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ING WOMEN
산타나 2
피트 해밀
차 례
이 소설은
3
4
5
이 책을
샐 코스텔라,닉 오클란 그리고 밀턴 캐니프에게
추억과 함께 바친다.
없어진 선원 친구들은 사나이들이 흔히 그렇듯이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그들 가운데는 두 번 다시 만난 적이 없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때때로 봄날 해빙기의 물에 실린 기억이 '구곡천'을 힘차게 거슬러 올라올 때가 있다. 그러면 막막한 수류에 한 척의 배가 표류해 온다. '황천의 나라'의 승무원이 조종하는 검은 배가. 그들은 가냘픈 목소리로 외쳐 대며 지나가면서 신호를 보낸다. 우리들은 함께 불멸의 바다를 항해하고 우리들의 죄 많은 삶에서 하나의 의미를 얻지 않았던가? 잘 있거라, 형제들이여! 당신들은 좋은 친구들이었다.
- 조셉 콘래드의 [나르시스 호의 흑인]에서
나는 표류하고 있다, 표류하고 있다. 대해원의 배처럼 나는 표류하고 있다. 표류하고 있다. 대해원의 배처럼 이 세상에는 누구 한 사람, 나를 좋아해 주는 녀석이 없다.
- 찰스 브라운의 [드리프틴 블루]에서
아아, 다시 한번 시도해 보자. 그러면 잘 될 것이다!
- 헨리 제임스
나는 1953년부터 54년에 걸쳐서 에리슨 비행장에 배속되어 있던 적이 있다. 이 책은 완전한 픽션이다. 그러나 등장 인물이나 사건은 모두 나의 상상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제3부
이덴이 멀리 가버리고 언제 돌아올지도
알고 있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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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의 교육은 시작된 것이었다. 마일즈 레이필드는 그림 그리는 비결을 일러 주었다. 바비 볼덴은 음악에 관해서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그 이외의 모든 것을 이덴 산타나가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모텔의 발코니에 앉아서 저녁 어둠이 내린 광대한 멕시코 만을 바라보는 지금 나는 그 무렵의 나날들을 다시 회상해 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많은 시간이 망막한 베일의 저편으로 사라져 버리기는 했으나 그 모든 것의 핵심을 나는 파악하고 있다. 나는 보급부에서 근면하게 일했고, 쓰레기 수거장의 보초도 섰고, 곧이어 당직 창고 관리계로 임명될 만큼 신뢰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어떻게든 수병의 본분을 다하여 래드 캐논에게 찍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무렵의 모든 시간이 선명한 연속 사진으로 뇌리에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그때 내가 보고 또한 경험했던 일들은, 내가 느꼈던 그러한 방식들과 아직도 교전중인 것이다.
그 무렵, 내가 느꼈던 그 감정의 대부분은 이덴 산타나와 지낸 시간과 떼어놓을 수 없을 만큼 강하게 밀착되어 있다. 모든 토요일 밤과 일요일 아침, 그리고 끌없이 계속될 것처럼 생각되던 감미로운 일요일 오후. 창고 당직에 걸리지 않는, 모든 화요일과 목요일 밤도 나는 그녀와 함께 있었다. 이덴이 화요일과 목요일 밤에 쉬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몇 십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화요일이나 목요일 밤에 여자와 만나게 되면 기묘하게 자극적이고 무엇에 찔리는 것 같은 어떤 것이 가슴에 솟구치곤 한다.
수요일과 토요일 밤에 이덴은 늦게까지 잔업이 있었다. 나는 트레일러에서 그녀의 귀가를 기다리고 있으면 되므로 언제나 원할 때 그녀를 만나는 일이 가능했다. 하지만 사귀기 시작한 지 아직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너무 빈번하게 만나는 것도 좋지 않다고 그녀로부터 다짐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은 특별한 사람이에요, 베이비. 그러니까 여느 보통 사람처럼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내 얼굴에 손을 갖다 대고는 덧붙였다.
"나도 당신에게 있어서 여느 보통 여자처럼 여겨지고 싶지 않고요."
이덴이 여느 보통 여자가 된다는 따위의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를 만나지 못하는 그런 밤이면 나는 혼자서 `둥근돌'이라고 은밀하게 부르는 것이 가슴 안에서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끼기 시작하게 되었다. `둥근돌'이란 질투를 의미한다. 이전에 영화나 만화에서 혹은 책에서 보았을 때, 그 흥미로움에 나도 모르게 웃어 버렸던 그 감정에 설마 나 자신이 이렇게 삐지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었다. 진정한 남자는 자신이 두렵지 않다면 절대로 여자에 대해서 질투심 같은 감정을 느끼지 않으리라 생각되었다. 그렇지만 혼자서 지내는 외로운 밤에는 명치 끝에서부터 `둥근돌'이 솟구쳐 올라오는 것을 나는 느꼈다. 혹은 그것이 외부에서 나에게 덤벼들어 오는 것처럼 느끼기도 했다. 또 마일즈 레이필드의 그림 속에 있던 거대한 오렌지처럼 부풀어 방에 가득 차기도 했다. 나는 음악을 듣거나 야자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를 듣거나 캡틴 플라워의 냄새를 맡곤 하였다. 그러면 이덴의 모습이 나의 마음 속에 떠오르곤 했다. 그런 다음 자연적으로 지금 이 순간 그녀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의심하곤 했다. 멜카도와 데이트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어쩌면 지금 그를, 아니면 다른 누군가를 그 트레일러의 성역으로 안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즉시 가슴이 답답해지고 땀이 배기 시작하곤 했다. 나는 울타리를 기어오르고 있는 내가 보인다. 그리고는 밤의 어둠에 뒤섞인 내가 트레일러에 다가가서 문을 재빨리 열어제친다. 당황하여 허둥대는 두 사람. 그 장면이 마치 신문의 일면 사진처럼 선명하게 보이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잠을 설치고 있는 사이에 완전히 신경을 소모해서 잠에 빠져든다. 그리고 또다시 화요일이나 목요일이나 토요일 밤이나 일요일 아침이 된다. 나는 이덴을 재회하고 망상은 산산조각이 나곤 했다. 어느 날 밤에 나는 이덴에게 `사랑해'하고 말했다. 무뚝뚝하게, 그러나 진정을 다해서 말했다. 그녀는 미소지었고, 그런 멋진 말을 듣는 것은 정말 오랫만이에요, 하고 말했다. 그녀 쪽에서도 똑같은 말을 해 줄 것을 기대하며 나는 다시 한번 말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또 다시 한번. 그렇지만 알게 된 최초의 몇 주일부터 몇 개월에 걸쳐서 이덴은 한 번도 `당신을 사랑해요' 하고는 말해 주지 않았다. 그 이외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해 주었다. 당신은 착한 아이예요, 베이비. 잘 자요 베이비. 당신은 정말로 멋진 사람이에요 베이비. 그렇지만, 당신을 사랑해요 베이비, 하고는 한 번도 말해 주지 않았다. 그 때였다. 남자와 여자 사이란 보기 보다 훨씬 미묘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그것은 만화의 스티브 캐니언이나 영화와는 다른 것이다. 스티브 캐니언이나 영화에서는 남자가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면 여자가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그 후 두 사람은 언제까지나 행복하게 살던데. 이덴과는 그야말로 살을 맞대는 사이가 됐는데도 그녀의 마음 속에서는 아직 내가 만지지 못하는 비밀의 방이 있는 것일까?
그리고 이덴은 세부적인 사생활에 관해서도 잘 말해 주려고 하지 않았다. 내가 넘을 수 없는 선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어서 집요하게. 질문해도 단편적인 일밖에는 가르쳐 주지 않았다. 나에게 밝혀진 가장 중요한 일은 그녀의 남편이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아직도 그 남자와 결혼하고 있지만 그것은 형식적인 관계라고 한다. 왜냐하면, 봐요, 나는 지금 당신하고 있잖아요 베이비?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웃는다. 그렇지만 일단 그 일을 알아버리자 설령 그녀와 함께 있어도 질투의 `둥근돌'이 부풀어 오르곤 했다. 그래서 언젠가 내가 나도 모르게 말했던 일이 있다. "그럼, 그, 그 남자, 당신의 남편과 이혼해 버리면 되잖아." 그러자 이덴은 대답했다. "당신은 유령하고 이혼할 수 있어요?"
그 말을 듣고 나는 생각했다(이 부근을 배회하고 있는 유령. 마치 일요판 <저널 아메리칸>에 실리는 `팬톰' 같은 것이군. 그래, 이덴의 남편은 `발이 있는 유령'이야. 수수께끼 같은 그 남편은 어딘가 가까이에 있고 우리 둘을 따라다니고 있어. 나를 따라다니고 있다고, 그 녀석은 언제나 자신이 좋을 때에 그녀에게 돌아올 수 있을 거야).
나는 그를 볼 수가 없고, 그때 한 장에 2달러의 지폐로 바뀌고 있던 동료 수병들의 연인의 사진과도 달라서 그 눈을 들여다볼 수도 없으므로 그 남자의 이미지는 오히려 상상 속에서 비대해지기 시작했다. 점점 불길하고 무시할 수 없는 두려운 존재로 되어갔다. 만약 그의 눈을 들여다 보면 그곳에 공포나 불안이나 허세나 증오가 숨어있는지 어떤지 알아낼 수 있을텐데. 그렇지만 아무리 그 남자의 모습을 떠올리려고 해도 얼굴도 없고 눈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 남자가 무서웠다.
가장 괴로운 일은 기지에 붙잡혀 있는 일이었고 무엇보다도 최악의 사태는 혼자서 있을 때였다. 그렇지만 그 시간에 몸을 움직임으로써 불안을 떨쳐 버리는 기술을 익혔다. 뭔가를 하고 있는 한은 그렇다, 침대에서 일어나서 집중하여 그림을 그리거나 기지 안을 천천히 달리고 있으면 불안한 환상을 몰아낼 수가 있었다. 때로는 바비볼덴이 일하고 있는 기지 병원까지 가서 그와 잡담을 나누거나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어둠의 왕국'까지 그를 만나러 가는 일도 있다.
볼덴은 음악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일단 말을 하기 시작하면 정신 없이 몰두하고 색소폰을 불 때의 어려움을 알기 쉽게 설명해 준다. 그렇지만 재미있는 것은 그의 말재주 뿐만이 아니었다. 거의 매주, 이덴 산타나가 일을 하고 있는 밤에 웨스트 썰번티즈 거리 부근의 흑인 전용 술집으로 데리고 가 주었다. <Patt's Bar> <Talk of the Town> <Two Spot> <My Club> <Mary Lou's Tavern> 등의 술집이었다. 어느 가게가 만원이었고 언제나 열기로 후덥지근하고 땀 냄새로 충만해 있었다.
입구의 문은 대부분 열려 있었고 천장의 선풍기가 멕시코 만의 공기를 나른한 듯이 휘젖고 있었다. 열기로 휩싸인 검은 얼굴들이 땀으로 빛나고 있었으며 내가 들어서면, 시선들이 일제히 나를 향하고 그리고 나서, 바비 볼덴이나 동행한 식당 주방장들에게로 향해졌다. 반드시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일순간 공기가 긴장을 내포하며 얼어붙고 그리고나서 나의 정체를 깨닫고는 이내 풀렸다.
라이브 밴드가 연주하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주크 박스가 반드시 놓여 있었다. 그것은 실로 엄청나게 큰 것으로서 그렇게 큰 주크 박스는 본 적이 없었다. 45회전의 레코드가 걸핏하면 회전반에서 빠졌고 박스 측면의 튜브 안을 둥근 조명등이 눈부시게 돌고 있었다. 그곳은 대부분 처진 허리에 엉덩이가 큰, 튼튼한 다리를 가진 여자가 리스트를 보고 있고, 누군가가 외치는 것이었다. 하니, B의 4번을 부탁해."
"저치들, 흑인의 움직임을 잘 보라고." 어느 날 밤에 바비 볼덴이 말했다.
"댄스 하는 법을 배우기는 무리겠지만 걷는 일 정도는 좀더 멋지게 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구, 마이클!"
음악이 배가 울려 주듯 맥박을 울렸고, 베이스의 리듬이 몸 안까지 쑤시고 들어왔다. 그럴 때는 다음날 대낮부터 밤이 되기까지 무의식적으로 그 리듬에 맞추어서 몸이 움직여졌다. 산타나와 함께 있을 때조차 썰반티즈 거리의 그 검은, 땀 냄새가 나는 리듬에 맞추어 몸이 움직여지는 것이었다. 주크 박스에서 흘러 나오는 노래에는 `어둠의 왕국'에서 들은 가수의 것도 몇 곡 섞여 있었다. 로이드 프라이스, 프로페서 롱헤어, 로이 브라운. 그렇지만 처음으로 듣는 가수도 많았다. 모두 힘찬 목소리의 흑인들이었다. 절규하는 타입, 외치는 타입의 가수, 블루스맨. 로웰 풀섬, 퍼시 메이필드, 지미 위더스 푼, 에이모스 밀번, 클린헤드 빈슨.
펜서콜라에 갓 도착했을 무렵의 행크 윌리엄스도 그러했던 것처럼 모든 이름이 귀에 새로웠다. 행크 윌리엄스의 노래는 못이 박히도록 들었고, 그의 노래라면 뭐든지 알고 있다는 경지에 이르렀는데 지금 또다시 내 앞에는 전혀 다른 종류의 뮤지션 일당이 나타난 것이다.
고향인 브룩클린에 있을 때에 나는 유행에 앞서 있다고 제법 우쭐대고 있었다. 라디오로 `시드'를 듣고 있었고 `버드'와 `디지'의 사운드 차이도 구별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곳에 와서 갑자기 문맹의 세계로 떨어져 버렸던 것이다.
검은 피부가 지배하는 눈부시고 농밀한 그 세계에서는 술집에 모이는 사람들도 여자가 필요하냐고 묻기 전에 뉴욕이나 다저스 팀의 일을 묻는 것이다. 검은 피부의 커다란 남자들, 심각한 얼굴을 한 남자들, 그리고 가련한 남자들. 그들의 음악은 시종 공기를 뒤흔들고 나는 그들의 여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기에 있는 여자, 너한테 눈독을 들인 모양인데." 어느 날 밤에 바비가 말했다. 우리는 그 때 모두 6명으로서 <투 팟트>의 카운터에 모여 있었다. 그녀는 동행인 두 명의 여자와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말이야, 네가 저 여자하고 함께 있는 장면을, 만약 그녀의 남펀한테 들키기라도 한다면 세 가지 방법으로 네 몸이 잘려 나갈 걸. 길고, 깊게. 그리고 끊임없이......"
그러면서 커다란 소리로 웃곤, 맥주를 목구멍으로 홀려보냈다. 다시 그 여자를 보자 상대편도 나를 보고 있었다. 계피색 피부, 도톰한 입술, 우아하고 가느다란 목선과 얄팍한 어깨, 풍만하게 튀어나온 가슴의 형태가 또렷하게 보였다. 힐끗힐끗 은근슬쩍 보면서 그녀를 알몸으로 만들어 갔고 그러면서 나는 머리 속으로 그녀를 그려보고 있었다. `색을 잘 사용하고 싶다, 저 피부색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싶다' 라고 생각하는 한편, 저 피부, 흑인 여자의 저 피부를 만지면 어떤 느낌일까? 하는 호기심도 생겼다.
"흑인 여자하고 잔 일이 있나?" 볼덴이 물었다.
"아니요."
"흥, 넌, 이 건으로 나한테 사실을 말한 최초의 백인이야."
"왜냐하면, 여기서 거짓말을 하면 죽잖아요." 맥주를 마시면서 나는 워레스키가 내뱉았던 말을 떠올려 보았다. `난 흑인 여자하고 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 흑인 남자가 흑인 여자하고 하고 있는 것을 볼 때까지는 말이야.' 그리곤 덧붙였다.
"그리고 그런 빗나간 일을 하면 역시 죽게 되잖아요."
"저것봐, 저 여자가 오고 있는데?"
주크 박스로 가려면 그 여자는 카운터 옆을 지나가야만 했다. 지금 흘러나오고 있는 것은 루이스 조단이 노래하는 `누군가가 내 문의 열쇠를 망가뜨렸다'였다. 주크 박스 등 뒤의 좁은 공간에서는 대여섯 쌍의 커플이 춤을 추고 있다. 여자는 주크 박스 앞에 서서 20센트 동전을 구멍에 집어넣고 선곡 단추를 두드리고 있었다. 전부해서 6곡. 그녀는 한 곡을 누를 때마다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이힐을 신은 한쪽 다리로 서서는, 다른 한쪽 다리를 그 다리의 복숭아뼈에 감고 있었다. 엉덩이에서 길게 뻗어내린 다리는 늘씬했고 무척 아름다웠다. 그녀를 그려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그녀와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 때 산타나의 얼굴이 뇌리에 떠올랐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모르는 여자의 엉덩이를 바라보고 있는 이 순간, 그녀는 어디에 있을까? 집에 있겠지, 하고 나는 믿으려고 했다. 혼자서 그 트레일러에 있는 게 분명하다. 어쩌면 내가 막사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이것 저것 상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리가 없다. 나도 모르게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에 저 흑인 여자하고 어딘가 가게 된다면 이덴을 배반하는 것이 되는 걸까?) 그 경우는 이덴으로부터 배반당하지 않을까 하고 항상 두려워하고 있던 일을 내가 저지르게 되는 거다. 이건 분명한 배반이다. 하지만 곧바로 다른 목소리가 속삭였다. (아냐, 이건 배반이라고는 말할 수 없어. 왜냐하면 배반할 대상이 없잖아. 우리는 뭔가 약속을 한 게 아니잖아?) 그래, 나는 사랑해, 하고 이덴에게 말했는데 그녀는 응해 주지 않았어, 우린 이렇게 함께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잖아요. 그것이 그녀의 뻔한 대답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혼자 있을 때에는 무슨 짓을 하든 내 자유가 아닌가.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을뿐. 그것이 그녀의 입버릇인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가 모든 일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아마도 그녀가 흑인 남자와 잔 일을 내가 알게 되었을 때, 느끼는 것과 똑같이 느낄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 이런 일에 그렇게 요란하게 신경을 써야만 하지? 요컨대, 단지 피부 색의 차이 아닌가. 이 남부에서는 이미 몇 세기에 걸쳐서 흑인과 백인이 관계를 맺어온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바비가 왜 그런 녹색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단 말인가? 선조가 아프리카에 있을 때부터 그랬을 리는 없다. 주크 박스 앞에 서 있는 여자도 그렇다. 흑인치고는 피부색이 너무 밝지 않은가. 저것은 분명 백인의 피가 섞여 있는 증거임이 틀림 없다. 그녀는 손님이 꽉 찬 카운터 앞으로 되돌아와서 자신의 테이블의 여자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었고 그리고 나한테 부딪쳤다.
"어머나 미안해요." 어린 소녀 같은 목소리였다. 나이는 나하고 비슷한 정도일 것이다. 아니, 약간 위일지도 모른다. 스무 살 정도일까?
"아니, 내 잘못이에요." 나는 말했다. "길을 막고 있었으니까."
그녀는 볼덴을 봤다. "불쌍하게, 이런 백인 남자를 데리고 와서 뭐하고 있어 바비?"
"당신을 만나러 왔지, 리틀 마마."
"잘도 말하는군."
"뭘 마시고 있지?"
여자는 럼주와 콜라를 시켰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새삼 응시했다. 도톰한 입술, 약간 위로 향한 코, 작게 여물어진 콧구멍. 그녀의 치마는 정말이지 짧았고, 불룩 솟아 있는 가슴은 실로 탄력이 있어 보였다. 그녀는 향수를 뿌리고 있었다. 달콤한 향기, 검은 향기. 그녀가 내 이름을 묻기에 내가 대답하자, 난 위니예요, 하고 그녀는 스스로 자기 이름을 밝혔다. 당신은 어디 출신이죠? 뉴욕. 그녀의 눈은 반짝거리며 빛나고 있었다. 볼덴은 천장을 바라보았다. 식당의 요리사들은 차가운 눈초리로 나를 본 후에 일제히 웃기 시작했다. 잡아 먹을 듯한 눈초리로 위니가 그들을 노려보았다.
"뭐야, 난 이 아저씨를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대해 주고 싶었을 뿐이라구. 짓궂은 사람들 같으니라
고."
"아니야, 모두 당신의 스타일에 감탄하고 있을 뿐이라구, 위니."
하고 로드아일랜드 프레디는 말했다.
"거짓말 말아요. 내가 이 아저씨를 데리고 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죠? 당신들은."
"만약에 그렇게 되면 이번 겨울에 두 번째의 눈이 내리지." 범퍼가 말했다. "검은 닭 오두막에 눈이 내릴걸."
"도대체가 온전한 사람이 없다니까...... 바비 볼덴과 흰둥이 꼬마, 그리고 고릴라 여섯 마리라니깐." 그러더니 그녀는 나를 보고는 손을 잡았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마이클. 다음에는 혼자서 와요, 이 고릴라들은 빼놓고서."
"이봐, 위니!" 바비 볼덴이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
그렇지만 위니는 그대로 자신의 테이블로 돌아가 버렸다.
"이봐, 목숨은 건졌군." 로드아일랜드 프레디가 말하고는 커다란 손을 내 어깨에 얹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나는 분명히 목숨을 건졌을 것이다. 위니가 그 자리를 떠났을 때 나는 이미 그녀와 오늘 밤을 보내야 하는지 어떤지의 선택을 면제 받았으므로. 그렇다, 한 가지 배반 행위를 하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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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은 간단하다. 불과 몇 주일 후에 어디에서 무슨 짓을 하든 이덴 산타나는 지금 나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 스케치북에는 그녀의 그림으로 가득했다. 가끔 수병들의 걸프렌드나 부인들의 그림을 그리고 있다가 당황하여 손길을 멈추는 일도 있었다. 나 쟈신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모두 이덴과 비슷해져 버리기 때문이었다. 금발, 검은 머리 등 색깔은 제각기일지라도 그녀들의 눈은 이덴의 눈이 되어 버린다. 자칫하다가는 뺨의 점까지 그려넣어 버리는 것이었다.
기지의 도서실에서 빌려온 소설을 읽고 있어도 등장하는 여성들이 모두 이덴으로 생각되어 버렸다. 데이지 브캐넌이나 캐서린 버클리까지 그랬다. 창고계 당직이 돌아와서 보급대에서 혼자 라디오를 듣고 있어도 드라마에 등장하는 여자들 모두가 이덴으로 여겨졌다. 실제로 그녀의 그림을 너무나도 많이, 여러 포즈로 그렸기 때문에 그녀의 육체를 언제 어디에 있어도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책상에 앉아 있다가 조금만 틈이 생기면 무의식중에 연필로 그녀의 얼굴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곤 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그린 그림들을 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람들은 모두 `기지의 바깥'으로 불리는 그 수수께끼 같은 세계에 내가 사귀고 있는 여자가 있다는 일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정체는 알지 못했고 나도 물론 가르쳐 줄 생각은 없었다.
3주일을 계속해서 이덴은 인기척이 없는 해변의 주차장으로 날 데리고 가서 자동차 운전을 가르쳐 주었다.
"잘 들어요, 어깨의 힘을 빼요. 당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바로 인식하는 거예요. 그리고 마음을 가라앉혀요. 그렇게 세게 핸들을 잡으면 안 돼요." 그녀는 조수석에 탔고 나는 주차장을 빙글빙글 돌았다. 급정차하고 기어를 바꾸고 후진한 후에 또다시 전진했다.
"그래요, 좋아요, 그렇게 해요. 가끔 거울로 뒤도 봐요. 바로 앞을 보면 안 돼요, 좀더 먼 곳을 봐요. 전방이 모두 눈에 들어오도록......"
그 해변에는 작은 언덕이 있었고 그 곳으로부터 포트 핀켄즈로 빠지는 길이 있었다. 두 번째의 토요일, 나는 자신만만하게 그 길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바로 앞에서 트럭 한 대가 굉음과 함께 언덕을 굴러 내려왔다. 얼굴이 없는 괴물처럼 똑바로 굴러 내려오는 것이었다. 나는 당황해서 핸들을 틀었고 오히려 트럭의 진행 방향으로 차머리를 돌리고 말았다.
"오른쪽! 오른쪽으로 틀어요!" 이덴이 외쳤다. 정신 없이 핸들을 다시 틀었고 너무 힘껏 달려서 모래사장으로 뛰쳐나가 바퀴가 빠지고 말았다. 트럭이 엄청난 소리를 내면서 통과했다. 양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너무나 놀란 나머지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 강철과 고무로 된 덩어리를 움직이는 일이 갑자기 무서워졌다. 다음에는 진짜 트럭의 본네트에 부딪치는 것이 아닌가 불안해졌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천천히 피운 후에 이덴이 말했다. "이제 다시 말을 달리게 해야죠, 베이비."
나는 그렇게 했다. 우선 이덴과 둘이서 차에서 내려 가까스로 차를 밀어 아스팔트 길까지 되돌렸다. 이덴은 웃으면서 이것은 분명히 당신 평생의 추억이 될 거예요, 하고 말했다. 그리고 또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이번에는 천천히 언덕을 올라가면서 나는 자신에게 다짐했다. 오른쪽이야, 오른쪽으로 달리라고. 그렇게 하면 맹스피드로 내려오는 차가 있어도 괜찮으니까. 다행히 그 뒤로는 대형차도 나타나지 않았고 나는 점차 매끄럽게 기어 체인지를 할 수가 있게 되었다. 이덴은 웃으면서 돌진판을 두드렸다.
"그래요! 좋아요. 그렇게 하라고요!" 그리고 제방길을 지나서 큰 거리로 되돌아올 때까지 그가 핸들을 잡게 해 주었다. 그 곳으로부터 그녀의 트레일러까지는 교통량이 많아진다. 운전석은 이덴으로 바뀌었다. "당신은 잘 하고 있어요, 이제 걱정할 필요 없어요. 그런 식으로 하면 되니까."
그 무렵, 초상화를 그리는 아르바이트가 궤도에 올라 있던 덕택에 주머니가 상당히 넉넉해져 있었다. "저기, 앞으로 식료품을 사는 돈은 내가 내게 해 줘요." 하고 나는 제법 어른스럽게 말했다. 남자라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덴은 요리를 해 주니까 식료품비 정도는 내가 부담해야지. 그리고 또 하나, 이제부터 드라이브나 운전 연습을 나갈 때에는 휘발유 값도 내가 내지, 하고 선언했다. "그렇지 않으면 불공평하니까."
이덴은 재미있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좋아요, 당신이 그렇게 하고 싶다면요."
쇼핑은 대부분 <스톱 앤드 숍>에서 했다. 스테이크 1파운드를 33센트에, 슈림프를 1파운드에 25센트로, 그리고 완두콩을 1센트에 샀다. -아, 행복했던 시절이여!- 그리고 물과 조미료와 소금을 넣어서 이덴은 그 때까지 내가 먹어본 적이 없는 멋진 요리를 만들어 주었다. 그렇게 훌륭한 요리는 지금까지도 먹어본 적이 없다.
요리는 예술처럼 신비적이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한 카세인 그림물감 자체는 예술이 아니다. 그것을 재료로 사용해 냄으로써 예술이 탄생하는 것이다. 이덴의 손을 거치면 단순한 콩도 그것과 아주 똑같은 변신을 이룩하는 것이었다. 화가가 새로운 캠버스를 향할 때 어떤 종류의 정신적 워밍업을 하는 것처럼 이덴도 요리를 하기 전에 독특한 워밍업을 한다. 우선 신문을 펼쳐 든다. 싸게 파는 광고로 눈길을 돌리고는 가끔 의분에 솟구쳐서 화를 내는 일이 있다. 저기요, 이 A&P의 광고를 봐요. 라운드 스데이크가 1파운드에 59센트로 인상되었어요! 너무하잖아요! 그리고 오렌지 5파운드 봉지가 37센트라니!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만 간다. 이 플로리다에서 말이에요! 그리고 그녀의 눈은 28파운드의 수박이 1달러 10센트 라는 항목을 발견한다. 그리고 피터팬 피너츠 버터가 35센트. 이덴의 분노는 어느 정도 수그러든다. 그리고 우리는 T거리에 있는 <스톱 앤드 숍>이나 <프리징>, 혹은 <에이 앤 피>로 쇼핑을 가는 것이다.
나를 구두쇠라고 생각하지 말아요, 하고 이덴은 말했다. 당신이 돈을 내겠다고 말한 때부터 나는 책임감을 느낀다고요. "왜냐하면 사람들은 모두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버는 거잖아요. 그렇다면 그걸 사용할 때에도 신중한 편이 좋아요. 쉽게 쓰지 말고요."
그리고 사들인 식료품을 집으로 가지고 돌아와서는 이덴은 그것을 맛있는 요리로 바꾸는 마법 같은 작업에 착수한다. 그렇게도 입맛을 돋구는 요리는 맛본 적이 없다.
낮이 점점 길어지며 추위가 누그러지기 시작하자 이덴은 화분이나 분재를 바깥에 내놓았고 트레일러 옆에 작은 정원을 꾸몄다. 접는 의자 두 쌍을 시어즈 백화점에서 사 왔다. 두 사람은 가끔 그 곳에 앉아서 스틱스 강을 윤택하게 만들고 있는 작은 호수를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럴 때에 트레일러는 흑인 주거구를 종단하고 있는 울퉁불퉁한 시골길로부터 우리를 지키는 은색의 울타리가 되어 주는 것이었다.
"요전 날 밤에 당시의 친구인 바비 볼덴을 이 근처에서 봤어요."
어느 일요일 오후에 이덴이 말했다. 잠시 침묵이 있은 후에 그녀는 말을 이었다. "뒤 숲 속 독립 가옥에 그 사람과 사귀고 있는 백인여성이 있어요."
"그것이 신경 쓰이나요?"
기묘한 눈초리로 이덴은 나의 얼굴을 봤다. "그래요, 이것 저것 생각하게 돼요."
"그거야 그 두 사람의 문제죠."
"그래요. 하지만 머지않아 `잠자코 있을 수 없어' 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나올지도 몰라요."
"예를 들자면 어떤 사람들?"
"그야, 얼마든지 있죠......". 백인 여자를 질투하는 흑인 여자라든가, 편견으로 똘똘 뭉친 백인 남자라든가, 이것만은 예측할 수 없다고요......" 가만히 나의 얼굴을 응시했다.
"여긴 남부니까요."
"하긴 그렇군."
그 날은 더 이상 그 문제는 건드리지 않았다.
봄이 되자 이덴은 이 자연계의 여러 가지를 가르쳐 주었다. 우선 삼나무나 늪층층나무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습지대에 살고 있는 여러 나무들의 이름을. 그리고 참나무, 물푸레나무, 목련, 단풍나무 등의 강변의 저지대에 살고 있는 활엽수들의 이름. 새로운 나무를 기억할 때마다 나는 그 잎을 따서 그 구조를 기억했다. 그러면 언제라도 나무를 그릴 수 있는 자신감이 솟구쳐 오를 것이다. 조금 더 고지로 나갈 때에는 가느다란 잎의 소나무와 긴 잎을 가진 소나무의 차이를 이덴은 가르쳐 주었다. 그러다가도 나무 둥치에 앉아, 오로지 숲의 정적에 휩싸여 침묵하는 일도 있었다. 그녀는 휘파람새와 딱따구리도 가르쳐 주었다. 우리는 눈을 감고 팔짱을 끼고서 긴 나뭇잎 소나무의 잎새를 빠져 나가는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어느 일요일, 붉게 퇴색한 해안선을 따라서 98번 도로를 달리고 있던 중에 길이 막혔다. 그래서 2차선 포장 도로를 타고 내륙으로 들어갔고 이끼로 덮인 커다란 참나무 아래에 차를 세웠다. 그 곳에서 내린 우리는 피크닉 바구니를 들고서 숲 속으로 깊이 들어갔다. 도로에서 안 보이는 곳까지 왔을 때에 나무가 툭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깜짝 놀라서 돌아보니까 한 마리의 하얀 사슴이 도망하는 참이었다. 이덴이 캥거루를 가리켰다. 살쾡이가 지나간 흔적도 가르쳐 주었다.
"이 근방에는 아마 흑곰도 있을 거예요. 그 놈한테 공격 당하면 목숨을 잃고 말아요...... 하지한 괜찮아요, 이제 거의 살해당해서 그다지 남아 있지 않을 테니까요."
숲에는 농밀한 흙냄새가 감돌고 있었고 그 기운이 이덴의 몸속으로 스며드는 모양이었다. 동작이 완만해졌고 말투가 느려지면서 목소리도 습기를 띠기 시작했다. 낮게 쳐진 나뭇가지 밑을 지나가게 하다가도, 갑자기 나를 밀쳐내며 낙엽 더미를 밟지 않도록 주의시키기도 했다. "미국 살모사는 저런 낙엽을 좋아하죠." 땅 위에 떨어져 있는 굵은 나뭇가지를 돌아가게 만들고는, "살모사는 저런 곳에 살고 있어요." 겁먹은 듯한 나의 걸음걸이가 우습다며 깔깔거렸다. 여러 가지 벌레의 이름도 가르쳐 주었다. 진드기에 불개미, 털진드기, 장님 등에, 그리고 파리매. 도시 사람이라면 모두 한 종류로 취급할 유사한 벌레들이었다. 만약에 진드기가 피부 밑으로 기어오르면, 하고 그녀는 말했다. "당황하지 말고 짓이겨 버려야 해요. 매니큐어를 뿌리면 좋죠, 숨이 막혀서 바깥으로 나오니까요. 털진드기는 말이에요, 인간의 피부 밑에 작은 관을 만드니까 그것을 긁어내야만 해요. 통째로 말이에요. 털진드기는 나뭇잎도 좋아하죠. 그러나 미국 살모사는 고맙게도 털진드기를 맛있는 먹이로 삼고 있죠."
주위에 뱀이 숨어 있다고 생각되자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덴의 말투는 평상시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방울뱀은 완전히 멸종해 버렸어요. 이유는 아무도 모르지만요. 어딘가 다른 곳으로 이주해 버린 것 같아요...... 산호뱀은 약간 위험하죠. 무척 작고 그것은 아름다운 색을 지니고 있어요. 하지만 집어서 키스하려고 하지 않는 한 괜찮아요. 살모사는 말이죠, 하긴, 그것에 손을 대려고 하는 사람은 물론 없겠지만, 굵고 음침한 회색을 띠고 있고 기분 나쁜 삼각형 머리를 가지고 있으니 그것에는 절대로 손대지 말 것!" 환하게 웃으며, "하지만 대부분의 뱀은 무해해요. 이쪽에서 해치지 않는 한 그쪽도 이쪽을 물지 않죠. 실제로 발이 없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뱀을 죽일 이유는 되지 않잖아요."하고 말했다.
좀더 앞으로 나가자 숲 속이 점점 밝아지고 나무 사이로부터 밝은 호박색의 빛이 스며 들어왔다. 갑자기 빨간 벽이 눈 앞에 나타난 듯한 착각을 느꼈다. 이덴의 설명에 의하면 그것은 가는 잎 소나무의 빨간 꽃봉오리가 부풀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벽을 지나치자 작은 강이 나왔다. 폭은 10피트 정도로서 매끄러운 돌 위를 깨끗한 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것이 빨간 홍차 같은 색을 띠고 있는 것이다. 붉은 강이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붉은 강 계곡의 추억을 노래한 진 오트리의 노래를 떠올렸다. 이건 말이에요, 삼나무에 포함되어 있는 타닌 때문이에요, 하고 이덴이 가르쳐 주었다. 깨끗한 갈색의 모래가 강의 양쪽을 테두리치고 있었으며 강의 중앙에는 평평한 돌이 있고 물은 그것을 감싸듯 흐르고 있었다. 그곳에는 벌레도 날아다니지 않았다. 강의 흐름을 타고서 헤엄치는 물고기와 힘들이지 않고 역행하고 있는 물고기들이 보였다. 메기와 미국 농어와 유럽 농어들이라고 했다.
주변은 너무나도 조용했다. 우리 두 사람은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강가의 침묵에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그리고 강가의 모래사장으로 걸어갔다. 이덴이 이쪽을 보고 피크닉 바구니를 놓았고 블라우스의 옷자락을 청바지에서 꺼냈다. 나도 셔츠의 옷자락을 꺼냈다. 그녀는 블라우스를 벗고는 바구니 위에 놓았다. 그 손은 다시 움직이더니 청바지의 지퍼를 내렸다. 나도 옷을 벗기 시작했다. 이덴은 청바지와 팬티를 바구니 위에 놓고 깊이 숨을 들이마시더니 브래지어를 벗기 시작했다.
"이리와요 베이비." 낮고 갈라진 소리로 그녀가 속삭였다.
우리는 차가운 물 속으로 들어갔다. 내 발이 돌 위로 미끄러지면서 나는 바구니와 옷들을 물 위로 들고 있었다. 물은 이덴의 가슴깨까지 차 있었고 차가움 때문인지 소름이 돋았고 유두도 딱딱해졌다. 그래도 그녀는 가운데의 평평한 돌을 향해서 전진해 나아갔다. 하얗게 색이 바랜 바싹 말라 있는 그 돌은 마치 섬을 연상케 했다. 그러는 사이에 그녀는 발이 미끄러져서 머리까지 물을 뒤집어 쓰고는 비명을 질러댔다. 그래도 키득거리고 웃으면서 빠른 물살을 거스르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먼저 `섬'에 도착한 것은 이덴이었다. 전신의 근육을 긴장시키면서 그녀는 돌 위로 기어 을라갔다. 뚝뚝 떨어지는 물이 반짝이며 빛났다. 그녀가 바구니를 받아 주었으므로 나도 기어올라갔다. 오랫동안 우리는 나란히 누워 있었다. 그녀는 다리를 벌려서 솟아오른 검은 수풀을 무거운 햇빛에 노출시켰다. 보이지 않는 곤충이나 동물이나 새가 내는 소리, 강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 자연이 만돌어 내는 한가로운 분위기가 우리를 감싸고 있었다. 닿아 있는 것은 우리 둘의 손 뿐이었다. 페니스는 축 쳐져 있었다. 나는 한 손으로 차가운 물을 젓고 있었다.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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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어느 싸늘한 수요일 저녁, 나는 샐과 막스와 함께 로커클럽 앞에서 볼덴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날 이덴은 잔업이 있어 늦게까지 일해야 한다고 했다. 고속 도로의 자동차들은 상당한 속도를 내며 흘러가고 있었고 <빌리조> 앞의 주차장은 자동차들로 가득했다.
"그 녀석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걸까?" 샐이 말했다.
"저녁 식사에 백인 여자 집으로 우리를 초대하다니?"
"아마도 죽음에 대한 갈망을 품고 있는가 보지." 하고 막스가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품고 있든가? 그 죽음의 갈망을 말이야."
기지 안에서는 샐이나 막스와 매일같이 얼굴을 마주치고 있었으나 산타나와 알게 된 후로는 <다트 바>에 두 번밖에 발길을 돌리지 않았다. 물론 어울려서 마시는 일이 싫었던 것은 아니다. 그 무분별한 분위기, 틀에서 벗어난 난장판 소동을 나는 매우 좋아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산타나를 만나는 편이 즐거웠다. 단지 이유는 그것뿐이었다. 그리고 그녀와 즐겁게 지내려면 수병의 월급만으로는 꾸려 나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월요일과 수요일 밤은 대부분 초상화를 그리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지냈다. 샐과 막스, 그리고 대부분의 동료들은 내가 여자와 사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나를 자주 놀렸다. 그렇지만 나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날 밤도 샐은 내가 사귀고 있는 여자의 집으로 자신들을 데리고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봐, 너한테 창피는 주지 않겠어. 물론 양말도 제대로 신고 가고, 식사 때에는 나이프와 포크를 쓸 테니까."
그날 밤 이덴이 잔업을 하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덕택에 바비가 여자와 살고 있는 집을 찾아가는 길에 그 트레일러의 앞을 지나가도 그녀가 보일까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다. 샐이나 막스가 힐끔힐끔 그녀를 쳐다 보는 것은 싫다. 당신도 결국은 경박스런 수병의 한 사람이었군요, 하고 그녀에게 여겨지는 것은 정말 싫었다.
이윽고 49년형의 파란색 머큐리가 <빌리즈>의 주차장에 멈추었다. 바비가 운전석에 있었다. 우리를 부르는 클랙슨 소리에 서둘러서 고속 도로를 건넜다. 그 때 힐끗 <빌리즈> 쪽을 봤는데 래드 캐논과 맥데드 상사가 네온의 그림자에서 우리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조수석에는 내가 앉았고 막스와 샐은 뒷좌석에 앉았다.
"왜 이렇게 시시하고 볼품없는 머큐리를 타고 다니는 거지?" 샐이 말했다. "깜둥이는 말이지, 뷰익이나 캐딜락 외에는 운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구."
"시체를 트렁크에 넣어서 운반할 때에는 그것을 쓰지." 무뚝뚝한 말투로 바비가 되받았다. "아깝잖아, 네놈들 같은 빈껍데기를 운반하는 데에 좋은 차를 쓰는 것은."
그는 고속도로를 달려 마을을 뒤로 하며 언젠가 이덴과 내가 빗속에서 그를 태워 주었던 그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우린 바닥에 엎드리는 편이 좋을까?" 하고 막스가 말했다.
"그래도 마찬가지야." 볼덴은 대답했다. "이 부근에서는 머큐리에 기대고 있었다는 그 이유만으로 흑인이 살해당한다구."
"만약에 도중에서 누군가에게 끌려 내려질 것 같아지면," 막스는 샐에게 말했다. "그 `마미......' 하는 녀석을 노래하자구."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알 존슨의 음색을 흉내내서 그 옛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태양은 동쪽에도 비춘다, 서쪽에도 비춘다, 가장 잘 비추는 곳은 어디일까? 하는 부분에서 차가 덜커덩 흔들리며 자갈길로 접어들었다. 그 커다란 참나무 밑을 지나서 이덴의 트레일러 앞을 지나쳤다. 저녁 태양은 어느새 지기 시작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호수의 수면이 검게 보였다. 볼덴이 힐끗 나를 쳐다 봤다. 나도 오른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 순간, 그 질투의 `둥근돌'이 엄청나게 부풀어 오르는 것이었다. 그 날은 수요일. 산타나는 잔업을 하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트레일러 앞에 그녀의 차가 주차되어 있는 것이었다. 이덴이 집에 있는 것이었다. 전등도 켜지 않은 채.
"마아아아미이이, 마아이아아아미이이이이......"
"야, 그렇게 하면 니그로한테 죽어." 볼덴이 말했다.
"하지만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 것은 KKK 쪽이잖아."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피부색이 아니야." 볼덴이 대답했다. "그렇게 틀에서 벗어나게 노래하면 흑인의 기분을 상하게 한다고 말하고 있는 거라구."
모두 일제히 웃었다. 그렇지만 숲으로 통하는 자갈길에 접어든 자동차에서 트래일러쪽을 되돌아본 후 나는 KKK의 일 따위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다른 어떤 일도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차가 그 곳에 있었다-.
모르는 남자와 함께 있는 이덴의 모습이 머리에 떠오른다. 혹은 알고 있는 남자인지도 모른다. 어둠침침한 빛 아래서 그녀는 나의 그림을 남자에게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남자의 감상을 듣고는 깔깔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숲을 통과하면서 나는 페인트칠도 안 된 작은 집 몇 채를 보았다. 문을 활짝 열어 놓은 집도 있어서 테이블 위에 놓인 전등이 보였다. 어두운 저녁 태양을 받으면서 흑인 아이들이 뛰놀고 있었다. (이덴은 분명히 슈림프의 칠리 소스와 샐러드를 남자에게 만들어 주고 있을 거야. 남자를 안고서 양 발을 트레일러 천장을 향해 있는지도 몰라.)
바비는 나무들 사이의 공터를 지나서 좁다란 길로 차를 몰았고, 집 앞에다 차를 세웠다. 뾰족한 지붕의 단층집으로 앞에 주차할 수 있는 현관이 있었다. 하얀 페인트가 벗겨져 있는 것이 어둠 속에서도 보였다. 창문에는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고 현관문은 닫혀 있었다. (분명히 트레일러의 문에도 열쇠가 채워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남자의 바지가 의자 등받이에 결려 있겠지. 유리잔 속의 얼음은 투명한 소리를 내며 부딪히고 있을 테고. 그리고 두 사람은 언제까지나 계속해서 속삭이고 있을까?) 우리는 차에서 내렸다.
"점잖게 행동해." 볼덴이 말했다. "이 곳은 고급 주택지니까."
`태양은 동쪽에도 비추고 서쪽에도 비추고......'
"샐, 입을 다무는 편이 좋겠습니다." `잭 페니 쇼'의 로체스터의 말투를 흉내내며 볼덴이 말했다.
바비가 검은 복장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그 때였다. 빛나는 검은 셔츠, 밑이 좁은 바지, 그리고 반짝거리는 검은 부츠. 마치 그 자신의 그림자 같았다. 그런 차림 때문인지 그의 녹색 눈동자는 유난히 더 짙어 보였다. 누군가의 시선을 느꼈는지 그가 우리의 등 뒤 도로로 시선을 돌렸다. 그 눈에 비춘 것은 백인 손님의 모습에 깜짝 놀라서 이 쪽을 보고 있는 두 명의 흑인 아이의 모습이었다. 그가 앞장 서서 현관으로 다가가서 문을 노크했다. 똑똑, 똑똑똑, 하는 리듬. 안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나야." 하고 볼덴이 말했다. 두 개의 열쇠가 열리는 기척이 났고 볼덴의 백인 연인이 빛을 등지고서 나타났다. 얼굴의 이목구비는 확실하지 않다. 그녀는 볼덴을 따뜻하게 껴안았다. 캐티 월버튼이야, 하고 짧막하게 볼덴이 소개했다. 그녀는 나의 손을 잡았고 옆으로 비켜서 우리를 지나가게 했다. 그리고 문에 열쇠를 채웠다.
"내 생전 이렇게 지저분한 사람들은 처음이에요."라고 그녀가 말했다.
"부랑죄로 잡혀 있던 자들을 구출해 왔거든." 하고 볼덴은 키득거렸다.
캐티는 25세 정도일까? 갈색의 젖은 눈을 하고 있었고 머리에는 약간 붉은 기가 있었다. 오똑하게 솟은 코, 뻐드렁니 바로 앞에서 멈춘 약간 벌어진 입. 사람에 따라서는 극히 얌전한 여성으로 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목소리는 안개가 낀 것처럼 갈라져 있었고 축 처진 허리 위의 가슴엔 상당한 볼륨이 있었다. 그리고 왠지 우울한 듯한 표정과 섹시한 읏음소리. (그렇군, 알았어, 당신이 끌리는 이유를) 하고 나는 생각했다.
"술은 저기에 있어요, 마음껏 드세요, 모두들." 캐티가 손을 흔드는 쪽을 보니 몇 권의 책이 꽂힌 테이블 위에 글라스, 얼음통과 더불어 술병이 몇 개 나란히 있었다. 캐티는 레인지쪽으로 돌아갔다. 벽이 하얗게 칠해져 있어서 집의 내부는 무척 밝고 청결했다. 커다란 원룸, 그것도 누군가가 막 이사를 왔거나 막 이사를 간 듯한 원룸이었다.
창문 부근의 벽쪽에 침대가 놓여져 있고 마루 바닥에 융단이 깔려있었다. 침대 양쪽에는 어울리지 않는 소나무 캐비넷. 그 한쪽 위에 레코드 플레이어가 놓여 있고 레코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부엌은 침실 공간보다는 넓었다. 중앙에는 플라스틱으로 된 붉은 테이블보가 덮인 커다란 원탁이 버티고 있고 접시나 나이프, 포크 세트 등이 놓여 있었다. 가스 레인지는 신품으로서 간소한 세간 중에서 이채를 띠고 있다. 래인지 옆에는 소형 냉장고, 그 옆에 스테인리스 싱크대가 있었다. 방에는 꽃이 하나도 없고 벽에는 사진 한 장 걸려 있지 않았다. (이덴과 만나고 있는 남자는 분명히 라일락이나 베고니아나 아카시아 향기를 맡고 있는 게 분명해.)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 녀석은 어두운 호수를 바라보겠지. 귓가에는 스틱스 강의 수면을 떼지어 날아다니는 풀벌레 소리가 들리는 게 분명해.)
샐이 세 개의 잔에 버본의 짐 빔을 따르고 얼음을 넣은 후에 나와 막스에게 주었다.
"그런데 당신들, 지금 뭘 꾸미고 있죠?" 검은 철냄비 속을 휘저으면서 캐티가 말했다. 냄비가 내뿜고 있는 향으로 보아 검보인 듯 싶었다.
"그야 금욕을 지키는 일이지." 샐이 말했다. "이것만 지키면 몸을 망치지 않아도 된다구."
"유태인한테는 통하지 않아, 그건." 막스가 말했다. "낳으라, 번식이여, 땅에 충만하라 하고 신은 말하셨느니라"
킬킬거리며 캐티는 수프를 저으면서 자신과 바비 몫의 마실 것을 장만했다.
"아무한테도 통하지 않아요, 그건." 그녀는 말했다.
바비가 레코드 플레이어에 몇 장의 레코드를 걸었다. 저음이 풍부한, 깊이 있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노래하기 시작했다.
내 사랑스러운 여자를 보지 말아 줘. 저 사랑스러운 여자를 보지 말아 줘. 저 귀여운, 사랑스러운 여자에게 접근하지 말아 줘.
왜냐하면, 저 귀여운, 사랑스러운 여자는
......내 것이니까......
캐티가 코러스에 맞추어 콧노래를 부르면서 여러 가지 얘기들을 지껄였다. 자신도 해군의 일원으로서, 메인사이드 기지에 있다고-
바비의 목덜미를 만지면서 그렇게 밝힌 후에 이번에는 그의 목을 꼬집으면서 상관인 멍청한 사무담당 사관을 헐뜯었다. 그래도 그 상관은 에리슨 기지의 그 구제할 수 없는 멍청이, 맥데드 상사보다는 낫다고 말했다. 그녀의 손은 그 때 바비의 엉덩이를 가볍게 쓰다듬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테이블에서 그릇을 들고 레인지로 다가가 검보를 담기 시작했다. 나는 계속 이덴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덴, 왜 나한테 거짓말을 한 거죠? 왜 잔업이 있다는 따위의 거짓말을 한 거예요? 자신이 뿌린 씨앗은 자신이 거두어야 한다구요.) 그 질투의 `둥근돌'이 커져갔다. 나는 검보를 먹기 시작했다. 닭과 야채로 만든 수프는 상당히 맛이 좋았지만 그 호수를 보면서 참나무 밑에서 처음으로 맛본 검보의 맛에는 비할 수가 없었다. 그런 일을 생각하고 있자니 `둥근돌'이 부풀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주 쉽게 작아지기 시작했다.
"이거 맛있군." 샐이 말했다.
"최고야. 남부의 백인판 미네스트로군."
바비가 또 한 잔의 마실 것을 장만했고 막스가 자신이 검보를 뜨기 위해서 레인지 앞에 섰다. 블루스맨이 또다시 사랑스런 여자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 집에는 화장실이 실내에 없고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변소가 숲 안쪽에 있었다. 가 보니까 아무래도 내키지 않는다. 모두들 뒤쪽 포치에서 방뇨해 버렸다.
"어어, 기분 좋다!" 샐이 말했다. "인간이 신의 경지에 가장 가까이 갈 수 있는 것은 이 순간이라구."
"그거 매우 경사스러운 일이지만 부탁이니까 바람 밑을 향해서 해." 볼덴이 말했다.
"내 물건은 바람을 느낄 정도로 크지 않다구. 바람 밑이 어느 쪽이지?"
그러자 막스가, "내가 있는 쪽이지. 그러니까 저 토마토를 노려서 갈기란 말야." 하고 말했다.
달이 호수면에 은색으로 비치고 있는 모습이 나무들 사이로 보였다.
"아아, 아름답군." 샐이 속삭였다.
"그래, 정말이야." 하고 내가 말했다.
"앞으로 20년 후에는 우리는 모두 할아버지가 되어 있겠지만 이곳도 변해 있을 거야, 분명히. 호숫가에는 집이 많이 들어서고 슈퍼같은 것도 생길 테고. 그리고 호수 위를 멍청한 놈들이 모터 보트로 신나게 달리고 있겠지, 분명히." 막스가 말했다.
"그 때 우리는 모두들 오늘밤의 일을 떠올릴걸."
"길은 어디나 포장되어 있을 테고." 샐이 말했다.
"니그로돌은 모두 쫓겨나 있겠지." 바비가 웃었다.
"그럴 때까지 20년도 걸리지 않아."
"그럴려면 총을 써야지." 하고 바비가 말했다.
"그래, 쓸 거야, 바보들은."
"지금도 가지고 있을 거고." 샐이 말했다.
"우리도 가지고 있지." 볼덴이 한탄하듯 말했다. "그래, 우리도 가지고 있고 말고."
안으로 들어가서 모두 또다시 술을 마셨고 레코드를 틀어서 캐티와 교대교대로 춤을 추었다. 캐티가, 왜 당신은 별로 말을 하지 않죠? 하고 물었으므로, 맛있는 요리를 많이 먹었으니까,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샐이 말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이 녀석은 지금 사랑을 하고 있기 때문이야."
그리고는 스탠 로렐의 째진 목소리로 바꾸어 그는 말했다. "그야 이 녀석이 떠올리고 있는 저 헤벌어진 웃음을 보면 알 수 있는 거 아니겠어요?"
나는 자신도 모르게 웃으며 생각했다. (이 녀석이 정말로 내 얼굴을 보고 알 수 있을까?)
그 때 현관문을 강하게 한 번 치는 소리가 났다.
모두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바비 볼덴이 조용, 하고 손짓으로 제지했고 침대 밑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 그가 꺼낸 것은 45구경의 커다란 자동 권총이었다. 그의 안색은 일변해 있었다. 조금 전까지의 편안하던 표정이 갑자기 험악해졌다. 녹색의 눈동자에는 경계의 빛이 떠올랐다. 발소리를 죽이고는 문으로 다가가서 그는 창문에서 떨어져서 몸을 낮추라고 손짓으로 신호했다. 샐이 과일 껍질을 벗기는 나이프를 집어들었다.
바비는 총을 겨누고서 문 옆에 섰다. 나는 캐티를 보호하는 자세로 그 앞으로 이동했고 싱크대 근처에 몸을 웅크렸다. 막스가 의자를 집어 올렸다.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볼덴이 열쇠를 벗긴 후에 방의 불을 껐다. 그리고 자세를 낮춤과 동시에 활짝 문을 열었다. 바깥에는 아무도 없었다.
스프링처럼 모두 숲 안으로 튕겨 나갔다. 수상한 인기척은 없었다. 자동차의 본네트를 열어서 폭탄이 장전되어 있지 않은지 점검했다. 호숫가로 뛰어가서 보트로 도망치는 사람이 없는지 조사했다. 역시 수상한 인기척은 찾을 수 없었다. 문을 두드린 사람은 사라지듯 없어졌다. 그렇지만 우리와 함께 기지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을 때에 바비는 캐티를 혼자 남겨 둘 수는 없다고 말했다.
"아무튼 수상한 녀석이 있었던 것은 분명해. 어쩌면 근처의 꼬마였는지도 모르지. 단순한 장난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누군가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구."
그래서 그는 집에 전부 열쇠를 채웠고 캐티까지 데리고 전원이 머큐리를 탔다. 우리 세 사람은 로커클럽 앞에서 내렸고 바비는 캐티를 메인사이드까지 바래다 주겠다고 말했다. 그 곳에는 여성용 숙소가 있어서 캐티도 머무를 수 있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조심하는 것이 나쁠 거야 없지."
일순간 볼덴이 우리를 속이고 있는 게 아닐까하고 생각했다. 일부러 누군가에게 문을 노크시키도록 처음부터 짰는지도 모른다. 그렇다, 자신은 총을 가지고 있고 언제든지 그것을 쓸 생각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과시하기 위해서. 그런 마음을 캐티에게도 과시하기 위해서.
그렇지만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앞뒤가 맞질 않는다. 그런 성가신 일을 할 거라면 애당초 우리를 데리고 가지 않으면 되니까. 모든 일이 비현실적으로 생각되었다. 유일하게 현실적인 것은 그 권총이었다. 볼덴은 그것을 앞좌석 밑에 숨겼다. 만약 도중에 경관에게 제지당해서 권총이 발각되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어 보니까, 그럼 샐거라고 대답하지, 하고 그는 말했다.
"녀석들은 이탈리아 놈이 하는 말은 뭐든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니까 말이야."
그러자 샐이, "아니, 그렇다고는 단정할 수 없어. 그 이탈리아 녀석이 검등이와 함께 차를 타고 있는 데다가 그 검둥이에게 총을 내주고 있다면 녀석들도 믿지 않을 걸."
캐티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차가 자갈길에 접어들었을 때에 막스가 말했다.
"아, 디저트를 먹지 않았군, 우리."
바비는 속도를 올렸고 차는 자갈길을 튕기면서 이덴의 트레일러 옆을 달려나갔다. 힐끗 그 쪽을 본 순간, 세상이 꺼꾸로 뒤집어진 듯한 생각이 들었다. 이덴의 차가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볼덴은 우리를 <빌리즈> 앞에 내려 주고서 그대로 메인사이드로 향했다. 나이트캡 하지 않겠어, 하고 나는 제의했다.
"좋았어." 하고 샐은 말했다.
술집 안에는 10여 명의 손님이 있었고 금발의 중년 여성인 바텐더가 상대하고 있었다. 우리가 들어가자 캐논은 목만 이쪽으로 비틀어서 노려봤다. 물론 우리는 상대할 마음이 없었다. 보고도 못본 척하고는 카운터에 돈을 놓고 맥주를 부탁했다.
"정말이지 으시시했어 아까는." 래드 캐논에게 등을 돌리고서 샐이 말했다. "누구였을까, 문을 두드린 것은?" "할일없는 건달 녀석이겠지." 하고 막스가 말했다.
"그녀가 걱정이야." 나는 말했다. "흑인들도 그녀를 어떻게 할지 모르고 `빨간목'의 백인들이 오는 날에는......"
`빨간목'이란 햇빛에 그을린 빨간 목, 남부의 무식한 백인들을 가리키는 속어다.
"지금 뭐라고 했지?"
목소리가 난 쪽을 보자 래드 캐논이었다. 상당히 취해 있는 듯했으나 등줄기는 곧바로 펴고 있었다.
"나를 `빨간목'이라고 불렀지?" 갑자기 덤벼 왔다.
"아니, 당신에게 한 말이 아니예요." 나는 대답했다.
"분명히 들렸다구. `빨간목'이라고 말하는 것을."
"그 말이 당신을 지칭한 게 아니라니까 그러네." 샐이 말했다.
"당신한테 말한 게 아니라구. 그러니까 머리나 식혀 래드."
"뭐라구? 나한테 머리나 식히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임마." 캐논은 겉옷을 벗었다. 그러자 여자 바텐더가 재빨리 그쪽으로 움직였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래드의 손을 잡고는 가만히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래드는 그녀 쪽을 봤다. 그리고 그것을 끝으로 우리한테 시비를 걸어오지 않았다.
"이봐, 최면술사야, 그녀는." 막스가 속삭였다.
"우리의 이름도 잊게 만들어 주면 좋을 텐데." 하고 샐은 말했다.
"아니, 원래 그는 우리의 이름 같은 건 몰라." 나는 말했다. "그가 알고 있는 건 우리의 군번 뿐이라구."
"그것만 알고 있으면 충분하니까."
그리고 샐은 클랩혼 상원 의원의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캐논이 우리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면 더욱 그가 기뻐할 일을 듣게 해 주자는 것이리라.
"네, 솔직히 말해서 나토의 장래야말로 전략적으로 최우선시켜야 하는 과제로서 지중해를 미국의 연못으로 바꾸어야만 해, 그 사악한 러시아인들에게 우리가 국가의 안전을 위협받아서야 되겠어!"
"이의없음!" 막스가 맞장구를 쳤다.
"절대로 과오를 범해서는 안돼! 그들은 세계 제패를 꾸미고 있어! 미국을 정복하고 침례파 교회를 폐쇄하려고 꾸미고 있어! 그들은 미국으로 쳐들어와서 잡혼을 국법으로 만들려고 노리고 있는 거라구! 우리를 혼혈의 나라로 만들려고 노리고 있단 말이다, 제군들! 우리는 흑인을 학교에 보낼 생각이다! 렉스 극장의 오케스트라에 니그로들을 참가시킬 생각이야! 내 말을 잘 들어라 모두들!" 막스가 나를 보고는 눈동자를 빙글 돌려 보인다. 카운터의 등 뒤의 술병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래드 캐논은 잠시 후 일어섰고 무언의 허세를 부리면서 출구까지 똑바로 결어 나갔다. 남은 우리 세 사람은 거나하게 취했다. 셔터가 내려질 때까지 붙어 있었고 뒤쪽 철책을 기어서 기지로 돌아왔다. 쓰레기 수집장에서는 메이허가 당직 경비를 서고 있었다. 그도 역시 취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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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바보 같은 사람 같으니라구! 그녀는 말했다. 도대체 무슨 상상을 한 거예요? 나는 자전거로 근무를 하러 나갔어요. 그런데 어젯밤에 돌아와 보니 식료품이 다 떨어졌더라고요. 자전거로는 물건을 사러 나갈 수 없잖아요? 그래서 차를 가지고 시내로 다시 나가서 <샤므즈>까지 사 왔어요. 그리고 아침 식사용으로 빵과 우유를 사왔어요. 그냥 그뿐예요. 제발 부탁이니 그런 어리석은 생각일랑 하지 말아 줘요. 당신이 그런 식으로 상장하면 알몸뚱이인 나를 속속들이 드러내 보일 수가 없어요. 솔직해질 수 없게 되어 버린다구요. 미안해요 라고 나는 말했다. 미안해요 라는 말 따위는 두 번 다시 하지 말아요. 알겠죠? 안 돼요! 당신 머리를 악마에게 먹히도록 그냥 놔두지 말아요. 당신은 지금 여기에, 나와 함께 있는 거예요. 1953년의 어느 목요일 밤에 말예요. 그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인 거예요. 이것은 시시한 영화같은 것과는 달라요. 당신과 나의 일인 거예요. 지금 이렇게 그냥 일어나 있는 것이 아니예요, 이러한 멋진 관계를 우리 둘이서 만들어 온 거라고요. 이런 관계를 맺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지만 지금 우리는 이렇게 함께 있어요. 그러니까 나쁜 성의 악마에게 머리를 갉아먹히는 것 같은 그런 어리석은 생각만은 하지 말기로 해요, 당신이나 나나.
그래요, 당신 말이 맞아요.
그럼 이쪽으로 와요.
나는 언제나 새로운 것을 그녀에게서 배울 수 있었다. 서늘한 만춘의 초저녁에 우리들은 나란히 누웠다. 그녀는 내 목에 키스를 하고 세게 끌어당기면서 몸을 비틀었다. 그리고나서 살짝 나의 머리를 가슴이 있는 아래쪽으로 밀어 보냈다. 풍만한 가슴이 뺨에 눌려 덮혔다. 혀끝으로 마른 유량을 꽉 눌러 핥았다. 그녀는 더욱더 나의 머리를 아래쪽으로 밀어 보냈다. 탐욕스런 입은 그녀의 배꼽에 이르고 나는 거기에 키스를 하면서 우묵한 곳에 혀를 묻었다. 이덴의 전신이 뒤틀리기 시작하며 숨결이 갑자기 빨라지기 시작했다. 새된 소리로 헐떡이면서 숨을 들이마시고 낮게 신음하면서 내뱉는다. 그 소리는 어느새 그녀의 의지가 미치지 못하는 정점에서 새어 나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이덴의 넓적다리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몰랐다. 자신이라면 어떻게 해 주기를 바랄까 라는 생각을 해보며 한 넓적다리 안쪽에 키스를 했다. 거기서도 어떻게 해야 될지를 모른 채 숨을 내뱉고 또 다른 한쪽의 넓적다리 안쪽에 키스를 했다. 촉촉한 살갗을 가볍게 깨물면서 양손을 그녀의 엉덩이 아래로 미끄러지게 하여 꽉 죄었다. 나는 무서웠다. 단순한 무지에서 예상하지 않았던 곳에 예상밖의 애무를 첨가한다는 것이 무서웠다. 그러자 그녀는 양손으로 나의 머리를 끌어안고 그 은밀한 골짜기로 나를 이끌었다. 진한 여자의 내음을 나는 들이마셨다. 그것은 흙의 내음, 바다의 내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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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른 노트로부터의 발췌
바비볼덴이 이것을 읽으라고 하면서 책을 한권 주었다. 리처드 라이트라는 사람이 쓴 책. 라이트는 니그로다. 그곳에는 내가 지금까지 생각도 해본 적이 없는 것들이 쓰여 있었다. 예를 들면- .
"백인이 니그로와 논의하고 싶어하지 않는 테마를 몇 가지 들어보자. 백인의 미국 여성. 큐 클럭스단(KKK단). 니그로 병사의 프랑스에서의 전투 태도. 프랑스 여성. 잭 존슨. 미합중국의 북부 지역. 남북 전쟁. 에이브러햄 링컨. U. S. 그랜트. 셔먼 장군. 가톨릭 신자. 로마 교황. 유태인. 공화당. 노예제도. 사회적 평등. 공산주의. 사회주의. 미국헌법수정 12조, 14조, 15조. 계발적인 지식을 필요로 하는 모든 화제. 니그로 남성의 자기 주장에 관한 모든 화제."
이것을 읽고 이곳에 열거되어 있는 모든 사항에 대해서 니그로와 얘기를 나눠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어느 것을 들어봐도 나의 지식은 미미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다른 분야와 다를 것이 없다. 나는 언제나 왜 이렇게 나는 무지한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그것은 니그로들과 얘기하고 있을 때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누구하고 얘기를 하고 있어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자신이 저지른 가장 어리석은 과오는 고등학교를 중도에서 포기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브룩클린 같은 곳에 살고 있는 녀석은 대학에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여기서 알게 된 댄버 같은 녀석은 대학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제대하고나서 가면 되지 않느냐고 태평스러운 소리를 해대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알고 싶은 것이 이렇게 많이 있는데 그 때까지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백과사전의 A에서 Z까지 전부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줄곧 머리를 지배해 오고 있다. `히프'라고 하는 말의 의미에는 그것도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무엇이든지 알고 있다고 하는 것.
질투의 `둥근돌'. 나는 정말로 그것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느끼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뿐인가? 생각하고 있는 것뿐이라고 한다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하지만 그 감정은 확실히 존재한다. 그래서 자신이 부끄러운 것이다. 스스로 자신의 기분을 컨트롤 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말이다. 자신이 감정의 포로가 되는 것은 싫다. 그러나 내가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다면 도대체 그런 나는 무엇일까? 단순한 바위인가. 나무인가. 감정과 이성의 양쪽 모두 컨트롤 할 방법이 어디엔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Vagina 질. 특정한 포유류의 암컷의 몸에서, 자궁으로부터 외성기에 이르는 통로. 칼집과 같은 부분, 혹은 기관.
Vulva 음문. 여성의 외성기.
Uterus 자궁. 난관의 일부로서 수정난이 분만에 이르기까지 그곳에서 발육한다. 특정한 포유류의 자궁.
Clitoris 음핵, 여성의 외성기에 있는 튀어 나와 있는 기관. 남성의 페니스에 해당함.
"그러나 누가 뭐라고 해도 최상의 방법은 남성과 여성의 나체를 그리는 것이다. 그 끊임 없는 훈련에 의해서 흉부, 등, 다리, 무릎의 근육과 그 밑에 있는 뼈의 양상을 기억에 새겨두는 것이다. 그 연습을 몇 번씩 쌓아 나가 보면 이윽고는 살아 있는 인간이 눈앞에 있지 않더라도 상상력의 도움을 빌어서 모든 자세를 취하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그릴 수가 있을 것이다."
-바자리 저 <스케치의 기술>(기지의 도서관에 있던 책)
어째서 이 세계에는 노인들에 의해 통치되고 있는 나라만 있는 것일까? 아이젠하워도 대통령에 갓 취임했지만, 벌써 파파 노인이고, 대만을 다스리고 있는 것도 늙은 장개석이고, 한국을 손에 쥐고 흔들고 있는 것은 저 이승만이다. 신문의 기사에 따르면 전쟁은 이미 끝나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평화 조약도 거의 합의가 되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승만 녀석이 서명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고 있는 동안에도 미국의 젊은이들은 수없이 죽어가고 있는 데 이승만은 승낙을 않고 있는 것이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의 목표를 끝까지 관철하고 싶은 모양이다. 그래서 아직 싸울 수 있는 미국인이 있는 한은 전쟁을 계속할 속셈인 것이다. 그런 녀석은 쏴 죽여버리면 된다. 그건 그렇고 그 사람들은 어떻게 자기 하고 싶은 대로 겁도 없이 할 수가 있는 것일까? 어떻게 사람들을 복종시킬 수가 있는 것일까? 길거리의 싸움에서는 일방적으로 상대를 때려 눕히는 일 따위는 할 수가 없는데. 어떻게 그들은 젊은이들을 죽음터로 내보낼 수가 있는 것일까?
요즈음, 신문의 1면을 읽는 일이 많아졌다. 아무래도 새로운 분쟁이 시작된 것 같다. 인도차이나의 프랑스 군이 공격을 받고 있다고 한다. 사태는 자꾸만 악화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모든 것은 한국전쟁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라고 덜레스는 말하고 있지만 신문을 읽어 보면 애당초 프랑스 군대가 그곳에 있다는 것이 잘못된 것임을 금새 알 수 있다. 그곳은 식민지로서 인도차이나인은 프랑스인에게 나가 달라고 부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프랑스인은 나가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인도차이나인은 무력에 호소하고 있는 것이리라. 도대체 언제쯤이면 이런 바보스런 일이 끝날까? 그리고 과테말라에 공산당 정권이 탄생했다는 기사도 실려 있었다. 과테말라라면 우리 미국과 가까운 곳이지만 솔직히 말해서 나는 과테말라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얼른 세계지도를 펼쳐 봐야겠다.
(그리고 나는 최근에 만화를 잊어버리고 있을 때가 있다. 공연히 걱정이 된다. 소여와 캐니언은 아직도 보고 있고, 이따금 릴 애브너와 조 파루커도 들여다보기는 한다. 그러나 이전 같으면 만화 페이지에 실려 있는 것은 모조리 읽고 있었던 것이다. 나를 보고 비웃는 녀석에게는 이렇게 말해 주곤 했었다. 내 말 들어, 이것은 변호사가 법률책을 읽는 것과 다름이 없는 거라구. 나는 열한 살 때부터 만화에 친숙해 왔으며 만화를 그리려고 생각해 왔어 라고. 만에 하나 그 소망이 흐려져가고 있는 것이라면 어떻게 하지? 나는 어떻게 되는 건가? 장차 무엇이 되는 것이 좋은가?)
세계 지도를 조사해 보았다. 과테말라는 멕시코의 바로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로버트 핸리 저 <예술의 혼>(마일즈 레이필드가 빌려 준 위대한 책)에서_ .
"가능한 한 자신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을 찾아내야 한다. 자신에게 있어서 정말로 소중한 것을 찾아내는 것이 좋다. 그렇게 되면 노래하는 것이다. 당신은 그 때 노래하고 싶은 무엇인가를 분명히 갖고 있을 테니까. 틀림없이 그 노래에는 당신의 마음의 전부가 담겨질 것이다."
정말 그렇다고 생각한다. 헨리는 음악을 구실로 삼아서 미술의 핵심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노래 그 자체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예를 들면 볼루스를 듣거나 하면 알 수 있는데, 그 감정을 움직이는 노래의 힘은 가수가 정말로 절실하게 느끼고 있는 것-그것이 설사 `아픔'이라 할지라도-을 노래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생기는 것이다.
핸리는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대개의 인간은 자신이 정말로 하고 싶은 것을 한 번도 끝까지 해 보지 못하고 인생을 허송해 버린다."
(이것은 그대로 아버지에게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어머니에게도 해당될지도 모른다. 브룩클린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렇다. 해군에 있는 동료들도 태반이 그럴지도 모른다.)
헨리는 말한다.
"자력으로 배우는 자는 스스로의 진로를 판단하고, 남들로부터의 조언을 취사 선택하고, 자기가 누구인가를 판단한다. 그는 자신이 더 이상 갓난아기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이미 어른인 것이다. 성장의 과정에 있는 것이다. 이미 어떤 사람도 그를 이끌어갈 수는 없다. 단순한 조언 정도라면, 그것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수없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예술가도 어떤 이에게 그가 취해야 할 진로를 지시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는 새로운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가 배워야 할 내용, 나아가야 할 과정은 다른 사람이 알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이다."
내가 `자신'이라는 말을 입에 담을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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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저녁 때 이덴과 둘이서 버디드만에 면한 인적이 없는 해안으로 나갔다. 넓게 펼쳐진 그 항만의 이름이 나는 좋았다. 그 무렵 일리노이 자켓트와 후립 필립스의 요란스러운 레코드, `버디드'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자켓트와 필립스는 듀크 엘링턴의 간단한 멜로디를 빌려다가 미쳐버릴 것 같은 황량한 곡으로 변형시키고 있었다. 실제의 항만은 레코드와는 엄청나게 달랐지만 웬지 친근감이 느껴졌다. 아마도 그 이국풍의 이름이 마음에 들었던 탓이라고 생각한다. `버디드'란 스페인어로 `잃어버린'이라는 의미라고 그녀는 가르쳐 주었다.
"그럼, 산타나는 무슨 뜻인가요?" 나는 물었다.
"<성자와 같은> 이란 뜻이에요." 자조하듯이 그녀는 웃었다.
우리는 해변을 천천히 거닐면서 그 지방 일대의 역사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었다. 그 부근의 해안에는 최초에 프랑스나 스페인 함대의 수부들이 난파당한 후 상륙하여 잘 알지 못하는 이상한 병에 걸려서 죽거나, 너무나도 장기간 고향으로부터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고독을 견딜 수 없어서 미쳐 죽거나 했다고 한다. 기지의 도서실에 있는 역사서는 고등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쓰여져 있는 탓인지 기술이 애매하고 단편적이었다. 이 항만을 최초로 `잃어버린'이라고 부른 것은 누구이고,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이덴은 내 손을 꽉 움켜 잡았다. 그녀의 조상은 언제쯤, 어떻게, 왜 멕시코 만으로 찾아온 것인가, 하고 나는 물었다. 이덴은 아득히 먼 수평선을 바라보면서, "벌써 몇 세기나 전의 일이에요." 라고만 대답했다. 어떻게, 왜, 라는 질문에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 우리들은 걸음을 멈췄다. 멀리 앞의 해변을 두 사람의 남자가 맨발로 걷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바짓가랭이를 무릎까지 걷어 올리고 있었다. 한 사람은 왜소하고, 또 한 사람은 좀더 키가 컸다. 그러나 이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어도 두 사람이 누구인지 짐작이 갔다. 키가 큰 쪽은 마일즈 레이필드, 또 한 사람은 프레디 헤러드였다.
