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 지음 / 더스토리이 책은 페스트의 창궐로 인해 위기에 빠진 오랑시의 시민들이 보여 주는 다양한 삶의 방식에 대한 연대기 소설이다. 저자는 비극적 운명 속에 갇혀 살지만 희망과 긍정을 향해 나아가려면 사람들의 연대의식이 중요하며, 인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부조리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라고 강조한다.
페스트
알베르 카뮈 지음
▣ 저자 알베르 카뮈
1913년 알제리의 몽도비에서 아홉 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1918년에 공립초등학교에 들어가 뛰어난 교사 루이 제르맹의 가르침을 받았고, 이후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알제 대학 철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이 시기에 장 그르니에를 만나 그를 사상적 스승으로 삼았다. 그르니에는 카뮈가 문학과 철학 사상을 계발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1935년 장 그르니에의 권유로 공산당에 가입하고, 가을에 친구들과 ‘노동 극단’을 창단했다. 카뮈는 1942년에 『이방인』을 발표하면서 이름을 널리 알렸으며, 같은 해에 에세이 『시시포스 신화』를 통해 철학적 작가로 인정받았다. 또한 1944년에 『오해』, 『칼리굴라』등을 발표하였고, 1947년에는 7년여를 매달린 끝에 탈고한 『페스트』를 출간해 ‘비평가상’을 수상했다. 1951년 그는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내용을 담은 『반항하는 인간』을 발표했다. 1957년 마흔네 살의 젊은 나이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3년 후인 1960년 겨울,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
▣ Short Summary
이 소설의 간단한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해안 도시 오랑에 사는 의사가 어느 날 갑자기 발밑에서 비틀거리다 죽어가는 쥐 한 마리를 발견하고 거리로 나오니 곳곳에서 쥐 떼가 죽어가고 있었다. 페스트 발병의 시작이었다. 사망자가 급속도로 늘어나자 당국은 페스트 발병을 선포하고 도시를 완전히 봉쇄하자 오랑에서는 가족과 이웃이 분리되기 시작하고 대혼란에 빠진다. 하지만 곧 오랑에 남은 사람들은 제각기 페스트에 대항하여 가까워진 죽음에 대응하기 시작한다.
등장인물은 의사로서 사명을 다하려는 리외와 카스텔, 작은 일에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보건위생대 일을 묵묵히 해내는 시청의 공무원 그랑, 세상의 진정한 의미를 탐색하는 미지의 인물 타루, 우연히 오랑에 체류하다 탈출을 시도하다 포기하고 페스트 퇴치 작업을 벌이는 신문기자 랑베르, 영적 구원을 구하는 파늘루 신부, 모두가 고통에 빠진 상황에서 오히려 세상에 소속감을 느끼는 코타르 등인데, 이 소설은 이런 시민들이 보여 주는 다양한 삶의 방식을 소개하고 탐구한다.
이 작품에서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페스트는 분명 질병이지만, 작품이 집필된 배경을 고려하면 페스트는 질병과 동시에 전쟁, 나치즘 등을 상징한다. 저자는 결국 각종 페스트에 걸리지 않는 건강한 사람이 되는 것, 그런 페스트에 걸렸을 때 남에게 옮기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런 페스트에 걸렸을 때 그것을 치유하기 위해 각자의 직분을 다해 성실하게 대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제1부
이 연대기의 소재가 되는 기이한 사건들은 194x년 오랑에서 발생했다. 일반적인 견해에 따르면 이곳은 일상에서 약간 벗어난 이 사건들이 발생하기에 적당한 곳은 아니었다. 사실 오랑은 일견 평범한 도시이고, 알제리 해변가에 있는 프랑스의 한 도청 소재지에 불과하다.
4월 16일, 의사 베르나르 리외는 진료실을 나와 계단 중간에서 죽은 쥐 한 마리에 발이 걸렸다. 그 순간 그는 별다른 생각 없이 그 짐승을 옆으로 치우고 계단을 내려왔다. 하지만 거리로 나왔을 때, 그는 쥐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수위에게 알려 주려고 발길을 돌렸다. 수위 미셸의 태도는 완강했다. 건물 안에는 쥐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날 저녁 리외는 집으로 올라가기 전에 건물 복도에서 피를 뱉으면서 쓰러지는 쥐를 보았다.
4월 17일 8시, 수위는 지나가는 리외를 불러 세웠다. 그러더니 그는 못된 장난꾼들이 죽은 쥐 세 마리를 복도 한복판에 던져 놓았다고 비난했다. 얼마 후, 리외는 병을 앓고 있는 아내를 요양소로 보내기 위해 기차에 태웠고, 승강장에서 예심판사 오통 씨와 마주쳤다. 이윽고 기관차가 기적을 울렸다. 그때 판사가 말했다. “쥐들이…….” “예, 별일 아니겠죠.”
그날 오후, 리외는 신문기자의 방문을 받았다. 그의 이름은 레몽 랑베르였다. 그는 파리에 있는 큰 신문사를 위해 아랍인들의 생활 여건을 취재하고 있는데, 따라서 그들의 보건 상태에 대한 정보를 얻기를 원했다. 리외는 그에게 그들의 보건 상태가 좋지 않다고 말했다. 또 그와 작별 악수를 하며 요즘 시내에서 발견되는 수없이 많은 죽은 쥐에 대한 특별 취재를 할 수도 있을 거라고 말했다.
