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해석
사람에게는 무의식이 있고 그 안에는 억눌린 소원이 있다. 무의식 속의 소원은 꿈으로 나타난다. 꿈은 무의식에 이르는 왕도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지음
꿈의 해석(Die Traumdeutung)
지그문트 프로이트 지음
▣ 저자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자유연상기법으로 꿈을 분석해 히스테리의 원인을 밝혔다.
자기 삶의 주인이고자 안락사 선택
1939년 가을, 런던의 한 병원에 암으로 입원한 노인의 팔뚝으로 치사량의 모르핀 주사가 들어가고 있었다. 노인의 딸과 의사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이튿날 새벽 노인은 세상을 하직했다.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종교가 주는 유혹을 거부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 삶의 주인이 되고자 안락사를 선택한 노인. 그의 이름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였다.
프로이트는 1856년 5월 6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프라이부르크에서 유대인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프로이트는 아버지의 세 번째 결혼에서 태어난 여덟 아이 중 장남이었다. 포목상이었던 아버지는 경제적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1860년 가족을 데리고 빈으로 이주했다. 유대인에 대한 반감이 극심했던 빈에 대해 프로이트는 애증을 품었지만 잠깐의 해외 방문 기간을 빼고는 80평생을 거의 이 도시에서 살았다.
프로이트는 원래 문학과 역사에 관심이 많았지만 우연히 자연에 대한 강연을 듣고 진로를 바꿨다. 1873년 빈 의과대학에 들어가서 에른스트 브뤼케의 생리학 수업에서 강한 영향을 받았다. 프로이트의 평생에 걸친 반형이상학적, 반종교적, 반관념적 태도는 이때 체험한 엄밀한 자연과학적-유물론적 교육에서 기초가 다져졌다. 프로이트는 신경생리학자로서 전문 연구자의 길을 걷고 싶었지만 반유대주의가 강한 빈에서는 숱한 난관이 있을 거라는 판단 아래 임상의가 되기로 결심하고 종합병원에 들어갔다.
여기서 프로이트는 당시 유명한 뇌 전문의였던 테오도어 마이너트의 지도를 받는다. 프로이트는 뇌의 기능 이상과 국부적 손상을 진단하는 분야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고 장학금을 받아 프랑스의 저명한 신경생리학자 장 샤르코가 연구하는 파리로 떠난다. 프로이트가 도착했을 때 샤르코는 히스테리 연구에 몰두해 있었다. 히스테리 증상은 국부 뇌 손상의 효과와 비슷하지만 신체적 원인을 찾기 어렵다는 특징이 있다. 당시 대부분의 의사들은 히스테리를 꾀병으로 일축하고 진지하게 다루지 않았지만 샤르코는 진정한 원인이 있다고 믿고 최면요법으로 히스테리 환자에게 접근해 상당한 성과를 거뒀고 프로이트는 여기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자유연상 기법으로 되살아난 카타르시스 요법
빈으로 돌아온 프로이트는 다시 신경생리학 연구에 몰두하고 싶었지만 환자 수가 적었기 때문에 생계 유지를 위해 히스테리 환자를 마지못해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처음에 프로이트는 목욕요법이나 가벼운 전기요법을 시도했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환자에게 최면을 걸어 증세가 사라질 것이라고 직접 암시를 주는 방법도 먹혀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프로이트는 파리로 떠나기 전 절친한 동료 브로이어가 들려줬던 베르타 파펜하임이라는 히스테리 환자의 치유 사례를 떠올렸다.
의사는 최면 상태의 환자에게 히스테리 증세와 관련된, 그동안 잊었지만 감정이 강하게 담긴 경험들을 회상하라고 요구했다. 환자가 그 사건들을 떠올리고 억눌렸던 감정을 폭발시키자 히스테리 증세가 사라졌다. 하지만 치료 막판에 환자가 의사에게 강한 집착을 보이는 데 질려버린 브로이어는 두번 다시 그 방법을 쓰지 않았다. 이렇게 망각되었던 카타르시스 요법을 부활시킨 사람이 프로이트였다. 프로이트는 브로이어와 함께 『히스테리 연구』를 펴냈다.
이 무렵 프로이트는 커다란 문제에 봉착해 있었다. 그것은 최면이 안 걸리는 히스테리 환자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따라서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했다. 프로이트는 ‘자유연상’ 기법을 창안해 이 난관을 돌파했다. ‘자유연상’은 환자가 최면 상태가 아닌 각성 상태에서도 자신의 증세와 관련돼 떠오르는 생각을 거침없이 털어놓았다. 환자의 자기 검열과 차단, 짜깁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분석가의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다. 프로이트는 불안을 낳는 생각은 환자의 무의식 속으로 들어가고 대신 증세가 나타나는 것이라고 확신하게 됐다. 환자의 무의식으로 어떻게 뚫고 들어갈 것인가? 무의식을 본격적으로 분석하는 데 꿈처럼 좋은 재료는 없었다. 프로이트는 꿈의 내용을 자유연상한 뒤 분석해 봤다.
무의식에 이르는 왕도, 꿈
꿈에 나타난 내용을 히스테리 증세와 똑같은 방법으로 자유연상시켰더니 무의식에 숨어 있던 내용이 나타났다. 꿈의 숨은 내용과 드러난 내용의 관계는 많은 점에서 히스테리의 발병 원인과 증세의 관계와 비슷했다. 두 경우에서 모두 의식에 떠오른 결과는 자유연상을 통해 캐내야 하는 원래의 무의식적 사고보다 안전하다. 즉 불안을 덜 일으킨다.