"돌아갑시다." 나는 말했다.
이덴은 이상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요?"
"저 두 사람을 알고 있고, 지금은 얘기를 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좋아요." 이덴은 말했다. "그럼 슈림프라도 먹으러 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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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어느 날 정오쯤 돌연 샐이 보급부로 뛰어 들어와서 카운터에 몸을 내던지고는, 숨을 할딱이며 말했다. "조가 죽었어!" 카운터에 이마를 갖다 대고 양주먹으로 카운터를 두드리면서 그는 계속했다. "처음에는 행크, 이번에는 조란 말이야! 프롤레타리아 혁명 만세!" 휙 하니 몸을 돌리자마자 그는 다시 나가 버렸다. 그렇게 해서 우리들은 스탈린의 죽음을 알았다.
할레르슨이 라디오를 꺼내고, 존스가 말했다. "꼴 좋다, 그 녀석. 실컷 고생이나 하다가 죽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자 베케트가 "그렇다면 빅 쓰리(Big Three : 3대국, 미국 소련 영국) 가운데 살아남아 있는 것은 처칠 한 명이 된 셈이군." 하고 말했다.
뉴스를 전하는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엄숙하기는 했지만 슬픈 기색은 없었다. 내용은 대동소이했다. 소련의 지배자이며 흉폭한 독재자, 수백 만이나 되는 인간의 살육자, 옛날의 동맹자이며 최근에는 미국 최대의 적이었던 스탈린이 사망했다. 듣고 있던 대니 레이가 어깨를 치켜 들어 보이면서 말했다. "그것 참 멋진 뉴스이기는 한데 4시에 마루 청소 일정은 달라지지 않는다구." 얼마 있다가 그는 걸려 온 전화를 받고, 심각한 얼굴로 몇 번씩이나 고개를 끄덕이면서 오랫동안 얘기를 하고 있었다. 카운터에 있던 해병대의 조종사가 말했다.
"어쩌면 이것으로 한국쪽도 해결이 나겠군."
"그야 물론이지. 이것은 대사건이니까." 하고 할레르슨은 말했다. "어떤 큰일이라도 모두 끝장이 날 거야."
"그렇지 않으면 된통 크게 벌어지든가 말이지." 존스가 말했다. "그 못된 빨갱이놈들!"
이럭저럭하고 있는 사이에 해병대원이 운전하는 프리체트 대령을 태운 지프가 속력을 내며 돌기 시작했다. 뒷좌석에는 맥데드 상사와 래드 캐논도 타고 있었다. 대니 레이가 겨우 수화기를 내려 놓았다.
"마침내 올 것이 왔다, 여보게들."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전군이 최고 경계 태세로 돌입했어. 지금 이 순간부터 이 기지도 전투 태세로 들어간다. 휴가는 전부 취소다!"
그 순간 주위는 혼란 상태에 빠지고, 전화가 발광이라도 한 것처럼 쉴 새 없이 울려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로서는 단 한 가지 일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덴에게 연락을 취하면 좋을까?) 지금에 와서 생각나는 일이지만, 진주만이나 히로시마나 헤이스팅스의 싸움 때, 남자들은 모두들 나와 똑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날은 오후 6시에 로커클럽 앞에서 그녀의 자동차를 얻어 타고 월링턴 드라이브 인에 <물램 루즈>를 둘이서 구경하러 가기로 되어 있었다. 그 영화에 대해서는 마일즈에게서 여러 가지 얘기를 주워듣고 있었다. 투르즈 로트렉이라고 하는 프랑스 화가의 전기 영화인데, 거짓말 투성이의 변변치 않은 영화라고 한다. 그래도 예술가를 주인공으로 한 헐리우드 영화로서는 최고의 작품이 아닐까, 하고 마일즈는 말하고 있었다. 그 말은 들었을 때부터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로트렉이라는 화가가 나와 비슷한지 어떤지 무척이나 알고 싶었다. 이덴은 주연인 호세 화라를 자세히 보고 당신과 닮아있는지 어떤지를 확인해 주겠다고 말했다.
그런 판국인데 휴가는 취소되고, 모든 것을 뒷날로 미루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혈기왕성한 18세, 무슨 일이든 간에 오래 기다리는 것은 딱 질색이었다. 그렇기는 하나 그녀의 트레일러에는 전화가 없고, 근무처인 시어즈 백화점에 전화를 할 수도 없다. 시어즈의 전기제품 판매장의 누군가가 라디오를 켜 주지 않으려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면 펜서콜라의 전 기지가 집념이 강한 소련군의 공격에 대비해서 경계 태세에 들어갔다는 것을 그녀도 알게 될 것이다. 나도 또한 죽은 사나이로부터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 용감한 미국의 젊은이들의 대열에 가담했다는 것을 그녀도 알게 될 것이다.
"녀석들, 진심으로 그럴까요?" 나는 대니 레이에게 물었다.
"그럴 거라고 생각해. 전 세계의 모든 미국군은 경계 태세에 들어 가 있으니까."
"그러나 무슨 이유입니까? 어쨌든 스탈린은 죽었잖습니까?"
"살해당했을 가능성도 있거든. 어쩌면 크레믈린에는 스탈린보다 훨씬 질이 나쁜 녀석들이 있어서 이 세계를 몽땅 날려 보내 버리려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니까 말이지. 스탈린이 죽은 것은 미국탓이라고 떠들어 대는 놈이 있는지도 모르는 것이고. 하여간 조심하는 것보다 더 안전한 일은 없을 것 아니겠어?"
"그렇다면 크레믈린의 그 고약한 못된 녀석들이 `좋다, 지금이야말로 기회다, 에리슨 비행장을 점령하자!' 하고 떠들어 대고 있다는 얘기입니까?"
대니 레이는 웃었다. "응, 그럴 수도 있지."
그 날은 밤이 될 때까지 고궁을 제트기가 금속음을 내면서 날아다니고 있었다. 기지에는 온갖 잡다한 소문들이 난무했다. 만일 소련군이 침공해 온다면 미국 정부는 쿠바로 옮겨질 예정이라든가, 전략 공군의 폭격기는 지상에서 파괴되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뉴욕의 상공을 비행하고 있다든가. 그 폭격기는 모두 수소 폭탄을 적재하고 있을 것이라든가 하는.
모두가 입을 열면 스탈린의 죽음에 관한 것들뿐이었다. 그에 대해서 `엉클, 조'라고 부르는 자가 있는가 하면, 히틀러보다 더 다루기가 고약한, 피에 굶주린 괴물이라고 호되게 깎아 내리는 자도 있었다. 스탈린이 사제가 되려던 가톨릭신자였다고 말을 꺼낸 것은 베케트였다. 그런데 어느 날 천상으로부터 비쳐오는 빛을 보고 볼셰비키의 은행 강도로 변신한 것이라고 했다. 그 녀석은 그루지아 태생이라고 누군가가 말하자, 그렇지, 메이콘 근처에서 태어났지, 하고 할레르슨이 말했다.
그 날처럼 모두가 커피를 많이 마신 날은 없다. `손님'들이 쉴새없이 찾아왔다. 하늘에 수많은 헬리콥터가 날아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만큼 고장이 나거나 마모되거나 하는 부품이 많아진 것이었다. 마일즈 레이필드가 댄버와 함께 메인사이드에 가 있기를 잘 했다고 베케트가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만일 그 녀석이 여기에 있을 때 소련의 폭격기가 노다지로 폭탄을 떨어뜨리기 시작하면, 틀림없이 바지에 오줌을 쌀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 녀석은 틀림없이 스커트를 공중에 던져 올릴 꺼야. 항복이다, 하고 소리치면서 말야." 하고 할레르슨이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버디드 만의 인적이 없는 해변을 프레디 해러드와 나란히 걷고 있던 마일즈 레이필드의 모습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것은 곧 이덴 산타나의 얼굴로 이어졌다. 식당으로 점심 식사를 하러 가니까 접시에 식사를 담아 주는 담당이 범퍼였다. 나의 바로 뒤에는 할레르슨이 줄을 서 있었다. 나를 알아 본 범퍼는 그 동그란 검은 얼굴의 눈을 반짝이면서 프렌치 프라이를 한 개 더 쟁반에 얹어 주었다. 그리고는 카운터 밑으로 손을 뻗어서 코코넛파이를 한 개 더 얹었다. 할레르슨이 범퍼를 노려보았다.
"나도 저 파이를 줘!"
"지금 것이 마지막이올시다."
"정말이야?"
범퍼는 빈 파이 접시를 쳐들어 보였다.
우리들은 앞으로 걸어갔다.
"흥, 건방진 검둥이 녀석." 하고 할레르슨은 말했다.
"당신이란 사람이 호감을 갖는 인간이 이 세상에 있기나 해?" 하고 나는 말했다.
"그야 물론 있고말고. 미국인들 중에."
둘이서 식탁 하나에 앉았을 때 보즈웰이 와서 함께 앉았다. 그의 접시에는 파이가 없었다.
"이봐, 대령은 고추가 없는 집오리처럼 뛰어다니고 있더라구."
"집오리에게 고추가 달려있어?" 나는 말했다.
"그야 물론 있지." 하고 보즈웰이 말했다. "하지만 꽥꽥거리고 고함을 질러대는 것 치고는 별볼일 없는 물건이지." 그는 쾅! 하고 식탁을 두드렸다. 할레르슨이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보즈웰은 말했다. "이봐, 그 파이, 어디서 손에 넣었지?"
"물어볼 것까지도 없는 일 아니겠어, 보즈웰?" 할레르슨이 말했다. "이 녀석은 니그로를 좋아하는 양키니까, 니그로쪽에서도 보답을 해 주는 거라구."
"흥, 바보스럽기는." 나는 말했다.
"하지만 거짓말은 아닐텐데 그래? 너는 하루 건너꼴 정도로 흑인 숙사 이층에 틀어박혀 지내잖아?"
"이 녀석은 틀림없이 그 냄새를 좋아하는 모양이군." 보즈웰이 말했다.
"그렇지 않다면 그 미치광이 같은 음악을 좋아하든가."
"이봐, 너희들 머리가 어찔어찔할 정도로 약이라도 마신 것 아니야?" 나는 반박했다.
"이 녀석은 보나마나 검은 풋시(음부)의 맛이라도 조금 볼까 해서 녀석들과 함께 시내까지 따라갔을걸 아마." 할레르슨이 말했다. 그 말을 듣자 주크박스 앞에서 한쪽 다리를 다른쪽 다리에 엉키게 하고 서 있던 위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니, 그럴 리는 없을 거야." 보즈웰이 말했다. "이 녀석한테 자신의 깔치가 따로 있으니까. 그 일은 누구나가 알고 있다구."
"그녀는 깔치가 아니란 말이지."
"허허, 그래?" 보즈웰이 말했다. "오늘은 이상하게 뻔뻔한데 그래, 자네."
"너희들이 참견할 일이 아니라니까." 포크로 쑤셔대고 있던 파이를 나는 보즈웰쪽으로 밀어 보냈다.
"먹겠어?"
보즈웰은 싱긋이 웃었다. "필요 없어. 코코넛파이는 먹고 싶지 않아."
할레르슨이 포크를 뻗어서 파이를 조금 잘라냈다. "그럼, 내가 먹어 주지."
"크레오소트 같은 맛이 나서 싫어." 하고 보즈웰이 말했다.
"보즈웰은 말이지, 옥수수가루가 섞여 있는 것이 아니면 먹지 않는다고 하더군." 나를 보고 말하고 나서 할레르슨은 보즈웰에게 물었다. "경계 태세가 해제되면 무얼 하겠어, 보즈웰?"
"미시시피의 잭슨에 갈 거야."
할레르슨이 다시 나를 보았다. "이 녀석은 말이지, 작년 9월경부터 잭슨으로 가자, 잭슨으로 가자 하고 나를 끈질기게 꼬시고 있다구."
"잭슨이라는 곳엔 집오리에 고추가 달려 있기라도 한가 보지?" 나는 말했다.
"누가 뭐래도 자동차로 5시간이나 걸리는 곳이니까." 할레르슨이 말했다.
"어쨌든 꼭 함께 가자구." 보즈웰이 말했다.
"어째서 미시시피의 잭슨 같은 데를 가자는 거지?"
내가 묻자 보즈웰은 갑자기 눈을 번쩍이면서 "왜냐하면 말이지, 그곳은 이 남부 전체 보험회사의 수도기 때문이지!"
그 말은 한참 동안 공중에 떠돌고 있었다.
"그래서?"
"이봐, 보험회사라니까,"
"그것이 어쨌다는 거야?"
"그것은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나?"
"글쎄...... 짐작도 가지 않는데."
"날씬한 미인 비서들이 우글우글거린다는 얘기가 아니겠어!"
나는 고개를 흔들면서 일어섰다. 할레르슨은 껄껄거리고 웃고 있다. 식기를 수납하는 방쪽으로 가려고 할 때 바비가 다가왔다. 그의 쟁반에는 코코넛파이가 얹혀 있었다.
"스탈린은 정말로 안 됐더군." 그는 말했다.
마일즈 레이필드와 댄버는 3시경에 돌아왔다. 마일즈의 얼굴은 붉으스레하게 햇볕에 그을려 있었으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눈이 흥분으로 빛나고 있다. 댄버는 재미있다는 듯이 담배를 피우고 있다.
"메인사이드의 상황은 믿을 수가 없을 정도라구!" 마일즈는 말했다.
"모두들 중세 때 페스트에 걸린 미치광이들처럼 날뛰고 있다니까! 마치 소련군이 모빌에 지금 상륙이라도 한 것같이 소동이란 말야!"
"고사포를 끌어내오지 않나." 하고 댄버가 말했다.
"수병들을 행진시키고 있다니깐!" 마일즈가 말했다. "총을 메게 하고서!"
"더구나 사관들로 말할 것 같으면 신분증명서를 모두 조사하고 있더라구. 누군가 공산당의 당원증을 갖고 있는 녀석이 있다고 믿고 있는 모양이던데." 댄버는 말했다. "자아, 얘기해 버려, 마일즈."
"나는 패스포트를 트럭에 놓고 갔었지! 요즘 신분증명서를 항상 가지고 다니는 녀석이 어디 있어?"
"그래서, 그들에게 신분증의 제시를 요구당했다구." 댄버는 동정을 위장하고서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서 체포를 당했단 말야?"
"녀석들이 무슨 일이 있어도 신분증을 확인해 봐야겠다고 하면서 이 녀석을 주차장까지 끌고 갔으니까."
"나를 체포해 가지고 말이지!"
"그런데 이 녀석의 지갑에는 콘돔이 한 개도 들어 있지 않았어. 그러니까 녀석들은 이 녀석이 해군이라는 것을 믿으려고 하지 않는 거야."
"게다가 이 인간 같지 않은 댄버 녀석은 나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고 딱 잡아 떼더라구, 그러는 사이에 그 저능인 사관 한 명이 내가 정말로 러시아인과 꼭 닮았다고 우겨대기 시작하는 거였어. 그래서 그 머리가 잘못된 사관녀석이 그 빌어먹을 제2차 대전 당시의 전쟁 선전 영화의 한 장면 같은 흉내를 내기 시작하는 거야. 그러더니 나에게 프로야구에 대해서 별의별 것을 다 물어 보기 시작했단 말씀야!"
"베이브(Babe)" 댄버가 말했다.
"그런데 난 야구 따위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어. 그러니까 일이 커질 수 밖에. 그러더니 이번엔 미식축구에 대해서 묻기 시작하더라구! 그런데 난 미식축구에 대해서는 야구보다도 더 모르고 있었거든."
"그래서 마침내 공안부로 연행되어 버렸지." 웃으면서 댄버는 말했다.
"그래서 나를 그쪽에 구치시켜 놓고서, 대니 레이와 전화통화를 하려고 했었지. 그런데 오늘의 소동으로 전화는 계속 통화중이었어. 약 두 시간 가량이나. 그러는 사이에 이 기지의 동료들은 모두 점심식사를 하러 가 버리고 남아 있는 것은 랠리 파슨스밖에 없었는데-"
"그 얼뜨기 백인 말이지?"
"그 녀석은 내 성조차 모르고 있단 말야! 내가 이 기지에 온 지 일 년이 다 되는데도 녀석은 내 성조차 모른다니까!"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되었어?" 나는 물었다.
"이 빌어먹을 해군에서는 그럴 때 모두 어떻게 하지? 할 수 없이 기다렸지 뭐."
"그래서 조종사들이 파라트카의 다운타운을 폭격할 준비를 하는 것을 보고 있었다구."
지금은 마일즈도 햇볕에 탄 손으로 입을 가로막고서 이 세상의 부조리를 큰 소리로 비웃고 있었다.
"정말이지, 이 염병할 해군이라는 곳은......"
우리들은 책상 앞에 앉아서 서류에 기입을 하고 있었다. 그 곳에 늦은 점심을 끝낸 랠리 파슨스가 돌아왔다. 잔뜩 긴장한 얼굴로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있었다.
"이보게들." 그는 말했다. "큰일 났어. 스탈린에 대해서 얘기 들었나?"
댄버가 미끌어져 마루에 떨어지면서 커다랗게 신음 소리를 냈다.
30분 후, 의자에 앉아 있던 마일즈가 갑자기 허리를 비틀어서 내쪽을 향했다.
"아뿔싸! 까맣게 잊고 있었군!"
그는 바지 주머니에서 편지를 끄집어 냈다.
"정문으로 들어오려고 하는데, 웬 여성이 서 있다가 말이지, 이걸 자네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하더군."
내게 편지를 건네 주고는 눈을 깜빡깜빡거리더니 다시 타이프라이터 쪽으로 돌아 앉았다. 봉투의 겉에는 조그맣고 꼼꼼스러운 솜씨로 내 이름이 씌어져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뜯었다.
나의 마이클
급한 볼일이 생겨서 오늘 밤은 만날 수가 없게 되었어요. 딸이이가 아파서 지금 당장 뉴올리언스로 가야 해요. 이해해 주시겠지요? 당분간 만나지 못하겠지만 바람은 피우지 마세요. 돌아오는 대로 연락하겠어요.
당신을 사랑해요.
이덴
그것이 전부였다. 전화번호도 적혀 있지 않고, 연락할 주소도 적어 놓지 않았다. 뉴올리언스라고 하는 도시도 나에게는 마냥 생소했다. 뉴올리언스라는 도시를 얘기한 적도 없었으니까. 자기 딸이 그 곳에 살고 있다는 얘기도 전혀 한 적이 없었다. 아이에 대해서는 나도 물어 보는 것이 두렵기는 했지만. 그녀가 얘기해 주지 않고, 나도 물어보지 않은 일은 그 밖에도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로 많이 있었다. 마치 신성한 고대 문서라도 조사하는 것처럼 나는 그 편지를 몇 번이고 다시 읽어 보았다. 자못 이덴답다고 생각했다. 중요한 것이 몽땅 빠져 있으니까. 예를 들면 딸의 병명이 무엇이고, 어느 정도로 중한 것인가도 씌어 있지 않다. 다시 돌아오면 나와 어떻게 연락을 취할 계획인가도 씌어 있지 않다. 확실한 것은 단 한 가지, 그녀가 가버렸다고 하는 것이다.
"이봐, 괜찮겠나?" 마일즈 레이필드가 말했다.
"응...... 왜 그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되었잖아."
"으응, 아무렇지도 않아."
최소한 그녀는 맨끝에 `사랑해요'라고 써 주었다. 일어나서 카운터로 가서 `손님'의 상대를 했다. 어쨌든 몸을 움직이자고 생각했다. 무엇인가를 하자. 그렇게 하면 쓸데 없는 것을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한참 있으니까 마일즈는 베케트와 댄버 두 사람과 함께 격납고로 갔다. 그곳에서 엔진을 트럭에 실는 것이다. 나는 후로트의 부품을 찾으러 창고의 안쪽으로 갔다. 그곳에서 천천히 시간을 갖고 스탈린의 최후의 순간 같은 것을 상상하려고 했다. 이덴의 얼굴을 머리 속으로부터 몰아낼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좋았던 것이다. 그리고는 마일즈 레이필드의 비밀의 아뜨리에를 들여다 보았다. 이젤의 메조나이트에는 인적 없는 해안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아직 미완성이어서 색채는 황혼의 색깔이라고나 할까? 얼마간 윤곽이 흐려져 있었다. 아직 세부까지는 모두 그려져 있지 않다. 거칠고 대충대충 그린 데생이었다. 스케치북을 집어들고 들쳐 보았다. 그의 스케치는 그 이후 상당히 늘어나 있었다.
최후의 다섯 장은 프레디 헤러드를 그린 것이었다. 그의 얼굴이 두 개의 앵글에서 무척 아름답게 포착되어지고 있다. 무구한 소년과 같은 이목구비는 이미지대로였으나 입가와 눈동자에, 지금까지 어둠의 왕국을 방문했을 때는 깨닫지 못했던 그의 새로운 면이 포착되어져 있다. 그 그림의 헤러드는 이 쪽에, 말하자면 마일즈에게 아양을 떨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다른 그림의 헤러드는 우뚝 서서 페이지의 바깥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완전히 벌거벗고 있었다.
저녁이 되었을 무렵, 샐과 막스를 만나러 격납고쪽으로 어슬렁 어슬렁 걸어갔다. 두 사람은 커다란 HUP의 전자 시스템을 수리하고 있었다. 멜카도의 모습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는다.
"이 기계의 최대의 난점은," 샐이 말했다. "사용하려 들면 고장이 난다는 거야."
"이것을 설계한 인간은 자신을 날려 보낼 필요는 없었을 테니까." 하고 막스가 말했다.
"그러니까 엉성한 거라구, 이런 것들은 모두."
"그런데, 이 근처에서 멜카도 녀석을 보지 못했어?" 나는 물었다.
샐이 얼굴을 들었다. "그 녀석, 1주일간 휴가를 얻었다든데? 고향인 멕시코로 돌아갔다나봐."
젠장. 이덴은 자취를 감췄다. 멜카도도 없어져 버렸다. 거의 같은 시간에. 막스와 샐은 부지런히 수리의 내용을 설명해 주었으나 도무지 귀에는 들어 오지 않았다.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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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은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한밤중인 12시경에 밖으로 나가서 계단에 걸터 앉았다. 따뜻한 밤공기를 호흡하면서 무수한 별들을 올려다 보고 있으려니까 보급부쪽에서 마일즈 레이필드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땅바닥을 응시한 채 발빠르게 걸어오고 있다. 계단의 옆까지 와서야 겨우 나를 알아 보았다.
"엇!" 어딘가 경직된 태도로 깜짝 놀란 것처럼 말했다. "자네군. 이런 곳에서 뭘하고 있는 거지?"
"잠이 오지 않아서, 그리고 밤 하늘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마일즈는 안도한 듯한 모습으로 담배를 끄집어 내고. 한 대에 불을 붙여 물었다.
"라브렌티 베리아가 이 기지를 습격하는 것을 기다리고 있는 줄 알았지."
"대체 그게 누군데?"
그는 가르쳐 주었다. 그 농담을 들은 나는 자신도 모르게 약간 너무 큰 소리로 웃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또다시 자신의 무지를 뼈아프게 느껴야만 했다. 이 세상에 다른 사람들은 누구나가 알고 있는 데도 혼자만이 모르고 있는 이름이 최소한 5백 개는 있는 것 같았다. 내 머리에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지식만이 잔뜩 들어 차 있는 것이다. 라브렌티 베리아가 소련 비밀 경찰의 두목이라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모르고 있는 것은 그것 이외에도 산더미처럼 있다. 그림은 완성했느냐고 마일즈에게 물어 보니까 그는 한순간 머뭇거리고 나서 내뱉듯이 말했다. "아니, 아직 안 됐어. 만일 그들에게 붙잡히는 일이라도 있다면 오늘 같은 날은 최고일 거야. 멋질 거야. 스탈린이 죽은 날에 뭔가 은밀한 일을 하고 있다가 붙잡히다니. 아아, 그렇지. 자네에게 보여 주고 싶은 것이 있어."
그의 뒤를 따라서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쭉 늘어 서 있는 침대에서는 병사들이 깊이 잠들어 있었다. 마일즈 레이필드는 자신의 로커로 다가가고 세면소에서 다시 만났다. 그곳에는 아직 조명등이 켜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서 건네받은 것은 잡지에서 잘라 낸 그림의 복제가 빽빽히 붙어 있는 홀더였다.
"이것으로 공부하면 좋을 거야." 그는 말했다. "마음에 드는 것을 묘사해도 좋지 않을까?"
제일 많은 것은 그가 좋아하는 화가, 일본계 미국인인 야스오 쿠니요시의 그림이었다. 최초에는-캬니프나 노엘, 식클즈나 크레인의 그림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쿠니요시의 그림은 어딘가 촌스럽다고 생각되었다. 인물의 자세가 어색하고, 머리부분이 지나치게 크고 손이 너무 작았다. 개중에는 그려져 있는 인물이 그림에서 넘쳐서 떨어질 것같이 되어 있는 것들도 있었다. 그러나 담배를 피우고 있는 마일즈와 나란히 놓고 자세히 바라보고 있으려니까, 다른 관점을 지닐 수가 있게 되었다. 머리가 가분수인 광적인 눈을 한 뚱뚱한 어린애를 그린 그림이 있었다. 그 아이는 바나나를 한 손에 들고, 흰그릇 속의 복숭아에 다른 하나의 손을 뻗고 있다. 암적색의 테이블이 비스듬하게 그려져 있기 때문에 이쪽은 바로 위에서 그 모습을 보는 느낌이 된다. 창문이 열려 있어서 공허한 풍경이 내다보이고 있다. 두 개의 건물, 두 개의 구름. 어딘가 을씨년스럽고 공허한 그 풍경은 호젓한 건물을 그린 르네상스의 회화와도 비슷했다.
"이 아이의 눈을 자세히 보라고." 뚱보 아이를 가리키면서 마일즈는 속삭였다.
"이 아이는 괴물이란 말이야. 아무리 먹어도 채워질 수가 없는 엄청난 식욕의 소유자지. 재미있지. 가운데 가리마를 타고 있는 저 느낌...... 그리고 말이지, 세일러복 같은 셔츠를 입고 있지 않냐구. 그런데 색깔은 곤색이 아니라 메마른 핏빛이 아닌가. 하지만 벽은 푸르고, 하늘도 푸르러. 이 아이는 매일 춥고 황량한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에 살아 있는 실감을 맛보기 위해서 죽자 하고 계속 먹어대기만 하고 있는 거야......"
돌연 등 뒤에서 문이 열리고 닫혔다. 할레르슨이 들어왔다. 술에 취해서 조그만 눈을 번뜩였다. 먼저 마일즈를 보고, 그리고나서 나를 보고 말했다.
"이런이런."
"빨리 꺼져 버려, 할레르슨." 마일즈가 말했다.
"러시아인들이 쳐들어 온다구."
"야아, 둘이서 재미보고 있군...... 이런 호젓한 화장실에서. 이런 깊은 밤에 말이지. 정답게 얼굴을 맞대고 못다한 한을 푸는 거야?"
나는 한 걸음 다가갔다. "그건 또 무슨 뜻이지?"
"자네하고 그 아가씨." 희죽 웃고는, "금년 최고의 커플이 아니겠어?" 라고 말했다.
녀석의 점퍼를 붙잡자마자 힘껏 벽에 박아 주었다. 머리가 맞부딪힐 정도로 가까이 얼굴을 가져가자 내쉬는 숨에 술 냄새가 지독했다.
"다시 한 마디라도 입을 열었다가는," 숨을 죽인 목소리로 말했다.
"네놈의 대갈통을 부셔 놓을 테다!"
어두운 병사쪽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시끄러워!" 뒤이어 누군가가 "빨리 자뼈져 잠이나 자라구!"
소리가 잠잠해지기를 기다렸다가 할레르슨의 점퍼를 놓았다. 나는 떨고 있었다. 할레르슨이 무서웠기 때문이 아니다. 내 자신의 돌연스러운 분노가 두려웠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폭력을 휘두르다가는 영창에 들어가기 십상일 것이다.
"정말, 넌 진짜 신병이라니까." 할레르슨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구역질을 돋구는 녀석이야!" 나는 쏘아 붙였다. "더 이상 나나 마일즈에게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면 네 물건을 잡아뽑아 버릴 테니까 그렇게 알라구. 마일즈는 내 친구란 말이야. 알았어? 친구라구."
"잠깐, 실례." 잔뜩 비꼬인 말투로 할레르슨은 말하고 변기 앞에 서서 끝도 없이 오줌을 싸기 시작했다. 나를 놀려대듯이 흥얼거리고 있는 노래는 <당신이 아직 나를 사랑하고 있다면 할 수 없다(I Can't Help It if You're still in Love With Me)>였다. 그것을 듣고 자신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그는 이처럼 무정한 녀석이다. 노여움이 가라앉아 버렸다. 확실히 할레르슨은 근성이 비뚤어진 녀석이다. 약이 올라서 벽에 쥐어 박긴 했지만 그를 미워할 수가 없다. 더구나 시종일관 행크 윌리엄스다. 볼일을 보고 나자 그는 부루퉁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고 나서 어두운 막사쪽으로 되돌아 갔다. 일부러 과장해서 크게 숨을 내쉬고 나서 나는 소리를 죽여서 킬킬거리고 웃었다. 마일즈 래이필드는 웃지 않았다.
"고마워." 한 마디 남기고 조용히 자신의 침대쪽으로 걸어갔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것으로 완전히 할레르슨을 적으로 만들고 말았다. 이런 곳에서는 적을 만들고 싶지가 않은데. 어디에서든지 적은 만들고 싶지 않다. 언제나 등 뒤를 조심하고 있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딱 질색이기 때문이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여러 가지의 음모가 획책되는 것도 싫다. 어쨌든 나는 자신을 지켰다. 마일즈 레이필드도 지켰다. 하지만 가령 마일즈에 관해서 할레르슨이 암시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되는가? 그 경우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마일즈는 친구다. 그는 회화나 데생에 관한 지식을 독점하고 있지 않고 나에게도 그것을 나눠 주었다. 그렇게 호의를 베풀어 준 친구는 지금까지 한 명도 없었다. 더구나 그는 내가 유치한 만화의 세계로부터 빠져 나와 진정한 미술에 접할 수 있도록, 진짜 그림에 도전할 수 있도록 인도해 준다. 그와의 우정으로 인하여 나는 보다 넓은 세계로 도전하는 계기를 잡은 것이다. 초상화 아르바이트로 돈을 버는 방법도 그의 조언에 의한 것이었다. 그의 덕택에 나는 일종의 프로가 된 것이라고도 할 수가 있다. 나는 분명히 그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 그러나 만약 그가 동성연애자라고 한다면, 나도 동성연애자라고 부를 수가 있다는 말인가? 이것은 매우 복잡한 문제다.
다시 침대에서 일어나서 세면장으로 돌아가 마일즈가 빌려 준 홀더의 다른 그림들을 보기 시작했다. 다종의 그림이 정리되어 있다. 아돌프 데인, 아론 보르트, 안톤 레프리지, 아놀드 브란치. 이것은 A로 시작되는 이름의 화가를 모아 놓은 홀더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쿠니요시에 필적할 만한 화가는 없었다.
B항의 처음으로 벤 셔언의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이것은 굉장하군.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내서 말하고 있었다. 이러한 그림이라면 나에게도 잘 이해가 되었다. 벤 셔언. 그는 나와 같은 거리의 출신임이 틀림 없었다. 그곳에는 <핸드볼>이라는 제목의 그림이 있었다. 중앙에 코트가 있고, 네 명의 선수가 그려져 있었다. 그 가운데 한명은 모자를 쓰고 있는 니그로였다. 경기를 관전하고 있는 두 명의 남자, 한 명은 모자를 쓰고 있고 헐렁헐렁한 바지에 양손을 찔러 넣고 있다. 또 한 명은 팔짱을 끼고 있었다. 코트의 배경에는 아파트가 쭈욱 늘어 서 있다. 마치 나도 그 코트에서 시합을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모자를 쓰고 있는 인물은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이 틀림 없다고 생각했다. <공터>라는 제목의 벤 셔언의 또 한 장의 그림에는 내가 열한 살이 될 때까지 입고 있던 것과 똑같은 스웨터와 바지를 입은 소년이 그려져 있었다. 흰 셔츠의 깃이 스웨터에서 삐져 나와 있는 소년은 공터의 벽돌벽을 상대로 혼자서 공치기를 하면서 놀고 있다. 소년은 완전히 외톨박이였다.
스탈린이 죽은 날, 플로리다 펜서콜라의 화장실에 앉아서 나는 브룩클린의 긴 토요일 아침을 회상하고 있었다. 토요일 아침에는 자주 여느 때보다 일찍 일어나서 홀리 네임 성당의 미사 의식을 거들고는 했다. 그것이 끝나면 한숨 돌리게 되는데, 아직 시간이 일러서 아이들이 모두 자고 있기 때문에 주변은 조용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안소니아 시계 공장까지 찾아가서 지저분한 벽돌벽을 상대로 종종 공던지기를 했다. 셔언의 그 그림을 보면서 나는 가슴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소년은 바로 나로구나.
그 때 문이 쾅 하고 열리고, 누군가가 낮게 웃으며 벽에 몸을 부딪치면서 들어왔다. 막사쪽에서 또 누군가가 잠을 깬 기척이 들린다. 나는 일어섰다. 샐이었다. 나의 존재를 알아채자 야아 하고 말하며 앞을 지나가서 세면대에다가 오줌을 싸기 시작했다.
"<다트 바>를 나올 때부터 꼭 쌀 것만 같았다구."
"휴가나 외출은 모두 중지되었다면서."
"그것은 그냥 헛소문이야. 스탈린이 살아 돌아온 것도 아니고."
샐은 자신의 침대쪽으로 걸어갔다. 언젠가 기회를 봐서 샐하고 진지하게 얘기를 나눠 보리라 나는 생각했다.
그 기회는 금세 찾아왔다.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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샐이 고백한 이야기
우리 아버지는 굽는 것이 직업이었지. 그렇다고 해서 이 빵을 굽는 것은 아니고 자동차를 굽는 거라구. 아버지는 남브롱크스에 자동차 수리 공장을 가지고 있어. 그래서 브롱크스 전체에서 밀려 들어오는 자동차를 수리하는 거야. 차 검사증을 보여 달라고는 절대로 요구하지 않아. 자동차의 몸체를 핑크색으로 칠해 달라고요? 아아, 좋습니다. 엔진 블록의 번호를 깎아내 달라구요? 좋습니다, 가지고만 오슈. 그런 식이었지. 일 솜씨는 좋았어. 색채를 구별하는 눈썰미도 있있고, 손으로 하는 작업이면 무엇이든지 잘 해 내셨지. 시대를 잘 만났더라면 조각자가 되어 있었을지도 몰라. 아마도 아버지가 아직 어렸을 때는 직업을 선택하는 자유가 그다지 없었던 것 같아. 수리 공장을 개업하기 전에는 주유소에서 일하고 계셨지. 그 전에는 제2차 대전에서 싸웠고.
하지만 기묘한 표현일지도 모르지만, 나에게 있어서의 진짜 아버지는 아버지의 아버지, 그러니까 우리 할아버지였다고 생각해. 할아버지는 우리 집에서 3블럭 가량 떨어진 곳의 조그만 아파트에서 살고 계셨어. 그곳에는 서적이나 잡지나 누렇게 변색한 사진 등이 하나 가득 쌓여 있었지. 할아버지 일가는 이탈리아의 토스가나의 피렌체에서 이주해 오셨다더군. 대대로 공산주의자 집안이었대. 그렇기는 하지만 지금 미국에서 말하는 공산주의자와는 약간 다르지. 할아버지는 일종의 무정부주의자였어. 한 나라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전 국민이 공유해야 한다고 그는 믿고 있었던 거야. 식량, 항만, 석유, 중공업 등 모든 것을 말이야. 굶어 죽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안 된다. 실업하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안 된다. 모든 인간은 의사에게 치료 받을 권리를 지니고 있다. 아아, 그런 것이 실현된다면 이 미국은 완전히 붕괴되어 버리고 말거야. 하지만 할아버지는 정부라는 것에도 반대이셨지. 책에 둘러쌓여 있는 그 작은 방에서 양팔을 흔들어대며 하얀 턱수염을 쓰다듬어 가면서 이렇게 외치셨지.
"이상은 훌륭하다, 추상은 훌륭하다, 사랑도 정의도 멋지다. 공중의 복지는 어떤가, 라고.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 훌륭한 것이다. 그런데 부패한 정치가놈들은 영락없이 국민을 팔아 넘기든가 감옥에 집어 넣거나 하고 있다."
할아버지는 시에나 출신의 여자와 결혼을 하셨어. 그러니까 내게 있어서는 할머니가 되는데, 본 기억은 없어. 그것도 그럴 것이 할머니는 우리 아버지를 낳으신 뒤 1930년 초에 돌아가셨거든. 사진은 많이 있었지. 호리호리한 몸집의 여성으로 코니 아일랜드나 자유의 여신상 앞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어딘가 겁을 먹은 듯한 표정을 하고 있더군. 무엇 때문에 이런 나라에 왔는지 알 수가 없다는 듯한 표짐으로 렌즈를 뚫어지게 보고 있는 거야. 할아버지 자신도 뉴욕으로 이주해 온 이유에 대해서 분명히 말한 적은 없으셨지. 고향에서 골치 아픈 일이 일어나서 말이야, 하고 대충 말하셨지만 그 이상은 말하시지 않으셨지. 진상은 나로서도 알 수가 없었지만 역시 할아버지가 공산주의자였다는 것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
젊었을 때의 할아버지는 굉장히 글씨를 잘 쓰셨지. 최근에는 그 뭐라더라, 칼리그라피라고 불리우는 것 말이야. 참으로 멋지게 쓰셨어. 장식문자 같은 것을. 독수리 깃털의 모필로 쓰는 것이라고 할아버지는 말하셨지. 그것에 채텀 광장의 중국 인상점에서 산 특별한 검은 잉크를 쓰고 있었던 것 같아. 미국으로 건너 온 직후 할아버지는 하루 종일 경마차점에서 일하고, 밤에는 돈 많은 손님들의 요구에 따라서 아름다운 비즈니스 카드를 쓰고 있었다. 왜 그 결혼식의 초대장이라든가, 상장이라든가, 그런 문서 말이다. 그것으로 벌어들인 돈을 할아버지는 의복이라든가 가구의 구입에 쓰지 않고 몽땅 책을 사는 데 써 버렸기 때문에 할머니는 늘 투덜대셨던 모양이더군. 할아버지가 쓴 것은 나도 몇 가지 본 적이 있어. 딱딱한 골판지에 쓴 것으로, 지금은 이미 누렇게 변색이 되어 버렸지만 말이야. 할아버지는 그것을 견본 삼아서 5번가의 부잣집을 돌아다니고 있었던 것 같아, 틀림없이 형편 없는 영어를 써가며 열심히 선전하고 돌아 다녔을 테지. 그런 할아버지를 보고 돈많은 사람들은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해. 이보게, 글씨를 쓸 줄 아는 이탈리아 촌놈이 찾아 오는 군!
그러는 동안에 할아버지는 어떤 사고에 말려 드셨어. 그래서 글씨를 쓰는 쪽 손을 못 쓰게 돼 버리고, 의사에게 인지를 절단당해 버리고 말았지. 할아버지에게 있어서는 정말 대단한 충격이었을 거야. 나도 이 얘기를 하고 있으면 슬퍼지지. 하지만 그 사고로부터 50년 가량이 지나서 내게 그 얘기를 했을 때 할아버지는 단지 어깨만 조금 쳐들어 보였을 뿐이라네. 어차피 그렇게 될 운명이었다고 말하시면서 말이야. 설사 그 사고가 아니었다 해도 틀림없이 다른 사고를 당했을 거라고 말이야. 할아버지는 필경 운명론자라고 하는 부류의 인간이었어.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할아버지가 어깨를 쳐들어 보였을 때, 나는 본심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어. 왜냐하면 방 구석에서 뚫어질 듯이 그 손을 응시하고 있는 할아버지를 나는 자주 보고는 했었으니까.
20년대에 듈어서자 할아버지는 자동차 수리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아. 그래서 우리 아버지도 자동차에 애착을 갖게 되었을 거야. 그때 대공황이 찾아왔지. 그래서 할아버지는 브롱크스에 식료품 상점을 열었던 거야. 로우이스트사이드에서 업타운의 프레잔드 애비뉴로 이사를 하고 결국은 브롱크스에 눌러앉고 말았지. "인간은 먹지 않고는 살 수 없으니까 식료품점 쪽이 좋겠다고 생각했지. "할아버지는 그렇게 말씀하시곤 했지. "불황이 찾아오면 자동차를 타는 사람도 없을 테니까 말이야." 하고.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억척스러운 할아버지도 심한 충격을 받았던 모양이야. 모두가 그렇게 말하고들 있었으니까. 그래도 상점은 계속 유지하셨지. 할아버지는 이층에 살고 있었는데 내가 찾아가면 반드시 무언가를 주시곤 했지. 아이스크림, 차, 과자, 그리고 책의 얘기를 해 주고. 대부분 이탈리아에 책이었는데 그것을 읽으라고 권해 주셨어. 교양인을 자칭하는 인간이라면 책을 읽지 않고는 살아나갈 수가 없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단테, 마키아벨리, -마키아벨리에 대해서는 <논고 The Discourses>를 읽으라고 말했지. 그것은 공화국을 건설하기 위한 처방전이라면서. <군주론 The Prince> 같은 것은 취직의 방편으로 쏜 것이라고 말씀하셨지. -그리고 레오파르디, 구이치알다니. 그런 사탐들이 모두 오래 된 친구라도 되는 듯이 할아버지는 얘기하는 거였어. "단테가 말한 것처럼......" 하는 식으로 말이야. 할아버지는 라틴어에도 능통하셨지, 내가 헤이즈 추기경 거처에 다니게 되자 라틴어의 책도 공부하라고 권해 주셨지. 케이사르, 키케로, 베르길리우스의 원전을 음독하게 했지. 할아버지는 무척 열심히 라틴어의 발음을 가르쳐 주셨어. 그것도 그러한 책이 죽은 사람이나 학자에 의해서 씌어진 것이 아니고 지금 호흡하고 있는 살아있는 인간에 의해서 씌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가르쳐 주는 것이었어. 덕택에 나는 라틴어도 좋아하게 되었지. 추기경 집에서 내가 읽을 차례가 되었을 때, 주위의 동료들이나 신부들은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지. 그들의 귀에 익은 라틴어의 발음은 미사 때의 기도의 발음으로서, 옛날의 로마인이 명령을 내리거나 여자와 동침을 할 때 쓰고 있던 라틴어의 발음은 아니었거든. 그렇게 해서 나는 라틴어도 능숙하게 되었지. 그러나 타키투스만은 좋아할 수가 없었어. 그의 문체에 대해서는 할아버지도 지독하게 욕설을 퍼부시곤 했지. 할아버지는 뭇솔리니를 굉장히 싫어하고 있었던 것 같아. 그것이 가족내의 말썽의 불씨가 되기도 했지.
우리 아버지는 시칠리 섬 출신의 양친을 가진 여성과 결혼을 했는데, 시칠리 사람들은 가리발디 일족을 증오하고 있었어. 그도 그럴 것이, 가리발디가 시칠리를 정복했을 때 그는 그 때까지 섬을 손아귀에 넣고 있던 사람들, 마피아라든가 불한당이라든가,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고 있던 자들이라든가, 지주라든가 그런 부류들을 전부 추방해 버렸기 때문이지. 우리 어머니의 일족이라는 것이 그렇게 추방된 무리들로, 그렇기 때문에 가리발디의 출신지인 피렌체 사탐들을 증오하고 있었지. 피렌체 사람들을 동성애자라든가 속물이라든가 빨갱이라고 일컫고 있었어. 그래서 나의 외할아버지는 나의 친할아버지, 나를 궈여워해 주었던 잉펀티노 할아버지하고는 말도 하지 않으려고 했지.
어쨌든 양가는 좀처럼 타협하려고 하지 않았어. 그래서 나와 누이동생은 양쪽 가문의 쟁탈전의 대상이 되어서,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항상 오고가곤 했지. 어머니의 형제는 아홉이었어. 그래서 어머니쪽의 가족들은 두 명밖에 자식을 얻지 못했던 잉펀티노 할아버지에 대해서 마치 동성연애자와 같은 표현을 쓰고 있었던 거야. 그러나 상식이라는 것을 독점한다는 것은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지. 할아버지는 할아버지대로 우리 어머니를 아무래도 좋아할 수가 없는 것 같았어. 언젠가 할아버지는 우리 어머니에 대해서, "저 아랍 계집 같으니라구." 하고 부르는 것을 들은 적이 있지. 그 이유를 비로소 안 것은, 훨씬 뒤에 일로서 시칠리 섬은 백 년 가량 아랍의 지배를 받았던 적이 있었다는 것을 책에서 읽었을 때였지. 실제로 양가는 하나부터 열까지가 모두 대조적이었어. 피렌체인들은 무슨 일에도 명쾌한 판단을 내리지. 약간 냉정한 면도 있지만 뭔가 특정한 테마에 관해서 자기를 잊고 논쟁한다고 하는 측면도 있고 말이야. 한편, 시칠리인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정열적이고, 과묵하고, 신앙심이 두터운 편이지. 나는 언제나 돌발 사태가 벌어지는 것은 아닐까 라는 이상한 분위기를 느끼고 있었어. 그리고 언젠가는 갑자기 폭발을 해 버리는 것이지. 비명, 절규, 정면으로 치고받는 주먹질. 일주일 동안에 한 번은 누군가가 두들겨 맞는 것 같았어. 귀가시간에 늦는다든가, 쓸모없는 인간과 어울려 다닌다든가, 토스트를 맛없게 구웠다든가, 구실은 무엇이든 좋았지. 메리 숙모 같은 경우는 아일랜드계 경관과 교제를 한다고 해서 턱뼈가 부숴졌을 정도야. 그뿐만 아니라 숙모는 하느님은 믿지 않는다고 떠들어 댔기 때문에 허리띠로 죽어라 두들겨 맞았지, 외할아버지에게. 더구나 외할아비지는 제대로 교회에 다지도 않는 사람이었는데 말이야. 그 정도로 모두가 괴상한 사람들이었어.
하지만 전쟁중에 모두가 배고픈 경우를 당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 그것만은 확실해. 첫째는 잉펀티노 할아버지의 식료품점이 있었고, 두 외삼촌이 이따금 스테이크 고기를 가져다 주었거든. 두 사람 모두 세로줄 무늬 양복을 입고, 새끼 손가락에는 늘 반지가 끼여져 있었지. 그 두 외삼촌이 찾아오면 모두들 구석에서 소근소근 귓속말을 해댔어. 아마 조직에 관련되어 있는 모양이었어. 마피아 일원이었을 거야. 단언은 할 수 없지만. 명확히 설명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지금까지도 어머니는 이렇게 말하고 있지. "그 두 사람은 말이다, 비즈니스맨이란다." 분명한 것이 한 가지는 있지. 그들은 전쟁에 나가지 않았다는 사실이야.
우리 아버지는 나갔지. 그래서 나는 아버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는 거야. 아무튼 내가 철이 들락말락했을 때 출정해 버렸으니까. 그리고 1944년, 휼트겐의 숲이라는 곳에서 다리의 일부가 날라가 버리고 말았어. 집에 돌아온 것은 45년 봄이었는데 사전에 아무 것도 알리지 않고 돌아오셨어. 부활절 이틀 뒤에. 군부 차림으로 목발을 짚고 돌아오셨어. 누가 노크를 해서 어머니가 현관문을 열고 나가니까 아버지가 서 있더래. 그 순간 어머니는 엉엉 울기 시작하셨지. 우리 누나인 휘오레타도 엉엉 울기 시작했고. 누나는 나보다 세 살 위였기 때문에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던 거야. 나는 얼른 할아버지에게 알리고 오라는 말을 들었어. 그리고 그날 밤의 소동이 얼마나 요란했는지! 그것은 참으로 굉장한 소동이었어! 아마 그 아파트에 2백 명 가량은 모였을 거야. 동네방네에서 모조리 모여들었지. 외갓집 식구들도 찾아왔지. 스파게티, 라자니야, 라비올리, 소다수, 맥주, 위스키. 온갖 음식을 들고왔어. 아코디온까지 들고 온 녀석도 한 명 있어서 영어와 이탈리아 노래의 대합창이 벌어졌지. 그 사이사이에 어머니는 다시금 울음을 터뜨리셨지. 그날 밤 어머니는 아버지 옆에 찰싹 달라붙어서 한 순간도 떨어지지를 않으셨어. 그 소음이 어찌나 굉장했던지, 자네는 아마 상상도 못할 거야. 이 밤이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 한 주일간, 한 달 동안, 일 년이라도 좋으니까.
다음 날, 아버지는 오후 3시까지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어. 3년 동안 쌓인 수면 부족을 단번에 보충하려는 듯이. 어머니가 침대로 아침 식사를 가져갔지. 팬케이크, 베이컨, 차가운 우유를. 그리고는 아버지를 욕실로 데려가서 뜨거운 욕조에 집어넣었어. 그 때 아버지는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이 눈으로 똑똑히 보았어.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의지하지 않고서는 욕조에 들어갈 수가 없었지. 목발이 없이는 걸을 수도 없었고 말이야. 그러나 누나나 나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붙평 한 마디 하지 않았고. 다만 어머니에게만은 이렇게 말하시더군. 괜찮아, 문제 없어. 미안해, 괜찮다구. 외지에 있는 동안에 아버지는 살이 쪄서 옛날에 입던 옷이 맞지 않게 되었지. 그래서 그 날 안으로 양복점 주인인 랠프를 집으로 와 달라 했지. 랠프는 아버지의 치수률 재 주었어. 두 사람은 시종 이탈리아어로 얘기를 하더군. 양복점 주인이 돌아가자 아버지는 거실의 창가에 커다란 의자를 갖다놓고, 4시간 가량 앉아 계셨지. 목욕 가운 차림으로 뚫어지게 바깥 골목을 응시하면서. 그동안 나에게는 아무말도 하지 않으셨지. 단 한 마디도. 그 때 나는 열 한 살이었지만 아버지가 엄청난 체험을 하고 돌아왔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지.
나는 할아버지를 만나러 갔어. 아버지가 말을 걸어 주지 않는 것은 내 탓일까, 내가 뭔가 나쁜 짓을 한 때문일까. 그것을 물어보러 갔던 거야.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하셨어. "네 아버지는 말이다, 이제 앞으로 줄곧 그런 모습일 게야. 그러니까 네가 그런 아버지 모습을 이해하도록 노력해라."
지금도 이따금 술집에서 자기가 얼마나 용감하게 전쟁에서 싸웠는가 하는 것 따위를 자랑삼아서 떠들어대는 자들이 있지 않은가. 그럴 때면 나는 영락없이 그 날 뚫어질듯이 창밖을 바라보며 앉아있던 아버지가 생각나는 거야. 그리고 누군가를 실컷 두들겨 주고 싶어지는 거야.
마침 그 무렵 나 자신도 여러 가지 시련을 겪고 있었지. 학교 성적이 수석이었는데도 가혹한 아일랜드 계의 신부나 수녀들은 어떤 격려의 말을 해 주지 않는 거야. 그들 입장에서 보면 이탈리아계인데도 머리가 좋은 나는 일종의 불구자 같은 존재였을 거야. 이탈리아계인 나에게는 진로가 두 가지밖에 없었어. 시청의 위생과나 마피아 조직. 그 무렵, 나는 우연한 계기로 내가 누군가의 턱에 한 방 강타를 먹이면 싱대방이 쉽게 뒤로 나가떨어져 버린다는 사실을 발견했지. 그래서 나는 주위의 아이들로부터 일단 공포의 대상이 되어 있었어. 라틴어를 읽을 수 있지 때문이라든가, 레오파르디를 알고 있기 때문이라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쉽게 때려 눕힐 수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존경의 대상이 되었던 거야. 외가쪽 친척들도 드디어 나를 인정하게 되었고. 어느 날 오차드 해안에서 두 명의 아일랜드 계의 사나이들을 내가 때려 눕히는 것을 사촌들이 보고 있었는데, 내가 록키 말시아노의 후계자자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야. 그래서 꼭 권투 클럽에 다니면서 복서가 되라고 충동질을 시작했지. 문제의 마피아인 두 명의 외삼촌도 뒷바라지는 우리들이 하겠다고 나겠어. 그렇게 되니까 나 자신도 굉장한 거물이나 된 것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하더군.
이럭저럭하는 동안에 47년이 되고, 나는 중학교를 졸업했지. 그러자 할아버지는 식료품점을 푸에르토리코에게 팔아치우고 나를 이탈리아로 데려가 주셨어. 아마도 이대로 내버려 두었다가는 당신의 손주가 시시껄렁한 불량배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노파심이 작용했던 것 같아. 그 여행은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올린 상이라고 할아버지는 말하셨지만. 하지만 그것은 나를 함정에서 구해내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나는 생각해. 그리고 그 여행은 할아버지가 자기 자신에게 내린 선물이기도 했어. 아무튼 할아버지는 1900년 이래 고향에 한 번도 돌아가 보지 못했으니까, 그러니까 그의 인생의 절반 이상을 타향에서 살았던 셈이지. 그 이유는, 첫째 뭇솔리니가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동안에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반항심이 있었을 거야. 게다가 필요한 돈도 아직 비축이 되어 있지 않았을 테고, 고집스러운 프라이드도 있었을 테지. 최소한 고향을 떠날 때보다 유복한 형편이 되지 않는 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아. 그턴데 마침내는 고국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된 거야. 죽기 전에 다시 한번 보아두고 싶다고 생각한 것일거야, 틀림없이.
그 여행만큼 즐거웠던 경험은 지금껏 없었어. 정말로 그 여행은 굉장했지. 우리들이 탄 것은 <제노아>라고 하는 새하얀 선체의 배였지. 손님의 대부분은 이탈리아어를 구사하고 있었는데 전쟁 신부도 몇 사람 정도 타고 있었지. 그녀들을 보고 지런 미인은 본 적이 없다고 생각했어. 콧수염이 희미하게 돋아있는 여성들까지도 그렇게 보였을 정도였으니까. 그녀들이 떠들어 대고 있는 것을 대부분 이해할 수가 있었지. 아버지에게서 배운 이탈리아어와 라틴어 실력으로 말이야. 밤이 되면 할아버지와 갑판에 나가서 구명 보트 옆에 서서 달빛에 반짝이는 대서양을 바라보았어. 파도가 뱃전을 두드리고, 악당이 어디선가에서 연주를 하고 있었어. 멋진 분위기였지. 해군에 들어가고 싶다는 소망이 처음으로 싹튼 것도 그 때라고 생각해.
여행 도중, 할아버지는 무엇이든지 알고 있다고 나는 생각하기 시작했어. 문명의 발상지인 지중해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설명해 주셨을 정도니까. 그리고 어느 날 밤 배가 지브롤터 해협에 도달하자, 나를 깨워서 그것을 보여 주셨지. 어느 쪽이 아프리카인지도 가르쳐 주었으며, 알프스도 손가락으로 가리켜 주셨어. 그리고 유럽의 모든 강의 기원이 알프스라는 것도 설명해 주셨어. 배가 제노아 항에 들어가자 할아버지는 너무나 감격해서 울먹이시더라구. 마침내 고향에 돌아온 거야.
그 해 피렌체는 아직도 전쟁의 타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있지. 피렌체에서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모양이야. 아르노 강 연변의 할아버지의 집도 날아가 버리고 없었어. 다리는 아직 복구중이었고 미술관도 폐쇄되어 있었어. 그도 그럴 것이 전시품 가운데 어느 것이 숨겨지고, 어느 것이 득일군에게 약탈당하고, 어느 것이 파괴되었는지 아질도 조사중이었던 거야. 할아버지 친지의 대부분은 이미 사망했던가 미국이나 아르헨티나로 이주하거나 했는데, 할아버지는 그것에는 별로 신경을 쓰고 있지 않는 것 같았어. 할머니가 옛날에 삼고 있던 집을 할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셨지. 지금 그 곳은 하숙집으로 되어 있어서 학생들이 많이 살고 있더군. 그리고서 할아버지는 사보나로라가 화형에 처해진 장소도 보여 주었지. 우리들은 도로에 빠져 나온 카페에 앉아서 레몬 조각을 곁들인 커피를 마셨지. 할아버지는 자리를 둘러 보면서 말씀하시더군. 레오나르도가 이 곳을 걸어다녔단다. 그리고 미켈란젤로와 마키아벨리도 그랬지.
그 말투를 듣고 있노라면 마치 할아버지가 젊었을 때 그들도 그곳에 살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야. 빛을 봐라, 하고 할아버지는 말했어. 빛과 그림자의 대비를 보아라. 중요한 것은 명석함이다, 항상 명석함이다. 라고 할아버지는 반복했어. 피렌체의 명석한 빛. 그래서 화가들은 저런 식으로 그린 것이다, 라고 할아버지는 정열을 담아서 얘기해 주셨어. 그리고 길을 가는 사람들의 얼굴도 보라고 할아버지는 말했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었어. 남들이 뭐라고 말하던 `위프'다, `기니아'다, `데이고우'다 하고 욕을 얻어먹고 기분이 상하더라도, 오늘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장소와 네 선조를 낳은 장소를 잊어서는 안 된다.
미국으로 돌아와서 3개월 후에 할아버지는 돌아가셨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내가 할아버지를 그리워 하지 않은 날은 단 하루도 없었어. 나는 카디날 헤이스 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어. 나는 대학에 가고 싶었지. 그 때 한국 전쟁이 발발했어. 우리 집에는 돈이 없었지. 어머니는 소중한 가게를 팔아서 얻은 돈을 이탈리아 여행에서 탕진해 버렸다고 할아버지를 비난했으며 아버지는 아무리 곤란해도 문제의 마피아 친척에게 돈을 빌리려고 들지 않으셨지. 그 당시 나에게는 애인이 있었어. 브록 파크에 살고 있던 아일랜드 계 아가씨였지. 그런데 그녀의 아비지가 나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어. 하지만 최소한 나는 백인이라구. 지금까지도 나는 그녀를 애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여러 가지로 궁리를 한 끝에 나는 군인이 되기로 작정했지. 그렇게 하면 제대했을 때 GI 장학금을 받아서 대학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 거야. 나는 대학에 가서 역사나 라틴어를 전공하고 싶어. 언젠가는 교사가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어. 계집애의 엉덩이만 쫓아 다니고 있는 나를 보고 있으면, 그런 것은 상상할 수도 없겠지만, 사실이야. 그런 행위라도 함으로써 가까스로 미치광이가 되지 않고 버티고 있는 거라구. 군대에 들어가고 싶다고 털어 놓았더니 아버지는 이렇게 말하시더군. "연안 경비대도 좋겠지, 해군도 좋겠지. 공군도 좋겠지. 그러나 그 빌어먹믈 놈의 육군에만은 절대로 들어가지 말아라" 라고. 그 때 나는 그리운 할아버지와 갑판에 서서 달빛에 반짝이는 지중해를 바라보던 그 날 밤의 일을 생각해 냈어. 그러자 더 이상 선택의 여지는 없었지.
이 해군 생활이 끝나면, 나는 다시 한 번 이탈리아에 가 볼 작정이야. 이따금 잠이 들기 직전에 나는 배의 트랩을 내려가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곤 하지. 시가지를 안내하는 간판이 서 있고, 악단이 신나게 음악을 연주하고 있고. 그 곳, 이탈리아의 땅으로 모여들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는, 그토록 그리운 할아버지가 나를 올려다 보고 계시는 거야. 빨리 내려 오너라 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그래, 그 그리운 얼굴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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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이 매장되고 마렌코프라는 뚱뚱하고 몸집이 작은 남자가 후계자의 지위에 올랐다. 그는 주름 한 줄 없는 넓은 이마를 지니고 있었고 양미간에는 머리카락이 한두 가닥 내려와 있었다. 그 얼굴을 한 번 보고 나자 실내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져 버렸다. 휴가와 외출 금지 조치가 해제되었다. 샐은 <다트 바>에서 조지프 V. 스탈린의 추도식을 열고 그들 모두는 엉망으로 취했다. 샐은 `인터내셔날'의 가사를 가르쳐 주었다. 딕시까지 모두 함께 노래했다. 조 맥카시가 라디오에 출연하여 경고했다. 마렌코프는 스탈린보다 악랄하고 미국 내에 스파이를 침투시키고 있다고 하는 것이었다. 진실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오전 중에 다시 한번 프리체트 대령이 봄의 화원을 가꾸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보급부는 변함없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오후에는 볼덴이 `어둠의 왕국'의 창을 열고 블루스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여자의 초상화를 일곱 장이나 그렸다. 산타나에게서는 여전히 연락이 없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그녀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녀가 없어서 무척이나 외롭다는 것, 그녀 생각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것, 다음 주에는 아니 앞으로 평생을 당신 곁에 있고 싶다고 생각한다는 것. 이러한 것들을 써내려 갔지만 어디로 보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결국 끝까지 쓰지 않고 찢어 버렸다.
어느 날 오후, 나는 그 호수까지 혼자서 가 보았다. 모두 그전 그대로였다. 차는 여전히 없었고 트레일러에는 열쇠가 채워져 있었다. 문 앞에 한 시간 정도 앉아서 재스민과 인동덩쿨, 평지꽃, 자목련 등의 향기를 맡았다. 그 때, 그렇게 둘이서 함께 맡았던 그 꽃들의 향기들을...... 해질녁이 되어도 기다리는 사람은 오지 않았고, 나는 다시 기지로 되돌아왔다.
금요일에 렉스 극장으로 `물램 루즈'를 보러 가지 않겠느냐고 마일즈 레이필드가 물어왔다. 펜서콜라 상영이 중단되기 전에 다시 한번 봐 두고 싶다는 것이었다. 순간, 대답이 궁색해져 지금 여자 친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어물어물 얼버무렸다. 그러자 마일즈는 말했다.
"렉스 극장에서의 상영이 중단되면 대본이 소각될 거야."
사실을 말하자면 마일즈 레이필드와 함께 영화보러 가는 것이 나는 약간 두려웠다. 상영중에 그가 나의 넓적다리에 손을 올려 놓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마일즈는 얻기 어려운 친구이므로 그와의 우정만은 깨고 싶지 않다. 그렇지만 할레르슨이 이야기했던 것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게다가 그 프레디의 그림도 염려되고 두 사람이 파디드 해변을 거닐었을 때의 모습도 염려되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문득 느껴졌다. (이봐 너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어느 틈에 할레르슨처럼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니야?)
"좋아." 나는 말했다.
"가기로 하지."
우리 두 사람은 버스로 시내에 나갔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지만 그 영화는 근사했다. 이제까지 본 적이 없는 듯한 색채감이 있었고 음악도 인상적이었다. 게다가 가볼의 연기가 훌륭했다. 그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그녀는 연기가 서투른 배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영화가 끝나고 알게 된 것이지만, 나와 로트렉과는 어떤 공통점도 없었다. 그렇지만 어둠 속에 앉아서 영화에 몰입하고 있을 때에 나는 나도 저런 삶을 살아보고 싶다고 강렬하게 느꼈다. 낮에는 파리의 아뜨리에에서 제작에 열중하고, 밤에는 카페나 사창가, 뮤직홀을 전전한다. 매우 근사한 생활 패턴인 듯했다. 그러나 이런 상상을 하고 있자니 또다시 산타나와의 추억에 젖어들었다. 그렇다, 이덴이 있는 데도 사창가에 드나들거나 하는 것은 당치 않은 일이 아닐까? 그런 생활을 하면서 어떻게 그녀가 있는 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영화를 보는 사이에 뇌리에는 다른 영화 장면이 스치기 시작했다. 그 때 가볼의 눈이 부실 듯한 하얀 피부가 눈에 들어왔고 그에 매료되어 그녀를 포옹하고 싶어졌다. "안녕, 앙리!"라고 그녀는 내게 소리쳤다. "나는 러시아 위병과 랑데부할 거예요......" 실크 가운이 걸쳐진 커다란 젖가슴이 풍만했다. 영화가 끝나자 왠지 모르게 울고 싶어졌다. 염려한 바와는 달리 마일즈 레이필드는 한 번도 내쪽으로 손길을 뻗쳐 오지 않았다.
에리슨 비행장행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도중 스탈린과 마렌코프의 사진이 표지에 실려 있는 <라이프>지를 한 부 샀다. 특집 기사에는 커다란 표제가 붙어 있었다. `거짓의 신이 죽음으로 위기 발발' 사진은 크레믈린의 밤이었다. 땅에는 눈이 쌓여 있고 밝은 불빛이 새어 나오는 창이 여기 저기 보인다. 어둠에 휩싸인 러시아. 에드워드 크랭크셔라는 자가 쓴 기사가 실려 있고 그에 의하면 마렌코프와 페리어는 스탈린이 죽은 지 24시간도 지나지 않았을 때 소련공산당 정치국을 제압했다고 했다. 그가 어떻게 그것을 알게 되었는지는 씌어 있지 않았다. 그가 크래믈린에 있었을 리는 없었는 데도 불구하고.
버스에 올라 자리를 잡고 기사 중의 일부를 읽어 나갔다. `이 혁명을 추진할 자들 마렌코프와 페리어가 지금 손을 잡고 나가고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최초의 공동 행동이 일으킨 폭력은 앞으로의 크레믈린의 장래를 암시하고 있는 듯하다......'
결국 소련은 더욱더 고약한 적이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 두 사람이 어떻게 실권을 장악했을까?" 나는 말했다. "정치국 사무실에 들어가 총을 겨누고 이제부터는 내가 보스다 라고 말했을까?"
"그랬을 거야 틀림없이." 마일즈는 말했다. "미시시피의 예비 선거와 같은......"
그리고서 그는 얼굴을 돌리고 눈을 감았다.
버스는 술집과 교회 앞을 천천히 지나쳐 갔다. 나는 레이몬드라고 하는 남자에 관한 기사를 읽었다. 그는 미국이 해외로 내보내는 방송 `보이스 업 아메리카'국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그 부서는 조 맥카시의 조사 대상에 올라 있었다는 것이었다. 레이몬드라고 하는 자는 공산주의자이라고 고발된 적이 아직 없는데도 메사추세츠주 캠브리지에서 버스에 몸을 던져 버렸다고 한다. 그의 아내에게 남겨진 유서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었다고 한다. `한 번 개의 목표물이 되면 시간의 탄생 이전에 행했던 모든 행위가 의심 받게 돼 버린다.'
어쨌든 이렇게 말했다.
가엾게도.
버스는 로커클럽 앞에서 멈추었다. 우리는 옷을 갈아입고 천천히 메인 게이트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마일즈는 계속 말이 없었다.
정문에 이르자 그는 말했다. "지구 끝 구멍에로의 귀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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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오후가 되어도 이덴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겨우 잠을 청하려고 했을 때 볼덴이 병사로 찾아 왔다. 빨리 옷 갈아입어, 라고 했다. 챔피온 잭 듀플리라는 블루스 가수의 노래를 들으러 모두들 클럽에 가기로 했다고 한다. 그 클럽은 웬지는 모르지만 외진 시골에 있는 것 같았다.
"케티가 그 가수를 마음에 들어 해." 그는 말했다. "그래서 그녀를 너의 여자 친구로 만들어 주고 싶어, 알겠지?"
이쪽에서 가고 싶어 하는지 가고 싶어 하지 않는지 따위는 물어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덴이 뉴올리언스에 갔다는 것만으로 내가 완전히 의기소침해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강하게 유혹했을 것이다. 저녁 무렵이 되어서 나는 바비의 머큐리를 운전하고 있었다. 바로 옆에는 캐티가 앉고, 바비는 창문쪽, 뒤쪽 의자에는 범퍼, 로드아일랜드 프레디, 그리고 댄버 세 사람이 꼭 끼어 앉았다.
시내를 벗어나자 우리들은 바비가 알고 있는 도로를 따라서 광대한 다이오 소나무 숲을 가로질러 북서쪽으로 향했다. 페인트도 칠해져 있지 않은 집들이 모여 있는 작은 마을을 그는 가리켰다. 노예시대부터 송진을 채취하기 위하여 일했던 흑인들이 지은 막사의 일부라고 했다. 소나무의 진짜 이름에 대해서 댄버가 이견을 제기했다. 그의 고향에서는 다이오 소나무가 아니라 테에다 소나무 또는 샌드 소나무라고 부르고 있다고 했다. 그러자 범퍼가 말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 없는 것 아냐? 아니, 상관 있지 라고 댄버가 응수했다. "그렇다면 좋아, 그 남북전쟁 이후 목화밭의 대부분이 폐쇄되었겠지. 공짜로 부릴 수 있는 흑인들이 없어졌을 거야. 그래서 백인들은 테에다 소나무를 심고 그것을 목재업자들에게 팔기 시작했을 거라고. 그러니까 이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 없는 문제가 아닐까? 그렇지?"
"아프리카에서는 틀림없이 마우마우 소나무라 불리워지고 있을 꺼야, 훨씬 전부터." 로드아일랜드 프레디가 말하자 모두 웃어댔다. 캐티가 이쪽을 힐끗 보았다.
"이 마우마우들이 총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지 살펴봐야 했다고 생각하지 않아? 차에 오르기 전에"
"총이 아니겠지. 살펴보아야 할 것은."
볼덴이 말했다. "살펴봐야 할 것은 아마 칼일 거야. 마우마우단 궐기했을 때인 `긴 칼의 밤'처럼......"
캐티가 소나무숲 상공을 유유히 선회하고 있는 한 마리의 매를 가리켰다. 바비가 말했다. "저걸 봐, 저것이 진정한 자유가 아닐까? 보초를 설 필요도 없고 경례할 필요도 없어. 인종 차별을 당할 일도 없어. 그게 자유라고 하는 걸 거야."
매는 재빠르게 시야에서 벗어났다. 나는 볼덴의 지시에 따라 샛길로 들어서 어둠컴컴한 숲을 통과했다. 그 때 습지대에 다다르자 갑자기 감미롭고 향긋한 냄새가 그윽하게 풍기고 마치 하얀 벽에 꽃을 장식해 놓은 듯한 꽃밭이 보였다.
"와아, 멋진데!" 캐티가 말했다. "무슨 꽃일까?"
알고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이덴이 있었다면 하고 생각했다. 그녀라면 어떠한 것이라도 알고 있었을 텐데. 이러한 향기에 향수를 느끼고 있는 거예요, 당신은? 하고 캐티가 말했다. 주위가 갑자기 어두워져 라이트를 켰다. 우리들은 여전히 샛길을 달리고 있었고 눈에 들어오는 것은 소나무와 길가를 느릿느릿 걷고 있는 몇 명의 흑인 정도였다. 바비가 앞으로 몸을 내밀고 어둠 속을 내다보았다. 그는 캐티의 손을 잡았다.
그 때였다. 음악이 들려온 것은. 처음에는 희미하게 베이스의 저음이 들려왔다. 다음에는 금관악기의 새된 소리. 어느 틈에 길에는 차가 늘어났고 앞쪽에 자동차의 빨간 미등이 보였다. 정장 차림으로 너댓 명씩 모여서 결어가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그리고 드디어 클럽의 불빛이 보였다.
"저기야." 바비 볼덴이 말했다. "속도를 줄여. 천천히 달려. 기는 듯이 몰아. 걸어가는 사람이 있으니까. 저기 하얀 기둥이 보이지? 저기를 지나자마자 오른쪽이야."
주차장 대신 들판에 차를 세우고 모두들 밖으로 나와 기지개를 폈다. 바로 <블랙호크>였다. 가늘고 긴 이층 건물로 축축한 밤공기 속에서 네온이 켜져 있었다. 열린 문에서 박력 있는 사운드가 홀러 나왔다. 주위의 어둠 속에 몇 백 명이나 되는 흑인들이 있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여기저기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흑인 여자들이 슬쩍 남자들을 잡으면 더욱 깊이 있는 소리로 이에 응한다. 무어라고 말하는지는 알아들을 수 없다.
"그녀의 손을 잡아 줘." 볼덴이 말했다. "숲 속에서 어떤 놈이 노리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내가 캐티의 손을 잡자 볼덴이 선두에 나섰다. 댄버와 범퍼, 로드 아일랜드 프레디가 우리의 뒤를 따라왔다. 주위의 시선이 우리들에게 쏠렸다. 특히 캐티와 나의 하얀 얼굴로 쏠려있는 것 같았다. 모두들 힐끗 이쪽을 보고는 곧바로 시선을 돌려 버린다. 남자나 여자나 우리와 시선을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다. 음악 소리가 더욱 커졌다. 창구에 이른 바비가 모두의 요금을 한꺼번에 지불했다. 돈을 받는 사람은 몸집이 매우 큰 흑인이었다. 까만 재킷을 입고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볼덴이 뭐라고 속삭이자 고개를 끄덕이고는 누런 빛을 띤 날씬한 흑인을 불러 세워 무언가 지시했다. 캐티의 손은 땀이 축축하게 배었다. 이것이 자기자신의 운명이라고 그녀는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흑인과 사귀기 위하여 백인 클럽에서는 배척당하고, 흑인 클럽에 와서도 사정을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당연히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되고 겨우 입장을 허락받는 것이. (당신의 손이 땀으로 흥건한 것도 무리는 아니야. 앞으로 더욱더 긴장될지도 몰라.) 라고 나는 생각했다.
담배 연기가 자욱한 커다란 방의 맨 마지막 빈 자리로 우리는 안내되었다. 나는 캐티의 왼쪽, 볼덴이 그녀의 오른쪽에 앉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멀리 벽 옆의 카운터에도 앉아 있는 남녀의 그림자가 보였다. 옆 테이블을 에워싸고 있는 것은 모두 흑인이었다. 땀에 번득이는 얼굴도 있다. 남자는 모두 슈트 차림, 여자들은 밝은 색의 드레스를 입고 약속이라도 한 듯이 머리에 꽃을 꽂고 있었다. 테이블에는 술병과 얼음상자가 널려 있었다. 몇 사람인가가 뒤돌아 나와 캐티의 얼굴을 보았지만 곧바로 저쪽을 향해 음악에 귀를 기울었다. 정면의 연주대에서는 인상이 좋고 몸집이 작은 흑인이 피아노를 치면서 노래하고 있었다. 챔피온 잭 듀플리였다.
