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대지 1
대지의 아들 편
동인도 문학의 진수
쁘라무디아 아난따또르 지음
- 차 례 -
프롤로그
제 1장 밍케
제 2장 쟝 마레의 비밀
제 3장 이상한 가족
제 4장 현지처
제 5장 증오와 갈등
제 6장 부빠티 취임식
제 7장 아아, 인간의 대지
제 8장 사랑의 열병
제 9장 우노크로모의 유곽
"인간의 대지"에 대하여
이책은 쁘라무디아 아난따 또르의 장편 4부작 중 하나인 "인간의 대지" (Pramoedya Ananta Toer, Bumi Manusia Jakarta 1980)의 완역본이다. 그 나머지 3부는 "모든 민족의 아들" "발자국" "유리의 집"이라는 제목으로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져 있다.
이 4부작의 무대가 된 1898년에서 1918년까지의 시대는 네덜란드의 식민지 지배 아래서 인도네시아 민족이 민족적 각성을 이루어가는 시대로서 영광과 일종의 향수를 갖고 인도네시아 현대사의 첫머리를 차지하는 시대이다. 이것은 바꿔 말하자면, 제 4부에서 하나의 주제로 반복해서 쓰이는 '새시대'라는 말이 상징하는 것처럼 새시대의 개막, 전통에서 근대에로의 과도기, 또는 인도네시아 민족이 세계사 속에서의 자기 위치를 모색해가는 시대의 시각이라 해도 좋다. 통신 및 철도망의 확대, 근대적인 인쇄술과 사진의 보급, 각종 중고등 교육기관의 정비 등은 이 새시대를 시작하는 준비이고 레모네이드나 코코아를 마시면서 토론하고 축음기로 레코드를 듣는 생활은 당시의 새로운 풍속을 보여 주고, 비덜란드인 자유주의파의 대두는 식민지 정책의 새로운 시작을 예고하고 있다.
그리고 물론 새시대를 가장 잘 상징하는 것은 밍케에게서 보여지는 것과 같은 '근대적 개인'의 등장이고, 그것이 마침내는 인도네시아인이 민족으로서의 자기를 발견해 나가는 새로운 민족의 여정, 민족 독립에로의 아득한 여경으로 이어져 간다. 지금까지 이러한 테마를 다룬 소설이 세계 문학에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은 모두 부분적이고 한정된 이야기로서 개인과 사회와 권력의 문제, 역사전체를 파악하여 그속에 있는 내용하나 하나를 섬세하개 그리고자 하는 의지로 씌어진 문학 작품은 이 소설이 처음이다.
어떤 평론가가 말한 바와 같이 이 소설이 만일 '지금까지 씌어진 모든 역사책을 무효로 만들' 정도의 충격을 갖고 있다고 한다면, 그 힘의 원천은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아시아 역사 재구성에 대한 작가의 강인한 의지력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도네시아 독립 혁명기, 옥중에서 작가로 출발한 쁘라무디아는 약 5년 동안에 수많은 작품을 발표했는데, 1955년 전후를 고비로 소설가로서는 세상에 내놓을만한 작품을 쓰지 않았다. 1957년에 장편 "부카시 강의 하반에서"와 단편집 "자카르타 이야기"를 발표했으나, 그것은 모두 초기에 쓰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그 시기에 그의 관심은 창작보다는 문학인의 사회 참여 쪽에 쏠려 있었다.
1950년대 후반에서 1950년대 전반에 걸쳐 쁘라무디아는 인도네시아 역사를 연구했다.
역사의 연구는 이윽고 인도네시아 소수 민족으로서의 중국인의 역사를 공감하고 쓴 "인도네시아의 화교"(1960년), 인도네시아 민족 의식의 어머니인, 카르티니 전기 "나를 카르티니라고만 부르세요"(1962년) 등으로 결실을 맺고 19세기 말에 씌어진 소위 "냐이 소설" 등의 근대 인도네시아 문학의 전사(前史)를 이루는 작품군의 발굴과 기록에 이어져 있다.
"인간의 대지"의 주인공 중 한 사람인 냐이 온트솔로는 물론 쁘라무디아 자신이 창작한 인물인데, 본디는 '냐이 소설'이라고 불리우는 이야기의 여주인공이다.
이 4부작 소설은 오래 전부터 구상(쁘라무디아에 의하면 1961년부터 준비)된 것인데, 블루 섬에서 강제 노동을 하는 동안 틈틈이 밤마다 같은 방의 죄수들에게 얘기해 들려 주는 형태로 완성시켜 나간 것이다. 그 내용은 입에서 입으로, 다른 수용 동의 죄수들 사이로 전해지고 얼마 뒤 그는 타자기를 얻어 원고를 완성했다(1975년). 블루 섬에서의 유형 중 그는 소설, 전기, 희곡 등 7편의 작품을 완성했다고 한다. 석방 후인 1930년 8월에 출판된 "인간의 대지"는 초판 1만 부가 12일 만에 매진되고, 몇달 동안에 4만 부가 팔려나갔다. 그것은 인도네시아 출판계에 있어서는 공전의 사건이었고, 거의 20년의 공백기를 두고 쁘라무디아가 발표한 이 소설은, "소설의 새로운 기법의 도입에만 만족하고 사회적인 문제에서 눈을 돌려 개인의 딜레머 문제에 부심해 온 현대 인도네시아 문학의 정체 상황에 강렬한 일격을 가하는 것"(인도네시아 죄고의 일간지 "콘파스"의 서평)으로서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9월 30일 사건'의 B급 정치범의 소설은 권력자에게는 환영받지 못했던 것 같다. 1981년 5월 29일, 검사총장은 "인간의 대지", "모든 민족의 아들"을 금서로 정하고, 이 소설에 이어지는 "발자국", "유리의 집"의 출판을 중지시켰다. 제 1부의 발행으로부터 10개월쯤 지나서 발행 금지 처분을 받은 것은 그동안 정부 내부에서 이 소설의 평가를 둘러싸고 의견대립이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되며, 사실 쁘라무디아와 같이 독립 혁명을 위해 싸운 세대인 부통령 아담 말리크는 그들의 부모나 선조들이 어떻게 식민지주의에 용감히 대항해 싸웠는가를 이해하기 위해 "인간의 대지"를 읽도록 모든 젊은 세대에게 권장해야 한다고 추천사를 쓰고 있다.
발행 금지 처분의 표면적 이유야 어떻든 식민지 국가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거의 혼자 몸으로 항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냐이 온트솔로의 모습에서 권력 기반을 위태롭게 하는 무엇인가를 정부 당국이 감지했다고 한다면, 그들이 이 소설의 영향력을 우려하는 것도 이유가 되는 것인지 모른다.
그 밖에 쁘라무디아는 석방후 "낡은시대"(1982년), 인도네시아 제1세대의 민족주의자, 언론인인 티루토아디스료의 소설에 평전을 붙인 "선각자"(1985년)를 발표했다.
티루토아디스료는 이 4부작의 주인공인 밍케의 모빌이 된 인물이다. 그는 중동부 자바의 부로라 시 부빠티의 아들이고, 어쩌면 이 소설에 등장하는 B시란 '부로라 시'일는지도 모른다. 부로라는 쁘라무디아 자신이 태어난 고향이기도 하다. 끝으로 이 졸고를 쾌히 빛보게 해 주신 도서출판 '오늘'에게 심심한 사의를 표하며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는 바이다.
1986년 9월
등촌동에서 정 성호
프롤로그
사람들은 나를 밍케라고 불렀다.
당분간은 나의 진짜 이름은......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본명을 숨겨 두는 이유는 특별히 내가 미스테리광이기 때문이 아니다. 곰곰이 생각해 본 끝에 내가 누구인지 사람들 앞에 밝히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본디 이 노트는 내가 슬픔의 상복을 입고 있는 동안, 즉 일시적이든 영원히든 그녀가 내 곁을 떠난 뒤에 쓴 것이다. 일시적이든 영원히든이라고 말했지만, 사태가 어떻게 전개될지 그 당시의 나로서는 알길이 없었다. 미래라는 녀석은 언제나 우리를 괴롭힌다.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대니까!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미래에 도달한다.......좋든 싫든 상관없이 모든 육체와 정신을 갖고서 말이다. 13년 뒤에 나는 이 짧은 노트를 다시 읽으며 재검토하여 꿈과 사상을 덧붙였다. 그 결과 당연한 일이겠지만 원래의 노트와는 아주 많이 달라지게 되었다. 다음부터 하려는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지은이/쁘라무디아 아난 따 또르
1925년 인도네시아 슬라바야에서 태어난 인도네시아 작가로서 우리나라 독자들에게는 처음 소개된다. 교육자의 아들로 성장해 일찍부터 조국 인도네시아의 민족적 독립과 자각에 눈을 떴다. 1947년 인도네시아 "자유의 소리"사에서 편집에 종사하면서 "판차 라야" 지 등에 단편 소설을 발표했다. 같은 해 식민 통치 네덜란 드군에 체포되어 오렛동안 옥중 생활을 했으며, 조국 독립 후에도 정치범으로 투옥된 적이 있다. 1950년 옥중에서 발표한 장편소설 "사냥"으로 인도네시아 최고 문학상을 탔다. 주요 작품에 "새벽"(1950), "부패"(1961) 등이 있으며 1980년도 이후 아시아인으로서는 드물게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이번에 소개된 "인간의 대지"는 동인도 문학상을 받은 그의 대표작이다.
옮긴이/정 성호
카톨릭 대학 신학과를 졸업하고 여흥 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1980년부터 영어와 일어 번역을 시작했다. 옮긴 책에 존 필미어 "신의 아그네스", 시드니 셀던 "내일이 오면", 에릭 시갈 "하버드 동창생" 등 많이 있다. 나오는 사람들
밍케 : 필명 맥스 트레나르, 이 책의 주인공. 명석한 두뇌, 강한 긍지와 자존심을 가진 젊은이로 네덜란드 지배의 동인도에서 새 시대를 상징하는 '근대적 개인'의 한사람. 안네리스와 결혼하지만 헤어지게 된다.
안네리스 메레마 : 애칭 앤. 네덜란드인 아버지와 원주민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감수성이 예민하고 아름다운 혼혈 처녀. 밍케와 사랑에 빠진다.
냐이 온트솔로 : 본명 사니켐. 강한 의지와 불굴의 정신력을 가진 헤르만 데 레마의 현지처. 안네리스와 로베르트의 어머니. 네덜란드의 압력에 여자의 틈으로 꿋꿋이 항거한다.
쟝 마레 : 프랑스 화가로 외인부대에 자원했다가 원주민 처녀와 사랑에 빠져 딸을 하나 두었다. 밍케에게 여러 가지 조언을 해준다. 마푸다 뻬테루스 : 밍케의 학교선생님. 네덜란드인으로 자유주의자며 밍케의 정신적 지주. 과격파로 몰려 동인도에서 추방당한다.
헤르만 메레마 : 네덜란드인 . 냐이 온트솔로와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중 본국에 두고 온 아들의 출현으로 정신적 충격을 받아 폐인이 된다. 결국 살해당한다.
로베르트 메레마 : 안네리스의 오빠, 냉혹하면서도 의지가 약한 젊은이. 자신의 핏줄을 부정하다가 나중에 폐인으로 떠돈다.
미리암과 사라 자매 : 네덜란드 관리의 딸. 밍케가 민족적 각성을 하여 인도네시아인의 지도자로 나서 주기를 바라는 아가씨들. 편지로 밍케와 많은 교류를 갖는다.
로베르트 슬르호프 : 밍케의 동급생으로 매우 이기적인 젊은이. 안네리스를 사랑하지만 이루자 못하고 실연의 상처를 안은 채 인도네시아를 떠나간다.
다르삼 : 마두라인 칼잡이. 온트솔로의 수족과 같은 사람이다.
마우리츠 메레마 : 헤르만 메레마와 본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아버지를 찾아와 메레마 일가를 곤경에 빠뜨린다.
마르텐 네이만 : 슬라바야 일보의 편집국장. 인도주의자 같지만 한편으로 자유주의를 거부하는 듯한 불투명한 사고의 소유자. 밍케를 도와 주는 입장에 선다.
얀 다페르스테 : 밍케의 동급생. 본디는 원주민이지만 혼혈아 행세를 하는 소심한 젊은이. 자신의 태생을 찾으려고 네덜란드인 양부모 곁을 떠나면서 이름도 찬지 다르만으로 바꾼다.
마이꼬 : 일본 나고야 출신의 창녀. 결혼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팔려다니다가 바바 아촌의 유곽에 정착. 타고 난 요부로 메레마 부자를 상대하게 되고 그 때문에 법정에까지 서게 된다.
바바 아촌 : 중국인이며 우노크로모의 유곽 주인. 돈을 위해서는 인륜도 무시하는 비정함이 있으나 살인 사건에 연루되어 법정에 섰을 때는 솔직함을 보이기도한다. 제 1 장
밍 케
언젠가 우리 학교 교장 선생님이 학생들 앞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여러분의 선생님이 여러분에게 가르쳐 온 학문은 매우 광범위합니다. 그것은 저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여러분과 같은 학년의 학생들이 배우고 있는 것보다도 훨씬 광범위한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내 가슴이 부풀어올랐던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나는 그때까지 유럽에 가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교장 선생님의 이야기가 과연 사실인지 어떤지는 몰랐다.
학교 친구들 사이에서는 다음과 같은 소문이 은밀히 퍼지고 있었다. 즉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은행가들조차도 그녀와 가까와질 기회는 없다. 썩씩하고 잘 생긴 귀족들이 그녀의 마음을 끌기 위해 -고작 마음을 끌기 위해서!- 법석을 떨고 있다고.
할일없이 무료함에 빠질 때면 나는 그녀를 어떻게 할까 여러가지 공상을 하면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곤 하는 것이다. 그녀는 신분이 높을 뿐만 아니라 너무나 먼 곳에 있었다.
그녀는 내가 있는 슬라바야에서 1만 해리 이상이나 떨어진 곳에 있는 것이다. 두개의 대양을 넘고, 다섯 개의 해협과 한 개의 운하를 지나서 배로도 일 개월은 걸릴 게다. 그렇게 해서 간다 하더라도 그녀를 만날 수 있다는 보증은 아무 데도 없다. 나는 그녀에 대한 이런 생각을 아무에게도 밟힐 용기가 없었다. 그런 말을 한다면 웃음거리가 되거나 미친 녀석으로 취급받기 십상이리라.
이것도 비밀이지만, 우체국에서는 때때로 머나던 바다 저편에 있는 그 고귀한 아가씨에게 보내는 구혼 편지를 발견한다는 것이다. 물론 저쪽에 전해지는 편지는 한 통도 없다. 만일 내가 망상에 빠져 그런 행동을 한다 하더라도 결과는 뻔할 것이다. 우체국직원이 내 몸을 생각해서 그 편지를 압류할 것이다. 이 신비스낀 여인은 나와 같은 나이인 열여덟 살이었다. 우리 두 사람은 같은 해 머리 숫자가 작대기, 가운데 두 개가 점차로 끝쪽이 퍼지고, 마지막 숫자가 둥근 모양을 한 1880년에 태어났다. 생년월일도 똑같이 8월 31일. 다른 게 있다면 태어난 시간과 성별 뿐이다. 우리 부모님은 내가 태어난 시간을 기록해 두지 않았고 나 또한 그녀가 태어난 시간까지는 알지 못했다. 성별은? 나는 남자고 저쪽은 여자다. 그 불확실한 시간을 떠올릴 때면 현기증이 날 것만 같다. 아뭏든 다의 성이 밤의 암흑으로 둘러싸여 있을 때 그녀의 나라는 햇빛이 비추고 있으여, 그녀의 나라가 밤의 어둠 속에 있을 때 나의 섬은 적도의 대양 아래서 빛나고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마푸다 뻬데루스 선생님은 우리 학생들이 점성술을 믿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며. 금지시켰다. 그녀는 말했다.
"옛날에 토머스 아퀴나스는 생년월일이 똑같고 태어난 시간도 똑같고 게다가 태어난 장소까지 똑같은 두 사람과 만났다." 마푸다 선생님은 이렇게 애기하며 우리들에게 집게 손가락을 들이내면서 따질 듯이 얘기를 했다.
"점성술 같은 것은 헛소리다. 그 증거로 이 두 사람의 운명은 똑같기는 커녕 18O도 달라서, 한 사람은 대지주가 되었고, 또 한 사람은 그의 노예가 되었다. "
물론 나는 점성술 같은 것은 믿지 않았다.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점성술이 과거에 인간의 학문과 지식의 발전에 있어 지침이 되었다는 전례는 없다. 점은 맞으면 아아 그런가 보다 하고 감탄할 뿐 그 다음은 돼지 밥그릇에 던져 버리는 것이 고각이다. 점성술은 내가 마음을 주고 있는 그 아가씨가 누구이고, 어디에 있는지도 알아맞히지 못한다. 더구나 다가올 일은 거의 맞히지 못한다. 어쩌다 한번은 심심풀이로 나의 연애운을 점쳐본 적이 있다. 점장이는 호로스코프(천궁도)를 몇 번이고 뒤적이더니 금니 두개를 드러내면서 신탁을 말하는 것이었다. '당신이 참고 견디면 반드시....' 그래서 나는 차라리 내 자신의 이성을 더 믿기로 했다. 비록 전인류의 인내력을 총동원한다 할지라도 그녀와는 만나는 것조차도 내게 있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확신했던 것이다.
나는 과학과 이성을 더 믿고 있다. 적어도 거기에는 증명할 수 있는 확실한 무엇인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문을 노크도 하지 않은 채 로베르트 슬르호프-여기서는 그의 본명은 사용하지 않겠다-가 나의 하숙방으로 들어왔다. 내가 바로 그 아가씨, 가진 속의 고상한 여인에게 홀린 듯이 넋을 잃고 있는 것을 보자 그는 빙그레 웃었다. 나는 눈물이 흘러내릴 것만 같아 쑥스러웠다. 그는 대들듯이 무례한 말을 지껄였다.
"헤이, 돈 환. 호색가. 색마 ! 오늘은 또 무슨 백일몽을 꾸고 있는 거지 ?"
물론 나는 그를 쫓아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않았다.
"흥, 내가 알 바 아니잖아."
"점성술은 뭐든지 다 알고 있어. 나자신에 관한 것 외에는......"
언제나처럼 그는 히죽이 이를 보이며 말했다.
여기서 로베르트 슬르호프를 소개하기로 하자. 그는 슬라바야의 하베에스 거리에 있는 고등학교(HBS-네덜란드 고등 시민학교로, 인도네시아인 중에서 이 학교에 진학하는 학생은 극히 한정되어 있다) 학생으로 나와 동급생이다. 나보다 키가 크고, 그의 몸에는 몇 방울인지는 몰라도 쁘리부미(Pribumi-동인도의 토착민)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만 둬, 집어 치우라고. 그런 여자는 잊어 주라구 ! 이 슬라바야에도 여신은 있잖아. 굉장한 미녀라구. 그 사진의 주인공보다 결코 뒤지지 않을 거야. 어쨌든 그건 사진일 뿐이잖니." "뭘 가지고 미녀라고 하는 거지?"
"뭘 가지고? 네가 정의하지 않았어 ? 골격의 위치와 형태가 올바르게 잡혀 있고 그 위에 살이 역시 올바르게 붙어 있어야지."
"그래, 맞았어."
나는 겸연쩍음을 잊고 덧붙여 물었다.
"그 밖에는 ?"
"그 밖에 ? 섬세하고 보드라운 피부, 빛나는 눈동자, 게다가 조잘대는 입술."
"조잘대는 입술이라고? 난 그런 말 한 기억이 없는데. 네 멋대로 덧붙이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럼 입술은 비명을 질러가며 너를 꾸짖기라도 해야 된다는 거니 ? 똑같이 꾸짖더라도 속삭이듯이 조잘되는 게 좋지 않겠어."
나는 그를 입다물게 하고 싶었다.
"요컨대 네가 진짜 사나이, 진짜 돈 환이라면 나하고 함께 그 미녀에게 찾아가 보지 않을래 ? 네가 그녀 앞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 네가 입으로 지껄이는 것만큼 남자다운지 어떤지를 이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단 말이야." "할 일이 아직 많이 남아 있어."
"전쟁터에 나가기도 전에 지레 겁먹는군 그래."
나는 울컥 화가 치밀었다. 고등학교 학생으로서 로베르트 슬르호프의 지각은 남을 무시하고 바보 취급하고, 나쁜 사람으로 만드는 데만 발달되어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는 아마 나의 약점을 알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약점이란 내 몸 속에는 유럽인의 피가 흐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분명히 그는 나에 대한 음모를 꾸미려 하고 있는 것이다. "좋아, 함께 가자?"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로베르트 슬르호프와의 대화는 몇 주일 전, 막 신학기가 시작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자바 전체가 축제 분위기에 들떠 있다. 아마 동인도 전체가 그럴 것이다. 가는 곳마다 3색기가 즐거운 듯이 펄럭이고 있다. 저 유일무이한 아가씨, 미의 여신, 신비스러운 여인이 즉위했던 것이다. 이제 그녀는 나의 여왕이며 나는 그녀의 신하가 되었다. 마치 마푸다 뻬테루스 선생님이 말씀하신 토머스 아퀴나스의 이야기처럼 되었던 것이다.
그녀란 바로 빌헬미나 여왕 폐하(역자주 : 네덜란드 여왕으로 1880--
1962년, 재위 기간은 1898--1948년)이다. 운명은 그녀를 여왕으로 즉위시켰고 나는 그녀가 통치하는 식민지국의 백성으로 전락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 여왕은 내가 이 지상에 존재한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는 것이다. 만일 그녀가 나보다 1,2세기 앞이나 뒤에 태어났더라도 내 마음이 이렇게까지 공허하지는 않을 것이다.
1898년 9월 7일. 르기 금요일. 이것은 동인도의 날짜이다. 저쪽 네덜란드는 1898년 9월 6일, 클리온 목요일이다. (역자주 : 르기와 클리온은 5일간을 1주기로 하는 자바 시장력)
학교 학생들은 광란하듯이 여왕의 즉위를 축하했다. 운동 경기, 연극, 유럽인들한테 배운 기술과 힘의 발표 -축구, 체조, 연식 야구. 그러나 나의 흥미를 끄는 것은 한 가지도 없었다. 나는 스포츠는 좋아하지 않았다. 주위는 축포 소리, 깃발 행렬, 축가 등으로 떠들썩했다. 나의 마음은 어둡고 공허하고 불만스럽고 결코 즐겁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처럼 이웃에 살고 있는 외다리 프랑스인 쟝 마레를 방문했다.
"아이구, 밍케 아냐? 그래 잘 있었니?"
그는 유창한 프랑스어로 말했다. "쟝, 주문이 들어왔어. 응접세트 1조야." 나는 고객이 구하고 있는 응접 세트의 도면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한참동안 그것을 살펴보더니 빙긋이 웃었다. "알았어. 얼마면 만들 수 있는지 견적을 뽑아 보자구. 조각 세공은 제파라 풍으로 하면 되겠군."
"밍케 ! "
바로 그때 이웃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창문으로 내다보니 하숙집 테린하 부인이 손짓하며 나를 부르고 있었다. "난 가기 싫은데. 저 참견하기 좋아하는 아주머니가 케이크라도 먹으라는 걸거야. 이 주문 너무 늦지 않도록 신경써 줘, 쟝."
하숙집에 돌아와 보니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케이크가 아니라 로베르트 슬르호프였다.
"자, 우리 외출하자."
신형 2륜마차, 칼베르가 한 대 이미 대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우리들이 올라타자 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부는 다이가 지긋한 자바인이었다. "이 마차삯, 상당히 비싸겠구나."
나는 네덜란드어로 말했다.
"그럼, 당연하지. 이건 다른 2륜마차나 4륜마차와는 질이 다르다구. 용수철이 부착되어 있거든. 아마 슬라바야에서는 처음 보는 걸 거야. 용수철값만 해도 보통 2륜마차보다 더 비쌀 거야."
"알겠어, 로브. 그런데 도대체 어디 가는 거지 ?"
"그 아름다운 천사 때문에 모든 젊은이들이 초대받기를 꿈꾸는 장소에. 왜 ? 싫어 ? 밍케, 잘 들어. 나는 다행히도 그 천사의 오빠로부터 초대를 받았단 말씀이야. 나 이외에 지금까지 거기 초대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구."
슬르호프는 엄지손가락으로 자기 가슴을 가리키며 으쓱댔다. "우연히 그녀의 오빠 이름이 나와 똑같은 로베르트여서....."
"요즈음은 로베르트라는 이름을 쓰는 사람이 많잖아."
그러나 슬르호프는 나를 무시한 채 계속 지껄였다.
"우리 두 사람은 축구 시합 때 한번 만난 적이 있어. 단지 그 뿐이지만 그의 집에서는 필요하지도 않은 황소가 여러 마리 태어났거든. 그것이 내게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일이지." 그는 홀끗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나는 뭐가 원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황소 ? "
"응, 그 송아지 고기를 대접하겠다는 거야. 그것이 내 문제거든, 네 문제는....."
그는 입맛을 다셨다. 그의 눈이 날카롭게 내 눈을 살폈다.
"네 문제는 그 로베르트의 여동생이구, 네 남성적 매력이 어느 정도인지 보고 싶단 말이야, 이 색골아 ! "
칼뻬르 마차는 브라우랑에서 우노크로모 방향으로 난 크랑간거리의 돌길을 덜그럭거리며 달렸다.
"자 노래를 불러봐. 베니, 비디, 비키 ---왔다, 보았다, 승리했다. "
슬르호프는 바퀴 소리보다 큰 소리로 내게 재촉했다. "벌써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잖아? 그러고 보니 너 남자답지 않게 자신이 없어진 거니 ? 하하하 !"
"어째서 넌 그 음식과 여신을 한꺼번에 독차지하지 않는 거지 ? "
"내가? 하하하. "
"사실은 우리가 지금 만나러 가는 여자는 인도 혼혈아야."
"난 순수한 유럽 여자밖에는 관심이 없다구 ! "
로베르트 슬르호프 ---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그의 본명이 아니다---
도 역시 혼혈아였다. 그의 어머니-그녀도 혼혈-가 슬르호프를 낳기 바로 전에, 역시 혼혈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당황하여 그녀를 탄쥰 베라크(역자주:슬라바야 항구의 선창)에 데리고 가서 마침 정박 중이던 판 햄스케르크 호에 승선하여 거기서 낳게 했다. 요컨대 그렇게 함으로써 슬르호프는 네덜란드의 식민지 신민임과 동시에, 네덜란드의 시민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 내가 알게 된 사실은 비록 네덜반드 배 위에서 태어났더라도 그것은 아무런 법적인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마 옛날에 로마 시민권을 둘러싸고 유대인이 취한 행동도 그것과 비슷한 것이었을 것이다. 슬르호프는 친형제 중에서도 자기만은 혼혈아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가 그 네덜란드 배에서 1킬로미터쯤 떨어진 곳, 예를 들면 탄쥰 뻬라크 다리나 마두라 거룻배 위에서 태어나서 마두라의 시민권을 얻었다면, 아마 그의 태도도 달라졌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왜 그가 혼혈아라고 불리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지 이해해 왔었다. 따지고 보면 네덜란드의 식민지 신민에 불과하지만 뒤에 올 자기 후손들의 이익을 위해 그는 네덜란드 시민인 것처럼 필사적으로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었다. 적어도 말과 행동으로 보아서는 그렇다는 것이다. 그는 장래에 혼혈아와 쁘리부미를 능가하는 지위와 보수를 원하고 있었다.
그것은 정말 아름다운 아침이었다. 푸른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젊은 생명은 오직 청춘의 환희만을 호흡하고 있었다. 내 노력은 결실을 맺어가고 있었다. 공부하는 데는 아무런 어려움도 없었다. 마음은 명랑해지고 고통이나 번민 따위는 었었다. 즉위한 아가씨는? 그것은 이미 끝난 일이다. 건물과 대문에 꾸며놓은 장식들은 모두 그녀를 위한 것이며 공공 집회도 모두 그녀를 위한 것이다. 신성한 여인! 하늘의 여신 ! 그리고 슬르호프는 지금 만나러 가는 여자 앞에서 나의 용기를 시험한다는 구실로 나를 놀림감으로 만들려 하고 있다. 시내를 향해 걷고 있는 시골사람들에게도 나는 관심이 없었다. 누런 자갈길은 곧장 우노크로모로 뻗어 있었다. 가옥, 밭, 논, 격자 모양의 대나무울타리로 둘러쳐진 가로수, 은빚 햇볕을 쬐고 있는 나무숲..... 모든 것들이 환희와 함께 쏜살같이 지다갔다. 저멀리 바위처럼 누워, 수도자처럼 진지하게 조용히 서 있는 산들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복장을 하고서 파티에 참석할 수 있을까 ?"
"상관 없어.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단지 먹기 위해서고, 너는 정복하기 위해서 가는 거니까." "도대채 어디 가는 건데 ? "
"포획물을 잡으러 가는 거야. "
나는 호기심을 억누르면서 주먹으로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로보, 괜찮으니까 가르쳐 줘."
"그런 찡그린 얼굴을 하지 마 ! 만약 네가 진짜 사나이라는 것을 보여주면."
슬르호프는 혀를 찼다.
"난 너를 우리 선생님보다 더 존경할 거야. 그대신 실패하면 너는 일생 동안 웃음거리가 될 거야. 그걸 잘 기억해 두라구, 밍케."
"그만 놀리란 말이야. "
"아냐, 이건 놀리는 게 아냐. 너는 부빠티 (역자주 : 원주민 관료 중 최고위에 위치하는 세습 관료로 우두머리를 가리킴)가 될거야. 아마 너는 불모지를 영지로 물려받을 거야. 나는 풍요로운 땅을 물려받도록 기도드리고 있지만 말이야. 그렇게 되었을 때, 저 여신이 라엔 아유(역자주 :부빠티의 정부인, 도는 자바의 귀족 부인의 호칭)가 되어 네 곁에 있게 되면 자바의 모든 부빠티들이 너무나 부러워 열병을 앓게 될 거야." "내가 부빠티가 된다고 도대체 누가 그러든?" "내가. 그리고 나는 네덜란드에서 공부를 계속할 거야. 기사가 될 작정이야. 그렇게 되면 그때 다시 만나게 될 테지. 나는 아내를 데리고 너를 찾아갈께. 그때 내가 맨 먼저 할 질문이 뭐라고 생각하니 ?"
"너 지금 꿈꾸고 있는 거니 ? 나는 부빠디 같은 건 되지 않을 거야. "
"어쨌든 내 이야기를 들어봐, 내가 조금 전에 이렇게 물었지. 헤이, 돈 환, 호색가, 색마, 너의 하렘 (역자주 : 회교도의 처첩이 거처하는 방, 또는 하궁)은 어디냐 말이야?"
"아무래도 넌 아직도 나를 야만스런 자바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지 ? "
"색을 좋아하지 않는 자바인, 그런 부빠티가 있다면 좀 만나보고 싶군 그래. "
"어쨌든 나는 부빠티가 될 생각은 없어."
슬르호프는 쌀쌀하게 웃었다. 마차는 계속 달려 슬라바야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나는 마음 속으로 상당히 상처받고 있었다. 나는 상처받기 쉬운 성격의 소유자이다. 슬르호프는 그런 걸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전에 이렇게 얘기한 적이 있었다.
자바인 고관이 하렘(첩)을 둘 생각이 없다고 아무리 말해도, 그것은 믿을 수 없다. 그 말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순종이든 혼혈이든 유럽인 여성을 아내로 맞이하는 일이다. 그렇게 되면 두번째 부인 세번째 부인을 맞는 일이 없을 것이다. 마차는 우노크로모 지구에 들어섰다. 슬르호프가 말했다. "왼쪽을 좀 봐 ! "
울타리로 둘러쳐져 있고 구석구석 손질이 잘 된 앞뜰을 가진 중국풍의 저택이 한 채 있었다. 정문과 창은 닫혀 있었다. 온통 빨강색 페인트로 칠해져 있어서 나의 미적 감각을 흐리게 했다.
그것이 누구의 저택이고,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화교 아촌의 소유인 유곽이었다. 마차는 계속 달렸다.
"왼쪽을 계속 보고 있으라구."
유곽 앞을 지나 왼쪽으로 도로 백오십 미터 사이에는 집 없는 공터가 계속되었다. 그리고는 마침내 넓은 정원이 붙은 목조 2층짜리 저댁이 보였다. 그 나무 울타리 바로 안쪽에는 '바이텐졸프 농장'이라고 씌어진 커다란 간판이 걸려 있었다. 슬라바야와 우노크로모의 주민이라면 그것이 헤르만 메레마라는 갑부의 저택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비록 티크재로 지은 목조 가옥에 지나지 않았지안, 사람들은 그 저택을 '우노크로모 궁전'이라고 불렸다. 멀리서도 회색의 관자 지붕이 또렷이 보였다.
방문과 창은 활짝 열려 있어 아촌의 유곽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베란다는 없고 그 대신 커다란 차양이 붙어 있어서 현관문보다도 넓은 목조 계단을 가리고 있었다. 그 즈음 사람들은 주인 메레마 씨에 관해서는 그의 이름을 알고 있는데 불과했다. 어쩌다 가끔 모습을 보았다든가, 단 한번 보았다든가 할 뿐 그에 관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와 반대로 사람들은 그의 현지처, 온트솔로 쪽을 자주 화제로 삼았다.
현지처라지만 이 넓은 농장을 혼자서 꾸려나가고, 사람들의 칭찬을 한몸에 모으고 있는 30대의 아름다운 여성이다. 그녀는 온트솔로라는 이름을 농장 이름인 바이덴졸프에서 자바식으로 발음하여 따온 것이었다.
사람들의 얘기에 의하면, 그녀의 가족과 농장의 안전은 다르삼이라는 마두라인 칼잡이와 그의 부하에 의하여 보호되고 있었다. 그래서 누구도 그 목조 궁전에 숨어드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저택에 이르자 나는 긴장했다.
마차는 갑자기 왼족으로 돌아 정문을 들어서더니 '바이빈졸프 농장'의 간판 옆을 지나 곧바로 건물 정면의 계단 쪽으로 향했다.
아직 보지는 못했지만 다르삼이라는 남자의 콧수염 --단지 콧수염만이-- 과 거대한 주먹과, 무성한 가마가 머릿속에 그려지자 나는 몸서리 쳤다. 이 폐쇄된 궁전으로부터 누군가 초대장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여태까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여기가 어디야? "
슬르호프는 "쉿 !" 하고 말했을 뿐이었다.
유럽계 혼혈의 젊은이가 한 사람 유리로 된 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와 슬르호프를 맞이했다. 나이는 나와 비슷했다. 얼굴 생김새는 유럽인, 피부는 쁘리부미, 큰키에다가 우람하고 다부진 체격이 었다.
"안녕, 로베르트 ! "
"안녕, 로브 ! 친구를 데려왔어. 괜찮겠지? 데리고 오면 안되는 것은 아니겠지 ?"
젊은이는 쁘리부미인 나에게는 인사도 하지 않고, 날카로운 눈으로 힐끗 쳐다보았다. 나는 불안해졌다. 연극의 일막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젊은이가 나를 거부한다면, 슬르호프는 웃으면서 내가 다르삼에게 쫓겨 길거리까지 기어서 달아나는 광경을 구경할 것이다.
젊은이는 아직 거부도 쫓아내지도 않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빙긋하기만 하면 나는 쫓겨나는 것이다. .....하느님, 나는 어쩌면 좋을까요? 그러나 그것은 쓸데 없는 걱정이었다.
그는 갑자기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로베르트 메레마야. "
"밍케 입니다."
그는 내 손을 잡은 채 내가 성을 말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성이 없었기 때문에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눈치를 챘다. 아마 그는 내가 아버지에개서 법적으로 인지를 받지 못한 사생아로서, 성이 없는 것은 비천한 혼혈아로 쁘리부미와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나는 쁘리부미다. 그러나 그는 내 성을 무리하게 물어 보려고 하지는 않았다. "자, 안으로 들어가지."
우리들은 계단을 올라갔다. 곁눈질하는 그의 날카로운 시선에 나는 여전히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 이 로베르트 메레마라는 젊은이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집안으로 들어간 순간, 나의 경계심은 새로운 분위기에 압도당해 눈깜짝할 사이에 사라져버렸다. 우리들 앞에 희고 섬세한 피부, 유럽인의 용모, 쁘리부미의 머리칼과 눈을 가진한소녀가 서 있었던 것이다.
그 빛나는 눈동자는 새벽 하늘의 별과 같았고, 미소짓는 입술은 신앙심까지도 포기하게 만들 정도였다. 만일 슬르호프가 이 소녀를 두고 얘기한 거라면 그의 말은 틀림없었다. 여왕 폐하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뿐더러 오히려 그 이상이었다. 그것은 한낱 사진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이었다. "안네리스 메레마입니다."
그녀는 먼저 나에게, 그리고 슬르호프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내게 평생 잊을 수 없을 정도의 강력한 인상을 주었다. 우리들 네 사람은 등의자에 앉았다.
로베르트 슬르호프와 로베르트 메레마는 곧 자신들이 슬라바야에서 구경한 축구 시합 화제에 열중했다. 나는 그 틈에 끼는 것이 싫었다. 나는 단 한번도 축구에 흥미를 느낀 적이 없었다. 나는 넓은 응접실을 살피기 시작했다. 가구, 천정, 그곳에 달린 크리스탈 샹들리에, 동관을 통해 벽에 매달린 가스 등. (가스탱크는 어디에 설치되어 있을까?) 그리고 거대한 나무 액자에 들어 있는 퇴위 직후의 엠마 여왕의 사진....... 그것들을 둘러보면서 동시에 내 시선은 몇번인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안네리스의 얼굴에 머물렀다. 나는 가구류를 취급하고 있었기 때문에 얼핏 살펴보아도 응접실의 가구가 모두 숙련공에 의해 만들어진 최고급품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의자 밑에 깔려 있는 카페트에는 내가 그때까지 구경해 본 일도 없는 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아마도 특별 주문으로 만든 것이리라. 마루는 광택제로 번쩍거리고 있었다. "왜 그렇게 아무 말도 않고 가만히 있는 거죠?"
안네리스가 감미롭고 친근한 네덜란드어로 말을 걸어 왔다. 나는 다시 한번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으나 눈을 똑바로 바라다볼 용기가 없었다. 성도 없고, 더구나 쁘리부미인 나를 그녀는 멸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대답 대신에 미소를 지을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다시 가구 쪽으로 눈을 돌렸다. "정말 모두 훌륭한 것들 뿐이군요."
"여기가 마음에 드세요?"
"물론이지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또 다시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사치스러운 응접실에 앉아 있었지만 그녀의 친란한 아름다움은 더욱 돋보여 그 화려함 앞에서 오히려 호화로운 가구들이 빛을 잃고 있었다. 그녀가 물었다. "어째서 자신의 성을 숨기고 있지요?"
"숨기고 있지는 않습니다."
나는 그렇게 대답하고 다시 불안해졌다.
"꼭 말을 해야 합니까?"
나는 슬르호프를 곁눈질했다.
그는 나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로베르트 메레마와 축구 얘기에 꽃을 피우고 있었다. 내가 시선을 거두려고 하자 그는 갑자기 나를 흘끗 쳐다보았다,
안네리스가 대답했다.
"물론이에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신은 아버지에게서 인지받지 못한 사람으로 오해를 받을 거예요."
"나는 성이 없어요. 거짓말이 아닙니다."
나는 각오를 하고 말했다.
"어머 !"
그녀는 낮게 소리질렀다. 그리고는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미안해요. 없어도 상관 없어요."
"나는 혼혈아가 아닙니다."
나는 변명하는 말투로 덧붙였다. 그녀는 또 다시 소리질렀다. "정말이세요? 정말 혼혈이 아니예요?"
가슴 속에서 큰 북이 울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쁘리부미라는 것을 그녀는 알아버렸다. 이제는 언제 쫓겨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나는 옷에 가려져 있지 않은 내 몸의 여기 저기를 값을 매기듯이 살피고 있는 로베르트 슬르호프의 따가운 시선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것은 마치 죽음을 눈앞에 둔 먹이를 평가하는 독수리와도 같았다.
눈을 들어 보니까 로베르트 메레마가 안네리스를 쏘아보듯이 노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는 입술을 굳게 다물면서 나에게 눈을 돌렸다. 아아, 도대체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슬르호프의 웃음을 물보라처럼 맞으며 이 호화로운 저택에서 개처럼 쫓겨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일까? 이렇게 심한 불안에 떨었던 적은 여태까지 한번도 없었다. 스르호프의 예리한 시선이 내 목덜미를 찌르는 것만 같았다. 로베르트 메레마의 눈은 나를 향한 채 꼼짝하지 않았다. 안네리스는 슬르호프를, 뒤이어 오빠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한순간 내 눈앞이 흐려지면서 얼굴과 손발이 사라진 안네리스의 흰 드레스가 보였다. 그 드레스에는 소매가 없었고 움직일 때마다 반짝반짝 빛을 뿜고 있었다.
모든 것이 점점 더 확실해져 왔다. 처음부터 슬르호프는 나를 욕보일 속셈으로 남의 집에 데리고 온 것이다. 이제 나는 쫓겨나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곧 다르삼이 불려와서 나를 문 밖으로 끌어내라는 명령을 받게 될 것이다.
뜻밖에 안네리스의 높은 웃음소리를 들었을 때, 나의 두근거리는 심장은 이미 고동을 멈춘 것 같았다. 나는 전천히 그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안네리스의 이는 내가 그때까지 본 어떤 진주보다도 희고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이봐, 돈 환. 지금 이 지경을 당하고서도 너는 미녀를 감상하고 찬미할 여유가 있나 ? "어째서 얼굴이 그렇게 창백하지요? 쁘리부미면 어때요?" 안네리스는 여건히 웃으면서 말했다.
로베르트 데레마의 시선이 이번에는 누이동생에게 향해겼고, 안네리스는 눈을 크게 뜨고 반발하듯이 오빠를 노려보았다. 오빠는 힘없이 시선을 돌렸다. 도대채 이건 무슨 연극이란 말인가? 슬르호프는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로베르트 메레마도 마찬가지였다. 이 두 젊은이는 내 사과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다만 내게 성이 없고 쁘리부미라는 이유만으로? 농담은 그만두라 ! 어째서 내가 사과를 하지 않으면 안된단 말인가? 친만에 말씀이야. 사과를 하다니 ?
안네리스는 진지한 얼굴로 말을 계속했다.
"쁘리부미라도 상관 없어요. 우리 어머니도 쁘리부미인걸요. 토박이 자바인이라구요. 당신은 내 손님이에요, 밍케. "
그녀의 목소리는 사뭇 명령조었다.
그제서야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정말 고맙습니다. "
"당신은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군요. 나도 그래요. 우리는 다른 곳으로 가서 에기해요. " 안네리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잡아 달라는 듯이 어리광스러운 몸짓으로 손을 내밀었다. 나는 일어나서 그녀의 오빠와 슬르호프에게 약간 고개를 숙여 목례를 했다. 두 사람의 시선은 우리들을 뒤쫓았다. 안네리스는 그들을 돌아보고는 미안하다는 듯이 미소를 보냈다. 우리들은 넓은 응접실을 가로질러 갔다. 나는 다리가 마치 허공을 밟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두 젊은이의 시선이 등에 깊숙이 꽃히는 것을 느꼈다.
우리들은 안쪽 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응접실보다 한층 더 호화스러웠다.
그곳도 벽이 모두 엷은 갈색 니스를 칠한 티크 목재로 만들어져 있었다. 방 한구석에는 한 개의 식탁과 여섯 개의 의자가 세트로 놓여 있었고, 그 가까이에는 이층으로 통하는 계단이 있었다. 다른 세 모퉁이에는 각각 조그만 탁자가 불침번처럼 서 있고, 그 위의 유럽제 도자기 꽃병 속에는 방에 어울리도록 꽃은 꽃들이 아름다움을 다투고 있었다. 나의 시선을 살피면서 안네리스가 말했다.
"내가 꽂은 거예요. "
"꽃꽂이 선생님은 누구지요?"
"마마, 우리 엄마예요."
"정말 멋지군요."
내 눈이 장식장에 못박혀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녀는 나를 그곳으로 안내했다. 그 장식장은 식탁과 반대족 벽을 등지고 서 있었으며 그 쪽에는 내가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미술품이 진열되어 있었다.
"지금은 열쇠를 갖고 있지 않아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이거예요."
그녀는 조그만 청동상을 가리켰다. "엄마 말씀으로는 고대 이집트의 왕비래요."
그렇게 말하고는 그녀는 잠시 생각했다.
"내 기억이 옳다면 네패르티티라는 이름의 미인일 거예요"
그 청동상의 이름이 무엇이든 쁘리부미, 그것도 현지처인 보잘것 없는 여인이 고대 이집트 왕비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감단했다.
장 속에는 가루라(역자주:신화속의 새)의 등에 앉은 아일랑가(역자주:11세기 자바의 크디리 왕국의 왕)의 목각상도 있었다. 다른 조각과는 달리 그것은 내가 모르는 종류의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
장의 첫번째 선반에는 여러 가지 동물의 열굴을 흉내내어 만든 작은 도자기 가면이 늘어놓여 있었다. "이것은 설인귀(薛仁貴-중국의 민화 속에 나오는 무장)의 이야기에서 본떠 손 가면이에요. 그 이야기를 알고 계시나요?" 그녀는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모릅니다."
"나중에 내가 얘기해 드릴께요. 듣고 싶지요?"
안네리스의 목소리에는 방안의 범접할 수 없는 호화스러운 분위기와 그녀와 나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거리를 없애 주는 친근하고도 은밀한 울림이 있었다.
"무척 듣고 싶군요."
"그렇다면 반드시 우리 집에 또 오셔야 해요."
"영광입니다."
작은 테이블 다리에는 언젠가 부빠티의 관저에서 본 것과 같은 커다란 자개는 박혀 있지 않았다. 네개의 다리에 각기 조그만 바퀴를 단 낮은 받침대 위에는 죽음기가 놓여 있었다. 축음기의 밑 부분은 레코드를 보관하는 곳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받침대 자체는 지나치게 조각이 되어 있고, 주문해서 만든 것 같았다.
어느 것이나 흠잡을 데가 없었다.
그러나 여기에도 또한 안네리스의 메력을 능가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왜 그렇개 잠자코 있는 거죠?" 그녀가 다시 물었다. "당신은 학생인가요?"
"로베르트 슬르호프와 동급생입니다."
"오빠는 그 사람과 같은 고등학교 학생을 친구로 갖고 있는 것을 굉장히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 것 같더군요. 나도 이제 고등학교 학생과 친구가 되었어요, 안그래요?"
그녀는 갑자기 안쪽에 있는 문을 돌아보며 큰 소리를 질렀다. "마마 ! 이리로 오세요 ! 마마, 손님이에요."
조금 뒤 진통적인 의상을 입은 부인이 나타났다. 그녀는 은실로 자수를 놓은 검은 빌로도 실내화를 신고 있었다. 단정한 옷차림, 청초한 생김새, 상냥한 미소, 그리고 아주 수수한 화장에 나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녀는 젊고 사랑스러워 보였으며 매끈한 피부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교과서식의 악센트로 발음하는 그녀의 훌륭한 네덜란드어였다. "안네리스, 네 손님이라니 어면 분이냐?"
"이쪽이에요, 마마. 밍케라고 해요. 자바의 쁘리부미예요, 마마. "
부인은 유연한 모습으로 내게로 다가왔다. 아무래도 그녀가 바로 바이민졸프 농장을 여자 손 하나로 운영해 나가는, 우노크로모와 슬라바야 주민에게 떠들썩하게 소문이 나 있는 현지처, 냐이 온트솔로인 모양이었다. "고등학교 학생입니다, 마마."
"그래요? 정말이세요?"
나는 망설였다. 유럽인 여성에게 대할 때처럼 손을 내밀어야 할까, 아니면 쁘리부미 여인으로서 그녀를 대해야 할까? 차라리 인사를 하지 않고 내버려 둘까?
그런데 뜻밖에도 손을 내민 것은 그녀 쪽이었다. 나는 당황해서 어색하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것은 쁘리부미의 습관은 아니었다. 유럽인의 태도다. 만일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면 당연히 내쪽에서 먼저 손을 내밀었어야만 했다.
"안네리스의 손님은 동시에 나의 손님인 셈이죠." 그녀는 유창한 네덜란드어로 말했다.
"어떻게 불러야 할까? 투앙? 아니면 시뇨? 하지만 당신은 혼혈은 아닌 것 같고....."
"혼혈은 아닙니다....."
나는 말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그녀를 어떻게 불러야 좋을까? 냐이, 아니면 마담?
"정말 고등학교 학생인가요?"
다정한 미소를 띠고 냐이 온트슬로 부인이 또 다시 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모두들 나를 냐이 은트솔로라고 부른답니다. 바이덴졸프라고 발음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죠. 시뇨는 나를 그렇게 부르는 것을 망설이고 있는 것 같군요. 모두들 그렇게 부르고 있으니까 당신도 사양하지 말고 그렇게 부르세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녀는 나의 우스꽝스러운 실례를 용서해 준 것 같았다. "고등학교 학생이라면 틀림없이 부빠티의 아드님이겠군요. 어느 곳의 부빠티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냐, 냐......"
"내 이름 부르는 것을 몹시 망설이고 있군요. 그렇다면, 만일 당신만 좋다면 안네리스와 마찬가지로 마마라고 불러요."
"그래요, 밍케." 안네리스가 옆에서 거들었다. "마마 말대로 하세요. 마마라고 부르는 게 좋아요."
"어느 곳의 부빠티 아들도 아닙니다, 마마."
그 새로운 호칭을 써 보았더니 나의 어색스러움, 그녀와 나 사이의 거리, 그 위에 그녀에게 갖고 있던 약간의 이질적인 느낌까지 한꺼번에 사라져버렸다.
"그렇다면 틀림없이 빠티 <역자주 : 부빠티의 보좌관>의 아드님이겠군요?"
냐이 온트솔로는 계속했다. 그녀는 내 바로 앞에 선 채로였다.
"자, 앉아요. 어째서 계속 서 있는 거죠?"
"저는 빠티의 아들도 아닙니다, 마마."
"알았어요. 어쨌든 안네리스의 친구가 찾아와 주었다는 것은 기쁜 일이지요. 자, 엔, 네 손님을 정중히 모셔야 한다." "물론이지요, 마마."
축복을 받은 것처럼 안네리스는 활기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냐이 온트솔로는 안쪽 문으로 방을 나갔다. 나는 마술에 걸린 것처럼 아직도 멀거니 서 있었다. 그것은 단지 쁘리부미의 여인이 그토록 훌륭한 네덜란드어를 구사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이상으로 그녀가 남자손님에 대해서 조금도 어려움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어디에 가서 그녀와 같은 여성을 다시 만날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어느 학교를 다녔을까? 그리고 그런 여성이 어째서 현지처, 첩으로 만족하고 있는 것일까? 유럽 여성들처럼 그녀를 그토록 자유로운 여성으로 교육을 시킨 것은 누구일까? 나는 목조로 지은 금단의 궁전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의 성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손님이 있다니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어머니가 싫은 얼굴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안네리스는 점점 더 기분이 좋아졌다.
"지금까지 아무도 나를 찾아와 주는 사람은 없었거든요. 모두들 이곳에 오는 것을 무서워했어요. 학교 때 친구들도 마찬가지예요."
"어느 학교에 다녔지요? "
"유럽인 국민학교요. 하지만 졸업은 못했어요. 4학년이 되기전에 그만두었으니까요."
"어째서 그만두었나요?"
안네리스는 손가락을 깨물며 나를 바라보았다.
"불행한 일이 있었어요....."
그렇게만 말하고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갑자기 물었다. "당신은 이슬람교도죠?" "어떻게 그걸 알았죠?"
"당신에게 돼지고기를 대접해서는 안될 것 같아서요."
"고맙군요. 그래요, 이슬람교도입니다."
하녀가 코코아와 케이크를 가져왔다.
그 하녀는 쁘리부미의 주인에게 대할 때처럼 무릎을 꿇고 내 앞으로 다가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렇기는 커녕 놀랐다는 듯이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쁘리부미의 주인 앞에서는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그대로 머리를 들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아도 되는 삶, 얼마나 멋진 것일까?
"손님은 이슬람이셔."
안네리스가 하녀에게 자바어로 말했다.
"절대로 돼지고기를 요리에 섞지 않도록 부엌에 전해 줘." 그리고 그녀는 재빨리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왜 그렇게 말이 없죠?"
"아니, 이 집 때문에 얼이 빠져서 그레요. 모든 것이 너무 놀랍고 훌륭해서."
"정말로 우리 집이 마음에 드세요?"
"물론이죠."
"조금 전에는 얼굴이 창백하던데 왜 그랬어요?"
안네리스의 스스럼없는 태도에 나도 모르게 대담해졌다.
"왜 그랬느냐고요? 그 이유를 모르겠어요?"
나는 거꾸로 되물었다.
"당신같이 아름다운 여신을 배알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죠."
그녀는 입을 다물고 샛별과 같은 눈동자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 보았다. 나는 그렇게 말한 것을 곧 후회했다.
머뭇거리면서 그녀는 속삭이듯이 물었다.
"그 여신은 누구를 가리키는 말인가요?"
"물론 당신입니다."
나도 머뭇거리면서 조그만 목소리로 대답했다.
안네리스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녀의 표정이 달라지며 눈이 휘둥그래졌다.
"내가요? 내가 아름답단 말인가요?"
나는 더욱 대담해져서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굉장한 미인입니다."
"마마 ! "
그녀는 큰 소리로 외치며 안쪽 문을 돌아다 보았다.
아뿔사 ! 나는 큰 낭패감을 느꼈다.
그녀는 문쪽으로 걸어갔다. 냐이에게 말할 생각인 모양이다.미모와는 어울리지 않는 어처구니 없이 미숙한 아가씨다. 그녀는 이렇게 고자질할 것이다--밍케가 무례한 말을 했다고.
정말 이 집은 저주받은 곳이야 ! 아니, 아니다.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이것은 저주도 아니고 재난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것은 모두 자업자득이다. 냐이 온트솔로가 문을 열고 나타나자 안네리스는 어머니에게 다가갔다.
두 사람은 나에게 결어왔다.
내 가슴은 또 다시 심하게 방망이질치기 시작했다. 어쨌든 내가 잘못한 거다. 이 파렴치한 놈을 얼마든지 벌해도 좋다. 하지만 슬르호프 앞에서만은 모욕을 당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번에는 또 왜그러지,앤? 이 젊은이와 말다툼이라도 시작한거니 ?"
"아녜요. 말다툼 따위는 하지 않았어요."
안네리스가 어머니의 말을 가로막고 아까처럼 응석이 섞인 말투로 호소했다.
"마마, 들어 보세요. 마마, 밍케가 나를 보고 미인이라고 했어요.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어요? "
냐이 온트솔로는 고개를 약간 갸우뚱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음에 안네리스에게로 시선을 돌리고 두 손을 딸의 어깨에 올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미인이라고 마마가 항상 말하지 않았니 ? 뛰어난 미인이라고 말이다. 앤, 의심할 필요도 없이 너는 미인이야. 저 젊은이가 말하는 것은 틀린 얘기가 아니란다."
"어머. 마마까지도 ! "
안네리스는 어머니를 손가락으로 꼬집으며 그렇게 소리치고는 얼굴을 붉히면서 나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나의 불안은 사라졌다.
냐이 온트솔로는 내 옆의 의자에 앉더니 말했다.
"이런 일이 있기 때문에 당신이 방문해 준 것을 나는 기뻐하고 있어요. 밍케라고 했지요? 이 아이는 다른 혼혈아들과 같이 평범한 교제를 해본 적이 없답니다. 그래서 다른 혼혈아처럼 될 수가 없는 거예요."
"나는 혼혈아가 아니라구요."
맏이 반박했다.
"혼혈아가 되고 싶지도 않아요. 나는 마마처럼 되고 싶어요."
나는 점점 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이 가족들의 관계는 어떻게 되어 있는 것일까?
"밍케, 당신도 들었지요? 이 아이는 쁘리부미 쪽이 좋다는 거예요. 어째서 당신은 그렇게 침묵을 지키고 있는 거죠? 아마 내가 당신에게 호칭을 붙여 부르지 않아 기분이 나쁜 모양이군요." "아닙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마마."
나는 황급히 부정했다.
"당황해하고 있는 것 같군요."
이럴 때 당황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나를 대하는 냐이 온트솔로의 태도는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을 잠시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아니 그녀는 마치 나를 낳아준 부모이고, 나의 어머니보다 나이는 젊지만 그 이상으로 가까운 여성이라는 느낌조차 주고 있었다. 안네리스에 대한 나의 무례한 언사 때문에 냐이의 분노가 폭발하는 것을 나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화를 내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마치 우리 어머니와 꼭 같았다. 어머니도 여태까지 한번도 화를 낸 적이 없었다. 마음 속에서 경고의 소리가 들려 왔다. 그만둬라, 밍케. 이 여자를 어머니와 동등하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녀는 정식 결혼을 하지 못한 현지처, 즉 첩에 지나지 않는 존재야. 사생아를 낳고 사치와 허영심 때문에 긍지와 명예를 팔아 먹은 하등 인간이란 말이야.......
그러나 냐이 온트솔로는 결코 무식한 여자라고는 할 수가 없었다. 네덜란드어는 유창하고, 세련된 태도를 갖고 있으며, 자기자식에게 대하는 태도도 자상하고, 현명하고 일반적인 쁘리부미의 어머니들과는 달리 개방적이고 그녀의 말투는 교양 있는 유럽여성을 연상시켰다.
그녀는 진보적인 새로운 물결에 동참하는 선구자를 방불케 했다. "새 시대"라는 말에 혹응하는 나의 몇몇 선생님들은 이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인간상을 종종 보여 주었는데, 과연 그들은 냐이 온트솔로를 그들 편으로 넣어 줄까?
"문제는, 앤" 하고 냐이가 계속했다, "네가 친구들과 사귀지 않고 항상 마마에게 붙어 있으려고만 하는 데 있는 거다. 너는 이미 어른이야. 그런데도 아직까지 어린애같이 행동을 한다니까."
그리고 나서 냐이가 갑자기 내개 말했다.
"밍케, 당신은 언제나 그런 식으로 여자 아이들을 칭찬하나요 ?"
참으로 뜻밖의 질문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나는 재빨리, 그리고 신중하게 맞받아 답했다.
"그녀가 정말로 미인이라면 칭찬해도 팬찮지 않을까요?"
"상대가 유럽인이나 쁘리부미라도 상관없이 말인가요?" "어떻게 쁘리부미의 여자아이를 칭찬할 수가 있겠읍니까? 옆에 접근하기조차 힘드는데요, 마마.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물론 유럽인 여학생들입니다."
"밍케, 정말 그렇게 할 수가 있나요?"
"우리들은 자신의 감정올 솔직하게 표형하라고 배우고 있읍니다."
"그렇다면 당신에게는 아름다운 유럽 여자 아이들을 맞대놓고 칭찬할 용기가 있다는 말이군요." "네, 있읍니다, 마마. 우리들의 선생님께서는 유럽식 예법을 가르치고 있읍니다."
"당신이 칭찬을 하면 상대방 여학생은 어면 반응을 보이나요? 욕을 하나요?"
"그런 경우는 없읍니다, 마마. 칭찬을 받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고 선생님께서는 말씀하셨읍니다. 칭찬을 받고 모욕을 당했다고 느끼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이 삐뚤어져 있다는 증거라고 했어요."
"그럼, 유럽 여학생들의 반응은 어때요?"
"이렇게 말합니다, 마마. '고맙습니다' 하고."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말인가요?"
그녀는 아마 유럽의 소설을 읽고 있는 모양이다. 현지처 가운데 이런 여자도 있는가?
"그렇습니다, 마마. 소설에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럼, 앤, 너도 인사를 해야지. '고마와요' 하고." 쁘리부미의 여자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안네리스는 얼굴을 붉히며 수줍어하면서도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상대방이 혼혈아인 경우에는 어떻게 하지요?"
"만일 유럽식 교육을 제대로 받은 사람이라면, 반응은 똑같습니다, 마마."
"교육을 받지 못했다면 ? "
"교육을 받지 못하고, 개다가 기분까지 나쁠 경우에는 욕을 먹을 때도 가끔 있읍니다." "당신은 자주 욕을 먹는 편인가요?"
그때 나는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냐이 온트솔로는 웃음을 띠고 딸 쪽을 돌아다보았다.
"앤, 너도 들었겠지 ? 자,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지....잠깐 기 다려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인사를 하기는 어색하겠지. 밍케, 이 아이에게 그 말을 다시 한번 반복해 줘요. 나도 함께 듣고 싶으니까요."
이번에는 오히려 내가 얻굴을 새빨갛게 물들기고 우물쭈물하기 시작했다.
이 상대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란 말인가? 나는 완전히 그녀의 손바닥 안에서 놀림을 당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내게는 들려주지 않겠어요?" 내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그녀는 말했다. "알겠어요. 자리를 피해 주지요." 냐이 온트솔로가 다시 방을 나갔다.
나와 안네리스는 그녀가 문 저편으로 사라질 때까지 뒷모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 두 사람 모두 어안이 벙벙해서 어린애들처럼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나는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와아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안네리스는 입술을 깨물면서 얼굴을 돌렸다. 이들은 도대채 어떻게 된 가족들가?
찌르는 것 같은 불길한 눈을 가진 로베르트 메레마, 어린애처럼 천진한 안네리스, 나의 판단력을 빼앗아 그녀가 첩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잊게 할 정도로 사람의 마음을 마음씨로 움직이는 기술을 가진 냐이 온트솔로.
그리고 이 막대한 부의 소유자 해르만 메래마씨는 과연 어떤 인물일까?
"아버지는 어디 계신가요? "
그때까지의 대화를 마무리짓듯이 내가 물었다.
안네리스의 얼굴에서 명랑한 표정이 사라지며 이내 눈썹을 찡그렸다.
"당신과는 관계 없는 일이에요. 어제서 그런 것을 알고 싶어하시죠? 나조차도 알고 싶지 않은 걸 말이에요. 마마도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고요."
"어째서요? "
"당신은 음악이 듣고 싶지 않으세요?"
"아니, 지금은 괜찮아요."
그런 식의 대화가 끝도 없이 계속되는 동안 어느 사이에 점심식사 시간이 되었다. 로베르트 메레마, 로베르트 슬르호프, 안네리스, 그리고 나는 식탁에 둘러앉았다. 젊은 하녀 한 사람이 문 옆애 서서 분부롤 기다리고 있었다. 슬르호프는 그의 친구 옆에 앉아서 때때로 나와 안네리스를 흘끔흘끔 곁눈질하고 있었다. 마마는 위쪽의 의자에 앉았다.
아무리 먹어도 못다 먹을 정도의 진수성찬이었다. 주요리는 송아지 고기였는데,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먹어 보는 것이었다. 안네리스는 내 곁에 앉아서, 마치 내가 유럽의 신사나 중요한 손님이라도 되는 듯이 정성껏 접대를 해 주었다. 냐이 온트솔로는 영국의 기숙학교를 졸업한 유서 깊은 가문의 유럽 여성처럼 침착한 모습으로 식사를 했다. 나는 스푼과 포크의 위치, 수프용의 스푼과 육류용의 나이프, 포크의 사용법, 그리고 식기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어느 하나도 흠잡을 데가 없었다.
양은으로 된 나이프도 강철의 회전 연마반(회전 숫돌을 회전하여 공작물의 면을 깎는 기계)으로 손질한 것처럼 번쩍번쩍 빛났다. 손가락을 씻는 그릇과 냅킨의 위치에서 은그릇에 든 유리컵의 위치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슬르호프는 지난 사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사람처럼 게걸스렵게 먹어댔다, 냐이 온트솔로의 존재 같은 것은 그의 관심밖인 것 같았다.
이집에 들어와서 나는 지금까지 냐이가 아들인 로베르트에게 말을 하는 것을 단 한번도 들어 보지 못했다. "밍케, 얼음을 인공적으로 만들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사실인가요?"
냐이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책에서 읽은 것처럼 정말로 차가운 얼음, 유럽의 눈오는 계절에 어는 딱딱한 얼음을 말이에요."
"정말입니다, 마마. 적어도 신문에는 그렇개 보도되었읍니다." 슬르호프가 음식을 씹으면서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그 신문보도가 사실인지 아닌지 알고 싶은 거예요."
"사람들이 만들 수 없는 것은 이제 점점 없어져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마."
나는 그렇게 대답했으나, 신문 기사에 의문을 표시하는 사람이 있다는 데 대해 내심으로는 적지 않게 놀라고 있었다. "무엇이든지 만들 수 있다고요? 그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냐이는 부정했다.
갑자기 대화가 끊겼다.
로베르트 메레마는 친구에게 밖으로 나가자고 말했다. 두 사람은 의자에서 일어나 쁘리부미의 부인에게는 인사도 하지 않고 방을 나갔다.
"내 친구를 용서해 주십시오, 마마."
냐이도 일어나 미소 띤 얼굴로 나에게 목레를 하고는 방을 나갔다. 하녀가 식탁을 치웠다. 안네리스가 말했다.
"마마는 사무실에서 일을 계속하고 계세요. 이렇게 점심식사가 끝난 다음이면 나도 뒤에서 일을 하지 않으면 안돼요."
"당신은 무슨 일을 하지요?"
"나를 따라오세요."
"내 친구는 어떻게 하고요?"
"걱정 마세요. 오빠가 틀림없이 밖으로 데리고 나갇 테니까요. 점심 식사가 끝나면 오빠는 항상 공기총으로 새나 다람쥐를 잡으러 나가요."
"어째서 점심식사 뒤에 나가는 거죠? "
"새도 다람쥐도 배가 불러서 졸리기 때문에 움직임이 둔해진다는 거예요. 자, 나를 따라오세요.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할수 없지만요."
그는 그녀의 뒤에 바싹 붙어서 따라갔다.
만일 그녀가 미인도 아니고 매력도 없었다면 그렇게 할 수가 있겠는가? 안 그런가, 돈환 !
우리들은 뒷문을 통해서 작업장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쇠줄을 두른 나무통이 하나 가득 늘어서 있고, 가장 큰 통 위에는 교반기가 얹혀 있었다. 우유냄새가 작업장 전체에 가득차 있었다. 사람들이 병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일을 하고 있었다. 때때로 그들은 천조각으로 몸을 닦았다. 모두들 흰 삼각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팔꿈치 10센티미터 밑에서 소매를 걷어올린 흰 웃옷을 입고 있었다.
모두가 남자는 아니고, 왼 웃옷 밑에 보이는 옷으로 미루어 보아, 여자들도 몇 사람 섞여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여자들이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곳은 결코 집안의 부엌은 아니었다. 더구나 작업복까지 입고! 마을의 여자들이 ! 그녀들은 작업복 속에 브래지어를 하고 있을까?
나는 그들을 한 사람씩 살펴보았다.
그들은 나를 힐끔 쳐다보았을 뿐이다. 안네리스가 한 사람 한 사람 옆으로 다가가자,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만 동작만으로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
그때 비로소 나는 이 어린 티를 아직 벗지 못한 미녀가 의심할 여지 없는 그들의 감독인이고, 남자건 여자건 인부들이 관심을 나타내지 않으면 안되는 존재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여자들이 작업복을 입고 남자들 속에 섞여 직장에서 돈을 버는 모습에 아직도 어리둥절해서 그냥 서 있었다. 이것도 역시 동인도에서의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상징일까?
"여자들이 일하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나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네리스는 나의 놀라움을 읽어 내려는 듯이 잠자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훌륭하죠? 모두들 흰 작업복 웃옷을 입고. 네덜란드의 관습을 약간 흉내내 보았어요. 네덜란드에서는 당국이 이러한 제복을 입히도록 법률로 정하고 있거든요."
그리고나서 안네리스는 내 손을 잡고 뒷마당으로 끌고 나갔다. 그곳은 농산물의 건조장으로 몇 사람의 인부가 갓따온 옥수수나 콩, 녹두, 땅콩을 햇볕에 말리고 있었다.
우리들이 다가가자 모두가 작업을 중단하고 한 손을 들어 인사를 했다. 모두 햇빛을 가리기 위해 대나무 갓을 쓰고 있었다. 안내리스는 딱딱 손뼉을 치고 누군가를 향해 손가락을 두 개 들어 보였다.
조금 뒤 인부의 아이인 듯 싶은 어린에 대나무 갓을 두 개 가져왔다. 안네리스는 그 중 하나를 내 머리에 씌워 주고, 다른 하나는 자기가 썼다. 그리고 나서 우리들은 자갈이 깔려 있는 길을 몇 백 미터 안쪽으로 걸어갔다.
"지금 성대한 축제가 열리고 있는데 어째서 그들은 쉬지 못하는 거죠 ?
"쉬고 싶으면 쉬어도 상관 없어요. 마마와 나는 쉰 적이 없지만요. 그들은 날품팔이니까요."
우리들로부터 상당히 멀리 떨어진 길 앞쪽에 각기 총을 둘러맨 두 사람의 알베르트의 모습이 보였다. "당신은 도대체 무슨 일을 맡고 있지요? "
"사무 외에는 무엇이나 다 해요. 사무는 마마의 담당이죠."
냐이 온트솔로가 맡고 있는 사무는 과연 어떤 것일까?
"마마는 경영을 맡았나 보죠? "
"모두예요. 장부 정리, 거래, 편지의 교환, 은행 관계......"
나는 걸음을 멈췄다. 안네리스도 함께 섰다.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내 손을 잡아끌었기 때문에 외양간이 있는 곳까지 갔다.
멀리서부터 이미 소똥 냄새가 코를 찌르고 있었으나 미녀에게 안내를 받고 있다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나는 코를 쥐고 도망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외양간 속으로 들어가는 일조차 과감하게 해치웠다. 외양간에 들어간 것은 그야말로 태어나서 처음 겪는 경험이었다. 정말이다. 기다란 외양간 안에서는 인부들이 젖소의 사료와 물 시중 때문에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배설물과 마른 풀 냄새로 숨이 콱 막혔다. 나는 구역질이 나려는 것을 꾹 참았다.
"수의사는 자주 옵니까? "
"부르면 와요. 작년에는 일년 내내 거의 매일 돔스홀 선생님이 오셨어요, 유선염에는 약장수 여자가 안든 생약이 잘 듣는데, 마마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약을 쓰려고 하지 않거든요."
"그 유선염이란 어떤 것인데요?"
안네리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새틴 드레스의 옷자락을 걷어들고 그녀는 소에게 다가가서 두 개의 뿔 가운데 이마를 손으로 가볍게 쓰다듬으면서 속삭이듯이 말을 하고 웃기까지 했다. 나는 떨어져서 그것을 보고 있었다.
값비싼 새틴 드래스를 입은 채 스스럼없이 외양간에 들어가 소들을 돌보다니.
그곳에도 역시 여자 인부들이 있었다. 다만 작업복은 입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 두 사람에게 허리를 굽혀서 인사를 하고 손을 들어 보였다.
나는 문턱 가까이까지 뒷걸음질을 쳐가서 신선한 공기를 마셨다.
안네리스가 내 쪽을 돌아보고 가까이 다가오라고 눈짓을 했다. 나는 못본 체하고 내 모습에 몹시 놀라고 있는 듯한 인부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외양간 바닥을 쓴 다음 물로 씻어 내리고 자루가 긴 솔로 벅벅 문지르고 있었다. 모두가 여자들이었다.
안네리스는 울타리를 따라 걸어가고, 나는 그 반대 쪽에서 그녀와 나란히 걸었다. 그녀는 문득 멈춰서더니 젊은 여자 인부와 얘기를 시작했다. 그 처녀는 가끔 머리를 돌려 나를 훔쳐 보았다. 아마 두 사람은 내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리라. 젊은 처녀 한 사람이 양철로 만든 빈 물통을 두 손에 들고 내 앞을 몸을 숙인 채 지나가려고 했다. 아주 매력적인 용모를 지닌 처녀로서, 다른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브래지어와 사롱(인도네시아 등의 회교도 남녀가 허리에 감는 천)을 입고 있었다. 맨발은 젖어서 더러웠고, 억센 발가락이 대지를 힘차게 딛고 있었다. 팽팽하게 부풀어오른 풍만한 가슴이 자연스레 내 눈길을 빼앗아 갔다. 처녀는 인사를 하고는 나를 흘끗보고의미 있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세요, 시뇨 ! "
가볍개 그리고 유혹하듯이 그녀는 인사말을 건넸다.
당당하고, 스스럼 없이, 생전 처음 보는 남자에게 가볍게 말을 거는 쁘리부미의 처녀를 나는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내 앞에 멈춰 서서 말레이어로 물었다,
"시찰 나오셨읍니까?"
"그렇소."
나는 맞장구를 쳤다.
"이봐요, 미네무. "
갑자기 안네리스가 내 뒤로 다가와서 말했다.
"당신 젖소에서는 하루에 물동이로 몇 개 나오지요?"
그때 그녀는 자바어를 사용했다.
"변함이 없읍니다, 아가씨. "
미네무라고 불린 처녀는 자바어의 복잡한 경어로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해 갖고 어떻게 젖짜는 반장이 될 수가 있겠어요?"
"아가씨가 반장을 시켜만 주신다면 충분히 해나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만."
"우유의 수량이 다른 사람들보다 많지 않으면 모범을 보일수가 없어. 그렇게 되면 반장 같은 것을 할 수가 없다고." "하지만 반장이 없으면 여러 가지로....."
"내가 당신네들의 반장이잖아?"
안네리스가 내 손을 끌어당겼다. 우리들은 나란히 줄을 선 젖소의 머리를 따라서 걸어갔다.
"당신이 그녀들을 감독하고 있나요?"
"나는 누구보다도 많은 우유를 짜낼 수가 있어요. 그런데 당신은 소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더군요. 좋으시다면 마굿간으로 가 볼까요? 아니면 밭으로 나가 보겠어요?" 나는 그때까지 밭이라는 곳에는 나가 본 일이 없었다. 도대체 무슨 재미로 그런 일을 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안네리스를 따라갔다. "그렇지 않으면 말을 타 보겠어요?"
"말을 타요?"
나는 엉겁결에 소리를 질렸다.
"당신은 말을 탈줄 아나요?"
국민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한 이 어린애 같은 처녀가 문득 성숙한 여인처럼 생각되었다. 그처럼 많은 업무를 맡고 있을 뿐만 아니라 누구보다도 많이 우유를 짜낼 수가 있고, 게다가 말까지 탈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이지요. 글쎄, 말을 타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토록 넓은 농장을 감독하며 돌아다닐 수가 있겠어요?"
우리들은 수확이 방금 끝난 밭으로 들어갔다. 여기저기에 수확물인 땅콩이 땅바닥에 높이 쌓여 있고, 잎과 줄기더미가 가축의 사료용으로 실려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은 땅이 너무나 좋아서 땅콩이 건조된 것으로 1헥타르당 3톤이나 수확이 되고 있어요. 눈으로 직접 보지 않으면 누구나 믿지 않겠지만요. 정말 좋은 땅이에요. 비옥한 일급 토지지요. 땅콩 잎이나 줄기도 비료와 가축의 사료로 안성마춤이라고요."
1헥타르 당 수확이 몇 톤이 되든 도대체 그것이 어쨌다는 건가 ? 그런 내 마음을 그녀는 읽은 것 같았다. "밭에는 흥미가 없는 것 같군요. 말을 타는 것이 좋겠어요. 어때요 ?"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안네리스는 내 손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강제로 끌려가듯이 나도 함께 달렸다. 뛰어가면서 차츰 거칠어가는 그녀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안네리스는 창고처럼 커다란 건물로 다를 데리고들어갔다. 그곳은 차고로 2륜마차와 4륜마차 등 여러 가지 마차가 늘어서 있었고, 벽에는 많은 종류의 등자<말을 탔을 때 두 발로 디디는 제구>가 달린 안장이 걸려 있었는데, 넓기만한 건물 안의 대부분은 텅 비어 있었다. 부빠디의 관저에 못지 않게 넓은 차고를 보고 내가 몹시 놀라는 것을 보자, 안네리스는 웃으면서 번쩍거리는 놋쇠로 장식되고 카바이드 램프를 단 한 대의 2륜마차를 가리켰다. "저렇게 멋진 마차를 본 적이 있어요?" 그것이 누구 것이든 나는 그때까지 마차의 모양 같은 것에 관심을 둔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때만은 그녀가 가리키는 곳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내 마음이 그렇게 갑자기 변한 것은 아마도 말을 꺼낸 상대가 안네리스였다는 것과, 또 하나는 그 마차가 너무나 근사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처음인데요. "
나는 마차로 다가가면서 대답했다.
안네리스는 다시 나를 잡아 끌고 갔다. 우리들은 넓고 기다란 마굿간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말이 세 마리밖에 없었다. 마굿간에 가득 찬 말 냄새가 코를 찔렸다. 안네리스는 회색 말에게 다가가더니 목을 끌어안고 뀌에다 대고 무엇인가 속삭였다.
말은 우습다는 듯이 코를 힝힝거렸다. 그리고 안네리스가 코를 두드리자 거친 이를 드러내 보였다. 안네리스는 즐겁다는 듯이 네덜란드어로 말을 걸었다.
"안돼, 바우크. 오늘은 산책이 아니라구." 바우크라고 부르는 말의 목을 끌어 안으면서 그렇게 속삭인 다음 그녀는 흘끗 나를 쳐다보고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말했다. "손님이 오셨어. 저분은 밍케씨란다, 가명이겠지, 틀림없이, 그는 이슬람교도야. 하지만 밍케라는 이름은 자바의 것도 이슬람의것도 크리스찬 것도 아니니까 가명일 거야. 바우크, 그의 이름이 밍케라고 하면 너는 믿겠니 ?"
안네리스는 바우크의 갈기를 쓰다듬었다. 바우크가 대답 대신 다시 힝힝거렸다. "그것 봐요. "
안네리스가 이번에는 나를 향해 말했다.
"당신이름은 가명이 틀림 없다고 바우크가 말하고 있어요."
그들은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 같았다. 표적은 나였다. 다른 두 마리도 함께 힝힝거리며 커다란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밖으로 나갑시다."
나는 안네리스를 재촉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그녀는나머지 두 마리에게 가서 각기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나서야 겨우 돌아섰다.
"당신에게서 말 냄새가 지독하게 나는군."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안네리스는 그냥 웃기만 했다.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군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바우크는 어릴 때부터 항상 저런 식으로 해온 걸요. 마마는 내가 귀여워해 주지 않으면 화를 내요, '네 생활에 도움을 주는 것은 어떤 것에 대해서도 감사하지 않으면 안된단다. 설사 그것이 한 마리의 말에 불과하더라도 말이다'하고 마마는 항상 말씀하셨어요. " 나는 두번 다시 말 냄새가 난다는 따위의 불쾌한 말을 꺼낼 수가 없게 되었다.
"내 이름이 밍케라는 것을 당신은 어째서 믿지 않죠?"
안네리스의 눈이 빛났다. 그것은 불신과 비난, 고발, 이의를 나타내고 있었다. 나는 변명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나의 이름은 밍케이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밍케라고 불려지게 된 것은 처음부터 전혀 내 뜻이 아니었다. 내 자신조차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는지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을 정도다.
얘기는 약간 복잡해서 내가 네덜란드어의 ABC도 모르고, 유럽인 국민학교(ELS)에 입학했을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의 첫번깨 담임선생님이었던 벤 로제봄 선생넘은 나를 몹시 답답한 학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눈물을 흘리면서 우는 것 이외에 그의 질문에 내가 전혀 대답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교 가기가 죽기보다 더 싫었는데, 그래도 매일 하인에게 이끌려 빠지지 않고 학교에 다녀야만 했다. 다음 해 새 학기가 시작될 무렵에는 어느 정도 네덜란드어를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으나, 결국 나는 일 학년을 두 번 다니지 않으면 안되었다. 변함없이 로제봄 선생님은 나에게 불친절해서, 나는 얼굴만 보아도 소름이 끼칠 정도로 그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낙제를 한 나는 2학년으로 진급한 친구들을 곁눈질로 훔쳐 보면서, 교실에서 네덜란드인 여학생 두 사람 사이에 앉혀졌다. 그 두 학생은 또한 쉴새없이 남에개 참견하기를 좋아하는 귀찮기 짝이 없는 아이들이었다.
그 가운데에서 내 옆에 앉은 벨라라는 계집애가 새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안되는 수업 시간에 인사 대신에 나의 넓적다리를 힘껏 꼬집었다. 내가 어떻게 했느냐고? 너무나 아픈 나머지 나는 비명을 질렀다. 로제봄 선생님은 눈을 부릅뜨고 나를 큰 소리로 꾸짖었다.
"이녀석, 조용히 해, 몽크.....밍케 ?"
그 뒤로 나와 새롭게 만나는 모든 동급생이 유일한 쁘리부미인 나를 보고 밍케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윽고 다른 선생님들도 그대로 따라 부르고, 뒤이어 전학년의 학생들이, 다음에는 학교 밖에서까지 모두들 나를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다.
언젠가 나는 할아버지에게 그 이름의 의미를 여쭈어 보았다.
할아버지는 알 수가 없으시다며, 로제봄 선생님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라고 했다. 물론 나에게 그런 용기가 있을 턱이 없었다.
내 할아버지는 네덜란드어는 물론 로마 글자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했고, 알고 있는 것은 자바어의 쓰고 읽기 정도였다. 오히려 할아버지는 그 별명을 내 본명으로 하라고 했다.
현명하고 훌륭한 선생님이 지어 주었으니까 명예스러운 일이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의 본래의 이름은 거의 잊혀져 버렸다. 국민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 이름에는 무엇인가 불쾌한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었다. 그 별명을 처음 입에 담았을 때, 로제봄 선생님은 황소눈처럼 커다란 눈을 부릅뜨고 이마에는 내 천자 주름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자가 책상 위로 떨어졌다. 거기에는 애정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찾아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현명하고 훌륭한 선생님이라니 ? 천만의 말씀이다. 네델란드어 사전에는 그런 단어가 없었다. 그 뒤 나는 슬라바야의 고등학교에 입학을 했는데, 고등학교 선생님들도 그 뜻과 어원을 모르고 있었다. 아무리 그들이 박식한 네덜란드인이라고 우쭐대도 그 뜻을 알아내지 못했고 거꾸로 나에게 되물을 정도였다.
대답을 하지 못했던 선생님들 중 한 분은 도대체 이름에 무슨 뜻이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 영국 문학가의 말을 인용하면서 설명을 하는 형편이었다(그는 뭐라고 하는 문학가의 이름을 들먹였으나, 오래 전에 나는 그 이름을 잊어버렸다). 그리고 얼마 뒤 우리들은 영어 수업을 받게 되었다. 6개월이 지났을 때, 나는 내 이름과 음과 철자법이 비슷한 단어와 부딪쳤다. 다시금 그 때의 일이 떠올랐다. 그 크게 부릅뜬 눈, 그리고 찡그린 눈썹, 그것은 틀림없이 무엇인가 지독한 욕을 하려고 할 때의 표정이었다.
그리고 보니 그 이름을 말했을 때, 로제봄 선생님은 잔깐 말을 더듬지 않았던가? 나는 조심스럽게 추리를 해 보았다. 아마도 그때 그는 "몽키"라는 말로 나를 욕하려고 했던 것이리라. 십중팔구 적중했을 그 추리를 나는 결코 입 밖에 먼 일이 없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나는 평생 어릿광대 노릇을 해야 할 운명에 놓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안네리스에게도 추리의 결론 부분은 얘기하지 않았다.
"밍케라는 이름도 멋있어요."
안네리스가 말했다.
"마을로 가볼까요? 우리 땅 안에는 마을이 네 개 있어요. 그곳에 살고 있는 모든 새대가 우리 농장에서 일하고 있다구요." 길을 가는 우리들에게 마을 사람들이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그들은 안네리스를 '논', 또는 '노니'(아가씨)라고 불렀다.
"당신의 농장은 몇 헥타르나 되지요?"
나는 가벼운 기분으로 그렇게 물었다. "180헥타르예요."
180헥타르! 그것이 도대체 어느 정도의 넓이인지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가 없었다.
"논과 밭의 넓이에요. 숲이나 잡목림은 빼구요."
숲! 그녀는 숲을 갖고 있다. 미친 짓이야. 숲을 갖고있다니 ! 무엇 때문에?
"장작을 얻기 위해서죠." "혹시 늪도 있는 것 아니에요?" "그것도 있어요. 조그만 늪이 두 군데나 있어요." 그녀는 늪까지 갖고 있었다,
"산은 어때요? 산은?"
"이제 그만 놀리세요."
안네리스는 그렇게 말하고 나를 꼬집었다.
"분화했을 때 그곳에서 불을 얻기 위해서 산을 갖고 있는가보지, 아마 ? "
"몰라요. "
안네리스가 또 한번 꼬집었다.
"저기 보이는 것은 뭐지요?"
"갈대예요. 이 갈내를 본 적이 없나요?"
갑자기 그녀는 어깨를 곳곳이 세웠다. 떨고 있는 것 같았다. "저 곳을 무서워하는 것 같군요. "
안네리스는 내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차갑게 느껴졌다. 갑자기 안네리스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한순간이라도 빨리 그 갈대숲으로부터 도망치려 하고 있었다. 입술이 창백했다. 내가 뒤를 돌아보자 그녀는 내 손을 잡아끌며 신경질적으로 속삭였다.
"신경 쓸 것 없어요. 자, 좀 더 빨리 걸으세요."
우리들이 한 마을로 들어갔다가 벗어나자 어느 새 또 다른 마을로 들어와 있었다.
어느 마을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느 곳에서다 아이들이 벌거벗고 놀고 있었다. 그 대부분이 코를 질질 흘리고 있었고 그것을 쉴새없이 핥고 있는 아이도 있었다.
그늘에서는 해산달이 가까운 커다란 배를 가진 여인들이 젖먹이를 허리에 안고 바느질을 하고 있거나, 두세 명이 모여 앉아 머리의 이를 잡고 있었다.
몇몇 여인이 안네리스를 불러 세우고 말을 하고는 배려와 도움을 요청했다. 이 유별난 아가씨는 마치 어머니처럼 상냥하게 그들을 대했다. 그녀 가족에게 생활 양식을 가져다 주기 때문에 한 마리의 말에게까지 아낌없이 애정을 쏟는 안네리스로서는 같은 인간에게 애정을 베푸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마을 사람들, 즉 그녀의 영지인들에게 둘러싸인 안네리스가 나에게는 매우 큰 존재로 보였다. 어쩌면 내가 그때까지 꿈 속에서 동경하고 있던 처녀, 지금은 영광스렵게 즉위하여, 동인도와 수리남, 안틸, 그리고 네덜란드 본국에 군림하게 된 문제의 처녀보다도 그녀 쪽이 더 위대해 보이는 것 같았다. 아마 피부도 더 섬세하고 더 아름다울 것이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그녀 쪽이 나와 더 가까이 있었다.
안네리스가 인부들과 헤어지자 우리들은 곧 다시 걷기 시작했다. 우리들의 주위에는 드넓은 별판과 머리 위에는구름한점 없는 맑은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찌는 듯한 더위였다. 내가 그녀에게 속삭인 것은 바로 그때였다.
"여왕의 사진을 본 적이 있나요?"
"물론 있어요, 너무나 아름다운 분이에요."
"그래요, 정말 아름답지요."
"그런데 왜 그런 말을 하시는 거죠?"
"당신은 여왕보다 더 아름다와요."
한순간 안네리스는 걸음을 멈추고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수줍은 듯이 말했다.
"고마와요, 밍케."
날씨는 점점 더 무더위지고 주위는 정적을 더해갔다. 나는 안네리스가 어떤 행동을 보여줄지 궁금해서 길가에 있는 도랑을 가볍게 뛰어 넘었다.
그녀도 긴드레스를 잔뜩 걷어올리고 펄쩍 뛰었다. 그 순간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아 당겨 뺨에 키스를 했다. 그녀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어쩌면 그런 짓을 !"
그녀는 비난했다. 얼굴이 창백해져 있었다. 나는 다시 한번 키스를 했다. 그녀의 빌로도처럼 부드러운 피부가 느껴졌다.
(당신은 지금까지 내가 만난 사람 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와요. )
나는 마음 속으로 그렇게 속삭였다.
"사랑하고 있어요, 앤."
안네리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고맙다고도 하지 않고, 다만 돌아가자는 몸짓을 할 뿐이었다. 그녀는 벙어리처럼 입을 꼭 다물고 빽빽이 들어선 인가에 이를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는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각했다.
밍케, 조금 전의 네 행위는 골치 아프게 될 것 같아. 만일 그녀가 다르삼에게 일러 바친다면, 너는 울 수도 없을 만큼 두들겨 맞을 거야.
안네리스는 고개를 푹 숙인채 걷고 있었다. 그때 나는 그녀가 샌들 한 짝을 도랑의 반대 쪽에 멸어뜨리고 온 것올 깨달았다. 나는 모르는 체하고 있었으나, 그러는 동안에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샌들을 잃어버리고 왔군요, 앤."
그녀는 보지도 않고 대답도 없이 점점 더 발걸음을 빨리했다.
나는 재빨리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화났어요. 앤? 나를 원망하고 있나요?"
여전히 그녀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멀리 다른 건물의 지붕보다 높이 솟아 있는 목조의 궁건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층 창에서 냐이가 우리들 두 사람을 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으니, 머리를 숙이고 걷고 있는 안네리스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냐이의 시선은 우리들의 모습이 창고 지붕에 가려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 우리를 뒤쫓고 있었다.
우리들은 집 안으로 들어가서 다시 응접실의 의자에 앉았다. 안네리스는 잠자코 앉아서 나의 말에 한마디 대꾸도 없었다. 그리고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아무 말도 없이 안쪽 문으로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홀로 의자에 앉은 채 나는 점점 불안속으로 빠져들었다. 틀림없이 그녀는 내 행동을 고자질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만큼의 벌을 받개 될 것이다.
아냐, 나는 절대로 도망치지는 않겠어. 얼마 뒤 커다란 종이 꾸러미를 들고 안네리스가 돌아왔다. 그것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그녀는 쌀쌀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늦었으니까 낮잠을 주무세요. 저쪽 문이....."
그녀는 뒤돌아보고 뒤쪽 문을 가리켰다.
"당신이 주무실 방이에요. 이 속에 샌들, 타올, 파자마가 들어 있어요. 저쪽에서 목욕을 하세요. 나는 아직 할 일이 있어요."
방을 나가기 전에 그녀는 방문으로 다가가서 나를 위해 문을 열어 주었다.
"어디가 욕실인지는 아시 겠죠?"
그렇게 덧붙이고는 그녀는 나의 등을 가볍게 밀어 방안으로 들여보내고는 밖에서 문을 닫았다. 나는 혼자 방 안에 남겨졌다. 그때까지의 크고 작은 긴장 때문에 나는 몹시 지쳐 있었다. 자신의 뻔뻔스러움이 원인이 되어 이제부터 일어날지도 모를 이런저런 일들을 나름대로 추측하느라 내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자신을 책망하고 탓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떻게 책망을 할 수가 있겠는가? 안네리스와 같은 아름다운 여자가 곁에 있다면, 젊은 남성은 누구다 나와 같은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물 선생님께서도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욕실에 들어가 보니 그곳은 또 다른 사치스러움을 맛보도록 꾸며져 있었다. 벽에는 크림색 자기 타일 바닥을 기점으로 두께가 3밀리미터 정도의 거울이 정면에 붙어 있었다. 그토록 넓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욕실은 일찌기 본 적이 없었다.
부빠티의 관저 같은 곳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는 것이었다. 자기 타일을 깐 욕조 속의 맑은 물이 내게 머리부터 담그라고 유혹하고 있었다.
어느 곳을 둘러보아도 비치는 것은 내 모습뿐이었다. 섬뜩할 정도로 차가운 물에 머리를 담그자 그때까지의 나의 불안과 의심이 한꺼번에 씻겨지는 것 같았다. 나는 언젠가 운수좋개 부자가 된다면 이것에 뒤지지 않을 만한 훌륭한 것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마마가 응접실 안쪽 방에서 나에게 의자를 권했다. 그녀는 내 옆에 앉아 사업 얘기에 나를 끌어넣었다. 그것들에 관한 나의 지식은 정말 보잘것없는 것이라는 사실이 금방 탄로났다. 냐이 온트솔로는 내가 모르는 유럽의 많은 전문 용어에 통달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때때로 그 용어의 해설까지 해 주었다.
해설까지 할 수 있다니, 냐이는 도대체 어떤 여성일까?
"시뇨는 사업이나 장사에 관심이 있군요."
마치 그녀가 말한 것을 내가 건부 이해하기라도 한 것처럼 냐이 온트솔로는 말했다.
"자바인에게는 흔치 않은 일이지요. 더군다나 고관의 아드님으로서는 말이에요. 앞으로 시뇨는 실업가나 장사꾼이 될 생각을 갖고 있나요?"
"지금까지도 나는 일을 해 왔읍니다, 마마."
"시뇨가? 부빠티의 아드님이 ? 어떤 일을?"
"나는 부빠티의 자식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을 할 수가 있는지도 모릅니다, 틀립없이."
"어면 일인가요?"
"최고급 가구를 취급하고 있읍니다."
나는 내 사업에 내해 선전을 시작했다.
"유럽의 최신식 가구입니다. 대개 이곳에 새로 도착하는 사람들을 배로 방문해서 팝니다만, 친구들의 부모님들을 찾아가서 파는 일도 있읍니다."
"공부하는 데 지장이 없을까요?"
"문제 없읍니다, 마마."
"재미있군요. 나는 누구든 열심히 일을 하는 사람에게 마음이 끌려요. 시뇨는 자신의 가구 공장을 갖고 있나요? 일하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되지요?"
"그런 것은 없읍니다, 나는 다만 가구의 도면을 보여 주고 매매계약을 성립시킬 뿐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오늘 우리 집에 온 것도 장사를 하기 위해서인가요? 그 도면이라는 것을 보여 주겠어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오늘은 아무것도 갖고 오지 않았읍니다. 하지만 마마가 원하신다면 다음에 가져오겠읍니다. 예를 들면, 오스트리아나 프랑스, 영국의 궁전에 있는 것과 똑 같은 장농이라든가, 르네상스식, 바로크식, 로코코식, 빅토리아식....."
냐이 온트솔로는 내 얘기를 열심히 듣고 있었다. 감탄을 했는지 아니면 바보 같다고 생각했는지 두 번 가량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내 말이 끝나자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자신이 땀흘려서 일하고, 자신이 노력해서 인생을 즐기고, 스스로 자립하는 사람, 그런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 말투는 와얀의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승려의 가슴 깊숙한 곳에서 나오는 듯한 울림이 있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그녀가 소리를 질렀다.
"어머 ! "
냐이 온트솔로는 이층으로 통하는 계단 위쪽을 보고 있었다.
"멋있어라 ! "
계단에서 바티크 사롱과 레이스로 짠 쿠바야를 입은 천사 안네리스가 내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머리를 묶어서 높게 올렸기 때문에 흰 목덜미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목, 팔, 귀, 그리고 가슴에는 초록색 에메랄드와 흰 진주, 그리고 다이아몬드가 장식되어 있었다(그렇기는 하지만 어느 것이 에메랄드이고 어느 것이 다이아몬드인지, 그리고 그것이 진짜인지 모조품인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나는 황홀했다. 의심할 여지도 없이 그녀는 "자바 연대기"에 등장하는 조코 타르프의 천사보다 아름답고 매혹적이었다. 안네리스는 수줍은 듯이 웃어 보였으나, 그녀의 장식은 솔직이 말해 상당히 화려했다.
그러나 그것은 일부러 나 한 사람을 위해서 장식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실제로 안네리스 정도의 미모와 기품이 있다면 보석 따위는 전혀 사용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설사 벌거벗었다고 하더라도 그 아름다움은 변함 없을 것이다. 사람이 만든 것은 신들이 내려 준 천성의 아름다움에는 도저히 비교할 수가 없는 것이다. 바다와 대지에서 얻은 장식품으로 한껏 치장한 안네리스는 낯설어 보였다. 그리고 보통 때는 입지 않는 옷차림이기 때문에 움직임은 허수아비 인형 같았고, 타고난 우아함도 사라지고 없었다. 모든 것이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아름다운 것은 어떻게 해도 아름다운 것이다. 문제는 어떤 말로 은근슬쩍 그녀의 과장된 겉치레에 일침을 가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저 애는 당신을 위해 잔뜩 멋을 낸 거예요."
냐이가 나에게 속삭였다.
나는 냐이가 매우 날카로운 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안네리스는 여전히 수줍은 듯한 미소를 띠고 우리들에게 다가왔다. 아마 마음 속으로는 벌써 칭찬에 대해 대답할 준비가 되어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찬사를 보내려고 하는데 냐이가 먼저 말을 걸었다.
"도내채 누구한데 배웠지, 그런 옷차림을?"
"어머, 마마는 ! "
안네리스는 소리를 지르며 어머니의 어깨를 가볍게 때리고는, 커다란 눈으로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 얼굴이 새빨갰다. 남이 보기에 매우 친근하게 느껴지는 모녀의 모습에 나는 난처해졌다. 그래도 나는 묵직하게 엉덩이를 붙이고 이 자리에 앉아 있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나는 웬만한 일에는 동요하지 않는 멋있고 씩씩한 사나이, 지칠 줄 모르는 미의 여신의 정복자라는 인상을 남겨두지 않으면 안되었다.
설사 여왕 폐하 앞에 나가는 일이 있어도 나는 같은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야말로 사자의 걀기, 호랑이의 이빨, 사나이다움의 모범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모녀의 내화에 끼어들지 않았다. "앤, 시뇨는 돌아가려는 참이었단다. 내가 붙잡아 두기를 잘했지? 그러지 않았으면 이처럼 아름다운 너를 보지 못해 한이 될 뻔했구나."
"어머, 마마는 ! "
다시 한번 안네리스는 어리광스렵게 소리를 지르고 어머니를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그리고 나를 흘끗 쳐다보았다.
"왜 그래요, 밍케? 어제서 잠자코 있지요? 그 문구를 잊어버리기라도 했나요?"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마마. 이런 미녀 중의 미녀에게 어떤 말이 어울리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래요, 당신은 미녀 중의 미녀예요, 앤. "
"맞아요. 앤, 너는 마치 동인도의 여왕과 같구나. 그렇지요, 시뇨 ? "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내가 앉은 쪽을 바라보았다. "어머, 마마 ! "
딸이 다시 소리를 질렀다.
두 사람의 모녀 관계가 나에게는 이상하게 느껴졌다. 아마도 그것은 냐이의 결혼은 법률로 인정되지 않는 내연 관계이고 거기서 태어난 안네리스는 서자라는 점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대개 현지처, 첩이 있는 가정의 분위기란 보통 그럴 것이다. 아니면 오늘날 유럽의 근대적인 가경, 그리고 던 장래 동인도의 쁘리부미의 가정이 이런 분위기로 변할지도 모른다.
아니, 그것은 역시 부자연스럽고 이상하다. 한편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그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모녀 간의 대화는 더 이상 계속되지 않고 끝났다.
해가 지고 차츰 어두워졌다. 마마는 많은 이야기를 했다. 안네리스와 나는 오로지 듣는 역할만을 충실하게 계속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네덜란드어의 풍부한 구사럭에 다시 한번 감탄했고 동시에, 선생님들에게서 배운 적도 없는 새로운 말들이 너무나도 많이 쏟아져 나오는 것에 경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런 까닭으로 나는 집에 돌아가는 것 조차 잊고 있었다, "돌아갈 마차가 걱정되죠? 마차는 뒤걷에 얼마든지 있어요. 괜찮다면 가장 큰 4륜마차를 타고 돌아가세요."
하인 한 사람이 가스 등에 불을 켜놓고 갔는데, 나는 가스의 중앙 탱크가 어디에 설치되어 있는지 여전히 알 수가 없었다. 하녀가 저녁식사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두 명의 로베르트가 안방으로 불려오고 무언 속에서 저녁 식사가 시작되었다.
다른 하녀가 응접실로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안방에서는 우유빛 유리 등피에 둘러싸인 램프가 희미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누구 한 사람도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눈만이 접시에서 주발로, 주발에서 빵 바구니로 움직이고 스푼과 포크, 나이프가 접시에 부딪쳐 소리를 낼 뿐이었다.
냐이 온트솔로가 얼굴을 들었다. 현관문이 노크도 없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 것이다. 고개를 들어 냐이를 보니 그녀의 눈은 응접실 쪽으로 경계의 빛을 보내고 있었다.
로베르트 메레마도 같은 방향으로 흘끗 시선을 보냈다. 그 눈은 기쁜 듯이 빛나고 입술에는 만족스러운 웃음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나도 또한 등 뒤의, 그들의 시선이 향해진 쪽을 돌아보고 싶었으나, 그것은 무례하고 신사가 취할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참았다.
그 대신 나는 안네리스를 흘끔 쳐다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눈동자만을 위로 올리고 귀를 곤두세우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신중하게 식사를 하던 손을 멈추고 등 쪽으로 신경을 집중시컸다.
마루를 밟는 구두 소리가 들려 왔다. 소리는 차츰 가까와오고 또렷해졌다.
냐이는 식사를 중단했다. 슬르호프도 입으로 가져가던 손을 멈추고 스푼과 포크를 접시 위에 내려 놓았다. 구두 소리는 점점 커져서 시계추 소리를 삼켜버리고 내 뒷가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로베르트 메레마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식사를 계속하고 있었다.
드디어 내 옆 자리에 앉아 있던 안네리스도 뒤를 돌아보고 불안한 듯이 눈을 커다랗게 치켜떴다. 쨍그렁 하고 소리를 내며 그녀의 스푼이 마루에 떨어졌다.
내가 그것을 집으려고 하니까 하녀가 재빨리 달려와서 주워주고는, 급하게 방을 나가 어디론가 모습을 감췄다. 안네리스는 차츰 다가오는 수수께끼의 인물과 대결이라도 할 듯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스푼과 포크를 접시 위에 올려놓고 안네리스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을 등지고 뒤돌아섰다.
냐이도 또한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방문객의 그림자가 응접실의 램프 빛을 받아 차츰 길게 뻗어왔다. 질질 끄는 듯한 구두 소리가 한층 더 선명해졌다. 이윽고 키가 크고 몸집이 크며 뚱뚱하게 살찐 유럽인 남자가 나타났다. 입고 있는 옷은 구겨져 주름투성이였고 머리칼은 흐트러져 있었는데, 그것이 백발인지 본래 은발인지 구별을 할 수가 없었다.
사나이는 우리들 쪽을 보고는 한순간 멈춰 섰다.
"아버지 ?"
나는 안네리스에게 속삭였다.
"그래요. "
그녀의 대답은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메레마는 구두를 질질 끌면서 나에게, 다 한 사람을 향해 똑바로 다가왔다. 내 바로 맞은펀에서 그는 멈춰 섰다. 눈썹은 짙고 얼굴은 석회암처럼 얼어붙어 있었다. 나는 끈이 풀린 먼지투성이의 그의 구두에 시선을 떨구었다.
그때 문득 상대방이 얘기를 하려고 할 때는 그 상대방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라고 한 선생님의 말씀을 생각해냈다.
황급히 나는 다시 얼굴을 들어 큰 소리로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메레마 씨 !"
나의 인사는 네덜란드어로서 매우 공손했다.
메레마는 고양이 같은 신음 소리를 냈다. 다림질을 하지 않은 양복이 몸에 엉겨 붙어 있었고, 빗질을 하지 않은 엷은 머리칼이 관자놀이와 귀를 덮고 있었다. "너 같은 녀석을 누가 이집에 오라고 했지? 원숭이 같은 녀석 !"
그는 거칠고 천한 곳에서나 쓰는 말레이어로 고함을 쳤다.
내 등 뒤에서 로베르트 메레마의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안네리스의 흐느낌을 억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슬르호프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했다. 그러나 내 앞에 선 거한은 그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나는 짧은 순간이지만 그때 몸이 마구 떨렸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 같은 상황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단 한가지, 냐이의 얘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다른 사람에게서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가 없었다. 만일 냐이 온트솔로가 잠자코 있으면 나는 파멸이다. 실제로 그녀는 입을 굳게 다문 채로 있었다.
"이 녀석아, 유럽인의 옷을 입고 유럽인과 교제를 하고 네덜란드 어를 조금 할 줄 알면, 그것으로 유럽인이 될 수 있는 줄로 생각하고 있는 거냐? 너 같은 놈은 어디를 가나 원숭이야 !" "조용히 하세요 ! " 냐이가 네덜란드어로 쏘아붙였다. "그는 내 손님이에요."
정기가 없는 메레마의 눈이 자기 첩에게로 옮겨 갔다.
"냐이 ! "
"미친 유럽인은 미친 쁘리부미와 마찬가지예요."
냐이는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눈에는 강한 혐오감과 불쾌감이 깃들어 있었다.
"이 집에서 당신은 아무런 권리도 없어요. 자기 방이 어딘지는 알고 있겠지요 !"
냐이는 그렇게 말하고 한쪽을 가리켰다. 그 손끝은 고양이 발톱처럼 날카로왔다.
메래마는 아직 내 앞에 선채로 망설이고 있었다.
"꼭 그렇다면 다르삼을 부를까요? "
냐이는 겁을 주었다. 거한은 폴이 죽은듯 대답 대신에 신음 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몸을 홱 돌려 내가 얼마 전까지 있던 방의 옆문으로 다리를 끌며 걸어가 방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슬르호프" 로베르트 메레마가 친구에게 말을 걸었다. "밖으로 나가지, 이곳은 너 무 더우니까." 두 사람은 냐이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안네리스는 흐느껴 울고 있었다. "조용히 해, 앤."
"용서해 줘요, 시뇨."
우리들 두 사람은 다시 의자에 앉았다. 안네리스는 실크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다. 냐이는 이미 닫혀진 문을 아직도 분노에 찬 얼굴로 노려보고 있었다.
"앤, 너는 시뇨에게 부끄럽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단다."
냐이는 화가 난 말투로 우리들 쪽을 보지 않고 말했다.
"그리고 시뇨, 당신도 지금의 일을 잊지 못할 거예요. 하지만 나는 부끄럽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시뇨도 충격을 받거나 부끄럽다고 생각하거나 하지 말 아 줘요. 나는 당연한 일을 한 것 뿐이에요. 그 사람은 아예 없는 걸로 생각해 주 세요. 옛날에 나는 저 사람의 정숙한 아내, 충실한 동반자였어요. 하지만 지금 저 사람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쓰레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식에게 치욕을 주 는 것밖에는 아무런 능력도 없는 인간이에요. 그것이 네 아버지란다, 앤."
그제서야 화가 풀렸는지 냐이 온트솔로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러나 더 이상 식사를 계속하지는 않았다. 몹시 굳어지고 험악한 표정이었다.
나는 조용히 냐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그녀는 어떤 여성이란 말인가?
"만일 내가 그처럼 심하게 굴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저 사람의 자식들 과 이 농장......모든 것이 엉망이 되고 우리들은 무일푼이 되었을 거예요. 그러니까 당신 앞에서 그런 행동을 보인 것을 나는 후회하지 않아요." 그리고 나서 내게 애원하듯이 냐이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나를 너무 억센 여자라고 생각하지는 말아 줘요."
그녀는 아름다운 네덜란드어로 계속했다.
"모든 것은 그 사람을 위해서입니다. 본인이 원하는 대로 나는 그 사람을 다루어 왔어요. 그것이 그 사람의 희망이에요. 정말 이렇게 행동하도록 내게 가르쳐 준 것은 다름 아닌 유럽인들입니다. 밍케, 그래요, 유럽인이 그렇게 가르쳤어요."
그 목소리는 믿어 달라고 내게 하소연하고 있었다.
"학교에서가 아니라 실생활 속에서 그렇게 배워 왔어요." 나는 그냥 잠자코 있었다. 그리고 냐이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가슴속 깊이 새겼다.
학교에서가 아니라 실생활 속에서 ! 억센 여자라고는 생각하지 마세요! 그렇게 가 르친 것은 다름 아닌 유럽인......
냐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더니 끝에 장식술을 단 끈을 잡아당겼다. 멀리서 방울 울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 왔다. 그리고 조금 전에 자취를 감추었던 하녀가 다시 나타났다. 냐이는 하녀에게 식사를 치우라고 말했다.
나는 여전히 무엇을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제 돌아가세요, 시뇨."
나를 돌아보며 냐이가 말했다.
"네, 마마, 이제는 돌아가 봐야겠읍니다."
냐이가 내게로 가까이 걸어왔다. 그녀의 눈은 다시 어머니와 같은 온화함을 되찾고 있었다. "앤, 오늘은 그냥 손님을 보내 드려라. 자, 이제 눈물을 닦아야지."
"오늘은 그만 돌아가겠어요, 앤. 아주 즐거웠옵니다." "용서해 주세요, 밍케. "
목이 맨 소리로 안네리스가 속삭였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앤."
"시뇨, 휴가 때가 되면 이곳에 와서 천천히 놀다 가세요. 어려워할 것은 없어요. 아무런 문제될 것이 없으니까요. 어때요? 승낙하시겠어요? 자, 오늘은 이만 돌아가세요. 다르삼에게 마차로 바래다 드리라고 할 테니까요." 그렇게 말하고 냐이는 다시 창가로 가서 끈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다시 의자로 돌아와 앉았다. 그동안 나는 이 현지처의 강인함에 놀라 멍해져 있었다. 그녀는 모든 것을 완전히 손아귀에 쥐고 있는 거다. 물론 나도 그녀의 손아귀에 잡혀 있었다.
도대체 어떤 교육을 받으면 그토록 지적이고 총명하고 또 그 많은 사람들을 각기 다른 모습으로 한꺼번에 상대할 수가 있을까? 그리고 만약 교육을 받았다면, 어째서 그녀는 현지처라는 운명을 받아들일 수가 있었단 말인가? 그것을 알아낼 열쇠를 나는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 한 마두라인 남자가 나타났다. 키 160센티미터, 나이는 40세 가량, 검은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고 머리에 두건을 쓰고 있었다. 허리에는 단도가 한 개 꽂혀 있고, 볼에 시커먼 수염이 더부룩하게 나 있었다.
냐이 온트솔로가 마두라어로 사나이에게 명령을 했다. 나는 그 뜻을 잘 알 수가 없었으나, 아마 마차로 나를 집까지 무사히 데려다 주라는 명령이었을 것이다.
다르삼은 똑바로 선 채 꼼짝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마치 내 얼굴을 머릿 속에 똑똑히 새겨 넣으려는 듯이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뚫어질 듯이 응시했다.
"이 도련님은 내 손님이기도 하고, 안네리스의 손님이에요."
냐이가 자바어로 말했다.
"전송해 드리고 돌아오세요. 만일 도중에 사고라도 나면 큰일입니다. 조심해야 해요 ! " 아무래도 그것은 조금 전의 마두가어를 자바어로 다시 말한 것인 모양이었다.
다르삼은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고 거수 경례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냐이가 말했다.
"밍케, 안네리스에게는 친구가 없어요. 오늘 시뇨가 우리 집을 찾아 주었기 때문에 이 아이는 몹시 기뻐하고 있옵니다. 물론 당신은 바쁜 탓으로 그다지 시간이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나도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어떻게든 시간을 만들어서 자주 찾아와 주세요. 메레마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읍니다. 그것은 내 문제니까요. 그보다는 시뇨만 좋다면 여기서 함께 살아요. 그렇게만 해주면, 우리들은 얼마나 좋을지 모르겠어요. 학교는 매일 마차로 다니면 됩니다. 물론 결정은 시뇨에게 달려 있어요." 이건 또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제안인가? 사람들이 "마성의 저택"이라고 소문을 퍼뜨린 것도 당연한지 모른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신중히 잘 생각해 보겠읍니다, 마마. 친절하신 말씀 너무나 감사합니다."
"싫다고 거절하면 안돼요, 밍케." 안네리스가 토라진 얼굴을 해 보였다.
"그래요, 잘 생각해 보세요. 만일 시뇨가 좋다면, 모든 것을 안네리스에게 준비하도록 하겠어요. 그렇지 않니, 앤 ?"
안네리스 메래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당을 지나는 마차 소리가 들렸다. 우리들은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그곳에서는 슬르호프와 로베르트 메레마 두 사람이 잠자코 앉아서 창밖의 어둠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차는 계단 앞에서 멈췄다. 나와 슬르호프는 계단을 내려가서 마차에 올라탔다.
"여러분, 안녕히 계세요. 친절하게 대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마마, 앤, 로베르트."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갑자기 냐이가 소리쳤다.
"멈춰요 !"
"밍케, 잠깐만 내려 줘요."
노예처럼 나는 다시 한번 냐이의 손바닥에 들어갔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마차를 내려 계단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냐이는 층계를 한 계단씩 내려왔다.
안네리스도 뒤따라 내려왔다. 냐이는 내 귀에다 대고 살며시 말했다.
"안네리스가 말을 했는데 시뇨, 화를 내지는 말아요. 당신이 그 애에게 키스를 했다는 것이 사실인가요?" 벼락에 맞았다 하더라도 그처럼 당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불안과 초조가 은몸으로 퍼져 나갔다. 나는 금방이라도 앞으로 고꾸라질 지경이었다.
"정말인가요?"
냐이는 재촉했으나 나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그녀는 안네리스를 데려다가 내 앞에 서게 했다. "역시 사실인 모양이군요. 그렇다면 밍케, 지금 내 앞에서 안네리스에게 키스를 해 주제요. 내 딸이 거짓말장이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라도."
나는 몸이 떨렸다. 그러나 냐이의 명령에는 저항할 수가 없었다. 나는 안네리스의 볼에 키스를 했다. "이 아이에게 키스를 한 것이 당신이라는 것을 나는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럼, 안녕. "
돌아가는 길에 나는 한 마디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냐이의 마술에 걸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과연 안네리스는 눈부시도록 아름다왔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사람을 자기 뜻대로 움직이고 무릎을 꿇게 하고 마는 냐이 온트솔로의 수완은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로베르트 슬르호프도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마차는 바퀴를 삐걱거리면서 길가의 돌을 튕기며 달리고 있었다. 마차의 카바이드 램프가 주위의 어둠 속에 밝은 빛을 뿌리고 있었다.
그날 밤 길을 가는 것은 우리가 단 마차뿐이었다. 사람들은 빌헬미나 여왕 즉위 기념 축제에 참석하기 위해 슬라바야로 몰려 나간 것 같았다.
다르삼은 투랑 강의 하숙집까지 나를 데려다 주었다. 내가 집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분명히 확인하고 나서 그는 슬르호프를 보내기 위해 다시 마차를 달렸다.
"어머, 밍케 도련님 !"
남의 일에 참견하기를 좋아하는 테린하 부인이 큰 목소리로 나를 맞아 주었다. "이렇게 늦게 돌아오다니 이제는 집에서 식사를 하지 않는 건가요. 조금전에 방에다 편지를 갖다 두었어요. 얼마건 부터 편지가 몇 통 와 있는 데도 도런님은 그 편지를 아직 읽지 않은 것 같더군요. 전혀 뜯지도 않은 채 방에 내던져 두지 않았어요? 알겠어요, 도련님 ? 그 편지는 읽어 달라고 정성껏 써서 우표를 붙여서 보낸 거라구요. 혹시나 중요한 내용이 들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전부 시에서 온 편지들이에요? 도대체 왜 그러시죠? 아아, 그건 그렇고, 내일 물건을 살 돈이 없는데요."
수다장이이기는 하지만 마음씨 좋은 부인에게 나는 일 타렌을 건네주었다. 그녀는 연제나처럼 몇 번씩 고맙다는 말을 했으나, 그것은 그녀의 마음 속에서 우러나왔다기보다는 오히려 조건 반사에 가까운 것이었다.
방에는 뜨거운 코코아가 준비되어 있어서 나는 재빨리 그것을 모두 마셨다. 구두와 셔츠를 벗자 나는 곧장 침대로 기어들어가서 그날 일어난 모든 일들을 되새겨 보려고 했다.
그러나 나의 눈은 자신도 모르게 석유 램프 옆의 탁자에 있는 한 장의 사진으로 가 버렸다. 그것은 내가 꿈 속에서 그리고 있던 소녀의 사진이었다. 나는 침대를 내려가 사진을 찬찬히 살펴보고 나서 그것을 뒤집어 놓고 다시 침대로 들어갔다. 나는 항상 베개 위에 놓여 있는 슬라바야와 부다위 발행의 신문을 옆쪽으로 밀어 놓았다. 잠들기 전에 신문을 읽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있었던 것이다.
무슨 까닭인지 일본에 관한 기사를 찾아서 읽는 것이 나는 좋았다. 유학을 위해 영국이나 미국으로 건너가는 젊은이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나는 기뻤다.
나는 일본에 대해서는 정보통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보다 더 흥미로운 것이 나타난 것이다. 그 불가사의한 대부호의 일가다.
마치 마술사처럼 사람의 마음을 사로 잡는 기술을 지닌 냐이, 아름답고 또한 어린애 같으면서도 인부들을 관리하는 데 있어서는 능숙한 안네리스 메레마.
축구 이외의 일은 전혀 관심이 없고 날카로운 눈을 가진 로베르트 메레마, 코끼리처럼 거대하고 꽤 까다로운, 그러나 자기의 첩에 대해서는 무력하고 갓난애 같은 헤르만 메레마.
한사람 한사람이 마치 연극 속의 등장인물과 같았다. 그들은 도대체 어떻게 된 가족인가? 그리고 나 자신은 어면가? 나도 또한 냐이 앞에서는 무력했다. 아직도 그녀의 목소리가 귀에 울리고 있었다.
안네리스에개는 친구가 없어요 ! 오늘 시뇨가 우리 집을 방문해 줘서 이 아이는 몹시 기뻐하고 있읍니다. 물론 당신은 바쁘기 때문에 시간이 없겠지요. 하지만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자주 놀러 오세요......시뇨만 좋다면 여기서 함께 살아요. 그렇게 해주면 우리들은 얼마나 좋겠어요...... 얼마 뒤 나는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집 밖에서 떠툴썩한 소리가 나서 나는 석유 램프에 불을 켰다. 새벽 5시였다. "짐이 왔읍니다. 밍케 씨 앞으로요."
