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ING WOMEN
산타나 1
피트 해밀
차 례
이 소설은
1
2
이 책을 샐 코스텔라,닉 오클란 그리고 밀턴 캐니프에게
추억과 함께 바친다.
없어진 선원 친구들은 사나이들이 흔히 그렇듯이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그들 가운데는 두 번 다시 만난 적이 없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때때로 봄날 해빙기의 물에 실린 기억이 '구곡천'을 힘차게 거슬러 올라올 때가 있다. 그러면 막막한 수류에 한 척의 배가 표류해 온다. '황천의 나라'의 승무원이 조종하는 검은 배가. 그들은 가냘픈 목소리로 외쳐 대며 지나가면서 신호를 보낸다. 우리들은 함께 불멸의 바다를 항해하고 우리들의 죄 많은 삶에서 하나의 의미를 얻지 않았던가? 잘 있거라, 형제들이여! 당신들은 좋은 친구들이었다.
- 조셉 콘래드의 [나르시스 호의 흑인]에서
나는 표류하고 있다, 표류하고 있다. 대해원의 배처럼 나는 표류하고 있다. 표류하고 있다. 대해원의 배처럼 이 세상에는 누구 한 사람, 나를 좋아해 주는 녀석이 없다.
- 찰스 브라운의 [드리프틴 블루]에서
아아, 다시 한번 시도해 보자. 그러면 잘 될 것이다!
- 헨리 제임스
나는 1953년부터 54년에 걸쳐서 에리슨 비행장에 배속되어 있던 적이 있다. 이 책은 완전한 픽션이다. 그러나 등장 인물이나 사건은 모두 나의 상상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제1부
병사들아. 닻을 올려라!
나팔바지. 짙은 감색의 수병복
나는 해군을 사랑한다.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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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싸구려 모텔방 침대에 누워서 멕시코 만의 파도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장사 밑천인 카메라는 아직 은색의 케이스에 처박혀 있다. 셔츠와 청바지는 옷장에 걸어 놓았다. 벽에는 펜서콜라 상공을 밀집 대형으로 날으는 블루 엔젤스의 바랜 사진이 붙어있다. 여기서는 룸서비스를 부탁할 수 없다. 조금 전부터 시장끼를 느끼고 있지만 조금도 움직이고 싶은 생각이 없다. 세 번째 아내와 헤어지고나서 일 주일. 고향으로부터 1536마일이나 떨어진 곳에 지금 나는 와 있다.
짐을 챙겨 들고 거의 30년 만에 이 고장에 찾아든 것은 이미 여러가지 것에 권태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고통도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 뉴욕과, 그곳에 있는 친구들에게, 사진에, 나 자신에게.
때마침 뉴욕에는 전염병이 만연하여 주위의 곳곳에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무시무시하고 영악한 바이러스가 그들의 핏속으로 퍼져 순식간에 인간 내부의 모든 면역 시스템을 파괴해 버린 것이다.
신문에는 대개 전날 사망자의 이름들이 실려 있다. 거기에는 몇몇 친지의 이름도 섞여 있었다. 그러면 머리속은 그들의 이름으로 가득 차고, 나는 생전의 그들을 생각해 낸다. 그리고 고통에 찬 최후의 나날의 모습을 머리속에 그려 보려고 애쓴다. 그러나 불과 두세 시간만 지나면 그들의 기억은 희미해져 버리는 것이다.
이별을 앞둔 몇 주일 동안 아내인 로즈와 찾아간 여러 군데의 레스토랑에서, 주변 분위기를 어지럽히고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들을 수 있었다. 바니 게츠, 도나 라이스, 이반 보스키, 폰 홀, 올리버노스. 그밖에 수백 명의 사람들. 그해 뉴욕에서는 그들의 이름이 식사시간에 오르내리곤 했었는데, 그 시대 그 도시의 다른 모든 것들처럼 그 지저분한 에피소드는 쓸데 없는 것이었다. 주위를 둘러 보면 신사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젊은이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화제는 정크 본드이며 차익을 노린 주식 매매이며, 차익을 노린 회사 매수다. 그 외에도 구두쇠인 파트너에게 배신을 당했다든가 등의. 51세의 나는 요즘 확 늙어 버린 기분이 든다. 그래서 레스토랑에서 마구잡이로 담배를 피우고 있노라면 헬스클럽에서나 봄직한 갈색으로 피부를 보기 좋게 태운 단단한 체구의 젊은이들에게 욕을 얻어 먹곤 했다. 그들이 데리고 온 여자들은 옆에서 자못 곤혹스러운 듯이 연기를 손으로 날려 보내고 있었다. 어쩌면 끽연의 습관은 내가 그들과는 다른 세대에 속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답습하고 있는 생활의 방식이나 자세는-직업의 스타일은 별도로 하고-분명히 보가트나 행동파 방송 저널리스트 마로우, 카뮤나 말르로에 의해서 형성되어진 것이다. 그들, 옛날의 살아있는 우상들은 사나이다움의 심볼이나 되는 것처럼 담배를 물고 몇 백만개비 정도의 연기를 들여마신 끝에 죽어갔다. 더구나 나의 경우, 포식한 다음 몇 시간씩 노틸러스 머신으로 운동을 해도 이 시대의 이상적인 체중에서 20파운드나 웃돌고 있다. 아직 팍싹 늙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젊다고 얘기할 수도 없는 나이다.
나의 생일날 밤 아내는 내쪽으로 몸을 가까이하더니 그 회색의 눈을
반짝이며 물어왔다.
"여보, 지금 당신의 소원은 뭔가요?"
콜럼버스 애비뉴의 봄을 즐기려고 몰려든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잠시 침묵한 다음에 대답했다.
"그거야 1953년으로 되돌아가는 거지."
물론 로즈가 이해했을 리는 만무다. 53년이라면 그녀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을 테니까. 옛날, 당시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들이 '혼전 교제'를 하고 있을 무렵이었다면, 그녀는 틀림없이 상냥하게 미소지으며 물어 보고, 나에게서 어떠한 대답을 끌어냈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 밤 로즈는 그런 기미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날 밤 그녀의 머리속은 다른 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다, 그날 밤 그녀는 그냥 눈만 깜빡깜빡거리고 나서 고개를 저었다. 시선이 딴 곳을 맴돌다가 다시 내게 되돌아왔을 때, 그녀는 다른 남자를 사랑하고 있다고 털어놓고, 그와 함께 살고 싶다고 고백했다. 그녀는 갑자기 눈물을 글썽거렸다. 내가 침울한 표정을 보이든가, 혹은 목소리를 높여 성을 낼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나는 그 어느 쪽의 반응도 나타낼 수가 없었다. 그것 자체가 사실은 문제였던 것이다. 그것이 나에게 있어서는 벌써 상당히 장기간에 걸친 문제였다. 그녀는 목소리를 떨면서 그 새로운 사실, 새로운 배신을 고백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나의 담배 연기처럼 다른 몇 가지 정보의 몽롱한 안개 속에 표류하고 있었던 것에 지나지 않았다. 웨이터를 불러서 계산을 끝내자 나는 그녀와 나란히 묵묵히 귀가길에 올랐다. 자정 무렵 얘기가 대충 마무리 되었다. 로프트는 이대로 그녀가 계속 소유하기로 하고, 나는 시골의 별장을 갖기로 했다. 그녀는 세 개의 가방에 짐을 챙기고 나서 오늘밤은 여자 친구네 집에 가서 자고 오겠다고 말했다. 나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지어낸 얘기였을 것이다. 다음날 아침이 되면 서로 변호사에게 연락을 취하기로 했다.
"당신은 에당초부터 나 따위는 사랑하지도 않았죠?" 그녀는 문턱에 멈춰서서 말했다.
"아니, 사랑했어. 사랑했고 말고.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
그러자 굵은 눈물 방울을 뚝뚝 홀리면서 로즈는 문을 닫았다. 나는 손목시계를 들여다 보면서 생각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 <뉴욕 타임즈>나 사러 가 볼까?'
로즈는 이탈리아계의 모친으로부터 몇 가지의 자질을 물려받고 있었다. 과장된 몸짓, 독기 어린 말투, 신랄한 욕설, 그리고 문을 쾅하고 닫는 버릇, 그러나 돌이켜 보면 4년 전, 이스트 71가에서 열린 파티 석상에서 나를 매료시킨 것은 그녀의 이와같은 자질들이었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이미 그녀의 그러한 버릇에 대해서 발끈하며 반발할 힘도, 의욕도 없었다. 그런 신파조가 섞인 기운은 이미 일체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아마도 내가 제법 나이를 많이 먹은 탓이리라. 오랜 기간에 걸쳐서 너무나도 많은 현장에서 죽음을 지나치게 많이 보아온 탓이리라. 그들이 살해당한 원인은 모두 '정열'이었다.
정치적 정열, 종교적 정열, 또는 개인적 정열 그리고 나의 내부에는 프로카메라맨으로서 가장 경계해야 할 병폐, 말하자면 '무관심'이 이미 자리를 깊게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시실리적인 정열의 분류에도 말려들지 않았고 갑작스러운 배신에 대해서 털끝만큼의 노여움도 느끼지 않았다. 이미 상당히 오래 전부터 나는 무감동한 인간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녀와 헤어진 그날 밤, 이별의 서글픈 의식의 하나로서 서류 선반을 비우거나 종이 상자에 짐을 챙겨 넣거나 하고 있는 동안에 나의 내부에서 무엇인가가 심하게 요동쳤다.
자신의 옛날 작품이 실려 있는 누렇게 변색이 되기 시작한 잡지, 출생증명서나 사망증명서가 가득 들어 있는 서류철이나 각종 자격증, 면허장... 그런 것에는 흥미가 없었다. 옛날에 사랑한 사람들의 스냅 사진에 마음이 흔들리기에는 지나치게 나이를 먹었으며 사라져 버린 친구들의, 사이공이나 라고스나 베이루트의 소인이 찍힌 편지들도 새삼스럽게 다시 읽어 볼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에 나는 헉! 하고 숨을 멈췄다. 어느 서랍의 밑바닥에 군데 군데 페이지의 모서리가 접혀져 있는, 두터운 서류철이 한 권 발견되었다. 표지에는 구태의연하고 커다란 글씨체로 '사물'이라고 쓰여 있다. 먹물을 사용하는 스피드 볼펜으로 쓰여져 있었다. 안에는 몇 통의 편지와 녹이 쓴 클립으로 찝어 놓은 몇 장의 스케치, 전화번호를 적은 종이, 그리고 <푸른 노트>가 끼어 있었다.
<푸른 노트>에 갖가지 단상을 쓰기 시작했을 때 나는 17세, 아직 풋내기 수병이었다. 그 노트가 옛날 그대로의 모습으로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 무렵 진지하기만 했던 한 젊은이가 그 속에 그대로 살아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않았었다.
<푸른 노트>를 한 옆으로 잘 치워 놓고, 나는 짐 정리를 계속했다. 다른 서류는 종이 박스에 집어 넣고, 문턱 옆의 벽에 쌓았다. 벽에 붙여 놓은 그림은 몇 장 떼어내서 갖고 가기로 했다. 호세 루이스 쿼바스의 스케치, 앤 프레이릿히가 그린 뉴욕의 조감도, 데이비드 르바인이 그린 코니 아일랜드의 수채화. 난로 위에는 로즈의 누드사진이 붙어 있었다. 머리칼이 앞으로 늘어져 있고, 표정이 흐려져 있다. 그것은 손을 대지 않기로 했다. 폭이 넓은 트렁크에는 겨울 옷가지를 집어 넣었다. 마지막으로 좋아하는 레코드를 정리하니까 세 개의 종이 박스가 가득 차 버렸다. 모두 로즈가 들으려고도 하지 않던 뮤지션들이다. 찰리 파커, 시나트라, 다이나 워싱턴, 위노니 해리스, 그밖에 수십 명의 뮤지션들. 모든 상자를 테이프로 봉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뉴욕타임즈>를 사러 나갔다.
그래도 새벽녁 가까이 되어 침대에 혼자 누워서, 천장에 비치는 빛의 패턴을 응시하면서 이른 아침 도로를 오가는 자동차의 낮은 주행음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려니까 먼 옛날의 영상이 머리속에 가득 차서 퍼지기 시작했다. 몇 명의 얼굴, 갖가지 소음, 플로리다의 밤에 야자나무 잎이 사각 사각 흔들리는 소리나 주크박스(동전 주입식 음반 장치)에서 흘러 나오는 행크 윌리엄스의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식당에 배인 수십 톤이나 되는 후라이드 베이컨 냄새가 코를 스쳐갔다. 전에 알고 지냈던 몇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무렵의 그리운 동료들. 그리고 자신의 목숨보다도 더 사랑했던 어떤 여인의 모습.
그날 오후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남부로 돌아가야겠다고 나는 결심했다.
* 푸른 노트로부터의 발췌
Journey(명사) 1. 통상 장기간에 걸친 어떠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의 여행, 2. 여행한 혹은 여행에 적합한 거리, 코스, 지역, 3. 여정,
4. 어떤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의 추이 또는 진전.
나는 모두에게 작별을 고했다. 드디어 출발이다. 모두도 잘가라고 말해 주었지만 저 사람들은 내가 어떤 인간인지 모를 것이다. 그야 물론 친구나 가족이나 내가 사랑하고 있는 여인은 빼놓고 말이지만.
지금은 모두 나를 미국 해군 수병인 마이클 패트릭 데블린으로 간주하고 있을 것이다. 바로 일년 전에는 단지 고등학생, 그리고 동네 야구선수, 그리고 열심히 만화를 그리는 색다른 소년이었는데 말이다.
나는 모두에게, 나에 대해서 알고 싶어하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라도 이렇게 말해 줄 것이다. 태어난 것은 1935년 6월 24일, 그러니까 지금은 17세 반이라는 얘기가 된다. 그리고나서 덧붙여 나는 브룩클린의 홀리 네임 스쿨에 8년 다니고 나서, 비숍 로린 하이 스쿨에 3년을 다녔다. 그리고 머리칼은 다크 블론드라고. 눈동자는 회색에 가까운 푸른색, 키는 5피트 11인치이며, 몸무게는 178파운드이다. 좋아하는 프로야구 팀은 다저스(당연하다). 권투의 경찰체육 리그에서는 14개월에 걸쳐서 미들급 시합에 출정했다(전적은 그다지 신통치 않지만). 아버지는 아일랜드의 벨퍼스트 태생이니까 나는 아일랜드계 미국인이라는 얘기가 된다. 어머니는 브롱크스 태생이지만 이미 세상을 떠나셨다. 종교는 가톨릭이다. 그밖에 무엇이 있더라? 그렇지, 이렇게도 말해 주자. 나에게는 두 명의 남동생과 한 명의 누이동생이 있다고. 지금까지 읽은 것 중에서 최고라고 생각하는 책은 케네스 로버츠의 역사소설 <무기를 잡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장차 나는 만화가가 되고 싶다. 하지만 지금까지 열거한 것을 전부 가르쳐 주었다 하더라도, 나라고 하는 인간의 정확한 이미지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나를 알고 있는 인간은 한 사람도 없다. 누구 한 사람도.
그리고 나도 그들을 얘기 상대로 삼을 생각은 없다.
나는 떠난다.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모든 해군 장병에게는 두 가지의 임무가 있다. 그는 전사인 동시에 전문가여야 한다. 자기의 부서에서 싸우는 의무가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하지만, 일상의 근무와 전문의 임무도 또한 중요하다. 설사 각자의 임무가 사소한 것으로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가 탑승하는 함정의 전투 능력의 일부라고 이해해야 한다. 함정 전체의 능력에 비한다면 각자의 임무는 미미한 것이다. 그러나 만일 한 사람의 수병이 자기의 임무에 실패한다면, 함정의 손실까지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수병 전범
신병 훈련소에서 돌아왔을 때 마가레트 숙모가 나에게 갖고 싶은 것이 없냐고 물었지만 나로서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있는 그대로를 대답한다면, 무엇인가를 구걸하고 있는 것 같은 심정이 들었을 것이다. 남에게 구걸하는 짓은 절대로 하고 심지 않다. 하지만 솔직히 말한다면 갖고 싶은 것이 몇 가지 있었다. 파커51 만년필, 누이동생과 동생들을 위한 텔리비전, 그리고 전화, 제대로 문이 닫혀지는 방, 크래프틴트 페이퍼도 가지고 싶었다. 그것이 있으면 로이 크레인처럼 그릴 수 있다. 또 <Bomba the Jungle Boy> 시리즈의 전권, 라이오넬 회사의 철도모형 세트. 어느 날 아침 깨어났을 때 자신이 윌리엄 훌덴과 체트 베이커를 합쳐 놓은 것 같은 남자가 되어 있다면 얼마나 멋이 있을까. 그것도 은밀한 소망의 하나였다. 또 새로운 여자 친구도 갖고 싶다. 하지만 마가레트 숙모가 물었을 때 나는 다만 어깨를 치켜 올려 보이고 말했던 것이다. "으응, 갖고 싶은 건 아무 것도 없어요, 숙모. 지금은 갖고 싶은 것이 아무 것도 없다구요."
그것이야말로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Love(명사) 1. 이성에 대해 굉장히 다정한, 혹은 정열적인 감정, 2.
부모, 자녀, 친구 등에 대한 따뜻한 애착, 혹은 깊은 애정, 3. 성적
인 정열, 소망, 혹은 그 충족, 4. 애정을 느끼는 상대, 에인, 연인,
5. 연애, 정사, 6. 에로스나 큐피드 같은 성애의 신, 7. 다른 사람의
행복을 바라는 애정이 담긴 배려, 8. 사물에 대한 에착이나 취향, 9.
좋아하는 물건, 애착을 갖는 대상, 10. 자기의 창조물에 대한 신의
자애, 혹은 피창조물이 신에게 보내는 숭배와 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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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른 봄 어느 으스스하게 추운 날 아침, 하늘이 아직 푸르스름한 빚을 띠고 있을 무렵 나는 홀랜드 터널을 자동차로 빠져나갔다.
그러자 마치 현상액에 담근 사진처럼 천천히, 차츰 선명하게 옛날 여행지에서의 영상이 되살아났다. 사람들의 소리, 음악, 그리고 여행지의 갖가지 소음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먼 옛날 그 시절에 나는 그레이하운드 버스에 타고 있었다. 1952년 섣달 그믐 날. 버스는 남부를 향하고 있었다. 그 즈음 나는 이성의 사랑을 갈구하고 있었다.
그때 창문에 비치는 내 얼굴을 들여다 보고는, 여자들의 눈에는 어떻게 비쳐질까 하고 생각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나는 하얀 수병 모자를 불량스럽게-라고 자신은 생각하고 있었다-한쪽 눈을 덮을 정도로 삐뚜름하니 쓰고, 수병용 외투 깃을 바짝 높이 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테리와 해적들>의 후립 코킨을 흉내내서 세상을 모두 내려다 보는 것처럼 입을 가볍게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사실은 신병훈련소에서 짧게 깎은 머리칼은 아직 자라지도 않았으며, 코의 살점도 빈약했으며, 이빨도 가지런하지 못했다. 영화배우처럼 보일 염려는 전혀 없었다. 그래도 나는 얼굴을 몇 번이고 열심히 들여다 보았다. 그것은 젊은이 특유의 나르시시즘 탓만은 아니었다. 나는 정말로 상대방, 특히 여성의 눈에 자신이 어떻게 비치는지, 알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버스가 뉴저지의 철교에 도착할 무렵, 눈이 쉬지 않고 내리고 있었다.
아직도 어린애 같았던 나는 탐스런 눈송이를 바라보면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바로 얼마 전의 크리스마스, 어쩌다 그녀와의 사이가 엉망이 되어 버렸을까.
모린 클라우리...... 다른 여자애들의 이름이 몽롱하게 망각의 늪에 갈아앉아 버린 지금에도 그녀의 이름만은 기억 속에 또렷이 남아있다. 알고 있는 친구들은 모두 애인이 있고, 개중에는 결혼까지 한 녀석이 있는 데도, 어째서 나에게는 한 명의 애인도 없는 것일까. 어린애 같았던 나는 어머니가 살아 계시다면 하고 생각했다. 그러면 그러한 문제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물어볼 수가 있었을 텐데. 아버지께 그런 것을 물어볼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 아버지는 딱딱하고 위엄이 있는 거한으로서, 덥수룩한 양쪽 눈썹이 코 위에서 맞닿고 있었다. 전선, 라디오 배선, 가로등의 공사 따위에는 정통했지만 인간 심리의 신비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은 아버지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쨌든 52년의 섣달 그믐 날에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아일랜드 출신이고, 어머니는 브롱크스 출신이다. 다혈질인 아일랜드인과 호리호리한 몸매의 도시 여인이 성스러운 결혼으로 맺어진 셈이다. 아버지는 나에게 다정한 말을 건네주는 일은 거의 없었고 내가 알고 있기로는 어머니에게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이건 내 직감이지만, 아버지는 어쩌면 3등 입원실에 누운 빈사의 어머니에게도 따뜻한 한 마디 건네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나는 14세였고, 어머니의 결핵이 전염될 우려가 있는 이유로 의사에게 어머니의 임종에 입회하는 것을 금지당했다. 게다가 그 병실에는 그밖에도 죽어가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죽음의 의미 따위를 어린 내가 알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렇다. 그때는, 아직.
분명히 당시 나에게 있어서 섹스나 죽음 따위는 친구끼리 소근 소근 속삭여대는 사항에 불과했다. 그리고 나는 장남이었으니까 아버지가 병원에 가 있는 동안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해야 했다. 나는 매일 밤 동생들과 라디오를 들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Gangbusters' 'Inner Sanctum' 그리고 지미 두란테. 귀로는 경관이나 쨍이나 코미디언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내가 그때 제일 알고 싶었던 것은 어떻게 하면 여자아이들에게 호감을 사는가 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어머니라면 해답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가까이 갈 수 없는 빈사의 상태에 있었고 아버지는 무뚝뚝하게 침묵을 지키고 계셨다. 아버지가 더 이상 어머니를 병문안 갈 필요가 없다고 말한 그날 밤까지 나의 머리속에는 갖가지 의문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그날 밤, 과연 아버지가 침대에서 울었는지 어떤지는 모른다. 그러한 기척은 났으나 나에게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날, 조국에 목숨을 바치겠노라는 의지가 담긴 듯한 수병제복을 입고, 텅빈 어둠컴컴한 버스에 흔들리면서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래, 52년은 형편 없는 해였지. 53년은 틀림없이 좀더 좋은 해가 될 거야. 어머니가 돌아가신 해처럼 몹쓸 놈의 일들은 없을 거라구.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여행을 떠나는 것이 기쁘기도 했다. 뉴욕으로부터, 브롱크스로부터 떠나는 것이 웬지 모르게 기뻤다. 그것은 당선 대통령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동안의 호감이 가는 미소를 짓는 육군 원수로서, 자신이 한국에 가서 전쟁을 끝내겠다고 공언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브룩클린의, 내가 살고있는 동네에서는 육군 원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으며, 또한 공화당원을 혐오하고 있었다. 더글러스 맥아더가 트루먼 대통령에게 잘못 보여서 귀국했을 때도 그랬다. 거리에는 '노병은 죽지 않는다' 연주가 울려 퍼지고, 트루먼을 탄핵하고, 맥아더를 대통령으로 뽑자는 함성이 터져 나왔을 때도 모두 트루먼 편이었다. 술집의 라디오에서 맥아더의 노래가 방송되기 시작하면 사나이들은 대부분 '닻을 올리고'를 노래하며 대항했다. 이웃에는 육군이나 해병대의 장병도 몇 사람인가 있었지만, 대부분 해군에 입대하는 것이 관례였다. 조국을 위해서 싸워야 할 때가 되면 우리 동네 사람들은 모두 군함에 올랐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징집 연령에 달했을 때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베닌브리지의 신병 훈련소에 들어간 것은 별로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동네 사내들은 모두들 그랬다.
아득-한 그 섣달 그믐날 밤, 버지니아의 상당히 깊은 곳을 향할 때까지 눈은 계속 내리고 있었다. 증기로 흐려진 창문으로 은세계를 내다보면서 이 눈이 영원히 내리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던 것을 기억한다. 어디까지고 뻗어있는 전화선을 나는 눈으로 쫓았다. 그러는 사이에 먼 곳의 메마른 나무들 그늘 사이로 자그마한 집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흰 설원에 늘어선 집들. 크리스마스의 장식등이 빚나는 저 집안에서는 남녀가 사랑을 속삭이고 있을 것이 틀림 없다. 그들은 인생과 아이들, 음악이나 흰 눈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펑펑 내려 쌓이는 눈 아래서, 두터운 담요에 쌓여서 드러눕는다.
이윽고 얼어붙은 온세계에 달빛이 내려 비추기 시작할 때, 그들은 사랑을 나눈다. 아아, 나를 안아줄 여자가 있었으면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에게 명랑하게 얘기를 걸고, 나의 농담에 소리를 내서 웃고, 섹스를 할 때는 격렬하게 응해 주는 여자. 아직 어린애와 같았던 나는 집 그 자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초라한 시골집은 갖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나의 삶의 방식은 아니다.
하지만 여자를 소유하고 싶었다.
정오가 될 무렵, 몹시 한기가 스며들어 히터마저 소용없게 되자 버스 안은 싸늘해졌다. 나는 조용히 펜서콜라, 다시 한번 펜서콜라, 펜서콜라, 펜서콜라. 묵주의 구슬처럼 되풀이해서 중얼거려 보았다.
크리스마스 휴가 전에 해군으로부터 받은 두꺼운 명령서를 펼쳐보기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던 지명이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넬슨 백과사전으로 조사해 보았다. 손때가 묻은 빨간 표지의 이 사전은 세로 두 줄로 구성되어 있었다. 어머니가 <뉴욕 포스트>지의 쿠폰을 이용해서 한 번에 한 권씩 사 모은 것이었다. 펜서콜라. 대체 어떤 도시일까. 사전에 실려 있던 몇 줄의 설명만으로 나는 그 도시의 모습을 머리에 그려 보려고 애썼다. 석유 스토브 옆의 넝마처럼 표면이 벗겨진 소파. 그곳에 앉아서 이런 저런 상상을 하고 있는 동안 밝은 파스델톤의 팬서콜라 거리가 1536마일 저쪽에서 다가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펜_서콜라. 버스에 흔들리면서 나는 속삭이고 있었다. (그리고 1987년 지금, 닛산280ZX의 운전석에서 그때의 자신을 회상하면서 나는 조그맣게 펜서콜라를 속삭이고 있다.) 그 울림에서 웬지 모르게 둥근 모양을 연상했다. 햇살을 받고 갈색으로 빛나고 있는 매끈한 둥근 모양. 펜서콜라. 연한 다갈색의 유방. 넓적다리. 그리고 복부. 오일로 반짝이는 여인의 육체. 만지면 화상을 입을 것 같은 뜨거운 피부, 팬서콜라. 그것은 여인의 이름의 울림을 지니고 있었다. 펜서콜라 브라운. 유연한 언덕이 몇 개나 이어져 있는 것 같은 울림. 슈투트-
가르트라든가, 뉴-욕처럼 두 개의 음절이 볼트로 단단히 연결되어 있는 느낌이 아니라 펜서와 콜라가 느슨하게 이어져 있는 느낌이다. 플로리다와 아주 많이 비슷하다. 안녕하세요, 난 플로리다 브라운이에요. 당신과 섹스를 하고 싶어요...... 다만, 플로리다에는 짙푸른 야자수 잎이 무성하게 우거져 있고, 라디오에서는 프로야구팀의 봄 합숙 훈련 소식이 홀러 나오고 있고, 바다는 언제나 푸르게 빛나고 있다. 게다가 '플로리다'는 여자의 이름치고는 지나치게 짧고, 매끄럽고, 너무나 귀에 익어 있다. 그런데 '펜서콜라'에는 딱딱한 작은 돌기가 있다. 마치 여자의 유두처럼.
창밖의 눈보라를 내다보고, 두 눈을 감았다. 눈 밑에 시들어있는 야자수나 모래사장을 바다로 밀어 떨어뜨려 거대한 빙하가 보였다.
더구나 북풍이 우렁찬 외침 소리를 내며 태양을 향한 개가를 부르고 있다. 한 순간 공포감에 사로잡혀 눈을 떴다. 버스에는 5,6명의 승객이 타고 있었으나 거의 잠들어 있다. 운전수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 왔다. 크게 숨을 들이쉬고는 힘겨운 듯 다시 내뱉고 있다.
다시 한번 눈을 감고 이번에는 작열의 세계를 상상해 보았다. 운전수를 도와 주고, 팬서콜라를 지키고, 나 자신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서. 나는 코니 아일랜드에 있었다. 22번 부두에서 강렬한 햇빛을 쬐고 있었다. 다음 순간에는 브룩클린의 우리집 옥상에서 푹푹 찌는 듯한 8월의 열기에 쌓인 맨해튼의 빌딩들의 집락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의 무더위, 노상에서는 접는 의자에 앉은 노인들이 <데일리 뉴스>지로 부채질하고 있다. 그들이 뜨거운 홍차를 마시고 있는 것은 그 편이 오히려 시원함을 느낄 수 있고, 홍차의 잎은 햇볕에 그으른 것을 고쳐준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뒤이어 나는 <사막의 노래>라는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신병 훈련소에서 모로코의 리오티 항구에 있는 해군 기지 근무를 지원한 것도 그 영화를 보고 자극 받은 탓이다. 나는 데니스 모건이었다. 래드 섀도 그 사람이다. 말을 타고 뜨거운 사막을 달리고 있다. 증오하는 프랑스 군에 대한 리프 족의 반란을 지휘하고 있다. 나는 소리 높이 노래한다.
전진하라, 전진하라, 전진하라.
적의 칼에 쓸어지기 전에.
나의 천막에는 실크파자마를 입고, 얼굴을 베일로 가린 여자가 있다. 깊이가 있는 검은 눈동자. 커다란 황금 귀걸이. 발가락에도 보석반지를 끼고 있고, 발톱은 빨갛게 칠해져 있다. 양손을 벌리고 내 얼굴을 감싸더니, 이국적인 외국 사투리로 그녀는 속삭인다.
"마이클, 나를 안아 주세요. 얼른요..... "
격렬한 섹스 뒤에 나는 그녀의 품 안에서 잠이 든다.
아아, 청춘.
잠에서 깨어나자 모든 것이 일변해 있었다. 눈은 이제 멎었고. 계곡 아래에는 노을이 깔려 있었다. 아직 손목시계도 살 수 없는 처지였기 때문에 도대체 몇 시간이나 잤는지, 지금 몇 시인지도 알 수가 없다. 창밖은 어둠컴컴하고, 불빛이 반짝반짝 깜빡이고 있다. 옆 좌석은 아직 비어 있었으나 버스는 상당히 붐비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웬 여자가 가래가 걸린 것 같은 코고는 소리를 내고 있다. 그러는 사이에 차 안의 담배연기, 배기가스, 방귀 그런 것들이 뒤범벅이 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웬지 기분이 언짢아져서, 황급히 자신을 꾸짖었다. (너는 미국 해군병적 번혹 4640237. 마이클 데블린이다. 이제 곧 18세가 된다. 이제는 어린애가 아니라구. 이런 사소한 일로 기분이 나빠지는 녀석이 어디 있는가.)
나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그런데 금새 모린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의 이미지를 지워내려고 어두운 산들을 바라 보았으나 그곳에도 그녀가 있었다. 어렴풋이 가련한 그녀의 모습이 나무숲 사이로 비쳤다. 그 이미지는 아무리 애써도 사라지지 않는다. 브룩클린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데도 그녀의 이미지는 선명했다. (그렇다. 280ZX를 운전하고 있는 지금도 나의 눈에 보이는 것처럼.) 다갈색의 코트를 입고, 휙하니 나에게 등을 돌린 모린. 그녀의 머리칼은 녹기 시작한 눈으로 젖어 있었다. 아아! 그 순간 어머니와 얘기를 할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프로스펙트 공원의 눈 덮인 길을 종종걸음하며 멀어져가는 그녀를 쫓아가면서 나는 그녀를 불렀지. 그녀는 양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머리를 숙인 채 바람을 향해서 가고 있었다. 모린. 다시 한번 외쳤다. 그러나 그녀는 못 들은 척 했다. 모린, 모린.
나의 목소리는 막혀 있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들리지 않았을 리없다. 그러는 사이에 마침내 모린은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눈에 발이 빠지면서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 담겨 있는 공포를 깨달은 것이다. 하필이면 그녀의 공포어린 눈빛을 보다니. 그녀의 얼굴은 떨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모린은 휙하니 공원 밖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나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그레이하운드 버스는 다시 힘차게 달리고 있었다. 나는 가슴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로부터 불과 9일밖에 지나지 않았는 데도, 벌써 까마득한 옛일 같구나.)
그때 모린의 뒤는 쫓지 않았다. 그것만은 할 수 없었다. 남에게 동정을 구하는 짓은 상대가 모린이든 누구든 할 수가 없다. 하지만 모린의 모습은 지워지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는 모래사장. 인기척 없는 여름날의 언덕. 언젠가 맨해튼에서 영화를 보고 돌아올 때, 나와 모린은 지하철을 탔다. 그녀는 머리를 다정하게 내 어깨에 기대고 있었다.
'모린......'
버스에 흔들리면서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그녀의 살갗-을 생각했다. 그러자 그녀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더구나 지금도 점점 더 멀어져 가고 있는데도, 또 사타구니가 쑤물거리기 시작했다.
그해 찌는 듯한 여름, 해군에 입대하기 전에 몇 번 찾아왔는지도 헤아릴 수 없는 충동. 수병복 곤색 바지의 꽉 끼는 사타구니 부분을 찌르고 올라오는 뜨거움.
이전에, 아직 홀리 네임 성당의 복사(服事 : 미사 등에서 사제를 돕는 아이)로 있을 때, 하느님은 이 세상 남자들의 발기 횟수를 헤아리는 계산기를 갖고 있을까 하는 상상을 했다. 어쩌면 그것이 신앙을 잃기 시작한 계기였는지도 모른다. 전능한 하느님은 천국에 있으면서 모든 것을 내려다보고 계신다. 내가 발기한 것을 깨달으면 전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수백 억의 지저분한 발기와 함께 그것을 거대한 계산기에 등륵한다. 하느님은 미친 듯이 화가 나서 눈을 번뜩인다. 내가 자신의 물건을 건드리지나 않을까, 혹은 더욱 괘씸스럽게 그것을 만지작거리지는 않을까. 그러다가 끝에 가서는 수음으로 폭발해버린 횟수까지 등록하게 되면 하느님은 더욱 거대한 계산기를 필요로 할 것이 틀림없다. 뭐니뭐니해도 브룩클린 지구 하나만 해도 수십억 번이라는 횟수를 등록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테니까. 언젠가,
일요일 8시 반의 미사에서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 나는 자신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신앙이라는 것은 그런 식으로 잃어가는 것이다. 생각을 해 보라. 이까짓 발기에 대해서까지 신경을 쓰는 하느님의 뭐가 위대하단 말인가? 그야말로 바보 멍청이가 아닌가. 나잇살이나 먹은 어른이 남의 발기의 횟수나 계산하다니.
하지만 나는 아직 가톨릭 교도였으므로 킬킬 웃고 난 뒤에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그리고나서 자신은 틀림없이 연옥에서 불태워질 것이고, 이제 와서 하느님의 환심을 살려고 해 보았자 이미 때가 늦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럴 바에는 아예 더 한층 죄 깊은 일을 마음껏 즐기는 것도 좋으리라. 나는 14세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해였다.
그로부터 몇 주일이 되지 않아서 나는 커다란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다. 어느 토요일 오후, 교회에서 거행된 결혼식에서 복사를 맡고 있었다. 신부는 정열적인 눈을 가진 백옥 같은 피부의 이탈리아계 여성이었는데, 횡장히 풍만한 가슴을 갖고 있었다. 그녀가 신랑을 보는 시선을 보고-그 앞에서는 카바노 신부가 죽음이 그대들을 갈라 놓을 때까지 이러쿵저러쿵 시끄럽게 설교를 하고 있었는데-나는 이내 알아챌 수가 있었다. 그녀가 그 순간 그 자리에서 신랑과 그것을 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어쨌든간에 지금부터 몇 시간 되지 않아 신랑은 그녀의 풍성한 가슴 속에 얼굴을 파묻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상상한 순간 나는 신성한 제단 위에서 발기를 해버렸다.
흰 법의를 입고 있었으니까 주위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발기는 전혀 가라앉지를 않았다. 희극배우인 제리 루이스의 얼굴을 생각해 내도, 해적 영화의 칼싸움 장면을 생각해 내도 효과가 없었다. 나는 뚫어질 듯이 신부의 뜨거운 눈을 응시하고 있었다. 식이 끝나고, 신부가 하객들에게 인사를 하러 가는 것과 동시에 나는 아무도 없는 성구실로 뛰어들어가서 법의 자락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틀림없이 하느님이 내리는 벼락에 맞을 것이라고 몸을 떨면서, 시들은 꽃 따위를 버리는 통 속에 그것을 쏟아놓았다.
그러나 벼락은 떨어지지 않았다. 최소한 그날만은. 아니, 다른 날의 낮이나 밤에도. 그렇다고 해서 지금 버스 안에서 수병복 차림으로 그것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혼자서 헛웃음을 웃어 보았다. 모린의 이미지도 사라져 버렸다. 사실을 말하면 그녀는 나의 가장 수치스런 비밀의 일부였다. 조국에 목숨을 바칠 수 있을 만한 나이에 달해 있으면서도, 그때 나는 수병 가운데서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창피스러운 존재, 즉 동정이었던 것이다. 이것만은 누구에게도 얘기할 수가 없었으나 사실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한 번도 여자와 잔 적이 없었다. 그렇다. 어떤 종류의 여자하고도. 물론 사랑에 빠진 적은 있었는데, 가장 열렬한 사랑의 대상이 모린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를 억지로 섹스로 이끌 수는 없었다. 모린과 사귀게 되고 나서부터는 그녀 이외의 여자와 사궐 수는 없었다. 그녀에 대한 배신이 되기 때문이다.
미국의 오지로 자꾸만 들어가고 있는 버스 안에서 나는 다시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친구들은 모두 해상 근무를 하고 있는데 나는 지상 근무. 모함이 없는 수병이었다. 지금은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취임하고, 장군들이 한국에 모여서 전쟁 종결책을 토의하고 있으니까, 나는 전쟁과도 인연이 없는 셈이다. 웬지 자신이 굉장히 어린 것처럼 여겨졌다. 그래도 한참 있으니까 다시 기분이 밝아졌다.
이 길의 아득히 끝, 신비한 남부의 어딘가에, 구원이 기다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 틀림없이, 고향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남부에서 멋진 여자를 만날 수 있으리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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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서 잠을 깨어 보니까 버스는 하워드 존슨의 레스토랑 앞에 정차해 있었다. 화장실에 다녀와서 커피를 한 잔 마셨다. 그것 뿐이었다. 크리스마스 휴가 뒤에 남은 것이라곤 단돈 19달러. 펜서콜라에 닿을 때까지 그 돈으로 버텨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니 펜서콜라에 도착한 뒤에도 첫 급료를 탈 때까지 2, 3주일은 그것으로 버텨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카운터에 앉은 나는 빨강머리의 웨이트리스의 마음을 끌려고 '상심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험프리 보가트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너무나 바빠서 이쪽의 은밀한 마음을 알아 차리지 못했다. 할 수 없이 옆의 의자에서 신문을 집어들고 만화난이 있는 페이지를 펼쳤다. 당시 세계 최고의 풍자만화인 <스티브 캐니언>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과 쌍벽을 이루는 <버즈소여>가 실려 있었다. <캐니언>과 <소여>는 12세 때부터 오려내어 10번의 봉투에 잘 간직해 두곤 했던 것이다. 스케치북을 몇 권씩 소비해 가며 등장 인물들의 그림을 흉내낸 것도 그 무렵이었다.
나는 밀턴 캐니프의 캐니언이나 만화책으로 모으고 있던 <테리와 해적>의 터치를 어떻게든 배워 보려고 했다. 로이 크레인이 <버즈소여>에서 그리고 있는 여자들의 묘사방법도 훔쳐 내려고 애썼다.
만화를 그리는 방법에 관한 책에서 읽은 것인데, 크레인은 크래프틴트라고 하는 특별한 종이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 종이에 어떤 화학약품으로 그리면, 회색 톤의 선이 생겨난다. 또 한가지 다른 화학 약품으로 그리면 선이 그물 모양이 되어서 색조가 좀더 어두워진다.
그래서 크레인이 그리는 그림은 흰빛을 띤 회색과 거무스름한 회색의 두 가지 뉘앙스가 있어서 굉장히 멋졌다. 하지만 등장 인물들의 매력이라는 점에서는 캐니프쪽이 한 수 위였다. 그의 세리프는 훨씬 재치가 있었고, 여자들도 한결 섹시하고 총명했다. 이 세상의 물정에 훤한 진짜 여자라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것은 유명한 <테리와 해적>의 드래곤 레이디 뿐만이 아니다. <세인트루이스 블루스>를 노래하는 바머도 그렇다. 코파 칼흔이나 딘 윌더네스나 에이프릴 케인,
그리고 휘타 휘타나 팬시도 그런 것이다. 그렇다. 그 팬시. 그녀에게 홀딱 반했었지. 크레인이 그리는 여자들과라면 영화 구경이나 댄스파티에라도 가고 싶었으며, 그녀들의 몸을 모래사장에서 주무르고도 싶었다. 그러나 섹스를 하고 싶다고 생각이 드는 쪽은 밀턴 캐니프가 그리는 여자들 쪽이었다.
커피를 마시며 <버즈 소여>를 보면서 나는 스토리 속으로 빠져들려고 했다. 그러나 신병 훈련소에는 신문을 비치해 두지 않았기 때문에 이야기의 전개를 전혀 알 수 없게 되어 있었다. 훈련소에 들어갈 때 만화를 오려놓아 달라고 아버지께 부탁했으나 해군에 입대할 정도의 나이가 된 사내가 어째서 그런 것에 집착하는지 아버지로서는 이해를 할 수 었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내가 만화가를 지망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마 상상 밖이었을 것이다.
아버지쪽에서 보면 그것은 로마교황이라든가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이 되고 싶어하는 것과 같았던 것이다. 나는 아일리쉬다. 그런 이상 브룩클린에 살고 있는 다른 모든 아일리쉬의 자식들처럼 경관이라든가, 소방관이라든가, 용접공이라도 되면 좋겠다고 아버지는 생각하고 있었으리라. 그때 <버즈 소여>를 보면서 뭔가 엄청난 반역 행위를 저지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은 그러한 사정이 있었던 탓이다. 미국의 한가운데에 있는 이 레스토랑에, 지금 이 순간 아버지가 들어와서 불같이 화를 낸다면 재미있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그 무렵의 만화는 록큰롤의 대용품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이야기의 줄거리는 알 수 없었지만, 최초의 만화의 주인공에게는 낯이 익었다. 주인공의 이름은 해리 스파로우. <버크 로저스>의 닥터 휴어같은 대머리로, 오른쪽 눈에 외짝 안경을 걸치고 있다. 더구나 복장은 턱시도에 줄무늬 바지. 스파로우는 사실은 세계를 휘젖고 다니는 악한이다, 사기꾼에다가 무기 밀수 상인. 그런 그가 중미의 어떤 나라에 대한 무기의 밀수를 둘러 싼 음모에 말려 들어간다. 그 나라의 이름은-지금도 기억하고 있지만-'살바도라스' 라고 한다.
크레인은 중요 인물인 소여와 이지를 정해놓고, 중미의 어떤 나라에 가게 한다. 캐니프가 중국을 홈그라운드로 삼고 있었던 것처럼 그는 중미를 홈그라운드로 삼고 있었다.
그리고 1952년 당시, 중미는 아직 바나나로 외화를 벌어들이고 있는 작은 나라가 늘어선 지역으로서, 혁명은 낭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무렵에는 악한들을 미국 건국의 아버지와 비유하는 인간은 아무도 없었다. 농민이나 수녀나 학교 선생을 쏴죽여 놓고, 그것을 해방이라고 부르는 놈들은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 최소한 <버즈 소여>의 세계에서는.
이 만화에서는-나는 그때 그 부분을 찢어 내서 <푸른 노트>에 끼어 두었는데, 35년 사이에 완전히 누렇게 변해버렸다-해리 스파로우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옆에서 전화를 걸고 있는 휘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섹시한 여자 휘휘가 전화하고 있는 상대는 살바도라스 지도자의 한 사람이다. 두 사람 등 뒤의 벽에는 금박의 액자에 들어 간 그림이 걸려 있다.
"좀더 달콤한 목소리로 말하라구 휘휘." 해리는 여자에게 명한다.
"좀더! 좀더! 놈을 완전히 녹여 버리는 거야!"
"난 너무나 슬퍼요, 아돌포 셰리." 그녀는 전화의 상대에게 아양을 떤다. 휘휘. 셰리. 그녀는 틀림없이 프랑스인일 것이다.
"네, 저녁을 함께 하는게 어때요?" 휘휘는 말한다. 그녀는 오른손으로 금발을 만지작거리면서 왼손으로 수화기를 애무하고 있다. 왼쪽 뺨에는 별 모양의 마크, 왜소하고 통통한 몸에서 가슴이 툭 삐져 나와 있다. "네? 우리들 둘이서만요......"
그때 밖에서 클랙슨이 울렸다. 급히 커피를 마시고, 신문을 접어놓고 버스로 되돌아갔다.
"해피 뉴 이어!" 버스의 운전수가 말했다.
"해피 뉴 이어!" 나는 대답했다.
그때까지 흑인은 '니그로'라고 불리고 있었다. 내 자리 옆의 통로쪽에는 머리에 포마드를 바른 니그로 병사가 앉아 있었다. 그는 일어나서 나를 들어가게 해 주었다. 나는 가볍게 목례를 했다. 그 병사는 이전 슈거 레이 로빈슨을 넉다운시킨 적이 있는 웰터급 복서인 토미와 비슷했다. 버스에는 그밖에도 5명의 니그로가 타고 있었는데, 모두 뒷부분의 넓은 좌석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서로 몸을 기대고 자고 있는 사람이 두 명, 팔짱을 끼고 자고 있는 사람도 있다. 버스는 이제 만원이었다.
얼굴을 들어 보니까 운전수가 핸들 옆에 서서 통로에 시선을 보내고 있다. 승객의 숫자라도 헤아리고 있는지 입술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맨 앞줄의 좌석에서 잠자고 있는 니그로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뭐라고 말했다. 반응이 없자 운전수는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래도 일어나지를 않자 어깨를 흔들었다. 니그로 병사는 깜짝 놀라서 눈을 뜨더니 반사적으로 몸을 빼고 권투선수처럼 양손을 앞에서 겨누었다. 슬픈 듯이 머리를 흔들고 무엇인가 속삭이는 운전수.
니그로 병사는 눈을 깜빡거리면서 일어나 통로의 뒤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운전수는 다음으로, 세째 줄의 좌석에 앉아 있는 뚱뚱한 흑인 여성을 일으키려 하였다. 니그로 병사는 선반에서 더플백을 내려서 어깨에 매고 통로를 걷기 시작했다.
"이봐요, 어디에 앉으면 되는 거요, 나는?" 그는 큰 소리로 말했다.
"네?" 운전수를 향해서, "대답해 보라구요! 자리가 없지 않느냐구요, 이쪽에는."
"잠깐만 기다려요." 하고 운전수는 대답했다. 통로에는 아까 그 뚱뚱한 니그로 여자가 거대한 소화전처럼 서 있다. 그녀는 입을 쩍하니 벌리고, 웅얼웅얼 뭔가 중얼거리고 있다. 운전수는 선반에서 쇼핑백을 두 개 내려 주었다.
"애틀랜타까지 서서 갈 수는 없소!" 니그로 병사가 고함을 쳤다.
"절대로 그렇게 못한다구!"
"잠깐만 기다리라니까요." 운전수가 말했다. "그렇게 큰 소리를 지를 것까지는 없쟎소."
문제의 여자가 쇼핑백을 받아드는 것을 기다렸다가 운전수는 그녀의 뒤에서 통로를 걷기 시작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뒤쪽에 앉아 있는 손님을 둘러보는 그의 얼굴은 더 한층 누렇게 보였다.
"이거, 사람을 데리고 노는 거요!" 병사가 소리쳤다. "정말 신경질 나는군!"
운전수의 목소리가 얼마간 험악함을 더해갔다. "글쎄, 조용히 하라니까 그러네 군인양반. 나도 좋아서 이러는 줄 아슈? 법으로 정해져 있으니까 하는 수 없이 이러는 거지."
"법률이라니......"
내 옆의 흑인은 시종 잠자코 지켜 보고 있었다. 양손을 움켜쥐었다 폈다 하면서 그는 말했다.
"이제부터 주경계선인 메이슨 딕슨 라인을 넘어야 해요. 우리들은 <스미스 앤드 웽슨 라인>이라고 부르고 있지만요." 씁쓸한 듯이 웃고, "대단한 나라 아닙니까? 안 그래요?"
운전수는 야윈 빨강 머리의 백인 여자에게 조금 전까지 뚱뚱한 니그로 여자가 앉아 있던 세째 줄의 좌석으로 옮기도록 재촉했다. 그리고는 스타킹으로 묶은 싸구려의 비닐제 여행가방을 내리는 것을 도와 주었다, 낚아채듯이 가방을 받아든 빨강 머리 여자는 창피한 듯이 그것을 자신의 몸으로 숨기고 있다. 이번에는 나를 보고 운전수가 말했다, "거기 해군 아저씨, 당신은 첫째 줄로 옮겨 주실까. 이 군인 양반과 교대를 해 줘요."
내가 일어서자 옆 자리의 니그로 병사가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말씀이 아니군"
수병용 백에 손을 뻗으면서,
"왜 이런 복잡한 짓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겁니까?"
내가 운전수에게 묻자,
"이제부터 남부로 들어가니까 그렇죠." 그는 귀찮은 듯이 대답했
다.
첫째 줄 창가의 좌석에서는 백인 남자가 자고 있었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남자였다. 한 40세 가량 되었을까? 벗겨져가는 금발, 뼈가 앙상한 얼굴, 높은 코. 격자무늬의 스포츠 재킷을 입고 있었으며, 검은 레인코트를 담요처럼 턱아래까지 끌어 올리고 있다. 구두는 벗고 있었고, 발밑에 항공가방이 놓여 있다. 내가 자리에 앉자 버스는 마침내 달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우리들은 이미 익숙해진 주행의 리듬에 몸을 맡겼다. 창밖에는 울울창창한 숲, 멀리에서 나타났다 사라지는 집들, 뇌리에는 다시 해리 스파로우와 휘휘의 모습이 떠올랐다.
두 사람은 잠자리에 들었다.
휘휘의 모습을 머리 속에서 몰아내고 길가의 경치에 몰두했다. 버스는 느릿 느릿 달리고 있는 트럭을 능숙하게 추월해간다. 운전수는 운전 기술만은 뛰어난 모양이다. 나는 아직 그때 자동차 운전을 할 줄 몰랐다. 아무튼 고향인 브룩클린에서는 우리 아버지를 포함해서 자동차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어딘가에 갈 때에는 지하철로 충분했으니까. 신병 훈련소에서 그 얘기를 했더니 모두들 박장대소를 했다. 뭐라고? 운전을 못한다고? 너 어디 잘못된 곳이라도 있는 것 아니냐? 내가 설명을 하려고 했지만 그들은 전혀 믿어주지를 않았다. 그들의 대부분은 12, 3세 무렵부터 차를 운전하고 다녔으니까 그것도 무리는 아니다. 아마 나는 또 하나의 수치스런 비밀로부터 화제를 돌리고 싶어서 자동차 얘기를 꺼냈을 것이다. 아직도 동정이라고 하는 비밀만은 절대로 알려지면 안 되었다.
어딘가 그리나빌에 가까이 간 곳에서 운전수가 운전석에 설치되어 있는 작은 마이크를 집어들었다. 힐끗 손목시계를 들여다 보고 나서 그는 마이크 스위치를 켰다.
갈라진 목소리로 그는 말했다. "승객 여러분, 앞으로 정확히 70초 후면 1953년 1월 1일입니다"
누군가가 박수를 쳤으나 뒤를 돌아보니까 백인들의 태반은 자고 있었다. 뒤쪽에 있는 니그로들은 어두워서 보이지 않는다. 고향에서는 모두 술을 마시거나 악을 쓰거나 하며 요란스럽게 신년을 경축하고 있을 것이다. 라디오에서는 가이 롬바드 악단의 <올드 랭 사인>이 홀러 나오고 있을 것이다. 그 악단은 세계 최악이다. 모두가 축하하고 있는 것은 이유는 앞으로 1년간 가이 롬바드의 연주를 듣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생각될 정도다. 아버지는 아마도 우리 블럭의 끝에 있는 <라티간스>에 가 계실 것이다. 모두들 곤드레 만드레가 되어서 시끌법썩한 그곳에서 혼자 묵묵히 술을 마시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동생들은 비상 계단을 냄비로 두들겨 대면서 주정뱅이들을 향해서 눈덩이를 던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오늘 밤, 지금 이 순간)-하고 나는 그때 생각했다-(내가 이렇게 낯선 도시로 끌려가고 있는 동안, 모린은 틀림없이 그 회계사와 만나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와 파티에라도 가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은 소파에 앉아 축음기에서 홀러나오는 토니 베네트의 노래를 듣고 있을 것이다. 모린은 분명히 푸른색 드레스 아니, 흰색 드레스일지도 모른다. 회계사는 그녀의 왼손을 잡고 있다. 오른손일지도 모른다. 그가 일어서면 모린도 그렇게 할 것이다. 주위는 어둠컴컴하고 구석쪽에는 30촉 가량의 빨간 램프가 켜 있을 뿐이다. 모린은 찰싹 그에게 달라붙어 춤을 추기 시작한다. 암흑 속의 그 회계사가 나라고 그녀는 생각하기로 한 것일까?
"어떻소, 해군 아저씨." 운전수가 말하고 전방의 노상에 눈을 고정시킨 채 작은 위스키 병을 넘겨 주었다. 상표가 붙어있지 않은 암갈색의 유리병은 촉감이 싸늘하다.
"고맙습니다." 뚜껑을 열고 한 모금 마셨다.
"해피 뉴 이어!"
평소에 위스키는 그다지 마시지 않는 편이었다. 목구멍을 따라 떨어져가는 뜨거운 액체의 감촉이나, 언제까지나 알코올 기운이 가시지 않고, 마신 뒤 며칠씩 그 독특한 냄새가 몸에서 나는 것이 싫었다. 그 점에 한해서는 나와 아버지가 닮았는지도 모른다. 두 사람 모두 맥주파였다. 그래도 나는 그때 상표가 붙어있지 않은 위스키를 마셨다. 고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고, 그것은 선물이었기 때문이다. 목구멍으로 떨어진 위스키가 뜨겁게 꽃피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해피 뉴 이어." 운전수는 말했다. "옆자리의 아저씨에게도 권해봐요." 옆자리의 사나이는 어느 틈엔가 잠에서 깨여나 있었다. 병을 건네주자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손은 매우 가늘고, 푸르스름한 혈관이 튀여나와 있다.
"이거, 미안하오." 사나이는 말했다.
"인사는 운전수 아저씨에게 하세요. 이 위스키는 저분 것이니까요."
"사실은 사양하는 쪽이 좋을지도 모르겠군요. 운전수가 술에 취하면 큰 일이니까."
"하지만 그는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데요."
"누구든지 그런 타입으로는 보이지 않는 법이지."