나를 또락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어......
나는 늘 마약을 하기 때문이지.
그래도 나는 행복하다네 항상 기분이 좋으니까......
볼덴이 웃음 소리를 내며 "이런 노래는 라디오에서는 들을 수 없어. 마약중독자의 노래니까." 라고 말했다. 계속해서 그는 말했다. 저기 챔피온 잭의 피아노 치는 방법을 봐, 모두. 왼손의 엄지손가락을 다른 손가락 밑에 넣고 있을 거야, 저것은 저음을 치기 위해서야. 챔피온 잭은 고향인 나프타운에서는 전설적인 존재였어. 30년대에는 그 곳에서 몇 년이나 활약했지. 그는 루이 암스트롱도 소년 시대에 지냈던 고아원 출신이야. 불황 때에는 권투선수도 했지. 그래서 <코튼클럽>에 출연한 적도 있었어.
바비 볼덴은 여기서 힐끗 출입구쪽으로 눈길을 돌리고 무서운 표정으로 주위에 있는 흑인들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그의 얼굴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제발 어떠한 소동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래. 이 두 사람의 백인은 내 친구야. 그러는 사이에도 듀플리는 노래하고 있었다.
바라건대 나를 대신하여 어머니에게 편지를 써 줘.
내가 어떤 상태인지 가르쳐 줘......
웨이터가 와서 얼음과 술과 컵을 테이블에 놓았다. 그 때 로드 아일랜드 프레디가 출입문쪽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쪽을 보니 지금 막 세 명의 흑인 여자가 남자들의 굶주린 듯한 시선을 받으면서 이쪽으로 오고 있는 중이었다. 너나할 것 없이 머리를 높이 틀어올리고 풍만한 몸매에 마치 문신이라도 새긴 듯한 꼭맞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은 위니였다. 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오셨군요, 모두들." 그녀는 말했다. 바로 그 때 볼덴이 손으로 일을 막고 듀플리를 향하여 턱을 치켜들어 보였다. 노래가 끝날 때까지 조용히 있자고 하는 것이다. 위니는 내 옆에 앉아서 얼굴을 가까이 대어왔다. 커다란 가슴이 팔에 닿았다. 그녀는 속삭였다. "기억해요? 난 위니예요."
물론 기억하고 있지, 라고 나는 대답했다. 그녀는 내 허리에 팔을 감고 얼음과 술을 끌어당겼다.
부디 블라우스를 벗어 줘.
그것을 당신의 치마에 올려놓아
그리고 땅속으로 꺼질 듯한 느낌으로
길게 드러누워 줘.
듀플리는 만면에 웃음을 띠면서 노래하고 청중은 환성을 지르며 이에 응했다. 발을 쾅쾅 구르는 사람도 있고 테이블을 두드리는 사람도 있다. 위니도 째질듯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지만 그 가운데 두 명의 동행을 소개했다. 벨마와 씨씨. 재빠르게 로드 아일랜드 프레디가 씨씨에게 자기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볼덴은 테이블 밑으로 캐티의 손을 잡고 있었다. 범퍼는 벨마쪽으로 바싹 다가갔다. 듀플리의 노래가 끝나자 장내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일어서서 환호성을 질렀다. 작은 몸집의 듀플리는 벙글벙글 읏으면서 답례를 표시하고 내려갔다.
"나는 저 사람의 노래를 매우 좋아해요." 위니가 말했다.
"당신은 어때요?"
"응-. 멋지다고 생각해."
마치 나 이외에는 남자가 없는 것 같은 눈길로 그녀는 나를 바라보았다. 어둠컴컴한 조명 탓일까? 위니의 피부는 전보다도 휠씬 검게 보였다. 드레스가 하얗기 때문에 검은 피부가 더욱 돋보이는 것일까? 눈언저리에도 매우 검은 섀도를 발랐다. 도톰한 입술에는 윤기있는 산호색 립스틱이 칠해져 있었다. 그녀는 뉴욕의 일을 이것 저것 물어 왔다. 듀플리와 그의 악단들은 이미 무대에서 사라졌고 T셔츠 차림의 건강해 보이는 남자들이 다음 연주를 준비하고 있다.
나는 될 수 있는 한 그녀의 얼굴과 가슴에 눈길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당신 흑인 여자와 경험이 없군요?"라고 묻기라도 한다면 부끄럽기 때문이다. 느린 템포의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둠의 왕국'에서 들은 적이 있는 노래도 몇 곡 정도 있었다. 로웰플루삼. 로이 브라운. 좁은 댄스 플로어는 순식간에 사람들로 꽉 찼다. 로드 아일랜드 프레디는 씨씨의 팔을 잡고 플로어로 나갔고 범퍼도 벨마의 손을 잡았다. 댄버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을 때 겁먹은 듯한 눈을 가진 야윈 여자를 데리고 와 춤추고 있는 무리들 속으로 합류하는 것이 보였다. 위니가 말했다. "저어, 우리도 춤춰요."
(이거 어찌 된 일이냐? 이 여자를 내게 선물한다는 말인가?) 라고 생각하면서 바비를 바라보자 그는 말했다.
"뭘 꾸물대고 있어? 빨리 춤추러 나가지 않고......"
위니는 내 손을 잡고 홀쪽으로 끌고 갔다. 웬지 쑥스러워 백인들만 있는 곳에 흑인이 돌어왔을 때의 기분이 바로 이런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주위 사람들은 나와 위니를 아니 우리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 틀림 없었다. 사람들은 지금 내가 그녀를 유혹하는 것이 아닌가, 정중한 태도를 보이는 건가 하고 평가하려 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정중하게 위니의 손을 잡았다. 주위의 누구에게라도 예의 바른 남자, 그녀와 친구들에게도 초대 받은 한 사람의 손님으로 여겨질 수 있도록.
그렇지만 플로어는 비집고 들어갈 틈도 없이 꽉 차 있었다. 위니가 나를 끌어당기며 말했다. "대장부라면 그렇게 뻣뻣하게 굴지 말아요." 그리고 나서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춤추기 시작했다. 그 순간 그녀의 곱슬머리에서 나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풍만한 가슴이 나의 가슴을 누르고 보드라운 아랫배가 피부 사이로 스쳤다.
이를 어쩌나. 갑자기 딘 마틴과 젤리 루이스의 일을 생각했다. 로버트 헨리와 존 포스터 달러스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러나 효과는 제로. 그것도 토요일 오후에 익히 있음직한 자연스러운 뜨거움이 아니다. 버스에 흔들리거나 영화에서 영화배우의 촉촉한 우유빛 피부를 보며 느끼는 뜨거움 또한 아니다. 그렇게 미미한 정도가 아니었다. 그것은 있는 힘을 다하여 힘에 넘치고 용감무쌍했다. 위니도 그것을 느낀 것 같았다. 나의 손을 꼭 잡고 낮게 신음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호모가 아닌 것만을 틀림 없군요. 잘 알았어요."
"아니...... 나는......"
"됐어요, 쉬잇!" 위니는 점점 하복부를 밀착시켜 왔다. 욕망의 열기가 익을 대로 익은 육체로부터 솟아오르는 듯하였다. 지금 나의 상태를 테이블에 있는 동료들에게는 알리고 싶지 않았다. 나는 테이블에 줄곧 앉아 있었지만 벌써 동료들에게 들켜버린 듯한 느낌도 들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마치 피노키오의 코처럼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자아, 밖으로 나가요." 라고 위니가 말했다. "이 상태로는 걸을 수가 없어." 나는 속삭였다.
몸을 슬며시 멀리하고 위니는 말했다. "괜찮아요.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으니까. 자, 주위를 둘러봐요. 이쪽을 보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요."
열기로 가득한 칙칙한 어둠 속에서는 바로 옆자리의 커플 정도밖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밖으로, 어디?"
"렌트카가 있어요, 밖에."
나와 마찬가지로 그녀 또한 욕망으로 불타오르고 있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녀에게 그 정도로 뜨거운 욕망을 느꼈던 백인은 아마도 내가 맨 처음이었을 것이다. 내게 있어서 그녀가 그러하듯이 그녀에게 있어서 나는 신선하고 색다른 위험한 존재임에 틀림 없다. 우리 둘은 홀에서 빠져 나왔다. 그 때 조명이 다시 밝아지고 댄스 플로어에서는 사람들이 흩어져 나왔다. 스피커에서 저음의 웅웅 울리는 소리가 흘러 나왔다. 뜨거움이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나중에." 나는 속삭였다. 위니는 그 순간 실망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대답했다. "응...... 좋아요...... 나중에."
나는 소변이 몹시 마려웠다. 곧 돌아올께 하고 출입구 쪽으로 걸어나갔다. 스피커 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업세터즈' 여러분 등장해 주세요."
문득 뒤돌아보니 로드 아일랜드 프레디가 서 있었다.
"길을 잃어버린 건 아닌가 하고 생각했어." 하며 빙긋이 웃었다.
나는 그의 뒤를 따라서 출입구를 나가 외벽을 따라 도로 뒤쪽으로 걸어갔다. 천장에는 40와트의 어둠침침한 전구가 매달려 있었다. 메인룸의 환호성이 거기까지 들려왔다. 좀더 걸어가자 챔피온 잭 듀플리가 서 있었다. 선글라스를 낀 커다란 몸집의 흑인과 얘기하고 있었다.
"나는 돈이 필요해 그뿐이야." 라고 하는 커다란 몸집의 흑인이 말했다.
"그러니까 한 스테이지만 더 해 줘. 그러면 지불할 테니까."
"거짓말!" 커다란 몸집의 흑인은 말하고는 얼굴을 돌렸다. "거짓말 말아."
프레디와 나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한쪽 벽을 따라 얕은 홈이 파여 있었다.
나와 프레디는 그곳을 향해 오줌을 누었다.
"불쌍하군, 그 남자 매일 빵값도 부족한가 봐." 프레디는 그렇게 말하면서 손으로 말은 권련을 물었다. 불을 붙이고 깊이 빨아들이고 나서 권련을 내게 주었다.
"마리화나인데 해 볼래?"
"아니. 난 됐어. 그보다도 위니는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왜 자네들이 상대하지 않는 거지? 뭔가 이상해. 자네들......"
"그런 걱정할 틈이 있으면 그녀의 젖가슴이나 주물러 주라구"
챔피온 듀플리가 들어와 홈 앞에 서서 아무 말 없이 소변을 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무언가 이상해."
"실은 그녀의 남편은 항공모함 미드웨이를 타고 있어." 로드 아일랜드 프레디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우리 모두는 그녀 남편을 알고 있지. 남편을 알고 있는 우리가 그녀를 품에 안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그녀는 남자를 그리워하고 있어. 당연하잖아. 그 때문이야. 넌 그자의 얼굴을 본 적이 없잖아. 그렇지, 챔피언?" 그는 듀플리에게 말했다.
"이 담배, 피워 볼래?" 챔피온 듀플리는 바지 지퍼를 올리고 나서 마리화나로 손을 뻗쳤다. "그 돼지 같은 녀석이 말하는 거 들었겠지? 당신들." 그는 말했다. 한 모금 크게 빨아들이고나서 담배를 손에 쥐고 그는 천천히 연기를 뿜어냈다. "내가 다음 스테이지를 마칠 때까지 그놈이 아직 이 도시에 남아 있는다면 그건 기적이야." 이쪽을 보고, "당신은 이런 곳에서 무얼 하고 있는 거지?" 하고 물었다.
"당신 노래를 들으러 왔지."
"입에 발린 말은 그만둬 신사 양반. 나는 알고 있다구. 특별히 관심있는 것은 검고 귀여운 계집애라는 것을."
로드아일랜드 프레디가 후후 웃었다. "그래도 혹시 듣는 귀가 있어서 말해 두지만, 신사 양반. 그녀는 남자들을 무서운 죽음의 계곡으로 몰아내는 원흉이라구."
그리고는 마리화나를 한 모금 빨아들이고 기분 좋은 듯이 노래하기 시작했다.
으음 자아, 당신은 어째서 같이 있어 주었는가
나를 포로로 만들어 놓고 `남편이 돌아 왔어요, 라고는......
세 사람은 소리내어 웃고 홀로 되돌아 왔다. 장내는 매우 소란스러워져 있었다. 여자들은 모두 일어서서 찢어지는 소리로 외치고 남자들은 머리를 흔들면서 웃고 있는 여자들을 앉히려고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리고 스테이지 위에는 난생 처음 보는 익살스러운 모습의 흑인이 있었다. 몸집은 그리 크지 않았다. 걸작인 것은 그의 머리였다. 마치 여자들 헤어스타일처럼 기름을 잔뜩 발라 뻗뻗하게 삐죽삐죽 솟아올라 있었다. 게다가 의상은 빨간 구두에 푸르스름한 재킷을 입고 있었다. 뒤에서는 트럼펫과 색소폰이 연주되고 그는 거기에 맞춰 선 채로 피아노를 치면서 눈동자를 굴리고 있었다. 가사는 전혀 들어본 적이 없었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이윽고 고막이 찢어질 듯한 클라이맥스가 지나자 그는 객석쪽으로 휙 뒤돌아서 두 다리를 벌리고 앉아 드럼을 두 번 연주하고는 일어서서 인사를 했다. 객석은 우레와 같은 갈채로 여기 저기에서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는 마이크를 잡고 눈물이 글썸글썽한 눈으로 객석을 둘러보고 있었다고 생각했을 때 위니 옆에 앉아 있는 내게서 눈길을 멈췄다. 위니는 전신이 온통 땀투성이가 되어 겨드랑이에서부터 등 언저리까지 땀 얼룩이 까맣게 번져 있었다.
"음. 괜찮아요? 미스 데카틴." 소리지르며 그는 성큼성큼 다가와 이쪽을 쳐다보고 나서 다른 객석을 둘러보았다. 장내는 커다란 웃음소리로 소용돌이쳤다. 다음 순간 힐끗 뒤돌아보자 그는 눈썹을 찌푸리면서 어둠 속을 바라보고 다음 곡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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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니의 방은 이스트 댄서 스트리트의 미스 하파스보딩 하우스 1층 우측에 있었다. 우리는 작은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당신은 어떻게 이런 일을 생각했어요" 라고 위니가 말했다.
"음, 그저" 라고 할뿐 대답을 얼버무렸다.
"이런 걸 해 주는 흑인은 한 명도 없었어요."
"정말?"
"남자들은 모두 자기가 기분이 좋아지는 것만 생각하니까요."
"당신은 정말 아름다워" 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위니도 잘 알고 있었다. 아름다운 여자들은 모두 자기 자신이 그것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그걸 해 주었다고 하는 소문이 퍼진다면 당신 집 앞에 흑인 여자들이 행렬을 이룰텐데 라고 그녀가 말했다.
당신 집 앞에도 남자들이 줄을 서겠지 라고 나는 말했다.
음. 이 근처의 남자들은 모두 내 남편을 알고 있어요. 나는 여기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요, 그래서 당신을 본 순간, 아 이 사람이면 좋겠어, 그를 꼭 붙잡아야지라고 생각했다고 그녀는 말했다.
나 이전에 백인 남자와 자 본 적이 있느냐고 나는 물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그건. 내게 추파를 던지는 지긋지긋한 백인은 있어요. 많이 있지요. 하지만 설사 100달러를 준다고 해도 그런 사람과 자는 것은 사절이에요.
검은 가슴을 내게 밀착시키면서 그녀는 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오른손은 그 전부터 나를 어루만지고 있다. 백인이라고 해서 정말로 하얀 것은 아니잖아요? 오히려 핑크빛에 가까워요. 그렇죠? 당신은 어때요? 흑인 여자와 자 본 적이 있어요?
으음.
그래 어쩐지 라고 말하고 그녀는 못된 장난기가 어린 듯이 웃어댔다. 당신 해군이었군요.
음 위니 라고 나는 대답했다. 세상에서 우리 해군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은 전부가 전부가 진짜가 아니야.
그녀는 몸을 일으켜 가슴을 나의 얼굴 위에 들이대면서 말했다.
음, 다시 한번, 해 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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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에는 하루종일 수치심으로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순한 죄의식과는 달랐다. 매우 오래 된 수치심, 충치처럼 쿡쿡 쑤시며 아픈 생리적인 감각. 어떤 의미에서 위니와 섹스를 한 것은 가톨릭 교리에서 말하는 형이하학적인 자선행위로도 보여질 것이다. 그녀는 자기와 남편을 모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는 도시에 갇혀서 오랫동안 남편 없이 혼자 외로움에 못이겨 왔다. 가엾게도 젊은 육체를 날마다 죽여왔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내 자신에게 들려 주었다. 그 거짓말을 나는 그 전부터 계속했을 것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나는 아직 위니가 젊었을 때에 그것도 섹스를 그 무엇보다도 필요로 하는 바로 그 시점에서 기쁨을 주었던 것이다. 물론 그녀의 남편은 알지 못하고, 겨울이 되어 위니가 파란 눈의 아기를 낳지 않는 한, 영원히 알려질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역시 나는 부끄러웠다. 다른 남자, 아니 같은 해군의 아내와 잔 것이 부끄러웠던 것은 아니다. 상대가 흑인 여자이고 그 결과 거의 몇 시간 동안 나 자신이 할레르슨이 말하는 `흑인을 좋아하는 사람'이 된 것이 부끄러운 것도 아니었다. 부끄러움의 근원은 다른 데에 있었다. 나는 나 자신의 나약함에 져서 그때 그때 되어가는 형편에 떠맡겨져 산타나를 배반해 버렸다는 사실에 있었다.
이덴이 멀리 가버리고 언제 돌아올지도 알리고 있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다 해도 나 자신이 행한 일을 이덴에게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바로 그것이 부끄러웠다. 게다가 그 때 나는 콘돔도 사용하지 않았다. 만일 위니로부터 성병이라도 옮겨졌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그녀의 남편이 어딘가에서 옮겨온 것을 그대로 옮겨 받았다고 한다면......? 나는 그것을 이덴에게 옮기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게다가 만일 위니가 임신이라도 한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지금부터 9개월 후에 그녀의 남편이 병원에 갔을 때 간호사가 갓난아이를 안아 올려 보여준다. 그 갓난아이가 위니와 위니의 남편이 아닌 나의 눈과 피부색을 지니고 있다면 미소는 순식간에 분노로 변할 것이다. 그런데 만일 그 아이가 정말로 나의 아이라면 내게도 당연히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닌가? 아들이든 딸이든...... 나의 혈육을 나누어 가진 아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위니에게 가서 그 아이의 이름은 내가 지어 준다든지 양육비를 보내 준다든지 따위는 말할 수 없다. 그런 일을 한다면 그녀의 남편은 날 조심조심 토막내어 버릴 것이다. 그렇지만 만일 위니가 정말로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나의 아이라면 나는 지금부터 평생 그 아이는 지금쯤 어떻게 하고 있을지, 멕시코 만에 연한 흑인 거주지인 이 작은 도시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생각하며 계속하여 괴로워할 것임에 틀림없다. 이 일도 이덴에게 이야기할 수는 없다. 다른 그 누구에게라도. 그리고 이 수치스러움은 나의 생애를 에워싸고 영향을 미칠 것이다.
월요일이 되어 여느 때처럼 근무에 들어가자 동요는 조금씩 진정되어 갔다. 할레르슨은 언제나처럼 내게 물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를 벽에 내동댕이쳤던 그 날 밤 이후 그러한 것이다. 그와 스쳐지나 갈 때는 언제나 이봐 하고 소리쳤지만 그는 내가 눈에 보이지 않는 듯이 잠자코 지나쳐 갔다. 마치 내가 흑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때때로 그와 보즈웰은 나와 마일즈 레이필드를 힐끗힐끗 바라보며 무엇인가 서로 속닥거리면서 낄낄 웃는 경우가 있었다. 언젠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느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그는 말했다. "알고 있겠지, 할레르슨이 어떤 놈인지. 그 녀석은 약간 돈 놈이야. 그렇게 마음에 두지 말아."
"마음에 두고 있지는 않아" 나는 대답했다. "그래도 그 녀석 쪽에서 마음에 두고 있어. 나와 마일즈가 호모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 녀석은"
"바보야, 그 녀석은. 아이젠하워조차도 호모라고 생각하고 있어. 걱정할수록 손해라구."
그 날 점심 때, 샐과 막스를 만나러 격납고에 가자 그 곳에 멜카도가 있었다. 항상 보기좋은 비행복 차림으로 한 손에는 커피잔을 들고 파일럿의 이름과 비행 시각이 표시되어 있는 커다란 칠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나는 소리쳤다.
"어이 데블린!"
"멕시코 여행은 어땠습니까?"
"실은 고국에는 돌아가지 않았다네. 마지막 순간에 뉴욕행 비행기가 있다고 들었거든. 그래서 그
걸 타버렸지. 그런데 어떻게 되었을 거라고 생각하나! 필라델피아에 도착하게 되었지, 필라델피아
에 간 멕시코인은 아마도 내가 처음이었을 거야. 그 곳에서 갈아타는 비행기를 세 시간이나 기다
리다가 결국은 포기하고 버스로 뉴욕까지 갔어......"
"뉴욕은 어떻던가요?"
"그 곳은 예전에 아버지를 따라서 갔던 적이 있었지. 열두 살 때였지. 그러니까 완전한 초행은 아니었던 거지. 아버지는 그 당시 멕시코 정부의 관료였거든. 어쨌든 위대한 도시야, 그 곳은. 아무튼 살아 움직이고 있었어. 에너지가 넘치고 있었지. 그런데 이번에 가보고 조금은 나빠졌다고 생각했어. 거리는 더러워졌고 혼잡스럽고 게다가 물가도 오르지 않았겠어. 아주 놀랐어!"하고 빙긋이 웃으며, "자네라면 멕시코로 가는 쪽이 좋을 거야." 하고 말했다.
속이 확 뒤집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이덴을 뉴욕으로 데리고 갔던 것이다. 뉴욕에 가는 것이 이덴의 가장 큰 바람이었다. 바로 그 뉴욕으로 멜카도는 그녀를 데리고 갔던 것이다. 이제까지의 수치스러움은 분노로 뒤바뀌어 버렸다. 묻자, 그녀를 데리고 갔었던 것이냐고 물어 보자.
"뉴욕에는 혼자서......?"
칠판에 쓰여진 비행 시각과 착륙 장소. 기체 번호를 바라보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애쓰며 나는 말했다.
"그래, 유감스럽더군. 해군 비행기에 여자를 동행하려고 했던 경험이 있나? 그건 소련인을 동행하는 편이 훨씬 쉬운 일이라구. 하지만 뉴욕에는 여자들이 득실거리더군. 그 가운데 미인도 있었지. 사실은." 그는 웃었다. "대단히 뚱뚱한 몸집의 여자도 많았지만 말이야. 그런데 뉴욕에서는 그런 여자들은 무엇을 먹고 있지? 뚱뚱한 것도 예삿일은 아닌데 말이야.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상한 습관이 눈에 띄더군. 모두 겁을 찍찍 씹고 있는 거였어."
"언젠가 뉴욕에서 만나십시다." 나는 말했다. "껌을 씹지 않는 여자를 소개시켜 줄 테니까요."
"뚱뚱하지 않은 여자를 부탁해도 되겠나?" 그는 말했다. 이 말에 둘이 함께 웃어 버렸다.
식당을 향해 걸으면서 나는 먹구름처럼 밀려오는 불안으로 눈앞이 아찔해지는 듯했다. 기지에 있는 모든 건물 옆에는 프리체트 대령의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빨강, 노랑, 자주. 스프링쿨러의 물이 잔디밭에 뿌려지면서 반짝반짝 빛나고, 잔디는 이 세상의 봄을 맞이하는 듯이 파릇파릇하다.
"어이, 여자 살인자!"
볼덴이 다가왔다. 둘은 나란히 식당으로 향했다.
"토요일 밤에 자네가 무엇을 했는지 알고 있지, 위니와 즐겼지?"
순간, 섬칫했다. 그렇지만 볼덴이 장난기 어린 웃음을 띠고 있는 것을 보고 나도 여유있는 듯이 웃어 보였다.
내 자신이 갑자기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했던 것은, 그렇게 나의 어떠한 능력이 처음으로 인정 받은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은 그때였다. 체격마저도 갑자기 커진 듯한 느낌이었다. 겸손한 기분을 나타내 보이려고 노력하면서 나는 말했다. "위니는 멋진 여자더군요."
볼덴은 나의 얼굴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연민의 정표였을지도 모른다.
오후가 되어 아버지께 편지를 썼다. 해군 생활에 관한 모든 것은 좋다는 거짓말을 써내려갔다. 이덴 산타나, 래드 캐논, 마일즈 레이필드, 프레디 헤러드, 위니, <블랙호크 클럽> <다트 바> 딕시 세이퍼, `어둠의 왕국', 프리체트 대령의 죽은 아내, 멜카도, 샐의 할아버지, 목탄-이러한 것에 관해서는 전혀 쓰지 않았다. 그 대신에 이쪽의 기후는 좋고, 음식은 맛있으며 해안은 아름답다고 썼다. 베케트가 찍어 준 사진을 한 장 동봉했다. 눈내리는 날에 야자수 밑에 내가 서 있는 사진이었다. 동생들에게 편지를 보내라고 얘기해 달라는 것도 썼다. 그리고 편지 봉투에 풀칠을 하고 있을 때 책상의 전화가 울렸다. 수화기를 집어들고 여보세요라고 했다.
"나예요." 이덴의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지금 돌아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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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덴 산타나가 고백한 이야기 1
당신은 아이를 가졌던 적이 없으니까 틀림없이 알지 못할 거예요. 그렇지만 내게는 딸이 두 명 있어요. 하나는 열다섯 살, 또 하나는 열 살인데 무척이나 귀엽고 사랑스러운 애들이죠. 그러나 이렇게 표현하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설명이 되지 않아요. 이것은 누구나가 어떤 아이를 이야기할 때와도 똑같으니까. 강아지나 카나리아 따위를 이야기 할 때도 마찬가지이고. 아이를 가진다고 하는 것은 이 삭막한 세상에서 경험하는 그 어떠한 것과도 견줄 수 없는 경험이에요. 그것은 아이를 가져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셜명하여도 이해하기 힘들지도 몰라요.
내 딸들은 나에게서, 내 몸에서 태어났지요. 나는 두 딸을 몸 속에서 길러 피와 고통 속에서 낳았고 사랑으로 길렀으며, 처음에는 걷는 법을, 그리고 말하는 법을 몸에 익히도록 가르치고 지켜보아왔죠. 그리고 먹는 것 이외의 여러 가지 것을 달라고 조르기 시작하는 모습을, 알 수 있겠어요? 왜 연락도 하지 않고 그렇게 갑작스레 출발할 기분이 되었는지 당신은 어쩌면 이해 못할지도 몰라요. 아니, 틀림없이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남자는 없을지도 몰라요.
나의 딸들은 내가 당신보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인생의 반 이상에 걸쳐서 나의 일부분이었어요, 적어도 큰아이 쪽은. 열 여섯이 되고나서 내가 작은 딸에게 이끌려 방에서 방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한밤중에 놀란 소리로 울어대지 않았던 적은 놀라서 한 순간도 없었어요. 정말로 한 순간도. 지구의 내가 뉴올리언스가 아닌 여기에 있는 이유 중 한 가지는 그런 것일런지도 몰라요. 딸들에 대한 애착. 그것에 수반되는 의무에서 조금이나마 자유롭고 싶고 그러한 기분이 많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과 제임스 로빈슨, 그와의 일, 당신은 알고 싶어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이야기해 두는 편이 좋으리라 생각되는군요. 왜냐하면, 당신이 나와 이야기할 때 당신은 제임스의 분신이기도 한 여자와 이야기하고 있는 것과 다름 없으니까요. 그래요, 제임스는 나의 일부예요. 그것을 피할 수는 없어요. 그는 여기에 있어요. 나의 인생 속에. 그리고 나의 딸들 못지 않은 중요한 존재로서.
그를 만났던 것은 내가 열다섯이었을 1938년 여룸이었죠. 그 사람은 눈부시게 빛나는 햇살을 받으면서 파칸디 스트리트를 걷고 있었어요. 하얀 정장에 하얀 구두를 신은 모습으로. 신장은 6피트 이상 그 모습을 보았을 때, 나는 아침 늪지대에서 솟아 올라 뉴올리언스에 올라 온 신을 목격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죠. 그 신이 나를 향해 똑바로 걸어 와서,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옆을 지나쳐 갔어요. 걷는 방법도 독특하게. 이 지상을 빈틈 없이 보고 와서 혹시라도 알지 못하는 것은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에 차 있고 뒤꿈치를 차며 가볍고 탄력있게 걸었어요. 나를 보자 멈추어 서고, 그리고 나서 퍼팩 마리클 지구의 에스플라나드 방향으로 걸어가더군요. 그리고 모퉁이에서 멈추어 서서 뒤를 돌아다 보는 거였어요. 그 순간 나의 혼은 그에게 빨려 들어가 버렸어요.
그가 어떠한 남자인지 전혀 알지 못했어요. 그를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을 거예요. 출신지도 알 수 있는 남자였으니까. 그러는 동안 나는 임신하고 그는 바로 그 하얀 정장 차림으로 나와 결혼했죠. 우리는 가정을 가졌어요. 식을 올리고나서 3개월이 지나도 아버지는 인정해 주지 않았어요. 아버지는 처음부터 그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으셨으니까요. 나는 아직 아이와 다름없는데 로빈슨은 어른. 아버지에게는 내게는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고 있었던 걸 거예요, 분명히.
자신이 어떠한 일을 하고 있는지 로빈슨은 이야기해 주지 않았고, 그것은 여자가 참견할 일이 아니라고 했어요. 그래도 집에 꽤 많은 돈을 가져다 주었어요. 집안 실내장식이라든가 요리 따위는 친정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그에게는 가족이 없었고, 그때는 아직 불황인 때라 너나할 것 없이 부자조차도 곤경에 처해 있던 시기였으니까요. 그는 여러 가지 물건을 자져다 주었어요. 꽃다발, 멋진 모자, 아름다운 드레스. 한 번은 핑크색 실크 양산까지 가져다 준 적이 있었죠. 그렇지만 그의 일상사를 말하자면, 밤늦게 집을 나가 아침 무렵에 돌아와요. 그리고는 한낮까지 잠을 잤어요. 그래서 언젠가 나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어요. 나도 밤에는 당신과 나란히 자고 싶어요. 당신이 내게 원하고 있는 것을 내게도 해 줘요. 나도 당신과 함께 여러 가지 일을 하며 즐겁게 지내고 싶어요. 내게도 억제할 수 없는 충동이 있고, 아내로서의 욕구가 있어요. 이렇게 말하면 그는 그저 미소만 지으며 이렇게 말하는 거였어요. `그래, 내 사랑(Yes, my dear)'. 단지 그 말뿐.
그런 어느 날 밤. 나는 그의 뒤를 미행하기로 했죠. 첫아이를 가진 배가 불룩한 무거운 몸을 이끌면서 의지할 곳 없다는 비참한 생각에 잠겨 그를 미행했던 가예요. 이 사람이 어딘가에서 여자들에게 에워싸여 있는 것은 아닌가? 내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딴 살림을 차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이 가장 두려웠어요.
그러자 그는 렘파트 스트리트에 있는 어느 클럽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어요! 입구에는 남자와 여자들이 무리지어 있었는데 들어가는 그에게 모두들 인사를 하더군요. 어쩐지 수상쩍은 장소, 여자가 몸을 파는 장소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죠. 재다가 그는 그곳에서 얼굴이 알려진 사람이었어요. 그러한 것을 느낀 순간 8월이었는 데도 불구하고 소름이 쫙 끼치고 한기가 느껴졌다. 그가 여자를 상대로 돈을 벌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마음 속에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그때 클럽으로 들어가는 그를 보며 나의 마음 속에는 절실한 의혹이 싹텄어요. 그는 어떤 병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나를 안아주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공포심도 마음 속에 생겨 났구요. 그렇다면 그의 병이 이미 옮겨진 것은 아닐까? 이제 아이를 낳으면 나도 저 클럽에서 일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돈을 버는 도구로 전락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따위의 두려움이었지요.
그래도, 그것을 알고 있어도, 그의 행선지를 알고 있어도 그에게 따질 수는 없었어요. 그것은 그의 비밀이고 나의 비밀이었으니까요. 내가 그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그에게는 결국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그리고나서 뱃속의 아이의 탄생을 기다리는 동안 그와는 한 번도 동침을 하지 않았어요. 새로운 생명의 숨결을 나는 느끼고 있었으므로. 뱃 속에서 마구 움직이는 것도 느낄 수 있었고, 심장의 고동도 느낄 수 있었어요. 그렇게 아이는 자기 자신의 세계를 원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 새로운 생명이야말로 내가 그때 제임스를 대신하여 포옹하고 있었던 것이었죠. 그렇게 태어난 아기를 우리는 `노라'라고 이름지었어요. 뉴올리언스 루이지애나(New 0rleans Louigiana)의 첫글자를 따서 지은 거였어요. 노라 로빈슨. 이렇게 예쁜 아이는 본 적이 없다고 그는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 그는 넘치는 애정으로 노라를 안아 주곤 했거든요. 그때는 면과 공단으로 된 옷을 몇 벌 가지고 왔어요. 그렇지만 밤이 되어도 나를 안아 주려고는 하지 않았어요. 그 뒤 몇 개월이 지나도록. 산후에는 충분한 휴양이 좋다고 하면서 말예요. 충분한 기간을 두지 않고 그것을 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그 때 나는 화가 나서 당신은 그 렘파트 스트리트 클럽에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지요 라고 말해 버리고 말았어요. 그때가 처음이었지요. 그 사람에게 얻어 맞은 것은.
그는 아기를 내려놓고 내 드레스를 찢고나서 가죽끈으로 때리기 시작했어요. 나는 바닥에서 벌벌 기며 고통에 못이겨 흐느껴 울고 있었어요. 아기도 울어대고 있었구요. 그리고 그는 묵묵히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가 버렸어요. 그날 밤 집에 돌아오자 그는 내 부르튼 상처를 손으로 어루만지며 내가 통증에 못이겨 울기 시작하자 비로소 만족한 듯이 나를 안아 주는 거예요. 그리고는 곧 끝내 버리더군요. 나는 만족하지 못한 채 고통에 흐느끼고 있었어요. 나의 마음 속에서는 여러 가지 감정이 엇갈렸지만 그것을 폭발시킬 수 없었고 내 자신을 잃어버린 듯이 희미한 희망에 매달리면서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면서 죽을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그는 고통을 호소하는 내게 이렇게 말했어요. 그래 내 사랑. 단지 그 말뿐. 그래 내 사랑.
나도 어렴풋이 깨닫기 시작했어요. 이 사람과 살고 있는 한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러한 굴욕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것을. 그렇지만 그것은 그냥 나의 가슴속에 묻어 놓았어요. 그리고나서 나를 안아줄 때에는 반드시 내게 가해 행위를 하제 된 것은. 우선 나를 구타하고 상체를 입히고 난 뒤 안아 주는 거예요. 당연히 나는 침대에서의 생활에 혐오감을 품게 되었죠. 서로 사랑한다는 의식은 이제 그만, 아내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것인가 하고 생각하게 되었죠. 그때 영화를 보면서 남녀가 키스하면 머리 속에 떠오르게 되었어요. "그래, 내 사랑" 이라는 말이. 그리고 무의식중에 기다리게 되었죠. 구타가 시작되는 것을. 소설을 읽을 때 남녀가 자는 장면에 이르면 몸이 떨리기 시작하면서 그 여자의 무서운 운명을 상상하고 그리고는 머리속에 그 말이 울려 퍼지는 거였어요. 그래 내 사랑, 그래 내 사랑. 그래 내 사랑.
나는 나의 모든 것을 노라에게 쏟아 부었어요. 노라에게 의지하고, 노라를 품에 안고. 필요 이상으로 노라에게 젖을 물렸지요. 그리고 제임스 로빈슨은, 그 미친 듯한 눈을 가진 훌쩍 큰 키에 하얀 정장차림을 한 그는 언제나 변함없이 렘파트 스트리트에 출입하고 있었지요.
그러는 동안 어머니가 나의 슬픔을 눈치채신 것 같았어요. 우리 사이가 좋지 않고 틈이 벌어져 바람이 일고 있다는 것을. 그렇지 않아도 어머니는 나의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짐작하고 있었으니까. 노라가 내게서 태어났듯이 나는 어머니에게서 태어났으니까. 나는 어머니의 또 다른 하나의 심장이었으니까. 어머니는 오후가 되면 제임스 로빈슨이 침대에서 일어났을 때를 맞추어서 집을 찾아오게 되었지요. 그리고 나의 얼굴을 지그시 보고나서 노라를 안아 주었어요. 그리고 또 나의 얼굴을 보고 시트률 갈아 주었어요. 또 나의 얼굴을 보고나서 마당으로 나가시는 거예요. 그곳에서 또 나의 얼굴을 보고, 이제는 얼굴만 바라보는 일에 지쳤다는 듯이 말하고 싶은 것을 더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나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어요. 너는 이제 성인이다. 그러니까, 진짜 남자다운 남자를 찾아야 한다.
그 말이 맞다는 것은 알고 있었어요. 나는 이제 여성이라는 것을. 내부에 유치한 구석이 깃들어 있을지라도. 내게는 진짜 남자를 찾을 권리가 있었어요. 그런데 큰 문제가 한 가지 있었어요. 나는 이미 신 앞에서 평생 제임스 로빈슨을 남편으로 맞이하겠다는 서약을 했다는 사실이죠. 그 서약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는 점. 그리고 또 한 가지 나는 두려웠어요. 만일 새로운 남자를 찾은 시점에서 그 사람도 제임스 로빈슨과 다름 없는 사람일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요.
당시, 나는 때때로 눈에 띄는 남자들을 바라보면서 상상하곤 했죠. 땀에 흠뻑 젖어 도로에서 공사하고 있는 남자들, 얼음을 운반하는 남자들, 소나무의 겨우살이를 위하며 가지치기를 하고 있는 남자들......, 그런 남자들을 바라보면서 저 사람과 나란히 누우면 어떤 기분일까, 저 사람과 장난하고 교제하는 기분은 어떨까? 하고. 그렇지만 몽상은 곧 끝나 버리고 말죠. 하얀 정장 차림에 신처럼 걸어오는 제임스 로빈슨의 모습이 머리에 떠올라 버리니까요. 순식간에 나 자신의 행동에 자신이 없어져 나는 집안에 틀어박히게 되었어요. 하루종일 울면서 지내는 짓도 하지 않았어요. 비탄에 빠지지도 않았어요. 어머니도 그것은 알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나서 전쟁이 시작되었고 제임스 로빈슨은 육군으로 징발되었지요. 그때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나는 집을 비우고 노라를 데리고 친정으로 옮겼어요. 요리와 청소는 어머니가 해 주었기 때문에 나는 나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어요. 그래서 책을 읽기 시작할 수 있었지요. 파간디 스트리트의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다가 탐독하곤 했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도 있었지만 그다지 좋지는 않았어요. 레트 버틀러가 어떤 남자인지 나는 짐작할 수 있었거든요. 레트 버틀러가 렘파트 스트리트의 클럽에 드나드는 것을 내 눈으로 직집 몇 번이나 보았으니까요. 톨스토이라고 하는 러시아인이 쓴 <안나 카레리나>도 읽었어요. 그 작품이 휠씬 좋더군요. 톨스토이는 인간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어요. 시도 읽었죠. 자연에 관한 책도 읽었구요. 그리고 모든 수목과 식물, 작은 새와 곤충, 동물의 이름을 기억할 수 있었어요. 그러한 책을 읽고 노라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쳐 줄 작정이었지만, 실은 내 자신을 가르치고 있었던 거예요. 아버지는 그때 하킨즈 조선소에서 어선을 만들고 있었고, 그의 인생에서 비로소 많은 돈을 벌고 있었어요. 그래서 아버지는 차를 샀고, 내게 운전을 가르쳐 주셨어요. 자동차 할부금이 모두 끝나자 이번에는 아처파라야강 근처에 집을 한 칸 사셨어요. 오래되고 작은 집이었지만 꽤 넓었어요. 왜냐하면 여동생과 남동생들은 이제 성인으로 득립했으니까. 나와 어머니는 그 아담한 집을 우리들의 취향으로 개조했어요. 마당에는 나무를 심고, 창문을 바꾸고, 집 안팎을 하얀 색으로 칠하고, 어머니가 프렌치 쿼터 고시장에서 사 오셨던 그림을 걸었죠. 나무로 된 넓은 바닥은 표면을 깨끗하게 깍아내고 검은 페인트를 칠하고나서 니스를 바르고, 윤기나는 검정 색으로 바뀔 때까지 몇 번씩이나 닦아냈어요. 그 집에 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기뻤는지. 이마에 땀이 맺히도륵 일하고, 노라가 걸어다니는 것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속에는 뿌듯함과 풍만함으로 가득했어요. 나는 행복했죠. 제임스는 이제 필요 없다. 그대로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나는 바라고 있었어요.
노라가 말을 배우게 된 것도 그 강기슭의 작은 집에서였다. 당시 구식 축음기가 있었기 때문에 노라는 노래도 부르고 완전히 말을 배우기 이전에 가사도 알게 되었어요. 아버지는 노라를 귀여워해 주셨어요. 나 이상으로 노라를 사랑해 주셨던 것 같아요. 주말이 되면 아버지는 노라를 데리고 낚시하러 가셨어요. 노라에게도 낚싯대를 주시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양동이에 가득하게 메기를 잡아 돌아오셨죠. 때때로 여동생이 자기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방에는 모두 함께 식사를 하면서 옛 노래를 불렀죠. 그러면 노라도 축음기에서 들었던 노래를 불렀어요. 나는 행복했어요. 남자 친구도 필요 없고, 대부분의 시간을 집안에 틀어박혀 지냈지만 행복했어요.
어쨌든 제임스로부터 소식이 오리라고 생각했지만 그 사람의 일 따위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어요. 아니 그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로부터 소식이 들려오는 것을, 그가 어느 날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무엇보다도 겁내고 있었어요. 그에게서는 편지 한 통 오지 않았고, 전화 한 통도 걸려오지 않았어요. 나의 가슴 속에는 혹시나 하는 희망이 생겼어요. 어느날 육군이 찾아와서,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럴듯한 표정으로 남편은 전사당했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 나는 그것을 내내 바라고 있었어요. 그 사람이 죽기를 원했던 거예요. 나는 매일 <아이템> 지와 <타임 피케윤> 지를 펼티고 전사자 명단을 살펴 보았어요. 그의 이름이 있으면 좋겠다, 그러면 나는 자유로워진다고 하는 몹쓸 소원을 하면서. 실제로 만일 그렇게 된다면, 나는 그 성스러운 서약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고 나의 인생을 다시 한번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게 되니까, 이번에야말로 인생다운 인생을.
그렇지만, 전쟁은 계속되고 제임스 로빈슨에 관한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어요. 그러는 사이에 노라는 학교에 들어가게 되었죠. 나는 더 이상 남자의 일 따위를 생각할 여유는 없어졌어요. 그러던 어느 날, 전쟁은 끝났어요. 뉴올리언스에서는 대단한 축하 행사가 열렸죠. 나도 아버지와 함께 차를 타고 가 보았어요. 아버지는 말하셨죠. "자아 이제 이것으로 불황이 정말로 끝났는지 어떤지 알겠지." 라고. 그런 아버지를 어머니는 기묘한 눈길로 바라보셨어요. 파본 스트리트에는 마구 취한 육군 병대와 해병들로 넘치고, 악대가 요란하게 행진하고, 젊은 여자들이 춤추며 돌아다니고, 여기저기에서 공공연하게 섹스를 하고 있는 남녀가 있었어요. 거리의 번잡스러움으로 말한다면 사상 최대의 말디 그라(사육제 마지막의 참회 화요일)라는 느낌이었어요. 우리도 모두 하나가 되어 환호성을 지르고, 큰 소리로 외치고서 집으로 돌아왔죠. 그날 밤 침대에 눕자, 프렌치 쿼터에서 보았던 많은 젊은 연인들의 모습이 계속해서 떠올랐어요. 그런 기분이라면 나도 그 젊은 사람들과 어울려 교제할 수 있었을 테니까, 차속이나 호텔이나 여염집 뒷마당에서.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자니 그 젊은 사람들의 단단한 육체와 마구 취해 풀린 눈이 뇌리에 퍼득퍼득 스치고 지나가 잠을 이룰 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침대에서 일어나 마당으로 나갔어요. 그때는 8월이었기 때문에 아직 벌레도 날아다녔고 무더웠죠. 문득 보니 마당 앞의 하얀 의자에 아버지가 앉아서 강쪽을 가만히 바라보고 계시더군요. 아버지도 잠을 이룰 수가 없있던 거예요. 내일이 되면 또 일을 찾아야겠구나 라고 아버지는 말하셨어요. 이제는 어선 따위는 필요하지 않을 테니까 라고. 정말 그대로였어요. 전쟁은 끝났어도 나와 아버지처럼 쓸쓸한 사람은 없었을 거예요.
그리고나서 몇 주일 후 가을 바람이 불어와 제법 시원해졌을 때쯤 마침 정원에 나와 있자니 차가 멈추는 소리가 나더군요. 그쪽을 보니 그가 있었어요. 제임스 로빈슨이. 육군 제복을 입고 한쪽 다리를 질질 끌며 걸어 왔어요. 나는 일어섰어요. 그는 나를 보았어요. 나는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죠. 그 사람에게 뛰어가거나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꼼짝도 하지 않고. 그랬더니 그쪽에서 먼저 다가와 양손을 내밀더군요. 한눈에 알 수 있었지만 그는 꽤 늙어 있었고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어요. 비로소 나는 그를 안았어요. 그 사람도 꼭 안겨 왔구요. 어머니가 나와서 우리를 보았어요.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아버지 차로 노라를 학교로 데리고 가셨어요.
그는 흐느껴 울면서 이야기했어요. 이제까지의 일은 모두 용서해 달라, 당신을 그렇게 대한 내가 나쁜 놈이다. 편지 한 통 쓰지 않았던 일을 용서해라. 전쟁에 나가기 전 나는 당신에게 너무나 가혹했다. 미안하다, 그렇지만 나는 변했다. 전쟁이 나를 변하게 했다. 아슬아슬하게 죽음을 면했다고 그는 말했어요. 울면서.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죽음의 고비를 넘으며, 인생에는 내가 알지 못했던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더군. 하고 그는 계속했어요. 당신과 처음부터 새롭게 살아 보리라 생각하고 돌아왔어. 나는 사흘 전에 돌아왔지. 그런데 집에 가 보니, 당신 모습이 보이지 않았어. 그래서 당신의 행방을 수소문하며 찾아다녔지. 그리고는 겨우 이렇게 당신을 찾게 된 거야. 이젠 괜찮아. 모두 잘 될꺼야. 정말로 잘 될 거야. 나는 결심했어. 이제 두 번 다시 당신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을 거야.
어머니가 노라를 데리고 돌아왔어요. 노라와 제임스 로빈슨, 아버지와 딸, 그들은 처음에 서로 남남인 것처럼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죠. 노라가 울기 시작하자 그도 울며 두 사람은 꼭 부둥켜 안았어요. 강쪽으로 둘이서 걸어가 오랫동안 서로 이야기했어요. 나는 생각했어요. 어쩌면 정말일지도 모른다, 이번에야말로 모든 일이 잘 될지도 모른다고 말예요. 그가 노라를 데리고 되돌아온 것을 보고 어머니가 노라에게 말했어요. 노라, 할머니와 함께 다른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러 가자. 아빠와 엄마 둘만의 시간을 주자꾸나.
그는 마치 정신나간 사람처럼 매달렸어요. 미안해, 미안해, 하고 울면서. 내 다리는 보지 말아 줘. 만지지 말아. 이 다리는 잊어 라고 말하면서. 함께 나란히 눕자 여러 군데의 지명을 이야기하기 시작했어요. 그 지명들은 모두 태평양에 있는 들은 적도 없는 섬이었지만. 그러는 틈틈이 계속해서 내가 허락하기롤 원했어요. 그래서 결국 나는 그가 원하는 것을 들어 주고, 부부로서의 맹세를 다시 새롭게 했던 거예요. 그렇게 그때까지 모든 것이 꼭꼭 감추어져 있던 그 침실에서.
이 주일 후 우리는 그가 현금으로 산 시골 집으로 이사했어요. 그 돈은 태평양에서 종군하던 중 동료들끼리의 노름에서 벌었다고 그는 말했어요. 아마 그랬을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이 사람도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지요. 이제는 번화한 곳에서는 살고 싶지 않아. 도시의 생활은 지긋지긋해. 렘파트 스트리트의 그 클럽도 이제는 보고 싶지 않아 라고 그는 말했어요. 자기는 정부에서도 돈을 받고 있으니까 그것으로 페인트와 가구를 사자고요.
그해 겨울, 그는 새로운 집을 살기 편하게 하기 위하여 열심히 일했어요. 집안을 청소하고, 파손된 곳을 수리하고, 나무들믈 잘라 늪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을 만들기도 했지요. 여기라면 안전하다, 여기라면 모두 행복하게 지낼 수 있다고 말하면서. 그리고 나의 친정에도 그다지 가고 싶어하지 않았어요. 모든 사람에게 응시당하는 것이 고통스럽다고 말했어요. 나의 친지들도 그다지 만다고 싶지 않다고. 지금 생각하면 그때 진상을 알아차렸어야 했어요. 그렇지만 나는 그때 그를 믿고 싶었어요. 그 사람은 변했다.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믿고 싶었던 거예요. 전쟁으로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이 되었다. 착한 사람이 되었다고 그렇게 믿고 싶었던 거예요.
제시를 임신한 것은 그리고 얼마 지나서였어요. 뱃속에서 자꾸 움직이는 것이 내게 느껴졌죠. 그러자 노라가 나의 배를 만져보고 신기한 듯이 눈을 빛내면서 아직 보이지도 않는 동생을 위하여 자장가를 불러 주었지요. 그즈음 제임스의 행동이 다시금 이상해지기 시작했어요. 우두커니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아졌지요. 왜 그러냐고 물어도 대답도 하지 않고 쏘아 보기만 할 뿐. 마치 그렇게 묻는 것이 죄라도 되는 듯이. 머지 않아 그는 필요로 하는 최소한의 일밖에, 전보문처럼 짤막한 말 이외에는 하지 않게 되었어요. 그리고 길 저쪽을 생각에 잠겨 바라보고 있었어요. 강쪽에서 보트가 다가오기라도 하면 당황하여 집안으로 뛰어들어가거나 나무 뒤로 숨기도 했죠. 한번은 태어날 제시를 위하여 옷을 사려고 퓨이 롱 다리를 차로 건넜던 적이 있었어요. 그때 왠지 계속해서 백미러를 들여다보더군요. 다리를 건너자 바로 오른쪽으로 꺾어져 알제 지구로 들어가 샛길을 빙빙 돌아 좁은 길에 다다르자 그곳에서 비로소 차를 세우고 휴-하고 숨을 내쉬는 거였어요. 그동안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도대체 왜 그러냐고 물으면 단 한 마디, 여자가 참견할 문제가 아니야. 너무나 긴장한 모습이어서 조금이나마 흥분을 가라앉혀 주려고 손을 잡았지만 나의 손을 매정하게 뿌리쳐 버렸어요.
제시를 낳을 때는 진통이 너무 심했어요. 진통이 시작되고나서 37시간이나 걸렸으니까. 몸의 안쪽이 찢어져 나가고, 모공이라는 모공에서는 피가 뿜어져 나오는 듯한 느낌이었어요 그것은. 몸이 두 개로 갈라지고 몸이 안쪽에서부터 한 바퀴 돌아 뒤집어져 버리는 듯한 고통이었어요. 정신을 차려보니 그가 침대 옆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더군요. 그의 눈에는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기묘한 감정이 서려 있었어요. 나는 말했죠. 이제 딸이 한 명 또 생겼어요. 당신만 좋다면 나의 할머니의 이름을 따서 제시하고 부르고 싶어요. 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 창문쪽으로 눈길을 돌려 버리더군요. 그것을 보고 아, 이 사람은 또 집에서 멀어지는구나 하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죠. 바로 그 순간 그 병실에서.
집에 돌아오자 그 사람이 거들어 주더군요. 나는 아직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 부자유스러웠고 통증에 지쳐 있었거든요. 그리고서 사흘 동안 꼼짝하지 않고 나는 잠을 잤어요. 출혈이 아직 완전히 멈추지 않아서 시트가 더러워지자 그는 몹시 언짢다는 듯이 그 시트를 벗겨 태워 버리더군요. 그리고 혼자서 뉴올리언스에 나가 돌아온 것은 밤 늦은 시간이었어요. 그리고는 나를 냉랭한 눈초리로 바라보더군요. 아마 피 때문일지도 몰라. 그 때문에 전쟁으로 잃어버린 다리를 생각하게 되었을지도 몰라 하고 나는 생각했죠. 그래서 그렇게 말했더니 갑자기 내 얼굴을 후려 치는 거였어요. 그 자리에 쓰러질 정도로 세게. 아, 또 시작되었구나 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울지 않았어요. 만일 울게 되면 그를 더욱 더 화나게 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요. 게다가 그렇지 않아도 산후의 통증이 남아 있기도 했고. 그러한 나의 고통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계속해서 때렸어요. 이 사람에게서 도망쳐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기 시작했지요.
그 사람도 내 생각을 읽은 것 같았어요. 아침이 되자 이렇게 말했으니까요. 도망치면 그냥 내버려 두지 않겠어. 나는 말했죠. 내 자유다, 내 맘대로 가겠다구요. 그러자 그는 갑자기 옆에 있던 나무 토막을 들더니 두들겨 패는 거였어요. 자 여기 보이지요? 이 턱 밑에. 이것이 그때 흉터예요. 나는 피를 흘리면서 무릎을 꿇었어요. 그것을 보더니 그는 더욱 흥분하여 내게 성행위를 하더군오. 얼굴에서는 피가 흐르고 아이를 낳은 출혈이 아직 멈추지도 않은 내게. 이 사람과는 정말로 끝장이다 라고 생각했어요. 자신의 욕구 충족이 끝나자 그는 나를 내버려두고 나가 버렸어요. 차를 타고 어딘가로 가버린 거예요. 나와 갓난아기를 내버려둔 채. 노라는 어머니에게 맡겨 놓았죠. 무언가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지만 전화도 없었고 차도 없었어요. 더군다나 턱뼈는 부서져 있었구요. 그래서 이를 닦을 수도 소금물로 그의 정액을 씻어낼 수도 없었어요. 피가 아직 멈추지 않았는데 아기에게 젖을 물리지 않으면 안 되었죠. 그러는 동안 젖과 피가 뒤범벅되어 울고 싶어졌을 때 차의 엔진 소리가 들려오더니 집 앞에 멈추는 것 같더군요. 고맙게도 그것은 경찰차었어요.
경관이 두 명이 노크했을 때 살려 줘 라고 필사적으로 소리쳤어요. 여기에 갇혀 있다고. 두 사람은 문을 부수어 밀고 뛰어 들어왔어요. 그리고 구타당하고 내동댕이쳐진 채 피투성이가 된 나를 발견했죠. 나이가 많은 경관이 어떻게 이렇듯 심한 짓을 하고 신음하듯이 말했던 것을 아직 기억하고 있어요. 두 사람은 제시를 안고 있는 나를 재빠르게 경찰차로 옮기고 병원으로 급히 달려 갔어요. 가는 도중 경관들은 제임스 로빈슨을 찾고 있었다고 가르쳐 주더군요.
의사들은 나의 턱뼈를 접합하고나서 부모님께 연락해 주었어요. 모두들 병원으로 달려왔죠. 노라는 나를 보자마자 엉엉거리며 울더군요. 상처 투성이로 핏빛으로 부어오른 나의 얼굴이 무서워 보였기 때문이었을 거예요. 그때였어요, 비로소 아버지에게 진상을 듣게 된 것은. 실은 제임스 로빈슨에게는 전쟁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었대요. 그는 강도단의 일원으로 육군에 입대한 직후에 범행에 가담하여 도망칠 때 경관에게 잡혔다더군요. 장소는 텍사스이고 그는 25년형을 받고 교도소에 수감되었대요. 형이 무서웠던 것은 범행 직후의 결투에서 경관 두 명이 부상당하고 한 명이 사살되었기 때문이었죠. 그가 다리를 부상당한 것은 그 때문이었어요. 그리고 전쟁중에는 계속해서 교도소에서 복역하고 있었대요. 태평양에서 조국을 위하여 싸웠다고 한 이야기는 새빨간 거짓말이었죠.
그리고는 전쟁이 끝나자마자 탈옥하여 나를 은신처 삼아 뉴올리언스로 돌아왔던 거예요. 물론 경찰도 방관하고 있지는 않았죠. 여기에서 강도, 저기에서 강도 이런 식으로 그가 도피하면서 저질렀던 사건을 쫓아다니면서 뉴올리언스까지 당도했다고 해요. 마치 아프리카의 사냥꾼이 사자의 냄새를 쫓아 추적하듯이 그를 쫓아왔을 거예요. 나는 울고 또 울고 눈물이 마를 때까지 계속 울었어요. 물론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들을 위해서, 노라와 제시를 위하여. 그 아이들에게는 그 사람의 피가 흐르고 있었으니까. 그의 흉악함, 조급함.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해대는 제멋대로인 성격.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고 그것을 즐기는 괴벽. 그러한 것들을 모두 이어받았을 것이기 때문에.
이제부터 평생 그 아이들의 핏속에는 나와 제임스 로빈슨과의 싸움이 계속될 것이라는 것을 나는 직감했어요. 동시에 나 자신이 매우 어리석었다고도 생각했지요. 그런 사람이 말하는 것에 귀기울이고, 그것을 믿고, 그토록 지독한 체험을 했으면서 그와 또 잤다는 사실 때문에. 부부로서의 맹세를 새롭게 했기 때문에.
경찰은 그를 계속하여 추적했고, 결국 1년 후에 앤밀드에서 붙잡았어요. 그때 나는 아처파라야 강 기슭의 집으로 돌아와 있었지요. 이번에야말로 절절히 근신하면서. 교회에 매일 나가고 부디 저에게 힘을 주세요. 나쁜 일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을 주세요 라고 지도 드렸어요. 딸들에게 흐르고 있는 나쁜 피를 꼼짝 못하게 할 정도로 오래 사는 것이 나의 바람이었어요. 딸들이 훌륭하게 성장하고 제각기 살아나가는 길을 찾게 된다면 그때 비로소 나는 해방된다, 해방되어 천국으로 간다. 그렇게 그것이야말로 앞으로의 나의 인생이다 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는 동안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늙으셨죠. 딸들은 순조롭게 자라 주었죠. 피아노를 잘 쳤을 뿐만 아니라, 스페인어와 프랑스어까지 할 수 있게 되었어요. 두 딸은 그것을 가톨릭 학교에서 배웠어요. 그리고 작년 사랑하는 어머니마저 이 세상을 떠나셨어요. 그때 문득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내 차례는 언제일까? 라고.
작년 11월의 어느 날, 나는 아처파라야 강 기슭의 그 낡은 집에 혼자 있었어요. 웬지 모르게 강을 지나가는 보트가 보고 싶어져서 해안까지 내려가 작은 선착장에 앉아 강을 바라보고 있었지요. 가슴 속에는 까닭 모를 공허함과 충만함이 함께 자리잡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어요. 그리고 집에 돌아와보니 테이블에 제임스가 앉아 있었어요. 테이블에는 커다란 45구경 권총이 놓여 있더군요. 그는 과도로 사과 껍질을 벗기고 있었어요. 내가 들어 온 것을 알아차리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어요.
곧 뒤돌아서 도망치려고 생각했어요. 그곳에서 그로부터 도망치자고 생각했어요. 그러자 그는 권총을 잡고 이렇게 말하더군요. 도망치면 쏘아 버릴테다. 딸들이 오면 그년들도 쏘겠다고. 나는 이제 아무래도 좋다. 죽는 것도 두렵지 않다. 언제든지 당신과 아이들과 함께 죽여 주지, 라고.
나는 가만히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문에 자물쇠를 채워 라고 하자 그렇게 했어요. 그리고 그는 그 자리에서 마룻바닥 위에서 덮쳐 왔어요. 조금도 울지 않자 욕설을 퍼부으며 나를 때리고, 내가 돌처럼 움직이지도 않고 울부짖지도 않으면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고 때리며 내동댕이쳤어요. 그리고는 즉흥적인 방법으로 나를 농락했어요. 그리고나더니 이렇게 말하더군요. 나는 탈옥했어. 또 올거야. 언제고 적당한 때에 와서 너를 안아 주겠어. 라고. 그리고는 나갔어요. 아이들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일 주일 후 한밤중, 딸들이 이미 잠들었을 때, 그는 또다시 와서 그 커다란 권총을 침대 옆 테이블에 놓았어요. 이번에는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나는 울고 있었어요. 그때만큼 내 자신을 증오했던 적은 없어요. 어쨌든 그가 강제로 못하게 하려고 웃어 보이기도 했지만 효과는 없었어요. 그는 또 가죽띠로 나틀 때리고 내가 울고 있는 것을 알고는 미친 듯이 기뻐하는 거였어요. 그리고는 강제로 더 더 하며 말을 듣게 했어요. 다 하고나서 내게 바닥을 기게 하고, 이마를 바닥에 강제로 밀어붙이고, 거침없이 농락한 다음 옷을 갈아입는 거였어요.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쥐어짜 나는 말했죠. 두 번 다시는 여기에 오지 말아. 그렇지 않으면 경찰을 부르겠어 라고. 그는 빙그레 웃고는 커다란 권총을 벨트에 꽂으면서 음, 그래 라고. 말하고 나가더군요.
그날 밤, 나는 아이들의 옷과 짐을 정리하여 아버지의 낡은 차로 동생 집으로 도망가 그곳에 숨었어요. 2주일 동안 나는 햇빛을 보지 않았어요. 아이들은 사정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듯이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 이유를 계속해서 알고 싶어 했지요. 나는 집에 남기고 온 것들이 걱정되었지만 동생의 남편은 좋은 사람으로 권총을 몸에 지니고 아처파라야 강 기슭의 집에 가서 남겨 놓았던 짐을 가져다 주었어요. 부모님과 생활할 때 추억이 깃들어 있는 소중한 물건들을. 그리고는 자기 작업장에 보관해 주었어요. 나는 동생 집에 숨어 있으면서도 창밖에 사람의 그림자가 비치거나 하면 깜짝 놀라고 마룻바닥이 삐걱거리면 부들부들 떨고, 밤에 나뭇가지가 차양에 스쳐 소리를 낼 때면 이젠 죽었구나 하는 마음까지 들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또다시 임신을 했다는 사질을 알게 되었어요.
이번에는 내 자신이 해내야 할 일을 나는 잘 알고 있었어요. 더 이상 제임스의 더러운 피를 이어 받는 아이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할 수는 없었죠. 여동생이 애틀랜타의 실력 있는 의사를 소개해 주었어요. 크리스마스 전에 나는 그곳에 가서 중절수술을 받고 난관을 결착했죠, 무서웠어요. 그래도 끝나고 보니, 한시름 놓을 수 있었어요.
나는 이제 나의 자궁에서 태어날 생명에 대해서는 두 번 다시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으니까요. 그때였어요. 당신을 처음으로 만났던 것은. 그날 애틀랜타에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애틀랜타에서 새로운 인생을 찾기 위하여 가는 버스 안에서. 왜냐하면, 나는 집으로 돌아갈 작정이 아니었으니까. 제임스 로빈슨이 그 근처를 배회하고 있는 이상, 그곳으로는 돌아갈 수 없었어요. 딸들은 여동생이 소재해 준 가톨릭 기숙 학교에 보내기로 했어요. 매주 토요일 나 대신 여동생이 딸들을 만나러 가 주기로 했지요. 나는 딸들에게 설명해 주었어요. 앞으로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권총을 가진 제임스 로빈슨이 배회하고 있는 한 너희들을 위험에 처하게 할 수는 없다고. 물론 경찰은 그의 행방을 추적하고 있었죠. 남동생도 몇 사람에게 이야기하여 독자적으로 수색해 주었구요. 그리고 나는 여기에, 펜서콜라에서 혼자 살고 있는 거예요. 그에게서 몸을 숨기고 다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기 위하여.
나는 그것이 어떠한 것인지도 몰랐어요. 그렇게 산다고 하는 의미를. 그렇지만 내 자신이 여러 가지 일에 지쳐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어요. 나는 공포 이외의 감정을 가질 수 없다는 현실에 지쳐 있었어요. 여자이면서 여자가 아닌 사실에 지쳐 있었어요. 은둔자처럼 생활하는 사실에 지쳐 있었어요. 오로지 혼자라는 사실에 지쳐 있었구요. 그렇게 많은 것들을 나는 앓고 있었던 거예요.
그때, 당신을 알게 된 거예요. 당신은 다정다감 했죠. 당신 같은 사람이야말로 내가 처음으로 알았어야 할 사람이에요. 하얀 정장의 신으로 착각할 정도의 남자가 아니라, 당신과 같은 젊은 사람이 그 운명의 날의 오후에 그 길의 모퉁이를 걸어갔다면 좋았을 거예요. 당신은 매우 다정하게 대해 줘요. 나도 당신에게 다정하게 해 주고 싶어요.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당신에게 알려 주고 싶어요. 그것만을 앞으로 평생 생각하고 싶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갑자기 출발하지 않으면 안되었을 때, 당신에게 꼭 알리고 싶었어요. 그것은 미리 계획했던 행동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실은 딸들의 소식이 궁금해서 여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지난 이틀 동안 내게 연락하려고 여기저기 수소문했다고 하더군요. 노라가 학교에서 말을 타다가 떨어져 머리뼈가 부러졌다고요. 그순간 심장이 멎는 것 같았어요. 당장이라도 달려가지 않으면 순식간에 노라는 죽어 버리고 내가 모르는 사이에 묻혀 버릴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가지 않을 수 없었죠.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어요. 피가 나를 부르고 있었던 거예요.
나를 보았을 때 노라가 기뻐하는 모습이란 뭐라고 표현할 수가 없어요. 위험했지만 이제 괜찮습니다 라고 의사 선생님이 말해 주더군요. 나는 노라에게 열심히 설명해 주었어요. 내가 지금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이제 조금만 참고 견디면 된다고 말하며 모든 것을 설명해 주었어요. 가능한 한 말을 골라가며, 그 아이의 혈관에 흐르고 있는 제임스 로빈슨의 피에 대하여 쓸데 없는 공포를 갖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노라는 알아듣는 것 같았어요. 무척이나 영리한 아이거든요, 그 아이는. 나도 엄마를 위하여 기도할께요. 학교 수녀님들에게도 기도해 달라고 하겠어요 라고까지 말해 주더군요. 노라가 침대에서 일어날 수 있을 때까지 나는 병원에 있었고 남은 시간을 어린 제시와 함께 보냈어요. 물론 제시는 아직 아무 것도 몰라요. 생각해 보면, 그 어린 몸으로 엄마의 품에서 떨어져 있는 그 아이가 가장 상처를 입을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엔젠가는 이해해 줄 거예요, 틀림없이. 이해시키고 싶어요. 당신도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구요. 이렇게 하고 있는 지금도 제임스 로빈슨은 어딘가 어둠 속을 기웃거리고 있을 거예요. 하지만 내게는 지금 당신이 있어요. 그리고 딸들도 있고. 제발 부탁예요, 언제까지나 다정한 사람으로 내 곁에 머물러줘요.
제4부
자신이 오랫동안 흑인여자와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니
어떤 느낌이 들죠?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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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노트로부터의 발췌
그녀가 돌아왔다. 나는 행복하다.
좋아하는 영화 배우-마론 브란도, 보가트, 캐그니, 에스티어. 하지만 제임스 딘은 얼른 떠오르지 않는다. 여자들이 법석을 떠는 것은 그가 입은 빨간색 재킷에 넋을 잃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의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이런 의문이 일어난다. -만약 마론 브란도가 없었다면 제임스 딘 녀석은 어떤 배우가 되어 있었을까? 그는 마론의 동작을 이것저것 똑같이 흉내내고 있으며 마론이 가끔 그렇게 하듯이 저음으로 머뭇거리며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얼굴 생김새가 마론과는 아주 딴판이어서 아무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확실하게 단언할 수 있는데, 만약 제임스 딘이 브란도와 같은 영화에 출연한다면 브란도에게 여지없이 당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 브란도가 보가트라든가 캐그니 등 불황기를 살아남은 배우들과 공연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 마론도 산 채로 그들의 밥이 될지도 모른다). 아무튼 최고는 뭐니뭐니해도 에드워즈 G. 로빈슨이다. <키 라르고>에서 그는 욕조 안에 앉아서 태풍의 습격을 기다리고 있는 그는 참으로 대단한 박력가였으니까.
영화 감독이란 어떤 일을 하는 걸까? 프로듀서는 또 뭘까? 누구에게 물어 봐야하지?
그래, 나는 행복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당황하고 있기도 하다. 그녀에게는 나 같은 것보다 훨씬 많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들이 있을 것이다. 내가 그녀에게 나의 출생과 성장에 관해서 말한다면 겨우 몇 줄 정도로 얘기가 끝나 버릴 것이다. 그녀의 인생에는 여러 가지 요소가 꽉 차 있다. 뉴올리언스, 아이들, 권총, 잔인한 남편. 그것도 그것은 그녀의 인생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나도 그녀에게 무언가를 가르쳐 주고 싶다. 그녀에게 여러 가지 얘기를 들려 주고 내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 그녀를 변화시켜 주고 싶다. 그러나 나는 도대체 무엇을 알고 있단 말인가? 도저히 그녀와 같은 여성에게 영향을 미칠 정도의 지식은 없다. 나는 언제나 그녀보다 한 걸음 뒤져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사실에 대해 어떻게 할 수도 없다. 딱 한 가지, 나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넓은 세계에 대해서 더 많이 배우는 일이다. 그녀는 거의 신문을 보지 않지만, 나는 꾸준히 읽고 있다. 그래서 만약 그녀가 알고 싶어 한다면 세계의 정세를 알려줄 수는 있다. 그렇게 되면 그녀도 아이들과 남편과 뉴올리언스의 일들을 덜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펜서콜라에서 이사를 가려는 생각도 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나와 헤어지려는 생각도 안 하게 될지도 모른다.
얼마 전 어느 날 밤 래드 캐논이 불쌍하다고 느낀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 자의 혹독하고 박정함을 미워하는 것이 당연지사인데 그런데...... 아마 그가 문을 나가려고 했을 때 트림을 한 것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두 번째로 그에게 당했을 때 그녀는 젖어있었다고 한다. 자기 입으로 그렇게 말했으니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쾌감을 느꼈던 것이다. 아마 그럴 것이다. 어젯밤 그에게 당하고 있을 때의 그녀 얼굴을, 증오와 쾌감을 동시에 느끼고 있는 얼굴로 머리에 그려봤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집트의 파르크 국왕이 국외로 추방당할 것 같다고 한다. 수영복을 입고 어느 바닷가를 거닐고 있는 그의 사진이 신문에 났다. 고귀한 발이 모래 범벅이 되면 안 된다고 슬리퍼를 신고 걷고 있었다. 볼수록 꼴불견이다. 이런 기사를 읽으면 또 생각에 잠겨 버린다. 이런 쓰레기 같은 인간들을 통치자의 지위에서 쫓아 버리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저 뚱뚱한 두꺼비 같은 놈의 자리에는 어떤 인간이 앉게 될까?
또 한 가지 신문을 보면서 신기하게 생각되는 것은 폴리휘리오 루비로사 또는 베이비 피그나타리와 같은 작자들은 어떻게 돈을 벌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들은 언제나 `플레이 보이'라고 불리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놀아나는 데에 쓰는 돈을 어떻게 해서 벌고 있는지 신문은 결코 설명해 주지 않는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그들이 성실하게 일해서 벌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이덴은 드디어 코텍스와 템포의 차이를 가르쳐 주었다.
래드 캐논은 무슨 일에 마음의 상처를 입고 있는 것 같다. 매우 심하게. 그건 틀림 없다. (그래도 그 자가 싫은 놈임에는 변함이 없지만 말이다.)
내가 미래에 대한 얘기를 할 때 이덴이 열심이 듣지 않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녀 인생에 관련이 있는 모든 것들이 뉴올리언스에 있으므로. 두 딸, 여동생 부부, 집, 과거. 그리고 지금도 그 바닷가를 방황하고 있는 이상한 남편. 그런데 어떻게 나와 함께 미지의 미래로 떠날 마음이 생기겠는가? 하지만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그녀없이 살아간단 말인가?
마릴린 몬로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와 자고 싶은 욕구는 있다. 만약 그녀가 보통 목소리로 말한다고 약속해 준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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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바닷가는 한산하다. 테라스의 문이 바닷바람 때문에 달그닥달그닥 소리를 낸다. 침대 머릿장에 있는 전화기에 시선이 쏠린다. 이 강철과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기구가 있으면 수백 명에 이르는 살아있는 인간의 목소리를 들을 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는 하고 싶지 않다. TV 스위치를 누를 마음이 내키지 않는 것도, 호텔바에 내려갈 생각이 없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내 귀에는 지금 이덴 산타나의 목소리가 들리고 있다.
나는 지금 이 세계와 여자 그리고 사랑의 의미를 이해하고저 애쓰고 있던 그 젊은이로 되돌아가고 있다. 굴욕, 자비, 이별, 화해의 감각을 지금 다시 맛보고 있다. 그때 나는 함께 걷는 것을 배우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또다시 그 따스한 멕시코 만 언덕의 봄 한가운데 있다. 그 시절 나와 이덴은 언제나 비밀 게임을 한창 즐기고 있었다. 낮에는 물론 에리슨 비행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용돈을 벌기 위해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샐과 막스, 마일즈 레이필드, 그리고 바비 볼덴 등 그밖의 친구들과 만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눅눅한 계절에 그들과 무슨 얘기를 주고 받았으며 어떤 일을 하고 있었는지는 통 기억이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게임에 정신이 빠져 있었던 것이다. 이덴이 뉴올리언스에서 돌아온 후에는 매일 밤 나는 그녀의 트레일러에 다녔다. 때로는 둘이서 저녁식사를 하고 나서 사랑하다가 잠시 눈을 붙이고 나서 기지로 돌아간 적도 있었다.
어느 날 밤 로커클럽 앞에 차를 세운 이덴은 유리창 너머로 신비한 눈으로 나를 봤다. 내 얼굴을 뚫어지게 지켜봤다. 언제나 그랬듯이 조수석에 타려고 하자 그녀가 그쪽으로 자리를 옮겨서 당신이 운전하세요, 라고 말했다. 그 날은 레인코트를 입고 검은 스타킹에 빨간 구두를 신고 있었다.
