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좌파 2』의 핵심적인 문제의식은 “왜 정치는 불평등을 악화시킬까?”라는 질문이다. 불평등의 완화를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은 하나일 것 같지만, 어떤 프레임으로 접근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인다. 한국 사회에서 지배적인 프레임은 상위 1% 계급에 문제가 있다는 ‘1% 대 99% 사회’ 프레임이지만, 이 책에서는 ‘상위 10%’나 ‘상위 20%’를 문제 삼는 ‘10% 대 90% 사회’ 프레임 또는 ‘20% 대 80% 사회’ 프레임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정파적 대결 구도를 넘어서 강남 좌파를 사회 전체의 불평등 유지 또는 악화와 연결시켜 ‘우리 모두의 문제’로 이해하자는 것이 이 책의 주요 메시지다.
▣ Short Summary
강남 좌파는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다른 나라들에도 비슷한 현상이 존재한다. 미국의 ‘리무진 진보주의자’, 프랑스의 ‘고슈 카비아(캐비아 좌파)’, 영국의 ‘샴페인 사회주의자’, 독일의 ‘살롱 사회주의자’, 캐나다의 ‘구치 사회주의자’, 호주의 ‘샤르도네 사회주의자(고급 와인 사회주의자)’ 등에 상응하는 게 바로 한국의 강남 좌파다. 모두 다 좋은 뜻으로 쓰는 말은 아니지만, ‘엘리트 독식’이라는 서구 정치의 딜레마를 가리키는 용어로 받아들일 만한 가치가 있다.
한국 국회의원의 재산은 1인당 평균 37억 2,800만 원으로 일반 가구 평균의 12.6배에 달한다. 여야, 진보-보수의 차이는 별로 없다. 민주화 투쟁을 하던 시절과는 달리 오늘날엔 주로 먹고사는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사람들이 정계 진출을 시도하기 때문이다. 서구의 경험에 비추어보자면, 앞으로 한국에서도 부자들이 정치를 할 가능성이 높고, 따라서 강남 좌파가 더욱 많아질 것이다. 사실 부자들이 서민을 생각하는 마음이 고맙지 않은가. 대부분 학벌도 권력도 막강한 그들이 진보적 가치를 역설하는 건 한국과 같은 ‘학벌 공화국‘에선 서민에게 큰 힘이 된다. 상층에도 진보가 있고 하층에도 보수가 있다는 건 사회적 갈등의 양극화를 막는 데에도 기여한다.
물론 강남 좌파의 부정적인 면도 있다. “강남 좌파여, 얼굴에 기름기 넘치면서 명예마저 가지려는 ‘심보’는 뭐냐”는 식의 비판도 있지만, 이런 비판엔 동의하기 어렵다. 명예가 정당하게 얻어지는 것이라면 얼굴의 기름기 여부는 아무런 문제가 안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강남 좌파의 문제는 좀더 큰 맥락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가용성 편향’의 문제다. 가용성 편형은 우리가 흔히 쓰는 “노는 물이 어떻다”는 식의 표현을 원용하자면, ‘물 편향’이라고 할 수 있다. 비슷한 계급의 사람들이 끼리끼리 어울리는 물의 영향을 받다보면 비슷하지 않은 사람들의 사정을 헤아리기 어렵다. 강남 좌파는 거시적이고 추상적인 진보의 가치를 역설하는 데엔 능하지만, 서민의 절박한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엔 무관심하거나 무능할 가능성이 높다.
다음으론, ‘도덕적 면허 효과’의 문제를 들 수 있다. 도덕적 면허는 사회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이 그런 경력으로 인해 갖게 되는 도덕적 우월감을 말한다. 그 정도가 지나치면 독선과 오만을 낳고, 공감 능력을 퇴화시켜 자기 객관화를 방해한다. 민주화 운동 경력이 있는 386세대이면서 강남 좌파에 속하는 사람들의 경제 자본과 학벌 자본은 이런 문제를 증폭시키는 경향이 있다.
386세대는 1960년대에 출생해 민주화 투쟁이 격렬하게 벌어진 1980년대에 대학 생활을 했고 1990년대에 30대였던 사람들로, ‘30대, 80년대, 60년대’의 첫 숫자를 따 지은 이름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들이 40대가 되었을 땐 486세대라고 했고, 50대가 되면서 586세대라는 말이 쓰이고 있다. 최근엔 그냥 ‘86세대’로 부르기도 한다. 이 책에선 우리 입에 밸 정도로 익숙해진 ‘386세대’라는 표현을 썼다.
많은 유권자가 보기에 정치는 좌우의 싸움도 아니고, 진보-보수의 싸움도 아니다. 기득권 엘리트가 더 나은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 벌이는 그들만의 싸움일 뿐이다. 강남 좌파론은 정치가 출세와 입신양명의 도구로 기능하는 사회에 대한 문제 제기로 이해하는 게 옳다. 강남 좌파를 개인에 대한 인신공격의 용도로만 쓰는 건 너무 비생산적이며, 강남 좌파론에 대한 심각한 오해다.
이 책의 핵심적인 문제의식은 “왜 정치는 불평등을 악화시킬까?“라는 질문이다. 불평등의 완화를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은 하나일 것 같지만, 어떤 프레임으로 접근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인다. 그간 한국 사회에서 지배적인 프레임은 상위 1% 계급에 문제가 있다는 ‘1% 대 99% 사회’ 프레임이었지만, 나는 이 책에서 ‘상위 10%‘나 ‘상위 20%‘를 문제 삼는 ‘10% 대 90% 사회‘ 프레임 또는 ‘20% 대 80% 사회’ 프레임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1% 대 99% 사회’ 프레임에선 1%에 속하지 않는 강남 좌파는 별 문제가 안 될 수도 있지만, ‘10% 대 90% 사회’ 프레임 또는 ‘20% 대 80% 사회’ 프레임에선 강남 좌파가 매우 중요해진다. 상위 10%나 20%에 속하는 사람들이 정치를 지배하는 현실에서 그들이 과연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정책을 주장할 수 있을까? ‘강남 좌파’는 바로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우리가 좀더 심각하게 문제 삼아야 할 존재라는 게 이 책의 주요 메시지다.
