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자키 마사카츠 지음 /
이 책은 ‘음식’과 ‘술’과 관계가 깊은 ‘미각’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한 시도이다. 고대로부터 오늘날
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쓴맛, 신맛 속에서도 유용성을 발견했고, 맛이라는 문화적 미각을 끊임없이
개발해왔다. 맛에는 짠맛, 단맛, 쓴맛, 매운맛 등이 있는데, 저자는 이 책에서 인간이 느끼는 맛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발전해왔는지를 자세히 설명한다. 또한 맛에 관한 설명
뿐만 아니라 맛을 촉진하는 음식과 기호품에 관해서도 흥미진진하게 설명하고 있다.
처음 읽는 맛의 세계사
미야자키 마사카츠 지음
▣ 저자 미야자키 마사카츠
1942년에 도쿄에서 태어나 도쿄교육대학 문학부 사학과를 졸업했다. 도립미타고등학교, 구단고등학교,
쓰쿠바대학 부속 고등학교 세계사 교사를 역임했다. 이후 쓰쿠바대학 강사와 홋카이도교육대학 교육학
부 교수를 거치며 20여 년 넘게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의 편집과 집필을 담당했다. 2007년 퇴임 후,
중앙교육심의회 전문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하룻밤에 읽는 세계사』, 『지도로 읽는다』, 『바
다의 세계사』, 『처음 읽는 음식의 세계사』, 『처음 읽는 술의 세계사』, 『황금의 섬, 일본 전설』 등
다수가 있다.
▣ Short Summary
인류가 품어온 문화는 변화에 변화를 거듭한 끝에 우리의 주위에서 살아 숨 쉬고 있으며, 문화의 변화
는 감각과 감성이 매개가 된다. 감각은 원래 미각, 시각, 청각, 후각, 촉각이라는 센서로서의 오감에
뿌리를 둔다. 오감이 음악, 예술 등의 기초가 된다는 이야기가 많은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생리적
센서가 문화적 감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할 필요가 있다. 오감은 결국 우리의 일상생활을 뒷받침하는
토대이자 사회를 바꾸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원래 오감은 생명 유지를 위한 센서였으나 환경의 변화와 함께 그 기능이 바뀌었다. 예를 들어 숲에서
생활하는 수렵민은 숲의 희미한 흔들림을 식별하는 눈과 귀를 가지고 있으며, 초원의 유목민도 100m
가 넘는 거리의 사소한 움직임을 놓치지 않는다. 또 손으로 식사하는 인도, 서아시아, 아프리카 사람들
은 손끝으로 음식의 상태를 느낄 수 있다. 이렇게 오감은 일상생활 속에서 단련되는 것이다. 그러나
도시 문명에 익숙해진 우리의 오감은 센서로서의 기능이 약화된 반면, 쾌락과 미의식, 창조 활동 등과
결합하여 섬세함을 증가시키고 있다. 센서로서의 오감이 문화를 뒷받침하는 오감으로 변화해가는 것이
다. 미각 또한 그와 같은 길을 걷고 있다.
미각에는 독일의 헤닝이 분류한 짠맛, 단맛, 신맛, 쓴맛의 ‘4원미’가 있는데, 처음부터 지금과 같이 개
발된 것이 아니고 혼돈된 상태였다. 대략 짠맛과 단맛은 긍정적 미각, 부패한 음식을 감지하는 신맛과
독을 식별하는 쓴맛은 부정적 미각으로 분류되었다. 하지만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인류는 쓴맛과 신맛에
서도 유용성을 발견하였으며, 감칠맛이라는 문화적 미각을 개발했다.
혀의 표면에는 약 1만 개의 미뢰가 존재하는데, 하나의 미뢰 속에 존재하는 수십 개의 미각 세포, 즉
수만에서 수십만 개에 이르는 혀의 미각 세포가 입에 들어온 것을 몸속으로 받아들일지, 거부할지에
대한 판단을 최종적으로 결정한다. 센서인 혀는 인류의 긴 역사 속에서 생명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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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맛의 세계사
해 왔다. 미각은 음식과 음료가 입과 혀에 닿을 때 일어나는 감각으로, 입속에서 음식과 음료를 가려
내는 작용과 관련이 있다.
미각이 후각, 시각과 함께 새롭게 개발한 것은 영양 섭취가 목적이 아닌 향과 색, 자극적인 맛을 즐기
기 위한 기호품이었다. 대표적인 기호품으로 맥주와 와인, 술 등의 알코올음료가 있으며, ‘대항해 시대’
이후에는 커피, 홍차, 코코아, 담배 등이 인류 사회와 깊은 관계를 맺게 되었다. 17~18세기 설탕의 대
량 생산, 19세기 식품 공업의 성장과 수송 기관의 개발, 20세기 수송ㆍ정보 전달 기관의 고속화, 안정
화, 저비용화에 의해 세계적으로 식자재가 활발하게 교류되어 기호품의 세계는 빠른 속도로 확대되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미각의 변화를 주도하는 조미료, 향신료, 기호품을 중심으로 맛의 세계를 탐구
한다.
