하게 된 고무신은 또 어떻고요? 비 오는 날에도 신을
수 있어서 편했지만 비싸서 아무나 신지 못했답니다. 그 당시 조선이 외국과 하던 통상은 서로에게 부
족한 걸 채우기 위해 비슷한 수준의 물건들을 주고받는 대등한 통상이 아니었어요. 한쪽은 일일이 손
으로 몇 달에 걸쳐 만든 물건을 들고 왔는데, 다른 한쪽은 공장에서 대량으로 찍어 내는 물건을 들고
왔으니 누가 더 불리했을까요? 불편해도 농사를 지으며 거둔 만큼 먹고살던 조선 백성들은 편리함과
신기함을 맛본 대신, 경쟁할 수 없는 통상으로 인해 크나큰 문제를 떠안게 되었답니다.
강화도 조약에 반대한 최익현이 걱정하던 게 현실이 된 셈이었어요. 농산물은 싼값으로 빠져나가고,
비싼 공산품이 수입되어 백성들만 점점 더 가난해지는 현상 말이에요. 게다가 불평등 조약으로 인해
손해만 보는 상황이 생겨도 항의조차 할 수 없었답니다. 조선의 상권은 이미 서양 상품의 파도를 경험
해 본 잇속 빠른 일본인 장사꾼들에게 다 빼앗기고, 공장에서 만든 서양의 값싼 면직물이 들어오며 조
선의 수공업자들은 전부 쇠락해 갔어요. 상황을 파악하고 장기적인 대비를 한 뒤 나라의 문을 여는 것
과 우왕좌왕하다 문이 부서져 어쩔 수 없이 개방 당한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을 수밖에요.

조선의 마지막, 한일 병합
오늘 만나 볼 분은 마지막 과거 시험 급제자인 이상설 선생입니다. 곁에서 안타깝게 바라보는 대신이
있는데, 무슨 일인지 인터뷰해 보겠습니다. [알파봇] 이 추운 날 저렇게 종일 엎드려 있으면 동상에 걸
리지 않을까요? 대체 무슨 요구를 하느라 저리 애통하게 외쳐 대는지 혹시 아세요? [신하1] 일본 놈들
이 강제로 을사조약을 맺지 않았습니까? 그걸 철회하라는 것이지요. 대한 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넘
긴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니까 말이오. [알파봇] 다른 신하들은 어딜 가고 혼자이신 거예요?
[신하2] 사실 다른 신하도 입은 있지요. 다만 목숨이 아까울 뿐……. 이상설 대감은 너무 뛰어나 아무
도 함부로 못 할 사람이기에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거지요. [신하3] 맞습니다. 지난번 황무지 개간 권
리를 일본이 빼앗으려고 수를 썼을 때도 이상설 대감이 나서서 무산시켰지요. 그래서 이번에는 저분을
쏙 빼고 간신배들만 불러 모아 조약을 맺었다고 합니다. [알파봇] 아, 충신들은 빼고 을사늑약을 맺어
버린 것이었군요!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일본은 대한 제국을 삼키는 데 방해물이 없어졌으
니, 이때다 싶어서 자신들의 야심을 확실히 드러낸 모양이네요, 그쵸?
궁궐 앞에서 조약이 무효라며 외치던 이상설 선생이 이 년 뒤 유럽 국가 네덜란드의 헤이그라는 도시
에 나타났습니다. 이곳에서 세계 강대국들이 모여 ‘만국 평화 회의’를 열었다고 해요. 이상설 선생은
‘을사늑약이 무효라는 사실을 세상에 알려야 한다!’는 주장을 그대로 실천하려는 것 같아 보이네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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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화냐 개화냐 조선의 마지막 승부수

상설 선생은 스스로 영어ㆍ불어를 익히고 수학ㆍ화학ㆍ정치학 등 근대 학문을 독학으로 깨친 분입니다.
외국어 실력은 물론 논리력ㆍ설득력 어느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데다, 나라에 대한 충성심마저도 따
라갈 수 없을 정도지요. 고종은 을사늑약 후 연변으로 몸을 피해 ‘신흥 무관 학교’를 운영하던 이상설
선생에게 비밀리에 명령을 내립니다. 이위종과 이준을 이끌고 전 세계 강대국들이 모인 평화 회의에
참가해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알리라고요.