정파적 대결 구도를 넘어서 강남 좌파를 사회 전체의 불평등 유지 또는 악화와 연결시켜 ‘우리 모두의 문제’로 이해하자는 나의 제안이 큰 호응을 얻진 못한다 하더라도, 강남 좌파에 대한 기존 오해만큼은 불식되길 기대한다. 나 역시 지방에 살고 있을망정 넓은 의미의 ‘강남 좌파’에 속하는 사람으로서 엄정한 자기비판에 임한다는 자세로 이 책을 썼다는 걸 밝혀두고 싶다.
▣ 차례
머리말 : 강남 좌파에 대한 오해
제1장 왜 ‘1% 대 99% 사회’ 프레임은 위험한가 : ‘진영 논리’와 ‘진보 코스프레’의 오류
‘불평등’은 언론인·학자들에게 인기가 없는 주제 / 불평등을 은폐하는 ‘1% 대 99% 사회’ 프레임
“가만, 내가 성공했다고 욕을 먹어야 한다는 거야?”
“한국은 20%가 80%를, 50%가 50%를 착취하는 사회” / ‘노동귀족’은 ‘수구꼴통’의 용어인가
“높은 중산층 기준을 갖고 자학하는 한국인” / “고위 공직자 절반이 상위 5% 부자”
1% 비판에 집중하는 ‘진보 코스프레’ / ‘부의 세습’을 정당화하는 ‘능력주의 신화’
능력주의 사회는 빈부 격차에 가장 둔감한 사회 / 정파적 싸움으로 탕진한 ‘조국 사태’
‘진영 논리’가 ‘개혁과 불평등 해소’를 죽인다 / ‘공정으로서의 정의’를 거부한 진보 진영
‘승자독식’ 체제하의 ‘밥그릇 전쟁’ / ‘조국 사태’에서 선악 이분법은 잔인하다
제2장 왜 정치는 중·하층의 민생을 외면하는가 : 개혁과 진보의 ‘의제 설정’ 오류
“검찰 개혁이 지나치게 과잉대표돼 있다” / 동질적인 사람들끼리 어울리면 위험하다
개혁을 민주화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생각하는 사고방식 / 가습기 살균제 사망자가 1,449명인데도
“정규직 안 해도 좋다. 더이상 죽지만 않게 해달라”
“아, 그거 『조선일보』가 하는 얘기야. 너 『조선일보』 보냐”
‘『TV조선』’과 조중동은 ‘박근혜 탄핵’의 공로자였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 ‘선출된 권력’을 제압하려 했는가 / ‘조국 사태’는 ‘문재인 사태’였다
여권이 정말 검찰 개혁을 원하기는 했던 건가? / 검찰 개혁과 정치 개혁을 분리할 수 있는가?
왜 1960년대 미국 신좌파를 흉내내는가? / ‘진보적인 척’하는 게 ‘진보’는 아니다
제3장 왜 ‘도덕적 우월감’이 진보를 죽이는가 : ‘민생 개혁’과 ‘민주화 운동’ 동일시 오류
386세대의 고유한 사고방식 / 적이 선명한 ‘민주화 투쟁’과 민생의 차이
왜 ‘싸가지 없는 진보’는 계속되는가 / ‘도덕적 면허 효과’로 인한 부도덕
팬덤형 정의파들의 ‘내 멋대로 정의’ / ‘보수 공격’이 진보라고 우기는 직업적 선동가들
진보와 보수는 도덕의 체계와 기준이 다르다 / ‘공정’에 대한 진보와 보수의 차이
‘미시적 공정’과 ‘거시적 공정’은 상충하는가? / 20대에게 구조에 대한 연대 책임을 묻지 마라
‘대의론’과 ‘조직 보위론’은 아직도 건재하다 / “우리 모두 위선을 좀 걷어내자”
맺는말 : ‘20% 대 80% 사회’ 프레임을 위하여
번지수를 잘못 찾은 한국 정치 / “갈등이 깊어질수록 추상의 수준을 높일 수밖에 없다”
공짜로 ‘도덕적 우월감’을 누릴 수는 없다 / “성인이 아니면 입 닥쳐”를 요구하는 게 아니다
위선에 둔감한 진보의 고질병 / ‘열정의 비대칭성’과 ‘공공 지식인’의 소멸
‘필터 버블’의 감옥에 갇힌 사람들 / 진보의 의제 대전환이 필요하다
제1장 왜 ‘1% 대 99% 사회’ 프레임은 위험한가 - ‘진영 논리’와 ‘진보 코스프레’의 오류
불평등을 은폐하는 ‘1% 대 99% 사회‘ 프레임
“1% 대 99% 사회”는 불평등 문제를 제기할 때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핵심 개념이 되었다. 그런데 과연 “1% 대 99% 사회”라는 프레임은 옳은 것일까? 이 프레임에 강한 의문을 가져온 나로선 최근 번역ㆍ출간된 리처드 리브스의 『20 vs 80의 사회』라는 책이 더할 나위 없이 반가웠다. 미국 브루킹스연구소 경제학자인 리브스는 영국 출신으로 신분 사회적 요소가 강한 영국 문화가 싫어 평등 지향적인 미국에 귀화해 미국인이 된 인물이다. 그런데 미국에서 살다보니, 실제로는 미국이 영국보다 더 심한 신분 사회라는 걸 절감하게 되었고, 그런 문제의식으로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그간 ‘20 대 80의 사회’에 대한 문제 제기는 많이 있었지만, ‘1대 99의 사회’에 시비를 걸진 않았다. 상호 공존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20 vs 80의 사회』는 양자가 사실상 공존이 불가함을 시사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리브스는 2011년 5월 1일에 벌어진 ‘윌스트리스 점령 시위’에 참여한 사람 중 3분의 1 이상이 연 소득 10만 달러가 넘었다는 점, 2015년 1월말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세제 개혁안이 당시 민주당 하원 원내대표였던 낸시 펠로시 등의 강력한 반대로 폐기되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펠로시가 누군가? 현재 하원의장인 펠로시는 ‘진보의 화신’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민주당 내에서 강경한 진보 노선을 걸어온 인물이다. 상위 1%를 향해 날카로운 비판과 독설도 불사했던 그가 상위 20%의 이익을 위해선 전혀 다른 자세를 취한 것이다. 20%의 기득권을 유지하면서 1%만 문제 삼는 것으로 극심한 불평등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529 대학 저축 플랜’으로 불린 그 세제 개혁안은 자녀의 대학 학비 용도로 돈을 붓는 장기저축 상품의 세제 혜택을 없애고, 그 재원을 공정한 세액 공제 시스템을 확충하는 데 쓰자는 것이었다. 펠로시를 비롯한 리무진 리버럴 정치인들의 지역구는 부유하고 교육 수준이 높으며 진보 성향 계층이 주로 사는 곳이었다.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부유하고, 당락을 좌우할 만큼 숫자도 많은” 소득 상위 20%의 중상류층이 개혁을 무산시킨 것이다.