▣ 차례
들어가는 글
Ⅰ. 세계를 지배한 짠맛
01. 농업을 보완한 소금 / 02. 소금을 지배하는 상인과 권력자
Ⅱ. 자연이 베푼 맛의 선물
01. 큰 사랑을 받은 단맛 / 02. 벌꿀과 무화과 / 03. 쓴맛을 받아들인 문화
04. 자극으로써의 매운맛 / 05. 과일에서 얻을 수 있었던 신맛
Ⅲ. 확장되는 맛의 영토
01. 감칠맛을 끌어내는 발효 / 02. 바다가 생선장을 키웠다 / 03. 장막의 안은 발효의 무대
04. 소금과 후추가 기른 장(醬) / 05. 알코올 발효와 식초의 탄생 / 06. 유산 발효와 치즈
Ⅳ. 영향력을 키우는 매운맛
01. 거대 상권을 움직인 향신료 / 02. 유럽인이 좋아하는 강한 향 / 03. 후추는 동쪽으로, 서쪽으로
04. 바이킹의 활약과 카르다몸 / 05. ‘대항해 시대’의 계기가 된 후추
06. 전쟁의 원인이 되었던 고가의 향료
Ⅴ. 맛의 신세계가 열리다
01. 전 세계로 확장된 맛의 세계 / 02. 매운맛 세계를 석권한 고추
03. 새로운 산미 토마토 / 04. 카리브해에서 온 설탕의 대행진
Ⅵ. 일상을 유혹하는 단맛
01. 설탕과 커피 / 02. 홍차 사랑과 동인도 회사 / 03. ‘신대륙’의 기호품, 카카오
Ⅶ. 변화를 추구하는 입맛
01. 분리된 단맛과 기호품 / 02. 일본에서 처음 발견한 감칠맛 / 03. 도시의 시대와 변하는 입맛
맺음 글_세계화와 가스트로아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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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맛의 세계사
처음 읽는 맛의 세계사
세계를 지배한 짠맛
소금을 지배하는 상인과 권력자
소금을 두고 경쟁한 베네치아와 제노바: 소금의 수요가 매우 방대했기 때문에 상인에게 소금은 큰 부
를 얻을 수 있는 원천이었다. 소금은 식염뿐만 아니라 고기나 생선의 보존용으로도 많은 양이 사용되
었다. 특히 14세기 이후에는 발트해에서 대량으로 잡아 올린 청어가 소금에 절여져 유럽 각지에서 판
매되었다. 예수가 광야에서 수행하며 쌓은 유덕을 기리기 위한 사순절의 40일 동안은 교회가 고기 섭
취를 금지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소금에 절인 청어로 연명해야만 했다. 참고로 청어를 소금에 절이기
위해서는 청어 무게의 3분의 1 이상의 소금이 필요했다. 1875년에는 청어 약 30억 마리가 소금에 절
여졌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경우 약 1억 2,300킬로그램의 소금이 사용된 것으로 계산할 수 있다.
지중해 상권에서도 소금은 매우 중요한 상품이었다. 르네상스기에 부와 패권을 뺏기지 않으려 경쟁했
던 베네치아와 제노바도 모두 소금 판매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도시 국가 베네치아의 시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토르첼로 섬 주변의 라구나(갯벌)는 베네치아 최초의 제염소로도 알려져 있다. 토르첼로 섬의
염전에서는 6세기에서 9세기에 걸쳐 농도가 다른 몇 단계의 못을 만들어 염수의 농도가 진해질 때마
다 못을 이동하는 합리적 제염을 시행하였다.
11세기가 되자 베네치아는 유럽 내륙 지역에 소금을 판매하면서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14~15세기의
베네치아는 키프로스 섬에서 스페인 발레아레스 제도에 이르는 염전을 지배하고, 소금을 독점 판매해
막대한 이익을 얻고 있었다. 당시 베네치아의 선박이 운반한 상품의 30~50%가 소금이었으며, 15세기
중반 소금의 연간 판매량은 3만 톤에 가까웠다. 결국 베네치아는 소금 판매를 통해 부를 쌓을 수 있었
던 것이다. 한편 베네치아의 경쟁 상대인 제노바 또한 흑해에서 북아프리카에 이르는 많은 제염소를
지배하고, 이비사 섬을 지중해 제1의 소금 생산지로 성장시켰다. 베네치아와 제노바는 소금을 둘러싸
고 격렬한 경쟁을 펼쳤던 것이다.
네덜란드 독립 전쟁(1568~1609)에서는 ‘워터구젠(바다의 거지)’이라고 불린 신도교의 독립파가 영국
의 항구를 거점으로 하여,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역에서 생산된 소금을 한자 동맹의 여러 도시로 보내
는 경로를 차단하였다. 이로 인해 경제에 큰 타격을 받은 스페인은 네덜란드의 독립을 받아들일 수밖
에 없었다. 스페인이 네덜란드의 독립을 승인한 1648년의 웨스트팔리아 조약에는 모든 교전국에 불이
익을 주는 소금 교역의 봉쇄를 금지하는 조항이 들어 있었다.
민중에게 원망의 표적이 되었던 소금세: 서민들의 생활과 깊은 관계가 있는 소금은 생산지가 한정적이
기 때문에 권력에 의해 지배되는 경향이 강했다. 유럽의 왕권이 강해진 16~18세기에는 쉽게 통제할
수 있는 소금이 절호의 과세 대상으로 간주되었으며 전매품으로 고액의 소비세가 부과된 것이다. 16세
기 중반, 프랑스 앙리 2세의 시대에는 소금에 대한 체계적인 과세가 시작되었다. 소금이 왕실의 주요
재원이 된 것이다. 프랑스의 정치가 콜베르는 1680년, 8세 이상의 개인에게 매주 정해진 가격에, 정해
진 양의 소금 구매를 의무화하였다. 원래 프랑스에서 ‘가벨’이란 단어는 물품세를 지칭하는 단어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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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맛의 세계사
점차 소금세를 가리키는 단어가 되었다.