세 명의 특사는 헤이그에서 각종 기자 발표회에 참여해 진실을 알렸어요. 일본이 어떻게 속임수를 썼
는지 알리는 호소문과 기사를 써서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홍보했지요. 이위종은 만국 기자
회의에서 ‘한국에 대해 호소합니다.’라는 연설을 해 전 세계 기자들을 울리기도 했답니다. 하지만 일본
의 방해로 본 회의에는 참석하지 못했어요. 그래도 전 세계에 대한 제국의 상황을 알릴 수 있었지요.
또 이때의 경험이 1920년대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에 바탕이 되었답니다.
일본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어요. 헤이그 특사를 파견했다는 책임을 물어 고종을 임금 자리에서 내쫓
아 버렸거든요. 그러고는 고종의 아들 순종이 왕위를 잇도록 했지요. 그런 다음에는? 당연히 일사천리
로 조선을 식민지로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어요. 1907년, 정미칠조약이 체결되었어요. 앞으로 대한 제
국 정부의 법과 행정은 모두 일본 통감에게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내용이었답니다.
그다음 단계는 일본에 저항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빼앗는 것이었어요. 바로 ‘군대 해산’ 명령이었지요.
“대한 제국 군인들은 전부 연무장에 모이도록!” 군인들은 무슨 일인가 싶어 어리둥절했어요. 그때 2대
대 쪽에서 총소리가 들렸지요. “박승환 대대장이 자결했다! 군대 해산에 불복한다!” 군대를 해산하라는
명령에 따르지 않겠다는 뜻으로 대대장이 목숨을 끊은 거예요. 그 소식을 들은 대한 제국의 군인들이
무기를 들고 나섰어요. 대한 제국 군인들은 용감히 싸웠지만 일본의 압도적인 화력 앞에 결국 패하고
말았답니다. 살아남은 군인들은 만주로 건너가 조선 독립을 위한 의병이 되었어요.
이후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났어요. 하지만 군사력에서 일본과 큰 차이를 보여 사천 명이 넘는 수가 체
포되거나 죽임을 당했어요. 그래도 대대적인 의병의 활동은 일본을 꽤나 괴롭혔지요. 여기에 개인적인
저항도 일본을 오싹하게 만들었답니다. 독립투사들이 을사늑약을 주도한 친일파 매국노들을 찾아가 암
살을 시도했고, 심지어 일본과 미국 등 해외에서 일본을 도운 외국인들을 암살하기도 했어요. 암살 시
도 중에서 독립운동가 이재명이 이완용을 칼로 찌른 사건은 백성들의 울분을 어느 정도 덜게 했답니다.
물론 이완용이 부상에 그친 걸 아쉬워한 사람이 더 많았지요. 그래도 그보다 두 달 전, 하얼빈에서 일
어난 사건의 소식이 있어 그 아쉬움을 날릴 수 있었어요.
“탕, 탕, 탕, 탕, 탕, 탕!” 여섯 발의 총성이 하얼빈 역을 뒤흔들었어요. 그중 세 발이 통감 이토 히로
부미의 가슴과 배에 꽂혔어요. 그 자리에서 사망한 이토 히로부미는 을사늑약을 추진한 대표적인 인물
이었답니다. 당연히 조선 백성들에게는 나라를 빼앗은 원흉이었지요.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
했다는 소식에 일본은 초상집이 되었고, 조선 백성들은 덩실덩실 춤을 추었어요. 중국은 왜 자기네 나
라에는 안중근 같은 인물이 없냐며 불평했다나요. 이렇게 끊임없이 저항하며 맞서 싸웠지만 차곡차곡
진행된 일본의 한일 병합은 막을 수 없었어요. 1910년 8월 29일, 각종 신문에 일본과 대한 제국의 병
합이 발표되었어요. 어차피 마지막 한 걸음인 형식적인 병합이기 때문에 임금도 백성들도 적극적으로
대항하지 못했지요. 그날, 조선 역사 오백 년의 문은 조용히 닫히고 말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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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화냐 개화냐 조선의 마지막 승부수

에필로그 ­ 파란만장한 조선의 끝자락
개항에 바로 앞선 시기, 그러니까 1860년대는 세도 정치의 시기였어. 이때부터 1910년에 나라를 빼앗
길 때까지 벌어진 굵직굵직한 사건들은 오백 년 조선 역사 속에서도 아주아주 뼈아픈 순간이라고 할
수 있지. 이때 일어난 사건들이 연속해서 다른 사건을 불러일으켰고, 그 과정에서 벌어진 실책들이 일
제의 침략으로 이어졌으니 말이야. 만장이에게 답장을 하기 전에 간략하게 정리해 볼까?