그렇게 소리치는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유, 치즈, 버터, 냐이 온트솔로 부인이 보낸 편지도 있읍니다........."
제 2 장
쟝 마레의 비밀
보통 때와 다름 없는 생활이 계속되고 있었다, 달라진 것은 어쩌면 나뿐인지도 몰랐다. 우노크로모의 바이텐졸프 농장이 자나깨나 나를 부르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나는 마술에 걸린 것일까? 순종이건 혼혈이건 유럽인 처녀라면 나는 얼마든지 알고 있는데, 어째서 안네리스만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것일까? 그리고 냐이 온트솔로의 목소리는 내 마음속에서 좀처럼 떠나지 않았다.
밍케, 밍케 군, 언제 와 줄 거예요?
나의 머릿속은 혼란했다.
매일 아침 나는 메이 마레를 데리고 학교로 갔다. 이 소녀의 손을 잡고 우선 신빤의 에에르에스에 있는 그녀의 국민학교까지 가서 그곳에서 하베에스 거리에 있는 우리 학교로 혼자 걸어가는 것이다.
나는 등교길에 내 앞을 달리는 마차 한대 한대의 마부를 혹시 그것이 다르삼이 아닌가 하고 유심히 살펴보곤 했라. 또 뒤에서 마차가 나를 앞질러 가려고 할때는 꼭 돌아봐야만 직성이 풀렸다.
마치 나는 길을 다니는 모든 마차와 관계가 있는 것 같았다. 수업 중에도 안네리스의 모습이 자꾸 떠오르고 냐이의 목소리가 되풀이해서 귀에 들려왔다.
언제 와 줄 거예요? 그 아이는 당신을 위해 멋을 부린 거예요. 언제 오는 거죠?
로베르트 슬르호프는 우노크로모의 일로 나를 괴롭히는 일은 없었다. 그는 나를 피하기만 하고 내가 안네리스를 함락시키면 나를 존경하겠다던 약속을 좀처럼 지키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의 생활은 잿빛 베일 속에서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모든 것이 불투명하고마음이 가라앉지를 않았다. 동급생들은 순종의 유럽인도, 혼혈도 남자도 여자도 모두 변해버린 것처럼 생각되었다. 또 그들 쪽에서도 내 마음의 변화를 알아채고 있었다. 그렇다. 나는 다고난 쾌활함, 남다른 붙임성을 잃고 있었던 것이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쟝 마레의 화방에 들렸다. 직공들이 마침 오후의 작업을 시작했을 때었다. 쟝 마레는 언제나처럼 제작 중인 그림이나 스케치, 디자인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날 나는 곧바로 하숙집으로 돌아가고 싶지가 않았다. 항구로 갈 생각도 없었다. 또 광고물을 만들기 위해 "경매"지의 사무실에 가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글을 쓰고 싶은 의욕도 없었다. 혹은 또 아는 사람의 집을 찾아가서 가구를 팔거나 초상화 주문을 받을 생각도 일어나지 않았다. 정말로 나는 아무것도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나는 다만 침대에 누워 안네리스만을 생각하고 싶었다.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오로지 안네리스, 그 어린애 같은 계집애 뿐이었다. 하숙집에 돌아오자 내가 바이민졸프 농장을 방문한 일에 대해서 테린하 부인이 집요하게 얘기를 캐내려고 했다. 얘기를 한 뒤 나는 그녀의 천박한 인신공격을 지루하게 들어야 할 곤란한 처지에 빠졌다.
"도련님, 도련님이 그 처녀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은 저도 알 수가 있어요. 하지만 문제는 처녀의 어머니 쪽이지요. 그 어머니는 추잡한 욕망을 갖고 있어요. 그 처녀의 아름다움은 모두들 칭찬을 하고 있지만, 아무도 그곳에 찾아갈 용기는 없다고요. 정말 도련님은 운이 좋은 분이에요. 하지만, 제발 조심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냐이한테 당한다고요 ! "
유치하고 지저분하고 교양이 없고 유일한 관심은 추잡한 성에 관한 것뿐, 현지처 가정의 도덕 수준은 그런 정도라는 것이 테린하 부인이나 나 뿐만 아니라 모든 세상 사람들의 인식이었다고 해도 좋다. 그들은 창부의 가족, 품위가 없는 인종, 흔적도 없이 거품처럼 사라져 버리도록 운명지워진 인간에 불과했다. 그러나 냐이 온트솔로단을 얘기하자면, 그런 세상 사람들의 생각이 들어맞는다고 할 수가 있겠는가? 나를 혼란케 만든 것은 바로 그 점이었다. 들어맞을 턱이 없어 ! 그렇게 말하는 것은 혹시 나에게 사람 보는 눈이 부족한 때문이 아닐까? 어쩌면 나는 진실이 어떤 것인지 알기를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모든 사회 계층이 현지처의 가정을 단죄하고 있었다. 그것은 또한 쁘리부미, 유럽인, 중국인, 아랍인을 가릴 것 없이 모든 민족이 같은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린 가운데서 어떻게 나 혼자만이 "노우"라고 할 수 있겠는가? 도대체 안네리스에게 키스를 하라고 명령하는 것부터가 냐이의 낮은 도덕 수준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닐까?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을 해도 나는 아직 테린하 부인의 인신 공격에 나의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물론 그것은 내가 어리석은 꿈을 꾸고 있는 탓인지도 모른다. 지난 며칠 동안 나는 자신에게 납득을 시키려고 노력해 왔다.
나와 안네리스 사이에 일어난 것은 젊은 남녀의 관계에서는 흔해 빠진 사건에 불과하다. 그것은 왕이든 장사꾼이든 종교지도자든 농민이나 노동자든 어면 가정에서나 일어날 수가 있고, 신들의 세계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것은 옳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다른 손이 나를 가리키며 지단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자기 자신의 생각을 정당화시키려고 하는 너에게 있는 것이라고.
생각다 못해서 나는 그날 저녁때 쟝 마레를 찾아가 그의 지혜를 빌릴 수 밖에 없었다. 그의 말레이어는 조금씩 향상되어 가고는 있었지만, 그와 얘기를 한다는 것은 아직 기대할 수가 없었다. 또한 그는 네덜란드어를 모르고 나의 프랑스어 실력은 거의 절망적이었다.
쟝 마레는 식민지 군의 병사로서 4년 이상이나 아치에에서 싸운 경험을 갖고 있었는데, 네덜란드어를 배우는 것만은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었다. 그가 알고 있는 네덜란드어란 군대의 명령 용어뿐이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쟝은 나보다 나이가 많고 친구인 동시에 나의 동업자였으니까 그에게 의논을 하는 것은 당연했다. 내가 찾아갔을 때, 화방에서는 직공들이 중국인 아촌으로부터 주문받은 가구의 마무리 손질을 하고 있었다. 아촌은 바로 냐이 온트솔로의 이웃에 있는 유곽의 주인인데, 주문이 유럽 스타일의 가구였기 때문에 중국인인 그는 자기 나라 업자에게 발주를 하였던 것이다. 그 주문을 다른 사람을 통해 내가 받아온 것이었다.
쟝은 연필을 만지작거리면서 다음 그림을 위한 스케치를 하고 있었다.
"잠깐 할 얘기가 있어요, 쟝."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그의 제도용 테이블에 붙어있는 의자에 앉았다. 쟝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시히루'라는 말의 의미를 알고 있나요?"
내 질문에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구나구나'는? "
"그 말이라면 알고 있지. '흑색 마술'인가 하는 의미지. 언젠가 들은 적이 있어. 아프리카의 흑인이 잘 쓴다더군. 하기야 그것도 내가 제대로 들은 건지는 모르지만."
그 흑색 마술에 완전히 걸려버린 자신의 현재 상태를 쟝에게 얘기하기 시작했다. 또 현지처의 가정, 특히 냐이 온트솔로의 가정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견해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샹 마레는 연필을 그림종이 위에 올려놓고 나를 바라보면서 내가 말하는 단어 하나하나를 똑바로 알아듣고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내 이야기가 끝났을 때 프랑스어와 말레이어를 섞어서 조용하게 말했다.
"상당히 고민하고 있는 것 같군, 밍케. 사랑에 빠져버렸나 보지 ?"
"그렇지 않아요, 쟝. 나는 사랑 따위에 진 게 아니라구요. 그야 물론 그녀는 매력적이고 황홀할 정도의 미인이기는 하지만, 사랑에 빠진 것과는 달라요."
"알겠어. 자네는 사랑의 병 때문에 괴로와하고 있는 거야. 그것도 사랑한다는 것을 남에게 말을 할 수가 없을 정도니까 상당히 중증인 셈이지. 알겠나, 밍케 ? 잘 들어둬. 자네의 젊은 피는 그녀를 자기 것으로 만들기를 바라고 있어. 그리고 자네는 세상사람들의 눈을 두려워하고 있는 거야."
그는 천천히 웃음을 떠올렸다.
"세상의 평가가 옳다고 생각되면 존중을 해야지. 그러나 만일 그릇된 것이라면, 참고하거나 존중할 필요가 없지 않겠나? 밍케, 자네는 교육을 받은 사람이야. 지식인은 먼저 생각하는 데 있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행동에 있어서 편견을 버리고 진실해지지 않으면 안되는 걸세. 그것이 교육을 받았다는 것의 의미지. 두 번이나 세 번쯤 더 그 가정을 방문해 보게. 그렇게 하면 세상의 평가라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좀더 잘 알게 되겠지." "그렇다면 나보고 그곳을 또 찾아가라는 말인가요?"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세상의 평가가 옳은지 그른지를 자네 자신이 직접 뛰어들어 알아 보라는 말일세. 그릇된 세상의 평가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이중의 과오를 범하게 되는 거야. 자네 자신의 생각에 의해서 스스로 심판을 내려야 되는 거야. 그 집안사람들이 그들을 심판하는 사람들보다 훌륭한 사람들일지도 모르지 않나."
"쟝, 당신은 진정한 내 친구예요. 나를 심판하려는 건 아니겠죠 ? "
"사정을 잘 알지도 못하고 남을 판단하거나 하지는 않네."
"나는 그 집에서 함께 살자는 요청을 받고 있어요."
"아뭏든 찾아가 보는 거야. 다만 자네에게 학식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게나. 그리고 더 이상 새로운 주문을 맡아 오지 않아도 괜찮다구. 이것 보게. 이제부터 완성하지 않으면 안될 초상화가 아직 다섯 장이나 더 남아 있다니까. 그리고 이것 !" 그는 스케치 용지를 가볍게 두드려 보었다. "이제부터 그토록 염원하던 그림에 손을 대 볼 생각이네." 나는 그의 앞에 놓인 스케치 용지를 집어들었다. 그 그림을 본 순간, 나는 내가 고민하던 문제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한 사람의 식민지군 병사---나는 대나무 모자와 장검으로 그렇게 판단했다---가 아치에의 병사의 배를 발로 밟고 희생자의 가슴에 총검을 들이대고 있었다. 총검은 희생자의 검은 셔츠를 압박하고 셔츠 밑으로는 젊은 여인의 유방이 보였다. 여인의 눈동자는 크게 열려 있고, 머리칼이 흐트러진 대나무 잎 위에 둥글게 놓여 있었다.
왼쪽 손은 일어나려고 히우적거리고 오른쪽 손은 힘없이 단도를 쥐고 있었다. 병사와 여인의 위에는 강풍에 불려 꺾어진 대나무 잎이 우산처럼 덮여 있었다. 마치 우주에 살아 있는 것이란 한쪽은 죽이려 들고, 다른 한쪽은 죽임을 당하려고 하는, 그 두 사람밖에는 없는 것 같았다. "지독하게 잔인한 그림이군."
"으응, 그래."
쟝 마래는 그렇게 말하고는 헛기침을 하고 나서 담배를 피웠다.
"쟝, 당신은 미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는데, 잔혹스런 저 그림 가운데 어디에 아름다움이 있다는 거죠?"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데, 이 그림은 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일반에게 공개할 성질의 그림은 아니라네. 이 그림의 아름다움은 나의 추억 속에 있네." "그렇다면, 이 병사는 당신인가요? 당신 자신?"
"그래, 바로 나야."
쟝은 얼굴을 쳐들었다.
"당신이 이렇개 야만스러운 짓을 했다는 건가요?"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 젊은 여인을 당신이 죽였나요?"
그는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도망시켰나요?"
그러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여인은 당신에게 감사했겠군요."
"아니, 죽여 달라고 애원했네. 그녀는 이곳 해안가까이에서 태어난 아치에 처녀인데, 이교도에게 납치당한 것을 치욕이라고 믿고 있었네."
"그래도 당신은 죽이지 않았지요?" "그래, 죽이지 않았지, 나는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네, 밍케."
그는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말은 마치 내게가 아니라 이미 손이 닿을 수 없게 된 그 자신의 먼 과거를 향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 그 여인은 어디에 있죠?"
나는 집요하게 물었다. 쟝은 슬픈 듯이 대답했다.
"죽었다네."
"그러면 역시 당신이 죽였군요. 이 나약한 처녀를?"
"그렇지 않아. 내가 죽이지는 않았어. 그녀의 동생이 병영 속으로 침입해 들어와서 단도로 그녀를 찔렀지. 거의 즉사였어. 단도에 독이 묻어 있었던 거야. 누이를 죽인 동생도 그 자리에서 죽었지. '죽어라, 이교도의 앞잡이 !' 하고 외치면서."
"왜 동생은 누이를 죽였을까요? "
나는 그때 나 자신의 고뇌는 완전히 잊고 있었다.
"동생은 나라를 위해, 신앙을 위해 싸움을 계속하고 있었지. 그런데 그의 누이는 항복한 뒤 그것을 포기해 버렸기 때문이지. 그녀는 혼자서 죽어갔네. 그때 그녀의 아이는 이웃 사람이 산책에 데리고 나갔고, 남편은 임무를 위해 다른 곳에 가 있었다네."
"그렇다면 이 여자는 항복하고 나서 식민지 군의 병영에 살고 있었나요? 포로로서 ? 포로가 되고 나서 아이를 낳았나요?" "처음에는 포로였지만 뒤에는 달랐지."
쟝은 재빨리 대답했다.
"그럼, 그녀는 다중에 누군가와 결혼을 했나요?"
"아니, 결혼은 하지 않았네. "
"그렇다면 산책에 나간 아이는 어떻게 해서 태어났죠?"
"그 아이는 그녀가 나에게 낳아 준 아이였다네. 내 자식이야. 밍케."
"쟝 !"
"그렇게 된걸세, 밍케. 이 얘기는 결코 메이에게 해서는 안돼."
나는 갑자기 끓어오르는 감정을 누르지 못해 메이를 찾아 달려갔다. 시트가 없는 목제 침대에서 메이는 잔잔한 숨소리를 내며 자고 있었다. 나는 메이를 들어올려 키스를 했다. 소녀는 깜짝 놀라 커다란 눈을 뜨고 나를 보았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메이 ! 메이 ! "
나는 목이 메었다. 그리고는 메이를 안고 쟝 마레가 있는 방으로 돌아왔다.
"쟝, 이 아이가 당신의 자식이에요? 이 아이가 그 갓난애란 말 인가요? 거짓말은 아니겠지요? 설마 나한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프랑스인은 손을 턱에 괴고 집 밖의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옛날 이야기를 계속하려고도 하지 않았고, 나의 물음에도 잠자코 있었다.
이 아이와 그 어머니의 운명, 그보다 더 한 샹 마레의 운명은 얼마나 감동적인 것인가? 이 친구는 이국에 살면서 미래도 없고 한쪽 다리도 없다. 그는 가끔 자기가 얼마나 아내를 사랑하고 있었는지를 종종 나에게 얘기해 주었었다. 여기 있는 어린 소녀는 그 두 사람의 유일한 결실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미 어머니의 일굴은 영원히 볼 수가 없고, 다만 외다리를 가진 아버지가 있을 뿐이다. "그건 아픈 과거 때문에, 나에게 우노크로모에 가보라고 했나요 ?"
"밍케, 사랑은 아름다운 거야. 이 허무한 인생 속에서 인간이 손에 넣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이지. "
쟝은 슬픈 듯이 말한 다음 내게서 메이를 빼앗아 무릎 위에 앉혔다. 소녀는 수염을 깎지 않은 아버지의 볼에 키스를 했다. 쟝은 프랑스어로 말했다.
"메이, 너는 늦도록 잠만 자고 정말 잠꾸러기구나."
"산책을 가는 거야, 파파?"
메이가 프랑스어로 물었다.
"응, 그래. 그려나 먼저 목욕을 하고 오너라."
메이는 신이 나서 유모에개로 뒤어갔다. 어머니를 모르는 소녀의 뒷모습을 나는 잠자코 바라보고 있었다. "사랑은 아름다운 거라네, 밍케. 어쩌면 사랑의 뒤에는 파멸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사람은 그 결과에 대처할 수 있는 용기를 갖지 않으면 안되는 거야."
"솔직이 말하자면, 그 우노크로모의 아가씨를 정말로 사랑하고 있는지 어떤지를 나자신도 잘 모르겠어요. 당신의 경우는 어떻게 그녀를, 즉 메이의 어머니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나요?"
"자네가 그 아가씨를 사랑하고 있는지 어떤지를 아직도 잘 모르겠다는 것은 사실인지도 몰라. 하지만 어느 쪽이든 판단하는 것은 내가 아닐세. 또 사랑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갑자기 생겨나는 것도 아니지. 왜냐 하면, 사랑은 문화의 소산으로서, 하늘에서 떨어지듯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니까. 어쨌든 사랑하고 있는지 어면지를 판단하는 것은 내가 아니고, 그것을 키워가는 것도 내가 아니야. 자네 자신이 자기를, 자기의 마음을 시험해 보아야 하네. 아마 그 아가씨는 자네를 좋아하고 있겠지. 또 자네의 얘기를 들어 보니까, 그녀의 어머니가 자네를 좋아하는 것은 틀림없네. 초면인데도 벌써 마음에 들어하고 있는 거야. 나는 '흑색 마술'같은 것은 믿지 않네. 아마 그런 것은 있기는 하겠지만 나는 그런 것을 믿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네, 그린 것이 통용되고 있는 곳은 문명이 아직도 극히 낮은 단계에 있는 곳뿐이지. 더구나 나이는 모든 사무를 담당하고 있다고 자네가 달하지 않았나? 그런 여자가 흑색 마술 같은 것을 쓸리가 없지. 그녀는 오히려 이성의 힘을 믿고 있을 거야. 흑색 마술이나 주술을 하는 것은 이성을 갖지 못한 사람들 뿐이야. 냐이는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가를 알고 있네. 아마 자기 딸의 인생에 깃든 고독을 잘 알고 있는지도 모르지. "
"메이의 어머니에 대해 얘기해 줘요."
나는 화제를 돌렸다.
"죽이려던 여자를 사랑하게 되다니, 흔한 일은 아니잖아요?"
"다음에 얘기해 주지. 지금은 아직 얘기할 기분이 아니야. 그보다는 이 그림을 보아 주게나. 자네의 감상은 어면가?" "나는 아직 그런 것에 관해서는 모르겠어요."
"자네는 교양이 있는 젊은이야. 그림에 대해서도 공부를 해서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지." "아직 그림 공부할 때는 아니에요." "알겠어. 저녁때 메이를 산책에 데려가 주지 않겠나?" "당신은 한번도 데리고 가지를 않는군요."
나는 강하게 비난하는 투로 에기했다.
"그 아이는 당신과 함께 가고 싶어해요."
"그건 아직 안돼. 그애가 불쌍해서 말일새. 나와 산책을 나가면 모두가 우리 두 사람을 이상한 듯이 바라본다네. 그리고는 저 외다리 네덜란드인과 딸을 보라고 놀려댈 거야. 그 욕설이 메이의 귀에 들어가 보게나. 그런 꼴을 보이고 싶지 않네. 밍케, 그 착한 어린 영혼을 설사 아버지의 불구가 원인이라 하더라도, 쓸데없는 고통으로 괴롭혀서는 안된다네. 나는 그 아이를 사랑하고 있어. 그 아이가 남의 이목에는 상관없이 언제까지나 나를 사랑하고 좋은 아버지라고 생각하게 하고 싶네."
일찌기 쟝이 그토록 많은 말을 한 적은 없었다. 또 그토록 어두운 얼굴을 한 적도 없었다. 도대체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이미 흘러가버린 과거에 대한 회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가 태어나고 자라나고 처음으로 대양을 본 나라, 그러니. 지금은 불구의 몸이 되어 이국에서 태어난 자식을 안고 돌아갈 수도 없는 나라, 그 조국땅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필생의 대작을 그려 조국이 위대한 화가로서 맞이해 주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당신은 동정이라든가 불쌍하다든가 하는 말에는 관심이 없을 텐데요?"
"맞아. 자네 말대로야. 밍케, 인질가 자네에게도 말한 것처럼 불쌍하다는 것은, 선의를 갖고 있으면서 그것을 행동으로 나타낼 수 없는 사람의 감정이야. 불쌍하다는 감정은 하나의 사치, 내지는 나약함의 표현에 지나지 않네. 선의를 행동으로 나타낼 수 있는 인간은 물론 칭친할만 하지만 나는 그것을 할 수가 없다네, 밍케. 유럽과 달라서 이곳 동인도에서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불쌍하다'는 말이 아름다운 울림을 갖게 되거든."
그의 목소리는 점점 더 무겁게 가라앉아 갔다. "왜 그러죠? 당신답지 않군요. 사람이 변한 것 같아 걱정이 되는군요."
"염려해줘서 정말 고맙네. 자네 관찰력이 점점 더 날카로와져 가는 것 같군."
"제발 부탁이니까 그런 어두운 얼굴은 하지 마세요. 당신에게는 아직 내가 있잖아요."
메이가 돌아왔다. 소녀는 아버지가 함께 산책을 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단번에 표정이 달라졌다. "밍케 아저씨와 함께 가거라. 섭섭하지만 파파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단다." 나는 프랑스인과 아치에의 혼혈아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파파는 나하고는 절대 산책을 가지 않는다니까." 소녀는 네델란드어로 하소연했다.
"내게도 손을 잡아 끌어줄 힘이 있다는 것을 파파는 믿지 않아요. 넘어지지 않도록 돌봐줄 수가 있는데 말이에요."
"그렇지. 메이는 힘이 센 아이니까. 하지만 오늘은 파파가 할 일이 너무나 많아서 말이야. 이 다음에는 꼭 데려가 주실 거야, 메이 ! "
나는 코부렌 광장으로 그녀를 데리고 갔다. 메이는 조금 전까지의 우울했던 기분은 잊은 것 같았다. 우리들은 풀밭에 앉아 연날리기 시합을 구경했다.
메이는 가끔 프랑스어를 섞어 가면서 자바어와 네덜란드어를 뒤섞어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의 얘기에는 전혀 귀기울이지 않고 다만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칠 뿐이었다. 내 머릿 속은 갖가지 일들로 혼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메레마의 가족, 쟝 마레의 가족, 변해버린 동급생들의 나에 대한 태도, 그리고 마찬가지로 번해버린 나 자신. 실이 끊긴 연이 몇 개 하늘에 떠가고 있었다. 방향을 잃고 흔들거리면서. 메이가 내 손을 잡아끌며 지평선에 나타난 한 무리의 구름을 가리켰다.
"파파를 사랑하고 있니, 메이 ? "
그녀는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표정에서 나는 쟝 마레를 보았다. 무성한 대나무 잎 아래 쓰러져 총검을 마주보고 누운 그 젊은여인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어쩌면 이 얼굴은 쟝 마레의 어릴 때 모습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여기 있는 나이 어린 메이 마래는 자기 아버지가 어면 사람인지 전혀 모르는 것이다.
쟝 마레의 말에 따르면, 그는 일찌기 소르본느 대학에서 공부를 했다고 한다.
어떤 학과이며 몇 학년까지 다녔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다 그는 자신의 마음 속의 이끌린대로 공부를 포기하고 온 정열을 그림에 쏟아부었다. 그것이 좀처럼 마음대로 되지 않자, 얼마 뒤 파리의 라틴 구에 살면서 길거리에서 자기 그림을 팔았다. 그의 작품은 언제나 잘 팔렸으나, 파리의 비평계와 대중의 주목을 받은 적은 없었다. 그는 길가에서 그림을 그리며 틈틈이 조각도 했다. 그렇게 해서 5년이 지났으나 여전히 길은 열리지 않았다.
쟝은 차츰 자신의 생활에 싫증을 느꼈다. 아프리카의 목상을 만들거나 조각을 하는 그를 바라보는 구경꾼 무리, 그리고 파리, 자신의 처지, 그런 모든 것들로부터 떠나고 싶었다. 그는 모로코, 리비아, 알제리, 이집트로 건너갔다. 그러나 그 곳에서도 그는 자신이 찾고 있는 것 ---그것이 무엇인지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을 찾을 수가 없었다. 충족을 느끼지 못한 채 불안과 초조로 계속 시달렸다. 여전히 그가 원하는 그림은 그릴 수가 없었다. 쟝은 아프리카를 떠났다. 그리고 동인도까지 왔을 때, 빈덜터리가 되었다. 살아가기 위해서 남겨진 유일한 길은 네덜란드 식민지 군에 입대하는 것이었다. 그는 입대하여 몇개월 동안 훈련을 받은 뒤, 아치에의 전선으로 배치되었다.
부대에서도 그는 변함없이 자기 혼자만의 새계에서 살며 네덜란드어로 내려지는 명령을 듣는 일 이외에는 누구하고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었다.
쟝 마레는 네덜란드어를 하나도 몰랐지만 전혀 배울 생각이 없었다.
쟝 마레는 군무중에 틈틈이 그림을 그리기로 결심했다. 동인도의 원주민은 극히 단순하고 순박했다. 그들과 전쟁을 해서 실수로라도 패배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총과 대포 앞에 칼이나 창기 무슨 위력이 있단 말인가? 고는 그렇게 생각했다. 일등병으로서 아치에로 보내졌다.
그가 속한 소대의 지휘관 바스티안 데린하 하사는 유럽 혼혈이었다. 쟝이 만일 준수한 유럽인이 아니었다면, 이등병에 머물고 말았을 것이다. 그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네덜반드어를 모르는 같은 순종의 유럽인 병사들과 같이 생활하기 시작했다. 그 병사들은 스위스인, 독일인, 스웨덴인, 벨기에인, 러시아인, 헝가리인, 루마니아인, 포르투칼인, 스페인인, 이태리인 등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모두가 각자 조국의 생활에서 실패한 삶의 낙오자들이었다.
꿈이 깨어진 사람, 경찰에 쫓기는 사람. 빚독촉을 견디지 못해 도망온 사람, 도박이나 투기로 파산한 사람 ---모두가 부랑민들이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는 일등병 이하는 한 사람도 없었다. 이등병은 혼혈아와 원주민들만의 계급으로, 원주민 병사는 대개 풀오레조 출신의 자바인들이었다.
언젠가 나는 왜 풀오레조의 쁘리부미가 많으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쟝은 그들이 냉정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해 주었다. 식민지 군이 아치에 인과 싸우게 하기 위해서 그들을 선택한 것은 아치에 인이 위협적일 뿐만 아니라, 강철처럼 완강하고 끈기가 있으며, 행동이 뛰어난 종족이기 때문이었다. 석회암 지역 출신과 같은 다혈질의 인종은 처음 얼마동안 밖에 견딜 수 없어서 아치에의 전투에서는 곧 전멸하고 만다는 것이다.
아치에에서의 체험은 그의 생각을 바꾸어 놓았다. 쁘리부미의 전투 능력에 대한 그의 선입관은 잘못되었다는 것이 입증된 것이다. 아치에인의 능력은 우수했으며 빈약한 것은 무기 뿐이었고 조직력도 뛰어났다. 그는 또 한편으로 인력 조달에 대한 네덜란드인의 우수성도 인정하게 되었다. 그는 아치에의 긴 칼과 창, 그리고 죽창을 장치한 함정 등이 총이나 대포에 대항할 수 있을 턱이 없다는 자신의 선입관도 잘못이었다고 언젠가 얘기했다. 아치에인은 독특한 전법을 갖고 있었다. 자연 환경을 이용하고 능력을 최대한 살리고, 신앙에 의기해서 그들은 많은 숫자의 네덜란드 식민지 군을 섬멸시켰다. 쟝은 그것을 보고 경악했었다고 덧붙였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또한 모든 것을 지키는 것이 스스로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어린애들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패배를 당해도 그들은 반격을 멈추지 않았다. 가능 불가능을 따지기에 앞서 합할 수 있는 모든 힘을 총동원해서 반격을 가해 왔던 것이다.
또 언젠가 쟝 마레는 프랑스 어와 말레이어를 뒤섞은 어설픈 말투로 다음과 같이 나에게 얘기해 주었다. "내가 아치에에서 전투에 참가하고 있을 때, 아치에인의 방어선은 내륙 깊숙이, 남쪽이 다켄곤 지방까지 후퇴해 있었네. 아치에군의 사령관 취트 알리는 병력과 지역의 대부분을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사기는 충천해 있었지.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는지 나에게는 수수께끼었네."
그들은 언제까지고 싸움을 계속했다.
식민지 군에게 반격을 가할 뿐만 아니라, 자기 군대 내의 내란과도 싸워야 했다.
다리, 도로, 통신망, 열차와 선로, 그와 같은 식민지 군의 연락망은 항상 그들의 좋은 표적이 되었다, 그리고 음료수에 대한 독극물 투입, 기습 공격, 죽창을 장치한 함정, 매복, 칼과 창에 의한 기습, 야영지에 대한 육탄 공격.......
네덜란드의 장군들은 섬멸 작전을 계속하려던 계획을 거의 단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몰살당하는 것은 언제나 아이들, 노인, 병자, 그리고 만삭이 된 여자들이었다. "그런데 밍케, 그런 무력한 사람들은 식민지 군에게 살해당할 때 그것을 바로 요행으로 알고 죽어갔던 거야." 군부의 상층부에서는 다음과 같은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유럽인 병사의 희생자는 자바 전쟁 때처럼 3천 명에 이르지는 않겠지만, 그들이 발을 들여놓는 어떤 고장에서나 노이로제가 식민지군 전체에 퍼져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윽고 쟝 마래는 용감무쌍한 아치에의 원주민에게 감동을 느끼고, 그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이미 27년 간이나 그들은 전 유럽 문명의 경험과 과학의 소산인 최신예 무기를 상대로 완강히 싸워오고 있는 것이었다. 사랑은 아름다운 것,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쟝 마레는 말했다. 하지만 과거에 적이 되어 싸운 여자 병사를 어떻게 해서 사랑하는 여인으로 변하게 할 수 있었는가를 그는 아직 얘기하지 않았다.
그 여자병사도 또한 쟝이 그녀를 사랑한 것과 같이 그를 사랑하고, 지금 내 무릎 위에서 재잘거리고 있는 사랑하는 딸 메이를 그에게 낳아 주었는데, 그 사랑의 이야기를 그는 아직도 말하지 않았다.
나는 메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도대체 네 어머니가 너에게 젖을 먹일 수 있었던 시간은 얼마나 될까? 너는 해안에서 태어난 아치에의 처녀인 네 어머니의 눈동자를 본 일이 없겠지. 어머니를 사랑해 볼 수도 없었을 거야. 메이, 너는 어린 나이에 그 어느 것도,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셈이구나.
"밍케 아저씨, 저기를 좀 봐 ! "
매이가 네덜반드어로 환성을 질렸다.
"저 구름 위에 개처럼 생긴 연이 보여 ! "
"개가 하늘을 날다니 이상하구나. 구름이 점점 더 두터워지는군. 자, 그만 집으로 돌아가자." 쟝 마레는 아직도 제도용 책상에 매달려 있었다. 우리들이 들어가자 그는 얼굴을 들었다. 메이는 아버지에게 달려가서 구름위에 떠 있던 개처럼 생진 연에 대한 얘기를 들려 주었다. 쟝은 일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그 동안 나는 완성된 그림들을 둘러보았다. 그것들은 내일이나 모레 주문한 손님들에게 내가 전해 주지 않으면 안될 것들이었다.
쟝은 고객의 까다로운 주문을 좀처럼 만족시켜 줄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좀더 그들의 기호에 맞도록 다시 그려 달라는 요구가 자주 나왔다.
그리고 골치 아픈 일이지만 그런 손님을 설득시키는 것이 나의 업무다.
나는 이렇게 말하며 손님들을 설득시켰다.
"이 그림을 그린 것은 프랑스의 위대한 화가입니다." 그 한 마디의 효과는 절대적이어서 그 자리에서 당장 그 그림은 불후의 ---주문한 손님의 수명보다는 불후할 정도의--- 명작이라는 믿음을 얻었다. 그래도 계속 다시 그려 달라고 할 경우에 그림의 불후성은 상실되고 평범한 화학 처리에 의한 얼굴 사진이 되어 버리고 만다며 설득했다.
가장 주문에 까다롭고 잔소리를 늘어놓는 것은 여자 손님들이었다. 그 점에서 쟝으로부터 여러 가지 얘기를 들어 둔 것이 도움이 되었다. 여성은 현재라는 시간의 노예가 되는 것을 좋아하고 늙어서 추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녀들은 무상한 청춘시절의 꿈에 사로잡혀 그 꿈 속의 젊음에 영원히 매달려 있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나이를 먹었다는 것은 여성에게는 참으로 잔혹한 일이다. 그래서 여자 손님이 요구하는 까다로운 주문에 대항하려면 그녀들의 논리와는 다른, 듣기 좋은 논리를 동원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니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이 그림은 마담이 자녀들에게 남겨 주는 최고의 재산입니다. 단순히 사모님의 것만은 아닙니다." 다행스럽게도 여자 손님 가운데는 아이를 못 낳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대체로 이런 나의 논리는 승리를 거두었다. 그래도 승복을 하지 않을 경우에는, 할수없이 다음과 같은 은근한 협박을 했다.
"알겠읍니다. 만일 마담의 마음에 안드신다면, 이 그림은 내가 사서 내 방에 걸어 놓겠읍니다." 이런 협박은 십중팔구 상대방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친다. 당장 그녀들은 이유를 묻는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내 것이 된 다음에는, 구워 먹든 삶아 먹든 내 마음대로입니다. 어떻게 하겠어요?"
예를 들면? 글쎄요, 콧수염이라도 그려 넣을까요.....? 미리 말해두지만, 실제로 그렇게 말한 적은 한번도 없다. 요컨대 오늘날까지 나는 손님과의 대화에서 진 적이 없는 것이다. 특히 잔소리를 늘어놓는 것을 대개의 경우 여성들은 두뇌 회전을 나타내는 바로미터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부터는 패한 적이 없었다.
"너무 늦었으니 가 보겠어요."
"여러 가지로 고마왔네."
쟝은 이렇개 말하고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학교 쪽은 괜찮겠나? 메이와 나 때문에 시간을 뺏겨 집에 가면 공부할 시간이 없을텐데......" "괜찮아요, 쟝. 시험은 언제나 잘 치니까요." 나는 건물 옆의 생나무 울타리를 뛰어넘어 하숙집 마당으로 들어갔다.
다르삼이 편지를 갖고 아까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인사를 하고 나서 자바어로 말했다.
"도련님, 냐이님이 회답을 기다리고 계십니까. 저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읍니다."
편지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우노크로모의 가족은 당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안네리스는 수심에 잠겨 있을 뿐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있어요. 일이 많이 밀려 있고, 일을 해도 실수만 하고 있어요. 밍케, 그 아이의 괴로움을 당신이 이해해 준다면 일을 잔뜩 안고 있는 이 어머니는 얼마나 감사할지 모르겠어요. 안네리스는 나의 왼팔과 같은 아이랍니다. 나 혼자서는 모든 일을 처리할 수 가 없읍니다.
그 아이의 건강 때문에 항상 걱정입니다. 시뇨가 와 준다면, 우리들 두 사람에게 있어서 더 이상의 기쁨은 없을 거예요. 잠깐만이라도 좋으니까 얼굴을 보여 주세요, 한 시간이나 두 시간도 좋습니다. 하지만 역시 우리들은 시뇨에게 우리들과 함께 지낼 수 있게 되기를 마음 속으로부터 기원하고 있옵니다. 시뇨의 깊은 배려와 따뜻한 온정에 감사를 드립니다.
편지는 완벽한 네덜란드어로 씌어 있었다. 학력이 낮은 국민학교 출신의 여성으로서는 도저히 볼 수가 없는 것이었다.
어쩌면 다른 사람이 대필한 것이 아닐까? 하지만, 적어도 로베르트 메레마가 썼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어쨌든 누가 썼는가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 편지는 나에게 용기를 주고 자신감을 되살려 주었다. 그렇다. 나만이 그 두 사람의 포로가 된 것이 아니다. 두 사람도 역시 나의 포로가 되어 있는 것이다. 서로가 마술에 걸려 있는 것이다.
아이들은 모두 냐이와 같이 현명하고 위엄 있는 어머니를 필요로 하고, 젊은이는 모두 절세의 미녀를 필요로 한다. 보라, 그 두 사람은 가족과 사업을 구하기 위해서 나를 필요로 하고 있지 않은가? 나도 이 정도면 대단하지 않은가? 아아,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나는 왜 또 이렇게 많은 이유를 늘어놓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좋다, 가 보자.
제 3 장
이상한 가족
냐이 온트솔로의 편지는 확실히 과장된 것은 아니었다. 안네리스는 약간 수척해진 것 같아 보였다. 그녀는 현관 앞의 계단에서 나를 맞이했다. 내 손을 잡자 눈동자가 빛나며 창백한 얼굴에 생기가 돌아왔다.
로베르트 메레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으나 나는 일부러 묻지는 않았다.
냐이는 응접실의 옆문에서 나타났다.
"드디어 와 주었군요. 얼마나 오랫동안 앤이 기다렸는지 아세요? 자, 앤. 소중한 분을 잘 모셔라. 시뇨, 나는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어서 그만...."
그때 나는 우연히 응접실과 이웃한 방 안을 흘끗 들여다보게 되었다. 한 눈으로 그곳이 사무실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냐이는 그 사무실로 들어갔다.
문득 나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것은 내가 처음으로 이곳을 방문했을 때 느낀 것과 같은 감정이었다. 당장이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정신을 바짝 차려라. 내 마음은 그렇게 경고하고 있었다. 조심하라 !
그때와 마친가지로 나를 힐책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이런 곳에 오다니? 어째서 너는 그렇게 어리석지? 여기서 살겠다는 생각이냐? 현재의 하숙생활이 싫어졌다면, 왜 집으로 돌아가거나 다른 하숙집으로 옮기거나 하지 않는 거냐? 이 금단의 집에 유혹당해 맞서기는커녕 무조건 굴복을 하다니! 안네리스는 요전에 내가 쓰던 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다르삼이 나의 여행 가방과 짐을 마차에서 내려 방으로 운반해 왔다. 안네리스가 말했다.
"당신의 옷을 옷장에 넣는 일은 내게 맡겨 주세요. 가방 열쇠는 어디 있죠? 주세요!"
내가 열쇠를 주자 그녀는 재빨리 정리를 시작했다. 가방에서 책을 꺼내 책상 위에 늘어 놓고, 옷을 장농에 집어 넣고, 가방 속의 물건들을 끄집어냈다.
다르삼이 빈 가방을 옷장 위에 얹었다. 안네리스가 책을 말끔하게 정돈해 놓아서 책이 정렬한 병사들처럼 보였다.
"마스'(역자주 : 오빠라는 의미로 아내가 남편을 부를 때 쓰기도 함) !"
안네리스가 나를 그렇게 부른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그 호칭이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고, 마치 내가 자바인 가족 속에 있는 것과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편지가 세 통 있는데, 아직 읽지 않은 것 같군요. 왜 읽지 않았어요?"
모두가 내게 그 편지를 읽어 보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세 통이 모두 B에게서 온 거군요."
"알아요. 나중에 읽죠."
안네리스가 펀지를 내게 건네주었다. "읽어 보세요. 중요한 편지일지도 모르니까요."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밖으로 통하는 문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나는 편지를 침대의 베개 위에 내려 놓고, 그녀를 뒤따라 나갔다.
우리들의 눈 앞에 아름다운 정원이 펼쳐졌다. 그것은 넓지는 않았으나 아담했고, 몇 마리의 집오리가 헤엄치는 연못이 붙어 있어서 마치 그림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연못가에는 돌로 만든 벤치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리 오세요."
안네리스는 내 손을 잡아 끌고 양쪽이 초록빛 잔디로 둘러싸인 콘크리트의 좁은 길을 걸어갔다.
우리들은 돌 벤치에 앉았다. 안네리스는 아직도 내 손을 잡고 있었다.
"자바어로 얘기하는 것이 좋을까요?"
아니다. 나는 그 복잡하고 어려운 언어로 그녀를 피롭히고 싶지는 않았다.
"네덜란드어도 좋아요."
"우리들은 정말로 당신을 오랫동안 기다렸어요."
"공부하느라고 바빴어요, 앤. 좋은 성적을 내야 하니까."
"당신이라면 틀림없을 거예요."
"고마와요, 내년에는 꼭 졸업을 해야 하거든요. 하지만 앤, 당신을 잊은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안네리스는 얼굴에 홍조를 띠며 내게로 몸을 기대왔다.
"거짓말은 하지 마세요."
"누가 당신에게 거짓말을 하죠? 거짓말이 아닙니다."
"정말?"
"정말이고 말고요." 나는 끌어안듯이 손을 그녀의 허리에 둘렀다. 안네리스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그렇다. 알라 신이여 ! 당신은 이 새상에서 최고의 미녀를 내게 내려주신 거예요.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로베르트는 어디 갔죠?"
흥분을 달래기 위해서 나는 그렇게 물었다.
"그런 것은 물어서 어떻게 하겠다는 거죠? 오빠가 어디 있는지는 마마조차도 물어본 적이 없어요." 무엇인가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대꾸를 하는 것은 적당치 않다고 느꼈다.
"마마는 이미 오빠를 어떻게도 할 수가 없다고 믿고 있어요."
안네리스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 목소리에는 깊은 슬픔이 깃들어 있었다.
"요즈음은 오빠가 해야 할 일을, 모두 내가 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어요."
나는 창백하고 밀랍 같은 그녀의 입술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는 마마를 좋아하지 않아요. 나도 좋아하지 않지만요. 집에 붙어 있는 일이 좀처럼 없어요. 당신은 내가 일하고 있는 것을 직접 봐서 알거예요."
내 마음을 전하기 위해 나는 안네리스의 몸을 끌어안았다.
"굉장하더군, 당신은."
"고마와요, 마스."
그녀는 기쁜듯이 그렇게 대답하고 말을 이었다.
"당신은 로베르트 오빠한테는 신경쓸것 없어요. 오빠는 쁘리부미의 모든 것, 쁘리부미에게서 얻을 수 있는 쾌락을 제외하고는 쁘리부미의 전부를 증오하고 있어요. 마치 오빠는 마마의 아들도, 나의 오빠도 아닌, 어쩌다 우리집에 찾아든 이방인 같아요."
아무래도 로베르트의 일로 골치를 썩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의 말에서 그것을 확실히 읽을 수가 있었다. "투앙 메레마씨의 모습이 안 보이는 것 같군요."
나는 말머리를 돌렸다.
"파파 말인가요? 아직도 무서워하고 있나요? 그날 밤의 불쾌한 일은 용서하세요. 파파의 일도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이집에서 그 분은 완전히 남과 같아요. 일 주일에 한 번 돌아올까 말까 하는 형편이고 돌아와도 금방 나가 버리니까요. 가끔 돌아와서는 한잠 잔 뒤 다시 자취를 감추곤 하지요. 어디에 가는지는 몰라요. 그러니까 모든 책임과 일이 마마와 나의 어깨에 달려 있는 거예요."
이것은 도대체 어떻게 된 가족인가?
여자 두 사람이 묵묵히 일하면서 가정을 꾸려 나가고, 그토록 큰 농장을 경영해 나가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투앙 메레마씨는 어디서 일하고 있지요?"
"제발 부탁이니까 그 사람 일에는 신경쓰지 마세요. 어디서 일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몰라요. 본인이 병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까요. 우리들도 물어본 적이 없어요. 그 사람과는 누구 한 사람 말을 하지 않으니까요. 그린 상태가 벌써 6년 동안이나 계속되고 있어요. 내가 자란 다음부터는 마치 그것이 당연한 일처럼 되었어요. 옛날에는 무척 친절하고 좋은 사람이었지요. 매일 틈을 내서는 우리들과 놀아 주었으니까요. 그러다가 내가 국민학교 2학년 때 갑자기 모든 것이 변해 버렸어요. 며칠 등안 농장은 폐쇄되었어요. 그리고 마마가 울면서 학교까지 나를 데리러 와서 나를 학교로부터 영원히 떼어 놓았어요. 그날부터 나는 농장에서 마마의 일을 돕지 않으면 안되었지요. 파파는 일 주일이나 이 주일 만에 잠깐동안 나타났다가는 사라지곤 했어요. 그 뒤 마마는 결코 파파에게 말을 하지 않았고, 파파의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게 되었어요......"
불행한 얘기였다.
"로베르트도 중도 퇴학을 했나요?"
"내가 중퇴했을 때, 오빠는 7학년이었어요.,... 하지만 오빠는 중퇴는 하지 않았어요."
"그 뒤 오빠는 상급 학교로 진학했나요?"
"졸업은 했지만 진학할 생각이 없었어요. 그렇다고 일을 할 생각도 없었고요. 축구와 사냥과 승마, 오빠는 그것밖에는 관심이 없어요."
"어째서 마마를 돕지 않을까요?"
"마마가 말하는데, 쁘리부미에게서 얻어지는 쾌락을 빼놓고는, 오빠는 쁘리부미를 아주 싫어한대요. 오빠에게 있어서는 자기가 유럽인이 되어 모든 쁘리부미를 지배하는 것이 죄대의 관심사죠. 하지만 마마는 굴복하지 않았어요. 오빠는 농장의 모든 것을 지배하고 싶어하고 있어요. 사람은 모두, 마마도 나도 포함해서 자신을 위해서 일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오빠는 당신도 쁘리부미라고 생각하고 있나요?" 나는 신중하게 물었다.
주저하지 않고 안네리스가 대답했다.
"나는 쁘리부미예요. 놀라셨나요? 물론 나는 혼혈 쪽에 더 가깝지만 그 이상으로 나는 마마를 사랑하고 있고 믿고 있어요. 왜냐 하면 마마는 쁘리부미니까요." 완전히 수수께끼로 가득 찬 가족이다.
가족 하나 하나가 탐정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 같았다. 많은 원주민이 네덜란드인이 되는 것을 갈망하고 있는데, 유럽인에게 더욱 가까운 모습을 가진 이 처녀는 오히려 원주민임을 주장하고 싶다고 한다.
안네리스는 얘기를 계속하고 나는 일방적으로 듣고만 있었다. "마마는 이렇게 말했어요. '로베르트, 네가 그것을 희망하고 있다면 문제는 간단하다. 너는 이미 성인이니까, 네 아버지가 죽게 되면 변호사에게 가거라. 아마 이 농장 전부가 네 것이 될 테니까" 그리고 이런 말도 했어요. '하지만 너한테는 또 다른 합법적인 결혼에서 태어난 배다른 형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 사람은 마우리츠 메레마라는 이름으로 직업이 기사란다, 너는 혼혈아에 불과하니까 네덜란드인에 대항할 힘은 없을 것이다. 만약 네가 이 농장 주인이 되어 훌륭하게 경영 해나갈 생각이 있다면 먼저 안네리스처럼 일하는 것부터 배워라. 너는 인부를 감독하는 것조차도 못하지 않느냐? 그것은 네가 스스로를 자제할 수가 없기 때문이야. 그리고 자신을 자제할 줄 모른다는 것은 네가 일 할 줄을 모르기 때문이지......."
"저기, 저 집오리를 보세요. 솜처럼 하얗군요."
나는 화제를 바꾸려고 했으나 안네리스는 얘기를 계속했다.
"왜 가족의 비밀을 나한테 얘기하는 거죠?"
"그것은 지난 5년 동안에 당신이 우리들을 찾아온 첫손님이기 때문이에요.
우리들의 손님, 가족의 손님, 물론 지금까지 몇 사람의 손님이 있었지만, 모두 사업과 관계가 있는 사람들 뿐이었어요. 가족들의 손님이 한 사람 있기는 있지만, 그사람은 우리집 주치의예요. 그러니까 진정한 의미의 손닙은 당신이 처음인 셈이에요. 게다가 당신은 스스럼 없고, 마마나 나에게 매우 호의적이니까요."
안네리스의 목소리에는 쓸쓸한 울림이 깃들어 있었고, 어리광스러운 면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부끄러워하지 않고 모든 것을 당신에게 털어놓고 있는 거예요, 마스. 당신도 우리 집에서 체면 차릴 필요 없어요. 당신은 우리 두 사람의 친구가 되는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는 차츰 감상적이고 대범해져 갔다.
"마스, 내가 가진 것은 모두 당신 거예요. 이 집에서는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해도 좋아요." 막대한 재산에 둘러싸인 처녀와 그 어머니의 마음은 얼마나 외로왔을까?
"자, 이제 좀 쉬세요. 나는 지금부터 일을 해야 하니까요."
그리고 안네리스는 일어섰다. 그녀는 나를 한참 바라보다가 망설이면서 내 뺨에 키스를 하고는 나를 혼자 남겨두고 빠른 걸음으로 멀어져 갔다.
안네리스는 얼마나 오랫동안 넘쳐 흐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살아 왔을까?
지금 용솟음쳐 나오는 그 감정의 흐름을 내가 받아내고 있는 것이다.
주위에서 갖가지 소리가 들려 왔다. 정미소의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 우유를 싣고 드나드는 마차 소리, 창고에서 창고로 물건을 나르는 침마차의 덜커덩거리는 소리,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인부들이 도리깨질을 하며 땅콩 껍질을 벗겨내는 소리.....
방으로 들어가자 나는 노트를 펼치고 어면 우연으로 나를 그 속에 말려들게 한 이 기묘하고 을씨년스러운 가족의 일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나는 장차 헤르토프 라모예의 화제작 "장미가 시들 때"와 같은 소설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누가 그 가능성을 부정할 수가 있단 말인가?
지금까지 나는 "경매" 지에 짧은 기사와 광고문을 써 왔을 뿐이지만, 그렇게 되면 당당하게 내 본명으로 써서 많은 애독자를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안네리스의 얘기 하나 하나를 써나갔다. 마두라의 칼잡이 다르삼에 관해서는 어떨까? 나는 아직 그에 관해서는 잘 모른다. 이 동떨어진 가족의 세 부류 가운데 도대체 다르삼은 누구 쪽에 속해 있는 것일까? 아니 어쩌면 그는 그들 모두에게 가장 가까우면서도 위험한 존재가 아닐까? 위헙 ? 위험은 정말 존재할까? 만일 있다고 한다면, 나 자신도 그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만약 진짜로 위험이 있다면, 어째서 나는 이런 곳에 있단 말인가? 이 집을 나가는 것이 현명하지 않을까? 이곳을 나가는 것조차 내게는 쉬울 것 같지가 않았다. 그 신비스러운 안네리스의 매력이 내 마음을 시로잡고는 놓아 주지를 않는 것이다.
문을 노크하는 소리에 나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냐이 온트솔로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시뇨가 흔쾌히 와 줘서 안네리스와 나는 얼마나 기쁜지 도저히 말로는 다 표현할 수가 없어요. 덕분에 그 아이는 다시 일을 시작했고, 예전의 쾌활함을 되찾았어요. 시뇨가 와 준 것은 사업의 윤활유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안네리스에게 있어서 특효약이 되었어요. 그 아이는 시뇨를 사랑하고 있읍니다. 그 아이에게는 당신의 보살핌이 필요해요. 미안해요. 너무 일방적으로 이런 얘기를 해서."
"알겠읍니다, 마마."
나는 우리 어머니 앞에 있을 때보다 더 맥을 못추는 것 같았다. 또 다시 냐이의 흑색 마술에 걸린 모양이었다.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그것 뿐이에요. 당분간 우리 집에 있어 줘요. 시뇨의 전용 마차와 마부를 준비해 두겠어요." "고맙습니다, 마마."
"그럼, 여기 있기로 하는 거죠? 왜 잠자코 있지요? 그래요. 좀더 생각해 보겠다는 뜻인가 보군요. 서두를 것은 없어요. 지금 이렇게 시뇨가 이 집에 와 있으니까요."
"그렇습니다, 마마."
점점 나는 또 다시 그녀의 마력에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됐어요. 그럼, 편히 지내도록 해요. 그리고 늦었지만 당신이 학교에서 무사히 진급할 수 있도록 마음 속으로 기원하겠어요." 이렇게 해서 나는 서서히 이 이상한 가족의 새로운 일원이 되어갔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 굳게 다짐해 두어야 할 게 있었다. 경계심을 풀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특히 다르삼에 대해서는 그랬다. 그에게는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 말자. 오히려 그에게는 항상 공손하고 신중하게 대하도록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로베르트가 나를 가치 없는 쁘리부미로서 혐오할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헤르만 메레마씨는 틀림없이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에게 욕설을 퍼부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경계를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안네리스 메레마라는 절새의 미녀 옆에 있는 행운의 대가로 짊어져야 할 내 문제니까.
대가를 치르지 않고 인생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 무슨 일이든 그것에 걸맞는 값을 지불하거나 보상하거나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짧은 순간의 행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저녁식사 때 로베르트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헤르만 메레마씨의 그림자와 질질 끄는 듯한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밍케, 만약 일에 흥미가 있어서 열심히 뛰어볼 생각이라면 여기서 우리들과 함께 일해 보면 어떻겠어요?"
냐이가 전천히 말을 꺼냈다.
"우리들로서도 이 집에 남자가 있는 쪽이 안심이 되거든요. 신뢰할 수 있는 남자라는 의미지만요."
"감사합니다, 마마. 생각해 보기 전에는 뭐라고 대답을 할 수 없겠지만, 그렇게 친절하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그렇게 대답하고 나는 아직 나의 힘을 필요로 하고 있는 쟝 마레 일가의 사정을 설명했다. 냐이 온트솔로가 말했다. "그것은 참으로 훌륭한 일입니다. 사람에게는 허물 없는 친구, 우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친구가 없는 생활은 너무 쓸쓸합니다......."
냐이의 말은 나에게보다는 오히려 그녀 자신에게 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리고는 갑자기 안네리스에게 말했다.
"자, 앤, 시뇨는 이제 네 옆에 있는 거야. 뜩똑히 보아 두거라. 더 무엇을 원하니 ?"
"어머, 마마는 !"
안네리스는 조그맣게 소리를 지르고 나를 곁눈질했다. "너는 무슨 말만 하면 '어머, 마마 !' 밖에는 모른다니까. 자, 얘기해 보렴. 마마도 옆에서 듣고 싶구나." 안네리스 얻굴이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냐이는 즐거운 듯이 미소를 지으며 나를 똑바로 보고 말했다. "이런 식이라니까요. 이 아이는 꼭 어린애 같아요. 그런데 시뇨, 당신 쪽은 어때요? 안네리스 옆에 있는 소감이 어떻지요?" 이번에는 내가 우물쭈물하며 침묵을 지켰다. 물론 나는 안네리스처럼 소리를 지를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냐이의 빠른 두뇌 회전과 날카로움은 참으로 놀랄만했다. 그녀는 마치 타인의 마음 속을 엿보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라는 듯이 궤뚫어 보고 있었다.
그녀가 사람을 자기 손아귀에 넣고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힘의 원천은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어째서 두 사람 모두 잠자코 있는 거죠? 비맞은 새끼 고양이처럼."
냐이는 자신의 비유가 마음에 들었는지 소리를 내어 웃었다. 정말 그녀는 아무데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현지처는 아니었다. 나는 누가 뭐라고 해도 고등학교의 학생이다. 그러한 나에게 그녀는 털끝만큼도 끌리는 것이 없었다. 그녀에게는 자신의 의견을 말할 용기가 있고 자신의 인격적인 힘을 믿고 있었다. 그날 밤 우리들은 축음기로 오스트리아의 왈츠를 들으면서 지냈다. 무슨 책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마마는 책을 읽고 있었다. 안네리스는 아무말없이 내 옆에 앉아 있었다.
나는 메이 마레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곳에 있으면 메이는 좋아할 것이다. 그녀는 유럽 음악을 듣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축음기는 그녀의 집에도, 내 하숙집에도 없었다. 나는 어머니를 잃은 어린 소녀의 일을 안네리스에개 얘기해 주었다. 그리고 그 어머니의 운명, 그리고 쟝 마래의 친절함, 사려깊음, 순수함 등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주었다.
냐이가 읽던 책을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함께 내 얘기를 들어 주었다. 하녀가 축음기를 껐다. 나는 쟝 마래의 얘기를 계속했다.
언젠가 쟝은 그의 소대가 브랑 쿠제렌의 어면 마을에 대한 공격 명령을 받았었다고 말했었었다. 그들은 아침 일찍 출발해서 오전 9시경에 그 마을에 도착했다. 그둘은 일단 마을에서 훨씬 못미친 곳에서 적을 도망가게 하여 무익한 전투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공중을 향해 위협 사격을 한 뒤, 나무 그늘에서 쉬다가 다시 한번 공중에다 대고 총을 쏘았다.
한참 있다가 그들은 다시 행군을 시작하여 마을에 들어갈 태새를 취했다. 아니나 다를까, 마을은 이미 텅 비어 있었고, 그의 소대는 아무런 장애도 받지 않고 마을로 들어갔다. 사람이라고는 그림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어린아이들도 없었다. 병사들은 마을 안의 집으로 들어가 부술 수 있는 것은 닥치는 대로 부수기 시작했다.
20년 이상이나 계속된 전쟁 때문에 마올 사람들은 형편없이 가난했다. 병사들이 전리품을 가져가려고 해도 무엇 하나 가져갈 것이 없었다.
소대장인 데린하 하사는 집을 불태우라고 명령을 내렸다.
아치에인이 개미떼처럼 멀리서 모습을 나타번 것은 바로 그때였다. 남자도 여자도 있었다. 모두가 검은옷을 입고 있었다. 가지각색의 목소리로 그들은 '알라신'을 외쳤다. 몇 몇 사람은 빨간 어깨걸이를 허리에 두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이던 마을 안에서 젊은 아치에의 남자들 한 무리가 갑자기 나타나 공격을 해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긴 칼을 빼들고 맹렬하게 덤벼들었다. 도대체 어디서 나타났는지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
총은 니미 사용할 수가 없었다. 멀리 떨어져 있던 검은 개미떼 같은 무리도 차츰 가까와 왔다.
테린하 소대는 공격해 오는 젊은이들을 대부분 죽이기는 했으나, 큰 혼란에 빠졌다. 나머지 젊은이들은 도망쳤다.
부상당한 동료 병사를 안고 소대는 허둥지둥 마을을 빠져나갔다. 도중에 쟝 마레는 죽창을 장치한 함정속에 빠졌다. 날카로운 창끝이 그의 다리를 꿰뚫었다. 테린하 하가도 함정에 빠졌으나 경상으로 끝났다. 동료 병사가 쟝의 다리에서 죽창을 뽑아냈고, 쟝은 기절해 버렸다.
병사들은 정신없이 뛰었다. 밀려오던 개미 떼와는 별도로 또다른 아치에인이 공격을 가해올지도 몰랐으나 병사들에게는 그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아치에인운 전략을 사용하는 데 능숙했다. 언제 갑자기 새로운 적이 나타날지 알 수가 없었다.
병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도망가는 일뿐이었다.
데리고 돌아갈 수 있는 부상자는 데리고 돌아와 식민지 군 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했다.
15일 뒤 쟝 마레의 다리는 무릎 관절 부분을 잘라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는 몇 개월 전에는 사랑하는 여인을 잃고, 지금 또 다시 자신의 무릎위를 절단당해 다리 하나를 잃게 되었던 것이다.
냐이가 말했다.
"그 아가씨를 집에 데리고 오세요. 동생이 생기면 안네리스가 좋아할 거예요. 그렇지 앤? 아, 그렇겠구나. 동생은 필요 없겠지, 밍케가 있으니까."
"어머, 마마는 ! "
안네리스가 수줍은 듯이 소리쳤다. 나도 안네리스처럼 망설이고 있었다.
여기서 질문을 하지 않으면 두 번 다시 기회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나는 이 비범한 부인 앞에서 인격을 가진 완전한 한 사람의 남자로서 행동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채찍질해 왔으나, 그녀의 명석함 앞에서 그 시도가 번번이 꺾여 버렸다.
나의 인격은 냐이의 그늘에 완전히 가려 있었다. 물론 그런 상태가 연제까지나 계속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마마, 질문을 한 가지 하겠어요."
냐이의 그늘로부터 벗어 나기 위해 나는 입을 열었다.
"마마는 어느 학교를 졸업하셨지요?"
"학교?"
냐이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기억을 더듬고 있는 것 같았다. "학교를 다닌 기억이라고는 전혀 없어요."
"설마 그럴 리가 있겠어요? 마마는 네덜란드어를 말하고 읽을 수가 있잖아요. 아마 쓸 수도 있을 겁니다, 학교에 다니지 않고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겠어요?"
"네덜란드어를 할 수 있다는 게 이상할까요? 인생은, 배우고 싶어하고 알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라도 모든 것을 가르쳐 준답니다."
그 대답을 듣고 나는 정말로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우리 선생님에게나 누구에게서도 그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날 밤, 나는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나는 냐이라는 대단한 여성을 이해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사람들 가운데는 그녀가 현지처, 첩에 불과하다는 이유로 펀견의 눈으로 보는 이들이 있다. 또는 부자라는 단 하나의 이유로 그녀를 존경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것과는 다른 각도에서, 즉 그녀가 현실적으로 하고 있는 일과, 그녀가 말하는 것 등 모든 것을 종합해서 냐이라는 여성을 보고 있었다. 고정관념 따위는 버리고 솔직한 심정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옳고 그름의 사리 판단은 자신의 의지만으로 결정해야 한다는 쟝 마레의 충고를 나는 수긍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세상에는 대단한 여성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실제로 만난 것은 냐이 온트솔로가 처음이었다. 쟝 마레의 얘기에 따르면, 아치에의 여인들에게는 전쟁터에 나가서 식민지 군과 싸우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녀들은 남자들과 같은 참혹한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다. 발리에서도 그랬다.
내가 태어난 곳에서도 농촌의 여성들은 남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논이나 밭에서 일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들 중 누구도 마마와 비교되지는 못한다. 그 이유는 마마는 자신의 좁은 세계만이 아닌 넓은 곳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학교의 학생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쁘리부미의 여성 중에도 대단한 인물이 한 사람 있다.
그녀는 나보다 한 살 위인 여학생이다. 그녀는 J의 부빠티의 딸로, 네덜란드어로 글을 쓰고 부타위의 학술 잡지에 글이 실린 최초의 쁘리부미 여성이었다.
첫 작품이 발표되었을 때, 그녀는 열일곱 살이었다.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글을 쓴 것이다. 학생들의 절반은 그 뉴스의 신빙성을 부정했다.
단지 유럽인 국민학교를 나온 것뿐인 원주민, 그것도 아직 어린 소녀가 어떻게 유럽식으로 자신의 생각을 써서 당당하게 발표할 수가 있으며, 더구나 학술잡지에 게재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믿었다. 또한 그녀가 할 수 있었던 일은 나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더하기 위해서라도 믿지 않으면 안되었다. 나도 이미 그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지금은 아직 시험적인 단계이지만 어쨌든 나에게 글을 쓰도록 자극을 준 것은 그 쁘리부미 처녀였다. 그리고 지금 내 옆에는 그보다 오래 살아온 여성이 있다. 그녀는 그 부빠티의 딸과는 달리 글을 쓰지는 않지만 그 손아귀에 사람을 꽉 휘어잡아버리는 달인이다. 그녀는 또한 유럽식 대농장을 경영하고 있다.
그리고 자기 아들과 내결하고 주인인 헤르만 메레마를 지배하고 자기 딸, 모든 남성의 동경의 대상인 미녀인 안네리스 메레마를 장래의 경영자로 만들기 위해 키워가고 있다. 나는 이 기묘하고 놀라운 가족에 대해 연구를 해 볼 생각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글로 써 보고 싶다.
제 4 장
현 지 처
냐이 온트솔로, 이 놀라운 여성은 도대체 어떤 인물일까? 나는 호기심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몇개월이 지난 뒤에야 나는 안네리스로부터 어머니의 얘기를 들을 수가 있었다. 아래는 그때의 얘기를 내가 재구성한 것이다.
마스, 처음으로 이곳을 방문했을 때의 일을 당신은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을거예요. 누가 잊을 수 있겠어요? 나도 잊을 수가 없어요. 평생 잊어버리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요. 그때 당신은 마마 앞에서 떨면서 나에게 키스를 해 주었어요. 나도 떨리기는 마찬가지였죠. 마마가 끌고 가지 않았다면, 나는 그대로 계단위에 언제까지나 서 있었을 거예요. 그 뒤 마차가 당신을 내게서 빼앗아가 버렸어요.
당신의 키스는 뺨에 뜨겁게 느껴졌어요. 나는 방안으로 뛰어들어가서 얼굴을 거울에 비추어 보았어요. 아무 데도 달라진곳은 없더군요. 그날 저녁식사에는 향신료를 사용하지 않았어요. 후추가루가 약간 들어간 것밖에는. 그런데 왜 그렇게 얼굴이 화끈거렸을까요? 나는 몇 번씩이나 뺨을 문질러 보았어요. 그래도 여전히 화끈거리기만 했어요. 그리고 어느 곳을 보아도 반드시 당신눈과 마주치는 것이었어요.
나는 머리가 이상해지고 만 것일까? 어째서 당신만이 눈앞에 나타나는 것일까? 어째서 당신 옆에 있으면 즐겁고 당신에게서 떠나면 외롭고 괴로운 것일까? 당신이 돌아가고 난 다음 어째서 갑자기 마음 속에 뻥 하고 구멍이 뚫린 것처럼 느껴졌던 것일까요 ?
나는 잠옷으로 갈아 입고 촛불을 끈 뒤 침대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어두워지니까 오히려 당신의 얼굴이 점점 더 또렷하게 보이는 것이었어요. 그날 오후처럼 당신의 손을 잡고 싶었어요. 그러나 당신의 손은 없더군요. 나는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몇번씩이나 고쳐 누웠으나 잠이 오지 않았어요. 몇시간이나 그런 상태가 계속되었죠. 나의 가슴속에 두 개의 손이 있어서 내게 무엇인가를 하도록 손가락으로 자극하고 있는 것만 같았어요. 무엇을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어요. 나는 담요와 베개를 던져버리고 방을 나왔어요. 그때는 이미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얼굴의 화끈거림은 사라져 버린 뒤였어요.
나는 노크를 하지 않고 마마의 방으로 들어갔어요. 언제나처럼 마마는 아직 자지 않고 있더군요. 책상 앞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는데 내가 들어가자 책을 덮고는 돌아다보았어요. 그때 "냐이 다시마"라는 책의 제목이 얼핏 보이더군요. "무슨 책이죠, 마마?"
마마는 책을 서랍 속에 집어 넣었어요.
"왜 아직 자지 않는 거냐?"
"오늘 밤은 마마와 함께 자고 싶어요."
"이렇게 커서도 아직 엄마와 같이 자겠다니 ! "
"부탁이에요, 마마."
"먼저 들어 가서 누워 있거라."
나는 침대에 들어갔어요. 마마는 아래 층으로 내려가서 문을 단속하고 왔어요. 그리고는 문을 잠그고 모기장을 내린 다음 촛불을 껐어요. 그러자 방안이 아주 캄캄해졌지요.
마마 옆에서 나는 당신에 대해서 마마가 어면 말을 해줄까 하고 기대와 불안이 뒤섞인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어요. "안네리스."
마마는 다정하게 입을 열었어요.
"어째서 혼자 자는 것이 무섭지 ? 너도 이제 어른이 아니냐 ?"
"마마, 지금까지 마마는 행복할 때가 있었어요?"
"누구나 한번은 행복한 때가 있는 법이란다. 그것이 아무리 잠깐 동안이고 작은 행복이라 할지라도."
"지금도 마마는 행복하세요?"
"그런 것은 모른다. 현재의 마마에게 있는 것은 불안 뿐이란다. 그리고 단 한가지 희망은. 하지만 그것은 네가 묻고 있는 행복이라는 문제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지. 마마가 행복한가 아닌가 하는 것은 아무래도 좋아. 내가 걱정하는 것은 너의 일이다. 네가 행복해지는 모습을 이 눈으로 보고 싶구나....."
나는 그 말을 듣고 가슴이 찡해 왔어요. 마마를 끌어안고 어둠속에서 키스를 했어요. 언제나 마마는 나에 대해 신경을 쓰고 걱정을 해주시거든요. 마마 이상 가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앤, 너는 마마를 사랑하고 있니 ?"
그 질문에 나는 눈물이 쏟아질 뻔했어요. 마마가 그런 말을 한 것은 처음으로 마마는 언제나 엄한 분이라는 인상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그래, 마마는 네가 영원한 행복올 붙잡는 것을 보고 싶단다. 옛날의 마마같은 고통을 맛보게 하고 싶지는 않아. 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친구조차 없는 그런 외로움을 느끼게 하고 싶지가 않구나, 그런데 왜 갑자기 행복이라는 얘기를 꺼냈니 ?"
"그건 묻지 말고 얘기해 주세요 마마."
"앤, 너는 그렇게 느끼지 않고 있는지 몰라도 지금까지 마마는 너를 엄하게 키워 왔다고 믿고 있다. 그것은 앞으로 만에 하나 --물론 그렇게 되지 않도록 빌고 있지만-- 남편이 네 아버지처럼 되었을 때, 남편에게 의지 하지 않아도 되도록 너에게 일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였단다." 나는 마마가 파파에 대한 존경심을 완전히 잃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나는 마마의 그러한 태도를 이해할 수가 있었기 때문에, 그 일에 대해서 물어볼 필요는 없었죠. 게다가 내가 기대하고 있는 것은 그런 얘기가 아니었거든요.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을 마마도 옛날에 느낀 일이 있는지 없는지를 나는 알고 싶었던 거예요.
"마마가 무척 행복하게 생각한 것은 언제예요?"
"투양 메레마, 즉 네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된 뒤 몇년동안은 그런 행복이 계속되었단다."
"그리고 나서는요?"
"네가 학교를 중퇴할 때 일을 아직 기억하고 있니 ? 그때가 행복의 종말이었단다. 이제 어른이니까 당연히 너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너도 알아 두어야 한다. 지난 몇주일 동안 너한데 얘기해 주려고 생각하고 있었단다. 하지만 기회가 좀처럼 없었다. 졸립지 않니."
"열심히 듣고 있어요, 마마."
"옛날에 아직 네가 무척 어릴 때의 일인데, 파파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단다..... 어머니라고 하는 것은 자기 딸이 알아두어야 할 것은 무엇이든 다 얘기해 주지 않으면 안된다고..... "
"그때는......"
"그렇다, 앤. 그때는 파파의 일이라면 무엇이든 존경하고 있었지. 똑똑히 머릿 속에 새겨두고 삶의 지표로 삼았었단다. 그리고 나서 얼마 뒤 사람이 변해서 옛날의 그가 아닌 정반대의 행동을 하기 시작했단다. 그래, 그때부터 마마는 그 사람에 대한 신뢰와 존경심을 잃어버리기 시작한 거야."
"마마, 그때까지의 파파는 현명한 사람이었나요?"
"현명할 뿐만 아니라, 다정한 사람이었단다. 농업, 사업, 축산, 사무실의 업무 같은 것을 마마에게 가르쳐 준 것은 파파었어. 처음에는 말레이어의 회화, 다음에는 읽고 쓰기. 그것이 끝나자 네덜란드어도 가르쳐 주었단다. 파파는 단지 가르칠 뿐만이 아니라 가르친 것을 모두 실생활에 이용하게 했다. 파파와 애기를 할 때는 반드시 마마에게 네덜란드어를 사용하게 했단다. 그리고 은행과의 관계, 변호사의 이용법, 거래상의 관계, 지금 마마가 너한데 가르쳐 주려고 하는 모든 것을 파파가 가르쳐 주었단다."
"어째서 파파는 그렇게 갑자기 번했지요?"
"그것에는 원인이 있었단다, 앤. 무슨 일이 일어났었단다. 그때부터 다정함도, 총명함도, 지혜도, 힘도, 모든 것을 상실해 버리고 말았어. 그 하나의 사건으로 파탄을 일으키고 완전히 폐인이 되어 버렸단다. 몰라보게 사람이 달라지고 자식도 아내도 잊어버린 동물이 되고 말았지."
"불쌍한 파파."
"그래, 가정을 마다하고 정처없이 나다니게 되었단다."
마마는 거기서 얘기를 중단했어요. 마마의 얘기는 마치 나의 미래에 대한 경고와도 같은 것이었어요. 주위는 점점 조용해지고 들리는 것은 우리들 두 사람의 숨소리뿐이었어요. 만일 파파에 대해서 마마가 그토록 심한 태도를 취하지 않았더라면 --그런 식으로 마마에게서 여러 번 얘기를 들었어요-- 내게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알 수가 없어요, 아마 나쁜 일, 내가 상상할수 있는 것 보다 훨썬 더 나쁜 일이 일어났을 거예요. "처음에 마마는 파파를 정신 병원에 입원시키려고 생각했었단다. 하지만 망설였지. 그러나 만일 그렇게 했다가는 세상 사람들이 너를 어떻게 보겠니 ? 네 아버지가 정신병자라는 것이 밝혀져 법원에서 금치산자라는 선고를 받게 된다면? 그렇게 되면, 사업도 재산도 가족도 모조리 법원이 임명한 관리인 밑에 놓이게 된단다. 마마는 원주민 여자니까, 재산에 대해서는 일체의 권리가 없고, 너를 위해서도 아무 것도 해줄 수가 없게 되는 거야. 우리들이 휴일에도 쉬지 못하고 뼈가 빠지도록 일해서 쌓아올린 것이 모두 물거품이 되어 버리는 거야. 법원은 내가 원주민이고 법률에 정한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나의 친권을 인정하지 않으니까 마마가 너를 낳은 것도 무효가 되는 거란다. 알겠니, 앤 ?"
"마마 ! "
나는 조그맣게 외쳤어요. 마마가 직면한 어려움이 그토록 큰것이라고는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가 없었어요.
"그 뿐만 아니라, 너의 결혼에 대한 승인까지도 어머니인 내가 아니라 생판 모르는 그 관리인한테 받지 않으면 안되게 되는 거야. 파파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키고 법원의 관리를 받는다면, 파파의 상태를 온세상 사람들이 알게 되고, 앤, 네 운명은......그런 일은 절대로 할수가 없다 !"
"하지만 내가 왜 ?"
"모르겠니 ? 네가 정신병자의 딸이라는 것이 세상에 알려지면 어떻게 되지 ? 너와 마마는 어떻게 되겠니 ?"
나는 병아리처럼 마마의 품에 머리를 파묻었어요. 나 자신의 입장이 그 정도로 악화하고 상처를 입을 가능성이 있었다고는 생각해 보지도 않았거든요.
"네 아버지가 정신병자가 된 것은 결코 유전적인 것은 아니란다."
마마는 나를 납득시키려는 듯이 말했어요.
"어떤 불행한 사건이 원인이 되어 그렇게 된 것이란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분명히 그 내막은 잘 알지도 못하고, 네게도 아버지와 같은 정신병자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믿을 거야."
나는 소름이 끼쳤어요.
"그렇기 때문에 나는 파파를 방치해 온 거린다. 그 사람이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 나는 모두 알고 있단다. 그러나 세상에 알려지지만 않는다면 그대로 좋은 거야."
나는 파파가 가엾어져서 차츰 내 문제는 잊어가고 있었어요. "마마, 부탁이니까 내게 파파의 시중을 들게 해 주세요." "네 얼굴 같은 것은 벌써 잊어버렸을 거다."
"하지만 파파잖아요?"
"안된다. 동정이라는 것은 그것을 아는 사람에게밖에는 통하는 것이 아니란다. 너야말로, 그런 사람을 아버지로 가진 너야말로 더 많은 동정을 받아야 하는 거야. 앤, 알겠니 ? 그 사람은 이미 인간이기를 포기해 버린 사람이야. 그 사람에게 가까이 가면 갈수록 너의 인생은 파멸해 가는 거야. 그 사람은 이미 선악의 구별을 할 수 없는 동물이 되어버렸단다. 더 이상 사람구실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 얘기는 그만하자. 더 이상 묻지 말아다오."
나는 즘더 알고 싶었지만 참아야 했어요. 마마가 이토록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 무리하게 조르는 것은 현명하지 않은 일이니까요. 나는 다른 사람들의 모녀 관계가 어떤 것인지 알지 못했어요. 마마와 나는 어느 쪽도 친구나 친지가 없었어요. 우리들의 생활은 노동자에 대한 고용주, 고객에 대한 장사꾼 같은 것으로서, 사업 관계만으로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에개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다른 집과 비교가 되지 않았어요. 다른 혼혈아들은 어떤지 그것도 나는 몰랐었어요. 마마는 내가 교제하는 것을 금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할 수 있는 시간 여유도 주지 않았어요. 마마는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힘이고 권위였거든요.
"네가 정신착란자의 딸이라는 것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한다. 그것을 너도 충분히 이해를 하고 평생 잊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말하며 마마는 문제를 결론지었어요.
그로부터 우리들은 상당히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었어요. 마마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어떤 것을 머릿 속에 그리고 있는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거든요. 내 가슴 속에서 조금 전의 손가락이 다시 자극을 주기 시작했어요. 참을 수가 없었어요. 마마는 여전히 당신에 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어요. 과연 마마는 내 말을 찬성해 줄까요? 아니면 반대를 할까요? 아니면 당신은 다만 사업상 필요한 존재로 여겨지는 것뿐일까요. 그곳에는 당신만이 있을 뿐 어둠은 존재하지 않았어요. 당신밖에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나는 마마의 유쾌하지 못한 이야기를 끝내게 하지 않으면 안되었어요. 그래서 나는 마마에게 졸랐어요. "마마, 어떻게 파파와 만나고 어떻게 파파와 살아 왔는지 얘기해 줘요."
"그래, 그 일은 너도 알아두는 게 좋겠다. 하지만 충격은 받지 않도록 해라. 젊었을 때의 마마와 비교하면, 너는 아직 철이 없고 선택받은 아이니까. 그럼 얘기를 시작할 테니 잘 들어 둬라."
그렇게 해서 마마는 얘기를 시작했어요.
나에게는 오빠가 한 사람 있었단다. 파이망이라는 이름이었다. 오빠가 있었지. 나는 세 살 아래로, 사니켕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아버지의 이름은 사스트로토모라고 했단다. 이웃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그 이름은 '우수한 서기 (書記)'라는 뜻이었다.
아버지는 근면 성실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단다. 마을에서 유일하게 읽고 쓰기를 할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서기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이미 삽이나 괭이로 밭을 갈거나 노동을 하거나 사탕수수를 심거나 거두어들일 필요도 없었고, 충분히 존경을 받는 높은 지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좀더 높은 지위를 꿈꾸고 있었던 거란다. 아버지에게는 동생과 사촌 형제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서기의 지위로서는 그들을 모두 공장에 취직시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좀더 높은 지위로 올라가면 그런일도 간단하고, 게다가 세상사람들의 눈에도 자신이 좀 더 훌륭해 보일 것이라고 아버지는 생각했던 거란다.
더구나 아버지는 친척들이 단순한 쿠리나 최하층의 노동자로서가 아니라, 최소한 인부 반장으로서 공장에서 일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었지. 인부 반장의 동의만 있으면 누구든지 채용될 수 있는, 쿠리가 되는 것이 목적이라면 구태여 집안에 서기가 있을 필요가 없었으니까. 아버지는 열심히 일했고, 일에 더욱 박차를 가해 갔다. 그 동안 급료는 물론 점점 더 높아졌지만 지위는 여전히 옛날 그대로여서 승진의 꿈을 이룰 수가 없었단다. 그래서 아버지는 기도에다 푸닥거리, 점, 월요일과 목요일의 단식 등 여러 가지 방법을 써 보았지만 그것도 효과가 없었단다. 아버지가 꿈꾸고 있던 지위라는 것은 금고지기, 즉 시드아르죠의 투랑강 제당 공장의 출납계였다. 제당 공장의 출납계라고 하면 모든 곳을 관할하는 부서로서 그것과 관계 없는 사람은 없을게다. 예를 들면 인부 반장에게 있어서 출납계는 절대적인 존재였단다.
돈을 타기 위해 그들은 출납계에 가서 모인을 찍는단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부하인 쿠리들의 봉급을 타가는데, 만일 그들이 쿠리의 봉급에 부과되는 새금을 거부하는 경우, 출납계는 그 인부반에 지불하는 임금을 차압할 수가 있었다. 또 제당 공장의 출납계로서 투랑강의 유력자가 될 수도 있었단다. 장사꾼들은 정중하게 인사를 하지. 순종과 혼혈의 신사들은 말레지아어로 인사를 하고. 아뭏든 출납계의 글자 하나가 돈을 의미하니까 말이다. 공장내에서는 실력자의 한 사람으로 지목을 받게된다. 사람들은 아버지의 손에서 돈을 받기 위해 "저기 의자에 앉아 기다리시오" 하는 아버지의 말에 잠자코 순종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아버지가 그토록 노력해서 손에 넣은 것은 승진도 명예도 존경도 아니었단다. 오히려 사람들의 증오와 반감을 사기에 이르렀던 거란다. 출납계의 지위는 여전히 그림의 떡에 불과했던 거야.
아버지는 네덜란드인 상사의 환심을 사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으나, 그려한 아첨은 친구들에게 상처를 주고,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받는 결과를 낳았을 뿐이다. 자신의 사회 속에서 아버지는 고립되어 버렸던 거다. 그려나 아버지는 그런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단다.
아버지는 일단 결심을 하면 결코 뒤로 물러서지 않는 분이었지. 흰 피부를 가진 신사들의 호의에 대한 아버지의 신뢰는 흔들리지를 않았어. 사람들은 네덜란드인 상사를 어떻게든 자기 집에 초대하려고 아버지가 안간힘을 쓰는 것을 보고 노골적으로 불쾌한 얼굴을 했단다. 그러한 상사들이 한두 사람 우리집을 방문하면, 아버지는 그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온갖 대접을 다했단다.
그러나 그렇게 해 보아도 역시 출납계 자리는 아버지에게 돌아오지 않았단다.
드디어 아버지는 기도사를 이용하여, 자신도 금욕의 고행을 행함으로써 최후의 목표인 제당 공장의 지배인에게 마법을 걸어서 자기 집으로 불러들이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도 효과가 없었단다. 그래서 거꾸로 아버지는 자기쪽에서 자주 지배인의 집을 찾아다녔단다. 물론 어떤 특별한 용건이 있어서 찾아가는 것은 아니었지. 다만 뒤뜰에서 잡일을 돕는 것 뿐이었다.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지배인은 거들떠도 보지도 않았던 거란다.
아버지에 대한 그런 얘기를 듣는 것은 나로서는 퍽 괴로운 일이었다. 때때로 아버지의 모습을 몰래 엿보고는 애처로움을 느꼈다. 아버지는 자신의 꿈에 얼마나 몸과 마음이 시달렸겠니 ? 얼마나 자신을 욕되게 하고, 자신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겠니 ? 하지만 나에게는 아무 말도 할 용기가 없었단다. 물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버지가 그러한 수치스러운 행위를 그만두도록 마음 속으로 기도할 뿐이었다. 이웃 사람들은 자주 얘기했다. 알라신에개 기도를 하는 것이 제일이라고. 사람의 힘에는 한계가 있고, 하물며 백인에게 기대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라고. 내가 아버지를 위해 기도한 것은 아버지가 출납계의 지위를 손에 넣게 되기를 바라서가 아니었단다. 수치스러운 행위를 깨닫게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어.
그때 나에게는 자신의 감정을 말로 표현할 힘이 없었다. 다만 마음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야. 그러나 나의 기도도 이루어지지 않았단다.
지배인은 새로 동인도에 은 순수 유럽인의 전례처럼 독신이었다. 나이는 아마 아버지보다 위였다고 생각된다. 사람들의 얘기로는 아버지는 언젠가 그 지배인에게 여자를 제공하려고 한 적이 있었다고 하더라.
그런데 그는 아버지의 제의를 거절하고 고맙다고 하기는커녕, 아버지를 욕하고 파면시키겠다고 협박했다는 거다. 그 이후, 아버지는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었단다.
어머니는 사람들의 놀려대는 소리를 듣고 차츰 몸이 마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지. 어쩌면 사스트로토모는 언젠가는 자기 딸까지 제공하지 않겠느냐고. 그 딸이란 바로 나를 가리키는 말이었단다.
그 말을 듣고 내 생활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틀림없이 너도 이해할 수 있을 게다. 그 이후 나는 무서워서 두번 다시 집 밖에 나가지 않게 되었단다. 하루 종일 겁먹은 눈으로 응접실 쪽을 바라보며 백인 손님이 있는지 없는지를 걱정하고 있었단다. 다행히도 손님은 나타나지 않았다. 다른 네덜란드인 직원과는 달리, 지배인은 파디나 연회 같은곳에서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단다.
매주 일요일에는 시드아르죠의 거리에 나가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 예배를 보는 것이 습관이었지. 아침 7시면 말이나 마차로 외출하는 그의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단다. 나도 먼 발치에서 그것을 본 적이 있다.
열세 살 때에 나는 집 밖에도 나가지 못하고 부엌과 안방과 내 방밖에는 모르는 생활을 보내게 되었단다. 친구들은 대개 시집을 갔다. 어릴 때처럼 집 밖에 나가 있는 것처럼 숨을 돌릴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이웃 사람이나 친척이 찾아왔을 때뿐이었다.
힌관 옆의 베란다에 나가 앉는 것도 나에게는 허용되지 않았단다. 베란다의 마루에 발을 들여놓는 것조차 금지되어 있었단다. 공장 일이 끝나고 직원이나 인부들이 돌아갈 무렵에 사람들이 우리집 앞을 왔다갔다 하면서 넘겨다 보는 것을 나는 집 안에서 자주 볼 수가 있었지.
그것도 무리는 아니었단다. 우리 집을 찾아오는 여자 손님은 한결 같이 나를 아름다운 처녀, 투랑강의 꽃, 시드아르죠의 미녀라고 칭찬을 해 주었거든.
실제로 내가 거울에 비춰 보아도, 그녀들의 칭찬을 부정할 이유는 한 군데도 없었다. 우리 아버지는 잘 생긴 분이었어, 이름은 모르지만 어머니도 미인으로, 깔끔하게 몸단장을 하시는 분이었단다. 흔히 그렇듯이 아버지는 두세 명의 아내를 둘 수도 있는 처지였단다. 공장에 임대해 주고 있는 토지 외에도 남에게 경작시키고 있는 땅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렇게 하지는 않았어. 미인 아내 한 사람으로 만족하고 있었단다. 제당 공장의 금고지기, 출납계, 장래 가장 존경받는 쁘리부미가 되는 것만이 아버지의 꿈이었단다. 열네 살이 되자, 세상 사람들은 나를 노처녀 취급을 했단다. 그 2년 전부터 나는 벤스를 시작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나에 대해서 다른 생각을 갖고 계셨던 것 같았다. 아버지는 따돌림을 받았지만 나를 아내로 달라는 혼담은 자주 있었거든. 아버지는 그것을 모조리 거절했다. 나도 그런 얘기가 오가는 것을 내 방에서 몇번인가 들은 일이 있단다.
어머니는 다른 쁘리부미 여성과 마찬가지로 발언권이 없었어. 모든 것을 아버지가 결정하고 있었단다. 언젠가 어머니가 도대체 어떤 사위를 원하고 있느냐고 아버지에게 물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단다. 나는 어떤 사위감이 아니면 안된다고 결정할 생각은 없단다. 정하는 것은 앤, 바로 너, 자신이니까. 나는 다만 의논 상대가 될 뿐이지. 어쨌든 지금 얘기한 것이 내가 놓여졌던 상황, 당시의 젊은 여성들이 겪어야 했던 일이다. 그때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어떤 남성이 나타나서 우리들을 집에서 데리고 가는 것을 기다리는 일 뿐이었단다.
어디로 데려가는지, 자신은 대체 몇번째 아내인지, 첫번째 첩인지 네번째 첩인지, 그것도 알 수가 없었단다. 내 경우도 아버지 한 사람만이 결정권을 갖고 있었단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자기가 첫번째 첩이고 그 위에 아내가 한 사람뿐이라고 하면, 그것은 바로 행운이라고 할 수 있었단다. 그리고 그것은 제당 공장 등이 있는 지역 사회에서는지극히 드문 일이었단다.
그것만이 아니었지. 상대방 남성이 젊은 사람인지 늙은 사람인지조차 우리들은 미리 알 수가 없었단다. 일단 맺어지고 나면 여자는 그 만난 적도 없는 남자를 위해 전심전력을 다해 섬기지 않으면 안되었어.
그것은 평생, 그녀가 죽든가 남자 쪽에서 싫증을 느껴 내쫓기든가 할 때까지 계속되는 거란다. 달리 선택의 길은 없었단다. 상대방 남자가 범죄자나 도박꾼이나 술주정뱅이인 경우도 있었단다. 아내가 되기 전까지는 그것은 아무도 모른단다. 상대방이 좋은 사람이라면 그것은 행운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단다. 어느 날 밤의 일이었단다. 문제의 지배인이 우리집에 나타났다. 나는 불안을 느꼈단다. 아버지는 안절부절 못하며 어머니와 나에게 여러 가지를 지시하고 너무나 당황해서 일단 명령을 내린 다음에 또 다른 지시를 내려서 취소하는 형편이었어.
아버지는 나에게 가장 좋은 옷을 입도록 명하고, 한 번인가 두 번 내가 옷을 차려 입는 모습을 보러 왔단다. 역시 사람들의 소문은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걱정이 태산 같았다. 어머니는 나 이상으로 걱정이 되는 모양인지 아직 아무 일도 없는데 부엌 구석에서 흐느껴 울고 있었다. 아버지는 나에게 코코아와 과자를 들고 나오라고 명했다. 아버지는 이미 커피를 끓이라고 했었는데, 그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단다.
나는 쟁반에 코코아와 과자를 얹어 응접실로 들고 나갔다. 지배인이 어떤 얼굴을 한 사람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양가집 규수가 가족과 그다지 가깝지 않은 남자 손님 앞에서 눈이나 얼굴을 드는 것은 실례였단다. 상대가 백인인 경우에는 특히 더 그랬었지.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쟁반에 얹은 것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래도 바지는 자연히 눈에 들어오더구나. 흰 바지였다. 구두도 보이더구나. 크고 긴 구두로, 지배인은 키가 크고 몸집이 크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나는 손과 목덜미에 지배인의 찌르는 듯한 시선을 느꼈다. "이 아이가 내 딸입니다, 지배인 나리."
아버지는 말레지아어로 그렇게 말했다.
"벌써 시집갈 나이로군."
그 목소리는 마치 가슴 전채에서 울려나오듯이 크고 무겁고 깊은 소리였다. 자바인으로서는 그런 목소리를 가진 사람은 없단다.
나는 다시 내 방으로 돌아와 새로운 명령을 기다렸다. 하지만 명령은 내리지 않았어. 얼마 뒤 지배인과 아버지는 함께 집을 나갔다. 어디로 갔는지는 모른다.
사흘 뒤 점심을 끝낸 일요일 오후, 나는 아버지한테 블려 갔다. 아버지는 거실에 어머니와 함께 앉아 있었다. 나는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만두세요, 여보. 제발 부탁이에요."
어머니는 슬픈 목소리로 말했었다. 아버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얘야, 네 물건과 옷들을 모두 네 엄마의 트렁크에 챙겨 넣어라. 그리고 예쁘게 차려 입어라."
나는 아버지의 명령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단다. 특히 아버지의 명령은 절대적이었으니까.
방으로 돌아은 뒤에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격하게 항의하고 있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러나 아버지는 상대를 하지 않았다. 나는 옷과 물건들을 남김 없이 트렁크에 담았다. 다른 집 처녀들에 비해 나는 옷을 많이 갖고 있었고, 값나가는 것도 많았다. 그래서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단다. 바티크 사롱이 여섯 벌 이상 있었고, 그 가운데는 내가 직접 만든 옷도 있었단다. 나는 여기저기 찌그려진 낡은 갈색 트렁크를 들고 방을 나섰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까와 같은 자리에 아직도 앉아 있었다. 어머니는 옷을 갈아입기를 거부했다. 그뒤 우리 세 사람은 집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마차에 올라탔다.
"네 집을 잘 보아 두거라, 사니켐. 오늘이 지나면 여기는 네 집이 아니란다."
나는 아버지가 말하려고 하는 뜻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어머니의 흐느낌 소리가 들렸다. 말할 것도 없이 나는 우리 집에서 쫓겨나고 있는 것이었단다. 나도 울었다. 마차는 지배인의 집앞에서 멈추었다. 우리들 세 사람은 마차에서 내렸다.
그때 처음으로 아버지는 나를 위해 아버지다운 일을 해 주었단다. 나의 트렁크를 들어다 준 거야. 나는 주위를 돌아다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사방에 수천 개의 눈이 있어서 우리들 세 사람을 놀라서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더구나.
그 돌로 지은 집의 계단 위에 나는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이곳에 오기까지 했던 여러 가지 생각과 궁리들이 나의 무거운 마음을 더욱 무겁게 하고, 몸에서 모든 것을 빨아들여 마치 내 몸은 경질밖에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단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나는 끝내 지배인의 집으로 끌려갔던 거란다. 세상 사람들의 야유와 비난이 현실이 돼버린 거지. 앤, 나는 서기 사스트로토모를 아버지로 가진 것을 마음속으로 부끄럽게 생각했다. 그는 나의 아버지라고 말할 자격조차도 없는 사람이었단다.
하지만 나는 그의 딸로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단다. 어머니의 눈물도 하소연도 개난을 막을 수는 없었단다. 하물며 이 새상 물정도 모르는 나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단다. 내 몸조차도 내것이 아니었단다.
지배인이 나오더구나. 그는 웃고 있었고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외국인다운 태도로 우리들에게 들어오라고 권했다.
전에 구두를 보았을 때부터 대충 침각은 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몸집이 큰 줄은 몰랐다. 나는 완전히 압도당해 버렸단다. 아마 체중이 아버지의 새 배는 될 것 같더구나. 붉은 얼굴에 코는 높고, 자바인 서너 명을 합한 크기와 같은 몸집이었다. 팔뚝의 피부는 도마뱀처럼 거칠거칠하고, 누런 털이 수북이 나 있었다. 나는 이를 깨물고 점점 더 고개를 깊숙이 숙였단다. 그의 팔은 나의 다리통만큼 크더구나.
이렇게 해서 내가 이 도마뱀 피부를 가진 백인 거인에게 넘겨진 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던 거란다. 똑바로 정신차리지 않으면 안되겠구나 하고 나는 조그만 소리로 나 자신에게 용기를 주었단다.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았어. 모든 악마와 도깨비가 나를 포위해 버렸단다.
지배인의 권유로 나는 생전 처음으로 아버지와 같은 높이의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우리들 세 사람 맞은편에 지배인이 앉았다. 그는 말레이어로 말했다.
나는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단다.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모든 사물들이 바다에서 떠올랐다가는 다시 빠져들어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지배인은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아버지에게 건네주었다. 또한 그는 같은 주머니에서 뭔가 씌어진 종이 한 장을 꺼내자 그것에 아버지가 사인을 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봉투에는 나를 그에게 넘겨준 사례비로 25길더가 들어 있었다. 또 종이에는 2년 간의 시험 기간에 합격했을 때, 아버지를 출납계로 등용하겠다는 약속이 씌어 있었던 거란다.
앤, 그것이 바로 서글픈 의식, 한 소녀가 자기 아버지에 의해 팔려 가는 의식이었단다. 딸을 판 사람은 서기 사스트로토모, 팔린 딸은 바로 나 사니켐이었단다. 그 순간부터 나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완전히 잃게 되었다. 그러한 나의 생각은 어떤 이유나 목적이 있든, 그리고 누구든 가릴것없이 자식을 팔아버린 사람에 대하여 바뀔 턱이 없었단다.
나는 언제까지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나를 구원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나를 도와 줄 가능성을 갖고 있는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뿐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고, 어머니는 나를 보호해 줄 수 없었다. 그런데 도대체 다른 사람이 무엇을 해 줄 수 있단 말이냐.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사니켐, 지배인님의 허락 없이는 너는 이 집에서 나가서는 안된다. 지배인님과 나의 히락 없이 집에 돌아와서는 안된다." 아버지가 그렇게 말하고 있을 때, 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았단다,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들은 아버지의 마지막 목소리가 되었단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타고 왔던 마차로 돌아갔다. 나는 혼자 의자에 남겨진 채 눈물을 흘리면서 어찌 해야 좋을지 몰라 불안에 몸을 떨고 있었단다. 세상이 새까맣게 느껴졌다. 고개를 숙인 나의 시선 끝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전송하고 들어오는 지배인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는 내 트렁크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나에게 다가와서 손을 잡아끌며 일어서도록 명했다. 나는 몸이 떨렸다. 일어설 의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 명령에 반항하려고 한 것도 아니다. 일어설 힘이 없었던 것이다. 나의 사롱은 젖어 있었다. 아무리 애써도 두 다리의 경련이 멈추지 않았고, 마치 뼈와 근육이 관절에서 퉁그려져 나간 것 같았다. 그는 낡은 베개처럼 나를 안아 올리더니 소중한 듯이 방안으로 옮겨가서 깨끗하고 아름다운 침대 위에 축 늘어져 있는 나를 내려놓았다.
앉아 있을 수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냥 누운 채로 있었다. 아마 정신을 잃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러나 눈만은 아직 방 안의 모습을 희미하게나마 볼 수가 있었단다.
지배인은 자물쇠가 달려 있지 않은 내 트렁크를 열고 옷들을 커다란 옷장에 챙겨 넣었다. 그리고 트렁크를 천으로 닦아서 찬장 밑 부분에 집어넣었다.
그는 다시 힘없이 침대에 누워 있는 나에게로 다가왔다. "두려워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는 말레이어로 말했다.
그의 숨결이 얼굴에 느껴졌다. 나는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이 거인은 나에게 무슨 짓을 할 생각일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까 그는 나를 안아 올려 마치 나무 인형처럼 끌어안은 채 방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나의 젖은 사롱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의 입술이 뺨과 입술에 와 닿았다. 내게는 울 만한 용기가 없었다. 몸을 움직일 용기도 없었단다. 은몸에 식은 땀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타일 마룻바닥에 나를 서게 했으나, 내가 앞으로 쓰러지려고 하는 것을 보고 황급히 나를 다시 붙잡았다. 그리고는 다시 안아올려 끌어 안고 키스를 했다.
그때는 뜻을 몰랐지만, 지금도 나는 그때의 그의 말을 기억하고 있다.
"사랑스렵고 사랑스러운 여인, 나의 인형, 사랑스러운 여인."
그는 나를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가 떨어지는 나를 받아 안았다. 그리고 아이를 달래듯이 나를 흔들어댔다. 그제서야 나는 겨우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을 수가 있었다.
또 한번 그는 나를 마루에 서게 했다. 나는 비틀거렸고 그가 넘어지지 않게 부축을 해 주었다. 그래도 나는 비틀거리며 침대 모서리에 머리를 처박았다.
그는 내 옆으로 와서 손가락으로 내 입을 열고 이를 닦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는 집 뒤곁에 있는 욕실로 나를 데리고 갔다. 내가 칫솔이라는 것을 보고, 그 사용법을 안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단다. 내가 이 닦기를 끝낼 때까지 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잇몸이 쑤시고 아팠다.
그 다음, 그는 몸짓 손짓을 섞어 목욕을 하고 향기가 나는 비누로 몸을 잘 문지르라고 명했다. 우리 부모의 명령처럼 나는 그의 명령에 온순하게 따랐다.
그는 샌들을 들고 욕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목욕이 끝나자 자기 손으로 내 발에 신겨 주었다. 깜짝 놀랄 만큼 크고 무거운 가죽 샌들이었다. 샌들을 신는 것도 나로서는 생전 처음이었단다.
그것이 끝나자 그는 나를 안고 집 안으로 들어가 방으로 데려가서는 거울 앞에 앉게 했다. 그리고 내 머리칼을 한 장의 두터운 천 --나중에 그것이 타올이라는 것인 줄을 알았다-- 으로 가볍게 문지른 다음 기름을 발라 주었다. 매우 좋은 냄새가 났으나 무슨 기름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마치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라는 듯이 나의 머리를 빗으로 빗겨 준 것도 그였다.
다음으로 지배인은 옷을 갈아 입도록 명하고 나의 동작 하나하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이미 혼이 나가서 마치 인형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옷갈아 입는것이 끝나자, 그는 내 얼굴에 분을 바르고 입술에 루즈를 발라 주었다. 그리고는 나를 방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두 명의 하녀를 불러 지시했다.
"이 냐이를 잘 모셔야 한다."
앤, 이것이 나의 '냐이'(현지처)로서의 첫날이었단다.
정신을 차려 보니 그때는 이미 자상하고 다정스러운 그의 태도 덕분에 나의 공포심도 어느 정도 엷어져 있었다. 하녀에게 지시 한 다음, 지배인은 어디론가 나가버렸다. 두 명의 하녀는 현지처가 되다니 재수가 좋은 여자라고 비꼬듯이 나를 보고 킬킬거리며 웃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또 말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이 집과 이 집의 규칙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던 것이다.
물론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다. 하지만 도대체 누구에게 보호를 청하면 좋을까? 도망친 뒤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을 생각하자 도망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는 대단히 큰 힘, 아버지보다도 투랑 강의 어떤 쁘리부미보다도 더 큰 힘을 지닌 인물의 수중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두 명의 하녀는 나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가져다 주었다. 그녀들은 5분 간격으로 방문을 노크하면서, 이것을 하면 어떠냐 저것은 소용 없느냐 하고 귀찮게 굴었다. 나는 방 안 물건에 일체 손을 댈 용기가 없어서 벙어리처럼 잠자코 마루 위에 앉아 있기만 했다. 눈은 뜨고 있었지만 주위를 둘러보는 것은 무서워서 할 수가 없었다. 아마 그런 것을 산송장이라고 부를 것이다.
밤이 되자 지배인이 돌아왔다. 무거운 구두 소리가 들리고 그는 곧장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전율했다. 온통 흰색으로 차려 입은 그의 양복이 하녀가 저녁때 켜 놓고 간 램프빛에 반사해서 눈부시게 보였다. 그는 나에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마룻바닥에서 나를 안아 올려 침대에 눕혔다. 그를 화나게 만드는 것이 두려워 나는 숨조차 크게 쉴 수가 없었다.
그 거대한 몸집을 가진 남자가 몇 시간 동안이나 나와 함께 있었는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실신해버린 것이다. 안네리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단다.
의식을 회복하자, 나는 곧 이미 자신이 어제까지의 사니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영락없이 현지처가 되어버린 것이다. 나중에 나는 그 지배인의 이름을 알게 되었단다.
그의 이름은 헤르만 메레마였다. 앤, 너의 파파, 네 아버지였단다. 그리고 그때부터 사니켐이라는 이름은 영원히 사라져버렸단다.
엔, 벌써 잠들었니 ? 아직 깨어 있었구나.
왜 내가 너한데 이런 애기를 하는지 알겠느냐? 그것은 내 딸이 그런 저주받을 경험을 되풀이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란다.
너는 제대로 된 결혼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네가 좋아하는 사람과 네 자신의 의지로 결혼해야 한다. 너는 내 자식이다. 내 자식이 소나 말처럼 취급당하는 것을 나는 허용하지 않겠다. 내 자식만은 누가 아무리 큰 돈을 가져와도 결코 팔지 않는다. 마마는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지켜 줄 것이다, 내 자식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 나는 싸울 것이다. 옛날에 나의 어머니는 나를 지켜 줄 수가 없었단다. 그렇기 때문에 어머니는 나의 어머니로서의 자격이 없는 거란다. 내게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다.
현지처로서의 생활은 참으로 쓰라린 것이었다. 현지처는 팔려 간 노예에 지나지 않고, 하는 일이란 주인을 만족시켜 주는 일뿐이란다. 모든 면에서 만족시켜 주지 않으면 안되는 거야.
한편으로는 언제 어느 때 주인에게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각오를 하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자칫 잘못하면 자기 자식, 비합법직인 부부 관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쁘리부미의 사회에서도 인정받을 수 없는 자식을 안고 쫓겨나야 하는 거란다. 두번 다시 부모와는 만나지 않겠다. 집에도 돌아가지 않겠다고 나는 마음 속으로 맹세했단다. 부모님은 생각하기도 싫었다. 그 굴욕적인 사건은 돌이켜 보고 싶지도 않았단다.
그들이 나를 이와 같은 현지처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현지처, 팔려간 노예가 된 이상, 나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노예, 최고의 현지처가 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주인의 뜻에 따라 나는 깨끗하고 아름답게 꾸미고 말레이어, 침대와 집안의 정리, 유럽식 요리 등 내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모두 배우려고 했다. 그래, 앤, 나는 부모에게 복수를 하려고 생각했단다. 그들에게서 아무리 가혹하게 버려졌고, 설사 현지처로 전락했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들보다 가치 있는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부모에게 증명해 보이려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일년동안 지배인 헤르만 메레마의 집에서 지냈다. 그 동안 단 한 번도 집에서 나간 적이 없었다. 산책을 나간 적도 손님과 만난 적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었겠니? 게다가 나 자신도 세상 사람 대하기가 부끄럽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특히 아는 사람이나 이웃 사람들과 일굴을 마주치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 부모를 가진 것이 부끄럽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에 나는 그 때까지 있던 하인을 모두 내보냈다, 모든 집안 일은 내가 혼자 도맡아서 하기로 했다. 현지처로서의 내 생활을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의 의지를 갖지 못한 무가치한 천박한 여자, 나에 대해서 그러한 소문이 떠돌아서는 안되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몇번인가 상황을 보러 왔다. 나는 만나기를 거부했다. 그의 아내도 한번 찾아왔으나 나는 얼굴도 보고 싶지 않았다. 헤르만 메레마는 한번도 나의 행동을 비난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내가 하는 모든 행동에 매우 만족하고 있었다. 또 그는 무엇이든지 배우려고 하는 나를 대단히 아껴 주었다. 그러나 아무리 아껴 줘도 상처를 받은 나의 자존심은 회복되지 않았다. 너의 아버지는 언제까지나 내게는 타인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결코 파파에게 몸을 기대거나 매달리거나 하지 않았단다. 어디까지나 타인, 나를 버리고 투랑 강의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언제 어느 때 네덜란드로 돌아가버릴지도 모르는 사람, 나는 항상 그를 그렇게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언제든지 그러한 사태에 대비할 수 있도록 나 자신에게 준비를 시키고 있었단다. 그가 없어진 지금에도 나는 집으로 갈 수가 없었다.
나는 근검절약하는 것을 배우고 돈을 저축하기로 했다. 파파는 생활비의 용도에 대해서는 한 번도 간섭한 적이 없었다. 다달이 필요한 것은, 그가 스스로 시드아르죠나 슬라바야까지 사러 나갔단다.
일 년에 백 길더 이상을 저축할 수가 있었다. 어느 날엔가 헤르만 메레마가 귀국하거나 나를 쫓아내거나 해도, 나는 슬라바야로 가서 어떤 장사라도 시작할 만한 자금을 마련한 것이다. 헤르만 메레마와의 생활이 일 년 지났을 때, 그는 회사와의 계약이 만료되었다. 그는 계약을 갱신하지 않았다. 투랑강에 온뒤부터 그는 계속 호주산 젖소를 키우고 있었는데 나도 그 사육법을 그에게서 배우고 있었다.
밤에는 네덜란드어의 회화, 읽고 쓰기, 작문을 배우고 있었다. 우리들은 슬라바야로 옮겨 가서 우노크로모에 넓은 토지를 구입했다. 지금 우리들이 사는 이곳이 바로 그 땅이란다. 하지만 그때는 지금처럼 개간이 되지 않고, 덤불만 무성한 들판으로 곳곳에 원시림이 있었단다. 그곳에 소를 옮겼다. 그 무렵 마마는 생활이 즐거워지고 행복을 느끼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내게 신경을 썼고, 모든 문제에 대해서 나의 의견을 묻고 상의를 했단다. 서서히 나는 그와 동등한 감정을 갖기 시각했단다.
오래 된 친지와 만나야 할 때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일년 동안에 내가 배운 것과 이룩한 것들이 나의 자존심을 회복시켜 준 거란다. 그렇기는 하지만, 누구에게 의지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준비를 해 둔다는 나의 결심은 변하지 않았다. 자바의 여성, 그것도 당시의 나와 같은 젊은 처녀가 자존심에 관해서 운운한다는 것은 물론 어울리지 않는 얘기지만 그것을 가르쳐준 것은 앤, 네 아버지였던 것이다. 물론 그 자존심의 의미를 내가 피부로 느낄 수 있게 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었지만 말이다.
집을 옮긴 뒤에도 몇 번이나 내 아버지가 찾아왔으나, 나는 완강하게 만나는 것을 거부했다. "아버지를 만나 보지그래?"
언젠가 헤르만 메레마가 나에게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든 네 아버지임에는 틀림이 없는 거야."
"분명히 아버지는 있었읍니다. 그러나 그것은 옛날 일이에요. 지금의 나에게는 아버지는 없읍니다. 만일 그사람이 주인님의 손님이 아니었다면 벌써 좇아냈을 거예요."
"그런 말은 하는 게 아니야."
"그 사람과 만나야 한다면 차라리 이곳을 나가는 편이 더 낫겠어요."
"네가 나가면 나는 어떻게 되지 ? 소들은 어떻게 되고 시중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잖아?"
"소의 시중 정도는 사람을 고용하면 됩니다."
"그 소들을 부릴 수 있는 것은 너밖에 없는걸."
그러한 응수를 통해서 현실적으로 나는 헤르만 메레마에게 전혀 의존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은근히 비쳤단다. 오히려 그가 나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는 모든 문제의 결정을 내가 하기로 했단다. 그는 그것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는 공부에 관한 것 이외에는 내게 무엇을 강요한 일이 없었단다. 배우는 것에 관해서 말하자면, 그는 엄하기는 하지만 좋은 선생님이었고 나는 고분고분한 착한 학생이었다. 그에게서 배우는 모든 것이, 장차 그가 고국으로 돌아간 뒤 나와 내 자식들을 위해 도움이 된다는 것을 마마는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스트로토모 서기에 대해서는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를 팔아먹은 그 서기는 메레마를 통해서 몇번인가, 만일 직접 만나는 것이 싫다면 편지라도 한통 보내 달라고 내게 전갈을 보내 왔다. 나는 그것도 거부했다. 이미 나는 말레이어로도 네덜란드어로도 훌륭하게 편지를 쓸 수가 있었으나, 비록 한 줄이나 두 줄이라도 절대로 싫었던 것이다. 몇 번씩 반복해서 사스트로토모는 편지를 보냈으나 나는 한 통도 읽지 않고 그때마다 돌려보냈다.
어느 날 부모가 함께 우노크로모로 찾아왔다. 내가 완강하게 만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헤르만 메레마는 난처한 입장에 빠져 곤혹스러워하고 있었다.
그의 얘기에 의하면, 두 사람은 나를 만나개 해 달라고 조르고 어머니는 울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그를 통해서 나는 이렇게 말해 주었다.
"나에 대해서는 둥지에서 떨어진 달걀이라고 생각하세요. 이미 깨져버린 것입니다. 잘못된 것은 달걀 탓이 아닙니다." 그것으로 나와 부모 사이의 문제는 끝났단다.
앤, 어째서 마마의 팔에 그렇게 매달려 있는 게냐?
나는 너를 사업가, 장사꾼으로 만들기 위해 키워 왔단다. 모든 일에 감정을 내세워 그것에 연연해 하는 것은 좋지 않다. 우리들의 세계는 손실과 이익으로 성립되어 있는 거란다. 마마의 태도에 너는 틀림없이 찬성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닭들조차도 적에게서 자기 새끼를 지키는 것이다. 암탉이라면 더더구나 자기 새끼를 지키려고 필사적이 될 것이다. 설사 하늘로부터 습격해 내려오는 매가 상대라도 그들은 싸울 것이다. 나의 부모가 응분의 벌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너도 마마에 대해서 같은 태도를 취해도 좋다. 그러나 그것은 장차 네가 스스로 설 수 있을 때의 얘기인 것이다.
메레마는 그 뒤 또 소를 사들였단다. 그것도 역시 호주에서였다. 일은 점점 더 늘어나고, 인부를 고용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농장의 관리에 관한 일체의 업무를 그는 내게 맡기기 시작했다.
처음에 나는 인부들에게 지시를 하는 것이 무섭기만 했는데, 그가 조언을 해주었다. 인부들이 일하는 것은 먹고 살기 위해서이고, 그들을 부리는 것은 바로 나라고 그는 말했다.
나는 용기를 내어 메레마 총감독 밑에서 지휘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선생님으로서는 여전히 엄하고 사려가 깊었다. 그러나 한번도 나를 때린 일은 없었다. 한번이라도 맞았다면 아마 뼈가 박살이 났을 테지만 말이다. 그것이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나는 서서히 그의 뜻대로 할 수 있게 되어 갔다. 메레마 자신은 농장 관리 이외의 업무를 떠맡았다. 밖으로 나가서 고객의 유치를 담당한 것이다. 우리들의 사업은 순조롭게 발전해 갔다.
다르삼이 부랑자 모습으로 일자리를 찾아서 온 것은 그 무렵의 일이었다. 그는 일에 열심이어서 주어진 일은 무엇이든 해냈다. 어느 날 밤, 다르삼은 칼을 든 도둑과 격투 끝에 도둑을 붙잡았다. 그 도둑은 죽었다. 물론 경찰에 붙잡혀 가게 되었으나 다르삼은 석방되었다. 그 이후 나는 그를 신뢰하게 되었고 나의 심복으로 삼았다. 그 사이 메레마는 집을 비우는 일이 점점 더 빈번해져 갔다.
그래, 앤, 깜빡 잊을 뻔했는데 깨끗이 몸단장을 하고 자기에게 어울리는 색깔을 선택하는 법을 마마에게 가르쳐 준 것도 메레마였단다. 그는 내가 몸치장하는 것을 즐겨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그는 자주 이렇게 말하곤 했다.
"냐이, 너는 항상 아름답게 보이도록 하지 않으면 안된다. 가꾸지 않은 얼굴이나 칠칠치 못한 복장은 사업까지도 형편 없고 지저분하다는 인상을 심어주기 쉬워서 사람들이 신용하지 않는 법이야."
그의 뜻에 나는 얼마나 열심히 따랐던가? 나는 그의 요구를 만족시키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른다. 나는 언제나 단정한 옷차림을 갖추고 있었다.
때로는 잘 때조차도 화장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단다.
실제로 보기 흉한 것보다는 아름답고 매력적인 쪽이 훨썬 더 좋은 것이란다. 앤, 너도 그것을 명심해 두어야 한다. 추한 것은 결코 사람을 매료시킬 수가 없는 법이란다. 자신을 아름답게 가꾸지 못하는 여성은 쓸모 없는 존재란다.
만일 내가 남자라면, 친구에게 그런 여자와는 결혼하지 말라. 자기 몸조차 제대로 가꾸지 못하는데, 다른 일을 할 수 있을 턱이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는 이렇게도 말했다.
"그 이가 언제까지나 희게 빛나도록 너는 킴마(역자주 : 껌 같은 것으로 한참 씹으면 빨개진다)를 씹어서는 안된다. 나는 진주같은 너의 이를 좋아하거든." 그래서 나는 결코 킴마를 씹지 않았단다. 거의 다달이 책이나 잡지가 네덜란드에서 보내져 왔다. 메레마는 독서가였단다.
앤, 너는 왜 아버지처럼 책읽기를 좋아하지 않는지 그것이 이상하다. 마마도 독서를 좋아하는데 말이다. 책 가운데는 말레이어로 된 책은 한 권도 없었다. 물론 자바어 책도 없었다. 해가 질 무렵, 일이 끝난 뒤 집앞에 앉아서 그가 내게 그것들을 읽게 하곤 했다. 신문도 읽어야 했다. 그는 내가 읽는 것을 듣고 있다가 잘못된 곳을 고쳐 주고, 내가 모르는 단어의 뜻을 설명해 주었다. 그러한 일이 매일 되풀이되고, 이윽고 나는 내 손으로 사전 찾는 법을 배웠다.
나는 팔려온 노예에 지나지 않았다. 무엇이든 그가 원하는대로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해가 뜨나 해가 지나 그랬다. 나는 독서의 책임량을 부과받았다. 어떤 책을 혼자서 끝까지 정확하게 읽고, 그 내용을 그에게 들려 주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그래, 앤, 세월이 흘러가면서 옛날의 낡은 사니켐은 사라져 갔단다. 마마는 새로운 안목, 새로운 견해를 갖는 새로운 인간으로 바뀌어 갔던 것이다. 나 자신은 이미 몇년 전 투랑강에서 팔려온 노예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내게는 이제 과거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갈색 피부를 가진 네덜란드 여성이 된 것일까 하고 때때로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나는 쁘리부미가 얼마나 뒤떨어졌는지를 내 주위에서 보고 있었으나, 그 질문에 스스로 대답을 할 용기는 없었다. 나는 너의 파파 이외의 유럽인과는 그다지 교제가 없었다.
언젠가 나는 지금 내가 교육을 받고 있는 것처럼, 유럽 여성들도 교육받고 있느냐고 그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그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아니 ?
"보통의 유럽 여성보다 네가 더 유능하다. 더군다나 혼혈 여성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아아, 그와 함께 생활할 수가 있어서 마마는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나를 칭찬하고 이끌어 주는 것을 그는 얼마나 잘 해냈는지 ! 나는 몸도 마음도 기꺼이 그에게 맡겼다.
