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아이를 낳고 아버지를 여의는 시간을 거치며 그 과정을 글로 옮기게 됐다. 이 책은 마흔일곱 된 아버지의 막내딸로 태어나 이 생(生)에서 38년을 함께하고 생의 마지막에 갓난아이로 돌아가는 아버지에 대한 애틋함을 담은 에세이다.
갓난 노인
마흔일곱 된 아버지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붕어빵처럼 따뜻하게 주변을 녹이곤 하셨던 아버지 품에서 자랐다. 시카고예술대학교에서 디자인을 공부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의류학 석사 졸업 및 박사 수료를 했다. 학업을 마친 뒤 패션, 컬러, 라이프스타일 트렌드 연구원으로 재직했다. 아이를 낳고 아버지를 여의는 시간을 거치며 그 과정을 글로 옮기게 됐다. <갓난 노인>으로 2018년 경기도 히든작가 공모전에 당선되었다.
▣ Short Summary
아버지를 아기로 완전히 혼동했다. 순간 혼란스러운 감정을 기록하지 않고선 견딜 수 없었다. 그렇게 이 글의 시작 종은 울렸다.
마흔일곱의 아버지, 여든다섯의 아버지, 나는 왜 굳이 아버지의 마흔 후반에 당신의 막내딸로 태어났을까. 아버지를 만나야 했기 때문일까. 아버지가 더 늙어 늦기 전에 부리나케 달려가 만나라고 창조주가 나를 아버지에게 보내 주어 감사하다. 아버지를 만나지 않은 내 인생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나의 턱없이 부족한 문장력으로 아버지를 온전히 표현하기는 불가능하다. 아버지의 한 순간, 아버지의 한 장면, 아버지에게서 얻은 위로, 용기, 유머가 의미 있게 회고되길 바랄 뿐이다.
▣ 차례
프롤로그
1장 삼 년
갓난 노인 / 일상의 기록
눈이 두 번 내리면 / 아직 남은 일상의 기록
2장 카이로스
카이로스의 순간 / 별 놈 없다
운전, 감자 / 카이로스의 조각들
이국(異國) / 갓난 노인 마트료시카
3장 만날 시간
참 갓난 노인 / 때를 따라 때 묻지 않은 사람
오늘의 의미
4장 인생 여행
낯선 도시, 낯익은 기억 / 한 살, 한생(生)
전망대 / 모든 생을 마주하는 곳
갓난 노인
문재윤 지음
사과나무 / 2018년 12월 / 157쪽 / 11,500원
1장 삼 년
갓난 노인
아버지를 안는 순간 아들을 품에 안은 느낌이었다.
왜 이런 감정이 이는지 문득 의아했다. 8개월 된 아들을 수시로 안다 보니 아버지를 아들로 잠시 착각했구나 생각했다. 그렇지만 혼동한 셈 치고 무심코 넘겨 버리기 에는 아버지나 아들을 안은 느낌이 매우 흡사했다. 내 품에 번갈아 안기는 두 육체 간의 부피와 질량차를 생각하면, 이미 자란 노인과 한창 자랄 아이의 몸은 완전히 상국면을 이뤄야 했다.
하지만 두 존재의 대조적인 물질적 크기는 인지되지 않았다. 오직 아버지의 가냘픈 숨소리와 앙상한 사지에서 흘러나온 미세한 떨림만이 내 몸에 전달됐다. 노부(老父)에게서 나온 힘없는 진동은 아이가 갓 태어나 내 가슴에 안겼을 때를 기억나게 했다.
나의 태(胎)에서 나온 아이는 울지 않았다. 의료진은 큰 스포이트 같은 것을 아이의 입에 넣어 이물질을 제거하고 기도를 확보했다. 아이의 다리를 잡고 거꾸러뜨려 엉덩이를 치기도 했다. 몇 번을 반복해도 아이는 울지 않았다. 다급한 듯 누군가가 소리쳤다. “빨리 소아과에 연락해!" 잠시 뒤 다행히도 아이의 입에서 울음소리가 터져나왔다. 그제야 제대로 숨을 쉬었다. 의료진은 아이의 몸에 묻은 양수와 태지를 수건으로 서너 번 닦아낸 뒤 나의 젖가슴을 갓난아이의 입에 물려주어 제 어미인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아이는 2.8킬로그램으로 태어났다. 가까스로 정상 범위 안에 드는 몸무게였다. 내 눈으로 보기엔 무게라는 게 나가기는 하는 것인지 의심될 만큼 앙상했다. 태 속에서 존재가 형성된 후 줄곧 웅크리고만 있던 아기는 당연히 몸을 펴기 힘겨워 했다. 양수 밖으로의 외출을 생애 가장 추운 순간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듯했다. 38주 6일 동안 액체 속에 있었던 터라 온몸의 피부는 쭈글쭈글했다. 혹여나 조금이라도 힘을 주어 안으면 바스라지지는 않을까 하는 조바심으로 손을 대기가 조심스러웠다.