좋아, 하고 대답하면서 나는 다소 놀라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운전하는 것을 매우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차를 출발시켰다. 그녀가 내 얼굴을 쳐다보고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길에서 시선을 떼는 것이 무서워서 돌아볼 수가 없었다.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지요, 베이비? 잠시 후 그녀가 말했다.
나는 어물어물 무슨 말을 했다.
빨리 대답해요, 라고 이덴은 졸랐다. 나에 대해서 진실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말해봐요.
갑자기 그런 질문을 받자 얼른 마땅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머리속은 금새 노래 가사와 영화의 대화 단편이 가득 찼지만 말의 범위가 점점 좁혀져 갔다.
사랑해요, 하고 나는 드디어 말했다. 당신을 사랑해.
나는 차 머리를 서쪽으로 돌려서 모빌 만 쪽으로 펼쳐진 교회를 향해 몰고 있었다. 이덴은 어슴푸레한 황혼에 둘러싸인 전원으로 말없이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나 말예요, 그전부터 당신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었어요, 하고 이덴은 말했다.
나는 기다렸다.
이덴은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만약 당신에게 얘기하면 당신은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어요.
별안간 불안이 가슴을 엄습했다. 그녀는 어떤 다른 남자가 있다는 것을 고백하려는 것일까? 예를 들면 멜카도에 대해서, 혹은 그녀 남편에 관한 무서운 소식 같은 것?
이대로 철길을 따라 달려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 길은 2차선이었으며 기찻길을 따라 뻗어 있었다. 옆 숲 속에는 자그마한 집과 헛간, 주유소 등이 즐비했다. 나뭇잎들은 녹음이 우거지고 내가 몰고 있는 차는 그 밑을 천천히 달려 갔다. 지나치는 차는 한 대도 없다. 잠시 후 길은 내리막으로 접어 들었으며 주위가 한층 더 어두워졌다. 이덴은 살짝 내 손을 잡았다.
저어, 속도를 늦춰요.
내리막길을 지나자 사거리가 나왔다. 교차하고 있는 길은 철도 고가로 밑을 지나 북쪽으로 이어지고 있다.
`여기가 좋겠어요' 하고 이덴은 말했다. `길 옆에 차를 대도록 해요.' 나는 시키는 대로 했다. 잠시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 그녀가 어떻게 할 작정인지 알 수 없다. 아까부터 말이 없었고 나를 만지려고도 하지 않았다. 머리를 손가락으로 살짝 빗어 주어도 아무 반응 없이 그냥 있다. 뭔가 엉뚱한 짓을 하려고 정신을 집중시키고 있는 듯이 그녀는 몸을 긴장시키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몸을 일으켰다. 그것은 마치 내 귀에는 들리지 않는 무언가를 들으려고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보고 있어요. 하고 이덴이 말했다. 밖에 나가서 보고 있어줘요.
빨간 하이힐을 손에 들고 그녀는 뚝을 올라갔다. 다 올라가자 그녀는 구두를 신었다. 나를 보고는 몸짓으로 철길 옆에 숨어 있으라고 명한다. 그때 그녀가 먼저 들은 소리를 내 귀도 들었다. 아득히 멀리서 울리는 기적 소리. 차와 어린이들 혹은 동물들에게 철길에서 물러서라고 경고하는 소리. 처음에는 서글프게 들리던 그 소리는 차츰 오만함을 더하여 가까워질수록 위압적인 소리로 변했다. 드디어 기차 모습도 보이기 시작했다. 맨 앞 기관차 라이트가 어둠을 가르고 있다. 이제 반 마일, 4분의 1마일, 수백 야드, 창백한 레일 위를 회전하는 차량 소리가 들린다. 외치듯이, 재촉하듯이 기적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음 순간 기관차의 라이트를 정면으로 받으면서 이덴은 코트를 훌렁 벗어 던졌다. - 알몸이었다. 검은 스타킹과 빨간 구두 이외에는 아무 것도 걸치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두 손을 허리에 대고 체중을 오른쪽 다리에 의지하고 서 있었다.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렸다. 가슴 언저리가 뚜렷하게 보였다. 기관차에 탄 기관사들도 봤을 것이다. 갑자기 기적 소리가 멈추고 열차의 속도도 떨어진 것 같다. 그러자 이덴은 양손을 가슴 밑에 대고 자 어때요, 라고 말하듯이 가슴을 내밀어 보였던 것이다. 기차 바퀴 주변에서 하얀 증기가 몽실몽실 품어 올랐다고 생각했을 때 끼익 하고 브레이크가 걸리는 소리가 났다. 쇠끼리 부딪히는 귀청이 찢어질듯 한 소리, 훽하고 코트를 주어올림과 동시에 그녀는 기관차에 등을 돌리고 나에게로 도망쳐왔다. 숨을 몰아쉬고 웃으면서 우리는 뚝을 미끄러져 내려왔다.
해냈어, 드디어 해냈어요. 이덴은 정신 나간 사람처럼 외쳤다, 봤죠? 드디어 해냈다구요.
코트를 입으면서 그녀는 조수석에 올라탔다. 나는 힘껏 악셀을 밟고 고가철로 밑을 빠져서 북쪽으로 향하여 비포장도로 오른쪽으로 들어섰다. 이덴은 까르르 웃으며 매우 젊은 목소리로 외쳤다. 나도 따라 웃었다. 마치 펜서콜라 최대의 은행을 습격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아 신난다! 흥분된 목소리로 말하고나서 이덴은 앞쪽에 위치한 사람 그림자도 없는 듯한 숲 속 나무 사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리 가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요.
그녀는 또다시 코트를 벗고 거칠은 시카모아 나무에 기대고 나와 하나가 됐다.
있잖아요, 사랑한다고 말해 줘요. 라고 그녀는 말했다. 말해 줘요, 빨리 !
둘이서 게임을 할 때에는 밤이나 낮이나 이덴은 빨간 하이힐을 신었다.
그때 말고는 그 구두를 신지 않았다.
혹시 빨간 하이힐이 테이블에 올려져 있거나 차 좌석에 굴러 있으면 그것은 이제부터 비밀 게임을 즐기자는 신호였다. 가끔 아무도 없는 들판에서 그녀는 나를 엎드려 눕히고 하이힐 굽으로 천천히 내 엉덩이를 눌렀다. 내가 비명 소리를 낼 때까지 눌러댔다. 그렇게 하면서 그녀는 자신을 애무하다가 클라이맥스에 달하면 방향을 바꾼다. 그리고는 내 위에 올라타서 구두 굽으로 상처를 입힌 내 엉덩이에 키스하였다. 영화관에 있을 때는 어둠 속에서 구두를 벗어 그것으로 나를 자극하기도 했다. 또 섹스할 때는 유두를 그 구두굽으로 건드리곤 했다.
어느 날 밤, 트레일러를 찾아 갔더니 이덴은 그 기묘한 나를 속속들이 훑어보듯 하는 눈초리로 나를 봤다. 침대에는 가지런히 개켜진 여자옷이 놓여 있었다. 그녀의 옷은 아니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옷이었다. 그녀의 옷보다는 두 치수 정도 큰 꽃무늬의 롱드레스와 팬티, 가터 벨트, 그리고 브래지어. 입어봐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나는 애매하게 웃었다.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순간 마일즈 레이필드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진담이란 말예요, 하고 그녀가 속삭였다.
그리고나서 내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팬티를 입어요, 라고 그녀가 말했다. 당신이 입었을 때의 모습을 보고 싶어요.
팬틱는 보드라운 실크 감촉이 느껴졌다. 브래지어는 찰싹하게 가슴을 싸고 레이온 끈이 살갗을 눌렀다. 앞가슴 캡 안에 이덴은 크리넥스를 뭉쳐서 쑤셔 넣었다. 마지막으로 가터 벨트를 입고 그녀가 도와 줘서 드레스를 입었다. 자 침대에 앉아요. 시킨 대로 했더니 그녀는 재빠르게 내 얼굴에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화운데이션, 분, 립스틱, 아이섀도, 그리고 스트로우 모자를 씌우고 끈을 내 턱 밑에서 묶었다. 그녀의 숨결은 점점 거칠어지고 있었다.
굽이 낮은 숙녀용 구두를 가리키면서 금방 올께요, 라고 말을 남기고 이덴은 화장실로 사라졌다. 나는 거울을 쳐다봤다. 예쁘고 젊은 여자가 이쪽을 보고 있다. 순간 오싹했다.
그때 화장실 문이 열리며 하얀 제복을 입은 해군이 나타났다.
이덴!
화장은 완전히 지워 버렸고 머리카락은 모자 안에 숨기고 있다. 가슴은 무엇인가를 사용하여 납작하게 누르고 있다. 순백의 바지가 가랑이에 착 붙어있다.
자 이리 와, 이 쑥맥아! 거칠은 말투로 내뱉고는 내 팔을 잡고 입구쪽으로 끌고 갔다. 이제부터 아슬아슬한 드라이브를 시켜줄 테니, 각오하라구.
나는 소리 내어 웃었다.
이덴은 조금도 웃지 않았다.
그녀는 무서운 속도로 변두리에 있는 수퍼마켓까지 차를 달렸다. 함께 가게 안으로 들어가면서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지금 이 꼴을 래드 캐논이 본다면 끝장이겠군.
굽이 낮은 구두인데도 역시 거북하다. 이덴은 나에게 쇼핑카트를 밀고 가게 하고 통로를 걸어갔다.
루이 암스트롱 못지 않는 낮고 쉰 소리로 그녀는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야지, 하며 소리를 질러댔다.
옳지 됐어. 그녀는 말했다. 콘 후레이크도 잊지 말앗!
또다시 웃음이 터져 나오려고 했을 때 청바지에 꽃무늬 셔츠를 입은 통통한 여자가 그 통로에 들어왔다. 그러자 즉시 이덴은 내 옆에 서서 그 여자에게 보라는 듯이 내 `가슴'을 꽉 부여 잡았다. 나는 소녀처럼 까르르 웃고 그녀의 손을 찰싹 때렸다.
이러지 마세요 호레이스, 라고 나는 말했다.
이덴은 다른쪽 가슴을 다시 꽉 잡았다.
시끄러워!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야.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이번에는 내 엉덩이를 잡았다.
꽃무늬 셔츠를 입은 여자 얼굴은 매우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훽 방향을 돌리더니 그녀는 급히 멀어져 갔다.
이덴은 즐겁게 웃고, 통증을 느낄 정도로 힘껏 엉덩이를 잡았다.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이 난폭한 해군 녀석은 대중 앞에서 나를 만지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걸까? 집에 돌아갈 때까지 참지 못한단 말인가? 신사처럼 행동하지 못하는 걸까?)
화가 난 듯이 그녀에게서 떨어져서 주차되어 있는 차 뒤쪽에서 이쪽을 보고 있는 사람들을 의식하면서 나는 말했다. 자아, 집으로 돌아가요.
지금 당장.
트레일러에 도착하자 이덴은 굶주린 듯이 달려들었다.
어느날 밤 시어즈 백화점에서 이덴과 만났다. 어디든 드라이브나 바닷가로 나갈 때는 반드시 그곳에서 만나기로 했었다. 그날 밤 가게에서 나온 이덴은 웬지 침울한 얼굴이었다. 서둘러야겠어요, 베이비. 그렇게 말하면서 운전석에 올라탔다.
무슨 일이 있어요? 나는 물었다.
로버터 때문에.
로버터란 시어즈에 다니고 있는 그녀의 금발머리 동료를 말한다. 수개월 전에 산 카로스 호텔에서 멜카도와 함께 나오는 것을 내가 목격했던 그 여자였다. 이덴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녀의 얘기를 했다. 잡다한 에피소드들로 모두 싸구려 멜로드라마와 같은 내용이었다. 물론 멜카도와의 교제는 결실을 맺지 못한 것 같다. 멜카도가 원하고 있던 것은 섹스였으며 로버터가 원하고 있던 것은 결혼이었으므로 무리도 아니다. 그래서 멜카도는 밝게 웃으며 그녀에게 키스를 하고 안녕 이라고 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멜카도 다음에 그녀는 랠리라는 소위를 알게 되었다. 랠리는 사관이었으며 나는 해군 쫄병이었으니 두 커플이 함께 놀러갈 기회는 한 번도 없었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지키는 우리 해군의 규칙으로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가끔 드라이브와 새우 요리점에서 랠리와 로버터 커플과 만난 적이 여러 번 있어서 그때마다 손을 흔들기는 했다. 나는 딱 한번 랠리를 소개 받은 적이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사복을 입었을 때였다. 그는 바싹 마른 키가 큰 남자로 구두닦이를 보는 듯한 눈초리로 나를 봤다. 내가 먼저 특별하게 말을 건 적도 없었다. 로버터에 대해서는 그 정도밖에 알지 못했는데 이덴은 물론 매일 가게에서 많은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녀가 오늘 밤 자살해 버리겠다더군요. 골목길을 빠져 나가면서 이덴은 말했다.
도대체 왜요?
랠리가 로버터를 배신했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여자가 생긴 것은 아니다.
훨씬 전부터 다른 여자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고향 오하이오에 번듯한 마누라가 있었다. 즉, 로버터가 오히려 `외간 여자'였던 셈이다.
그녀는 그것이 견딜 수가 없다는 것이다.
무슨 소리야!
어떻게든 해서 말리려고 전화로 설득해 보았죠. 이덴이 말했다. 로버터, 자기 목숨과 맞바꿀 만한 남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구. 단 한 사람도. 아무리 그 남자를 사랑한다고 해도 자기 목숨까지 버릴 건 없어, 라고요.
나는 생각했다. (흠, 그럼 나는 뭐지? 당신 자신은 자기 목숨과 바꿀 정도로 나를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거야?) 그러나 나는 말하지 않았다.
아무튼 그녀를 말려야 해요. 이덴이 말했다. 로버터의 생명을 구해야 한다구요.
무서운 속도로 차를 모는데 차는 메인사이드를 조금 지난 지점인 백인 중산계급 주거지구로 접어 들었다. 로버터가 살고 있는 것은 2층짜리 새 아파트였다. 벽은 칠기를 발랐으며 타일을 붙인 지붕, 차도에는 차가 몇 대 서 있었다. 계단은 건물 외부에 있었다.
이덴이 앞장서서 로버터의 방까지 가서 벨을 눌렀다. 대답이 없다. 이덴은 문틈에 귀를 댔다.
어떻게 하죠? 아무 소리도 돌리지 않는데요?
이번에는 수없이 계속 벨을 눌렀다.
간신히 문앞에 다가오는 발소리가 났다.
"누구세요?" 하고 로버터의 목소리가 났다.
"이덴과 마이클이야, 로버터. 빨리 문을 열어 줘."
"돌아가 줘. 만나고 싶지 않으니까."
"열어 주지 않으면 이 문을 부숴버리겠어. 그래도 상관 없겠니?"
잠시 망설이는 기척이 있더니 자물쇠가 풀리고 문이 열렸다. 로버터가 서 있었다. 흰색 프란넬 가운을 걸치고 있었는데 꼴이 말이 아니었다. 머리는 엉망으로 헝클어져 있었으며 얼굴은 화장이 얼룩져 있었다. 손톱은 때가 새까맣게 끼어있고 눈은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으며 얼굴도 푸석푸석했다.
시시한 눈물을 짜내는 너의 얘기는 듣고 싶지 않아, 하고 말하면서 이덴은 로버터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문을 손을 뒤로 돌려서 잠꿨다.
할 얘기는 아무 것도 없어. 라고 로버터가 말했다.
할 말이 많을 텐데, 이덴은 대꾸했다. 이기적이며 거짓말쟁이인 파일럿에 대한 원망이 태산같이 있을 텐데? 실컷 매도하고 싶은 심정이겠지. 하지만 오늘 밤에는 그 얘기는 듣고 싶지 않아, 로버터. 오늘은 우리가 조금이라도 너를 인간다운 기분으로 만들어 주고 싶어. 그녀는 로버터의 손을 잡고 침실로 들어갔다. 이건 즉 여자끼리의 회담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말이 오고가는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나는 주위를 살펴 봤다. 정신이 혼란스러워질 정도로 어지럽혀져 있었다. 여러 가지 물건들이 흩어져 있다. 양주 병, 담배 꽁초가 수북한 재떨이. 더러워진 접시와 글라스, 게다가 바닥 여기저기에 옷을 벗어던진 것이 흩어져 있었다. 이덴도 그것을 본 것 같았다. 침실 문 앞에서 그녀는 나를 돌아봤다.
저어, 당신이 이 방을 좀 치워 줄래요? 나는 어떻게든 로버터를 진정시킬 테니까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침실 문을 닫았다. 즉시 작은 방 정리를 시작했다. 빈 양주병을 쓰레기 봉지에 넣은 다음 재떨이를 부시고 옷을 개서 안락의자에 놓았다. 창문을 모두 열고 몽롱한 숙취 냄새를 젖은 밤 공기에 날려 보냈다.
그러는 동안 침실 저쪽에서 샤워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덴은 로버터와 함께 욕실에 들어가서 몸을 부추기고 있는 걸까? 의자와 소파를 반듯하게 정리하자 방 분위기가 달라 보였다. 어지럽게 흩어졌던 로버터의 방은 누군가 다른 사람의 방처럼 변해 버렸다. 친구나 친척이나 애인의 사진은 아무 곳에도 없다. 바비 볼덴이 캐티와 살고 있는 방처럼 선반에 책도 꽂혀 있지 않았고 벽에 사진 한 장 걸려있지 않다. 어딘지 살벌한 느낌이 나는 공간, 아마 로버터는 혼돈 때문에 이 방에 자기 체취를 베이게 하고 있었으리라. 나는 어지럽던 그녀의 방을 호텔 객실처럼 말끔히 정돈했다.
어느 사이엔가 샤워 소리는 멈춰 있었다. 그러나 침실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해군 제트기가 하늘을 가르며 나르는 굉음이 들렸다. 저 소리를 듣고 로버터는 다시 미칠 지경이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되었다. 파일럿 중 하나는 랠리일지도 모르니까. 라디오에서 토미 에드워즈의 노래가 흘러 나왔다.
아무리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도
언젠가는......
이때 문이 열렸다. 이덴이 알몸에 타올만 두르고 서 있었다. 로버터는 아직 욕실 가운을 걸치고 있었지만 머리는 단정하게 뒤로 넘겨져 있었다, 피부는 핑크색으로 빛났으며 손톱도 깨끗했다. 마치 깜짝 파티에 온 어린아이처럼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가운을 걸친 채 큰 침대에 다가가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는 동안 그녀는 계속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이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침대쪽으로 턱짓을 해보이고 내 앞을 지나 벽으로 다가가서 스위치를 껐다. 나는 옷을 벗고 로버터 옆으로 들어갔다. 비누와 향수 향기가 가득했다. 로버터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내 얼굴을 매만졌다. 어렴풋한 빛을 받은 그녀의 살결은 빛나고 있었다.
뒤돌아보니 어느새 이덴도 알몸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그대로 로버터의 저편에 들어누웠다. 나를 보고 괜찮아요, 라고 말하듯이 끄덕여 보였다. 나는 로버터의 가운 끈을 풀기 시작했다. 로버터가 상반신을 일으켰다. 가운이 어깨에서 흘러 떨어지고 볼륨 있는 가슴과 핑크빛 유두가 드러났다. 내 손이 움직이기 쉽게 그녀는 몸을 틀었고 가운은 바닥에 떨어졌다.
나 정말 비참했다구요. 로버터는 느닷없이 울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를 끌어안고 한 손을 이덴 쪽으로 뻗어서 그녀의 팔과 얼굴, 가슴을 더듬었다. 로버터가 나에게 얼굴을 돌렸다. 그 입술에 나는 키스했다.
그렇게 나와 이덴은 로버터와 섹스를 하기 시작했다. 그녀를 위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녀를 파일럿과 허위로 가득 찬 펜서콜라에서 아득히 멀리 떨어진 나라, 그녀 기억 속에 영원히 새겨질 비밀스런 의식이 행하여지는 나라로 유인하고 있었다. 우리는 함께 로버터 입술에 키스했다. 입술과 입술, 혀와 혀가 동시에 얼키고 서로 움직였다.
두세 시간 정도 잠들었을까. 눈을 떠 보니 로버터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고마워요. 그녀는 말했다.
로버터의 말소리에 이덴이 잠에서 깨어나고, 로버터의 표정을 보고 밝게 웃었다.
이만 가볼까.
우리는 옷을 입기 시작했다. 로버터는 이불을 턱 밑까지 끌어당기고는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웬지 묘한 기분이었다. 모든 일이 우리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일어났던 것처럼 느껴졌다. 에리슨 비행장의 동료에게 말을 해도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이덴이 침대에 다가가서 로버터의 눈썹 위에 살짝 키스했다.
다시는 바보 같은 전화 걸지 않을 거지? 알았지?
그래, 낮은 목소리로 로버터가 대답했다.
우리는 차를 달렸다. 벌써 늦은 시간이었으므로 나는 기지 울타리를 넘어서 몰래 들어가야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상관 없다. 이덴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 모두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우리가 한 행동은 도저히 옳은 짓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이덴은 어딘가 변태끼가 있는 이상한 여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여자와 태연하게 끌어안을 수 있는 여자니까. 그래도 나는 기분이 좋았다. 섹스 때문만도 아니다. 자살하려고 한 여자를 살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덴은 내 옆에 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와 함께 있는 것이다. 로버터의 침실 정경이 머리에 되살아났다. 그것은 이덴의 머리에도 되살아나고 있었을 것이다. 잠시 후에 그녀가 내 허벅지를 꽉 잡았기 때문이다.
어딘가에 차를 세워요. 저기가 좋겠어요. 저 교회 뒤 주차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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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식으로 우리는 봄에서 여름에 걸쳐 그 신비로운 `게임의 시간'을 지냈다. 뭐든 새로운 것이 생각나면 즉시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 어떤 의미에서 이덴은 나보다 14살 연상인, 두 아이의 어머니라기보다 나와 같은 어쩌면 나보다 연하의 여성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게임'에 임해서는 그녀가 리드할 때도 있었고 내가 리드할 때도 있었다. 그러던 중 우리는 미리 아무 것도 정하지 않고 대본이 없는 게임을 즐기게 됐다. 거기에는 어떤 종류의 기묘한 순수함도 있었다고 생각된다. 아무튼 두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새로웠으므로 실제로 시험하면서 그것을 발견하고 있는 듯한 데가 있었다. 두 사람의 과거, 그녀의 경력, 신부님들의 엄한 설교, -그런 것은 모두 두 사람이 열정적인 현재형을 살아감에 있어서 등 뒤로 멀어져 갔다. `게임'은 우리들의 것, 우리들의 상상력의 소산이었다. 그리고 몰아지경에 있을 때까지도 나는 언젠가 먼 장래에 자기는 지금 보내고 있는 나날을 수없는 체험의 계절로서 회상하게 되겠지 하고 생각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지금 자기가 맛보고 있는 이 아득해 지는 체험은 이제는 두 번 다시 맛볼 수 없을 것이다. 어떤 여자와 사귄다 해도 맛볼 수 없을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지금에 와서 되돌아볼 때, 그 직감은 옳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두 사람의 시간은 언제나 기발한 의상과 무대를 골라잡은 `게임'에 시종한 것은 아니다. 때로는 이덴도 조용한 시간을 보내고 싶어하는 때도 있었다. 그렇다. 그 고요한 트레일러 안에서 내 옆에 누워서 호수와 스틱스 강의 밤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싶어한 적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격렬하고 성급하게 섹스를 원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녀는 환락을 맛본 후에 이렇게 설명했다. 오늘은 하루종일 이 일만 생각했기 때문에 전에 했던 애무는 모두 머리속에서 해버렸노라고. 그리고 몽롱한 목소리로 알고 있는 모든 외설스러운 단어들을 실컷 내뱉고 나서 나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유도했다. 그리고 이것은 여유가 있는 주말이 대부분이었는데 둘이서 일종의 춤이라 할까 멋대로 하는 의식처럼 천천히 에로틱한 미사에 심취되는 신기한 밤도 있었다. 내 귓가에는 라틴어 어구가 들려온다. (내 청춘을 기쁘게 하시는 주께. 그리고 내 안에 새겨진 그 말, 반드시 되풀이되는 꿈처럼 머리 안에서 메아리치는 그 말로 나는 그 어구를 중얼거렸다. 그때 나는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덴을 깔보고 있던 것은 아니다. 자기 자신의 과거, 머리에 박혀 있는 가톨릭의 교리, 자기가 발명한 것도 아닌 폭군적인 교리에 대한 강제적인 굴종에 나는 반기를 휘날리고 있었던 것뿐이다. 죄를 꼭 끌어안음으로써 나는 가톨릭 신자에서 벗어났다, 죄, 감미로운 죄, 어두운 나락으로 끌어당기는 감미로운 죄......)
나도 이덴도 자기들이 하고 있는 행동에 대한 선악을 물으려 하지 않았다. 우리는 다만 그렇게 했다. 음악이 언제나 어디에선가 울려퍼지고 있는 듯했다. 라디오의 스위치가 끊겨 있을 때에도 호수를 타고 오는 소리가 끊기는 한밤중에도 그것은 들렸다. 죄의 음악, 변경을 건너와서 우리가 상상하며 실천함으로써 우리들 자신을 변하게 하는 음악, 나와 이덴은 그 음악에 귀를 기울이고 그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 그 선율을 만들어내고 그 리듬에 맞추어 서로를 사랑했다.
어떤 때, 나는 이덴을 테이블 앞에 앉게 했다. 정숙한 주부처럼 얌전한 차림으로 신문을 읽게 했다. 도리스 데이와 같은 브랜디와 같은 나의 귀여운 아내인 것이다. 라디오에서는 빙 크로스비의 멋지고 건전한 노래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천천히 테이블 밑으로 기어 들어가 그녀의 허벅지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그녀를 사랑해 주었다. 그러나 그 음악 소리는 언제나 어디서든지 꼭 들렸던 것은 아니다. 한 번 연방재판소 주차장에 세워둔 차 트렁크 안에서 그녀의 팬티를 뚜껑 사이에 끼워두고 잠기지 않게 하여 섹스를 즐긴 적도 있었다. 또 앨라배마의 황야를 달리고 있을 때 작은 성당을 발견한 적이 있었다. 개신교의 바다에 방치된 듯한 보잘 것 없는 건물이었다. 우리는 텅 빈 주랑에서 속삭이며 고해실의 낡은 벨벳 커튼 뒤로 갔다. 그곳에서 이덴이 나를 삼켰다. 그것은 죄 많은 행위였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조금도 나쁘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죄란 모독, 방종, 파계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덴이 상대라면 나쁜 짓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다만 이것은 죄많은 짓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따름이었다.
물론 나에게 있어서 죄의식을 극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끔 돌아가신 어머니의 얼굴, 주일 아침의 경건한 가톨릭신자인 엄숙한 어머니의 얼굴이 머리에 떠올라서 문득 주저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면 머리 속에서 약간의 분쟁이 일어난다. 어린아이인 내가, 어른인 나를 비난한다-(너는 어머니 앞에서도 그런 짓을 할 수 있니?) 그러나 심한 논쟁 끝에 승리를 장식하는 것은 언제나 어른인 나였다. 어머니는 어머니 나름대로 인생을 살았으며 지금은 저 세상에 가 있는 것이다. 이건 내 인생이다. 내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어떻다는 건가? 그러나 어린이인 내가 일시적인 승리를 거두는 경우가 없지도 않았다. 로버터와 섹스를 즐겼을 때 등에는 처음 몇 번은 태연한 태도와는 달리 내심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유치한 나는-
생각했다. (만약 로버터가 로버트라는 이름의 남자였다고 해도 역시 나는 이런 짓을 할까? 로버트와 함께 이덴 산타나를 안을 것인가? 가령 멜카도와 내가 이 침대에서 이덴을 안고 두 사람이 동시에 그녀 안에서 절정을 맞았다면 어떨까? 그리고 이덴은 머리 속에서 무슨 생각을 할까? 왜 그녀는 로버터를 끌어들인 섹스를 저토록 좋아하는 걸까?)
로버터의 집을 찾는 것은 우리가 두 번 이상을 되풀이한 드문 일 중의 하나였다. 이덴은 우리들의 방문에 육체에 의한 자비의 행위, 병든 자를 치유해 주는 행위라는 옷을 입혔던 것이다. 그렇다, 육체와 혀와 페니스와 정액이 혼연일체가 되어 정신적 상처를 불식하는 것이다. 그러나 병사에 돌아와서 비밀을 털어 놓을 수 없는 동료들에게 둘러싸이면 나는 생각에 잠기곤 한다. 이덴이 레즈비언이라면 어떻게 될까? 내가 없을 때에도 그녀와 로버터가 사랑을 나누고 있다면 어떻게 한다?)
그러나 두세 번 거듭 로버터의 집을 방문하자 그런 의문은 깨끗이 씻겨졌다. 우리 셋이 그 침대에 눕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로버터는 생각이 얕은 여자였지만 그녀를 좋아했다. 그녀는 섹스를 매우 즐겼으며 장차는 많은 자녀들에게 둘러싸이고 점점 뚱뚱보가 되어서 섹스의 쾌감은 잊어버리는 그런 별자리에 태어난 여자였다. 내가 그녀와 사랑에 빠져들 가능성은 거의 없었으며, 이덴 또한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아는 바로는 그녀에게는 신비적인 그늘은 전혀 없었다. 로버터는 그 외모대로의 여자, 즉 약간 애수에 젖은 듯하고 애교 있는 미소를 항상 띠우고 있는, 선량한 마음과 풍만한 육체의 주인이었다.
그래도 나는 이덴의 거므스름한 살결이 로버터의 눈과 같이 흰 피부에 겹쳐져 있는 광경과 두 사람의 평소에는 수영복에 가려져 있는 창백한 부분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미국에는 1억 5천만 명에 달하는 인간이 살고 있다. 나는 그 중에서 그녀들의 육체 깊숙한 부분을 볼 수 있는 얼마 되지 않는 인간 중 하나인 것이다. 두 여자가 왜 나에게 그와 같은 `게임'을 허락해 주는지 이덴에게도 로버터에게도 물어본 적이 없다. 우리는 한 번도 콘돔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나는 가끔 그녀들 모두에게 사정하는 경우도 있었다. 내가 몸을 떼려고 하면 두 사람 모두 내 엉덩이를 꽉 잡으며 무언 속에서 강요하는 것이다. 로버터는 어떤 비밀스런 피임조치를 하고 있겠지만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끝나고 나면 두 사람은 번갈아서 화장실에 갔으며 잠시 동안 물소리가 났다. 우리는 그런 다음 멕시코 만 안의 독특하고 냉냉한 어둠 속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 그러다가 얼마 후 뜨거운 손이 내 허벅다리를 잡고 또다시 에로스의 `게임'이 시작되는 것이다. 한 가지 확실한 일이 있었다. 두 여자는 나라는 상대에 안심하고 있었을 것이고 나 또한 진심으로 안심하고 두 여자와 즐길 수가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덴과 로버터는 다만 단순히 심장이 멎을 듯한 쾌락을 주고받는 대타가 가능한 육체는 아니었다. 나는 풍만한 로버터의 육체와 그것을 자유롭게 사용하게 해 주는 그녀의 너그러움에 마음껏 즐길 수가 있었다. 더, 더 하고 소녀와 같은 목소리로 재촉당하면 점점 홍분되었다. 그러나 나는 동시에 18세 젊음이 갖는 오만이라 할까, 로버터에 한해서만은 그 침대와 뜨거운 샤워와 파란 정맥이 보이는 유방 이외에 알아야 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 점이 이덴과는 달랐다. 이덴에 대해서는 더 알고 싶은 것이 산더미처럼 많았다. 그리고 그 수수께
끼, 그녀 속에 있는 지도가 없는 나라, 아직 미발견인 나라가 들먹이는 것이야말로 나에게 있어 사랑의 핵심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녀의 비밀을 하나하나 벗겨가는 과정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밤의 `게임'을 되풀이하며 로버터의 집에서 몰아의 시간을 지내고 있는 중에 나는 이덴에게 당신을 사랑한다고 호소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떻게 나를 사랑한다란 말을 할 수 있어요, 베이비? 라고 이덴은 말한다. 나를 알지도 못하면서.
바로 그거라구요, 중요한 것은. 하고 나는 대답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 것은 당신을 모르기 때문이죠. 당신의 전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라구요.
이덴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아요. 아니, 바보 같은 소리라니요. 나는 어느 날 밤에 말했다. 만약 당신을, 당신의 전부를 알 수가 없다면 나의 앞으로의 인생을 몽땅 바쳐서라도 밝혀내고 말겠어요.
이덴은 잠시 내 얼굴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담배에 불을 붙이고 흠뻑 빨아당기고 나서, 나에게가 아닌 우리가 있는 방에, 밤에 그리고 과거를 향하여 말했다.
나 말이죠. 한 가지, 인생에 대해서 확실하게 배운 것이 있어요. 그건...... 무엇을 하든 미리 계획을 세우지 말라는 것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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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저녁 때 나는 로커클럽에서 트레일러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대기는 초여름의 상쾌한 향기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스틱스 강에 걸려 있는 다리에 접어들었을 때 소형 트럭이 눈에 들어왔다. 연한 푸른색 차체로 앨라배마 번호판이며 짐을 실은 칸 가장 안쪽에 공구 상자가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강 위에 뻗어나온 물가에 세워진 낚싯밥을 파는 집 앞에 세워져 있었다. 그 가게 뒤에는 작은 길이 있었고 풀 숲을 누비며 보트 계류장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트럭 옆에서는 네 명의 남자가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었다. 이 펜서콜라에 도착한 첫 주에 침례교회에서 대난투극을 벌였을 때 상대 중 하나였다.
그 버스터라고 하는 남자.
순간 섬뜩했다. 그것은 참으로 혼란스러운 전대미문의 밤이었다. 버스터와 그의 친구들에게는 굴욕적인 밤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하고 나는 자신에게 타일렀다. 그건 벌써 몇 개월 전의 일이다. 그날부터 벌써 몇 백 일이 지났다. 나는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생활을 하고 있으며 모두가 이덴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 버스터도 아마 나 따위는 기억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한편으론 나는 긴장감에 가슴이 조여드는 것을 느끼면서 생각을 고쳤다. 내가 저자를 기억하고 있는데 그 자도 나를 기억하고 있지 않을 턱이 없잖은가.
소형 트럭과 낚싯밥 가게, 그리고 버스터에게 등을 돌리고 그냥 강을 내려다봤다. 힐끔 하늘을 쳐다보니 매 한 마리가 유유히 하늘을 날고 있다. 다시 시선을 트럭에 돌렸더니 이쪽으로 다가오는 버스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다른 한 명이 트럭 운전석 안에 손을 넣고 있다.
나는 오싹한 한기를 느끼며 그 자리에 섰다.
"이봐! 야 임마!" 그가 외쳤다. "이 해군 녀석!"
꽁지가 빠지라고 마구 달렸다.
에리슨 비행장으로 이어지는 길을 되돌아 서서 달렸다.
"이번에는 가만두지 않을 테다, 이 양키놈!"
전속력으로 사람이 다니지 않는 길을 달리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이제 막 소형 트럭이 낚싯밥 가게 앞에서 후진한 직후였고 갱 영화의 한 장면처럼 버스터가 스탭에 발을 얹고 있다. 이미 문을 닫은 조그마한 세탁소 앞을 나는 통과했다. 그 옆이 차 소음기를 팔고 있는 가게이다. 여기도 문이 닫혀 있다. 뭔가 좋은 무기는 없을까 하고 주위를 둘러봤다. 판자 조각, 벽돌, 버스터 일당과 싸울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좋다.
다음 순간 노면이 패인 곳에 걸려 앞으로 넘어졌다. 가까스로 왼손을 짚어서 몸을 지탱했다.
급브레이크를 밟는 끼익하는 소리. 한 바퀴 돌아 버스터의 주먹을 한 방 먹을 것을 각오하면서 고개를 들었다.
급정차한 것은 바비 볼덴의 차였다. 뒷좌석 문을 열면서 그가 외쳤다.
"자, 타! 빨리 서둘러!"
나는 머큐리 바닥에 올라탔다. 볼덴이 목덜미를 잡고 끌어 당기고 문을 닫았다.
"바닥에 엎드려!"
그의 숨결이 거칠었다. 굉음과 함께 트럭이 옆을 지나갔다.
"가버렸어." 볼덴이 말했다. "자네를 봤을지도 모르지. 트럭이 키가 더 크니까. 어쩌면 못 봤을지도 모르겠어. 이런! 다시 돌아서 오고 있군. 제기랄! 이봐 꽉 잡고 있어!"
그는 악셀을 바닥에 닿도록 밟고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크게 선회하고 노면이 매끄러운 포장도로를 달렸다. 잠시 후 갑자기 크게 오른쪽으로 꺾어서 바닥에 누워있는 나에게도 보이는 나무 밑을 지나서 다시 크게 돌렸다. 노면은 차츰 거칠어지고 크고 작은 돌이 튀어서 차 바닥에 닿았다.
"조수석 밑에 총이 있어, 거기에서 손을 뻗어서 집어......"
기름 종이에 싸인 45구경 권총이었다. 손으로 잡았더니 차갑고 묵직했다.
"놈들이 보이지 않는데. 하지만......"
큰 총의 무게를 재면서 나는 생각했다. 잘못 하면 이것을 사용하게 될지도 모르겠구나, 이것으로 놈들을 쏘지 않으면 안 될지도 모른다. 버스터의 머리를 날려 버릴까?
그때 차가 또다시 급선회하여 나는 반대편 문짝에 부딪혔다. 차는 굉장한 스피드로 직진하기 시작한 것 같았다.
이 새끼들! 죽여버리고 말테다!
그래-하고 나는 속으로 속삭였다. 버스터와 나 둘 중 누군가가 죽어야 한다면 그건 버스터가 분명하다.
나에게는 사랑하는 여자가 있다.
차는 어딘지 습지대에 당도했다. 숨이 막힐 듯한 달콤한 향기가 그윽했다. 볼덴은 백만 가지 소리에서 단 한 가지 소리를 가려내려는 사냥꾼과 같이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다.
"이제 안심이야." 낮은 소리로 그는 말했다.
"고마워요. 정말 이 은혜는 잊지 않겠어요."
"이제 내가 차를 가지고 있는 이유를 알았지?"
"여기서는 탱크가 필요하겠어요, 정말."
"누구였지? 그놈들은?"
1월에 있던 그 댄스 파티에 뛰어 들었던 사정, 샐과 막스 그리고 내가 버스터 패거리들과 벌였던 난투극의 경위를 간단하게 설명했다.
"댄스가 나빴군 그래." 볼덴이 말했다.
"백인들의 파티에서는 반드시 문제가 생긴다니까."
그는 권총을 쥔 채 차에서 내렸다. 나는 건너편의 캐티와 볼덴이 작은 집을 갖고 있는 주변, 나와 이덴의 트레일러가 있는 근방을 바라봤다.
"이렇게 되면 자네는 앞으로는 어느 길이든 혼자서는 못 다닐 텐데." 볼덴이 말했다. "여기에 있는 동안은 말야. 나도 마찬가지지. 미국은 자유로운 나라라구 백날 기염을 토해봤자 아무런 소용 없지. 언젠가 어두운 밤에 놈들에게 잡혀서 연못에 던져지는 것이 고작이라구." 한숨 돌리고,
"막스와 샐도 마찬가지지." 기름 종이로 조심스럽게 총을 싸면서 그는 계속했다.
"그 바보놈들도 멍청이는 아닐 거야. 자네가 아직 이곳에 있다는 것과 또 에리슨 비행장에 근무하고 있으리라는 것을 눈치챘을 테지. 앞으로 자네를 찾으려고 혈안이 될걸? 길거리나, 술집, 기지. 그러니까 어디를 갈 때 차가 없는 경우는 피하는 것이 좋아."
앞으로 팬서콜라에서 지내는 동안 계속해서 숲 속을 숨듯이 걸어다니고 있는 자기의 모습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러자 갑자기 분노가 터져 나왔다. 그때 우리 셋은 버스터와 그 친구 네 명과 싸움을 하여 실컷 때려 눕혔다. 그러니 승부는 이미 난 것이 아닌가. 아직 젊었던 나는 이 세상에는 규칙이 있을 것이다. 사나이가 싸워서 승부가 가려졌으면 그것으로 일단락 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비 볼덴은 그래도 끝난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이 세상에는 상대가 죽기 전까지 끌나지 않는 일도 있다고. 그렇다, 다른 지역에서라면 몰라도 이곳에서는 놈들은 그날 밤에 기억이 아직 아침과 같이 새로울 때에 쳐들어와서 흘린 피에 대한 복수를 한다, 라고. 바비 볼덴은 나보다도 훨씬 정확하게 사태를 파악하고 있었다. 이 지역이 어떤 곳인지 그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남부,
쓸모도 없는 남부.
"놈들이 그렇게 나온다면 우리도 똑같이 나가면 될 것 아닙니까."
흥분된 말투로 나는 말했다.
"우리도 놈들을 쫓아다니면 된다구요."
볼덴은 서글프게 나를 봤다. "머리를 굴려 마이클. 잘 들으라구. 여기는 놈들의 구역이야. 자네 땅이 아니라구. 또한 내 땅은 더더욱 아니구."
"일단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두고 보기로 하지."
권총을 벨트에 꽂으면서 볼덴은 말했다. "아니, 그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는 편이 좋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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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히 트레일러에 도착했는데 블라인드 뒤편에 불이 켜져 있었다. 노크를 했더니 이덴의 분명치 않는 목소리가 대답했다. 들어와요. 이 트레일러의 열쇠는 아직 받지 않았다. 아마 앞으로도 주지 않을 것이다. 문을 밀고 들어가니 이덴이 싱크대에 기대어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희미한 미소가 얼굴에 떠 있다. 저렇게도 아름다운 이덴을 본 적이 없었다. 머리는 뒤로 아무렇게나 묶었고 화장은 깨끗이 지우고 있다. 오늘은 검은색 터틀넥을 입고 있으며 흰색 앞치마를 두르고 있다. 맨발에 빨간 구두를 신고 있었다. 나는 문을 뒤로 잠꿨다.
늦었군요. 쉰 목소리로 이덴은 말했다.
그녀는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것을 입에서 빼고는 내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재를 뒤에 있는 싱크대에 털었다.
문제가 좀생겨서, 라고 나는 말했다. 나중에 이야기할께요.
오늘도 건강해 보여요.
단신도,
이것도 `댄스'의 일부인 것이다. 인사 대신 하는 부드러운 칭찬의 말. 오늘 밤의 이덴의 느낌은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마치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읽고 있는 것처럼 눈의 초점이 맞지 않는다. 나는 이미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팔을 내밀고 끌어당겨서 강열하게 키스하면서 잘 익은 몸에 손을 더듬었다. 그래서 알게 되었는데 터틀넥을 제외하고는 그녀가 걸치고 있는 것은 앞치마 뿐이었다.
당신이 깜짝 놀랄만한 선물이 있어요. 쉰 목소리로 그녀는 속삭였다.
정말?
마음에 들어야 될 텐데.
담배를 싱크대에 떨어뜨리고 두 손을 내 어깨에 얹어서 아래로 눌렀다. 나는 스웨터 위에서 좌우의 유두를 번갈아 가며 입에 넣고 뜨거운 입김을 내품었다. 목이 막힌 듯한 소리를 내면서 그녀는 계속 내 어깨를 눌렀다. 나는 그녀 앞에 꿇어앉은 것과 같은 자세가 됐다.
이덴이 살짝 앞치마를 들어 을렸다. 그러자 눈앞에 나를 깜짝 놀라게 하는 선물이 나타났다.
이덴은 그곳을 면도질했던 것이다.
그 신비로운 장식 털은 하나도 남김없이 면도되었고 내 눈 앞에는 그녀의 아름다운 성기가 노출되어 있었다. 도툼한 그곳은 전체적으로 창백했으며 화집에서 본 희랍의 조각상의 모습을 연상케했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은 대리석과 청동을 소재로 손으로 만든 조각상의 일부가 아니다. 그곳에는 피가 통하고 근육이 차 있는 것이다. 무릎을 꿇고 있는 나의 바로 눈앞에서 숨쉬고 있는 여자의 비밀스런 곳. 두툼한 입술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녀는 오른쪽에 발을 내밀고 싱크대에 엉덩이를 대고 나의 머리를 잡고는 자기의 그곳으로 세게 끌어당겼다.
내가 입술을 댄 순간부터 그녀는 떨고 있었다. 빨간 구두 굽에 힘을 주어 두 다리를 벌리고 버텨 서서 나의 후두부를 꼭 안았다. 양다리가 긴장했다가 풀렸다가를 반복하다가 그녀는 허리를 뒤로 뺐다. 다음 순간 이번에는 허리를 쑥 낮추고는 내 머리를 잡아당겼다. 자기 안에 나를 빨아 당기려는 듯한 격한 행동이었다. 그녀는 미친듯이 몸부림치면서 드디어 클라이맥스에 달하기 시작했다. 두 손으로 앞치마를 벗어던지고 내 머리카락을 쥐어 뜯으면서 허리를 쭉쭉 밀어댔다. 그러다가 탱탱한 엉덩이를 싱크대에 부딪히듯하여 발 끝으로 서서 숨이 끊어질 듯이 외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기진하여 나를 덮듯이 몸을 꺾었다.
엉덩이를 싱크대에 밀어대고 배를 내 머리 위에 올린 그녀는 두 손으로 나의 벨트를 잡고 있다. 털이 없는 축축한 언덕과 중간 홈을 향하여 나는 살짝 입김을 불었다. 이덴은 또다시 몸부림을 치고나서 쓰러지듯이 허리를 들어 깨끗이 닦인 바닥에 몸을 쓰러뜨렸다. 무겁게 눈을 감고 있는 그녀 속으로 나는 들어갔다-.
절대로 끝내고 싶지 않아요. 당신과. 긁힌 나의 왼손을 따스한 소독수로 씻어 주면서 그녀는 말했다. 나는 지칠대로 지친 몸을 그녀가 안내해 준 침대에 눕히고 있었다.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나도.
하지만, 하고 그녀가 말했다. 사실은 이런 말을 하는게 아닌데. 우리는 지금 여기에 있고, 이런 밤을 앞으로도 자주 가질 수 있겠죠? 그것만으로도 만족해야겠는데. 나는 정말 끝내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역시 언젠가는-.
하지만, 이라는 말은 듣고 싶지 않다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나는 지금 이 생활이 영원히 계속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따스한 물에 담근 내 손을 그녀는 사랑스럽게 어루만져 주었는데 그 시선은 벽을 향하고 있었다. 영원히 계속될 리가 없잖아요. 쓸쓸하게 그녀가 말했다. 언젠가는 당신은 당신과 비슷한 나이의 여자와 사귀게 될 테니까. 어쩌면 당신보다 연하의 여자일지도 모르죠. 그리고 그녀는 당신과 함께 파리에 가서 당신이 화가가 되는 것을 돕고 싶어할지도. 당신이 늘 말하는 것과 같은 장래 희망을 당신과 함께 실현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리고는 당신의 아기를 낳고 싶다고 말할 테고. 당신도 그것을 원하겠죠. 그녀는 당신 친구를 만나고 싶어 할 테고. 당신이 읽고 있는 책을 읽고 싶어 할 거예요. 뿐만 아니라 당신과 함께 매일 아침밥을 먹고 싶다고 할 걸요? 그런 그녀는 당신 눈에 매우 신선하고 아름답고 가련하게 보일 것이 틀림 없을 테고. 마치 이 세상에 이제막 태어난 여자처럼 당신은 그녀와 사랑에 빠져들고. 그런데 나에게 어떻게 고백하면 좋을지 몰라서 고민하게 되고, 당신은 안개 속을 헤매고 다니면서 일마다 나와 충돌하게 될 거예요. 내 얼굴의 주름살과 내 가슴이 쳐지고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겠지요. 그러는 동안에 나의 아이들은 독립하여 자기들의 자녀를 낳겠죠. 그렇게 되면 당신은 묘한 느낌에 사로잡히게 될 거예요. 왜냐하면 당신은 `할머니'와 살고 있는 거니까. 그래서 당신은 간신히 용기를 내어 나에게 고백하겠죠. 실은 사랑하는 여자가 있다구. 당신 안에 진정으로 그 여자에 대한 사랑이 싹틀지도 모르고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겠죠. 하지만 언젠가는 당신은 떠나 가게 될 거예요.
말도 안 돼! 라고 나는 말했다. (그 말은 지금도 분명하게 내 귀에 남아있다.) 맹세할께요 이덴, 나는 절대로 당신 곁을 떠나지 않겠어요. 약속할 수 있어요.
제발 그런 말은 하지 말아요. 그녀가 말했다. 그런 말이라면 싸구려 영화에서나 들을 수 있는 거잖아요.
당황하다가 소리를 지르면서 나는 말했다. 하지만 달리 어떻게 말하면 좋은지 알 수가 없어서 그래요. 나로서는 이렇게 밖에는 말할 수가 없어요. 특히 당신에게는. 왜냐하면 이건 본심이니까요. 그야 지금은 그렇죠. 조용한 말투로 그녀는 말했다. 하지만 언젠가는 지금 나에게 한 말까지 잊는 날이 올 거예요. 당신이 다른 인생을 시작하는 날이.
그러자, 내 입에서 넘치듯이 많은 말이 쏟아져 나왔다. 그녀는 머리를 내 가슴에 올리고 누웠고 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애무했다. 욕실에서 풍겨 나오는 비누 내음과 호숫가의 짙은 목련 향기가 어우러져 독특한 향을 발산하고 있었다. 당신은 앞으로 한 평생 내 곁에 있어줘야 돼요 라고 나는 말했다. 이덴과 마이클. 우리 둘이서 한 평생을 즐겁게 살아 가자구요. 그리고 당신 아이들도 함께 살아도 상관 없어요. 당신이 할머니가 되었다고 해서 그게 무슨 문제가 되죠? 그야 나는 당신 아이들의 아버지는 될 수 없겠죠. 두 아이에게는 친아버지가 있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 아이들에게 다정하게 대해 줄 수는 있어요. 그리고 무언가를 가르쳐 줄 수 있을지도 모르죠. 유익한 책을 선택해 줄 수 있을 거고 파리에 가면 미술관에 데리고 가줄 수도 있어요. 다 함께 불어 공부를 하면서 즐겁게 살자구요. 만약 내 그림이 팔리지 않거나 GI 장학금만으로는 살 수가 없다면 나는 무엇이든 안정된 직장을 잡겠어요.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든 하겠어요. 그리고 당신과 아이들에게 밥을 먹이고 예쁜 옷을 입히고 인간다운 생활을 누리게 해 줄 거예요. 그리고 남는 것은 모으면 되는 거죠. 그림은 직장에서 돌아와서 밤에 그려도 되고 주말에 그려도 되니까. 살다 보면 돌파구가 생길 테고 나는 그림만으로 살 수 있게 될 거예요. 틀림 없다구요. 아, 자신 있어요. 당신만 곁에 있어주고 내가 그림 수업을 하는 동안 여러 가지로 힘이 되어 준다면 말예요. 진정으로 나는 당신이 필요해요. 당신을 놓칠 수가 없어요. 지금도, 앞으로도. 우리 둘이 늙은 후에도. 나는 말을 끝낼 수가 없었다. 계속해서 말이 흘러 나왔다. 어리석고 서글픈 말들이.
그녀는 꼼짝 않고 말 없이 듣고 있었다. 그 몸은 천천히 경직되어 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드디어 나는 할 말을 다 퍼붓고는 입을 다물었다. 키스하려고 몸을 틀었더니 그녀 얼굴은 젖어 있었다.
지금까지 그렇게 말해 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어요. 속삭이듯 그녀는 말했다. (언젠가 기찻길 건너에 있는 숲에서 사랑해 라고 나에게 말하게 한 적이 있다는 것을 잊었단 말인가.)
바보로군요, 당신은.
사랑해. 나는 말했다. 그녀는 아직 나의 진심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성의를 다하여 그 고전적인 단어를 말한다면 모든 것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한 단어, 한 단어를 천천히 말했다. 사랑해-.
그녀는 말이 없었다. 풀벌레가 소리를 내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호숫가 쪽에서 새의 요란한 웃음소리와 같은 울음 소리가 들렸다.
사랑해!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나는 말했다.
그녀는 한숨을 쉬면서 싸늘한 손가락을 내 입에 대고 말했다. 그래요, 나도. 아마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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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노트로부터의 발췌
그녀는 나를 어디든 들여보내 주는데, 마음에만은 들여보내 주지 않는다.
래드 캐논 녀석이 어딘가에서 싸움을 한 모양이다. 오늘 아침 식당에서 만났을 때 양손의 살갗이 까져 있었다. 그러나 얼굴은 말짱했다. 상대의 펀치가 래드의 얼굴까지는 미치지 못한 것일까. 샐의 얘기로는, 기지내에서는 래드가 <트레이더즈 빅>에서 어딘가의 `빨간목' 녀석을 때렸다는 소문이 나돌았던 모양이다. 래드가 그 녀석을 해치운 후에 SP들이 찾아왔다. 그런데 그 SP 녀석은 래드의 오랜 친구였으므로 가련한 `빨간목' 녀석이 의식을 회복할 즈음 이번에는 SP들이 그 녀석을 두둘겨 팬 모양이다.
나도 언젠가 래드와 일전을 벌여야 할까? 솔직히 말하면 두렵다. 래드는 터프하고 냉혹한 놈이다. 그 녀석의 눈에는 언제나 저승 사자처럼 무감동한 빛이 서려 있다. 죽음을 수많이 보아 온 것 같은 무감동한 빛이다. 저쪽이 이쪽을 죽일 작정으로 대적해 오면 나 역시 놈을 죽일 각오로 대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도 녀석을 대적해 나갈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아무래도 대적해야 할 때는 선제 공격을 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녀석에게 그 광기와 증오와 노여움을 분발시키게 할 여유를 주게 되면 그것만으로 나의 패배인 것이다. 단숨에 그 놈을 때려눕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도 역시 두렵다.
이덴은 그곳에 털이 돋아나기 시작한 모양이다.
다저스가 로스앤젤레스로 본거지를 옮길지도 모른다는 신문 기사 스크랩을 아버지가 보내 주었다. 자이언트의 오너, 호레이스 스토넘이 혹시 자이언트도 그쪽으로 이동할지 모른다는 말을 하고 있다. 단지 한 팀과 시합하기 위해 일부러 비행기로 날아간다는 것은 경비가 지나치게 많이 들게 되므로 대 리그의 이사회는 한 팀만의 본거지 이동은 허가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즉 자이언트도 다저스와 함께 본거지를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확실히 그것은 있을 수 있는 얘기다. 내년이나 내후년에, 오마리는 거액의 텔리비전 방영료가 탐나는 것이라고 신문은 쓰고 있다. 믿기지 않는다. 이곳의 신문에서는 스포츠 관계의 기사는 모두 AP의 것을 내보내고 있다. (AP는 캐니프가 처음 뉴욕으로 찾아왔을 때 근무한 통신사이지만. 그는 그곳에서 한 편의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로 가게 되는 것일까?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하지만......
마일즈 레이필드가 가지고 있는 책으로 티티아노라는 인물이 그린 굉장한 그림을 보았다. 인물이 빛나고 있는 것이다. 그림은 냉혹해 보이는 얼굴의 늙은 추기경이나 교황들인데 그 얼굴이 마치 황금처럼 빛나고 있다. 그림 물감과 오일 그리고 테레빈유밖에 사용하지 않고 있는데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한 것일까? 마일즈에게 물어 봐야지.
이번 달에는 초상화의 아르바이트로 46달러를 벌었다. 마일즈 레이필드가 인물의 표정이 부드러워지는 쵸크와 목탄으로 바꾸어 보라고 충고해 주었다. 그가 말하는 대로였다. 나는 쵸크로 그린 뒤를 손으로 비벼 농담을 살리는 것을 좋아했다. 어쩐지 여자의 얼굴을 손으로 어루만지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 돈으로 산 것-셔츠 두 장하고 이덴에게 선물하기 위한 <위대한 게츠비>라고 하는 책. 이 책은 댄버가 권해서 읽어본 것인데 멋진 책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주류 밀조업자인 울프샤임을 제외하고는 등장 인물들에 대해 잘 이해할 수가 없다. 이덴에겐 귀걸이도 사주려고 생각했지만 결국 살 수가 없었다. 내가 고르는 것을 그녀가 마음에 들어할지 어떨지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은 귀걸이 가게에서 머뭇거리다 나오고 말았다......
신문에서는 여전히 만화의 주인공들이 활약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미 관심이 희미해진 것 같다. 지금은 만화보다 그 빨간 구두를 빨리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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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 생활은 물살빠른 강기슭의 울퉁불퉁한 도로처럼 지나가 버렸다. 꽉 짜여진 일과와 습관 덕분에 일은 몹시 쉬웠다. 그러나 본질적인 생활은 밤에 비로소 시작되었다. 혹인들의 거주구에 여전히 드나들며 초상화를 공짜로 그려 주거나 함께 먹고 마셨다. 할레르슨이 기분 나빠하는 것도 잘 알면서 그들과 함께 식당에 가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과 거리에 나가는 일은 훨씬 줄어들었다. 이 일로 뭔가 물어올 경우에는 그림을 그리느라고 바빴다든가 애인과 만나기 때문이라든가 당직이기 때문이라든가 적당히 핑계를 대곤 했다.
사실 나는 위니와는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임신했다든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든가 그런 따위의 얘기를 듣는 것이 두려웠다. 그녀가 정문 앞을 어슬렁 거리기라도 하면 난처해지고 만다. 임신한 흑인 여자가 백인 해군을 쫓아다니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기라도 한다면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있다. 나는 그녀가 이덴과 대결하거나 하는 사태가 일어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녀에게 어떤 말썽이 일어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나중에 내가 이덴 앞에 꿇어앉아 그녀가 뉴올리언스로 갔던 그 날 밤에 일어난 것을 해명해야 하는 궁지에 몰리는 것은 어떻게서든 피하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자기 자신 속에서 감정이 소란스러워지는 것이 두려웠다.
솔직히 말하면 그 무렵, 이덴과 섹스를 하고 있는 동안에 위니의 탄력있고 부드러운 육체를 떠올리곤 했던 적이 몇 번인가 있었다. 나는 그녀의 작은 방의 바닥에서 위니를 품에 안고 있었다. 남편을 배신하고 있는 위니를 안아 주는 것으로 이덴을 배신하고 있었다. 위니의 천진난만한 분명치 않은 목소리가 귀에 메아리치고 어떤 남자와도 마음대로 상대하지 못하는 여자의 가련함 같은 것이 되살아나곤 했다. 이덴과 섹스하고 있는 동안 적어도 한 번은 나는 뇌리에 위니를 떠올렸다. 다시 한번 위니를 만난다면 다시 그녀를 갖고 싶어질까봐 나는 두려웠다. 이덴에 대한 연정 따위는 가볍게 떨쳐버리고 거치른 욕망이 되살아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두려웠다. 나는 이덴을 사랑하고 있다. 그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위니의 뜨겁고 방자한 육체의 이미지도 좀처럼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또 한가지, 내가 남몰래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만약 위니의 일을 이덴이 알게 되면 그것을 기회로 그녀도 다른 남자들과 어울리기 시작하는 것은 아닐까. 자기와 이덴 산타나 사이에는 어떤 묵계와 같은 것이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 묵계는 어떻게서든 끝까지 지키고 싶었다. 자기에게는 음식물과 수면과 호흡할 공기가 필요한 것처럼 이덴이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편 한국전쟁은 고비를 넘겨 점점 수그러들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기지의 활동도 진정되어 갔다. 해군은 신규 징집을 전면적으로 정지하게 되었으므로 신병이 찾아오는 일도 없어졌다. 아시아 해역으로의 돌연한 전출 명령을 받는 일도 없어지게 되었다. 사관도 징집병도 양키도 남부인도 에리슨 비행장에 갇혀 버리고 말았다. 모두들 지루함을 주체스럽게 생각했고 자기 나름대로 처치법을 생각해 내야만 했다. 막스와 샐은 해상 근무를 신청했는데도 잠시 대기한다는 통고를 받았다. 댄버는 조기 제대 신청서를 제출했다. 나는 매일 오후 막스와 체육관에 다니게 되었다.
머리 숱이 몹시 많아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심심풀이로 그림도 많이 그렸고 유화도 해 보았지만 그것은 심한 졸작이었다. 색이 이상하게 흐려져 광선을 잘 포착하질 못했다. 책도 많이 읽었다. 어느 날 오후 진료소 바비 볼덴의 방에 가서 체중을 재어 보았다. 순간 체중계가 고장난 것이 아닐까 하고 눈을 의심했다. 지방은 거의 붙질 않았는데 체중이 12파운드나 불어났던 것이다. 밤에 이덴과 서로 사랑하고 있으면 그녀가 이두박근에 엄지손가락의 손톱을 세우는 일이 있다. 그 아픔을 느끼기 시작하면 나는 이를 악물고 근육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그녀의 손톱이 튕겨 나가고 마는 것이다. 신장도 반 인치 정도 커졌다.
어느 날 오후 나는 마일즈 레이필드와 기지 내의 코프터 로드를 걷고 있었다. 그는 부인의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듣고 있는 동안에 자기가 어떤 연극에 출연하고 있었으며 그는 누군가가 쓴 세리프를 읽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든 일을 기억하고 있다. 마일즈의 어조에는 다분히 노여움이 서려 있었다. 그게 벌써 2주일째 편지를 보내오지 않았어 라고 그는 말했다. 아니 3주일째인지도 모르겠군. 이젠 뭐 아무래도 좋지만. 차라리 이혼해 버릴까 하고 생각하고 있어.
나에게 동조를 구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 조언을 청해 온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생각을 정리해 보려고 하자 누군가가 클랙슨을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멜카도였다. 멕시코 육군의 제복을 입고 뚜껑을 내린 그의 콘버티블의 핸들을 쥐고 있었다. 뒷자석에는 여행용 가방이 쌓여 있었다.
"이보게, 잘들 있게나!" 명랑하게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 보였다.
"나는 이제 고향으로 돌아간다네."
우리들은 콘버티블로 다가갔다. 그는 헬리콥터의 조종 훈련을 정식으로 마치고 프리체트 대령과 국방 장관의 사인이 들어있는 종료 증명서를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멕시코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 연락을 취하도록 하지 않겠나." 그는 그렇게 말하고 우리들에게 명함을 주었다. 어느 회사의 이름, 주소, 전화번호가 스페인어로 적혀 있었다.
"멕시코에 올 일이 있으면 이곳으로 연락을 주게. 사실 그곳은 아버지 회사이지만 말이야. 하지만 나의 거처는 알고 있을 걸세. 우리 멕시코인들의 입버릇이지만 `미 카사 에스 수 카사'일세. 내 집은 당신 집이라는 말이지......"
마일즈가 말했다. "하지만 당신이 초대한 녀석들이 한꺼번에 밀어닥치면 그야말로 스타디움이라도 빌리지 않으면 수용할 수 없을 텐데요."
"글쎄...... 나의 아버지는 스타디움도 가지고 있으니까." 멜카도는 말하고 미소지었다. "그러니까 걱정없어......"
우리들은 악수를 나누었다. 멜카도는 손을 흔들고 게이트쪽으로 멀어져갔다. 어쩐지 슬펐다. 멜카도는 선량한 남자였다. 부하들을 턱으로 혹사하는 다른 사관들과는 달랐다.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는 동안 나의 속에서는 전혀 다른 감정이 솟아올랐다. 안도감. 그것은 곧 행복감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멜카도는 드디어 가버렸다.
나는 이미 자기가 미해군에 혹사당하고 있는 밤에 이덴 산타나가 누군가와 맥시코로 가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고 걱정할 필요는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가버렸다.
나는 행복했다.
아주 잠시 동안은.
거의 30초쯤 지나자 가슴에 작은 동요가 다시금 솟아 올랐다. 멜카도는 멕시코로 사라지기 전에 다시 한번 팬서콜라의 거리에 들를 작정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어쩌지? 저 상냥한 작별의 말은 산카로스 호텔의 실크 시트 위에서 몇 시간 이덴 산타나와 지내기 전에 이 나를 방심케 하기 위한 연기였다면? 이덴이 그의 유혹에 빠져들 이유는 오직 하나, 호기심일 것이다. 멜카도와 잠자리를 같이 한 적이 있는 로버터가 뭔가 그녀의 마음을 부추기는 말을 할지도 모른다. 콘버티블로 지나가는 그를 한 번 보았을 때 마음을 흔들어 놓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내일은 그는 멕시코로 떠나가 버리고 말 테니까 내게 들킬 염려도 없다.-그렇게 이덴은 생각할지도 모르지 않는가 말이다.
"이 봐, 왜 그래?" 마일즈가 말했다. "뺨이 실룩거리고 있어."
"으응 아무 것도 아니야. 아무 것도 아니라구. 잠깐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야."
"여자 때문이겠지."
"글쎄."
그 날 밤, 마일즈가 보급부의 당직이었다. 이덴은 잔업으로 늦어졌다. 이대로 병영에서 빈둥거리고만 있으면 점점 더 망상에 시달릴 것이 틀림 없다. 나는 일하기로 했다. 마침 병사들에게 부탁 받은 초상화도 열 장 정도 밀려 있다. 그 때 나에게는 무엇보다도 돈이 필요했다. 저녁 식사를 마치자 한잠 자고 긴긴 밤의 아르바이트를 위한 에너지를 비축했다. 잠이 깨자 주위는 완전히 어둠이 깔려 있었다. 세수를 하고 머리를 상쾌하게 한 다음 쵸크와 도화지와 사진을 가지고 보급부로 나섰다.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하늘에는 헬리콥터가 몇 대 날고 있었다. 본부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마일즈는 틀림없이 바쁘게 일하고 있을 것이다. 마일즈의 푸념을 들어주는 것도 흥미로울지 모른다. 그림을 그리는 사이사이에 그의 얘기를 듣고 있으면 이덴 산타나의 일을 잠시 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보급부에는 마일즈의 모습은 없었다. 누구 한 사람 없었다. 그의 책상에 다가가자 재떨이는 담배꽁초로 수북했다. 의자에는 마일즈의 이름이 테두리 안쪽에 적힌 해군의 제모가 걸려 있었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없었다. 나는 자기 책상에 다가가 생기가 없는 금발의 여자 사진을 옆에 놓고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에 입구쪽의 문이 열리고 기계 담당자가 부픔의 청구서를 팔랑거리면서 들어왔다. 그것을 받아들고 이런저런 항간의 얘기를 나눈 다음 마일즈는 어디에 갔을까 하고 생각하면서 사판캠을 가지러 갔다. 그리고 창고에 발을 딛어 넣으려는 순간 얘깃소리가 들렸다. 나지막하게 숨죽인 얘깃소리. 나무 상자의 벽 저쪽의 `비밀 아뜨리에' 쪽에서 들려왔다. 한 사람은 마일즈 레이필드. 또 다른 목소리의 주인공은 프레디 헤러드였다. 기계 담당에게 사판캠을 건네주고 영수증에 사인하게 했다. 그가 물러가는 것을 확인한 후에 나도 병영으로 돌아오기로 했다. 사인이 끝난 서류를 마일즈의 모자 위에 놓고 내 짐을 정리한 후 가랑비를 뚫고 병영으로 돌아왔다. 침대에 앉아 어두컴컴한 전등불 아래서 나는 계속 그렸다. 상상에 의지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사진에 충실하게 그렸다. 소등 시각이 되었다. 이번에는 화장실로 이동했다. 변기에 앉아 무릎에 도화지를 놓고 그려 나갔다. 병사들이 계속해서 들어와 수면 전의 세수 의식을 마치고 돌아갔다. 녀석들은 이미 나의 그러한 모습에는 익숙해 있어 그림을 들여다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엔 아무도 오지 않았다. 심야의 정적에 감싸인 채 나는 혼자 계속 그렸다. 석 장째의 사진의 주인공은 까만 눈의 금발이었다. 너무나 완벽한 미인이어서 재미없는 얼굴이다. 금발 쪽이 흑발보다 그리기가 어렵다. 하지만 쵸크가 나를 위해 활약해 주었다. 마일즈 레이필드에게서 배운 테크닉을 여러 번 되풀이하고 있는 동안 나는 자연스럽게 그것을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몇 시경이었을까 철망문이 열렸다 닫힌 소리가 난 것에 이어 발소리가 들려왔다. 입구쪽을 보자 프리체트 대령과 래드 캐논이 가만히 이쪽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황급히 일어서려고 했지만 이미 때가 늦었고 래드 캐논이 재빨리 세면실로 들어와 양손을 들면서 말렸다.
"움직이지 마, 데블린." 목소리는 얌전했지만 눈은 노여워하고 있었다. 누군가를 체포하려고 하는 그런 서슬이 시퍼런 모습이었다.
"대령님께서 너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고 하신다."
대령이 세면실로 들어왔다.
"수고했네 캐논." 물러가도 좋다고 그 목소리는 말하고 있었다.
"실례하겠습니다 대령님." 캐논은 경례를 했다. 소리를 내지 않게 문을 닫자 그는 재빨리 나가버렸다. 흥, 알랑쟁이 같으니라구 라고 생각했다. 캐논이 사라지는 것을 기다려 대령은 이쪽을 향했다.
"최근 이곳저곳에서 볼 수 있는 초상화를 그리고 있던 것은 자네였나?"
"네, 그러리라 생각합니다."
"아무튼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으니까 말이야. 로커, 격납고. 드디어 사관 거주구에까지 보이기 시작하더군."
그래서 어떻다는 것입니까 라고 나는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물론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게다가 내가 보는 바론 그림의 됨됨이도 그리 나쁘지 않더군."
도화지에 그려져 있는 금발의 여인의 그림을 대령은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자네는 요령을 터득한 것 같군 그래, 데블린. 혹시 재능을 타고 났는지도 모르겠고."
"고맙습니다, 대령님."
"나도 해군에 들어온 지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까 모든 부류의 예술가가 입대해서는 제대했고 또 입대해 오는 것을 보아 왔다네. 그들은 대개 나야말로 차세대의 피카소란 듯이 생각하고 세상으로 나가지. 그리고 미술 학교에 입학한다네. 졸업하자마자 미술에 관련이 있는 일거리를 찾아내려고 애쓰지. 끝내는 자신이 뛰어나게 재능이 있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깨닫더군. 그래도 어쨌든 먹고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지. 더욱 사정이 나쁜 경우는 그들이 결혼해 버린다는 거야. 그렇게 되면 다시는 그들에 대한 소문을 들을 수 없게 되지. 그런 다음 자주 있는 일이지만, 그들은 해군에 재입대하는 거야. 이곳이라면 거물로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 말이야.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겠나, 데블린?"
"네."
"아냐, 아직 자네는 알지 못할 거야. 그러한 것을 이해하기에는 자네는 너무 젊어."
푸하고 한숨을 내쉬자 대령은 제복의 안쪽 호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리고 지갑 안쪽에 붙어있는 비닐케이스를 뒤져 한 장의 사진을 빼냈다.
"그러나 자네 솜씨가 뛰어난 것은 사실이네."
언젠가 그의 방에서 보았던 사진의 주인공 그의 부인의 사진을 이쪽에 건네주면서 대령은 말했다.
"자아, 이걸 좀 부탁하네. 가능하다면 커다란 그림으로 고쳐 그려주게."
"알겠습니다, 대령님."
"사례금은 얼마인가?"
"그건 저어, 얼마든 상관 없습니다. 저는 그저......"
"쓸데 없는 소리 말게, 데블린. 나도 다른 동료들이 지불하는 액수를 지불하겠네. 자네의 사령관이란 것을 빌미로 에누리할 생각은 없어."
"저어, 5달러입니다."
"좋아, 잘 그려 주면 10달러를 내지."
"알겠습니다."
"잘 자게, 데블린."
그렇게 말하자 대령은 경례도 생략하고 돌아섰고, 가랑비를 맞으며 잠들고 있는 그의 화단쪽으로 나갔다.
대령이 남기고 간 사진의 주인공을 나는 지긋이 응시했다. 동그란 얼굴, 또렷한 이목구비, 해맑은 눈, 뺨에 작은 보조개가 있다. 대령의 집무실에서 본 사진보다도 젊었을 때 찍었던 것인 모양이다. 뒤집어 보자 그녀가 써 넣은 글이 있었다.
`잭 프리체트 소위에게. 변함 없는 사랑을! 캐더린.'
쟈신도 모르게 가슴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이덴의 그림을 수백 장이나 그렸는데 그녀 사진을 한 장도 가지고 있지 않다. 단 한 장도 말이다. `변함 없는 사랑을'이라고 적혀 있는 사진은 한 장도 가지고 있지 않다.) 가지고 있는 것이란 그녀가 뉴올리언스에 출발하기 전에 갈겨쓴 그 메모 뿐이다. 그곳에는 `사랑해요'란 글자가 있지만 `변함 없는'이라고는 적혀 있지 않다. 그렇다고 나는 생각했다-만약 자기보다 먼저 이덴이 죽어 버린다면 어떻게 할까? 이렇게 열애하고 있는 여자를 추억의 실마리가 되는 것을 나는 단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이 되지는 않을까.
대령의 부인의 사진을 도화지에 끼워넣자 나는 메인사이드에 근무하고 있는 슐레진저의 애인의 그림을 그렸다. 그 때 마일즈 레이필드가 들어왔다.
"자네가 보급부쪽으로 오리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말했다.
"갔었어, 한 번."
"그래?"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은 다음 그는 잰걸음으로 침대쪽으로 걸어갔다.
거울에 비친 자기의 얼굴에 나는 잠시 들여다 보았다. 처음 이곳에 착임한 날이지만 지금은 아득한 옛날처럼 여겨진다. 그 즈음 아직 내가 마음에 남겨두고 있던 브룩클린의 여자애의 얼굴은 이미 희미해져 있었다. 지금 나는 무엇보다도 거울에 비치고 있는 자기 등 뒤에 이덴이 서 있어 주길 바랬다. 욕정에 눈을 적시고 있는 그녀가 서 있어 주기를 바랬다. 나는 뒤를 돌아다 보았다. 그녀는 빨간 구두를 신고 있을 것이다.