미국 정치학자 래리 바텔스는 미국 상원의원들을 대상으로 그들이 누구를 대변하는가 하는 실증적 연구를 했다. 그는 상원의원들이 가난한 유권자들보다 부유한 유권자들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걸 입증했다. 분석 결과 소득분포의 상위 3분의 1에 속하는 유권자들의 견해는 중간 3분의 1에 속하는 사람들보다 50% 더 높은 중요도를 부여받았으며. 하위 3분의 1에 속하는 유권자들의 견해는 거의 무시된 것으로 나타났다.
더욱 놀라운 건 부자들의 요구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성향은 민주당 의원들과 공화당 의원들 사이에 차이가 없었다는 점이다. 왜 그런 일이 벌어진 걸까? 부유한 유권자일수록 투표를 더 많이 하며 돈과 로비로 정치에 영향을 미치려고 애를 쓴다는 이유들이 그간 제시되었지만, 바텔스는 상원의원들이 부유층에 속한다는 점을 중시했다. 자신이 부유하기 때문에 부유층의 이익을 대변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과연 리브스의 생각처럼 미국이 영국보다 심한 신분 사회냐 하는 건 별도로 따져볼 문제겠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미국인들은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바로 “1% 대 99% 사회”라는 프레임 때문이다. 1%를 불평등의 주범으로 몰아버리면, 나머지 99% 내부의 격차와 불평등은 비교적 작은 문제로 여겨지고, ‘1% 개혁’을 완수하는 그날까지 대동단결해야 할 공동체가 된다.
하지만 20%의 중상류층은 다수 대중과 같은 이해관계를 갖고 있지 않다. 1979년에서 2013년 사이 미국 상위 20% 가구 소득 총합은 4조 달러 늘었는데, 하위 80%는 3조 달러 정도 늘었다. 4조 달러 중 3분의 1을 상위 1%가 가져가긴 했지만, 바로 아래의 19%가 가져간 소득 증가분도 2조 7,000억 달러에 달했다. 중상류층은 최상류층을 공격하는 데 목소리를 높이지만, 1%와 20%는 분리된 존재가 아니다. 최상류층은 상위 20%가 ‘들락날락하는 집단’이다.
‘부의 세습’을 정당화하는 ‘능력주의 신화‘
‘1대 99의 사회’라는 프레임을 유지시키는 이념적 방어 메커니즘은 바로 능력주의 신화다. 이른바 ‘개천에서 용 나는 모델’이다. 이 모델은 고성장 시대엔 제법 잘 작동했다. 가난한 집 아이들도 명문 대학에 들어가 신분 상승을 꾀하는 ‘코리언 드림’의 실현이 꽤 이루어졌다. 그러나 저성장 시대를 맞아 이 모델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고, 많은 사람이 그걸 잘 알고 있음에도 이 모델은 여전히 건재하다.
지능과 노력이라는 능력에 의해 부와 사회적 지위가 부여되는 ‘사회인 능력주의(meritocracy)’는 출신과 배경에 의해 부와 사회적 지위가 부여되는 ‘사회적 귀족주의(aristocracy)’의 반대 개념으로 등장해 처음엔 진보적 이념으로 간주되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사실상 귀족주의와 다를 바 없는 것임이 드러났다.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한 최초의 학자들 중 한 명인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프랑스를 사례로 들어 분석한 내용을 살펴보자. 부르디외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이런 내용이다.
교육은 사회적 불평등 유지와 강화에 기여한다. 특히, 고등 교육 시스템은 특권을 부여하고, 지위를 할당하고, 기존 사회제도에 대한 존경을 배양시키는 기능을 수행한다. 형식적인 평등에 대한 광범위한 신념은 지배계급이 그 지위를 공개적으로 자식에게 물려주는 걸 어렵게 한다. 따라서 새롭고 더욱 신중한 사회통제와 지위 상속 수단이 있어야만 했다. 그것이 바로 고등교육의 ‘능력주의 시스템’이다. 그래서 지배계급의 이해관계는 민주주의 이데올로기의 원칙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보존될 수 있게 되었다. 계급적 이해관계를 교육적 위계질서에 떠넘김으로써 사회적 위계질서를 재생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실제로 부르디외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프랑스에서 대부분의 대학 졸업장은 상류계급 출신에게 돌아가고, 농민ㆍ노동계급 자식들에겐 거의 가지 않는다. 그가 실시한 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회사 간부 자녀들의 58%가 대학에 진학하는 반면 농민의 자녀는 1.4%만이 대학에 진학한다. 돈뿐만 아니라 교육도 ‘상속’되고 ‘유전’되는 것이다.