아버지의 온몸에 새겨진 주름은 80여 년의 세월을 방증해 주었다. 기이하게도 아버지의 모습은 열 달간 양수의 세계에 적응하다 나와 온몸이 쭈글쭈글해진 갓난아이의 모습과 겹쳐졌다. 거칠거칠하게 일어난 아버지의 피부는 탯줄만 겨우 자른 채 몸에 묻은 태지를 제대로 닦아내지 않은 갓난아이의 겉모습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아버지의 몸을 감싸고 있던 근육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고, 육체를 간신히 지탱하고 있던 뼈는 흐늘흐늘 늘어진 겉가죽이라도 급한 대로 걸쳐서 완전히 드러날 상황을 모면한 모습이었다.
팔순 넘은 아버지와 8개월 된 아들을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아버지 연세와 아들 나이의 숫자 반복이 묘했다. 마치 인생은 올 때와 같은 모습으로 가게 된다는 암시인 듯했다. 순간 인간은 아이로 태어나서 아이로 생을 마감한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3년 전쯤부터였다. 나의 결혼식이 있던 겨울, 아버지의 말과 움직임이 예전과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손을 간간이 잡아 드리는 정도면 아버지가 스스로 걸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목적지까지 단번에 걸어가지는 못했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느린 걸음으로 쉬어 가야 했다. 큰 예배당의 긴 신부 입장로를 걸어가는 것은 무리겠다 싶었다. 신랑과 나는 동시에 입장하는 편을 택했다.
나는 결혼 후에도 결혼 전과 다름없이 퇴근 후 종종 친정으로 향했다. 하루는 소파에 앉아서 아버지와 짤막한 대화를 나누고 TV 프로그램도 시청했다. 시계를 보니 밤 아홉 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부모님은 잠자리에 누울 시각이었고 나도 신혼집으로 돌아가 다음날 출근 준비를 해야 할 때였다.
“아빠, 저 이제 슬슬 가볼게요.”
“어디 가니?”
아버지는 내가 얼마 전에 결혼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아빠, 나 결혼했잖아요’라고 말하려다 목 뒤로 그 말을 삼켰다. 그 일 이후였는지 그 이전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어머니는 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에 다녀오셨다. 병원에서 아버지의 상태를 설명하길 장기 기억은 문제가 없으나 단기 기억이 다소 흐려진 상태라고 했다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를 볼 때마다 이 생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남은 것인지 궁금했다. 그 당시 친정과 신혼집 그리고 회사는 삼각형의 위치에 있었다. 이동시간이 만만치 않게 걸리는 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와 조금 더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속내가 나 자신을 압박하곤 했다. 퇴근 후 저절로 친정을 향해 발걸음이 옮겨졌다.
계절은 어김없이 돌고 돌아 3년의 시간이 차곡차곡 쌓였다. 무심하게 흘러가는 일상 가운데 아버지의 날들만은 구별되어 보였다. 아버지는 익숙지 않은 몸의 변화와 고군분투했다. 얼마 전 홀연히 하늘로 거처를 옮길 때까지 그랬다.
아버지 입장에서 보면 이 생에서 보낸 마지막 3년여의 시간은 질긴 싸움과도 같았을 것이다. 특히 아버지는 마지막 1년 반 가량을 더욱 집요하게 버텨야 했다. 아버지의 육체는 겉보기에는 고요한 상태였다. 육체의 움직임이 둔해질 대로 둔해졌으니 그저 누운 모습 그대로 잠잠해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계절이 오고 가는 당연한 자연의 흐름 앞에서마저도 그 변화를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하는 당신의 몸과 격렬한 한판 승부를 벌여야 했다.