철망창이 탕하고 소리를 냈다. 다시 또 한 번 하지만 누군가가 들어온 기색은 없다. 나는 문으로 다가가 고리를 벗기고 문을 뒷짐진 손으로 닫았다. 바깥 도로는 비에 젖어 반짝이고 있었다. 여름 날 오후 브룩클린의 나의 집 옥상에 서서 비를 바라보고 있었을 때의 일을 생각해 냈다. 그 옥상이 지금은 100만 마일이나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렇다, 동생들에게도 편지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지금 세계의 혼란에 관해 배우고 있는 중이라고 써 보내자. 동생들 역시 그것을 배우는 편이 좋을 테니까.
다음 순간, 아니야 그만두는 편이 좋아 라고 고쳐 생각했다.
그것은 언젠가 그들 자신이 배워야 할 일이니까.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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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밤 나는 마일즈 레이필드의 일을 이덴에게 설명했다. 그의 재능, 관대함, 친절함에 관해. 그리고 자기는 그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있지만 다른 한 면이 염려가 된다는 것도. 마일즈의 부인의 일도 나는 얘기했다. 프레디 해러드와 마일즈의 스케치북에 그려져 있는 남성의 나체화에 대해서도, 설마 그러한 얘기가 뜻하지 않은 그와 같은 결말로 맺어지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날 밤은 모든 것을 바꾸어놓고 말았던 것이다.
우리들은 트레일러 안의 작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향해 있었다. 이덴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 연기 덕분에 그녀의 눈이 희미하게 보였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렇군요 라고 그녀는 말했다. 확실히 그 마일즈라고 하는 사람은 조금...... 이상해요.
그리고 다시 담배를 피웠다.
하지만 당신은 사실은 알고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베이비? 즉 그가 남성과 뭔가를 하고 있는 장면을 목격한 것은 그건 그래요. 아니잖아요?
하지만 가령 그가 정말 그렇다고 한다면. 즉, 그 필리핀인 젊은이와 어떤 관계가 있다면-. 거기서 이덴은 한 호흡 쉬었다.
만약 그렇다고 하면 그렇군요, 당신은 질투하고 있는 것이 아니예요?
나는 부루퉁해 말했다. 농담이 아니라구요...... 당신은 알고 있잖아요, 난 그렇지가 않다는 것을-.
입가에 살며시 웃음을 띠우고 그녀는 말을 이었다. 가령 그가 그 필리핀인 젊은이와 사랑의 도피를 한다면 당신은 어떻겠어요?
어떻다 할 것도 없죠. 하지만 난-.
정말요? 당신은 아주 조금이라도 그를 사모하거나 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있어요? 돌아와 주었으면 하고 생각하거나 하지 않을까요?
난 대답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당신은 아무런 근거도 없이 나에게 질투한 적이 있잖아요. 그렇다면 그 마일즈란 사람에게도 질투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있어요?
그야 물론 단언할 수 있죠. 그는 남자니까. 그리고 나는-.
호모가 아니니까?
그래요!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어 나의 손에 가져다 대었다.
인간이란 대단히 복잡한 동물이라는 것을 당신도 빨리 배워야 해요, 베이비. 알겠어요? 모든 여자들 속에는 작은 남자가 살고 있어요. 모든 남자 속에는 작은 여자가 살고 있고요. 100퍼센트 남자라든가, 100퍼센트 여자인 사람은 존재하지 않아요. 마일즈 레이필드란 당신의 친구 역시 그래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거예요.
나를 보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그 때는 마음에 거슬렸다. 그 미소. 어린이를 가르치는 국민학교 선생 같은 자신만만한 미소.
알았어요. 뜨거운 어조로 나는 말했다. 당신이 말하는 대로라고 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째서 나는 그 녀석에게 질투를 해야 하는 거죠?
이덴은 담뱃재를 튕겨 떨구었다.
당신의 얘기를 듣고 있으면 알아요, 만약 그 마일즈란 사람이 자취를 감추면 당신은 틀림없이 슬퍼할 것이라는 것을.
그럼 그러니까 호모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요?
아뇨, 다만 당신의 그 마일즈란 친구와 언제까지나 사귀고 싶어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뿐이에요.
흥, 바보 같으니라구! 나는 망설여지는 마음으로 말했다.
그녀는 양손을 합해 A의 글자를 만들고 그 꼭대기 너머로 나를 보고 있었다.
어째서 그런 말을 하죠?
당신이 바보 같은 소릴 하니까.
그녀는 눈썹을 찌푸리고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그렇게 소리를 지르지 말아 주세요. 뿌리치는 것 같은 싸늘한 어조였다.
또야. 저 잘난 체하는 어조. 나는 탁하고 테이블을 두드렸다. 재떨이가 튕겨나 바닥에 떨어졌다.
나는 호모 따위가 아니라구요.
누가 그렇다고 했어요?
그럼 무슨 얘기예요, 도대체?
그녀는 대답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전에 이쪽은 일어서 목소리를 거칠게 그리고 격하게 말했다.도대체 당신에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기나 한 거예요? 다른 사람도 아닌 당신이! 로버터와 그런 짓을 한 당신이!
그녀의 얼굴에 노여움과 두려움이 뒤범벅이 된 표정이 떠올랐다. 그녀도 일어나 뒷걸음질쳤다.어떻게 그런 말을!
말이 지나쳤다고 하는 것을 나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게 아니라...... 등의 뜻 없는 말을 중얼거리면서 담배 꽁초를 줍기 시작했다. 노여움은 이미 희미해졌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나온 말을 다시 주어 담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말했다. 기지로 돌아가는 편이 좋을 것 같군요, 베이비. 하룻밤 자고 나면 당신의 노여움도 덜해지겠죠. 돌아가요. 지금 당장.
뭐라고요?
다음 순간 그녀의 입에서도 말이 뒤를 이어 넘쳤다. 그 얼굴은 일그러졌고 미간에 주름이 지어졌다. 서로 사귀게 된 이래 처음으로 이덴이 밉게 보였다. 늙어 보이기도 했다.
그녀는 소리쳤다. 기지로 돌아가라고 했어요. 지금 곧. 에리슨 비행장으로 돌아가요. 수병들이 우글거리고 있는 곳으로. 난 말예요. 승강이는 이젠 진절머리가 나요. 상대가 당신이든 다른 누구이든. 입씨름이란 이미 인생을 열 번을 더 되풀이한다 해도 결말이 나지 않을 만큼 체험해 왔으니까. 그리고 당신의 그 표정은...... 그게 뭐죠? 날 칠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군요, 마이클 데블린. 지금 당신의 그 얼굴은, 전에 알고 있던 남자와 꼭 닮았군요. 남자들은 모두 같아요. 자기 귀에 거슬리는 것은 들으려고 하지 않는군요. 그래 귀찮은 것은 들으려고 하지 않아요. 그렇다면 이곳에 있어 봤자 별 볼일 없잖아요. 자아, 돌아가 주세요.
나는 재떨이를 벽에 내동댕이쳤다.
젠장! 숨을 할딱이면서 나는 말했다. 이런 바보 같은 얘기가 어디있어, 제기랄!
잡아 뽑듯이 문을 열어 재켜 탕! 하고 뒷짐을 쥐고 뒤로 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
하이웨이를 향해 걷고 있는 동안에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두 사람이 지금 같은 싸움을 한 것은 처음이었다. 피차 거칠은 목소리로 욕설을 퍼붓는 일 따위는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도-오늘 밤 우리들은 큰 소리로 떠들어대고 물건까지 던져댔다. 어쨌든 나는 그러했다. 잔혹한 말을 나는 말해 버리고 말았다. 문득 발끈해서 화를 내고 말았다. 그 결과-두 사람의 사이가 깨지려고 하고 있다. 원인은 말이다. 호모. 비역. 멜카도라든가 그녀의 전남편이나 또 다른 애인이란 것이 원인이었던 것이 아니다. 계기는 마일즈 레이필드였다. 호모일지 모르는 마일즈의 일로 우리들은 티격태격하고 말았던 것이다.
도대체 그녀는 무얼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나에게도 호모기가 있다는 말이라도 하고 싶었을까? 학교의 선생 같은, 그 잘난 체하는 얼굴로. 대체 어째서 그녀는 그런 일에 흥분을 하는 것일까? 내가 마일즈의 일을 설명하려고 하자 화살을 내게 향해 트집을 잡으려고 한다. 그것에 반발하자 도리어 고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나에게 덤벼들었고 나도 반박했다. 아아 틀림없이 그것이 좋지 않았다. 내가 반박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나는 무엇이나 말하는 것을 고분고분 듣는 순진한 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베이비라고 말하는 것이 그녀의 입버릇이었으니까. 어이가 없다. 나는 베이비 따위가 아니다. 오늘 일로 그녀도 알았을 것이다. 그쪽이 덤벼들면 나도 되받아 친다는 것을. 사나이답게. 이것으로 그녀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다. 대체 나 같은 멋진 남자를 쉽게 찾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이덴은? 아니다, 잠깐만...... 혹시 잘못을 저지른 것은 내쪽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녀는 절대로 용서해 주지 않을 것이다. 잘못을 저지른 것이 나라면 모든 것은 끝장이다. 디 엔드. 기다려, 정말 그런가? 틀림없이 그렇다. 내가 알고 있는 수많은 남자들처럼. 진정으로 여자를 사랑하면서 사랑을 받지 못했던 남자들처럼, 바보! 싫어! 그렇게 되는 것은 싫다구!
순간 발길을 멈춰 돌아설까 하고 생각했다.
(지금이라면 아직 용서를 구할 수 있을지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자신이 답을 내었다. 안 돼 그럴 순 없어. 발끈한 것은 나빴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 로버터의 일로 심한 말을 하고 말았다. 재떨이를 던져 나빴다고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간청하고 싶지는 않다. 마일즈 레이필드의 건은 당신이 말하는 대로라고는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확실히 그가 없다면 나는 그를 그리워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단연코 그의 성기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이덴 역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식의 싸움으로 이별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그래도 그녀가 노라고 말했다고 하면 어쩌지? 문을 열어 주는 것마저 거절한다면? 그리고 그렇다, 그녀는 사실 말이지 헤어지기 위한 구실을 찾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쩔까? 혹시 그녀가 이런 소란을 일으킨 이유도 그런 이유 때문인지 모른다. 생각해 보면 이렇게 되도록 유도한 것은 그녀인 것이다. 내가 아니다. 이덴이야, 그녀가 이렇게 되도록 한 것이다. 제기랄 이젠 될 대로 되라지. 아니 나는 역시 그녀가 필요하다. 그녀 곁에 있기를 바란다. 아니 이렇게 되도록 한 것은 그녀야. 라고 하면 그녀쪽에서 먼저 사과해야 하지 않는가. 그렇다마다. 그녀쪽에 용서를 바라는 전화를 먼저 걸어오게 해야 한다. 나에게 돌아와 달라고 간청하게 해야 한다. 좋아 이제부터 O스트리트로 가기로 하자. 나는 생각했다. <다트 바>로 가자. 그곳에서 샐이나 막스를 만나자. 어때, 그런 것은? 좋겠지. 그리곤 실컷 취하자. 당신이 없어도 나는 까딱 없다구.
아암, 까딱없고 말고.
난 발길을 멈추었다.
길가의 숲 속에서 뭔가가 움직이고 있다. 순간 돌을 주어들고 그늘에 숨었다. 다시 뭔가가 움직이고 있다. 이어 고통에 찬 웅얼대는 신음 소리. 그리고 조약돌을 구두로 밟아 짓누르는 소리가 났다. 어떻게서든 기어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움직임. 돌을 들어올리고 신음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다가갔다. 엎드려 기려고 하는 것은 바비였다.
그는 자갈 속에 엎드려 있었다. 셔츠는 갈기갈기 찢기고 등의 베인 상처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양팔을 앞쪽으로 내밀고 있었지만 손목께가 흔들거리고 있다. 그래도 팔꿈치를 짚고 전진하려고 하고 있었다. 얼굴은 고통에 일그러져 있었고 나도 알아보질 못했다. 아니 이 지상의 누구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나는 트레일러쪽을 돌아보았다.
이덴!
괴로워 몸부림치는 그의 겨드랑이 밑으로 양손을 집어넣어 안아 일으키려고 했다. 그의 몸은 생각했던 것보다 크고 무거웠다. 찢겨진 살갗 표면이 피로 미끈미끈했다. 이덴에게 발을 잡게 하고 그녀의 차 뒤쪽 시트에 바비 볼덴을 태웠다. 양손은 축 늘어져 있었다. 턱이 움직이고 무슨 말인가가 흘러 나왔지만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제기랄! 하고 그 입은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집으로 데려다 줘. 아아, 당신인가. 당신인가. 부탁해. 캐티를. 부탁해.
차를 스타트시켜 곧 나무들 사이에 밝은 불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이덴이 알아차렸다. 볼덴의 집. 핸들을 꺾자마자 나는 악셀을 밟고 하이웨이에서 갈라진 갈림길로 꺾어들었다. 나무숲 저쪽에서 바비와 캐티가 같이 살고 있던 집이 불타고 있었다. 흑인들이 나무들 사이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대부분이 웃통을 벗어 던지고 양동이를 나르고 있었다. 아이들이 도로 앞을 세차게 달려갔다. 나는 속도를 떨어뜨렸다. 이덴은 조수석에서 몸을 웅크리고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다. 크게 뜬 눈에는 공포가 엿보였다.
그러자 전방에 무언가 색다른 것이 보였다.
불과 30피트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호수 기슭에 우두커니 홀로 서있는 나무. 그 가지에 양팔이 묶여진 상반신이 알몸인 캐티가 매달려 있었다.
머리를 뒤로 젖히고 축 늘어뜨린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등이 크게 찢겨져 있었다.
그녀는 양손을 단단히 주먹쥐고 있다.
지독히도 처참한 모습이었다.
차를 가까이 접근시켜 엔진을 끄고 밖으로 나섰다. 하지만 이덴은 내리려고 하지 않았다. 숲을 누비며 기관 단총을 손에 든 초로의 흑인이 다가왔다. 10대의 흑인 젊은이가 6명, 등 뒤를 따르고 있다. 모두가 무표정했다.
"빨리 꺼져!" 초로의 흑인이 말했다.
나는 캐티를 가리키며 병원으로 데려가야잖소 라고 했다.
"아니 내버려둬!" 초로의 흑인이 말했다.
"저건 자업자득이야. 저 여자는 이곳에 와서 살면서부터 제멋대로 행동해 귀찮은 일만 일으켰어. 저 백인 계집이 오기 전에는 이곳은 평화스러운 주택지였어. 그런데 보란 말이야. 이런 소동이 일어났어. 저 여자 덕분에 우린 지독한 피해를 입고 있어. 저 여자가 크란 녀석들을 불러 들었으니까 말이야."
KKK단. 바비 볼덴이 말한 대로였다. 혹인들이 말하고 있던 대로였다. 이건 저 비열한 큐 클럭스단의 소행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저대로 매달아 놓을 순 없어." 나는 말했다. 캐티의 양 발은 지면에 닿지 않았다. 문자 그대로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저대로 두면 양팔이 찢겨 떨어져 나가고 만다. 흑인 소년들이 저쪽으로 돌아가 생전 처음으로 보게 되는 백인 여자의 유방에 매혹되어 바라보고 있었다.
"야, 이 녀석들아 저리 갓!" 초로의 흑인이 말했다. 아이들은 그의 얼굴을 보고 캐티의 유방에 눈을 옮긴 다음 불타고 있는 집쪽으로 달려갔다. 오렌지 색의 볼은 약간 수그러들긴 했어도 주위에는 코를 찌르는 연기가 자욱했다.
흘끗 차쪽으로 돌아보았다. 이덴과 바비 볼덴의 모습은 여기서는 보이지 않는다. 초로의 흑인에게 등을 돌리자 나는 캐티가 매달려 있는 나무에 다가갔다. 옆의 풀숲에 아직 흑인 소년 둘이 숨어 있었다.
"이봐 나이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나?" 나는 물었다.
소년 하나가 날이 뒤로 젖혀진 나무 손잡이에 테이프를 감은 나이프를 내밀었다.
"이봐! 내버려 두라니까!" 초로의 흑인이 소리쳤다.
나는 그 말에 상관 않고 캐티에게 다가가 양손을 묶어 놓은 밧줄을 끊고 그녀의 무게를 어깨로 받쳤다. 그리고 축 늘어져 의식이 없는 피 범벅이 된 그녀를 지면에 내려 놓았다. 입이 살며시 벌어졌다. 유방 사이에 보기 흉하게 긁힌 자국이 나 있었다.
바로 뒤에서 누군가가 노한 소리를 질렀다.
돌아보자 그 초로의 흑인이 기관단총을 겨눈 자세를 취하고 서 있었다. 하지만 나는 태연했다. 저쪽은 진심으로 쏠 리가 없다. 나는 상대를 쏘아 보았다. 저쪽도 이쪽을 되쳐다 보았다.
"이 사람을 데려가겠소." 나는 말했다. "지금 데려 가겠소. 날 죽이고 싶으면 맘대로 하시오. 날 죽여 봐야 아무 소용도 없으니까."
그 자리에 몸을 웅크리고 당장이라도 저격당하는가 하고 생각하면서 캐티를 안아올렸다. 간신히 차까지 운반해 가자 이덴이 조수석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그 옆에 캐티를 밀어넣었다. 불은 완전히 꺼진 것 같았다. 하지만 연기는 여전히 주위에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나무 숲 속에서 동물이나 사람들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이제 다시는 돌아오지 말앗!" 초로의 흑인이 말했다. 초췌한 그 목소리에는 비애가 엿보였다. "두 번 다시 우리들의 땅으로 돌아오지 말라구! 꺼져버려! 다시는 우리들에게 참견하지 말라구! 또 돌아오면 그 땐 때려 죽일 테니까!"
나는 메인사이드로 급히 갔다. 하지만 바비와 캐티의 몸이 흔들리면 안 되기 때문에 속도를 높이지 않도록 주의했다. 이덴은 캐티의 몸에 코트를 덮어주고 껴안고 있다. 갈 곳이라곤 메인사이드밖에 없었다. 에리슨 비행장에는 야근하는 위생병은 없었고 온 펜서콜라의 어디를 찾아봐도 부상한 흑인 남자와 백인 여자를 하나의 긴급 치료실에서 진료해 줄 그런 병원은 없다. 바비는 혀가 꼬부라진 목소리로 피거품을 뿜어대면서 자꾸만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가야 해. 아아. 놈들 산을 내려오고 있어. 눈 속을. 눈을 감시해. 아니면. 아아. 대열을 무너뜨리지 말고 행진해. 이 바보야! 당했어. 그가 당했어. 바닷물이 찬 병에 1달러 짜리가 두 장, 그리고 그녀. 그렇다. 아니. 집이야. 집이 위험해. 아아, 캐티. 그래. 아아 캐티. 그래. 아아 캐티.
이덴은 줄곧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나는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바비 볼덴은 나를 버스터 일당으로부터 구해 준 대가를 치른 것일까. 아니, 아니다. 만약 그렇다고 해도 그것은 적의 동기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는 이 남부에서 백인 여자와 사는 흑인 남자였다. 그것을 언제까지 계속 숨길 순 없다. 그 초로의 흑인은 마음 속 깊이 분노하고 있었다. 그것을 보면 흑인들마저 볼덴의 행위에는 반대인 것이다. 백인이 알게 되면 미칠 것만 같이 노여워할 것이 틀림없었다. 어쩌면 그 흑인의 거주구에 멀리서 볼덴에게 사랑을 그리워하는 흑인 여인이라도 있었을 것이다. 그 연모의 정이 쌓여 드디어 질투에 미쳐 날뛰었고 KKK단 놈들에게 전화를 걸거나 투서하거나 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러고 보면 몇 개월 전의 어느 날 밤 볼덴의 집의 문을 격렬하게 노크하는 놈이 있었다. -어쩌면 캐티쪽의 누군가가 꾸민 짓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의 남편이라든가 애인이라든가. 그것이 메인사이드로부터 그녀를 미행해 그 집을 알아냈다. 그리고 KKK단에게 전화를 결어......
낡은 신문에 실려 있던 KKK단의 모습이나 빌 몰딘이 그린 KKK단의 만화가 머리에 되살아났다. 깊은 밤, 하얀 꼬깔 같은 자루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불타오르는 십자가를 지켜보고 있는 바보들. 퇴폐한 백인의 바보들. 이전에 브룩클린에서 그 패거리들을 본 적이 있지만 언제나 우스꽝스러웠다. 녀석들은 밤에 하얀 자루를 뒤집어쓰고 나서는 것이다. 아내나 아이들에게 뭐라고 하며 나오는 것일까? 깜둥이나 유태인놈이나 가톨릭 놈들로부터 좋았던 옛 미국을 구해내는 것이다. 라고 말하고 나오는 것일까? 바보 같다. 하지만 지금은 이미 한낱 우스꽝스러운 녀석들이고 하면서 끝내버릴 수만은 없었다. 놈은 나의 친구 두 사람에게 폭행을 가했고 빈사 상태의 중상을 입혔기 때문에.
메인사이드 기지의 게이트와 통하는 긴 길로 들어서면서 나는 이덴쪽을 흘끗 보았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그 뺨은 축 늘어지고 머리는 부수수하게 헝클어져 있다. 여느 때보다 몇 살은 더 들어 보였다.
게이트에 차를 가까이 대자 해병대 하사가 앞을 가로막았다. 나는 바비와 캐티를 가리키며 사정을 설명했다.
"두 사람 모두 수병으로 한 사람은 에리슨 비행장, 또 한 사람은 이 메인사이드에 근무하고 있소."
해병대 하사의 이름이 그의 가슴패기에 적혀 있었다. 개브리. 금발, 햇빛에 그을린 살갗, 그는 차 앞에서 물러 서려고도 하지 않았고 통과하라는 손짓을 해 보이지도 않았다.
"스티커가 붙어 있지 않군 그래, 이 차에는." 그는 말했다. "당신은 사복이고, 그 두 사람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또 한 사람-그 여자는 민간인이야." 금빛 눈썹을 떨면서 그는 계속했다.
"기지로 들어갈 순 없어. 기분 나쁘게 생각하진 말게."
"뭐라고? 이봐, 지금 제정신인가?" 나는 소리쳤다.
개브리는 쓰윽 눈을 가느다랗게 오무리고 밤낮 파리스 아일랜드의 훈련소에서 익힌 듯한 `해병대식 전능 터프가이의 얼굴'을 지어 보였다.
"목소리가 좀 크군 수병. 목소리를 낮추지 않으면 시끄러워져. 눈 깜짝할 사이에 말이야."
"너의 상관은 어디있지?" 차에서 내려 나는 말했다. 개브리는 좀더 가슴을 두껍게 보이려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한쪽 손을 권총에 가져다 대었다.
"지금은 취침중이시다, 수병. 그리고 난 너에게 일일이 대답할 의무도 없다."
"그럼 빨리 상관을 깨워야 하겠군 그래, 이 멍청아. 만약 저 두 사람이 죽으면 너를 고소해 버리겠어."
"흥 바보 같은 녀석. 난 너를 군기 위반으로 체포할 수도 있어."
나는 괴로운 듯이 몸부림치고 있는 바비 볼덴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봐, 이 사나이는 해군 위생병으로서 한국의 격전지에서 싸웠어. 그는 너 따위가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해병대원을 구해줬어. 만약 그를 죽게 하는 일이 생기게 되면 네 목은 댕강 떨어져 나가고 말 거야."
"날 협박할 생각인가, 수병?"
"그렇고말고. 협박이든 무엇이든 해 주지. 자아 허세 따위는 적당히 집어 치우고 이 두 사람을 병원으로 운반해!"
개브리은 45구경을 허리의 가죽 케이스에서 꺼내려고 했다. 그 얼굴에는 인간다운 감정은 한 조각도 보이지 않았다. 볼덴의 신음 소리가 들렸다. 이덴의 모습은 캐티의 뒤에 가려있어 보이지 않았다.
"뽑아서 단숨에 날 쏘아 봐." 나는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걸 빼앗아 널 저승으로 보내 줄 테니까."
그 때 다른 차가 우리들 등 뒤에서 멎었고 클랙슨을 울렸다. 두 사람의 소위가 타고 있었다. 나는 개브리에게 등을 돌리고 그들에게 다가가 사정을 설명했다. 두 소위는 모두 해병대의 파일럿이었다.
"제기랄, 저런 돌대가리 바보 같은 녀석!" 핸들을 잡고 있던 소위가 말했다. 차에서 내려 소리쳤다. "이봐 하사, 이리 좀 와!"
두 사람은 호리호리한 키다리로 과연 파일럿답게 눈을 가느다랗게 치뜨고 거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태의 긴급성은 곧 이해해 주었다. 개브리 하사에게 도와달라고 해 캐티와 바비 볼덴을 두 사람의 차에 태우자 급발진해 깊이 잠에 빠져들고 있는 기지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나는 이덴의 차를 스타트시켜 빙그르르 돌아 게이트 앞에서 일단 멈추었다. 그곳에는 개브리가 서 있었다.
"또 만나세, 하사."
그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이쪽을 되보았다. 나는 차를 출발시켰다. 이덴은 나에게서 떨어져 조수석쪽의 문에 기대어 있었다. 에리슨 비행장으로 통하는 길에 이를 때까지 그녀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상한 운명의 밤이로군! 그녀의 입을 열게 하려고 나는 중얼거렸다.
이덴은 이쪽을 보고 머리를 끄덕였다.
미안해요. 그런 쓸데 없는 소리를 떠들어 대서. 나는 말했다. 그렇게 울컥 화를 내서 미안해요. 됐어요 이젠. 이덴은 말했다. 나도 나빴어요, 당신을 도발하는 그런 말을 해서.
그것으로 분위기를 환기시켜도 또 뭔가 구애되는 것이 남아있는 듯했다. 이미 문을 닫고 있는 많은 바와 교회 앞을 우리들은 통과했다. 기지 바로 앞에까지 온 곳에서 이덴이 멈추라고 말했다.
오늘 밤에는 트레일러에는 돌아갈 수 없어요.
하지만 당신까지 저런 바보 같은 일들을 두려워할 것 없잖느냐는 말을 나도 중얼대듯 말했다. 당신이 두려워할 것은 아무 것도 없잖아요. 지금의 그 사건은 바비 볼덴과 캐티의 교제가 야기시킨 일이니까.
단순히 그렇게 생각해요? 라고 이덴은 물었다.
물론이지요. 나는 대답했다. 한데 이번의 사건은 볼덴 자신이 자초한 일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 백인 여성과 사귀고 있었으니까. 흑인쪽에서도 분개하고 있었으니까. 아까 그 흑인 노인을 보았죠.
그러자 이덴 산타나는 갑자기 머리를 저으며 몸을 떨면서 울기 시작했다.
정말 바보로군요, 당신은. 울면서 그녀는 말했다. 불쌍하게도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예요, 당신은!
나는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둘러 안아 당겼다. 그러자 그녀는 도리어 괴로운 듯이 흐느끼며 울었고 얼마 후 서서히 평정으로 돌아왔다.
도대체 무슨 얘기예요? 나는 속삭였다. 내가 왜 바보라는 거죠?
이덴은 슬쩍 몸을 당겼고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는 것도 마음에 두지 않고 젖은 눈으로 지긋이 나를 응시했다.
당신은 정말 아무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어요?
나는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이덴은 말했다.
나도 흑인이에요, 나도 흑인이란 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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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덴 산타나가 고백한 이야기 II
나는요 `일족'의 한 사람이예요, 베이비. 당신은 아마 모를 거예요 `일족'의 일 따윈, 그리고 나에 관한 확실한 것들을. 그러니까 잘 들어요. 알겠죠? 그런 어안이 벙벙한 얼빠진 백인이란 것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표정을 짓지 말아요. 당신은 좀더 신중해야 했어요. 그랬으면 이러한 의문은 생기지 않았을 거예요. 제임스 로빈슨이란 대체 어떤 자인지. 어째서 트레일러 안에는 나의 아이 사진이 한 장도 붙어 있지 않는지. 어째서 내 머리에는 곱슬머리가 섞여 있는지. 그리고 어째서 나는 호숫가의 흑인 거주구에 살고 있는지.
그래요 당신은 오래 전에 알아차려야 했어요. 물론 내가 의식적으로 그것을 숨긴 것은 확실해요. 솔직히 말해 난 당신을 잃고 싶지 않았어요. 이 사실을 알면 당신은 틀림없이 날 버리고 떠나갈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자신이 백인으로 통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이미 훨씬 전부터예요. 그러나 그것을 영원히 지속하는 일은 불가능해요. 조만간 백인은 니그로의 냄새를 맡아낼 거예요. 그리고 백인들 자신의 타락한 죄를 후인에게 대신 지불하게 하는 거죠. 그것은 `일족'이 배워 터득한 일이기도 해요. 그들이 자기들의 교만과 가련한 배신의 대가를 지불하게 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지만 말예요.
나는 처음부터 이러한 결말을 예견하고 있었어요. 당신이 내게 다가오고 내 몸에 돌아왔을 때부터. 왜냐하면 그것은 모두 나의 할아버지로부터 아버지에게 아버지로부터 나에게 대대로 전해진 `전설'이 말해 주고 있던 일이니까요. 이 `전설'은 마치 주문처럼 우리의 선조 대대로 전해져 내려왔거든요.
`일족'은 원래 나키토슈에서 25마일 정도 떨어진 루이지애나 북서부 아일 브리벨이란 곳에서 살고 있었어요. 벌써 오래된 얘기예요. 알겠어요? 미국이 탄생되지 훨씬 전에 당신의 선조들이 건너오기 전 이 광막한 대지에 정착한 모든 사람들이 찾아 오기 훨씬 전의 얘기죠. 그 즈음부터 `일족'은 이곳에 있었어요. 그들은 애초부터 `미국인'이었어요.
그것은 두 개의 큰 강이 합류해 새로운 강을 만드는, 그런 비유로 설명하면 적당하겠군요. 하나는 `아프리카 강' 또 하나는 `유럽 강'. 당시에는 프랑스인이 이 땅을 지배하고 저 대하 미시시피가 그들의 것이었지요, 멀리 캐나다에 이르기까지요. 그리고 스페인이 찾아왔고 물론 인디언도 처음부터 이곳에 있었어요. 프랑스인이나 스페인인은 함께 어울려 아프리카의 남자나 여자들을 이곳에 데려왔지요. 그리고 우리들이 태어났어요. 나중에 그자들은 우리들을 가리켜 잔 드크루르 리블, `자유로운 살갗의 종족'이라 불렀죠. 즉 크리올의 얘기죠. 우리들은 자신들을 가리켜 `일족'이라 부르고 있었죠. 우리들은 물론 아프리카인과 유럽인의 섹스에서 태어났어요. 광막한 숲 속에서의 섹스, 8월 광야에서의 섹스, 노예의 거주구나 주인님의 침대에서의 섹스, 총을 들이댄 섹스, 그리고 자유 의지에 의한 섹스에서로부터 잉태되었지요.
백인은 우리들과 특히 여자들과 자고 싶어했죠. 이곳에는 그들과 같은 종족의 여자들은 없었으니까요. 있었다고 해도 그리스도의 저주가 머리 가득히 차 있는 여위고 창백한 여자들밖에 없었으니까. 그렇지만 그 여자둘 중에도 흑인 남자들과 숲 속으로 도망쳐 `일족'의 일원이 된 자도 있었던 것 같지만. 그것도 `전설'로 전해지고 있어요. 백인은 우리들에게 새로운 이름을 붙이고 싶어했죠. 하얀 살갗이나 파란 눈을 보기 전에, 우리들에게는 버젖한 아프리카식 이름이 있었다는 것을 그들은 무시했어요. 이 세계가 탄생되었을 때부터 우리들은 아프리카에서 살고 있었으니까요. 훨씬 후세가 되어 그곳에 아랍인이 찾아왔고 우리들을 쇠사슬에 묶에 신대륙을 향하는 배의 선창에 가두어버렸지요. 백인은 마치 물건처럼 우리들에게 라벨을 붙였어요. 물론 대다수의 백인에게 있어 우리들은 그야말로 상품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었지만. 하지만 깊은 밤이 되면 살갗이 희든 검든 간에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 백인 남자들은 우리들을 탐냈으니까요.
그것이 교만의 뿌리였는지도 모르겠군요. 백인이 우리들을 갖고 싶어 한 것은.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그들과 행동을 같이했어요. 그들을 무골충으로 만들어 우리들에게 매혹되게 만들기 위해. 만약 그들이 우리들에게 매혹되면 그것은 그들을 포로로 한 것이나 마찬가지란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었던 거죠. 그것이 아마도 교만과 연결되었던 모양이에요. 그래요, 틀림 없는 죄로.
당신은 1950년대인 지금 이곳에서 나를 보고 있어요. 그리고 나는 저기 걷고 있는 여성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나를 볼 때 당신은 그 아득한 옛날에 멸망한 `일족'을 보고 있는 거예요. 나의 내부에는 그들의 피가 흐르고 있어요. 그래요 `일족'의 피가.
지금 여기서 `전설'의 처음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해요. 아프리카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1742년, 나키토슈 근교의 대농장에서 코인코인이란 이름의 흑인 여성이 태어났다는 사실이예요. 그녀의 양친은 프랑스인의 노예로 아프리카에서 끌려왔지만 그녀는 그 농장주로부터 크리스찬의 이름을 받았어요. 마리 테레스. 하지만 평소엔 언제나 코인코인이란 본래의 이름으로 불리워지고 있었던 것 같아요. 어쨌든 `전설' 속에서 전해지고 있는 것은 그 이름이에요.
그 노예의 부부에게는 다른 자식들도 있었지만 가장 영리한 것은 코인코인이었죠. 그녀는 이목구비도 뚜렷했고 매끄러운 까만 살갗을 가지고 포동포동한 커다란 엉덩이를 가지고 있었죠. 노예선에서 바다를 건녀 온 언어도 물론 그녀는 알고 있었지만 프랑스어와 스페인어도 코인코인은 지껄일 수 있었죠. 그리고 농장 주인의 집에 있는 책은 모두 읽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녀는 신의 땅. 나무의 뿌리, 풀, 나무, 마법의 수렁이란 단순한 것을 사용하는 치료법도 터득하고 있었다고 해요. 스스로 가톨릭이라고 믿고 있었고 성경책을 읽었고 성당에도 다니고 있었지만 아프리카의 오래 된 종교도 믿고 있었던 것 같아요. 강이나 숲이나 바람이나 태양이나 달을 지배하고 있는 신들을 그녀는 알고 있었어요. 12세가 될 즈음에는 그 뛰어난 치료술로 그녀를 모르는 자가 없을 정도로 알려져 백인도 흑인도 병에 걸리면 그녀에게 찾아왔다고 해요.
그러한 면에서는 모두에게는 실력을 인정받으면서도 코인코인은 어떤 두려운 사실을 항상 의식하고 있었어요. 알겠어요? 즉 아무리 유명해지건 자기는 타인의 소유물에 불과하다고 하는 것. 그녀의 아버지도 어머니도 형제 자매도 남을 위해 일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들의 요리를 만들고 그들의 밭을 경작하며 그들의 수확을 거두고 그들의 갓난아기의 시중을 들고 있는 셈이죠. 그리고 그들이 남의 소유물이기 때문에 임금을 지불해야 할 일도 없었죠. 마치 당나귀가 임금을 받을 수 없듯이. 또한 관습법에서는 금지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백인들은 노예의 여자를 침실에 끌어들여 범하는 것도 가능했죠. 게다가 안장이나 짐차나 당나귀를 팔아치우듯이 그들을 팔아버릴 수도 있었어요.
어느 날 밤 코인코인이 16세가 되었을 때 그녀는 외톨이가 되고 말았어요. 단 하룻밤 사이에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가 죽었으며 농장의 주인마저 죽어버렸기 때문에. 실은 당시 그 지역에서 맹위를 떨치며 몇 백명이란 희생자를 내고 있던 전염병에 당하고 만 거예요. `전설'에서는 그 때 주인의 아내도 병으로 쓰러졌지만 코인코인이 그 옛부터 정해지는 약으로 고쳐 주었다고 하더군요. 그 전에 그녀는 빈사의 아버지로부터 키아의 뿌리를 찾아보라는 말을 들었고 깊은 숲 속을 나흘씩이나 찾아 헤맸어요. 그리고 드디어 그 비밀의 뿌리를 발견해 돌아오긴 했지만 때가 이미 늦어 양친은 죽어버렸죠. `전설'에 따르면 코인코인은 농장의 주인을 미워하고 있었지만 그의 부인의 목숨은 구해 주었다고 해요.
전염병 소동이 낙착되고 보니 코인코인의 일가는 뿔뿔이 흩어지게 되고 말았죠. 그녀와 동생은 죽은 주인의 자식에게 인계되었지요. `전설'에 따르면 새 주인은 코인코인을 대단히 친절하게 대해 주었던 모양이에요. 그야 그렇겠죠, 코인코인은 그의 어머니의 은인이니까요. 하지만 아무리 다정하게 대해 주었어도 그녀가 노예의 신분이란 것에는 변함이 없었죠. 그리고 그 즈음 농장의 주인에게 있어 여자 노예는 번식용의 암말 같은 존재였지요. 즉 여자의 노예가 아이를 많이 낳아 주면 낳아 줄수록 주인은 그들을 팔아 돈을 벌 수 있었던 것이죠. 물론 자기의 농장에서 혹사할 수도 있었지만. 그래서 새로운 주인은 코인코인에게 새로운 흑인의 노예를 짝지어 주어 함께 살게 했어요. 그녀는 그 상대를 밉지 않게 생각했던 모양이에요. 왜냐하면 그와의 사이에서 네 명의 자식을 얻었으니까요. 그렇게 지내는 동안에 그녀는 이 세상의 관습에 관해 여러 가지로 배워 나갔던 것이라고 생각돼요.
그리고 `전설'에 의하면 그녀가 25세가 되었을 때 어떤 프랑스인이 나가트슈에 찾아 왔어요.
그녀의 프랑스인이.
파란 눈을 가진 장신의 그 프랑스인은 코인코인보다 두 살 아래였어요. 대단히 선량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며 천애 고독한 몸이었기 때문에 분발해 새로 사업을 일으켜 보려고 루이지애나로 찾아왔던 모양이에요. 이름은 메토와이에. 그는 코인코인과 사귀게 되었고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죠. 그로부터 몇 개월도 채 되지 않아 그녀의 남편이던 흑인은 시골로 팔려갔으며 그와의 사이에서 생겨난 아이들도 다른 곳으로 팔렸죠. 그리고 코인코인은 그 프랑스인의 집에서 살게 되었어요.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어요, 베이비. 그녀는 그 프랑스인의 소유물은 아니고 다른 남자의 소유물이었으니까. 자기가 원할 때 원하는 장소에 갔다왔다하는 것은 그녀로서는 불가능했어요. 하지만 그 프랑스인은 그녀를 좋아하고 있었고 그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을 그녀도 바라고 있었죠. 그래서 프랑스인은 코인코인의 주인한테 가서 흥정을 했어요. 그는 코인코인을 임차했던 거죠, 마치 밭을 자는 황소를 세내듯이. 그리하여 프랑스인의 집에서 같이 살게 된 코인코인은 그와 더불어 `일족'을 형성해 가기 시작했어요.
그로부터 25년간이나 두 사람은 함께 살았으니까 굉장한 일이지요. 코인코인은 그와의 사이에서 일곱 명의 아이를 얻었어요. 하지만 그녀는 항상 굴욕감을 가지고 있었겠지요. 왜냐고요? 자기는 임차된 몸이라고 해도 아이는 모두 원래의 농장 주인의 소유물이니까요. 그래도 두 사람은 진지하게 살아간 모양이에요. 요컨대 코인코인은 그의 여자였죠. 다만 그것뿐이에요. 그녀는 프랑스인의 집에 사는 흑인 아내로서 그를 받아들이며 그에게 아이들을 낳아 주고 있었죠.
물론 순풍의 돛단배만은 아니었어요. 때론 스페인의 신부가 나키토슈에 찾아와 두 사람의 사이를 갈라 놓으려고 한 적도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메토와이에는 코인코인을 사랑하고 있었어요. 때문에 기관의 압력에 어디까지나 대항해 그녀와 함께 살아가고 있었어요. 그러는 동안 그녀의 진짜 소유자인 농장 주인이 임종의 날이 닥쳐왔죠. 그러자 매토와이에는 농장 주인으로부터 코인코인을 사들였어요. 거금을 지불하고 말예요. 그러나 당시의 관습법으로 백인의 농장주는 노예의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규칙이 있었기 때문에 델토와이에는 드디어 코인코인을 노예가 아닌 자유의 몸으로 만들었죠. 그리하여 그녀는 아이들과 함께 프랑스인의 집에서 계속 살아왔던 것이예요.
하지만 인간이란 동물은 가련한 것이죠. 코인코인도 드디어 나이를 먹어 아름다운 용모가 쇠퇴하기 시작했죠. 그러자 어느 날 밤 그 프랑스인이 너와 헤어지고 싶다는 말을 꺼냈어요. 25년간이나 함께 살았고 일곱 명의 아이까지 얻었으면서 말이예요. 메토와이에도 지금은 그 근처에서 제일의 재산가가 되어 있었고 누구보다도 많은 노예와 수천 에이커나 되는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는군요. 실은 뉴올리언스에서 알게 된 백인 여성과 결혼하고 싶다고 그는 말했죠. 당시의 관습법 아래서는 재산을 누군가에 양도하겠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요. 흑인에게 재산을 양도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으니까. 그 때 코인코인이 뭐라고 말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난 이렇게 생각하고 싶어요. 그때 그녀는 데이블 너머로 메토와이에에게 시선을 맞추고는 좋을 대로 하세요 메토와이에, 당신의 백인 여자한테 가세요. 하지만 나 같은 여자는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을 거예요 라고 말했을 것이라고. 그래요 그녀는 이어 이렇게 말했을 것이 틀림없어요, 침대에서나 당신에게 시중을 드는 면에서 나 같은 여자는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을 거예요.
그녀가 어떻게 말했든 두 사람은 그로부터도 죽을 때까지 좋은 친구 사이로 지냈던 것 같아요. 메토와이에는 케인 강 근처의 땅을 코인코인에게 사 주었고 상당액의 돈도 주었지요. 주 사람이 낳은 아이들도 자유의 몸으로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이름까지 붙여주어 읽고 쓰는 능력도 습득할 수 있게 했다는 거예요.
그리고 코인코인은 노경에 들아가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부터 자유를 최대한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던 거예요.
갈색 머리와 파란 눈을 가진 아이들과 함께 그녀는 케인 강 연안의 황무지를 개간하기 시작했어요. 우선 먼저 재배한 것이 담배였죠.
그들은 그것을 보트에 실고 뉴올리언스로 운반해 갔죠. 그것은 그곳에서 다시 쿠바로 운반되어 여송연으로 만들어진 모양이에요. 코인코인은 닭과 칠면조도 키워 나키토슈의 시장에 팔았죠. 그리고 얻어진 수익으로 다시 토지를 계속 사들여 이번에는 인디고의 재배에 나섰어요. 그것은 유럽의 군인들이 입는 제복을 염색하는 염료로 되었죠. 처음 한동안은 그녀와 아이들은 토지를 경작해 먹고 살아가는 것이 고작이 아세톤에 옹색한 시늉을 하고 있었죠. 그리고 돈이 쌓이게 되면 자꾸만 땅을 자꾸 사들여 불렸어요. 케인 강 연안의 대지에 눈독을 들인 코인코인은 이제는 그 일대의 소유자로 되어 있었던 스페인 왕에게 양도를 신청해 왕의 이름이 적힌 권리증을 받았던 모양이에요. 그 권리증의 규정에 따라 코인코인들은 작열하는 태양을 아랑곳하지 않고 그 토지를 개척했으며 곰을 내몰고 도로를 정비하기도 했고 다리도 놓았어요.
코인코인은 두 채의 작은 집을 지었고 점점 더 저축에 열을 올렸죠. 그러는 한편 근처의 농장을 이잡듯이 뒤져 팔려나간 자기의 까만 아이들의 행방을 찾아 보았죠. 그리고 저축한 돈으로 빼앗긴 아이들을 도로 사들였어요. 내가 자유인이 되었으니까 나의 피를 나눈 자식들 역시 자유의 문으로 만들어 줘야 된다고 그녀는 말했다고 해요. 언젠가 머지 않아 아이들은 모두 자유인으로 만들어 주겠다고요. 그리고 얼마 후 그녀는 모종의 저주를 자기 자신이 떠맡게 되었지요. 그것은 하나의 죄였다고 해도 좋겠지요. 그 행위의 의미를 그녀만큼 잘 알고 있는 사람은 그 지방에서 그녀 외엔 없었을 테니까요.
코인코인은 드디어 자기의 노예를 사들이기 시작했어요.
자기도 노예를 사들이자고 처음 결심했을 때의 그녀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하고 상상해 본 적이 있어요. 자신도 예전에는 타인의 소유물이었던 코인코인, 강아지를 누더기 강보에서 격리시키듯이 자식이 팔려나가는 것을 직접 눈으로 전송했던 코인코인, 그녀가 노예를 사려고 했다. 그 때 어떠한 생각이 그녀의 가슴에 떠오르고 있었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아마 이러한 심정이었을 거예요-
아이들이 있다고는 해도 자신은 한 사람의 여자일 수 밖에 없다. 이제부터 생활을 지탱해 주는 것은 토지다. 토지를 착실히 자기 것으로 해두면 빼앗길 염려가 없다. 하지만 그 토지를 지름지게 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경작해 지켜 나가야 한다. 한편 자신은 자꾸만 노쇠해지고 있다. 이미 의지할 만한 남자와 결혼할 나이도 지나버렸다. 그렇다면 많은 일군을 확보해 이 토지를 지켜나가야 한다. 그렇다. 자신도 백인들의 방식을 따르자. 앞으로 줄곧 그렇게 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어느 정도의 전망이 설 때까지면 된다. 이 죄가 언제까지나 계속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할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은 백인의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이니까. 자기에게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남편도 없다. 그래도 이 농장을 번영시켜 나가려면 그것밖에 별 도리가 없는 것이다.
이리하여 코인코인은 노예를 사들였죠. 뿐만 아니라 자기 의사에 따르지 않는 노예를 수용하기 위한 감옥까지 만들었어요. 그녀는 이를테면 여왕님, 대지의 어머니가 된 셈이죠. 그녀는 1816년까지 계속 그렇게 살았어요. 이것은 어엿한 사실이며 역사책에도 나와 있으니까 조사해 봐요. 하지만 코인코인의 노예들은-그녀가 죽은 후에도 해방되지 않았어요. 코인코인 아래서 단결하고 있던 아이들은 어머니의 죽음에 임해 예전과 마찬가지로 힘을 합해 농장을 발전시켜 나가자고 결의했죠. 그들은 나키토슈에서 강을 내려와 아일 브리벨에 정주하게 되었어요. 아일(섬)이라고 이름이 붙어있긴 해도 그곳은 보통 의미의 섬은 아니고 레드 강의 옛 강과 새 강에 끼어있는 광대한 땅이었죠. 그 옛 강이 케인 강이고 코인코인이 아직 살아있었을 때 아이들은 그녀와 그곳에 가본 적이 있었으며-황야로 곰을 쫓아 갔겠죠-그 때 그녀로부터 그곳이 풍요로운 땅이며 방어하기에도 용이하다는 것을 배웠던 것이 아닐까요.
즉, 코인코인의 생전부터 `일족'은 아일 브리벨에 토지를 사두었던 것 같아요. 그들은 사슴의 털이나 소나무 겨우살이로 굳힌 흙으로 집을 만들었죠. 이익이 있을 때마다 토지와 노예를 샀고 그것을 항상 코인코인에게 보고해 그녀의 허가를 얻고 있었던 것 같아요.
코인코인이 이 세상을 떴을 때 `일족'은 1만 2천 에이커의 토지와 100명 이상의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어요.
이후 새로운 피의 흐름을 막은 채 아일에서 생존을 계속해 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은 그들도 알고 있었죠. 하지만 그것 자체가 그들을 오만한 죄로 직면하게 했던 것이예요. 즉 그들로서는 흑인과 교접할 수는 없었던 것이죠. 자기들의 피부 색깔을 다시 검게 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들은 피부가 검다는 것이야말로 그들을 남의 소유물로 만들었던 거예요. 그래서 그들은 점점 더 피부색을 희게 하고 싶었던 거예요. 그래서 백인과 교접하는 것을 장려했어요. 혹은 아프리카인과 유럽인의 피가 반반 섞여 있는 그들 자신과 같은 남녀와 교섭하는 것을 말예요. 절대로 금지되었던 것은 순수한 흑인과 교접하는 것. 왜냐하면 그것은 과거로 되돌아가는 것이었으니까.
당연히 적령기가 된 남녀는 상대를 찾아야만 했죠. 젊은이들은 뉴올리언스로 나들이를 나가 악토룬(흑인의 피를 8분의 1 받은 혼혈아)들을 무도회에서 찾아내기 시작했죠. 그녀들은 일생 동안 안락하게 지낼 수 있도록 부자인 백인 젊은이의 마음을 끌려고 서로 아름다움을 겨루었죠. 그러나 악토룬의 미녀들은 그다지 아일 브리일에게는 시집가려고는 하지 않았죠. 그녀들 자신 `일족'의 일원이었으므로 결혼 상대는 백인으로 정하고 있었을 거예요. 대조적인 것이 뉴올리언스의 젊은이들이었죠. 혼혈의 가난한 갈 곳이 없는 그들 젊은이들을 결혼 상대로 하는 그런 백인 처녀들은 뉴올리언스에는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그들은 아일 브리벨의 여자들과 결혼하려고 강을 거슬러 올라 갔어요. 그들은 무일푼이었고 재산이라곤 몸뚱이와 끓는 피뿐이었지요. 하지만 아일 브리벨에서는 참으로 그들의 피를 필요로 하고 있었지요. 그래서 그들은 아일을 목표로 삼았던 거예요.
아일은 차츰 살쪄 부유하게 되었지요. 토지는 목화밭과 옥수수밭으로 바뀌었지요. 목화는 뉴올리언스에서 팔렸고 옥수수는 나카토슈에서 현금화되었지요. 1840년경이 되자 `일족'은 그 교구에서 가장 부유한 농장을 소유하고 있었고 백인들보다 많은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다고 해요. 농작물의 으뜸인 목화는 `일족'을 그야말로 풍요롭게 해 주었지요. 그들은 백인의 입식자들에게 돈을 빌려주었고 그들을 진흙 오두막을 대신하게 된 대저택으로 초대했어요. 뉴올리언스에서 가정 교사를 초청해 아이들을 교육했구요. 백인들까지도 지도하려 오는 성당을 세웠지요. 비단 양말이나 향수를 사고 악단을 붙러 왈츠를 연주시켰지요.
하지만 목화 재배를 지탱해 주고 있던 것은 황소와 당나귀와 흑인 노예이기도 했어요.
밤이 되면 때때로 생각하는 일이 있어요. `일족'의 농장주들은 당시 악단이 연주하는 음악을 들으면서 포치에 섰을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고. 그들의 눈에는 저 멀리에 있는 노예들이 살고 있는 흙집이 보였겠죠. 그 때 그들의 귀에는 금단의 북소리가 들렸을까요? 아프리카의 가락이 잔디밭을 가로질러 오는 것이 들리지 않았을까요?
사람은 죄의 보상을 해야만 해요. 그건 알고 있겠죠 베이비. 당신도 가톨릭 교도이니까요. 우리들 일족처럼. 나처럼요. 교만은 언젠가 몰락을 자초하게 되죠. 안 그래요? 그 체험이야말로 `일족'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짐지니고 다니는 것이에요.
그것은 거센 파도처럼 엄습해 왔죠. 처음의 난관은 극히 자연스러운 진행 과정이었다고 해도 좋겠지요. `일족'은 광대한 토지를 가지고 있었지만 누군가가 죽게 되자 그 토지는 아이들에게 분배되었기 때문에 토지는 차츰 세분화되어 갔으며 큰 덩어리의 수입을 올리는 것이 곤란해졌어요. 그러는 동안에 미국인들이 몰려왔죠. 여윈 몸의 차가운 눈을 가진 프로테스탄트들이 말예요. 처음 `일족'은 그들을 무시해 전부터의 생활을 바꾸지 않았죠. 여전히 스페인어와 프랑스어를 지껄였고 프로테스탄트의 물결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가톨릭을 고집하고 있었죠. 그 초라한 강둑의 쥐새끼들 같은 녀석들이 유럽인의 자손들을 영원히 구축해 버리고 말 날이 오리라고 그들은 믿지 않았던 거예요. 무리도 아니예요, 당시 파리는 천년, 마드리드는 그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었으니까요. 워싱턴은 아직 마을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요.
하지만 미국인들은 속속 주위의 토지에 정착하기 시작했죠. 그리고 은행이나 회사를 경영했고 피부색에 관해서도 더욱 엄하고 냉혹한 태도를 취하기 시작했어요. `일족' 중에는 미국인과 우의를 맺으려고 한 자도 있었어요. 그들을 저택으로 초대하거나 돈을 융자하거나 해서.
그런데 미국인들이 `일족'을 보는 눈은 달랐어요. `일족'이 땀과 희생에 의해 달성한 것에 경이의 눈길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녀석들은 그것을 속여 빼앗으려고 했죠. 그리고 얼마 후 예전에 코인코인과 그 자식들이 어깨에 가래를 붙들어매고 밭을 일구고 어두운 숲에서 곰을 몰아 사냥하며 쌓아올린 것을 힘들이지 않고 가로채려고 하기 시작했죠. 즉 미국인은 프랑스 국왕이나 스페인 국왕이 일정한 토지의 권리를 무효로 하려고 획책하기 시작한 것이죠. 온갖 수단을 다해 신을 그들의 제일 가는 증인으로 조작해서 말예요. 그들은 법정에서 우리들 `일족'의 사람을 농락했죠. `일족'의 남자들을 카드게임에 유인해 옛날처럼 몇 리알을 등쳐먹으려는 것이 아니라 농장을 고스란히 빼앗으려고 했죠. 또한 그것을 성공시킨 일마저 몇 번이나 있었죠. 그 때마다 토지를 잃은 가족이 생겨났고 많은 여자와 아이가 `일족'의 농장으로 도망쳐 갔지요. 그 결과 `일족'이 소유해 오던 토지는 점점 더 잘게 토막나고 말았어요.
그러는 동안에 이번에는 목화의 가격이 폭락했고 불황이 찾아들었죠. 은행이 도산해 온 나라에 굶주리는 자가 넘쳐났죠. 미국인은 그것을 독수리처럼 대기하고 있었지요. 당시 목화의 농장주들은 백인이나 흑인을 불문하고 융자에 의지해 생활하고 있었어요. 즉, 농기초에 은행에서 돈을 빌리고 수확기에 그것을 변제한다는 패턴이 일반적이었죠. 하지만 불황은 한없이 계속되었고 그러한 상황은 1년 가까이나 계속되었어요. 도처에서 토지나 노예나 농구가 빚의 담보로 빼앗겼죠. 누구나가 이렇게 생각한 것은 당연했겠죠-이러한 것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리 없다 불황은 이제 곧 끝나고 우리들은 다시 원래대로 살아갈 수 있게 될 거야 라고.
`일족'의 젊은이들은 여전히 가슴을 펴고 자랑스럽게 걷도록 가르침을 받고 있었죠. `일족'의 사람은 누구나 일요일에 회중의 반수가 백인인 아일 브리벨의 교회에서 기도드리고 있었죠. 파티는 여전히 계속되었고 결혼이나 정사가 펼쳐졌죠. 그러한 `일족'들에게 미국인은 가차없이 덤벼 들었어요.
신도 또한.
왜 그렇게 얘기하는가 하면, 어느 해의 봄, 케인강이 범람하여 작물의 절반을 쓸어버리고 말았어요. 나머지 반은 그 뒤에 내습한 나방애벌레 무리에게 먹혀 버리고 말았죠. 다음 해도 해충의 무리에 피습당했는데 게다가 전세계의 목화 가격은 폭락했죠. 은행의 도산이 뒤를 이었어요. 기회를 노리던 미국인들은 `일족'의 사람들이 개척하고 비옥하게 가꾼 토지를 빼앗었어요. `일족'의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 교만의 죄가 드디어 하느님의 노여움을 사 완벽하리 만큼 단죄된 것 같은 생각이 들었을 거예요.
그런 재난에 직면해 있었으므로 최후의 비극이 막을 올렸을 때 `일족'의 사람은 그 본질을 꿰뚫어볼 수 없었어요. 그래요 나는 남북전쟁을 얘기하고 있어요. 주와 주의 전쟁. 내전. 그것이야말로 최후의 비극이었죠. 그리고 `일족'의 사람들은 그들도 결국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사실로 보여 주고 말았죠. 일은 단순했어요. 그들은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죠. 때문에 남부 연합에 가담하게 된 것이죠.
그리고 전쟁터가 북부에서 남부의 안쪽 깊숙히 옮겨졌교 남군이 퇴각하게 되자 `일족'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죠. 하지만 남군은 `일족'과 그 노예들이 쌓아올린 대부분을 파괴하고 말았어요. 이윽고 `반란군'을 추적해 침입해 온 북군도 또한 남아있던 모든 것을 파괴하고 말았어요. 녀석들은 `일족'의 여자들을 범했고 남자들을 고문했죠. 1주일 동안 나키토슈에서 아일 브리벨에 이르는 토지의 모든 것은 북군의 손에 의해 불타버리고 말았죠. 녀석들은 우리들을 니그로라고 불렀죠. 그리고 새로운 땅으로 행군해 갔지요. 자유를 입에 떠올리면서 말예요.
결국 아일 브리벨은 재기할 수 없은 상태로 마감되었죠. 노예들은 약속의 땅을 구해 떠났고 `일족'에게는 새로운 일군을 고용할 자금 따위는 이미 없었죠. 작물은 썩었고 토지는 버림받았어요. 어느 가족이나 노예 오두막으로 옮겨 진흙 위에 웅크리고 사슴털로 굳힌 진흙벽에 기대어 잠들었죠. 전후의 `재건 시대'는 끝났어요. 그때 미국인들은 그들이 고취하고 있던 자유는 속임수에 불과했던 것을 명백히 했어요. `일족'의 사람들은 처음부터 알고 있어야 마땅했던 것을 분명히 깨닫게 되었죠. 그래요 백인에게 있어 그들은 여전히 니그로에 불과하다는 것을.
`일족' 중 케인 강의 유역에 남아 있던 자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다른 땅으로 옮겨갔죠. 나의 가계의 경우에는 뉴올리언스로 이주했어요. 남북전쟁 후 잠시 동안 `일족'의 사람은 다시 뉴올리언스에서 살아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백인이 강요한 굴욕적인 생활이 아닌 자유롭고도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어요.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곳에서 먹을 수 있었지요. 하지만 그것도 오래는 계속되지 않았죠. 인종편견에 응고된 고루한 빨간목들이 남부를 지구로 하여 사람들을 억압하고 열등감을 품게 하고 교육이나 일도 주지 않고. 자유를 거역했어요. 남부 전쟁의 승자는 양키 같은 것이 아니란 것을 알게 해 주었던 거예요.
그리고 지금 내가 여기 있는 거예요. 당신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입을 한없이 벌리고 있군요, 내 앞에서. 그 KKK단은 바비 볼덴에게 가한 보복을 지금 당장 나에게도 가해 올지 몰라요. 그리고 또 하나, 자신이 오랫동안 흑인 여자와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니 어떤 느낌이 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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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덴이 운전하는 차는 차가운 아침 안개 속에 사라져 갔다. 나는 기지의 담장을 향해 비틀거리며 숲 속을 걷기 시작했다. 바로 며칠 전까지 그림자도 형태도 없었던 영상이 머리 속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이제 음악도 연주할 수 없게 된 바비 볼덴의 피에 범벅된 손. 어두운 숲에서 곰을 사냥하고 있던 노예들을 응징하고 있는 코인코인. 캐티의 육체를 마구 칼질한 KKK단. 기관 단총을 겨누고 이곳에서 썩 물러가라고 독촉하는 흑인 노인. 도처에 분노가 소용돌이치고 있다. 나의 분노와 다른 패거리들의 분노가.
하지만 그것들 모두를 위압하고 있던 것은 역시 이덴 산타나와 그녀가 말한 `전설'이었다. 그 신화와 역사와 잃어버린 말과 옛 범죄가 자아내는 이야기에 비하면 나 자신의 사소한 인생에 대한 경험은 너무도 빈약했다. 저 `전설'의 비밀스러운 계승자의 한 사람인 그녀가 나의 사소한 야심, 파리로 가서 화가가 되고 싶다는 꿈 이야기에 감동할 것은 없지 않느냐 말이다. 기지까지 수백 피트 떨어진 곳에 당도했을 때 나는 어둠에 싸인 나무 줄기에 기대어 땅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울기 시작했다.
어리석은 놈! 어째서 간파할 수 없었지? 단서는 그 섣달 그믐날 밤에 비로소 그녀와 만났을 때부터 나의 눈앞에 있었는데. 그 조금 곱슬한 머리카락, 거무스름한 피부, 어미가 약간 명료치 않은 말투. 당연히 존재해야 마땅할 것에 존재하지 않는 것에 나는 눈길을 보내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 그녀의 가족과 아이들과 친구의 사진. 심야, 사진을 기본으로 초상화를 그리면서 나는 교만하게도 주름진 스냅 사진에서 타인의 인생을 유추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언제나 자기 앞에 전라를 드러내고 있던 여자의 참된 모습을 꿰뚫어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확실히 만화에 그려져 있는 깜둥이 같은 두툼한 입술이나 펑퍼짐한 코와는 무관했다. 하지만 바비 볼덴은 그 비오는 밤 우리들에게 구조되었을 때 알아차리고 있었던 것이 틀림 없다. 그 호수가에 사는 흑인들 역시 그렇다. 백인으로 행세하려고 하고 있는 자기들의 동류가 있다면 반드시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을 알고도 녀석들은 반감을 품지 않을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까지 몇 세기에 걸쳐 많은 흑인 여자들이 백인 남자를 포로로 삼아 왔던 것처럼 그녀도 나를 포로로 삼으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틀림없이. 하지만 사실은 어떤지 알 수 없다. 때문에 더더욱 자기가 어리석게 생각되는 것이다. 나는 그를 안았고 그녀는 나를 안았다. 하지만 최초로 그녀를 안은 것은 제임스 로빈슨이다. 워레스키의 `잠언'이 머리에 되살아났다-나는 흑인 여자와 했다고 생각했어, 흑인의 남자가 흑인 여자와 하고 있는 것을 보기까지는.
나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몸이 갑자기 뜨겁게 달아올랐고 이어 한기를 느꼈다. 어떻게서든 분노를 부추기려고 했다. 노여움에 의해 치욕을 눌러 감추려고 했다. 어째서 그녀는 가만히 있었을까?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다면 어째서 그런 비밀을 감추고 있었을까? 혹시나 그녀는 기회를 엿보아 나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나를 비웃고 그것에 의해 나의 주인 나의 상처 받은 명예로운 관리자로 될 작정이었을까? 그 매력으로 나를 포로로 삼은 것은 하나의 복수 행위였던 것일까? (하지만 기다렸다) 라고 나는 자기 자신에게 말했다. (그녀가 비밀스러운 존재로 계속 있을 것을 바란 것은 당신 자신이지 않는가. 그녀가 신비적인 존재이기에 그야말로 자기는 평생 계속 해서 사랑한다고 말한 것은 너 자신일 텐데. 너는 되풀이해 그렇게 그녀에게 말했어, 그렇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새삼 노여워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는가. 너는 비밀을 바랐다. 그리고 커다란 비밀을 알았다. 그러자 처음엔 우울했고 이어 화가 났지. 그건 너무 제멋대로가 아닌가.)
하지만 그와 동시에 깨달았지만 나는 다만 속임을 당하거나 굴욕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울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숲에서 흐느껴 울고 있는 것은 이제까지 이덴 산타나와 더불어 이루려고 생각하고 있던 꿈이 모두 깨어지고 말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분명히 말해 봐 라고 나는 자신에게 말했다. 소리내어 말해 봐. 내가 어째서 니그로 따위와 결혼해야지? 그래서 나는 소리내어 외쳤다. `바비 볼덴의 손을 부러뜨리고 KKK단을 보내 나무에 여자를 매달았다.' 나는 자신을 찰리 파커나 막스 로치나 빌리 홀리디의 일을 모두 알고 있는 히피적인 뉴요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지금은 저 부끄럽기 짝이 없는 말을 소리내어 말하고 있었다. 니그로. 커다란 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니그로야, 이덴. 그녀의 니그로의 아이들과 우리들 자신의 니그로의 피를 받은 아이들의 손을 이끌고 거리를 걷고 있는 자기의 모습이 뇌리에 떠올랐다. 레스토랑에 들어가려고 하자 사람들이 말리며 말한다. 이 봐 이곳은 니그로는 사절이야. 이 학교는 니그로는 들어갈 수 없어. 안 됐군 그래. 이 버스는 여분의 자리가 없어. 자네는 앞에 앉게, 수병. 하지만 당신의 니그로 부인은 뒷좌석 쪽에 앉히도록 해 주게.
니그로, 싸늘한 숲 속을 향해 나는 소리쳤다.
니그로. 니그로. 니그로. 니그로. 니그로. 니그로. 니그로. 니그로. 니그로. 니그로. 니그로. 니그로. 니그로.
말은 드디어 의미를 잃었고 나는 일어나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점퍼의 소매로 눈물을 닦고 있는 사이에 새로운 영상이 머리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뉴올리언스에 있다. 이덴의 친정 식당에서 그녀의 양친과 마주 향해 앉아있다. 두 사람은 내가 캐티의 손을 묶고 있던 끈을 자르고 지면에 내려놓았을 때 옆에서 노려보고 있던 그 흑인과 같은 눈매로. 그렇다, 기관 단총을 겨누고 싸늘하게 노려보고 있던 그 눈매로 이쪽을 보며 내가 아직 풋나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확인한다. 두 사람은 나의 해군 제복이나 깨끗이 닦여있지 않은 구두를 보고 그 나름의 판단을 내린다. 그리고 나를 가련한 가난뱅이 백인의 부류에 집어넣을 것이다. 옆방에는 이덴의 아이들이 있다. 나와 이덴의 나이 차가 오히려 적다. 칠흑 같은 살빛을 가진 두 사람은 이런 가난한 백인이 어떻게 자기들의 아버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인가 하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다음 순간 나와 이덴과 그녀의 아이들이 나란히 성당에 나가 미사에 참석하려고 파라폭스 스트리트를 걷고 있는 곳을 할레르슨이 바라보고 있는 그림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는 상스러운 웃음을 떠올리면서 니그로 개구쟁이가 어쩌니 저쩌니 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 때였다, 돌연 어떤 것이 갑자기 머리에 떠오른 것은. KKK에 밀고한 것은 할레르슨이 틀림 없다.
그렇다.
녀석이 틀림 없다.
놈은 그 날 우리들을 보았으니까. 호수로 통하는 갈림길에서 하이웨이로 향하는 곳을 보았으니까.
그 사람이 아니다.
나는 서둘러 걸어나갔다. 나뭇가지를 헤집고 관목 숲을 헤집으며 나아갔다. 기지의 배후에 있는 담장의 개구멍을 발견해 숨어들었다. 이제 머지 않아 4시다. 되도록 그늘진 곳을 택해 인기척이 없는 착륙장을 횡단해 격납고의 벽에 몸을 붙였다. 병영 안에 미끌어들어 할레르슨의 침대로 곧장 다가갔다.
놈은 없었다.
보기좋게 피해 버린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놈을 마음껏 혼내 주고 싶었는데. 정식의 소송 따위로 시간을 낭비할 시간은 없다. 놈이 피해버린 것은 확실한 것이다. 이 원한은 절대로 갚고 말 것이다. 한데 제기랄 놈이 없다.
할 수 없이 자기 침대에 숨어들어 오랫동안 떨면서 옆으로 누어있었다. 단 하룻밤 사이에 나의 세계는 일변해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도 이제부터 자신은 어떻게 하면 좋을지 전혀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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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비 볼덴과는 그 후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었다. 메인사이드쪽에서 전해온 소문에 따르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을 때 그의 양손은 골절이었고 늑골도 부러지고 턱도 깨진 상태였다고 한다. 병원에 실려갔던 다음 날 아침 상관이 그를 찾아와 사정을 여러모로 들어보려고 한 모양이다. 바비 볼덴은 그들에게 꺼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병실 앞에는 해병대원이 한 사람 배치되어 방문자를 모두 되돌려 보냈다고 한다. 나중에 MP가 두 사람 `어둠의 왕국'으로 찾아와 바비의 색소폰을 비롯해 그의 사물을 모두 가져가 버렸다. 또한 그 날 중에 그가 비행기로 노포크로 후송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던 것이다. 바비 볼덴은 사라졌다, 에리슨 비행장이나 메인사이드에서 펜서콜라에서 남부에서 그리고 우리들 앞에서.
캐티의 소식도 역시 전해졌다. 골절된 어깨는 철사로 얽어매었고 마구 걷어채인 가슴은 붕대로 둘둘 감아 말은 것 같았다. 그 이외의 상처도 물론 치료를 받았다. 그녀도 역시 상관으로부터 공식적인 사정 청취를 받았다고 한다. 상층부에서는 일단 병원의 병실을 확인하긴 했어도 결국은 그녀를 샌디에이고로 이송하고 말았던 것 같다. 바비 볼덴으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격리시키려고 했을 것이다. 그날밤의 진상을 알고 싶어하는 자들로부터도 가능한 한 멀리 격리시키고 싶었을 것이 틀림 없다.
아직 젊었던 나는 펜서콜라의 신문에 사건이 한 행도 보도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신문에는 그 사건에 대해 전혀 언급이 없었다. 이러한 것은 사관보다 사무계 하사관쪽이 잘 알고 있었으므로 본부의 메이허에게 전화를 걸어 어째서 사건이 신문에 실리지 않느냐고 물어 보았다. 메이허는 지금 바쁘지만 알아봐 주겠다고 말했다. 20분 후에 그로부터 전화가 왔다. 사정은 간단해 그 사건은 펜사콜라 경찰에게는 통보되지 않았다고 한다. 경찰에 통보되지 않으면 신문이 탐지해 내는 일도 없다는 것이다.
"그럼 우리들이 신문에 통보하면 어떨까?" 나는 말했다.
"그야 통보하는 것 뿐이라면 간단하지." 메이허는 대답했다.
"하지만 신문 기자는 어떻게 하는가 하면 먼저 해군 홍보부에 전화를 거는 거야. 홍보부의 녀석들은 네 그대로입니다, 라고 말할 리가 없으니까 말이야. 해군의 병사들의 행동 기록은 모두 부외비이기 때문에라든가 하는 그런 응답을 해올 것이 틀림 없기 때문이야...... 그리고 물론 KKK의 녀석들이 신문에 발표하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이고 말이야."
나는 샐과 막스를 만나러 갔다. 두 사람 모두 몹시 화를 내며 어떻게서든 버스터를 찾아내 반죽음을 당하게 만들겠다며 기세가 대단했다. 두 사람 모두 바비의 신원을 알아낸 것은 버스터 일당이 틀림없다고 보고 있었던 것이다. 확실히 내가 바비에게 구조된 그날 녀석이 우리들을 미행해 온 것은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놈을 화형에 처해 주겠어." 샐이 말했다. "고기 매다는 갈고리에 매달아 놓겠어."
막스도 말했다. "놈의 양손과 양발을 부러뜨려 줘야지."
하지만 양지바른 격납고의 옆에 서서 지껄이고 있는 동안, 버스터가 범인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는 그러한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그날 밤 바비와 캐티를 습격한 것이 몇 사람인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바비 볼덴의 머큐리가 어떻게 되었는지도 역시 모르고 있다. 아까까지의 노여움은 서서히 사그라지고 있었다.
"하지만 뭔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야." 셀이 말했다. "때려눕혀야 할 상대가 어딘가에 있을 거야." "아냐." 막스가 머리를 저었다. "그건 유령을 쫓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바비 볼덴의 사물을 남김없이 MP가 가져간 다음 나는 `어둠의 왕국'에 찾아갔다. 문은 잠겨 있었다. 노크를 하자 로드 아일랜드 프레디가 얼굴을 내밀었다. 하지만 내 모습을 보더니 곧 아무 말도 않고 문을 닫아 버리려고 했다.
"잠깐만 기다려!" 나는 말했다.
"흥, 네 얼굴 따위는 보기도 싫어."
"내가 한 짓이 아니라구. 난 메인사이드까지 그를 데려갔어. 캐티를 나뭇가지에서 끌어내린 것도 나였다구. 난 그를 구해 줬어. 여기 찾아온 것은 한 마디 할 말이 있어서야. 나 역시 분하단 말이야-."
"이 봐, 모르는 거야?" 프레디는 말했다.
"어지간히 멍청한 녀석이군 그래. 바비도 마찬가지로 멍청한 녀석이고. 놈은 바보야. 너를 친구 취급까지 하고 말이야. 백인 여자와 사귀기까지 하고. 그 결과가 어땠어 응? 대답해 봐! 그 보답이 뭐냐구! 넌 똑똑히 그 눈으로 보았겠지, 응? 분명히 말이야. 바비 녀석은 이미 다시는 색소폰을 불 수가 없어. 양손이 모두 분질러졌으니까 말이야. 그게 보답이야. 도대체 왜냐 말이야? 응? 대답해 봐. 너라면 알고 있겠지, 백인인 너라면 말이야!"
"그야 그......"
"너희들 백인은 모두 똑같아. 너도 그 여자도 KKK도 링컨도 대통령도, 이 걸레 같은 해군의 사관 녀석들도. 모두 백인으로 똑같은 구멍의 너구리라구!"
그는 쾅하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나를 모든 백인을 쫓아냈던 것이다.
또한 그것으로 결말이 난 것은 아니었다.
점심 때가 되어 식당에 가보았더니 지독한 요리를 내놓았던 것이다. 모두가 설익은 것으로 닉닉했다. 요리사들은 모두 예외없이 가면을 쓴 것 같은 무표정한 얼굴로 응대했다. 말을 걸어도 도무지 대꾸하지 않았다. 이쪽의 얼굴 따윈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이. 나는 가만히 쟁반에 놓여진 설익은 선홍빛 닭고기와 끈적하고 닉닉한 야채를 응시했다. 다음 순간 옆 테이블의 할레르슨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성큼성큼 다가갔다.
"이 구더기 같은 녀석!"
놈은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이거 참, 무슨 일이지. 오늘은 기분이 좀 언짢으신가. 니그로를 좋아하는 철부지?"
홱하니 테이블 너머로 손을 내밀어 나는 놈의 점퍼의 깃을 쥐고 당겼다.
"다시 또 한 번 말해 봐. 너의 코를 콱 씹어버리고 말 테니까, 이 구더기 같은 놈아!"