그 불안의 뿌리를 프로이트는 유년기에서 찾았다.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자신이 받았던 충격을 깊이 분석해 그 바탕에는 어린 시절 어머니를 독점하기 위해 아버지가 죽기를 바랐던 경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해부해냈다. 이른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였다. 이런 자기인식은 히스테리를 이해하고 치료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전부터 프로이트는 히스테리 환자들의 자유연상이 자꾸만 어린 시절의 성과 관련된 기억과 결부되는 데 주목하고 있었다. 그것은 대개 아버지나 어머니에 의한 성적 희롱의 양상으로 나타났다. 어린이에게는 이것이 성적으로 인식되지 않았겠지만 사춘기를 겪으면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은 이 경험은 의식의 억압을 받고 무의식으로 잠복한다. 이 무의식을 분석하는 데 결정적 도움을 주는 것이 바로 꿈이었다. 꿈은 무의식에 이르는 ‘왕도’였다.
1900년에 발표한『꿈의 해석』에서 프로이트는 꿈은 겉보기에는 무의미하고 혼란스러워 보이지만 실은 의미가 있으며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특별한 해석법이 있다고 주장했다. 프로이트는 만년에도 자신의 대표작을 『꿈의 해석』으로 꼽을 만큼 이 책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지만 발간 후 10년 동안 겨우 361권이 팔릴 만큼 처음에는 무시당했다. 이듬해 간행한 『일상생활의 정신병리학』에서는 실언 같은 사소한 행위의 배후에 숨어 있는 무의식적 욕망을 분석했다. 1905년에는 『농담과 무의식의 관계』,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를 발표했다.
잇따른 저서의 발간으로 프로이트의 추종자들이 조금씩 생겨났다. 알프레드 아들러, 칼 구스타프 융, 카를 아브라함, 산도르 페렌치 등이었다. 1902년부터 프로이트의 집에서 매주 열린 '수요 심리학 모임'은 1908년 '빈 정신분석학회'로 발전했다. 이듬해 프로이트는 융, 아들러와 함께 미국을 방문해 정신분석학을 신대륙에 전파했다. 정신분석학은 세력을 넓혔고 1910년 '국제 정신분석학협회'가 발족했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아까운 두 제자 융, 아들러와 모두 결별한다. 두 사람은 스승의 이론이 지나치게 성 일변도라고 여기고 인류의 시원적 심성인 집단무의식을 상정하는 분석심리학(융)과 사회 현실이 개인의 의식에 미치는 영향을 중시하는 개인심리학(아들러)으로 갈라져나갔다.
혁명적 학문 정신분석의 창시자
1차대전은 프로이트의 삶과 사상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그의 아들 셋이 전선에 나가 있었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프로이트는 인간이 가진 공격성의 심리적 원인을 끈질기게 성찰했다. 그 전까지는 성욕(쾌락욕)과 식욕(자기보존욕)을 인간의 근원적인 두 가지 충동으로 봤지만 1920년에 쓴 『쾌락원칙을 넘어서』에서 프로이트는 에로스 즉 삶을 지향하는 충동과 타나토스, 즉 죽음을 지향하는 충동이라는 새로운 대립항을 내놓았다. 아무런 자극이 없고 아무런 긴장이 없는 태초의 상태로 회귀하려는 본능을 프로이트는 타나토스라고 불렀다. 아들의 죽음과 구강암의 발병이라는 개인적 고통을 겪으면서 프로이트의 생각은 점점 비관적으로 흘러갔다.
『환상의 미래』(1927), 『문명 속의 불만』(1930) 같은 후기작에서 프로이트는 의학과 심리학을 거쳐 철학, 사회심리학, 문화인류학의 영역으로 사색을 발전시킨다. 인간은 쾌락을 지향한다. 프로이트는 자극이 유발시킨 긴장을 해소하는 것이 곧 쾌락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쾌락의 무분별한 표출은 개인간의 갈등을 유발시킨다. 이것을 방지하는 장치로 사람들은 '문명'을 만들었다. 사회와 개인의 관계는 모순적이다. 사회는 개인의 욕망을 억누르려고 한다. 사회와 개인의 조화는 불가능하다.
이처럼 프로이트는 이성의 의도와 노력을 회의적으로 거의 비관적으로 바라보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디까지나 계몽적 인간이었다. 독일의 작가 토마스 만은 프로이트를 이렇게 평가했다. “프로이트가 연구자로서 감정에 대해 갖는 흥미는 이성의 영역을 희생시키면서 감정을 찬미하는 방향으로 전락하지 않는다. 그의 반합리주의는 정신에 비해 본능이 현실적으로 강력한 우위를 갖고 있다는 점을 통찰할 뿐이다. 프로이트는 본능의 우위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면서 정신을 조롱하려는 것이 아니다.”
1933년 독일의 국가종교로 부상한 국가사회주의라는 비합리주의 이념은 프로이트의 저작을 모두 불살랐다. 1938년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되자 프로이트 일가는 망명을 떠나야 했다. 정신분석의 창시자는 망명한 지 1년 만에 런던에서 세상을 떠났다. 합리성의 심층 세계를 규명한 그의 연구는 히틀러가 주도한 2차대전과 유대인 학살을 견뎌냈다. 적잖은 반론에 부딪히기도 했지만 프로이트가 세운 무의식의 과학은 인간이 스스로에 대해 가진 지식의 범위를 혁명적으로 확대시킨 위대한 문화적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 Short Summary
그동안 꿈에 대해서는 꿈의 창조성과 예언력을 믿는 입장과 꿈은 무의미하고 우연적인 생리적 반응이라는 두 가지 입장이 있었다. 하지만 꿈은 단편적인 두뇌활동이 아닌 해석할 수 있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무의식 속에 들끓고 있지만 성취되지 못한 소원들이다. 꿈은 이 소원들이 가면을 쓰고 나타나기에 실제 소원과는 다른 모양을 띤다. 이 모양을 원래의 모습으로 찾아가려는 이성의 작용이 꿈의 해석이다.