1789년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으로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자, 혁명 정부는 1790년 소금세를 폐지하
였다. 소금세 폐지는 민중에게 새로운 정권의 존재 의의를 나타낼 수 있는 지극히 알기 쉬운 방책이었
다. 하지만 1805년, 소금세는 나폴레옹에 의해 부활하였다. 징병제에 의한 군대로 유럽의 패권자가 된
나폴레옹에게는 막대한 전쟁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소금세를 부활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
렇게 소금세는 1945년까지 유지되었다. 소득세의 도입은 그 후의 일이며, 근대적 세금의 근원은 소금
세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 왕조의 흥망성쇠와 소금: 소금이 주요한 세원이 된 것은 프랑스뿐만이 아니다. 일본에 비해 면적
이 26배나 되지만 해안선의 길이는 3분의 2에 지나지 않는 중국에서도 권력이 소금을 지배하였다. 중
국에서는 내륙 지방의 염지나 염정(소금 우물)에서 소금이 최초로 생산되었다. 샨시성에는 260㎢나 되
는 큰 염지가 만들어졌으며, 염정은 쓰촨이나 원난 등의 지역에 분포되어 있었다.
한나라 시대(기원전 202~기원후 220) 이후가 되자, 바닷소금이 식염의 중심이 되었다. 염분 농도가
3.5%인 바닷물은 77.9%가 염화나트륨이었는데, 소금을 골라내기 위해서는 수분을 제거해야 하는 노
력이 필요했다. 염전으로 적합한 평탄한 해안이 한정적이었기 때문에 국가가 소금을 관리할 수 있었다.
흉노족과의 대전쟁, 한반도와 베트남으로의 대원정을 반복하며 재정난에 빠진 전한의 한무제 시대 이
후, 소금이 전매품이 되어 정부는 막대한 수입을 거두어들일 수 있었다. 양귀비에 빠진 당 현종에게
반기를 든 안녹산의 반란군에게 수도 장안을 점거당하여 쇠퇴한 당제국도, 반란 중이었던 758년에 소
금의 전매를 시작하고 소금 가격의 10배나 되는 소금세를 부과하였다. 지방에 대한 지배력이 약했던
조정은 소비세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편 세금이 부과된 소금의 가격이 크게 상승하면서 소금 밀매는 빅 비즈니스가 되었다. 소금으로 오
늘날의 마약 판매에 필적할 만한 거액의 이윤을 얻을 수 있었다. 소금 밀매상은 많은 부하와 지방의
유력자, 조직폭력배, 공무원을 끌어들여 대규모 밀매 조직을 만들고, 적발될 것 같으면 반란을 일으키
고 도망갔다. 당나라 말기의 황소의 난(875~884)은 소금 밀매 상인이 일으킨 농민 반란으로, 이는 당
나라의 몰락을 초래하는 계기가 되었다. 소금 밀매 상인의 적발이 대제국의 붕괴로 이어진 것이다.
북송 말기, 송나라 사람인 송강의 반란군이 거점을 둔 장소는, 후에 108명의 호걸이 활약한 중국의 대
표 장편 소설 『수호전』의 무대인 ‘양산박’이 되는데, 이곳은 산둥성 서부에 있는 양산 산기슭에 있어
황하가 자주 범람하는 곳으로, 소금 밀매 상인이 기승을 부리는 지역이었다.
당나라 시기부터 20세기 초, 청나라가 몰락할 때까지 소금의 전매가 이어졌는데, 소금에 대한 왕조 재
정의 의존이 계속되어 대부분 국고 수입의 40%를 소금세가 차지하였다. 원나라 시대처럼 소금세 수입
이 80%를 차지하는 시기도 있었으며, 소금의 판매 가격은 원가의 37배에 달하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오늘날의 소비세율과 비교하면 당시 소금세는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가격이었다.
인도인을 분기하게 만든 23그램의 소금: 소금에 대한 무거운 세금은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에도 부과
되었다. 20세기 민족 운동으로 유명한 ‘소금 행진(단디 행진)’은 마하트마 간디가 영국 식민지 정부에
의한 소금 통제를 무너뜨리고, 소금을 다시 민중의 품으로 되찾으며 독립에 큰 물결을 일으킨 사건으
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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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맛의 세계사
인도를 지배한 영국은 인도에 도착한 영국 선박의 안정을 위한 바닥짐(선박평형수)으로서 소금을 운반
하고, 50%의 소금세를 붙여 소금 판매를 독점하였다. 또한 제염 금지법을 제정하여 인도에서 소금 제
작을 금지하였다. 소금이 소위 민족 억압의 상징이 된 것이다.
인도 민중의 곤궁을 강제한 제염 금지법의 폐지를 슬로건으로 내세우며 61세의 독립운동 지도자, 간디
가 일어났다. 1930년 3월 2일, 백의를 몸에 걸치고 둥근 안경을 쓴 간디는 79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수행처가 있는 사바르마티의 아쉬람에서 390km 정도 떨어진 단디의 해안을 향해 행진을 시작했으며,
행렬이 통과하는 약 170개의 마을에서 소금세와 소금 전매제의 폐지를 호소하였다. 민중들은 그가 가
는 길에 나뭇잎을 깔고 물을 뿌리며 소금을 인도인의 품으로 되찾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일행을 맞
이하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소금 행진’이다.