오후 5시, 리외는 다시 왕진을 나가면서 계단에서 장 타루와 마주쳤다. 그는 의사 쪽을 바라보며 인사를 하고는 쥐들의 출현은 기이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이튿날 4월 18일 아침, 의사는 역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돌아오는데, 지하실에서 다락까지, 계단마다 십여 마리의 쥐들이 널려 있었다. 리외는 시청의 구서과(驅鼠科)에 전화를 했다. 메르시에 과장은 그런 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그 뒤로 며칠 사이에 상황이 악화되었다. 랑스도크 통신이 라디오방송에서 4월 28일에 약 8천 마리의 쥐를 수거했다고 보도하자 시의 불안은 절정에 달했다. 사람들은 근본적인 대책을 세우라고 요구하며 당국을 비난했고, 바닷가에 집을 갖고 있던 몇몇 사람들은 이미 그곳으로 피난 가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정오, 리외는 집 건물 앞에 차를 세우다가 길 저쪽 끝에서 수위가 고개를 숙인 채 팔다리를 벌리고 허수아비 같은 자세로 힘겹게 오는 것을 보았다. 수위는 의사도 알고 있는 파늘루 신부의 팔에 의지하고 있었다. 의사는 미셸의 목 아래쪽을 만져 보았다. 거기에는 나무옹이 같은 것이 있었다. 리외는 말했다. “가서 누우시고 체온을 재세요. 오후에 보러 가겠습니다.”
점심 식사 후, 리외가 아내의 도착을 알리는 요양소의 전보를 읽고 났을 때 전화가 울렸다. 그의 예전 환자 중 한 명인 시청 서기인 그랑으로부터 온 전화였는데, 그가 말했다. “이웃집에 일이 발생했습니다.” 몇 분 후, 리외는 페데르브가에 있는 나지막한 집의 문을 넘어섰고, 계단 중간에서 그를 마중하러 내려오던 그랑을 만났다. 그는 오십쯤 되는 나이에 몸이 마른 남자였다. 마지막 층인 3층, 왼쪽 문 위에서 리외는 붉은 분필로 쓴 글씨를 읽었다. ‘들어오시오. 나는 목을 맸소.’ 그들은 안으로 들어갔다. 엎어진 의자 위로 밧줄이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고, 탁자는 구석으로 밀쳐져 있었다. “제때에 내가 풀어 줬어요. 마침 밖으로 나가다가 소리를 들었어요. 그 글을 봤을 때, 허풍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저 사람이 신음 소리를 내는 거예요.” 그랑이 말했다.
몸이 땅딸막한 작은 사내가 구리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는 숨을 거칠게 쉬고 있었고, 충혈이 된 눈으로 그들을 보았다. 리외는 침대 쪽으로 갔다. 그 사람은 높은 곳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어서 척추는 말짱했다. 물론 약간의 질식 증상은 있었다. 의사는 장뇌유 주사를 한 대 놓고 나서 며칠이 지나면 다 좋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리외가 경찰서에 신고했느냐고 묻자, 그랑은 “아뇨. 아! 안 했어요.” “그럼 제가 신고할게요.” 그 순간 환자인 코타르는 자기는 괜찮으니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항변하면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말했다. “다시는 안 그럴 것이고, 내가 지금 흥분해 있으니 그냥 내버려 두었으면 좋겠습니다.” 리외는 처방전을 써주며 말했다. “알았어요, 이 일은 그냥 덮어 두기로 하죠.”
그날 저녁, 수위는 헛소리를 했고, 열이 40도가 되자 쥐를 원망해 댔다. 그다음 날인 4월 30일, 아침에는 열이 38도로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정오에는 열이 대번에 40도로 올랐고, 수위는 끊임없이 헛소리를 했으며, 구토가 다시 시작되었다. 그리고 두 시간 후에 구급차 안에서 수위는 운명했다.
수위의 죽음은 당황스러운 징후들로 채워진 한 시기를 끝내고, 초기의 뜻하지 않은 놀라움이 점차 공황으로 변해 가는, 상대적으로 더 어려운 다른 한 시기의 시작을 보여 준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서술자의 생각으로 새로운 사건들을 상술하기 전에 방금 기술된 시기에 대한 다른 사람의 견해를 제시하는 것도 유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이야기의 시작 부분에서 만난 바 있는 장 타루는 몇 주 전에 오랑에 정착했고, 그 이후로 시내의 한 대형 호텔에서 지내고 있다.
타루의 수첩들 또한 이 힘든 시기에 대한 일종의 연대기를 이룬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무의미한 선택에 따르는 것처럼 보이는 특이한 연대기라는 것이다. 그는 무질서한 상태에서 이야깃거리가 없는 것을 기록하는 역사가가 되려고 노력했다. 그가 작성한 수첩들은 그 시대의 한 연대기로서 꽤 많은 세부 사항들을 제공해 주는데, 이것들은 부차적임에도 불구하고 나름의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며칠 사이에 죽은 자들의 수가 배가되었고, 따라서 이 기이한 병에 주의를 기울여 온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전염병이라는 것이 명백해졌다. 바로 그즈음 리외의 동료 의사이고 그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 카스텔이 그를 보러 왔다. “리외, 자넨 당연히 이게 뭔지 알고 있지?” “분석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난, 그 결과를 알고 있네. 그리고 분석할 필요도 없어. 난 중국에서 의사 생활을 한 적도 있고, 파리에서도 몇몇 사례를 겪어 보았소. 20년 전이었지. 리외, 자네도 나처럼 이게 뭔지 잘 알고 있지.” “그렇습니다. 믿기 어려운 일입니다만, 페스트인 게 분명한 것 같습니다.” 리외가 말했다.