▣ 차례
1장 꿈의 문제를 다루는 문헌들
전통적으로 꿈을 연구하는 시각은 두 가지로 나뉜다. 꿈의 창조성과 예언력을 믿는 입장과 꿈은 무의미하고 우연적인 생리적 반응이라는 입장이다. 전자는 미신이고 후자는 과도한 유물론이다. 꿈에는 생리적 요인과는 구별되는 ‘심리적’ 요인이 분명히 작용한다.
2장 꿈을 해석하는 방법
꿈은 해석할 수 있다. 꿈에는 의미가 있다. 꿈은 결코 단편적인 두뇌 활동의 표현이 아니다.
3장 꿈은 소원 성취다
꿈은 소원 성취다. 누구의? 무의식 속에는 억압당한 소원들이 들끓고 있다. 이것들은 의식으로 뚫고 들어오고 싶어한다. 그런데 이 소원들은 대부분 의식을 불편하게 하는 내용이다. 그래서 무의식에 의해 억압된다. 수면 중에는 억압이 약화된다. 그러나 검열은 여전히 작동한다.
4장 꿈의 왜곡
원래대로 가다가는 걸리니까 검열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본래의 소원과는 다른 모습으로 꾸며야 한다. 그래서 꿈은 왜곡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꿈의 겉모습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꿈이 부조리하게 보이는 것은 이런 왜곡 때문이다.
5장 꿈의 재료와 꿈의 출처
꿈에는 최근에 겪은 일이 반드시 나온다. 그런데 중요한 일이 아니라 사소한 일이 나온다. 하지만 그 사소한 일의 뒤에는 억압당한 소원이 달라붙어 있다. 사소한 일은 억압당한 소원의 가면이다.
6장 꿈작업
꿈은 4가지 방식으로 왜곡된다. 왕창 줄이고(압축), 엉뚱한 데 갖다 붙이고(전위), 그림처럼 만든다(시각적 묘사). 그리고 나중에 해석하면서 빈 구멍을 메꿔나간다(2차 가공). 이 결과가 꿈내용이다. 꿈내용을 자유연상 기법으로 분석하여 꿈작업에 의해 왜곡된 원래의 꿈사고를 알아내는 것이 꿈해석의 목표다.
7장 꿈과정의 심리학
깨어 있을 때는 감각에서 사고로 우리의 의식이 진행하지만 잠자는 동안에는 사고에서 감각으로 우리의 정신이 퇴행한다. 꿈이 잘 망각되는 것은 꿈을 잊으려는 의도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수면 중에 소원의 표출을 부분적으로 허용한 검열 장치는 잠에서 깨어나면 힘을 되찾아 그것을 지워버리려고 한다.
꿈의 해석(Die Traumdeutung)
지그문트 프로이트 지음
1. 꿈은 소원 성취다
전통적으로 꿈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두 가지로 갈라진다. 먼저 꿈은 일상의 굴레로부터 사람의 마음을 해방시켜 창조적이고 자유분방한 세계로 인도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꿈에는 현실의 논리를 뛰어넘는 창조와 예언의 논리가 있다는 것이다. 아득한 옛날부터 철학자들과 예술가들은 꿈이 갖는 이런 마력과 생명력을 존중했다. 꿈에는 모종의 진리가 있다고 믿었다.
반면 꿈은 아무런 일관성도 객관성도 없이 아무렇게나 굴러가는 지리멸렬한 세계라고 보는 입장이 있다. 근대 이후 자연과학이 발전하면서 상당수의 의사들은 꿈의 심리적 활동을 사소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여겼다. 꿈의 심리적 능력을 경시하면서 신체적 자극이 꿈의 유일한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생리학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꿈을 연구했다. 꿈을 꾸게 만드는 심리적 자극의 독자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꿈에 예언력이 있다는 말은 틀렸지만 꿈이 단편적인 두뇌 활동이며 무의미하다는 말도 거짓이다. 물질적이고 생리적인 원인과는 엄연히 다른 심리적 역할이 꿈에는 분명히 있다. 그런 면에서는 꿈에는 의미가 있다고 예로부터 믿어온 대중들의 생각이 고루한 학자들의 견해보다 진실에 더 가깝다. 하지만 가령 ‘편지’는 ‘불쾌감’으로, ‘장례식’은 ‘약혼’ 등으로 기계적으로 대입하는, 대중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해몽서’식의 꿈풀이는 보편성이 없다.
꿈은 많은 생리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연주자의 손이 아니라 외부의 충격을 받고 제멋대로 울리는 악기가 아니다. 그것은 완벽한 심리적 현상이며 정확히 말하자면 소원의 성취다. 간단한 예로 젊은 시절 나는 늦게까지 일을 해서 아침에 일어나기가 힘들었다. 그럴 때면 침대에서 일어나 세수하는 꿈을 꾸곤 했다. 잠시 후에는 아직 잠자리에 있다는 걸 깨달았지만 그 사이 조금 더 잘 수 있었던 것이다.
꿈이 소원 성취라는 건 아이의 꿈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배를 타고 아름다운 호수를 건넜는데 너무 아쉬워서 배에서 내리지 않으려던 내 딸아이는 다음날 어젯밤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는 꿈을 꿨다고 말했다. 그리스 전설에 심취한 내 맏아들은 아킬레스와 함께 마차를 타는 꿈을 꿨다.
