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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아이나 레벤] 죽음의 키스

by Casey,Riley 2023. 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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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의 키스 (상)
아이나 레벤



       ----- 차 례 -----

       제 I 부 도로시

       ⊙ 작가소개
       제 1 장
       제 2 장
       제 3 장
       제 4 장
       제 5 장
       제 6 장
       제 7 장
       제 8 장
       제 9 장
       제 10 장
       제 11 장
       제 12 장
       제 13 장
       제 14 장
       제 15 장


        ⊙ 작가소개 

       - 1920, 죽음의 키스를 발표하면서 추리문단에 혜성처럼 등장
       - 1956년, 이 작품은 거드 오스왈드 감독, 로버트 와그너
       주연으로 유나이티드 아티스트 사에서 영화화
       - 1967년 공포 괴기 소설 로즈메리의 아기.(Rosemary's Baby,
       1967)를 발표하면서 명성을 드높임.
       - 이 작품은 로만 폴란스키 감독, 미아 패로 주연으로
       파라마운트 사에서 영화화.
       - 그밖에 저서로 공상과학소설인 <이 완전한 시대(This
        PerfectDay, 1970)>, 괴기공포소설인 <스테포드의
        아낙네들(The Stepfore Wives, 1972)> 정치공포소설인
        <브라질에서 온 소년들(The Boys from Brazil, 1976)> 심리
       멜로드라마인<인터로크(Interlock,1958)>,뮤지컬인<성가신고
       양이!(Drat!TheCat!,1965)>,공포극<베로니카의방(Veronica's
        Room, 1973)> 등이 있다.



        제 1 장 

       그의 계획은 아주 순조롭게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한 것을 
     지금 그녀가 몽땅 수포로 돌아가게 하는 중이었다. 그는 증오의 
     감정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턱이 아플 정도로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상관없다 -- 불이 꺼져 있으니까.
       그녀는 어둠 속에서 그의 가슴에 뺨을 대고 나지막이 흐느끼며 
     뜨거운 눈물과 함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여자를 밀쳐 버리고 
     싶었다.
       마침내 그는 찡그렸던 얼굴을 펴고 그녀를 감싸안으며 등을 
     어루만져 주었다. 따뜻했다 -- 아니, 그의 손이 차가운 
     것이리라. 그의 몸 전체가 차가웠다. 일이 갑자기 비틀어지거나 
     궁지에 몰리면 항상 그렇듯이 겨드랑이가 땀으로 근질거리고 
     다리가 떨렸다. 그는 잠시 떨리는 것이 멈추기를 기다리면서 
     가만히 누워 있었다.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에 담요를 덮어 
     주었다. "운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잖아." 하고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그녀는 고분고분히 그 말에 따르려고 숨을 길게 내쉬며 울음을 
     그치려 애써 보았다. 그녀는 낡은 담요를 움켜쥐고서 눈물을 
     닦았다. "그게 저......너무 오래 되었어요. 며칠, 아니 몇 주일 
     전에 알고는 있었지만 확실해질 때까지는 말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녀의 등에 얹혀 있던 그의 손이 따뜻해졌다. "잘못 안 건 
     아니지?" 비록 집에 아무도 없었지만 그는 소곤거리듯이 말했다.
       "아니에요."
       "얼마나 됐어?"
       "한 두 달쯤." 그녀가 그의 가슴에서 얼굴을 들어올리자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그는 자기를 응시하고 있는 그녀의 눈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 이젠 어떻게 하죠?" 하고 그녀가 물었다.
       "의사에게 진짜 이름을 대진 않았겠지?"
       "그러지 않았어요. 하지만 의사는 내가 거짓말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정말 무서워요......"
       "네 아버지가 아신다면......"
       그녀는 또다시 머리를 떨구고는 그의 가슴에다 대고 말하듯이 
     똑같은 질문을 되뇌었다. 그의 대답을 기다리면서 -- "우리 이젠 
     어떻게 하죠?"
       그는 자기가 말한 것을 강조도 할 겸, 한편으로는 그녀의 몸을 
     움직여 보려고 자리를 조금 움직여 보았다. 그의 가슴을 누르고 
     있는 그녀의 무게가 차츰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봐, 도리." 그가 말했다. "네가 당장 내일이라도 결혼하고 
     싶어한다는 걸 잘 알아. 나도 마찬가지야. 이 세상의 무엇보다도 
     더욱! 하나님께 맹세하겠어." 그는 조심스럽게 말하고 나서 잠시 
     멈췄다. 그에게 감싸인 그녀의 몸은 꼼짝하지 않은 채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런 식으로 결혼한다면 
     -- 내가 네 아버지를 한번 만나보지도 않은 채 일곱 달 뒤에 
     아기가 태어난다면......네 아버지가 어떻게 하리라는 것은 잘 
     알잖아."
       "아버지는 뭐라고 하실 수 없을 거예요." 하고 그녀는 
     아버지를 두둔했다. "나는 열여덟 살이 넘었어요. 열여덟이면 
     아버지 손 안에서 벗어날 수 있는 나이예요. 아버지가 뭘 
     어쩌시겠어요."
       "글쎄, 불쾌해 하신다거나 뭐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야."
       "그럼? 무슨 뜻으로 그런 거예요?" 그녀는 따지듯이 물었다.
       "돈 말이야." 하고 그는 말했다. "도리, 네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지? 네가 아버지에 대해서 뭐라고 말했지 -- 그 거룩한 
     도덕에 대해서 말야. 네 어머니가 잘못을 저지른 걸 8년이 지난 
     뒤에 알고서도 이혼을 했잖아. 너와 네 언니들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고, 네 어머니의 건강이 나빴는데도 말이야. 그런 사람이 
     네게 어떻게 할 것 같아? 지금까지 네 아버지는 너의 존재마저 
     잊고 있었어. 너는 돈 한푼 구경해 보지도 못했잖아."
       "나는 그런 것엔 상관하지 않아요." 그녀는 진지하게 말했다. 
     "당신은 내가 그런 것에 관심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하지만 나는 관심이 있어, 도리." 그는 다시 부드럽게 그녀의 
     등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나를 위해서가 아냐. 하나님께 맹세하지만, 절대로 나를 
     위해서가 아니야. 바로 너 도리를 위해서야. 우리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생각해 봤어? 먼저 우리는 학교를 그만둬야 할 거야. 
     너는 아기 때문에, 나는 일을 하기 위해서. 그렇게 되면 나는 
     무엇을 하지? 겨우 대학이나 2년 다닌 녀석이, 학위도 없이 
     무엇이 될 것 같아? 점원? 아니면 섬유공장에서 아첨꾼 노릇이나 
     하란 말이야?"
       "그런 것은 문제가 안돼요."
       "문제가 돼. 너는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몰라. 너는 
     이제 겨우 열아홉 살이고 돈에 쪼들려 보지 못했으니까, 돈이 
     없다는 것이 어떤 건지 잘 몰라. 하지만 나는 알지. 우리는 
     일년도 안되어서 서로를 원망하게 될 거야."
       "아니...... 아니에요...... 우리는 그렇지 않을 거예요!"
       "좋아, 서로 사랑해서 원망하지 않는다고 하자. 그럼, 우리는 
     어디에서 살지? 종이 커튼을 친 방에서? 일주일 내내 밤마다 
     스파게티나 먹으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너를 보고, 또 그게 죄다 
     내 잘못이라고 생각된다면 -- "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낮은 
     목소리로 끝을 맺었다. 나는 보험을 들어놓고는 차 앞으로 
     뛰어들게 될 거야."
       그녀는 다시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눈을 감고 침착한 어조로 말에 힘을 주면서 말했다. 
     "내가 아주 근사한 계획을 세웠어. 이번 여름에 뉴욕에 가서, 
     도리가 아버지에게 나를 소개하는 거야. 나는 네 아버지가 나를 
     좋아하게끔 할 수 있어. 그전에 도리가 내게 아버지가 뭐에 
     관심이 있고,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말해 주기만 하면 돼." 
     그는 잠시 멈췄다가 계속했다. "그리고 우리는 졸업하고 나서 
     결혼하는 거야. 아니면 이번 여름에 하든지. 그리고 나서 남은 
     2년을 마치고 싶으면 9월에 다시 이곳에 돌아와도 되고. 캠퍼스 
     근처에 아담한 아파트를 하나 구해서 말이야."
       그녀는 그의 가슴에서 고개를 들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그녀가 물었다.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죠?"
       "그렇게만 된다면 네가 얼마나 멋지고 아름답게 될는지, 그 
     모습을 보고 싶어."
       "알아요. 나도 다 알고 있다고요." 흐느낌으로 그녀의 
     목소리가 메었다. "하지만 나는 아기를 가졌어요. 임신 
     2개월이란 말이에요." 마치 의식하고 있지 못한 모터 소리가 
     갑자기 멈춘 듯이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아기를 떼라는 
     거예요? 유산시키라고요? 그런 뜻이에요?"
       "아니야! 그건 아니야, 도리!" 그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그녀의 얼굴을 자기 얼굴 가까이로 끌어당겼다. "아니란 
     말이야!"
       "그럼, 날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우리 결혼해요, 예? 
     다른 것을 생각할 여지가 없잖아요!"
       "도리, 좋은 게 있어." 그가 말했다.
       그는 그녀의 몸이 빳빳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약간 겁먹은 듯이 작은 목소리로, "안돼요!" 하고는 
     머리를 세게 양옆으로 저었다.
       "들어봐, 도리!" 그는 그녀의 어깨를 잡으며 호소하듯이 
     말했다. "수술하라는 게 아니야. 그런 것이 아니라고." 그는 
     손으로 그녀의 턱을 잡고 뺨을 누르면서 입을 막았다.
       "들어봐!" 그는 그녀의 거친 목소리가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 "학교에 허미 고드슨이란 녀석이 있는데, 그 애 
     삼촌이 대학가 34번지에 약국을 하나 가지고 있어. 허미가 
     거기에서 약을 파는데, 그 애한테 말하면 약을 가져올 수 있을 
     거야."
       그는 그녀의 입에서 손을 떼었다. 그녀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래도 모르겠어, 베이비? 일단은 한번 해보자고. 아주 
     중요한 일이야!"
       "약......" 그녀는 마치 처음 듣는 말처럼 어리둥절한 듯이 
     중얼거렸다.
       "한번 해보는 거야. 틀림없이 잘될 거야."
       그녀는 절망적인 혼돈에 빠져서 머리를 양옆으로 흔들었다. 
     "오, 하나님! 난 모르겠어요......"
       그는 손으로 그녀를 감쌌다. "베이비, 나는 너를 사랑해. 네게 
     해가 될 일은 하지 않아."
       그녀는 힘없이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맥없이 주저앉았다. 
     "모르겠어요......난 모르겠어......"
       "틀림없이 잘될 거야......" 그는 손으로 부드럽게 
     쓰다듬으면서, "우리들의 아담한 아파트......그 빌어먹을 주인 
     아줌마가 영화보러 가는 것을 기다리지 않아도 되고......" 하고 
     말했다.
       이윽고 그녀가 말을 꺼냈다. "어떻게...... 어떻게 그것이 
     잘될지 알아요? 만일 잘못되면 어떡하지요?"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만일, 일이 잘못되면 -- " 그는 
     그녀의 이마, 뺨, 입술 할 것 없이 키스를 퍼부었다. "만일 일이 
     잘못되면 네 아버지와 그 킹쉽 코퍼(銅) 주식회사는 아예 
     단념하고 우린 당장 결혼하는 거야. 맹세하겠어, 베이비."
       그는 그녀가 '베이비'라고 불러주는 것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가 그녀를 '베이비'라고 부르면서 팔로 감싸주면 그는 
     거의 그녀를 마음대로 다룰 수 있었다. 그러한 점에 대해서, 
     그것은 아마도 그녀가 아버지에게 따뜻한 사랑을 받아보지 
     못해서 그러는 게 아닐까 하고 그는 생각해 보았다.

       그가 따뜻하고 나지막하게 말하면서 부드럽게 그녀에게 
     키스하자, 그녀는 다시 침착하고 편안해졌다.
       그들은 담배 한 개비를 나누어 피웠다. 먼저 도로시는 그의 
     입에 담배를 물려주었다가 그것을 빼내어 자기 입으로 가져갔다. 
     한 모금 빨 때마다 핑크빛 불꽃에 언뜻언뜻 깃털 같은 금발과 큰 
     갈색 눈이 비쳤다.
       그녀는 타고 있는 담배의 끝을 남자 쪽으로 돌렸다가 이리저리 
     앞뒤로 움직였다. 담배는 어둠 속에서 선명한 오렌지색 선과 
     원을 그리며 움직였다. "아마 당신은 이런 식으로 어느 누구든지 
     유혹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그의 눈앞에서 천천히 담배를 흔들었다. 그 빛 사이로 그녀의 
     가냘픈 손이 움직였다. "당신은 내 노예예요." 하고 그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대고 속삭였다. "당신은 내 말에 무조건 복종해야 
     해요!" 그녀의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그는 그만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담배를 다 피우고 나자, 그는 손목시계에서 반짝이는 
     바늘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그녀 앞에서 손을 흔들면서 힘주어 
     말했다. "옷을 입어야 되겠어. 벌써 10시 20분인데, 11시까지는 
     기숙사에 돌아가야 하잖아."


        제 2 장 

       그는 매사추세츠 주 폴 리버 교외의 메나세트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폴 리버 섬유공장에서 아첨꾼 노릇을 
     했으며, 어머니는 생활이 궁핍해서 삯바늘질을 해야 했다. 
     그들은 몇 대 전에 프랑스 인의 피가 섞인 영국계였는데, 
     포르투갈 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에서 살았다. 그의 아버지는 
     그런 곳에서 산다고 해서 멸시를 받을 이유는 없다고 했으나, 
     어머니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어머니는 어려서 결혼한 모질고 
     불행한 여자였으나, 남편이 아첨꾼 노릇이나 해가며 살아가는 걸 
     벗어날 날이 오겠지 하고 늘 기대하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는 자기 외모에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일요일에 손님들이 찾아와서 그를 보고 -- 그의 금발과 맑고 
     푸른 눈에 감탄하곤 했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그런 
     손님들이 못마땅한 듯이 머리를 저으면서 항상 저만치 떨어져 
     있었다. 그의 부모는 자주 다투었는데, 그것은 대개 어머니가 
     아들에게 옷을 해입히는 데 돈과 시간을 너무 많이 들이는 
     탓에서 비롯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이웃 아이들과 놀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에 학교에서 처음 얼마 동안은 불안하고 서먹서먹했다. 그는 
     갑자기 많은 아이들 사이에 특징 없는 존재로 내던져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그의 깔끔한 옷과, 운동장에서 흙이 묻는 
     것을 피하려는 지나친 그의 태도를 놀려댔다. 어느 날 그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자기를 놀리는 아이들의 주동자에게 
     달려들어 신발로 때려주었다. 그 바람에 순식간에 격렬한 싸움이 
     시작되어, 결국 그는 그 애 위에 올라타서 머리를 붙잡고 
     땅바닥에 쾅쾅 박아버리게 되었다. 선생님이 뛰어와서야 싸움은 
     끝났다. 그 뒤로는 모든 일이 잘되었다. 결국 그는 그 
     아이하고도 친구가 되었다.
       그의 뛰어난 학교성적에 어머니는 무척 만족해 했으며, 
     아버지도 마지못해 칭찬을 해주곤 했다. 그의 성적은, 
     매력적이지는 않지만 꽤나 똑똑한 여자애 옆에 앉게 될 때까지는 
     계속 좋았다. 그 소녀와는 화장실에서 몇 번 어설픈 키스를 
     했으며, 시험칠 때는 시험지를 가리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의 학창시절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행복한 때였고, 
     여자애들은 잘생기고 매력적인 그를 무척 따랐다. 선생님들도 
     그를 좋아했다. 그는 예의바르고 태도가 좋아서 선생님이 중요한 
     것을 말할 때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게다가, 남자애들에게는 
     자기가 여자애들이나 선생님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제스처만 
     써주면 단박에 그를 좋아하곤 했다. 집에서 그는 신과 같은 
     존재였다. 마침내 아버지도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입에 침이 
     마르도록 그를 칭찬하기 시작했다.
       그가 데이트할 나이가 되었을 때는 그 도시에서 가장 좋은 
     가문의 딸들과 어울렸으며, 부모님은 다시 그의 옷에 들어가는 
     엄청난 돈 때문에 또다시 다투게 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버지도 그냥 냉담하게 몇 마디 내뱉을 뿐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부유한 집 딸과 결혼하면 좋겠다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물론 농담이긴 했지만, 그래도 어머니는 자주 그 말을 
     되풀이하곤 했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반 때에는 반장을 맡았고 3등으로 
     졸업했다. 특히 수학과 과학에서는 전교 최고점수를 받았다. 
     학교연감에는 '가장 춤을 잘 추는 학생', '가장 인기 있는 
     학생', '가장 촉망되는 학생'으로 기재되었다. 그의 부모님은 
     그를 위해 파티를 열어주었고, 그 파티에는 가문 좋은 집 
     아이들이 많이 참석했다.
       2주일 뒤에 그는 영장을 받았다.
       기초훈련을 받던 처음 며칠 동안은 그는 자기의 과거의 영광만 
     생각하고 빈둥거리며 보냈다. 하지만 현실은 그런 망상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는 처음으로 학교다닐 때보다도 수천 배나 
     더 지독한 군대의 비인격적인 맛을 체험했던 것이다. 만일, 
     여기에서 하사관에게 대들어 구두로 그를 후려갈긴다면 아마 
     그의 남은 생애는 감옥에서 썩어야 할 것이다. 그는 자기를 
     보병에 편성시킨 그 눈먼 군대 체계를 저주했다. 그는 그곳에서 
     만화책이나 읽는 난잡한 멍청이들과 휩쓸려 지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는 동안 그도 다른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만화책을 
     읽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가져온 <안나 카레리나>에 몰두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PX에서 맥주를 사기도 하고, 
     장교들에 대해 조잡스럽고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조작해 내면서 
     사람들을 사귀었다. 그는 군대에서 자기가 배워야 할 것들과 
     해야 할 일들을 모두 경멸했다.
       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태평양을 횡단하여 이송되는 동안 내내 
     배멀미를 했다. 그는 그것이 배가 오르락내리락하기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되었지만, 거의 죽는 줄 알았다.
       아직도 일부분은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는 어느 섬에서, 그는 
     다른 부대원들과 떨어져서 적막한 정글 한가운데를 절망적으로 
     헤매게 되었다. 겁에 질려 멍청히 서 있는데 갑자기 총탄 하나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그의 귀를 스쳐 지나갔다. 새의 비명이 
     허공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그는 몸을 낮추고는, 이제는 
     죽는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덤불 아래로 굴러 들어갔다.
       새소리가 잠잠해지고 다시 주위는 고요해졌다. 그는 머리 위 
     나무 사이의 빛나는 햇빛 속에서 저격병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몸이 식은땀으로 축축해졌다가 싸늘하게 식었다. 다리가 
     너무 떨려서 다리 사이에 있는 잎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그 
     일본군이 들을까 걱정되었다. 손에 들고 있는 총의 무게가 1톤은 
     되는 것 같았다.
       마침내 그가 나무에서 간신히 6미터 떨어져 나가서 위를 
     올려다보니, 나뭇가지 사이에서 웅크리고 앉아 있는 형체가 
     보였다. 그는 총을 들어 겨냥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새들의 
     소리가 갑자기 요란해졌다. 나무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그 형체가 손을 허우적거리며 땅으로 떨어지는 것이었다. 
     나뭇잎과 나뭇가지로 괴상망측하게 위장한 작은 몸집의 
     황인종이었는데, 그는 섬뜩한 말들을 읊어대고 있었다.
       그는 일본군에게 조심스럽게 총을 들이대고서 일어섰다. 
     일본군도 그처럼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그 노란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고, 무릎은 떨고 있었다. 사실 그는 일본군 앞에 서 
     있는 것보다, 점점 짙어져 가는 어둠이 더욱 두려웠다.
       그는 경멸하듯이 일본군의 초라한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제 
     그의 다리는 떨리지 않았고, 식은땀도 가셨다. 총도 처음부터 
     그의 팔에 달려 있는 것처럼 거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그 총으로 꼼짝않고 자기 앞에 서서 떨고 있는 한 인간의 
     우스꽝스런 얼굴을 겨냥했다. 일본군의 중얼거림이 점점 간절한 
     애원조로 바뀌었다. 그 일본군은 누런 손을 모아서 싹싹 비는 
     것이었다.
       아주 천천히 그는 방아쇠를 당겼다. 일본군은 주춤하더니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어깨 안에서 비정한 총 개머리판이 
     반동으로 인해 뒤쪽으로 튀었다. 그는 일본군의 가슴에 생긴 
     검붉은 구멍이 점점 커져가는 것을 빤히 지켜보았다. 그 작은 
     사람은 정글 바닥에 웅크리고 있다가 그냥 나동그라졌다. 새의 
     비명은 마치 허공에 던져진 한 무더기의 색종이처럼 넓게 
     울려퍼졌다.
       죽어 넘어진 적을 잠시 내려다본 뒤 그는 돌아서서 그 자리를 
     떠났다. 그의 발걸음은 마치 졸업장을 받고 나서 당당하게 
     단상을 걸어가는 듯이 가볍고 자신만만했다.

       그는 1947년 1월에 명예제대를 했다. 동성 훈장과 명예 상이 
     기장 및 오른쪽 갈비뼈 위에 가벼운 포탄 파편 자국을 받고서 
     제대하게 되었다. 집에 돌아와서야 그는 자기가 출정중에 
     아버지가 자동차 사고로 돌아가신 것을 알았다.
       그는 메나세트에서 몇몇 군데 일자리를 추천받긴 했으나 
     보수가 작아 거절했다. 아버지의 보험금으로 어머니는 충분히 
     살아갈 수 있었으나 어머니는 다시 삯바느질을 시작했다. 그래서 
     두어 달 정도 마을 사람들로부터 칭찬의 말을 듣고, 
     연방정부로부터 주당 20달러의 수당을 받게 되어 그는 뉴욕으로 
     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어머니는 그를 말렸으나, 이제 몇 달 만 
     있으면 스물한 살이 넘는 그로서는 자기의 길을 찾아야 했다. 
     몇몇 이웃들이 -- 특히 정부에서 장학금을 주겠다는 데에도 그가 
     대학에 가지 않겠다고 하자 사람들은 모두 놀라움을 나타냈다. 
     그는 대학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성공에 접근하는 데 오히려 
     시간 낭비만 될 뿐이라고 생각했다.
       뉴욕에서 그의 첫 직장은 출판사였다. 그곳 인사부장은 착실한 
     사람에게는 밝은 미래가 있다고 보장했다. 그러나 2주일 내내 
     그는 단지 책 발송 일만 맡아보았다.
       다음 직장은 백화점이었는데, 거기서 그는 남성의류 
     판매부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가 한 달씩이나 남아 
     있었던 이유는 단지 옷을 20% 싸게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뉴욕으로 온 지 어느덧 다섯 달이 지나는 8월말 무렵, 그는 여섯 
     번째 직업을 갖고 있었다. 그는 혼자 있을 때보다도 대중 속에서 
     혼자가 된다는 것이 더욱 두렵고 불안했다. 게다가 성공할 
     가능성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는 가구가 딸린 방에 앉아서 
     곰곰이 자기 자신에 대해 분석해 보았다. 그가 여태까지 여섯 
     가지 직업 가운데서 무엇이 적성에 맞는지 알아내지 못한 지금, 
     다음에 또 여섯 가지 직업을 갖는다고 해도 그것을 찾게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는 만년필을 꺼내어 자기가 바라는 것들을 
     성격, 능력, 재능 등에 관해 객관적인 목록을 만들어 보았다.
       9월에 그는 제대병 규정의 혜택으로 연극학교에 들어갔다. 
     처음에 선생님들은 그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그는 잘생기고 
     총명했으며, 뉴잉글랜드 지방의 억양이 약간 남아 있긴 했지만 
     발음도 정확한 편이었다. 그도 역시 처음에는 큰 기대를 걸었다. 
     그런데 배우가 되려면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굉장히 많은 노력과 
     상당한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사진을 보고 
     감정을 넣어 표정을 지어봐." 하고 말하는 선생님들의 지시를 
     다른 아이들은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지만, 그는 가볍게 
     받아들였다. 그가 단 하나 좋아했던 과목은 발성법이었다. 그는 
     자기와 관련시켜서 '액센트'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것을 들을 
     때마다 진절머리를 내곤 했다. 다른 사람이 그런 말투를 사용할 
     때도 언제나 같은 기분이 느껴지곤 했다.
       그는 스물두 번째 생일이 있는 12월에 우아하고 매력적인 한 
     미망인을 만났다. 그녀는 40대였으며, 돈도 꽤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5번가와 55번가의 모퉁이에서 처음 만났는데, 두 사람 
     모두 그것이 매우 낭만적인 만남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버스를 피하려고 인도로 뒷걸음치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 그의 
     품으로 넘어졌다. 그녀는 매우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는 5번가 버스 운전사들이 경솔하고 운전 재주를 부린다고 
     유머러스하게 말을 했다. 그들은 함께 길을 내려가다가 어느 
     술집에 들어가서 그가 마티니를 한잔 샀다. 그 뒤 몇 주일 동안 
     그들은 조그만 이스트 사이드 예술극장에 가기도 하고, 서너 
     명의 웨이터들에게 팁도 주어야 하는 호화로운 레스토랑에서 
     식사도 했다. 그는 자기 돈이 나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많은 
     수표를 지불했다.
       그들의 교제는 몇 달간 계속되었으며 그 동안 그는 연극학교엔 
     나가지 않았다. 그런데 조금도 서운하지 않았다. 오후에는 
     그녀를 쫓아다니며 쇼핑을 했으며, 그 중에서 몇 가지는 그에게 
     사주는 것이었다. 처음에 그는 그녀와의 나이 차이 때문에 
     그녀와 함께 있는 것이 남에게 보여지는 게 창피했지만, 곧 그런 
     것을 무시해 버렸다. 그러나 그는 다른 이유에서 그 관계에 
     불만을 갖게 되었다. 첫째, 그녀의 얼굴은 분명히 
     매력적이었지만 그녀의 육체는 그렇지 못했다. 둘째, 이건 가장 
     중요한 사실인데, 그녀가 있는 아파트 엘리베이터 보이에게서 
     자기가 여섯 달마다 정기적으로 바뀌는 젊은 제비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그는 우습게도 자기 위치가 장래성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와 만난 지 다섯 달이 거의 지났을 
     무렵, 그녀와 함께 보내지 않은 밤에 그가 어떻게 보냈는가에 
     대해 그녀가 별로 관심을 나타내지 않게 되기 시작했을 때, 그는 
     어머니가 몹시 아프기 때문에 집에 돌아가야 한다는 핑계를 대고 
     그녀에게서 빠져나왔다.
       그는 자기 옷에서 양복점의 상표를 떼고, 파테크 필립 
     손목시계를 어쩔 수 없이 저당잡힌 뒤에 집으로 돌아갔다. 
     6월초에 그는 집에서 빈둥거리며 그 과부가 젊지도 예쁘지도 
     않았다고 투덜거리면서, 좀더 장래성 있는 관계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계획을 세우기 시작할 때였다. 그는 마침내 대학에 
     진학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제대병 규정에 의해 장학금을 받을 
     순 있었지만 생활비가 너무 들어 그 해 여름에 건어물 가게에서 
     일을 했다. 그는 좋은 학교에 들어가고 싶었다. 그는 아이오와 
     주 블루 리버에 있는 스토다드 대학에 지원했다. 그곳은 
     중서부의 부유한 집 자제들을 위한 컨트리 클럽 같은 곳이었다. 
     그는 고등학교 성적이 매우 좋았기 때문에 별 어려움 없이 그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는 입학한 해에 어떤 귀여운 여학생을 만났는데, 그녀는 
     농기구를 취급하는 국제적인 회사의 부사장 딸이었으며 
     4학년이었다. 그들은 함께 다녔고, 함께 수업도 빠지고, 함께 
     잠도 잤다. 5월이 되었을 때, 그녀는 집에 돌아가서 약혼하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그가 그것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가 2학년이 되던 해에 그는 도로시 킹쉽을 만나게 되었다.


        제 3 장 

       그는 허미 고드슨에게서 회백색의 캡슐 두 개를 받고 5달러를 
     주었다. 8시에 그는 그들이 늘 만나던, 미술대학과 약학대학 
     건물 사이의 넓은 잔디밭 가운데에 있는 벤치에서 도로시를 
     만났다. 그는 하얀 콘크리트 길에서 잔디밭으로 걸어가면서, 
     도로시가 4월의 쌀쌀한 날씨에 어깨에 검은 코트를 걸치고 무릎 
     위에 손을 올려놓은 채 꼿꼿하게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저만치 
     떨어져 있는 가로등이 그녀의 얼굴 위로 나뭇잎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는 그녀 옆에 앉아서 그녀의 뺨에 키스를 했다. 그녀도 
     가볍게 그에게 응했다. 미술대학 건물의 불켜진 사각 창문에서 
     여러 대의 피아노 소리가 섞여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잠시 뒤에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것을 가지고 왔어."
       한 쌍의 남녀가 잔디밭 쪽으로 건너오다가 벤치에 그들이 있는 
     것을 보고는 다시 하얀 콘크리트 길로 돌아갔다.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다른 애들이 모두 차지해 버렸어."
       그는 주머니에서 약봉지를 꺼내어 도로시의 손 안에 
     쥐어주었다. 손가락으로 봉지 안에 든 캡슐을 느낄 수 있었다. 
     "두 개를 한꺼번에 먹어야 된대. 약간 열이 날 수도 있고, 
     어쩌면 메스꺼울지도 모른다는군."
       그녀는 코트 주머니에 그 약봉지를 집어넣었다. "성분이 
     뭐라고 해요?" 그녀가 물었다.
       "키니네와 또 다른 것들이 섞였겠지. 나도 확실히는 
     모르겠어." 그는 말을 멈추었다. "몸에 해롭지는 않을 거야."
       그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그녀가 미술대학 건물 너머의 어떤 
     곳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그녀가 
     응시하는 저쪽 깜박거리는 붉은빛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블루 
     리버에서 가장 커다란 시청 건물의 옥상에 세워진 라디오 지방 
     통신탑이었다 -- 그곳엔 결혼 허가 사무실이 있었다. 그녀가 
     그것 때문에 그 빛을 바라보는 건지, 아니면 단지 캄캄한 하늘에 
     빨간빛이 깜박거려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만져보았다. 차가웠다. "걱정하지마, 도리. 모든 게 다 잘될 
     거야."
       그들은 아무 말 않고 잠시 앉아 있었다.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밤에 극장에 가고 싶어요. 시내에서 조안 폰타인 
     영화를 한대요."
       "미안해, 스페인 어 숙제가 산더미같이 쌓여 있어."
       "그럼, 학생회관으로 가요. 내가 도와줄 테니까."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나를 유혹하려는 거 아니야?"
       그는 캠퍼스를 가로질러 그녀와 함께 돌아왔다. 낮은 현대식 
     여학생 기숙사 건너편에서 그들은 작별 키스를 했다. "내일 
     수업시간에 봐." 그가 말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그에게 키스했다. 그녀는 떨고 있었다. "이봐, 베이비, 걱정할 
     것 없어. 만일 그게 듣지 않으면 결혼하면 되니까. 사랑은 모든 
     것을 뛰어넘는다는 말 들어보지 못했어?" 그녀는 그가 좀더 말을 
     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나는 도리를 매우 사랑해." 그는 그 
     말을 하고는 그녀에게 다시 키스했다. 그들이 입술을 떼었을 때 
     그녀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안녕, 베이비."
       그는 자기 방에 돌아왔지만 스페인 어 숙제를 할 수가 없었다. 
     테이블에 팔꿈치를 괴고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는 그 약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오, 하나님, 효력이 있어야 할 텐데! 효력이 
     있어야 해 !
       그러나 허미 고드슨은, "나는 확실한 보증은 못 해. 네 여자 
     친구가 벌써 두 달이 넘었다면......" 하고 말했었다.
       그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는 벌떡 일어나 
     장농으로 가서는 아랫서랍을 열었다. 반듯이 접어놓은 잠옷 
     밑에서 그는 표지가 구릿빛으로 반짝거리는 팜플렛 두 장을 
     꺼냈다.
       그는 도로시를 처음 만났을 때 학생처의 학적부를 통해서 
     그녀가 단지 킹쉽 코퍼 주식회사의 킹쉽 가(家)일 뿐만이 
     아니라, 그 회사의 회장 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그 
     회사의 뉴욕 사무실로 사업문제인 것처럼 편지를 썼다. 그는 
     마치 킹쉽 코퍼에 투자를 생각하고 있는 사람처럼 쓰고는 (사실 
     완전히 거짓은 아니었지만) 그 회사의 주식에 대해 소개된 
     팜플렛을 보내달라고 했다.
       2주일 뒤 그는 도로시가 좋아하는 <레베카>를 읽으면서 꽤나 
     그 책이 좋은 체하고 있을 때, 그리고 그녀는 소중한 
     남자친구에게 사람의 마음을 표시해 주는 커다란 마름모 무늬가 
     있는 양말을 뜨고 있을 때 팜플렛이 도착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봉투를 뜯었다. 그것은 정말 호화찬란한 내용이었다 -- '킹쉽 
     코퍼와 킹쉽 합금'에 대한 기술적인 정보와, 자기들이 소위 
     말하는 '평화와 전쟁의 선구자, 킹쉽 코퍼' 라는 내용에 수많은 
     사진들이 곁들여 있었다 -- 광산, 제련소, 농축기, 전로(轉爐), 
     굴착기, 압연기, 막대분쇄기와 관(管)분쇄기에 관한 
     사진들이었다. 그는 그것을 읽고 또 읽어서 모든 문장을 외웠다. 
     그는 마치 연애편지를 받은 여자처럼 입술에 미소를 머금으며 
     그것을 읽어나갔다.
       그러나 오늘밤에는 그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미시건주 
     랜더즈에 있는 광산. 이 공장의 일년 산출량은......"
       그는 도로시와의 문제를 모두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화가 치밀어오르는 것이었다. 그는 언젠가 꼭 한 번 그녀를 
     -- 결혼하겠다는 값싼 약속으로 그의 방에 데려왔었다. 사실 
     도로시는 살며시 눈을 감고는 아무 반항 없이 오히려 그를 
     기다렸었다. 그는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것은 정말이지 그녀의 
     잘못이야! 그녀의 잘못이라고!
       그는 팜플렛으로 주의를 기울이려고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잠시 뒤, 그는 그것을 던져버리고 다시 머리를 감싸쥐었다. 만일 
     약이 듣지 않는다면...... 학교를 그만두어야 하나? 그녀를 
     데리고? 바보 같은 짓이다. 그녀는 그의 메나세트 집의 주소를 
     알고 있다. 그녀가 그를 찾아내고 싶지 않다고 해도, 그녀의 
     아버지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법적소송은 없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킹쉽은 여러 가지로 
     그에게 많은 고통을 줄 것이다. 그는 빈틈없고 도덕적으로 
     완고한 돈많은 사람에 대해 상상해 보았다. 레오 킹쉽은, "이 
     젊은이를 좀 봐. 아무 쓸모가 없어. 부모로서 네게 
     경고하겠다......" 그렇다면 그에게 남는 일은 뭘까? 책 발송?
       만일 그가 그녀와 결혼한다면 -- 그러면 그녀는 아기를 가질 
     것이고 그들은 킹쉽에게서 한푼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발송 일이나 하겠지 -- 이번에는 처자식을 거느린 채. 오, 
     하나님 !
       그 약이 효력이 있어야 할 텐데. 그렇게만 된다면 모든 것이 
     제대로 될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면 그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하얀 성냥갑에는 도로시 킹쉽이라고 구릿빛 스탬프가 찍혀 
     있었다. 매년 크리스마스 때면 킹쉽 코퍼는 간부직원, 고객, 
     친구들에게 죄다 성냥을 나눠주었다. 그녀는 서너 번 성냥을 
     그어 겨우 불을 켜고는 담배에 붙였다. 바람이 부는 것처럼 
     불꽃이 팔락거렸다. 그녀는 마음을 가다듬으려고 등을 기대어 
     앉았으나, 열린 욕실 문으로 보이는 세면대 위의 하얀 약봉지와, 
     그 옆에 놓인 물 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엘렌과 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날 아침에 편지가 왔었다 -- 날씨가 참 
     좋아졌어......" -- 등등 크리스마스 이후의 일들과 자기가 
     다투었던 이야기들을 쓴 거였다. 엘렌에게 털어놓고 나서 그녀의 
     충고를 들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레오 킹쉽이 이혼했을 때 도로시는 다섯 살, 엘렌은 여섯 살, 
     그 위의 언니 메리온은 열 살이었다. 어머니와 헤어진 세 자매는 
     처음에는 이혼으로 인해서, 그리고 일년 뒤에는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서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메리온이 누구보다 가장 
     깊은 상처를 받았었다. 동생들이 자람에 따라 그녀는 그 일을 
     분명하게 회상하면서, 그리고 원망하면서 동생들에게 자세하게 
     말해 주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냉정한 성격에 대해서 어느 정도 
     과장해서 말했다. 나이가 들수록 그녀는 따로 떨어져 혼자 
     집안에만 틀어박혀 지내는 때가 많았다.
       그러나 도로시와 엘렌은 냉정한 아버지에게서 받을 수 없는 
     애정을 서로에게 주면서, 아버지의 후계자로서의 권리와 그에 
     따라 나타나는 일들을 담백하게 이야기하곤 했다. 두 자매는 
     같은 학교에 다녔고, 서클도 같았으며, 춤추러도 함께 다녔다. 
     (아버지가 허락한 시간까지 집에 돌아오는 것에 신경쓰면서.) 
     엘렌이 가는 곳에는 늘 도로시가 따라다녔다.
       엘렌은 위스콘신 주의 컬드웰 시에 있는 컬드웰 대학에 
     들어갔으며, 도로시도 다음 해에 그녀를 따라 그곳에 가기로 
     했다. 그런데 엘렌이 도로시도 어른이 되어야 하고, 혼자서 일을 
     해나가야 한다며 반대했다. 아버지는 자신에게 있어서나 다른 
     사람에게 있어서 자립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엘렌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래서 도로시는 컬드웰에서 수백 마일이나 떨어져 
     있는 스토다드로 보내졌고, 주말에나 서로 만나게 되었다.
       몇 번의 왕래가 있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도로시가 대학 
     일년을 보내고 나서는 완전히 혼자서 해결해 나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서로 찾아가는 일이 뜸해졌다. 그러다가 마침내 
     지난번 크리스마스 때는 다투기까지 했다. 별것 아닌 것으로 
     말다툼이 시작되었다 -- "블라우스를 빌리려면 내게 물어봤어야 
     하잖아! -- 게다가 도로시가 방학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던 터라 
     일이 크게 벌어진 것이었다. 서로 학교에 돌아가서도 편지가 
     점점 뜸해졌고, 단순한 이야기만이 오갔다......
       그래도 전화는 여전했다. 도로시는 전화기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즉시 전화로 엘렌에게 연락할 수 있었다......그러나 
     하지 않았다. 그녀가 먼저 지고 들어가서 딱지를 맞을지 모르는 
     일을 왜 해야 한단 말인가? 그녀는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껐다. 
     이제는 어느 정도 진정되었다. 망설일 필요가 없다. 그녀는 약을 
     먹고 싶었다. 만일 효과가 있으면 다행이고, 그렇지 않으면 
     결혼하면 되는 거다.
       그녀의 아버지가 불같이 화를 낼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생각만 
     해도 정말 신나는 일이었다. 어쨌든 그녀는 아버지의 돈은 
     조금도 바라지 않았다.
       그녀는 현관으로 가서 문을 잠갔다. 그리고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야릇한 스릴과 약간은 감상적인 기분을 느꼈다.
       욕실로 들어가 그녀는 세면대 구석에 있는 약봉지를 집어들어 
     손바닥에 약을 쏟았다. 가느다랗고 기다란 보석처럼 반짝거리는 
     회백색의 캡슐이었다. 약봉지를 휴지통에 버리고 나자, 번쩍 
     어떤 생각이 그녀의 머리에 떠올랐다 -- "만일 내가 이 약을 
     먹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그들은 내일이라도 결혼해야 할 것이다! 여름까지 기다릴 것도 
     없이 -- 아니, 2년 뒤나 하게 될 졸업을 기다릴 것도 없이 내일 
     밤에라도 결혼을 해야 할 것이다 !
       그러나 그것은 옳지 못한 생각이다. 그녀는 약속을 했다 -- 
     아기를 없애겠다고. 하지만 내일은......
       그녀는 컵을 들고서 입에 약을 넣고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제 4 장 

       스토다드 대학의 새로 지은 건물에 있는 강의실은 한쪽 벽이 
     깨끗한 알루미늄 틀로 된 유리창으로 되어 있었다. 교단을 향해 
     여덟 줄로 자리가 배열되어 있었다. 한 줄에 회색빛의 금속 
     의자가 열 개씩 놓여 있었으며, 그것은 필기하기 편하게 오른쪽 
     팔 있는 곳이 안쪽으로 구부러져 있었다.
       그는 뒤쪽의 창문에서 두 번째 자리에 앉았다. 창문 쪽 자리인 
     그의 왼쪽 자리는 비어 있었다 -- 그녀를 위한 자리였다. 그것은 
     아침 첫시간이었으며, 이번 학기 중 유일하게 함께 듣는 매일 
     있는 사회과학 강의였다. 교수의 목소리가 햇빛 속에서 
     윙윙거렸다.
       무엇보다도 오늘만은 그녀는 제시간에 와 있어야 했다. 그녀는 
     그가 불안해서 몸이 얼어붙을 지경이라는 것을 모른단 말인가? 
     제기랄! 완전히 홀가분해지는 건지, 최악의 사태가 되는 건지 
     그는 더 이상 고민할 수가 없었다. 시계를 보았다. 9시 8분. 
     제기랄!
       그는 신경질적으로 열쇠고리를 만지작거리면서 자리에서 몸을 
     움직였다. 그는 앞에 앉은 여학생의 등을 쳐다보고서 블라우스의 
     물방울 무늬를 세기 시작했다.
       강의실의 옆문이 조용히 열렸다. 그는 고개를 들어 
     돌아다보았다.
       그녀는 겁먹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고, 
     입술은 마치 페인트를 칠한 것 같았다. 눈 아래에는 둥그렇게 
     회색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녀는 문을 열자마자 그를 
     쳐다보고는 희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오, 하나님! 그는 손가락에 걸려 있는 열쇠고리를 쳐다보면서 
     꼼짝하지 않았다. 그녀가 그의 뒤로 돌아와서는 왼쪽 자리에 
     앉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들 사이에 있는 통로에 그녀의 
     책이 놓여지고, 종이에 연필 긁히는 소리, 그리고 마침내는 
     메모지에서 종이 찢는 소리까지 다 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겁먹은 눈을 크게 뜨고는 그를 지켜보았다.
       그는 종이를 받아들고는 무릎 위에서 펴보았다.
       '열이 심하게 나더니 그 약을 토했어요. 그밖에는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나서 눈을 뜨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돌아다보았다. 그녀의 입술이 초조해 하면서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도 미소를 보내려고 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는 다시 손에 든 쪽지로 눈을 돌렸다. 쪽지를 반으로 
     접었다. 그리고 다시 반, 반 -- 더 이상 접혀지지 않을 때까지 
     -- 그리고는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런 뒤 손을 바로 하고 교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참 뒤에야 그는 도로시에게 안심시키는 미소를 보낼 수 
     있었다. 그는 소리를 내지 않고, "걱정하지 마." 하고 
     입술만으로 말했다.

       9시 55분에 종이 울리고, 그들은 다가오는 시험과 많은 숙제, 
     바람맞은 데이트 등에 대해 떠벌이면서 웃고 장난치는 다른 
     아이들에 섞여서 강의실을 나왔다. 그리고 사람들이 많이 있는 
     길을 함께 걷다가 콘크리트 벽 건물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곳에서 
     멈춰섰다.
       도로시의 뺨이 차츰 제 빛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녀가 
     재빨리 말을 꺼냈다. "괜찮을 거예요. 잘될 거라고 믿어요. 
     학교를 그만둘 필요는 없어요. 정부에서 돈을 좀더 타낼 수 있지 
     않을까요? 아내가 있으면 -- "
       "한 달에 105달러쯤 -- " 그는 부루퉁하게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 정도의 돈으로도 얼마든지 잘 살아가고 
     있어요...... 트레일러 캠프 (이동주택 주차지)에 있는 사람도 
     있고요. 우린 잘 해낼 거예요."
       그는 잔디에 책을 내려놓았다. 중요한 것은 시간을 버는 
     것이다. 생각할 시간을 -- 그는 자신의 무릎이 떨리기 시작할까 
     봐 두려웠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어깨에다 손을 얹었다. 
     "힘내, 아무 걱정 말고." 그는 숨을 내쉬었다. "금요일 오후에 
     시청 건물에 가자 -- "
       "금요일에?"
       "베이비, 오늘이 화요일이야. 사흘이라야 별 차이가 없잖아."
       "난 오늘 갔으면 좋겠어요."
       그는 그녀의 코트 깃을 만지작거렸다. "도리, 그럴 순 없어. 
     현실적으로 생각해 봐. 해결해야 할 게 너무 많이 있단 말이야. 
     우선 우리는 시험부터 치러야 해. 그 뒤에 해도 늦지 않아. 
     그리고 만일 우리가 금요일에 결혼한다면 주말에는 신혼여행을 
     갈 수 있을 거야. 나는 뉴 워싱턴 하우스에 예약해 놓겠어."
       그녀는 못마땅한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사흘이라야 뭐 별 차이가 없잖아?"
       "그래요, 당신 말이 맞아요."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좋았어, 우리 베이비."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나...... 나는 그것이 우리가 원하던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아요. 하지만...... 괜찮지요? 그렇죠?"
       "글쎄, 너는 어떻게 생각해? 사실, 돈이란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야. 나는 단지 너를 위해서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라고."
       그녀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가 시계를 보았다. "10시에 수업이 있잖아?"
       "스페인어 뿐이에요. 가지 않아도 돼요."
       "그러지 마. 오전 수업을 빠지려면 좀더 그럴 듯한 이유가 
     있어야지." 그녀는 그의 손을 꼬집었다.
       "8시에 만나." 하고 그가 말했다. "그 벤치 알지!"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발길을 옮겼다. "참, 도리......"
       "왜요?"
       "언니에게는 말하지 않았겠지, 응?"
       "엘렌에게? 물론."
       "그래, 말하지 않는 게 좋겠어. 우리가 결혼할 때까지는."
       "사실은 말하려고 했어요. 우리처럼 친한 사이에 말하지 
     않는다는 게 마음에 걸렸거든요."
       "지난 2년 동안 언니가 도리에게 지독하게 굴었다며......?"
       "그렇지 않아요."
       "아니, 네가 한 말을 그대로 했을 뿐이야. 어쨌든 그녀는 네 
     아버지에게 말할 가능성이 있어. 그러면 아버지는 우리들 사이를 
     끊어놓으려고 할 거야."
       "아버지가 어떻게 우리 사이를 끊을 수 있다는 거예요?"
       "자세히는 모르겠어. 어쨌든 아버지가 우리 사이를 끊어놓으려 
     할 거라고 생각지 않아?"
       "너무 마음대로 말하는군요."
       "아무튼 이 다음에 그녀에게 전화하기로 하자. 그런 다음,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리고."
       "좋아요." 마침내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밝은 햇살이 비치는 
     오솔길을 금발을 반짝거리며 걸어갔다. 그는 그녀가 건물 모퉁이 
     뒤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책을 
     들고 반대방향으로 사라졌다. 마치 어디선가 빵빵거리는 
     차소리에 쫓겨 걸어가는 듯이. 그것은 정글 속에서 들었던 
     새소리 같았다.
       별 특별한 이유 없이 그는 나머지 수업을 모두 빼먹었다. 그는 
     시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가, 파랗다기보다는 오히려 진흙으로 
     부연 강으로 내려갔다. 모튼 스트리트 다리의 까만 난간에 
     기대어 그는 물속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웠다.
       바로 이것이다. 그는 결국 딜레마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만 
     것이다. 마치 저 깊은 물이 다리의 기둥에 부딪쳐서 소용돌이 
     치는 것처럼. 그녀와 결혼하느냐, 아니면 그녀를 버리느냐. 
     아내와 자식, 그리고 무일푼. 게다가 그녀의 아버지에게 쫓겨서 
     사회에서 매장당할 것이다. "당신은 나를 모르실 겁니다. 나는 
     레오 킹쉽이라고 합니다. 당신이 고용하신 그 젊은이에 대해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 젊은이는 당신의 딸과...... 
     당신이 꼭 아셔야 된다고 생각해서......" 그리고 나면 무엇을 
     할 것인가? 집 이외는 발붙일 곳이 없게 될 것이다. 그는 
     어머니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오랫동안 다른 집 아이들을 
     무시하면서 어머니는 자기 만족의 자존심을 지켜왔다. 하지만 
     어머니는 여름만이 아니라 일년 내내 건어물상에서 점원으로 
     일하는 아들을 보게 될 것이다. 아니, 어쩌면 보잘것없는 
     공장에서 일하는 모습을! 그의 아버지는 어머니의 기대에 못 
     미쳤으며, 아버지는 어머니가 추구하는 사랑을 냉혹하게 
     경멸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에게도 또한 그런 운명이 
     닥쳐오는 것일까? 사람들은 그의 뒤에서 수군거리겠지. 오, 
     주여! 왜 그 약이 그녀에게 작용하지 못했습니까 ?
       그가 그녀를 수술받게끔 설득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가 지금부터 결혼할 때까지 
     '베이비'하면서 어르고 겁주더라도 그녀는 결혼하겠다는 마음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어디서 돈을 구할 수는 없을까? 만일 어떤 
     일이 벌어진다면 -- 그녀가 죽는다면 수술을 주선한 사람은 
     자기이기 때문에 자기가 혐의를 받게 될 것이다. 그는 그녀의 
     아버지를 자기편으로 하기 위해서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될지 
     몰랐다. 그녀가 죽는다고 해서 그에게 이득이 될 것은 없었다.
       그런 식 말고 다르게 그녀가 죽는다면...... 까만 난간 쪽을 
     향해 있는 화살 표시의 뾰족한 부분이 가슴을 찌르는 것 같았다. 
     그는 밖으로 쏟아져 나오는 마음을 억누르기 위해 손톱으로 
     난간을 톡톡 치면서 여러 가지 계획을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긁힌 자국으로 겹겹이 칠한 단면이 보였다. 검은색, 오렌지색, 
     검은색, 오렌지색, 검은색, 오렌지색, 다시 검은색, 오렌지색. 
     그것을 보고 있노라니 지질학 책에서 보았던 암석 스펙트럼 
     사진이 생각났다. 이미 지나간 시대의 기록들......

       죽음.

       잠시 뒤, 그는 책을 들고 천천히 다리에서 내려왔다. 차들이 
     그를 향해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질주해 왔다가 지나쳐 갔다.
       그는 강 근처에 있는 어두컴컴한 음식점으로 들어가 햄 
     샌드위치와 커피를 주문했다. 테이블 한구석 자리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고 커피를 마시면서 그는 수첩과 만년필을 꺼냈다.
       먼저 떠오른 것은 그가 제대할 때 가지고 나온 콜트 45구경 
     권총이었다. 총알은 별 어려움 없이 손에 넣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얻는다고 해도 별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것은 우연한 
     사고나 자살처럼 보여야 한다. 권총은 너무나 복잡한 문제가 
     많이 뒤따르게 된다.
       그는 독약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어디서 그런 걸 구하지? 허미 고드슨에게서? 천만에. 
     아니면, 약대 건물에서? 약품보관실에 들어가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는 그럴 듯한 독약을 구하기 위해 
     도서관에 가서 여러 서적을 들춰봐야 할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우연한 사고나 자살처럼 보여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경찰 혐의자의 명단에 그가 제일 첫번째 인물로 
     오르게 될 테니까.
       그는 그에 필요한 것들을 알아보려고 좀더 세부적인 사항들을 
     적어보았다. 오늘은 화요일이다. 결혼을 금요일 이후로는 미룰 
     수 없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녀는 엘렌을 부를 것이다. 
     금요일이 마지막이다. 따라서 매우 신속하고도 세심한 계획이 
     필요하다.
       그는 자기가 적어놓은 것들을 보았다.

       1. 권총
       2. 어떤 독약?
       b) 획득 방법?
       c) 사용 방법?
       d) (1) 사고처럼 위장?
       (2) 자살처럼 위장?

       물론 그는 그것을 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단지 
     추측뿐이었다. 그는 좀더 구체적으로 연구해야 할 것이다. 
     머릿속에서의 연습 --
       그가 음식점을 나와 다시 시내로 들어갈 때 그의 걸음걸이는 
     여유 있고 확실하고도 안정되어 있었다.


        제 5 장 

       그는 3시에 학교로 돌아와서, 바로 도서관으로 향했다. 
     도서목록에서 그는 찾아보고 싶은 책 여섯 권의 제목을 
     알아냈다. 그 중 네 권은 독물학의 일반적인 사항에 대한 
     것이고, 나머지 두 권은 독약에 대해서 단원별로 되어 있는 
     범죄조사에 관한 지침서였다. 사서 담당이 자기에게 책을 
     찾아주게 하는 것보다는, 자기가 프런트에 기록을 한 뒤 서고 
     안으로 들어가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그는 한 번도 서고에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3층으로 된 
     서가에는 온갖 책들로 가득차 있으며, 철제 사다리가 곳곳에 
     걸쳐져 있었다. 그의 목록 가운데 한 권은 이미 대출되어 
     있었다. 그는 쉽게 나머지를 책꽂이에서 뽑아볼 수 있었다. 그는 
     한쪽 벽에 붙어 있는 작은 책상에 앉아 불을 켜고 메모지와 펜을 
     준비한 뒤 읽어 내려갔다.
       한 시간쯤 지났을 때, 그는 약품보관실에서 찾을 수 있을 만한 
     독약 다섯 종류를 알아냈다. 그것은 모두 시간이나 증세에 
     있어서 치명적이었고, 그가 이미 강가에서 걸어오며 세운 계획의 
     윤곽에 꼭 들어맞는 것이었다.
       그는 도서관을 나와 캠퍼스를 건너 그가 묵고 있는 집 쪽으로 
     향했다. 그가 두 블럭을 지났을 때, 의상실 창문에 커다랗게 
     '세일'이라고 쓰인 표지가 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중 
     하나에는 '마지막 세일'이라는 말과 함께 모래시계가 그려져 
     있었다.
       그는 잠시 그 모래시계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돌아서서 
     학교로 돌아갔다.

       그는 대학 서점으로 갔다. 게시판에 붙여진 책 목록을 본 
     뒤에, 점원에게 약대생들이 보는 실험지침서인 <조제기술>을 
     달라고 했다. "학기가 벌써 시작되었는데 너무 늦었군요." 하고 
     점원이 말하고는 그 지침서를 들고 뒤에서 돌아나왔다. 그것은 
     선명한 초록색 표지로 된 크고 얇은 책이었다. "책을 
     잃어버렸나요?"
       "아니, 누가 훔쳐갔습니다."
       "오, 저런, 그 밖의 것은?"
       "그것 뿐이에요. 그리고 봉투 좀 주세요."
       "크기는?"
       "규격봉투로요. 편지를 쓸 겁니다."
       점원이 책 사이에 하얀 봉투 묶음을 넣었다. "1달러 50센트, 
     이건 25센트. 세금 포함 총 1달러 79센트예요."
       약대 건물은 담쟁이덩굴로 덮인 3층짜리로, 스토다드 
     대학에서는 꽤 오래 된 건물 중 하나였다. 앞쪽에는 현관으로 
     이어지는 넓은 돌계단이 있었다. 그리고 건물 양쪽에는 지하실로 
     끝나는 기다란 복도를 향해 층계들이 나 있었는데, 그곳에 바로 
     약품보관실이 있었다. 약품보관실 문에는 둥그런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이 자물쇠의 열쇠는 약학대학의 모든 교수와 
     대학의 직원들, 그리고 감독 없이 실험할 수 있는 약대 고학년 
     학생들이 가지고 있었다. 실험용 재료가 필요한 학과에서는 
     반드시 보관실을 운영해야 한다. 그것은 캠퍼스 내의 모든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는 현관에 들어가서는 복도를 가로질러 로비로 향했다. 두 
     팀이 브리지 카드 게임을 열심히 하고 있었으며, 또 한쪽에서는 
     빙 둘러앉아서 책도 읽고 이야기도 하고 있었다. 그가 들어가자 
     몇몇 학생들이 그를 흘끗흘끗 쳐다보았다. 그는 곧바로 구석에 
     있는 긴 가운 서랍으로 가서 그 위의 선반에 책을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코르덴 재킷을 벗어 못에 걸었다. 그는 책 속에서 봉투 
     뭉치를 꺼내어 세 장을 빼어 접어서는 뒷주머니에 넣었다. 
     나머지는 다시 책에 끼워넣고 실험지침서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그는 아래 계단으로 가서 지하실 복도로 향했다. 계단 벽 
     오른쪽이 남자 화장실이었다. 그는 그곳에 들어가서 화장실 문 
     아래로 안이 비어 있는지를 확인한 뒤 바닥에 그 지침서를 
     떨어뜨렸다. 그리고는 몇 번 밟았다가 다시 타일이 깔린 바닥 
     저쪽으로 걷어찼다. 그가 책을 집어들었을 때는 새 것 같은 
     빳빳한 기가 없어졌다. 그는 그것을 세면대 선반에 놓았다.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면서 그는 셔츠 소매 단추를 끄르고는 소매를 팔 
     중간까지 걷어올렸다. 그는 칼라를 느슨하게 풀고 넥타이도 약간 
     늦췄다. 그런 모습으로 팔 아래에 지침서를 끼고 걸어나와 
     복도로 돌아섰다.
       약품보관실로 향하는 문은 중간 계단과 복도 한쪽 끝 사이의 
     중간쯤에 있었다.그 너머 몇 발자국 떨어진 벽에는 게시판이 
     있었다. 그는 복도 끝을 향해 등을 보인채 비스듬하게 서 있었기 
     때문에 옆눈으로 계단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왼쪽 팔에 
     그지침서를 끼었다. 오른쪽 팔은 손가락에 열쇠고리를 낀 채 
     옆구리에 갖다댔다.

       한 여학생이 뒤에서 문을 닫으며 약품보관실에서 나왔다. 
     그녀는 낡아서 누렇게 된 지침서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복도를 내려가는 것을 지켜보다가 돌아서서 층계를 오르기 
     시작했다.
       몇 사람이 그의 뒤에 있는 문을 통해서 들어왔다. 그들은 
     이야기를 하면서 그의 곁을 지나갔다. 남학생 세 명이었다. 
     그들은 복도 아래로 곧장 걸어가서는 다른쪽 끝에 있는 문으로 
     나갔다. 그는 계속 게시판을 보고 있었다.
       5시 종이 울리자 몇 분 동안 복도가 학생들로 붐볐다. 그러나 
     곧 잠잠해지고는 다시 그 혼자만이 있게 되었다. 게시판에는 
     취리히 대학에서 있게 될 여름 학기에 대한 설명 책자가 걸려 
     있었다. 그는 그것을 읽기 시작했다.
       어떤 대머리 남자가 층계 쪽에서 불쑥 나타났다. 그는 책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나, 그가 다가가고 있는 방향과 열쇠고리로 
     향하는 손의 움직임으로 보아 약품보관실로 가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그는 교수인 듯했다. 가까이 다가오는 그 남자를 
     등지고 선 채 그는 취리히 대학의 팜플렛 페이지를 넘겼다. 그는 
     열쇠가 딸그락거리는 소리와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었다. 1분 
     뒤에 다시 문이 열렸다 닫혔고, 그 남자의 발자국 소리가 점점 
     멀어지더니 층계를 오르는 규칙적인 리듬으로 바뀌었다.
       그는 다시 처음의 자세로 들어가 담배에 불을 붙여 한 모금 빤 
     뒤 바닥에 떨어뜨려 발로 밟았다. 한 여학생이 그쪽으로 오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실험지침서가 들려 있었다. 갈색의 
     긴머리에 뿔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그녀는 실험복 주머니에서 
     구리 열쇠를 꺼냈다.
       그는 그 지침서를 누르고 있던 겨드랑이에서 힘을 빼어 
     왼손으로 떨어뜨려 녹색 표지가 똑똑히 보이게 했다. 그는 
     다가오고 있는 여학생을 보지 않은 채 취리히 대학 팜플렛을 
     손가락으로 한번 치고는 보관실 문 쪽으로 향했다. 그는 열쇠가 
     주머니 안에 있는 것처럼 열쇠고리를 만지작거렸다. 마침내 그가 
     열쇠 뭉치를 꺼냈을 때, 그 여학생은 이미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관심은 여러 개의 열쇠 -- 그 중에서도 특히 한 개의 
     열쇠를 찾고 있었다. 그녀가 자물쇠에 열쇠를 집어넣고 돌려 
     문을 조금 열고 그에게 미소를 보낼 때에야 비로소 그는 그녀의 
     존재를 인식한 것처럼, "아, 고마워요." 하고 말했다. 그는 
     그녀에게 다가가 문을 좀더 열면서 다른 손으론 열쇠를 주머니에 
     넣었다. 그는 그녀의 뒤를 따라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그곳은 각종 병과 상자, 그리고 이상하게 생긴 기구들로 
     가득찬 선반과 테이블이 죽 놓여 있는 작은 방이었다. 여학생이 
     벽을 더듬어서 스위치를 누르자 고색창연한 그 방 분위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형광등이 껌벅껌벅거리더니 불이 들어왔다. 
     그녀는 방 한쪽으로 가서 테이블 위에다 자기 지침서를 
     펼쳐놓았다. "애버슨 반이에요?" 하고 그녀가 물었다.
       그는 반대편으로 걸어가서 그녀 쪽을 등지고 선 채 병들이 
     놓여 있는 벽을 바라보았다. "그래요."
       유리와 금속이 살짝 맞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그분 팔은 좀 
     어때요?"
       "그저 그래요." 하고 그는 말했다. 그는 그 병들을 조금씩 
     밀면서 만지작거렸다. 그래야만 그녀에게 의심을 받지 않을 것 
     같았다.
       "그것은 정말 미친 짓 아니에요?" 그녀가 말했다. "그 분은 
     안경만 없으면 장님이나 마찬가지라면서요?" 그녀는 다시 
     잠잠해졌다.
       병마다 까만 글씨가 쓰인 흰 라벨이 붙어 있었다. 그 중 몇 
     개에는 빨간 글씨로 '극약'이라고 쓰인 라벨이 덧붙여 있었다. 
     그는 줄지어 있는 병들을 재빨리 훑어보면서 빨간 라벨이 붙은 
     것들을 골랐다. 그가 적은 것은 주머니에 있었으나, 그 이름들은 
     마치 투명한 막에 비친 것처럼 그의 눈앞에서 가물거렸다.
       그는 한 가지를 찾았다. 그 병은 그가 서 있는 데에서 2피트도 
     안되는, 눈 높이보다 약간 높은 곳에 놓여 있었다. 백색 비소 -- 
     AsO -- 극약. 하얀 가루가 반쯤 차 있었다. 그는 그쪽으로 손을 
     뻗다가 멈췄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곁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천칭 접시에다 유리컵으로 노란색 가루를 쏟아붓고 있었다. 그는 
     벽 쪽으로 다시 돌아서서 테이블에 지침서를 펼쳐놓았다. 
     아무곳이나 펼쳐서는 도표와 지시들을 훑어보았다.
       마침내 그녀가 일을 다 끝낸 모양이었다. 천칭을 치우고 
     서랍을 닫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지침서를 
     좀더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안녕." 그녀가 말했다.
       "안녕."
       문이 열렸다가 닫혔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혼자뿐이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손수건과 봉투를 꺼냈다. 오른손을 
     손수건으로 감싸고 선반에서 비소 병을 꺼내어 테이블에 놓고는 
     마개를 열었다. 그것은 마치 밀가루 같았다. 그는 찻숟가락으로 
     한 스푼 덜어내어 봉투에 담았다. 가루가 조금 날렸다. 그는 
     봉투를 꼭꼭 접어서는 다른 봉투로 다시 쌌다. 그리고 나서 
     마개를 다시 닫아 병을 제자리에 올려놓고는 서랍들과 상자에 
     붙은 라벨을 읽으며 천천히 방을 돌아보고서 세 번째 봉투를 
     열었다.
       몇 분 안되어서 그가 찾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타원형의 
     거품처럼 반짝이는 빈 젤라틴 캡슐 상자였다. 그는 그 중에서 
     여섯 개를 꺼냈다. 그리고 캡슐이 부서지지 않도록 살며시 세 
     번째 봉투에 집어넣었다. 그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다 찾아내자, 
     테이블에서 지침서를 집어들고는 불을 끈 뒤 방을 나왔다.
       그는 책과 재킷을 찾아가지고 캠퍼스를 나왔다. 그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는 모든 과정을 치밀하게 계획하고, 신속하고도 
     신중을 기해 첫단계를 실행한 것이다. 물론 그것은 아직 
     임시계획일 뿐이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은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는 다음 단계를 빨리 확정지어야 한다. 
     경찰은 우연히 도리가 비소를 먹었다고 믿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자살처럼 -- 너무 분명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는 자살처럼 
     보여야만 한다. 유서나 그 밖의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 
     만일 그것이 자살이 아니라고 의심하여 조사가 시작된다면, 
     약품보관실에 자기를 들어가게 해준 그 여학생이 자기를 
     알아보게 된다면......
       그는 왼쪽 바지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부서지기 쉬운 캡슐을 
     의식하면서 천천히 걸었다.
       그는 8시에 도로시를 만났다. 그들은 조안 폰타인 영화가 
     아직도 상영되고 있는 시내로 갔다.
       지난밤에 도로시가 가고 싶어했었지 -- 그때 그녀의 세계는 
     그가 준 약처럼 회색빛이었다. 그러나 오늘밤 -- 오늘밤은 모든 
     것이 밝게 빛났다. 상쾌한 바람이 썩은 나뭇잎들을 휩쓸어가듯이 
     결혼약속이 그녀의 문제들을 모두 쓸어가 버렸다. 그녀가 임신한 
     것에 대한 찜찜한 문제뿐만 아니라 그녀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모든 문제들, 곧 고독감과 불안감까지도 -- 다만, 서둘러 
     한 결혼만으로도 질색할 아버지가 그 이유에 대해서 알게 되는 
     날만이 꺼림칙하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늘밤에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는 항상 아버지의 굽힐 줄 모르는 
     도덕성을 증오했으며, 은밀하게 그것을 부인해 왔었다. 그런데 
     이제는 안전한 남편의 품속에서 당당하게 부인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아버지는 그것에 대해 몹시 불쾌하게 생각하겠지만, 
     그녀는 마음속으로 어느 정도는 그런 데 대한 쾌감을 맛보고 
     있는 터였다.
       그녀는 트레일러 캠프에서의 훈훈하고 행복한 생활을 생각해 
     보았고, 아기가 태어나면 더욱 재미있고 행복할 거라고 상상의 
     나래를 펴 보았다. 그녀는 어떤 영화보다도 더 아름다운 
     현실로부터 자기를 분리시켜 놓는 그 영화를 계속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한편, 그는 지난밤에는 영화를 보고 싶지 않았었다. 그는 
     영화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특히 과장된 감정에 치우친 영화는 
     더욱 싫어했다. 그러나 편안하게 어둠 속에서 팔로 도로시를 
     안은 채 손을 그녀의 앞가슴에 가볍게 얹고 있는 오늘밤은 
     그녀가 임신했다고 말했던 일요일 밤 이후 처음으로 안락함을 
     느꼈다.
       영원한 신비에 대한 대답이 그 비비 꼬인 구성 속에 숨어 
     있다고 해도 그는 영화에 관심이 없었다. 그는 단지 그것을 즐길 
     뿐이었다.

       그는 집에 돌아와서 캡슐을 만들었다.
       접혀진 종이에서 하얀 가루를 꺼내어 작은 젤라틴 캡슐 컵에 
     넣고 나서 그 위에 나머지 약간 큰 캡슐 컵을 씌웠다. 하나는 
     부서뜨렸고, 또 하나는 손의 땀으로 녹아버려서 두 개의 캡슐을 
     완성하는 데는 거의 한 시간이나 걸렸다.
       그는 일을 마치고 나서 부서진 캡슐들과 남은 것, 그리고 
     가루를 욕실 변기 속에 버렸다. 또한, 비소 가루를 털어 낸 
     종이와 봉투를 갈기갈기 찢어서 역시 변기 속에다 버렸다. 
     그리고 나서 두 개의 비소 캡슐을 새 봉투에 넣어 장농 
     아랫서랍의 잠옷과 킹쉽 코퍼 팜플렛 아래에 숨기고는 얼굴에 
     슬그머니 미소를 머금었다.
       그가 그날 오후에 읽었던 책에는 비소의 치명적인 분량이 
     '0.1g에서 0.5g까지'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는 두 개의 캡슐 
     안에는 약 5g 정도가 들어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


        제 6 장 

       수요일에 그는 모든 수업을 빼먹지 않고 들어갔으며 평상시와 
     똑같이 행동했다. 그러나 그는 마침 잠수기 안에서 잠수부가 
     낯선 세계에 갇혀 있는 것처럼 그를 둘러싼 환경과 생활에 
     구속되어 있지는 않았다. 그는 도로시를 속여서 유언장을 쓰게 
     하는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았다. 만일 그것이 
     안된다면 그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처럼 보이게 할 다른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이러한 일에 골몰하는 동안, 그는 자기의 
     계획을 실행하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그는 그녀를 죽일 것이다. 
     그는 독약을 손에 넣었으며, 이미 사용법도 알고 있다. 단지 한 
     가지 문제만이 남아 있어서, 지금 그 해결책을 궁리중이었다. 
     오후 내내 그는 큰소리나 분필 긁히는 소리로 순간순간 흠칫 
     놀라서는 친구들을 둘러보았다. 브라우닝의 시 구절이나 칸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그들의 눈매를 보고 그는 갑자기 
     돌차기놀이를 하고 있는 어른들이 떠올랐다.
       그날 마지막 강의는 스페인 어였으며, 그 시간의 반은 
     예고없이 시험을 보았다. 그가 가장 자신 없는 과목이었으므로, 
     그는 강의시간에 배웠던 화려한 문체로 된 스페인 어 소설의 한 
     면을 해석해 내느라고 쩔쩔매야 했다.
       지금 이대로 실행해도 되는 건지, 아니면 하루쯤 더 
     심사숙고한 뒤에 실행하는 게 마음 편할지 그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시험을 보고 있는 도중에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것은 실패할 위험도, 도로시의 의심을 받을 위험도 없는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한 계획이었다. 그의 마음은 온통 그 
     문제로 가득차 있어서 그 시간이 끝날 때까지 겨우 시험지의 
     반밖에 메꾸지 못했다. 그런 간단한 시험에서 낙제 점수를 
     받는다고 해도 지금의 그로서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다음날 
     아침 10시면 도로시는 유언장을 쓰게 될 것이다.

       그날 저녁 그의 주인집 아주머니는 이스턴 스타 모임에 
     나갔다. 그는 도로시를 그의 방으로 데리고 왔다. 두 시간 동안 
     함께 보내면서 그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 포근하게 잘 대해 
     주었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녀를 아주 즐겁게 해주었는데, 
     이번이 그녀에게는 마지막이 될 거라는 사실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도로시는 여느때와 달리 그가 점잖고 헌신적인 것은 결혼식이 
     가까워졌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신자는 아니었지만, 
     결혼이란 성스러운 것이 뒤따른다고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
       나중에 그들은 캠퍼스 근처의 조그만 레스토랑으로 갔다. 
     그곳은 조용했지만, 학생들이 많이 가는 곳은 아니었다. 나이가 
     지긋한 주인은 파랗고 하얀 주름 종이들과 스토다드 패넌트들로 
     창문을 장식하는 등의 노력과는 대조적으로, 시끄럽고 부수길 
     좋아하는 대학생들에게 성을 잘 내는 편이었다.
       파랗게 칠해진 벽 구석에 앉아서 치즈 햄버거와 초콜릿을 
     주문한 뒤, 도로시는 커다란 테이블 옆에 놓인 새로운 책장 
     모양에 대해 계속 재잘거렸다. 그는 그녀의 말이 그치기를 
     기다리면서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도리, 내가 주었던 사진들을 아직도 가지고 있어? 내 
     사진도?" 그가 갑자기 물었다.
       "그럼, 물론이지요."
       "한 이틀만 돌려주지 않겠어? 어머니에게 복사를 한 장 해서 
     보내 드려야겠어. 그러면 사진관에서 다시 뽑는 것보다 싸게 들 
     거야."
       그녀는 옆자리에 접어두었던 코트 주머니에서 초록색 지갑을 
     꺼내면서 물었다."어머니에게 우리들에 대해서 말했어요?"
       "아니, 하지 않았어."
       "왜요?"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글쎄, 네가 네 가족에게 말할 
     때까지는 나도 어머니에게 말하지 않을 거야. 당분간 비밀로 
     해두자고." 하며 미소지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겠지?"
       "예."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지갑에서 스냅 사진을 몇 장 
     꺼냈다.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첫번째 사진을 보았다. 도로시와 
     두 명의 여자들이었다 -- 그녀의 언니들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흘끗 쳐다보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녀는 그 사진을 
     내밀었다. "가운데가 엘렌, 이 끝이 메리온이에요."
       그는 세 명의 여자들이 캐딜락 앞에 서 있는 것을 
     들여다보았다. 뒤에서 햇빛이 비쳐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지긴 
     했지만, 그들이 서로 닮았다는 것은 알아볼 수 있었다. 모두들 
     큰 눈에 광대뼈가 나와 있었다. 엘렌의 머리는 도로시의 금발과 
     메리온의 검은 머리 중간 정도였다. "누가 제일 예쁘지?" 하고 
     그가 물었다. "도리 다음으로 말이야."
       "엘렌이지요." 도로시가 말했다. "나보다 예뻐요. 메리온도 
     예뻐질 수 있을 거예요. 머리를 이렇게 한다면 -- " 그녀는 
     머리카락을 뒤로 치켜올리면서 이맛살을 찡그렸다. "메리온 
     언니는 지적이에요. 기억하지요?"
       "오, 프루스트 팬이라고 했지?"
       그녀는 다음 사진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것은 그녀 아버지 
     것이었다. "우 -- " 하고 그가 웅얼거리자, 둘 다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이것은 내 약혼자." 하며 그의 
     사진을 내밀었다.
       그는 자기 계획이 정확하게 들어맞아 가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 사진을 보았다. "나는 몰랐는데 -- " 그는 턱을 어루만지면서 
     나직하게 말했다. "나 몰래 살짝 바람을 피웠군."
       "하지만 잘 생겼잖아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그래, 아주 잘 생겼어." 그는 만족스럽게 미소지으며 사진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거 잃어버리면 안돼요." 그녀는 진정으로 주의를 주었다.
       "알았어." 그는 눈을 반짝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옆의 벽 
     뒤쪽으로 주크박스 (자동 전축)가 있었다. "음악이 -- " 하며 
     그는 동전 하나를 꺼내어 구멍에 집어넣었다. 그는 노래 
     제목들을 읽으면서 두 줄로 나 있는 빨간 단추들을 손가락으로 
     더듬어갔다. 그는 도로시가 좋아하는 노래 중의 하나인 
     '매혹적인 밤'이란 단추에 잠시 멈추었으나, 그의 눈은 좀더 
     아래쪽에 있는 '짙은 안개 위에서'라는 곡으로 옮겨갔다. 잠시 
     머뭇거린 뒤에 그는 그 노래의 단추를 눌렀다. 주크박스가 
     도로시 얼굴 위로 핑크빛 광채를 내뿜으며 붉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시계를 보고 나서 몸을 뒤로 기대며 황홀한 듯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아, 생각만 해도......" 그녀는 미소를 머금고 
     중얼거렸다. "다음주에는 기숙사에 돌아가려고 허둥거리지 
     않아도 되겠지." 주크박스에서 기타 소리가 흘러나왔다. 
     "트레일러 캠프에 신청서를 제출하지 않아도 될까요?"
       "오늘 오후에 가봤어." 그가 말했다. "2주일 정도 걸릴 것 
     같아. 우선 내 방에서 지내지 뭐. 내가 주인 아주머니에게 말해 
     둘 테니까." 그는 내프킨 종이를 꺼내어 접힌 선을 따라 조금씩 
     찢기 시작했다.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눈으로 온통 뒤덮인
       짙은 안개 위에서
       나는 진정으로 사랑했던 연인을 잃었네.
       너무 늦게 구혼을 했기에......