능력주의 신화는 미국에서도 각종 통계 수치로 입증되었다. 2004년 워싱턴의 정책연구소인 센추리재단 조사를 보면, 미국 가정을 사회경제적인 등급에 따라 4등분했을 때 전국 146개 명문대 학생들 중 3%만이 가장 낮은 등급에 속해 있으며 최상위 등급에 속하는 학생은 74%인 것으로 나타났다. 고등교육을 받은 미국의 엘리트는 겉으론 능력에 의해 성장한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세습에 의해 신분이 결정되는 새로운 ‘세습된 능력 계급’인 것이다.
요컨대, 능력주의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인해 신화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능력을 이겨버리는 비능력적 요인들, 즉 차별적 교육 기회, 불평등한 사회적 자본과 문화적 자본, 특권의 상속과 부의 세습, 개인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손쓸 방법이 없는 불가항력적인 요인들, 자영업자의 자수성가를 방해하는 대기업, 편견에 의한 차별 등은 모두 능력주의 시스템을 방해하는 요인들이다.
‘조국 사태’에서 선악 이분법은 잔인하다
한국 사회의 최대 문제는 승자독식 체제하의 ‘밥그릇 전쟁’으로 인한 ‘분열 구조’에 있는 것이지, 어떤 진영이 승리하느냐는 부차적인 문제다. 어느 한 진영이 상대 진영을 완전히 압도해버린다면 ‘분열의 사회적 비용’은 무시해도 좋을 수준이겠지만, 그게 불가능한 이상 그 어떤 정치와 개혁도 분열 비용을 넘어서지 못하는 비극이 발생하고 만다. 이걸 직시하는 게 진정한 ‘애국’이다.
‘조국 사태’의 와중에서 나타난 선악 이분법은 보기에 끔찍했다. 어느 문인은 10월 5일 열린 ‘검찰 개혁 촛불문화제’에 다녀온 후 자신의 페이스북에 글을 올리고 “나라가 두 쪽이 났다고 한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저들은 적폐이고 우리는 혁명”이라고 했다. 그는 “저들은 폐기된 과거이고 우리는 미래다. 저들은 몰락하는 시대의 잔재이고 우리는 어둠을 비추는 영원한 빛”이라며 “(나라가) 두 쪽이 난 게 아니라 누가 이기고 지는지 판가름이 나는 것”이라고 했다.
이 문인만 그런 게 아니다. 여권의 기본적인 인식 구도가 바로 이런 선악 이분법이다. 좋다. ‘적폐’를 물리치고 ‘혁명’ 세력이 일방적인 승리를 거둔다면 그것도 기대해볼 만한 일이긴 하다. 그러나 그건 불가능하다. 전혀 정의롭지도 않다. 2017년 5월 10일 대통령에 취임한 문재인의 지지율은 한동안 80%대 중반까지 치솟을 정도로 높았다. ‘대통령이 잘하고 있다’며 지지를 보내는 국민이 80%를 넘은 것은 1993년 10월 김영삼 대통령 이후 24년 만이었다. 여권이 적폐로 몰아붙이는 사람들의 절반 이상이 지난 국정 농단 촛불 혁명에 찬성했던 동지였음을 감안컨대, 이런 선악 이분법은 잔인하다.
그런데 불행 중 다행히도 이런 망국적인 선악 이분법에 비교적 오염되지 않은 사람들이 나타났다. 바로 20대다. 고성장 시대의 세대들은 ‘민주화’만 고민해도 무방했지만, 고성장 시대의 종언과 함께 닥친 ‘일자리 전쟁’은 공정의 문제를 부각시키면서 그걸 개인적 영역으로 끌어내렸다. 그래서 20대는 진영을 초월한 공정을 중시한다. 이 공정에 대해 구조를 보지 못한 ‘미시적 공정’이라거나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능력주의적 공정’이라는 비판이 적잖게 나왔지만, 이거야말로 적반하장이다. 누가 세상의 구조를 그렇게 만들었는가?
나는 20대가 이전 세대보다 대학 서열에 미쳐 있는 현실을 강하게 비판해왔지만, 그런 서열 구조를 심화시켜온 386세대를 비롯한 기성세대에게 더 큰 책임이 있다는 건 두말할 나위가 없다. 20대의 공정 개념에 그 어떤 한계가 있다 하더라도, 이는 구조 개혁의 강력한 동력이 될 수 있다. ‘밑에서 위로’는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를 내포한 개념이다. 어쩌면 20대가 새로운 패러다임의 기수가 되리라는 희망을 키워가는 게 이 지긋지긋한 이분법 세상을 끝낼 수 있는 길이 아닐까? 이전 세대들과는 확연히 다른 20대들의 독특한 사고방식에 전적으로 동의할 순 없다 하더라도, 우리가 정녕 새로운 삶과 정치의 패러다임을 모색하고자 한다면 그들의 힘을 빌려야 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2019년 4월 어느 세미나에서 한국개발연구원장 최정표는 “기득권의 성이 너무나 단단하다. 불평등은 이미 구조적으로 고착화되었다”고 탄식했다고 한다. 이 고착 구조를 깨는 것은 새로운 사고의 틀을 가진 청년 세대가 힘을 갖는 것밖에 없다. 그러나 돈도 명성도 없는 청년들이 정치를 경유하지 않고선 힘을 갖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정치를 해야 할 청년들은 정치를 멀리 하고, 제발 정치를 그만두었으면 하는 기성세대는 정치에 목숨을 건다는 점이다. 그래서 정치는 바뀌지 않고, 그로 인한 정치적 불평등은 경제적 불평등을 악화시킨다.