며칠 후 적절하지 못하다는 소리를 들으며 고집을 피워 리외는 도청으로부터 보건위원회 소집 허가를 얻어 냈고, 토론에서 동료의사들은 이 병을 페스트라고 생각했다. 토론회 다음 날, 열병의 기세는 약간 더 세졌다. 어쨌든 토론회 이틀 후에 리외는 도청에서 가장 이목을 끌지 않는 시의 길모퉁이에 신속하게 붙이도록 한 작은 흰색 벽보를 볼 수가 있었다. 벽보에는 개괄적인 대책들이 공고되어 있었는데, 그중에는 하수구에 독가스를 분사하는 과학적 쥐잡기, 수돗물의 철저한 감독 등과 같은 조항들이 들어 있었다. 다른 한편 환자의 가족들은 의사의 진단이 내려진 경우, 이를 의무적으로 당국에 신고하고, 환자들을 병원의 특별 병실에 격리하는 데 동의해야 했다. 그다음 날, 랑스도크 통신은 도청의 조치들이 차분하게 수용되었고, 벌써 30여 명의 환자들이 자진 신고했다고 보도했다.
도청에서는 의사 리샤르를 통해 리외에게 수도에 보내게 될 지시 요청 보고서를 작성해 줄 것을 의뢰했다. 같은 날, 사망자 수는 약 40명에 이르렀다. 도지사는 자기 책임 아래 그다음 날부터 해당 조치들을 더 강화하기로 했다. 의무적 신고와 격리가 계속 이루어졌다. 환자의 집은 폐쇄되고 소독되어야 했고, 주변 사람들은 격리 보호에 따라야 했으며, 매장은 추후 정해질 조건에 따라 시에서 하기로 했다. 하루가 지나 혈청이 비행기 편으로 도착했다. 현재 치료 중인 사람들에게 충분한 양이었다. 전염병이 확산되는 경우라면 이 혈청만으로는 부족했다. 이후 며칠 동안 사망자 수가 감소했다. 그러다가 단번에 다시 급상승했다. 사망자 수가 다시 30명에 도달한 날, 베르나르 리외는 도지사가 내민 공식 전보를 받아 읽었다. 전보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페스트 사태를 공표하라. 도시를 폐쇄하라.’
제2부
그 순간부터 페스트는 우리 모두의 문제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일단 관문(關門)들이 폐쇄되자 서술자를 포함해 그들 모두가 같은 자루에 들어 있는 처지였고, 또 거기에 잘 적응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관문 폐쇄로 인한 가장 뚜렷한 결과 중 하나는 이 병에 대해 준비를 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처한 갑작스러운 이별이었다. 아울러 시행령에 따라 모든 우편물을 주고받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리고 또 전염병 발병 이전에 시를 떠난 사람들의 귀가는 자유이지만 다시 떠날 자유는 없었다. 페스트가 우리 시민들에게 맨 먼저 가져다준 것은 귀양살이였다.
시민들이 난데없는 귀양살이와 타협하려고 애쓰고 있는 동안, 페스트로 인해 관문마다 보초들이 서게 되었고, 오랑으로 오던 선박들이 우회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시의 폐쇄 이후, 한 대의 차량도 시내로 들어가지 못했다. 페스트 발병 후 3주 만에 사망자 수가 302명에 달하고, 다섯째 주에는 321명, 여섯째 주에는 345명이었다. 그리고 관문 폐쇄 후 셋째 주에, 병원 출입구에서 리외는 그를 기다리는 한 젊은 남자를 만났다. “이 사건이 터지기 전에 찾아뵈었지요. 제 이름은 레몽 랑베르입니다.” 상대방이 말했다. “아! 그랬었지요. 그래, 좋은 취재거리를 찾은 거네요.” 리외가 말했다.
랑베르는 이 사태가 어느 정도 지속될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는 추천을 받아 도지사의 비서실장과 접촉할 수가 있었다. 랑베르는 그에게 자신은 오랑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우연히 여기에 있게 되었으며, 따라서 밖으로 나가면 일단 격리 수용된다고 해도 자기가 이곳을 떠나는 것을 허락해 주는 것이 옳다고 말했다. 그런데 비서실장은 사태를 잘 이해하지만 예외를 둘 수는 없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랑베르는 리외를 찾아왔다.
랑베르가 말했다. “저는 그저 제가 그 병에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증명서를 써 주실 수 없는지 부탁하고 싶었습니다.” 리외가 말했다. “그런 증명서를 발급해 줄 수 없습니다. 실제로 당신이 그 병에 걸렸는지 안 걸렸는지도 모르고, 심지어 안다고 해도 내 진찰실을 나가는 순간부터 도청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당신이 감염이 안 된다고 증명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리고 또 내가 문제의 증명서를 발급해 준다고 해도 그건 당신에게 아무 소용이 없을 겁니다.” “왜 그렇죠?” “이 시에는 당신과 같은 경우가 수천 건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밖으로 나가게 두지 않으니까요.”
그달 말경에 시의 성직자들이 공동 기도 주간을 정해 그들 나름의 방법으로 페스트에 대항하기로 결정했고, 파늘루 신부에게 연설을 부탁했다. 파늘루 신부가 설교단에서 “형제님들, 여러분은 불행을 겪고 계십니다. 형제님들, 여러분은 그래야 마땅합니다.”라는 한 구절을 내뱉자 성당 앞뜰에 있는 청중까지 동요했다. 이어 파늘루 신부는 페스트와 관계된〈출애굽기〉의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재앙이 역사 속에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신의 적을 치기 위해서였습니다. 파라오가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에 대항하자 페스트는 그의 무릎을 꿇게 합니다. 모든 역사의 시작부터 하느님의 재앙은 오만한 자들과 눈먼 자들을 그 발 아래에 뒀습니다. 이 점을 잘 생각하시고 무릎을 꿇으십시오.”