계절의 흐름은 자연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일이다. 그 생생함은 차 한 잔의 여유와 함께 즐길 만한 일이다. 인생의 한창 때를 보내고 있는 나는 적어도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인생을 마무리하고 있는 아버지에게 계절의 변화란 한 번 더 버티고 살아남아야 하는 고비였다. 환절기 때마다 아버지의 몸은 감기에서 독감으로, 독감에서 폐렴으로의 고비를 넘기며, 주저앉지 말자 살아보자고 온 힘을 다해야 했다. 그때마다 아버지의 육체는 점차 거칠고 뻣뻣하게 굳어갔다. 병원에서는 아버지의 상태를 콕 집어 진단 내릴 만한 병명을 찾지 못했다. 아버지는 그저 늙음을 온몸으로 체험하는 중이었다.
아버지의 몸을 일으키는 일은 어머니 혼자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어머니도 아버지와 같은 노인이니 당연했다. 어머니와 나는 아버지의 앞뒤를 둘러싸고 섰다. 나는 앞에서 아버지의 가슴을 안고, 어머니는 뒤에서 아버지의 등을 안은 채로 세 사람이 샌드위치가 되어 동시에 으라차차 하고 일어서야 했다. 나는 거의 매일같이 아버지를 품에 안고 일어나서 화장실까지 옮겨 드리곤 했다. 그 옆에는 언제나 흔들의자에 앉아서 재롱을 피우고 있는 내 아이가 있었다. 거동이 불편한 노부와 걸음마도 떼지 않은 아이, 두 사람 모두 누군가에 의지해야 살아갈 수 있는 존재였다.
“당신, 입을 좀 떼 보세요!”
아버지를 향해 어머니가 습관처럼 반복했던 주문이었다. 지난 몇 년 동안 아버지의 몸에서 없어진 것은 근육만이 아니었다. 아버지에게서 언어가 점차 사라져 입을 다물고 있는 시간도 늘어났다. 아버지가 한 마디라도 꺼내는 날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아버지의 상태를 무척 답답하게 여겼다. 하루 종일 어머니 혼자 얘기하는 상황이 어느 것보다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어떤 날은 어머니가 아버지의 입술을 열게 하려고 의도적으로 말하기 연습을 시켰다.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와 같은 간단한 말들을 따라 하도록 하는 방법이었다. 그렇게라도 아버지가 입을 벌리도록 유도했다. 아버지는 교육자였으니, 말을 상당히 많이 하는 일을 해 온 분이었다. 하지만 강단에 서는 동안 평생토록 할 말의 분량을 남김없이 쏟아낸 탓에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어느 날은 아버지가 당신의 상태를 받아들이기 버거워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노년의 때를 보내는 아버지는 그렇게 언어도 기억도 뿌옇게 흩어버렸다.
살아 있는 존재라고 해서 살아 있는 내내 그와의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가 입을 여는 시간이 줄어든 후에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아버지는 살아 있었지만 나와 대화를 나누기는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둘 사이의 대화를 원했다. 아버지의 최근 기억이 흐려졌다면, 그렇다면 오래 전 기억을 끄집어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당신의 젊은 시절 앨범을 꺼내 들었다. 말이 없던 아버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지난날의 기억이 되살아났나 보다. 그렇게라도 말할 거리를 기억할 수 있게 도와드려야 했다. 우리 속에 끝나지 않은 말을 나눠야 했다.
물론 깜짝 선물처럼 아버지의 유쾌한 말 한 마디가 툭 터져나온 때도 있었다. 내가 결혼한 지 1년이 지날 무렵 겨울이었다. 아버지는 폐렴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아버지는 당시에도 하루 중 말을 꺼내는 경우를 손에 꼽을 정도였다. 아버지 목소리가 늘 그리웠다. 목소리와 더불어 당신의 모습도 늘 그리웠다. 아버지가 살아 있는데 아버지의 모습을 그리워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았다. 논리에 어긋나는 감정은 매순간이 당신과 이 생에서 보내는 마지막 순간일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인해 마음 한 편이 아리는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사진 \을 찍을 때마다 오늘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찍곤 했다.
그 겨울 병실에서도 아버지의 모습을 찍고 싶었다. 병환으로 입원한 상황이었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찍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핸드폰 사진기의 셔터를 누르기 직전에 “아빠, 김치~”하고 나지막이 말했다. 몸이 아픈 사람을 최대한 덜 성가시게 한다는 취지가 깔린 작은 목소리였다.
“김치이!”