다시 한 모금 마시고나서 사나이가 병을 되돌려 주자 나는 운전수에게 돌려주고 고맙다는 말을 했다.
"그건 그렇고 인사가 늦었군." 옆의 사나이는 말했다. "나는 잭터너요."
나도 이름을 말하고, 정식으로 악수를 나누었다.
"어디로 가는 길이오?"
"펜서콜라입니다."
"저런저런. 나도 그렇소."
"당신도 해군인가요?" .
"그렇다네." 그는 말했다. "해군에 들어온 지 17년이 되었지." 발밑의 백을 뒤져서 (일 파인트짜리 위스키 병을 꺼내더니 뚜껑을 땄다. "앞으로 3년 있으면 제대일세. 놀랍게도 20년이라니까. 여자 없는 해군에서 20년 있었다는 얘기지. 그리고나서 바깥 세계로 되돌아가는 거라구."
나는 얘기가 계속되기를 기다렸다. 그는 내가 처음으로 일대일로 만나는 고참병이었다. 신병훈련소에서 만난 고참병은 우선 예외없이 '무자비한 하사관 타입'이었다. 쉴새 없이 고함을 쳐대면서 우리들이 지쳐서 쓸어질 때까지 연병장을 행진하게 하는 타입. 그런데 이 터너라는 고참병은 사복 차림이었던 탓인지, 웬지 모르게 얘기가 통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면 넓은 세상을 꽤 많이 보셨겠군요." 나는 말했다. "17년간이나 해군에 있으셨다니까요."
그는 내게 병을 건네주었다. 한 모금 마시고나서 계속 병을 입을 문 채로 있었다.
"글쎄." 터너는 대답했다. "별의별 곳을 다 돌아다녔지. 지독하게 고생을 한 적도 있었고. 그러나 여러 가지 장소가 곧 세상이라고 할 수는 없지. 그것은 현실의 세상과는 전혀 다른 거야."
위장의 한가운데에서 위스키가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럼, 현실의 세상이란 무엇입니까?"
터너는 창밖의 어둠에 시선을 보냈다. "여자일까? 그리고 자신, 집, 자동차...... 그런 류의 따분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지. 그것이 바로 세상이야. 운전수에게 병을 넘기라구. 좋은 사람 같으니까."
운전수의 팔꿈치를 찌르고 위스키 병을 건네주려고 하니까, 그는 필요없다고 고개를 젖으며 미소를 띤다. 나는 병을 터너에게 돌려주고 물었다.
"그런데, 여행을 할 때는 군복을 입지 않습니까?"
터너는 웃었다. "당연하지. 내 돈으로 여행을 할 때는 입을 필요가 없다구. 물론 히치 하이크라도 한다면 군복이 그런대로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만, 돈이 있을 때는 군복을 미련 없이 벗어 버리지."
나의 곤색 상의의 소매를 잡았다. "그 이유를 가르쳐 줄까? 세상 사람들은 언제나 수병을 보면 웃음을 터뜨린단 말이야. 수병은 모두 머리가 약간 돌았다고 그들은 생각하거든. 머리가 돈 녀석을 보고 웃는 것은 당연하지. 그런데 말일세, 재미있는 사실은 말이지, 그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대로라구. 수병이라는 족속들은 제정신이 아니라구. 왜 안 그렇겠어? 언제 물이 샐지도 알 수 없는 대야에 올라타고 넓은 바다로 나가는 거나 마찬가지 아냐? 몇 주간, 몇 개월, 몇 년. 마치 전쟁중인 것처럼 말일세. 며칠이라면 또 모를까 몇 년씩이나. 그동안 눈에 보이는 것은 바다와 동료 수병들뿐이지. 맞아, 머리가 돌아버린, 시시껄렁한 해군들뿐이라구. 오탠 항해 동안에 이놈저놈 할 것 없이 머리가 이상해져 버리지. 호모가 되는 녀석도 있고 말이지. 그래도 언젠가는 모두 모항으로 돌아오지. 그때는 모두들 욕구가 폭발할 지경에 이른다구. 주말 밤에 맨정신으로 길을 걷고 있는 수병을 본 적이 있나? 교회나 도서관 같은 장소에서 해군을 본 일이 있나? 한 번도 없을 걸세. 해군은 대개 길거리에 쓰러져 있지.
그들은 대개 오줌이나 쓰레기통 속을 뒹굴면서 토해 대거나 미친 놈처럼 큰 소리로 웃어 대거나 하고 있다구. 그렇지 않으면 유치장에 처넣어지거나 말이지. 하지만 말일세, 그런 해군들을 봐도 뭐라고 화를 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구. 진짜 백치가 그와 같은 추태를 부리고 있다면 모두들 이맛살을 찌푸릴 거라구. 육군 녀석이 여자 엉덩이를 끌어안고 있으면, 설사 그 녀석이 검둥이 니그로가 아니더라도 린치를 가하려고 들테고. 공군 녀석이 길거리에서 소동을 벌리면 신문에 투서당하기 십상이지." 병에 입을 대고 한 모금 마시고 그는 계속했다. "그런데 말일세, 셔츠를 피투성이로 물들인 수병이 창녀를 어깨에 둘러맨 채 시궁창 속에 쓸어져 있다고 하자구, 구두에 마구 먹은 것을 토해 놓고...... 그 녀석을 보면 사람들은 그냥 웃기만 한다구."
나도 웃었다. "알아듣겠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입안 가득히 술을 머금고는 그는 그것을 천천히 목구멍으로 넘겨갔다.
"그래서 나는 사복으로 여행을 하는 것일세. 어디에 배속이 되든 나는 먼저 사설 옷장을 확보한다네, 그리고 상륙할 때는 반드시 사복으로 갈아입는 거야. 누구로부터도 웃음을 사고 싶지 않으니까 말일세."
그것에는 나도 동감이었다. 그 한 가지 점만으로도 터너가 마음에 들었다. 이대로 에리슨 비행장까지 함께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얘기 상대가 생겨서 좋고, 나는 군대 생활에 대해서 여러 가지 것을 배울 수가 있다. 터너는 병기계의 하사관으로 신참 조종사들에게 총기가 무엇인가를 가르치러 메인사이드로 부임하는 길이라고 말했다.
그 근무지를 그는 마음에 들어했다. 그것이 '최저의 도시' 노포크였다고 해도 불평은 할 수가 없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아니, 지상 근무가 아니라 항공모함 승선을 명령 받을 가능성도 있었던 것이다.
그는 항공모함을 죽기보다 싫어하고 있었다. 해군에는 네 가지 삶의 방법이 있다고 그는 말했다. 편하게 사는 법, 죽도록 고생하며 사는 법, 해군으로 사는 법, 그리고 미드웨이. 그가 최후로 승선했던 항공모함의 이름이다.
한참 동안 침묵하고나서 터너는 자네, 애인은 있나? 하고 물었다.
없다고 대답하니까 빤히 내 얼굴을 쳐다 보았다. 그곳에서 뭔가를 읽어낸 것이리라,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심한가?"
사실은 신병 훈련소에 있을 때 작별 편지를 받았습니다 하고 나는 털어놓았다. 터너는 술병을 다시 건네주었다. 한 모금 마시니까 위장이 불타는 것처럼 뜨거워지고, 갑자기 공복을 느꼈다. 터너가 말했다. 어차피 작별의 편지라는 것은 일찍 받는 쪽이 좋다네, 나 같은 사람은 전혀 아무렇지도 않다구. 언젠가는 모두 받는 것이니까. 수병치고 딱지 한 번 안 맞은 녀석은 없을걸.
그리고 다시 한 모금 마신다. 나도 그대로 따랐다. 그러자 터너는 말했다. 나는 지금까지 작별의 편지를 다섯 통 받았는데, 그 가운데 세 통은 마누라들에게서 온 것이었지.
그때는 충격이 컸겠네요 하고 말하니까 천만에 말씀이라고 대답한다.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니었다구, 그리고 객관적으로 판단한다면 대개 그들의 주장이 옳았어. 수병이라면 누구나 다 그렇겠지만 나는 모범적인 남편은 아니었으니까 말이지. 하지만 헤어진 마누라들을 사랑하고 있었다구. 최후의 순간까지 사랑하고 있었다니까.
그 여인들의 얘기를 들려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고 나는 말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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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너가 고백한 이야기
첫 여자는 주디였지. 빨강머리의 16세로 물기가 담뿍 오르고 뜨거운 피가 끊고 있는 듯한 여자였지. 팔꿈치를 쓰다듬기만 해도 흥분되는 진짜 정열적인 그런 여자였어. 결혼한 적은 1938년. 장소는 샌디에이고였지. 극동으로 향하는 항해가 시작하기 직전에 결혼했어.
주디는 루이지애나 주의 슈레브포트 출신으로, 나랑 사귀고 있을 때는 샌디에이고에 사는 언니 집에 동거하고 있었어. 그 언니라고 하는 여자는 상선의 갑판장과 결혼했는데 그때 그녀 남편은 항해중이었고, 주디와 엔니는 수병들의 소굴인 한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지. 그곳에서 우연히 만났지. 그날 밤 우리 세 사람은 주디 언니집으로 갔어. 잠을 깼을 때도 세 사람은 함께 였지. 그러나 주디에게 나는 첫 남자였어. 마침 일 주일의 휴가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우리들은 결혼했지.
순양함에 타고 과해역을 항해하던 그녀에게서 편지를 받았어. 임신했으니까 갓난애 이름을 생각해 두라는 편지였어. 그리고 샌디에이고는 쓸쓸하니까- 슈레브포트 근교의 친정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어. 그곳이라면 소작을 하고 있는 양친도 있으니까 그곳에서 아이를 낳고 싶다고 말이야. 아아, 그렇게 하라고 나는 답장을 써 보냈아. 그러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그때 좀더 앞을 내다보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때 항해는 18개월이나 걸렸지. 전쟁이 발발하기 전으로, 우리들은 태평양 구석 구석을 돌아다녔지. 그래서 가까스로 모항으로 돌아와서, 아내가 있는 슈레브포트에 가 보니까. 갓난애는 기어다니고 있었고, 아내는 그 고장의 보안관과 자고 있었어. 그 일은 동네 사람 모두가 알고 있었지. 그녀의 가족들조차.
그래서 내가 슈레브포트에서 6마일 떨어진 그 빌어먹을 마을에 가 보니까 만나는 녀석마다 모두들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것이었어.
도대체 이 녀석이 어떻게 나올까 하는 흥미진진한 얼굴로. 그들의 얼굴에는 어떤 공통된 표정이 내비쳤어. 연민,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경멸이었을까. 주디와 만난 나는 내가 깨달은 것, 마을의 분위기에서 느낀 것들을 털어 놓았어. 이봐,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하고. 주디는 빤히 내 얼굴을 바라보고나서 획하니 등을 돌리더군. 나는 보안관을 더 좋아해요. 한 달에 40달러만 달랑 보내주고 오지도 않는 해군을 믿고 사느니 차라리 보안관과 결혼하고 싶어요. 더구나 그 보안관도 그녀와 결혼하고 싶어하고 있다는 것이었어.
그녀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어. 마음에 안 들면 거리의 보안관 사무소로 가서 실컷 지껄여 보라구요. 그 날 나는 그녀 아비지의 자동차를 타고 밤새껏 마구 돌아다녔어. 무릎에 산탄총을 얹고, 술을 마구 마셔대면서 말이야. 보안관 사무소 근처의 싸구려 술집에 들어가 주크박스의 음악을 듣기도 했어. 그동안 그 못되 먹은 보안관의 사무실을 꼼짝 않고 지켜보고 있었지. 머리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슈레브포트로 오는 도중에 있던 창녀집에 들른 다음에 보안관을 쏘아 죽여도 늦지는 않을 것이라고. 그턴데 여자와 하고 나서 자동차로 돌아오자마자 산탄총을 끌어안은 채 잠들어버렸어. 잠에서 깨자 나는 자동차와 산탄총을 그곳에 내버려 둔 채 히치 하이크로 슈레브포트까지 돌아갔지. 그곳에서 비스로 곧장 샌디에이고까지 돌아와 버렸어. 주디에게서는 그 뒤 편지가 한 통 왔을 뿐이었지. '당신쪽의 이혼 서류를 보냅니다. 성실한 주디'라고 쓰여 있었어. 그 말에는 가슴이 찢어질 것 같더군. '성실한' 그 뒤 그 빌어먹을 단어를 들을 때마다 주디의 일이 생각나더구만. 그녀는 슈레브포트에서는 누구보다도 색정적인 풍만한 엉덩이를 가지고 있었어.
두 번째 마누라의 이름은 진저였어. 결혼하고 나자마자 이건 완전히 실패작이라고 생각했지. 그녀와는 설사 하긴 하더라도 결혼은 하지 않는 쪽이 좋았어. 진저는 호놀룰루 댄스 홀의 호스티스로 일하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처음 알게 되었어. 다리가 길고 히프가 무척 높이 자리하고 있었고, 하와이 여자들이 흔히 입고 있는 꽃무늬 드레스를 입고 있있지. 가슴은 작았지만 엉덩이는 엄청나게 크고, 피부는 황금처럼 빛나고 있었어. 그녀에게는 약간 일본인의 피가 섞여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했지. 가슴이 작은 것이나, 얼굴의 윤곽에서 그런 느낌이 들었어. 하지만 그녀의 엉덩이는, 그것만은 일본인의 것은 아니었지. 아아, 그 엉덩이만은. 자기는 19세라고 진저는 말했지. 나는 전혀 그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어.
어쨌든 그 어둠컴컴한 댄스 홀에서 본 진저는 기가 막혔으니까 말이야. 홀에는 연기가 꽉 들어 차 있고, 글렌 밀러의 음악이 흐르고 있었어. 우리들 해군들은 곤드레만드레가 되어 있었지. 그곳은 굉장히 후덥지근 했기 때문에 그 꽃무늬 드레스가 찰싹 진저의 몸을 감싸고 있었어. 나는 젓눈에 반해 버렸어. 그녀를 보고 몇 분도 되지 않았는데 이미 평생의 반려자로 삼으려고 결심했을 정도였지. 나중에 나는 그녀의 진짜 나이가 29세라는 것을 알았어. (당시 나는 19세었지.) 나중에 나는 그녀가 전에 한 번 결혼한 적이 있고, 아이가 둘씩이나 있다는 것도 알았어. 그런 것을 그녀는 손톱 끝만큼도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말이야. 게다가 나중에 나는 뼈저리게 느껴야만 했어. 그녀가 임질 환자라는 것을. 그것을 알게 된 것은 결혼 후 3개월, 항해에 나간 지 2개월이 지났을 때였지. 물론 그때 이미 임질균에 전염된 상태였으니까 나도 알게 된 것이지. 의무실의 군의관과 의논한 뒤에 나는 사무계 하사관을 찾아 가서, 사랑하는 아내 진저에 대한 송금은 그만 중단하겠다고 말했어. 그녀에게 단 한 줄의 편지를 보냈지. 친애하는 진저. 당신에게서 임질이 옮았지. 바람둥이. 성실한. 그래 그곳에 그 단어를 끼어넣어 주었어. 성실한. 그 다음에 사인을 했어.
진주만에 상륙한 것은 1943년이었는데, 진저는 놀랍게도 사창굴에서 일하고 있었어. 나는 그녀에게 이혼 얘기를 꺼냈지. 성실하다니, 정말로 구제 불능의 여자였어. 진저는.......
그 밖에도 여자는 여러 명이 있었어. 아아. 젊은 여자도 나이 든 여자도. 흑인이나 중국계의 여자. 그러나 정말로 반했던 것은 세 번째 마누라였어. 그녀라면 틀림없이 인생을 의미있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생각했지.
이름은 수잔. 태평양 전쟁이 끝난 후 샌프란시스코에서 알게 되었어. 몸집이 작은 검은 머리칼의 여자로 은행에 다니고 있었어. 혼자 살고 있었는데 근시 때문에 안경을 쓰고 있었어. 미션 스트리트의 조그만 집에 살고 있었지. 내가 보잘 것 없는 수병이었기 때문인지 나 같은 것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어. 깨끗이 퇴짜를 맞은 거야. 접근을 시도한 그 자리에서 말이야. 20달러 지폐를 소액권으로 바꿀려고 그 은행으로 들어갔을 때에. 그야 물론 나는 에롤 프린 같은 미남은 아니지만 나에게도 오기라는 것이 있지. 퇴짜를 맞은 탓에 나는 오히려 더 뜨거워지고 말았어. 이렇게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말이야.
그래서 그 다음부터 매일 한 번씩은 찾아갔어. 때로는 하루에 두 번 만나러 간 일도 있어. 마침 승선하고 있던 군함이 독에 들어가 있어서 시간이 있었던 것이지. 어쨌든 끈질기게 밀어 붙였더니, 그녀도 최후에는 승낙했지.
내가 수잔과 결혼했던 것은 아마 자신은 사방에 우글거리는, 여자와 자는 것밖에 생각하지 않는 무책임한 해군과는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던 탓이라고 생각했어. 상관없지 않은가? 그도 그럴것이 수잔에게는 보안관도 없으며, 임질도 걸리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나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평화로운 결혼 생활이라는 것에 도전해 볼려고 생각했던 것이지.
그런데 같이 살아 보고 금세 알게 된 것인데 그녀는 병적인 결벽증의 소유자였어. 온갖 사항에 관해서 정확한 규칙을 세워 놓고 있었지. 집안의 어떤 물건 하나라도 모두 놓아두는 장소가 정해져 있다는 얘기야. 처음에는 그런 것도 마음에 걸리지 않았어. 눈가 뭐래도 나는 해군이었으니까. 상당히 오랫동안 비좁고 불편한 장소에서 생활을 해 온 셈이고, 규칙도 정확하게 지켜왔어. 군함 위에서는 규칙을 지켜야만이 목숨을 지킬 수가 있으니까.
그래서 처음에는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했어. 수잔의 그러한 면은 우리들 군인들과도 공통점이 있으니까 말이야. 그러다 한참 뒤에 그녀가 열렬한 기독교신자라는 것도 알게 되었어. 그것도 신을 두려워 하는, 성서 읽는 것을 굉장히 좋아하는, 고지식하기 짝이 없는 기독교인이었어. 그런 종류의 기독교인들은 융통성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골수 교조주의자들이야.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고, 안 되는 것 천지였어. 담배는 벽지가 더러워지니까 피워서는 안 되고, 위스키를 나와 함께 마시는 것도 사절, 내가 교회에 가지 않거나 저녁식사에 늦거나 하면 얼굴을 빨갛게 상지시키면서 화를 냈지. 내가 군함에서의 잔업에 겉리거나 교통 정체에 말려 들거나 도중에 술집에서 한 잔 걸치기라도 하고 돌아올라치면 속수무책이지. 미친 사람처럼 날뛰어 대니까.
집에 있는 것은 모두 조그만 셀로판 봉지로 싸서 벽장 안에 정연하게 챙겨 넣어 놓았어. 어떤 봉지에나 정확하게 이름이 붙여져 있었지. 팬티라든가, 슬립이라든가 브래지어라든가, 냉장고 속은 상품이 정연하게 늘어서 있는 슈퍼마켓 뺨칠 정도였어. 그래서 내가 야채 선반에 우유병을 넣어 놓기라도 하는 날이면 쇠된 목소리로 고함을 치곤 했치. 물론 생리 기간 동안 섹스는 절대 금물이고, 생리가 시작되기 전의 4,5일간은 뾰로통하니 침묵을 지키며, 내 얘기 같은 것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아. 콘돔을 사용하는 것도 죄, 섹스를 하는 장소는 전등을 끈 침실이라야 하고. 시간도 밤 9시부터 11시 사이로 제한이 되어 있지. 그보다 늦어지면 완강하게 섹스를 거부하는 거야.
다음 날 아침 출근 시간에 늦지 않도록 일찍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면서. 그래서 나는 이봐, 토요일이나 일요일은 은행도 놀잖아. 하고 말했지. 그랬더니 금요일 밤은 일 주일 간의 피로가 쌓여 있어서 안 되고, 토요일 밤은 이튿날 교회에 가야 되니까 휴양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거야.
그러는 사이에 나의 귀가시간이 자주 늦어지게 되었어. 외박을 하고 아예 돌아가지 않는 일도 있었어, 그러던 어느 금요일 날 밤 나는 난로 옆의 커다란 의자에 앉아 있었어. 잡지에 실리는 사내들처럼 포즈를 잡고 말이야. 난로불은 기세좋게 타고 있었지. 샌프란시스코의 밤은 무척이나 추웠지. 그런데 수잔은 내가 바닥에 신문을 마구 내동댕이쳐 놓았다고 고함을 치기 시작했어. 당신은 항상 집안을 어지러 놓는다니까요 하며 악을 써댔어. 무슨 일을 해도 지저분하게 만들어 놓는다고 큰 소리로 고함을 쳐대는 것이었지.
얼마 있다가 나는 일어나서 천천히 담배에 불을 붙였지. 그리고 벽을 향해서 힘껏 연기를 내뿜어 주었어. 물론 수잔은 신경질적으로 악을 써댔지. 여보, 무슨 짓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담배 꽁초를 카펫에 떨어뜨리고는, 힘껏 밟아 버렸지. 그리고는 또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그것을 입에 물고 그녀의 앞을 지나서 냉장고 문을 열었어. 냉장고 안은 언제나처럼 깨끗이 정돈되어 있었어. 그곳에 천천히 손을 집어넣고, 모든 것을 뒤죽박죽으로 휘저어 놓았지. 그리고 그 빌어먹을 놈의 냉장노 안에 오줌까지 갈겨 주었지. 버터 접시에 얹혀 있던 버터가 녹아내려가던 것이 눈에 선해. 다음에는 윗저고리에서 위스키 병을 꺼내 들고 꿀꺽꿀꺽 나발을 불고, 곤드레만드레 취해서 매트리스 둬에 모두 토해 주었어. 그동안 우리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 붕쌍하게도 수잔은 견디다 못해서 밖으로 뛰쳐 나가 버렸어.
그날 밤도, 그 다음 날 밤에도 수잔은 돌아오지 않았어. 나는 라다오를 커다랗게 켜 놓고 집안을 돌아다녔지. 술잔을 한손에 들고, 담배를 쉴새 없이 피워대면서. 화장실 문은 활짝 열어놓고.
일요일 아침이 되어도 수잔은 돌아오지 않았어. 그날 나는 집에서 꼼짝하지 않은 채. 연거푸 술을 마셔 댔지. 그러는 사이에 나도 집안에 가득한 악취가 마음에 걸리기 시작했어.
윌요일 아침. 차가운 샤워를 오랫동안 하고 난 후 사복을 단정하게 입고 은행으로 찾아갔지. 수잔은 없었지. 이상한 눈초리로 나의 얼굴을 보면서 병 때문에 쉰다는 연략이 있었다고 그녀의 상사는 말했어. 틀림없이 이상한 냄새라도 맡은 것이리라. 기분이 상한 나는 여기 저기 술집들을 싸돌아 다니기 시작했지. 주크박스의 음악을 들으면서 한 시간마다 집에 전화를 걸었어. 몇 번을 걸어도 수잔은 받지 않더군.
그러는 사이에 그녀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는 걸 나는 깨달았지. 그녀의 출신지도 모르고, 어디로 갔는지도 몰라. 생각해 보니까 그녀의 양친과도 만난 적이 없었어. 아무튼 수잔이 다니고 있는 교회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었으니까. 알고 있는 것은 단 하나, 그녀가 자취를 감춰 버렸다고 하는 사실뿐이었어. 우리들의 관계도 이제 끝장이었지. 해가 질 무렵 나는 완전히 만취해 버렸어. 똑바로 걸을 수도 없는 형편이었지, 그래도 어떻게 해서인가 비스를 타고 미션 스트리트로 가서 짐을 챙기기 위해 집으로 향했어. 머리속에서 나는 계속 작별의 편지를 쓰고 있었지. 나는 역시 내게 가장 걸맞는 해군으로 돌아가겠다. 못된 짓을 해서 미안하다. 엔젠가 좋은 남자 만나면 이따금 신문을 바닥에 놓아 두게도 해 줘라. 그리고 물론 마지막은 '성실한이란 단어로 마무리를 할 생각이었어.
나는 현관문을 열었어. 그러자 이층 우리들의 침실 근처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는 거야. 밤손님이 내는 그런 소리하고는 달랐어.
나는 발소리를 죽이고 이층으로 올라갔어. 그리고 침실의 문을 여니까 완전히 벌거벗은 수잔이 놀랍게도 은행에서 만났던, 그 턱수염의 뚱뚱한 사나이와 함께 있는 거야. 나를 본 사나이는 공포 때문에 초죽음이 되어 있었지. 나는 아래층으로 내려와서 짐을 챙기고 그 뒤로는 한번도 그녀를 만나지 않았어. 일 주일 후, 타이프로 깨끗이 쳐진 작별 편지가 왔더군. 마치 군법회의의 곤소장 같은 아니면 은행의 성명문이라고나 할까. 그 뚱보 상사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언급되어 있지 않았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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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 귀에는 그의 목소리가, 아니 경고가 들린다. 그래, 사랑의 대가에 대하여 젊은이에게 충고하는 고참병의 목소리가. 아니, 그가 말하고 있었던 것은 섹스의 대가에 대해서였는지도 모르고, 섹스와 사랑 그 모두에 대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젊은이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하는 얘기는 어디까지나 그의 체험이야. 터너가 저지른 실수였지. 난 절대로 그런 실수는 하지 않겠어. 나는 최고의 여자를 찾는 거야. 그렇고말고, 절대로.) 이런 종류의 야망에 휩싸여 젊은이는 종종 괴로운 싸움을 강요받게 된다. 하지만 운명은 그다지 멀지 않은 곳, 남부의 그림자 속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애틀랜타의 도심가에 있는, 그저 넓고 어슴푸레한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갈아탔다. 출발시간까지 한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때 터너가 말했다. 버스 여행을 할 때에는 창가쪽에 앉는 편이 낫다고. 그리고 만원이 아니라면 누워갈 수 있으니까 그렇게 하자고 했다. 분명히 맞는 얘기라고 생각했다. 그는 나보다 훨씬 많이 버스를 탄 경험이 있다. 그리고 훨씬 많은 여자들을. 나는 일곱 번째 줄에서 두 사람이 앉을 수 있는 빈 자리를 발견하고 터너는 두 번째 줄에서 발견했다. 뒤쪽에는 흑인들이 앉아 있었는데 아직 빈 자리는 많이 있었다.
펜서콜라. 나는 얼마 안 있으면 그곳에 도착하게 된다.
한 여자가 출발 직전에 버스에 올라 탔다.
맨 처음 발견했을 때 그녀는 운전수 옆에 서 있었다. 정류장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희미한 빛을 받아 피부가 거의 올리브색으로 보였다.
그 후 지금까지 그 순간의 소박한 영상이 머리속에 강렬하게 남아있다. 무인 버스 속에서, 그때와 똑같이 희미한 빛에 싸인 모델을 세워 놓고 나는 몇 번이고 사진을 찍었다. 그때와 똑같은 분위기를 재현하려고 니카라과의 산속과 케냐 고지의 버스 속에서 촬영한 적도 있다. 워싱턴 하이츠 주변을 이동하면서 찍었던 적도 있다. 하지만 성공한 예는 한 번도 었었다. 머리에 새겨진 영상은 종이에 비쳐진 영상보다도 훨씬 더 강한 것이다.
아무튼 그녀는 그곳에 있었다. 웨이브가 있는 검은 머리에, 계란형 얼굴, 깨끗이 뻣은 콧마루. (그런 코를 '매부리코'로 형용하고 있는 문장을 한 번 읽었던 적이 있다.) 블루진에 검은 터틀넥 스웨터를 입은 그녀는 낡아빠진 작은 여행가방을 들고 있었다.
이쪽으로 와 줘, 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어두운 버스의 공기를 통하여 그녀에게 텔레파시를 보내려고 애썼다. (자, 여기에 앉아 줘. 옆에 앉아서 내 친구가 되어 줘. 나는 매일 밤 너를 만난다. 너는 베일을 쓰고, 그 검은 눈동자로 나를 바라봐 주면 돼. 나는 이 세상의 무엇보다도 너를 사랑할 거야. 자, 여기에, 이 비어 있는 내 옆자리에 앉아 줘. 자아 제발!)
그녀는 좌우를 번갈아 보면서 통로를 나와, 내 옆에 멈춰 섰다.
"여기, 비어 있어요?" 그 허스키한 목소리에는 희미한 두려움의 빛이 엿보이고 있던 것을 기억한다. 화장을 하고 있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내 눈에는 안 하고 있는 것같이 보였다. 입술은 통통하고 왼쪽 뺨에 검은 사마귀가 하나 있었다.
"네, 비어 있습니다." 나는 일어섰다. "그 가방, 위에 올려 드릴까요?"
여행가방을 받아 선반에 올려 놓았다. 어느 틈엔가 버스는 달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고마워요, 해군 아저씨." 그녀는 말했다.
내가 앉자마자, 그녀는 허물어져 내리듯이 옆자리에 앉았다. 무릎에 큰 가죽 핸드백을 놓고, 두 발은 딱 붙이고 있었지만, 진바지 밑에는 튼튼한 허벅지가 숨겨져 있는 것을 간파할 수 있었다.
자아 지금이다, 하고 생각했다. (말을 거는 거야. 뭔가 말해. 뭐든지 좋으니까 말해. 뭔가 얘기해. 그토록 꿈꾸고 있던 여자가 여기에 있잖아. 자아 말을 걸어.)
"펜서콜라에 가는 겁니까?" 나는 말했다.
(아, 제기랄. 바보 자식. 정말 멍청해. 그런 바보스런 걸 묻다니.)
"네," 그녀는 말했다.
"저도 그래요. 아름다운 마을이라던데요."
"글쎄요. 어떨지요. 전 처음이라서요."
분명히 남부 사투리인데, 리듬이 약간 달랐다. 영화와 라디오에서 들어 귀에 익은, 전형적인 남부인의 말투와는 다르다. 어미가 더 애매했다. 마치 빌리 홀리데이의 목소리같이. 다시 한번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눈가에는 아주 엷게 잔주름이 있고, 턱 밑에는 약간 지방이 붙어 있다. 하지만 뺨 주위의 살은 젊디젊고 탄력이 있었다. 도대체 몇 살 정도일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것이 도리어 나를 몰두하게 만들었다. 분명한 것은 그녀가 어린애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저도 처음이에요, 펜서콜라는. 그래서 즐겁습니다만."
"그렇군요, 당신이라면 분명히 즐길 수 있을 거예요. 온 마을이 해군 아저씨들로 흘러 넘치고 있다고 하니까요."
"뭐라 해도 미국 최대의 기지 중 하나니까요."
"그러니까 상상이 가잖아요."
시원시원한 어조였지만, 나를 뿌리치려고 하는 듯한 느낌은 아니다. 뭔가 따로 맘에 걸리는 일이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그럭 저럭 얘기를 하는 동안에 내 시선은 무심코 그녀의 가슴에 감돌고 있었다. 상대도 그것을 깨달았는지 약간 왼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핸드백을 가슴에 밀착시켰다. 그래도 나를 귀찮아하고 있는 태도는 아니었다. 이렇게 물었으니까. "당신은 북부 태생이군요. 양키인가요?"
"네. 뉴욕 출신이니까요. 하지만 제가 자란 동네에서는 남한테 양키라는 말을 듣거나 하면, 모두들 기분 나빠하죠. 제가 자란 곳은 브룩클린입니다. 그러니까 다저스의 본거지이고 양키스는 모두 아주 싫어합니다. 양키라는 것은 프로야구 팀이고......"
"네, 그렇군요." 그녀는 미소지었다. "양키스를 싫어한다면, 당신은 정말로 딱 맞는 곳에 온 것이 돼요."
(제발이야, 다시 한번, 다시 한번, 지금같이 웃어 줘, 그리고 '곳'이라는 말을 발음할 때의, 그 독특한 사투리를 듣게 해 줘. 그리고 다시 한번, 그 새하얀 이를 보이고 웃어 줘.)
그녀는 나를 보았다. "담배 피워도 괜찮겠어요?"
'괜찮겠어요?' 하고 말할 때에도, 독특하고도 섹시한 사투리가 있다.
"피우세요, 어서."
가방에서 꺼내 불을 붙였던 것은, 럭키 스트라이크였다. 그 손놀림은 여배우 아이더 루핀을 연상케 했다. 한데 성냥의 불꽃 속에서, 나는 의외의 부분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녀의 손은 매우 거칠어 보였다. 피부가 꺼칠꺼칠해 있었고, 정맥이 드러나 있고, 손톱을 꽤 이빨로 깨문 흔적이 보였다. 그녀는 기분 좋은 듯이 담배를 한 대 피웠다. 어두운 차내에 흰 연기가 떠올라 간다. 손에 대한 기억은 잊고, 나는 그녀가 알고 있는 것을 뭐든지 좋으니까 가르쳐 주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뉴욕하고는 꽤 분위기가 다르죠?" 그녀는 말했다.
"네, 많이 다르군요," 대답하면서 생각하고 있었다.-내 목소리는 그녀에게 어떻게 들릴까?
"저어, 당신은 무슨 일로 그곳에 가는 길입니까?"
그녀는 다시 이쪽을 향해 지그시 보았다. 교태가 있는, 짙은 갈색 눈동자가 계속 내 얼굴을 뚫어지게 보았다. 그것은 이 세상 여자들이 몇 천 세대에 걸쳐 자연히 지닌 그 교태부리는 듯한 시선과는 전혀 다르다.
"당신은 왜 이 버스를 탔죠?" 어딘가 당혹한 듯한 빛이, 그 목소리에 담겨 있었다. 나는 웃고는, 나는 펜서콜라 기지에 부임하러 가는 길이라고 설명했다. "크리스마스 휴가는 받았지만, 섣달 그믐날에는 펜서콜라 기지에 출두하라고 명령을 받아 버려서 말입니다."
그녀는 미소를 띠우고, 한 번 내 몸을 언뜻 보고는, 다시 정면을 보고 담배를 피웠다. 생각했던 대로였다. 루즈는 칠하지 않고 있다.
"그런 거예요, 인생이란. 앞일은 모르는 거죠."
담뱃불을 비벼 끄고는, 머리를 약간 뒤로 젓히고 눈을 감았다. 핸드백을 움켜쥔 채. 얼굴 표정이 누그러지더니, 눈가의 주름이 약간 퍼졌다. 눈밑에는 파란 기미가 있다. 피로 탓일까, 아니면 나이 탓일까. 모르겠다. 버스는 넓디넓은 평지에 당도해 있고, 맞은편에서 오는 차의 라이트가 이쪽을 비출 때밖에 그녀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갑자기 그녀를 그리고 싶어졌다. 아, 그녀가 그 터틀넥의 스웨터를 벗고 내 앞에 서서 차분히 그 모습을 그리게 해 준다면 얼마나 기쁠까. 종이 위에서 그녀는 내 것이 되는 것이다. 그녀의 눈이 열렸다.
"왜 나를 보고 있나요, 베이비?"
"당신이 아름다우니까요.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바로는." 뒷말은 괜스레 덧붙였다고 곧 생각했다. 회의와 유보를 덧붙일 필요 따위는 없는데.
잠시 동안 침묵하고 나서 그녀는 물었다. "몇 살이죠?" 그래서 나는 영화와 소설, 혹은 누군가의 대사를 흉내내어 말했다.
"이제 충분히 성인입니다."
그녀는 다시 그 하얀 이를 내보이며 웃었다.
"충분히 라는 건 무슨 뜻이죠?"
킥킥 읏으면서 말한다. 머리속에 터너의 말이 되살아났다. '세상 사람들은 해군을 보면 웃지.'라는 말이.
"말하자면, 당신이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정도로는 어른이라는 의미죠."
다시 담배를 한 대 꺼내고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난 내가 아름답다고 느낀 적이 없어요. 하지만 고맙게 그 말을 받아 둘께요. 고마워요, 베이비." 담배에 불을 붙이고나서 럭키 스트라이크 담배갑을 내게 내밀었다. 필요없다고 고개를 흔들자 백에 넣었다. 거의 직각으로 팔꿈치를 구부린 왼손에 담배를 들고, 그녀는 말했다. "당신에게 뭔가 부도덕한 일면이 있다고 생각하나요, 베이비?"
그 '베이비'란 말이 싫었다. 웬지 놀림을 당하고 있는 것같이 들리는 것이다. 나를 애 취급하여, 거리를 두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좋아, 하고 나는 생각했다. 이번에는 그 프리프 코킹을 흉내내어 자못 세상 물정에 밝은 것같이 입술을 일그러뜨려 주자 그대로 입을 일그러뜨리고 귀찮은 듯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녀는 말했다. "어머나, 입의 근육이 이상해요?"
제기랄!
"아뇨, 왜요?"
"아네요." 깊이 담배를 빨고 나서 뒤에 기대어 완벽한 연기 도너츠를 한 개 내뱉아 보였다. 이어서 또 하나. 마치 타임즈 스퀘어의 카멜 네온사인같이. 그렇구나, 나는 생각했다. (그녀도 나를 향해서 연기하고 있는 거야. 분명히 나와 똑같이. 그녀도 냉정하게 행동하려고 하고 있는 것일거다.)
"지금 한 연기 도너츠 만드는 방법은 어디에서 배웠습니까?"
"부도덕한 내 사촌에게 배웠어요. 그 에는 나쁜 짓이라면 뭐든지 알고 있었어요. 내가 여덟 살 때에, 담배 피우는 법을 가르쳐 주었어요."
"아무리요. 정말 여덟 살 때였어요?"
"그래요, 뭐 그때는 흉내내어 피는 정도였지만. 뻐끔뻐끔 거리는.
그래서 아홉 살 때에는 본격적으로 피우게 되었어요."
나는 웃음 소리를 냈다. 그녀도 웃었다.
"당신은 어디 출신입니까?" 나는 물었다.
한숨 쉬고 그녀는 말했다. "여기예요. 남부-."
"남부 어디죠?"
"......"
그녀는 정확한 답을 피하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을 때, 버스 뒤쪽에서 누군가가 섣달 그믐날이면 늘상 들어왔던 노래를 시작했다. '반딧불......' 그쪽으로 귀를 기울이고나서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피워 물었다. '창문의 눈......' 다른 사람들도 같이 부르기 시작했다. 나도 무의식중에 허밍하기 시작하자 그녀는 아주 조용하게 노래 부르며 담뱃불을 비벼끄고는 두 눈을 감았다. '밟아라 정월, 반복하면서......'
차내에는 노랫소리가 점점 크게 가득 차 갔다. 1952년 섣달 그믐날. 오래되고 애절한 노래의 가락을 타고 버스는 남쪽을 향해 쉬지 않고 달리고 있다. '어느덧 세월도 지나가는 것을......' 그녀가 눈을 떴다. 두 눈동자가 눈물로 젖어 있었다. 눈을 감자 눈물이 뺨을 타고 떨어졌다. '날은 밝고, 오늘 아침은, 헤-어져 간-다......'
그녀는 그대로 눈을 감은 채 뜨려고 하지 않고 두 손을 폈다 오무렸다 하고 있었다. 그러다 두 손을 꼼짝하지 않고 가만 있었다. 차내의 노랫소리도 조수가 빠지듯 희미해져 갔다. 끝없는 어둠의 왕국을 우리는 통과하고 있었다. 이윽고 버스가 곤 커브에 당도했을 때 그녀의 몸이 내게 기대어 왔다. 완전히 잠이 들어 버려 있는 것이다.
그대로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다. 머리카락의 향내, 방금 감은 것 같은 청결한 향내가 코를 찌른다. 방금 그녀는 살짝 코를 골고 있다.
잠시동안, 오른쪽 내 허벅지에 얹혀 있는 줄 알았는데 손가락 끝이 움직였다. 어둠속에서 내 허벅지를 붙잡았던 것이다. 심장이 갑자기 고동치기 시작했다. 흥분이 몸을 빠져 나간다. 이건 어떠한 신호임이 분명하다. 신뢰와 안도감의 표명인 것은 분명하다. 나는 그때 여자의 애정을 갈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녀가 옆에 있다.
섣달 그믐날 밤 어둠 속에서 알게 된 두 사람. 그녀는 자면서 이 세상에는 말이 필요치 않는 유대가 존재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따뜻한 한숨이 팔에 닿았다. 부드러운 몸이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다. 나는 이제 충분히 어른이라구, 그렇고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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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에 모습을 나타낸지 얼마 안 되어 그녀는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잠에서 깨자 창밖의 세계는 아침의 싱그러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내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둘러 보니 차내에는 그 밖에도 빈 자리가 몇 군데 눈에 띄었다. 회색 머리의 흑인이 세상사에 찌든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고 네 줄 앞의 터너는 창에 머리를 기대고 자고 있다. 하지만 그 여자는 어디에도 없다. 그녀는 나와 같이 얘기하고, 내 몸에 기대어 잠들고, 내 허벅지를 붙잡았는데 지금은 형적도 없이 환상같이 사라져 버렸다. 내가 잠들어 버린 것조차 나는 기억 못하고 있었다. 얼마나 어설픈 남자란 말인가, 그리고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건 꿈이었는지도 모른다. 내 스스로 만들어 낸 환영이었는지도 모른다. 분명히 여자에 대하여 불타는 듯한 갈망이 그녀를 만들어 내어 이 버스에 태웠던 것이다. 그 계란형의 얼굴과 정맥이 도드라진 손과 웨이브 진 머리까지 진짜같이 만들어낸 이 쓸쓸한 섣달 그음날 밤.)
좀 더 확인하기 위해서 재떨이를 살펴 보았다. 그런데, 흔히 있는 동화나 영화의 마지막 장면과 비슷하게 천사가 찾아온 물리적인 증거가 분명히 남아 있었던 것이다. 꾸깃 꾸깃해진 럭키 스트라이크.
분명하다. 그녀는 도중에서 내렸던 것이다. 그렇게 확신하고 나는 주의를 둘러보았다. 그로부터 수십 년 지난 지금도, 나는 내가 잠든 사이에 여자가 사라져 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에 사로잡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정말 자신이 한심했다. 얼마나 바보 같은가. 그녀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묻지 않았다니. 그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이름조차 묻지 않았던 것이다. 실망하면서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내 눈은 여러 가지 톤의 녹색에 젖어 있었다. 짙은 녹색, 밝은 녹색, 풍부한 녹색, 윤기 나는 녹색. 온통 녹색에 싸인 도로를 버스는 통과해 간다. (어디인가 그 녹색 그늘에 그녀는 있다.) 라고 나는 생각했다. 우거져 있는 녹색 나무들은 내리막에서 버스가 속력을 내자 마치 벽같이 앞쪽에 우뚝 솟았고 평균 속도로 되돌아오자 다시 옆쪽으로 물러난다. 노견의 녹색 저편에는 늪 같은 강이 가로 놓이고, 그 또 저편에는 안개가 감돌고 있는 숲이 보였다. (이 녹색의 남부 어딘가에 그녀는 있다.)
그 무렵에는 아직 자연계의 사물 명칭을 몰랐다. 하지만 그 때 내 눈에 비치고 있었던 것은 금잔화, 껍질이 검은 떡갈나무, 딱총나무, 삼나무, 인동덩굴, 플라타너스, 워터 오크 그리고 버드나무라고 불리는 나무들이었다. 막 잠자리에서 일어난 듯한 멍한 의식 속에, 아직껏 그녀의 손의 감촉이 남아 있었다. 어둠 속을 돌아다니며 내 급소를 잡았던 그녀의 손, 뭔가에 겁먹고 있는 듯한 낮은 목소리, 검은 터틀넥 스웨터 아래의 풍만한 유방에 닿았을 때의 감촉, 그건 모두 현실이었다. 아니, 꿈이었는지도 모른다. 수십 년을 지난 지금도 무엇이라 말할 수 없다. 뭔가 단서가 되는 것을 찾아 재떨이의 럭키 스트라이크 포장지를 보았다. 그리고는 시선을 창밖으로 돌려 천천히 흘러가고 있는 늪과 같은 강을 보았다. 그 밖에도 눈에 비쳤던 것은-
당시에 그 모든 것들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여러 가지였다. 사탕수수 더미, 떡갈나무 가지에서 처져 있는 소나무 겨우살이 비슷한 것, 암녹색의 나뭇잎을 갑자기 뒤흔드는 어떤 동작, 그리고 헬리콥터같이 체공해 있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잔뜩 흐린 수면에 급강하하는 곤충. 정맥이 도드라진 그녀의 손, 그 풍만한 가슴.
갑자기 그녀의 목소리같이 떨리는 풀로 덮힌 갈색의 지면이 보인 것도 잠시, 버스는 다시 검은 습지대에 삼켜 들어가고 있었다. 괴물같이 치솟은 나무들이 하늘을 덮고 있다. 그 중에는 맹그로브 나무도 섞여 있었다. 물 속에 빠져 있는 울퉁불퉁 옹이가 많은 그 뿌리는 무엇인가 민첩한 사냥감을 잡으려하다 얼어붙은 큰 손같이 보인다.
(좋다, 반드시 그녀를 찾아내겠다.) 곧 습지대가 사라지고 버스는 밝은 황금색 빛으로 가득한 지역으로 접어들었다. 그곳에서는 대지 그 자체의 빛이 밝고 모래가 많고 풀의 녹색도 표백된 것같이 희끄무레했다. 먼 곳에는 가옥도 드문 드문 보이기 시작했다. 도장되어 있지 않은 은색의 판자로 만들어진 집들. 그 벽돌 굴뚝에서는 깃털 같은 파란 연기가 사뿐히 피어 오르고 있다. 작은 언덕의 큰 나무 그늘에는 세 마리 소가 지쳐서 주저앉아 있고 그 맞은편에서는 백인 소년이 안장도 얹지 않은 채 밤색털 말을 타고 들판을 뛰어 다니고 있었다.
내게는 아직 그 모든 것이 현실로 실감되지 않았다. 어젯밤에 옆에 앉았던 그 여자. 그녀는 현실 속의 인물인가? 지금 주위에 보이는 강과 숲, 습지와 곤충, 가옥과 소와 말은 현실인 것일까? 갑자기 버스를 멈추고 이 이상한 아침 세계를 헤매이고 싶어졌다. 이 처음 느끼는 남부의 땅. 그곳을 해매이며 그녀를 찾고 싶었다. (부탁예요. 버스를 세워 줘요, 운전수 아저씨. 이 남부의 땅에서 내 여자를 찾게 해 줘요.) 이것 저것 모두 나는 그녀와 함께 하고 싶었다. 그녀와 함께 보고, 이해하고, 책과 지도를 보고, 아주 많은 대화를 하고, 나무와 마을과 사람들의 이름을 찾아 내고 싶었다. 이 광대한 들판에서 어떤 군대가 싸웠는지도 알고 싶었다. 그곳에서는 어떤 영웅이 악한이 있었는지 어떤 탐험가와 모험가가 있었는지. (남부. 나는 지금 남부에 와 있는 것이다.)
좋다, 그녀를 찾아내자, 하고 마음속으로 맹세했다. 어디까지나 행방을 쫓는 것이다. 그녀가 내린 장소를 찾아 내어 그 발자취를 더듬어 찾아갈 것이다. 탐정같이 뒤를 쫓자. 그래, 캐니언과 버즈 소여같이. 홈즈와 필립 마로우같이. 그녀의 인상을 얘기하며 찾아다니자.
그리고 언젠가 어딘가에서 해질녁에 그녀와 해후한다. 그녀는 말할 것이다. 당신은 몇 살이죠? 그러면, 이미 충분히 어른이 되었죠, 라고 대답한다. 고향에 애인은 없어요? 하고 그녀는 묻는다. 그러면 네, 지금은 없어요. 라고 대답한다. 그러면 그녀는 이렇게 말할 것이 분명하다. 그럼 내 집에 머무르고 가세요. 그렇고말고, 그렇게 될 것이 뻔하다.
그런데 앞쪽에 밝고 넓디넓은 공간이 펼쳐졌다. 하늘이 갑자기 열리고 하얀 빛으로 충만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버스는 길고 완만한 오르막에 당도해 있었다. 나무들이 갈수록 듬성듬성해져간다. 그리고 마침내 언덕 꼭대기에 도달했을 때는 완만하고도 끌없이 펼쳐지는 대지가 보였다. 회색 연기를 내뿜고 있는 많은 굴뚝. 오랜만에 보는 주유소와 레스토랑. 암즈라는 이름의 그 레스토랑 옆에는 식당이라는 간판이 서 있다. 게다가 얼마나 많은 흑인들이 길가를 걷고 있는지! 버스 뒤에는 몇 대나 되는 차가 줄지어 있고 맞은편 차선에는 트럭이 달려 온다. 창을 열자 축축하고 뜨거운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그리고 그 때, 트럭과 흑인들 뒤, 가옥과 굴뚝과 얼룩덜룩한 지면 저편에 맥시코 만의 검푸른 바다가 보였다.
"아무래도......" 옆의 통로에서 계속해서 얼굴을 비비거나 주먹 쥔 손가락을 딱딱 울리거나 하면서 터너가 말했다. "종점에 도착한 것 같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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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밤 섹스를 한 뒤 세 번째 아내에게 질문 받은 적이 있다. 지금까지 몇 명의 여자와 잔 적이 있느냐고. 나는 읏으며 그런 건 모르는 편이 낫지 않냐고 대답했다. 그녀는 뾰로통해져 딴쪽을 보며 베개를 치면서 대답하라고 우겨댔다. 그 무렵 우리의 결혼 생활에 있어서 그녀는 '인티머시(intimacy)'라는 추상적 관념을 갖고 싶어하는 단계에 있었다. 그 단어는 그 해 여성지와 자기 계발을 위한 실용서 등에서 제일 유행하던 말이었다.
"그 얘길 듣기 전에는......" 감정을 다스리고 있는 듯한 목소리로 그녀는 말했다. "당신을 정말로 알고 있다고 할 수 없어요."
로즈는 아주 일상적인 말을 심각하게 만드는 데 천재였다. 나는 담배에 손을 뻗어 한숨을 쉬면서 세기 시작했다. 한데 침묵이 흐르자 로즈의 마음 속에는 그녀 자신이 찾고 있던 슬픔이 밀려 오는 것 같았다. 흐느껴 울기도 하고 욕설을 지껄이기도 하다가, 베개로 얼굴을 덮어 버렸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삼십 몇 년의 세월과 오대륙에 걸친 많은 얼굴과 이제는 윤곽이 희미해진 수많은 육체를 기억해 내려고 시도했다. 금발과 검은 머리, 창백한 피부와 올리브색 피부, 호리호리한 여자와 풍만한 여자. 로즈는 마침내 미친 듯이 성내며 침대에서 일어나 꽝하고 문을 닫더니 욕실로 가 버렸다. 잠시 후에 되돌아온 그녀에게 나는 말했다. 대강 천 이백 명쯤 될까? 그리고 전부 기억하라는 것은 무리야, 하고 덧붙였다. 로즈는 상처 입은 듯이 전혀 입을 열지 않고 정말이지 충격을 받은 것같이 몸을 떨면서 누워 있었다.
순간, 솔직히 말하는 게 아니었구나 하고 나는 깨달았다. 이 세상에는 믿고 싶지 않은 진실이라는 것이 있다. 로즈쪽에서 알고 싶어 했어도, 거의 강제였다고 해도 변명이 될 수는 없다. 그 질문에 대해서 정말로 대답했던 것은 잔혹하고도 바보스런 행위였다. 그래서 나는 다시 그녀와의 화합을 위해서 거짓말을 했다. 지금 한 말은 농담이야, 지금까지 잔 건 헤어진 아내를 포함시켜 이십여 명쯤이야 라고. 게다가 당신만큼 침대에서 멋진 여자는 없었어, 하고 덧붙이자 그녀는 울다가 눈빛을 바꾸고는 한 시간 가량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다이어트 얘기를 했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그녀 옆에 누워 여러 여자의 얼굴이 뒤범벅이 된 채 그녀와 섹스하면서-또 하나의 거짓말이다-나는 그녀를 떠올리고 있었다. 버스 안에서 잠깐 스쳤던 여자.
이덴 산타나라는 여자. 그리고 오늘 밤, 몇십 년 만에 멕시코 만에 다가가면서 내 가슴에는 그녀를 영원히 놓쳤다는 쓸쓸함이 퍼지고 있다. 이덴 산타나.
그 날, 버스는 마침내 펜서콜라에 도착했다. 밝은 햇빚이 눈부셨다. 뚜렷한 정류장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레이하운드 버스는 연석 옆에서 멈췄다. 옆에 서 있는 표지판으로 그곳이 가든 스트리트와 노스 파라폭스 스트리트의 모퉁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자아, 펜서콜라입니다." 운전수가 말했다. 그 순간 문이 부웅 하고 신음하면서 열리고 모두들 선반에서 짐을 내리기 시작했다. 터너는 내려갔고 나는 운전수 옆에 멈춰 서서 물었다. "내 옆에 여자가 앉아 있었는데요. 애틀랜타에서 타고 여기에 오는 도중 어딘가에서 내린 것 같은데- "
"백인 여자 말이오?"
"네."
"아, 생각났다. 예쁜 여자였지. 흑인과 교대로 내려갔소. 그건 파라트카였어요, 분명히."
"어디라구요7 파라트카라구요?"
"그렇소, 여기에서 59마일 가량 떨어진 마을이오. 왜 그러시오, 잊
은 물건이라도 있소? 그 여자가 갖고 가 버린?"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전 단지......"
운전수는 히쭉 웃었다. "아, 맞아. 대단한 미인이었지."
"네."
그걸로 끝이었다. 그녀와 만난 건 분명하다. 그녀의 몸이 내 몸에 닿은 것을 분명히 느꼈고, 어둠 속에서 그녀가 내 몸을 만지작거렸던 것도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이 정도라면 굉장한 일이 생길지도 모르지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는 사라져 버렸다. 파라트카라는 곳으로.
버스에서 내리자 응달 진 벽 옆의 물 마시는 곳에서 터너가 물을 마시고 있었다. 그곳에는 '백인용'이라고 쓰여 있었다. 하얀 도기 개수대에 물이 쉴새없이 방울져 떨어지고 있었다. 거기에서 5피트 정도 오른쪽에 치우친 곳까지 수도관이 뻗어 있고, 한결 작은 식수기에 접속되어 있다. 그곳에는 '흑인용'이라고 쓰여 있었다. 하지만 그곳을 사용하고 있는 흑인은 한 명도 없다.
"바닷물 같은 맛이 나는데?" 터너가 얼굴을 찡그렸다. "이 부근부터 이미 배에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하자는 의도일 거야."
"마셔도 괜찮습니까?"
"해수를 마시면 미쳐 버릴 걸."
"그럼, 참는 게 나을까요?"
"좀 기다려. 내가 미치는지 안 미치는지 확인해 보라구."
"그때는 목이 타서 죽어 있을 겁니다, 전."
마을의 순환 버스는 햇빛을 받으면서 엔진을 공전시키면서 파라폭스 스트리트 모퉁이에 멈춰 있었다. 한 그룹의 해군이 일렬로 나란히 서서 메인사이드 행이라고 쓰인 버스에 올라 타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레이하운드 버스의 운전수가 <애틀랜타 컨스티튜션>지 다발을 안고 오나 싶더니, 그걸 렉스라는 영화관 로비에 털썩 내던졌다. 그 영화관에는 <유리 동물원> 간판이 붙어 있었지만 문은 닫혀 있었고 매표소도 어두웠다.
"그럼, 갈까. 데블린?" 터너가 말했다. "에리슨행은 다른 버스야. 난 이 메인사이드행을 타야 해."