꿈이 소원의 성취라는 내 주장에 사람들은 강하게 반발한다. 쫓기는 꿈, 처벌당하는 꿈, 고통을 겪는 꿈 등 편한 꿈보다는 불쾌한 꿈이 더 많다는 것이다. 어른이 꾸는 꿈은 특히 그런 내용이 많다. 게다가 꿈은 두서없고 부조리하고 과장되고 비현실적일 때가 많다. 이런 꿈이 어떻게 소원 성취일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이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표면에 드러난 꿈의 내용은 꿈의 의미가 아니다. 꿈의 세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 표면에 드러난 꿈의 내용은 심층에 자리한 꿈의 사고를 은폐하고 있다. 꿈의 내용은 꿈의 사고가 위장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왜 은폐하는가? 왜 위장이 필요한가? 내부 검열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2. 꿈은 소원을 왜곡시킨다
꿈은 이중 구조로 되어 있다. 겉으로 드러난 ‘꿈내용’이 있고 밑바탕에 깔려 있는 은폐된 ‘꿈사고’가 있다. 전문어로는 각각 ‘외현몽’과 ‘잠재몽’이라고 한다. 꿈사고는 본심이지만 결코 표면에 드러나지는 않는다. 꿈내용이라는 우회로를 거쳐서만 우리는 꿈사고에 도달할 수 있다.
꿈은 왜 이런 이중 구조를 가지게 됐을까? 우리 마음 속에서 서로 상반된 두 개의 힘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한쪽에는 소원을 성취하려는 힘이 있고 또 한쪽에는 그것을 누르려는 힘이 있다. 권력자의 비위를 거스르는 진실을 말해야 하는 관리의 처지를 생각하면 된다. 관리가 진실을 솔직하게 밝히면 권력자는 관리의 발언을 억압할 것이다. 관리는 검열을 두려워하게 되고 자연히 자신의 생각을 완화하고 왜곡한다. 악의가 없다는 걸 알리기 위해 암시와 위장과 은폐에 의존해야 한다. 검열이 엄격할수록 위장의 범위는 넓어지고 원래 말하려는 의미를 종잡기 어렵게 된다. 꿈은 두 힘의 타협의 산물이다. 자신을 위장해 검열을 통과한 꿈사고만이 꿈내용으로 진입할 수 있다.
여기서 실제로 내가 꾼 간단한 꿈의 일부를 소개한다. ‘...친구 R이 내 삼촌이다. 나는 그에게 깊은 애정을 느낀다 ...’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꿈이라고 생각했지만 만약 내 환자가 똑같은 반응을 보인다면 나는 그 배후에 뭔가 불쾌한 이야기가 숨어 있을 거라고 추측하리라는 점을 깨닫고 내적 저항을 극복하고 분석을 시도했다. 내 삼촌은 중죄를 저질러 징역을 산 일이 있다. 아버지는 삼촌이 사람은 착하지만 생각이 모자란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친구 R이 삼촌이라면 나는 R이 생각이 모자라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R은 법 없어도 살 사람이다. 나는 왜 R과 삼촌을 연관지었을까? 그때 며칠 전 다른 친구 N과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R도 N도 나도 교수 임용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린 친구였지만 경쟁자였다. N은 나에게 자신의 교수 임용이 자꾸 지연되는 이유를 알아보니 예전에 어떤 여자한테 억울하게 고발당한 일 때문이었다며 나한테는 아무 문제 없으니 잘 될 거라고 말했다. 나는 꿈을 이해할 수 있었다. R과 N의 교수 임용이 지연되는 것이 유대계라는 이유 때문이라면 나 역시 유대인이니까 문제가 된다. 그렇지만 다른 이유라면 나는 괜찮다. 꿈 속에서 삼촌은 내 두 친구를 하나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하나는 범죄자로 묘사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 세 사람의 유대인이라는 공통성이 소멸되고 나는 안심하고 교수 임용을 기다릴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나는 왜 애정을 느꼈을까? 나는 삼촌에게 한 번도 정을 느껴본 적이 없다. 한편 R을 좋아하긴 하지만 꿈 속의 애정은 분명 과장돼 있다. 나는 조금씩 깨닫는다. 꿈 속에서 내가 느낀 애정은 꿈사고를 은페하는 구실을 한다. 꿈해석을 가로막는 역할을 한다. 내 꿈사고는 R을 어리석다고 비방한다. 내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도록 애정이 이입된 것이다.
앞에서 말한 불쾌한 꿈들이 모두 소원 성취라는 사실도 이런 이중 구조를 통해 명쾌히 설명된다. 많은 환자들이 자 이래도 꿈이 소원 성취라고 우기겠느냐면서 나에게 들려준 꿈들도 마찬가지였다. 재판마다 패소하는 꿈을 꾸는 변호사, 시어머니와 함께 여행을 가는 꿈을 꾸는 며느리의 꿈에서 나는 내 말이 틀리기를 원하는 그들의 강한 소원을 읽을 수 있었다. 그들은 꿈에서 그 소원을 이룬 셈이었다.
하지만 꿈이 소원 성취라는 말에 가장 거세게 반발하는 사람은 부모나 형제가 죽어서 슬퍼하는 꿈을 꾼 사람들이다. 그들은 절대로 가족의 죽음을 바란 적이 없다고 말한다. 내가 말하는 소원은 반드시 그 사람이 지금 품은 소원이 아니어도 된다. 어린 시절에 적어도 한 번은 품었던 소원이기만 하면 된다. 소원은 망각될 수는 있으나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지금은 형제 자매를 사랑하고 그들이 죽으면 상심할 사람이 옛날에 나쁜 소원을 품었던 적이 있으면 이 소원이 꿈에서 현실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어린 시절부터 형제들은 대체로 화기애애하게 지낸다고 믿는다. 정말 그런가? 아이는 동생이 태어나면 십중팔구 질투한다. 아이는 이기적이다. 새로 태어난 동생 때문에 예상되는 불이익을 정확하게 계산할 줄 안다.
부모의 경우는 어떤가. 자식이 부모가 죽는 꿈을 꿀 때는 대개 자기와 성이 같은 쪽이 죽는 꿈을 꾼다. 아들은 아버지가 죽는 꿈을 꾸고 딸은 엄마가 죽는 꿈을 꾼다. 이것은 어린 시절 경쟁 의식을 느꼈기 때문이다. 어린 남자아이는 엄마를 독차지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아버지라는 존재 때문에 그럴 수가 없다. 남자아이는 아버지가 사라지기를 바란다. 불가피한 운명으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는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 오이디푸스는 모든 남자아이가 한번쯤 꿈꿔본 모습이다. 반면 여자아이는 아버지에게 끌리며 엄마를 경쟁자로 여긴다.