만일 젊어서 죽는 일이 생긴다면, 그의 품 속에서 죽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과거와 완전히 결별하려고 한 것은 옳은 일이었다고 나는 새삼스렵게 확신했다.
메레마는 '남편이란 스승이고 신이다'라는 자바의 격인 그대로였다. 그는 네덜란드로부터 여성 잡지 몇 권을 나를 위해 정기구독을 해 주었다.
그렇게 말하고 그는 다시 소리를 내어 웃었다.
물론 그는 과장해서 말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기쁘고 행복했다. 적어도 나는 네덜란드의 여성들에게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그의 칭찬을 듣는 것은 몹시 즐거운 일이었단다. 그는 결코 깎아내리는 법이 없고 칭찬만을 할 뿐이었다. 또 나의 질문에는 무시하는 일이 없이 언제나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마마는 점점 더 자신과 용기가 용솟음쳤단다.
그런데 앤, 그 얼마 뒤 나의 행복이 위협당하고, 내 생활의 토대를 크게 뒤흔드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윽고 로베르트가 태어났다. 그로부터 4년 뒤에는 앤, 네가 태어났단다.
사업은 점차 확대되어 가고 토지도 늘어났다. 우리들의 토지와 접하고 있는 마을의 미개림을 살 수가 있었다. 모두 내 명의로 구입한 것이다.
그 당시에는 논이나 밭은 없었다. 사업이 점점 번창하기 시작하자 메레마는 과거의 세월로 거슬러 올라가서 나의 노동에 대한 보수를 지불하기 시각했다. 나는 그 돈으로 정미소와 그 밖의 설비를 구입했다.
그 이후, 농장은 나의 주인으로서의 헤르만 메레마 개인 것만이 아닌 내것도 되었다,
그후 나는 5년 동안의 이익 분배금 5천 길더를 받았다. 그는 그것을 내 명의로 은행에 예금하게 했다. 또 그 무렵에 농장은 "바이텐졸프 농장"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농장내의 모든 문제를 맡아 보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나를 냐이 온트솔로, 냐이 바이텐졸프라고 부르게 되었단다.
앤, 잠이 들었니 ? 아직도? 그럼, 얘기를 계속하겠다. 여성 잡지를 오랫동안 구독하여, 거기에 씌어 있는 가르침을 여러 가지로 실천하고 난 뒤, 언젠가 나는 그에게 되풀이하여 물었다.
"나는 이제 네덜란드 여자처럼 되었나요?"
네 파파는 큰 소리로 웃기만 했다.
"네가 네덜린드 여성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지. 또 그렇게 될 필요도 없고. 지금 그대로도 너는 어면 네덜란드 여성보다 더 영리하고 훌륭해. 누구보다도 말이야."
그렇게 말하고 그는 다시 소리를 내어 웃었다. 물론 그는 과장해서 말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기쁘고 행복했다. 적어도 나는 네덜란드의 여성들에개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그의 칭찬을 듣는 것은 몹시 즐거운 일이었단다. 그는 결코 깎아내리는 법이 없고 칭친만을 할 뿐이었다. 또 나의 질문에는 무시하는 일이 없이 언제나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마마는 점점 더 자신과 용기가 용솟음쳤단다.
그런데 앤, 그 얼마 뒤 다의 행복이 위협당하고, 내 생활의 토대를 크게 뒤흔드는 사건이 일어났다. 어느 날, 나와 그는 로메르트와 너를 헤르만 메례마의 자식으로서 인지하기 위해 법원으로 갔었다. 처음에 나는 그 인지에 의해서 너희들이 적출자로 법적인 승인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네 오빠와 너는 어디까지나 비적출자로 간주되고, 다만 헤르만 메레마의 자식으로서 그의 성을 쓸 권리만을 인정받게 되었다. 법원의 개입에 의해서 법률은 너희들을 내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게 되었단다. 너희들을 낳은 것은 이 마마인데도 지금에 와서는 내 자식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 인지 이후, 너희들 두 사람은 법률에 의해 헤르만 메레마 한 사람의 자녀가 된 셈이다. 법률, 그러니까 이곳 동인도에서의 네덜란드 법률에 의한다면 그렇다는 것이다. 오해해서는 안된다. 법적으로야 어떻든 네가 내 자식이라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때 처음으로 나는 법이라는 것이 얼마나 비정한 것인가를 알게 되었다. 너희들 두 사람은 한 사람의 아버지를 얻었고, 한편으로는 어머니를 잃어버린 것이다. 인지에 뒤이어 메레마는 너희들 두 사람에게 세례를 받게 하려고 했다. 나는 교회에는 함께 가지 않았지만 너희들은 금방 집으로 돌아왔다. 목사가 너희들의 세례를 거부한 것이다. 파파는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내뱉듯이 말했다.
"이 아이들에게는 아버지를 가질 권리가 있어. 왜 이 아이들에게는 그리스도로부터 죄를 용서 받을 권리가 없다는 거야?" 나는 그러한 문제를 이해할 수가 없어서 잠자코 있었다. 그 얼마 뒤에야 나는 다음과 같은 것을 알아냈다. 그것은 우리들이 호적 등기소에서 결혼을 하기만 하면, 너희들 두 사람은 적출자가 될 수 있고 따라서 세례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을 알게 되자 나는 매일 호적등기소에서 결혼을 하자고 메레마에게 졸라댔다. 집요하게 독촉했다. 새례 거부 사건 이후, 며칠 동안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던 네 파파는 갑자기 화를 내기 시작했다. 지난 몇 년 동안 그가 화를 낸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그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너희들 두 사람은 법률상 비적출자인 채로 새례를 받지 못하고 말았단다. 나는 두 번 다시 그러한 요구를 하지 않았다. 마마는 그 상태로 만족할 수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 동안 나를 마담이라고 불러 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냐이"라는 호칭이 평생 동안 붙어다니게 되었다.
그래도 너희들 두 사람이 충분히 존경할 수 있고 신뢰할 수 있고 세상 사람들의 평판도 높은 믿을 만한 아버지를 갖고 있는 동안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더구나 아버지에게서 인지를 받았다는 것은 너희들 자신에게는 커다란 의미를 갖고 있었다.
사람들이 나에 대해 갖고 있는 선입관도 너희들이 당연히 얻어야할 권리를 얻을 수만 있다면 상관 없다고 생각했다. 적출자로서 세례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된다면 나는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나를 인정받는 것? 그것은 나 혼자 힘으로 어떻게든 할 수가 있었다. 앤, 벌써 잠이 들었구나. "자지 않아요, 마마."
마스, 당신에 대한 마마의 말을 나는 계속 기다리고 있었어요. 또 다음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 기회를 놓치고 나면 마마는 이토록 많은 것을 얘기해 주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마마가 우리들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 얘기를 꺼낼 때까지 나는 참지 않으면 안되었어요. 그래서 나는 유도하듯이 물었죠.
"마마는 파파를 사랑하고 있었나요? "
"사랑이라는 것의 의미를 마마는 모른단다. 그는 자기의 책임을 다하고 나도 나의 책임을 다 했다. 그것으로 우리들 두 사람에게는 충분했단다. 만약 그가 고국으로 돌아간다고 했더라도 나는 붙잡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 그렇게 할 권리가 없다는 이유에서뿐만 아니라, 우리들은 서로 아무런 빚이 없었기 때문이다. 언제든지 좋을 때, 그는 내게서 떠날 수가 있었던 거야. 나는 이미 많은 것을 배우고, 많은 것을 언어 나의 굳센 의지에 자신을 갖고 있었다. 다는 일찌기 부모로부터 그에게 팔려온 첩에 불과하지만, 이미 많은 것을 소유하고 무슨 일이든 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단다. 마마의 예금은 이미 1만 길더가 훨씬 넘고 있었단다, 앤."
"마마는 투랑강의 가족은 한번도 찾아간 적이 없나요?"
"투랑강에는 가족이 없단다. 나의 가족은 우노크로모뿐이다. 몇 번 오빠 파이망이 찾아왔는데, 나는 오빠하고는 만났다. 돈을 달라고 오는 거야. 언제나 그랬단다. 마지막으로 오빠가 온 것은 아버지가 집단 콜레라에 걸려 죽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어머니는 그 이전에 죽었다고 하더구나. 원인은 나도 모른다." "찾아가 보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요, 마마?"
"아니야, 그대로가 좋았단다. 과거와는 깨끗이 결별하기로 했으니까. 그래도 상처받은 명예와 자존심은 좀처럼 아물지를 않는구나. 내가 얼마나 비장한 생각을 하며 팔려왔었는지를 생각하면..... 사스트로토모의 탐욕과 그 아내의 나약함을 나는 용서할 수가 없다. 사람은 일생에 한 번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있단다. 그것을 할 수 없으면 그 사람은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는 거야."
"마마는 지나치게 냉정해요, 무섭도록 엄격하구요," "마마가 엄한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면 너는 어떻게 되었겠니? 누구에 대해서나 엄한 태도는 늦추지 않을 것이다. 마마는 노예가 되는 길을 받아들이고 말았지만, 그린 일로 희생되는 것은 나 한 사람만으로 충분하다. 앤, 너야말로 너무 착해서 달이야. 쓸데 없는 동정만 하고......" 마마는 여전히 당신의 애기를 하지 않았어요. 마마는 파파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 같으니까 대답하는 것이 마음에 내키지를 않았나 봐요. 파파는 마마에게 있어서는 남이었거든요. 그것에 비한다면 마스, 어째서 당신은 내게 이토록 가깝게 느껴지는 것일까요? 어째서 나는 하루종일 당신 일만 머리에 떠오르고 언제나 당신 옆에 있고 싶은 것일까요? "그리고 나서 앤, 내개 두 번째 시련이 닥쳐왔단다."
마마는 얘기를 계속했어요.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이었단다."
네덜란드 정부는 탄쥰 빼라크 항의 보수와 확장 공사를 하기로 결정하고, 항만 전문가 팀이 본국에서 파견되어 왔다. 그 무렵 우리들의 낙농업은 순조롭게 번창해 가고 있었단다. 수요는 늘어나고 매달 새로운 고객을 맞고 있었다. 드루새 석유 회사는 관련 부분을 포함해서 기업 전체가 우리들의 좋은 단골이었단다. 그때 갑자기 청천벽력과도 같은 파국이 닥쳐왔단다. 마마는 침대에서 내려와 물을 마시러 갔다. 방안은 캄캄했다. 이층에 있는 그 방에서 우리들의 얘기를 듣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용한 밤이었다. 괘종 시계의 뜩딱거리는 소리가 열려 있는 문을 통해서 아래층으로부터 희미하게 들려 왔다. 마마가 방으로 돌아와 문을 닫자 그 소리는 사라졌다. 그 항만 전문가 팀에 한 사람의 젊은 기사가 있었단다. 처음에 나는 신문에서 그의 이름을 읽었다. 기사의 이름은 마우리츠 메레마었단다. 그의 경력이 간단히 소개되어 있었다. 타협을 싫어하는 정의파로, 짧은 경력이지만 이미 위대한 업적을 이룩했다고 씌어있었다.
나는 그가 파파의 친척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평화롭고 안정된 행복한 생활을 누구로부터도 침해당하고 싶지가 않았단다. 우리들의 사업에는 누구라도 손가락 하나 대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해 파파가 읽기 전에 나는 그 신문을 감췄단다. 신문은 오지 않았어요. 아마 배달부가 병이 난 모양이죠 하고 나는 꾸며 댔다. 그도 그 이상은 묻지 않았다.
그로부터 3개월 뒤, 너희들이 학교에 간 다음 말 두 필이 끄는 크고 멋진 정부의 공용 마차를 타고 한 사람의 손님이 찾아왔다. 그날 따라 파파는 집 뒤쪽에서, 나는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있었단다. 그것이 불운이었다.
공용 마차는 계단 앞에서 멈추었다. 나는 마중을 하기 위해 사무실에서 나갔다. 아마 어딘가 관청에서 유제품을 구입하러 왔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란다.
젊은 유럽인이 마차에서 내리는 것이 보였다. 차림은 아래 위가 모두 흰색으로, 웃옷은 해군사관의 제복이고, 쓰고 있는 모자도 해군의 모자였는데 옷소매에도 어깨에도 계급장은 붙어 있지 않았다. 딱 벌어진 체격으로 넓은 가슴을 가진 젊은이였다.
주저하는 빛빚도 없이 그는 문을 몇 번 노크했다. 얼굴이 헤르만 메레마와 꼭 닮았고, 닻 모양의 웃옷의 은단추가 빛나고 있었다.
"투앙 메레마는 어디 있죠?"
그는 서두른 말레이어로 그렇게 물었다. 건방지고 무뚝뚝한 그의 말투에서 나는 금방 내가 알고 있는 유럽적 기호에 반대되는 난폭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단다. "누구신가요?"
나는 불쾌해하며 물었다.
"투앙 메레마에게만 볼 일이 있어."
그는 먼저보다 더 오만한 말투로 대꾸했다.
또 한번 나는 자기 집에서 대우를 받을 권리를 갖지 못한 현지처로 되돌아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이 대농장의 주인이 아닌가? 아마 그는 나를 투앙 메레마에게 기생하고 있는 여자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오해해서는 안된다. 나의 도움이 없이는 이 집을 지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 오만한 태도를 취할 권리 같은 것은 그 손님에게는 없었단다.
나는 그에게 의자도 권하지 않고 세워 둔 채로 누군가에게 메레마를 불러 오라고 일렀다. 너의 파파는 자기에게 관계가 없는 편지를 읽거나 대화를 엿듣거나 해서는 안된다고 내게 가르쳐 주었단다. 그러나 그때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사무실과 응접실 사이의 문을 약간 열어 두었다. 그 남자가 누구이고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를 알아내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었지. 메레마가 나타났을 때, 젊은이는 여전히 선 채로였다. 열려진 문 틈으로 파파가 마루에 얻어붙은 듯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투앙 메레마가 소리쳤다.
"마우리츠 ! 이처럼 훌륭하게 자라다니......."
나는 금방 그가 탄쥰 빼라크 항의 보수를 위해 온 전문가 팀의 기사 마우리츠 메레마라는 것을 알아챘다. 젊은이는 인사도 하지 않고 건방진 말투로 투앙의 말을 정정했다.
"기사 마우리츠 메레마요, 메레마 씨 !"
그 말을 듣고 파파는 어리둥절해 하는 것 같았다. 손님은 여전히 선 채로 있었다. 파파는 앉으라고 권했으나, 그는 무시한 채 앉으려고 하지 않았다.
앤, 이 얘기는 정확히 들어 둬야 한다.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단순히 네 자식이나 손자에게 이 얘기를 전해야 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현재 마마와 네가, 그리고 이 농장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의 발단은 바로 그가 찾아온 데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란다.
젊은 네덜란드인 손님은 이렇게 말했단다.
"이 의자에 앉기 위해서 나는 이곳에 온 것이 아니오. 앉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읍니다. 잘 들어요, 메레마 씨. 나의 어머니 아메리아 메레마 한벨스는 비겁하게도 당신이 집을 나간 뒤, 나를 먹이고 학교에 보내고 졸업을 시켜 기사가 되기까지 뼈빠지게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소. 메레마 씨, 나와 메레마 한멜스는 당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지 않겠다고 굳개 맹세했소. 당신은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고, 어디에 있는지 소식도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소."
문 틈으로 파파의 옆 열굴이 보였다. 그는 두손을 들었다. 입술은 움직였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뺨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단다. 이윽고 두손이 축 늘어지더구나. 기사 메레마는 계속했다.
"당신은 아메리아 한멜스에게, 그녀가 부정을 범했다는 비난을 남기고 사라졌소. 그녀의 아들인 나도 그녀와 같은 치욕을 맛보았소. 그 부정 행위를 당신은 법정으로 들고 나가지 않았소. 나의 어머니에게 자기 변호와 진실을 밝힐 수 있는 기회를 주지않은 거요. 어머니에 대한 추잡한 비난을 당신이 다른 누구에게 누설했거나 떠들어냈는지, 그런 것은 알 수가 없소. 메레마씨, 나는 우연히도 지금 슬라바야 정부에서 일을 하고 있소. 그리고 이것도 우연한 일인데, 언젠가 "경매"지를 읽다가 '바이텐졸프 농장' 산 유제품과 우유 선전 광고를 발견했소. 그 광고 밑에 당신의 이름이 실려 있더군요. 나는 사립 탐정을 시켜 당신의 정체를 조사하게 했소. H 메레마란 바로 헤르만 메레마, 내 어머니 아메리아 한벨스의 남편이었소. 어머니는 재혼해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도 있었소. 그런데 당신은 문제를 마무리도 짓지 않고 도망쳐 버렸단 말이오."
"이혼하고 싶으면 언제든 그녀는 법원에 갈 수 있었어."
파파는 그렇게 대답했지만 그처럼 거칠게 자라난 자기 자식에게 압도당한 듯이 약한 목소리였단다.
"부정을 비난한 것은 당신인데 왜 어머니가 법원에 가지 않으면 안되는 거죠? 만일 어머니가 부정을 범했다고 정말로 믿고 있다면 어째서 당신은 지금이라도 법원에 이혼 소송올 제기하지 않는 거죠?"
"만일 내가 이혼 소송을 제기하면, 네 어머니는 네덜란드에 있는 내 낙농 회사에 대한 모든 권리를 잃게 되는 거야."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메레마 씨. 진실은 단 한 가지, 당신이 법정에서 흑백을 가리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오. 그 때문에 어머니는 희생을 당한 거란 말이오." "네 어머니가 부정을 폭로하는 데 반대하지 않았더라면, 너의 충고가 없어도 나는 옛날에 소송을 제기했을 게다." "그때는 어머니에게 변호사를 고용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죠. 지금 그 아들은 그것을 할 수가 있소. 아무리 값비싼 변호사라도 고용할 수가 있단 말이오. 지금이라도 소송을 제기하는 것이 어떻소, 메레마 씨. 당신에게도 변호사를 고용할 돈이 있고, 위자료를 지불할 수 있는 여유가 있잖소?"
앤, 모든 것이 밝혀진 셈이란다. 기사 메레마는 네 파파의 외아들, 즉 그의 본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유일한 적자였단다. 그가 우리들의 생활을 엉망진창으로 만들기 위해 침략자로서 찾아온 것이란다.
나는 모든 얘기를 듣고 전율했다. 그때까지 우리는 서기 사스트로토모와 그의 아내에게도, 파이망에게도 우리들의 생활에 손가락 한개 대지 못하게 했다. 또 투앙 메레마의 태도 변화에도 위협을 받지 않았단다. 가정 생활과 사업은 누구에게서도 간섭을 받아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너의 배다른 오빠가 우리들의 생활을 엉망으로 만들기 위해 침략해 왔던 것이다. 나는 그 때까지 아직 애기에 끼어들지 않고 있었으나, 얘기를 듣고 있는 동안 참을 수가 없게 되어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 사무실로 들어갔단다. 파파를 돕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도 있었단다.
"그 사립 탐정은 매우 상세하고 믿을 만한 보고서를 내게 제출했소. "
그곳에 나타난 나의 존재를 무시하고 그는 계속했단다. "이 집의 각 방에 무엇이 있는지, 인부들은 몇 명인지, 소는 몇 마리 있는지, 밭과 논에서 쌀과 다른 작물이 몇톤이나 수확되는지, 당신의 연간 수입은 얼마인지, 은행 예금은 얼마나 있는지, 모든 것을 나는 알고 있소.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놀란 것은 메레마 씨, 당신의 생활 윤리에 관한 것이오. 일찌기 아메리아 한멜스에세 부정한 여자라는 낙인을 찍은 당신의 인생 말이오. 이 현실은 어떻게 된 거요? 당신은 법률상으로는 아직 우리 어머니의 남편이오. 그런데 당신은 그것을 잊고 원주민 여자와 잠자리를 같이하고 있소. 그것도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 10여 년 전부터 정식 결혼도 하지 않고서 말이오. 그리고 두 명이나 죄많은 자식을, 사생아를 만들었단 말이오 !"
그 말을 들은 나는 머리로 피가 솟구치는 것 같았단다. 입술이 마르고 몸이 떨리고 이가 딱딱 마주쳤다. 나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서 당장이라도 그 얼굴을 손톱으로 할퀴고 싶었다. 지금까지 내가 소중히 지켜오고 키워오고, 그 때문에 심혈을 쏟고 사랑해 온 모든 것을 그는 모욕한 것이란다. "그 말은 메레마 한멜스와 그 아들의 집에서나 해야 할 소리 같군요 !"
나는 네덜란드어로 쏘아붙였다.
하지만 그 무뢰한은 내 쪽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표정조차 변하지 않더구나.
그에게 있어서 나는 한 개의 돌덩이만도 못한 것이었다. 내가 그의 아버지와 간통을 하고, 그의 아버지가 나와 부정을 범했다고 그는 판단했던 거란다.
어쩌면 그렇게 판단하는 것은 그의 권리이고, 세상의 권리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네 파파와 내가 한 사람의 여성, 아메리아라는 이름의 내가 알지도 보지도 못한 여인과 그 자식을 속였다는 말을 듣다니.......이보다 더 억울한 일이 있을 수 있겠느냐? 더구나 그 일이 우리들이 온갖 고생을 하며 우리들 손으로 세운 집, 다름 아닌 우리들 집에서 행해지고 있었던 거란다.
"내 가족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권리가 당신에게는 없어요 !" 나는 네덜란드어로 소리쳤다.
"너하고는 관계 없는 일이야, 냐이."
그는 서투른 말레이어로 건방지게 대답하고, 그 다음부터는 거들떠 보지도 않더구나.
"여기는 내 집이에요. 그런 애기는 밖에 나가서 하세요. 여기서는 할 수 없다구요 !"
나는 너의 파파에게 집에서 나가라고 눈짓을 했으나, 그는 눈치채지 못했다. 무례한 젊은이는 여전히 나를 무시한 채였다. 파파는 제정신을 잃은 듯이 입을 크게 벌리고 장승처럼 서 있을 뿐이었단다. 나중에야 알았는데, 사실 그는 정신을 잃고 있었다고 하더구나."
여전히 나를 무시한 채 무뢰한은 네덜란드어로 계속했다.
"메레마 씨. 설사 당신이 이 냐이, 이 첩과 결혼해서 그 결혼이 합법적이라고 해도, 이 여자는 크리스찬이 아니오. 이교도란 말이오. 가령 크리스찬이라고 해도 아메리아 한멜스보다 당신 쪽이 더 부패하고 타락한 거라구요. 옛날에 당신이 비난한 어머니의 배덕을 전부 합친 것보다 훨씬 더 큰 배덕행위를 당신은 저질렀소. 당신은 피의 죄, 금기로 되어 있는 유럽의 크리스찬 피를 유색 원주민의 이교도 피에 섞어 버렸단 말이오. 이건 용서 받을 수 없는 대죄란 말이오 !"
"나가요 ! "
나는 소리쳤다. 그는 여전히 나를 무시해 버렸다.
"남의 가정을 파괴하다니, 기사라고 잘난 듯이 떠들지만 예의는 조금도 모르는 사람이군요 ! "
그는 나를 상대하지 않았다. 내가 한 발 앞으로 다가서자 마치 원주민이 가까이 오는 것은 불쾌하다는 듯이 그는 반 걸음 뒤로 물러났다.
"메레마씨, 당신은 자신이 정말로 어떤 인간인지 이제는 알았을 거요."
그렇게 말하고 그는 우리들에게 등을 돌리고 계단을 내려가 두번 다시 뒤돌아보지 않고 마차에 올라 탔다. 네 파파는 망연히 말도 잊은 채 마루에 못박힌 듯이 서 있었다.
"저 사람이 당신과 본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군요. 지난 10여년 동안 당신이 내게 가르쳐 준 유럽 문명의 실태가 저런 건가요? 하늘에 닿을 정도로 당신이 예찬하던 문명이란 게 말예요? 협박을 하기 위해 남의 가정 환경을 조사하여 모욕하는 것이? 협박이 ? 이것이 협박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협박이지요? 무엇 때문에 남의 재산을 조사하는 거죠?"
앤, 내가 지르는 소리를 그는 듣고 있지 않았단다. 그의 눈동자는 그의 시선은 까딱도 않고 바깥 도로에 못박혀 있었다. 나는 계속 소리쳤으나, 그는 듣지 뭇하는 것 같았다. 인부들이 무슨 일인가 해서 달려왔으나, 내가 투앙에게 마구 대드는 것을 보고는 항급히 물러가더구다. 나는 그를 잡아 끌며 가슴을 마구 쥐어뜯었다. 그는 아무런 아픔도 느끼지 못하는지 잠자코 서 있었다. 다만 내 마음 속의 아픔만이 표적을 찾아서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단다.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단다. 분명히 네털란드 본국에 남겨두고 온 아내를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받은 마음의 상처는 얼마나 깊은 것이었을까? 그 괴로움을 그가 이해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더욱 쓰라렸단다.
그의 가슴을 쥐어뜯는 데도 지친 나는 엉엉 울며 의자 위에 헌 옷처럼 꾸겨박힌 채 앉았다. 테이블에 얼굴을 파묻었다. 얻굴은 온통 눈물로 범벅이 되었단다. 현지처에 대한 멸시는 언제쯤이나 끝다는 것일까? 모두에게 상처받는 것을 언제까지나 참아 내고 있지 않으면 안된단 말인가? 나는 이렇게 나를 현지처로 팔아 넘긴, 지금은 없는 부모를 저주하지 않으면 안되는가? 하지만 나는 결코 그들을 저주한 일은 없단다.
나만이 아니라 나의 자식들까지 모욕한 것을, 교육을 받고 기사라는 직함까지 얻은 그 젊은이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까? 내 자식들은 치욕이 버려지는 쓰레기통이 되지 않으면 안되는가? 그리고 헤르만 메레마, 덩치가 크고 넓은 가슴을 갖고 털이 많으며 우람한 근육을 지닌 남자. 그에게는 어째서 자기 인생의 반려자, 자기 자식들의 어머니를 지킬 힘이 없단 말인가? 그린 남자가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그는 나의 선생님일 뿐만 아니라 내 자식들의 보호자이고, 나의 신이 아니었던가? 도대체 그의 지식이나 교양은 무엇 때문에 있는 것인가? 유럽인으로서 모든 원주민에게 존경을 받는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인가? 자기 자신조차 지킬 수가 없다면, 나의 주인이고 선생님이고 그리고 나의 신이라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그 순간부터 너의 아버지에 대한 나의 존경심은 사라져 버렸단다. 자존심과 명예에 관한 그의 가르침은 내 자신 속에서 이미 독립 왕국을 형성하고 있었지. 그는 사스트로토모와 그 아내 이상의 인간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 정도의 시련에 부딪쳐서 그가 보여줄 수 있었던 행동이 그 정도라고 한다면, 나는 그이 없이도 아이들을 키우고 나 혼자 힘으로 어떤 일이든 해나갈 수 있다. 앤, 나의 마음은 얼마나 깊은 상처를 입었는지 모른다. 평생을 두고 그보다 큰 상처를 입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얼굴을 들어 보니까 눈물이 어려 있는 내 눈에 여전히 망연하게 서서 길거리를 내다보고 있는 메레마의 모습이 비쳤다. 인생의 반려자이고, 최대의 협력자이기도 한 내게는 눈길 한번 돌리지 않았단다.
이윽고 그는 기침을 몇 번 하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악마나 귀신이 들을까봐 염려라도 하듯이 조심스럽게, 그리고 살며시 불렀다.
"마우리츠 ! 마우리츠 ! "
그는 계단을 내려가 앞뜰을 가로질러 갔다. 큰 길까지 나가자 오른쪽 슬라바야 방향으로 구부러졌다. 구두는 신지 않았고 작업복 차림에 슬리퍼를 끌고 있을 뿐이었단다.
그날 해가 질 때까지 너의 파파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마음의 상처를 달래지 못해 괴로와하고 있었으니까.
밤이 되어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단다. 이튿날 아침에도.....사흘 낮 사흘 밤을 돌아오지 않았다. 그 동안 나의 눈물만이 하염 없이 베개를 적시고 있었단다. 다르삼이 모든 일을 맡아 해 주었다. 사흘째 되는 날 저녁때 그는 과감하게 문을 노크했다. 현관문을 열고 그를 이층으로 올려보낸 것은 앤, 바로 너였단다.
설마 그가 이층에 올라오리라고는 나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것을 알았을 때, 마음의 아픔과 슬픔이 단번에 분노가 되어 폭발했던 거란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아마 내 고통이나 슬픔보다 좀더 중대한 문제가 있다고 그는 판단했던 것 같다.
방에는 자물쇠가 잠겨 있지 않았다. 그것을 네가 열었던 것이다. 그런 사건이 있었다는 것을 너는 잊어버렸을 게다. 그리고 다르삼이 이층에 올라온 것은 그것이 처음이고 마지막이었단다. 다르삼은 마두라어로 이렇게 말했다.
"냐이, 읽는 것과 쓰는 것을 빼놓고 나머지 일은 모두 이 다르삼이 해놓았읍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는 일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계속 침대에 누워 베개를 끌어안고 있었단다. "냐이는 걱정하실 것 없읍니다. 모든 일이 잘 되어가고 있읍니다. 이 다르삼을 믿어 주십시오, 냐이." 사실 그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나흘째 되는 날 나는 외출했다. 네 학교로 찾아가서 너를 퇴학시켰던 것이다. 우리들의 땀의 결정인 농장이 헛되이 무너져버리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었다. 농장이 나의 모든 것이었으니까. 우리들의 생활도 그 위에서만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이다. 농장이 나의 첫번째 자식인 셈이었단다.
거기까지 말하고 마마는 그때의 고통, 방어할 수도, 보복할 수도 없는 굴욕에서 오는 고통이 다시 떠오르는지 흐느껴 울었어요.
눈물이 그치고 나자 다시 얘기를 계속했어요.
앤, 너도 알고 있겠지. 그때 학교에서 돌아와 내가 무엇을 했는지를. 그래, 열다섯 명 이상의 인부들을 해고시켜 우리 땅에서 쫓아냈다. 불과 한두 푼의 돈으로 그들이 마우리츠에게 정보를 판 것이다. 아니 한 푼도 받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마마는 네게 용서를 빌어야 할 일이 있다. 네 파파와 나는 언젠가 너를 유럽에 유학시켜 그 곳에서 교사 자격을 따게 하기로 합의를 보았었단다. 너를 중도 퇴학시켜서 나는 몹쓸짓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어른이 되기도 진에 마마는 너를 맹렬하게 일을 시켰단다. 휴일도 없고 친구도 사귀지 못하게 하고 매일 일만 시켰던 거야. 친구들도 만들지 못하게 한 것은 사업에 온힘을 기울이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너는 좋은 경영자가 되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경영자는 인부들과 가까와져서는 안된다. 그들의 영향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들과 달라져야 한다. 그것은 어쩔수없는 일이란다, 앤.
기사 메레마가 나타난 뒤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어요. 누구에게 들은 것도 아닌데, 나는 파파의 일을 알고 있었어요. 이레째 되는 날 파파는 겨우 돌아왔어요. 이상한 일이지만 그때 파파는 말쑥한 양복을 입고, 새 구두를 신고 있었어요.
그것은 일이 끝난 저녁때의 일이었어요. 마마와 나와 로베르트는 마침 집앞에 앉아 있었어요. 그때 파파가 돌아왔던 거예요. "모르는 척해라. 말을 걸어서는 안된다."
마마가 엄격하게 말했어요.
가까이 다가올수록 깨끗이 수염을 깎은 파파의 창백한 얼굴이 똑똑하게 보였어요. 머리는 한가운데서 단정하게 가리마를 타고 있었고 집에서는 사용한 적이 없는 머리 기름 냄새가 우리들의 후각을 자극했어요.
향료가 섞인 강한 알콜 냄새도 났어요. 파파는 말을 하지도 않고 시선을 주지도 않은 채, 우리들 앞을 곧장 지나서 계단을 올라가 집안으로 사라졌어요.
갑자기 로베르트 오빠가 일어나서 눈을 부릅뜨고 마마를 노려보며 고함쳤어요.
"나의 파파는 원주민이 아니야 !"
로베르트는 파파를 부르면서 달려 갔어요. 나는 마마를 보았는데 마마는 나를 바라보며 조용하게 말했어요. "너도 그렇게 하고 싶으면 오빠 흉내를 내도 괜찮다." "싫어요, 마마."
나는 소리치며 마마의 목을 껴안았어요.
"나는 마마를 따를 뿐이라구요. 나도 마마와 같은 쁘리부미니까요."
그래요, 마스. 이것이 우리들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에요. 오빠인 로베르트, 배 다른 오빠인 마우리츠와 마찬가지로 당신도 우리 두 사람을 경멸하는지 어떤지를 나는 모르고 있어요. 집 안에서 파파는 대체 무엇을 했을까? 아래층도 이층도 방이라는 방에는 모두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어요. 15분 가량 있다가 파파는 다시 나왔어요. 파파 뒤에는 로베르트가 따르고 있었다는데 파파는 다시 앞뜰을 빠져나가 큰 길로 모습을 감추었어요.
로베르트는 파파에게 무시당했기 때문에 실망을 해서 어두운 얼굴로 집안으로 되돌아 왔어요.
그 이후 5년 동안, 나는 거의 파파의 모습을 본 적이 없어요. 가끔 아무 소리 없이 나타나서 소리 없이 나갈 뿐이었죠. 마마는 파파를 거부하고 시중을 들려고도 찾으려고도 하지 않았어요. 내가 찾으러 나서는 것도 마마는 못하게 했어요. 그 뿐만 아니라 파파를 화제로 삼는 것조차 못하게 했어요. 파파의 초상화는 다르삼이 벽에서 떼어냈고, 마마가 명하는대로 앞뜰에서 가족과 인부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불태웠어요, 아마 그런 식으로 마마는 복수를 한 것인 것 같아요.
처음에 로베르트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어요. 파파의 초상화가 불태워진 다음에야 비로소 항의했어요. 그는 집안으로 뛰어들어가 마마의 방에서 마마의 초상화를 떼어다가 부엌에서 그것을 불태웠어요.
"저 애는 아버지와 함께 두어도 상관없어요."
마마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했어요.
무술의 달인인 다르삼은 그런 마마의 말을 로베르트에게 전하고 다음과 같이 덧붙였어요. "냐이와 아가씨를 방해하는 녀석은 설사 그것이 도련님이라도 용서하지 않겠읍니다. 이 긴 칼 밑에서 목숨이 끊기고 말 것입니다. 도련님도 그런 생각이 있으면 언제든지 해 보세요. 또 도련님이 투앙을 찾아내려고 한다면......" 그 사건이 있은 지 2개월 뒤, 로베르트는 유럽인 국민학교를 졸업했어요. 로베르트는 그것을 마마에게 알리지 않았고, 마마도 신경 쓰지 않았어요.
로베르트는 목적도 없이 여기저기를 쏘다녔죠. 마마와 오빠와의 무언의 전쟁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어요. 5년 동안이나 말이에요.
처음 얼마 동안 로베르트는 창고와 부엌, 사무실 등 집안의 물건들을 닥치는 대로 내다 팔아 돈을 만들었어요. 마마는 그의 명령을 받고 도둑질을 한 인부들을 모두 해고시켰어요. 그리고 마마는 오빠가 그의 방과 식당을 빼놓고는 다른 장소에 들어가는 것을 일체 금지시켰어요.
그리고 벌써 5년이 흘렀어요. 5년이라구요, 마스. 그리고 두 사람의 손님이 나타났어요. 로베르트 슬르호프가 오빠의, 밍케가 나와 마마의 손님으로 말이에요. 그래요. 당신이, 지금 내 앞에 있는 당신이 나타난 거라구요.......
제 5 장
증오와 갈등
우노크로모의 호화로운 저택에서 지내게 된 지 닷새째였다. 로베르트 메레마가 자기 방으로 나를 초대했다. 나는 경제하면서 방으로 들어갔다. 내 방보다는 많은 가구가 갖추어져 있었다. 유리를 깐 책상이 하나 있고 그 유리 밑에 영국 국기를 단 화물선, 카리브 호의 커다란 사진이 끼어 있었다.
로베르트는 친절하게 나를 맞았으나 눈이 수상쩍게 빛나고 약간 붉었다. 입고 있는 옷은 말끔했고, 싸구려 향수 냄새가 났다.
머리는 포마드로 번쩍거렸고 왼쪽에서 가리마를 타고 있었다. 그는 키가 크고 잘 생긴 젊은이로, 영리해 보이며 힘차고 정중하며 항상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다만 다갈색의 눈, 아랫 입술을 약간 내밀면서 훔쳐 보는 듯한 그의 눈만은 나를 몹시 불안하게 만들었다. 방 안에 우리 두 사람만이 있다는 것은 마음을 놓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로베르트가 입을 열었다.
"밍케, 이 집에서의 생활이 마음에 드나보군. 자네는 로메르트 슬르호프의 동급생이지 ? 고등학교에서 같은 반에 있다면서 ?" 나는 마음이 내키지 않아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들은 의자에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본래대로 한다면 나도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지금쯤은 졸업을 했을 거야."
"왜 진학을 하지 않았지?"
"그건 마마의 책임이야. 마마가 책임을 다 하지 않은 거라구." "안됐군. 자네도 아마 진학시켜 달라고 부탁하지 않았겠지." "부탁할 필요는 없었지. 그렇게 하는 것이 마마의 당연한 책임이니까."
"자네에개 진학할 의사가 없다고 마마는 판단했겠지."
"이제 와서 지나간 일을 왈가왈부해도 이미 소용 없는 일이네. 어쨌든 여기 있는 것이 내 현재의 모습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원주민에 불과한 자네에게 나는 졌어. 누가 뭐래도 자네는 고등학교의 학생이니까...... 그만두겠네. 여기서 학교 얘기 같은 것을 해 보았자 소용이 없으니까." 그는 한순간 입을 다물었다가 다갈색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질문을 하고 싶은데, 어째서 이 집에서 살게 되었지 ? 몹시 만족스러운 것 같은데 안네리스가 있기 때문인가?"
"그래, 자네 동생이 있기 때문이야. 그리고 또 한 가지, 부탁을 받았기 때문이지."
내가 그를 똑바로 쳐다보자 로베르트는 헛기침을 했다.
"내가 이 집에 있는 것이 자네는 마음에 안드는 것 같군."
"내 동생을 좋아하나?"
"응, 좋아하네."
"유감이로군, 원주민인 주제에."
"원주민이라서 안됐나?"
로베르트는 대꾸할 말을 찾으면서 다시 한번 헛기침을 하고 창밖으로 촛점이 없는 시선을 보냈다. 그 기회를 틈타 나는 그의 방을 살펴보았다.
침대에는 모기장이 없었다. 침대 밑에 병이 세워져 있고 그 주둥이 부분에 모기향이 남아 있었다. 병 밑에는 떨어진 재가 흩어져 있었고 마루는 청소가 되어 있지 않았다. 다시 그의 말소리가 들려서 나는 침대 밑의 관찰을 중단했다. "이 집은 내게는 너무 조용해."
로베르트는 화제를 바꾸었다.
"자네는 체스를 할 줄 아나?"
"유감이지만 할 줄 모르네."
"그래 ? 그건 유감이군. 그럼, 사냥은 어떤가? 사냥을 함께 가지 않겠나?"
"안됐지만 나는 공부할 시간이 필요해. 사실은 나도 사냥을 좋아하지. 다음 기회에 가기로 하겠네." "그러지. 다음에 함께 가자구." 그의 시선이 내 눈을 궤뚫었다. 그 시선에는 협박하는 빛이 역력했다.
"잠시 산책 정도 하는 것은 어떤가?"
"안됐지만 공부를 해야 한다니까." 한참동안 두 사람 모두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로베르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닫았다. 나는 무엇인가 얘깃거리가 없을까 하고 주위를 둘러 보았으나, 그때도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모든 가능성에 대비하고 있었다. 내 눈에 띤 것은 창문이었다. 만일 그가 갑자기 덤벼들면 저 곳으로 도망쳐서 뛰어내리자. 창 밑에 화분이 놓여 있지 않은 받침대가 보였다.
로베르트가 앉아 있지 않은 의자 위에 억지로 접은 한 권의 잡지가 놓여 있었다. 옷장이나 테이블 다리의 받침으로 사용된 것 같았다.
"읽을 만한 책 가진 것 없나?"
로베르트는 다시 의자에 앉으면서 소리 없이 웃었다. 잘 닦인 흰 이가 빛났다.
"읽을 만한 것이라니 이 책 말인가." 그는 접은 잡지를 눈으로 가리켰다.
"나도 한번 잃어 보았는데. "
로베르트는 잡지를 들어 내게 건네주었다. 그때 나는 그가 무엇인가 하려고 주저하는 기척을 느꼈다. 날카로운 그의 눈에 심장을 찔린 것처럼 나는 몸을 떨었다. 그가 건네준 것은 분명히 잡지였다. 표지는 이미 찢겨져 있었으나, "동인도XXX" 지라는 제목의 일부는 아직 읽을 수 있었다. "한가한 사람들을 위한 읽을거리지. "
로베르트는 내뱉듯이 말했다.
"읽고 싶으면 읽어 보게나. 갖고 가도 좋아."
종이와 잉크로 보아 그것이 새 잡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자네는 무엇을 할 생각인가?"
갑자기 로베르트는 그렇게 물었다.
"로베르트 슬르호프 얘기로는 자네는 부빠티 후보생이라더군." "그렇지 않다네. 나는 관리가 될 생각은 없네. 지금처럼 자유로운 몸이 좋아. 게다가 도대체 누가 나를 부빠티로 임명해 주겠나? 그렇게 말하는 자네는 어떤가?"
"나는 이 집을 좋아하지 않네. 이 나라도 좋아하지 않지. 너무나 더워. 나는 눈을 좋아하네. 이 나라는 너무 더워. 나는 유럽으로 돌아갈 생각이야. 배를 타겠어. 그리고 전세계를 여행하겠어. 첫번째 배에 탈 때 가슴과 팔에 문신을 새길 생각이야." "그거 참 좋은 생각이군. 나도 외국에 가보고 싶어." "나도 그래, 그렇다면 함께 배를 타고 세계 일주를 할 수가 있지 않겠나? 자네와 둘이서 말이야. 함께 계획을 세워 보지 않겠나? 하지만 자네가 쁘리부미라는 것이 유감이군." "그래, 유감스럽지만 나는 원주민이지."
"이 배의 사진을 보게나. 친구가 준 거야."
로베르트는 눈에 광채를 띠었다.
"그는 카리브 호의 승무원이었네. 우연히 탄쥰 빼라크에서 알게 되었지. 그는 여러 가지 일, 특히 캐나다에 관해 얘기를 해 주었네. 나는 그를 따라가려고 했었는데 그가 거절했어. '뱃놈이 되어서 무얼 하갰다는 거야. 너는 갑부의 아들이잖아? 집에 얌전히 있는 게 좋아. 생각만 있다면 너는 배를 살 수도 있지 않겠어 ?' 하고 그는 말했네."
꿈을 꾸는 듯한 눈동자로 로베르트는 나를 응시했다.
"2년 전의 일이었지. 그리고 두번 다시 탄쥰 빼라크에는 기항하지 않았어. 편지도 보내지를 않는 거야. 아마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는지도 몰라."
"자네가 떠난다면 틀림없이 마마가 허락하지 않을 거야. 자네가 떠나 버리면 도대체 누가 이 큰 농장을 꾸려 나가겠나?" "흥, 나는 이미 어른이야. 나 자신의 일은 내가 결정할 권리가 있다고. 하지만 아직 확실히 그렇게 정한 것은 아니야. 망설이고 있는 이유를 나 자신도 모르겠다니까." "먼저 마마와 의논하는 게 좋아."
내 의견에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자네가 마마와 애기를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네. 괜찮다면 내가 자네의 마음을 마마에게 전해 줄까, 어떤가?"
"아니, 괜찮네. 슬르호프한테 들었는데, 자네는 사기꾼에다가 호색가라면서 ?"
나는 피가 끓어올라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나는 곧 그가 지금까지 가장 하고 싶어했던 말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의 본심이 나타났다면 그것도 또한 좋았다.
"누구든지 선인이라든가 악인이라든가 제삼자에게서 멋대로 평가받는 경우가 있을 거야. 마찬가지로 또한 자신도 그렇게 남을 비난하지. 내게도 그런 경험이 있어. 자네도 그렇고 슬르호프도 마찬가지야."
"내가? 나는 그런 일 없어."
로베르트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나는 남의 말이나 행동 같은 것에 신경을 쓴 일이 없네. 하물며 자네에 관해서 다른 사람이 얘기하는 것 따위는 아무래도 좋아. 나 자신에 관해 무슨 말을 들어도 마찬가지야. 다만 슬르호프는 이렇게 말했어. '저 밍케라고 하는 지저분한 쁘리부미에게는 조심하게. 저 녀석은 주잡한 오입장이니까.' 라고."
"확실히 그의 말대로 우리들은 모두 조심을 하지 않으면 안되지. 슬르호프도 그렇고. 물론 나도 자네를 조심하고 있네." "내 말 잘 들어 뒤, 여자를 노리고 남의 집에 들어와서 먹고 자다니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야. 아무리 초대를 받았다고 해도 그런 일은 꿈에도 생각할 수가 없어. " "나는 자네 동생을 좋아한다고 조금 전에 말했을 거야. 게다가 마마로부터 이곳에 있어 달라는 부탁을 받았네." "좋아. 하지만 자네를 초대한 것은 내가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게나. "
"잘 알고 있네. 마마가 보번 그 편지는 아직도 갖고 있지."
"내개 보여 주게. "
"나한테 온 편지야. 자네에게 온 편지가 아닐세."
차츰 그의 태도와 말투에 적의가 나타나기 시각했다. 내게 공포심을 심어줄 셈인지, 로베르트는 나에게 힐끔힐끔 찌르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실제로 나는 이미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자네가 동생과 결혼할지 어떨지 나는 모르겠네. 마마와 안네리스는 자네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더군. 그것은 상관없지만 이 집의 장남은 나라는 사실을 명심하라구."
"내가 이곳에 있는 것은 자네의 갖가지 권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네. 자네 권리를 빼앗기 위해 온 것은 아니니까. 이 집의 장남은 어디까지나 자네겠지. 그것은 아무도 어쩔수없는 거야."
그는 헛기침을 하고 단정히 빗어 넘긴 머리칼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조심스레 머리를 긁었다. "자네도 알고 있겠지만, 이 집 사람들은 모두 나를 적대시하고 있어. 나를 상대해 주는 녀석은 아무도 없네. 이렇게 된 것은 누군가 그렇게 만든 장본인이 있기 때문이야. 그리고 지금 또 자네가 나타났어. 자네가 그들과 한패라는 것은 틀립없는 사실이야. 여기서 나는 외톨박이라네. 따돌림당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결코 잊지 말게."
로베르트는 입술에 미소를 띠고 인상을 써 보었다.
"알았네. 자네도 자신의 지금 말을 잊지 않도록 하게. 왜냐 하면, 지금 그 말은 자네 자신에게도 한 말일 테니까." 로베르트의 눈은 꿈꾸는듯이 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의 힘을 가늠하고 있는 것이다. 나도 미소를 띠고 그의 흉내를 냈다. 그의 움직임 하나 하나에 나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수상한 기미가 보이면 재빨리 창문으로 뛰어내릴 생각이었다. 그가 깨달았을 때는 이미 방안에는 없다는 계산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말해 두겠는데 자네는 자신이 쁘리부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도 잊지 않도록 하게. " "아아, 물론 잊지 않고 있네. 항상 머릿 속에 넣어 두겠네. 걱정하지 말게나. 자네도 잊지 말게나. 자네 몸에도 쁘리부미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나는 혼혈아는 아닐새, 유럽 혼혈이 아니지. 그러나 유럽인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 한 내 머릿속에도 유럽의 학문과 지식이 들어가 있네, 만약 자네가 유럽적인 것이 최고라고 생각한다면 말일세. " "밍케, 자네는 영리하군. 과연 고등학교 학생다와."
그때 로베르트와의 대화는 긴장에 차 있어서 몇 시간이나 계속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으나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겨우 10분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다행히도 안네리스가 밖에서 불렀기 때문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놀란 것은 그때의 로베르트의 말이었다. 의자에 앉은 채 그는 태연스럽게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가 보게나. 자네의 냐이가 부르고 있어. " 나는 나 자신도 모르게 문 앞에서 멈취 서서 어처구니가 없어하며 그를 돌아다보았다. 그는 그냥 웃고만 있었다.
"그녀는 자네 누이동생이야. 그런 말버릇이 어디 있나? 내게도 자존심이라는 것이 있다고. " 마치 그곳에서 어떤 중대한 일이 일어나기라도 한 듯이 안네리스는 황급히 나를 안방 쪽으로 끌고 갔다. 우리들은 크림색 바탕에 갖가지 꽃무늬를 수놓은 커버가 달린 푹신한 소파에 앉았다.
안네리스는 내게 바짝 몸을 붙이고 앉아서 근심스러운 듯이 속삭었다.
"로베르트 오빠에게 너무 가까이 가지 말아요. 오빠의 방에 들어가다니 말도 안돼요. 걱정이에요. 하루 하루 오빠는 변해가고 있어요. 마마는 벌써 두 번씩이나 오빠의 빚을 갚아주기를 거절했어요."
"자기 오빠와 원수처럼 지낼 필요가 있겠어?"
"그런 문제가 아니라구요. 오빠는 자기가 일을 해서 벌어야 해요. 그럴 마음만 있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거예요. 하지만 일하려고 들지를 않아요."
"그것은 알지만 그렇다고 어째서 당신들 두 사람이 서로 반목을 해야 하는 거지?"
"내 탓은 아니에요. 그보다 마마 쪽이 옳은데도 불구하고, 오빠는 마마가 쁘리부미라는 이유만으로 마마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거예요. 오빠가 그러한 태도를 취하는데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겠어요? "
나는 이 가족의 문제에 끼어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구태여 그 이상의 것은 묻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다음과 같은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잘 생긴 젊은이는 가정 생활에서 도대체 무엇을 얻어 왔는가? 어머니에게서는 아무것도 얻은 게 없다, 아버지에게서도 그렇다. 게다가 누이동생에게까지 애정도 동정도 얻고 있지 못하다. 그런 상태에서 내가 들어왔으니 오해받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앤, 왜 당신이 다리 역할을 하지 않는 거지 ?"
"무엇 때문에요? 오빠의 대도가 너무나 괘씸하기 때문에 나는 오빠를 저주하고 있는 형편이라구요."
"저주? 앤이 그를 저주한다고?"
"얼굴을 보는 것조차 싫어요. 그전에는 잘 해 왔는데, 이젠 틀렸어요. 죽을 때까지 변치 않을 거예요, 마스." 갑자기 안네리스의 얼굴이 붉어지며 분노를 노골적으로 나타냈다. 나는 참견하려고 했던 것을 후회했다. 냐이가 방으로 들어와서 우리 곁에 앉았다. 손에는 "솔라바야 일보"가 들려 있었다. 그 신문에 실린 '평범한 현지처의 비범한 생활'이라는 단편을 그녀는 나에게 보여 주었다.
"시뇨, 이 소설을 읽었나요? "
"네, 마마, 학교에서 읽었읍니다."
"아무래도 이 글에 나오는 인물을 내가 아는 것 같은 생각이 드는군요. "
그 말을 듣고 나는 아마 창백해졌을 것이다. 제목은 바뀌어 있었으나 그것은 틀림없이 내가 쓴 것으로서, "경매" 지 이외의 일반 신문에 처음으로 실린 나의 단편이었던 것이다.
몇개의 어구와 문장이 약간 고쳐졌다고는 하지만 내 작품임에는 틀림없었다. 소설의 소재는 안네리스에개서가 아니라 마마의 실생활을 바탕으로 한 내 자신의 창작이었다.
"작자는 누구인가요?"
나는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맥스 트레나르. 당신은 정말 광고문밖에는 쓰지 않나요?"
얘기가 복잡해지기 전에 나는 솔직이 고백했다.
"사실은 그 글은 내가 쓴 것입니다, 마마."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당신은 정말 잘 쓰는군요. 이런 식으로 쓸 수 있는 건 백 명 중에 한 사람도 없어요. 다만 이 소설속에서 당신이 그리고 있는 인물이 나라고 한다면....."
"내가 창작한 가공의 마마입니다."
그녀의 말을 가로채듯이 나는 재빨리 대답했다.
"그래요? 그렇다면 사실과 다른 일이 많이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군요. 얘깃거리로는 굉장히 훌륭해요. 빅토르 위고 같은 작가가 되면 좋겠어요."
그녀는 빅토르 위고를 알고 있었다. 아아,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가 ! 그때 나는 위고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부끄러워서 묻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녀는 작품을 감상할 수가 있다. 언제 문학을 공부한 것일까? 아니면 단지 아는 체를 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일까?
"프란시스를 읽은 적이 있나요? G 프란시스?" 나는 아주 난감해졌다. 그것도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시뇨는 말레이어 소설을 읽은 적이 없는 모양이군요." "말레이어 소설입니까? 그런 사람이 쓴 책이 있옵니까?" 나는 새끼 염소가 울듯이 애처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이 모르다니 뜻밖이군요. 그는 말레이어로 여러 권의 책을 썼지요. 내 추측으로는 그는 순수 백인이거나 혼혈로, 쁘리부미는 아닐 거예요. 당신이 관심을 갖지 않다니 정말 유감이로군요."
문학의 세계에 대해서 냐이는 많은 얘기를 했다. 그리고 나는 들으면 들을수록 의문을 품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헤르만 메레마에게서 들은 것을 그대로 자랑스럽게 늘어놓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학교의 신생님들은 네덜란드어와 네덜란드 문학에 대해서 많은 것을 가르쳐 왔으나, 그녀가 말하는 작가나 작품에는 전혀 언급한 적이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마푸다 베데루스 선생은 한낱 현지처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을 텐데 말이다. 더구나 놀랍게도 내 앞에 있는 이 냐이는 소설의 언어에 관해서까지 논하러 들었다.
"프란시스는 "냐이 다시마"라는 소설을 쓰고 있어요. 완전히 유럽 풍의 작품이지만, 사용되고 있는 것은 말레이어예요. 나한테 그 책이 있어요. 아마 당신도 연구해 보고 싶을 거예요."
나는 기계적으로 맞장구를 칠 뿐이었다.
그녀는 문학 세계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있다는 것인가? 한편으로 자기가 낳은 자식은 무시하고 돌보지 않으면서도 왜 그녀는 소설을 애독하고 작가들이 만들어낸 가공 인물에 대해 일일이 비평하고 문제삼고, 끝내는 그들이 소설 속에서 사용하는 언어까지 논하려고 드는 것일까? 나는 납득할 수가 없었다. 내 마음 속을 궤뚫어본 듯이 냐이가 물었다.
"당신은 로베르트의 일도 써 보려고 생각하고 있겠지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합니까, 마마?"
"당신의 젊음 때문입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주변 인물의 일을 당신은 틀림없이 써 보고 싶은 마음이 들 것입니다. 당신의 흥미를 끄는 인물, 당신의 공감이나 반감을 불러 일으키는 인물, 그런 사람들을 말입니다. 로베르트는 틀림없이 당신의 흥미를 끌고 있을 거예요."
다행히도 곧 저녁식사 시간이 되어 그 유쾌하지 못한 대화는 중단되었다. 로베르트는 식사에 참석하지 않았다. 마마도 안네리스도 별로 놀란 기색이 없고, 그의 일을 묻지도 않았다. 하녀도 묻지 않았다.
식사 도중에 나는 선원이 되고 싶으며 유럽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로베르트의 희망을 전하려고 했다. 그러나 냐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시뇨, 항상 인간에 관해서, 인간의 죽음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 관해서 쓰세요. 가령 동물이나 악마나 신, 괴물을 등장시키더라도 인간을 묘사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인간만큼 이해하기 힘든 존재는 없을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이 세상에 소설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매일 몇 편씩 탄생하고 있어요. 나 자신은 그것에 대해 그다지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옛날에 다음과 같은 글을 읽은 적이 있어요. '때로는 인간이 매우 단순하게 보이지만, 결코 인간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설사 매와 같이 날카로운 눈과 면도칼과 같은 예리한 두뇌를 지니고 신보다도 섬세한 감수성, 인생의 음악과 비탄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겸비하고 있더라도, 인간을 완벽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마는 먹기를 중단하고 수프를 먹던 스푼을 턱아래 그대로 들고 있었다.
"지난 10년동안 나는 많은 소설을 읽었어요. 모두 인간이 곤경을 뚫고 나가거나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그린 내용이었어요. 행복한 얘기는 내게는 전혀 흥미가 없읍니다. 그것은 인간이 살아가는 얘기가 아니라 천국에 관한 얘기이고,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대지에서는 분명히 일어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마마는 다시 식사를 계속했다. 나는 그녀의 말한마디 한마디를 놓치지 않으려고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녀는 말하자면 재야의 교육자이고, 그녀의 말은 교실에서는 배울 수 없는 깊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식사를 끝내고 그녀는 얘기를 계속했다.
"그러니까 당신은 틀림없이 로베르트에게 흥미를 느꼈을 거예요. 그애는 언제나 자기 쪽에서 문제를 불러들이고, 그것에서 빠져나갈 수 없게 되지요. 아마 그런 것을 '비극적'이라고 부르겠지요. 아버지와 꼭 같습니다. 어쩌면 그애는 당신이 쓴 것을 통해서 ---그애가 읽을 거라는 가정 아래 하는 얘기지만요--- 자신을 거울에 비추어보고 자기의 참 모습을 볼 수가 있을지도 몰라요. 그애의 태도도 달라질 가능성이 있어요. 그렇지요? 단지 나로서는 당신에게 부탁이 한 가지 있읍니다. 로베르트에 대해서 쓴 것을 발표하기 전에 먼저 내게 읽게 해 주세요. 미리 내게 보여 주면, 그릇된 묘사나 잘못된 추측을 피할 수 있을 테니까요. 물론 당신에게 이의가 없는 경우에 말입니다만," 분명히 나는 로베르트에 대해서 글을 쓰는 작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냐이의 경고는 상당한 충격이었다. 내게는 그녀가 매와 같은 눈을 가진 감시자처럼 느껴졌다.
작가로서의 나의 권리 영역에 그녀의 예리한 감시의 눈이 침입해 온 것처럼 생각되었다. 처음으로 소설이 활자화된 것에 나는 크게 의기양양해 있었으나, 그 의기도 로베르트에 관한 작품의 진척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냐이의 매서운 경고에 한 꺼풀 꺾인 것이다.
저녁식사 때 냐이가 한 말은 내게 여러 가시 일을 생각하게 했다. 그녀는 열렬한 독서가인 것이 틀림없었다. 분명히 옛날의 헤르만 메레마는 지극히 사려 깊고 또 인내 깊은 선생님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냐이 쪽도 뛰어난 학생이고, 주인에게서 이해력이라는 자본을 얻은 다음 혼자서 발전시켜 나가는 능력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학교에서 얻지 못했던 것을 나는 지금 현지처의 가족 가운데서 배우고 있다. 도대체 누가 그런 것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또한 그녀는 로베르트 메레마의 일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쁘리부미를 증오하는 그 젊은이에 관해서 냐이가 내게 한 주문은 아들에 대한 그녀의 깊은 우려를 얘기해 주고 있다.
그 키가 큰 젊은이에 대해서 나는 아직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아마 어머니를 닮아서 그도 독서가일 것이다. 그가 내게 준 잡지는 흔해빠진 경박한 잡지가 아니었다.
서재에서 가져왔는지 아니면 우편배달부에게서 받은 뒤 냐이에게 전해주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로베르트는 그 잡지를 제대로 읽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나로서는 자세한 것은 알 수가 없었다.
잡지에 게재된 기사는 모두가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국가, 주민, 기타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그 가운데는 일본과 동인도의 관계를 다룬 내용이 있었다.
그 논문은 지난 몇개월 자주 논해진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한 나의 노트를 풍부하게 해 주었다, 학교 토론회에서 두 번 정도 거론된 일이 있는데, 나의 동급생 중에 그 나라와 민족에 대해 관심을 갖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동급생들은 일본인을 언급할 가치가 없는 지극히 저급한 민족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그들은 일본이라는 나라를 아주 간단하게 슬라바야의 유흥가, 쿤반준푼에 넘쳐나는 창녀, 또는 선술집, 요리점, 이발소, 행상인과 잡화점과 같은 이미지에 연결시켜 생각했다. 따라서 근대적인 학문과 과학에 도전하는 산업을 일으켰다는 것은 미처 생각지도 못했다.
언젠가의 학교 토론회에서 라스텐딘스트 선생님이 학생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려고 했을때, 그들의 대부분은 흥미를 나타내지 않고 따분하다는 듯이 잡담을 주고받고 있었다. 선생은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과학 분야에서 일본도 또한 눈부신 발전을 보이고 있다. 기따사또(北星)는 페스트균을 발견하 고, 시가(志賀)는 이질균을 발견했다. 이와 같이 일본도 또한 인류에게 봉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그것을 문명에 대한 네덜란드인의 공헌과 비교했다.
내가 그 얘기에 적지 않은 관심을 보이고 그의 얘기를 적고 있는 것을 보고 라스텐딘스트 선생은 힐책하는 듯한 말투로 내게 물었다.
"밍케군, 자네는 이 토론회장에 있는 자바인 대표인데, 자네 민족은 인류에게 어떤 공헌을 했는가?"
대뜸 그런 질문을 받으면 당황하는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대답하지 않고 넘기기 위한 가장 유효한 방법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네, 라스텐딘스트 선생닌, 지금 단계에서는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읍니다."
그러자 선생은 그냥 웃고 말았다.
위의 얘기는 일본에 관한 나의 노트에서 조금 발췌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 로베르트가 준 잡지 기사에 의해 내 노트에는 상당한 정보가 새롭게 보충되었다. 그것은 국방 전략의 결정을 둘러싼 일본의 동향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한 문제에 대해서 나는 그다지 많이 알고 있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노트를 하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학교 토론회 때 훌륭한 자료로 쓸 수가 있을 것이다. 그 기사에 따르면, 일본의 육군과 해군 사이에 대립이 있었다. 그뒤 일본을 지키기 위해 해상을 주로 한 전략이 채택되었다. 그러자 몇백 년의 "사무라이" 전통를 갖는 육군이 불만을 나타냈다.
반대로 우리 네덜란드령 동인도는 어떠한가? 기사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었다. 즉 동인도는 육군만 있지 해군이 없다. 일본은 섬나라이다. 동인도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어째서 일본이 바다를 중시하고 있는데, 동인도는 육지를 중시하고 있는가? 나라를 지키는 문제는 양국이 같지 않은가? 거의 백년 전에 동인도가 영국의 손에 떨어진 것도 동인도의 해군력이 약한 것이 원인이 아니었던가?
왜 그것을 본보기로 삼지 않는가?
잡지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일도 알았다. 즉 네덜란드령 동인도는 해군을 갖지 못하고 있다. 동인도 해역을 순찰하는 함정은 동인도에 속한 것이 아니고, 네덜란드 왕국의 것이다. 일찌기 동인도 총독인 단데르스는 슬라바야를 해군 기지로 만들었다. 동인도에 군함이 한 척도 없었던 시대에 말이다! 그로부터 백년 뒤인 오늘날, 동인도가 독자적인 해군력을 갖는 것의 무용성을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고위층들은 싱가포르의 영국 해군과 필리핀의 미국 해군을 의지하고 있다.
그 논문은 만일 일본과 진쟁이 일어날 경우를 가정한 것이었다. 무방비 상태의 영해를 안고 네덜란드 왕국 해군이 생각나면 한번씩 돌아보는 것이 고작인 동인도는 어떤 상황이 되겠는가?
1811년의 경험이 다시금 네덜란드의 패배라는 결과로 되풀이되지 않겠는가?
로베르트가 그 논문을 읽고 연구를 했는지 어떤지는 나는 모른다. 선원으로서 세계를 항해해 보고 싶다고 했으니 아마 읽고 연구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유럽의 숭배자로서 그는 백색 인종의 우월성을 믿고 있을 것이다.
그 논문은 또한 일본은 바다에 관해서 영국의 흉내를 내려 하고 있다고 쓰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 필자는 일본을 원숭이 흉내만 낸다고 비웃는 것은 그만두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든 발전의 계기는 모방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리들은 모두 어린 시절에는 역시 흉내내는 것밖에는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아이도 마침내 자라나서는 혼자 걸으며 자기 힘으로 자랄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필자는 그렇게 논하고 있었다.
그 무렵 나는 전쟁이라는 문제에 관해서 쟝 마례와 테린하와의 대화를 듣고, 그것을 다음과 같이 노트에 기록해 두었다.
쟝 마레......역할이라는 것은 새대에서 새대로, 어떤 민족에게서 다른 민족으로 옮겨 가면서 번화한다. 옛날에는 유색 인종이 백인을 정복하고, 현재는 백인이 유색 인종을 경복하고 있다.
테린하.....지난 300년 동안 백인이 유색 인종에개 패한 적이 없다. 300년 동안을 말이다 ! 물론 백인이 다른 백인을 정복하는 일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유색 인종이 백인을 정복한다는 것은 있을수 없다. 앞으로 500년 간, 아니 영원히 있을 수 없다. 로베르트는 유럽인으로서 선원이 되기를 원하고 있다. 카리브호로 항해하기를 꿈꾸고 있다. 태양이 지는 날이 없는 광대무변한 나라 대영제국의 깃발 아래서.......
제 6 장
부빠티 취임식
잠자리에 든지 얼마나 되었을까. 방문을 세게 두드리는 소리에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밍케, 일어나세요 !"
문을 열자 눈 앞에 마마가 촛불을 들고 서 있었다. 머리칼이 약간 흐트러져 있었다. 괘종 시계의 똑딱거리는 소리가 어두운 새벽의 정적 속에 울리고 있었다.
"지금 몇시지요, 마마?"
"네시. 당신을 찾아온 사람이 있어요." 어둠 속에 한 사람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촛불 빛을 가까이 가져가자 모습이 차츰 확실해졌다. 경관이었다. 그는 일어나서 경례를 하고 자바 사투리가 섞인 말레이어로 말했다.
"밍케씨인가요?"
"그런데요."
"당신을 데려오라는 명령을 받았옵니다. 지금 당장 말입니다."
경관은 영장을 제시했다. 그가 말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것은 B시의 경찰서로부터의 출두 명령으로, 슬라바야 경찰서의 승인이 나 있었다.
그곳에는 틀림없이 내 이름이 씌어 있었다. 마마도 영장을 읽은 것 같았다.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질렀지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나는 황급히 대답했다. 말은 그렇게 했으나 나는 불안을 느꼈다.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어 지난 몇 주일 동안의 나 자신의 행동을 전부 되새겨 보았다.
그리고 또 다시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정말 아무짓도 하지 않았어요, 마마."
안네리스가 왔다. 검은 빌로도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머리가 흐트러지고 눈은 아직 어리벙벙해 있었다.
마마가 내게로 다가왔다.
"당신이 무슨 죄로 호출당하는지 이 경찰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영장에도 적혀 있지 읽아요." 그리고 이번에는 경관쪽을 향했다.
"어떤 일로 호출당하는지, 그에게는 알 권리가 있어요."
"그런 명령은 받지 않았옵니다, 냐이. 어떤 사정으로 호출을 당하는지 영장에 명시되어 있지 않으면 당사자를 포함해서 아무도 그것을 알 수가 없읍니다."
나는 반론했다.
"그런 바보 같은 법은 없옵니다. 나는 자바의 귀족인 라빈 마스(역자주 : 귀족을 나타내는 호칭)입니다. 이런 엉터리 대우를 받을 까닭이 없읍니다."
나는 대답을 기다렸으나 경관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하는 것을 보고 다시 계속했다.
"내게는 '특별 재판권'(역자주: '백인 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르킨다)이 있옵니다."
"그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옵니다, 라덴 마스 밍케씨. " "그럼, 어째서 이런 짓을 합니까? "
"나는 다만 당신을 데려오라는 명령을 받은 것뿐입니다. 명령을 내린 사람이 사정을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준비들 해 주십시오. 곧 출발해야 합니다. 오후 다섯시까지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으면 안되니까요."
"마스, 어째서 끌려가야 하지요?"
안네리스가 겁에 질린 얼굴로 물었다.
나는 그 목소리에서 공포를 느낄 수 있었다.
"경관이 대답하려고 하지 않는군그래. "
"앤, 밍케씨가 입을 것을 준비해서 이리로 가져오너라. 며칠있게 될지도 모르니까. 출발하기 전에 목욕과 아침식사를 끝내도 상관없겠지요 ? "
"물론입니다. 아직 시간은 조금 있읍니다." 경관은 30분가량 시간을 주었다.
응접실로 들어갔을 때, 나는 로베르트가 자기 방에서 그 소동을 지켜보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하품을 했을 뿐 나에게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욕실에서 나는 이 소동의 원인을 생각해 보았다. 어젯방과 그 전날 밤, 로베르트는 저녁 식사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의 협박하는 듯한 말투 하나 하나가 머릿속에 되살아났다.
좋아, 이 소동의 원인이 자네라고 한다면 로베르트, 나는 결코 자네를 잊지 않을 걸세. 응접실로 돌아가니까 커피와 케이크가 준비되어 있었다. 경관은 이미 아침식사를 즐기고 있는 중기었다. 그는 조금 전보다는 약간 정중한 것처럼 보였다.
그는 우리들에게 적의는 없는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자꾸만 웃으면서 말을 걸어 왔다. 마지막에는 이런 말까지 했다.
"별로 걱정할 것은 없읍니다, 냐이. 밍케씨는 아무리 길어도 2주일 정도면 돌아올 수 있을 것입니다." "2주일이든 한 달이든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 집에서 그가 구속당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이유로 구속되는지 내게는 알 권리가 있읍니다."
냐이는 강한 어조로 말했다.
"정말로 나는 모릅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러니까 이렇개 아침 일찍 찾아온 것입니다. 연행하는 것을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고요?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읍니까? 내가 현관문을 열기 전에 문지기와 만나지 않았나요? "
"그렇다면 문지기에게 입을 다물도록 명하면 되잖습니까?"
"하여간 이런 일을 당하고 있을 수는 없읍니다. 경찰서에 납득이 갈만한 설명을 요구할 생각입니다." "그렇게 해 주십시오. 쉽게 설명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납득할 만한 사정이 있을 것입니다."
여행용 가방을 든 안네리스가 말없이 나에게로 다가왔다. 그녀는 마루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내 손을 꼭 잡았다. 그녀의 손은 떨고 있었다. 경관이 재촉했다. "우선 식사를 해 주십시오, 라넨 마스님. 아마 경찰에서는 이렇게 호화판 식사는 나오지 않을 테니까요. 안드시겠어요? 그럼, 출발합시다."
"곧 돌아오겠읍니다, 앤, 마마, 틀림 없이 어떤 착오일 것입니다. 나를 믿어 주세요." 안네리스는 내 손을 놓으려고 하지 않았다.
경관은 내 짐을 밖으로 옮겼다. 내가 경관의 뒤를 따라 집 밖으로 나갈 때까지도 안네리스는 그냥 내 손에 매달려 있었다. 나는 그녀의 뺨에 키스를 하고 그 손을 놓았다. 안네리스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발 무사히 돌아와 주세요, 시뇨."
냐이가 말했다.
"자, 이제 됐다, 앤. 그가 무사하기를 빌자."
기다리고 있는 마차는 경찰용이 아니라 보통 임대 마차였다. 우리들이 올라타자 마차는 슬라바야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경관은 나를 B시로 데리고 가는 것이다. 새벽녁의 어둠 속에서 나는 옛날에 B시에서 본 건물들을 하나 하나 그려 보았다. 그 건물 가운데 어떤 곳으로 가는 것일까, 경찰서? 감옥? 여관? 민가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길을 가는 것은 우리들의 마차뿐이었다. 다른 때 같으면 탱크차가 새벽의 어둠을 뚫고 드루세 석유회사의 정유소로부터 20대에서 30대 가량이 열을 지어 달리고 있을 텐데, 오늘은 볼 수가 없었다.
장사꾼이 몇 사람 슬라바야에서 팔 야채를 짊어지고 걸어가고 있었다. 같이 탄 경관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얘기를 해본 적이 없다는 듯이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틀림없이 로베르트가 나를 모함했을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왜 행선지가 B시란 말인가 ?
마차의 석유 램프가 안개가 낀 새벽녘의 어둠을 조심스럽게 가르며 나아갔다. 마치 우리들만이 ---경관, 나, 마부, 그리고 말만이--- 길에 있는 생물처럼 생각되었다.
나는 위안도 받지 못하고 울고 있는 안네리스를 상상했다. 냐이는 나의 구속이 사업에 타격을 가져올 것을 걱정하며 실의에 빠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로베르트 메레마는 슬르호프의 얘기가 사실이 아니었느냐 하고 큰소리 칠 구실을 찾았을 것이다.
마차는 우리들을 슬라바야 경찰서로 데리고 갔다. 나는 대합실에 앉아 기다리라는 명령을 받았다. 어면 이유로 출두 명령을 받았는지 물어보려고 했으나, 안개가 간뜩 낀 새벽의 대기 속에서 납득이 가는 설명을 해줄 사람이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질문을 단념했다.
마차는 경찰서 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경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혼자 내버려 둔 채였다.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렸을까? 그래도 해는 아직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해가 떠오른 뒤에도 안개를 좇아낼 수는 없었다. 잿빛의 작은 물방울들이 모든 것을 뒤덮고 나의 폐패속에까지 침입해 왔다.
화물 마차와 승합 마차, 보행인, 행상인, 노동자 등이 오가면서 경찰서 앞 거리는 바빠지기 시작했다. 나는 여전히 대합실에 혼자 앉아 있었다.
9시 15분 건이 되자, 경관이 겨우 모습을 나타냈다. 한 시간 가량 잠을 자고 목욕을 한 것 같았다. 말쑥한 표정이었다. 그것에 비해 나는 기다리다 지쳐서 기진해 있었다. 여전히 출두 이유를 물을 기회는 없었다.
"자, 갑시다, 라덴 마스 님."
다시금 마차를 타고 우리들은 역으로 향했다. 그때도 그가 내 짐을 들어다 주었다. 역에 도착해서도 경관은 짐을 내려놓고 차표 파는 곳으로 나를 안내했다. 창구 속으로 그는 펀지를 제시하고 백색 차표를 두 장 받아들었다. 일등 승차권이었다. 이 시간에 떠나는 급행은 없을 것이다. 완행을 타는 것일까? 사실 우리들이 탄 것은 지루하기 짝이 없는 서부행 완행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그런 종류의 열차에 타 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급행을 이용하고 있었다. 다만 B시에서 고향인 T시까지 가는 경우는 달랐다.
경관은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나는 창가에 자리를 잡고 그와 마주보고 앉았다.
객차 안의 승객은 헤아릴 수 있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우리들 두 사람을 제외하면 유럽인 남자 세 명과 중국인이 한명 있을 뿐이었다. 모두들 따분한 모습이었다. 첫번째 역에서 중국인을 포함한 두 사람이 내렸다. 새로운 승객은 타지 않았다. 이미 여러 번 나는 그 구간을 지나다녔다. 그래서 철로변의 경치는 조금도 신기하지 않았다. B시에서 여관에 묵고는 이튿날 아침, 다시 T시까지 기차 여행을 게속하는 것이 나의 습관이었다. 그러나 지금 내가 향하고 있는 곳은 그 단골 여관은 아니다. 내가 가는 곳은 경찰서인 것이다.
열차가 앞으로 나아 갈수록 차창 밖의 풍경은 점점 더 지루하게 변해 갔다. 어떤 때는 잿빛, 어떤 때는 희끄무레한 황색을 띤 불모의 황무지였다.
나는 고픈 배를 움켜쥐고 잠이 들었다. 이제부터 어떤 일이 일어나든 알게 뭐냐? <아아, 인간의 대지>!
가끔 담배 농장이 나타나서는 작아지고 열차의 속력에 씻겨 나가서 사라진다. 그리고서는 다시 나타나서는 작아지고 또 사라져간다. 그리고 논, 논, 또 논...... 기차는 느릿느릿 기어가고 먼지에 더렵혀진 검은 연기를 뿜어낸다.
이것들을 지배하는 것이 왜 영국이 아니고 네덜란드란 말인가? 그리고 일본, 일본은 어떤가?
경관이 나를 깨웠다. 내 옆에 그가 갖고 온 것이 펼쳐져 있었다. 그곳에는 스푼과 포크, 볶은밥, 계란 프라이, 닭튀김이 놓여 있었다. 아마 나 때문에 일부러 준비해 온 것 같았다. 경관으로서는 그와 같은 음식을 내는 것에 대해 지나치게 사치스럽다고 몇번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했을 것이 틀림없다. 코코아가 든 흰 병이 옆에 놓여 있었다. 코코아는 쁘리부미에게는 그다지 친숙한 것이 아니었다.
저녁 5시 가까와서 드디어 음침한 B시의 거리가 눈 앞에 나타났다. 경관은 여전히 말이 없었으나, 이곳에서도 내 짐을 옮겨 주었다. 나는 그것을 말리지는 않았다.
고등학교의 학생과 일개 경찰 관리는 비교될 수 없는 것이다. 기껏해야 그는 자바어와 말레이어의 읽고 쓰기를 조금 할 수 있을 뿐이다.
마차가 우리들을 역에서 싣고 나갔다. 어디로 데리고 가는 것일까? 눈에 보이는 흰 자갈길은 어느 곳이나 낯익었다. 마차는 호텔로도, 나의 단골 여관으로도 향하고 있지 않았다. 또 B시 경찰서가 목적지가 아니라는 것도 분명했다.
거리의 광장에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고, 여기저기 뜯겨지고 패어진 풀밭으로 덮여 있었다. 어디로 끌고 가는 것일까? 임대마차는 부빠티의 관저로 향해 가서 돌로 만든 정문 반대쪽에 약간 거리를 두고 멈춰섰다. 이번 내 사건과 B시의 부빠티와 어떤 관계가 있단 말인가? 나의 머리는 필사적으로 그 연결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경관이 앞장서서 마차를 내려가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내 짐의 시중을 들어 주었다. 그리고 갑자기 자바 경어로 말했다. "내리시지요."
나는 그의 뒤를 따라 관저와 비스듬히 마주보고 서 있는 카부파텐(역자주 : 부빠디가 있는 현청)의 청사로 들어갔다. 건물 안에는 전혀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고, 벽장식도 뜯겨지고 눈에 띄는 가구도 없었다. 우리들은 엉성한 가구가 놓인 방으로 들어갔다.
우노크로모의 호화로운 저택에서 지내다가 이곳에 들어오자 마치 곡물 창고에 기어들어온 느낌이 들었다. 안네리스의 닭장보다 약간 사치스러운 정도라고 해도 좋았다. 그곳은 아마 심문실인것 같았다.
테이블과 의자, 그리고 긴 의자가 몇 개 놓여 있을 뿐이었다. 방 안쪽에 선반이 있고, 서류더미 몇개와 책이 몇권 얹혀 있었다. 고문 도구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각 테이블 위에 잉크병이 놓여 있었다.
경관은 여기서도 나를 마냥 내버려 두었다. 오랜 시간 기다리기는 이것으로 두 번째였다. 날이 저물어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커다란 사원의 북이 울리고 그 뒤로 예배 시각을 알리는 서글픈 아잔(역자주 : 예배 시간을 알리는 육성)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가로등에 불이 켜졌다. 청사 안은 차츰 어두워져 갔다. 악령에 홀린 모기들이 떼를 지어 방안에 홀로 있는 나에게로 덤벼들었다.
무례한 놈들 ! 나는 욕설을 퍼부었다. 이것이 라덴 마스이고, 고등학교의 학생인 나에게 대하는 대우란 말인가? 교육을 받고 자바 왕족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에게 하는 대우란 말인가?
옷이 몸에 착 달라붙고, 땀 냄새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나는 이런 대우를 받은 적이 없다. "정말 실례했읍니다, 라덴 마스님."
경관이 모기가 득실거리는 어두운 건물을 나가도록 나를 재촉했다.
"내가 알현장으로 안내를 하겠읍니다."
또다시 그는 내 짐을 옮겨갔다.
결국 나는 B시의 부빠티에게 알현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이냐 ! 도대체 어떤 용건일까? 고등학교의 학생인 내가 그의 앞에 엎드려 일일이 내가 한 마디 할 때마다 전혀 보지도 못한 사람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지 않으면 안된단 말인가? 램프가 밝혀져 있는 알힌장으로 걸어가면서 나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쩔수없이 읽고 쓰지도 못하는 무식한 왕 앞에 엎드려 달팽이처럼 기어가서 공경의 뜻을 표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한다면, 유럽의 학문과 지식을 배우고 유럽인과 교제해 온 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정말로 기가 막힌 노릇이다. 부빠티에게 알현하는 것은 자신을 내던져버린 채 자진해서 굴욕을 받아들이는 것과 마찬가지다. 일찌기 나는 내게 그런 태도를 취하도록 남에게 강요한 적이 없다. 그런 내가 왜 보지도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된단 말인가?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역시 생각한대로였다. 무례하게도 경관은 내게 구두와 양말을 벗으라고 재촉했다. 견딜 수 없는 학대의 시각이었다. 어떤 불가사의한 힘이 나로 하여금 그의 명령에 따르게 했다. 마루가 발바닥에 시원스럽게 느껴졌다. 그가 눈짓을 해서 나는 계단을 하나씩 올라갔다. 위까지 을라가자 그는 하나 놓여 있는 흔들의자의 앞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곳에 나는 얼굴을 맞대고 앉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흔들의자는 파산 직전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남기고 간 최고의 선물이라고 우리 선생님께서 말한 적이 있다, 아아, 흔들의자여, 얼굴을 본 적도 없는 한 사람의 부빠티를 찬양하기 위해 내가 어떻게 자신을 더럽히는가를 너는 보게 될 것이다. 제기랄 ! 마치 다리가 없는 사람처럼 무릎으로 기어서 파산 직전의 동인도 회사의 유물인 ---
알현장의 벽가에 있는 움직이지 않는--- 의자에 다가가는 내 모습을 본다면, 친구들은 뭐라고 할까?
"네, 무릎으로 걸어가 주세요, 라덴 마스님. "
경관은 진흙탕에 물소를 몰아넣는 듯한 말투었다.
그 10미터 가량의 거리를 나는 3개국 이상의 말로 저주하면서 기어갔다.
나의 양쪽에는 조개 모양의 깔개가 있고, 마루는 네 개의 석유램프 불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보통 때는 두 개의 다리 전체를 써서 발바닥을 밑으로 하고 걷는 인간이, 지금 다리를 절반으로 접고 두손의 도움을 받아 걷지 않으면 안되는 이 원숭이 재주와도 같은 모습을 보면 동급생들은 배를 잡고 웃을 것이다. 아아, 선조들이여, 무엇때문에 당신들은 자손의 존엄을 해하는 이와 같은 관습을 만들었는가? 당신들은 생각해 본적도 없으리라. 참으로 딱한 나의 선조들이여 ! 당신네들의 명예를 더렵히지 않고도 좀더 고귀할 수가 있었을 텐데, 도대체 무엇때문에 당신네들은 이런 관습을 후세에 남겼는가?
나는 흔들의자 앞에서 멈췄다. 그리고 관습에 정해진 대로 무릎을 꿇고 앉아 마루에 눈을 떨구었다. 여전히 3개국어로 저주의 말을 퍼붓고 있었다.
내 앞에 보이는 것은 조각이 된 낮은 받침대와 그 위에 있는 발을 올려 놓는 쿠션, 그것뿐이었다. 쿠션은 오늘 아침 안네리스가 입고 있던 드레스와 같은 검은 빌로도로 만들어져 있었다. 이리하여 나는 저주스러운 흔들의자 앞에 고개숙이고 앉았다. 대체 B시의 부빠티와 내가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아무것도 없다. 친척도 아니고 아는 사이도 아니다. 하물며 친구도 아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앞으로 언제까지 이러한 학대와 굴욕이 계속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일까? 이러한 고역과 치욕을 참으면서 계속 기다리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끼익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나서 가죽으로 만든 실내화 끄는 소리가 차츰 가까와졌다. 나는 그 전율할 발을 끄는 듯한 헤르만 메레마의 구두 소리를 연상했다. 내가 앉은 위치에서 다가오는 실내화가 천천히 시야에 들어왔다. 그 위에는 개끗한 두 개의 다리, 남자의 다리가 있었다. 그 위에는 커다란 주름이 잡힌 바티크 사롱(역자주 : 말레이인이나 자바인이 허리에 두르는 천, 또는 통치마를 가리킴).
옛날 레바랑(역자주 : 단식일) 때에 본 나의 조부모, 또는 부모님에 대하여 관리들이 행동했던 모습을 본따서 나는 얼굴 앞에서 양손을 합치고 공손하게 절을 했다. 그리고 그대로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B시의 부빠티가 자리에 의젓하게 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하여 공경의 뜻을 나타내면서 나는 지금까지 몇년에 걸쳐 조금씩 내가 몸에 익혀온 학문과 지식이 모조리 사라져가는듯한 느낌을 갖게 되었다. 학문의 진보가 약속한 아름다운 세계가 사라지고, 인류의 밟은 미래를 환영하는 선생님들의 열광도 사라졌다.
앞으로 몇번이나 더 절을 하지 않으면 안될까? 얼굴 앞에서 손을 합치고 가능한 한 바닥에 가깝게 몸을 굽히고 자신을 낮추는 자세로 복종을 맹세한다. 이것이 선조나 귀인을 알현하는 방법인 것이다. 내 자손에게는 결코 이러한 굴욕적인 방법을 강요하지는 않으리라. 그 사나이, B시의 부빠티는 에헴 하고 큰 기침을 했다. 그리고는 유유히 흔들의자에 앉아 발판 앞에 실내화를 벗어 놓고 그 고귀하신 발을 빌로도 쿠션 위에 얹었다. 의자가 약간 흔들렸다. 빌어먹을 ! 시간이 어찌 그렇게 더디게 느껴지는지 ? 어떤 물건이 --
-내 추측으로는 꽤나 긴 것이었다--- 모자를 쓰지 않은 나의 머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나는 이 무례한 녀석에게 계속 굽실거리지 않으면 안된단 말인가? 가볍게 머리를 때릴 때마다 나는 고맙고 황송하다는 듯이 절로써 응답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빌어먹을 !
다섯 번 가량 두드리고 나자 그 물건은 거두어져서 의자 옆에 걸렸다. 그것은 무두질한 최고급품의 가죽을 얇게 감은 황소의 생식기로 만들어진 손잡이가 달린 승마용 채찍이었다. "여보게" 그는 쉰 목소리로 가날프게 불렀다.
"네, 각하 ! " 나는 그렇게 대답하면서 손은 기계적으로 몇번씩 얼굴 앞에서 합쳐 절을 했다. 마음 속으로는 이것으로 몇번째가 되는지 모를 저주의 말을 퍼부었다.
"그대는 어째서 지금까지 찾아오지 않았는가?" 그의 목소리는 독감이 걸린 목구멍에서 차츰 또렷하게 새어나왔다.
감기든 목소리 때문에 확실하게 판단할 수는 없었지만, 나는 그 목소리를 어디에선가 들은 일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니, 설마 그는 아닐 것이다. 그럴 리가 없다 ! 그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
나는 아직 사태를 이해할 수가 없어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정부에서는 우편 사업을 멋으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 편지를 어떤 주소에 배달하고 그대의 손에 정확히 전달하는 정도는 틀림없이 해낼 수가 있을 것이다......" 분명히 그의 목소리다. 설마 !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있을 수가 없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려고 했으나 혹시나 하는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어깨서 잠자코 있는가? 고등 교육을 받은 그대에게는 내 편지 따위는 부끄러워서 읽지 못하겠다는 말인가?" 틀림없이 그의 목소리다. 나는 다시 한번 언굴 앞에서 손을 합치고는 살며시 머리를 들어서 훔쳐 보았다. 아아, 이럴 수가 ! 목소리의 주인공은 영낙없이 그였다. 나는 소리쳤다.
"아버님 ! "
"죄송합니다."
"대답하라 ! 내 편지에 답장을 보내는 것이 그대는 수치스러운가 ?"
"참으로 죄송합니다, 아버님. 수치스럽다니 말도 안됩니다."
"어머니의 편지에도 답장을 하지 않았는데 무슨 이유냐?"
"아버님, 용서해 주십시오."
"그리고 형의 편지에도......"
"용서해 주십시오, 아버님. 죄송합니다. 우연히도 저는 그 주소에 살고 있지 않았읍니다. 잘못했읍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대는 거짓말을 하기 위해 야자나무만큼 높은 교육을 받아왔느냐?"
"정말 죄송합니다, 아버님."
"우리들의 눈은 장님이라서 몇월 며칠 네가 우노크로모로 옮겨갔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줄 아느냐? 우리들의 편지를 네가 읽지도 않고 이곳에 가져온 것을 나는 모두 알고 있다." 황소의 생식기로 만든 채찍이 흔들거렸다. 나는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우고 그 채찍이 내게 떨어질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는 아직도 사람들 앞에서 이 채찍으로 맞아야만 한단 말이냐?"
"제발 사람들 앞에서 저를 때려 주십시오."
나는 쏟아지는 비난을 견딜 수가 없어서 자포자기하듯이 대답했다.
"그 명령이 아버님에게서 내려진다면 명예로운 일입니다."
나는 점점 더 될대로 되라는 듯이 계속했다. "못난 녀석 !" 그가 고함쳤다. "옛날에 나는 역시 같은 문제로 T의 유럽인 국민학교에서 너를 데려왔다. 코흘리개 주제에 말이다. 그것으로 정신을 차렸는가 했는데, 상급생이 되어 갈수록 난봉군이 되어 가다니 ! 같은 나이 또래 처녀와 노닥거리는데 싫증이 났는가 했더니만, 이번에는 첩의 집에까지 들어가서 살고 도대체 너는 무엇이 될 생각이냐?"
나는 잠자코 있었다. 그러나 마음 속에서는 부르짖고 있었다. 그대는 나를 모욕했다. 왕의 핏줄이여 ! 내 어머니의 배우자여 ! 좋다. 대답따위를 하는가 봐라. 자, 더 계속해라. 왜 그러는가? 자바 왕족의 피여 !
어제까지 그대는 수리 사업소의 관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지금 갑자기 부빠티가, 조그만 왕이 되었다. 자, 그 채찍으로 나를 때려 보라.
어떻게 해서 학문과 지식이 인간의 대지에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알렸는가를 모르는 어리석은 조그만 왕이여 !
"너는 할머님의 손으로 부빠티가 되도록 소중히 길러졌었다. 모든 사람에게 존경받는 인물이 되도록.....가족 가운데서 가장 머리가 좋은 아이였다..... 시내에서도 제일이었다....그런데 아아, 신이여 ! 이 아이는 도대체 무엇이 될 겁니까?"
좋다,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그러나 너도 학교에서만은 제대로 공부하고 있는 모양이더구나. 그것이 단 하나의 구원인 셈이다." 11학년까지 나는 진급할 수 있었다 ! 상처를 입은 내 마음은 소리쳤다.
자, 조그만 왕이여, 그대의 무지를 폭로하는 짓일 뿐이다.
"다른 사람의 첩과 함께 살고 있는 위험을 너는 생각한 적이 있느냐? 그 여자의 주인이 화가 나서 너를 쏘아 죽이기라도 한다면 도대체 어떻게 되겠느냐? 칼이나 단검, 부엌칼로 당하거나 혹은 목을 졸려 죽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어찌 되겠느냐? 신문은 네가 누구고, 부모가 누군지 떠들어대게 될 것이다. 너는 부모 얼굴에 먹칠을 하고 싶은 거냐? 만약 네가 그런 문제까지 깊이 생각하고 있지 않다면......"
나는 더욱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마마와 마찬가지로 나는 이가족, 피의 끈(혈연)으로 나를 노예처럼 꽁꽁 붙들어 매고 무거운 짐을 지우는 것뿐인 가족 따위는 언제라도 버릴 각오가 되어있다 ! 자, 계속하라 ! 왜 그러는가, 자바 왕족의 피여 ! 그 다음을 계속하라 ! 나도 폭발할 수가 있다. "내일 저녁에 내가 부빠티로 임명된 축하연을 개최한다는 것을 너는 신문에서 읽지 못했느냐? B시의 부빠티가 된 것이다. B시의 부이사관님, 슬라바야의 이사관님, 감독관님, 그래서 근처의 부빠티가 전원 참석하기로 되어 있다. 고등학교의 학생이 신문을 읽지 않다니 말이나 되느냐? 설사 네가 읽지 않았다 하더라도 누군가가 가르쳐 주지 않았겠느냐? 네 첩은 너에게 신문도 읽어 주지 않더냐?"
임명이나 파면이나 전임 따위의 관리의 인사에 관한 뉴스는 나에게는 전혀 흥미가 없었다. 그헌 것은 나와는 관계가 없는 일이다 ! 푸리야이(역자주 : 원주민의 식민지 관리)의 새계는 내가 사는 곳이 아니다. 악마가 종두관에 임명되거나 부경을 범하고 징계 면직이 되거나 그것이 어쨌단 말이냐? 내가 찾는 세계는 관리의 직위나 지위, 급료, 오직과 같은 것이 아니다. 갖가지 복잡한 문제를 안고 있는 인간의 대지, 그것이 바로 내가 찾는 세계인 것이다.
"잘 듣거라, 이 불효막심한 놈 ! "
의욕에 충만한 신임 관리답게 그는 명령했다.
"너는 남의 현지처에게 열을 올리고 있다. 부모를 잊어버리고 자식으로서의 의무를 잊어 버렸다. 하기야 너도 아내를 얻고 싶을 것이다. 좋아, 그 문제에 대해서는 다시 의논을 해 보자. 이제부터 말하는 것은 그것과는 다른 문제다. 명심해서 들어야 한다. 내일밤 너에게 통역을 부탁한다. 사람들 앞에서 나와 가족의 명예를 더렵히지 않도록 해라. 이사관과 부이사관, 감독관, 이웃 부빠티앞에서 말이다."
"네, 알겠읍니다, 아버님."
"통역을 맡아 주겠느냐?"
"네, 기꺼이 하겠읍니다, 아버님."
"그래, 그래야지. 가끔은 효도를 해서 부모를 안심시켜 줘야한다. 감독관님이 통역을 맡아야 하지 않을까 해서 걱정하고 있던 참이다. 생각해 보아라. 높은 사람들이 참석했는데, 아버지의 취임 축하연에 자식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면 어떻게들 생각하겠느냐? 또 언제 너를 그런 사람들에게 소개하겠느냐? 너에게 있어서 이렇게 좋은 기회는 다시 없을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네 문제는 정말 골칫거리다. 부모가 너에게 얼마나 열심히 입신 출세의 길을 열어 주려고 하는지 너는 모를 것이다. 네가 가족 가운데서 가장 머리가 좋다는 것을 모두에게 알려야 한다. 너는 그것보다는 첩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하느냐?"
"알겠읍니다, 아버님."
"너의 출세길이 탄탄하도록 모두 노력하고 있다." "네, 아버님,"
"그럼, 물러가도 좋다. 저쪽으로 가서 어머니에게 인사드려라. 너 같은 녀석은 그렇개라도 하지 않으면 집에 돌아오지 않는구나. 부이사관의 도움까지 청하지 않으면 안되었는데, 정말 창피한 일이다. 어떠냐, 죄인처럼 강제로 끌려 오니까 재미있느냐? 하기야 너는 수치심이 없으니까. 자기 어머니를 공경하는 것조차 잊어버리려고 결심하고 있었을 테지. 어쨌든 그 더려운 첩과의 관계는 청산해 버려라."
물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지금까지 했던 대로 고개를 숙여 절만 했을 뿐이다.
그리고 다리의 절반과 두손의 도움을 받아 무겁게 짓누르는 듯한 감정을 등에 지고 소라게처럼 기어서 물러나왔다. 목적지는 내가 양말과 구두를 벗은 장소, 이 저주스러운 체험이 시작된 장소였다. 부빠티의 건물 안에서 구두를 신는 쁘리부미는 없다. 나는 구두를 손에 들고 알현강 옆을 지나 안채로 들어갔다. 희미한 불빛이 주방으로 통하는 길을 비추고 있었다. 나는 구두를 든 채 부서진 안락의자에 몸을 던졌다. 누군가가 상황을 살펴보기 위해 왔다. 나는 모르는 체했다. 블랙 커피가 한 잔 나왔다. 나는 그것을 단숨에 마셨다. 만일 형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아마 나는 그대로 잠이 들었을 것이다. 일부러 험악한 표정을 짓고 형은 네덜란드어로 말을 걸었다.
"곧장 어머님께 인사를 하지 않다니, 너는 예의조차 잊어버린 모양이구나. "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원주민 관리 양성소의 학생,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관리 후보생인 형의 뒤를 따라갔다. 마치 하늘이 무너져서 지구를 멸망시키는 일이 없도록 감시하고 있는 것처럼 그는 줄곧 험악한 표정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네덜란드어가 서투른 형은 자바어로 바꿔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무시한 녀석이라고 하면서 나를 더욱 힐책했다. 물론 나는 대꾸를 하지 않았다. 우리들은 부빠디 관저로 들어가서 문을 몇 개 통과했다. 마지막으로 어떤 문 앞에서 그는 말했다. "여기다. 들어가 보아라 ! "
나는 조그맣게 문을 노크했다. 누구의 방인지는 몰랐지만, 열고 들어갔다.
어머니가 거울 앞에 앉아서 머리를 빗고 있었다. 긴 다리가 달린 석유 램프 하나가 그녀 옆에 놓인 작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어머님,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나는 새끼양이 우는 듯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다음 그녀 앞에 꿇어앉아 무릎에 키스했다. 웬일인지 갑자기 어머니에 대한 강렬한 사모의 정이 끓어올라 가슴을 아프게 했다.
"이제서야 돌아왔구나, 구스(역자주 : 자바의 귀족들이 아들을 부르는 애칭). 무엇보다도 건강해서 다행이구나." 마치 내가 네 살짜리 어린아이라도 되는 것처럼 어머니는 내 턱을 쳐들고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자애로 가득찬 인자한 목소리에 나는 가슴이 뭉클했다. 눈물이 넘쳐 흘렀다. 어머니는 옛날과 다름없는 어머니, 틀림없는 나의 어머니였다.
"제발 불효한 자식을 용서해 주십시오." 나는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이미 한 사람의 어른이다. 콧수염도 훌륭하게 자라나고 있구나. 듣는 바에 의하면, 너는 유복하고 아름다운 현지처를 사랑하고 있다지."
나에게 애기할 여유도 주지 않고 어머니는 계속했다.
"만약 네가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면, 그 다음은 네가 결정해야 한다. 너도 이미 어른이니까, 어면 결과를 가져오든 죄인처럼 도망가지 않고 그 결과와 책임을 받아들일 각오는 단단히 되어 있겠지?"
그녀는 갓난애를 어루만지듯이 나의 뺨을 쓰다듬었다. "구스, 학교 쪽은 잘 되어가고 있는 모양이더구나. 고마운 일이구나. 한편으로 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으면서 어떻게 공부를 잘 해 나갈 수 있는지 나는 가끔 궁금하게 생각할 때가 있다. 그런 것쯤은 쉽사리 해 낼 정도로 너는 머리가 좋은 모양이지 ? 하기야 남자란 모두 그런지도 모르지." 어머니의 목소리는 슬프게 들렸다.
"남자들은 모두 토끼인 체하는 고양이다. 토끼처럼 풀잎을 먹고 고양이처럼 고기를 먹는다. 좋아, 구스, 학교 공부를 열심히 해라. "
나는 어머니에게 항의하지 않았다. 변명 같은 것은 아무 필요가 없었다.
"구스, 남자들은 풀잎이든 고기든 하여간 먹는 것에 많은 관심이 있다. 그것은 그것대로 괜찮은 일이다. 하지만, 고등 교육을 받으면 받을 수록 그만큼 남의 것을 먹어도 괜찮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높은 교육을 받으면, 그만큼 한계라는 것을 분별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것이 어려워서 이해를 못한다고는 하지 않겠지 ? 한계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하느님께서 독특한 방법으로 그것을 깨닫게 해 줄 것이다." 아아, 어머님, 당신은 너무나 많은 주옥 같은 말들을 내개 심어주고 계시군요.
"아까부터 줄곧 침묵만 지키고 있는데, 내게 무엇인가 할 얘기는 없느냐? 나는 그것을 오랫동안 기다려 왔다. 내게 선물로 줄 만한 얘기는 없느냐 ?"
"저는 내년에 졸업하게 되었읍니다."
"그러냐. 축하한다. 모두 하느님의 은혜다. 그저 기도만을 드려야 한다. 그런데 어째서 좀더 일찍 돌아오지 않았느냐? 아버지는 몹시 걱정을 하시고, 매일 네 일로 화만 내고 계셨단다. 아버지는 이번에 부빠티로 임명되셨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이렇게 빨리 되리라고는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지. 너도 언젠가는 아버지처럼 높은 사람이 될 것이다. 틀림없이 되고 말 것이다. 아버지는 자바어밖에는 모르지만, 너는 네덜란드 어를 할 수 있겠지. 고등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니까. 아버지는 보통국민학교밖에는 못나오셨다. 너는 아버지와 달라서 네덜란드인과 폭넓게 교제를 하고 있으니, 장차 너도 반드시 부빠티가 될 것이다. "
"아닙니다, 어머님. 결코 저는 부빠티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되고 싶지 않다고? 그것 참 별난 소리를 다 듣는구나, 그래. 네가 좋을대로 해 봐라. 그런데 너는 도대체 무엇이 될 생각이지 ? 그야 물론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여러 가지 일을 할 수야 있겠지만."
"저는 명령도 하지 않고 명령도 받지 않는 자유로운 인간이 되고 싶은 것뿐입니다. 어머님. "
"뭐라고? 그런 시대가 찾아은다는 말이냐? 처음 듣는구나, 그런 얘기는."
어렸을 때 나는 학교에서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것을 어머니에게 열심히 얘기해 주었는데, 지금도 그때와 마찬가지였다. 마푸다 뻬테루스 선생의 얘기를 인용해서, 프랑스 혁명과 그 의의, 그리고 기본 사상에 관한 지극히 흥미로운 해설을 나는 어머니에게 들려 주었다.
어머니는 다만 웃기만 할 뿐 이견을 제기하지는 않았다. 그것도 내가 어릴 때와 같았다. "땀 냄새가 나고 형편 없이 더럽구나. 목욕을 하거라. 목욕이 끝나거든 자거라. 내일 너에게는 중요한 일이 있으니까. 내일 너의 임무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겠지 ?" 이 부빠티의 관저는 내게는 처음이었다. 나를 위해 준비해 둔 방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석유 램프가 켜져 있었다. 방에는 형도 있었다. 그는 테이블 램프 옆에 앉아서 열심히 무엇인가를 읽고 있었다. 짐을 정리하기 위해서 나는 옆을 가로질러 갔다.
항상 장남으로서의 권리를 내세우는 형은, 마치 나 같은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 전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공부에 열심인 학생이라는 인상을 나에게 주고 싶은 것일까?
나는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여진히 형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읽고 있는 책에 나는 흘끗 시선을 보냈다. 활자가 아니었다. 손으로 쓴 것이었다. 표지를 보고 나는 의심을 가졌다. 그것은 쟝 마레가 만들어 준 책의 표지로 나밖에 갖고 있지 않은 것이었다. 나는 슬그머니 그의 등 뒤로 다가갔다. 틀림없는 나의 일기였다. 나는 그것을 빼앗아 들고 소리쳤다. "이 책에 손대지 말아 ! 누가 형더러 이것을 읽으라고 그랬지 ? 이봐, 형의 학교에서는 이런 짓을 하라고 가르치나 보지 ?" 그는 일어나서 눈을 부릅뜨고 나를 노려보았다. "너는 이미 자바인이 아니구나."
"개인의 사생활을 침해당하면서까지 살아가야 한다면 자바인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 이런 노트가 개인의 사생활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 형에게는 이해가 안되는 모양이지. 형 선생님은 개인의 권리와 윤리에 대해서 가르쳐 준 적이 없었어 ?" 형은 입을 다물고 분노의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이것은 장차 관리가 되기 위한 훈련이란 말이야 ? 남의 문제를 은밀히 엿보고 제멋대로 권리를 침해하는 형은 새로운 교육을 받지도 않았어 ? 무엇이든지 자기 좋을대로 하고 싶은 짓을 하는 왕이 되고 싶은 거야? 형의 선조님들의 왕처럼."
분노와 짜증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그것이 새로운 문명이라는 거냐? 모욕하는 것이 ? 관리를 모욕하는 것이 ? 그리고 너도 그리고 언젠가는 관리가 될 거다."
형은 항변했다.
"관리가 된다고? 내가 관리 따위가 될 것 같아?" "좋아, 아버지에게 데려다 주겠다. 아버지 앞에서 지금 한 말을 다시 한 번 해 봐라."
"형이 데려가 주지 않아도 그 정도는 나 혼자서 얘기할 수 있어. 형이야말로 뭐야? 내 물건에 몰래 손을 대고 사과할 줄도 모르고 ! 학교에 다닌 적이 없어 ? 아니면 예의라는 것을 배운 적이 없는 거야?"
"닥쳐 ! 내가 학교에 다닌 적이 없다면, 벌써 내 앞에 엎드려 빌도록 네게 명령했을 거야." "나를 그렇게 생각하다니, 형은 멍청이야, 얼간이고 ! " 그때 어머니가 방으로 들어와 우리 사이에 끼어들었다.
"2년만에 만난 사인데......어째서 애들처럼 다투지 않으면 않되는 거냐?"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용서할 수가 없읍니다. 상대가 자기 형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어머님, 이 녀석은 자기 악행을 일기 속에서 솔직이 고백하고 있어요. 나는 그것을 아버지께 보여드리려고 생각했읍니다. 그것이 두려워서 이 녀석은 화를 내며 내게 대들었읍니다." "너는 아직 관리가 아니야. 칭찬을 듣기 위해서 자기 동생을 팔 권리는 없다. 나는 내가 동생보다 훌륭한 사람인지 어떤지 알 수가 없구나."
나는 짐을 집어 들었다.
"나는 슬라바야로 돌아가겠읍니다."
"안된다 ! 너는 내일 아버지한테 중요한 일을 위임받고 있어." "그 일이라면 형도 할 수가 있읍니다."
나는 형에게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
"형은 고등학교의 학생이 아니다."
"나를 필요로 한다면 어째서 이런 취급을 하는 거죠?"
어머니는 형에게 다른 방으로 가도록 명했다. 그리고 그가 나간 뒤 다시 말했다.
"너는 이미 자바인이 아니야. 네덜란드인에게 교육을 받고 네덜란드인이 된 것이다. 갈색의 피부를 가진 네덜란드인이. 아마 너는 이미 크리스찬이 되었을 게다."
"아아, 어머님, 그런 투로 말씀하지 마세요. 저는 옛날과 다름없는 어머님의 아들일 뿐입니다." "옛날의 내 자식은 이처럼 반항적이지는 않았다." "옛날의 어머님의 아들은 사물의 선악을 잘 모르고 있었읍니다. 지금 저는 다만 잘못된 것에 항변을 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어머님. "
"그게 바로 네가 이미 자바인이 아니라는 증거다. 연장자와 마땅히 존경해야 할 사람과 보다 힘이 있는 사람에게 머리를 숙이려고 하지 않는 게 말이다."
"어머님, 저를 꾸짖지 마십시오. 옳은 것에는 저도 경의를 표하고 있읍니다."
"자바인은 나이 많은 사람과 보다 힘이 있는 사람에게만 엎드려 경의를 표하는 거란다. 그것이 숭고한 것에 이르는 길이란다. 얘야, 사람은 복종하는 용기도 있어야 되는 법이란다. 아마 너는 그 노래도 벌써 잊고 있을 테지 ? "
"아직 기억하고 있읍니다, 어머님. 저는 지금까지도 자바의 책을 읽고 있읍니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그릇된 자바인의 잘못된 노래입니다. 복종하는 용기가 있는 사람은 오로지 남에게 짓밟힐 뿐입니다, 어머님. "
"얘야 ! "
"어머님, 저는 오늘날까지 십여년동안 네덜단드인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그러한 것을 터득하게 되었읍니다. 그래도 어머님은 저를 꾸짖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너는 네덜란드인과 지나치게 가까이 사귄 거야. 그러니까 지금 와서는 동포와 가까이 하려고 하지 않으며 집안의 가족들, 특히 아버지에게 가까이하려고 하지 않는 거다. 우리들이 보낸 편지에 너는 답장조차 하지 않았다. 아마 너는 이미 나까지도 좋아 하지 않는 모양이구나."
"용서해 주세요, 어머님."
그녀의 말은 나를 날카롭게 찔렀다.
나는 마루에 무릎을 꿇고 어머니 앞에 앉아 다리를 껴안았다.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 어머님. 너무 심하게 저를 꾸짖지는 말아 주십시오. 저는 다만 자바인이 모르고 있는 일을 알고 있을 뿐입니다. 왜냐 하면, 그러한 지식은 유럽인의 것이고, 저 그들에게 배워 왔으니까요." 어머니는 내 귀를 비틀었다. 그리고나서 무릎을 꿇고 내 귀에 속삭였다.
"나는 너를 꾸짖지는 않는다. 너는 이미 네 자신의 길을 찾은거다. 나는 너에게 방해를 하거나 너를 집으로 부르지는 않을 생각이다. 너는 네가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길을 걸어가면 되는 거다. 다만 너의 부모를, 그리고 네가 배웠다고 해서 그것을 가지고 못배운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
"저는 누구에게 상처입히려고 생각한 적은 없읍니다."
"아아, 이것이 아마도 여자의 숙명일 게다. 여자는 낳을 때 고통을 당하고, 그리고 자기 자식의 행동에 의해 또 다시 고통을 받는단다."
"말대꾸를 하는 것 같습니다만 어머넘, 저의 행동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고 하셨는데, 너무 하신 말씀입니다. 어머님은 언제나 저에게 열심히 공부하라고 말씀해 오셨옵니다. 저는 힘자라는 한 그 말씀을 지켜 왔읍니다. 그런데도 저를 책망하시다니요."
내가 아직 갓난애라도 되는 듯이 어머니는 내 머리와 뺨을 쓰다듬어 주셨다.
"네가 내 뱃속에 있었을 때, 나는 모르는 사람이 찾아와서 단검을 준 꿈을 꾸었단다. 그때부터 나는 배 안에 있는 아기가 날카로운 무기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얘야, 그 단검을 사용 할 때는 제발 조심해야 한다. 네 자신에게 꽂히는 일이 없도록 말이다......"
아버지의 부빠디 임명을 축하하는 연회장의 준비에 아침부터 사람들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날을 위해 카부파텐 가운데서 용모와 재주가 뛰어난 무회가 고용되었다는 소문이었다. 이미 아버지는 청동으로 만든 최고의 가무란 악기를 T시에서 운반해 왔다.
그것은 우리 할아버지의 가무란으로서 평소 사용되지 않을 때는 언제나 빨간 빌로도에 싸여 있고 해마다 조율을 하는 것 외에 꽃잎을 뿌린 물로 씻겨진다는 유서 있는 악기였다.
가무란과 함께 조율사도 와 있었다. 아버지는 가무란 악기 자체뿐만 아니라, 음질까지 순수 동부 자바식이 아니고서는 만족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알현장은 아침부터 사람들이 조율을 위해 줄질하는 소리로 시끄러웠다. B시의 카부파민 청사의 공무 집행은 완전히 중단되어 있었다. 전 직원이 슬라바야로부터 불려온 유명한 장식가인 니콜로 모레노씨의 조수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는 장식을 위한 도구를 담은 커다란 상자를 갖고 왔는데, 그것들은 내가 그때까지 본 적도 없는 것들 뿐이었다. 또 장식이라는 것이 하나의 진문 기술이라는 사실을 내가 안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니콜로 모레노씨는 B시 부이사관의 추천에 의해 슬라바야 이사관의 승인과 보증을 받아 이곳에 온 것이었다.
그날 아침, 나도 또한 그와 얼굴을 마주 대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모레노씨는 내게 양복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인지 자기 손으로 내 몸을 쟀다. 그것이 끝나고 나서야 나는 자유로와졌다. 이미 알현장은 그의 손에 의해 화려한 무대로 변하고, 그 중앙에는 내가 일찌기 꿈 속에서 동경했던 아름다운 처녀, 빌헬미나 여왕의 커다란 초상화가 장식되어 있었다. 일부러 슬라바야에서 갖고 온 그 초상화는 휴센페르트라는 독일인 이름을 가진 화가가 그린 것이었다. 나는 여전히 그녀의 아름다움에는 감탄할 뿐이었다. 삼색기가 한 개씩, 또는 두 개씩을 교차시킨 모양으로 여러 곳에 장식되어 있었다. 또 3색의 긴 리본이 여왕의 초상화에서 알현장 전체에 둘러져 있었다. 그 장엄함에 참석자들은 매료당할 것이다.
알현장의 기둥은 그것 또한 내가 그 때 처음 보는 것이었다. 겨우 2시간이면 말라버린다는 분말의 도료로 칠해져 있었다. 반얀의 나뭇잎과 누르스름한 야자의 잎이 전통적인 색채로 어우려지고 메마른 벽과 기둥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는 상쾌한 무대장치로 바뀌고 있었다.
주황색, 푸른색, 흰색, 자주색과 같은 스며드는 것 같은 선명한 꽃들의 색채 경연이 또한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아 갔다. 아버지의 일생 일대 최고의 밤이 찾아왔다. 이미 조금 전부터 가무단이 낮은 소리를 울려대고 있었다. 내 방에서는 니콜로 모레노씨가 나에게 옷을 입혀 주는데 바빴다. 다 큰 어른이 되어서도 옷 입는데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하다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백인한테! 마치 내가 시집을 가는 숫처녀나 되는 것처럼.
나에게 옷을 입히는 동안 그는 마치 쁘리부미의 입에서 나오는 듯한 억양이 없는 기묘한 느낌의 네덜란드어를 쉴새없이 지껄여댔다. 분명히 그는 네덜란드인은 아니었다. 그의 얘기에 의하면, 그는 자주 나의 아버지를 포함한 각지의 부빠티, 자바의 왕족, 그리고 수마트라와 보르네오의 술탄 등의 양복을 만들고, 현재도 그들이 단골이라고 했다. 또 자바왕의 근위병 제복도 그가 디자인한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얘기를 전부 믿지는 않았으나, 수긍도 반론도 하지 않고 잠자코 듣고 있었다. 모레노는 나에게 자수가 들어 있는 조끼를 입혔다. 그것은 마치 거북이의 등 딱지로 만든 것처럼 거북살스러워서 몸을 굽히는 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또한 소가죽처럼 뻣뻣한 칼라는 목의 자유를 빼앗았다. 그와 같은 조끼를 입히는 것은 등줄기가 곧게 선 자세를 갖게 하고 두리번거리지 않고 진짜 신사답게 시선이 똑바로 정면을 향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나서 그는 은띠가 달린 바티크의 사롱을 내게 입혔다. 사롱을 입은 모습에 씩씩한 동부 자바적 품격이 우러나도록 손질을 했다. 그것은 아버지의 의향 같았다. 나는 수줍은 처녀처럼 고분고분 따랐다. 머리에는 니콜로 모레노 자신이 만든 동부 자바풍과 마두라풍을 섞은 아주 새로운 스타일의 두건이 씌어졌다. 뒤이어 보석을 박은 단검, 등이 터진 반코트 같은 검은 공단 웃옷이 입혀졌다. 검은 공단에 단검을 조화시켜 사람들이 그 아름다움에 단성을 지르게 하려는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검은 나비 넥타이가 매어져 목을 죄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때문에 내 눈이 한점을 향해 고정되었다. 서서히 뜨거운 땀이 등과 가슴을 적시기 시작했다. 가울에 비친 내 모습은 옛날 이야기 속에 나오는 승리의 무사와 같은 느낌이 들었다. 웃옷 밑에는 금실로 자수를 놓은 빌로도가 비어져 나와 있었다. 물론 나의 선조는 자바의 무사이니까 나도 또한 자바의 무사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렇기는 하지만, 나를 이토록 씩씩한 대장부로 만들어내는 것이 어째서 자바인이 아닌가. 왜 유럽인인가?
아마 니콜로 모레노씨는 이태리인이겠지만, 어째서 이태리인인 그가 자기는 입어 본 적이 없는 의상을 내게 입히지 않으면 않되는 것일까?
"옛날에 아망크라트 1세 (재위기간 1646--77년) 이후로 자바의 임금님들의 의상은 유럽인이 디자인하고 만들어 왔옵니다. 미안하지만 당신네들은 우리들이 올 때까지 담요밖에는 몸에 두르지 않고 있었읍니다."
모레노씨가 말했다.
위도 아래도 머리도 담요뿐이었다니 ! 정말 자존심 상하는 얘기다.
사실인지 거짓말인지 그의 얘기는 둘째 치고, 거울에는 쓱 빼놓은 미남인 내가 비치고 있었다. 나중에 사람들은 조끼나 칼라, 넥타이에서 보여지는 유럽적 요소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그 위에 공단이나 빌로도가 모두 영국제라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명실공히 자바의 의상이었다고.
지금 입고 있는 내 옷차림과 모습은 새로운 시대가 탄생한 19세기 말의, 인간의 내지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자바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그 인간의 대지 전체 속에서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존재에 불과하다고 통감하게 되었다.
이미 자바인의 복지는 투엔테(역자주 : 직물 산업으로 유명한 네덜란드의 도시)에서 짜고, 그 재료까지 선택하고 있다. 마을의 직조물은 지금은 마을 사람만이 소비한다. 겨우 바틱 직조만이 자바인에게 남겨져 있을 뿐이다. 그리고 나의 이 육체, 나는 여전히 자바인이다.
모레노씨가 방을 나갔다. 나는 앉았다. 오늘 밤의 분위기를 들뜨게 하기 위한 동부 자바풍의 가무란 소리를 듣고서야 나는 골똘한 생각에서 깨어나 다시금 거울을 들여다보고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관습에 따라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식장에 들어설 때의 종자를 내가, 선도역은 형이 맡았다. 누이동생들은 공식 장소가 아니라 뒤쪽에서 바쁘게 움직였다.