25일 후 단디의 카티아와르 해변에 도착한 간디는 이른 아침, 바다에 들어가 제염 금지법을 어기고 아
주 적은 양인 23그램의 소금을 만들었다. 매우 미량이긴 하지만 민족의 자랑스러운 소금이었다. 이로
써 마침내 권력에 의한 소금의 지배가 무너진 것이다. 이를 방관할 수 없었던 식민지 정부는 간디를
체포했다. 하지만 23그램의 소금이 계기가 되어 제염 운동이 확산되었으며, 6만 명 이상의 인도인이
체포되었다. 이와 함께 인도 전역에서 영국 상품 불매 운동도 일어나 인도에 대한 영국의 지배가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간디는 ‘소금 행진’을 통해 인도의 주권자가 영국인이 아닌 인도인이라는 사실을 민
중에게 알려주었다. ‘소금 행진’ 사건 약 15년 후에 영국의 인도 식민 지배는 막을 내렸다.
자연이 베푼 맛의 선물
큰 사랑을 받은 단맛
단맛의 매력: 혀의 가장 앞쪽에서 감지되는 단맛은 생명을 뒷받침하는 에너지원을 찾아내기 위한 미각
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에너지의 기본이 되는 당류가 단맛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맛에 대
한 인류의 욕구는 탐욕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며, 때로 달콤함에 대한 욕망은 충동적이기까지
하다. 인류는 자연 속에서 단맛을 끊임없이 추구해왔다.
달콤함에 대한 인간의 욕구는 매우 강렬하며, 단맛은 혀에 만족감을 줄 뿐만 아니라 신맛과 쓴맛 등을
마비시킨다. 단맛이 가진 기분 좋은 달콤함에 혀가 속고 마는 것이다. 양고기처럼 향이 강하고 개성
있는 고기에 달콤한 소스를 사용해 향을 옅게 하거나, 조금 오래되어 맛이 변한 생선을 요리할 때 설
탕을 많이 사용하는 것은 인간의 단맛에 대한 동경을 이용하는 것이다. 19세기 이후에는 항상 똑같은
맛을 유지해야 하는 가공식품과 청량음료가 대량 생산되었는데, 여기에도 미각을 모호하게 만들 목적
으로 많은 양의 설탕 또는 인공 감미료가 혼입되었다.
생명 활동에서 단맛을 빼놓을 수 없다. 피곤하면 단것이 생각나는 것은 동맥 속의 혈당치가 떨어지면
인간은 견딜 수 없는 공복감에 시달리고 당분을 섭취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기 때문이다. 혈중 당도
의 저하가 음식을 먹어야만 한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운동선수가 경기 후 당분을 찾거나, 성장이
빠른 아이들이나 임신한 여성이 단것을 매우 좋아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인간은 달콤함의 유혹에 약하다. 쾌락을 ‘꿀맛’이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단맛은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는
가장 첫 번째 맛이 되었다. 상대방의 감정을 자아내도록 교묘하게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달콤한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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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맛의 세계사
한다’고 하며, 듣는 사람에게는 그다지 기분 좋은 말은 아니지만 그를 위해 일부러 하는 말을 ‘쓴소리
를 한다’고 한다. 기분을 좋게 하는 단맛과 혀에 불쾌감을 주는 쓴맛을 잘 구분하여 사용한 표현이다.
또한 다른 사람을 이용하여 이익을 취하는 것을 ‘단물을 다 빼먹는다’고 하는데, 여기에서 ‘단물’은 가
치가 있는 것,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을 가리킨다.
세계로 확장되는 맛의 영토
감칠맛을 끌어내는 발효
발효는 ‘맛의 대혁명’: 발효는 맛의 세계를 혁신하는 엄청난 발견이었다. 발효에 의해 맛의 세계는 범
위가 넓어지고 깊이는 깊어졌다. 인간에게 발효는 매우 유익한 부패다. 식품의 부패는 미생물에 의해
일어나는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며, 일상생활의 어느 곳에도 존재한다. 인류는 경험적으로 미생물의 부
패 작용을 이용해야 한다고 깨달은 것이다.
발효란 인류에게 유용한 작용을 하는 곰팡이, 효모(이스트), 세균(바이러스) 등 미생물(유익균)의 이로
운 분해 작용을 통제하는 미시적 세계에서의 현상이다. 물론 맨눈으로 유용한 미생물을 식별할 수 없
으며, 곰팡이를 식별하기 위해서는 배율 100~150배, 효모는 배율 400~600배, 세균은 배율
1,500~2,000배의 현미경이 필요하다. 인류와 발효의 만남은 굉장한 우연이었으며, 인류는 경험적으로
발효에 의한 맛을 축적해왔다.
부패나 발효가 무엇인지 몰랐던 시대에는 방치된 식품을 먹고 복통과 설사가 일어나는지 여부에 따라
유용한 발효와 해로운 부패를 식별했다. 부패한 식품을 용기 내어 먹어 보고, 냄새와 외형은 나쁘지만
맛은 더욱 좋아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맛의 세계가 확장되었다. 미생물이 가진 효소의 작용으로
새로운 감칠맛과 향미가 올라온다는 사실을 이해한 것이다.