       "포크송이군요." 도로시가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불꽃이 
     구릿빛으로 찍힌 성냥갑 위에서 반짝거렸다.
       "도리가 너무 귀하게 자란 것이 문제야."

       지금은 구혼이 기쁨이지만
       헤어지는 슬픔도 있겠지.
       나를 배신하는 연인은
       어떤 도둑보다도 잔인한 사람......

       "혈액 검사는 받았어요?"
       "그럼, 오늘 아침에도 했는걸."
       "나는 받지 않아도 될까요?"
       "그럴 거야."
       "달력에서 봤는데, 아이오와 주에선 '혈액검사 요함'이라고 
     쓰여 있었어요. 그것은 두 사람 모두를 말하는 게 아닐까요?"
       "내가 물어봤는데 너는 할 필요가 없대." 그는 조심스럽게 
     손가락으로 내프킨을 집었다.

       그 도둑은 당신을 강탈해서
       당신의 모든 것을 앗아간다네.
       하지만 배신한 연인은
       당신을 무덤으로 이끌어갈 것이라오......

       "너무 늦었어요......"
       "이 노래가 끝날 때까지만 괜찮지? 나는 이 노래를 
     좋아하잖아." 그는 내프킨을 펼쳤다. 여기저기 대칭으로 찢겨진 
     것이 마치 정교한 레이스 같았다. 그는 감탄을 금치 못하면서 
     테이블에 자기 작품을 펼쳐보였다.

       그 무덤이 당신을 멸망시켜
       먼지로 변하게 할 것이라오.
       남자들은 백 명 중 한 사람도 믿지 않아도
       가엾은 여자들은 믿어버린다오.

       "우리 여자들이 무엇을 참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동정 -- 진정한 의미의 동정. 가슴이 아프군."
       방으로 돌아와 그는 재떨이에 사진을 올려놓고, 아래 
     가장자리에 성냥불을 갖다댔다. 그것은 앨범 사진인데 괜찮게 
     나온 것이었다. 그는 태우고 싶진 않았다. 그러나 그 사진 
     아래에 '내 사랑, 도리에게'라고 쓰여 있었기 때문에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 7 장 

       그녀는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9시 수업에 지각을 했다. 그는 
     뒷줄에 앉아서 학생들이 자리에 와 앉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밖에는 비가 오고 있었고, 창문이 있는 벽 아래로 물이 스며들고 
     있었다. 교수가 교단에 올라가 정부의 도시경영형태에 대해 
     강의를 시작할 때까지도 그의 왼쪽 자리는 여전히 비어 있었다.
       그는 앞에다 노트를 펼치고 그 위에 펜을 올려놓고는, 
     무릎에다 <플로레스 네그라스의 집> 이라는 스페인어 소설을 
     펼쳐놓았다. 갑자기 가슴이 덜컹 내려앉으면서 어떤 생각이 
     뇌리를 스쳐갔다. 만일 오늘 약을 먹지 않는다면? 내일이 
     데드라인인 금요일이다.
       이 말은 기회는 오늘밤 밖에 없다는 것을 뜻한다. 
     오늘밤까지는 어떻게 해서든 유서를 손에 넣어야 한다. 그런데 
     만일 그녀가 약을 먹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9시 10분이 되어서야 그녀가 나타났다. 숨을 헐떡이면서 한 
     손엔 책, 또 한 손엔 비옷을 걸치고 문으로 들어오면서 그를 
     보고 활짝 미소지었다. 그녀는 발뒤꿈치를 들고 흘끗 걸어 
     들어와 그의 뒤로 와서는 비옷을 의자 등받이에 걸쳐 놓고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노트와 작은 연습장을 꺼내 놓고, 그들 
     사이의 통로에 다른 책들을 내려놓으면서도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잠시 뒤, 그녀는 그의 무릎에 펼쳐진 책을 보고는 물어 보듯이 
     눈썹을 치켜떴다. 그는 그녀가 제목을 볼 수 있도록 페이지 
     가운데에 손가락을 넣은 채 책을 들어보였다. 그리고는 다시 
     그것을 펼치고서 펜으로 그 페이지와 노트를 번갈아 가리키며 
     얼마나 많이 해석해야 하는지를 암시해 주었다. 도로시는 
     안됐다는 듯이 머리를 저었다. 그는 그녀에게 교수와 그녀의 
     노트를 가리켰다 -- 그녀가 필기를 해야 나중에 그가 그것을 
     베낄 수 있을 테니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15분 동안 그는 소설에 나오는 단어들을 중얼거리고는 천천히 
     노트에 쓰기 시작했다. 그는 도로시를 살짝 쳐다보았다. 그녀는 
     수업에 열중해 있었다. 그는 노트 한 페이지에서 약 2인치쯤 
     귀퉁이를 찢어내어 한 면을 낙서로 가득채웠다. 거미줄처럼 
     단어들을 서로 겹쳐쓰고, 지그재그로 줄을 그었다. 그는 그 
     종이를 뒤집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소설의 단어를 짚은 채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불안하게 발을 
     떨었다.
       도로시가 그 모습을 알아차리고는 물어보듯이 고개를 돌렸다. 
     그는 그녀를 보고 걱정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나서, 
     손가락으로 잠깐 기다리라는 신호를 했다. 그는 소설에서 
     베껴놓은 말들을 조그만 종이쪽지에 적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그 종이쪽지를 건네주었다.'Traducci·n, por 
     favor'라고 첫머리에 쓰여 있었다. 미안하지만 해석을 
     부탁한다는 뜻이다.

       Querido,
       Espero que me perdonares por
       la infelicidad que causar·. No
       hay ninguna otro cosa que puedo
       hacer.

       그녀는 약간 이상하다는 듯이 흘끗 그를 쳐다보았다. 그것은 
     너무나 쉬운 문장이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연필을 들고 종이를 뒤집었다. 그러나 뒷면은 
     낙서로 가득차 있었다. 그녀는 자기 연습장을 한 장 뜯어서 그 
     위에 썼다.
       그녀는 그것을 해석하여 그에게 주었다. 그는 그것을 읽고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하고 그가 스페인어로 
     속삭였다. 그는 앞으로 다가 앉아서 그것을 자기 노트에 적었다. 
     도로시는 그가 스페인 어로 적어보낸 쪽지를 구겨서 바닥에 
     버렸다. 그는 곁눈질로 그것이 떨어진 곳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 주위에는 다른 종이조각들과 담배꽁초들이 떨어져 있었다. 
     오늘 수업이 끝나면 그것을 모두 치워서 태워버리리라. 그는 
     비스듬히 기울어진 그녀의 글씨를 읽었다.

       사랑하는 당신
       나 때문에 당신이 불행하게 되어 정말 미안해요.
       나는 이렇게 밖에 도리가 없었어요.

       그는 그 종이쪽지를 노트 안 표지에 조심스럽게 끼워넣고 
     표지를 덮었다. 그리고 소설책을 덮어서 노트 위에 올려놓았다. 
     도로시가 고개를 돌려 그의 책을 한번 보고는 다시 쳐다보았다. 
     그녀는 다 끝냈느냐고 물어보듯이 눈짓을 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저녁에는 서로 만나지 않았다. 도로시는 머리를 감고 
     세트를 말고 나서, 뉴욕 워싱턴 하우스에서 보내게 될 신혼여행 
     짐을 꾸릴 준비를 했다. 그런데 8시 반경에 책상 위의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도리. 일이 생겼어. 중요한 일이야."
       "무슨 일인데요?"
       "지금 당장 만나야겠어."
       "안돼요. 나갈 수가 없어요. 방금 머리를 감았단 말이에요."
       "도리, 아주 중요한 일이야."
       "전화로 말하면 안돼요?"
       "안돼. 직접 만나야 해. 30분 뒤에 벤치에서 봐."
       "밖에 가랑비가 오고 있어요. 아래층 라운지까지 올 수 
     없겠어요?"
       "안돼. 어젯밤 우리가 치즈를 먹던 곳 알지? 기디언이었던가? 
     아무튼 거기서 만나, 9시에."
       "왜 라운지로 올 수 없다는 건지 모르겠네요."
       "베이비, 미안하지만......"
       "내 일과 관계있는 일이에요?"
       "기디언에서 모두 말해 줄께."
       "정말이에요?"
       "글쎄,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모든 게 잘될 거야. 
     모두 말해 준다니까. 9시까지 꼭 그곳으로 나와야 해."
       "좋아요."
       10분 전 9시, 그는 장농 아랫서랍을 열고 파자마 밑에서 봉투 
     두 개를 꺼냈다. 하나는 우표가 붙은 채 봉해져 있었고, 
     주소까지 적혀 있었다.

       위스콘신 주 컬드웰
       컬드웰 대학
       북부 기숙사
       엘렌 킹쉽 양

       그는 그날 오후에 일반 학생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학생회관 
     로비에 비치된 타자기로 그 주소를 쳐두었다. 봉투 안에는 아침 
     수업 때 도로시가 쓴 쪽지가 들어 있었다. 다른 봉투에는 캡슐 
     두 개가 들어 있었다.
       그는 봉투가 바뀌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재킷 호주머니에 
     하나씩 집어넣었다. 그리고 나서 비옷을 입고 벨트를 맨 뒤 
     거울에 자기 모습을 비춰보고는 방을 나섰다.
       그는 현관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오른발을 내디디면서, 자기가 
     드디어 해냈다는 듯한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제 8 장 

       기디언에는 별로 사람들이 없었다. 그가 도착했을 땐 겨우 두 
     자리에만 사람들이 있었다. 한 자리엔 나이든 남자 두 명이 체스 
     (서양 장기) 앞에 꼼짝않고 앉아 있었고, 방 건너 다른쪽엔 
     도로시가 커피잔을 마치 수정 그릇이나 되는 듯이 감싸쥐고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하얀 머리 수건을 쓰고 있었다. 머리 
     앞쪽으로 편편하고 검은 고리들이 여러 개 있는 것이 보였다.
       그가 그녀 앞에 가서 모자를 벗으며 앉을 때에야 비로소 
     그녀는 그가 온 것을 알았다. 근심스런 눈빛으로 그녀가 
     올려다보았다. 화장을 하지 않은 창백한 얼굴에 머리를 감싸올린 
     것이 더욱 어리게 보였다. 그는 그녀의 비옷이 걸린 옆 옷걸이에 
     코트를 걸고 맞은편에 앉았다.
       "중요한 일이란 게 뭐예요?" 그녀가 근심스럽게 물었다.
       볼이 푹 패이고 나이가 지긋한 기디언 씨가 그들 자리로 
     다가왔다. "뭘 드시겠소?"
       "커피."
       "커피만?"
       "예."
       기디언 씨는 슬리퍼를 질질 끌면서 가버렸다. 도로시가 앞으로 
     다가앉았다.
       "무슨 일이에요?"
       그는 약간 목소리를 낮추었다. "오늘 오후에 집에 돌아와 보니 
     편지 한 통이 와 있었어. 허미 고드슨에게서 -- "
       그녀의 손이 커피잔을 움켜쥐었다.
       "허미 고드슨이라면......"
       "그래서 나는 그를 불러냈어."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가 요전에 약을 잘못 줬다는 
     거야. 그의 아저씨가 -- " 그는 기디언 씨가 덜컹거리며 
     커피잔을 들고 다가오자 말을 딱 멈췄다. 그들은 눈을 
     내리뜨고서 그가 갈 때까지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의 아저씨가 
     약국인가 어디에서 그 약을 바꿔놓았대. 그러니까 그 약은 그게 
     아니었던 거야."
       "그럼, 무슨 약이었대요?" 그녀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물었다.
       "구토제 종류였다는군. 네가 토했다고 그랬잖아?" 그는 기디언 
     씨가 엎지른 커피를 닦기 위해서 잔을 들고 받침 접시에 
     내프킨을 깔았다. 그리고는 커피잔으로 내프킨을 꾹 눌렀다.
       그녀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모조리 토해낸 거군요. 
     그럼, 몸에는 해롭지 않았을 거예요. 나는 당신 전화 목소리를 
     듣고 무슨 일일까 무척 걱정했어요......"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야, 베이비." 그는 축축해진 내프킨을 
     한쪽으로 치웠다. "내가 전화걸기 조금 전에 허미를 만났거든. 
     그런데 그가 바로 그 약을 주었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해보는 
     거야."
       그녀의 얼굴이 축 늘어졌다. "싫어요......"
       "자, 아무런 일도 없을 거야. 우린 월요일과 똑같은 상태야. 
     그것 뿐이라고. 두번째 기회란 말이야. 만일, 약이 들으면 모두 
     잘 풀어지는 거라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여전히 내일 
     결혼하면 되는 거고 -- " 그는 천천히 커피를 저으면서 그 
     파문들을 바라보았다.
       "지금 가지고 왔어. 오늘밤에 그 약을 먹어봐."
       "하지만......"
       "하지만 뭐?"
       "나는 두 번째 기회는 원치 않아요.더 이상 약 같은 건 먹고 
     싶지 않아요......" 그녀는 하얀 손을 깍지끼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앞으로 몸을 숙였다. "나는 지금까지 내일이 얼마나, 
     정말 얼마나 멋지고 행복할 것인가를 생각해 왔는데......" 
     그녀가 눈을 감자 눈물이 주르르 속눈썹 밖으로 흘러내렸다.
       그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는 체스를 두는 사람들과, 
     그것을 바라보는 기디언 씨가 있는 방 건너편을 흘끗 
     쳐다보았다. 그는 주머니에서 동전 하나를 꺼내어 주크박스에 
     넣고는 아무 단추나 한 개 눌렀다. 그리고는 깍지낀 그녀의 손을 
     억지로 벌려서 손을 꽉 잡았다. "베이비, 베이비 -- " 그는 
     그녀를 달랬다. "우리가 꼭 고생할 필요는 없잖아? 내가 
     걱정하는 것은 너야. 내가 아니라 너라고."
       "그렇지 않아요." 그녀는 눈을 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만일 
     당신이 나를 생각해 준다면 내가 원하는 것을 당신도 똑같이 
     원해야 해요." 시끄럽고 요란한 재즈 음악이 흘러나왔다.
       "베이비, 네가 원하는 게 뭐야? 굶주리는 것? 이건 영화가 
     아니야. 현실이란 말이야."
       "우린 굶주리지 않아요. 당신은 실제보다 더 나쁘게만 말해요. 
     당신은 학교를 마치지 않더라도 좋은 직업을 얻을 수 있을 
     거예요. 당신은 똑똑하니까 -- "
       "모르는 소리 마." 그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너는 아무것도 
     몰라. 지금까지 부족한 것 없이 자라왔을 테니까."
       그의 손 안에서 그녀는 손을 꽉 움켜쥐었다. "왜 모두들 나를 
     그렇게 생각하지요? 당신까지도 그렇게 말해야겠어요? 그리고 
     그게 뭐가 중요하다는 거지요?"
       "그건 중요해, 도리. 그것을 좋아하든 싫어하든간에 말야. 잘 
     생각해 봐 -- 옷에 어울리는 신발과 그 신발에 어울리는 가방. 
     너는 늘 그런 식으로 자라왔어. 그렇기 때문에 모른다는 거야 -- 
     "
       "그게 문제예요? 내가 정말 그런 것들에 관심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녀는 말을 멈췄다. 그리고는 손에서 힘을 빼고 
     나서 훨씬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당신이 내가 영화를 
     좋아하고 낭만적이라 데에 불만을 갖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요. 
     그것은 당신이 아마 나보다 다섯 살이나 많고, 군대도 다녀왔고, 
     또 남자라서 그럴 거예요 -- 하지만 진정으로 두 사람이 
     사랑한다면......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돈이나 
     그런 것은 절대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나는 믿어요. 나는 -- 
     내가 그렇다고...... 믿고 있어요." 그녀는 손을 빼내어 얼굴로 
     가져갔다.
       그는 윗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그녀의 손등에 
     갖다대었다. 그녀는 그것을받아 눈을 감쌌다. "베이비, 나도 
     알아. 너도 내가 그렇다는 걸 알 거야." 하며 그는 부드럽게 
     속삭였다. "내가 오늘 뭘 했는지 알아?"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두 가지를 했어. 도리에게 줄 결혼반지를 사고, 그리고 
     일요일자 클래리언 지(紙)에 광고를 냈어. 구직광고 말야. 밤에 
     일하는 것으로 -- " 그녀는 손수건으로 눈을 문질렀다. "내가 
     너무 비관적으로 일을 생각하나 봐. 분명히 우리는 잘 해나갈 
     거야. 또 행복하고. 하지만, 도리, 좀더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자고. 우리가 네 아버지의 승낙을 얻고 나서 이번 여름에 
     결혼한다면 더욱 행복할 거야. 그것을 부정하지는 않겠지, 응? 
     그리고 우리가 그런 행복을 얻기 위해서 도리는 단지 이 약을 
     먹기만 하면 되잖아." 그는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제대로 
     잡았는지 봉투를 눌러 본 뒤에 그것을 꺼냈다. "도리가 거절할 
     이유가 없잖아."
       그녀는 그것을 쳐다보면서 손수건을 접어 쥐었다. "화요일 
     아침부터 나는 줄곧 내일을 생각하며 꿈에 부풀었어요. 그런데 
     그것이 모두 바뀌는군요...... 세상이 온통." 그녀는 그에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나는 지금까지 모두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해왔어요."
       "나도 네가 실망했다는 것은 알아. 하지만 좀더 먼 미래에 
     대해 생각해 봐." 그는 그녀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그녀는 손을 
     테이블 위에서 깍지낀 채 그것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테이블에 그것을 내려놓았다. 캡슐 때문에 약간 불룩해진 하얀 
     직사각형 봉투를 -- "나는 당장 야간 일자리를 구하고, 이번 
     학기를 마치고는 학교를 그만둘 거야. 내가 너에게 부탁하는 
     것은 이 약을 먹어 달라는 것 뿐이야."
       그녀는 여전히 손을 깍지낀 채 하얀 봉투를 바라보았다.
       그는 차갑고 엄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만일 거절한다면, 
     도로시, 너는 꽉 막히고 공상이나 하는 순 엉터리야. 그건 
     나보다도 너 자신에게 더욱 불공평한 거라고."
       재즈 음악이 끝나고, 조명도 꺼지고, 주위는 조용해졌다.
       그들은 봉투를 가운데에 둔 채 앉아 있었다.
       방 저편에서 한 노름꾼이 속삭이는 소리와 노인이,"장군이야!"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그녀의 손이 약간 벌어지고 손바닥에 땀이 배어 
     반짝거리는 것을 보았다. 자신의 손도 역시 땀에 젖어 있었다. 
     그녀는 봉투에서 눈을 떼고 그를 바라보았다.
       "제발, 베이비......"
       그녀는 봉투를 집어 옆 의자에 놓인 핸드백 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나서 다시 테이블 위에 손을 올려놓고 자기 손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는 테이블을 가로질러 그녀의 손목을 잡고서 손등을 
     쓰다듬었다. 다른 손으론 그가 마시지 않은 커피를 그녀에게 
     주었다. 그는 그녀가 잔을 들어 마시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손을 잡은 채 주머니를 뒤져 동전을 꺼내어 
     주크박스에 넣고서 '매혹적인 밤'의 단추를 눌렀다.
       그들은 서로 다른 생각을 하면서도 버릇대로 손을 잡은 채 
     비에 젖은 콘크리트 길을 조용히 걸었다. 비는 그쳤지만, 
     가로등이 부옇게 내리비치는 공기 중에서 작은 물방울들이 
     흩날려 얼굴에 와 닿았다.
       기숙사 건너편 길에서 그들은 키스를 했다. 그의 입술 아래로 
     그녀의 입술이 차갑게 움츠러들었다. 그가 그만 떼려고 하자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잠시 그녀를 껴안고서 속삭이다가 
     작별인사를 했다. 그는 그녀가 길을 건너 노란불이 켜진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가까운 술집에 가서 맥주 두 잔을 마시고 감탄할 정도로 
     종이 내프킨을 가늘고 길게 찢었다. 30분이 지난 뒤에 그는 전화 
     박스로 들어가서 기숙사의 전화번호를 돌렸다. 교환에게 
     도로시의 방을 부탁했다.
       전화벨이 두 번 울렸을 때 그녀가 받았다. "여보세요?"
       "도리?" 아무 대답이 없었다. "도리, 그거 했어?"
       한참 뒤에, "예." 하고 대답했다.
       "언제?"
       "몇 분 전에요."
       그는 깊이 숨을 내쉬었다. "베이비, 교환대에 있는 그 여자는 
     요즈음도 엿들어?"
       "아니에요. 지난번 그 여자는 쫓겨났어요."
       "음, 아까는 차마 말을 못 했는데...... 그런데...... 어쩌면 
     약간 부작용이 있을 수도 있대." 그녀는 아무 말도 안했다. 그는 
     계속 말했다. "허미 말에 의하면, 전처럼 토할지도 모른대. 
     그리고 목이 타는 듯하고 위에 가벼운 통증을 느낄지도 몰라. 
     하지만 어떤 일이 있든지간에 두려워하지 마. 그것은 단지 약이 
     효과를 나타내느라고 그러는 거니까. 다른 사람을 부르고 그러지 
     말라고." 그는 그녀가 뭐라고 말하기를 기다리며 말을 멈췄다. 
     하지만 그녀는 잠잠했다. "아까 말 안해서 미안해. 하지만 
     그렇게 많이 아프지는 않을 거야. 곧 괜찮아질 거래." 잠시 
     침묵이 흘렀다. "화나지 않았지, 응, 도리?"
       "그래요."
       "너도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는 걸 알게 될 거야."
       "알아요. 고집부려서 미안해요."
       "괜찮아, 베이비. 이제 그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말자."
       "그럼, 내일 봐요."
       "그래."
       잠시 침묵이 흐른 뒤에 그녀가 말을 꺼냈다. "잘 자요."
       "안녕, 도로시." 그가 대답했다.


        제 9 장 

       금요일 아침 그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의기양양하고 기분좋게 
     강의실로 걸어갔다. 날씨도 화창했다. 강의실 안으로 쏟아져 
     들어온 햇살이 금속 의자들에 반사되어 벽과 천장이 반짝거렸다. 
     그는 평상시와 똑같이 뒷자리에 앉아 다리를 죽 뻗고 팔장을 낀 
     채 다른 학생들이 하나둘 들어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아침 
     햇살이 그들을 모두 밝혀 주었다. 내일은 올해 들어 처음으로 
     열리는 대학야구 경기가있으며, 저녁에는 스프링 댄스가 있을 
     예정이라서 강의실 안은 재잘거리고, 소리치고, 싱글벙글 웃는 
     소리로 가득찼다.
       한쪽 귀퉁이에서는 여학생 세 명이 흥분해서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는 그들이 기숙사에 있는 여학생들이며, 혹시 
     도로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건 아닐까 하고 궁금했다. 그녀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을 텐데. 왜 그녀 방에 들어갔을까? 그들은 
     그녀가 밤늦게 잠든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잠시 동안은 
     그녀가 발견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수군거리던 
     여학생들이 웃음을 터뜨리는 모습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다, 오후 1시 이전까진 발견될 리가 없다. "도로시 킹쉽이 
     아침식사 때도 보이지 않고, 점심식사 때도 보이지 않아." 그 
     다음에 그들은 그녀의 방을 두드리고, 방에서는 아무 기척도 
     없겠지. 그들은 기숙사 사감이나 열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찾아야 할 것이다. 어쩌면 그런 식으로 발견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기숙사의 여학생 중 많은 아이들이 아침 내내 일어나지 
     않으며, 가끔 몇 명은 점심을 밖에서 먹기도 하니까. 도리에게는 
     그녀가 없다는 것을 금방 알아볼 가까운 친구도 없었다. 아니, 
     만일 그에게 행운이 계속된다면 엘렌이 전화를 걸어올 때까지 
     그녀가 발견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전날밤에 전화로 도로시에게 작별인사를 한 뒤 그는 기숙사로 
     돌아갔었다. 그리고 모퉁이에 있는 우편함에 엘렌 킹쉽 앞으로 
     보내는 편지를 집어넣었다. 그 안에는 도로시의 유언장이 들어 
     있었다. 첫 우편 수거가 아침 6시에 있으며, 컬드웰은 겨우 150 
     킬로미터 떨어져 있으니까 오늘 오후면 배달될 것이다. 만일 
     도로시가 아침에 발견된다면 엘렌은 그녀 아버지에게 연락을 
     받고 편지가 도착하기 전에 블루 리버를 향해 컬드웰을 떠날 
     것이다. 그것은 거의 확실히 몇 가지 조사가 뒤따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언장은 엘렌이 컬드웰로 돌아가기 전에는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유일하게 걱정되는 점이긴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고 하찮은 일에 
     불과하다. 그가 여학생 기숙사에 몰래 들어가 도로시 방에서 
     유언장을 작성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녀에게 약을 주기 전에 
     그녀의 책갈피나 코트 주머니에 그것을 숨긴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 경우에 도로시는 그 쪽지를 발견해서는 
     버릴 것이어서, 그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한다는 것은 훨씬 많은 
     위험이 뒤따랐을 것이다. 그는 정오를 안전 기준 시간으로 
     정했다. 만일 도로시가 12시 이후에 발견된다면 학교에서 레오 
     킹쉽에게 연락하고 킹쉽이 엘렌에게 연락하는 사이에 엘렌이 그 
     쪽지를 받아볼 수 있을 텐데. 그에게 행운이 뒤따른다면 엘렌이 
     흥분해서 전화하는 오후 늦게까지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모든 일은 잘 짜여진 적당한 순서대로 진행될 것이다.
       물론 시체는 해부될 것이다. 상당량의 비소와 두 달된 태아가 
     있다는 것이 밝혀지겠지 -- 그것은 그녀의 자살방법과 동기를 
     말해 주는 것이다.그것과 함께 그 유서는 경찰관을 더욱 
     만족시킬 것이다. 물론 그들은 근처 약국을 조사해 보겠지만 
     아무 소득이 없을 것이다. 그 다음에 약품보관실을 생각해 
     내겠지. 그들은 학생들에게, "약품건물이나 보관실에서 이 
     여자를 본 적이 있습니까?" 하면서 죽은 사람의 사진을 보여줄 
     것이다. 그리고는 그 수사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것이다. 끝내 
     그것은 밝혀지지 않을 것이며, 거의 중요한 일로도 취급되지 
     않을 것이다. 경찰이 비소의 출처를 확실히 알아내지 못했다고 
     해도 그녀의 죽음은 의심할 바 없이 자살로 남을 테니까.
       그런 경우에 경찰은 그녀의 애인을 찾으려고 할까? 그는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알고 있는 그녀는 버니 
     (놀이 상대가 되어주는 젊은 여자) 만큼이나 남자 관계가 복잡할 
     테니까. 그 문제는 거의 경찰의 관심거리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킹쉽은 어떻게 나올까? 화가 난 고집스러운 그 
     성인군자가 사립탐정이라도 고용할까?
       "내 딸을 망친 그놈을 찾아내라!" 도로시가 말한 그녀 
     아버지의 성격으로 보아 킹쉽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래, 그 애는 늘 그 모양이었어. 그 에미에 그 딸이지 -- " 
     그래도 아마 조사는 해볼 것이다......
       그는 분명히 그 속으로 질질 휘말려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가 
     바라던 대로 그렇게 자주는 아니었지만, 그들이 함께 있는 
     장면을 여러 사람이 목격했었다. 도로시와 만나기 시작했을 때 
     그는 그녀를 사람이 많은 장소에는 데려가지 않았었다. 작년에는 
     다른 부잣집 여자를 데려갔었다. 만일 그가 계획한 대로 
     도로시와 잘되지 않는다면 앞으로 다른 사람을 구해야 할 
     테니까. 그는 돈만 아는 사람이란 말을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로시를 알게 되었을 때 영화관으로, 그의 
     방으로, 기디언처럼 조용한 곳으로만 돌아다녔다. 그리고 기숙사 
     휴게실에서보다는 벤치에서 만나는 게 버릇처럼 되었다.
       그는 경찰의 조사를 받게 될지도 모르지만, 도로시는 그들이 
     애인 사이라고 다른 사람에게 말한 적이 없기 때문에 다른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취급받을 것이다. 그가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그리고 구릿빛으로 킹쉽이라고 찍힌 그녀의 성냥갑을 
     알아차렸을 때, 강의실 밖에서 도로시와 재잘거리던 빨간 머리의 
     여학생 -- 그녀가 신은 마름모 무늬의 양말을 놀리던 학생, 
     그리고 한두 번 데이트했던 남자들 -- 경찰은 이들 모두를 
     불러들여서 누가 그녀를 '버려 놓은' 사람인지 알아내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그것을 부인할 테지. 조사가 
     끝난다고 해도, 킹쉽은 그 혐의자들을 완전히 무죄라고 인정해 
     주지 않을 것이다. 모든 남자들에게 혐의는 있지만 그 어느 
     누구에게도 증거가 없으니까.
       아니, 모든 것은 완전할 것이다. 학교를 그만두지 않아도 
     되고, 점원 일자리를 구할 필요도 없고, 부담스러운 아내와 
     자식도 없고, 킹쉽의 보복도 없을 것이다.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다면...... 도로시와 함께 캠퍼스를 돌아다녔던 남자들 중의 
     한 명으로 주목된다는 것이다. 그를 약품보관실에 들어가게 
     해줬던 그 여학생이 다시 그를 보고, 그가 누구라는 것을 듣고, 
     약대생이 아니란 걸 알게 된다면...... 그러나 1만 2천 명이나 
     되는 학생들 가운데서 그렇게 쉽게 눈에 뛰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주 최악의 경우 그녀가 그를 기억해 내서 
     경찰로 달려간다는 것을 가정해 보자. 하지만 그래도 증거는 
     없을 것이다. 약품보관실에 갔었다는 것이 밝혀진다고 해도 몇 
     가지 변명을 할 수 있고, 경찰도 그의 말을 믿어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쪽지가 있으니까 -- 도로시가 직접 쓴 유서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강의실의 옆문이 열리고 바람에 그의 노트가 펄럭거렸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도로시였다.
       그는 화산이 폭발하는 것과 같은 충격을 느꼈다. 그리고 피가 
     얼굴로 솟구쳐오르고 가슴이 얼음처럼 굳어져 엉거주춤한 자세로 
     일어났다. 몸에서 땀이 구슬구슬 맺히더니 백만 마리의 벌레처럼 
     온몸을 기어다녔다. 그는 불쑥 튀어나온 눈과 빨개진 볼에 
     자기의 당황한 표정이 쓰여 있으며, 그녀가 그것을 알아차렸다는 
     것을 알았다.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그녀는 즐거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등뒤로 문을 닫았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팔에 책을 끼고서 초록색 스웨터와 격자 무늬의 
     치마를 입은 도로시 -- 그녀는 그에게 다가오면서 그의 얼굴을 
     보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의 노트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는 그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서 허리를 구부렸다. 그리고는 자기 옆구리 근처에 얼굴을 
     묻고 숨을 크게 내쉬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오, 하나님! 
     그녀가 약을 먹지 않은 것이다! 그녀는 약을 먹을 수 없었던 
     거야! 거짓말쟁이! 거짓말쟁이 계집년! 그 쪽지는 엘렌에게 가고 
     있을 텐데...... 오, 주여, 주여 !
       그는 그녀가 자기 자리로 들어가 앉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의 
     겁먹은 속삭임 -- "무슨 일이에요? 뭐가 잘못되었어요?" 그는 
     노트를 집어들고 자리에 똑바로 앉았다. 얼굴과 온몸에서 핏기가 
     가시고 식은땀이 흘러내려 온몸이 차가워지는 듯했다. "무슨 
     일이에요?" 그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 
     그녀의 머리엔 초록색 리본이 매달려 있었다. 그는 말을 
     꺼내려고 했지만, 마치 소리를 전혀 못 낼 듯이 속이 텅빈 것 
     같았다.
       "무슨 일이에요?" 학생들이 돌아다보았다. 마침내 그가 
     쥐어짜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괜찮아."
       "아픈 모양이죠? 얼굴이 창백한데요......"
       "괜찮아. 그건...... 이것 때문에......" -- 그는 그녀도 알고 
     있는 군대에서 입은 옆구리의 흉터 자리를 만지면서, "가끔 
     쑤시거든......" 하고 말했다.
       "하나님! 나는 심장마비라도 일으킨 줄 알았어요." 그녀가 
     속삭였다.
       "아니야, 괜찮아." 그는 그녀를 계속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긴장된 자세로 손으로 무릎을 감싸쥐고 길게 숨을 쉬어 보려고 
     했다. 오, 하나님, 이젠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망할 것! 
     그녀는 또 계획을 세웠겠지, 결혼 계획!
       그녀 얼굴에서 그에 대해 걱정하는 빛이 사라지고, 대신 
     흥분하는 빛이 나타났다. 그녀는 메모지를 한 장 찢어서 뭐라고 
     적더니 그에게 건네주었다.

       약이 듣지 않았어요.

       거짓말! 깜찍한 거짓말쟁이 같으니라고! 그는 종이를 구깃구깃 
     구겨서 손톱이 손바닥을 찌를 정도로 그것을 움켜쥐었다. 
     생각해야 한다! 생각을! 그의 위험이 너무 어마어마해서 도저히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엘렌이 쪽지를 받을 텐데 -- 언제? 3시? 
     4시? -- 그리고 도로시를 찾아간다 -- "이게 무슨 소리니? 왜 
     이런 말을 썼지?"-- "무엇을 썼는데?"-- 엘렌은 쪽지를 보여주고 
     도로시는 그것을 알게 될 테지...... 그녀는 그에게 달려올까? 
     그럼,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혹시 그녀도 엘렌에게 사실을 모두 
     털어놓고 아버지를 부를까? 만일 그녀가 그 약을 가지고 있다면 
     -- 그녀가 그 약을 버리지 않았다면 그것이 증거가 될 텐데! 
     살인미수. 그것을 약국에 가져가서 분석해 볼까? 지금으로서는 
     그녀의 행동을 예측할 수 없다. 그녀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여자니까. 그는 그녀의 그 영악한 머리 회전을 조금은 예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녀는 자기가 쓴 말에 대한 그의 반응을 기다리면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노트 한 장을 찢어서 펜을 들었다. 그가 
     손으로 가리고 있어서 그녀는 펜이 흔들리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는 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써야만 했다. 펜촉을 너무 세게 
     눌러서 종이가 찢어졌다. 될 대로 되라지 !

       좋아, 우린 할 수 있는 것을 다했어.
       이젠 계획대로 결혼하자.

       그는 그것을 그녀에게 주었다. 그것을 읽고 나서 그를 
     돌아보는 그녀의 얼굴이 햇빛처럼 부드럽고 밝게 빛났다. 그는 
     그녀에게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이려고 했다. 그녀가 억지 
     미소를 알아채지 않기를 바라면서 --
       아직 그렇게 늦은 건 아니다. 사람들은 유서를 써놓고 나서도 
     실제로 행동에 옮기기 전에 망설이는 경우가 많으니까. 그는 
     시계를 보았다. 9시 20분. 아무리 일찍 도착한다고 해도 엘렌이 
     받아보는 것은...... 3시쯤은 될 것이다. 다섯 시간 40분 
     남았다. 지금은 계획대로 차근차근하게 해나갈 수가 없다. 
     가능한 한 빨리, 적극적으로 조치해야 한다. 그녀가 어느 시간에 
     어떤 일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 도리가 없다. 독약도 통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 밖에 어떤 방법으로 자살할 수 있을까? 
     다섯 시간 40분 안에 그녀는 죽어야 한다.


        제 10 장 

       10시에 그들은 팔짱을 끼고 왁자지껄 떠드는 강의실을 나와 
     신선한 바람을 맞았다. 치어리더 제복을 입은 여학생 세 명이 -- 
     한 명은 나무 숟가락으로 과자 굽는 철판을 두드리며, 다른 두 
     명은 커다란 야구시합 응원 광고판을 들고서 -- 옆에서 밀면서 
     지나갔다.
       "아직도 옆구리가 아파요?" 도로시는 찡그린 그의 표정을 
     살피며 물어보았다.
       "약간."
       "자주 그렇게 쑤셔요?"
       "아냐, 걱정할 건 없어." 그는 시계를 보았다. "환자와 
     결혼하게 되지는 않을 테니까."
       그들은 오솔길을 벗어나 잔디밭으로 걸음을 옮겼다. "우리 
     언제 갈 거예요?" 하며 그녀는 그의 손을 꽉 눌렀다.
       "오늘 오후 4시쯤."
       "좀더 일찍 갈 수는 없을까요?"
       "왜?"
       "글쎄, 시간이 걸릴 텐데요. 아마 5시 정도에 문을 닫을 
     거예요."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단지 결혼신고 서류를 쓰고, 우리가 
     결혼할 수 있게 누가 같이 있어 주기만 하면 돼."
       "내가 열여덟 살이 넘었다는 증거를 가져가야 되나요?"
       "그래."
       그녀는 갑자기 심각한 얼굴로 뺨을 붉히며 그를 돌아다보았다. 
     그래도 능숙한 거짓말쟁이는 못 된다고 그는 생각했다.
       "약이 제대로 듣지 않아서 섭섭해요?" 그녀는 근심스럽게 
     물어왔다.
       "아니, 그렇지는 않아."
       "당신은 너무 과장해서 생각하는 것 같아요, 아녜요? 일이 
     어떻게 될 건지에 대해서 말이에요."
       "그래, 우린 잘될 거야. 나는 단지 네가 그 약을 먹어보기를 
     바랐을 뿐이야. 너 자신을 위해서 -- "
       그녀는 더욱 얼굴을 붉혔다. 그는 그녀의 이런 태도에 
     당황해서 고개를 돌렸다. 그가 다시 그녀를 쳐다보자, 순간의 
     기쁨이 양심의 가책을 덮어버렸다. 그녀는 팔로 그를 껴안으며 
     미소를 지었다. "나, 수업에 들어가지 않겠어요! 빠질래요!"
       "좋아, 나도 -- 나와 함께 있어."
       "그게 무슨 뜻이에요?"
       "우리가 시청 건물에 갈 때까지 -- 그때까지 함께 있자고."
       "안돼요. 하루 종일은 안돼요. 나는 기숙사에 들어가서 짐을 
     싸야 하고, 또 옷도 갈아입어야 해요...... 당신은 준비하지 
     않아도 돼요?"
       "나는 호텔 예약할 때 그곳에 가방을 놔두고 왔어."
       "아, 그래도 옷은 갈아입어야 하잖아요? 나는 당신이 파란색 
     양복을 입은 게 보고 싶어요."
       그는 미소를 지었다. "알았습니다, 어머니. 어쨌든 시간은 좀 
     낼 수 있겠지? 점심때까지 만이라도 -- "
       "뭘 할 건데요?" 그들은 잔디밭을 어슬렁어슬렁 걸어다녔다.
       "모르겠어. 강까지 산책할까?"
       "이런 구두를 신고요?" 하며 그녀는 하늘거리는 장식이 달린 
     구두를 보이려고 한쪽 발을 들어올렸다. "발이 꽤 아플 거예요. 
     이런 구두에는 밑창이 거의 없거든요."
       "좋아, 그럼 강에는 가지 말자."
       "내게 생각이 있어요." 그녀는 앞에 있는 미술대학 건물을 
     가리켰다. "미술대학에 있는 음악감상실에 가서 음악을 들어요."
       "글쎄, 실내에 틀어박혀 있기에는 날씨가 너무 화창하잖아?" 
     그는 그녀의 미소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 말을 멈췄다.
       그녀는 미술대학 건물 너머로 하늘을 찌를 듯이 치솟아 있는 
     KBRI의 전송탑의 뾰족한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난번엔 
     의사를 만나서 진찰받으려고 시청 건물에 갔었어요." 그녀가 
     답답하게 말했다.
       "이번에는 다를 거야." 하며 그가 말했다. 그리고는 발걸음을 
     멈췄다.
       "왜 그래요?"
       "네 말이 맞아. 4시까지 기다릴 이유가 어디 있어? 지금 
     가자!"
       "결혼하러요?"
       "그래. 네가 짐을 꾸리고, 옷을 갈아입고,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서 -- 빨리 기숙사로 돌아가서 준비를 하라고. 더 할 말 
     있어?"
       "오, 아니, 없어요! 나도 지금 가고 싶어요!"
       "조금 있다 전화해서 언제 데리러 갈지 말해 줄께."
       "그래, 그렇게 해요." 그녀는 팔을 활짝 벌리고 그의 볼에 
     정신없이 키스를 해댔다. "사랑해요." 그녀가 속삭였다.
       그는 그녀를 보고 씩 웃었다.
       그녀는 서둘러 가다가 고개를 돌려 얼굴을 붉히며 미소를 
     짓고는 빠른 발걸음으로 걸어갔다.
       그는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돌아서서 블루 리버 
     시청 건물의 KBRI 탑을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단단한 돌로 된 
     보도 위로 14층이나 되는, 이 도시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다.


        제 11 장 

       그는 미술대학 건물의 경사진 중앙 계단 밑에 있는 전화 
     박스에 들어갔다. 교환을 불러 결혼허가 사무실 전화번호를 
     물어보았다.
       "여기는 결혼허가 사무실입니다."
       "여보세요, 오늘 언제까지 사무실을 엽니까?"
       "정오까지, 그리고 1시부터 5시 30분까지 열어요."
       "12시와 1시 사이에는 닫습니까?"
       "예."
       "감사합니다." 그는 전화를 끊고 다시 동전을 넣고서 
     기숙사번호를 돌렸다. 도로시 방에 벨소리가 울렸지만 대답이 
     없었다. 그는 그녀가 왜 아직 도착하지 않았을까 의아해 하면서 
     수화기를 바꿔들었다. 그녀는 걸어갔어도 이미 방에 도착했어야 
     할 시간이다.
       그는 동전이 없었다. 그는 전화 박스에서 나와 캠퍼스를 건너 
     간이식당에 가서 1달러짜리 지폐를 바꾸고서는 전화 박스 안에 
     있는 여자를 쳐다보았다. 마침내 그녀가 통화를 끝냈다. 그는 
     아직도 향수 냄새가 가시지 않은 박스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이번에는 도로시가 받았다.
       "여보세요?"
       "아, 왜 그렇게 오래 걸렸어? 몇 분 전에 전화했었단 말야."
       "오는 길에 장갑을 샀어요." 그녀는 행복에 겨워 숨이 차 
     올라오는 목소리로 말했다.
       "자, 잘 들어. 지금 10시 25분이지. 12시까지 준비할 수 
     있겠어?"
       "글쎄, 모르겠어요. 샤워를 하고 싶은데요......"
       "12시 15분?"
       "좋아요."
       "도리, 주말에 외출한다고 쓰지 말고 그냥 나와. 알았지?"
       "안돼요. 당신도 여기 규칙을 잘 알잖아요."
       "그렇다면, 행선지를 적어야 하잖아?"
       "그래요."
       "그러면?"
       "뉴 워싱턴 하우스라고 쓰지요 뭐. 사감이 물어보면 적당히 
     설명할께요."
       "오늘 오후 늦게 써도 되잖아. 어쨌든 우리는 여기로 돌아와야 
     해. 트레일러 문제도 있으니까."
       "그렇게 해야 돼요?"
       "그래. 우리가 실제로 결혼하지 않고서는 정식신청을 할 수가 
     없대."
       "나중에 돌아와야 한다면 지금 가방을 가져갈 필요가 
     없겠네요."
       "아니야, 지금 가져와. 식이 끝나는 대로 호텔에 가서 점심을 
     먹을 테니까. 시청 건물에서 겨우 한 블럭 정도 떨어져 있거든."
       "그렇다면 아무래도 지금 써두는 게 좋겠어요. 지금 쓰나 
     나중에 쓰나 마찬가지잖아요."
       "도리, 학교측에선 결혼하려고 기숙사를 뛰쳐나오는 지방 
     여학생을 어떻게 생각하겠어? 사감은 어떻게든 우리를 말리려 할 
     거야. 네 아버지에게 알릴지도 모르고. 사감은 너에게 훈계하며, 
     이번 학기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라고 할 게 틀림없어. 그게 바로 
     사감이 필요한 이유이니까."
       "좋아요, 그럼 나중에 적겠어요."
       "그래야 여자답지. 12시 15분에 기숙사 밖에서 기다릴께. 
     대학로에서 -- "
       "대학로?"
       "그래, 옆문으로 와. 서명은 하지 말고 짐은 가져오는 거야."
       "알았어요. 모두 당신 말대로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정말 우리 도망가는 거지요?"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녀가 밝게 웃었다. "12시 15분!"
       "그래, 12시 30분에는 시내에 있게 될 거야."
       "안녕, 나의 서방님."
       "안녕, 나의 신부."

       그는 푸른색 양복에 검은색 양말과 구두, 하얀 와이셔츠, 검은 
     은빛의 백합 무늬가 있는 하늘색 이탈리아제 실크 넥타이 등으로 
     꼼꼼하게 차려입었다. 그리고 거울에 비춰 보니 넥타이가 약간 
     눈에 뛰는 듯하여 단순하게 진주빛이 도는 회색으로 바꿔맸다. 
     윗도리를 바로 입고 다시 자신을 비춰보며 사람들 눈에 좀더 
     뛰지 않게 얼굴을 바꿀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기가 너무 잘생겼다는 것도 단점이 될 때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공공장소에 나갈 것을 생각해서 내키지는 않았지만, 회색 
     중절모를 머리카락이 흐트러지지 않게 해서 조심스럽게 썼다.
       12시 5분에 그는 기숙사 건너편 대학로에 가 있었다. 태양이 
     머리 바로 위에 있어서 따뜻하고 밝았다. 찌는 듯한 대기 
     가운데서 기숙사 쪽으로 등을 돌린 채 건물의 창문 안을 
     들여다보며 서 있자니, 마치 유리벽 뒤에서 나는 것처럼 가끔씩 
     새소리, 발자국 소리, 차들이 삑삑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12시 15분에 길 건너 창문이 열리고 초록색 옷을 입은 
     도로시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녀의 일생에 있어 단 한 번 시간을 
     정확히 지킨 것이었다. 그는 몸을 돌렸다. 그녀의 눈길은 그를 
     지나친 채 좌우로 두리번거렸다. 하얀 장갑을 낀 한쪽 손엔 
     지갑을 들었고, 다른 손엔 비행기 여행용의 빨간 줄무늬가 굵게 
     쳐진 황갈색 커버를 씌운 작은 가방을 들고 있었다. 그가 한 
     팔을 들고 나서야 그녀는 그를 알아보았다. 이내 함박꽃 같은 
     미소를 지으며 인도를 건너오다가 잠시 차를 피한 뒤에 그가 
     있는 쪽으로 왔다.
       아름다웠다. 그녀는 짙은 초록색 옷에 반짝이는 하얀색 실크 
     스카프로 목을 감쌌다. 구두와 지갑은 악어 가죽이었으며, 깃털 
     같은 그녀의 금발은 나풀거리는 짙은 초록색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오자 그는 씩 웃으며 그녀의 가방을 
     받아들었다.
       "신부들이 모두 아름답다지만, 도리는 더욱 아름다운걸."
       "고마워요." 그녀는 키스를 하고 싶다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택시가 두 사람 곁을 천천히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물어보듯이 그를 쳐다보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경제적으로 
     생활하려면 실용적으로 행동해야 되지." 그는 걸어서 길을 
     내려갔다. 반짝거리는 대기를 가로지르며 시내 전차 한 대가 
     다가왔다.
       도로시는 마치 몇 달 동안 실내에만 있었던 사람처럼 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하늘은 짙푸른 조개 같았다. 기숙사 
     앞에서부터 대학로를 따라 일곱 블럭이나 걸쳐 늘어서 있는 
     캠퍼스는 신록의 나무로 뒤덮인 채 고요했다.
       몇몇 학생들이 오솔길을 걷고 있었으며, 또 잔디밭 여기저기에 
     드러누운 학생들도 있었다. "이런 걸 한번 생각해 봐요." 그녀는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오늘 오후에 이곳에 돌아왔을 때 
     우리는 결혼해 있겠지요?"
       전차가 덜컹거리며 경적을 울렸다. 그들은 올라탔다.
       두 사람은 차 뒤쪽에 앉아서 거의 말을 하지 않은 채 각자의 
     생각에 잠겨 있었다. 누가 이들을 보았어도 두 사람이 함께 
     여행하는 거라고는 생각지 않을 것이다.
       블루 리버 시청 건물의 아래쪽 8층은 블루 리버 시와 로크웰 
     군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었다. 블루 리버는 군청소재지였다. 
     나머지 6층에는 개인 -- 주로 변호사, 의사, 치과의사들이 
     임대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건물의 모양은 현대와 고전 양식이 
     혼합된, 즉 30년대의 기능적인 면과 완고한 아이오와 주 전통이 
     어우러진 것이었다. 스토다드 미술대학의 건축학 입문 
     강의시간에 교수들은 그 건물이 건축상의 기형물이라고 하여 
     신입생들은 킥킥거리며 웃곤 했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그 건물은 가운데가 푹 가라앉은 속이 빈 
     사각형이었다. 그리고 옆에서 보면 8층과 12층의 단형 후퇴로 
     인해 한층 한층 세 블럭씩 크기가 줄어드는 모양이었다. 건물의 
     전체적인 선(線)은 우아하기보다는 딱딱했고, 정문의 난간들은 
     부자연스러운 그리스식 디자인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세 개의 
     청동과 유리 회전문이 이삭 모양으로 글자들이 새겨져 있는 
     커다란 기둥 사이에 끼어 있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흉칙한 
     모양이었으나, 도로시는 전차에서 내리자마자 마치 샤르트르에 
     있는 대성당이라도 되는 듯이 그것을 올려다보았다.
       그들이 길을 건너 층계를 올라 가운데 회전문을 지날 때 
     시계는 12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대리석으로 된 로비는 
     점심을 먹으러 오가는 사람들과, 약속시간에 서두르는 사람들,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로 가득찼다. 둥그런 천정 아래로 사람들의 
     말소리와 대리석 위를 내딛는 발자국 소리들이 커다랗게 울렸다. 
     그는 로비 한옆의 안내판 쪽으로 다가가는 도리에게서 한 발자국 
     떨어져 있었다. "R는 로크웰(Rockwell) 군 사무실의 약자이고, 
     M은 결혼(Marriage)의 약자이겠지요?" 그가 그녀의 곁으로 
     다가오자 그녀는 안내판을 보면서 물었다. 그는 그녀가 옆에 
     있다는 것을 잊은 듯이 안내판을 바라보았다. "이거예요." 
     그녀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결혼허가 사무실 -- 604호." 그는 
     회전문의 반대편에 있는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도로시는 서둘러 
     그를 따라가기 위해서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으려고 했으나, 
     그의 손에는 가방이 들려 있었다. 그가 가방을 바꿔들려고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녀의 행동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 
     틀림없었다.
       네 대의 엘리베이터 중 한 대가 사람들을 반쯤 태운 채 열려 
     있었다. 그 앞에서 그는 도로시를 먼저 들어가게 하려고 약간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나이든 부인이 오는 바람에 그녀가 탈 
     때까지 기다렸다가 한 발 늦게 탔다. 그 부인은 그의 신사다운 
     행동에, 게다가 이렇게 복잡한 건물 안에서 젊은 남자에게서 
     받은 뜻밖의 친절에 만족해서는 그에게 미소를 보냈다. 그러나 
     그가 모자를 들어보이지도 않자 약간은 실망한 듯했다. 도로시는 
     자기들 사이에 끼어 있는 그 여자의 머리 위에서 미소지었다. 
     그는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입술을 약간 움직이며 답례로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은 6층에서 서류가방을 든 두 명의 남자들과 함께 
     내렸다. 그 남자들은 오른쪽으로 돌아서 바쁘게 복도를 걸어 
     내려갔다. "잠깐 기다려요!" 도로시는 뒤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흥분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녀는 맨 나중에 내렸고, 
     그는 맨 처음에 내렸던 것이다. 그는 마치 세상에 혼자만 있는 
     듯이 왼쪽으로 돌아 15피트 정도 걸었다. 그녀가 따라와 
     쾌활하게 그의 팔을 잡자 그는 당황한 빛을 보이며 
     돌아다보았다. 그는 그녀의 머리 위로 서류 가방을 든 남자들이 
     저편 복도 끝 오른쪽 모퉁이로 사라지는 것을 쳐다보았다. "어딜 
     보고 있는 거예요?" 도로시가 안달하듯이 물었다.
       "미안해."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신랑이 흥분한 모양이야." 
     그들은 팔짱을 끼고 왼편으로 돌아 복도를 따라 걸어갔다. 
     도로시는 지나가면서 방의 번호를 소리내어 읽었다. "620, 618, 
     616......" 그들이 604호에 가기 위해서는 한 번 더 왼쪽으로 
     돌아야 했으며, 그 방은 엘리베이터의 반대편 홀 끝에 있었다. 
     그는 문을 열어보았지만 닫혀 있었다. 그들은 부연 유리창 틀에 
     써 있는 시간을 읽었다. 도로시가 실망해서 신음소리를 내었다.
       "빌어먹을." 그가 말했다. "확인해 보는 전화를 걸었어야 하는 
     건데." 그는 가방을 내려놓고 시계를 보았다. "25분 전 
     1시로군."
       "25분 동안 -- " 도로시가 말했다. "아래층에 내려가 있는 게 
     낫겠어요."
       "그렇게 사람들이 복작거리는데......?" 하며 그는 
     중얼거리다가 말을 멈췄다. "내게 좋은 생각이 있어."
       "뭔데요?"
       "옥상, 옥상에 올라가는 거야. 오늘처럼 맑은 날에는 몇 
     마일이나 멀리까지 볼 수 있을 거야!"
       "괜찮을까요!"
       "아무도 우릴 막지 않는다면 우린 허가받은 거나 마찬가지야." 
     그는 가방을 들었다. "자, 미혼여성으로서 마지막으로 세상을 
     둘러보는 거야."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그들은 왔던 길을 되돌아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으로 왔다. 잠시 뒤 한 엘리베이터 문 위에서 위층으로 
     올라간다는 하얀색 화살표에 불이 들어왔다.
       그들이 14층에서 내릴 때, 그곳에서 내리는 다른 손님들 
     때문에 두 사람이 다시 헤어지게 되었다. 그 사람들이 서둘러서 
     돌아가거나, 또는 사무실로 들어가길 기다렸다가 이윽고 
     도로시가, "자, 가요." 하며 무슨 음모라도 꾸미듯이 
     소곤거렸다. 그녀는 그것을 커다란 모험이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그 건물을 반쯤 돌고 나서야 1402호 옆에 '계단'이라고 
     쓰여 있는 문을 겨우 찾아냈다. 그가 그 문을 열었고, 그들은 
     안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 뒤에서 문이 쉬 소리를 내며 닫혔다. 
     그들 앞에는 검은색 철계단이 완만하게 뻗어 있었다. 희미한 
     빛이 먼지로 뽀얗게 된 대기 사이로 비쳤다. 그들은 위로 
     올라갔다. 여덟 계단, 한 번 돌아서 또 여덟 계단을 올라갔다. 
     불그스레한 갈색의 육중한 철문이 그들 앞에 보였다. 그가 
     손잡이를 열어보았다.
       "잠겼어요?"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그는 문에 어깨를 대고 밀어보았다.
       "양복이 더러워지겠어요."
       계단 위에서 한 발자국쯤 떨어져서, 선반처럼 생긴 문지방 
     위에 문이 달려 있었다. 이 커다란 문지방이 앞으로 튀어나와 
     있어서 그가 온몸에 힘을 주어 밀어도 열리지 않는 거였다. 그는 
     가방을 내려놓고 문에 어깨를 대고는 다시 한번 밀어보았다.
       "아래층에 내려가서 기다려요." 도로시가 말했다. "그 문은 
     열리지 않는 건가 봐요......"
       그는 이를 악물었다. 문지방 밑으로 왼쪽 발을 옆으로 
     밀어넣고는 뒤로 물러났다가 온 힘을 다해서 문에 어깨를 대고 
     밀어보았다. 그러자 삐걱거리며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옆에 
     달려 있던 쇠사슬이 덜컹거렸다. 갑자기 파란 하늘이 그들의 
     시야에 들어왔다. 어두웠던 계단에 서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잠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비둘기들이 날개를 푸드득거리며 
     재빨리 날아올랐다.
       그는 가방을 들고 문지방을 넘어서 문이 닫혀도 부딪치지 않을 
     자리에 다시 내려놓았다. 그리고 문을 좀더 열어 등을 대고 선 
     채 한 손을 도로시에게 내밀었다. 다른 손으로는 마치 지배인이 
     손님에게 자리를 안내하듯이 옥상 쪽으로 부드럽게 내밀면서 --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활짝 웃었다. "들어오시죠, 
     아가씨." 그녀는 그의 손을 잡고 문지방을 넘어 아스팔트가 깔린 
     옥상으로 우아하게 발을 내디뎠다.


        제 12 장 

       그는 이제 흥분하지 않았다. 문을 열 수 없었을 때는 거의 
     공포에 가까운 순간이었으나, 그 문이 그의 어깨 힘에 항복한 
     지금 그런 기분은 사라지고 마음은 안정을 되찾았다. 모든 일이 
     실수나 방해자 없이 완벽하게 되어가고 있었다. 그는 그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고등학교 이래로 이렇게 홀가분해 본 적이 
     없었다 -- 고등학교 이래로 !
       그는 1인치 반쯤 사이를 두고 문을 닫아놓았기 때문에 나갈 
     때는 별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그는 이제 서둘러야 한다. 
     허리를 구부려서 그는 가방을 옮겼다. 나중에 다른 손으로 문을 
     열면서 한 손으로 그것을 집어들 수 있도록 -- 그가 몸을 똑바로 
     펴는 순간 모자가 약간 움직였다. 그는 모자를 벗어 그것을 슬쩍 
     쳐다보고는 가방 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지금 모든 것을 
     계산하고 있는 것이었다. 모자 같은 아주 작은 것이 어쩌면 다른 
     중요한 일들을 그르칠지도 모를 일이다. 그녀를 밀어 떨어뜨릴 
     때 바람결이나 움직이는 힘에 의해 모자가 벗겨져서 그녀의 몸과 
     함께 날아갈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되면 경찰에서는 그것을 
     실마리로 수사를 시작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았다. 그는 앞을 내다보고 준비해 두는 
     사람이었다. 신의 섭리에 의해서 조금도 실수가 없이 완벽한 
     일이 망쳐지는 법도 있는 일이다 -- 그는 그것까지 내다보고 
     있었다. 주여! 그는 거울 앞에 서 있는 것처럼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리 와서 이것 좀 봐요."
       그는 돌아다보았다. 도로시가 한쪽 팔에 악어 지갑을 끼고 
     그에게 등을 보인 채 저만치 서 있었다. 손으로 허리 높이에 
     있는 난간을 붙잡고서 -- 그는 그녀의 뒤로 다가갔다.
       "멋있죠?" 그녀가 말했다. 그들은 남쪽을 향하고 있는 건물의 
     뒤에 있었다. 찬란한 햇빛 속에 시가지의 모습이 분명하고도 
     선명하게 펼쳐져 있었다. "봐요!"-- 도로시는 저 멀리 보이는 
     초록색 지점을 가리켰다 -- "저기가 캠퍼스일 거예요." 그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하얀 장갑을 낀 손이 위로 
     올라와서 그의 손을 잡았다.
       그는 그녀를 이곳으로 데려오자마자 일을 해치우리라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지금 그는 가능한 한 안전한 방법을 천천히 
     구상해 가면서, 그리고 쉽게 해나가고 있었다. 지난 한 주일은 
     극도로 긴장된 상태에서 보냈다. 아니, 그런 긴장은 한 주일이 
     아니라 몇 년 동안이나 계속되어 온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로 죽 긴장과 걱정, 그리고 자책감에 젖어서 보내왔다. 그러한 
     터라 이런 일에 긴장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자기의 가슴에 
     와닿는 짙은 초록색 베일 속의 그녀의 금발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입김을 불자 아름다운 그물 레이스가 흔들렸다. 그녀가 
     고개를 뒤로 젖히고 그를 올려다보며 미소지었다.
       그녀가 뒤쪽의 광경을 보기 위해서 고개를 돌리자, 그는 
     그녀의 어깨에 한 팔을 감은 채 좀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는 
     난간 너머로 윗몸을 구부렸다. 두 층 아래에 빨간 타일이 깔린 
     발코니가 건물 폭을 가로질러 선반처럼 뻗어 있었다. 12층 
     꼭대기에는 단이 있어서 아래로 내려가 있었다. 이 건물은 아마 
     사면이 모두 그런 모양인 것 같았다. 그것은 그에게 불리했다. 
     고작 두 층을 떨어지는 것은 그가 바라는 게 아니었다. 그는 
     옥상을 둘러보았다. 14 평방미터 정도 될 듯한, 위가 하얀색 
     돌로 되어 있는 30㎝ 폭 정도의 벽돌담이 둘러싸여 있었다. 옥상 
     한가운데에서 9 미터쯤 떨어진 곳에 사각형의 환기통 구멍이 
     있었다. 그리고 옥상 왼쪽에는 받침대가 받쳐진 거대한 물 
     탱크가 있었다. 오른쪽에는 작은 에펠탑 같은 KBRI 탑이 하늘을 
     향해 대들보처럼 시커멓게 치솟아 있었다. 왼쪽 앞에 약간 
     지붕이 경사진 계단 입구가 있었다. 환기통 너머 건물의 
     북쪽에는 커다란 직사각형 건물인 엘리베이터 조작실이 있었다. 
     옥상 전체에 불쑥불쑥 튀어나와 있는 굴뚝과 환기통이 시커먼 
     바다 위의 방파제처럼 보였다.
       도로시를 그곳에 둔 채 그는 환기통의 난간으로 걸어가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사면의 벽이 14층 아래의 작은 환기로까지 아래로 
     깔대기처럼 뻗어 있었고, 그 구석에는 빈 깡통과 목재 
     부스러기들이 쌓여 있었다. 그는 그 안을 잠시 바라본 뒤에 몸을 
     구부려 고무로 덮인 곳에서 비에 맞아 빛이 바랜 성냥갑을 
     집어올렸다. 그는 그것을 난간 밖으로 들어올려서 떨어뜨리고는 
     그것이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 마침내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지켜보았다. 그는 환기통의 벽들로 눈길을 옮겼다. 삼면이 
     유리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러나 그가 마주보고 있는 다른 
     한쪽 면, 즉 엘리베이터 환기통의 뒤쪽 벽에는 유리창이 없었다. 
     이곳이 바로 그 지점이었다. 환기통의 남쪽, 게다가 층계 바로 
     옆이다. 그는 난간 위를 탁 치면서 깊이 생각하는 듯이 입술을 
     오므렸다. 그것은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높았다.
       도로시가 그의 뒤로 다가와서 팔을 잡았다. "너무 조용해요." 
     그녀가 말했다. 그는 귀를 기울여 보았다. 처음에는 조용한 것 
     같았으나, 잠시 지나자 옥상 자체에서 소리가 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 모터가 윙윙거리고, 라디오 탑의 케이블이 
     바람에 떨리는 소리, 환풍기가 천천히 돌아가면서 내는 
     삐걱거리는 소리......
       그들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를 환풍기와 
     엘리베이터 조작실 뒤쪽으로 데려갔다. 걸어가면서 그녀는 
     문에서 그의 어깨에 묻은 먼지를 털어주었다. 옥상북쪽의 
     가장자리로 가자, 강과 그 안에 비친 하늘이 보였다. 그것은 
     정말 지도에 칠해 놓은 강처럼 푸르렀다. "담배 있어요?" 그녀가 
     물었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체스터필즈 담뱃갑을 만졌다. 그러나 
     그는 빈손을 내보였다. "아니, 없어. 도리는?"
       "여기 어디에 있을 거예요." 하고 그녀는 지갑을 뒤적이며 
     콤팩트와 손수건을 한쪽으로 치우더니, 마침내 구겨진 허버트 
     타레이톤즈 담뱃갑을 꺼냈다. 그들은 한 대씩 꺼내 들었으며, 
     그가 불을 붙였다. 그녀는 담뱃갑을 다시 지갑에 넣었다.
       "도리, 말할 게 있어......" -- 그녀는 거의 귀를 기울이지 
     않고 하늘을 향해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그 약에 
     대해서."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지면서 홱 돌아다보았다. 그리고는 침을 
     삼켰다. "뭐예요?"
       "그 약이 듣지 않아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 그가 웃으면서 
     말했다. "정말이야."
       그녀는 그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기쁘다고요?"
       "응, 어젯밤에 그것을 먹지 말라고 하려고 전화를 걸었는데 
     도리가 이미 먹었다고 했잖아." 자, 어서 털어놔 봐. 너의 그 
     가슴속에서 꺼내놓으란 말이야. 그게 널 죽이게 될 거야......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왜요? 참...... 무엇 때문에 마음이 
     바뀌었어요?"
       "모르겠어. 그 일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나도 
     도리처럼 결혼하고 싶었던 것 같아." 그는 담배를 깊게 빨았다. 
     "게다가 그런 일을 하는 것은 정말 죄를 짓는 것 같았어." 그가 
     다시 올려다보자 그녀는 뺨을 붉히며 눈을 반짝였다.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녀가 숨가쁘게 물었다. "정말 기쁜 
     거예요?"
       "물론이야.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런 말은 하지 않을 거야."
       "오, 정말 고마워요, 하나님!"
       "도리, 왜 그래?"
       "저...... 화내지 말아야 해요. 나 -- 나, 그 약 안 
     먹었어요." 그는 놀란 것처럼 보이려고 했다. 그녀 입술에서 
     봇물이 터진 듯이 말이 흘러나왔다. "당신이 밤일을 구할 거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나는 우리가 결혼할 수 있다고 믿었고, 그러면 
     다른 모든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나는 
     좀더 많이, 아주 많이 그것에 대해 생각해 봤어요. 지금은 내가 
     옳았다고 생각해요." 그녀는 잠시 말을 끊고는, "화나지 
     않았죠?" 하고 말하고는 그의 눈치를 살폈다. "이해해 
     주시겠죠?"
       "물론, 베이비. 화나지 않았어. 내가 말했잖아. 약이 듣지 
     않아서 기쁘다고."
       그녀의 입술이 안도의 미소로 떨렸다. "나는 당신에게 
     거짓말을 하고는 큰 죄를 지은 것 같았어요. 나는 당신에게는 
     말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거든요. 난...... 정말 믿을 수가 
     없어요."
       그는 앞가슴 주머니에서 잘 접힌 손수건을 꺼내어 그녀의 눈에 
     갖다댔다. "도리, 그 약을 어떻게 했어?"
       "버렸어요." 그녀는 수줍은 듯이 웃었다.
       "어디에?" 그는 손수건을 주머니에 넣으며 지나가는 말투로 
     물어보았다.
       "화장실에요."
       그것은 바로 그가 듣고 싶었던 대답이었다. 그녀가 독약을 
     먹고 이미 발작을 일으켰어야 할 때, 왜 그녀가 그 같은 구차한 
     방법을 생각했는가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는 담배 
     꽁초를 떨어뜨려서 발로 밟았다.
       도로시는 마지막 한 모금을 빨고 나서 발로 비벼껐다. "오, 
     자기." 그녀는 탄성을 질렀다. "모든 일이 이젠 완전해졌어요. 
     완전해졌다고요."
       그는 그녀의 양어깨에 손을 얹고서 부드럽게 그녀 입술에 
     키스했다. "그래, 완전해." 그가 말했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두 개의 꽁초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것에는 립스틱 자국이 묻어 있었고, 그의 것은 깨끗했다. 그는 
     자기 것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엄지 손톱으로 가운데를 잘라 
     담뱃재를 바람에 날려가게 한 뒤, 종이를 조그맣게 말아서 난간 
     너머로 휙 던져버렸다. "군대에 있을 땐 늘 이렇게 했어." 그가 
     말했다.
       그녀는 시계를 보았다. "10분 전 1시예요."
       "도리 시계가 빠른 모양이군." 그는 자기 시계를 보면서 
     말했다. "아직 15분 남았어." 그는 그녀의 팔을 잡고서 옥상 
     가장자리에서 천천히 떨어져 나왔다.
       "당신, 주인 아주머니에게 말했어요?"
       "뭘? 아, 그래. 모든 게 잘 처리되었어."
       그들은 엘리베이터 조작실을 지났다. "월요일에 기숙사에서 
     도리의 짐을 옮기면 돼."
       도로시가 씩 웃어 보였다. "애들이 놀라겠지요? 기숙사에 있는 
     애들 말이에요." 그들은 환기통 난간 주위를 천천히 서성거렸다. 
     "당신 주인 아주머니가 우리에게 벽장을 줄까요?"
       "그럴 거야."
       "기숙사 다락방에 겨울 물건을 놔둘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많지는 않을 거예요."
       그들은 남쪽의 환기통에 이르렀다. 그는 등을 난간에 기대고, 
     난간 위를 손으로 잡고 훌쩍 뛰어올랐다. 그는 벽면을 발꿈치로 
     치면서 앉았다.
       "거기 앉지 말아요." 도로시가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다.
       "왜?" 그는 하얀 돌을 쳐다보면서 물었다. "너비가 1피트나 
     돼. 너는 폭이 30 센티나 되는 벤치에 앉아도 떨어지지 않잖아." 
     그는 그의 왼쪽 자리의 돌을 툭툭 쳤다. "자, 이리 와."
       "싫어요." 그녀가 말했다.
       "바보같이."
       그녀는 뒤를 툭툭 털었다. "옷이 이래서요......"
       그는 손수건을 꺼내어 죽 펴서는 바로 옆 돌 위에 깔았다. 
     "월터 롤리 경 (1552~1618, 영국의 군인, 탐험가, 숙녀를 위해 
     진흙탕에 망토를 깐 일이 있다)." 그가 말했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지갑을 그에게 주었다. 그리고 난간 
     쪽으로 등을 돌리고 손수건의 양쪽 위를 꽉 잡고서 훌쩍 
     뛰어올랐다. 그가 그녀를 도와주었다. "거기서 -- " 그는 그녀의 
     허리를 팔로 감싸면서 말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어깨 
     너머를 흘끗 보았다. "아래를 보지 마." 그가 주의를 주었다. 
     "현기증이 날 테니까."
       그는 오른쪽 돌 위에 지갑을 놓고 잠시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돌의 앞을 꽉 쥐고 있었다. 비둘기 두 마리가 
     계단 뒤에서 날아와 그들을 조심스레 쳐다보면서 타르 바닥을 
     쪼며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당신 어머니에게는 전화로 말씀드릴 거예요, 아니면 편지를 
     쓸 거예요?" 도로시가 물었다.
       "글쎄."
       "나는 엘렌과 아버지에게 편지를 쓸 거예요. 전화로만 
     말하기가 좀 쑥스러워서요."
       환풍기가 덜컹거렸다. 잠시 뒤 그는 그녀의 허리에서 손을 
     떼어, 그들 사이의 돌을 꼭 붙잡고 있는 그녀의 손 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다른 손으로는 돌을 잡고 난간에서 내려왔다. 
     그리고는 그녀가 내려오기 전에 몸을 돌려 그녀를 쳐다보면서 
     그녀의 무릎에 허리를 갖다대고 손으로 그녀의 두 손을 덮었다. 
     그가 웃자 그녀도 따라 웃었다. 그가 시선을 그녀의 배 쪽으로 
     움직이며, "꼬맹이 엄마." 하고 말하자 그녀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는 그녀의 무릎 쪽을 손으로 받친 채 그녀의 치마 가장자리 
     아래를 손끝으로 더듬었다.
       "그만 가는 게 좋겠어요."
       "조금 있다가, 베이비. 아직 시간이 있어." 그의 손이 아래로 
     내려가 종아리의 곡선을 어루만지는 동안 그는 그녀의 시선을 
     놓치지 않고 마주보고 있었다. 그는 주위에 펼쳐진 광경에서 흰 
     장갑을 낀 그녀의 손을 보았다. 여전히 난간을 꼭 쥐고 있었다.
       "블라우스가 아름답군." 그는 그녀의 목에서 나부끼는 실크 
     스카프를 보며 말했다. "새로 샀어?"
       "새것이라니? 얼마나 오래 됐는데요."
       그의 시선은 점점 차가워졌다. "스카프가 조금 비뚤어졌어."
       그녀의 한쪽 손이 돌에서 떨어져 스카프를 바로 하기 위해 
     올라갔다. "아니 -- " 그가 말했다. "더 비뚤어졌어." 그녀는 
     나머지 한쪽 손도 난간 위에서 떼었다.
       그의 손이 부드러운 그녀의 종아리를 감싸며 뒤로 움직였다. 
     그가 몸을 구부리지 않고 닿을 수 있는 데까지 -- 그는 오른쪽 
     발을 뒤로 빼어 발끝으로 균형을 잡고 준비 자세를 취했다. 그는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는 두 손으로 스카프를 매만졌다.
       "이제 잘되었 -- "
       뱀이 쥐를 낚아채듯이 그는 몸을 구부려 -- 그녀의 발목을 
     잡기 위해 손을 아래로 뻗고서 -- 뒤로 물러나면서 몸을 똑바로 
     하고는 그녀의 다리를 높이 쳐들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손은 그녀의 발꿈치에서 신발 바닥까지 옮겨갔고,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정신이 나갈 정도로 겁에 질린 그녀의 눈, 
     그리고 그녀의 목에서 외마디 비명이 새어나왔다. 그는 온 힘을 
     다해 공포로 빳빳해진 그녀의 다리를 밀었다.
       그녀가 지르는 째지는 듯한 비명이 타오르는 철사처럼 환기통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는 눈을 감았다. 비명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 잠시 뒤, 귀가 먹을 정도로 지독하게 요란한 소리가 났다. 
     그는 흠칫하고는 아래쪽에 빈 깡통과 목재 부스러기가 쌓여 
     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그는 돌 위에서 바람이 부는 대로 나풀거리는 자기의 손수건을 
     바라보았다. 그것을 집어올렸다. 그리고 몸을 돌려 한 손으로 
     모자와 가방을 집어들고 계단 문으로 걸어가서 문을 밀었다. 
     그리고는 손수건으로 손잡이를 닦았다. 문지방을 재빨리 넘어서 
     문을 잡아당겨 닫고는 안쪽 손잡이도 닦았다. 그는 돌아서서 
     급하게 뛰어갔다.
       그가 검은색 철제 계단을 한단 한단 덜커덕거리며 내려가는데 
     가방이 다리에 채이고 난간을 잡은 오른손은 불이 날 정도였다. 
     그는 가슴이 쿵쿵 뛰고, 벽이 뱅뱅 돌아 눈앞이 아찔아찔했다. 
     결국 그는 7층에서 멈췄다.
       그는 난간을 붙잡고 매달렸다. '긴장의 육체적 발산'이란 말이 
     그의 마음에서 방망이질쳤다. 그것 때문에 그가 그렇게 뛰었던 
     것이다. 긴장의 육체적 발산 -- 공포가 아니다...... 공포가 
     아니야...... 그는 숨을 가다듬었다. 가방을 내려놓고, 꽉 
     잡아서 찌그러진 모자를 바로잡았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모자를 
     썼다. 그리고는 손을 쳐다보았다. 손바닥이 신발 바닥에서 묻은 
     먼지로 더러웠다. 그는 그것을 깨끗이 닦고는 손수건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는 윗도리를 몇 번 잡아당긴 뒤, 가방을 들고서 
     문을 열고는 복도로 걸어나왔다.
       문은 모두 열려 있었다. 사람들이 사무실에서 뛰어나와 복도를 
     가로질러 환기통과 접해 있는 창문으로 몰려갔다. 작업복을 입은 
     남자들, 소매를 걷어올리고 종이를 든 속기사들, 초록색 보안용 
     챙을 쓰고 소매 없는 셔츠를 입은 사람들 -- 모두의 입을 꽉 
     다물고 눈을 크게 뜬 얼굴에는 핏기가 없었다. 그는 여느 때와 
     똑같은 걸음걸이로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다가 누군가가 그의 
     앞을 지나가는 바람에 잠깐 멈췄다가는 다시 걸었다. 사무실 
     앞을 지날 때마다 흘끗 안을 기웃거리며 열어놓은 창문 주위에 
     모여 흥분해서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았다.
       엘리베이터 앞에 다다른 순간,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그는 안으로 비집고 들어가서 문 앞을 
     바라보며 섰다. 그의 등뒤에서 사람들이 여기저기에서 얻어들은 
     이야기를 바쁘게 나누었다. 덕분에 늘 엘리베이터 안에 잠겨 
     있는 침묵이 사라졌다.
       로비는 평상시와 똑같이 부산했다. 그곳 사람들은 막 밖에서 
     들어왔기 때문에 어떤 소란이 있었는지 모르고 있었다. 그는 
     가볍게 가방을 흔들면서 대리석 바닥을 걸어 밝고 시끄러운 
     오후의 대기 속으로 나갔다. 그가 건물 앞의 계단을 내려갈 때, 
     경찰관 두 명이 그를 지나 계단을 올라갔다. 그는 돌아서서 
     회전문 안으로 사라지는 파란색 제복을 쳐다보았다. 그는 계단 
     앞에 잠시 멈추어서서 한 번 더 손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손이 
     돌처럼 굳어 있었다. 그러나 떨고 있지는 않았다. 그는 다시 
     돌아서서 회전문을 보면서 씩 웃었다. 되돌아가서 사람들에 섞여 
     그녀의 모습을 보는 것은 위험한 일이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대학으로 향하는 시내전차가 덜컹거리며 지나갔다. 그는 차가 
     빨간 불에 멈춰서 있는 교차점까지 뛰어갔다. 재빨리 뛰어올라 
     10센트 동전을 떨어뜨리고 차 뒤쪽으로 들어갔다. 그는 창문을 
     바라보며 섰다. 전차가 네 블럭 정도 지났을 때 하얀 앰뷸런스가 
     사이렌을 울리며 지나갔다. 그는 그 소리가 점점 작아지며 시청 
     건물 앞 신호등에 가려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쪽을 바라보았다. 
     이내 전차가 대학로로 방향을 돌렸기 때문에 더 이상은 볼 수 
     없었다.