모든 청중이 곧 무릎을 꿇었다. 그때 파늘루는 더 강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오늘 페스트가 여러분의 문제가 된 것은 바로 성찰할 때가 왔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사람들은 이 일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악인들이 떠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이 불행은 하느님이 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너무 오랫동안 이 세상은 악과 타협했고, 너무 오랫동안 신적 자비에 의지했습니다. 회개하는 것으로 충분했고, 모든 것이 허용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지속될 수 없었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이 도시의 사람들 위에 연민의 얼굴을 드리우고 계셨던 하느님께서 기다리다 지치시고 당신의 무궁한 희망이 무너져 막 시선을 돌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하느님의 광명을 잃고 오랫동안 페스트의 암흑 속에서 지내는 겁니다!”…(중략)… 그리고 신부는 다음과 같은 말로 설교를 마무리 했다.
“오래전에 아비시니아의 기독교도들은 페스트에서 하느님이 그 기원이신 영생을 얻는 효과적인 수단을 보았습니다. 병에 걸리지 않은 자들은 확실하게 죽을 목적으로 페스트 환자들이 사용했던 홑이불을 몸에 감고 있기도 했습니다. 분명 구원에 대한 이와 같은 격정은 바람직하지 않을 겁니다. 하느님보다 더 서둘러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궁극적으로 세운 불변의 순서를 앞당기려고 하는 것 모두가 이단에 이릅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 예에는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이런 예는 사물을 예리하게 뚫어 보는 정신의 소유자들에게 오직 모든 고통의 바닥에 놓여 있는 영생의 황홀한 미광을 돋보이게 해 줍니다. 이 미광은 어김없이 악을 선으로 바꾸는 하느님의 의지를 분명히 보여 줍니다. 오늘도 역시 이 빛은 죽음, 고뇌, 비명의 길을 통해 본연의 침묵과 모든 생명의 원칙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형제님들, 이것이 바로 제가 여러분에게 드리고 싶었던 커다란 위안입니다.”
한편 랑베르는 역시 막 시작된 이와 같은 공황의 분위기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더 많은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었지만 더 끈기 있고 수완 있게 노력했다. 랑베르는 우선 공식적인 절차를 계속 밟았다. 그는 평상시에는 두말없이 능력 있는 사람들에 속하던 수많은 관리들과 인사들을 찾아갔다. 하지만 시를 빠져나가는 이 문제에서만큼은 이런 능력이 그들에게 전혀 쓸모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리외에게 타루가 만나자고 요청했는데, 타루는 이 사실을 그의 수첩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타루가 대뜸 말했다. “내가 알기론 당신하고는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리외는 침묵으로 동의를 표시했다. “두 주나 한 달 안에 당신은 이곳에서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될 겁니다. 당신은 이 사건을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입니다.” 리외가 말했다. “사실입니다.” 타루가 말을 이었다. “보건위생과의 조직이 허술합니다. 당신에겐 사람과 시간이 부족하고요. 건강한 사람들을 구조 작업에 강제로 참가시키려고 도청에서 일종의 시민 의무 봉사를 검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왜 자원봉사자들을 모집하지 않는 거요?” “해 봤지만 결과가 빈약했어요.”
“별다른 믿음 없이 사무적인 방식으로 했겠죠. 그들한테 부족한 것은 바로 상상력입니다. 만일 그들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면, 그들은 죽을 것이고, 우리도 그들과 함께 죽을 겁니다.” “그래서요?” “내게 자원 보건위생대 조직을 위한 방안이 있습니다. 내가 그 일을 맡도록 승인해 주고, 행정 당국은 일단 제쳐 둡시다. 친구들이 거의 모든 곳에 있어서 그들이 첫 번째 구심점이 되어 줄 겁니다. 나도 당연히 거기에 참여할 겁니다.” “이 구상을 도청에서 받아들이도록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리외가 말했다.
그다음 날로 타루는 일에 착수해서 제1조를 모았고, 다른 많은 조가 그 뒤를 이어 조직되었다. 보건위생대에 헌신한 사람들이 아주 대단한 자질이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해야 할 유일한 일이 그것임을 알고 있었고, 또 그때는 그런 결단을 내리지 않는 것이 믿기 힘든 일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뿐이었다. 보건위생대는 시민들이 페스트 속에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그 병이 거기 있는 까닭에 그들이 이 병과 싸우는 데 필요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부분적으로 납득시키기도 했다. 이처럼 페스트는 몇몇 사람의 의무가 되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페스트는 사실상 실체로서, 즉 모든 사람이 관련된 문제로서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한편 카스텔은 현장에서 혈청을 만드는 데 모든 정력을 바쳤다. 그와 리외는 시에 퍼져 있는 병원체 자체를 배양해 만든 혈청이 외부에서 온 혈청보다 더 효과가 있기를 희망했다. 이 세균이 전통적으로 규정된 페스트 간균과 약간 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랑은 보건대에서 일종의 서기 역할을 맡고 있었다. 보건대의 모든 일에는 등록이나 통계 작업이 필요했는데, 그랑이 그것을 하겠다며 나섰다.
그리고 랑베르는 페스트가 자기를 덮치는 것을 막기 위해 투쟁했다.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프랑스의 아내를 만나기 위해 이 도시를 빠져나갈 수 없다는 확증을 얻었기 때문에, 다른 수단을 강구하기로 했다. 일이 조금 진척된 것은 리외의 집에서 랑베르가 코타르를 만나게 되면서였다. 코타르는 여러 친구가 있어서 이런 종류의 일을 취급하는 조직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진실을 말하자면, 그 당시 수입보다 지출이 많아진 코타르는 배급품의 암거래에 관여하고 있었다. 코타르는 랑베르에게 가르시아를 소개했다. 그리고 가르시아는 랑베르에게 라울을 소개했고, 라울은 만 프랑 정도가 들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라울은 곤잘레스를 소개했는데, 자신의 친구 중 두 사람과 곧 연결해 줄 거고, 또 그 친구들이 우리가 매수해 놓은 보초병들을 당신에게 소개해 줄 거라고 말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랑베르는 리외와 타루와 스탠드바에서 만났다. “만족스럽나요?” 리외가 물었다. “그렇게 되어 갑니다. 아마 이번 주 중일 거예요.” 그러자 타루가 외쳤다. “유감이네요.” “왜요?” 타루가 리외를 보았고, 리외가 말했다. “아! 타루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당신이 여기서 우리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이 떠나겠다는 욕망을 아주 잘 이해해요.” “제가 두 분을 위해 어디에 쓸모가 있을까요?” “그야, 우리 보건위생대 내에서죠.”