내빈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등장하고 형이 두 사람의 앞쪽에, 내가 뒤쪽에 자리잡았다. 알형장에 마련된 식장에 우리들이 들어서는 것과 동시에, B시의 부이사관이 도착했다. 그러한 식순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모두 기립해서 경의를 표했다. 부이사관은 아버지에게 똑바로다가가서 인사를 하고 뒤이어 어머니에게 인사를 한 뒤 형과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이렇게 해서 겨우 아버지와 나란히 앉았다.
환영의 노래 "쿠보 기로"가 가무란으로 연주되어 사람들의 마음을 들뜨게 만들었다.
알현장은 흥분과 가스등불빛 때문에 얼굴이 상기된 참석자들로 꽉 차 있었다. 그들 뒤쪽의 정원에 돗자리가 깔려 있고, 촌장이나 마을의 관리들이 줄을 지어 앉아 있었다. 사회자인 B시의 부빠티 보좌관이 개회를 선언했다. 가무란이 한순간의 망설임 끝에 신비의 힘에 제압된 듯이 조용해겼다. 네덜란드 국가 "빌헬름스"가 제창되었다. 사람들은 일어섰으나 노래를 부른 것은 극소수였다. 물론 대부분이 부르고 싶어도 부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쁘리부미로서 노래하고 있는 것은 한두 사람으로, 그 나머지는 어쩌면 그 기묘하고 짜증스러운 선율을 저주하면서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B시의 부이사관이 슬라바야의 이사관 대리로서 축사를 하기 시작했다. 감독관 윌렘 엔데씨가 자바어로 통역하기 위해 앞으로 걸어 나왔다. 부이사관은 고개를 흔들고 손을 흔들어 그것을 제지했다. 그가 통역으로 지명한 것은 바로 나였다. 나는 한순간 망설였으나 곧 침착성을 되찾았다. 걱정할 것은 없다. 나보다 잘 할 사람은 없을 거야 ! 그런 생각을 하자 용기가 생겼다. 학교의 시험 때와 같은 요령으로 하면 되는 것이다.
나는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때 자바의 관습에 따라 공손하게 절을 하고, 손을 모으는 것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교실 앞에 나와 선 것만 같았다. 어떤 곳에 시선을 보내도 부빠티들의 눈과 마주쳤다. 아마 그들은 절반은 자바풍, 절반은 유럽풍의 옷차림을 한 이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젊은 무인과 같은 나에게 놀라고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내가 그들에게 절하는 것을 잊었기 때문에 반감을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부이사관이 축사를 끝내고, 나도 자바어의 통역을 끝냈다. 그는 아버지와 악수를 나누었다. 이번에는 아버지가 연설을 할 차례였다. 아버지는 네델단드어를 몰랐지만, 그래도 읽고 쓰기조차 못하는 다른 부빠티보다는 나았다. 그는 자바어로 얘기를 하고 내가 그것을 네덜란드어로 통역했다.
그때 나는 부이사관과 그밖의 유럽인 내빈을 향해 전형적인 유럽식으로 통역했다. 마치 내가 연설하고 있는 것이기라도 한 것처럼 부이사관은 나를 주목하고 열심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아니면 원숭이가 재롱을 피우고 있다고 나의 일거일동을 비웃고 있었을까?
아버지의 연설이 끝나고 나의 통역도 끝났다. 고관들이 부모와 형과 나에게 축하의 인사를 했다. 부이사관은 내게 축하를 할 때, 나의 네덜란드어를 칭찬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굉장히 잘 했네."
그는 그렇게 말한 뒤 말레이어로 아버지에게 말했다. "부빠티님, 이린 젊은이를 아들로 두어서 당신은 행복한 분이오. 네덜란드어는 물론이지만 무엇보다 그의 태도가 훌륭했읍니다."
그리고는 다시 네덜란드어로 말했다.
"자네는 고등학교의 학생이라고 했지 ? 내일 오후 5시에 우리집에 올 수 있겠나?"
"네, 기꺼이 가겠읍니다."
"마차를 마중보내겠네."
축사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촌장 등이 부빠티의 손을 잡고 절을 하는 것은 실례되는 일이기 때문에 아버지는 일일이 손을 내밀어 그들과 악수를 하지 않아도 된 것이다. 그들은 정원에 깔린 돗자리에 앉은채로 있었다. 다시금 가무란이 커다란 소리를 냈다. 풍만한 육체를 가진 무희가 장식띠를 얹은 쟁반을 들고 날듯이 식장으로 들어왔다. 은쟁반을 든 채 그녀는 뜩바로 부이사관에게로 다가갔다. 그러자 그 백인 고관은 의자에서 일어나 장식띠를 자기 어깨에 걸쳤다.
사람들은 박수 갈채로 호응을 했다. 부이사관은 아버지에게 목테를 보내 양해를 구하고 나서 참석자들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조금도 망설임이 없는 당당한 발걸음으로 그는 무희와 함께 회장의 중앙으로 걸어나갔다.
그리고는 장식띠의 끝을 잡고 징소리가 울릴 때마다 목을 활기 있게 흔들면서 춤을 추었다. 그와 마주서서 육감적인 몸매의 매혹적인 무희가 멋지게 춤을 추었다.
몇분 뒤 무희가 또 한 사람 뛰어들어왔다. 그녀도 눈부실 정도의 미인이었다. 그녀는 은쟁반을 손에 들고 술이 담긴 작은 크리스탈 잔을 날라와서는 부이사관 옆에서 함께 춤을 추었다. 부이사관은 춤추기를 그만두고 새로 들어온 무희의 정면에 똑바로 섰다. 그리고 크리스탈 잔을 들고 술을 4분의 3가량 마셨다. 나머지 4분의 1이 든 술잔을 그는 상대된 무희의 입술에 갖다 댔다.
여인은 춤을 추면서 싫다는 빛을 나타내 보인 다음, 그것을 쭉 들이마시고 몹시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숙였다. 관객은 요란한 갈채를 보내고, 촌장과 마올의 하급관리들이 일어나서 소리를 질렀다.
"마셔라, 아가씨 ! 마셔, 자, 한 잔 ! "
나중에 등장한 무희는 부이사관의 손에서 술잔을 받아들고 쟁반 위에 올려놓았다.
부이사관은 만족스러운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유쾌한 듯이 손바닥을 치며 웃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의자로 돌아가 앉았다. 또 다른 무희가 나타나서 아버지에개 장식띠를 공손하게 내밀었다. 아버지는 멋지게 춤을 추었다. 그 춤은 이윽고 다른 무희의 쟁반에서 술을 마시고는 끝났다.
그것이 끝나자 부이사관은 돌아갔다. 부빠티들도 한 사람씩 호화로운 전용 마차로 돌아갔다. 남아 있던 촌장들과 경찰 관리들은 알현장으로 밀려 들어와 술을 마실 때마다 환성을 질러댔고, 댄스는 새벽녘까지 계속되었다.
나의 여행용 가방에서 조그맣게 포개 쌓은 은화가 들어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은 축제의 이튿날이었다.
그 종이 뭉치에는 안네리스의 글씨로 <너무 오랫동안 소식을 끊지는 마세요. 안네리스 올림> 이라고 씌어 있었다. 돈은 모두 합쳐서 15길더였다. 그것은 마을의 한 가족이 10개월, 아니 하루 생활비를 2센트 반이라고 한다면 20개월은 먹고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아침 나절에 나는 우체국으로 갔다. 확실한 이름은 모르겠으나, 혼혈인 우체국장이 나에게 악수를 청하고 전날 밤 축제에서의 나의 네덜란드어는 참으로 훌륭하고 정확했다고 말하며 칭찬했다.
그 조그만 우체국의 직원은 모두가 일부러 일을 중단하고, 우리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내 얼굴을 뚫어질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만일 당신이 이곳에서 일을 한다면, 우리들로서는 그처럼 기쁘고 자랑스러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고등학교의 학생이시죠?" "나는 전보를 치러 온 것뿐입니다."
"무슨 나쁜 소식이라도 있읍니까?"
"아닙니다."
우체국장은 앞장서서 전보 용지를 가져오고 자기 자리에 나를 앉게 했다.
나는 전문을 써서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것도 그 자신이 직접 취급했다.
"당신의 형편만 괜찮으시다면, 우리들도 식사에 초대할 수가 있을 텐데요."
부이사관이 나를 초대한 것이 시의 큰 화제거리가 된 것 같았다. 백인과 갈색 원주민의 모든 관리에게서 초대장이 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하룻밤 사이에 왕자로 변신이 된 셈이었다. 이 문맹 사회의 한가운데서 고등학교의 최상급생이라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 모두가 나를 떠받들 것이다. 부이사관에게 제일 먼저 초대받았다고 하면, 이미 그 사람은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고, 하는 일 모두가 옳으며 자바의 관습을 깨뜨렸다는 등의 비난을 받을 걱정은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런 예측이 현실적인 것으로 변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그 조그만 우체국을 나올 때, 나는 실내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둘러보았다. 전직원이 공손하게 절을 했다. 아마 그들 가운데는 벌써 나를 데릴 사위나 매부로 삼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틀림 없이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고등학생인 것이다. 역시 내가 생각한대로 집에 돌아오니, 자바어로 씌어진 편지가 몇통 이미 배달되어 있었다.
모두가 초대장이었다.
발송인 가운데는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모두 장인 내지는 매부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이 틀림없다고 나는 추측했다.
사람들은 나를 부빠티의 아들로서 본인도 장래에는 부빠티가 되리라 지목하고 있으며, 또한 젊은 나이에 이미 부이사관으로부터 주목을 받고 있다.
감독관조차도 그와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
이 도시, 아아, 인간의 대지의 한 잿빛 구석이여 !
부모의 체면을 세우려는 단 한가지 이유 때문에, 나는 그날 오전 내내 곧 슬라바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초대에는 응할 수 없다는 사과의 답장을 쓰지 않으면 안되었다. 저녁때 약속한 마차가 나를 데리러 왔다. 어머니는 찬성하지 않았으나 나는 슬라바야에서의 일상 생활 때 입었던 양복을 입고 갔다.
내가 부이사관에게 초대받았다는 소식은 벌써 온 거리에 퍼져있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부빠티 관저와 부이사관 관저 사이의 짧은 거리를 가는 나를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맨발이기는 하지만 깨끗한 자바의 복장에 몸을 감싼, 내가 모르는 많은 얼굴들이 공손하게 절을 했다. 두건 위에 모자를 쓴 사람들은 그것을 벗고 인사를 했다. 마차는 나를 태우고 곧장 부이사관 관저의 뒤쪽으로 가서 베란다가 있는 곳에서 멈췄다. 부이사관과 그의 옆에 앉아 있던 두 명의 딸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부이사관이 먼저 인사를 했다. 그는 딸을 소개했다. "여기가 사라, 내 큰딸일세. 여기는 막내딸인 미리암, 두 아이모두 고등학교의 졸업생일세. 막내는 자네와 같은 학교에 다녔네, 물론 자네가 입학하기 전의 일이네만. 미안하지만 나는 그만 실례하겠네. 급한 일이 있어서. " 그렇게 말하고 부이사관은 가버렸다.
거리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든 명예로운 초대는 그런 것이었다. 나를 딸들에게 소개하고 본인은 재빨리 자취를 감춰버린 것이다.
사라와 미리암은 나보다 상당히 나이가 많았다. 선배는 웬만한 일에도 금방 으스대며 후배를 놀려대고 열을 빼놓는 일이 많다는 것을 고등학교 학생은 누구나 잘 알고 있었다.
밍케, 조심해라.
아니나 다를까? 사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 "미리암의 네덜란드어와 문학 담당이었던 메이러 선생은 지금도 있어요? 머리가 이상한 수다장이 말이에요?" "미스 마푸다 빼테루스로 바뀌었읍니다."
"틀림없이 더 지독한 수다장이에다 아는 것이라고는 단지 부엌에 관한 얘기뿐이겠죠."
"그녀가 '미스'라는 것은 확실한가요? "
"모두들 '미스"라고 부르고 있읍니다."
미리암이 킬킬거리고 웃었다. 그리고 사라도. 도대체 무엇때문에 웃는지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얼마간은 될대로 되라는 듯이 떠들어댔다.
"부엌 용어에만 능통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녀는 대단히 훌륭한 선생님으로 나는 가장 좋아합니다." 두 사람은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고 킬킬거리며 웃었다. 무엇이 그토록 우스운지 알 수가 없어서 나는 곤혹스러웠다. 한순간 두 사람이 호기심에 찬 눈으로 양쪽에서 힐끗힐끗 나를 훔쳐 보는 것 같았다. 미리암이 놀려댔다.
"선생을 좋아한다고요? 네덜란드어와 문학 담당으로서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는 선생님은 지금까지 한사람도 없었어요. 모두들 엉터리였어요. 당신은 그녀에게서 무엇을 얻었지요?"
"80년대의 문학 형태에 대해서 알기 쉽게 설명해 주고, 그것을 오늘날의 형태와 비교하는 것이 그녀의 특기입니다." 사라가 소리쳤다.
"어머 ! 그렇다면 윌리엄즈 크로스의 (주 : 미국의 시인이며 소설가)시를 어느 것이나 하나 암송해 봐요. 그러면 당신의 선생님이 정말로 우수한지 어면지 우리들도 알 수가 있을 태니까요." 나는 다시 될대로 되라는 듯이 계속했다.
"그녀가 잘 가르치는 것은 80년대 문학 작품의 심리적, 사회적 배경에 관한 것입니다. 대단히 재미있읍니다." "심리적, 사회적 배경이라니 ? 당신은 그것을 어떤 의미로 말하고 있는 거죠?"
사라와 미리암은 또 킬킬거리고 웃어댔다. 나는 그녀들의 심술궂은 웃음에 신경이 곤두서기 시작했다. 두사람의 옆눈질을 피하기 위해 나는 조금 진까지 부이사관이 앉아 있던 의자로 슬며시 자리를 옮겼다.
이번에는 정면으로 그녀들과 마주 앉게 되었다. 그렇게 보니까, 두 사람 모두 쾌활한 유럽 처녀로서, 매력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후배된 입장으로서 선배에 대한 경계심을 게을리할 수는 없었다.
"그것에 관해 만약 논하라고 한다면. 눈앞에 구체적인 문학 작품을 놓고 검토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내가 궁지에 빠져 들어가는 것을 보고 두 사람의 웃음은 점점 커지고 서로 곁눈질로 신호를 주고 받았다. "심리적, 사회적 배경에 관해서 논하는 네덜란드어와 문학 선생이 있다니 거짓말이지요? 그런 일은 모조리 터무니 없는 거짓말이라구요. 그 미스 마푸다 빼데루스인가 하는 선생은 도대체 무엇이 될 생각일까? 기껏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80년대'의 문학가들 ---공장의 매연에 오염된 하늘을 탄식하고, 도로와 철조망에 침식되고 자동차나 기차의 소음에 파괴된 전원을 우려하는 작가들을 말하는 것이 고작이겠지." 도전적인 미리암이 공격을 시작했다.
"만약 그녀가 사회적 배경에 대해서 운운할 생각이라면, 당연히 그러한 감상적인 새대가 아니라 무르다투리 (역자주 : 식민지 관리로서 네덜란드의 동인도 정책을 비판한 네덜란드 작가)에 대해서 논해야 해요..... 그리고 동인도에 대해서 ! "
"그래요. 그래야만 비로소 힘찬 문학, 진흙이 연꽃을 피게 하는 문학을 논하게 되는 거라구요. " "그녀는 무르타투리에 대해서도 얘기했읍니다."
나는 자신있게 대답했다.
"학교에서 무르타투리를 가르치다니, 도저히 생각할 수 없어요. 진리니 뭐니 하는 것에 까다로운 곳에서 어떻게 그턴 일이 가능하겠어요? 교과서에 그의 글이 실린 적은 한번도 없어요."
미리암이 공격을 계속했고 사라가 맞장구를 쳤다.
"미리암의 말대로예요. " 하고 "사회적 배경에 관해서 논할 생각이라면 무르타투리야말로 바로 전형적인 예라구요."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동생을 힐끔 쳐다보았다. "마푸다 빼테루스 선생은 다만 단순한 전형으로서, 무르타투리를 거론한 것은 아닙니다. 더 나아가 그에게 촛점을 맞추고 평가했읍니다."
"촛점을 마추다니 ! "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사라가 소리쳤다.
"동인도 고등학교의 선생님이 무르타투리에게 호의를 표명했다고 ! 앞으로 10년이 지나도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미리암, 어떠니 ?" 미리암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혹시 당신들의 교과서가 달라진 건 아닌가요?"
"아닙니다."
"당신네 선생님은 상당한 허풍선이군요. 당신도 그녀의 제자다와요. "
사라는 심술궂게 말했다.
"아니 그렇지는 않습니다."
"참으로 대담한 선생이군요. 만약 당신이 말하는 대로라면, 그녀는 신세를 망칠 수도 있어요."
미리암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째서 그렇지요?"
"당신도 상당히 단순하군요. 모르고 있는 모양이군요. 꼭 알아두어야 해요. 왜냐 하면, 만일 당신의 얘기가 사실이라면, 그 선생은 어쩌면 급진파(식민지 탄압에 반대하는 자유주의자들)에 속한다고 볼 수가 있기 때문이에요."
"급진파의 어디가 나쁩니까? 그들은 동인도에 진보를 가져오려고 하는 겁니다." 그때 나는 내 머리가 완전히 돌아버렸다고 생각했다.
"좋은 일이 반드시 정당하다고는 할 수 없고, 적절하다고도 할 수 없어요, 안그래요? 좋은 일도 시간과 장소를 그르치면 잘못으로 되는 경우가 있어요." 미리암이 역설했으나 사라는 가볍게 헛기침을 할 뿐 참견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가 가장 열심히 소개한 작품은 무엇인가요?"
두 사람의 말 장난은 점점 더 심해갔다.
그러나 후배로서는 도대체 누가 처음에 그런 전례를 만들어 놓았는지는 모르지만 어디까지나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무르타투리의 대표작인 '막스하페랄'이나 '네덜란드 상업 회사의 커피 경매'입니다."
"그럼, 무르타투리는 누구를 말하는 거지요?"
이번에는 사라가 공격을 해 왔다.
"누구냐구요? 에드위드 다우에스 데켈입니다."
"맞았어요, 하지만 또 한 사람의 다우에스 데켈을 알아 둬야해요. 의무예요, 그것은." 이 짓궂은 선배들은 점점 더 대담해졌다. 그런데 왜 이렇게 나를 못살게 구는 것일까? 사라는 나를 툭툭 쏘아대면서 입술을 경련시키며 웃음을 참고 있었다.
두 사람은 원주민을 노예마냥 놀림감으로 삼는 연극을 즐기고 있었다. 정말 무례한 여자들이다. 역사상 알려져 있는 다우에스 데켈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잠자코 있는 것을 보니까 모르는 것 같군요, 당신은?"
사라가 쌀쌀맞게 말했다.
"혹시 의심하는 건 아니겠죠?"
미리암이 억제할 수 없는 발각처럼 킬킬거리고 웃었다. 좋다. 이 악마의 음모와 대결을 해보자. 아무래도 이것이 시를 뒤흔든 부이사관으로부터의 명예로운 초대의 댓가인 모양이다. 좋다. 나는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될 수 있는대로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필명을 무르타투리라고 하는 에드워드 다우에스 데켈 뿐입니다. 다른 다우에스 데켈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전혀 모르겠는데요."
"정말 있어요."
사라가 계속했다. 미리암은 실크 손수건에 얼굴을 파묻었다.
"훨씬 더 중요한 인물이에요. 자, 누굴까요? 그렇게 놀란 얼굴을 하지 말아요. 당신, 사실은 알고 있는 거죠? 모르는 체할뿐이죠?"
"정말로 모릅니다."
나는 짜증스럽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마푸다 빼데루스라는 당신의 선생님을 높이 평가하고 있지만 상식 부족이군요. 잘 들어요. 무르다투리보다 중요한, 또 한 사람의 다우에스 데켈이라는 사람이 어떤 젊은이냐면......"
"젊은 사람입니까?"
"물론 아직 젊어요. 지금 배를 타고 있어요. 아니 이미 지금쯤은 남아프리가에 도착해서 네덜란드 편에 붙어서 영국을 상대로 싸우고 있을지도 몰라요. 들어본 적이 없어요?"
"없읍니다. 그 사람은 어떤 글을 썼읍니까?" 나는 저자세로 물었다.
"그는 아직 젊어요. 아직 저서가 없다 해도 용서받을 수가 있어요. "
사라는 그렇게 말하고 또 킬킬거리며 웃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을 알턱이 없지 않습니까? 저서가 있어야 세상에 알려지개 되는 것이 아닙니까?" 겨우 나는 궁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았다.
"이 지상에 있는 몇억이라는 사람들은 이름을 세상에 알릴 수 있는 저서를 갖지 못하기 때문에 무명으로 있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 사람도 많이 쓰고 있어요. 다만 독자가 한사람밖에 없을 뿐이지요. 가장 충실한 그의 독자, 그것이 이 미리암 드라크로아, 즉 그는 동생의 애인이라구요. 알겠어요?"
빌어먹을 ! 나는 마음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미리암의 애인에 불과하다면, 내가 그 사나이와 무슬 관계가 있단 말인가? 이 두 여자도 안네리스 메레마가 누군지 모를 것이다. "자, 미리암, 네 애인에 대해서 애기를 해 주렴."
사라가 매우 기분이 좋아서 재촉했다. "안돼. 우리들의 손님과는 관계가 없는 일이야. 다른 얘기를 해요. "
"밍케, 당신은 순종 쁘리부미지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굴욕의 문이 소리도 없이 열리려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유럽식 교육을 받은 쁘리부미, 멋있어요. 유럽에 관해서는 당신은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자기 나라에 관해서는 그다지 모르고 있어요. 그렇죠? 내 말이 틀렸어요?"
드디어 모욕이 시작되었다.
"당신네들의 선조는, 미안해요, 이런 얘기를 해서 화나게 할 생각은 없어요. 당신네들의 선조는 대대로 번개라고하는 것은 전사가 악마를 붙잡으려고 할 때 일으키는 파열음이라고 믿고 있었어요, 그렇지요? 왜 잠자코 있어요? 당신 선조들의 신앙이 부끄러운가요"
사라 드라크로아가 웃음을 그쳤다. 진지한 표정으로 신기한 동물이라도 보듯이 나를 살펴보고 있었다.
"우리들의 선조를 일부러 꺼낼 필요는 없을 텐데요?" 나는 반발했다.
"유럽인의 선조, 네덜란드인의 선조도 옛날에는 우리들의 선조못지 않게 무지몽매했으니까요."
"어머 ! 걱정하던대로군요. 당신들 선조를 들먹이며 싸울 생각이에요? "
"그래요. 당신과 나는 소와 같은 거라고요, 밍케."
미리암이 계속했다.
"처음 만났을 때 뿔을 마주대고 싸우고, 그 다음에는 사이가 좋아지는 거예요. 영원히 친구가 되는 거예요, 안그래요?" 싹싹한 아가씨다 ! 나의 불신감은 엷어져 갔다. "우리들의 선조 쪽이 당신네 선조들보다 무지했는지도 몰라요, 밍케. 당신네 선조가 이미 논과 관개를 만들고 있을 무렵, 우리들의 선조는 아직 동굴에 살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에요. 당신도 학교에서 이런 것을 배웠을 거예요 ---번개는 정전기의 구름과 부전기의 구름이 부딪치는 것에 불과하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피뢰침을 발명했다.--- 그렇지요? 그것에 대해서 당신들의 선조는 번개를 잡아서 닭장 속에 가두었다는 키 아겐스라에 관한 아름다운 전설을 갖고 있어요."
사라가 읏음을 터뜨렸다. 미리암은 점점 더 진지한 얼굴로 짙어가는 황혼 속에서 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수수께끼를 던졌다.
"당신은 틀림없이 정전기와 부전기의 구름에 관한 가르침을 머리로는 받아들일 수가 있을 거예요. 왜냐 하면, 진급을 하려면 좋은 성적이 필요하니까요, 하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당신은 그 가르침을 옳다고 믿고 있나요?"
나는 겨우 이해가 갔다. 그녀는 내 생각을 떠보는 것이다. 그렇다. 영낙 없는 시험이다. 솔직이 말해서, 나는 그러한 것에 관해서 자신에게 진지하게 물어본 적이 없었다. 모든 것이 극히 당연한 것으로, 자연스럽게 흐르고 있는 듯이 생각되었다.
이번에는 사라가 끼어 들었다.
"물론 우리들은 당신이 그러한 자연 과학의 수업을 이해하고 있으리라고 확신해요. 다만 문제는 당신이 그것을 믿고 있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에요. "
"믿지 않으면 안됩니다. "
"믿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은 단지 시험에 통과하기 위해서지요. 믿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은 당신이 아직 믿고 있지 않다는 애기라구요."
"나의 선생인 미스 마푸다 빼데루스는......"
"또 마푸다 빼테루스군요." 하고 사라가 가로막았다.
"그녀는 나의 선생님입니다. 그녀는 무슨 일이든지 배우고 그리고 실천해 보는 데서 시작된다고 말했읍니다. 그것은 신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들 두 사람도 만일 믿는 것을 배우고, 그것을 실천하지 않았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군요. 확실히 당신 선생닝의 말대로군요."
사라는 애매하게 대답했다.
한편, 미리암은 애인의 초상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두 사람의 공세를 겨우 물리칠 수 있게 되어 얼마간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올해들어 우리들은 '새시대'라고 하는 새로운 말을 자주 하게되는데 당신은 어면 의미인지 알고 있나요?"
미리암이 번개의 문제를 젖혀두고 다시 공격을 가해 왔다. "알고 있읍니다. 다만 마푸다 빼테루스 선생님이 설명해 주신거지만."
"그렇다면, 당신네 마푸다 빼테루스 선생님이 말하는 '새시대'는 어떤 의미죠?"
미리암이 파고 들어왔다.
"그 말은 사전에는 없지만, 우리 선생닝에 의하면, 과학, 미학, 효율성의 요건을 중시하는 정신, 태도, 사물을 보는 시점 등의 총칭입니다. 그밖에 다른 뜻은 나는 모릅니다. 그녀는 로마 교황에게 제명당한 카톨릭 교회 내의 분리파 출신입니다."
나는 그렇게 대답하고 나서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 밖의 뜻도 있겠지요, 아마?"
사라와 미리암은 서로 상대방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표정이 내게는 잘 보이지 않았다.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잠자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볼 뿐 내 질문에 대답하기는 커녕 친숙한 듯이 달려드는 모기들을 부지런히 쫓는데 열중하고 있었다.
"이 모기는 나를 레스토랑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야."
사라가 얼굴을 찡그렸다.
이번에는 내가 웃을 차례였다.
"어머, 이걸 마시는 것을 잊고 있었네. 얼른드세요." 사라가 말했다.
긴장이 차츰 풀려 갔다. 나는 마음 놓고 숨을 쉴 수가 있게 되었다.
흰 바지와 셔츠를 입은 하인이 얼마 전에 우리들의 테이블에 컵과 케이크를 놓고 간 것을 생각해냈다. 처음으로 나는 웃을 여유가 생겼다. 그것은 긴장이 풀린 갓만이 아니라, 그녀들도 나 이상은 알고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당신은 스누크 푸르푸로니에 박사(역자주 : 네덜란드의 이슬람 학자, 1857--1936년)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나요?"
또 다시 미리암이 공격을 시작했다.
지금 부이사관이 나타난다면 이 고역도 끝장이 날 텐데. 구원의 신이여, 당신은 어디에 있읍니까? 어째서 나타나지를 않는가? 그리고 왜 이리 당신의 딸들은 황혼녕의 모기에 못지 않게 흉폭한가? 어쩌면 내 선배인 당신 딸들에게 곤혹을 당하게 하려고 당신은 일부러 나를 초대한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해 보니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부이사관은 의도적으로 나를 자기의 두 딸과 대결시켜, 나를 시험하려고 했던 것이다. 틀립없이 그에게는 무엇인가 명확한 의도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번에는 내가 질문을 하면 어떨까요? "
사라와 미리암이 웃음을 터뜨렸다.
"잠깐 기다려요."
미리암이 가로막았다.
"먼저 당신부터 대답을 하세요. 당신이 좋아하는 선생님이 뛰어난 선생님이라는 것은 인정하겠어요. 당신도 못지 않게 우수한 학생이구요. 당신이 그녀를 좋아한다는 것도 무리가 아니에요. 아마 나도 좋아하게 될 거예요. 내가 마지막으로 한질문 말인데, 당신이 좋아하는 선생님은 그것에 대해서도 아마 여러 가지로 얘기를 해주겠지요?"
나는 짧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배우지 못했어요. 가르쳐주십시오." 다분히 미리암은 나의 선생으로서 등장할 기회를 줄기차게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녀는 재빨리 요령 있게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스누크 푸르푸로니에 박사는 탁월한 재능을 가진 학자이다. 비범한 사상가이며 실천가로서, 학문의 발달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할 용기를 갖고 있었다. 아치에 전쟁에서는 네덜만드의 승리를 결정짓는데 이바지한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현재 판 휴츠(아치에 전쟁의 네덜란드군 총사령관, 후에 동인도 총독)와의 논쟁에 말려들고 있다. 아치에를 둘려싼 의견의 대립이다. 그 대립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것이 쓸데 없는 대립이다. (미리암은 그렇게 말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세 사람의 원주민 젊은이와 어떤 귀중한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실험의 목표는 단 한가지, 과연 원주민은 유럽의 학문과 지식을 실제적으로 흡수할 수가 있는가, 그리고 그것들에 의해 살려질 수가 있는가를 아는 데 있다. 매주 그는 유럽인 학교의 학생으로서 그들에게 내면적인 변화가 있는가, 또한 그들에게 그것을 흡수할 능력이 있는가를 연구하기 위해 젊은이들과 토론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학교에서 배우는 학문과 지식은 쉽게 벗겨지고 마는 엷은 도금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확실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가? 석학은 아직도 결론을 얻지 못하고 있다. 이번에는 또 내가 웃을 차례였다. 별것은 아니었다. 내 앞에 있는 이 두명의 아가씨는 그 훈장님의 흉내를 내고 있는 것뿐이다. 나는 그녀들에게 마구잡이로 붙들려온 실험용 모르모트인 셈이다.
잘한디. ! 잘들 논다 ! 그러나 그녀들이 이러는 것은 아버지의 명령에 의한 것인지도 모르고 아버지도 반드시 악의가 있어서 한 짓이라고는 속단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역습으로 나가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나는 미리암의 얘기를 입을 다물고 계속 듣기만 했다. 그것은 후배로서, 학생으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손님으로서였다. 투명한 정적이 우리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잠자코 있던 사라가 물었다,
"당신들은 어소시에이션 이론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나요?" "미스 미리암, 여기서는 당신이 내 선생이군요." 나는 질문을 피해 얼른 말했다.
"아니, 선생님은 아니에요. "
갑자기 미리암이 겸손해졌다.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의견을 교환하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지요, 안그래요? 그럼, 그 이론에 대해서 들은 적이 없군요."
"없읍니다."
"알았어요. 그 이론은 푸르푸로니에 박사가 내세운 거예요, 새로운 이론이죠. 그의 생각은 만일 그의 실험이 잘 되기만 하면, 동인도 정부는 그것을 실제로 시행할 수 있게 된다는 거예요. 그렇지, 사라?"
"네가 얘기하렴. "
"어소시에이션이란 유럽적 방법에 의거한, 유럽인 관리와 교육을 받은 원주민과의 '협동'이라는 뜻이에요. 진보적인 당신들과 함께 이 나라를 다스려가는 것이지요. 따라서 통치 책임은 이제 백인만이 젊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거죠. 따라서 유럽인의 행정기구와 원주민의 행정기구를 연결하고 있던 감독관의 직책은 필요가 없어진다는 거예요. 부빠티가 직접 백인 행정 기구와 손을 잡게 된다는 거죠. 알겠어요?"
"계속해 주세요?"
"당신의 의견은?"
"참으로 간단합니다."
나는 대답했다.
"우리들 쁘리부미는 '자바 연대기'와 같은, 당신들이 읽지 않는 것을 읽고 있읍니다. 자바어를 읽고 쓰는 것은 우리네 가정에서는 필수 과목으로 되어 있어요. 그런데 알다시피 유럽인 학교에서는 국민학교에서부터 고등학교의 교과 과정에서 학생들은 우리들 쁘리부미를 정복한 네덜란드군의 용맹성을 친양하도록 배우고 있읍니다. "
"네덜란드군은 정말로 용감했어요. 그건 사실이에요."
하고 미리암은 자기 민족을 변호했다.
"그렇습니다.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쁘리부미가 쓴 많은 연대기에는 당신들의 압박을 쁘리부미는 몇백 년에 걸쳐서 어떻게 견디어 왔는가를 적고 있읍니다. 그것을 알고 있읍니까?" 나는 그녀들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패배의 연속이었다, 그 말인가요?" 미리암이 도전했다.
"그래요. 확실히 지기만 했지요."
갑자기 나는 말을 계속할 흥미를 잃고 말았다. 그대신 질문을 했다.
"왜 3백년 전에 그 이론이 탄생하고 실현되지 않았을까요? 유럽인이 책임을 쁘리부미와 공동 부담하자고 해도 반대하는 쁘리부미가 없었던 시대에 말입니다, 왜죠?"
"당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모르겠군요." 사라가 끼어들었다.
"즉, 그 뭐라나 하는 박사는 당시의 쁘리부미들보다 3백 년이나 뒤떨어져 있었다는 말입니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나는 귀찮기만 한 두 선배에개 작별인사를 하고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 왔다.
제 7 장
아아, 인간의 대지
내가 부이사관 에르베르 드라크로아씨에게 초대받은 것을 아버지와 어머니는 더할수없는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집에는 쁘리부미의 지방 명사들로부터 초대장이 꼬리를 물고 쇄도했다.
부모님에게는 자랑거리인 아들이 선배들로부터 얼마나 놀림을 받았는지 얘기하지 않는 편이 현명했다.
두 사람은 부이사관 댁에서 일어난 일을 얘기해 달라고 끈질기게 물어왔으나 나는 단호하게 거절하고 빠른 시일 내에 슬라바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쇄도해 오는 초대장에 대한 답장을 쓰는 데 많은 시간을 빼앗겼다.
아버지는 이제 화가 풀리신 것 같았다. 부이사관의 초대로 나의 모든 잘못이 저절 용서된 것이다.
나는 다시 우노크로도에 전보를 쳐서 슬라바야로 돌아가는 날짜를 알리고, 역까지 마차로 마중나와 달라고 부탁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의 출발을 늦추게 할 수가 없었다. 아마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냐이 온트솔로의 문제로도 또 다시 질책을 받는 일은 없었다. 부이사관에게 초대받은 사람은 그것만으로도 이미 불가침적인 존재가 되고, 그의 앞날에는 중요한 고위직이 약속된 것이나 다름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부모님은 부이사관에게 학교로 돌아간다는 인사를 하고 가라고만 말했다. 나는 죽기보다 싫었으나 아뭏든 부이사관 댁을 방문했다. 또 다시 사라와 미리암 자매를 만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때 발견한 일이지만, 아버지가 옆에 있으면 두 사람의 공격심은 사라지고 오히려 예의바르고 정숙했다. "자네 학교의 교장은 나의 옛날 동창생일세." 부이사관은 말했다.
"학교에 돌아가거든 내가 안부를 전하더라고 해 주게."
그리고 나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딸애들은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어하고 있네, 두 사람은 어머니를 잃은 지 10년쯤 되었는데, 딸들이 귀국하게 되면 나는 틀림없이 쓸쓸해질 걸세. 그러니까......"
그는 잠시 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자네의 소식을 가끔 편지로 내게 알려 주게나. 그 편지를 읽는 것은 나에게는 크나큰 즐거움이 될 걸세. 또 사라와 미리암과도 편지 왕래를 해주게나. 교육을 받은 젊은이들이 각자의 의견을 교환하는 것은 크게 환영할 만한 일이지. 그것은 장차 보다 나은 인생의 기초가 될 걸세. 만약 장차 자네들이 모두 중요한 인물이 된다면, 더더구나 그 의의는 커질 걸세. 안 그런가?"
나는 그대로 실행할 것을 약속했다.
"밍케군, 만일 자네가 현재의 생활을 계속한다면, 즉 대부분의 자바인과 같은 노예적 자세가 아니라 유럽인과 같은 적극적인 자세로 생활을 한다면, 얼마 뒤에 자네는 중요한 인물이 될 수 있을 걸세. 민족의 지도자, 선각자로서 모범이 될 수가 있네. 지식인으로서 자네는 자기 민족이 얼마나 원시적인지 알고 있을걸세. 유럽인은 도와주려고 생각해도 아무 할 일이 없다네. 우선 쁘리부미 자신이 스스로 시작하지 않으면 안되는 걸세." 부이사관 에르베르 드라크로아씨의 말에 나는 심한 상처를 입었다. 그렇다.
자바인이 외부인에게 바보 취급을 당하면 나도 자바인의 한 사람으로서 같이 바보 취급을 받는 것에 자존심이 몹시 상하는 것이다. 그럴 때면 나는 어쩔수없이 같은 피가 흐르는 자바인이라는 것을 실감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자바인의 무지몽매가 문제가 되면 나는 그것과 무관한 듯 자신을 유럽인처렴 느끼는 것이었다. 나는 부이사관의 말을 가슴에 담고 슬라바야로 돌아가는 급행 열차를 탔다.
만일 드라크로아씨가 자바인이라면, 그의 의도를 헤아리는 것은 간단한 일이었다. 요컨대 나를 사위로 삼으려고 한 것이리라. 그러나 그는 유럽인이니까 그것은 불가능했다. 게다가 사라와 미리암은 나보다 몇살씩 연상이었다.
그 식민지 고관은 내가 민족의 선각자, 모범이 되는 것을 기대한다고 했다.
정말 꿈같은 얘기다 ! 그런 것은 우리 선조들의 역사에도 없었다. 진정으로 그런것을 바라는 유럽인이 과연 존재한단 말인가? 지금까지 동인도의 역사에서 그런 일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동인도에서 3백 년 동안 네덜란드 군은 총과 대포를 쉬게 한 적이 없다. 그런데 갑자기 자바 민족의 개척자, 선각자, 모범이 되기를 기대하는 유럽인이 나타난 것이다. 어린애들의 동화같은 이야기도 아니고 농담으로도 될 성 싶지 않은 애기다. 아무래도 부이사관은스누크 푸르푸로니에 박사의 '어소시에이션 이론'의 틀 안에서 나를 실험 도구로 삼으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빌어먹을 ! 내가 알 바 아니다. 다행히도 나는 메모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항상 지침과 경고가 될만한 일들은 적어 두고서 참고하고 있었다.
나는 가방 속을 뒤져서 아직 읽지 않고 있는 편지 몇 통을 꺼내 기차 속에서 읽어 보았다. 분명히 편지의 내용은 아버지의 부빠티 임명을 축하하는 리셉션이 열린다는 내용과 곧 돌아오라는 명령이나 요청들이었다.
형의 편지에는 학교의 교장선생님께 보내는 휴가 신청서까지 동봉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그것도 별 필요가 없게 되었다. 모든 것은 나의 승리로 끝난 것이다. 나는 차안에서 가느다란 눈을 가진 뚱뚱한 사나이가 이상하게도 자꾸만 나를 감시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갈색 능직물셔츠와 바지를 입고 있었다.
구두도 또한 갈색으로 일등 차에 어울리는 구두였다. 비단 띠가 붙은 펠트 모자를 줄곧 머리에 쓰고 있었으며, 그것은 때때로 이마가 가릴 정도로 깊숙이 내려져서 아무 곳이나 은일히 관찰할 수 있게 해주었다.
짐은 작은 가죽가방 한 개로 선반 위에 얹혀 있었다. 그는 통로를 사이에 둔 반대쪽 좌석에 앉아 있었다. 차장이 차표를 검사하러 오자, 그는 차표를 내밀었으나 눈은 여전히 나를 훔쳐보고 있었다. B시에서 슬라바야까지 급행 열차가 머무는 역은 몇 군데 되지 않는다. 뚱뚱한 사나이는 중간 역에서 내리지도 않았고, 내릴 기척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그도 종착역을 향하고 있었다. 그만 ! 그런 일에는 신경 쓰지 말자. 나는 이 여행을 하는 동안 충분히 쉬고 싶다. 푹 잠들고 싶다. 내게는 체력과 건강이 중요하니까.
열차는 슬라바야를 향해 달려갔다. 저녁 5시가 되어서야 슬라바야에 도착했다. 그 기다란 묘지를 지나자 이윽고 기차는 멈춰섰다.
플랫폼에는 인적이 드물었고 몇 사람이 서거나 앉아서 내리는 승객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앤, 안네리스 !"
나는 창에서 소리쳤다. 그녀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안네리스는 내가 있는 차량으로 뛰어와서 창 밑에 선 채 손을 뻗었다.
"괜찮았어요, 마스?"
뚱뚱한 사나이는 가방을 들고 내 옆을 지나쳐 갔다. 그는 먼저 기차에서 내리자, 안네리스에게 힐끗 시선을 보내고 출입구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내 시선은 그 사나이를 쫓았다. 사나이는 밖으로 나가지 않고 멈춰서서 우리들 쪽을 돌아다보았다. "자, 내려오세요. 또 누구를 기다리고 있나요?" 안네리스가 재촉했다.
나는 기차에서 내렸다.
쿠리가 짐을 들고 뒤를 따랐다.
"빨리 가요. 다르삼이 기다리고 있어요."
뚱뚱한 사나이는 아직도 개찰구에서 밖으로 나가지 않고 있어서 우리들이 앞질러 가게 되었다. 사나이는 누런 피부에 붉은 얼굴이었다.
기차에서도 그랬지만, 연방 푸른 수건으로 목덜미를 닦고 있었다. 우리들이 앞서자 미행이라도 하듯이 그 사나이가 움직였다. "어서 오십시오, 도련님 ! "
다르삼이 4륜마차 옆에서 소리쳤다. 뚱뚱한 사나이는 우리들이 마차에 올라타는 것을 뚫어지게 바라 보고 있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어째서 자기 갈길을 가지 않고 계속 나를 엿보고 있는 것일까? 우리들이 마차에 올라타자 그도 황급히 임대 마차를 부르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우리들이 탄 마차가 달리기 시작하자 금방 그의 마차도 뒤쫓아 움직였다. 분명히 뭔가 미심쩍은 게 있는 것이다. 사나이에게 어떤 특별한 의도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 내가 그의 마차를 돌아보자 사나이는 수건으로 목덜미를 닦으면서 우리들 쪽은 보지 않고 있었다. 두 번째로 돌아다보았을 때는 우리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봐요, 다르삼. 왜 오른쪽으로 구부러지지 않아요?" 나는 항의했다.
"어째서 왼쪽으로 가죠, 다르삼?"
안네리스가 마두라어로 물었다. 다르삼이 짧게 대답했다.
"잠깐 볼 일이 있읍니다."
마차는 역 구내를 나서자 왼쪽으로 구부러지고 한참 가다가 이사 관저의 광장 앞을 지났다.
다르삼은 어디로 갈 생각일까? 그는 매우 진지한 표경이었다. "어째서 오른쪽으로 구부러지지 않죠?"
안네리스가 물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어요."
"잔깐만 참으시면 됩니다, 아가씨. 해는 아직 지지 않았읍니다. 랜턴도 준비해 왔읍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뚱뚱보 사나이의 마차는 우리들의 마차 뒤를 미행해 오고 있었다. 내가 몇 번째인가 돌아다보았을 때 그는 고개를 숙이고 마부의 등에 얼굴을 감췄다.
"잠시 속력을 늦춰 줘요, 다르삼."
마차는 3급 도로에 들어서서 친천히 달렸다. 뒤의 마차도 속도를 늦추었다. 길이 너무 좁아서 그렇게 할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길을 비켜 주기를 바란다면 뒤의 마차는 종을 울리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또 무리하게 추월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우리들의 마차가 갑자기 멈췄다. "왜 여기서 ? "
안네스리가 항의했다.
"잠깐 기다려 주십시요, 아가씨. 잠시 볼 일을 보고 올 테니까요. "
다르삼은 그렇게 대답하면서 마차에서 뛰어 내렸다. 그리고 마차를 길가로 끌고 가서 울타리 기둥에 고삐를 잡아맸다. 뚱뚱한 사나이의 마차는 빠져 나갈까 어쩔까 주저하고 있었으나 결국 빠져나갈 수밖에는 없었다. 푸른 손수건으로 코를 풀면서 그는 얼굴을 외면하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중국인도 중국인 혼혈도 아닌 것 같았다. 또 장사꾼같지도 않았다. 만일 동인도 태생의 중국인이라고 한다면, 아마 교육 정도가 높은 계층 출신으로, 마요르 공관(역자주 : 식민지 정부에 의해 임명된 자바 각지의 중국인 사회의 지도자)의 직원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중국인과 유럽인의 혼혈로서 휴가를 끝내고 슬라바야의 근무지로 돌아오는 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째서 B시에서부터 줄곧 나를 감시하고 있지 않으면 안된단 말인가. 옷차림으로 보아 장사군 같지는 않았다. 혹시 보르네오 수마트라 무역회사나 조지 웨일리 회사의 출납계는 아닐까? 아니면 마요르 공관일까? 그러나 마요르라면 보통 거만하고 자신을 유럽인과 동등시하고 있기 때문에 나에게 흥미를 가질 턱이 없으며, 애당초 쁘리부미에 관심을 가질 수가 없다. 혹시나 그의 관심은 안네리스에게 있는 것일까? 아니,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다. 아뭏든 B시를 출발할 때부터 줄곧 나한테서 눈을 떼지 않고 있는 것이다.
"아가씨, 여기서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저는 이 가게에 잠깐 들러 나오겠옵니다."
다르삼은 그렇게 말하고 나에게로 눈을 돌렸다. "도련님은 잠시 내려 주십시오."
나는 경계하면서 마차를 내렸다.
나와 다르삼은 기와로 지붕을 얹은 찰나무로 만든 조그만 식당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무엇을 하죠, 다르삼? "
마차 위에서 안네리스가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러자 다르삼이 뒤돌아보았다.
"언제부터 아가씨는 저를 못 믿게 되셨읍니까 ?" 나도 의심을 품었다. 뚱뚱한 사나이의 마차는 얼마 떨어지지 않은 길 앞쪽에 서 있었다. 이번에는 다르삼이 무엇인가를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그곳에 앉아 있어요, 앤."
나는 안네리스를 안심시키기 위해 그렇개 말했으나, 눈은 마두라인 칼잡이 다르삼의 손과 긴 칼에 못박혀 있었다. 허르스름한 식당 안에는 커피를 마시고 있는 손님이 한사람 있을 뿐이었다. 우리들이 들어갔을 때, 손님은 뒤를 돌아다보지도 않았다.
무엇인가 골똘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혹시 뚱뚱한 사나이와 한패가 아닐까? 아니면 다르삼의 ? 다르삼은 내게 손님의 건너편에 있는 긴의자에 앉도록 명령투로 말했다. 그는 땀냄새가 날정도로 내게 몸을 가까이하고 앉았다. "밖에 있는 마차에 차와 과자를 갖다 드리게. "
다르삼은 식당 여주인에게 주문했다. 그리고 여주인이 나무 쟁반에 차와 과자를 얹어서 밖으로 갖고 나갈 때까지 날카로운 눈으로 여주인을 주시했다.
눈을 번뜩이면서 다르삼은 서투른 자바어로 속삭였다. "도련님, 우노크로모의 저택에서 일이 생겼음니다. 알고 있는 것은 나 한 사람뿐입니다. 아가씨와 냐이는 모릅니다. 놀라서는 안됩니다. 당분간 도련님은 우노크로모에 가까이 가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위험합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요, 다르삼?" 다르삼의 목소리가 얼마간 침착을 되찾았다. "도련님, 저는 냐이에게만 충성을 맹세했읍니다. 냐이에게 중요한 것은 제게도 중요한 것입니다. 냐이의 명령을 받으면 다르삼은 반드시 그것을 실행합니다. 어떤 명령이든 상관 없읍니다. 냐이는 도련님의 안전을 지키도록 명령했읍니다. 나는 그것을 실행할 것입니다. 도련닌의 안전을 지키는 것은 나의 임무입니다. 믿고 안 믿고는 도련님의 자유입니다만, 어쨌든 여기서는 내 충고를 들어 주십시오."
"당신의 임무는 잘 알겠소. 당신의 성의에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읍니까?"
"냐이는 나의 주인입니다. 그 다음이 아가씨입니다. 그녀 또한 나의 주인이지요. 지금 아가씨는 도련님을 사랑하고 있읍니다. 나는 도련님에게도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충고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 다르삼의 칼이 도련님의 안전을 보증할 수 없기 때문은 아닙니다.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읍니다. 그러나 아직 나도 잘 모르는 일이 있읍니다."
"그것은 알겠어요. 그런데 정말 무슨 일이 있었읍니까?"
"어쨌든 오늘은 도련님을 우노크로모가 아니라 두랑강의 하숙집으로 모시고 가겠읍니다."
"그 이유를 알고 싶네."
다르삼은 입을 다물고 여주인에개 경계의 눈을 보냈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다르삼?"
안네리스가 밖에서 소리쳤다.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아가씨. "
다르삼은 밖을 보지 않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여주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다시 계숙했다. "시뇨 로베르트입니다, 도련님. 시뇨가 여러 가지 약속을 하면서 도련님을 죽이라고 내게 명령했읍니다."
나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그가 악람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을 나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에게 무슨 해를 끼쳤다는 겁니까?"
"단순한 질투입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냐이는 도련님을 좋아합니다. 집안에 자기 이외의 남자가 있는 것이 마음에 안 드는 것입니다."
"털어놓고 그렇게 말하면 되지 않습니까? 어째서 그런 비열한 수단을 쓴답니까?"
"그 도련님은 생각이 모자랍니다. 그래서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이제 도련님도 나의 충고를 이해하셨을 것입니다. 이 말은 아가씨나 냐이에게는 하지 마십시오, 절대로. 그럼 가 보시지요." 다르삼은 내 의견은 듣지도 않고 돈을 지불했다. 뚱뚱한 사나이의 마차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우리들이 탄 마차는 출발했다.
우노크로모에서는 만약 다르산의 말이 사실이라면 한 젊은이가 나의 단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노리고 있다. 그리고 오늘 하루종일 수상한 뚱뚱한 사나이가 B시에서부터 줄곧 나를 뒤쫓고 있다. 생각해 보면 나에 대한 아버지의 분노도 그다지 엉뚱한 것은 아니다. 또 내 행동의 결과를 받아들일 각오를 하라는 어머니의 경고도 웃어 넘길 일은 아니었다.
그렇다. 분명히 로베르트 메레마는 나를 그의 왕국에 대한 침략자라고 볼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이다. 척어도 내가 그의 마음에 새로운 부담이 된 것만은 사실이다. 그런 눈으로 나를 볼 이유가 그에게는 충분히 있다.
안네리스는 언제 마차에서 빠져나가 도망칠는지도 모르는 물고기라도 되는 듯이 내 손을 붙잡은 채 놓아 주려고 하지 않았다.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눈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듯 먼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앤, 가방 속에서 당신이 넣어 둔 돈을 보았어요." "그래요. 내가 넣었어요. 당신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당신은 미지의 여행을 떠나서 한 시라도 빨리 내게로 돌아오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으니까요."
"고마와요, 앤. 하지만 그 돈은 쓰지 않았어요."
그때 처음으로 안네리스는 웃었다. 그러나 그녀의 웃는 얼굴도 내 마음을 달래 주지는 못했다. 마차 속은 랜턴의 빛이 반사하지 않아 어두웠다. 안네스리의 아름다움은 검은 어둠 속에 파묻혀버렸다. 설사 그렇지 않았다하더라도 나의 마음은 결코 평화롭지는 못했을 것이다. 불길한 예감이 내 머릿속에 꽉 차서 다른 생각들은 도무지 할 수가 없었다.
나의 대지, 인간의 대지는 일체의 확실성을 상실하고 있었다. 나를 올바르게 이끌어 온 학문과 지식은 증발해서 사라져버렸다.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로베르트? 물론 그는 알고 있다. 뚱뚱한 사나이? 그의 인상도 확인해 두었다. 어둠 속에서도 식별할 수가 있다. 그러나 범죄는 내가 모르는, 예측하지 못하는 제삼자가 저지를 수도 있다. 슬라바야는 1루피아 정도의 보수로 살인을 청부받은 청부살인업자가 많기로 유명한 도시다. 미국 해안이나 숲속, 길가, 시장에 반드시 시체가 나뒹굴고 있고 그 시체에는 칼자국이 남겨져 있는 것이다.
마차는 투랑강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왜 이쪽으로 가는 거예요?"
안네리스가 다시 항의했다.
" 또 한 가지 볼 일이 있옵니다, 아가씨. 참아 주십시오." 다르삼이 대답했다.
안네리스에게는 뭐라고 말해야 좋을까? 구실도 제대로 찾지 못한 채 마차는 데린하의 집 앞에 멈췄다.
아무 말도 없이 다르삼이 내 짐을 마차에서 내렸다. "왜 짐을 내리는 거예요?"
안네리스가 또 다시 항의했다. 나는 다정스렵게 말했다. "앤. 앞으로 일 주일 동안 나는 수업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돼요. 대단히 유감스럽지만 한동안 당신 곁을 떠나 있지 않으면 안된다구요. 그래서 오늘은 당신과 함께 우노크로모에는 돌아갈 수가 없어요. 마중나와 줘서 고마왔어요. 마마에게 미안하다고 내 대신 전해 줘요. 틈이 나면 꼭 찾아갈께요."
"마스, 지금까지 우노크로모에서는 공부를 못했나요? 아무도 공부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았을 텐데요? 내가 방해를 했다면 미안해요."
안네리스의 목소리는 금방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런 이유가 아니라니까요."
"방해가 되었었다면 그렇게 말해 줘요. 내가 얼마나 나쁜 짓을 했는지 알 수 있도록." 그녀는 점점 더 울음 섞인 목소리로 변해갔다.
"아니라구요, 앤. 절대로 그렇지 않다니까." 안네리스는 마침내 울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어째서 우는 거죠, 앤? 단 한 주일 동안인데. 일 주일만 지나면 꼭 우노크로모로 돌아간다구요. 그렇지요, 다르삼?"
"그렇습니다, 아가씨. 남의 집 앞에서 그렇개 울면 안됩니다." 그때 나는 나 자신이 자바의 용감한 젊은이, 대적할 사람이 없는 용자라는-물론 그것은 내 생각이지만 ----의식은 사라지고 생명이 위험하다는 얘기에 잔뜩 겁을 먹은 단순한 겁장이로 전락해 있었다.
"내리지 말고 그대로 앉아 있어요, 앤."
나는 그렇게 말하고 어두운 마차 속에서 안네리스의 뺨에 키스를 했다. 그녀의 얼굴이 눈물로 젖어 있었다. "마스, 빨리 우노크로모로 돌아와 주세요."
그녀는 체념한 듯이 울면서 애원했다.
"그럼, 나를 이해해 주겠지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이 처리되면 곧 돌아갈 테니까. 오늘은 내 말을 믿고 내 입장을 이해해 줘요." "알았어요, 마스. 불평은 하지 않겠어요."
안네리스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 "
"마스, 안녕 ! "
나는 마차에서 내렸다.
다르삼은 아직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해는 완전히 지고 여기 저기서 램프가 빛을 뿌리고 있었다. 어둡게 가라앉고 있는 것은 내 마음뿐이었다. "왜 마마에개 애기를 하지 않습니까?"
하고 나는 다르삼애게 속삭였다.
"안됩니다. 냐이는 로베르트 도련님과 주인님 때문에 너무나도 많은 고통을 당하고 계십니다. 이 문제는 나 혼자서 해결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도련님은 잔깐 동안만 기다려 주십시오."
데린하 부부는 의자에 앉아 내가 고향 얘기를 하기 위해 방에서 다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금실이 좋은 선량한 부부 ! 그들은 나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 것일까?
다는 방에서 나가지 않고 문을 잠근 뒤 옷을 갈아 입고는 저녁식사도 하지 않고 그대로 침대로 들어갔다. 석유 램프를 끄기 전에 전가 다름없이 빌헬이나 여양의 초상을 바라보았다.
아아, 인간의 내지 ! 인간이 어떻게 하면 신들의 애인이 될 수가 있는 것일까? 그녀의 궁진은 얼마나 평화로울까? 아마 그녀 개인의 심리적이고 정신적인 고뇌를 제외한다면, 무엇 하나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것과 비교하면 나는 어떤가? 그녀의 백성인 나는? 별점에 의해서 그녀와 같은 운명을 약속받았을 나는 로베르트 메레마가 보냈을 죽음의 신이 나를 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지금 방 한구석에서 벌벌 떨고 있는 것이다.
방 안은 어둠으로 덮여 있었다. 거실에서의 대화가 어렴풋이 귀에 들려 왔다. 애기 내용은 알 수가 없었다. 아아, 이 젊은 나이에 생의 위협을 느끼다니 ! 선생님께 들었던 가슴 설레게 다가와야 할 찬란한 새시대의 약속은 실현될 가망도 기미도 건혀 보이지 않았다.
로베르트. 자네는 어째서 그렇게 미쳐버렸는가.
연애 문제를 둘러싼 질투 때문에 저질러지는 살인은 지구 어느곳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이 원초적으로 갖고 태어난 잔인함의 잔재이다. 재산을 둘러싼 살인도 또한 인간 본성의 한 표현이다.
그렇지 ? 내 말이 틀리는가. 그러나 자네에게는 훨씬 복잡한 배경이 있다. 자네는 자신의 어머니, 자신의 태생을 증오하고, 또 자네는 구걸하듯이 아버지의 애정을 애걸복걸하면서도 그에게 멸시만 당한다.
로베르트, 자네는 자네 어머니의 애정이 내게 쏠리는 것을 시기하고 있는 거야. 왜냐 하면, 유럽의 소설에 흔히 나오듯이 유산 상속인으로서의 자네의 권리가 내게로 돌아올까봐 자네는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지. 아마 자네 눈에는 나는 한 사람의 범죄자로밖에는 비치지 않을 걸세.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정직하게 살아오지 않았던가? 그리고 이웃에 대해서도. 나는 다만 내가 노력한 만큼만 갖기를 원할 뿐, 이상은 바라지 않는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필요가 없다. 나에게 있어서 행복한 인생이란 남에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고투 속에서 찾아내는 것이다.
내 가족과의 사이에 생겼던 벽이 내게 그렇게 가르쳐 주었다. 정말 가족이라는 것은 학교의 수업을 전부 합친 것보다 더 골치 아픈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다르삼, 너도 그렇다. 제발 그대가 얘기한 것이 거짓이기를 바란다. 네가 말하는 정도로 로베르트가 악인이 아니기를. 그러나 그대도 무엇인가 특별한 의도, 나쁜 속셈을 숨기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대, 누런 피부를 가진, 가느다란 눈의 뚱뚱보, 그대는 나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그대와 같이 말쑥한 옷차림을 한사람이 단순한 살인 청부업자일 수가 있는가? 메레마 가의 재산과 아이들이 갖고 싶은가?
그리고 사라와 미리암 자매, 부이사관.....그리고 어소시에이션 이론.......
나는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왜 나는 이토록 겁장이란 말인가?
제 8 장
사랑의 열병
이 얘기를 순서를 쫓아 진행시키기 위해서 경관에게 연행되어 내가 B시를 향해 우노크로모를 떠난 뒤 로베르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밝혀 두어야겠다.
아래의 얘기는 안네리스, 냐이, 다르삼, 그 밖의 사람들이 말한 것을 바탕으로 내가 재구성한 것이다.
내가 탄 마차가 새벽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안네리스는 마마를 끌어안고 울었다. (그녀가 어린애처럼 그렇게 울었는지 나는 모른다).
"조용히 해라 앤, 그는 틀림없이 무사할 거야."
냐이 온트솔로가 말했다.
"어째서 마마는 그가 끌려가는 것을 막지 않았어요?" 안네리스가 항의했다.
"법률의 대리인에개 반항할 수는 없는 거란다, 앤." "뒤를 쫓아가요, 마마."
"그럴 필요는 없다. 아직 이렇게 이른시간이고, 또 그가 B시로 연행되어 간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
"마마, 어떻게 하죠?"
"너 정말로 그를 사랑하고 있느냐? "
"그런 말로 나를 괴롭히지 마세요, 마마."
"그런데 마마에게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 아무것도 할 수가 없구나, 앤.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기다리는 일. 뿐이란다."
"어떻게 해 봐요, 마마. 어떻게 좀 해 보라고요."
"앤, 너는 밍케를 인형쯤으로 생각하고 있구나. 그는 인형이 아니야. 물론 나도 가만히 있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잠시 기다려 보자꾸나. 아직 이른 새벽이니까."
"마마는 나를 이대로 놓아둘 생각이에요? 나를 죽일 생각이에요 ? "
냐이는 곤혹스러워짐을 느꼈다. 결코 약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는 딸이 이런 고통을 호소하는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안네리스가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견딜 수 없어하고 있다는 것을 냐이는 알아챘다. 안네리스, 그 아이는 그녀의 사업상의 신뢰할 수 있는 동반자였다.
안네리스가 바라는 것, 안네리스가 자신의 권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어떤 일이라도 들어 주지 않으면 안된다고 냐이는 생각했다.
냐이는 딸을 데리고 가서 쉬게 하려고 했다. 안네리스는 그것을 물리치고 밍케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노라고 우겨댔다.
"그것은 억지다, 앤, 무리야. 그는 내일이나 모레가 되어야 돌아올 수 있단다." 안네리스는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마마는 점점 더 난감해졌다. 어릴 때부터 안네리스는 자기 생각을 좀처럼 드러내는 아이가 아니었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지난 몇주일간 자꾸만 요구를 했다. 모든 것이 밍케에 대한 것으로서, 그것은 단순한 요구가 아니라 재촉이고 강요였다. 항상 온순하고 얌전한 태도를 보이고 있던 가장 사랑하는 딸이 반항하기 시작한 것이다. 안네리스는 갖고 놀던 인형을 돌려 달라고 조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어머니밖에 매달릴 상대가 없었던 것이다. 냐이는 딸이 병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차츰 그녀는 딸의 행동에서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이 온순한 아이도 또한 아버지처럼 정신적 충격 때문에 좌절하는 것은 아닐까? 서서히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다르삼이 문과 창을 열기 위해서 왔다. 안네리스의 심상치 않은 모습에 놀랐으나, 힘으로도 칼로서도 어쩔수없는 문제 앞에서는 그도 무력했다. "그래, 이 것은 행정에 관한 문제야."
마마는 조용히 타일렀다.
"손으로 만져볼 수도 눈으로 볼 수도 없는 문제, 도깨비 같은 문제란 말이다."
문득 마마는 아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에 그가 경찰에 밀고 편지를 보먼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었다. 그녀는 로베르트를 의심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에게 따져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마마는 다르삼에게 말했다. "로베르트를 오라고 해요. "
얼마 뒤 눈을 비비면서 로베르트가 나타났다. 그는 잠자코 앞에 와서 섰다. 만일 다르삼이 없었다면 그는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었다.
로베르트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서서 눈에는 냉담한 무관심을 나타내고 있었다.
"누구에게 몇번 밀고의 편지를 보냈지 ?"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르삼이 다가서며, 강요했다.
"대답해요, 도련님. "
안네리스는 구원을 청하듯이 마마에게 매달린 채였다.
"밀고 편지 같은 것은 나하고는 전혀 관계 없어."
얼굴을 다르삼 쪽으로 향하고 로베르트는 대들 듯이 말했다. "내가 그따위 편지나 쓰는 사람으로 보이나?"
"냐이에게 대답하라구요, 내가 아니구요."
"그런 편지는 쓴 기억이 없어요. 물론 보번 적도 없고요." "알았다. 나는 항상 네 말을 믿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왜 너는 밍케를 미워하고 있지 ? 그가 너보다 우수하고 고등 교육을 받고 있으니까? "
"밍케 따위는 관심 없어요. 그 녀석은 원주민에 불과하니까요."
"그가 원주민이니까 싫어한다는 말이구나."
"그럼, 나의 유럽인 피는 어떻게 되는 거죠?"
로베르트가 덤벼들었다.
"알겠다. 밍케는 원주민, 너는 유럽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 다만 그 이유만으로 너는 밍케를 싫어한다는 말이구나. 알겠다. 내게는 너를 교육시키고 키워 갈 힘이 없다. 네게 그것을 할 수 있는 것은 유럽인뿐일 테니까. 나는, 즉 네 어머니이고원주민인 나는 유럽인의 피가 흐르고 있는 사람이 분명히 원주민보다 현명하고 교양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너는 틀림없이 이해할 수 있을 게다. 절반은 원주민의 피가 흐르고 있는 너에게 부탁한다. 지금 슬라바야 경찰서까지 가서 밍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을 듣고 오너라. 다르삼은 할 수가 없는 일이니까. 나도 마찬가지다. 일이 없기 때문에 갈 수가 없다. 너는 네덜란드어에 능숙하고 읽기 쓰기도 할 수 있으니까. 네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보고 싶구나. 말을 타고 갔다 오너라."
로베르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르삼이 명했다.
"자, 가세요, 도련님."
로베르트 메레마는 대답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려 방 안으로 들어가서는 두 번 다시 나오지 않았다. "경고를 해 주세요, 다르삼."
마마의 명령을 받은 다르삼은 로베르트의 뒤를 쫓아 방으로 들어갔다.
날이 서서히 밝아오고 있었다. 로베르트는 마두라의 칼잡이 다르삼을 따라 방에서 나와 뒤쪽에 있는 마굿간으로 향했다. 그는 승마 바지에 장화를 신고 손에는 가죽 채찍이 들려져 있었다.
"너는 이제 그만 들어가 쉬거라, 앤." 하고 냐이가 말했다.
"싫어요."
안네리스의 체온을 재 보니 열이 올라 있었다. 틀림없이 병에 걸린 것 같았다. 냐이는 걱정이었다.
"다르삼, 사무실에 소파를 준비해 주새요. 일을 하면서 앤을 돌볼 수 있게. 담요도 잊지 말아요. 그리고 마르디네 의사 선생님을 불러 와요."
그렇게 말하고 냐이는 딸을 의자에 앉혔다,
"마음을 굳게 갖고 참는 거야, 앤. 너, 정말로 그를 사랑하고 있니?"
"마마, 나의 마마 !"
안네리스는 속삭였다.
"앤, 마마는 네가 그를 사랑하는 것을 막을 생각은 없단다. 그런 짓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내가 좋은 때, 그리고 그가 바랄 때, 언제든지 너는 그와 결혼해도 괜찮다. 다만 지금은 참고 견디는 거야."
눈을 감고 안네리스는 어머니를 불렀다.
"마마, 마마의 뺨은 어디 있어요? 이리로 오세요. 키스를 할수 있도록. "
그녀는 어머니의 뺨에 키스를 했다.
"하지만 병이 나면 안돼. 네가 병이 들면 도대채 누가 마마를 도와주겠니 ? 마마가 혼자서 말처럼 일하는 것을 보고 혼자 누워 있을 수 있겠니 ? "
"언제든지 마마를 도울께요."
"그러니까 이렇게 병이 나면 안되는 거야."
"나는 아프기는 싫어요."
"점점 더 몸이 뜨거워지는구나. 이럴 때일수록 안정해야 한단다. 이런 문제가 생겼을 때는 여러 가지로 손을 써 보고,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참고 기다리는 수밖에는 없단다."
다르삼이 혼자서 소파를 사무실로 옮겨 왔다. 안네리스는 로베르트가 출발하는 것을 보기 건에는 사무실로 옮겨 가지 않겠다고 고집했다. 로베르트의 모습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로베르트가 어떻게 됐나 보고 와요, 다르삼 ! "
마마가 소리 쳤다.
다르삼이 뒤곁으로 달려갔다. 10분뒤 키가 큰 잘 생긴 젊은이가 뒤로 돌아보지 않고 똑바로 말을 타고 달려 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15분 뒤 마르티네 의사를 데리러 다르삼이 마차를 몰고갔다.
냐이는 가까스로 안네리스를 달래서 사무실로 옮겼다. 그리고 식초와 양파 즙을 적신 천을 딸의 이마에 얹었다. "앤, 이제 한잠 자거라. 조금 있으면 의사 선생님이 오고 로베르트도 좋은 소식을 갖고 올 테니까." 냐이는 사무실 구석으로 가서 수도를 틀어 얼굴을 씻고 머리를 빗었다.
담요 밑에서 안네리스가 속삭듯이 물었다. "마마, 마마도 그를 좋아하세요?"
"물론 좋아한단다, 앤. 네가 좋아하는 데 마마가 싫을 턱이 없지 않니 ? 그런 아들을 가진 부모는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여자로서 정식으로 그의 아내가 되는 사람은 얼마나 자랑스러울까, 마마도 그를 사위로 삼으면 자랑스러울 것 같구나."
"마마, 나의 마마 !"
"그러니까 너는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도 나를 좋아하고 있을까요? "
"너에게 반하지 않을 젊은이가 있다고 생각하느냐? 순종도 혼혈도 쁘리부미도 모두 반할 게다. 마마는 잘 알고 있어, 앤. 너만큼 예쁜 처녀는 이 세상에 없다. 자, 이제 자려무나.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눈을 감아라." "마마, 만일 그의 부모가 반대한다면 어떻게 하지요?" "아무 생각도 하지 말라고 그랬잖니 ? 마마가 모든 것이 잘 되도록 돌보아 줄테니까 염려 마라. 가만 있거라. 우유를 가져올께. 너는 우선 건강해져야 한다. 네가 수척해져서 보기 싫어지면 밍케가 돌아와서 뭐라고 하겠니 ? 아무리 미인이라도 병에 걸리면 매력이 없어진단다."
냐이는 사무실에서 큰 소리로 부엌에 있는 하녀를 불렸다.
얼마 뒤 하녀가 뜨거운 우유를 갖고 들어왔다.
"자, 마셔라. 마마는 목욕을 하고 오겠다. 마시고 나서는 자는거야, 앤."
냐이는 목욕을 하러 갔다. 오는 길에 그녀는 더운 물과 타올을 가져와서 딸의 몸을 닦아 주었다. 안네리스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마르티네 의사가 와서 간단히 진찰한 다음 치료를 했다. 그는 정중한 태도에 웃음이 끊이지 않는 조용한 40대의 신사였다. 다르삼이 마르티네 의사를 위해 서둘러서 사무실에 아침식사를 준비했다. 그는 냐이와 식사를 했다. "저녁때 다시 한번 오겠읍니다. 잠들기 전에 부드럽고 소화가 잘 되는 음식을 먹이십시오. 시끄러운 소리는 금물입니다. 조용하게 해 줘야 합니다. 좋아지려면 수면을 많이 취하는 길밖에는 없읍니다. 그녀의 방으로 옮겨 주십시오. 사무실에 두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싫다면 거실에 소파를 옮기고, 그곳에서 쉬게 해도 괜찮겠지요. 창과 문은 꼭 닫아 두십시오." 그런데 로베르트 메레마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래에 기록하는 그에 관한 사건은 바이빈졸프 농장 사람들의 얘기, 그리고 나중에 법정에서의 증인 및 피고인의 진술에 의거하여 내가 구성한 것이다.
마굿간을 나온 로베르트 메레마는 큰길로 말을 달렸다, 그리고는 슬라바야 방향인 오른쪽으로 구부러졌다. 큰길로 나온 그는 말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고는 아침 경치를 구경하면서 말을 천천히 몰았다.
그는 아직도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어디서 굴러온 말뼈다귀인지도 모르는 밍케 때문에 이렇게 아침 일찍 일어나서 경찰서까지 심부름을 간다. 무엇 때문인가? 밍케 따위는 영원히 사라져버리는 것이 좋다. 그가 없어진다고 해서 세상이 가난해지고 좀 더 지독한 고통에 시달리는 것도 아니다. 어디서인지도 모르게 바람에 실려온 그 한 알의 먼지는 도대체 언제까지 내 집에 버티고 있으려는 것일까? 아직 아침 여물을 못얻어 먹은 탓인지 말은 힘없이 걷고 있었다. 그것은 로베르트도 역시 마친가지여서 그도 아침식사를 못얻어 먹은 채 심부름을 나온 것이다.
을씨년스러운 아침이었다. 보통때 같으면 끊일 줄 모르고 긴 열을 이루며 우노크로모에서 드럼통으로 석유를 운반하는 화물 마차의 대열이 아직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었다. 띄엄띄엄 마을에서 온 행상인들만이 슬라바야 시장으로 농작물을 짊어지고 줄을 지어 걷고 있었다.
말은 느린 발걸음으로 50미터 가량 걸어갔다. 로베르트의 생각은 두서없이 이리저리로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그때 길 오른쪽에 있는 생나무 울타리 너머에서 누군가가 인사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십니까, 시뇨 로베르트."
로베르트는 말을 세우고 울타리 너머를 들여다보았다.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중국인 남자가 한 사람 붙임성 있게 그를 보고 웃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남자는 머리 숱이 거의 없어서 변발도 매우 가늘었다. 웃으면 볼이 치켜 올라가서 가는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안녕하십니까, 시뇨?"
로베르트가 대답을 망설이고 있는 것을 보고 중국인은 인사를 되풀이 했다.
"안녕하세요, 바바 아촌 ! "
로베르트는 공손히 인사를 하고 빙긋이 웃으며 목례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냐이는 건강하신가요?"
"건강하십니다. 바바의 얼굴을 보는 것은 이것이 처음입니다. 지금까지 어디에 있었읍니까?"
"언제나 일이 너무 바빠서요. 투앙은 어떠십니까?"
"잘 있읍니다."
"오랫동안 못뵈었읍니다."
"항상 일 때문에 바쁘셔서요. 오늘은 문과 창을 열어놓고 있는 것 같은데, 무슨 일이 있읍니까? 특별한 일이라도?" "오늘은 좋은 날입니다. 즐기는 날이지요. 잠깐 들러 가시지요."
아촌의 웃는 얼굴은 그날 아침 로베르트의 우울한 기분을 달래 주고, 또 중국인이나 중국풍에 관해 그가 품고 있던 혐오감도 잊게 했다.
그때까지의 그는 중국인과 사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른 때였다면 인사를 해도 대답조차 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고, 더구나 중국인의 뜰 안이나 집에 들어간다는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무엇인가 재미있는 일이 있을 것 같아 몹시 흥미를 느꼈다.
"글쎄요. 그럼, 잠깐 들어가 볼까요?"
로베르트는 그렇게 말하고 말의 방향을 바꿔 그 이웃사람의 마당으로 들어갔다. 그는 지금까지 바바 아촌은 알지도 못했고, 단지 이 사람이 그가 아닐까 하고 추측한 것에 불과했다. 말에서 내리려고 하자 중국인은 달려와서 로베르트를 맞았다. 중국인은 손뼉을 쳐서 하인을 부른 다음 로베르트의 말을 뒤곁으로 끌어가게 했다.
보통때는 문과 창이 닫힌 채로 있는 건물 쪽으로 로베르트와 아촌은 마당의 자갈길을 나란히 걸어갔다. 두 사람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정면에 있는 계단은 모두 야자 열매의 섬유로 짠 발로 가려 있었다. 베란다가 없는 정면의 대합실은 굉장히 넓고 조각된 디크 의자 세트가 몇개 놓여 있었다. 벽에는 중국풍의 붉은 화문자(花文字)가 붙은 여러 가지 크기의 거울이 장식되어 있었다. 건물의 중앙부에는 계단이 통하고 있었는데, 그 출입구는 투명한 조각을 아로새진 목재 간막이가 가로막고 있었다. 또한 아무것도 꽂지 않은 커다란 도자기 화병이 몇개씩 방을 장식하고 있었는데, 그것들은 용이 조각된 각대위에 서 있었다.
카페트는 깔려 있지 않았다. 빌헬미나 여왕의 초상도 없었고, 꽃은 대합실의 어느 곳에도 보이지 않았다. 아촌은 그를 대나무 의자로 안내했다. 그것은 세 개의 의자와 하나의 긴의자가 세트로 되어 있고, 앞뜰 가까이에 놓여 있었다.
아촌과 로베르트는 그곳에 마주 보고 앉았다.
"오랜 이웃끼리인데, 지금까지 한 번도 찾아 주시지 않다니 ?"
"항상 문과 창이 닫혀 있는데, 어떻게 방문을 하겠읍니까?"
"아닙니다. 왜 이 집을 닫아 두겠읍니까?"
"문이 열린 것을 본 것은 오늘이 처음입니다."
"이처럼 열려 있을 때는 반드시 나는 이 집에 있읍니다."
"그렇지 않을 때는 어느 집에 계십니까? "
"어느 집이냐구요?"
아촌은 유쾌한 듯이 웃었다.
"무엇을 마시겠읍니까? 보통 때는 무엇을? 위스키, 브랜디, 코냑, 진, 배갈, 아니면 보통 술입니까? 소흥주(중국 소흥 지방에서 나는 술)는 어떻습니까? 백색, 황색, 뜨거운 것, 찬 것 ? 아니면 마라가 포도주는요? "
"하지만 바바 아촌씨, 아직 이른 아침입니다." "아침이면 어떻습니까? 땅콩을 안주로 한 잔 하시지요."
"그럼, 기꺼이 들겠읍니다."
"시뇨와 같은 손님을 맞을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잘생기고 사나이답고 적극적이고 젊고..... 시뇨는 모든 조건을 다 갖추고 있읍니다. 더구나 돈 많은 부자에다......"
아촌은 정면을 향한 채 머리 한번 움직이지 않고 황제처럼 오만한 태도로 손뼉을 쳤다. 칸막이 그늘에서 소매가 없는 긴 드레스를 입은 중국 여인이 한 사람 나타났다. 드레스 옆은 깊이 갈라져 있어서 넓적다리의 일부가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머리는 두 갈래로 따고 있었다. 로베르트는 눈처럼 흰 피부를 한 그 여인을 보고 눈이 동그레졌다. 여인이 바로 옆에 와서 탁자에 위스키 병과 유리컵, 땅콩 볶은 것을 올려 놓을 때까지 그의 눈은 드레스의 갈라진 곳에 못 박혀 있었다.
아촌이 중국어로 무어라고 말하자, 여인은 재빨리 로베르트의 앞에 등을 똑바로 펴고 섰다.
"자, 이 여자를 평가해 주십시오."
로베르트는 부끄러운 듯이 어물어물했다. 그는 귀신에게 홀리기라도 한 듯이 눈과 얼굴을 엉뚱한 곳에 떨구고 있었다.
"밍 호아라고 합니다. 마음에 안드십니까?"
아촌이 그렇게 말하고 헛기침을 했다.
"홍콩에서 온 지 며칠 안됩니다."
밍 호아는 몸을 굽혀 쟁반을 내려놓고 로베르트 옆 의자에 앉았다.
"유감이지만 밍 호아는 말레이어를 할 줄 모릅니다. 네덜란드어나 자바어도 못하구요. 중국어밖에는 모릅니다. 어쩔수가 없군요. 시뇨는 줄곧 침묵만 지키고 있으니 어떻게 된 겁니까? 그녀는 시뇨 옆에 있읍니다. 자 자,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는 투의 얼굴은 하지 마시고. 바바 앞에서는 부끄러워 할필요가 없어요." 밍 호아가 위스키 잔을 로베르트의 입술에 갖다대었고, 그는 무의식 속에서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들었다.
아촌은 일부러 상냥한 웃음을 지으며 그의 용기를 북돋아 주려고 했다.
밍 호아는 고개를 쳐들고 얼굴을 실룩거리며 간드러지고 요염하게 웃었다. 열린 입술로 진주와 같은 이가 드러나 보였는데, 하나만이 고르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높은소리로 쉬지 않고 빠르게 무엇인가 말했다. 로베르트는 그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여인이 가까이 다가 앉자 그는 점점 더 침착성을 잃어갔다. 로베르트가 새파랗게 질려서 손에 든 컵을 떨어뜨릴 뻔하자 밍호아는 컵을 들어 그 키 큰 젊은이의 입술에 다시 갖다댔다. 로베르트는 서슬지 않고 단숨에 들이마셨다. 그러고 갑자기 콜록거렸다. 알콜을 입에 대는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위스키의 물방울이 아촌과 밍 호아에게 튀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화도 내지 않고 유쾌하게 웃기만 했다. "자, 다시 한 잔."
밍 호아가 다시 위스키를 따라서 손님에게 마시도록 권했다. 그러나 젊은 손님은 거절하고 입을 손수건으로 닦았다. 그는 "설마 위스키를 처음 마시는 듯한 흉내를 내는 것은 아니겠지요?"
주인이 놀려댔다.
"위스키도 싫다, 밍 호아도 싫다 이겁니까?"
그렇게 말하고 그는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여인이 일어나서 칸막이 뒤로 모습을 감추었다. 아촌이 다시 손뼉을 쳤다. 이번에는 화려한 무늬를 새긴 비단 바지와 셔츠를 입은 다른 중국 여인이 나타났다.
여인은 과자를 담은 대나무 쟁반을 돌고 종종걸음으로 다가와서 밍 호아가 남기고 간 쟁반 위에 겹쳐서 올려놓았다. 여인은 로베르트에게 인사를 하고 요염하게 미소를 지었다. 밍 호아와 마찬가지로 그녀도 루즈를 칠하고 있었다. 과자를 내려 놓기 진에 밍 혹아가 다시 나타나 물이 든 유리컵을 얹은 유리 쟁반을 로베르트 앞에 놓았다. 그리고 조금 전에 앉았던 곳에 앉았다.
"자, 이번에는 양손에 꽃입니다. 어느 쪽이 매력적입니까? 사양하지 마세요. 이쪽은 셰셰입니다."
건물 앞에 마차가 도착하기 시작했다. 손님들은 당당하게 안으로 들어왔다.
어떤 사람은 중국옷을, 어떤 사람은 파자마를 입고 있었으며, 모두가 남자들로 변발을 하고 있었다. 주인이 있는지 없는지 신경을 쓰는 기색도 없이, 그들은 의자에 앉아 잡담을 하거나 가래침을 뱉거나 도박을 시작했다. "아무래도 어느 쪽도 시뇨의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군요." 주인은 그렇개 말하고 저쪽으로 가서 손님들의 접대를 하도록 두 여인에게 손짓했다.
"셰셰도 마음에 안드십니까?"
그는 일어나서 셰셰를 다시 불렀다.
셰셰가 다시 돌아오자, 아촌은 그녀를 잡아 로베르트 옆에 앉혔다.
"시뇨는 이쪽을 좋아하지요, 아마. 눈치가 없어서......" 로베르트는 여전히 우물거리며 욕망과 두려움 사이에서 망설이고 있는 것 같았다. 주인은 다시 웃음을 띠고 당황해하는 젊은이를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다른 손님들은 구석에 있는 그들 세 사람에게는 전혀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다.
셰셰는 빠른 말로 무엇인가를 떠들어대며 로베르트를 설득하려고 들었고, 그의 셔츠와 벨트의 위치를 고쳐 주며 셔츠의 단추를 쏜끝으로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주인은 여전히 싱글싱글 웃으면서 바라보고 있었다. 로베르트는 점점 더 위축되어 갔다. 이윽고 두 사람의 중국인은 큰 소리로 무엇인가 말을 주고 받았다. 로베르트는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알겠읍니다. 시뇨는 두 사람 모두 마음에 안드신다는 말이군요."
셰셰가 일어나서 칸막이 뒤로 사라지고, 아촌은 손바닥을 네번 두드렸다.
몹시 아쉬운 듯이 로베르트는 머리를 숙였다.
이번에는 간막이 뒤에서 커다란 꽃무늬를 그린 기모노를 입은 일본 여인이 나타났다.
이 여인은 얻굴을 붉히며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둥근 얼굴로 입술에 루즈를 칠하고 줄곧 웃음을 띠고 있었다. 그녀는 그대로 아촌의 옆에 앉았다. 웃으니까 금니가 한 개 보였다. "자, 또 다른 아가씨를 불렀읍니다."
후회를 되풀이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한 것이리라. 로베르트는 용기를 내어 일본 여인에게 시선을 보냈다. "여기는 마이꼬양. 2개월 건에 일본에서 왔읍니다." 아촌의 소개가 끝나기도 건에 마이꼬는 빠르고 높은 어조의 일본 말로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로베르트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는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아촌은 손으로 여인의 입을 막고 이렇게 말했다.
"이 여자는 내 전용입니다만, 시뇨가 마음에 드신다면 좋을대로 해도 괜찮습니다. 이쪽에 앉으세요, 마이꼬 옆에요."
로베르트는 주인의 지팡이에 겁먹은 개처럼 일어다서 조심스럽게 긴 의자로 옮겨 앉아 마이꼬를 아촌과 사이에 두고 앉게 되었다.
"그럼, 시뇨는 이 여자로 정했군요? 마이꼬로? 좋습니다."
아촌은 알았다는 듯이 웃었다.
"그렇다면 내가 자리를 비켜 드리지요. 뒤는 시뇨에게 맡기겠읍니다."
로베르트는 그가 자리에서 멀어져 가는 것을 눈으로 쫓았다.
아촌은 차츰 수가 늘어나 카드나 당구, 마작에 열중하고 있는 손님들 틈에 끼었다. 그는 테이블과 테이블 사이를 천천히 돌아다니며 살피다가, 다시 대나무 의자가 있는 곳으로 돌아와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로베르트와 마이꼬 앞에 와서 섰다.
"그래요, 꽤나 힘들지요? 마이꼬는 말레이어를 모릅니다. 물론 네덜란드어도 모르지요. 하지만 시뇨가 지금까지 젊은 일본 여자와 경험이 없다니,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읍니까? 쿤반준푼에 가 보신 적이 없읍니까?"
"구경하는 것조차 이것이 처음입니다."
로베르트는 가까스로 말을 할 수가 있었다.
"너무나 아깝습니다. 젊은 부호가 일본 여자를 모르다니 말도 안됩니다. 우리들 같은 중국인 유곽에는 대체로 일본 여자가 있읍니다. 정말 안타깝군요. 유곽에 가 본 적이 없다고요? 없다면 정말 손해를 보신 것입니다. 일본 여자는 최고입니다. 경험이 없다니 참으로 안됐군요. 자, 이쪽으로......"
아촌은 황제처럼 과장된 몸집으로 재촉했다. 세 사람은 걷기 시작했다. 바바 아촌이 맨앞에 서고, 그 다음에 로베르트, 그리고 마이꼬가 그 뒤를 따랐다. 아촌이 걸을 때마다 변발이 흔들려 그의 파자마 등을 스쳤다. 세 사람은 칸막이 옆을 빠져나갔다. 마이꼬는 로베르트의 흥미를 끌기 위해 계속 콧소리를 내며 종종 걸음을 쳤다. 주위에서 향수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들은 층계로 들어섰다. 좌우 양쪽으로 방들이 늘어서 있고, 벽 장식이 있을 뿐 가구류는 하나도 없었다. 여기저기서 중국 여인들이 몇 사람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모두가 깨끗한 화장과 몸치장을 했고 아촌을 보고서는 절을 했다. 뒤이어 로베르트에게도 절을 했으나, 마이꼬에게는 하지 않았다. 로베르트는 한 사람 한 사람 주의해 보았다. 키가 큰 여자, 작은 여자, 뚱뚱한 여자, 마른 여자, 육감적인 여자, 궁상맞게 생긴 여자 ---
모두들 루즈를 칠하고 생글거리거나 또는 큰 소리로 웃고 있었다.
"이러한 미녀들은 삶의 위안거리입니다. 시뇨가 중국 아가씨를 좋아하지 않는다니 유감이로군요."
아촌은 놀려대듯이 웃었다.
"방은 모두 마주보고 있읍니다. 자물쇠만 잠기지 않았으면 어떤 방을 써도 좋습니다." 그는 어떤 방문을 열고 내부를 보여 주었다. 가구류의 호화스러움이라든지 청결함이 로베르트의 방에 못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방이 약간 좁은 것을 빼놓고는 침대 등의 비품은 그의 것보다 훌륭했다.
"좋으시다면 시뇨를 위해 환제의 방, 영광의 방을 준비하도록 하겠읍니다."
아촌은 다시 걸어가더니 다른 방문을 열었다.
"여기가 황제의 방입니다. 이곳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마요르님뿐인데, 그분은 지금 홍콩에 출장 중이십니다." 방 안에 놓인 가구는 모두 새 것으로, 로베르트로서는 본 적도 없었고 어느 나라식 가구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문 앞에서 아촌은 손님에게 소감을 물었다. 로베르트는 그 훌륭함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밖에 아무것도 할 말이 없었다. 아촌이 안으로 들어가고 로베르트와 마이꼬도 따라 들어갔다. "최고급 가구입니다. 티크재를 사용하여 프랑스 식으로 만들었지요. 아뭏든 마요르님은 프랑스식을 좋아해서요. 유명한 프랑스의 장인이 만든 것입니다. 이 집에서 가장 비싼 가구들입니다. 저쪽 구석에 있는 작은 테이블에는 위스키와 사케(일본식 정종)가 있으니까 시뇨가 좋아하시는 것으로 드십시오." 아촌은 가구를 둘려보며 성명했다. "이런 조각을 한 침대는 보다 쾌적하게 잠을 잘 수가 있읍니다. 그렇지, 마이꼬?" 마이꼬는 허리를 굽히고 까치처럼 빠른 말투로 무어라고 대꾸를 했다.
"그럼, 시뇨, 천천히 즐기십시오 ! " 로베르트는 주인이 방에서 나가는 것을 눈으로 쫓으며 그가 문밖으로 사라질 때까지 변발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제9장
우노크로모의 유곽
이 장도 역시 시간적인 계속성을 중시하고 싶기 때문에, 나중에 법정에서 얻은 자료를 바탕으로 해서 쓴 것이다. 그 대부분은 선서 통역을 통해서 마이꼬가 진술하고, 그것을 내가 다시 기록한 것이다.
나(마이꼬)는 일본의 나고야 출신으로, 창녀로서 홍콩으로 건너왔읍니다. 나의 주인은 일본인이었으나, 그는 그 뒤 역시 홍콩에서 유곽을 경영하고 있던 중국인에게 나를 팔았읍니다. 그 두 번째 주인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는 기억하고 있지 못합니다. 그 밑에서 일했던 기간은 발음이 어려운 그의 이름을 기억하기에는 너무나 짧은 기간이었읍니다.
그는 또 다른 경영자에게 나를 팔았던 것입니다. 그도 역시 중국인으로, 나는 그렇게 해서 싱가폴로 배를 타고 끌려갔읍니다. 세 번째 주인에 대해서는 밍이라는 이름이었다는 것밖에는 모릅니다. 그는 나에 대하여 매우 만족했고 좋아했읍니다. 왜냐 하면, 나로 인해서 그가 큰 돈을 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네 번째 주인은 싱가폴의 일본인이었읍니다. 그는 나를 촌에 넣는데 상당한 열의를 보였읍니다. 꽤나 오랫 동안 매매 교섭이 있은 뒤, 결국 나는 싱가폴 달러로 75달러라는, 싱가폴의 일본인 공장에 붙여진 최고가로 그에게 팔려갔읍니다.
내 몸에 슨다 출신의 공창보다 높은 가격이 붙은 것을 나는 몹시 자랑으로 생각했읍니다. 일반적으로 동남 아시아의 화류계에서는 슨다인 창녀가 가장 값비싸고, 가장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나의 긍지도 오래 가지는 못했읍니다. 겨우 5개월이었읍니다. 나의 주인인 그 일본인이 얼마 뒤 나를 지독하게 미워하기 시작했읍니다.
종종 나는 그에게 매를 맞았음니다. 담뱃불로 고문당한 일도 있읍니다. 원인은 내 손님이 차츰 줄어들어 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원인은 가장 이름 있는 창녀에게도 여지 없이 찾아드는 위험, 즉 매독에 내가 걸렸기 때문입니다.
내가 걸린 것은 보통 매독이 아니라, 이 저주받은 창녀의 세계에서 '비르마'라고 불리는 매독이었읍니다.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 나는 모릅니다,
그 성병은 치료가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남성 쪽이 더욱 고통이 심하고 빨리 파멸해 버립니다. 여성은 상당히 오랫동안 자각 증상이 없읍니다.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주인은 20달러로 나를 중국인에게 팔았읍니다. 그것이 나의 다섯 번째 주인으로, 나는 그를 따라 부타위로 갔읍니다.
매매가 이루어지기 건에 네 번째 주인은 나를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기절할 때까지 나의 가슴과 허리를 두들겨 팼읍니다.
의식이 회복되자 벌겨벗겨서 몸의 여러 군데에 지압을 했읍니다. 그렇게 해서 성욕을 없애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 일본인은 나까가와라는 이름이었읍니다.
이튿날 나는 새로운 다섯 번째 주인에게 인도되었읍니다. 새로운 주인에게 팔려간 첫날에 주인은 내 몸을 시험하기 위해서 요구했읍니다. 나는 거절했읍니다. 만약 내가 저주스러운 병에 걸렸다는 것을 그가 알게 되면, 틀림없이 나는 다시 폭력을 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살해당하고 말 것입니다. 창녀가 주인에게 살해당해서 시체가 토막나거나 어딘지 모르게 파묻혀 버리는 일은 결코 드문 일이 아니었읍니다. 창녀라는 것은 보호해 주는 사람이 없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더군다나 나는 몸이 쇠약해져서 성욕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한 징후를 깨닫고 있었읍니다. 나는 주인에게 부탁해서 중국인 지압사를 불러 달라고 했읍니다.
세 번 가량 지압사의 치료를 받고 나의 성욕은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읍니다. 그렇지만 나는 주인이 요구하는 것을 여전히 거절했읍니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단념해 주었읍니다.
3개월쯤 지나자 내가 병을 갖고 있다는 것을 주인은 겨우 눈치챈 것 같았읍니다. 그는 화를 냈읍니다. 나는 중국어를 모르기 때문에 그의 안색과 목소리로 그럴 것이라고 판단했을 뿐입니다. 손님은 차츰 줄어들기 시작했읍니다. 사람들은 나를 멀리했고, 주인의 짜증은 더해가기만 했읍니다. 낮이나 밤이나 나는 그가 폭력을 휘두르지 않도록 빌었옵니다. 아니 저축해 둔 돈을 그에게 빼앗기지만 않는다면 때리고 차는 것쯤은 참을 수 있었읍니다.
나는 일본으로 돌아가 나까다니라는 남자와 결혼하게 되기를 희망하고 있었옵니다. 그는 내가 저축한 돈을 갖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주인은 결국 나에게 폭력을 휘두르거나 내 저금을 빼앗거나 하는 짓은 하지 않았옵니다. 내가 싱가폴 달러로 10달러에 가까운 가격으로 바바 아촌에게 양도되었을 때, 주인은 내게 반 길더의 전별금을 주면서 서투른 일본어로 이렇게 말했읍니다.
"사실은 나는 너를 첩으로 삼고 싶었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몹시 후회를 했읍니다. 첩은 창녀보다는 편합니다. 그런대로 보통 생활을 할 수 있고, 아내가 되는 여성에게 지참금을 기대하는 일본의 젊은 남성의 아내보다는 자유롭습니다.
하지만 그 저주스러운 병이 나의 몸 속에 자리잡고 있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읍니다.
바바 아촌은 내 몸을 강력하게 요구했읍니다. 나는 새로운 제난이 두려워서 필사적으로 그것을 거부했읍니다. 여기서 또 다시 비밀이 드러난다면, 아마 내 몸값은 5달러 정도로 떨어지고, 나는 이국 땅의 쓰레기로 전락해 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지압사를 고용해 주도록 부탁했읍니다.
중국인 지압사는 저녁때 지압 치료를 하고, 그것을 열 번 정도 계속하면 한 달 안으로 치료할 수 있다고 장담했읍니다. 그러나 바바는 비싼 돈이 드는 중국인의 지압 치료를 그렇게 오랫동안 계속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읍니다. 나는 단 한번 시험적인 지압 치료를 받았을 뿐입니다.
슬라바야로 떠나기 전까지는 나는 더 이상 주인의 요구를 거절할 구실이 없었읍니다. 우노크로모의 그의 유곽에 살면서 가장좋은 방을 배당받을 때까지 나는 완전히 그의 전유물로서 그 한 사람만을 상대했읍니다.
우노크로모의 유곽에 있을 때, 그는 거의 내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고, 모두 열네 개나 되는 다른 방에는 가지 않았읍니다. 바바에게는 내 병이 전염되지 않는 모양이었읍니다. 그 때문에 나는 안심하고 기뻐했읍니다. 확실히 특정한 남성은 화류병에 대해 면역성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면 그 단 한번의 지압 치료가 효과를 발휘하여, 병새를 약화시켰기 때문에 전염되지 않은 것일까요? 그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읍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내 몸값도 다시 올라갈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누가 그렇개 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겠읍니까? 만약 바바가 나를 첩으로 삼겠다고 하면, 나는 감사하고 첩으로서 열심히 그를 섬길 생각이었읍니다.
만일 그렇게 되지 않아도 나머지 11개월이면 기일이 만료되어 낙적되기 때문에 나는 귀국할 예정이었읍니다. 적어도 나는 이미 마지막 주인에게 나 자신의 몸값을 치를만한 금전적 여유를 충분히 갖고 있었읍니다.
두 달이 지났음니다. 바바도 역시 비르마 매독에 걸렸다는 것이 판명된 것은 그 무렵입니다.
그는 그 기묘한 병에 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읍니다. 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고 나서도 그는 직접 나를 탓하는 일은 없었읍니다. 왜냐 하면, 그는 나 이외의 여자들도 많이 상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나와 그는 서로 건혀 말이 통하지 않았다는 이유도 있읍니다.
그가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내가 안 것은, 어느 날 열네 명의 창부 -
--여러 나라 국적의 여성들이었다--- 들을 발가벗겨서 자기 앞에 새워 놓고 그녀들의 병에 대해 한 사람씩 문책을 할 때였읍니다.
그는 오른손에 채찍을 들고, 왼손으로 그 불운한 여성들의 질에서 나오는 냄새나는 열을 쟀읍니다.
일본인인 나는 아무에게도 의심을 받지 않고 넘어갔읍니다.
이 지구상의 화류계에서 일본인 창녀는 항상 가장 청결하고 건강관리에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어서, 그것이 병을 갖고 있지 않다는 보증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 때문에 나는 검사를 받지 않을 수가 있었읍니다. 세 사람이 끌려나왔읍니다. 아촌은 나를 제외한 나머지 여자들에게 세 사람을 끈으로 묶으라고 명령했읍니다. 입에는 재갈이 물려졌읍니다.
아촌 자신이 직접 가죽 채찍으로 그녀들의 몸을 때렸으나, 재갈이 물려진 새 사람의 입에서는 소리가 새어나오지 않았읍니다. 세 사람은 나의 희생이 된 것입니다, 나는 잠자코 있었읍니다, 창녀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고된 것입니다. 성병에 걸리면 당장 보고를 하지 않으면 안되고, 보고를 하면 했다고 해서 주인에게 당장 혼이 납니다.
가장 현명한 것은 주인이 독자적인 방법으로 병을 알아낼 때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화를 피할 수는 없읍니다.
매를 맞은 상처가 아물자, 새 사람의 창녀는 싱가폴의 중개인에게 팔려 메단으로 끌려갔읍니다.
나는 변함 없이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은 채 아촌의 유곽에 있었읍니다. 그때까지 나는 바바 한 사람만을 상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고되지는 않았읍니다.
건강이 좋아지고 생기가 되살아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읍니다. 그리고 아름다움도 말입니다.
대부분의 중국인 갑부들은 자신의 기루, 유곽을 갖고 있읍니다. 그리고 홍콩에서나 싱가폴에서나 또는 부타위나 슬라바야에서도 그들의 습관은 같습니다.
즉 그들은 차례를 전하고 각자가 소유하는 유곽을 서로 방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어느 날 바바 아촌의 유팍에 그 당번이 돌아왔던 것입니다.
아침 일찍 바바가 손뼉을 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 왔읍니다. 나는 대합실로 나갔읍니다. 그날은 아칙부터 도박이 예정되어 있었고, 여자와 함께 노는 것은 저녁때부터라는 규칙이 있었읍니다.
손님이 이미 몇 사람 도착해 대합실에서 카드와 마각, 당구에 열중하고 있었읍니다. 나는 몹시 불안했읍니다. 우노크로모의 유곽이 당번인 그 날 바바는 어쩌면 그의 손님에게 나를 제공한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어쨌든 일본 여성은 그들에게는 인기가 있었읍니다. 바바가 나를 제공한다는 말을 꺼내기만하면 나는 도대체 몇 사람의 손님을 상대해야 할지 모릅니다.
바바가 있는 곳에 가 보았더니, 예상했던대로 그는 어떤 손님을 접대하라고 내게 명령했읍니다. 그 손닌은 키가 크고 건강하고 우람하고 잘 생긴 매력적인 유럽인의 피를 받은 젊은이였읍니다.
이름은 로베르트. 첫눈에 보아도 그다지 경험이 없는 픗나기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읍니다. 그의 장래를 생각하니까 나는 몹시 마음이 아팠읍니다. 만약 그가 내 몸을 요구하게 되면, 그토록 젊은 나이에 그는 저주스러운 병을 나한테 물려받는 신세가 되는것입니다.
그것을 뻔히 알면서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그는 평생 그 병을 짊어지고 살게 되고, 그 병이 원인이 되어 불구가 되거나 젊은 나이에 죽을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바바는 진담일까 농담을 하는 것일까? 나는 그의 표정을 살폈읍니다, 나를 로베르트에게 제공하는 것을 애석해하는 것 같지는 않았읍니다.
순간 나는 병을 옮긴 것이 나라는 것을 바바는 알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고 생각했읍니다. 얼마 뒤 그는 나를 다른 사람에게 팔든지 아니면 나를 사올 때 치른 10달러를 내놓으라고 할 것입니다. 그날 아침 나는 말할수없는 슬픔에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읍니다.
바바가 로베르트와 나를 방으로 들여보내고 밖에서 문을 잠그자 나는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헌신적으로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깨달았읍니다. 슬픔이나 불안 따위는 모두 던져버려야 한다고 생각했읍니다. 로베르트는 긴의자에 앉았읍니다. 나는 곧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장화를 벗겼읍니다. 그의 양말은 더러웠고 깨끗이 손질이 되어 있지 않은 것 같았읍니다. 나는 벽장에서 그가 신을 샌들을 꺼냈읍니다. 하지만 치수가 맞는 것이 없었읍니다. 그의 발은 굉장히 컸읍니다. 그 뒤 그의 발에서 양말을 벗겼읍니다. 샌들은 그의 앞에 놓아두기만 하고 신기지는 않았읍니다. 짚으로 만든 샌들은 그가 신으면 부서질 것만 같았읍니다.
로베르트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다만 나와 내 동작 하나하나를 경이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읍니다.
나는 주머니가 두 개 달린 그의 셔츠를 벗겼읍니다. 그는 입을 다문 채였읍니다. 주머니는 어느 쪽도 텅 비어 있었읍니다. 그리고 그를 일어서게 하여 승마 바지를 벗겼읍니다. 더럽혀져 있는 탓으로 냄새가 지독해서 싫었으나, 나는 바지를 접어 옷장 속에 걸었읍니다.
내의도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는데, 아마 일 주일 이상 갈아 입지 않은 것 같았읍니다. 그는 창피한 듯이 잠자코 있었읍니다. 로베르트는 젊음과 건강, 수려한 용모, 그리고 육욕 이외에는 아무것도 갖지 못한 젊은이였읍니다.
나는 다시금 생각하기 시작했읍니다.
초라하기 짝이 없는 이 젊은이에게 어째서 바바는 나를 제공했을까? 틀림없이 그는 그 저주스러운 병을 이유로 나를 사온 값을 내게 받거나 나를 팔거나 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나의 병에 대해서 그는 아직도 모르고 있는 것 같았읍니다. 그렇게 생각하자 나는 어느 정도 침착성을 되찾고 마음이 편해졌읍니다.
다른 옷장에서 나는 마요르가 입던 기모노를 한 벌 꺼내서 로베르트에게 주었읍니다. 그리고 그의 속옷을 벗기고 기모노를 입혀 주었읍니다.
여전히 그는 입을 다물고 앉아 있기만 했읍니다. 나는 강장용의 포도주를 한 잔 그에게 주었읍니다. 그것은 그가 앞으로 자기 몸 속에 영원히 자리잡게 될 병에 걸린 것을 그다지 후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옵니다.
아름다운 꿈과 쾌락을 맛보는 것은 이미 그의 권리였읍니다. 설사 그가 끝없는 고통에 괴로와한다 하더라도 그곳에서 아름다운 추억을 끄집어낼 수 있도록 해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여전히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로베르트는 강장용 포도주를 단숨에 들이켰읍니다. 나는 그동안 분위기를 깨뜨리지 않기 위해 낮은 목소리로 애기를 계속하고 있었읍니다.
물론 그런 배려는 창녀로서의 여러 가지 임무 가운데 하나였읍니다.
물론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그는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했읍니다. 하지만 나는 불쾌한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읍니다.
일본 여인이 얘기를 하고 떠드는 것 따위는 듣기 싫다, 그녀들의 대도나 건는 모습 따위는 보기도 싫다, 방안에서 일본 여인으로부터 서비스를 받는 것은 싫다고 하는 남자가 과연 있을까요? 아침 8시 반에 우리들은 침대에 들어갔읍니다. 로베르트는 엄청나게 힘이 세고, 땀에 젖은 육체는 마치 그가 청동의 주물로 만들어진 것 같은 느낌을 주었읍니다.
그는 점심도 마다하고 단 한 번도 나를 놓아주지 않았읍니다. 침대 속에서의 그의 움직임은 경험이 없는 남성 특유의 조급한 것이었읍니다.
그 강장용 포도주를 마시지 않았더라면, 그는 빈혈을 일으켜 혼자서는 침대에서 내려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좋을대로 내버려 둘 수밖에는 없었읍니다.
그의 훌륭한 육체도 멀지 않아 파멸할 것이다. 젊음, 미모, 늠름함 -
--그것은 하늘이 내려준 것으로서 누구나가 갖는 것은 아닙니다-- 과 같은, 그에게 갖추어진 모든 것이 곧 소멸해버릴 것이라고 생각한 나는, 옛날에 내가 중국인 지압사에게 받은대로 로베르트에게 거칠게 안기면서 그의 몸 곳곳에 지압을 해 주었읍니다.
무엇때문에 내가 그런 짓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겠지만, 그는 어린애처럼 온순하게 참고 있었읍니다.
오후 1시가 되어서야 로베르트는 나를 해방시켜 주고 침대에서 내려왔읍니다. 나도 내려와서 땀이 흥건한 그의 몸을 몇 번씩이나 장미수와 젖은 타올로 닦아 주었읍니다. 타올이 다섯 장이나 필요했읍니다.
그는 완전히 정력을 탕진하고 있었읍니다. 억센 힘도 늠름함도 사라지고, 의자에 벗어던진 헌옷 같았읍니다. 그는 자기 옷을 달라고 했읍니다. 나는 그것을 가져다가 하나 하나 입혀 주었읍니다.
지독한 냄새가 나는 더러운 양말도, 가죽으로 만든 무거운 장화도, 그리고 그의 머리를 빗질해 주고, 그가 현기증을 일으키지 않도록 머리를 맛사지해 주었읍니다. 그리고나서 나도 타올로 몸을 닦고 옷을 입었읍니다.
로베르트는 매우 만족스러운 모습이었읍니다. 갑자기 그가 내 팔을 움켜잡고 자기 무릎 위에 나를 얹고는, 낮고 느릿느릿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 왔읍니다.
말하고 있는 뜻은 알 수 없었으나, 그의 목소리는 듣기에 기분이 좋았읍니다. 나는 로베르트의 성욕이 다시 솟구치는 것이 두려워 억지로 몸을 비틀어 그에게서 떨어졌읍니다.
다시 상대를 하라면 다는 부서져버렸을 것입니다. 나는 아침도 점심도 굶었옵니다. 아마 그도 배가 고팠을 것입니다. 병상에서 일어난 것처럼 로베르트는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읍니다. 나는 차마 바라볼 수가 없어 그의 얼굴에 혈색이 돌아오도록 다시 강장용 포도주를 따라 주었읍니다. 그리고 나서 방 밖에까지 전송했읍니다.
그는 망설이다가 문 앞에서 멈춰섰읍니다. 그리고 갑자기 방안으로 들어와서 나를 끌어안고 우왁스럽게 키스를 했읍니다. 나는 공손하게, 그리고 상냥하게 로메르트를 방 밖으로 밀어내고 안에서 쇠를 잠갔읍니다. 나는 기진맥진해 있었읍니다....... 아래는 법정에서의 바바 아촌의 진술(말레이어로 행해지고 그것을 네덜란드어로 통역한)을 내가 재구성한 것이다.
그때 나는 마침 사무실에 있었읍니다. 오후 4시경 '황제의 방'에서 호출 벨이 울리고 문을 열어 달라는 연락이 있었읍니다. 사무실을 나와 나는 직접 상황을 보러 갔읍니다. 아뭏든 시뇨 로베르트는 나의 특별한 손님이었던 것입니다.
왜냐구요? 이상한 것을 묻는군요. 그는 나의 이웃집 아들이고, 이웃과 친하게 지내는 것은 우리들의 전통적인 관습이니까요. 더구나 시뇨 로베르트는 장차 단순한 이웃집 도련님의 관계를 떠나서 나의 이웃집 주인이 될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방에서 나왔읍니다. 얼굴이 창백해서 매력적인 모습은 완전히 찾아볼 수가 없었읍니다. 거의 얼굴을 들 수도 없을 정도였읍니다.
전혀 한도라는 것을 모르는 젊은이, 언젠가는 마음도 몸도 모조리 욕망에 바쳐버릴 것 같은 인간, 그렇게만 보였읍니다.
그렇지만 로베르트는 만족스런 표정이었읍니다. 자연히 입술에 떠오르는 웃음이 그것을 말해 주고 있었읍니다. 그것을 보고 내가 기뻐한 것은 물론입니다.
"시뇨 로베르트."
나는 그에게 말을 걸었읍니다.
"오늘부터 우리들은 사이 좋은 이웃입니다. 영원한 이웃, 어떻습니까?"
갑자기 로베르트는 눈을 크게 뜨고 의아스러운 듯이 나를 쳐다보았읍니다. 그리고 정신이 번쩍 든 듯이 몸이 굳어졌읍니다. 나와 같은 경험이 풍부한 사람은 금방 눈치를 챌 수 있읍니다. 즉 그는 방금 맛을 보고 온 쾌락의 대가로 거액의 화대를 지불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계산은 사인으로 대신하면 안될까요?"
로베르트는 겁을 집어먹고 말했읍니다.
"시뇨, 우리들은 사이좋은 이웃입니다. 시뇨에게서는 한 푼도 받을 수 없읍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앞으로 우리들은 공동 경영자가 될지도 모릅니다. 요컨대 시뇨는 언제 오시든지 대환영이라는 얘기입니다. 쇠가 잠겨 있지 않은 방은 어느 곳이나 자유롭게 사용해 주십시오. 시간에 제한 없이 밤이나 낮이나 좋습니다. 어떤 여자를 고르든 시뇨의 자유입니다. 만약 정문과 창에 쇠가 잠겨 있으면, 문으로 들어와 주세요. 정원사와 수위에게 얘기해 두겠읍니다."
그러자 로베르트의 근심스러운 표정이 금방 사라졌읍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읍니다. "고맙습니다, 바바. 바바가 이렇게 좋은 분인 줄은 꿈에도 몰랐읍니다."
"시뇨는 좀더 일찍 오셔야 했읍니다. 오늘이 처음이라니."
"꼭 다시 오겠읍니다."
"꼭 오세요. 기다리겠읍니다."
나는 선량한 이웃 사람으로서 그가 찾아온다는 것을 거절할 수는 없읍니다. 하물며 그는 혈기 왕성한 젊은이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욕구의 분출구를 제공하도록 배려할 뿐만 아니라, 그가 만족하고 싫증을 낼 때까지 마이꼬를 제공하지 않을 수 없었읍니다.
로베르트는 돌아가겠다고 말했읍니다.
"벌써 저녁때니까요."
나는 말리지 않았읍니다. 돌아가기 전에 그를 내 사무실로 안내했는데, 여자들을 보는 그의 눈에 핏발이 서 있었읍니다.
로베르트는 완전히 변해서 이미 아침 나절의 내성적인 젊은이는 아니었읍니다. 나는 보고도 못본 체하고 있었읍니다. 만약 그에게 또 서비스한다면 모든 규칙이 어긋나게 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여자 이발사를 불러 내가 지정하는 머리형으로 그의 머리를 깎도록 명했읍니다. 시뇨는 이발하는 것을 싫어하지는 않았읍니다. 스페인풍으로 머리를 한가운데서 가르고, 최고급 머리 기름을 바르게 했읍니다.
그것이 끝나자 내가 특별히 간직해 둔 술을 그에게 마시게 했읍니다.
"이렇게 하고 보니까 시뇨는 한층 더 돋보이는군요."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나는 그에게 1링키트를 주었읍니다. 흠집 하다 없는 태양과 같은 순백색의 링키트 은화였읍니다.
로베르트는 그것을 부끄러운 듯이 받아들고 고개를 숙이더니 겨우 이렇게 말했읍니다.
"정말로 바바는 최고의 이웃입니다."
점차로 수가 늘어난 손닌둘 사이를 빠져나가 나는 그를 밖으로 안내했읍니다. 손님 가운데 몇몇이 우리 두 사람을 불러 세우고, 마이꼬를 요구했읍니다.
시뇨는 불쾌한 얼굴을 했고, 나는 그들의 요구를 모두 거절했읍니다. 나는 그와 함께 뜰로 나왔읍니다.
그리고 로베르트가 탄 말이 거리로 나가 왼쪽으로 구부러지는 것을 보고 나서 다시 안으로 들어가 마이꼬를 살피러 갔옵니다. 그 뒤 나는 시뇨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릅니다.
끝으로 로베르트 메레마에 관해서 냐이와 안네리스가 얘기한 것을 내가 정리한 것이다.
오후 2시, 안네리스는 잠에서 깨어났다. 열은 이미 내려 있었다.
당장 그녀는 로베르트가 경찰서에서 돌아왔느냐고 물었다. "아직 안돌아왔다, 앤. 로베르트는 도대체 어디까지 간 것일까 ? "
냐이는 몹시 짜증을 부리며 아들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그녀는 다르삼에게 자기 자리를 떠나지 말라고 명했다. 거리에 우유와 치즈, 버터를 배달하는 일은 다른 마부에게 맡겨졌다. 그 뿐 아니라 뒤곁에서 작업을 감독하는 것도 아직 감독이 되기에는 이른 인부에게 맡겨졌다.
"현관에 나가서 기다리겠어요, 마마."
안네리스가 냐이에게 졸라댔다.
"안된다. 여기서 기다리나 밖에서 기다리다 마간가지야. 마마와 함께, 응접실에서 기다리자꾸나."
냐이는 안네리스를 부축해서 장소를 옮겨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로베르트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괘종시계 소리가 안타깝게 기다리는 두 사람의 가슴을 흔들어 놓았다.
때때로 냐이는 앞뜰을 내다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로베르트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앤, 그와 만나서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너는 그에게 완전히 빠져버렸으니 도대체 어찌된 일이냐? 본디는 그가 네게 빠져야 하는 건데."
안네리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말에 기분을 상한 것 같았다.
"식사를 가져다 줄까? "
"필요 없어요, 마마."
그래도 냐이는 안으로 들어가서 밥에 반찬을 곁들인 요리 두 접시와 스푼과 포크, 그리고 마실 것을 들고 나왔다. 냐이는 자기도 먹으면서 안네리스의 입에 억지로 음식을 넣어 주었다.
"씹는 것이 싫으면 그대로 넘겨도 괜찮다." 그러자 안네리스는 정말로 씹지 않고 넘기기만 했다. 두 번 가량 냐이는 고객을 상대하기 위해 다르삼을 불렀다. 안네리스는 먼 곳을, 아주 먼 곳을 바라보면서 잠자코 앉아 있었다.
그리고 두 시간이 지나갔다. "앗, 저 미친 녀석이 이제야 돌아오는군 ! "
냐이가 소리쳤다.
안네리스가 길거리로 시선을 집중시켰다.
"다르삼 ! "
냐이가 큰 소리로 외쳤다. 그리고 다르삼이 들어오자 말했다. "사무실의 쇠를 잠가요. 그리고 여기에 서 있어요."
냐이는 사무실과 응접실을 연결하는 문을 가리켰다. 로베르트는 말을 타고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천천히 돌아왔다. 그는 현관 앞 계단에서 멈추자 말을 매지 않고 놓아준 뒤, 계단을 올라와서 냐이와 안네리스 앞에 와 섰다.
아들이 머리를 자르고 한가운데서 가리마를 단 것을 보고 냐이는 미간을 찡그렸다. 그리고 땀도 흘리지 않고 먼지도 뒤집어쓰지 않은 그의 온몸을 뚫어보았다.
로베르트의 손에 승마용 채찍은 들려 있지 않았다. 모자도 쓰고 있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다 두고 온 것일까? 냐이는 중얼거렸다.
"저 머리꼴 좀 보지. 창백한 얼굴에다......"
그녀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앤, 네 오빠의 모습을 좀 봐라. 네 아버지가 바깥을 쏘다니다가 돌아올 때와 어쩌면 저렇게 꼭 같니 ? 저 머리 기름 냄새......저것도 똑같구나. 로베르트가 입을 열면 5년 전과 같은 술 냄새가 날 거야."
냐이는 로베르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안네리스는 꿈을 꾸고 있는 듯한 눈동자로 오빠를 노려보고 있었다.
다르삼은 잠자코 서 있었다.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자, 마두라의 칼잡이는 헛기침을 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로베르트가 다르삼을 바라본 뒤, 그 다음에 어머니를 돌아보았다.