        제 13 장 

       그날 밤 9시에 경기장 옆의 빈터에서 야구경기 응원연습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한 학생의 자살 이야기 (클래리온지에 
     의하면 담의 높이가 1미터나 된다고 했으니까 과실사라고는 보기 
     어렵잖아?) 가 화제였다. 오렌지색 축하 불꽃이 터지는 
     가운데에서 학생들, 특히 여학생들은 아예 자리를 펴고 앉아서 
     재잘재잘 이야기를 그치지 않았다. 야구부 주장과 응원단원들은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남학생들에게 땔감을 좀더 모아오라고 말했고, 불이 꺼지려고 
     하면 불기둥이 솟아오를 때까지 빈 상자와 두꺼운 종이들을 
     집어넣었다. 그러나 모두 소용없었다. 응원하는 학생들은 
     술렁거리다가 학교 이름이 반도 써지기 전에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전에 그는 응원연습에 자주 참가하진 않았지만, 이번에는 
     참가했다. 그는 마분지 상자를 들고 숙소를 나와 성찬식에 가는 
     듯한 느린 걸음으로 캄캄한 거리를 걸었다.
       오후에 그는 도로시의 가방을 비워서 그녀의 옷가지를 그의 
     침대 밑에 숨겨두었었다. 날씨가 따뜻했지만, 그는 트렌치 
     코트를 입고 옷가지와 함께 들어 있는 조그만 화장품 병들을 
     주머니에 넣은 뒤, 도로시의 뉴욕과 블루 리버 주소가 적힌 
     가방을 들고서 집을 나섰다. 시내로 들어가 버스 터미널에 있는 
     유료보관함에 가방을 집어넣었다. 그는 모튼 스트리트 다리로 
     걸어가서 보관함의 열쇠를 던져 버렸다. 그리고는 화장품 병들이 
     물에 뜨지 않도록 마개를 열어 공기를 뺀 뒤 하나씩 차례로 
     물속에 떨어뜨렸다. 분홍빛 로션이 물 위로 떠올랐다가는 이내 
     흩어져서 없어졌다. 다리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잡화점에 
     들러 파인애플 주스 통을 담았었던 구겨진 상자를 하나 얻었다.
       그는 그 상자를 응원연습장에 가져가서, 어둠 속에서 
     오렌지빛으로 웅크리고 앉아 있거나 드러누워 있는 학생들 
     사이를 뚫고 지나갔다. 담요 모퉁이와 파란색 청바지 다리 
     사이를 활기차게 지나 불이 타고 있는 응원연습장 중앙으로 
     나아갔다.
       활활 타오르는 장작 근처는 열기와 불빛이 강렬했다. 그는 
     잠시 멈춰서서 불꽃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야구부 감독과 
     응원단장이 불 건너편에서 이리로 뛰어나왔다. "바로 이거야!" 
     하고 그들은 소리를 치고는 그의 손에서 상자를 낚아챘다.
       "이봐 -- " 야구부 감독이 상자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이건 
     빈 게 아니잖아?"
       "책들과 헌 공책인데요."
       "와! 굉장하군!" 감독은 빙 둘러싼 학생들 쪽으로 돌아섰다. 
     "주목! 주목! 이제부터 책을 태우는 거야." 몇몇 학생들이 
     쳐다보았다. 야구부 감독과 응원단장이 상자를 그들 사이로 들고 
     와서 펄럭거리는 불꽃을 향해 앞뒤로 흔들었다. "꼭대기로 
     던져야 해!" 하고 감독이 소리쳤다.
       "이봐......"
       "걱정 마. 우리는 절대로 실수하지 않을 테니까! 책을 태우는 
     데는 명수거든!"
       그들은 상자를 던졌다. 하나......둘......셋! 그것이 
     둥그렇게 쌓인 장작 더미와 나란히 날아가 원을 그리며 맨 
     꼭대기의 불꽃 속으로 내려앉았다. 상자는 잠시 앞뒤로 
     흔들거리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구경하던 사람들이 여기저기에서 
     박수를 쳤다.
       "알이 상자를 가지고 온다!" 하고 응원단장이 소리쳤다. 그가 
     불 저쪽으로 뛰어가자 감독도 그를 따라서 쫓아갔다.
       그는 상자 옆으로 불꽃이 기어 올라가 검게 변하는 것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갑자기 불 한가운데가 흔들리며 불꽃이 
     튀어올랐다. 불붙은 나무토막이 그의 발에 부딪쳤다. 그는 뒤로 
     물러섰다. 불꽃이 그의 바지 앞쪽에서 타올랐다. 짜증스럽게 
     그것들을 털어내는 그의 손이 활활 타오르는 불꽃 안에서 
     구릿빛으로 보였다.
       마지막 불똥을 털어내고 나서 그는 상자가 아직도 그대로 
     있는지 보기 위해서 고개를 올려다보았다. 됐다. 불꽃이 그 위로 
     치솟아오르고 있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것도 지금은 완전히 다 
     타버렸을 것이다.
       약품 실험지침서, 킹쉽 코퍼 팜플렛, 가방의 꼬리표, 그리고 
     도로시가 그들의 약식 신혼여행을 위해 준비했던 몇 가지 옷들 
     -- 회색 호박단 칵테일 드레스, 검은색 양가죽 구두, 스타킹, 
     속치마, 브래지어와 팬티, 손수건 두 장, 분홍색 비단 슬리퍼, 
     분홍색 실내복, 나이트가운, 그리고 향기가 나고 섬세한 
     레이스가 달린 옷 등이 들어 있었다.


        제 14 장 

       블루 리버 클래리온 레저에서, 1950년 4월 28일 금요일
       스토다드 대학 여학생 추락 사망
       부호 코퍼 씨의 딸로 시청 건물에서 참사

       스토다드 대학 2학년인 열아홉 살 도로시 킹쉽 양이 오늘 블루 
     리버 시청 건물 14층 옥상에서 떨어졌거나 뛰어내려 시체로 
     발견되었다. 뉴욕 시 출생의 매력적인 금발의 이 아가씨는 킹쉽 
     코퍼 주식회사의 회장인 레오 킹쉽의 셋째딸이다.
       오늘 12시 58분, 그 건물 일꾼들은 커다란 비명소리와, 건물 
     옥상까지 나 있는 환기통이 부서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이 
     놀라 창문으로 달려갔더니 한 젊은 아가씨가 쓰러져 있었다. 
     마침 그곳 로비에 있었던 57번가 우드브리지 클럽의 하비 헤스 
     의사가 여자가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그 사건현장으로 달려갔다.
       조금 늦게 도착한 경찰은 옥상의 환기통을 둘러싸고 있는 1 
     미터 정도 되는 담에 지갑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지갑 
     안에는 신분을 알려주는 출생증명서와 스토다드 대학 학생증이 
     있었다. 또한, 경찰은 옥상에서 금방 피웠던 담배 꽁초를 
     발견했는데, 그것에는 킹쉽 양이 발랐던 립스틱 자국이 묻어 
     있었다. 이러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그녀는 투신자살을 하기 전에 
     몇 분 동안 옥상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엘리베이터 안내원인 렉스 카길은 참사가 있기 30분 전에 킹쉽 
     양을 6층인가 7층까지 태워다 줬다고 경찰에게 진술했다. 또 
     다른 안내원인 앤드루 베시는 킹쉽 양과 비슷한 옷차림을 한 
     여자를 12시 30분이 조금 지났을 때 14층에서 내려주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녀가 몇 층에서 탔는지는 알지 못했다.
       스토다드 대학의 학생처장인 클라크 D. 웰시 씨의 말에 따르면 
     킹쉽 양은 성적이 우수했다고 한다. 기숙사의 학생들도 충격을 
     받았으며, 그녀가 왜 자살을 했는지 이유를 알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그녀가 평소에 혼자 있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어떤 
     여학생은, "그녀와 친하게 지낸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하고 
     말했다.

       블루 리버 클래리온 레저에서, 1950년 4월 29일 토요일
       여학생의 죽음은 자살이었다
       언니가 우편으로 편지를 받다

       어제 오후 시청 건물 옥상에서 떨어져 숨진 스토다드 대학의 
     여학생인 도로시 킹쉽의 죽음은 자살이었다고 엘든 체서 
     경찰서장이 어젯밤에 발표했다. 서명은 없었지만, 죽은 여학생이 
     쓴 것이 분명한 짤막한 편지가 위스콘신 주 컬드웰 대학의 
     학생인 그녀의 언니 엘렌 킹쉽에게 어제 오후 늦게 우편으로 
     배달되었다. 거기에 쓰인 내용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체서 
     서장은, "자살 의도가 분명히 나타나 있다." 라고 말했다. 
     그것은 이 도시에서 발송된 것으로, 어제 아침 6시 30분 소인이 
     찍혀 있었다.
       엘렌 킹쉽은 유서를 받자마자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는 
     스토다드 대학의 클라크 D. 웰시 학생처장에게 연결되었고, 그가 
     열아홉 살 된 여학생의 죽음을 알려주었다. 킹쉽 양은 즉시 블루 
     리버를 향해 떠나 어제 저녁에 여기에 도착했다. 그녀의 
     아버지인 킹쉽 코퍼 주식회사의 레오 킹쉽 회장은, 그가 탄 
     비행기가 날씨 관계로 시카고에 머무르고 있어서 아직 도착하지 
     못했지만 오늘 안으로 도착할 것으로 보인다.

       자살자와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람은 그녀가 
     긴장하고 흥분되어 있었다고 말했다

       -- 레이번 브린
       "그 애는 자주 웃었어요. 내 방에 있는 동안 내내 웃고 
     있었지요. 그리고 가만히 있지 않고 여기저기 돌아다녔어요. 
     나는 그 애가 무척 기분이 좋은 모양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 보니 그게 모두 극도의 신경쇠약증세였던 것 같아요. 그 
     애의 웃음은 긴장된 웃음이었지, 행복한 것은 아니었던 거예요. 
     내가 그때 알아챘어야 하는 건데." 스토다드 대학 2학년인 
     애너벨 코크는 도로시 킹쉽이 자살하기 바로 두 시간 전의 
     행동을 이렇게 설명했다.
       보스턴 출신인 코크 양은 작고 매력적인 여학생이다. 어제 
     그녀는 심한 두통과 감기 때문에 기숙사 방에 들어가 있었다. 
     "도로시가 11시 15분쯤 문을 두드렸어요." 하고 코크 양은 
     말했다. "나는 침대에 있었어요. 그 애를 보고 나는 조금 
     놀랐죠. 왜냐하면 우린 서로 잘 아는 사이가 아니었거든요. 내가 
     말하는 동안 그 애는 미소를 지으면서 여기저기 서성거렸어요. 
     그 애는 화장옷을 입고 있었는데, 내게 내 초록색 옷에 달린 
     벨트를 빌려줄 수 없겠느냐고 묻더군요. 우리들은 똑같은 초록색 
     옷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나는 보스턴에서 샀고 그 애는 
     뉴욕에서 샀지만, 우리 옷은 정말 똑같았어요. 우리들은 지난 
     토요일 밤 저녁식사에 똑같이 그 옷을 입고 나와서 서로 정말 
     당황해서 혼났어요. 그녀는 자기 벨트의 버클이 망가졌다고 
     하면서 내 벨트를 빌려달라고 하더군요. 나는 처음엔 
     망설였지요. 왜냐하면 그것은 봄에 새로 산 옷이었거든요. 
     하지만 그 애에게 벨트가 꼭 필요한 것 같아서 그것이 들어 있는 
     서랍을 일러주었더니 그 애가 꺼내어 갔어요. 그 애는 나에게 
     고맙다고 하고는 방을 나갔습니다."
       여기서 잠시 코크 양은 말을 멈추고 안경을 벗었다. "아주 
     이상한 일이 있어요. 나중에 경찰이 그 애의 유서를 찾으려고 
     수색하다가 그 애 책상위에서 내 벨트를 찾았대요! 그런데 버클 
     톱니의 금빛 도금이 벗겨졌더군요. 나는 몹시 속이 상했어요. 
     사실 그 옷은 비싼 거였거든요. 아직도 경찰에서 그 벨트를 
     보관하고 있다고 해요.
       나는 도로시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애는 내 벨트가 
     필요하다고 했으면서도 사용하지를 않았거든요. 그 애는 자기 
     초록색 옷을 입고 있었어요. 그때......그 일이 일어났을 때 
     말이에요. 경찰이 조사를 했는데, 그 애의 벨트는 조금도 
     망가지지 않았대요.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에요. 나중에 나는 그 
     벨트는 단지 내게 말을 걸기 위한 구실이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 애는 그 옷을 꺼내다가 나를 생각했겠지요. 내가 
     감기에 걸렸다는 것은 모두들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 애는 
     나에게 와서 벨트가 필요한 체했던 거예요. 그 애는 누군가와 
     말을 하고 싶었던 게 틀림없어요. 그때 내가 그것을 눈치챘어야 
     하는 건데 말예요. 내가 그 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내게 털어놓도록 했다면 아마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건데."
       ......우리가 애너벨 코크의 방을 나올 때 그녀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경찰이 그 벨트를 다시 돌려준다고 해도 나는 
     다시는 내 초록색 옷을 입을 수 없을 거예요."


        제 15 장 

       그는 그 학년의 남은 여섯 주일이 몹시 지루했다. 도로시가 
     죽고 나면 로켓처럼 하늘로 떠오를 것 같은 환희를 느낄 거라고 
     기대했었다. 하지만 그런 기분은 금방 사라져 버렸다.
       그가 찬란한 우월감을 느낄 수 있도록 도로시의 죽음이 
     캠퍼스에서 좀더 화제가 되고, 신문에 좀더 많은 기사가 
     실리기를 바랐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도로시가 죽은 지 
     사흘이 지나자 캠퍼스의 이야기는 조그만 기숙사에서 발견된 
     열두 갑의 마리화나 담배로 옮겨졌다. 지난번 클래리온 지에 
     도로시의 아버지 레오 킹쉽이 블루 리버에 도착했다는 짤막한 
     기사가 실렸었다. 결혼하지 않은 여자가 뚜렷한 이유를 밝히지 
     않고 자살했을 때 분명히 첫번째로 조사해 보았을 임신검사 
     결과에 대해서도 한마디도 없었다. 킹쉽은 신문에서 그 기사를 
     삭제하기 위해서 상당한 액수의 돈을 썼을 것이다.
       그는 기뻐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만일 어떤 수사가 
     진행되고 있다면 지금쯤 분명히 그는 어떤 식이든 심문을 받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의문점도, 미심쩍은 것도 없는 
     것이다 -- 그래서 수사도 없는 것이리라. 모든 것이 완전히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 벨트 문제만 빼고는. 그것이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도대체 도로시는 그것을 매지도 
     않았으면서 왜 코크라는 여학생의 벨트를 빌려 갔을까? 어쩌면 
     정말 그녀는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 결혼에 
     대해서 -- 그래서 그 벨트를 생각해 냈겠지. 그렇다면 정말 
     다행인데. 아니면, 그녀의 벨트 버클이 정말 망가졌는데, 나중에 
     코크의 것을 빌린 뒤에 그것을 고쳤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 두 
     가지 모두 중요한 사건은 아니다. 그 일에 대한 코크의 설명은 
     단지 자살 가능성을 확실히 해주었으며, 또한 그의 계획을 
     흠잡을 데 없이 성공하게 해주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여유 
     있는 미소를 보내며 걸어야 할 것이다. 은밀히 혼자서 
     샴페인으로 축배를 들면서 -- 그런데 이렇게 지루하고 덤덤하고 
     축 처져 있다. 그는 자신의 이런 기분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우울증은 6월초에 메나세트로 돌아오고 나서 더욱 
     심해졌다. 그가 지난 여름 농기구를 다루는 회사 부사장의 
     딸에게 어떤 녀석이 있다는 말을 듣고 나서 돌아왔던 고향, 또 
     그전 여름엔 미망인과 헤어지고 나서 머물렀던 고향에 돌아온 
     것이다. 도로시의 죽음은 방어수단일 뿐이었다. 그의 모든 
     계획은 조금도 진척되지 않았다.
       그는 어머니에 대해서 어쩔 수 없었다. 학교에서의 그의 
     편지는 일주일마다 보내는 엽서로 한정되었기 때문에 지금 그의 
     어머니는 사사건건 그가 귀찮을 정도로 물어보았다. 함께 다니는 
     여학생들의 사진을 가지고 있느냐 -- 그 여학생이 예쁘고 명성이 
     있기를 기대하면서 -- 그가 이 모임에 들었는가 저 모임에 
     들었는가 -- 그가 각 모임에서 대표이기를 바라면서 -- 철학과 
     영어, 그리고 스페인 어의 점수는 어떠한가 -- 모든 것에서 가장 
     뛰어나기를 바라면서 -- 아들은 하루는 참다못해 짜증을 냈다. 
     "어머니도 이젠 제가 세상에서 으뜸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셔야 
     해요!" 하며 소리를 버럭 지르고는 방을 뛰쳐나갔다.
       그는 여름 내내 일을 했다. 돈이 필요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어머니와 하루 종일 집에 있는다는 것이 너무 불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일이라는 것이 그의 마음에 들 정도로 좋은 
     자리는 아니었다. 그것은 내부 설비가 현대식으로 디자인된 
     양품점이었다. 진열장에는 1인치 폭 정도의 반짝거리는 구리 
     테두리가 둘러져 있었다.

       7월 중순에 접어들면서 그는 우울증에서 벗어났다. 그는 
     도로시의 죽음에 대한 기사가 실린 신문 스크랩을 회색의 작은 
     금고 안에 넣고 자물쇠를 채워 침실의 벽장에 보관했다. 그리고 
     가끔씩 그것들을 꺼내어 죽 훑어보고는 엘든 체서 경찰서장의 
     비공식적인 확신과 애너벨 코크의 어설픈 이론에 조소를 보냈다.
       그는 헌책 대출증을 찾아내어 갱신하고는 정기적으로 한물 
     지난 책들을 빌려보았다. 지방 살인사건 시리즈 전집에 있는 
     퍼슨의 <살인 연구>, 볼리소의 <돈을 위한 살인>, <지방 
     살인사건 시리즈> 의 전집 등 -- 그는 자기라면 성공했을 
     사건에서 실패한 사람들인 랜드루, 스미스, 프리차드, 크리픈에 
     대해서 읽었다. 물론 그것은 실패한 이야기만 적어놓은 것이다 
     -- 하지만 하나님만은 얼마나 많은 성공이 있었는지 알 것이다. 
     그것은 또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실패했는지를 상기시켜 주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그는 항상 시청 건물에서 일어난 사건을 '도리의 
     죽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을 '도리의 살인'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가끔 침대에 누워 그런 책에 나온 몇몇 사건을 읽고 있으면 
     그가 저지른 행동에 대한 엄청난 두려움이 엄습해 오는 
     것이었다. 그럴 때면 그는 벌떡 일어나 거울에 비친 자기의 
     모습을 쳐다보곤 했다. '나는 살인하지 않았어!' 하고 그는 
     생각했다. 한번은 큰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나는 살인하지 
     않았어!"
       아직 부자가 아니라는 것이 어쨌단 말인가! 제기랄, 그는 이제 
     겨우 스물네 살인데 --

죽음의 키스 (중)
아이나 레벤


       ----- 차 례 ----
      
    제 II 부 헬렌
       ⊙ 작가 소개
       제 1 장
       제 2 장
       제 3 장
       제 4 장
       제 5 장
       제 6 장
       제 7 장
       제 8 장
       제 9 장
       제 10 장
       제 11 장
       제 12 장
       제 13 장
       제 14 장
       제 15 장


        ⊙ 작가 소개 

       - 1920, 죽음의 키스를 발표하면서 추리문단에 혜성처럼 등장
       - 1956년, 이 작품은 거드 오스왈드 감독, 로버트 와그너
       주연으로 유나이티드 아티스트 사에서 영화화
       - 1967년 공포 괴기 소설 로즈메리의 아기.(Rosemary's Baby,
       1967)를 발표하면서 명성을 드높임.
       - 이 작품은 로만 폴란스키 감독, 미아 패로 주연으로
       파라마운트 사에서 영화화.
       - 그밖에 저서로 공상과학소설인 <이 완전한 시대(This
        PerfectDay, 1970)>, 괴기공포소설인 <스테포드의
        아낙네들(The Stepfore Wives, 1972)> 정치공포소설인
        <브라질에서 온 소년들(The Boys from Brazil, 1976)> 심리
       멜로드라마인<인터로크(Interlock,1958)>,뮤지컬인<성가신고
       양이!(Drat!TheCat!,1965)>,공포극<베로니카의방(Veronica's
        Room, 1973)> 등이 있다.



         제 1 장 

       레오 킹쉽에게 온 애너벨 코크의 편지
       1951년 5월 5일
       아이오와 주 블루 리버
       스토다드 대학
       여학생 기숙사

       존경하는 킹쉽 선생님에게
       신문에 났던 제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제가 누구인지 
     의아해 하시겠군요. 저는 지난 4월에 선생님의 딸인 도로시에게 
     벨트를 빌려줬던 여학생입니다. 저는 그녀와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람이에요. 그 사건이 선생님에게 매우 
     가슴아픈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다시 들춰내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도로시와 제가 똑같은 초록색 옷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실 거예요. 그녀는 제 방에 와서 벨트를 빌려달라고 
     했어요. 저는 그것을 빌려줬고, 나중에 경찰이 그녀의 방에서 
     그것을 (제가 그것이라고 생각한 것을) 찾아냈지요. 경찰은 한 
     달 남짓 그것을 보관하고 있다가 제게 돌려주었는데, 그 때는 
     철이 지난 뒤라서 작년에는 초록색 옷을 다시 입지 않았습니다.
       저는 올봄이 되어서 어젯밤에 봄옷들을 입어보았지요. 그 
     초록색 옷을 입어보았더니 딱 맞더군요. 그러나 벨트를 매려는 
     순간 저는 그것이 도로시의 벨트라는 것을 알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답니다. 버클에 나 있는 구멍이 두 칸이나 제 허리보다 
     컸거든요. 도로시는 제법 날씬했지만, 저는 마른 편이거든요.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아주 말랐어요. 그리고 작년과 비해 
     몸무게도 줄지 않았답니다. 그리고 말씀드린 대로 그 옷은 제게 
     꼭 맞았지요. 그러니 그 벨트는 도로시의 것이 틀림없잖겠어요? 
     처음에 경찰이 그것을 보여주었을 때, 저는 톱니의 금빛 도금이 
     벗어졌기에 제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저는 그때 우리 옷이 같은 
     회사 제품이기 때문에 버클도 똑같이 도금이 벗겨졌다는 걸 
     알아차렸어야 했는데요.
       도로시가 자기 벨트가 망가지지도 않았는데 자기 것을 매지 
     않고 제 것을 빌려간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을 거예요. 저는 
     그것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때 저는 그녀가 단지 저와 
     이야기하고 싶어서 제 벨트가 필요한 체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 벨트가 도로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니까 웬지 그것을 
     맨다는 게 우스운 일 같아요. 저는 미신을 믿지는 않지만, 결국 
     그것은 제 것이 아니라 가엾은 도로시의 것이니까요. 그것을 
     버릴까 생각도 했지만, 그것도 어리석은 행동 같아서 소포로 
     선생님에게 보냅니다. 그것을 보관하시든지, 알아서 적당히 
     처리하세요.
       어쨌든 올해도 이곳 여학생들은 넓은 가죽 벨트를 매니까 아직 
     그 옷은 입을 수 있어요.
       애너벨 코크 드림

       엘렌 킹쉽에게 보내는 레오 킹쉽의 편지
       1951년 5월 8일
       사랑하는 엘렌에게

       지난번 네 편지를 받고 곧 답장해 주지 못해서 미안하구나. 
     그러나 일이 바빠서 부득이 늦을 수밖에 없었다.
       수요일인 어제 메리온이 저녁식사를 하러 이곳에 왔었다. 그 
     애는 그렇게 건강해 보이지 않더구나. 어제 내가 받은 편지를 그 
     애에게 보여주었더니 그것을 네게 보내라고 하더구나. 동봉된 
     편지가 있을 게다. 먼저 그것을 읽어보고, 내 편지를 읽거라.
       코크 양의 편지를 읽었을 테니, 이제 내가 왜 그것을 보냈는지 
     설명하겠다.
       메리온이 그러는데 -- 도로시가 죽고 나서 네가 그 애에게 
     냉담하게 대했다며 자신을 학대하고 있다고 하는구나. 도로시가 
     '이야기 상대가 절실했다'는 코크 양의 유감스런 이야기가 
     메리온에 따르면, 그 이야기 상대가 네가 되었어야 했으며, 또 
     너밖에 없었을 거라고 네가 느끼고 있기 때문에 네가 쉽게 
     도로시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는구나. 비록 그 말이 
     메리온이 네 편지를 읽고 추측한 것일지라도, 너는 만일 
     도로시에 대한 네 태도가 달랐더라면 그 애가 그런 식으로 
     죽음을 택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믿을 게다.
       나는 그것이 네 생각을 설명해 주는 것이기 때문에 메리온의 
     말을 믿는다. 작년 4월, 거론할 여지가 없는 증거인 유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네가 도로시의 죽음이 자살이라는 것을 
     완강하게 거부했던 일이 떠오르는구나. 너는 도로시가 
     자살했다면 어떻게든 네게 책임이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네가 
     도로시의 죽음을 자살이라고 받아들이는 데는 몇 주일이 
     걸렸으며, 또한 거기에 따르는 많은 책임감도 받아들였다.
       코크 양에게서 온 이 편지로 보아, 도로시는 그 애 나름대로 
     몇 가지 이유가 있어서 그 여학생의 벨트를 빌리러 간 것이 
     확실해지는 것 같다. 그 애는 이야기할 수 있는 상대가 절실했던 
     게 아니었어. 그 애는 자기가 계획했던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던 거야. 그러니까 너희 둘이 지난번 크리스마스에 다투지 
     않았다면 먼저 너에게 갔을 거라고 믿을 만한 이유는 완전히 
     없어진 거야. (그리고 그 애가 시무룩해 있었고 먼저 싸움을 
     걸었다는 것을 잊지 말거라.) 도로시 편에서 처음으로 차갑게 
     느끼기 시작한 것은, 그 애가 네게 좀더 의지하려고 컬드웰로 
     가겠다는 것을 네가 스토다드로 가라고 한 말에 내가 찬성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기억해라. 사실, 만일 그 애가 너를 따라 
     컬드웰로 갔다면 그 비극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그 
     '만일'이란 단어는 중요한 말이다. 도로시에 대한 처벌은 너무 
     가혹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그 애는 그것을 선택했어. 나도 
     책임이 없고, 너도 책임이 없다. 아무도 도로시를 제외하고는 
     책임이 없어.
       도로시의 행동에 대한 코크 양의 설명이 잘못된 것이니, 
     아직도 네 마음에 남아 있을 자책감은 모두 털어버렸으면 
     좋겠다.
       너의 사랑하는 아버지
       추신 ; 글씨가 엉망이어서 미안하구나. 편지 내용이 너무 
     사적인 것이어서 리처드슨 양에게 받아쓰게 할 수가 없었다.

       버드 콜리스에게 보내는 엘렌 킹쉽의 편지
       1951년 5월 12일 
       아침 8시 35분 

       사랑하는 버드
       나는 특별열차에 앉아 콜라 한 잔과 (이 시간에 -- 우!) 
     연필과 종이를 놓고 흔들리는 기차 속에서 글씨를 쓰고 있어요. 
     그리고 내가 블루 리버로 여행하는 이유에 대해서, 멀홀랜드 
     교수가 말한 것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분명하게 설명하려고 
     해요.
       오늘밤 농구경기는 미안해요. 하지만 코니나 제인이 내 대신 
     시합할 수 있겠고, 그러면 당신은 내 생각을 반밖에 할 수 없을 
     거예요.
       무엇보다도 먼저 얘기하고 싶은 건 이번 여행은 충동적인 게 
     아니라는 거예요! 나는 어젯밤 내내 그것에 대해 생각했어요. 
     당신은 내가 이집트의 카이로 같은 곳으로 떠났을 거라고 
     생각하겠지요! 두 번째, 공부에 지장을 주지는 않을 거예요. 
     왜냐하면 당신이 과목마다 완전한 노트를 해놓을 테니까. 어쩌면 
     일주일이 더 걸리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다가 수업을 너무 
     빼먹어 낙제할 거라고요? 세 번째,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거예요. 내가 해보지 않고서는 결코 알 수가 없으니까요! 그리고 
     그러지 않고서는 잠시도 편안치 못하다니까요.
       반대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왜 내가 가야 하는지 이유를 
     설명하죠. 먼저 지금까지의 얘기를 간단하게 설명해야겠군요.
       토요일 아침에 아버지에게서 편지를 받았는데, 당신도 
     알겠지만 도로시는 컬드웰에 오기를 원했는데 내가 그 애를 위해 
     반대했어요. 그때는 그렇게 하는 게 옳다고 확신했지요. 그런데 
     그 애가 죽고 나서는 그것이 내 입장만 생각한 이기심에서 나온 
     행동이 아니었나 의심스러워졌어요. 비록 그때는 그것을 깨닫지 
     못했지만, 집에서 나는 엄격한 아버지와, 나에게 의존하는 
     도로시 사이에서 많은 제약을 받아왔어요. 그래서 컬드웰에 
     도착했을 때 나는 정말 내멋대로였어요. 처음 3년 동안 나는 
     꽤나 촐싹거리는 여자였지요. 맥주 파티나 빅 휠즈 등에도 많이 
     돌아다녔어요. 당신은 나를 잘 모를 거예요. 내가 도로시를 오지 
     못하게 한 이유가 그 애의 독립심을 키워주기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내 시간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는지는 지금도 
     확신할 수가 없어요. 컬드웰은 모든 사람들이 서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지내는 그런 곳이니까요.
       도로시의 죽음에 대한 내 반응에서 느낀 아버지의 판단은 
     (아마 간접적으론 메리온이 영향을 줬겠지만) 모두 옳아요. 나는 
     그 애가 자살했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아요. 그 말은 부분적으로 
     내게 책임이 있다는 뜻이니까요. 나는 감정적인 의심 외에 다른 
     것들도 의심하고 있답니다. 예를 들면, 그 애가 내게 보낸 유서 
     말이에요. 그것은 그 애가 쓴 거예요 -- 그것은 부정할 수 
     없어요 -- 그런데 말투는 전혀 그 애 같지가 않아요. 말이 
     딱딱하고,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당신'이라고 불렀어요. 
     그전에는 항상 '친애하는 엘렌,' 아니면 '가장 친한 엘렌'이라고 
     했거든요. 내가 경찰에 그것을 말했지만, 그들은 그 애가 유서를 
     쓸 때 긴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평상시의 말투가 나오지 
     않은 것이며, 나에게 그런 정도는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더군요. 
     또, 그 애가 출생증명서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도 좀 이상했어요.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또 적당히 둘러댔죠. 경찰들 말은, 자살은 
     자기가 누구라는 것을 확실히 밝히는 고통을 동반한다는 거예요. 
     그 애가 지갑에 항상 가지고 다녔던 다른 물건들 (스토다드 
     학생증 등) 로도 충분히 신분을 증명해 줄 수 있다는 사실에서 
     그들은 아무 느낌도 받지 못한 모양이에요. 내가 그들에게 그 
     애는 정말 자살할 애가 아니라고 말해 줬지만, 그들은 심지어 그 
     말에 대꾸조차 해주지 않는 거였어요. 내가 내세우는 것을 
     모조리 무시했죠.
       그래서 내가 그곳으로 가는 거예요. 물론 결국은 도로시가 
     자살을 했으며 -- 어느 정도 나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은 
     인정해야겠죠. 그런데 애너벨 코크의 이야기가 맘에 걸려요. 
     도로시의 자살 동기가 웬지 내게 책임감을 느끼게 한단 
     말이에요. 요즈음 이성 있는 아이들은 임신했다고 해서 
     자살하지는 않아요. 다른 사람에게 의지해서 살아왔는데, 그 
     의지했던 사람이 갑자기 없어지지 않았다면 말이에요.
       그러나 도로시의 임신은 다른 사람이 그 애를 거절했다는 것을 
     의미해요 -- 그 애도 또 그 남자도. 내가 알고 있는 도로시는 
     절대로 섹스를 가볍게 생각하는 애가 아니에요. 그 애는 방탕한 
     애가 아니었어요. 그 애가 임신했다는 사실은 그 애가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고, 그리고 언젠가 그 남자와 결혼하려고 했다는 
     것을 의미해요.
       그 애가 죽기 전 12월초에 도로시는 영어 시간에 만났다는 
     남자에 대해서 내게 편지를 보낸 적이 있어요. 그 애는 자주 그 
     남자와 함께 외출했다고 했어요. 그 애는 크리스마스 휴가에 
     대해서 자세하게 내게 말해 주었지요. 그런데 크리스마스에 우린 
     서로 다투었고, 그 뒤로 그 애는 내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죠. 
     우리가 다시 학교로 돌아오고 나서는 거의 사무적인 내용의 
     편지만 나누었어요. 그래서 나는 그의 이름조차 몰라요. 그에 
     대해 아는 거라고는 그 애가 그 편지에 썼던 게 전부예요. 그가 
     가을 학기에 그 애와 같은 영어강의를 들었으며, 잘생겼고, 렌 
     버논을 조금 닮았다는 것 -- 렌 버논은 내 사촌의 남편이에요 -- 
     곧, 도로시의 남자는 키가 크고 금발에 푸른 눈을 가졌다는 
     말이죠.
       나는 아버지에게 그에 대해서 말하고, 그를 찾아내어 복수를 
     하자고 졸라댔죠. 아버지는 도로시를 궁지에 몰아넣은 것이 그 
     사람이란 것을 증명할 수 없으며, 또 혹시 증명한다고 해도 
     소용없는 일이라고 반대를 하셨어요. 그 애는 자기의 잘못을 
     스스로 처벌한 거라고요 -- 아버지는 그것으로써 그 사건을 
     끝내셨죠.
       이것이 내가 애너벨 코크의 편지가 동봉된 아버지의 편지를 
     받았던 토요일까지의 일들이에요. 그래서 이젠 내가 나서서 
     행동을 하기로 마음먹은 거예요.
       이런 편지들은 우리 아버지가 기대했던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았어요 --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지만 -- 왜냐하면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애너벨 코크의 이야기는 내가 괴로워하던 
     원인과는 관계가 멀기 때문이죠. 그러던 중에 나는 이상스러운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만일 도로시의 벨트가 망가지지 
     않았다면 왜 그 애는 거짓말을 하고 애너벨의 것을 
     빌려갔을까요? 도로시는 왜 자기 벨트를 맬 수 없었던 걸까요? 
     아버지는 그 애에게 '그 애 나름대로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말하면서 그냥 지나쳐 버리셨어요. 하지만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싶었어요. 왜냐하면 도로시가 죽던 날 논리에 맞지 
     않는 그 애의 세 가지 행동이 그 당시 나를 당황케 했으며, 
     그리고 아직도 그 행동들을 이해할 수가 없거든요. 그 세 가지 
     행동은 다음과 같은 거예요.
       1. 그날 아침 10시 15분, 그 애는 기숙사 건너편 가게에서 
     하얀 장갑을 샀어요. (가게 주인이 신문에 난 그 애의 사진을 
     보고 나서 경찰에 말했죠.) 처음엔 스타킹을 달라고 했는데, 
     다음날 밤에 있을 스프링 댄스 때문에 다 팔려서 그 애에게 맞는 
     사이즈가 없었어요. 그러자 그 애는 장갑을 달라고 하고는 1달러 
     50센트를 지불했다고 하더군요. 그 애가 죽을 때 그것을 끼고 
     있었지만, 그 애의 방 서랍 속에는 메리온이 지난번 크리스마스 
     때 사준 흠 하나 없는 예쁜 수제품 하얀 장갑이 있었어요. 그 
     애는 왜 그것을 끼지 않았을까요 ?
       2. 도로시는 옷을 신경써서 입는 편이죠. 그 애는 죽을 때 
     초록색 옷을 입고 있었어요. 그런데 겉옷과는 어울리지 않게 축 
     늘어진 나비 리본이 달린 싸구려 흰색 실크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 애 옷장 안에는 특별히 그 옷에 맞춰 
     입도록 마련한 깨끗한 흰 실크 블라우스가 있었어요. 왜 그 
     블라우스를 입지 않았을까요?
       3. 도로시는 흰색과 갈색 액세서리를 달고 짙은 초록색 옷을 
     입었어요. 그런데 지갑에 들어 있던 손수건은 옷차림에 맞지 
     않는 엷은 하늘색이었어요. 그 애의 방에는 적어도 옷차림에 꼭 
     어울리는 손수건이 열 두 장은 있었을 텐데요. 왜 그 애는 
     그것들을 가져가지 않았을까요 ?
       그 애가 죽었을 때 나는 그런 것들을 경찰에 말했어요. 그들은 
     내가 끄집어냈던 다른 문제들을 그냥 넘어갔듯이 그 일도 대강 
     처리해 버렸죠. 경찰은 그 애가 마음이 산란했기 때문에 
     평상시처럼 신경을 써서 옷을 입는다는 것은 오히려 우스운 
     일이라고 하더군요. 나는 바로 그 장갑 사건이 그 애 마음이 
     산란하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지적해 주었죠. 그 애가 직접 
     나가서 그것들을 준비했다고 하면서 -- 만일 한 사건 뒤에 
     의식적인 준비가 있었다면 이 세 가지에 모두 어떤 목적이 
     있었다고 가정하는 것이 부당한 것은 아니잖아요? 그들의 
     대답은, "아가씨는 자살자의 마음을 알 수 없소." 하는 
     거였어요.
       애너벨 코크의 편지는 이 세 가지 외에 네 번째의 사실을 
     덧붙여 주는 거죠. 그 애는 자기 벨트가 아무 이상이 없었는데도 
     애너벨의 것을 맸어요. 모든 경우에 있어서 그 애는 적당한 것을 
     거부하고 적당하지 않은 것을 선택한 거예요. 그 이유가 뭘까요?
       토요일 내내 나는 그 문제로 머릿속 구석구석이 지근거렸어요. 
     내가 무엇을 밝히려고 하는 건지는 묻지 말아줘요. 나는 
     틀림없이 그런 것들에 모두 분명한 의미가 들어 있다고 
     느꼈으며, 그 당시 도로시의 마음 상태에 대해서 내가 할 수 
     있는 한 알아내려고 해요. 물론 그것이 혀로 충치를 가려내는 
     식이지만 말예요.
       나는 상반되는 네 항목들 사이에서 그럴 듯한 관계를 찾기 
     위해서 내가 겪었던 정신상태에 대해서 말해야겠군요. 그러한 
     생각들을 하게 된 의미와, 그 밖의 다른 수천 가지의 생각들. 
     그러나 어떤 것도 내게 의미를 주지 못했어요. 실제로 그 애가 
     입었던 구질구질한 것 가운데에서 공통적인 특징을 찾으려고 
     하면 언제나 똑같은 일이 일어나지요. 나는 종이를 꺼내어 
     '장갑, 손수건, 블라우스, 벨트'라고 쓰고, 그 의미를 
     알아내려고 그것에 대해서 내가 아는 것을 모두 써놓았어요. 
     하지만 확실히 아무 의미도 없더군요. '크기, 나이, 물건 주인, 
     값, 색깔, 질, 구입 장소' -- 어느 것 하나 위의 네 가지 항목에 
     대해 아무런 특징을 나타내 주지 못했으니까요. 나는 종이를 
     모두 찢어버리고 잠자리에 들었답니다. 자살자의 마음을 알 순 
     없으니까요.
       한 시간쯤이 지난 뒤에 어떤 생각이 문득 떠올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는데,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지는 걸 느꼈어요. 
     유행에 뒤떨어진 블라우스, 그 애가 그날 아침에 산 장갑, 
     애너벨 코크의 벨트, 엷은 하늘색 손수건...... 낡은 것, 새것, 
     빌려 온 것, 그리고 푸른색의 것.
       그것은 어쩌면 우연의 일치인지도 모른다고 나 자신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을 믿지 않았어요.
       도로시는 시청 건물에 갔어요. 그것이 블루 리버에서 가장 큰 
     건물이기 때문이 아니라, 결혼하려고 할 때 가는 곳이기 때문에 
     간 거예요. 그 애는 낡은 것과 새것, 빌려온 것과 푸른 옷가지를 
     입었어요 -- 감상적인 도로시 -- 그리고 그 애는 열여덟 살이 
     넘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출생증명서를 가지고 갔던 
     거예요. 그리고 대부분 그런 데에는 혼자 가지 않죠. 도로시는 
     자기에게 임신하게 한 남자, 오랫동안 함께 지내왔고, 그 애가 
     사랑했던 바로 그 남자 -- 그 애와 가을 학기 영어수업을 함께 
     들은 잘생기고 파란 눈을 가진 금발의 남자와 함께 갔던 거예요. 
     그는 어떻게 해서 그 애를 옥상까지 데리고 올라갔겠죠. 나는 
     사건이 바로 그렇게 이루어졌다고 거의 확신하고 있어요.
       유서? 그것에는 단지, '나 때문에 당신이 불행하게 되어 정말 
     미안해요. 나는 이렇게 밖에 할 수 없었어요.' 라고만 쓰여 
     있었어요. 도대체 어디에 자살이란 말이 있어요? 그 애는 결혼 
     쪽을 말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 애는 그렇게 성급한 절차를 밟는 
     것에 아버지가 실망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아기를 
     가졌기 때문에 결혼할 수밖에 어쩔 도리가 없었던 거지요. 그 
     애의 말투가 딱딱했던 것은 긴장했기 때문이라고 경찰이 말한 
     것은 맞아요. 하지만 그것은 자살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도망가는 신부로서 긴장했기 때문이었을 
     뿐이에요.
       '헌것과 새것'은 내 생각을 확실하게 해주기에 충분했지만, 
     그것은 경찰들이 자살을 미해결 살인사건으로 재수사하게 
     하기에는 충분한 것이 아니었어요 -- 특히 작년에 자기들을 꽤나 
     괴롭혔던 나에게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버드도 그게 
     사실이라는 것을 알 거예요. 그래서 나는 그 남자를 찾아서 셜록 
     홈즈 탐정처럼 행동하려는 거예요. 내가 의심하는 것들을 받쳐줄 
     만한 것이나 경찰의 관심을 끌 만한 확실한 것을 찾아내면 즉시 
     그들에게 맡기고 곧장 돌아가겠어요. 나는 영화 속에서 여자 
     주인공이 방음장치가 된 방에서 살인자를 추궁하면 그 살인자가, 
     "그래, 내가 했어. 그러나 너는 살아서는 그 이야기를 듣지 못할 
     거야." 하고 말하는 장면을 여러 번 본 적이 있어요. 그러나 나 
     때문에 안절부절못해 하지는 마세요. 또, 우리 아버지에게 
     편지하지도 말고요. 아버지가 법석을 떨지도 모르니까요. 어쩌면 
     이런 식으로 이 일에 뛰어드는 것이 '분별없고 충동적인' 
     행동일지도 몰라요. 하지만 분명히 무엇인가를 해야만 하는데 
     나밖에 할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서 어떻게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수 있겠어요?
       시간이 정확하게 맞는군요. 지금 막 블루 리버로 들어서고 
     있는 중이에요. 창문으로 시청 건물이 보여요.
       숙소와 일이 진행되는 과정까지도 덧붙여서 이 편지를 
     부치겠어요. 비록 스토다드가 컬드웰보다 열 배나 크다고 해도, 
     나는 어떻게 시작해야 좋을지 그럴 듯한 생각을 가지고 
     있거든요. 행운을 빌어줘요......


        제 2 장 

       웰시 학생처장은 번쩍이는 불그레한 얼굴에 단추처럼 동그란 
     회색 눈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목사들이 입는 검은 플란넬 
     옷을 즐겨 입었으며, 한쪽 가슴에는 파이 베타 카파 클럽 
     (성적이 우수한 미국 대학생 및 졸업생으로 조직된 모임)의 열쇠 
     마크를 달고 있었다. 그의 사무실은 어두운 예배당처럼 검은 
     나무와 커튼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방 한가운데는 깔끔하게 
     장식된 넓은 책상이 놓여 있었다.
       학생처장은 사무실 스피커의 버튼을 누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평소의 습관대로 침바른 입술로 미소를 지어 
     보이는 대신에 명목상 자기가 책임맡고 있는 동안 목숨을 잃은 
     여학생의 언니를 만나는 데 적당하게 진지한 표정을 짓고는 문 
     쪽으로 향했다. 정오를 알리는 답답한 종소리가 그 방까지 
     들려왔다가 커튼에 감싸여 사라졌다. 문이 열리고 엘렌 킹쉽이 
     들어왔다.
       그녀가 문을 닫고 그의 책상으로 다가올 때, 그 학생처장은 
     오랫동안 젊은 사람들과 지내온 경험으로 그녀를 살펴보았다. 
     그녀는 말쑥했다. 그는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아주 
     예뻤다. 숱이 많은 적갈색의 단발에 갈색 눈. 불행과 과거를 
     알고는 절제하는 미소...... 확고한 외모. 아마 머리가 
     뛰어나지는 못하더라도 노력파는 될 것이다...... 반에서 
     중상위권에 드는 정도 -- 그녀의 코트와 옷은 짙은 푸른기가 
     돌았는데, 그것은 여러 색깔로 된 옷을 입는 다른 학생들과 좋은 
     대조가 되었다. 그녀는 약간 신경질적으로 보였지만, 그러나 
     요즈음은 모두들 그렇지 않은가 ?
       "킹쉽 양......"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리듯이 말하고는 
     손님용 의자를 가리켰다. 그들은 자리에 앉았다. 학생처장은 
     불그레한 손을 모아쥐었다. "아버지는 편안하신지요?"
       "건강하세요, 감사합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숨이 
     가빴다.
       학생처장이 말했다. "작년에...... 그분을 만났었지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무슨 일이 있다면 도와줄 수 
     있어요......"
       그녀는 딱딱한 등받이 의자에서 약간 몸을 움직였다. "저희 -- 
     아버지와 저는 -- 어떤 남자 -- 이 학교의 남학생을 찾으려고 
     해요." 학생처장이 의아하다는 듯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는 
     동생이 죽기 몇 주 전에 동생에게 상당히 많은 돈을 
     빌려주었거든요. 동생의 편지에 그렇게 쓰여 있었어요. 지난주에 
     우연히 그 애의 수표장을 보다가 문득 생각이 났어요. 하지만 
     거기엔 그 애가 그 돈을 갚았다는 표시가 없더군요. 그래서 
     우리는 그가 그 애에게 돈을 갚으라고 말하기에는 난처한 
     입장이었던 모양이라고 생각했죠."
       학생처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 가지 문제가 있는데 -- " 엘렌이 말했다. "사실은 그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가 가을 학기 
     영어수업을 도로시와 함께 들었고, 금발이라고 말한 것은 
     생각나요. 선생님이 그를 찾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좋겠어요. 그것은 정말 굉장한 액수였거든요......" 그녀는 깊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알았소." 학생처장이 말했다. 그는 마치 두 손의 크기를 
     비교해 보듯이 조심스럽게 포갰다. 그리고 엘렌에게 미소를 
     지었다. "물론 도와줄 수 있지요." 그는 군인처럼 짤막하게 
     말했다. 그는 잠시 동안 그대로 있다가 사무실 스피커의 버튼을 
     눌렀다. "플레이트 양 -- " 하고 짧게 부르고는 버튼을 놓았다.
       그는 긴 연설을 준비하는 것처럼 의자를 책상 쪽으로 바싹 
     잡아당겼다.
       문이 열리고, 유능해 보이는 창백한 얼굴의 여자가 방으로 
     들어왔다. 학생처장은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의자에 등을 
     기대면서, 자기의 계획을 그려보며 엘렌 머리 너머에 있는 벽을 
     응시했다. 몇 분 지나서 그가 말을 꺼냈다. "도로시 킹쉽의 
     1949년 가을 학기 수업 카드를 가져와요. 그 학생이 어느 
     영어수업을 들었는지 보고, 그 반의 등록 학생들의 명단을 
     가져와요. 그 명단에 있는 남학생들의 서류철도 -- " 그는 
     비서를 쳐다보았다. "알겠지?"
       "예, 선생님."
       그는 그녀에게 그의 지시를 반복해 보게 했다.
       "좋아." 그가 말했다. 그녀는 방을 나갔다. 
     "서두르도록......" 그는 닫힌 문을 향해 말했다. 그리고는 
     엘렌에게 고개를 돌리고 만족한 듯이 웃어 보였다. 그녀는 
     답례로 미소를 보냈다.
       차차 군인 같은 딱딱한 태도가 사라지고 큰아버지 같은 엄격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학생처장은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손가락을 
     책상 위에서 부드럽게 모았다. "단지 이 일 때문에 블루 리버에 
     온 것은 아닐 텐데?"
       "친구들을 만날 일이 있어서요."
       "아 -- "
       엘렌은 핸드백을 열었다. "담배 피워도 될까요?"
       "물론." 그는 유리 재떨이를 그녀가 있는 쪽으로 밀어주었다. 
     "나도 피우니까." 하며 그는 부드럽게 허락했다. 엘렌은 그에게 
     담배를 권했으나 그는 사양했다. 그녀는 구릿빛 글씨로 엘렌 
     킹쉽이라고 쓰인 하얀 성냥갑을 꺼내어 불을 붙였다.
       학생처장은 유심히 그 성냥갑을 바라보았다. "돈 문제에 
     대해서 무척 철저하군요." 하고 말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우리가 상대하는 사람들이 모두 이렇게 양심적이라면 -- " 그는 
     구리로 만들어진 레터 오프너 (편지 봉투 자르는 칼)를 집어들고 
     살펴보았다. "지금 실내경기장과 체육관을 새로 짓기 시작했소. 
     그런데 기부금을 내겠다고 약속했던 사람들 중에서 몇 명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요."
       엘렌은 안됐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아마 아버지께서 기부금에 관심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하고 학생처장은 생각에 잠기며 말했다. "학생 동생을 위한 
     기념비......"
       "아버지에게 말씀드려 보겠어요."
       "그래 주겠소? 정말 고마워요." 그는 레터 오프너를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그런 기부금엔 세금이 공제되지요." 그는 덧붙여 
     말했다.
       몇 분 뒤에 비서가 마닐라 종이로 된 서류 뭉치를 가지고 
     들어와서 학생처장 앞에 놓았다. "영어 수강생은 51명이었으며 
     -- " 그녀가 말했다. "여섯 반에 남학생은 열일곱 명이었어요."
       "좋아요." 학생처장이 말했다. 비서가 나가자, 그는 의자를 
     바로 하고 손을 비비며 다시 군인 같은 태도로 돌아갔다. 그는 
     서류 겉장을 열고 수강신청서가 나올 때까지 내용물을 죽 
     넘겼다. 그 종이의 한쪽 구석에는 사진들이 붙어 있었다. "검은 
     머리." 그는 그 종이를 왼쪽에 놓았다.
       그가 그것을 모두 보고 나자, 골라낸 서류 더미가 두 개 
     생겼다. "검은색 머리가 열두 명, 연한 머리색이 다섯 명인데." 
     하고 학생처장이 말했다.
       엘렌은 앞으로 몸을 숙였다. "도로시는 그가 아주 잘생겼다고 
     했어요......"
       학생처장은 다섯 장의 서류를 책상 가운데로 밀어놓고는 맨 
     위에 있는 것을 열었다. "조지 스페이서 -- " 하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글쎄, 스페이서를 잘생겼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그는 수강신청서를 집어들어 엘렌에게 내밀었다.
       사진 속의 얼굴은 턱이 없고 날카로운 눈을 가진 젊은이였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두 번째는 두꺼운 안경을 쓴 허약해 
     보이는 학생이었다.
       세번째는 쉰다섯 살에, 머리가 금발이 아니라 백발이었다.
       지갑을 잡고 있는 엘렌의 손이 땀으로 축축해졌다.
       학생처장은 네 번째 서류를 펼치고, "고든 갠트." 하고 
     말했다. "이런 이름과 비슷하지는 않았소?" 그는 수강신청서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금발에 의심할 바 없이 잘생긴 얼굴이었다. 짙은 눈썹 
     아래에 반짝이는 눈, 길고도 굳은 턱, 남자다운 미소. "그런 것 
     같아요......" 그녀가 말했다. "예, 바로 그 사람이......"
       "혹시 드와이트 파웰일지도 모르겠군." 학생처장이 다른 
     손으로 다섯 번째 수강신청서를 내밀며 말했다.
       다섯 번째 사진은 각진 얼굴에 뾰족한 턱과 엷은색 눈을 가진 
     아주 성실해 보이는 젊은이였다.
       "어떤 이름이 귀에 익소?" 하고 학생처장이 물었다.
       엘렌은 이 사진과 다른 사진을 힘없이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두 사람 모두 금발에 푸른 눈을 가졌으며 잘생겼다.

       그녀는 학적과 건물을 나와 캠퍼스를 돌아다니다가 돌계단 
     위에 멈춰섰다. 하늘에는 회색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다. 그녀는 
     한 손에 지갑을 들고 있었고, 다른 손에는 학생처장의 메모 
     수첩에서 찢어낸 종이쪽지를 들고 있었다.
       두 명...... 다소 시간이 걸리겠지만, 뭐 상관없다. 두 사람 
     중에서 그 남자를 가려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그를 지켜볼 것이다. 어쩌면 그를 만날지도 모르지 
     -- 물론 엘렌 킹쉽으로서가 아니라 자기를 노려보는 그 시선을 
     향해 도전하리라. 살인자에게는 분명히 표시가 나는 법이다. 
     (그는 살인자야. 그게 틀림없어.)
       그녀는 발길을 재촉하면서 손 안에 든 쪽지를 바라보았다.

       고든 C. 갠트
       웨스트 26번가 1312번지

       드와이트 파웰
       웨스트 35번가 1520번지


        제 3 장 

       그녀는 캠퍼스 건너에 있는 조그만 식당에서 그저 습관적으로 
     서둘러 점심을 먹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온통 바쁜 
     생각들로 스쳐 지나갔다.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그들의 
     친구부터 접근해 볼까? 이것 참, 어디에서부터 시작을 해야 
     하지? 두 사람을 따라다니며 그들의 친구들을 알아내고, 
     그들에게 접근해서 작년에 그의 동정에 대해 알고 있는 아이들을 
     찾아낸다? 시간, 시간, 시간이...... 만일 그녀가 너무 오랫동안 
     블루 리버에 머무른다면 버드는 아마 아버지에게 연락을 할 
     것이다. 그녀는 조급한 생각에 손가락을 탁 퉁겼다. 누가 고든 
     갠트와 드와이트 파웰에 대해 확실히 알고 있을까? 그들의 가족, 
     만일 그들이 다른 지방 출신이라면 하숙집 아주머니나 같은 과 
     친구들 -- 그들의 가까운 사람들을 향해 정면으로 뛰어든다는 
     것은 성급한 행동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시간은 절약할 
     수 있겠지...... 그녀는 여전히 손가락을 퉁기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잠시 뒤 그녀는 반쯤 마신 커피잔을 내려놓고 탁자에서 일어나 
     전화 박스로 갔다. 그녀는 급히 얄팍한 블루 리버 전화번호부를 
     뒤적였다. 하지만 갠트도, 35번가의 파웰도 나와 있지 않았다.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그들이 전화가 없다는 
     뜻이다. 아니면 가족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녀는 안내에 전화를 걸어 웨스트 26번가 1312번지의 
     전화번호를 알아냈다. 2-2014 -- 
       "여보세요?" 무뚝뚝한 중년 여자 목소리였다.
       "여보세요." 엘렌은 침을 삼켰다. "고든 갠트 있어요?"
       잠시 뒤, "누구세요?"
       "친구인데, 집에 있나요?"
       "없어요." 그녀는 날카롭게 말을 잘랐다.
       "지금 전화받으시는 분은 누구시죠?"
       "집주인이에요."
       "언제쯤 돌아올까요?"
       "오늘밤에는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 귀찮은지 그 여자의 
     목소리가 빨라졌다. 그리고 찰칵 하고 전화를 끊는 소리가 났다.
       엘렌은 끊긴 수화기를 쳐다보며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자리로 
     돌아왔을 때 커피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는 하루 종일 밖에 나가 있는 것이다. 어디에 
     갈까?......주인집 여자와 이야기해 보면 갠트가 도로시와 
     다녔던 그 남자인지를 알아낼 수도 있겠지. 혹시 아니라면 
     파웰이 바로 그 사람이라는 것이 밝혀지는 셈이다. 그 주인집 
     여자와 이야기를 하자...... 그런데 무슨 구실로?
       아무 구실이나 만들어내지 뭐! 주인집 여자가 믿기만 한다면, 
     아무리 터무니없는 이야기라도 그것이 무슨 상관이야 -- 비록 
     주인집 여자가 갠트에게 이야기하면 금방 거짓말이라는 게 
     들통이 나겠지만. 그가 친구나 친척인 체하는 이상한 질문자에게 
     당황해 한다면, 그는 바로 그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다음 같은 
     경우에는 그 사람이 맞을 것이다. (A) 그는 도로시를 죽이지 
     않았으므로 이상한 질문자에 대해 당황해 할 것이다. 아니면 -- 
     (B) 그가 도로시를 죽였다 -- 그러면 어떤 여자가 그를 조사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몹시 불안해 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불안은 
     그녀의 계획에 별 방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만일 그녀가 나중에 
     그를 알게 된다고 해도 그는 주인집 여자에게 질문을 한 여자와 
     자기를 연관시킬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의 불안은 도리어 
     그를 긴장하게 만들고, 스스로 자신을 배신하기 쉽도록 함으로써 
     그녀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어쩌면 그는 요행을 바라지 않고 이 
     도시를 떠났을지도 모른다 -- 그러면 그것은 그녀의 의심을 
     경찰에게 확인시키는 데 아주 멋진 이유가 될 것이다. 경찰이 
     수사를 하게 되면 증거를 찾아낼 수 있겠지......
       그래, 정면으로 곧장 뛰어들자. 너무 성급한 행동인가? 어떤 
     것에 대해 생각했을 때 곧바로 실행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것이 아닐까 ?
       그녀는 시계를 보았다. 1시 5분, 전화를 건 뒤 곧바로 
     찾아가서는 안되지. 주인집 여자가 두 가지 일을 연관시켜 
     의심할지도 모를 테니까. 억지로 의자에 다시 앉은 엘렌은 
     여종업원의 눈치를 보고는 커피 한 잔을 더 주문했다.

       2시 15분에 그녀는 웨스트 26번가의 1300번지 블럭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겨울이 지났는데도 아직 거칠거칠한 갈색 
     잔디가 돋아 있는 뒤쪽으로, 생기없어 보이는 2층집들이 
     자리잡고 있는 조용하고 우중충한 거리였다. 낡은 포드 자동차와 
     시보레 자동차 몇 대가 길가에 죽 세워져 있었는데, 그 중 몇 
     대는 아주 낡았고 몇 대는 새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한 밝은색의 
     페인트가 어설프게 칠해져 있었다. 엘렌은 태연한 체하려고 
     애쓰면서 천천히 걸었다. 구두 발자국 소리가 조용한 대기에 
     울려퍼졌다.
       고든 갠트가 사는 1312번지는 모퉁이에서 세 번째 집으로 
     겨자색이 칠해져 있었으며, 갈색의 창틀은 썩은 초콜릿색으로 
     보였다. 잠시 그 집을 쳐다본 뒤, 엘렌은 죽은 잔디 한가운데로 
     난 깨진 콘크리트 길을 따라 현관으로 갔다. 그녀는 한쪽 기둥에 
     붙어 있는 우체통에서 문패의 이름을 읽었다. 미나 아퀴트 부인 
     -- 그녀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초인종은 꽤 오래 된 종류로, 문 
     가운데에 불쑥 튀어나와 있는 평평한 모양의 금속 제품이었다. 
     깊이 숨을 들이마신 뒤 그녀는 빠르게 초인종을 두 번 눌렀다. 
     집안에서 초인종 소리가 귀에 거슬리게 울렸다. 엘렌은 잠시 
     기다렸다.
       이내 안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집안에서 
     나온 그 여자는 말처럼 긴 얼굴 위로 잿빛 고수머리가 흘러내린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사람이었다. 불그레한 눈은 촉촉해 
     보였으며, 현란한 무늬의 옷을 각진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그녀는 엘렌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누구시죠?" 무뚝뚝한 
     중서부 출신의 전화 목소리 그대로였다.
       "아퀴트 부인이시죠?" 엘렌이 말했다.
       "그런데요?" 그 여자는 고르지 못한 이를 모두 드러내 보이며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웃자 엘렌도 따라 웃었다. "전 고든의 사촌이에요."
       아퀴트 부인의 가느다란 눈썹이 올라갔다. "그의 사촌?"
       "오늘 제가 올 거라고 말하지 않던가요?"
       "글쎄, 못 들었어요. 사촌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없었는데 -- 
     한마디도."
       "이상하네요. 제가 들르겠다고 편지를 보냈는데. 저는 
     시카고로 가는 길이에요. 그래서 그를 만나려고 일부러 여기까지 
     왔는데요. 까맣게 잊어버린 모양이군요 -- "
       "편지를 언제 했죠?"
       엘렌은 주춤했다. "그저께, 토요일에요."
       "아." 다시 한 번 미소가 떠올랐다. "고든은 아침 일찍 집을 
     나가기 때문에 10시까지는 편지를 받아보지 못해요. 아가씨 
     편지는 아마 지금 그의 방에 있을 거예요."
       "아, 예......"
       "그는 지금 여기 없는데 -- "
       "잠시 들어갈 수 있을까요?" 엘렌은 재빨리 말을 가로챘다.
       "정거장에서 전차를 잘못 타서 열 블럭이나 걸어왔거든요."
       아퀴트 부인은 집안 쪽으로 한 발자국 발을 들여놓았다. 
     "물론, 자, 들어와요."
       "정말 감사합니다." 엘렌이 문턱을 넘어 쾨쾨한 냄새가 나는 
     집안으로 들어가자 현관문이 닫히고 희미한 불이 켜졌다. 계단이 
     오른쪽 벽을 따라 올라가도록 되어 있었다. 왼쪽에는 거실쪽으로 
     통하는 아치형의 복도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 듯한 딱딱한 모양의 방이 있었다.
       "아퀴트 부인?" 집 뒤에서 어떤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가요!" 하고 그녀가 대답했다. 그리고 엘렌 쪽으로 
     돌아보며, "부엌에 앉아도 되겠지요?" 라고 말했다.
       "그럼요." 엘렌이 말했다. 아퀴트 부인의 이빨이 다시 빛났다. 
     엘렌은 그 큰 몸집을 따라 현관을 내려가며 이렇게 친절한 
     여자가 왜 전화에서는 그렇게 신경질적이었는지 의아해 했다.
       부엌은 집의 바깥 부분과 똑같은 겨자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그곳 중앙에는 사기로 덮인 하얀 탁자가 있었으며, 그 위에는 
     글자 수수께끼 놀이 기구가 한 무더기 놓여 있었다. 나이가 든 
     대머리 남자가 두꺼운 안경을 쓰고 탁자에 앉아서 술병에 남아 
     있는 것을 치즈를 담았던 꽃무늬 병에 붓고 있었다. "옆방에 
     사는 피시백 씨예요." 하고 아퀴트 부인이 말했다. "글자 
     맞추기를 하고 있었어요."
       "한 단어에 5센트지." 그 노인이 엘렌을 자세히 보려고 안경을 
     올리며 덧붙였다.
       "이쪽은 미스......" 아퀴트 부인은 기다렸다.
       "갠트예요." 엘렌이 말했다.
       "고든의 사촌인 갠트 양이에요."
       "처음 뵙겠수." 피시백 씨가 말했다. "고든은 좋은 청년이지." 
     그는 안경을 내리고는 눈을 위로 치켜떴다. "당신 차례예요." 
     그가 아퀴트 부인에게 말했다.
       그녀는 피시백 씨의 맞은편에 앉았다. "앉아요." 그녀는 
     엘렌에게 빈 의자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마실 것 좀 
     드릴까?"
       "아니, 괜찮아요." 엘렌이 앉으며 말했다. 그녀는 코트를 벗어 
     의자 뒤에 걸쳐놓았다.
       아퀴트 부인은 글자들을 올려놓는 나무 눈금 고리의 비어 있는 
     열두 칸을 바라보았다. "어디에서 오는 길이에요?" 그녀가 
     물었다.
       "캘리포니아."
       "고든이 서부에 친척이 있었는지 몰랐는데."
       "아니에요. 그곳에는 잠깐 머물렀던 것뿐이에요. 저는 동부 
     태생이에요."
       "오." 아퀴트 부인은 피시백 씨를 쳐다보았다. "내가 졌어요. 
     모음 없인 아무것도 만들 수 없잖아요."
       "내 차례인가?" 그가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씩 
     웃으며 피시백 씨는 올려놓는 글자들을 쓸어갔다. "부인은 그걸 
     생각하지 못했어. 그것을!" 그는 환호성을 질렀다. "C -- R -- Y 
     -- P -- T. 크리프트(토굴) 말이오. 죽은 사람을 묻던 곳." 그는 
     글자들을 끌어당겨서 자기 앞에 놓인 다른 것에 낱말을 
     덧붙였다.
       "그건 불공평해요." 아퀴트 부인이 대꾸했다. "당신은 내가 
     나가 있는 동안 내내 생각할 시간이 있었잖아요."
       "게임은 정정당당하게 하자고요." 피시백 씨가 잘라말했다. 
     그는 글자를 두 개 더 올려서 고리 중앙에 놓았다.
       "오, 이럴 수가!" 아퀴트 부인이 의자 뒤로 기대며 
     웅얼거렸다.
       "요새 고든은 어떻게 지내나요?" 엘렌이 물었다.
       "아, 좋아요. 학교에다 프로그램에다 벌처럼 바쁘지."
       "프로그램?"
       "고든의 프로그램을 모른단 말이에요?"
       "글쎄, 오랫동안 그의 소식을 못 받았거든요......"
       "그는 벌써 세 달째 그 일을 해왔는데!" 아퀴트 부인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는 레코드를 틀며 이야기를 하지요. 디스크 
     자키 말예요. 그는 자기를 '원반던지기 선수'라고 부르더군요. 
     일요일만 빼고 매일 밤 8시에서 10시까지 KBRI에서."
       "멋있는데요!" 엘렌이 탄성을 질렀다.
       "물론 그는 유명인사라고요." 주인 여자는 피시백 씨가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글자를 올려놓으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2주일 전 일요일 신문에 그의 인터뷰 기사가 
     나왔어요. 기자가 여기에 와서 모든 것을 알아갔지요. 그리고 
     모르는 여학생들이 매일 그에게 전화를 걸어온다오. 스토다드 
     여학생들이 -- 학생기록부에서 그의 전화번호를 알아내서는, 
     단지 그의 목소리만이라도 들어보려고 전화를 하지요. 하지만 
     그는 그런 것엔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에 내가 적당히 
     둘러댄다오. 정말 그것도 미칠 노릇이지." 아퀴트 부인은 얼굴을 
     찌푸리며 글자 게임을 보았다. "자, 해요, 피시백 씨." 그녀가 
     말했다.
       엘렌은 탁자 가장자리를 만지작거렸다. "고든은 작년에 편지에 
     쓴 여자와 아직도 사귀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하고 물었다.
       "누구 말이오?"
       "금발에 키가 작고 예쁘장하다고 했어요. 그는 작년 편지에 몇 
     번이나 그 여자 얘기를 썼거든요 -- 10월, 11월, 그리고 
     4월까지. 저는 그가 정말 그 여자를 좋아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4월 이후로는 그 여자 얘기가 뚝 끊어졌지 
     뭐예요."
       "글쎄 -- " 하고 아퀴트 부인이 말했다. "나는 고든과 함께 
     다니는 여자를 본 적이 없어요. 그가 프로그램을 맡기 전엔 
     일주일에 네댓 번씩 외출을 했어요. 하지만 여자를 집으로 
     데려온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나는 그러기를 바라지도 않았고. 
     나야 뭐 하숙집 주인일 뿐이니까요. 그는 전혀 자기 
     여자친구들에 대해선 말하지 않아요. 전에 여기 있던 다른 
     청년들은 내게 자기 여자친구에 대해 어쩌고저쩌고 하며 
     떠들어댔지만 -- 그때 대학생들은 더 어렸던 것 같아요. 요즈음 
     학생들은 대부분 여자 경험이 있고, 내가 보기에는 나이도 더 
     많은 것 같아요. 그들은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거든요. 고든도 
     마찬가지예요. 하지만 나는 그런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나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거든요." 그녀가 말했다. "그 여학생 
     이름이 뭐였수? 이름을 알면, 고든이 아직도 그 여학생과 사귀고 
     있는지 말해 줄 수 있을 텐데. 가끔 그가 저기 계단 가까이에서 
     전화를 하기 때문에 내가 복도에 있으면 어쩔 수 없이 이야기를 
     듣게 되거든."
       "이름은 생각나지 않아요." 엘렌이 말했다. "작년에 그가 
     사귀었다는 것밖에 -- 아주머니가 그가 그때 만났던 여자들의 
     이름을 말해 주면 제가 기억해 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글쎄 -- " 아퀴트 부인은 건성으로 단어를 찾기 위해 글자를 
     배열하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루엘라라는 여자가 있었지. 내 
     시누이 이름하고 똑같아서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요. 그리고 가만 
     있자, 또......" 그녀는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서 축축한 눈을 
     감았다 -- "......바바라. 아니야, 그 앤 재작년이었지. 1학년 
     때 -- 가만 있자, 루엘라......" 그녀는 머리를 저었다. "또 
     다른 여자들이 있기는 한데, 그 이름들을 기억해 내려면 내 목이 
     빠지겠는걸."
       잠시 조용한 가운데에서 글자맞추기 게임이 계속됐다. 마침내 
     엘렌이 말했다. "그 여학생 이름이 도로시였던 것 같아요."
       아퀴트 부인은 피시백 씨에게 어서 빨리 하라고 손짓했다. 
     "도로시......?"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니야...... 
     도로시라면 고든이 지금은 사귀고 있지 않은 것 같은데. 최근에 
     도로시라는 이름을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어요. 그건 
     확신할 수 있어. 물론 그가 진짜 사적인 전화나 장거리 전화를 
     할 때는 저 구석에 가서 하곤 하지만."
       "그럼, 작년엔 도로시와 함께 다녔나요?"
       아퀴트 부인은 고개를 들어 천정을 올려다보았다. 
     "모르겠어요......--이름은 기억나지 않는군. 그 이름 말고는 
     기억나는 이름이 없수?"
       "도티." 엘렌이 한번 해봤다.
       아퀴트 부인은 잠시 생각하더니 모호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부인 차례요." 피시백 씨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나무토막이 아퀴트 부인이 움직이는 대로 부드럽게 소리를 
     냈다. "제 생각엔 -- " 엘렌이 말했다. "그의 편지에 그녀 
     이야기가 끊어진 4월에 도로시란 여자와 헤어진 게 틀림없는 것 
     같네요. 그러니까 4월말쯤엔 그의 기분이 퍽 안 좋았을 거예요.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그녀는 물어보듯이 아퀴트 부인을 
     쳐다보았다.
       "고든은 그러지 않았어요." 그녀가 말했다. "작년 봄에 그는 
     정말 바람이 났었다우. 항상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다녔지. 내가 
     그것을 놀려댄 기억이 나는군."
       피시백 씨가 참지 못해 안달했다. "오, 어서 해요." 아퀴트 
     부인이 말했다.
       피시백 씨는 술을 들이키고, 다시 글자 게임에 달려들었다. 
     "당신 또 한 개를 놓쳤군!" 그는 글자를 모두 그러모으며 
     소리쳤다. "F -- A -- N -- E. 페인(신전)!"
       "무슨 소리예요? '페인'이라니, 그런 단어가 어디 있어요?" 
     아퀴트 부인은 엘렌 쪽을 돌아다보았다. "'페인'이란 단어를 
     들어봤어요?"
       "그건 나한테 따져봐야지!" 피시백 씨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뜻인지는 모르지만, 그런 단어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어요. 어디에서 본 기억이 있다고!" 그는 엘렌 쪽을 
     돌아보았다. "나는 시계추처럼 규칙적으로 일주일에 책을 세 
     권씩 읽는다오."
       "'페인'이라 -- " 아퀴트 부인이 코웃음을 쳤다.
       "사전에서 찾아봅시다!"
       "포켓용 사전에 나와 있지 않으면요? 당신이 말한 단어가 
     거기에 나와 있지 않으면 당신은 늘 사전을 탓하잖아!"
       엘렌은 서로 노려보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고든이 
     사전을 갖고 있을 거예요." 그녀는 말하고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방을 가르쳐 주시면 제가 가져오겠어요."
       "좋아요." 아퀴트 부인이 명확하게 말했다. "그에게 사전이 
     있었지." 그녀가 일어섰다. "앉아요, 아가씨. 내가 그게 어디 
     있는지 아니까."
       "그럼 제가 따라가도 될까요? 고든 방을 보고 싶어서요. 내게 
     아주 좋은 곳이라고 했거든요......"
       "따라와요." 아퀴트 부인이 부엌을 나오면서 말했다. 엘렌은 
     서둘러 그녀 뒤를 따라갔다.
       "나와 있을 거요." 뒤에서 피시백 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부인이 아는 것보다, 아니 부인이 백 살까지 산다고 해도 
     훨씬 더 많은 단어를 알 거요!"