어린 고종이 왕위에 오른 후 흥선 대원군이 권력을 쥐면서 세도 정치로 곪아 가던 조선을 치료하고자
개혁을 단행했어. 그 와중에 조선 바다에도 이양선이 출몰하기 시작했지. 근대화를 마친 서양 여러 나
라들이 인도, 동남아시아와 중국에 진출한 뒤 그 옆의 조선에까지 손을 뻗은 거야. 중화사상에 젖어
성리학을 바탕으로 삼지 않은 나라는 모두 오랑캐라고 여기던 조선의 권력층은 심하게 동요했어. 게다
가 강성하던 중국 대륙의 청나라마저 그들 손에 당했다고 하니, 무섭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해서 통상
을 전면 거부해 버렸지.
또 강하게 통상을 요구하던 서양 세력과 ‘병인양요’, ‘신미양요’라는 전투를 치르면서 개항을 거부하려
는 자세는 더욱 확고해졌어. ‘척화비’라는 비석을 세워 오랑캐와 친하게 지내자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오랑캐라고 선포했을 정도니, 개항 얘기는 꺼낼 수도 없었겠지. 그런데 문을 닫아건 그 소중한 시간
동안, 조선이 적극적으로 대비를 했던 것도 아니었어. 권력을 잡은 수구파들에 의해 나라 살림은 점점
어려워지고 백성들의 삶은 고달파지기만 했지. 그런데 이게 우리 조상이 어리석어서가 아니라 당시 상
황이 그랬다고도 할 수 있어. 일본은 조선에 비해 유교의 영향력이 크지 않았어. 게다가 일찍 동방 항
로를 찾아 나선 외국과 무역을 했던 덕분에 서양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지. 그래서 짧은 시간에 근
대화를 이룩하고 점차 서양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시작했어.
그러던 중에 상황이 불합리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늘어나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어. 조선 밖의 돌아가
는 분위기를 감지하던 젊은 지식인들, 그리고 중국과 일본을 넘나들며 소식을 물어오는 역관들이 중심
이 되어 세상을 더 넓게 보기 시작한 거야. 이들은 나라 문을 닫아걸어서는 안 되고, 오히려 서양 열강
과 통상을 해서 그들의 발전된 문물을 배우고 베껴서라도 힘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어. 바로 척화파
와 날을 세운 개화파들이야. 그런데 개화파도 모두 똑같지는 않았어. 천천히 나라 문을 열자는 온건
개화파와 지금 바로 열고 빨리 배우자는 급진 개화파로 나뉘었지.
처음에는 척화파의 주장이 우세했어. 병인양요나 신미양요와 같은 서양의 침략적 행위로 인해 거부감
이 컸기 때문이지. 그러나 일본에 의해 강제적으로 강화도 조약을 맺어 개항을 하게 되었어. 조선은
준비된 바가 전혀 없었기에 불평등한 조약이었어. 이후 대기하고 있던 다른 나라들과의 통상이 줄줄이
이어졌고, 근대 문물이 밀려오기 시작했어. 이제 개화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어. 개화를 하는 건 분명
한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가 문제였지. 이에 급격한 개화를 노린 갑신정변이 벌어졌고, 밀려오는 외국
세력과 비리로 점철된 조정을 비난하며 아래로부터의 개혁인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났지. 비록 동학
농민 운동은 실패로 끝났지만, 농민들의 개혁 요구는 갑오개혁에 상당 부분 반영되었어.