"흥 재미있군. 해 보시지." 잇새로 밀어내듯 그는 그렇게 말했다. "그 니그로와 같은 꼴을 당하고 싶다면 말이야."
나는 놈의 깃을 놓아 주었지만 그것으로 끝낼 마음은 없었다. 식당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놈과 정면으로 대항하며 나는 한결 소리를 크게 지르며 말했다.
"그건 네 놈의 짓이었지? 네가 바비 볼덴의 얘기를 KKK단에 알렸지?"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그가 그 호수가에 살고 있었다는 건 너도 알고 있었쟎아."
"그 일이라면 이 기지에서 모르는 녀석은 없었을텐데."
"아암 아마 그렇겠지. 하지만 다른 녀석들은 그런 것 따위는 마음에 두지도 않아. 하지만 너는 마음에 꺼려 견딜 수 없었쟎아."
할레르슨은 일어나 아직 손도 대지 않은 쟁반을 들어올렸다.
나의 얼굴을 노려보며 말했다. "너 정말 뜨거운 맛을 보고 싶은 모양이군, 그래. 이 니그로 편들기쟁이가."
나는 테이블을 돌아가 놈의 팔을 붙들었다.
"너의 먹이가 되지는 않을걸, 이 구더기 같은 놈아!" 놈을 마음껏 때려눕히고 그야말로 쟁반째 식기들을 모조리 입 속에 처넣어 줄 생각으로 팔을 들어올렸을 때 어느새 래드 캐논이 옆에 서 있었다. 문간에는 맥데드상사의 모습도 보였다.
"차렷!" 래드가 울부짖었다.
두 사람 모두 차렷 자세를 취했다. 할레르슨 녀석은 아직 쟁반을 든 채였다. 식당은 완전히 조용해졌고 커피메이커가 내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인가, 할레르슨군?" 캐논이 물었다.
"이 양키 녀석이 큰소리를 쳤습니다. 그게 원인이었습니다."
"이 녀석에게 바비 볼덴의 일을 심문해 주십시오." 나는 말했다. "이 녀석이 KKK에게 고자질 한 것이 언제였는지 물어 보십시오."
"너한테 질문한 것이 아니었다, 수병." 캐논이 말했다.
"하지만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으셨지 않습니까, 발단은 바비 볼덴의 사건입니다. 그래서 언쟁이 생겼습니다. 이 구더기 같은 놈이 KKK에게 볼덴의 일을 고자질했습니다."
맥데드가 애매한 웃음을 띠우면서 다가왔다.
"편히 하고 있어 둘 다." 그는 기침을 했다. 식당에 있는 전원이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을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바비 볼덴의 사건은 모두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너희들 둘이 다툰다고 해서 사태가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두 사람 모두 자기 근무로 돌아다도록 해."
래드 캐논에게 끄덕여 보였다. 두 사람은 식당을 가로질러 밖으로 나가 버렸다. 맥데드가 가능한 한 이 사건을 손대고 싶지 않다는 것이 명백했다. 그는 그 자세를 래드 캐논에게도 떠맡기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할레르슨은 희미하게 웃음을 떠올렸다.
"바보 같은 녀석!"
"누가 할 소리 !" 나는 말했다. "똥개 같은 놈."
할레르슨은 이쪽에 등을 돌리고 음식 찌꺼기 처리장으로 재빨리 걸어갔다. 이곳저곳에서 다시 왁자지껄한 얘깃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였다. 조리실의 흑인들은 누구 하나 내쪽을 보려고 하는 자가 없었다.
그 날 오후 할레르슨은 메인사이드로 전근이 하달되었다.
그 날 밤 보급부에서 당직 명령이 내려왔다. 그 때만큼 당직 임무가 반가웠던 적은 없었다. 이덴은 로버터의 집에 가 있을 것이 틀림 없었다. 트레일러에는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비록 이덴을 찾아냈다 해도 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대니 레이에게 당직을 명령받았을 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나는 도화지와 쵸크를 가지고 보급부에 갔으며 프리체트 대령의 죽은 부인의 초상화를 그리는 작업에 2시간 정도 열중했다. 카운터를 찾아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기지의 모든 사람이 어딘가로 가서 바비 볼덴의 으스러지게 얻어맞은 손을 애도하고 있기라도 하듯 말이다.
나는 대령의 부인의 얼굴을 되살려 보려고 계속 노력했다. 하지만 부인의 얼굴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던 도화지를 쫙 찢어서는 옆의 휴지통에 던져버렸다. 어째서 그렇게 되고 마는지 곧 알았다. 대령의 지금은 죽은 아내, 꽃을 화단에 옮겨심고 있는 그 부인의 얼굴은 아무리 애써 그려도 이덴 산타나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자정이 되어 마일즈가 들어왔다. 안경이 더러워져 얼굴이 누렇게 뜬 것같이 보였다. 자기 자리에 앉자 그는 두 손을 내려다 보면서 바비 볼덴에 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바비의 손에 대해서 내내 생각해 보았어. 그는 오후가 되면 자주 우리들을 위해 색소폰을 불어 주었지. 처음에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불었겠지만 우리들을 위해서도 불어 주었어. 그리고 그를 습격한 얼뜨기 `빨간목'의 일도 생각해 보았어. 놈들은 틀림없이 즐거워했을 거야. 그래 놈들 전부를 합친 것보다 훨씬 재능이 있었으며 머리도 좋았고 마음씨도 상냥한 흑인의 손을 분질러버렸다는 사실에 말이야. 틀림없이 굉장한 쾌감을 느꼈을 거야."
"그건 틀림 없겠지."
"난 그에게 경고해 줄 수도 있었어."
"누구든지 경고해 줄 수는 있었어, 마일즈."
"그럼 그 자신이 그렇게 되는 것을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바보 같은 소리 말아, 마일즈."
"아니, 그럴지도 몰라. 이 세상에는 자기의 재능을 두려워한 나머지 자신이 그것을 파괴하는 것보다 누군가가 대신 파괴하기를 원하는 녀석들이 존재하니까. 그들은 타인을 자극해서 스스로 죽음을 택하지."
"바비 볼덴은 녀석들에게 그러한 만족감을 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을 거야."
기계공 한 사람이 카운터로 찾아왔다. 내가 그를 상대하고 돌아오자 마일즈 레이필드는 모습을 감추었다. 그는 자기가 전날 밤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연출했는지 모를 것이다.
이것은 실제로 이상야릇한 만남이었지만 그의 존재가 바비 볼덴의 생명을 구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내가 그의 일로 이덴과 언쟁을 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어둠 속으로 뛰쳐 나가지 않았다면 나는 숲 속에서 버둥거리며 괴로워하고 있는 바비를 발견할 수 없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다시 그림으로 시선을 옮겼다. 군데군데 묘사된 선을 흐리게 하거나 반대로 짙게 하거나 하여 마일즈가 조금 손을 대 주었다. 자기가 잘못한 점을 뚜렷하게 발견할 수 있었다. 마지막 한 장을 처음부터 그리기 시작했고 곧 그림을 마쳤다. 그리고 캐더린 프리체트의 그림이 완성되자 이번에는 이덴 산타나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도화지에 쵸크로 그렸다. 트레일러 안의 의자에 앉아 한쪽 발을 의자의 팔걸이에 걸고 있는 이덴. 사타구니에는 곱슬곱슬한 털이 다시 돋아나 있었다. 머리카락에도 흑인 여자의 특징을 또렷이 첨가했다. 얼굴의 이목구비도 똑같이 고쳤다. 코는 약간 넓혀서 그렸고 입술도 좀더 두툼하게 만들었다. 하이힐을 신은 이덴은 정면에서 싸늘하게 나를 응시하고 있다. 그것은 이제까지의 그 어느 이덴보다도 아름다웠다.
20여 분 후 보급부의 문을 닫고 병영으로 천천히 걸어 돌아왔다. 자기 침대에 앉아 지긋이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았다.
이덴 산타나의 곳으로 돌아가자.
지금 곧.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그녀를 잃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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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도 별도 나오지 않았다. 평소 다니던 길은 피하기로 했다. 그 도로는 <빌리즈>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곳에는 래드 캐논이 술을 마시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도로는 버스터의 기억이 악취처럼 달라붙어 있는 보트 숍의 앞을 지나가야 하고 연도에는 많은 주유소도 있다. 그곳에 정차해 있는 소형 트럭의 라이트가 갑자기 켜지거나 하면 어둠에 숨어있는 이쪽 모습이 쉽게 발견되고 만다. 때문에 나는 숲 속을 걸어가기로 했다. 그리고 곧 길을 잃고 말았다. 관목 숲이나 젖어 있는 나지막한 나뭇가지가 뒤엉켜 있는 곳을 피하면서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이 숲 속 길로 간 일은 한번도 없었다. 오늘 밤 비로소 지나가는 것이다. 사실은 하이웨이에 연결되는 길로 가면 되었지만 나는 반대로 나아가 미지의 숲 속을 더듬었다.
잠시 지나자 구두가 흠뻑 젖었고 몸의 마디들이 쑤셔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오직 앞으로만 나아가고 있었다. 나는 이덴이 필요했다. 오늘 밤 필요했다. 그녀를 만나면 두 번 다시 당신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작정이었다. 그녀가 흑인이든 상관 없다. 니그로이든 유색 인종이든 상관 없다. 나는 그녀가 흑인이기 때문에 좋아하게 된 것은 아니다. 흑인이라고 해서 헤어질 생각도 없다. 남이 뭐라고 하든 상관없다. 그녀의 친척이 뭐라고 하든 브룩클린의 나의 친구들이 뭐라고 하든 상관 없다. 기관 단총을 겨누고 있던 흑인이 뭐라고 하든 채찍을 든 백인이 뭐라고 하든 상관없다. 산타나에 관한 한 남의 의견 따위는 아랑곳할 것이 없다.
머리 속에는 수많은 말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의식하면서 나는 숲이나 나뭇가지를 헤집고 자꾸만 앞으로 전진해 나갔다. 나무줄기에 부딪히거나 가지에 스치거나 하여 팔이나 얼굴에 무수한 찰과상이 생겼다. 머리 속에 소용돌이치는 말은 오직 전진하기 위한 에너지였다. (이대로 항복할 수 없어요, 이덴. 그렇게 되면 놈들의 승리라구요. KKK의 승리가 아니란 말예요. `빨간목' 녀석들의 승리, 할레르슨의 승리인 거예요. 우리들은 힘을 합해 놈들에게 대항해 나가야 해요. 당신, 나, 당신의 아이들, 우리들의 아이들. 모두들 싸우는 거예요. 파리, 뉴욕, 어디를 가도 모두 합해 열심히 살자구요. 모두 힘을 합해 최후까지 싸워 나가자구요.)
그러는 동안 드디어 호수가 보였다. 그래 꼭 갇힌 것처럼 조용하기만한 까만 수면이.
기슭을 따라 걷고 있는 동안에 말뚝에 매어진 거룻배 같은 보트가 한 척 보였다. 노가 말뚝에 세워져 있었다. 그것을 집어들고 붙들어 맨 밧줄을 풀고 보트를 젓기 시작했다. 방금 자기가 보트를 훔치고 있다는 범죄를 범한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상관 없다. 대안에는 이덴 산타나가 있기 때문에.
주위의 어디에도 불빛은 없었고 별도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누군가에 들키지나 않을까 하고 불안했었다. 그렇다 KKK이거나 흑인이 어딘가에 숨어 있지 않다고 단정할 순 없지 않은가. 그리고 어둠 속에서 대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가능한 한 몸을 낮추어 소리를 내지 않도록 저었다. 놈들이 정말 대기하고 있다고 한다면 빤히 알고 있으면서 모습을 드러내고 싶지는 않다. 한 번 저을 때마다 노가 이덴이란 소리를 내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덴. 이덴. 찰싹하고 물을 저을 때마다 이덴.
드디어 대안에 다다랐다. 보트가 탁하는 소리를 내면서 수초와 진흙 속에 박혔다. 1피트 정도의 깊이가 있는 물 속에 내려서서 보트를 더욱 끌어당겨 진흙 속에 단단히 고정시켰다. 그곳은 트레일러로부터 반 마일 정도의 지점이었다. 이덴과 내가 `게임'에 흥을 돋우고 있던 장소보다도 바비 볼덴이 캐티와 살고 있던 곳에 더 가깝다. 흠뻑 젖은 구두를 신은 채 풀숲 속을 걷기 시작했다. 캐티가 거꾸로 매달려 실신할 때까지 채찍에 얻어맞고 있던 나무가 보였다. 그 흑인이 나에게 기관 단총의 총구를 겨누었던 숲으로 눈길을 보냈다. 어쩐지 모든 것이 100년이나 전에 본 꿈의 일부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발길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윽고 희미한 불빛 속에서 은빛으로 빛나는 트레일러가 보였다. 심장이 갑자기 크게 뛰기 시작했다. 언제나 있던 그녀의 차가 보이지 않았다. 무의식중에 달려나갔다. 트레일러의 몇 피트 앞에서 멈춰서서 불안에 떨면서 귀를 기울였다. 곧 문에 달라붙었다. 열려 있었다. 하지만 스위치를 올려도 불이 켜지지 않았다. 전기가 끊겨 있었다. 하지만 어차피 전등 같은 것 필요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부에 한 발 내딛인 순간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덴 산타나를 포함해 모든 것이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을.
제5부
"내 애인도 살고 있지. 거기에."
멕시코 만의 어두운 습지를 달리며 나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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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노트로부터의 발췌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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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이 기어코 나의 신상에도 일어나고 말았다. 터너와 샐, 메이허, 이제까지 알았던 모든 불쌍한 수병들의 신상에 일어났던 일이. 그것은 내가 무엇보다도 두려워하고 있었던 일이었다. 그 지겨운 폭력 사건 이후 그녀는 갑자기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아직 어린애나 다름 없던 나는 이덴이 다니던 백화점으로 가서 여점원들에게 물어보고 다녔다. 그러나 대답은 한결 같았다. 글쎄요, 모르겠군요. 이덴이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군요. 철부지같이 나는 점포 주인도 만나러 갔다. 루돌프라고 하는 돼지 같은 눈을 지닌 뚱뚱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뻔뻔스럽고 되먹지 못한 여자요. 전화 한 통 없었다니까요." 그가 말했다.
"덕분에 내가 그녀의 카운터 일을 맡게 되었소. 그녀에게 건네줄 급료도 이곳에 있소. 어쨌든 이것을 받으러 오기만 하면 단단히 혼을 내줘야겠소."
그 무렵의 어느 날 밤, 전 미국인들이 안락한 자신들의 집에서 휴식을 취하며 고저스 조지, 하워드 앤루, 미스 해시, 피라미드 클럽의 얘기로 흥겨워하고 있을 때 나는 거리의 뒷골목을 돌아다니면서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여자를 찾아 헤매이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로버터의 집을 찾아간 것은 사홀째의 밤이었다. 나는 모든 사정을 털어 놓았다. 우리는 희미한 불빛에 싸인 거실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두 번 흐느껴 울었다. 내가 위로하자 그녀는 내 손을 자신의 가슴에 갖다 대고 침실로 이끌어 가려고 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내가 마음의 상처를 받았을 때 당신이 도와 주었잖아요. 이번에는 내가 당신을 위로해 줄 차례예요."
"하지만 로버터, 내가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건 오직 그녀가 나에게 돌아오는 것, 그것밖에 없어요."
그녀는 다시금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래요, 나 역시 그래요."
그녀는 갑자기 나이가 들어 보였다. 이미 이 비극, 사랑하는 이가 떠나버린 슬픔은 나의 것이 아니고 그녀의 것이 된 것이다.
"나의 친구들은 사라지고 말았어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다정한 이덴은 사라지고 말았아요."
내가 돌아올 때도 그녀는 웃음을 멈추지 못하고 있었다. 고뇌에 가득 찬 며칠을 나는 몽유병자처럼 지냈다. 편지라도 좋고 메모라도 좋다, 이덴 산타나가 소년이나 다름 없는 나의 상상 속의 인물이 아니고, 확실히 실재했다는 증거를 어떻게든 손에 넣고 싶었다. 저 프리체트 대령 부인의 사진 뒤에 쓰여 있던 것과 같은 `변치 않는 사랑을'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는 것이 필요했다. 침대에서, 숲에서, 강에서, 그리고 바닷가에서 이덴은 나를 그런대로 남자로 만들어 주었다. 그런 다음 어느 날 갑자기 모습을 감추는 어이 없는 행위로 나를 재기불능에 빠뜨리고 다시 유치한 소년으로 되돌아 가게 하고 만 것이다. 그녀는 결국 한 줄의 편지도 보내오지 않았다. 늪지에서 온 지긋지긋한 폭한들에게 위협을 당해 그녀는 도망쳐 버렸다. 나로서는 그 뒤를 쫓을 수도 없다. 그녀에게는 차와 대지를 가로지를 방도가 있다. 그러나 나는 경솔하게 행한 서약의 대가로 해군에 구속되고 있으므로.
잠시 후 나는 하는 수없이 그녀와 알게 되기 전의 생활로 되돌아갔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샐, 막스, 메이허, 그밖의 동료들에게 사정을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어느 날 밤 게이트로 가, 일당과 함께 O스트리트로 달려갔다.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행크 윌리엄스가 외로워서 죽겠다고 노래하고 있었다.
그리고 변함없이 웃으면서 병마개를 따는 딕시 세이퍼.
그곳에는 여느 때의 맴버가 모두 있었는데 내가 어디에 다니고 있었는지, 왜 돌아왔는지, 물어 보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맥주를 마시고 바비 볼덴과 해군의 은폐 공작에 대해 떠들어 댔다. 그리고 취기가 오르자 밀고를 한 것은 할레르슨이라고 규탄했다. 모두들 저마다 지껄여대고 바비 볼덴을 살릴 방법이 없는지 논의하면서 더욱 더 기세좋게 맥주를 들이켜댔다. 이윽고 나는 밖으로 나가 콘크리트 블럭에 기대어 토하기 시작했다. 땅바닥이 흔들리고 밤하늘이 빙빙 회전을 했다. 이봐요, 모두들 기지로 돌아갈 시간이 됐어요 하면서 딕시가 말했다.
아아, 이덴!
이튿날 아침은 혀가 껄껄한 느낌이 들고 머리가 쑤시고 아팠다. 샤워 물줄기를 오랫동안 받고 있는 동안에 겨우 머리가 산뜻해졌는데, 이덴에 대한 연정은 여전히 엷어지지 않았다. 나는 점심식사를 들지 않고 병사로 돌아가 침대에 누어 잠을 청했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그녀의 모습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보급부로 돌아가 사무를 돕고 마루를 청소했다. 베케트와 농담을 주고 받거나, 찰리 댄버와 대학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래도 그녀를 잊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나를 완전히 바꿔 버리고 만 것이다. 둘이서 함께 즐겼던 은밀한 일의 모두가 나를 바꾼 것이다. 여러 가지 이미지가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가고 강렬한 소망과 절망이 덮쳐왔다. 그녀의 육체와 머리칼과 치아를 애타게 동경한 나머지 당장 흑인 술집으로 달려가 위니를 찾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덴의 얼굴과 머리카락, 그리고 신음 소리가 머리속에서 소용돌이치는 대로 마음껏 위니를 욕보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위니를 찾아가지는 않았다. 나는 몇 번이고 O스트리트에 나가고 가끔씩은 <트레이더 존즈>에 간 적도 있었다. 그렇게, 사나홀이 지나자 이제 바비 볼덴 따위는 누구도 입에 올리지 않게 되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무리 비분강개를 한다 해도 그것은 단지 말뿐, 바비도 살릴 수 없는가 하면 캐티도 살리지 못하고 우리 자신조차 살릴 수 없다는 것이 명백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대신 야구와 복서, 판문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정전 회담 등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었다. 신문에 게재되고 있는 정전회담의 미국 대표에게 트집을 잡기도 했다. 나는 이덴 산타나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누군가가 이런 제안을 했다. 이번 금요일은 샐의 생일이고 급료일이기도 하다. 한 번 성대한 파티를 열어보면 어떻겠냐고. <미스 텍사스 클럽>을 추천한 것이 누구였는지는 모른다. 그 클럽에는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곳이 스트립 흥행장이고 펜서콜라의 교외, 서쪽으로 향하는 하이웨이 연도에 있다는 것 뿐이었다. 좋다, 모두 돈을 추렴하기로 했다. 입장할 때는 해군의 신분증명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것은 제복을 입고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미다.
상관 없지 않은가.
그리고 스트리퍼 가운데 한 사람을 샐에게 선물한다.
그거 좋지.
크그사 . 산타나
그리고 마음껏 마시고 떠들고 노래를 부르자. 이 시시한 1953년의 여름 밤에.
좋다, 좋아.
이튿날 아침 베케트가 보급부에 들어와 편지를 휘두르면서 나에게 말했다.
"어이, 무언가 좋은 소식인 것 같은걸."
그 순간 이덴의 편지로구나 하고 생각했다. 몸이 떨렸다. 결국 온 것이다. 편지를 받아들자 아무렇지도 않은 듯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고 베케트가 사라지는 것을 기다렸다. 그런 다음 발신인을 보았다.
브롱크스에 있는 부친에게서 온 것이었다.
제기랄!
자신의 마음이 이제는 존재하고 있는지 어떤지도 확실치 않은 세계에 떠돌고 있을 때, 배후에 남겨두고 온 세상에서 보낸 편지. 나는 천천히 겉봉을 뜯었다.
아들아
편지를 쓰는 일은 고역이다. 내가 문장을 쓰는 일에 서투르다는 것은 너도 알고 있을 것이다. 아일랜드인은 `구변'에 재능이 있다고 세간에서는 말하지만 나에게는 그것도 해당이 되지 않는 것같다. 그러고 보니 나의 부친도 그러하셨다. 오, 부친의 혼령이 천국에서 평안하시기를......
지난 번에 받은 너의 편지를 읽고 네가 정말 자랑스럽게 생각되었다. 너는 조국을 위해 성실하게 의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 같구나. 한국 전쟁은 이제 곧 끝날 모양이지만 이 나라는 너와 같은 인물들을 필요로 하고 있다. 빨갱이는 어디에고 있으니까. 저 맥카시라는 인물의 말을 들어보는 것도 바람직하다. 그는 빨갱이들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네가 한국에 가는 일은 없겠지만 빨갱이를 타도해라. 미국의 남부에도 반드시 있을 것이다.
너의 동생들은 모두 잘 있다. 대니는 너를 닮아서 문장을 구사하는 재능이 있는 것 같다. 홀리 네임 학교에서 A를 두 개나 땄다. 작문 과목에서. 그 녀석이 쓰는 얘기를 나는 도통 알 수가 없다. 어쩐지 `엉뚱한' 얘기여서. 그런데 그 녀석은 하룻밤을 꼬박 새우면서 미친듯이 계속 써대고 있다. 열 한 살의 나이로서는 대단한 것인지도 모른다. 생일선물로 타이프 라이터가 필요하다고 한다. `딕'영과 같은 스포츠라이터가 되고 싶다는 거다. 그 녀석도 너를 닮아서 몽상가인 것 같다. 로리는 역시 네가 지니고 있는 그림의 재능이 있는 것 같다. 그 녀석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1년내내 그림을 그리고 있다. 네가 보내준 그림이 상당히 마음에 든 것 같다. 물론 그 녀석은 아직 너만큼 능숙하지는 못하지만 모친의 소질을 이어받은 것 같구나. 어쨌든 아직은 아홉살이니까 잘 하고 있는 편이지. 이만 펜을 놓기로 하겠다. 너도 즐겁게 지내고 있는 것 같구나. 요전의 편지에서 네가 `교제'하던 여성은 어떻게 되었니? 꽤 진지한 것 같던데. 좋은 여자일 것 같구나. 그런데 네가 전에 교회에서 교제하던 아가씨를 지난 번에 보았다. 유감스럽게도 상당히 살이 쪄있더구나. 그것은 `좋은 물건'이 못 되지. 정확히 말해서.
또 틈이 나면 편지를 보내거라. 이쪽은 만사에 변함이 없다. 네가 빨리 돌아오기를 모두 기도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변치 않는 사랑을! 애비로부터'라고 씌여져 있었다.
무릎 위에 놓고 접거나 또 펼치거나 했다. 나도 드디어 `변치 않는 사랑을'이라는 문구를 갖게 된 것이다.
불쑥 부친을 만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뉴욕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해군과 색소폰 주자의 손을 부러뜨리는 부류들에게서 멀리 벗어나고 싶었다. 이덴 산타나와 함께 지냈던 곳을 이제는 떠나고 싶다. 지금 이 순간 뉴욕의 브룩클린, 7번가 378번지의 아파트 3층으로 달려가고 싶어졌다. 그렇다, 명령과 서약과 래드 캐논이 없는 곳, 회전 경사판과 야자수, 임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곳으로.
나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샐의 생일 전날 밤, 밖에서 들려 오는 시끄러운 사람의 목소리에 꿈에서 깨었다. 병사는 텅 비어 있었다. 몹시 무더웠다. 뒤섞인 목소리의 주인공의 한 사람은 마일즈 레이필드였다.
"부탁입니다. 제발 그렇게 함부로 굴리지 말아 줘요."
그 목소리에는 불안과 공포가 스며 있다.
"부탁입니다, 제발 그 것 만은......"
속옷 차림 그대로 서둘러 문으로 달려가 망 너머로 밖을 내다 보았다. 밖의 도로에서 마일즈 레이필드가 래드 캐논에게 애원하고 있었다. 그 옆에서는 두 명의 젊은 수병이 창고에서 운반해 낸 마일즈의 사물을 닥치는 대로 소형 트럭에 싣고 있었다. 마일즈가 그린 그림, 브러시, 파레트, 물통, 그리고 카세인의 튜브, 스케치북. 마일즈의 비밀 아뜨리에의 모든 비품들, 그의 인생에 있어서 너무나도 소증한 모든 것들이었다. 서둘러 침대로 돌아가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신을 신고 밖으로 나갔다.
"부탁입니다, 그렇게 난폭하게 그림을 다루지 말아 줘요."
마일즈는 애원하고 있었다. 이쪽을 눈치채고 나를 본 그의 눈에는 호소의 말이 담겨 있었다. 그 눈은 말하고 있었다. 부탁이야 제발 도와 줘. 부탁이야, 살려 줘. 그는 어떻게든 래드의 이성에 호소하려고 하고 있었다.
"래드, 부탁합니다."
"귀찮게 구는군." 캐논이 말했다. "너는 이미 사문이 결정됐어. 사태를 더 이상 악과시키지 않는 것이 신상에 이로울걸."
내가 말을 걸었다.
"그가 무슨 나쁜 짓을 했다는 겁니까, 도대체?"
"참견하지 말아. 군법 회의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군법 회의요?" 내가 되물었다. 마일즈의 얼굴에서 순간 핏기가 싹 가셨다. "도대체 무엇 때문이죠?"
"자넨 그놈의 스케치북을 보았나?" 캐논이 말했다. "만일 보았다면 최상의 증인이 될 수 있을 거다. 너희들의 그림은 모두 비슷해. 아, 그 스케치북을 보지 않았다면 내 말 뜻을 알아듣지 못하겠군."
마일즈는 문틀에 한쪽 손을 걸치고 기대었다. 입은 힘없이 벌여져 있었다. 다가가 한 손을 어깨에 걸치자 그는 몸을 뺐다. 나는 래드 캐논쪽을 돌아다 보았다. 그는 씨익 미소를 띠워 보이더니 트럭에 몸을 싣고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마일즈 레이필드의 목숨과도 같은 그것들이 짐받이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이젠 끝장이야." 속삭이듯이 마일즈가 말했다. 털퍼덕 땅바닥에 주저 앉더니, 그는 모든 힘이 다 빠진 듯이 벽에 기대었다. 나는 그 자리에 웅크리고 그를 마주 바라보았다.
"어쩌다 놈이 냄새를 맡게 된 거지?" 그렇게 묻기는 했지만 대답은 뻔했다.
마일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천천히 절망적으로 고개를 젓고는 조용히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의 어딘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 고통과 비애가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나는 마일즈 곁에 앉아 그의 어깨를 손으로 감싸 안고 오랫동안 꼭 껴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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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나는 마일즈와 함께 식당으로 갔다. 그러나 그는 아무 것도 입에 대지 않았다. 나중에 함께 산책을 했다. 여름 밤은 길다. 계속 걸으면서 나는 어떻게든 그에게 말을 건네 보려고 애썼다. 그렇지만 마일즈는 망연히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래서 전보다 어리게 보이기도 했는데, 동시에 연약해 보였다. 이제까지 외부의 세계로부터 몸을 지키는 무기였던 언어를 그는 잃어버리고 만 것 같았다. 도중에 세 번 그는 우뚝 멈추어 섰고 그때마다 흐느껴 울었다. 울음이 그치기를 기다렸다가 또다시 그를 재촉해서 걷기 시작했다.
구멍난 철책으로 빼꼼히 그를 바라다 보기도 했지만 그는 반응이 없었다. 그리고 우리가 언제나 입버릇처럼 지껄이던 말을 내뱉었다.
"정말 지긋지긋하군 해군은." 하고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어둠 속을 나는 그와 함께 병사로 되돌아가 그가 옷 벗는 것을 지켜 보았다.
그는 그대로 말로 하지 않은 채 침대에 쓰러져 눈을 감고 잠에 빠져 들어갔다.
나의 침대에 누운 나는 한동안 잠도 자지 않고 마일즈의 일을 생각했다. 날이 밝으면 프레디 헤러드를 찾아서 경고를 해야겠다. 자신과 마일즈에게 불리한 말은 하지 말라고 못을 박아두는 것이 좋겠다. 분명히 래드 캐논과 맥데드 상등병이 신문을 하기 위해 올 것이라고 말해 두자. 두 사람은 어떤 책략이나 공갈을 이용해서 프레디를 처벌하고 마일즈를 십자가에 매달려고 할 것이 틀림 없다. 죄명은 남색죄라고 그들은 말할 것이다. 이것도 사전을 들추어서 발견한 말이다. 놈들이 애틀랜타에 사는 마일즈의 부인에게 통지하는 꼴을 나는 상상해 보았다. "부인, 댁의 남편은 호모입니다." 마일즈의 모친에게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아드님은 페니스에 문제가 있어서 말입니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든 프레디는 전면 부정을 관철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프리체트 대령은 설마 합증국 정부 소유의 시설을 아뜨리에로 사용하고 있었다는 죄목으로 그를 군법 회의에 회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확실히 규칙 위반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마일즈는 무슨 공산중국의 스파이에게 군사 기밀을 팔아 넘긴 것은 아니니까. 이것은 아주 사소한 위반 행위에 불과한 것이다. 말하자면 `가정 사정'과 같은 것이다.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저 스케치북 뿐일 것이다.
나중에 나는 이렇게도 생각했다. 비록 마일즈가 군법 회의에 회부되어 해군에서 추방되었다고 해도 그렇게 비관할 일은 아니지 않는가. 적어도 마일즈는 자유롭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별볼일 없는 해군에서, `지구의 뒷구멍'에서 해방되는 것이므로. 그렇다 그는 그때부터 좋아하는 곳으로 갈 수 있는 것이다.
실로 마일즈는 나보다 자유롭게 될 것이다. 나는 당분간 어찌할 도리가 없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갑자기 자유가 그리워졌다. 나도 이곳에서 빠져 나가고 싶다. 그렇다고 해서 단지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저 아파트 3층 왼쪽의 고향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이곳에서 빠져 나가고 싶은 것이다. 딱딱한 규칙과 규율로부터, 에리슨 비행장이라는 지루한 감옥에서 빠져 나가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이덴을 찾고 싶다. 그녀가 어떤 피부를 지니고 어떤 과거를 지녔던 상관이 없다. 어디 출신이든 어디에 살고 있든 상관 없다. 이 순간 무엇을 하고 있든, 앞으로 어떤 희망을 품고 있든 상관 없다.
아무튼 나는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있고 싶다.
이튿날 아침, 눈을 뜨자 마일즈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침대도 정돈이 되어 있고 단정하게 접은 시트와 담요가 레몬빛의 아침 햇빛을 받고 있었다. 샤워를 한 다음 재빠르게 옷을 입고 식당으로 갔다. 샐과 막스가 일찍이 와 있었다. 파티의 진행 방법을 여러 가지로 짜서 급료의 용도도 거의 정해진 것 같았다. 그러나 마일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주방에서 프레디를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어 이쪽으로 불러 들였다. 그는 옆의 출입구에서 나왔다.
"지금 바빠, 난." 그가 말했다. "무슨 일이지?"
나는 마일즈 레이필드에 대해서 얘기하고 캐논과 맥데드가 반드시 찾아올 거라고 경고했다. 순간 겁에 질린 빛이 프레디의 얼굴에 떠올랐다. 마일즈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느냐고 내가 물었다.
"오늘 새벽에 여기 있었는데." 주위를 힐끗힐끗 둘러 보면서 프레디가 말했다.
"6시쯤이었나 커피와 롤빵의 식사를 들고 편지 같은 것을 쓰고 있는 것을 보았어."
"모습은 어땠지?"
"평소와 다름 없는 것 같던데?" 우리는 또 안으로 돌아갔다. 샐이 전날 밤 <다트 바>에서 막스가 낚은 여자의 얘기를 하고 있었다. 신장 6피트 3인치, 몸무게 90파운드라고 한다.
"마치 편지봉투 따는 칼처럼 날씬한 여자였지. 그놈에게 막스가 한 눈에 반한 거야." 샐이 말했다. "반한 것이 아니였어 샐. 껴안고 싶었을 뿐이야."
마일즈 레이필드를 보지 못했냐고 내가 물었다.
"아아 보았지." 샐이 말했다.
"이발소 계단에 앉아 있더군. 30분 전이지. 편지를 쓰고 있던 것 같애. 왜 그래? 무슨 일이 있었나?"
"아니, 별로."
보즈웰이 와서 앉고 최신의 뉴스를 알려 주었다. 할레르슨이 전함 사라토가에 근무하게 되었다고 했다. "펄 하버에서 출항한다는 거야."
눈망울을 빙글 빙글 돌리면서 그가 말했다.
"아아 제기랄! 나도 하와이의 미녀와 흠뻑 즐기고 싶군."
"하와이의 미녀들이 뭐라고 할까 보즈웰?" 샐이 말했다.
"글쎄." 막스가 말했다. "미녀에 관한 한 우리들 유태인에게 맡기라는 거야."
"하지만," 보즈웰이 말했다. "어쨌든 놈은 가버린 거야."
그것 봐라. 잘 됐다고 나는 생각했다.
식사를 마치자 샐과 막스는 그럼 오늘 밤 또 만나자고 말하면서 격납고쪽으로 향했다. 나는 보즈웰과 함께 보급부로 갔는데 도착하자마자 대니 레이가 총원 점호를 명했다. 여느 때와 같은 멤버들이 모였지만 한 사람 마일즈 레이필드의 모습만 보이지 않는다.
"마일즈는 아침 식사를 하고 있습니다." 내가 말했다.
"찾아 오겠습니다."
"대지급으로 부탁한다." 안색이 어두워지면서 대니 레이가 말한다. "규칙상 그놈은 도망을 친거나 다름 없으니까."
서둘러 밖으로 뛰쳐 나왔다. 그러나 마일즈는 아무 데도 없었다. 이발소, 병사, 식당, 진료소, 우체국, 어디에도 없다. 아아 그는 이곳에 왔었죠, 하고 우체국에 근무하는 민간인이 말했다. 우표를 2달러치 사가지고 갔습니다. 하지만 벌써 2, 3시간 전의 일입니다.
그밖의 장소에서 그를 보았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하는 수 없다. 보급부에 돌아가 대니 레이에게 보고 했다.
"곤란하군, 이대로라면 무허가 부대 이탈로 처리되는데." 한숨 섞인 말로 그가 말했다.
"그 전에 진료소에 연락을 해 두면 어떻겠습니까?" 내가 말했다.
"어딘가에서 갑자기 아파서 쓰러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진료소로 옮겨지겠지요, 틀림없이."
대니 레이는 또 한숨을 쉬었다. "아아 그렇지 않으면 역시 탈주를 기도해서 지금쯤은 이미 모빌 근처까지 도망을 갔겠지." 힐끗 팔목시계를 본 다음, 입의 안쪽을 깨물고, "그것은 어쨌든간에 마루 청소를 시작해 주게. 오늘은 네 차례야."
그는 말없이 전화를 바라보았다. 갓 베어낸 풀내음이 창의 블라인드를 통해 홀러 들었다. 곤충이 붕 소리를 내면서 날고 헬리콥터가 폭음 소리를 내면서 떠올랐다. 나는 걸레와 양동이, 비누 등을 챙겨 둔 청소함 창고쪽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그러자 마일즈가 있었다. 수도관에 동여맨 잿빛의 빨랫줄에 매달려 있었다. 목이 직각으로 구부러져 있고 빨랫줄이 피부에 짓눌려있고 얼굴은 검푸르게 변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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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랫줄을 자르고 그를 끌어내린 것은 베케트였다고 기억한다. 아니, 대니 레이였는지도 모른다. 확실히 기억이 나질 않는다. 기억나는 것은 보즈웰과 파슨스, 대니가 저마다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구급차를 불러라. 위생병을 불러라. 누구 인공호흡을 할 줄 아는 사람 없어? 서둘러! 아직 살릴 수 있을지도 몰라. 좋아, 그렇게. 살짝 안아서 내려 놓아. 여기 저기에서 팔이 뻗혀져 그가 안겨지고 셔츠가 풀어 헤쳐졌다. 콘크리트 바닥에 고무밑창의 슬리퍼들이 부리나케 끌리고 뛰어 다니고 물동이가 뒤집혀지고 남자들의 노성이 뒤섞였다. 제기랄, 왜 이런 짓을 했지? 더욱 부르짖는 소리가 요란하고 문이 쾅하고 닫혔다. 그리고 쉴새 없이 울리는 전화 벨소리. 죽음의 기혹학.
나는 보랏빛으로 지렁이처럼 부풀어 오른 마일즈의 목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콘크리트 바닥에 널브러진 그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 그 마루바닥 위에서 마일즈는 이제는 두 번 다시 욕설을 퍼붓는 일도 없을 것이고 그곳을 걷는 일도 없을 것이며 금요일 오후 청소를 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나는 해군을 저주했다. 신을 저주했다. 래드 캐논을 저주했다. 울면서 마일즈의 머리를 감싸안고 그의 목숨이 점점 꺼져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너무도 슬퍼서 소년처럼 흐느껴 울었다. 드디어 위생병이 달려 와서 멎은 심장에 층격 요법을 가했다. 그러나 헛수고였다. 아무래도 늦은 것 같군 하고 위생병이 말했다. 이미 죽었어, 어이 이 사람의 병적 번호는 몇 번이지?
베케트가 나를 밖으로 끌어냈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목이 메어 배케트에게 말했다. 마일즈가 죽어버리다니. 하지만 그놈은 지금 갑자기 없어진 것이 아니다. 벌써 며칠 전부터 그는 궁지에 몰려 있었던 거다. 맨먼저 그들은 그의 가장 중요한 것을 빼앗겼다. 그의 스케치, 그림, 그림물감과 쵸크, 모두 없어지고 말았다. 그는 그들에게 혀를 잘린 것이나 다름 없었던 것이다. 그는 넋을 잃고 슬퍼했으며 침묵했다. 그리고 오늘에야 비로소 놈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해치운 것이다. 자진해서 해군과 이 세상에 작별을 고했으니까.
마일즈, 이 바보! 나는 소리내어 말했다. 왜 이런 일을 저지른 거야, 이 바보야! 차라리 이런 일을 저지를 셈이었다면 깨끗이 탈주라도 시도하는 편이 낫지 않은가. 왜 스스로 목을 매달았단 말인가!
그러자 배케트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 해 둬, 어이 마이클 자네도 사나이잖아."
그래서 나는 눈물을 닦고 크게 심호흡을 한 다음 기지개를 켜고 보급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베케트는 따라오지 않았다. 입구에 닿자 마침 위생병들이 마일즈의 유해를 들것에 실어 대기하고 있는 해군의 구급차로 옮기고 있는 중이었다. 유해에는 담요가 덮혀 있었다. 시종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마일즈를 구급차에 실은 위생병들은 문을 쾅 닫은 다음 사라졌다. 안으로 들어간 나를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맞이했다.
"오늘은 그만 쉬는 것이 어떤가?"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대니 레이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괴로운 일이야, 저런 모습을 보는 것은. 차라리 전투가 낫지."
"정말 괜찮습니다."
"조금도 괜찮은 표정이 아닌데?"
"그는 저의 친구였습니다. 그가 좋았습니다. 저는 그것 뿐입니다."
"아아 그것은 알겠다. 하지만 괜찮다면 어딘가 기분 전환하러 다녀와도 좋아."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는데요. 그의 부인에게 전화도 해야 하고."
"그의 부인?"
"네, 마일즈는 입을 열기만 하면 그녀의 얘기를 하곤 했었죠...... 부인의 얘기를. 애틀랜타에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머니도 계실 겁니다. 같은 시내에."
"흠."
"누군가가 전화를 해야 합니다."
"그래, 그렇게 해야지."
그는 내 책상의 전화를 들고 본부의 메이허를 불러냈다. 마일즈의 가족에 대해서 그가 문의하고 있는 것을 들으면서 나는 마일즈의 책상쪽을 돌아다 보았다. 그가 자살을 결심하고 있었던 것과 같은 징후는 아무 것도 없었다. 재떨이, 쌓여 있는 청구서, 그리고 연필이 몇 개 있을 뿐이었다. 연필 한 개를 주머니에 집어 넣은 다음 창 너머로 무더운 6월의 아침을 바라보았다. 아무 것도 변한 것은 없다. 어슬렁 어슬렁 횡단보도를 걸어가는 수병들, 폭음도 요란하게 하늘을 날으고 있는 헬리콥터. 지금부터 수 시간 전 심장을 두근거리면서 결단을 했을 때 마일즈의 뇌리에는 어떤 상념이 교차했을까.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고통과 비에와 굴욕을 느꼈다 하더라도 그것은 영원히 끝나고 만 것이다.
대니 레이가 수화기를 놓았다.
"그의 모친에게는 대령이 전화를 하겠다고 하는군."
"부인에게는 어떻게 하죠?"
대니 레이는 애처러운 듯한 눈초리로 나를 보았다.
"마일즈에게는 아내가 없었다는군."
카운터쪽을 향해 그가 말했다.
"하루 쉬어 자넨." 몹시 친절한 말투였다.
"마일즈는 자네 친구였으니까."
사실 그랬다. 마일즈는 나의 친구였다. 샐의 친구도, 메이허의 친구도 아니었다. 다른 누구의 친구도 아니었다. 오직 한 사람 프레디 헤러드를 제외하고. 마일즈는 O스트리트 패거리가 아니었다. 그곳에서의 난폭하고 치기 어린 소동에 단 한 번도 가담하지 않았다. 행크 윌리엄스가 죽든 그는 개의치 않았고 웨브 피어스의 노래 가사 따위도 전혀 몰랐다. 그래서 나는 샐이나 막스에게 마일즈의 죽음을 알리러 가지 않았다. 그들은 지금쯤 <미스 텍사스 클럽>에서 샐의 생일 파티 얘기에 열심일 것이다.
나는 프레디를 만나러 갔다.
그는 `어둠의 왕국'의 셔터가 내려진 곳으로 통하는 계단에 앉아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이쪽을 내려다 보았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프레디."
"뭐야?"
"마일즈가 죽었어, 프레디."
"뭐라고?"
"오늘 아침에 자살했어."
프레디는 나보다 서너 단 위의 계단에서 천천히 신중하게 일어섰다. 쓸데 없는 농담 집어 치우라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이건 농담이 아니야."
"그럴 수가!"
"목을 맸어. 걸레 창고에서."
`걸레 창고'라는 말을 들으면 마일즈는 웃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마도 그곳을 택했는지도 모른다. "그가...... 유언을 했나? 유서 같은 것을 남겼어?"
"글쎄, 그건 모르겠는걸."
순간 안도한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프레디는 내 등 뒤의 보급부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 다음 손잡이를 잡고 털썩 계단에 주저 앉더니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날 정오가 되기 전에 프레디는 로커의 짐을 모두 헐렁한 자루에다 담아 놓고 있었다. 메이허가 그의 이동 명령을 타이프로 치고 프리체트 대령이 거기에 사인했다. 프레디는 리오티 항구로 향했다. 안녕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이렇게 생각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틀림없이 프레디 헤러드는 래드 새도를 만나러 가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래드 새도를 만나러 가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물론 마일즈 레이필드도 이제 만나러 갈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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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택시로 <미스 텍사스 클럽>으로 향했다. 전원 제복 차림이었다. 샐과 막스는 큰 소리로 농담을 주고 받고 있었고 메이허는 일찌감치 보즈웰이 가지고 온 위스키를 병째 마시고 있다. 택시 운전기사는 이상한 놈들을 태우고 말았다는 낭패감을 노골적으로 나타내고 있었다. 이날 샐은 21세가 된다. 게다가 오늘은 급료일. 우리는 모두 취해서 여자를 껴안을 심산이었다. 그 이상의 야심은 갖고 있지 않았다. 만일 민간인들이 우리를 구제할 길 없는 쓸쓸한 수병으로 간주한다면 보기 좋게 그 기대에 보답하자고 모두 생각하고 있었다. 한 번 고약한 일을 시작한 바에는 끝장을 보고야 말겠다는 것이다.
마일즈 레이필드의 일을 입에 올리는 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모두가 그 일에 침묵을 지키는 까닭은 마일즈를 궁지에 몰아 넣은 비극에 무관심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 일에 관해서 그 누구든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는 탓이었다. 누군가에게 보복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기도를 할 생각도 없었다.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택시의 뒷좌석 구석에 처박힌 나는 모친이 죽었을 때의 밤샘을 상기하고 있었다. 그날 밤은 삼춘과 조카들이 찾아와서 마시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어떤 이는 웃어대기까지 했다. 그것을 보고 얼마나 화가 났던가! 하지만 그날 밤 펜서콜라의 거리를 가로지르면서 나는 모두를 용서하고 있었다. 노래를 부르는 것도 좋고 마음껏 불러서 살아있는 자의 존재를 알려 주는 것도 좋다.
그리고 지금-이곳 멕시코 만이 바라다보이는 모델방 한 구석에서 창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으면서 모진상의 밤샘을 상기하고 있는 자신을 생각하고 있는 동안-다른 죽은 이들이 나의 기억 속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아시아 정글의 무의미한 언덕에서 죽은 사람, 시나이 반도의 작열하는 사막에서 죽은 사람, 친지의 애도도 받지 못한 채 죽은 사나이들. 나는 그들의 죽음 앞에서 오한을 느껴본 일도 없고 메스꺼움을 느낀 적도 없었다. 암살자의 비정한 눈으로 알지 못하는 사자를 사진으로 찍을 수 있다는 것이 오랫동안 프로의 카메라맨으로서의 자랑이었다. 그래도 마음속에서는 이 지상의 모든 인간과 같은 상처가 언제나 쑤시고 있었다. 사랑하는 자의 죽음이 남긴 상흔. 그 최초의 상처는 틀림없이 마일즈가 죽은 그 날에 입은 것이리라. 저 머나먼 지난 날 밤, 나의 마음속에는 분노와 두려움과 수수께끼와 죄의식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소중한 친구가 죽었다. 어째서 그것을 예견하지 못했을까. 이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취하거나 여자를 껴안거나 회상하거나 하는 부질 없는 일밖에 없었다. `쇼'극장 앞에는 넓은 주자장이 있었다. 스트립쇼장. 붉은 페인트로 칠해진 거대한 창고와 같은 곳에 미스 텍사스 클럽이라는 빨간색 네온이 반짝이고 있었다. 입구에는 거한이 한 사람. 우리는 한 사람에 1달러씩 각출해 택시비를 지불하고 차에서 내렸다. 쇼 극장 앞에서 있는 거한은 손님의 신분증명서를 한 사람 한 사람 확인하고 있었는데 이쪽은 모두 흰 수병복을 입고 있었으므로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는지 한 사람당 2달러의 입장료를 받고는 들어가도 좋다고 손을 흔들었다.
"마음껏 즐기시오 세일러."
그러자 샐이 기성을 지르면서 말했다.
"아암, 실컷 즐겨야겠소 형씨. 진짜로 신나게 놀아보고 싶다구요, 우리는!"
안에는 벌써 500여 명의 손님이 들어 차 있었는데도 아직 홀은 제법 여유가 있었다. 들어가서 바로 테이블석이 있고 그 안쪽에 판자를 댄 댄스플로어와 스테이지가 있었다. 스테이지에서는 웨스턴 밴드가 계속 연주를 하고 있었다. 오른쪽에는 원형의 카운터가 있고 손님이 의자에 앉아서 마시고 있었다. 젊은 여자와 춤을 추고 있는 병사들이 시야에 들어오자 무의식 중에 이덴을 찾고 있었다.
우리는 테이블석 한 곳에 앉아 사슴가죽의 미니스커트와 스니커(고무창을 댄 신)를 신은 포동포동한 다리의 금발 웨이트리스에게 맥주를 주문했다. 반 정도 마셨을 때, 막스가 어슬렁 어슬렁 카운터로 다가가 그곳에 혼자 있던 붉은 머리카락의 여자에게 댄스를 권했다. 그때 베케트가 댄버와 함께 들어왔다. 그리고 잠시 뒤에 랠리 파슨스도 나타났고 격납고 근무자도 두세 명 찾아 왔다. 이어서 모습을 나타낸 것은 딕시였다. 그녀는 초콜릿 생일 케이크와 초가 담긴 상자를 들고 있었다.
그녀의 첫 마디가 대단했다. 댄스플로어에 있는 막스를 보고는 소리를 질러 댔다.
"들어와 이 베이비야! 그런 납작한 젖을 가진 아이하고 춤을 추다니!"
맥주를 약간 마시고 얼굴을 들자 이번에는 `1톤분의 쾌락' 손님을 헤치면서 들어왔다. 두 사람 모두 예쁘게 포장된, 샐에게 보내는 선물 꾸러미를 들고 있었다. 알로하 셔츠와 가죽 벨트였다. 밴드는 웨브 피어스의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모두들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글래스가 거기에 있으니
철철 넘치도록 따라다오
나의 괴로움이 가실 때까지
이것은 오늘의 첫 잔......
그렇게 O스트리트의 테마송을 부르고 있는 사이에 반년 전 처음으로 그 곡을 들었을 때의 일을 상기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어린애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 섣달 그믐날 밤은 어쩌면 그다지도 고독하였던가! 이덴 산타나는 어두운 버스 속에서 힐끗 보았을뿐 아직 이름도 모르는 타인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오늘 밤 너는 어디에 있을까
별 탈없이 잘 있는지
나를 생각하고 있을까
나는 이다지도 외로운데.
큰 소리로 합창하는 우리를 해병대원들이 기묘한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석양보다도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딕시가 바짝 다가섰다. 샐이 일어서서 보랏빛 블라우스를 입은 거무스름한 피부의 여성에게로 다가갔다. 메이허가 맥주를 꿀꺽꿀꺽 마시기 시작했다. 나는 무심코 입구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 래드 캐논이 들어오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아 마일즈. 가엾은 마일즈 레이필드.
래드 캐논은 갈색의 티노 팬티에 화려한 알로하 셔츠를 입고 있었다. 누군가를 찾고 있는지 눈을 가늘게 오므려뜨리고 담배 연기가 자욱한 장내를 둘러보는 듯 싶더니 카운터로 다가갔다. 앞으로 몸을 내밀고 여자 바탠에게 뭐라고 속삭였다. 담배 연기 속을 통해서 이쪽을 눈치챘을 것 같은데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네 놈이 그를 죽였어, 래드. 네 놈이 그의 관 뚜껑에 못을 친 장본인이란 말이다!
그때 음악이 멈추고 조명이 어두워졌다. 샐이 이쪽을 향해 소리쳤다. (보랏빛 드레스의 여성은 사라졌다)-"지금의 밴드 리더는 너무 서툴러서 피살되고 말았다!"
딕시가 초에 불을 붙이고 모두 샐을 위해 `Happy Birthday'를 불렀다. 해병대원들이 야유를 퍼부었다. 그들을 향해서 시끄러워, 꺼져버려! 하고 소리쳤다. 그는 손을 뻗어 케이크를 손에 움켜 쥐고 막스의 입에 밀어넣었다. 우리는 일제히 환성을 질렀다. 샐은 이어서 보자기를 풀었다. 고맙다는 듯이 `1톤분의 쾌락'의 가슴에 키스를 했다. 다음 순간 진 크루파 풍의 드럼 소리가 울려 퍼지자 다른 밴드가 `Caravan'을 연주하기 시각했다. 스테이지에 갑자기 스포트라이트가 비치고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스피커에서 목소리가 홀러 나왔다.
"만장하신 여러분 <미스 텍사스 클럽>은 오늘 밤 당대 최고의 댄서 가운데 한 사람, 하바나 공연에서 개선한 지 얼마 안 되는 스타-마담 나리타를 소개하겠습니다!"
새까만 가운으로 몸을 감싼 장신의 빨간 머리 여자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등장했다. 팔꿈치까지 닿는 흰 장갑을 끼고 얼굴은 무표정했다. 나는 글라스의 맥주를 비우고 또 쏟아 부었다. 여자는 오래 된 엘링턴의 곡에 맞추어 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그녀의 탄력있는 복부의 윤곽이 라이트에 떠오르는 것을 보고 나는 순간 래드 캐논의 존재를 잊고 저 여자의 치모는 어띤 빛을 띠고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몇 번인가 부드럽게 허리를 내밀고 히프를 돌려 대더니 그녀는 장갑을 벗기 시작했다. 관객석에서 일제히 환성이 터져 나왔다.
샐이 말했다. "저 동작은 마치 페니스에서 콘돔을 벗기고 있는 것 같구만."
마담 나리타는 드러낸 손가락을 곡에 맞추어 천천히 움직였다. 그와 동시에 또 다시 몇 번인가 허리를 내밀고,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한 손을 등으로 돌렸다. 그것을 능숙하게 움직이고 있는 사이에 가운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져 버렸다. 이제는 새까만 브래지어와 까만 팬티, 거기에 까만 하이힐만 남긴 채 그녀는 천천히 몸을 비틀고 있다. 어두운 객석에서는 와아 하는 환성이 일었다. 눈처럼 흰 마담 나리타의 살결이 희미한 블루의 스포트라이트 속에 떠올랐다. 그녀는 눈을 반쯤 감고 혀끝으로 입술을 핥으면서 탄탄한 넓적다리에서 복부, 가슴으로 손끝을 더듬어갔다.
그때 딕시가 속삭였다. "오늘은 왜 그렇게 슬픈 표정을 짓고 있지?"
"흐응." 내가 말했다. "정말 슬프기 때문이지요."
마담 나리타는 또다시 한 손을 등으로 돌렸다. 관객의 열띤 환성에 휩싸이면서 그녀는 브래지어의 호크를 벗겼다. 딕시가 테이블 밑으로 숨어 들어 바지의 지퍼를 벗겨 주지 않으려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여자 때문이라고 얼굴에 쓰여 있군." 딕시가 말했다. "무언가 다른 일도 얽혀 있구."
"친구가 죽었거든요."
"그것 때문에?"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거든요."
"여자쪽은 무슨 일이지?"
마담 나리타는 앞으로 몸을 구부리고 어깨를 떤다. 장내는 또 다시 찢어질 듯한 환성으로 휩싸였다. 호크가 벗겨진 브래지어가 마담 나리타의 가슴에서 떨어졌다.
"어떻게 되긴요." 내가 대답했다.
"그러다가는 몸을 망치고 말아." 하고 딕시가 말했다.
마담 나리타를 보고 있는 사이에 나는 울고 싶어졌다. 그녀의 유두에는 작은 플라스틱의 별이 붙여져 있었다. 그 가슴을 흔들면서 그녀는 더욱 격렬한 몸짓으로 춤추기 시작한다.
나는 천천히 딕시쪽을 뒤돌아보자 높게 겹쳐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풀어헤치면서 그녀의 입 가득히 키스를 했다. 이대로 풍만한 딕시의 육체속에서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싶었다. 딕시가 속삭였다. "오늘은 샐의 생일이야."
또다시 커다란 환성이 일었다. 마담 나리타가 팬티를 벗은 것이다. 그녀는 이제 번쩍번쩍 빛나는 G-스트링(스트립 댄서의 일종의 국부 가리개)밖에 걸치지 않았고, 더구나 그 선정적인 몸짓에는 즐거움이 아직 남아 있음을 약속하고 있었다.
나는 힐끗 카운터쪽을 보았다. 순간 발기가 사라지고 말았다. 래드 캐논이 제복의 수병과 얘기를 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수병이 이쪽을 향했을 때 얼굴이 보였다. 잭 터너였다. 뉴욕에서 이곳을 향해 달리던 버스에서 그날 밤에 알게 된 터너. 두 사람은 왠지 분석하는 듯한 눈초리로 마담 나리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어느새 바닥에 무릎을 꿇고 상체를 등 뒤로 쓰러뜨려 여성을 관객의 시선에 드러내놓고 있었다. 나는 그때 넉 잔째 비우고 있었다. 마담 나리타는 G-스트링 위로 성기를 쓰다듬어 성기의 털의 빛깔을 알고 싶어하는 관객의 애를 태우고 있었다. 그것을 곁눈질로 보면서 나는 일어섰다.
그리고 꽉 들어찬 테이블 사이를 천천히 걸어갔다. 입구 근처의 벽을 따라서 많은 수병과 해병대원이 서 있었다. 나는 카운터로 향했다. 어쩌면 이제부터 어리석은 행동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전혀 무의미한 행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이야말로 나에게 있어서는 마일즈의 사건을 결말 지을 호기였다.
처음로 나를 눈치챈 것은 잭 터너쪽이었다.
"어이, 이거 오랫만이군 세일러. 어떤가? 건강하게 지내고 있나?"
나는 손을 내밀며 인사를 했다. 그때 마담 나리타가 G-스트링을 힘껏 옆으로 제쳐 숲을 사내들의 시선에 드러내 보였다. 엄청난 환성이 장내에 소용돌이쳤다. 수병과 해병대원들이 계속 바닥을 구르고 두 손과 글라스로 테이블을 쳐댔다. 나는 캐논쪽으로 다가갔다.
"잠깐 좀 보지 않겠소, 래드?"
캐논은 꼼짝도 하지 않고 말했다.
"꺼져 버려, 이 애송아."
터너가 나의 두 팔을 눌렀다.
"어이, 무슨 짓이야 이게?"
"당신과는 상관 없는 일입니다. 나와 이 사람과의 문제입니다."
"무슨 뜻이지, 그게?"
"래드는 내 친구를 죽였습니다."
래드가 말했다. "친구라면, 그 호모놈 말인가?"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표정으로 글라스의 술을 마시면서 마담 나리타의 최후의 연기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마담 나리타가 고별로 다시 한번 허리를 내밀자 관객은 모두 일어서서 어둠 속에서, "더!" "조금만 더!" 하고 간청했다.
무엇이라도 좋다. 래드 캐논을 통렬하게 끽소리도 못하게 해 줄 말은 없을까. 그렇다, 놈을 완벽하게 단죄할 수 있는 말이. 그렇지만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 래드 캐논의 셔츠 앞자락을 잡았다. 터너가 우리들 사이에 끼어들어 내 얼굴에 바짝 얼굴을 대고 험상궂은 말투로 말했다.
"조용히 기지로 돌아가라 세일러!"
래드가 히죽 웃으며 터너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내버려 둬, 이쯤에서 이놈에게도 맛을 보여 주는 것도 좋을 테니까."
다음 순간 나와 래드는 관객을 밀어 제치고 밖으로 나와 경비 앞을 지나서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때 갑자기 두려운 생각이 들고 무릎의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앞장 서서 걷고 있는 것은 나였다. 주차장에 다달아서 뒤를 돌아보는 순간 말도 없이 래드 캐논이 덤벼 들었다. 나는 한 방에 그 자리에 쓰러졌다.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머리가 텅 비었을 뿐이었다. 놈은 차리라고 생각하고 한 바퀴 돌았다. 중요한 고환을 지키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래드는 발길질을 하지는 않았다.
"빨리 일어나, 이 애송아!" 조용한 목소리로 래드가 말했다.
"흠씬 두들겨 줄 테니까."
나는 일어서서 그를 마주 보았다. 근육이 늠름한 몸집의 작은 사내는 무표정한 얼굴로 두 손을 가슴에 대고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 얼굴에는 자신감이 가득 차 있고 이제부터 실컷 즐기겠다는 여유마저 풍기고 있었다. 나의 대응 여하에 따라서 틀림없이 놈을 뜻을 이룰 것이다. 머리가 아찔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순각 뒤로 물러 서서 두 손으로 자세를 취했다. 이제야말로 브룩클린에서 배운 모든 것을 상기해야 한다. 그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할 것 같았다.
래드가 덤벼들면서 오른쪽 주먹을 휘둘렀다. 순간적으로 더킹을 하면서 피하자 그의 주먹은 나의 측두부를 스치면서 빠져 나갔다. 그곳에 마음껏 훅을 날렸다. 계속해서 오른쪽 펀치를 넣었는데 이것은 헛손질이었다. 다시 한번 훅을 날리자 래드는 신음 소리를 냈다. 이 한 방은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 그때 등 뒤에서 고함 소리가 들렸다. 뒤돌아 보자 걱정스러운 듯한 터너의 얼굴과 차에서 내려 다가오고 있는 여섯 명 정도의 해병대원의 모습이 보였다. 래드의 펀치가 날아와 나는 다시 쓰러졌다. 해병대원 가운데 한 사람이 소리쳤다.
"좋아 해군! 해치워 !"
래드가 소리쳤다. "구경 거리가 아니야, 이 바보들아!"
웬지 모를 당혹감을 느끼면서 나는 일어섰다. 맞는 것은 두렵지 않았지만 구경거리가 되는 것은 싫었다. 그 긴장감에서 나는 래드를 향해 돌진했다. 그리고 배에 한 방을 먹이고 뜻하지 않게 몸을 굽힌 곳에 또 펀치를 먹였다. 그것은 효과가 있었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 꼴보기 싫은 놈을 때려 눕혀라!"
더욱 펀치를 먹이고 구역질을 하는 곳에 추격의 일격을 가했다.
그때였다. 개브리의 얼굴이 보인 것은.
저 메인사이드의 게이트를 지키고 있었던 해병대원.
바비 볼덴을 병원으로 옮기려고 했던 그날 밤.
이덴 산타나가 공포로 자지러지게 놀라 나의 인생에서 모습을 감춘 그날 밤. 놈은 차의 본네트에 기대어 내가 두드려 맞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제기랄 여기에서 삐에로가 되는 것은 질색이다. 나는 래드를 들이받고, 또 마주 오는 곳에 잽을 넣었다. 한 방 두 방. 또 한 방. 그것을 잽싸게 빠져나가 래드가 돌진해 오는 곳에 오른쪽 스트레이트. 이것은 멋지게 미간을 명중했다. 그의 코에서 피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래드의 얼굴에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바로 왼쪽으로 스텝을 밟고 보디에 혹을 쳐넣고, 발을 멈추어 몸을 비틀자마자 어퍼컷을 처올렸다. 턱에 명중했다. 래드는 드디어 그 자리에 쓰러졌다.
나는 그곳에서 결말을 짓고 싶었다. 그를 자갈에 때려눕힘으로써 나 자신의 공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래드는 순순히 때려눕힐 수 있는 사내가 아니다. 어느새 구경을 하고 있는 해병대원의 수가 늘고 있었다. 래드가 천천히 일어나는 것을 보고 일당들 사이에서 환성이 일었다. 피투성이가 된 래드의 얼굴에 엷은 웃음이 떠오르고는 그 다음 순간 그는 돌진해왔다. 이제야말로 카운터를 먹어야 한다. 래드의 콧대를 꺾듯이 나는 펀치를 날렸다. 래드의 발이 멈추었다. 전의를 상실한 듯이 나에게서 등을 들렸다. 그렇게 보이면서 그는 다시금 돌진해 왔다. 나는 사이드스텝을 밟으면서 몸을 피했다. 래드는 힘에 겨워 해병대원의 무리쪽으로 날아갔다.
싸움의 양상이 일변한 것은 그 순간이었다.
해병대원 가운데 한 사람이 래드를 들이받았다. 이어서 또 한 사람. 그들은 래드를 에워싸 가두어 놓고 어깨와 등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그처럼 밉게 보였던 래드가 갑자기 작고 가련해 보였다. 그의 몸은 진흙투성이가 되었다. 미간에서 홀러 내리는 피가 코를 통해서 떨어졌다.
나는 터너쪽을 보았다.
말이 필요 없었다.
나와 터너는 해병대원의 무리로 돌진했다. 몸의 깊은 곳에서 짐승과 같은 신음 소리가 끓어 오르고 나는 이미 반 미치광이가 되어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싸움의 룰이고 뭐고 없다. 나는 래드라는 해군동료를 해병대원들에게서 구출하기 위해 바보 같은 해병대원을 응징하는 것이다. 우선 표적이 된 것은 개브리였다. 놈의 얼굴에 팔꿈치로 한 방 먹이고 동시에 사타구니를 발로 찼다. 억! 하면서 개브리의 몸이 고꾸라졌다. 바로 이때다 하고 이번에는 놈의 엉덩이를 찼다.
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에게 습격을 당해 쓰러졌다. 쓰러지면서도 나는 두터운 발뒤꿈치의 부츠를 잡고 힘껏 잡아당겼다. 해병대원이 쓰러졌다. 나는 곧바로 일어서서 그놈을 힘껏 걷어 찼다. 래드 캐논은 두 사람을 상대로 싸우고 있었다. 얼굴은 피투성이었다. 등은 찢겨져 있다. 달려가서 상대 중 한 사람을 쳐 쓰러뜨렸다. 터너는 지변에 엎드린 채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도와주려고 생각했지만 또 다른 해병대원이 나와 래드에게 덮쳐 왔다. 나는 공중으로 들어올려져 차의 본네트에 내동댕이쳐진 다음 땅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래도 천천히 일어났다.
온 몸이 쑤시고 아팠다.
차에 기대어 래드쪽을 보자 3명의 해병대원에게 둘러싸여 땅바닥에 내동이쳐 지려는 순간이었다. 어떻게든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무슨 영화라도 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래드는 두 다리를 벌리고 서서 두 손을 가슴에 주먹을 쥔 자세로 언제까지든 싸우려 하고 있다. 해병대원들의 움직임이 순간 멈췄다. 래드의 여력을 확인이라도 하듯 한 사람이 뚫어지게 그를 바라보고 있다. 다른 한 사람이 바지 벨트를 빼서 그것을 주먹에 감았다. 그들은 공격을 재개했다. 벨트가 하늘을 갈랐다. 한 번, 두 번. 래드는 코웃음을 쳤다.
그런 가운데 나는 안간힘을 써서 차의 본네트로 기어 올라갔다. 그리고 얏! 하는 절규와 함께 가장 가까운 해병대원에게 덤벼들어 땅바닥으로 잡아끌어 쓰러뜨렸다. 그곳에 개브리가 덮쳐 왔다. 놈도 묵직한 버클이 달린 벨트를 휘두르고 있었다. 그때 놈의 배후에 샐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막스의 모습도.
메이허와 댄버와 파슨스도.
놀랍게도 딕시까지 와 있었다. 그녀는 백에 손을 집어 넣고 무언가를 끄집어내려 하고 있었다.
기병대의 도착이다.
개브리가 그쪽으로 돌아섰다. 나는 일어섰다. 더욱 더 많은 해병대원과 수병이 <미스 텍사스 클럽>에서 뛰쳐 나오고 있었다. 이제는 주차장의 여기 저기에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개브리를 두 대의 차 사이로 끌고 가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놈이 녹초가 될 때까지 펜더(차의 일종으로 완충장치)에 박았다. 그리고는 가슴 속으로 부르짖고 있었다. 바비 볼덴의 원한을 깨달았느냐, 마일즈 레이필드의 원한을 깨달았어? 이덴 산타나의 원한을 깨달았어?
그런 가운데 누군가에게 어깨를 잡히고 얼굴이 돌려지고 주근깨 투성이의 장신의 해병대원에게 머리를 한 방 맞았다. 다음 순간 이번에는, 그 해병대원이, 나에게 가한 것처럼 똑같이 샐에게 두들겨 맞았다. 주근깨 투성이의 해병대원은 견디지 못하고 나자빠졌다. 샐은 그놈의 머리를 걷어 찬 다음, 다른 상대를 향해 나아갔다. 그는 재미있다는 듯 미친놈처럼 웃고 있었다. 40피트 전방에 막스가 보였다. 한 해병대원의 손목을 잡고 풍차처럼 빙빙 돌리고 있다. 그 선회의 속도가 절정에 달했을 때에 손을 놓자 상대는 10피트 정도 날아가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소형 트럭에 격돌했다.
수병과 해병대원이 도처에서 서로 치고 받았다. 딕시는 지면에 쓰러진 해병대원의 머리를 짤막한 곤봉으로 두들겨 패고 있었다. 뻗어있는 것은 해병대원 뿐만이 아니었다. 잭 터너는 아직도 일어날 기미가 없었다. 그쪽으로 가려고 했을 때 해병대에게 잡혔다. 나는 이미 녹초가 되어 두 손을 들 수조차 없을 지경이었다.
"멈춰!" 그가 고함을 쳤다. "움직이지 말아."
나는 그의 얼굴에 펀치를 날렸다. 그는 눈을 깜짝거린 다음 되받아 쳤다. 재빠르게 몸을 숙여 그것을 피하고 크게 숨을 들이쉬고 그의 명치를 스트레이트로 먹였다. 쿵하고 주저앉은 상대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무언가 움켜쥘 것을 찾는 듯이 손을 옆쪽으로 뻗쳤다. 그 얼굴을 향해서 나는 걷어찼다.
그때 다급한 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돼 ! 놈들이 왔다!"
SP다.
SP 일당이 지프 3대에 나누어 타고 하이웨이를 달려 온 것이다. 선두의 지프가 벌써 <미스 텍사스 클럽> 주차장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파티는 끝났다.
주차장 너머의 숲으로 목표를 정하고 나는 뛰기 시작했다. 그러자 메가폰으로 고함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모두들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말아라. 전원 체포한다. 도망치는 자는 용서 없이 쏘겠다!"
그 말을 듣는 놈은 없었다. 수병과 해병들은 사방팔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허리를 낮게 구부리고 차와 차 사이를 빠져나가 숲을 목표로 삼았다. 총성이 들렸다. 그리고 한 방. 갑자기 공포가 엄습해 왔지만 계속 달렸다. 멀리 뒤쪽에서 세 발째의 총성이 들렸다. 먼데서 들리는 나직한 부르짖음. <미스 텍사스 클럽>에서 홀러나오는 음악도 희미하게 들려 왔다. 다음 순간 숲속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나무 그늘에 멈추어 서서 등 뒤를 돌아다 보았다. 두 사람의 SP가 메이허를 지프로 연행하는 것이 보였다. 잭 터너가 일어나 있었는데 부상을 입은 모양이었다. 한 사람의 SP가 그에게 말을 걸고 있다. 딕시는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정신없이 달렸기 때문에 옆구리가 결렸다. 두 손도 아팠다. 목덜미 근처가 지근 지근 맥박치고 있었다. 멀찌감치에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구급차거나 SP일 것이다. 나는 더욱 더 숲속으로 들어갔다. 다른 패거리들은 어떻게든 에리슨 비행장으로 돌아갈 것이다. 나도 어떻게 해서라도 돌아가야 한다.
이윽고 주위가 캄캄해졌다. 미풍을 타고 바닷바람의 내음이 전해져 왔다. 밤 공기가 더욱 서늘해졌다. 땅바닥이 자츰 울퉁불퉁해지고 나무들의 간격이 드문 드문해졌다. 그것도 가는 나무가 많아지고 있었다. 지면도 모래땅으로 바뀌었다. 전방의 나무 사이로 보이는 하늘이 자츰 밝아졌다. 모래산에 올라가 걸음을 멈추었다.
전방에는 바다가 펼쳐지고 있었다.
반달 아래 텅 빈 해변은 은빛으로 떠오르고 있다. 한동안 그 자리에 선 채 바다 내음을 품은 공기를 가슴 가득히 들이쉬고 추격의 발소리가 들리는지 귀를 기울였다. 콧구멍에 피가 엉겨있어 따끔거렸다. 어금니는 흔들리고 있었다. 두 손의 동통은 조금도 가라앉지를 않았다. 바다를 향해 걸으면서 제복을 머리에서 벗고 T셔츠를 벗어 던졌다. 자신의 몸에 걸쳐진 것을 모두 깨끗이 떨어 버리고 싶었다. 옷도, 진흙도, 피도. 파도가 밀려오는 곳에 닿았을 때 나는 알몸이 되어 있었다.
제복, T셔츠, 팬티, 양말, 그리고 구두 벗은 것을 산처럼 쌓아올렸다. 지갑에는 75달러가 들어 있었다. 대단한 급료일의 증거다. 그 지갑은 제복 밑 모래 속으로 밀어넣었다. 그런 다음 바다쪽으로 돌아서서 재빠르게 물가까지 걸어가 차디찬 멕시코 만의 바다 속으로 뛰어들었다.
몸의 힘을 빼고 해변에 떠오르자 고환과 등에 냉기가 스며들어 통증이 가시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크게 숨을 들이 쉰 다음 물 속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해병대원도 없고 래드 캐논도 없었다. 두 손이 으스러진 연주자도 없으며 목을 매단 화가도 없다. 상심한 수병들도 없다. 오로지 나 혼자일 뿐. 그렇다, 이대로 영원히 물 속에 있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갑자기 죽는 것은 참으로 간단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앞이 캄캄해질 때까지 이렇게 물속에 있으면 되니까. 그것만으로도 나는 이 세상을 떠나 영원한 평화 속에 감싸여 있는 것이다. 마일즈 레이필드의 경우와 달라서 스캔들이 될 것도 없다. 명예가 손상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내가 실수로 빠진 것이라고 모두들 믿을 것이다. <미스 텍사스 클럽>에서의 대난투로 지쳐서 빠졌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 틀림 없다. 젊은 수병을 덮친 애처러운 비극. 마이클 데블린이여 안녕. 그것으로 모든 것은 끝나고 만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더욱 깊이 잠수를 했을 때 갑자기 폐에 통증이 오고 공포에 휩싸였다. 아직 죽고 싶지 않아!
이처럼 어둡고 길도 없는 바다 속에서는.
나중에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이덴 산타나를 만나고 싶다. 나중에 한 번으로 족하다. 그리고 이제까지 말할 수 없었던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 마지막으로 간청하는 말을. 그렇지 않으면 마음에 담긴 이별의 말을.