       그들은 거무스름한 나무 계단을 올라갔다. 아퀴트 부인은 
     앞장서서 올라가며 분한 듯이 계속 투덜거렸다. 엘렌은 문을 
     지나 계단 앞까지 그녀를 따라갔다.
       방은 꽃무늬 벽지로 인해 밝았다. 초록색 시트가 깔린 침대, 
     서랍, 안락 의자, 탁자......가 있었다. 책장 위에서 책 한 권을 
     재빨리 꺼낸 아퀴트 부인은 창가로 가져가서 한 장씩 
     넘겨보았다. 엘렌은 책장으로 다가가서 그 위에 죽 꽂혀 있는 
     책들을 훑어보았다. 일기장으로 보이는 것과 노트도 몇 권 
     있었다. <1950년대의 빛나는 이야기> <역사 개요> <라디오 
     아나운서의 발음 교본> <용감한 사나이> <미국 재즈의 역사> 
     <백조의 길> <심리학 기초> <세 가지 걸작 살인 소설> 그리고 
     <미국인 웃음의 보물 유래>
       "오, 이런!" 하고 아퀴트 부인이 외쳤다. 그녀는 펼친 면을 
     손가락으로 짚고 서 있었다. "페인 -- " 그녀가 읽었다. "신전 
     또는 성당." 그녀는 사전을 거칠게 닫았다. "그 양반이 어디서 
     이런 단어를 얻어 들었을까?"
       엘렌은 편지 세 통이 펼쳐져 있는 탁자 쪽으로 옮겨갔다. 
     아퀴트 부인은 책장 위에 사전을 놓고 그녀를 보았다. "보내는 
     사람의 주소가 없는 게 아가씨 편지인 모양이군?"
       "예, 그래요." 엘렌이 말했다. 나머지 두 통은 뉴스위크와 
     국영방송국에서 온 거였다.
       아퀴트 부인은 문간에 서 있었다. "안 나가요?"
       "나가요." 엘렌이 말했다.
       그들은 계단을 내려와 피시백 씨가 기다리고 있는 부엌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피시백 씨는 축 늘어진 아퀴트 부인을 보고 
     낄낄거렸다. 그녀가 얼굴을 찌푸렸다. "성당이라는군요." 그녀는 
     의자에 풀썩 앉으며 말했다. 그는 계속 웃어댔다. "아유, 제발 
     그만 웃고 게임이나 계속해요." 아퀴트 부인이 투덜거렸다. 
     피시백 씨는 글자 두 개를 내놓았다.
       엘렌은 자기가 앉은 의자에 걸쳐둔 코트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만 가봐야겠어요." 그녀는 섭섭한 체했다.
       "가려고요?" 아퀴트 부인은 가는 눈썹을 모으며 올려다보았다.
       엘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든을 기다린 게 아니었어요?" 엘렌은 섬뜩했다. 아퀴트 
     부인이 문 옆에 있는 냉장고 위의 시계를 보며 말했다. "2시 
     10분이군. 마지막 수업이 2시에 끝났을 테니까 조금 있으면 
     도착할 거예요."
       그녀는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아퀴트 부인의 위로 치켜올린 
     얼굴이 구역질나게 어른거렸다. "아주머니가...... 아주머니가 
     그는 하루 종일 나가 있는다고 하셨잖아요......" 결국 그녀는 
     긴장하고 말았다.
       아퀴트 부인이 화난 얼굴로 쳐다보았다.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수! 그를 기다린 게 아니라면 도대체 왜 앉아 있었지?"
       "전화로......"
       주인집 여자의 턱이 내려갔다. "그게 아가씨였나? 1시쯤 
     전화한 사람이?"
       엘렌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 아가씨가 누구라고 말하지 않았어요? 나는 그렇고 그런 
     여자인 줄 알았지. 전화를 건 사람이 이름을 밝히지 않으면 나는 
     무조건 낮에는 그가 없다고 말한다오. 그가 집에 있어도 말이오. 
     고든이 내게 그렇게 하라고 부탁했거든요. 그는......" 아퀴트 
     부인의 얼굴에 진지한 표정이 떠올랐다. 흐릿한 눈과 얇은 
     입술의 입이 점점 냉정하고 의심하는 듯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가 낮에는 나가 있다고 생각했다면 -- " 그녀가 느린 말투로 
     따지고 들었다. "도대체 왜 여기에 왔어요?"
       "저...... 저는 아주머니를 만나뵙고 싶었어요. 고든이 편지에 
     하도 많이 써서......"
       "그럼, 왜 그런 질문을 했수?" 아퀴트 부인이 일어섰다.
       엘렌은 손을 뻗어 코트를 들었다. 갑자기 아퀴트 부인이 뼈가 
     앙상한 긴 손가락으로 엘렌의 팔을 아플 정도로 꽉 잡았다.
       "가게 해주세요......제발......"
       "왜 그의 방을 기웃거렸지?" 그녀는 말처럼 긴 얼굴을 
     엘렌에게 가까이 들이댔다. 그녀의 눈은 분노로 동그래졌으며, 
     거칠거칠한 얼굴이 붉어졌다. "무엇을 하려고 했지? 내가 등을 
     돌리고 있는 사이에 무엇을 훔쳤지?"
       엘렌의 뒤에서 피시백 씨의 의자가 끌리며 겁에 질린 듯한 
     그의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자기 사촌에게서 무엇을 
     훔치겠어요?"
       "누가 그의 사촌이라고 했는데?" 하고 아퀴트 부인이 
     쏘아붙였다.
       엘렌은 그녀의 손아귀 속에서 무력하게 움직여 보았다. "제발, 
     아파요......"
       희미한 눈이 가늘어졌다. "나는 이 아가씨가 기념품이나 뭐 
     그런 것들을 훔치는 그런 끔찍한 여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왜 그런 말을 했지?"
       "저는 그의 사촌이에요! 사촌!" 엘렌은 목소리를 가라앉히려고 
     애썼다. "저는 지금 가고 싶어요. 아주머니는 저를 여기에 
     붙잡아 놓을 수 없어요. 나중에 와서 그를 만나겠어요."
       "지금 그를 만나게 될 거야." 아퀴트 부인이 말했다. "고든이 
     올 때까지 여기에 있어요." 그녀는 엘렌의 어깨 너머를 
     쳐다보았다. "피시백 씨, 뒷문으로 가세요." 그녀는 눈으로 
     피시백 씨가 천천히 지나가는 것을 따라가며 기다렸다가 엘렌을 
     놓아주었다. 그녀는 재빨리 문 쪽으로 가서 문을 닫고는 가슴 
     위로 팔짱을 끼었다. "도대체 무슨 이유인지 알아야겠어." 
     그녀가 말했다.
       엘렌은 아퀴트 부인에게 손가락으로 잡혔던 팔을 비볐다. 
     엘렌은 부엌 양쪽 끝의 문을 막고 서 있는 남자와 여자를 
     보았다. 돋보기 안경을 끼고 신경질적으로 눈을 껌벅이는 피시백 
     씨, 돌처럼 엄하게 서 있는 아퀴트 부인. "이러시면 안돼요."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지갑을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의자에서 
     코트를 들어 팔에 걸쳤다. "나가게 해주세요." 그녀는 엄숙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현관문이 꽝 닫히고 계단을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고든이야!" 아퀴트 부인이 소리쳤다. "고든!" 발자국 소리가 
     멈췄다.
       "무슨 일입니까, 아퀴트 부인?"
       주인집 여자는 돌아서서 현관 입구 아래로 달려갔다.
       엘렌은 피시백 씨를 쳐다보았다. "부탁이에요 -- " 하며 
     그녀는 애원했다. "여기서 나가게 해줘요. 저는 아무 피해도 
     끼치지 않았어요."
       그는 천천히 머리를 저었다.
       그녀는 등뒤에서 흥분한 아퀴트 부인의 쉰 목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서 있었다.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 오고, 목소리도 점점 
     커졌다. "저 여자가 작년에 학생이 사귀었던 여자들에 대해 
     꼬치꼬치 물어보고선, 심지어 나를 속여 학생 방에까지 데려가게 
     했지 뭐야. 학생 책과 탁자 위에 있던 편지들도 
     뒤져보았어......" 갑자기 아퀴트 부인의 목소리가 부엌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바로 저 여자야!"
       엘렌은 돌아섰다. 아퀴트 부인은 한쪽 팔을 들어 피고를 
     가리키고는 탁자의 왼쪽에 섰다. 갠트는 문간에 기대어 서 
     있었다. 엷은 파란색 프렌치 외투를 입고, 한 손에 책을 든 키가 
     크고 늘씬한 청년이었다. 그는 잠시 그녀를 쳐다보더니, 입술을 
     구부려 긴 턱 가득히 미소를 짓고는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그는 그녀를 바라본 채 문설주에서 떨어져 냉장고 위에 책을 
     올려놓고 안으로 들어왔다.
       "웬일이야, 헤스터......" 그는 신중하게 눈을 다시 위아래로 
     깜박이면서 자연스럽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젠 아주 
     어른티가 나는구나......" 그는 천천히 탁자를 돌아와서 엘렌의 
     어깨 위에 손을 얹고는 다정하게 그녀의 뺨에 키스를 했다.


        제 4 장 

       "저......저, 정말 이 여자가 학생 사촌인 거야?" 아퀴트 
     부인이 숨을 헐떡였다.
       "아퀴트 아주머니 -- " 갠트는 엘렌의 왼쪽으로 움직이며 
     말했다. "우린 아기 때 빨리 이가 나라고 물던 고무 고리도 같이 
     썼는걸요." 그는 엘렌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렇지 않아, 
     헤스터?"
       그녀는 얼굴을 붉히고 입을 벌린 채 당황해서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탁자 왼쪽에 서 있는 아퀴트 
     부인에게로, 그 너머의 현관 입구 쪽으로, 코트와 자기가 들고 
     있는 지갑으로...... 움직였다. 그녀는 순간 오른쪽으로 돌아 
     재빨리 탁자를 지나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아퀴트 부인이, 
     "도망간다!" 하고 외쳤을 때 그녀는 이미 현관 입구로 내려가고 
     있었다. 갠트가 쫓아오며 소리쳤다.
       "저 애는 정신병 증세가 있어요!" 육중한 현관문을 열고 
     그녀는 그 집에서 나와 콘크리트 길을 달렸다. 보도의 
     오른쪽으로 돌아 보폭을 넓게 하여 급하게 걷는데 코트 자락이 
     자꾸만 발에 걸리는 거였다. 오, 하나님, 모두 엉망이 
     되어버렸어! 그녀는 뜨거운 눈물이 괴는 것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갠트가 어느새 그녀에게 다가와 긴 다리로 그녀와 
     나란히 걷고 있었다. 그녀는 웃고 있는 얼굴에 무서운 눈초리를 
     던지고서 똑바로 앞을 노려보았다. 그녀의 몸 전체가 자기 
     자신과 그에 대한 이유 없는 분노로 짓눌려 있었다.
       "무슨 비밀이 있는 거 아니에요?" 그가 물었다. "내 손에 
     쪽지를 쥐어주며 '서던 컴포트'나 뭐라고 속삭이려 했소? 아니면 
     검은 양복을 입은 녀석이 하루 종일 따라와서 가까운 집으로 
     숨어들은 거요? 나는 어떻든지 모두 괜찮아요......" 그녀는 
     참기 어려운 침묵을 지키며 계속 걸었다. "세인트의 소설을 
     읽어봤어요? 나는 읽어보았지요. 노련한 사이먼 템플러는 항상 
     이상한 행동을 하는 아름다운 여자들에게 뛰어들었지요. 
     언젠가는 그 여자들 중 하나가 한밤중에 그의 요트로 헤엄쳐 
     왔어요. 아마 그녀는 해협을 헤엄쳐 오다 길을 잃었다고 했을 
     거예요. 내가 알기론 나중에 보험회사 조사원이라는 게 
     밝혀졌지만 -- " 그는 그녀의 팔을 잡았다. "헤스터 -- 나는 
     아주 끔찍이도 질긴 호기심을 갖고 있어요......"
       그녀는 팔을 빼려고 잡아당겼다. 그들은 택시 한 대가 
     돌아다니고 있는 길 반대쪽의 교차로에 이르렀다. 그녀가 손을 
     흔들자, 그 택시가 U자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냥 
     장난이었어요." 하고 그녀가 앙칼지게 말했다. "미안해요. 단지 
     내기를 했던 것 뿐이에요."
       "요트에 온 그 여자도 세인트에게 그렇게 말했어요." 그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장난은 장난이고, 내 지저분한 과거에 
     대해서 물어봤다고요?"
       택시가 와서 멈췄다. 그녀가 문을 열려고 하자, 그의 손이 
     문을 꽉 잡았다. "잠깐, 사촌, 내 디스크 자키 말투로 놀리지 
     마, 난 농담하는 게 아니야......"
       "제발 -- " 그녀는 문 손잡이를 잡아당기며 지친 듯이 
     중얼거렸다. 운전사가 앞창문으로 얼굴을 내밀어 그들을 
     올려다보고 상황을 짐작한 모양이었다. "이보시오......" 하고 
     그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위협하는 듯이 으르렁거렸다.
       한숨을 내쉬며 갠트는 문을 놓았다. 엘렌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서 재빨리 문을 닫았다. 낡았지만 부드러운 가죽 
     의자였다. 갠트는 차에 기대어 손을 문에 얹은 채 마치 그녀의 
     얼굴을 조목조목 기억하려는 듯이 창문을 통해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시선을 돌렸다.
       운전사는 그녀가 행선지를 말하고 나서야 차를 움직였다.
       엘렌이 학생처장을 찾아가기 전에 예약해 둔 뉴 워싱턴 
     하우스까지는 10분이 걸렸다 -- 10분 내내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조급하게 담배를 빨아댔다. 그녀는 극심한 자기책망에 빠졌다. 
     갠트가 나타나기 전에는 긴장이 풀렸었는데 갑작스러운 그의 
     도전에 붙들려 그것이 모두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헤스터 
     사촌이라니! 오, 모든 일이 산산조각이 나버렸어! 그녀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가능성의 반을 걸었지만 돌아온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그 남자인지 확인하지도 못했으며, 게다가 그녀는 
     그 사람이나 그 주인집 여자에게 더 이상 물어볼 수도 없게 
     되었다. 만일 파웰을 조사해서 그 남자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다면 -- 곧 갠트가 바로 그 남자라면 -- 항상 두 번째에 
     중요한 '만일'이라는 단어를 쓰게 된다 -- 갠트가 도로시를 
     죽였다면 그는 엘렌의 얼굴을 알고, 그녀가 아퀴트 부인에게 
     물어봤던 질문들로 그녀가 무엇을 뒤쫓는 것인지 알고서는 
     경계하게 될 것이다. 감시를 받고 있는 살인자는 아마 다시 살인 
     준비를 할 것이다. 그녀는 그런 위험을 받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 그가 그녀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면 말이다. 진실을 밝혀내고 
     죽는 것보다는 의문 속에서 사는 게 훨씬 나은 것이다. 그녀에게 
     다른 방법이란 경찰에 가는 길밖에 없다. 하지만 그녀는 
     그들에게 '헌것과 새것'이라는 것밖에 더 이상 알려줄 것이 
     없으며, 그들은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정중하게 
     역으로 안내할 것이다.
       우, 사실 출발은 아주 좋았었는데!

       호텔 방엔 베이지색 벽과 조잡스러운 갈색 가구가 있었고, 
     옆에 붙어 있는 화장실에 놓여 있는 비누 포장지의 조그만 
     그림처럼 깔끔하고도 인정미가 없이 밋밋한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 방에 사람이 묵고 있다는 유일한 표시라면 더블 침대 
     아래쪽의 그물 선반 위에 있는 컬드웰 딱지가 붙은 여행용 
     가방이었다.
       엘렌은 코트를 옷장 안에 건 뒤 창문가의 책상에 앉았다. 
     지갑에서 만년필과 버드에게 보내는 편지를 꺼냈다. 주소는 적혀 
     있지만 봉하지 않은 편지를 내려다보며, 그녀는 웰시 학생처장과 
     만났던 이야기와 갠트에 관한 큰 실수를 덧붙여 쓸까말까 
     망설였다.
       아니야...... 드와이트 파웰이 그 남자인 것으로 밝혀지면 
     갠트의 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 틀림없이 갠트가 아니라 
     파웰일 거야. 그녀는 혼자 생각했다 -- 그렇게 밝은 마음으로 
     말하는 사람은 아닐 거야. 그런데 그가 뭐라고 했지? '내 디스크 
     자키 말투로 놀리지 마. 난 농담하는 게 아니야......'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벌떡 일어섰다. 
     "누구세요?"
       "수건 가져왔습니다." 카랑카랑한 여자 목소리가 대답했다.
       엘렌은 방을 가로질러 문 손잡이를 잡았다. "난......나는 
     옷을 벗었어요. 밖에 놔두시겠어요?"
       "알겠습니다." 그 목소리가 말했다.
       그녀는 2분 동안 그곳에 서서 가끔씩 지나가는 발자국 소리와 
     홀 아래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의 잡음을 들었다. 손잡이가 
     그녀의 손으로 축축해졌다. 이윽고 그녀는 자기 자신이 잠자기 
     전에 침대 밑을 들쳐보는 고약한 늙은 하녀 같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과잉반응에 씩 웃었다. 그녀는 문을 열었다.
       갠트가 문기둥에 한쪽 팔꿈치를 대고 금발을 위로 쓸어넘기고 
     있었다. "어이, 헤스터 사촌 -- " 그가 말했다. "나는 지칠줄 
     모르는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잖소." 그녀는 문을 
     닫으려고 했으나 그의 발이 끼어들어서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가 미소를 지었다. "재미있는데, 그 택시를 따라왔지!" 그는 
     오른손으로 지그재그 코스를 그려 보였다. "워너 브러더스의 
     영화처럼 -- 운전사는 눈치를 채고 팁까지 거절하더군요. 나는 
     그에게, 당신이 내 침대에서 도망쳤다고 말했거든."
       "나가요!" 그녀가 사납게 소리쳤다. "나가지 않으면 지배인을 
     부르겠어요!"
       "헤스터 -- "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나는 당신을 
     불법침입이나, 아니면 사촌 행세를 한 죄로 고발할 수도 있어요. 
     그러니 내게 탁 털어놓는 게 어때요? 호텔 보이가 이상하게 
     생각할 게 걱정되면 문을 열어놓아도 좋고 -- " 그는 엘렌을 
     뒤로 한 걸음 물러나게 한 뒤 부드럽게 문을 열었다. "착한 
     여자로군." 그는 안으로 들어가면서 말했다. 그리고는 그녀의 
     옷을 보고 과장되게 실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옷을 
     벗었어요.' 하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녀가 당신이 
     상습적인 거짓말쟁이란 것을 알았어야 하는 건데." 그는 침대로 
     걸어가서 끝에 걸터앉았다. "글쎄, 제발 떨지 말아요! 나는 
     당신을 잡아먹으러 온 게 아니니까."
       "뭘...... 뭘 원하는 거지요?"
       "설명."
       그녀는 활짝 열려진 문을 닫고, 마치 그곳이 그의 방이고 
     그녀가 손님인 듯이 문 쪽에 서 있었다. "그건...... 아주 
     간단한 거예요. 나는 늘 당신 방송을 듣고 있어요."
       그는 여행 가방을 흘끗 보았다. "윈스콘신에서 왔어요?"
       "그곳은 겨우 150 킬로미터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요. 우리도 
     KBRI를 들어요. 정말 듣는다니까요."
       "계속해요!"
       "난 늘 당신 방송을 듣고, 당신 프로를 매우 좋아해요...... 
     그래서 블루 리버에 있는 동안 당신을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당신은 나를 보자마자 도망쳤어요."
       "그런 경우,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겠어요?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도망치려고는 하지 않았어요. 난...... 난 당신에 대해 
     -- 당신이 어떤 여자들을 좋아하나 -- 그런 것에 대해서 알고 
     싶어서 당신 사촌인 체했을 뿐이에요."
       그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턱을 쓸면서 일어섰다. "어떻게 내 
     전화번호를 알아냈지요?"
       "학생기록부에서."
       그는 침대 아래쪽으로 구부려서 여행 가방을 만졌다. 
     "컬드웰에 다닌다면 어떻게 스토다드 학생기록부를 얻었을까?"
       "여기 있는 여학생에게서 -- "
       "누구?"
       "애너벨 코크. 내 친구예요."
       "애너벨......" 그는 그 이름을 생각해 냈다. 그리고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엘렌을 쳐다보았다. "그게 
     사실이에요?"
       "그래요." 그녀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게 쓸데없는 
     짓이란 걸 알았지만, 나는 당신의 프로가 너무 좋아서......" 
     그녀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창가에 서 있었다.
       그가 말했다. "미련하고 바보스런 사람들이야......" -- 
     그리고 실망한 눈으로 그녀 뒤쪽의 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돌아다보았다. 별다른 것은 없었다. 그녀는 다시 갠트를 
     돌아보았다. 그는 그녀에게서 돌아서서 창문 쪽으로 향했다. 
     "헤스터 -- " 그가 말을 꺼냈다. "엉터리 설명 뿐인걸." -- 그는 
     윗도리에서 손을 빼며 돌아다보았다 -- "그리고 내가 오랫동안 
     기억하게 될 말이고." 그는 약간 열린 욕실 문을 흘끗 보았다. 
     "당신의 물건을 써도 되겠소?" 하고 묻더니, 그는 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욕실 안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자물쇠가 
     찰칵 소리를 냈다.
       엘렌은 갠트가 자기의 말을 믿는 건지 믿지 않는 건지 궁금해 
     하면서 멍청하게 문을 바라보았다. 무릎이 떨렸다.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그녀는 방을 가로질러 책상으로 가 지갑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냈다. 불을 켜는 데 성냥개비가 두 개나 부러졌다. 
     그리고 창밖을 내다보며 서서, 지갑밖에 놓여 있지 않은 책상 
     위에서 신경질적으로 만년필을 앞뒤로 굴렸다. 아무것도 
     없다......편지......버드에게 보내는 편지! 갠트는 책상 
     가까이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을 교묘하게 문 쪽으로 
     돌리고 난 뒤 다시 창문을 보고 있다가 윗도리 안에서 손을 빼며 
     몸을 돌렸다...... !
       그녀는 미친 듯이 욕실 문을 두드렸다. "편지 내놔요! 내게 
     달란 말이야!"
       잠시 뒤 갠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내 호기심은 
     터무니없는 얘기를 하는 가짜 사촌들에 대해선 특히 지칠 줄 
     모르지."
       그녀는 여전히 닫혀 있는 욕실 문과 현관 쪽을 보면서, 한 
     손으론 문기둥을 잡고 다른 손으론 코트를 들고 서 있다가 가끔 
     지나가는 사람들을 향해 씁쓰레한 미소를 보냈다. 호텔 보이가 
     뭐 도와줄 것이 있느냐고 물어왔다. 그녀는 머리를 저었다.
       이윽고 갠트가 나왔다. 그는 조심스럽게 편지를 봉투 안에 
     접어넣고서, 그것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자 -- " 그가 
     말했다. 그는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자 
     -- " 그는 약간 거북하게 웃었다. "우리 할머니는 전화에서 
     남자가 래너 터너를 찾으면, '이봐요, 전화 잘못 걸었소!' 하고 
     말했지."
       엘렌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사실 -- " 그가 말했다. "난 정말 그녀를 몰랐어요. 한두 번 
     인사한 적밖에 없었으니까. 그 반에는 금발 녀석들이 몇 명 
     있었지. 나는 신문에 그녀의 사진이 실릴 때까지 그녀의 
     이름조차 몰랐어요. 교수는 자리 번호로 출석을 확인했으니까. 
     이름을 부르지 않고 -- 나는 정말 그녀 이름도 몰랐어요."
       엘렌은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성큼성큼 침대 옆에 있는 탁자로 걸어와서 기디온 성경을 
     집어올렸다. 그리고는 오른손을 들었다. "난 성경에 대고 
     맹세하지만, 절대 당신 동생과 사귄 적이 없어. 기껏해야 두 
     마디 정도밖에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고...... 물론 다른 짓도 
     하지 않았고." 그는 성경을 내려놓았다. "됐소?"
       "도로시가 살해됐다면 -- " 엘렌이 말했다. "그 일을 저지른 
     사람이라도 성경에 대고 열두 번이나 맹세할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그 애가 그 남자의 사랑을 받았다고 생각했을 정도면, 
     그는 훌륭한 배우일 거예요."
       갠트는 눈을 위로 올리고는 수갑을 채우라는 듯이 손목을 
     들어올렸다. "좋아."그가 말했다. "이만 조용히 돌아가지."
       "당신이 이 일을 장난으로 생각해 줬으면 좋겠어요."
       그는 손을 내렸다. "미안해요." 그가 진지하게 말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당신을 확신시킬 수 있겠소?"
       "당신은 할 수 없어요." 엘렌이 말했다. "그냥 가주는 게 
     좋겠어요."
       "그 반에는 금발 녀석이 몇 명 있었는데." 그가 고집스럽게 
     말하면서 깍지를 꼈다. "그녀와 늘 함께 다니던 친구가 
     있었다고! 캐리 크랜트 같은 턱에 키가 크고......"
       "드와이트 파웰?"
       "맞았어!"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당신의 명단에 벌써 올라 
     있나?"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 녀석일 거야!"
       엘렌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손을 들어올렸다. "좋아, 이젠 포기했소. 당신은 곧 그 
     녀석이 파웰이란 것을 알게 될 거요." 그는 문 쪽으로 움직였다. 
     엘렌이 복도 쪽으로 물러섰다. "당신 부탁대로 그냥 돌아가는 게 
     좋겠군." 갠트가 거만하게 말했다.
       그는 복도 쪽으로 나와서 말했다. "계속 헤스터라는 이름을 
     듣고 싶지 않으면 당신 진짜 이름을 말해 줘야죠."
       "엘렌."
       갠트는 좀처럼 갈 것 같지 않았다. "이젠 무엇을 할 거요?"
       잠시 뒤에 그녀가 말했다. "모르겠어요."
       "만일 파웰에게 뛰어들 거라면 오늘 오후 같은 실수는 하지 
     말아요. 그는 나처럼 어슬렁거릴 어리석은 친구가 아닐지도 
     모르니까."
       엘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갠트는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비밀임무를 띤 여자라 -- " 그는 생각에 잠겼다. "나는 이런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해 봤었는데." 그는 가려고 하다가 
     뒤로 돌아섰다. "나를 와트슨 (셜록 홈즈의 친구이자 조수) 으로 
     써줄 수 없겠소?"
       "고맙지만 사양하겠어요." 그녀는 문간에서 말했다. 
     "미안해요. 하지만......"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웃었다. "나도 당신이 신임해 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소. 그럼, 행운을 빌겠소." 그는 돌아서서 
     천천히 복도를 내려갔다.
       엘렌은 방으로 돌아와 천천히 문을 닫았다.

       ......지금 7시 30분이에요, 버드. 난 뉴 워싱턴 하우스의 
     아주 멋진 방에 편안히 묵고 있어요 -- 방금 저녁을 먹고, 
     목욕할 준비를 했어요. 곧 잠자리에 들 거예요.
       나는 오후 시간을 학생처장 방에서 기다리느라고 보냈어요. 
     결국 그분을 만나서 도로시가 가을 학기 영어수업을 함께 들었던 
     금발의 미남에게 빌린 돈을 갚으려고 한다고 이야기를 꾸며댔죠. 
     여러 기록부를 들쳐보고, 수강신청서에 있는 사진을 조사해서 그 
     남자를 알아냈어요 -- 웨스트 35번가 1520번지에 사는 드와이트 
     파웰. 내일 아침부터 사냥을 시작할 거예요.
       정말 멋진 출발이었죠? 이젠 여자의 능력을 과소평가하지 
     말라고요!
        사랑하는 엘렌 

       8시에 그녀는 잠시 옷을 입지 않은 채 쉬면서 침대 옆에 놓인, 
     동전으로 작동되는 라디오에 25센트짜리 은화를 넣었다. 그리고 
     KBRI라고 표시된 단추를 눌렀다. 나지막한 노래가 들리더니 이내 
     부드럽고 낭랑한 갠트의 목소리가 방안에 흘러들었다. 
     "'......원반던지기 선수'와 한때를 -- '고든 갠트와 함께' -- 
     그것은 바로 순수과학 교육의 한계를 보여주죠. 여기 메모가 
     있군요. 오늘 저녁 첫곡은 옛날 곡으로, 윈스콘신의 헤스터 홈즈 
     양에게 보냅니다......"
       빠른 템포의 오케스트라 전주곡이 향수를 일으키며 
     흘러나오다가 어린 소녀의 달콤한 노래 소리로 바뀌었다.

       바람이 불어올 때면
       코트 단추를 채우세요.
       당신 몸을 잘 돌보세요.
       당신은 나의 것이니까......

       미소를 지으며 엘렌은 욕실로 들어갔다. 욕조 속으로 떨어지는 
     물소리로 타일 벽이 울렸다. 그녀는 슬리퍼를 벗어던지고 문 
     옆의 고리에 가운을 걸었다. 그녀가 욕조 안으로 들어가자 물이 
     넘쳐흘렀다. 갑자기 정적이 흘러들었다. 옆방에서 쉰 듯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말벌의 테일(꼬리)에 앉지 말아요, 오 -- 오 --
       아니, 네일(손톱)에도, 오 -- 오 --
       아니, 세 번째 레일(철로)에도, 오 -- 오 --




        제 5 장 

       "여보세요?" 여자 목소리였다.
       "여보세요 -- " 엘렌이 말했다. "드와이트 파웰 있어요?"
       "아니, 없는데요."
       "언제 돌아올까요?"
       "확실히 말할 수가 없군요. 수업 사이사이와 수업이 끝난 뒤에 
     폴저에서 일을 하는 것으로 아는데, 언제 올지는 모르겠어요."
       "혹시 주인 아주머니 되세요?"
       "아니에요. 며느리예요. 일을 도와주러 왔어요. 호니그 부인은 
     다리 때문에 아이오와 시에 있어요. 지난주에 다리를 잘랐는데 
     감염이 됐대요. 남편이 아이오와 시까지 그분을 데려다 
     드렸어요."
       "아, 안됐군요."
       "드와이트에게 전할 말이 있으면 메모를 해두지요."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오늘 두 시간짜리 수업을 함께 듣는 
     데, 그때 만나죠......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에요."
       "좋아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엘렌은 전화를 끊었다. 주인 아주머니와는 이야기할 필요도 
     없었다. 그녀는 이미 파웰이 도로시와 함께 지냈던 그 남자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단지 좀더 확실히 하고 싶어서 주인 
     아주머니에게 알아보려고 한 것뿐이었다. 그의 친구들에게서 
     아주 쉽게 알아낼 수도 있으리라. 아니, 파웰 
     자신으로부터도......
       그녀는 그가 일하고 있는 데가 어떤 곳일까 하고 궁금해 했다. 
     폴저 가게라. 그가 수업이 없는 시간에도 가는 곳이라면 캠퍼스 
     근처일 것이다. 만일 가게라면 그는 손님들을 접대하겠지......
       그녀는 전화번호부를 집어들고 F로 시작되는 부분을 펼쳐서 죽 
     훑어보았다.

       폴저 약국, 대학로 1448......2_3800

       그곳은 캠퍼스 건너편의 28번가와 29번가 사이에 있었다. 
     지붕에 초록색 간판이 기다랗게 걸려 있는 땅딸막한 벽돌 
     건물이었다. 폴저 약국 -- 그리고 작은 글씨로 '처방,' 또 더 
     작은 글씨로 '식수 준비'라고 쓰여 있었다. 엘렌은 유리문 밖에 
     멈춰서서 살짝 두드렸다. 그리고 마치 무대에 등장하는 듯이 
     몸을 위로 올려서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식수는 왼쪽에 있었다. 거울과 크롬 도금, 회색빛 대리석, 그 
     옆에 붉은 가죽이 씌워진 의자가 한 줄로 놓여 있었다. 아직 
     오후가 되지 않아서인지 겨우 몇 명만이 앉아 있었다.
       드와이트 파웰은 꼭 맞는 하얀색 짧은 윗도리에, 배를 
     뒤집어놓은 것 같은 모양의 흰 모자를 아름다운 금발에 쓰고서 
     카운터 뒤에 서 있었다. 거기에다가 홀쪽하고 네모난 얼굴에 
     콧수염이 나 있었다. 거의 색이 없는 듯한 머리처럼 조심스럽게 
     다듬은 얇은 콧수염은 빛이 비칠 때만 겨우 볼 수 있었다. 그는 
     학생처장이 보여줬던 그 사진을 찍은 뒤 몇 번 수염의 모양을 
     바꾼 듯했다. 파웰은 양철통에 있는 생크림을 끈적끈적한 선디 
     아이스크림에 쏟아붓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부루퉁한 것은 
     분명히 그가 그 일을 싫어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엘렌은 카운터 끝으로 걸어갔다. 그녀가 손님 앞에 선디 
     아이스크림을 놓고 있는 파웰을 지나갈 때 그가 흘끗 쳐다보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앞을 똑바로 바라보며 비어 있는 자리로 
     갔다. 그리고는 코트를 벗어 비어 있는 의자에 지갑과 함께 
     놓았다. 그녀는 옆 의자에 앉았다. 차가운 대리석 탁자에 손을 
     펴고, 맞은편 벽에 달린 거울에 비친 자기의 모습을 살폈다. 
     그녀는 대리석 탁자에서 손을 떼어 푸른색 스웨터를 아래로 
     잡아당겼다.
       파웰은 카운터 뒤의 통로를 지나 다가와서 물 한 잔과 
     내프킨을 그녀 앞에 놓았다. 짙은 푸른색의 눈 밑에는 회색 
     기미가 끼어 있었다.
       "무엇을 드릴까요?" 낮은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그는 그녀의 
     시선과 마주치자, 눈길을 아래로 내려서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녀는 거울이 달린 벽과 거기에 붙어 있는 샌드위치 크림을 
     보았다. 그녀의 바로 맞은편에는 석쇠가 있었다. "치즈버거 하나 
     -- "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의 눈과 그녀의 눈이 다시 
     마주쳤다. "그리고 커피 한 잔."
       "치즈버거와 커피." 하고 말하면서 그는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그의 얼굴에 익숙하지 않은 듯이 재빨리 사라지는 딱딱한 
     미소였다. 그는 돌아서서 그릴 아래에 있는 찬장의 문을 열고 
     종이로 싸인 다진 고기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발로 찬장문을 
     차서 닫은 뒤, 고기를 그릴에 놓고 뒤에 붙은 종이를 벗겼다. 
     고기가 지글거렸다. 그는 그릴 옆에 있는 커다란 상자에서 버거 
     빵을 꺼내어 긴 칼로 가운데를 갈랐다. 그녀는 거울에 비친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도 흘끗 올려다보고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살짝 미소로 답례했다. '관심 있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관심이 없는 것도 아니에요.' 그는 햄버거 옆에 
     반으로 자른 빵을 놓고 엘렌 쪽을 돌아보았다. "커피를 지금 
     드릴까요, 아니면 나중에?"
       "지금 주세요."
       그는 카운터 밑에서 황갈색 컵과 접시, 그리고 찻숟가락을 
     꺼냈다. 그것들을 그녀 앞에 놓고 나서 통로 쪽으로 몇 발자국 
     움직여 유리 커피 포트를 가져왔다. 그는 그녀의 컵에 김이 나는 
     액체를 따랐다. "스토다드에 다녀요?" 그가 물었다.
       "아니, 그렇지 않아요."
       그는 대리석 탁자 위에 커피 포트를 내려놓고, 아무것도 안든 
     손으로 카운터 밑에서 크림이 가득 담긴 작은 컵을 꺼냈다.
       "당신은?" 엘렌이 물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운터 밑에서 찻숟가락이 유리잔에 부딪쳤다. 파웰은 입술을 
     샐쭉하게 움츠리면서 대답했다.
       잠시 뒤 그는 돌아서서 주걱을 들어 햄버거를 뒤집었다. 그는 
     다시 찬장을 열고 아메리칸 치즈 한 조각을 꺼내어 고기 위에 
     얹었다. 그가 접시에 빵과 피클 두 조각을 놓는 동안, 그들은 
     거울을 통해 서로를 바라보았다. "여기엔 처음이죠?" 그가 
     말했다.
       "예, 블루 리버에 온 지 겨우 이틀밖에 되지 않았어요."
       "오, 오래 머물 거예요, 아니면 지나다가 그냥 들른 거예요?" 
     그는 마치 빙빙 돌고 있는 사냥꾼처럼 천천히 말했다.
       "좀 머물 거예요. 일자리를 구하게 된다면."
       "어떤 일자리?"
       "비서."
       그는 한 손에는 주걱을, 다른 손엔 접시를 들고 한 바퀴 
     돌았다. "아마 쉽게 구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요?" 그녀가 말했다.
       이야기가 잠시 멈춰졌다. "어디서 왔어요?" 그가 물었다.
       "데모인."
       "그곳이 여기보다 일자리 구하기가 훨씬 수월할 텐데."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일자리를 구하는 여자들이 모두 
     데모인으로 와요."
       그는 그릴 쪽으로 돌아서서 주걱으로 치즈버거를 들어올려 빵 
     안에 집어넣었다. 그는 그녀 앞에 접시를 놓고 카운터 밑에서 
     케첩 병을 꺼냈다. "여기에 친척이 있어요?"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요. 
     직업소개소 여자만 빼고."
       카운터 밑에서 다시 찻숟가락이 유리잔에 부딪쳤다. "거 참 
     --" 그가 투덜거렸다. "이런 일자리는 어때요?" 그는 천천히 
     어디론가 가버렸다.
       잠시 뒤에 그가 돌아왔다. 그는 주걱 끝으로 그릴 위를 가볍게 
     긁기 시작했다. "치즈버거 맛이 어때요?"
       "맛있는데요."
       "또 주문할 것이 있어요? 커피를 더 드릴까요?"
       "아니, 됐어요."
       그릴이 완전히 깨끗해졌는데도 그는 거울 속으로 엘렌을 
     쳐다보면서 계속 긁어댔다. 그녀는 내프킨으로 입가를 닦고는 
     말했다. "얼마예요?"
       그는 돌아서서 허리춤에 달려 있는 연필과 초록색 수첩을 
     꺼냈다. "글쎄 -- " 그는 계속 쓰면서 말했다. "오늘밤 
     패러마운트에서 아주 근사한 영화를 재상영한데요. '잃어버린 
     지평선'이라고 -- 그거 보지 않을래요?"
       "나는......"
       "이곳에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했잖아요."
       그녀는 잠시 곰곰이 생각하는 듯했다. "좋아요." 마침내 
     그녀가 말했다.
       그는 위를 쳐다보며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신나는데.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요?"
       "뉴 워싱턴 하우스 로비에서요."
       "8시에, 괜찮죠?" 그는 수첩에서 계산서를 뜯었다. "내 이름은 
     드와이트예요." 하고 그가 말했다. "아이젠하워와 똑같은 
     드와이트 파웰." 그는 그녀를 보면서 기다렸다.
       "내 이름은 에블린 키트리지."
       "아."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녀는 답례로 활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파웰 얼굴 위로 어떤 표정이 언뜻 스쳐 지나갔다. 
     놀라움일까?...... 아니면 기억 ?
       "뭐가 잘못됐어요?" 하고 엘렌이 물었다.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거죠?"
       "당신 웃음이......" 그가 어색하게 말했다. "전에 알았던 
     여자애와 아주 똑같아서......"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엘렌이 명확하게 말했다. "조안 
     베이컨인가 배스콤이겠지요. 나는 이곳에 온 지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벌써 두 사람이나 내게 조안 누구와 닮았다고 
     했거든요."
       "아니 -- " 파웰이 말했다. "그 여자 이름은 도로시예요." 
     그는 계산서를 접었다. "점심은 내가 살께요." 그는 앞쪽에서 
     계산하는 사람 쪽으로 손을 흔들었다. 그는 목을 죽 빼어 
     계산서와 엘렌, 그리고 자신을 가리키고는 주머니에 계산서를 
     집어넣었다. "잘 가요." 그가 말했다.
       엘렌은 일어나서 코트를 입었다. "뉴 워싱턴 하우스 로비에서 
     8시에 -- " 그는 되풀이했다. "거기에서 묵고 있나 보죠?"
       "예." 그녀는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는 복도를 
     지나는 순간 그의 마음을 알아차렸다. 오다가다 쉽게 만난 사람, 
     이곳에 처음 온 사람, 호텔에 머물고 있고......"점심 잘 
     먹었어요."
       "천만에."
       그녀는 지갑을 집어들었다.
       "오늘밤에 봐요, 에블린."
       "8시에 -- "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돌아서서 --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의식한 채 -- 천천히 가게 
     앞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문 앞에서 돌아섰다. 그가 손을 들어 
     웃어 보였다. 그녀도 미소를 지었다.
       밖에 나오자 그녀는 갑자기 무릎이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제 6 장 

       엘렌은 7시 30분에 로비에 나와 있었다. 그래야 파웰이 
     키트리지 양 방에 전화를 걸어달라고 안내원에게 부탁하는 일이 
     없을 테니까. 8시 5분쯤에 날카로운 미소 위에서 가느다란 
     콧수염을 번득이며 그가 도착했다. (오다가다 쉽게 만난 
     사람......이곳에 처음 온 사람......) 그는 '잃어버린 
     지평선'이 8시 6분에 시작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겨우 
     다섯 블럭 떨어진 곳이었는데도 극장에 가기 위해 택시를 탔다. 
     영화가 반쯤 상영되었을 때 파웰이 그녀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녀는 -- 도로시의 몸을 애무하고는 밀어 떨어뜨렸을 그 손을 
     -- 옆눈으로 계속 지켜보았다.
       시청 건물은 극장에서 세 블럭 떨어져 있었고, 뉴 워싱턴 
     하우스는 겨우 두 블럭 떨어져 있었다. 그들은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그곳을 지났다. 길 건너에 있는 희미한 건물의 위층 창문 
     몇몇 개에 불이 켜져 있었다. "저것이 이곳에서 제일 큰 
     건물이죠?" 엘렌이 파웰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래요." 그의 눈길이 6미터 앞쪽의 길로 모아졌다.
       "높이가 얼마나 되나요?"
       "14층." 그의 시선은 움직이지 않았다. 엘렌은 생각해 보았다. 
     누군가에게 앞에 있는 건물의 높이를 물어보면, 혹시 그가 그 
     높이를 확실히 안다고 해도 자연적으로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게 
     마련이다. 그것을 쳐다보고 싶지 않은 특별한 이유가 없는 
     이상은 -- 
       그들은 검은 벽으로 둘러싸이고 감미로운 피아노 소리가 
     울리는 호텔의 칵테일 라운지에서 위스키 샤워를 마셨다. 그들의 
     대화는 자주 중단되었다. 파웰의 느리고 신중한 말투를 엘렌이 
     조급하게 몰아붙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녁때 한껏 부풀어오른 쾌활함은 시청 건물을 지날 때 
     사라졌다가 호텔로 돌아서면서 다시 들뜨기 시작했다. 그러나 
     빨간 의자에 앉아 있는 지금은 더 이상 그런 기분이 아니었다.
       그들은 일자리에 대해 이야기했다. 파웰은 자기 일을 좋아하지 
     않았다. 두 달 동안 그 일을 해봤지만, 좀더 나은 일자리를 
     찾으면 당장 그만둘 거라고 했다. 그는 여름에 유럽으로 
     공부하러 가기 위해서 돈을 모으고 있다고 했다.
       그는 무엇을 공부하고 있는 걸까? 그의 전공은 영문학인데. 
     앞으로 무엇을 하려고 마음먹고 있는 걸까? 그는 자기 자신도 
     확실하지 않았다. 광고업계나, 아니면 출판사에 뛰어들겠지. 
     그의 장래계획은 단지 구상에 지나지 않는 듯했다.
       그들은 여자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이 대학 여자들이라면 
     골치가 아파요." 그가 말했다. "어리숙하고...... 모든 것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인단 말이야." 엘렌은 이 말이 어떤 대화를 
     꺼내려는 건지 알고 있었다. '당신은 섹스를 너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 우리가 서로 좋아한다면 함께 침대에 
     들어가는 것이 무슨 문제겠어?'-- 뭐 이런 거 아닐까...... 
     그런데 그것이 그렇지도 않았다. 그를 괴롭히는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기다란 손가락 사이로 초조한 듯이 세 번째 칵테일 
     잔을 들어올리면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런 여자에게 
     걸려들면 -- " 그의 푸른 눈이 흐려졌다. "벗어나기가 
     힘들어요." 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꼭 일을 당하고 
     말지......"
       엘렌은 눈을 감았다. 매끄럽고 까만 탁자 위에 놓인 그녀의 
     손이 땀으로 축축해졌다.
       "그런 사람들에겐 안됐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는 계속했다. 
     "그러나 먼저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해야 하지."
       "어떤 사람 말이에요?" 그녀는 눈을 뜨지 않고 말했다.
       "스스로를 다른 사람에게 던져버리는 사람들......" 그는 
     손바닥으로 탁자 위를 쳤다. 엘렌이 눈을 떴다. 그는 웃으면서 
     탁자 위의 담뱃갑에서 담배를 꺼내고 있었다. "나는 위스키 
     샤워를 너무 많이 마시는 게 탈이지." 그가 말했다. 그녀의 
     담배에 성냥불을 갖다대는 그의 손이 떨렸다. "당신에 대해서 
     이야기 좀 해봐요."
       엘렌은 나이 많은 프랑스 남자가 운영하는 데모인의 비서학교 
     이야기를 만들어냈고, 그는 아이들이 보지 않을 때면 침바른 
     종이를 던졌다고 꾸며댔다.
       그 이야기가 끝나자 파웰이 말했다. "자, 여기에서 나갑시다."
       "어디 다른 데로 가자는 거예요?" 엘렌이 물었다.
       "당신이 좋다면 -- " 그는 시원치 않게 대답했다.
       엘렌은 옆에 놓아두었던 코트를 들었다. "웬만하면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나는 오늘 아침에 일찍 일어났거든요."
       "좋아요." 파웰이 말했다. "문까지 바래다 줄께요." 저녁때와 
     똑같은 날카로운 미소가 되돌아왔다.

       그녀는 구릿빛 꼬리표가 달린 열쇠를 든 채 자기 방문에 등을 
     대고 서 있었다. "정말 고마워요." 그녀가 말했다. "멋진 
     저녁이었어요."
       두 사람의 코트를 걸치고 있던 그의 팔이 그녀의 등을 감쌌다. 
     그가 그녀에게 입술을 내밀었으나, 그녀는 고개를 돌려 뺨에 
     키스를 받으려고 했다. "수줍어하지 말아요." 그가 딱딱하게 
     말했다. 그는 손으로 그녀의 턱을 잡고 거칠게 입술에 키스를 
     했다.
       "들어가서...... 담배 한 대만 피웁시다." 그가 말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에비......" 그의 손이 그녀의 어깨 위에 놓였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 피곤해서 
     죽을 지경이에요." 그것은 거절하는 말이었지만, 부드럽게 
     넘어가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다른 밤이면 일이 다를 수도 있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두 번째 키스를 했다. 그녀는 뒤에서 그의 손을 
     떼어 어깨 위로 올렸다. "제발...... 누가 보기라도 하면......" 
     그는 여전히 그녀를 안은 채 약간 뒤로 물러서면서 웃었다. 
     그녀도 아까 가게에서 그에게 보냈던 것처럼 활짝 웃어보려고 
     했다.
       그것이 제대로 들어맞았다. 그것은 노출된 신경에 전류가 
     흐르는 철사를 갖다댄 것 같았다. 그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스쳤다.
       그는 두 손으로 그녀를 안은 채 더욱 가깝게 그녀를 끌어당겨 
     그녀의 어깨 뒤로 턱을 가져갔다. 마치 그녀의 미소를 피하려는 
     듯이.
       "아직도 내가 그 여자를 생각나게 해요?" 그녀가 물었다. 
     그리고 나서, "그 여자도 다른 여자들처럼 단 한 번만 
     만났었겠지요?"
       "아니 -- " 그가 말했다. "그녀와는 오랫동안 사귀었어요." 
     그는 몸을 뒤로 젖혔다. "내가 당신과 단 한 번만 만날 거라고 
     말했었나? 내일밤에 무슨 일이 있어요?"
       "아니, 없어요."
       "그럼, 같은 시간, 똑같은 장소에서 어때요?"
       "당신이 좋다면 -- "
       그는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다시 그녀를 바싹 끌어안았다.
       "왜 그랬어요?" 그녀가 물었다.
       "무슨 뜻이지?" 그의 목소리가 그녀의 관자놀이에서 떨렸다.
       "그 여자 말이에요. 왜 그 여자와 헤어졌지요?" 그녀는 
     지나가는 말투로 가볍게 물어보았다. "하긴 그 여자 실수 때문에 
     내가 이익을 보긴 했지만."
       "오!" 잠시 침묵이 있었다. 엘렌은 청회색 실로 꼼꼼하게 
     짜여진 그의 윗도리 옷섶을 바라보았다. "그건 내가 아래층에서 
     말한 것처럼...... 우린 너무 빠져들었거든. 그래서 헤어져야 
     했지." 그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녀는 너무 어렸어." 그가 
     덧붙였다.
       잠시 뒤 엘렌이 방에 들어가려고 했다. "이젠 
     들어가야겠어요."
       그는 그녀에게 다시 키스했다 -- 아주 오랫동안. 그녀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의 팔에서 벗어난 그녀는 돌아다보지도 않고 문에 열쇠를 
     넣었다. "내일 밤 8시에 -- " 그가 말했다. 그녀는 코트를 받기 
     위해서 뒤를 돌아봐야 했고, 그래서 그의 시선을 피할 수가 
     없었다.
       "안녕, 에비."
       그녀는 등뒤로 문을 열고, 계속 입가에 미소를 띤 채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안녕." 그리고 문을 닫았다.

       그녀는 여전히 코트를 든 채 침대에 꼼짝않고 앉아 있었다. 
     5분 뒤에 전화벨이 울렸다 -- 갠트였다.
       "늦게 걸어야 있을 줄 알았지."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당신에게 말하면 좀 도움이 될까요......?"
       "그럼!" 그는 길게 말을 끌었다. "그럼, 그럼, 그렇고말고! 내 
     결백을 분명히 증명해 줄 것들을 보았소?"
       "그래요. 파웰이 그 애와 함께 지냈던 그 사람이에요. 그리고 
     내 생각대로 그애는 자살한 것이 아니에요. 내가 옳았어요.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던지고 일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여서 
     그런 일에 빠지는 여자들에 대해서 이야기했어요." 경계하는 
     듯한 긴장감이 무너지고 그녀의 말투가 빨라지면서 어지럽게 
     쏟아져 나왔다.
       "오, 하나님! 당신의 능력엔 항복하겠어요. 어디서 그런 
     정보를 들었지요?"
       "그에게서."
       "뭐라고?"
       "그가 일하는 가게에서 그를 끌어냈지요. 나는 아이오와의 
     데모인에서 온 에블린 키트리지라고 했어요. 저녁 내내 그와 꼭 
     붙어 있었거든요."
       갠트 쪽 전화기에서 긴 침묵이 흘렀다. "모두 말해 봐요." 
     마침내 그가 힘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 그에게서 자백서를 
     받아낼 거지요?"
       그녀는 갠트에게 파웰이 시청 건물을 지날 때 우울해 했으며, 
     그 우울한 기분과 위스키 샤워의 취기에서 그가 한 말과 행동을 
     가능한 한 정확하게 말해 주었다.
       갠트가 진지한 목소리로 바꾸어서 말했다. "이봐, 엘렌, 
     이것은 누구와 놀자는 게 아니오."
       "왜요? 그가 나를 에블린 키트리지라고 생각하는 한 -- "
       "그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아요? 도로시가 
     그에게 당신 사진을 보여줬을지도 모르잖소?"
       "그 애는 내 사진을 단 한 장 가지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건 
     우리 얼굴이 나무 그늘에 가려 있고, 또 아주 여러 명이 함께 
     찍은 스냅 사진이에요. 그가 그것을 보았다고 해도 거의 1년 
     전의 일이어서 아마 나를 알아볼 수 없을 거예요. 게다가 만일 
     날 의심했다면 그는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지도 않았을 거예요."
       "그래, 아마 그러지 않았겠지." 갠트는 억지로 인정했다. 
     "이젠 뭘 할 거요?"
       "오늘 오후 도서관에 가서 도로시의 죽음에 대한 기사를 모두 
     읽어봤어요. 거기엔 세부적인 것들은 몇 가지밖에 실려 있지 
     않더군요 -- 모자 색이나 그 애가 장갑을 끼고 있었다는 것 
     정도밖에는요. 나는 내일밤에도 그를 만날 거예요. 만일 내가 
     그에게 그 애의 '자살'에 대해서 이야기하도록 할 수 있다면 
     그는 그 애와 함께 있지 않고서는 도저히 알 수 없을 그런 
     종류의 말을 흘릴지도 몰라요."
       "그건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 없어." 갠트가 말했다. "그는 
     그때 건물 안에 있다가 그녀가 죽은 뒤에 그녀를 본 거라고 
     주장할 수도 있잖소."
       "난 결정적인 증거를 찾는 게 아니에요. 내가 주장하는 것이 
     터무니없는 망상이 아니라고 경찰이 생각할 수 있는 한 가지만 
     찾아내면 돼요. 그때 그 애 가까이에 파웰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만 할 수 있다면, 나는 경찰에게 그 일을 다시 수사하도록 
     할 수 있어요."
       "그럼, 그에게 의심받지 않도록 하면서 어떻게 그에게서 
     자세한 이야기를 얻어낼 수 있을 것 같소? 그는 바보가 
     아니라고."
       "아무튼 최선을 다해 볼 거예요." 그녀가 고집스럽게 말했다. 
     "그밖엔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갠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게 오래 된 둥근 쇠망치가 
     있는데 -- " 그가 말을 꺼냈다. "그것으로 그의 머리를 내리쳐 
     범죄현장에 끌고가서 자백하게 하는 건 어떨까?"
       "당신도 알겠지만 -- " 엘렌이 심각하게 말했다. "다른 방법이 
     없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차츰 희미해졌다.
       "여보세요?"
       "듣고 있어요." 그녀가 말했다.
       "무슨 일 있었소? 끊어졌는 줄 알았지."
       "생각 좀 하느라고요."
       "오, 제발 진지하고......신중해야 해요. 알겠소? 그리고 
     가능하다면 내일 저녁에 내게 전화 좀 해줘요. 당신이 어디에 
     있으며, 일들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알려달란 말이오."
       "왜요?"
       "안전하게 해두기 위해서지."
       "그는 내가 에블린 키트리지라고 알고 있어요."
       "글쎄, 어쨌든 내게 전화해요. 해롭진 않을 테니까. 그렇지 
     않으면 내 머리가 곧 허옇게 될 거요."
       "알았어요."
       "잘 자요, 엘렌."
       "안녕, 고든."
       그녀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생각에 골몰할 때면 늘 
     하는 식으로 아랫입술을 깨문 채 손가락을 두드리며 침대에 앉아 
     있었다.


        제 7 장 

       지갑을 찰칵 닫으며 엘렌은 눈을 들어 로비를 가로질러 오는 
     파웰에게 미소지었다. 그는 푸른색 양복에 회색 코트를 입고 
     지난밤과 똑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안녕 --" 그는 그녀 옆의 가족 소파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시간 약속을 아주 잘 지키는데."
       "몇몇 사람에게는 그렇지요."
       그의 미소가 퍼져 나갔다. "일자린 어떻게 되었어?"
       "아주 잘 되었어요." 그녀가 말했다. "일자리를 얻게 될 것 
     같아요. 변호사 사무실에 --"
       "그거 잘됐네. 그럼, 블루 리버에 머물겠군, 응?"
       "그렇게 될 것 같아요."
       "멋진데...." 그는 달래듯이 말했다. 그리고 시계 쪽으로 잠깐 
     눈을 돌렸다. "뛰어보는 게 어때? 이곳에 오는 길에 글로레이 
     볼룸을 지나왔는데 줄을 죽 서 있던데--"
       "아--" 그녀가 신음 소리를 냈다.
       "무슨 일이야?"
       그녀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먼저 할 일이 있어요. 
     변호사에게 -- 그에게 편지 한 통과..... 신원 증명서 한 통을 
     가져다 줘야 하거든요." 그녀는 지갑을 열었다.
       "비서에게도 신원증명서가 필요한진 몰랐는데. 내 생각엔, 
     단지 속기나 뭐 그런 것을 테스트해 보기만 하면 될 것 같은데."
       "그렇지요. 그런데 내가 지난번 사장에게서 추천장을 받았다고 
     했더니 그것을 봤으면 좋겠대요. 그는 8시 30분까지 사무실에 
     있겠다고 했어요."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미안해요."
       "괜찮아."
       엘렌은 그의 손을 잡았다. "춤추러는 가지 않는 게 낫겠어요." 
     그녀가 말했다. "어디 가서 술을 조금 마시고...."
       "좋아." 그는 더 신이 나서 말했다. 그들은 일어섰다. "변호사 
     사무실은 어디에 있지?" 파웰은 그녀 뒤에서 코트 입는 것을 
     도와주면서 물어보았다.
       "여기서 멀지 않아요." 엘렌이 말했다. "시청 건물이니까요."

       시청 건물 앞으로 이어지는 계단 앞에서 파웰은 걸음을 
     멈췄다. 엘렌은 회전문 안으로 들어가 손으로 밀려다가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이 창백했다. 그러나 그것은 
     로비에서 새어 나오는 회색 조명 때문인지도 모른다. "여기 
     아래에서 기다릴께, 에비." 그의 턱이 굳어졌는지 목소리가 
     어색하게 들려왔다.
       "함께 올라갔으면 좋겠는데--" 그녀가 말했다. "나는 8시 전에 
     이 서류를 가져올 수 있었는데도, 그가 저녁에 가져오라고 한 게 
     좀 이상해요. 그는 좀 능글맞아 보이는 사람이거든요." 그녀가 
     씩 웃었다. "당신은 내 경호원이잖아요."
       "오!" 파웰이 말했다.
       엘렌은 문을 밀며 들어갔고, 잠시 뒤에 파웰이 그녀를 따랐다.
       그녀는 돌아서서 그가 문으로 들어올 때까지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약간 입을 벌린 채 숨을 쉬고 있었으며, 얼굴은 완전히 
     굳은 표정이었다.
       넓은 대리석 로비는 조용하고 텅 비어 있었다. 네 대의 
     엘리베이터 중 세 대는 금속 격자문으로 잠겨 있었으며, 네번째 
     것만이 벌꿀색의 나무 벽에 노란 불이 켜져 있었다. 발자국 
     소리가 둥그런 천장에 울려 또각또각 메아리치는 가운데 그들은 
     나란히 그 쪽으로 걸어갔다.
       그 안에는 검은 제복을 입은 흑인 안내원이 '룩'이란 잡지를 
     읽으면서 서 있었다. 그는 겨드랑이에 그 잡지책을 끼고서 
     커다란 금속 미닫이 문을 열기 위해 층 단추를 누르고는 뒤에 
     있는 격자문을 잡아당겼다. "몇 층입니까?" 그가 말했다.
       "14층이에요." 엘렌이 말했다.
       그들은 문 위에 있는 캄캄한 숫자판에 불이 켜지는 숫자 
     위치가 차츰 올라가는 것을 조용히 지키보며 서 있었다. 
     7.....8......9...... 파웰은 집게 손가락 옆으로 콧수염을 
     비볐다.
       불빛이 13에서 14로 넘어가고 엘리베이터는 제일 꼭대기 
     층에서 부드럽게 멈췄다. 안내원은 문을 잡고 바깥문을 여는 
     가로놓인 막대기를 아래로 잡아당겼다.
       엘렌은 적막한 복도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파웰이 그녀 뒤를 
     따랐다. 그들 뒤에서 덜컹 소리를 내며 엘리베이터의 문이 
     사르르 닫혔다. 문이 닫히는 소리에 이어 '윙' 하고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쪽이에요." 엘렌이 오른쪽으로 움직이며 
     말했다. "1405 호에요." 그들은 복도가 구부러진 곳에서 
     오른쪽으로 돌았다. 그들 앞에 죽 뻗어 있는 복도의 뿌연 유리문 
     중 단지 두 개만이 불이 켜져 있었다. 윤이 나는 고무 타일 위를 
     걷는 그들의 발자국 소리 밖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엘렌이 머뭇거리며 말을 껴냈다.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그저 서류만 그에게 주면 되니까요."
       "거기서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물론이에요. 서류가 괜찮은 편이니까요."
       그들은 복도 끝에서 다시 오른쪽으로 돌았다. 왼쪽 벽의 위쪽 
     문 하나에 불이 켜져 있었고, 파웰은 그쪽으로 비스듬히 
     다가갔다. "아니, 그쪽이 아니에요." 엘렌이 말했다. 그녀는 
     오른쪽의 불이 켜지지 않은 문으로 갔다. 그것의 뿌연 판에 
     '프레드릭 H. 클로즌 변호사' 라고 쓰여 있었다. 그녀가 헛되이 
     손잡이를 돌려보고 손목 시계를 쳐다보자, 파웰이 그녀 뒤로 
     다가왔다. "어떻게 된 거지?" 그녀가 쌀쌀맞게 말했다. "15분이 
     아니라 8시 30분까지 여기에 있겠다고 말했었는데." (전화로 
     비서가, '사무실은 5시에 닫습니다' 하고 말했었다)
       "어떻게 할거야?" 파웰이 물었다.
       "문 밑으로 넣어둬야겠어요." 하고 말하고는 지갑을 열었다. 
     그녀는 커다란 흰 봉두와 만년필을 꺼냈다. 그리고는 뚜껑을 
     열어 지갑에 봉투를 편편하게 대고 쓰기 시작했다. "춤추러 가지 
     못해서 미안한데요." 그녀가 말했다.
       "괜찮아." 파웰이 말했다. "나도 그렇게 가고 싶었던 것은 
     아니니까." 그는 마치 풋내기 곡예사가 줄의 중간쯤을 지나는 
     것처럼 안절부절 못하면서 숨을 내쉬었다.
       "생각이 바뀌었어요." 엘렌이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지금 
     이 편지를 두고 간다고 해도 어차피 내일 다시 와야 할 거예요. 
     그러니 차라리 아침에 다시 가져오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녀는 다시 만년필 뚜껑을 닫고는 도로 지갑에 집어 넣었다. 
     그녀는 비스듬히 달빛에 봉투를 비춰보고 잉크가 아직 마르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봉투를 빠르게 흔들었다. 그녀는 복도 
     건너편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 문에는 '계단'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녀의 눈이 빛났다. "내가 어떻게 하려는지 알아요?" 
     그녀가 물었다.
       "글쎄?"
       ".....우리, 돌아가기 전에 왕창 마셔요...."
       "뭐를?" 그가 웃었다.
       그녀도 계속 봉투를 흔들면서 따라 웃었다. "아니, 그냥 
     옥상으로 올라가 보자구요."
       "왜 옥상에 올라가자는 거지?" 하고 그가 천천히 물었다.
       "아까 달을 보지 못했어요? 그리고 별도? 오늘은 멋진 
     밤이에요. 밤 경치가 굉장할 거예요."
       "글로레이에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가 말했다.
       "어머, 그렇게 꼭 갈 필요는 없잖아요." 그녀는 봉투를 지갑에 
     넣고서 닫았다. "한번 가봐요." 그녀는 명랑하게 말하며 
     그에게서 몸을 돌려 복도를 가로질러 갔다. "어젯밤에 그 홀에서 
     말했던 로맨스는 어땠어요?"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팔을 
     잡으려고 했으나 손이 닿지 않았다.
       그녀는 문을 밀어젖히고 뒤를 돌아다보며 그가 따라오기를 
     기다렸다.
       "에비, 나는.... 높이 올라가면 어지럽단 말이야." 그는 살짝 
     웃어보이려고 했다.
       "내려다보지 않으면 돼요." 그녀는 가볍게 말했다. "그리고 
     가장자리 쪽으로 가지 않으면 괜찮아요."
       "만일 문이 잠겼으면...."
       "옥상으로 가는 문은 잠그지 않을 거예요. 소방법에 의해서." 
     그녀는 넌덜머리가 난 체하며 얼굴을 찡그렸다. "아이, 
     어서와요! 마치 내가 무거운 짐을 지고 나이아가라 폭포에 
     뛰어들라고 한 것 같군요!" 그녀는 복도를 지나 층계참에 서서 
     문을 잡은 채 그를 기다리며 웃었다. 그는 마치 그의 일부분이 
     그녀를 따라가라고 시키기라도 한 것처럼 넋을 잃고 천천히 
     걸어갔다. 그가 층계참에 다다르자 엘렌은 붙잡고 있던 문에서 
     손을 놓았다. 쉬잇 하고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문이 닫히면서 
     복도의 불빛이 차단되었다. 그리고 단지 10 와트짜리 전구만이 
     계단의 어둠과 손해보는 싸움을 해 나가고 있었다.
       그들은 계단을 여덟개 올라가 돌아선 뒤, 다시 여덟 개를 더 
     올라갔다. 거기에는 커다랗게 흰 글씨로 경고가 쓰인 시커먼 
     금속 문이 있었다. '비상시를 제외하고는 출입 엄금' 파웰은 
     '엄금'이란 단어를 강조하며 크게 읽었다.
       "형식적인 거예요." 엘렌은 무시하는 투로 말했다. 그녀는 
     손잡이를 열어 보려고 했다.
       "분명히 잠겼을 거야." 파웰이 말했다.
       "만일 잠겼다면 그런 걸 써놓지 않았을 거예요." 엘렌은 
     경고문을 가리켰다.
       "당신이 열어봐요."
       그는 손잡이를 잡고 밀었다. "잠겼어."
       "오, 좀더 세게 밀어봐요."
       "알았어, 알았어, 알았다구." 그는 마치 지옥에 가서나 그만 
     둘 것처럼 그 말을 되풀이했다. 그는 뒤로 물러섰다가 온 힘을 
     다해 어깨로 문을 밀었다. 문이 활짝 열리는 바람에 그는 
     하마터면 나동그라질 뻔했다. 그는 문턱을 넘어서 타르가 칠해진 
     옥상으로 나갔다. "자, 에비---" 그는 몸을 죽 펴고 문을 활짝 
     열며 부루퉁하게 말했다. "나와서 멋진 달을 구경하시지."
       "화가 났군요." 엘렌은 심각하고 냉소적인 표정으로 서있는 
     그를 얼르듯이 밝은 어조로 말했다. 그녀는 문턱을 넘어 계단의 
     그림자에서 나와 혹시 살얼음은 아닌가 하고 걱정하며 스케이트 
     타는 사람처럼 넓은 옥상쪽으로 나아가는 파웰의 곁을 가벼운 
     걸음걸이로 지나갔다. 그녀 뒤에서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 잠시 뒤 파웰이 그녀의 왼쪽으로 다가왔다.
       "미안해---" 그가 말했다. "그 단단한 문에 어깨를 부숴뜨리고 
     싶지 않아서 그랬을 뿐이야." 그는 거북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들은 KBRI 탑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별이 반짝이는 검붉은 
     하늘 위로 시커멓게 해골처럼 솟아 있었다. 그 탑의 꼭대기에서 
     깜박거리는 빨간빛이 가끔씩 옥상을 잠시 비추었다가는 
     사라졌다. 빨간 깜박등 빛 사이로 머리 위의 초승달이 은은한 
     빛을 내고 있었다.
       엘렌은 고개를 들어 파웰의 긴장한 옆모습을 쳐다보았다. 
     처음에는 희끄무레하더니 이내 빨간빛으로, 다음엔 다시 하얗게 
     바뀌었다. 그 너머로 환기통을 둘러싸고 있는 벽과, 밤에도 
     선명하게 보이는 하얀색 돌이 보였다. 그녀는 어느 신문에 
     실렸던 그림이 떠올랐다. 저 네모난 곳 남쪽에 X표시 -- 
     그들에게서 가장 가까운 쪽이었다. 갑자기 그녀는 그쪽으로 가서 
     안을 들여다보고, 도로시가 어디에 있었는지 알아보고 싶은 
     충동이 치밀어 올랐다.
       고통의 파문이 그녀를 휩쓸고 지나갔다. 그녀의 시선이 
     가장자리가 하얗게 테두리진 파웰의 옆모습에 고정되었다가 
     가까스로 다른 쪽으로 돌려졌다.
       '이젠 됐어.'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안전해 -- 칵테일 
     라운지에서 이것저것 캐묻는 것보다 더욱 안전해. 난 괜찮아, 난 
     에블린 키트리지이니까....'
       그는 차츰 그녀의 눈빛을 의식하게 되었다. "당신은 하늘을 
     보고 싶다고 했잖아." 그는 위로 치켜든 얼굴을 조금도 내리지 
     않고 말했다. 그녀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갑자기 고개를 
     쳐드니 어지러웠다. 별들이 빙빙 돌고....
       그녀는 고개를 내리고 오른쪽으로 돌아 옥상의 바깥 
     가장자리로 갔다. 거칠거칠한 면을 손으로 짚으면서 그녀는 
     차가운 밤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이곳에서 그는 그녀를 
     죽였다. 그는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만으로도 
     경찰서에 가기에 충분한 일이다. 나는 안전하다.... 마침내 
     그녀의 머릿속이 맑아졌다. 그녀는 아래에 펼쳐진 파노라마를 -- 
     무수한 불빛들이 어둠 속에서 반짝거리는 광경을 내려다보았다. 
     "드와이트, 와서 저것 좀 봐요!"
       그는 돌아서서 난간 쪽으로 오다가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멈춰섰다.
       "아름답죠?" 그녀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그래, 아름다운데." 그가 말했다.
       그는 미풍에 부드럽게 탑의 케이블이 흔들거리는 것을 잠시 
     바라보더니, 천천히 제자리에서 돌아 환기통을 마주 보았다. 
     그는 그 난간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잠시 뒤 오른쪽 발을 
     내디디면서 걷기 시작했다. 그이 다리는 마치 주정뱅이가 한 
     잔만 마시러 술집으로 가는 것처럼 조용히, 그리고 아주 
     잔인하게 그를 앞으로 데려갔다. 그는 환기통 난간 앞으로 
     똑바로 가서 차가운 돌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는 몸을 내밀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엘렌은 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제자리에서 
     한바퀴 돌면서 희미한 초승달빛 아래에서 그를 찾아보았다. 잠시 
     뒤 탑의 붉은색 불빛이 환기통 벽에 있는 그를 비쳐 주었을 때, 
     그녀의 가슴은 놀란 듯이 마구 뛰었다.
       붉은 빛은 사라졌지만, 그가 있는 곳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희미한 달빛만으로도 그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었다. 엘렌은 
     탄력있는 타르 위를 발자국 소리를 내지 않으며 앞쪽으로 
     나아갔다.
       파셀은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불켜진 창문에서 나오는 
     몇몇 개의 노란빛 줄기가 환기통의 네모난 구멍 안에서 서로 
     엇갈렸다. 하나는 멀리, 바로 바닥의 벽들이 한 점에서 만나는 
     초점인 작은 회색 콘크리트 사각형을 비추고 있었다.
       "너무 높아서 어지러운가 보죠?"
       그가 빙그르 돌았다.
       그의 눈썹과 콧수염 위에 구슬땀이 맺혔다. 신경질적인 미소가 
     그의 얼굴에 스켰다. "그래--" 그가 말했다. "하지만 내려다보지 
     않을 수가 없었어. 스스로 고문을 받고 있는 것만 같아서...." 
     그의 미소가 사라졌다. "그게 내 특기지." 그는 깊이 숨을 
     내쉬었다. "그만 내려갈까?" 그가 물었다.
       "온 지 얼마 안됐잖아요?" 엘렌은 가볍게 반대했다. 그녀는 
     돌아서서 가늘고 긴 환풍기 굴뚝 사이를 지나 옥상의 동쪽 
     가장자리로 걸어갔다. 파웰은 마지 못해서 따라갔다. 가장자리에 
     이르자, 엘렌은 난간에 등을 기댄 채 그들 옆으로 솟아있는 
     빨간색 빛의 탑을 올려다 보았다. "여기서 보니 훨씬 멋있군요." 
     그녀가 말했다. 파웰은 난간을 잡은 채 시가지를 둘러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밤에 여기에 와본 적이 있어요?" 
     엘렌이 물었다.
       "아니--" 그가 말했다. "오늘이 처음 와보는 거야!"
       그녀는 난간 쪽으로 돌아서서 몸을 구부려 2층 아래에 불쑥 
     튀어나온 면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생각에 잠겨 얼굴을 
     찡그렸다. "작년에--" 엘렌은 천천히 말을 꺼냈다. "여기에서 
     어떤 여자가 떨어졌다는 기사를 읽은 것 같아요...."
       환풍기의 캡이 찰칵 소리를 냈다. "그래--" 파웰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자살이지, 떨어진 게 아니야."
       "오, 그랬나요." 엘렌은 그 불쑥 튀어나온 곳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여기서 떨어져 죽을 수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그녀가 말했다. "겨우 2층 밖에 안되는데."
       그는 한 손을 들어 엄지손가락으로 어깨 너머 뒤쪽을 
     가리켰다. "저쪽에 있는..... 환기통."
       "아, 맞아요." 그녀는 몸을 쭉 폈다. "이제 생각났어요. 
     데모인 신문에 아주 커다랗게 났었지요." 그녀는 난간 위에 
     지갑을 올려 놓고, 마치 지갑이 제대로 닫혔는지 확인해 보듯이 
     양손으로 그것을 꽉 쥐었다. "스토다드 여학생 아니었던가요?"
       "그랬었지." 하고 말하고 나서 그는 멀리 지평선 쪽을 
     가리켰다. "저기 불이 켜진 둥그런 건물이 보이지? 저것이 
     스토다드 천체 관측소야. 자연과학 과제 때문에 한번씩 가곤 
     하지. 그들은 한 개--"
       "아는 여학생이었어요?"
       빨간 불빛이 그의 얼굴에 지나갔다.
       "그런 건 왜 묻는거지, 에비?" 파웰이 말했다.
       "단지 당신이 그녀를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생각해 
     보는 게 당연하잖아요, 당신이 스토다드에 다니니까...."
       "그래--" 그는 날카롭게 말했다. "아는 여자였어. 아주 멋진 
     여학생이었는데.... 자, 이젠 다른 이야기나 하지."
       "그 이야기가 갑자기 떠오른 것은--" 그녀가 말했다. "모자 
     때문이에요."
       파웰은 화가 나서 한숨을 내쉬고 지겨운 듯이 말했다.
       "무슨 모자?"
       "그녀는 나비 리본이 달린 빨간 모자를 쓰고 있었대요. 그런데 
     바로 그 사건이 일어났던 날 나도 나비 리본이 달린 빨간 모자를 
     샀었거든요."
       "그녀가 빨간 모자를 쓰고 있었다고 누가 그래?" 파웰이 
     물었다.
       "그렇지 않았나요? 데모인 신문에는 분명히 그렇게 실려 
     있었는데...." 그 신문이 틀렸다고 말해 봐, 어서. 그녀는 
     간절히 바랬다. 말해 봐, 그것은 초록색이었다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클레리온 지에는 빨간 모자에 대해서는 
     나와 있지 않았는데." 파웰이 말했다. "난 그 기사를 꽤 
     주의깊게 읽었거든. 아는 여자였으니까...."
       "다만 블루 리버 신문이 그것을 쓰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이 
     빨간 모자가 아니라는 뜻은 아니잖아요." 엘렌이 말했다.
       파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엘렌은 그가 곁눈질로 자기 
     시계를 보는 것을 보았다. "이봐--" 그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25분전 9시야. 난 이 광대한 장면을 이젠 지겹게 보았어." 그는 
     몸을 돌려 서둘러 계단 쪽으로 나아갔다.
       엘렌은 얼른 그의 뒤를 따랐다. "아직 갈 순 없잖아요." 
     그녀는 경사진 지붕 그림자 바로 바깥에서 파웰의 팔을 잡으로 
     달콤한 말로 유혹했다.
       "왜 갈 수 없다는 거야?"
       미소 뒤에서 그녀의 가슴이 콩콩 뛰었다. "나... 담배 좀 
     피우고 싶어요."
       "아...." 그는 주머니를 뒤지다가 잠시 멈췄다. "하나도 
     없는데. 아래층에 내려가서 사면 돼지 뭐."
       "내게 있어요." 하고 말하며 그녀는 지갑을 뒤적였다. 엘렌은 
     뒤로 물러나 마치 신문 그림을 보고 있는 것처럼 정확하게 그녀 
     뒤에 있는 환기통으로 갔다. 바로 X표시가 되어 있던 그곳으로-- 
     그리고 살짝 돌아서서 그가 있는 쪽으로 미끄러지듯이 뒷걸음질 
     치고는 지갑을 열고, 파웰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공허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에서 담베를 피우면 멋있을 거예요." 
     그녀의 엉덩이가 난간에 닿았다. X. 엘렌은 지갑 안을 
     더듬거렸다. "한대 피우겠어요?"
       그는 사양하고는 그녀에게 다가와서 화가 난 듯이 입술을 
     실룩거렸다. 그녀는 하얀 원통형 담배가 나올 때까지 구겨진 
     담뱃갑을 흔들면서 생각에 잠겼다 -- 오늘밤에 해야 해. 이제 더 
     이상 그는 에블린 케트리지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지 않을 
     테니까. "여기 있어요." 그녀가 내밀었다. 그는 거칠게 담배를 
     낚아챘다.
       그녀는 한 개비 더 빼려고 손가락 끝을 넣으면서 
     두리번거리다가 환기통의 위치를 분명히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녀는 그가 있는 쪽으로 살짝 몸을 돌렸다. "여기가 
     그곳이지요....?" 그녀는 그를 돌아보았다.
       파웰의 눈이 가늘어졌고, 턱은 단단한 인내의 마지막 실로 
     팽팽하게 굳어졌다. "잘 들어, 에비." 그가 말했다. "그것에 
     대해선 이야기하지 말자고 부탁했어. 그 정도의 호의는 베풀어 
     줄 수 있잖아. 응? 부탁이야." 그는 입술 사이로 담배를 찔러 
     넣었다.
       엘렌은 파웰의 얼굴에서 눈의 떼지 않았다. 담잿감에서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물고는 담뱃갑을 침착하게 다시 지갑 안에 
     집어넣었다. "미안해요." 왼쪽 팔 아래로 지갑을 끼면서 그녀는 
     차갑게 말했다. "난 당신이 뭣 때문에 그렇게 기분이 상했는지 
     모르겠어요."
       "이해 못하겠어? 그 여학생은 내가 아는 사람이었단 말야."
       그녀는 성냥을 켜서 그의 담배에 붙여주었다. 노란 불꽃이 
     그의 얼굴을 비췄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긴장되어 
     이글거리는 파란 눈과 피아노 줄처럼 팽팽해진 턱이 보였다. 
     한번 더, 한번 더.... 그녀는 그의 담배에 불이 붙자, 성냥을 
     그의 얼굴 쪽으로 들어올렸다. "신문에서는 왜 그녀가 
     자살했는지 그 이유는 밝히지 않았었죠. 그렇죠?" 그는 
     고통스럽게 눈을 감았다. "분명히 그녀는 임신했을 거예요." 
     엘렌이 말했다.
       성냥불이 꺼지고 탑의 불빛이 비치자, 그의 얼굴이 노란 
     불빛에서 강렬한 빨간색으로 바뀌었다. 철사처럼 빳빳해진 
     근육이 터지고 푸른 눈이 댐이 폭발하듯이 활짝 떠졌다...... 
     지금이다! -- 엘렌은 승리감에 차서 생각했다 -- 지금이다! 
     유리해질 수도 있고, 더 나빠질 수도 있겠지...... !
       "맞아 -- " 그가 갑자기 소리쳤다. “맞아! 당신은 왜 내가 
     그것에 대해 얘기하지 않으려는지 알고 있어? 당신은 왜 내가 
     여기에 올라오지 않으려고 했는지 알아? 왜 이 빌어먹을 건물 
     안에 들어오려고 하지 않았는지 알아?” -- 파웰은 담배를 
     내던졌다 -- “왜냐하면 여기서 자살한 그 여자가 어젯밤에 
     당신에게 말했던 바로 그 여자란 말이야. 당신처럼 웃는 그 
     여자!” 그의 눈이그녀 얼굴에서 떨어졌다. “내가 알던 그 
     여자는 -- ” 그의 말이 단두대에 잘린 듯이 갑자기 끊어졌다. 
     그녀는 아래로 떨구어진 그의 눈이 놀라면서 커지는 것을 
     보았다.
       탑의 불빛이 사라지고 그녀는 앞에 있는 희미한 형태로서만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갑자기 그가 엘렌의 왼쪽 손목을 피가 
     안 통할 정도로 꽉 붙잡았다. 비명을 지르는 바람에 그녀의 
     입에서 담배가 밀려나왔다. 파웰은 그녀의 손가락을 비틀면서 
     팔을 꺾었다. 그녀의 겨드랑이에서 지갑이 미끄러져 발 아래로 
     떨어졌다. 그녀의 오른손이 그의 머리 위에서 헛손질했다. 그는 
     그녀 손의 힘줄을 엄지손가락으로 만져서 억지로 손가락을 펴게 
     했다...... 그녀에게서 떨어져 파웰은 뒤쪽으로 걸어갔고, 다시 
     희미한 형체만 보이게 되었다.
       "뭐 하는 거예요?" 그녀가 소리쳤다. “뭘 가져간 거예요?” 
     그녀는 어리둥절해서 몸을 구부려 지갑을 주워들었다. 그녀는 
     왼손을 구부리고, 불쾌한 생각에서 그에게 잡혔던 손에 생긴 
     자국을 없애보려고 애썼다.
       잠시 뒤 다시 빨간빛이 비쳤고, 엘렌은 파웰의 손바닥에 어떤 
     물체가 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어둠 속에서 그것을 
     살펴보고 있었다. 구릿빛으로 찍힌 글씨가 날카롭고 분명하게 
     반짝거렸다. 엘렌 킹쉽이라고 --
       싸늘한 기운이 그녀를 휘감았다. 그녀는 매스꺼운 공포가 
     차올라와서 눈을 감았다. 그녀는 비틀거렸다. 그녀의 등에 
     딱딱한 환기통의 난간 끝이 느껴졌다.