"경찰은 밍케가 어디에 연행되었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그런 이름조차 모른다고 했읍니다." 냐이 온트솔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새빨개진 얼굴로 아들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고함쳤다. "거짓말 ! "
"소식을 알려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다가 왔다구요."
"더 이상 얘기할 필요 없다. 그 술 냄새, 향수 냄새, 머리 모양.....모든 것이 5년 건의 네 아버지와 똑같구나. 앤, 잘 봐둬라. 네 아버지가 돌아갈 방향을 잊어버리게 된 발단이 바로 이런 것이었단다. 당장 없어져 버려 ! 이 거짓말장이 ! 내게는 너같은 거짓말장이 아들은 없다 ! "
사무실로 통하는 문 앞에 서 있던 다르삼이 다시 한 번 헛기침을 했다.
"앤, 오늘을 결코 잊어버려서는 안된다. 옛날에 네 아버지도 이런 식으로 돌아왔었단다. 그래서 나는 그 뒤 내 삶 속에서 그가 없는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단다. 지금 네 오빠도 그것과 마찬가지다. 그 아이는 제 아버지의 뒤를 쫓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저 좋을대로 내버려둘 수밖에 없지." 안네리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앤, 너는 강해지지 않으면 안된다. 강하지 않으면 저런 돼먹지 않은 인간의 놀림감이 되고 만다. 앤, 이제 그만 울어라. 너도 오빠나 아버지 같은 사람의 뒤를 밟고 싶으냐?"
"마마, 나는 마마의 뒤를 따를 거예요."
"그렇다면 이제 철없는 행동은 그만두어야지. 마음을 강하게 먹어야 한다."
안네리스는 냐이가 절망의 밑바닥에서 아파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집 앞에서 말이 힝힝거렸다. 로베르트는 자기 방에서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고 다시 나왔다. 그리고 어머니, 누이동생, 다르삼을 무시한 채 집을 나갔다. 매어 두지 않았던 말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날 이후, 이 아들은 가족이 사는 집에는 거의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인간의 대지 2
사랑의 제단 편
동인도 문학의 진수
쁘라무디아 아난따또르 지음
- 차 례 -
제10장 동인도인들
제11장 사랑의 굴레
제12장 청춘 , 악령
제13장 무서운 과거
제14장 영혼과 철판
제15장 미행자
제16장 소문의 덫
제17장 졸업식과 결혼식
제18장 승자 , 패자
제19장 긴 이별
제10장 동인도인 들
오전 9시, 나는 두통 때문에 잠을 깼다. 눈의 위쪽을 무언가가 쿡쿡 찌르는 것처럼 아팠다. 파라키아 씨앗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피부를 뚫고 들어가 내 머릿속에서 한 그루의 나무가 되기 위해 뇌수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인류 역사상 가장 효과 좋은 진통제가 만들어졌다고 요란스럽게 보도하던 신문 기사를 생각해냈다. 그 약은 독일인이 발명한 것으로 '아스피린'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약은 신문에만 등장했을 뿐 동인도에서는 아직 판매되고 있지 않았다. 최소한 나는 모르고 있었다. 아아, 동인도, 다만 유럽의 제품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나라여 !
데린하 부인이 열이 내리도록 몇번 양파와 식초로 내 이마에 찜질을 해 주었다. 방 안에는 온통 식초 냄새가 가득 찼다. "혹시 나에게 온 편지가 없읍니까?"
"어머, 처음으로 도련님이 편지 얘기를 다 꺼내는군요. 지금까지는, 읽는 것조차 싫어하더니 정말 많이 변했군요. 아마 와 있을 거예요. 그런데 조금 전까지 손님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도련님은 아직 주무시고 있다고 했죠. 누군지는 모르겠어요. 아마 지금쯤은 돌아왔을 거예요. 내가 그 사람에게 밍케 도련님은 지금 우노크로모에 있을 거라고 말했더니 못들은 척하고 잠깐 이웃에 다녀오겠다고 하며 쟝 마레씨 댁으로 간 것 같아요."
하숙집은 조용했다. 다른 하숙생들은 학교에 가고 없었다. 마음씨 좋은 하숙집 여주인은 식탁을 끌어다가 침대 옆에 붙이고, 그 위에 코코아와 게이크를 놓아 주었다. 케이크라는 것은 쌀가루와 흑설탕을 반죽해서 기름에 튀긴 것이었다. "도련님, 오늘은 무엇을 드시고 싶으세요?" "돈은 있으세요? "
"없으면 도련님에게 청구하면 되니까요, 안그래요?"
"요즈음 나에 관해서 뭐 알아볼 것이 있다고 경관이 찾아온 적이 없나요? "
"네, 있어요. 하지만 경관은 아닙니다. 도련님과 비숫한 나이의 젊은이였어요. 도련님의 친구 같아서 사정 얘기를 다 해 주었답니다."
"혼혈? 유럽인 ? 아니면 쁘리부미던가요." "쁘리부미였어요."
나는 그 이상 묻지 않았다. 역시 그때 그 경찰관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도련님, 오늘은 무엇을 잡수시고 싶은가요?"
"마카로니 수프."
"알겠읍니다. 마카로니 수프를 드시고 싶다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군요. 한 봉지에 얼마나 하는지 아세요? 5센트나 한다니까......."
"두 봉지면 충분합니다."
테런하 부인은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나에게서 15센트를 받아들고 황급히 그녀이 왕국인 주방으로 사라졌다.
조용한 아침이었다. 이따금 마차의 방울 소리가 들려올 뿐이었지만 내 머릿속은 여전히 시끄러웠다. 각양 각색의 얼굴과 모습을 한 살인청부업자들이 긴 행렬을 이루며 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마푸다 빼테루스, 내가 좋아하는 마푸다 빼테루스 선생님까지 비수를 빼들고 나에게 덤벼들었다. 나는 거의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이것은 모두가 다르삼의 얘기에 너무 겁을 집어 먹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정보에 불과하다. 그 진위도 근거도 뚜렷하지 않은 일에 나는 왜 이토록 겁을 집어먹는 것일까? 학문을 배운 내가? 그 얘기가 비록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두려워해야 할 필요가 있단 말인가? 밍케여, 만일 그 얘기가 사실이라면, 너는 두 번씩이나 피해자가 되는 셈이다. 너는 벌써 극도의 공포에 빠져 있다. 이것이 첫번째 피해다. 두번째 피해는 아무리 두려워한다 해도 너는 살해될 것이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되는 것은 한번이면 충분하다. 밍케, 어느 것이든 하나로 족하다. 자, 일어나라. 무엇 때문에 두 개의 피해를 한꺼번에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는가? 지성인 이라고 자처하면서 너는 어리석기 짝이 없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나는 무의식 중에 나자신을 비웃었다. 비틀거리며 침대에서 빠져나가 어떻게든 걸어서 욕실로 가려고 했다. 그러자 주위의 물건들이 이리저리 흔들거려서 나는 의자 등받이를 움켜 잡았다.
현기증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방을 나갔다. 욕실에 가는 것은 그만두고 거실에 앉아 신문을 읽으려고 했다. 두통은 차츰 가라앉았으나, 양파와 식초 냄새가 지독하게 신경을 건드렸다.
'참으로 호사스러운 몸이군' 하고 혼자 속으로 중얼거렸다. 결국 나는 욕실로 가서 참견하기 좋아하는 테린하 부인의 반대를 무릅쓰고 목욕을 했다. 자식 복이 없는 그 부인은 얼마만큼 나를 귀여워했는지 모른다.
그녀는 유럽인보다 쁘리부미에 가까운 혼혈이었는데, 옛날의 미모는 간 곳이 없고, 지금은 통나무처럼 살이 쪄 있었다. 테린하 부인의 네덜란드어는 형편 없이 서툴렀으나, 그것이 그녀에게 있어서는 일상 용어이고, 가족 사이에서 쓰는 언어였다. 그녀는 단 한번도 학교라는 곳에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었다. 그 때문에 읽고 쓰기를 못했다. 자식이 없는 그녀가 양자로 삼은 것은 한 마리의 들개 수놈뿐이었다. 그 개는 시장에서 생선을 훔쳐오는 것이 특기로서, 하루에 두세 번씩 훔쳐와서는 양모에게 건네주며 구어 달래서 먹었다. 그리고 그것을 먹어치운 다음에는 문 한가운데서 낮잠을 자고 다시 잔이 깨서는 도둑질을 하러 나갔다.
이 개는 낯선 사람이 찾아와도 결코 짖거나 하지 않았다. 마치 상대방이 먼저 짖기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이 눈을 껌벅이면서 손님을 쳐다보는 것이었다. 옷을 갈아 입고 머리를 빗은 다음 나는 쟝 마레를 찾아갔다. 그의 딸 메이의 어머니가 싸우고 있는 문제의 그림은 아직 완성되지 않고 있었다.
쟝 마레는 그 그림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그것을 자신의 최고 걸작으로 만들기를 원하고 있었다.
메이가 내 무릎에 앉아 어리광을 부렸다. 지난 며칠 동안 내 얼굴을 보지 못한 것을 그녀는 서운해했다. 대개 나는 캔디를 사다 주곤 했는데, 그때 내 주머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함께 산책 안갈래요, 아저씨 ? "
"아저씨는 오늘 몸이 좋지 않단다."
"얼굴색이 좋지 않군, 밍케."
쟝 마레가 프랑스어로 말했다.
"나는 몰랐어요."
메이가 역시 프랑스어로 말하며 무릎에서 내려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정말이야. 아저씨 얼굴이 창백해요."
"수면 부족이에요."
"우노크로모와 관계가 생긴 뒤로 자네는 자주 여러 가지 일에 말려드는 것 같은데, 밍케."
"요즈음은 새로운 주문도 맡아 오지 못하고 말일세. "
"요즈음 내가 어떤 일을 당했는지 알게 되면 그런 말씀은 하지못할 겁니다. 정말이에요."
"또 뭔가 문제를 일으킨 모양이군."
그는 책망하는 말투였다.
"여느 때와는 달리 눈에 차분함이 없어."
"눈을 보면 상대방의 마음속을 다 알 수 있나요?"
"메이, 아빠 담배 좀 사다 주겠니?"
메이는 밖으로 나갔다.
"자, 밍케, 무슨 문제를 일으켰는지 얘기해 보게나."
나는 수상하고 뚱뚱한 사나이에 관해서 얘기했다. 누군가가 나를 죽일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 같은 예감이 든다는 것, 가는 곳 마다 나를 노리고 있다가 기회를 틈타 칼로 찌를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는 것을 털어놓았다.
"바로 내가 예상한대로군. 그것은 남의 첩 집에 들어가 사는 사람이 져야 할 당연한 위험 부담일세. 자네는 이전에는 현지처의 인간적인 가치와 도덕 수준을 비난하는 세상 사람들의 견해에 동조하고 있었어. 그때 내가 뭐라고 했나? 자신이 확실히 모르는 일에 대해서 남이 하는내로 허단을 해서는 안된다고 말했을거야. 그리고 두세 번 그곳에 찾아가서 지식인으로서 자기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라고 조언했었지."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요."
"그래서 자네는 그곳에 갔었지만, 단지 간 것만이 아니라 그곳에 눌러 앉았거든."
"맞아요."
"자네가 그곳에 눌려 앉은 것은 세상 사람들의 견해가 현실과 일치하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네. 오히려 자네는 그러한 세상 사람들의 견해를 증명해 보이는 꼴이 되었거든. 즉 비열하고 치욕스러운 도덕 수준에 말려들어간 셈이 되었지. 그리고 이윽고 누구에게서인지는 모르지만 자네는 협박을 받게 되었구. 틀림없이 가장 가깝게 있는 사람, 자네에게서 피해를 입은 사람일 거야. 지금 자네는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다고 느끼고 있네. 그러나 자네는 그 이상으로 자기 자신의 죄의식에 쫓기고 있는 거야."
"그래서요?"
"내 말이 틀렸나?"
"맞을지도 몰라요."
"왜 정확하게 대답하지 못하나?"
"그것은, 즉 내가 그 치욕스러운 행위라는 것을 확실히 저질렀다고 가정했을 경우에는 맞는다는 얘기죠."
"그럼, 저지르지 않았단 말인가?"
"절대로 하지 않았어요."
"적어도 그 말을 듣고 나는 안심했네, 밍케." "그뿐만이 아닙니다. 여러 가지 얘기를 해 보았는데, 냐이는 그런 여자들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녀에게는 교양이 있어요. 아마 내 인생에서 만난 최초의 지적인 뿌리부미 여성이라고 믿습니다. 경탄할만한 여성이었어요. 언젠가는 당신에게도 소개해 드리지요. 메이도 데리고 갈 겁니다. 그애도 그곳이 마음에 들 거예요, 틀림없이."
"그런데 치욕스러운 행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누군가에게 살해당할지도 모른다는 자네의 공포심은 어디서 오는거지 ? 자네는 교육을 받은 사람이야. 자신의 양심에 솔직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되는 거야. 자네도 쁘리부미 지식인 제1호 가운데 한 사람일세. 자네는 올바른 행실을 보여야 하네. 그렇지 못하다면, 자네 뒤를 잇는 쁘리부미 지식인에개서는 자네보다 더 부패한 인간들이 태어날 테니까 말일세." "너무 그러지 마새요, 쟝, 그런 쓸데없는 설교는 듣고 싶지 않아요. 나는 정말 난처한 입장에 빠져 있다구요." "그건 자네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 거야."
메이가 옥수수잎 담배를 한 다발 갖고 왔다. 쟝은 즉시 담배를 피워 물었다.
"당신은 담배를 너무 많이 피워요." 그는 웃고만 있었다.
그날 그 프랑스인은 조금도 내 마음을 위로해 주지 못했다. 그는 오해를 하고 있었다. 근거 없는 추측으로 나를 비난하고 있었다.
아버지도 만나자마자 나를 힐책했는데, 쟝 마레도 나의 결백을 믿고 있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이러쿵 저러쿵 말은 하면서도 그도 결국은 세상 사람들의 기준을 갖고 나를 심판하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 그와 얘기를 계속해도 소용이 없을 것만 같았다. 나는 메이의 손을 끌고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둘이서 베란다의 긴의자에 앉았다.
"왜 학교에 가지 않지, 메이 ?"
"파파가 그림을 그리는 옆에 있으라고 했어요."
"그래 ? 옆에서 메이는 무엇을 하지 ? "
"파파가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고 있어요. 잠자코 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때 파파는 너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니 ? "
"물론 얘기를 해요. 이 참나무 숲속은 항상 바람이 불고 있으니까 시원하겠다고 말했어요. 하지만, 그 군인에게 짓밟히고 있는 사람은 너무나 불쌍해요, 아저씨."
바로 그 발에 밟히고 있는 것이 자기 어머니라는 것을 메이는 모르고 있는 것이다.
"메이, 노래를 해 봐라."
소녀는 그녀가 즐겨 부르는 곡을 스스럼없이 불렸다.
"프랑스 노래지, 메이 ? 네덜란드 노래는 아저씨가 모두 알고 있거든. "
"프랑스 노래 ?"
메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귀여운 북치는 소년'을 불렀다.
"어머, 아저씨는 듣고 있지도 않으면서. " 그때 나의 눈은 도로 건너편 르쟈크(설탕을 친 과일 샐러드)장수 옆의 타마린드 나무 밑에 앉아 있는 뚱뚱한 사나이에게 못박혀 있었다.
그 사나이는 차양이 었는 패치 모자를 쓰고 있었다. 구두는 물론 샌들도 신지 않고 옷은 캬라코의 웃옷에 검은색 헐렁한 바지, 주머니가 많이 달린 넓은 가죽 허리띠를 매고 있었다. 웃옷은 단추를 채우지 않고 있었다.
특징 있는 체격, 피부, 그리고 찢겨져 올라간 가느다란 눈은 나를 속일 수 없었다. 틀림없이 저 녀석이 나의 목순을 노리는 살인청부업자일 거야. 저 뚱뚱보 ! 다르삼을 이용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로베르트는 저 녀석을 하수인으로 고용한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이따금 르쟈크를 먹으면서 사나이는 우리 두 사람을 흘끔흘끔 쳐다보고 있었다. "메이, 파파를 불러 오너라."
소녀는 뛰어갔다. 얼마 뒤 키가 큰 깡마른 몸집을 지팡이에 의지한 쟝 마레가 절룩거리면서 나타나 내 옆에 와서 앉았다. "역시 내 착각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쟝. 저 사나이가 바로 그 녀석이라고요. 저 놈이 B시에서부터 나를 미행해 왔어요. 옷차림은 그때와 다르지만."
"모두가 자네의 환상에 지나지 않아. "
쟝은 나를 타일렀다.
마침 그때 테린하가 어디선지 모습을 나타냈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 그는 한쪽 손에 바구니를 들고 다른 손에는 어디서 주워 왔는지 길이가 1미터쯤 되는 쇠파이프를 들고 있었다.
"안녕하신가, 쟝, 밍케 ? 웬일인가? 아침부터 둘이 이런 곳에 앉아서 말일세."
테린하가 말레이어로 말을 걸어왔다.
"사실은......"
쟝 마래가 나의 공포에 대해서 설명했다. 그리고 나서 내가 의심하고 있는 문제의 뚱뚱보 사나이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테린하는 바구니를 땅에 내려놓았다. 바구니 속에는 아직 푸른 구돈돈 열매가 가득 들어 있었다. 한 손에 쇠파이프를 든 채 테린하는 험악한 눈길을 도로 건너편으로 보냈다.
"좀더 가까이 가서 보아야겠군. 자, 밍케, 함께 가보세. 그를 알고 있는 것은 자네니까."
나는 테린하의 뒤를 따라갔다. 쟝 마레가 절룩거리며 뒤따랐다.
가까이 다가감에 따라 그때의 뚱뚱보라는 것이 점점 더 확실해졌다. 지금도 틀림없이 나를 감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이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사나이는 못본 체하고 있었다.
힐끗힐끗 옆눈으로 경계하고 있는 것은 분명했으나 여전히 르쟈크의 맛을 즐기는데만 열중하고 있는 체하고 있었다. 사나이의 변장이 나의 의혹을 더욱 부채질했다.
"역시 그녀석이 틀림없어요."
나는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테린하는 쇠파이프를 손에 잡은 채 위협하듯이 사나이에게로 다가갔다.
나는 당황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쟝은 절룩거리면서 아직도 내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테린하가 자바어로 대들었다.
"이봐 ! 우리 집을 감시하고 있는 거야?"
사나이는 못들은 체하고 계속 먹고만 있었다.
"이녀석이 시치미를 떼고 있어 ?"
전 네덜란드 식민지군 병사, 지금은 제대해서 연금으로 생활을 하고 있는 테린하는 이번에는 말레이어로 협박했다. 그리고는 르쟈크 그릇을 빼앗아 땅바닥에 집어던졌다.
뚱뚱보는 혼혈아를 두려워하는 기색도 없었다. 천천히 일어나서 양념으로 더렵혀진 손을 타마린드 나무에 문지르고는 입속에 남아 있던 르쟈크를 삼켰다.
그리고 허리를 굽혀 르쟈크 장수의 양동이에 손을 씻고 나서야 겨우 침착하게 자바어로 말했다.
"나는 어떤 것도, 또한 어떤 사람도 감시 따위는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사나이는 나를 힐끗 보고 미소지었다. 저런 간덩이가 큰 녀석 보겠나 ! 저녀석은 나를 보고 웃었어, 이 살인자 ! 웃기까지 하다니 이럴수가 ! "빨리 여기서 꺼져 버려 ! "
테린하가 소리쳤다.
르쟈크 장수인 노파는 싸움이 날까봐 이미 도망쳤다. 멀리서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유럽인 혼혈을 상대하는 용감한 원주민에게 흥미를 느낀 것이 틀림없다.
"나는 매일처럼 이곳에서 르쟈크를 사 먹고 있읍니다, 아저씨."
"너 같은 녀석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 꺼져 ! 아니면......"
뚱뚱보는 까딱도 하지 않았다. 계속 경계하는 빛을 보이면서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지금까지 이곳에서 르쟈크를 먹는 것을 금지당한 적은 없읍니다, 선생."
"내게 말대꾸를 하는 거냐? 내가 식민지군의 네덜란드인이라는 것을 알고서 하는 말이냐? " 사나이는 완력에 자신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전 식민지군 병사를 그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마도 검술이나 권법을 익히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이곳에서 먹어서는 안된다고 경찰이 금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아무런 금지표시도 없지 않습니까? 내가 편안하게 앉아서 르쟈크를 먹도록 내버려두십시오. 아직 대금도 지불하지 않았으니까요."
사나이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앉으려고 했다.
사나이의 말을 듣고 나는 불안해졌다. 분명히 그는 법률이나 조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테린하는 좀더 신중히 대처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했을 때는 이미 힘을 행사하는 것을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테린하가 주먹을 휘두르며 사나이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사나이는 날쌔게 피했다. 그러나 반격해 오지는 않았다. "그만 됐어요, 그만 ! "
쟝이 말리러 들었다.
"그만두시지요, 선생."
사나이는 부탁했다.
테린하는 자신의 명령에 반항하고 말대꾸를 하는 버릇 없는 인간에게 격분했다. 문제의 발단 따위는 이미 그의 안중에 없었다. 혼혈 퇴역 군인으로서의 위신이 상처를 입은 것이다. 그는 오른 손을 들어 뚱뚱보의 머리에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려고 했다. 사나이는 침착하게 주먹을 피했다. 표적을 잃은 테린하는 자기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그때 사나이는 충분히 상대방의 옆구리에 한 방 먹일 수가 있었는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상대방이 이리저리 피할수록 테린하는 점점 더 격분해서 집요하개 덤벼들었다. 뚱뚱보는 후퇴를 되풀이하더니 이윽고 도망치고 말았다. 테린하는 추적했으나 그 사나이는 쓰레기 하치장으로 쓰는 좁은 골목길로 모습을 감추었다. 쟝 마레가 내뱉듯이 말했다.
"미치광이 테린하 ! 아직도 군대에 있는것으로 착각하고 있다니까. "
퇴역 군인은 추격을 단념하지 않고 사나이가 사라진 골목으로 모습을 감췄다.
"이런 짓을 해서 도대체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 자, 돌아가세. 자네가 모든 일의 장본인이야." 쟝 마레는 나를 책망했다.
내가 부축하려는 것을 그는 거절했다.
그때 메이와 테린하부인이 황급히 뛰어나와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쟝도 나도 설명을 하지 않았다. 우리들은 앉아서 신경질적인 퇴역 군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10분 뒤 테린하가 돌아왔다. 땀을 뻘뻘 흘리며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어깨를 들썩이며 식식거리고 있었다. 그는 의자에 쓰러지듯이 앉았다.
아내가 그를 보자마자 몰아세웠다.
"여보, 도대체 무슨 일이죠? 당신은 상이 군인이라는 것을 잊었나요? 싸움 따위를 하고 다니고. 아직 당신이 젊다고 생각하세요? "
그녀는 남편에게 다가가서 쇠파이프를 빼앗아 들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태린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들 사이에는 마치 암암리에 양해가 되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식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마음 속으로 참극이 빚어지지 않은 것을 신에게 감사했다.
또 다르삼의 얘기를 하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다고도 생각했다. 자칫 잘못 했으면 상해 사건의 장본인이 될 뻔했던 것이다.
"도련님은 아직 병이 낫지 않았잖아요." 집 안에서 테린하 부인이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런 곳에 앉아서 바람을 쐬면 안돼요, 들어와서 쉬세요. 곧 식사 준비가 끝나니까요. "
"메이, 너는 집에 돌아가 있거라."
쟝의 말을 듣고 메이는 돌아갔다.
우리들 세 사람은 테린하가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 잠자코 앉아있었다.
"조금 전의 얘기는 잊어 주세요."
만일 경찰 문제가 되어 골치아픈 일이 생기면 그야말로 나는 불명예스러운 사건의 장본인이 되고 마는 것이다. "쟝, 또 두통이 시작되는 것 같아요. 실례하겠어요, 태린하씨, 쟝....."
방으로 돌아오자 나는 점점 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뚱뚱보는 나를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분명히 그는 로메르트의 앞잡이다. 다르삼의 얘기를 황당무계하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밍케, 조심해라 !
한낮인데도 나는 문 안쪽에서 쇠를 잠갔다. 창에도 그리고 마루를 청소하는 걸레 자루로 사용하고 있던 튼튼한 막대기를 방구석에 세워 두고 언제나 손에 참을 수 있도록 했다. 나는 아직 초보자에 지나지 않지만, 일찌기 T시에 있을 때 호신술을 배운 적이 있었던 것이다.
교육을 받은 인간으로서 나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즉 누군가가 내 생명을 노리고 있지만, 그것을 경찰에 신고할 수는 없다.
냐이와 안네리스, 얼마 전에 부빠티로 임명된 아버지, 그리고 특히 어머니를 사건에 끌어들이는 것은 현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비밀리에, 그러나 충분한 경계심을 갖고 대처하지 않으면 안된다.
나흘이 지났는데도 두통은 낫지 않았다. 수면 부족에 빠진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매일 아침 변함없이 우노크로모로부터 우유가 배달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다르삼으로부터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너무나도 오랫동안 학교를 결석한 것 같았다. 의사는 3주일 동안의 요양을 필요로 한다는 내용의 진단서를 끊어 주었다. 머릿속의 파라키아 열매는 유일하고 정당한 소유자인 내 허가도 없이 한 그루의 나무로 성장해 있었다. 파라키아의 나무여, 확실히 네가 경고하는대로 나는 냐이와 안네리스의 일을 잊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들과의 관계는 정리하지 않으면 안된다. 관계를 계속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얻는 것은 충돌 뿐이다. 그 기묘하고 불안스러운 가족을 모른다고 해서 내 인생이 손해를 보는 것은 아니다. 문둥병에 걸리는 것도 아니다. 나는 다시 건강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예전처럼 주문을 받으러 돌아다니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리고 신문사에 보낼 원고도 써야 한다. 무슨 일이 있든 나는 아직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싶다. 학우들과 마음을 터놓고 사귀지 않으면 안된다. 무한히 펼쳐지는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자.
그리고 과거, 현재, 미래와 인간의 대지로부터 모든 것을 흡수해야 한다.
다음 달 말쯤에 마푸다 빼데루스 선생님은 토론회를 열어서, 인간의 대지에 대해 가능한 한 여러 각도에서 조명을 해보려 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병을 앓고 있다니.
휴가는 아무런 보람도 없이 지나갔다. 긴장으로 가득 찬 시간속에서 이따금 나는 나와 같은 젊은 나이에 이렇게 심한 긴장속에서 괴로와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하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는 아직 그럴 필요는 없다고 자문자답했다. 언젠가 마푸다 빼데루스 선생님은 무르다투리와 그의 친구인 시인이자 저널리스트인 로르다 판 에이싱하에 대해 말한 적이 있었다.
이 두 사람은 동인도 사람들의 운명을 바꾸어보려고 노력한 강인한 신념과 싸움 때문에, 그리고 그들 자신의 개성 때문에 늘 극도의 긴장 속에서 살았다.
모든 유럽인들의 원주민에 대한 억압에 항거해 그들은 동시에 일어섰다. 세상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동인도 사람들을 위해, 찾아와주는 친구도 없는, 구원의 손길도 없는 고립무원한 속에서.......
밍케, 로르다 판 에이싱하가 '센토트'라는 가명을 사용해서 쓴 시 '자바에서의 네덜란드 최후의 날'을 꼭 잃어 보아라. 그 단어 하나하나에는 세상을 깨우치려는 한 인간의 의지가 담겨져 있으니까.
무르타투리와 판 에이싱하는 숭고한 사명감 때문에 주위로부터 늘 준엄한 긴장과 압력을 받았다. 그것에 비해 지금 나를 괴롭히고 있는 이 긴장은 한 여자를 좋아하는 사람의 무분별한 행동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안네리스를 단념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내 가슴은 아무리 해도 그것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그토록 아름다운 여인을 ! 그리고 냐이......그렇게 매력적이고 뛰어난 개성과 마력을 지닌 여왕을 단념하라고? 그래, 그것이야말로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곰보 자국도 보조개로 보이고 미워하게 되면 보조개도 곰보 자국으로 보인다'는 이야기와 같은 거야.
서서히 그리고 확실하게 나는 이해를 해 갔다. 즉 이 긴장의 원인은 모두 환희의 세계, 꿈이 형실로 이루어지는 세계에 들어가기 위한 통행세 지불을 내가 꺼리고 있는 데 있는 것이다. 무르타투리와 판 에이싱하는 통행세를 지불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무엇 하나 요구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작품과 비교해 보면 내가 쓰는 작품에 어떠한 의미가 있단 말인가? 나는 다만 모든 것을 나 자신의 이익을 얻기 위해 야심을 불태우고 있을 뿐이 아닌가 ! 부끄러운 일이다.
그렇다. 역시 나는 안네리스를 단념하지 않으면 안된다. 안녕, 아름다운 여신이여 ! 행복한 꿈, 두 번 다시 꿀 수 없는 달콤한 꿈인 채로 헤어지자.
한 여인의 미모나 현지처의 매력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존재할 것이다. 무의미하게 죽어서는 안된다. 나의 생명, 나의 육체,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유일하고 또한 최고의 재산이다. 그렇게 결단을 내리자 두통도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완전히 나은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사실 병이란 그런 것이 아닌가. 느닷 없이 나타나서 감쪽같이 사라져가기도 하는.....
머릿 속의 파라키아 나무는 뿌리와 가지를 더이상 뻗지 못하고 이윽고 한 통의 편지가 배달된 것을 계기로 메말라 죽어갔다.
그것은 조그맣고 섬세한 글씨로 가지런히 씌어진 미리암 드라크로아로부터의 편지였다.
그녀는 이렇게 쓰고 있었다.
친구에게
틀림없이 무사하게 슬라바야에 도착했으리라고 믿습니다. 당신으로부터의 편지를 기다렸으나 좀처럼 오지 않더군요. 마침내 내가 졌읍니다.
놀라지 마세요. 당신에 대한 파파의 관심은 대단한 것입니다. 당신에게서 편지가 오지 않았느냐고 벌써 두 번이나 물었읍니다. 파파는 당신의 변화에 대해서 몹시 궁금해 하고 있읍니다. 당신의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은 것입니다. 당신은 평범한 자바인이 아닌 개척자이며 혁신자라고 파파는 말하고 있읍니다.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이 편지를 쓰고 있읍니다. 뿐만 아니라, 파파의 의견을 당신에게 전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파파는 언젠가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했읍니다.
"미리암, 사라, 밍케의 모습이 지금부터 자바인들이 보여 줄 바로 그 모습이다. 우리들의 문명을 정확하게 흡수하여 더 이상 햇볕에 오무라든 지렁이처럼 위축되지 않을 새로운 자바의 얼굴이란다."
파파가 이번 거친 비유를 쓴 것을 용서해 주세요. 밍케, 파파는 모욕할 의도는 없는 것입니다. 화내지 마세요. 파파나 우리들 두 사람도 쁘리부미에 대한 악의는 없읍니다. 더구나 당신에게 그런 감정은 털끝만큼도 없읍니다. 파파는 지금과 같은 몰락한 자바인의 모습에 몹시 동정하고 있읍니다. 이것도 먼저 번과 같이 난폭한 비유를 쓰고 있지만, 제발 이해해 주세요.....
"이 지렁이 같은 민족이 필요로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너희들은 아느냐? 그것은 그들을 구원해 줄 수 있는 지도자란다."
밍케, 내 얘기를 이해하겠어요? 제발 내 참 뜻을 이해하기전에 화부터 내지는 마세요. 모든 유럽인이 당신네 민족의 몰락에 협조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파파는 부이사관이기는 하지만, 그런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분명히 파파는 나와 사라 언니가 그런것처럼, 가령 아무리 원조의 손길을 뻗쳐 주려고 열망하더라도 당신네 민족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기껏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우리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는 일뿐입니다. 당신은 무르타투리를 좋아했지요? 급진파가 찬양해 마지않는 그 작가는 물론 당신네 민족을 위해 큰 공헌을 했읍니다. 그렇습니다. 무르타투리, 그리고 바른 판 호에펠(바다비아의 네덜란드 개혁파 교회의 목사), 그리고 또 한 사람, 아마 당신의 선생님도 그에 내하여 이야기 하는 것을 잊었겠지만, 로르다 판 에이싱하.
그렇지만, 이 세 사람은 당신네 민족을 향해 호소한 적은 없읍니다. 그들의 상대는 어디까지나 자기 나라 국민, 즉 네덜란드인이었옵니다. 그들은 당신네 민족을 정당하게 대우하도록 유럽에 주의를 환기시켰던 것입니다.
밍케, 그들이 당신네 민족을 위해 한 것은, 파파의 말을 빌리면 이 19세기가 끝나려고 하는 오늘날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것에 불과합니다.
지금은 쁘리부미 스스로가 자신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그날 스누크 푸르푸로니에 박사의 노력에 대해서 논의한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닙니다. 박사는 우리 가족의 사상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읍니다.
그때 당신이 비웃은 '에소시에이션 이론'을 우리들은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옵니다. 여기까지 말하면, 왜 파파가 당신에게 관심을 갖고 있는지 당신도 이해가 갈 것입니다. 실제로 파파도 우리들도 당신과 같은 자바인을 만난 적이 없읍니다.
파파에 의하면, 당신의 태도는 완전히 유럽적인 것으로서 당신이 태어난 이 땅에 유럽인이 발을 들여놓은 이래 줄곧 계속되어온 패배시대의 산물인 자바인의 노예근성과는 달랐읍니다.
이 넓은 관저에서의 쓸쓸한 저녁, 우리들의 큰 즐거움은 피로하지 않을 때 파파가 들려 주는 당신네 민족의 운명에 대해 얘기를 듣는 것입니다. 당신네 민족은 유럽의 압제에서 벗어나려는 괴로운 싸움 속에서 몇백 몇천 명이라는 지도자와 영웅을 낳았읍니다.
그들 지도자나 영웅들은 한 사람 한 사람씩 쓰러지고 패배하고 전사하고 항복하고 발광하고 굴욕 속에서 잊혀져 갔읍니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싸움에서 승리한사람은 없읍니다.
우리들은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감동하고, 동시에 당신네들의 지도자들이 그 성격적, 정신적인 약점을 폭로하여 자기 이익을 위해 동인도 회사에 영지 등을 분양받아가는 데에 분개도 했읍니다.
당신네들의 영웅들은 파파의 얘기로는 그러한 매국적 반역이라는 배경 속으로부터 나타나기 시작했옵니다. 그들은 몇 세기에 걸쳐 차례차례로 나타나서는 싸웠고, 그리고 그것이 모두 과거의 투쟁을 되풀이하는데 불과하다는 것을 아무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파파의 표현에 의하면, 그것은 바로 영광이라는 단순한 추상적 관념을 위해서 육체도 정신도, 그리고 물질적 부도 팽개쳐 버린 민족인 것입니다. 파파가 말하는 것은 그들은 패배하도록 운명지워져 있었던 것이고, 그러한 자기 운명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층 더 애처로운 것입니다. 이 위대하고용감한 민족은 끊임없이 수면에서 머리를 내밀려고 하다가는 그때마다 유럽인으로부터 머리를 다시 물 속으로 처박혔읍니다. 원주민이 목을 공중으로 들어 위대한 알라의 세계를 쳐다보는 것을 유럽인은 허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고투라는 말을 잊어버릴 때까지 고투를 계속하고 패배라는 단어를 잊어 버릴 때까지 패배에 패배를 거듭했읍니다.
파파에 의하면, 현재 그리고 미래의 인류의 운명은 어떻게 과학과 지식을 자기 것으로 만드느냐에 달려 있다고 합니다. 그것 없이 인간은 개인은 물론이고 국민으로서도 살아남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과학과 지식을 익힌 사람을 상대한다는 것은 몰락과 죽음에 몸을 내맡기는 것이나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파파는 '에소시에이션 이론'에 동의하고 있읍니다. 그것만이 쁘리부미에게 있어서 유일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파파는 당신이 가까운 장래에 유럽인과 대등한 입장에 서서 이 나라와 민족을 이끌어 가기를 바라고 있읍니다. 그 기대는 우리들 자매에 있어서도 변함이 없읍니다. 당신은 이미 그 문턱에 서 있읍니다. 우리들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당신은 틀림없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 자매는 아버지를 대단히 사랑하고 있옵니다. 그 분은 단순한 한 사람의 아버지만이 아닙니다. 아버지인 동시에 우리들이 세상를 보고 이해해 가는 데 올바른 지침을 제시해 주는 교사이고, 풍부한 경험과 지식을 갖춘 원숙한 친구이기도 합니다.
또한 아버지는 부하들의 처지는 아랑곳 않고 사리사욕을 도모하는 그런 부류의 행정관도 아닙니다. 당신이 처음으로 우리들을 방문한 날, 당신이 돌아간 뒤에 파파가 무슨 말을 했는지 들려 드리겠어요. 돌아갈 때 당신은 분개하고 있었지요? 우리들은 알고 있었읍니다. 그때 당신은 아직 우리들의 의도를 이해하고 있지 않았으니까요. 물론 그날 파파가 당신을 두고 즉시 자리를 뜬 것은, 당신이 우리들과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도록 일부러 그렇게 한 것입니다. 하지만, 유감스업게도 당신은 몹시 긴장해서 굳어 있었읍니다. 당신이 돌아간 뒤에 곧 파파는 당신에 대한 우리들의 의견을 물었읍니다. 사라 언니가 끝내 밍케가 화를 냈다고 얘기하고, 스누크 푸르푸로니에 박사와 그의 '에소시에이션 이론'은 3백 년이나 뒤떨어져 있다고 한 당신의 말을 그대로 전했읍니다.
그러자 파파는 깜짝 놀라서 내게 좀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읍니다. 그뒤 파파는 이렇게 말했읍니다.
"밍케는 자바인이라는 사실에 긍지를 갖고 있구나. 그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또 민족의 아들로서의 자존심을 갖고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밍케는 보통 자바인과는 전혀 다르다. 자바인은 동포들 속에서는 자신들이 세계에서 비할 바 없이 훌륭한 민족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유럽인 앞에 나가면 상대가 한 사람밖에 없어도 갑자기 위축되어 얼굴을 들 용기조차 잃어버리거든. "
밍케, 당신에 대한 파파의 찬사에 나도 동감입니다. 당신에게 행운이 있기를 !
그때 와양 오랑의 작은 방에서 가무란 소리가 들려 왔옵니다. 파파는 2년 전부터 가무란에 관심을 갖고 당신네 민족의 언어에 귀를 기울이도록 우리들에게 가르쳤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읍니다.
"너희들은 지금까지 가무란을 듣는 법을 공부해 왔다. 이제는 충분히 감상할 수 있을 게다. 잘 들어 보아라. 가무란의 선율은 모두 징소리를 중심으로 만들어졌고, 그것을 따르고 있다. 저것이 자바 음악의 기본이다. 그린데 자바인의 현실적인 생활은 그렇지가 않다. 그것은 이 애처로운 백성이 자신들의 생활 속에 징을, 즉 자신들이 믿고 따를 수 있는 지도자와 사상가를 지금까지도 찾아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
부탁이에요, 밍케, 제발 아버지의 이 말을 이해해 주세요. 그런 애기는 나의 아버지 외에 다른 사람한테서는 들을 수가 없읍니다. 저 위대한 학자인 스누크 푸르푸로니에 박사에게서도 듣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아버지를 가진 것을 우리들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유럽 음악보다는 가무란을 더 좋아할 것이라고 아버지는 확신하고 있음니다. 왜냐 하면, 당신은 우아한 가무란의 음악을 들으면서 자라났을 테니까요.
밍케,
가무란의 선율 속에 등장하는 징소리 말고 도대체 자바의 현실 생활 어디에 징이 존재할까요? 당신이 장차 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닐까요? 그 위대한 징으로? 당신이 그렇개 되기를 기도해야 될까요?
그리고 다서 파파는 저 가무란 소리를 잘 들어 보라고 하며 다시 한번 말했읍니다........
"지난 수백 년 동안 가무란의 연주는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바인의 현실 생활에 있어서의 징은 지금도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가무란은 대개 구세주의 도래를 대망하는 민족의 감정을 노래한 것이란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앉아서 기다리고 바라기만하는 것으로서, 구세주를 자기 힘으로 찾거나 탄생시킨다는 얘기는 아니다. 즉 가무란은 자바인의 정신 세계를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힘으로 추구하는 것을 기피하고, 기도나 주문과 같이 단순한 요행만을 바라면서 사고를 점점 잃어가고 힘이 없는 나약한 미로의 세계에 사람을 끌어들인다. 가무란은 그런 그들의 정신 상태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란다."
밍케, 이것은 어디까지나 한 유럽인의 견해입니다. 자바인에게는 그런 견해를 가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파파는 그리고 또 이렇게도 말했읍니다. "20년 뒤에도 그런 가무란의 선율이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이 민족이 아직도 자신들의 구세주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아아, 밍케, 이 불쌍한 당신네 민족은 20년 뒤 도대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언젠가 우리들은 네덜란드로 돌아갑니다. 나는 정계에서 활동할 생각입니다. 다만 매우 유감스럽게도 네덜란드에서는 아직 여성이 하원의원이 되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읍니다. 언젠가 그런 제도가 바뀌어 내가 영광스러운 하원의원이 되었을 때, 나는 국회에 나가 당신네 나라와 민족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발언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다시 자바에 돌아오게 되면, 나는 제일 먼저 당신들의 가무란을, 더할수 없이 아름다운 하모니를 읊어대는 가무단을 다시 한번 들을 생각입니다, 그때 만일 여전히 똑같은 선율이라면..... 스스로의 노력을 포기하고 기다릴 뿐이라는 주제에 변화가 없다면, 그것은 곧 구세주가 아직 도래하지 않았고 아직 탄생하지 않았다는 것일 테지요.
또 그것은 당신이 아직도 징이 되어 등장하지 않았다는, 즉 자바인은 아무도 징이 될 사람이 없고, 결국 당신네 민족은 끝없이 쏟아지는 선률의 홍수와 악순환 속에 언제까지나 가라앉아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때 만일 가무란의 선율에 변화가 있다면, 나는 당신을 찾아가 당신에게 경의를 표할 생각입니다. 20년 !
그것은 경주마처럼 눈깜짝할 사이에 변화해가는 이 시대에 있어서도 충분히 길고 또한 한 인간의 생애로 보아도 넉넉한 시간입니다.
밍케, 이것이 당신이 나한테 받는 최초의 편지입니다.
당신의 성공을 비는 성실한 친구 미리암 드라크로아 올림
편지를 접을 때, 나는 내 눈물이 여기저기에 번져 푸른 얼룩을 만들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단 두번 밖에 만난 적이 없는 처녀의 편지를 읽고 나는 왜 울어야만 했을까? 육친도 천척도 아니고 동포도 아닌 데 말이다. 그녀는 나에게 커다란 기대를 걸고 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자신의 무분별한 행동 때문에 혼란에 빠져 있었다. 미리암은 그녀의 동포가 아니라 내 동포 내 민족에게 이바지하는 사람이 되어 주기를 나에게 바라고 있다. 과연 새로운 무르타투리, 새로운 판 에이싱하가 태어날 것인가?
나는 이미 "슬라바야 일보"의 편집국장 마르틴 네이만씨한테 재능을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아름다운 편지에 도대체 어떻게 답장을 써야 할까? 미리암의 기대에 부응하기에는 나는 너무나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겨우 답장을 썼다. 고마와요, 미리암, 고맙습니다.----- 그 말을 다는 징소리를 기다리면서 전주를 반복하는 가무란의 선율처럼 몇번이고 몇번이고 되풀이했다. 답장 또한 마침 내가 무르타투리와 판 에이싱하를 생각하고 있을 때, 그녀도 또한 편지 속에서 두 사람에 대해 이야기한 우연의 일치에 대해 놀라움을 표시하고, 우리들이 동시에 두 사람을 생각한 것은 아마도 같은 시대조류, 즉 같은 자유주의적인 시대의 흐름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썼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편지를 매듭지었다.
친애하는 미리암, 당신과 같은 좋은 친구를 얻을 수 있게 되어서 나는 행복합니다. 앞으로 20년 뒤 어떤 일이 일어나 있을지 나는 알 수가 없읍니다. 내가 징이 될 수 있다니,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읍니다. 북이 되는 것조차 꿈꾼적이 없읍니다. 만일 아름답고 감동적인 당신의 편지를 받지 못했다면, 앞으로도 그런 일은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내 동포가 아닌 사람의 편지였기 때문에 당신의 편지는 더욱 가슴을 찌르는 것이 있었읍니다. 나의 성실한 미리암, 당신에게 안녕과 행운이 깃들기를 빕니다. 언젠가는 당신이 영광스러운 하원의원의 자리에 오르개 되기를 빌겠읍니다.
나는 얼굴을 테이블에 파묻었다. 미리암의 편지를 평생 잊지 말자고 마음 속으로 다짐했다.
우정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두통은 차츰 덜하더니 조금 뒤에는 완전히 나았다. 미리암은 단지 편지를 보낸 것에 불과하지만 나는 거기서 긴장감을 좇아주는 부적을 얻었다. 그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나는 용기를 얻었고, 세상이 전보다 더 밝고 찬란하게 빛나 보였다. 징이 되는 거야 ! 그런 목소리가 내 귀에 강하게 울렸다.
"도련님 !"
나는 얼굴을 들었다. 내 앞에 서 있는 인물이 눈에 들어온 순간, 머릿속의 파라키아 나무가 일제히 되살아나서 조금 전보다 더 힘차게 뿌리와 가지를 뻗기 시각했다.
눈 앞에 서 있는 것은 바로 다르삼이었다.
"실례했읍니다, 도련님. 놀라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얼굴이 새파랗게 변하셔서."
흘끔흘끔 그의 긴 칼과 손을 보면서 나는 웃음을 지어 보이려고 애썼다. 수염을 만지면서 다르삼은 붙임성 있게 웃었다. "도런님은 나를 의심하고 있군요."
그는 말했다.
"다르삼은 도련님의 친구인데요."
"그래, 도대체 무슨 일이오?"
나는 아무것도 모른 척하고 물었다. "냐이님께서 편지를 보내셨읍니다. 아가씨께서 중병에 걸리셨읍니다."
나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다르삼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서 있었다. 그는 편지를 내밀었다. 이따금 그의 칼과 손에 시선을 보내면서 나는 그 편지를 읽었다. 분명히 안네리스는 심한 병이 들어서 마르티네 의사의 치료를 받고 있다고 씌어 있었다.
냐이는 안네리스가 병에 걸린 원인을 설명하고, 의사의 권고에 따라 즉시 돌아와 달라고 애절하게 부탁하고 있었다. 내가 곁에 있어 주지 않으면 안네리스는 회복할 가망이 없고, 점점 더 악화되어 갈 것이라고 마르티네 의사가 말했다는 것이다 "자, 도련님, 우노크로모로 가 주십시오, 어서요."
가슴이 찢어질 것처럼 아파 왔다. 똑바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재빨리 테이블 모서리를 잡고 희미한 눈으로 마두라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는 내 어깨를 잡았다. "걱정 마십시오. 시뇨 로베르트는 염려 없읍니다. 이 다르삼이 틀림없이 지켜드리겠옵니다. 자, 가십시다."
미리암 드라크로아는 사라졌다. 증발해서 궤도로부터 소멸했다. 우노크로모가 발산하는 마력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었다. 다르삼의 부축을 받아 나는 2륜 마차에 올라탔다.
"하숙집 주인에게 인사를 하고 가지 않아도 됩니까?"
다르삼이 물었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테린하 부인을 불러 외출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문턱에 서서 반갑지 않은 얼굴을 해 보였다.
"너무 오래 있으면 안됩니다, 도련님."
그녀는 그렇게 주의를 주었다.
"몸이 시원치를 않으니까요."
"도련님은 우노크로모에서 곧 완쾌될 것입니다."
다르삼이 대답했다.
무시무시한 다르삼의 얼굴에 검을 집어 먹었는지 테런하 부인은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련님, 짐은? "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우느크로모까지 가는 도중 나는 마차 속에서 내가 정신을 잃고 있는지 어떤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한 것은 그때 로베르트 슬르호프의 유혹을 받아들인 탓으로 지금까지의 모든 사태를 초래했고, 많은 사람들을 말려들게 하고 이렇게 젊은 나이에 벌써부터 생명을 위협당하는 긴장 속에 떨고 있다는 점뿐이다. 그 동안 내 귀에 들려온 것은 마두라의 칼잡이 입에서 흘러나온 한 마디뿐이었다.
"이 마차와 말은 지금부터 도련님 것입니다."
제11장
사랑의 굴레
다르삼의 안내를 받아 계단을 올라가려고 하는데 냐이 온트솔로가 마중을 하기 위해 뛰어나왔다.
"너무하는군요, 이처럼 사람을 기다리게 하다니 ? 안네리스는 당신이 보고 싶은 나머지 중병에 걸렸어요."
"도련님도 편찮으십니다, 냐이. 일단 모시고는 왔읍니다만." "괜찮아요. 두 사람이 만나서 함께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테니까요. 병 따위는 도망가버릴 거예요."
그 말에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으나 동시에 그것이 독소가 되어 머릿 속의 파라키아를 움츠리게 하는 것 같기도 했다. 냐이는 내 어깨를 잡고는 미소를 띠며 귓가에서 속삭였다.
"정말 열이 있군요. 하지만 모든 것이 잘 될 거예요. 자, 이층으로 올라가요. 당신의 안네리스가 기다리고 있어요. 편지 한장 보내지 않다니 너무 했어요."
냐이의 목소리는 너무나 다정해서 마치 나의 어머니, 내가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처럼 내 마음 속으로 깊숙이 스며들어 왔다. 그녀의 손에 끌려가는 나는 갓난애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눈만큼은 빈틈 없이 여기저기를 살펴보고 있었다. 언제 어느 때 로베르트가 어둠 속에서 튀어나와 나에게 덤벼들지 모르는 것이다.
"로베르트는 어디 있읍니까?"
계단을 올라가면서 내가 물었다.
"당신이 그런 것을 물을 필요는 없어요. 그애는 자기 아버지의 아들이니까. "
이 여자 앞에 서면 왜 나는 이토록 온순해지는 것일까? 그녀의 마음대로 빚어지는 점토처럼 어째서 아무런 반발심 없이 따르게 되는 것일까? 저항할 의욕조차 없어져 버리는가? 그녀는 나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그것을 그녀가 바라는 방향으로 바꿀 수가 있는 것이다.
이층은 훨씬 호화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계단 바닥은 거의가 융단이 깔려 있어서 도둑 고양이처럼 소리 하나 내지 않고 걸을수가 있었다.
열려 있는 창문으로는 멀리 논밭과 숲이 끝없이 펼쳐진 경치가 한눈에 들어왔다. 사람들 한 무리가 수확의 마무리에 열중하고 있었다. 손을 대지 않은 채 방치된 논이 건조기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그 해는 대풍작이라고 신문은 보도하고 있었다. 동부 자바와 중부 자바의 가장 비옥한 미작 지대는 실제로는 사탕밖에는 생산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삼에서 낮은 품질의 쌀을 수입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것은 보기 드물게 어린 나이로 즉위한 빌헬미나 여왕이 신에게 축복받고 있는 증거라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침대 앞에 섰다. 냐이는 딸의 담요를 반듯하게 다시 덮어 주었다. 안네리 스의 가슬이 담요 밑에서 탐스럽게 부풀어올라 있었다. 냐이는 딸의 손을 내 손에 쥐어 주었다.
"안네리스 !"
괴로운 듯이 그녀는 살며시 눈을 떴다. 그러나 우리들 쪽으로 얼굴을 돌리려고도 바라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수심에 잠긴 시선을 천천히 천정으로 보내고는 이윽고 다 시 감았다. "밍케, 나의 귀중한 보물을 보살펴줘요."
냐이가 속삭였다.
"당신도 몸이 아프다고 했죠? 그렇다면 지금 여기서 낫기를 바래요. 당신과 함께 이 아이를 건강하게 해 주세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간절함이 역력히 나타나 있었다. 냐이는 절박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에게 맡기겠어요. 만일 이 아이가 다시 건강해지기만 한다면 말이에요. 당신은 배운 사람이니까, 내가 하려는 말 뜻을 알고 있을 거예요."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녀는 두 손으로 내 팔을 꽉 붙잡았다. 그리고는 갑자기 등을 돌리고 방을 나갔다.나는 담요 밑에서 안네리스의 손을 더듬었다. 차가왔다. 그녀의 귀에 가까이 입을대고 몇 번씩 이름을 불러 보았다.
안네리스는 미소를 지었으나 눈은 감은 채였다. 열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그때 나는 머릿속에 있는 파라키아 나무의 뿌리와 가지가 몽땅 뽑혀서 밖으로 내던 져져 어디론가로 굴러 떨어져 버린 것을 깨달았다.
지금 안네리스와 나는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이 있다. 심장이 격렬하게 두근거 리며 뜨거운 피를 온몸에 뿜어댔다. 땀이 배어나왔다.
"밍케의 도착을 줄곧 기다리고 있었지 ?"
나의 착각인지 실제로 그랬는지 안네리스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인 것 같았다, 그러나 눈은 여전히 감겨 있었다. "앤, 당신은 밍케가 그리웠지 ? 틀림 없이 그리웠을 거야. 나도 당신이 그리웠어. 사실이야. 항상 당신 곁에 있고 싶어. 내가 얼마나 당신을 인생의 반려자로 삼고 싶어하는지 당신이 알아 준다면, 그것만으로 나는 세상을 모두 얻은 것 보다 더 기쁠 거야. 왜냐 하면, 나의 행복은 바로 당신이니까. 앤, 밍케가 옆에 있잖아. 제발 눈을 떠 줘, 응?"
안네리스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눈과 입술은 여진히 닫혀 있었다.
이미 내 목소리도 기억하지 못하게 되었단 말인가?
나는 안네리스의 얼굴과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그녀는 고개를 기울이고 다시 한숨을 쉬었다. 이 처녀는 죽어버린 것일까? 이토록 아름다운 처녀가? 나는 안네리스의 몸을 끌어안고 입술에 키스했다. 가슴 안쪽에서 느릿느릿한 심장의 고동 소리가 들려왔다. 손가락이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천천히 움직였다.
"앤, 안네리스 ! "
참다 못해서 나는 귓가에 대고 소리쳤다.
"눈을 떠요, 앤"
그녀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러자 안네리스는 눈을 떴다. 허공을 바라보는 두 눈동자는 나를 보지도 내 얼굴에 와 닿지도 못했다.
"앤, 벌써 나를 잊었어 ? 나를? 밍케를?"
그녀는 미소를 지었으나 그 시선은 여전히 내 얼굴을 보고 있지 않았다.
"앤, 앤, 이래서는 안돼. 밍케가 왔는데도 기쁘지 않은 거야? 내가 왔어. 당신을 남겨 두고 다시 돌아가라는 거야? 안네리스, 나의 안네리스 !"
내 품에서 그녀를 죽게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나는 일어서서 이마의 땀을 닦아주었다. "계속해요, 밍케."
문 가까이에서 냐이가 격려했다.
"그 아이가 말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얘기를 하세요. 그렇게 하라고 마르티네 의사가 말했어요."
나는 뒤돌아보았다. 냐이는 밖에서 문을 닫으려 하고 있었다. 그녀의 말에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안네리스가 위독한 상태는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아직 의식이 분명치 않을 뿐이다.
나는 침대 옆에 걸터앉았다. 안네리스는 눈을 뜨고 있었으나 아직 아무것도 보고 있지는 않았다. "언제까지나 이래서는 안돼요, 앤."
나는 나 자신에개 확신시키듯이 말했다.
담요를 옆으로 치우고 그녀의 두손을 잡아당겨 침대 위에 일으켜 앉혔다. 그러나 그녀의 몸은 쇠약한 탓으로 내가 손을 놓자 다시 베개 위로 쓰러졌다.
나는 다시 일으켜 앉혔다. 그러나 여전히 안네리스는 몸을 지탱하지 못했다. 어떻게 해야 될까?
다시 한번 나는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 손이 움직였다. 거의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미세한 움직임이었으나, 조금 전보다는 많이 움직였다.
나는 안네리스의 목을 왼손으로 감싸 안았다. 그리고 어떻게든 그녀의 입을 열게 하려고 다시 말을 걸었다. "앤, 당신이 이렇게 앓아 누워 있으면 도대체 누가 마마를 도와 주지 ? 아무도 없잖아? 그러니까 당신은 앓아 누워서는 안 돼. 건강해야 한다구. 일을 하고 나하고 산책도 할 수 있게 말이야. 말을 타고 함께 슬라바야의 거리를 달려야지." 나는 먼 곳을 향하고 있는 안네리스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검은 눈동자에는 내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나를 보고 있지는 않았다. 눈동자에 얼굴이 비친 것은 환영이었을까 ? 냐이 온트솔로가 두 잔의 따뜻한 우유를 갖고 다시 나타났다. 컵 하나는 테이블 위에 놓고, 다른 하나는 내게 갖고 와서 내 입술에 갖다댔다.
"쭉 마셔요, 밍케. 다시 건강해져야 해요. 병 때문에 몸이 약해진 사람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되는 거예요."
그리고 안네리스를 향해 말했다.
"앤, 일어나라. 밍케가 네 옆에 있잖니 ? 또 누구를 기다리고 있니 ?" 안네리스의 반응도 살펴보지 않고 냐이는 다시 방에서 나갔다.
얼마 뒤 아무런 진전도 없는데 마르티네 의사가 냐이의 안내를 받아 방으로 들어왔다. 나는 안네리스의 머리를 베개에 눕혀놓고 그를 맞았다.
"선생님, 이족은 밍케입니다. 오늘은 그가 간호를 하고 있읍니다. "
우리들은 악수를 나누었다.
냐이는 그 모습을 잠시 보고 있더니 계속 말했다.
"저는 이만 실례하겠옵니다. 아래층에 볼 일이 있어서요." "당신이 밍케씨군요? 고등학교에 다닌다는? 부럽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처녀의 깊은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으니 말이오."
의사는 서투른 네덜란드어로 말했다. "선생님, 제가 온지 한 시간이나 지났는데도 앤의 상태는 변함이 없읍니다. 걱정이 되어서......"
40대의 의사는 가벼운 웃음을 지어 보이고 고개를 끄덕이며 내 어깨를 흔들었다.
"당신은 이 아가씨를 좋아합니까? 솔직하게 대답해 주십시오."
"네, 좋아합니다."
"그녀를 장난삼아 데리고 논다는 생각은 없겠지요?"
그는 나를 똑바로 쏘아 보면서 말했다.
"데리고 논다고요? 어떻게 그런 짓을 합니까?"
"고등학교의 학생은 언제나 젊은 여성들의 신망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학교가 생긴 이래 계속 그랬읍니다. 부타위에서도 사마랑에서도 그렇습니다. 밍케씨, 다시 한번 다짐하겠는데, 당신은 그녀를 장난삼아 사귀는 것은 아니란 말이지요?"
내가 잠자코 있는 것을 보고 그는 계속 말했다. "이 아가씨에게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입니다. 그것은 당신입니다. 당신 이외의 것은 그녀는 무엇이든 갖고 있으니까요."
나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가슴속은 갈기갈기 찢겨져 있었다.
처음부터 안네리스를 데리고 놀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동시에 상대가 그녀가 아니더라도 젊은 처녀와 사귈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지금 안네리스는 나를 완전히 손아귀에 넣으려고 한다. 나는 스스로의 행동에 의해서 시험받고 있는 것이다.
마르티네 의사의 질문에 대해서 아직 확신도 없는데 내가 그렇다고 대답한 것은 은밀한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녀의 의식이 빨리 회복되기를 바라고 있겠지요?"
"물론입니다, 선생님. 진심으로 그렇게 원하고 있옵니다. 의식이 돌아오기만 하면 신생님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릴 생각입니다."
"회복할 겁니다. 사실은 내가 일부러 약을 써서 잠들게 해 놓은 것입니다. 그녀가 이렇게 오래 혼수 상태에 있는 것도 좀처럼 이곳에 나타나지 않은 당신 탓입니다. 깨어 있을 때, 당신이 곁에 없으면 그녀는 병이 더 악화됩니다. 거꾸로 당신이 없다고 해서 약으로 너무 오랫동안 혼수상태로 놓아두면 심장이 위험해집니다. 어쨌든 당신이 모든 열쇠를 쥐고 있읍니다."
"죄송합니다."
"그녀가 이렇게 위험한 상태에 빠진 것도 바로 당신 때문입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얘기를 계속했다. "조금 있으면 의식을 회복하게 됩니다. 아마 15분쯤 뒤일 것입니다. 그 기미가 보이거든 말을 걸어 주십시오. 조용하고 다정스럽게 말입니다. 거친 말투로 꾸짖거나 해서는 안됩니다. 모든 것을 당신에게 맡기겠읍니다. 용기를 갖도록 해 주십시오."
"알겠읍니다, 선생님."
"네, 그렇습니다."
"축하합니다. 약의 효력이 떨어질 때까지 그대로 그녀 곁에 있어 주셔야 합니다. 괜찮다면 당신의 성을 가르쳐 주시겠읍니까?"
"성은 없읍니다."
그는 침을 삼키지 않고 헛기침을 했다. 극히 짧은 순간이었으나 의아스러운 듯이 내 얼굴을 바라 보았다. 그리고는 창가로 걸어가서 안채 옆의 밭과 뜰을 바라보았다. "이쪽으로 오세요."
의사는 돌아다보지도 않고 내게 말했다. 나는 다가가서 창가에 나란히 섰다.
"없음니다. 정말입니다."
"세례명은요? "
"없읍니다."
"성도 세례명도 없는데, 고등학교의 학생이라니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읍니까 설마 당신이 쁘리부미라는 건 아니겠죠?"
"바로 맞혔읍니다. 나는 쁘리부미입니다."
그는 나를 보고 심문하는 듯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쁘리부미가 아무리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다고 해도 그런 식으로 살 수는 없을 거요, 당신은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소." "아닙니다. 숨기는 건 없읍니다."
상당히 오랫동안 그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아마 나름대로 이해해 보려고 애쓰고 있을 것이다.
"또 한 가지 묻겠는데, 당신은 인제까지나 안네리스와 친하게 지낼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까." "물론입니다. "
"영원히 ? "
"왜 그런 말을 묻습니가?"
"그녀는 가엾은 아가씨입니다. 난폭한 것은 견디어 내지 못합니다. 자신을 소중하게 아껴 주는 사람, 열렬하게 사랑해 주는 사람을 그녀는 바라고 있읍니다. 안네리스는 지켜 주는 사람도 없고 세상 일도 모르고, 오로지 외토리라는 생각으로 쓸쓸하게 살아 왔읍니다. 당신에게 모든 희망을 걸고 있는 것입니다."
의사의 말은 과장된 데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녀에게는 이끌어 주고 사랑해 주고 돌보아 주는 어머니가 있지 않습니까?"
"그녀는 지금과 같은 어머니의 태도가 언제까지나 계속 되리라고 믿고 있지 않습니다. 언제 무슨 이유로 어머니와 헤어질 때가 찾아올 지도 모른다고 항상 겁을 먹고 있읍니다."
"......하지만, 신생님, 마마는 현명한 여성입니다."
"그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었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안네리스는 진심으로 믿고 있지 않습니다. 틀림없이 어머니는 자기보다도 사업 쪽에 더 애착심을 갖고 있다고 그녀는 믿고 있어요. 이것은 당신과 나만의 비밀 얘기입니다. 내 말 알겠지요?"
다시 마르티네 의사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는 갑자기 입을 열었다.
"이제 알았겠지요?"
"대충 알겠읍니다."
"심한 말이나 난폭한 얘기, 충격을 주는 얘기 같은 것은 절대금물입니다. 안네리스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읍니다. 내가 이런 얘기를 일부러 하는 것은 여성을 다정하고 따뜻하게, 그리고 부드럽게 다루는 데 쁘리부미 남성은 익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범위에서는 그렇습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유럽 문명을 배워 왔기 때문에 여성을 대하는 유럽의 남성과 쁘리부미 남성의 태도의 차이를 알고 있을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일반적인 자바 남성과 마찬가지라면, 이 아가씨의 건강은 장담할 수가 없읍니다. 죽지는 않더라도 산 송장이 될 것이 뻔합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가정해서 하는 말인데, 만약 안네리스와 결혼할 경우 당신은 두 번째 부인을 맞을 생각입니까 ?"
"그녀와 결혼을요?"
"그래요. 적어도 이 아가씨는 그것을 꿈꾸고 있옵니다. 그녀와 결혼할 생각이겠지요딜?당신은 지금 마지막 학년일 테니까요."
"지금으로서는 구혼할 의사는 없읍니다."
"필요하다면 이 아가씨를 위해서 내가 중매역을 하겠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녀와 결혼을 하실 생각인가 보군요. 그리고 두번째 부인도 얻지 않고."
그는 그렇게 말하고 내게서 확답을 얻으려는 듯이 악수를 청했다.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처음부터 나는 여러 명의 아내를 갖는다는 것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두 명 이상의 아내를 갖는 남자는 모두 예외 없이 거짓말장이들이다. 그가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이 거짓말장이가 된다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귀에서 항상 떠나지를 않았다.
"이 아가씨의 마음은 너무나도 섬세하고 부서지기 쉽고 조그만 일에도 곧 상처를 입기 쉽습니다. 항상 다정하게 돌보고 신경을 쓰고 토닥거려 주고 보호해 주지 않으면 안됩니다. 안네리스는 빈 껍질만 남아 있는 것 같아요." "빈 껍질 ?"
"원인은 그녀와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있읍니다." "누군가요, 그것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읍니다. 어쨌든 그녀가 놓인 환경, 그 분위기에서 짐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 젊은 나이에 아가씨의 마음은 말로는 표힌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문제로 꽉 차 있읍니다. 그것을 누구에게도 털어 놓을 수가 없기 때문에, 그녀는 고아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항상 안네리스는 자신이 공중에 떠 있는 듯이 느끼고 있지요.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확실한 것을 찾지 못하고 있읍니다. 그녀는 자신을 부축해 줄 사람을 필요로 하고 있읍니다. 풍요로운 가정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돈의 힘이라는 것을 그녀는 자각하지 못합니다. 안네리스에게 있어서 돈은 아무런 의미도 없어요. 이것이 그녀에게서 내가 느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 얘기를 듣고 있읍니까 ?" 마르티네 의사는 주머니에서 외쪽 안경을 꺼내 오른쪽 눈에 끼었다. 그리고는 시계를 보고 내게 시선을 돌렸다. "진지하게 들어줘서 감사합니다. 이 조용하고 평화로운 풍경을 보십시오. 풍요와 평화 속에 둘러싸여 살 수 있다는 것은 그녀에게는 행운입니다. 만일 그 두 가지가 없었다면 도대체 어떻게 되었을까요?"
내 머릿 속의 파라키아 씨앗은 다른 종류의 씨앗으로 바뀌었다.
그것은 의사의 얘기 속에 담긴 뜻에 대한 의혹이었다.
"나는 심리학자는 아닙니다만 지금까지 안네리스의 어머니와 나눈 얘기를 나름대로 분석해 보았읍니다. 그녀의 말한마디 한마디는 교양이 있고 깊은 내용이 담겨 있읍니다. 또한 거기에는 사무친 원한을 품은 인간의 강한 의지가 숨겨져 있읍니다. 여자로서 그 정도 지식을 갖기는 상당히 힘듭니다. 유럽에도 그녀 같은 여성은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내 생각으로는 그녀는 자신이 원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녀를 변하게 만든 원인이 한 가지, 아니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릅니다. 그녀가 뛰어나게 강인한 의지와 예리한 사고력을 가지고 노력 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열매를 맺어 그녀를 강하고 용기있는 사람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녀도 어떤 문제에서는 커다란 실수를 저지르고 있읍니다. 당신도 알겠지만 혼자 힘으로 성공을 한 사람은 한결같이 일종의 결함을 갖고 있기 마련입니다."
마르티네 의사는 내가 얘기의 참뜻을 스스로 이해하기를 기대했는지, 그 이상은 계속하지 않았다.
"의식이 돌아올 시간이 된 것 같군요."
갑자기 그렇게 말하고는 나를 남겨 두고 환자에게로 다가갔다. 안네리스의 맥박을 재고 나서 나를 손짓해 불렀다.
"자, 밍케씨, 몇 분 있으면 그녀는 당신이 알고 있는 옛날의 안네리스로 돌아옵니다. 당신의 간호로 다시 건강올 되찾기를 법니다. 지금부터 이 아가씨는 이미 내 환자가 아니라, 당신의 환자입니다. 지금까지 당신에게 한 얘기는 모두 혼자만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럼, 안녕."
마르티네 의사는 방을 나갔다.
지금이야말로 나는 내 자신의 입장을 생각해 봐야 한다. 지난 며칠 동안 나는 계속해서 새로운 체험을 했고, 그 속에서 정신없이 쫓겨 다녀야만 했다. 그리고 이제부터 또 하나의 관문을 뚫지 않으면 안된다. 바로 안네리스다 ! 언젠가 쟝 마레는 이렇게 말했다. 밍케, 위대한 예술가가 위대해진 이유는 그것이 화가이든, 또는 지도자이든 군인이든 그들의 삶이 감각적으로, 또 정신적이고 육채적으로 크고 강렬한 체험을 잉태하고 그것을 밑바탕으로 삼고 있기 때문일세.
그가 그렇게 말한 것은 네덜란드의 시인 폰텔과 무르타투리의 생애를 내게 소개했을 때였다.
위대한 경험이 없이 위대해지려고 하는 것은 완전히 헛된 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위대함은 돈에 눈이 먼 사람들이 만들어 낸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
내가 쓴 글이 활자가 되어 발표되고 있다는 것을 쟝 마레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만일 그의 말이 진실이라면, 앞으로 나는 위대한 작가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냐이가 얘기한 것처럼, 제2의 빅토르 위고가 될지도 모른다. 또는 드라크로아 일가가 기대하는 것처럼 민족의 선각자나 지도자가 될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거꾸로 로메르트 메레마와 뚱뚱보 사나이가 바라고 있는 것처럼 썩어빠진 시체로 끝나버릴지도 모른다.
안네리스의 숨소리가 들리고,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의식이 되돌아오고 있는 모양이다. 이제 그녀가 내 눈 앞에서 숨을 거두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조금 떨어진 의자에 앉아 지켜 보았다. 환자라고는 하지만 그녀는 찬란할 정도로 아름다왔다. 섬세한 피부, 코, 눈썹, 입술, 이, 귀, 머리칼......모든 것이 아름다왔다. 이 미녀의 심리에 관한 마르디네 의사의 분석이 내게는 의문스럽게 생각되었다. 이처럼 아름다운 육체에 깃든 정신 세계가 과연 그가 말하는 것과 같이 그렇게 불안정하고 혼란할 수가 있을까? 그리고 나는 그녀가 아름답다는 단 한가지 이유만으로, 그녀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된단 말인가? 혼혈의 미녀라는 이유만으로?
나의 인생 항로는 어쩌면 이렇게도 골치 아프게 전개되어 가는 것일까 ? 모두가 호색가인 내 죄다.
"마마 !"
안네리스가 힘없이 불렀다. 그녀의 다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앤 ! " 그녀는 눈을 떴다. 그 눈은 여전히 먼 곳을 향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부터 그녀는 내 환자라고 마르티네 의사는 말했었다. 그러니까 내가 그녀를 고치는 의사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뜻이라고 생각하고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테이블에서 우유컵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안네리스의 머리를 팔로 받쳐 일으키고 우유를 조금씩 입에 넣어 주었다.
그녀는 맛을 보듯이 홀짝거렸다. 틀림없이 안네리스는 의식을 되찾고 있는 것이다. 나는 조금 더 넣어 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마시기 시작했다.
"앤, 나의 안네리스, 모두 마셔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더 많은 우유를 흘려주었다.
냐이가 두 사람분의 점심을 갖고 들어왔다.
"어째서 마마가 직접 그런 일까지 하세요?" 나는 이상한 듯이 물었다.
"그게 아니에요. 일하는 사람들을 이층으로 못 올라오게 하니까 그런 거예요. 역시 선생님이 말한대로 의식이 돌아왔군요."
"거의 회복한 것 같습니다."
"그래요, 밍케, 의사 선생님이 그랬어요. 이 아이의 병을 고칠 수 있는 것은 당신뿐이라고요. 모든 것을 당신에게 맡기겠어요." 냐이는 다시 방을 나갔다.
안네리스가 다시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앤, 어디가 아프지 ?"
안네리스는 대답하지 않고 나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나는 그녀의 머리를 다시 베개 위에 뉘어 주었다. 아름다운 콧날에 매혹되어 나는 손으로 쓰다듬어 주었다.
눈썹은 짙고 풍부했다. 위로 말려올라간 긴 속눈썹이 두 개의 눈동자를 새벽 하늘에 빛나는 샛별처럼 보이게 하고, 그 별을 담은 얼굴은 더욱 투명한 하늘을 연상케 했다.
완벽하게 균형이 잡힌 그토록 훌륭한 혼혈의 미녀를 인간의 대지말고 다른 어디서 볼 수가 있단 말인가. 신은 단 한번 내 앞에 있는 이 육체에 그 미를 창조한 것이다. 앤, 당신의 마음이 어떻든 나는 결코 당신을 놓아 주지 않을거야. 무슨 일이 일어나든, 누가 상대이든 간에, 당신을 위해서라면 나는 기꺼이 싸울 거야.
"앤, 오늘은 날씨가 무척 좋아요." 나는 다정하게 말했다.
"약간 덥기는 하지만 습도가 낮아서 상쾌하군요." 안네리스는 코 끝에 촛점을 맞추고 나를 뚫어질 듯이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여전히 입을 열지 않고 가끔씩 눈을 깜박였다. 그렇지만 그녀의 찬란한 아름다움은 변하지 않았고, 일체의 인위적인 것을 초월한 고귀함,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풍요로움을 담고 있었다.
안네리스는 알라 신의 유일무이한 선물인 것이다. 그리고 나만의 것이다.
"눈을 떠요, 앤. 당신은 모르고 있소? 알렉산더 대왕이나 나폴레옹조차 당신 앞에 무릎 꿇고 사랑을 고백할 거요. 당신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라면 국가도 민족도 기꺼이 희생했겠지, 알겠소 ? 제발 눈을 떠요."
나는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그녀의 긴 한숨이 내 얼굴에 부딪쳤다. 나는 다시 안네리스를 바라보았다.
입술이 열리고 눈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말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이스라엘의 처녀들을 찬미하는 솔로몬처럼 그녀의 모든 것에 생각나는대로의 찬사를 쏟아놓았다.
"마스 !"
"앤, 나의 안네리스 ! "
나는 소리쳤다.
"병은 이미 나았소. 자, 일어나서 걸어 봐요."
안네리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손짓으로 나를 불렀다. "자, 내가 안아주지."
나는 그녀를 안아 올렸다. 그렇다. 안아 올렸다. 하지만 내게는 힘이 없었다. 정말 믿을 수없을 정도로 힘이 없었다. 가냘픈 여자 하나를 안아 올리지 못하다니!
나는 안네리스를 카페트 위에 내려 놓았다. 그녀는 걸으려고 하다가 비틀거 렸다.
나는 그녀를 붙잡았다. 조금전까지 의사가서 있던 창가로 그녀를 부축해갔다. 정말 환자를 돌보는 의사가 된 기분이었다. 광활한 전원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해는 이미 기울어가고 있었다. "앤, 잘 봐요. 숲이 조그맣게 보이죠? 그리고 산, 하늘, 대지, 보여요, 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새찬 바람이 광대한 자연으로부터 공격을 가해오듯이 창 틈으로 불어들어왔다. 안네리스는 몸을 떨었다.
"앤, 추위요?"
"괜찮아요."
"다시 침대에 가서 눕는 게 좋겠군요, "
"이렇게 당신 옆에 있고 싶어요.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렸는데......당신은 와 주지 않았어요." 안네리스가 책망하듯이 말했다.
"나는 여기 있을 거요."
"나를 꼭 잡아 줘요. 놓으면 안돼요." "이러다가는 얼어버리겠소."
"따뜻해요. 멀리 보이는 숲이 보통 때와는 다른 것 같아요. 바람도 산도, 그리고 새들도."
"병이 나은 거요, 앤. 다시 건강해진 거라구." "병은 싫어요. 나는 병이 아니었어요. 당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에요. "
그때 이미 내 병도 나아 있었다. 문득 무엇인가가 뒷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것 같아 나는 뒤를 돌아다보았다. 냐이와 마르티네 의사가 문틈으로 흘끗 보였다. 두 사람은 방으로 들어오지 않고 다시 문을 닫았다.
제12장
청춘, 악령
의사의 진단서에 기재된 기간이 넘게 내가 학교를 쉰 것을 교장선생님은 묵인해 주었다. 부이사관 에르베르 드라크로아씨로부터의 안부 인사가 그의 내도를 누그러뜨린 것이다. 며칠을 걸려서 나는 뒤떨어진 공부를 보충했다. 아무런 어려움도 없었다. 일찌기 할머니는 나를 다음과 같이 격려하고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너는 어면 학과라도 훌륭히 소화해낼 수 있을 것이다. 할 수 있다고 믿어라. 그렇게 하면 간단해지는 것이다. 어떤 학과든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왜냐 하면, 그러한 공포심이 무지의 발단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할머니의 충고를 따르고 그 가르침의 정당성을 믿고 있다. 지금까지 단한번도 나는 다른 학생에게 공부에서 뒤떨어진 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과 비교해 내가 특별히 공부벌레였다는 말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때만은 뒤떨어진 것을 만회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마차와 마부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마마가 나를 위해 특별히 제공해 주었다. 아침에 마차로 등교할 때 나는 언제나 도중에서 메이 마레를 태우고 신팡에 있는 그녀의 학교까지 데려다 주었다.
모든 것이 변해 버렸다. 무엇보다도 많이 번한 것은 나 자신이었다. 호화로운 전용 마차로 슬라바야의 시가지를 오가면서부터 나는 자신의 위치가 꽤나 높아진 듯한 느낌을 갖게 되었다. 변화는 급우들에게서도 느껴졌다. 어딘지 모르게 나와 거리를 두려는 것 같았다. 그것을 나는 갑자기 잘 살게 된 사람에 대한 경의의 표현이라고 해석하고 있었다. 선생님들은, 이것도 또한 일시적인 추측이지만, 내가 호화로운 마차를 타고 등교하는 것을 보고 어딘지 모르게 서먹서먹한 태도를 보였고 그들과 대등한 성인으로서 나를 대하는 것같았다. 나는 이미 내가 옛날의 밍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겉모습은 똑같지만 그 내실, 사물을 보는 눈이 변하게 된 것이다. 이미 농담이나 하며 강난을 치는 것은 재미가 없었다. 더 점잖아지고 이전보다 사리가 깊어졌다고 나 자신을 느끼는 한편, 급우들의 여전한 유치함이 유달리 눈에 거슬렸다. 사물을 대할 때에도 겉모양만으로 판단하지 않고 어떤 대화나 토론에서도 직접 문제의 본질에 파고 들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로베르트 슬르호프도 역시 나에게 접근하려고 하지 않았다. 서로 마주쳤을 때는 항상 나를 피해 갔다. 여학생들도 내가 전염병환자라도 되는 것처럼 나를 피하고 있었다.
교장선생님은 몇번씩이나 나를 불러 내가 결혼했는지 아닌지를 확인했다. 그도 그럴 것이 결혼을 한 학생은 자동적으로 퇴학을 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내 추측으로는 교장선생님에게 나에 관한 일을 일고한 것은 슬르호프임에 틀림없었다. 달리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 문제의 발단을 아는 것은 슬르호프밖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얼마 뒤 나는 그 추측이 역시 옳았다는 것을 알았다. 슬르호프는 근거 없는 소문을 퍼뜨려서 급우들이 나를 멀리하도록 만들었다. 그 때문에 나에게 향해지는 급우들의 시선은 마치 생판 모르는 타인을 대하는 것처럼 점점 서먹해져 갔다. 모든 것이 변했다. 학교에서의 생활은 생기를 잃고 쓸쓸하게 보이지 않으면 안되었다.
선생님들 가운데서 단 한사람 태도가 번하지 않았던 것은 네델란드어와 네덜란드 문학을 담당하는 마푸다 빼데루스 선생님뿐이었다. 그녀는 아직 독신이었다. 그녀의 피부는 갈색 주근깨 투성이었고, 맑은 다갈색 눈을 항상 깜빡거리고 있었다. 처음 마푸다 선생님을 보았을 때 우리들은 무심결에 웃고 말았다.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의 흰 원숭이 암놈을 연상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첫 강의를 듣고나자 모두들 생각이 달라졌다. 존경심이 우러나 원숭이 같다는 인상도 얼굴의 주근깨도 모두 쓸어가 버렸다.
네덜란드에서 온 그녀가 우리반에서 처음으로 한 말은 이랬다. "슬라바야 고등학교의 학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나는 마푸다 빼데루스라고 합니다. 여러분의 네덜란드어와 네덜란드 문학을 담당하게 되었읍니다. 여러분 가운데 문학을 좋아하지 않는 학생이 있읍니까? 있으면 손을 들어 주세요."
거의 모두가 손을 들었다. 그 가운데는 벌떡 일어서서 반발을 나타내는 사람도 있었다.
"좋습니다. 고마와요. 자리에 앉아 주세요, 예를 들면 아프리카의 심장부에 있는, 가장 원시적인 사회에서 생활하고 학교에서 배우기는커녕 평생에 단 한번도 책을 대하지 못하고 읽고 쓰기도 못하는 사람들조차도 문학을 사랑할 수가 있읍니다. 물론 그들의 경우는 구전(口傳) 문학에 지나지 않겠지요. 그것에 비해 적어도 10년 가까이 학교에서 공부를 해온 고등학교의 학생이 만약 문학과 언어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정말로 놀랄 수밖에는 없군요."
누구 한 사람 웃거나 놀려대거나 하는 학생은 없었다. 교실 안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물론 여러분은 학력은 향상되어 가겠지요. 어떤 어려운 학위도 얻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문학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여러분은 어디까지나 영리한 동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 대부분은 아직 네덜란드에 가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는 그곳에서 자라났읍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우리민족이 모두 우리나라의 문학 작품을 애독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옵니다. 사람들은 또한 반 고호, 렘브란트 같은, 우리나라가 낳은 세계적으로 위대한 화가의 그림을 애호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읍니다. 그것을 사랑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묻는 사람, 또 사랑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을 배우지 않는 사람은 야만적인 네덜란드인이라고밖에 할 수 없옵니다, 회화는 색채에 의한 문학이고, 문학은 언어에 의한 회화인 것입니다. 내가 말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학생이 있으면 손을 들어 보세요." 야만적인 네덜란드인이 되지 않도록 그 뒤부터 누구나가 그녀의 말은 한마디도 놓쳐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녀는 학생들을 자기 손아귀에 넣어버린 것이다. 그러한 마푸다 빼데루스 선생님이 나를 대하는 태도는 변하는 일이 없었다. 틀림없이 그녀도 로메르트 슬르호프가 나발을 불고 다니는 소문을 들었을 텐데 말이다.
그런데 우리 학교에서는 거의 매주 토요일 오후에 전교 토론회가 열리고 있었다. 그런데 보통 그것을 주재하는 것이 마푸다 빼태루스 선생님이었다.
그녀는 기꺼이 토론회를 주재했을 뿐만 아니라, 아주 정열적으로 그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그 토론회에서는 의제로 어떤 문제라도 제출할 수가 있었다. 모든 사람이 갖고 있는 일반적인 문제, 지역적 또는 국제적인 뉴스 등 무엇이든 좋았다.
교사가 의제를 내는 것은 학생에게서 의제 제기가 없는 경우에만 한정되어 있었다. 사실 관심이 없는 학생은 출석하지 않아도 괜찮았으나, 토론회를 주재하는 것이 마푸다 빼데루스 선생님에었기 때문에, 그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전학년에서 대부분의 학생이 참석했다. 그 때문에 토론회는 강당에서 해야만 했고 대부분이 마룻바닥에 앉지 않으면 안될 정도의 대성황이었다. 일어서는 것은 발연하는 학생 뿐이기 때문에 참석한 선생님들도 마루에 앉아 있었다. 다만 토론의 진행을 맡은 선생님은 역시 서 있지 않으면 안된다. 그럴 때 마푸다 빼태루스 인생님의 주근깨는 어쩔수없이 사람들 눈에 띄었다.
주위의 상황에 대한 나의 입장과 태도는 어떤 것이었는가, 내 자신의 상황판단은 정확했는가 아닌가, 그것을 명백하게 하기 위해서 전교 토론회에서의 나의 체험을 여기서 얘기해 두고 싶다. 언젠가의 토론회에서 나는 스누크 푸르푸로니에 박사의 '에소시에이션 이론'에 대해서 질문했다. 마푸다 빼테루스는 '먼저 학생들에게 해답을 구했는데, 누구 한 사람 그 이론을 알지 못했다.'
뒤이어 그녀는 동료 교사들을 조심스럽게 둘러보았다. 선생님들한테서도 반응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 자신이 해설을 하기 시작했다.
"나도 잘 모르지만, 아마 식민지 경치의 과정에서 제기된 하나의 원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식민지 정치가 무엇인지 학생여러분, 알고 있읍니까?"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피지배국과 그 민족에 대한 통치권을 견고하게 하기 위한 시스템, 즉 권력 기구를 말합니다. 그러한 시스템에 찬동하는 사람을 식민주의자라고 합니다. 그들은 다만 찬동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정당화하여 실천하고 옹호해 나갑니다. 그들 가운데는 식민지에서 꿈을 찾고 그곳에서 혜택을 받고 식민지 체제에 감사하는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옵니다. 이 시스템에서의 기본적인 문제는 생활의 문제입니다. 하지만, 학생 여러분은 아직 그런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기에는 여러분은 아직 나이가 젊습니다. 만일 그러한 문제가 문학 작품의 테마로서 거론된다면, 이미 여러분에게 소개해서 몇번인가 토론을 한 무르타투리의 작품처럼 좀 더 여러분의 흥미를 끌었을것입니다. 밍케군, 스누크 푸르푸로니에 박사의 '에소시에이션 이론'이란 어면 것인지 한번 설명해 보세요."
나는 미리암 드라크로아한테 들은 얘기에 나 자신의 생각을 덧붙여서 대충 설명을 해나갔다.
"잠깐만."
마푸다 빼테루스 선생닌이 내 말을 가로막았다.
"그러한 테마를 고등학교에서 논하기에는 아직 이릅니다. 학교밖에서 하는 것은 자유지만 말입니다, 그것은 여왕 페하와 네덜란드 정부, 총독, 동인도 식민지청에 관계되는 문제입니다. 학생여러분이 이 테마에 대해서 좀 더 논하기를 원한다면, 학교 밖에서 하라고 말할 수밖에 없읍니다. 오늘은 여러분에게 의제가 없는 것 같으니까, 내가 테마를 내겠읍니다."
"최근에 나는 동인도의 생활에 대해 쓴 어떤 작품을 읽었읍니다. 그러한 일에 대해서 쓰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에 그 작품은 몹시 나의 흥미를 끌었읍니다. 확실치는 않지만 아마 각자는 유럽의 혼혈일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시 그것을 읽은 사람이 있읍니까? 제목은 '어떤 아름다운 시골 처녀의 멋진 생활에서로'이고, 작가의 이름은 맥스 트레나르입니다."
몇개의 손이 올라갔다, 나는 잠자코 있었다. 맥스 트레나르는 나의 필명이다. 내가 붙인 원제목은 변경되고 내용 자체에도, 편집자의 손이 가해져 있었다. 내가 처음에 붙인 제목도 바뀌어져 있고 내용도 썩 내마음에 들게는 아니지만 편집자가 손질을 한 것이었다.
마푸다 빼테루스 선생님은 낭독을 시작했다. 말에 강약을 붙여 단락을 지어가면서 읽는 그녀의 목소리는 노래하는 투가 되어 내 원문이 의도한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여운을 남겼다. 그렇다. 그것은 한편의 서사시와 같은 것이었다고 해도 좋았다. 거의 모두가 꼼짝도 하지 않고 듣고 있었다. 낭독이 끝나자, 겨우 그들은 긴감장에서 해방되어 휴우 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동인도의 인간과 사회에 대해서 씌어지고 동인도에서 발표되었다는 이유 때문에 아직 아무도 학급에서 거론한 일이 없읍니다. 여러분, 누군가 앞에 나와서 이 작품에 대한 감상이나 의견을 말해 주세요, 비평도 곁들여주면 좋겠읍니다."
간발의 차도 두지 않고 로베르트 슬르호프가 움직였다, 그는 일어나서 양 다리를 벌리고 마치 어떤 힘에도 쓰러지지 않겠다는 듯이 마루에 버티고 섰다. 모든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주저한 것은 나 한 사람뿐이었다.
입을 열기 전에 그는 급우들을 둘러보았다. 아마 지지를 얻고자 하는 뜻이었으리라. "나는 최근에 맥스 트레나르가 쓴 네 작품을 읽었읍니다. 모두가 마치 작가가 어떤 외적인 힘에 포박당해 있는 것처럼 같은 주제를 같은 필치로 묘사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작가는 지독한 열병에 걸려 있읍니다. 씌어 있는 것은 마치 제 정신을 잃고 자기가 서 있는 현실을 잊어버린 사람의 장황스러운 잠꼬대 같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맥스 트레나르라는 사람이 누군지는 모릅니다, 다만 그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작가가 누구인지는 추측할 수가 있읍니다. 왜냐 하면, 나는 그의 작품에 묘사되어 있는 일련의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이기 때문입니다." "마푸다 빼태루스 선생님, 그와 같은 작풉을 고등학교의 토론회에서 다룬다는 것은 잘못이 아닐까요? 이 자리가 더렵혀질 뿐입니다, 내가 틀리지 않았다면, 이 작가는 성조차 갖지 못한 인물입니다."
슬르호프는 잠깐 쉬었다가 긴장된 눈빛빚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학생들로 꽉 찬 장내를 둘러보았다. 그의 눈은 승리로 빛나고 있었다. 나는 이제부터 최후의 일격이 가해지리라는 것을 알았다.
마푸다 빼테루스 선생님은 어안이 벙벙한 모습으로 쉴새없이 눈을 깜빡거리고 있었다. 강당을 메운 학생과 선생님들 가운데서 오직 나만이 슬르호프의 의도를 알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노골적으로 복수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일에서 안네리스에게 접근하려고 한 것은 사실은 그 자신이었다는 것도 점차 분명해졌다. 나에 대한 적의 때문에 많은 사람들 앞에서 창피를 주려고 하는 것은 질투 이외의 다른 이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렇다. 안네리스를 손에 넣으려고 한 것은 처음부터 그였던 것이다. 그날 나를 우노크로모에 데리고 간 것은 나를 그의 들러리로 삼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왜 하필이면 나를? 그것은 내가 원주민이니까, 나하고 비교해서 자신을 보다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치 그것은 어디를 가더라도 원숭이를 데리고 다니며 자신을 보다 아름답게 돋보이게 했던 옛날의 유럽 상류층 부인들의 풍속과 비슷했다.
그런데 짓궂게도 그 결과는 슬르호프가 데리고 간 원숭이가 안네리스를 차지해 버린 것이다.
"선생님, 그는 혼혈아도 아닙니다."
슬르호프는 말을 계속했다.
"아버지에게 인지받지 못한 혼혈아보다 더 비천한 태생입니다. 그는 원주민......유럽 문명의 틈바구니에 끼어든 쁘리부미인 것입니다."
그는 마푸다 빼데루스 선생님과 다른 선생님들에게 절을 하고 마루에 주저앉았다.
"여러분, 방금 로베르트 슬르호프군이 자기 혼자만이 정체를 알고 있다는 이 작품의 작가에 대해서 의견을 말했읍니다. 내가 요구한 것은 작가의 얘기가 아니라, 작품 자체에 대한 의견이었읍니다만 좋습니다. 그런데 슬르호프군, 학생의 추측에 의하면 이 작품의 작가는 누구입니까"
학생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뒤이어 선생님은 슬르호프의 말에 따라 유럽인이나 혼혈아가 아닌 급우들에게로 향해졌다.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폐부를 찌를듯이 따갑게 쁘리부미 학생들에게로 향해졌다.
쁘리부미 학생들은 고개를 숙였다.
나는 슬르호프의 얼굴이 내개 향해져 있는 것을 느꼈다. 다른 학생들도 그의 시선을 따랐다. 겁먹지 마라. 겁낼 것 없지 않느냐고 나는 마음 속으로 외쳤다. 제기랄 ! 만일의 경우에는 이 학교를 그만두면 되지 않느냐? 그래, 지금 당장이라도 그만두겠다, 슬로호프가 다시 일어나서 짤막하게 말했다.
"그 사람은 바로 이곳에 있읍니다."
그는 이미 학교 전체에 소문을 퍼뜨린 것이 틀림없다. 이제는 모든 얼굴이 나 한 사람에개 향해져 있었다. 나는 슬르호프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승리감에 빛나고 있었다.
"이곳에 있다니 누굽니까, 그것은?"
마푸다 빼테루스 선생님이 물었다.
"밍케입니다 !"
마푸다 빼대루스 선생님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목덜미와 손을 닦았다. 당황해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참석하고 있는 선생님들을 보고 그 다음에 나를 보고, 다시 마루에 앉아 있는 학생들을 보았다.
그런 다음 그녀는 신생님들과 그날 우연히 참석하고 있던 교장선생님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다시 회장의 중앙으로 돌아와 학생들을 헤치면서 나를 향해 똑바로 걸어왔다.
자, 나는 드디어 궁지에 몰려 모든 학생들 앞에서 망신을 당하는구나.
그녀는 내 앞에 와서 섰다. 다리의 주근깨가 눈에 들어왔다. "밍케 군 !"
"네, 선생님."
나는 일어섰다.
"이 글을 쓴 것이 정말 밍케군인가요?"
마푸다 빼태루스 선생님은 "슬라바야 일보"를 들어 보였다.
"맥스 트레나르라는 필명으로?"
"그것을 쓴 것이 나쁜 일입니까?"
"맥스 트레나르 !"
그녀는 속삭이고 나서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 이리로 오세요. "
그녀는 내 손을 잡고 교장선생님 앞으로 데리고 갔다. 모든 시선이 나에게로 집중해 있었다.
교장선쟁과 신생님들 앞에서 나는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그들은 냉담하게 인사에 답했다. 마푸다 빼태루스는 나를 학생들 쪽을 향해 서게 했다.
강당은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했다.
이 여선생은 내 어깨를 잡은 채 놓지 않았다. 그때 나는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도 모른 채 얼굴이 창백해 있었던 것이다.
"학생 여러분. 선생님들, 그리고 교장선생님,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특히 학생 여러분에게 슬라바야 고등학교의 한 학생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그의 이름은 밍케입니다. 그에 관해서는 이미 모두들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지금부터 소개하는 것은 여러분이 알고 있는 밍케군이 아니라, 또 하나의 다른 재능을 지닌 밍케군, 즉 자신의 감정과 사상을 네덜란드어로 표현하는 데 능숙해서 이미 하나의 문학 작품을 세상에 발표한, 그러한 밍케군입니다. 그는 모국어 이외의 인어를 사용해서 하나의 오류도 없이 문장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읍니다. 다른 사람들이 느낄 수는 있어도 표현할 수는 없는, 어떤 생활의 한 단면을 그는 우리들에게 그려내 보였읍니다. 밍케와 같은 학생을 가진 것을 나는 자랑스업게 생각합니다." 마푸다 빼테루스 선생님은 내게 악수를 청했다. 나는 여전히 붙들려 있었다.
그녀의 칭찬을 들으면서 나는 가시나무 꼭대기로 자꾸만 기어올라가는 느낌이 들었다. 최후의 도끼가 내려쳐지는 것을 나는 참고 기다리고 있었다.
"밍케군, 성이 없다는 것은 사실인가요?"
"사실입니다, 선생님. "
"학생 여러분, 성이라는 것은 하나의 칭호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유럽의 역사 무대에 등장할 때까지 우리들의 조상은 모두 성이라는 것을 갖고 있지 않았읍니다." 그렇게 말하고 마푸다 선생님은 성에 관한 나폴레옹의 결정이 그의 지배하에 있던 전 영토에서 법제화된 경위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스스로 적절한 성을 찾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관리로 하여금 스스로 그것을 붙이게 하고, 유대인에게는 동물의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그러나 여러분, 성이라는 것은 결코 유럽 고유의 것도, 나폴레옹의 독창적인 생각도 아닙니다. 오히려 다른 민족에게서 발상을 얻은 것입니다. 유럽에서 문명이 발달하기 휠씬 이전부터 유대인이나 중국인은 이미 씨족 명을 사용하고 있었읍니다. 바로 그러한 타민족과의 접촉이 있었기 때문에 유럽인은 성씨의 중요성을 깨닫기에 이른 것입니다."
성씨에 관한 그녀의 강의는 거기서 끝났으나, 나는 여전히 선배 구경거리가 되고 있었다.
"밍케군, 혼혈아가 아니라는 것이 사실인가요?"
마푸다 빼데루스 선생님은 이번에는 당연히 나오리라고 쟁각했던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원주민......쁘리부미입니다, 선생님."
"그래요."
그녀는 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을 백 퍼센트 순종이라고 믿고 있는 유럽인은 그들의 몸안에 아시아의 피가 어느 정도 흐르고 있는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읍니다. 여러분은 역사를 공부해서 이미 알고 있겠지만, 몇백년 전 여러 아시아 민족이 유럽을 침략하여 그 후손들을 남겨 놓았읍니다. 아랍인, 터어키인, 몽고인이 그랬으며, 그것은 로마인이 그리스도교 신자가 된 이후의 사건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잊어서는 안되는 것은, 유럽의 일정 지역에 대한 로마인의 지배하에서 아시아의 피가 아랍, 유대인, 시리아, 이집트 등과 같은 갖가지 아시아계의 로마 시민을 통해서 그 자손을 남겼다는 사실입니다...... "
회장 안은 여건히 숙연해서 기침 소리 하나 없었다.
나의 머릿 속은 텅 비어 있었다. 다만 몸이 노곤하여 얼른 마루에 앉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유럽의 대부분의 학문은 아시아에 기원을 두고 있읍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이 매일 사용하고 있는 숫자입니다. 그것은 아라비아 숫자입니다. 제로라는 숫자도 포함해서 그렇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만일 아라비아 숫자가 없고 제로라는 숫자가 없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수를 헤아리겠읍니까? 제로라는 개념은 본디 인도 철학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철학의 의미를 여러분은 알고 있읍니까? 그 문제에 대해서는 또 다른 기회에 얘기하겠읍니다. 제로라는 것은 무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무에서 유가 생기고, 그것이 나아가서 9라고 하는 정점의 수에 이르고, 또다시 무가 된 뒤 10, 11, 12....등 보다 높은 수치를 만들어내고, 그 위에 백단위, 천 단위 등등으로 무한히 계속해 가는 것입니다. 제로가 없으면 십진법이 성립하지 않고, 여러분은 로마 숫자로 계산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또 여러분의 이름, 새례명의 대부분도 아시아의 것입니다. 왜냐 하면, 그리스도교는 아시아에서 탄생한 것이니까요."
마루에 앉아 있는 학생들에게서 드디어 초조감이 보이기 시작했다.
"쁘리부미가 성을 갖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그들이 성씨를 필요로하지 않기 때문이므로 별로 부끄러운 일도 아닙니다. 네덜란드가 프란바난 불교 유적이나 보로브두르 힌두 유적을 갖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 당시 자바쪽이 네덜란드보다 분명히 앞서 있다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네덜란드가 그것을 갖고 있지 않은 까닭은 네덜란드가 그런 것을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푸다 빼태루스 선생님."
교장선생님이 가로막았다.
"이제 토론회를 끝내는 것이 좋겠읍니다."
전교 토론회는 그렇게 끝났다. 마푸다 빼태루스 선생님을 빼놓고 모두 의식적으로 나를 피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언제나처럼 큰 소리로 웃는 사람도 없었고, 웃음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보통 때 같으면 토론회가 끝나자마자 앞을 다투어 뛰어 나가던 학생들도,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모두가 깊은 생각에 잠겨 조용히 걸어서 돌아갔다.
얀 다페르스테 학생이 담 옆에 서서 눈으로 나를 쫓고 있었다. 그의 생김새는 원주민에 가까왔으나, 사람들 앞에서는 항상 혼혈아라고 말하고 있었다. 단지 내게만은 자기가 쁘리부미라는 것을 고백하고 있었다. 그는 나를 친구라 믿고 다페르스테 목사의 양자에 불과하다고 털어놓았던 것이다.
양자 ! 그는 진짜 쁘리부미인 것이다. 그는 나에게 호감을 갖고 있어서, 내가 전용 마차를 타고 다닌 뒤부터 수업이 끝나면 편승시켜 달라고 부탁하곤 했다. 그도 지금은 나를 멀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얀 다페르스테를 대신해서 편승시켜 달라고 부탁해 온 사람은 마푸다 빼태루스 선생님이었다. 집에까지 가는 동안 그녀는 줄곧 침묵을 지켰다. 머릿속이 여러 가지 문제로 가득 차 있을 때는 떠들어 보았자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오가는 마차나 사람들의 모습도 내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단 한가지, 마푸다 빼테루스 선생님에 대한 학생과 다른 선생님들의 분노뿐이었다. 그들은 자신들 속에 있는 유럽의 자존심을 건드렸다고 느꼈음에 틀림이 없다. 옆에 앉은 마푸다 빼태루스 선생님이 나를 쳐다보는 것을 깨달았다.
"정말 유감이었어요."
그녀는 허공을 향해 중얼가렀다.
나는 못들은 척했다.
마차가 그녀의 집 앞에서 멈추고, 나는 언저 내려서 유럽식으로 손을 뻗어 부축해 주었다. 그녀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덧붙여 말했다.
"잠깐 우리 집에 들렸다 가요, 밍케군. "
그녀의 집에 나를 초대한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나는 안내하는 대로 집 안으로 들어가서 거실 의자에 그녀와 마주보고 앉았다.
"밍케군, 당신에게는 정말 놀랐어요. 그 작품을 정말 당신이 썼나요?"
"네, 그렇습니다. "
"내 제자 가운데서는 두말할 것없이 당신이 가장 우수한 학생이에요. 지금까지 나는 5년 동안 네덜란드어와 네덜란드 문학을 가르쳐 왔어요. 그 가운데 1년은 네덜란드 본국에서 가르쳤지만, 그 정도의 문장력을 가진 학생은 없었어요, 더구다 활자화가 되다니 ! 당신은 물론 나를 좋아하지요?"
"어떤 선생님보다 좋아합니다." "그게 사실인가요?"
"솔직한 감정입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내 강의에 항상 모든 감성을 다 동원해 듣고 있었죠, 틀림없이 ? 그렇지 않고서는 그토록 훌륭한 글을 쓸 수가 없을 테니까요. 슬르호프에 대해 화를 내고 있지는 않겠지요?"
"화는 내지 않습니다."
"그래야 해요. 당신 쪽이 그보다 훨썬 더 훌륭해요. 당신은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증명해 보였으니까요." 그런 찬사를 듣는 것은 매우 낯간지러운 일이었다. 그녀는 내게 일어서라고 말했다.
"밍케군, 당신은 지난 5년 동안의 내 노력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어요." 마푸다 빼데루스 선생님은 나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깜짝 놀라는 그 순간 나는 그녀의 품에 안겨 숨막힐 정도로 격렬한 포옹을 당했다.
나는 매일 메이의 등하교의 시중과 새로운 가구의 주문을 전해주기 위해서 짧은 시간이나마 쟝 마레의 집에 들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또 하숙집에도 얼굴을 내밀 필요가 있었다. 전용 마차 덕분에 가구 주문을 맡으러 다니거다 "경매"지에 내는 광고문이나 그 밖의 원고를 쓰는 일이 이전보다 훨씬 수월해졌다. 하루가 훨씬 길어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모든 일을 마치고 우노크로모에 도착하면 몹시 지쳐서 잠시 낮잠을 자지 않으면 안될 지경이었다. 그럴 때 언제나 깨끗한 타올을 갖고 나타나서 나를 깨워 목욕을 하라고 말하는 것이 안네스리였다.
그리고 그 뒤 안네리스와 잡담을 하거나 동인도의 신문이나 네덜란드의 잡지를 읽는 것이 나의 일상 생활이었다. 밤이면 나는 안네리스의 방에서 공부를 하거나 집필을 했다. 안네리스의 건강은 나날이 회복되어 갔다. 그러나 아직 일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마마는 사무실이나 뒤쩝에서 일에 쫓겨 낮에는 우리들 두 사람과 함께 지낼 시간이 없었다. 그날 밤도 나는 언제나처럼 안네리스의 방에서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다니엘 데포의 네덜란드 번역판 "로빈슨 크루소"를 읽고 있었다. 나는 이미 그녀가 읽어야 할 책의 목록을 작성해 두었던 것이다.
모두 뒤마, 스티븐슨 같은 젊은이들이 읽기 좋은 책으로, 그것들을 그녀는 한달 안에 읽도록 되어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사전이 놓여 있었다. 그것은 마마가 지난 10년동안 써온 것으로,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얻을 수 없게 된 낡은 사전이었다.
나는 책상을 사이에 두고 안네리스와 마주보고 앉아서 소설을 쓰기 전에 미리암과 사라에게서 온 편지를 읽었다.
앞에서 말한 소설이란,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제목을 붙일 예정이었다. 그것이 로베르트 메레마의 이야기임은 두 말할것도 없다.
이번에 온 미리암의 편지는 한결 더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또 한 사람의 그이'를 기억하고 있겠지요? 얼마 전에 나는 네덜란드로부터 한통의 편지를 받았읍니다. 남아프리카 트랜스발 지방에서의 '또 한 사람의 그이'에 관해 알고 있는 친구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 편지의 필자는 어떤 작은 전투에서 부상당한 뒤, 네덜란드로 귀국했는데, 그전에 그와 같은 부대에 있었읍니다. 그 부대는 편지에 의하면, 매우 엄격하고 용감하고 야심에 찬 메레마라고 하는 젊은 기사의 지휘 아래 있었다고 합니다. 밍케, 이 편지를 받고 나는 굉장히 기뻐했읍니다.
당신에게서 편지를 받았을 때의 기쁨에 못지 않을 정도입니다. 편지에는 당신이 흥미를 느낄만한 일들이 씌어 있었읍니다. '또 한 사람의 그이'는 당신보다 약간 연상일 것입니다. 그는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여 그것을 끝까지 지켜가는 남아프리카 네덜란드인들의 호소에 응하여 별다른 생각도 없이 남아프리카로 건너가서.....그리고 큰 실망을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남아프리카 전쟁에 관해서는 동인도의 신문에도 보도는 되었으나, 보도되지 않은 문제가 아주 많이 있읍니다. 남아프리카의 네덜란드인은 대부분 유럽으로부터의 이민입니다만 지금까지 남아프리카의 원주민을 지배해 왔읍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네덜란드인이 역시 유럽에서 건너온 세력인 영국인에게 지배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남아프리카에는 원주민을 최하층으로 하는 여러 계층의 계급구조가 이루어졌읍니다.
밍케, 생각해 봐요. 그것은 동인도의 상황과 비슷하지 않을까요? 전에 파파가 말한 것처럼, 물론 약간의 차이점은 있겠지만 그것은 역시 기본적인 구조를 숨기지는 못할 것입니다. 동인도의 원주민은 왕, 술탄, 부빠티와 같은 권력자에게 지배받고, 그 갈색 정부는 백인 정부에 지배받고 있어요. 그렇지 않나요? 동인도의 왕, 술탄, 부빠티와 그 부하는 남아프카리에서의 네덜란드 이민 세력과 같은 입장에 놓여 있읍니다.
밍케,
'또 한 사람의 그이'가 크게 실망을 느낀 것은 영국인과 보어인(네덜란드 이민) 사이의 전쟁은 사실은 토지와 황금, 그리고 원주민에 대한 절대적 지배권을 둘러싼 쟁탈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애절한 호소에 응해서 세계 각지에서 남아프리카로 건너간 네덜란드의 젊은이들은 결과적으로 네덜란드의 국익과는 관계가 없는 일 때문에 상처를 입고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또 한 사람의 그이'는 편지에 의하면, 남아프리카의 원주민이 동인도 원주민보다, 아치에인보다 훨씬 비참한 상환에 있다는 것을 목격했읍니다. 그리고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묻는다면, 그는 아치에의 식민지군 병사와 별로 다를 것이 없다고 느꼈다고 합니다.
실제로 깨닫는 것이 너무 늦었읍니다. 그렇게 깨닫게 된 것도 어떤 주민과의 예기치 않는 만남이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 원주민은 자바어를 할 줄 아는 몇 사람의 부유한 농민 중 한 사람으로서, 이름은 마드 윙스라고 했읍니다. 그와 그의 동료들은 아프리칸스어(남아프리카 네덜란드계 주민의 언어)를 말하기는 하지만, 백인은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토착의 흑인도 아닙니다. 그들은 슬라메예르인(이슬람 사람과 말레이인과의 혼혈), 즉 당신네 동포였던 것입니다. 마드 웡스라는 이름은 아프리칸스어화된 이름으로, 내 추측으로는 본디 마르디 웡스였을 것입니다. 슬라메예르인이란 이전에 동인도 회사에 의해 남아프리카로주방된 자바인의 후손입니다.
흥미로운 얘기지요?
그런데 네덜란드에서 편지를 보낸 친구에 따르면, 그들이 소속되어 있던 메레마 소대는 언젠가 마드 원스의 저택에 들어가서 하룻밤 재워 달라고 부탁했읍니다. 그러자 백발의 그 노인은 그것을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노발대발해서 그들을 내쫓았읍니다. 메레마는 화가 나서 쏘아 죽이겠다고 노인을 위협했읍니다.
그러자 마드 웡스는 이렇게 소리쳤읍니다......너희들 네덜란드인은 더 이상 무엇을 원하고 있는 거지 ? 그전에 너희들은 자바에서 우리들의 재산을 빼앗고 자유를 빼앗아갔다. 그러한 너희들이 이제는 내 집에서 잠자리까지 뺏으려 들다니 !
너희들은 강도와 거지가 뭔지 모른다는 거냐? 자, 쏴라 ! 이 마드 웡스의 가슴을. 너희들에게는 처마끝도 판자 한쪽도 빌려 주고 싶지 않다. 꺼져라 ! 어찌된 영문인지 메레마는 그냥 물러갔읍니다. 그는 부대와 함께 야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읍니다.
그래요, '또 한 사람의 그이'를 눈뜨게 한 것은 바로 그 사건이었읍니다. 이제서야 겨우 그는 네덜란드인에 대한 동인도 원주민의 증오의 깊이를 깨닫고, 그의 부대가 숭고한 이상의 옹호자 같은 것이 결코 아니라 순전히 식민지주의적 이상의 옹호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자신을 그릇된 장소에 두게 된 것을 그는 부끄러워했고, 머릿속이 혼란해졌읍니다. 일찌기 영웅이 되기를 꿈꾸고 인류에 공헌하기를 바라고 있던 그는 지금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압제의 무대 한가운데 서 있었던 것입니다.
불쌍한 '또 한 사람의 그이'
이튿날 아침, 그듣의 부대는 남아프리카의 영국 기병대가 점거하고 있는 지점에 공격을 감행했읍니다. 친구의 편지에 의하면, 그 기병대는 W. Ch. 중위가 지휘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미 그들 부대보다 먼저 다른 방향으로부터 보어인 대대가 그 지점을 공격했으나, 반격을 당해 후퇴하다가 포위당해서 전멸의 위기에 빠져 있었읍니다.
그 때 메레마 부대가 적의 배후를 급습한 것입니다. 영국군은 기습을 당해 혼란에 빠지고, 두 곳으로부터의 파상 공격을 받아 패주했읍니다. 그렇게 해서 그 지점은 보어인 손에 들어갔읍니다.
그러나 '또 한 사람의 그이'는 부상을 당해 포로가 되었읍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며칠동안 그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두고두고 후회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밍케, 내가 당신에게 이런 편지를 쓰는 것은 다름이 아닙니다. 동인도에서는 그다지 공개되는 일이 없는 문제에 대해서 좀더 눈을 크게 뜨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신문에서 읽고 있는 것은 영국의 잔학 행위와 네덜란드의 승리에 관한 기사뿐이지 않습니까? 반대로 영국의 신문들은 파파에 의하면, 원주민에 대한 네덜란드인의 잔인함과 탐욕성을 보도하고 있다고 합니다.
동인도는 물론이고 네덜란드 본국도 영국도 남아프리카 원주민에 대해 정확하게 보도하는 신문은 하나도 없읍니다. 슬라메예르인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읍니다. 정말로 이 세계야말로 기묘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것에 비한다면 자바의 쁘리부미는 아직도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그들 편에 서서 대변해 주는 사람이 몇사람인가 나타났으니까요. 물론 관료 기구의 그늘에 가려서 확실하게 모습을 볼 수는 없지만 말입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 우리들은 아직 토론과 검토를 하지 않았읍니다. 다음 기회에 하기로 해요, 알겠지요? 밍케, 나의 친구여, 당신의 답장이 나를 너무 기다리게 해서는 안돼요.
미리암 드라크로아 올림
사라의 편지에는 또 다른 것이 씌어 있었다.
마푸다 빼대루스 선생님이 '에소시에이션 이론'에 관해서 모르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미리암과 나도 솔직이 말해서, 그날 당신에게 얘기한 것 이상은 모릅니다. 그것이 알고 있는 전부입니다. 나는 파파에게 그 이론에 관해서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더라고 전했읍니다. 파파는 단지 큰 소리로 웃으며 이렇게 말했읍니다....너도 밍케에게 얘기한 것 이상은 모르고 있지 않느냐? 너희들은 아무래도 선배라고 너무 으스댄 모양이구나.
당신의 편지를 받은 다음, 나는 파파에게 이렇게 말했읍니다. 마푸다 빼테루스 선생님도 역시 그 이론을 모르고 있는것 같아요. 다른 신생님들도 설명을 하지 못했대요. 설명하지 않은 것은 그 이론을 알면서도 자제를 했든가 아니면 실제로 모르고 있었기 때문일 거예요. 그러자 파파가 뭐라고 말했는지 아세요? 이렇게 말씀하셨어요.....사람의 마음이 다 같지 않은 것처럼 누구나가 식민지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란다. 게다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는 동인도 전체가 식민 관청의 위대함, 권위, 견식, 정의, 관용을 신뢰하고 있단다. 지금 길거리에서 굶어죽는 거지는 없다. 맞아 죽는 일도 없다. 거지라 하더라도 식민지 관청의 법률의 보호를 받고 있거든. 또한 외국인이 단지 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몰매를 맞아 살해당하는 일도 없다. 외국인도 또한 관청의 법률에 의해서 보호를 받고 있는 것이란다.
밍케, 당신에게 꼭 알려 두어야 할 일이 있어요. 파파는 당신에 대해 이렇게 생각하고 있읍니다. 그 젊은이는 네덜란드의 대학에 진학해서 공부를 계속해야한다. 법학부에 적을두는 것이 좋을 거야. 그렇게 하면 설사 나중에 졸업을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유렵적 의미의 법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는 이해할 수가 있을 테니까 말이다.
당신의 의견은 어떠세요? 과연 쁘리부미는 유럽의 학문을 마스터할 수가 있을까요? 솔직하게 말하자면, 파파는 회의적입니다. 그전처럼 화를 내지 말고 들어 주세요. 파파는 이렇게 말하고 있읍니다.
쁘리부미의 정신 연령은 아직 유럽인 수준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단다. 그들은 음탕한 욕망에 빠져 너무나도 쉽게 판단력을 상실해 버리거든.
파파의 말이 맞는지 어떤지 나는 모릅니다. 하지만 현실을 보면, 특히 당신네 민족의 상층 계급을 보면 그 말이 맞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신은 어떻개 생각합니까? 또 한 가지 당신에게 알려주고 싶은 일이 있읍니다. 그것은 문제의 스누크 푸르푸로니에 박사의 실험 대상 중 한 사람으로서, 반민출신의 아프마드라는 젊은이의 일입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언젠가 당신들 두 사람이 서로 알게 되어 편지 왕래를 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왜 한숨을 쉬는 거죠?"
갑자기 안네리스가 물었다.
"불이 났다구요."
"무슨 불인데요?"
"머릿 속에 불이 났단 말이오, 여러 가지 일이 차례차례로 내 머리를 괴롭히고 있어요. 하지 않으면 안될 일이 너무나 많아서 잠깐 동안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구요. 자, 어서 이 편지를 읽어 봐요."
하고 나는 두 통의 편지를 안네리스에게 내밀었다.
"내게 온 것이 아니잖아요."
"당신도 알아두는 게 좋을 겁니다."
"당신에게는 팬이 상당히 많은 것 같군요. 유감스럽게도 편지의 내용을 잘 알 수는 없지만요." "조금도 유감스러울 것도 없어요. 모두들 나의 신생님이 되려고 하는 것뿐이니까요."
"선생님이 많으면 좋지 않아요?"
"앤, 당신까지 ! 물론 신생님이 많은 것은 좋은 일이죠. 어떤 일이라도 알아두어서 해로울 것은 없으니까요. 다만 싫은 것은 그들의 도움으로 내가 중요 인물이 되는 것을 꼭 보고야 말겠다는 식의 도움 같아서 싫다는 것이죠, 그런 일을 그들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어쨌든 따분한 선생은 그것만으로도 벌써 훌륭한 고문인 셈이죠."
"그렇다면, 답장을 쓰지 않으면 되지 않겠어요?"
"그럴 수도 없다니까 ! 나는 이미 그들의 편지를 읽었어요. 그들은 답장을 받기 위해 편지를 쓴 거라구요."
그렇기는 하지만 사라는 너무했다. 부끄러움도 없이 음욕이니 하는 말을 거침없이 쓰고 있었다. 게다가 답장까지 보내란다, 나에개 벌거벗으라는 것일까? 유럽에서조차도 그런 문제는 내놓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사적인 문제로서 터놓고 얘기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정말 드라크로아가의 딸들은 도가 지나치다.