하지만 이 대화가 있고 난 이후에도 랑베르는 결국 탈출하지 못했다. 그리고 어느 날 꼭두새벽에 랑베르는 리외에게 전화를 걸었다. “제가 시를 떠날 방도를 찾을 때까지 함께 일하는 걸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잠시 수화기 저쪽에서 침묵이 흐르다가 곧 이런 답이 들려왔다. “그럼요, 랑베르. 고마워요.”
제3부
8월에는 페스트가 모든 것을 뒤덮어 버렸다고 할 수 있었다. 거기에는 더 이상 개인적인 운명 같은 것은 없었고, 페스트라는 집단적 역사와 모두가 공유하는 여러 가지 감정이 있었다. 가장 큰 감정은 공포와 반항을 내포한 이별과 귀양살이에서 비롯되는 감정이었다.
한편 지금까지 페스트는 도심에서보다 인구밀도는 높고 살기는 더 불편한 외곽 지역에서 더 많은 희생자를 냈다. 하지만 페스트는 단번에 더 가까워져 번화가에도 자리를 잡은 듯했다. 그러자 시내에서도 피해가 극심한 동네들을 격리하고 오직 불가피한 일을 맡은 사람들만 외출을 허락하자는 계획이 세워졌다. 그때까지 그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이런 조치가 특히 자신들을 겨냥한 박대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으며, 따라서 자기들에 비해 다른 동네 주민들은 어쨌든 더 자유롭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른 동네 주민들은 반대로 다른 사람들이 자기들보다 더 자유롭지 못하다고 상상하면서 힘든 순간에 위안거리를 찾아내기도 했다.
거의 그 시기에, 시의 서쪽 관문들 근처의 별장 동네에서는 특히 화재가 자주 발생했다. 조사를 해 본 결과, 문제는 예방 격리에서 돌아와 장례와 불행 때문에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페스트를 태워 없앤다는 환상 속에서 자기 집에 불을 지른 사람들이었다. 당국에서 실시하는 가옥 소독으로 모든 전염 위험을 충분히 제거할 수 있다고 설명했으나 허사였으며, 나중에는 그런 철없는 방화자들에게는 아주 엄격한 형을 부과할 수밖에 없다는 법령을 공포해야 했다. 또 이번에는 무장한 소규모의 무리에 의해 시의 관문들이 습격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하지만 경비 초소들이 강화되자 이런 시도는 중지되었다. 하지만 이런 시도가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모종의 급변하는 기운이 시중에서 돌아 몇 차례 폭력적인 장면을 연출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위생상의 이유로 소각되거나 폐쇄된 집들이 약탈당했다.
제4부
9월과 10월 두 달 동안 페스트는 오랑 시를 자기 발 아래에 굴종시켰다. 리외와 그 친구들은 그때 자신들이 어느 정도까지 지쳐 있는가를 발견했다. 사실 보건위생대의 사람들은 더 이상 피로를 감당해 내지 못하고 있었다. 한편 랑베르는 자신이 유숙하던 호텔에 얼마 전부터 설치된 예방 격리소의 관리를 임시로 맡고 있었고, 가까운 장래에 탈출하리라는 희망을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랑의 건강은 아주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는 시청 보조 직원직, 리외의 서기직, 자신의 야간작업을 겸하고 있었다. 참고로 그는 갑작스럽게 나약해지는 편이었고, 그럴 때면 리외에게 아내 잔에 대해 말하곤 했다. 리외가 어느 날 평범한 어조로 아내에 대해 말하는 자신에게 놀랐던 것도 바로 그와 함께 있었을 때였다. 리외는 아내가 요양하고 있는 요양소의 원장에게 전보를 쳤고, 답신으로 환자의 병세가 악화되었다는 통지와 병의 진행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다짐을 받았다.
다른 사람들도 같은 상태에 처해 있었다. 타루가 가장 잘 이겨 내고 있었지만, 그의 수첩을 보면 호기심의 깊이는 줄어들지 않았어도 다양성을 잃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카스텔에 대해 말하자면, 리외에게 혈청이 준비되었다고 알리러 온 그날, 방금 병원에 데려왔으나 리외의 판단으로 증상이 절망적이던 오통 씨의 어린 아들에게 첫 시험을 해 보기로 둘이 결정한 후, 리외는 카스텔에게 최근의 통계를 건네주다가 카스텔이 안락의자에 앉아 깊이 잠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랑베르는 리외 옆에서 진지하게 일했다. 다만 곤살레스와 두 청년을 만나야 했던 날에 하루 휴가를 청했을 뿐이었다. 그날 정오, 곤살레스와 랑베르는 두 녀석이 웃으면서 도착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지난번에는 운이 없었지만 그런 일은 예상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어쨌든 이번 주에 그들은 경비 당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다음 주까지 참아야 했다. 그때가 되어야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어느 날 랑베르가 리외에게 말했다. “선생님, 떠나지 않고 함께 남고 싶습니다.” “그러면 부인은요?” 랑베르는 다시 생각해 보니 그 자신이 믿어 온 것을 계속 믿고 있지만, 그래도 이곳을 떠난다면 부끄러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렇게 되면 두고 온 아내를 사랑하기가 거북해질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리외는 그것은 어리석다, 행복을 우선시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라고 말했다. 그러자 랑베르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혼자만 행복하다는 것은 부끄러울 수 있는 일입니다.”