물을 박차고 수면으로 떠오르려 하였다. 그러나 빠른 조류가 나를 바닥으로 끌어 당겼다. 또다시 물을 찼다. 폐가 파열될 것처럼 되어서 머리속이 점점 멍해졌다. 온갖 힘을 발에 집중시켜 수면을 목표로 삼았다. 어쩌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더욱 깊이 잠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자 다시 공포에 휩싸였다. 어쩌면 이젠 다 틀렸는지도 모른다. 이대로 아무에게도 이별을 고하지 못한 채 죽어가는 것일까. 다음 순간 나의 몸은 수면으로 떠올랐다. 정신없이 숨을 들이쉬고 물을 헤치며 몇 겹이나 겹쳐져 반짝이고 있는 별을 올려다 보았다.
살았다.
아직 살아 있다. 눈을 감고 파도 사이를 떠다니면서 파도 소리와 먼 고동소리를 들으며 이제 해군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직 근무 기간은 2년이 남아 있다. 아니 더 남아 있다. 끝없는 시간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곳에는 이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이곳에서 이렇게 알몸으로 언제나 떠 있고 싶다. 죽음을 생각하고 그 안락함을 깨달은 탓일까. 이제는 해군 따위는 두렵지 않다. 만일 탈주해서 이덴을 찾으러 가면 그들은 나를 어떻게 할까? 나를 죽이려 들까?
갑자기 기분이 들떠 해변으로 향해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모래사장에 오르자 무릎을 안고 숨을 들이쉬었다. 해수의 소금이 피부에 달라붙은 채 마르고 있는 것 같았다. 똑바로 일어섰다가 당황해서 다시 웅크렸다. 50야드쯤 앞에 옷가지를 모아 둔 곳에 누군가가 서 있었던 것이다.
순간,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SP가 주차장에서부터 뒤쫓아 왔는지도 모른다. 해병대원 중 죽은 자라도 있었던 것일까. 주차장에서 걷어 채여 피살된 놈이 있었는지도. 다시 한번 바다로 뛰어 들까. 그렇지 않으면 숲으로 도망쳐 버리는 것이 상책일까. 문제는 내가 알몸이라는 것에 있다. 하이웨이로 나가 보았자 1마일도 채 가기 전에 잡히고 말 것이다. 게다가 긴요한 돈이 저 곳에 있다. 제복 밑의 모래 속에. 이렇게 된 바에는 이제 하는 수 없다. 만일 SP라면 모두 끝장이다. 하지만 아직 그렇다고 단정할 순 없다. 저것은 단순히 해변가를 산책하고 있는 인간, 이 멕시코 만으로 밀려 온 알코올 중독자일지도 모르지 않는가. 아무튼 옷과 돈은 어떻게든 되찾아야 한다. 어떤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나는 나의 옷가지 옆에 서 있는 물체쪽을 향해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가까이 다가갔을 때 그 정체를 알 수가 있었다.
래드 캐논.
무의식중에 걸음을 멈추었다.
제기랄!
온몸이 상처투성이로 지쳐 있고 더구나 알몸인데 <미스 텍사스 클럽>의 주차장에서 시작한 싸움의 결말을 짓지 않으면 안 되다니.
꽤나 회되게 혼을 내 주었는데도 아직 체념하지 않고 그는 나를 기다리고 있다. 견딜 수 없는 피로가 엄습해 왔다. 가능하다면 알몸인 채로 모래에 쓰러져 잠이 들어 버리고 싶었다. 더 이상 싸울 힘은 이미 남아 있지 않았다. 놈을 때려눕힐 기력이 없었다. 그래도 싸우려면 다시 한번 분노를 몸안에 돋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나는 마일즈 레이필드의 일을 생각했다. 그의 검붉게 부풀은 얼굴을 상기시켰다. 로프가 박힌 목덜미를 뇌리에 되살아나게 했다. 그러나 분노는 더 이상은 끓어 오르지 않았다. 그렇지만 저 옷은 아무래도 필요한 것이다. 놈이 덤벼들 때 표적이 조금이라도 작아지도록 몸을 비스듬히 하고 사타구니 쪽을 방어하면서 나는 가까이 다가갔다. 래드는 언더셔츠 차림이었다. 얼굴에는 멕시코 만의 미풍으로 마른 피가 엉겨붙어 있었다. 그는 히죽 웃었다. 그러나 그 눈초리는 나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파도 해변으로 밀려와 물보라를 일으켰다. 그의 6피트쯤 앞에서 멈추어 서서 나는 기다렸다.
"그 옷이 필요하다구."
"그럼 가지러 와."
"그 때문에 또 싸우고 싶지는 않아. 하지만 네가 할 생각이라면 상대는 해 주지."
"이것은 네 옷이야. 왜 내가 탐을 내겠나?"
그래서 나는 한 걸음 전진했다. 그도 한 걸음 전진했다. 거기에서 두 사람 모두 멈추어 섰다. 래드의 눈이 이제는 또렷하게 보였다. 한쪽은 거의 감겨져 있고 또 한쪽의 눈가는 보랏빛으로 멍들어 있었다. 그 눈이 웬지 모르게 슬퍼 보였다.
그는 한쪽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것을 잡았다.
"너는 좋은 녀석이야. 데블린."
"너는 역시 지겨운 놈이라고 생각해."
나는 그의 손을 놓고 옷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 주섬주섬 입기 시작했다. 래드쪽을 보니 그는 말없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의 몸이 힘없이 앞으로 고꾸라져 모래바닥으로 엎어졌다.
나는 도와 주려고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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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드 캐논이 고백한 이야기
놈들이 모습을 나타냈을 때부터 모두 쓰레기라는 걸 간파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 아직 젖비린내 나는 신참들 꼴하고는 쯧쯧쯧......!
수병 졸따구들이나, 장교들이나 똑같았지. 함선은 샌프란시스코 부근의 메어 섬 독 안에 있었어. 오키나와에서 가미가제 공격을 받아 박살이 난 곳을 전부 수리해 놓았어. 선체, 급수 계통, 함교, 배 구석구석을 모두 그것은 1945년 여름, 전쟁이 끝나기 직전의 일이었지. 나는 미해군 중순양함 인다애나폴리스의 탄약과 포장비계 상사였어. 그러나 그 함선에 관해서는 들어 본 적도 없겠지, 데블린? 뭐 그것은 자네만 그런 건 아냐. 당시나 지금이나 이 배에 관해 알고 있는 자는 별로 없으니까. 해군 당국에서 비밀로 덮어두고 싶어 하니까. 그 배에서 일어난 일을, 정치가들도 마찬가지고.
그렇지만 이 배는 귀신이 씌인 배였어, 데블린. 이 무식하게 큰 중순양함에 말이지. 이런 군함을 두고 우리들은 `물렁한 배'라고 부르지. 즉 홀수선(배의 밑 부분이 물에 잠기는 한계선) 위의 상부구조가 홀수선 하부와 비슷하게 무거웠어. 처음 건조될 때는 없던 것을 나중에 이것저것 갖다 붙인 탓이었지. 하여튼 갑판을 좀 걸어다니기만 해도, 대단한 파도가 아니더라도 전복하는 거 아냐 하는 기분이 들 정도였으니까. 그래도 해군 상부에서 그런 사실을 마이동풍으로 흘려 듣기만 했어. 해군 사관학교 출신들은 어쨌든 순양함을 좋아했어. 왜냐하면 군함의 지위가 순양함이 전함에 이어 두 번째였기 때문이지. 당시에는 아직 항공모함이 출현하기 전의 일이니까. 그래서 우리가 이 배는 급선회 뒤 자세를 바로하기까지 시간이 걸린다고 불평해도 놈들은, `그게 어쨌다는 거지?' 하고 눈을 부라리면서 반문했지. 그 배가 `물렁'한지 어쩐지 몰랐던 거야. 하여튼 놈들은 이 배를 제5함대의 기함으로 추대했을 정도니까. 그리고 스프루안스 제독이 올라와 지휘할 때마다 화려한 의식이 거행되었어.
함장은 마크베이란 녀석으로 회색 머리에다 차가운 검은 눈의 남자였지. 그는 또 별볼일 없는 정치가처럼 24시간 동안 썩은 미소를 띠고 있었어.
아아.
인디애나폴리스란 배였어. 내가 탄 배는.
굉장히 멋진 순양함이었지.
놈들은 이 배가 비록 바다 위에서는 쓸모가 없을지 몰라도 사진발은 그만이라고 생각했을 거야, 틀림없이. 그럭저럭 7월이 되자 드디어 출항 준비에 박차가 가해졌지. 유럽에서의 전쟁은 끝났으니까 일본 본토 침공 작전에 참가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어. 난 그것이 정말로 내키지 않더군. 왜놈들의 전투 장면을 오키나와에서 목격했기 때문에 본토 침공 작전이라면 아군도 많이 저승 길동무가 되겠군 하는 생각을 했어. 왜놈에 대해서 많은 견해들이 있지만, 전의만은 왕성한 놈들이란 걸 기억하고 있는 게 좋을 거야. 그렇지만 놈들은 이미 전쟁에 패했어. 그건 놈들도 인정하고 있을텐데 좀처럼 항복을 안 한단 말이야. 그렇게 되고 보니 본토를 침공하는 수 밖에 없었던 거야.
이건 전쟁이고, 전쟁이기 때문에 결말을 지어야 했어. 해군도 응분의 역할을 완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지. 물렁한 배든 아니든, 인다애나폴리스에게도 웅분의 활약이 기대되었지.
문제는 왕년의 노련한 승무원의 태반이 전사하거나 여기저기로 흩어져 버렸다는 사실이었어. 그런데 어느 화창한 아침에 새 승무원들이 들어왔어. 내원 참, 그 신참들 꼬락서니하고! 신병 훈련소에서 막 나온 입만 야무진 250명의 신병과 사관학교를 갓 졸업한 서른 명의 장교들. `이거 좀 어렵겠는데?' 그것이 녀석들을 첫눈에 보고 느낀 생각이야. 녀석들은 전 승무원의 3분의 1에 상당하는 숫자였는데 마치 독립기념일 소풍이라도 가는 듯한 할랑한 얼굴로 올라 와 있는 거야. 이제부터 싸울 적은 전례가 없을 만큼 완강한 놈들인데. 이 녀석들을 맹훈련시켜 군기를 잡아 놔야지, 라고 나는 생각했지. 그런데 녀석들이 승산함과 동시에 출항 명령이 떨어졌어. 그것도 불과 24시간 후에 줄항이라는 거야. 아직 준비도 완전히 끝나지 않았는데 말이야. 식량도 제대로 싣지 못했고 내무반 수리도 끝나지 않았어. 그렇지만 상관 없다는 거야. 어쨌든 출항하라는 거였어. 그건 다 저 개뿔도 아닌 `상자'와 `통' 때문이었어.
그 두 가지는 출항 당일 아침, 거대한 크레인으로 배 위로 운반되었지. `통'은 쇠로 만든 것인데 완전히 밀폐되어 있었고 무게는 3백 파운드쯤 되었을 거야. 우리는 당장 그것을 갑판에 용접하고 그 위에 이중 삼중으로 로프로 동여매었지. 배가 아무리 움직여도 절대로 움직이거나 미끄러지지 않도록. 만일 배가 가라앉는다면 그 커다란 통도 가라앉을 것이 명백했어. 그리고 `상자'란 것은 실은 커다란 나무 궤짝으로 높이는 8피트 정도. 그것은 함내 창고로 가져가 짐 사이에 꽉 깨워 두었어. 그런데 나중에 나와 빅 노즈 베르나르디가 아래로 불려 내려갔어. 거기서 총을 지닌 대학교수 같은 풍채의 육군 장교를 만났어. 녀석들, 그 나무 궤짝을 열고 길이 3피트 정도의 쇠파이프를 꺼내 놓았어. 그리고 그걸 함장실로 가져 가라고 했어. 시키는 대로 가져가니 맥베이 함장이 우리한테 맛있는 걸 주었어. 즉 그것으로 우릴 입막음한 거야. 우린 함장이 지켜보는 앞에서 로프로 쇠파이프를 바닥에 단단히 고정시켰지. 육군 장교는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어. 두 사람은 그 후에도 그 쇠파아프에 붙어 앉아 한 번도 갑판 위로는 올라오지 않았어.
닻을 올린 것은 7월 16일 새벽 3시. 우리는 샌프란시스코를 출항하여 전속력으로 항행을 시작했지. 그 `상자'와 `통'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소문이 무성했어. 승무원의 대부분은 그 내용물이 세균일 것이라고 믿고 있었지. 그 세균을 왜놈들한테 뿌리겠지 라고. 그렇지 않으면 나치로부터 몰수한 독가스 같은 것으로 왜놈들을 한 놈도 남김 없이 마비시키기 위해서 쓰일 것이라고도 했어. 진상을 알게 된 것은 전쟁이 끝나고 한참 지나서였지. 그 `상자'와 `통'에는 원자폭탄 부품이 가득 담겨 있었다는 거야.
그런데 보통 항해에 나서면 신병들을 엄하게 훈련시키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지. 물론 원폭 때문은 아냐. 전투 때문이지. 신병들에게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즉각 훈련을 개시한다. 그것이 원칙이다. 단순, 그것이 원칙이다. 헌데 그때는 훈련도 여의치 않았어. 뭣보다 시간이 없었고 함내가 대혼란에 빠져 있었거든. 그 이유는 어떻게 된 셈인지 이 배에 펀승하여 최초 기항지인 펄하버까지 가려는, 대부분이 장교 클라스인 `히치하이커'가 타고 있었던 거야. 그 자식들의 짐들이 갑판 여기저기 데굴데굴 굴러다니질 않나. 그런데 더욱 꼴불견인 것은 그 속에 육군도 몇 명 끼어들었는데 그 자식들은 선상 생활에 관해 아무 것도 모르는 거야. 한편 신참 수병들은 또 어떤가 하니 일찌감치 여자 친구가 그리워 울적해 하는 놈들이 나타나더군. 엄마가 보고 싶다고 훌쩍이는 놈들까지 있었으니 말해 뭐하겠어. 하여간 놈들은 좌현인지 우현인지도 분간을 못해 미아가 되는 놈돌까지 나타나는 지경이었다구.
더욱 가관이었던 것은 신참들이 연도 옆에 여행가방을 놓아둔 덕분에 화재가 일어난 거야. 하필이면 여행가방이었다구! 그걸 군함에 들고 들어왔으니. 가관인 것은 또 있었지. 식당이 좁아 모두들 온 배 위를 돌아다니며 밥을 먹었어. 덕분에 여기저기 접시나 음식찌꺼기가 홀려져 있었어. 난 바퀴벌레까지 보고 말았어. 아아. 틀림 없는 바퀴벌레였어. 그것도 미해군 기함 위에서.
그렇지만 그걸로 신경을 곤두세우는 자는 아무도 없었어. 그것은 단지 집안 일일 뿐이었으니까. 맥베이 함장은 오직 펄하버를 향해 일사천리로 달렸지. 인디애나폴리스는 함령 13년의 말하자면 노후함이었는데 그것을 함장은 29노트로 달리게 했지. 각종 시스템의 테스트도 하였지. 무선, 레이더, 단 음향 탐지기 즉 소나가 없었어. 그 때문에 나중에 우리는 경을 치게 되지만. 소나를 달 틈이 없었거든. 우리는 원폭을 안고 단숨에 달려가고 있었으니까.
그날 월요일 아침. 마침내 펄 하비에 도착했을 때 우린 신기록을 수립한 걸 알았어. 2091마일을 74시간 반 만에 돌파한 거야. 이 숫자는 난 지금도 놀라워.
그러나 신기록수립 축하 같은 걸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지. 사진을 찍거나 신문기자들에게 자랑할 틈도 없었어. `히치하이커'들을 내려 놓자 즉각 출항 명령이 내려왔지. 거기서도 또 불길한 징조를 내눈으로 보게 되었어. 아 글쎄 신참들 중에는 울음을 터뜨리는 놈까지 있었다니까. 녀석들은 하와이에 상륙하고 싶었던 거야. 애인이나 엄마에게 전화도 걸고 싶었고. 아직 의무다운 의무도 치르지 않았는데 휴가를 원했던 거야. 그럴 시간이 없다, 우리는 전쟁터로 가는 중이라는 말을 듣고 점점 더 설움이 복받쳤던 게야. 배는 또다시 돛을 올리고 테니안인지 하는 조그만 섬을 향해 출항하였지.
난 목이 쉬도록 외쳐댔어, 신병들에게 기초 훈련을 시키자고. 총원퇴각, 포격, 구조, 대공사격 등의 훈련을 시켜야 된다고. 그러나 귀를 기울이는 자는 한 사람도 없었어. 함장은 아마 자기가 역사적 거사에 참가했다고 신바람이 나 있었을 거야. 언젠가 기념 사진을 찍을 때 어떤 포즈를 취할까 하는 생각밖에 없었던 모양이야. 더군다나 우리는 안전 수역에 있었거든. 천 마일 사방에 걸쳐 왜놈 배는 없다고 모두들 말했었어. 훈련은 나중에 하면 되지 라고 말야. 그래, 테니안에 도착해서 하자구. 필리핀 레이테에 도착한 후에 차차 해도 늦지 않아 라고. 난 묵묵히 내 일만 하기로 했어.
테니안에는 금요일에 도착했어. 그곳은 그래, 대불황 때, 몽고매리의 화교 사원 극장에서 본 영화에 나왔던 섬 같았어. 왜 있잖아, 그런 영화가 많이 있었지. 허리에 도롱이 같은 걸 걸진 미녀라든지, 야자나무 아래서 허구헌 날 그물침대에 흔들거리면서 취해 있는 의사 나부랭이가 등장하는 제멋대로 만들어진 영화 말이야. 그곳에 활주로는 있었지만 인디애나폴리스 급의 배가 정박할 수 있는 독은 없었어. 그래서 우리는 그 `상자'와 `통'을 상륙용 보트에 싣고 섬까지 실에 나르게 되었지. 쇠파이프를 고정시킨 로프를 끊어 `상자'에 담고, 출하 작업이 시작됐어. 그런데 함선에서 내려보내는 와이어가 너무 짧아 그 `상자'가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려 바람에 흔들거리는 거야. 상륙용 보트 6피트 정도 위에서 말야. 그걸 본 신병들이 모두 우하고 야유를 시작했어. 그래도 그럭저럭 출하 작업은 성공했어. 사명을 완수한 거야. 우린 모두 그렇게 생각했어. 수상쩍은 `상자'와 `통'을 정확하게 목적지에 보냈다. 자아, 드디어 일본을 칠 차례다 라고.
배는 다시 출항하여 서쪽으로 향했지. 도중에 괌에 기항한 뒤 레이티를 향할 참이었어. 난 겨우 신병들을 질타하여 `집안일'에 종사할 수 있게 만들었지. 즉, 함내 대청소였지. 이 배의 승무원은 천 2백 명인데 멍청한 장교가 2천 5백 명분의 구명조끼를 주문하여 갑판 위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고 있었어. 나는 우선 그 구명조끼를 끈으로 묶어 격벽 옆에 쌓아두도록 했어. 그리고 음식 찌꺼기를 청소시켰어. 페인트 칠과 간단한 수리도 시켰어. 그래도 녀석들의 일하는 동작은 파도를 향해 똥을 내던지는 것처럼 도무지 능률이 오르지 않는 것이었어.
레이티에 도착할 때까지 지다리자.
그것이 이른바 슬로건이 되어 있었어.
레이티에서 한번 맹훈련을 한 뒤에는 일사불란해 질 가야.
그렇고 말고.
괌을 지나자 우리는 `십자로'로 불리는 지점을 지나 `전선 해역'에 들어섰어. 그곳은 즉 이미 펄 하버의 관제하가 아니라는 의미야. 그곳부터는 직접 레이타와 연략을 취하게 되지. 난 영 맘에 들지가 않았어. 그곳에서 우리가 놓여 있던 상황이. 그것은 `십자로'를 통과할 때부터 느끼고 있었지.
우선 첫째로 우리는 단 한 척으로 항해하고 있다는 점.
보통 중순양함이 항해할 때는 네 다섯 척의 직위함이 따르기 마련이거든. 인다애나폴리스같이 `물렁한' 배의 경우는 특히 그게 중요할 밖에. 그런데 우리는 그 태평양에서 단 한 척이었어. 그 가도가도 끝없는 망망대해에서 말이야, 데블린. 또 한 가지 언잖았던 것은 `전선해역' 항해할 때는 최고 속도를 16노트로 제한하라는 규칙이 있다는 점이었어. 그 이유는 연료 절약 때문이었지만 말야. 세 번째로 맘에 들지 않았던 것은 가장 근본적인 문제였지. 즉 승무원의 숙련도였지.
하여튼 젓비린내 나는 애송이들만 죄다 모아 놓았으니! 그건 그렇고 우린 토요일 오전 9시에 괌을 출항하였다. 시속 16노트로 가도 레이티에는 화요일 오전 11시 경에는 도착할 예정이었어.
위크엔드 크루즈(weekend cruise)였지.
아아.
토요일은 아무 탈없이 지나갔어. 나는 12시부터 4시까지 당직을 맡았으므로 일요일 아침은 푹 잠을 잤지. 점심은 괜찮은 편이었어. 햄버거와 으깬 감자였지. 감자는 전부 다 먹지 못했어. 그리고 며칠동안을 나는 그때 남긴 감자를 내내 생각하게 될 줄이야, 아아, 너무나도 후회가 되었지. 오후에는 신참들이 필리핀 상륙에 대비하여 콜레라 예방주사를 맞고 있는 것을 바라보면서 갑판 위 그늘진 곳에서 보냈어. 그때쯤부터 기상이 변했어. 해상에는 안개가 끼고 파도가 거칠어지기 시작했어. 함선은 평소처럼 지그재그 패턴을 반복하면서 나아가고 있었지. 이는 `전선 해역'에서 라는 의미야. 그 해역에서는 적의 잠수함이 숨어 있을 가능성도 있으므로 놈들의 음향 탐지기를 교란시키기 위한 대책인 것이지.
우리도 소나가 있으면 좋을 텐데. 나는 그때 그 생각을 했어.
몇 척이라도 요함이 옆에 있으면 하는 아쉬운 생각도 했지.
그날 밤 나는 8시부터 12세까지 당직에 들어갔어. 지독하게 후덥지근한 밤이었지. 함내의 내무반을 돌아다니면서 수밀문이 꽤 열려진 채 있군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 기억 나. 누가 지휘를 담당하고 있는지 이상했어. 열이 머리 끝까지 뻗쳐 나는 상부 갑판으로 올라갔어. 담배를 피우고 싶어서 커피 향에 이끌리듯이 올라갔던 가야. 상부갑판은 그야말로 개판이었다. 수병들이 여기저기 매트리스를 깔고 잡담을 지껄이거나 자고 있더군. 몇 백 명이나 되는 수병이 말야. 그 배에는 에어컨이 단 한 대 밖에 없었는데 의무실에 설치되어 있었어. 그러므로 함장은 수병들이 어디서 자든 너그럽게 봐줬던 것 같아, 분명 그랬을 거야. 내무반에서 도박을 하고 있는 자들이 있었으므로 불빛이 밖으로 새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했지. 그리고 나서도 여전히 여기저기 수밀문이 열어 젖혀져 있는 것이 맘에 걸렸어. 나는 함교에 올라가 잠시 주위의 해면을 감시했어. 어쩐 일인지 그때 배는 지그재그 항법을 그만두고 똑바로 서쪽을 향헤 나아가고 있더군. 해면은 참으로 잔잔했어. 하늘에는 초승달이 걸려 있었고 말야. 카멜을 열 대쯤 피고 나는 함내를 돌아다녔지. 함수에서 함미, 좌현에서 우현으로 갑판에 누워 있던 놈들은 잡담이나 음담패설이 끝나고 잠들어 있었어.
그리고 아마 주위가 너무 적막했던 탓이었든지. 아니면 다른 요함이 없었던 때문이었을까 나는 실로 몇 년만에 고향 생각을 했지.
내게도 전에 아내가 있었어. 그녀와는 동갑이었고 열 여섯 살 되던 때에 결혼했는데 그때는 남들처럼 꿈 같은 이야기를 주고 받았지. 언젠가는 호숫가에 작은 집을 짓고 늘 호수를 바라보며 살자고도 했지. 한때 내 아내였던 그 여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났어. 좀 더 나은 남자와 재혼했을까. 아이는 있을까?(우리 사이에는 없었지) 이번 남편은 내가 해 주지 못했던 것을 그녀에게 해 주고 있을까 등등의 생각을 했던 거야.
그녀는 정말 심성이 곱고 사랑스런 여자였어. 우리가 헤어진 것은 그녀 책임은 아니야. 사실 난 그녀의 애정이 부담스러웠어. 내 속의 어떤 무엇이 그것을 견딜 수 없어 했어. 그녀의 포옹이나 키스, 그녀의 애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게 되었던 거야. 게다가 나는 평온한 삶이라는 것에 염증이 났어. 앞으로 일생 봄이나 가을이 올 때마다 앨라베마의 땅을 갈면서 보낼 것을 생각하니 앞날이 아득했어. 나는 그 전부터 앨라베마란 땅에 적의를 품고 있었어. 내 아버지와 삼촌들이 밭에 목숨을 바치고, 어머니가 그 때문에 몸져 누워버린 걸 지켜 봤으므로. 그렇지만 그 사랑스런 여자와 결혼했을 때는 이제 그런 생각은 버리겠다고 결심했지.
그러나 역시 버릴 수가 없었어. 그 땅에 대한 적대감은 아무리 해도 떨쳐 버릴 수가 없더군. 그 검은 땅을 보면 내가 이미 죽은 것 같은 기분이 되었어. 지금까지도 이렇게 앨라배마와 그리 멀지 않은 펜서콜라에 있으면서 고향에는 아무래도 돌아갈 맘이 생기지 않는 걸. 아아, 두 번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아 그곳에는.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 그 땅은.
그러던 어느 날 밤, 그 사랑스런 여자가 자고 있을 때 난 짐가방을 챙겨 모빌행 버스를 탔어. 그 길로 해군에 입대한 거야. 그 이후로 그녀와는 한 번도 만나지 않았어.
그렇지만 가끔 밤이면 그녀의 모습이 떠오를 때가 있어. 그날 밤도 그랬어. 그 인디애나폴리스에서 8시부터 12시까지의 당직근무를 서고 있는 동안 나는 또 그녀 생각이 났어. 지금쯤 어떻게 살고 있을까, 어쩌다 내 생각이 떠오를 때도 있을까 하는 생각들 끝에 그녀의 얼굴 하나하나를 자세히 그려 보았지. 후끈한 앨라배마의 대지, 그 땀처럼 촉촉한 그녀의 체취를 떠올렸어. 그녀 머릿결의 감촉, 그리고 온몸 구석구석의 감촉을 더듬었어. 그런 생각을 끝없이 뗘올리고 있을 때, 왜놈 잠수함이 쏜 첫 번째 어뢰가 배에 명중한 거야.
그것은 함수 부분을 멋지게 한 방 먹였지. 약 40피트에 걸쳐 닻이나 양모장치 등 모든 것이 박살이 나 버렸지. 그 부분은 주로 식당계 하사관과 급식계 하사관 흑인들의 거처였어. 그들 서른 두 명 전원이 즉사였어. 그리고 해병대가 서른 두 명 있었는데 그들도 전원 즉사. 군함이 기우뚱 들어올려지는 것 같더디 활활 타는 불기둥이 치솟아 해면 위로 내리치더군. 동시에 함교에 닿을 만큼의 물보라가 일었어. 나는 무의식중에 난간을 꼭 붙들고 있었지. 누군가의 비명이 들렸어. 두 번째 발사가 명중한 것은 그로부터 3초쯤 뒤였을 거야.
이번에는 배의 중앙부였지.
그것도 우현 함교 부근. 나는 어마어마한 힘에 떠밀려 갑판에 내동댕이쳐졌어. 주위 사방에서 비명과 절규가 교차했지.
어떻게 몸을 일으켜 격벽의 전화 수화기를 집어 들었지만 이미 불통. 전기 관계 장치는 전부 사용할 수 없게 되어 있었어. 라이트도 꺼지고 통신도 끊겼고, 난 빌었어, 무선만이라도 무사하길, 요함 스파크스가 어디 가까이 있어주길. 어떻게 해서든지 이 배가 어뢰공격을 받은 것을 누군가에게 알리지 않으면 끝장이다. 우린 끝없이 너른 바다 한가운데 있었으므로 젊은 수병이 미친 사람처럼 울부짖으며 옆을 스쳐갔어. 나는 퍼뜩 정신이 들었어. 배가 아직 전진을 계속 하고 있으며, 박살 난 함수 부분에서 대량의 물이 밀려 들어은다는 것을. 순간 여기저기 수밀문이 열어 젖혀져 있던 것이 생각났으며, 배 안의 수많은 수병들이 죽음의 문턱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 그 때쯤에는 불에 타 눌은 도료의 악취가 나는 회색 연기가 이곳저곳에서 새어 나왔지. 그 연기 속에서 맥베이 함장이 모습을 나타냈어. 그는 완전히 전라로 제복을 손에 들고 함교로 뛰어 올라 가려는 것이었어. 내게는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지만 바다와 엎어지고 자빠지며 도망치려는 수병들을 보고 있었어. 이미 침몰하고 있는 함수 부근과 갑판으로 번지고 있는 불길을 보고 있었어. 그 얼굴 표정을 보고 나는 함장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어. 이 배는 이제 끝장이다. 그렇게 판단했을 거라고 생각해.
갑판이 몇 도쯤 기울어졌어. 함내에서 무시무시한 비명이 들려왔지. 함장이 연기 속으로 뛰어들어 갔어. 기관을 정지하라. 기관을 정지하라니까.
그러는 중에도 배는 전진을 계속했어.
나는 구명조끼를 입고 힘껏 끈을 졸라매고 함미 방향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주위에서는 겁에 질린 수병들이 우왕좌왕 헤매고 있었지. 녀석들은 자기 전투소 위치도 모른 채 허겁지겁 동동거리고 있었어. 그래도 아무리 신참이라지만 수병은 수병으로, 이제 침몰은 피할 수 없는 사실로 깨닫는 것 같았어.
나는 녀석둘 중 몇 명인가를 제지시켜 선미쪽의 오던 길로 되돌려 보냈지. 구명조끼를 입고 바다에 뛰어들 준비를 하라고 외쳤어. 구명정을 내리려 하는 녀석들을 도와 주고 있는데 이때 갑판이 다시 6, 7도 기울어지는 바람에 수병 하나가 몸의 균형을 잡지 못하고 바다에 떨어졌어. 구명정쪽은 이제 손이 닿지 않았지. 그때부터 바다에 떨어지는 자들이 점점 불어났어. 구명조끼도 입지 않고 떨어진 자도 있었고 반바지 하나만 걸치고 떨어지는 자도 있었어. 왜놈 잠수함이 습격했을 때, 대부분의 승무원들은 깊이 잠들어 있었으니까. 전신이 검게 타 짓무른 남자가 갑판에 주저앉아 있었어. 위생병이 그에게 몰핀을 놓아주고 있었는데 다시 갑판이 기울어짐과 동시에 그 짓물러터진 남자가 미끌어져 떨어져 내렸지.
그때 선미에 모여 있던 수병은 약 5백 명 정도에 이르렀던 것으로 기억되는군. 거의 전원이 반라었어. 회중전등이나 총이나 칼을 지닌 자는 한 사람도 없었어. 그런데 배는 여전히 전진을 계속하고 있는 거야. 장교들이 무더기로 돌아다니고 있었어. 모두 갓 사관학교를 졸업한 햇병아리들로 끊임없이 배를 멈추라는 호령을 내리고 있었지. 마치 그 배가 어디 딴 길을 달리고 있는 트럭이나 되는 것처럼. 제기랄, 개똥도 모르는 아무짝에도 쓸데 없는 놈들이었어. 기관실 위치도 모를 뿐더러 거가까지 내려가 기관을 정지시킬 만큼의 배짱도 없는 것들이. 몇몇 젊은 수병이 함미에서 뛰어 내리기 시작했지. 나는 주위에 있는 녀석들에게 플로트 네트를 내리라고 외쳤어. 플로트가 달려있는 커다란 그물이야. 그런데 운나쁘게 배가 크게 진동하더니 그 무지무지하게 큰 함선 전체가 뒤틀리면서 좌현이 높이 올라가고, 갑판이 다시 25도 정도 경사가 졌어. 젊은 수병이 데굴데굴 바다에 떨어져 내렸지. 각종 장비와 침대, 갑판에 널부러져 있던 각종 도구류들도. 그때 제3스크류가 아직 회전하고 있었어. 두 명의 수병이 손을 맞잡고 어미에서 떨어지는 것이 보였는데 스크류 위에 떨어져 공중분해되어 버렸어. 중대의 나팔수는 꼭 껴안고 바다에 떨어지더군.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어.
바로 생지옥 같았어.
나는 경사진 갑판을 기어오르기 시작했어. 마치 전 세계가 뒤집힌 것 같았어. 보통 때 걸어다니던 곳이 벽이 되어 있었지. 그 벽을 나는 기어 올라 가야만 했어. 겨우겨우 벽의 정상에 올라가 보니 나는 선복에 서 있었어. 나와 같이 올라 온 수병이 백 명 정도 되었지. 나중에 안 일이지만 배가 첫 번째 어뢰를 맞은 시각이 12시 2분, 침몰한 것이 12시 18분이었어.
불과 16분.
그러나 그때는 훨씬 더 길게 느껴졌어.
나는 좌현의 선복에 서 있었는데 그대로 똑바로 앞으로 걸어가 바다로 들어 갔지.
그리고는 조금이라도 배에서 멀어지려고 힘껏 헤엄쳐 나아갔어. 배가 침몰할 때 물속으로 빨려드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어. 수영에 관한 한 누구보다도 자신있는 나였지만 그때는 좀처럼 앞으로 나가지지 않더군. 이유는 금방 알게 되었어. 해면에 이미 대량의 중유가 유출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어. 그렇다면 중유 아래로 잠수하여 멀어지는 수 밖에 없겠다고 판단했어. 그래서 한동안 바닷속엘 해엄쳐서 떠올라 뒤를 둘러 보았지. 인디애나폴리스는 이제 해면과 거의 비슷하게 잠겨 있었어. 여기저기서 고함소리가 들렸지. 몇 명은 비명을 질러대더군. 아무래도 아직 배에서 너무 가깝다고 생각되었어. 이 거리라면 배가 가라앉을 때 휩쓸려 들어갈지도 모르겠다고. 어쨌든 배에서 퇴각하는 일은 처음이기 때문에 자신이 없었어. 그렇게 배를 쳐다보고 있으려니 강철 선복을 파도가 찰싹찰싹 때리는 소리가 들리더군. 그러는 사이 인디애나폴리스는 조용히 바닷속으로 꼴딱 들어가 버렸어.
주위에 있던 자들도 거의 휩쓸려 들어가지 않았지.
커다란 소용돌이도 일어나지 않았어.
군함은 그냥 조용히 사라져 갔던 거야.
그리고...... 나는 굳이 고백해 두는데 그때만큼 두려웠던 적은 없었어. 나 혼자, 기름 철갑을 하고 바다에 떠 있는 거였으니까. 머리에는 불안이 소용돌이 치고 있었어. 혹시 SOS를 발신 안한 것은 아닌가. 금방이라도 왜놈 잠수함이 떠올라서 우리들을 무차별 사살해 버리는 건 아닐까. 이 우주에서 가장 넓은 바다 한가운데서 나 혼자만 남겨지는 건 아닐까. 구명 뗏목이 내려졌는지도 알 수 없었고 나 외에 몇 명이 바다 위에 떠 있는지, 녀석들을 발견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알 수가 없었어.
잠시 후 무언가 딱딱한 물체가 내게 부딪혀 왔어. 반사적으로 그것을 잡으니 감자가 든 궤짝이더군, 아 잘됐군 하며 거기 매달려 있는데 이번에는 탁자 조각이 떠밀려 왔으므로 그것도 잡았지. 오른손은 꿰짝, 왼손은 탁자에 매달려 체력을 절약하면서 그냥 파도에 몸을 내맡기고 있었어. 마음이 안정되기 시작하자 여기저기서 비명 소리가 들리더군. 그러나 모습이 보이지 않았어. 엄마 하며 울부짖는 앳된 목소리도 들렸어. 기도를 올리고 있는 목소리도 들렸고, 그는 아마 독실한 침례교도인 것 같았어.
그런데 이번에는 나이 어린 수병이 눈에 들어왔어. 구명조끼도 입지 않고 헤엄치고 있었어. 이 탁자를 잡아, 하고 내가 소리쳤다.
이젠 틀렸습니다. 그가 말했어. 제 체력으로는 틀렸어요.
아냐, 할 수 있어. 붙잡으라구. 내가 질타했어.
그 녀석은 탁자를 잡고 파도에 떠밀려 갔지. 나중에 또다시 그 탁자를 발견했는데 그 수병은 사라지고 없었어.
나는 그대로 감자 궤짝에 매달려 있었어. 그런데 감자가 물에 불었는지 궤짝이 점점 가라앉더군. 그래서 판대기를 하나 뜯어내고 감자를 버리기 시작했지. 몇 개는 셔츠 안에 쑤셔 넣었어. 그 다음은 아무 생각도 않고 날이 샐 때까지 파도에 몸을 맡긴 채 홀러 갔어.
아침이 되자 다른 수병들의 모습도 보이기 시작했어. 대략 백 오십 명은 되었을 거야. 주위에 온통 흩어져 있더군. 그런데 구명 뗏목은 한 척도 없었어. 나증에 알았지만 승무원 중 바닷 속에 뛰어든 자는 함장을 포함해서 약 팔백 명. 그 중에는 땟목에 올라탄 차도 있었어. 그런데 군함이 어뢰를 맞고서도 한동안 전진을 계속했기 때문에 승무원은 지름이 몇 마일이나 되는 넓은 해역에 뿔뿔이 흩어져 버린 거야. 더군다나 풀 속에 잠길락말략하게 떠 있었으므로 구명뗏목도 발견할 수가 없었지. 신호탄을 가진 자도 없었고 식량을 가진 자도 없었어. 그동안 오렌지가 하나 떠올라 왔으므로 그것도 감자와 함께 셔츠 안에 넣어 두었어. 남은 감자가 또 떠오르지 않을까 싶어 둘러 보니 내 바로 옆에 수병이 떠올랐어. 그의 얼굴은 증유투성이로 새까맣게 되어 있었어. 그 뿐만이 아니었지. 그는 전신에 심한 화상을 입고 있었어. 눈꺼풀도 타 버리고 없었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았어. 그가 말하더군. `어떻게 된 거야, 이거?' 하고.
그리고 바닷 속으로 가라앉았어.
아침 햇살 속에서 보니 바다 위에 검둥이들이 동둥 떠 있는 것 같았어.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모두 증유 범벅이 되어 있었다. 제복을 입고 있는 자가 있는가 하면 셔츠나 바지도 입지 않은 자들도 있었지. 모두들 자연히 모여들기 시작했어. 구명조끼를 입지 않은 자도 있었어. 이제 해가 뜨기 시작했지.
내가 태어나서 처음 보는 가장 크고 뜨겁고, 짙은 오렌지빛 태양이었어. 그러자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들려 그쪽을 보니 수병 하나가 구명조끼를 쥐어뜯으며 점점 가라앉았어. 그것이 시작이었지.
나는 모두를 향해서 고함을 쳤어. 모두들 바맛물을 먹으면 안 된다! 바닷물만은 절대로 먹지 말라! 바닷물을 먹으면 끝장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지. 처음에는 머리가 돌아 버리고 다음에는 구토를 일으키며 끝내는 죽어 버린다. 당장 주위에 있는 자들에게 내 말을 전달하도록 명했어. 아무리 목이 말라도 바닷물만은 먹지 말라고.
그 다음 나는 주위에 있는 자들을 격려하기 시작했어. 안심하라, SOS가 발신되었을 테니까. 만에 하나 발신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가 레이티에 도착하지 않으면 수색이 시작될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 침착하라. 쓸데없이 체력을 낭비하지 말라. 그리고 절대로 바닷물을 마시면 안 된다.
나는 주위에 있는 두 수병에게 감자를 줬어.
그때쯤이었을거야. 묘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먼저 처음에는 앞이 안 보인다는 자들이 생겨났어.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것은 광선공포증으로 강렬한 햇빛과 기름과 해면의 반사가 함께 작용하여 일으키는 증상이라고 하더군. 세 명의 병사가 앞이 안 보인다며 절규하더군. 나는 내 자신을 생각해 보았어. 내 피부는 강한 편이 아니니까 하루도 배겨내지 못할 것 같았어. 게다가 온몸이 기름투성이이니까. 그러나 여기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나도 당하고 말 거다. 그때 얼굴을 물 속에 담근 채 홀러가는 남자가 보이더군. 뒷머리가 흐물 흐물 엉망이었어. 나는 그 사람의 웃옷을 벗겨 모자처럼 내 머리에 둘러썼어. 물론 그것으로 완벽하지는 않았지. 이것 봐, 여기 피부가 보이지? 흉터가 보이지? 신경조직의 말단이 탄 흉터가 보이지? 어쨌든 그 옷으로 모자를 만들어 쓰지 않았더라면 훨씬 더 지독한 꼴을 당했을 거야. 그 첫날 월요일 저녁 무렵이 되자 상어가 습격해 왔어.
먼저 상어의 지느러미가 보였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모두 세 마리였어. 그것이 우리 주위를 선회하기 시작했어. 상어들이 처음 습격한 것은 이미 숨이 끊어져 우리 무리에서 좀 떨어진 곳에 떠 있던 남자였지. 별안간 그 시체에 덤벼들어 바닷 속으로 끌고 들어갔어.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어. 젊은 수병들 중 하나가 갑자기 비명을 내질렀어. 그렇게 처절하고 피가 얼어붙는 것 같온 비명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어. 다음 순간 그는 사라져 버리더군.
중유에 피가 섞이기 시작했어. 주위에서는 상어를 쫓아 보려고 열심히 발로 물을 차 물보라를 일으켰지. 그렇지만 나는 전에 어느 잡지에서 읽은 기사가 떠오르더군. 이 경우, 가장 좋은 방법은 해면에 드러누워 가만히 있는 것이라는 것이. 상어 쪽에서는 바둥거리고 있는 자를 보면 기운이 약해져서 쉽게 죽일 수 있겠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던가. 나는 그 이야기를 주위에 전하고 드러누워 있었어. 한 번 뭔가가 등을 쿡 찍어 올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곧 가 버리는 것 같았어. 다시 한 번 소름이 오싹 돋아오르는 것 같은 비명소리가 났지. 나는 그대로 꼼짝도 않고 누워 있있어.
그러고 있는데 비행기가 보였어. 그렇게 고공도 아니었어. 고작 3, 4천 피트 정도였을 거야. 모두 다 그걸 알았어. 일제히 환성을 올리며 모두 필사적으로 외치면서 기름에 뒤덮힌 해면을 때리기 시작했지. 그러나 그 비행기는 아무런 기미도 보이지 않은 채 점점 멀어져 가 버렸어. 그리고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어. 난 생각했어. 역시 SOS는 타전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공포가 엄습했어. 물론 주위 사람들에게는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어. 만일 SOS가 타전되었다면 지금쯤 몇 십 대의 비행기가 날아와 상공을 선회할 것이라는 건 입밖에 꺼내지 않았지. 그런 말은 절대 하지 않았어. 그렇지만 난 알고 있었어. 그건 그렇다 하고, 따갑게 내리쬐는 뙤약볕의 기세처럼 대단한 건 없었어. 나는 해수를 마시지 않으려고 단단히 입을 다물고 있었어. 힘을 너무 주어 턱의 근육이 아파왔을 정도였으니까. 상어는 배가 불렀는지 돌아오지 않았지. 우리는 오로지 폭염과 싸우면서 해면에 떠 있었어. 그날 밤 다시 비행기 폭음 소리가 들렸지. 그런데 해상어디에선지 신호탄이 쏘아져 올라갔어. 꽤 떨어진 곳에 우리 외의 표류자가 있는 것이 틀림 없다고 나는 비로소 확신했지. 저렇게 신호탄을 쏠 수 있는 것을 보니 배리식 신호 피스톨을 가진 자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신호 피스톨을 가지고 있는 자가 있다는 것은 구명뗏목을 타고 있는 자가 있다는 말이 된다. 신호 피스톨은 구명 뗏목 비품의 하나니까. 비행기 조종사는 지금 쏜 신호탄은 틀림없이 봤을 것이라고 생각되더군. 낮에는 해면이 거울같이 보일테니까 신호탄을 놓칠 가능성도 있지. 그렇지만 밤에는 그런 일이 없어. 표류자가 있는 것을 녀석들이 알아차린 것이 틀림없어. 구원은 눈앞에 있다. 파도에 흔들리고 있는 내 귀에 누군가가 부르는 노랫소리가 들려왔어.
잠깐 실례
이건 차타누가츄츄......
그러자 누군가가 받아 부르더군.
그렇다면 29번선이군요
곧 다른 사람이 받았지.
자, 구두를 닦아 주실까요.
그렇지만 아침이 되어서도 구원기는 오지 않았어. 그 다음 날 아침이 되어도 오지 않았어. 도처에서 발광하는 자들이 생겨났지. 바닷물을 마신 게 틀림 없었어. 마시지 않았다고 해도 어쩌다가 그만 바닷물이 입에 들아가서 목구멍으로 흘러 내려가 버렸을 거야.
광기는 파도처럼 밀려 왔지. 어떤 소위가 이런 말을 퍼뜨렸어. 바로 1마일 앞에 야자나무 그늘이 있고 진짜 강물이 흐르는 섬이 있다고. 더군다나 그곳에는 도로시 라무아 같은 미녀가 수두룩하다고. 그는 몇 명의 남자들을 이끌고 헤엄쳐 갔어. 그리고 그들의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었어.
그런데 또 다른 남자가 우리들 바로 아래 30피트 밑에 인디애나폴리스가 보인다고 떠들어 대는거야. 안에는 마실 풀이 몇 백 갤론이나 있고, 또 가판에는 베티 그레이블이 서 있다구. 모든 게 다 끝내 줘 라고. 나는 그에게 이 부근 해역은 수심 일만 피트는 될 거라고 말해줬지. 그랬더니 그 녀석이 뭐라고 대꾸했는지 알아, 자네 제정신이야. 응? 자아 저기 보이잖아! 그 녀석은 구명조끼를 벗어 던지고 물 속으로 들어갔어. 세 놈이 더 그 뒤를 따랐어. 그 녀석들의 모습도 그 후 다시는 볼 수 없었지.
그러는 동안 서로 티격태격 싸우는 자들이 생겨났어. 같이 치고받고 버둥거리며 물결을 때리는 중에 그 갈색 거품이 입에서 뿜어져 나오지. 그러면 끝장인 거야. 녀석들 중에는 칼을 가지고 있는 놈도 있었어. 그들은 그것을 식량 확보를 위해서 썼어. 구명조끼를 뺏는 데에도 사용했지. 그것으로 상관을 위협했어. 이미 군기도 없고 규칙도 없고, 해군혼이 어디 있어. 전원 단결하여 어려움에 대항하자던 연대감도 실종되어 버렸어.
사흘 밤 사흘 낮 동안을 해상은 정글의 법칙이 지배했지. 자기 몸은 자기가 지키지 않으면 안 돼. 자네는 인간이 아주 고결한 동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인간은 이웃을 사랑하는 동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언제 동료와 대해원을 건너가 보라구. 인디애나폴리스가 침몰했을 때 바다에 뛰어든 자는 8백 명이었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자는 그 중 겨우 3백 명이었어.
시간은 그렇게 지나갔어. 나는 오렌지는 먹었지만 감자는 바닷물이 스며 들었을 위험이 있으므로 내버렸어. 이틀째 밤부터 구명조끼에 물이 새어 몸이 전보다 가라앉더군. 초조해서 미치지 않으려고, 어떻게 해서든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나는 머릿속으로 문답 게임을 시작했지. 지금 몇 시일까? 어제는 오늘이 내일이었다. 지금 이 순간은 어제의 미래였어. 밤은 언젠가는 새벽이 된다. 그런데 새벽은 언제 아침이 되지? 오후는 아침과 어떻게 다르지? 아침은 언제 오후가 될까?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있다면 상어에게 습격 당했던 때밖에 없는 이 잘난 바다에 우리는 왜 표류하고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나는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곁국 나는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지. 만일 살아날 가망이 없다면 죽어도 마찬가지 아닐까. 그래서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이렇게 중얼거렸지, 나는 아무것도 필요없다, 아무 것도 원하지 않아, 가고 싶은 곳도, 좋아하는 사람도, 물건도 없다, 나는 무이다. 그냥 바다에 떠다니고 있을 뿐이다. 단지 점에 지나지 않아. 살아도 무슨 의미가 있겠나. 나는 죽었어, 무야.
그렇게 생각했으므로 나는 살아남을 수가 있었던 거야.
그 뒤에도 몇 번이나 고공을 나는 비행기를 보았지만 돌아오지는 않았어. 그러나 그것도 이제 아무 관심이 없었어. 언제쯤인지 먼 하늘에 비구름이 일며 스콜이 시작된 것이 보였어. 저것이 다가은다면 마침내 물을 먹을 수 있겠다고 모두들 기대했다. 하지만 스콜은 서쪽으로 빠져 버리고 이쪽으로는 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 또한 아무렇지도 않았어. 주위에 있던 놈들이 뒤집어져 죽어가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어. 한 놈이 동료의 목을 냅다 찌르고 구명조끼를 뺏는 것이 보여도 아무 느낌이 없었어. 기도 소리를 들어도 아무 것도 느껴지지가 않았어. 아침이 오든, 노래를 부르든, 밤이 오든, 전혀 무감각 했던 거야.
그리하여 목요일이 되었을 때 PV-I이 한 대 머리 위로 날아 와 빙글빙글 선회하기 시작하더군. 그리고 마침내 해상에 착수하여 큰 파도를 일으키며 잠시 활주한 뒤 정지했어. 우리는 구조되었던 거야. 그래도 아무런 감동도 없었어.
환호성도 지를 수 없었고. 코 부분만 간신히 물 밖에 내놓고 있을 정도였으니까. 전혀 마음이 들뜨질 않는 거야.
그 뒤, 바다에서 건져져서 도일이라는 군함으로 옮겨진 다음에야 비로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 우리는 페리류 섬에 있는 병원으로 옮겨졌어. 거기서 물을 너무 많이 마셔 토하고, 밥을 너무 많이 먹어 토했지. 18시간을 줄창 잤어. 그리고 잠에서 깨어났을 때 뼈저리게 생각한 게 있어, 앞으로도 해군 생활을 계속할거라면 주동이만 똑똑한 젖비린내 나는 애송이들이, 마친년 널 뛰듯이 설쳐서 다른 사람들끼리 물귀신 마냥 끌고 들어가 죽어버리는 장면일랑 두 번 다시 만나지 않겠다고.
날 역겨운 놈이라고 자넨 생각하고 있겠지, 데블린?
아아, 바로 봤는지도 몰라.
앞으로도 난 그런 놈으로 통하겠지.
그러나 난 태어나면서부터 역겨운 놈은 아니었어. 아마도 난 그 잘난 바다에 뭘 빠뜨리고 왔을 거야, 틀림없이. 그것은 두 번 다시 찾을 수 없겠지. 이 지상에서는 절대 찾지 못해. 그래, 어이, 슬슬 이 모래사장에서 엉덩이를 떼는 게 좋겠어, 세일러. 기차로 돌아가야 된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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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스스한 잿빛 공기 속을 걸어 우리는 기지에 도착했다. 멕시코만 연안의 일요일 아침. 하늘이 공허했다. 래드 캐논은 말없이 사라졌다. 이제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걸까, 아니면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한 것이 공연히 쑥스러워진 걸까. 제복은 더러웠고 몸은 상처투성이다. 오래오래 샤워를 했다. 마음 속이 하늘 못지 않게 공허했다. 몸을 깨끗이 씻고 나니 아픔도 얼마간 가셔져, 나는 침대로 올라갔다. 얼마나 졸음이 쏟아지는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무심코 베개 밑으로 한 손을 집어 넣었는데 편지 한 통이 만져졌다.
마이클에게
자네가 이걸 읽을 때쯤이면 나는 이 세상에 없을 거야. 나는 결국 모든 것을 빼앗겨 버렸어. 나의 일, 나의 자존심, 그리고 사랑에 대한 나의 갈망. 이대로라면 언젠가는 군법회의가 열릴 거야. 녀석들은 나에 관해서 온갖 추문을 퍼뜨릴 것이 틀림 없겠지. 복도에서 더러운 농담을 주고 받으며, 내 기록 밑에다 지저분한 사항을 첨가해 기입하겠지. 그것은 내가 어디를 가더라도 따라다닐 거야. 그것을 어떻게 견딜 수 있겠나. 굴욕, 눈물, 자조, 그 어떤 것도 나는 원하지 않아. 이 지구의 항문에서 나는 나가고 싶어, 영원히.
여태까지 계속 나는 진짜 나 자신을 은폐해 와야만 했어. 어릴 때는 그것은 문제가 안 되었어.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열 두세살 정도 되었을 때부터 나는 내가 남자 몸의 여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어. 그렇지만 어느날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한 건 아냐. 철이 들 무렵부터 여자애들보다 남자애를 쳐다보는 게 좋았어. 입는 것도 여자들이 입는 옷이 입고 싶었어. 내 속에는 어떤 저항할 수 없는 충동이랄지 욕망이 잠재되어 있어서 늘 가슴이 아렸지. 그것은 보통 남자애들이 느끼는 것과는 다른 것이었어. 영화에서 본 것, 라디오에서 들은 것과는 달랐어. 어떻게 그런 충동이 생겨났는지는 나도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어. 나 자신도 완전히 그걸 이해하지 못한 채 죽어가는 거야.
어떤 소년을 좋아하게 된 것은 미술학교에 다닐 때였어. 그 소년쪽에서도 나를 좋아해 주었지. 그때였어. 앞으로 자신이 얼마나 험난한 인생을 걸어가야 하는지를 이해하게 된 것은. 우리는 아무리 상대방을 좋아해도 보통 남녀들이 하는 행동을 공공연하게 할 수는 없었으니까. 어쨌든 애틀랜타에서는 무리였어. 이 남부에서는 말이야. 아니, 그것은 이 세상 어디든지 마찬가지일거야. 우리는 손을 잡고 학교 복도도 걸을 수 없었으며 극장에서 키스도 할 수 없었어.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의 부모가 이층에서 자고 있다 해도 거실에서 애무할 수는 없었어. 우리는 언제나 어둠 속에서 살짝 밀회할 수 밖에 없었지. 그러던 중 어느 날 호숫가에서 그 미술 학교 파티가 개최되었지. 학생들은 모두 취해 있었어. 그런데 내가 그와 함께 숲속에 있는 것을 어떤 광고관계의 일을 하는 야비하기 짝이 없는 디자이너에게 들켜 버렸어. 그 일을 계기로 나는 해군에 입대해 버린 거야. 그 소년에게서 떠나기 위해. 굴욕과 소문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렇지만 나는 그 소년을 사랑했어. 그 애가 내 아내였어. 그 성미 고약한 아이가. 그리고 그 뒤 오랫동안 나는 그에게서 사랑받지 못했어. 아니 누구한테서도 사랑받지 못했어.
그런데 결과적으로 고향을 도망쳐서 해군에 입대한 것은 대실패였던 것 같아. 해군은 내게 있어 너무나도 잔인했어. 그렇잖아. 샤워실에 들어가면 건장한 남자의 육체가 줄지어 있으니까. 근육과 엉덩이와 남근 그만, 이 편지를 읽은 것을 멈추었나? 진절머리를 치며 찢어 버리지는 않았나?- 그 남자들의 벗은 몸을 보기만 하면 나는 만지고 싶어져. 키스하고 싶어져. 힘껏 안고 싶어지는 거야. 그리고 나도 그들에게 안기고 싶어지는 거야. 그들의 로커 안에 붙여져 있는 사진 속의 글래머 여자처럼 나를 꼭 끌어안아 주었으면 싶어. 사실을 말하면 마이클, 나는 자네를 몇 번이나 그런 눈으로 바라본 적이 있어. 내가 왜 자네와 함께 O스트리트에 안 갔는지 아나? 나는 자네가 그런 싸구려 술집 여자들과 춤추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야. 그리고 또 술에 취해 나중에 후회하게 될 행동을 하지 않을까 그것도 염려되었기 때문이지. 나는 자네를 좋아했어. 그렇지만 자넨 내 친구이기도 했어. 아마 이 별볼 일 없는 해군에서 만난 유일한 친구라고 말해도 좋을 거야. 자네를 사랑한 나머지 우정까지 잃어 버리는 일은 역시 피하고 싶었던 거야. 이해해 주겠어?
그래 나는 겁쟁이였어. 그래서 자네도 알고 있는 그 자와 사귀었어. 그는 체구가 작고, 잘 생겼고, 돈밖에 생각하지 않았어. 이 `위대한 미국의 남부'에서는 그도 애인을 구할 수가 없었어. 피부가 너무 새까만 데다 체격이 작았으므로. 그래서 그는 나를 발견한 거야. 아니 내쪽에서 그를 발견했는지도 모르지. 누가 먼저 적극적인 태도를 취했는지 잘 모르겠어. 그러나 그것도 지금에 와선 아무래도 좋아. 그는 처음에 내 그림의 모델이 되어 주었어. 자네가 그린 여자 그림을 처음 봤을 때 내가 얼마나 그녀를 질투했는지 아나? 물론 그는 돈 때문에 포즈를 취해 주었어. 그리고 다음 번에는 사진 모델이 되어 주었지. 그것 역시 돈 때문에. 그 사진도 지금은 캐논이 쥐고 있을 거야. 그리고 결국 그는 내게 몸을 맡겼어. 그것도 역시 돈 때문이었지만. 나는 그의 어떤 면에 빠지기도 했어.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너무 완벽했으니까. 몸집이 너무 가냘픈 데다, 마치 인형 같았고...... 그렇지만 그는 날 사랑하지 않았으며, 나도 그를 사랑한 건 아니었어.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었어. 왜냐하면 나는 자네를 사랑했으니까. 이런 말을 하면 재키에게 욕이 되려나? 이 편지를 태워 버리고 싶은가? 뭐, 그러는 편이 자넬 위해서는 좋겠지......, 하지만 자네도 내 마음을 눈치채고 있었겠지? 브룩클린 출신인데도 자네는 여러 가지 면에서 순진했지만, 그래도 바보는 아냐. 자네도 알고 있었다고 생각해. 그래도 이 사랑이 맺어질 수 없는 건 명백했어. 맺어질 건덕지라곤 아무 것도 없었어. 게다가 내게는 그 쥐꼬리만한 돈으로 맺어진 그가 있었어. 실은, 캐논에게 모든 것을 몰수당한 뒤 나를 무엇보다 슬프게 한 것은, 내가 좋아하지도 않는 녀석,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의 관계로 오명을 남기게 되었다는 생각이었어.
어쨌거나 나는 이제 사랑이 없는 세상에서는 더 이상 살고 싶지가 않아.
외톨박이로 살고 싶지 않아.
한때 나는 자주 예술만 있다면 살아갈 수 있다고 자신에게 말하곤 했었지. 그림에 모든 것을 쏟아 붓는다면 거기서 살아가는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야.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내 그림에는 그만한 힘은 없어. 기술은 있지만 예술의 영역으로는 도달하지 못했어. 눈은 있지만 시각이 없어. 내게는 애초에 뭔가의 결함이 있었어. 그래, 모든 요소의 중심이 되는 것, 시각의 초점을 죄는 것, 모든 요소를 하나로 결집하는 것...... 그것은 사랑이라고 생각해.
그래서 나는 이 세상에서 빠지기로 했어. 만약 해군이 허락한다면 내 소지품은 전부-물감이나 캔버스, 책 등도-자네가 가져 주었으면 좋겠어. 언제 애틀랜타에 갈 기회가 있으면 어머니를 만나 주게. 그렇지만 자네가 알고 있는 사실을 모두 말씀드리지는 말고, 내 작품도 보여 드리지 말았으면 좋겠어. 뭘 말하고 싶은지 짐작할 거라고 생각해...... 어머니에게는 당신께서도 받아들이기 쉬운 모양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는 편지를 써 두었어.
그밖에 자네에게 줄만한 물건은 아무 것도 없어. 자네가 해야 할 일은 알고 있겠지? 자네가 사랑하는 사람을 고이 손으로 꼭 끌어안는 거야.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돼. 그 사랑을 얻었다면 거기에 매달려야 해. 왜냐고? 그것만이 예술을 예술답게, 인생을 인생답게 해 주기 때문이지. 나는 간다. 그렇지만 어느 먼 훗날, 몇 년의 세월이 흘러 자네가 유명한 화가가 되지, 여섯 자녀의 아버지가 되었을 무렵, 많은 사람들과 사귀고 전 세계 위대한 도시들을 편력했을 즈음, 멕시코 만에서 부는 바람처럼 끈적끈적한 바람이 부는 여름 날 아침이 있다면 문득 지난 날을 돌아다 보고 내 생각을 해 주기를!
안녕!
마일즈
이런, 바보 같은 사람!
마일즈!
편지를 봉투에 도로 넣고 접었다. 순간 박박 찢어 버릴까, 갈기갈기 조각내어 버릴까 생각했지만 그만두었다. 내 로커를 열고 그 편지를 마일즈로부터 받은 <예술의 혼> 사이에 끼어 넣었다. 그리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마일즈에게 대답해 주고 싶었다. 그의 침대로 가서 그를 흔들어 일으켜, 조금만 더 참고 제대할 때까지 견뎌 보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그리고 나서 뉴욕이나 파리 같은, 자네가 누구이건 아무도 상관 않는 곳, 자네가 진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대도시로 가면 되잖아 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아아, 정말로 그의 목숨을 구해줄 만한 마법의 언어를 속삭여 주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모든 것이 이미 한 발 늦었다.
나는 몸도 마음도 녹초가 되어 깊은 잠에 떨어져 잠 속에서 떨고 있었다.
아침 식사 시간에도 나는 자고 있었다. 점심식사 시간에도 자고 있었다. 겨우 일어난 것이 오후 세시 경. 손과 머리가 아팠다. 샤워를 하면서 마일즈의 편지 생각을 했다. 그리고 문득 그걸 누군가가 봤으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났다. 위에서 무슨 증거를 찾으러 와서 로커를 모두 뒤졌다면? 사문회나 공식 조사 같은 것이 벌어지게 된다면? 다음 순간 나는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런 생각을 하다니, 이미 마일즈를 배신한 것과 다름 없지 않은가. 머리를 비우고 샤워를 계속했다. 얼굴을 쳐들고 물이 입으로 들어오든 말든 이를 닦았다. 그러자 어젯밤의 체험이 단편적으로 점점 머리에 되살아 났다.
전쟁 말기, 끝없는 태평양에서 죽은 자에게 둘러싸여 고투하는 래드캐논. 딕시 세이퍼의 풍만한 육체. 마담 나리타의 요염한 연기. <미스 텍사스 클럽> 주차장에서의 일. `자네가 사랑하는 사람을 자네 손으로 꼭 꼴어안는 거야.' 이 세상에는 사랑하는 여자가 없는 남자가 너무 많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싸워 상처를 입는 것이다. 나도 그들 중의 하나로 돌아가 버린 것일까.
몸을 닦고 흰 제복을 입고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배가 너무 고팠다. 하사관 클럽에 가니 베케트가 구석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어두운 얼굴로 내 얼굴을 올려다 보며 어젯밤의 전말을 이야기해 주었다. 샐, 막스, 댄버, 메이허, 그리고 여섯 명의 해병대원이 영창에 들어가 있다고 한다. 메인사이드 병원에는 해병대원 일곱 명이 입원해 있는데 그 중 한 명이 중상을 입고 빈사 상태에 있다고 한다. 개브리란 남자라는 것 같다. 만일 개브리가 죽으면 관계자 전원은 살인죄로 기소된다고 한다.
"살인?"
그 말은 너무 과장되어 으시시하게 울렸다.
"지금 미사에 가는 길이야." 베케트가 말했다. "함께 가지 않겠어?"
"아니, 그만 두겠어."
"자네 가톨릭이었잖아?"
"벌써 은퇴했어, 가톨릭에서는."
베케트는 웃으면서 내 어깨를 툭툭 치고는 더운 오후 속으로 나갔다. 나는 버거를 먹고 콜라를 마신 뒤, 커피를 한 잔 마셨다. 지금쯤 해병대 경비병들은 샐과 막스와 메이허를 구타하고 있을까. 나를 니그로 역성 드는 멍청이라고 부른 개브리를 실컷 두들겨 패 주었듯이. 문득 한국의 얼어붙은 구름에서 싸우던 시절의 바비 볼덴을 생각했다. 그 무렵, 몇 백 명의 해병대원이 부상하고, 동상으로 발가락을 잃으면서 퇴각해 왔다고 볼덴은 말했다. 그들의 모습을 보고 볼덴은 정말로 가슴 아프게 생각했던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해군 수병과 해병대원의 라이벌 의식만큼 우스운 것은 없다. 그것은 제복과 제복의 싸움인 것이다. 만일 우리가 어젯밤 사복 차림으로 <미스 텍사스 클럽>에 나갔다면 그런 싸움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나와 래드 캐논의 일대일 대결만으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창밖으로 눈을 돌리니 프리체트 대령이 화단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금은 그와 얼굴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어젯밤의 사건이나 앞으로의 전망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일어서서 문밖으로 살짝 나와 기지를 가로질러 갔다. 땀에 젖은 티셔츠가 등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막사로 돌아와서 마일즈의 편지를 다시 한번 읽었다. `자네가 사랑하는 사람을 자네 손으로 꼭 끌어안는 거야.' 마일즈가 무덤에서 소근거렸다.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돼. 그 사랑을 얻었다면 거기에 매달려야 해. 왜냐고? 그것만이 예술을 예술답게, 인생을 인생답게 해 주기 때문이지.'
나는 밖으로 나와서 햇빛이 환한 식당 속을 들여다 보았다. 래드 캐논 혼자서 스프를 보고 있었다. 얼굴은 부어 올랐고 태평양의 땡볕에 탄 피부가 번질 번질 빛나고 있었다.
지금이야말로 이곳을 나가지 않으면......
소형 플라이트 백에 토마스 크레이븐의 <예술의 혼>과 <푸른 노트> 양말, 속옷 그리고 면도 도구를 집어넣었다. 신발 이외에 내가 수병인 것을 알리는 것은 없었다. 백을 로커에 집어 넣고 모두가 잠들길 기다렸다. 그리고 옆문을 살짝 열고 밖으로 나왔다. 기지는 쥐죽은 듯이 고요했다. 보급부까지 가서 창고 옆을 지나, 마일즈 레이필드가 진실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비밀 아뜨리에가 들여다 보이는 창가에 섰다. 잠시 동안 모든 것이 예전대로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만일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지 않으면 그가 그린 그림이나 판유리 위에 놓인 붓과 물감, 테레빈유 통 등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방안에 가득한 오렌지도.
블라인드는 내려져 있지 않았다. 눈에 들어온 것은 나무궤짝 더미 뿐이었다.
병영 뚤 끝을 따라 나는 주위 깊게 나아갔다. 위병의 모습은 없었다. 쓰레기 수집 창고 앞에도 한 명도 었었다. 철조망의 구멍을 빠져나와 숲으로 빠진 뒤 거기서 빙 둘러 하이웨이로 나섰다. 로커클럽에 살짝 들어가 철사 옷걸이에 제복을 걸었다. 스포츠 셔츠에 면바지로 갈아입고 플라이트 백을 어깨에 메고 로커클럽 뒤로 돌아갔다. 거기서 그림자 속에 숨어 서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가는 길 앞에는 건너야 할 장애물이 나올 것이다. 붙잡힐 가능성도 있다. 물론 두려웠다. 나는 지금 내 인생을 일변시키는 행동을 감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영창에 들어가게 될지도 모르며 일생 도망자로 남의 눈을 피해 사는 인생을 보내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도리가 없었다.
나는 뉴올리언스로 갈 생각이었다.
내 사랑하는 여인을 찾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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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쪽 트레일러로 통해 있는 자갈길이 보이는 곳에 멈춰 서서, 잠시 오늘 밤은 저기서 머물다 갈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덴이 나를 바꾸고 내가 이덴을 바꾸었을지도 모르는 그 좁다란 침대에서 최후의 밤을 보내는 것도 좋겠지. 그런데 트레일러 뒤에서 희미한 불빛이 반짝이고 있는 것이 보였으므로 안전한 어둠 속으로 갈 길을 서둘렀다.
밤이 샐 때까지 에리슨 비행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오랜 시간을 계속해서 걸었다. 빨간 구두를 신은 이덴이, 언젠가 황당무계한 흉내를 내어 철도원을 도발시킨-아니면 공포에 떨게 했던-그 제방 옆을 지나갔다. 한동안 히치하이크는 금지다. 이 일대를 항상 돌고 있는 버스터 일당에게 잡히고 싶지 않고, 내가 기지의 수병인 줄 알고 있는 사람들과도 맞닥뜨리고 싶지 않았다. 그 해병대원이 정말로 죽어 버리면 나는 탈영 이상의 죄가 씌워지게 된다. `살인'이란 단어가 다시 머리에 떠올라 머리골이 쭈뼛하고 곤두섰다. 아아, 이대로 사라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내 소식이 이대로 끊긴들, 이 세상이 눈 하나 끔쩍하겠는가? 나는 세상에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청년에 지나지 않는다. 겨우 78달러를 주머니에 넣고 오로지 뉴올리언스를 향해 가고 있는 그저 일개 청년일 뿐이다. 내게 중요한 것은, 이덴 이외의 누구에게도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쩌면 이덴에게조차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뉴올리언스에 갈 것이다. 뉴올리언스에 가서 이덴을 찾을 것이다. 설령 앞으로도 계속 이대로 걸어야만 된다고 해도. 시간은 점점 홀러갔다. 나무나 입간판 뒤를 걸어가고 있는 내 곁으로 수없이 많은 차들의 라이트가 스쳐 지나갔다. 얼마를 걸었는지, 저 앞에 폴리라는 도로표지판이 보였다. 이제 앨라배마주에 들어 온 것이다. 갑자기 피로가 엄습해 오고 발바닥이 아파 왔다. 이젠 괜찮겠지. 마음을 굳게 먹고 차를 얻어 타 보자. 도로변에 서서 일시적인 살인귀가 아닌, 어디에나 있는 선량한 청년으로 보이도록 애썼다. 잠시 후 짙은 청색의 소형 트럭이 다가와서 멈추었다. 시동을 건 채로 운전석에서 이쪽을 보고 빙긋이 웃고 있는 사람은 이가 다 빠진 노인이었다.
"자아 빨리 타 수병 친구." 그가 말했다. "나는 밤새도록 여기서 기다릴 수는 없어."
내가 조수석에 올라 타자 그는 기어를 넣고 맹렬하게 달리기 시작했다. 고물 트럭은 가끔씩 좌우로 비틀거리면서 노견의 자갈을 튀어오르게 하면서 달려갔다. 라디오 채널은 흑인 위주의 방송에 맞춰져 있었다. 행크 발라드의 노래가 흐르고 있었다. <Work with Me, Annie> 어둠의 왕국 녀석들도 자주 이 노래를 불렀지. 가까이 온 흑인들은 모두 멈춰 서서 합창에 가담했다.
"제가 수병인 줄 어떻게 알았어요?" 내가 물어 보았다.
"그야 이 부근에서 차를 얻어 타려고 했으니까. 캐나다의 삼림경비대원은 아닐 테고. 나도 셜록 홈즈는 아니지만 이 길을 늘상 다니다 보니 눈에 띄는 건 수병이 틀림 없더라구. 자네들은 모두 어딘지 비슷한 데가 있거든. 자넨 어디 출신인가?"
"마이애미예요." 순간적으로 거짓말이 나왔다.
"거기도 유태인이 엄청 있겠지, 요즘은?"
"뭐, 그렇겠죠."
"전국 방방곡곡에 있으니까. 멤피스에서도 봤다는군. 믿어지나?"
"흥, 그것 참 대단한데요. 멤피스라......"
"그래, 자넨 어디로 갈 건가?"
"모빌이지만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주세요."
"좋아, 그렇게 해 주지."
차는 4차선 도로로 접어들었다. 주위는 온통 회색 하늘 아래 사각거리고 있는 습지의 풀들로 둘러싸였다. 찌는 듯한 열기가 공중에 충만해 있었다. 모기 한 마리가 팔에 앉아 있었으므로 딱 때려잡으니 노인이 웃었다. "이 부근의 모기는 흠, 농구를 할 수 있을 만큼 엄청나게 크지."
그 말에는 나도 웃고 말았다. 이윽고 차는 습지를 가로지르고 있는 둑길로 들어갔다. "길이 6마일이나 된다네." 노인이 말했다. "세상에서 제일 긴 다리일걸."
나는 우즈라고 한다고 그는 소개했다. 나는 리라고 했다. 마음만 먹으면 이름이나 경력이나 그야말로 입에서 제멋대로 척척 나오는 것이 놀라웠다.
흑인 대상 방송국의 수신 상태가 나빠지자 우즈는 다시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 다른 흑인 방송국을 찾았다. 로이드 프라이스의 노랫소리가 홀러 나왔다. "나는 이런 흑인 음악이 좋아." 미즈 클로디와 만나는 기쁨을 노래하는 프라이스의 소리를 들으면서 그가 말했다.
"아암 좋죠!"
계기판을 손바닥으로 두들기며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들었다. 전방에 뱅크헤드 터널이 보였다. 노인은 속도를 줄이고 동전을 찾아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나는 10센트짜리를 건네주었다.
"고마워, 젊은이." 하면서 우즈는 동전을 받아들었다.
요금 받는 곳 주변에 경찰의 모습이 보였다. 날 찾고 있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 해병대원 개브리 살인죄로. 자는 척할까 생각했지만, 아냐 모르는 척 하는 것이 제일 간단하다고 생각을 고쳤다. 경찰들의 옆구리 아래는 거무스름하게 땀이 배인 자국이 있었으며, 모두 지겨워 죽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우즈가 70센트를 건네주고 소형 트럭은 날렵하게 차의 물결 속으로 쓸려 들었다. 라디오에서는 빌리 워드가 <Sixty-Minute Man>을 부르기 시작했다. 바비 볼덴의 얼굴이 머리에 떠올랐다. 지금쯤 그는 어디 있을까. 그도 역시 앞날의 인생에 관해 곰곰 생각하고 있을까.