아버지의 입이 열리며 입술이 양옆으로 벌어지고 윗니와 아랫니가 다 드러났다. 병실에 감돌던 정적이 순식간에 깨졌다. 당신의 유쾌한 “김치” 소리가 천진난만하게 공간 속으로 퍼져나갔다. 그 순간 병실 침대 위에서 아버지의 등을 받치고 앉아 있던 남편과 침대 맞은편 의자에 앉아 있던 어머니 그리고 나는 거의 동시에 박장대소했다. 역시 우리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참 명랑했다. 이 광경을 다른 누군가가 지켜봤다면 곧 퇴원할 분이라고 여겼을 터였다. 당신의 생동감 넘치는 긍정성은 언제나 나를 들뜨게 했다. 머릿속에서 끄집어내려고 아무리 애써도 예상치 못한 순간에 치고 나오는 아버지의 유쾌한 한 마디는 그때 그 병실에서가 마지막이었다. 그 뒤로 나 외에 가족 중 누군가가 아버지로 인해 웃음 짓던 순간이 있었을는지는 모르겠다.
2장 카이로스
이국(異國)
1990년에 아버지는 대한민국 교수 자격으로 구소련을 방문했다. 우리나라 정부에서 교수단을 꾸려 그곳에 보냈다고 들었다. 아마도 냉전 종식의 시대적 흐름에 맞춰 공산권 국가와 교류의 물꼬를 트고자 이루어진 일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아버지가 방문할 당시는 한국과 러시아의 국교가 정상화되기도 전이었다. 주변에서 공산권 국가를 방문하고 온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 때였다. 일반 국민의 해외여행 자유화도 그보다 불과 한 해 전인 1989년에 시작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외국에 가는 일 자체가 지금처럼 일상적인 일로 여겨지던 때는 아니었다. 아버지의 공산권 국가로의 출장은 온 가족을 들뜨게 만들었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외국을 상상할 때마다 빨간 캉캉원피스를 입은 요염한 자태의 여인이 사는 곳을 머릿속에 그리곤 했다. 그녀는 옆모습이 보이게 몸을 틀어 선 채로 양손을 맞잡아 접은 팔을 하늘을 향해 들어 올리고 있었다. 맞잡은 두 손의 손가락은 서로 엇갈리듯 휘감기려는 찰나였다. 바닥을 지탱하고 선 다리는 원피스의 러플 아래로 보일락 말락 했다. 여인의 손가락 끝에서부터 타고 내려오는 시선은 하늘을 향해 접어 올린 팔을 지나 척추와 엉덩이, 다리로 지나가는 S자 곡선을 타고 내려오면서 요염함을 완성했다. 여성의 입술을 덮은 붉은색 립스틱이 분위기를 더욱 강렬하게 돋우었다.
내 머릿속에 이 여인이 곧 이국의 모습으로 각인되었던 이유는 우리 집 책장 한켠에 늘 꽂혀 있던 〈세계의 여행> 전집 표지에 실린 사진 때문이었다. 커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표지 속 여자는 플라멩코를 추는 여인이었다.
몇 년 전 어머니가 책장을 정리하면서 그 책을 버리려고 했다. 놀란 나는 한달음에 그 책을 가져와 내 책장에 꽂아두었다. 그때 어머니가 얘기하길 그 책은 아버지와 결혼할 때 세계여행을 가자고 약속하고 마련한 것이었다고 했다. 물론 부모님은 세계여행을 다녀오지 못했다. 자녀를 넷이나 둔 덕분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넷이나 둔 탓이라고 해야 할까. 4남매의 뒷바라지에 쉴 틈이 없었던 두 분에게 세계여행은 그저 아무 상관없이 플라멩코를 추고 있는 여인처럼 낯설고 먼 남의 이야기와 같았을 것이다.
아버지는 구소련 출장을 다녀온 뒤 가족들에게 이야기 한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지금도 두어 가지가 기억난다. 그중 한 가지는 불가리아 요거트 얘기였다. 불가리아에서 먹은 요거트는 우리나라에서 파 는 마시는 야쿠르트와는 식감이 무척 다르다고 했다. 불가리아의 것은 우리 것보다 걸쭉한데 참 맛있게 먹었다고 했다. 나는 왜 유독 불가리아 요거트 얘기를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그것을 들을 당시에 언젠가 꼭 한번 맛보고 싶다는 마음이 강하게 들었었나 보다.