안네리스는 계속해서 편지를 읽었다. 그것이 젊은 두 명의 자매한테서 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아무래도 태연할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안네리스는 편지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반듯하게 접어서 봉투에 집어넣었다. 더 이상 아무런 소감도 말하지 않았다. 잠깐 동안 두 사람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앤."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이제는 몸의 상태도 좋아진 것 같군요."
"당신의 간호 덕택이에요. 고마와요, 닥터."
"이 상태대로라면 내일부터는 이 방에서 당신을 간호하지 않아도 되겠군요."
안네리스는 의아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투랑강으로 돌아갈 생각은 아니겠지요?"
"당신이 계속 이곳에 있어 달라고 한다면 물론 돌아가지는 않겠읍니다."
그녀는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사라와 미리암의 편지를 흘낏 바라보았다.
"그렇게 내 곁에 있는 것이 싫어졌나요?"
그녀의 목소리는 당장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물론 그렇지는 않아요. 당신의 병이 완쾌되지 않는 동안은 !"
"또 병을 앓아야 하나요?"
"그건 또 무슨 뜻이지요 ?"
그 순간 나는 마르티네 의사의 얘기가 생각났다. 그녀에게 별로 난폭한 말을 한 것은 아니라고 나는 믿었다. 그래서 곧 덧붙였다.
"완전히 건강해지지 않으면 안되거든요. 마마는 당신을 굳게 믿고 있으니까요. "
"내가 아프지 않으면 어째서 내 옆에 있어 줄 수가 없다는 거죠 ?"
안네리스가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모두들 뭐라고 말하겠어요."
"누가 뭐라고 한다는 거예요 ?"
"내 말 잘 들어요, 앤. 당신은 이미 병이 나았다구요. 당신이 바라지 않는다면 나는 물론 투랑강에는 돌아가지 않겠어요. 그것은 믿어줘요. 당신이 원하는대로 우노크로모에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이 방은 안돼요. 내일부터 나는 일층에 있는 내 방으로 옮겨 가서 그곳에서 지내고 싶어요. 심심하면 당신이 내 방으로 찾아오면 되니까요. 그러면 마찬가지 아닐까요?" "마친가지라 하더라도 언제까지나 이대로 있어 줘요. 당신이 내 방에 있어 줘요. "
"하지만 이층에는 마마와 당신밖에는 출입금지일 텐데요? 그규칙은 지키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게 말하고 나는 온갖 얘기로 그녀를 달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눈의 촛점이 차츰 먼 곳으로 향할 뿐이었다. 안네리스는 질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튿날 나는 쟝 마레를 찾아갔다. 우노크로모에서 나오기 전부터 나는 이미 남아프리카 문제에 관한 질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는, 천전히 입을 열었다. "밍케, 나는 유럽인으로서 나 자신이 식민지 문제에 관여해 온 것을 매우 부끄럽게 생각해 왔네. 아마도 나는 지금 자네가 얘기한 인물, 우리들이 보지도 알지도 못하는 그 인물과 똑같은 처지였었네 나는 아치에 전쟁에 참가했었네. 이유는 단지 쁘리부미에게는 저항할 능력이 없으니까 충분히 승리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지. 그런데 그것이 엄청난 착각이었지. 그들은 저항했으니까. 맹렬하고 철저하게 저항했거든. 유럽의 수많은 전쟁에 참여한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용감무쌍했지. 아치에의 싸움에서 내가 부끄렵게 생각한 것은 유럽의 최신 무기와 아치에 인의 몸싸움이었다는 사실일세. 자네가 내 의견을 알고 싶어 하니까 대답은 하겠는데, 앞으로는 내 양심을 괴롭히는 이런 문제는 두번 다시 끄집어내지 말아 주게나."
어느 틈엔가 테린하씨가 나타나 조금 떨어진 곳에서 우리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다가와서 테이블에 걸터 앉았다. 우리들의 얘기에 끼어들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 같았다. "과거 25년동안의 식민지 전쟁은 모두 자본을 위한 것, 즉 유럽의 자본을 위한 시장회득을 위해 싸운 것에 지나지 않네. 요즘은 자본이 매우 중요하고 귀중한 존재가 되었거든. 오늘날에는 국가가 발전하거나 퇴보하는 것은 자본이 결정하지."
"전쟁이라는 것은 어떤 시대에도 어느 쪽이 승자인가를 결정하기 위한 힘과 전략의 대결이라구."
테린하가 참견했다.
"테린하씨, 그건 틀린 말입니다."
하고 쟝 마레가 테린하씨의 말에 반박했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전쟁을 위한 전쟁이라는 것은 없었읍니다. 승자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전쟁을 하는 민족은 얼마든지 있읍니다. 그들은 싸움터에 나가서 싸우다 전사합니다. 예를 들면 오늘의 아치에인처럼 말입니다. 그것은 그들에게는 지켜야 할 것, 단순한 삶이나 증오, 또는 이기고 지는 것보다 훨씬 더 소중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마찬가지일세, 쟝. 승자가 되기 위한 힘과 전략의 대결이지."
"그것은 결과에 지나지 않습니다, 테린하씨. 하지만 당신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것으로 좋습니다. 이런 생각은 어떨까요? 현재의 전쟁에서 가령 아치에인이 승리하고 네덜란드가 패배했다고 합시다. 그렇게 되면 네덜란드 본국은 아치에의 소유가 됩니까 ?"
"아치에가 이기다니 그건 말도 안되는 소리야." "그렇습니다. 바로 그것이 문제입니다. 아치에인 자신이 반드시 패배한다는 것을 알고 있읍니다. 네덜란드 쪽도 자기네들이 틀림없이 이긴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치에인은 끝까지 싸움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네덜란드인은 만약 아치에의 힘이 자기네들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면 위험을 무릅쓰고까지 공격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처음에 전쟁을 시작할 턱이 없읍니다. 문제는 자본에 있어서의 손익 계산에 달려 있읍니다. 민일 이기는 것이 목적이라면 어째서 네덜란드는 룩셈부르크나 벨기에를 공격하지 않는 겁니까? 두 나라 모두 가까이에 있고 풍요한 나라인데도 말입니다."
"자네는 프랑스인으로 동인도에는 아무런 이해 관계도 없으니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지." "그럴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나는 이 땅에서 전쟁에 참가한 것을 후회하고 있읍니다."
"하지만, 자네는 퇴역 후에도 계속 연금을 받고 있지 않은가! 나도 그렇겠지만."
"그래요. 당신과 같은 처지지요. 하지만, 그 연금은 나를 싸움터로 보낸 사람들로부터 내가 얻은 당연한 권리입니다. 당신도 그렇지요? 전쟁에서 나는 한쪽 다리를 잃었고, 당신은 건강을 잃었어요. 우리들 두 사람에게 아치에 전쟁이 가져다 준 것은 그것뿐입니다. 서로 말다툼하는 것은 이제 그만둡시다. 테린하씨."
"군대에 있을 때 자네는 그렇지 않았었는데 ! " "군대에서는 나는 당신의 부하였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그렇게 다투어서 어쩌겠다는 겁니까?"
내가 뜯어 말렸다.
"나는 남아프리카 문제에 대해 질문했을 뿐입니다. 이만 실례하겠어요. 안녕히 계세요."
그리고 나서 나는 마푸다 빼테루스 선생님을 찾아갔다. 그녀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남아프리카에 관해서 ? 당신은 정치가가 될 생각인가요?" "선생님, 정치가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다시금 그녀는 고개를 흔들며 딱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우리들은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졸업할 때까지 기다리세요. 그 일에 대해서는 다음에라도 천천히 얘기할 수 있으니까요. 지금은 그 시기가 아닙니다. 그런 일보다 지금은 졸업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세요. 물론 당신의 성적은 나쁘지 않지만, 더욱 좋은 성적으로 졸업할 수 있기를 빌겠어요. 지금은 다른 일을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밍케군, 누가 퍼뜨렸는지는 모르지만 당신이 어떤 현지처의 집에 살고 있다는 소문은 사실인가요?"
"사실입니다, 선생님."
"그런 일을 세상 사람들이 어떤 눈으로 보는지 당신은 알고 있나요? "
"알고 있읍니다."
"알고 있으면서 왜 그런 일을 하나요?"
"어디서 살고 있느냐는 것은 아무래도 좋은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남들이 그녀를 냐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그녀는 참으로 교양이 있는 여성으로, 제가 선생님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입니다."
"선생님이라고요? 무슨 선생님이죠?"
"꼬집어서 무슨 선생님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독학으로 모든 것을 몸에 익힌 경이적인 여성입니다."
"독학으로 무엇을 몸에 익혔다는 거죠?" "제일 면저 자기 자신을 다스려 나가는 것, 그리고 대농장을 경영해 나가는 것입니다"
"거짓말로 자기 변호를 하지는 마세요."
"지금까지 저는 선생님에게 거짓말을 단 한번도 한 적이 없을텐데요?"
"분명히 지금까지는 없었어요. 하지만 지금 한 말은 거짓말입니다."
마푸다 빼데루스는 그렇게 말하고 쉴새없이 눈을 깜빡거리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 동작은 나의 추측에 의하면 그녀가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할 때 하는 버릇이었다. "밍케군, 나를 실망시키지 말아요. 당신은 학문을 배운 사람이에요. 배우지 못한 사람처럼 행동해서는 안됩니다."
"지금 말씀드린 것이 학문을 배운 사람으로서의 대답입니다."
마푸다 빼데루스 선생님의 눈에서 우려하는 빛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눈을 깜빡였으나, 이제는 우스꽝스럽게는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 냐이가 독학으로 모든 것을 배울 수 있었는지 나에게 설명을 해 줘요. 당신이 말하는 것은 유럽적인 의미의 독학이겠죠?"
"적어도 제가 이해하고 있는 의미에서는 그렇습니다, 어쩌면 제가 오해를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신생님께서 시간이 있을 때, 언제라도 좋으니 저녁 무렵쯤 한 번 방문해 주십시오. 돌아오실 때는 제가 모셔다 드리겠읍니다. 그녀들은 거의 손님을 초대하는 일이 없읍니다만, 선생님은 저의 손님으로서 초대하겠읍니다."
"알겠어요."
그녀는 내 부탁을 받아들였다.
나에게는 마푸다 빼데루스선생님이 반드시 찾아올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선생님, 어떻습니까? 지금 당장 가시지 않겠읍니까?"
"좋아요. 직원 회의에서 보고하기 위해 사실을 분명히 알아둘 필요가 있으니까요. 밍케군, 내 말 잘 들으세요. 이대로 있다가는 당신에게 어떤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 같아요." 그렇게 해서 우리들은 출발했다. 우노크로모에 도착한 것은 오후 5시였다. 나는 마푸다 빼데루스 선생님을 응접실로 안내한 다음, 의자를 권하고 그 표정을 살폈다. "내 예상과는 틀리는군요."
그녀는 속삭였다.
"네덜란드에서는 물론 유럽의 어느곳에서도 이런 집은 보지 못했어요. 그럼 당신은 여기 살고 있나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의 저택을 갖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에요. 보는 것만 하더라도...... 그래요, 밍케군, 중부 유럽의 독일인의 집이 이런 느낌이 들더군요. "
그녀의 시선이 어느 한곳으로 집중되는것 같았다. 나도 그녀의 시선을 쫓아갔다. 검은 빌로도 드레스를 입은 안네리스가 응접실에 들어온 것이었다.
"앤, 이분이 미스 마푸다 빼데루스, 나의 선생님입니다." 안네리스가 가까이 다가와서 절을 하고 상냥하게 손을 내밀었다. 마푸다 빼데루스 신생님은 마술에 걸린 것만 같았다. 눈을 깜빡이거나 하지도 않았다. 의자에서 일어나 입을 멍청하니 벌리고 악수를 나누었다.
"안네리스 메레마입니다, 선생님. 아직 병중입니다. 앤, 미안하지만 마마를 불러다 주겠어요? "
안네리스는 손님에게 목례를 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을 나갔다.
"여왕님 같군요. 무척 섬세한 얼굴이라서 마치 이탈리아의 프리마돈나 같아요. 그녀가 냐이의 따님인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얌전하고 기품이 있고 귀하게 자란 것 갇군요. 당신이 여기 사는 것은 그녀 때문인가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나의 침묵의 의미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아무래도 그녀가 '어떤 아름다운 시골 처녀의 멋진 생활에서' 의 주인공인 모양이군요."
"그렇습니다, 선생님."
"이탈리아나 스페인의 프리마돈나, 프랑스나 러시아의 발레리나라도 그녀의 아름다움에는 미치지 못할 거예요." 마치 자신의 운명을 한탄이라도 하듯이 마푸다 빼테루스 선생님은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나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리고 보면, 모두가 혼혈 미녀를 자주 화제에 올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로군요. 하지만 아깝군. 저 드레스는 밤에 입어야 더욱 어울리는 건데."
마마가 들어왔다. 언제나처럼 레이스로 뜬 흰, 쿠바야, 초록과 빨강과 갈색 무늬의 사롱을 입고 있었다. 그녀는 손님에게 손을 내밀었다.
"선생님, 이분이 마마입니다. 마마, 이분이 미스 마푸다 빼데루스 선생님입니다. 우리 선생님이십니다. 네덜란드어와 문학을 담당하고 계십니다. 선생님, 마마는 평소에 손님을 초대하는 일은 없읍니다."
나는 양쪽에 양해를 구하듯이 말했다. 그것은 냐이의 동의없이 선생님을 모시고 왔기 때문이었다. 마마는 나의 행동을 불쾌하게는 생각하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녀는 이렇게 말을 시작했다.
"신생님, 밍케의 공부는 어떻습니까?"
"본인이 노력만 한다면 더욱 향상되리라고 봅니다." 마푸다 빼테루스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저희들은 평소에 손님을 초대하는 습관은 없읍니다만......."
마마는 완벽한 네덜란드어로 말했다.
"선생님께서 일부러 와 주셔서 대단히 기쁩니다."
"마담, 내가 댁을 찾아온 것은, 사실은 학교의 용건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밍케군이 이곳에서 제대로 공부를 할 수 있는지 없는지 환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어서요." "밍케군은 아침에 나가서 저녁때 돌아옵니다. 저녁에는 독서나 공부, 그리고 글을 쓰고 있읍니다. 그런데 신생님, 실례되는 말씀이지만, 나는 보통때 '마담'이라는 호칭으로 불린 적이 없읍니다. 사실 나는 기혼자는 아닙니다. 마담이라는 호칭은 적절하지 않고 그렇게 불릴 자격도 내게는 없읍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냐이'고 불러 주십시오. 누가뭐래도 나는 냐이이니까요. 상관은 없읍니다. 무례한 것도 아니구요. 다만 마담이라고 불리우는 것은 사실과 다르고, 이론적으로 따져봐도 합당하지가 않습니다. 지금까지 나는 남편을 가져 본 적이 없으니까요. 나라고 하는 인간을 소유했던 남자가 한 사람 있었을 뿐입니다." 나는 그녀의 목소리를 통해 그녀가 살아온 인생의 고뇌를 들었다. 그것은 인간의 양심을 향해 던지는 날카로운 항변 같았다.
"소유라고요?"
"그것이 현실이었읍니다. 유럽 여성인 선생님은 그런 말을 들으면 틀림없이 치를 떠시겠지만요." 나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는 것이 고통스러워졌다. 마푸다 선생님과의 대화를 아무래도 마마는 자신의 과거 상처를 들추어 내는 방향으로 끌어나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듣는 쪽에서도 얘기하는 쪽에서도 결코 유쾌한 얘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냐이, 동인도에서는 30여 년 전에 노예 제도가 폐지되었을 텐데요?"
"그렇습니다, 선생님. 적어도 법률상으로는 선생님의 말씀대로입니다. 그러나 나는 동인도의 각지에 아직도 노예 제도가 남아 있다는 것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읍니다."
"그것은 선교사들의 보고서에서 읽으셨겠죠? "
"내 처지는 그런 노예와 마찬가지였읍니다."
"마담은 결코 노예는 아닙니다. 비슷하지도 않습니다."
"냐이라고 불러 주세요, 신생님."
마마는 정정했다.
"노예는 설사 황제의 궁전에서 산다고 하더라도 노예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읍니다." "어떤 이유로 냐이는 자신을 노예라고 생각하고 있읍니까?"
그것은 마치 오랫동안 가슴속에 응어리졌던 문제가 지금 한 사람 유럽여성을 앞에 두고서 항의, 규단, 저주, 호소, 고발, 그리고 논고에서 판결까지 한꺼번에 무너뜨리기 위해 배출구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
듣고 있으려니까 나는 점점 더 참을 수가 었게 되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그곳을 도망쳐 나갈 구실을 열심히 찾고 있었다. 냐이는 과거의 문을 열어 젖혔다.
"어떤 유럽인, 순종인 유럽인이 나의 부모한데서 나를 샀던 것입니다. "
고뇌에 찬 그녀의 목소리에는 궁전을 다섯 개 물려받아도 아물 수 없는 원한이 담겨 있었다. "나는 그의 자식을 낳고 키우는 암말이 되기 위해 팔려온 것입니다."
마푸다 빼데루스 선생님은 잠자코 있었다. 황급히 나는 자리를 떴다. 두 사람은 각자의 감회에 젓도록 내버려두면 된다. 이층에 올라가니 안네리스가 창가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앤, 왜 내려오지 않았죠?"
"이 책을 마저 읽고 싶어서요. "
"어깨서 그렇게 서둘러 잃지 않으면 안되죠?"
"사실은 책 같은 것을 읽는 것보다 당신이 만들어낸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아직 내개는 얘기를 해 주지 않았어요. 이런 책이나 다른 사람이 쓴 것만을 읽으라고 하면서요. 당신의 이야기를 내개 들려 주는 것이 싫은 것은 아니겠죠?"
"물론이죠."
안네리스는 다시 책을 읽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읽는 것을 중단하고 나를 돌아다보았다.
"왜 이층에 올라왔어요? 이곳은 출입 금지일 텐데요."
"당신을 부르러 왔다구요. 선생님이 당신과 얘기하고 싶어해서요."
안네리스는 대답하지 않고 다시 책을 읽었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서 살며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안네리스는 아무런 반응도 나타내지 않았다.
내가 손에서 책을 빼앗았을 때, 그녀는 내 행동을 말리지 않았다. 그녀는 책을 읽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안네리스는 얼굴을 돌렸다.
"앤, 무슨 일이죠? 화났나요? "
대답이 없었다.
"당신이 읽고 있는 소설은 틀림없이 훌륭한 작품이에요."
안네리스는 고개를 떨구었다. 두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몸을 내 앞으로 돌렸다. 갑자기 안네리스는 나에게 매달리며 봇물을 터뜨리듯이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왜 그래요, 앤? 당신이 상처입을 말이라도 했나요?" 그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얼마나 많은 얘기를 늘어놓아야 했는지 ? 그래도 안네리스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는 나를 꽉 끌어안고 있었다. 마치 내가 그녀의 손에서 떠나 푸른 하늘로 날아가 버리지나 않을까 염려하듯이. 안네리스는 질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조금 열려진 문 사이로 두 사람의 대화가 들려오고 있었다. 이윽고 그 소리가 이층층계참에서 들려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마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안네리스는 나를 안고 있던 손을 풀었다. 나는 문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상황을 살폈다. 마푸다 선생님과 냐이가 이층의 어떤 방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밍케, 선생님이 우리 서재를 구경하시겠대요. 당신도 오세요. 이제부터 안내할 테니까요."
그 방은 헤르만 메레마씨의 서재였다. 넓이는 안네리스의 방과 비슷했는데, 세 개의 서가에는 호화롭게 장정한 책들이 빽빽이 들어 차 있었다.
또한 서가에는 유리 케이스가 놓여 있고, 그 속에 메레마 씨가 수집한 파이프들이 장식되어 있었다.
가구는 모두 때 하나 묻지 않은 깨끗한 것이었다. 바닥은 카페트도 깔지 않고 니스를 칠하지도 않은 보통 판자마루였다. 책상은 한 개뿐이고, 거기에 의자와 팔걸이 의자가 한 개씩 붙어있었다.
책상 위에는 열네개의 초를 꽃은 흰 금속 촛대가 서 있었다. 잡지를 철해 놓은 듯한 책이 한 권 책상 위에 펼쳐진 채 놓여 있었다.
"너무나 훌륭한 방이군요. 깨끗하고 분위기도 차분하구요."
마푸다 빼데루스는 그렇게 말하고 전원 풍경이 펼쳐져 있는 유리창으로 시 신을 보냈다. "어머, 아름다와라 ! "
그리고는 그녀는 똑바로 책상으로 다가가서 펼쳐진 채로 있는 잡지의 합본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누구에게라고 할것없이 물었다.
"이 '동인도 안내'는 누가 읽고 있읍니까?"
"수면제 대신 제가 읽고 있읍니다."
"수면제 대신이라구요 !"
마푸다 빼데루스 신생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냐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잠자기 전에 책이라도 읽으라는 의사의 권고에 따라서요."
"불면증인가요? "
"네, 그래요."
"오래 되었나요?"
"벌써 5년이나 되었어요."
"불면증 말고 다른 병을 앓은 적은 없나요?"
마마는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데, 냐이는 이 잡지의 어느 부분을 읽나요?" "읽고 있으면 잠이 오는 것이면 아무 거나 좋습니다."
"그밖에 어떤 책이 수면제 역할을 하죠?" 그녀는 검찰관처럼 물었다.
"닥치는대로입니다. 특별히 고르지는 않습니다."
마푸다 선생님은 다시 눈을 깜빡거렸다.
"여기 있는 책 가운데서 냐이는 어떤 책을 좋아하죠?"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책입니다, 선생님."
"스누크 무르푸로니에의 '소시에이션 이론'에 관해서 냐이는 알고 계십니까?"
"잠깐 실례하겠어요."
냐이는 마푸다 선생님의 손에서 잡지를 받아들고 어떤 페이지를 찾아서 그녀에게 보여 주었다. 마푸다 빼데루스 신생님은 그 페이지를 대충 읽고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나를 보고 말했다.
"어째서 당신은 '소시에이션 이론'을 전교 토론회에서 질문했지요? 냐이에게 질문하는 편이 더 좋았을 텐데 말이에요?" "좀더 상세하게 그 이론에 관해 알고 싶었읍니다."
이 집에 서재가 있고, 그런 문제를 다룬 잡지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는데도 나는 일부러 그렇게 대답했다.
마푸다 선생님은 서가에 어면 책이 진열되어 있는지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이 아름답게 장정된 잡지의 합본이었다. 그녀는 마치 냐이의 두뇌 구조를 검사해 보아야겠다는 태도였으나 축산, 농업, 임업, 목재 관계의 책이 제속되기 때문에 그다지 흥미가 없는 것 같았다.
그 다음에는 동인도와 네덜란드, 독일에서 발행된 여성 잡지, 종합 잡지를 합본한 것이 진열되어 있었다. 그러한 책들을 그녀는 대충 훑어보면서 지나갔다. 그 뒤 다시 식민지 관계 잡지의 합본이 진열된 곳으로 돌아와서, 네덜란드어로 번역된 세계 문학전집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여기에는 네덜란드 문학 작품은 없는 것 같군요."
"투앙은 플랑드르인의 작품을 빼놓고는 네덜란드 문학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었으니까요."
"그 말은 냐이도 플랑드르인의 작품을 읽은 적이 있다는 말씀인가요?"
"네, 있읍니다."
"왜 투앙 메레마씨는 네덜란드 문학을 좋아하지 않는지 괜찮다면 말씀해 주시지 않겠읍니까?"
"나는 잘 모릅니다. 다만 네덜란드 문학은 아기자기한 면은 있지만 기백이 없다, 불꽃이 없다고 말하더군요."
마푸다 뻬테루스 신생님은 헛기침을 하며 침을 삼켰다. 더 이상 질문을 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다시 서재를 빙 둘러보았다. 그것은 마치 냐이의 가족, 요즘 빈번하게 학교에서 중상모략의 표적이 되고 있는 가족의 문화 수준에 대해서 일단은 가늠할 수 있개 되었다는 인상을 우리들에게 심어 주려고 하는 것 같았다.
"안네리스 메레마와 얘기를 좀 할 수 있을까요?"
"앤, 안네리스 ! "
마마가 큰소리로 불렸다. 나는 그녀의 방으로 갔다. 안네리스는 창가에 앉아서 멀리 보이는 산과 숲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가고 싶지 않아요, 앤 ?"
여전히 그녀는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았다.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알겠어요. 그럼, 그대로 방에 있어요."
나는 안네리스를 남겨두고 방을 나왔다. "앤 !"
냐이가 다시 한 번 조용히 불렸다.
"아직 몸이 편치 않은가 봅니다. 용서해 주세요, 선생님. 중병에서 회복된 지가 얼마 안되거든요."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두 여성은 쉴새없이 얘기를 주고받으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무엇에 대해서 얘기를 하고 있는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그로부터 한 시간 뒤, 나는 올 때와 같이 마차로 슬라바야의 자택까지 마푸다 뻬데루스 선생닌을 전송해 주었다. 도중에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집에 도착하자 잠깐 할 얘기가 있다면서 나를 집안으로 불러들였다. "밍케군, 그 가정의 생활 태도를 보고 나는 앞으로도 종종 찾아가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확실히 당신의 마마는 보기 드문 여성입니다. 그 옷차림이라든가 생김새라든가, 그리고 태도라든가 모든 것이 말이에요. 단지 그녀의 마음은 몹시 복잡한 것 같더군요. 그녀는 어느 모로보나쁘리부미이지만, 옷차림과 언어를 제외하면 굴절된 복잡한 심리는 진보적이고 밝은 유럽인 쪽에 가까운 것입니다. 쁘리부미로서 특히 쁘리부미 여성으로서 그녀는 세상 일을 너무 많이 알고 있어요. 당신이 말한대로 그녀는 당신의 선생님이라고 부르기에 어울리는 여성이에요. 다만 그녀의 한마디 한마디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복수의 절규, 그것은 차마 들을 수가 없더군요. 복수심에 불타고 있는 듯한 그녀의 모습, 그래요 그것만 없다면 그녀는 참으로 뛰어난 여성이에요. 어쨌든 나는 주어진 자신의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개척해 나가는 사람과 처음 만났어요. 더구나 그것이 여성이라니 ! "
선생님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일은 그녀가 그처럼 높은 법지식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에요."
나는 그냥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마푸다 선생님의 얘기에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점이 몇군데 있었다. 기회를 보아서 쟝 마레에게 물어보자.
"마치 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오는 이야기 같아요. 생각해 봐요. 그녀는 냐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울린다고 믿고 있어요. 하지만 그것은 내 생각으로는 단지 자신의 원한을 풀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아요. 확실히 '냐이'라는 것은 외국인의 첩이 된 쁘리부미 여성에게는 가장 어울리는 호칭이겠지만 말이에요. 그녀는 겉치레 말이나 아첨하는 것을 싫어해요. 어디까지나 의연한 태도로 복수의 칼을 갈며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어요."
여전히 나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마푸다 된생님은 마치 교실에서 학생들에게 하듯이 마마를 소설의 주인공인양 도마 위에 올려 놓고 성격을 분석해 보이고 있는 것 같았다. "밍케군, 그녀는 항상 신중하게 일을 진행해 나가는 사람이에요. 아무리 큰 사업이라도 그녀라면 훌륭하게 경영해 나갈 수 있을 거예요. 이 정도의 여류 실업가를 지금까지 나는 만난 적이 없어요. 상업 전문학교의 졸업생이라도 그 정도로 할 수 있을지 어떤지 의심스러워요. 분명히 당신이 말한대로 그녀는 오직 혼자 힘으로 성공을 거둔 사람입니다. 어디까지나 그것은 사업 쪽의 얘기지만 말이에요. 정말 대단한 여성이에요 ! "
마푸다 선생님은 혀를 내둘렀다.
"밍케군, 쁘리부미 역사상으로도 그녀는 놀라운 존재입니다. 정말 대단해요. 그녀는 본디 20세기에 태어나야 할 여성이라고요. 정말 그래요 !"
여전히 나는 듣고만 있었다.
"그 비범한 여성에 대해서 나도 글을 써 보고 싶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밍케군만큼 문장력이 뛰어나지 못해요. 조금 전에 그녀는 기백이 없다, 불꽃이 없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맞는 말입니다, 다만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희망뿐이에요. 그 이상은 아무것도 없어요. 밍케군, 당신은 문학 재능이 있다는 것을 행복하게 생각해야 돼요. 그리고 문제의 '에소시에이션 이론' 말인데 그것은 단 한사람의 쁘리부미 여성, 즉 당신의 마마의 출연에 의해서 이미 쓸모 없는 것이 된 것이나 다름없읍니다. 만일 그녀와 같은 쁘리부미가 천 명 있다면 이 네덜란드령 동인도는 반드시 파산 지경에 이르고 말 것입니다. 내가 얘기하는 것이 과장된 것인지는 몰라요.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첫인상에 불과해요. 잘 들어요, 밍케군, 첫인상이라는 것이 중요하긴 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말이에요."
마푸다 뻬테루스 선생님은 잠깐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또 다시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아직도 더 발전할 수 있읍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런 사람은 동족들과 함께 살아나갈 수는 없을 거예요. 비유를 하자면, 그녀는 궤도를 벗어나서 끝없는 우주 공간을 혼자서 달리는 유성과 같은 존재입니다. 마침내 그녀는 어디에 도착할까요? 다른 혹성일까요? 아니면 이 대지로 되돌아올까요? 그것도 아니라면 우주의 저 너머로 사라져버릴까요? "
"선생님은 마마를 너무 칭찬하시는 것 같군요."
"그것은 그녀가 쁘리부미이고 여성이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사실 뛰어난 여성이니까요."
"그렇다면 종종 방문해 주십시오."
"유감스럽지만 그렇게는 할 수가 없어요."
"저의 손님으로서 말입니다."
"밍케군, 그럴 수가 없어요."
"그렇겠군요. 마마는 항상 바쁘니까요."
"그런 말이 아니에요. 당신의 프리마돈나가 아무래도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요. 미안해요. 초대해 줘서 고마왔어요, 밍케군. 그 프리마돈나는 당신을 무척 사랑하고 있는 것 같아요. 당신은 행운아예요. 나도 당신들에게 그런 중상모략을 하는 의도를 이제 겨우 알게 되었어요."
제13장
무서운 과거
우노크로모에서의 생활에 나는 평화와 안정을 찾게 되었다. 로베르트는 한번도 모습을 나다내지 않았다. 마마와 안네리스도 로베르트에 대해서는 일체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것은 곧 내가 그의 자리를 대신 차지했다고 생각해도 좋다는 얘기는 아니다.
나는 기회가 있을때마다 내가 이 집에 들어온 데는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는 것, 또 그런 생각은 해보지도 않았다는 것, 나는 단순한 손님에 지나지 않으며, 나가라고 하면 언제든지 나갈 용의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든 외부 사람들에게 확실하게 심어 주려고했다.
그날 밤 공부를 대충 끝냈는데도 나는 일부려 글을 쓰지 않았다. 한숨 돌린 뒤 다시 공부를 계속할 작정이었다.
학교에서 상위권의 성적을 따겠다고 결심한 것은 사실이지만, 왜 지금 갑자기 그런 공부벌레가 되었는지 나 자신으로서도 잘 알 수가 없었다. 단 한가지 확실한 점은, 나의 가족이나 안네리스의 질타와 격려때문은 아니라는 것이다. 어머니에게서도 공부에 관해서 격려의 편지를 받은 적은 없었다. 어머니의 펀지는 언제나 내가 생활에 불편을 겪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네 번째 보내온 어머니의 편지에, 나는 금전적으로 여유가 있으니까 내게 보내는 매달의 송금을 동생이나 누이동생을 위해 써 달라고 답장을 썼다.
편지 말이 났으니 말인데, 나에게는 펀지를 주고받는 것이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 무렵 나는 아직도 모든 편지에 테린하의 주소를 사용하고 있었다. 우노크로모의 주소를 이용하는것은 미리암과 사라와 펀지를 주고받는 경우에만 한정되어 있었다.
새 주소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그녀들이 먼저였다. 두 사람이 우노크로모의 주소를 어디서 알아냈는지 나는 따로 물어보지도 않았다.
그날 밤 나는 이미 대수 문제를 세 개나 풀고 있었다. 괘종시계가 9시를 쳤다. 그 아홉 번째 소리가 끝나는 것과 거의 동시에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대답도 하기 전에 안네리스가 들어왔다.
"9시에는 잠을 자지 않으면 안된다고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셨지요?"
나는 그녀를 꾸짖었다.
"싫어요 ! "
안네리스가 토라졌다.
"당신이 그전처럼 내 방에서 공부를 해 주지 않으면 자지 않겠어요. "
"당신의 어리광은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군요."
정말 이런 까다로운 환자에게는 마르티네 의사도 골치를 썩었을 것이다.
그녀의 뜻대로 될 때까지 정말로 자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이층으로 와 주세요. 언제나처럼 내가 잠이 들 때까지 얘기를 해 줘야 해요."
"이젠 이야깃거리도 다 떨어졌다고요."
"내가 잠을 못 자도 괜찮다는 거예요?"
"이야기라면 마마가 더 많이 알고 있을 텐데요?"
"당신 이야기가 훨씬 재미있어요."
그렇게 말하고 안네리스는 책상에 펼쳐 있는 책을 모두 덮어 버리고 내 손을 잡아 일으켰다. 환자의 말이면 거역하지 못하는 이 의사는 손을 잡힌 채 이층으로 올라가 마마의 거실과 서재 앞을 지나 다시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지난 며칠 동안 나는 더이상 안네리스가 잘 때 담요를 덮어 주거나 모기장을 내려 주거나 하는 것을 중단하고 있었다. 차츰 눈에 띄게 건강이 회복되자 그것은 그녀 자신이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안네리스는 침대에 올라가 뜩바로 눕고는 이렇게 말했다. "담요를 덮어 주세요, 마스. "
"설마 언제까지나 이런 식으로 어리광을 부릴 생각은 아니겠지요 ?"
"당신에게 어리광을 부리지 못하면 누구에게 부려 보죠? 자, 이야기를 해 줘요. 그렇게 서 있지만말고 여기 앉으세요, 언제나처럼. "
나는 시키는 대로 침대가에 걸터앉았으나, 회복기에 있는 미의 여신 옆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자, 빨리요,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 줘요. 스티븐슨의 "보물섬"이나 "유괴"보다 훨씬 더 멋지고, 디킨즈의 "친구"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이야기를요. 그들의 소설은 말을 해 주지 않는다고요, 마스. "
도대체 나는 그녀의 건강 때문에 항상 꺾여야만 된단 말인가? "앤, 어떤 얘기가 좋을까요? 자바의 이야기 ? 아니면 유럽의 얘기 ? "
"당신 좋을대로 하세요. 나의 귓가에서 숨소리가 들리는 듯이 얘기해 주는 당신의 목소리가 좋아요."
"어디 나라 말로? 자바어 ? 네덜란드어 ?"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으니까 빨리 시작해 줘요."
나는 얘깃거리를 찾기 시각했다. 준비는 전혀 없었다. 이야기라고 쉽게 말하지만, 그리 간단하게 떠오르는 것은 아니다. 처음에 스스푸낭 아망크라트 4세의 왕비와 라민 스쿠로의 사랑 이야기를 생각해냈으나 유감스럽게도 그 이야기는 잔혹해서 그녀의 건강에 해로울 것이 뻔했다.
나는 마르티네 의사로부터 다음과 같은 주의를 받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즐거운 얘기를 해주지 않으면 안됩니다. 무시무시한 내용은 금믈입니다. 이 아가씨는 참으로 기묘한 일이지만, 육체나 지능의 발달은 정상적인데, 정신 연령은 아직 열 살짜리 어린애와 같아요. 밍케씨, 당신이 그녀의 좋은 의사가 되어 주는것입니다. 그녀의 병을 고칠 수 있는 것은 당신밖에는 없읍니다. 그러므로 당신에게 완전한 믿음을 갖도록 노력해 주십시오. "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아름다운 것을 안네리스는 꿈꾸고 있읍니다. 그 원인은 너무나 일찍 여러 가지 책임이 지워졌기 때문입니다. 부담이 없는 자유롭고 느긋한 생활을 그녀는 동경하고 있어요, 밍케씨. 저런 미녀를 망쳐서는 안됩니다. 버티는 것입니다. 당신이 그녀의 신뢰를 받을 수 있을 때, 비로소 그녀에게 자신감을 심어 줄 수가 있읍니다.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 주십시오."
생각나는대로 나는 얘기를 시작했다. 도대체 어떤 결말의 이야기가 될지 전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등장 인물은 적당히 표절하고, 각 인물에게 얘기를 마무리짓게 할 생각이었다. "멀고 먼 어떤 나라에."
나는 시작했다.
"앤, 모기 소리가 시끄럽시 않나요?"
"아뇨. 하지만 어째서 모기가 그 먼나라 얘기에 나오지요?"
안네리스는 그렇게 말하다 방울이 울리는 듯한 맑은 목소리로 웃었다. 이가 촛불 빛을 받아 아름답게 빛났다.
"멀고 먼 그 나라에는 이곳처럼 모기는 없었어요. 모기를 잡아 먹으려고 벽을 기어다니는 도바뱀도 없읍니다. 깨끗한 나라였지요. 그 나라는 너무나 깨끗했옵니다. " 언제나처럼 안네리스의 시선은 뚫어질 듯이 나에게 향하고 있었다. 병을 앓는 눈동자였다. ".....그 나라는 땅이 비옥해서 언제나 초록빛으로 넘쳐 있었읍니다. 심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열매를 맺었어요. 해충 따위는 전혀 없었지요. 질병도 가난도 없읍니다. 사람들은 모두 즐겁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읍니다. 누구나가 노래와 춤을 사랑하고, 그것이 또한 능숙했읍니다. 모두 제각기 말을 갖고 있었읍니다. 빨강, 하양, 까망, 노랑, 파랑, 갈색, 회색, 분홍색 말들이 있었는데 얼룩말은 한 마리도 없었어요."
"어머, 참 우습다 !"
안네리스는 웃음을 참으며 혼자 조그맣게 되풀이했다.
"파랑 말과 검정 말이 있었읍니다."
"그 나라에 매우 아름다운 공주님이 한 분 있었옵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비할 데가 없었어요. 피부는 섬세해서 마치 상아빛 빌로도처럼 매끄럽고, 눈동자는 샛별처럼 빛나서 모두들 눈이 부셔서 처다볼 수가 없을 정도이고, 산의 능얼처럼 뚜렷한 속눈썹이 그 새벽 하늘의 샛별을 감싸고 있었어요. 몸매는 모든 여성의 부러움을 샀읍니다. 목소리는 달콤해서, 그 목소리를 듣고 반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읍니다. 그런 미녀니까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사랑했어요. 그녀가 한번 미소지으면 아무리 악한 사나이라도 금방 사랑을 느꼈지요. 웃으면 희고 빛나는 이가 드러나 보였고, 그녀의 숭배자 모두에게 희망을 주었읍니다. 화가 나면 시선이 한 곳에 집중되고, 얼굴은 홍조를 띠었어요, 그런데 이상스럽게도 그러면 그녀는 한결 더 아름다와지고 매력적이 되었읍니다.......어느 날 그녀는 하얀 말을 타고 정원을 한바퀴 산책하고 있었읍니다. "
"그 공주님의 이름은요? "
나는 아직 알맞는 이름을 생각해 대지 못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야기의 무대가 유럽인지 동인도인지, 또는 중국이나 페르시아인지 그때까지도 정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공주님을 보고 정원의 꽃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줄기를 굽혔읍니다. 그녀의 아름다움에는 도저히 맞설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부끄러워하게 되었지요. 꽂들은 빛깔을 잃고 창백해졌읍니다. 공주님이 지나간 다음에 가까스로 그들은 고개를 들어 햇님을 보고는 불만을 털어 놓았읍니다...... 오오 ! 우리들의 위대한 태양신이여 ! 무엇때문에 우리들은 이렇게 치욕을 당해야만 합니까? 당신은 옛날에 자연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창조물로 우리들을 지상에 보낸 것이 아니었나요? 그리고 인간들의 생활에 아름다움을 나누어 주는 임무를 우리들에게 주지 않았던가요? 그런데 도대체 어찌된 영문입니까? 우리들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존재하다니 !"
"햇님은 그 불만을 듣고 창피해서 얼른 두터운 구름 속으로 숨어버렸어요. 그러자 바람이 불어와 슬픔에 젖은 꽃들을 심하게 흔들어댔읍니다. 얼마 뒤 비가 내려서 형형색색의 꽃잎들을 지게 했읍니다."
"공주님은 그녀가 지나온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그대로 산책을 계속했어요. 비도 바람도 공주님에게 훼방을 놓을 용기는 없었읍니다. 길가에 늘어선 사람들은 멈춰 서서 감탄의 소리를 질렀지요......"
언뜻 보니까 안네리스는 잠들었는지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살며시 먼지떨이를 들어 침대에서 모기를 쫓고 모기장을 치려고 했다.
"마스."
갑자기 안네리스가 눈을 뜨고 내 손을 잡았다. 그 바람에 또다시 나는 침대 끝에 앉아 중단된 이야기의 다음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래요. 공주님은 말을 타고 산책을 계속했어요. 그것을 본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이 자신을 저 말로 변신시켜 주었으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고 생각했읍니다. 그러나 공주닌 자신은 그들의 감정을 알 턱이 없었지요. 자신은 다른 사람들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믿고 있었어요. 단 한번도 자기가 아름답다고 느낀 적이 없었고, 더구나 자신이 절세미녀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읍니다."
"그 공주님의 이름은요?"
"글쎄요?"
"이름, 그녀의 이름 말이에요."
안네리스는 재촉했다.
"그녀의 이름은 안네리스가 아닌가요?"
"맞아요. 그녀의 이름은 안네리스라고 했옵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안네리스가 되어버렸다.
"그녀는 많은 옷을 갖고 있었읍니다. 가장 아끼는 것은 검은 빌로도의 이브닝 드레스로, 낮이고 밤이고 할것없이 그 옷을 입고 있었읍니다."
"어머나 ! "
"공주님은 아름다운 사랑......하늘 나라 신들의 유명한 사랑이야기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사랑을 동경하고 있었음니다. 남자답고 잘생기고 용감하고 신사보다도 더 고귀한 왕자님이 나타나기를 꿈꾸고 있었읍니다."
"그리고 어느 날, 그 꿈이 실현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잘생기고 남자다운 왕자님이었지요. 다만 그는 말을 갖고 있지 못했읍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말을 탈 줄도 몰랐읍니다."
안네리스가 우습다는 듯이 킬킬거렸다.
"그는 임대용 이륜 마차를 타고 왔읍니다. 허리에는 칼도 차고 있지 않았읍니다. 왜냐 하면 그는 한 번도 전쟁에 나간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가 가진 것은 연필과 펜, 그리고 종이가 있을 뿐이었옵니다."
또 안네리스가 웃었다,
"왜 웃습니까?"
"그 왕자님의 이름은 밍케라고 하나요?"
"그래요. 밍케라고 합니다."
안네리스는 눈을 감았다. 손은 내 팔을 꽉 움켜쥔 채였다. 내가 가버릴까봐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도착한 왕자님은 마치 개선이라도 한 듯이 공주님의 궁전으로 들어갔읍니다. 두 사람은 얘기를 주고받았음니다. 공주님은 곧 그를 사랑하게 되었읍니다. 그것도 무리는 아니죠." "그렇지 않아요."
안네리스는 항의했다.
"왕자님이 먼저 그녀에게 키스를 했다구요 ! "
"그렇습니다. 왕자님은 잊고 있었읍니다만, 그가 먼저 공주님에게 키스를 했읍니다. 공주님은 그것을 왕후에게 일러 바쳤읍니다. 왕후에게 왕자님을 꾸짖어 달라고 일렀던 것은 아닙니다. 왕자님을 왕후에게 인정받게 하려고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왕후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읍니다." "당신의 얘기는 약간 틀렸어요. 공주님의 어머니는 진심을 나타내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이었어요. 화를 내셨다구요."
"정말로 화를 냈어요? 뭐라고 했는데요? "
"이렇게 말했어요. '왜 고자질을 하지. 네 쪽에서 그의 키스를 기대하고 있었으면서'라고요."
이번에는 내가 웃음을 참아야 할 차례였다. 안네리스의 부푼 마음을 꺾지 않기 위해 나는 황급히 애기를 계속했다. "왕자님은 참으로 멍청하군요. 별써 두 번이나 틀렸으니까요. 사실은 공주님은 그로부터 키스를 받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거짓말이에요. 그녀는 기대 따위는 하지 않았어요. 그런 일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어요. 왕자님이 나타났어요. 그는 말을 탈 줄 몰랐어요. 아니, 오히려 말을 무서워하고 있었어요. 그가 다가와서 공주님이 모르고 있는 사이에 키스를 했다구요. 이것이 진실이라구요."
"그러나 공주님은 싫다고는 하지 않았읍니다. 그래서 샌들이 벗겨진 줄도 모르고......"
"거짓말 ! 당신은 거짓말장이야 !"
안네리스는 힘껏 내 팔을 잡아당기면서 얘기가 사실에서 벗어난 것에 항의했다. 그 기세에 이끌려 나는 그녀의 부드러운 팔 속으로 쓰러졌다. 심장이 거친 바람에 일어난 파도처럼 심하게 두근거렸다. 온몸의 피가 머리로 솟구쳐 올라와 의사로서의 임무도, 자신이 누구인지도 잊게 했다. 무의식 중에 나는 그녀의 포옹에 응했다. 안네리스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나의 숨결도 거칠어져 있었다. 어쩌면 숨결이 거칠어진 것은 나 혼자였는지도 모르지만, 무아경에 빠진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주위의 모든 것이 무(無) 속으로 소멸한 것처럼 느껴졌다. 존재하는 것은 안네리스와 나뿐으로, 어떤 힘에 의해 한쌍의 원시동물로 변한 우리들뿐이었다.
그리고나서 우리들은 빈껍질처럼 축 늘어져서 나란히 누웠다. 확실히 무엇인가를 상실한 느낌이 들었다. 모든 것이 갑자기 의미가 없는 정적으로 바뀌어 있었다. 시커먼 덩어리 같은 것이 마음속에 나타났다. 이건 어떻게 된 일일까?
안네리스가 또 다시 내 손을 잡았다. 침묵. 우리들은 적대하듯이 서로에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적대 ?
"후회하고 있어요?"
내가 크게 숨을 내쉬자 안네리스는 그렇게 물었다.
그렇다. 나는 후회하고 있었다. 교양도 분별도 있고, 그녀를 의사로서 돌보아야 할 처지에 이린 일을 벌이다니 !
검은 덩어리가 점점 더 부풀어갔다. 그와 동시에 나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가 없는 또 다른 하나의 후퇴가 일었다. 안네리스는 대답을 재촉했다. 일어나서 침대에 앉자 내 몸을 세게 흔들어대며 같은 질문을 되풀이했다.
다만 한줌, 조금 전보다 더욱 기다란 한숨만이 나의 대답이었다. 자신을 납득시키기 위해서 그녀는 얼굴을 나에게로 가까이 가져왔다. 그녀가 나의 대답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무슨 말이든 해 주세요 !"
안네리스는 강요했다.
나는 그녀 쪽을 보지 않고 물었다.
"앤, 내가 첫번째 상대는 아니지요? "
안네리스는 나를 뿌리치고 침대에 쓰려졌다. 그리고 나를 등지고 벽쪽을 향해 흐느껴 울었다.
가혹한 질문이기는 했지만, 그렇게 해서 나는 그녀에게 난폭한 짓을 한 것을 후회하지 않으려 했다. 그녀는 그냥 흐느껴 울고 있었다.
"후회하고 있어요. 당신은 후회하고 있군요."
안네리스는 그렇게 말하고 이번에는 소리를 내어 울었다. 나는 내가 취했어야 할 행동을 생각해냈다.
"미안해요, 앤."
그렇게 말한 다음 나는 애마의 갈기를 쓰다듬듯이 그녀의 풍성한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한참만에 그녀는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다.
"나는 알고 있었어요."
하고 그녀는 자신을 격려하면서 쥐어짜듯이 말했다. "어느 날엔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그렇게 물을 것이라고 말이에요. "
안네리스는 한층 더 평온한 목소리로 계속했다.
"그런 길문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나는 모든 용기를 다져 왔어요. 정면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그렇지만 나는 아직 두려워요. 당신이 떠나버리는 것이 무서워요, 마스. 나를 버리고 가실건가요? "
그녀는 여전히 내게 등을 돌리고 있었다. "그런 짓은 하지 않겠어요, 안네리스." 하고 위로했다.
"저와 결혼해 주시겠어요?"
"응."
안네리스는 다시 울기 시작했다.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동요가 가라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전히 나에게 등을 돌린 채 거의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한마디씩 단락을 지어 그녀가 말했다.
"마스, 당신에게 미안해요. 첫 번째 상대가 아니어서요. 하지만, 그것은 내 의지가 아니었어요. 사고였어요. 피할 수 없는." "첫 번째 상대는 누구지 ?"
나는 쌀쌀맞게 물었다.
한참동안 안네리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를 원망하실 작정이세요?"
"그가, 누군데?"
"부끄러워요."
그녀는 계속 나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다.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나는 내가 질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짐승 같은 인간 !"
그녀는 벽을 두드렸다.
"로베르트 ! "
"로베르트라구 ? "
나는 자신도 모르게 거칠게 내뱉었다.
"슬르호프하고? 설마하니 ! "
"슬르호프가 아니에요. "
또 다시 안네리스는 벽을 쳤다.
"그가 아니라구요. 메레마예요. "
"당신 오빠가 ? "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안네리스는 다시 울기 시작했다. 나는 난폭하게 그녀를 붙잡아 똑바로 눕혔다.
그녀는 황급히 팔로 얼굴을 가렸다. 얼굴은 눈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거짓말이야 ! "
그런 식으로 그녀를 다루는 것이 당연한 내 권리라도 되는 듯이 나는 안네리스를 힐책했다.
안네리스는 고개를 흔들었다. 얼굴은 아직도 팔로 가리고 있었다. 내가 그 팔을 떼어내려고 하자 심하게 저항했다. "거짓말이 아니라면 얼굴을 감추지 말아요." "당신에게 부끄러워요.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부끄럽구요." "그하고 몇 번 관계했지?"
"한번뿐이에요. 이건 거짓말이 아니에요. 사고였어요." "거짓말이야 ! "
"거짓말이면 나를 죽여요."
안네리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당신이 믿어 주지 않는다면, 살아 있어도 소용이 없으니까요. 언젠가 당신도 진실을 알게 될 때가 올거예요."
"로베르트 메레마 외에는?"
"없어요. 당신뿐이에요."
나는 안네리스를 놓아 주었다. 충격적인 그녀의 고백에 대해 나는 생각하기 시작했다.
역시 이것이 현지처 가족의 일반적인 도덕 수준일까? 나는 거의 "예스"라고 대답할 뻔했다. 그러나 그때 쟝 마레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지식인은 먼저 그 머릿 속에서 편견을 버리고 진실해지지 않으면 안된다."
쟝이 손가락질을 하며 비난하는 모습이 떠을랐다. "밍케, 그렇게 말하는 자네의 도덕 수준은 어떤가? 그녀들보다 높다고는 할수없을 걸세."
나는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그렇다. 안네리스가 밍케보다 비열하다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한참동안 우리 두 사람 모두 입을 다물고 각자의 생각에 잠겨 있었다.
마침내 안네리스가 입을 열었다.
"마스, 어떻게 해서 그런 사고가 생겼는지 나한테 설명하게 해줘요."
그녀의 목소리는 이미 평온해져 있었다. 안네리스는 자신을 변호할 필요가 있었다.
조금 전까지 흐느끼던 모습과는 반대로 의연해져 있었다. 다만 아직도 눈만은 오른 팔로 가리고 있었다,
"그것이 언제 일이었는지 날짜와 요일까지 확실히 기억하고 있어요. 벽에 붙은 달력에 붉게 표시해 놓았어요, 당신도 보이죠? 약 반년 전의 일이었어요. 마마가 나한테 다르삼을 찾아오라고 했어요. 모두의 얘기로는 다르삼은 마을에 있다고 했어요. 나는 애마를 타고 그를 찾으러 갔어요. 그의 이름을 큰 소리로 부르면서, 나는 마을에서 마을로 찾아다녔어요. 마을 사람들도 함께 찾아 주었구요. 하지만, 다르삼은 보이지 않았어요. 그 때 누군가가 다르삼은 지금 밭에서 땅콩 작황을 조사하고 있다고 알려 주었어요. 나는 말의 방향을 바꿔 땅콩밭으로 가보았지요. 하지만 그곳에도 그는 없었어요. 그 근처에는 키큰 나무도 없었는데, 그의 모습은 아무 곳에도 보이지 않았어요. 다르삼은 항상 아래 위 모두 검은옷을 입고 있기 때문에 얼른 눈에 띄는데 말이에요. 결국 그는 땅콩밭에도 없었어요. 그 뒤 지나가던 한 어린애가 다르삼은 늪 건너편에 있다고 가르쳐 주었어요, 그때서야 나는 겨우 다르삼이 새로운 실험용 밭을 개간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냈지요. 그것은 그메까지는 깊은 풀숲이었지만, 밭으로 만들어 마마가 호주에서 새로 수입해온 가축의 사료용으로 쓸 목초를 심기로 계획되어 있었어요. 그것은 주위에 무성하게 자란 갈대에 가로막혀 있어서,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어요. 갈대를 자르고 난 그루터기가 있던 것을 당신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 거예요. 당신이 가자고 했을 때 내가 가기를 거절한 그 장소 말이에요?" "아아, 기억하고 있소."
빽빽하개 자란 높은 갈대 숲이 있었다. 틀림없이 그때 안네리스가 두려워 몸을 떨던 것을 나는 아직 기억하고 있다.
"나는 말의 방향을 바꿔서 늪의 반대쪽에서 다르삼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갔어요. 아무 대답도 없었어요. 양쪽의 갈대를 비집듯이 하고 좁은 길로 들어서자, 다르삼이 아니라 로배르트가 나타났어요.
'앤' 로베르트 오빠가 이상한 눈으로 나를 보면서 말했어요. 그리고는 총과, 그날 아침 사냥에서 잡은 집오리를 끈에 묶은 채 땅에 내던졌어요. '다르삼은 조금 건에 이곳을 지나갔어.' 그가 말했어요. '마마에게 간다고 하더군. 오늘 아침 9시에 마마와 만날 약속을 깜빡 잊고 있었다면서 급히 갔다구' 그 말을 듣고 나는 안심했어요. '오늘은 많이 잡았어 ?' 나는 로베르트에게 물었지요. 그는 집어던진 집오리를 다시 집어들어 내게 보였어요. '이런 것이야 별 것 아니지. 그것보다 오늘은 희귀한 것을 잡았지. 앤, 말에서 내려오너라.' 로베르트는 몇 미터 걸어가서 검은 털로 덮인 커다란 삵괭이 시체를 주웠어요. 나는 말에서 내렸어요. '좀처럼 보기 힘든 삵괭이지 ?' 그가 말했어요. '아마 이것이 사향고양이라는 것일 거야.' 나는 그 삵괭이의 부드러운 털을 만져 보았어요. 머리를 무엇인가로 강타당해 있었어요. '그래, 총을 쏜 게 아니야. 나무 밑에서 기분 좋게 자는 녀석을 한방에 때려 죽였지.' 갑자기 그의 더러운 손이 나의 어깨를 움켜잡았어요. 나는 화를 냈어요. 미친 물소처럼 덤벼 들었어요. 나는 균형을 잃고 갈대 숲 속에 넘어졌어요. 만약 그때 뾰죽한 갈대 그루터기가 있었다면 그것에 찔려 죽었을 거예요. 로베르트는 내 몸을 덮쳐 누르며 왼팔로 끌어안고 내 입을 틀어 막았어요. 나는 죽이는 줄만 알았어요. 도망치려고 필사적으로 저항하면서 그의 얼굴을 할퀴었어요. 그러나 그의 힘에는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었어요. 죽을 힘을 다해 마마와 다르삼의 이름을 불렀으나, 그의 손바닥에 막혀 버렸어요.
나는 그때서야 겨우 오빠에게 가까이 가서는 안된다는 마마의 경고를 이해할 수가 있었지요. 하지만 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어요. 훨씬 이전부터 로베르트는 파파의 유산을 차지하려 들지 모른다고 마마는 오빠의 탐욕을 비웃고 있었어요.
그때 문득 그는 나를 죽이기 전에 언저 욕보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로베르트는 내 옷을 찢었어요. 입은 틀어막힌 채였구요. 그때 라의 애마인 '바우크'가 큰소리로 힝힝거렸어요. 얼마나 나는 바우크가 도와주기를 바랬는지 몰라요. 로베르트는 꽉 오무린 나의 두 다리를 억센 무릎으로 벌리려고 했어요. 그것은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사고였어요. 재난이었어요, 마스." 안네리스는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다만 그녀가 얘기한 광경을 내 머릿 속에서 재현시키고 있었다.
"바우크가 다가와서 로베르트의 엉덩이를 물었어요. 오빠는 비명을 지르며 뛰어 일어났어요. 한동안 말은 그를 쫓아다녔어요. 로베르트는 갈대 숲 속으로 도망쳤어요. 나도 총을 들고 쫓아가서 그를 쏘았어요. 맞았는지 어떤지는 몰라요. 그의 바지에 피가 배어나와서 넓적 다리에서 무릎께로 흘러내리는 것이 먼발치로 보였어요. 바우크한데 물린 상처였어요. 나는 총을 버렸어요. 온몸이 쑤셔댔어요, 입 안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어요. 나는 바우크의 등에 올라탈 힘이 없었어요, 하지만 마을 가까이까지라도 가려고 있는 힘을 다해서 말등에 올라탔지요. 흐트러진 내 모습이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어요."
"안네리스 ! "
나는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믿을께, 앤. 당신 말을 믿겠어요. "
"당신이 믿어 주는 것, 그건 바로 나의 생명이에요, 마스. 처음부터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어요."
또 다시 우리 두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때 마르티네 의사가 한 얘기가 의심스러워졌다. 안네리스는 이미 완전한 어른인 것이다.
잘 되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을 지키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죽는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의 의미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마마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나요? "
"애기를 한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사태가 좋아질 것도 아니구요, 만약 마마가 그것을 알게 되면, 로베르트는 틀림없이 다르삼한테 죽음을 당할 거예요.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끝장이지요. 마마도 나도 말이에요. 아무도 이 농장을 가까이하지 않게 될 거예요, 이 집은 악마의 저택이 되고 말 거예요. " 마지막으로 하는 말에서는 굳센 힘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 힘은 곧 사라졌다. 안네리스는 나에게 매달려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하염없이 울었다.
"마스, 내가 나쁜 여자일까요?"
나는 그녀를 꽉 껴안았다. 갑자기 심장이 심하게 두근거렸다.
다시 우리들은 한 쌍의 원시 동물로 변해서 그대로 침대에 뒹굴었다.
그때는 이미 마음 속에 검은 덩어리 따위는 없었다. 나무 인형처럼 우리들은 그냥 꽉 서로를 껴안고 있었다. 안네리스는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몽롱한 의식 속에서 나는 마마가 방으로 들어와 잠시 침대 앞에 멈춰 서서 모기를 좇으며 중얼거리는 것을 어렴풋이 들었다.
"마치 두 마리의 개처럼 끌어안고 있구면."
그리고 나서 마마는 우리들에게 담요를 덮어 주고는 모기장을 내리고 촛불을 끈 뒤 문을 닫고 나가는 것을 나는 비몽사몽간에 느끼고 있었다.
제14강
영혼과 철판
급우들은 여전히 나를 피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 단 한사람 나에게 다시 접근해 온 것은 얀 다페르스테였다.
이전부터 얀은 나의 숭배자였고 나를 행운아, 좌절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5월의 사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얀은 공부벌레였으나 성적은 언제나 나보다 밑이었다. 학교에서 매일 쓰는 돈은 모두 내 주머니에서 나가고 있었다. 그가 나를 친형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마 그 용돈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들은 같은 반이었다. 얀 다페르스테는 항상 나에 대한 소문을 전해 주었다. 그 때에 내게 대한 로베르트 슬르호프의 악의에 찬 행동을 자세히 알수가 있었다.
나를 교장 선생님에게 밀고한 것이 슬르호프라는 것을 알게 된 것도 역시 얀을 통해서였다. 나는 그런 음모 따위에 신경을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퇴학시키고 싶으면 시켜도 좋다. 어차피 이 학교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으니까. 학교를 대신해 줄 장소는? 적어도 여기보다는 자유롭고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곳이 있을 것이다.
언젠가 교장 선생넘이 나를 불러 이렇게 물었다.
"아무래도 요즈음 자네는 말수가 적어지고, 급우들에게서 따돌림을 받는 것 같은데 왜 그런가?"
"저는 모두 좋아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나를 좋아하도록 강요 할 수는 없잖습니까 ?"
나는 대답했다.
"그들이 자네를 멀리하고 있는 것은 분명 어떤 이유가 있을 걸세."
"틀림없이 그럴 거라고 저도 생각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저로서는 잘 모르겠옵니다. 다만 저에 관해 좋지 않은 소문이 떠돌고 있다는 것은 알고있읍니다. 소문을 퍼뜨린 장본인은 로베르트 슬르호프입니다."
"이유는 자네가 이미 그들의 일원이 아니라는 데 있네. 자네는 이미 그들의 동료가 아니야. 그들과는 다르단 말이지."
나는 곧 눈치챘다. 교장 선생님은 나를 퇴학시키겠다는 암시를 하고 있는 것이다.
좋다. 그것에 대처할 준비는 이미 되어 있었다. 구태여 겁을 집어먹을 필요는 없어. 공부를 계속하지 못하게 된다면 ? 그것이 어쨌다는 거냐 ?
학교라는 곳은 결국 매일의 시간표를 메꾸어 가는 곳에 불과하다. 졸업을 해도 좋고, 설사 졸업을 못한다 해도 큰일날 것도 없는 것이다.
"우리들로서는 자네가 행실을 고쳐 주기를 바라고 있네. 장차 자네는 중요한 지위에 오를 인물이야. 자네는 유럽의 교육을 받아 왔네. 장차 유럽에서 상급 학교에 진학할수도 있을 걸세 자네는 부빠티가 되고 싶지 않나?"
"되고 싶지 않습니다."
"되고 싶지 않다고?"
짧은 순간이지만 교장 선생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아, 그렇군. 자네는 작가 지망생이었지. 벌써 몇 작품 발표도 한 모양이더군. 아니면 저널리스트 지망생인가. 어쨌든 이 사회에서 살아 나가려면 남에게 손가락질을 받을 행동을 해서는 안되네. 밍케, B시의 부빠디 님에게 내가 꼭 편지를 써야 하겠나? 아니면 부이사관 에르베르 드라크로아씨에게 쓸까." "교장 선생님께서 제 일 때문에 편지를 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신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제가 간섭할 일은 아니니까요." "그럼, 자네의 행동을 편지로 써도 상관없단 말인가?" "저는 별로 상관이 없읍니다. 그것은 교장 선생님 자신의 문제지, 저와는 관계가 없는 일이니까요." "관계가 없다고?"
교장 선생님은 더욱 날카로운 눈초리로로 나를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어처구니 없다는 얼굴을 하고 곤혹스러운 듯이 말을 계속했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누구를 상대로 얘기를 하고 있는 거지 ? 밍케 ? 아니면 맥스 트레나르?"
"똑같습니다. 이름은 달라도 어느 쪽이나 같은 하나의 인격체니까요."
교장 선생님은 가도 좋다고 말하고는 두 번 다시 나를 부르지 않았다.
마푸다 뻬테루스 선생님도 호의적인 시선에는 번함이 없었으나 어딘지 모르게 나를 멀리하고 있는 모양으로, 내가 그녀와 얼굴을 마주치는 것은 수업 시간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전교 토론회는 교장선생님에 의해 동결된 채로 있었다. 나 자신도 놀라고 있었지만, 나는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겠다고 마음 속으로 다짐하고 있었다. 내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이 강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가 쓴 작품은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졌고, 점점 더 많이 발표되고 있었다. 하기야 내게 그동안 원고료 따위는 한 푼도 들어오지 않았다.
만일 집필자인 내가 쁘리부미에 불과하다는 것이 세상에 알려지면, 사람들은 단번에 흥이 깨져 속았다고 분개할 것이다. 원주민인 주제에 !
그런 사태에 대해서도 나는 이미 대비하고 있었다. 나에 대한 것을 세상에 폭로하려고 하는 슬르호프의 계획을 얀 다페르스테가 통고해 주었던 것이다.
그때 한달 동안 나의 생활에서 일어난 일은 교장 선생님의 호출사건만이 아니었다. 얀 다페르스테가 슬르호프의 계획을 은밀히 가르쳐 준 지 얼마 안되어, "슬라바야 일보" 사에서 호출이 왔다.
그 신문사 사장이며 편집국장 마르턴 네이만씨가 나를 만나고 싶다는 것이었다.
함께 가 달라는 나의 권유를 얀 다페르스테는 거절하지 않았다. 마르빈 네이만씨는 우리들 두 사람을 방으로 안내하고 독자로부터 보내 왔다는 투서를 내게 보여주었다. 바로 다페르스테가 알려 준 그대로였다.
그것은 맥스 트레나르가 원주민에 불과하다는 투서였던 것이다. 나와 다페르스테는 그 필적을 본 적이 있었다. 역시 그랬구나 하는 듯이 얀 다페르스테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투서를 읽고 손해 배상을 청구하기 위해서 나를 이곳에 불렀읍니까 ?"
나는 물었다.
"그렇다면, 이 투서 내용이 사실입니까?" "사실입니다. "
"그럼, 당연히 손해 배상을 청구해야겠지요."
네이만씨는 싱글싱글 웃었다.
"청구서는 이미 준비해 두었읍니다. 우리들의 요구가 무엇인지 벌써 알고 있겠지요? "
"모르겠읍니다."
"트레나르씨, 우리들의 요구는 당신에게 우리 신문사의 촉탁이 되어 달라는 것입니다. 상임 촉탁입니다."
그렇개 말하고 네이만씨는 한 장의 종이쪽지를 내밀었다. 그것은 영수증이었다. 많은 금액은 아니었으나, 나는 그것을 지금까지의 원고료조로 받았다.
"앞으로는 상임 촉탁으로서 좀더 많은 사례금을 드리겠읍니다."
"촉탁으로 어떤 일을 하면 됩니까?"
"당신이 쓰고 싶은 것을 쓰면 됩니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마차는 우리들을 레스토랑으로 데리고 갔다. 얀 다페르스테는 나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하고 난생 처음 식사를 하는 사람처럼 게걸스럽게 먹어댔다.
교장 선생님과 "슬라바야 일보"의 호출에 뒤이은 세 번째 사건은, 마르티네 의사와의 면담이었다.
나는 레스토랑에서 나오는 길로 마르티내 의사를 만나러 갔다. 그때도 얀 다페르스테가 동행했다.
마르티네 의사는 자기 집 베란다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나와 둘이서만 얘기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 닥터."
그는 말을 꺼냈다.
"환자의 상태는 어떤가요? "
"양호합니다."
"그건 어느 정도를 말하지요?"
"상당히 건강을 회복해서 이미 예전처럼 일을 하고 있읍니다. 한가한 시간에는 독서도 하게 되었구요. 밭이나 마을을 돌아볼 때는 말을 탑니다. 독서는 내가 만든 계획표에 따라 열심히 하고 있읍니다. 가끔 마마와 셋이 느긋하게 앉아서 축음기로 음악을 들을 때도 있읍니다."
"그렇다면 겉으로 봐서는 건강을 회복한 것 같군요."
그 동안 얀 다페르스테는 혼자 베란다에 남아 있었다. "겉으로만 그렇다구요? 그럼, 선생닝께서는 아직 기대한 만큼 회복되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런 얘기가 아니오, 밍케씨. 나는 요즈음 여섯번인가 그녀를 진찰했읍니다. 처음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었는데, 세 번째 진찰이 끝난 뒤 내 손이 몸에 닿을 때마다 그녀는 몸이 떨리고 소름이 돋는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았읍니다. 내가 이상하게 생각하게 된 것은 그때부터였지요. 이 아름다운 처녀의 내부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을까? 그녀의 의식 밑바닥에는 무엇인가 정상이 아닌 것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즉시 나는 연구를 시작했지요. 처음에 생각한 것은 그녀가 나에게 거부반응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소. 나의 생김새가 그녀의 눈에 추잡한 동물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거울로 내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읍니다. 오른쪽 눈에 뾰쪽 안경을 끼게 된 것밖에는 10년 동안 나는 달라진 것이 없읍니다. 내 얼굴은 그다지 못생긴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어떻습니까? 오히려 미남 축에 들어가는 게 아닐까요? 그다지 뛰어난 미남은 아니지만요."
"아닙니다. 선생님은 상당한 미남이십니다."
"허어, 고맙군요. 나는 이 정도로 충분해요. 진짜 미남은 당신이지요? 그러니까 안네리스는 내가 아닌 당신을 선택했지요."
"농담 그만하세요, 선생님."
"아니, 사실을 얘기하는 겁니다. 닥터 밍케."
마르티네 의사가 웃었다.
"당신을 알고나서 겨우 그녀가 몸을 떠는 것이 나의 생김새 탓이 아니라는것을 알았읍니다. 아마도 그녀의 경련의 원인은 내 피부에 있는 것 같습니다. 흰 피부에 말이오."
"그녀의 아버지도 흰 피부입니다. 순수한 유럽인이니까요."
"글쎄요.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 추측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피부가 흰, 순수한 유럽인이지요. 좋습니다. 밍케씨, 내가 당신을 만나자고 한 것은 그 문제에 협력을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맞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순종 유럽인이죠. 바로 그것이 문제입니다. 이 세상에는 부모를 미워하고 있는 자녀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증오하는 정도가 잤으냐 얕으냐 지속적인 것이냐 일시적인 것이냐는 둘째 치고 말입니다. 물론 통계가 나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아이들이 많이 있읍니다. 애 그들이 부모를 증오하는 원인은, 가령 부모 자신의 행동 때문이기도 합니다. 부모와 자식이 피부색이 같은 경우에는 피부색이 증오의 원인이 되는 일은 물론 없을 테지만 말입니다." "안네리스도 흰 피부입니다."
"그렇소. 쁘리부미의 섬세함을 가진 흰 피부지요. 한때는 나도 그녀를 내 것으로 만들려고 꿈꾼 적이 있었소. 우습지요? 닥터 밍케, 유감이지만 그녀는 나와 비교하면 너무 어립니다. 어림도 없는 꿈이었지요. 기분 나빠하지는 마세요. 농담이니까요. 어쨌든 문제는 그녀가 나를 보고 경련을 일으켰다는 데 있읍니다. 말씀대로 그녀도 피부가 휩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판단했읍니다. 즉 어떤 외적인 영향으로 저항할 수 없는 굉장히 강한 힘이 자기 자신에 대한 그릇된 이미지를 만들어버린 것이 아닐까? 그녀는 자신을 뱃 속까지 철저한 쁘리부미라고 믿고 있으며, 어쩌면 그녀는 어머니 때문에 유럽인이 모조리 더럽고 인품이 비천한 인종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 아닐까? 냐이와 안네리스 본인과 면담을 해 보고 나는 그런 결론을 얻기에 이르렀읍니다. 과연 냐이는 특별한 여성입니다. 그것은 누구나 인정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나는 당신에게 냐이는 무의식 속에서 혼자 힘으로 그렇게 되었다고 말한 적이 있읍니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다른 쪽으로는 실패했다고 말입니다. 그녀는 자녀들의 양육법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녀 자신의 개인적인 갈등 속에 자식들을 말려들게 했읍니다. 그것은 단순히 경솔했다는 말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되돌이킬 수 었는 결정적인 실패였던 것입니다. 밍케씨. "
얘기가 길어질 것 같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마부에게 얀 다페르스테를 집까지 모셔다 드리라고 일렀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는 어머니에게서 강요된 것을 모조리 받아들여, 자신의 감각의 한 부분으로 만들어갔읍니다." 마르티네 의사는 계속했다.
"그러나 마마는 결코 유럽인을 증오하지만은 않습니다. 유럽인과 많은 거래를 하고 있으며, 선생님 같은 의사라든가 변호사와 교제하고 있읍니다. 그뿐만 아니라 유럽의 책까지 읽고 있읍니다."
내가 한 마디 했다.
"말씀대로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의 이익이 될 경우에 한정되어 있읍니다. 지금 그녀와 투앙 메레마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어 있읍니까. 투앙 덕택에 그녀는 성공했는데도 불구하고, 의식의 밑바닥에서는 줄곧 투앙을 경계하고 불신감을 버리지 않았읍니다. 이곳 상류사회 사람들은 모두 투앙 메레마와 현지처와의 비극적인 애기를 알고 있어요. 모르는 것은 안네리스 한 사람뿐입니다.
냐이는 무의식 중에 안네리스를 제2의 자신으로 만들었읍니다. 그녀는 어머니를 떠나서 스스로 설 수가 없읍니다. 주도권은 항상 어머니에게 빼앗기고, 어머니의 말은 절대적인 명령이 되어 그녀를 구속합니다. 불쌍한 처녀지요. 그토록 빼어난 미모를 갖추고도 말입니다. 밍케씨, 그녀는 혼란 상대에 빠져 있음니다. 그녀의 중추 신경은 어머니의 것과 똑같습니다."
나는 놀라움을 느끼면서 마르티네 의사의 얘기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린 분석은 내게는 낯설고 복잡한 것이었으나, 방법이 너무나도 직접적이어서 매우 흥미로왔다. 그렇기는 하지만, 어떻게 사람의 내면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이 꿰뚫을 수 있는지 나로서는 신기하기만 했다.
"냐이는 지나치게 개성이 강합니다. 그것에는 폭넓은 지식이 바탕으로 되어 있지만, 동인도라고 하는 이 무지한 정글 속에서 살아나가는 데는 그런 학식 따위는 쓸모가 없읍니다. 모두들 그녀와 얼굴을 마주하기를 두려워하고 있어요. 그녀에게 압도당해 꼼짝 못하게 된다는 선입관 때문이지요. 나 같은 사람조차 압도당해 당황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만일 그녀가 평범한 현지처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 정도의 재산과 미모를 갖고 있고 더구나 주인은 실종 중이니까 틀림없이 많은 사내들이 유혹의 손길을 뻗치려고 했을 겁니다. 그러나 전혀 그린 일이 없읍니다. 아무도 가까이 가려고 하지 않지요. 내가 알고 있는 한 유럽인도 혼혈아도 누구 한사람 유혹의 손을 뻗친 사람이 없읍니다. 물론 쁘리부미에게는 그런 용기가 있을 턱도 없읍니다만. 그들은 암호랑이와 상대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고 있음니다. 한번 포효하기만 하면 귀뚜라미 같은 사내들은 모조리 겁을 집어먹고 도망쳐버릴 겁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사실입니까?"
"당신도 한번 생각해 보시오. "
"저 같은 고등학교의 학생이 그런 일에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물었다.
"무슨 말입니까? 가장 깊이 관련된 것은 바로 당신입니다. 내가 얘기를 지어서 한다고 생각합니까? 당신은 지식인이오. 내가 틀렸다면 지적해 주어야 합니다. 그때문에 만나자고 했으니까요. 당신 쪽이 그들과는 훨씬 더 가깝습니다, 본디는 당신이 풀어야 할 문제입니다. 나는 다만 조그만 단서를 제공하려는 데 불과합니다.
당신은 이미 어른입니다. 그리고 안네리스를 도울수 있는 것은 당신밖에는 없어요. 그 처녀는 지금 당신을 사랑하고 있읍니다. 사랑이야말로 어떤 것보다도 강한 힘의 원천입니다. 사랑은 인간을 변하게 할 수가 있읍니다. 인간을 파멸시켜 폐인으로 만들 수도 있어요. 또한 도와 주고 재생시킬 수도 있어요. 당신에 대한 애정, 그것만이 그녀를 어머니로부터 하나의 독립된 인격으로 성장시킬 수가 있다고 나는 믿고 있읍니다. 요즈음의 진료와 그녀의 헛소리나 눈의 광채로 판단하건대, 그녀는 모든 것을 당신에게 걸고 있어요. 이것은 나의 억측도 비약도 아닙니다......."
그의 분석은 점점 더 나의 흥미를 끌었다. 그것은 물론 얘기가 나 개인의 문제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일단 안네리스가 어머니에게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그녀의 내부에 번화가 생겨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고통이 수반하지만, 모든 일의 탄생에는 고통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냐이 자신이 무의식 속에 그런 새로운 씨앗을 자기 자식에게 심어준 것입니다. 당신과 딸의 관계를 반대하지 않은 것이 그 좋은 예입니다. 반대하기는커녕 냐이는 당신들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밀어 주고 있읍니다. 그런데도 아직 그 처녀에게는 무엇인가 가슴 속에 풀리지 않는 응어리가 남아 있읍니다."
(마르티네 의사의 얘기는 그 뒤에도 계속되었지만, 내 지식으로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되어 있다.) "당신의 연인 안네리스는 남에게 말할 수 없는 어떤 문제 때문에, 그것이 줄곧 그녀의 섬세한 마음을 무겁게 짓눌러 온 것입니다. 분명히 지금 길은 열려 있읍니다. 길을 열어 준 것은 그녀의 어머니입니다. 아무래도 냐이는 당신을 사위로 삼기를바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당신 자신도 그런 냐이의 뜻에 따를 것 같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처녀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것은 없어지지 않았어요. 만일 내 눈이 들리지 않았다면 안네리스는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읍니다. 상식으로 보면 그녀는 행복감에 젖어 있어야 할 겁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가 않아요. 오히려 몹시 괴로와하고 있읍니다. 그것은 당신을 잃는 것, 그녀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에 대한 공포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밍케씨, 그녀의 심리 상태는 지극히 복잡합니다. 그런 상태가 계속되면 사람은 미쳐버립니다. 결코 농담이 아닙니다, 정서 불안정에서 신경 이상을 일으켜 발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르티네 의사는 얘기를 중단했다.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얼굴과 목덜미를 문질렀다. "덥군요."
그는 말했다.
그리고 일어나더니 방구석으로 걸어가서 신풍기 태엽을 감았다. 선풍기가 돌아가기 시작하고, 방안이 시원해지는 것 같자 다시 의자로 돌아왔다.
"나에게 있어서 하나의 임상 예라고 생각한다면, 이처럼 흥미있는 것은 없읍니다. 하지만 그만한 젊음과 미모가 불안이나 공포에 구속받고 있는 것을 본다는 것은 정말 딱합니다. 내가 말하는 뜻을 알겠읍니까? "
"글쎄요, 그 공포라는 것이 도대체 뭔지 잘모르겠읍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지금부터 말하겠읍니다. 어쩌면 이브 이래로 지금까지 미모를 가진 여성은 그 아름다움 때문에 잘못이나 결함도 덮어주고 같은 여성들 사이에서도 떠받들려지고 귀중한 존재로 여겨져 왔읍니다. 그렇지만 어떤 미모도, 인생 자체도 그렇기는 하지만, 공포에 지배당해서는 무의미합니다. 이렇게까지 말해도 이해가 안된다고 한다면, 문제는 그녀를 공포에서 해방시켜 주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알겠읍니다, 선생님."
"알겠다고만 한다고 해결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은 학식이 있는 사람이고 주관이 뚜렷한 사람입니다. 나와 다른 의견을 갖고 있다면 그것을 말해 주어야 합니다. 내 의견이 반드시 옳다고는 할 수 없으니까요, 나는 심리학자는 아닙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녀를 치료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나에게는 의견이 없읍니다."
"그럴 리가 있읍니까? 숨기지 말고 말해 주시지요."
나는 잠자코 있었다. 마르티네 의사는 말을 제속했다. "내 말 잘 들으세요, 밍케씨. 학문의 세계에 '부끄럽다'는 문구는 없읍니다. 틀렸다든가 실패했다든가해서 부끄러워할 필요는 조금도 없읍니다. 잘못이나 실패는 오히려 진리를 보다 견고하게 해 주고 결과적으로는 문제의 해결을 도와 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정말입니다, 선생님. 내게는 의견 같은 것이 없읍니다."
"당신이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읍니다. 틀림없이, 설사 그것이 그릇된 것이라 할지라도 어면 의견을 갖고 있는 법입니다. 자, 말해 보세요."
그는 맑은 회색 눈동자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두손을 나의 어깨에 올려 놓고 말을 이었다.
"내 눈을 똑바로 보고 정직하게 말해야 합니다. 나를 더 이상 곤란하게 만들지는 마세요."
"선생님."
나는 모기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솔직이 말씀 드린다면, 이런 얘기를 듣는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저 놀라고만 있을 뿐인데, 어떻게 결론 같은 말을 할 수가 있겠읍니까? 분명히 나도 안네리스와 마마에 대해서 무엇인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읍니다. 특히 로베르트에 대해서는 그렇습니다. 나의 느낌으로는 의견이라고 할 것도 없지만, 선생님이 지금까지 하신 말씀은 거의 틀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오히려 선생님은 제가 그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 주셨읍니다. 제 말이 우습지요?" "아닙니다. 우습지 않습니다. 학문의 세계에서는 때로는 겸허한 태도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질문에 대답하는 데 겸손 따위는 필요없읍니다. 하지만, 만일 내 태도가 검찰관처럼 보였다면, 실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 문제는 당신에게 있어서도 중요하다고 나는 확신하고 있옵니다."
선풍기의 회전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다시 방구석으로 가서 태엽을 감았다.
"좋습니다."
그는 의자에 앉지 않고 말했다.
"그렇다면 내 얘기를 잘 들으세요.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기는 당신이 집에 들어가면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줄 것입니다. 먼저 당신을 잃는다는 공포에 대해서입니다. 그 문제는 완전히 당신에게 달려 있읍니다. 제삼자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당신에게 버림받을 기미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그녀는 금방 불안에 휩싸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절대로 그런 기색을 보여서는 안됩니다. 물론 그녀를 정말로 버린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틀림없이 그녀는 부서져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는 책상 위에서 연필을 집어들었다.
"이전 식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연필을 두 동강 냈다.
"연필은 부러져도 다시 쓸 수가 있어요. 하지만 밍케씨,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는 안됩니다. 살아 있다고 해도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죽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녀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다고 나는 말했지만, 거꾸로 그녀를 죽이는 일도 당신은 할 수가 있어요. 그녀의 사랑을 배신하면 죽이는 것과 다름없으니까요. 지금까지 나는 될 수 있는대로 솔직하게 내 견해를 얘기했읍니다. 부끄러워하지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고 사심없이 말입니다. 구원자가 되느냐 살인자가 되느냐는 당신 마음에 달려 있읍니다. 이것을 당신에게 얘기함으로써 비로소 나의 마음도 가벼워졌읍니다."
마르티네 의사는 다시 의자에 앉아 부러진 연필을 테이블에 놓았다. 그리고는 또 다시 나를 바라보았는데, 그것은 마치 그가 지금 말한 것은 결코 가볍게 생각할 얘기가 아니라고 나에게 확신시키려는 것만 같았다.
"알겠읍니다, 선생님."
내가 말했다.
"그러나 바꿔 말하면, 안네리스는 바로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에 독립된 인격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고도 할 수 있어요. 왜냐 하면, 그녀는 지금 남이 이래라 저래라 참견할 수 없는, 완전히 개인적인 문제에 직면하고 있으니까요. 그녀가 병에 걸린것은 새로운 인격을 탄생시키는 진통이 원인이었읍니다." 하고 마르티네 의사가 덧붙여 말했다.
나는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조용히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갑자기 유럽인으로서의 그에 대한 불신감이 끓어올랐다.
내 마음의 움직임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이 황급히 그는 덧붙여 말했다.
"되풀이 해서 말하지만 밍케씨, 나의 해석이 반드시 옳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절반 정도 맞는지 어떤지도 모릅니다. 하물며 백퍼센트 옳다고는 할 수 없읍니다. 다만 당신이 아직 자신의 견해를 갖고 있지 않다면, 내 얘기를 하나의 단서로 삼아 달라는 것 뿐입니다. "
그는 얘기를 한동안 중단했다. 아무래도 자신이 없어진 것 같았다. 솔직이 말해서 나도 마음을 놓았다. 최소한 나도 자유롭제 숨을 쉴 수가 있으니까. 처음부터 그가 나에게 퍼부은 것은 말의 돌팔매질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맞아야 하는 나의 심중은 어떠했나 ! 마치 나를 철판으로 삼아 망치를 휘둘러 이해라는 이름의 강철을 만들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선생님."
나는 엉겁결에 말을 했으나, 그것은 내가 영혼을 갖지 못한 철판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은밀한 의사 표시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소."
그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가슴에 맺힌 것을 토해 내듯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렇소, 내가 한 말은 모두 추측에 불과한 것이오. 몇 가지의 사실에 바탕을 둔 추측 말이오." 자신을 변호하듯이 아니면 사과하듯이 그는 말했다.
"이번에는 당신 차래요. 당신이 얘기해 줄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겠소. 당신의 얘기를 들려 주시오. 밤에 당신은 어면 방에서 자지요?"
내가 난처해하는 것을 그는 알아차렸다. 학교에서도 나에게 그런 실례되는 질문을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학문에서는 부끄럽다는 생각은 쓸데없는 것입니다. 단 한푼의 값어치도 없읍니다. 밍케군, 나에게 협력해 주어야 합니다. 그녀의 또 하나의 공포를 게거해 줄 수 있는 것은 우리들 두 사람밖에는 없읍니다. 그러니까 대답을 해야 합니다. 당신은 어디서 잡니까?"
나는 잠자코 있었다.
"알겠읍니다. 당신은 부끄러워하고 있어요. 한푼의 가치도 없는 관념에 묶여 있읍니다. 하지만, 반대로 당신이 부끄러워서 대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바로 내 추측이 옳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읍니다. 냐이는 말의 안정을 바라고 있읍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진실을 얘기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당신은 벌써 그녀와 침실을 같이 쓰고 있어요, 그렇지요?" 나는 더 이상 마르티네 의사의 얼굴을 뜩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오해는 하지 마세요."
그는 황급히 덧붙였다.
"당신의 사생활을 간섭할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환자로서 안네리스의 건강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과 냐이를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기도 합니다. 지금 내가 당신에게 바라고 있는 것은 진실을 밝히기 위해 협력해 달라는 것뿐입니다. 나의 추측이 잘못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꼭 확인하고 싶습니다. 안네리스의 병을 고치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읍니다. 물론 당신의 사적인 비밀과 환자의 비밀은 보장되고 지켜집니다. 나는 의사입니다. 자, 얘기해 주시지요."
내가 감정을 정리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 그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뒤 레모네이드를 갖고 다시 나와서 그것을 글라스에 따랐다.
"왜 손수 이런 일을 하십니까? "
"이 집에는 아무도 없읍니다. 나 혼자지요."
"하녀나 하인은 없나요?"
"하루에 세시간, 파출부가 옵니다."
"식사는 어떻게 합니까? "
"레스토랑 신세를 지고 있읍니다. 자, 얘기를 계속 할까요? 우선 한 모금 드세요. 얘기를 하려면 당신도 용기가 필요할 테니까요. "
그렇게 말하고 마르티네 의사는 친근하게 웃었다. 나에게 용기따위는 없었다.
"필요하다면,"
그는 조언을 했다.
"큰 마음먹고 자신을 삼인칭으로 바꿔 보는 겁니다. 당신도 그런 용기를 배워야 합니다. 내가 말하는 삼인칭이란 문법적 의미의 삼인칭은 아닙니다. 먼저 당신은 일인칭으로서 생각하고 계회하고 실행 명령을 내립니다. 다음에 이인칭으로서 일인칭의 당신이 실행하려고 한 일의 정당성을 판단하고 이의를 제기하거나 거부하거나 함니다. 물론 긍정하고 받아들일 수도 있옵니다. 그럼, 삼인칭의 당신은 누군가? 그것은 타인으로서의 당신, 문제의 대상으로서의 당신입니다."
마르디네 의사는 손가락 끝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당신이 거울 속으로 보고 있는 실행자로서의 자기는 타인으로서의 자기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자, 일인칭, 이인칭으로서의 당신이 거울에 비친 삼인칭으로서의 자기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즌 애기를 하라는 겁니까?"
나는 또 다시 모기만한 소리로 말했다. "무엇이든 좋습니다. 당신의 환자와 관계있는 일이라면." "어떻게 시작해야 합니까?"
"그럼, 얘기할 생각은 없군요. 내가 문제를 제기하겠읍니다. 우선 내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쉬울 것입니다. 자 시작할까요? 당신은 이미 안네리스와 같은 방에서 살고 있음니까?"
"그렇습니다."
"좋습니다. 그리고 냐이는 그것을 금지하거나 그 일 때문에 화를 내거나 하지는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냐이는 자기 자식의 행복을 위해 현명한 방법을 택했군요. 당신은 안네리스와 따로 잡니까? 아니면 같은 침대에서 잡니까 ? "
"따로 자지는 않습니다."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읍니까?"
"이삼 개월 전 부터입니다."
"안네리스의 커다란 공포가 무엇인지 알아내는 데는 충분한 시간이군요. 그러니까 그녀와는 벌써 성적인 관계를 맺고 있겠군요 ?"
나는 몸을 떨었다.
"왜 그러지요? 여기가 가장 중요한 대목입니다. 앞으로 또 같은 사태에 직면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다시 한모금 마시고 시작할까요?"
"신생님, 화장실에 다녀오겠옵니다. "
"그러시죠. "
그는 나를 안으로 안내했다.
집안에도 뒤곁에도 전혀 인기척이 없었다. 묘지처럼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욕실에서 나는 얼굴을 씻고 머리를 적셨다. 차가운 물이 상쾌해서 기분도 한결 개운해졌다. 뚝뚝 흘러내리는 물을 손수건으로 닦고 그곳에 있는 빗과 거울을 썼다. 거울에는 삼인칭의 밍케가 비치고 있었다. 다시 내가 그의 앞에 앉자 마르티네 의사는 바로 얘기를 시작했다.
"무엇인가를 감추려고 하면 할수록 긴장하게 되기 마련입니다."
나의 마음을 읽어내는 그의 관찰안은 점점 더 예리해져 갔다. 나는 다시 침착성을 잃어갔다. 도망치고만 싶었다. "자, 얘기하세요. 이제는 내가 질문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당신이 자신의 생각대로 얘기해 보세요. "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도저히 말할 수가 없었다.
"또 길 안내가 필요하다면 그것도 상관없읍니다. 당신은 이미 그녀와 같은 침대에서 자고 있지요. 육체 관계도 있구요. 그리고 그녀가 처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다른 남성이 먼저 스쳐갔던 겁니다."
"선생님 ! "
나는 외쳤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긴장의 실이 끊기고 나는 흐느껴 울고 있었다. "그래요. 실컷 우세요, 밍케씨. 갓난애처럼 우는 겁니다. 태어났을 때처럼 때묻지 않은 마음으로 말입니다. " 왜 나는 그렇개 울었을까? 나의 부모도 아니고 전혀 타인과 같은 사람 앞에서 도대체 나는 무엇을 슬퍼하고 있는 것일까? 나의 비밀, 나와 안네리스의 비밀을 사람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던 것일까 ?
"역시 내 추측이 옳았읍니다. 당신은 진심으로 그 처녀를 사랑하고 있읍니다. 그녀가 무엇인가를 상실하는 것은 바로 당신이 무엇인가를 상실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무엇인가를 잃고 그것에서 오는 실망을 필사적으로 숨기려 하고 있어요. 그녀는 이미 순결한 처녀는 아니었지요. 그래요, 그렇게 울고 있어도 좋아요. 하지만 내 질문에 대답해 주세요. 아직 질문이 끝나지 않았으니까요. 안네리스가 경험한 최초의 성관계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아는 것은 그녀에게 그것이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를 추측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최초의 섹스 체험은 사람의 마음 속 깊이 새겨지고, 그 사람의 성에 대한 관념을 결정하는 수도 있읍니다. 아니, 그런 표현은 적당치 않군요. 앞으로 그 사람의 성개념을 결정할 수도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묻겠는데, 그 최초의 상대,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당신보다 앞서서 그녀와 관계한 남성이 누군지 안네리스는 당신에게 고백했읍니까? 자진해서 먼저 그 애기를 했읍니까?"
"안되겠읍니다, 선생님."
나는 비통하게 소리쳤다.
"여기서 제 3의 밍케씨를 등장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내 질문의 끝도 아닙니다. 누굽니까, 그 상대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자코 있는 것은 그 사람 또는 그들이 누구인지 당신은 똑똑히 알고 있다는 겁니다."
"그들은 아닙니다. 그 한 사람뿐입니다."
"알겠읍니다. 그 한 사람이 누굽니까?"
마르디네 의사는 무엇인가를 생각하듯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거침없는 질문이 번개처럼 나의 의식을 불러 일으켰다.
"그가 누굽니까? 그, 그렇다면 상대는 한 사람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도대체 그가 누굽니까?"
"아아, 선생님! "
"알겠읍니다. 그의 이름은 말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다만 그 인물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당신은 어느 쪽이라고 생각하고 있옵니까? 즉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의 성적인 욕망을 운운하자는 게 아니고 평소의 행동에서 그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안됩니다, 선생님. 나에게는 평가를 내릴 권리가 없읍니다."
"아무래도 당신은 무엇이든 개인의 비밀, 또는 가족, 말하자면 가까운 장래에 당신도 그 일원이 될 가족의 비밀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 같군요. 가족 모두, 장래의 가족 전체에 대한 의리라는 말이군요."
나에게 여유를 주려는 듯이 마르티네 의사는 일부러 딴청을 부렸다.
"어쨌든 그 인물이 누군지 대충 짐작할 수는 있읍니다. 그래요, 당신의 반응을 보면 대강 짐작은 갑니다. 당신은 아직 젊어요. 대단히 젊지요. 그런데 당분간 안네리스를 도울 수가 있는 사람이란 당신밖에는 없음니다. 그러니까 당신은 강해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내가 당신은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녀를 결코 싫어하지도 않습니다. '사랑'이라는 표현을 쓰고 싶지만 말입니다. 이미 당신은 그녀의 나약함이 가져온 결과를 받아들일 도량을 갖고 그녀의 건강과 행복에 자진해서 책임을 지려 하고 있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은 결코 그녀를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혼자 내버려두면 수많은 독수리들이 그녀를 덮칠 테니까요.
그녀의 아름다움은 어느 나라의 남자도 사로잡을 수 있을 만큼 대단합니다. 여러 가지 우여곡절은 있겠지만, 결국 당신은 그녀를 아내로 맞이할 것입니다. 당신은 그녀의 좋은 의사가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오늘과 내일, 그리고 영원히 말입니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복잡하고 힘겨운 삶이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어요. 그러니까 그것과 맞설 수 있도록 사람은 점점 더 큰 용기를 갖지 않으면 인됩니다."
그의 얘기가 길어점에 따라 나의 머릿속에서 로베르트 메레마가 신이 나서 날뛰기 시작했다. 나를 비웃고 협박하고 곁눈질로 훔쳐 보며 주먹을 휘두르는 그의 모습이 말이다. "그렇소. 바로 당신의 태도가 내 추측을 인증해 주고 있소. 나의 추측을 부정도 긍정도 하고 싶지 않다면 어쩔 수 없군요." "신생님, 상대는......그녀의 오빠인 로베르트 메레마입니다."
그의 손에 들려 있던 레모네이드 글라스가 마루에 떨어져서 깨졌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마차까지 곧장 달려나갔다.
그 뒤에도 마르터네 의사는 몇 번인가 우노크로모를 방문했다. 보통 그가 오는 것은 저녁 때로, 냐이 온트슬로와 안네리스가 일을 끝낸 뒤였다.
그들은 뜰에 앉아서 잡담을 하거나 축음기로 음악을 듣거나 했다. 나는 마차를 타고 밖에서 돌아와 그의 모습을 보면 먼저 목욕하고 나서 그들과 어울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 충격적인 면담이 있은 뒤 ---그것에 관해서는 내 노트에 쓴 이외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마르티네 의사에 대한 나의 존경심은 점점 더 깊어지고 솔직해져 갔다.
나는 그를 단순히 노련한 의사라든가 고결한 인간성을 지닌 학자라는 이유에서 뿐만 아니고, 내 속에 무엇인가 새로운 힘을 불어 넣어준 은인이라고도 생각하게 되었다. 타인을 이해하는데 그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단지 이해할 뿐만 아니라 의사로서, 인간으로서, 교사로서 도움을 베풀기 위해서 말이다.
나중에 마푸다 뻬테루스 선생님이 명명한 바에 의하면, 그는 바로 '인류의 친구' 였다. 그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애를 표시했고 사람들의 신뢰를 얻었다.
이따금 나는 아무리 그것이 나의 권리 였다고 해도 그를 의심한 나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할 때가 있었다.
한동안 관찰하고 있는 동안에 마르티네 의사의 나이는 40대라고 생각했던 나의 예상과는 달리 그는 아무래도 노련한 50대 같았다.
붉은 기가 도는 얼굴은 언제나 생기에 차 있었으며 정열적이고 활동적인 그의 젊음 앞에서는 주름따위는 감히 침범하지 못했다.
그의 얘기는 하나 하나가 깊은 흥미로 함축되어 있었다. 그는 화술이 능란했고, 자기 얘기에 대한 상대방의 반응을 어느 틈에 받아 적어서는 환자를 알고 이해하기 위한 자료로 삼고 있었다. 이상은 어디까지나 나의 추측에 의한 것이고, 혹시 틀렸을는지도 모른다.
언젠가 나는 어느 정부요인 가족의 초상화 주문을 마무리짓기 위해 그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내가 도착했을 때, 그 집 주인은 베린다에서 어떤 영국잡지를 읽고 있었다. 얼마 뒤 그는 무엇인가를 가지러 집안으로 들어가고 잡지는 펼쳐진 채로 있었다. 그런데 내가 얼핏 그 인쇄물을 들여다보고 그 속에서 마르티네 의사의 글을 발견한 것은 단순한 우연 이상의 사건이었다.
글의 제목은 "새시대의 개막과 사회 변동에 따르는 병의 양상" 이었다. 컬럼 안에 '사회적인 배경을 이해하지 않고 행해지는 의료는 이미 중세의 의료법에 지나지 않는다'는 귀절이 있었다. 주인이 돌아왔기 때문에 잡지를 테이블에 되돌려 놓았으나, 나는 그 이후 마르티네 의사가 문필가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았다. 나와 같은 소설가가 아니라 자연과학 계통의 글이 전문이지만 말이다.
그날 저녁에 마르티네 의사가 우노크로모를 방문했을 때, 나는 그전보다 좀더 자세히 그의 일거일동을 살펴보려고 했다. 더 이상 나는 그가 내 마음 속을 엿보지나 않을까 하고 겁을 낼 필요가 없었다.
그때에도 그는 약간의 농담을 섞어가며 익살스럽게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는 어떤 쌍동이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가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릴 때부터 두 사람은 한 그릇에 밥을 먹고, 같은 공기로 물을 마시며 자랐다. 그뒤 그들은 얼굴은 꼭 같았으나 대조적인 사람으로 자랐다.
각각 다른 욕구와 꿈에 따라 행동하개 되었다, 그들의 욕구도 꿈도 그 뿌리는 똑같은, 채워지지 않는 현실에서 오는 것이었다. 바꿔 말하면 자기 자신에 대한 상이한 이미지, 그렇게 되고 싶다는 이미지, 그것이 욕구가 되고 꿈이 되었던 것이다. 마르티네 의사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나는 처음에는 알 수가 없었다. 함께 듣고 있는 마마와 안네리스는 그저 잠자코 있었다. 만일 마르티네 의사가 곧 이렇게 덧붙이지 않았다면, 두사람은 곧 따분한 얼굴을 지어 보였을 것이다.
"이 안네리스양처럼 말입니다. 금전, 애정이 넘치는 어머니, 뛰어난 미모, 일에 대한 재능 등 그녀는 거의 모든 것을 갖고 있읍니다. 그런데도 아직 그녀는 자신에게 무엇인가 모자라는 것이 있다고 느끼고 있읍니다. 그 욕구는 정확하게 채워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병이 될 수도 있어요. 충족되지 못한 욕구는 잔혹하게, 그리고 용서없이 육체를 억압합니다. 감정도 이성도 그것에 지배되고 명령을 받습니다. 욕구불만이 많은 사람은 병자와 같고 심하면 착란 상태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안네리스양에게 묻겠는데, 몸져 누울정도로 당신이 풀지 못한 소원은 도대체 무엇이었지요? "
"없어요, 그런 것은, 정말이에요. "
"그런데 왜 얼굴이 붉어졌을까요? 사실은 밍케씨 때문이 아닌가요?"
안네리스는 곁눈질로 나를 힐끗 보고 고개를 숙였다.
"보신대로입니다, 냐이.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우습지만, 될 수 있는대로 빠른 시일 내에 이 두 사람을 결혼시키십시오."
마르티네 의사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밍케씨, 이제 용기를 얻었읍니까? 배울 용기가 생겼느냐는 겁니다."
그는 더 이상 계속할 수가 없는 것 같았다.
그때 임대 마차가 한 대 도착했다. 마부의 손을 빌어 남자가 한 사람 내렸다. 쟝 마레였다. 메이가 마차에서 뛰어내려 아버지의 손을 잡아 끌었다. 나는 두 사람을 모두에게 소개했다.
"여기는 쟝 마래, 제 친구입니다. 화가이며 가구 디자이너입니다. 프랑스인으로 네덜란드어는 모릅니다."
분위기가 바뀌었다. 불행하게도 마마와 안네리스는 프랑스어를 못하고 마르티네 의사는 프랑스어를 하지만 말레이어를 못했다. 그 말을 모두 할 수 있는 것은 메이와 나뿐이었다. 메이는 안네리스와 친해져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언니와 동생처런 기뻐하는 안네리스와 메이의 들뜬 모습을 보고, 마르디네 의사는 자꾸만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그는 흘끗 쟝 마레를 보고 프랑스어로 물었다. "아이는 몇이나 됩니까?"
"메이는 제 외동딸입니다, 선생님."
쟝 마레는 대답했으나, 그의 눈에는 그런 질문을 받은 데 대한 불쾌감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마르티네 의사는 사람의 심리를 파헤치려고 드는 의사의 습정 그대로 다른 것에 개의치 않고 누구에게라고 할 것 없이 네덜란드어로 계속 말했다.
"저 두 사람을 함께 있도록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벌써 오래전에 그렇게 해 주었어야 하는 건데...... "
그 사이에 안네리스는 메이를 데리고 집안으로 들어가서 아예 나오지를 않았다. 어느 때는 말레이어로, 또 어느 때는 자바어로, 네덜란드어로 즐겁게 떠들어대며 웃는 두 사람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 왔다. 딸의 밝은 목소리에 쟝 마레는 자꾸만 고개를 흔들었다. 그의 표정이 빛나고 있었다.
안네리스와 메이의 즐거워하는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우리들 사이에 흐르는 어색한 분위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이 싫었는지 마르티네 의사는 인사를 하고 안채 옆에서 기다리던 마차를 타고 돌아갔다. "마르티네 선생님은 명의예요."
나는 말레이어로 말했다.
"안네리스의 병을 고쳐준 것은 그 선생님이에요. 우리들은 모두 감사하고 있옵니다."
그리고 나는 냐이에게 말했다.
"마마, 사실은 제 친구는 마마에게 부탁이 있어시 찾아왔옵니다. 만일 마마가 허락해 주신다면 마마의 초상화를 그리고 싶다고 할 것입니다. "
"나를 그려서 어쩌겠다는 거죠?"
"마담."
쟝 마레가 나를 대신해서 말했다.
"저는 냐이입니다. 마담이 아닙니다."
"밍케군이 마담에 대해 많은 애기를 해주었읍니다."
"냐이라니까요."
" .....드물게 보는 쁘리부미 여성이라고 해서요. 너무나 밍케가 마담을 칭찬했기 때문에......"
"냐이라고 불러 주세요."
"그러니까 초상화로 영원히 남겨두자는 데 둘이서 의견이 일치했읍니다. 앞으로 1년 뒤가 될지 40년 뒤가 됨지 모르지만, 사람들은 틀림없이 당신을 기억하고 칭송할 것입니다."
"미안합니다만 남에게 칭송을 받고 싶은 생각은 털끝 만큼도 없읍니다."
"말씀은 잘 알겠읍니다. 자신이 스스로를 높이려는 사람은 어리석기 그지 없으나 마담의 경우는 본인이 아니라 시대의 산 증인으로 찬양하고 기리려는 것이니까요. "
"유감스럽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사진을 찍는 것도 사양합니다."
"그렇다면.....그렇습니까? 그것은 정말 유감이군요....만일 그러시다면 마담의 얼굴을 잘 좀 보여 주시겠읍니까 머릿속으로나마 새겨 놓게 말입니다."
쟝 마레는 띄엄띄엄 정중하게 제의했다.
냐이는 얼굴을 붉혔다.
"그러면 집에 돌아가서 그릴 수가 있으니까요." 쟝 마레가 덧붙였다.
냐이는 내게 시선을 보내고나서 안채 쪽으로, 다음에는 멀리 보이는 농장 간판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마지막에는 테이블 위로 시선을 떨구었다.
그녀의 어색한 동작에서 초조와 당혹감을 읽을 수 있었다.
"안됩니다. 그것도 안됩니다."
냐이는 쑥스러운 듯이 말했다.
"밍케, 당신은 내 얘기를 밖에서 어떻게 하나요?"
"나쁜 얘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읍니다. 마담,"
쟝 마례가 대답했다.
"언제나 칭찬만 하더군요."
냐이가 곤혹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황급히 끼어들었다. "마마는 오늘은 그럴 기분이 아닌 것 같아요. 다른 날 다시 부탁해 보지요. 다음에는 틀립없을 거예요." "다음에도 안돼요. "
"제 친구입니다, 마마. "
아마 신체적인 결함 때문이리라. 평소에도 민감한 쟝 마레는 안절부절을 못하며 금방 돌아갈 것처럼 보였다. 그의 눈은 초조한 듯이 자기 딸을 찾고 있었으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멀리서 노래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따님은 집안에 있어요."
냐이가 말했다.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우리들은 집안으로 들어갔다. 메이와 안네리스의 명랑한 노래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다.
냐이는 그것이 기쁜듯했다. 내가 우노크로모에서 살게 된 뒤 안네리스의 노래 소리를 듣는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마치 안네리스는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녀에게 있어서 어린 시절은 일찍부터 짊어지워진 책임과 일에 빼앗겨서 맛볼 여유도 없이 눈깜짝할 사이에 흘러가 버린 안타까운 시간이었다.
쟝 마레는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마레씨."
우리들이 응접실에 자리를 잡고 앉자 마마가 말했다.
"댁의 따님이 우리 집에 신선한 공기를 가져다 준 것 같군요. 어떠세요, 조금 전에 마르디네 선생님이 권한 것처럼 따님을 자주 우리 집에 놀러 오게 하면 어떨까요?"
"그 아이가 그렇게 하고 싶다면 나는 상관없읍니다."
쟝 마레는 대답했으나, 무엇인가를 잃는 것을 두려워하는듯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밍케, 오늘 밤 집에서 주무시고 가시도록 당신이 마레씨에게 부탁을 하세요. "
"쟝, 오늘밤 여기서 자고 가면 안돼요?"
그의 그런 태도를 보는 것은 이것으로 몇 번째일까? 이 예술가, 미의 창조자의 반응은 몹시 어색했다. 선뜻 대답을 못하고, 그는 망연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해요, 쟝. 자고 가면 되잖아요. 아침 일찍 내가 모셔다 줄 테니까요. 그렇게 하면 작업장을 여는데도 지장이 없지 않겠어요?"
쟝 마레는 세심한 배려에 인사를 하는 것도 잊고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나타냈다.
그날 밤 같은 침대에서 잠들기 전에 나는 마르티네 의사가 내게 했던 문답식 진찰 방법을 흉내내듯이 쟝에게 질문했다. "쟝, 요즈음 계속 피곤해 보이는데 지금도 옛날 일들을 생각하고 있나요? 미안해요, 이런 질문을 해서요. " "그것은 작가로서의 질문이군 그래, 밍케. 자네는 정말 작가가 된 것 같아."
"그런 뜻이 아닙니다, 쟝. 나는 당신보다 어리고 경험도 지식도 훨씬 부족합니다. 내 질문에 대답하고 싶지 않나요?"
"그것은 완전히 내 개인적인 일이야. 그리고 요전에 자네에게 보여준 그 그림을 완성하고 나면 그것으로 과거의 일을 청산할 생각이네. 자네는 내 얘기를 쓰고 싶은 건가?"
"당신은 특별한 사람 같아요. 그래요. 쓸 수 있다면 써 보고 싶어요. 쟝, 당신의 진짜 꿈은 무엇이죠?"
"꿈? 꿈이라고 ! 자네도 예술가, 나도 예술가야. 예술가는 모두 성공을 꿈꾸며 앞으로 나가지. 오직 성공을 위해서. 그리고 그 성공을 지켜나가는 거야. 그 한가지를 위해 온 정력을 기울이지. 고문과도 같은 고통을 대가로 지불하면서 말일세."
"하지만 당신의 목소리에는 전혀 힘이 없어요. 마치 그 성공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당신 자신은 믿고 있지 않는 것 같아요."
"자네는 이미 훌륭한 예술가일세. 그 질문은 자네 자신의 심리적인 갈등에서 생겨난 것, 요즈음의 자네 심경의 변화가 가져다 준 것이라고 생각하네. 결코 그 나이에 할 수 있는 질문은 아니야. 권위를 담고 있는 질문이야. 자네 자신은 그 질문을 이해하고 있나?"
나는 한순간 당황했으나 태연한 척 되물었다.
"권위라니 무슨 의미지요?"
"요컨대, 자기 자신의 질문을 진실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을 의미하지. "
분명히 그도 잠이 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의 시도가 실패한 것은 확실했다.
그날 밤 나는 참으로 많은 생각을 했고 이제는 승리에 찬 아름답고 찬란한 청춘 시대와 작별을 고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다.
그렇다. 그것은 남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노트에 기록한 모든 사건은 그것을 승리가고 불러도 좋을만한 것이었다. 그 많은 승리 가운데서 가장 큰 것은 안네리스의 사랑을 얻은 것이다. 비록 그녀는 나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인형과도 같았지만.
괘종 시계 소리만이 밤의 정적을 깨뜨리고 있었다. 나는 문득 마르티네 의사의 말을 생각해냈다.
"냐이가 키우고 있는 젖소는 송아지에서 젓소로 자라는데 불과 13개월에서 14개월밖에 걸리지 않아요. 그것에 비해 사람은 성숙한 어른이 되기까지, 그 육체적인 성숙과 졍신적인 성숙이 완전한 균형을 이루기까지 10여 년, 아니 몇십 년이 걸리지요. 결국은 사람다운 사람이 되지 못하고 타인이나 사회의 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이들도 있지. 정신이상자, 범죄자가 그런 셈이오. 한 사람이 가치있는 인간으로 성숙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은 그가 직면한 시련의 정도에 달려 있소. 그러한 시련과 시험에서 도망가려고만 하는 사람, 범죄자나 정신이상자들은 결코 가치 있는 사람이 될 수가 없는 것이오. 소는 불과 14개월에 완전히 자라게 됩니다. 시련이나 시험을 거치지도 않고....."
아아, 알라신이여, 당신이 내린 시련과 시험은 나와 같은 애송이에게는 너무나도 가혹한 것입니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시련들은 본디 나와는 관계없는 것으로 뚫고 나가기에 아직은 어린 나이입니다. 알라 신이여, 당신이 내게 준 시험과 시련을 이겨나갈 힘을 내게도 내려 주소서.
제15장
미 행 자
그날 아침 하늘에는 구름 한 점도 없었다. 쾌청한 일요일이었다. 편안하지 못한 것은 나의 마음뿐이었다. 멀지 않아 폭풍우가 불어닥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었다. 그 전날 전교 토론회가 었었던 토요일 오후, 안네리스와 나란히 말을 달리고 있을 때 (나는 승마에 익숙해 있었다.) 문제의 뚱뚱보를 얼핏 보았던 것이다. 그 뒤 나는 다시 안정을 잃었다. 그는 내가 보았을 때 초라한 말을 타고 농장 부지 안에 있는 마을을 떠나려 하고 있을 때였다. 그날 밤 다르삼이 읽고 쓰기와 계산을 배우기 위해 내 방에 찾아왔을 때, 나는 수업을 중단하고 B시에서부터 나를 미행해온 수상한 사나이에 대해 얘기했다. "도련님, 그 녀석은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 뚱뚱안 몸집의 중년 남자죠 ?"
"맞아요. "
"아아, 그 녀석이라면 몇 번 마을에서 본 적이 있읍니다. 나는 행상인이라고 생각했읍니다만."
"행상인은 변발을 했을 텐데 녀석은 변발이 아니에요. 틀림없이 로베르트의 패거리 같아요."
다르삼은 잠자코 있었다.
"로베르트는 지금 어디 있지요? 내가 B시에서 돌아온 다음에는 한 번도 보지 못했는데. " "무서워서 이 집에는 돌아오지 못하는 겁니다. 도련님, 요전에 제가 한 얘기롤 기억하세요? 도련님을 죽이라고 내게 명령한 일 말입니다. 그때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읍니다. 내 주인은 냐이와 아가씨뿐입니다. 두 분에게 소중한 사람은 내게도 소중합니다. 만일 당신이 도련님을 죽이라고 한다면, 당신을 죽여버리겠읍니다. 당신은 내 주인이 아니니까요. 각오하시오 ! 내가 칼을 뽑아 들었더니 그는 도망쳤읍니다."
다르삼과 뚱뚱보 얘기를 한것이 바로 전날이었다. 뚱뚱보의 등장은 내 마음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졌다. 아침의 밝은 햇살도 마음 속에 덮친 검은 구름을 쫓아버리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당신도 그 뚱뚱보를 본 일이 있다는 말이군." 전날 밤 나는 다르삼에게 물었었다.
"이번에 녀석을 다시 만나면 어떻게 하겠소? "
"만약 시뇨 로베르트의 패거리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살려둘 수 없읍니다."
"저런 ! 그런 난폭한 짓은 안돼요. 녀석에게 손을 대서는 안됩니다. 그런 짓을 했다가는 우리들 모두에게 화가 미친다구요. 절대로 알겠어요, 다르삼? 허튼 짓은 안패요, 알겠어요?" "알았읍니다, 도련님. 허튼 짓은 안합니다. 다만 녀석이 이상한 짓을 하지 못하도록 단단히 혼내 줄 생각입니다."
"그것도 안돼요. 우리들은 아직 내막을 잘 모르니까요. 만일 법적인 문제로 까지 간다면 누가 마마를 돕겠어요? 우리들은 안돼요. 그런 힘이 없으니까요."
다르삼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불만스럽다는 듯이 천천히 이렇게 말했다.
"알겠읍니다. 도련님 분부대로 하겠읍니다."
"그래요. 내 말대로 하세요. 나는 이 가족을 파멸 속에 몰아넣는 장본인이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비밀로 해 주세요."
그리고 오늘 아침 주위를 근심스러운 얼굴로 돌아다니고 있는 다르삼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여차하면 내가 언제나 그를 부를수 있도록 일부러 앞에서 얼씬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뜻하지 않은 뚱뚱보의 습격으로부터 내 생명을 지켜주려고 하는 다르삼 나름대로의 배려였다. 우리들 세 사람, 마마와 안네리스와 나는 안채 앞뜰에 앉아 헝가리 민속 무용곡을 듣고 있었다. 그 선율은 홍수 대의 개울 새우처럼 생기있고 활기찬 것이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여건히 무겁고 암울했으며 무슨 일인가가 일어날 것만 같았다. 나는 안네리스와 마마의 표정을 번갈아 보았다. 마마는 보통때와는 다른 다르삼의 행동을 의아스러운 듯이 보고 있었다. "마마,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는데 무슨 일이지요?"
"항상 그래요. 다르삼이 뒤주에 쥐 들락거리듯 눈 앞에서 얼쩡거리기 시작하면 나는 언제나 불안해져요. 어김없이 무슨 일이 일어나고 마니까요. 어젯밤부터 아무래도 이상해요. 다르삼 ! " 그러자 다르삼이 다가와서 마마에게 경례를 했다.
"왜 그렇게 서성거리는 거죠?"
마마는 마두라어로 물었다.
"제 다리가 근질근질해서 제멋대로 움직이는 겁니다." "다리가 근질근질하면 뒤곁을 돌아다니면 되잖아요?"
"웬일인지 이 다리가 앞뜰을 돌아다니겠다면서 말을 듣지 않습니다."
"알겠어요. 그런데 표정은 왜 그렇죠?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살기등등한 얻굴을 해가지고서 ?"
다르삼은 억지로 웃어 보이고 거수 경례를 하고는 물러갔다. 주문이라도 외고 있는듯이 콧수염이 흔들렸다. 확실히 오늘 아침 다르삼의 눈은 개미 한 마리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번쩍거리고 있었다.
"앤, 왜 그렇게 잠자코 있지?"
말이 없는 안네리스가 이상해서 내가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
안네리스는 일어나서 축음기 쪽으로 다가가 축음기를 껐다.
"왜 음악을 끄니 ?"
마마가 물었다.
"웬일인지 오늘은 음악이 귀에 거슬려요."
"밍케는 더 듣고 싶을 텐데 ? "
"아니, 괜찮습니다, 마마. 그런데 앤, 어제 말을 타고 있던 남자를 기억하겠어 ? "
"갈색 줄무늬가 있는 파자마를 입고 있던 사람 말인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는 사람인가요? "
"누가 말을 타고 있었다는 게냐? 어디서 ? "
마마가 황급히 물었다.
"마을에서 보았어요."
"말을 타고 마을을 찾아오는 사람은 없다. 드루세 석유 회사의 수위로 있는 무보크 카루요와 그의 아들을 빼놓고는."
"그 사람은 아니었어요. 왜냐 하면 그는 부모를 만나러 말을 타고 올 때 파자마 같은 것을 입고 오지는 않아요. 그 사람은 살이 찌고 누런 피부에 눈이 치켜올라가 있었어요." "다르삼 ! "
마마가 소리쳤다.