한편 판사 오통 씨의 아들이 병에 감염되었고, 모든 가족이 예방 격리소로 들어가야 했다. 주어진 규정을 준수하던 판사는 아이의 몸에서 병의 증세를 확인하자마자 리외를 불렀고, 아이는 탈진 단계여서 보채지 않고 검사를 받았다. 판사가 물었다 “그거죠, 안 그래요?” “예.” 그들과 헤어지기 전에 리외는 혹시 필요한 것은 없느냐고 물었다. “없습니다. 하지만 제 자식 좀 살려 주십시오.” 이후 10월 말 판사의 아이에게 카스텔의 혈청을 접종했으나, 단 한 번의 반응도 얻지 못하고 아이는 죽었다.
그리고 파늘루 신부는 보건위생대에 가입한 이후, 페스트가 스쳐 간 병원과 장소를 떠난 적이 없었다. 그는 구조원 사이에서 마땅히 자신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자리, 다시 말해 선두에 섰다. 겉으로 보기에 그는 항상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 아이가 죽어 가는 것을 오랫동안 지켜본 그날부터 그는 변한 듯이 보였다. 신부는 강한 바람이 불던 어느 날 두 번째 설교를 했다. 그 설교 후 타루가 호텔을 떠나 리외의 집에서 묵어야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신부 역시 교구에서 거주하도록 해줬던 아파트를 놔두고 교회에 잘 다니며 페스트에 감염되지 않은 한 노부인의 집에 가서 묵어야 했다.
이후 어느 날 저녁 잠자리에 들 때, 그는 머리가 쑤시고 여러 날 전부터 있던 신열이 걷잡을 수 없이 손목과 관자놀이로 빠져나오는 느낌이었다. 그다음 일은 후일 여주인의 이야기를 통해 다음과 같이 알려졌다. 아침에 그녀는 일찍 일어났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는데도 신부가 방에서 나오는 것을 보지 못해 놀란 그녀는 방문을 두드렸다. 신부는 가슴이 답답해 고통스러워했다. 그녀는 의사를 부르자고 공손하게 제안했으나, 신부는 그녀가 섭섭하다고 여길 정도로 매몰차게 거절했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그녀는 두 시간마다 규칙적으로 환자를 들여다보았다. 그날 오후 노부인은 거듭 제안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신부가 몸을 일으켜 자기는 의사를 원치 않는다고 또박또박 말했다.
이튿날 새벽 그녀가 신부에게 상태가 어떠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자신의 상태가 안 좋은데, 의사는 필요 없고 규정대로 자신을 병원으로 옮겨 달라고 말했다. 질겁한 노부인은 전화로 달려갔다. 리외가 정오에 도착했다. 신부는 초연한 태도로 그를 맞았다. 그를 진찰해 보더니 리외는 울혈과 폐의 압박을 제외하고는 선(腺)페스트 또는 폐페스트의 기본 증세를 하나도 발견할 수 없어 놀랐다.
리외는 신부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그 병의 주요 증상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석연치 않으니 격리를 해야만 합니다. 제가 곁에 있겠습니다.” 병원으로 옮겨진 파늘루는 모든 치료에 자신을 맡겼지만, 십자가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침대 밖으로 몸을 반쯤 내놓고 죽은 채 발견되었을 때, 그의 시선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그의 병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병명 미상.’
페스트는 끈덕지고 발작적인 보폭으로 그칠 줄 모르고 전진했다. 당국자들은 이런 진행을 멈출 수 있는 동절기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스트는 물러섬 없이 겨울의 첫 혹한을 뚫고 지나갔다. 더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너무 기다리면 지치는 법이어서 시 전체는 미래 없이 살아가고 있었다. 한편 병원이 하나 더 개설되어 리외는 이제 환자들 말고는 만나지 못했다. 그는 지금 단계에서 페스트가 점점 폐 질환 형태로 나타나는 반면, 환자들이 의사에게 협조하려는 듯 한다는 느낌을 가졌다. 의사로서 피곤하기는 마찬가지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경우에 덜 외롭다는 느낌을 가졌다.
12월 말 무렵, 리외는 수용소에 있던 오통 씨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다. 격리 기간이 지났는데도 자기가 여태 격리 수용소에 억류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리외는 랑베르에게 중재를 부탁했고, 며칠 후에 오통 씨는 격리 해제 되었다. 실제로 당국의 실수가 있었고, 리외는 그것에 대해 화가 났다. 하지만 몸이 야윈 오통 씨는 힘없는 손을 들어 올리더니 신중하게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고 말했다. “뭘 하실 겁니까, 판사님?” “휴직을 하고 싶습니다.” 판사가 말했다. “사실, 좀 쉬셔야 됩니다.” “그런 게 아닙니다. 수용소로 다시 돌아가렵니다.” “아니, 거기서 나오셨잖아요!” “오해하게 했군요. 수용소 내에 행정 자원봉사자들이 있다고 하던데요.” “물론이죠. 원하시니 곧 알아보겠습니다.” 리외는 이 일을 알아봐 줬고, 페스트에 휩싸인 도시의 삶은 성탄절까지 다시 계속되었다.
그 무렵 랑베르는 리외에게 두 젊은 보초들의 도움으로 아내와 비밀리에 서신을 주고받고 있다고 털어놓으며, 자신이 이용하는 방편을 써 보라고 권하자 리외는 받아들였다. 리외는 몇 달 만에 처음으로 아주 어렵게 편지를 썼고 발송했다. 하지만 답장은 도착이 늦어졌다. 그리고 코타르는 장사가 잘되었고 자질구레한 투기로 돈을 벌었다. 한편 그랑에 대해 말하자면 좋지 못한 명절이 되었다. 성탄 전야에 그랑이 약속 시간을 어겼다. 걱정이 된 리외는 이른 새벽에 그의 집에 갔으나 그를 만나지 못했다. 이후 11시경 랑베르가 리외에게 그랑이 일그러진 모습으로 거리를 헤매는 것을 먼발치에서 보았다고 말했다. 의사와 타루는 차를 타고 그랑을 찾으러 나섰다.