혈연이 죽는 꿈은 어떻게 검열을 피할 수 있었을까?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첫째 부모가 죽기를 바라는 소원이 있을 리 만무하다고 보기 때문에 아예 검열의 관심조차 끌지 못했을 것이다. 고대의 법에 아버지 살해에 대한 처벌 규정이 없는 것과 비슷하다. 천부당 만부당한 일이어서 고려의 대상에서 아예 제외된 것이다. 둘째 낮에 소중한 사람을 염려했을 수 있다. 이 염려는 앞서 말한 소원을 등에 업고 꿈에 들어오며, 한편 소원은 염려 뒤로 모습을 감추고 나타날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 낮에 걱정을 했기 때문에 그 걱정의 연장선에서 밤에도 꿈을 꾼 거라고 여긴다.
3. 꿈은 어디서 재료를 가져오나
꿈을 분석하는 실마리는 예외없이 그 날 겪었던 일, 만났던 사람, 나눴던 대화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심리적 가치를 거의 갖지 않는 사소한 요소들이다. 그럼 왜 중요한 요소가 아니라 사소한 요소가 꿈에 등장하는 것일까? 이것은 검열 때문이다. 우리 무의식 속에는 강한 소원을 담고 있는 체험들이 들어 있다. 이 소원은 겉으로 표출되고 싶어하지만 원래의 체험과 함께 나타나면 검열에 걸린다. 그래서 낮에 경험한 사소한 사건과 결합하여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등장하는 것이다.
이 억눌린 소원은 어린 시절에서 유래하는 것이 많다. 친구 R에 대한 꿈으로 돌아가자. 적어도 성인이 된 이후로 나는 공명심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나는 교수라는 명예로운 지위를 얻기 위해 환장한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면 꿈에 등장한 내 공명심은 어디서 온 것일까? 내가 태어났을 때 이웃집 할머니가 큰 인물이 태어났다고 축하해줬다는 얘기를 나는 어렸을 때부터 자주 들었다. 어렸을 때 내 주위에는 유대인이라도 열심히 공부하면 장관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친구들이 많았다. 나도 의대로 진학하기 전까지는 법학을 전공할 작정이었다. 내 좌절된 야심은 꿈 속에서 그런 공명심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나 많은 연구자들은 꿈은 심리적 동기에서 비롯된 정신 현상이 아니라 생리적 자극의 결과라고 말한다. 소화 불량이나 갈증, 성기의 흥분 같은 내부 자극이나 신체 외부로부터 수면 중에 끊임없이 받는 자극이 꿈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슈트륌펠 같은 생리학자는 자극과 꿈내용의 관계를 악기를 다룰 줄 모르는 사람의 무지막지한 연주에 비유한다. 그러나 이것은 겉으로 드러난 현상에만 집착하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쉐르너 같은 연구자는 신체 자극을 상징화한 것이 꿈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숨을 쉬는 폐는 활활 타오르는 난로, 심장은 빈 상자와 바구니, 방광은 주머니 모양의 물건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꿈의 의미를 단편적으로만 해석하는 꿈해몽서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똑같은 자극이 왜 다른 꿈을 만드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물론 신체 자극이 꿈에 전혀 영향을 안 미치는 건 아니다. 갈증이 나면 물을 마시는 꿈을 꾸고 오줌이 마려우면 소변 보는 꿈을 꾼다. 하지만 신체 자극과 꿈의 관계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수면 중에도 사람은 자극을 얼마든지 정확히 해석할 수 있지만 그럴 경우 수면을 끝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자신의 소원과 가장 잘 부합되는 방향으로 자극을 해석한다. 꿈은 결코 자의적이지 않다.
어느 날 나는 ‘교황이 죽은’ 꿈을 꿨다. 나는 이 꿈을 도저히 해석할 수 없었다. 그런데 얼마 뒤 아내가 오늘 새벽 그 끔찍한 교회 종소리 들었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나는 꿈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꿈은 내 잠을 깨우려는 소음에 대해 내 수면 소원이 나타낸 반응이었다. 나는 교황이 죽는 꿈내용을 가지고 종을 친 교인들에게 복수했으며 종소리와는 무관하게 잠을 계속 잘 수 있었다. 내가 아는 대학생은 하숙집 주인이 병원에 가라고 깨우자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꿈을 꾸고는 계속 잤다. 잠을 계속 자고 싶다는 소원만큼 강한 소원도 드물 것이다. 이런 식으로 꾸는 꿈을 ‘편의꿈’이라고 부른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꿈은 편의꿈인 셈이다. 꿈은 자극으로부터 수면을 지켜준다. 꿈은 잠의 훼방꾼이 아니라 파수꾼이다.
4. 꿈은 어떻게 만들어지나
꿈은 이중 구조라고 말했다. 이제 우리는 은폐된 꿈사고가 꿈내용으로 변장하기 위해 동원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규명해야 한다. 어떤 과정을 통해 꿈사고가 꿈내용으로 변형되는지 물어야 한다.
첫째로, 꿈은 ‘압축’된다. 꿈사고는 풍부하고 복잡하지만 꿈내용은 짧고 간결하며 빈약하다. 꿈사고 중에서 대부분은 생략되고 최소한의 내용이 꿈내용으로 등장한다. 꿈내용에 등장하는 요소는 다의적이다. 하나의 꿈요소는 여러 개의 꿈사고와 연결되고 하나의 꿈사고는 여러 개의 꿈요소와 연결된다. 꿈사고들이 만나는 교차점이 바로 꿈요소다. 그래서 꿈내용에 등장하는 꿈요소들은 여러 개의 꿈사고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성분이다.