제2장 왜 정치는 중ㆍ하층의 민생을 외면하는가 - 개혁과 진보의 ‘의제 설정’ 오류
개혁을 민주화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생각하는 사고방식
한국에서도 진보적 정치인들은 중ㆍ하층의 민생을 생각하는 것처럼 전투적인 말은 많이 하지만, 그것에 대해 직접 접촉하거나 생각할 기회가 거의 없다. 그들은 부지불식간에 자신의 계급적 기반과 동질적인 동료의 압력이나 교류로 인해 자신에게 중요한 게 사회적으로도 중요하다는 착각에 빠진다. 여권의 정치적 실세인 운동권 386 출신의 그런 착각은 더욱 심해 개혁적 정책을 민주화 운동의 연장선상에서만 생각하고, 실제로 그런 정책을 주요 의제로 삼는다.
노무현 정권이 가장 중요한 입법으로 내세웠던 ‘4대 개혁 입법’이 그 좋은 예다. 국가보안법, 사립학교법, 과거사진상규명법, 언론관계법이 중요하다는 데엔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중요한 건 이 입법이 민생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점이었다. 2004년 탄핵 역풍 속에서 원내 과반을 이룬 열린우리당은 17대 국회 첫 정기국회에서 공격적으로 4대 개혁 입법을 추진했지만, 한나라당이 이를 ‘4대 국론 분열법’으로 규정하고 격렬하게 저항하는 바람에 국회는 파행을 거듭했고, 결국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반면 민생은 어떠했던가? 노무현 정권만큼 부동산 문제에 대해 호전적인 말을 쏟아낸 정권은 없었지만, 부동산 정책은 대실패였다. 서울 강남 일부 아파트 평당 가격이 1,000만 원 돌파(2003년 4월), 2,000만 원 돌파(2003년 8월), 3,000만 원 돌파(2006년 1월) 기록을 세운 건 모두 노무현 정권 들어서였다. 서울과 지방의 집값 양극화는 더욱 벌어지고 말았다. 개혁에 반대하는 한나라당의 수구성을 비난하기는 쉬운 일이었지만, 문제는 집권 세력으로서 ‘책임 윤리’였다. 의도가 정의롭고 선하면 그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괜찮은 것인가? 절대로 괜찮지 않다는 게 민심이었고, 이 민심은 결국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이명박근혜 정권을 탄생시켰다.
이젠 달라졌을까? 아니다. 진보세력의 386형 강남 좌파 마인드는 여전하다. 이들은 서울-지방 격차를 더 벌리기 위해 안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이 다 서울이나 서울 근처에서 사니 눈에 보이는 게 서울뿐이다. 촛불 시위를 하는 정의로운 국민들 역시 서울이 대한민국인 줄 아는 건 마찬가지다. 문재인 정부는 수도권 신도시 정책처럼 지역균형발전을 완전히 무시하는 ‘철학의 빈곤’을 드러냈고, 최악의 반지역균형발전 정권이 되기 위해 작정한 것처럼 보이는데도, 이렇다 할 반발이나 저항이 없다.
이들은 여전히 개혁 정책을 민주화 운동의 연장선상에서만 생각하고, 실제로 그런 정책을 최우선 의제로 삼고 있다. 검찰 개혁에 정권의 명운을 거는 게 그 좋은 예다. 이게 과연 민생 의제일까? 민생을 조금이라도 생각했다면, 법조 개혁을 하더라도 ‘유전무죄ㆍ무전유죄’부터 깨부수는 게 우선이 아니었을까?
2017년 1월 《동아일보》가 여론조사 회사인 엠브레인과 함께 20대 이상 남녀 1,000명에게 모바일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무려 91%가 한국은 ‘유전무죄ㆍ무전유죄’가 통하는 사회라고 응답했다. 과연 정부와 국회는 믿을 수 있는가? 공직은 그걸 차지한 사람들에게 단지 좋은 직장일 뿐이다. 자칭 엘리트라는 사람들은 전관예우에 미쳐 돌아가면서 자기 밥그릇 챙기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위장전입’은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고위 공직 엘리트의 ‘필수’가 되어버렸다.
전관예우는 ‘사회 신뢰를 좀먹는 암 덩어리’임에도, 우리는 그 암 덩어리의 발호에 최소한의 분노마저 잃은 지 오래다. 당파 싸움엔 열을 올려도 당파를 초월해 작동하는 법칙에 대해선 별 말이 없다. 아니 정부는 오히려 전관예우의 브로커 역할까지 떠맡고 나선다. ‘공정거래’를 책임진다는 공정거래위원회는 매년 10여 명을 대기업에 재취업시켜주면서 고시ㆍ비고시 출신을 나눠 ‘억대 연봉 지침’까지 기업에 정해주었다. ‘행정고시 출신 퇴직자’는 2억 5,000만 원 안팎, ‘비행정고시 출신 퇴직자’는 1억 5,000만 원 안팎이라는 억대 연봉 가이드라인까지 책정해준 것이다. 《경향신문》 경제부장 오관철은 “공정위 고위직을 맡으려면 퇴직 후 로펌이나 대기업에 재취업하지 않겠다는 서약서 제출 제도라도 만들어졌으면 속이 시원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고 했지만, 전관예우를 방치하는 데엔 보수나 진보가 한 통속이어서 이 문제엔 별관심이 없다.
“정규직 안 해도 좋다. 더 이상 죽지만 않게 해달라.”