"아시겠읍니까, 냐이 ? 그래서 근질근질한 내 다리가 필요한겁니다."
마마는 다르삼의 우스갯소리를 묵살했다.
"어제 마을에서 말에 타고 있던 뚱뚱보 남자는 도대체 누구죠 ?"
"흔해빠진 행상인입니다."
"바보 같은 소리는 하지 마세요. 말을 탄 행상인이 어디 있어요? 오늘은 당신 정상이 아니에요. 그 남자는 변발을 하고 있었나요? "
다르삼은 다시 큰 소리로 웃었다. 그가 그런 식으로 웃는 것은 좀처럼 없는 일로, 무엇인가를 숨기려고 하는 웃음이 분명했다.
"냐이는 언제부터 이 다르삼을 신용하지 않게 되었읍니까?"
그는 콧수염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다르삼 ! 오늘은 정말 이상하군요. "
마두라의 칼잡이는 다시 한번 웃더니 경례를 하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다르삼은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어."
마마는 중얼거렸다.
"점점 더 불안해지는군. 자, 집안으로 들어가자꾸나." 마마는 독서를 그만두고 집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다르삼도 마마도 모두 이상하군요. 왜들 그럴까요? "
"내가 알 리가 없지. 자, 들어가요, " 안네리스는 집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냥 그 자리에 선 채 주위를 살폈다.
그때 칼을 빼들고 정문 쪽으로 달려가는 다르삼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 앞쪽에 얼핏 슬라바야 방향으로 걸어가는 뚱뚱보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상아색 양복을 입고 흰 모자와 흰 구두에 지팡이를 들고, 마치 관광여행이라도 나선 듯한 옷차림이었다. 그가 중국인 마요르의 부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이전의 내 추측은 이 시점에서는 이미 통하지 않게 되었다.
다르삼을 보고 나는 엉겁결에 큰 소리로 외쳤다. "그만둬, 다르삼 ! 그만두라구 ! "
다르삼은 내가 제지하는 소리를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는 뚱뚱보를 계속 추격해갔다, 할수없이 나도 그의 뒤를 쫓아갈수 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든 일어나서는 안된다. 다르삼은 추적을 중단하지 않았다. 제지하기 위해 나도 소리를 지르며 기를 쓰고 마두라의 칼잡이 뒤를 따라갔다. 등 뒤에서 안네리스의 비명이 들렸다. "마스 ! 마스 ! "
나는 힐끗 뒤돌아보았다. 안네리스가 내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멈춰라 ! 이 뚱뚱보야 ! 멈춰 ! "
다르삼이 쉰 목소리로 외쳤다.
뚱뚱보는 자세를 낮추며 속도를 더 빨리했다.
"다르삼 ! 돌아와요 ! 쫓지 말아요 !"
"마스 ! 마스 ! 따라가면 안돼요 ! "
등 뒤에서 안네리스가 금속성에 가까운 비명을 질렀다. 나는 정문에 이르렀다. 선두를 달리는 뚱뚱보는 일직선으로 슬라바야를 향해 달렸다. 다르삼은 차츰 거리를 좁혀 갔다.
"안네리스 ! 앤 ! 돌아오너라 !"
냐이의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힐끗 뒤돌아보니 냐이가 사롱의 옷자락을 쳐들고 뒤쫓아오는 것이 보였다. 머리가 풀어져 흩날리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도망치는뚱뚱보를 다르삼이 추적하고, 다르삼을 내가, 나를 안네리스가, 그리고 안네리스를 냐이가 쫓는 형태가 되었다.
"다르삼 ! 내 말 들어 ! 그만두라구 ! " 나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다르삼은 추적을 계속했다. 얼마 뒤 뚱뚱보는 다르삼에게 붙들려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안된다 !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을 막아야 한다.
"마스 ! 마스 ! 쫓아가지 말아요 ! "
안네리스가 외쳤다.
"앤, 안네리스, 돌아오너라 ! "
마마가 소리 쳤다.
뚱뚱보는 슬라바야 방향으로 똑바로 도망치면 틀림없이. 다르삼에게 죽게 된다. 그 길은 일요일에는 사람의 통행이 없고 논과 밭, 아촌의 유곽, 그리고 냐이의 밭과 논이 있고 논이 계속되고, 그 다음에 겨우 숲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뚱뚱보는 그 주변 지리에 밝은 것 같았다. 그가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길에서 벗어나 아촌의 유곽으로 도망쳐 들어가는 것이었는데, 그는 정말 그렇게 했다.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쪽으로 꺾어지면 안돼 ! "
다르삼이 도망치는 뚱뚱보에게 소리쳤다. "다르삼 ! 그만둬요 !"
이윽고 마두라의 캅잡이도 길에서 구부러져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곳으로 들어가면 안돼 ! "
냐이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그곳에 들어가지 말아요 ! "
안네리스가 마마의 소리를 받아 외쳤다. 나도 다르삼의 뒤를 쫓아 길을 꺾어서 아촌의 들안으로 들어갔다. 뚱뚱보의 모습은 아무 데도 보이지 않았다. 다르삼이 혼자서 어떻게 할지 몰라 우두커니 서 있었다. 건물 정면의 문과 창은 언제나처럼 굳게 닫혀 있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갔을 때, 다르삼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나도 숨이 턱에 닿아 헐떡거렸다.
"도련님, 그녀석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렸읍니다."
"자, 이제 그만 돌아갑시다. 더 이상 쫓지 말아요." "안됩니다. 붙잡아서 혼을 내주어야 합니다."
제지할 수가 없었다. 다르삼은 건물 옆면에 있는 창을 따라 걸어갔다.
"마스 ! 그 건물에 들어가면 안돼요 !"
안네리스가 정문에서 소리쳤다.
"마마가 안된대요. "
그렇게 말하며 안네리스도 비틀거리면서 아촌네 뜰안으로 들어섰다.
다르삼은 좌우를 둘러보았다. 나는 그의 팔을 잡고 끌고 가려고 했으나 그는 막무가내였다. 칼은 그냥 뽑아 든 채였다. 드디어 나도 눈에 핏발이 섰다.
뜰 안에 들어와 보고야 처음 알았는데, 우리들의 이웃 아촌의 유곽은 밖에서 보기보다 훨씬 넓고 컸다. 그 밖에도 뒤쪽으로는 길다란 별관이 서 있었다. 건물은 거의가 정원으로 둘러싸여 있고 잘 가꾸어진 과실수와 꽃이 가득 심어져 있었다. 자갈을 깐 좁은 길이 정원 전체를 구획짓듯이 가로지르고 짐은 페인트칠을 한 육중한 나무 벤치가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얼핏 한 쌍의 남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미처 우리들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런 광경은 몇겹으로 심어진 두텁고 높은 생나무 울타리에 가려서 보통 때는 외부에서 전혀 볼 수가 없었다.
다르삼은 오른쪽으로 꺾어져 본관 뒤쪽으로 돌아갔다. 가까이에 인기척은 없었다. 뒷문이 하나 활짝 열려 있었다. 나의 등 뒤에서는 안네리스가 창을 따라 본관 옆 길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냐이의 목소리가 차츰 또렷하게 들려 왔다. "안돼요 ! 그 건물로 들어가면 안된다니까 !"
다르삼은 곧장 뒷문으로 들어갔다. 뽑아든 칼을 손에 든 채 그는 문턱에서 잠시 좌우를 살폈다. 나도 다르삼의 뒤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중앙에 상당히 넓은 홀이 있었다. 테이블과 의자, 식기 등이 들어 있는 식기장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식당인 것 같았다. 벽에는 중국의 꽃글자가 씌어진 거울이 걸려 있고 새우, 대나무, 말을 그린 수묵화의 족자가 몇개 장식되어 있었다. 갑자기 다르삼이 헉 하고 숨을 삼키며 마룻바닥에 못박힌 듯이 우뚝 섰다. 양쪽으로 쭉 벌린 그의 두 팔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나를 제지했다,
그러나 나는 앞으로 나아갔다. 무슨 일일까? 그런데 식당 구석쪽에 유럽인 같아보이는 남자가 한 사람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큰 키에 땅땅한 배가 튀어나와 있고, 붉은 머리칼에 백발이 섞여 있고 약간 벗겨져 있었다.
오른손은 머리 위에 들고 왼손을 가슴에 올려놓고 목과 턱은 노란 구토물로 덮여 있었다. 알콜 냄새가 방안에 가득차 있었다.
그의 셔츠와 바지는 새까맣게 찌들어 있었는데, 몇달 동안이나 세탁을 하지 않은 것 같았다. "투앙 !"
다르삼이 속삭였다.
"투앙 메레마? "
그 이름을 듣고 나는 치를 떨었다. 그리고 그때에 본 것보다 살이 찌기는 했으나 메레마씨와 몸집이 비슷한 그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방구석에 넝마처럼 누워 있었는데, 술이 취한 상태인지 토하고 나서 그대로 잠이 들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르삼이 다가와서 몸을 굽히고 왼손으로 그를 건드렸다. 오른손에는 여전히 칼을 빼들고 있었다, 그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다르삼은 몸을 흔들어 보고 다음에 손을 가슴으로 가져갔다.
나도 바짝 다가갔다. 틀림없는 투앙 메레마였다.
"죽었어요 ! "
마두라의 칼잡이가 조그맣게 소리쳤다.
"죽었어요. 투앙 메레마가 죽었어요."
그의 얼굴에서 살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안네리스가 문턱에 나타나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쉰 목소리를 짜내 말했다.
"마스, 이 건물에 들어가면 안돼요 ! "
나는 안네리스의 어개를 잡고 문 밖으로 끌고 나왔다. 그곳에 마마가 괴로운 듯이 숨을 헐떡이면서 모습을 나타냈다. 얼굴이 붉고 흐트러진 머리칼이 얼굴에 흘러내려 있었다. 땀이 흥건히 젖어 있었다.
"빨리 돌아가요! 세 사람 모두 ! 이런 마굴에 들어가면 안돼요 ! "
그녀는 헐떡이며 말했다.
"도련님 ! "
다르삼이 안에서 나를 불렸다.
"들어가면 안돼요 !"
이번에는 내가 마마와 안네리스를 제지하고 혼자서 들어갔다. 다르삼은 메레마씨의 몸을 흔들고 있었다. 오른손에는 여전히 칼이 들려 있었다.
"틀렸어요, 이미."
다르삼이 말했다.
"숨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맥박도 멈추었어요."
뒤돌아보니 안네리스와 마마가 서 있었다.
"파파. "
안네리스가 속삭였다
"그래, 당신의 파파요. "
"투앙 ?"
냐이가 속삭였다.
"죽었어요. 투앙 메레마씨는 죽었읍니다."
두 여인은 몇 발자국 더 다가와서 우뚝 셨다. "이 술 냄새 !"
냐이가 중얼거렸다.
"마마 !"
"앤, 이 술 냄새를 잘 맡아 보렴. "
냐이는 더 이상 다가가지 않으면서 조그맣게 말했다. "기억이 나느냐?"
"그때의 로베르트가 풍기던 것과 같은 냄새를? "
"그래. 그 아이가 미치기 시작했을 때는 이것과 뜩같은 술 냄새였어. "
냐이가 계속했다.
"투앙이 그렇게 되기 시작했을 때도 역시 같은 냄새가 났었다. 가까이 가서는 안돼. 앤, 안돼 ! "
그때 갑자기 발소리가 들려 모두 돌아다 보았다. 빨강과 검은꽂을 그린 노랑색 기모노 차림의 여인이 나타났다. 피부는 황색보다는 흰색에 가까왔다. 일본 여인이었다. 그녀는 종종 걸음으로 우리들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맑고 매혹적인 목소리의 일본어로 말을 걸어 왔다. 물론 우리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답 대신 나는 식당 구석에 쓰러져 있는 시체를 가리켰다. 여인은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몸을 떨었다. 그리고는 계단 안쪽으로 도망치듯이 모습을 감추었다.
우리들은 어안이 벙벙해서 눈으로 그녀를 좇았다.
내가 일본 여성을 본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둥근 얼굴, 약간 치켜올라간 가는 눈, 장미빛 루즈를 칠한 입술, 한개의 금니를 해넣은 이. 그것은 평생 잊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얼마 뒤 여인이 사라진 곳에서 바싹 마르고 눈이 움푹 들어간 키가 큰 혼혈 젊은이가 나타났다. "마마. "
안네리스가 소근거렸다.
"로베르트예요. "
가까스로 나는 그 젊은이가 누군지 알아 볼 수 있었다. 그 넘치던 기개는 찾아볼 수 없었지만 분명히 로베르트였다. 로베르트라는 이름을 듣고 웅크리고 앉아 있던 다르삼이 투앙 메레마의 시체를 버려두고 벌떡 일어났다. "시뇨 ! "
다르삼이 소리 쳤다.
그것과 동시에 로베르트가 우뚝 섰다. 그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리고 칼을 빼든 다르삼을 보자마자 곧장 몸을 돌려 도망쳤다. 다르삼이 재빨리 그 뒤를 쫓았다. 남아 있는 우리들은 아연실색해서 마루에 못박힌 듯이 서 있을 뿐이었다.
칼을 맞고 입을 해벌린 채 피바다 속에 쓰러져 있는 로베르트의 모습이 한순간 나의 뇌리를 스쳐갔다.
그러나 그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았다. 다르삼이 씨근덕거리며 다시 나타났다. 험악한 얼굴이었다. "도망쳤읍니다, 냐이. 방으로 들어가서 창문으로 뛰어 내렸읍니다.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가 없었어요." "그만뒤요, 다르삼. 이제 됐어요."
냐이는 가까스로 말했다.
"미친 짓들 그만하세요. 그 아이는 내 아들이에요."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보다 당신은 투앙을 돌보세요."
"알겠읍니다, 냐이."
안네리스는 어머니의 팔에 매달려 있었다.
"정말, 이 꼴들이라니 !"
냐이는 분노를 억누르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창피스러위요. 앤, 너는 집으로 돌아가거라. 마마가 뭐라고 했지 ? 이런 부도덕한 곳에 발을 들여놓아서는 인된다. 다르삼, 투앙을 집으로 옮겨 가세요."
"이곳에서 짐차를 빌려요."
나는 다르삼에게 지시했다.
다르삼은 그제서야 겨우 칼을 칼집에 넣고 밖으로 나갔다. 냐이는 굳어진 표정으로 투앙의 시체를 바라보고 안네리스는 어머니의 가슴에 얻굴을 파묻었다. 가족들의 시중을 마다하고 이웃 사람에게 신세를 지다니!
"아촌 아촌 !"
냐이가 큰소리로 불렀다. "아촌 ! 바바 !"
사나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다르삼이 돌아왔다.
"무례한 수위녀석이 허가 없이는 짐차를 빌려줄 수 없답니다." "바바는 어디 있지요?"
"이곳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내가 마차를 갖고 오겠어요."
내가 말했다.
"당신들 두 사람은 여기 있으세요. 나는 돌아가겠어요. 자, 돌아가자, 앤."
냐이는 그렇개 말하고 딸의 손을 잡아 끌었다.
두 여인은 손을 잡고 뒷문으로 해서 아촌의 유곽을 빠져 나갔다. 입을 헤벌쭉 벌리고 마룻바닥에 누워 있는 투앙 메레마의 시체에 그들은 시선조차 보내지 않았다. 그때 나는 냐이가 그녀의 주인과 얼마나 깊은 단절 상태에 있었는지를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남편의 시체인데도 그녀는,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았다. 그 정도로 철저하게 남편을 용서할 수 없었단 말인가?
"도련님, 행복의 막이 열리고 중오의 막이 내린 셈입니다."
다르삼이 얼굴을 찡그렸다.
"추구하던 것은 멀리 도망가고 얻은 것은 파멸뿐이군요."
얼마 뒤 계단의 안쪽 방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 왔다.
그리고 곧이어 여자들이 뛰어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바바 아촌의 창녀들 !"
다르삼이 내뱉듯이 말했다.
"5년 전부터 투앙은 이곳에서 붙어살고 최후도 여기서 맞이한겁니다. 창녀의 소굴에서 목숨을 거둔 것입니다. 투앙 메레마! 지난 5년동안 냐이는 분노를 누르며 살아 왔어요. 그러니 투앙이 죽어도 거들떠보지 않죠. 정말 투앙은 인간 쓰레기였어요 ! " 다름삼이 마루에 침을 뱉었다.
"로베르트도 이곳에 있었어요. 한 지붕 밑에 같은 창녀들과 함께. 천벌을 받을 ! "
"그 동안의 계산은 모두 마마가 했나요?"
"매달 청구서가 날아 왔읍니다."
"다르삼, 시체를 건드리지 말아요. 그대로 놓아 두세요."
마차가 한 대 도착했다. 타고 있는 것은 안네리스도 마마도 아닌, 네 명의 경관과 혼혈 지휘관이었다. 검증이 시작되고 경관 한 사람이 지휘관의 말을 기록했다.
"시체의 위치는 달라겼는가? "
지휘관은 말레이어로 물었다.
"약간. 조금 전에 내가 잡아 흔들었읍니다."
다르삼이 마두라어로 말했다.
"이 집의 주인은 어디 있는가 ? "
"이곳에 없읍니다."
"이곳에는 누가 살고 있는가? "
지휘관은 회중 시계를 꺼내 보고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그 집에 사는 사람은 누구 한 사람 모습을 다타내지 않았다. "맨 처음 발견한 사람은 누군가?"
대답 대신 다르삼이 헛기침을 했다.
"농장 사람들이 모두 함께 이곳에 오다니 그것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지휘관은 마두라어로 물었다.
나의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렸다. 이제 경찰 문제가 되는 것을 피할 수는 없게 되었다. 모든 사람이 성가신 일에 말려들게 된 것이다.
"내가 뚱뚱보를 쫓고 있었읍니다." "뚱뚱보? 그는 누구인가?"
"수상한 사나이입니다. 그 녀석이 도망쳤기 때문에 이곳까지 추적해 왔읍니다. 그 녀석은 여기서 모습을 감췄읍니다."
다르삼이 설명했다.
"남의 집에 침입했단 말인가? 허가도 없이?"
"우리가 여기 왔을 때는 아무도 없었음니다, 게다가 이곳에는 누구나 허가 없이도 들어올 수 있읍니다. 이곳은 유곽이니까요."
"그러나 당신들이 이곳에 온 것은 여자를 사기 위해서는 아니지 않는가?"
"지금 말한대로입니다."
"뚱뚱보를 추적해 왔을 뿐입니다, 아마 그 녀석은 이곳 단골인 모양이죠?"
지휘관은 차갑게 웃었다. 경관들이 시체를 들고 나가려고 했다. 힘이 달리는 것을 보고 다르삼이 재빨리 거들었다. 그것은 더 이상의 질문을 피하려는 순간적인 행동이었다. "좋아. 당신들의 이름은?"
그 뒤 다르삼과 나는 시체와 함께 관청 마차로 경찰까지 연행 되어갔다. 우리들은 집요한 심문을 받았다. 그리고....아아 ! 그러는 동안에 아버지는 신문에 실린 자식의 이름을 보게 될 것이다. 집안에서 가장 머리가 좋고, 자랑거리였던 자식이 형사 사건, 그것도 매춘굴에서 일어난 추잡한 사건에 연루가 되다니......바로 아버지가 걱정하고 있던 일이 현실로 나다난 것이다. 그날 안으로 메레마씨의 사인은 독물에 의한 중독사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구토물 및 구강, 인후의 점막 손상 등이 그 사실을 나타내 주고 있었던 것이다.
검시를 위해 불려온 마르디네 의사에 따르면 피해자는 독물을 아주 조금씩 오랜 기간에 걸쳐 복용해왔기 때문에 이미 독물에 대한 면역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죽던 날은 보통 때보다 두세배 가량의 독물이 투여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예상한대로 사건은 각 신문에 보도되었다. '슬라바야 최대의 자산가 중 한 사람, 바이민졸프 농장의 소유자, 메레마 씨의 사망 !'
'우노크로모 바바 아촌의 유곽에서 죽다 ! '
'독이 들어간 술을 토하고.......'
그리고 우리들의 이름이 되풀이해서 언급되었다.
쁘리부미, 중국인, 혼혈아, 유럽인 등 모든 신문 기자가 우리들에게 몰려왔다. 마마와 안네리스는 그들의 질문에 일체 대답하지 않았다. 두 사람에게 함구령을 내린 것은 나였다. 집 앞의 도로에는 우리들이 사는 곳을 보려고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그렇다. 바로 우리들은 할 일 없는 사람들의 좋은 구경거리였던 것이다.
우리들 가운데 신변을 구속당한 사람은 없었다. 그 기회를 이용해서 나는 사건의 진상에 가까운 보고를 쓰고, 그것이 "슬라바야 일보"에 게재되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나의 그 연재 기사는 신문의 발행 부수를 증가시켰다고 한다. 뉴스의 출처가 믿을 만한 것으로 보여졌기 때문에, 슬라바야 이외의 도시에서도 주문이 쇄도했다. 자산가의 변사는 언제나 갖가지 억측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인가 보다 .
학교의 일 주간의 휴가를 이용해서 나는 수많은 편향된 허위 보도에 대한 반론의 붓을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새로운 기사가 나타났다.
그것은 경찰 관계자로부터의 믿을 만한 정보라고 전제한 뒤, 경찰 당국은 현재 뚱뚱보 사나이와 메레마가의 장남 로베르트 메레마의 행적을 수사하고 있으며, 로베르트는 부친 살해의 공모혐의를 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뚱뚱보 사나이는 누군가?' 어떤 말레이어와 중국어 신문은 그렇게 제목을 달고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그는 최근에 자바에 밀입국한 '신케(新客)'일 가능성이 높고, 아마도 '중화 신청회'(中華新靑會)라고 자칭하는 조직의 일원일것이다. 그것은 청조의 타도를 외치는 결사이고, 그 조직의 특징의 하나는 변발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뚱뚱보 사나이는 변발이 아니었다.
뚱뚱보 사나이는 홍콩이나 싱가폴에서 영국경찰의 수배를 받았기 때문에 자바로 건너온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그는 슬라바야를 혼란 속에 몰아넣고 있다. 밀입국자, 특히 변발을 하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는, 그들은 분명히 범죄의 의지를 갖고 있으니까 단호한 조치를 강구해야만 할 것이다.
'그것은 억측이다 !'
나는 그 신문의 보도를 부인했다. 확실히 그는 약간 치켜 올라간 가느다란 눈을 갖고 있지만, 그것은 반드시 중국인만의 특징은 아니다. 변발이 아니라는 것도 그를 '중화신청회'의 일원으로 간주할 수 있는 근거로는 부족하다.
이런 반론 기사를 게재한 결과 "슬라바야 일보"는 경찰 당국으로부터 뚱뚱보 사나이에 관한 조회를 받았다. 그것에 대해 마르텐 네이만은 정보 제공을 거부했다.
사실 그는 사정을 자세히 모르기 때문에 거부한 것인데, 경찰에 협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흘 동안 구류 처분을 당했다. 미리암과 사라 드라크로아 자매는 나와 안네리스와 냐이에게 동정의 뜻을 표시하고, 우리들에개 혐의가 없음을 확신하고 있다는 편지를 보냈다.
그녀들의 편지에는 에르베르 드라크로아씨의 전언도 씌어 있었는데, 우리들이 확고한 의지를 갖고 시련을 꿋꿋이 극복해 가기를 간절히 희망한다고 적혀 있었다. 어머니에게서 온 편지에는 눈물어린 걱정과 우려로 일관하고 있어서 가슴이 아팠다. 그와 동시에 나에 대한 아버지의 분노가 그대로 적혀 있었는데, 대노한 아버지는 더 이상 나를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하시며 슬라바야 고등학교의 교장 선생님에게 편지를 보내서 나를 퇴학시키겠다는 내용을 통지했다고 한다. 어머니의 두 번째 편지에는 B시의 부이사관이 아버지의 노여움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찾아왔었다는 내용이 씌어 있었다. 부이사관은 내가 나쁘다고만 몰아붙이는 것은 경솔하다. 오히려 내가 문제를 정면으로 받아들여 해결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단다.
그리고 내가 바이민졸프 농장에서 지내고 있는 것이 꼭 부도덕하고 추잡한 것이라고 속단할 수만은 없다. 우리들이 겪게 되는 사고에는 물론 자업자득 같은 것도 있으나, 전혀 당사자와는 관계 없이 뜻밖의 재난으로 일어나는 일도 종종 있다, 그리고 그런 재난이 언제 닥치느냐 하는 것은 아무도 예측을 할 수가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부이사관의 말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기 아들과 딸에게는 경찰 문제가 된 것은 대단히 수치스러운 일이며, 아버지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짓이다. 따라서, 그런 잘못을 저지른 아들을 절대로 앞으로는 자식으로 생각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했다.
나는 모든 편지에 답장을 썼다. 아버지의 말씀에 대해서는, 만일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라면 어쩔 수 없다. 앞으로는 어머니만을 사랑하고 어머니만을 위한 아들이 되겠노라고 써 보냈다.
형은 이렇게 답장을 보내왔다.
어머니는 네 편지를 읽고 눈물을 흘리고, 네 태도에 몹시 걱정하고 있다. 왜 너는 불효막심한 짓을 해서, 그렇지 않아도 화를 내고 있는 아버지의 심기를 더욱 괴롭히는 거냐? 마치 아버지가 자식이 잘 되는 것을 방해라도 했다는 듯이 너는 행동했다. 너는 아버지의 아들이다. 네가 아버지보다 모든 면에서 미숙하다. 당연히 네가 굽히고 들어와야 하지 않겠느냐? 나는 형의 현지를 묵살했다. 아버지가 화를 내셔도 할수없다. 처음부터 아버지가 어면 태도를 취하건 그것은 아버지의 자유다. 나와 아버지와는 그다지 가까운 관계는 아니다. 어릴 때부터 나는 할아버지 손에서 자랐기 때문에, 아버지는 나에게 있어서 아버지라는 호칭 이상의 존재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나를 대할 때마다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아버지로서의 권위를 내세우려고 했다.
구워 먹든 삶아 먹든 마음대로 하라지 ! 아버지의 노여움도 권위도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나를 고등학교에서 퇴학시키는 것도 물론 그의 마음대로다.
쁘리부미가 고등학교에 들어가려면 고위 관료의 보증이 있어야 하는데 나의 경우 보증인이 아버지가 아니라 지금은 돌아가신 할아버지다. 아버지가 나를 퇴학시키려고 하더라도 교장 선생님이 꼭 승인한다고만은 할 수 없다.
그러나 교장선생님이 퇴학을 인정한다고 해도 좋다. 이미 나는 독학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고 스스로 설 수 있는 힘이 있다. 시체가 발견 된 지 나흘뒤에, 메레마씨는 푸레네에 있는 유럽인 묘지에 묻혔다. 우리들은 모두 장례식에 참석했다. 참석자들의 대부분은 농장 내 마을의 주민들이었다, 그 밖에 취재차 나온 신문기자가 7명, 그리고 마르티네 의사, 쟝 마레, 테린하가 참석했다.
매장은 패르부루헤 장의사에 의해 치러졌다.
메레마 가의 대리인을 맡은 마르터네 의사는 장례식 조문 가운데서 과거 5년 동안 메레마 집안의 사람들, 특히 냐이 온트솔로와 안네리스를 찾아온 가혹한 시련을 목격하고 대단히 가슴 아파했다고 동정을 표시했다.
그것은 참으로 강인한 사람만이 견디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것을 이겨낸 것은 쁘리부미의 여성이며, 그녀의 힘이 되는 사람이라고는 단 하나, 유능한 조수로서 일하는 자기 딸 뿐이었읍니다.
그렇지만 마르티네 의사가 말하는 시련은 그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다시 법정으로까지 번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유족에 대해 동정을 나타낸 마르티네 의사의 발언은 즉각 말레이어 신문과 네덜란드어 신문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식민지 저널리즘의 안성마춤의 표적이 되어, 자신의 발언에 관한 상세한 해명을 요구받았다. 해명을 하게 되면 그것이 왜곡되어 신세이셔널한 흥미물로 변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마르디네는 완강하게 침묵을 지켰다.
그 때문에 네덜란드어 식민지 신문들은 제각기 독자적인 필치로 원주민이며 첩인 냐이 온트솔로에게 보인 마르티네의 동정을 헐뜯고 비난했다. 냐이는 아직 완진히 무죄가 결정된 것은 아니다. 첩이 외부인과 공모해서 자기 주인을 살해하려고 한 예는 많이 있었다. 동기는 색정과 금전이다. 어떤 신문은 이렇게 썼다.
'19세기에만해도 교수대에 올라간 첩은 다섯 손가락을 헤아린다. 냐이 다시마도 만일 그녀의 투앙인 에드워드 윌리엄스가 현명한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같은 범죄를 저질렀을 것이다. 사실 그녀의 이야기도 끝에는 살인으로 막을 내리고 있다. 다만 희생자가 에드워드 윌리엄스가 아니라 냐이 다시마 자신이었지만......'
그렇게 논한 신문은 더욱 세밀하게 냐이 온트솔로를 심문해 줄 것을 당국에 요구하면서 기사를 끝맺었다. 한편, 부타위의 어떤 신문은 그 밍케라는 인물을 좀더 철저하게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르티네 의사와 마르텐 네이만은 여러 도시에서 발행되는 엄청난 수의 신문을 모아서 우리들에게 보내주었다. 그러한 신문의 논평이나 주장을 읽은 냐이가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쁘리부미가 그들의 발 밑에 짓밟혀 없어지는 것을 보지 않고는 참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쁘리부미는 항상 검고, 유럽인은 항상 희지 않으면 안됩니다. 즉 쁘리부미라는 것 자체가 죄악이며, 쁘리부미로 태어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목인 거예요. 우리들은 지금 전보다도 훨씬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읍니다. 밍케, 내 아들 !"
냐이가 나를 '내 아들'이라고 부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가슴이 뭉클해지며 눈물이 쏟아질 뻔했다. "당신은 우리 두 사람을 버릴 생각인가요?"
"천만에 말씀이십니다. 우리들은 힘을 합쳐서 어떤 어려움도 이겨나가야 합니다. 우리들에게도 친구는 있읍니다. 마마, 제발 이 밍케를 그련 비겁한 사람으로 생각하지는 마세요. 부탁입니다. "
"그들은 우리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고 악인으로 날조할 수 있는 자료를 갖추고 있읍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특히 다르삼이 염려되었지만 우리들 가운데 구속된 사람은 없읍니다. 아무래도 경찰은 신문 보도에는 영향을 받지 않고 있는 것 같아요." 메레마 가에 있어서의 나의 존재를 고발하는 기사가 나타났다.
분명히 로베르트 슬르호프가 쓴 것으로, 그것에 의하면 나는 남의 재산을 빨아먹는 염치도 없는 기생충인 주제에 세상에는 '무고한 참새'로 행세하는 인물, 성도 없거니와 뻔뻔스러움만이 자본인 철면피, 요컨대 불한당이 틀림없다고 되어 있었다. 그 문장을 실은 것은 물론 "슬라바야 일보"는 아니었다. 편집광적인 엽기 취미의 협력자들, 마르티네 의사의 표련을 빌리면 고대 로마의 티투스 같은 병자를 몇 명 고용하여 모든 영역의 스캔들, 추문을 끈질기게 쫓는 것으로 이름난 어떤 일간지였다.
"힘을 내십시오. 침울해 있어서는 안됩니다."
기사를 읽고 걱정을 한 마르티네 의사는 나를 찾아와서 그렇게 격려했다.
어떤 동정이나 위로의 말도 격려도 그 기사에서 내가 받은 충격을 덜어 주지는 못했다. 고통이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그를 고소하겠어요, 마마."
"안돼요."
냐이가 말렸다.
"당신에게는 승산이 없어요."
"그가 쓴 것이 거짓말이라고 마마가 증언만 해주시면 나는 승리할 수 있읍니다."
"마마는 물론 당신 편이에요."
냐이는 말했다.
"하지만 법률 앞에서는 당신이 불리해요. 문제를 법정에까지 끌고 나가면, 당신은 유럽인을 상대로 싸워야 합니다. 검사나 판사까지도 당신에게 집중 포화를 퍼부을 것입니다. 당신에게는 재판 경험이 없고, 변호사도 믿을 수 없읍니다. 쁘리부미가 유럽인을 상대로 한 재판 같으면 더욱 그렇습니다. 펜에는 펜으로 대항하세요. 펜을 무기로 삼아 그와 대결하는 거예요."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이 기사의 필자는 아마 나의 친구일 것이다. 그것이 누구든 상관없이 나는 반격의 펜을 들었다. '왜 자네는 당당하게 모습을 나타내지 못하는가? 왜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채 돌을 던지려고 하는가? 본디의 얼굴을 보여라. 어째서 자네는 자신의 얼굴을, 본명을, 그리고 자신의 행위를 숨기고 있는가? '
나의 반론은 우선 마르빈 네이만씨의 "슬라바야 일보"에 게재되고, 그뒤 어면"경매"지에도 발표되었다. 그 "경매"지는 여전히 지면의 대부분을 선전 광고가 차지하고 있었으나, 헤르만 메레마 변사 사건 덕택에 보통 일간지로 바뀌어 있었다.
그 무렵 슬라바야에는 여섯 개의 경매 회사가 있어서, 제각기 독자적인 신문을 갖고 있었는데, 그 중에 일간지로 승격한 것은 바로 그 신문 하나뿐이 었다.
나는 "경매"지에 이렇게 썼다.
'도대체 내가 무엇때문에 고 헤르만 메레마씨의 재산을 노린다는 것인가? 자네 대답해 보게나. 될 수 있는 대로 자세하게. 자네가 확인하고 싶다면 메레마씨의 유족에게 협력을 구할 수가 있다, 아니, 내가 도와줄 수도 있다. 만약 필요하다면 계리사를 고용해도 상관없다.'
전혀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났다. 신문들이 미친 듯이 나를 향해 집중 공격을 해 온것이다. 바로 마마가 말한대로였다. 재판에 회부되지도 않았는대도 그 지경이었다. 그러니 실제로 고소를 했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촛점은 이미 내가 고 헤르만 메레마의 재산을 빨아먹는 기생충이라는 것이 사실이냐 사실이 아니냐 하는 데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문제의 핵심은 피부색이 다른 유럽인 대 쁘리부미의 대결로 옮겨가 있었다. 슬라바야 이외의 다른 신문들도 하나 둘 끼어들기 시각했다.
그때문에 나는 한 달 동안 교과서를 펼쳐 볼 시간적 여유도 갖지 못했다. 매일 세상 사람들의 비난에 대해 응답하고, 마르티네이만이 전해 주는 공격 기사에 하나 하나 반론을 쓰지 않으면 안되었다.
마푸다 뻬테루스도 나를 찾아와서 격려해 주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요, 바로 이것이 식민지의 일반적 상황입니다.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 어디나 마친가지입니다. 그곳에서는 유럽인이 아닌, 특히 통치국 국민이 아닌 원주민은 모두 여러 면에서 유럽인의 우월성, 통치국의 힘을 과시하는, 그것 때문에 비웃음을 받고 욕을 당하고 있읍니다. 그러나 밍케군,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 동인도에 통치자로서 건너온 그들은 다만 유랑민, 유럽 본국에서는 쓸모가 없게 된 부랑자에 불과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이곳에 쫓겨와서는 허세를 부리고, 오만한 유럽인으로서 행세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들은 인간의 쓰레기들입니다."
이런 얘기들을 우리들은 잠자코 듣고 있었다.
우리들은 안네리스가 이 복잡한 논쟁에 휘말리지 않도록 힘썼다. 생각대로 그것은 잘 된 것 같았다. 그렇게 해서 냐이와 나 사이에 외부 세계에 맞서는 동맹관계가 맺어졌다. "밍케, 만일 내 편을 들어 그들과 대결하는 것에 동의한다면, 당신은 끝까지 철저하게 그들을 적으로 돌리게 될 거예요. 그들은 마지막에 버틸 수 없게 되면, 당신을 이 사회에서 못살게 만들 거예요. 지금까지도 그런 일이 몇번 있었어요. 어때요, 그래도 해 보겠어요?"
"이것은 중요한 문제로서 어디까지나 정면으로 맞서지 않으면 안됩니다. 마마, 이 밍케는 비겁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옵니다. 결코 도망치거나 하지도 않습니다."
"좋아요. 그렇다면 한동안 학교는 쉬도록 해요. 이 싸움은 매우 중요하니까요. 학교에 가면 당신은 몰매를 맞을지도 모르고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상처를 입게 될 거예요. 이 문제에 뛰어들게 됨으로써 당신은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서 적과 맞서야 할 거예요. 그리고 명성이라는 이름의 증서를 받고 졸업을 하게 될 거예요. "
생각지도 않았던 곳에서 나를 옹호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유럽인이 발행하는 말레이어 신문에 콤멜이라고 칭하는 인물이 쓴 다음과 같은 글이 실린 것이다.
밍케, 필명 맥스 트레나르가 만일 위법 행위를 저지르고 있다고 한다면 그를 고발함으로써 문제를 법정으로 끌고 나가려는 사람이 왜 비난자들 가운데서 다타나지 않을까? 동인도의 법률은 아직도 그들의 요청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또는 의도적으로 법률을 병신취급해서 우리의 영광스러운 법무관들의 무능을 폭로하려는 것인가? 아니면 이 존경할 만한 신사들은 그렇게 해서 새로운 법률을 만들기를 바라고 있는 것인가? 이 콤멜의 글은 몇 사람인가의 법률가 사이에 논쟁을 불러 일으키고, 나에 대한 집중 공격은 딴전으로 밀려났다. 그리고 냐이가 약속한 명성이라는 이름의 졸업증서는 내 손에 들어오지 않았다.
냐이 온트솔로는 어떠한 사태에도 전혀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비정상적인 분주함 속에서 안네리스는 점점 더 일에 몰두해 갔다. 외부 세계와의 교섭은 우리 두 사람에게 모두 맡기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비로소 유일한 남자 가족으로서 인정받게 되었다. 물론 법적으로 인지된 것은 아니었지만.
헤르만 메레마 살인 사건의 공판은 이제 더 이상 연기할 수 없는 시점에 와 있었다. 로베르트 메래마와 뚱뚱보 사나이는 여전히 행방이 묘연한 채였다. 그 때문에 법원은 일단 바바 아촌을 피고로서 법정에 세우기로 했다. 백인 법정, 유럽인 법정에 말이다. 백인 법정에 세워지게 된 것은 아촌이 '특별재판권'을 갖고 있어서가 아니었다. 공범 관계가 존재한다고 간주되었기 때문이다.(여기서 말하는 공범 관계란 비유럽인과의 공범 관계를 가리킨다.) 아촌은 헤르만 메레마의 살해를 용의주도하게 계획하고 실행한 죄로 기소되었다. 아마도 그 재판은 슬라바야의 재판 사상 가장 특별한 사건이었을 것이다. 신문보도, 또는 사건을 둘러싼 저널리즘 내의 논쟁에 신동되어 각색 인종으로 구성된 슬라바야 시민이 방청석으로 몰려 들었다. 다른 도시에서도 대거 원정을 왔다고 전해졌고, 냐이의 친오빠도 투랑강으로부터 모습을 나타냈다.
또한 이것이 역사상 가장 비용이 많이 드는 재판이라고 사람들은 떠들어댔다, 법정에서는 자바어, 마두라어, 중국어, 일본어, 그리고 말레이어가 등장한다고 해서인지 통역이 네 명이나 동원 되었다. 통역은 모두 순수 유럽인이었다. 테린하, 쟝 마레, 그리고 문제의 콤멜도 방청을 하러 왔다. 콤멜은 평소에는 몹시 두려워하는 법원 건물에 사람들이 그렇게 웃고 떠들면서 몰려드는 것을 본 것은 그가 신문 기자가 된 이래 처음이라고 말했다.
내가 알고 있는 경매 사무소 "경매"지의 사주도 방청을 했다. 슬라바야 고등학교는 역사상 처음으로 휴교가 실시되었다. 교사와 학생이 교실을 법원으로 옮겨버린 것이다. 마르티네 의사는 의사로서의 전문적인 입장에서 증언하기 위해 소환되었다.
바바 아촌은 일부러 중국으로부터 영어를 쓰는 변호사를 한 사람 고용했다. 그때문에 통역도 한 사람 더 늘어나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것은 또한 중국인이 백인 법정에서 심판받는 최초의 재판이라고도 말했다. 처음에 심리는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그 단계에서는 네덜란드어가 사용되었다. 의학계에는 알려져 있지 않은 중국의 약초를 재료로 한 것을 먹였다고 최종적으로 인정하기는 했으나, 살인의 동기에 대한 진술을 바바 아촌으로부터 받아내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상세한 약초의 처방에 대해 밝히는 것을 거부하고, 다만 카리스소크 교도소에 수용되어 있는 열명의 살인범에 대한 실험에서 증명된 것처럼, 그것을 마신 사람은 평형 감각을 상실한다는 것밖에는 시인하지 않았다.
아촌은 처음에는 그 약초가 사람에게 독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부정했다. 그는 단지 야자 술의 향기를 좋게 하기 위해 사용한 것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전문가로서 증언대에 선 어떤 한의사가 그의 주장을 뒤집었기 메문에 아촌은 최대의 약점을 찔려 결국은 자백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살인의 동기는 무엇일까?
처음에 아촌은 6년 동안이나 눌러앉아 나가려고 하지 않는 손님에게 싫증이 났기 때문이라고 진술했다. 그러나 손님은 그동안 계속해서 수입을 올려 주었을 텐데 싫증이 나다니 무슨 까닭인가? 게다가 만일 싫증이 났다면, 어째서 나중에 로베르트 메레마까지 손님으로 받아들였느냐는 질문에는 대답하지 못했다.
냐이 온트솔로에 대한 심문은 재판의 주인공이 된 그녀의 얼굴을 새빨갛게 만들었다. 그녀는 네덜란드어의 사용이 금지되고, 자바어를 쓰도록 명령받았으나, 그것을 거부하고 말레이어로 진술했다.
그녀는 고 헤르만 메레마의 아촌에 대한 지불은 한 달에 45 길더이고 그것은 언제나 심부름꾼이 그녀의 사무실로 청구를 하러 왔다는것, 최근에는 그것에 로베르트 메레마의 몫 60길더가 더해져 매달 청구되고 있었다는 것을 밝혔다.
어째서 로베르트의 지불 쪽이 더 많았을까?
왜냐 하면, 시뇨 로베르트는 가장 화대가 비싼 마이꼬만을 상대했고 독점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아촌은 답변했다. 정말로 마이꼬는 로베르트 메레마만을 상대했는가?
마이꼬는 부인했다. 아촌이 명하는 내로 아촌 본인을 위시해서 누구라도 상대했다. 그런데 로베르트 메레마는 차츰 체력이 약해져서 성욕이 쇠퇴했기 때문에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마이꼬는 진술했다.
사람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창녀가 되고 난 뒤 성병에 걸린 일은 없는가 하는 질문이 마이꼬에게 던져졌다. 전문가로서 마르티네 의사가 마이꼬가 매독에 걸려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증인했다. 남의 나라에 와서 그런 병을 퍼뜨린 것을 유감으로 생각지 않는가?
그 질문에 대해서 마이꼬는 이렇게 대답했다.
자기는 병에 걸리고 싶어서 걸린 것이 아니고, 자기가 그 병을 만들어낸 것도 아니다. 창녀로서 자신의 의무는 단지 손님의 욕망을 만족시켜주는 것뿐이라고. 그리고 방청객들의 호기심을 만족시켜 주기 위해서 또 하나의 질문이 던져졌다. 누가 그 병을 증인에게 옮겨 주었는가? 맑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마이꼬는 전혀 모르겠노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손님이 그녀에게서 병을 옮아갔다고 해도 그것은 자기 잘못이 아니라고 말했다.
바바 아촌은 냐이에게 불평을 털어놓은 적이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 냐이는 그 이웃 사람은 얼굴도 본 적이 었고, 오직 그의 청구서를 본 적이 있을 뿐이며, 그와 얼굴을 마주 대한 것은 이 법정이 처음이라고 답변했다. 재판은 마지막 단계에 와서 많은 문제에 부딪친 채로 그것을 규명하지 못해 사람들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결정적인 장애가 된 것은 물론 로베르트 메레마와 뚱뚱보 두 사람이 출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 동안 법정에서 행해진 수많은 심문 가운데서 완전히 이치에 어긋나고 엉뚱한 쪽으로만 몰고 간 것은 나와 안네리스의 관계에 대한 질문이었다. 방청인들은 그 질문에 소리죽여 킬킬거리거나 큰 소리로 웃거나 했으며, 판사와 검사까지도 우리들의 관계를 사람들 앞에서 비웃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나와 냐이의 관계도 추잡하고 불쾌한 질문으로만 일관된 것이었다.
나의 희망이고 스승이었던 유럽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을까 나는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그 질문의 의도가, 메레마 살해에 우리들이 관여한 상황 증거로서 이용하기 위해 우리들에게 성관계가 있었는가 없었는가를 밝히는 데 있다는 것은 쉽사리 이해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런 질문은 곧 끝났다.
우리들을 구해준 것은 바바 아촌이었다. 그는 냐이도 나도 안네리스도 다르삼도, 그밖에 누구도 살인에는 관계가 했다고 단언하고, 그 증언이 그 사건에서 우리들을 해방시키는 열쇠가 되었다.
2주일 간에 걸쳐 심리가 진행되었는데, 여전히 바바 아촌으로부터 살인의 동기에 대한 진술은 얻을 수가 없었다.
판사는 그에 대한 판결 언도를 연기하기로 결정하고, 검사는 로베르트 메레마의 신병을 구속하여 취조하기 위해 그의 거처를 찾아내라는 명령을 받았다.
법원의 결정은 세상 사람들을 실망시킨 것 같았다. 많은 사람들은 동양인이 유럽인을 계획적으로 살해했으므로 판사가 사형 판결을 내릴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판사는 바바 아촌을 미결인 채 계속 구류할 것을 결정하고, 그의 협력자들에게 3년에서 5년형을 인도했다. 마이꼬는 그녀의 고용주인 아춘이 비용을 부담하는 조건으로 병원에 입원할 것을 명령받고, 의사의 감시 하에 놓여지게 되었다.
그래서 재판은 로베르트 메레마와 뚱뚱보 사나이의 신병을 확보한 뒤 재개하기로 결정되었다.
제16장
소문의 덫
재판이 일시 휴정으로 들어가고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내가 탄 마차가 교문 앞에 멈춰섰을 때, 다른 학생들은 이미 교정에 모여 있었다.
그들은 하던 것을 중단하고 일제히 나를 노려보았다. 교실에 들어가기 전에 나는 교장선생님의 부름을 받고 그의 방으로 갔다.
"밍케군, 한 개인으로서, 그리고 이 학교의 교직원과 학생 대표로서 재판에서의 자네 승리에 대해 축하하네. 또 세상사람들의 공격에 대한 자네의 끈질긴 변호활동에 개인적으로 축하하네. 나를 포함하여 우리들은 모두 자네 같은 똑똑한 학생을 갖고 있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네. 재판의 경과에 대해서는 선생님이나 학생이다 모두 주목해 왔네. 물론 그것은 자네도 알고 있을 걸세. 밍케군, 자네는 그야말로 우리들 모두의 관심의 대상이었네. 그것은 물론 자네가 이 학교의 학생이기 때문이지. 이제부터 교직원 회의의 결정을 자네에게 전달하겠네. 자네 일로 치열한 토론이 전개되었는데, 교직원 회의는 법경에서의 자네 진술, 즉 안네리스 메레마와의 관계에 대한 자네 진술에 의거하여 급우와 책상을 나란히 하고 앉기에는 너무 어른스럽고, 특히 여학생에게는 위험한 존재라는 결론에 도달했네. 교직원 회의는 여학생의 안전에 대해서 학부형이나 보호자에개 책임을 질 수가 없다는 거지. 내가 말하려는 뜻을 이해하겠는가?"
"잘 알겠읍니다, 교장 선생님."
"참으로 유감이야. 이런 일이 없었다면 앞으로 몇개월 뒤에 졸업할 수 있을 텐데."
"할수없읍니다. 모든 것은 교장 선생님께서 결정하는 일이니까요."
마지막으로 교장은 내게 손을 내밀며 이렇게 말했다. "밍케군, 자네는 학교에 관한한 실패한 셈이네. 그러나 사랑과 인생에 있어서는 승리자일세." 교장실을 나왔을 때 수업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창 너머로 모든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나는 손을 흔들었다. 그들도 손을 흔들어 나에게 답했다. 쁘리부미인 나를 아직도 걱정해 주고 있는 듯한 태도였다. 그런 그들과 헤어지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을 하자 갑자기 슬픔이 복받쳐올랐다.
마부는 아직 교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곧장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나는 마차를 세우도록 마부에게 명했다.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르면서 쫓아왔기 때문이다. 마푸다 뻬데루스 선생님이었다. 나는 마차에서 내렸다. "유감이군요, 밍케군. 당신을 지켜줄 수가 없어서. 힘껏 싸웠는데.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런 사적인 일을 질문하다니, 그 법정은 파렴치해요."
" 고맙습니다, 선생님. "
마푸다 뻬데루스 선생님은 되돌아갔다.
나는 다시 마차에 올라타고 내가 부탁한대로 마차는 천천히 달렸다.
그렇다. 정말 그 법정은 파렴치했다. 검사는 로베르트 슬르호프를 닮기라도 한 것처럼 특히 우리들의 사생활을 사람들의 면전에서 폭로해 보이려고 했다.
마치 마르티네 의사의 길문을 되풀이 하듯이 검사는 네덜란드어로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밍케군, 당신은 어떤 방에서 잠을 잡니까?
물론 나는 편견과 악의에 찬 그 질문에 대답하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곧바로 이번에는 안네리스에개 똑같은 질문을 했다. 안네리스 메레마양은 누구와 잠을 잡니까?
안네리스에게는 대답을 거부할 힘이 없었다. 그렇게 해서 크고 작은 갖가지의 노골적인 비난과 조소가 법정 안에 퍼져 나갔다. 계속해서 질문은 냐이에게 퍼부어졌다.
냐이 온트솔로, 본명 사니켐, 고 헤르만 메레마씨의 첩에게 묻는다. 어떻게 해서 냐이는 냐이의 손님과 딸의 불순한 관계를 방치해 둘 수 있었는가?
방청석에는 점점 더 노골적인 비웃음이 퍼져갔다. 검사, 그리고 판사까지도 비굴한 웃음을 띠고 많은 유럽인 여성들에게서 시샘을 받고 있는 원주민 여성에게 정신적 고문을 가할 수 있게 된 기쁨을 노골적으로 나타냈다.
자바어를 강제적으로 쓰게 하려는 판사의 제지도, 나무 망치소리도 무시하고 냐이는 낭랑한 목소리를 가다듬어 완벽한 네덜란드어로 답변했다.
"재판장 각하, 검찰관 각하, 우리들의 가정 생활이 무참하게 폭로당하고 있는 데 대해....(망치가 다시 테이블을 때리고, 질문에 직접 답변하라는 경고가 주어졌다) 나, 냐이 온트솔로, 본명 사니켐, 헤르만 메레마의 첩은 내 딸과 손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여러분과는 다른 견해를 갖고 있읍니다. 나 사니켐은 한 사람의 첩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첩의 뱃속에서 안네리스는 태어났읍니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나와 헤르만 메레마의 관계는 누구에게도 지탄받은 적이 없읍니다. 그것은 그가 순수 유럽인이라는 단 한가지 이유에서였읍니다. 그런데 어째서 내 딸과 밍케씨의 관계가 문제가 됩니까? 밍케씨가 쁘리부미라는 이유에서입니까? 어째서 혼혈아의 부모들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까? 나하고 헤르만 메레마씨의 관계는 주종 관계였읍니다. 그러나 그것은 위법이 되거나 남들의 비난을 받은 적도 없읍니다. 내 딸과 밍케씨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이고, 그 사랑은 순수한 것입니다. 물론 아직 두 사람은 합법적인 혼인관계는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그런 인정을 받지 못한 내가 낳은 자식들에 대해서 그 누구에게도 아무 비난을 듣지 않았읍니다. 유럽인은 고 헤르만 메레마가 나를 산 것처럼 쁘리부미의 여자를 살 수가 있읍니다. 그런 인신 매매 쪽이 순수한 사랑보다 더 옳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 압도적인 부와 권력때문에, 만약 유럽인의 그런 행위가 허용된다면, 어째서 쁘리부미는 순수한 사랑 때문에 조소를 받지 않으면 안된단 말입니까?"
법정이 얼마간 소란스러워졌다. 냐이는 판사의 망치 소리를 무시하고 얘기를 계속했다.
안네리스가 쁘리부미가 아니고 혼혈아라는 것을 냐이는 어쩔수 없이 인정해야만 했다. 그때 검사의 노한 목소리가 법정에 울려 퍼졌다.
그녀는 혼혈아, 너보다 훨씬 신분이 높은 인간이다 ! 밍케는 '특별 재판권'을 갖고 있기는(그 점에서 나는 냐이보다 신분이 높다 !) 하지만 원주민에 불과하다. 밍케의 특별 재판권 따위는 언제든지 취소할 수가 있다. 그러나 안네리스양은 어디까지나 원주민보다 신분이 높은 것이다. "각하, 내 딸, 안네리스는 말씀하신대로 혼혈아입니다. 그렇다면 왜 안네리스에게는 그녀의 아버지와 같은 행위가 허용되지 않습니까? 그녀를 낳고 키우고 교육시켜 온 것은 나입니다. 존경하는 여러분에게서 한푼의 원조도 받지 않고 말입니다. 또 지금까지 그애를 책임져 온 것도 내가 아닙니까? 지금까지 여러분은 안네리스에 대해 조금이라도 걱정해 주거나 그 애를 위해 땀 한방울 흘린 일이 없읍니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갑자기 참견을 하는 겁니까?"
이미 법원의 권위 따위는 냐이의 안중에 없었다.
한 사람의 법정 관리가 그녀를 법정에서 끌어내라는 명령을 받았다. 냐이는 끌려 나갔다. 그러나 그녀는 원한에 사무친 말을 계속 퍼붓고 있었다.
"나를 첩으로 만든 것은 누굽니까? 냐이라고 불리게 만든 것은 누굽니까? 투앙이라고 존경받고 있는 당신네들 유럽인이 아닙니까? 왜 우리들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웃음거리가 되지 않으면 안됩니까? 왜 모욕을 당해야 합니까? 당신네들은 내 딸도 또 첩이 되라고 하는 건가요?"
냐이의 목소리는 법원 건물 전체에 울려 퍼졌다. 판사도 검사도 방청객도 모두 침묵했다. 냐이를 끌고 나가는 관리만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이야말로 한 사람의 쁘리부미 여성과 그녀를 비웃어 온 사람들의 입장이 완전히 뒤바뀌어 당당한 목소리로 호소하는 냐이가 유럽인을 고발하는 검사가 된 것 같았다. 법정 밖으로 끌려 다가면서도 냐이는 호소를 멈추지 않았다.
활기를 되찾기 시작한 아침 길을 마차는 천천히 달렸다. 그래, 지금 이곳은 법정이 아니다. 그러나 조금 전에 학교의 법정에서도 판결의 망치가 내려졌었다.
더 이상 급우들과 함께 공부해서는 안된다. 여학생에게 있어서 위험한 존재라고 해서 나는 불명예스러운 퇴학 처분을 받은 것이다.
만약 선생님들의 부끄러운 비밀이 법정에서 폭로되고 가차 없이 비난을 받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그들이 결함이 없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사람은 누구나가 한가지쯤은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비밀이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비정한 검사나 판사는 어면가? 그들도 남몰래, 혹은 내놓고 첩을 두고 있지 않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세상의 이목과 법률의 감시의 눈이 없다면, 그들의 행위는 사니켐에 대한 헤르만 메레마의 그것보다 훨씬 더 부패한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마차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사람들이 모두 나를 지탄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봐라, 저 자가 문제의 밍케라는 녀석이다. 안네리스라는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처녀와 동침하고 있는 사내지. 기어코 학교에서도 쫓겨난 모양이야.
녀석에게는 우리의 상식은 통하지 않거든. 아뭏든 법정에서 사생활을 폭로당한 파렴치한이야.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그런 일은 당하지 않거든. 검사나 판사가 까닭없이 그런 일을 할 턱이 없으니까.
그때 나의 심정은 우리 조상들이 '누란소'라고 부른 적막감, 허망함, 비애, 동포와 함께 살아가면서도 이미 그들과는 다른 인간이라는 것을 느끼게 하는 쓸쓸함, 똑같이 작렬하는 햇볕을 쬐면서도 홀로 마음 속의 뜨거운 분노를 견뎌내는 고독감 같은 것이었다.
이런 생각에서 벗어다는 길은 같은 운명, 유대감, 고뇌를 함께하는 사람들, 냐이, 안네리스, 쟝 마레, 다르삼과 함께 마음을 통하는 길밖에 없다.
나는 쟝 마레의 집을 찾아갔다.
"기운이 없군, 밍케. 퇴학이라도 당했나? 고개를 들라구." 힘없이 고개를 늘어뜨리기 일쑤이던 장이 이번에는 반대로 나에게 고개를 들라고 한다. 기운을 내려고 해도 내 마음 속에서 기운을 북돋을 만한 것들이 모두 없어져버린 것 같았다.
"그 학교는 이미 자네에게는 너무 좁은 거야, 밍케. 하지만 설사 밍케가 실패했다 하더라도 또 하나의 맥스 트레다르는 건재하지 않은가 ?"
마치 나에게는 또 다른 구원의 길이 있을 것이라는 듯이 쟝 마레는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학교를 못다니게 되면 가구의 주문을 받아오는 것이 어렵게 되어 우리들의 일에 지장을 가져온다는 것을 그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사정을 얘기했다. 그는 한동안 잠자코 있다가 감자기 웃기 시작했다. 나는 화가 났다.
"웃기는 얘기가 아닌가, 밍케?"
"웃을 일이 아닐 텐데요."
나는 불쾌해하며 말했다.
"아냐, 웃기는 얘기지. 모르겠나? 지금 자네가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한 가지 있네. 결혼하는 거야, 밍케. 안네리스와 결혼하는 걸세. 설사 악마와 맞서는 일이 있더라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 주는 거야. 이제는 그들과 같은 평범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네. 요컨대 그들과 같은 어리석은 야만인이 되라는 말일세. 결혼을 하게나, 밍케. 결혼만 하고 나면 문제는 간단해지는 거야."
"마푸다 뻬테루스 선생님은 우리들에 대한 법정의 태도는 파렴치하다고 했어요."
"그래, 그건 야만이지. 야만이라는 말밖에는 그들을 달리 표현할 말이 없어. 말레이어 신문과 네덜란드어 신문에도 그렇게 쓰고 있다더군. 야만이라는 심한 표현은 쓰지 않았지만 말일세. 그런 질문은 본디 비공개 재판에서 해야 하는 걸세."
"맞아요. 그러나 네덜란드어 신문에서는 오히려 마마가 법정을 혼란시킨 것은 잘못이라고 비난하고 있어요. 그러면서도 마마의 발언 내용은 한 마디도 싣지 않았다구요." "콤멜의 기사를 읽어 보게나. 상처를 입은 사자처럼 공격하고 있네. 그는 자네 편이야." "어떤 내용인지 설명해 주새요. 나는 읽어 보고 싶지 않으니까요."
"그는 이렇게 쓰고 있네. 검사와 판사의 행위는 첩 또는 현지처에게서 태어난 모든 유럽 혼혈아를 모욕하는 것이다. 혼혈아들은 아버지에게 인지를 받으면 쁘리부미가 안 되지만 인지를 받지 못하면 쁘리부미가 된다. 바꿔 말하면, 쁘리부미와 첩에게서 태어나 아버지에게 인지받지 못한 혼혈아는 같아지는 것이다. 그리고 또 콤맬은 법정에서 개인의 사생활을 폭로한 것을 비난하고 있네. 검사와 관사에게는 유럽인답지 않게 비도덕적이며 프로노 치트로를 심판하기 위해 위로구노가 행한 쁘리부미 법정보다도 악랄하다고 비난하고 있네. 그것은 약 250년 전에 있었던 사건인 모양인데, 프로노치트로와 위로구노는 어떤 인물이지? 나는 처음 듣는 이름인데."
"그 두 사람에 관해서는 나중에 얘기해 줄께요."
집으로 돌아오자 나는 곧장 사무실로 가서 냐이에게 학교에서의 일을 전했다.
"마마, 우리들이 결혼하는 것에 대해서 마마는 어떻게 생각하지요?"
"조금 기다려요. 그렇게 서두를 이유가 있나요?"
나는 새로운 가구 주문이 어렵게 되어서 이대로는 쟝 마레의 사업에 지장이 있을 것 같다고 얘기했다. "그것도 어쩔 수가 없겠지요. 유감스럽지만 지금 당장 결혼을 허락할 수는 없어요. 재판 때문에 우리들의 사업은 많은 피해를 입었어요. 지금은 그 피해를 복구시키는 것이 우선입니다. 왜냐 하면, 사업을 견실하게 경영해 나가는 것이야말로 우리들 가족의 명예를 지켜 나가는 것이니까요. 이해해 주겠지요? " 나는 냉정하게 타이르는 냐이의 입술을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이해해 주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 엿보였다. "밍케, 전부터 줄곤 생각해 온 일인데, 인생은 참으로 기묘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만약 이 사업에 실패하게 되면,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냐이로 전락해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당하고, 비웃음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가장 큰 피해를 입게 되는 것은 안네리스예요. 나는 어머니로서 실격이 되고 맙니다. 그 아이는 세상의 어면 혼혈아보다 더 많은 존경을 받게 되지 않으면 안돼요. 자기 민족 가운데서 존경받는 쁘리부미가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존경을 받는 길은 이 농장을 훌륭하게 경영해 나가는 것밖에는 없음니다. 우스꽝스러운 일이지만 세상이 보는 눈이라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안네리스는 뒤곁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사무실 의자에 앉은 채 순수 유럽인, 혼혈, 쁘리부미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혼란을 일으켜 내가 느끼고 있던 고독감과 좌절감 따위는 사라져버렸다.
순수 유럽인, 혼혈, 쁘리부미 등으로 얽혀진 혈연 관계가 마치 거미줄처럼 사회의 그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물의 한가운데 있는 것이 첩, 냐이라고 불리는 여인들이다. 그러나 그 암거미들은 망에 걸린 먹이를 잡아 먹지는 않는다. 오히려 거꾸로 망에 걸린 일체의 능욕과 멸시를 받아들이고 혼자 잠자코 삼켜 버린다.
그녀들은 설사 투앙과 같은 집에 살고 있다 하더라도 결코 주인공일 수는 없다. 자기 배로 낳은 자식과 같은 계층에 속할 수가 없는 것이다. 유럽 순종이나 혼혈은 물론 아니고, 이미 쁘리부미조차 아니라고 해도 좋다. 그녀들은 환상의 산인 것이다. 이윽고 나는 물흐르듯이 글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콤멜이 제시한 생각이 내 문장의 기본이 되었다. 해가 질 무렵 문장은 거의 완성되었다.
알라 신이여, 깊은 좌절이나 고독도 또한 당신의 백성이 무엇인가를 낳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는 것 같군요. 많은 민족을 이루게 하고 번식해 가도록 인류에게 명한 것도 당신이었읍니다. 사회적 경제격인 능력의 차이 때문에 태어나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도 당신은 축복을 줄 수가 있었읍니다.
그렇다면, 사회적 경제적으로 차이가 없는 두 사람의 남녀가 자유로운 의지와 책임에 의해서 맺은 관계를 왜 당신은 축복해 주려고 하지 않습니까? 당신의 계율을 따르지 않는다는, 단지 그 하나의 이유 때문인가요?
지금까지 당신은 그턴 일이 일어나는 것을 허용하고 당신의 축복 속에 태어난 사람들에게 큰 권력을 휘두르는 혼혈아라는 계층을 만들지 않았읍니까 ?
알라 신이여, 지금 나는 당신에게 묻습니다. 왜냐 하면, 거기에 대한 답변을 아무도 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알라 신이여, 당신이 대답을 해주십시오. 나는 다만 나 자신이 알고 있는 것, 알고 있다고 믿고 있는 것에 관해 쓰고 있는데 불과합니다. 모든 학문과 지식도 또한 근원을 따지자면, 당신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던가요?
순수 유럽인, 혼혈, 쁘리부미라는 문제에 대한 맥스 트레나르의 글이 발표된 지 10일 뒤, 학교에서 수업이 진행되고 있을 시간에 마푸다 뻬테루스가 찾아왔다. 교장선생님이 나를 찾고 있으니까 같이 가자는 것이었다.
나는 이미 학교와는 인연이 끊긴 사람이라는 이유로 그 제의를 거절했다.
냐이도 내가 가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안네리스는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사정이 많이 달라졌어요."
마푸다 빼데루스 선생님이 말했다.
"이유야 어떻든 꼭 가지 않으면 안돼요. 하지만 그전에 우선 내 축하의 말부터 들어 주세요. 당신이 얼마 전에 발표한 글 말인데요. 확실히 그 글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그 문제를 좀 더 이성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했어요."
그래서 결국 나는 함께 가기에 이르렀다.
학교로 가는 도중에 마푸다 뻬테루스 선생님은 나와 같은 학생을 둔 것을 자신이 얼마나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지 여러 차례 강조했다. 요즘 얼마 동안 뜻하지 않은 일에 우롱당하고 긴장해야 했던 나에개 그녀의 말은 위안이 되었다.
교장선생님은 나를 친절하게 맞아 주었다. 학생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간 뒤였으므로 모든 선생님들이 모여 있었다. 밀실 재판이라도 하겠다는 것일까? 나 한 사람을 위해 왜 일부러 이런 일을 하는 걸까? 내가 그토록 중요한 인물이란 말인가?
교장 선생님이 개회를 선언했다. 그리고 나서 말했다. "이미 유럽에서는 문화적인 공적에 따라 사람을 평가하는 것이 전통이 되어 있읍니다. 이 슬라바야에서도 그런 유럽의 전통은 유지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들은 그 문화인이 어떤 사람인지는 문제삼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그것은 개인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어디까지나 그는 그 공적에 의해서, 동포에게 그가 어떤 공헌을 했느냐에 의해서 평가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을 시작한 교장선생님은 그 다음에 최근에 발표한 나의 글에 대해 얘기를 이어 나갔다. "참으로 감동적이었읍니다. 건강한 정신의 소유자라면 누구나 반드시 깊은 감동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점은 그 글이 진리를 얘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동인도의 쁘리부미 역사에는 인연이 없었던 유럽적인 휴머니즘이 지금 맥스 트레나르, 여기에 모인 선생님들의 제자인 밍케군 속에 싹트기 시작한 것은 명백합니다."
교장선생님이 말하는 유럽적 휴머니즘의 의미가 나에게는 분명치가 않았다.
"밍케군을 퇴학시킨 우리들의 조치에 항의하는 편지가 이미 일곱 통이, 그 가운데 두 통은 졸업생한테서 온 것입니다만, 나에게 왔읍니다. 그 편지는 이렇게 말하고 있읍니다. 그 학생을 퇴학시킬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와 주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B시의 부이사관은 이번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몰라바야의 이사관을 만나러 올 용의가 있다고까지 말하고 있옵니다. 슬라바야의 이사회은, 이 문제에 대해 별다른 생각은 없는 것 같습니다만, B시의 부이사관은 밍케군의 후견인을 떠맡을 용의가 있다고까지 말하고 있읍니다. 부이사관은 또한 만일 슬라바야에서 그의 노력이 결실을 맺지 못할 경우, 교육산업 종교부 장관에게 직접 부탁하겠다고 했읍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내린 조치는 지금 지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로서는 처음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들이 내린 결정을 재고하려는 것은 그런 지탄을 받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유럽인들의 양심에 비추어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지금 이 중요한 교직원 회의에는 맥스 트레나르, 즉 밍케군이 참석하고 있읍니다. 이 죄의에서 밍케군에 대한 앞서의 결정을 재검토하고, 새로운 판단을 내려 주도록 요청하는 바입니다." 자기 새끼를 잃어버린 어미 사자가 새끼를 다시 찾으려는 듯이 마푸다 뻬테루스 선생님은 포효하며 손톱을 날카롭게 세우고 덤벼들었다.
얼굴의 주근깨가 한결 눈에 띄고 눈의 깜빡거림이 더욱 빨라졌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한 마디 한 마디를 야무지게 끊어가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교육이라는 것은 지극히 인도주의적 견지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만일 어떤 학생이 학교를 떠나 최근의 글 속에 나타난 밍케군처럼, 사고방식에 있어서나 태도에 있어서나 휴머니즘에 넘친 사람으로 성장해 간다면, 설사 그 인격 형성에 기여한 교사의 역할이 미미하더라도 우리들은 하느님께 감사하고 고맙게 생각해야 합니다. 비범한 개성은, 밍케군의 경우가 그런 것처럼, 어렵고 복잡한 상황 속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그가 앞으로의 발전을 위해 한층 견고한 기초를 다질 수 있도록 다시 밍케군을 이 학교의 학생으로서 받아들일 것을 제안합니다."
교직원 회의는 침묵을 지킨 채 앉아 있는 나를 복학시키기로 결정했다.
단 그것에는 일정한 조건이 붙어 있었는데, 나는 다른 학생들과 떨어져서 앉아야 하고, 교실의 안팎에서는 물론이고 가령 질문하거나 질문에 대답하는 경우라도 동급생과는 일체 말을 해서는 안되도록 되어 있었다.
"밍케군, 들은 그대로일세. 자네 의견은 어떤가?"
이런 문제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어하는 표정이 교장 선생님의 얼굴에 역력했다.
"가능하다면 학교를 계속 다니겠읍니다. 다시 받아 주신다면, 물론 다니겠읍니다만, 안된다면 거기에도 이의는 없읍니다. 여러가지로 노력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회의는 그것으로 끝났다.
선생닌 모두가 나와 축하의 악수를 나누었으나, 마푸다 뻬데루스 선생님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험악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나의 네덜란드어 선생님은 더할수 없이 만족스러운 모습이었다. 내가 복학하게 된 것을 그녀 자신의 승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헤어질 때, 교장 선생닌은 미리암과 사라 드라크로아 자매가 보낸 우표가 붙지 않은 편지를 내게 건네 주었다. 슬라바야 고등학교의 교내는 조용했다. 교사와 교정, 그리고 그곳에 깔려 있는 자갈이 지금 처음 보는 것처럼 생소하게 느껴졌다.
선생님들의 시선이 내 등을 간지럽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결코 뒤돌아보지 않고 마차까지 곧장 걸어갔다. "천천히 달리도록 해요."
나는 마부 마르주키에게 자바어로 일렀다.
"곧장 신문사까지 갑시다."
도중에 마르주키가 주저하며 물었다,
"도련님, 안색이 나쁜 것 같아요. 좀 마른 것 같기도 하구요."
"그래 ? "
"왜 요양을 하지 않으십니까?"
"글쎄, 학교를 졸업하면 그렇게 해야지. 몇달만 다니면 되니까."
"앞으로 3개월 남았죠 ? "
"그래, 3개월 더 노력해야지."
"하지만 도련님, 더 이상 학교를 다녀서 뭘 하시겠읍니까? 도련님은 뭐든지 다 알고 있는데요."
"뭘 하느냐구? 그것도 그렇군. 하지만 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일을 해도 마친가지거든. 웬지 그런 느낌이 드는걸."
"도련님은 지금 모든 일을 잘 해나가고 있지 않습니까?"
"잘 해나가다니, 무엇을?"
"그야 모두들 그렇게들 얘기하고 있으니까요..... 도련님에게는 안네리스 아가씨가 계시지 않습니까? 게다가 돈이 많고 똑똑하고 많은 정부고관, 명사, 네덜란드인과도 친분이 두텁구요. 우리같은 것 하고야 비교가 안되지요."
"모두가 그렇게 얘기하고 있나?"
"네, 도련님. 더구나 젊고 잘 생기셨고 곧 부빠티가 되신다고들 그러던데요."
"잊어버리게나. 그런 얘기는 잊어버리라구."
"슬라바야 일보"의 사무실에서는 마르빈 네이만이 끝까지 학교에서 퇴학을 주장한다면 신문사에서 정식 직원으로 일하도록 하라고 권했다. 급료는 12.5길더로 많지는 않지만, 일은 매우 재미있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럼, 미스 마푸다 뻬데루스가 당신을 열렬히 변호했겠군요. 그녀와 친한가요? "
"그녀는, 가장 현명하신 선생님입니다."
"하지만 그녀와는 약간의 거리를 두는 쪽이 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대단히 친절한 분입니다."
"친절 ? 그것은 사람들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그녀의 무기지요. 나는 그렇게 믿어요." 마르덴 네이만씨가 말했다.
"함정이라구요?"
"이런 애기는 처음 듣겠지만, 친절을 내세워 남을 함정에 몰아넣을 수가 있지요."
"어떻게 함정에 빠뜨린다는 거죠?"
나는 놀라서 물었다.
"그녀는 광신적인 급진파, 즉 과격파입니다. '동인도를 위한 동인도'를 부르짖는 조직의 한 사람이지요. 그 구호를 들은 적이 있나요? "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동인도를 네덜란드와 같은 곳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그것이 동인도에서의 광신적인 급진파의 특색입니다. 그녀와 그 조직은 동인도에 갖가지 제약이 뒤따르는 것을 알려고 하지 않아요. 그 제약에 도전하고 게다가 그것을 침범하려고 하는 사람은 파멸을 피할 수 없읍니다. 그것은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제약이지만, 그 이상으로 많은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제약이 있지요. 분명히 네덜란드 본국에는 완건한 자유가 존재합니다. 그러나 이곳에는 그것이 전혀 없어요. 자유주의자라는 그 자체는 그가 여러가지 규정을 존중하고 소동을 일으키지 않는 한 별로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도 알아두는 게 좋아요. 쁘리부미 가운데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이 없는 것은 다행입니다. 가령 당신이 과격파가 되어, 그들의 동지가 되었다고 합시다, 자유주의파는 일단 정청의 주목을 받으면, 그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든 상관없이 그가 순종 유럽인이라면 동인도에서 퇴거 명령을 받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만일 혼혈아라면 결과는 좀더 비참해서, 그는 직장을 잃게 됩니다. 그런데 쁘리부미라면 틀림없이 자유를 잃고 재판에 회부되지도 않은 채 구속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밍케씨, 아무쪼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들의 함정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당신이 태어난 이 나라는 네덜란드나 유럽이 아닙니다. 여기는 동인도예요. 만일 당신이 덫에 걸려 곤경에 빠져도 그들은 누구 하나 당신을 도와 주지 않을 것이고, 도와 줄 힘도 없읍니다."
"그녀는 나의 선생님일 뿐입니다, 네이만씨. "
"밍케씨, 이 네덜란드령 동인도는 소문을 나침판으로 해서 움직이고 있는 사회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동인도의 상류 사회에서의 소문은 믿을 수 있었어요. 이미 마푸다 뻬테루스에 관해서도 소문이 떠돌고 있읍니다. 지금까지 당신은 이미 신물이 날 정도로 많은 곤경에 휘말렸었읍니다. 더 이상 새로운 화를 초래할 필요는 없잖습니까, 밍케씨 ?"
마르빈 네이만은 오랫동안 자유주의파의 활동에 대해서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태도로 자세하게 설명해 돌려 주었다. 어느 대목에 이르자 그는 안정된 질서를 유지하고 평화롭게 안심하고 살 수 있으며, 국민에게 나날의 양식을 충분히 공급하고 있는 지금의 동인도를 그들은 변혁시키려 하고 있다면서 비난까지 했다.
"게다가 밍케씨, 역내 쁘리부미왕 지배 아래에서 이 나라의 국민은 평화와 안녕을 얻을 수가 없었읍니다. 법의 보호도 받지 못했지요. 그것은 물론 법률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기 메문입니다. 동인도 정청의 어디가 마음에 안드는 것일까요? 그들은 동인도에 대해서 기묘한 환상을 갖고 있어요." "하지만 그들도 또한 유럽인임에는 틀림없읍니다."
마차를 타고 돌아오는 도중에 나는 갖가지 대립이 얼마나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는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종래부터의 대립에 지금은 유럽인끼리의 대립이 더해진 것이다. 여기에 외국인이 추가되면 어떻게 될까?
마르텐 네이만도 역시 휴머니즘을 바라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자유주의를 거부한다. 많은 사람과 사귀면 사귈수록 그만큼 지금까지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던 참으로 여러 가지 문제가 마치 우후죽순처럼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네이만은 앞으로의 일에 지금부터 대기를 해 두도록 나에게 경고했다. 그에 의하면, 멀지 않아 마푸다 뻬태루스는 동인도에서 추방당할 가능성이 있다. 있는 정도가 아니라, 그 가능성은 매우 크다. 벌써부터 그것을 암시하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그먼 사태가 일어나기 건에 나에게 그녀를 가까이 하지 말라는 것이다. "마푸다 뻬테루스는 다만 동인도에서 추방당하면 끝납니다. 그러나 당신은 어딘가에 유배당해 그곳에서 유폐 생활을 보내개 될지도 모릅니다."
그가 말하는 동인도에서의 제약이 어떤 것인지 네이만은 밝히려고 하지 않았다. 좋다. 그 문제에 대답을 해 줄 수 있을 만한 사람을 붙들고 물어 보자. 적어도 만약 그런 제약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사실이라면, 그의 말은 신빙성이 있다고 믿어도 좋을 것이다. 테린하의 집에 들렸더니, 어머니의 편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그것은 자바어로 씌어 있었다. "아들아, 네 일을 신문에서 읽고 모두 걱정을 하고 있단다. 너는 나의 씩씩한 아들이다. 그 한 가지에 나는 용기를 얻고 희망을 갖고 있단다. 네 자신의 문제는 스스로가 해결하지 않으면 안된다. 옛날 내가 한 말을 잊어서는 안된다. 도망쳐서는 안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만일 네가 안고 있는 문제를 회피하려고 든다면, 네가 지금까지 공부해 온 것과 학교에 다닌 것은 모두 허사가 되고 만다. 왜냐 하면, 그렇게 된다면 내 자식은 단순한 비겁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너는 냐이 온트솔로의 딸을 좋아한다고 했지. 그것은 네 자신이 정할 일이고, 우리들이 간섭할 문제는 아니다.
내가 말해 두고 싶은 것은 다음과같은 것뿐이다. 결코 자신이 직면한 문제로부터 도망쳐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것에 대항해 나가는 것이 남자로서의 너의 권리이니까. 아름다운 꽃은 손에 넣어라. 왜냐 하면, 그것은 용감한 남자를 위해 그곳에 준비되어 있는 것이니까. 그리고 또 한 가지, 연애에 있어서 비겁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 여기서 말하는 비겁한 사람이란 재산이나 지위를 내세워 여성을 손에 넣으려는 남자를 말한다. 그런 남자는 비겁자이고, 그것에 걸려들어 정복당하는 여자도 마찬가지로 형편없는 여자일 뿐이란다.
네덜란드어 신문을 읽은 사람이 애기를 해 주었는데, 너는 지금은 문필가로 유명해졌다고 하더구나. 하지만 얘야, 왜 너는 어머니가 이해할 수 없는 말로 글을 쓰는 게냐? 너의 사랑 이야기를 어머니나 이 나라 사람들이 노래할 수 있도록 팡클, 키난리 같은 전통의 시가 형식으로 써다오. 아버지 걱정은 하지 마라. 아버지에게는 아버지의 노래가 있으니까......"
아아,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 나는 당신의 사랑에 어떻게 보답해야 합니까? 당신은 나를 벌한 적이 없어요. 이 아들을 한번도 단죄한 적이 었읍니다. 어릴 때부터 회초리를 든 일조차 없었읍니다.
그리고 지금 당신은 안네리스와의 관계를 탓하려고도 하지 않고 있어요. 다만 당신은 내게 자바어로 써라, 당신이 노래할 수 있는 글로 쓰라고만 하십니다.
어머니, 자바의 시가 형식으로 글을 쓰지 못하는 나는 얼마나 당신을 실망시키고 있는 것일까요? 내 생활의 리듬은 자바의 전통 세계에서 상당히 벗어나 있기 때문에 전통 시가 형식을 쓰기에는 어렵습니다.
어머니와의 은밀한 교류는 테린하 부인의 입버릇인 넋두리 때문에 깨어졌다.
"어떻게 하지요, 밍케 도련님? 내일 시장을 봐야 하는데요." 그것은 내 주머니에서 적어도 1타렌을 내놓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쟝 마레의 집으로 찾아가니 메이가 새로운 메트레스를 깐 자기 방 침대에서 시트도 깔지 않은 채 잠을 자고 있었다. 쟝 마레는 무슨 생각엔가 골몰해 있었다. 집 뒤쪽에 있는 방은 조용했다.
"쟝, 내일부터 마마의 그림을 그릴 수 있어요. 마마가 사무실에서 서류 정리 같은 것을 하고 있을 때, 그리는 것이 좋아요. 내일부터 나는 다시 학교에 가게 되었어요. 당신이 마마의 그림을 그리는 동안, 메이는 우노크로모에 머물러 있게 하면 될 거예요. "
"그렇다면 가 보기로 할까?"
쟝 마레는 아직도 어딘지 서운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솔직이 지금은 그녀를 그리는 것이 썩 마음에 내키지 않는 걸."
"그리고 싶다고 말을 꺼낸 것은 당신이잖아요?"
"밍케, 그녀는 대단한 여성일세. 매우 강한 성격이야. 나는 감탄하고 있네. 특히 법정에서의 그녀는 놀랍더군. 그녀는 참으로 의연한 여성이야. 굳건한 주권을 가지고 있어. 그녀 앞에 서면 나는 정신을 차릴 수 없을 것 같네. "
나는 조용히 쟝을 바라보았다. 그는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일까? 마마를 사랑하게 될 것 같다고? 그런데 그것을 전할 수가 없다는 것일까 ?
쟝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쟝, 당신은 사랑때문에 괴로와해 본 적이 있나요?"
그는 얼굴을 들고 미소 지었다. 그리고 오히려 되물었다. "자네는 프랑스의 화가 투루스 로트랙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나? 불후의 걸작이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위대한 화가 말일세."
"아니, 모르겠는데요. "
"그는, 사실은 인생에서 모든 일을 성취했네. "
"왜 그런 얘기를 꺼내는 거죠 ?"
쟝은 의미 있는 웃음을 띠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직 잠이 덜 깬 메이가 내 무릎 위로 올라왔다.
"목욕을 하고 오너라, 메이. 지금 우노크로모로 가자. 내일 아침 다시 밍케 아저씨와 학교에 가는 거야." "우노크로모에서 마차를 타고?"
아버지를 빤히 쳐다보면서 메이가 물었다. 쟝 마레는 다정하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당신도 함께 가요. 내일까지 기다릴 것 없이 지금 함께 갑시다."
우리들 셋은 출발했다. 세 사람이 타기에 마차는 비좁았다. 그날 밤, 쟝 마레가 지켜보는 가운데 고등학교의 졸업 시험에 합격하는대로 나와 안네리스는 결혼식을 올리기로 결정했다.
세상과 나의 마음이 조용히 악수를 나누었다.
제17장
졸업식과 결혼식
졸업식은 금상첨화였다.
학교로 돌아가고 나서 3개월 동안 나는 공부에만 몰두했다. 글 쓰는 것도 그만두고 일도 전혀 하지 않았다. 공부, 오로지 공부만 했다. 그러는 동안 예전의 생활로 되돌아 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의 졸업식은 급우들과 더 이상 떨어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극히 짧은 시간이기는 하지만 다시 그들 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렇다. 그것은 참으로 짧은 시간이기는 하지만 이제부터 각자 끝없는 바다로 배를 저어나갈 이별을 앞에 둔 귀중한 시간이었다. 학부형이나 후견인이 몇줄씩 나란히 참석하고 있었다. 모두가 순수한 유럽인, 혼혈아, 그리고 몇 명의 중국인들로서 쁘리부미는 한 사람도 없었다.
마마가 참석을 거부했기 때문에 나는 안네리스를 동반했다. 졸업식에 참석하기 위해 외출한다는 것은 안네리스에개 있어서 생전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다.
그녀는 좋아하는 검은 빌로도 드레스에 진주 목걸이를 세 겹으로 감고 다이아몬드가 눈부신 매달리온, 그리고 팔찌를 차고 있었다.
본디의 아름다움에도, 치장을 한 모습에서도 안네리스가 내덜란드 여왕에게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새삼스럽게 확인했다.
내 모습은 졸업증서를 받는 다른 학생들처럼 위아래 모두 흰 옷차림이었는데, W자를 새긴 황동 단추를 달지 않은 것만 뺀다면 정청 관리와 같은 모습이었다.
우리들 두 사람은 졸업식장에 들어가 정장을 한 마푸다 뻬태루스 선생님의 안내를 받았다. 그녀는 몹시 흥분해서 안네리스를 맞았다.
"프리마돈나 ! 당신이 오늘의 여왕 같아요 !"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안네리스는 별로 싫어하는 기색도 없어 마푸다 뻬테루스 선생님닌 안내를 받으며 가족석으로 걸어갔다. 남학생도 여학생도. 모두 고개를 돌려서 나의 여왕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이제야 알았을 것이다. 이 세계가 나의 왕국이 되었다는 것을. 그것은 내가 고난 끝에 힘겹게 얻은 것이다. 나는 재빨리 로베르트 슬르호프를 찾았다. 눈에 띤 것은 슬르호프가 아니라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얀 다체르스테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응답했다.
의자에 앉으면서 나는 어머니를 생각했다. 어머니가 참석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부터 자랑스러운 이 아들이 고등학교의 졸업장을 받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디에도 어머니의 모습은 없었다. 나는 장엄하고 화려한 분위기의 어던가에 구멍이 뚫린 듯한 허전함을 느꼈다.
졸업식장의 웅성거림이 멈췄다. 3색기와 테이프가 펄럭이는 가운데 참석자 전원의 제창에 의한 "빌헬름스"가 울려 퍼졌다. 그 다음에 교장 선생님이 졸업생들에게 간단한 축사를 했다. 그는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졸업생들의 찬란한 앞날을 축복하고, 앞으로 다가올 사회 생활에서의 성공을 기원했다. 네덜란드에 건너가 대학에서 공부를 계속할 학생들에게는 무사한 항해와 함께 그들이 네덜란드와 동인도, 그리고 세상에서 유능하고 쓸모있는 학자가 되기를 빌었다. 유럽인 장학사의 축사는 없었다. 그 뒤 순서는 1899년도 통일국가시험의 합격자 발표로 옮겨갔다. 선생님들은 교장 신생님 뒤에 줄지어 있었다. 침묵과 긴장의 순간이었다.
"이제 19세기도 저물어가는 이번 학년을 끝마치면서 동인도의 통일 국가시험을 치른 45명 중 수석 합격자는 바타비아 고등학교 학생이 차지했읍니다. 45명 중 11명은 불합격으로 판정되어, 내년도에는 더 한층 노력을 해야겠읍니다. 차석 합격자는 슬라바야 고등학교에서 나왔읍니다. 이것은 곧 그가 슬라바야에서 수석이라는 뜻도 됩니다."
졸업식장은 갈채 속에 휩싸였다.
나는 급우들의 마음을 생각했다. 각자가 자기가 전 동인도에서 2등, 슬라바야에서는 1등이 아닌가 하고 상상하며 가슴을 두근거리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나 자신도 또한 오랫동안 꿈꾸어 온 일이었다. "전 동인도에서 차석, 슬라바야의 수석, 그 학생의 이름은.,....밍케."
나는 몸이 떨렸다. 예상치도 못한 결과였다.
사실 유럽인의 자녀들보다 높은 성적을 올린다는 것은 쁘리부미 학생으로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는 금기와 같은 것이다. "밍케군 ! "
교장 선생닝이 나를 불렀다.
나는 아직도 일어설 수가 없었다. 곁에 있던 급우가 보다 못해 부축해 주었다.
"밍케군 !"
마푸다 뻬데루스 선생닌이 손짓하며 불렀다. 비틀거리면서 나는 가까스로 일어섰다. 졸업식장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처량한 내 모습을 보고 있을 것이다. 축하의 박수를 보내는 사람은 더 이상 없었다. 이유는 단 한가지 제일 먼저 호명된 것이 쁘리부미였기 때문이다.
선생님들 쪽에서도 박수는 일어나지 않았다. 겨우 희미하게 박수 소리가 들렸는데 그것이 마푸다 뻬태루스 선생님이라는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마 안네리스도 박수를 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이런 자리에 나오는 것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아니 박수는커녕 철부지와도 같은 그 아가씨는 틀림없이 시골 처녀처럼 얼이 빠져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을 것이다. 나는 단상에 올라가 졸업장을 받고 격려사를 들었다. 졸업장을 받는 손이 계속 떨리고 있었다. "침착하게나, 밍케군."
교장 선생님이 조그맣게 말했다.
나는 전천히 걸어서 자리로 돌아왔다. 뒤따르듯이 선생님들 쪽에서 약한 박수가 일어나고 거기에 대한 반동으로 학생 몇 사람, 뒤이어 참석자 몇몇이 박수치는 소리가 들렸다. 내 뒤로 다섯 번째가 슬르호프, 꼴찌는 얀 다페르스테였다. 그 마지막 학생이 자리로 돌아갈 때 가족석에서 유럽인인 다페르스테 목사가 튀어나와 애정어린 포옹으로 그를 맞이했다. 목사의 부인도 마찬가지였다.
경험이 있었다면 안네리스도 그렇게 맞이했겠지만, 그녀에게서는 바랄 수 없는 일이었다.
파티가 시작되었다. 일이 학년 학생들이 "다윗과 밧세바"라는 연극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것은 성서에서 소재를 얻어 어떤 선생님이 각색한 것이라고 했다.
학부형 등의 참석자와 졸업생이 한데 어울려 앉게 되어 안네리스도 내 옆에 앉았다.
연극의 막이 오르기 전에 교장선생님이 우리들 두 사람의 자리로 찾아와 B시에서 왔다는 전보를 건네주었다.
통일 국가시험에 전 동인도에서 차석으로 합격한 데 대한 미리암, 사라, 에르베르 드라크로아로부터의 축전이었다. 아무래도 그들은 당사자인 나보다 먼저 이 결과를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교장 선생님은 친절하게 안네리스와 악수를 나누었다. 교장 선생님의 친절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심으로 그가 모욕적인 말을 하지나 않을까 경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교장 선생님은 진심으로 안네리스를 환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교장선생님, 우리들은 오는 수요일에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읍니다. 교장선생님과 여러 신생님들을 초대하고 싶은데 참석해 주시겠읍니까? 저녁 7시부터입니다"
"그렇게 갑자기 ?"
교장 선생님은 다시 한번, 우리들에게 악수를 청했다.
안네리스는 그의 악수에 쌀쌀하게 응했다. 그녀의 그런 태도는 마르티네 의사의 분석을 상기한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교장 선생닌은 희색이 만면해서 잡고 있던 내 손을 크게 흔들고 나서 회장 안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쪽을 돌아다볼 정도로 크게 손바닥을 쳤다.
"그 일을 지금 여기서 모두에게 발표해도 되겠나?"
"감사합니다, 교장선생님. 물론 상관없옵니다. 구두에 의한 정식 초대로서 말입니다."
"초대장을 만들지 않았나?"
"약간 걱정이 됩니다, 지금까지의 경위가......"
옆에서 얘기를 듣고 있던 마푸다 뻬테루스 선생님도 역시 악수를 청했으나, 그녀는 한 마디도 얘기하지 않았다.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단 한가지 분명한 것은, 문제의 깜빡거림이 빨라지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교장 선생님은 다른 자리로 옮겨 갔다. 무대 위에서는 연극의 시작을 알렸다.
천전히 막이 오르고 바위가 있는 경치가 나타났다. 그것은 이제부터 밧세바가 목욕을 하개 되고, 그 모습을 예언자 다윗에게 들키게개되는 장면일 것이다.
그러다 밧세바는 막이 완전히 올라갔는데도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다윗이 등장할 리도 없다.
사람들은 목을 길게 빼고 미녀 밧세바의 모습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자 밧세바를 대신해서 외쪽 안경을 벗어 든 교장선생님이 나타나 미소 지었다.
사람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교장 선생님도 어쩔수 었었던지 쓴 웃음을 지었다. 아랍인의 옷과 터번이 아닌 외쪽 안경을 손에 든 그 다윗은, 지금부터 알려야 할 일이 있어서 나왔다고 관객에게 양해를 구했다.
연극이 끝나고 나서 발표하게 되면 효과가 없으리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교장 선생님은 우리들의 결혼식 초대를 전달했다. 망설이는 듯한 박수 소리가 일어났다. "선생님과 재학생과 졸업생 이외에는 초대받지 못했으니까 참작하시기를 바랑니다."
와아 하고 회장에 웃음이 터졌다.
"제군들 가운데는 아마 지금 곧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이미 다른 계획을 세우거나 해서 참석할 수 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여러분을 대표해서 내가 솔라바야 고등학교의 교장으로서 내일의 신랑 신부를 축복하고 두 사람의 영원한 행복을 빌겠읍니다. 감사합니다."
교장 선생님은 무대를 내려왔다. 막 그늘에서 무대를 내다보고 있던 밧세바와 엇갈리면서......
결혼 피로연은 처음에는 간소하게 할 예정이었으나 졸업 파티에서 갑자기 손님을 초대하개 되었기 때문에 성대하게 치러야만 했다.
냐이도 그것에 찬성했다. 그녀는 피로연에의 초대가 졸업 파티에서 어떻게 전해졌는지를 안네리스한테서 전해 듣고 매우 기뻐했다.
"밍케, 이 피로연은 졸업 시험에서의 당신 승리를 축하하는 파티이기도 해요, 그렇게 많은 시련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어요. 모든 시련을 당신은 보기 좋게 극복해낸 거예요. "
결혼식을 올리기 며칠 전에 나의 가족을 대표해서 어머니가 우노크로모에 찾아왔다.
냐이는 마치 백년지기라도 만난 듯이 어머니를 환영했다. 어머니는 며느리가 될 안네리스가 마음에 쏙 들었던 모양이다. 결코 며느리 곁을 떠날 수 없다는 듯이 싫증도 내지 않고 안네리스의 아름다움에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부인."
어머니는 얼마 뒤면 아들의 장모가 될 냐이에게 말했다.
"정말 아름다운 처녀로군요. 아마 바누와티 (전설상의 미녀) 보다도 더 아름다울 거예요. 당신이 내 아들을 사위로 맞아 주다니 꿈에도 생각 못할 일입니다. 평생, 아니 저세상에 가서도 잊지 못할 겁니다."
"두 사람은 오래 전부터 서로 사랑하고 있었읍니다. 다만 저로서는 용서를 빌어야 할 일이 있읍니다. 무슨 말씀이냐 하면, 이 아이는 훌륭한 집안의 출신이 아니고 태어난 것은......"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처녀라면 달리 무엇을 바랄 것이 있겠읍니까?"
그날 밤 어머니는 나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아들아, 너는 참으로 행운아다. 저렇게 예쁜색시를 맞이할 수 있다니 말이다. 네 선조님 시내에 저런 미녀가 있었다면 아마 전쟁이 났을 게다."
"설마 어머니는 내가 싸우지 않고 그녀를 손에 넣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시갰지요?"
"아니지. 네 말이 맞다. 너는 싸우고, 그리고 빛나는 승리를 거둔 게 틀림없다."
우리들의 결혼식은 이슬람 양식으로 거행되었다. 이슬람 법에 따라 다르삼이 입회인이 되었고, 안네리스의 후견인 역할을 했다.
결혼식이 시작된 것은 아침 9시 정각이었다. 관습대로 감사의 뜻을 나타내기 위해 우리들은 어머니와 마마 앞에 무릎을 꿇고 공손하게 머리를 숙였다.
두 사람은 우리들의 절을 받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우리들을 축복했다.
안네리스도 울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는 이 경사스러운 날에 행복을 함께 나눌 아버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약간의 서운함을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어머니와 마마는 서로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려 놓고, 젖은 눈으로 마주보며 끌어안았다.
감상, 그리고 눈물. 그것은 인간의 원초적 감정의 표현이다.
동시에 그것은 감정의 표현은 지난날의 아픈 상처와 고통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 하면 인간은 그런 대 지위나 체면을 완전히 떠나 본디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뒤이어 집안끼리의 조촐한 축하연이 베풀어졌다. 본격적인 피로연은 그 다음에 있다. 농장 안의 각 마을 주민에게 있어 우리들의 결혼식은 성대한 축제와도 같은 것이었다. 벼나 잡곡의 건조장에는 천막이 쳐지고 대연회장으로 꾸며져 있었다.
인부들에게는 모두 유급 휴가가 주어졌다. 가축을 돌보느라 도저히 쉴 수가 없는 인부들에게는 세배의 임금이 주어졌다.
소가 다섯 마리, 300마리의 닭이 사라졌다. 그리고 2025개의 계란, 온갖 유제품이 주방에 쌓였다.
그리고 마차들은 모두 오색의 색종이로 장식되었다. 이렇게 성대한 결혼 피로연은 우노크로모의 주민에게는 처음보는 것이었다.
언젠가 안네리스가 나에게 이렇게 얘기한 적이 있다.
"마마는 결혼 피로연을 위해 내가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아끼지 않을 거예요. "
또 이렇게도 말했다.
"마마는 딸의 결혼식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기뻐해 주는 것을 보고 싶어해요. 그러니까 아무리 많은 비용이 들어도 결코 후회하지는 않을 거예요."
안네리스도 마마도 금전상의 도움 같은 것은 일체 요구하지 않았다.
"더 이상 우리들이 무엇을 바랄 것이 있겠읍니까? 안네리스는 이미 미래의 남편에게서 모든 것을 받지 않았읍니까?"
마마는 그렇게 말했다.
"그래도 꼭 돕고 싶다면 아직 밍케에게서 받지 못한 것, 내가 죽을 때까지 나에 대한 절개를 지키겠다는 약속, 그것을 약속해 주세요. "
안네리스는 말했다.
나는 그것을 결혼식에서 안네리스에게 맹세했다. 오후 5시, 내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얀 다페르스테였다. 약간 유행에 뒤떨어진 것이기는 했지만, 말쑥한 고급 양복을 입고 있었다, 그는 주저하며 방안으로 들어왔다. "미안해, 밍케. 너무 일찍 왔나봐. 사실은 도울 일이 있을까 해서 일부러 일찍 왔어."
그는 그렇게 말하고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한숨을 섞어가며 이렇게 말했다.
"정말 자네는 재수가 좋은 친구야. 바라는 것은 모두 손에 넣었으니까 말일세. 무슨 일이든지 마음먹은 대로 되고, 몇년 있으면 부빠티가 될테고 말이야."
"운이 나쁜 녀석이 운명을 한탄하고 있는 말투로군 그래." "자네 말 그대로야. 사실은 파파와 마마에게서 도망쳐 나왔어. 배가 유럽을 향해 출항한 뒤, 갑판에서 바다로 뛰어내려 해안까지 헤엄쳐 왔다네."
"거짓말. 멋진 양복을 입고 있으면서, 뭘?"
"이 옷은 친구한테서 빌린 거야. 친구라고 해도 동급생은 아니지만."
"모두가 유럽을 동경하고 있는데 자네는 왜 싫다는 건가?"
"유럽에는 잠깐 들르는 거고, 그 다음에 수리남(남미의 네덜란드 식민지)으로 건너갈 예정이었어. 물론 내가 한 짓이 잘못이라는 것은 알고 있네. 양자로서 얼마나 깊은 은혜를 입고 있는지도 알고 있네."
"자네가 자신을 그런 식으로 꾸짖는 것을 벌써 여러번 들었어." "미안해. 이렇게 경사스러운 날에 재수 없는 소리를 해서. 하지만 밍케, 나를 도와 주어야겠어. 나는 자바를 떠나고 싶지 않네. 나는 네덜란드인도 아니고 혼혈아도 아니야."
"그 얘기도 몇번 들었네."
"그럴거야. 그런데 무엇보다 다페르스테라는 이름이 싫어."
다페르스테 목사 부부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어릴때 양자로 입적되어 세례를 받고, 부부의 성인 다페르스테를 물려받았던 것이다.
그 뒤로 그는 얀 다페르스테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졌다. 그 이전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그는 모르고 있었다. 다페르스테 목사는 법원을 통해 그를 정식 양자로 삼는 수속을 취하려고 했다. 그런데 네덜란드 민법에는 양자에 관한 규정이 없었기 때문에 목사의 노력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그 결과, 얀 다페르스테라는 이름은 인정을 받았지만 법적으로는 끝내 인지되지 않았다. "나는 어릴 때부터 겁장이였지. 그것은 자네도 알고 있을 거야, 나에게 있어서 다페르스테라는 이름은 언제나 고문 같은 것이었네."
그렇다, 그의 겁장이 기질은 동급생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들 가운데는 다페르스테(용감한자)를 라프스테(비겁한자)로 바꿔 부르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그러니까 만일 그의 얘기가 사실이라고 한다면, 끊임없는 고문처럼 느껴온 이름에서 해방되기 위해 갑자기 그는 '용감한 자'로 변신한 셈이 된다.
아뭏든 바다로 뛰어들어 양부모 곁을 떠나온 것이다. "그럼, 지금은 누구 집에 머물고 있나?" "여기저기 다니며 신세를 지고 있어. 고등학교의 졸업장을 내세워 슬라바야에서 취직을 하고 싶네, 다만 문제는 졸업 증서의 이름이 다페르스테로 되어 있다는 걸세. 밍케, 나는 평생 그 이름을 짊어지고 살아가야만 할까?"
"이름은 바꿀 수가 있어. "
"그건 나도 알고 있어. 지난 1년 동안 어떻게 하면 개명할 수 있는지 수속 방법을 연구해 왔네. "
"수속? 어떻게 하는 건데 ?"
"이사관에게 서면으로 신청하는 거야. 그러면 그가 총독에게 그것을 보내지."
"그럼 그렇게 하면 될 것 아닌가? 왜 안하는 거지 ?"
고등학교 졸업생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멍청한 눈으로 얀은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혀를 차더니 얼굴을 돌렸다. "할 수 없는 거야? 정식 신청서가 있을 텐데."
"문제는 인지대금이야, 밍케. 인지대금이 너무 비싸, 신청서에만 일 길더 반의 인지대금이 필요하네. 내가 필요한 최종 결정서를 받을 때, 또 일 길더 반을 내지 않으면 안돼. 여러 가지로 생각한 끝에....."
"그런데, 왜 신청하지 않았지 ?"
"그만큼 얘기했으면 알아들어야지. 도대체 어디서 삼 길더를 구한다는 말인가? 그밖에 우표값도 필요하다네." "돈이 필요하다면 왜 진작 그 말을 하지 않았지 ? 그 정도는 간단히 얘기할 수 있었을 텐데." "미안해. 이 경사스러운 날에 이런 얘기를 자네에게 하는게 도리가 아닌 것 같아서 그랬네."
"내 행운을 원망하고 있지는 않겠지 ?"
"천만의 말씀. 솔직이 말해서 나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네."
"그렇다면 나와 행운을 나누어 갖도록 하지." "그래서 나도 이렇게 찾아오지 않았겠나?"
"그런 말이 아니고 얀, 내 말을 잘 들어. 이 피로연이 끝나고 나면 마마는 사업을 확장하게 될 거야. 향료 분야에 손을 댈 계획일세. 자네에게 뜻이 있다면 여기서 일을 배울 수가 있어. 해 볼 생각 없나? 개명의 최종 결성서가 나올 때까지 말이네, 어때 ?"
"고마와, 밍케. 자네는 항상 친절하고 내게는 잘 해 주었어. 최종 결정서를 받으려면 먼저 신청서를 내야 하는데, 유감스럽게도 나는 아직 신청서도 작성하지 못했네."
"그 새로운 회사의 책임자로는 후양도르넨보스라는 혼혈아가 맡기로 되어 있네, 나중에 소개해 줄께. 모든 것을 내게 맡겨 두게. "
얀 다페르스테는 내 손을 잡고 아무 말도 없이 머리를 깊숙이 숙였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그 동안 나하고 얘기다 하지." "고맙네, 밍케. 사실은 또 한 가지 부탁아 있네. 내 얘기를 들어서 대충 사정을 알겠지만, 일 주일 가량 머물 장소와 슬라바야를 돌아다닐 교통비가......"
그때 내가 옷 입는 것을 거들어 주기 위해 어머니가 방으로 들어왔다. 어머니는 그 일을 둘러싸고 쟁탈전을 벌이고 온 참이었다.
자랑스러운 아들이, 지금부터 결혼 피로연에 참석하려는 데 다른 사람이 옷을 입혀 준다는 것은 어머니로서 용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오른손에 종이 상자, 왼손에는 바구니를 들고 다가왔다. 바구니에는 가지각색의 꽃이 끈에 매달았거나 그냥 담겨 있었다.
어머니는 경멸하는 듯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얀 다페르스테의 태도에 당황한 모양이었다. "우리 어머니야, 얀."
나는 소개했다.
다페르스테는 억지로 웃는 표정을 짓고 공손하게 절을 했다.
"어머니는 네덜란드어를 모르시네. "
나는 주의를 주었다.
얀 다페르스테는 유창하게 자바어 경어로 얘기를 했다. 나는 어안이벙벙했다. 그는 같은 고등학교의 졸업생이고, 목사의 아들이라고 어머니에개 소개했다.
"그 전에는 목사의 양자였읍니다."
얀이 내 말을 바로 갑았다.
"지금부터 이 아이의 옷을 입혀야 하니까 실례하겠어요."
"저도 돕겠읍니다, 어머님."
"그건 고맙군요. 하지만 괜찮습니다. 이것은 어머니로서 아들에게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일이니까요. 혼자서 하고 싶습니다. 자리를 비켜 주시겠어요?"
얀 다페르스테는 애걸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가 지쳐 있고 잠을 못 잤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몹시 허기져 있을 것이다. 나는 표경만 보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그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종이를 한장 꺼내 그의 시중을 들도록 다르삼에게 지시 사항을 썼다.
"이걸 다르삼을 찾아서 전해 주게. "
얀 다페르스테는 종이쪽지를 받아들고 방을 나갔다. 나는 방 안의 가스등을 켰다. 그것은 6시가 되었다는 표시였다. 다르삼이 관리하고 있는 안채 뒤쪽의 돌방에 설치된 가스는 이미 열려 있었다. 방안이 밟아졌다.
어머니는 나의 얼굴, 목, 가슴, 손을 이름도 모르는 액체로 문질렀다.
"옛날 같았으면,"
내가 어릴 때처럼 어머니는 얘기를 시작했다.
"저런 미녀를 며느리로 맞으려면 수없이 많은 전쟁을 치렀을 게다. '왕궁은 멸망시키는 것, 공주는 약탈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듯이 옛날에는 그것이 예사로운 일이었단다. 지금은 세상이 평화로와서 우리들이 어렸을 때와는 다르지. 하물며 내 할머니가 어릴 때와는 비교도 할 수가 없단다. 새상이 옛날보다 평화로와진 것은 모두가 네덜란만인을 무서워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사람들은 얘기하고 있다.
확실히 네덜란드인은 네 선조들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아무리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어도 네덜란드인은 과거에 이 나라를 지배하던 왕들과는 달리, 남의 아내나 딸을 약탈하지는 않는다. 네가 만일 그 시대에 살았었다면 네 아내, 이 아름다운 미녀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일년 내내 싸움터에 나가 있지 않으면 안되었을 게다. 얘야, 그녀는 선녀보다 더 아름답더구나. 이런 며느리를 얻어서 나는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른다. 이런 행복을 맛보는 것도 모두 네 덕이구나."
"어머니 며느리에게는 전혀 자바인다운 데가 없는 걸요."
"너는 그녀에게 만족하고 있지 ? 지금은 우선 기쁘게 생각해야만 한다. 하지만 굉장한 미녀니까 잠시도 눈을 떼서는 안된다. 너무나 아름다와서 신들도 가만 있지 않을 것이다." 어머니는 쉬지 않고 내 몸을 문지르며 얘기를 계속했다. "너는 운이 좋구나 ! 선조들처럼 전쟁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
"어머님."
"아아, 저 며느리를 B시로 데리고 돌아갈 수 있으면 좋으런만. 온 마을 사람들이 뛰어나와 그녀를 환영할 것이다. 어떠냐? 한번 B시에 돌아오지 않겠느냐?"
"무리한 말씀입니다."
"역시 그렇겠지. 그렇다면, 내가 양보해서 너와 며느리와 손자의 얼굴을 보러 이곳으로 찾아오도록 해야겠구나." "아버지가 반대하실 거예요."
"그런 것은 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다. 너는 네 아내가 삭치(결혼을 하게 되면 이를 갈아서 고르게 하는 것)하는 것을 반대하느냐? 그녀의 비어져 나온 이를 그냥 둘 셈이냐?"
"아내의 이는 그대로 놓아 두도록 해 주세요, 어머니."
"유럽 사람들처럼 날카로운 채로 내버려 두라고?" "왜 어머니는 내몸을 이렇게 문지르는 거지요? 마치 내가 한번도 목욕을 하지 않은 사람처럼 말이에요." "저런 ! 오늘은 네 결혼식날 아니냐? 이 경사스러운 날에 나는 신의 아들처럼 빛나는 네 모습을 보고 싶단다. 나중에 후회하지 않도록 말이다."
"신의 아들처럼 보여서 어떻게 한다는 겁니까?"
"무슨 소리를 하느냐 ! 신의 아들처럼 꾸미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은 너 때문만은 아니다. 이먼 혼례식에는 네 선조님들도 모두 오셔서 축복을 내리신단다. 이 어미도 언젠가 네 손자나 아들의 결혼식에는 저 세상에서 찾아오게 되겠지. 손자의 경사스러운 모습을 보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생각해 봐라. 피로연의 윗자리에 앉은 자기 손자가 자바의 사토리오 같지 않다면 나는 어떤 심정이 되겠느냐? 부모가 제대로 돌보지 못해서 손자가 자바인답지 않다면 저 세상에 가서 나는 뭐라고 해명을 해야 한단 말이냐?"
"네덜란드인의 조상들도 이 세상에 내려와 그들 자손의 결혼식에 참석할까요?"
"저런 ! 왜 너는 네덜란드인에게 신경을 쓰지 ? 너는 아직 완전한 자바인이라고 할 수가 없구나. 선조님들에 대한 공경이 부족하구나.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 보면, 너는 문필가로 활약하고 있다는데, 밤이면 밤마다 너를 생각하면서 어머니가 노래할 수 있는 시가를 너는 어디에 쓰고 있다는 게냐?"
"저는 자바어로는 쓰지 못합니다, 어머니."
"네가 아직도 자바인이라면 언젠가는 자바어로 쓸 수 있을 것이다. 네덜란드어로 쓴다는 것은 이미 자바인이기를 원하지 않고 있기 메문이다. 너는 네덜란드인을 위해 쓰고 있는 거야. 어째서 너는 그렇게 그들을 의식하는 거냐? 그들은 자바의 땅에서 얻은 걸로 마시고 먹고 있다. 하지만 너는 네덜란드의 땅으로부터 아무것도 얻고 있지 않아.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들에게 그렇게 신경을 쓰느냔 말이다?"
"네, 어머니."
"뭐가 네냐? 너의 선조님, 자바의 왕후들은 모두 자바어로 글을 썼단다. 혹시 너는 자바인이라는 것이 부끄러운 게 아니냐? 네덜란드인이 못된 것이 부끄럽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냐?"
어머니의 말에 대답할 정도로 나는 어리석지 않았다. 부드러운 말투이기는 했으나, 어머니의 말에는 저항할 수 없는 근엄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누구나가 내게 요구를 한다. 지금 어머니 또한 그렇다. 내가 어머니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는 것은 어머니가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어머니는 나보다는 오히려 선조를 향해 나를 용서해 주도록, 사랑하는 자식을 용서해 주도록 몇번이고 얘기했다.
나의 선조여, 어머니가 애원하고 있읍니다. 저에게 화를 내서는 안됩니다.
아아, 어머니,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 당신은 단 한번도 내게 무리하게 강요한 적이 없읍니다. 말로도 힘으로도 나를 괴롭히신 적이 없읍니다.
"자, 이 바디크 사롱을 입어 봐라. 이 바티크는 오늘의 너를 위해 내가 만든 것이다. 몇년 동안이나 상자 속에 보관하고, 매주 쟈스민 꽃을 뿌렸단다. 재판에 관한 신문 보도를 사람들한테서 들으면 즉시 나는 이 바티크를 깨끗하게 했다. 하나는 네 것이고, 또 하나는 신부 것이다. 자, 바티크의 만듬새를 살펴보아라. 그리고 몇년 동안이나 뿌린 쟈스민 향기를 맡아 보거라."
어머니의 재촉대로 나는 바티크 사롱을 살펴보고 냄새를 맡아 보았다.
"훌륭합니다, 어머니. 굉장히 좋은 냄새가 납니다. 실에까지 쟈스민 냄새가 스며 있읍니다."
"저런 ! 바티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고 내가 얼굴을 찡그리는 것을 보고 일부러 눈을 돌렸다. "내가 이 손으로 남색과 빨간색으로 물을 들인 것이란다. 그 염료도 내가 만들었다. 다시 한번 맡아 봐라. 소가(역자주 : 바티크를 염색하는 데 사용하는 식물성 적색 염료)와 좋은 향기가 아직 남아 있을 것이다."
어머니는 바티크를 내 코앞에 내밀었다.
"정말 좋은 냄새로군요, 어머니 "
"거짓말도 꽤 잘 하는구나 ! 나도 기쁘다. 이 늙은이를 거짓말이라도 해서 기쁘게 해주니까 말이다."
어머니는 얼굴을 찡그린 나에게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신부와 어머니는 바티크를 만들 수 없을 것 같아서 내가 모든것을 만들기로 했다. 아들아, 내가 어렸을때는 바티크를 만들 수 없는 여자는 여자로서 실격이었단다."
"어머니의 바디크는 매우 섬세하고 올이 가늘군요. 짜는 데 한달은 걸리겠지요?"
"두 장 짜는 데 두 달이 걸렸단다. 오늘 입게 하려고 특별히 만들었으니까, 피로연이 끝나고 나면 버리든지 마음대로 하려무나."
"죽을 때까지 소중히 간직하겠어요." "정말 말이 많이 늘었구나. 꽃장식도 내가 만들었단다. 이 계도(역자주 : 악마를 비방한다는 칼)는 네 할아버지의 유물인데, 몇백 년이나 된 유서깊은 물건이란다. 마타람보다도 파잔보다 더 오래된 것이다. 마자 파이트 시대 (1293--1528년)의 것이란다." "어머니는 어디서 그런 것을 배우셨지요?"
"옛날 할아버지 집에 계도가 있었던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 할아버지 얘기를 너는 들은 적이 없지 ? 몹쓸 손자로구나. 아마 너는 네덜란드인이 말하는 것밖에는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이 계도는 네 아버지를 빼놓고, 선조 대대로 사용해 오던 것이다. 그리고 너를 위해서 할아버지가 소중하게 간직해 둔 것이다. 아아, 너하고는 대체 어떻게 얘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정말 답답하구나, 얘야, 무지한 이 어머니를 용서해라. "
"어머니 ! "
"네덜란드인은 아무도 계도를 만들 수가 없다. 앞으로도 그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열어 봐라. 그것을 만든 명장의 솜씨인 무늬가 보일 것이다."
그때 나는 사롱을 입고 있는 도중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다.
"죄송스럽지만 어머니가 계도를 빼서 보여 주세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너는 이미 자바인이 아닌 것 같구나. 이 계도를 부엌칼과 같이 취급하고 있구나?"
어머니의 뺨에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 다는 황급히 사롱을 몸에 걸치고 어머니 앞에 엎드렸다. "용서하세요, 어머니. 어머니를 속상하게 해드릴 생각은 없었읍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어머니는 얻굴을 돌리고 눈물을 닦았다.
"바보같은 소리 하지 마라. 아무리 변했다고 해도 정도가 있는 것이다. 도대체 언제부터 계도를 칼집에서 뽑는 것이 여자에게 허용되었느냐? 계도는 남자만의 것이다. 여자를 위한 단검은 계도라고 하지 않는다. 이것은 너도 만들지 못하는 것이다.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은 존경하지 않으면 안된다, 나중에 거울을 들여다 봐라, 허리에 계도를 차면 너는 딴 사람처럼 보일 게다. 선조님을 닮게 되어 본디 네 자신으로 되돌아가게 될 것이다."
어머니는 그 다음에도 쉴새없이 얘기를 계속했다. 그리고 이윽고 옷입는 것이 끝났다.
"그럼, 그곳 마루에 앉거라. 머리를 숙이고."
어머니는 독촉했다.
지금부터 무엇이 시작되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 피로연에 임하기에 앞선 훈계였다. 그 밖에 다른 것이 있을 수 없었다. 드디어 시작되었다.
"너는 자바의 사토리오, 무사의 자손이다. 왕국의 건설자, 파괴자들의 자손이다. 네게는 사토리오의 피가 흐르고 있다. 너는 용감한 무사인 것이다. 자바 무사의 필요 조건이 무엇인지 말해 보아라."
"저는 모릅니다, 어머니."
"저런 ! 너라는 인간은 무엇이든 네덜란드인에 관한 것밖에는 믿지를 않는구나. 자바 무사에게는 다섯 가지 필요 조건이 있다. 위스모, 와니토, 투롱고, 쿠키로, 추리고의 다섯 가지다. 기억할 수 있겠느냐?"
"물론 기억할 수 있읍니다."
"의미는 알겠느냐?"
"네, 압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도 알고 있느냐?"
"모릅니다."
"너는 자신의 혈통도 모르는구나. 잘 들어라. 그래서 장차 네 자식들에게도 이것을 전해야 한다."
"네, 알겠읍니다."
"우선 첫번제 위스모, 집이다. 집이 없는 사토리오는 있을 수 없다. 그런 사람은 단순한 부랑자에 지나지 않는다. 집은 사토리오가 출발하는 곳이고, 돌아오는 곳이다. 단순한 집이 아니다. 그것은 그곳에 사는 사람과의 상호 신뢰의 장소인 것이다. 벌써 지루하니?"