나는 지금까지도 불가리아에 가본 적이 없다. 하지만 아버지가 말한 그 요거트를 맛볼 기회가 있었다. 6년 전쯤인가 친구들과 함께 송년회를 하고자 이태원에 있는 불가리아 음식점에 들렀을 때였다. 우연히 예약한 레스토랑이었기에 큰 기대는 없었다. 그런데 주문하는 음식마다 “우와” 소리가 절로 나왔다. 불가리아 요리에는 요거트를 소스처럼 곁들이는 경우가 많았다. 해당 레스토랑의 요리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인지 불가리아 음식 전반의 특징인지는 알 수 없었다. 요거트 특유의 새콤달콤한 맛이 미각을 자극했다. 요거트를 좋아하는 내게는 제격인 음식이었다.
내가 요거트를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설명하자면, 산후조리 기간에도 밥보다 요거트를 더 많이 먹었다. 조리를 도와주러 온 도우미 분이 요거트를 챙겨 먹듯이 밥도 잘 챙겨 먹으라고 내게 당부할 정도였다.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 음식을 묻는다면 요거트를 꼽을 것이다. 특히 최근 몇 년 동안 더욱 요거트에 흠뻑 빠져 지냈다. 별다른 맛이 첨가되지 않은 플레인 요거트에 호두, 아몬드, 캐슈넛 등 견과류와 건크렌베리, 건포도와 같은 각종 건과일을 듬뿍 올려 먹는 것을 즐겼다. 어떤 날은 하루에 두 끼를 요거트로 먹기도 했다. 나도 아버지가 방문했던 불가리아에 들르면 본고장의 요거트 맛에 푹 젖어버릴 것이라 예상된다. 아버지가 현지에서 맛본 요거트도 불가리아 레스토랑에서 맛본 것과 같았을까 궁금하다.
갓난 노인 마트료시카
구소련에 다녀온 아버지는 가방 속에서 생전 처음 보는 물건을 꺼냈다. 러시아 전통 목각 인형 마트료시카였다. 마트료시카를 본 첫인상은 오뚝이를 연상시켰다. 일반적인 오뚝이와 차이가 있다면 좀 더 홀쭉하다는 점이었다. 밑바닥이 편편하여 흔들흔들 움직이지 않는 것도 다른 점이었다. 마트료시카는 세워두고 감상하는 장식용 인형일 것이라 짐작했다.
홀쭉한 목각 오뚝이 형태 위에는 사람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머리에는 두건을 두르고 허리에는 화려한 빨간 꽃무늬 앞치마 같은 것을 둘렀다. 혹은 원피스 위에 앞치마를 두른 모습 같아 보이기도 했다. 마트료시카의 얼굴 속 두 눈은 아주 커다랬다. 그 두 눈 아래로는 아주 조그마한 앵두 입술이 살포시 다물어져 있었다. 얼굴은 너무나 사랑스럽고 어여쁘지만 몸매는 어째서 전혀 날씬하지 않은 오뚝이일까 의아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흔히 미인상으로 규정하는 몸매와는 거리가 있었다. 그 몸매를 포함해 전반적인 외모로 판단해 보건대 이 인형은 젊은 여자를 표현한 것인지 아니면 아동을 표현한 것인지 모를 형상이었다. 하지만 새치름한 얼굴 표정에 화려한 붉은색 색채감과 꽃무늬로 압도하는 마트료시카의 모습은 참 예쁘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 당시 내가 마트료시카를 보자마자 놀랍다고 여겼던 부분은 그것의 강렬한 페인팅 기법뿐만이 아니었다. 인형의 가운데에 가로로 금이 가 있어서 분리되는 것 또한 매우 인상적이었다. 인형은 그 금을 기준으로 위와 아래로 이등분되어 열렸다. 열린 인형 안에는 조금 작은 또 하나의 인형이 들어 있었다. 그 인형도 역시 위아래로 이등분되어 열렸다. 그리고 그 인형 안에도 역시 더 작은 인형이 들어 있었다. 양파 껍질을 벗기는 것처럼 반복적으로 인형 속에 인형이 들어 있었다.