터널은 2차선이었는데 맞은편의 차선은 손으로 꼽을 수 있을 만큼 차량이 적었다. 우즈는 핸들을 양손으로 잡고 여유있게 트럭을 몰았다. 터널 속에서는 엉덩이를 씰룩거리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서서히 속력을 올리기 시작했다. 터널의 타일 벽에서는 여름의 땀방울이 방울져 떨어지고 있었다. 이대로 곧장 간다면 어쩌면 맨해튼 맞은편이 나올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 뒤에는 꼭 허드슨 강과 대형 여객선이 정박해 있는 부두가 보일 것 같았다. 왼쪽에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솟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주위에는 눈에 익은 사람들이 걸어다니고 있다. 유태인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흑인이나 푸에르토리코인도. 나는 우즈에게 인사를 하고 트럭에서 내려 길모퉁이 매점으로 걸어가 <뉴스>와 <밀러>와 <저널 아메리칸>을 산다. 지하철로 에베트 구장까지 가도 되지. 도저즈가 카디널즈를 맞아 공격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게임이 끝나면 코니 아일랜드로 가, <네이선즈>에서 핫도그를 사들고 해변까지 걸어가는 거다. 수영복 차림의 아가씨들의 피부에는 아직 겨울의 흔적이 남아 있을 것이 틀림 없다. 나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돌아 왔다고 알린다.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어요, 곧 그쪽으로 갈 겁니다 하고 전화할까......
그렇지만 터널을 빠져 나오니 그곳은 아직 앨라배마였다. 현실은 뉴욕에서 점점 멀어졌다. 불현듯 공포가 몰려와 머리가 아찔아찔했다. 몇 시간만 지나면 내가 한 행동은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된다. 대니레이가 점호를 하면 내가 없는 사실이 명백해진다. 그는 보즈웰이 나타나지 않았던 아침처럼 여러 군데로 수소문해 보겠지. 그러다 내가 사라진 것이 확실해지면 그는 나를 탈영으로 보고하겠지. 나는 두 번 다시 뉴욕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아버지와 동생들과 공공연히 만나는 것도 불가능해졌다. 그렇게 생각하니 목이 메어 왔다.
왼쪽으로 보이는 모빌 강의 강 어귀에는 많은 화물선이 정박하고 있었으며 보크사이트를 배에 싣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공기는 이제 소금기를 머금고 있었다. 아직 태양이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는데 대단히 더웠다.
"상당히 지저분한 곳이지?" 우즈가 말했다.
"글쎄, 그렇게 한 마디로 단정지을 순 없겠죠."
"그러면?"
"이 지역 사람이냐 아니냐에 따라 보는 시각이 달라지겠죠. 이 지역 사람들에게는 아름다운 광경으로 보일 것 아닙니까."
"난 이곳 출신이지만 젊은이, 저건 더할 나위없이 추한 광경이야."
트럭은 자전거가 정원 잔디밭에 넘어져 있을 법한 별장이 즐비한 곳으로 접어들었다. 아름드리 나무들이 푸른색으로 우거져 있었다. 한 개 정도의 풀은 모두 갖춰져 있었다. 우즈는 몇 번씩 왼쪽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갔다. 그러더니 돌연 웅장한 저택이 늘어서 있는 큰길 거번먼트 스트리트로 나왔다. 떡갈나무가 만들어 주는 높은 지붕 밑을 몇 블럭쯤 지나자 다시 가로수 없는 후진 동네가 나왔다. 가게 가운데 `세놓음'이란 간판이 붙어 있는 데도 있었다. 좁은 골목에는 녹슨 차가 한 대 방치되어 있었다. 창문은 깨어졌고 타이어도 벌써 없어진 채였다. 그대로 조금 더 가니 앞에 그레이하운드 버스 터미널 간판이 나타났다.
"자 다 왔네, 젊은이."
"정말 고맙습니다. 뭐라고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아냐, 나도 이야기 상대가 생겨서 기분 전환이 됐는 걸. 그런데 자네 혹시 안 좋은 일이라도 있나?"
"아뇨, 왜요?"
"아무래도 말이야, 얼굴색이 나빠."
"좀 피곤해서 그래요. 목적지에 도착하면 곧 괜찮아질 겁니다."
"그건 그럴테지."
노인은 버스 터미널 맞은편 인도 앞에 트럭을 대어 주었다. 나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내렸다.
"자, 힘내라구, 젊은이." 그리고 우즈는 사라졌다. 참으로 마음씨 좋은, 괴짜 백인이다. 유태인에게는 편견을 가지고 있으면서 흑인 음악은 또 좋아하니. 크게 심호흡을 하고 나는 큰길을 건넜다.
순간 심장이 얼어붙어 버렸다.
잡지 매점 앞에 흰 제복 차림의 SP가 두 명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지금은 등을 돌리고 신문을 읽고 있었다. 세상에, 내 사진이 1면에 나오다니. 그리고 샐과 막스, 메이허, 댄버의 사진도. 전원 살인죄로 기소되어. 그래, 우리 사진보다 더 크게 죽은 해병대원의 사진도 실려 있는지도 모르겠다.
슬며시 뒤로 돌아 나는 유유히 그 자리를 떠났다. 태연하게 골목으로 들어가서 왼쪽으로 돌았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돈 뒤 다시 왼쪽으로 돌았다. 당장이라도 SP가 뒷덜미를 낚아챌 것 같았다. 요란하게 타이어 소리를 울리면서 지프가 모퉁이를 꺾어 나타날지도 모르겠다. 땀이 볼을 타고 뚝뚝 떨어졌으며 양손에 땀이 배어 미끌거렸다. 건너편 집 현관에 자주색 허드레옷을 입은 뚱뚱한 흑인 여자가 나타났다. 맨발로 담배를 입에 물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아무렇지도 않게 가장했다. 흑인 여자는 엎드려서 우유병을 꺼냈다. 그녀의 등 뒤에 있는 차에는 보드지로 만든 간판이 붙어 있었다. `숙박 가능함.'
"잠깐 말씀 좀 묻겠습니다." 내가 말을 걸었다. "큰길로 나가려면 어디로 가면 됩니까?"
"큰길이라니, 거번먼트 스트리트 말이우?"
"떡갈나무 가로수가 있는 길인데."
"그럼 저쪽이 맞아요. 여기서 세 블럭쯤 가면 있어요."
"고맙습니다."
"이봐요, 잠깐만."
"네?"
"왜 그곳을 찾는 거죠?"
"뉴올리언스로 가는 길이거든요."
"근데 얼굴색이 형편 없어."
"좀 피곤해서요."
"피곤하면 좀 자는게 좋을 것 같은데."
"그렇지만 빨리 뉴올리언스에 가야 하거든요."
"오늘은 빈 방이 있어. 1달러면 돼." 담배를 길에 내버렸다.
"아뇨, 급히 뉴올리언스에 도착하고 싶어서 그래요."
"내 동생이 말이야, 마침 차로 뉴올리언스쪽으로 가는데......"
"목욕도 할 수 있어요?"
"그러면 25센트 더 내야 돼."
눈을 뜨니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곳은 비좁고 갑갑한 방이었다. 머리맡의 벽지는 벗겨져 있었다. 침대 옆에는 녹색 선반이 있었는데 그것도 더위로 진득거리는 느낌이었다. 방 안에는 무슨 음식 쉰 냄새가 떠돌고 있었다. 배개 밑에 손을 집어 넣었다. 지갑! 자기 전에 그곳에 찔러 넣어 두었는데 그것이 없다. 벌떡 몸을 일으켰다. 심장 고동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벗어놓은 옷은 그대로 의자에 걸려 있었다. 문을 쳐다보면서 내가 여기 갇힌 건 아닐까 생각했다. 어렸을 때 나그네가 산속의 외딴집에 하룻밤 묵다가 고기파이가 되는 괴기담을 많이 들었는데 그 나그네처럼 돈을 뺏기고 여기 갇혀 버리는 건 아닐까.
휘청 휘청 문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휴 한숨을 쉬었다.
문이 잠겨 있지 않았다. 일층으로 내려가는 계단과 층계참이 보였다. 문을 닫고 바닥에 무릎을 꿇고 침대 밑을 들여다 보았다. 지갑이 있었다. 돈도 무사했다. 방금 전 그 지갑이 내 인생에서 가장 귀중한 것으로 생각되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무허가 부대 이탈 탈영병. 그래, 이 무서운 세상에 나는 혼자서 대항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때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무의식증에 몸이 움츠려 들었다.
삐이걱 문이 열렸다. 전신이 경직되었다.
들어온 것은 그 흑인 여자였다.
그녀는 커다란 노란 타올과 얼음이 든 레모네이드 주전자를 들고 있었다.
"목욕 준비가 됐어."
"고맙습니다."
"어때, 할 마음이 생겼어?" 여자가 은근슬쩍 말하고 히죽 웃었다.
"벌써 동생이 왔어요?"
"그게 아냐. 더...... 좋은 걸 할 기운이 생겼느냐고 물은 거야."
"아뇨. 샤워하고 곧장 나가는게 좋을 것 같아요."
"그래?"
그녀 동생의 이름은 로드릭이라 했다. 나이는 마흔 둘이고 생김새는 마르고 험상궂었다. 파스카구라까지 파이프를 운반하는 길이라고 했다. 파스카구라가 어디 있는지 나는 잘 모르는데 그는 알고 있었다. 그곳에 가는 것을 그는 별로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난 될 수 있으면 미시시피에는 가까이 가고 싶지 않다구. 그곳 놈들은 모두 홱 돈 놈들이니까."
"뉴올리언스는 어때요?"
"아아, 거긴 또 다르지. 그곳 녀석들도 홱 돌아버리긴 했지만 돈 방법이 좀 틀리거든."
1946년에 육군의 방출 물자를 산 것이라는 1톤 트럭에 라디오는 달려 있지 않았다. 우리는 묵묵히 어두운 소나무 숲을 뚫고 지나갔다. 소나무 숲은 이제 피칸(호두나무의 일종) 숲으로 바뀌었는데 나무들이 모두 더위를 먹어 축 늘어져 있었다. 트럭은 멕시코 만을 향하여 2차선 포장 도로를 돌진했다.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이 보였는데 딱하는 소리가 들렸다. 로드릭의 이야기로는 피칸 열매가 바람에 흔들리면서 부딪혀, 백만 개의 캐스터네츠가 치는 것 같은 소리를 낸다고 했다.
피칸 소리는 비록 시에 도착할 때까지 줄곧 우리를 쫓아 왔다. 비록 시 시내에 들어서는 순간 로드릭은 입을 다물었다. 이곳은 미시시피 주. 로드릭은 정말로 이곳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서쪽으로 향하는 하이웨이와 동쪽으로 향하는 하이웨이가 합류하는 로터리가 정면에 있었으며 그 중앙에 석회를 칠한 거대한 등대가 서 있었다.
"저 등대, 일부러 저런 곳에 세웠을까요?"
이상해서 물어보니 로드릭은 웃음을 터뜨렸다.
"천만에. 옛날에는 이 일대가 바다였어. 지금 달려온 육지 전체가 말야."
왼쪽으로 멕시코 만이 보였다. 전세 보트, 독, 낚싯밥 가게, 식료품점, 토산품점. 몇 마일 계속되는 흰 백사장. 그리고 저 멀리 해면에는 오백 척쯤 되는 새우잡이, 굴조개잡이 배들이 닻을 내리고 있었다. 참으로 예쁜 그림엽서 같은 광경이었다. 이 트럭에서 내려 저 그림엽서 속으로 들어가 보통 사람들처럼 휴가를 즐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도로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수영복 차림의 아가씨들, 경찰, 키슬러 기지에서 온 것 같은 공군 병사들. 대학생 차림의 젊은이들. 그들은 보기 좋게 햇볕에 태워져 있었으며 오일을 발라 피부가 반질반질했다. 그들 중에는 모텔을 들락날락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들 대부분이 백인이었다.
나는 로드릭을 훔쳐 보았다.
그는 눈을 똑바로 전방에 고정시킨 채 천천히 움직이고 있는 차의 행렬을 바라보고 있었다.
싸구려 술집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그대신 낭떠러지 위에 서 있는 백악을 칠한 대저택이 보였다. 오만하게 바다와 대치하고 있는, 호화주택. 모두 남북전쟁 영화 속에 등장하는 것 같은 지붕을 받치고 있는 하얀 기둥과 잔잔하게 물결치는 넓은 잔디밭을 가지고 있었다. 저 멀리 안쪽 포치(밖으로 내민 현관)에는 흔들 의자에 앉아 바다와 수평선과 시내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조그맣게 보였다.
비록 시가 멀어져 가고 걸프폿 시내가 나타났다. 비록 시보다 한결 조용하고 중앙 분리대가 있는 하이웨이가 시내 가운데를 달리며, 야자수가 늘어 서 있었다. 대저택의 수가 훨씬 불어났으며 낚싯밥 가게나 전세 보트나, 모텔에 들락거리는 오일을 몸에 칠한 금발 아가씨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기묘한 모양을 한 나무가 눈에 띄었다. 탠너트 나무지 하며 로드릭이 설명했다.
"벌써 오래 전의 일인데 탠너트로 한몫 잡으려던 미친 놈들이 많이 있었지. 그 전에는 오렌지가 붐이었어. 내가 아직 꼬마였을 무렵, 사방의 해안에 오렌지 나무를 심었더랬어. 그런데 오렌지는 죽어 버렸고 탠너트도 같은 운명을 밟았어. 그래도 녀석들은 꿈이여 다시 한번인지, 다시 황금알을 낳는 종자를 찾고 있어. 이 가엾은 멕시코만을 끝까지 이용해 먹으려는 거야, 놈들은. 이 거대한 푸른 바다를 말이야."
로드릭은 금새 걸프폿을 빠져 나왔다. 햇볕은 등 뒤로 돌아갔고 멕시코 만은 너무나 거대하고 음울해 보였다. 요란한 출범의 징 소리가 들리고 전쟁터로 달려 나가는 기세로 물결을 차고 나가는 어선이 보였다. 그리고 이제 전방에 조선소의 거대한 크레인이 보였다. 엷은 보랏빛 하늘을 등 뒤로 솟아 있는 크레인은 삐어져 나온 관절처럼 기괴한 인상을 풍겼다. 각종 표지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인걸즈 조선소에 물자를 운반하는 트럭은 다음 분기점에서 왼쪽으로 꺾으시오 라고 쓰여 있었다. 로드릭은 갓길에 트럭을 세웠다. 도로 양쪽에는 갈대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땡볕에 달구워진 대지에서 시큼한 냄새가 일어났다.
"다 왔소." 로드릭이 말했다. "이후부터는 자네 능력껏 뉴올리언스까지 가도록 해 보라구."
"덕분에 편하게 왔어요, 여기까지 태워 주셔서." 그렇게 말했는데 웬지 거북했다. 그는 양손으로 핸들을 잡고 있었다. "이 부근은 정말 깨끗한 곳이군요."
"아아." 그가 말했다. "그런 편이지."
1마일 정도 걸어가니 수산물 가게가 딸려 있는 주유소가 눈에 들어 왔다. 1달러로 작은 새우를 1파운드 사서 하이웨이를 건너 축축한 통나무에 걸터 앉았다. 새우 껍질을 벗겨 우물우물 씹고 있으려니까 좀더 먹고 싶었다. 내가 사라진 것은 이제 확실하게 알려졌겠군 하는 생각을 했다. 대니 레이가 래드 캐논에게 전화하여 내가 어디 유치장에 처넣어져 있는 건 아닐까고 묻고 있는 그림이 머리에 떠올랐다. 래드는 이렇게 말하겠지. 유치장에 처박힌 것 좋아하네. 녀석은 일요일 새벽 나와 함께 돌아왔다구.
나는 정식으로 `탈영병'이란 낙인이 찍힌다.
수색대가 결성될 것이다.
아니 일이 더욱 나쁘게 꼬일지도 모른다.
살인죄로 기소되었다면 어떡하지?
작은 새우를 다 먹고 도로 건너쪽 주유소를 돌아다 보았다. 해는 벌써 떨어졌다. 급유 펌프 앞에 1949년형 청색 시보레가 서 있었다. 뒤쪽 창에 공군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남자 둘이 콜라 자동판매기 앞에 서 있었다. 다른 한 명은 사무실 옆에서 나타났다. 회장실에 갔다오는 모양이었다. 내리닫이 작업복을 입은 키가 작은 남자가 차에 급유를 하고 있었다. 세 남자 중 하나가 수산물 가게로 들어갔다. 나는 그리로 다가갔다.
"실례지만 이 차를 좀 얻어 탈 수 있을까요?"
가장 키가 큰 사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응시했다. 그는 풀이 빳빳한 소매 없는 흰 셔츠에 짧은 면바지를 입고 있었다. 운전석쪽으로 돌아가더니 대꾸도 않고 차에 올랐다. 다른 한 사내는 가솔린 값을 지불하고 있었다. 세 번째 사내는 작은 새우가 든 커다란 봉지를 안고 돌아왔다.
"어딜 가는데?" 키 큰 사내가 물었다.
"뉴올린즈." 로드릭의 발음을 흉내내어 그렇게 말했다. 뉴올리언스가 아니고.
"기름값 정도는 가지고 있겠지?"
"물론이죠."
"자아, 타."
세 사람은 키슬러 기지 소속의 공군병으로 열홀 동안의 휴가를 막 받았다고 했다. 전부 텍사스 출신으로 지금부터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인 것 같았다. 키가 큰 남자 데이브는 오스틴 출신. 그는 스피드 기록 갱신을 목표로 경주하는 선수처럼 차를 쌩쌩 질주시켰다. 새우를 사들고 온 하리는 포트 워스 출신. 남은 한 남자 제이크는 달라스 출신이었다. 그가 일행의 회계를 담당한다 하므로 뒷좌석 그의 옆자리에 앉았을 때 3달러 건네주었다. 데이브는 완전히 운전에 몰두하여 트럭을 추월하거나 마주 오는 차를 피하면서 맹렬히 달리고 있었다. 다른 두 녀석은 새우 껍질을 벗겨 창 밖의 후덥지근한 밤공기를 향해 집어 던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잭 다니엘즈 병을 돌리기 시작했다.
"자 쭈욱 들이켜."
"그만 두겠어요 난."
"그냥 미스터 다니엘즈인데."
"뉴올리언스에서 좀 용무가 있거든요. 비틀거리면서 도착하면 곤란해요."
"그럼 맘대로 하라구."
어둠 속에서 그들의 얼굴은 똑똑히 보이지 않았다. 나는 뒷좌석 구석, 운전석 바로 뒤에 동그마니 웅크리고 앉아 자든가 어둠을 응시하고 있는 척했다. 일단 마이애미 출신의 밀러라고 말해 두었는데, 뜻하지 않는 곳에서 말이 막히거나 거짓말이 탄로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 일만은 피해야 했다. 그들은 열심히 젝 다니엘즈 병을 돌리고 있었다. 나는 자신에게 이르고 있었다. (알겠나, 침착하게, 머리를 샤프하게 움직이고 있어야 해. 술에 취하면 제동이 안 걸리잖아. 곧 정체가 드러나고 말 거야. 뉴올리언스에 도착하기 전에 영창행이다. 사랑하는 여인을 찾기도 전에 모든 것이 끝장이다. 게다가 이 녀석들한테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는 없어. 이 녀석들은 친구가 아니니까. 그래 녀석들은 귀향중인 공군병사에 불과하니까.)
도중에 우리는 다섯 번 차를 세웠다. 누군가가 소변이 하고 싶다든지, 샌드위치가 먹고 싶어졌다든지, 멀미가 났기 때문이다. 한 번 차가 갑자기 미끄러지는 것 같은 느낌에 잠에서 깨어났다. 인기척이 없는 길 위에서 차는 빙 돌아 덜덜 몸체를 떨면서 정지하였다. 데이브가 하마터면 길을 헤매고 있는 소와 격돌할 뻔했던 것이다.
"무법천지로군!" 제이크가 외쳤다.
"상금 따먹기 천국이야!"
전원 밖으로 내려섰다. 거기서 녀석들은 또 위스키를 돌려가며 마셨다. 이번에는 나도 한 모금 들이켰다. 버본은 타는 듯이 뜨겁게 위를 통과했다. 모두 어둠을 향해 소변을 갈겼다.
그때 대부대의 모기가 우리에게 덤벼 들었다. 달빛을 받아 은색으로 빛나는 대군이 무더기로 모두의 입과 코 할 것 없이 덤벼들어 물어댔다. 모두 얼굴과 팔 등을 찰싹찰싹 두드리면서 차로 도망쳐 돌아왔다. 데이브도 팔을 찰싹 두들기고 욕을 퍼부으며 차를 출발시켰다.
차 안으로 따라들어 온 모기를 쫓아내기 위해 창문을 열어 두었다. 전신이 모기에 뜯겨 부어 올랐다. 물린 자국에 위스키를 바르면 낫는다고 하리가 말했다. 아니, 그건 아깝잖아. 데이브가 만류했다. 듣는지 안 듣는지 시험해 보자고 제이크가 말했다. 나는 그만 두기로 했다. 나중에 가는 곳마다 버본 냄새를 팍팍 풍기면서 다니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더 이상 위스키는 마시지 않았다.
그 무렵, 밤 공기의 내음이 바뀌기 시작했다. 농밀한 바다 내음이 풍겨 왔다. 점점이 검은 늪이 보이는가 했더니 수상가옥이 물 위에 떠 있는 커다란 호수가 나타났다. 드디어 철다리를 건넌 곳에서 마을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세프 만타르 주유대가 두 대, 낚싯집이 몇 채, 그리고 술집.
"야, 이거 굉장한 대도시 아냐!"
"세프 이름을 딴!"
"어이, 여긴 루이지애나야."
"저건 펄 강이겠지?"
모두 함께 바에 들어갔다. 아까 버본을 마신 탓인지 나는 목이 바싹 바싹 탔다. 안에는 남자 둘이 핀볼 머신으로 게임을 하고 있었으며, 빨간 머리 여자가 조그만 카운터 뒤에 서 있었다. 우리가 들어서자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덕지덕지 화장을 하고 있었으며 가슴은 또 도저히 진짜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튀어나와 있었다.
"이봐, 너희들 알코올 마실 나이는 된 거야?"
"한국에서 전사할 만한 나이는 됐지." 데이브가 대답하고 1달러 지폐를 두 장 카운터에 얹었다.
"자, 이젠 마셔도 좋아." 여자가 웃으며 가슴을 살짝 흔들었다.
두 개의 창 사이의 벽에는 조잡한 지도가 붙어 있었으며, `여기가 어디냐고 묻지 마라, 당신은 여기에 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화살표가 세프 만타르를 가리키고 있었다. 우리는 일종의 섬 비슷한 데 있는 것 같았다. 그 서쪽 끝에는 리골레트라고 부르는 작은 강이 무수히 흐르고 있었으며 `습지'라고 표기된 곳이 대여섯 군데 있었다. 그 지도를 따라 나는 습지쪽을 바라보았다. 멀리 하늘 저편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여자 바텐쪽을 돌아다보며 물었다.
"뉴올리언스까지는 여기서 얼마나 남았죠?"
"자넨 벌써 도착한 거라구!" 그녀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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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뜯은 위스키 병을 돌리며 마셔대면서 큰소리로 기성을 질러대고, 여자들에게 찝쩍거리면서 그들은 나를 카널 스트리트와 렘파트 스트리트 모퉁이에 내려놓고 그대로 무서운 속도로 달려갔다.
그 후, 현재에 이르는 몇 십 년 동안에 낯선 도시를 밤중에 방문한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러나 그때 뉴올리언스에서 맛보았던 그런 감동을 준 도시는 한 군데도 없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잠시 고향에 돌아온 것과 같은 신기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거기에는 조명이 밝은 업무용 빌딩이 있었다. 선물을 파는 가게, 카메라점, 보석상, 레스토랑 그리고 거대한 호텔이 있었다. 노란색 드레스를 입은 엉덩이가 큰 여자들이 드나들고 있는 가게 앞에서 경찰관 몇 명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마치 뉴욕처럼.
게다가 그곳은 전차가 다니고 있었다. 나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져준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전차는 나에게 손을 내밀어서 안아주고 나를 구제해 줄 것을 약속해 주었다. 그토록 반가웠던 전차. 그것은 강철 차량으로 강철 노선을 덜커덩 덜커덩 달리며 차장이 땡땡치는 종소리와 함께 드높게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사잇길에서 카널 스트리트로 꺾으며 들어온다. 낡아빠진 차체의 일부는 목조였으며 만화에 나오는 전차와 같은 네모진 얼굴을 하고 있다. 7번가 노선을 다니고 있는 유선형의 회색 전차는 보이지 않았으며 브룩클린 5번가를 다니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바라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아, 고향으로부터 왜 이렇게 멀리 와 버렸을까.)
그리고나서 이렇게 생각을 고쳤다. (하지만 걱정 없어. 모든 것이 잘 될 테니까.)
그리고 걷기 시작했다. 한밤중의 뉴올리언스를. 아스팔트는 낮에 흡수했던 더운 열기를 품어내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하룻밤을 지낼 장소를 찾아야 한다. 그러나 일류 호텔에 묵을 수는 없다. 그런 돈을 쓸 수도 없으며 더구나 신원을 확인하는 증명을 제출하라고 하면 그야말로 낭패다. 그리고 이 카널 스트리트가 타임즈 스퀘어와 같은 곳이라면 SP도 어딘지 이 근방을 돌아다니며 수상한 사람을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 역시 어디든 골목으로 들어가는 편이 무난하다. 소시민이 살고 있는 곳, 귀찮게 굴지 않는 여인숙 또는 헌병 따위가 나타나지 않는 곳이라면 오케이다.
정신을 차려보니 강 앞에 서 있었다. 사람들이 줄을 지어 `아르제'라고 쓰인 페리에 타는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차도 줄에 서 있었다. `아르제'라고? 이건 놀랠 일이다. 아르제라 하면 북아프리카에 서 있는 도시가 아니었는가? 대열 옆을 지나쳐서 페리 발착장까지 가서 아래를 내려다 봤다.
미시시피강.
윤기가 나는 검은 수면이 느긋하게 움직이고 있다.
뒤에서 깊이가 있는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라도 있소, 당신?"
뒤를 돌아보니 경찰관 하나가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꽤 나이가 들어 보인다. 50은 넘은 듯했다. 매우 뚱뚱했으며 눈 아래가 처져 있었다. 얼굴은 땀이 배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니, 아무 일도 아닙니다. 왜 그러시죠?"
"요즘은 여기에서 뛰어 내리는 자가 많아서 말이오. 여기에 잠시 서 있었는가 하면 곧 이어 강물에 덤벙하고 뛰어내린단 말씀이야."
바싹 나에게로 다가와서 내 눈을 들여다 보았다. "당신도 혹시 바보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말투가 베케트와 비슷하다. 브룩클린 아이들과도 비슷하다. 나는, 사실은 그렇지 않지만, 지극히 평범한 젊은이로 보이려고 미소를 띠었다.
"천만의 말씀을. 어딘가에 마땅한 여인숙이 없을까 하고 찾고 있던 중입니다, 경찰 아저씨. 지금 캘리포니아로 가는 길입니다. 다음달부터 그곳의 새로운 일자리에서 일하기로 되어 있어서요."
"캘리포니아 어딘데?"
"저 샌디에이고인데요, 가 보신 적이 있으세요?"
"전쟁중에 가 본 적이 있지. 산타바바라에는 여동생이 살고 있지. 그앤 거기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야. 나는 여기가 좋은데. 뭐니뭐니해도 음식이 맛있거든. 뭐 맛있는 음식이라도 먹고 가도록 하게. 출발하기 전에."
"저 쓸 만한 여인숙을 혹시 알고 계십니까?"
그는 볼을 긁고나서 데카타 스트리트쪽을 가리켰다. 그 주변에는 여인숙이 많이 있다고 한다. 철길을 따라 가는 지름길이 있지만 기차와 무임승차를 한 불량자들에게 조심해야 한다고 말해 주었다.
"또 한 가지 방법은 말이지, 이 카널 스트리트를 따라 차터즈 스트리트까지 되돌아가는 거야. 그리고 오른쪽으로 돌아서 프렌치 쿼터에 들어서지. 브 카레이로 가는 거야. 그리고 똑바로 직진하면 잭슨 스퀘어가 나오지. 거기에서 다시 한번 우회전하면 부둣가가 나온다네, 거기서......."
느닷없이 끼익하는 차의 급브레이크를 밟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이어 금속과 금속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패리를 타려던 두 대의 차가 충돌한 것 같았다. 경찰은 급히 그쪽으로 달려갔다. 나는 어슬렁거리며 카널 스트리트를 걷기 시작했다. 도중에서 우회전하고 차터즈 스트리에 접어들었다. 길 폭이 좁고 조명도 어두웠다. 까칠까칠한 높은 돌장벽이 양쪽에 솟아있다. 돌을 놓은 길바닥 어디에서인지 무언가가 썩은 듯한 신 냄새가 풍기고 있다. 도로 밑에 있는 하수도까지 더위로 끓고 있는 듯했다. 인도에는 술주정뱅이 몇 명이 벽에 기댄 채 앉아 있었다. 모두들 백인이었다. 그 중 하나가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충혈된 눈, 윤기없이 처진 피부, 나의 배낭에 손을 얹고 히죽히죽 웃는다. 희미한 어둠 속에서도 치아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뭐가 들어있지, 이 안에?"
"놔요!" 나는 말했다.
주정뱅이는 배낭을 잡아 당기려고 했다. 그것을 다시 빼앗고 그를 밀어냈다. 그는 잽싸게 자세를 고치고 공격 자세를 취했다. 한손에는 칼을 쥐고 있었다.
썅!
다른 주정뱅이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쪽에 벌어진 일에는 아랑곳 없다는 듯이.
(이건 바보 같은 짓이다. 이런 일을 하려고 이쪽으로 온 건 아니다.)
나는 후퇴했다.
(이런 식으로 죽고 싶지는 않다. 지금 죽다니 말도 안 된다. 나는 사랑하는 여인을 찾아야 한다.)
주정뱅이가 말했다. "좋은 것이 들어있지, 그 속에 말이야 응?"
나는 홱 돌아서서 뛰기 시작했다.
차터즈 스트리트를 직진하여 오른쪽으로 돌아서 다음에는 왼쪽으로 돌았다. 잠시 달리고 나서 이젠 괜찮겠지 하고 뒤를 돌아봤다. 사람이 다니지 않는 노면에서 수증기가 오르고 있을 뿐, 눈이 충혈된 주정뱅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속도를 차츰 늦추면서 잠시 후에는 걷기 시작했다. 점점 소규모의 술집이 많아지고 노란 빛이 인도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공중에는 음악 소리가 흐르고 있었다. 딕시랜드, 비밥, 블랙 뮤직 이쪽에서 고음이 들리는가 하면 저쪽에서는 저음이 울려온다. 어딘지 보이지 않는 방에서 즐겁게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웬지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때 <오텔>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네온의 H자가 불이 꺼져 있었다. 글자 외에는 아무런 명칭도 붙어 있지 않다. 바로 모퉁이에 위치하고 있고 입구 문이 열려 있었다. 슬며시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 그곳은 높은 천장에 형광등이 켜져있는 좁은 로비였다. 선풍기가 천천히 돌고 있었지만 탁하고 무더운 공기에는 아무 효력도 없었다. 뚱뚱한 창녀 한 명이 소파에 앉아서 TV를 보고 있었다. 프론트의 카운터는 없고 극장의 매표소와 같은 창구가 있을 뿐이었다. 노란 피부에 바싹 마른 남자가 나를 쳐다봤다. 가는 잎담배를 물고 있었다.
"어서 오십쇼."
"방이 있을까요?" 나는 말했다.
"있고 말고요."
"얼마죠?"
"하룻밤에 3달러. 선불인뎁쇼. 여자가 함께라면 1달러 추가구요."
"그럼 사홀밤 묵기로 하겠소." 10달러짜리를 내놓았더니 남자는 거스름돈 1달러와 127호실 열쇠를 주었다.
"2층에 있어요." 담배를 문 채 말했다. 콜라 자동판매기 뒤에 2층으로 통하는 계단이 보였다.
높은 천장에 노란 백열등이 켜져 있는 작은 방이었다. 초라한 가구였지만 필요할 만큼 비치되어 있었다. 침대, 정리장, 나이트 테이블, 작은 싱크대, 그리고 마이애미 비치의 사진이 있는 1952년도 달력. 침대는 연한 하늘색 커버가 쓰여져 있었는데 온 사방에 하얗게 보푸라기가 일어나 있었다.
전화는 없다.
욕실도 없다.
침대 한쪽에 덜썩 앉았다.
창은 철조망이 처져 있다. 벽에 생긴 얼룩은 이탈리아 반도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몸이 몹시 달아오르고 있었다. 눕자마자 나는 잠이 들었다.
그렇다. 드디어 찾아 온 뉴올리언스, 이덴 산타나가 숨쉬고 있는 뉴올리언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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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틀 동안 그녀를 찾아서 뉴올리언스 시내를 돌아 다녔다. 맨 처음에는 전화번호부로 시작했다. 호텔 방에도 로비에도 없어서 우체국 벽에 걸려 있는 것을 뒤적거렸다. 시내에 살고 있는 산타나라는 성을 가진 사람 모두를 조사하여 일일이 전화를 걸었다. 댁에 이러이러한 여자분이 계십니까 하고 물어보면 한결같이 난처해하는 목소리였다. 그래도 나는 전화를 걸 때마다 내 이름과 호텔 이름을 전해 주었다. 오래 된 영화와 추리소설에 대해서도 생각해 봤다. 행방불명된 사람을 끈질기게 찾아다니는 사립탐정의 수법, 그것을 참고로 할 수는 없을까. 그래서 개스 회사에 가서 이덴 산타나와 제임스 로빈슨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는가 하고 물어봤다. 카운터에 앉은 여자는 별 미친 사람이 다 있다는 듯한 눈초리로 나를 보더니 상사를 불렀다.
"그건 외부 사람에게는 가르쳐 주지 못하게 되어 있는 사항이오." 머리가 벗겨진 남자가 말했다. "무엇 때문에 그런 걸 알려고 하슈?"
그건 대답할 수가 없다. 나는 도망치듯 나왔다. 이번에는 지방 신문사를 훑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하고 제임스 로빈슨에 관한 기사를 보고 싶다고 부탁해 보는 것이다. 로빈슨이 정말 이덴이 말한 대로 악인이라면 틀림없이 그에 관한 어떤 기사든 남아 있을 것이 분명하다. 즉시 전화를 걸어서 과거의 사건에 대해서 알고 싶다고 물어봤다. 그러자 상대방은 왜 알고 싶은 거냐고 되물었다. 나는 학생인데 지금 논문을 쓰고 있는 중입니다 라고 대답하자 전화를 받은 여자가 말했다. "그럼 먼저 담당 교수님께 소개장을 받아오세요. 그러면 가능할 거예요......" 물론 경찰에 갈 수는 없다.
첫날 정오 무렵, 완전히 지쳐 버려서 잭슨 스퀘어 벤치에 털썩 앉았다. 너무 더워서 몹시 갈증이 났다. 냉차를 팔고 있는 남자에게 체리 주스를 주문했다. 매우 달고 시원했다. 한 잔 더 마셨다. 한 잔에 3센트였다. 광장을 둘러보니 상점가 앞에서 이젤을 세우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 남자들이 있었다. 이덴을 찾으면 어떻게 할까 하고 생각했다. (그렇다. 이 도시에서 살면 되지 않는가.)
나는 뉴올리언스가 점점 좋아지고 있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도시는 본 적이 없다고 생각되었다. 프렌치 쿼터의 자갈이 깔린 길을 몇 시간 씩이나 돌아다니면서 스페인풍 마당의 어스름한 입구를 들여다 봤다. 그곳에는 분수가 있었으며 열대 식물이 우거지고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다. 이런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매우 감미로운 감각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 정원은 프랑스나 스페인의 통치시대로부터 여기에 있었으며 그 무시무시한 철문으로 봉쇄된 채 시간의 흐름과는 무관하게 지켜져 왔던 것이 아닐까. 달아오른 몸을 거칠거칠한 벽에 기대어, 나는 냉랭한 내부를 들여다 봤다. 그러자 아득한 옛날, 딸들의 배우자를 찾아서 강을 내려왔던 이덴의 선조들 모습이 머리에 되살아났다. 그 당시 백인 멋쟁이들은 혼혈 여성이 모여드는 무도회에 가서 자기 취향의 여자를 찾아서 이런 집에 살게 했을 것이다.
이층에는 정교하게 장식된 철제 난간으로 둘러싸인 발코니가 있었다. 그 뒤편에 천장이 높은 침실이 보였다. 더운 여름의 어느 날 오후 그들은 아마 그곳에 누워서 미풍과 천장에 붙여있는 선풍기 바람에 나체를 내맡겼을 것이 틀림 없다. 그 방을 보고 있는 동안 크레이븐의 화집 속에 있는 그림 생각이 났다. 벌거벗은 여자가 소파에 누워 있고 그 옆에 흑인 여자와 검은 고양이가 있는 그림이다. 그런데 이 뉴올리언스에서 내가 머리에 떠올리는 그 그림은 나체인 여자의 피부는 검고 고양이의 털은 흰색이며, 옆에 있는 여자의 살결은 한층 더 검다.
그 첫날 밤 나는 여러 곳을 헤매고 다녔다. 어느 사이엔가 이덴 뿐만이 아니라 도시 그 자체의 매력에 빠져들고 있었다. 나가기 전에 이덴의 얼굴을 그려서 그 그림을 가지고 술집을 돌아다녔다. 버본 스트리트까지 갔더니 어느 술집 할 것 없이 한결같이 딕시랜드 재즈가 흘러 나온다. 바텐더, 창녀 등 닥치는 대로 이덴의 그림을 보이고 이런 여자를 모르냐고 물으며 다녔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공기가 차츰 농밀하게 관능적으로 변해갔다. 밤 12시경에 나는 한참동안 버본 스트리트와 센트 피터즈 스트리트 모퉁이에 서서 백인이 연주하는 딕시랜드 재즈를 들으면서 길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좁은 거리에 수백 명의 관광객과 그 도시에 사는 시민들이 때를 지으며 걷고 있다. 그들은 여러 지방의 사투리에다 프랑스어, 스페인어, 그리고 독일어 등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여러 사람들의 얼굴이 끊임없이 스쳐지나갔다. 부드러운 얼굴, 긴장한 얼굴, 넋이 빠진 듯한 얼굴, 날카로운 얼굴, 아름다운 얼굴. 그러나 이덴의 얼굴은 어디에도 없었다. 문득 코끝을 자극하는 커피 향기에 이끌려 걷고 있는 사이에 다시 잭슨 스퀘어에 와 있었다. 미시시피 강을 따라 이어진 불빛이 보였다. 몹시 배가 고팠다. 도로 건너편 강을 등에 진 곳에 야외 카페테리아가 있고 흑인 웨이터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카페 드 몽드, 프랑스어는 몰랐지만 고등학교에서 배운 라틴어 덕분에 대충 짐작이 갔다.
카페 오브 더 월드. 세계의 카페라는 뜻일 것이다.
길을 가로 질러서 비어 있는 테이블에 앉았다. 강변에서 바람이 불어오는 탓인지 그곳은 시원했다. 메뉴는 두 종류 밖에는 없었다. 커피와 베이그네트. 커피를 마셔보니 보통 커피보다 텁텁한 느낌이었으며 뭔가 알갱이가 남았으나 매우 맛이 좋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베이그네트를 먹어치우고 다시 주문했다. 두 접시도 정신없이 먹었다. 그리고나서 편안하게 의자에 등을 기대고 트림을 했다. 갑자기 배가 불렀던 탓인지 오히려 식곤증에 빠지게 됐다. 화려하게 전기장식을 한 쇼 보트가 강물 위를 지나갔다. 승객을 가득 실은 갑판에서는 악단이 신나게 연주를 하고 있다. 지금 이덴이 함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이 <카페 드 몽드>에 둘이 함께 앉아서 그 독특한 커피를 마시면서 쇼 보트를 구경할 수 있다면 얼마나 즐거울까.
다음날 조금 늦잠을 자고 눈을 떴는데 몸도 침구도 그리고 벽까지도 축축해 있었다. 싱크대 옆에 있는 타올을 만져보니 그것도 젖어있었다. 서둘러서 방을 뛰쳐 나왔다.
이번에는 거리를 지나가는 흑인들 뒤를 따라가 보니 건물 모양이 완전히 다른 지역이 나왔다. 어느 집이고 모두 낮았으며 양철 지붕이었다. 입구 문을 열어보면 뒤뜰까지 볼 수가 있었다. 앞마당에서는 흑인들이 한가롭게 앉아서 찬 음료수와 레모네이드를 마시면서 불만섞인 목소리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에게 이덴의 그림을 두루 보였지만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뭐야, 이 백인은. 응 무슨 일인데? 그리고는 또다시 찬 레모네이드와 자기들의 담소에 여념이 없었다.
점심 때가 가까워질 무렵 몸은 천근만근이었고 온 몸이 땀투성이었으며 졸음이 쏟아졌다. 머리 속에는 갖가지 의문이 맴돌고 있었다. (어쩌면 이덴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거짓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출신이 뉴올리언스라는 것도 새빨간 거짓말일지도 모른다. 사실은 맴피스라든가 텍사스일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남부 출신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세탁소와 이발소 그리고 술집을 돌면서 나는 계속 생각했다. (나는 어처구니 없는 거짓말을 곧이 듣고 평생을 망쳐 버리려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물론 여기에서 그녀를 찾아낸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러던 중에 핑크색의 긴 코트를 입은 슬픔을 머금은 듯한 노란눈을 가진 여자가 이덴의 그림을 보고 말했다.
"어머 이건 이덴이잖아." 머리가 아찔해지는 것 같았다.
"어디에 살고 있는지 아세요?" 나는 물었다.
"아, 이덴은 옛날에 이사를 가버렸어요."
"언제쯤요?"
"글쎄 2, 3년 전이었을까?"
"어디로 이사를 갔는지 혹시 아세요?"
"글쎄요...... 그녀의 남편이 또 무슨 골치 아픈 일을 저질렀나요?"
"남편이라면 제임스 로빈슨 말인가요?"
"그렇죠...... 키가 크고 잘 생긴 남자지요. 하지만 여러 가지로 평판은 나빴지요."
"내가 찾고 있는 것은 이덴이에요. 로빈슨이 아니고."
"교회에는 가 봤나요?"
"어떤 교회?"
"천주교회가 뻔하잖아요? 잭슨 스퀘어에 있는. 세인트루이스 대사원말예요. 천주교 신자라면 그곳에 다니는 것이 당연하지요."
만약 이덴 산타나를 만나게 되면 내가 뉴올리언스에 와 있다고 전해 달라고 그녀에게 말했다. 그림의 한 귀퉁이를 찢어서 차터즈 스트리트에 있는 호텔 주소를 급히 적었다. 그것을 그 여자에게 주며 인사를 했다. 그리고 나서 나는 성당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어느덧 하늘이 어두워지고 구름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벌써 가게문을 닫은 상점 주인도 있었다. 폭풍의 전조였다. 그래도 상관 없다. 이 여행, 여기까지 왔던 이 여행은 결코 아무렇게나 지껄인 거짓말에 속은 건 아니었다. 이덴 산타나는 정말 이 도시 출신이었다. 그녀는 정말 제임스 로빈슨이라는 남자와 결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이 도시에 있음이 분명하다. 그런 확신이 섰다. 아, 그녀는 이 뉴올리언스의 어딘가에 꼭 있을 것이다. 어쩌면 바로 맞은편 모퉁이쯤에 있을지도 모른다.
대성당 앞에 도착했을 때 이미 잭슨 스퀘어는 사람의 그림자가 뜸해지고 있었다. 성당 정문은 닫혀 있었지만 옆문이 열려 있어서 그곳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운 양초가 켜져 있는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그 냄새를 맡자 다시 카톨릭 신자로 되돌아간 듯한 생각이 들었다. 미사 시간은 아니었지만 성당 안에는 검은 옷을 입은 여인들이 많이 앉아 있다. 흑인 남자도 드문드문 있었다. 모두 경건하게 기도를 바치고 있었다. 오른쪽 고백실 앞에는 남녀 몇 사람이 줄을 서 있었다.
나는 제단을 향해 회중석의 통로를 조심스레 걸어가면서 이덴이 있을까 하고 여자들 얼굴을 살펴 봤다. 그녀는 없었다. 5센트를 주고 양초를 사서 불을 켜서 제단 앞에 끓어앉았다. 자연스럽게 기도할 수 있을 정도의 신앙심이 남아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건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나 얼굴은 양초 불꽃처럼 달아오르고 있었다. 제의실에 들어가면 신부님을 만날 수 있다. 옛 체험을 미루어보고 성당 안 구조를 머리에 떠올리려고 했다. 고향의 성당과 똑같이 오른쪽에 문이 있다. 앞쪽을 지나치면서 제단 앞에서는 습관대로 무의식중에 한쪽 무릎을 꿇었으며 제의실로 들어갔다.
눈에 익은 물건들이 눈에 들어왔다. 시들기 시작한 꽃이 놓인 테이블, 복사들이 입은 옷과 제의가 들어있는 옷장, 뉴욕에 있는 방자거 브라더스 상회에서 만든 양초, 제단 뒤에 통하는 어두운 통로를 걸어가자 이쪽으로 다가오는 그림자가 보였다. 갑자기 무릎 힘이 빠져 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음 속에서 경멸과 공포를 안고 하느님을 섬기고 있던 그 복사 시절로 되돌아간 듯한 불안감에 휩싸였다. 차가운 뭔가를 마시고 싶었다.
어두운 통로의 그림자는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생김새는 아직 분명하지가 않았다. 다음 순간 그는 제의실의 희미한 불빛 안으로 들어왔다.
검은 수단을 입은 나이든 신부였다.
"나를 만나러 왔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예 그렇습니다, 신부님. 저는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친구를요. 그녀는 천주교 신자여서 혹시 신부님께서 그녀의 주소 또는 전화번호를 모르실까 해서......"
"글쎄요......"
그림을 꺼냈다. 벌써 그림은 얼룩져 있었다. 이덴이라는 이름과 그녀의 남편에 대해서도 간단히 설명했다. 낙엽과 같은 마른 목소리로 신부는 말했다.
"둘 다 이 뉴올리언스에 흔히 있는 이름이구랴. 허기야 로빈슨보다는 산타나쪽이 훨씬 그...... 카톨릭신자답지만......" 머리를 긁적거리 다가 자신의 손톱을 들여다 봤다. 손톱 밑에는 때가 검게 끼어있었다.
"어쨌거나 사무실에 있는 기록을 살펴 봐야겠소. 그런데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요?"
"아아뇨,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친구랍니다. 그녀와 친한 사이입니다."
"나로서는......"
"혹시 그녀가 있는 곳을 아신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저에게 가르쳐 주시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걱정이 되신다면요. 다만, 제가 이 도시에 와 있다는 것과 묵고 있는 호텔 이름을 그녀에게 전해 주세요. 그러면 그녀가 찾아올 테니까요."
신부는 수단 밑에서 담배곽을 꺼내어 한 개비에 불을 붙였다. 담배를 피우는 신부는 처음 봤다.
"바로 작년에 있었던 일인데 어띤 사람이 우리 교구에 소속한 신자의 주소롤 알고 싶다고 찾아 왔소...... 나는 그냥 곧이 듣고서. 불쌍한 그 신자의 주소를 알려 줬지. 그 신자는 지금 앙골라에서 20년형에 복무하고 있소. 앙골라란 교도소의 농장이지...... 당신은 이 뉴올리언스 출신이 아니겠지요?"
"예."
신부는 내가 어디에 사는 사람인지 말할 것을 기다리고 있다.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말하지 않았다. 신부가 믿고 있는 신앙을 이제 믿지 않고 있다 하더라도 그를 속이는 것은 웬지 내키지 않았다.
"당신이 어디에 사는지 말해 주면 고맙겠는데......" 신부는 말하고나서 담배를 흠뻑 빨고 후-하고 내뱉으면서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그 완벽한 원을 자랑스럽게 바라보면서 그는 말했다. "적어도 어떤 문제가 있는지 가르쳐 주지 않겠소?"
"말씀 드릴 수 없습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소."
"저는 이제 고해라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신부님."
"그러면 믿었던 적이 있단 말이오?"
"네."
"당신의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소."
"고맙습니다, 신부님. 하지만 무리일 겁니다......"
"그 여인도 문제에 관련이 있나요?"
"아아뇨."
"그토록 뿌리가 깊단 말이오?"
"저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 뿐입니다."
"그것이 전부란 말이오?"
"신부님."
"뭔가요?"
"물 한 잔 얻어마실 수 있습니까?"
때마침 태풍이 도시를 몰아치고 있었다. 옆에서 때리는 듯한 강풍과 호우 때문에 쓰레기통이 굴러다니고 상점 차양이 벌럭이고 위로 젖혀진 우산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성당 입구에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몰려와서 태풍의 피해에 대해 불안이 섞인 농담을 주고받고 있었다. 별안간 번갯불이 반짝이고 천둥이 요란하게 내리치자 모였던 사람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나 걱정스럽게 마주보며 웃었다. 그때 만큼은 흑인도 백인도 모두 신변의 안전이라는 공통된 관심사 때문인지 몸을 맞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언제까지고 비를 피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심하게 뿌리던 비는 어느새 우박을 동반하여 광장을 큰 소리로 때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몸은 가마솥에서 삶아지고 있는 것처럼 뜨거웠다. 갑자기 구역질도 났다. 미시시피 강 상공을 또다시 번갯불이 하늘을 가르듯이 번쩍였다. 눈 속이 뜨겁게 쑤셨다.
뛰어야지.
호텔 방에 돌아가서 침대에 누워야지.
빽빽하게 들어선 인파로부터 멀어져서 나는 옆으로 세차게 내리는 비 속을 달리기 시작했다. 지면에 고인 물은 벌써 발목까지 달하고 있다. 다음 순간, 그 물이 갑자기 올라오고 길도 떠 올라서 얼굴에 부딪혔다. 나는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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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가 천장이 높은 하얀방 창문 새를 비집고 스며 들어왔다. 하늘거리는 안개 속에 금속테 안경을 쓰고 흰 모자를 쓴 마일즈 레이필드가 서 있다. 그는 입술에 새빨간 연지를 바르고 있었다. 그 뒤에 다른 여러 사람이 들어왔다. 샐과 막스, 위니, 버스터와 래드 새도, 프리체트 대령, 래드 캐논, 누군가가 외쳤다. 전원 <카페드 몽드>에 집합!
아, 바비 볼덴!
버즈 소여도 있다!
발열에 시달린 그 구역을 방문한 그들이 모두 기억 났다. 드와이드 아이젠하워도 있었고 멕시코에서 온 멜카도도 있었다. 행크 윌리엄스가 존 포스터 덜리스와 함께 들어왔으며 `1톤분의 쾌락'도 있었다. ......물론 딕시 세이퍼도. 모두 미소를 띠우며 다가왔고 나를 슬프게 가엾게 여기는 기색도 없이 내려다 봤다. 로버터가 푸른 줄이 들어간 하얀 꽃을 손에 들고 들어왔다. 터너가 화려한 남방셔츠를 입고 나타났다. 그리고 그건 맥데드 상병이었고 이쪽에는 튄트레트이다. ......프레디 헤러드는 할레르슨의 손을 꼭 잡고 있다. .......그리고 저쪽에서 이마를 찌푸렸다가 미소지었다가 앞으로 왔다가 뒤로 물러섰다가 하면서 나에게 다가와서 내 얼굴을 만지고 공포에 질린 듯 눈을 동그라게 뜬 여자-이덴 산타나.
그녀는 조 스탈린에 대해서 속삭였던 것일까? 어네스트 헤밍웨이를 읽으라고 권했지? 소변색 안개 속에서 모든 것이 초점이 맞지 않는 카메라 렌즈처럼 흐릿했다. 보즈웰이 행크 윌리엄스 때문에 훌쩍거리고 있다. 이덴이 내 손을 잡았다가 다시 놓았다. 나는 일어나려고 했다. ......그녀와 나란히 서고 싶었다. ......함께 춤을 추고 싶었다. ......그런데 발이 말을 듣지 않았다. 양손은 굵은 빈 관과도 같다. 아버지가 어머니 때문에 훌쩍거리며 울고 있다. 마일즈 레이필드가 안개 속에서 손을 흔들었다. 그때 이덴이 다가와서 내가 알아 듣지 못하는 말로 속삭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 <일족>의 언어, 케인강의 언어, 아프리카의 말일 것이다. 나는 얼굴을 돌려서 고요한 녹색 세계를 그리려고 했다. 그 속으로 깊숙히 빠져 들어가 맑은 강을 쫓고, 비틀어진 시체와 상어 옆을 지나서 하얀 세계 속으로 들어가고......
눈을 떴다.
침대 발치에 이덴 산타나가 서 있었고 나를 뚫어지게 지켜보고 있다. 검은 블라우스에 흰 스커트, 머리는 뒤로 묶고 있다. 그 눈은 강한 빛을 띠고 반짝거리고 있었다.
"오랫만이군요, 마이클." 그녀는 속삭였다.
"이덴......"
그녀는 침대 옆에 돌아와서 내 손을 양손으로 잡았다. 싸늘하게 차가운 감촉이었다.
"말라리아에 걸린 거예요, 당신은."
"말라리아?"
하얗고 헐렁한 방을 나는 둘러 봤다. 의자와 나이트 테이블, 그리고 정리장이 있을 뿐이었다.
"여기가 어디지?"
"자선병원예요. 당신은 이틀 전에 이곳에 들려왔어요. 태풍 속에 차터즈 스트리트에서 쓰러진 거예요."
"이틀 전에요?"
"간호사님은 그렇게 말하던데요."
이틀 전?
"내가 여기에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요?"
"비엔빌 신부님이 내동생 집에 찾아오셨어요, 난 지금 동생 집에서 신세를 지고 있거든요. 그래서 당신이 지금 뉴올리언스에 와 있다고 신부님이 알려 주셨어요. 당신 신부님께 호텔 이름을 알려 드렸었죠? 즉시 그 호텔에 찾아갔더니 당신은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어요. 그리고 하루치 방세가 남아 있다고 해서 그것을 지불하고 당신 짐을 가지고 왔어요."
벽쪽에 놓아둔 내 가방을 보고 턱짓을 해보였다.
"그리고는 여기저기에 전화를 걸기 시작했었죠."
"경찰에도?"
이덴은 눈을 껌뻑거렸다. "아아뇨, 해군에도 연락하지 않았어요. 그게 걱정되는 거죠?"
그녀의 손을 꼬옥 쥐고 나는 속삭였다. "얼른 여기를 나가야겠어요, 이덴. 문제가 있어서 그래요."
"알고 있어요." 그녀는 말했다.
온두라스인인 의사는 나를 퇴원시키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공군에 소속한 몸이기 때문에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돌아가면 바로 기지 군의관을 찾아가서 상태를 설명하겠어요. 의사는 단념한 듯 4시간마다 마시는 약을 주었다. 나는 옷을 갈아입고 이덴 뒤를 따라 흰 복도를 걸어갔다. 흰 옷을 입은 간호사 옆을 지나서 흰색 옷이 가득한 방 앞을 지나간다. 몸이 매우 가벼워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늘을 날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느껴질 정도로 가벼웠다.
엘리베이터 앞에 왔다. 내가 뛰어가는 것을 말리기라도 하듯 이덴이 내 손을 꽉 잡았다. 나는 멈춰 섰다.
엘리베이터 옆에 래드 캐논이 담배를 피우면서 앉아 있었다. 흰제복을 입고 SP 완장을 팔에 끼고 있다. 총걸이에 달린 총 케이스에는 45구경 권총. 담뱃불을 금속제 재떨이에 비벼서 끈 다음 그는 일어섰다. 나에게서 이덴에게로 옮겨진 시선이 또다시 나에게로 돌아왔다.
"괜찮은가, 수병." 그 목소리는 부드럽고 다정함이 배어 있었다.
"그런 대로요. 말라리아라는군요."
"그렇다면 경험이 많은 의사가 메인사이드에 많이 있는데."
나는 이덴을 봤다. 그녀는 말없이 바닥만 보고 있다.
"거기에는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래드."
"나도 그래. 하지만 가야 한다구."
"싫다고 한다면? 만약 도망친다면?"
"그때는 자네를 쏴야 되지."
"진심입니까?"
"이건 내 임무니까. 자네를 관에 넣어서 돌아가는 것보다 두 다리로 걸어가게 하는 편이 휠씬 낫지. 나는 프리체트 대령과 약속했어. 자네를 반드시 찾아서 데리고 오겠다고. 약속은 꼭 지키는 것이 내 주의지. 그러니 나와 함께 돌아가는 거야, 얌전하게 말야."
그녀가 순간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녀가 나를 도망치게 한다고 생각했는지 래드는 긴장했다. 어느새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우리를 보고 있었다. 환자와 간호사 그리고 의사들.
"밑에 내려가서 조용히 말씀을 나누시겠어요, 캐논씨?" 조용하게 이덴이 말했다.
"좋아요."
세 사람은 엘리베이터로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메인 로비를 지나 주차장으로 갔다. 미해군의 회색 차가 입구 근처에 서 있었다. 차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래드는 혼자서 왔던 것이다. 주차장 건너길로 나는 시선을 던졌다.
"나에게서 도망치려는 생각은 한 순간도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걸." 래드가 말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바닥으로 시선을 내려뜨렸다. 함정에 빠진 듯한 불안과 막연한 굴욕감이 느껴졌다. 나의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덴이 허리에 팔을 감아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래드는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주차장 건너에 있는 큰 목련나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좋아." 느닷없이 이쪽은 보지 않고 그는 말했다. "내일 아침까지 기다려 주지. 일요일, 오전 10시. 잭슨 스퀘어의 잭슨 동상 바로 밑에서 만나자. 알겠지? 그리고 같이 돌아가는 거야......"
그리고나서 이쪽을 보고 담배를 껌뻑거리고 연기를 내보내면서 그는 계속했다. "만약 자네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나는 반드시 자네를 찾아내서 쏴 버리겠어."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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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덴이 75달러, 내가 35달러를 가지고 있었다. 굉장한 재산이었다. 그것을 합쳐서 로열 올리언스 호텔에 체크인했다. 모든 일을 이덴이 처리해 주었다. 숙박계에 기록하고 요금을 선불하고, 그녀는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반짝거리는 고요한 로비를 앞장 서서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갔다. 그동안에도 계속 그녀는 말라리아에 걸린, 더러워진 옷을 입은 해군 도망병을 임금님 호송이라도 하듯 대해 주었다. 401호실 문 앞까지 오자 키를 구멍에 넣은 다음 기묘한 눈초리로 나를 봤다. 그리고나서 문을 열고 손짓으로 나에게 먼저 들어가라고 재촉했다.
엄청나게 큰 더블침대가 놓인 어두운 방이었다. 양쪽으로 열리는 문이 작은 발코니로 통하고 있다. 이덴이 여러 개의 희미한 불을 켠 다음 침대 커버 한쪽을 젖혔다. 벽에는 금박 액자에 든 어두운 갈색의 풍경화가 걸려 있고, 전 세기와 조금도 변하지 않는 것 같은 소용돌이 무늬의 벨벳 질감의 벽지가 사방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녀가 싸늘한 두 손으로 나의 얼굴을 감싸고 살며시 키스했다. 나는 눈물을 꾹 눌러 참으면서 으스러지듯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런채로 얼마 동안 있었는지, 우리는 그러다가 침대에 그대로 누웠다.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이 그녀 안에서 함께 녹았다. 그 심야의 버스 여행, 해안에서의 데이트, 새우 요리를 먹으며 지냈던 밤, 트레일러, 비밀의 숲. 우리는 또다시 이름 없는 강 중턱에 있는 솟아있는 바위 위에 있었다. 앨라배마의 붉은 물이 우리들의 주위를 흐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이덴이 새와 나무들, 동물과 구름 등의 이름을 가르쳐 주었던 시절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가시나무와 연기 담쟁이덩굴과 모래에 둘러싸이고 있었다. 꽃잎과 돌, 진흙과 피, 키스와 목련과 공포에도 둘러싸였다.
이덴, 하고 나는 그녀의 귀에 입을 바짝 갖다대고 말했다. 하복부에 밴 땀이 그녀의 땀과 뒤섞이고 있었다. 당신과 언제까지나 함께 있고 싶어요, 이덴.
그러자 그녀는 내 등어리를 손톱으로 누르면서 말했다. 안 돼요. 우리는 이것이 마지막이에요. 나의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그녀는 말했다. 이것이 전부, 지금이 최고의 순간, 지금의 당신과 내가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에요.
두 사람의 몸은 떴다가 갈아앉으면서 뒤엉켰다.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부르면서 시트를 걷어차고 손톱을 세우면서 드디어 깊은 바다 밑바닥에 갈아앉았고 싸늘한 침대 위에 두 사람은 허탈해진 몸을 눕혔다.
그리고 얼마 지난 뒤 룸서비스로 새우 요리와 스테이크를 시켰다. 삼페인을 마셨다. 내가 처음으로 마시는 삼페인이었다. 우아한 글라스를 벌벌 떨면서 잡는 나의 손놀림이 우습다고 그녀는 웃다가 일부러 큰 트림을 해 보였다. 나도 목소리를 맞추면서 웃어 보였다. 둘다 통상적인 말은 하지 않았다. 꼭 해야 할 말도 입에 담지 않았다. 비난도 설명도 정의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또다시 침대에 뒹굴었다. 상실과 이별의 예감에 압도당하면서 지금까지의 그 어느 때보다도 한층 더 격렬하게 사랑을 나누었다. 나는 암흑을 마셔 버리고 싶었다. 그렇다. 이덴 산타나라는 삼페인과도 같은 암흑을.
당신은 가야 해요. 이덴은 말했다. 그리고 미래를 찾아야죠. 이대로 나와 함께 지낸다면 당신은 한평생 떳떳치 못한 삶을 계속하게 될 거예요. 나처럼 떳떳치 못한 삶을.
의식이 다시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어느 사이엔가 회색빛 도는 냉랭한 복도에 서 있었다. 소변색 안개가 머리에 스며 들어온다. 음악 소리가 들렸다. 찰리 파커에 그레고리오 성가, 웰 피어스와 리틀 리처드, 엔트림 들판에서 울려 퍼지는 백파이프와 케인 강 수면을 홀러가는 드럼의 울림. 그리고 나는 안개 저 먼 곳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었다. 사랑이 매장되는 끝없는 묘지이다.
당신은 가야만 해요.
그리고 미래를 찾아야죠.
거의 사경을 헤매며 나는 최후의 분노 때문에 벌떡 일어나 생을 움켜쥐었다.
괜찮아요, 베이비. 염려말아요.
이덴 산타나.
차가운 수건으로 나의 이마를 닦고 나에게 키스한 다음 알약과 물을 나에게 집어 주었다. 잡은 컵이 차가워서 시원했다. 햇빛가리개에서 회색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다. 멀리서 회미하게 색소폰 소리가 들린다. 술집에서 영업이 끝났음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침대로 돌아와 옆에 누워 내 손을 꼭 잡았다. 거므스름한 살결이 한결 싸늘하게 느껴졌다.
죽으면 안 돼요, 라고 그녀는 말했다. 스스로 죽으려고 하면 안돼요. 공포와 회의 그리고 암흑에 져서는 안 되죠. 당신은 앞으로 많은 삶을 살아야 하니까. 당신은 이 도시와 나에게 이별을 고하고 떠나야 해요. 알아 둬요. 떠나는 것 자체는 쉬운 일이니까. 어려운 것은 살아가는 거예요. 하지만 당신이 어디로 가든 나는 언제나 함께 있을 거예요. 알았죠, 무슨 말인지? 하지만 어쨌거나 당신은 가지 않으면 안 되요. 뒤로 돌아서면 안 돼요. 앞으로, 앞으로 나아 가야죠. 그래서 천 명의 여성과 나란히 눕고 천 명에게 키스를 하는 거예요. 그녀들 모두에게 우리가 서로 나누었던 것을 주는 거예요. 그녀들 전부를 사랑하고 또한 당신을 사랑하게 해요. 그렇게 하면 알 수 있을 거예요. 내가 늘 당신 곁에 있다는 것을. 그 여자들은 알 수 없어도 당신만은 알 수 있을 거예요. 왜냐하면 사랑의 행위가 끝나고 그녀가 층만하고, 당신도 충만해졌다고 하더라도 당신은 혼자니까요, 마이클. 당신은 아직 나를 계속 사랑하고 있으니까요. 내가 당신을 한결같이 계속 사랑하듯이. 앞으로 우리가 어디에 있어도 말예요. 천장이 높고 어두운 방에 그녀의 속삭임이 빨려 들어갔다. 그녀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나와의 관계는 끝난 것이다. 나는 이제, 그날 밤 처음으로 버스 안에서 그녀를 만났고 그녀를 원하여 암흑 속에서 그녀의 손을 더듬었던 인간은 아니다. 이젠 그런 애숭이가 아니란 말이다. 그래도 나는 아직 자신이 서지 않는 하나의 취약한 인간임에는 틀림 없다.
그러니까 당신은 남자답게 이곳에서 떠나가는 거예요. 그녀는 속삭였다. 그리고 절대로 두려워해서는 안 돼요. 이 세상을, 또 해군을 두려워해서는 안 돼요. 이 세상이나 해군이 아무리 당신을 괴롭혀도. 알았죠 마이클? 당신이 계속 살아 있기만 하면 상처와 고통은 사그라들 거예요.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키스해 줘요, 마이클. 당신은 이제 떠나야 하니까. 남자답게 떠나야 하니까.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살아가기 위해서......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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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는 맥시코 만 안의 어둠 속을 달리고 있다. 영원한 현재형으로 라디오 방송이 흐른다. 시각은 새벽 4시. 펜서콜라는 뒤로 멀어졌다. 아나운서가 최신 뉴스를 알리기 시작했다. 합중국 검찰총장이 또다시 대배심에 출정, 챌린저 스페이스 셔틀의 마무리가 준비작업이 미비한 탓으로 다시 연기, 에이즈의 새로운 균이 아프리카에서 도래, 오늘은 온 종일 덥고 가끔 소나기가 올 것 같다, 갑자기 뉴스가 끝나고 프랭크 시나트라의 노래가 홀러 나왔다. 예전에는 행크 윌리엄스와 웰 피어스가 지배하고 있던 이 남부 지방에.
사람의 무리를 볼 때마다
나는 바보처럼 멈춰 서서 그쪽을 바라본다.
어리석은 짓임을 알고는 있지만
혹시 당신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오래된 노래이다. 50년대의 시나트라가 에버 가드너에게 반해서 가슴을 태우다가 예술가들도 사랑에 눈이 멀면 바보가 된다라는 것을 입증했을 무렵의 노래. 따라서 흥얼거리고 있노라니 늙고 잠들었던 살갗이 벗겨져 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진부한 언어 밑바닥에 감춰진 진실한 감정의 꿈틀거림이 느껴졌다. 열려 있는 창문에서 따뜻한 새벽 기류가 홀러 들어왔다. 예전에는 공터였던 곳에 가옥과 쇼핑센터, 그리고 공장 등이 보였다. 그리고 내 안에는 아득히 옛날부터 계속 사랑했던 여인, 나와 함께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여자와 동침하고 세 번 결혼을 경험한 여인, 내가 처음으로 사랑했던 여인, 지금까지 사랑하는 어느 여자보다도 사랑스런 여인의 얼굴이 점점 크게 떠올랐다.
그 이름을 소리내어 불러 보았다.
다시 한번.
또 다시 한번.
이덴.
그날 래드 캐논은 이 길을 지나 나를 해군기지로 데리고 갔다. 나는 얌전하게 따랐다. 뉴올리언스를 떠나서 한 시간 남짓, 그는 45구경 권총을 허리에 매단 채 말없이 운전하고 있었다. 걸프포트에 들어서자 나는 소나무 숲과 작은 시냇물과 넓은 습지를 바라봤다. 마음은 삭막하고 허탈했다. 거기에서 해안쪽으로 돌자 수평선상에 뭉게구름이 보였다. 래드가 말했다.
"소변 보고 싶지 않아?"
"네." 나는 대답했다. "보고 싶어요."
"그럴 줄 알았지. 그 말라리아 약 때문이라구."
그는 고속도로에서 내려서 주유소로 갔다. 내가 사무실 옆에 있는 신사용 화장실에 가는 동안 그는 운전석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순간 도망칠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짓은 하지 않는다고 래드와 약속을 했다. 그리고 만약 도망친다면 한평생을 도망치면서 살아야 될 것이다.
돌아와 보니 래드는 차 등받이에 기대어 콜라를 마시고 있었다. 등을 이쪽에 돌리고 있다. 내가 절대로 도망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는 듯 했다. 나는 그 옆에 섰다. 그는 아득히 먼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SP의 완장을 이제는 차고 있지 않았다. 권총을 거는 탄알이 들어있는 탄대도 허리에서 사라졌다. 그것은 운전석에 팽개처져 있었다. 우리는 기지에 돌아가는 두 명의 보통 해군 병사가 된 것이다. 래드는 콜라를 다 마신 후에도 의연하게 수평선에 눈을 박은 채 병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지금 저 바다를 항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지."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동감입니다."
래드는 비로소 내쪽을 돌아보며 고개를 저었다.
"자네는 저기에 갈 수 있을 거야 곧."
"글쎄요." 나는 말했다. "이제 내가 처박히는 곳에서는 무리겠지요."
그러자 래드는 사뭇 경멸하듯이 입을 삐죽거렸다.
"자네는 지금 어디로 간다고 생각하고 있지?"
"포츠머드 해군 교도소겠죠?"
"웃기네." 비웃는 듯한 말투로 그는 말했다. "포츠머드에 처박힐 정도로 거물인가 자네가?"
그는 운전석에 들어갔다. 나도 조수석에 다시 앉았다. 권총과 탄대를 집어들고 뒷좌석으로 던진 다음 래드는 차를 출발시켜서 고속도로로 다시 진입했다. 여기에도 한심한 사나이가 한 명 있다고 말하듯이 강렬한 눈초리로 이쪽을 보고나서 그는 말했다. "자네는 운이 좋아. 그 해병대 멍청이는 살아났어. 두개골이 함몰하는 정도로 끝난 모양이야. 그 정도로 해병대는 죽지 않는다구. 게다가 또 하나, 자네가 행운아라는 점이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데 프리체트 대령이 자네에게 굉장히 호의를 갖고 있는 것 같더군."
언젠가 내 소원이 이루어지는 날
틀림없이 계단에서 발소리가 들려올 것이다......
나는 라디오를 껐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래드의 말대로였다. 나는 프리체트 대령의 사문을 받았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군법회의보다 훨씬 가벼운 조치였다. 대령은 말라리아가 모든 일의 원인이라고 처리를 해 주어서 일주일간의 근신 처분으로 용서해 주었다. 그리고 수 주일 후 나는 해상 근무로 바뀌었고 그때부터 진정한 의미의 기나긴 가혹한 인생이 시작되었다. 그후 래드 캐논이 어떻게 됐는지는 알 수가 없다. 바비 볼덴의 소식도 모른다. 베케트, 할레르슨, 보즈웰, 프리체트 대령, 맥데드 상사 등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막스와는 잠시 편지 왕래가 있었다. 샐과는 휴가를 받아 뉴욕에 갔을 때 우연히 만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러다가 서로 주소가 바뀌고 여기저기로 이동하고 있는 동안에 결국 연락이 끊겨 버렸다. 마일즈 레이필드의 모친 앞으로 편지를 쓰려고 서너 번 시도했지만 제대로 문장이 정리가 되지 않아서 결국 쓰다가 말았다. 한번은 해상근무를 하고 있다가 칸느 앞바다에서 상륙 허가를 기다리고 있었을 때에 딕시 세이퍼로부터 편지를 받은 적이 있다. 전만큼 장사 경기가 없어서 <다트 바>를 그만 둘까 한다고 쓰여 있었다. 나는 엽서로 답장을 보냈지만 그녀 역시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아마 옛날 친구들 중에는 담배와 술, 월남전 때문에 희생되어 이미 죽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직껏 살아있는 친구들은 그야말로 황금처럼 눈부실 정도의 에피소드를 잔뜩 갖고 있음에 틀림 없다.
그러나 시간이 홀러감에 따라 잊었던 노래의 단편이 문득 회상될 때가 있는가 하면, 인기척이 없는 바닷가에서 불고 있던 미풍을 얼굴에 느끼는 때도 있다. 그러면 어느 여름 날 아침에 건넜던 강, 숲 속의 트레일러, 빨간 구두를 신은 그녀의 모습이 저절로 되살아난다-이덴 산타나의 소식이 못견딜 정도로 알고 싶어지는 것은 그런 때이다. 지금까지 오랜 세월 동안 나는 그것을 알게 되는 것이 두려웠다. 뉴올리언스도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 나는 이덴이 늙었다는 사실을 알고 싶지 않았다. 제임스 로빈슨과 화해했다는 등의 소문도 듣고 싶지 않았으며 행여 그녀가 죽었다는 등의 얘기는 더더욱 듣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아득한 옛날 그 고열에 시달렸던 날 아침 로열 올린스 호텔의 샹들리에 밑에서 그녀가 예언했던 대로 내가 그후 방황했던 수천 군데의 장소, 내가 꿨던 수천 가지 꿈 속에서 그녀는 진정 나와 더불어 살아왔던 것이다.
아, 이덴!
갑자기 헤드라이트에 흰색 해군복 차림의 병사가 비췄다. 지난 20년 동안, 무전여행자를 길에서 태워 준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나는 차 속도를 늦추었다. 그런데 브레이크가 멎지 않아서 조금 앞선 지점에서 정지했다. 백미러를 들여다 보니 작은 가방을 든 해군병사가 뛰어오고 있다. 조수석 측문 열쇠를 열었다.
"휴, 살았네! 죄송합니다." 병사가 말했다. 쓰라린 작대기 두 개가 소매에 붙어있다. 햇볕에 그으른 얼굴, 고르지 않는 치열. 아직 젖비린내가 난다고 느껴지는 젊은이었다.
"행선지는?" 고속도로로 다시 돌아가면서 나는 물었다.
"뉴올리언스입니다."
"좋은 도시지, 그곳은."
"끝내 주지요." 해군은 말했다. "제 애인이 살고 있어요."
"내 애인도 살고 있지, 거기에." 맥시코 만의 어두운 습지대를 달리면서 나는 말했다. 어느 사이에 심장의 고동 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손도 땀으로 흠뻑 젖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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