앞에서 소개한 삼촌의 꿈에서 내가 본 얼굴은 친구 R의 얼굴이면서 동시에 삼촌의 얼굴이었다. 그것은 가족의 초상화를 만들기 위해 어떤 사람이 하나의 판으로 여러 얼굴을 찍었던 것과 비슷하다. 공통되는 특징은 부각되고 일치하지 않는 부분은 상쇄돼 흐릿해진다. 꿈에서 나는 A가 내게 적대감을 품고 있는데 B도 마찬가지라고 말하지 않고 A와 B의 혼합 인물을 만들어내거나 B다운 행동을 하는 A를 묘사한다. 양측의 사소한 특성들로 이뤄진 이런 혼합 인물은 검열에 걸리지 않고 거뜬히 꿈내용에 수용된다. 꿈에서 두 인물의 사소한 공통점이 묘사되는 것은 검열 때문에 묘사할 수 없었던 은폐된 다른 공통점을 찾으라는 암시로 받아들여야 한다.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낯선 복합어가 꿈에 곧잘 나오는데 이것은 압축의 가장 명확한 예라고 할 수 있다. 꿈에 나오는 내용을 하나의 상징과 일 대 일로 대응시키기 어려운 결정적인 이유는 이런 압축 작업 때문이다.
둘째로, 꿈은 ‘전위’된다. 꿈사고가 정말로 겨냥하는 대상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엉뚱한 대상이 등장한다. 꿈사고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꿈내용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요소로 등장한다. 꿈을 이루는 요소들의 상대적 비중이 꿈사고에서와는 다르게 처리된다. 하나의 생각이나 경험과 관련된 감정이 원래의 자리에서 떨어져나와 다른 생각이나 경험에 붙어버린다. 직장에서 안 좋은 일이 있었던 사람이 집으로 돌아와 고양이를 발로 걷어차는 것은 직장에서 표현될 수 없었던 분노가 엉뚱한 대상을 향해 표출된 것이다.
그런가 하면 자연스럽게 나와야 할 감정이 전혀 생기지 않는 경우도 있다. 감정이 사건과 분리되는 것이다. 어떤 아가씨는 꿈에서 사랑하는 조카가 죽었는데도 아무런 고통이나 슬픔을 느끼지 않았다. 분석 결과 예전에 장례식에서 본 뒤로 짝사랑을 하게 된 남자를 다시 만나고 싶다는 소원이 그런 꿈을 만들어냈음을 알 수 있었다. 남자를 만나고 싶다는 강렬한 감정이 조카의 죽음이라는 사건과 결합한다. 그 아가씨는 조카의 죽음을 바란 적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소원을 은폐하기 위해 슬픔을 느낄 필요가 없다. 대신 조카의 죽음이라는 사건 뒤에 남자에 대한 연모의 감정이 달라붙는 것이다. 두 인물의 중요한 성격상의 공통점이 아니라 사소한 외모상의 공통점이 엉뚱하게 부각되는 예에서 우리는 ‘전위’가 ‘압축’과 곧잘 함께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셋째로, 꿈은 ‘시각적 묘사’를 선호한다. 같은 값이면 추상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구체적으로 묘사하기를 좋아한다. 가령 논문의 매끄럽지 못한 부분을 고쳐야겠다는 내 생각은 내가 나무 토막을 대패질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어떤 문제에 관한 사고의 끈을 놓쳐버렸다는 내 생각은 마지막 몇 줄이 빠져 있는 조판으로 나타난다. 한 여자는 15개월 터울의 두 어린 딸과 길을 걷는 꿈을 꾼다. 이것은 그녀가 어린 시절에 겪은 충격적인 두 사건이 15개월 간격을 두고 일어났음을 암시한다. 구체적 언어는 단선적 논리에 의존해야 하는 추상적 언어보다 풍부한 결합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꿈작업에서 선호되는 듯하다. 마치 시인이 복잡한 사고를 구체적 이미지로 묘사하는 것처럼.
물론 많은 사람들의 꿈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일종의 상징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우리에게는 공통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왕과 왕비는 부모를 상징하고 왕자와 공주가 꿈꾸는 사람을 상징하는 듯하다. 동굴이나 난로가 여성의 성기를 상징한다면 뱀이나 지팡이가 남성의 성기를 상징하는 듯하다. 이것은 인류의 아득한 원시적 심성을 드러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꿈내용의 의미는 어디까지나 꿈꾼 사람이 떠올리는 복잡한 연상들의 그물망 속에서 이해돼야 한다. 상징 해석은 이것을 보완하는 선에 머물러야 한다. 정형화된 상징들만 가지고는 복잡한 꿈작업의 전모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
넷째로, 꿈에서는 ‘2차 가공’이 이뤄진다. 갈피를 못 잡겠는 꿈들도 많지만 조리정연하고 논리적으로 보이는 꿈도 적지 않다. 이것은 꿈 속에서 가공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꿈에서 깨어나 해석을 하기 전에 이미 해석이 가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마치 누더기를 깁듯 부조리한 꿈의 빈 틈을 메꿔나간다. 우리는 고통이나 슬픔을 느끼면서 이것은 꿈일 뿐이야 하는 생각을 곧잘 하는데 이것도 이미 허용한 꿈에 의해 허를 찔렸다고 느끼는 검열이 뒤늦게 덧붙이는 2차 가공의 일종이다.
이차 가공은 말 그대로 꿈이 만들어지는 긴 과정의 마지막 단계에서 일어난다. 뿔뿔이 흩어진 생각과 감정을 모아서 이야기를 엮어 초고를 완성한 작가가 다시 한번 읽어보면서 첨삭가감을 하는 것처럼 마음도 잠에서 깨어나기 전에 각성 상태의 이성적 논리를 다분히 의식하면서 꿈내용들의 논리적 고리를 만들어 꿈의 줄거리를 엮어간다. 나중에 덧붙여지는 것이므로 이 논리적 고리가 가장 먼저 망각된다. 꿈을 기억하기 어려운 건 그래서다.