대개 마트료시카는 동일한 형상의 목각 인형들을 크기만 점강적으로 달리해 포개져 있다. 이와 대비해서 겉에 드러난 가장 큰 인형부터 맨 마지막 가장 작은 인형까지 모두 다른 모습이 그려진 것도 눈에 띄었다. 인상적으로 기억되는 것은 레닌, 스탈린에서 고르바초프, 옐친까지 구소련에서 러시아로 이어지는 역사 속 지도자들을 그려 넣은 마트료시카였다. 내가 알아본 얼굴이 앞서 열거한 네 명의 지도자였다. 그들 사이에 모르는 인물들도 있었다.
최근 들어 문득 그 인물들이 누구일까 궁금해졌다. 인터넷의 힘을 빌려 20세기 이후 러시아 지도자들을 검색해봤다. 그 결과 레닌, 스탈린과 고르바초프, 옐친 사이에 흐루쇼프, 브레즈네프, 안드로포프, 체르넨코가 열거되었다. 내가 알아보지 못한 모습의 마트료시카들은 아마도 그들 네 명이었나 보다.
마트료시카는 각 지도자들의 외모적 특징을 잘 살려 표현했다. 특히 고르바초프의 대머리 위에 있는 점을 선명하게 부각시킨 것이 뇌리에 남았다. 20세기 이후 러시아 지도자들을 그린 인형이 아버지가 가져온 것이었는지 아니면 TV 프로그램에서 본 것이었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러시아 목각 인형 마트료시카는 내게 단순히 먼 나라 전통 인형 정도의 의미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것은 아버지를 상징하는 물건이었다. 우리 부모님이 결혼을 앞둔 자녀들에게 물려주는 유일한 물건이기도 했다. 마트료시카는 아버지 삶의 한순간을 기념하는 것이자 우리 가족이 함께한 시간을 담고 있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구소련 현지에서 엽서도 써 보냈다. 엽서가 든 봉투 앞면에는 ‘모스코우에서’라고 적혀 있었다. 그 엽서가 아버지가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기 전에 도착했는지 아니면 그 후에 도착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다. 당시에는 국제우편이 도착하는 데 한 달은 족히 걸렸을 것이다.
내가 중학생 때 필리핀으로 이민 간 친구와 편지를 주고받은 적이 있다. 중학생 때라면 아버지가 구소련을 다녀오고 몇 년 뒤이긴 하지만, 그 친구에게 기별이 오는 데는 언제나 한 달 정도의 기간이 소요됐다.
물론 어느 지역에서 오는 편지인가에 따라 운송 기간은 다를 것이다. 다만 해외 우편물을 주고받았던 경험에 비춰 보자면 모스크바에서 보낸 편지가 서울에 도착하는 데도 비슷한 기간이 걸리지 않았을까 어림잡아본다.
얼마 전 그 오래된 엽서를 다시 꺼내 보았다. 엽서의 앞면은 모스크바 번화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사진으로 채워져 있었다. 사진 속 시내 모습을 바라보며 마트료시카가 있는 그곳 겨울은 어떨지 생각에 잠겼다. 1년의 절반이 겨울이라는 그곳. 아버지가 다녀간 그곳의 겨울에도 당신의 숨결이 녹아든 눈이 내리겠지. 장터마다 진열해놓은 마트료시카 위에 수북이 눈이 쌓이겠지.
엽서를 돌려 뒷면을 봤다. 아버지의 손 글씨가 적혀 있었다. ‘아빠가 소련 나무 인형을 재윤에게 주려고 샀는데 그 인형 속에는 작은 인형들이 열두 개나 들어 있단다.’ 이 대목을 읽자마자 내가 받은 마트료시카를 꺼내 보았다. 결혼할 때 어머니가 준 것이다. 4남매 중 가장 마지막에 결혼한 막둥이에게는 당연히 마트료시카 선택권 같은 것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인형을 가져오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예상대로 내가 받은 인형 안에는 열두 개의 마트료시카가 들어 있지 않았다. 내 것은 다섯 개짜리였다. 나는 누가 열두 개짜리 인형을 가져갔는지 오빠, 언니들에게 물어보았다. 그 인형을 찾으면 아버지의 친필 엽서를 증거 삼아 그것은 내 것이라는 짓궂은 주장을 해보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열두 개 인형이 든 마트료시카를 갖고 있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에게 그것이 어디 있는지 물었다. 어머니 말씀으로는 우리 집에 그렇게 많은 개수가 든 마트료시카는 없다는 것이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어머니는 “너희 아버지가 그렇지, 뭐”하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 순간 나도 함께 웃었다. 아버지답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짐작하기로는, 아버지가 열두 개 세트 마트료시카를 보긴 했지만 사온 것은 그보다 적은 개수의 것이었거나 혹은 당연히 당신이 고른 마트료시카 안에도 열두 개의 인형이 들어 있겠거니 믿고 산 것이 아니었겠냐는 것이다. 나도 어머니의 추측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내게 마트료시카의 개수는 문제 되지 않았다. 그저 아버지가 사다준 마트료시카면 충분했다.