다시 만나고 싶습니다, 하고 악수를 하고 작별을 나누었다. 웬지 모르게 기묘한 기분이었다. 장시간 버스에 흔들리면서 나는 그의 헤어진 아내들의 이야기를 들었고 그의 위스키를 마셨다. 그런데 그는 지금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이다. 아주 깨끗이. 실사회를 접함에 따라서 사람은 모두 영화의 등장 인물처럼 만났다가 헤어진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영화에서는 스크린의 인물과 알게 되고 그와 매우 친밀해졌을 때 상대는 사라져 버린다. 터너가 정말로 그러했다. 게다가 둥글게 머리를 만 그 여자도. 신병 훈련소에서 알게 된 사람들도 그러했다. 고등학교 동창들도 그렇다. 죽는 것도 함께 하자는 약속을 하면서, 쉽게 헤어져 버린다.
메인사이드행 버스 승강구에서, 터너는 내 손을 잡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계단 위에서 내쪽을 뒤돌아보며 말했다. "해피 뉴이어!"
나는 손을 흔들고 메인사이드행 버스는 점차 멀어져 사라져갔다.
나는 오랫동안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오늘 밤, 그로부터 삼십 몇 년 만에 펜서콜라에 도착했을 때 나는 방향감각을 되찾으려고 똑바로 마을 중심부로 차를 타고 들어갔다.
그리고 곧 그 장소를 발견했다. 그 순간, 내가 아직 풋내기였을 무렵의 그 밝은 햇빛이 내리쬐던 아침으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완만하게 경사진 대로 양쪽에는 종려나무가 정연하게 나란히 서 있었지. 네 블럭쯤 앞에는 엄숙한 얼굴로 마을을 내려다 보고 있는 세 개의 교회가 보였다. 그 때는 기분이 의기소침해서 뭔가 으스스 한기를 느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1953년 당시 교회는 항상 무슨 일에 대해서나 '노'라고 말하고 있는 것같이 보였다. 그래서 나는 그날 아침 교회에 등을 돌리고 햇빛이 내리쬐이는 인기척이 없는 모퉁이를 둘러보았다. 도로 맞은편에는 산 카로스라는 호텔이 있었다. 에리슨행 버스를 기다리면서 나는 그 건물의 층수를 세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오늘 밤, 나는 그 때와 비교하면 초라하기 이를데 없는 그 호텔을 올려다 보며 똑같은 행동을 했다. 창에는 먼지가 들러붙어 있고, 문에는 보수한 흔적이 또렷한 그 호텔은 모두 9층이었다. 전에 하얀 제복을 입은 니그로 도어맨이 서 있던 현관 앞 계단에 오늘 밤은 알코올 중독자가 쓰러져 있었다. 그 무렵 출입구 양쪽에는 레스토랑과 술집이 있었을 것이다. 당시 반짝 반짝 닦여 있던 유리창은 지금 베니어판으로 덮혀 있다. 맨 처음 그 호텔을 올려다본 아침, 3층 창문에는 반소매 언더셔츠 차림의 뚱뚱한 남자가 밖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 외에도 그 때는 여러 사람이 투숙한 듯 싶었는데, 오늘 밤은 그런 기미 따위는 전혀 없다. 처음으로 펜서콜라에 도착했던 그날 아침, 나는 아마 단골 손님은 모두 집에 돌아가 숙취를 깨우면서 자고 있든가 마누라와 좋은 일을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오늘 밤, 나는 그 사람들은 이제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아님을 느꼈다.
산 카로스 호텔 오른쪽에는 당시-지금도 마찬가지지만-작은 빨간 벽돌 건물이 있고 그 옆에 크림색의 교회가 있었다. 그 첨탑과 십자가는 호텔 6층 높이와 같았다. 벽돌 건물은 목사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교회 지붕에는 십자가가 서 있었으니까 가톨릭이 분명했다. 스페인풍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아니면 맥시코풍이라고나 할까.
<내쇼날 지오그래픽 매거진>에 현기증이 날 것 같은 강렬한 빛에 감싸인 마을의 성당 사진이 실린 일이 있는데, 바로 그것과 같았다. 백과사전에 실려 있던 펜서콜라에 관한 짧은 설명이 머리에 되살아났다. 펜서콜라는 통칭 '다섯 깃발의 마을'이라고 말한다고 한다. 이 마을은 불과 20년 동안 13번이나 통치권이 변해갔던 적이 있는 것 같다. 그 이름 자체는 스페인어에서 유래하고 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펜서콜라. 코카콜라. 펩시콜라.
그 때, 온 몸에 굉장히 땀을 많이 흘리고 있었고 뉴욕에서 입고 온 겨울용 두꺼운 모직 제복에서 심한 악취가 나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떠났던 것은 이 냄새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고-후년에 다른 여자들이 떠나갔을 때에도 생각했던 거지만-생각했다. 정말로 그건 지독한 냄새였음이 분명하다. 몸은 이틀 동안 씻지 못했고 게다가 담배 냄새와 방귀 냄새와 술 냄새가 베어 있었으니까.
그녀는 분명히 그것을 참지 못해서 자리에서 일어섰고, 그래도 참지 못하고 버스에서 내려 버렸는지도 모른다. 해군들이란 모두 나같이 냄새가 날 거라고 믿어버렸을 것이다. 분명히, 내가 알기로도, 그들은 모두 그런 냄새를 발산하고 있다. 그렇다. 펜서콜라에는 분명히 냄새를 풍기는 해병이 많을 거라고 그녀는 생각하고 구토를 느끼고 도중에 파라트카라는 마을에서 내려 버렸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이유는 그 밖에도 있었을 것이다. 뭐랄까, 더욱 신비적이고 불가사의한 특별한 이유가.
얼마 안 있어 가든 스트리트 방향에서 구닥다리 버스가 한 대 모퉁이를 돌아와, 렉스 극장 앞에 멈췄다. 앞유리 안쪽에 한 장의 마분지가 끼어있었다. 모가 나고 비좁은 글씨체로 '에리슨 비행장'이라고 쓰여 있다. 문이 열리자 사복 차림의 운전수가 내려와 기지개를 켰다.
"이거, 에리슨 비행장으로 가나요?" 나는 물었다.
"거기 뭐라고 써 있수, 수병 아저씨? 텍사스의 브라운즈빌행이라고도 써 있나?"
안에 올라타 맨 앞줄에 앉으면서 나는 정말 바보라고 생각했다.
텍사스의 브라운즈빌이 어디지? 대체 어째서 그에게 되묻지 않았던 걸까? 정말 그런 어조로 되물을 수 있어야만 했다. 재빨리 충분한 야유조로. 그리고 생각했다. 아, 왜 그녀의 이름을 물어 보지 않았던가. 당장이라도 다른 버스에서 그녀가 내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맞아, 파라트카발 순환 버스 같은 데에서 내려 올지도 모르잖은가.) 그러자 산 카로스 호텔 옆을 돌아서 달려들어 오는 하얀 해군복 차림의 병사가 세 명 보였다. 버스를 향해 필사적으로 손을 혼들면서 무엇인가 알아 듣기 어려운 말로 소리치고 있다. 운전수는 이미 자리에 앉아 있고, 귀찮은 듯이 그쪽을 바라보았다. 이어서 점심이 들은 종이 봉지를 들고 두 명의 민간인이 역시 이쪽으로 뛰어왔다. 그들은 모두 버스에 올라탔다. 해병들은 모두 20대 후반일 것이다. 해병복의 견장으로 보아 한 명은 조포술 준위, 두 번째 사람은 무선계 이등 하사관, 세 번째 사람은 기관 준위임을 알 수 있었다. 모두 밤새도록 마셔댔는지 물기가 맺힌 눈을 하고 욕지거리를 하거나 공연히 큰 소리로 읏으며 모두 뒤쪽으로 가서 털썩 앉았다. 민간인들은 통로를 사이에 둔 맞은편에 조용히 앉았다. 그들은 말없이 있다. 침묵함으로써 뒤쪽의 술고래 해병들을 비난이나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파란 해병복을 입은, 아직 머리털이 짧은 애송이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운전수가 일어나 손목 시계를 들여다보고 언뜻 내쪽을 보았다.
"차비가 얼마죠?"
내가 묻자,
"해병들은 무료요." 운전수는 대답했다. "당신, 지금 방금 탔죠?"
"네."
"에리슨에 가면 정신 차리시오. 잇따른 흥분으로 숨이 넘어갈지도 모르니까."
그는 다시 운전석에 앉아 기어를 넣고 문을 닫았다. 버스는 파라폭스 스트리트를 달리기 시작했다.
이 길은 곧 내 인생에 빠뜨릴 수 없는 일부, 깊이 마음에 새겨진 비명이나 마찬가지다. 돌이켜 보면, 내가 지금까지 지내온 사무실과, 여자와 지낸 집과 목숨을 잃을 뻔했던 전쟁터 등은 이제 거의 잊혀졌다. 하지만 에리슨 비행장에 이르는 이 도로만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 양쪽에는 식당이 있었다. 양복점과 보석 가게가 있었다. 게다가 큰 법원 건물에 <드리프트우드>라고 하는 레스토랑.
그로부터 삼십 몇 년이 지난 오늘 밤, 이 도로를 둘러보니 가게 이름은 모두 변해 있었다. 하지만 건물 자제는 거의 원래대로였다.
그 거리에는 교회도 세 개 있었는데 그 날 그 도로를 따라 가다 보니 각각 루터파, 침례파, 프리메이슨 교회임을 알 수 있었다. 북부도시는 눈이 쌓여 있는 1월 1일, 각 교회 앞에는 밝은 햇빛을 받으며 사람들이 떼지어 있었다. 검은 슈트에 몸을 에워 싼 남자들은 정말이지 숨막힐 듯이 답답해 보였다. 게다가, 그 무렵 내가 '아주머니'라고 부르던, 적어도 서른을 넘어 뵈는 여자들, 모두가 롱드레스에 밀짚 모자를 쓰고 하얀 장갑을 끼고 굽이 낮은 질좋은 구두를 신고 있었다. 모두 예외없이 성경을 손에 들고 있었다. 그녀들을 보면서, 무의식중에 말없이 그들의 여성을 찾고 있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이 열기 가운데에서 그녀의 머리는 분명히 흩어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진과 터틀넥 스웨터를 노란 썸머 드레스로 바꿔 입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물론 그녀의 모습은 없었다. 낯선 타인들만이 눈에 비칠 뿐. 낯익은 얼굴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녀는 나를 '베이비'라고 불렀던가.)
버스는 살벌한 구역에 들어갔다. 건물은 콘크리트 블럭으로 만든 것이 많았다. 정체 불명의 빨갛게 녹슨 철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어수선한 고철 야적장, 검은 기름이 들러붙어 있는 보도, 그 옆 자동차 부품점, 식당이 몇 채인가 있었는데 모두 새해 연휴로 휴업하고 있다. 그리고 그 근방 안에 전신주가 서 있었다. 사람 그림자는 거의 없다. 여기에서는 파라폭스 스트리트만큼 햇빛은 강렬하지 않았다. 맞은편 좌석의 민간인들은 동상처럼 말 없이 앉아 있었다. 하지만 해병들이 있는 뒤쪽에서는 시종 얘기 소리가 들려왔고 가끔 와 하고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어젯밤의 일을 모두 이야기 하고 있는 것 같다. 나도 어젯밤에 체험한 것을 누군가에게 얘기하고 싶어졌다. (아, 이름 모르는 웨이브 진 머리의 여자,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
얼마 안 있어 버스는 살벌한 구역을 빠져나가 넓디넓은 평원으로 향했다. 양쪽 밭에는 야채가 가지런히 심어져 있다. 도로 가장자리를 걷고 있는 흑인도 눈에 띄게 많아져 갔다. 교회도 제법 눈에 띈다.
여기에서는 교회의 건물도 한결 작고 목조나 콘크리트 블럭으로 진 건물이었으며 비교적 큰 교회는 하얀 첨탑을 갖추고 있었다. 죄인들에게 소리치는 간판이 어느 교회 앞에나 서 있었다. '그리스도는 일어나셨다. 이번에는 여러분의 차례이다.' '이제 곧 그리스도가 오신다.' '인간에게 유익한 것은 무엇인가?'
양쪽에 싸구려 술집이 늘어 선 도로에 당도하자 버스는 속력을 떨어뜨렸다. 술집은 모두 평평한 지붕의 건물로 앞에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서클> <굿 타임즈> <잭스 포트 오 콜> <팜즈 어웨이> 그리고 <더 프리츠 인> 창유리에 '주류 소매점' 이라든가 '휘시 후라이'라든가 '버거'라는 간판을 내걸고 있는 가게도 있었다. 버스가 빨간 신호에서 정지하자 교차하고 있는 길 양쪽에서 차가 뛰어나왔다. 그때 <앵커인>이라는 가게에서 하얀 해병복 차림의 해병이 뛰어나왔다. 운전수가 문을 열자 그는 숨을 헐떡거리며 올라 탔다. 기관계 삼등 하사관.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고 다박수염은 자라 있었다. 뒤쪽에 있던 해병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고 한 사람이 소리쳤다. "이번에 임질을 걸리지 않았다면 네 발을 쏴야 해. 안 그러면 제대시켜 주지 않아."
그는 웃으면서 내 옆을 지나 뒤쪽에 있는 동료들에게 다가갔다.
<앵커인>의 빠꼼히 열린 문에서 주크박스의 음악 단편이 홀러 나왔다. 기타, 완전히 찌부러진 여자 목소리, 그것이 마치 외국어같이 들렸다. 브룩클린에 있을 때는 음악의 아주 일부라도 들으면 노래 전체가 머리에 되살아났다. 하지만 그건 힐비리, 남부 음악이었기 때문에 전혀 친숙함이 없었다. 술집 문이 닫혔다. 그 때 음악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마지막으로 듣고나서 벌써 며칠이나 지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동안 들었던 것은 그 그레이하운드 버스에서 들었던 '반딧불' 정도인 것이다.
지금도 '반딧불'을 들으면 나는 그 버스에서 맞이했던 섣달 그믐날 밤이 떠오른다. 컨츄리 뮤직을 들으면 마음은 남부로 내달아 그 도로를 달리고 있다.
버스는 교차로에서 우회전했다. 그러자 앞쪽에 긴 대로가 뻗어 있었다. 양쪽에는 잡초가 우거진 들판이 전개되고, 노견에는 발육이 도중에서 멈춘 것 같은 작은 야자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들판에는 높이 8비트의 철조망이 쳐 있다. 곧 앞쪽에 벽돌 건물이 나타나고 버스가 가까이 감에 따라 점점 더 커 보였다. 'HTU-I 에리슨 비행장'이라고 쓰인 표지가 눈에 들어왔다. 초콜릿색 제복에 하안 벨트, 허리에 권총을 찬 해병대원이 버스의 접근을 지켜보고 있다. 그 저편에, 앞으로 긴 시간을 보내게 될 시설이 보였다. 격납고, 은폐된 이 착륙장에서 날아 올라가는 곤충 같은 크기의 헬리콥터, 왼쪽의 녹색 잔디에 고요히 서 있는 하얀 병영, 에리슨 비행장. 해군과 해병대의 헬리콥터 조종사 양성소. 여기에서 훈련 받은 남자들은 즉각 한국으로 날아가 격추되어 해상을 표류하는 비행사들을 구출하는 임무를 맡는다. 여기에 알고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갑자기 공복을 느꼈다.
위장이 쑤시던 것도 잠깐, 그건 가벼운 구역질로 변했다. 여기에는 어느 누군가 나를 혼내 주거나 따끔한 맛을 보여 주려고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명령서 한 세트를 꺼내고 신분증명서를 준비한다. 나는 왜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일까.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버스는 천천히 반 선회하고 나서 문과 평행하게 정지했다. 배낭을 들고 있는 것은 나뿐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내리는 것을 기다렸다 마지막에 내려갔다. 앞쪽에서 모두가 해병대 하사관에게 신분 증명서를 제시하고 있었다. 민간인은 해병대원에게 가볍게 인사하고 해군들은 경례하고 있었다. 나도 해병대원에게 다가갔다.
"마이클 데블린 이등 수병, 착임했습니다." 나는 말하고 경례를 올려 붙였다. 해병대원은 입을 일자로 꽉 다물고 있다. 명령서와 신분 증명서를 대충 뚫어보고 나서 내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경례에 답례하더니 그는 말했다.
"착임, 수고, 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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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루 배낭을 어깨에 메고 나는 해병대원의 지시에 따라 기지의 큰길을 걸어갔다. 누군가 보는 것은 아닐까 하여 몸을 약간 앞뒤로 혼들면서 걸었다. 해상 근무중의 걷는 방법의 흉내다. 당시는 그렇게 걷는 법이 널리 퍼져 너나할 것 없이 몸을 흔들면서 걸었는데 결국에는 그것이 평상시 걸음걸이로 굳어져 버렸다.
나중에 여자들에게서 자주 그 일로 인해 웃음을 샀고 나 자신도 웃어 넘기곤 했지만 이미 고치기에는 늦었다. 인간은 자신이 되고 싶어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1953년 1월 1일, 나는 변변치 못한 수병에 지나지 않았으며 이 세상의 갖가지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고 있는 중이었다. 아마 그래서 그날 처음으로 에리슨 비행장을 걸었을 때의 일을 이 정도로 선명히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불안은 분명히 의식을 날카롭게 연마시키는 것 같다.
왼쪽으로 꺾어 샛길이 없는 한길로 들어선다. 그때, 연석 가장자리까지 다가와 자란 잔디가 신병 훈련소에서 깎은 나의 스포츠형 머리같이 깨끗이 깎여져 있는 것에 깜짝 놀랐다. 녹색 잔디의 높이는 아주 일정했으며 얼룩도 없었다. 크림과 같이 향긋하고 농밀한 흙 향기가 그곳으로부터 피어올랐으며 잎사귀 사이에 보석 같은 이슬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 향기를 지금에 이르러서는 건물과 도로만큼 기억속에 정확히 재현할 수는 없다. 소중한 오감(五感)이 담배 때문에 완전히 무디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어디에 있든 미국의 대기는 배기가스와 화학 약품에 오염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날은 촉촉하고 신선한 대기를 가슴 가득히 들이마셨던 것이었다. (그렇다, 나는 지금 플로리다에 있는 것이다. 친구 중 누구 한 사람도 온 적이 없는 이 플로리다에)
깨끗이 깔린 세 줄기의 자갈길이 잔디밭을 누비고 세 개의 병사(兵舍)의 문으로 통해 있었다. 순간 그곳에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면 될까 생각했다. 졸음을 재촉하는 듯한 대기를 통해 곤충의 울음 소리가 들려온다. '독신 병사용 거주구'는 새하얗게 칠해진 한 블록 정도 길이의 목조 건물내에 있었다. 타르 지로 이은 지붕 꼭대기에는 작은 새의 무리가 머물고 있었다. 망창문 안은 어두워서 들여다 보이지 않는다. 건물 전체가 3피트 정도 높이의 쥐색 콘크리트 블록 토대에 지탱되어져 있었다. 자신의 새로운 세계가 될지도 모를 구역을 살펴봤다. 기지의 전체적인 전망은 거리 바로 맞은편의 흰 건물로 가려져 있다. '보급부' 라는 표지가 눈에 들어오자, 심장의 고동이 갑자기 빨라졌다. 저곳에서 이제부터 나는 근무하게 되는 것이다. 해군성에 빚을 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곳이라면, 아침 점호 시간까지 잠을 자더라도 1분 이내에 달려갈 수 있지 않을까?
이 점 하나는 좋다.
그곳에서 바라보니 건물은 두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는 것 같았다. 중앙에 문이 나 있으며, 왼편 창 너머에 표면이 까칠까칠한 나무 상자더미가 보였다. 오른쪽 창에는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어서 안이 들여다 보이지 않는다. '바로 저곳에서 근무할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 (물자는 왼편 구역에 저장되어 있는 것이다). 잠시 동안 그곳에 멈춰 서서 저 안에서 이제부터 어떤 일을 체험할 것인가,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제법 먼곳에서 색소폰 소리가 흘러왔다.
블루스였다. 휑뎅그레한 기지의 어딘가에서 감돌아 오는 구슬픈 슬로우 음조다. 비애를 띤 기다란 선율 후에 침묵이 찾아왔으며, 다시 길다란 선율이 이어진다. 아마 테너 색소폰일 것이다. 작은 소절이 넘실거리며 뒤엉켜져 다시 기다란 선율로 이어진다. 그쯤에서 다시 침묵. 마치 나처럼 적적한 느낌의 가락이었다. 상처입은 마음같이, 굶주린 영혼같이, 감옥같이 적막한 사운드.
색소폰 소리가 갑자기 뚝 그쳤다. 귀를 기울여 이어지기를 기다렸으나 들리는 것은 곤충의 날개 소리와 헬리콥터의 흐릿한 엔진음 정도였다.
자루 배낭을 감싸안고, 자갈을 밟으면서 병사로 통하는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망창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썰렁한 회색방 벽에는, 해리 트루먼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때는 아직 그가 대통령이었다. 전년도 11월에 아이젠하워가 차기 대통령에 선출되어져 있었으나 정식 취임은 아직 하지 않았다. 오른쪽에는 해군의 게시판. 조그만 목조 테이블과 의자가 벽 가장자리에 놓여 있다. 아치형의 출입구 너머로 거주구가 보였다. 중앙에 높지막한 금속제 로커가 일렬로 늘어서 있으며, 그것과 마주보고 2열의 이층 침대가 쓸쓸히 늘어서 있다. 바닥은 번쩍 번쩍 닦여져 있어서, 희뿌옇게 보일 정도였다.
창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가느다란 햇빛이 그곳에 밝은 패턴을 그리고 있다. 자루 배낭을 놓고 안으로 들어섰다. 누구 한 사람 없다. 도둑놈이라도 된 듯한 느낌이다.
"아무도 없어요?" 라고 말을 걸었다.
대답은 없다.
그러자, 안쪽에서 화장실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그쪽으로 다가갔다. 로커에는 이름이 기재되어 있는 것도 있다. 침대는 하나도 예외없이 정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시트가 팽팽히 펼쳐져 있으며 단정히 접혀진 뻣뻣한 해군 담요가 가장자리에 놓여 있다. 물 흐르는 소리가 그쳤다. 뒤이어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조니 레이의 <크라이>였다. 1951년에 대히트한 곡이다. 그 해는 설령 그 멜로디와 조니 데이를 싫어해도 그 노래를 듣지 않을 수 없었다. 일년 내내 어디를 가더라도 그 곡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애인이
이별의 편지를 보내 온다면
색바랜 청바지를 입은 남자가 휘파람을 불면서 돌연 화장실에서 나왔다. 그는 멈춰 서서 싱긋이 웃었다. 엷은 갈색 머리카락, 주근깨가 두드러진 피부, 거드름 피우는 웃음.
"어서 오게. 자네는 누구지?" 라고 그는 말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해군 이등 수병, 마이클 데블린,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
"잭 워레스키야." 그는 이렇게 말하고, 내 손을 잡았다. "이곳에 배속되었나?"
"그렇습니다."
"어떤 나쁜 짓이라도 했나?"
"아닙니다, 스스로 이곳을 지원한 것입니다." 리오티 항구의 일은 입에 담지 않았다. 틀림없이 이상하게 여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실은- "
"어쨌든, 이 펜서콜라를 스스로 지원하는 녀석이 있다니, 별 꼴 다보겠군."
그는 읏으면서 채스터필드를 끄집어냈다. 한 개비 권하는 것을 거절하자 그는 자신의 것에 불을 붙이고 말했다. "이것만큼은 알아두는 편이 좋을 거야. 알겠나? 이곳은 엉망진창이란 말이야. 그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어버린 거지."
갈라진 목소리로 웃어 보인다. 얼마만큼 지독한 곳이냐고 묻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오늘 당직이지." 담뱃재가 바닥에 떨어지지 않도록 손바닥을 둥글게 펴서 담배 밑에 갖다 대면서 말했다. "자네는 이렇게 해.
우선 그 옷을 벗어던지고 샤워를 하도록 해. 그리고나서 자신의 침대를 고르도록. 그렇게 한 후, 한숨 돌리고나서 사무실로 와. 펜서콜라에 관해서 대충 가르쳐 줄 테니까."
"이곳에 들어왔을 때에는, 그다지 지독한 곳으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만."
"흥, 똥에 얼룩진 거리라도 처음에는 파리같이 보이는 법이지."
걸어나가는 그를 웃으며 배웅했다. 이 남자는 괜찮은 것 같다. 의외로 이곳에서는 유쾌히 지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워레스키는 걸음을 멈추고 소리쳤다.
"내가 자네라면 곧바로 샤워를 하겠어. 냄새가 보통 지독하게 나야지."
"예, 그렇게 하죠." 이렇게 대답하면서 그 곱슬머리 여자의 일을 또 다시 생각하고 있었다.
어딘가 먼 곳에서 블루스를 연주하는 테너 색소폰 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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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른 것은 로커 때문에 그늘져 있는 쪽의 비어 있는 상단 침대였다. 배낭을 열고 흰 속옷을 끄집어냈다. 끈적거리는 모직 제복을 벗자 멕시코 만의 축축하고 뜨거운 공기가 비로소 살갗에 느껴졌다. 구슬픈 색소폰 음조가 병사의 창을 빠져나가 맴돌아 온다. 이번에는 '블루버드 오브 브로큰 드림즈'를 한밤중의 재즈풍 터치로 불고 있었다. 얼얼한 발을 샤워용 고무 샌들에 밀어넣으면서 나는 허밍했다.
슬픔의 거리를 걸어가면......
침대 맞은편 쪽의 비어 있는 로커의 행거에 반코트를 걸었다. 속옷, 티셔츠, 양말, 진바지 등은 바닥에 쌓았다. 로커는 폭은 좁지만 깊이는 그런대로 괜찮다. 푸른 제복은 빨리 마르도록 뒤집어서 줄무늬 매트리스 위에 놓았다. 사물 보따리는 신병 훈련소에서 사용한 것을 그대로 가지고 왔다. 면도 세트와 펩소던트 치약, 체취 제거제 등으로 팽팽해져 있는 그것을 해군 지급용 타올과 나란히 역시 침대에 놓았다.
배낭 밑바닥에는 세 권의 책이 숨겨져 있었다. 그것도 모두 끄집어냈다. 한권은 <수병전범 The Bluejacket's Manual>. 푸른색 표지의 얇은 책이다. 수병용 문답서 같은 것으로서 지켜야 할 법과 규칙이 열거되어 있다. 두 번째 것은 마가레트 숙모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책이다. 숙모는 어머니의 여동생으로서 장의사 남편과 함께 맨해튼에 살고 있다. 이 숙모는 걸핏하면 내게 책을 사 주었다. 이곳에 가지고 온 것은 <명화보전 A Treasury of Art Masterpieces>란 화집으로서 토마스 크레이븐이라는 인물이 편찬한 것이었다. 표지에는 바다에서 나체로 아름다운 금발 여인이 한손으로 가슴을 가리고 또 한손으로 허벅지에 드리워진 긴 머리카락을 누르고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세 번째는 <푸른 노트> 였다. 그것은 <명화보전> 사이에 끼워져 있었으며 <수병전범>과 함께 로커의 안쪽에 쑤셔 넣었다.
워레스키가 담요와 베개와 매트리스 커버를 가지고 돌아왔다. "해군에 들어오는 녀석은 누구든지 하루 세 끼 식사와 마른 '방귀 보자기'가 보장된단 말이야." 라고 그는 말했다. "자아, '방귀 보자기'를 가지고 왔네."
돌아가려고 하는 그에게 저 색소폰을 불고 있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 봤다. 워레스키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귀를 기울이고 나서 말했다. "바비 볼덴이라는 녀석이지. 성질이 고약한 녀석이야. 전쟁 영웅인데 어쩐지 정이 안가는 놈이야. 난봉꾼이지. 하지만 색소폰 연주만은 기가 막히지. 그렇지 않나?"
"예, 정말 그렇군요."
"좋은 것 하나 가르쳐 줄지. 녀석에게는 접근하지 않는 편이 좋을 거야."
그 보잘 것 없는 화장실에서 처음으로 면도했을 때의 일은 잘 기억하고 있다. 그곳에는 야트막한 세면대와 조그만 거울, 그리고 소변기와 문이 없는 대변 보는 곳이 있었다. 구석에는 금속으로 된 쓰레기통. 그곳에는 커다랗고 흰 세탁 보따리가 옆에 붙어 있었으며, '럭키 백'이라는 명필의 표찰이 달려 있었다. 해군에서는 자신에게 필요없는 옷과 오래 입어 낡은 옷 따위를 그곳에 넣게 되어 있다. 누구라도 그것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힐끗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그녀는 럭키 스트라이크를 피우고 있었지. 이 남부의 어딘가에 그녀는 있는 것이다. 아마 남자와 함께 지내고 있을 것이다. 그 녀석은 자신을 분별할 줄 아는 어른이겠지. 그녀는 그곳에 있는 것이다. 그래, 파라트카에. 창 바깥의 팜나무 잎사귀가 미풍에 흔들리며 바삭 바삭 소리를 내고 있다. 귀를 기울이면서 생각했다.
팜나무를 실제로 보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이제까지는 영화나 코믹, 그리고 <내셔널 지오그래픽 매거진> 등에서 봤을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이 화장실에서 면도를 하고 있다. 눈앞의 창문 바로 바깥에 팜나무가 있다. 바람에 흔들려 잎이 바삭 바삭 소리를 내고 있다. 마치 한숨을 내쉬고 있는 것같이 지금 기분이라면 바깥에 나가 저 팜나무를 만질 수도 있을 것 같다. 이곳은 플로리다다. 펜서콜라. 나는 이곳에 있다. 브룩클린으로부터 오랜 시간 버스에 흔들리며, 이 특별한 곳으로 찾아왔다. 오로지 나 혼자 찾아온 것이다. 그녀는 왼손으로 럭키 스트라이크를 피우고 있었지.
샤워 밑에 서서 더운물 마개를 최고 위치까지 돌렸다. 버스를 세 번이나 갈아탄 긴 여행의 피로를 살갗을 찌를 듯한 뜨거운 물이 씻어 주기를 바랬다. 아, 이렇게 뜨거운 물을 뒤집어쓴다는 것은 얼마나 사치스러운 일인가?
실은 해군에 들어오기 전에 나는 독립된 샤워실에서 샤워를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살갗을 핑크빛으로 물들이고, 머리카락을 충분히 적시면서 혼자서 샤워 밑에 서 있자니 그것이 바로 천국이다. 그것이 그때의 실감이었다. 프로이드 식의 해석 따위는 엿이나 먹어라.
어느 때, 신병 훈련소에서 알게 된 남자에게 그 비밀을 누설한 적이 있다. 독립된 샤워실에서 샤워를 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말하자 그는 좀처럼 믿어 주지 않았다. 무리도 아니다. 그는 브룩클린의 복도도 없는 좁은 아파트에서 자란 것이 아니라, 착실하고 정상적인 집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우리 아파트 방의 배치가 어떠한 식으로 되어 있었는지 도저히 그에게 설명할 수는 없었다. 우리 욕실은 L자형으로써 욕조와 화장실이 L자의 제각기 끝 부위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싱크대가 그 사이에 있었다. 훗날에, 장시간 샤워를 하는 나를 이상하게 여기는 여자들에게 그것을 설명한 적이 있다. 우리집 욕실은 내 한 몸뚱이 돌릴 말한 여유도 없었으며 수도관은 1년 내내 뜨거워져 있으므로 기댈 수도 없었다 라고. 습기 속에서 바퀴벌레는 비대해졌으며, 단 하나밖에 없는 창은 수차례의 페인트칠로 인해 창틀에 들러붙어 버렸다. 그녀들은 도저히 그런 사실들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에리슨 비행장에 처음 도착한 그 날, 스스로 브룩클린에서 지낸 생활을 떠올리자, 기분이 언짢아지기까지 했었다.
(이봐- !) 라고 나는 그때 혼잣말을 했다. 쓸데 없는 일은 떠올리지 말라구! 너는 여기 있는 거야. 이곳에 훌륭히 도착한 거라구. 이곳은 플로리다란 말이야. 지금쯤 뉴욕에서는 눈이 내리고 있겠지.
타올로 몸을 닦고 있자니 바비 볼덴의 색소폰 소리가 또 다시 들려왔다. 속시원하게 점프하는 듯한 곡이다. 가사가 머리속을 스쳤다.
길거리에서 시드와 점프하네
그는 디스크자키 클럽의 회장이라네
작사가는 레스터 영이며 노래를 부른 것은 킹 프레저. 에스닉의 라디오국 WEVD의 심포니 시드의 프로그램을 위해 지어진 곡이다.
어느 시기엔가 밤중에 자주 그것을 듣곤 하다가, 어느새 잠들어 버렸던 적이 있었다. 그러다 눈을 떠보니까 라디오에서는 헝가리 노래가 흐르고 있다. 그것은 뉴욕에서 가장 색다른 라디오국이다. 여하튼 헝가리 아워가 있었으며 심지어 러시아 아워가 있었다. 게다가 아이리쉬 아워, 리투아니아 아워까지 있었다. 매일 밤 한밤중이 되면 시드가 등장하여 재즈를 연주한다. 당시에 나는 어렸으므로 '히피' 라든가 '스퀘어' 라든가 하는 개념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래도 시드가 히피인 것은 알고 있었다. 만나 보지는 않았지만 바비 볼덴도 히피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렇다, 반드시 그를 만나도록 하자. 몸을 다 닦고는 타올을 두르고 샤워용 고무 샌들을 신었다. 사물보따리와 더러워진 속옷을 손에 쥐고 침대로 향했다.
그리고 아치형 출입구에 섰을 때 나도 모르게 멈춰 섰다. 연상의 수병이 내 침대 옆에 있었다. 경찰봉 가죽띠를 손목에 감아쥐고 그봉으로 가볍게 넓적다리를 두드리고 있었다. 탄약 포장비계 일등 하사관이다. 흰 제복 차림으로 키는 나보다 작았으나 등골을 바싹 펴고 있었으며 꼭 맞는 상의 밑으로 근육이 불거져 있었다. 소매에는 세 개의 줄. 그 한 개의 줄이 4년간의 근무를 의미하는 것이다. 얼핏보아 그 모습은 용맹스러운 산양의 수컷을 연상시켰다. 갑자기 불안이 치밀어 올랐지만 두려워진 것은 그 탄탄한 몸도 경찰봉 때문도 아니다. 나를 위축시킨 것은 그의 얼굴이었다. 불그스레한 귀밑 털.
눈썹이 있어야 할 위치에서 손가락 두 개 분의 위쪽에 쓰고 있는 흰 모자. 그의 얼굴에는 눈썹도 없으며 속눈썹도 없었다. 그 눈은 우중충한 회청색이었으며, 더욱이 전혀 깜빡거리지 않는다. 입은 하나의 선이었다. 굳게 다물어져 있어서 입술이 거의 보이지 않으며 핏기도 없다. 그 입을 가위질하듯이 양쪽 뺨에 선이 하나씩 세로로 새겨져 있다. 얼굴의 살갗은 비닐과 같이 번질 번질 빛나고 있었다. 그것이 래드 캐논과의 첫 대변이었다.
그는 수피트 왼쪽으로 움직여 내가 고른 로커 옆에 섰다. 그 눈은 나를 응시한 채다. 나는 알아차리고 나서 단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일순간, 자신이 천장으로부터 우리 두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묘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기척이 없는 병사와 그것을 에워 싼 팜나무가 보였다. 창문에서 홀러 들어오는 산들바람이 느껴졌다.
고참병과 대치하고 있는 신병. 서로 꼼짝 않고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다. 2초, 아니 한 시간쯤으로 느껴졌다. 지금도 그때 가슴에 떠오른 생각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여기서 눈을 돌리면 끌장이다, 그것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얼음과 같이 서늘한 두려움이 명치끝을 타고 전해져 왔다.
결국, 상대의 얼굴에 눈을 고정시킨 채 나는 말했다. "실례하겠습니다."
앞으로 나가고자 하는 몸짓을 보였으나 상대는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다. 그가 비켜 주지 않으면 나는 로커 앞으로 갈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제 로커인데요."
상대의 얼굴에 웃음 같은 것이 번졌다. 그러나 역시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다. 일순간 구중충한 청색에 밀크 한 방울이 떨어진 듯이 그의 시선이 흐려졌다. 곧이어 그 시선은 마치 칼날같이 내 속으로 파고들어 나의 약점과 연약함을 찾아내는 듯했다. 나는 시선을 돌렸다. 몸을 약간 돌려 타올을 만지작거린다든지 사물 보따리를 뒤적거리며, 무엇인가를 찾는 척했다. 비참한 기분이었다. 나는 결국 제압당해 버렸던 것이다. 개와 같이, 패배를 인정해 버린 것이다. 세상에서 격리된 이 이상한 장소에서.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새해의 첫날에.
"이름을 말해 봐, 풋나기."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마이클 데블린입니다."
"해군 이름 말이야, 풋나기"
"464 0237"
"그뿐인가?"
"464 0237-입니다."
긴 침묵이 흘렀다. 상대는 꼼짝 않고 나를 응시하고 있다. 나는 공포를 무마하기 위해 친숙한 듯한 미소를 지으려고 했다.
"열어 봐!" 그렇게 말하고 그는 로커 앞에서 비켜 섰다. 짧은 양팔이 겨드랑이 밑에 드리워져 있다. "무엇이 들어 있는지 내가 봐야 겠어."
나는 다이얼 자물쇠를 돌렸다. 내가 태어난 달 6, 태어난 날 24, 태어난 해 35. 일등 하사관은 안을 들여다봤다. 그리고나서 손으로 문짝을 냅다 후려쳤다. 굉장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는 다시 한번 후려쳤다. 잇따라 또 한번. 금속음이 병사 안을 빠져 나간다. 마지막으로 또 한번 후려치고 나서 그는 입을 열었다.
"똑똑히 알아 둬. 이건 너의 로커가 아니야. 알았나?"
신음하듯이 말하고나서 경찰봉으로 문을 두드렸다.
"알겠나, 이 로커는 말이야, 미 해군의 소유물이야." 다시 한번 문을 세게 두드리고 "그리고 내 허락 없이는 너는 이 로커에 접근할 수도 없다. 알았나?"
또다시 문을 후려친다. 입 가장자리가 찌릿 찌릿 흔들리고 있었으나 번질 번질한 얼굴은 조금도 움직임이 없다. 그리고나서 그는 안을 들여다 봤다. 가장 윗단의 선반에 손을 뻗어 놓여 있던 물건을 모조리 끌어냈다. 워크 셔츠, 흰 제복, 속옷, 양말. 두 번째 단 선반에 놓여 있던 물건도 바닥에 팽개쳤다. 마지막으로 나의 반코트를 옷가지 위에 떨어뜨리고 나서 그는 말했다,
"알겠나? 이 풋나기야. 나는 이 기지의 MAA란 말이야. 선임 일등하사관이지. 모른다면 가르쳐 주겠는데, 이 병사의 로커 할당은 내가 한단 말이야. 알겠나? 나란 말이야! 다른 누구도 아니야. 알았나? 바로 나야! 미 해군, 탄약 포장비계 일등 하사관, 웬델 캐논이지"
"그렇습니다만, 저......"
"그렇습니다만이고 뭐고, 바로 내가 말했쟎아. 아직 모르겠나? 내가 허락하지 않는 한 너 스스로 로커를 고르는 것은 물론, 그 더러운 코를 벌름거릴 수도 없단 말이야. 알겠나?"
그의 시선은 바닥의 옷가지들로 향하다가 다시 로커로 옮겨갔다.
"뭐야, 저건?"
보티첼리가 그린 긴 금발 여자의 그림이 표지에 나타나 있는 큼지막한 화집을 그는 끄집어냈다. 타이틀을 읽으면서 눈을 깜빡이고 있다. 그리고나서 내쪽으로 몸을 돌렸다.
"<명화보전>?"
"예, 그것은, 그러니까..., "
"<명화보전>?" 앙칼진 목소리로 소리치면서 화집을 내 얼굴 앞으로 들이밀었다. "넌 도대체 뭐냐? 변변치 못한 플레이보이냐?" 목소리를 한 옥타브 더 높여, "도대체 말이 되는 거야? 이런 것이 빛나는 미해군의 로커에 들어가 있다니!"
그는 즉시 등을 돌리자마자 화집을 통로에다 팽개쳤다. 비어있는 침대에 일단 부딪친 화집은 곧바로 바닥에 팽개쳐졌다. 끼어져 있었던 <푸른 노트>가 쏟아져 나왔으나, 캐논은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그는 꽁짝 않고 내 얼굴을 노려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주위의 모든 것에 불그스레한 안개가 끼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당장이라도 분노로 몸이 폭발할 것 같았다. 주먹을 휘둘러 한 방 먹여 때려 눕히고 싶었으나 손을 쳐든 순간에 허리에 감고 있었던 타올이 떨어져 버렸다. 나는 벌거벗은 채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캐논은 턱을 바싹 당기고 코로 숨을 쉬고 있다.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나는 다시 한 발자국 다가갔다. 그의 얼굴에 닿듯이 바싹 다가갔으나 그의 푸른 눈은 깜빡 거리지도 않는다.
"어쩌겠다는 거야? 내게 반항하겠다는 건가, 풋내기?" 조용한 어조로 그는 말했다. "알몸으로 내게 어떻게 해보겠다는 거야? 응? 내게 반항하겠다는 건가?"
나는 잠자코 있었다.
"좋아, 네놈을 위해 좀더 좋은 것을 가르쳐 주지." 캐논은 엷게 웃었다. 그 얼굴을 노려본 채 나는 한 걸음 물러섰다. 캐논은 시치미 떼는 얼굴을 하고 있다. 나는 타올을 집어서 허리에 둘렀다.
"지금 곧 짐을 챙겨서 211번 로커로 가도록 해. 알겠나? 그리고나서 네 시트를 가지고 그곳 침대로 가는 거야. 어느 것인지 알겠지? 저것 말이야, 화장실 바로 옆의 침대지. 너에게는 안성마춤일 거야, 풋나기. 밤새도록 불이 켜져 있을 테니까 <명화보전>을 실컷 볼 수 있지. 저곳이라면 이 빛나는 미해군 병사에서의 피곤을 깨끗이 풀어버릴 수 있을 거야."
이제는 완전히 냉정을 되찾은듯이 그의 목소리는 냉혹 그 자체였다.
"그리고 오늘 밤" 그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제 3초소 근무를 서도록 해.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야. 그 정도 시간이면 세계의 명화를 충분히 감상하실 수 있을 거야."
그는 이야기를 끌내고 등을 휙 돌리더니, 바닥을 번쩍 번쩍하게 광이 나는 구두로 쿵쿵 울리면서 멀어져갔다. 그 등 뒤로 망창문이 쾅하고 닫혔다.
나는 잠시 동안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이곳이 '외계' (나는 민간인 세계를 외계라고 부르고 있었다)였다면 녀석을 늘씬하게 패주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내가 뻗어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곳이 외계였으면 저 책을 그의 입 속에 처박았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저 번질번질한 얼굴에 어떤 상처라도 입혔을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이 해군에서는 그런 짓을 한다면, 결국 영창행이다. "빌어먹을!"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나서 몸을 떨었다. 이제와서 무슨 말을 하든 그에게 위압당한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 그 땀방울 하나 흘리지 않는 얼굴과 더럽혀진 눈같은 색깔의 눈과, 세 줄의 계급장, 단지 그것만으로 완전히 항복해 버렸다. 굉장한 펀치를 맛본 것이 아니다. 단순히 그녀석쪽이 계급이 높다고 하는, 단지 그것뿐이다. 더욱이, 내가 이곳에 온 것은 지원했기 때문인 것이다. 나는 스스로 서명하여 해군에 들어왔다. 그 결과가 이것이다. 일순간, 자유롭게 브룩클린 거리를 싸돌아다녔던 그 무렵의 일들을 떠올리고 울고 싶어졌다. 다음 순간, 몸을 비틀어 팔이 부러지도록 문짝을 후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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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른 노트로부터의 발췌
팬이 종이 위를 굴러가는 소리를 좋아한다. 나는 지금 이 문장을 샤파 만년필로 쓰고 있다. 잉크가 새어 손가락이 물들기도 하지만 삭삭 하는 소리가 좋다. 프로 만화가들은 모두 강철로 된 크로우 쾰의 펜촉을 사용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펜촉이 언제나 갈라져 버려서 그것을 능숙하게 구사하지 못한다. 틀림없이 손가락 끝에 힘이 너무 들어간 까닭이다. 펜을 쥐는 법이 나쁜지도 모른다. 한번, 백화점에서 파카51을 시험해 본 적이 있다.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거침이 없으며 펜촉에 탄력성이 있어서 굵은 선과 가느다란 선을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지만 가격이 20달러. 언젠가는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무리다. 이 해군의 값싼 급료로는 당분간 무리일 것이다.
지금, 그림을 굉장히 그리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필요한 도구가 없으며 뭐니뭐니해도 그 캐논에게 발각되면 군법 회의에 보내져 버린다. '그런 그림을 그리는 놈은 얼간이들뿐이야' 하고 녀석이 지껄이는 것을 듣는다면 참야내지 못할 것이다.
뛰어난 해군 장병이 되기 위해서는 다음 사항을 준수한다. 충절을 소중히 여기고, 명령을 엄수할 것. 매사에 있어서 솔선 수범할 것. 투사로서 신뢰받는 사내가 될 것. 못된 짓을 하지 말 것. 공정할 것. 정직할 것. 쾌활할 것. 청결을 소중히 할 것.
<수병전범>
우리들 인간은 틀림없이 신이 몽상했던 존재인 것이다. 어쩌면 신은 지금도 계속해서 몽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말이다. 이 세상의 모든 인간과 마찬가지로 나는 이전에 신을 믿었다. 신에게 기도도 했으며 숭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까지의 일이다. 그 날, 나는 소리 내어 말했다. 어머니같이 선량한 여자를 죽게 하는 하느님이 도대체 무슨 신이란 말인가?
한번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자 걷잡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도대체 어떤 신이 히로시마와 같은 참사를 일으키게 한단 말인가? 어떤 신이, 600만이나 되는 유태인을 강제 수용소에서 죽게 한단 말인가? 어떤 신이 수많은 사람들을 가난으로 몰고 간단 말인가? 고향인 브룩클린에는 악덕 경관과 살인자와 부패한 정치가들이 들끓고 있다. 어째서 신은 그런 놈들을 살려두고 내 어머니를 죽게 한단 말인가? 어째서 신은 화집을 벽에 내팽개치는 놈을 벌 주지 않고 내버려 둔단 말인가?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당연히 예술에 있어서도 책임을 지고 있을 것이다. 신은 이렇게 말했던 적이 있음에 틀림없다 - 좋아, 이 세상에 예술을 존재케 하지. 하지만, 만일 그렇다고 하면 어째서 예술을 증오하는 캐논 같은 놈을 이 세상에 방치하는 것일까? 실제로 이유를 알 수 없다. 이것은 특별히 요즈음 시작된 것이 아니다. 어느 세상에도 야만인은 있었으므로. 그렇다, 로마를 공략하려고 호시탐탐 엿보고 있었던 서 고트 족과 같은 놈들이 있었던 것처럼 놈들은 아름다운 것을 모조리 멸망시켰으며 수만 명이나 되는 사람을 살해하고 욕보였다. 그런 것이 어째서 신의 계획의 일부란 말인가? 그런데도 신이 존재한다면 신은 악몽을 꾸고 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지 않은가?
아니다, 어쩌면 진상은 다른 것인지도 모른다. 좀더 단순한 것인지도 모른다. 틀림없이 신은 짓궂은 존재인 것이다. 아마 그럴 것이다.
신은 틀림었이 사람들이 고통스러워 하는 것을 보고 즐거워하는 그런 짓궂은 존재인 것이다.
Agostic(명사) 절대자(신)와 사물의 본질은 불가지(不可知)라고 믿는 자, 혹은 인간이 알 수 있는 것은 스스로 체험하는 것에 한정되어 있다 라고 믿는 자. (그것은 나다.)
Aquiline(형용사) 매부리코의.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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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0시 29분 전에 철책 옆의 비포장도로를 제3초소까지 어슬렁 어슬렁 걸어가 프레디 헤러드라는 이름의 몸집이 작은 동양계 젊은이와 교대했다. 그때 건네 받은 것은 모의 스프링필드 라이플과 실탄이 채워져 있지 않은 탄띠였다. 입초중에 잠자는 것은 단념하는 편이 좋다고 노래부르는 듯한 갸날픈 목소리로 헤러드는 말했다. 래드 캐논이나 해병대 놈이 30분마다 지프를 타고 둘러보러 온다는 것이다. 헤러드는 종종 걸음으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내가 경비하기로 되어 있는 것은 커다란 쓰레기 수집고였다. 일주일만 지나면 쓰레기로 가득 차 트럭으로 쓰레기 처리장까지 운반되는 금속제 상자다. 이것은 차 한 대 수용할 수 있을 정도의 크기로서, 신병 훈련소에서도 본 적이 있다. 그러나 그 쓰레기 수집고를 경비하라는 따위의 명령은 받은 적이 없었다. 탄환도 나오지 않는 라이플을 어깨에 메고 주위를 돌아다니는 동안 은근히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쓰레기 수집고 뒤편에는 철조망이 쳐져 있으며 그 맞은편의 하이웨이를 헤드라이트가 이동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래드 캐논이나 그가 강요한 임무만큼 나는 바보가 아니다. 어찌 되었든 간에, 이 거대한 쓰레기 수집고를 소련군이 뺏으러 올 리는 없다 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 입초가 노리는 점은, 단지 파수에 임한 병사를 잠들지 못하게끔 하는 것에 있는 것이다. 놈들은 그것을 '단련' 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대개 단순히 상관에게 복종한다고 하는 그것뿐, 하찮은 행위인 것이다. 이쪽은 밤새 자지 않고 정찰병이 오기를 기다리고, 정찰병은 보초가 밤새 깨어 있는지 어떤지를 확인하러 온다. 이것이야말로 변변치 못한 해군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 없어져야 할 병폐가 아닌가?
그러나 얼마쯤 지나자 이제까지의 불만이 오히려 다른 방향으로 홀러가고 있임을 느꼈다. 넓다란 들판에서 벌레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별이 총총한 하늘을 가로지르는 은색의 구름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기분이 매우 상쾌해졌다. 어둠 속에 떠돌고 있는 바다 내음은 습기를 띠고 있었다. 그것을 손에 쥐고 주물럭거려, 눈을 뭉치듯이 둥글게 매만져서 별을 향해 힘껏 내던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목적 없이 지금 이곳에 있다. 훗날, 밤새도록 일을 한다든지, 필름을 현상한다든지, 여자와 잔다든지, 다음 여행에 대비하여 티켓과 여권과 비자를 체크한다든지 하고 있을 때, 젊고 고독했던 그 무렵, 아무런 목적도 없이 별이 가득한 하늘을 을려다 보고 있었던 그 펜서콜라의 밤이 몹시도 그리워지곤 했다.
그날 밤, 그 어둠에 적응하면서 여러 가지 톤의 검정 빛깔을 경험하였다. 철조망 저쪽편의 푸른빛을 띤 검정, 무성한 잡초의 거무튀튀한 검정, 나무들 줄기의 한층 짙은 검정, 만화가 크레인이었다면 이것을 어떻게 그려낼까, 라고 생각했다. 눈에 들어오는 모든 어둠의 세계. 그는 아마도 이곳이 플로리다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팜나무를 덧붙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곳에 팜나무는 한 그루도 없다. 병사부근은 모조리 소나무이다. 하지만 화가에게는 그리는 대상을 보기좋게 그리고 진실되게 표현하기 위해, 그러한 작위를 가하는 것이 허용되어 있다. 아니, 그러한 작위를 가하는 것이 당연시 되어 있다.
크레인은 틀림없이 그러한 테크닉을 항상 이용했을 것이다. 캐니프 역시 그렇다. 뭐라고 하든 그들은 사진보다도 진실에 가까운 그림을 그렸다. 그렇다, 그 두 사람의 손을 거치면 현실보다 훨씬 정돈되어 보이는 것이 얼마나 많이 있단 말인가? 이 세상은 혼돈 속에 있으며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은 모두 허위에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일단 예술가가 세계를 형성하면 모든 것이 순조롭다. 만일 예술가가 그 만남을 연출했더라면 그 버스에서 만난 여자를 그대로 버스에 태워두고 그녀가 젊은 수병을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도록 배려하지 않았을까? 그렇고말고, 그래서 둘이서 끌어 안고 오랫동안 행복하게 지내게 했을 것이다.
쓰레기 수집고의 문을 열자 악취가 물씬 풍겨온다. 한 걸음 다가가서 보니 쓰레기 내용물이 선명히 보였다. 자동차 타이어, 망가진 쇠조각, 재단된 종이, 마른 팜나무 잎사귀, 그밖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것들로 엉클어져 있다. 악취의 근원이 분명해졌다. 녹슨 쇠, 타버린 종이, 고무, 부식된 금속. 도시의 냄새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시골 냄새도 아니다. 나는 중얼거렸다. (그래, 이것은 해군 냄새다.
해군에서만 맡을 수 있는 냄새야. 나는 결코 이 냄새를 평생 잊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생각했던 대로 그렇게 되었다.
그때, 들판 저쪽편 어둠 속에서 라이트가 상하로 오르내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좌측으로 이동하여 멈췄다. 엉겁결에 모의 라이플을 거머쥐었다. 라이트는 또다시 움직이더니, 멈췄다. 다음 순간,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점점 커져온다. 제법 엔진 소리가 크게 들리기 시작했으며, 라이트가 갑자기 밝아진 듯하자 나는 10피트 전방에 정지한 지프의 하이빔을 똑바로 얼굴에 뒤집어 쓰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터프하게 보이려고 나는 라이플을 겨누었다.
"거기 누구야?" 싸구려 영화의 대사같이 내뱉었다.
대답은 없다. 한 남자가 차의 조수석에서 내려왔으나 라이트가 눈부셔서 얼굴을 알아볼 수 없다. 사나이가 앞으로 다가왔다. 캐논이었다. 클립보드를 가지고 있다.
"네 놈은 지금쯤 저 세상에 가 있어야 해." 라고 그는 말했다. 바로 눈앞까지 다가와 그 눈썹이 없는 눈으로 나를 노려본다.
"이런 경우는 말이야, 우선 상대에게 암호를 물어보는 거야. 상대가 말하지 못하면, 즉시 발사하는 거지."
"하지만 암호는 아직 전달 받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스스로 묻지 않았나?"
"저는 이 기지에 도착한 지 얼마 안됩니다. 아직 이것저것 규칙을 모릅니다. 그래서......"
"변명은 그만 둬. 단지 인정만 하면 되는 거야."
"무엇을 말입니까?"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라는 거야, 이 얼간아! 너는 자신이 해야만 할 일을 아무에게도 묻지 않은 채, 미합중국의 초소에 서 있다고 고백한 거야. 당연히 알아두어야 할 암호의 확인을 게을리한 거지. 즉, 임무 수행에 실패했단 말이야. 임무의 내용을 확인하지 않은 거지."
"하지만, 만일 당신이 소련인이었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임무는 수행할 수 없었습니다. 이 라이플은 실탄을 발사할 수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이토록 법석을 떨 것까지는 없지 않습니까?"
눈을 껌뻑이고 나서 캐논은 지프의 운전석쪽으로 몸을 돌렸다. 핸들을 쥐고 있는 사내의 얼굴은 눈부신 헤드라이트의 그늘에 가려 있어서 잘 보이지 않는다.
"들었나, 잉펀티노? 지금 막, 이 저능아가 한 말을 들었어?"
"아니요."