발효는 자연계의 흔한 현상이지만 미묘한 단계에서 발효를 멈추면 맛의 깊이와 복잡함, 감칠맛이 더해
진다. 무엇이 발효 식품이 될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주관적인 미각이었다. 이상한 냄새를 풍기는
낫토나 블루치즈도, 맛있어지는 발효 식품도 악취를 풍기는 부패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이다. 자연계
에서는 포도, 야자, 벌꿀 등 당분이 많은 식자재가 자연 상태로 발효하기 쉬웠기 때문에, 맛의 세계에
는 일찍이 와인, 야자 주, 벌꿀 술이 등장했다. 발효는 농업보다 더 역사가 깊은 것이다.
어로와 유목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짧은 기간에 대량으로 수확한 생선과 고기를 부패로부터 지키
기 위한 방법이 굉장히 큰 과제였는데, 이로 인해 소금을 활용한 보존법이 연구되었다. 식자재의 발효
를 소금으로 통제하려고 한 시도가 젓갈, 생선장, 절임 등 새로운 짠맛의 세계를 탄생시켰다. 소금이
충분히 확보되지 않는 지역에서는 건조, 훈증으로 부패를 억제하고 미생물의 작용을 통제하여 가다랑
어포 등의 새로운 맛을 만들어냈다. 또 염소나 양, 소의 우유도 유산균의 작용으로 요구르트나 치즈로
가공되었다.
보리, 밀 등을 먹는 사람들은 딱딱한 껍질을 제거한 가루로 빵을 만들었는데, 재워두었던 생지에 우연
히 효모가 혼입하게 되면서 발효 빵이 탄생하였으며, 빵에 타액이 첨가되면서 맥주로 바뀌었다. 쌀과
조를 먹는 사람들은 취사한 밥에 생긴 곰팡이 가운데 누룩이라는 유용한 곰팡이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
하고 이를 이용해 술과 장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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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맛의 세계사
1935년 이라크에서 발굴된 ‘모뉴망 블루’라는 두 장의 점토판은 지금으로부터 5,000년 전에 농업과
풍요의 여신에게 바치기 위해 만들어졌는데, 여기에는 탈곡과 맥주 제조를 위해 긴 막대기로 항아리를
젓고 있는 인물의 모습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또 그림 주위의 설형 문자를 통해 맥주 제조
에 대맥의 맥아를 사용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문명의 탄생기부터 발효가 맛의 형성에 이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향력을 키우는 매운맛
거대 상권을 움직인 향신료
향신료는 지위?: 세계사에 큰 영향을 미친 맛의 재료는 말할 것도 없이 향신료다. 유라시아 세계를 동
양, 중양, 서양, 세 부분으로 나누면 향신료는 주로 인도 등의 중양에서 생산되었다. 그리고 아라비아
해를 경유하여 서양으로, 남중국해를 경유하여 동양으로 엄청난 양의 향신료가 전달되면서 유라시아
상권의 형성에 공헌하였다. 향신료는 유라시아의 거대 상권을 구축할 수 있는 매혹적인 맛과 향을 지
니고 있었던 것이다.
인도와 남아시아에서는 더위로 인해 식자재가 쉽게 부패하였기 때문에 악취를 제거하고 살균하기 위해
저렴한 향신료를 복합적으로 요리에 이용하였다. 이러한 동방의 향신료는 지중해와 유럽 세계에서 사
치품이자 동방의 선진 문명의 맛이었다. 지중해와 유럽 세계에서는 향신료가 주술력을 가진 약재, 문
명의 맛, 지위를 나타내는 사치품으로 사랑받아 향신료 거래에 관여하는 원거리 상인에게 큰 부를 가
져다주었다. 향신료는 매우 적은 양이라도 고가였기 때문에 세계적인 상품으로 크게 활약하였다. 허브
도 강한 향과 다양한 약효가 있다고 여겨져 왕성하게 이용되었으나, 유력 상품은 되지 못했다. 향신료
의 맛은 지위의 맛이었던 것이다.
향신료는 열대 또는 아열대에서 생산된 방향성을 가진 씨앗, 열매, 나무껍질, 뿌리줄기, 꽃봉오리 등을
건조시킨 것으로, 일반적으로 매운맛을 띠고 소화액 분비의 촉진, 신경 흥분, 강정 작용 등 많은 약효
를 지녔다고 여겨졌다. 아라비아해, 홍해, 지중해를 왕래한 향신료의 양은 매우 방대하였으며, 원거리
무역을 바탕으로 넓은 맛의 세계가 구축되었다. 로마 제국 시대의 에리트레아해(홍해와 이어진 아시아
의 바다) 무역, 다우선을 이용해 아라비아해와 남중국해를 연결한 이슬람 상인의 무역, 정크선을 이용
한 중국 상인의 동남아시아 무역, ‘대항해 시대’의 아시아 무역처럼 세계사에 등장하는 대상권의 주역
상품은 바로 향신료였다.
원거리 무역 상인이 사랑한 향신료: 지구는 70%가 바다이며, 육지의 면적은 30% 정도에 불과하다.
게다가 육지는 산, 사막, 거친 땅 등 장애가 있어 상업 지역은 자연스레 한정되었다. 그에 비해 바다와
강은 어느 정도의 항해 기술만 있으면 장대한 수로로 이용할 수 있었으며, 간선 경로가 되는 바다에
주변의 섬, 하천을 따라 거대한 상업권을 형성하였다.