고용노동부가 산업재해 발생 현황을 집계한 통계자료를 보면, 2017년 산업재해로 사망한 노동자는 2,209명으로 2016년에 비해 10% 가까이 늘었다. 한국에서 산재 사망자들은 주로 떨어지고, 기계에 끼이고, 부딪혀 숨진다. 한국의 사고사망 만인율(1만 명 당 명)은 0.71(2013년 기준)인데 반해, 미국은 0.37, 독일 0.17, 영국 0.04(이상 2011년 기준) 수준이다. 한국이 영국의 18배인 셈이다. 주 5일 노동 기준 매일 9명이 산업재해로 죽어나간다는 것도 놀랍지만, 더욱 놀라운 건 이 통계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산업 재해 피해자가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이다. 산업재해로 인정을 받는 게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기업의 힘이 센 대기업일수록 더욱 그렇다. 정부가 대기업 편을 들기 때문이다.
2018년 12월 9일 방영된 MBC 탐사기획 <스트레이트: “기업 살인, 버려진 사람들> 편은 이 점을 생생하게 잘 보여주었다. 상대가 삼성전자인데 산업재해를 입은 노동자가 무슨 수로 당해낼 수 있겠는가. 산업재해를 인정받기 위해선 작업 환경 보고서가 필수인데, 삼성전자는 그 공개를 거부하고 산업자원부는 국가 기밀이라 삼성전자의 공개 거부엔 문제가 없다고 거드는데 무슨 수로 이들의 갑질을 이겨낼 수 있겠는가 말이다.
게다가 산업재해 사망자의 90%가 ‘하청노동자’다. 2018년 12월 24일 하청업체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이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석탄 운송 컨베이어벨트에 끼여 숨지는 비극이 발생했다. 누군가 한 사람만 있었더라도 안전장치를 작동해 기계를 멈출 수 있었겠지만, 그간 노동자들이 요구해온 ‘2인 1조’ 근무는 비용 절감을 위해 거부당했다. 화력발전소에서 20년째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는 이태성은 비정규직 대표 100인 기자회견에서 “정규직 안 해도 좋다. 더 이상 죽지만 않게 해달라”고 울부짖었다. 이런 ‘죽음의 외주화’, ‘죽음의 비정규직화’가 멈출 수 있을까?
‘태안화력 비정규직 청년 노동자 고 김용균 사망사고 진상규명 및 책임자 처벌 시민대책위원회’의 위원장 이태희는 “지침이 있는데도 지켜지지 않았고, 시설에 문제가 있어서 28번이나 개선을 요구했는데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태안화력발전소에서만 10년간 하청노동자 12명이 죽었죠. 이건 단순 산업재해가 아니라 사회적 타살입니다”라고 말했다.
그것도 국가가 공모한 사회적 타살이라고나 해야 할까? 태안화력발전소는 정부에서 ‘무재해 사업장’ 인증을 받았으며, 원청인 서부발전은 무재해 사업장이라며 정부로부터 5년간 산재보험료 22억여 원을 감면받고 직원들에게도 무재해 포상금을 지급했다고 하니 말이다. 다시 묻지만, 우리는 왜 정치적 사건을 둘러싼 갈등엔 수백만 명의 인파가 모이면서도 이런 절박한 민생 문제엔 무관심한 걸까?
‘진보적인 척’ 하는 게 ‘진보’는 아니다
‘최저임금제’와 ‘주 52시간제’를 살펴보자. 얼마나 아름다운 정책인가. 그 아름다움을 결과로까지 이어지게 만들기 위해선 이 정책들이 시행될 때 생겨날 수 있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나 부작용에 대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악마의 변호인’을 대거 초청해서라도 돌다리를 두들겨 보는 심정으로 반드시 성공시켜야 한다. 이게 바로 현실주의적 진보, 또는 진보적 현실주의다.
그러나 문재인 정권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직 당위만 있었다. 심각한 부작용이 터져나오자 뒤늦게 급조해낸 보완책이 먹힐 리 만무했다. ‘후퇴’라거나 ‘굴복’이라며 펄펄 뛰는 노동계와의 갈등만 키우는 꼴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처음부터 워낙 당위를 강하게 밀어붙였기 때문에 진보 진영 내에서 “어, 저런 식으로 하면 안 되는데……”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도 입을 벙긋하기가 힘들었다. 이의 제기라도 할 것 같으면 그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으로 찍혀 온갖 욕설과 모함을 감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문제는 어떤가? 진보적 현실주의로 가려면 정규직의 ‘양보’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걸 과감하게 공론화했어야 했다. 모두를 만족시키면서 비정규직 문제를 풀 수는 없다. 단계별로 공공기관의 정규직화부터 먼저 하겠다면, 미리 ‘모든 비정규직의 정규직화’가 과연 가능한 프로젝트인지, ‘1% 개혁론’처럼 오지도 않을 그날을 위해 ‘선별적 특혜’를 베푸는 건 아닌지도 따져보았어야 했다. 그러나 그런 준비는 없었다. “공공기관 비정규직을 전부 정규직화하겠다”는 대통령의 선언이 먼저 나왔다.
‘톨게이트 비정규직 요금 수납원 사태’처럼 이 선언에 자극 받아 정규직화를 요구하는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다. 쟁점은 공공기관이 자회사를 만들어 채용하는 걸 정부가 약속했던 정규직화로 볼 수 있는지의 문제였다. 그렇게 보는 건 사기극이라는 게 시위자들의 주장이었다. 그렇다면 ‘공공기관 비정규직 제로’ 선언을 한 정부는 어느 쪽이건 답을 해야 했다. 물론 답은 없었다. 중요한 건 아름다운 당위의 대향연이었지, 구체적인 현실 문제는 애초에 안중에도 없었기 때문일 게다.