"이토록 법석을 떨 것까지는 없지 않습니까 라고 말하지 않았나?"
캐논의 목덜미 혈관이 불끈거리는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이 기지는 또 한 놈의 저능아를 뉴욕에서 받아들인 것 같군. 그렇지 않나, 잉펀티노?"
잉펀티노는 잠자코 있다.
"그래서, 뉴욕에서 온 저능아의 머리를 약간 긁어 주면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해? 바로 그 순간 이 녀석은 뉴욕에서 온 허풍쟁이로 변신하는 거야. 그러나 이 풋나기야, 아직 궁등이가 퍼런 주제에 주둥이만 나불거리는 신병 따위는 이 기지는 필요치 않아! 그렇지 않나, 잉펀티노?"
침묵을 지키고 있는 잉펀티노에게도 캐논은 화가 치밀기 시작한 듯 싶다.
"귀는 어디에 달고 있어? 상관의 이야기를 듣고 있지 않는 건가, 자네는?"
"아닙니다, 듣고 있습니다."
"좋아, 그렇다면 이 녀석을 어떻게 하면 좋겠나? 이 브룩클린 출신의 '미스터 생떼쟁이'를?"
나 자신이 브룩클린 출신이라는 것은 그에게는 아직 말하지 않았다. 녀석은 내 서류를 살펴본 것이다.
"그것은 일등 하사님의 판단에 맡깁니다."
번쩍이는 라이트 그늘에서 잉펀티노가 말했다. 조금은 떨떠름하면 서도 친근감 있는 목소리였다.
"내가 진심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해 주지." 라고 캐논은 말했다.
"나는 이 빌어먹을 신병을 빛나는 해군에서 내쫓아 버리고 싶어, 2년쯤 영창에 처넣은 후 불명예 제대를 시키고 싶단 말이야." 한숨을 내쉬고, "그러나 변변치 못한 이 신생 해군에서는 이제 그런 짓도 할 수 없지."
그는 클립보드와 볼펜을 내게 건냈다. "이곳에 사인하도록 해!"
괘선으로 된 서류의 가장자리 공란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종이에는 기지내의 각 초계점과 시각이 쓰여 있었다. 오른쪽 난에 당직을 섰던 다른 병사들의 서명이 있었다. 나도 시키는 대로 했다.
캐논의 손톱은 깨끗하게 손질이 되어 있었다.
"쉬엿!" 캐논은 말했다. 나는 몸의 힘을 뺐다. 다음 순간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목소리를 일변시키면서 고함을 질렀다. "차렷!" 나는 재빨리 소총을 어깨에 메고 차렷 자세를 취했다, "좋아. 다음 교대 시간까지 그 자세대로 있어라!" 캐논은 말했다. "자세를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하려고 잔꾀를 부리는 날엔 목숨이 없어질줄 알아. 사령관님께 보고해 버릴 테니까 말이다."
휙하니 몸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지프 차에 다가가서 올라타자 지프는 급발진해서 달려갔다. 아주 짧은 한 순간, 또 한 사람의 수병의 얼굴이 보였다. 검은 머리칼, 붉은 빛을 띤 얼굴.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지프 차가 멀어져가자 주위의 어둠이 더욱 깊어졌다. 차렷 자세인채 지프의 라이트가 메인 게이트의 라이트에 합쳐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았다. 소총은 무릎에 놓았다. 빌어먹을 캐논 녀석. 잠을 자지는 않았으나 완전히 깨어있던 것도 아니었다. 분노가 또 하나의 호흡처럼 고동치고 있었다. 브룩클린에 있을 무렵 분노의 발작에 사로잡혔을 때처럼 시도 해보았다. 머리속을 비우는 것이다. 글자를 모두 지워버린 칠판처럼. 그러자 캐논의 얼굴이 칠판에 나타났다. 쓰레기 수집 창고와 <수병전범>까지 나타났다. 그것들을 젖은 걸레로 닦았다. 한 번, 두 번, 모든 것이 깨끗이 사라져 버렸다. 글자가 지워진 머리속의 칠판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칠판은 말끔했다. 마치 평화를 상징하는 것처럼.
다음 순간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지프차의 라이트가 다시 접근해오고 있다. 일어서서 바지의 흙먼지를 털었다. 소총을 어깨에 메고 차렷 자세를 취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저 친구들은 암흑 속에서도 투시할 수 있는 쌍안경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앉아서 졸고 있는 장면을 사진으로 찍었는지도 모른다. 지프는 타이어를 울리면서 정지했다. 잉펀티노가 엔진을 걸어놓은 채 운전석에서 뛰어 내렸다. 그대로 이쪽으로 다가 오더니 냅킨에 싼 두 개의 도너츠와 커피가 든 종이컵을 건네주었다.
"그 녀석은 정말 나쁜 녀석이야." 하고 말하고는 그대로 멀어져갔다.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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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시코만의 아침. 동경에서 산 실내 가운을 걸치고 나는 지금 창가에 서서 회색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태풍이 닥쳐 올 모양이다.
몇 명의 젊은이들이 꾸물거리는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해변에 모포를 깔고 있다. 꽃무늬 비키니를 입은 여자가 한 명이 보였다. 쭉 뻗은 다리, 아름다운 가슴, 젊은 사내 하나가 그녀를 놀리고 있다.
아마도 그는 그녀를 일생의 반려로 삼고 싶은 거겠지. 그러나 그들 앞에는 위험과 유혹에 가득 찬 반 세기 가까운 세월이 가로놓여 있다. 어떻게 살아남는 것만도 대사업일 것이다. 더군다나 백년해로하는 것은 거의 기적을 필요로 한다. 그들이 지금의 내 나이가 되었을 때 이미 나는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가능하다면 그들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 두 사람이 일생 간직할 만한 말 한마디를 해 주고 싶다.
그래 저 젊은이들을 갖가지 위험들로부터 지켜 줄 순수하고 충실한 말을. 하지만 머리속에는 아무 것도 떠오르지가 않는다. 한 쌍의 남녀가 파도 속으로 들어간다. 비키니 아가씨가 그 젊은이의 얼굴을 어루만졌으며, 그가 머뭇머뭇 수줍게 얼굴을 대어 그녀의 뺨에 키스한다. 두 사람의 인생의 아침이다. 그때, 이 두 사람에게 띄울 말이 머리에 떠을랐다. "항상 경계를 게을리하지 마라."
천천히 옷을 입으면서 나는 에리슨 비행장에서 맞이한 그 첫날 아침으로 되돌아 갔다.
그때 잠에서 깼는데 아직 머리가 몽롱했고 입안에는 시큼한 맛이 괴어 있었다. 두 시간밖에 못 자서 그럴까, 몸속의 뼈마디가 뻐근했다. 해군 특유의 아침의 떠들썩한 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들려온다.
기상, 기상! 하는 외침소리, 투덜거리며 웅얼대는 소리, 고함치는 소리, 그리고 로커 문을 탕탕탕 두들겨대는 소리.
그리고 나서 나는 기상을 했다. 말없이 주위의 낯선 얼굴들에게 목례하고 몸의 근육과 뼈마디를 풀기 위해 그 자리에서 엎드려 팔뻗기 운동을 했다. 샤워를 하고 몸을 닦았다. 세면장 바닥은 젖어서 미끌미끌했다. 남자들은 거울 앞에 서서 수염을 깎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치 자신들의 육체에 화풀이라도 하듯이 얼굴, 배 등의 피부를 싹싹 문지르고 있었다. 콧노래를 부르는 자도 있었고 웬지 낑낑대는 자도 있었다. 또한 몸에 문신을 새기는 자도 있었다. 대부분의 병사들은 머리가 부스스했다. 나는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청바지에 검은 구두, 흰 모자였다.
이부자리도 깔끔하게 정돈했을 것이다. 그리고 새로이 시작되는 인생의 시련에 대비하여 마음을 긴장시키고 있었을 것이다.
그때 알맞게 햇볕에 탄 근육질의 작은 젊은이가 다가왔다. 코끝이 벗겨져 있었다. 입술을 비틀어 읏으니 그가 말했다.
"뉴욕에서 왔다고."
"응. 브룩클린에서 왔어."
"난 막스 필즈너야. 이스트 사이드에서 왔어. 밥 먹으러 갈래?"
그뿐이었다. 간단한 아침 인사를 나누었을 뿐인데 우린 친구가 되었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지금 나는 이젠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싶어도 사궐 수 없다. 지금까지 너무나 많은 배신을 맛보았고 너무도 많은 환멸을 겪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참으로 많은 진정한 친구가 죽어갔다. 막스는 친구였다. 그의 생사를 지금도 모르고 있는 사실 자체가 그 후, 우리가 걸어 온 시간의 길이를 가늠케 해 줄 것이다.
그날 아침, 막스는 플로리다의 눅눅한 공기 속에서 내 앞으로 다가왔다. 양팔이 어깨에서 똑바로 뻗었으며 단단한 허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걸을 때는 마치 기어를 바꾸듯이 몸을 구부렸다. 그의 경우, 걷는다는 간단한 동작 자체가 멋진 퍼포먼스인 것 같았다. 주변 곳곳에서 수병들이 어슴푸레한 아침 공기 속에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들의 담뱃불이 반딧불처럼 반짝 반짝 공중을 배회했다. 우리는 보급 창고 뒤편의 식당으로 걸어갔다. 토스트와 구운 베이컨 냄새가 풍겨 나왔다. 막스의 이야기로는 그는 제3격납고 기술병이라 했다. 맴피스 기술병 양성소에서 바로 이곳으로 왔지만 기실 해상근무를 하고 싶었던 것 같았다. 이 에리슨 비행장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면 어디든지 좋다고 했다.
"해병대에 들어가도 좋아." 그가 말했다. "그 자식들도 지금 한국에서 싸우고 있으니까, 어쨌든 위생병은 말이야......."
이 에리슨에서 단 한 가지 좋은 점은 이야기할 만한 놈이 개중에 있다는 거야 라고 막스는 말했다. 그것은 즉 뉴요커를 말하며 나머지는 모두 변변찮은 녀석들이라는 것 같았다. "그래, 나머진 이놈저놈 할 것 없이 모두 미친 놈들만 모여 있지."
식당 건물 옆쪽에 달린 차양 아래의 창문을 들여다 보니 워레스키가 있었다. 긴 목조 테이블 하나에서 동료들과 함께 밥을 먹고 있었다. 프레디 헤러드가 역시 두 동양계 젊은이와 먹고 있다. 금속제 식판이 테이블에 부딪히는 소리, 나이프나 포크가 알루미늄 식기에 닿아 달그락거리는 소리, 컵 부딪치는 소리, 커피 주전자 뚜껑이 딸랑이는 소리, 김이 자욱하게 서린 주방에서 큰 소리로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조리사들. 그런 온갖 소음들이 아침의 대기를 뒤흔드는 헬리콥터 로터의 굉음과 뒤섞였다.
"바비 볼덴이라는 사람은 어떤 남자지?"
내가 물었다.
"최고지." 막스가 대답했다. "해군에서 가장 뛰어난 색소폰 주자지. 아니, 어쩌면 이 별볼일 없는 남부 전역에서 으뜸가는 색소폰 주자일지도 몰라. 그래, 그치도 해병에서 공을 세운 축이야. 위생병으로. 한국에서 부상당했다더군. 훈장을 왕창 받은 모양이야. 그의 대단한 면을 가르쳐 줄까? 그는 훈장 같은 건 전혀 내비치지도 않아.
그가 두려워 하는 놈은 하나도 없어. 단 한 사람도 말이야. 그러니까 그에게 시비를 거는 놈은 아무도 없지. 정말 그 바비 볼덴이란 작자는......"
막스는 식당 위의 거주구를 가리키며 바비 볼덴은 저기서 대부분 식당 조리사인 다른 흑인 병사들과 함께 기거하고 있다고 한다. 다음으로 막스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것은 입구 옆에 서 있는 프란시스 자비아 맥데드라는 이름의 상사였다. 래드 캐논도 지겨운 놈이지만, 하며 막스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자식은 과거 해군 함정이 아직 목조(木造)였고 사내들이 모두 사나이다웠던 시절을 기억하고 있는 능구렁이지. 그렇지만 맥데드는 그 캐논의 보스로 캐논보다 훨씬 처치곤란한 녀석이야.
우리는 그때 스크램블 애그와 베이컨을 잔뜩 식판에 올려 놓고 있었다. 나는 맥데드쪽을 보았다. 그는 펑퍼짐하고 넓적한 얼굴이었는 데 햇볕에 거무스럼하게 탄 모습이었다. 그도 내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는데 불현듯 기분 나쁜 생각이 들었다. 래드 캐논 녀석, 저 자에게 내 이야기를 고자질한 것일까? 뉴욕에서 온 '생떼쟁이'라고 말해 버린 걸까?
우리는 자리를 잡고 앉았다. 무심코 입구쪽을 보니 커피색 피부를 한 강건한 체격의 흑인이 들어 오고 있었다. 그렇게 멀리에서도 그가 녹색 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 자가 바비 볼덴이야 하고 막스가 말했다.
"저 치에게도 커다란 문제가 하나 있지." 그가 계속해서 말했다.
"여자 문제야."
"그건 모두 마찬가지잖아."
"그런데 저 녀석의 경우는 특별해. 백인 여자거든."
나는 꾸역 꾸역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막스가 나를 건너다 보며 말했다.
"신경쓰이나?"
"글쎄. 그런 일 생각해 본 적이 없으니까."
"이곳 남부에서는 백인 여자와 관계한 흑인은 린치를 당해. 아마 이 부분은 너에게 도움이 될거야."
"아무리! 린치 따위는 옛날 이야기겠지?"
"그거야, 붙들리지만 않는다면."
바비 볼덴은 미국을 방문중인 어느 국가 원수나 되는 것처럼 열을 가로질러 왔다. 흑인 조리사가 그와 가볍게 말을 주고 받은 뒤 그의 식판에 음식을 수북히 담아 주었다. 통로쪽으로 온 볼덴은 막스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백인 병사들이 모여 있는 테이블에 잠자코 자리를 잡았다.
"글쎄, 저것 봐." 막스가 속삭였다. "비어 있는 테이블이 천지인데 바비는 일부러 기지에서도 가장 따돌리는 백인들 테이블에 앉는 것 좀 보라구. 녀석들이 질겁을 하는 꼴을 보려고. 자, 봐."
문제의 테이블에서는 아직 식사가 끝나지 않았는데 다섯 명의 남자가 일어서서 다른 테이블로 옮겼다. 식당에서 아예 나가 버리는 자도 두 명 있었다. 바비 볼덴은 무표정하게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식사를 할 뿐이었다.
"그가 사귀고 있는 백인 여자는 한 사람이야? 아니면 몇 명이라도 되는 거야?"
"글쎄." 막스가 대답했다. "내가 뭐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것도 아니니까. 게다가 총소리에는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나니까." 싱끗 웃어 보이고는 계속했다. "메인사이드 기지에 해군의 여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는데 그 대원 가운데 한 사람이야. 상당히 유쾌하고 괜찮은 여자지. 나한테 맞는 타입은 아니지만. 그래도 가슴이 엄청나게 커."
나는 소리내어 웃었다. "그럼 그를 비난할 이유가 없잖아."
"그래도 그의 우둔함을 비난할 수는 있지. 이 부근에서는 아직도 백인 여자를 빤히 쳐다 보았다는 것만으로 흑인이 살해당하기도 하는 판이니까."
나는 커피를 마셨다. 맛이 없었다. "그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 주었나?"
"이봐, 그에게 그런 말을 어떻게 하겠어? 어떻게 말하지? 그 녀석 앞에 어슬렁 어슬렁 다가가서 이렇게 말할까- '어이, 바비. 당신은 니그로야, 맞지? 알겠나, 여긴 인종차별이 심해. 그러니까 백인 여자와 자다가는 당신 목숨이 위험해.'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애?
응? 바비 볼덴은 한국 전쟁의 영웅이란 말야. 하여간 퍼플 하트 훈장이 두 개, 브론즈 스타 훈장이 두 개, 그 밖에도 훈장을 무더기로 받았어. 그런 그에게 어떻게 내가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할 수 있느냐고?" 막스는 주위를 스윽 둘러 보았다. "게다가 어차피 그는 그런 데 신경조차 쓰지 않아."
다시 한번 바비 볼덴쪽을 보니 그날의 색소폰 소리가 되살아났다.
1월 1일 밝은, 고독한 오후에 블루스를 불던 남자, 그 멜로디에 귀를 기울이는 모든 인간에게 깨어진 꿈에 관해 노래하던 남자, 그는 영원이라고도 생각되는 고독 속에서 천천히 밥을 먹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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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남부 어딘가의 버스에서 사라진 그 여자. 길을 걷고 있든지, 차를 운전하고 있든지, 아니면 시장에서 쇼핑을 하고 있든지. 어쩌면 알몸으로 샤워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럭키 스트라이크에 불을 붙여 왼손으로 신경질적으로 담밸 피울지도. 내가 얼마나 절실하게 만나고 싶었는지 그녀는 몰랐을 것이다. 사실 그녀가 약속해 줄 밤의 은밀한 일이나 여자의 신비에 대해서 내가 얼마나 알고 싶었던가! 그녀가 가지고 있는 갖가지 지식을 얼마나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던가! 그렇지만 나는 해군의 일원이었다. 그러니까 남부까지 굴러들어 그 버스에 탔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발목을 붙들기 전에, 그녀에 대한 탐색을 개시하기 전에 -그러기 위해 지도 위에서 그 수수께끼 같은 파라트카의 위치를 확인하고, 일찍이 황금의 땅을 필사적으로 찾아 헤맨 남자들처럼 그곳을 향해야 하는데- 나는 우선 해군의 무리 속으로 섞여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은 의외로 간단했다.
아침 식사를 끝내고 내가 보급부 건물로 들어가자 대니 레이 브레드포드라는 창고계 중사가 카운터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도날드도 돈도 아닌 대니 레이. 진을 입은 입술이 얇은 남자였다. 눈매는 젖어 있었으며 어딘지 슬픈 빛을 띠고 있었다. 내가 이름을 대자 '해군에 잘 왔다'고 해 주었다. 그리고 나는 십여 명의 해군들과 함께 8시의 정식 점호에 참여했다. 이 점호가 이후로 펜서콜라에서 매일 아침의 행사가 되었다. 그것은 지금도 몸에 배어 있다. 어디에 있든, 누구와 함께 자든, 설령 새벽 5시에 잠자리에 들었다 해도 8시가 되면 지금껏 어김없이 눈이 뜨인다. 그날 아침 대니 레이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불러 점호 기록에 기입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해산 신호였다. 참으로 대범하고 소탈한 행동거지이며 너무나도 어른스런 방법으로, 그때 내 눈에는 그렇게 비쳤다. 몇 명의 병사들이 내 손을 잡고 잘 왔다고 말해 주었다. 그리고는 재빨리 각각 제자리로 흩어져 갔다. 트럭을 운전하여 메인사이드 기지로 나간 자도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전부 기억하고 있다. 그들과의 추억은 무덤까지 가져가게 될 것이다. 그 첫날 아침은 아직 그들의 얼굴과 이름이 일치하지 않았다.
대니 레이는 앞장 서서 보급부 안을 안내해 주었다. 예상대로 창고는 깊숙히 있었으며 나무 궤짝이 천장 꼭대기까지 쌓여 있었고, 그 사이에 좁은 통로가 나 있었다. 문 입구 가까이에는 포크 리프트가 한 대, 나무궤짝 속에 있는 것은 헬리콥터의 로터와 엔진, 플로트등이라 한다. 궤짝은 모두 짐받이 위에 쌓여 있었다. 그것은 포크 리프트가 들어 올릴 때 편하도록 하기 위한 한편, 홍수에 대비한 예방조치 같았다. 이 주변은 태풍이 덮쳐오는 일이 자주 있다고 한다. 부품 확인 시스템에 관해 설명한 뒤, 대니 레이는 모든 부품이 제자리 갖추어져 있는 것을 확인하는 일의 중요성을 두 번씩 반복하여 강조했다. "뭘 하나라도 잊어 버리면," 그가 말했다. "워싱턴의 높으신 분들이 노발 대발 달려 온다구."
대니 레이는 내 책상도 가르쳐 주었다. 벽과 직각으로 놓여 있는 다섯 개의 책상 중 가장 끝에 있는 것이었다. 청구서함, 전화, 사전 등이 질서정연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모두 자네 것이야." 대니 레이가 일러 주었다. "이게 항공화물관리계 물품 세트라는 거야."
누군가가 그의 이름을 부르며 전화가 왔다고 알렸다. 대니 레이는 서둘러 그쪽으로 다가갔다. 나는 내 책상에 앉아 보았다. 그야 남중국해를 시위 항행하는 구축함에서 이연장포를 조작하는 것과는 천지차이지만, 하여튼 이것은 내 것인 것이다. 이곳이 앞으로 오랫동안 내 전장이 될 것이다. 의자에 앉으니 유리창과 미풍에 흔들리고 있는 종려나무 잎의 진한 향기에 휩싸였다. 스프링쿨러가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건물 안에 있어도 플로리다의 공기는 자못 농밀하고 관능적이었다. 버스에서 사라진 여자의 모습이 일순 뇌리를 스쳤다.
블라인드가 달려있는 창으로부터 온갖 사물들이 다 보였다. 멀리 둘이서 나란히 걷고 있는 하얀 모자를 쓴 병사들이 눈에 들어 왔고, 흰 페인트칠을 한 목조 건물이 이외에도 몇 채 있었으며 광장에는 삼층짜리 본부 건물이 서 있었다. 그것은 흰 테가 둘러진 벽돌 건물로서 제일 위층에는 커다란 녹색 창을 단 관제탑이 있었다. (나는 여기 있다.)고 새삼 생각했다. (새로운 인생의 첫 아침이 열렸다. 뉴욕은 이제 과거이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보니 맛있는 음식처럼 농밀한 공기를 호흡하고 있었다.대니 레이 브레드포드가 되돌아 왔다. 무슨 걱정거리가 있는 듯한 얼굴이었지만 거기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내가 해야 할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보급 신청서 분류, 기계수리 담당이나 전기 공사계 앞으로의 부품 인도, 간혹 조종사가 직접 가지러 올 때도 있다고 했다.
"우린 그들을 '손님'이라 부르지. 녀석들이 요금을 내는 건 아니지만."
그들은 부품이나 새 기계 공구를 받기 위해 이곳 보급부로 온다.
그리고 정면에 있는 커다란 가운터에서 부품 인도를 기다린다. 대부분의 경우 그들은 사관의 인가를 받은 보급 신청서를 준비해 온다.
"그렇지만 거기 정확한 숫자가 기업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어."
대니 레이가 이어 말했다.
"그러니까 수치들을 이쪽 장부와 확인할 필요가 있는 거야."
부원들은 하루 온종일 책상에 붙어 있을 수만은 없다. 청소 임무도 완수해야 한다. 창고계는 하루 한 번 이 건물 내부를 청소한다.
끝에서부터 순서대로 막대걸레로 닦아 나간다고 한다. 또한, 부원들은 이 건물 안에만 갇혀 있지 않고 가끔씩 새 보급품을 수령하러 트럭으로 메인사이드까지 나가는 일도 있다. 그날도 몇 명이 메인사이드로 나간 참이었다.
"그리고 날씨에도 조심할 것."
대니 레이의 주의사항이 계속되었다.
"잘 모르는 사람은 여기가 플로리다니까 언제나 항상 무덥다고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때로는 지독하게 추울 때도 있지. 캐나다에서 대형 폭풍이 내려와 앨라배마를 반쯤 휩쓸어 버릴 수도 있으니까. 뭐 대체적으로는 몹시 무더워 찜통이지만. 따라서 저장된 부품을 항상 깨끗하게 건조시켜 놓는 것이 중요하다. 안그러면 모두 녹슨 쇠덩어리가 되어 버리지. 그리고 각 부품의 번호를 똑바로 기입할 것. 숫자가 한 줄이라도 틀리면 드라이버가 지프로 둔갑해 버리니까 말이야......"
부드러운 말투였으나 어딘가 목소리가 공허했다. 뭔가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어 입에 익은 말들을 단지 기계적으로 되풀이 읊조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밖에 다른 사항도 말했지만 머리가 멍해진 탓에 내게는 들리지 않았다. 아마 심야 보초로 뺏긴 잠을 몸이 원하는 모양이다.
"운전 면허는 가지고 있겠지?" 대니 레이가 물었다.
"아닙니다,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중사님."
"정말인가? 왜지?"
"운전을 못합니다."
그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운전을 못한다고?"
"네. 배운 적이 없습니다."
"그치만 이봐, 차 운전 따윈 아무나 할 수 있어."
"저희 집에는 차가 없었습니다." 또 그 설명을 해야 하나 싶어 진저리를 치며 나는 말했다.
"제가 자란 곳에서는 차를 가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운전을 배울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하고 덧붙이고 싶었지만 소리가 입 밖에 나오지 않았다. 난 우리 집의 장남이다. 아버진 아일랜드 태생, 어머닌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즉 나는 우리 집안에서 최초의 미국인인 셈이다. 그러니까 난 무엇보다도 미국적인 것을 이것저것 배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야구와 미식 축구, 슈거 레이 로빈슨, <배트맨>에 <더스프릿>에 <정글의 여왕 시나>, 밤에는 라디오의 <심포니 시드>에서 찰리 파커. 물론 운전도 조만간 꼭 배울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라고 덧붙이고 싶었다. 하지만 말할 수 없었다.
"아마......" 대니 레이 브래드포드가 부드럽게 말했다. "하역 작업을 몇 번 하고 나면 면허를 따고 싶어질 걸세." 병사 하나가 밖을 걸어가고 있는 것을 창 너머로 흘깃 본 뒤, 마이클쪽으로 시선을 돌려 다시 말했다.
"우리 기지의 누군가가 가르쳐 줄 걸세."
그의 말투는 시종일관 차분하고 침착했다. 교양 없는 백인이 꿱꿱 질러대는 것과는 격이 달랐다. 그 래드 캐논의 심술궂은 말투와도 달랐다. 대니 레이는 나를 노예나 어린애나 하급 인간이 아닌 하나의 인격을 갖춘 성인으로 상대해 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번 더,
"자아, 잘 해 봐. 이 기지에 잘 왔다, 세일러."
라고 격려해 주었다. 나는 그만 감동하여 그에게 반해 버렸다.
다시 전화를 걸러 나간 그와 교대로 다른 병사가 들어왔다. 셔츠 호주머니에 이름이 새겨져 있다. 해럴드 R. 존스. 군무를 맡고 두 번째로 상대하는 창고계 상등병이었다. 머리에 착 달라붙은 희미한 금발, 경계심 많을 것 같은 눈, 바지는 빳빳하게 줄이 서 있어 걸으면 쪼개질 것 같았다. 그는 청구 전표를 한 장 가지고 있었다.
"잠깐 도와 줘." 부담 없는 말투였다.
"네."
함께 안쪽 창고로 들어갔다. 존스가 앞장서서 헬리콥터 로터가 들어 있는 길고 넓적한 나무 상자로 다가갔다.
"대니 레이 중사님 말입니다, 웬지 우울해 보이던데요?"
내가 물어 보았다.
"늘 그런가요?"
"으응, 그치는 좀 여린 데가 있지." 존스가 대답했다.
"그렇지만 오늘은 좀 특별해. 수병 하나가 행방 불명되었거든. 지미 보즈웰 녀석이 점호에 안 나타났어. 보즈웰은 대니 레이 중사와 막역한 친구지."
"그럼 탈영입니까?"
"글쎄. 대니 레이는 아직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겠지만. 어쨌든 보즈웰 녀석이 어떻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어. 보즈웰 녀석은 술주정뱅이라서 지금쯤 어느 구석에 차를 꾸러박고 있을지도 모르지. 하여간 아무도 몰라. 대니 레이는 일단 병원을 조사해 본 모양이야. 현재로선 정보는 없어. 그래, 그 끝을 좀 들어쥐......"
궤짝은 터무니없이 가벼웠다. 그것을 들어 짐받이에 올리는데 존스가 내 구두를 보고 말했다.
"그 구두, 어떻게 좀 하지 그래."
내 검은 구두는 반질거리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더러운 것은 아니었다. 존스의 구두는 기가 막히게 반짝이고 있었지만.
"자기 구두도 안 닦는 놈은 자기 밑구멍도 안 닦는다잖아."
짐받이를 밀면서 존스가 말했다. 자기 구두를 안 닦는 놈은 자기 밑구멍도 안 닦는다고? 그것참 연장자 뺨치는 예지로구만. <푸른 노트>에 기록할 가치가 충분한데. 카운터에 도착하자 존스는 전표 적는 법을 내게 가르쳐 준 뒤 로터를 가지러 온 기계 수리병에게 사인하게 했다. 그는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나도 그렇게 하려고 하는데 또 한 사람의 이등병과 세면장에서 나오는 길이었다. 이름은 진 베케트.
"오늘 화장실은 촬 하버같군."
"혹시, 뉴욕 출신입니까?" 내가 물었다.
"아니, 뉴올리언스야. 왜?" 뉴욕, 특히 브룩클린에서는 <필 ; 진주>을 <촬>, <토일릿 ; 화장실>을 <타일릿>으로 발음하는 경향이 있다고 내가 설명했다. 그래서 브룩클린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나는 타일릿에 촬을 빠뜨려 버렸다> 만일 다저스의 시합에서 웨이트 휘트가 태만히 해서 뭔가가 무슨 일이 일어났다면 사람들은 <휘트가 부상당했다고 할 것을 하트가 부상 당했다>고 할 것이다. 그러니까 물론 <토일릿이 촬 하버같이 보인다>고 하기도 하는 것이다.
"히야, 정말 뉴올리언스랑 같은데." 이빨 틈새가 유난히 벌어진 이를 드러내며 히죽 읏었다. 그러자 양쪽 눈썹이 일자가 되어 어디의 소악당 같은 얼굴이 되었다.
"자네 이름이 뭐지?"
그렇게 되면 금새 친구가 되어 버린다. 정말 간단하다. 베케트는 한 단계 작은 소형 부품인 공구나 너트, 볼트 등을 넣어 두는 금속제 상자의 위치를 가르쳐 주었다. 대니 레이가 해군 찻잔 새 것을 가져다 주었다. 전화가 여기저기서 울어대고, 카운터 앞은 부산하게 돌아갔다. 존스와 베케트의 일하는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나도 청구 전표를 몇 장 다루어 보았다. 그러다 별로 할 일이 없을 때는 커피 메이커쪽으로 슬슬 가 보았다.
그 앞에는 얼굴이 팍삭 야윈 남자가 커피잔을 들고 서 있었다. 셔츠의 이름표를 보니 J.T. 할레르슨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는 몇 번씩이나 낮게 신음소리를 냈다. 나는 컵에 커피를 따랐다. 할레르슨은 지겹다는 듯이 텅빈 아침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괜찮아요?"
내가 말을 걸었다.
"괜찮기는 염병!" 그가 씨부렁거렸다.
"제기랄, 밀조 위스키를 마셨다가 끔찍하게 당했다구."
"뭘 좀 먹어야 되지 않아요?"
"뭘 먹을 정도라면 구더기를 삼키는 편이 나아."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찬찬히 훑어 보았다. 나는 틀림없이 미소를 띠고 있었을 것이다.
"누구지, 자넨?"
이름을 대고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할레르슨은 양손으로 컵을 싸쥐고 뗄 생각을 않는다.
"그래, 어디서 왔는데?"
나는 또다시 치명적인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뉴욕.
"어얼씨구. 뉴욕엔 이제 아무도 없겠구만? 이 영광스런 해군에 이렇게 뉴욕 출신이 몰려든 것은 요 13년 만에 처음이야."
"그래요?" 나는 그 자리를 벗어났다. 할레르슨의 비아냥거리는 태도와 뉴욕을 발음할 때 입술이 뒤틀리는 꼴이 보기 싫었다. 그렇지만 이런 사람은 어디든 있기 마련이다. 내 자리로 돌아가 부품 카탈로그를 자세히 읽어보고 있었다.
갑자기 옆문이 쾅 열리더니 더러운 흰 제복 차림의 호리호리한 병사가 튀어 들어 왔다. 실내의 모든 움직임이 정지되었다. 대니 레이가 전화를 걸다가 얼굴을 들었다. 안도와 경계가 뒤섞인 눈빛을 띠고 있었다. 튀어 들어온 그는 20대로 상등병 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눈은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고 커다란 두 팔을 찢어져라 휘두르고 있었다. 신발에는 진흙이 묻어 있었다. 이 자가 행방이 묘연했던 보즈 웰인가 보다.
"행크가 죽었어!" 그가 외쳤다.
대니 레이가 황망히 뛰어왔다. 베케트도 구석 방에서 급히 다가왔다. 존스도 그 뒤를 따르고 있다.
대니 레이가 물었다. "어떻게 된 거냐 보즈, 아침부터 찾아 헤맸잖아."
"행크가 죽었어!"
대니 레이가 팔짱을 끼자 보즈웰이 냉큼 풀어 버리면서
"행크가 죽었다구, 어이! 행크가 죽었다니까!"
"대체 무슨......"
"행크 윌리엄스말야! 행크 윌리엄스가 죽었대두, 대니! 웨스트 버지니아, 차 안에서 죽어 있는 걸 봤어! 캐딜락 뒷자리 시트에서!"
행크 윌리엄스라니 금시 초문이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뭣 때문에 보조웰이 저렇게 흥분해서 난리지? 도대체 무슨 일이야, 이건?)
그곳에 할레르슨이 핏기 없는 얼굴로 다가왔다.
"행크 윌리엄스가 죽었다고?"
"그래. 죽었어."
보즈웰은 눈을 감았다가 다시 크게 치떴다.
"죽어 버렸어!"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털썩 콘크리트 바닥에 주저 앉았다. "라디오에서 들었어. 신문에도 났어. 행크가 죽었다구, 제기랄, 1월 1일에."
할레르슨이 급히 제자리로 가 소형 라디오를 꺼내 다이얼을 돌렸다. 카운터에는 세 명의 병사가 서서 100피트 정도 안쪽에 있는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니 레이가 보즈웰 위로 몸을 굽혔다.
"어디 가서 몸을 좀 씻고 와, 보조웰. 대체 어떻게 기지에는 들어 왔지?"
"어떻게라니, 뒤쪽으로 들어왔지." 보즈웰은 우물 우물 말했다.
"철책에 구멍이 나 있는 곳이 있는데......"
존스와 베케트가 완전히 넋이 나간 그를 양쪽에서 부축하여 일으켜 세우려 했다. 대니 레이가 나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와 주라고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보즈웰의 허리를 잡아서 모두 함께 그를 일으켜 세웠다. 대니 레이가 카운터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쪽을 흘깃 쳐다보았다. 기다리고 있는 인원은 다섯 명 정도로 불어나 있었다. 보즈웰이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불쌍한 행크. 말라깽이 촌놈. 가엾은 주정뱅이......"
뭐야, 꼭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군 하고 생각하는 순간 그는 실신해 버리고 말았다.
대니 레이가 말했다. "이렇게 되면 샤워를 시킬 수도 없고. 막사에 재울 수도 없어. 맥데드에게 발견되면 골치 아프니까." 주위를 둘러본 뒤,
"그래, 짐받이에 올려 놓자." 하고 말했다.
그는 종종걸음으로 카운터로 되돌아 갔다. 우리는 보즈웰을 창고로 들고 갔다. 베케트가 맨 앞에서 몸을 약간 숙인 자세로 잔뜩 쌓인 상자 터널을 빠져나갔다. 가장 안쪽의 비어 있는 구석에 여남은 개의 짐받이가 가지런하게 쌓여 있었다. 모두 그쪽을 향해서 끙끙거리며 가는데 보즈웰이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어이, 뭣들 하는 거야? 어디로 끌고 가지?"
"자네가 스컹크같이 지독하게 취해서 말야, 보즈웰." 베케트가 말했다.
"술이 깰 때까지 좀 재워 주려고."
보즈웰이 의외라는 듯한 얼굴을 했다.
"억지로 재우려는 건가?"
"자네가 조용히 잔다면야 그럴 필요가 없지." 베케트가 대답했다.
뭔가 매우 중요한 것을 기억해 내려는 듯, 보즈웰이 일순 침묵했다. 그러더니 별안간 눈을 커다랗게 뜨고는 중얼거렸다.
"행크가 죽었어."
"아아, 알고 있어, 보즈웰. 끔찍한 일이지. 그러나 솔직히 말해 지금 우리와는 관련이 없는 일이라구. 우리는 일을 해야 하니까."
그리고 우리가 그를 내려 놓자마자 보즈웰이 순간적으로 베케트의 명치를 힘껏 찼다. 그 다음 살짝 몸을 돌리면서 존스의 가슴을 한방 먹였다. 원래는 얼굴을 맞히려고 한 것이 빗나간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눈을 깜빡깜빡거리면서 내쪽으로 돌아섰다. 강한 오른쪽 펀치가 날아 왔다. 나는 잽싸게 더킹, 그의 펀치 아래로 몸을 숙여 그의 배에 훅을 먹였다. 으윽하는 신음 소리와 함께 보즈웰이 픽 주저 앉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눈을 깜박이더니 쓰러졌다.
베케트가 나를 쳐다보았다.
"대단한데, 어디서 배웠지?"
"전에 체육관에 다닌 적이 있거든요."
"권투를 했어?" 존스가 물었다.
우리는 보즈웰을 일으켜서 짐받이에 뉘였다.
"뭐, 조금. 그렇지만 재능이 없어서요."
그 이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보즈웰이 단 한방으로 고꾸라져 버린 데 대해 나 자신도 놀라 얼떨떨했던 것이다. 지금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잘난 체하는 것처럼 들릴 것이다. 보즈웰은 짐받이 위에 뻗어 있었다. 베케트가 그 둘레에 다른 짐반이를 둘러쌓았다.
마지막으로 존스가 보즈웰의 흰 모자를 가슴에 올려 주었다.
"야, 이 신참 구두 좀 보게." 존스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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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쳐 지나온 인생을 되돌아 보면 전혀 기억에서 사라진 1년이 있는가 하면, 화강암처럼 단단하게 기억 속에 버티고 있는 날들도 있다. 에리슨 비행장에 복무한 첫날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우선 첫째 나는 행크 윌리엄스에 관하여 배웠다. 그것은 미국 남부에 대하여 배웠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때까지 내가 모국인 이 광대한 지역에 관하여 알고 있던 지식은 거의 한정되어 있었다. 1860년대에 북부는 남부연합과 싸웠다. 치열하고 야만적인 전쟁이었다. 그것은 노예제도를 폐지하기 위한 전쟁이었다고 학교에서 배웠다. 남부에서 흑인은 여전히 시민으로 취급받지 못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라디오 프로에서는 남부 정치가가 자주 야유의 대상이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유명한 야구 선수 중에는 남부 출신이 많았으며, 미식축구 선수도 많이 있었다. 그 정도였다. 내가 남부에 대해 알고 있던 것은.
그리고 남부에 사는 보통 사람들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몰랐다.
무지는 픽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마 나는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보지 않은 유일한 미국인이 아니었을까.
그날 나는 행크 윌리엄스의 남부는 클라크 케이블이나 비비안 리의 남부와 다르다는 것을 배웠다. 행크 윌리엄스가 죽은 그날은 공기마저 흥분으로 떨며, 고독과 상실감에 젖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라디오는 계속해서 그의 노래를 내보내고 있었고, 디스크 자키들의 음성은 숙연하여 울먹이는 소리로 들렸다. 숭배심조차 느껴졌다. 처음 한동안은 모든 것이 우스꽝스럽게만 보였다. 라디오에서 슬픔으로 가라앉은 남부 방언이 홀러 나오면 그만 고개를 돌리고 피식 웃어 버리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말과 음성이 끝없이 쌓여가는 것을 듣자니까, 그들이 진심으로 슬퍼하고 있구나 하는 것이 가슴에 와 닿았다.
뉴스는 온통 그 사건 일색이었다. 플로리다, 앨라배마, 조지아, 미시시피, 그리고 루이지애나 등지의 각 주지사가 이구동성으로 행크 윌리엄스의 죽음을 애도했다. 이것은 남부와 미국과 인류 전체에게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라고 했다. 그건 아무리 그래도 좀 호들갑스럽잖느냐고 당시에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30년이 더 지난 지금은 그들의 말이 확실히 옳았다는 생각이 든다. 라디오 리포터는 남부 민요 가수들에게도 인터뷰를 했다. 나는 잘 모르는 이름뿐이었지만 그들이 토로하는 슬픔에는 진실이 담겨 있었다. 열여 개의 남부 도시 거리에서 비탄에 젖은 사람들의 목소리도 라디오에서 홀러나왔다. 저녁 무렵에는 행크 윌리엄스의 정실 부인이라는 여자가 두 명 등장하여 모두 충격을 받아 눈물만 흘리고 있다고 보도되었다.
나는 왕이 막 죽은 나라에 도착했는데 그 왕의 이름조차 모르는 것에 당혹해 있는 나그네와도 같은 심정이 들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이윽고 아나운서가 다음 소식을 전했다. 몽고메리 시립공회당에서 행크 윌리엄스의 추도식이 성대하게 열린다고 했다. 그러자 할레르슨이 외쳤다.
"난 갈거야!" 왼손으로 책상을 쾅 내리치고는 계속했다.
"근무가 있든 없든 알게 뭐야, 난 갈 거라구!"
드디어 상세한 정보가 입수되었다. 제이미라는 이름의 경관이 라디오에 등장하여 증언했다. 그는 오크힐의 메인스트리트에 있는 24시간 영업점인 퓨어 오일 주유소에서 행크 윌리엄스 씨가 캐딜락 뒷자리 시트에서 죽어 있는 것을 봤다고 했다. 장소는 웨스트 버지니아, 시간은 오전 다섯 시 반. 차에는 그 밖에 두 남자가 더 타고 있었다고 경관이 말했다. 한 사람은 캐딜락을 운전하던 남자, 또 한 사람은 윌리엄스의 친구였다. 그들은 그날 밤 콘서트가 있는 오하이오주의 캔턴으로 그를 데리고 가는 중이었다고 했다. 대단히 악천후였으므로 비행기를 타지 않았다고 했다.
"그놈들이야!" 할레르슨이 고함을 질렀다.
"그놈들이 죽였어! 운전수와 친구라는 놈이. 그놈들이 죽였어. 행크는 살려 두기엔 너무 훌륭한 남자였으니까!"
사인은 아마 심장마비일 겝니다 라고 검시관이 말했다.
"그러나 정확한 것은 검시를 해봐야 알겠죠."
할레르슨은 끌까지 듣지 않았다.
"놈들이 분명히 이상한 주사를 놓은 거야. 두고 보라고. 내 말이 틀림없을 테니까. 저놈들이 그를 죽인 게 확실해."
행크 윌리엄스는 스물 아홉 살이었다. 나하고 겨우 열 두 살 밖에 차이가 안났다.
"제기랄!" 할레르슨이 내뱉았다.
음악이 흐르기 시작하자 할레르슨은 마음이 심란한 듯 왔다갔다하며 행크의 노래를 낮게 웅얼거리며 따라 불렀다.
나는 그 애에게 주위 받았지, 두 번이나 주위 받았지.
그러나 난 남의 조언 같은 건 듣지 않는 남자......
뉴올리언스 출신이라는 베케트도 그 가사를 아는 모양이었지만 입술만 달삭거렸다. 그리고 책상에서 카운터, 카운터에서 창고로 시종분주하게 돌아다니면서 내 도움을 청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주위로 번져가는 슬폼에 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해 주지 않았다. 거기서 나는 한 가지 사실을 배웠다. 즉, 나는 그들 무리 중의 한 사람이 아니며, 앞으로도 그 점은 변함없을 거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내게 깊이 뿌리박고 있는 어떤 정서는 그들과 무관한 것들이며, 역으로 남부 사람들의 깊은 곳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정서는 나에게 아무런 홍미도 유발시키지 못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잠자코 있는 것, 그뿐이었다. 그들의 기분을 존중해 줄 수는 있지만 그들의 감정을 그대로 느낄 수는 없었다. 결국 아웃사이더인 셈이다. 그들이 브룩클린에서 아웃사이더인 것처럼.
<손님>들도 행크 윌리엄스의 이야기로 웅성거렸다. 틀림없이 위스키 때문일거야 라고 그들은 말했다. 그러자 여자들 때문이라며 머리를 내젓는 자도 있었다. 일동은 비행장에 시선을 두면서 라디오에서 훌러 나오는 음울한 노랫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그래, 싸구려 술집이 결국 행크의 목숨을 앗아갔어.
그때 내가 아는 행크 윌리엄스의 노래가 흘러 나왔다.
내가 얼마나 애태웠는데
너야말로 내 꿈이라는 마음 전하려고......
템포도 다르고 액센트도 두드러졌다. 그래도 틀림없는 그 노래였
다.
넌 두려워하고 있지
내 행동 뒤에 짓궂은 장난이 숨겨져 있을까 봐.
바이올린 반주에 맞추어 남브룩클린 방언 같은 목소리로 토니 베네트가 1951년 가을, 이 노래를 자주 불렀다. 나는 그때 모린에게 사랑을 전하려고 맹목적으로 열중하던 때라, 베네트의 가슴저미는 듯한 목소리가 내 마음의 아픔을 대신해 주는 것같이 들렸던 것이다.
너의 고독한 옛 기억이
우리 사이를 점점 더 멀어지게 해......
그러던 어느 토요일 밤, 케이튼 여인숙의 후미진 방에서 그녀와 만나 부드럽게 몸을 꼭 끌어안으며 달콤한 거짓말을 그녀의 향긋한 내음을 맡으며 속삭였던 것이다. 그래, 바람이 미친 듯이 휘몰아치던 밤에.
왜 나는 할 수 없을까?
너의 의심을 풀어, 차가운, 차가운 마음을 녹이는 일을.
행크 윌리엄스의 죽음이 내 마음을 흔든 것은 그때였다. 그 <콜드, 콜드 하트>를 듣는 순간이었다. 그 다음부터는 의식적으로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며, 지금 이곳 남부의 옛날 노래방이나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행크 윌리엄스의 노래를 들으면서 가슴에 안았던 여자를 떠올리는 남자들이 많이 있겠다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아아, 그래도 행크의 목소리는 짙은 비에와 깊은 상처를 안고 흐느꼈다. 저 상태라면 무슨 수를 써도 그를 구할 수는 없었겠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내슈빌의 대저택과 캐딜락이 여섯 대 있으며-라디오가 전했다-두 자녀와 두 아내가 있다. 그런데 이런 비운의 주인공이 되어 버렸다. 스물 아홉에 저 세상으로 가 버린 것이다. 할레르슨이 볼륨을 올려 놓은 라디오 소리에 나는 빠져 들어갔다. 카운터에는 <손님>들이 점점 불어나고 있었다. 내 눈에는 그것은 마치 루즈벨트가죽은 날같이 비쳤다. 그때도 부근의 사람들은 모두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으며 눈물을 글썽이는 자도 있었고, 빌어먹을 해리 트루먼은 누구야 하고 떠드는 자도 있었다.
훗날에 이르러, 잭 케네디의 암살을 위시하여 마틴 루터 킹, 로버트 케네디, 말캄 X, 존 레논 등이 쓰러졌을 때 나는 항상 카메라맨으로 현장취재로 뛰었다. 비극의 실상을 쫓는 데 전력을 기울이느라 개인적인 감개를 느낄 여지가 없었다. 비극의 순간을 가능한한 충실히 재현함으로써 카메라맨으로서의 보수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심야에 달라스나 멤피스, 로스엔젤레스의 어느 모텔 방에 솜처럼 지친 몸을 끌고 들어가 누우면, 행크 윌리엄스가 죽은 이날 일이 자꾸만 떠오르곤 했다.
열일곱 살이던 나는 그때 펜서콜라 보급부 카운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에는 시커먼 기름때에 손이 찌들은 기술병이 엉엉 목놓아 울고 있고 그의 동료가 달래고 있었다. 그렇게 큰 남자가 그런 식으로 우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자아, 이제 그만 울어, 지미." 기계수리공 친구가 다독거렸다.
"울음을 삼키라구."
그곳에 누군가가 <펜서콜라 뉴스>지를 들고 들어왔다. 1면에 행크 윌리엄스의 사진이 커다랗게 실려 있었다. 모두가 침통하게 그 지면을 응시했다. 라디오로 듣기만 해서는 실감나지 않던 일이 활자와 사진에 의해 꼼짝없이 입증되어 버린 것처럼 모두들 느꼈을 것이다.
한 남자가 눈물을 쏟으면서 나갔다. 그때 갑자기 문이 꽈당하며 열리자 모두 일제히 돌아 보았다. 맥데드 상사가 래드 캐논을 거느리고 서 있었다. 방 안에는 라디오의 노래 소리가 흐르고 있었다.
난 이제 자유다
어디든지 갈 수 있어
그러니까 너와......
"그 고물 라디오를 끄지 못해." 맥데드가 호령을 했다.
할레르슨이 스위치를 껐다. 주위는 일순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으며, <손님> 한 사람이 코를 훌쩍이는 소리만이 정적을 깨뜨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응?" .
맥데드가 핏대를 올렸다. 캐논이 눈을 가늘게 뜨고 주위의 얼굴들을 쏘아 보았다. 모두 묵묵부답이었다. 그때 처음 깨달은 건데 대니레이가 이 자리에 없었다. 우리들의 선임자는 대니였으므로 맥데드의 물음에 대답할 역할은 그가 짊어져야 했다.
맥데드는 카운터 중앙을 향하여 두 세 걸음 나아갔다. 그래도 아직 카운터 맞은쪽에 있었다. <손님>들이 뒤로 물러서며 길을 비켰다.
"너희들 기도 집회라도 열었나?"
맥데드의 목소리는 라디오 아나운서처럼 기름기가 자르르했다.
"아니면 단합대회를 가졌나? 대체 무슨 일인가?"
결국 할레르슨이 조그맣게 말했다. "행크 윌리엄스가 죽었습니다. 상사님."
맥데드와 캐논은 질렸다는 듯이 얼굴을 마주 보았다. 어저구니 없는 놈들 아냐, 이거? 하는 듯한 표정으로, 카운터에 나 있는 쪽문을 밀고 맥데드가 들어 왔다. 기술병 하나가 돌아가려는 것을 캐논이 앞에 서서 말렸다.
"캐논군, 자네라면 이 녀석들을 어떻게 하겠나?"
맥데드가 슬쩍 물었다.
"야근을 좀 시킬까요?"
"총살형이 어때?"
"그거야 뭐 최고죠."
맥데드가 우리들 속으로 헤치고 들어와 늘어서 있는 몇몇의 얼굴과 제복, 구두 등을 훑고 지나갔다. 그가 창고쪽으로 가 보즈웰을 발견하는 일이 없어야 할 텐데, 걱정이 되었다. 내 앞으로 다가왔을 때 그의 발이 멈추었다.
"새로 왔나?"
"네, 어제 착임했습니다."
"자네도 행크 윌리엄스 때문에 울었나?"
"아닙니다."
"왜지?"
"그의 노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의 노래를 모른다고?" 한숨을 쉰 뒤 맥데드가 말했다.
"어째서?"
"남부 출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아, 그럼 어디 출신인가, 자넨?"
캐논이 끼어들었다. "뉴욕에서 왔습니다."
"그렇군." 셔츠 호주머니의 이름에 눈길을 보낸 다음 다시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보기 좋을만큼 햇볕에 그을렸으며 로션 냄새가 은은하게 풍겨졌다.
"자넨 뉴욕 똑똑이인가, 데블린군?"
"저는 합중국 해군 병사입니다."
"내 질문에 대답 안 했어."
"저는 뉴욕 똑똑이가 아닙니다!"
"좋아." 맥데드가 말했다.
"그래야지."
그리고 나서 다른 사람들을 향해 물었다.
"대니 레이 브레드포드는 어디 있나?"
"격납고에 갔습니다. 상사님." 존스가 대답했다.
"그럼, 그가 돌아오는 대로 내게 전화를 걸라고 해."
"넷, 잘 알았습니다, 상사님."
맥데드는 일단 우리에게서 떨어져 입을 꾹 다물더니 거기 있는 전원을 향해 단호하게 훈시했다.
"자아, 빨리 자기 자리로 돌아가라, 이 식충이들아. 여긴 미해군 기지다. 유원지가 아냐. 알겠나? 가령 합중국 대통령이 죽더라도 너희들은 임무를 수행하고 있어야 해. 어디 밴조 주자 하나가 죽었다고 해서 임무를 중단하는 일은 용서하지 않는다. 내 말을 의문의 여지없이 머리에 새겨 들었겠지?"
그 말만 남기고 그는 쪽문을 나가 캐논을 거느리고 아침 햇살 속으로 사라졌다. 카운터에 있던 자들은 지긋 지긋하다는 듯이 한숨을 푹푹 쉬고 불평을 터뜨렸다.
"제기랄, 밥맛 없는 녀석!" 내가 중얼거렸다.
"그냥 냅 둬." 베케트가 신경쓰지 말라는 투로 말했다.
"그 녀석은 원래가 그런 놈이니까."
"아니, 맥데드 말이 맞는지도 몰라." 존스가 깐깐하게 말했다.
"우리 모두 라디오를 들으면서 급료를 받는 건 아니잖아."
베케트가 아니꼽다는 듯이 흘겨 보았다.
"이봐, 존스. 자넨 가끔 맘에 안 들때가 있어."
그는 그대로 가 버렸고 존스는 어깨를 들썩여 보였다. 멀리서 바비 볼덴이 부는 색소폰 소리가 들려왔다.
'콜드, 콜드 하트'
슬로우 블루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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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점심 시간 직전에 메인사이드에 나갔던 창고계 몇 명이 돌아왔다. 한 사람은 랠리 파슨스라는 이름의 덩치가 큰 근육질의 금발 청년이었다. 그는 항상 세상보다 템포가 두 박자 정도 늦은 듯 들어서자마자 외쳤다. "어이, 모두 행크 윌리엄스에 대해 들었나?"
모두들 웃자 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두 번째는 찰리 댄버였다. 자그만 체격에 시원시원한 남자로, 몸에 딱 맞는 제복은 완전히 물이 빠져 누가 봐도 고참병이었다. 얼굴은 깨끗하게 탔으며 무슨 말을 하면 흰 이를 드러내며 싱긋 웃었다. 그는 내가 만난 최초의 대졸자이고, 유일한 공화당 지지자였다. 고향 브룩클린에는 대학 졸업자도 공화당원도 드물기 때문이다. 후에 그는 자기에게는 단 한 가지 야심밖에 없노라고 털어 놓았다. 그것은 미국 대통령이 되는 것이라 하는 것 같았다.
세 번째는 마일즈 레이필드로, 그때는 물론 알 수 없었지만 나중에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다. 모가 난 얼굴, 얄상한 윗입술. 굵은 검은테 안경을 끼고 있었고 입가에는 주름이 깊게 패여 있었다. 몸과 어울리지 않게 머리가 큰 가분수였고 손가락은 가는 튜브 같았다.
그와 댄버와 파슨스가 무거운 상자를 창고에 반입하는 것을, 나와 베케트가 도왔는데 마일즈는 시종일관 앓는 소리를 내거나 욕지거리를 씨부렁거렸다. 창고에 들어오자 모두 일제히 걸음을 멈추고 정신없이 곯아떨어진 보즈웰을 내려다 보았다.
"맥을 짚어 볼까?" 마일조가 말하자
"냅 둬, 냅 두라구." 베케트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 목숨은 붙어 있을 테니까."
작업이 끝나자 각각 식당이나 화장실 막사 등으로 흩어져 갔다.