세계의 주요 대양으로는 태평양, 대서양, 인도양이 있는데, 아주 오랜 과거부터 항로가 개척된 곳은,
바람의 방향이 정기적으로 변하는 계절풍을 이용할 수 있었던 인도양 북부에 있는 아라비아해였다. 중
국, 동남아시아를 배후에 둔 인도와 서아시아, 홍해, 그리고 지중해를 잇는 아라비아해는 향신료를 주
력 상품으로 하는 바다, 즉 향신료의 바다였던 것이다. 이들 바다 대상권의 주력 상품은 중국에서 유
럽에 이르는 지역까지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건조된 후추, 시나몬, 카르다몸, 클로브(정향나무), 육두
구 등의 향신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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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맛의 세계사
십자군 전쟁 이후 지중해의 동쪽에서 활약한 이탈리아 상인이 이슬람 상권과 강력한 연합을 맺게 되면
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고가의 향신료를 구입하고 고액의 중계 마진을 붙여 유럽 각지에 판매하
였다. 이렇게 발흥한 오스만 제국이 향신료에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자, 유럽인이 향신료 산지인 아시
아로 직접 가서 향신료를 저렴하게 손에 넣으려는 움직임이 거세지게 되었다. 향신료의 맛과 향을 추
구하는 욕망과 향신료 무역에서 막대한 이익을 얻고자 하는 욕망이 ‘대항해 시대’라는 바다의 시대를
열었다고 할 수 있다.
‘대항해 시대’의 계기가 된 후추
돈 아까운 줄 모른다: 후추의 주요 성분은 찌릿한 매운맛을 내는 피페린이라는 물질이다. 톡 쏘는 매
운맛과 향을 가진 후추는 장기간 보존하여 악화된 고기의 맛을 절묘하게 균형 잡힌 맛과 향으로 완화
시키는 데 유용했다. 16세기 초반에는 전 세계 후추의 73%가 독일, 영국, 네덜란드 등 북유럽에서 소
비되었다고 한다. 후추를 분말로 만들면 풍미를 쉽게 잃기 때문에 알갱이로 수확하고, 사용할 때마다
갈아서 사용하였다. 후추는 방역, 식육의 보존, 건위, 식욕 증진 등의 효과와 최음 효과가 있다고 믿어
져 지배층은 후추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
후추에 미친 시대: 13세기 이후, 후추 무역을 독점한 것은 베네치아 상인이었다. 그런데 16세기 초에
오스만 제국이 이집트의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하고 후추 무역을 통제하면서, 후추에 대한 세
금이 급격하게 상승하였다. 후추 가격이 갑자기 8배로 오른 것이다. 그래서 만약 후추를 직접 인도에
서 사들일 수 있다면, 거액의 이익이 보장되는 것이었다.
1497년, 바스쿠 다 가마(1469년경~1524년)가 이끄는 170명의 선원과 4척의 함대는 험난한 항해의
끝에, 다음 해 후추의 적출 항구였던 인도 서부 해안의 코지코드에 이르러 후추의 산지 직송을 시작하
고 후추를 유럽에 가지고 들어왔다. 그의 항해는 햇수로 3년이나 걸렸으며, 100명의 희생자가 발생하
였음에도 불구하고 운반한 후추는 중계 마진이 가산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없이 저렴한 가격으로 항해
비용의 60배나 되는 이익을 포르투갈 왕실에 가져다주었다. 뛸 듯이 기뻐한 포르투갈 왕은 스스로를
‘인도양의 왕’이라고 칭하였으며, 후추 무역을 국영화하였다. 이후 포르투갈 왕은 한 해에 여러 척의
배를 인도에 파견하고 후추 판매를 독점하려 했다.
맛의 신세계가 열리다
전 세계로 확장된 맛의 세계
‘콜럼버스의 교환’: 대서양을 횡단하여 ‘신대륙’에 다다른 콜럼버스의 항로 개발은 재배 작물과 가축의
세계적인 대교류를 단숨에 진행하고, 미각의 세계를 크게 혁신시켰다. 1만 년 전, 농업의 시작에 따른
먹거리 대변동을 ‘음식의 제1차 혁명’, 유럽인이 중개하는 ‘대항해 시대’ 이후의 먹거리 교류를 ‘음식의
제2차 혁명’이라고 부를 정도이다.
지구의 생태계를 바꿀 정도인 재배 작물과 가축의 교류는 ‘콜럼버스의 교환’이라고 부르는데, ‘신대륙’
에서 ‘구대륙’으로 옥수수, 감자, 고구마, 호박, 카사바, 토마토, 강낭콩, 땅콩, 고추, 피망, 파프리카,
카카오, 파인애플, 파파야, 아보카도, 딸기, 바닐라, 칠면조 등이 전달되고, 반대로 ‘구대륙’에서 ‘신대
륙’으로 보리, 밀, 쌀, 채소류, 오렌지, 올리브, 사과, 커피, 소, 양 등이 건너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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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맛의 세계사
이러한 교환으로 가장 큰 이익을 얻은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유럽이었다. 새롭고 다양한 식자재가 전파
되면서 먹거리의 안정과 미각의 확대가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신대륙’에 대농장(플랜테이션)과 대목
장을 경영하며 많은 식자재를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유럽의 맛의 세계가 다른 여러 지
역보다 앞장서 넓게 확장될 수 있었다. 즉, ‘음식의 제2차 혁명’은 유럽에 ‘새로운 맛의 세계’를 탄생시
켰다고 할 수 있다.