시간강사법은 어떤가? 시간강사에게 교원의 지위를 부여하고, 임용 기간을 1년 이상 법적으로 보장하며, 방학 기간 중에도 임금을 지급하고 4대 보험을 적용해 처우를 개선해주자는 취지의 법률이니, 이 또한 사실상 착취당하는 시간강사들을 위한 아름다운 법이다. 결과는 강사 대량 해고 사태였다. 정확한 통계는 나오지 않았지만, 1만 명에서 2만 명에 이르는 시간강사들이 거리로 내쫓기고 말았다. 정부의 고충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이건 허술해도 너무 허술한 정책이 아니었을까? 우리 모두 “‘진보적인 척’ 하는 게 ‘진보’는 아니다”는 원칙을 재확인해둘 필요가 있지 않을까?
물론 이 모든 문제를 진보 정권과 강남 좌파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는 일이다. 여기서 하고자 하는 말은 한국 정치가 늘 중ㆍ하층민의 민생을 외면하는 것은 개혁 의제 설정에서 정치인들의 당파성과 더불어 가용성 편향이 작동하기 때문이고, 그런 점에서 강남 좌파형 진보 정치가 높은 개혁적 열망에도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는 점이다.
중ㆍ하층의 민생을 외면하는 주범은 보수파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이 많을 게다. 아니 ‘수구꼴통’이라고 욕하면서 그들이 중ㆍ하층의 민생을 보살피려는 진보파의 노력을 좌절시킨다고 핏대를 올릴 게 틀림없다. 일견 맞는 말이지만, 번지수를 완전히 잘못 짚었다. 사실 그냥 이대로가 좋다고 말하는 수구꼴통들의 행태는 당연한 게 아닌가? 그걸 여태까지 몰랐단 말인가? 중ㆍ하층의 민생을 우선시하면서 그걸 관철시켜야 할 책임은 진보파에 있는 게 아닌가? 수구꼴통을 완전히 제압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설사 그게 가능하더라도 진보파가 강남 좌파식 의제 설정으로 개혁에 임한다고 해서 민생의 무엇이 달라질 수 있을까? 진보파는 그간 수구꼴통을 제압하기는커녕 오히려 내부의 잘못된 의제 설정과 도덕적 우월감으로 인한 독선과 오만으로 스스로 무너지면서 수구꼴통의 전성시대를 만들어준 전과가 있지 않은가? 자기 탓을 해야 할 일마저 남 탓을 하는 못된 버릇,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제3장 왜 ‘도덕적 우월감’이 진보를 죽이는가 : ‘민생 개혁’과 ‘민주화 운동’ 동일시 오류
386세대의 고유한 사고방식
박근혜 정권의 국정 농단을 응징하고 새로운 정권 교체를 이루어낸 촛불 시위는 ‘위대한 혁명’으로 예찬되었다. 무엇이 그런 혁명을 만들어낸 걸까? 《경향신문》기자 전병역은 “‘1,500만 촛불’의 원동력은 박근혜 정부에 대한 분노만이 아니다”며 “그 근저에는 새로운 세상을 향한 요구가 있다. 수년째 화두인 저출산 문제의 바탕에도 임금ㆍ교육비ㆍ주거비가 깔려 있다”고 했다.
촛불 정권은 그런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했고, 2018년 여름부터 서울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는 현상을 보였다. 반면 지방의 부동산 가격은 급락했다. 서울과 지방의 집값 격차는 날이 갈수록 벌어져 상위 20% 아파트 값이 하위 20%의 6배를 넘어 섰다. 서울과 지방의 격차는 날이 갈수록 벌어지고, 청년 세대의 일자리 문제는 암담한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프랑스 사회학자 앙리 르페브르는 “일상이야말로 그 모든 혁명이 실패하는 원인”이라고 했는데,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이 바로 그것이다. 일상은 먹고사는 문제다. 촛불 혁명의 덕에 집권한 문재인 정권은 먹고사는 문제보다는 적폐 정산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두 가지는 동시에 할 수 있는 일이었기에 그게 문제될 건 없었지만, 문제는 문재인 정권의 주축 세력인 운동권 386 출신의 ‘아비투스(habitus; 습속)’다.
아비투스는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사람의 마음속에 내면화된 사회질서를 가리켜 쓴 말인데, 이걸 바꾸는 게 영 쉽지 않다. 역지사지해서, 운동권 386이 싫어하거나 경멸하는 공안 검사들을 생각해보라.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공안 검사들의 세계관이나 인간관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걸 인정하면, 자신들의 내면에도 바뀌지 않는 그 어떤 유별난 습속이 있으리라는 데에 흔쾌히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2016년 총선에서 386세대(당시 47~56세) 당선인은 132명으로 전체의 44.0%를 차지해 명실상부한 국회의 대세가 되었다. 특히 제1당인 더불어민주당은 123명의 당선인 가운데 386세대가 66명(51.2%)으로 과반을 넘었다. 현재 더불어민주당 의원 128명 가운데 386세대는 총 68명인데, 이들 모두 대졸자였다. 인서울 대학 졸업자는 57명이었고 그중 서울대학교 15명, 연세대학교ㆍ고려대학교는 각각 10명이었고 문재인 정부 장ㆍ차관 중 63%, 청와대 수석의 70%가 386세대다.
《중앙일보》는 386세대가 공유하는 사고방식의 고유한 특성으로 ① “우리가 독재를 끝냈다”……낙관적 진보주의, ②“우리가 대학 다닐 때는 말이야” ……집단주의와 선민의식, ③ “우리는 선, 너희는 악”……진영 논리와 이분법적 사고, ④ “반미, 반제, 자주”……감성적 민족주의, ⑤ 탈인습적 가치관 등을 들었다.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대의’를 위해 작은 것들은 희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도 386세대의 특성으로 꼽힌다고 했다.