정오 무렵 리외는 차에서 내려 나무 장난감들로 가득 찬 어느 가게 진열장 앞에 바짝 붙어 있는 그랑을 멀리서 주시하고 있었다. 이 늙은 공무원의 얼굴 위에서 눈물이 계속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 눈물은 리외를 뒤흔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눈물의 의미를 이해하던 그 역시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 그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리외 역시 이 불행한 사람이 성탄절 용품 가게 앞에서 했던 약혼과 그에게 기대면서 자기는 기쁘다고 말하던 잔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리외는 울고 있는 이 늙은 남자가 그 순간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고 있어서 그와 마찬가지로 그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사랑이 없는 이 세상은 죽은 세상이나 마찬가지라는 것, 감옥, 일, 용기 등에 진절머리가 나서 누군가의 얼굴과 감동적인 사랑의 마음을 바라는 시간이 꼭 오게 되는 법이라는 것을 말이다.
이후 어느 날 늙은 천식 환자가 흥분한 기색으로 리외와 타루를 맞이하며 말했다. “됐어요. 그것들이 다시 나와요.” “누가요?” “아, 그야 쥐들이지요!” “또 나올까요?” “그것들이 뛰어다니는 것을 봐야 해요! 좋은 일이에요.” 이후 리외가 통계를 확인했더니 통계는 병의 일보 후퇴를 보여 주고 있었다.
제5부
시민들은 성급히 기뻐하지는 않았다. 지난 몇 개월 동안, 그들은 해방에 대한 욕망을 키웠지만, 또한 조심스러움 역시 배워서 전염병이 조만간 끝난다는 기대를 점점 덜하도록 길들여졌었다. 하지만 모두 이런 새로운 사실을 입에 올렸고,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희망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1월 초순 동안, 추위가 어느 때와 다르게 오래 자리를 잡아 오랑 시 위에서 굳어진 듯했다. 하늘이 이렇게 푸르렀던 적은 없었다. 이렇게 깨끗해진 대기 속에서 페스트는 3주 동안 연속적으로 하락하면서 그것이 늘어놓던 점점 줄어드는 시체의 숫자만큼 약해져 가는 것 같았다. 또 카스텔의 혈청은 그때까지는 거부되었던 연이은 성공을 단숨에 거두고 있었다.
하지만 가끔은 거세진 병이 마구잡이로 뛰어올라 완치를 기대하던 서너 명의 환자를 앗아 가기는 했다. 그들은 희망이 가득할 때 페스트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이었는데, 오통 판사가 그런 경우에 해당되었다. 하지만 어느 미지의 굴에서 소리 없이 나온 페스트가 그곳으로 되돌아가려고 멀어져 가는 듯하던 순간, 시내에서 누군가는 이런 동향에 의해 내쳐져 망연자실했는데, 타루의 수첩을 믿자면, 그것은 코타르였다. 1월 25일까지는 모든 사람이 코타르의 안절부절못하는 정신 상태를 알게 되었다. 그는 동네 사람들인 지인들과 함께 어울려 보려고 애쓴 후 며칠 내내 그들과 심하게 대립하기도 했다. 그러더니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세상과 연을 끊은 듯 줄곧 야만인처럼 생활하기 시작했다.
도청의 발표가 있던 날 코타르는 거리에서 사라졌다. 이틀 후, 타루는 거리를 헤매던 그와 마주쳤는데, 코타르는 그에게 변두리까지 같이 가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타루에게 도청의 발표로 정말 페스트에 종지부가 찍혔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타루는 전염병이 곧 끝난다는 생각을 당연히 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둘이 코타르의 집 근처에 이르렀을 때 두 남자가 불쑥 나타났고, 그들은 당신 이름이 코타르가 맞느냐고 묻자, 코타르는 몸을 돌리더니 어둠 속으로 줄행랑을 쳤다. 타루는 두 남자에게 뭘 원하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조사할 일이 있어서 그런다고 말하더니 코타르가 간 쪽으로 떠났다.
이틀 후 리외가 집 문을 여는 순간, 어머니가 나와서 타루가 몸이 안 좋다고 일러 주었다. 타루는 리외에게 페스트 증세일 가능성도 있는 애매한 증세라고 말했다. 그를 진찰하고 나서 리외가 말했다. “아니에요. 아직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아요.” 하지만 방을 나갔다 잠시 뒤 돌아 온 리외의 손에는 큼직한 혈청 병이 들여 있었다. “아! 역시 페스트군요.” 타루가 말했다. “아닙니다. 하지만 예방 차원에서입니다.” 타루는 말없이 팔을 내밀어 자기가 다른 환자들에게 놓았던 그 긴 주사를 맞았다. “오늘 저녁에 상태를 봅시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리외는 타루를 보았다. “그러면 격리는요, 리외?” “페스트에 걸린 건지 전혀 확실치 않아요.” 타루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혈청주사를 놓으면서 격리 지시를 같이 안 내리는 건 처음인데요.” “어머니와 내가 간호할 거예요. 여기가 훨씬 나을 겁니다.”