이전 시대의 향신료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식자재와 기호품은 지위를 과시하기 위한 귀중한 약재, 부유
층의 사치스러운 식자재로서 유럽 사회에 들어왔지만 머지않아 서민의 식자재가 되었다. 새로운 식품
의 수용은 유럽의 식문화 편견이 개선되고 맛의 세계가 팽창을 이루는 과정이기도 했다.
카리브해에서 온 설탕의 대행진
산미의 욕망을 해방한 설탕: ‘음식의 제2차 혁명’이 진행되는 가운데, 카리브 해역의 대농장에서 대량
생산된 설탕은 새로운 미각으로서 맛의 세계에서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단맛이 근대의 맛을 주도하게
된 것이다. 약효와 결부되는 향신료를 중심으로 한 쓴맛의 시대에서 ‘욕망의 맛’인 단맛의 시대로 전환
하게 된 것이다.
향신료의 시대에서 설탕의 시대로: 브라질과 카리브해에서 흑인 노예를 사용한 ‘플랜테이션’이라는 새
로운 생산 시스템에 의해 설탕이 대량 생산되면서 맛의 세계에도 지금까지는 볼 수 없었던 혁명적인
변화가 찾아왔다. 인기 상품이 된 설탕은 급격하게 판로를 넓혔고, 설탕이라는 전략 상품을 지배하는
나라에 비약적인 경제 성장을 가져다주었다. 설탕의 대량 생산이 초래한 세계 규모의 사회 변화를 ‘설
탕 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유럽에서 설탕이 대중화되자, 인간의 욕망과 활력을 자극하는 단맛이 전면적으로 해방되어 욕망의 추
구를 긍정하는 시대로 전환되었다. 설탕의 달콤함이 욕망의 긍정과 그의 전면적 해방을 전제로 한 자
본주의 사회의 길을 연 것이다. 당분을 충분히 섭취하여 활동력이 강해진 인류는 대규모 개발을 통해
지구를 변화시키고,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시스템을 차례차례 만들어나갔다. 과도한 개발은 지구에 환
경 문제를 초래할 정도이다.
설탕에 의해 생명 활동에 필요한 에너지가 보장되자, 인류는 생리적인 맛보다 문화적인 맛을 더욱 중
시하게 되었으며, 새로운 맛의 시대로의 전환이 찾아왔다. 향신료의 시대와 설탕의 시대를 거쳐 ‘식자
재의 맛 그 자체’를 즐기는 시대로 돌아온 것이다. ‘맛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새로운 고찰의 대상이
되고, 냉정하고 객관적인 맛을 추구하였다. 가스트로노미의 시대가 온 것이다. 식자재가 가진 본연의
맛과 그 맛의 조합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과도한 향신료와 설탕은 배척하게 되었다.
이러한 움직임 속에서 식사의 기본은 짠맛이 되고, 단맛이 디저트를 통솔해야 한다는 맛의 새로운 질
서가 탄생하였다. 17세기 말 이후, 단맛과 짝을 지은 쓴맛, 신맛, 향기가 새로운 기호품의 분야를 만들
어내고 있다. 아이스크림과 셔벗, 커피, 홍차, 코코아 등 기호품의 세계가 넓어지면서 서민의 생활을
침투해나갔다. 맛의 세계가 다양화되고 식사도, 기호품도 상품화가 이루어졌다.
맛의 세계를 크게 변혁시킨 저렴한 설탕을 대량으로 생산한 곳이 브라질과 카리브해의 섬들이었다. 욕
망을 해방하는 맛의 설탕은 유럽으로 유입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로 수출되었다. 설탕의 달콤함
은 유럽에서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로 확산되면서 자본주의 시스템을 수용하게 했다. 미각의 측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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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맛의 세계사
서 보면 욕망 해방의 시대는 카리브해의 설탕 플랜테이션에서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맛 남조(濫造)의 시대: 사탕수수는 16세기에 브라질 식민지로 이식되었다. 포르투갈인의 사탕수수
농원이 유대인의 자본과 결부되어 급속도로 증가하면서 브라질의 ‘설탕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전반에 유럽에서 소비된 설탕 대부분은 브라질에서 생산되었다. 네덜란드인은 17세
기 초반에 사탕수수 재배에 발을 들여놓았다. 네덜란드 이민자가 남아메리카 북동부의 가이아나 지역
에서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을 시작하고, 17세기 중반 이후, 영국과 프랑스가 서인도 제도에서 경쟁적으
로 설탕을 생산하였다.
‘대항해 시대’에 스페인인과 함께 들어온 천연두가 유행하면서 서인도 제도의 선주민들이 대부분 전염
되어 죽었기 때문에 영국과 프랑스의 사탕수수 재배는 흑인 노예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은
1612년 버뮤다 제도, 1627년 발바도스 섬, 1655년 자메이카 섬을 점령하고, 네덜란드인의 제당 기술
을 받아들이며 ‘설탕 제도’로 모습을 바꾸었다. 그렇게 18세기에 자메이카 섬은 브라질을 제외하고 세
계 최대의 설탕 생산지가 되었다.
플랜테이션에서는 흑인 노예가 100명 정도 있으면 연간 80톤의 설탕 생산을 기대할 수 있었다. 그 결
과, 대량 생산된 설탕의 가격이 저렴해지면서 설탕의 대행진이 시작되었다. 영국인은 설탕의 달콤함의
포로가 되었다. 1660년 이후 영국의 설탕 수입량은 다른 식민지의 상품 생산을 합친 것보다 더 많았다
고 한다. ‘대항해 시대’ 이후의 카리브 해역의 주산물은 담배였지만, 1700년경 설탕이 담배를 뛰어넘었
으며 영국의 설탕 수입액은 담배의 2배가 되었다. 서인도 제도의 설탕 생산은 폭발적이었으며 이는 유
럽의 맛의 세계를 격변시켰다.