예전 어느 순간에 아버지와 나의 아들이 한 존재로 겹쳐 보이면서 마트료시카가 떠오른 적이 있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버지와 아들을 반복적으로 안아 올리던 날들 중 하루였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 그려진 마트료시카의 모습은 이제껏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마트료시카의 상부에는 노인이 된 아버지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고 하부에는 기저귀를 찬 젖먹이 아들의 다리가 그려져 있었다. 노인의 상부와 갓난아이의 하부가 결합된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던 나는 ‘갓난 노인 마트료시카’라고 이름 지어 보았다.
갓난 노인 마트료시카를 열어 그 속에 있는 작은 마트료시카, 더 작은 마트료시카, 그보다 더 작은 마트료시카로 이어지는 모든 마트료시카들을 꺼내 나열해보는 상상을 했다. 마트료시카의 상부 모습은 노년에서 장년, 중년, 청년, 소년 그리고 유년의 모습으로 변해 간다. 하부 모습은 거꾸로 유년에서부터 소년, 청년, 중년, 장년, 마지막으로 노년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인생의 변화기가 엇갈려 연결된 마트료시카들을 한눈에 바라보았다. 노인이 아이이고, 아이가 노인이었다. 인간은 아이로 생을 맞이하고 아이 같은 존재로 생과 고별했다.
언젠가 나는 갓난 노인 마트료시카 그림 동화를 지어서 내 아이에게 보여주겠노라고 다짐했다. 그 어떤 날 아이에게 이야기하길 이 동화는 너와 네 외할아버지에 관한 이야기이자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인생이야기라고 해야겠다. 하지만 아버지와 아이의 인생을 사는 모두의 얘기라고 생각하니 그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잘 그려야 한다는 생각에 쉽사리 손이 움직여지지를 않았다.
4장 인생 여행
모든 생을 마주하는 곳
서쪽 해안가를 찾았다. 강렬한 바람이 캐논 비치(Cannon Beach)를 에워싸고 있었다. 맹렬히 달려드는 바람으로 인해 내 몸은 절로 뒷걸음질쳤다. 하지만 그 바람의 결은 거칠지 않았다. 살을 에는 날카로운 직선의 칼바람이 아니었다. 넓고 묵직하게 내 몸을 짓누르더니 내 육체의 굴곡을 따라 굵게 유선을 그리며 뒤편으로 쏜 살같이 달아나는 바람이었다.
바람이 휘어지는 곡선을 따라 내 육신도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이리저리 휘감겨 돌고 돌았다. 내 몸은 바람결을 따라 흘러갔다. 나와 함께 걷고 있던 아이도 제 피부를 쓸고 사라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실체를 만끽하고 있었다. 아이는 힘찬 공기의 흐름이 마냥 신기한지 그것을 붙잡으려고 손을 오므려 주먹을 쥐어보기도 하고 손을 펴서 손바닥을 드러내 보이기도 했다. 아이는 자기 손을 벗어난 바람을 잡으려고 모래사장 위를 강중강중 뛰어다니며 연신 까르륵 소리 내어 웃었다.
내 몸을 누르고 지나간 바람은 코와 뺨을 차갑게 만들었다. 그 바람이 내 몸의 온기를 앗아가 열 손가락 끝이 벌겋게 얼얼해졌다. 세찬 바람은 나의 겉사람을 벗겨내고 곧장이라도 속사람을 드러낼 지경이었다. 마치 마트료시카가 이등분된 몸을 열어 그 안에 숨겨 놓았던 또 하나의 자신의 모습을 내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왼쪽으로 휘감기는 바람에 몸을 맡기면 내 안에 숨어 들어간 지난날의 유년의 모습을 드러낼 것만 같았다. 나의 유년 때는 아버지의 생전의 때와도 겹친다. 캐논 비치의 해안선에는 바람에 벗겨진 내 인생의 지난날이 나열되었다. 주르륵 펼쳐진 인생의 시기마다 나와 함께 했던 살아생전 아버지의 모습도 펼쳐졌다.