나는 내 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뒤 마일즈가 다가와서 자기 소개를 했다. 조지아 마리에타 출신으로 스물 세 살이라고 했다. 해군에 들어온 이유는 자신도 모르니까 묻지 말라고 했다.
"이거야말로 해군식 자기 소개 아니겠어? 또 한 가지 말해 두겠는데 행크 윌리엄스에 관해서도 의미 없이, 조종사의 공중 회전처럼 떠들썩하게 슬퍼들하고 있어, 요-만큼도 느낌이 없어." 그러면서 웃었다.
"이 지구의 항문으로 온 것을 환영하네."
나도 웃으면서 이름을 말하고 출신지를 댔다. 브룩클린이라 하지 않고 그냥 뉴욕이라고만 해 두었다. 마일즈의 책상은 내 맞은편이라 그가 분주하게 서류를 뒤적이거나, 창문을 열어 바람이 넘어 들어오게 하는 것 등이 보였다.
"메인사이드 사람들도 행크 윌리엄스 건으로 완전히 얼이 빠졌더구만." 마일즈가 말했다.
"멘켄 말 그대로야. 남부는 보자르 사막이야. 여기서는 어떤 것이 예술로 통하는지 금방 알 수 있어. 역겨울 정도로 천박하고 병적이라서 속이 메슥거릴 정도로 센티멘털한 동네지."
지금 그가 한 말중에는 내가 모르는 것이 있었다. 첫머리의 멘켄이 어떤 자인지 모르고, 보자르의 스펠링도 모르겠다. 그러나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대충 짐작이 갔다.
"자네 어젯밤에 도착했다고 했나?"
"응, 어제 오후에. 그리고 제3초계점에서 한밤중부터 새벽 네 시까지 보초를 섰어."
"그 쓰레기 회수고 말이지!" 마일즈가 웃었다.
"그럼 저 위대한 미국의 인텔리 웬델, 저 래드 캐논과는 벌써 상면했겠구만. 그 자식은 신병을 보면 누구든지 첫날 밤에 그 쓰레기 회수고 경비를 세우지."
"도대체 어떤 문제가 있는 거야, 그 사람?" 내가 물었다.
"그 자식의 문제는 파충류라는 거야. 백치 파충류 징그러운 무지렁이, 촌개구리, 돼지 뺨치게 더러운 놈, 거만하고 무지몽매하고 모자라는 천하의 비열한이야." 거친 숨을 한번 몰아 쉬고 말했다.
"간단히 말해서 일생을 해군에서 보낼 수 밖에 없는 바보 멍청이라는 거야."
그리고 자리에 앉아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그 커다란 양손은 손자체의 의지로 움직이듯이 연필을 쥐었다, 클립을 만지작거렸다 했다.
"어떤 식으로 대해야 좋을까? 그 녀석과는?" 내가 물었다.
"그 자식은 선(腺) 페스트를 앓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대처하면 될 거야."
아무 것도 적혀 있지 않은 푸른 종이를 한 장, 로열 타이프라이터에 끼우더니 마일즈는 타이프를 두드렸다. 그리고는 나를 보고 말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게 아냐. 만일 캐논 녀석이 진짜 선 페스트에 걸렸다면 녀석 오히려 머리가 좋아져 버릴지도 몰라."
나도 종이를 타이프에 끼우고 있는데 마일즈가 다시 덧붙였다.
"그 자식을 맥카시 위원회에 회부하는 방법도 있어. 그렇잖아. 이럴 바에야 공산주의가 낫겠다고 사람들이 생각하도록 만드는 자가 이 기지에 있다면 그가 바로 래드 캐논이거든."
일언일구가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놀랄 만한 완벽한 의미를 지닌, 속된 말씨 같지만 풍부한 뜻이 담긴 말이 줄줄 튀어나왔다. 이런 말투는 처음 들어 보는 것이었다. 마일즈에게는 남부 방언이 있어 모음이 약하게 울리는데,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 놓을 때는 자음이 세게 울린다. 두꺼운 안경 너머로 그는 줄곧 이쪽을 보았다. 흐트러짐 없는 표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대로이다.
"내가 농담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데블린?" 그가 말했다.
"그러나 난 진지하게 이야기한 거야. 난 암소 젖처럼 명백한 사실을 이야기했을 뿐이라구."
할레르슨이 다시 라디오를 틀었다. 순간 행크 윌리엄스의 노래가 흘러 나왔다. 마일즈는 노래 소리가 나는 곳을 쳐다본 뒤 다시 내쪽을 보았다.
"점심 먹으러 가자. 식당에서 주는 한심한 그것도 점심이라고 한다면, 그래도......"
일어서면서 그의 타이프에 꽂혀 있는 종이를 흘깃 쳐다 보았다. 단 한 마디 찍혀 있는 단어는, '도와 줘' 라는 글자로 보였다.
"이 꼴도 보기 싫은 음식찌꺼기를 구정물통에 버리고 차 한잔 마시러 갈까."
마일즈가 말했다. 그는 먹다 남은 햄버거와 매시 포테이토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나는 거의 다 먹어치웠다.
"아, 좋지." 식당을 나올 때 바비 볼덴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우리 바로 앞에서 식판의 음식찌꺼기를 쓸어모아 통에 버리고 있었다.
그리고 식판을 창구 안쪽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손만 움직이는 곳으로 밀어놓고 있었다. 밖으로 나와서 내가 이름을 부르자 볼덴이 돌아다 보았다. 양손을 호주머니에 찔러 넣고 있었다. 마일즈는 모르는 척 걸어갔다. 경계하는 눈초리로 볼덴이 쳐다보았다.
"연주하신 '콜드, 콜드 하트'는 정말 좋더군요." 내가 말을 건냈다.
"바로 오늘 아침에 불었던......"
"전에 만난 적이 있었나, 자네와?"
"아뇨, 전 여기 온 지 얼마 안 되었습니다."
내 이름을 소개하고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그는 싹 무시하였다.
"어제 하루 종일 당신의 연주를 들었지요. '점핑 위드 심포니 시드', 정말 좋더군요. 뉴욕에서 살 때는 매일 밤 시드를 들었죠. WEVD 방송으로. 당신이 부는 것은 알토입니까 아니면 테너 색소폰입니까?"
"테너야."
"그렇군요. 찰리 파커를 좋아하십니까?"
"그가 부는 건 알토야."
"아,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그렇게 딱딱하게 굴지 마세요. 전 그저 당신 연주가 마음에 든다고 전해주고 싶었을 뿐이니까요. 당신이라면 음악 이야기가 통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요. 당신의 하루를 망치려는 생각은 없었어요. 미안합니다."
그리고는 걸어 나오려는 데 그가 팔을 잡았다. 허튼 짓 하기만 해 봐라 한 방 올려 붙일 테니 하고 내뱉을 줄 알았는데 그는 녹색 눈을 지그시 뜨더니 내 팔을 놓았다.
"고맙다."
그렇게 말하고는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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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른 노트로부터의 발췌
Lonesome(형용사) 1. 친구나 지인이 없어 허전한, 슬픈, 쓸쓸한 to feel lonesome(홀로 외로운) 2. 어쩐지 슬픈, 쓸쓸한 기분이 들게 하는 3. 인적이 없는, 인가에서 떨어진, 황량한, 고립된. a lonesome road(인적이 드문 길)
이 기지 사람들과 내가 다른 점 하나는 음악이다. 다른 사람들은 행크 윌리엄스와 함께 성장했지만 난 아니다. 그래, 그뿐인 것이다.
그리고 음악이란 시간을 재는 척도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시계나 달력과는 다르다. 음악인 것이다. 음악이 시간 그 자체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4분의 4박자라거나 4분의 3박자(왈츠)라고 한다.
그렇지만 음악은 이 세상의 시간을 부동시켜, 특정한 시기를 머리에 새겨 넣고 의식에서 빠져 나가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그러므로 빅 밴드의 연주를 들으면 나는 반드시 전쟁이 연상된다.
이것은 반대로도 작용하여, 어느 해의 일이 떠오르면 꼭 몇 곡의 노래가 생각난다. 예를 들면 누군가가 1950년을 들먹였다고 하자. 그러면 어김없이 Andrews Sisters의 'I can Dream, Can't I?'의 멜로디가 기억난다. 그 밖에 Theresa Brewer, Eileen Barton, Phil Harris 등이 불러 히트시킨 시시한 노래. 그해 여름, 군인들이 차례차례 한국에서 전사해 가던 무렵, 우리는 가두에서 Frankie Laine을 흉내내며 'Mule Train'이나 'That Lucky Old Sun'을 불러댔다. 그때 한국에서 싸우던 군인들은 무슨 노래를 불렀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어떤 음악을 들으면 나는 우리집 부엌에서 그림을 그리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그때는 동생돌이 걸핏하면 울음을 터뜨렸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처음 맞이한 그해 여름, 우린 모두 허전하고 외로워서 어쩔 줄 몰라했다. 그 서럽던 시절의 유행가는 머리에 생생하게 각인되어 있다. Patti Page, The Weavers, Joni James, Mario Lanza, The Four Aces, Les Paul and Mary Ford, Nat Cole. 그리고 Rose-mary Clooney. 모든 것이 음악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 내가 어디를 가든 그들도 나와 함께 다녔다.
1951년 가을, 토니 베네트가 'Because of you'를 부르며 데뷔했다. 우린 어딜 가나 그 곡을 들었다. 술집마다 파티장마다. 당시 선배들이 잇따라 한국으로 보내졌으므로 여기 저기서 송별회가 열렸다. 거기서 이 노래가 으레껏 연주되었다. 그 바로 뒤에 유행한 것이 'Cold Cold Heart'였던 것이다. 그것이다. 나와 펜서콜라의 동료들과 공감하고 있는 오직 하나. 그 노래.
신병 훈련소 시절의 최대 히트곡은 'You Belong to Me'였다. Jo Stafford, 그 곡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
비에 젖은 바다를 보면......
미국 어느 벽촌에서 온 촌놈이라도 그 곡만은 알고 있었다. 우리는 한밤중에 막사에서 그 노래를 불렀다. 그야말로 시원찮은 노래일지 모르지만 마치 나를 위해서 쓰여진 노래 같았다. 나 뿐만 아니고 모두들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나의 심정을 대변해 주는 노래라면 내겐 위대한 곡이다.
나는 사실 쓸데 없는 노래를 많이 들어 왔다(들으려고 들은 것이 아니라 술집 같은 데 출입하면 저절로 귀에 익게 된다. 그 외에 다른 곳에서도 들었고). 그러나 나는 symphony 56, Charlie Parker, Dizzy, Max, Horace Silver, Ben Webster 등도 즐겨 들었다. 이런 부류쪽이 WNEW 방송국이 내보내는 실없이 달콤하고 황당한 노래들보다 낫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중요한 영역을 이룩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 것 같았으며 이제까지 그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터치로 음악을 표현하려 했다. 그렇지만 그들 곡은 우선 음악 다방에서 찾을 수가 없었다. 시드를 제외하면 뉴욕의 라디오에서 들을 수도 없었다. 만일 그들의 곡을 그 무렵 라디오에서 들을 수 있었다면, 지금 다른 시시한 노래를 들어도 이렇게 우울해지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렇고말고, 만일 그들의 곡을 라디오에서 틀어 주었다면 나는 지금쯤 'You Belong To Me'가 아닌 'A Night in Tunisia,(데이지의 노래)의 멜로디를 모조리 외우고 있을 것이 틀림 없으니까.
그렇지만 그렇게는 안 되었다. 그래서 지금 나는 시시한 노래들을 들으면서, 앞으로 이 노래들을 잊어버리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는 사실에 두려워 하고 있다. 왜냐하면 요즘 내 머리속에서는 계속해서 이런 노래들만 맴돌고 있기 때문이다. 밤이나 낮이나.
은빛 비행기로 바다 위를 난다
비에 젖은 정글이 보인다
당신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를 상상해 본다.
마일즈 레이필드가 말한 멘켄이란 누구를 말할까? 보자르는 또 무
엇일까?
파라트카는 여기서 46마일 떨어져 있다.
만화가인 스티브 캐니언은 귀향하여 어느 대학에 근무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가 프린세스 스노우플라워와 히말라야에 있던 때가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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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나는 워싱턴 애비뉴와 제퍼슨 하이웨이의 길 모퉁이에 있는 탈의실 로커클럽 앞에서 막스 필즈너와 샐 잉펀티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함께 시내로 가기로 되어 둘은 안에서 사복으로 갈아 입고 있었다. 나 혼자만 해군 이등병임을 나타내는 두 줄의 녹색 줄무늬가 있는 흰 해군복을 입고 있었다. 내 경우는 사복으로 갈아 입기 위해서는, 봉급날까지 기다려 새 옷을 사든지, 아버지가 빨리 옷을 소포로 부치는 방법을 알게 되기를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기지까지 한 줄로 늘어서 있는 종려나무 가로수는 늦은 오후의 석양을 받아 한층 장려하게 보였다. 비행장의 잡초나 소나무, 야자나무 등은 훨씬 푸르렀다. 하이웨이 맞은편에는 <비리즈>라는 가게가 있는데, '5시부터 7시까지 즐거운 시간을' '여성도 환영'이라는 팻말이 윈도우에 게시되어 있었다. 그 앞에는 행크 윌리엄스를 애도하느라 그러는지 반기가 게양되어 있었으며 여남은 대의 차들이 머리가 부대낄듯이 주차되어 있었다. 시내는 하이웨이 왼쪽으로 가면 있었다. 100야드 정도 후방의 소나무숲 사이로 교회의 흰 첨탑이 보였다.
나는 지나가는 차들을 구경했다. 차는 별로 많지 않았다. 승용차가 두세 대. 대형 트럭이 한 대. 그리고 파란 자전거. 노란 티셔츠에 짧은 바지 차림의 여자가 페달을 밟고 있었다. 늘씬한 다리에 힘줄이 드러나 있었다. 아아, 저런 다리를 그리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했던 적이 있었지. 그녀는 야구모자를 깊숙히 눌러쓰고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다음 순간, 앗 생각이 났다.
그녀다.
버스에서 사라진 여자.
이곳에.
이 펜서콜라에.
2,3초 멍청히 서 있던 나는 몸을 튕기듯이 하이웨이쪽을 향하여 달려갔다. 쓰레기 차가 굉음을 울리면서 옆을 스쳐간다.
"이봐요!" 나는 목청껏 불렀다.
"저, 잠깐만...... "
그러나 그녀라고 깨달은 순간 이미 상대방은 사라지고 있었다. 하이웨이의 코너를 돌아 교회 앞을 지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때 막스와 샐이 나왔다. 막스는 몸에 꼭 끼는 티셔츠에 진, 샐은 야자수와 해변과 넘실거리는 큰 파도가 그려져 있는 화려한 레이온 셔츠. 다시 한번 하이웨이쪽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가슴이 쓰릴만큼 긴장했지만, 그렇게 초조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할 수 있다면 택시를 잡든지, 버스에 뛰어올라가 당장 쫓아가고 싶었다. 그러기엔 한발 늦었지만 그래도 어쨌든 멀리 파라트카에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이 도시에 있는 것은 알았다. 그건 확실해졌다. 그녀는 여기 있다. 이 펜서콜라에. 이곳에 있다면 언젠가는 만날 것이다. 반드시.
"자네 오늘도 트레이닝하고 왔군, 막스."
샐은 그렇게 말하고 막스의 어깨를 탁 쳤다.
"이것 봐, 근육이 탱탱하잖아."
"손 좀 떼지, 샐."
"막스는 보디빌딩을 하고 있어." 샐이 내게 말했다. 우리는 차가 뜸해지길 기다려 하이웨이를 건너갔다. 좀더 빨리 걸어가 버스를 타고 싶다, 그녀를, 내 여자를 한 번 더 잠깐이라도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스와 샐은 마냥 느릿느릿하게 걸었다.
"기지에는 말야, 세 사람이 들어가도 꽉 차 버릴 것 같은 작은 체육관이 있어. 막스는 거기 가서 아령을 들다가 왔을 거야. 오늘같이 티셔츠를 입기로 마음먹은 날은 꼭 사전에 트레이닝을 하고 오니까."
"제발 입 좀 다물어, 자-식아."
막스가 말을 막았다.
샐과 막스는 비리즈에는 가까이 가지 않는 것이 좋다고 충고해 주었다. 그곳은 고참병들이 모이는 곳이고 래드 캐논 일당의 집합소라고 했다. 그 가게 앞을 지나 침례교회 앞의 버스 정류장까지 왔다.
버스가 도착하자 모두 탔다. 막스와 샐이 함께 앉았으므로 나는 두 사람 뒷자리에 앉았다. 시내로 가는 길에 줄곧 내 눈은 노란 티셔츠에 야구모자를 쓰고 파란 자전거를 타고 가던 그녀의 모습을 쫓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꼭 만날 것이라고 나는 확신했다.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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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다트 바>에 도착하자 딕시 세이퍼가 도어 바로 안쪽에 서 있었다. 키는 그다지 크지 않았으나 윤기있는 붉은 머리카락이 탐스럽게 올라가 있는 탓인지 몰라도 몸집이 제법 있어 보인다. 입도 코도 작았으며 살갗은 크림과 같이 새하얗다. 체중이 300파운드는 족히 될 것 같고 그 체중의 상당 부분은 가슴쪽에 집중되어 있었다. 풍만한 그 가슴은 어깨가 노출되어 있는 꽃무늬의 집시풍 블라우스를 금방이라도 비집고 나을 것 같았다. 가슴 골짜기에는 금으로 된 십자가 장식이 매달려 있다. 그것은 그녀가 움직일 적마다 뒤집어진다든지 가슴에 착 달라붙는다든지 했다. 큼지막한 짙은 붉은색의 할리퀸 안경 속의 눈동자는 청색, 양쪽 귀에는 금귀걸이가 매달려 있으며, 열 개의 손가락 전부에 반지를 끼고 있었다. 이런 여성을 가까이하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신참을 데려왔어." 라고 샐이 말했다.
"마이클 데블린이야!"
"처음 온 손님은 가게에서 한턱 내지!"
딕시가 이렇게 외치고 거대한 유방을 밀어붙이면서 나를 끌어안았
다.
"오늘은 특별 서비스야. 다음부터는 당신이 내야 해!"
그녀는 가운터 뒤쪽으로 돌아갔다. 샐의 설명에 의하면 그녀가 스트리트의 이 공터에 술집을 연 것은 1년쯤 전의 일이라고 한다. 그 무렵, 그녀의 머리속에 번뜩이는 것이 있었다. 일대의 땅값이 굉장히 쌌으므로 그녀는 이 토지를 매입했으며, 메인사이드 기지의 병기고에서 콘크리트 블록을 사들였다. 병기고계는 기지로부터 그 물건들을 빼돌렸던 것이다. 지붕을 얹은 것이 그로부터 일 주일 후, 카운터는 은퇴한 조선공이 아르바이트로 만들어 주었다. 그녀는 주크박스와 셔플보드를 설치했다. 그러나 그쯤에서 자금이 바닥나 버려서 바닥을 깔 돈이 단 1센트도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병사들은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바닥 따위가 없어도 전혀 개의치 않았고, 더욱이 흙이 드러나 있는 편이 더 좋다고 하는 수병들이 샐을 비롯하여 몇 사람이나 있었다. 게다가, 수병들에게 있어서는 카운터와 주크박스, 차가운 맥주, 여자의 따뜻한 젖무덤만 있으면 나머지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도 그녀는 배웠다. 그래서, 그녀는 바닥을 깔기 위해 모은 돈으로 뒤편에 별관을 지었으며, 그곳에서 자신이 지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젊은 수병들이 바라고 있는 그것을 충족시켜 주는 일에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그것은 맥주와 여자, 여자와 맥주였다.
"만일 천국이 딕시의 <다트 바> 같은 곳이 아니라면 나는 가고 싶지 않아." 라고, 샐이 말했다.
그녀는 잭스 비어를 3병 이쪽으로 보냈으며 우리는 각자 1달러씩 카운터에 올려 놓았다. 자욱한 담배 연기를 통해 같은 기지의 수병들의 얼굴이 몇몇 보였다, 주크박스에서는 행크 윌리엄스의 노래가 흐르고 있다.
잼바라야와 크로피시 파이
그리고 피레 검보......
사복 차림의 네 명의 사내가 셔플보드에서 플레이하고 있다. 도어가 열렸다. 두 명의 손님이 들어와 이미 가운터에서 마시고 있는 여러 명의 병사들과 어울렸다.
아, 이제부터 실컷 즐기자
그 늪지대에서
맥주에는 조그만 얼음이 많이 들어있다. 카운터 안에서 바삐 돌아다니는 딕시의 출렁이는 가슴에 나는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맥주 마개를 능숙하게 따고 아이스박스 옆의 쟁반에서 잔돈을 거둬들이고 있다. 아, 저 새하얀 젖가슴 사이에 얼굴을 파묻으면 어떤 기분일까?
"행크는 죽지 않았어!"
돌연 샐이 부르짖더니, 선교사같이 양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렇고말고, 절대로 행크는 죽은 것이 아니야!"
셔플보드에서 플레이하고 있던 사내들이 손을 멈췄다. 딕시가 의아한듯 그를 응시한다. "행크 윌리엄스가 죽었다니 말도 안돼!" 그 어조까지 선교사와 닮아 있었다. 게다가 크래그혼 상원의원의 어조까지 조금 섞여있었다.
"잘 들어보시오, 형제자매들이여! 저것이 들립니까? 가엾은 행크, 떠돌이 루크 그 사람의 목소리가 들립니까? 그는 살아있는 겁니다, 형제자매들이여! 저 주크박스 안에 살아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죽는 날까지 저곳에서 계속 살아있는 겁니다!"
"아멘!" 셔플보드에서 플레이하고 있던 사내 중 한 명이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멘, 아멘......"
"주님은 그를 우리들에게 보내셨으며, 지금은 또한 그를 데려가셨습니다. 그러나 형제 자매들이여, 우리는 천국에서 그를 다시 만나볼 수 있습니다! 알겠습니까, 여러분! 오늘 밤, 이곳에, 이 술집에, 우리 가엾은 죄인들과 함께 그는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들 중에 그가 죽었다고는 분명히 단언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이지오. 행크는 살아있어요! 자, 형제들이여, 함께 외칩시다!"
카운터의 해군 둘이 외쳤다.
"행크는 살아있다! 아, 행크는 살아 있는 거야!"
"안돼, 그 정도로는! 좀 더 큰 소리로 외쳐야만 해! 주님의 귀에 미치도록, 커다란 소리로 외치는 거야! 알았습니까, 여러분? 내가 말하는 것을?"
샐이 진심으로 말하고 있었던 것인지 어떤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수초가 지나자 술집에 있던 전원이 큰 소리로 카운터를 두드리면서, "행크는 살아있다! 행크는 살아있다!" 라고 합창하고 있었다. 샐은 얼굴을 한껏 쳐들고 맥주를 단숨에 비우고나서 그 병을 가운터에 내동댕이쳤다. 주크박스에서는 행크의 노래소리가 흐르고 있었다.
나와 만나기 전의 사랑이
너의 마음을 슬프고 우울하게 했지.
막스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봐, 그만 떠들고 술이나 마시지,
샐."
"그야 물론이지, 내 유태인 친구. 행크 역시 이렇게 하기를 바라고 있을 테니까"
우리는 마치 종교 의식과 같이 셋이서 함께 맥주를 들이켰다. 샐이 다소 해학스럽게 그러나 거의 종교적 열정의 경지에 도달한 듯한 목소리로 모두를 부추기곤 했으며, 막스는 커다란 소리를 내며 트림을 한다. 딕시는 또다시 맥주 세 병을 가져왔으며, 행크 윌리엄스는 'Ramblin Man'을 부르고 있었다. 사복 차림의 수병 세 사람이 또 들어왔다. 술집 안은 바야흐로 입추의 여지도 없을 정도가 되어, 담배 연기에 휩싸였다. 콘크리트 벽 가장자리에 설치해 둔 커다란 워리츠 주크박스의 튜브 안을 물거품 같은 빛이 빠져 나가고 있었다. 나는 두 병째의 맥주는 단숨에 마시지 못했으며 가스와 같은 거창한 트림을 내뱉고 말았다. 샐이 내 등을 두드리며 딕시를 불렀다. 그녀는 또다시 맥주 세 병을 가지고 왔다.
딕시의 가슴은 얼마나 멋진가! 아니, 저것은 가슴이 아니야 라고 생각했다. 좀더 개성에 넘친 그런 것이다. 모두들 왁자지껄했으며, 그들 모두를 압도하는 듯한 커다란 목소리로 샐이 부르짖고 있었다.
화제는 단 한 가지, 행크 윌리엄스.
"행크는 죽지 않았어!"
샐은 이렇게 외치고, 맥주를 들이켰다.
"행크는 살아있어!"
그는 그날 밤의 슬로건을 반복해서 내뱉고 있었다.
"행크 역시 이렇게 되기를 바랐을 거야."
그는 단지 즐기고 있었던 거라고 생각한다. 그는 진심으로 행크 윌리엄스를 그만큼 애도하고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렇지만, 터무니 없이 큰 소리로 그는 나름대로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고 있었으며 그들을 얼마쯤 연민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하여 그날 밤의 조각조각의 단편들이 연결되었다. 맥주, 새로운 얼굴들, 다트 바의 카운터, 깨어진 맥주병, 딕시의 새하얀 젖가슴.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이어 맞추고 있던 것은 독하고 가엾은 행크였다.
"행크 역시 이렇게 되기를 바랐을 거야."
혼돈 속에서 딕시가 다가와,
"이봐, 왜 그렇게 입을 다물고 있지?" 라고 말하고는 다시금 멀어져 갔다. 행크 윌리엄스가 그동안 줄곧 노래하고 있었다.
울새가 훌쩍거리며 우는 것을 본 적이 있나
나뭇잎이 마르기 시작할 때에?
울새는 살 기분을 잃었던 거야
너무 쓸쓸한 나머지 울고 싶어져......
몽롱하고 흐릿한 공기를 통해 나는 '더 갱'이라고 불리우는 놈들의 얼굴을 가려내려고 했다. 우선 하트포드 출신의 브라이언 메이허. 멕시코 만의 햇볕에도 아직 그을리지 않은 해쓱한 아일리쉬 피부. 먹같이 검고 촉촉한 머리카락. 샐의 이야기로는 매우 영리한 사무계원으로서 속기 솜씨라면 프로와 맞먹는다고 한다. 그는 굉장한 스피드로 맥주를 마셨으며 조심스럽게 트림을 하면서 비밀을 털어놓는 듯한 어조로 어렸을 적의 일을 이야기했다. 메리맥 강에서 자주 스케이트를 탔었다던가, 그 겨울 강에서 스케이트를 타던 여자애들만큼 둥글고 야무진 궁둥이를 가진 여자는 이 세상에 다시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라던가. 옆에는 뉴욕 출신의 돈 카터가 있었다. 그의 사투리로 말하자면 어떤 뉴요커보다도 심했다. 듬성 듬성 나 있는 이빨, 높직한 코, 커다란 손, 햇볕에 그을린 피부. 에리슨 기지에서는, 낙하산 장착계로 일하고 있다. 'Mind Your Own Business'의 노랫소리에 뒤지지 않음직한 큰 소리로 샐이 그를 향해 부르짖었다. 바깥 세계로 돌아가면 자네, 낙하산 장착 따위의 기술로 밥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카터는 나를 힐끗 바라보고 어깨를 으쓱이더니 높은 코를 문지르면서 맥주병 주둥이를 들여다봤다. 알게 뭐야 라고 그는 중얼거렸다. 우연히 낙하산 장착 학교가 우리집 근처인 레이크허스트에 있었어. 나는 단지, 사귀고 있던 여자애 곁에 있고 싶었을 뿐이야. 그러자 샐이 카운터를 세게 두드리며 소리질렀다. 그래서, 그 소중한 여자는 도대체 지금 어디 있는 거야? 응, 카터? 카터는 속삭이듯이 말했다. 가버렸어. 샐은 눈을 깜빡이고 말했다. 좋아, 마셔. 이 멍텅구리야! 행크 역시 이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을 거야.
그곳으로 보즈웰이 다가왔다. 셔플보드에 부딪혀 비틀거렸다고 생각하자, 'Jambalaya'를 듣고 울음을 왁 터뜨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워레스키가 내쪽을 향해 말했다. 이봐, 나는 말이야, 영화 따위라도 볼 수 있는 뉴욕은 매우 좋은 곳이라고 생각했고 뉴요커 역시 좋아했지, 하지만, 웬걸! 시카고는 더 근사해. 시카고야말로 위대한 도시, 최상의 도시지. 하긴 니어사이드의 프라스키 블루버드 같은 거리는 뉴욕에는 없을 거야. 그뿐인가? 코지어스코를 기념키 위한 다리도 있지. 당치도 않아 라고 나는 말해 주었다. 뉴욕 역시 코지어스코 브리지라는 것이 있어. 또한 뉴욕에는 칼메트의 매디슨 스트리트 같은 곳은 없을 거야. 한 번 여자를 품는데, 단 5달러란 말이야. 풋내기든 바람둥이든 마음대로 골라잡아 밤새도록 품을 수 있지. 그럼- 그의 올가미에 감쪽같이 걸려들어 나는 물었다-흑인 여자와 잔 일이 있어? 워레스키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응, 나 자신은 흑인 여자와 하고 있는 것을 보기까지는 말이야. 그리고나서 마시는 속도를 조금 떨어뜨리자, 맥주를 물끄러미 응시하면서, 그는 해군에 입대하기 1년 전의 일을 이야기했다. 그 해 만큼 지독한 적은 없었다고 한다. 여하튼 어둑어둑할 때에 일어나 게일리의 인랜드 스틸 사의 공장으로 일하러 간다. 밤이 되어 애인 샐리를 만나면, 그녀는 손톱 밑에 검은 기름때가 끼어 있다고 말하며 화를 내곤 한다. 그래서 그러한 밤은 절대로 그녀의 소중한 곳을 만질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 샐리란 애, 지금 어디 있는데? 라고 나는 물었다. 워레스키의 대답은 -수병이라면 예외없이 내뱉는 대답과 다를 바 없었다-가버렸어.
물론 먼저 가버린 것은 수병쪽인 것이다. 그것이 취약점이라고 말해도 좋다. 수병이라면 누구라도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막다른 처지에 빠진 나머지 사인한다. 해군에 입대한다. 어째서 해군이냐고 하면 한국에서 싸울 수병을 국가가 필요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육군에는 들어가고 싶지 않았던 탓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형제가 해군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케이트 스미스가 부르는 'God Bless America'를 들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렸을 적에, <싸우는 설리번 형제> 라든가 <콜레히들 전기> 라는 영화를 봤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혹은, 단순히 해군 제복을 입고 싶었기 때문이라든가 자신이 진짜 남자인 것을 증명하고 싶었기 때문이라든가. 어찌 되었든, 우리는 고향을 등졌으며 그 뒷모습을 지켜본 여자들은 우리가 나중에-그녀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면서-말하듯이 가버렸어 라고 중얼거렸을 것이다. 송별회가 여기 저기서 열렸으며 애틋한 작별의 말이 오갔다. 애인과 약혼한 사람도 있으며 결혼까지 해버린 사람도 있었다. 결혼한 남자들은 다운타운의 사진관에서 신부와 나란히 찍은 사진을 간직한다. 남자는 빌려 입은 턱시도, 여자는 흰 웨딩드레스. 사진관 앞에는 렌트카가 이중 주차해 있다. 남자들은 그 사진을 지갑이나 씨 백(Sea bag;의복, 소지품을 넣는 원통형의 포대)에 숨겨넣어 신병 훈련소까지 가지고 간다. 맴피스와 잭슨빌, 오클라호마의 노만 훈련학교까지 가지고 간다. 해외의 전장터까지 가지고 간 사람은 그것을 바라보고는 아내의 육체의 촉감, 웃음 소리를 떠올리려고 애쓴다. 그리고 그녀들이 '가버렸어' 라고 알아차렸을 때에는 이미 늦다. 여자들은 토요일 밤에 반드시 가까이에 있는 다른 사내들을 찾아내는 것이다. 편지 봉투의 발신인이 아닌. 건장한 사람들을. 함께 마신다든지 춤춘다든지 잠잔다든지 할 수 있는 사내들을.
이것이 그날 밤 자욱한 담배 연기와 소음과 조각조각난 어둠 속에서, 내가 들을 수 있었던 이야기였다.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되어지는 그것들의 회상이 하나로 끼어맞추어져 있었던 것이, 이미 이 세상을 떠난 고독한 컨트리 웨스턴 가수의 노랫소리였다. 그리고 그때, 고향을 나온 이후 처음으로 나는 알았다. 자신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자신도 또한 상실을 기반으로 삼는 이 거대한 비밀 클럽의 일원인 것이며 오늘 밤은 이곳 딕시의 <다트 바>에서 그 펜서콜라 지부의 집회에 참석하고 있는 것이라는 점을.
10시경이 되자 여느 때처럼 창녀들이 찾아왔다.
"저길 봐, 저들이야말로 진짜 천사들이지."
라고 샐이 말했다. 막스가 고개를 저으며 임질을 조심하라구 라고 속삭여 주었다. 그러나 샐은 미소 짓고 몸매가 호리호리한 여자의 손을 잡고 'Cold Cold Heart'에 맞추어 춤추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도 여자들의 손과 허리와 궁둥이를 붙잡기 시작한다. 여자들은 울먹이는 소리로 행크의 죽음을 애도하며, 수병들의 어깨에 얼굴을 묻는다. 개중에는 구두를 팽개치고 <다트 바>의 축축한 흙을 직접 밟아대는 사람도 있었다.
"당신도 춤춰요." 딕시의 권유로 나는 루이지애나의 습지대에서 왔다고 하는 이빨 틈이 벌어진 여윈 여자와 춤추기 시작했다. 그녀는 4년 전, 마이애미에 가려고 하다가 이 펜서콜라에 흘러들어 왔다는 것이다. 그녀는 나를 '뱃사람'이라고 불렀으며 행크의 죽음이 쇼크였다고 말했다. 바깥의 내실로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으므로 지금 지갑이 비었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단 4달러면 오케이라고 말한다. 다음에 하자고 대답하자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렇게 해요, 수병 나으리. 그 곡이 끝나자 그녀는 막스에게 다가가 그를 댄스 플로어로 끌어냈다. 얼마쯤 있자 두 사람은 바깥으로 사라졌다.
술집 안은 순식간에 수병들과 창녀들로 북적거렸으며 모두들 밟아서 다져진 붉은 흙 위에서 춤추고 있었다. 문신을 하고 있는 여자도 있으며, 이빨이 없는 여자도 있었다. 시골티를 그대로 드러내는 사투리로 지껄이는 거친 피부의 우락부락한 여자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우리를 '뱃사람' 이라든가 '수병 나으리'라 부른다. 그 점도 틀림없이 그녀들의 직업 정신에서 나온 것일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 그녀들로서는 상대로 삼는 사내들 전부의 이름을 기억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우리를 '뱃사람' 이라든가 '수병' 이라든가 '색골' 등으로 부르는 것이다. 나도 몇 여자와 춤추었으나 그냥 카운터에서 바라보고만 있는 시간이 많았다. 그곳에서 알고 있는 얼굴을 발견하면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들을 그림으로 그리고 싶다 라고. 그녀들을 실제보다 미인으로 그려도 괜찮겠지. 그렇게 하면 모두 행복해 할 것이다. 그것도 그럴 것이 그날 밤, 그곳에 있던 남녀 모두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라고 곧바로 생각했다. 시체는, 웨스트 버지니아에 세워져 있었던 캐딜락 안에서 발견되었다. 그렇지만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은 지금은 행방도 알지 못하는 잊혀진 사람들, 떠나가 버린 애인, 깨어진 약속, 과거. 애도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애도의 대상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고향인 브룩클린에서 행해지던 밤샘과 다를 바 없는 멋진 밤샘이었다. 창녀들이 웃고 샐이 부르짖는다든지 그녀들의 궁둥이를 주물럭거리고 있었을 때, 그들은 브룩클린의 아일리쉬계 사람들과 똑같이 밤을 지내고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그랬다. 처음에는 모두 침통한 얼굴로 훌쩍인다. 그러나 나중에는 관례에 따라 술이 들어오고 술에 취해서 오래된 민요를 부르기 시작한다. 아일리쉬 사람들은 블루스 대신에 그런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자정 무렵에는 귀를 찢을듯한 솔이 장내에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행크 윌리엄스, 맥주, 보즈웰이 바깥에서 가지고 들어온 눈부신 라이트. 그러는 동안 도어가 세차게 열렸더니 두 명의 뚱뚱한 여자가 비틀거리면서 활기차게 들어와,
"야호!" 라고 외쳤다.
"1톤 분의 쾌락이다!" 라고 샐이 외치고 그녀들을 향해 돌진하자마자,
"야호!" 라고 부르짖으면서 공중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자 베티와 프레디라는 그 여자들은 재빨리 마주 보고 양손을 활짝 펴서 네트처럼 샐의 몸을 받아냈다. 마치 서커스 묘기 같은 멋진 행동이었다. 그녀들은 곧바로 샐의 얼굴에 유방을 밀착시켰으며 프레디는 그의 허벅지 사이를 어루만지기 시작한다. 샐은 일부러 공포에 질린 듯한 목소리로 소리질렀다.
"목사님을 불러줘! 빨리 목사님을 불러 달란 말이야!"
딕시쪽을 바라보자 그녀는 이쪽을 향해 고개를 젓는다. 노. 무슨 신호일까? 무엇인가를 전하려고 하고 있다. 노. 저 두 여자는 임질 보균자란 말인가? 노. 그때 프레디와 베티가 샐을 떨어뜨렸으며 그는 마치 <매트와 제프>의 라스트 신처럼 양발을 공중에 올리고 버둥대다 흙바닥으로 낙하했다. 왁자지껄한 환성이 울려 퍼졌으며 뒤이어 많은 맥주가 카운터에 올려졌다. 그리고나서 샐이 내 팔을 붙잡고 말했다.
"이봐, 내 피앙세(fiancee ; 약혼녀)를 만나보도록 해......"
-다음 순간, 그 두 여자가 카운터에 앉아 있었으며 풍만한 몸뚱이를 이쪽으로 밀어 붙이기 시작한다. 보즈웰은 베티의 귀에 혀를 밀어 넣었으며 샐은 녹초가 된 척했고 메이허는 기겁을 하고 주춤거렸다.
그러자 프레디가 말했다. 난 뉴스를 들었을 때 내가 행크 윌리엄스 대신에 죽었으면 좋았을 걸 하고 생각했지. 그녀는 병을 입에 대지도 않은 채 차가운 잭스 비어를 목구멍에 쏟아넣었다. 그것을 본 샐이 탄성을 질러댔으며 베티는 내 허벅지를 줄곧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것을 알아차린 딕시가 또다시 고개를 젓는다. 노. 이쪽을 바라보는 눈길도 안 돼, 절대로 안 돼 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동안 수병과 창녀들은 잇달아 나가기 시작했으며 샐은 "행크 역시 이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었어."
라고 외치면서 베티와 프레디를 데리고 돌아갔다. 그때 내 의식 속에는 바닥이 큰파도같이 넘실거렸으며 벽이 우그러진다든지 튀어 나온다든지 하고 있었다. 그리고 주크박스도 마침내 침묵을 지켰을 때 딕시 가운터 너머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나서 안쪽 방으로 통하는 복도로 힐끗 눈길을 보내 보였다. 그곳에는 불이 켜 있지 않았다. 그녀는 할리퀸 안경을 벗어 가슴의 계곡으로 미끌어지게 했다. 그리고나서 카운터 너머로 상체를 불쑥 내믿고는 내 손을 양손으로 감싸쥐었다.
"처음에는 가게에서 한 턱 내는 거라오."
라고 그녀의 입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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딕시가 고백한 이야기
나는 켄터키 출신이야. 원래는. 브래지트 군이지. 들어본 적이 있어? 온통 산들과 삼림으로 뒤덮혀 있고 나증에 광산이 생겼어. 우리 아버지는 '하드셀 침례교도'여서 우리 식구들은 모두 소나무로 지은 조그만 교회에 다녔지. 그 교회의 가르침은 정말이지 엄격했어. 교회에서 기도할 때는 통로를 사이에 두고, 여자석과 남자석이 분명히 구별되어 있었어. 열심히 찬송가를 부른다든지 탬버린을 울린다든지 하곤 하지만 조금도 흥미롭지 않았어. 그 교회에 내가 여덟살 때, 우드포드라는 목사가 부임해 왔지. 그 목사가 괴짜였어. 신자들이 '발씻는 의식'이라든가 '뱀 의식' 따위를 시작했던 것도 그때였어. 발씻는 의식이란 터무니 없는 것이었지.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신자들이 웅크리고 앉아 서로의 발을 씻어줄 뿐이거든.
그렇지만 뱀 의식은 그것과는 아주 딴판이었지. 대개 한밤중에 행해지곤 했지.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데, 그날 밤은 모두 손전등을 켜고 숲을 빠져나왔어. 그 판자를 붙인 조그만 교회에 도착하기까지 여기저기 시커먼 그림자에 흠칫흠칫 놀라곤 했어. 교회 안에는, '예수님이 강림하신다' 라는 게시판이 걸려 있었으며 스토브가 하나 놓여 있었지. 벽에는 케로신 램프가 고정되어 있었고. 그 무렵에 여자들은 거의 모두가 깅검(ging-ham : 줄무늬 또는 바둑판 무늬로 짜여 진 무명 옷)으로 된 옷을 입고 있었어. 그리고 남자들은, 그 무렵의 그곳 남자들은 모두들 광부로서 헬밋을 벽의 못에 걸고 뱀을 기다렸어.
그러는 동안 우드포드 목사가 방울뱀을 가지고 의식을 시각하지. 그가 주님에게 기도를 올리지 시작하면 모여든 신자들은 흥분하여 울부짖는다든지 탬버린을 울려댄다든지 하는 지야. 모두들 빠르게 중얼거리곤 했어. 그러면 우드포드 목사가 말하는 가야. 만일 여러분이 죄가 없다면, 이 뱀을 손에 쥐어도 하느님께서 지켜주실 것이며, 만일 죄를 범했다면 화를 면치 못할 것이오 라고. 우리 아비지는 절대로 그 뱀을 쥐려고 하지 않았어. 그러면, 엄마는 그것은 죄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단정했지. 어딘가 광산 부근에 여자가 있는 것이 틀림 없다. 광산에서 술을 마시는 것이 틀림없다고 말이야. 그래도 아빠는 완강히 거부하고 있었지. 싫어, 나는 사양하겠어 뱀은 딱 질색이란 말이야. 아빠는 그 태도로 일관했지만 내가 열두 살이던 어느 날 밤. 여느 때처럼 교회에 갔을 때 엄마가 뱀을 잡아보라고 집요하게 아빠를 몰아세웠지. 탬버린의 울림이 점차 커졌으며 누군가가 소리치고 있었어. 나도 소리치고 있었지. 그것은 '성스러운 외침' 이며 내부로부터 자연스레 솟구쳐 나오는 것이라고 모두들 말하곤 했어. 그러는 동안 엄마는 단상에 나가 모두가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방울뱀을 잡았던 거야. 아빠는 얼마쯤 수치스러웠겠지. 주위의 미친 듯한 외침 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었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버지까지 제단에 올라가 있었어. 그것은 아마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빠의 입장이 난처한 지경에 빠지기 때문이었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엄마를 잃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인지도 모르지. 그러는 동안 모두의 외침은 극에 달했어.
말해두겠는데, 당시 나는, 지금 같은 계집이 아니었어. 아주 딴판이었지. 남자애들에게 아주 가련한 여자애로 보였어. 아빠는 제단에서 4인치 정도 길이의 방울뱀을 쥐고 있었어. 그것을 보고 있는 동안에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것을 느꼈지. 몸 안에서 뜨거운 폭발이 일어나려고 하는 것을. 그때, 방울뱀이 아빠를 물었던 거야. 처음에는 딸랑딸랑 하는 소리를 내더니 그리고나서 아빠의 목을 물었지. 딸랑딸랑 꼬리를 울리면시 다시 한번 물었어. 아빠는 뱀을 팽개치고 뒷걸음질쳤어. 그 눈에는 악마를 본 것 같은 공포가 떠올랐지. 그리고나서 뒤로 쿵하고 자빠졌어. 교회 안은 일시에 정적으로 휩싸였으며, 엄마는 벌떡 일어섰지. 그러나 엄마는 울지도 않았고, 제단으로 달려가려고 하지도 않았어. 제단으로 달려간 것은 나였어. 나는, 뱀이 어디에 있는지 전혀 개의치 않았어. 아빠에게 달려들어 나는 소리쳤지. 아빠, 아, 아빠! 일어나요, 아빠. 사랑해요, 아빠! 그러나 이미 늦어 버렸던 거야. 이틀 후 차가운 바람이 산에서 불어닥치는 가운데 우리는 아빠를 묻었어. 우드포드 목사가 찬송가를 불렀지. 주위의 모두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그들 얼굴을 보면 알 수 있었지. 가엾게도 죄 많은 부친을 두어 이런 꼴을 당했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었을 거야 틀림없이.
엄마는 그후 여느 때와 다름없는 생활을 계속했어. 엄마는 천을 아주 잘 짰지. 양털을 깎아 카드(소모기)로 엮은 다음 그것을 실로 짜는 거지. 엄마는 그 작업을 능숙하게 해내셨어. 다 짠 실은 중매인에게 팔며 그들은 그것을 어딘가 강으로 운반하여 또다시 팔아 넘기는 거지. 당시 우리집은 아주 조그맣고 보잘 것 없어서 오두막이라는 표현이 적당하겠지만 난로는 돌로 만들어졌으며, 꽤나 튼튼한 집이었지. 게다가, 먹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었어. 호박에다 콩, 육즙, 양파, 콘플레이크에다 꼬투리째 먹는 강낭콩. 나는 종일 엄마가 실을 짜는 옆에서 조그만 동생들을 돌보고 있었지. 엄마는 한번도 아빠의 일이나 아빠가 저지른 죄에 관해서 언급하지 않았어. 단 한번도 말이야.
어느 날 밤. 숲에서 돌아오니 주위는 정말로 칠흑같이 어두워져 있있어. 그 당시는 전지도 없었으며 라디오 따위는 상상도 못했지. 더구나 그 산속에는 말이야. 그런데 그때 집 뒤뜰의 공터에서 우드포드 목사의 모습이 보였지. 그때 그가 주물럭거리고 있었던 것은 뱀이 아니라 엄마의 젖가슴이었어. 그날 밤은 밤새도록 숲에서 아빠를 위해 울었지. 그때였던 거야. 도회지로 나가보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세상 일에 관해서는 그전부터 알고 있었어. 몽고메리 워드 가탈로그를 통해 알았던 거야. 그 카탈로그의 설명서는 읽을 수 없었지만 사촌인 프란시스는 읽을 수 있었어. 가령, 두통과 비듬 방지에 효과가 있는 닥터 스코트의 전기 헤어브러시, 웃지 말라구 그리고, 마무라든가 코텍스라든가 리스테린이라든가 오드롱 등등의 물건들. 큐디쿠라 비누, 와일드 로즈, 샨돈 벤. 이랑 이랑 등의 향수. 닥터 퓰러의 바스트 확대기도 있었어 (그것은, 내게 필요없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갖고 싶었던 것은 문라이트 소나타라는 가운이었지. 카탈로그에 나와 있었던 설명까지 기억하고 있어- '부드러운 레이온에 감싸여 매력을 발산하는 당신. 그 날씬한 허리를 감싸는 것은 속삭이는 듯한 레이온 태피터. 가격은 3달러 98센트. 아, 나도 매력적인 여자가 되고 싶어 라고 생각했어. 넓은 세상에 나가서 말이야.
나는 밀드레드 고모의 남편이었던 프레드 고모부에게서도 이것저것 세상일을 배우곤 했어. 프레드 고모부는 세상일에 훤했거든. 실제로 그곳에서 지낸 적도 있있단 말이야. 고모부는 내게 여러 가지 일을 이야기해 주었어. 세상 사람들은 벽돌집에 살고 있다든가, 도로 표면에는 콜타르가 깔려 있다든가, 상점에는 몽고메리 워드 카탈로그에 실려 있는 것보다 훨씬 멋진 가운이 장식되어 있다든가, 게다가, 대개의 사람들은 학교에 다니며 일하고 있는 사람들은 차를 가지고 있다든가. 나는 숙부에게 부탁해 가운 이야기를 몇 번이고 들려달라고 했지. 그 뿐만 아니라 보석 이야기도 말이야. 그는 이야기를 아주 잘 했어. 그 프레드 숙부 말이야. 그래서, 세상에 널려 있는 아름다운 물건들을 상상 속에서 내게 이것 저것 보여 주었던 거지.
그리고 나는 로버트를 알게 되었어. 얼마 동안은 둘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주고 받고 지내다 함께 자게 되있지. 그렇다고는 해도 특별히 섹스를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서로의 몸을 만지작거리는 정도였지. 그래도 나는 그와 결혼하기로 작정했어. 그래서 말했지. 엄마 난 결혼하고 싶어요 라고 하지만. 그 우드포드 목사에게 결혼식 주례를 맡기는 것은 거절하겠어요 라고. 어째서냐고 엄마가 묻길래 그 자리에서 나는 처음으로 말해 주었지. 왜냐하면...... 하고, 그래서 목사는 이웃 마을에서 부르기로 했어. 우리 집에 찾아와 준 목사는 거창한 기도를 해 주었어. 그리고, 우리는 시끌법썩한 연회를 열었으며 그후 건초 오두막으로 이사했지.
그후, 로버트가 점차로 비뚤어져 나간 계기는 내가 새로운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을 때였어. 루즈벨트가 깊은 산속 마을에까지 교사를 파견했을 무렵이었지. 우리 마을에 온 사람은 북부 펜실베이니아에서 온 청년이었이. 즉, 넓은 세상에서 온 남자였지. 이름은 이라이. 유태인이었어. <다트 바>에 오는 그 막스처럼. 이라이는 마을에 와서 어떻게든 학교를 세워야만 한다고 모두를 설득했던 거야. 결국 뜻은 이루었지만 아주 초라한 학교였어. 판자집에 함석 지붕. 전기는 없고 스토브가 하나 있을 뿐이었어. 여자애들이 따로 지은 화장실에 갈 때 남자애들을 내쫓기 위해 네 명씩 몰려가야만 했지. 남자애들은 6마일이나 8마일 떨어진 곳에서 그 학교에 다니곤 했어. 나는 이미 나이가 제법 들었지만 어떻게든 세상 일을 배우고 싶어서 필라델피아에서 온 그 젊은이를 찾아가서 호소했지. 반드시 읽는 법을 배우고 싶어요. 당신께서 도와주신다면 학생들 뒷바라지를 해주겠어요 라고. 좋고말고 라고 그는 대답해 주었지.
그 마을 남자들은 주사바늘을 들이댄다고 해도 공부 따위는 하지 않으려 했지만 이라이는 굳세게 버티었던 거야. 눈이 많이 쌓이거나, 강이 바싹 말라버리면 아이들은 오지 않았어. 그래도 이라이는 아이들을 열심히 가르쳐 주었지. 그는 여러 가지 낱말과 시 작법도 가르쳤지. 커다란 세계 지도를 보여 주었어. 나는 그것을 모조리 머릿속에 담아 집으로 돌아와 로버트에게 이야기하곤 했어. 그러는 동안 로버트는 내가 이라이와 깊은 관계일 것이라고 오해했던 거야. 사실이 아니었는데도 로버트는 나를 믿어주지 않았어. 그리고 어느날 밤, 그는 그 학교에 가서 학교 건물을 불태워 버렸던 거야.
이라이는 마을을 떠나 버렸어. 나는 산속을 이틀간 헤매며 그의 이름을 불러댔지. 어떻게든 그를 만류하려고 생각했던 거야. 그 산들은 한때 나무가 울창히 우거져 매우 아름다웠지만 목재 회사 놈들이 몰려와 닥치는 대로 벌채를 하기 시작했지. 놈들은 그것을 강에 띄워 제재소까지 운반해 갔어. 그곳에서 목재가 되었지. 산들은 금새 벌거숭이가 되어버렸어. 그런 벌거숭이 산속에서도 이라이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어. 이 마을에는 이제 무엇 하나 즐거운 일이 남아 있지 않아 라고 나는 생각했어.
그래서 나는 마을을 떠났지. 로버트와 헤어지고 며칠이고 걸어서 읍내로 갔지. 벽돌집과 콜타르를 입힌 도로와 여성스런 분위기를 연출해 주는 문라이트 소나타 가운이 장식되어 있는 상점을 들여다 보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고. 그런데, 그런 것은 눈에 띄지 않았어. 그것은 모두 어딘가 모자란 여자애의 머릿속에밖에 존재하지 앓는 허망한 거지. 그래도 나는 그럭저럭 하자드 마을의 공구점 점원직을 찾아냈어. 도로는 진흙투성이였으므로, 항상 고무 장화를 신고 다녀야 했어. 그러는 동안 마을의 여자애들과 알게 되어 '암탉 헛간'이라고 부르는 커다란 창고를 개조한 홀에 출입하게 되었지. 그곳에서 모두들 코카콜라 글라스로 크림 오브 켄터키 위스키를 마시곤 했지. 그곳에서 알게 된 여자애들 중에는 풋내기가 아닌 제법 조숙한 여자애들도 있었다구. 그 애들은 댄스를 추러 오는 것이 아니라, 겨울 동안은 그런 곳에서 지내다 여름이 되면 각지의 축제를 찾아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거야. 그곳은 매우 붐볐지. 항상 음악이 울려펴졌으며 도처에서 남자들이 찾아왔다구. 산지에서도 우르르 몰려들었으며 그 숫자로 말하자면 산속이 텅 비었을 정도였지. 사실이야.
그리고 어느 날, 일하던 공구점이 불황의 여파로 문을 닫아버렸어. 당시 온나라가 불황이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암탉 헛간'에서 일하기로 했어. 그밖에 달리 구할 만한 직장이 없었거든. 그래도 처음에는 무서워서 몇 번이고 울곤 했어. 이런 무서운 죄를 저질렀으니 하느님께 죽임을 당할 것이 틀림없다고 말이야. 그러나 사흘이나 일해도 죽임을 당하지 않겠지, 어차피 하느님은 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았으므로 이제 태도를 바꾸어 살아갈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지. 처음 한 번을 경험해 버리자, 더 이상 무섭지 않았으며 사실대로 고백하자면 무섭기는 커녕, 그 일이 마음에 들었던 거야. 남자 손님들은 모두 주정뱅이로 거칠고 얼빠진 놈들이었지만 여자를 기쁘게 해 주는 점에 있어서는 로버트보다 능숙했거든. 게다가 모두들 내 젖가슴에 흡족해 했어. 그 홀 뒤쪽의 숲속에는 헛간이 몇 채 있었으며 나는 그곳으로 남자들을 데리고 가곤 했지. 한번에 3달러로 말이야. 당시로서는 상당한 벌이였다고 생각해. '암탉 헛간'의 주인에게 한건에 1달러씩 치뤄야만 했지만, 그 정도는 별것 아니었어. 걱정이라면 병에 걸리는 일이었으나 다행스럽게 그런 일은 없었어. 내가 자랑하는 솜씨는 또 하나 있었어. 어쨌든 얼마쯤 있자 나는 그 일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존재가 되어 비렸어.
그런데 어느 날 밤의 일이었어. 그 이라이가, 그 유태인 열혈 청년이 찾아온 거야. 그는 내가 하고 있는 일에 참을 수 없다며 자기와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말했지. 물론, 나는 따라 나섰지. 그는 그때 전국 광부 조합을 조직하고 있는 중이었어. 하란 군의 자본가들에 대항하여 노동자들을 단결시키고자 했지. 그는 공산주의자였어.