        제 8 장 

       "그녀의 언니......" 파웰은 더듬거렸다. "바로 그녀의 
     언니였군......"
       그녀는 눈을 떴다. 그는 이해할 수 없는 눈빛으로 성냥갑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이게 
     뭐지?" 그는 무뚝뚝하게 물었다. 갑자기 그는 그녀의 발에 
     성냥갑을 내던지고는 격한 목소리로 외쳤다. "내게 뭘 원하는 
     거지, 말해 봐?"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어요." 엘렌은 얼른 대답했다. 
     "아무것도 없어요." 그녀의 눈빛이 절망적으로 변했다. 그는 
     그녀와 계단의 그림자 사이에 서 있었다. 만일 그녀가 그를 
     한바퀴 돌게 할 수만 있다면...... 그녀는 난간에서 등을 떼고 
     왼쪽으로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파웰은 이마를 쓸어내렸다. "당신은...... 당신은 일부러 나를 
     찾은 거야...... 나에게 그녀에 대해서 물어보고...... 여기 
     옥상으로 나를 데려왔어......" 이제 그의 목소리는 애원하는 
     투로 바뀌었다. "내게서 무엇을 원하는 거지?"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어요." 그녀는 조심스럽게 
     옆걸음질을 했다.
       "그렇다면 왜 이러는 거야?" 그는 앞쪽으로 나오려고 몸을 
     구부렸다.
       "잠깐." 엘렌이 소리쳤다.
       엉거주춤하게 구부리고 있던 다리가 힘없이 얼어붙었다.
       "만일 내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 " 그녀는 천천히 또박또박 
     말하려고 애썼다. "당신에 대해서 모두 아는 사람이 또 있어요. 
     내가 오늘밤에 당신과 함께 있다는 것과, 또 당신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니 만일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무슨 일이......"
       "만일 무슨 일?" 파웰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다는 거야?"
       "내가 뭘 말하는지 당신은 알고 있어요. 만일 이곳에서 내가 
     떨어진다면......"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지?" 파웰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내가 그런 사람처럼 보이나......?" 그의 
     한쪽 손이 힘없이 난간 쪽으로 늘어졌다. "제기랄!" 그가 
     중얼거렸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당신 혹시 정신나간 사람 
     아니야?"
       엘렌은 그에게서 5 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다. 그녀는 난간에서 
     떨어져서 그의 오른쪽 뒤에 있는 계단 문으로 똑바로 가로질러 
     갔다. 그는 천천히 그녀가 조심스럽게 가로질러 가는 데에 
     따라서 몸을 돌렸다. "나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안다는 말이 무슨 
     뜻이지?" 그가 다그쳤다. "뭘 안다는 거야?"
       "모든 것을 -- " 그녀가 말했다. "전부. 그 사람은 지금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만일 내가 5분 안에 내려가지 
     않으면 그가 경찰을 부를 거예요."
       파웰은 지친 듯이 손바닥으로 이마를 탁 쳤다. "내가 졌군." 
     그가 중얼거렸다. "이젠 아래층에 내려가고 싶다고? 가고 싶다는 
     거야? 그럼, 어서 내려가!" 그는 몸을 돌려 환기통 난간으로 -- 
     엘렌이 처음에 문 쪽으로 가기 전에 서 있었던 지점으로 
     다가갔다. 그는 뒤에 있는 돌에 팔꿈치를 대고 서 있었다. "어서 
     가! 어서 가라고!"
       엘렌은 그가 자기를 때려서 못 가게 막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천천히 문 쪽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만일 내가 체포되기로 되어 있다면 -- " 파웰이 천천히 
     말했다. "그 이유나 알고 싶어. 아니, 그것을 물어봐서도 안되는 
     건가?"
       엘렌은 손으로 문을 열고 나서야 대답했다. "난 당신이 대단한 
     배우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당신은 도로시가 당신과 결혼하게 될 
     거라고 믿도록 했으니까."
       "뭐라고?" 그는 너무 놀라 고통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와 결혼할 거라고 그녀에게 믿게끔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어. 
     그건 모두 그녀 쪽에서, 모두 그녀의 일방적인 생각이었어."
       "거짓말 -- " 엘렌은 증오스럽게 쏘아붙였다. "당신은 추악한 
     거짓말쟁이야." 그녀는 열린 문 뒤로 머리를 숙이고 높은 문턱을 
     넘었다.
       "잠깐만!" 그는 자기가 앞으로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엘렌이 
     도망갈 거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난간을 따라 뒤로 떨어져 그 
     길을 나와 방금 엘렌이 갔던 길을 따라갔다. 그는 문의 
     반대쪽에서 약 6 미터 되는 곳에 이르자 걸음을 멈췄다. 그림자 
     속에서 엘렌이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 한 손으로는 문 
     손잡이를 잡고 닫을 준비를 한 채.
       "제발 -- " 파웰이 진지하게 말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러는지 말이라도 해줘야지!"
       "당신은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군요. 당신은 
     정말 우리가 모를 거라고 생각해요?"
       "제기랄......" 그는 거칠게 중얼거렸다.
       "좋아요." 엘렌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말해 
     주지요. 첫째, 그 애는 임신을 했어요. 둘째, 당신은 그것을 
     원하지 않았어요 -- "
       "임신?" 그 말이 바위처럼 그의 가슴을 쳤다. 그는 몸을 
     앞으로 웅크렸다. "도로시가 임신을 했다고? 그게 바로 그녀가 
     자살한 이유야? 자살한 이유냐고?"
       "그 애는 자살한 게 아니에요!" 엘렌이 소리쳤다. "당신이 그 
     애를 죽였어!" 그녀는 문을 잡아당겨 닫아버리고는 돌아서서 
     뛰어 내려갔다.
       그녀는 철계단을 덜컹거리며 뛰어 내려갔다. 구둣굽이 
     흔들거려 계단 손잡이를 꽉 움켜잡고 계단참마다 방향을 돌렸다. 
     그녀가 계단을 두 칸 반을 내려가기도 전에, "에비! 엘렌! 
     기다려!" 하고 그가 뒤에서 큰소리치며 내려오는 것을 들었다. 
     그때 그녀는 복도를 돌아서 줄곧 뛰고 있었기 때문에 
     엘리베이터를 타기에는 이미 늦었으며, 다음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로 내려간다면 그가 그곳에 와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엘렌의 가슴은 쿵쿵 방망이질쳤다. 옥상에서 로비까지 14층의 
     계단은 중간에서 구부러지니까 28개나 된다. 엘렌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어두컴컴한 계단이 아래로 휘감겨 있었고, 그가 
     뒤에서 점점 가까워지며 목소리도 점차 커졌다. 그녀는 겨우 
     팔로 벽을 짚으며 돌아서서, 그 빌어먹을 구둣굽 때문에 반쯤 
     미끄러지듯이 1층으로 굴러 내려갔다. 대리석 복도를 지나 
     미끄러운 로비 바닥에 딸각거리는 요란한 소리를 울리면서 
     뛰어가자 깜짝 놀란 흑인 안내원이 엘리베이터에서 고개를 삐죽 
     내밀었다. 그녀는 기진맥진한 상태로 육중한 회전문을 간신히 
     밀고 나와서 미끄러지기 쉬운 대리석 계단을 몇 개 더 내려갔다. 
     보도에서 어떤 여자와 거의 부딪칠 뻔하면서 계속 왼쪽으로 돌아 
     적막한 작은 도시로 내려가는 워싱턴 가(街) 쪽으로 뛰어갔다. 
     가슴이 쿵쿵 세게 고동치는 가운데 속도를 줄여 모퉁이를 돌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저쪽에서 파웰이 대리석 계단을 내려오면서 
     손을 흔들며 소리치고 있었다. "기다려! 기다려!" 그녀는 
     모퉁이를 돌아서 다시 달렸다. 지나가던 남녀가 고개를 돌려 
     쳐다보고, 차를 타고 있는 녀석들이 태워주겠다고 소리치는 것을 
     무시한 채 -- 그 블럭 끝에 있는 호텔 광고처럼 번쩍이는 호텔의 
     유리문 쪽으로 달려갔다 -- 그도 역시 점점 더욱 가까워졌으나 
     그녀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계속 뛰었다 -- 마침내 엘렌이 
     반짝이는 유리문에 도착하자, 한 남자가 미소를 지으며 그 
     광경을 즐기듯이 문 한쪽을 열어주는 것이었다. "고마워요, 
     고마워요." 그녀는 로비 안으로 들어갔다. 로비, 안전하고 
     포근한 로비, 호텔 보이와 어슬렁거리는 사람들, 그리고 신문을 
     보고 있는 남자들이 있는 곳......그녀는 의자에 앉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곧장 구석에 있는 전화 박스로 갔다. 
     왜냐하면 그 지방에서는 제법 이름이 알려진 갠트가 그녀와 함께 
     경찰에 간다면 그들은 엘렌의 말에 귀를 기울일 것이고, 그녀를 
     믿고 재수사를 시작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숨을 헐떡거리며 
     그녀는 전화번호부를 집어들고 K로 시작되는 면을 뒤적였다 -- 
     지금이 5분 전 9시이니까 그는 스튜디오에 있을 것이다. 그녀는 
     전화번호부를 넘기며 숨결을 가다듬었다. KBRI -- 5_1000. 
     그녀는 지갑을 열고 동전을 찾았다. 5_1000, 5_1000, 그녀는 
     전화번호부 선반에서 몸을 돌려 위를 쳐다보았다.
       파웰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는 얼굴이 붉어지고 금발이 
     헝클어진 채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무섭다는 생각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 이곳에는 밝은 불빛과 사람들이 있다. 
     증오가 그녀의 거친 숨소리를 빙하처럼 매끄럽게 만들었다.
       "당신은 다른 길로 도망갔어야 했어. 뭐 그래 봤자 
     소용없겠지만, 내가 당신이라면 지금이라도 도망갈 텐데."
       그리고는 그는 병든 개가 애원하듯이 매우 애처롭게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듯한 표정으로 엘렌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진정으로 연민의 정을 자아내게 하는 슬픈 얼굴이었다. 
     그는 부드럽고 심각하게 말했다. "엘렌, 나는 그녀를 사랑했어."
       "나는 전화할 데가 있어요." 엘렌이 말했다. "저쪽으로 
     비켜줘요."
       "제발, 당신에게 말할 게 있어." 파웰은 호소했다. "그녀가? 
     그녀가 정말 아이를 가졌었어?"
       "전화할 데가 있다니까요."
       "그녀가 아이를 가졌었느냐고?" 그는 다그쳐 물었다.
       "그녀가 그렇다는 것은 당신이 더 잘 알잖아요!"
       "신문엔 그런 말이 없었어! 아무 말도......" 파웰은 갑자기 
     눈살을 찌푸리더니 낮고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몇 
     개월이었지?"
       "제발 나가줘요."
       "그녀는 몇 개월째였지?" 그가 다시 한 번 다그쳤다.
       "오, 하나님! 두 달째였어요."
       그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기라도 한 것처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자, 제발 이제 비켜주겠어요?"
       "당신이 지금까지 해왔던 행동을 설명해 주지 않으면 비켜줄 
     수 없어. 에블린 키트리지로 행세한 이유를......"
       그녀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파웰은 당황하여 중얼거렸다. "정말로 내가 그녀를 죽였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리고는 여전히 가늘게 뜨고 있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난 그때 뉴욕에 있었어!" 그가 변명하듯이 말했다. 
     "난 그걸 증명할 수 있어! 난 지난 봄 내내 뉴욕에 있었다고!"
       그 말에 엘렌은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잠시 동안이었다. 그녀가 말했다. "난 당신이 이집트의 카이로에 
     있었다고 말할 줄 알았죠."
       "제기랄......" 그는 거칠게 내뱉었다. "5분간만 내게 말할 
     시간을 줄 수 있겠어? 단 5분간만?" 그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뒤에서 얼른 신문을 들어올리며 사라지는 어떤 남자의 머리를 
     흘끗 쳐다보았다. "사람들이 듣고 있어." 그가 말했다. "자, 단 
     5분만 칵테일 라운지에 들어가자고. 그게 아무런 해도 되지 
     않잖아. 거기선 당신에게 아무 짓도 할 수 없어. 만일 당신이 
     그런 걸 걱정하고 있다면 -- "
       "무슨 말을 하겠다는 거예요?" 그녀가 대들었다. "만일 당신이 
     그때 뉴욕에 있었고 그 애를 죽이지 않았다면, 그렇다면 왜 
     어젯밤에 시청 건물을 지날 때 시선을 돌렸지요? 그리고 왜 
     오늘밤에 옥상에 올라가려고 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왜 그렇게 
     환기통 안쪽을 내려다보았을까요?"
       파웰은 기가 막힌 듯이 고통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거라면 설명할 수 있지." 그가 사납게 말했다. "하지만 
     당신이 이해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군. 아니, 당신은 알 거야. 
     나는 느끼고 있어......" -- 그는 어떤 낱말 하나를 찾아내려고 
     말을 멈췄다. "......나는 그녀의 자살에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거든."
       검은 벽으로 둘러싸인 라운지는 자리가 많이 비어 있었다. 
     여기저기의 자리에서 유리잔들이 마주치고, 피아노가 거시윈의 
     작품을 감미롭게 연주하고 있었다. 그들은 어젯밤에 앉았던 
     자리에 앉았다. 엘렌은 어떤 말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은 
     태도로 소파 뒤에 등을 대고 빳빳하게 앉아 있었다. 웨이터가 
     오자 그들은 위스키 샤워를 주문했다. 두 사람 사이에 있는 
     테이블에 마실 것이 놓이고 나서야 파웰은 엘렌이 아무 말 없이 
     새초롬하게 앉아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자기 잔을 들고 
     홀짝거렸다.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당황한 목소리가 천천히, 
     그리고 거북하게 흘러나왔다.
       "재작년에 수업이 시작된 지 2주일이 지났을 때 나는 그녀를 
     만났어." 그가 말했다. "지지난 학기 -- 재작년 9월에 말이야. 
     난 그전에도 그녀를 본 적이 있었어 -- 그녀는 나와 두 과목을 
     함께 듣고 있었고, 1학년 때도 한 과목을 함께 들었었지 -- 
     그러나 난 그때까지 한 번도 그녀와 말해 본 적이 없었어. 
     왜냐하면 나는 대개 첫번째나 두 번째 줄에 앉았고, 그녀는 항상 
     뒤쪽 구석에 앉았으니까. 내가 그녀와 말하기 전날 밤에 두세 
     녀석과 함께 이야기를 했었는데, 그 중 한 녀석이 얌전한 
     여자애가 사실은 어떻다는 둥......그런 이야기를 하더구먼." 
     그는 말을 멈추고 잔을 만지작거리며 내려다보았다. "'너는 
     얌전한 여자애와 사귀는 게 어울릴 거야.' 하고 녀석들이 
     말하더군. 다음날 그녀가 항상 앉던 구석 뒷자리에 앉아 있는 
     그녀를 보았을 때, 녀석이 한 말이 떠올랐어.
       난 수업을 마치고 강의실을 나오면서 처음 그녀에게 이야기를 
     걸었지. 난 그녀에게 과제물 적은 것을 잊어버렸는데, 그것을 
     알려주겠느냐고 말했어. 그녀는 그렇게 하겠다고 했지. 그것은 
     단지 그녀에게 말을 걸 구실이었고, 그녀도 그것을 알고 있었어. 
     그런데도 그녀는 내게 대답을 해줬어...... 아주 진지하게. 나는 
     깜짝 놀랐지. 내 말은, 대부분 예쁜 여자애들은 그런 일을 
     시큰둥하게 받아들이고 대충 대답하게 마련이거든. 당신도 
     알겠지만...... 하지만 그녀는 너무...... 순진해서 나는 어느 
     정도 죄책감까지 느낄 정도였어.
       그래서 우린 토요일 밤에 만나서 극장에 갔다가 프랭크의 
     플로런타인 룸에 갔지. 우린 정말 멋진 시간을 보냈어. 우스개 
     장난이나 뭐 그런 것이 아니라 정말 멋진 시간을 보낸 거야. 
     우린 다음주 토요일 밤에 또 만났고, 그 다음주엔 두 번, 그리고 
     다음에는 세 번씩 만났어. 마침내 우리는 헤어지기 전까지는 
     거의 매일 밤 만났지. 서로를 잘 알게 되고 보니 그녀는 정말 
     재미있는 여자였어. 강의실 안에서의 그녀와는 전혀 달랐으니까. 
     나는 행복했어 -- 난 그녀를 좋아했지.
       그러다가 11월초에 그 녀석들의 말이 옳았다는 걸 깨달았어 -- 
     얌전한 여자애들이 사실은 어떻다고 말하던 것이. 도로시에 
     대해서도 -- " 그는 고개를 들고 엘렌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겠지?"
       "그래요." 그녀는 재판관처럼 차갑고 무감각하게 말했다.
       "이것은 그녀의 언니에게 하기엔 좀 곤란한 말인데."
       "계속해 봐요."
       "그녀는 아주 멋진 여자였어." 파웰은 여전히 엘렌을 보면서 
     말했다. "그것은 단지 그녀가......사랑에 굶주렸다는 말이야. 
     섹스가 아니라 사랑에." 그의 눈길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녀는 
     집과 어머니 -- 당신 어머니, 그리고 당신과 함께 학교에 다니고 
     싶다고......그런 이야기를 했지."
       엘렌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 그녀는 그것은 단지 자기의 
     뒷자리에 누가 앉는 바람에 생기는 흔들림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얼마 동안 그렇게 진행되었지." 파웰은 이제 고백하는 
     만족감에 부끄러움이 녹아 없어졌는지 좀더 빠른 말투로 계속해 
     나갔다. "그녀는 정말 사랑에 빠져서 줄곧 내 팔에 매달려서는 
     나를 쳐다보며 미소지었어. 언젠가 내가 마름모 무늬의 양말을 
     좋아한다고 했더니, 그녀는 그것을 세 켤레나 떠주었어." 파웰은 
     조심스럽게 테이블 위를 쓸었다. "나도 그녀를 사랑했지. 하지만 
     그 사랑은 다른 거였어. 그것은......동정에서 나온 사랑이었어. 
     난 그녀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지. 그녀는 내게 너무 잘 
     해주었으니까.
       12월 중순쯤에 그녀가 결혼 이야기를 꺼냈어. 아주 간접적으로 
     -- 크리스마스 휴가 바로 전이었는데, 난 여기 블루 리버에 머물 
     예정이었어. 난 가족이 없었고, 시카고에서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라야 사촌 두 명과 고등학교 친구 몇 명, 그리고 해군 
     친구들뿐이지. 그녀는 함께 뉴욕으로 가서 자기 가족을 만나자고 
     하더군. 난 안된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계속 그 애길 꺼냈어. 할 
     수 없이 나는 현실을 이야기했지.
       난 아직 정착할 준비가 안됐다고 말했더니, 그녀는 많은 
     남자들이 약혼만 해두었다가 심지어 스물두 살에 결혼하기도 
     한다더군. 그리고 만일 내가 걱정하는 게 장래문제라면 자기 
     아버지가 내게 자리를 하나 줄 수도 있다고 했어. 하지만 나는 
     그런 건 원치 않았어. 난 나름대로 계획이 있었거든. 언젠가 내 
     계획에 대해서 말하게 될 때가 있겠지. 그녀는 학교를 마치고 
     나면 우리 두 사람 모두 직업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했어. 
     하지만 난 그녀에게 여지껏 부유하게 생활해 왔기 때문에 
     그런식으로는 살 수 없을 거라고 말했지. 마침내 그녀는 자기가 
     날 사랑하는 것만큼 내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거라고 말했고, 
     나는 그 말이 맞는 것 같다고 했어. 그것에는 물론 몇 가지 다른 
     이유가 더 있었지만.
       끔찍한 소동이 벌어졌지. 그녀는 울부짖으면서 내가 후회하게 
     될 거라며, 보통 여자들이 흔히 말하는 그런 말을 해댔어. 잠시 
     뒤 그녀는 작전을 바꾸었는지 자기가 잘못했다고 말하더군 · 
     10· 때를 기다렸다가 우리의 길을 계속 걸어갈 수 있을 거라고 
     했어. 그러나 난 줄곧 그녀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어. 
     그래서 우리 두 사람 사이에 그런 틈이 생긴 것이어서 나는 방학 
     전에 그것을 완전히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했지. 나는 그녀에게 
     이제는 모두 끝났다고 말했어. 그녀는 그냥 울기만 하더군. 
     '당신은 후회할 거예요.' 라고 말하면서 -- 이렇게 해서 끝이 
     났지. 그리고 며칠 뒤에 그녀는 뉴욕으로 떠났고."
       엘렌이 말했다. "크리스마스 휴가 동안 그 애는 내내 우울해 
     있었어요. 툭 하면 화를 내고...... 트집이나 잡고......"
       파웰은 유리잔 바닥으로 테이블에 동그란 물자국을 만들었다. 
     "방학이 끝난 뒤에 -- " 그는 계속 말을 이었다. "참 불편했어. 
     우리는 여전히 두 과목 수업을 함께 들어야 했으니까. 나는 
     강의실 앞자리에 앉아서 감히 뒤를 돌아볼 엄두도 못 냈지. 
     우리는 캠퍼스 안 여기저기에서 서로 부딪쳤어. 그래서 난 
     스토다드에 진절머리가 나도록 있었으니까 뉴욕 대학으로 전학 
     신청서를 제출했어." 그는 엘렌의 축 늘어진 얼굴을 바라보았다. 
     "왜 그래?" 그가 말했다. "내 말을 못 믿겠다는 거야? 난 그것을 
     증명할 수도 있어. 난 뉴욕 대학에서 입학허가증을 받았고, 
     도로시가 내가 준 팔찌를 돌려줄 때 내게 보낸 편지도 가지고 
     있어."
       "아니에요." 엘렌은 멍청하게 말했다. "나는 당신을 믿어요. 
     그런데 바로 그게 문제예요."
       파웰은 당황한 표정으로 계속했다. "내가 떠나기 바로 전인 
     1월말쯤, 그녀는 다른 녀석과 어울리기 시작했지. 내가 봤어--"
       "다른 남자?" 엘렌은 앞쪽으로 몸을 구부렸다.
       "난 그들이 함께 있는 것을 두 번이나 보았어. 그래서 내 일이 
     결국 그녀에게 그렇게 큰 충격은 아니었구나 하고 생각했지. 그 
     때문에 나는 아주 홀가분한 마음으로 떠날 수 있었어. 심지어 
     약간 떳떳함마저도 느끼면서."
       "그가 누구였어요?" 엘렌이 물었다.
       "누구?"
       "다른 남자."
       "몰라. 나와 한 과목을 함께 들은 녀석이라는 것밖엔 -- 
     이것으로 그녀와의 이야기는 끝이야.
       그리고 난 5월 1일에 그녀의 자살기사를 읽었어. 단지 뉴욕 
     신문에 실린 단 한 줄의 기사를 통해서 -- 나는 타임스 광장의 
     시외 신문판매대로 뛰어가서 클래리온 레저 한 부를 손에 
     넣었어. 그리고는 그 주 내내 빠뜨리지 않고 클래리온 지를 
     사봤어 -- 그녀가 당신에게 보냈다는 유서에 대한 기사가 
     실리기를 기다리면서. 하지만 그녀에 대한 기사는 더 이상 
     실리지 않았어. 끝내 그녀가 왜 자살했는지 그 이유를 밝히지 
     않았단 말이야......
       당신은 그때 내 기분이 어땠는지 상상도 할 수 없을 거야. 난 
     그녀가 단지 나 때문에 자살했다고는 생각지 않았어. 
     그것은......일반적인 절망감 때문이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그것이 어떻든 주원인은 나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
       그 일이 있은 뒤 내 성적은 뚝 떨어졌지. 나는 너무 괴로웠어. 
     내가 그녀에게 한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라도 좋은 점수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시험지를 받아들면 식은땀이 흘렀고, 
     결국 점수는 아주 형편없었어. 나는 스스로에게 그건 학교를 
     옮겼기 때문이라고 위안했지. 뉴욕 대학에서 나는 스토다드에서 
     이수하지 않았던 여러 교양 과목을 들어야 했으니까. 게다가 
     거의 16학점이나 무효로 되었어. 그래서 난 9월에 스토다드에 
     돌아가서 정상적인 내 생활을 찾아야겠다고 결심했지."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리고 내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는 것을 
     내 자신에게 확인시키고도 싶었고.
       어쨌든 그것은 실수였어. 나는 그녀와 함께 갔던 곳들 -- 시청 
     건물 같은 것을 볼 때마다......" 그는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나는 계속 내 자신에게 그것은 그녀의 잘못이었으며, 만일 다른 
     여자였다면 그것을 충분히 극복해 낼 수 있었을 거라고 
     말했지......하지만 그것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어. 나는 내가 
     그 건물을 지날 때면 내 스스로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지. 오늘밤 환기통 안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그녀의 
     모습을 상상해 보기도 하고......"
       "알아요." 엘렌은 그를 재촉하면서 말했다. "나도 역시 그곳을 
     보고 싶었어요. 사실 그것은 자연스런 반응이지요."
       "아니 -- " 파웰이 말했다. "당신은 몰라. 책임감을 느낀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는 엘렌의 싸늘한 미소를 보고 말을 
     멈췄다. "왜 웃는 거지?"
       "아무것도 아니에요."
       "글세...... 바로 그거야. 지금 당신은 그녀가 임신했기 
     때문에 자살한 거라고 말했어......두 달째. 물론 그것은 
     유감스런 일이긴 하지만, 내게는 좀더 부담감을 덜어주는 
     이야기야. 나는 만일 내가 그녀를 버리지 않았다면, 그녀는 아직 
     죽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내가 일이 그렇게 
     되어가리라고 어떻게 예상할 수 있었겠어? 내 말은 책임감에도 
     한계가 있다는 거야. 만일 계속 그런 식으로 추궁해 올라간다면 
     누구라도 비난받지 않을 사람이 없단 말야." 그는 남아 있는 
     술을 들이켰다. "당신이 경찰로 가는 것을 단념해서 일단은 
     안심이야." 그가 말했다. "그런데 어디에서 내가 그녀를 
     죽였다고 당신이 생각하게 됐는지 모르겠어."
       "그 애는 살해된 거예요." 엘렌이 말했다. 그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피아노 소리가 멈추고 정적이 감돌았다. 
     그녀는 뒷자리에 있는 사람의 옷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몸을 앞으로 숙이면서 파웰에게 모호하게 쓰여진 편지, 
     출생증명서, 헌것과 새것, 빌려온 것과 푸른 것 등에 대해서 죽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는 조용하게 그녀의 말을 다 들었다. 그리고 나서, 
     "오......그건 우연의 일치일 리가 없어." 하고 그는 그녀가 
     자살을 부인하는 것처럼 진지하게 말했다.
       "당신이 그 애와 함께 있는 걸 보았다던 그 남자 -- " 엘렌이 
     말했다. "정말 그가 누군지 모르겠어요?"
       "난 그와 그 학기 수업 중 한 과목을 같이 들었던 것 같아. 
     하지만 그들이 함께 있는 것을 두 번이나 보았을 때는 시험이 
     시작되었던 1월말이어서, 그 이후로는 수업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확실히 알 수가 없었어. 그리고 그 다음에 바로 
     나는 뉴욕으로 떠났고."
       "그를 다시 본 적은 없어요?"
       "모르겠어." 파웰이 말했다. "확실치 않아. 스토다드 캠퍼스가 
     워낙 넓은 곳이라서."
       "그러면 그의 이름을 알 수 없다는 건가요?"
       "지금은 알 수 없어." 파웰이 말했다. "그러나 한 시간 안에 
     그의 이름을 알아낼 수는 있어." 그가 미소를 지었다. "난 그의 
     주소를 가지고 있거든."


        제 9 장 

       "그들이 함께 있는 것을 내가 두 번 보았다고 했지?" 파웰이 
     말했다. "그러니까, 두 번째는 어느 날 오후에 캠퍼스 건너편에 
     있는 간이음식점에서였어. 거기에서 도로시를 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지. 그곳은 사람들이 드문 곳이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그 음식점을 이용했던 거야. 난 자리에 앉고 나서야 그들을 
     알아보았어. 하지만 일어나서 나가고 싶지는 않았어. 왜냐하면 
     그녀가 이미 거울 속으로 날 보았으니까. 나는 구석 자리 끝에 
     앉아 있었으며, 다음에 여자애들 두 명, 그 다음에 도로시, 
     그리고 그 녀석. 그들은 우유를 마시고 있었지.
       그녀는 날 보는 순간 그의 팔을 어루만지면서 말하기 
     시작했어. 내게 새로운 사람이 생겼다는 것을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이 -- 나는 그녀의 그런 행동이 불쾌했고, 또 다소 당황하게 
     되었지.
       잠시 뒤 그들은 나갈 준비를 하더군. 그녀는 우리 사이에 앉아 
     있는 여자애들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 녀석 쪽으로 돌아서서 
     필요 이상의 큰소리로 말했어. '자, 당신 집에 가서 함께 
     공부해요.' 나에게 얼마나 자기들이 친한가를 나타내 보이려고 
     한 거겠지.
       그들이 나가자마자 여자애들 중 하나가 다른 애에게 그가 참 
     잘생겼다고 말하더군. 그 여자는 그 말이 맞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어. '그는 작년에도 그런 애들하고 어울려 다녔었잖아. 그는 
     돈이 있는 여자에게만 관심이 있는 것 같아.' 하고 말이야.
       나는 도로시가 손쉬운 목표가 되었다면 그것은 나에 대한 반발 
     때문이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난 그녀가 그런 돈을 
     노리는 녀석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지. 나는 간이음식점을 나와서 그들 뒤를 따라갔어.
       그들은 캠퍼스의 북쪽으로 몇 블럭 떨어진 집으로 가더군. 
     그는 벨을 두 번 누르고 나서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어 문을 
     열고 그녀와 함께 안으로 들어가더구먼. 나는 길 옆으로 
     걸어가서 그 집 주소를 노트에 적어놓았지. 나중에 다른 사람이 
     있을 때찾아가서 그의 이름을 알아내야겠다는 생각으로 -- 나는 
     그에 대해서 학교 주변의 여자애들에게 물어볼까 하는 생각도 
     해봤어.
       하지만 그런 짓은 하지 않기로 했지. 캠퍼스로 돌아오면서 
     나는 그 일에 대해서 죽 생각해 봤어. 다만 신 포도 (여우가 
     아무리 애써도 따먹을 수 없는 포도를 가리키며, '저 포도는 
     시어서 먹을 수 없을 거야' 하고 말했다는 속담에서 유래된 말) 
     같은 나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여자애들에게 그 녀석에 대해 몇 
     마디 물어본다고 해서 내가 제대로 알아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 아무튼 그는 내가 그녀에게 한 것보다 더 
     가혹하게 도로시를 다루지는 않을 테니까. 그리고 '반발'이라는 
     말 -- 어떻게 내가 그들이 서로 사랑하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어?"
       "지금도 그 주소를 가지고 있어요?" 엘렌은 걱정스럽게 
     물었다.
       "가지고 있을 거야. 나는 오래 된 수첩들을 모두 가방 속에 
     보관해 두니까. 당신이 필요하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그것을 볼 
     수 있어."
       "좋아요 -- " 그녀는 곧 동의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집을 
     찾아가서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기만 하면 되겠군요."
       "그가 바로 그 남자가 아닐 수도 있지." 파웰은 지갑을 꺼내며 
     말했다.
       "그 남자가 틀림없어요. 그보다 더 나중에 그 애가 함께 다닌 
     남자가 있을 순 없으니까요." 엘렌은 일어섰다. "그곳으로 가기 
     전에 전화할 데가 있어요."
       "당신의 보조자에게? 5분 안에 나타나지 않으면 경찰을 부를 
     준비를 하고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다던 사람?"
       "그래요." 그녀는 웃으면서 인정했다. "아래층에서 기다리지는 
     않았지만, 정말 그런 사람이 있어요."
       그녀는 조명이 흐릿한 방의 뒤쪽으로 갔다. 거기에는 벽에 
     맞춰 검은색으로 칠해진 전화 박스가 마치 관처럼 서 있었다. 
     그녀는 5_1000을 돌렸다.
       "안녕하세요, KBRI입니다." 여자 목소리가 나왔다.
       "안녕하세요, 고든 갠트 좀 바꿔주세요."
       "미안합니다만, 갠트 씨는 지금 방송중인데요. 10시에 다시 
     전화하시면 그가 나가기 전에 통화하실 수 있을 거예요."
       "방송 레코드가 나가고 있는 동안 통화할 수 없을까요?"
       "미안합니다. 방송중인 스튜디오에는 전화가 연결될 수 없을 
     거예요."
       "그럼, 메모를 해주시겠어요?"
       그 여자는 기꺼이 메모를 하겠다고 말했다. 엘렌은 그녀에게 
     킹쉽 양이라고 철자를 말해 주고는 파웰 (이것의 철자도 
     불러주었다)이 아닌 것 같아서 킹쉽 양이 파웰의 집으로 가서 
     10시까지 있을 예정이니, 갠트가 그 시간에 그곳으로 전화해 
     달라고 말했다.
       "전화번호는요?"
       "잠깐 -- " 엘렌은 무릎에서 지갑을 열며 말했다. "전화번호는 
     모르지만 주소는 알고 있어요." -- 지갑을 떨어뜨리지 않고 
     종이쪽지를 펴려고 애쓰면서 -- "웨스트 35번가 52번지."
       그 여자는 또박또박 메모를 다시 읽었다. "맞아요." 엘렌이 
     말했다. "틀림없이 그에게 전해 주시겠지요?"
       "물론이죠." 그녀가 쌀쌀맞게 말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엘렌이 자리로 돌아오자, 파웰은 옆에 서 있는 웨이터가 들고 
     있는 작은 은쟁반 위에 동전을 몇 개 올려놓았다. 순간 웨이터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으며, 우물거리며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가버렸다. "다 됐어요." 엘렌이 말했다. 그녀는 자기가 앉았던 
     의자에 걸쳐 있는 코트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런데 그 남자는 
     어떻게 생겼어요? 여자애들이 아주 잘생겼다고 말했다는 건 
     말고."
       "금발에, 키가 크고......" 파웰은 지갑을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또 금발이군." 엘렌이 한숨을 쉬었다.
       "도로시는 우리 같은 북유럽 타입의 사람을 좋아했지."
       엘렌은 코트를 입으며 미소지었다. "우리 아버지가 금발이에요 
     -- 비록 지금은 머리카락이 죄다 없어졌지만. 그리고 우리 세 
     자매도 모두 -- " 엘렌이 코트에 팔을 집어넣다가 그녀의 빈 
     소맷자락이 간막이 위를 살짝 스쳤다. "미안해요." 그녀는 어깨 
     너머로 뒤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그러나 그 자리는 비어 있었다. 
     그 테이블 위에는 칵테일 잔과 1달러짜리 지폐, 그리고 종이 
     내프킨이 정교하게 레이스 그물처럼 찢겨져 있었다.
       파웰은 그녀가 소매를 끼는 것을 도와주었다. "됐어?" 그가 
     코트를 입으면서 물어보았다.
       "됐어요." 그녀가 말했다.

       택시가 파웰의 집 앞에 선 것은 9시 50분이었다. 웨스트 
     35번가는 조용하고 가로등이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 가로등 
     빛은 얽혀 있는 나뭇가지 사이를 뚫고 일직선으로 뻗어 있었다. 
     길 양쪽에서 마주보고 있는 노란 창문의 집들이 마치 깃발을 
     나부끼며 무인지대를 가로질러 걸어가는 겁먹은 군인들처럼 
     보였다.
       택시가 떠나가는 엔진 소리가 사라지자, 엘렌과 파웰은 어둡고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는 현관 계단을 올라갔다. 열쇠 구멍에서 
     몇 번 열쇠를 돌리고 나서 파웰은 문을 밀어서 열었다. 그가 
     먼저 한쪽으로 발을 옮기고 엘렌이 그를 따라 들어가자, 그는 한 
     손으로 문을 밀어 닫으면서 다른 손으로 전등 스위치를 켰다.
       그들은 단풍나무 가구로 가득찬 안락해 보이는 거실로 
     들어갔다. "여기에서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하고 파웰이 
     말하고는 방 왼쪽에 있는 계단 쪽으로 갔다. "모든 게 지저분한 
     2층에 있어. 주인 아주머니는 병원에 있고 찾아올 친구도 없어." 
     그는 첫번째 층계에서 멈춰섰다. "아마 그 책을 찾는 데 몇 분 
     걸릴 거야. 저기 뒤쪽 부엌에 인스턴트 커피가 약간 있는데, 
     마시겠어?"
       "좋아요." 엘렌은 코트를 훌떡 벗으며 말했다.
       파웰은 층계를 올라가 난간 기둥에서 돌았다. 그의 방 문은 
     계단의 맞은편에 있었다. 그는 들어가서 불을 켜고 코트를 
     벗었다. 오른쪽 창문 쪽으로 붙여놓은 침대에는 파자마와 
     벗어던진 옷이 널려 있었다. 그는 코트를 아무데나 던져놓고 
     침대 밑에서 가방을 잡아당기려고 했다. 그러다가 급히 손을 
     빼며 몸을 똑바로 세우고 돌아서서 벽장 문과 안락의자 사이에 
     끼어 있는 책상으로 걸어갔다. 그는 맨 윗서랍을 열고는 종이와 
     작은 상자, 넥타이, 망가진 라이터 등을 뒤적였다. 그가 찾는 
     종이는 맨 아래에 있었다. 과장된 몸짓으로 그것을 잡아당긴 
     파웰은 홀에 나가서 계단 기둥 쪽으로 몸을 내밀었다. "엘렌!" 
     그가 소리쳤다.
       부엌에서 엘렌은 물주전자 밑에서 흔들리는 가스불을 조절하고 
     있었다. "왜요?" 그녀가 대답했다. 그녀는 서둘러 식당을 나와 
     거실로 들어갔다. "벌써 찾았어요?" 그녀는 층계 쪽을 
     올려다보며 물어보았다.
       파웰의 손과 어깨가 층계 안으로 불쑥 나왔다. "아니, 아직 -- 
     " 그는 말했다. "하지만 당신이 이것을 보고 싶어할 것 같아서." 
     그는 빳빳한 종이 한 장을 옆으로 미끄러져 내려가게 했다. 
     "당신이 아직도 의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 "
       그것은 엘렌의 앞쪽 층계에 내려앉았다. 그녀는 그 종이를 
     집어들었다. 그것은 겉에 '학생사본'이라는 스탬프가 찍힌 뉴욕 
     대학의 성적증명서를 복사한 것이었다. "만일 내가 조금이라도 
     의심했다면 -- " 그녀가 말했다. "여기에 오지 않았을 거예요. 
     그렇잖아요?"
       "그건 그렇지." 파웰이 말했다. "그래." 그리고 그는 층계에서 
     사라졌다.
       엘렌은 그 성적증명서를 다시 보았다. 그의 점수가 정말 
     형편없다는 것을 눈여겨보았다. 그 성적표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그녀는 식당을 지나 부엌으로 돌아왔다. 부엌은 구식 
     설비에, 스토브 뒤쪽과 모퉁이가 갈색으로 변한 크림색의 벽으로 
     둘러싸인 우중충한 곳이었다. 그러나 뒤쪽에서 상쾌한 
     산들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엘렌은 찬장에서 찻잔과 접시, 그리고 네스카페 깡통을 찾아 
     찻잔에 커피 가루를 넣고 저으면서, 스토브 옆쪽의 선반 위에 
     플라스틱 케이스가 깨진 라디오가 놓인 것을 보았다. 그녀는 
     라디오를 켜서 소리를 크게 했다가, KBRI가 나올 때까지 천천히 
     주파수를 돌렸다. 셀룰로이드 진동이 갠트의 목소리를 생소하고 
     가늘게 하는 바람에 그녀는 하마터면 그냥 지나갈 뻔했다. 
     "......정치성을 띤 문제들이 너무 많아서 -- " 그가 말하고 
     있었다. "자, 이제 음악을 들읍시다. 정확하게 한 곡을 더 들을 
     시간이 남았군요. 고(故) 버디 클라크가 부른 '이것이 사랑이 
     아니라면'입니다."
       파웰은 엘렌에게 성적표 사본을 떨어뜨리고 나서 한 바퀴 돌아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침대 앞에 엎드려 아래쪽으로 손을 
     죽 내밀었다 -- 손끝이 가방에 탁 부딪쳤다. 그 가방은 보통때 
     벽 쪽에 놓여 있던 곳에서 조금 앞으로 나와 있었다. 그는 손을 
     잡아당겨 손가락을 흔들고 입김을 불면서, 책상 밑에 그의 
     신발을 감춰두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서 가방을 잡아당겨 놓은 
     주인 아주머니의 며느리를 욕해 댔다.
       그는 다시 침대 밑에 엎드려 이번에는 좀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납덩이처럼 무거운 가방을 죽 밖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열쇠 뭉치를 꺼내어 알맞은 것을 찾은 뒤 두 개의 
     자물쇠에 넣고 비틀었다. 열쇠를 빼내고 그는 가방 뚜껑을 
     올렸다. 가방 안에는 교과서, 테니스 라켓, 캐너디언 클럽 병, 
     골프 신발......등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는 맨 밑에 깔린 
     노트들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위에 놓인 좀 커다란 물건들을 
     바닥에 꺼내놓았다.
       노트가 아홉 권이 있었다. 나선 모양으로 옆으로 철해진 
     초록색 노트들 -- 그는 그것을 한꺼번에 모아 팔에 안고 
     일어서서 한 권씩 살펴보기 시작했다. 앞뒤 겉장을 살펴보고 
     나서는 차례차례 노트를 가방 안으로 떨어뜨렸다.
       그것은 일곱 번째 노트 뒷장에 쓰여 있었다. 연필로 쓴 주소가 
     뭉개져서 희미해졌지만 읽을 수는 있었다. 그는 나머지 두 권을 
     가방 안에 떨어뜨리고 돌아서서 승리에 찬 목소리로 엘렌의 
     이름을 부르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는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의기양양한 
     표정이 마치 멈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잠시 그의 얼굴에 
     머물렀다. 그의 입은 점점 틈이 벌어지면서 서서히 미끄러져 
     나갔다. 마치 두꺼운 눈더미가 갈라지면서 비스듬한 지붕에서 
     미끄러져 내리듯이 --
       벽장문이 열리고 트렌치 코트를 입은 한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키가 크고 금발에, 장갑을 낀 오른손에는 커다란 총이 들려 
     있었다.


        제 10 장 

       그는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것은 식은땀이 아니라, 바람이 
     통하지 않는 벽장에서 축축한 트렌치 코트를 입고 서 있었기 
     때문에 흐르는 뜨거운 땀이었다. 그의 손도 역시 땀으로 
     축축했다. 갈색 가죽 장갑 안쪽엔 가는 털이 있었고, 바람이 
     통하지 않도록 고무 커프스가 달려 있었다. 그의 손에서 땀이 
     너무 많이 흘러나와 가는 털 안감이 흠뻑 젖어 뭉쳐져 있었다.
       그러나 그 자동권총 (저녁 내내 그의 주머니 안에서 무겁게 
     질질 끌고 다녀 이제는 마치 그의 몸의 일부분이 된 것처럼 
     가벼웠다)은 움직이지 않았다. 좌표에 찍힌 점처럼 공간에서 
     피할 수 없는 분명한 총알의 궤도. 점 A -- 돌처럼 확고한 입, 
     점 B -- 아이오와 주에서 산 듯한 산뜻한 양복 깃 아래의 심장. 
     그는 너무 가벼워서 싸늘한 강철의 존재를 확인하는 듯 콜트 
     45구경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선분 AB의 사이를 한 발자국 
     줄이면서 벽장 입구에서 앞으로 한 걸음 나왔다.
       그는 드와이트 파웰의 얼굴이 천천히 무감각하게 녹아내리는 
     것을 즐기면서 생각했다. 이야기를 꺼내봐. 변명을 해보라고. 
     아마 할 수 없을 테지. 아니, 어쩌면 그는 기탄없이 모두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무슨 말이었지? 칵테일 라운지에서 
     '로고레아(logorrhea)' -- 좋은 말이지.
       "너는 '로고레아'가 무슨 뜻인지 모르지?" 그는 총을 쥐고 
     기세당당하게 서서 말했다.
       파웰은 그 총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네가 
     바로......도로시와 함께 있었던 -- " 그가 말했다.
       "그것은 네가 가진 것을 뜻하는 거야. 입에서 터져나오는 것 
     말이야. 잘도 지껄이더군. 칵테일 라운지에서는 내 귀가 
     떨어지는 줄 알았지." 그는 둥그렇게 커진 파웰의 눈을 보고 
     웃었다. "난 가엾은 도로시의 죽음에 책임이 있어." 그가 파웰의 
     흉내를 냈다. "동정, 진정한 동정." 그는 좀더 가까이 걸어왔다. 
     "그 노트, 이리내놔." 그는 왼손을 내밀면서 말했다. "그리고 
     서툰 짓 하려고 들지 마."
       아래층에선 노래 소리가 부드럽게 들려왔다.

       이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겨울은 여름......

       그는 파웰이 들고 있던 노트를 빼앗아 뒤로 한 걸음 
     물러나서는, 권총과 시선을 파웰에게 고정시킨 채 노트를 
     옆구리에 끼고 반쯤 세로로 구부려서 겉장을 찢었다. "네가 이걸 
     찾아내서 무척 유감스러워. 나는 네가 못 찾기를 바라면서 저 
     속에서 서 있었지." 그는 접힌 노트를 코트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네가 그녀를 죽였구나......" 파웰이 말했다.
       "목소리를 낮춰." 그가 위협하듯이 총을 움직였다. "저 처녀 
     탐정을 끼어들게 하고 싶진 않겠지, 응?" 드와이트 파웰은 그저 
     우두커니 서 있는 방법으로 그를 괴롭혔다. 하지만 그는 너무 
     어리석어서 그것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 넌 지금 
     사태를 깨닫지 못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것은 진짜 권총이고 
     장전되어 있는 거야."
       파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권총만 쳐다보고 
     있었다 -- 아니, 지금은 노려보지도 못했다 -- 다만, 약간 
     무관심한 눈빛으로 그것을 바라볼 뿐이었다. 마치 그 해 들어 
     처음 보는 무당벌레라도 되는 듯이.
       "이봐, 난 널 죽일 거야."
       파웰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넌 너를 아주 잘 분석하는 놈이야 -- 말해 봐, 지금 기분이 
     어때? 틀림없이 네 무릎이 떨리고 있을 거야, 그렇지? 식은땀이 
     몸 전체에 주르르 흘러내릴 텐데?"
       파웰이 말했다. "그녀는 결혼하기 위해서 그 건물에 간 
     것이라고 생각했어......"
       "그녀 일은 잊어버려! 네 자신에 대해서나 걱정하라고!" 왜 이 
     녀석은 떨지 않는 걸까? 지능이 좀 모자라는 녀석인가?
       "왜 그녀를 죽였지?" 파웰의 눈길이 마침내 총에서 떨어졌다. 
     "그녀와 결혼하고 싶지 않았다면 그냥 그녀 곁을 떠날 수도 
     있었을 텐데. 그게 그녀를 죽이는 것보다 훨씬 나았을 거야."
       "그 이야기는 그만둬! 그게 뭐 어떻다는 거야? 지금 내가 
     말로만 협박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런 거야?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군 -- "
       파웰은 앞으로 달려나왔다.
       그가 15 채 센티미터도 가기 전에 요란한 총소리가 
     울려퍼졌다. 선분 AB는 납덩어리에 의해 굳어졌고 끝이 났다.
       엘렌은 부엌에 서서 닫힌 창문 너머 밖을 내다보면서 고든 
     갠트 프로그램의 주제 음악이 차츰 사라지는 것을 들었다. 그때 
     갑자기 그녀는 창문이 닫힌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상쾌한 산들바람이 불어오는 걸까?
       방 뒤쪽 구석에 움푹 들어간 곳이 있었다. 그녀는 그쪽으로 
     가서 뒷문을 보았다. 손잡이 가까이에 유리창이 깨져서 유리 
     조각이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그녀는 드와이트가 그것을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가 알았더라면 모두 쓸었을 텐데 --
       그 순간 그녀는 총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에 집 전체가 크게 
     흔들렸고, 그 소리가 사라지고 나서는 2층에서 무엇이 
     넘어지는지 천장의 불빛이 흔들거렸다. 그 뒤 침묵이 흘렀다.
       라디오에서 말이 흘러나왔다."차임벨로 정확한 시계가 저녁 
     10시를 알려 드립니다." 그리고 차임벨이 한 번 울렸다.
       "드와이트?" 엘렌이 불렀다.
       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식당 안으로 들어가서 이름을 더 크게 불렀다. 
     "드와이트?"
       거실로 나온 그녀는 층계 쪽으로 서둘러 다가갔다. 위층에서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이번엔 메마른 목소리로 불안스럽게 그 
     이름을 다시 불러보았다. "드와이트?"
       잠시 침묵이 계속되었다. 마침내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아, 
     엘렌. 올라와."
       그녀는 쿵쿵 뛰는 가슴으로 서둘러 층계를 올라갔다. 
     "이쪽으로." 그 목소리는 오른쪽에서 났다. 그녀는 난간 기둥을 
     돌아서 불켜진 복도로 갔다.
       엘렌이 첫번째 본 것은 방 한가운데에 손발을 축 늘어뜨린 채 
     등을 대고 누워 있는 파웰의 모습이었다. 그의 윗도리는 
     가슴에서 멀리 젖혀져 있었다. 그의 하얀 셔츠의 가슴 위로 피가 
     꽃무늬 모양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문기둥을 잡았다. 그리고 눈을 뜨고는 파웰 
     옆에 총을 쥐고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눈이 커지고, 차마 입으로 말할 수 없는 의문들로 
     가득찬 얼굴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는 권총을 쏜 지점에서 장갑낀 손바닥 위로 총의 무게를 
     한번 어림해 보면서 권총을 옮겨두었다. "난 벽장에 있었어." 
     그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물어보지도 않은 말들을 
     늘어놓았다. "저 녀석이 -- 저 가방을 열고 이 권총을 꺼내잖아. 
     아마 엘렌을 죽이려고 했을 거야. 난 이 녀석에게 뛰어들어서 
     총을 쏘았지."
       "아니야......오, 하나님......" 그녀는 어지러운지 이마를 
     문질렀다. "하지만 어떻게......어떻게 당신이......?"
       그는 코트 주머니에 권총을 집어넣었다. "난 칵테일 라운지에 
     있었어." 그가 말했다. "바로 엘렌 뒷자리에. 나는 이 녀석이 
     자기 집으로 가자고 말하는 것을 들었지. 그래서 엘렌이 전화 
     박스에 간 사이에 자리를 떠났던 거야."
       "그가 내게 한 말은......?"
       "이 녀석이 엘렌에게 말하는 것을 들었어......아주 뻔뻔스런 
     거짓말쟁이더구먼."
       "오, 하나님! 난 그를 믿었는데......그를 믿었는데......"
       "그게 바로 엘렌의 문제점이야." 그는 너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엘렌은 모든 사람을 믿지."
       "오, 하나님......" 그녀는 몸을 떨었다.
       그는 파웰의 벌어진 다리 사이를 지나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난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어요......어떻게 거기에 있었지요, 라운지에 말이에요."
       "난 로비에서 엘렌을 기다리고 있었어. 엘렌이 이 녀석과 함께 
     외출할 때 엘렌을 놓쳤거든. 내가 너무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모든 걸 내 자신에게 책망했지. 그래서 그때부터 죽 기다린 
     거야. 뭐 달리 어떻게 할 수가 없었잖아?"
       "하지만 어떻게......어떻게......?"
       그는 마치 귀향한 군인처럼 그녀 앞에서 팔을 활짝 벌렸다. 
     "이것 봐, 여주인공은 위급할 때에 구해 준 구원자에게 질문을 
     퍼붓지 않는 거야. 엘렌이 나에게 그의 주소를 말해 준 것이 
     정말 다행이었어. 난 엘렌이 어리석은 여자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어떻게 내 입으로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어?"
       그녀는 그의 품속으로 뛰어 들어가서 안도와 공포의 눈물을 
     흘렸다. 그는 빳빳한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위로하듯이 그녀의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이젠 괜찮아, 엘렌."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모든 게 잘됐어."
       그녀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오, 버드." 그녀는 
     울먹였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버드를 보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제 11 장 

       아래층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받지 마." 엘렌이 내려가려고 하자 그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난 누구 전화인지 알고 
     있는데요."
       "아냐, 받지 마. 이것 봐 -- " 그는 그녀의 어깨를 꽉 잡았다. 
     "누군가 분명히 총소리를 들었을 거야. 몇 분 있다가 경찰이 
     여기로 올지도 몰라. 기자들도 -- " 그는 목소리를 가라앉혔다. 
     "이 일이 신문에 크게 실리는 것을 원치는 않겠지? 그렇게 되면 
     도로시에 대한 모든 것이 파헤쳐질 테고, 또한 엘렌의 
     사진도......"
       "하지만 그것을 막을 방도가 없잖아요......"
       "아냐, 있어. 아래층에 차가 있어. 엘렌을 호텔까지 데려다 
     주고 나서 나는 다시 여기로 돌아오겠어." 그는 불을 껐다. 
     "만일 그때까지도 경찰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내가 그들을 
     부르겠어. 그러면 엘렌은 여기에서 기자들에게 둘러싸이지 
     않아도 돼. 그리고 나는 경찰과 단둘이 있게 될 때까지는 입을 
     열지 않을 거야. 그러면 그들이 나중엔 엘렌에게도 질문을 
     하겠지만, 신문에서는 엘렌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없을 
     거야." 그는 복도 쪽으로 그녀를 끌고 갔다. "그때까지 엘렌은 
     아버지를 오시게 하는 거야. 그분은 엘렌이나 도로시에 관한 
     경찰의 활동을 막아줄 만큼 충분한 영향력을 갖고 계시니까. 
     그들은 파웰이 술이 취해서 나와 싸움을 하게 되었다거나 뭐라고 
     둘러댈 수도 있겠지."
       전화벨이 그쳤다.
       "내가 이곳을 빠져나가는 게 옳은 것 같진 않은데......" 
     층계를 내려가기 시작했을 때 그녀가 말했다.
       "왜 그래? 총을 쏜 사람은 나지 엘렌이 아니야. 다시 말해서, 
     엘렌이 여기에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 거짓말하는 게 아니라는 
     거야. 나중에 내 이야기를 뒷받침해 주기 위해서 엘렌의 도움이 
     필요하게 될 때가 있을 거야. 내가 원하는 것은 신문이 이 일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하자는 거야." 그들은 거실로 내려갔다. 그가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날 믿어 줘, 엘렌." 그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녀는 어깨에 힘을 빼고는 책임의식을 떨쳐버리려고 깊게 
     숨을 내쉬었다. "좋아요 -- " 그녀가 말했다. "그러나 날 태워다 
     줄 필요는 없어요. 택시를 잡을 수 있을 테니까요."
       "지금 이 시간에는 안될 거야 -- 전화를 걸지 않고서는. 
     그리고 전차는 10시에 끊어지는 걸로 알고 있어." 그는 그녀의 
     코트를 집어들고 그녀가 입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어디에서 차를 구했어요?" 그녀가 덤덤하게 물어보았다.
       "빌렸어." -- 그는 그녀에게 지갑을 집어주었다 -- 
     "친구에게서." 그는 전등불을 끄고 현관문을 열었다. "서둘러 -- 
     " 그가 말했다. "시간이 넉넉하지 않으니까."
       그가 차를 세워둔 길 건너 쪽으로 15 미터쯤 보도를 내려갔다. 
     그것은 2~3년 된 검은색 뷔크 세단이었다. 그는 엘렌에게 문을 
     열어준 뒤, 반대편으로 가서 차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리고 점화 열쇠를 만지작거렸다. 엘렌은 무릎 위로 손을 
     포개놓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기분은 괜찮아?" 그가 물었다.
       "예 -- " 그녀는 가늘고 피곤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단지......그가 날 죽이려고 했었다는 게......"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도로시에 대해서는 내가 옳았어요. 나는 그 
     애가 자살한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아냈어요." 그녀는 원망하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당신은 이번 여행을 못하게 하려고 
     했지요......"
       그는 시동을 걸었다. "그래 -- " 그가 말했다. "엘렌이 
     옳았어."
       그녀는 잠시 조용히 있었다. "어쨌든, 이 사건 때문에 한 가닥 
     밝은 빛이 생겼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게 뭔데?" 그가 기어를 바꾸자 차가 앞으로 미끄러져 
     나아갔다.
       "당신이 내 생명을 구해 줬다는 거 말이에요." 그녀가 말했다. 
     "당신은 정말 내 생명을 구해 줬어요. 그것은 우리 아버지가 
     어떻게 당신을 반대한다고 해도 물리칠 수 있는 좋은 무기예요. 
     당신이 아버지를 만나 우리 문제를 말할 때 말이에요."
       그들이 잠시 뒤 워싱턴 가를 내려오자, 그녀는 그에게 좀더 
     가까이 다가가 운전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그의 팔을 
     잡았다. 그녀는 엉덩이에 딱딱한 것이 눌리는 것을 느꼈고, 
     그것이 그의 주머니에 들어 있는 권총이란 것을 깨달았으나 
     떨어지고 싶진 않았다.
       "엘렌 -- " 그가 말했다. "엘렌도 알겠지만, 이번 일은 
     번거롭게 될 거야."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나는 살인죄로 체포될 거야."
       "하지만 당신은 의도적으로 그를 죽인 것이 아니었잖아요. 
     당신은 그에게서 권총을 빼앗으려고 했을 뿐이라고요."
       "알아. 하지만 경찰은 어떤 구실을 둘러대서라도 나를 체포할 
     거라고......" 그는 실망한 얼굴로 옆에 앉아 있는 엘렌을 흘끗 
     훔쳐보고는 앞에 있는 신호등으로 눈을 돌렸다. 
     "엘렌......호텔에 도착하면 얼른 엘렌 물건을 챙겨 가지고 
     호텔을 나와. 우린 두 시간 안에 컬드웰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버드!" 그녀는 나무라는 듯한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그렇게 해서는 안돼요."
       "왜 안돼? 그 녀석은 엘렌 동생을 죽였잖아? 그 녀석은 응당 
     자기가 받아야 할 것을 받은 거야. 왜 우리가 그 일에 
     말려들어야 하지--?"
       "그렇게 할 순 없어요." 그녀가 대들었다. "그런 일 -- 그렇게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해서는 안돼요. 경찰이 어떻게든 
     당신이......그를 죽였다는 것을 알아낼 거라고 생각해 봐요. 
     그렇다면 경찰은 진실도 믿으려고 하지 않을 거예요. 만일 
     당신이 도망간다면!"
       "경찰은 나를 찾아낼 수 없을 거야." 그가 말했다. "난 장갑을 
     끼고 있었어. 지문이 남아 있을 리가 없다고. 또, 아무도 내가 
     그곳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지 못했어 -- 엘렌과 그 녀석을 
     빼놓고는."
       "그러나 경찰이 당신을 찾아낸다고 가정해 봐요! 아니면 그 
     일로 다른 사람이 벌을 받게 된다고 생각해 봐요! 그럼, 당신 
     기분이 어떻겠어요?" 엘렌은 말을 멈추었다. "내가 호텔에 
     도착하는 대로 아버지에게 전화하겠어요. 아버지는 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으니까 변호사나 그 밖의 문제를 돌봐 주실 거예요. 
     그렇게 된다는 것은 정말 끔찍한 일이에요. 하지만 도망가는 
     것은......"
       "그래, 내가 잘못 생각했어." 그가 말했다. "나도 엘렌이 
     동의할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지."
       "그래요, 버드, 당신도 정말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을 거예요, 
     그렇죠?"
       "그냥 마지막 수단으로 해본 소리야." 그가 말했다. 그는 
     갑자기 차를 왼쪽으로 돌려 밝은 워싱턴 가에서 어두컴컴한 
     북쪽길로 접어들었다.
       "워싱턴 가엔 들르지 않을 거예요?" 엘렌이 물었다.
       "이쪽 길이 더 빨라. 신호등을 거치지 않아도 되고 -- "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 " 그녀는 계기반 재떨이에 
     담뱃재를 톡톡 털면서 말했다. "그가 왜 옥상에서 내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느냐는 거예요." 그녀는 왼쪽 다리를 몸 아래로 
     죽 뻗으며 버드 쪽을 향해서 자리를 고쳐앉았다. 흥분을 
     가라앉히는 담배의 온기가 차 안에 퍼져갔다.
       "밤에 그곳에 간다는 것은 분명히 의심받을 만한 행동이야." 
     그가 말했다. "그 녀석은 엘리베이터 보이나 누가 자기 얼굴을 
     기억할까 봐 두려워했겠지."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하지만 그것이 나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서 죽이는 것보단 덜 위험하지 않았을까요?"
       "그 녀석은 자기 집에서 엘렌을 죽이려고 하지는 않았을 거야. 
     아마 강제로 엘렌을 차에 태우고 멀리 교외로 빠져나가려고 
     했겠지."
       "그는 차를 가지고 있지 않았어요."
       "훔칠 수도 있어. 차를 훔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가로등 빛이 하얗게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자, 
     다시 계기반의 흐릿한 초록빛만이 반듯하게 잘려진 형체를 
     비추는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어. 나는 뉴욕에 있었지. 나는 책임감을 
     느꼈어!' 하고 그가 말한 것도 거짓말이겠군요!" 엘렌은 머리를 
     세게 흔들며 담배를 재떨이에 비볐다. "오, 하나님!" 그녀는 
     숨을 헐떡였다.
       그는 홱 그녀를 돌아다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녀의 목소리는 다시 고통스러워하는 투로 바뀌었다. "그는 
     내게 성적증명서를 보여줬어요......뉴욕 대학의 성적표. 그는 
     틀림없이 뉴욕에 있었어요......"
       "그건 아마 속임수였을 거야. 그 녀석은 틀림없이 뉴욕 대학의 
     학적과에 아는 사람이 있었을 거야.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 정도의 일은 얼마든지 속일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가정해 봐요......그가 말한 것이 모두 
     사실이라고 말이에요!"
       "그 녀석은 권총을 들고 엘렌을 찾으려고 했어. 그것만으로도 
     녀석이 거짓말을 했다는 충분한 증거가 되잖아?"
       "확신할 수 있어요, 버드? 당신은 그가 그렇지 않다는 걸 
     확신할 수 있어요? 어쩌면 다른 것을 찾기 위해서 총을 
     꺼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가 말하던 노트는?"
       "그 녀석은 권총을 들고 문 쪽으로 가고 있었어."
       "오, 하나님! 하지만 만일 그가 정말 도로시를 죽이지 
     않았다면......" 그녀는 잠시 조용히 있었다. "경찰이 조사를 할 
     거예요." 그녀가 고집스럽게 말했다. "경찰은 그가 바로 여기 
     블루 리버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할 거예요! 그리고 그가 
     도로시를 죽였다는 것도요!"
       "맞아." 그가 말했다.
       "하지만 비록 그가 죽이지 않았다고 해도, 버드, 비록 그것이 
     -- 지독한 실수였다고 해도 경찰은 당신에게 어떤 벌을 주지는 
     않을 거예요. 당신은 알 수 없었잖아요. 당신은 단지 총을 가진 
     남자를 보았던 거예요. 경찰은 절대로 당신에게 벌을 줄 수 
     없어요."
       "그렇겠지." 그가 말했다.
       그녀는 거북하게 몸을 틀면서 몸 아래로 꼰 다리를 풀었다. 
     그녀는 계기반 불빛으로 자기의 시계를 비춰 보았다. "10시 
     25분이에요. 벌써 컬드웰에 도착해 있어야 할 시간이잖아요?"
       그는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가로등 불빛도 건물도 보이지 
     않았다. 별만 반짝이는 높고 캄캄한 하늘 아래는 칠흑 같은 
     벌판뿐이었다. "버드, 이건 시내로 들어가는 길이 아니에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차 앞으로 고속도로의 하얀 선이 헤드라이트가 닿는 너머로 
     끝없이 좁아지면서 이어졌다.
       "버드, 길을 잘못 들어섰어요!"


        제 12 장 

       "내게 원하는 게 뭔가?" 엘든 체서 경찰서장이 부드럽게 
     물었다. 그는 뒤로 죽 기대어, 친스 천으로 싸인 소파 옆 받침 
     밑에 긴 다리를 쓰러지지 않게 괴고서, 손을 붉은 플란넬 셔츠 
     앞에 느슨히 올려놓고는 커다란 갈색 눈으로 멍하니 천정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차를 추적하십시오. 내가 원하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고든 갠트는 거실 한가운데에서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아아!" 체서가 말했다. "아하, 검은색 차에 대해서는 옆집에 
     사는 남자가 아는 것이 전부네. 그는 총소리를 듣고 나서, 곧 
     이어 한 남자와 여자가 블럭을 내려가 검은 차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어. 남자와 여자가 탄 검은 차 -- 자네도 얼마나 많은 
     검은 차가 남자와 여자를 싣고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는지 
     알잖나. 우리는 자네가 이곳에 뛰어 들어오기 전까지는 그 
     여자의 인상조차 몰랐네. 그때까지 그들은 시더 래피즈까지 반도 
     못 갔을 거야. 아니면 여기서 두 블럭 떨어진 어떤 차고에 차를 
     세워두었겠지. 그게 우리가 아는 전부라네."
       갠트는 위협적으로 다가갔다.
       "그래서 어떻게 하시겠다는 겁니까?"
       "기다릴 수밖에 없지. 고속도로 경관들에게 지시를 해놓았네. 
     아마 여기에는 현상금이 붙을 거야. 좀 앉는 게 좋겠군."
       "물론 앉아야죠." 갠트는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는 
     살해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체서는 침묵을 지켰다. "작년엔 
     그녀의 동생이 -- 올해는 그녀가."
       "다시 말해 줘야겠군." 체서가 말했다. 그는 지친 듯이 갈색 
     눈을 감았다. "그녀 동생은 자살했네." 그는 천천히 한마디씩 
     또박또박 말했다. "바로 내 눈으로그 유서를 확인했어. 그녀가 
     직접 손으로 쓴 -- " 갠트가 부스럭거렸다. "그런데 누가 그녀를 
     죽였다고?" 체서가 다그쳤다. "자네는 파웰이 그녀를 죽였다고 
     말하고 있네만, 지금 상황으로는 그 사람일 수가 없어. 왜냐하면 
     그녀가 자네에게 파웰이 아닌 것 같다는 메모를 남겼으며, 
     자네는 여기에서 그가 작년 봄에 이곳에 있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는 뉴욕 대학의 서류를 보았네. 그러니 단 한 명의 
     혐의자가 그녀를 죽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된 거겠나? 그것은 
     아무도 그녀를 죽이지 않았다는 말이야."
       갠트는 화가 나서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되풀이했다. "그녀는 
     메모에서 파웰이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범인은 분명히 그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파웰이 -- "
       "오늘밤까지 범인은 한 명도 없었어." 체서는 딱 잘라서 
     말했다. "그녀의 동생은 자살한 거야." 그는 눈을 깜박이더니 
     다시 천정을 올려다보았다.
       갠트는 그를 쳐다보고는 다시 비통한 기분에 잠겼다.
       잠시 뒤 체서가 입을 열었다. "모든 걸 다시 생각해야 할 것 
     같군."
       "예?" 갠트가 말했다.
       "하, 자네는 내가 여기서 게으르게 누워만 있었다고 생각했나?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방법이지 -- 다리를 머리보다 높게 하여 
     피가 머리까지 올라가게 하는 것 말이야." 그는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 녀석은 10시 15분쯤에 침입했네 -- 옆집 남자가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를 들었지만, 그런 일이라고는 미처 생각도 
     못했었다는군. 다른 방에는 들어간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파웰이 처음 만난 사람은 분명히 그 녀석이었을 거네. 몇 분 
     뒤에 파웰과 그 여자가 들어왔지. 그 녀석은 2층에서 꼼짝하지 
     않고 있었네. 파웰의 벽장 안에 숨어 있었어 -- 옷들이 모두 
     양쪽으로 밀려나 있었거든. 파웰과 그 여자는 부엌으로 
     들어갔어. 그녀는 커피를 끓이기 시작했고 라디오를 켰네. 
     파웰은 코트를 걸기 위해서였거나, 아니면 어떤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2층으로 올라갔어. 그런데 그 녀석이 나타난 거야. 
     파웰은 그때 가방을 열려고 하고 있었지 -- 우리가 그 위에서 
     얼룩진 장갑을 발견했으니까. 그 녀석은 파웰이 가방을 열고 
     안을 뒤져보도록 내버려두었네. 물건들이 온통 바닥에 널려 
     있었거든. 파웰은 돈 같은 것이라도 찾아낸 모양이야. 아무튼 
     파웰은 그 녀석에게 뛰어들었을테지. 그러자 그 녀석이 파웰을 
     쏘았네. 당황해서 그랬겠지. 그 녀석은 아마 쏘려고도 하지 
     않았을 거야 -- 그런 녀석들은 절대로 그러지 않으니까. 
     그치들은 단지 사람들을 위협하려고 총을 가지고 다니지. 그리고 
     항상 위를 향해 쏜다네. 45구경. 대부분이 군대에서 사용하는 
     권총 같은 것이지. 그런 종류는 수만 개가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니까.
       다음에 그 여자가 2층으로 올라왔겠지 -- 문틀에는 부엌의 
     컵과 다른 그릇에 있는 것과 똑같은 지문이 찍혀 있었네. 그 
     녀석은 당황해서 생각할 겨를도 없었어...... 그래서 강제로 
     그녀를 끌고서 달아난 거야."
       "그렇다면 그 녀석은 왜 여기에서 그녀를 죽이지 
     않았을까요?......파웰과 같은 방법으로?"
       "내게 물어보지 말게. 아마 용기가 없었겠지. 아니면 어떤 
     다른 생각이 있었던가. 권총을 가지고 있고, 또 예쁜 여자가 
     있을 때면 다른 생각을 갖게 마련이지."
       "고맙군요." 갠트가 말했다. "그 말은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해주는데요, 대단히 고맙습니다."
       체서는 한숨을 쉬었다. "앉게." 그가 말했다. "기다리는 
     것밖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까."
       갠트는 자리에 앉아서 손등으로 이마를 비비기 시작했다.
       "체서는 마침내 천장에서 얼굴을 돌렸다. 그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갠트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누군가? 자네 여자친구인가?" 
     그가 물었다.
       "아닙니다." 갠트가 말했다. 그는 엘렌의 호텔 방에서 읽었던 
     편지를 떠올렸다. "아녜요, 그녀는 윈스콘신에 남자친구가 
     있습니다."