"재미있게 듣고 있읍니다."
어머니는 내 귀를 잡아당겼다.
"하기야 너는 부모의 얘기를 들은 적이 없는 아이니까."
"아닙니다. 열심히 듣고 있읍니다."
"두 번째 조건은 와니토, 여자다. 여자가 없는 사토리오는 남자로서의 본질에 어긋나는 것이다. 여자는 생명과 생활의 상징이고 풍요, 번영, 안녕의 상징이다. 단순하게 남편에 대한 아내만의 존개는 아닌 것이다. 여자는 만물의 중심으로 생명도 생활도 그곳에서 시작하고, 그곳을 중심으로 퍼져 나가는 거란다. 너도 늙은 어머니를 그와 같은 존재로서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네게 딸이 태어나면 그런 생각을 갖고 키워야 한다." "알겠읍니다. "
"네덜란드인은 그런 것을 전혀 모른다. 하시만, 너는 꼭 알아두어야 한다. 너는 자바인이니까."
"네, 어머니. 그들은 그런 것을 전혀 모릅니다."
"세 번째는 투롱고. 말이다. 말은 너를 어디에나 태워다 주는 도구이다. 그것에 의해서 너는 학문이나 지식, 능력, 실력, 기량, 기술과 같은 것, 그리고 마지막에 진보에 이르는 것이다. 말이 없으면 멀리까지 같 수 없고 따라서 안목이 좁아진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듣고 있었다. 그것이 수백 년에 걸친 경험속에서 태어난 지혜라는 것도 이해할 수가 있었다. "네 번째는 쿠키로, 새다. 그것은 아름다움이나 즐거움의 상징, 생명과는 직접 관계가 없는 것, 다만 개인의 내면의 충족에 관계하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그것 없이는 인간은 영혼을 갖지 못한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다섯 번째는 추리고, 계도이다. 그것은 경계심, 대비, 용기의 상징이고, 앞의 네 가지를 지키는 무기이다. 계도가 없으면 재난이 닥쳐왔을 때, 네 가지는 파괴되고 사라지고 말 것이다. 어떠냐? 고등학교 졸업생님 ? 이런 것은 학교의 선생님에게서도 배우지 못했지 ? 그 네덜란드인들에게서 ? 너는 자바의 무사로서 이제 모든 것을 알았을 것이다. 이 다섯 가지 조건 가운데 네게 부족한 것이 있다면 스스로 손에 넣어야한다. 다섯 가지 모두를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선조님의 말씀에 너는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된다. 선사 다른 것은 따르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 다섯 가지 조건만은 완벽하게 갖추지 않으면 안된다. 아들아, 지금 듣고 있는 거냐? "
"네, 듣고 있읍니다. "
"그럼, 지금부터 명상을 해라. 박해와 중상, 진투로부터 지켜 달라고 선조님에게 보살핌과 용서를 구하는 거다." 나는 여전히 마룻바닥에 앉아서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그런 자세로는 안된다. 똑바로 정좌를 하고 앉아라. 어깨의 힘을 빼고 손을 가만히 무릎에 얹어라. 이 한 순간 단 한번만이라도 진정한 자바인이 되는 것이다. 좀더 깊이 머리를 숙여라."
그때까지 어머니의 명령과 요구를 따라오던 나는 보지도 알지도 못하는 선조님에게 순순히 용서를 빌었다. 그 순간 얼굴을 생각해낼수도 없는 선조를 대신해서 그 뚱뚱보의 얼굴이 얼핏 뇌리를 스쳤다.
어머니는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사슬 모양으로 엮은 쟈스민 꽂장식을 내 목에 건어 주었다, 조심스럽게 어머니는흐느껴 울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 어머니는 조그만 화환을 내 양쪽 손바닥에 얹고 아무 말없이 내 손가락을 움직여 그것을 잡게 했다. 나도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선조들의 얼굴은 나의 머릿속에서 형태를 이룰 사이도 없이 사라져 갔다. 그 대신 심한 격정의 소용돌이가 가슴을 저리게 하며 더욱 눈물을 쏟아지게 했다.
"이 아이에게 가호를, 당신들의 피를 이어받은 이 아이에게 가호를, 그를 재난에서 지켜 주시고 박해와 중상과 질투에서 지켜 주십시오. 이 아이는 제가 가장 사랑하는 자식이고 제가 빈사의 고통끝에 낳은 아이 입니다." "어머니 !"
나는 마루에 몸을 던지고 어머니의 무릎을 끌어안았다.
"나는 이 날을 맞기 위해 오늘날까지 살아 왔읍니다. 이 아이는 당신들의 피를 이어받은 자손입니다. 이 아이를 위대함과 영광에 가까이 가도록 해 주십시오. "
나는 어머니의 손이 내 등에 얹혀지는 것을 느꼈다. 이미 어머니는 울고 있지 않았다. 어머니는 나의 자세를 바로잡고 목에 걸린 꽃장식과 손으로 쥔 꽃의 위치를 고쳐 주었다. 그리고 쿠바야 옷자락으로 내 눈물을 닦아 주었다.
"명상을 해라, 얘야. 나의 도움을 빌지 말고 혼자서 명상을 해라."
손님들이 꼬리를 물고 도착하여 응접실과 거실 또는 야외에 설치된 가설 회장을 메워 갔다. 그때도 나의 마음은 조금 전에 거행된 의식에서 어머니가 보여준 행동에 깊은 감명을 받아 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신랑이 피로연 직전에 그와 같은 의식을 받는 것을 나는 그때까지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어머니 자신의 즉흥적인 생각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가족으로부터는 소외당하고 있으나, 어머니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 아들을 위한 특별한 의식이었을 것이다.
특별히 초대한 콤벨이 7시 6분 전에 도착했다. 그는 자신에 찬 발걸음으로 성큼성큼 나에게 다가오더니 손을 내밀고 친근하게 악수를 했다.
그 다음 안네리스에게 인사를 하고 다시 내게로 돌아와서 이렇게 말했다.
"밍케씨, 이 결혼으로 인해서 외야석의 말많은 친구들은 침묵하겠지요. 그뿐이 아닙니다. 당신은 자신이 시작한 일에 자신이 결론을 지었읍니다. 앞으로 우리들은 잘 협력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
"물론입니다, 콤멜씨. 우리들은 좋은 동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는 활발한 성격의 혼혈아였다. 머리 모양과 높은코만이 유럽인을 닮았을 뿐 쁘리부미와 다름없었다. 정신도 쁘리부미였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나이는 나보다 열 살 세에서 열 다섯 정도 많을 것이다. 활동적인 성격과 생김새에서도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을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쟝 마레와 메이 부녀, 그리고 테린하 부부가 4륜 마차로 도착했다. 마푸다 뻬데루스 선생님과 급우들도 똑같이 4륜 마차를 타고 찾아왔다.
마르빈 네이만과 부인은 자가용 마차로 왔다. 교장 선생님과 다른 선생님들은 한 사람도 오지 않았다. 그들은 축사를 써서 마푸다 뻬데루스 신생님 편에 보냈을 뿐이다.
7시 1분 전에 미리암, 사라, 에르베르 드라크로아가 보낸 축전이 도착했다. 도대체 그들은 어디서 오늘 결혼식 얘기를 들었을까? 또 다시 나는 궁금해졌다.
예상했던대로 로베르트 슬르호프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의 불참은 급우들 사이에 흥미로운 얘깃거리가 되었다. 그리고 얀 다페르스테가 자진해서 손님 접대를 맡아 대활약을 보였다.
내 손님만해도 상당히 많았다. 그 가운데는 얀 다페르스테를 제외하고 쁘리부미는 없었다.
마마의 거래처 손님도 계속 도착했다. 몇개월 전에 그녀를 일약 법정의 스타로 만들었던 재판이 오히려 마마의 사업에 선전 효과를 가져다 준 것 같았다.
달변가인 마르티네 의사가 피로연의 사회를 맡았다. 8시 정각에 그는 유창한 연설을 시작했다. 그는 처음에 나와 안네리스의 사랑 이야기를 소개했다. 그것은 그가 알고 있는 어떤 연애 소설에도 나오지 않는 숱한 우여곡절 끝에 맺어진 사랑이야기로서 한편의 소설로도 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마르티네 의사는 말했다. (내가 나의 체험을 이 노트에 기록한 것도 바로 그때 마르티네 의사의 연설이 동기가 되었다.) "이 이야기는 두 번 다시 없을 특별한 이야기입니다."
마르티네 의사는 말했다. 말주변이 좋은 의사는 청중을 한순간 긴장시키는가 하면, 다음 순간에는 그들을 폭소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에 가서는 반드시 손짓을 섞어가며 강조했다.
다만 말레이어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는 사람도 많았던 것이 유감이다.
우리들의 사랑 이야기를 모두 얘기한 뒤 마르티네 의사는 생각지도 않았던 것에 화제를 돌렸다. "여러분. 행복해 보이는 신랑신부 위에 결려 있는 그림을 보아 주십시오."
웅변가와 같은 멋진 제스처로 그는 우리들의 머리 위에 걸려 있는 마마의 초상화에 참석자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저 그림은. "
마르티네 의사는 설명하기 시작했다.
"어떤 총명한 여성, 뛰어난 쁘리부미 여성, 그렇습니다. 신부의 어머니이며 신랑의 장모인 냐이 온트솔로라는 분의 초상화입니다. 참으로 그녀는 훌륭한 사람이며 명선장입니다. 그녀의 조타술이면 배는 난파하는 일이 없이 항해할 수 있읍니다. 오늘 이러한 경사를 맞이하게 된 것도 선장으로서의 그녀의 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처녀의 찬란한 아름다움과 젊은 시인의 풍부한 재능이 이렇게 맺어진 것은 도저히 그녀의 존재를 빼놓고는 생각할 수가 었읍니다. 두 사람은 앞으로 이 선장의 도움으로 힘을 합하여 빛나는 인생 항로를 항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저 훌륭한 초상화의 작가가 누군지 알고 계십니까? 저 그림을 그린 사람은 어느 천재 화가입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화가가 아닙니다. 그림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화가가 모빌의 영혼을 참으로 잘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녀의 아름다움, 위대함, 고결함이 유감없이 나타나 있읍니다. 나의 이 비평은 틀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쟝 마레씨 ? 그렇습니다. 참석하신 여러분, 저 초상화를 그린 것은 예술 분야에서 위대한 전통을 갖는 나라 프랑스 출신의 화가입니다. 쟝 마레씨, 일어나 주십시오." 테린하가 쟝 마레를 부축해서 일으키는 것이 보였다. 참석자들은 우뢰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쟝 마레는 부끄러운 듯이 얼굴을 붉히고 곧 자리에 앉았다.
마르티네 의사의 그 짧은 연설은 식장을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바꾸어 놓았다. 동시에 그것은 마마와 쟝 마레를 알리기 위한 것처럼도 생각되었다.
내가 앉아 있는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 아래 모두 검정색으로 차려 입은 다르삼이 혼자 있는 것이 보였다. 짙은 콧수염이 뺨까지 뻗쳐있었고, 눈은 경계의 빛을 띠고 쉴새없이 주의를 살피고 있었다.
항상 가지고 다니는 긴 칼은 보이지 않았으나 검은 웃옷 밑에 단검이 몇 자루 숨겨져 있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나의 장모인 냐이 온트솔로는 우리들의 자리 뒤쪽에 쳐진 천막 그늘에 앉아서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어머니는 며느리 곁에 앉아서 공작 깃털로 만든 부채를 부치며 쉴새없이 바람을 보내주고 있었다.
천막 그늘에서는 테린하 부인이 여자 손님들의 접대를 맡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 수록 나와 안네리스 앞에는 축하 선물들이 자꾸만 쌓여 갔다. 나중에는 누가 보낸 것인지 구별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또 우리 양쪽 옆에는 화환이 차츰 줄을 이었다. 오후 8시, 동부 자바의 가무란 소리가 들려 왔다. 그것은 타유브의 반주에 사용되는 것으로, 마을 사람들의 향연이 시작된 것을 알리고 있었다. 이따금 환성도 들려왔다. 이미 다르삼의 부하들이 싸움이나 혼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경계를 펴고 있었다. 야자술이 준비되고 마을사람들은 쉴새없이 마셔대기 시작했다.
9시 반이 되자, 손님들은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가장 면저 자리를 뜬 것은 급한 환자가 생겼다는 전갈을 받은 마르디네 의사였다.
그 뒤에 곧 한 젊은이가 도착했다. 검은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입고 머릿기름을 바르고 빗으로 정성들여 빗은 머리가 번쩍였다.
화려한 손수건이 가슴 주머니를 장식하고 황금 사슬이 조끼 주머니에 금시계가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었다. 돌아갈 준비를 서두르는 손님들 사이를 젊은이는 가슴을 활짝 펴고 나와 안네리스가 앉아 있는 자리를 향해 그는 똑바로 걸어 왔다. 그는 다름아닌 로베르트 슬르호프였다.
그는 매우 정중하게 나에게 악수를 청하고 축하 인사를 했다. 그리고 안네리스를 향해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미안합니다, 마담. 늦었읍니다."
"로베르트, 자네가 와 주어서 정말 기쁘네."
나는 반갑게 말했다.
"지금까지의 일은 용서해 주게, 밍케. "
그는 마치 나이 많은 어른을 대하는 것처럼 정중한 태도를 버리지 않고 말했다. "자네 부인에게 기념 선물을 드리고 싶은데 괜찮겠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로베르트 슬르호프는 굉장히 큰 다이아몬드가 박힌 금반지를 꺼냈다. 그리고 안네리스의 손에 반지를 끼워주고 손에다 키스했다. 그런 다음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약속을 어기지 않네, 밍케. 자네에게 매우 깊은 찬사와 경의를 표하네. "
그는 그렇게 말하며 분홍색 리본이 달린 작은 상자를 내게 건네주었다.
"이것은 오늘의 결혼식을 기념하기 위해서 자네에게 주는 선물이네. 언제까지나 행복하기를 빌겠네."
"여러 가지로 신경을 써 주어 고맙네."
"사실은 나도 이 기회에 작별 인사를 하고 싶네. "
그는 힐끗 안네리스를 곁눈질했다.
"유럽으로 건너가게 되었네. 진학해서 법률 공부를 할 예정이야."
"항해가 무사하기를 바라네. 그리고 성공적으로 공부를 마칠 수 있도록 빌겠네. "
그리고 로베르트 슬르호프는 올 때처럼 가슴을 펴고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돌아가는 친구들 틈에 끼었다.
눈에 눈물을 머금은 마푸다 뻬테루스 선생님이 작별인사를 하러 왔다. 그녀는 내 손을 꼭 쥐었다. "앞으로 3년 동안 당신이 좀더 성숙해가는 모습을 내 눈으로 보기를 얼마나 원했는지 몰라요. 하지만 지금은 불가능하게 되어 버렸군요 언젠가 당신들 두 사람이 유럽을 방문하게 되면 잊지 말고 내 주소로 연락해 줘요. "
그녀는 종종 걸음으로 돌아갔다.
테린하 부부와 쟝 마레 부녀는 돌아가지 않았다. 그들은 우노크로모에서 자고 가기로 했다. 얀 다페르스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층의 신랑신부 방으로 선물을 부지런히 나르고, 보낸 사람의 이름과 주소 목록을 만드는데 바빴다. 선물 가운데는 드라크로아 일가의 선물도 있었다. 도대체 누가 그것을 갖고 왔는지 아는 사람이 었었다. 글을 쓴 쪽지가 붙어 있고 미리암의 글씨로 이렇게 씌어 있었다. "우리들을 초대하는 것이 부끄러웠나요? 아니면 우리들이 초대손님으로서 어울리지 않았을까요? 그 미녀의 영광스러운 들러리가 되고 싶었었는데. 그럴 수가 없군요.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축하한다는 말을 하는것 뿐입니다. 앞으로도 편지를 보내는 것을 잊지 마세요. 부인에게 우리들의 축복과 경의를 전해 주세요."
사라의 선물 꾸러미 속에는 또 다른 쪽지가 들어 있었다.
"밍케, 나는 조금 앞서 유럽으로 돌아가요. 당신의 결혼식에 축하를 할 수 있게 되어 다행이에요. 안녕, 유럽에서 다시 만날때까지. "
마푸다 뻬테루스 선생님이 보번 선물 가운데는 몇 권의 책과 지은이도 발행인도 또 발행 년월일도 인쇄되어 있지 않은 팜플렛이 한권 들어 있었다.
그 팜플렛에는 이런 글이 씌어 있었다. "밍케군, 당신과 같은 신랑에게 가장 어울리는 선물은 무엇인가하고 생각해 보았읍니다. 쉽게 구할 수 없는 책, 그것이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해서 당신이 마음에 들어할 것 같은 책을 몇권 골라 보았읍니다. 당신이 이 글을 읽을 대쯤이면, 나는 이미 집에 돌아와 사랑하는 제자의 행복한 모습을 생각할 여유도 없이 바쁘게 일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두 사람이 힘을 합해 보람있는 생활을 이끌어 나가기를 빕니다. 언젠가, 만일 미숙하고 고지식하기만 했던 한 여교사를 기억하게 된다면 위대한 휴머니스트, 무르타투리의 뒤를 따르고자하는 한 학생을 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부디 기억해 주세요. 밍케군, 동인도 관청은 슬라바야 고등학교의 많은 학부형의 압력 때문에 나를 해고시키고 동인도를 떠나도록 권고해 왔읍니다. 만일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강제 추방을 당할 것입니다. 내일 영국기선으로 이곳을 떠납니다. 안녕 !"
"이것을 읽어 보게, 얀. "
나는 다페르스테에게 말했다.
"우리들의 선생님이 쓰신 거야."
"왜 그래요, 마스?"
앤이 말했다.
"역시 그 소문은 사실이었던 것 같네. 정청은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교묘한 방법으로 마푸다 뻬테루스 선생님을 동인도에서 추방하려고 하고 있네. 어때, 앤, 가슴이 뭉클하지 않아? 이렇게 어려운 일에 처해 있으면서도 일부러 우리들을 위해 와 주었어."
"정말 정청은 비열하군 그래."
메모를 읽고 난 얀 다페르스테가 중얼거렸다.
"그래, 비열해. 마푸다 선생님은 추방당하고 자네는 자바를 떠나기 싫어 하고. 어떤가. 얀, 내 부탁 한 가지 들어 주겠나?"
"물론이야. "
"마푸다 뻬테루스 선생님을 배까지 배웅해 주었으면 좋겠어. 우리 두 사람, 마마, 그리고 자네 자신을 대표해서. 그리고 나의 어머니 몫도 함께. 그렇게 좋은 사람을 혼자 외롭개 떠나보낼 수는 없네. 그런 일이 있어서는 절대로 안돼. "
선물 가운데 가늘고 긴 뭉치가 한 개 있었다. 열어 보니까 촉이금으로 된 펜이 달려 있는 아름다운 펜대였다.
직접 그린 듯한 그림 엽서가 들어 있고, 활자체로 이렇게 씌어 있었다.
'밍케, 안네리스 메레마 두분의 행복과 건강을 기원합니다. 저에 관한 일은 용서하시고 잊어버리시기를 빕니다. 이름도 없는 뚱뚱보로부터.'
선물이 마룻바닥에 굴러 떨어졌다.
"마스 !"
안네리스가 주의를 주었다.
멀어진 물건을 얀 다 페르스테가 주웠다. "그것은 자네가 갖게, 얀."
나는 말하고 그림 엽서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찢어버릴 것인가 아니면 얼마 뒤 심리가 재개될 공판정에 제출하기 위해 보관해 둘 것인가를 신중히 생각해 보아야 했다. 시간은 이미 새벽 1시를 지나고 있었다. 얀 다페르스테는 이미 일을 끝내고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갔다.
나는 안네리스에게 다가갔다.
"앤, 당신은 이제 나의 아내야."
"그리고 당신은 나의 남편이구요."
그때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깜짝 놀라 문을 열었다.
마마가 들어왔다. 너무나 울어서 눈꺼풀이 많이 부어 있었다. 우리들에게 다가왔으나 말이 나오지를 않는 것 같았다. 그녀가 무엇 때문에 왔는지 우리들은 짐작할 수 있었다. 틀림없이 마지막 당부의 말을 해 주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마마. "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마마는 우리 두 사람에게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고, 우리들을 위해 정성을 다해 돌봐주시고 걱정해 주었옵니다.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들은 그것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결코 잊지 않겠읍니다."
마마는 고개를 끄덕이고 아무 말 없이 방을 나갔다. 가스등 밑에서 안네리스가 내게로 다가와 두손을 내밀었다. "이 반지를 빼 주세요. "
나는 수상쩍은 반지를 뽑았다. 반지 그 자체도 의심스러웠지안 그보다 안네리스의 손가락에 그것을 끼워 줄 때의 슬르호프 동작이 아무래도 미심쩍었던 것이다.
"받고 싶지 않아 ? "
"그 사람에게서 편지는 많이 받았지만, 한번도 답장을 쓴 적은 없어요."
이제야 모든 것을 똑똑히 알 수 있었다. 그동안 슬르호프는 아무도 몰래 안네리스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밀하게 반지를 살펴보았다, 그것은 분명 22금의 반지였다. 그러나 거기에 붙어 있는 다이아몬드가 진품인지 모조품인지는 알 수 없었다.
진짜 다이아몬드 치고는 너무 컸다. 그런 것을 선물할 정도로 슬르호프는 돈이 많지 않다. 그의 용돈이 한달에 1링기트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그의 부모를 잘 알고 있었는데, 결코 부유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평소에 그의 어머니가 반지를 끼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게다가 선물을 할 때 으례 담아오는 반지 상자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나는 반지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에게 돌려 주세요, 마스."
"응, 그렇게 하지."
밤은 깊어 갔다. 슬르호프와 뚱뚱보가 여전히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제18장
승자, 패자
과학은 점점 더 많은 기적을 낳고 있었다. 우리 선조들의 진설은 이제 아득한 옛날 얘기가 되어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는 없었다. 사람들은 이미 바다 건너 멀리 떨어진 상대와 얘기를 하기위해 어렵고 복잡한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독일인이 영국에서 인도까지 해저 전신을 부설한 것이다 ! 그와 비슷한 시설은 차츰 수가 늘어나 전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자신들의 개인 문제를 해결할 때는 구태의연한 방법밖에는 모른다. 특히 연애 문제에 있어서는 그렇다.
예를 들면, 내 주머니 속에 들어 었는 검은 린빈을 입힌 판지로 만든 상자 속에 나와 슬르호프 이외에는 무엇이 들었는지 모른다.
아무도 속에 든 것은 돈이나 보석이 아니다. 부적도 아니다. 사랑에 패배한 한 인간이 그 사랑을 쟁취한 또 한 사람의 인간에게 보낸 한통의 편지가 들어 있을 뿐이다.
한쪽은 사랑의 패자, 한쪽은 사랑의 승자.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 간다고 하더라도 연애에 관한 한 실패와 성공은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다. '밍케, 나의 친구.'
그는 쓰고 있었다. 글씨가 컸고 떨면서 썼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편지 속에서 슬르호프는 자신이 지금까지 한 비열한 행동, 그리고 남의 사랑올 시기해 온 데 대해 진심으로 용서를 빌고 있었다. 우스운 얘기지만, 그런 여러가지 행동은 악의가 있어서가 아니라, 바로 안네리스 메레마에 대한 순수한 사랑 때문이었던 것이다.
슬르호프는 다섯 번인가 안네리스를 본 적이 있는데, 얘기를 하기는 커녕 인사를 할 기회조차도 없었다고 한다. 안네리스를 사랑하게 된 것, 그리고 그 사랑을 이룰 수가 없었다는 것을 그는 고백하고 있었다.
밍케가 너무나 쉽게 안네리스와 가까와지는 것을 보고 그는 몹시 괴로와했었다. 그러나 체념하지는 않았다. 체념이라는 말은 자신에게는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슬르호프는 말했다.
그는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여러 가지 경로로 몇 통씩이나 편지를 써 보냈다. 한 번도 답장이 오지 않았다. 그래도 안네리스를 잊을 수는 없었다.
'이제 나에게 있어서 모든 것은 끝났네. 반대로 자네들 두 사람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시작이지. 사실대로 말한다면 나는 지금도 아직 현실을 믿고 싶지 않네. 이 동인도를 떠나는 길밖에 그녀를 잊을 방법이 없네. 밍케, 나는 잊지 않으면 안되는 거야. 하지만 지난날이야 어쨌든 내가 저지른 잘못 때문에 우리의 우정에 금이 가는 일은 바라지 않네.'
결혼식이 있은지 20일 뒤, 콜롬보에서 보낸 편지가 도착했다. 마푸다 뻬데루스 선생님에게서 온 것이었다. 편지에서 그녀는 로베르트 슬르호프와 같은 배를 탔다고 쓰고 있었다. 슬르호프는 수부로서 배를 타고 있었고, 그 사실을 몹시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그녀는 수부는 고등학교 졸업생에게 있어서 부끄러운 직업이 아니며, 더구나 그는 유학이라는 뚜렷한 목표가 있으므로 부끄러워할 것 없다고 슬르호프를 격려해 주었다고한다. 그것과 동시에 사라에게서도 편지가 왔다. 그녀는 싱가폴의 훌륭함에 대해서 쓰고 있었다. 넓고 깨끗하며 번잡하지만 역시 개끗한 도로. 항구가 비좁게 느껴질 정도로 꽉 찬 배들. 그 수효는 지난날 암스테르담에서 본 것보다 훨씬 많으며 로테르담과도 비교할 수가 없을 정도라고 했다.
B시의 부이사관의 편지는 대조적이었다. 그는 동인도 정청에 대해 내가 네덜란드로 유학을 갈 수 있도록 조처해 달라고 신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의 학업 성적이 충분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신청은 기각되었다,
정청이 요구하는 유학을 위한 첫째 조건은 방정한 품행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조건에 합당치 않다는 결정이 내려졌다고 부이사관은 쓰고 있었다. 그것도 또한 과학의 진보가 낳은 결과인 것이다. 이제는 나의 인격, 품성까지도 무조건 실격 낙인이 찍힌 것이다. 먼저 학교당국에 의해서. 그 다음에는 재판 경과를 보도한 저널리즘에 의해서.
본디 나는 남의 이목에 그다지 신경 쓰는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취급을 당하게 되자 몹시 마음의 상처가 컸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나는 남에게 해를 끼친 일이 없다. 남의 명예를 훼손 시킨 일도 없다. 또 남의 물건을 가로채거나 암거래에 관계한 일도 없다.
그런 나를 부당하게 단죄하려는 사람들로부터 어떻게 자신을 지켜나가야 하는가? 언젠가 쟝 마레는 나에게 어떤 것을 판단하는 경우에는 먼저 편견을 버리고 솔직해져야 한다고 가르쳤었다. 분명히 그말은 그들에게 필요한 말이다. 이 현실에서 사리를 그르치고 있는것은 오히려 유럽인들 자신이라는것이 명백해진 것이다.
이 새시대의 성과도 또한 틀림없이 유럽까지 전해졌을 것이다. 독일제의 해저 전선을 타고......
3개월이 지났다. 나의 일은 주로 사무실의 마마 옆에 앉아서 때로는 그녀의 업무를 도와주기도 하면서 글을 쓰는 것이었다.
얀 다페르스테는 슬라바야의 이사관을 통해 총통의 최종 결정서를 받았다. 판지 다르만이 그의 새로운 이름이었다. 혐오하고 증오하고 있던 다페르스테라는 이름에서 가까스로 해방된 것이다. 성격도 차츰 그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변해갔다. 근면하고 명랑 활발하고 개방적으로 되어 갔다. 그는 처음에 농장에서 마마의 사무를 돕고 있었으나, 얼마 뒤 도르빈보스씨의 사무실로 옮겨 가 향료 회사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 한 달이 지났다. 어머니는 두 번 우리들을 방문했다.
다섯 달이 지났다. 사라 드라크로아가 두 번 편지를 보내왔다. 미리암은 자신도 또한 언니의 뒤를 따라 유럽으로 돌아갈 예정이라고 알려 왔다.
그 넓고 적막한 부이사관저택에 에르베르 드라크로아씨가 혼자 살게 된다. 따라서 좀더 자주 아버지에게 편지를 써 달라고 그녀는 부탁하고 있었다.
여섯 달이 지났다. 그리고 그때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당연히 일어나야 할 것이 일어난 것이지만, 안네리스가 냐이와 함께 백인 법정에 출두 명령을 받은 것이다. 또 다시 법원에 가다니 ! 더구나 이번에는 안네리스가 제일 당사자로 소환된 것이다.
두 사람은 출두했다. 나는 집에 남아서 마마의 업무를 대신했다. 대신한다고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군대의 병영이나 항만 사무소, 또는 선박용 식료품을 취급하는 업자에게 답장을 쓰거나 새로운 주문이나 고객의 주소 변경을 노트에 적거나 하는 일 정도였다.
그러나 그밖에 골치 아픈 일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마마에게 어떻게든 접근하려는 진 식민지군 병사들을 쫓아내는 일이었다.
그 전 식민지군 병사들에 대해서는 나도 그깨까지 네 차례 정도 마마가 그들을 쫓아내는 것을 본 일이 있다. 아치에 전쟁에서 돌아와 지금은 일정한 직업도 없이 빈둥거리며 지내고 있는 그들 동료들 사이에 냐이가 화제거리가 된 모양이다. 그들은 막대한 재산을 지닌 메레마미망인을 차지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써서 접근해 오는 것이었다. 그 가운데 한사람이 나를 찾아왔다. 건 식민지군 소위라고 자칭하는 그 혼혈아는 과거에 청동 훈장을 수여받았고, 연금의 일부로 마랑시 교외에 농지 10헥타르를 받았다고 하면서 꼭 마마를 만나야겠다고 주장했다.
그는 가까운 장래에 마마와 공동 경영자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헤어질 때 그 소위라는 사나이는 그의 말을 그대로 냐이에게 전해 달라고 하면서 나의 협력을 구하고, 일이 잘되면 무엇이든 바라는 것을 사례로 주겠다고 약속했다. 사나이는 이름을 말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돌아갔는데, 그런 친구들을 쫓아 버리는 것도 내 일의 하나였던 것이다. 그 밖의 시간을 나는 "슬라바야 일보"의 원고를 쓰는 일로 보냈다.
안네리스와 마마가 떠난 지 3시간이 지났다. 나는 차츰 불안해졌다. 원고 쓰는 것을 중단하고 우유를 운반하는 짐마차가 들어올 때마다 밖으로 나가 보았다.
4시간이 지났다. 드디어 내가 초조해하면서 기다리던 마차가 돌아왔다. 멀리서 냐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밍케, 빨리 !"
나는 현관 앞으로 뛰어나갔다.
먼저 마마가 내렸다.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아직 마차 안에 있는 안네리스에게 그녀는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아내가 내려왔는데 얼굴은 창백하고 눈물에 젖어 있고, 입은 굳게 다물고 있었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그녀는 쓰러지듯이 내게 안겼다.
"데리고 올라가요."
마마가 거친 말투로 내게 말했다.
마마는 빠른 걸음으로 우리 곁을 스쳐 그대로 사무실로 들어갔다.
"마마와 다투기라도 했어 ? "
나는 안네리스에게 물어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여전히 입을 굳게 다문 채였다. 나는 안네리스를 이층으로 데리고 올라가려고 했다. 그녀의 몸은 차가왔다.
"어째서 마마는 저렇게 화가 났지 ? "
안네리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이층으로 데리고 가려는 것을 마다하고 응접실의 의자에 앉혀 달라고 눈짓했다. "몸이 아프기라도 한 거야 ? "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왜들 그러는 거야 ?"
이 섬세하고 부서지기 쉬운 나의 인형은 무엇인가 큰 충격을 받은 것이 틀림없다. 그런 생각이 들자 나는 몹시 불안해졌다. "마실 것을 갖다 줄까? "
안네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물을 갖다 주었다. 그녀는 그것을 마시자 좀 나아진 것 같았다.
"다르삼 ! "
사무실에서 마마의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마두라의 칼잡이를 찾으러 뛰어갔다. 그는 자기 집에서 수염을 다듬고 있는 중이었다.
"빨리 와요, 다르삼. 마마가 화를 내고 있어요."
그는 곧 의자에서 일어나 거울과 쪽집게를 대나무 바구니에 집어 던졌다.
내가 사무실에 들어갔을 때, 다르삼은 이미 그곳에 와 있었다.
안네리스도 있었다.
"왜 침대에서 쉬지 않지, 앤?"
냐이는 책망했다.
아내는 고개를 흔들었다. 마마는 아직도 얼굴이 새빨갰다. "마마, 무슨 일이 있었나요?"
다르삼이 냐이에개 경례를 하고 사무실에서 나갔다. 이미 마차가 준비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다르삼이 나가자 곧 마차가 자갈을 튕기며 사무실 앞을 달려가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마마는 내물음을 무시하고 창으로 걸어가 밖을 향해 소리쳤다. "서둘러 가요 ! 조심해서 ! "
그리고 나서 그녀는 돌아서서 안네리스에게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로했다.
"앤, 오늘 일은 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마마와 네 남편과 둘이서 해결할 테니까. 우리들에게 맡겨 두거라," 그리고 나를 돌아보았다.
"밍케, 드디어 올 것이 왔어요. 내가 두려워하던 것이. 나는 법률에 대해서는 잘 몰라요. 하지만 우리들은 어떻게든 싸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모든 힘과 전 재산을 걸고서라도 말입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읍니까?"
마마는 몇 통의 서류를 나에게 내밀었다. 원본과 사본으로 된 그 서류의 발행처는 암스테르담 지방법원으로 내무성, 식민성, 사법성등 각 부처의 날인이 찍혀 있었다. 첫번째 서류는 기사 마우리츠 메레마가 남아프리카에서 그의 어머니 아메리아 메레마 함멜스에게 보낸 편지의 사본이었다.
그 속에서 마우리츠 메레마는 슬라바야에서 살해된 아버지 헤르만 메레마의 유산 상속에 대해서 그 수속을 어머니에게 위임한다고 씌어 있었다.
다음에는 마우리츠 메레마의 어머니 편지의 사본이 있었다. 그것은 고 헤르만 메레마의 유산에 대한 아들의 권리 확인을 아들을 대신해서 암스테르담 지방법원에 요구한 것이다.
그리고 슬라바야의 법원, 검찰국과 암스데르담 지방법원이 교환한 통신문의 사본이 첨부되어 있었다, 그 내용은 고 헤르만 메레마와 사니켐 사이에 혼인증명이 존재하는가, 생전에 헤르만 메레마가 유언장을 남겼는가, 아촌에 의한 헤르만 메레마 살해 사건에 대한 법원의 판결, 로베르트 메레마 실종에 관한 확인, 사니켐에게서 태어난 두 명의 자식, 안네리스와 로베르트에 대한 헤르만 메레마의 인지 증명 사본 등이었다. 그리고 냐이의 계리사와 슬라바야 법원이 교환한 펀지의 사본이 있고, 그 속에서 계리사는 바이텐졸프 농장의 자산에 대한 조회에는 당사자의 동의 없이는 응할 수 없다는 거부 회답을 하고 있었다. 또 그 다음에는 바이텐졸프 농장의 납세액에 대한 세무서의 기록 등본, 농장의 넓이와 구역에 관한 토지국의 기록등본, 소등 가축의 수와 사육 상황에 관한 농업 축산 사무소의 보고가 이어졌다.
마마와 안네리스의 시선을 받으면서 나는 한 장씩 서류를 읽어나갔다. 두 사람은 내 의견을 기대하고 있는 것 같았으나 문제가 될만한 것을 나는 아직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런 종류의 서류가 있다는 것 자체도 몰랐고, 또 그런 것을 써서 보수를 받는 사람이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 뒤이어 암스테르담 지방법원의 결정에 대한 공식 기록의 사본이 있었다. 슬라바야 법원에 집행을 위임한 그 결정은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암스테르담 주재 변호사 한스 푸라에프를 통해서 행해진 고 헤르만 메레마의 아들 기사 마우리츠 메레마의 청구에 의거하여 암스테르담 지방법원은 더 이상 의심할 것 없는 슐라바야로부터의 공식 기록에 근거를 두고 헤르만 메레마와 사니켐에게 법적인 혼인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이 명백하기 때문에, 고 헤르만 메레마의 전 유산을 아래와 같이 분배하기로 결정한다. 즉 적출자인 마우리츠 메레마가 전체의 6분의 4를 상속한다. 인지된 서출자인 안네리스 메레마와 로베르트 메리마가 각기 6분의 1을 상속한다. 로베르트 메레마에 대해서는 그 소재가 일시적으로 불명하다고 신고되었기 때문에, 동인이 상속할 유산은 기사 마우리츠 메레마가 관리하는 것으로 한다.'
암스테르담 지방법원은 또한 안네리스 메레마가 미성년이라는 이유로 기사 마우리츠 메리마를 그녀의 후견인으로 지정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안네리스가 성년이 될 때까지 그녀의 유산 상속권도 또한 마우리츠 메레마가 관리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우리츠 메레마는 후견인으로서의 권리를 행사함에 있어서 그의 변호사 한스 푸라에프를 통해서 슬라바야에 있는 한 변호사를 대리인으로 지명하여, 안네리스의 보호와 그녀의 네덜란드에서의 양육에 관해서 냐이 온트솔로, 즉 사니켐 및 안네리스 자신에 대해 적절한 조치를 취하도록 슬라바야의 백인 법정에 제소하고 있었다.
가공할 그 기록들을 읽고 나는 하마터면 실신할 뻔했다. 내용은 대부분이 내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인간성을 무시하고 완전히 사람을 상품 목록의 한 항목으로밖에 보지 않는 것이었다.
"마마는 그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나요?"
"잘 들어요, 밍케. 나와 안네리스가 법원에 도착하자 이미 우리 변호사가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이런 서류의 사본을 준비한 것은 그 사람이었어요. 판사 앞에서 암스테르담 지방법원의 결정을 우리들에게 전하고 그 내용을 설명한 것도 그였어요." 그것을 들으면서 나는 어머니의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네덜란드인은 아무리 강한 힘을 갖고 있어도 과거에 이 나라를 지배한 왕들과는 달라 남의 아내를 약탈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어머니, 이것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지금 바로 그들은 당신의 며느리를 빼앗아 가려 하고 있읍니다. 어머니에게서 자식을, 남편에게서 아내를 빼앗아가려 하고 있읍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마마가 20년 동안 하루도쉬지 않고 뼈빠지게 일해서 얻은 땀의 결정까지 그들은 약탈해 가려 하고 있읍니다. 그 약탈의 근거가 되는 것은 대서사들이 꾸민 아름다운 서류, 종이 두께의 절반까지 스며들어 결코 변색되는 일이 없는 검은 잉크로 씌어진 서류일 뿐입니다. "우리도 법률가의 도움이 필요한 것 같군요."
"데라데라 변호사가 곧 올 거예요."
그 기묘한 이름은 얼마 전 내가 겪었던 복잡한 문제 때문에 내게도 이미 낮익은 것이었다. "변호사 데라데라 레리오부트쿡크스......"
그 이름을 외어 제대로 쓸 수 있게 되는 데는 상당히 긴시간을 필요로 했다. 나는 그와 직접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으나, 마마는 법률 상담을 위해 이따금 그를 찾아다녔다.
내 상상으로는 그는 틀림없이 온몸이 붉은 털로 뒤덮인, 헤르만 메레마와 같은 비만형의 거한일 것이다. 그 이름에서 도깨비 같은 인물을 나는 상상하고 있었다. 초인적인 힘을 가진 법률가가 틀림없었다.
"그 결정에 마마는 항의하지 않았나요?"
"항의요? 항의 정도가 아니라 단호하게 거부했어요. 그들 유럽인은 돌담처럼 딱딱하고 차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어요. 그들의 말은 확고해서 웬만해서는 뒤집을 수가 없어요. 안네리스는 내딸이에요. 나는 법원에서 말했어요. 그애에게 권리를 가진 것은 나뿐이며, 내가 그애를 낳고 키웠어요. 그러자 판사는 이렇게 말했어요. '기록에 의하면, 안네리스 메레마는 헤르만 메레마씨가 인지한 자식이오.' 어머니는 누구지요? 그녀를 낳은 것은 누구지요 하고 내가 물었읍니다. '기록에 의하면, 사니켐, 별명 냐이 온트솔로라는 여자가 어머니로 되어 있다. 그러나..... 내가 그 사니켐입니다. '그렇다. 그러나 사니켐은 메레마 부인은 아니다.' 나는 증인을 세울 수가 있읍니다. 안네리스를 낳은 것은 바로 나입니다. '안네리스 메레마에게는 유럽의 법률이 적용된다. 냐이는 그렇지 않다, 냐이는 원주민에 불과하다. 만일 안네리스양이 메레마씨에게 인지받지 않았다면 그녀도 또한 원주민이고, 백인 법정은 그녀의 일에 일체 관여하지 않을 것이다! 판사는 그렇게 말했읍니다. 밍케,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얘기예요. 그래서 나는 결정을 따를 수 없으며. 유능한 변호사를 내세워 싸울 것이라고 말했어요. '좋을대로하시오.' 하고 판사는 냉담하게 대답했어요. 안네리스는 단지 울고만 있을 뿐이어서 다는 다른 문제는 완전히 잊고 말았어요."
마마는 심호흡을 했다.
"밍케, 당신도 함께 가야 했어요. 법정 밖에서도 당신은 자신의 아내와 자신의 이익을 지킬 수는 있을 거예요. 그 판사도 아내가 있고 자식이 있을 테니까요."
그때 나의 노여움, 그 심정은 누구라도 이해할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막상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와 같은 문제에서는 나는 아직 코흘리개 어린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딸은 이미 결혼을 한 유부녀라고도 나는 말했읍니다. 그러자 판사는 웃으면서, '그녀는 미혼이다. 아지 미성년이다. 설사 누군가가 그녀를 결혼시키고 누군가 그녀와 결혼을 했다 하더라도, 그 결혼은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불법적인 것이다.'라고 대답하더군요. 밍케, 들었어요? 불법이라고 했어요."
"설마 그럴 리가 있읍니까 ? "
"그뿐만 아니라, 인정받지 못한 결혼에 대해서 당국에 보고를 하지 않은 것은 범죄 행위라고 나를 몰아세웠어요. 부녀 폭행의 공범이라나요."
사무실은 찾아오는 손님도 없이 한산했다.
우리들 세 사람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 암스테르담 지방 법원의 결정을 뒤집을 수 있는 것은 아마 성실하고도 유능한 변호사뿐일 것이다.
아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암스테르담 지방법원이여 ! 백인 법정과 마찬가지로 그 곳도 또한 고등교육을 받고 정의롭고 공정하게 법을 집행하는 법학자 자격을 가진 사람만이 모인 곳이 아닌가. 그 법원이 어떻게 해서 우리들의 법의식, 우리들의 정의감에 모순된 법률을 집행할 수 있는가.
"나의 권리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되어 있지 않은 유산 분배 문제에 관해서는, 말 한 마디 못해 보았어요. 물론 이 농장이 내 소유물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문서가 갖추어져 있지 않은 탓도 있었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안네리스를 지키지 않으면 안된다는 오직 그 생각뿐이었읍니다. 다른 것은 안중에도 없었읍니다. 판사는 우리의 관심사는 안네리스뿐이라고 말했어요. 나는 첩, 원주민이기 때문에 당 법원과는 일체 관계가 없다는 것이었어요." 마마는 이를 갈며 원통해했다.
"결국은. "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문제는 확실히 유럽인 대 쁘리부미, 유럽인 대 나라는 거예요. 밍케, 똑똑히 새겨 두세요. 쁘리부미를 학대하고 혹독하게 괴롭히는 것이 유럽인이라는 것을 말이에요. 그들에게서 흰 것이란 피부 색깔뿐이에요. 그들의 마음도 영혼도 온통 검게 물들어 있어요."
마마는 그들을 저주하고 있었다.
"그 변호사도 역시 유럽인인가요? "
"돈의 노예에 불과합니다. 돈을 주면 주는 것만큼 고용주에게 충실해지는 인간이지요. 바로 유럽인의 전형이에요."
나는 몸을 떨었다. 몇년 동안에 걸쳐 학교에서 배워 온 것이 현지처가 얘기한 단 몇 마디 말로 뒤바뀐 것이다.
안네리스는 긴장에서 오는 피로 때문인지 책상에 엎드린 채 잠이 들어 있었다. 나는 다가가서 흔들어 깨웠다.
"앤, 이층으로 가요."
그녀는 그것을 거절하고 다시 등을 바로 세우고 의자에 고쳐 앉았다.
"이층에 가서 쉬어라, 앤. 네 일은 마마와 밍케에게 맡겨 두렴. 할 수 있는데까지 손을 써보겠다."
마마의 말에 안네리스는 순순히 따랐다. 나는 이층으로 그녀를 데리고 가서 침대에 눕히고 담요를 덮어 주었다.
"마마와 내가 해결할 테니까 걱정 말아요."
안네리스는 단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내 얘기는 안심시키기 위한 거짓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법리에 대해서 나는 전혀 모르고 있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혼자 있어도 되겠지 ?"
안네리스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나는 그녀를 혼자 두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 그녀는 큰 어려움에 처해 있다. 금방이라도 부서져버릴 것만 같은 인형 같은 네 아내의 운명은 왜 이다지도 험난하단 말인가? 그녀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기력이 없는 것 같았다.
"마르티네 선생을 불러 줄까 ? "
그녀는 끄덕였다.
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주치의를 불러 오도록 마부에게 일렀다. 마르주키가 슬라바야를 향해 마차를 달리는 것이 보였다.
사무실에서는 마마가 유럽인 한 사람과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내 어깨 정도 닿는 키에다 깡마르고 볼품 없는 체격을 한 사람이었다. 머리가 벗어지고 치켜올라간 눈에 가는 테데 둥근 안경을 쓰고 있었다.
마마는 암스테르담 지방법원에서 발송되어 온 안네리스에 관한 기록을 읽는 그를 잠자코 지켜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 사람이 데라데라 레리오부트쿡크스 변호사인 모양이었다. 결코 똑똑해 보이지 않는 그 사람이 오래 전부터 마마의 법률 고문을 맡아온 것이다.
왜 마마가 아직도 그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인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었었다. 그의 능력은 이미 판사 앞에서 똑똑이 증명되지 않았는가?
나는 두 사람을 관찰했다. 홍조를 띠고 있던 마마의 얼굴 표정은 차츰 나아지고 자세도 훨씬 안정되어 보였다.
"밍케, 이분이 데라데라씨예요"
우리들은 악수를 나누었다.
"네, 당신에 관해서는 그전부터 애기를 많이 들었읍니다. 잠깐 기록을 다시 검토해야겠는데, 괜찮겠읍니까?"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그는 다시 서류를 들여다보았다. 얼굴에 여드름 자국이 남아 있는 이 왜소하 사나이가 냉혹하고 독신과 폭력으로 가득 찬 거대한 유럽의 법률에 어떻게 맞설 수가 있단 말인가 ?
더구나 그는 유럽인이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어느 쪽에 붙겠는가 ?
그는 몇번씩이나 서류를 반복해서 읽어가며 한 장 한 장 자세히 검토했다.
마마는 여기저기를 바쁘게 돌아다니며 일을 처리하고 마실 것까지 손수 마련해 왔다. 변호사는 마치 주위에서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여전히 침착하게 서류 사본을 조심스럽게 읽고 있었다.
한 시간 뒤, 그는 서류를 챙겨 쌓아 놓고 그 위에 검은 돌로 만든 문진을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미간을 찡그리고 골똘한 생각에 빠졌다. 이윽고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헛기침을 한 다음 마마를 쳐다보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떻습니까, 선생님 ?"
마마가 답답해서 물었다.
"우리들은 미칠 것만 같다고요."
"그 마음은 알겠읍니다. 하지만 냐이, 법률 문제인 경우에는 서두른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감정을 내세워 봤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결정을 내리는 것은 어디까지나 법률이니까요."
"그럼, 재판에서 우리들이 진다는 말인가요?"
"이기고 지는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변호사는 그렇게 말하고 서류를 손가락으로 두들겼다. "여기서는 아직 아무 대책을 취하지 않았으니까요.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냐이는 어디까지나 침착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법률은 냉정합니다. 아무리 감정을 내세워 봤자 아무 이득도 없읍니다. 밍케씨, 듣고 계십니까?"
그는 대뜸 내게 얼굴을 돌렸다.
"당신은 네덜란드어를 잘 알겠지요?"
"듣고 있읍니다."
"이것은 모두 당신의 결혼과 당신 부인의 운명에 관계되는 일입니다. 상대방이 우리보다 유리한 입장에 놓여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해보는 데까지는 해 봅시다. 어떻게 하느냐 하면 당신과 냐이가 그 결정을 어떻게든 번복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설사 그렇게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결정의 집행을 지연시킬 수는 있다는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그의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문득 우리둘이 패배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다만 저항하는 것뿐이다.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일찌기 쟝 마레가 얘기해 준 네덜란드와 아치에인의 싸움처럼 칼이 꺾이고 화살이 없어질 때까지 저항하는 길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마도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그렇다. 그녀에게 있어서는 문제는 패배한다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자식, 농장, 피와 땀의 결정, 그리고 그녀 개인의 재산, 결국 모든 것을 그녀는 잃게 되는 것이다. "그래요. 밍케, 우리들은 싸워야 해요."
마마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갑자기 그녀가 몹시 늙어 보였다. 지친 발걸음으로 딸을 살펴보기 위해 이층으로 올라갔다.
변호사는 다시 서류 검토에 몰두했다. 나는 왜소한 법률가에 대한 의혹이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나, 그가 서류를 몇장 몰래 빼가지나 않을까 줄곧 그를 감시하고 있었다. 다시 한 시간이 흘러갔다. 마마가 다시 이층에서 내려와서 사무실로 들어오더니 내 곁에 변호사와 마주보고 앉았다. "아직도 검토할 것이 있읍니까 ?"
그녀 본디의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변호사는 얼굴을 들고 웃음을 참으며 대답했다.
"소송을 제기할 수 있읍니다."
"그러나 이긴다는 확신은 없다는 말인가요?"
"소송은 제기할 수 있읍니다."
변호사는 되풀이 말하고 다시 서류로 눈을 돌리려고 했다. 마마는 그에게서 서류를 빼앗아 들었다.
"나머지 사례금은 나중에 댁으로 보내드리겠음니다. 이제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데라데라 레리오부트쿡크스 변호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들에게 목례를 하고 다르삼의 배웅을 받으며 돌아갔다. "밍케, 우리들은 싸워야 합니다. 각오는 되어 있나요?"
"싸워요, 마마. 힘을 합쳐서."
"변호사는 없어도 상관없어요. 우리들은 백인 법정을 상대로 싸우는 최초의 쁘리부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또한 하나의 명예가 아닐까요? "
어떤 식으로 싸워야 하는지 나로서는 막연하기만했다. 무엇을, 누구와,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 무기는? 전술은? 전혀 알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냥 싸우는 것이다 !
"싸웁시다, 마마 ! 싸워요. 힘을 합쳐서 반격을 하는 겁니다." "당신이 만일 안네리스를 위해 싸운다면 그애는 틀림없이 저렇게 병으로 앓아 눕거나 무력감에 사로잡히는 일도 없어질 거예요, 당신 같은 남편에게 있어서 그녀는 인생의 최고의 반려자가 될 수 있을 거예요." 안네리스를 간호하면서 나는 지금까지 일어났던 일과,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신중하게 생각해 보았다. 마우리츠 메레마와 그 어머니는 어쨌든 헤르만 메레마에게 원한을 품을 만도 했다. 그렇다. 그들이 헤르만 메레마의 재산을 싫어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유산을 조금이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안달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안네리스의 아버지가 죽기를 고대했을 것이다. 그들은 마음속으로 은밀하게 아촌의 범행에 가담하여 그의 행위를 도왔을지도 모른다.
그것 때문에 두 사람이 처형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마음 속에서의 범죄는 겉으로 나타나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렇다, 이것은 바로 백인이 쁘리부미를 파멸하고 마마를 파멸시키고 안네리스와 나를 파멸시키는 사건이다. 피지배 민족인 쁘리부미를 파괴하는 것이다.
마푸다 선생님의 말대로라면 아마도 이것이 이른바 식민지 문제일 것이다.
나는 문득 쁘리부미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자고 주장하는 자유주의파를 생각했다. 존경하는 마푸다 뻬데루스 선생님, 당신을 배까지 전송하지 못한 것을 나는 후회하고 있옵니다.
만일 당신이 슬라바야에 있다면 기꺼이 도와 주었을 텐데 말입니다.
적어도 어떻게 해야 좋을 지 방향을 제시해 줄 수도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마푸다 선생님을 생각하고 있으려니까 갑자기 어떤 의혹이 생겼다. 과장된 추리일는지도 모르지만, 그 의혹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마푸다 선생님이 동인도에서 추방당한 것은 사실은 암스테르담 지방법원의 결정을 집행하는 것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것이고, 아마도 그녀는 진짜로 추방당한 것이 아니라 얼마 뒤 세상에 알려질 이번 사건으로부터 그녀를 미리 떼어놓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
그 의혹은 점점 더 확실해져 갔다. 즉 모든 것은 마우리츠 모자와 암스테르담 지방법원과의 악마의 동맹에 의해 미리 줄거리가 꾸며진 것이 틀림없다. 만일 이번 사건에서 마푸다 뻬데루스 선생님을 일부러 떼어놓은 것이 사실이라면, 나와 그녀 사이를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슬라바야 고등학교의 교장 선생님과 선생님들이다.
이 기발한 추리가 만약 사실이라면, 모든 것은 악마처럼 사람을 희롱하기 위한 연극이라고할 수밖에는 없다. 그리고 내가 동인도 전체에서 차석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는것도 한낱 연극, 자유주의파를 기쁘게 하기 위해 꾸며진 연극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대담한 추리와 의혹은 용서되지 않는 일인가? 나의 생각은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일까? 그런 추측은 바보스러운 것일까? 지나치게 비약된 걸까? 나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은 같은 곳에 이르고, 내 추리가 정당한 것처럼 생각되었다.
퇴학 처분, 복학, 전교토론회의 중지, 마푸다 뻬테루스의 추방, B시의 부이사관의 개입, 졸업 파티 석상에서 교장 선생님이 결혼식에의 초대를 공표한 것, 그리고 결혼식에는 교장선생님과 다른 선생님들이 불참하고 한 장의 편지를 마푸다 뻬레루스 선생님에게 보내는 것으로 그친 것. 아니 결코 어리석은 생각이 아니다. 유치할 것도 었다. 각각의 사건은 한줄의 실처럼 이어져서 쁘리부미인 사니켐, 그 딸과 사위, 그 재산을 상속받기 위한 마우리츠 메레마의 의리를 가져오기 위해 계획된 것이다.
"좋은 생각이라도 있나요 ?"
"마마, 순조롭게 된다면 오늘 저녁 때 이번 문제에 대해 내가 쓴 최초의 글이 신문에 개재될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호응을 얻지 못한다면, 그때는 우리의 패배입니다. 우리들에게는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지는 것을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지금은 우선 최선을 다해 싸우는 것, 될 수 있는 한 정당한 방법으로 반격할 것, 그것이 우선이에요."
"나의 친지, 친구 가운데는 양심적인 유럽인이 있읍니다. 그들에게 호소해보겠읍니다."
"신중하게 하세요, 실수는 허용되지 않습니다."
저녁때 나는 에르베르 드라크로아에게 전보를 치고, 우리들의 문제를 그의 양심에 호소했다. 만일 그들이 나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들이 지금까지 시끄럽게 떠들어대고 칭찬을 해 온 유럽의 학문과 지식은 한낱 허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말이된다. 허상 !
모든 것은 결국 우리들이 그토록 애쓰며 가꾸고 우리들이 아껴온 것, 즉 명예, 긍지, 땀, 권리, 그뿐만 아니라 남의 자식과 아내까지도 약탈하기 위한 단순한 도구나 방편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 된다.
그날 밤 마마와 나는 또 다시 마르티네 의사에게서 수면제를 투여받아야만 하는 안네리스를 침대 옆에 앉아 지켜보았다. 마르티네 의사는 기구한 운명, 아득히 먼 북쪽 나라에서 엄습해 온 인위적인 운명에 꽁꽁 묶인 환자와 그 어머니, 그 남편에게 깊은 동정과 우려를 나타냈다. "나는 다만 의사에 불과합니다. 법률이나 정치에 관헤서는 아는 것이 없읍니다."
그는 자신이 원망스러운 듯이 말했다.
정치라는 말을 입에 담은 것은 그것이 두 번째였다. "냐이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 내가 아무 일도 해 줄 수 없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나는 사교 클럽과는 친분이 없어서 정부고관등에 친한 사람도 없읍니다."
마르티네 의사는 매우 겸손하게 말했다.
"내 친구들은 오히려 나의 조그만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뿐입니다. 그 밖에는 없읍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우리들에 대한 이번 결정이 부당하다고 믿고 계시죠? "
마마가 물었다.
"부당한 정도가 아니라 야만입니다 ! "
"그렇게 말씀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것이 정직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말씀이라면 말입니다."
"죄송합니다. 아무런 힘도 되어 줄 수가 없으니 말입니다."
침통한 얼굴로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방을 나가다가 한숨을 섞어가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금까지 인생에서의 단 한가지 고통은 세금을 내는 일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읍니다. 이 하늘 아래 이와 같은 괴로운 일이 또 있을 줄이야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읍니다." 다르삼의 전송을 받으며 그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B시의 부이시관에게 전보를 친지 벌써 5시간이 지나 있었다. 5시간 !
회답은 아직 오지 않았다. 에르베르 드라크로아, 미리암도 의출중일까? 아니면 나를 비웃고 있는 것일까?
"그래요. 우리들끼리 싸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 유럽인이 아무리 우리들에게 호의적이었다 하더라도, 역시 그들은 유럽의 법률, 자신들의 법률이 결정한 것에 거역하는 위험을 무릅쓰려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쁘리부미를 위한 것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싸우다가 지더라도 부끄러울 것은 없읍니다. 왜냐 하면 그것은 밍케,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지금까지 보아왔지만 쁘리부미는 변호사를 고용할 수가 없어요. 설사 돈이 있다해도 고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금전 문제가 아니라, 그들에게는 용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쁘리부미는 평생 지금의 우리들과 같은 고통에 신음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누구 한사람 어떻게 해보려고 들지 않아요. 깨지고 부서지더라도 묵묵히 입을 다물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모두 우리 뒤를 따라 일어난다면 어떻게 될까요. 세상이 뒤집힐지도 모릅니다."
마마는 무엇에 씌인 듯이 얘기를 계속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이미 사건은 가족이나 그녀 개인의 감정을 넘어서 있었다. 입이 있어도 말을 하지 않는 껍데기 뿐인 원주민의 설움과 고통을 대변하고 있었다.
"싸운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들은 참패당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그 말투에는 닥쳐올 패배를 예감한 울림이 들어 있었다.
"그들은 수치심을 모르는 것입니다, 마마."
"수치심 따위는 유럽 문명과는 아무 관계가 없어요." 마마는 화가 난 듯이 나를 커다란 눈으로 노려보았다. "지금까지 줄곧 그들과 교제해 온 당신이 지금 와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요? 쁘리부미로서 그런 생각을 갖는다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세요. 유럽인에 대해서 수치심 운운해서는 안됩니다. 그들 머릿속에 있는 것은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뿐입니다. 그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알겠읍니다. 마마."
나는 대답했다.
그것은 그녀의 우위성을 인정한 꼴이 되었으나, 그녀가 말한 것이 정당한가 아닌가는 별개 문제였다. "나는 학교라는 곳에는 전혀 가본 일이 없읍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럽인을 찬미하도록 교육을 받은 적도 없어요. 학교라는 곳은 몇십 년 다니건 어떤 것을 공부하건, 그 교육 이념은 같습니다. 무조건 유럽인을 찬미하고 숭배할 것, 우리들 자신의 처지를 생각할 수 있을 때까지 철저하게 교육시킬 것, 그것이 학교 교육의 이념입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학교에 다닐 수 있는 사람은 다행입니다. 최소한 다른 민족의 것을 약탈하는 데 있어서 독특한 방법을 쓰는 민족에 대해 알 수가 있으니까요."
마마는 테이블에서 신문을 집어 들었다. 그곳에는 내가 쓴 글과 편집자의 해설이 실려 있었다.
"당신의 글은 너무 조심스러워요. 마치 규중 처녀가 쓴 글 같아요, 요전에 그렇게 호된 경험을 겪었는데 어째서 더 강해지지 못하는 거죠? 지금도 이런 고통을 겪고 있는데 왜 좀더 과감하게 강경한 태도를 취하지 못하는 건가요?"
그리고 그녀는 누가 우리 말을 엿듣기나 하고 있는 것처럼 목소리를 낮추었다.
"밍케, 이제부터는 말레이어로 쓰세요. 말레이어 신문 쪽이 훨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어요."
"유감스럽지만 마마, 저는 말레이어로 쓸 수 없읍니다." "쓸 수 없으면 다른 사람에게 번역을 시키세요."
대뜸 콤멜이 머리에 떠올랐다.
"알겠읍니다, 마마. "
나는 얼른 대답했다.
"당신들의 결혼은 이슬람 법에 의해 정식으로 인정된 것입니다.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이슬람 법을 모욕하고 이슬람 사회가 신봉해 온 계율을 모독하는 것입니다........아아, 법에 의해 인정받는 결혼을 나도 얼마나 원했는지 몰라요. 하지만 그때마다 그 사람은 거절했어요. 그것은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에게는 정식으로 결혼한 부인이 있었기 때문이었읍니다. 안네리스의 결혼은 합법적인 것으로서 내 경우와는 비교가 안됩니다. 그 합법적인 결혼을 그들은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제부터 글을 쓰겠읍니다. 마마는 쉬세요."
그녀는 침실 쪽으로 걸어갔다. 그 발걸음은 개선장군처럼 힘차고 확신에 넘쳐 있었다.
새벽 3시 10분쯤 되었을 때였다. 글은 거의 완성되었다. 해뜨기 전의 정적 속에서 질주하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 왔다. 그 소리는 차츰 가까와 오더니 이윽고 앞뜰로 들어왔다. 조금 뒤에 창밑에서 다르삼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련님, 일어나세요 ! "
창을 내다보니 다르삼이 들고 있는 석유 램프의 희미한 불빛속에 우편배달부의 제복을 입은 유럽 혼혈아가 함께 서 있었다. 배달부는 나를 향해 경례를 하고 말레이어로 물었다. "밍케씨입니까? B시의 부이사관님 전보입니다."
팁으로 준 10센트 은화를 받아들고 그는 신이 나서 돌아갔다. 닭의 홰소리에 섞여 말을 달리는 소리가 차츰 멀어져 갔다. "도련님, 너무 일을 많이 하십니다. 조금 있으면 해가 뜹니다. 이제 주무세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다르삼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다만 어딘지 모르게 어수선한 우리들의 모습에서 심상치 않은 것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아아, 다르삼, 너와 같은 칼잡이가 천 명 있어도 2천 자루의 긴 칼을 갖고도 우리들을 도울 수는 없다. 이것은 힘의 문제는 아니야. 다르삼, 이것은 원리와 법과 정의를 둘러싼 문제이고, 너의 권법과 그 긴칼로도 우리들을 지켜 줄 수는 없다. 갑자기 반론이 들려 왔다.
밍케여, 편견을 버리고 솔직해져라. 칼잡이인 다르삼은 물론이고 말을 할 수 없는 돌들조차 너의 힘이 되어 줄 수가 있다. 네가 그들을 이해한다면 말이다. 한 인간의 힘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된다. 더구나 두 사람이지 않느냐 ! "알겠어요, 다르삼. 그만 자도록 합시다."
"안녕히 주무세요, 도련님. 해가 뜨면 또 다시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는 법입니다."
이 검은 옷의 사나이는 얼마나 현명한가?
나는 이층으로 올라가 전보를 읽었다.
'밍케, 고명한 변호사가 모레 스마랑으로부터 도착. 그를 믿어달라. 역까지 마중 바람. 급행 열차. 냐이와 안네리스에게 안부를 미리암, 에르베르.'
어머니 ! 어머니 ! 드디어 나의 절규가 그들에게 전해졌읍니다. 하지만 당신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고 계십니다. 편안히 주무세요, 어머니. 앞으로도 어머니를 깨우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은 여기 있읍니다. 결코 도망치거나 하지는 않을 겁니다. 언제까지나 버티고 싸우겠읍니다. 어머니, 당신의 아들은 비겁자가 아닙니다. 당신의 소중한 며느리를 빼앗겨서야 되겠읍니까? 제 아내는 어머니가 기다리고 기다리는 손자를 안겨 드릴 것입니다. 언제인가는 당당한 자바인으로서 결혼하는 자랑스러운 모습을 어머니가 똑똑히 볼 수 있도록 해드리겠읍니다.
백인의 법률에 의한 이슬람 법의 침범을 고발한 내 글은 네덜란드어로 "슬라바야 일보"에, 말레이어판인 "말레이어 신문"에 같은 날 오후에 동시에 게재되었다. 그리고 마르빈 네이만이 게재된 신문을 들고 직접 찾아왔다.
"지금까지 당신은 우리들을 많이 도와주었옵니다. 이번에는 우리들이 당신을 할 수 있는데까지 도울 차례입니다." 그는 흥분해서 말했다.
"그러나 당신과 가족에 대한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지면으로 지원하는 길밖에는 없읍니다. 우리 신문의 편집국 사원과 직공들은 당신의 투쟁을 높이 평가하고 마음속으로 당신에게 갈채를 보내고 있옵니다. 그렇게 어린 나이에 참새가 폭풍에 시달리는 것처럼 발버둥치며 그래도 끝까지 싸우려고 하는 그 기개를 높이 사고 있옵니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엄두도 못 낼 일입니다, 트래나르씨." 그는 신문에 실을 안네리스의 사진을 빌려 달라고 했다.
"될 수 있으면 당신과 냐이의 사진도 있었으면 좋겠옵니다."
그는 다이아몬드와 진주를 장식하고 자바의 정장을 한 안네리스의 사진을 마마에게서 받았다.
"다만 유감인 것은 이 사진을 당장은 실을 수가 없읍니다. 두 달 정도 기다려야 합니다." 네이만은 설명했다.
"동인도는 아직 미개의 정글이라서 사진의 '네가 필름'을 아연판으로 만들 수 있는 공장이 없읍니다. 따라서 이 사진의 필름은 홍콩에서 만들게 됩니다. 동남 아시아로부터의 주문이 많아서 만일, 홍콩에서 만들 수 없는 경우에는, 유럽까지 보내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더 늦어지겠지요. 어쨌든 이것이 잘 되면 더욱 많은 독자의 호응을 얻게 될 뿐만 아니라, 목판이나 석판이 아닌 아연판 필름에 의한 사진을 우리들이 동인도 역사상 처음으로 신문에 게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안네리스를 만나게 해 달라고 부탁했으나 우리들은 그녀가 병으로 누워 있다는 이유로 그것을 거절했다.
"혹시 안네리스양이 임신한 것은 아닙니까?"
네이만은 물없다.
"미안합니다, 그런 질문을 해서. 실례되는 질문인 줄은 알지만 만일 임신 중이라면 사태가 달라질지도 모릅니다. 암스테르담 지방법원의 결정을 번복하는 것은 힘들겠지만, 마우리츠 메레마의 결정을 무효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은 있읍니다." 안네리스가 임신? 그것은 생각해 보지도 않은 일이었다. 네이만의 질문에 나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것은 마마도 마찬가지여서, 그녀는 눈만 멀뚱거리며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마르민 네이만이 돌아간 다음 이번에는 콤멜이 역시 내 글이 실린 신문을 들고 찾아왔다. "냐이, 밍케씨. "
그는 말했다.
"이 기사는 곧장 농촌에도 들어가기로 되어 있읍니다. 마을 사람들에게 기사를 읽어 줄 사람을 우리들이 고용했읍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앉아 듣게 될 것입니다. 또 빨간 연필로 밑줄을 친 특별판 15부를 이슬람 학자들에게 발송했읍니다. 그들도 이 문제에 대해 발언을 해야 합니다. 우리들은 오늘 밤 그들의 견해를 취재해 올 생각입니다. 냐이와 밍케씨는 결코 고립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콤멜을 당신들의 친구로 생각해 주십시오."
같은 마차로 콤멜과 나는 슬라바야로 출발했다. 그는 구멘사리에서 내리고, 나는 아직 이름도 모르는 변호사를 마중하기 위해 그대로 역으로 향했다.
콤멜은 헤어질 때 마차 밖에서 내 손을 꽉 잡았다. 그의 눈은 인도주의적인 사명감에 불타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 마차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내가 마중나간 변호사는 차분한 느낌의 중년 신사였다. 웃는 얼굴로 기꺼이 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고, 데라데라 변호사와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지금은 그의 이름을 말하지 않겠다. 어쨌든 큰 소송사건에서 종종 이름을 듣는 법률가로서 그 빛나는 활동에 의해서 명성과 부를 얻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우노크로모의 우리들 집에 묵었다. 밤을 새워 그는 안네리스의 관계 기록을 검토하고 모든 기록의 사본을 작성하기 위해 서기를 두 사람 준비해 달라고 요구했다. 판지 다르만, 즉 얀 다페르스테와 내가 서기 일을 하기로 했다. 그러나 나는 서기로서는 적합하지 않았다. 왜냐 하면 나는 글씨를 지저분하게 쓰고 틀린 곳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다르삼이 밤중에 나가서 드루세 석유회사의 서기를 찾아오지 않으면 안되었는데, 그는 공문서용의 특별한 잉크를 갖고 왔다.
스마랑에서 온 변호사(나는 그의 이름을 말할 용기가 없다. 이 재판이 패배로 끝났을 경우, 그의 변호사 활동에 지장을 초래할지도 모르니까)는 아침까지 모든 기록을 검토했다. 두 사람의 서기는 각 기록에 대해서 2부씩 사본을 작성했다. 오전 5시가 되자 두 사람은 각기 직장으로 떠나고, 또 다른 서기를 고용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오전 7시, 변호사는 장문의 서류를 쓰기 시작하고, 새로운 서기들이 그 사본을 몇부 작성했다. 그리고나서 그는 그 사본의 하나를 갖고 슬라바야의 유럽인 법원에 다르삼을 데리고 갔다. 밤이 되어서야 돌아온 그는 그대로 잠자리에 들었다.
법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우리들로서는 알 수 없었다. 콤멜이 게재한 그날 오후의 뉴스는 이슬람 학자들이 슬라바야의 유럽인 법원에 몰려가서 암스테르담 지방법원의 결정과 슬라바야의 법원에 의한 그 집행에 항의를 했다고 보도하고 있었다. 이슬람 학자들은 그 문제를 슬라바야의 이슬람 종교 재판소에 제소한다고 위협했고, 당국이 동원한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당했다고 한다.
콤멜 자신이 쓴 것으로 보이는 논설은 이슬람 교도의 존경과 신망을 한 몸에 모으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을 경청하는 이슬람 학자에 대해서 당국은 좀더 사려 깊은 신중한 대도로 임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신앙을 비웃는 것은 위험하다. 무력한 식민지의 백성을 우롱하고 그들의 재산이나 처자식을 빼앗거나 하는 일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고 그는 주장하고 있었다. 콤멜은 두 번에 걸쳐서 우리들 편에서 피력하고 있었다. 그는 매우 교묘하게 우리들을 대변하고 우리들의 입장과 일반적인 상황에 대해 논했다.
그의 논조는 아주 간단한 것이었으나 무게가 있고 자신에 넘쳐있었으며 호소력이 있었다. 물론 그것은 그 나름대로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슬라바야 일보"는 네이만에 의한 냐이의 인터뷰 기사를 싣고 있었다.
"나는 20년 이상이나 피땀을 흘려가며 일해서 이 농장을 꾸려왔읍니다. 이 농장에 바친 나의 노력은 나의 두 자식에 대한 것 이상이었읍니다. 그런데 지금 모든 것들을 빼앗기게 되었읍니다. 나는 돌아간 투앙 메레마의 생활 태도, 병, 무능력 때문에 장남 을 잃어버렸옵니다. 그리고 지금 또 다시 한 사람의 메레마라는 사람이 나에게 남겨진 딸까지 빼앗아가려고 합니다. 내가 권리로써 획득한 것, 내가 사랑해 온 모든 것들로부터 유럽의 법률로 나를 떼어 놓으려고 하고 있읍니다. 그런 일이 교묘하게 꾸며진 것이라면 나는 이렇게 물어볼 수 밖에 없읍니다. 무엇이 자신의 원리이고 무엇이 자신의 권리가 아닌가, 무엇이 정의이고 무엇이 정의가 아닌가를 가르칠 수 없을 정도라면 당신네들의 학교는 도대체 무엇때문에 존재하느냐고 묻고 싶습니다."
뒤이어 네이만은 나에 대한 인터뷰 기사를 이렇게 끝맺고 있었다.
"우리들은 자신들의 의지로 결혼한 것이고, 안네리스의 어머니도 이 결혼을 인정하고 있다. 1800년에 법률에 의해 노예 제도가 정식으로 폐지된 이후, 우리들의 신체는 우리들 자신의 것이고, 다른 어떤 사람의 소유물도 아니다. 적어도 '네덜란드령 동인도 역사'에서는 그렇게 가르쳐 왔다. 나는 법원의 결정으로 나의 아내를 빼앗으려 하고 있는 지금 현재 유럽의 양심에 묻고 싶다. 그 저주받을 노예 제도를 당신들은 부활시키려 하고 있는가? 어째서 당신들은 한 장의 공문서로 사람을 결정지으려 하는가, 왜 인격을 가진 인격체로서 사람을 보지 않는가?"
마지막으로 마르티네 의사와의 인터뷰가 실려 있었다.
"나는 옛날부터 그 가족과 교제를 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안네리스 메레마의 건강 상태에 대해서는 그녀가 결혼하기 전에도 결혼하고 나서도 잘 알고 있다. 안네리스는 그녀의 남편, 어머니, 그리고 주위의 환경을 사랑하고 있다. 중대한 결의를 갖고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세 가지 모두에 대해서 그녀는 매우 강한 집착을 갖고 있다. 만일 암스테르담 지방법원의 결정이 그대로 집행되는 일이 생긴다면, 그녀는 정서적으로 극도의 불안정 상태에 빠져서 그 결과, 젊고 아름다운 생명을 단축시키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도 안네리스 부인은 수면제를 복용하지 않으면 안될 상태에 놓여 있다. 이미 그녀는 확실히 안심할 수 있는 것, 법적인 보증 같은 것의 존재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고 있다. 그녀의 마음 속은 공포와 불안으로 가득 차 있다. 방 밖에는 태양이 빛나고 웃음과 환희가 넘쳐 있는데, 나는 언제까지 그녀에게 수면제를 투여하지 않으면 안되는가. 그 젊은 천사는 왜 그녀의 뜻과는 관계가 없는 결정에 시달림을 받아야만 하는가? 앞으로 그녀에게 수면제의 투여를 계속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한다면, 나는 의사로서 더 이상 책임을 질 수가 없다."
스마랑에서 온 변호사는 우리들의 재판에 관한 자료를 남김 없이 읽었다. 그는 그것을 노트에 적었으나, 우리들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들도 무턱대고 질문을 해서 그를 번거롭게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저녁때 그는 슬라바야 이외에서 온 신문에도 관심을 나타냈다. 그런 다음 그는 않은 문제에 대해 얘기했다.
"우리는 비장한 각오를 갖고 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냐이."
그는 마마에게 이렇게 물었다,
"왜 메레마씨는 냐이와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았읍니까?"
"투앙이 왜 정식으로 결혼하려고 하지 않았는지 나도 그 이유를 모르고 있었옵니다. 그렇게 해 달라고 나는 몇번이나 졸랐읍니다만."
마마는 대답했다.
"내가 가까스로 사정을 이해하게 된 것은, 그의 아들인 마우리츠 에레마가 갑자기 이 집에 나타났을 때입니다. 약 5년 전의 일이었읍니다. 그때 처음으로 나는 투양 메레마는 마우리츠의 어머니와 아직도 법적인 혼인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변호사는 놀라서 마마를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그들은 이혼하지 않고 있었읍니까?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메레마씨는 법률상 이곳에 있는 자식을 인지할 수가 없읍니다. 왜냐 하면, 그런 자식들은 사생아나 다름 없고, 그들에 대한 인지는 합당한 것으로 간주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 소송에서의 냐이의 입장은 매우 유리해집니다."
마마와 나에게 희미하게나마 서광이 비쳤다. 그러나 며칠 뒤 그런 것을 이유로 맞서도 우리에게는 승산이 없다고 변호사는 통고했다.
"네덜란드 본국에 전보로 조회한 결과 알게 된 일인데, 아메리아 메레마 한멜스 부인은 남편이 집을 나가 행방불명이 된 지 5년뒤, 네덜란드의 법원에 이혼 소송을 제기했읍니다. 정당한 이유없이 남편이 그녀를 버렸다는 것이 제소의 이유였읍니다. 그리고 메레마씨의 실종이 최종적으로 확인된 다음, 1879년에 아메리아 부인의 이혼 청구는 인정되었읍니다. 따라서 그들의 혼인 관계는 법률상, 냐이의 장남 로베르트가 태어났을 때 이미 없어졌던 것입니다."
변호사는 그렇게 설명한 다음 마마에게 물었다. "메레마씨는 그 이혼에 대해서 알고 있었읍니까?"
"모르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마마가 대답했다.
그리고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하더니 분노를 터뜨렸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마우리츠 메래마는 5년 전, 이곳에서 투앙과 대면했을 때 교활하게 거짓말을 했읍니다 ! 내 어머니가 부정을 저질렀다면 이혼 소송을 제기해 보라고 그는 투앙 메레마에게 대들었읍니다. 그 얘기가 투앙을 정신적인 파멸에 이르게 했던 것입니다."
마마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느라 한마디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으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마우리츠 메레마에 대한 우리들의 감정은 더욱 나빠졌다. 아무래도 그는 의도적으로 헤르만 메레마에개 정신적 충격을 주어 죽음을 재촉하려고 계획한 것 같았다. 모든것은 재산이 목적이었을 것이다.
이튿날 아침 변호사는 스마랑으로 돌아갔다.
우리들은 그렇게 해서 법률가라는 방패를 잃어버렸다. 법원의 결정과 싸우는 직접적인 무기를 빼앗긴 것이다. "괜찮습니다. 마마. 남은 것은 펜밖에는 없지만 말이에요." 나는 썼다. 쓰고 절규하고 열변을 토하고 단식하고 포효하고 탄핵하고 신음하고 선동했다.
콤멜이 그것을 말레이어로 번역해서 지면을 제공해 주는 신문사에 배부했다. 그리고 어느 졍도의 성과는 있었다. 슬라바야의 종교 재판소는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밍케와 안네리스의 결혼은 이슬람 법에 의해 승인되고 보증된 것이므로, 그것을 부정하거나 침해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한편 몇몇 식민지 성격을 띤 신문은 모멸, 냉소, 악담을 퍼부었다. 네이만과 콤멜의 신문은 종교재판소의 성명을 부지런히 요약해서 실었다.
나의 아내, 섬세하고 부서지기 쉬운 인형 같은 안네리스가 죽은 사람처럼 침대에 누워 있을 때, 슬라바야는 그녀와 냐이와 나의 문제를 둘러싸고 열병을 앓고 있었다. 이 사건의 발생 이후 콤멜이 기울여 온 노력은 차츰 열매를 맺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신문은 농촌에서 글을 아는 사람들에 의해서 읽혀지고, 많은 청중이 그 주위에 모였다. 눈을 통해서가 아니라, 귀와 입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퍼져나가 전 사회적인 사건으로 발전해 갔던 것이다.
우리들에게 질문을 하지 않고도 다르삼은 얼마 뒤 사태의 진상을 알아챘다. 그는 자식들의 도움으로 말레이어 신문을 열심히 읽고 있었던 것이다.
또 다시 안네리스와 냐이는 법원의 소환을 받았다. 안네리스의 출정은 무리였다. 그래서 마마와 나만이 변호사를 동반하지 않고, 출정하고, 그녀는 마르티네 의사가 특별히 간호를 하게 되었다. 판사는 즉시 안네리스의 거처를 물었다.
"아픕니다. 마르티네 의사가 간호하고 있읍니다."
"의사의 증명서는 ?"
"내 말은 믿을 수 없다고 법원에서는 결정했나요?"
난폭한 냐이의 대답에 나는 깜짝 놀랐다.
"좋소."
판사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냐이는 좀더 말을 삼가시오. "
"모든 것을 잃게 된 사람에게 이 자리에서 말을 삼가라고 하는 겁니까 ? 판사는 무엇을 바라고 있읍니까? 분명히 말해 주세요. "
판사는 쁘리부미 여인과의 충돌을 가능한 한 피하려고 양보를 했다.
"좋소. 그럼 지금부터 고 헤르만 메레마씨가 인지한 자녀, 미스 안네리스 메라마에 대한 슬라바야 법정의 결정을 전한다. 미스 안네리스 메레마는 닷새 뒤 슬라바야로부터 선박으로 이송하기로 한다."
"딸은 병중입니다. "
마마가 항의했다.
"배에는 훌륭한 의사가 동승하고 있소."
"그녀의 신병 이송은 인정할 수 없읍니다."
나는 거부했다.
"나는 그녀의 남편입니다."
"누가 그녀의 남편이라고 내세우건 당 법원은 일체 상관하지 않는다. 안네리스 에라마양은 미혼이며, 남편 같은 것은 없다." 이것은 악마와 대화를 하고 있는 것과 다름 없었다. 판사는 회중시계를 꺼내 본 뒤 의자에서 일어나 나가버렸다. 형용할 수도 없는 격심한 분노를 느끼며 우리들은 법원 건물을 나섰다.
나는 마마를 먼저 돌려보내고 네이만과 콤멜을 만났다. 그리고 법원의 결정을 두 사람에게 전하고, 두 사람의 사무실에서 그것을 보도하는 기사를 함께 만들고 인쇄소에서 활자를 줍는 문선일까지 도왔다.
그날 저녁 뉴스가 보도되었다.
집에 돌아가 보니 마르티네 의사가 냐이와 함께 안네리스 옆에 붙어 있었다. 두 사람 모두 고개를 떨구고 잠자코 앉아 있었다. 얘기를 할 기력도 없는 것 같았다.
이튿날 아침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믈라바야 법원의 결정은 많은 사람과 단채의 분격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에 긴 칼과 낫 등으로 무장한 마두라인 일단이 우리 집을 둘러싸고 집안으로 들어 오려는 유럽인과 정청 관리에개 공격을 가했던 것이다. 통행인과 마차들은 무슨 일인가하고 멈춰 서서 지겨보았다.
검은 옷을 입은 마두라인 남자 한 사람이 셔츠 앞을 풀어헤치고 누구라도 상대해 주겠다는 듯이, 그리고 어떤 위험도 겁나지 않는다는 듯이 활개치고 다녔다.
머리에 두른 띠가 길게 늘어져 어깨까지 닿았다. 안네리스의 방 창문으로부터 백인 법정의 결정은 알라 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교도의 범죄이고, 미래 영겁을 두고 용서받지 못할 대역 행위라고 비난하는 마두라인의 저주 소리가 쉴 새없이 들려 왔다.
이른 아침부터 오전 11시까지 그들은 집 주위를 점거했다. 농장 일은 완전히 중단되었다. 인부들은 혼란을 피해 사방으로 흩어져 각기 마을로 돌아가고 말았다.
경찰 2개 소대가 마차에 나누어 타고 도착했다. 이미 멀리서부터 그들이 마차 위에서 두들겨대는 징소리가 끊임없이 들려 왔었다.
마두라인을 무시하고 마차의 대열은 다짜고짜 집안으로 들어오려고 했다. 방에서 보고 있으려니까 그때 몇사람의 마두라인이 큰 낫을 휘두르며 말의 다리를 공격했다.
말이 놀라서 날뛰는 바람에 마차 가운데 두대가 뜰 안으로 들어와 개구리가 있는 연못으로 넘어졌다. 운좋게 집안으로 들어와 멈춘 나머지 마차에서 총을 든 제복의 경찰들이 뛰어내려 마두라인을 쫓아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두라인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충돌이 일어났다.
내가 있는 곳에서 경찰 두 명이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경찰대의 유럽인 지휘관이 총을 발사하라고 부하들에게 고함을 질렀다.
그때 돌멩이 한 개가 날아와 그의 관자놀이에 정통으로 맞았다. 지휘관은 비틀거리며 쓰러지고 그대로 일어나지 못했다. 대신 지휘를 맡은 검은 네덜란드인(경찰에 고용된 원주민)이 더욱 큰소리로 마두라인을 물리치라고 소리쳤다.
그도 팔에 칼을 맞아 순식간에 셔츠가 피로 물들었다. "알라 신은 위대하다 ! "
마두라인의 아우성 소리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힘이 넘쳤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패배해서 사방팔방으로 도망쳤다. 앞뜰 잔디 위에 피투성이가 된 사람들이 몇몇씩 쓰러져 있었다. 훈련을 끝낸 지 얼마 안되는 특수 부대, 마레소세가 경찰대를 대신해서 투입되었다. 경찰대는 하늘을 향해 쏘았다고는 하나 총을 발사했기 때문에 명령을 위반했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그들은 특수부대원들에게 욕설을 들으며 연못에 빠진 두 대의 마차를 끄집어 내는 즉시 철수하도록 명령받았다. 마두라인과 그밖의 사람들로 구성된 한 무리가 집안으로 돌입하려고 했다. 그들은 대기하고 있는 것이 아직도 경찰대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특수부대원이라는 것을 알자, 그들은 겁을 집어 먹고 일부는 집안으로 들어오기도 전에 도망쳤다. 마레소세는 식민지 군의 우수한 병사들로 이루어진 정예부대로서, 전 동인도에 공포의 대상으로 군림한 특수부대였던 것이다.
폭동을 진압하는 데 있어서 그들은 고무 곤봉을 사용할 뿐 화기나 칼 같은 것은 쓰지 않았다. 그들은 용감한 집단으로서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방에서 보고 있으니까 번쩍번쩍 빛나는 놋쇠로 만든 사자 휘장이 달린 청죽 모자가 새로운 침입자 사이를 누비고 있었다. 호각이 요란스럽게 울려퍼지고, 곤봉이 마구잡이로 침입자들 머리위에 떨어졌다.
호각, 곤봉과 둔기의 충돌은 반 시간 가량 계속되었다. 두 명의 마레소세 대원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날은 또한 항의를 하기 위해 몰려든 다른 무리도 쫓겨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다르삼이 체포되어 어디론가 연행되어 갔다.
소동이 진압되고 나서 함멜스테라고 칭하는 특수부대의 하사관이 우리들이 있는 방문을 요란스럽게 두드렸다, 마마가 문을 열고 그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냐이 온트솔로? "
하사관이 말레이어로 물었다.
"마레소세 따위에 볼 일이 없어요."
"이 집과 주변을 마레소세가 경비하게 되었소." "내가 알 바 아닙니다, 내 허가 없이는 이 집에 들어오지 마세요. "
"그래서 내가, 함멜스테 하사관이 그 허가를 얻으러 온 거요."
"허가할 수 없어요."
"그렇다면 앞뜰에서 야영을 하겠소."
냐이는 쾅 하고 문을 닫은 뒤 안에서 쇠를 잠그고 잠시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는 나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일단 양보하기 시작하면 기어오르는 사람들이에요. 걱정 말아요. 그들이 어떻개 하겠어요. 그들은 이 집에 관한 영장 같은 것은 갖고 있지 않으니까요."
냐이의 목소리는 날카로왔다.
창에서 마르티네 의사의 모습이 보였다. 조금 전의 하사관과 정문 앞에서 실랑이를 벌이다가 쫓겨나려는 순간이었다.
두 사람이 주고 받는 소리는 내가 있는 곳에서는 들리지 않았지만, 행동으로 봐서 마르티네 의사는 왕진을 위해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고, 하사관이 그것을 막고 있는 것 같았다. 마르티네 의사는 끈질기게 버렸으나 결국은 다시 마차를 타고 돌아갔다,
이제는 안네리스를 돌볼 의사도 없었다. 우리들만이 돌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오후 늦게 안네리스는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커다란 눈을 뜨고 마치 처음으로 세상을 보는 듯이 조심스럽게 둘레를 둘려보고 다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앤, 안네리스."
나는 불러 보았다.
안네리스는 나를 바라보았다. 핏기가 없는 창백한 입술이 열렸으나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나는 코코아를 집어 입에 넣어 주었다. 그녀는 컵으로 절반 정도 마시고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마마는 의자에 앉은채 잠자코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몸을 일으켜 방에서 나갔다. 나는 처음에 소를 돌보고 있는 인부들을 감독하기 위해 뒤뜰 쪽으로 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얼마 뒤 마마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거의 비명에 가까운 것이었다.
"누구나 네덜란드에 갈 수가 있는데, 나는 왜 안된다는 거죠?"
나는 밖을 내다보았다. 아래층에서 냐이는 허리에 손을 얹고 있는 순수 유럽인과 얘기를 하고 있었다.
상대방의 얘기는 낮아서 내게는 들리지 않았으나, 고개를 좌우로 흔들기도 하고 이따금 냐이에게 손가락질을 하고 있었다. "내가 내 딸을 쫓아간다는데 당신이 무슨 상관이에요. 누구의 돈도 아니고 내 돈으로 간다는데 말입니다." 상대방 남자는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내 딸을 쫓아가서는 안된다는 법이라도 있나요?"
남자는 손을 움직인 것 같았으나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검역 증명서는? 건강 진단서는? 내 딸도 아직 갖고 있지 않아요. 아니 오히려 지금 앓아 누워 있어요. 배 위에서 예방 접종을 받게 되나요? 그렇다면 나도 배에서 받겠어요." 나는 두 사람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안네리스가 침대에서 내려오려 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부축하고 창가로 내려갔다. 그곳이 그녀가 좋아하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한동안 그곳에 서 있었다. 안네리스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나도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잠자코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나는 억지로 얘깃거리를 찾았다.
"앤, 당신은 아직 저 산까지 가 본 적이 었지 ? 저 산에서는 우노크로모와 슬라바야 전체가 내려다 보이겠지. 언젠가 함께 가 보도록 하지."
산은 게으름장이가 젓다 만 코코아처럼 묵직한 구름에 가려서 볼 수가 없었다. 언제나 암록색으로 보이는 멀리 있는 숲도 낮게 깔린 구름에 뒤덮여 있었다.
훨씬 먼 곳의 하늘에서 이따금 번개가 번쩍이고, 한순간 구름들을 제압하며 하늘에 군림하는가 하면, 다음 순간에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자연계에는 자연계의 섭리가 존재하는 것이다. 옆에서 안네리스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마마가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조금 전까지 앉아 있던 의자에 조용히 앉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내가 돌아보자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나는 안네리스를 창가에 남겨두고 다가갔다. "밍케, 당신이 얘기하세요. 출발이 사흘 뒤로 다가왔다는 것을 말이에요."
물론 그것은 남편인 내가 전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지난 며칠 동안 어수선함에 쫓겨 아직 얘기하지 못한 그러나 내가 할 일이었다.
우리들이 패배했다는 것을, 반격은커녕 자신들조차 지키지 못하고 참패했다는 것을 안네리스에게 알리지 않으면 안된다. 멀리 있는 하늘은 점점 어두워지고 번개가 칠 때마다 어둠은 더해갔다. 창 밑에서는 경찰대의 마차에 부서진 연못이 손질도 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었다.
보통 때는 창문을 통해 뛰노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이던 농장 안의 마을은 지금은 쥐죽은듯이 조용해 사람 사는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아내에게 다가가서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그녀의 뺨에 내 뺨을 갔다 댔다. 나는 모든 용기를 끌어 모았다.
"앤 !"
그녀는 돌아보지 않았다. 아무런 반응도 나타내지 않았다. "앤, 안네리스, 내 얘기를 들어 주겠어 ?"
그녀는 듣지 않고 있었다. 왼손으로 목덜미를 천천히 긁었다. 말려 올라간 머리칼에 숨겨진 아름다운 목덜미는 창 밖의 자연보다도 더 완벽했다. 우리들이 함께 지낼 수 있는 것도 앞으로 사흘. 나의 연인, 더할수 없이 아름다운 나의 인형, 안네리스는 사흘 뒤면 떠나가 버리는 것이다.
엔, 당신은 그 뒤 어떻게 될까? 그리고 나는?
당신은 저 먼 하늘의 번개처럼 한순간의 광채로 주위의 사물을 밝혀 주다가 영원히 사라져버릴 것인가? 우리가 모르는 누군가가 갑자기 당신을 재판에 걸어 이런 판결을 내리게 했어. 그리고 또한 그는 우리들에게서 당신이 사랑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당신을 떼어 놓으려 하고 있는 거야. 당신은 이토록 야위고 창백해졌어. 마마와 나도 이렇게 바짝 야위어버렸구. 앤, 당신이 너무도 불쌍해. 이렇게 아름다운데, 그 미모도 젊음도 함께 할 수가 없군.
"앤, 내 말 듣고 싶지 않아 ? "
그녀는 여전히 나를 무시하고 있었다.
"앤, 당신은 저 산을 좋아하지 ?"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좀더 오래 전에 말을 타고 가볼 걸 그랬어. 마마가 집에 있을테니까 우리 둘이서 말이야."
다시 한번 그녀는 살짝 끄덕였다. "당신의 애마 바우크가 울면서 묻곤 하더군. 앤은 어디 있느냐고? "
안네리스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는 아주 천천히 나를 돌아다 보았다.
새벽 하늘의 샛별과도 같은 두 개의 눈동자가 꿈꾸듯이 나를 바라다보았다. 입은 여전히 꼭 다물고 약 냄새만을 풍길 뿐이었다.
마마는 더 이상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흐느끼면서 방에서 나갔다.
그리고 10분 쯤 있다가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또 다른 유럽인과 함께였다. 우리들이 서 있는 곳으로 그 사나이는 똑바로 걸어왔다.
"정청의 의무관이오."
그는 이름을 밝히지 않고 말했다. "미스 안네리스 메레마의 건강 진단을 하겠소." "미세스입니다."
나는 정정했다.
그는 내 말을 무시하고 내 아내를 침대에 데려다 앉혔다. 그리고 긴 웃옷 주머니에서 청진기를 꺼내 검진을 시작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혈압을 쟀다. 그런다음 청진기를 주머니에 넣고 눈을 검사했다. 그리고 안네리스의 코와 입에서 나오는 숨을 맡았다.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마마는 그것을 잠자코 지켜보고 있었다. 의무관은 환자에게 누우라고 일렀다.
"냐이! 왜 당신은 이처럼 많은 약을 이 아이에게 먹이도록 내버려 두었소? "
그는 거친 말래이어로 마마를 힐책했다.
"당신, 이 집에서 쫓겨나고 싶은가요? "
냐이는 그보다 더욱 거친 말투로 대꾸했다.
"빌어먹을 ! 내가 누군지 몰라? 나는 정청의 의무관이야 !" "당신 따끔한 맛을 봐야 알겠어 ?"
"좋아. 당신을 고발하겠어. 마르티네 의사도 마찬가지야. 두고보라구 !"
"고발하려면 당신네 집에 가서 하시지. 우리 집에서 얼씬거리지 말고. 문은 열려 있으니까 썩 꺼져 !"
의무관은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 그는 나를 돌아다보았다. "당신도 들었겠지 ?"
그가 소리쳤다.
"이 여자가 지금 한 말, 당신이 중인이 되어야 해, 알겠지 ? " "문은 열려 있다니까요."
내가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냐이가 나와 안네리스에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아 일으켰다.
"그녀는 몸이 몹시 쇠약해 있어. 그냥 눕혀둬. 심장이 약해졌어. 내버려 둬 !"
의무관이 말했다.
우리들은 안네리스를 침대에서 내려오게 하여 의자에 앉혔다. "앤, 식사를 가져다 줄깨. 누가 뭐라든 무슨 일이 있든 신경쓰지 마라."
안네리스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무관은 위협적인 태도로 내게 다가와 협박했다.
"너는 내 명령에 반항할 생각인가?"
"아내에 관한 것은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어요." 나는 그를 보지 않고 말레이어로 대답했다.
"좋아, 마음대로 해라 ! "
그는 말하며 방을 나갔다.
"어디 두고 보자 !"
"앤, 어째서 당신은 한 마디도 말이 없지 ? "
여전히 안네리스는 대답이 없었다.
"내 말 들려 ? 그 머리가 이상한 의무관은 가 버렸어. 걱정할 것 없어."
나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갔다. 안네리스는 여전히 창밖의 구름에 덮여 있는 산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마마는 잠자코 내 행동을 지켜보았다.
안네리스는 천천히 음식을 씹어가며 삼킬 때마다 망설이는 것 같았다.
내 등 뒤에서 마마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옛날에 마우리츠는 혈연 관계를 폭로했어요. 그리고 그는 지금 그 피가 부른 죄의 대가를 요구하고 있어요. 그를 성스러운 예언자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과거의 일을 생각해도 필요 없읍니다, 마마."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그래요. 추억은 이따금 고문이기도 하지요. 분명히 지나간 일은 이것저것 생각해 보았자 소용이 없군요. 그런데 안네리스에게 그 얘기를 했나요? "
"아직 못했읍니다."
"말을 해라, 앤. 왜 그렇게 말을 안하지 ? "
안네리스가 나를 보았다. 그리고 웃었다! 안네리스가 웃었다 !
마마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앤, 당신은 이제 나은 모양이군 하고 나는 마음 속으로 외쳤다.
마마는 일어나서 딸을 끌어안고 키스를 하며 속삭였다.
"앤, 너의 웃는 열굴을 보니까 마마의 슬픈 생각도 사라져 버리는구나 네 남편도 마친가지야. 너무했다, 앤. 한 마디도 안하다니 ? "
마마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안네리스는 천천히, 다시는 눈을 뜨고 싶지 않다는 듯이 천천히 눈을 깜박거렸다. 마르티네 의사는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그녀의 단점은 한 가지를 어디까지나 고집하려고 하는 데 있다. 일단 붙잡은 것은 결코 놓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는 장차 어떤 일이 원인이 되어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고, 그 결과 주위에 있는 것과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관심을 잃어 버릴 가능성 이 있다고.
그렇다면 아내는 지금 그 단계에 있는 것일까?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믿을 수 있는 마르티네 의사는 왕진을 금지당했다. 그때 그의 마지막 말은 이러했다. 그녀가 주어진 상황에 순순히 따를 수가 있다면 안네리스는 건강해질 것이라고. 지금은 어떤가?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마마도 모른다. 마르티네 의사여, 당신은 또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 마르티네 의사는 자신의 치료를 받고 있을 대의 안네리스는 그곳에 있는 것에 필사적으로 매달려 있는 상태였다고 했다.
그리고 마르티네 의사는 우리들이 패배하여 모든 노력이 실패로 끝나도 그녀는 그것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순순히 따르는 듯이 보이지만 마음은 천갈래로 찢어져 불안정한 상태에 있다. 약으로 겨우 심리적인 손상을 막고 있다. 그렇지 못하면, 모든 것이 그녀에게 있어서 가치를 상실할 수가 있다. 혹은 거꾸로 그녀 자신이 남에게 있어서 무의미한 존재가 될 수도 있다.
메레마씨를 생각해 보라. 따라서 그녀가 의식을 회복하고 나면 멋진 일, 아름다운 일, 희망에 넘치는 일, 마음을 즐겁게 해 주는 일을 쉴새없이 그녀에게 얘기해 들려 주라고, 그러나 지금 남편으로서의 나의 임무는 앞으로 사흘이라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그녀에게 전하는 일이다. 더구나 마르티네 의사의 왕진이 금지된 지금 약을 쓸 수도 없는 것이다.
안네리스는 이미 위기는 넘겼다고 마르티네 의사는 말한 적이 있다. 그가 그렇게 말한 것은 우리들이 결혼하기 직전의 일이었다.
지금 그 위기가 다시 찾아왔다. 여기서도 또한 안네리스를 구할 수 있는 의사는 내가 아니다. 밍케씨, 당신, 남편인 당신, 그녀가 사랑하는 당신이 그녀의 의사가 되는 겁니다. 마르티네 의사는 그렇게 말했다. 당신이 네덜란드까지 그녀를 따라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120길더가 필요한데 냐이는 그 정도의 비용은 부담할 수가 있읍니다. 그녀에게 있어서는 결코 큰돈은 아니니까요. 그러나 그들은 이미 우리들이 안네리스와 동행하는 것을 금지해버렸다.
어떻게든 해 보아야 한다고 마르티네 의사는 말했다. 모든 수단, 모든 방법을 강구해야 합니다. 아직도 어린 부인의 생명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당신이 없이는 그녀는 살 수가 없읍니다. 지금 그녀에게는 당신이 유일한 희망입니다.
나는 모든 방법을 써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모조리 했다고 믿는다. 그리고 나서 패배한 것이다. 암스테르담 지방법원의 결정에는 저항할 수가 없었다.
슬라바야의 백인 법정은 냐이와 나 두 사람은 안네리스와 일체 관계가 없다고 선언했다.
냐이는 교묘한 계책을 하나 세워놓고 있었다. 판지 다르만 즉, 얀 다페르스테에게 향료의 거래를 위해 네덜한드로 건너가도록 이르고, 그렇게 해서 그를 내 대신 안네리스와 동행시키기로 한 것이다.
이미 냐이는 의심을 사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그가 우노크로모에 가까이 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네덜란드 기선회사의 대리인이 꾀를 내어 안네리스의 선실 옆 2등 선실에 다르만을 태우기로 했다. 또 그의 건강진단일의 날짜를 실제보다 앞당기도록 꾸며 준 것도 그 대리인이었다.
아내의 표정은 대리석 조각 같아서 마치 안면의 신경이 뇌와 끊어져 버린 것처럼 보였다. 움직임도 감정 표현도 일체 없고, 변함없이 말이 없었다.
나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출발 날짜를 그녀에게 알려 주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번번이 실패로 끝났다. 그녀는 스푼으로 네 번 정도 먹었을 뿐, 그 다음은 입을 벌리려고 하지 않았다. 도대체 몇번을 그랬을까? 냐이는 안절부절 못하고 방안을 들락거렸다.
냐이가 방을 나갔을 때, 나는 아내를 끌어안고 용기를 내어 귓가에 속삭였다. "앤, 우리들은 패배하고 말았어. 당신을 따라 우리들도 네덜란드로 가려고 했는데, 그들이 그것마저 금지해 버렸어. 앤, 듣고있어 ? "
그녀는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당신이 어떻개 생각하고 있는지 나는 모르겠어. 하지만 앤, 잘 들어줘. 마마와 나 대신 얀 다페르스테가 가기로 했어. 사흘 뒤 그도 같은 배로 유럽까지 당신과 함께 가기로 했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알겠지? 당신이 그곳에 도착하면 마마와 나도 곧 뒤쫓아갈 거야."
안네리스는 변함 없이 아무런 관심도 나타내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것으로 이미 남편으로서의 무거운 임무를 다 한 것이다. 물론 그녀가 그것을 듣지 않았다면 임무를 완전히 다 했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지만.
도대채 나는 몇번이나 얘기하지 않으면 안되는가? 나는 안네리스에게 키스를 했다. 그래도 반응은 없었다. 어쩌면 마르티네 의사가 말한대로 그녀는 벌써 위기를 지나서 이제는 모든 것을 포기하기 시작한 것일까?
이것으로 몇번째일까? 마마가 또 방으로 들어왔다. 그때 그녀는 에르베르 드라크로아에게서 온 전보와 어머니에게서 온 편지를 내게 건네주었다.
B시의 부이사관은 변호사를 파견했으나 그것이 실패로 끝난것을 유감으로 생각한다고 전해 왔다.
우리들과 슬픔을 함께 하고 우리들에게 진심으로 동정을 표한다고 그는 말하고 있었다. 장문의 전보 속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었다.
즉 암스테르담 지방법원의 결정은 부당하다. 그는 동인도 총독에게 전보를 쳐서 암스테르담 지방법원의 결정이 그대로 집행된다면, 자신은 사직을 하겠다고 통고했다. 또 사법성에도 항의의 전보를 보냈으나 회답조차 없었다. 그때문에 그는 사직하고 미리암과 함께 유럽으로 돌아갈 예정이라고 했다.
문제의 안네리스는? 여전히 그녀는 일체의 것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필사적으로 얘기하고 또 얘기했다. 그녀는 건혀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아마 듣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녀를 침대에 데리고 가서 눕히고 나도 그 옆에 나란히 누웠다. 그럴 때 내가 많은 이야기, 선조의 진설 같은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은 다행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이윽고 바닥이 났다.
유럽의 이야기에서 나는 "성 주느비에브"를 최소한 네번, "걸리버 여행기"를 네번, "작은 엄지손가락"을 두번 이상 얘기했다. 그 밖에 새끼 사슴 이야기도 있었다.
나는 목이 쉬어버렸다. 그러나 그래도 아직 모자라서 나 자신의 우스꽝스러운 경험담까지 덧붙이지 많으면 안될 정도였다. 안네리스를 안고 입을 그녀의 귀 가까이에 대고(그것이 그녀가 좋아하는 자세였다) 나는 되풀이해서 애기를 들려 주었다.
눈을 뜨자 밤이 지나고 어느새 방안에 밟은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잠든 지 얼마나 지났을까? 여전히 피곤했다. 문득 나는 안네리스가 나를 안고 키스를 하며 내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황급히 나는 몸을 일으켰다.
"앤, 안네리스 !"
나는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손에 느껴지는 그녀의 맥박은 전날처럼 느리지는 않았다. "마스 ! "
그녀는 대답했다.
정말로 내 아내가 말을 했을까? 아니면 꿈에 지나지 않는가? 꿈이여, 나를 괴롭히지 말아다오 ! 그러나 내가 본 것은 틀림없이 미소 짓고 있는 나의 아내였다. 얼굴은 창백하고 이는 지저분했다.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아아, 안네리스, 이제 나았군 ! "
나는 그녀를 끌어안고 키스를 했다. 지난 며칠 동안의 나의 필사적인 노력이 헛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식사 준비가 되어 됐어요, 마스. 드세요."
그녀는 병이 나기 전과 다름 없는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안네리스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심리는 불안정하고 정상적인 경신 발육이 없었다고 마르티네 의사가 말했는데, 과연 그럴까 ?
나는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슬픔에 젖은 눈이었다. 입술은 아직 웃고 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사팔뜨기가 된 것 같았다.
"마마 ! "
나는 소리쳤다.
"안네리스가 정신을 차렸어요."
마마는 나타나지 않았다.
세수도 하지 않고 나는 식탁 앞에 앉았다. 내 앞에는 스푼도, 포크도 접시도 없었다. 다만 안네리스가 내 앞에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미쳐 버린 것일까? 아니면 나혼자서 먹으라는 것인가?
그녀는 스푼으로 음식을 떠서 내 입에 넣어 주었다. "혼자 먹을 수 있어, 앤. 당신이나 먹어요. 내가 먹여 줄 테니까."
안네리스는 자기는 먹지 않고 계속 내게 먹이려고 했다. 나는 씹지 않고 삼키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녀의 마음을 상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배가 부를 때까지 먹었다. "왜 이렇게 나만 먹게 하는 거지 ? "
"어때요? 일생에 한번 내 손으로 당신에게 먹여 드리고 싶었어요. "
그렇게 말하고 난 뒤 안네리스는 입을 다물고 다시는 말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제19장
긴 이별
오늘이 마지막 날이다.
농장 일은 완전히 멈춰 있었다. 마레소세 (기마 힌병대-1890년에 아치에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창설된 특수 부대)는 농장 출입을 일체 금지하고 있었다. 겨우 소의 시중, 우유 짜는 것만이 평상일이었다.
마마의 항의는 묵살되었다.
많은 편지가 왔으나 답장은커녕 읽어 볼 시간조차 없었다. 네이만에게서 보내져 온 신문은 손도 대지 않은 채 쌓여만 갔다. 마마와 나, 그리고 안네리스도 욕실과 화장실에 갈 때를 제외하고는 밖에 나가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를테면 우리들은자택 연금된 셈이었다.
앞뜰에 쳐진 야영 텐트에서 마레소세 병사들이 나오는 것은 길가에 모인 사람들을 쫓을 때뿐이었다.
사람들은 대개 우리들에게 동정을 나타내기 위해 모여들었지만 그 가운데는 단순한 호기심만으로 구경온 사람들도 있었다. 안네리스는 여위고 창백하고 눈빛이 흐려 있었지만, 정신 상태는 비교적 정상처럼 보였다.
"전에 얘기해 준 무르타투리 이야기처럼 네덜란드에 대해 얘기해 줘요."
갑자기 그녀가 요구했다.
"북해의 연안에 어떤 나라가 있었읍니다....."
나는 생각나는대로 얘기를 시작했다.
"그 나라는 땅이 낮았기 때문에 '저지대의 나라'라고 불리고 있었읍니다. 그곳이 바로 네덜란드, 즉 홀란드입니다."
거기서 나는 더 이상 계속할 수가 없었다. 변함 없이 슬프고 꿈꾸는 듯한 눈이 생전 처음으로 보는 신기한 동물이 눈앞에라도 있는 듯이 신기한 눈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땅이 낮기 때문에 그 나라 사람들은 언제나 제방을 보수하지 않으면 안되었옵니다. 개다가 싫증이 난 사람들은 나라를 버리고 산이 있고 땅이 높은 나라들을 동경하여 방랑하는 것이 버릇처럼 되었읍니다. 땅이 높은 나라로 건너간 사람들은 이윽고 그 나라를 지배하려고 생각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읍니다. 그린 나라들에서 그들은 원주민을 지배하고 압박했읍니다."
"바다 얘기를 해 줘요. "
그때 흰 옷에 흰 모자를 쓴 유럽인 여성 한 사람이 노크도 하지 않고 들어왔다. 며칠 동안 우리들의 방에는 누구나가 제멋대로 드나들고 있었기 때문에 냐이와 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여인은 사무적인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 세시간 뒤면 출항이에요, 아가씨." 하고 여인이 말했다.
"아가씨는 호화스러운 기선을 타고 넓은 바다를 횡단하여 수에즈 운하로 들어가게 됩니다. 지브롤터를 본 일이 있나요? 그래요, 그 산호초의 도시를 아가씨는 지나게 되지요. 그리고 나서 며칠 뒤에 아가씨는 드디어 선조의 땅을 밟게 되는 거예요. 황금식으로 빛나는 모래, 형형색색의 꽃들, 그곳에는 아가씨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있어요. 얼마나 신나는 일이에요. 얼마나 행복하겠어요?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유명한 학자이고 기사인 오빠와 함께 살게 되니까요. 그리고 만일 그곳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일이 년 있다가 다른 결정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요 아가씨, 얼마나 행복하겠어요?" "마스, 나는 큰 파도나 물보라나 거품이 더 좋아요. 기선이나 네덜란드보다 말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아가씨."
여인이 가로막았다.
"네덜란드에는 무엇이든 다 있어요. 아기씨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손에 넣을 수 있어요."
"마스, 이곳에는 없는 것이 있나요? "
"그렇지는 않아, 앤. 무엇이든 여기서도 구할 수 있어. 당신은 여기서 행복했지."
"만일 네덜란드에 무엇이든 다 있다면......"
마마가 화가 나서 말했다.
"도대체 무엇때문에 네덜란드인은 이곳에 왔죠?"
"냐이, 내 일을 방해하지 말고 얼른 그녀의 옷이나 챙겨요." "아니, 옷뿐이 아니에요."
마마는 차츰 흥분했다.
"이 애의 보석도, 예금통장도, 아버지의 인지 증명서도 모조리 싸 줘야 해요. 그리고 어머니와 남편의 기도도 함께요."
"마마."
안네리스가 말했다.
"지금도 마마는 기억하고 있어요. 언젠가 마마가 들려 준 이야기를?"
"이야기라니 무슨?"
"어머니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고 집을 떠났을 때의 이야기를 말이에요."
"응, 기억하고 있지. 그런데 왜 ?"
"그때 마마는 낡은 갈색 트렁크를 들고 집을 떠났지요?"
"그렇단다, 앤."
"그 트렁크는 지금 어디 있어요?"
"창고에 있단다."
"그것을 갔다 주세요."
마마는 트렁크를 가지러 갔다.
"이제 출발할 시간이에요, 아가씨."
유럽인 여성이 옆에서 말했다.
안네리스도 나도 못들은 척했다.
얼마 뒤 마마가 낡은 갈색 트렁크를 들고 돌아왔다. 녹이 슬어 모양은 일그러지고 여기저기 찌그러진 양철제 트렁크였다. 안네리스가 재빨리 그것을 받아들었다. "이 트렁크를 갖고 갈께요, 마마."
"너무 작고 보기 싫구나, 앤."
"마마, 옛날에 마마는 이 트렁크를 갖고 두번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하고 집을 나왔어요. 이 트렁크에는 마마의 쓰라린 추억이 하나 가득 담겨 있어요. 안에 담겨 있는 마마의 쓰라린 추억과 함께 이 트렁크를 가져가게 해 주세요. 시어머니가 만들어 준 바티크 신부 의상, 내가 가져가는 것은 그것뿐이에요. 여기에 넣어 주세요, 마마. B시의 시어머니에게 진심으로 존경을 보냅니다. 저는 갑니다, 마마. 과거의 일은 돌아보지 마세요.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로 잊어버리세요 마마. 사랑하는 마마."
"아가씨, 마차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유럽인 여성이 다시 옆에서 끼어들었다.
"앤, 그건 무슨 의미지 ? "
"옛날의 마마와 마찬가지로 저도 이 집에는 두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
"앤, 안네리스, 사랑스런 앤."
마마는 소리를 지르며 안네리스를 끌어안았다.
"앤, 마마도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야. 너를 지키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단다. "
마마는 억울해서 눈물을 흘렸다. 나도 흐느껴 울었다.
"우리들 두 사람은 할 수 있는 한 다했어, 앤."
나는 덧붙여 말했다.
"그만두세요, 마스. 울지 말아요. 또 한 가지 소망이 있어요, 마마. 그러니까 울지 마세요."
"말해다오, 앤. 소망이라는 것이 뭐냐 ? "
"마마, 동생을 낳아 주세요. 마마를 소중히 모실 귀여운 동생을 말이에요."
마마는 점점 더 심하게 울었다."마음씨가 곱고, 나처럼 마마를 울리지 않는 여동생을 말이에요."
"그러면, 어떻게 된다는 거냐 ?"
"그러면 안네리스가 없어도 마마는 외롭지 않을 거예요." "앤, 앤, 어쩌면 그런 말을..... 용서해 다오. 마마가 너를 끝까지 지키지 못한 것을 용서해다오, 용서해다오......"
"마스, 그동안 함께 지내서 우리들은 행복했지요?" "물론이지. "
"그 행복했던 일만을 생각해 주세요, 마스. 그 밖의 것은 안돼요."
문턱에서 혼혈의 사나이가 소리쳤다.
"서둘러 ! 벌써 출발이 2분이나 늦었어."
"자, 아가씨, 갑시다."
유럽인 여성이 안네리스의 손을 잡아 끌었다.
갑자기 안네리스는 입을 굳게 다물고 무표정해졌다. 잠깐 동안 보였던 당돌한 기개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천천히 걸어서 방을 나가 유럽인 여성에게 끌려 계단을 내려갔다. 몸이 너무나 쇠약해서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
나와 마마는 뛰어가서 그녀를 부축하려고 했다. 그러나 혼혈의 사나이와 여인이 그것을 가로막았다. 계단 밑에는 마레소세 병사들이 집결해 있었다. 우리들은 가까이 가는 것을 금지당했기 때문에 소가 끌려가듯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계단을 한 계단씩 천천히 내려가는 것을 다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일찌기 투앙 메레마로부터 딸을 지킬 수가 없어서 끌려가는 딸을 지켜보기만 했던 마마의 어머니도 역시 이런 쓰라린 마음을 맛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안네리스의 마음은 어떨까? 과연 그녀는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의 감정까지도 포기해버린 것일까? 더 이상 나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어졌다. 갑자기 마음 깊숙이에서 울음 소리가 들려 왔다.
어머니, 당신의 아들은 패배했읍니다. 하지만, 당신의 아들은 도망치지는 않았읍니다. 어머니, 자신의 아내를, 당신의 며느리를 끝까지 지킬 수는 없었지만 나는 결코 비겁자는 아닙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유럽에 맞서는 쁘리부미는 이다지도 약하단 말입니까 ?
유럽 ! 나의 스승, 유럽이여 ! 이것이 그대의 문명적 행동인가 ! 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내 아내는 덕택에 그녀의 작은 세계에 대한 믿음을 잃어 버렸다. 그녀 한 사람의, 그래, 단 한사람의 인간의 평화와 안전조차 보증할 수 없었던 세계에 대한 믿음을......
나는 안네리스의 이름을 불렸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돌아보려고조차 하지 않았다.
"앤, 나도 곧 뒤따라 갈께. "
대답은 없다. 돌아보지도 않는다.
"마마도 갈께, 앤. 용기를 내라 ! "
마마의 목소리는 쉬어서 거의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안네리스는 여전히 대답도,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현관 문이 열렸다. 정청의 마차 한 대가, 말에 탄 마레소세 병사들 틈에 끼어 얘기하고 있었다. 마마와 나는 밖으로 나가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안네리스가 부축을 받고 마차에 타는 것이 잠깐 보였다. 그때도 그녀는 우리 쪽을 돌아보지 않았고 소리도 내지 않았다. 문이 밖에서 잠겼다.
자갈을 튕기는 바퀴 소리가 차츰 멀어져가고, 이윽고 들리지 않게 되었다. 여왕 빌헬미나가 윽좌에 앉아 있는 나라로 안네리스는 떠나간 것이다.
우리들은 문 앞에서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우리들은 패배했옵니다. 마마."
나는 속삭였다.
"우리들은 최선을 다해 싸웠읍니다. 힘 닿는 데까지 민족의 긍지를 갖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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