단맛의 보급과 노예 무역으로 움직이는 거대한 부: 사계절이 없는 열대 지방에서는 사탕수수를 일 년
내내 수확할 수 있기 때문에, 심는 시기를 조절하여 1년 6개월 동안 5미터에 가까이 성장한 사탕수수
를 수확할 수 있다. 그러나 사탕수수는 수확하면 바로 수액을 잃거나, 수액 속의 당분이 줄어들고 발
효되기 때문에 빠르게 압착하고 바짝 졸여 설탕으로 제조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플랜테이션
이 제당 공장을 부설하여 사탕수수의 재배, 수확, 제당이 하나의 작업 프로세스로 조직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브라질이나 서인도 제도 등의 설탕 플랜테이션에서 많은 흑인 노예를 활용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탕수수 재배가 노예 무역과 노예 노동을 급격하게 확대시킨 것이다.
노예 무역을 가장 활발하게 행했던 나라는 바로 영국이다. 영국은 스페인 계승 전쟁(1701~1713)의 강
화 조약인 위트레흐트 조약(1713)에서 스페인 식민지에 대한 독점적인 노예 무역(아시엔토)을 획득하
고, 나아가 노예선에 노예를 가득 태우는 대량 수송 방식을 고안해 내면서 압도적인 우위에 올라서게
되었다. 이렇게 영국은 설탕 생산과 노예 무역으로 거액의 부를 축적하고 세계를 주도하게 되었다.
변화를 추구하는 입맛
도시의 시대와 변하는 입맛
맛의 세계의 인공화: 18세기 후반에 일어난 영국의 산업 혁명과 프랑스의 프랑스 혁명은 비슷한 시기
에 유럽에서 나란히 일어난 변혁이기에 ‘이중 혁명’이라 부른다. 이중 혁명은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으로 인류 사회를 격변시키는 변동을 일으켰다. 당연히 맛의 세계도 크게 변화하였으며 먹거리의 상품
화 및 공업 제품화가 진행되고 국민 요리나 세계 요리가 탄생하는 등 미각의 평준화가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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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맛의 세계사
1830년대 이후에는 철도, 1860년대 이후에는 증기선이 보급되면서 인류의 활동 공간이 빠른 속도로
넓어지고 식품의 고속 및 원거리 수송이 가능해졌으며, 맛의 세계 또한 급격하게 확대되었다. 교통수
단이 혁명적으로 변화하였을 뿐만 아니라, 도시와 결부되어 식량을 공급하는 공간이 세계적으로 확장
되었다. 넓은 장소에서 다양한 식량이 모이는 가운데, 냉동 수송, 저온 살균, 통조림 등 식품 보존 기
술이 개발되고, 시간적으로도 식품 보존의 범위가 대폭 확대되었다. ‘먹거리’와 ‘맛’의 세계가 급격하게
팽창하게 된 것이다.
19세기의 도시화와 공업화는 식품의 제조, 유통, 소비의 구조를 크게 변화시키고 근대적인 맛의 체계
를 탄생시켰다. 식품 산업에 의해 맛이 평준화되는 한편, 많은 선택지의 도시 생활에 대응하는 다양한
맛이 만들어지고 맛의 개성화가 진행된다. 맛의 세계의 양극화이다. 19세기 후반에는 유럽에서 세계
각지로 대규모 이민이 행해지는 시대도 있었다. 유럽이 엄청나게 팽창하는 시대이자 세계적인 맛의 혼
합이 진행된 시대라고 간주된다. 또한 북아메리카에 넓게 펼쳐진 프레리 지역이나 남아메리카 최대의
곡창 지대로 알려진 팜파스 대초원에서 생산되는 저렴한 식육 등이 증기선과 냉동선을 통해 유럽에 대
량으로 공급되면서, 유럽의 민중은 세계의 맛을 받아들이고 맛의 세계를 팽창시켰다.
식품 보존과 맛의 딜레마: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도시에서 생활하게 되자, 공업 기술을 구사하여 저렴
한 가공식품을 만들고, 대규모로 유통하는 시스템이 정착되었다. 미생물학과 유기 화학, 영양학 등을
동원하여 결코 맛있다고는 말할 수 없을 만한 가공식품이 끊임없이 탄생하고 있다. 가공식품은 무엇보
다 저렴한 가격, 장기 보존, 맛의 지속과 균일성이 요구되기 때문에 인공 감미료, 인공적인 향과 색 등
인공적인 첨가물이 추가되었다. 가공식품이 증가하고, 자연의 맛, 식감, 향의 모방, 그리고 맛의 속임
수가 확대되었다. 맛의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하는 시대로 진입한 것이다. 물론 공장에서 자연의 맛
과 비슷한 맛과 식감, 향을 만들기 위한 혼합물과 첨가물의 투입은 큰 문제가 되었다.
미각은 신체에 유익한 음식과 해로운 음식을 식별하기 위한 센서였던 적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꽤 둔감
한 편이어서 교묘히 더해지는 첨가물과 화학 물질을 감지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제 가공식품에 익숙해
져 버려 자연의 맛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혀를 속이는 유사한 맛의 양산은 미각을 둔
감하게 만들고 먹거리의 형식화를 추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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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맛의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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