        제 13 장 

       헤드라이트가 닿는 대로 질주하는 수목들을 뒤로 하면서, 차는 
     콘크리트가 깨진 틈을 타르로 메꾼 고속도로를 규칙적인 리듬을 
     내면서 달렸다. 속도계의 야광 바늘이 눈금 50을 기준으로 해서 
     양쪽으로 나뉘었다. 액셀러레이터를 밟은 발은 동상에라도 걸린 
     것처럼 꼼짝하지 않았다.
       그는 왼손으로 운전하면서, 가끔씩 최면에 걸린 듯한 
     고속도로의 단조로움을 없애기 위해서 약간씩 핸들을 좌우로 
     움직였다. 엘렌은 온몸을 꽁꽁 묶인 듯이 문에 움츠리고 기댄 
     채, 무릎 위에서 손수건을 비틀고 있는 손을 가끔씩 쳐다보았다. 
     그들 사이에는 장갑을 낀 그의 오른손이 총을 든 채 놓여 
     있었다. 그것은 뱀처럼 총부리를 그녀의 엉덩이에 대고 있었다.
       그녀는 울부짖었다 -- 길게 쥐어짜내는 듯한 동물의 
     신음소리로. 실제의 슬픔보다도 더 크게, 그리고 몸부림치면서. 
     그는 그녀에게 모든 것을 말했다 -- 어둠 속에서 초록빛이 
     감도는 그녀의 얼굴을 자주 쳐다보면서. 비통한 목소리로. 그의 
     목소리는 자주 머뭇거렸는데, 마치 휴가를 받아 고향에 온 
     군인이 마을 사람들에게 훈장을 받은 이야기를 하면서 어떻게 
     적의 배를 찔러댔는지 떠벌이기 전에 잠시 망설이듯이 말이다. 
     사람들이 어떻게 훈장을 받게 되었느냐고 성급하게 물어보는 
     탓에 더욱 당황해 하면서. 하지만 그는 말을 해나갔다. 한 번도 
     다른 사람의 배를 찔러보지 않은 온순한 마을 사람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나가듯이 약간은 짜증스럽지만 부드럽게 말을 했다. 
     그는 그 극약과 옥상에 대한 얘기, 그리고 도로시를 죽여야 했던 
     이유와 합법적인 과정으로 컬드웰로 옮겨가서 엘렌을 쫓아다닌 
     이유 등을 설명했다. 그는 도로시를 통해서 엘렌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알아냈으며, 어떻게 해야 그녀가 원하는 
     남자가 될 수 있는지도 알아냈다. 그가 그런 정보를 알고 그녀를 
     따라다닌다는 것은 가장 합리적이고도 필연적인 과정일 뿐만 
     아니라, 그의 불운한 과거에 대해서 아이러니컬하게도 가장 
     확실하게 보상받는 방법이었다고 -- (법의 헛점을 노려 남의 
     등뒤를 쳐서 만족을 얻는 과정이겠지만) -- 그는 이런 
     이야기들을 약을 올리며 구역질나게 늘어놓았다. 공포에 질려 
     손으로 입을 막은 엘렌에겐 모든 것이 은쟁반 위에 놓인 것처럼 
     분명해졌다. 그녀는 멀리 떨어져 있는 성공의 단단한 땅을 향해 
     어떻게 하면 위험을 무릅쓰고 몰래 조금씩 움직여서 실패의 깊은 
     구렁 너머 흔들리는 좁은 통로에 붙어 살아서 도망칠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엘렌은 그의 총부리에 엉덩이를 찔린 채 그의 이야기를 계속 
     들었다. 처음에는 단지 고통스럽다가 곧 마비가 되어, 마치 
     엉덩이 부분은 이미 죽은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죽음은 빠른 
     총알이 아니라, 접촉되어 있는 그 지점에서 천천히 발사되어 
     나오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울부짖었다. 
     그녀는 너무 아프고, 고통스럽고, 충격을 받아서 달리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울음소리는 길게 쥐어짜내는 듯한 동물의 
     신음소리 같았다. 실제의 슬픔보다도 더 크게, 그리고 
     몸부림치면서.
       그녀는 무릎 위에서 손수건을 비틀고 있는 자기 손을 가끔씩 
     쳐다보았다.
       "내가 오지 말라고 했지." 그는 투덜거리면서 말했다. "내가 
     컬드웰에 그냥 있으라고 했잖아." 그는 확실한 대답을 
     기다리듯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너는 내 말을 듣지 
     않았어! 너는 여탐정처럼 행동하고 말았지! 그리고 결국 
     여탐정은 이런 꼴을 당하고." 그는 고속도로 쪽으로 눈길을 
     옮겼다. "만일 내가 월요일부터 내내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알았더라면 -- " 그는 주먹을 쥐고, 엘렌이 전화했던 월요일 
     아침 그에게서 온세계가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던 순간을 기억해 
     냈다 -- '도로시는 자살하지 않았어요! 나는 블루 리버로 
     가야겠어요!' -- "정거장으로 뛰어나가 간신히 너를 붙잡아서 
     네가 떠나는 것을 막으려고 했지만, 너는 기차 안으로 발을 
     내디디며 -- '곧 편지를 쓸께요! 모든 것을 설명해 줄께요.' 
     하고 말했지 -- 나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미끄러져 가는 
     너를 지켜보았어. 땀이 흐르고 모든 것이 두려웠어. 나는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웠어."
       엘렌은 희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라고?"
       "경찰이 당신을 잡을 거예요......"
       잠시 침묵이 흐른 뒤에 그가 말했다. "얼마나 많은 범인이 
     잡히지 않는지 알기나 해? 50퍼센트 이상이야, 굉장한 숫자지. 
     아니, 사실은 훨씬 더 많을 거야." 다시 침묵이 흐르고 나서 
     그가 말했다. "어떻게 경찰이 나를 잡을까? 지문? -- 아무것도 
     없어. 증인? -- 아무도 없어. 동기? -- 그들이 아는 것은 하나도 
     없어. 경찰은 심지어 나는 생각해 내지도 못할 거야. 권총? -- 
     나는 컬드웰로 돌아가려면 미시시피 강을 지나야 해. 안녕, 
     권총. 이 차? -- 새벽 2시나 3시에 가져왔던 곳에서 두 블럭쯤 
     떨어진 곳에 가져다 놓을 거야. 경찰은 그 사건이 정신이 나간 
     고등학생 녀석들의 짓이라고 생각하겠지. 불량청소년들." 그는 
     미소를 지었다. "나는 어젯밤에도 일을 꾸몄었지. 나는 극장에서 
     엘렌과 파웰이 앉아 있는 뒤쪽 두 번째 줄에 앉아 있었고, 그 
     녀석이 엘렌에게 작별 키스할 때는 홀에서 서성거리고 있었어." 
     그는 엘렌의 반응을 보려고 그녀를 한번 쳐다보았으나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그의 시선이 길 쪽으로 돌아갔고, 다시 그의 
     얼굴이 찌푸러졌다. "너의 그 편지 -- 내가 그것을 받을 때까지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렸는지 알아! 처음 그것을 읽기 시작했을 때 
     나는 안전하다고 생각했지. 엘렌은 도리가 가을 학기 
     영어수업에서 만난 사람을 찾고 있었어. 나는 1월에 그녀를 
     만났으며, 가을 학기 그 시간엔 첫 수업이 있었지. 그 뒤에 나는 
     엘렌이 실제로 찾고 있는 그 녀석이 누구인지 알아냈어 -- 낡은 
     마름모 무늬 양말을 신는 내 선배. 우리는 함께 수업을 들었고, 
     그는 내가 도리와 같이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었어. 나는 그가 내 
     이름을 알 거라고 생각했지. 그리고 네게 자기는 도로시의 
     죽음에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을 확신시킬 거라는 것도 
     알았어......만일 그가 네게 내 이름을 말해 준다면......"
       갑자기 그가 브레이크를 밟았다. 차가 삑 소리를 내면서 
     멈췄다. 그는 왼손을 뻗어 기어를 잡아당겼다. 그가 다시 
     액셀러레이터를 밟자 차는 천천히 뒤쪽으로 움직여 갔다. 그들의 
     오른쪽으로 주차장의 넓은 공간과 낮게 웅크리고 있는 시커먼 집 
     한 채의 모습이 시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뒤로 움직이는 차의 
     헤드라이트가 고속도로 가장자리에 서 있는 커다란 표지판을 
     비췄다. '릴리와 돈스'-- 스테이크 별식. 좀 작은 표지판이 
     커다란 표지판 기둥에 흔들흔들 매달려 있었다. '4월 15일 
     재개장'
       그는 먼저 후진을 하고, 오른쪽으로 핸들을 돌린 다음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그리고는 주차장을 가로질러서 엔진을 
     켜둔 채 낡은 건물 한쪽에 세워두었다. 그는 경적을 눌렀다. 
     커다란 소리가 밤의 정적을 뚫고 지나갔다. 그는 잠시 
     기다렸다가 다시 경적을 울렸다. 아무 반응이 없었다. 어느 
     창문도 올라가지 않았고 불도 켜지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집 
     같군." 그는 헤드라이트를 끄며 말했다.
       "제발......" 그녀가 말했다. "부탁이에요......"
       어둠 속에서 차가 앞으로 나아가 왼쪽으로 돌아서, 주차장의 
     아스팔트가 포장된 좀더 좁은 지역으로 이어진 집 뒤로 
     움직였다. 차는 커다랗게 모퉁이를 돌아 거의 아스팔트 끝을 
     벗어나 검은 하늘과 맞닿을 것 같은 진흙 벌판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왔던 방향으로 되돌리려고 차를 여러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는 브레이크를 밟고 엔진을 껐다.
       "부탁이에요......" 그녀가 말했다.
       그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나라고 이런 일을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알아? 내가 이런 걸 좋아한다고 생각하느냐고? 우리는 약혼을 
     하려고 했었어!" 그는 왼쪽 문을 열었다. "너는 좀더 영리했어야 
     했어......" 그는 웅크리고 있는 그녀 몸에 여전히 총을 겨눈 채 
     아스팔트 쪽으로 걸어갔다. "이리 와." 그가 말했다. "이쪽으로 
     나와."
       "제발......"
       "내가 어떻게 할 거라고 생각해, 엘렌? 너를 그냥 가게 할 순 
     없잖아, 응, 안 그래?" 그는 권총으로 찌르는 몸짓을 했다. 
     "이리 나와."
       그녀는 지갑을 집으며 자리에서 몸을 당겨 아스팔트 위로 발을 
     내디뎠다.
       그녀가 벌판에 등을 대고 설 때까지 권총은 반원을 그리며 
     그녀를 향했고, 그녀와 차 사이에 놓이게 되었다.
       "제발......" 그녀는 지갑을 들어올려서 막아보려고 했다. 
     "부탁이에요......"


        제 14 장 

       [블루 리버 클래리온 레저, 1951년 3월 15일 목요일]
       이중살인
       경찰이 수수께끼의 총잡이를 찾고 있다

       어젯밤 두 시간 동안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총잡이가 두 건의 
     잔인한 살인을 저질렀다. 희생자들은 뉴욕 시 출신의 스물한 살 
     된 엘렌 킹쉽과 시카고 출신의 스토다드 대학 3학년에 재학중인 
     스물세 살의 드와이트 파웰이다. 파웰은 저녁 10시에 웨스트 
     35번가 1520번지에 있는 엘리자베스 호니그 부인 집에서 
     살해되었다. 파웰은 그곳에 세를 들어 살고 있었다. 경찰은 9시 
     50분에 친구인 킹쉽 양과 집으로 들어온 파웰이 2층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가 거기서 그들보다 먼저 뒷문을 통해서 집안으로 숨어 
     들어온 무장 살인범과 마주쳤을 거라고 추정하고 있다.
       ......시체검시반은 킹쉽 양의 살해시간을 자정쯤이라고 
     추정했다. 그러나 그녀의 시체는 오늘 아침 7시 20분에 랜달리아 
     근처에 사는 열한 살 난 월러드 헤른이 벌판을 지나 식당으로 
     가다가 발견했다......경찰은 KBRI 아나운서이자 킹쉽 양의 
     친구인 고든 갠트에게서 그녀가 작년 4월 블루 리버 시청 건물 
     옥상에서 떨어져 자살한 도로시 킹쉽의 언니라는 것을 알아냈다.
       킹쉽 코퍼 주식회사 회장이며 피살자의 아버지인 레오 킹쉽 
     씨는 큰 딸인 메리온 킹쉽 양과 함께 오늘 오후 블루 리버에 
     도착할 예정이다.

       [클래리온 레저의 사설에서, 1951년 4월 19일 목요일]
       고든 갠트의 해고

       고든 갠트가 해고된 데에 대해 KBRI 경영자측에서는, "여러 
     차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는 경찰을 비난하고 공격하기 
     위해서 마이크(KBRI)를 사용했다." 라고 지적했다. 갠트는 지난 
     달에 있었던 킹쉽 -- 파웰 살인사건에 대해 개인적으로 신랄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경찰에 대한 그의 공적인 비난은, 
     경솔하다는 말을 듣지 않을 순 없지만, 사건이 전혀 진전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자면 타당성은 없다고 해도 이해할 
     만하다고는 생각할 수 있다.


        제 15 장 

       학년말이 되자 그는 메나세트의 집으로 돌아와서 우울한 
     기분으로 틀어박혀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의 우울한 기분을 
     풀어주려고 애썼으나, 그는 도리어 그것에 반발하기 시작했다. 
     두 모자는 서로에게 불꽃을 돋우어주며 활활 타는 석탄처럼 
     다투었다. 그는 집과 우울한 자신에게서 벗어나기 위해서 옛날에 
     일했던 신사용품 가게에서 다시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오전 
     9시에서 오후 5시 30분까지 반짝반짝 윤이 나는 구릿빛 테두리를 
     쳐다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진열장 카운터 뒤에서 있어야 했다.
       7월 어느 날 그는 벽장에서 작은 회색 금고를 꺼냈다. 그것을 
     책상 위에다 올려놓고 열고서, 도로시의 살인에 대한 기사를 
     오려낸 것을 꺼냈다. 그리고는 그것을 갈기갈기 찢어서 휴지통에 
     버렸다. 그는 엘렌과 파웰에 대한 기사도 똑같이 찢어버렸다. 
     그리고 나서 킹쉽 코퍼 팜플렛을 꺼냈다. 엘렌을 만나기 
     시작하면서 그는 두 번이나 그것을 보내달라고 부탁했었다. 
     팜플렛을 잡고 찢으려다가 그는 문득 후회스러운 미소를 
     떠올렸다. 도로시, 엘렌......
       그것은 마치 '믿음, 소망......'이라는 구절을 생각나게 하는 
     것 같았다. 이어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가슴속에서 튀어올랐다.
       도로시, 엘렌......메리온.
       그는 혼자 씩 웃고 나서 다시 팜플렛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찢어버릴 수가 없었다. 그는 천천히 
     그것을 책상에 내려놓고서는, 자기가 손으로 만든 구김살을 
     어루만졌다.
       그는 금고와 팜플렛을 책상 뒤쪽으로 밀어놓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종이에 메리온이란 글씨를 쓰고 세로로 줄을 
     그어 종이를 반으로 나눴다. 그는 한쪽에는 찬성, 다른쪽에는 
     반대라고 썼다.
       찬성 밑에는 늘어놓을 것이 매우 많았다. 도로시와 이야기하던 
     말들, 엘렌과 이야기하던 말들, 메리온에 대해서 슬쩍 지나가는 
     투로 한 말들이 온통 꽉 차 있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그녀의 생각, 그녀의 과거. 그는 비록 그녀를 만나 
     보지 못했지만, 한 권의 책을 읽은 것처럼 그녀에 대해 환하게 
     알 수 있었다. 외롭고 쓸쓸하게 혼자서 살고 있는 
     여자......그녀는 완벽한 그의 먹이였다.
       그의 감정은 찬성 쪽으로 기울어졌다. 또 한 번의 기회. 
     홈런을 쳐서 먼저 있었던 투 스트라이크를 말끔히 없애버리리라. 
     그리고 3이라는 행운의 숫자가 있다......세 번째의 
     행운......동화에 나오는 세 번째 시도, 세 가지 소원, 세 번째 
     구혼자......
       그는 반대 밑에 목록을 만들려고 했으나 한 가지도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그날 밤 그는 찬성과 반대 목록을 모두 찢어버리고, 메리온 
     킹쉽의 성격, 생각, 그녀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에 대한 
     목록을 만들었다. 그는 몇 가지 주석을 만들고, 그 다음주 내내 
     규칙적으로 그 목록에 새로운 사항을 덧붙였다. 시간이 날 
     때마다 도로시와 엘렌과 이야기했던 내용을 떠올렸다. 
     간이식당에서, 수업시간에, 산책하면서, 춤추면서 하던 
     이야기들을. 그리고 그의 기억의 연못 아래에 가라앉아 있는 
     낱말, 구절, 문장들을 위로 끌어올렸다. 때때로 그는 저녁 내내 
     등을 대고 누워서 방사선 측정기처럼 메리온에게 붙어, 좀더 
     넓게 무의식적인 부분까지 면밀히 조사하고 기억해 내려고 
     애썼다.
       목록이 점점 늘어나자 그의 기분도 풀리기 시작했다. 어느 
     때는 덧붙일 사항이 없는데도 금고에서 그 종이를 꺼내보곤 했다 
     -- 거기에 나타나 보이는 그 민첩함과 계획성, 그리고 
     가능성들에 대해서 감탄하면서. 그것은 도로시와 엘렌에 대한 
     신문기사를 오려낸 것만큼 도움이 되었다.
       "미쳤군." 하루는 목록을 보면서 자신에게 소리내어 말했다. 
     "너는 미친 놈이야." 그는 정감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는 사실 그렇게 생각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대담하고, 
     뻔뻔스럽고, 재치 있고,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학교로 돌아가지 않겠어요." 8월 어느 날 그는 어머니에게 
     말했다.
       "뭐라고?" 그녀는 헝클어진 허연 머리 사이로 난 가리마에 한 
     손을 올려놓은 채, 작고 여윈 몸으로 그의 방문 앞에 서 있었다.
       "몇 주일 뒤에 뉴욕으로 갈 거예요."
       "넌 학교를 마쳐야 한다." 어머니는 서글픈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니? 뉴욕에 
     가면 누가 일자리라도 준다던?"
       "모르겠어요. 하지만 한 자리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일을 하고 싶어요. 저 나름대로 계획 같은 것이 있거든요."
       "하지만 넌 학교를 끝내야 한다, 버드."
       "'해야 한다'라는 말에 이젠 질렸어요!" 그가 대들었다. 
     침묵이 흘렀다. "물론 그럴 리야 없겠지만, 이번 계획에 
     실패한다고 해도 내년에 학교를 끝낼 수 있어요."
       그의 어머니는 초조하게 앞치마에 손을 닦았다. "버드, 너는 
     스물다섯 살이 넘었다. 너는 -- 어서 학교를 졸업하고, 다른 
     곳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해야 해. 때가 지나면 공부를 다시 
     계속할 수가 없어 -- "
       "제발, 저를 제 뜻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세요."
       그녀는 그를 노려보았다. "바로 네 아버지가 내게 하던 
     그대로구나." 그녀는 조용히 말하고 나가버렸다.
       그는 잠시 동안 책상 옆에 서서 부엌의 설겆이대에서 나는 
     요란한 칼질 소리를 들었다. 그는 신경쓰지 않는 체하면서 
     잡지를 집어올려 펼쳐보았다.
       몇 분 뒤에 그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그에게 등을 
     보인 채 설겆이대에 서 있었다. "어머니 -- " 그는 호소하듯이 
     말했다. "어머니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해야 한다고 걱정하는 
     것만큼 저도 걱정하고 있어요." 어머니는 돌아보지 않았다. 
     "이번 계획이 중요한 게 아니라면 제가 왜 학교를 
     그만두려고까지 하겠어요. 어머니도 제 성격 잘 아시잖아요?" 
     그는 테이블에 앉아서 어머니의 등을 바라보았다. "일이 잘 
     안된다면 내년에 학교를 끝마치겠어요. 그러겠다고 약속할께요, 
     어머니."
       마지못해 그녀가 돌아보았다. "도대체 어떤 계획인데?" 그녀는 
     천천히 물어보았다. "발명이라도 하겠다는 거니?"
       "아니에요. 말씀드릴 수가 없어요." 그는 유감스러운 듯이 
     말했다. "그건 겨우 계획단계거든요. 죄송해요......"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는 수건에 손을 닦았다. "내년까지 미룰 
     수 없는 거니? 네가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말이다."
       "내년이면 너무 늦어요, 어머니."
       그녀는 수건을 내려놓았다. "글쎄, 그게 뭔지 말해 줬으면 
     좋겠구나."
       "죄송해요, 어머니. 저도 말씀드리고 싶어요. 하지만 그건 
     어머니가 이해하실 수 없는 종류의 일이에요."
       그녀는 그의 뒤로 돌아가서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잠시 근심스럽게 치켜올린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글쎄다 -- " 그녀는 그의 어깨를 꽉 누르며 말했다. "나는 그게 
     틀림없이 좋은 생각일 거라고 믿는다."
       그는 그녀를 올려다보며 행복하게 미소지었다.
죽음의 키스 (하)
아이나 레벤



       ----- 차 례 -----

       제 III부
       ⊙ 작가 소개
       제 1 장
       제 2 장
       제 3 장
       제 4 장
       제 5 장
       제 6 장
       제 7 장
       제 8 장
       제 9 장
       제 10 장
       제 11 장
       제 12 장
       제 13 장
       제 14 장
       제 15 장


        ⊙ 작가 소개 

       - 1920, 죽음의 키스를 발표하면서 추리문단에 혜성처럼 등장
       - 1956년, 이 작품은 거드 오스왈드 감독, 로버트 와그너
       주연으로 유나이티드 아티스트 사에서 영화화
       - 1967년 공포 괴기 소설 로즈메리의 아기.(Rosemary's Baby,
       1967)를 발표하면서 명성을 드높임.
       - 이 작품은 로만 폴란스키 감독, 미아 패로 주연으로
       파라마운트 사에서 영화화.
       - 그밖에 저서로 공상과학소설인 <이 완전한 시대(This
       PerfectDay, 1970)>, 괴기공포소설인 <스테포드의
       아낙네들(The Stepfore Wives, 1972)> 정치공포소설인
       <브라질에서 온 소년들(The Boys from Brazil, 1976)> 심리
       멜로드라마인<인터로크(Interlock,1958)>,뮤지컬인<성가신고
       양이!(Drat!TheCat!,1965)>,공포극<베로니카의방(Veronica's
       Room, 1973)> 등이 있다.



        제 1 장 

       메리온 킹쉽이 학교를 -- 엘렌이 들어갔던 중서부 20세기 폭스 
     사의 영화에 나오는 놀이터와는 달리 꾸준하게 공부를 해야 하는 
     컬럼비아 대학을 졸업하고 나자, 그녀의 아버지는 바로 킹쉽 
     코퍼 주식회사가 운영하는 광고대행사의 사장에게 그 사실을 
     말해서 메리온은 카피라이터로 와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녀도 
     광고문안을 쓰고 싶긴 했지만 그 제안을 거절했다. 결국 그녀는 
     화장실의 배수관에 킹쉽이라는 이름이 찍힌 작은 대리점에서 
     간신히 일자리를 얻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광고문안 작성하는 
     것이 비서업무에 방해되지 않기를 바라며, 머지않아 작은 
     회사들의 광고문안을 작성해 주는 것을 허락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질 수 있었다.
       1년 뒤에 도로시가 불가피하게 엘렌의 뒤를 따라서 미식 축구 
     응원이나 캠퍼스의 들뜬 분위기에 휩싸이게 되었을 때, 메리온은 
     아버지와 둘이서 방이 여덟 개나 되는 아파트를 지켜야 했다. 
     그들 두 사람은 서로 표류하며 지나치면서 절대로 부딪치지 않는 
     장전된 총알 같았다. 그녀는 아버지가 말로는 안했지만 분명히 
     반대할 것을 무릅쓰고라도 자기의 거처를 따로 마련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메리온은 이스트 50번가에 붉은 벽돌로 싸인 건물의 맨 위층에 
     있는 두 칸짜리 아파트를 빌렸다. 그녀는 상당히 신경을 써서 
     가구를 들여놓았다. 그 방은 그녀가 있던 방보다 훨씬 작아 
     집에서 쓰던 그녀의 물건을 모두 갖다놓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각별하게 주의를 기울여 가져갈 물건들을 골랐다. 그녀는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것들, 가장 필요한 것들만 골라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하고서, 또 그렇게 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림들을 걸고 선반에 책을 꽂아놓으면서, 그것들은 자신뿐만이 
     아니라 언젠가 그녀의 아파트에 찾아오게 될 방문객 -- 물론 
     남자겠지만, 아직 신분을 알 수 없는 그 방문객도 보게 될 
     거라는 걸 의식했다. 물건 하나하나가 그녀 자신에게는 모두 
     의미 있는 것들이었다. 가구와 전등, 재떨이 (최근의 것이지만 
     현대적인 분위기가 나진 않았다), 그녀가 좋아하는 그림의 
     모조품 (찰즈 디머스의 '나의 이집트'-- 아주 사실주의적이지는 
     않지만 예술가의 눈에 의해서 공간의 의미가 상당한 가치를 지닌 
     것), 레코드 (몇 장은 재즈이고, 몇 장은 스트라빈스키와 
     바르토크, 하지만 대부분은 캄캄할 때 듣기 좋은 그리그와 
     브람스, 그리고 라흐마니노프의 작품들이다), 그리고 책들 -- 그 
     사람의 개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책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을까? -- 
     (소설과 희곡, 평론과 시, 모두 그녀의 취미와 표현에 맞추어 
     고른 것들이다) -- 이런 것들은 구인광고를 간단하게 요약한 것 
     같은 것이었다. 그러한 것을 충동질하는 자기 중심적인 생각이 
     일을 그르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중에서도 그녀는 아주 
     조금씩 일을 그르쳐 가고 있었다. 고독 -- 만일 그녀가 
     화가였다면 자화상을 그려보고 싶었으리라. 언젠가 어떤 
     방문객이 인정해 주고 이해해 줄 물건들로 두 칸의 방을 
     장식하는 대신에 -- 그리고 그 방문객은 그런 이해를 통해서 
     그녀 스스로 발견했지만 뭐라고 표현할 수 없었던 능력과 동경을 
     모두 알아줄 것이다.
       메리온의 일주일 예정표는 두 가지 일에 집중되어 있었다 -- 
     아버지와 저녁을 함께 하는 수요일 저녁, 그리고 두 칸의 방을 
     대청소하는 토요일. 처음의 것은 의무의 노동이었고, 두 번째 
     것은 사랑의 노동이었다. 그녀는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나무에 
     윤을 내고 유리를 닦고 먼지를 털고 물건들을 정리했다.
       손님들이 있었다. 도로시와 엘렌이 방학을 맞아 집에 오면 
     무의식적으로 독립해서 살고 있는 메리온을 부러워했다. 그녀의 
     아버지도 찾아왔었다. 숨을 헐떡거리며 층계를 올라와서는 작은 
     침실과, 그보다 더 작은 부엌을 의아스러운 눈길로 둘러보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여자들도 
     왔었다. 그녀들은 마치 인생과 명예가 걸려 있는 것처럼 
     커내스터 (트럼프 놀이)를 하며 놀았다. 그리고 한번은 남자가 
     찾아왔었다. 매우 멋지고 지적인 젊은 경리부장이었다. 아파트에 
     대한 그의 관심은 긴 소파를 곁눈질로 보며 나타냈었다.
       도로시가 자살했을 때 메리온은 2주일간 아버지의 아파트에서 
     머물렀으며, 엘렌이 죽었을 때는 한 달간 머물렀다. 그들이 
     서로서로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장전된 총알보다 더 
     가까워지지는 못했다. 그 달 말쯤에 그녀의 아버지는 그답지 
     않게 자신없는 태도로 그녀에게 자기가 있는 곳으로 이사오라고 
     했다. 그녀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녀가 자신의 아파트를 
     포기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것은 마치 그녀가 
     집안에 틀어박힌 채 자물쇠로 잠기는 것 같은 거였다. 그래서 그 
     뒤로 그녀는 일주일에 단 한 번만 아버지와 함께 하던 
     저녁식사를 세 번씩 하기로 했다.
       토요일에는 방 청소를 했으며, 책이 빳빳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책을 한 달에 한 번씩 모두 펼쳐보았다.
       9월 어느 토요일 아침에 전화가 울렸다. 앉아서 유리로 된 
     커피 테이블을 닦고 있던 메리온은 전화벨 소리에 깜짝 놀랐다. 
     그녀는 푸른빛이 도는 유리를 통해서 납작해진 먼지닦는 헝겊을 
     내려다보면서, 누군가가 전화를 잘못 걸었다가 곧 알아차리고 
     끊기를 바랐다. 전화가 다시 울렸다. 그녀는 한 손에는 여전히 
     먼지닦는 헝겊을 든 채 마지못해 하며 일어나서 긴 소파 옆에 
     있는 테이블로 갔다.
       "여보세요." 그녀는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세요 -- " 처음 듣는 남자의 목소리였다. "메리온 
     킹쉽입니까?"
       "그런데요."
       "당신은 아마 나를 모를 겁니다. 나는......엘렌의 
     친구입니다." 메리온은 갑자기 거북해졌다. 엘렌의 친구라 -- 
     잘생기고 똑똑하고 말이 빠른 사람...... 어딘지 불쾌하고, 
     어쨌든 그녀가 신경쓰고 싶지 않은 사람. 거북스러움이 이내 
     사라졌다. "내 이름은 -- " 그 남자가 말을 이었다. "버튼 
     콜리스입니다......버튼 콜리스."
       "아, 예, 엘렌이 당신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난 
     그를 매우 사랑해.' 하고 엘렌이 마지막으로 이곳에 왔을 때 
     이렇게 말했었다. '그 사람도 나를 사랑하고.' -- 메리온도 
     그녀가 행복해 하는 게 기뻤지만, 그날 그녀는 저녁 내내 몇 
     가지 이유 때문에 우울해 있었다.)
       "당신을 만났으면 하는데요." 그가 말했다. "엘렌에 관한 일이 
     좀 있어서요. 그녀가 내게 책을 몇 권 빌려줬었지요. 
     얼마전에......그녀가 블루 리버에 가기 전에요. 그래서 
     당신에게 그걸 돌려 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아마 무슨 월간 추천도서쯤 되겠지 -- 메리온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자기의 좁은 소견을 탓하며 말했다. "예, 
     그렇게 하는 게 좋겠군요. 그러세요."
       잠시 수화기 저쪽에서 침묵이 흘렀다. "지금 당장 가져다 드릴 
     수 있는데요." 그가 말했다. "나는 바로 근처에 살고 있거든요."
       "아니에요." 그녀가 얼른 말했다. "나는 지금 막 외출하는 
     중이에요."
       "그렇다면 내일 아무때나......"
       "나......나는 내일도 없는데요." 그녀는 불편하게 수화기를 
     바꿔들었다 -- 그가 자기 아파트에 오는 것이 싫어서 하는 
     거짓말에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그는 아마 괜찮은 사람일 
     것이다. 그는 엘렌을 사랑했었고, 엘렌은 죽었다. 그는 엘렌의 
     책을 그녀에게 돌려주려는 것뿐이다......"오늘 오후 어디서 
     만났으면 하는데요." 그녀가 제안을 했다.
       "좋습니다 -- " 그가 말했다. "그게 좋을 것 같군요."
       "나는 5번가 근처로......갈 건데요."
       "그러면 약속장소를 록펠러 센터의 동상 앞에서 하죠. 온 
     세계를 받치고 있는 아틀라스 중 하나에서 -- "
       "좋아요."
       "3시에 어때요?"
       "그러죠, 3시. 전화해 줘서 고마워요. 정말 친절하시군요."
       "아닙니다 -- " 그가 말했다. "그럼 나중에 봅시다, 메리온." 
     잠시 침묵이 흘렀다. "킹쉽 양이라고 부르는 게 어쩐지 우스운 
     것 같아서요. 엘렌이 당신에 대해서 아주 많은 말을 
     해주었거든요."
       "아니, 괜찮아요......" 그녀도 다시 어색해지고,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따 봐요......" 그녀는 그를 버드라고 불러야 
     할지 콜리스 씨라고 불러야 할지 결정하지 못한 채 말끝을 
     흐렸다.
       "이따 봐요." 그가 다시 한번 말했다.
       그녀는 수화기를 내려놓고서 잠시 전화기를 보며 서 있었다. 
     그리고 나서 돌아서서 커피 테이블로 갔다. 무릎을 꿇고 앉아서 
     그녀는 어설프게 먼지닦는 헝겊을 집어들고 빠르게 원을 그리며 
     닦았다. 왜냐하면 이제 오후 시간을 모두 빼앗기게 되었기 
     때문이다.


        제 2 장 

       치솟아 있는 동상 그림자 안에서 그는 회색 플란넬 옷을 입고 
     종이로 싼 꾸러미를 옆구리에 낀 채 주춧돌 쪽으로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요란하게 경적을 울리는 버스들과 성급하게 움직이는 
     택시와는 대조적으로 그의 앞으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묵묵히 
     지나갔다. 그는 찬찬히 사람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5번가에 
     도착했다. 어깨에 패드를 넣지 않고 가늘게 넥타이를 맨 남자들. 
     마치 저 아래 길에서 사진사가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맞춤옷에, 목에는 스카프를 매고, 아름다운 머리를 위로 
     치켜들고 걷고 있는 여자들. 그리고 새장 속에서 갇혀 온 
     참새들처럼 촌스러운 분홍빛 얼굴을 가진 사람들이 동상과 길 
     건너에 태양을 받아 뾰족하게 서 있는 성 패트릭 탑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그들 모두를 주의깊게 쳐다보았다 -- 
     아주 오래 전에 도로시가 그에게 보여주었던 스냅 사진을 기억해 
     내려고 애쓰면서. "메리온도 예뻐질 수 있을 거예요. 머리를 
     이렇게 한다면 -- " 그는 도로시가 자기 머리카락을 홱 뒤로 
     잡아당기면서 잔뜩 얼굴을 찡그리던 모습을 떠올리면서 
     미소지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꾸러미를 싼 포장지를 장난스럽게 
     매만졌다.
       북쪽에서 그녀가 오고 있었다. 30 미터나 떨어져 있었는데도 
     그는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는 키가 크고 말랐으며 -- 
     정말 아주 깡말랐다 -- 보통 여자들과 비슷한 옷을 입고 있었다. 
     갈색 정장에 금빛 스카프, 요즘 유행하고 있는 듯한 작은 펠트 
     모자, 어깨에 매는 핸드백. 그녀는 다른 사람의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하고 불편해 보였다. 거기에다가 갈색 머리카락을 
     뒤로 틀어올렸다. 그녀는 도로시와 비슷한 커다란 갈색 눈을 
     가졌지만 그녀의 찡그린 얼굴에는 너무 컸고, 그녀의 
     동생들에게는 그렇게 아름답게 보이던 광대뼈도 메리온의 
     얼굴에서는 너무 날카롭게 눈에 뛰는 것이었다. 그녀는 좀더 
     가까이 다가와서야 그를 알아보았다. 그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의문스런 미소를 머금고, 그리고 약간 불편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그는 그녀의 립스틱 색깔이 자기의 한창때를 희미하게 
     연상시켜 주는 엷은 장미빛이라는 것에 주목했다.
       "메리온?"
       "그래요." 그녀는 주저하면서 손을 내밀었다. "처음 
     뵙겠어요." 그녀는 그의 눈 아래를 보면서 아주 잠깐 미소를 
     보냈다.
       그의 손을 잡은 그녀의 손가락은 길고 차가웠다. 
     "안녕하세요." 그가 말했다.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곧장 모퉁이 주위에 있는 미국 초창기식 칵테일 
     라운지로 갔다. 약간 머뭇거리다가 메리온은 다이커리를 
     주문했다.
       "난......난 오래 있을 수 없어요." 그녀는 자리 끝에 
     걸터앉아서 칵테일 잔을 꽉 쥐고 말했다.
       "아름다운 여자분들은 항상 그렇게 바쁘게 다니나 보죠?"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 그리고 곧 그것이 잘못된 방법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긴장된 미소를 지으며 점점 더 불편해 하는 것 
     같았다. 그는 자기 말이 희미하게 사라지는 것을 의식하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잠시 뒤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광고대행사에서 일을 하고 있다죠, 그렇죠?"
       "캠든 앤드 갤브레이스에서예요." 그녀가 말했다. "당신은 
     아직도 컬드웰 대학에 다니나요?"
       "아닙니다."
       "엘렌이 3학년이라고 말했던 것 같은데."
       "그랬지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생겨서 학교를 
     그만뒀어요." 그는 마티니를 한 모금 마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셨거든요. 어머니가 일하시는 걸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어요."
       "아, 미안해요......"
       "아마 내년에는 졸업할 수 있을 겁니다. 아니면 야간대학에 
     다니거나. 어느 대학을 나왔죠?"
       "컬럼비아. 당신은 뉴욕 출신인가요?"
       "매사추세츠입니다."
       그는 그녀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끄집어내려고 했으나, 매번 
     메리온은 화제를 그에게로 돌렸다. 그렇지 않으면 날씨나, 
     아니면 놀랍도록 클로드 레인즈를 닮은 웨이터에 대해서 --
       마침내 그녀가 질문을 했다. "그게 그 책이에요?"
       "그래요. 。앤터니의 저녁。 -- 엘렌은 내게 이것을 읽으라고 
     했습니다. 책의 앞뒤에 그녀가 써놓은 것이 있어서 당신이 갖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지요." 그가 그녀에게 꾸러미를 건네주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 " 그가 말했다. "난 좀더 의미 있는 책을 
     좋아합니다."
       메리온이 일어섰다. "그만 가봐야 할 것 같아요." 그녀는 
     변명하듯이 말했다.
       "아직 다 마시지도 않았잖습니까?"
       "미안해요." 그녀는 손에 든 꾸러미를 내려다보면서 얼른 
     말했다. "약속이 있어서요. 일 문제로. 늦으면 곤란한 
     약속이에요."
       그가 일어났다. "하지만......"
       "미안해요." 그녀는 어색한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그는 테이블 위에 돈을 올려놓았다.
       그들은 5번가를 다시 걸어 올라왔다. 모퉁이에 이르자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은 여전히 차가웠다. "만나게 되어 
     반가웠어요, 콜리스 씨." 그녀가 말했다. "잘 마셨어요. 그리고 
     책도 고맙고......정말 고마워요......" 그녀는 돌아서서 사람들 
     속으로 섞여 들어갔다.
       그는 멍청하게 잠시 모퉁이에 서 있었다. 그리고 입술을 
     깨물면서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갈색 펠트 모자에 반짝이는 금색 
     장신구가 달려 있었다. 그는 그녀 뒤쪽으로 10 미터 가량 간격을 
     두고서 걸었다.
       그녀는 54번가로 올라가서 길을 건넌 뒤 메디슨 가를 향해서 
     동쪽으로 돌았다. 그는 그녀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전화번호부에 있던 주소를 기억했다. 그녀는 메디슨 가와 
     파크 가를 건너갔다. 그는 모퉁이에 멈춰서서 그녀가 갈색 석조 
     건물의 계단을 올라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일 문제로 약속이 있다고?" 그는 중얼거렸다. 그는 자기가 
     기다리는 정확한 이유도 모르면서 잠시 동안 기다리다가 
     돌아서서 천천히 5번가를 향해서 걷기 시작했다.


        제 3 장 

       일요일 오후에 메리온은 현대미술관에 갔다. 1층에서는 그녀가 
     전에 보았던 자동차 전시를 아직도 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그것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2층은 평소와는 다르게 
     사람들로 꽉 차 있어서 그녀는 층계를 올라가 3층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녀는 아주 낯익은 그림들과 조각 작품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감상했다. '머리감는 여인'의 하얗고 부드러운 
     곡선, '공중을 나는 새'의 완벽할 정도의 예리한 선.
       남자 두 명이 램부르크 조각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방에 
     있었다. 메리온이 그곳으로 들어가자, 그 두 사람은 남녀 
     조각상이 있는 어둠침침한 공간에 그녀 혼자를 남겨둔 채 
     나가버렸다. 두 조각상은 방의 서로 맞은편 모퉁이에 있었는데 
     남자는 일어서 있고 여자는 무릎을 꿇고 있었으며, 그들의 몸은 
     가늘고 수척했지만 아름다웠다. 조각상의 가는 선이 이 세상 것 
     같지 않은, 거의 종교적인 예술 분위기를 자아냈기 때문에 
     메리온은 평소에 누드 조각상을 볼 때마다 느끼는 당혹감 없이 
     그것들을 감상할 수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젊은 남자의 조각상 
     주위를 돌아보았다.
       "안녕하십니까?" 그녀 뒤에서 명랑하고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세상 참 좁군요." 그가 그녀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난 
     아래층에서부터 바로 당신 뒤를 따라왔는데, 당신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잘 지냈습니까?"
       "덕분에, 고마워요."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당신은 잘 
     지냈나요?" 그녀가 덧붙였다.
       "덕분에요."
       그들은 조각상 쪽으로 몸을 돌렸다. 왜 그녀는 그렇게 얼굴이 
     달아오를까? 그가 잘생겼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가 엘렌의 
     친구였기 때문일까? 함께 미식축구 응원도 가곤 했던 캠퍼스 
     커플......
       "여기에 자주 옵니까?" 그가 물었다.
       "예."
       "나도 그렇습니다."
       그 조각상이 지금은 그녀를 당황케 만들었다. 바로 옆에 버드 
     콜리스가 있으니까. 그녀는 얼른 몸을 돌려서 무릎을 꿇고 있는 
     여인상 쪽으로 갔다.
       그가 그녀 옆으로 따라왔다.
       "그때 약속시간엔 늦지 않았습니까?"
       "예." 그녀가 가볍게 대답했다. 무엇 때문에 그는 여기에 온 
     것일까? 그는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엘렌을 팔에 끼고 
     센트럴 파크를 돌아다녔을 것이다......
       그들은 조각상을 바라보았다. 잠시 뒤에 그가 말을 꺼냈다. 
     "아래층에서 본 그 사람이 당신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왜요?"
       "글쎄, 엘렌은 미술관엔 다니지 않았거든요......"
       "형제라고 해서 모두 똑같은 것은 아니에요." 그녀가 말했다.
       "그래요.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가 무릎꿇고 있는 
     조각상 주위를 한 바퀴 돌아보았다.
       "컬드웰의 미술대학에는 작은 미술관이 하나 있습니다." 그가 
     말했다. "대부분이 모조품과 복사품이긴 하지만. 한두 번 엘렌을 
     데리고 그곳에 갔었지요. 그녀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 애는 예술엔 관심이 없었어요."
       "그래요." 그가 말했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억지로 
     자기 취미를 밀어넣으려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짓이지요."
       메리온은 조각상의 맞은편에 서서 자기를 쳐다보는 그를 
     바라보았다. "나는 한번 엘렌과 도로시를 데리고 여기에 
     왔었어요 -- 도로시는 내 막내 동생이에요 -- "
       "압니다......"
       "그 애들이 10대가 되었을 때 이곳에 데리고 왔었지요. 그러나 
     지루해 하더군요. 나는 너무 어려서 그런 모양이라고 
     생각했어요."
       "모르겠는데 -- " 그는 그녀를 향해 반원을 그리며 따라가면서 
     말했다. "만일 내가 그 나이였을 때 우리 고향에 미술관이 
     있었다면......당신은 열두세 살 정도에 이곳에 와본 적이 
     있습니까?"
       "예."
       "그래요?" 그가 말했다. 그는 엘렌과 도로시와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인 양 미소지었다.
       어떤 남녀가 아이들 두 명을 데리고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나갑시다." 그가 그녀 옆으로 다가오면서 말했다.
       "나는......"
       "오늘은 일요일이에요." 그가 말했다. "일 문제로 약속이 있을 
     수도 없잖습니까." 그는 그녀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 10· 
     아주 근사한 미소 -- 부드럽고 편안하게 해주는 미소. "난 
     혼자예요, 당신도 혼자고......" 그는 살며시 그녀의 팔꿈치를 
     잡았다. "자, 갑시다." 그는 설득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두 사람은 3층을 지나 2층 층계참까지 내려와서는, 그들이 
     보았던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며 1층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건물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번쩍거리는 
     자동차들을 지나서 유리문을 나와 미술관 뒤쪽의 정원으로 갔다. 
     그들은 조각상들 앞에서 잠시 머무르면서 그 사이를 산책했다. 
     두 사람은 눈에 거슬리는 전라(全裸)의 마이욜의 여신상 앞에 
     이르렀다.
       "붉게 타오르는 가슴의 최후라 -- " 버드가 말했다.
       메리온이 미소를 지었다. "말할 게 있는데 -- " 그녀가 
     말했다. "나는 이런 조각상을 보면 항상 좀 당황하게 된답니다."
       "나도 조금 얼떨떨한데요." 그가 웃으며 말했다. "이건 누드가 
     아니라 발가벗은 거지요." 두 사람은 소리내어 웃었다.
       그들은 조각상을 모두 보고 나서 정원 뒤쪽에 있는 벤치에 
     앉아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당신과 엘렌은 굉장히 사이가 깊었던 걸로 아는데요?"
       "정확하게 말해서,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내 생각엔......"
       "공식적으로는 그렇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학교 안에서 만나는 
     것은 학교 밖에서 만나는 것과는 다르니까요."
       메리온은 조용히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우리는 아주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지요. 하지만 주로 
     표면적인 것들이었습니다. 같은 수업을 듣고, 똑같은 사람들을 
     알고......컬드웰 대학과 관련된 일을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젠가는 대학을 떠나게 될 것이고, 모르겠습니다, 
     우리가......우리가 결혼하게 되었을는지는." 그는 자기 담배를 
     쳐다보았다. "난 엘렌을 좋아했습니다. 그때까지 내가 알았던 
     어떤 여자보다도 그녀를 좋아했지요. 그녀가 죽었을 때 무척 
     괴로웠습니다. 하지만......그녀와는 그렇게 깊은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잠깐 말을 멈췄다. "내 말을 불쾌하게 
     생각하진 마십시오."
       메리온은 그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모든 일이 저 미술관 일 같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호퍼나우드처럼 별로 난해하지 않은 미술가들에게 흥미를 갖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지요. 그녀는 그런 
     것엔 하나도 흥미를 느끼지 못했으니까요. 그 밖에 책이나 정치, 
     중요한 일에 대해서도 모두 마찬가지였어요. 그녀는 항상 색다른 
     행동을 하기를 원했지요."
       "그 애는 집에서 억압된 생활을 해왔어요. 그래서 그것을 
     메꾸려고 그렇게 했을 거예요."
       "맞아요." 그가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나보다 네 살이나 
     어렸지요." 그는 담배를 껐다. "그러나 엘렌은 아주 달콤한 
     여자였습니다."
       잠깐 말이 끊겼다.
       "경찰은 아직도 누가 그녀를 죽였는지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습니까?"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아무것도, 끔찍한 일이에요......"
       그들은 잠시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잠시 뒤 그들은 다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뉴욕에서 재미있는 일들이 상당히 
     많이 있었다는 둥, 미술관은 정말 쾌적한 장소라는 둥, 방금 
     지나온 마티스의 작품은 어떻다는 둥 --
       "내가 누구를 좋아하는지 압니까?" 그가 물었다.
       "글쎄, 누군데요?"
       "당신이 그 사람 작품을 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가 
     말했다. "찰스 디머스라고 -- "


        제 4 장 

       레오 킹쉽은 테이블에 팔꿈치를 기대고 앉아서, 우유가 담긴 
     부연 유리잔 주위를 손가락으로 꽉 쥔 채 그것이 마치 아름다운 
     빛깔의 포도주라도 되는 것처럼 자세히 바라보았다. "네가 그를 
     자주 만난다지?" 그는 애써 별일 아니라는 투로 물어보았다.
       메리온은 조심스럽게 푸르고 금빛이 도는 에인슬린 접시에 
     커피잔을 놓고 나서 은과 크리스탈과 장미빛으로 장식된 테이블 
     너머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불그스레한 그의 얼굴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빛에 반사되어 아버지의 안경 렌즈가 보이지 
     않았다. "버드 말씀이세요?" 그녀는 아버지가 버드를 말하는 건 
     줄 알면서도 물어보았다.

       킹쉽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 10· " 메리온은 분명하게 대답했다. "그를 자주 
     만나고 있어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 "오늘밤에, 15분만 
     있으면 그가 올 거예요." 그녀는 대답을 바라는 눈초리로 
     아버지의 무표정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말다툼이 없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 말이 그녀가 버드에게 느끼는 
     감정의 강도를 시험하는 것이기 때문에 한 번쯤은 말다툼이 
     있기를 바라기도 하면서--

       "그의 직업 말이다 -- " 킹쉽은 우유잔을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전망이 어떠냐?"
       잠시 차가운 분위기가 돈 뒤에 메리온이 말했다. "그는 지금 
     지배인 교육을 받고 있어요. 몇 달 안에 지배인이 될 거예요. 왜 
     그런 걸 물어보시는 거죠?" 그녀가 입술을 살짝 움직여서 웃어 
     보였다.
       킹쉽은 안경을 벗었다. 그의 푸른 눈이 메리온의 차가운 
     시선과 어색하게 마주쳤다. "네가 저녁식사에 그를 부른 
     모양이구나, 메리온?" 그가 말했다. "전에는 저녁식사에 사람을 
     초대한 적이 없었잖니.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내가 질문할 
     자격이 있는 거 아니냐?"
       "그는 하숙하고 있어요." 메리온이 말했다. "저와 함께 먹지 
     않으면 그는 혼자 먹어야 해요. 그래서 오늘 저녁식사에 부른 
     거예요."
       "나와 함께 먹지 않는 날에는 그와 식사를 하니?"
       "예, 대부분은요. 우리 두 사람이 각각 혼자서 먹을 이유가 
     없잖아요? 우리들 집은 겨우 다섯 블럭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데." 그녀는 자기가 왜 이렇게 둘러대고 있는지 
     의아스러웠다. 잘못을 저지르다가 들킨 것도 아닌데. "우리는 
     함께 있으면 즐겁기 때문에 같이 먹는 거예요." 그녀는 
     강조하듯이 말했다. "서로 아주 좋아하고 있거든요."
       "그렇다면 더욱 내게 몇 가지 물어봐야 할 권리가 있겠구나, 
     그렇지 않니?" 킹쉽이 은근히 말했다.
       "그는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킹쉽 코퍼에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이 아니란 말예요."
       "메리온......"
       그녀는 은 컵에서 담배 하나를 뽑아 은으로 된 테이블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아버지는 그가 좋지 않은 모양이군요, 
     그렇죠?"
       "난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가 가난해서요?" 그녀가 말했다.
       "그런 것이 아니야, 메리온. 너도 그것을 잘 알잖니."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 그래." 킹쉽이 말했다. "그가 가난하다는 것은 괜찮아. 
     그는 어느 날 밤에 그것을 분명하게 세 번씩이나 말하려고 
     애쓰더구나. 어머니가 삯바느질한다는 얘기까지 -- "
       "그의 어머니가 삯바느질하는 것도 문제가 되나요?"
       "아니야, 메리온. 그런 것이 아니다. 그는 너무 생각 없이, 
     아주 생각 없이 그 이야기를 하더구나. 그를 보면 난 누가 
     생각나는지 아니? 내가 다니는 클럽에 약간 다리를 절름거리는 
     남자가 있단다. 그는 우리가 골프를 칠 때마다 이렇게 말하지. 
     '자, 어서 계속하시오. 늙은 목발이 따라잡을 테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아주 천천히 걸어간단다. 만일 사람들이 그를 
     이긴다면 자신이 비열하다고 느껴질 테니까."
       "그런 비유로 말씀하시면 전 도망가 버리겠어요." 메리온이 
     말했다. 그녀는 테이블에서 일어나 거실로 가버렸다. 킹쉽은 몇 
     가닥 안되는 노리끼한 머리카락을 절망스럽게 손으로 긁적이면서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거실에는 커다란 창문이 있었는데, 그곳으로 이스터 강을 
     내다볼 수 있었다. 메리온은 그 앞에 서서 두꺼운 커튼을 한 
     손으로 잡았다. 그녀는 아버지가 거실로 들어와서 그녀 뒤로 
     다가오는 소리를 들었다.
       "메리온, 나를 믿어라. 나는 다만 네가 행복해 하는 것을 보고 
     싶을 뿐이다." 그는 어색하게 말했다. "내가 항상 
     네게......신경쓰지 못한다는 것은 나도 안다. 
     하지만......도로시와 엘렌 사건이 있은 뒤에는 좀더 신경을 
     쓰고 있어......"
       "알아요." 그녀는 내키지 않았지만 억지로 대답했다. 그녀는 
     커튼을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이제 저는 스물다섯 
     살이에요...... 성숙한 여자라고요. 아버지는 저를 마치 
     어린애처럼 -- "
       "나는 다만 네가 너무 무모하게 뛰어드는 것을 원치 않을 
     뿐이다, 메리온."
       "저는 그렇지 않아요." 그녀는 부드럽게 말했다.
       "그게 내가 원하는 것 전부다."
       메리온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왜 아버지는 그를 싫어하세요?" 
     그녀가 말했다.
       "난 그를 싫어하지 않는다. 그는, 글쎄, 모르겠다......"
       "제가 아버지를 떠날까 봐 걱정이 되세요?" 그녀는 그 생각에 
     자신도 깜짝 놀란 듯이 천천히 물어보았다.
       "너는 벌써 내게서 떠나 있지 않니? 아파트에서 -- "
       그녀는 창문에서 몸을 돌려 방 옆에 서 있는 킹쉽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버드에게 고맙게 생각하셔야 할 거예요." 
     그녀가 말했다. "아버지께 말씀드릴 게 있어요. 저는 그가 
     여기에 와서 저녁식사하는 것을 바라진 않았어요. 저는 그 말을 
     하고 나서 금방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그가 
     고집했지요. '그분은 당신 아버지예요.' 하고 그가 말하더군요. 
     '그분의 기분도 생각해 줘야죠.' 아버지도 아시겠지만, 버드는 
     가족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저는 그렇지 
     못하지만. 그런 점에서 아버지는 그를 미워할 것이 아니라 
     고맙다는 생각을 가지셔야 할 거예요. 만일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아버지와 저를 좀더 가까와지게 만들어줄 수도 
     있다고요." 그녀는 다시 창문을 바라보았다.
       "좋아 -- " 킹쉽이 말했다. "괜찮은 청년이겠지. 네가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무슨 말씀이죠?" 그녀는 다시 창문에서 몸을 돌렸다. 
     이번에는 아주 빳빳하게 굳은 몸을 천천히 움직이면서 --
       "다만, 네가 어떤 실수도 저지르지 않았으면 하는 것 뿐이다." 
     킹쉽은 모호하게 말했다.
       "그에 대해서 또 물어보실 것이 있으세요?" 메리온이 물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봤나요? 혹시 사람을 시켜서 그의 
     뒷조사를 하진 않았나요?"
       "그렇지 않아!"
       "엘렌에겐 그렇게 하셨잖아요?"
       "엘렌은 그때 열일곱 살이었어. 그리고 내가 옳았다. 그렇지 
     않니? 그 녀석이 어디 괜찮은 녀석이었니?"
       "저는 스물다섯 살이고, 제 자신을 잘 알고 있어요! 만일 
     아버지가 사람을 시켜서 버드에 대해 뒷조사를 하신다면......"
       "그런 생각은 해보지도 않았다!"
       메리온이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전 버드를 좋아해요." 
     그녀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전 그를 정말 
     좋아해요. 아버지는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났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아세요?"
       "메리온, 나는 -- "
       "만일 아버지가 그런 일을 하신다면 -- 그가 불쾌하게 
     생각하거나 제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는 어떤 일을 
     하신다면...... 절대로 아버지를 용서하지 않겠어요. 하나님에게 
     맹세코, 제가 살아 있는 한 다시는 아버지와 말도 하지 
     않겠어요."
       그녀는 다시 창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메리온, 맹세하지만......" 
     그는 씁쓸히 뻣뻣하게 굳은 그녀의 등을 바라보고 나서 지친 
     듯이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몇 분 뒤에 문에서 벨이 울렸다. 메리온은 창문에서 떨어져 
     방을 가로질러서 현관으로 이어지는 이중 문으로 갔다.
       "메리온." 킹쉽이 일어섰다.
       그녀가 멈춰서서 그를 돌아보았다. 현관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와 중얼거리듯이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만 있으라고 해라...... 한 잔만 마시고."
       잠깐 침묵이 흘렀다. "좋아요." 그녀가 말했다. 문 앞에서 
     그녀는 잠시 망설였다. "그런 식으로 말해서 죄송해요." 그녀는 
     밖으로 나갔다.
       킹쉽은 그녀가 나가는 것을 지켜본 뒤에 돌아서서 벽난로 
     쪽으로 갔다. 그리고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서 벽에 걸린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보았다. 그는 340달러짜리 양복에 한 달에 
     700달러짜리 거실에서 사는 뚱뚱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똑바로 서서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는 돌아서서 
     현관쪽으로 걸어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어서 오게, 버드." 그가 
     말했다.


        제 5 장 

       메리온의 생일은 11월 초의 토요일이었다. 아침에 그녀는 
     서둘러서 아파트를 청소했다. 1시에 그녀는 파크 가의 조용한 
     골목에 있는 조그만 건물로 갔다. 하얀 문 옆에 달린 은빛 
     장식판으로 보아, 그 건물에 정신과 의사나 실내장식가가 아니라 
     레스토랑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레오 킹쉽은 
     하얀문 안에 있는 루이스 퀸스 소파에 조심스럽게 앉아, 그곳에 
     있는 '미식가'라는 책을훑어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잡지책을 내려놓고 일어나 메리온의 뺨에 키스를 하고, 생일을 
     축하한다고 말했다. 지배인이 손가락을 흔들고 이를 드러내며 
     다가와서 두 사람을 테이블로 안내하고, 예약 카드를 치우면서 
     프랑스식 말투로 자리를 권했다. 테이블 중앙은 장미로 장식되어 
     있었으며, 메리온의 자리에는 하얀 종이에 금빛 리본으로 묶은 
     작은 상자가 놓여 있었다. 킹쉽은 그것을 의식하지 않는 체했다. 
     그가 와인 카드를 보고, "제가 권해 드리고 싶은 것은, 
     선생님......" 하고 지배인이 말하는 동안, 메리온은 흥분해서 
     뺨을 붉히고 눈을 반짝거리며 금빛 리본 상자를 풀었다. 상자 
     밑에 깔린 솝 사이에는 가장자리가 진주로 장식된 금빛 브로치가 
     놓여 있었다. 메리온은 탄성을 질렀다
       지배인이 가고 나자 그녀는 자기 손 가까이에 놓여 있는 그의 
     손을 꽉 잡으면서 행복하게 아버지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그 브로치는 그녀가 고를 만한 그런 모양이 아니었다. 그 
     디자인은 그녀의 다른 장신구에 비해서 너무 정교했다. 그러나 
     그녀의 행복은 선물 때문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과거에 레오 킹쉽이 딸들에게 주는 생일선물이란 5번가 
     백화점에서 물건을 살 수 있는 100달러짜리 선물 교환권이었다. 
     그것도 비서가 기계적으로 전달해 주었다.
       아버지와 헤어진 뒤, 메리온은 잠시 미장원에 들렀다가 
     아파트로 돌아왔다. 오후 늦게 벨이 울렸다. 그녀는 아래층 문을 
     여는 단추를 눌렀다. 몇 분 뒤에 심부름꾼 하나가 나타났다. 
     그는 굉장히 무거운 것을 운반하기라도 한 듯이 지나치게 숨을 
     헐떡거리며 꽃상자를 들고 있었다. 그녀가 25센트를 주자 그의 
     숨결이 가라앉았다.
       초록색 파라핀 종이 밑에 코사지 (여자의 가슴이나 어깨에 
     다는 작은 꽃다발)로 장식된 하얀 난초 한 송이가 있었다. 함께 
     들어 있는 카드에는 '버드'라고만 쓰여 있었다. 거울 앞에 서서 
     메리온은 그 꽃을 머리, 손목, 어깨에 꽂아 보았다. 그리고 나서 
     부엌으로 들어가 꽃을 그 상자 안에 넣어서 허리 높이 만한 
     냉장고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굵은 결이 있는 열대 꽃잎에 
     물을 몇 방울을 떨어뜨렸다.
       그는 정확하게 6시에 도착했다. 그는 메리온 문패 옆에 있는 
     단추를 세게 두 번 누르고 나서, 회색 수에드 가죽 장갑을 벗어 
     푸른색 코트 깃에 묻은 실오라기 하나를 떼어내며 복도에 서서 
     기다렸다. 곧 현관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거무죽죽한 
     커튼이 쳐 있는 문이 열리고 메리온이 나타났다. 검은 코트 
     위에서 난초가 하얗게 반짝였다. 그들은 서로 굳게 손을 잡았다. 
     가장 행복한 생일이 되기를 바란다고 인사하고, 그는 그녀의 
     립스틱이 지워지지 않도록 뺨에 키스를 했다. 그는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보다 립스틱이 훨씬 짙어졌다는 것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들은 52번가에 있는 스테이크 집으로 갔다. 그곳의 음식값은 
     그녀가 점심에 먹었던 것보다 훨씬 값이 쌌지만, 메리온은 
     버드의 눈을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터무니없이 엄청나게 
     보였다. 그녀는 그에게 두 사람 음식을 주문하라고 했다. 그들은 
     검은 양파 수프와 서로인 (소의 허리 윗부분의 살) 스테이크를 
     먹었고, 샴페인 칵테일을 들어올리며, "메리온을 위해서." 하고 
     건배했다. 식사를 끝내고 나서 웨이터의 쟁반에 18달러를 놓은 
     버드는 메리온이 얼굴을 약간 찡그리는 것을 알아차렸다.
       "오늘은 당신 생일이잖아."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식당에서 택시를 타고 '성 조안'이 상영되고 있는 극장으로 
     갔다. 그들은 아래층 무대 앞쪽에서 여섯 번째 줄의 중간에 
     앉았다. 그녀는 쉬는 시간에 평소와 다르게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녀는 토끼 같은 눈을 반짝이면서 버나드 쇼와 그의 연출, 
     그리고 그들의 앞줄에 앉은 유명인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뒤에 -- 그날 저녁에 버드가 돈을 너무 많이 썼다고 그녀는 
     말하고 나서 -- 자기 아파트에 가자고 했다.
       "성당에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받은 순례자 같은데." 그는 
     자물쇠 구멍에 열쇠를 넣으면서 말했다. 그는 열쇠를 돌리고 
     손잡이를 돌렸다.
       "환상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메리온이 얼른 말했다. 
     "모두 현실이에요. 방이 두 개 있는데, 하나는 그저 그렇고 
     부엌은 아주 작아요."
       그는 메리온에게 열쇠를 주며 문을 열었다. 그녀는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서 문 옆에 있는 벽 스위치를 찾았다. 전등에서 
     나오는 빛들로 방안이 가득찼다. 그는 들어와서 손을 뒤쪽으로 
     돌려 문을 닫았다. 메리온은 그의 얼굴을 보려고 뒤로 돌았다. 
     그의 눈은 짙은 회색 벽과 파란색과 하얀색 줄무늬가 있는 커튼, 
     참나무로 된 가구 위를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는 놀랐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정말 작지요?" 메리온이 말했다.
       "하지만 훌륭한데." 그가 말했다. "정말 멋있어."
       "고마워요." 그녀는 코트에서 난초를 떼며 그에게서 몸을 
     돌렸다. 갑자기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어색한 분위기가 
     되었다. 그녀는 코사지를 옆 테이블에 놓고 나서 코트를 벗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를 거들어주었다. "가구가 아름답군." 그는 
     그녀의 어깨 위에서 말했다.
       그녀는 두 사람의 코트를 옷장에 걸고 나서 장식장에 붙은 
     거울을 보았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적갈색 옷의 어깨에 
     난초를 꽂으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뒤쪽에 있는 버드에게 초점을 
     맞췄다. 그가 방 가운데로 걸어왔다. 그는 커피 테이블 앞에 
     서서 네모난 청동 접시를 들어올렸다. 옆으로 돌린 그의 
     얼굴에는 그것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암시를 주는 표정이 
     없었다. 메리온은 문득 자신이 꼼짝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흠 -- " 그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는지 마침내 말을 
     꺼냈다. "아버지에게서 받은 선물인 것 같은데?"
       "아니에요." 메리온은 거울 속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엘렌이 
     준 거예요."
       "오 -- " 그는 잠시 그것을 보고 나서 내려놓았다.
       메리온은 옷의 칼라를 만지작거리면서 거울에서 몸을 돌려 
     천천히 세 발자국 정도 방을 가로질러 오는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낮은 책꽂이 앞에 서서 그 위의 벽에 걸린 그림을 
     바라보았다. 메리온은 그런 그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의 옛친구 디머스 -- " 하고 그가 말했다. 그는 웃으면서 
     그녀를 지켜보았다. 그녀도 따라서 미소지었다. 그는 다시 
     그림을 쳐다보았다.
       잠시 뒤 메리온은 앞으로 나아가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난 왜 디머스가 양곡기 그림을 '나의 이집트'라고 
     이름붙였는지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겠어." 버드가 말했다.
       "그게 그런 그림이었나요? 나는 몰랐는데."
       "아무튼 아름다운 그림이야." 그는 메리온을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 있어? 내 코에 뭐라도 묻었나?"
       "왜요?"
       "당신이 바라보는 게 좀 --"
       "아, 아니에요. 마실 것 좀 드릴까요?"
       "으 -- 흠."
       "포도주 밖에 없는데."
       "좋아."
       메리온은 부엌 쪽으로 몸을 돌렸다.
       "가기 전에......" 그는 주머니에서 화장지로 싸인 작은 
     상자를 꺼냈다. "생일을 축하해."
       "오, 버드, 이럴 필요는 없어요."
       "이럴 필요는 없어요!" 그는 메리온의 말을 흉내냈다. "하지만 
     그래도 기쁘잖아."
       상자 안에는 단순한 모양의 삼각형 은제 귀걸이가 들어 
     있었다. "오, 고마워요! 정말 귀여운데!" 메리온은 탄성을 
     지르며 그에게 키스했다.
       그녀는 귀걸이를 달아보려고 서둘러서 장식장으로 다가갔다. 
     그는 그녀 뒤로 다가와서 거울 속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양쪽 귀걸이를 모두 달고 나자, 그는 그녀 주위를 한 
     바퀴 돌아보았다. "정말 예쁜데." 그가 말했다.
       또다시 키스를 하고 나서 그가 말했다. "아까 말하던 그 
     포도주가 어디에 있지?"

       메리온은 쟁반에 라피아 뚜껑으로 막힌 바돌리노 병과 컵 
     두개를 얹은 채 부엌에서 나왔다. 재킷을 벗은 버드는 책꽂이 
     앞의 마루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 무릎에 책을 펼쳐놓고 있었다.
       "당신이 프루스트를 좋아하는지는 몰랐는데." 그가 말했다.
       "오, 무척 좋아해요!" 그녀는 커피 테이블 위에 쟁반을 
     올려놓았다.
       "이쪽으로 -- " 그가 책꽂이를 가리켰다. 메리온은 책꽂이로 
     쟁반을 옮기고, 잔 두 개에 포도주를 따른 다음 하나를 버드에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다른 잔을 들고 신발을 벗은 뒤, 그의 옆에 
     다가가 앉았다. 그는 책장을 죽 넘겼다. "내가 감동받은 부분을 
     보여줄께." 그가 말했다.
       그는 스위치를 눌렀다. 암이 뱀 머리 모양으로 천천히 
     흔들리면서 돌고 있는 레코드 판 위에 닿았다. 그는 전축 뚜껑을 
     닫고서 방을 가로질러 와 파란 덮개가 씌워진 긴 소파의 메리온 
     옆에 앉았다.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제2번의 첫부분인 심오한 
     피아노 선율이 흘러나왔다. "아주 잘 어울리는 음악이에요." 
     메리온이 말했다.
       버드는 벽을 따라 놓여 있는 두꺼운 베개에 기대면서 램프 
     하나만이 켜져 있는 방을 훑어보았다. "이곳에 있는 모든 것이 
     아주 완벽한데." 하고 그가 말했다. "왜 전에는 나에게 
     들어오라는 말을 안했지?"
       그녀는 자기 옷의 단추 하나에 걸려 있는 라피아 실오라기를 
     집어올렸다. "모르겠어요......" 그녀가 말했다.
       "나는......당신이 들어오고 싶어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나 
     봐요."
       "내가 들어오고 싶지 않다니, 그럴 리가 있겠어?" 그가 
     물었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단추 줄을 어루만지면서 내려갔다. 
     따뜻한 그녀의 손이 가슴 사이에서 그의 손을 덮으면서 막았다.
       "버드, 나는 한 번도......경험해 본 적이 없어요."
       "알고 있어. 그런 말은 하지 않아도 돼."
       "나는 누구를 사랑해 본 적도 없어요."
       "나도 그래. 나도 어느 누구를 사랑해 본 적이 없어. 메리온을 
     만나기 전에는."
       "정말이에요, 응?"
       "오직 당신뿐이야."
       "엘렌도 사랑하지 않았나요?"
       "오직 당신뿐이야. 맹세할 수 있어."
       그는 다시 그녀에게 키스했다.
       그녀의 손이 그의 손에서 떨어져 그의 뺨으로 올라갔다.