이후 저녁때 집에 돌아온 리외는 친구의 방으로 들어갔다. 리외는 타루에게로 몸을 숙였다. 몹시 뜨거운 피부 아래에 신경질이 맺혀 있었고, 그의 가슴에서는 땅속 대장간의 풀무 소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 타루는 기이하게도 두 종류의 증세를 보이고 있었다. 신열과 기침 사이사이에 타루는 간간이 친구들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곧 눈을 뜨는 횟수가 점차 줄어들었다. 타루는 폭풍의 깊숙한 곳으로 서서히 표류해 갔다. 그에게 너무나 친근했던 이 인간 형상이 그의 눈앞에서 페스트의 검은 물속으로 침몰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이 난파를 막기 위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베르나르야?” “예.” “피곤하지 않니?” “괜찮아요.” 그는 이 순간 어머니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고 있었고,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너도 산에 가서 쉬어야 할 거다, 거기 말이다.” “그래야죠, 어머니.” 그가 간직하게 될 타루의 모습은 두 손으로 리외의 차 핸들을 움켜잡고 운전하는 한 인간의 모습이거나 혹은 미동 없이 누워 있는 한 육중한 육체의 모습일 것이다. 살아 있는 따뜻함과 죽어 있는 모습, 바로 이런 것이 소중한 경험인 것이다.
아침에 리외가 아주 담담하게 아내의 부고를 받은 것도 분명 이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그는 진찰실에 있었다. 어머니가 뛰다시피 들어와 전보 한 장을 건네주고 배달부에게 수고비를 주기 위해 나갔다. 그녀가 돌아왔을 때 아들은 손에 전보를 펼쳐 들고 있었다. “전보는?” 어머니가 물었다. “그거예요. 일주일 전이래요.” 리외가 시인했다. 어머니는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의사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어머니에게 울지 말라고, 각오는 하고 있었는데도 힘들다고 말했다.
2월의 어느 아름다운 아침 동틀 무렵, 주민들, 신문들, 라디오, 도청 관보들의 환호를 받으며 관문들이 드디어 열렸다. 따라서 서술자에게 남은 일은 관문 개방에 이어진 기쁨의 시간의 기록자가 되는 것이다. 비록 그 자신은 거기에 완전히 섞일 자유가 없는 사람 가운데 한 명이었지만 말이다. 대규모 행사들이 밤낮으로 개최되었다. 이와 동시에 몇몇 외양선들이 벌써 우리 항구 쪽으로 뱃머리를 돌리고 있는 동안, 기차들은 역에서 연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이 기차들은 그 나름의 방식으로 그날이 헤어짐으로 인해 신음해 왔던 모든 사람에게는 성대한 재회의 날임을 보여 주었다.
이 연대기는 종착역에 다다랐다. 의사 베르나르 리외가 이 연대기의 작가임을 고백해야 할 시간이 되었다. 그런데 우리 시민 가운데 의사 리외가 대신 이야기할 수 없는 한 사람이 있다. 이 연대기는 무정한 마음, 다시 말해 외로운 마음을 지녀 온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옳다.
축제로 소란스러운 큰길을 빠져나와 그랑과 코타르가 살고 있는 거리로 접어들었을 때, 의사 리외는 경찰의 비상선에 의해 저지당했다. 그는 신분증을 내보였다. “안 됩니다, 의사 선생님. 한 미치광이가 군중에게 총을 쏴 대고 있습니다.” 한 경관이 말했다. 그때 리외는 자기를 향해 오고 있는 그랑을 보았다. 그랑 역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의 길을 막으려 했고, 그는 총이 코타르의 집에서 발사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손에 권총을 들고 그 집과 마주한 건물들의 문 안에 달라붙어 있는 경관들도 눈에 들어왔다. 그 집의 덧창은 모두 닫혀 있었다. 한순간 그 집 맞은편의 건물 중 하나에서 권총이 두 번 발사되자 망가진 덧창에서 파편이 튀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잠잠해졌다. “코타르의 창이에요. 하지만 코타르는 종적을 감췄는데.” 그랑은 몹시 흥분해서 단번에 말했다.
갑자기 경찰들이 배치된 집들의 창에서 기관총 사격이 시작되었다. 사격이 멎자 두 번째 기관총이 조금 더 떨어진 어느 집으로부터 다른 각도에서 따닥따닥 소리를 냈다. 같은 순간에 세 명의 경관이 대문으로 돌진했다. 곧바로 다른 세 명의 경관이 그곳으로 뛰어 들어가고 나서 기관총 사격은 멎었다. 건물 안에서 어렴풋한 총성이 두 번 울렸다. 그러고 나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지더니 그 집에서 셔츠 차림의 키 작은 사내가 계속해서 소리를 지르면서 거의 들리다시피 끌려 나오는 것이 보였다. “코타르예요. 미쳤군요.” 그랑이 더듬거렸다. 그랑과 의사는 저무는 황혼 속에서 그 자리를 떴다.
어두운 항구로부터 공식적인 축하 행사의 첫 불꽃이 올라갔다. 코타르, 타루, 리외가 사랑했고 잃은 남자들과 여자들, 죽었거나 범죄자였거나 그들 모두가 잊혀 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항상 같다. 하지만 이것이 그들의 힘이자 무고함이었고, 바로 여기에서 리외는 모든 고통을 넘어 그 자신이 그들과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의사 리외는 이렇게 여기에서 끝나 가는 이야기를 쓰기로 결심했다. 이것은 다만 입을 다물고 지내는 사람들에 속하지 않고, 페스트에 걸린 사람들을 위한 증언을 하고, 또 그렇게 해서 최소한 그들에게 가해진 불의와 폭력의 기억을 남겨 재앙의 한복판에서 배우는 것, 즉 인간에게는 경멸해야 할 것보다 찬양해야 할 것이 더 많다는 것만큼은 말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리외는 이 연대기가 최후의 승리의 연대기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연대기는 공포에 맞서, 그리고 공포의 지칠 줄 모르는 무기에 맞서 그가 수행해야 했던 것이자, 성자가 될 수는 없으나 재앙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의사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든 사람이 개인적 아픔에도 불구하고 계속 수행해 나가야 할 것에 대한 증언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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