《중앙일보》 등 보수 언론이 이렇듯 386세대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에 대해 진보 진영은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서강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전상진은 “‘386 때리기’가 국민 스포츠”라고 했지만, 《한겨레》 정치팀 선임기자 성한용은 “난세에는 요설이 판친다”며 훨씬 공격적인 자세를 보였다. “이른바 보수는 조국 사태를 계기로 정치 지형을 ‘박근혜 탄핵’ 이전으로 되돌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가장 위력적인 선동은 세대 갈등 부추기기다. 조국 장관을 ‘운동권 출신 386’의 상징으로 세우고, 그 아래 세대를 ‘386세대’와 분리하려는 시도다.
‘도덕적 면허 효과‘로 인한 부도덕
운동권 386에 더욱 치명적인 건 남들은 일신의 영달을 꾀할 때에 자신들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신의 모든 걸 바쳤다는 자부심과 도덕적 우월감이다. 이건 존중하거나 예찬해야 할 것이지 비판할 게 결코 아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라는 게 묘한 동물이어서 그 어떤 미덕도 상황이 바뀌면 악덕이 되고 만다. 선명한 적이 있을 때에 온몸에 각인시킨 선악 이분법은 민주화 투쟁엔 더할 나위 없이 강력한 무기가 되었지만,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체제하에선 ‘적’과의 타협을 죄악시함으로써 정치의 정상적인 작동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게다가 민주화 투쟁 시엔 ‘나 홀로’였지만, 세월이 흘러 결혼을 해 가정을 갖게 되면서 학부형이 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일상이 지배하는 삶 속으로 빠져들게 되어 있다. 정관계에 진출한 운동권 386은 대부분 막강한 학벌 자본을 자랑하는 사람들인지라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강력한 인맥의 혜택을 누리면서 강남 좌파로 변신하게 된다. 이들의 일상은 ‘내로남불’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바로 ‘도덕적 면허 효과’ 때문이다. 우선 이 개념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최근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란 말이 유행이다. 이는 친환경 경영, 윤리 경영, 사회 공헌처럼 노동자, 소비자, 지역사회 같이 기업을 둘러싼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이익을 함께 추구하는 의사결정과 활동을 말한다. 좋은 일이긴 하지만, 학자들이 《포천》 500대 기업을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놀랍게도 사회적 책임에 투자를 많이 했던 기업들이 나중에는 무책임한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이게 바로 ‘도덕적 면허 효과’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과거 선행이나 도덕적 행동을 하면, 도덕성에 대한 자기 이미지가 강해지는데, 이런 긍정적 자기 이미지는 자기 정당화의 방편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이미 착한 일을 많이 했기 때문에, 이 정도 나쁜 일은 괜찮다고 생각하는 심리를 갖게 된다는 이야기다. 아마도 우리가 즐겨 쓰는 ‘도덕적 우월감’과 비슷한 개념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도덕적 면허’ 현상은 정치적 태도의 영역에서도 나타난다. 2008년 미국 대선에서 흑인 후보인 버락 오바마에 대한 투표 선호도를 보여주었던 실험 참가자들은 이후의 결정 과제(직종에 대한 적합성과 기부금 할당)에서 흑인보다는 백인을 훨씬 편애하는 경향을 보여주었다. 오바마를 지지한 참가자들이 그 지지를 자신이 인종 편견을 갖고 있지 않음을 표명한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일종의 ‘도덕적 신임장’을 획득한 것으로 여긴 탓이다.
맺는말 - ‘20% 대 80% 사회’ 프레임을 위하여
번지수를 잘못 찾은 한국 정치
한 경관이 밤에 순찰하다가 가로등 아래에서 뭔가를 찾는 사람을 보았다. 경관은 그에게 다가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 사람은 술기운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답했다. “열쇠 찾는 중입니다. 도와주세요” 경관은 취객과 함께 열쇠를 찾기 시작했다. 꽤 오랜 시간을 살폈지만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경관이 물었다. “여기서 열쇠를 잃어버린 게 분명해요?” 취객이 답했다. “아니요. 여기가 아니라 저기에서 잃어버렸어요. 그런데 저기는 가로등이 없어서 너무 어두워요. 안 보이면 못 찾잖아요.”
오스트리아 출신의 커뮤니케이션 이론가 파울 바츨라비크가 남긴 우화로 학자들이 즐겨 인용하는 것이다. 나름 열심히 애를 쓰긴 하지만 성공 가능성이 전혀 없을 때 우리는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고 하는데, 이게 바로 이 가로등 우화를 잘 압축해준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다. 혹 한국 정치도 그런 함정에 빠져 있는 건 아닐까? 정작 답은 ‘20% 대 80% 사회’에 있는데, 우리는 단지 편리하고 부담이 없다는 이유로 ‘1% 대 99% 사회’ 프레임에 빠져 그곳엔 존재하지도 않는 답을 찾느라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면서 오히려 불평등을 키우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이 책은 “왜 ‘1% 대 99% 사회’ 프레임은 위험한가?”, “왜 정치는 중ㆍ하층의 민생을 외면하는가?”, “왜 ‘도덕적 우월감’이 진보를 죽이는가?”라는 3가지 질문을 던지면서 각각 ‘진영 논리’와 ‘진보 코스프레’의 오류, 개혁과 진보의 ‘의제 설정’ 오류, ‘민생 개혁’과 ‘민주화 운동’ 동일시 오류라는 답을 제시했다. 그 과정에서 주로 비난의 용도로만 쓰이는 ‘강남좌파’라는 개념이 한국 정치의 전반적인 현실이 되었으며, 그로 인한 문제는 기존 좌우 이분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걸 말하고자 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질문과 관련, 나는 국회의원의 계급 구성이 다양하지 못하며 강남 좌파가 너무 많은 현실을 바꾸기 위해 의도적인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우리가 수많은 반대에도 원래 무보수 명예직으로 출발했던 지방의원들에게 적잖은 봉급을 주게 된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던가? 물론 이는 거의 실패로 돌아간 게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계급 구성의 다양화 노력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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