        제 6 장 

       [뉴욕 타임스 지, 1951년 12월 25일 월요일]
       메리온 J 킹쉽 토요일에 결혼할 예정

       킹쉽 양은 뉴욕의 스펜스 고등학교와 컬럼비아 대학을 
     졸업했다. 지난주까지 그녀는 캠든 앤드 갤브레이스 
     광고대행사에 근무했다.
       한편, 2차 대전 동안 군대에 복무했고, 윈스콘신 주의 
     컬드웰에 있는 컬드웰 대학을 다녔던 장래가 유망한 신랑은 
     최근에 킹쉽 코퍼 주식회사의 국내 판매과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제 7 장 

       책상에 앉은 리처드슨 양은 오른손을 죽 뻗고서 포동포동한 
     자기의 손목에 죄어 있는 금팔찌를 쳐다보며 참 우아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것이 자기 어머니에게는 너무 젊어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는 다른 것을 주고 그 팔찌는 
     자기가 가져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녀의 손 뒤쪽이 갑자기 푸른색으로 변했다. 하얀 세로 
     줄무늬로 --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마치 독충이라도 본 것처럼 미소를 그쳤다.
       "안녕하세요." 어떤 남자가 명랑하게 말했다.
       리처드슨 양도 서랍을 열고는 바쁘게 하얀 타이프 종이 가장 
     자리를 구겼다. "회장님은 아직 점심식사 중이세요." 그녀는 
     쌀쌀맞게 말했다.
       "아가씨, 그분은 아까 12시에 점심식사를 했어요. 지금은 
     3시이고. 그분이 코뿔소입니까?"
       "만일 주말쯤에 약속을 원하신다면......"
       "난 오늘 오후에 그분을 만나고 싶은데."
       리처드슨 양은 거칠게 서랍을 닫았다. "내일이 
     크리스마스예요." 그녀가 말했다. "회장님은 오늘까지 주말 
     나흘간은 아무도 안 만나십니다. 무척 바쁘시다고요. 어떤 
     이유이든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라는 지시를 내리셨어요. 어떤 
     이유이든 -- "
       "그렇다면 그분은 점심식사 중이 아니군요."
       "회장님이 지시를......"
       그 남자는 한숨을 쉬었다. 한쪽 어깨 위로 코트를 걸치고 있는 
     그는 리처드슨 양의 전화기 옆에 있는 선반에서 종이 한 장을 
     끄집어냈다. "써도 되겠소?" 그는 종이를 들고 나서 물어보았다. 
     그는 구부린 채로 들고 있던 커다란 푸른색 책 위에 종이를 
     올려놓고, 리처드슨 양의 마노 펜대에서 펜을 꺼내어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갖다드리진 않을 거예요!" 하고 리처드슨 양이 
     말했다. "솔직하게 말해서요!"
       그 남자는 다 쓰고 나서 펜을 제자리에 놓고는 종이 위로 
     입김을 불었다. 그는 종이를 4등분으로 조심스럽게 접어서는 
     리처드슨 양에게 주었다. "그분에게 이것을 전해 주십시오." 
     그가 말했다. "필요하다면, 문 아래로 밀어넣어도 괜찮습니다."
       리처드슨 양이 그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나서 조용히 종이를 
     펼쳐서 읽어보았다.
       기분이 언짢은 얼굴로 그녀가 위를 올려다보았다. "도로시와 
     엘렌--?"
       그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그녀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회장님은 어떤 이유에서든 
     방해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녀는 마치 주문에서 방법을 
     찾아내듯이 부드럽게 되풀이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그냥 그것만 갖다주시오, 천사처럼."
       "이것 보세요......"
       그는 밝은 목소리와는 대조적인 표정으로 아주 심각하게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리처드슨 양도 얼굴을 찡그리며 한 번 
     더 종이를 쳐다보고는 다시 접었다. 그녀는 육중하게 보이는 
     나무문 쪽으로 움직였다. "좋아요." 그녀가 희미하게 말했다. 
     "하지만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회장님이 지시를 내려놓았다고요." 
     그녀는 가볍게 노크했다. 그리고는 문을 열고 변명하듯이 종이를 
     앞에 들고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1분 뒤에 그녀는 배신당한 듯한 표정으로 나왔다. "들어가 
     보세요." 그녀는 문을 열고 서서 앙칼지게 말했다.
       남자는 어깨에 코트를 걸치고, 책을 겨드랑이에 낀 채 그녀를 
     지나서 안으로 들어갔다.
       "아까처럼 계속 웃으시지 않고?" 그가 속삭였다.
       살짝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고, 레오 킹쉽은 손에 들고 있는 
     종이에서 눈을 떼어 올려다보았다. 그는 윗도리를 의자 등받이에 
     걸쳐둔 채 와이셔츠 차림으로 책상 뒤에 서 있었다. 안경도 붉은 
     이마 위로 치켜올려져 있었다.
       베니스풍의 블라인드 사이로 비쳐 들어오는 햇살이 그의 
     땅딸막한 몸집에 줄무늬를 그렸다. 그는 카펫이 깔린 방을 
     가로질러 자기에게 다가오고 있는 남자를 조심스럽게 옆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오 -- " 남자가 햇빛이 가려질 정도로 가까이 다가와서, 
     킹쉽이 그를 알아볼 수 있게 되었을 때 말을 꺼냈다. "자네." 
     그는 종이쪽지를 내려다보고는 그것을 구겼다. 걱정스러웠던 
     표정의 얼굴이 안도의 표정으로 바뀌었다가 이내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변했다.
       "안녕하십니까, 킹쉽 씨?" 남자는 손을 내밀며 말했다.
       킹쉽은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손을 내밀었다. "리처드슨 
     양에게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아서 이상하게 생각했지."
       남자는 미소를 지으며 손님용 의자에 앉아서 무릎에 코트와 
     책을 올려놓았다.
       "그런데 아무래도 자네 이름을 잊어버린 것 같군." 킹쉽이 
     말했다. "그랜트이었던가?" 그가 말했다.
       "갠트입니다." 그는 긴 다리를 편안한 자세로 꼬았다. "고든 
     갠트."
       킹쉽은 계속 서 있었다. "난 매우 바쁘네, 갠트 군." 그는 
     서류결재 책상을 가리키며 엄숙하게 말했다. "그러니 도로시와 
     엘렌에 관한 정보가 -- " 그는 구겨진 종이쪽지를 들어올렸다 -- 
     "블루 리버에서 자네가 설명하던 것과 똑같은 
     '이론'이라면......"
       "부분적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미안하네. 난 듣고 싶지가 않아."
       "제가 선생님의 인기 순위에서 1등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내가 자네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뜻인가? 그건 그렇지 않네. 
     절대로 그렇지 않아. 난 자네의 동기가 아주 훌륭한 거라고 
     생각하네. 자네는 엘렌을 좋아했어. 그리고 젊은이다운 열정도 
     보여줬네...... 하지만 그것은 나를 정말 고통스럽게 만드는 
     잘못된, 정말 잘못된 길로 들어섰어. 엘렌이 죽고 난 뒤에 금방 
     내 호텔 방에 뛰어들어서...... 그런 때에 과거를 
     들춰내고......" 그는 호소하듯이 갠트를 바라보았다. "자네는, 
     도로시가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았다는 걸 내가 믿고 싶어한다고 
     생각하나?"
       "그녀는 자살하지 않았습니다."
       "유서." 그가 지친 듯이 말했다. "유서가 있네."
       "그 유서는 자살을 제외하고도 열두 가지로나 생각해 볼 수 
     있는 모호한 문장이었습니다. 아니면 그녀가 그것을 쓰도록 
     유도될 수도 있지요." 갠트는 몸을 앞으로 구부렸다. "도로시는 
     결혼하기 위해서 시청 건물에 간 겁니다. 엘렌의 생각이 옳았던 
     거죠. 그녀가 살해당했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가 않네." 킹쉽이 잘라 말했다. "그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어. 자네도 경찰 이야기를 들었잖나--?"
       "가정집 강도 말입니까!"
       "그렇다네. 어째서 강도가 아니라는 건가?"
       "왜냐하면, 저는 우연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건 그런 
     종류가 아닙니다."
       "그건 자네가 아직 어리다는 증거야, 갠트 군."
       잠시 뒤 갠트가 엄숙하게 말했다. "그것은 두 번 다 같은 
     사람의 짓입니다."
       킹쉽은 지친 듯이 책상을 꽉 잡으며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왜 
     새삼스럽게 그 일을 다시 들먹이는 겐가?"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사람 일에 끼어들어서 -- 자네는 내가 어떻게 
     느낄 거라고 생각해 보았나?" 그는 안경을 다시 내려쓰고 장부를 
     넘겼다. "자, 그만 나가주겠나?"
       갠트는 일어서려고 하지 않았다. "전 방학이라 집에 와 
     있습니다." 그가 말했다. "제 집은 화이트 플레인스입니다. 저는 
     작년 3월에 이미 말씀드렸던 것을 단지 고쳐 말하기 위해서 뉴욕 
     중심가에서 한 시간이나 보낸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뭔가?" 킹쉽은 턱이 긴 그의 얼굴을 지친 듯이 
     바라보았다.
       "오늘 아침 타임스에 기사가 실렸더군요......사회면에."
       "내 딸에 대해서 말인가?"
       갠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앞가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버드 콜리스에 대해서 무엇을 아시죠?" 그가 물었다.
       킹쉽은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에 대해 무엇을아느냐고?" 
     그는 천천히 말했다. "그는 내 사위가 될 사람이네. 그에 대해서 
     무엇을 알다니, 도대체 무슨 뜻인가?"
       "그와 엘렌이 사귀었다는 것을 아십니까?"
       "물론 알고 있네." 킹쉽은 벌떡 일어섰다. "자넨 뭘 
     끌어내려는 건가?"
       "좀 이야기가 깁니다." 갠트가 말했다. 짙은 눈썹 아래에 있는 
     파란 눈이 예리하고 확고했다. 그는 킹쉽의 의자 쪽으로 손짓을 
     했다. "그렇게 계속 서 계시면 제 이야기가 더 고통스러우실 
     텐데요."
       킹쉽은 자리에 앉았다. 그는 금방이라도 다시 일어날 것처럼 
     앞쪽 책상 가장자리를 꽉 잡고 있었다.
       갠트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는 잠시 조용히 앉아서, 마치 
     신호를 기다리는 듯이 심각하게 담배를 지켜보면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잠시 뒤에 그는 편안하고도 부드러운 아나운서의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엘렌은 컬드웰을 떠나면서 -- " 그가 말했다. "버드 
     콜리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엘렌이 블루 리버에 도착한 직후에 
     저는 우연히 그 편지를 읽게 되었죠. 그것은 아주 인상적인 
     내용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저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살인 혐의자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으니까요." 그가 미소를 
     지었다. "저는 두 번이나 아주 신중하게 그 편지를 
     읽어보았습니다.
       엘렌이 죽던 그날 밤, 한번 본 증거면 죄다 믿어버리는 엘든 
     체서 경찰서장은 제게 엘렌이 제 여자친구냐고 물었습니다. 
     그것은 아마 그의 직업적인 경험에 의한 추정적인 질문이었겠죠. 
     그것으로 저는 콜리스라는 친구에 대해서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하나님만이 아는 곳에서 무기를 든 살인자와 
     함께 있을 엘렌에게서 제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하기 
     위해서였고, 한편으로는 그녀를 좋아했기에 그녀가 어떤 종류의 
     남자를 좋아했을까 궁금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직도 
     마음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경쟁자 버드 콜리스에 대한 유일한 
     정보인 그 편지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갠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계속해 나갔다. "처음에는 
     아무 내용도 아닌 것 같았습니다. 이름 -- 버드에게, 그리고 
     편지 봉투에 있는 주소 -- 윈스콘신 주 컬드웰 루즈벨트 가 몇 
     번지 버튼 콜리스.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좀더 
     생각을 해보고 나서, 저는 엘렌의 편지에서 몇 가지 힌트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들을 이어맞춰서 버드 콜리스에 
     대해 훨씬 많은 정보를 얻게 되었지요. 하지만 그때는 그것이 
     별로 중요하다고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성격에 대한 
     암시보다는 주로 그의 외형적인 사실들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게 바로 제가 찾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사실이 
     지금까지 계속 제게 머물러 있다가 오늘에야 비로소 중요하게 
     보이기 시작했단 말입니다."
       "계속하게." 갠트가 담배를 집어들자 킹쉽이 말했다.
       갠트는 편안하게 몸을 뒤로 기댔다. "무엇보다도 먼저, 엘렌은 
     자기가 컬드웰을 떠나 있다고 해도 학업에 뒤떨어지지 않을 
     거라고 썼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에게서 노트들을 빌릴 수 
     있었을 테니까요. 당시 엘렌은 4학년이었으니까, 주로 
     전공과정을 밟고 있었을 겁니다. 각 대학에서 4학년 과정은 
     1학년에게는 제한되어 있지요. 2학년들에게 제한되는 경우도 
     있고요. 만일 버드가 수업을 모두 엘렌과 함께 들었다면 -- 두 
     사람은 아마 함께 시간표를 짰겠지만 -- 그가 2학년일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모든 가능성에서 보면 그는 3학년이나 
     4학년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두 번째로, 엘렌은 편지에서 컬드웰에서의 처음 3년 동안의 
     그녀의 생활에 대해서 썼습니다. 그것은 도로시가 죽고 난 뒤의 
     그녀 생활과는 달랐다고 했죠. 그녀는 자기가 아주 '극성스러운 
     여자'였다고 썼으며, 저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지만, 그녀는 
     '당신은 나를 잘 모를 거예요......' 하고 써놓았습니다. 그것은 
     버드가 처음 3년 동안은 그녀를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이런 일은 스토다드 대학처럼 커다란 학교에서는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죠. 그러나 문제는 세 번째에서 걸립니다.
       세 번째로, 컬드웰 대학은 아주 작은 학교죠. 엘렌은 스토다드 
     대학의 10분의 1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그녀가 잘 모르고 대충 
     이야기한 것입니다. 저는 오늘 아침에 연감을 찾아보았습니다. 
     스토다드 대학은 1만 2천 명이 넘는데 비하여 컬드웰 대학은 
     겨우 8백 명 정도밖에 되지 않더군요. 엘렌은 편지에서, 
     도로시가 컬드웰 대학으로 가고 싶어하지 않았다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모든 사람들이 서로 알고 지내고, 
     그들이 무엇을 한다는 것까지도 아는 그런 곳이었기 때문이죠.
       첫번째,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의 사실을 합쳐서 생각해 볼 
     때 버드 콜리스는 적어도 3학년은 되었을 텐데, 엘렌은 4학년이 
     시작될 때까지도 그를 보지 못했다는 말이 됩니다. 그들이 아주 
     작은 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제가 알기론 
     그곳은 학구파 학생들에게는 귀찮은 곳이지요. 이런 것들로써 
     저는 단 한 가지 방법을 설명할 수 있고, 간단한 사실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그것은 -- 작년 3월에는 중요해 보이지 
     않다가 오늘 갑자기 엘렌의 편지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로 
     밝혀졌습니다. 그것은, 버드 콜리스는 '전학온 학생이고', 
     더군다나 그 시기는 도로시가 죽고 난 뒤 엘렌이 4학년이 
     시작되는 1950년 가을에 그곳으로 전학갔다는 뜻입니다."
       킹쉽은 얼굴을 찌푸렸다. "난 뭐가 뭔지 모르겠네 -- "
       "오늘은 1951년 12월 24일입니다." 갠트는 담배를 재떨이에 
     비비면서 말했다. "어머니께서 이 방탕한 아들의 침실로 아침 
     식사와 함께 가져온 뉴욕 타임스의 사회면에는 킹쉽이란 이름이 
     있었습니다 -- 메리온 킹쉽 양, 버튼 콜리스와 결혼하다. 제가 
     얼마나 놀랐을지 상상해 보십시오.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정말로 분석적인 제 마음이 몹시 
     혼란스러워졌습니다. 그것은 국내판매부의 한 신입사원이 킹쉽 
     코퍼 주식회사와의 도박에서 승리했다는 걸 의미하는 것 
     같더군요."
       "이것 보게, 갠트 군 -- "
       "그래서 저는 생각해 봤습니다 -- " 갠트는 계속했다. "어떻게 
     동생이 살해되고 나서 곧장 그 언니에게 접근할 수 있었을까 
     하고 말입니다. 킹쉽 집안의 두 딸들의 애인. 세 딸 중의 두 명. 
     나쁜 점수는 아니지요.
       그리고 나자, 제 머릿속에서 분석적인 면과 더러운 면이 
     섞여서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1950년 9월에 컬드웰 
     대학으로 전학간 버튼 콜리스에게는, 세 딸 중에서 세 번째 
     딸에게 도전한 것이 승리였구나 하고요."
       킹쉽은 갠트를 쳐다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터무니없는 생각이지요." 갠트가 말했다. "정말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의심에서 쉽사리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아침식사 쟁반 아래에서 빠져나와 책꽂이로 
     가서 1950년도 연감인 '스토다드 플레임'을 꺼냈습니다." 그는 
     겉장에 하얀 글씨가 쓰인 커다란 푸른 가죽책을 내보였다. 
     "2학년 칸에 -- " 그가 말했다. "재미있는 사진들이 몇 개 
     있더군요. 도로시 킹쉽과 드와이트 파웰이었지요. 지금은 두 
     사람 다 이 세상에 없습니다. 고든 갠트의 것은 없었습니다. 그 
     당시엔 제 얼굴을 영원히 남길 수 있는 5달러가 없었으니까요. 
     그 밖에 2학년 학생들 중에는 사진이 없는 애들이 제법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학생들 중에 -- " 그는 신문지 조각을 
     끼워둔 면을 펼쳐서 책을 한 바퀴 돌려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손가락으로 장기판만한 사진 하나를 가리켰다. 그는 그 옆에 
     쓰여 있는 말을 외고 있는지 줄줄 읊어댔다. "콜리스 버튼, 가로 
     열고 버드 가로 닫고, 매사추세츠 주 메나세트, 교양학부."
       킹쉽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는 거의 우표 크기만한 사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갠트를 쳐다보았다. 갠트는 앞으로 나와서 
     몇 장을 넘기고 또 다른 사진을 가리켰다. 그것은 도로시였다. 
     킹쉽도 역시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서 다시 고개를 
     치켜들었다.
       갠트가 말했다. "갑자기 아주 이상한 생각이 들더군요. 저는 
     선생님이 꼭 이것을 알아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왜?" 킹쉽은 딱딱하게 말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그러는 건가?"
       "그것에 대답하기 전에 제가 질문 하나 할까요, 킹쉽 씨?"
       "어서 해보게."
       "그는 선생님에게 스토다드에 다녔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죠?"
       "그래. 하지만 우린 그런 문제에 대해 이야기해 본 적이 
     없었네." 그는 재빨리 설명했다. "하지만 메리온에게는 말했을 
     거네. 메리온은 분명히 알고 있을 거야."
       "저는 그녀가 알고 있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왜 모른다는 건가?" 킹쉽이 물었다.
       "타임스 말입니다. 메리온이 그 기사에 대한 정보를 
     주었겠지요, 그렇죠? 대개 그런 것을 신부될 사람이 
     말하니까요."
       "글쎄."
       "그런데 거기엔 스토다드 대학에 대한 말이 없었습니다. 다른 
     결혼이나 약혼기사를 보면, 어떤 사람이 한 학교 이상을 
     다녔다면 그 학교 이름을 모두 말하는 게 상례입니다."
       "아마 그 애가 모두 말하는 게 귀찮아서 그랬을 걸세."
       "글쎄요. 아니면 그녀가 몰랐겠죠. 어쩌면 엘렌도 몰랐을 
     겁니다."
       "좋아, 도대체 자네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가?"
       "제게 화를 내지 마십시오, 킹쉽 씨. 사실들은 그것들 
     스스로가 말해 주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만들어낸 게 
     아닙니다." 갠트는 연감을 덮고 무릎에 내려놓았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그가 말했다. "콜리스가 메리온에게 스토다드 
     대학에 다녔다고 말했다면, 그 경우 우연의 일치라고 
     추측했겠지요. 그가 스토다드에 다녔다가 컬드웰 대학으로 
     전학했다는 것이 말입니다. 그는 제가 아는 것 이상으로 
     도로시에 대해서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또 
     한 가지는, 그가 그곳에 다녔다는 것을 메리온에게 말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무슨 뜻이지?" 킹쉽이 물었다.
       "그것은 그가 어떤 면에선 도로시와 관련되어 있다는 뜻이 
     아닐까요? 그렇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그가 그것을 
     숨겼겠습니까?" 갠트는 무릎에놓여 있는 연감을 내려다보았다. 
     "도로시에게 임신을 하게 만든 남자는 그녀를 없애버리고 싶었을 
     겁니다......"
       킹쉽이 그를 노려보았다.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군! 누가 
     도로시를 죽였고, 그리고 나서 엘렌을 죽였다...... 자네는 
     받아들여야 하네 -- 그것이 터무니없는 영화 같은 이론이라는 
     것을 말이야. 물론 인정하고 싶지야 않겠지만......" 갠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버드?" 킹쉽이 말했다. 그는 뒤로 
     기대어 앉았다. 그리고 동정어린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것 보게 -- " 그가 말했다. "그것은 터무니없는 
     소리야. 미친 소리라고!" 그는 계속 고개를 젓고 있었다 -- 
     "자네는 그 녀석이 누구라고 생각하나, 미친 녀석?" -- 그는 
     미소를 지었다 -- "자네는 지금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좋습니다." 갠트가 말했다. "그것이 미친 생각이라고 해두죠. 
     당분간은 말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메리온에게 스토다드 
     대학에 다녔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면, 정말 그렇다면 그는 
     어떤 식으로든 도로시와 관련이 있다는 게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가 도로시와 관련이 있다면, 그리고 엘렌과 관련되었고, 
     지금은 메리온과 관계를 갖고 있다면 -- 그 빌어먹을 선량한 
     사람은 선생님 딸들 중 하나와 결혼하기로 결심하고 계획적으로 
     접근한 겁니다! 누구든 상관없이!"
       킹쉽의 얼굴에서 천천히 미소가 사라지더니 이내 어두운 
     표정으로 변했다. 그의 손은 책상 끝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것은 그렇게 터무니없는 생각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킹쉽은 안경을 벗었다. 그는 두어 번 눈을 껌벅거리고 나서 
     벌떡 일어났다. "메리온에게 물어봐야겠네." 그가 말했다.
       갠트는 전화기를 바라보았다.
       "아니야 -- " 킹쉽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애는 
     전화기를 떼냈어. 결혼식 날까지 나와 함께 있으려고 아파트를 
     처분했지."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신혼여행 뒤에 그 애들은 
     내가 마련해 준 아파트로 들어가서 살게 될 거야......서튼 
     테라스......메리온이 처음엔 받지 않겠다고 하는 걸, 그가 그 
     애를 설득했지. 그는 그 애에게 아주 잘해 주고 
     있어......덕분에 우리 두 사람 사이도 훨씬 
     부드러워졌고......" 그들은 잠시 서로를 마주보았다. 갠트의 
     시선은 확고하고도 도전적이었으며, 킹쉽의 눈에는 걱정이 어려 
     있었다.
       킹쉽이 일어섰다.
       "그녀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갠트가 물었다.
       "그 애는 집에서......짐을 싸고 있을 거야." 그는 윗도리를 
     입었다. "그는 틀림없이 그 애에게 스토다드 대학에 대해서 
     말했을 걸세......"
       그들이 사무실을 나오자 리처드슨 양이 잡지책에서 눈을 
     들었다.
       "오늘은 들어가겠어, 리처드슨 양. 내 책상을 치워도 좋아."
       그녀는 호기심이 좌절되었는지 얼굴을 찌푸렸다. "예, 킹쉽 
     씨.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보내세요."
       "메리 크리스마스, 리처드슨 양."
       그들은 긴 복도를 걸어나갔다. 복도의 벽에는 위아래에 청동 
     받침대가 받쳐 있고 두꺼운 판유리에 끼워진 흑백 사진이 
     어지럽게 걸려 있었다. 지하탄광과 노천탄광, 제련소, 용광로, 
     화덕, 압연공장, 구리 철사와 튜브의 모습이 정교하게 확대된 
     사진들이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킹쉽이 말했다. "나는 그가 그 애에게 
     말했을 거라고 확신하네."


        제 8 장 

       "고든 갠트?" 메리온은 그와 악수를 하면서 이름을 불렀다. 
     "그 이름을 제가 알지 않느냐고요?" 그녀는 웃으면서 한 손으로 
     킹쉽의 팔을 잡아끌며, 다른 손으로는 윗도리 칼라에 달려 있는 
     진주가 박힌 금 브로치를 만지작거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블루 리버 -- " 킹쉽 씨는 딱딱하게 긴장된 목소리로 
     소개했으나, 메리온을 정면으로 바라보지는 못했다. "그에 
     대해서 네게 말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아, 예. 엘렌을 안다던 바로 그 사람인가요?"
       "맞습니다." 갠트가 말했다. 그는 들고 있던 책의 등에서 손을 
     떼어 축축하지 않은 곳으로 팔을 좀더 내렸다. 그는 킹쉽이 
     자기를 소개할 때 너무 흥분하지 않기를 바랐다. 타임스에 
     실렸던 메리온의 사진에는 빛나는 눈동자와 윤기나는 뺨, 그리고 
     그녀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나는 토요일에 결혼할 거예요'라는 
     말 이상의 것은 나타나 있지 않았었다.
       그녀는 곤란하다는 듯이 그들에게 방으로 들어가라는 몸짓을 
     했다. "앉을 데가 없어서 어떡하죠." 그녀는 신발 상자가 쌓여 
     있는 의자 쪽으로 갔다.
       "신경쓰지 말거라." 킹쉽이 말했다. "우리는 곧 일어날 거다. 
     1분이면 된다. 사무실에 일도 많이 쌓여 있고 해서."
       "아버지, 오늘밤 잊지 않으셨겠죠?" 메리온이 물었다. 
     "7시쯤이 좋겠어요. 그분은 5시에 도착할 거예요. 아마 먼저 
     호텔에 들르고 싶어하실 거예요." 그녀는 갠트를 돌아보았다. 
     "시어머니 되실 분이 오시기로 하셨어요." 그녀는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오, 하나님!' 갠트는 생각했다. '결혼하신다고요?'--'예, 
     토요일에요.' -- '축하합니다. 행운이 따르고, 원하는 일들이 
     모두 잘되길 바랍니다!' 그는 이런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그는 
     힘없이 미소를 지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이렇게 영광스럽게 찾아와 주셨는데 어떻게 대접해야 하죠?" 
     메리온은 말로 인사치레를 했다.
       갠트는 킹쉽이 먼저 이야기를 꺼내길 기다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메리온은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특별한 용건이 
     있으신 건가요?"
       잠시 뒤 갠트가 말을 꺼냈다. "나는 도로시도 알고 있죠, 아주 
     조금."
       "오!" 메리온은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나와 한 과목 수업을 함께 들었지요. 나는 스토다드 
     대학에 다니고 있습니다." 그는 잠깐 말을 멈췄다. "하지만 
     버드와는 수업을 함께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버드?"
       "버튼 콜리스. 당신의......"
       그녀는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버드는 스토다드 대학에 
     다니지 않았어요." 그녀는 그의 말을 고쳐주었다.
       "그는 스토다드 대학에 다녔습니다, 킹쉽 양."
       "아니에요." 그녀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는 컬드웰 대학에 
     다녔어요."
       "아뇨, 스토다드 대학에도 다녔고, 컬드웰 대학에도 
     다녔습니다, 킹쉽 양."
       메리온은 묘한 표정으로 킹쉽을 바라보며 웃었다 · 10· 마치 
     아버지가 데려온 손님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아버지가 설명해 
     주기를 바라는 듯이.
       "그는 스토다드 대학에 다녔었다, 메리온." 킹쉽이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책을 보여주게."
       갠트는 연감을 열어, 사진을 가리키면서 메리온에게 
     건네주었다.
       "오, 이런 일이 -- " 그녀가 말했다. "내가 사과를 
     해야겠군요. 난 전혀 몰랐어요......" 그녀는 그 책의 표지를 
     흘끗 보았다. "1950년."
       "그는 1949년도 연감에도 나와 있습니다." 갠트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는 스토다드 대학에 2년 동안 다니다가 
     컬드웰 대학으로 전학간 겁니다."
       "그렇다면 -- " 그녀가 말했다. "우습게 됐네요? 그는 
     도로시를 알았을지도 모르겠는데요." 그녀는 마치 이것이 그녀와 
     약혼자 사이에 또 다른 공통점이라도 되는 것처럼 유쾌하게 
     말했다.
       "그가 그런 것에 대해 당신에게 말하지 않던가요?" 갠트는 
     킹쉽이 그만두라고 고개를 흔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물어보았다.
       "아뇨. 말한 적이 없는데......"
       그녀는 그제서야 두 남자 사이에 흐르고 있는 긴장과 어색함을 
     알아차리고 천천히 책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뭐가 
     잘못되었나요?" 그녀는 호기심에서 물어보았다.
       "아무 일도 아니다." 킹쉽이 말했다. 그는 확실한 대답을 
     바라듯이 갠트를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두 분이 왜 이렇게 서 계신 거죠? 마치......" 
     그녀는 다시 책을 보았다가 아버지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녀의 
     목에서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났다. "그것 때문에 여기까지 
     올라오신 건가요? 이 이야기를 하려고요?"
       "우리는......다만 네가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것뿐이야."
       "왜요?" 그녀가 물었다.
       "우린 다만 궁금했어. 그게 전부야."
       그녀의 시선이 갠트에게로 움직였다. "왜요?"
       "왜 버드가 그것을 숨겼을까요?" 갠트가 진지하게 물었다. 
     "만일-- "
       킹쉽이 말렸다. "갠트!"
       "그것을 숨겼다고요?" 메리온이 말했다. "대체 그게 무슨 
     말씀이죠? 그는 숨긴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엘렌 때문에 학교에 
     대해선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 이야기가 나오지 않은 
     것뿐이에요."
       "그와 결혼하려고 하는 여자가 그가 스토다드 대학에 2년 동안 
     다녔었다는 것을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요?" 갠트는 매정한 투로 
     다시 말했다. "만일 그가 도로시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면 -- "
       "관련되었다고? 도로시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커진 그녀의 
     눈이 갠트에게로 향해지더니 점점 작아지면서 마침내 킹쉽에게로 
     돌아갔다. "이게 무슨 일이죠?"
       킹쉽은 눈에 먼지라도 들어간 것처럼 약간 불편하게 
     껌벅거렸다.
       "아버지가 이 사람에게 돈을 얼마나 주었나요?" 메리온이 
     차갑게 말했다.
       "돈을 주다니?"
       "그런 걸 캐내기 위해서요!" 그녀가 발끈 화를 냈다. "더러운 
     일을 캐내기 위해서 말이에요! 더러운 일을!"
       "이 사람은 자기 발로 나를 찾아온 거다, 메리온!"
       "오, 예, 아주 때맞추어서 갑자기 나타난 거군요!"
       갠트가 말했다. "나는 타임스에 난 당신의 기사를 봤어요."
       메리온은 아버지를 노려보았다. "아버지는 이런 식으로 하지 
     않겠다고 저하고 맹세하셨어요." 그녀가 가혹하게 몰아붙였다. 
     "분명히 맹세하셨잖아요. 다른 사람에게 물어본다거나, 뒷조사를 
     하고 그를 죄인처럼 다룬다는 것은 생각도 해보지 않으셨다고 
     했잖아요? 오, 아니에요. 그런 건 대단찮은 일이에요!"
       "난 사람을 시킨 적 없다." 킹쉽이 날카롭게 말했다.
       메리온은 등을 돌렸다. "아버지 마음이 변하신 것 같아요." 
     그녀가 말했다. "저는 정말 아버지가 버드를 좋아한 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저도 좋아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아버지는 그렇지 않으세요."
       "메리온......"
       "아니에요. 아버지가 우리 두 사람을 좋아한다면 이런 일을 
     하실 리가 없어요. 아파트며, 일자리......그리고 이런 것에 
     따라서 모든 것이 계속 진행되고 있는 거예요."
       "진행되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메리온. 내가 
     맹세하마......"
       "아무것도 없다고요? 제가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나 정확하게 
     말씀드리죠." 그녀는 다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제가 아버지를 모른다고 생각하세요? 버드가 도로시와 관계를 
     맺었으며, 도로시를 곤경에 빠뜨린 장본인이다. 그리고 그는 
     엘렌과 사귀었다. 그리고 지금은 너와 결혼하려 하고 있고 -- 
     모두 돈을 위해서, 오로지 아버지의 귀중한 돈을 위해서 
     계획적으로 꾸미고 있는 일이라고요 -- 아버지는 그렇게 
     생각하고 계시다고요." 그녀는 연감을 그의 손으로 쑤셔넣었다.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군요, 킹쉽 양." 갠트가 말했다. "그건 
     모두 내 머릿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이지, 당신 아버지가 
     생각하시는 게 아닙니다."
       "알겠니?" 킹쉽이 말했다. "이 청년은 자기 발로 나를 
     찾아왔다."
       메리온은 갠트를 노려보았다. "당신 누구예요? 뭣 때문에 남의 
     일에 끼어드는 거죠?"
       "난 엘렌을 알던 사람입니다."
       "그래서요?" 그녀가 쏘아붙였다. "당신, 버드를 알아요?"
       "불행하게도 그런 영광은 갖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그의 뒤에 숨어서 
     그를 고발하려는 이유를 설명해 주세요."
       "그건 긴 이야기입니다."
       "그만두게, 갠트." 킹쉽이 끼어들었다.
       메리온이 말했다. "버드를 시기하나요? 그런 거예요? 엘렌이 
     당신보다 그를 더 좋아했었다고 해서요?"
       "그렇습니다." 갠트가 냉담하게 말했다. "나는 온통 질투심에 
     불타고 있습니다."
       "명예훼손죄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나요?" 그녀가 물었다.
       킹쉽은 비스듬히 문 쪽으로 가서 갠트에게 눈짓을 했다. 
     "좋아요." 메리온이 말했다. "두 분 모두 나가시는 게 
     좋겠어요."
       "잠깐만요." 갠트가 문을 열 때 그녀가 말했다. "당신, 이젠 
     이 일에서 손을 뗄 건가요?"
       킹쉽이 말했다. "손을 떼고 말고 할 것도 없다, 메리온."
       "뒤에서 조종하는 사람이 누구든간에." -- 그녀는 갠트를 
     바라보았다 -- "그것에서 손을 떼세요. 우린 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어요. 굳이 엘렌이 끼어 있는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잖겠어요? 우리는 단순히 이야기하지 않은 
     것뿐이에요."
       "네 말이 맞다, 메리온." 킹쉽이 말했다. "맞아." 그는 갠트를 
     따라 홀에 나가서 문을 잡아당기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런 일은 제발 그만두세요!" 그녀가 말했다.
       "그래." 그는 머뭇거리다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늘밤에 집에 오겠지, 응, 메리온?"
       그녀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잠시 생각을 했다. "저는 
     버드 어머니의 기분을 상하게 해드리고 싶지 않아요." 그녀가 
     말했다.
       킹쉽은 문을 닫았다.
       그들은 렉싱턴 가에 있는 약국에 들어가서 갠트는 커피와 체리 
     파이를, 킹쉽은 우유를 시켰다.
       "지금까지는 잘 되어가고 있습니다." 갠트가 말했다.
       킹쉽은 자기 손에 들려 있는 종이 내프킨을 보고 있었다. 
     "그게 무슨 뜻인가?"
       "적어도 우리는 현재 우리의 위치를 알아냈습니다. 그는 
     메리온에게 스토다드 대학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어요. 그것은 그 
     사실을 확실하게 말해 주는 겁니다 -- "
       "자네도 메리온 말을 들었지?" 킹쉽이 말했다. "그들은 엘렌 
     때문에 학교 이야기를 안했다고 했네."
       갠트는 살짝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선생님 -- 
     " 그는 천천히 말했다. "그녀는 그런 식으로 만족해 할 겁니다. 
     그녀는 그에게 빠져 있으니까요. 그러나 약혼녀에게 자기가 
     다녔던 대학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건 그가 메리온에게 거짓말한 것과는 달라." 킹쉽이 
     날카롭게 말했다.
       갠트가 비웃듯이 말했다. "그들은 다만 학교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는 것뿐이죠."
       "상황을 고려해 보면 난 그걸 이해할 수 있네."
       "물론이죠. 그가 도로시와 관계를 맺었다는 상황을 고려해 
     보면 말입니다."
       "자네 멋대로 그런 가정을 만들지 말게."
       갠트는 천천히 커피를 젓고서 한 모금 마셨다. 그는 크림을 
     좀더 넣고 다시 저었다. "선생님은 그녀가 두려운 거죠, 그렇지 
     않습니까?" 그가 말했다.
       "메리온이? 엉뚱한 소리 말게." 킹쉽은 우유잔을 탁 
     내려놓았다. "사람이란 죄가 있다고 밝혀질 때까지는 무고한 
     걸세."
       "그렇다면 증거를 찾아봐야겠군요."
       "이것 보게. 자네는 시작하기도 전에 그가 돈을 노리고 있다고 
     추정했네."
       "전 그것보다 훨씬 더 끔찍한 상태를 추정하고 있습니다." 
     갠트가 파이 한 조각을 포크로 찍어 들어올리며 말했다. 그는 
     그것을 삼키고 나서 말을 이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킹쉽은 다시 내프킨을 내려다보았다. "아무것도."
       "그 두 사람이 결혼하게 내버려두실 겁니까?"
       "내가 반대하고 싶어도, 지금으로서는 두 사람을 막을 도리가 
     없어. 두 사람 모두 스물한 살이 넘었잖은가?"
       "탐정을 고용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아직 나흘이나 남아 
     있으니까요. 아마 탐정들은 뭔가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
       "그럴지도 모르지." 킹쉽이 천천히 말했다. "찾아낼 것이 
     있다면 -- 어쩌면 버드가 그걸 눈치채고 메리온에게 말할지도 
     모르지."
       갠트는 미소를 지었다. "제가 선생님과 메리온에게 어리석은 
     행동을 한 것 같군요."
       킹쉽은 한숨을 쉬었다. "나도 할 말이 있네." 그는 갠트를 
     보지 않고 말했다. "난 아내와 세 딸이 있었지. 딸 둘은 이미 
     내게서 떨어져 나갔네. 아내는 내가 밀어서 내보냈어. 어쩌면 세 
     딸 중의 하나는 내가 밀어낸 건지도 모르지. 아무튼 지금 내게는 
     하나밖에 없네. 나는 쉰일곱 살에 딸 하나와, 골프치고 사업 
     이야기를 나누는 두세 명의 친구가 있을 뿐이야. 그게 
     전부일세."
       잠시 뒤 킹쉽은 몹시 굳은 얼굴로 갠트를 바라보았다. "자네는 
     어떤가?" 그가 물었다. "이 일에 자네가 그렇게 관심을 갖는 
     이유가 뭔가? 어쩌면 자네는 그저 자네의 분석적인 두뇌를 
     움직여 보고, 사람들에게 자네가 얼마나 명석한가를 과시하며 
     즐기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자네는 그렇게까지 
     들쑤셔놓을 필요는 없어. 자네는 내 사무실에 와서 엘렌의 
     편지에 대해서 말했네. 그리고 내 책상 위에 연감을 펼쳐놓고서, 
     '버드 콜리스는 스토다드에 다녔습니다.' 하고 늘어놓았네. 모두 
     자네가 과시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 아닌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죠." 갠트는 가볍게 말했다. "하지만 
     저는 그가 선생님의 딸들을 죽였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고, 
     살인자는 처벌되어야 한다는 돈키호테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킹쉽은 우유를 다 마셨다. "자네는 그냥 욘커즈에 돌아가서 
     방학이나 즐기는 게 좋겠군."
       "화이트 플레인스입니다." 갠트는 포크 옆으로 파이 조각에 
     남아 있는 시럽을 그러모았다. "위궤양인가 보죠?" 그는 빈 
     우유잔을 바라보며 물었다.
       킹쉽은 고개를 끄덕였다.
       갠트는 의자 뒤로 몸을 기대고 옆에 있는 사람을 훑어보았다. 
     "13㎏ 정도 살이 찌신 것 같군요." 그는 빨갛게 시럽이 묻은 
     포크를 입에 넣어서 싹 빨아먹었다. "버드는 선생님이 10년 
     이상은 자리를 지키실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어쩌면 
     그는 3~4년은 참았다가 계속 선생님을 재촉할지도 모르죠."
       킹쉽은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는 돈뭉치에서 1달러를 꺼내어 
     카운터 위에 올려놓았다. "잘 가게, 갠트 군." 그는 말하고 나서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카운터에 있는 사람이 와서 그 돈을 가져갔다. "또 시키실 게 
     있습니까?" 그가 물었다.
       갠트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화이트 플레인스 행 5시 19분 차를 탔다.


        제 9 장 

       어머니에게 편지를 쓰면서 버드는 아주 어렴풋하게 킹쉽의 
     재산에 관해서 비쳤었다. 한두 번 킹쉽 코퍼 주식회사 이야기를 
     했으나, 구체적인 내용을 쓴 적은 없었다. 사춘기의 유흥에 관한 
     바람만큼이나 모호하고 분명하지 않은 부(富)에 대한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는 어머니가 아들이 그러한 대기업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선 거의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그는 
     확신했다. 그는 어머니에게 메리온과 그녀의 아버지를 소개하는 
     순간, 그리고 킹쉽의 웅장한 아파트에 둘러싸이는 순간을 고대해 
     왔었다. 어머니는 무늬가 박힌 테이블과 반짝이는 샹들리에를 
     킹쉽의 능력의 증거가 아니라, 버드 자신의 능력의 증거라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그날 저녁은 실망이었다.
       그의 어머니의 반응은 그가 예상했던 것에 빗나가지는 않았다. 
     어머니는 입을 헤 벌리고, 가볍게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하나가 
     아니라 계속 이어지는 기적을 보는 것처럼 '씩씩'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정장으로 차려입은 집사! -- 부드러운 카펫의 촉감, 
     종이가 아니라 정교하게 짜여진 헝겊으로 된 벽지, 가죽으로 
     장정된 책들, 금시계, 집사가 샴페인을 가져온 은쟁반 -- 
     샴페인! -- 크리스탈 가블릿 (긴 받침이 달린 잔)에 
     넣어서......그녀는 부드럽게 미소지으면서 감탄을 연발했다. 
     "아름답구나. 정말 아름다워." 최근에 퍼머한 듯한 뻣뻣한 잿빛 
     머리를 가볍게 끄덕이면서 -- 그녀는 그러한 물건들은 자신에겐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축배를 
     들며 그녀의 시선이 버드와 마주칠 때면, 일로 거칠어진 한쪽 
     손으로 앉아 있는 긴 의자의 천을 은밀히 감탄하면서 그녀는 
     터질 듯한 자부심으로 키스를 퍼부을 것처럼 그에게로 몸을 
     내미는 것이었다.
       아니, 사실 그의 어머니의 태도는 부드럽고 훌륭했다. 단지, 
     그날 저녁의 실망은 메리온과 레오 킹쉽이 말다툼을 한 것 
     때문이었다. 메리온도 피할 수 없었을 때만 아버지에게 말했다. 
     게다가 그 다툼은 버드 때문인 것이 틀림없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 앞에선 절대로 그런 적이 없었던 메리온이 분명하고도 
     대담하게 감정을 내보이며 그에게 달라붙어서 그를 '내 
     사랑'이나 '자기'라고 부르는 반면, 레오는 머뭇거리며 초점 
     없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희미한 근심이 
     신발 속에 들어 있는 돌멩이처럼 그를 찌르기 시작했다.
       저녁식사 역시 음울한 분위기였다. 레오와 메리온은 테이블 
     가장자리에 앉았고, 그 옆에 그의 어머니와 그가 앉았다. 하지만 
     대화라고는 겨우......가장자리 근처에서만 오고갔을 뿐이었다. 
     아버지와 딸은 이야기하지 않았고, 어머니와 아들은 이야기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말할 수 있는 거라야 구경꾼 같은 이 
     사람들 앞에서는 개인적이고 전문적인 이야기일 뿐이니까. 
     그래서 메리온은 그를 '자기'라고 불렀고, 그의 어머니에게는 
     서튼 테라스 아파트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의 어머니는 
     레오에게 '아이들' 이야기를 했으며, 레오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그에게 빵을 건네달라고 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는 마치 빵을 고르듯이 천천히 포크와 스푼을 들며 
     침묵을 지켰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는 그런 모습을 보고 똑같이 
     행동할 수 있었다 -- 말이나 신호도 없는 애정어린 음모가 그들 
     사이의 결합을 단단하게 해주어 식사를 즐겁게 할 수 있었다. 
     메리온과 레오가 자기들의 음식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 테이블 
     사이를 오가는 미소 -- 자랑스럽고, 사랑스럽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이 빠져들게 된 예상치 못했던 행운 때문에 훨씬 
     더 만족스러워 보이는 미소.
       식사가 끝나고 나서, 테이블에 은제 라이터가 있었지만 그는 
     자기 성냥으로 메리온과 자기 담배에 불을 붙이고, 그의 
     어머니가 하얀 성냥갑 위에 구릿빛으로 버드 콜리스라고 찍힌 
     것을 알아차릴 때까지 식탁보 위에 있는 책을 공연히 톡톡 
     두드렸다.
       하지만 그의 신발에는 여전히 돌멩이가 들어 있었다.

       나중에 크리스마스 이브라서 그들은 교회에 갔고, 예배가 끝난 
     뒤 버드는 메리온을 레오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게 하고는 
     어머니를 호텔까지 데려다 주려고 했다. 그러나 곤란하게도 
     메리온은 그녀답지 않은 어리광을 부리며 호텔까지 함께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래서 레오는 버드가 여자들을 택시에 
     태우는 동안 혼자서 가버렸다. 그는 두 여자 사이에 앉아서, 
     어머니에게 자기들이 탄 차가 지나가는 곳의 이름을 말해 
     주었다. 운전사는 그가 지시하는 대로 차를 몰았으며, 한 번도 
     뉴욕에 와본 적이 없는 콜리스 부인은 타임스 광장의 밤경치를 
     보게 되었다.
       그는 어머니가 묵는 호텔 로비 엘리베이터 앞에서 어머니와 
     헤어졌다. "매우 피곤하시죠?" 그가 물어보자 어머니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는 약간 실망했다. "가서 바로 주무시지 마세요." 
     그가 말했다. "나중에 전화드릴 테니까요." 그들은 작별 키스를 
     했고, 여전히 버드의 손을 잡고 있는 콜리스 부인은 메리온의 
     뺨에 행복하게 키스했다.
       레오의 집으로 택시를 타고 가는 동안 메리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 자기?"
       "아무 일도 없어요." 그녀는 내키지 않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왜요?"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는 아파트 문 앞에서 그녀와 헤어지려고 했다. 그러나 
     걱정의 돌멩이가 점점 날카로워지는 것 같아서 그녀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킹쉽은 이미 잠자리에 들어 있었다. 그들은 
     거실로 들어가서, 메리온이 라디오를 켜는 동안 버드는 담뱃불을 
     붙였다. 그들은 긴 소파에 앉았다.
       그녀는 그에게 어머니가 매우 좋으신 분 같다고 말했다. 그는 
     자기는 상당히 기쁘며, 자기 어머니도 메리온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들은 장래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그는 
     그녀의 목소리가 딱딱해진 것에서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눈을 
     반쯤감은 채 뒤로 기대어 앉아 전에는 들어본 적이 없는 것처럼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가 말을 멈출 때와 
     목소리가 바뀔 때, 그리고 그녀의 억양이 올라가는 순간이면 
     그의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닐 거야! 
     그럴 리가 없어! 무의식적으로 다소 거칠게 대했거나 무슨 약속 
     같은 걸 잊어버린 정도겠지 뭐. 무슨 일이야 
     일어나려고......그는 대답하기 전에 잠시 시간을 갖고 자기가 
     할 말을 다시 생각해 보고, 또 그 말에 대한 영향을 생각해 보곤 
     했다. 마치 체스를 두는 사람이 말을 움직이기 전에 한수 한수 
     생각해 보듯이.
       그녀는 아기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두 명이 좋아요." 그녀가 
     말했다.
       그는 무릎에 있던 왼손으로 바지 주름을 잡았다. 그는 미소를 
     지었다. "아니면 세 명." 그가 말했다. "네 명이 어떨까?"
       "두 명이 좋아요." 그녀가 말했다. "그래야 하나는 컬럼비아 
     대학에 가고, 하나는 컬드웰 대학에 가지요."
       컬드웰. 컬드웰 대학에 대한 것. 엘렌?
       "우리 애들은 아마 미시건 대학이나 뭐 그런 곳에서 졸업하게 
     될 거야." 그가 말했다.
       "만일 한 명만 낳는다면 -- " 메리온이 계속해 나갔다. 
     "컬럼비아 대학에 입학했다가 컬드웰 대학으로 전학하면 
     되겠군요. 아니면 거꾸로 하든지." 그녀는 웃으면서 몸을 앞으로 
     숙여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눌렀다. 그는 그것이 평소에 그녀가 
     담배를 끄는 것보다 훨씬 더 신중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컬드웰 대학으로 전학을 간다, 컬드웰 대학으로......그는 
     조용히 기다렸다. "아니에요." 그녀가 말했다. "사실은 우리 
     애가 그렇게 하는 건 바람직하지 못해요." -- 그녀는 결코 
     바보스러운 잡담을 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집요하게 자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러면 신임을 잃을 거예요. 전학이란 
     매우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들이 뒤따르니까요."
       그들은 잠시 동안 아무 말 없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아냐, 그렇지 않아." 그가 말했다.
       "그렇지 않다고요?" 그녀가 물어보았다.
       "그래 -- " 그가 말했다. "난 조금도 신임을 잃지 않았어."
       "당신은 전학을 한 적이 없잖아요?" 그녀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야 -- " 그가 말했다. "내가 메리온에게 말했잖아."
       "아니, 안했어요. 그런 말은 전혀 -- "
       "했어, 자기. 나는 메리온에게 분명히 말했어. 난 스토다드 
     대학에 다니다가 컬드웰 대학으로 전학갔어."
       "그곳은 내 동생 도로시가 다니던 곳이에요, 스토다드 
     대학은!"
       "알고 있어. 엘렌이 내게 말해 주었으니까."
       "하지만 당신은 그 애를 안다고 말하지 않았잖아요?"
       "엘렌이 그녀 사진을 보여줬을 때, 나는 그녀를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어.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 
     미술관에서 말했었잖아."
       "아니, 안 그랬어요. 틀림없이 말하지 않았어요."
       "이상하군. 난 스토다드 대학에 2년 동안이나 다녔었어. 
     메리온이 몰랐었다고 말하려는 뜻은 -- " 메리온은 자기가 
     의심했던 것을 갚으려는 듯이 열렬하게 그에게 키스해 댔다.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몇 분 뒤에 그는 자기 손목시계를 보았다. "난 그만 가보는 게 
     좋겠어." 그가 말했다. "이번 주에는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자둬야겠어. 다음주에는 잠을 충분히못 잘 것 같은 생각이 
     들거든."

       단지 레오가 어떻게 해서 그가 스토다드 대학에 다녔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뿐이다. 위험스러운 일은 없다. 없어! 곤란한 
     문제가 있다면 결혼 그 자체도 날아가 버리는 것이다 -- 오, 
     하나님! -- 그러나 위험은 없다. 경찰이 추적해 올 위험도 없어. 
     돈많은 여자를 따라다니는 것이 법에 걸리지는 않는다. 그렇지?
       그런데 왜 이렇게 늦게서야? 만일 네오가 그를 조사해 보고 
     싶었다면 왜 좀더 빨리 하지 않았을까? 왜 오늘?......타임스 
     지에 발표......그래! 누군가가 그 기사를 보았겠지 -- 스토다드 
     대학에 다녔던 누군가가. 레오 친구의 아들이거나, 뭐 그런 
     사람이 신문기사를 보고 말했을 것이다. "내 아들과 자네 사위 
     될 사람이 스토다드 대학에 함께 다녔었다는군." 그래서 레오는 
     둘씩 둘씩 묶었겠지. 도로시, 엘렌, 메리온 -- 황금 벌레. 그가 
     메리온에게 말을 했고, 그 문제로 부녀가 말다툼을 했을 것이다.
       제기랄, 처음부터 스토다드 대학에 대해 말했었으면 이런 
     문제는 없었을 텐데! 하지만 그건 미친 짓이었을 것이다. 레오는 
     곧 의심했을 것이고, 메리온은 그의 이야기에 신경을 썼을 
     것이다. 그런데 왜 지금에서야 그 문제를 들먹이는 걸까!
       그래도 겨우 의심하는 것만으로 레오가 뭘 할 수 있을까? 그건 
     단순히 의심일 뿐이다. 그 노인은 그가 도로시를 알았었는지 
     확신할 수가 없다. 혹시 레오는 그의 정보가 메리온에게 
     들어가지 않게 할 수 있었을까? 아니다, 그는 자기가 알고 있는 
     증거를 모두 메리온에게 주어서 그녀를 확신시키려고 했을 
     것이다. 그래, 레오는 확신하고 있지는 않은 것이다. 그에게 
     확신시킬 수 있었을까? 어떻게 스토다드 녀석들, 지금은 4학년이 
     되었을 그들이 누가 도로시와 함께 다녔었는지 기억할 수 
     있을까?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은 
     크리스마스고! 방학중이다. 그들은 각 도시로 뿔뿔이 흩어져 
     있을 것이다. 결혼식까지는 단지 나흘밖에 남지 않았다. 레오는 
     메리온에게 연기하라고 말할 순 없을 것이다.
       그는 계속 의심만 하고 있을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그리고 토요일. 일이 
     더럽게 되어 그가 돈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 해도 
     그것이 레오가 증명할 수 있는 전부이다. 그는 도로시가 
     자살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 그는 
     미시시피 강의 20피트(약 6·)나 되는 진흙 아래에 묻혀 있을 그 
     권총을 끄집어내지도 못할 것이다.
       그리고 결혼식은 계획대로 치러지겠지. 그리고 나서 스토다드 
     녀석들이 기억을 해낸다고 해도 레오가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겠나? 이혼? 취소? 두 가지 모두 증거가 충분하지 못하다. 
     메리온에게 한 가지를 택하라고 설득한다고 해도 아마 그녀는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까? 아마 
     레오는 그에게 돈을 주어서 헤어져 달라고 하겠지......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다......레오는 자기 딸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지독한 황금 벌레에게 얼마나 줄까? 어마어마한 
     액수겠지, 아마도.
       하지만 메리온이 물려받을 것만큼 많지는 않을 것이다. 꿩먹고 
     알먹는 것이 어떨까?
       그는 하숙집으로 돌아와서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혹시 제 전화 때문에 깨신 건 아니세요? 메리온의 집에서 
     걸어서 돌아왔어요."
       "괜찮다, 애야. 오, 버드. 그 애는 아주 아름다운 여자더구나! 
     사랑스러워! 그렇게 상냥하고......나도 아주 기쁘다!"
       "고맙습니다, 어머니."
       "그리고 킹쉽 씨도 아주 좋은 분이더구나! 애야, 그의 손을 
     보았니?"
       "손이 어때서요?"
       "아주 깨끗해!"
       그는 웃었다.
       "버드 -- " 그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들은 틀림없이 
     굉장한 부자일 게야. 굉장한 부자......"
       "제 생각에도 그런 것 같아요, 어머니."
       "그 아파트는 말이야......영화에서나 나오는 저택 같더구나! 
     오, 하나님......!"
       그는 어머니에게 서튼 테라스 아파트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다. "조금 기다리시면 보시게 될 거예요, 어머니!" -- 
     그리고 제련소 방문에 대한 이야기도 -- "그분이 화요일에 
     데려간다고 하셨어요. 그분은 제가 모든 조직에 익숙해지기를 
     원하시거든요!" -- 그리고 이야기가 끝날 때쯤 그녀가 말했다.
       "버드, 네 생각은 전혀 바뀌지 않았니?"
       "무슨 생각이요?"
       "학교에 돌아가지 않겠다는 생각 말이다."
       "아, 그거요 -- " 그가 말했다. "그건 바뀌지 않았어요."
       "오......" 그녀는 실망했다.
       "어머니, 면도용 크림 아시죠?" 그가 말했다. "단추를 누르면 
     생크림처럼 깡통에서 그게 나오죠?"
       "응?"
       "글쎄, 그것은 바로 그런 거예요. 그 생각이 저를 그리로 
     몰아붙여요."
       그녀는 가엾다는 듯이, "오 -- " 하며 숨을 내쉬었다. "만일 
     그게 부끄러운 게 아니라면......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거라, 
     알았지?"
       "예, 그것들은 단지 저를 몰아붙일 뿐이에요."
       "글쎄 -- "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힘없이 말했다. "그 같은 
     일이 있었구나. 그래도 그건 확실히 부끄러운 일이다. 그런 
     생각도......"
       어머니와 통화를 끝낸 그는 방안으로 들어가서 모든 것이 다 
     잘 되어간다고 느끼며 침대에 죽 뻗어 누웠다. 레오와 그의 
     의심들은 그에게는 어려운 일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모든 
     일은 완벽하게 될 것이다.
       그가 단 한 가지 해야 할 일은 -- 그녀가 돈을 얼마나 
     가졌는지 알아보는 것이다.


        제 10 장 

       스탬포드와 브리지포트, 그리고 뉴 헤이븐과 뉴 런던을 지난 
     열차는 왼쪽으로는 눈에 덮인 평지, 오른쪽으로는 잔잔한 물 
     사이를 지나 코낵티컷의 남쪽 경계를 따라 계속 동쪽으로 치닫고 
     있었다. 구불구불한 열차에 탄 사람들은 흥미 없는 시선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복도와 통로는 크리스마스 인파로 가득 
     들어찼다.
       갠트는 통로의 먼지낀 창문을 마주보고 서서 광고판들을 세고 
     있었다. 그는 크리스마스를 이렇게 끔찍스럽게 보내게 된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6시가 조금 지나서 기차는 프로비던스에 도착했다.
       역에서 갠트는 안내소에 있는 우둔한 안내원에게 몇 가지 
     질문을 했다. 그리고 나서 시계를 보며 건물을 나왔다. 밖은 
     벌써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넓은 진창길을 지나 스파 (약국을 
     겸한 다방) 라고 불리는 곳으로 들어가서 즉석 스테이크 
     샌드위치와 민스미트, 그리고 커피를 주문했다. 크리스마스 
     저녁식사 -- 그는 스파를 나와서 다음다음에 있는 약국에 가서 
     1인치 폭짜리 스카치 테이프를 샀다. 그는 정거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불편한 벤치에 앉아서 보스턴 태블로이드판 신문을 
     읽었다. 7시 10분에 다시 역을 나와 근처에 버스 세 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갔다. 그는 메나세트 -- 서머시트 -- 폴 
     -- 리버라고 쓰여진 푸른색과 노란색 줄무늬 버스에 올랐다.
       7시 20분에 버스는 메나세트에서 네 블럭 떨어진 메인 
     가(街)에 잠시 멈춰서 승객 몇 명을 내려놓았다. 그 사람 사이에 
     갠트가 끼어 있었다. 그는 잠깐 주위를 둘러보고 나서, 1910년대 
     건물로 보이는 약국에 들어가서 얇은 전화번호부를 뒤져 어떤 
     주소와 전화번호를 베꼈다. 전화 박스에서 번호를 돌렸는데, 
     신호가 열 번이나 울려도 저쪽에서 받지 않자 전화를 끊었다.
       그 집은 까만 창틀에 눈이 쌓여 있는 회색의 초라한 
     단층집이었다. 갠트는 지나가면서 그 집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그 집은 길에서 겨우 몇 야드 떨어진 뒤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문에서 길 사이에 있는 눈 위에는 발자국도 없이 그대로 쌓여 
     있었다.
       그는 삭막한 블럭 끝으로 걸어갔다가 돌아서서 다시 그 회색빛 
     집을 지나오면서, 이번에는 그 집의 양쪽에 있는 집들을 더욱 
     관심을 기울여서 보았다. 유리창 틀에 크리스마스 장식이 달린 
     한 집에서는 스페인계로 보이는 가족들이 잡지 커버에 나오는 
     듯한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 집 
     다른쪽에서는 한 남자가 쓸쓸히 무릎에 지구본을 올려놓고 
     돌리다가 갑자기 멈춘 뒤에 손가락이 어느 나라를 짚었나 
     알아보고 있었다. 갠트는 그 집을 지나 블럭의 저쪽 끝까지 
     걸어갔다가 몸을 돌려 다시 돌아왔다. 이번에 그가 그 회색 집을 
     지날 때는 그 집과 스페인 식구 집 사이에 멈춰서서 홱 
     돌아섰다. 그는 그 집의 뒤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작은 현관이 있었다. 그것 맞은편에는 빨랫줄이 쳐진 
     좁은 뜰 너머로 높이 올린 나무 울타리가 있었다. 갠트는 
     현관으로 올라갔다. 문 하나와, 창문 하나, 쓰레기통, 그리고 
     빨래 집게 바구니가 보였다. 문을 열어보려고 했지만 열리지 
     않았다. 창문도 역시 닫혀 있었다. 창문 안쪽 턱에는 네 면에 5, 
     10, 25, 그리고 X라고 인쇄된 아이스크림 회사의 네모난 
     포스터가 기대어 있었다. 그것은 X라고 인쇄된 면이 위쪽으로 
     향해 있었다. 갠트는 주머니에서 스카치 테이프를 꺼냈다. 그는 
     25㎝ 길이로 잘라서 열두 개의 유리문 중 중앙 걸쇠 밑에 있는 
     창에 그것을 붙였다. 그는 그 창문 위에 테이프를 붙이고서 다시 
     25cm를 잘랐다.
       몇 분 동안 그는 셀로판 테이프로 직사각형의 창유리를 
     전부쌌다. 그리고 나서 장갑낀 주먹으로 그것을 쳤다. 깨지는 
     소리가 났다. 깨진 유리 조각이 테이프에 붙은 채 제자리에서 축 
     늘어졌다. 갠트는 틀에서 테이프를 떼어냈다. 그리고 나서, 
     사각형의 셀로판을 잡아당기자 창문에서 유리가 떨어져 나왔다. 
     그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그것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창문을 통해 손을 넣어 걸쇠를 풀고는 아랫부분을 올렸다. 
     아이스크림 포스터가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
       그는 주머니에서 연필만한 손전등을 꺼내어 열린 창문 사이로 
     비추며 안을 들여다보았다. 바로 앞에 신문들이 쌓여 있는 의자 
     하나가 있었다. 그는 의자를 한쪽으로 밀고서 기어 들어간 뒤 
     창문을 닫았다.
       손전등의 희미한 빛이 갑갑하고 꾀죄죄한 부엌을 이리저리 
     비춰나갔다. 갠트는낡은 리놀륨을 조심스럽게 밟으며 앞으로 
     움직였다.
       그는 거실로 들어갔다. 안에는 양쪽 손잡이 부분이 대머리처럼 
     벗겨진 벨벳으로 된 푹신한 의자들이 있었다. 꽃모양의 종이 
     커튼 옆의 창문에 크림색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온통 버드의 
     사진들이었다. 짧은 바지를 입고 있는 어렸을 때의 버드, 
     고등학교 졸업 때의 버드, 군복을 입은 버드, 까만 양복을 입고 
     미소짓고 있는 버드. 웃고 있는 커다란 얼굴과 작은 얼굴의 스냅 
     사진들이 사진틀에 끼어 있었다.
       갠트는 거실을 나와 복도로 갔다. 복도에서 첫번째 방은 
     침실이었다. 화장대 위에는 로션 병, 침대 위에는 빈 옷상자와 
     휴지, 그리고 침대 옆 테이블 위에는 결혼사진과 버드의 사진이 
     놓여 있었다. 두 번째 방은 목욕탕이었다. 전등빛이 축축한 벽에 
     그려져 있는 백조 무늬에 가 닿았다.
       세 번째는 버드의 방이었다. 그곳은 이류 호텔 방 같았다. 
     침대 위의 고등학교 졸업장을 제외하고는 방주인의 개성을 
     나타내 주는 것이 하나도 없는 삭막한 방이었다. 갠트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책꽂이에 꽂혀 있는 책들을 주의깊게 살펴보았다. 주로 
     대학 교과서였으며, 고전 소설이 몇 권 있었다. 일기장이나 약속 
     수첩 같은 것은 없었다. 그는 책상 앞에 앉아서 서랍을 하나씩 
     조사해 보았다. 문방구와 아무것도 쓰지 않은 종이, 지나간 
     '라이프'와 '뉴요커', 대학의 논문, 뉴 잉글랜드의 길 안내도, 
     약속이 적혀 있는 편지나 달력은 없었으며, 이름이 쓰여진 
     주소록도 없었다. 그는 책상에서 일어나 옷장 쪽으로 갔다. 
     서랍은 거의 반이나 비어 있었다. 나머지에는 여름 셔츠와 
     수영복, 마름모 무늬가 있는 양말 두 켤레, 속옷, 변색된 커프스 
     단추, 셀룰로이드 칼라 스테이, 클립이 망가진 나비 넥타이 등이 
     들어 있었다. 잊고 간 종이쪽지도 없었고, 사진도 없었다.
       형식적으로 벽장을 열어보았다. 구석에 작은 회색 금고가 
     있었다.
       그는 그것을 꺼내어 책상에 올려놓았다. 잠겨 있었다. 그는 그 
     금고를 흔들어 보았다. 그 안에서 종이 뭉치 같은 것이 왔다갔다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다시 금고를 내려놓고 열쇠고리에 
     달린 작은 칼날을 자물쇠에 집어넣고 나서, 그것을 들고 
     부엌으로 갔다. 서랍에서 드라이버를 찾아내어 그것으로 열어 
     보려고 했다. 하지만 마침내 그는 콜리스 부인의 생활비가 들어 
     있지 않기를 바라면서 신문지로 그 금고를 쌌다.
       그는 창문을 열고는 바닥에서 아이스크림 포스터를 집어들고 
     나서 현관 쪽으로 기어나갔다. 그리고는 창문을 닫고 잠그고 
     나서, 포스터를 적당한 크기로 찢어서 창문 안으로 끼워 덮어 
     가렸다. 그는 겨드랑이에 금고를 끼고 조용히 골목길을 지나 
     찻길 쪽으로 걸어갔다.


        제 11 장 

       레오 킹쉽은 수요일 밤에 크리스마스 때문에 빼앗겼던 시간을 
     보충하기 위해서 늦게까지 일을 하고, 10시에 자기 아파트로 
     돌아왔다. "안에 메리온 있나?" 그는 집사에게 코트를 주면서 
     물어보았다.
       "콜리스 씨와 나갔습니다. 일찍 돌아오겠다고 했습니다. 
     거실에서 데트웨일러 씨가 기다리고 계십니다."
       "데트웨일러?"
       "리처드슨 양이 유가증권 문제로 보냈다고 하더군요. 작은 
     금고를 하나 가지고 왔던데요."
       "데트웨일러?" 킹쉽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거실로 들어갔다.
       고든 갠트는 난로 주위에 있는 안락의자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십니까?" 그는 유쾌하게 말했다.
       킹쉽은 잠시 그를 쳐다보았다. "오늘 오후에 리처드슨 양이 
     분명히 말했을 텐데. 내가 만나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 " 그는 
     주먹을 쥐어 옆구리로 들어올렸다. "여기서 나가게." 그가 
     말했다. "메리온이 들어오기라도 하면......"
       "증거물 A입니다." 갠트는 양손에 팜플렛 하나씩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버드 콜리스 사건에 대한 -- "
       "난 듣고 싶지 않네 -- " 그는 말을 채 끝내지 못했다. 킹쉽이 
     근심스러운 얼굴로 나왔다. 그는 갠트의 손에서 팜플렛을 
     빼앗았다. "우리 회사의 선전물......"
       "버드 콜리스의 소유로 -- " 갠트가 말했다. "어젯밤까진 
     메나세트의 그의 집 벽장 안에 있던 금고에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옆 바닥에 놓여 있는 금고를 발로 가볍게 
     찼다. 뚜껑이 열려서 구부러져 있었다. 안에는 마닐라 종이로 
     만들어진 직사각형 봉투가 네 개 들어 있었다. "제가 이것을 
     훔쳐왔습니다." 갠트가 말했다.
       "훔쳤다고?"
       그는 씩 웃었다. "불에는 불로 대항하라. 저는 그가 뉴욕의 
     어디에서 머물고 있는지 몰라서, 먼저 메나세트를 공격하기로 
     했죠."
       "자네 미쳤군......" 킹쉽은 난로 바로 앞에 있는 긴 소파에 
     주저앉았다. 그는 팜플렛을 쳐다보며, "오, 하나님!" 하고 
     말했다.
       갠트는 긴 소파 옆에 자리를 잡았다. "원하신다면, 증거물 A의 
     상황을 관찰해 보시죠. 팜플렛의 가장자리가 낡았고, 수많은 
     지문들로 때가 묻었고, 스테이플러로 가운데를 찍은 것이 
     느슨해져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아주 오랫동안 팜플렛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상당히 여러 번 
     들춰봤다는 것도 말입니다."
       "저런......치사한 놈......" 킹쉽은 그 말이 익숙치 않은 
     듯이 한마디 한마디 또박또박 내뱉었다.
       갠트는 발끝으로 금고를 툭툭 쳤다. "버드 콜리스라는 인간의 
     역사가 이 네 통의 편지 안에 한 편의 드라마처럼 들어 
     있습니다." 그가 말했다. "편지 1 -- 고등학교 시절 영웅으로 
     부각되던 신문기사 -- 반장, 무도회 준비위원회 회장, 가장 
     성공할 것으로 기대되는 인물, 기타 등등. 편지 2 -- 
     명예상이기장과 동성 훈장을 받고 명예스러운 제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재미있는 음란한 사진들과, 필요없는 돈 
     200달러가 있으면 손목시계를 찾을 수 있는 전당표가 들어 
     있었습니다. 편지 3 -- 대학시절 -- 스토다드와 컬드웰 대학의 
     성적증명서. 편지 4 -- 킹쉽 코퍼 주식회사의 낡은 팜플렛 두 
     권, 그리고 이것......" -- 그는 주머니에서 파란 줄이 있는 
     노란 종이를 접은 것을 꺼내어 킹쉽에게 건네주었다 -- 
     "어디서부터 시작해서 끝을 맺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킹쉽이 그 종이를 펼쳤다. 그는 그것을 반쯤 읽어 내려가다가 
     말했다. "이게 뭔가?"
       "그건 제가 선생님에게 묻고 싶은 겁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이 일에 어느 정도 관계가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갠트가 
     말했다. "그게 팜플렛과 함께 금고 안에 들어 있었습니다."
       킹쉽은 고개를 흔들며 갠트에게 그 종이를 다시 돌려주었고, 
     갠트는 그것을 받아서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킹쉽의 눈길이 
     팜플렛으로 떨구어졌다. 그가 손으로 팜플렛을 꽉 움켜쥐자 
     두꺼운 종이가 구겨졌다. "어떻게 메리온에게 말하지?" 그가 
     말했다. "그 애는 그를 사랑하는데......" 그는 우울한 얼굴로 
     갠트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이 천천히 진정되었다. 그는 
     팜플렛을 쳐다보다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다시 갠트를 
     바라보았다. "내가 어떻게 그것이 금고 안에 들어 있었다는 걸 
     믿지? 어떻게 그것들을 자네가 금고 안에 집어넣지 않았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겠나?"
       갠트의 턱이 축 늘어졌다. "오, 그것은......"
       킹쉽은 긴 소파 끝으로 가서 방을 가로질렀다. 조각으로 
     무늬를 새긴 테이블 위에 전화기가 놓여 있었다. 그는 번호를 
     돌렸다.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갠트가 투덜거렸다.
       조용한 방에 전화번호를 돌리는 소리만이 찰칵찰칵 들렸다. 
     "여보세요? 리처드슨 양? 킹쉽이오. 부탁이 있는데, 미안하지만, 
     어려운 부탁이야. 그리고 은밀하게 해야 해요." 수화기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미안하지만, 
     사무실에 가주겠소? -- 그래, 지금 당장. 리처드슨 양에게 
     시키고 싶진 않지만, 워낙 중요한 일이라서. 그리고 내가 -- " 
     다시 소곤거리는 소리. "광고선전부로 가요." 킹쉽이 비밀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서류를 조사해서 우리가 선전용 
     간행물을......버드 콜리스에게 보낸 적이 있나 알아봐요."
       "버튼 콜리스입니다." 갠트가 말했다.
       "아니면 버튼 콜리스나. 그래, 맞아 -- 콜리스. 나는 집에 
     있을 거요. 리처드슨 양, 알아내는 대로 빨리 내게 전화해 
     주시오. 고맙소, 정말 고마워, 리처드슨 양. 정말 고마워......" 
     그는 전화를 끊었다.
       갠트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정말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겁니까 ?"
       "난 확실히 해야만 하네." 킹쉽이 말했다. "자네도 이 같은 
     일에 있어서는 증거를 확실히 해야 하고." 그는 다시 방을 
     가로질러 돌아와서 긴 소파 뒤에 섰다.
       "선생님은 이미 확신하고 있고, 그리고 선생님 자신도 
     그렇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갠트가 말했다.
       킹쉽은 긴 소파를 잡으며, 그가 앉았던 쿠션의 오목한 곳에 
     놓여 있는 팜플렛을 내려다보았다.
       "선생님은 자신이 확신하고 있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갠트가 되풀이했다.
       잠시 뒤 킹쉽이 피곤한 듯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는 긴 
     소파를 돌아와서 팜플렛을 집어들고 자리에 앉았다. "메리온에게 
     어떻게 말해야겠나?" 그가 물었다. 그는 자기 무릎을 
     쓰다듬었다. "그 치사한 놈......빌어먹을 놈의 자식......"
       갠트는 무릎에 팔꿈치를 댄 채 그를 향해 앉았다. "킹쉽 씨, 
     이번 일에서는 제 생각이 거의 옳았습니다. 제가 모든 것에서 
     옳았다는 것을 인정해 주시겠습니까?"
       "모든 것이라니, 그게 뭔가?"
       "도로시와 엘렌에 대해서 말입니다." 킹쉽은 화가 난 듯이 
     숨을 들이마셨다. 갠트는 얼른 말을 이었다. "그는 스토다드 
     대학에 다녔다는 것을 메리온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도로시와 관계가 있었던 게 틀림없습니다. 그가 그녀를 죽였고, 
     파웰과 엘렌은 어떻게 해서 그가 그 남자라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들도 죽여야 했던 거지요."
       "유서는......"
       "속임수를 써서 그것을 쓰게 할 수도 있잖습니까!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죠 -- 바로 지난달 신문에 그런 짓을 한 녀석에 대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똑같은 이유로 -- 여자가 임신을 한 
     겁니다."
       킹쉽은 고개를 흔들었다. "나도 그에게 그런 면이 있다는 것을 
     믿네." 그가 말했다. "그가 메리온에게 그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안 뒤에는, 웬지 그가 뭔가 숨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 
     하지만 자네 이론에는 허점이 있어, 커다란 허점이."
       "그게 뭐죠?" 갠트가 물었다.
       "그는 돈을 노리고 있는 거야. 그렇잖은가?" 갠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네는 도로시가 헌것, 새것, 빌려온 것, 
     푸른 것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살해되었다고 알고 있는 거지, 
     그렇지?" 갠트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 " 킹쉽이 
     말했다. "만일 그가 도로시를 곤경에 빠뜨린 녀석이라면, 그리고 
     그 애가 그날 그와 결혼할 준비를 했었다면, 그렇다면 도대체 
     그가 도로시를 죽인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도로시와 결혼해도 
     돈을 손에 넣을 수 있었을 텐데."
       갠트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이 일에 대해서는 자네가 옳았네." 킹쉽은 팜플렛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하지만 도로시 문제에 대해서는 틀렸어. 모두 
     틀렸단 말일세."
       잠시 뒤 갠트가 일어났다. 그는 몸을 돌려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제가 비약해서 생각했을지도 모르겠군요." 그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문에서 벨이 울리자 갠트는 창문에서 돌아섰다. 킹쉽은 
     일어나서 난로 앞에 서서 피라미드 모양으로 정교하게 쌓인 
     나무장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갠트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 팜플렛을 만 것을 옆구리에 든 채 마지못해서 몸을 
     돌렸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이어서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 
     들어오겠어요?"
       "아니야, 됐어, 메리온. 우리는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할 
     테니까." 오랫동안 침묵이 흘렀다. "7시 30분에 집 앞에 
     있을께."
       "검은색 양복을 입는 게 좋을 거예요. 제련소는 틀림없이 
     지저분한 곳일 테니까." 다시 침묵이 흘렀다. "잘 가요, 버드."
       "안녕."
       문이 닫혔다.
       킹쉽은 팜플렛을 더 단단하게 말아쥐었다. "메리온 -- " 그가 
     불렀으나 그 목소리는 너무 낮았다. "메리온 -- " 다시 좀 큰 
     목소리로 불렀다.
       "가요." 그녀는 쾌활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두 남자는 갑자기 시계의 째깍거리는 소리를 의식하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빳빳하고 흰 긴 소매 블라우스의 깃을 세우며 넓은 
     복도에서 나타났다. 그녀의 뺨이 바깥의 차가운 날씨로 상기되어 
     있었다. "오 -- " 그녀가 말했다. "우리는 -- "
       그녀는 갠트를 보았다. 그녀의 손이 굳어지더니 뚝 떨어졌다.
       "메리온, 우리는......"
       그녀는 홱 몸을 돌려서 나가버렸다.
       "메리온!" 킹쉽은 서둘러 복도를 나가서 현관의 홀로 
     들어갔다. "메리온!" 그녀는 거칠게 다리를 올리며, 굴곡이 진 
     하얀 계단을 반쯤 올라가고 있었다. "메리온!" 그는 명령조로 
     엄숙하게 소리쳤다.
       그녀는 멈춰서서 한 손을 난간에 대고 굳은 얼굴로 계단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세요?"
       "이리 내려오거라." 그가 말했다. "내가 할 말이 있다. 아주 
     중요한 이야기야." 잠시 시간이 흘렀다. "어서 내려오거라." 
     그가 말했다.
       "내려가지요." 그녀는 몸을 돌려 당당하고 냉담한 태도로 
     층계를 내려왔다. "아버지는 제게 말씀하실 수 있는 권리가 
     있죠. 제가 2층에 올라가서 짐을 꾸려 이 집을 나가기 
     전까지는요."
       킹쉽은 거실로 돌아왔다. 갠트는 방 한가운데의 긴 소파 뒤를 
     잡은 채 거북한 자세로 서 있었다. 킹쉽은 걱정스러운 듯이 
     머리를 저으면서 그의 옆으로 갔다.
       메리온이 거실 안으로 들어왔다. 두 남자는 그녀의 눈을 보지 
     않은 채, 그녀가 문 가까이에 있는 긴 소파의 끝으로 가서 
     갠트가 앉았던 곳의 맞은편에 있는 의자로 가는 모습을 죽 
     지켜보았다. 그녀가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다리를 
     모으고, 빨간색 모직 스커트를 단정하게 가다듬었다. 그리고 
     나서 의자의 팔걸이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녀는 자기 왼쪽의 긴 
     소파 뒤에 서 있는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말씀하세요." 그녀가 
     말했다.
       킹쉽은 그녀의 시선에 억눌려서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갠트 군이......어제......갔었는데......"
       "예?"
       킹쉽은 어쩔 수 없이 갠트 쪽으로 몸을 돌렸다.
       갠트가 말했다. "어제 오후에 -- 당신 아버지는 전혀 모르는 
     일입니다 -- 나는 메나세트에 있는 당신 약혼자 집에 몰래 
     들어갔습니다 -- "
       "뭐라고요!"
       "--그리고 나는 그의 방 벽장에 있었던 금고를 가지고 
     왔습니다 --"
       그녀는 의자 뒤로 푹 기대어 앉아 손마디가 하얗게 되도록 
     손을 움켜쥐고서 입을 꼭 다물고 눈을 감았다.
       "나는 그걸 집에 가져가서 뚜껑을 쇠지렛대로 억지로 
     열었습니다 --"
       그녀의 눈이 크게 떠지며 반짝거렸다. "무얼 찾아냈나요? 
     원자폭탄 계획서라도 들어 있던가요?"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얼 찾았죠?" 그녀는 이글거리는 분노로 목소리를 
     내리깔고는 되풀이했다.
       킹쉽은 긴 소파 끝으로 내려가서 팜플렛을 펴서는 어색하게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그것을 받아들고 천천히 바라보았다.
       "낡았죠." 갠트가 말했다. "그는 오래 전부터 그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킹쉽이 말했다. "그는 너를 사귀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메나세트에 돌아가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는 너를 만나기 전부터 
     그 팜플렛을 가지고 있었던 거야."
       그녀는 조심스럽게 무릎에 있는 팜플렛을 어루만졌다. 몇 면의 
     귀퉁이가 접혀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똑바로 폈다. "엘렌이 
     그에게 줬을 거예요."
       "엘렌은 우리 회사의 간행물을 하나도 갖고 있지 않았다, 
     메리온. 너도 잘 알잖니. 그 애는 너와 마찬가지로 회사엔 거의 
     관심이 없었으니까."
       그녀는 팜플렛을 뒤집어서 뒷면을 살펴보았다. "이 사람이 
     금고를 열 때 아버지도 계셨나요? 이 팜플렛이 금고 안에 
     있었다는 것을 확신하실 수 있어요?"
       "지금 그것에 대해서 조사하고 있다." 킹쉽이 말했다. "하지만 
     갠트 군이 왜 거짓말을 하겠니......?"