환자에게 꿈 이야기를 다시 한번 들려달라고 부탁하면 똑같은 말로 표현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표현이 달라지는 부분이야말로 꿈 위장이 실패한 곳이다.
5. 꿈을 어떻게 해석할까
꿈의 해석은 겉으로 드러난 꿈내용을 가지고 그 꿈내용을 만들어낸 꿈작업을 풀어헤쳐 배후의 꿈사고를 드러내는 것을 의미한다. 꿈을 해석한다는 건 쉽지 않다. 꿈내용에 나타난 요소를 그 자체로 받아들여야 할지 아니면 반대항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과거의 회상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상징적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유사어로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해 꿈은 우리에게 말해주지 않는다. 가령 꿈내용에 물이라는 요소가 나타났을 때 꿈사고는 불일 수도 있고 내가 실제로 마신 물일 수도 있고 순결을 상징할 수도 있고 굴일 수도 있다. 우리는 유일무이한 해석을 하고 싶어하지만 하나의 꿈을 완전무결하게 해석해 나는 무엇을 원한다는 형식으로 환원하는 것은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 꿈에는 단 하나의 소원만 나타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의 꿈요소는 여러 개의 의미를 가지며 여러 개의 연상과 결합된다.
따라서 이 복잡다단한 꿈의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꿈내용과 관련해 머리 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연상하는 것이다. 이름해 ‘자유연상법’이다. 그러나 자유연상은 쉽지 않다. 심리적 저항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저항은 꿈을 만드는 데도 영향을 미치지만 꿈을 연상하고 해석하는 데도 영향을 미친다. 심리적 저항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많은 훈련이 필요하다. 연상을 하는 사람도 많은 훈련을 해야 하지만 분석가의 풍부하고 노련한 경험도 요구된다. 우리의 무의식 속에 있는 소원은 성적 욕망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꿈을 해석하기 힘든 또 하나의 이유는 꿈이 쉽게 망각되기 때문이다. 망각은 우발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꿈을 망각하려는 분명한 의도가 있다. 심리적 저항은 잠에서 깨어남과 동시에 힘을 되찾아 자신의 힘이 약했을 때, 다시 말해서 자는 동안에 허용한 꿈을 즉시 제거하려고 한다. 그래서 어제 그제 꾼 꿈보다 몇 년 전에 꾼 꿈이 오히려 또렷하게 기억나는 일도 드물지 않게 일어난다. 최근에 꾼 꿈은 검열에 잘 걸리지만 예전에 꾼 꿈은 상대적으로 감시망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꿈은 단번에 해석되지 않는다. 이처럼 꿈을 해석하는 것은 물론 어렵다. 하지만 상형문자를 해석하는 것보다는 쉽다.
꿈해석은 조각 그림 맞추기와 비슷하다. 꿈을 만들어내는 꿈사고들은 논리적 인과 관계에 따라서 배열되는 것이 아니라 한 자리에 그냥 같이 놓인다. 꿈은 논리적 관계를 묘사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 꿈은 꿈사고의 알맹이만을 받아들여 가공한다. 꿈작업이 파괴한 관계를 되살리는 것은 해석자의 몫이다.
무의식 속의 소원은 원래의 감각 기억을 재현하고 싶어하지만 검열 장치가 버티고 있기 때문에 그 자체로는 의식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그러나 밤에 잠을 자는 동안에는 검열 장치가 완화된다. 만약 검열 장치가 밤에도 강력하게 작동해 무의식의 소원을 계속 내리누른다면 우리는 꿈을 꾸지 않을 것이다. 꿈은 빗장이 느슨해진 틈을 타서 무의식 속의 소원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검열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아니어서 만약 소원이 원래 모습 그대로 나타날 경우 당장 발각돼 무의식 속으로 다시 추방당할 것이다. 그래서 소원은 낮에 받은 인상 중에서 남아 있는 사소한 표상과 결합해 본래 모습을 숨기고 나타난다. 그것은 마치 합법적 면허를 가진 사람의 명의를 빌려 진료하는 무면허 의사와도 같다.
꿈 속의 심리적 과정은 깨어있을 때의 심리적 과정과 다르다. 깨어있을 때는 우리의 감각으로 들어온 지각 내용들이 앞으로 ‘진행’하여 사고를 만들어낸다. 꿈 속에서는 반대다. 무의식 속의 꿈사고가 자꾸만 자신을 낳았던 원래의 감각으로 ‘퇴행’하려 한다. 깨어있을 때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감각이 워낙 많아서 퇴행 과정이 원활하게 이뤄질 수 없다. 하지만 수면 중에는 이것이 가능해진다. 꿈사고는 원래의 감각 원료로 해체된다. 고향을 찾아간다. 꿈은 시각 형상으로 바뀐 사고다. 억제됐거나 무의식 속의 기억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고만 이런 변화를 겪는다.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퇴행은 무의식 속의 사고가 정상적 경로를 통해 의식에 진입하는 것을 막으려는 저항의 산물이며 강한 감각성을 지닌 기억들이 무의식 속의 사고를 빨아들이는 과정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더 큰 맥락에서 보았을 때 퇴행은 인류의 태고적 유산과 정신적 근원을 탐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우리 앞에 열어준다.
그 정신적 근원은 꿈에서 상징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꿈에도 상징은 등장한다. 꿈에 나오는 상징의 대부분은 성적 상징이다. 하지만 그 상징은 꿈의 전유물이 아니라 미술, 문학, 언어와 공유되는 상징이다. 개인의 무의식 속에는 그 사람만의 체험에 의해 만들어진 그물망처럼 복잡한 세계가 있다. 상징은 그 중 극히 일부분만을 드러낼 뿐이다. 그 세계에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고정되지 않고 사방으로 뻗어가는 자유연상의 길뿐이다.