평소의 생활 태도는 하드셀 파의 신자들보다도 엄격했지. 식사는 하루에 단 한 번. 그래서, 몸은 피골이 상접해져서 차마 눈뜨고 보기가 힘들 정도였어. 그리고 매일같이 자전거를 타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연설을 늘어놓는 거였어. 북부쪽에서 포드를 탄 남자가 오기까지 그의 자전거 행각은 계속 됐지. 바로 그가 금욕주의자가 아니었던 유일의 장소라고 하면 침대 속이었어. 그 사람만큼 침대에서 정열적인 남자는 드물었지. 내가 예위었을 정도였으니까 말이야. 그리고 또 한 가지 놀랄 만한 것은 그 사람의 연설이었어. 들은 적이 없는 듯한 정열적인 언변을 지녔거든. 자신들의 노동의 성과는 자신들이 소유해야만 한다든가. 자신들 노동자는 탄광 바닥에서 죽어가며 아이들은 제대로 읽지고 쓰지도 못하는데도 보스들은 노동자를 착취하여 돈을 벌고 있다든가. 읽고 쓰는 것에 관해 지껄일 때, 그 사람의 눈에는 눈물이 넘쳐 흘렀어. 듣고 있는 나도 눈물이 나와버렸지. 그 사람의 연설을 듣는 사람은 누구나 그랬단 말이야.
그리고나서 얼마 안 있어, 하란 군에서 자본가와 노동자들의 전쟁이 일어났지. 그는 있는 그대로의 사태를 보여 주기 위해 북부로부터 유명한 작자들을 여럿 데리고 왔어. 주위의 산지로부터 남자들이 총출동되어 달려나와 거리와 진흙탕 속에서 생활하고 있었어. 텐트를 치고 잠자고 있었는데 그것은 코가콜라 간판으로 만들어진 집 같은 것이었다구. 선량한 남자들, 상처 입은 남자들, 가족이 굶주리고 있는 남자들, 적어도 읽기 쓰기 정도는 아이에게 가르치고 싶다고 바라고 있는 남자들. 그것은 정말로 가슴 벅찬 광경이었어. 누구나 총을 가지고 있었지. 라이플, 권총. 그리고 가장 강경했던 쪽은 여자들이었어. 여자들은 지치지 않고 서로 거들어가며 광장에서 연설을 늘어놓고 있었지. 그곳으로 보안관들이 몰려들어 모두들 체포되었던 거지. 전부 열 여섯 명이었을 거야. 우리는 감방에 앉아 당시 유행하고 있던 노래를 잇따라 불러댔어. 그때 이 눈으로 분명히 봤지만 보안관들을 조종하고 있었던 것은 회사측이었어. 이라이가 말했던 대로 회사놈들이 거드름피우며 보안관 사무실에 들어와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하고 명령을 내리는 거였어. 우리는 모두 똑똑히 목격했다구. 당시 놈들은 어딘가에서 갱들을 데려와 모두 보안관으로 꾸몄던 거지. 우리는 결국 석방되었어. 신문이 회사의 험담을 이것저것 늘어놓았기 때문에 별 수 없었던 거겠지. 그러는 동안 커다란 집회가 열렸지.
이번에 당한 것은 나의 열혈한 이라이였어. 놈들은 그 사람의 머리를 곤봉으로 마구 후려쳤지. 그리고나서 어딘가로 데려가려고 했으므로, 나는 큰 소리로 외쳐댔지. 왜냐하면 그의 얼굴은 피투성이였으니까. 내가 계속 소리치자 놈들은 다시 그 사람을 때리고 나를 딴 곳으로 질질 끌고갔어. 그는 군 경계 바깥으로 끌려 나가 도랑 속에 팽개쳐졌지. 동료들이 찾아내 병원으로 데려갔을 때에는 이미 늦었어. 이틀 후에 그는 죽어 버렸다구. 어째서 그를 체포했느냐고 누군가가 물으면 보안관 녀석은 씨익 웃으며, '공무 집행 방해지' 라고 대답했어. 그야말로 웃지 못할 노릇이지. 그가 스스로 도망치다가 도랑으로 굴러 떨어진 거라고 놈들은 말했어. 결국 그 건으로 아무도 체포되지 않았어. 어떻게 보더라도 그것이 명백한 살인이었다는 것은 마을 사람들 누구나 알고 있었는데도 말이야.
그때 나는 그곳을 떠났지. 영원히. 이제 정치와 그 산골과는 결단코 관계하고 싶지 않았어. 나는 이럭저럭 뉴올리언스에 도착했지. 얼마 동안 다른 남자와 결혼했던 시기도 있었지만 결국 그것도 실패로 끝났지. 제2차 대전 동안은 히긴즈 조선소에서 일하여 그런대로 돈을 모았어. 그래서 곰곰이 생각했어. 이제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것은 그만두기로 하자 라고. 특히 남자와는. 그리고 지금껏 이런 생활을 하고 있는 거야. 이런 연유로 당신 앞에 있는 나는 자유로운 여자인 가야. 이봐, 아직 동정이지? 나는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구.
지금부터 좋은 때지. 너도 여자에게 익숙해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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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빛의 살을 에이는 듯한 새벽에 딕시는 1950년형 <플리머스>로 에리슨 비행장까지 환송해 주었다. 차창을 내리고 있었으므로 그녀의 향수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쩐지 기분이 안정되지 않았다. 내 시선은 무의식중에 파란 자전거를 탄, 노란셔츠를 입고 야구 모자를 쓴 그녀를 찾고 있었으나 그런 여자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딕시는 중앙문에서 100피트쯤 앞에서 차를 세웠다. 문을 열고서 잘 가라고 인사를 하자, 그녀는 물끄러미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사람이야 당신은."
그녀는 달려 갔다.
제2부
몇 십년 동안이나 읊조리고 있는
지도처럼 속삭여 보았다. 이덴 산타나.
그녀가 이곳 펜서콜라에 있다니.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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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겨울이 되었다. 멀리 캐나다에서 차가운 바람이 남쪽으로 불어 왔다. 잠에서 깨면 담요 속은 냉랭했고, 샤워물은 차가웠고, 아침 해로 시각을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모두들 창을 굳게 닫고 하얀 제모를 겨울용 모자로 바꾸었다. 정오의 하늘은 납빛이고, 몇 천 마리에 이르는 갈매기가 멕시코 만에서 찾아 와서는 떼를 지어 지상에 닿을듯 말듯 날고 있었다. 헬리콥터는 모두 지상 대기 태세에 들어갔다. 하늘에는 먹장구름이 뒤덮혀 있었다. 그러더니 오후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눈 위에서 재주넘기를 하기도 하고 눈덩이를 서로 던지기도 하여 시간을 보냈다. 베케트는 소형 브라우니 박스 카메라로 열심히 스냅을 찍고 있었다. 휴가는 취소되었고, 모두 삽을 받아들고 기지 내의 도로와 격납고 맞은편 이착륙장의 눈치우기를 명령받았다. 격납고 앞에서 샐과 막스를 비롯하여 열대 명의 동료들과 눈을 치우고 있을 때, 비로소 조종사들의 모습을 아주 가까이에서 보았다.
어느 남자나 담배를 피우고 있고, 트럼프의 진 밀러 게임을 하면서 사진에 담고 있다. 그들은 모두 헐렁한 비행복을 입은 마른 남자들이었다. 샐이 한국에서 방금 돌아왔다는 해병대 조종사를 가리켰다. 그는 한국에서 151회나 헬리콥터로 출격하여 그 중 86회는 적지 깊은 곳까지 침입했다고 한다. 그리고 아군 부상자와 사상자의 반출을 담당한 것 같다. 그는 오래된 영화의 클라크 케이블같이 대담한 빛을 발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 눈은 그저 피로와 동정의 빛을 띠고 있었다.
조종사의 대부분은 특별한 도안이 새겨진 패치를 비행복에 달고 있었다. 헬리콥터의 회전 날개 밑에 대형 바람막이 안경을 걸친 배터가 있고 그 밑에 8자가 쓰여 있다. 이착륙장의 눈을 치우고 있는 동안에 바로 내가 서 있는 곳이 콘크리트에 페인트로 그려진 큰 사각 모양 속의 8자 위라는 것을 깨달았다. 막스의 이야기에 의하면 그곳에서 헬리콥터 조종사의 기초 훈련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조종사들은 그 8자의 맨 위에 체공하여 착륙하는 것을 배우는 것 같다. 조종사들은 평상시에 헬리콥터를 '불바퀴 폭죽'이라든가 '회오리새'라든가 '전기 거품 내는 기구'라고 부르며 그 조종을 꺼리고 있었다. 헬리콥터는 무게중심이 낮기 때문에 쉽게 전복해 버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샐의 얘기는 아니지만, 제트기를 조종한 뒤라면 도대체 누가 그런 걸 타고 싶어할까?
우리는 눈을 깨끗이 다 쓸었다. 그 순간 강풍이 솟아올라 비행장에 눈을 내리고 또다시 온통 은세계로 만들어 버렸다. 막스가 웃으며 말했다.
"정말이지, 이게 해군이란 거야."
그 때 활주로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스페인 풍의 얼굴을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높은 광대뼈, 반듯한 이목구비, 깔끔한 콧수염, 역시 비행복을 입고 있었다. 나를 손짓으로 부르길래 다가갔다. 그는 토니 멜카도라고 하고 미국에서 헬리콥터 조종 훈련을 받고 있는 멕시코 공군 조종사인 것 같았다. 멜카도는 나에게 카메라를 건네주며 눈 위에 서 있는 자기를 찍어 달라고 한다.
카메라는 라이카였다. 내 손에 든 최초의 그럴듯한 카메라다. 묵직하고 신비스런 아름다움이 있었다. 훗날에 내가 프로카메라맨이 되고나서 상점에서 신형 카메라를 집어 들었을 때,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맨처음으로 내 소유의 카메라를 손에 들었을 때, 그 눈 내리는 날 에리슨 비행장 격납고 앞의 정경이 종종 떠오르곤 했다. 아무튼 그 눈 오는 날, 그 카메라를, 그 신비한 기계를, 처음으로 손에 들었을 때의 설레임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멜카도에게 조작법을 배운 후 나는 파인더를 들여다 보았다. 그는 내리퍼붓는 눈 속에서 반쯤 열린 격납고 문 앞에 서서, 자못 뽐내듯 밝은 미소를 띠우면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내게 필름을 감게 하고 나서 이번에는 커피잔을 손에 들고 한쪽 무릎을 세우고 포즈를 취한다. 한국에 간 조종사들 가운데에서 가장 클라크 케이블과 닮은 이는 저 사람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사투리가 섞인 영어로 인사를 하고는 어슬렁 어슬렁 멀어져 갔다. 그때부터 카메라를 빌려 많은 사진을 찍어 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바람에 날려 펄럭이고 있는 깃발, 종려나무 뿌리 밑에 쌓여 있는 눈, 그 반들반들한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여 기지 본부에서 어딘가로 뛰어가는 래드 캐논, 그리고 어슬렁 어슬렁 화장실 쪽으로 걸어가는 샐, 그런 광경을 닥치는 대로 찍어 보고 싶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막스가 삽자루에 기대고 말했다.
"너, 카메라맨이 잘 어울리는데."
그 말이 맞는다는 걸 깨달은 것은 훨씬 뒤의 일이었다.
다음 날, 눈이 그쳤다. 유난히 맑은 하늘 높이 불타는 듯한 태양이 얼굴을 내밀었지만 혹독한 한기를 쫓아내지는 못했다. 휴가가 부활되었다. 빨리 마을로 가서 버스에서 만났던 여자를 찾고 싶었지만 <다트 바>에서의 그 하룻밤에 돈을 다 써 버렸다. 급료일까지는 아직 사흘이나 남았다. 그래도 딕시 세이퍼 덕분에 그 부끄러운 비밀로부터 해방되어 있었던 나는 아주 자랑스럽고, 자신만만해 있었다. 부족한 것은 단지 돈뿐이었다. 할레르슨과 보즈웰은 일부러 행크 윌리엄스의 성대한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서 몽고메리에 나갔다. 하지만 이틀 지나 그들이 여행담을 잔뜩 담아서 기지에 되돌아왔을 때는 모두가 이미 행크 윌리엄스에 식상해 있어서 얘기를 듣고 싶어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나는 좁고 긴 안뜰을 걸으면서 바비 볼덴의 색소폰이 들려오지 않나 하고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창문은 모두 추위 때문에 굳게 닫혀져 있었다. 그를 만나러 가 볼까도 생각했지만 볼덴이 흑인 동료들 앞에서 이상한 태도를 보이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앞섰다. 이곳은 백인이 올 데가 아니라구 라는 정도의 말은 낯설지 않지만 말이다.
헬리콥터는 아침 5시부터 일몰까지 날아다니고 있었다. 30대나 한꺼번에 날아다니기 때문에 그 모습은 장관이었다. 나도 바삐 일하게 되었다. 푸시-풀 로드와 일리버서블의 상위, 경사판, 워블 캠의 상위, 커프와 트러누언 어셈블리의 상위라는, 비행기 부품의 전문 지식을 배운 것도 그때 일이었다. 짐벌 링만은 어떤 것인지 몰랐지만, 그것을 가지러 온 샐은 이렇게 말했다. 글쎄, 그건 메이시 백화점에서 살 수 없는 것만은 분명하지.
해군 병영의 밤은 어디나 비슷할 것이다. 한 푼 없이 어디에나 가는 정처 없는 병사들은 침대를 둘러싸고 신문을 읽거나 라디오를 듣거나 하며 지낸다. 나는 구두에 침을 묻혀 가며 반짝반짝하게 윤을 내는 기술을 배웠다. 어느새 머리도 길어졌다. 오전 0시부터 4시까지의 보초를 다시 한번 섰지만 이번에는 사전에 암호를 확인하고 래드캐논이 내미는 회람판에 사인했다. 제복을 맞춤 주문으로 만드는 데 최적인 가게는 사우스 베이렌 스트리트의 앵커 데일러즈이라는 것도 알았다. 가게 주인의 이름은 메어리라고 한다. 하지만 맞춤 주문 제복 따위는 원하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건 사복이었다. 아무튼 그 때의 최대의 희망은 군복 아닌 옷을 입고, 주머니에 약간의 돈을 꼬물쳐 가지고 그 버스에서 만난 여자를 찾으러 가는 것이었으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사복을 살 돈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옷을 보관해 둘 사설 로커를 빌리는 돈도. 해군의 등급으로 말하면 밑에서 두 번째인 이등 수병으로서 받는 급료는 실 수령액이 80달러 90센트였을 것이다. 당시의 나에게는 큰 재산이다. 그리고 마침내 어느 날, 오전 10시 20분에 우리는 급료를 받기 위해서 제2격납고 앞에 줄지어 섰다. 모두에게 급료가 지급되었지만 내게는 1센트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당직 사무 담당자는 메이허였다. 미안하네, 신병의 경우 흔히 이런 일이 있지 하고 그는 말했다. 워싱턴의 중앙 관청 사이의 서류 교환에 시간이 걸려 수속이 늦어지는 거라고 한다. 사정을 알아보고 추후에 알려 주겠다고 말했다. 셀, 막스, 게다가 마일즈 레이필드까지 돈을 빌려 주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내 급료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대답했다.
결국 급료가 도착하는 것을 기다리면서 나는 이 주일 이상 기지에 계속 있었다. 샐과 막스는 거의 매일 밤 외출했다. 마일즈는 병영에 남아 있었지만 역시 매일 밤 기지 내의 어딘가로 나갔다. 어디에 가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 여자의 영상은 뇌리에서 갈수록 희미해져 갔다. 그녀는 분명히 남자와 지내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강해졌다. 상대는 아마 분명한 남편이든가, 혹은 애인인 해군 군인일 것이다. 나는 화집에 몰두하여 머릿속은 고야, 레오나르도, 보티첼리 등의 그림으로 가득 찼다. 보급부의 주간 근무에는 날마다 일에 익숙해져 갔고, 기계 담당자들도 내 이름을 기억하게 되었다. 라디오에서 행크 이외의 힐비리의 가수들의 노래도 들었다. 웨브 피어스와 레프티 프리첼의 가사도 외우기 시작했다.
바비 볼덴이 색소폰을 불고 있을 때, 그것을 들을 수 있는 건 식당의 요리사들 정도였다.
어느 추운 밤, 나는 병영에서 <팬서콜라 저널>을 읽고 있었다. 마일즈와 존스도 그곳에 있었다. 1면에는 군대에서의 탈주병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고, 그것에 의하면 한국 전쟁이 발발한 이후 약 4만 명의 병사가 탈주하여 그 중 3만 6천 명이 잡혔다고 한다. 그 숫자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 사람들을 비난할 수 있는 놈이 있을까?"
마일즈가 내뱉듯이 말했다.
"헌데, 도대체 이번 전쟁의 의의는 어디에 있지?"
그러자 존스가 분발하여 아니, 이건 전쟁이 아냐, 군사 행동이야 라고 말했다. 어떻게 죽은 사람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고 마일즈는 반박했다. 하지만 만일 한국에서 공산주의자와 싸우지 않았더라면, 다음에는 샌디에이고에서 싸우게 되는 거니까 말야, 하고 존스는 말했다. 마일즈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존스" 그는 말했다.
"그런 진부한 상투어를 지껄이는 놈이 아직 있는 줄 몰랐군."
존스는 다시 눈썹을 치켜 올리고 싸움도 하지 않고 도망치는 놈은 어떤 전쟁터에나 있는 거야 하고 말했다.
마일즈는 말했다.
"하지만 이번의 경우에는 탈주병 수가 족히 2개 사단은 족히 된다구, 존스. 그 숫자에서 뭔가 느껴지는 것이 없나?"
"있고 말고." 존스는 대답했다.
"말하자면, 이 미국이라는 나라가 갈수록 겁쟁이가 되어 가고 있다는 거지."
그 말을 끝내자마자 그는 어딘가로 가 버렸다.
마일즈와 나는 잠시 침묵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일즈가 나를 올려다 보며 말했다.
"자네도 생각해 본 적이 있나?"
"탈주 말인가요?"
"응."
"아뇨."
나는 대답했다. 그것이 본심이었다.
"따지고 보면 난 해군과 거래한 것이니까 설사 마음에 안 든다해도 약속은 지킬 생각이라구요."
마일즈는 꼼짝 않고 자기 손을 내려다 보았다.
"선배님은 어떤데요?"
내가 되묻자 마일즈는 안경을 벗어 눈을 닦았다.
"나? 늘 생각하고 있지."
어느 추운 날 오후, 마일즈는 나를 기지의 도서관으로 안내해 주었다. 목조 계단을 올라간 이층 912호실. 우편실 바로 위였다.
"여기가 의외로 나쁘지 않아."
감탄한 듯한 어조로 그는 말했다. "잡지도 제법 갖추어져 있고, 좋은 책도 몇 권 정도 있어."
그가 말하는 대로였다. 맨 처음 그 계단을 올라갔을 때의 인상은 지금까지도 기억에 선명하다. 모직 반코트를 입은 중년 사무계 수병이 책상에서 앉은 채 졸고 있었다. 다가가자 잠을 깨고 눈을 깜빡이며 술고래 특유의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내가 그냥 신병에 불과하다는 것을 간파하고는 다시 잠이 들어 버렸다. 다섯 줄의 책장, 잡지꽂이, 그곳에서 편지를 써도 좋고 그냥 멍하니 창너머로 기지를 바라봐도 좋을 길고 폭이 좁은 책상. 그곳은 해군에서의 일종의 피난처로 간주할 수 있는 곳이었다. 나는 <라이프> 지를 집어들었다. 표지는 장식용 구슬 커튼 틈새로 이쪽을 보고 있는, 얼굴 윤곽이 애매한 모델 사진이었다. 생전 처음으로 손에 든 <라이프>였기 때문에 그 호는 아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내게 있어서, 그건 정말로 경이로 가득 찬 일이었다. 우선 넋을 잃고 보았던 것은 '골든 그리드 튜너' 같은 것이 구비되어 있는 필코제 텔리비전 광고였다. 존 폰테인과 흡사한 여성이 거대한 텔리비전 세트의 채널을 돌리고 있다.
그녀의 화장술은 완벽했고, 얇은 드레스로 몸을 감싸고 있었으며 귀걸이를 매달고 있었다.
우리 집에는 텔리비전은 아직 없었고 주위에서 존 폰테인을 닮은 여자도 발견할 수 없었다. 한데 그 해 겨울, 아는 사람들은 누구나가 텔리비전을 사들이고 있었다. 텔리비전은 빠른 속도로 세상을 바꾸어 놓기 시작했다. 그건 지난 여름에 내가 집을 나올 무렵부터 깨달은 것이었다. 그 무렵 밤이 되면 노상에 보이던 사람들의 그림자가 어느 시기보다 현저히 줄어 있었고, 올려다 보면 파란 빛이 비치고 있는 창이 부쩍 많아지고 있었다. 텔리비전은 술집에도 늘고 있어서, 남자들은 취해서 떠드는 일 없이 바텐더가 쉴새없이 조절하는 흑백화면을 넋놓고 보고 있었다. 좋아, 첫 만화 작품이 팔리면 아버지에게 텔리비전을 사드리자 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다저스팀의 시합을 즐길 수 있을 것이고, 남동생과 여동생은 아니메와 웨스턴을 즐겁게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도 넋을 잃고 가족들과 함께 보고 있는 그림은, 아무리 해도 상상할 수 없었다.
마치 파라오의 묘에서 발견된 파피루스라도 넘기듯이 나는 <라이프>의 페이지를 넘겨 갔다. 광고에는 거의 라고 말해도 좋을 만큼 수많은 여성이 등장해 있었다. 클로로덴트 치약 광고에서는 남성과 볼을 바싹 대고 서 있었고, 두통약 아나신 광고에서는 머리를 누르고 있었다. 킹스톤 재봉틀 광고에서는 신부로 분장하고 있고, 프롤에버 비닐 카펫 광고에서는 바닥을 문지르고 있었다. 어깨도 드러내고 시트로 몸을 감싸고, 체중계에 을라가 체중을 재고 있는 여성은 다이어트에 레몬을 권하고 있었다. 그녀는 전혀 살이 쪄 있지 않은 것같이 보였는데 말이다.
뉴스 페이지에는 아르헨티나의 다섯 살 난 아이의 사진과, 하원의 주도권을 민주당으로부터 뺏으려 하는 공화당 의원들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당시 정식으로는 해리 트루먼이 아직 대통령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그 트루먼이 존슨이라는 상원 의원과 나란히 앉아 있는 사진도 실려 있었다. 존슨은 귀가 크고 머리를 올백으로 쓰다듬어 붙이고 여송연을 피우고 있었다. 일련의 사진을 보고 있는 동안에 토니 멜카도의 카메라를 떠올렸다. 프로 카메라맨이 파인더를 들여다 보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어디에 가면 이런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것인지 그들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그런 현장에는 누구에 의해 파견되는 걸까? 아니면 누군가가 불러서 가는 걸까? 그들은 필름을 현상소에 맡길까 아니면 어떤 방법으로 자기가 직접 현상하는 걸까?
또 한 가지, 다른 기사가 눈에 띄었다. 1952년이라는 해는 1888년 이후, 흑인의 린치 사건이 미국에서 한 건도 일어나지 않았던 최초의 해라고 한다. 반사적으로 바비 볼덴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 기사를 읽는다면 그는 뭐라고 생각할까? 기분이 좋아질까? 그렇게는 생각되지 않는다. 만일 자기가 흑인이고, 린치 소문 따위를 듣는다면 분명히 앙갚음으로 누군가에게 린치를 가하고 싶어질 것이다.
코텍스의 한 페이지 광고를 폈을 때, 내 손이 멈췄다. 오트밀 같은 색의 바느질이 매끄럽게 된 슈트를 입은 여성이 크게 찍혀 있다. 짙은 갈색 구두에 빨간 장갑, 귀걸이를 하고 모자를 쓰고 있다. 오른손에 가죽 테두리를 두른 가방을 들고, 장갑을 낀 왼손으로 목 주위를 신경질적으로 누르고 있다. 배경으로는, 그녀를 향해 모자를 흔들고 있는 비지니스 슈트를 입은 남자가 찍혀 있다. 그는 레인코트를 팔에 두르고, 서류 가방을 한쪽 손에 들고 있다. 그 뒤에는 쌍발 소형 자가용 비행기. 그 무렵, 코텍스란 여성 생리에 관계있는 것 같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어떤 방법으로 사용되는지는 몰랐다.
그 광고도 내 무지를 깨우쳐 주지는 않았다. '코텍스라면, 아무도 모릅니다' 라고 광고 문구는 되어 있었다. 그 이외에 그 광고가 주장하고 있는 것은 '완전한 보호, '흡수성이 좋음' '상쾌하고 부드러운 감촉'이었다. 그건 도대체, 무얼 얘기하고 있는 걸까? '밖으로 드러나 보이지 않습니다'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무엇보다도 이상했던 것은 그 사진 구도의 의미였다. 사진의 여성의 불안해 보이는 포즈는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일까? 이건 코텍스의 광고니까, 그녀는 지금 생리중인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은 비행기에서 내려 온 남성에게 밝힐 수 없는 비밀일까? 만일 그렇다면, 왜일까? 두 사람은 언뜻 보기에 부부같이 보인다. 하지만 그녀가 장갑을 끼고 있기 때문에 반지를 끼고 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다. 아니면 그녀는 누군가 다른 남자의 아내인 걸까? 그래서 그 남성과 밀회 약속을 했는데, 생리가 시작되어 버린 걸까? 이 세상은 정말로 신비에 가득 차 있구나.
다시 몇 페이지를 넘기자 스키로 점프하고 있는 여성을 담은 광고가 나타났다. 그녀는 스키 팬츠와 부츠를 신고 있었지만, 셔츠는 안입고 있다. '메이돈폼 브래지어를 하고 스키하러 갔던 꿈을 꾸었다'라는 것이 그 광고 문구였다. 금발의 여성이다. 선글라스를 끼고, 매우 아름다운 치열, 그녀가 나를 만나러 어슴푸레한 방을 찾아 오는 모습을 무의식중에 상상하고 있었다. 무거운 부츠가 딱딱 소리를 내며 다가온다. 그녀의 유방은 브래지어로 밀어 올려져 있다. 내 앞에선 그녀는 혀 끝으로 입술을 핥으면서 침대 가장자리에 앉는다. 나는 그 등에 팔을 두르고 부드러운 육체의 감촉을 맛보면서 끌어당긴다. 브래지어가 조용한 소리를 내고, 그녀의 가슴이 내 가슴에 닿는다. 단지 그렇게 상상했을 뿐인데 나는 벌써 긴장되어 있음을 느꼈다.
접수 담당자쪽을 보니 아직 앉아서 졸고 있다. 하지만 난 어떻게든 꿈 같은 페이지의 섹시한 광경에서 관심을 돌리려고 애썼다. 창너머로 천천히 밖의 도로를 걷고 있는 이 기지의 사령관인 프리채트 대령과 두 명의 사관의 모습이 보였다. 대령은 잔디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눈과 추위 탓인지 잔디는 갈색으로 시들어 있었다. 대령은 거기에 웅크리고 앉아 잔디를 쓰다듬고나서 흙 속으로 손가락을 쑥 집어넣었다. 일어선 그는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가련해 보이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나는 <라이프>지를 덮고 어깨를 떨구고 떠나가는 대령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 순간, 대령이 아주 좋아졌다. 다른 면에서는 어떻든간에 적어도 그가 뭔가를 사랑하는 걸 알고 있는 남자같이 보였기 때문이다.
아이젠하워가 정식으로 대통령에 취임했지만, 내 급료가 나올 징조는 여전히 없었다. "분명히 트루먼이 훔친 거야." 댄버가 말했다. "동결해 버린 거야. 그의 가죽 코트 할부금 지불에 충당할 생각인 거야."
<펜서콜라 저널>지의 보도에 따르면, 대통령 취임 축하 무도회에는 만 명 이상의 남녀가 12달러의 참가비를 내고 참석했다고 한다. 회장은 대혼잡을 이루어 모두 만족하게 춤을 추지도 못 한 것 같다. 고향인 브룩클린에서는 공화당원은 그야말로 외국인 취급을 받는다. 하지만 적어도 이젠 한국 전쟁의 종결은 가까워졌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아이젠하워는 대통령 선거 후에 친히 한국에 나가 있다. 그는 장군이다. 어떠한 수단으로 전쟁을 종식시킬 것이 분명하다. 지난 번의 전쟁과는 달리, 아마 그 때 온나라가 축하 분위기로 넘치지는 않을 것이다.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에게 승리를 거두었을 때는 모두가 도로로 몰려나와 거리 여기저기에서 축하 파티가 열리고 타임즈 스퀘어에서는 수병들이 지나가는 아가씨들에게 닥치는 대로 키스했지만. 역시 한국 전쟁은 그 전쟁과는 다른 것이다. 이 전쟁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전쟁인지 알고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그래도 아무튼 정전이 실현되면 더 이상 전사하거나, 전상을 입거나, 적진 내에서 행방 불명이 되거나 하는 자는 없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헬리콥터 조종사를 훈련시키거나 할 필요가 없어진다. 해군은 에리슨 비행장을 폐쇄할 수 있을 것이다. 나도 배를 탈 수 있을 것이다.
기온은 꽤 높아졌지만 아직 여기에 도착했던 날만큼 따뜻하지는 않다. 그리고나서 몇 주 동안에 메인사이드에는 일곱 번 가게 되었다. 베케트가 운전을 가르쳐 주겠다고 약속했다. 샐과 막스는 매일같이 보급부에 와서 딕시 세이퍼가 나를 만나고 싶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급료를 받을 때까지는 아무 데도 안 가겠다고 나는 반복했다. 그럼 그녀를 수상기의 플로트 상자에 쑤셔넣어, 야간에 기지로 데리고 들어올까 하고 두 사람은 말을 꺼냈다.
헌혈차가 왔을 때 1파인트 분을 기부했다. 나중에 프리체트 대령이 헌혈자에게 감사하는 통지를 냈는데, 그것에 의하면 헌혈률은 80퍼센트, 헌혈 총량은 478파인트로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어느 날 오후, 도서관에서 되돌아오는 도중에 바비 볼덴을 만났다. 가볍게 인사해 보였더니 그는 헬로우 하고 말을 걸어 주었다.
"색소폰 연주를 요즘은 별로 들을 수가 없더군요." 나는 말했다.
"하사관 클럽에서 연주해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싫어."
"왜요?"
"남부 태생의 바보 백인들이 너무 많으니까."
"그런 작자는 무시하면 되잖습니까."
"그곳에서는 흑인에게 식사를 내거나 하지 않아. 왜 그런 놈들을 위해서 연주해야만 하지?"
"그런 바보는 생각하지 말고 우리들을 위해서 연주해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린치 사건이 머리에 떠올랐다. 하얀 두건을 쓴 K.K.K. 단원들이 흑인들을 집에서 질질 끌어내는 장면도.
"아무튼, 거절이야."
그대로 그와 계속 얘기하고 싶었다. 볼덴을 더 잘 알고 싶었다. 대화를 갖게 하기 위해서는 해군 부대의 화제를 꺼내는 것이 가장 좋을지도 모른다. 대기하고 있는 헬리콥터쪽을 바라보면서 나는 태연하게 말했다.
"선배님도 어제 헌혈하셨습니까?"
"이봐, 너 또라이 아니냐? 우리들 피 따위는 받지도 않는다구 그들이."
"설마요."
"한참 배워야겠군. 여기는 해군 부대야. 합중국 해군에서는 흑백의 피를 합하는 짓은 안 한다구. 남부 백인놈들이 자기들 몸에 흑인 피가 섞인 걸 알면 어떻게 할 것 같아?"
"하지만, 자기 목숨을 구했다면 아무 말도 하지 못할 것 아닙니까."
"그들은 흑인 피를 받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말할 걸."
"그렇게까지 완고할까요, 아무리 !"
"이런, 답답한 녀석! 여기는 미국이야. 쓸데 없는 법률이 잔뜩 있다구, 여기에는."
약간 거북했지만 한편으로는 기쁘기도 했다. 적어도 볼덴은 나와 얘기를 나누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라디오에서 들었던 음악가들의 이름을 꺼내 보았다. 맥스 로치, 케니 클라크, 로이 엘드리지, 그리고 밀트 잭슨. 그도 그런 사람들은 마음에 든다는 것. 그들에 대해서 아는 한껏 얘기하고나서 볼덴은 말했다. "백인치고는 비교적 필부로군." 하고 말하곤 웃었다. 마치 볼덴으로부터 가슴에 훈장을 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선배님 병영에 가서 연주를 들을 수 있겠느냐고 하자 그는 생각해 보지 하고 말했다.
"지금 급료가 내려오길 기다리고 있는데." 나는 말했다.
"만일 해군이 내 수표를 찾아 주면 함께 해안으로 나가 하루를 즐기지 않으시겠어요?"
볼덴은 혀를 찌찌 울리고나서 말했다.
"넌 아무 것도 모르는구나. 응? 여기는 플로리다야. 여기서는 어느 해안이나 차별되어 있대두."
"플로리다에서는 어느 바다에도 못 간다는 말씀입니까?"
"<흑인>용 해안에서라면 수영할 수 있지. 그 외의 해안에서는 안돼."
"하지만 선배님은 이번 전쟁에서 훈장을 왕창 받으셨잖습니까. 그래도 안 되는 건가요?"
"그래, 그런 것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구."
그는 발길을 돌렸다.
"다음에 또 보자구."
신문의 만화난에는, 버즈 소여의 얼간이 남동생 럭키가 라틴 아메리카의 혁명에 태연히 참가해 가는 대목이 실려 있었다. 그건 정말로 기묘하게 그려져 있었다. 로이 크레인의 절호의 기회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라틴계 사관 한 명의 얼굴은 멜카도와 비슷하다. 그러고 보면, 멜카도가 헬리콥터 조종법을 배우고 있는 것은 장래에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서일까? 만일 그렇다면 부럽다고 나는 생각했다. 한국 전쟁같이 성격이 애매한 투쟁과는 달리 적어도 혁명은 흑백이 명료하니까. 하지만 만일 멕시코에서 새로이 혁명이 일어난다면 멜카도는 어느 쪽에 붙을까? 그는 선택을 강요당할 것이 분명하다. 아마 그가 선택하는 것은 라이카 카메라를 갖고 있는 사람들 쪽일 것이다. 이 미국에서는 그런 선택을 강요받는 일은 없다. 당시 17세로 아무 것도 몰랐던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아침, 겨울은 떠나고 있었다. 태양이 한층 더 지구에 접근한 것이다. 식당에 갈 때에도 더 이상 반코트를 입을 필요는 없었다. 온 기지의 창은 일제히 열렸고 바비 볼텐의 색소폰 소리가 들렸다. 연주 곡목은 '봄과 같이'였다. 그것을 들으면서 나는 무심결에 홍얼거리고 있었다.
별과 같은 눈의...... 웬지 불만스워 보이는......
노래할 노래를 잃은 나이팅게일같이......
그 날, 나는 메인사이드에 가도록 명령 받고 트럭의 짐받이에 서 있었다. 운전수는 베케트. 우선 부두에 가서 나무 상자를 인수해 오라고 그는 말했다, 아침 차의 행렬 사이를 천천히 누비고 나가면서 그들은 사우스 파라폭스 스트리트를 달려 부두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트레이더 존스> 앞을 통과했을 때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약간 고개를 숙이고, 가든 스트리트 쪽으로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짙은 갈색의 슬랙스에 하안 블라우스, 가벼운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그 얼굴은 선글라스에 숨어 있었지만 그 특징 있는 둥글게 만 머리에서 그녀가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저어, 잠깐!" 멀어지는 트럭 위에서 나는 소리쳤다.
그녀는 얼굴을 들었다. 하지만 나를 알아 본 기색은 없었다.
"나예요, 기억 나지 않아요?"
내 가슴을 가리키면서 열심히 소리질렀다.
한순간 그녀는 내쪽을 바라보는 듯했다. 그리고나서 다시 고개를 숙이더니 길을 가로질렀다. 도움을 구하는 신호수처럼 나는 필사적으로 손을 흔들었다. 울워스 백화점 입구에서 멈춰 선 그녀는 다시 이쪽을 보았다. 그 눈에는 정신 없이 손을 흔들고 있는 내 모습이 비쳤으리라 여겨진다. 휙 내게 손을 흔들어 주는가 했더니 곧 그녀의 모습은 백화점 안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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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른 노트로부터의 발췌
Segregate(동사) 1. 나누다, 분리하다 2. 격리하다 3. 일반사회에서, 특정한 인종적, 종교적, 그 밖의 그룹을 어떤 힘에 의해 분리하다. 특히 인종적 차별을 실천하거나, 요청하거나, 강제하거나 하다. 인종적으로 다른 그룹에게 사회적인 시설을 사용 못하도록 한다. 차별된 교육, 차별된 버스 등등.
이 나라는 미쳐 있는 것일까? 한국에서 모든 훈장을 모조리 휩쓴 사나이가 플로리다 해변에서 수영을 하지 못한다구? 백인 병역 기피자, 보석중인 백인 살인범, 마피아 보스, 매독을 가진 백인 창부-이런 사람들이 활개를 치며 수영하고 있는데, 바비는 수영하지 못한다구? 대체 무슨 얘기인가 이건. 아이젠하워와 그 일당은 이번에는 자유의 가치가 어떠니, 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공산주의자와 싸우는 중요성이 어떠니 하고 거창한 연설을 떠들어 대면서, 어떻게 바비에게 백인과 함께 수영해서는 안 된다는 말 따위를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건 학교에서 전혀 배우지 않았다. 놀라운 건 그런 처사를 받으면서도 이 나라를 위해서 싸우는 흑인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희롱한 법률을 통과시키는 백인들,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 걸까?
'이교도'란 이 세상에서 유태인이 아닌 모든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것을 안 것은, 내가 샤바스 고이(shabbas goy ; 안식일에 일할 수 없는 유태교도를 대신하여 유태교 예배당에서 일하는 기독교도) 역할을 하던 그 해, 브룩클린 14가에 살고 있던 늙은 랍비에게 배우고 있을 때이다. 그러니까 나도 이교도 중 한 사람이 된다. 그러고 보면 찰리 파커도 그렇다. 아이젠하워도, 윌리엄 홀덴도, 준 알리슨도 그렇다. 샐은 늘 이교도의 세력을 증거로 삼아 막스를 놀리고 있다. 하지만 막스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있는 것 같다. 막스는 내가 맨처음 만난 나와 동갑인 유태인이지만 견딜 수 없는 분명한 일에 대하여 결코 얘기하려고 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그는 히틀러와 강제 수용소에 대해서도 그렇다. 그 일이 일어났던 것이 바로 8년 전 정도라니 믿을 수 없다. 우리 아버지의 친구들 같은 경우는 1840년경에 일어난 아일랜드의 대기근에 관한 노래를 아직껏 부르고 있는데. 유태인을 끌어들였던 그런 사건이 현실로 일어났다니, 상상도 안 된다. 하긴 그 일이 일어났던 것은 내가 <캡틴 아메리카> 같은 걸 정신없이 읽고 있던 열살 때쯤이었으니까. 어떻게 인간이 다른 인간을 소각로에 내던지거나 산 채로 태우거나 가스로 죽이거나 할 수 있는 것일까? 그것도 두세 명의 숫자가 아니다. 수백 만이라는 숫자다. 그것도 단지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신문에 의하면 6백만 명이나 되는 유태인이 죽은 것 같다. 무엇보다도 섬뜩한 것은, 히틀러가 더 죽였으면 좋았을 것을 하고 지금도 큰 소리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정말로 마음 가짐이 형편 없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이해가 안 되는 것은, 그런 처사를 받은 뒤에도 여전히 유태인들이 하느님을 믿고 있다는 점이다. 그와 정말 똑같은 이유에서 자기가 원하는 곳에서 앉거나 수영하거나 하지 못하는 그런 나라, 레스토랑과 학교에서 차별을 하는 그런 나라에 대해서, 바비는 어째서 충성의 서약을 할 수 있는 건지 모르겠다. 요즘 '떠나버렸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몇 번이나 되풀이하여 듣는다, 내 애인은 떠나버렸다. 그놈의 아내는 떠나버렸다. 떠나버리는 것은 극히 평범한 사람들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그건 모든 인간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우리 앞에 나타났다가 아주 친밀해졌을 때 사라져 버린다. 루즈벨트도 떠나버렸다. 우리 집 주방 벽에는 그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어머니가 <데일리 뉴즈 매거진>지에서 오려내어 붙여 두었던 것이다. 그 루즈벨트도 죽고, 어머니도 죽었다. 어머니가 죽자, 아버지는 루즈벨트의 사진을 떼어버렸다. 분명히 어머니를 생각나게 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아버지는 루즈벨트를 원래 싫어했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들은 모두 떠나버렸다.
헨리 워레스라는 인물이 있었다. 한 시기의 부통령이었던 인물로, 1948년에 전쟁이 끝나자 자기 자신의 당을 만들어 트루먼과 듀이 그리고 딕시클레트(민주당 탈당파)를 인솔한 그 남부 출신의 과격한 행동가를 상대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미합중국의 부통령을 역임했던 인물인데도 모두들 워레스에게 반기를 들고 그를 공산주의자라고 지칭했다. 그런 그도 이제는 가버렸다. 라 과디아와 피트 라이저와 디마지오와 딕시 워커도 이젠 없다. 떠나 버렸다. 왜 그렇게 되는 걸까? 어째서 모두 이 지상에 머무를 수 없는 걸까? 어째서 모든 일은 변해 가는 걸까?
가끔 <라이프>나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를 보고나서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생각한다. 지금 내게 있어서는 마치 외국같이 느껴진다. 하긴 전형적인 미국 풍속으로 불리우는 것-구두를 벗고 춤추는 홉이라는 댄스 파티라든가, 드라이브 인이라든가, 졸업생을 초대하여 행해지는 풋볼 게임이라든가, 파자마 파티-에 나는 한 번도 나간 적이 없으니까. <내쇼날 지오그래픽 매거진>지에서 브라질에 대해 읽었던 경험도 없다. 엉덩이에 퐁퐁을 단 치어 리더를 내 눈으로 본 적도 없다. 카 섹스를 한 적도 없다. 아치 코믹이 되면 마치 SF를 읽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아치와 잭헤드 베티와 베로니카. 그 옥스포드 슈즈에 학교 머릿글자가 가슴에 짜여 들어가 있는 반소매 스웨터, 그런 자들은 도대체 미국 어디에 살고 있는 것일까? 적어도 내가 살던 곳에서는 만날 수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샐이 시내로 나갈 때 최대의 야망은 여자를 안고, 돈을 멋대로 쓰고, 문신을 새기는 것이다.
유태인을 의미하는 속어-카이크(kike), 이드(yid), 헤베(hebe). 히틀러라면 그걸 모조리 사용했을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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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아침에 메이허가 보급부에 있는 내게 전화를 걸어와 수표가 드디어 도착했다고 알려 왔다. 그로부터 몇 십년이 지난 지금도 눈앞에 서광이 비치는 것 같았던 그 순간의 감동,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었던 그 감격을 잊을 수가 없다. 마치 감옥에서 해방된 것 같은 환희의 순간이었다. 빨리 환금해 오라고 대니 레이가 말해주었다. 너는 이미 조국을 위해서 충분히 고생했으니까 오늘은 이제 일을 그만 해도 된다고.
회계과에서 되돌아오는 도중에 샐과 마주쳤다.
"무엇보다도 먼저 사복 한 벌을 사와."
하고 그는 말했다.
"오늘 밤에 <다트 바>에서 만나자."
"응, 알았어."
분명히 사인해 받은 외출 허가증을 들고 병영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버스로 마을로 가는 동안에 그 여자 모습을 열심히 떠올리려고 애썼다. 지난 삼 주 동안, 그 여자의 영상은 의도적으로 머리에서 쫓아 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내 손에 잡힐 턱이 없다고. 상상해 보았자 소용 없으니까. 하지만 지금 기분으로는 만사 제쳐 놓고 그녀를 찾고 싶었다. 옷가지와 차가운 맥주도 필요하지만 그녀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뒤로 홀러가는 거리와 한산해 있는 술집과 엄숙한 교회 등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에 그녀를 찾아내는 일이 쉽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 속에서 그녀의 모습은 이미 핀트 안맞는 스냅 사진같이 혼란스러워져 있었다. 아주 희미한 기억 밖에 남아 있지 않는데 어떻게 그 여자에게 불 타는 듯한 정열을 쏟거나 할 수 있는 건가? 아무래도 그녀를 찾는 방법밖에 없을 것 같다. 그녀를 만나기만 하면 그 얼굴 생김새를 똑똑히 각인시켜 둘 수 있고, 그녀의 존재 또한 틀림없이 증명할 수 있게 될 테니까. 어쩌면 내가 바라고 있는 것은 그녀가 이 가슴에 휘저어 놓았던 감정일 뿐, 그녀 자신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노래 가사가 머리에 떠올랐다.
사랑하는 것은
환상을 사랑하는 것......
천차만별의 모든 연령의 여성을 보아 왔는데 섣달 그믐날 밤, 버스에서 함께 탔던 그 여자에게만은 해후할 수 없다. 이 펜서콜라에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사우스 파라폭스 스트리트에서 어떤 가게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았으니까. 부두를 향해 멀어져 가는 트럭을 타고 있던 내게 그녀는 손을 흔들어 주었다. 하지만 그 때 이 눈으로 봤다고 생각한 건 과연 현실이었을까? 어쩌면 나는 그 여자를 보았다고 믿고 싶을 뿐인지도 모른다. 섣달 그믐날 버스에서 봤을 때, 그녀는 다른 옷을 입고 있었고, 머리 스타일도 달랐고,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어쩌면 나의 애달픈 소원이 신기루를 만들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그래, 마른 사막에 언젠가 나타나는 싱싱하고 윤기 있는 녹색의 낙원을. 내가 손을 흔들었던 상대는 전혀 낯선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두 번 다시 그녀를 만날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가든 스트리트와 파라폭스 스트리트의 모퉁이에서 버스를 내렸다. 해는 높이 떠올라 있었지만, 별로 덥지는 않고 부두쪽에서 소금기를 실은 미풍이 불고 있었다. 브랜트 빌딩 1층에 있는 맨즈 숍의 쇼윈도우를 들여다 보았다. 그곳은 산 카로스 호텔의 바로 맞은편이었다. 걸려 있는 옷은 모두 값이 너무 비싸다. 맞은편 호델을 바라보며 로비에서라도 슬슬 거닐어 볼까 하고 멀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그 때, 옛날 영화의 한 장면같이 그 멕시코인 조종사 토니 멜카도가 호텔 한관에 나타났다. 옆에는 금발의 여자가 같이 있었다. 그가 여자의 뺨에 키스하자 여자는 택시 안으로 사라졌다. 하얀 제복 차림의 키가 큰 흑인 도어맨이 뭐라고 말을 건냈다. 멜카도는 싱긋 웃었다. 그곳으로 다른 흑인이 운전하는 번쩍 번쩍 빛나는 파란 콘버터블이 쓱 다가와 멈췄다. 운전하고 있던 흑인이 내려 한 발 뒤로 물러 섰다. 멜카도는 그에게 팁 같은 걸 건네주고 운전석으로 쑥 들어가더니 떠났다. 그 동작 하나 하나가 정말로 세련되고 선명했다.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 멜카도에게 선망을 느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런 큰 호텔에서 여자와 하룻밤을 보내는 기분은 어떨까 하고 생각했다. 시트는 분명히 실크이고, 침대 옆에는 술병이 들은 얼음통이 준비되어 있을 것이다. 분명히 식사는 룸 서비스이다. 영화의 한 장면같이.
"이봐, 해군."
모르는 사이에, 두 명의 SP(해군헌병)가 옆에 서 있었다. 둘 다 경찰봉을 들고 허리에는 권총을 차고 있다. 한 명은 검은 귀밑털을 기른, 각이 진 어깨의 키가 큰 남자, 또 한 명은 작은 남자였다.
"외출 허가증을 보여 주겠나?" 키가 큰 남자가 말했다.
고분고분히 건네주자 상대는 의심스러운 듯 조사를 했다. 웬지 모르게 불안해졌다. 거기에 뭐라고 쓰여 있는지 난 알고 있다. 몇 번이나 읽어 암기해 버렸던 것이다. 해군 외출 허가증. 날짜. 이름. 병적 번호. 허가증 번호. 내 계급과 소속 부대. 마지막으로 대니 레이의 서명. 전혀 뒤가 켕기는 일은 없는데도 SP와 맞닥뜨리자 공연히 불안했다. 키가 큰 남자가 작은 남자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허가증을 내게 돌려 주었다.
"나쁘게 생각하지 마, 으레 하는 체크니까."
비싸지 않은 사복을 살 수 있는 가게가 어디냐고 묻자, 두 사람은 사우스 파라폭스 스트리트에 있는 시어즈 백화점을 권해 주었다. 나는 경례하고 걷기 시작했다. 흘끗 뒤를 돌아보니, 두 사람은 산 카로스의 로비에 어슬렁 어슬렁 들어가는 중이었다. 그 두 사람도 거기에 여자를 기다리게 하고 있는 것일까.
시어즈는 조명이 어슴푸레한, 기다란 가게로 도처에 염가 매출이라는 표시가 붙어 있었다. 화려한 녹색의 알로하 셔츠가 눈에 띄어서 그것을 샀다. 샐의 셔츠만큼 화려하지는 않지만 플로리다 기분을 나게 해 주는 것 같다. 2달러 50센트. 그것과 티노 팬츠를 6달러에 샀다. 카운터의 남자에게 여기서 옷을 갈아 입고 싶다고 말하자, 탈의실을 가르쳐 주었다. 제복을 벗어 차곡 차곡 개키고나서 사복으로 갈아입고 카운터로 돌아와 벗은 제복을 포장해 달라고 부탁했다. 남자는 말없이 끄덕였다. 그런 기운 없는 얼굴을 한 남자는 본 적이 없다.
그곳에서 출구로 가려고 했을 때, 화구 매장이 눈에 들어왔다. 다가가 도화지를 바라보았다. 유화 그림물감을 손에 들고 각종 목탄과 연필을 살펴 보았다. 앞으로 지루한 휴일과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는 밤에 다시 그림을 그려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좋아, 스케치북을 한 권 사자, 그리고 색연필도. 점원이 어딘가에 없나 하고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러자 다섯 매장 정도 간격을 둔 곳에 그녀가 있었다.
아! 그 여자,
여성용 내의 매장 카운터 안에 있다. 이층 끝쪽에. 내 옷 위에. 백화점의 회색 유니폼을 걸치고 있고 머리를 뒤로 꽉 매어 틀어 올리고 있다. 분명하다. 역시 그건 환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내가 트럭을 타고 지나갈 때, 그녀는 분명히 이 가게에 출근하는 중이었을 것이다. 지금 그녀는 파란 드레스를 입은 뚱뚱한 손님과 얘기하고 있었다. 뚱뚱한 여성은 팬티를 손에 들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다가가 보니-심장은 고동치고, 얼굴은 땀에 젖어 있었다-나의 '환상의 여자'는 그 여자가 내민 팬티를 손에 들고 허벅지 부분을 쭉 펴서, 그 상품의 장점을 설명하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또다시 다가갔다. 다른 카운터를 보고 있는 척 하면서 흘끗 흘끗 여자쪽에 시선을 빨리 움직여 차례로 본다. (그 뚱뚱한 여자가 가 버리면)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녀 앞에 다가가, 이봐요! 하고 말해 보자. 아주 자연스럽게. 내가 긴장하고 있는 걸 눈치채지 않도록)
그런데 갑자기, 49세쯤 되어 보이는 흑인 남자가 다가와, 이봐요, 여기 점원이오? 하고 물었다. 아니라고 대답하자 남자는 싸구려 손목 시계를 힐끔 보면서 큰일이네, 하고 말했다. 정말로 난처해 하는 모습이어서 왜 그럽니까 하고 물어 보았다. 저 잡화 카운터에서 실을 사고 싶은데, 하고 남자는 말했다. 그쪽을 보니 가운터 안에 창백하고 야윈 여점원이 있었다. 저 점원에게 물어 보면 되잖냐고 나는 말했다. 이봐,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나는 흑인 남자고 저 여자는 백인이잖아. 그 순간, 아마 그의 눈에 나는 방금 상륙한 무지한 이민인같이 보였을 것이다. 흑인은 설명했다. 이 마을에서는 말이야, 백인 여자는 흑인 손님을 상대하면 안 되게 되어 있어. 그는 백인 남성 점원을 찾으러 멀어져 갔다. 이런 세상에 하고 나는 생각했다. 더 이상 기다리고 있을 수 없다. 어슬렁 어슬렁 여성 내의 매장쪽으로 다가갔다. 뚱뚱한 손님 오른쪽에 서서 윈도우를 들여다보고 있는 척을 하면서 시어즈 제복을 입고 있는 여자를 살짝 훔쳐 보았다. 가슴이 부푼 곳 위에 명찰이 붙어 있었다.
이덴 산타나.
이름. 그녀의 이름이다. 그 후 내 뇌리에 새겨진 이름. 이덴. 에덴. 낙원과 같은 여운이 있다. 천장의 형광등 탓일까, 얼굴 빛이 약간 거무스름하게 보인다. 코와 뺨같이 융기해 있는 부분은 녹색 빛이 돌고 있었고, 눈썹 털은 거무스름하고 굵다. 그리고 그 우미한 매부리코, 그 콧마루 한가운데 주변에 약간 충이 나 있는 것이, 내가 기억하고 있는 대로였다. 윗입술이 얇은 데 비해 아랫입술은 통통하다. 뚱뚱한 여자 손님에게 생긋 웃으면서 그녀는 포장과 잔돈을 건네주었다. 그 때 뺨에 보조개가 떠오른 걸 깨달았다. 밝은 천장 형광등에 떠오른 그녀는 적어도 28살은 되어 보였다. 어쩌면 30살이 넘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 술조차 떳떳하게 살 수 없는 연령이다. 그 때 그녀가 얼굴에 손을 댔다. 왼손의 결혼 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아주 수수한 금반지. 아, 제기랄 하고 냉각했다. 아까 그 뚱뚱한 여자가 되돌아와 그녀와 얘기해 주지 않을까. 그 틈에 나는 살짝 멀어져 갈 수 있을 테니까,
"뭘 찾으십니까?"
이젠 틀렸다. 도망칠 수가 없다.
"안녕하세요." 나는 말했다
"언젠가 버스에서 만났죠."
"네?" .
"기억나지 않으세요? 섣달 그믐날 밤. 당신은 파라트카에서 내렸
죠."
의심스러운 듯이 눈을 가늘게 떴다가는 그녀는 생긋 웃었다. 그 아름다운 미소.
"아, 그 때, 그 때 옆에 앉아 있던 수병이죠? 네, 생각났어요. 알로하 셔츠를 입고 있어서 못 알아 봤어요."
"지금 방금 샀어요. 이 백화점에서."
"머리가 좀 길어진 것 같네요."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 속에서 적당한 말을 찾고 있었다. 샤프하고, 재치가 있고, 그리고, 그리고, 뭐라고 했지? 그렇다. 멋진 말이다. 하지만 그 때 몸 속에 움크리고 있었던 것은, 위트가 풍부한 문구 따위로는 따라잡을 수 없는, 더욱 난폭한 충동이었다. 그 순간 나는 카운터 너머로 손을 뻗어 싫든 좋든 그녀의 입술에 키스하고, 상품인 슬립과 팬티 위에 쓰러뜨리고 싶었다. 그리고 그녀를 안고 싶었다. 위트가 풍부한, 멋진 문구를 말하는 건 그 다음에 해도 된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이죠, 베이비?"