       그녀는 팜플렛 하나를 들어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 마치 
     대기실에 있는 잡지를 훑어보는 것처럼. "좋아요." 그녀가 잠시 
     뒤에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어쩌면 처음에는 그가 돈에 
     매혹되었을지도 모르죠." 그녀의 입술이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 일생에 단 한 번 아버지의 재산에 고마움이 
     느껴지는군요." 그녀는 천천히 페이지를 넘겼다. "사람들이 
     뭐라고 말할까요? -- 부잣집 딸과 사랑에 빠지는 것은 가난한 집 
     딸만큼이나 쉬운 일이에요." -- 그리고 또 페이지를 넘기면서 -- 
     "아버지는 정말로 그렇게 혹독하게 그를 비난해서는 안돼요 -- 
     그가 가난한 집안 출신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는요. 환경의 
     영향이에요......" 그녀는 일어나서 팜플렛을 긴 소파 위로 
     던졌다. "그밖에 아버지가 원하시는 게 또 있나요?" 그녀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그밖에?" 킹쉽이 노려보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니?"
       "충분하다고요?" 그녀가 말했다. "무엇에 충분하다는 거죠? 
     제가 결혼을 포기하기에 충분하다는 건가요? 그렇지 않아요." --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 "그렇지 않아요. 그건 충분하지 
     않아요."
       "너는 그래도 그와 결혼하고 싶냐?"
       "그는 저를 사랑해요." 그녀가 말했다. "어쩌면 처음에 그는 
     돈에 이끌렸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 만일 제가 아주 예쁜 
     여자라고 가정해 보세요. 만일 그가 제 외모에 이끌렸다는 것을 
     알았다고 해서 결혼을 그만둬야 하나요?"
       "처음이라고?" 킹쉽이 말했다. "아직도 그는 돈을 노리고 
     있다."
       "아버지는 그렇게 말씀하실 권리가 없어요!"
       "메리온, 지금 이 상태에선 너는 그와 결혼할 수 없어......"
       "왜 결혼할 수 없어요? 우리는 토요일 아침에 시청으로 갈 
     거예요!"
       "그는 좋지 않은 음모를 꾸미고 있다 -- "
       "오, 예! 아버지는 항상 누가 좋고 누가 나쁘다는 것만 
     알지요, 그렇죠! 아버지는 엄마가 나쁘다고 여겨서 엄마를 
     버렸어요. 그리고 도로시를 나쁘게 생각했어요. 아버지가 우리를 
     좋고 나쁘고, 옳고 그른 방식만으로 키웠기 때문에 그 애가 
     자살하게 된 거예요! 아버지가 좋고 나쁘고를 가리는 것은 그 
     정도만 해도 충분한 거 아녜요?"
       "너는 돈만 보고 따라온 남자와 결혼할 수 없어!"
       "그는 저를 사랑해요! 우리 나라 말인데 정말 이해 
     못하시겠어요? 그는 저를 사랑해요! 저도 그를 사랑하고요! 
     우리는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이 느끼고 있어요! 우린 똑같은 
     책, 똑같은 연극, 똑같은 음악, 똑같은 것들을 좋아한다고요 -- 
     "
       "똑같은 음식은요?" 갠트가 끼어들었다. "당신들은 이탈리아 
     음식과 미국 음식을 좋아하겠군요?" 그녀는 입을 약간 벌린 채 
     그에게 돌아섰다. 그는 주머니에서 파란 줄이 쳐진 노란 종이 한 
     장을 꺼내어 펼쳐 들었다. "그리고 책들은 -- " 그는 종이를 
     보면서 말했다. "프루스트, 토마스 울프, 카슨 매컬러즈의 
     작품을 좋아하시죠?"
       그녀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어떻게 당신이......? 도대체 
     그게 뭐죠?"
       그는 긴 소파의 끝을 한 바퀴 돌았다. 그녀는 그가 움직이는 
     대로 따라 고개를 돌렸다. "앉으시죠." 그가 말했다.
       "당신은 무엇을......?" 그녀가 뒤로 움직였다. 긴 소파의 
     가장자리가 그녀의 무릎 뒤쪽으로 눌렸다.
       "자, 앉으시죠." 그가 말했다.
       그녀가 앉았다. "그게 뭐죠?"
       "이것은 팜플렛과 함께 금고 안에 들어 있었던 겁니다." 그가 
     말했다. "같은 봉투 안에. 그가 쓴 글씨입니다 -- 내 
     생각으로는." 그는 노란 종이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미안합니다." 그가 말했다.
       그녀는 어리둥절해 하며 그를 바라보고 나서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프루스트, T. 울프, C. 매컬러즈, <보바리 부인>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엘리즈 B. 브라우닝 -- 읽을 것.
       미술 (가장 현대) -- 호플리 아니면 호퍼, 디머스 현대 미술에 
     관한 책을 읽을 것.
       고등학교 시절의 핑크빛 말.
       엘렌을 질투하느냐?
       르누아르, 반 고호.
       이탈리아와 미국 음식 -- 뉴욕 시에서 음식점들을 찾아볼 것.
       극장 : 버나드 쇼, T. 윌리엄즈 -- 대개 심각한 내용들......
       심각한 내용들......

       그녀는 뺨이 빨갛게 물들어서 깨알같이 써진 글의 4분의 1 
     가량은 간신히 읽어나갔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접었다. "글쎄 -- " 그녀는 다시 종이를 접으며 고개를 들지 
     않고 말했다. "만일 제가 믿지 않는다면......" 그녀는 소파 
     끝을 조용히 돌아가서 그녀의 옆에 힘없이 서 있는 아버지를 
     보고 정신이 나간 듯이 미소지었다. "제가 미리 알았어야 하는 
     건데요." 피가 그녀의 뺨으로 거꾸로 올라와서 빨갛게 물들였다. 
     그녀의 눈이 번쩍거렸고, 손가락은 갑자기 종이를 세게 구겨서 
     비틀었다. "제가 이 사실을 알았어야 하는 건데요."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손가락으로 종이를 잡아당겨 찢으면서 웃었다. 
     "정말 미리 알았어야......" 그녀가 노란 종이 조각을 
     떨어뜨리자, 그것들이 그녀의 얼굴로 날아갔다. 그녀는 울기 
     시작했다.
       킹쉽은 그녀의 옆에 앉아서 그녀의 구부린 어깨에 팔을 
     얹었다. "메리온......메리온......더 늦게 알지 않았다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해라......"
       그녀의 등이 그의 팔 아래에서 흔들렸다. "아버지는 이해하지 
     못해요." 그녀는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흐느꼈다. "아버지는 
     이해하지 못하신다고요."

       울음을 그치고, 그녀는 킹쉽이 준 손수건을 쥐고서 카펫 위에 
     흩어져 있는 노란 종이조각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멍청하게 앉아 
     있었다.
       "내가 2층으로 데려다 주련?" 킹쉽이 물었다.
       "아녜요, 제발......그냥......그냥 여기에 있게 해주세요."
       그는 일어나서 갠트가 있는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들도 
     잠시 묵묵히 강 건너의 불빛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킹쉽이 말을 
     꺼냈다. "나는 그에게 보복을 해야겠네. 맹세코 보복을 할 
     거야."
       잠시 시간이 지난 뒤에 갠트가 말했다. "따님이 선생님의 
     '선과 악'에 대해서 말하던데, 선생님은 딸들을 아주 엄하게 
     키우셨나 보죠?"
       킹쉽은 잠시 생각했다. "그렇게 엄하지는 않았네." 그가 
     말했다.
       "제 생각엔 -- 따님의 말한 것으로 보아서 선생님이 엄하게 
     대하신 것 같습니다."
       "그 애가 흥분해서 말한 걸세."
       갠트는 강 건너의 펩시 콜라 광고판을 쳐다보았다. "며칠 전에 
     우리가 메리온의 아파트를 나온 뒤 약국에 들어갔을 때, 
     선생님은 딸 하나를 밀어냈을지도 모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게 뭘 뜻하는 거였죠?"
       "도로시 말일세." 킹쉽이 말했다.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아주 엄하게 대하지 않았다면 말입니까?" 갠트가 넌지시 
     말했다.
       "아니야, 나는 그렇게 엄하지는 않았어. 난 애들에게 올바로 
     행동하라고 가르쳤네. 어쩌면 내가......조금 지나쳤을지도 
     몰라......그건 애들 엄마 때문에......"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도로시가 자살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한 것이 잘못이었어." 
     그가 말했다.
       갠트는 담뱃갑을 꺼내어 한 개비 빼냈다. 그는 손가락 
     사이에서 담배를 돌렸다. "킹쉽 씨, 만일 도로시가 선생님과 
     의논하지 않고 먼저 결혼을 했다면 어떻게 하셨을 것 같습니까? 
     그리고 나서 아기를 갖게 됐다면......너무 일찍......"
       잠시 뒤 킹쉽이 말했다. "모르겠네."
       "아버지는 그 애를 내쫓았을 거예요." 메리온이 조용하게 
     말했다. 두 남자가 그녀를 돌아다보았다. 그녀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긴 소파에 꼼짝도 않고 앉아 있었다. 그들은 벽난로 
     선반 위에 비스듬하게 걸린 거울로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바닥에 흩어져 있는 조각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습니까?" 갠트가 킹쉽에게 말했다.
       "그 애를 내쫓지는 않았을 걸세." 그가 날카롭게 말했다.
       "아버지는 내쫓았을 거예요." 메리온이 억양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킹쉽은 창문 쪽으로 돌아섰다. "글쎄 -- " 그가 이윽고 
     말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결합한 부부는 결혼의 책임을 떠맡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네. 그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말끝을 흐렸다.
       갠트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바로 그겁니다." 그가 말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가 그녀를 죽인 겁니다. 그녀는 분명히 
     그에게 선생님에 대해서 말했을 겁니다. 그래서 그는 비록 
     그녀와 결혼한다고 해도 돈 근처에는 얼씬도 못할 거라는 사실을 
     안 거예요. 그리고 그녀와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가 곤경에 
     빠져들게 될 거라고 생각한 거죠. 그래서 그는 두 번째 음모를 
     꾸미기로 결정한 겁니다. 엘렌과. 그러나 그녀는 도로시의 
     죽음을 조사하기 시작했으며 사실에 너무 가까이 접근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엘렌과 파웰을 죽여야 했던 거죠. 그리고 나서 세 
     번째 시도를 한 겁니다."
       "버드!" 메리온이 말했다. 그녀는 마치 자기의 약혼자가 식사 
     예절이 좋지 않다고 핀잔을 들은 것처럼 멍청하게 그 이름을 
     불렀다. 거울에 비친 그녀의 얼굴에는 잠깐 놀라는 기색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킹쉽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창밖을 내다보았다. "난 그것을 
     믿네." 그가 고집스럽게 말했다. "난 그걸 믿어......" 그러나 
     그가 갠트에게 돌아섰을 때 그의 눈에서는 확신의 빛이 사라지고 
     없었다. "자네는, 그가 메리온에게 스토다드 대학에 다녔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는 것에서 모든 것을 끄집어냈네. 그렇지만 
     우리는 그가 도로시를 알았었는지 확신할 수가 없어. 그가 그 
     애를 그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다는 사실은 젖혀두고라도 말일세. 
     우리는 확실히 해야 하네."
       "기숙사에 있는 여학생들 말입니다." 갠트가 말했다. "그 중 
     몇 명은 그녀가 누구와 같이 다녔었는지 틀림없이 알고 있을 
     겁니다."
       킹쉽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을 시켜 그곳에 가서 
     알아보도록 하지."
       갠트는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건 좋지 않은 
     방법입니다. 지금은 방학이기 때문에 가까스로 그걸 말해 줄 수 
     있는 여학생을 찾아낸다고 해도 그땐 너무 늦게 됩니다."
       "너무 늦다니?"
       "그가 결혼식이 취소된 것을 알면 -- " 그는 메리온을 흘끗 
     쳐다보았다. 그녀는 가만히 있었다 -- "그는 그 이유를 찾기 
     위해서 기다릴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를 찾아낼 거야." 킹쉽이 말했다.
       "그럴 수도 있겠죠. 그리고 어쩌면 찾아내지 못할 수도 
     있고요. 감쪽같이 사라질 테니까요." 갠트는 깊이 생각하면서 
     담배를 피웠다. "도로시는 일기 같은 것을 쓰지 않았나요?"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킹쉽은 조각이 새겨진 테이블로 가서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꽤 오랫동안 침묵이 흘렀다. 갠트는 메리온을 
     보았다. 그녀는 앞으로 엎드려서 바닥에서 종이조각들을 줍고 
     있었다. "언제?" 킹쉽이 물었다. 그녀는 종이조각들을 왼손에 
     놓고 꽉 움켜쥐었다. 그녀는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눈치채지 못한 채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기 옆에 있는 
     긴 소파 위의 두 권의 팜플렛에 종이조각을 올려놓았다. 
     "고맙소." 킹쉽이 말했다. "정말 고마워." 수화기 놓는 소리가 
     나더니 다시 조용해졌다. 갠트는 고개를 돌려 킹쉽을 
     쳐다보았다.
       그는 굳은 분홍빛 얼굴로 테이블 옆에 서 있었다. "리처드슨 
     양이네." 그가 말했다. "선전용 간행물이 1950년 10월 16일에 
     윈스콘신 컬드웰 대학에 있는 버튼 콜리스에게 보내졌다는군."
       "바로 그가 엘렌을 만나기 시작했을 때가 틀림없습니다." 
     갠트가 말했다.
       킹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건 두 번째였네." 그가 
     천천히 말했다. "1950년 2월 6일 아이오와 주 블루 리버에 있는 
     버튼 콜리스에게도 보내졌어."
       갠트가 말했다. "도로시......"
       메리온이 신음소리를 냈다.

       갠트는 메리온이 2층으로 올라간 뒤에도 계속 남아 있었다.
       "우리는 엘렌과 똑같은 배에 타고 있는 겁니다." 그가 말했다.
       "경찰이 도로시의 유언장을 가지고 있는데 비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의심과 상황에 의한 간접증거들 뿐입니다."
       킹쉽은 팜플렛 하나를 집어들었다. "내가 확실하게 할 거네." 
     그가 말했다.
       "경찰은 파웰의 집에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나요? 지문이나 
     헝겊 쪼가리 같은 거라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어." 킹쉽이 말했다. "파웰의 
     집에서도, 엘렌이 묵은 그 호텔에서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네."
       갠트가 한숨을 쉬었다. "비록 선생님이 경찰을 시켜 그를 
     체포케 할 수 있다고 해도, 법과대 신입생이라도 단 5분 안에 
     그를 석방시킬 수 있을 겁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나는 그를 잡을 거네." 킹쉽이 말했다. 
     "먼저 상황을 확실히 해두고서 말일세."
       갠트가 말했다. "우리는 그가 어떻게 그녀에게 그 유서를 쓰게 
     했으며, 또 그가 파웰과 엘렌을 쏜 권총이 어디에 있는지도 
     찾아내야 합니다. 그것도 토요일이 되기 전에."
       킹쉽은 팜플렛 표지의 사진을 보았다. "제련소......" 그가 
     비통하게 말했다. "우린 내일 그곳에 가기로 했네. 나는 그에게 
     두루 구경시켜 주고 싶었지. 메리온도. 그 애는 전에는 전혀 
     회사에 관심이 없었어."
       "그녀가 결혼이 취소됐다는 것을 가능한 한 마지막 순간까지 
     그에게 알리지 않도록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킹쉽은 무릎 위에 올려놓은 팜플렛을 어루만지다가 고개를 
     들었다. "뭐라고?"
       "그녀가 결혼이 취소됐다는 것을 가능한 한 마지막 순간까지 
     그에게 알리지 않도록 하시는 게 좋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 -- " 킹쉽이 말했다. 그는 다시 팜플렛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런 상태로 시간이 흘렀다. "그는 사람을 잘못 
     골랐어." 그는 여전히 제련소 사진을 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사람을 택했어야 하는 건데."


        제 12 장 

       지금까지 이렇게 완전한 날이 있었는가? 그것이 그가 알고 
     싶은 전부였다 -- 있었는가? 그는 비행기를 보고 미소지었다. 
     비행기도 자기만큼 참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비행기는 활주로 
     앞으로 죽 뻗어 있었다. 반짝이는 탄탄한 몸체에 옆쪽에 
     구릿빛으로 새겨진 킹쉽이라는 글씨와 왕관 모양의 상품 마크가 
     이른 아침 햇살을 받아 휘황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상업 
     비행기가 서 있는 저 아래쪽의 부산스러운 광경을 보고 씩 
     웃었다. 그곳에는 쇠울타리 뒤쪽으로 승객들이 말 못하는 
     짐승처럼 떼를 지어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모두가 마음대로 탈 
     수 있는 개인 비행기를 가질 수는 없겠지! 그는 짙푸른 하늘을 
     보고 미소지었다. 그리고 나서 가슴을 활짝 펴자, 숨이 위로 
     치솟아오르면서 행복에 겨워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니다, 그는 
     공정하게 결정을 내렸다. 정말로 결코 이런 완전한 날은 없었다. 
     없었다고? 그래 없었어! 결코 없었어? 글쎄......지금까지는 
     거의 없었지! 그는 돌아서서 길버트와 설리번의 가극을 
     흥얼거리며 격납고로 어슬렁어슬렁 걸어갔다.
       메리온과 레오는 입을 꼭 다물고 그늘 속에 서 있었다. "저도 
     가겠어요!" 메리온이 고집을 부렸다.
       "뭐 곤란한 문제가 있습니까?" 그는 그들에게 다가가면서 
     미소를 지었다.
       레오가 돌아서서 가버렸다.
       "무슨 일이야?" 그는 메리온에게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내가 좀 몸이 좋지 않다고 하니까 
     아버지가 가지 말라고 하세요." 그녀의 시선은 뒤쪽에 있는 
     비행기에 고정되어 있었다.
       "신부의 신경과민인가?"
       "아니에요. 그냥 몸이 좀 좋지 않은 것뿐이에요."
       "오." 그는 알겠다는 듯이 말했다.
       그들은 잠시 비행기 연료 탱크를 정비하는 두 명의 기술자를 
     바라보며 조용히 서 있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레오에게로 갔다. 
     이런 날에는 모든 걸 다 메리온에게 맡기자. 그래, 그게 아마 
     좋을 것이다. 어쩌면 그녀는 생활의 변화를 위해서 조용히 혼자 
     있고 싶어할지도 모른다. "갈 준비가 다됐나요?"
       "잠시만 기다리게." 레오가 말했다. "데트웨일러가 오기로 
     되어 있어."
       "누구요?"
       "데트웨일러. 우리 회사 이사의 아들일세."
       몇 분 뒤에 금발에 회색 코트를 입은 남자가 상업용 격납고 
     쪽에서 다가왔다. 그는 긴 턱과 짙은 눈썹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메리온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레오에게로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킹쉽 씨?"
       "잘 있었나, 데트웨일러." 그들은 악수를 했다. "내 사위가 될 
     버드 콜리스일세. 버드, 이쪽은 고든 데트웨일러일세."
       "처음 뵙겠습니다."
       "글쎄요 -- " 데트웨일러가 말했다 -- 그는 압착 롤러처럼 
     악수를 했다 -- "당신을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예, 무척 만나고 
     싶었습니다." 이 남자의 천성이 그런 건지, 아니면 레오와 
     어떻게든 잘 지내보려고 하는 탓에서 이러는 건지도 모른다고 
     버드는 생각했다.
       "준비됐습니까?" 한 남자가 비행기 안에서 물어보았다.
       "준비됐네." 레오가 말했다. 메리온이 앞으로 나왔다. 
     "메리온, 너는 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 -- 그러나 그녀는 
     레오를 지나서 세 계단 올라가 비행기 안으로 들어갔다. 레오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고개를 흔들었다. 데트웨일러가 메리온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레오가 말했다. "먼저 타게, 버드."
       그는 터벅터벅 계단 세 개를 올라가서 비행기 안으로 
     들어갔다. 그것은 6인승 비행기로, 내부가 하늘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그는 날개 뒤쪽의 오른쪽 끝자리에 앉았다. 메리온은 
     통로 건너편에 앉아 있었다. 레오는 데트웨일러 건너편의 맨 
     앞자리를 잡았다.
       엔진이 덜컹거리며 부르릉거리기 시작하자 버드는 안전벨트를 
     맸다. 이런 것까지 청동 버클로 되어 있다니! 그는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창문 너머로 울타리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이 자기를 볼 수 있을지 
     궁금했다......
       비행기가 이륙하기 시작했다. 출발......레오가 아직도 
     의심하고 있다면 제련소로 그를 데려갈까? 아니야! 뭐라고, 
     아니라고? 그래, 아니야, 결코! 그는 몸을 구부려 메리온의 
     팔꿈치를 탁 치고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그녀도 미소를 
     지었지만, 몸이 안 좋기 때문인지 곧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레오와 데트웨일러는 통로를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얼마나 걸립니까, 레오 씨?" 그는 유쾌하게 
     물어보았다. 레오가 돌아보았다 -- "세 시간. 바람이 좋다면 덜 
     걸릴 걸세." -- 그리고 다시 데트웨일러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는 어느 누구하고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창문으로 
     고개를 돌리고 옆으로 미끄러지듯이 지나가는 땅을 쳐다보았다.
       벌판 가장자리에서 비행기가 천천히 한 바퀴 돌았다. 엔진이 
     더 높이 컹컹거리며 출력을 높이고 있었다......
       그는 청동 버클을 만지작거리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제련소로 
     가는 길......제련소! 공장! 재산의 원천지 !
       도대체 왜 어머니는 비행기를 무서워할까? 오, 어머니를 
     데려왔더라면 굉장했을 텐데 !
       비행기는 요란한 소리를 울리며 앞으로 날았다.

       그가 그 지점을 첫번째로 알아맞추었다. 멀리 앞쪽에서 눈(雪) 
     위에 작고 검은 기하학적인 모양의 집단 -- 구불구불한 철로의 
     줄기 끝에 달린 지선(支線) 같은 작고 시커먼 집단. "저것이 
     그것일세." 그는 레오가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메리온이 
     통로를 건너와 그 앞자리에 앉는 것도 겨우 알아차렸다. 그의 
     입김에 창문이 부옇게 흐려졌다. 그는 그것을 깨끗이 닦았다.
       그 작은 지선이 비행기의 날개 밑으로 사라졌다. 그는 
     기다렸다. 비행기가 낮게 내려갈 때, 그가 침을 삼키자 귓속에서 
     꼴깍 소리가 났다.
       제련소가 날개 밑으로 미끄러져 나오면서 그의 바로 
     아래쪽에서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직선으로 죽 늘어선 갈색 
     지붕이 여섯 개 있었고, 그 가운데에서 연기가 꾸역꾸역 
     흘러나오고 있었다.
       건물들이 태양 아래에서 거대하게 그림자도 없이 모여 있었다. 
     그 옆에는 주차장이 갑옷의 부스러기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선로가 그러한 모습을 둥그렇게 에워싸면서 여러 갈래가 하나의 
     줄기로 합해졌고, 아래로는 화물열차가 기어오르는 가운데 
     연기가 그 뒤에서 커다란 깃털처럼 뻗어나가 있었다. 열차의 
     사슬이 은어색 섬광을 받아 번뜩였다.
       그는 머리를 천천히 돌려 비행기 꼬리 부분으로 미끄러져 가는 
     제련소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눈에 덮인 벌판이 그 뒤를 따라 
     나타났다. 군데군데 집들이 보였다. 제련소가 사라졌다. 더 많은 
     집들이 보이고, 그 집들을 블럭으로 나누는 길이 있었다. 훨씬 
     더 많은 집들이 점점 가까이 보이고, 가게들과 표지판과 
     삑삑거리는 차들과 점처럼 보이는 사람들, 공원, 입방형의 
     주택단지......
       비행기가 원을 그리며 기울어졌다. 지면이 기울어져 수평으로 
     되었다가 좀더 가까이서 지나갔고, 마침내 비행기 날개 아래로 
     완전히 미끄러져 들어왔다. 비행기가 한 차례 요동을 쳤다. 
     안전벨트의 버클이 그의 배를 때렸다. 그리고 나서 비행기가 
     부드럽게 착륙했다. 그는 청동 버클에서 하늘색 띠를 
     잡아당겼다.
       그들이 비행기에서 내리자 리무진 한 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검고 깨끗하게 닦여진 주문품 패커드. 그는 데트웨일러 옆의 
     점프 시트(접혀지는 좌석)에 앉았다. 그는 몸을 앞으로 숙여 
     운전사의 어깨 너머로 바라보았다. 길게 뻗어 있는 시내 
     중심가에서 지평선 저 멀리 하얀 언덕이 보였다. 저 멀리 보이는 
     언덕의 꼭대기에서 연기 기둥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 모습은 
     제니(아라비아 동화에 나오는 마귀)의 손가락처럼 하늘로 검게 
     휘말려 올라가고 있었다.
       중심가를 지나자 눈이 덮인 벌판 사이로 뻗어 있는 2차선 
     고속도로가 나왔고, 또다시 언덕 기슭의 만곡을 감싸고 있는 
     아스팔트 길로 나섰다. 그 아스팔트 길은 철로가 빽빽한 지점을 
     덜컹거리게 하는 자갈길이 되어 왼쪽으로 돌아 철로와 나란히 
     언덕 중턱을 올라가고 있었다. 처음엔 천천히 올라가고 있는 
     기차를 추월했고, 그 다음에 또 한 량을 추월했다. 광석을 
     쌓아올린 무개화차에서 금속빛이 반짝거렸다.
       앞쪽에 제련소가 우뚝 솟아올라 있었다. 갈색 건물들이 
     피라미드 모양으로 조잡하게 몰려 있었고, 거기에서 연기를 
     뿜어내는 굴뚝은 더욱 큰 것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좀더 가까이 
     가자 그 건물이 솟아 올라오면서 분명하게 보였다. 절벽 같은 
     벽들은부분부분 뇌문 장식으로 꾸며져 있었고, 매연으로 얼룩진 
     유리가 있는 줄이 쳐진 갈색 금속으로 되어 있었다. 건물의 
     모양은 딱딱하고 기하학적이었다. 건물들은 비탈진 도랑과 좁은 
     통로 경계에 자리잡고 있었다. 좀더 가까이 다가가자 건물들이 
     다시 합쳐졌고, 그들 사이로 하늘이 불쑥 튀어나온 모퉁이 뒤로 
     사라졌다. 그것들은 하나의 덩어리 모양이 되었으며, 커다란 
     폐선(廢船)이 연기가 치솟는 거대한 공원의 성당 안으로 더 큰 
     폐선을 끌어들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이 산더미처럼 
     나타났다가, 갑자기 리무진이 방향을 바꾸자 옆으로 휩쓸려 
     지나가 버렸다.
       차가 낮은 벽돌 건물 앞에 멈춰섰다. 문 앞에는 짙은 회색 
     양복에 호리호리하고 머리가 하얀 남자가 미소를 지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자기가 무엇을 먹고 있는지, 또 점심식사 시간이라는 
     것조차도 잊어버렸다. 창밖으로는 회갈색의 흙더미에서 
     반짝거리는 청동을 제련시키는 건물들이 보였다. 그는 창문에서 
     눈을 떼어 방을 살펴보고 자기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크림 
     치킨이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보조를 맞춰주기를 바라면서 
     좀더 빨리 먹기 시작했다.
       신경을 써서 옷을 입은 하얀 머리의 남자가 제련소 지배인인 
     오토라는 것을 알았다. 레오가 버드를 소개해 주자, 오토는 
     그들을 회의실로 데리고 가서 부족한 점들을 해명하기 시작했다. 
     그는 긴 테이블 끝의 한쪽이 거의 드러나 보이는 테이블보에 
     대해서까지 웃으며 해명했다 -- "여기는 뉴욕의 사무실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 그리고 차가운 음식과 
     미지근한 포도주에 대해서도 자상하게 해명해 주었다 -- 
     "대도시처럼 시설이 잘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토는 뉴욕 
     사무실로 옮겨 가고 싶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나타냈다. 수프를 
     다 먹고 나서 그는 청동이 부족하다고 말하며, 그것은 당국의 
     경감조치 때문이라고 비난했다. 가끔씩 그는 청동을 '붉은 
     금속'이라고 말했다.
       "콜리스 씨 -- " 그가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았다. 
     데트웨일러가 테이블 건너에서 그를 보고 웃고 있었다. 
     "조심해서 드십시오." 데트웨일러가 말했다. "제 음식에서 뼈 
     하나가 나왔거든요."
       버드는 거의 다 먹은 그의 접시를 흘끗 쳐다보고 
     데트웨일러에게 미소를 보냈다. "제련소를 빨리 보고 싶어서요." 
     그가 말했다.
       "그건 우리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데트웨일러는 여전히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 음식에 뼈가 있었다고요?" 오토가 물었다. "이런 여자가 
     있나! 내가 그렇게 주의를 주었건만. 이곳 사람들은 심지어 닭 
     하나도 제대로 요리하지 못한다니까요."

       그들은 왼쪽의 갈색 건물을 지나, 아스팔트 구내를 건너 
     제련소 본 건물로 갔다. 그는 천천히 걸었다. 다른 사람들은 
     코트를 벗은 채 앞에서 서둘러 걷고 있었으나, 그는 이 순간의 
     기분에 황홀해 하며 뒤에 처져 있었다. 그는 원광(原鑛)을 실은 
     기차가 건물 왼쪽의 강철 벽 뒤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오른쪽에서 기차 하나가 짐을 싣고 있었다. 크레인이 청동을 차 
     안으로 옮겼으며, 단단한 불꽃 같은 거대한 사각 석판도 각각 
     300 킬로그램은 될 것 같았다. 그는 하늘로 점점 더 치솟아 
     올라가는 괴물 같은 갈색의 형태를 올려다보면서 생각했다 -- 
     나쁜 피를 빨아들여 좋은 피로 뿜어내는 미국 산업의 거대한 
     심장! 그는 거의 그 안에 들어갈 정도로 아주 가까이에 서서 
     들끓는 힘을 함께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치솟아 있는 강철 벽 밑에 있는 현관 안으로 
     사라졌다.
       오토가 현관 안에서 손짓을 하며 웃고 있다.
       그는 마치 오랫동안 기다린 애인에게 가듯이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성공은 보장된 것이다! 약속된 것이다! 팡파르가 
     울려야 할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팡파르를 울려라 !
       요란한 휘파람 소리가 찢어질 듯이 울렸다.
       감사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는 어두운 현관 안으로 들어갔다. 뒤에서 문이 닫혔다.
       휘파람 소리가 다시 한 번 날카롭게 울렸다. 마치 정글 속의 
     새소리처럼.


        제 13 장 

       그는 쇠사슬을 쳐놓은 좁은 통로에 서서, 마치 거대한 붉은 
     나무 기둥이 서 있는 숲처럼 그 앞에 점점 작아지며 배열되어 
     있는 거대한 원통 모양의 용광로들을 황홀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들 밑에서 몇몇 남자들이 알 수 없는 제어기를 
     조절하면서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공기가 뜨겁고 유황 
     냄새가 났다.
       "노상(爐床)이 여섯 개 있죠. 각 용광로에 하나씩." 오토가 
     설명해 나갔다. "원광은 위에서 들어옵니다. 가운데 굴대에 달려 
     있는 회전 벨트에 의해서 아래로 천천히 노상에서 노상으로 
     회전하면서 유황이 제거되는 거죠."
       그는 주의깊게 고개를 끄덕이며 오토의 설명을 들었다. 그는 
     놀라움을 나타내려고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단지 그의 
     오른쪽에 있는 메리온만이 하루 종일 그랬듯이 굳어진 얼굴로 서 
     있었다. 레오와 데트웨일러는 그 자리에 없었다. "아버지와 
     데트웨일러는 어디 갔지?" 그가 그녀에게 물었다.
       "모르겠어요. 아버지는 그 사람에게 보여줄 게 있다고 
     하셨거든요."
       "오." 그는 다시 용광로 쪽을 보았다. 레오가 데트웨일러에게 
     보여줄 거란 게 무엇일까? "얼마나 있습니까?"
       "용광로 말입니까?" 오토는 입술 위쪽에 접힌 손수건을 
     갖다대며 땀을 닦았다. "쉰네 개."
       쉰네 개! 오, 하나님! "하루에 얼마나 많은 원광이 그 
     용광로를 통과합니까?" 그가 물었다.
       굉장한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 이렇게 한 가지에 깊은 흥미를 
     가진 적이 없었다! 그는 굉장히 많은 질문을 해댔고, 오토는 
     황홀해 하는 그에게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메리온이 뒤에서 
     보이지 않게 따라오는 동안 두 사람만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른 건물에는 더 많은 용광로가 있었다. 벽돌 벽으로 된 것, 
     편편한 것, 30 미터가 넘는 것 등등. "반사로입니다 -- " 오토가 
     말했다. "뜨겁게 달궈진 용광로에서 나오는 원광에는약 
     10퍼센트의 청동이 들어 있지요. 여기에서 그것을 용해하는 
     겁니다. 가벼운 광물질들은 슬래그(용해된 쇠녹)처럼 날아가 
     버리고, 철과 청동만이 남게 되죠 -- 여기에서는 그걸 
     '매트'라고 부르죠 -- 청동이 40퍼센트 들어 있습니다."
       "연료는 뭘 사용합니까?"
       "가루 석탄을 사용합니다. 남은 열은 전력을 일으키는 데 
     사용되지요."
       그는 이 사이로 휘파람을 불며 고개를 흔들었다.
       오토가 물었다. "놀랐습니까?"
       "굉장하군요." 버드가 말했다. "정말 굉장한데요." 그는 
     아래로 끝없이 뻗어 있는 용광로를 바라보았다. "저것을 보고 
     있으니 이곳이 얼마나 위대한 곳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것은 -- " 오토는 주위의 으르렁거리는 소리보다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전체 제련 과정 중에서 가장 볼 만한 
     부분일 겁니다."
       "오, 저런!"
       "전로(轉爐)들입니다." 오토는 큰소리로 말했다.
       건물은 사람들과 기계들이 내는 천둥 같은 요란한 소리를 
     견디고 있는 거대한 강철 조개 같았다. 청동빛 연기가 어둡고 
     위로 높이 치솟은 지붕의 창문에서부터 크레인과 트랙, 그리고 
     좁은 통로를 거쳐 기둥처럼 내려오는 노랗고 파란 햇빛 광선 
     주위를 허우적거리며 저 멀리까지 덮어버렸다.
       건물 끝 근처의 양쪽으로 마치 거대한 강철통 같은 검은색 
     원통형의 용기들이 연이어 여섯 개 놓여 있었고, 그 사이로 
     철로가 깔린 플랫폼 위의 일꾼들이 조그맣게 보였다. 각 
     용기들의 맨 위쪽에 입구가 있었다. 그곳에서 불꽃들이 뿜어져 
     나왔다. 노란색, 주황색, 빨강색, 파랑색 불꽃이 머리 위의 
     깔대기 모양의 굴뚝 안으로 빨려 들어가며 올라갔다.
       전로 하나가 그것을 받치고 있던 톱니 롤러에서 앞으로 
     돌았다. 그러자 응고된 금속들이 달라붙은 거칠거칠한 둥그런 
     입구가 옆에 붙어 있었다. 반짝이는 목구멍에서부터 액화가 
     돌진해 나와서는 바닥에 있는 거대한 도가니 안으로 부어졌다. 
     전로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뒤로 굴렀다. 그것의 입에서는 
     액체가 뚝뚝 떨어졌다. 도가니의 이음쇠가 올라가서 뭉뚝하면서 
     거대한 고리에 엇물려 있었고, 받침에서는 열두 개의 케이블이 
     흔들리지 않도록 전로보다 더 높이 좁은 통로의 중앙 스핀보다 
     더 높게 올라가서 까마득한 지붕 밑의 레일 트랙에 달려 있는 
     때묻은 운전대 밑으로 올라가 있었다. 케이블들이 줄어들었다. 
     도가니가 천천히 무중력 공중부양처럼 들어올려졌다. 그것은 
     전로보다 더 높이 땅에서 약 7 미터 높이까지 올려졌고, 그리고 
     나서 운전대, 케이블, 도가니는 건물 북쪽 끝에 있는 청동빛 
     연기 속으로 물러나며 떨어지기 시작했다.
       여기가 모든 것의 중심이다! 심장 중의 심장! 버드는 홀린 
     듯한 눈으로 떨어지고 있는 도가니 위에서 가물거리는 공기의 
     열기둥을 따라갔다. "슬래그입니다." 오토가 말했다. 그들은 두 
     개의 전로 둑 가운데 중간 길과 바닥에서 몇 피트 올라온 남쪽 
     벽에 이어져 있는 철로가 깔린 플랫폼에 서 있었다. 오토는 
     손수건을 이마에 갖다댔다. "반사로에서 용해된 매트는 이 전로 
     안으로 쏟아집니다. 실리카가 첨가되어, 뒷면에서 파이프를 통해 
     압축된 공기가 안으로 넣어집니다. 그러면 불순물이 모두 
     산화되지요. 다시 말해서, 슬래그가 굳어져서 밖으로 쏟아지는 
     겁니다. 지금 보시는 것처럼. 매트가 많이 첨가되면 될수록 
     슬래그는 더 많이 굳어지지요. 그리고 청동은 점점 더 
     풍부해져서 다섯 시간 뒤에는 순도가 99퍼센트가 됩니다. 그 
     다음에 그것은 슬래그와 똑같은 방법으로 밖으로 쏟아져 
     나오죠."
       "금방 청동이 쏟아져 나온다는 겁니까?"
       오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로는 엇물리는 식으로 작동되고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쏟아져 나옵니다."
       "청동이 쏟아져 나오는 장면을 보고 싶군요." 버드가 말했다. 
     그는 전로 하나가 오른쪽으로 슬래그를 쏟아내는 것을 보았다. 
     "왜 불꽃들 색깔이 다르죠?" 그가 물었다.
       "불꽃의 색깔은 작업이 진행되는 과정에 따라서 변합니다. 
     그것으로 기사들은 안에서 어떤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지 
     알아내죠."
       그들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버드가 고개를 
     돌렸다. 레오가 메리온 옆에 서 있었다. 데트웨일러는 문 옆의 
     벽으로 올라가는 사다리에 기대어 있었다. "자네 아주 관심이 
     많은 모양이로군?" 레오가 우렁찬 목소리로 물었다.
       "굉장합니다, 레오 씨! 정말 숨이 막힐 지경이에요."
       "저기에서 청동을 쏟아내려고 하고 있군요." 오토가 큰소리로 
     말했다.
       크레인이 왼쪽에 있는 전로 하나 앞에다 도가니보다 더 커다란 
     쇠통을 내려놓자, 그 안으로 슬래그가 쏟아졌다. 그것의 옆면은 
     가파르고 사람 키만한 높이에 7㎝ 두께가 되는 육중한 회색 
     금속으로 되어 있었다. 테두리는 직경이 2 미터는 될 것 같았다.
       전로의 거대한 실린더가 제자리에서 돌면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앞으로 구르기 시작했다. 푸른 불꽃이 그 응고된 입구에서 
     터져나왔다. 그것이 멀어지면서 분화 같은 빛이 안쪽에서 뿜어져 
     나와 흰 베일의 연기를 토하고, 그리고 무시무시하게 작열하는 
     덩어리가 쏟아져 나왔다. 그것은 반짝거리며 거대한 그릇 안으로 
     떨어졌다. 용해되어 흐르는 것이 전로와 주조용 용기 밑바닥 
     사이에서 움직이지 않고 딱딱하게 굳어서 굴대처럼 반짝였다. 
     전로가 좀더 돌려졌다. 새로운 늑재(肋材)들이 굴대 밑에서 
     유동적으로 뒤틀리더니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주조용 용기 
     안에서는 용액의 표면이 천천히 올라오면서 나타났고, 
     꾸불거리는 연기의 흐름이 온통 뒤덮였다. 고약한 청동 냄새가 
     공기중으로 올라왔다. 전로가 뒤로 구르기 시작하자 스팀 굴대는 
     뒤틀리면서 얇아졌다. 용액의 가는 흐름도 없어지고, 마지막 몇 
     방울이 실린더의 돌출된 부분에 떨어져서 시멘트 바닥으로 
     불꽃이 튀었다.
       주조용 용기에서 나오는 연기들도 엷은 안개처럼 되었다가 
     사라졌다. 가장자리에서 몇 피트 올라와 용해된 청동의 표면은 
     반짝이는 깊은 바다 같은 녹색의 원반처럼 보였다.
       "초록색이네요." 버드가 놀라면서 말했다.
       "식으면서 원래의 색으로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오토가 
     말했다.
       버드는 쉴새없이 소용돌이치는 웅덩이를 바라보았다. 거품이 
     생겨 부풀어 올라갔다가는 표면에서 끈적끈적하게 터져버렸다. 
     "무슨 일이냐, 메리온?" 그는 레오가 묻는 소리를 들었다. 
     주조용 용기 위로 마치 셀로판지가 흔들리듯이 뜨거운 공기가 
     흔들렸다. "뭐가요?" 메리온이 말했다. 레오는, "얼굴색이 안 
     좋구나." 하고 말했다.
       버드는 뒤를 돌아다보았다. 메리온은 평소보다 그렇게 창백해 
     보이진 않았다. "괜찮아요."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창백하구나." 하고 레오가 말하자, 데트웨일러도 
     그렇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뜨거운 증기 같은 것 때문일 거예요." 메리온이 말했다.
       "증기 -- " 레오가 말했다. "증기를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지. 오토, 딸아이를 관리건물로 데려다 주겠소? 우리는 조금 
     있다 따라갈 테니까."
       "정말, 아버지 -- " 그녀가 피로한 듯이 말했다. "저는 
     괜찮아요."
       "그런 소리 마라." 레오는 뻣뻣한 미소를 지었다. "몇 분 
     있다가 바로 네가 있는 곳으로 갈 테니까."
       "하지만......"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귀찮은 듯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돌아서서 문으로 갔다. 데트웨일러가 그녀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오토는 뒤를 따라갔다. 그는 문 앞에서 멈춰서서 레오 쪽으로 
     돌아보았다. "콜리스 씨에게 애노드를 만드는 것을 
     보여주십시오." 그는 버드를 돌아다보았다. "놀랄 만한 
     작업이죠." 오토는 그렇게 말하고 나가 버렸다. 데트웨일러가 
     문을 닫았다.
       "애노드라니요?" 버드가 물었다.
       "밖의 기차에 싣고 있는 석판 말일세." 레오가 말했다. 버드는 
     그의 목소리에 야릇하게 기계적인 면이 있다고 생각했다. 마치 
     다른 것을 생각하면서 말하는 것처럼 -- "그것이 뉴저지에 있는 
     정련소로 수송된다네. 전해 제련을 하기 위해서 -- "
       "오 -- " 버드가 말했다. "그런 과정도 있었군요." 그는 왼쪽 
     전로 쪽을 돌아보았다. 머리 위에서 구부러진 마름모꼴의 핸들이 
     크레인으로 청동이 담긴 주조용 용기를 막 들어올리려고 하는 
     중이었다. 열두 개의 케이블이 흔들리며 늘어나더니 갑자기 
     고정되었다. 주조용 용기가 바닥에서 올려졌다.
       뒤에서 레오가 말했다. "오토가 좁은 통로를 보여주던가?"
       "아니오." 버드가 말했다.
       "한번 구경해 보는 게 좋을 걸세." 하고 레오가 말했다. 
     "올라가겠나?"
       버드가 돌아섰다. "시간이 있습니까?"
       "물론." 레오가 말했다.
       사다리에 기대고 있던 데트웨일러가 옆으로 비켜섰다. "먼저 
     가시죠." 그가 웃었다.
       버드는 사다리 쪽으로 갔다. 그는 금속으로 된 사다리의 
     발딛는 가로대 하나를 잡고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거대한 
     스테이플처럼 생긴 사다리의 가로대는 점점 좁아지면서 갈색 벽 
     위로 올라가 있었다. 그는 좁은 통로의 바닥에서 직각으로 15 
     미터쯤 위로 불쑥 나와 있는 트랩에 초점을 맞췄다.
       "아주 좁은 통로로군요." 데트웨일러가 옆에서 중얼거렸다.
       그는 올라가기 시작했다. 사다리의 가로대는 따뜻했으며, 위쪽 
     표면은 잘 닦여 있었다. 자기 앞에서 내려가는 벽을 바라보면서 
     규칙적인 리듬으로 계속 올라갔다. 데트웨일러와 레오가 그의 
     뒤를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좁은 통로에서 보게 될 
     광경을 상상해 보았다. 어마어마한 공업력의 광경을 
     내려다보면......
       그는 트랩을 지나 사다리를 올라가서, 좁은 통로의 딱딱한 
     금속 바닥으로 발을 내려놓았다. 기계들의 요란한 소리는 
     사라졌으나 공기는 더욱 뜨겁고, 청동 냄새도 더욱 짙어졌다. 
     쇠기둥 사이에 육중한 쇠사슬로 깔려 있는 비좁은 통로는 건물의 
     아래쪽으로 죽 뻗어 있었다. 그것은 건물 높이를 반쯤 
     내려가다가 끝났으며, 그곳에서 넓은 쇠 칸막이 조각에 의해 
     막혀졌다. 그 조각은 좁은 통로보다 3.5 미터쯤 더 넓은 것으로 
     지붕에서부터 바닥까지 걸려 있었다. 머리 위 양쪽으로는 크레인 
     트랙들이 통로와 나란히 나 있었다. 그 트랙은 좁은 통로가 막힌 
     부분을 지나서 건물의 북쪽으로 반 가량까지 계속되어 있었다.
       버드는 허리 높이에 있는 기둥 하나를 잡고서 좁은 통로의 
     왼쪽 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여섯 개의 전로들과 
     그 사이에서 왔다갔다 하는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이 움직였다. 오른쪽으로 6 미터 아래의 좁은 통로에서 
     3 미터 바깥으로 이 건물의 저쪽 끝으로 천천히 움직여 가는, 
     청동이 담긴 녹색 강철통이 매달려 있었다. 연기의 망령들이 
     표면의 투명한 액체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는 왼손으로 쇠사슬의 들어간 부분을 더듬으며 천천히 
     걸어서 그것을 따라갔다. 그는 주조용 용기에서 훨씬 뒤에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약간의 복사열을 느낄 뿐이었다. 레오와 
     데트웨일러가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주조용 용기의 
     양쪽으로 여섯 가닥씩 달려 있는 케이블로 시선을 옮겼다. 
     그것은 그의 머리 위 3.5 미터 높이에 있는 운전대로 뻗어 
     있었다. 그는 다시 청동으로 시선을 돌렸다. 얼마나 많이 
     있을까? 몇 톤이나 될까? 값은 얼마나 나갈까? 1천 달러? 2천 
     달러? 3천? 4천? 5천 ?
       그는 강철 벽으로 가까이 가서, 좁은 통로가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란 것을 알았다. 그것은 양쪽으로 2 미터 정도의 거리로 
     갈라져서 발이 긴 T자형의 머리처럼 강철 벽의 가장자리로 
     이어졌다. 이제 청동이 담긴 주조용 용기가 강철 벽 너머로 
     사라졌다. 그는 T자의 왼쪽 날개 쪽을 돌아보았다. 1 미터 
     정도의 쇠사슬이 좁은 통로 끝에 가로질러 걸려 있었다. 그는 
     왼손으로 모퉁이 쪽의 기둥을 잡고, 오른손은 강철 북의 
     가장자리를 잡았다. 그것은 아주 따뜻했다. 그는 약간 몸을 
     앞으로 기울여서 쑥 들어간 주조용 용기의 강철 벽을 자세히 
     보았다. "저것이 지금 어디로 가는 겁니까?" 그가 큰소리로 
     외쳤다.
       뒤에서 레오가 말했다. "제련 용광로인데, 다음에 틀 안으로 
     부어진다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레오와 데트웨일러가 어깨를 맞대고 그 
     T자 길을 막고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얼굴이 
     기묘하게 뒤틀려 있었다. 그는 왼쪽에 있는 강철 벽을 두드렸다. 
     "이 뒤에는 뭐가 있습니까?" 그가 물었다.
       "제련 용광로가 있지." 레오가 말했다. "또 물어볼 것이 
     있나?"
       그는 두 남자의 어두운 표정에 의아해 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내가 자네에게 한 가지 물어보겠네." 레오가 
     말했다. 그의 눈이 안경 뒤에서 마치 시퍼런 대리석처럼 
     번뜩였다. "자네는 도로시에게 어떻게 그 유서를 쓰게 했지?"


        제 14 장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렸다 -- 좁은 통로, 제련소, 온 세상이 
     모든 것이 모래성이 바닷속으로 빨려 들어가듯이 녹아 없어졌다. 
     그를 노려보는 대리석 같은 시퍼런 눈이 공간 속에서 그를 
     공포로 밀어넣었다. 그리고 레오가 물어보는 목소리가 격해져서 
     마치 쇠종 안에 있는 것처럼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잠시 뒤 레오와 데트웨일러가 다시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제련소에서 으르렁거리며 울리는 소리가 올라왔다. 강철 벽을 
     잡은 그의 왼손이 미끌거리고, 기둥을 잡은 오른손은 땀으로 
     축축해졌다. 그리고 좁은 통로 바닥은......그러나 바닥이 
     완전히 꺼지지는 않았다. 그것은 그의 발 밑에서 닻없는 배가 
     파도에 출렁이듯이 흔들거렸다. 왜냐하면 그의 무릎이 -- 오, 
     하나님! --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말 -- " 
     그는 입을 열었지만, 아무것도 말할 수 없었다.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무슨......말씀을 하시는 건지......"
       "도로시 말이오." 데트웨일러가 그에게 말했다. 그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당신은 그녀와 결혼하고 싶어했어. 단지 돈 
     때문에. 그런데 그녀가 임신을 한 거야.그렇게 되면 당신은 돈을 
     갖게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지. 그래서 당신은 그녀를 살해 
     했어."
       그는 얼떨떨한 상태에서 대항하듯이 머리를 흔들었다. "아냐." 
     그가 말했다. "아냐! 그녀는 자살한 거야! 그녀는 엘렌에게 
     유서를 보냈어! 당신도 그것을 알잖습니까, 레오!"
       "자네가 그 애를 속여서 그걸 쓰게 한 거야." 레오가 말했다.
       "어떻게......? 레오, 어떻게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겁니까? 도대체 어떻게 내가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을 바로 당신이 우리에게 말해 줘야 하는 거야!" 
     데트웨일러가 말했다.
       "나는 그녀를 거의 몰라요."
       "자네는 그 애를 전혀 알지 못했지." 레오가 말했다. 
     "메리온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그렇습니다! 나는 그녀를 전혀 모릅니다."
       "방금 자네는 그녀를 거의 모른다고 말했어."
       "난 전혀 그녀를 모릅니다!"
       레오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자네는 1950년 2월에 우리 회사 
     팜플렛을 보내달라고 요청했어!"
       버드는 강철 벽을 꽉 잡고 있는 손을 노려보았다. "무슨 
     팜플렛 말입니까?" 그것은 거의 중얼거리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는 다시 한 번 그 말을 되풀이했다. "무슨 팜플렛 말입니까?"
       데트웨일러가 말했다. "메나세트의 당신 방 금고에서 내가 
     발견한 팜플렛들."
       좁은 통로가 미친 듯이 기울어졌다. 금고! 오, 하나님! 
     팜플렛들과 그 밖의 것들? 신문기사들은? -- 그는 그것을 
     버렸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 팜플렛들...... 하지만 메리온에 
     대한 목록! 오, 주여! "당신은 누구야?" 그가 폭발하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도대체, 왜 남의 집에 뛰어들어서 -- "
       "뒤로 물러서!" 데트웨일러가 경고했다.
       버드는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딘 발을 뒤로 옮기면서 다시 
     기둥을 잡았다. "당신 누구야?" 그가 소리쳤다.
       "고든 갠트." 데트웨일러가 말했다.
       갠트! 라디오에 나오는 그 사람, 끈질기게 경찰을 귀찮게 하던 
     그 사람! 도대체 어떻게 그가 --
       "난 엘렌을 알았지." 갠트가 말했다. "난 당신이 그녀를 
     죽이기 며칠 전에 그녀를 만났어."
       "나는 -- " 그는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당신 미쳤군!" 
     그가 소리쳤다. "정말 미쳤어! 내가 누구를 죽였다고?" 그는 
     레오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 친구가 말하는 것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당신도 미쳤군요! 나는 절대로 아무도 죽이지 
     않았어요!"
       갠트가 말했다. "당신은 도로시와 엘렌, 그리고 드와이트 
     파웰을 살해했어!"
       "그리고 메리온도 죽이려 들겠지!" 레오가 말했다. "그 애가 
     그 목록을 보았으니......"
       그녀가 목록을 보았다고! 오, 전능하신 하나님! "나는 절대로 
     어느 누구도 죽이지 않았어! 도리는 자살한 거고, 엘렌과 파웰은 
     강도에게 당한 겁니다!"
       "도리?" 갠트가 그의 말을 되받았다.
       "나는 -- 사람들이 그녀를 도리라고 부르더군요! 
     나는......나는 절대로 아무도 죽이지 않았어! 단 한 명의 
     일본군밖에. 그리고 그건 군대에 있었을 때야."
       "그렇다면 왜 그렇게 다리를 떨고 있지?" 갠트가 물었다. 
     "그리고 뺨 아래로 땀이 흘러내리는 이유는 뭐야?"
       그는 뺨을 닦았다. 억제! 자기억제! 그는 가슴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천천히, 천천히......그들이 증명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어, 어떤 것도 ! 그들은 목록에 대해서, 메리온에 
     대해서, 팜플렛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뿐이야 -- 좋아 -- 하지만 
     그들은 증명할 수 없어. 어떤 것에 대해서도......그는 다시 
     숨을 들이마셨다.
       "당신은 하나도 증명할 수 없어." 그가 말했다. "증명할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당신들은 미쳤어. 두 사람 다." 그는 
     넓적다리에 손을 닦았다. "좋아 -- " 그가 말했다. "난 도리를 
     알았어. 열두 명의 다른 녀석들처럼, 그리고 나는 내내 그녀의 
     돈에 눈독을 들였지. 그것이 법에 걸리는 건가? 그래, 토요일에 
     결혼식을 올리지 않겠군. 괜찮아." 그는 빳빳한 손가락으로 
     윗도리를 똑바로 했다. "당신 같은 사람을 장인으로 갖느니 
     차라리 가난하게 사는 게 낫지. 자, 길을 비켜 주시지요. 나는 
     두 미치광이들과 이렇게 서서 이야기한다는 게 몹시 
     불쾌하니까."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2 미터쯤 떨어져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었다.
       "비켜 주시오." 그가 말했다.
       "뒤에 있는 쇠사슬을 만져봐." 레오가 말했다.
       "지나가게 길을 비켜 주시오."
       "뒤에 있는 쇠사슬을 만져봐!"
       그는 돌같이 굳은 그의 얼굴을 잠시 쳐다보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는 쇠사슬을 잡을 수 없었다. 단지 바라봐야만 했다. 기둥의 
     금속 고리가 헐겁게 C자 모양으로 구부러져서 무거운 첫번째 
     고리와 간신히 연결되어 있었다.
       "오토가 자네를 구경시킬 때 우리는 여기로 올라왔지." 레오가 
     말했다. "그걸 만져."
       그는 손을 앞으로 내밀어서 쇠사슬을 흔들어 보았다. 그것은 
     부서져 있었다. 풀어진 쇠사슬 끝이 철컥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그것은 미끄러져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강철 벽에 
     부딪쳤다.
       15 미터 아래의 시멘트 바닥이 입을 벌리고서 흔들리는 것 
     같았다......"도로시가 떨어졌던 곳만큼 높지는 않아." 갠트가 
     말했다. "그러나 충분해."
       그는 기둥과 강철 벽을 꽉 잡은 채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발꿈치 뒤가 허공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 "당신들은 이래서는 안돼!" 그는 자신이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내 이유가 충분하지 않나?" 레오가 물었다. "자네는 내 
     딸들을 죽였어!"
       "나는 아닙니다, 레오! 하나님께 맹세해요, 난 절대로 죽이지 
     않았다고요!"
       "그런데 도로시란 이름을 말했을 때 땀을 흘리며 벌벌 떤 
     이유가 뭐야 ? 그것이 지나친 농담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은 
     이유이며, 죄없는 사람이 반응하는 방법인가?"
       "레오, 죽은 우리 아버지의 영혼을 걸고 맹세합니다......"
       레오는 그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그는 기둥을 잡고 있던 손 위치를 옮겼다. 그 자리가 땀으로 
     번질거렸다. "당신은 그럴 수 없을 겁니다......" 그가 말했다. 
     "당신은 사람을 죽여본 적이 없으니까......"
       "내가 안할 거라고?" 레오가 말했다. "자네만이 이런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는 기둥을 가리켰다. "렌치의 입구는 
     헝겊으로 싸여 있어. 고리에는 아무 표시도 없고. 우연한 사고, 
     비참한 우연의 사고라고 알려질 걸세. 180㎝ 키의 남자가 높은 
     열에 시달린 낡은 철조각에 매달려 있는 쇠사슬에 발이 걸려 
     넘어지자 낡은 쇠조각이 구부러졌다. 비참한 사고 -- 어떻게 
     자네가 그것을 막을 수 있겠나? 소리를 쳐서? 아무도 자네 
     소리를 듣지 못할 거네. 팔을 흔들어서? 저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아주 정밀한 일을 하고 있고, 가령 그들이 
     올려다본다고 해도 연기가 끼어 있고, 너무 거리가 멀어. 
     우리에게 덤벼든다! 우리 중 한 사람이 밀면 자네는 끝이야." 
     그가 말을 멈췄다. "말해 보게. 내가 무죄방면이 되지 않겠나, 
     응?"
       "물론 -- " 그는 잠시 뒤에 말을 이었다. "나도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네. 자네를 그냥 경찰에 넘겨주고 싶어." 그는 시계를 
     보았다. "지금부터 3분 동안 여유를 주겠다. 나는 배심원을 
     확신시킬 수 있는 증거가 필요해. 배심원이 자네를 체포하는 데 
     전혀 놀라지 않고, 자네의 온몸에 쓰여 있는 죄를 볼 수 있는 
     증거가 필요하단 말이야."
       "권총은 어디에 있지?" 갠트가 말했다.
       그들 두 사람은 나란히 서 있었다. 레오는 왼쪽 손목을 들어 
     올리고 시계를 보기 위해서 오른손으로 왼쪽 소매 끝을 
     걷어올렸다. 갠트는 옆구리에 손을 올려놓고 있었다.
       "어떻게 도로시에게 유서를 쓰게 했지?" 갠트가 물었다.
       강철 벽과 기둥을 꽉 잡고 있는 그의 손이 마비된 채로 벌벌 
     떨렸다. "협박하고 있군." 그가 말했다. 두 사람이 그의 
     말소리를 듣기 위해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당신들은 나에게 
     협박하고 있어 -- 나는 절대로 죽이지 않았어."
       레오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시계를 보았다. 잠시 뒤에, "2분 
     30초." 하고 그가 말했다.
       버드는 왼손으로 기둥을 잡은 채 오른쪽으로 홱 돌아서서 
     전로에 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소리쳤다. "도와줘요!" 그는 
     소리쳤다. "도와줘요! 도와줘요!" -- 그는 커다랗게 소리치며 
     기둥을 잡은 오른팔을 격렬하게 흔들었다. "도와줘요!"
       저 아래에 멀리 있는 사람들이 마치 그림처럼 보였다. 그들의 
     관심은 청동을 쏟아내는 전로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는 레오와 갠트를 돌아보았다.
       "알겠나?" 레오가 말했다.
       "당신은 죄없는 사람을 죽이려는 거요!"
       "권총은 어디에 있지?" 갠트가 물었다.
       "권총은 없어! 난 권총을 가져보지도 못했어!"
       레오가 말했다. "2분."
       이 사람들은 협박하는 거야! 분명히 그런 거야! 그는 
     절망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좁은 통로의 주축, 지붕, 크레인 
     트랙, 창문 몇 개......저 크레인 트랙!
       그는 그들에게 눈치채이지 않도록 천천히 오른쪽을 보았다. 
     전로가 뒤로 굴러 있고, 그 앞에 있는 주조용 용기는 청동으로 
     가득차서 연기를 뿜어내고 있으며, 케이블은 위쪽 운전대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주조용 용기는 곧 올려질 것이다. 지금 60 
     미터 떨어져 있는 운전대는 트랙을 따라 다가오면서 주조용 
     용기를 앞쪽으로 운반할 것이다. 그럼 운전대에 있는 사람은 -- 
     3.5 미터 위? 1 미터 밖으로? -- 그렇다면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운전대가 충분히 가까이 올 때까지 그들을 지체시킬 수 있다면 
     좋겠는데 !
       주조용 용기가 올라온다......
       "1분 30초 -- " 레오가 말했다.
       버드는 눈을 홱 돌려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는 몇 초 
     동안 자기를 노려보는 그들의 시선을 바라보고 있다가, 위험을 
     무릅쓰고 다시 조심스럽게 오른쪽을 보았다. 그들이 그의 계획을 
     눈치채서는 안된다. 그래, 계획! (지금 이 순간에도 
     계획이라니!) 멀리에서 주조용 용기가 바닥과 좁은 통로 사이에 
     매달렸고, 케이블 가닥이 열기 때문에 떨리는 것처럼 보였다. 
     상자 같은 운전대는 트랙 아래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 그러더니 
     주조용 용기를 품고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커지면서 앞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아주 천천히! 오, 하나님! 좀더 빨리 오게 
     해주소서 !
       그는 그들 쪽으로 몸을 돌렸다.
       "우린 협박하는 게 아니야." 레오가 말했다. 그리고 1분 뒤에, 
     "1분." 하고 말했다.
       그는 다시 보았다. 운전대가 더 가까워졌다 -- 50 미터? 40 
     미터? 그는 새카만 사각형의 창문 뒤로 희미한 형체를 분간할 수 
     있었다.
       "30초."
       어쩜 그렇게 시간이 빨리 지나갈 수 있을까? "말하죠." 그가 
     흥분해서 말했다. "도로시에 대해서 -- 말할 게 있습니다. 
     그녀는......" 그는 더듬거렸다 -- 그리고 나서 눈을 크게 
     뜨고는 말을 멈췄다. 좁은 통로 저 멀리 끝에서 희미하게 
     움직이는 게 있었다. 누군가가 여기로 올라오고 있다! 구세주 !
       "도와줘요!" 그는 팔을 흔들면서 소리쳤다. "여보세요! 
     여기예요! 도와줘요!"
       희미하게 움직이는 물체는 서둘러서 좁은 통로를 따라 그들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레오와 갠트는 당황해서 어깨 너머로 돌아보았다.
       오, 자비로우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잠시 뒤에 그는 그 형체가 여자라는 것을 알았다.

       메리온.
       레오가 소리쳤다. "뭐하는 거야 -- 여기서 나가! 제발, 
     메리온, 내려가!" 그녀는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들의 뒤쪽으로 올라왔다. 그들의 단단한 어깨 
     위로 빨갛게 상기된 얼굴과 휘둥그래진 눈을 내밀면서 --
       버드는 그녀의 시선이 그의 얼굴을 스쳐서 다리로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다시 떨리는 다리......만일 내가 권총을 가지고 
     있다면......"메리온." 그가 애원했다. "이 사람들을 막아! 이 
     사람들은 미쳤어! 날 죽이려고 하고 있어! 제발 막아! 메리온 
     말이라면 들을 거야! 그 목록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있어. 모든 
     것에 대해서 설명해 줄 수 있어! 맹세하지만, 거짓말하는 게 
     아니야 -- "
       그녀는 계속 그를 바라보았다. 드디어 그녀가 입을 열었다. 
     "스토다드 대학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던 이유처럼 그렇게 설명할 
     수 있다는 건가요?"
       "나는 메리온을 사랑해! 하나님에게 맹세할 수 있어! 내가 
     처음에 돈 때문에 메리온에게 접근했다는 것은 인정해. 하지만 
     지금은 메리온을 사랑해! 메리온은 내가 거짓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거야!"
       "어떻게 내가 알지요?" 그녀가 물었다.
       "내가 맹세해!"
       "당신은 아주 많은 것을 맹세하는군요......" 그녀의 손가락이 
     그들의 어깨 곡선 위로 나타났다. 핑크색 매니큐어를 칠한 길고 
     하얀 손가락들. 그것이 그를 밀어 떨어뜨릴 것처럼 보였다.
       "메리온! 안돼! 우리는......우리는 나중에......"
       그녀의 손가락이 두 남자의 어깨를 눌렀다......
       "메리온." 그는 간청했다.
       갑자기 그는 제련소의 천둥 같은 소리와 이어서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의 오른쪽 옆으로 열기가 퍼졌다. 운전대! 
     그는 양손으로 기둥을 잡고 돌아다보았다. 바로 그것이 보였다! 
     -- 6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 복부에서 케이블을 
     내려뜨린 채 머리 위의 트랙을 따라 삐걱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앞쪽의 입구를 통해서 회색 챙모자를 쓰고서 머리를 구부리고 
     있는 사람 모습이 보였다. "여봐요!" 그는 턱 근육을 세우며 
     큰소리로 외쳤다. "운전대에 있는 사람! 도와줘요! 이것 봐요!" 
     다가오는 주조용 용기에서 나오는 열기가 그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도와줘요! 운전대!" 회색 모자는 점점 가까이 
     다가왔지만 고개를 들지는 않았다. 귀머거리인가? 바보 같은 
     귀머거리 자식인가? "도와줘요!" 그는 계속해서 울부짖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는 절망감에 울부짖으며 휘말려오는 열기를 피해서 몸을 
     돌렸다.
       레오가 말했다. "제련소에서 가장 시끄러운 곳이 저 운전대 
     위야." 그는 그 말을 하면서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갠트가 
     그의 옆으로 움직였다. 메리온이 뒤를 따랐다.
       "이것들 보세요." 버드는 왼손으로 다시 벽을 잡으면서 
     달래듯이 말했다. "이렇게 부탁합니다." 이글거리는 눈을 
     제외하고는 모두 가면 같은 그들의 얼굴을 그는 노려보았다.
       그들이 한 발자국 더 가까이 왔다.
       좁은 통로가 흔들리는 담요처럼 가라앉았다가 흔들렸다. 그의 
     오른쪽에 있던 찌는 듯한 열기가 등 쪽으로 펼쳐지기 시작했다. 
     이 사람들이 노린 게 바로 그거야! 나를 협박하는 게 아니야. 
     나를 죽이려 하고 있는 거야! 그는 온몸이 땀으로 축축해졌다.
       "좋아요." 그가 소리쳤다. "좋아요. 그녀는 스페인 어를 
     해석해 달라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내가 스페인 어로 글을 써서 
     그녀에게 번역 좀 해달라고 부탁했어요 -- " 그의 목소리가 
     희미해지더니 사라졌다.
       그게 그들과 무슨 관계가 있지? 그들의 얼굴......가면 같은 
     멍청한 표정이 사라지고 -- 당황함과 메스꺼운 경멸의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들은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도 내려다보았다. 바지 앞쪽이 얼룩으로 새카매졌다. 그것은 
     오른쪽 바지 가랑이로 내려가면서 점점 옅어졌다. 오, 하나님! 
     일본군......그가 죽였던 일본군이......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애원하며 식은땀을 흘리던 그 우스꽝스런 얼굴의 남자 -- 그 
     사람이 바로 자기인가? 그 사람이 바로 자기 자신이란 말인가?
       대답은 그들 얼굴에 쓰여 있었다.
       "아냐!" 그가 소리쳤다. 그는 손으로 눈을 가렸지만 그들의 
     얼굴은 여전히 거기에서 어른거렸다. "아냐! 나는 그 남자와는 
     절대 달라!" 그는 그들에게서 물러났다. 바닥의 물기에 발이 
     미끄러지면서 몸이 한 번 비틀거렸다. 손이 얼굴에서 떨어져 
     허공에서 허우적거렸다. 뜨거운 공기가 그에게로 덮쳐왔다. 그는 
     떨어지면서 반짝이는 커다란 초록색 원판이 아래로 미끄러지는 
     것을 보았다. 속이 텅 빈, 끊임없이 가물거리는 원판 --
       그의 손에 딱딱한 것이 잡혔다! 케이블! 불쑥 튀어나온 
     강철줄에 손이 찢기고, 겨드랑이가 잡아 끌리면서 그의 몸이 
     아래로 한 바퀴 돌았다. 그는 팽팽한 케이블에 걸려 있는 다리를 
     허우적거리면서 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위로 손 안에서 바늘처럼 
     콕콕 찌르고 있는 낡은 섬유가 보였다. 혼잡한 소리 --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 여자의 비명, 위에서 나는 목소리들, 아래서 나는 
     목소리들. 그는 옆눈으로 자기의 손을 보았다 -- 피가 손목 
     안으로 뚝뚝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 찜통 같은 열기에 숨이 
     막히고 현기증이 났다. 지독한 청동 냄새가 그를 삼켰다. 그를 
     향해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 그는 한쪽 손에서 점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 그는 손을 놔버렸다. 그가 원했기 때문에 
     -- 그것은 숨막힐 것 같은 공기나 손 안에서 바늘처럼 콕콕 
     찌르는 것 때문이 아니었다. 단지 그가 원했기 때문에 놔버린 
     것이다. 바로 그가 좁은 통로에서 뛰어내린 것처럼 -- 그러나 
     본능이 그에게 케이블을 잡게 만들었고, 지금 그는 본능에 
     압도되어 있었다 -- 그의 왼손이 느슨해지며 풀어졌다 -- 그는 
     오른손으로 매달린 채 용광로에서 나오는 열기를 피하기 위해 
     몸을 살짝 올렸다 -- 그의 손등에는 기둥이나 쇠사슬 같은 
     데에서 묻은 듯한 기름이 묻어 있었다 --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그를 밀어낸 것이 아니었다 -- 누구나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 그는 스스로 뛰어내렸고, 지금은 그가 원하는 
     대로 손을 놓아버린 것뿐이다. 그게 전부다. 그리고 모든 것이 
     잘되었고, 그의 무릎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하지만 많이 
     떨렸던 것은 아니다. 그가 다시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무릎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 그는 오른손이 풀렸는지 바라보지 
     않았으나 분명히 풀렸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열기 속으로 
     떨어지고 있으니까. 케이블이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환기통 
     안으로 떨어지는 도리처럼, 첫번째 총알을 맞은 엘렌처럼 
     누군가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 그 사람은 끔찍한 비명을 
     지르고 있으며, 그리고 갑자기 그것이 그 자신이 되었다. 그는 
     멈출 수가 없었다! 왜 그는 비명을 지르는 것일까? 왜? 도대체 
     왜 비명을 질러야 하는 것일까?
       제련소의 정적을 자르는 듯한 갑작스러운 비명이 끈적거리는 
     청동 안에서 끝나버렸다. 주조용 용기의 다른쪽에서 초록색 
     판지가 튀어올랐다. 그것은 원을 그리며 바닥 아래로 
     떨어졌으며, 그곳에서 수백만 개의 작은 방울들이 튀었다. 
     그것들은 시멘트 위에서 쉬 소리를 내며 천천히 초록색에서 
     청동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제 15 장 

       킹쉽은 제련소에 남아 있었다. 갠트는 메리온과 함께 뉴욕으로 
     돌아왔다. 두 사람은 비행기 안에서 통로를 사이에 두고 조용히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얼마 뒤에 메리온은 손수건을 꺼내어 눈가에 갖다댔다. 갠트는 
     창백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그저 그의 자백을 
     듣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는 변호하듯이 말했다. "우리는 
     그렇게 할 생각이 아니었어요. 그리고 그는 자백을 했습니다. 
     그런데 뭣 때문에 그가 그렇게 뛰어내렸는지 모르겠습니다."
       한참 뒤에야 그녀에게서 말이 나왔다. 그녀는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그는 아래로 내려뜨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울고 
     있군요."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녀는 군데군데 젖어 있는 자기의 손수건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그것을 접고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조용하게 
     말했다. "그 사람 때문이 아니에요."

       그들은 킹쉽의 아파트로 갔다. 집사가 메리온의 코트를 
     받아들고서 말했다 -- 갠트는 그의 코트를 들고 있었다 -- 
     "콜리스 부인이 거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 하나님." 메리온이 말했다.
       그들은 거실로 들어갔다. 늦은 오후의 햇살 속에서 콜리스 
     부인은 도자기 상(像)의 밑바닥을 살펴보면서 골동품 진열장 
     옆에 서 있었다. 그녀는 그 상을 내려놓고서 그들 쪽으로 
     돌아섰다. "아주 빨리 왔네?" 하고 그녀는 미소지었다. 
     "재미있었어--?" 그녀는 햇빛 속으로 갠트를 슬쩍 바라보았다. 
     "오, 나는 당신이......" 그녀는 그들 뒤쪽의 텅빈 현관을 
     바라보며 방을 가로질러 갔다.
       그녀는 다시 메리온을 바라보면서, 눈썹을 치켜올리고 미소 
     지었다.
       "버드는 어디에 있지?" 하고 그녀는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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