나는 바람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나를 숨 쉬게 한 바람은 이전에 아버지의 코끝을 매만지며 아버지의 몸속을 살피고 나온 숨결일지도 모른다. 그날 해변에 분 바람이 어느 시간 속을 살던 당신의 모습을 살아 숨 쉬게 하고 온 것인지 나는 무척이나 궁금했다. 언제를 살던 아버지의 살갗을 휘감고서 세상 속을 돌고 돌아와 다시 나의 살갗을 덮은 것일까. 당신의 유년의 모습인지, 청년의 모습인지, 장년의 모습인지, 아니면 인자함이 농후하게 밴 노년의 모습을 담아 온 바람인지 묻고 싶었다.
현재의 시간을 살고 있는 내게 지나간 아버지의 시간을 바래다 준 해변의 바람은 창조주가 몰고 온 것이었나 보다 아버지를 살아 숨 쉬게 한 바람이 나를 숨 쉬게 했고, 나를 숨 쉬게 한 바람은 내 아이의 숨으로 들이쉬어졌다.
어느 사이엔가 오른쪽으로 휘감기는 바람결에 내 몸이 쓸렸다. 그 바람에 나의 육체는 유년의 모습을 벗고 청년의 모습을 내보였다. 그리고 또 한 바퀴를 스치며 청년의 모습을 쓸어내고 중년의 모습을 내보이려 했다. 아이도 바람에 씻겨 그 겉모습이 한 겹 벗겨지고 나면 유아의 모습 뒤에 기다리고 선 소년의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곳의 바람은 나의 살갗을 쓸어내 다른 시간을 사는 내 모습을 드러냈다. 내 인생의 시간들과 맞닿아 있던 아버지의 모습과 아이의 모습도 나타났다. 해변 어디선가 나는 중년의 모습으로 서 있었고, 아버지는 청년의 모습으로 서 있었다. 아버지가 갓난아이의 모습으로 누워 울고 있을 때, 노인의 모습을 한 아이는 갓난아이가 된 아버지를 토닥이고 있었다. 그곳을 맴도는 바람을 따르던 우리들 각자의 존재를 이루고 있는 마트료시카가 몇 겹이고 벗겨지고 또 벗겨졌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인생에서 이미 마주했고 앞으로도 마주할 자신들의 모습을 한 꺼풀씩 열거했다.
인생의 모든 때가 나열됐을 때 그 모습은 온전할 것이라 기대했다. 마치 어디서부터 시작되어 어디서 끝나는지 볼 수도 없는 바람에게서 그것의 일부분을 떼어내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우리의 생도 어느 한 부분을 떼어낼 필요조차 없이 하나의 완전함을 이룰 것이라고 소망했다.
물리적인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창조주는 바람과 같구나 생각했다. 창조주는 시간을 종으로 횡으로 자유자재로 넘나드니 아버지와 아이와 내 인생의 모든 모습들을 바람처럼 이 해변 위에 불러들여 오기도 하고 불러 가기도 하겠지.
인간이 시간의 안경을 쓰고 인생을 본다면, 창조주는 바람의 안경을 쓰고 인생들을 통찰하는 게 아닐까 상상했다. 소년이었던 인간은 10년의 시간이 지나야 청년이 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또 10년의 시간이 흘러야 장년이 된 자신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창조주는 시간에 구애받지 않으니 마치 이쪽저쪽 곡선을 그리며 빠르게 혹은 느리게 날아가는 바람처럼 세상을 운행하는 것이 아닐까 짐작했다.
해변의 바람은 내 삶이 또 한 번 변화의 단계에 들어섰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소금기 어린 바람이 내 피부 속으로 속속들이 스며 들어와 내게 속한 모든 것을 신선하게 만들었다.
캐논 비치에는 거대한 마트료시카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내 눈에 비친 헤이스택 바위(Haystack Rock)는 흡사 자연이 빚은 마트료시카 같았다. 내 아버지가 살고 간 시간보다도, 내 아이가 앞으로 살아갈 시간보다도 더욱 오랜 시간동안 한 겹 한 겹 깎이고 깎여서 그 속에 감추어 두었던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 놓고 있었다.
나의 존재를 형성하고 있는 마트료시카는 몇 번째 마트료시카를 열어 보인 것일까, 지금 나는 인생의 어느 시간쯤에 닿아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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