나는 외면했다. 좀 떨어진 가운터에서, 뚱뚱하고 머리가 벗겨지고 있는 백인이 아까 그 흑인을 상대하고 있었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있는 당신을 찾으러 에리슨 비행장 옆이 하이웨이에 몇 번이나 나간 적이 있다고 이 여자에게, 이덴 산타나에게 도저히 말할 수 없다. 당신 모습을 뇌리에서 내쫓기 위해서 얼마나 애썼는지 모른다고 도저히 말할 수 없다. 베이비. 그녀는 나를 베이비라고 불렀다.
"아니, 그, 저......" (말해, 과감하게 말해 버리는 거야)
"저-일이 끝나면, 커피라도 한 잔 같이 드실 수 있나 해서요. 이렇게 다시 만난 것도 인연이니까 말입니다. 괜찮다면 렉스 극장에서 영화를 봐도 좋고......"
마음속으로는 필사적으로 외치고 있었다. (제발 부탁예요, 웃지 말아요.)
그녀는 지그시 내 얼굴을 보고나서 웬지 슬픈 듯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좋아요. 일이 끝나면 나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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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그녀가 시어즈 백화점에서 나왔을 때 교회의 종소리가 7시를 알리고 있었다. 나는 오랫동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까지 머리 속으로 온갖 말과 행동이나 시나리오를 반추하고 있었다. 만약 그녀가 이렇게 말하면 저렇게 말하자. 당장이라도 그녀를 만나고 싶었으며 그녀는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라고 이것저것 두루 상상해 보기도 했다. 그러는 한편으로 나는 긴장에 떨고 있었다. 엄청난 큰 재해, 지진이라든가 태풍이 돌연스럽게 일어나 주지나 않을까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렇다, 그녀와의 데이트를 연기하지 않을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나 주지 않을까 하고.
그 때 손에는 종이 쇼핑백을 들고 있었는데 그 속에는 연필과 목탄과 스케치북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산 것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와의 일 이외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부두에 앉아 지난해 화재를 당해 검게 그으른 흔적이 남아있는 부두를 스케치하고는 곧 찢어버렸다. 갈매기의 수도 세어 보았다. 낡은 빅토리아 왕조 풍의 집들이 늘어선 거리를 정처 없이 거닐기도 했다. 문을 꼭 닫고 있는 그들 집들은 모두 바다를 향하고 있어 웅장하고 아름다운 외관을 자랑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이름을 되풀이하여 중얼대어 보았다. 이덴 산타나. 몇 십년 동안이나 읊조리고 있는 기도처럼 속삭여 보았다. 이덴 산타나. 음악 같은. 그녀가 이곳 펜서콜라에 있다니, 일이 끝난 뒤에 그녀가 나를 만나 주다니, 이 모든 현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어쩌면 그녀는 나를 놀려댈 심산일지도 모른다. 날 장난삼아 만나려는 것은 아닐까? 친구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어릿광대로 만들 생각은 아닐까. 나는 갑자기 두려워 졌다.
그녀가 왔다. 희미해지고 있는 회색빛으로 비쳐지면서. 내쪽을 보고 생긋 웃었으며,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옆에 다가와 있었다. 핸드백의 끈을 양손에 들고 있는 그 모습은 수줍어하고 있는 것같이 보이기까지 했다. 그 때 그녀에게 뭐라고 했는지 어떠한 인사말을 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잘 지냈어요? 하고 말했을 것이다. 틀림없이. 하지만 그 때 그녀의 자태는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신장은 5피트 6인치 정도, 가느다란 양팔, 노란 블라우스, 다리는 슬랙스에 감춰져 있다. 나는 아마 우물쭈물 자기 이름을 대었을 것이다. 그녀가 <그릭스>로 가자고 말했다. 가든 스트리트를 걸으면서 윈도우에 비치는 우리들의 모습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키는 내가 더 컸다. 그녀는 아름다웠다. 가든 스트리트를 건너갈 때 그녀는 나의 손을 잡았다. 순간 근육이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그릭스>의 밝은 쪽의 방 벽쪽에 있는 칸막이 좌석. 그곳에서 마주 앉아 메뉴를 들여다 보았다. 토실토실한 얼굴의 웨이트리스가 팬을 들고 옆에 서 있었다. 배가 고프냐고 말하자 으응, 상당히 라고 이덴은 대답했다. 메뉴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즉 가격부터 먼저 훑어보며 햄버거로 결정했다. 이덴은 베이컨 토마토 샌드위치와 콜라로 하겠다고 말했다. 토실토실한 여자는 주문한 것을 적고 물러갔다. 그녀는 나를 보고 생끗 웃었다.
"각자 부담하기로 해요. 수병님은 호주머니도 얄팍할 것 아녜요?"
"아뇨, 내가 낼께요." 나는 미소지었다.
"내가 당신을 초대했으니까."
태연함을 가장하려고 흘끗 주위를 살폈다. 카운터에 두 명의 SP가 앉아 있었다. 그곳에서 테이블 둘 정도 떨어진 곳에 잭 비어의 재킷을 입은 사나이, 칸막이 좌석 하나에 더블데이트를 하고 있는 네 명의 틴에이저가 아이스크림 소다를 마시고 있다. 손님은 그저 그 정도였다.
"이렇게 한산한 것을 보니 이 가게도 틀림없이 오래 가진 못하겠군요."
이덴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금은 모두 급료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녀는 핸드백 속을 더듬어 종이 성냥과 함께 럭키 스트라이크를 꺼냈다. 나는 그것을 넘겨받아 불을 붙여 주었다. 이덴은 담배를 입에 문 채 몸을 수그려 담배를 피웠다 .
"당신을 찾지 못할 줄 알았어요." 나는 사실대로 고백했다. 오후내내 반추하고 있던 말 한 마디를 겨우 건넨 것이다.
그녀는 푸하고 연기를 토하며 살며시 웃었다.
"나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면서요?"
"아뇨, 알고 있는 것이 많죠. 그 버스에서 당신과 함께 타고 있었다는 것, 당신이 아름다웠다는 것, 그리고 당신과 만나고 싶었다는 것, 그 날 아침 잠에서 당신이 모습을 감춘 것을 알아차렸을 때 정말 실망스러웠어요."
그러한 일들을 말해 버리자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웃음을 터뜨리는 건 아닐까 하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웃지 않았다.
"그 때는 아무래도 내리지 않을 수 없었어요." 억양이 없는 어조로 말했다.
"그땐...... 몹시 기분이 좋지 않았어요."
그런 다음 얼굴을 들었다. 약간 볼이 홍조되어 있었다. 뭔가 말을 덧붙이려고 했지만 아무 말도 않고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날 깨웠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했으면 함께 있어 주었을지도 모르는데. 당신이 바란다면 함께 버스를 내렸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녀는 깜짝 놀란 듯 내 얼굴을 보았다.
"그래요 당신이라면 그렇게 했을지도 몰라요."
주문한 것이 나왔다. 어느 기지에서 근무하고 있느냐고 물어서 사실대로 대답했다. "어머나 그래요? 난 그 에리슨 비행장에서 몇 마일 떨어진 곳에 살고 있어요" 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 늪지 옆에 다리가 있지요? 그 근방이에요. 당신은 어째서 해군에 들어갔죠?" "그건 말입니다" 하고 나는 대답했다. "넓은 세상을 보고 싶기 때문이었죠." "항구마다 걸프렌드를 두고 있듯이 말예요?" "그래요, 나는 참으로 이 세상을 보고 싶었어요. 하지만 이 세상에는 매일 눈에 비치는 것만을 보고 만족해 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예를 들면 브룩클린 출신들 말인가요?" "글쎄요,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뉴욕이라면 고층 빌딩이지요,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그리고 브로드웨이."
그녀의 식사법은 빨랐지만 품위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나이프와 포크로 샌드위치를 작게 자르고 포크로 찔러 입으로 가져갔다. 그녀는 여러 가지 것을 물었다. 당신은 어디서 태어났죠? 걸프렌드는 있나요? 가족은 몇 명이죠? 해군에서는 무슨 일을 하고 있죠? 장래는 어떤 일을 하고 싶죠? 그 날 그 때 이후로 얼마나 많은 여자들로부터 그러한 질문을 받았던가? 퍼즐의 단편 같은 조심성있고 꼼꼼한 수집. 하지만 그러한 것을 처음 나에게 물어온 것은 그녀였다. 그 목소리는 나지막했고 다소는 허스키했다. 내가 얘기할 때는 묵묵히 먹기만 했고 먹을 것을 입에 넣은 다음에는 말하려고 하지 않는다. 왼손은 줄곧 무릎에 올려 놓고 있었다. 그녀에게 요구대로 나도 여러 가지 일을 얘기했다. 아니 그것은 얘기가 아니다. 명사나 동사가 자신도 놀랄 만큼 연쇄적으로, 사리 때의 조수처럼 나의 내부에서 넘쳐 나왔던 것이다. 그것은 그 날 오후 거리를 헤매듯이 걸으면서 연습한 문구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나는 브룩클린에 관해 열심히 설명하려고 한 것 같다. 그 거리를 자기가 얼마나 사랑하고 그리워하는가. 때로는 돌아가고 싶어 견딜 수 없을 정도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얼마나 미워하고 있는가. 그렇다, 그 거리의 증오심에 대해 나는 말했던 것이다. 어떤 부류의 주민들 사이에서 볼 수 있는 어리석은 일, 다른 분자들을 배제하려고 하는 경향, 교회에 대한 맹신. 나는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얘기했다. 부분적인 거짓말을 했다 해도 나 가신 그 거짓말을 나중에까지 기억할 수 없기 때문이다. 프로스펙트 공원이나 다저스 팀이나 아버지에 관해서도 얘기했다. 하지만 오랜 고난 끝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일은 덮어 두었다. 그런 다음 그녀에게 물어 보았다. 찰리파커라는 사람을 알고 있나요? 대답은 노였으므로 언젠가 그의 레코드를 구해 주겠노라고 약속했다. 화제는 행크 윌리엄스로 옮겨졌으며 나는 마치 그의 음악을 들으며 자란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떠들어 댔다. 그래 지금은 걸프렌드는 한 사람도 없다고 나는 말했다. 한 사람이 있었지만 그건 해군에 들어오기 전의 얘기로 작년 여름의 일이다. 하지만 그녀와는 헤어졌다, 그리고 조심성있게 미소지으면서 재빠른 말투로 말을 이었다. 실은 난 아티스트가 되고 싶다고. 정말요? 그래요, 해군을 제대하면요. 어떻게 그 때까지 기다릴 수 있죠? 내가 되고 싶은 것은 소위 예술가가 아니고 만화를 그리는 만화가예요. 연속된 그림을 그려 이야기를 엮어 보여 주는 거죠. 나는 파리라든가 로마, 이런 외국에서 살고 싶어요. 그러한 외국의 도시를 무대로 이야기를 꾸미고 싶어요. <테리와 해적>처럼 말인가요? 그래요. 그럼 <드래곤 레이디> 속에 나를 묘사해 넣어줄 수 있겠어요. 그럼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거짓말 말아요. 그러한 대화를 계속하면서 그녀가 웃지 않아 주었으면 좋겠는데 하고 나는 자꾸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웃지 않았다. 내가 얘기하고 있는 동안 눈썹을 찡그리면서 지긋이 나의 얼굴을 응시하면서 들어 주었다. 때때로 끼어든 말도 조리에 들어맞는 말이었다. <테리와 해적>이나 <드래곤 레이디>를 제대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별난 젊은이군요 당신은.
"진짜 사람을 그린 적도 있나요?"
"물론이죠."
"그렇다면. 저기 가운터에 앉아있는 잭 비어의 재킷을 입고 있는 남자도 그릴 수 있어요?"
"그럼요, 그려 보여 줄께요."
스케치북과 연필을 꺼냈다. 긴장되어 양손이 땀에 젖어 있었다. 나는 하나의 퍼포먼스를 연출해 보이려고 했기 때문에 무리도 아니었다. 아직 어머니가 생존해 있을 때 휴일에 친척을 방문하면 사촌들이 거실에 모이게 되고 돌아가면서 노래를 부르게 했던 그 때와 같은 초조함이었다. 그 때엔 가사를 잊어먹지나 않을까 하고 언제나 조마조마했다. 'Danny Boy'라든가 '앤트림의 푸른 계곡'이나 그리고 또 하나 아일랜드의 애창곡 '해병대 찬가'의 조사를 만약 잊어버리기라도 한다면 어머니를 우울하게 만들거나, 아버지가 나를 바보 같은 놈이라고 놀릴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게 되는 것이었다.
어쨌든 만화에 관해 나는 마구 지껄였다. 그러나 막상 손 동작이 민첩하지 못하거나 자연스럽게 선을 그리지 못하거나 하면 영락없이 입만 나불대는 사내라고 여길 것이다. 아마 그런 점을 확인해 보기 위해 그녀는 그림을 그려 보지 않겠느냐는 말을 건냈으리라. 모종의 테스트, 그렇다. 나의 수다가 기술에 의해 뒷받침되어 있는지 어떤지를 확인하기 위한 테스트인 것이다. 이젠 어찌할 도리가 없다. 잭 비어의 재킷을 입은 사나이에게 시선을 모으고 그리기 시작했다. 땅딸막한 체구, 동그란 얼굴, 캐니프였다면 어떻게 그렸을까 하고 상상했다. 처음에는 희미하게 회색선으로 그리고 그런 다음 좀더 굵은 선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자의 부분을 검게 칠해 나가자 사나이의 모습이 리얼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귀, 머리카락, 콧구멍 같은 세부적인 것을 그려 넣었고 맨 마지막에 잭 비어라는 글자를 꼼꼼하게 등에 그려넣었다. 일단 완성시킨 곳에서 스케치북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어머나! 정말 잘 그렸네요, 베이비" 그녀는 말했다.
"정말 재능이 있군요. 굉장한 재능이에요, 이 정도의 실력이라면."
내가 주섬주섬 얘기하자 그녀는 나의 손을 쥐었다.
"얼굴이 빨개졌어요."
"네, 하지만 그......"
"비위에 거슬리는 말을 했는지 모르겠군요,"
"그게 아니라 저어...... 그러니까 말예요 그림이란 대개 혼자 그리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남이 보는 앞에서 그리니까 어쩐지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요."
"하지만 훌륭한 솜씨예요."
다시 그림을 본 다음 잭 비어의 재킷을 입은 사나이쪽을 바라보았다.
"저어, 사인해 줘요. 그리고 날짜를 적어 넣어요."
나의 이름을 적어넣고 그 종이를 스케치북에서 떼어내 그녀에게 건네 주었다. 하나의 기념품. 선물. 정중한 인사. 그것을 둘둘 말자 그녀는 핸드백에 집어 넣었다.
"언젠가 머지않아 당신이 유명해지면 틀림없이 굉장한 재산이 되겠군요. 이 화가는 나의 옛 친구예요 라고 자랑할 수 있을 테구요."
갑자기 등줄기에 차가운 것이 치달았다. (날 놀려대고 있는 것일까?) 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언젠가 정말 그러한 일이 실현될 수 있을까?) 웨이트리스가 커피를 가져왔으며 테이블을 정리했다. 그녀는 테이블에 짚고 있는 손에 턱을 얹고 지긋이 나를 응시했다.
"저어, 근데 말이죠. 왜 날 만나자고 했죠?"
"그야, 당신이 아름답기 때문이지요."
앞으로 몸을 기울이고 커피를 마셨다. 그녀는 여전히 나를 계속 응시하고 있었다.
"진심으로 말하고 있는 거죠, 베이비?"
"그럼요."
"인사 치레로 하는 말이 아니죠?"
"물론 그렇지 않아요."
그녀는 럭키 스트라이크를 꺼내고 성냥을 켜려고 했다. 그것을 다시 건네 받아 대신 불을 붙여 주었다. 기분 좋은 듯이 담배를 피우는 이덴. 종이성냥의 그림에 나는 눈길을 보냈다. '날 그려 주세요' 라고 적혀 있다. 이런 여성이라면 왼손으로라도 그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 실제로 그렇게 해 보고 그 그림을 이 성냥의 주소로 보내 볼까, 우수한 작품을 보내준 분에게는 그림의 통신 교육코스를 무료로 제공합니다 라고 적혀 있다. 로이 크레인도 처음에는 통신 교육으로 그림 공부를 했지 않았던가? 하지만 기다려라. 나는 지금 해군에 몸담고 있다. 해군 기지에 그러한 교재를 보내줄 리가 없다. 그리고 첫째로 그 그림의 실습은 어디서 하면 되지? 순간 그러한 것을 생각한 다음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표정이 어딘가 달라져 보였다. 전보다 밝고 젊어진 것 같았다. 어른스러움이 희미해지고 어떤 싱싱함이 감돌고 있다.
"이미 오래된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내가 아름답다고 생각한 것은."
"믿어지지 않는군요, 그 말은."
"정말이에요."
"하지만 거울을 들여다 보면 금방 알 수 있잖아요."
그녀는 얼굴을 돌려 SP와 엇갈려 들어온 두 명의 사복 수병을 지켜보았다. 뺨이 살짝 상기되는 듯이 보였다. 한참 스픈으로 커피를 휘젓고 있는가 싶더니 그녀는 다시 담배를 피웠다.
"그럼 그 영화를 보러 가요." 그녀는 말했다. 그녀가 결혼 반지를
빼버렸다는 것을 그 때 알게 되었다.
우리가 보러 간 영화는 록 허드슨 주연의 <최후의 추장>이었다. 용감한 백인이 플로리다의 거치른 땅에 농원을 만들었으나 인디언의 세미놀 종족과의 싸움으로 모든 것이 엉망이 되고 만다는 줄거리이다. 록은 육군사관학교의 졸업생이란 설정으로 사관생도로 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자연히 인디언쪽을 응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은 영화에는 좀처럼 마음을 집중할 수 없었으며 스토리를 뒤쫓는 데도 몹시 애를 써야만 했다. 1층의 좌석에 앉아 그녀가 산 팝콘의 봉지를 손에 들고 있었다. 팝콘을 다 먹어 버리자 그녀가 냅킨을 건네주었다. 그것으로 손가락을 닦고 양손을 느긋이 무릎에 얹어놓고 있었다. 얼마 후 스크린에서 인디언의 무리들이 백인 여인을 죽이려고 문을 마구 부셔 대는 장면이 흐를 때 그녀는 나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영화가 끌날 때까지 그렇게 하고 있었다.
그녀의 손톱은 짧게 다듬어져 있었고 손가락 피부의 감촉은 거칠었다. 하지만 손바닥 중심은 촉촉히 젖어 있었다. 그녀에게 쥐어진 나의 엄지손가락은 그 손바닥의 촉촉한 습기에 감싸여 있었다. 잠시 후에 그녀는 이쪽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어 왔다. 상큼한 머리카락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비누인지 향수인지 그녀의 몸은 희미하게 꽃향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그 목덜미나 등에 키스를 한다면 어떠한 기분이 들게 될까 하고 막연히 생각했다. 얼마 후 그녀의 유방이 팔에 밀어붙여졌다. 블라우스 아래에서 부드러운 브래지어에 감싸여 있는 것 같았으며 묵직한 양감이 있다. 그렇게 그녀와 나란히 앉아 있자 그밖에도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어쩐지 이미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지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윽고 영화가 끝나고 장내가 밝아졌다.
"정말 웃긴다니까요, 저 세미놀 족은."
나에게 몸을 떼고 머리를 가다듬으면서 그녀는 말했다. "그 세미놀 족들이 날뛰었기 때문에 도망친 노예들은 플로리다에서 자유를 구해 도망쳐 나왔지만 결국은 백인들이 몰려와 몰살당하고 말았으니 말예요."
"그래요? 난 몰랐어요."
"그래요?"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좀더 역사를 공부하라구요, 베이비."
그 때 출구쪽에 눈길을 보내자 장외로 나가려고 하는 터너의 모습이 보였다. 그 섣달 그믐날 밤 버스에 같이 탔던 수병이다. 오늘은 스포츠 셔츠를 입고 있었다. 또 한 사람은 역시 셔츠를 입은 수병이 곁에 있었다. 래드 케논이었다.
"왜그래요?" 그녀가 물었다,
"아뇨, 아무 것도 아네요. 저기 수병이 보이죠? 같은 기지에 있거든요. 밥맛 떨어지는 녀석인데, 이름은 래드 캐논이죠. 잠깐 기다려요. 저 녀석이 먼저 나갈 때까지."
그녀는 이상하다는 듯이 나를 보았다.
"저 작자가 두려운 거예요?"
"두렵다기보다는 귀찮은 것을 피하고 싶은 거죠."
잠시 기다렸다가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꼬옥 이쪽 손을 쥐고 있다. 로비에 나갔을 때 앞 도로의 모통이에 터너와 캐논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순간 주저하며 생각했다. (다시 안으로 들어갈까. 화장실에라도 가도 좋다. 조금 시간을 지나면 녀석들은 가버릴 것이다. 지금은 얼굴을 마주 대하지 않는 편이 좋다. 이 여자와 함께 있는 것을 보여 주지 않는 편이 좋다.) 다음 순간 자기가 그녀에게 겁쟁이 같은 인상을 주는 건 아닐까 하여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두 사람은 돌아다 보며 이쪽을 보았다.
"어이 세일러." 터너는 그렇게 말하고 싱끗 웃었다.
"완전히 해군에 익숙해진 것 같군."
"그래 보입니까?" 그녀를 굳이 소개하지는 않았다. 캐논쪽을 보고 인사 대신 끄덕여 보였다. 그의 눈은 다시 더럽혀진 눈 같은 색깔로 바뀌어 있었다.
"다음에 메인사이드쪽으로 갈 때 전화하겠어요." 터너를 향해 말했다.
"에리슨에 들릴 일이 있으면 보급부에도 들려 주십시오."
그리고 물러가려고 하자 캐논이 말했다.
"뉴욕에선 예의란 것을 가르치지 않는 모양이군."
멈춰 서서 그의 얼굴을 보았다. 캐논은 무표정한 눈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다. 나에게 도전하고 있는 것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나를 평가하는 것으로 미국 북부 전체를 평가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남부의 우월감 같은 것으로 날 삼켜 버리려고 대들고 있다. 그런 기분이 들었다. 캐논에게 어떻게 생각되건 상관 없지만 터너에게 미움을 사고 싶지는 않다.
"아, 미안합니다." 나는 말했다.
"이쪽은 친구인 이덴. 이덴, 이쪽은 터너와 웬델 캐논입니다. 두 사람 모두 해군의 선배죠."
그녀는 예의적으로 두 사람과 악수를 나누었다. '처음 뵙겠습니다'란 말이 교환되고 터너가 감탄하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 시선은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만사를 잘해 나가고 있구만 세일러......'
"지난 주에 산 카로스 호텔의 바에서 만났죠?"
캐논이 그녀에게 말했다.
"당신은 그 멕시코인 조종사와 파일롯과 함께 였죠?"
"사람을 잘못 보신 모양이군요."
그녀는 나의 손을 잡아당기며 걷기 시작했다.
"아니, 그건 틀림없이 당신이었소." 캐논은 말했다.
"뻬틈玖?쌍둥이 여동생이라도 있는게요?"
그녀는 대답도 않고 걸어갔다. 모퉁이를 왼쪽으로 꺾어 파라폭스 스트리트의 불빛을 피하듯이 가든 스트리트로 나섰다. 그곳으로부터 몇 블럭쯤 상점이 계속되고 이윽고 하얀 포치나 그네가 있는 주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곳까지 왔어도 그녀는 발길을 멈추지 않고 나의 손을 쥐고 걸어갔다. 아까 그 두 사람이 훨씬 뒤에 처졌을 때 비로소 그녀는 입을 열었다.
"지겨운 녀석."
"알았겠죠? 왜 그 녀석들과 얼굴을 마주 대하고 싶지 않아 했는지."
"매끌매끌한 얼굴과 멀건한 눈매, 저급해요."
"죽은 것은 놈의 눈이 아니라 놈의 마음이죠."
"정말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요."
두 사람은 보조를 늦추었다. 어두컴컴하고 인기척이 없는 작은 공원에 이르렀다. 멀리서 깜빡이고 있는 가로등의 불빛이 나무들의 가지를 통해 어렴풋이 비치고 있다. 둘이서 벤치에 앉았다. 그녀는 담배를 피우며 세게 연기를 토했다. 그랬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안해요."
"뭐가요?"
"산 카로스의 바에서 보았다는 등의 엉터리 같은 말을 듣게 해서 말예요."
"엉터리가 아니예요. 나 거기 있었어요."
"토니 멜카도와 말예요?"
"그래요."
절반밖에 피우지 않은 담배를 그녀는 어둠 속으로 던져 버렸다. 순간 불이 빨갛게 반짝였나 싶더니 곧 사라졌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마음에 돌연 생겨난 혐오감과 분노가 향기처럼 솟아올랐다. 그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어떻게서든 위로해 주고 싶어 그녀의 어깨에 손을 둘려 끌어당겼다. 아니 그 때 도리어 그녀보다 자기 자신을 위로해 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대로 아무런 결실 없이 이별을 하게 되는 건가 하는 예감에 겁을 먹고 그녀를 끌어당겼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가만히 몸을 당겼다.
"이젠 진절머리가 나요 남자에게." 그 말은 사라지지 않고 어두운 밤기운 속에 감돌았다. 문득 자신이 만화 속에 등장한 인물처럼 되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망의 나락에 떼밀려 떨어지고 만 여인의 옆에 앉은 나의 머리 위에는 보이지 않는 풍선이 떠 있었다. 그 풍선 속에는 이러한 생각이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지금 그것은 어떠한 의미일까?
"이젠 진절머리가 나요, 남자에게."
내가 목격한 금발의 여자처럼 그녀도 멜카도와 잠자리를 같이 했을까? 그건 돈 때문일까? 아니면 그녀는 멜카도를 사랑하고 있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하면 되나? 멜카도를 상대로 어떻게 하면 싸울 수 있단 말인가? 그 용모, 전문적인 기량, 사관의 견장, 나이, 돈-나에게는 승산이 없다. 그리고 그는 라이카 카메라도 있다. '이젠 진절머리가 나요, 남자에게는.'
"이만 자전거를 찾으러 가야 할 것 같군요."
풍선은 탁하고 튕겨나고 말았다.
"집에까지 자전거를 타고 간단 말예요?"
"그렇지 않아요. 에리슨 비행장까지는 버스로 가고 거기서 자전거로 갈아타는 거예요."
그녀는 일어서 있었다. 나는 그녀와 나란히 가든 스트리트로 되돌아갔다. 바로 조금 전 3시간 이상이나 그녀는 다정하고 따스하게 대해 주었다. 나에게 자기 신상과 희망을 말하게 했다. 내가 그린 그림을 받아 주었고 그것을 둘둘 말아 핸드백에 거두어 넣었다. 영화관의 어둠 속에서는 지긋이 나의 손을 쥐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일방적으로 떠나버리려고 하고 있다.
"저어 좀더 얘기를 나눌 생각은 없어요?"
"없어요."
그리고 빙그르 내쪽으로 돌아서서 지긋이 나의 얼굴을 응시했다.
"좋아요, 이건 당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어요. 당신은 멋져요. 오해하지 말아요. 당신 탓이 아니니까."
"하지만 다시 꼭 만나고 싶어요."
두 사람은 도로를 건너 시어즈 백화점쪽으로 향해 갔다.
"만난다 해도 어쩔 도리가 없잖아요."
"아니, 만나고 싶어요."
"당신은 18세잖아요. 난 31세예요."
"상관 었어요, 그런 것은."
"아이가 둘이나 있어요."
"그래서 어떻다는 거죠?"
"당신과 사귀는 건 요람을 흔들고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아니, 그렇지 않아요!"
그녀는 시어즈의 옆 골목길로 꺾어들어 자전거의 자물쇠를 벗겼다.
"당신의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난."
"그림의 모델이라면 당신과 같은 나이 또래의 여자애들이 몇 백명이라도 있을 텐데요." 자전거를 끌고 걸으면서 그녀는 말했다.
"그렇게 하는 편이 좋아요. 이렇게 다 늙어가는 할머니 따위는 상대하지 말아요."
그녀의 허리에 손을 돌려 끌어안고 나는 그 입에 세게 키스를 했다.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 뺨에 살며시 손을 대었다. 그녀는 꿈틀 떨었고 자전거를 놓쳤다. 자전거는 쓰러져 벽에 걸쳤다. 다음 순간 그녀는 허리를 밀어붙여 왔다.
"바보군요. 구제 불능의......" 그녀는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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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진을 건 채 나는 지금 앉아있다. 라디오는 꺼져 있다. 지금 이곳은 폐쇄된 주유소 앞이다. 호스는 모두 잡아 뜯겨졌으며 창문에는 '휴업'이란 간판이 묘한 각도로 매달려 있다. 눈앞의 넓은 한길에서 오른쪽으로 향한 곳에 에리슨 비행장이 있다. 오늘 아침 나는 이 그리운 길을 천천히 달려 본다. 되돌아올 때는 좀더 속도를 떨어뜨리고 모텔로 향하려다 그만두고, 차를 노견에 접근시켜 부숴진 콘크리트 위에 세웠다. 그곳은 예전에 종려나무라든가 관목이 가득 무성한 들판이었다. 이대로라면 예전처럼 들판으로 되돌아가게 될 것 같다. 낡은 주막, <비리즈>는 이미 그곳에는 없었고 선원 클럽도 없어졌다. 비행장 자체도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곳은 지금 공업단지가 조성되어 있으며 헬리콥터의 발착장이 있던 곳에는 트럭 운전사의 교습소가 있다. 그곳은 금이 간 아스팔트 사이로 잡초가 무성해져 있었다. 병사가 있던 자리에는 태양에 타서 오므라든 잡초가 돋아나 있었으며 식당 내부는 완전히 수리되어 창고로 바뀌었다. 하늘은 공허했으며 주위는 아무런 소리도 없다.
머리에는 이덴 산타나와 처음 밤을 함께 지낸 다음 날 아침 희미한 가운데 눈을 뜬 순간이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그 때는 누구든 상관없이 그녀에 대해 떠벌리고 싶은 충동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회색빛의 아침 식당으로 서둘러 갔다. 그 이래 사귄 여인은 수없이 많았지만 자신을 그렇게까지 흥분에 휩싸이게 한 여자는 없었다. 아무튼 이 세상에 이렇게 멋진 여자가 있다는 사실을 요란하게 떠벌리며 다니고 싶은 그런 기분이었으니까.
그건 화요일의 아침이었을 것이다. 다음 토요일 밤에 다시 만나주겠다는 약속을 그녀한테서 승낙을 받아놓고 있었다. 토요일 까지는 아주 얼마 안 되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아직 18세도 되지 않은 풋내기에게는 거의 영원이나 마찬가지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식당에 들어가자 마일즈 레이필드의 옆에 앉았다. 두 사람 모두 시리얼한 라이스 크리스파이를 먹고 있었다. 그리고 마일즈는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부인으로부터 온 편지라고 한다. 나는 자못 놀랜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부인이 있다는 것을 그가 한 번도 입에 떠올린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 때 마일즈는 지겹다는 어조로 여자들이란 자신을 모른다니까 하고 투덜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내 여편네는 더욱 그렇지 하고 그는 말을 이었다. 엉뚱하게도 여배우가 되고 싶다니 말이야. 할리우드로 이사하고 싶다더군. 도자기 예술을 그만두고 지금은 책으로 스타니스라프스키 시스템을 공부하고 있는 모양이야. 제임스 딘하고 만나고 싶대. 엘리어 카잔 감독 아래서 연기 수업을 하고 싶다나.
그는 머리를 설레 설레 흔들었다. 그러면 차라리, 하고 내가 끼어들었다. 부인을 이 펜서콜라로 데려오면 어때요? 이곳에 가족들을 위한 숙사에서 함께 살면 되잖아요. 그렇게 하면 해군에서 특별 수당도 탈 수 있고 말예요.
그는 다시 머리를 저으며 말했다. 하지만...... 이 거리에 예쁜 여자를 데려오면 어떤 엄청난 일이 벌어지라구...... 하며 중얼거렸다. 혈리우드라니 젠장!
잠시 후 모두가 어슬렁 어슬렁 들어왔다. 막스와 샐, 워레스키와 메이허, 할레르슨, 보즈웰 등등. 모두 숙취로 인해 고함을 쳐대고 낄낄거리고 있다. 막스가 다가와 금요일 밤 침례교파의 교회에 가는데 같이 가자고 했다. '반명예 훼손 연맹'을 위해 그자들이 행한 종교 살인을 조사하러 간다고 한다. 마일즈가 웃음을 터뜨렸다. 머리가 돈 침례교파의 신자들이나 이 근처에 우굴거리고 있는 프리메이슨(비밀 결사)의 멤버들로부터 유태인인 막스를 지켜야만 하기 때문에 너희들 두 사람이 꼭 와 달라는 것이었다. 마일즈가 히쭉거리며 끄덕이자 녀석들은 농담을 지껄이거나 서로의 엉덩이를 거머쥐면서 다른 테이블로 옮겨갔다.
항상 그렇듯이 마일즈는 손목을 조금 구부려 담배를 입에 밀어붙이고 있다. 꽤 멋있어 보이는 몸동작이었다. 그것을 보고도 나는 별로 아무런 느낌이 없다. 마일즈는 마일즈다. 어쨌든 이덴 산타나에 관해 그에게 여러 모로 상의하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예컨대 그녀가 정말 결혼했는지 자기가 속을 떠 봐야 할 것인지 어떤지. 아이가 둘 있다는 것은 사실인가 그렇다고 하면 그 아이들은 어디에 살고 있는가, 알고 싶은 것은 태산 같았다. 아니면 그런 사실들을 일체 마음에 두지 않는 편이 좋을까? 반대로 그녀를 추궁해 산카로스에서 멜카도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백하게 해야 할까? 이러한 질투로 가슴을 태우는 반면 다음 순간에는 환희로 가슴이 벅차오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마일즈는 23세였다. 이러한 일들에 관해서는 나보다 훤할지 모른다. 하지만 결국 그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아직 그가 어떤 인물인지 알지 못한다. 그의 특유의 비웃는 말투로 바보 취급을 당하거나 경멸당하거나 하면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를 아마 친구라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아직 확신을 가질 수 없다. 두 사람이 함께 어떤 곤란에 직면하기까지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다른 녀석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 때 할레르슨이 마일즈의 등 뒤에 있는 통로로 다가왔다. 커피컵을 손에 들고 있다. 그는 마일즈의 목덜미를 야릇하게 그려 보며 히프를 배배 틀어 보였다.
"안녕, 나의 마일즈님"
"시끄러워, 이 병신아!"
마일즈는 되받아쳤다.
그 말이 들리지 않은 듯이 할레르슨은 걸어가며 다시 한번 엉덩이를 배배 틀면서 자기 의자에 앉았다. 마일즈쪽을 보면서 생각했다.(만약 내가 진정 마일즈의 친구라면 할레르슨의 얼굴에 한 방 먹였어야 했다. 그 등신 같은 바보에게.) 하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병신같은 새끼!" 마일즈는 말했다. 관자놀이의 핏줄이 꿈틀거렸다. 그는 깊이 담배를 들이마셨다.
"아무리 두둘겨 패 줘도 부족할 녀석이지만." 나는 말했다.
"쓸데 없는 데 힘을 쓰지 않는 편이 좋겠죠?"
"알고 있어. 아암 알고 있다마다."
하지만 다시 한번 그의 얼굴을 살펴보니 두툼한 안경 너머로 물기가 보였다.
"잠깐 볼일이 있어서."
돌연 그는 일어섰으며 쟁반을 들고 종종걸음으로 나갔다.
아침은 해가 저물지 않을 것처럼 영롱했다. 날씨는 따뜻했으며 격납고에는 계속 헬리콥터가 들락거리고 있었다. 엔진의 부품을 건네 주거나 서류에 적어 넣기도 하고 청구서를 정리하기도 했다. 할레르슨은 행크 윌리엄스의 곡을 휘파람으로 불면서 자못 바쁜 듯이 움직거리며 돌아다니고 있다. 맞은편 책상의 마일즈는 뚱한 얼굴로 타이프를 치거나 잰 말투로 전화에 응대하거나 가느다란 연필로 낙서를 하거나 했다. 오후 무렵 그는 메인사이드로 심부름을 나갔다. 나는 일어나서 기지개를 폈다. 커피 포트쪽으로 가려다가 마일즈가 낙서한 그림을 힐끗 보았다. 베케트의 얼굴이 실물 못지 않게 그려져 있었다. 나도 모르게 베케트를 가까이 불러 그 낙서 그림을 보여 주었다.
"와아, 기절할 노릇이군." 베케트는 말했다.
"우리 동료중에 진짜 화가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군."
그는 그림을 가져가려고 했지만 나는 마일즈에게 물어본 다음에 가져가는 것이 좋겠다고 충고했다. 그래 그렇게 하지 라며 베케트는 말했다. 그 녀석은 사실 상당히 신경질적인 데가 있으니까 말이야. 베케트는 웃었다.
존스가 다가와 너, 좋은 구두를 신었구나 라고 말해 주었다. 조간이 배달되었다. 일면에는 아이젠하워가 임명한 새 국무장관 덜레스의 담화가 실려 있었다. 우리들은 평화를 원하지만 소련과 그 동맹국들에게 포위되는 것은 원치 않는다. 제일 큰 문제는 아시아로서, 공산주의자들은 인도차이나를 탈취하려고 하고 있다 등등.
나는 인도차이나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 신문에 의하면 공산주의자는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에게 일격을 가하고 한국에서도 미국에게 일격을 가했다. 더구나 소련군은 조금의 병력 손실도 없이 그것들을 성취했다고 했다. 미국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덜레스는 명언하고 있지 않았지만 그의 담화를 읽고 난 후 세계의 미래가 밝게 생각되지 않았다.
점심 직전에 이르러 문득 서류에서 얼굴을 들자 멜카도가 카운터에 서 있었다. 용건을 듣기 위해 다가갔다. 그는 미소지었다. 명치 언저리가 갑자기 경련을 일으켰다. 정말 멋진 남자다. 이덴이 그를 차버리고 내게로 온다는 일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어이, 어떻게 지내나 요즘?" 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사판캠(운동 변환 장치)이 필요한 모양으로 청구서의 필요사항도 친필로 적어 넣고 있었다. 그 부품을 가지려 가다가 다시 베케트와 만났다. 그는 머리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난 뉴올리언스 출신이지만 저 사투리가 한 마디라도 귀에 들려오면 뭔가를 던져 버리고 싶단 말이야."
가운터로 돌아오자 멜카도는 신문을 읽고 있었다.
"대위님은 어디 출신이십니까?" 대답은 알고 있었지만 그가 뭐라고 할까 하고 물어 보았다.
"국경에서 남쪽 나라지. 가 본 적이 있나?"
"아뇨. 이곳이 제가 경험한 제일 남쪽의 땅입니다. 전 뉴욕 출신입니다."
"그래? 뉴욕이야? 뉴욕을 좋아하지. 뉴욕 출신이라면 메히코도 마음에 들겠군."
메히코란 물론 맥시코를 말한다. 틀림없이 진짜 발음은 메히코일 것이다. "수도는 메히코 시티로 아주 멋진 곳이지. 높은 빌딩이 많이 있지. 그렇지 마천루 말이야. 하지만 실제로는 뉴욕의 빌딩만큼 높지는 않지. 인구도 뉴욕 정도는 아니고 말이야. 거리 주변에는 아름다운 산들이 있고 정상에는 눈이 쌓여 있지. 모두 화산일세. 여자들도 예쁘고, 일년 내내 봄같이 따스한 곳이지. 꼭 한 번 와 보게. 내게 연락해 주면 안내해 줄 테니까."
"그건 멋진데요."
그는 서류에 사인을 하고 사판캠을 받아들었다.
"정말 그렇게 하게, 메히코에 오게 되면 꼭 연락해 주게."
돌아가는 그를 보면서 생각했다. (그는 틀림없이 좋은 녀석일지도 모른다. 대단히 명랑하고 사람도 좋아 보이고 미국인 사관들처럼 으시대는 구석도 조금도 없지 않는가.) 그럼 어째서 그의 모습을 본 것만으로 동요하는 것일까? 그가 금발의 여자와 산 카로스 호델에서 나오고 있는 광경을 목격했기 때문일 거다. 이덴 산타나하고는 대체 어떠한 관계일까? 그만두자. 그것들을 머리에서 쫓아 버리려고 했다. 이제까지 고민해 오던 것은 모두 쫓아내 버리려고 했다. (모두 잊어 버리는 거야. 이 바보야.) 두 사람의 기계공이 들어와 공구와 볼트가 필요하다고 한다. 나는 그것을 가지러 갔다. (그러고 보면 산타나라고 하는 이름은 라틴계가 아닐까?) 아아 물론 그럴 것이 틀림 없다. 그렇다면 그녀도 라틴계일지 모른다. 비록 그 어미를 길게 끄는 남부 사투리가 있긴 해도. 그렇다, 틀림없이 멜카도가 유리한 것은 그것이다. 그것에 플러스 그의 나이, 경제적 풍요, 용모. 혹시 그녀쪽은 멜카도를 사랑하고 있는데 멜카도쪽에서 아무 것도 느끼고 있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아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나는 토요일에 그녀와 만나기로 되어 있다. 하지만 오늘 밤 그녀는 누구와 만나는 것일까? 내일 밤은? 모래 밤은? 틀림없이 멜카도는 멕시코로 데려가 주겠다고 그녀에게 말을 건넨 것이다. 멕시코. 메히코. 옛날 미국인 무법자들이 모두 도망쳐 들어간 나라. 멜카도는 틀림없이 그곳으로 그녀를 데리고 갈 생각인 것이다. 그는 바로 2,3분 전 나에게도 자기를 찾아 오라고 말했다. 그렇다 상춘의 나라, 미인이 많은 나라, 메히코로.
"야, 임마, 뭘 그렇게 멍청히 생각하지?"
정신을 차려 주위를 둘러보자 대니 레이가 서 있었다. 서둘러 공구와 볼트를 기계공들에게 건네주었다. 그들은 수령서에 사인을 하고 돌아갔다.
"마치 달을 향해 지구를 방금 날아오른 그런 얼굴을 하고 있군."
라고 대니 레이가 말했다.
"식곤증일 거야. 배가 부르면 문득 멍청해지니까."
그는 미소지으면서 책상을 가볍게 두드렸다.
"레이필드가 메인사이드에서 돌아오게 되면 녀석과 함께 대걸레를 가지고 바닥 청소를 해. 마침 마일즈와 자네의 차례이니까."
"네 알았습니다."
4시가 지날 때쯤 마일즈와 나는 화장실로 들어가 바퀴가 달린 커다란 철제 양동이에 물을 담았다. 그곳에 비누와 소나무 향기가 나는 향료를 넣었다. 그것을 창고 끝까지 끌고-카운터에서 시작해 마지막으로 화장실까지 청소하는 것이다. 지금은 모두 모습을 감추고 남아있는 것은 당직 사무계의 존스 정도이다. 나는 대걸레를 비눗물에 담그어 준비를 했다. 마일즈도 이웃 통로에서 나와 같이 하고 있었다.
"젠장!" 그는 말했다.
"지긋지긋해 죽겠군. 어휴 더러워, 이 끈적거리는 비눗물 감촉. 이 물 1온스당 세균이 1억 개는 있을 거야. 콜레라균이나 폴리오균 같은."
"하지만 바닥만 닦는 거잖아요, 마일즈. 그것을 뒤집어 쓰라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건 알고 있어. 하지만......"
나는 자기 통로의 바닥을 커다랗게 반쯤 원호를 그리며 닦아 나갔다. 그 일은 그렇게 싫은 것은 아니었다. 단순하고 바보 같은 일이기는 했지만, 하고 있는 동안만은 굳건한 신념의 수병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일즈는 여전히 계속 불평을 했다. 두 통로를 두고 서류장 너머로 저쪽을 들여다보고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는 리드미컬하게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어색하기 짝이 없다. 도대체 양발을 가지런히 하고 서 있는 것부터가 틀렸다. 그리고 바닥을 잘게 지르듯이 하며 닦고 있다. 그 때마다 불평을 늘어놓고 있는 것이다.
"마일즈."
동그란 머리 해머의 선반 사이로 저쪽을 들여다 보면서 나는 말을 걸었다.
"그런 방법으로 하면 안 돼요."
"청소하는 데 방법이고 나발이고가 어디 있어!"
자기 대걸레를 선반에 걸쳐 놓고 나는 마일조쪽으로 돌아갔다.
"제가 하는 것을 잘 보세요."
그의 대걸레를 들어올렸다. 그밖의 이렇다 할 장기는 없지만, 바닥 청소의 방법 정도라면 자신이 있다.
"우선 이렇게 양 발을 벌려야 해요."
"뭐라고?"
"이상한 상상은 하지 말아요. 이렇게 양 발을 단단히 벌리고 서는 거예요. 야구에서 타석에 섰을 때처럼. 그런 다음......"
"야구는 싫어한다구."
나는 움직임을 멈췄다.
"야구를 싫어한다고요?"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건 왜죠?" .
"왜냐하면 말이야, 그건 나이살이나 먹은 사람들이 애들 옷 같은 것을 걸치고 조그많고 하얀 공을 몽둥이로 두들겨 대는 거니까."
그 때 즉각 와닿았다.
"그렇군요, 어렸을 적에 야구를 해 본 적이 전혀 없었던 것 아닙니까?"
마일즈는 배터의 자세를 취해 대걸레를 쥐고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야구를 해본 적이 없군요."
"시끄러워!"
"혹시 공산주의자 아니었습니까, 마일즈? 그렇지 않으면 비밀 정보원이라든가."
그는 주뼛주뼛 나를 쳐다 보았다.
"야구를 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이 어쨌다는 거지?"
"그건 말예요 마일즈.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거죠."
그는 멋지게 리듬에 실려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나도 내 통로로 돌아와 힘차게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그러자 마일즈가 서류장 사이에서 말했다.
"야구가 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야!"
"그야 그렇죠. 공기가 그렇듯이. 하지만 살아가기 위해서는 공기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난 필요하지 않아."
"아무튼 언젠가 야구를 해 봐요. 이 마루 청소에 숙달해 봐요. 그리고 부인에게 모두 얘기해 주면 좋지 않겠어요? 헐리우드에 이사갔을 때 말예요."
마일즈는 웃었다.
"오늘은 기분이 영 풀리지를 않는군."
나는 상당한 피치로 대걸레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움직임을 취하듯이 이웃 통로에서 마일즈의 으르렁대는 소리가 들렸다. 철망창이 탁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다 보자 베케트가 서 있었다.
"어이 마일즈." 그는 말했다.
"저어 날 그린 그림 얘긴데 말이야. 그것 얻을 수 없을까? 고향에 보내 주고 싶어......"
"무슨 소리야?" 마일즈가 되물었다.
나는 그의 책상에 눈길을 보냈다. 아무 것도 얹혀 있지 않다.
"오늘 아침 자네가 그리고 있던 그림 말이야. 책상 위에 놓여 있던데?"
"그런 것 난 몰라." 마일즈는 말했다.
"난 자네를 그린 기억이 없어."
거짓말이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나는 분명히 그 그림을 보았다. 베케트 역시. 그건 대단히 좋은 그림이었다. 대단히 훌륭하게 그렸는데.
"그럼 누군가......"
"아마 외부 사람일 거야." 마일즈는 우겨댔다.
"어쨌든 나는 아니야."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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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주간 내내 기지에서 떠나지 않고 책이나 잡지를 읽으며 지냈다. 토요일 밤의 데이트 자금을 비축하기 위해서였다. 어느 날 밤 저녁 식사 후 바비를 만나러 흑인용 병사를 찾아갔다. 나이가 지긋한 쿡이 가로막듯이 입구에 버티고 서서 바비는 없다고 한다. 마치 경찰관이라도 되는 듯한 시선으로 그는 이쪽을 보았다.
"그래요?" 나는 말했다.
"그럼 보급부의 데블린이 만나러 왔다고 전해 줄 수 있겠습니까?"
상대는 끄덕였지만 그 얼굴은, '우리들 가까이에 접근하지 말아!'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곳을 물러나면서 생각했다. (도대체 무엇을 두려워하는 걸까 저 흑인들은?)
저녁에는 대개 깜빡 깜빡 졸면서 지냈다. 라디오가 있으면 좋을텐데 하고 생각했다. 고향 생각이 나기도 했다. 어느 날 밤 신발을 신은 채 자고 있는 것을 순찰 나온 래드 캐논에게 들키고 말았다. 나의 구두 뒷꿈치를 철썩 방망이로 때리고 나서 그는 호통을 쳤다.
"이 바보 같은 녀석 너 언제부터 구두를 신은 채 침대에서 자는 것을 허락받았지?"
"이 구두는 더럽지 않잖아요."
"더럽지 않다구? 넌 하루 종일 똥같이 더러운 곳을 걸어다니고 있잖아. 흙탕이라든가 가솔린에 범벅이 된 곳을. 그래도 더럽혀지지 않았다는 건가?"
일어나 구두를 보았다. 천천히 신중하게.
"젠장!" 나는 말했다.
캐논은 머리 위의 선반에 한쪽 손을 짚고 얼굴을 가까이 댔다. 몸전체에서 위스키의 냄새가 풍겨 나오고 있다. 하지만 날숨에서는 치약 냄새가 났다.
"지금 뭐라고 씨부렁거렸지, 이 멍청아?" 속삭이듯 말했다.
"젠장이라고 말했습니다."
나도 이제는 일어나 똑바로 그의 얼굴을 되쳐다 보고 있었다.
"그래, 분명히 그렇게 말했지?" 캐논은 소리를 질렀다.
"아마도 거리에서 보았던 그 여자 덕분에 골통이 썩어버린 모양이
군."
"난 그저 젠장' 이라고만 했습니다. 여자의 일 따위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허어, 언제부터 이렇게 꼬박 꼬박 말대꾸를 하게 됐지, 이 멍청아?"
내가 래드 캐논보다 몇 인치는 컸지만 완력으론 캐논이 우세할 것이 틀림 없다. 그래서 상대가 언제 펀치를 올려 붙여도 막아낼 수 있도록 약간 비스듬히 서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이젠 물러설 수는 없다. 때가 늦었다. 병사에는 인기척 하나 없다. 이건 캐논과 나만의 대결인 것이다. 증인 한 사람도 없다. 만약 캐논이 치려고 덤비면 나도 되받아 친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가 먼저 공격하길 바라고 있었던 것 같았다. 단호하게 결말을 맺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쨌다는 겁니까?" 나는 말했다.
"날 처형하겠다는 겁니까? 미국 군대 규칙에 비추어 군법 회의에라도 걸겠다는 겁니까? 미국 해군의 시트에 군화를 올려 놓았고 자유 시간에 '젠장'이라고 말했다는 이유로?"
끝내 말해 버리고 말았다. 정면 도전이다. 그것은 캐논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터프가이를 자처해 입을 꽉 다물고 있었지만 나의 심장은 빨리 뛰고 있었고. 그 잘 알고 있는 악순환게 자꾸만 빠져들고 있는 기분도 들었다. 도발, 응수, 부상, 보복. 브룩클린의 노상에서 일어나는 법칙의 재현. 그 거리에서 살고 있을 때마저 그러한 사이클에 걸려드는 것은 소름이 끼쳤다. 하지만 살아간다는 것은 그러한 것이다. 당하면 되받아 쳐라. 그것이 룰이다. 얻어 맞으면 되받아 보복하라. 덮쳐오면 이쪽에서도 덮쳐라. 나는 그야말로 캐논에게 덮치듯 덤벼 들었던 것이다.
캐논은 나를 노려 보았다.
"오늘밤 내로 그 시트를 빨아 놔, 알겠나?"
그는 한 발 후퇴했다.
"잊지 말아라, 앞으로는 너에게서 눈을 떼지 않을 테니까."
빙그르르 발뒷꿈치를 돌리자 그는 병사에서 나갔다. 그 등 뒤에서 문이 탕하고 닫히자 후- 하고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도 한동안 심장이 거세게 뛰고 있음을 느꼈다.
그 때 로커의 열 저쪽에서 마일즈가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처음부터 그 광경을 지켜 본 듯하다. 싱끗 미소짓고 있었다.
"해냈군 그래! 훌륭해!"
나를 끌어 안으려는 듯이 다가와 옆에 있는 침대를 붙들고 흔들었다.
"넌 래드 캐논으로부터 한판 따냈어! 그 세계 제일의 바보 녀석에게 이겼단 말이야!"
"그게 그런 것이 아닌데......"
"이건 <펜서콜라 저널>지에 알려야겠는데. 일면에 실을 빅뉴스야."
"그만둬요."
"자아 식당으로 차를 마시러 가자."
목요일 밤, 또다시 쓰레기 수집 창고의 보초로 돌려졌다. 하지만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래드 캐논이 그 따위 짓을 계속 일삼는다면 나도 굴복했다고 보이고 싶지 않다. 그가 아무리 짓굿은 짓을 해오건 태연히 받아들이겠다. 점점 더 우쭐해 한다면 나름대로 대응을 해 줄 것이다. 그리고 대니 레이는 오전 0시부터 4시의 보초 근무자에게는 다음 날 오후에 휴일을 허락한다. 결국 그것으로 본전인 셈이다. 대니 레이도 우리들 못지 않게 래드 캐논을 싫어하고 있었다.
나에게는 지금도 그 날 밤 별이 총총한 하늘 아래서 이덴 산타나에게 연정에 사로잡혀 있던 자기의 모습이 보인다. 그 젊은이를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는 그 주간 내내 불안정했다. 보초 근무 때에도 책에 정신을 집중해 보려고 열심히 시도하면서도 그녀의 모습을 뇌리에서 쫓아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최악의 일들을 여러 가지 떠올렸다. 그녀가 나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라든가, 나를 농락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든가, 남편이나 아이가 실제로 있다면 그 남편과 아이와도 원만하게 지내면서 나를 만날 생각인지도 모른다든가. 9회 말의 역전을 염려하는 야구팬이나 벼랑에서 구르는 아이 같은 모든 불길한 상상을 나는 머리 속에서 희롱하고 있었다.
문제는 간단했다. 나는 그녀의 일을 거의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릭스에서 마주 앉았을 때도 주로 얘기를 한 것은 내쪽이었다. 그녀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받고 그것에 대답하는 데 정신이 없었다. 어떻게서든 실제 나이보다 어른스럽게, 세상 물정에 익숙한 것처럼 보이려고 열중했다. 그리고 그녀는 거의 자기에 대해서는 말해 주지 않았다. 근무처가 시어즈 백화점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고, 하지만 집이 어디인지 어느 출신인지도 나는 아직 파악하고 있지 않다. 그 섣달 그믐날 그레이하운드 버스에 타고 있었던 이유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이것이 가장 중요한 점인데-그녀가 어째서 이번 토요일 밤의 데이트를 승낙해 주었는지를 알 수 없다. 그 이유를 아는 것도 실은 두려웠다.