개화의 물결을 타게 된 조선은 청과 일본, 러시아 등 외국 세력에 기대면서 자주적이고 건실한 근대화
를 이루지 못했어. 광산 채굴이나 삼림 채취 같은 권한을 내주면서 우왕좌왕했고, 결국 청나라와 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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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화냐 개화냐 조선의 마지막 승부수

아 세력과 대립하던 일본이 전쟁에서 차례로 승리를 거두며 조선을 삼켜 버리게 되었지. 대략의 흐름
을 보면 자못 답답하게 느껴질 거야. 척화든 개화든 각자 주장하는 바가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실행
방법을 제대로 세우지 못해서 대부분의 시도가 실패로 끝나 버린 셈이니까. 그러니 척화와 개화 중 어
떤 게 더 나은 선택이었는지 고르는 건 큰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어. 아오, 이 결론을 내가 만장이에
게 잘 설명할 수 있을까? 일단 해 보자.
‘제목 : 만장이에게 / 보낸 사람 : 멍 박사 / 받는 사람 : 만장이 ­ 만장아, 안녕? 척화파가 옳았는지
개화파가 옳았는지 질문했지? 실은 만장이의 이번 메일처럼 나를 고뇌의 늪에 빠뜨린 질문은 없었어.
그래도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고민하다 보니, 나도 근본적인 문제를 다시 따져 볼 수 있었지.
각각의 주장들을 두루 살피다 보니 혹시 이런 생각 안 들었니? ‘과연 척화파와 개화파 어느 한쪽의 잘
못 때문에 나라를 빼앗겼을까?’ 하는 생각 말이야. 1860년대 조선 말기에서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으
로 나라를 빼앗기기까지 흐름을 살펴보면, 두 입장이 부딪쳐 조선의 발목을 잡은 적은 딱히 없는 것
같아. 굳이 따지자면 이양선이 출몰한 뒤 개항을 할 거냐 말 거냐 논쟁할 때는 크게 대립했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개항과 개화는 피할 수 없는 흐름이 되고 말았으니까. 결국 개화를 거부하거나
너무 급격한 개화를 해서 조선이 망한 게 아니라, 각각의 정책을 펼 때 제대로 실행되지 않아서 문제
가 생겼던 거야. 여기서 분명한 건, 나라 밖은 하루가 다르게 휙휙 변해 가는데, 조선의 권력자들은 세
계정세에 어두웠을 뿐 아니라 알게 된 이후에도 주체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점이야. 외려 부패를
일삼으며 권력 유지에 골몰하느라 개혁에 실패해 나라를 빼앗기고 말았지.
역사에 ‘만약’이란 게 있었으면 어떨까? 일찌감치 세계의 흐름에 눈과 귀를 열고 정세를 파악하고 있었
더라면, 또 세도 정치 없이 나라가 안정되어 있었더라면, 나라 문을 일찍 열고 근대 문물을 받아들였
더라면, 신분제를 빨리 없애고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켰더라면 등등 의견이 끝도 없겠지? 만장이는
어떻게 생각하니? 어떤 방식을 받아들이거나 시행했으면 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을까? 한번 생각해 봐.
그러려면 시대의 흐름과 세부적인 문제들을 더 알아봐야겠지?
또 하나, 조선의 마지막을 살펴보면서 지금 우리가 나아갈 길을 고민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어떤
사람은 우리나라를 ‘섬’에 비유하기도 해. 중국, 러시아, 일본, 그리고 바다 건너 미국에 둘러싸인 외로
운 처지니까 말이야. 그렇다면 서로 자기편에 줄을 서라고 요구하는 지금,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백여 년 전 실패한 역사에서 오늘의 상황을 풀어 갈 수 있는 힌트를 얻을 순 없을까? 앞으로도 꾸준히
스스로 문제를 만들고 또 거기에 대한 답을 구해 보도록 해. 그러다 아무리 궁리해도 풀리지 않는 문
제가 있다, 그럼 어떻게 하라고? 연구소에 질문하면 되지, 뭐. 그럼 만장이,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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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화냐 개화냐 조선의 마지막 승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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