▣ 더 깊이있게 알기 위하여
프로이트처럼 찬반 양론의 극단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킨 사상가도 흔치 않다. 긍정적 측면은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는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다는 것이다. 흔히들 프로이트를 무의식을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사람이 의식하지 못하는 세계가 있다는 것은 옛날 사람들도 알고 있었다. 프로이트의 혁명성은 무의식이 나도 모르게 나를 ‘억압’한다고 주장한 데 있다. 무의식 속의 억압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프로이트는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는 새로운 체계를 제시했다. 그래서 인간 행동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확대했다. 이 의미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람의 행동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무의식이 나도 모르게 나를 '억압'한다
나는 슈퍼마켓의 계산대에서 왜 돈을 지불할까? 음식을 구입해서 먹기 위해서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소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행동한다. 이 의식되는 소망이 돈의 지불이라는 의식되는 행위의 동기인 셈이다. 동기는 행동을 낳는 내면의 심리 상태다. 우리는 행동을 낳은 동기가 있을 때 그 행동을 합리적으로 여긴다.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하는 동기를 대개 안다. 자기의식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물은 그렇지 않다. 행성은 자신이 움직이는 이유를 모른다.
프로이트의 심리학에 깃들어 있는 혁명적 요소는 동기의 존재와 동기의 인식이라는 두 가지 요소가 분리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행동을 유발하는 동기가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이다. 꿈은 무의미하고 우발적이고 목적이 없어 보인다. 이렇다 할 동기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겉보기에만 그렇다고 말한다. 동기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주인이 모르는 동기다. 꿈을 해석한다는 것은 무의식 속의 동기를 찾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프로이트는 동기에 토대를 둔 설명의 범위를 혁명적으로 확대시켰다. 무의식을 설명권 안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프로이트가 사람들에게 주는 매력은 이런 광범위한 설명력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프로이트에 거부감을 갖는 사람도 많다. 프로이트의 설명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가령 칼 포퍼는 프로이트가 하는 말은 반증 가능성을 원천 봉쇄한다고 비판한다. 포퍼에 따르면 어떤 말이 참이기 위해서는, 이러저러한 조건이 성립한다면 그 말은 거짓이 된다고 밝힐 수 있어야 한다. 즉 반증의 가능성이 있어야 한다. 자기를 객관적 조건 속에 노출시켜야 한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그러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꿈은 소원 성취라는 명제에 대해 어떤 환자가 불쾌한 꿈을 소개하면서 반론을 폈을 때 프로이트는 당신은 내 말이 틀리기를 바라기 때문에 그런 꿈을 꾼 것이고 그건 결국 소원 성취인 셈이라고 했다. 그래서 프로이트의 비판가들은 언제나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하는 프로이트의 이론은 과학이 아니라고 말한다.
원숭이의 무의식 속에서도 억압이 이뤄지나
프로이트의 이론에서 가장 중요한 전제가 되면서 또 일반인에게 가장 널리 수용된 요소는 무의식의 억압이다. 프로이트의 이론이 가장 박대를 당하는 미국에서도 어린 시절에 겪은 너무나 충격적이고 고통스러운 기억은 무의식 속에서 억압된다고 하는 프로이트의 주장은 폭넓게 수용됐다. 그래서 어린 시절에 성적으로 학대를 당했다며 친부모를 고소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심심치않게 화제에 오르내린다. 하지만 개나 원숭이 같은 동물도 꿈을 꾼다는 사실이 속속 밝혀지면서 많은 연구자들은 억압에 바탕을 둔 프로이트의 꿈이론에 의문을 제기한다. 프로이트는 꿈은 무의식에 의해 억압돼 있던 유년기의 경험이 위장하고 나타나는 것이라고 설명하는데 그럼 개나 원숭이의 무의식 속에서도 억압이 이뤄지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현대의 정신의학계에서 점점 대세로 자리잡은 약물 치료에 맞서서 심리 치료의 중요한 축을 맡아왔다. 무의식의 막강한 영향력을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인간을 왜소한 존재로 격하시키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처럼 인간의 주체적 역량을 신뢰한 치료 기법도 드물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은 자기 무의식에서 억압당해온 것을 인식함으로써 해방될 수 있다고 프로이트는 믿었다. 과정은 더디더라도 그것이 진정한 치료라고 생각했다. 프로이트는 ‘인식’의 힘을 믿었고 ‘말’의 힘을 믿었다. 그는 인문주의자요, 계몽주의자였다.
▣ 프로이트의 생애와 작품
1856 오스트리아 모라비아 지방에서 출생
1860 빈으로 이주
1873 빈 의과대학 진학
1881 의대 졸업
1882-85 빈 종합병원에서 뇌해부학 연구
1885-86 파리에서 샤르코의 지도 아래 히스테리와 최면을 연구
1886 마르타 베르나이스와 결혼. 빈에서 개업
환자를 돌보면서 차츰 신경생리학에서 정신병리학으로 관심을 돌림
1888 브로이어를 따라 히스테리 치료에 최면술을 사용하기 시작
얼마 뒤 자유연상기법을 고안
1895 『히스테리 연구』출간
1900 『꿈의 해석』출간
1901 『일상 생활의 정신병리학』출간
1908 제1회 국제정신분석학회 개최
1909 융, 아들러와 함께 미국 강연 여행
1911 아들러와 결별
1912 정신분석학을 인류학에 응용한 『토템과 타부』출간
1914 융, 정신분석학회 탈퇴
1920 『쾌락 원칙을 넘어서』출간
1923 암 발병
1930 파괴 본능을 다룬 『문명 속의 불만』출간
1933 히틀러 정권의 프로이트 저서 공개 소각
1938 히틀러 오스트리아 침공. 빈을 떠나 런던으로 이주
1939 런던에서 사망. 향년 8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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