그녀는 아름답다. 이제까지 만난 어떤 여자보다도 아름답다. 그런 이유 때문에 나는 두려웠다. 그녀라면 나 이외의 어띤 남자라도 선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좀더 세상 물정에 밝은 남자도, 차를 가지고 있는 남자도 그리고 부자인 남자도, 그리고 번지르르한 멋진 사관도, 멜카도라도.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다른 동료들에게 그녀와의 일에 대해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비록 시어즈 백화점에서 근무하고 있는 여자와 데이트한다고 녀석들에게 실토를 하면 어떻게 될까? 막스나 샐은 좋아라고 시어즈로 달려가 그녀를 찾아내 데블린은 임질 감염자라든가 있는 것 없는 것 나발을 불어댈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으면 녀석들은 데이트 장소에 앞질러 가서 내가 보기좋게 헛탕을 치고 바보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을 구경하려 들 것이다. 끌내 상심한 나는 <다트 바>를 찾아가 풍만한 딕시에게 위안을 받는 처지가 되고 말 것이다. 또한 염려가 되는 것은 멜카도 이외에 그녀를 본 자는 또 한 사람이 이 기지에 있다는 점이다. 더구나 그 자가 래드캐논이란 것이다. 젠장!
금요일 오후 우편물이 배달되었다. 내게도 한 통. 엷은 담청색 봉투였다. 앞면에 이름, 계급, 병적 번호, 주소가 마치 수녀들이 소녀들에게 가르치는 모범적인 습자체 같은 글씨로 적혀 있었다. R이나 M의 첫 획 부분 등은 장미꽃을 지키려는 가시처럼 또렷하게 머리를 내밀고 있다. 대니 레이가 오후 시간을 쉴 수 있게 해 주었으므로 점심을 마친 후 곧 병사에 돌아가 구두를 벗고 침대에 누어 버렸다. 몇몇 사나이들이 로커를 여닫으며 찰칵대는 소리를 냈다. 나는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친애하는 마이클,
편지는 받았어요. 답장이 늦어져서 미안해요. 이해해 주시겠지만 크리스마스 휴가 동안 여러 가지로 바빴어요. 편지를 받아 기뻤어요. 지금쯤은 이미 그쪽에서의 고통에는 익숙해졌겠지요, 따뜻한 플로리다에서 건강하게 지냈으면 좋겠다고 모두들 바라고 있습니다.
당신이 출발한 뒤 곧 우리들은 휴가를 내어 여행을 떠났습니다. 졸업기념 앨범에 실을 사진도 찍었습니다. 완성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지만 졸업식 날에는 충분히 완성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요. 당신에게도 한 장 보내 드릴 수 있을 거예요. 스냅 사진과는 다르게 예쁘게 찍혔으리라고 생각해요.
당신이 입대한 이래 이곳에는 눈이 많이 내려 굉장히 추워요. 도로의 눈은 모두 샤베트처럼 얼어 버려 걷기조차 힘들어요. 그래서 모두들 집에 틀어박혀 있는 것 같아요. 전번에 베티와 콜라를 마시러 <스티븐슨 란쵸넷>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늘 모이던 패거리들이 한 사람도 없는 거예요. 모두 군대에 입대한 모양이에요. 마이크 피세티는 해병대에 입대하고 말았고요. 주말 밤 <샌더스>나 <프로스펙트>의 손님도 여느 때의 절반밖에 되지 않아요. 지금까지도 어째서 모두 입대해 버렸는지 이해를 못 하겠어요. 신문에서는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이 되면 전쟁은 곧 끝난다고 써대고 있었잖아요. 정말 모두들 그렇게 바라고 있어요. 하지만 이상하게도 군대에 들어가는 친구들이 끊이지가 않아요.
어쨌든 바디 티어넌은 미국재향군인회에서 표창을 받을 것 같아요. 그의 어머니는 아직 그 타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계세요. 자식이 한국에서 전사했다니 믿기지가 않는 모양이예요. 행방불명이 된 것은 트루먼이나 다른 공산주의자들의 탓이라고 말하고 있어요. 바디는 그곳에서 아마 중국 포로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전쟁이 끌나면 틀림없이 돌아오리라 믿고 있어요. 지금은 잠비처럼 여위고 말았어요. 더욱 가련한 것은 캐롤 웰즈예요. 캐롤과 바디가 결혼 약속한 것은 알고 계시죠? 하지만 지금은 불가능한 옛 얘기가 되어 버렸죠.
마이클, 제발 이해해 주세요. 난 당신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어요. 난 다만 당신과 만나고 싶었을 뿐, 연인 사이가 되는 것은 원치않았어요. 하지만 그 점을 분명히 밝히지 않았던 것은 옳지 못했다고 생각해요. 사실대로 말해 버리면 나를 멀리하게 되지나 않을까 하고 걱정했어요. 그래서 당신이 제대할 때까지 교제하고 싶어요. 하지만 서로를 속박하는 관계는 맺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해요. 당신의 편지를 되풀이해 읽었어요. 눈물이 나왔어요. 당신의 문장은 때로 시처럼 나에게 감동을 주니까요. 하지만 파리에 관한 대목이라든가 그러한 부분은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난 당신을 만나기 전에 그런 일은 생각해 본 적도 없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어쨌든 당신은 그곳에 있고 난 이곳......, 때문에 지금은 어쩔 도리가 없잖아요?
당신이 날 되먹지 못한 여자로 생각할까봐 두려워요. 내가 찰리 템플턴과 데이트한 일로 내가 당신을 속였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마이클, 당신과 나누었던 은밀한 행위 같은 것을 난 결코 누구하고도 하지 않을 것이고, 그리고 누구의 애인이 되겠다는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찰리도 친구이지만 당신 같은 의미의 친구는 아니예요. 앞으로 시시한 소문이 당신의 귀에 들어간다 해도 나와 찰리가 사랑하는 관계라는 상상은 하지 마세요. 난 당신과 만나 즐거웠다는 것만을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하려고 해요. 당신도 그렇게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햇빛이 쨍쨍 내리쬐는 플로리다에서 아무쪼록 즐겁게 지내세요. 당신이 그곳에서 아주 멋진 여성과 교제하게 된다면 그 이상 멋진 일은 없겠지요.
우리들은 언제까지나 좋은 친구로 있을 수 있겠죠?
당신의 모린
추신 : 애디 테렐이 캘리포니아에서 결혼했어요. 해병대를 제대한 다음에도 신부와 그곳에서 살 예정이래요.
침대에 벌렁 누어서 두 눈을 감았다. 그러자 몇 주일 만에 나는 브룩클린으로 돌아가 있었다. 어느 여름날 밤 나는 7번가의 아파트를 나와서 언덕 저쪽 모린의 집을 향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일하고 있던 커다란 벽돌로 지어진 공장 앞을 지나 모린의 아버지가 경영하고 있는 술집 앞에 이르렀다. 14번가에서 큰 거리를 건너 미네르바 극장의 정면 현관의 차양 밑으로 나왔다. 그 오두막 같은 곳에서는 '드럼즈'가 언제나 '포 페덜스'와 공연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제14연대 무기고의 벽돌 건물 앞을 다시 나아갔다. 거리 저쪽에 있는 것은 유태교의 교회이다. 그곳에서 1년쯤 '샤버스 고이' 역할을 한 적이 있다. 시리아 인이 경영하는 잡화점 앞을 지나 거리의 가로수를 따라 공원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눈에 들어오는 광경에 압도되어 멈춰서지 않을 수 없었다. 산더스 영화관의 눈부신 네온, 바델 브리차드 광장에 늘어서 있는 술집들, 깨진 종소리 같은 음률을 내며 달리는 트롤리 카, 1부에 2센트 하는 <데일리 뉴스>지나 <데일리 밀러>지를 파는 상인들이 외쳐대는 소리, 공원을 따라 늘어서 있는 벤치는 언제나 사람으로 가득 찼으며 산더스 영화관에서는 북극과 같은 에어컨 바람이 흘러 나오고 있다. 그것은 세계에서 제일 찬 공기였을 것이다. 그 당시 광장의 광경을 대하면 틀림없이 홍분을 느꼈던 것이다.
나는 그곳에서 1시간쯤 시간을 보냈다. 친구들과 농담을 주고받거나 어슬렁거리거나 섀도복싱을 하거나 하면서. 그리고 다음에는 일단 종종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렇다 공원에서 '저쪽 거리'-그곳은 실제로 주위와는 동떨어져 있었다-의 반대쪽까지, 그곳에는 보기에도 튼튼해 보이는 집이 늘어서 있었는데 하늘이나 미풍이나 햇빛을 가로막아 주변을 어둡게 하는 아파트 따위는 한 채도 없었다.
그 때 나는 7번가 주민이란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 말판형의 바지에 굽이 두꺼운 플랙 브로스 구두차림으로. 그 차림새는 모린이 살고 있는 지역의 아름답게 손질된 뜰이나 화려한 커튼이나 번쩍거리는 차가 정차되어 있는 차도가 특징적인 그런 구역과는 상충되는 것이었다. 나는 확실히 그 부류와는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모린의 양친은 나를 한 번 본 순간부터 그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녀의 어머니는 나를 흘끗 보자마자 2층으로 올라가 버리고 말았다. 깊이 주름진 뺨, 냉기가 감도는 파란 눈동자, 그 눈에는 유쾌한 빛이란 조금도 없었고 정열도, 분별력 따위도 읽을 수 없었다. 회의와 모멸이 섞인 표정 뿐이었다. 그것은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영국인을 위해 일하는 사람의 얼굴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정확하리라. 나의 어머니가 자주 '성채에 사는 아일랜드인'이라고 부르던 그런 종족 말이다. 그날 밤, 그는 판사처럼 나를 엄숙히 노려보면서 7번가에 사는 가난한 아일랜드인의 조무라기라는 것을 내 옷차림으로 순식간에 간파했다. 그후 모린을 만나러 갈 적마다 애달픈 연정과 더불어 강한 노여움을 느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펜서콜라에서의 오후, 그녀의 편지를 손에 들고 선잠을 자던 젊은 날의 나는 두 번 다시 '그쪽 거리'까지 걷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직감하고 있었다. 그 편지에서 모린이 되풀이해 말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당신에게 갖는 감정은 당신이 나에게 갖는 감정과는 다른 거라고.
그 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흥, 멋대로 하라지.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이미 상관 없어. 이 편지가 올 때까지 나는 이럭저럭 몇 주일간 너의 일 따윈 생각한 적도 없었어. 이곳에 이덴이 있어. 그녀는 진짜 여자야. 너보다 훨씬 아름다워. 그러니까 너 따윈 이미 안중에도 없어. 너의 서툰 문장, 오자 투성이의 철자, 문법적인 미스 모두 진절머리가 난단 말이야. 고향의 소문 따위는 이젠 너의 편지로 전해 듣고 싶지 않아. 친구로 지내고 싶다느니 어쩌니 하는 제멋대로의 얘기도 말이야. 너의 친구가 되는 건 난 딱 질색이야. 친구라면 이곳 기지에도 있으니까. 너 따위가 결코 교제할 수 없는 친구들이 말이야. 나는 너를 사랑하고 싶었고 너에게도 사랑을 받고 싶었어. 좋아, 이것으로 안녕이야, 결별이야. 그럼 아듀-언젠가 반드시 너는 후회하게 될 걸.)
그리고 난 정말 잠들어 버리고 만 것 같다.
정신을 차려보니 샐이 소리치고 있었다.
"이 봐 왜 그러는 거야! 일어나!"
그와 막스가 이쪽을 내려다 보고 있다.
"상당히 충격적인 편지였나 보군." 샐이 말했다.
"자면서 뭘 그렇게 중얼거리니?"
일어나 편지를 진즈의 포켓에 쑤셔넣었다.
"아아." 나는 말했다. "충격적인 편지였지."
"자아, 빨리 옷을 입어." 샐이 말했다.
"교회에 가야 한다구."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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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가고 있는 샐의 입에서는 쉴새없이 신, 맥주, 해군, 펠라치오 따위의 단어들이 뒤섞여 쏟아져나왔다. 오늘 밤은 금요일 밤이다. 자아 한바탕 벌릴 거야! 로커클럽을 나서자 곧 하이웨이를 횡단했다. 다리가 긴 샐이 성큼 성큼 선두에 나서 걸었다. 상고머리인 그의 머리카락은 머리에 꽂아놓은 못처럼 오똑 서 있었다. 하늘은 연보랏빛. <빌리즈> 앞에는 차가 여러 대 늘어 서 있었다. 두려움을 모르는 우리들의 리더인 샐은 그것에는 눈길도 보내지 않고 재빠르게 걸어갔다.
그는 침례파 교회 앞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들었다. 마치 어릴 적부터 그곳에 다녔던 것 같은 자신만만한 걸음으로 들판을 가로지르고 비포장의 차도로 들어갔다. 하얗게 칠을 한 교회의 옆을 지나가자 앞쪽에서 기타와 바이올린 소리가 엉성한 마이크에 실려 들려왔다. 우리들은 샐의 뒤에 붙어 공터를 가로질러 하얀 목조 건물 앞으로 나왔다. 그곳이 공관이었다. 정면의 폭넓은 계단을 올라가자 바이올린의 음향이 한층 더 커졌다. 샐이 가리켜 보인 포스터에는 '오늘밤은 스퀘어 댄스'라고 적혀 있었다. 오른손 쪽에는 몇 대의 소형 트럭을 포함해 십여 대의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적어도 그 중의 한 대는 핫로드였다. 홀의 배후에 넓게 펼쳐져 있는 것은 울창한 소나무 숲이었다.
"샐, 난 들어갈 수 없어." 막스가 말했다.
"난 유태인이란 말이야. 아무리 그렇다 해도......"
"괜찮으니까 들어와. 이곳에는 말이야 펜서콜라의 굉장한 미인들이 모이고 있어. 날 믿으라구!"
계단을 모두 올라간 곳에 접수계의 테이블이 있었고 두 명의 젊은 여성이 표를 팔고 있었다. 그 등 뒤에 엄숙하게 까만 옷을 입은 바싹 마른 목사가 멍청히 서 있었다. 울퉁불퉁한 콧등에 무테 안경이 오도카니 얹혀 있었다. 샐이 10달러 지폐를 한 아가씨에게 건네주고 석 장이라고 말했다. 그 때 목사가 쓱 앞으로 발을 내딛고 나섰다.
"잠깐 실례."
그는 아가씨들에게 손을 들고 표를 끊는 것을 제지했다.
"미리 주의해 두겠네. 이건 크리스찬의 모임일세. 술도 맥주도 나오지 않지. 물론 술을 마시고 취해서 떠들어 대는 것은 절대 금지야."
"목사님."
라디오의 아나운서 같은 매끄러운 어조로 샐은 말했다.
"내가 주정뱅이로 보이십니까? 떠들어 댄다구요? 천만에요. 나는 <펜서콜라 저널> 지에서 목사님의 활동 사실을 읽었어요. 이 건전한 댄스 모임에 의해 당신이 얼마나 젊은이들을 교화하고 있는지. 사실 말이지, 목사님 해군의 병사들이 하고 있는 것은 욕지기가 나요. 여기 있는 나의 친구들도 생각은 같습니다. 우리들 좀더 평소의 생활을 충실하게 하고 싶어요. 참으로 건전한 참된 미국적인 생활을 추구하고 싶습니다."
목사의 입술 언저리가 떨렸다. 그것은 마치 악마의 책략을 감지하고 있으면서 그것을 입증할 수 없는 초조함을 드러내고 있는 것 같았다.
"좋은 생각일세." 목사는 말했다.
"꼭 참가하고 싶다면 들어가도록"
빙그르르 뒤로 돌아 그는 홀 안으로 들어갔다. 샐은 접수계의 두 여자에게 몸을 구부렸다. 하나는 나이가 15살 정도로 머리를 포니테일형으로 하고 있었다. 치열의 교정구를 숨기려고 하자 웃는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짙은 감색의 면드레스 아래의 가슴은 포탄처럼 솟아올라 있었다. 그곳에서 눈을 외면하는 것이 꽤나 힘들었다. 또 한 명은 22세 정도의 성숙한 여자였다. 붉은 기가 있는 금발로 호리호리한 몸매, 쓸쓸해 보이는 입술과 탐욕스러운 눈매.
"휴우......"
샐은 레트 버틀러식 어조로 바꾸어 연하인 아가씨에게 말했다.
"정말 매력적인 아가씨로군."
이번에는 좀더 공손한 태도로 연상쪽의 아가씨에게 말했다.
그녀는 억지로 웃음을 꾸욱 참고 있었다.
"첫 번째로 춤을 당신과 출 수 있는 영광을 제게 주시겠습니까?"
그녀는 낄낄대듯 웃었고 연하의 아가씨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바라건대" 샐은 계속했다.
"왈츠이기를 바라지만......"
석 장의 표를 받아들자 우리들쪽을 향해, "자아, 갑시다 여러분." 하고 말하더니 재빨리 홀로 걸어 들어갔다. 연하인 아가씨가 말했다.
"즐겁게 보내세요."
연상의 여자는 지긋이 샐의 뒷모습을 눈으로 전송했다.
홀 안은 상당히 붐비고 있었다. 남자보다 여자의 수가 단연 많았다.
"어때? 저 여자들." 샐이 속삭였다.
"이 나의 착안이 기막하다는 것을 인정하겠어?"
"물론이야, 인정하겠어. 하지만 음악을 들어 봐." 라고 막스가 말했다.
"이런 음악이라면 어떤 식으로 춰야 하지?"
"걱정 말라구. 여자들은 그런 것은 신경쓰지 않을 테니까. 알겠어? 그애들의 보이프렌드들은 모두 지금 전쟁터에 가 있을 거야. 안그래? 그런데 여자들은 이곳에 있어. 남자들은 바보스러운 편지를 보내오는 거야. 연하장에서 슬쩍 베낀 것 같은 아니꼬운 로맨틱한 문구를 죽 늘어놓은 편지를 말이야. 하지만 여자들은 집에서 한가해 시간을 주체스러워하고 있어. 그들은 대개 어머니와 함께 지내고 있지만 개중에는 더욱 가련하게도 전쟁터에 가 있는 남편의 어머니와 지내고 있는 애도 있어.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뭔가 재미있는 일은 없을까 하고 나돌아다니는 거야. 좋은 남자는 없을까 하고 말이야. 그렇다고 해서 설마하니 <다트 바>에 갈 수는 없겠지? 아니면 <트레이더 존즈>에는 말이야. 그렇다면 부모에게 들켜도 화를 내지 않는 장소란 어떤 곳이 있겠나? 교회밖에 없다구. 그래서 이곳에 오는 것이지. 남자를 찾아 보려고. 저 여자들을 봐, 아까 그 여자들 말이야."
"난 자신이 없어. 어떻게 춤을 춰야할지."
막스가 말하자,
"그렇게 걱정이라면 추지 않으면 되잖아." 하고 샐이 대답했다.
"좋은 여자를 발견하면 재빨리 뒤편의 숲에서 데이트를 즐기라구."
붐비고 있는 홀의 벽을 따라 우리들은 나아갔다. 생소나무의 목재로 엮은 스테이지 위에서 밴드가 연주하고 있다. 악사들은 작업복에 플란넬 셔츠, 맥고모의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있었다. 바이올린 악사가 두 명에 베이스 기타 연주자가 한 사람, 그리고 머리가 벗겨진 피아니스트, 드러머는 없었다. 이전에 <다운비트>지에서 읽었던 것을 회상해 보았다. 남부에서는 몇 세기 동안 드럼이 금지되어 있다고 하는 것이다. 노예가 드럼을 사용해 신호 보내는 것을 대농장주들이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예컨대 '오늘 밤 농장주를 죽여라' 라는 그런 신호를 두려워하고 있었을 것이다. 때문에 힐비리 음악은 리듬을 취할 역할을 베이스 플레이어와 피아니스트의 강인한 왼손에 맡기고 있다. 이 밴드는 '잼바라야'를 연주하고 있었고 피아니스트가 행크 윌리엄스 식의 창법으로 노래하고 있었다.
홀의 벽을 따라 아무렇지도 않게 걸으면서 우리들은 아가씨들을 물색했다. 여러 타입의 여자들이 있었다. 큰 여자, 뚱뚱한 여자, 키다리, 홀쭉이, 약간 통통한 여자. 개중에는 영화배우같이 멋진 여자도 있었다. 유방이 크고 허리가 꽉 조여진 커다란 엉덩이에서 늘씬한 다리가 뻗어 있는 여자, 키가 큰 여자는 낮은 힐을, 키가 작은 여자는 하이힐을,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신고 있었다. 화장을 한 여자는 하나도 없다. 그녀들은 4,5명이 한데 뭉쳐 눈을 깜빡이며 이쪽을 보고 있다. 순간 시선이 마주쳐도 곧 부끄러운 듯이 눈을 외면하고 동료끼리 낄낄대며 서로 웃고 있다. 그녀들의 육체, 그 향긋한 머리카락이나 뺨 그리고 가슴 사이를 걸으면서 나는 이덴 산타나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내일 밤에는 그녀와 만나기로 되어 있다. 하지만 오늘은 금요일이다. 나는 지금 샐이나 막스와 거리로 나와 탐욕스럽게 다른 여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래도 되는 것일까? 그녀에게 그렇게까지 연모하며 애를 태우면서 어째서 남자에 굶주린 침례교파의 여자를 어두운 숲으로 데려가려는 생각 따위를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머리 속에서는 곧 이러한 생각이 솟아올랐다. 상관할 것 없잖은가? 그녀도 멜카도와 데이트하고 있는지도 모르니까. 지금 이렇게 붐비는 홀에 서 있는 이 순간에 그녀는 멜카도와 만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일 밤 그녀가 나와의 약속을 어길 가능성 역시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멍청하고 얼띤 해군 취급을 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그리고 이쪽은 다만 그녀와 데이트할 약속을 했을 뿐인 것이다.
어떤 관계를 맹세한 것은 아닌 것이다. 그녀가 이 댄스장에 있다면 어떻게 보일까 하고 생각했다. 이 젊은 여자들 사이에 어울려 있는 그녀를 보게 되면 자신은 어떻게 생각할까? 하지만 그녀가 이 홀에 있는 정경은 좀처럼 명료한 상을 맺지 못했다. 그녀는 어딘지 다른 곳에서 온 여인인 것이다. 뉴욕의 여자도 아니거니와 이 고장의 여자도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 아직 18세도 채 안되고 딕시 세이퍼의 풍만한 육체 이외의 여자는 모르며 또한 완전히 카톨릭과 인연을 끊었다고도 할 수 없는 나는 어쩐지 떳떳치 못한 기분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 자리에 있는 것으로 모종의 배신 행위를 하고 있는 그런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샐은 아가씨들의 무리로 다가가 땅딸막한 금발의 아가씨의 손을 잡아당겨 댄스 플로어로 나아갔다.
"저런 바보 같은 녀석!" 막스가 말했다.
"머지않아 된통 당하게 될걸?"
샐은 그 금발을 상대로 바닥을 발로 탕탕 두드리는 것 같은, 헤이허라고 맞춤 소리를 지르는 것 같은 스타일로 춤을 추면서 그 여자 애를 웃기고 있었다. 주위에서 춤을 추고 있는 페어들도 두 사람 위해 스테이지를 비워 주고 있는 것 같았다. 갈색 머리의 아가씨가 막스 앞에 서서 말했다.
"저어 우리도 당신의 친구에게 뭔가 보여주도록 해요."
그리고 이번엔 빨간 머리의 키가 큰 아가씨가 내 앞에 와서 손을 잡았다.
"난 이블린이에요. 잘 부탁해요."
우리들은 모두 플로어로 나가 큰소리를 주고받으면서 춤추기 시작했다. 나도 막스도 샐의 동작을 흉내내고 있었다. 그건 뭐라고 해야 할까. 린디홉과 지르박에 맘보를 조금 섞어 팍팍 바꾸어 나가는 그런 느낌이었다. 나는 뉴욕 거리에서의 댄스를 보여주고 있다구 라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얼마 후 곡이 끝났다.
"고마웠어요." 그녀는 숨을 할딱이며 말한 다음 갑자기 정색한 표정을 지었다.
"천만에요." 라고 내가 말하자 그녀는 서둘러 떠나갔다. 어쩐 일일까 나의 댄스에 두려움을 느꼈을까 아니면 '천만에'라고 진지한 체 말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일까. 그러한 것을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 그녀는 붐비는 사람들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다음 곡이 시작되었다. 벽에 기대어 샐과 막스를 지켜 보았다. 두 사람 모두 파트너를 바꾸었다. 미국인은 모두 이런 과정으로 생애의 반려자와 서로 교제하게 되는 것일까. 누구 하나 술도 마시지 않으려니와 담배도 피우지 않는다는 이러한 장소에서 우연히 만난 남녀가 낡아빠진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고 그런 다음 걷거나 차를 운전하거나 하여 귀가한다. 이윽고 한 달이나 두 달이 지나면 두 사람은 키스하게 되고 그런 다음 사랑을 속삭이게 된다. 그리하여 결혼하게 되고 내내 행복하게 지내게 된다. 어쩌면 미국인의 인생이란 것은 그렇게 하여 영위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자리의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 어쩐지 가련해 보이는 것 같았다. 모든 개체 그대로의 미국인과 마찬가지로 자기 역시 그렇게 해야 된다고 하는 것은 알고 있다. 그와 동시에 아니 나는 그렇게는 되지 않을 것이다. 되고 싶지 않다고 하는 기분은 분명히 있긴 하다. 혹시나 자신은 일생 동안 이렇게 방관자로서 지내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직 혼자 벽에 기대어 홍분에 눈을 번득이며 춤추고 있는 여자들을 바라보았다. 그녀들의 불가사의한 힘을 간직한 신화적인 가슴이나 풍만한 엉덩이를 바라본다. 사나이들을 불러들이기도 하고 뿌리치기도 하는 육체를 바라보면서 그 사타구니에 숨겨져 있는 신비의 자물쇠를 여는 말이나 몸짓을 한결같이 생각해 보고 있다. 만약 그것이 자기의 운명이라면-당시엔 그런 말을 자주 사용하고 있었다.-결국 자신은 지금 이 순간처럼 고독하게 인생의 막을 내리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다음 나의 주의는 비로소 신앙심이 깊은 남자들에게 쏠리게 되었다. 혹시나 그들 역시 여성이 간직하고 있는 강렬한 힘에 사로잡힌 몸이 되어 있어 하느님의 힘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만약 어쩔 도리가 없이 피가 끓어오르고 있으면 사후의 세계에서 그것을 식힐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틀림없이 천국이나 지옥이 뜨거운 피의 세찬 솟구침을 식혀 줄 것이다.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 머리 속에 무의식적으로 그 얼굴을 그려보기 시작했다. 그 사나이들이라면 그려보는 것은 간단하다. 얼굴은 그 어느 것이나 네모지고 기름기도 거의 붙어있지 않기 때문에 관골도 턱의 선도 또렷하다. 입은 그 어느 것이나 엷게 당겨져 다물고 있었으며 뭔가 노여움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양끝이 처져 있다. 대체 무엇을 노여워 하고 있는 것일까? 샐이나 막스나 나일까. 그리고 미국의 전복을 기도하고 있는 공산주의자들. 그리고 그렇다, 여자들에게도 녀석들은 화를 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 그들을 거절하는 여자, 그들의 돈이나 마음을 앗아버리고 마는 여자들에게.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그 노여움은 삶 그 자체에서 발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의 눈을 그리는 것은 더욱 어렵다. 녀석들의 대부분은 눈을 가느다랗게 움추리고 있는데 눈 그 자체는 안쪽에 감춰져 있다. 이전에 그 어떤 책에서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하는 문장을 읽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바르게 그릴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지긋이 보고 있는 동안에 움추린 시선 안쪽 깊숙히 숨겨진 눈이 점점 보이게 되었다. 그곳에는 싸늘함과 노여움 그리고 특히 확신히 숨쉬고 있었다. 뉴욕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신앙을 여기서는 찾아낼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을 바르게 그리는 것은 지난한 재주인 것 같았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 녀석들 쪽에서도 말똥말똥 보기 시작했으므로 시선을 문간쪽으로 던졌다. 그곳에서는 또한 사람들이 속속 도착하고 있었다. 접수계의 두 아가씨 중 연상인 쪽의 여자가 지금 샐과 춤을 추고 있다. 그 중 저 아가씨라면 춤추고 싶다는 여자가 홀을 가로질러 왔다.
노란 드레스를 입고 양손을 앞에서 깍지끼고 있다. 짙은 다갈색의 머리, 하안 달걀형 얼굴. 아마도 나를 제외한다면 홀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고독하게 보였다. 벽을 따라 조금씩 그녀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내가 흥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가장하며 나아갔다. 그녀에게 싫어요, 라고 말하는 계기를 주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될 수 있으면 시원스러운 사나이라고 생각해 주기를 바랬다. 그렇다 클리포드 브라운처럼, 선글라스를 끼고 있지 않는 클리포드 브라운처럼-물론 브라운이나 그의 황금 트럼펫에 관한 일을 그녀가 알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누구를 시원스럽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나는 알지 못했다. 이래뵈도 나는 미국 최대의 도시에서 온 남자다. 너는 플로리다 주 펜서콜라 태생의 여자겠지만.
가까이 가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녀는 화장을 한 얼마 안 되는 여자들쪽에 속했다. 이유는 간단히 감지되었다. 화장 아래 비쳐 보이는 살갖은 여드름 자국으로 곰보처럼 얽어 있었다. 밴드가 연주하는 음악은 웨스턴의 스윙으로 바뀌어 있다. 그녀는 시선을 악사들에게 향했다. 그리고 똑바로 나를 보았다. 그 눈은 이렇게 호소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와 춤을 춰요, 부탁예요. 당신은 일부러 홀을 가로질러 왔잖아요. 그런데 이제와서 내 얼굴을 보고 멀리 가버린다면 난 너무 자존심 상해요. 나와 춤을 춰요. 부탁해요."
"함께 추실까요?" 나는 말했다.
"네에,"
자아, 초연한 태도를 보이도록 하자.
우선은 린디의 스탭부터 시작해 보았다. 그녀의 움직임은 매끄럽다고는 말할 수 없다. 손을 어떻게 해야 될지도 모르는지 슬며시 올리고 내 발에 시선을 떨구고 있다. 거기서 음악이 바뀌었다. 이번엔 발라드였다. 'I Can't Help It If I'm Still in Love with You' 손이 흥건히 젖어있다. 그녀는 그 손을 이쪽과 거리를 두기 위해 사용하고 있었다. 이쪽을 밀어젖히려고 하는 느낌만은 아니었지만 가까이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문득 시선을 떨구어 크게 솟아오른 가슴을 알아차렸다.
"행크 윌리엄스는 정말 안 됐어요." 나는 말했다.
"그래요. 하지만 생활이 문란했던 것이 잘못이었다고 생각해요."
"그건 그래요."
"하느님과 만나게 되면 반드시 행실이 바르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진정으로!"
나는 마이클이라고 이름을 대고는 그 틈에 다시 가슴에 흘끗 시선을 옮겼다.-난 수 엘렌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 풍만함을 조금이라도 느껴 보고 싶은 생각에서 슬며시 그녀의 허리를 가까이 당겨 보려고 했다. 하지만 실패. 그녀가 수상쩍은 눈매로 이쪽을 올려다 보았다. 해서-가슴이 아니야 얼굴을 보는 거야 라고 자신에게 타이르면서-
되쳐다보자 그녀는 시선을 외면했다. 잠깐 뒤에 다시 한번 당겨 보았다. 이번엔 몇 인치쯤 다가와 그녀의 몸의 온기가 느껴졌다. 상대는 가만히 있었지만 양손은 축축해져 있었다. 홀은 점점 더 붐볐으며 샐의 모습도 막스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피아노 연주자는 행크 윌리엄스를 흉내내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슬픈 노래로군요."
"네에 그래요. 물론 저기서 노래하고 있는 버디 잭슨은 행크 윌리엄스와는 비교도 안 되지만요."
"하지만 그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 같군요."
어떻게서든 남부식 말투에 호홉을 맞추려고 애를 쓰면서 나는 말했다.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요? 수? 엘렌? 스웰렌?
"이 근처에서 살고 있나요?"
"네에 조금 떨어진 곳에." 그리고 그녀는 용기를 북돋으려고나 하듯이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당신은 해군이죠?"
"그래요. 해군 사나이죠."
"해군하고 댄스했다는 것을 아버지한테 들키면 혼쭐나요."
"그래요?"
"이곳에 와 있는 다른 아가씨들 역시 마찬가지예요. 이 고장에서는 해군이 별로 인기가 없어요, 나쁘게 생각하지 않기를 바라지만 당신도 이미 알고 있겠죠?"
"아뇨, 전혀 몰랐는걸요." 나는 말했다.
"그야, 해군은 언제나 인기가 없지요. 전사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나 같은 신출내기가 자주 그렇게 말했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이쪽을 보고 눈썹을 찡그렸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예요, 마이클. 이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거죠. 모두들......"
"난 '해군'이란 말로 도매금으로 치부되는 건 싫어요, 수 엘렌. 해군에 입대하기 전까지는 나 역시 평범한 보통 사람이었으니까."
"네에, 그러게 말예요. 그래서 난 일반 사람들이 좀더 넓은 시야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난 일생을 해군으로 끝낼 생각도 없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자신에게 타이르고 있었다. (이봐, 좀더 화끈하게 나가라구! 뜸들이는 것은 이 정도로 해 두고. 자아, 돌진이다. 해군의 사회적인 지위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저런 풍만함이 내 가슴에 와 닿지 않는가.)
"네에 그것은 그렇겠죠, 마이클. 하지만 현실은 해군이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만약 이 순간 아빠가 이곳에 들어오시면 난 엉덩이를 걷어차일 거예요."
"아무리요!"
"정말이에요."
"믿어지지가 않는군요. 당신같이 예쁜 아가씨의 엉덩이를 때리다니. 당신은 숙녀잖아요."
수 엘렌은 입을 다물고는 의아한 듯이 눈썹을 찡그리고 살피듯 내 얼굴을 응시했다. '성숙'이란 말이 효력이 있었던 것 같다. 그녀의 신장은 약 5피트 사인치 정도. 내려다 보자 그 커다란 가슴이 불안스럽게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다. 다음 순간 그녀는 뜻하지 않은 질문을 던져왔다.
"당신은 기독교인인가요?"
나는 미소지었다. 화끈하게 나가자. 나는 뉴욕에서 온 사나이. 세상에 익숙한 나그네. 초연한 한 마리의 승냥이로 처신해야 한다.
"글쎄......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요. 그러니까, 어렸을 때는 카톨릭 신자로 자랐지만 말입니다......"
"카톨릭인으로 자랐다구요?"
어색하다.
나는 피부병에 걸렸다고 말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는 뒷걸음질을 쳤다.
"그래요, 왜요? 그러면 안 됩니까?"
"아뇨, 그게 아니라요. 지금까지 한 번도 카톨릭 신자와 만난 적이 없었거든요."
내가 실수를 저지른 것이 분명했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서든 실지 회복을 꾀해야 한다. 밴드는 점점 더 열연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나의 귀에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필요한 것은 임기응변이다.
"그야 카톨릭 신도로 자란 것은 확실하지만 지금은 전혀 다르죠. 당신은 침례교인입니까?"
"감리교인이에요."
"저런. 나는 그 차이를 알 수 없더군요. 침례교, 감리교, 장로파, 영국국교파, 제1개혁파, 제2개혁파......"
그러한 종파의 구별 따위 모른다, 당신의 매력만 알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하는 것을 그 때 은근히 풍기려고 했다고 생각한다.
"내겐 어쩐지 바보스러운 기분이 드는데......"
그녀는 추던 것을 멈추고 이쪽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곤 눈을 몹시 가느다랗게 치떴다.
"뭐라고요?"
"나에게는 바보스럽게 생각된다고 했어요. 종교란 것이 말입니다."
"종교가 바보스럽다고요?"
"솔직히 말한다면......"
"어머나 어이 없어......"
두 사람은 댄스 플로어 끝쪽에 있는 한 기둥으로 다가갔다. 어머나 어이 없어, 코믹 연재 만화에서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직접 대면한 사람의 입에서 그런 세리프를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어머나 어이 없어-이런 식이라면 다음에 듣게 되는 것은 '기가 막혀'일까 하고 생각했다.
수 엘렌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올려다 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완전히 거물이 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지금 자기가 토한 말이 그녀에게 이런 날카로운 반응을 일으키게 했던 것이다. 자기의 일을 그녀는 자못 두려움을 모르는 지적인 반역자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완전히 기분이 좋아진 나는 입을 다물거나 거짓말을 하기는 커녕 좀더 그녀의 젖가슴의 골짜기가 보이도록 위에서 덮치면서 기분이 좋아 계속 지꺼렸던 것이다.
"생각해 봐요. 옛날 예수라는 유태인 목수가 있었고 그는 2천 년이나 전에 죽었잖아요. 그런데도 아직도 온 세계에서 그의 말의 진의를 둘러싸고 언쟁을 하거나 서로 죽이려고까지 하고 있으니 말예요. 그런 것이 바보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리고......"
"이봐요, 말 조심하세요." "모두 다 기독교인이잖아요? 그런데 어째서 몇 백 개의 종파로 분열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죠? 이런 바보스러운 얘기가 어디 있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당신 예수는 유태인이라고 말했죠!"
"사실이 그렇잖아요. 그는 나사렛에서 태어났고 유태교의 교회에도 다녔어요. 그러니까......"
"예수는 유태인이 아니예요! 주님이 유태인이라니 당치도 않아요! 주님은 크리스찬이었어요!"
쓱 돌아서자 그녀는 옆의 무리들을 밀쳐 버리고 홀의 입구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잘못되었다, 너무 지나치게 떠들어댔군. 하고 생각하면서 뒤를 쫓아가며 불렀다.
"저어, 당신의 기분을 상하게 할 생각은 없었어요, 수 엘렌!"
그 때 여러 사람들이 돌아다 보고는 나의 얼굴을 응시하거나 그녀의 뒷모습을 쫓기 시작했다. 춤을 멈춘 커플들도 몇 있었다. 모두 소곤거리며 얘기를 하거나 이쪽을 향해 턱을 치켜들거나 했다. 샐과 막스는 어디에 갔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지금 당장이라도 터질 것만 같은 청색 개버딘 슈트를 입은 뚱뚱한 사나이가 수 엘렌쪽으로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상관 않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지금의 뜻하지 않은 실수는 아직 만회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 그것은 모두 실언이었다고 하면서 어떻게서든 그녀의 풍만한 가슴에까지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내자. 뚱뚱한 남자는 당장이라도 몸을 수그려 키스라도 하려는 듯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 용모란 커다랗게 둥근 안면 중앙에 작은 눈과 코를 으스러지게 모아놓은 것 같은 몰골이었다. 지긋이 이쪽을 응시하면서 그 남자는 그녀에게 말했다.
"무슨 일이지, 수 엘렌?" ,
"아아 버스터." 그녀는 말했다.
"이 해군이 우리들의 구세주가 유태인이라고 하는 거야!"
"저어, 이봐요, 잠깐만요!" 나는 말했다.
"아까 말하려고 한 것은......"
바스터가 말했다.
"뭐라고?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 우리들의 구세주이시며 죄를 속죄해 주실 예수가 유태인이라고?" 거기서 그녀의 손을 놓자 한층 더 소리를 높여, "뭐 유태인이라고!"
간신히 미소를 머금으며 나는 버스터를 시야 속에 포착하면서 몸을 약간 비틀었다. 북적대는 사람을 헤집으면서 샐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밴드는 한층 더 커다란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이번에는 막스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아군을 확인하고 용기를 얻었다고 하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버스터쪽에서도 일당의 수가 늘어났다. 두 사람, 다섯 사람, 여섯 사람 드디어 여나믄 되는 젊은이가 버스터와 수 엘렌 뒤에 모여들었다. 급조된 그 군단은 곰보의 얼굴로 커다란 덩치를 쿼터백의 플레이어로 삼은 이상 야릇한 풋볼 팀 못지 않았다. 수 엘렌은 뭔가에 씌인 것 같은 미친 듯한 눈으로 이쪽을 보았다. 그녀는 돌연 자기가 사나이들을 수족처럼 다룰 수 있다는 것을 과시하는 것 같았다. 아아, 위대한 여성의 마력이여.
"무슨 일이야?" 샐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물었다.
"하찮은 신학 논쟁을 하고 있는 중이야."
그 뿐만 아니라 주위의 무리들도 의식해서 태연하게 나는 말했다.
"예수는 유태인이란 것을 설명하고 있었어. 그랬더니......"
"자아 들었지?" 내가 볼을 던진 것처럼 수 엘렌이 말했다.
"또 이렇게 말하잖아!"
그 때 막스가 앞으로 나서 복서를 갈라놓는 레프리 못지 않게 두 손을 들어 주위를 제지했다.
"자 자, 모두 진정해."
주위의 얼굴들은 독한 가스에 쏘인 것처럼 그를 보았다.
"나는 우연하게도 이 문제의 전문가여서 말이야. 그래서 분명히 말할 수 있지만 말이야, 내 친구 데블린의 말이 옳아. 이것은 이미 논의의 여지가 없는 역사상 사실이야. 예수는 유태인이야. 이건 틀림없는 사실이야. 어떻게 알고 있느냐 하면, 무엇을 숨기겠어? 내가 유태인이기 때문이지."
"그래, 태생도, 자란 곳도. 내력이 바른 뉴욕의 유태인이시지."
돌연 수 엘렌의 등 뒤를 굳게 지키던 목사가 사람들을 헤집고 앞으로 나섰다. 얼굴에서 완전히 핏기가 가셨다.
"무슨 일이지, 이게?" 목사는 말했다.
이쯤에서 우리들은 악수를 나누고 얌전하게 <다트 바>로 철수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수 엘렌이 순식간에 논쟁의 테마를 바꾸어놓고 말았던 것이다.
그녀는 눈을 빛나게 반짝이며 막스를 가리켰다.
"이 사람은...... 이 사람은 유태인이래요!"
급기야는 흥분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눈매를 떨면서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이 남자는, 내가 무심코 댄스의 권유에 응했던 이 남자는, 주 예수가 유태인었다고 말하는 거예요!"
목사가 떨면서 이쪽을 보았다. 하지만 그가 입을 열기에 앞서 샐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는 연극 대사 못지 않은 영국식 액센트로 지껄이기 시작했다. 때때로 가래로 목을 잠기게 한 시늉을 내면서.
"스승이여, 깊이 경애하는 스승이여. 아무쪼록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야만스러운 젊은이와 이 사랑스러운 크리스찬의 여인 사이에 야기된 논쟁의 근저에 가로놓인 신학적인 해석과 세속적 철학적 인식과의 차이에 관해."
그는 안경을 밀어올리듯 코의 옆쪽을 매만졌다. 모두 무슨 일인가 하고 그의 얼굴을 주목하고 있다.
"아시겠습니까, 경애하는 스승이여. 이 두 사람을 끌어들인 논쟁의 씨앗은 어홈, 현상론도 아니러니와 인식론도 아닙니다."
거기서 한 번 기침을 한 다음,
"유태계 크리스찬의 전통적 역사적 루트도 아니거니와 기독교를 포함한 지중해 전역의 문명의 교리에도 없습니다."
짐짓 점잔을 빼며 입을 오므리고 그는 계속했다.
"아시겠습니까 경애하는 스승이시여, 이 두 사람의 논쟁의 씨앗은......" 한 호흡 하고 나서,
"......여자의 그것입니다."
잠시 모두 쇠사슬에 묶인 듯이 움직이지 않았다. 버스터가 입을 벌렸다. 목사의 코가 꿈틀꿈틀 떨렸다. 수 엘렌은 까무라치지 않으려는 듯 양 발을 벌렸다.
다음 순간 샐이 슬쩍 돌아보더니 양손으로 막스와 나의 손을 붙잡았다. 세 사람은 킥킥 웃으면서 홀을 가로질러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버스터와 동료들이 쫓아왔다. 의자가 허공에 날으고 테이블이 쾅하고 뒤집혀졌으며 이곳저곳에서 노성과 비명이 솟아올랐다. 밴드는 밴드대로 이 때가 고비라는 듯이 열연하고 있다. 우리들은 싸늘한 밤기운 속으로 뛰어나갔다. 샐은 웃으면서 힘껏 달렸고 막스는 돌아서 근육이 불룩 솟아오른 양팔을 하늘을 향해 주먹질을 해댔다. 홀의 입구를 향해 그는 소리쳤다.
"난 유태인이야, 너희들이 싫어하는 유태인이야! 유태인이야, 유태인이란 말이야!"
그리고 날 살려라 하고 도망쳤다. 양 발의 근육이 경련을 일으키고 관자놀이 언저리가 욱신거렸다. 옆구리에 통증이 일어나는 것을 느끼면서 하이웨이를 향해 계속 달렸다. 기지의 방향에서 버스 한 대가 달려왔다. 멈춰, 멈추라고 하며 샐이 소리쳤다. 나지막한 울타리를 뛰어넘어 울퉁불퉁한 공터를 가로질러 세 사람은 계속 달렸다. 이만하면 도망칠 수 있다!
저 버스를 타고 번화가까지 가서 <다트 바>에 들러 오늘 밤을 장식하자. 틀림없는 딕시가 환영해 마지않을 것이다. 아아, 얼른 그곳으로 가자.
나는 뒤돌아 보았다. 막스가 넘어지는 것이 보였다. 저 멀리에서 네 명의 미련한 녀석들이 울타리를 넘고 있다. 버스터가 선두에 서 있었다.
"막스! 서둘러! 저 버스를 붙잡을 수 있어!" 샐이 소리쳤다.
하지만 막스는 바싹 뒤따르는 녀석들을 알아차리고는 그 자리에 장승처럼 우뚝 섰다. 그것은 마치 자기는 명예로운 유태인이니까 적에게 등을 보이거나 하지 않겠다고, 우리들 뿐만 아니라 전세계를 향해 선언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적이 그 바보 같은 녀석들이든 누구든 도망치거나 하지 않겠다 라고 그의 등은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와 샐도 멈춰서서 버스를 보내 버리고 막스에게 가담했다. 먼저 앞선 사나이가 덤벼 들었다. 막스는 허리를 낮추고 몸을 가볍게 튼 다음 오른쪽 펀치를 때려 넣었다. 상대는 그 자리에 굴러서 나가 떨어졌다. 두 번째 사내는 나에게 덤벼들었다. 차의 엔진이 셔츠를 걸쳐 입은 것 같은 녀석이었다. 잘 노려 오른쪽 펀치를 먹였다. 그 놈의 얼굴을 포착한 순간 어깨에까지 찡하는 저린 느낌이 전해졌다.
그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어 작렬한 듯이 보인 것도 한 순간 그 놈은 푹석 무릎을 꿇었다. 그 놈의 옆구리를 나는 힘껏 걷어찼다.
그곳에 노여움의 형상으로 스산하게 버스터가 덤벼들었다. 이번엔 이쪽도 행운을 맞이하지는 않았다. 오른쪽 펀치를 먹였지만 버스터의 머리를 빗나가고 말았다. 반대로 이쪽이 지면에 엎어지고 말았다 라고 생각할 사이도 었이 다시 안아 올려졌다. 갑자기 힘이 빠지고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다음 순간 벌렁 땅에 나자빠졌다. 시간이 정지했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하늘이 보였다. 어두운 하늘에 별이 빙글 빙글 돌고 있다. 젠장 넉아웃당했어 라고 생각했다. 놈에게 넉아웃되었다. 소리가 분류처럼 되살아났다. 욱하고 신음 소리가 계속되고 콰당하는 소리, 고통을 호소하는 소리, 일어나기 시작하자 왼쪽으로 샐의 모습이 보였다. 뜻밖에도 옹이가 울퉁불퉁한 나뭇가지를 휘둘러 올려 버스터의 팔과 허리, 팔꿈치를 내리치고 있다. 막스는? 하고 보자 네 명째의 사나이와 맞붙고 있었다. 그곳에 또 하나 다섯 명째의 사나이가 달려와 막스의 등에 뛰어들었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은 것을 의식하면서 일어서 막스의 등에 올라 탄 사나이에게 덤벼들었다. 그 놈의 저고리를 붙들자 한가운데가 쫙 찢어졌다. 곧 옆으로 발을 내짚고 그 놈의 귀를 힘껏 때렸다. 상대는 막스의 목을 놓아 주고 귀를 누르면서 비틀비틀 뒷걸음질쳤다. 그 사타구니를 겨냥해 걷어차자 상대는 허리를 꺾으며 꼬꾸라졌다. 샐이 천천히 그리고 신중하게 몸을 폈다. 적의 대장격인 버스터는 흙탕에 얼굴을 파묻고 엎어져 있다. 그의 머리에 샐은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버스터는 기절한 것 같았다. 둘이서 막스쪽을 돌아다 보았다. 웬일인가 서커스에 등장하는 힘을 자랑하는 사나이처럼 다섯 명째의 사나이를 높이 머리 위까지 들어 올렸다. 천천히 앞으로 달려 나갔는가 했더니 그는 그 사나이를 나무 줄기를 향해 던져버렸다.
모든 것은 끝났다. 흙투성이가 된 우리들 세 사람은 숨을 헐떡이면서 전과를 내려다 보았다. 어두운 공터에 다섯 명의 거한이 실신해 쓰러져 있었다.
"해냈군." 나는 말했다.
"꼴 좋다." 샐이 말했다.
밤 공기를 흔들어 놓고 있는 풀벌레 소리가 다시 귀에 들리기 시작했다. 멀리서 다시 밴드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또다시 홀에서 달려 나오는 자는 없었다. 틀림없이 목사가 제지한 것이리라. 수 엘렌의 모습도 그 어디에도 없었다.
막스가 말했다.
"이 봐, 이것들이 죽어 버렸는지도 몰라."
샐이 그의 얼굴을 응시한 다음 자기가 들고 있는 나뭇가지를 내려다 보았다. 그 눈은 아직 미쳐 날뛰는 것이 부족한 듯이 빛나고 있었다. 어쩐지 저 원시인의 코믹한 주인공, 알리 우프와 흡사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나뭇가지를 야구방망이처럼 휘두르고는 나무를 향해 세게 던져버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이웨이를 서둘러 횡단하여 로커 클럽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자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어처구니가 없군, 마치 영화 같지 않아?" 샐이 말했다.
"살인자들이 빌딩에 들어가 있는데 그 아래를 경찰관들이 달려간다. 사이렌을 활기차게 울리면서 말이야. 그래서 그 놈들은 경찰관들을 향해 소리친다-경찰의 우두머리는 찰스 빅포드이고 그는 언제나 메가폰을 쥐고 있는 거야-이봐 경찰관, 그 메가폰 따위는 네 엉덩이에 꽂아버려, 너희들 같은 것들에게 누가 붙잡힐 줄 알아?"
막스가 웃으면서 제모를 머리에 쓰고 말했다.
"영화 속에서는 아무튼 언제나 그렇겠지? 대개 악한을 향해 먼저 언제나 경고를 하는 것일까? 경찰이란 어지간히 얼빠진 녀석들만 모여 있는 것 같아, 틀림없이......"
지금 달려오고 있는 것은 구급차일 거야 틀림없이. 라고 나는 말했다.
"놈들이 실신해 있으니까."
아니 저승으로 가버린 것인지도 모른다고 되풀이하며 언제까지 우물쭈물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샐이 말했다.
"자아 가자구."
하얀 제복으로 갈아입은 우리들은 샐을 선두로 로커클럽을 빠져 나왔다. 사이렌이 교회쪽으로 다가갔다. 우리들은 곧 배후로 돌아 종려나무의 그림자를 따라 에리슨 비행장의 정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곳에 운좋게 한 대의 차가 콥터 로드쪽에서 다가왔다. 샐이 뛰어나가 손을 흔들었다.
"이봐요, 합승 좀 합시다."
차는 멈추었다. 번쩍 번쩍 빛나는 빨간 머큐리. 막스와 나도 서둘러 달려 다나갔다. 혼자 핸들을 잡고 있는 것은 멜카도였다. 우리들을 보자 그는 싱끗 웃으면서 말했다.
"좋아, 타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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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초, 첫 번째 아내가 죽은 후에 나는 얼마동안 빨간머리의 스트립퍼와 사권 적이 있다. 그녀는 내가 남과 싸우는 모습을 보는 것을 최상의 즐거움으로 삼고 있었다. 출연하고 있던 곳은 허드슨 극장이고, 무대에 설치된, 꾀죄죄한 핑크빛의 거대한 와인글라스 속에서 알몸이 되어 가는 것이다. 그녀는 장미십자회의 주의(Rosicrucianism)를 믿고 있었고 매일 밤 절벽 위에서 잔다는 장미십자회의 광고에 등장하는 남자 같은 삶을 살고 있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위험이란 일종의 종교적 체험이었던 것이다. 가는 곳곳에서 그녀는 말썽을 일으켰다. 그것도 그녀쪽에서 먼저 유혹하는 것이다. 남자다 싶으면 추파를 던지고, 상대방이 유혹해 오면, 돌변하여 화를 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녀의 손상된 명예를 위해서 내가 싸우는 광경을 구경하는 것이었다.
어느 날 밤, 역시 그런 싸움을 한 뒤-양손의 살갗은 깨지고 양복은 엉망이 되었다-그녀에게 화가 난 나머지 운전하던 차의 핸들을 뽑아 내 버렸던 적이 있다. 그 후 양손으로 필사적으로 핸들의 축을 붙잡고, 간신히 충돌사를 모면했던 것이다. 그 때 그녀는, 내가 숨을 헐떡거리고 있는 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깔깔대며 내 사타구니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그 날 밤 이후로, 그녀와는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았다. 후일, 볼티모어의 어띤 호텔 방에서, 그녀가 여자 애인으로 부터 총살되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 세상에는 이런 유형의 여자도 있다. 돌이켜 보면, 수 엘렌도 정말 그녀와 똑같은 유형의 여자다.
다음 날, 아침부터 병영을 어슬렁거리면서 SP가 이제 오려나, 저제나 오려나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분명히 나를 펜서콜라 군 교도소에 처넣을 것이다. 그리고 그 수 엘렌이 찾아온다. 그녀는 새침한 얼굴로 크게 호흡하고, 그 가슴의 계곡을 여러 경찰에게 보이고나서 나를 가리키며 예수가 유태인이라고 말한 것은 이 사람이에요, 하고 단언한다. 그리고나서 그녀는 버스터의 장례식에 가고, 나는 포츠머드 해군 교도소에서 일생을 보내거나 심하게는 플로리다 교도소의 가스실로 보내지는-.
하지만 SP는 결국 찾아 오지 않았다. 그 날은 토요일. 저녁이 되기를 기다려 나는 로커클럽에 나가, 사복으로 갈아입고나서 버스로 시내로 향했다. 침례교회 앞을 통과할 때에는 정말이지 허리를 앞으로 쭉 빼고 몸을 움추렸다.
이덴 산타나와의 데이트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었지만, 약속 시간에 절대 늦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가든 스트리트를 따라 있는 해안에 한 시간 정도 앉아 있었다. 웬지 모르게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그녀와 만나서 어디로 가면 좋을지, 뭘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그녀는 그저 미소지으며, 그럼 다시 만납시다 하고 말했던 것이다. 이름을 불러 보았다. 이덴 산타나. 이번에는 나지막이 속삭였다. 이덴. 산-타나. 이름의 마지막 여운과 그것이 암시하는 낙원을 연상하여 몸서리치면서, 아름다운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성은 여성적인 모음으로 끝맺어지고 있고-자음은 으레 남성적이기 마련이다-소리내어 말해 보면 펜서콜라 라고 하는 지명과 같이, 둥글게 넘실거린다. 그건 그렇다치고 내일이나 다음 주, 또는 이번 달 내내, 아무 염려없이 쓸 수 있는 백 달러가 필요한데 하고 생각했다. 만일 그만한 돈이 있다면 점잖고도 신중하게 산 카로스 호텔에 안 가겠냐고 유혹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 실크 이불에 감싸여 한밤중에 나는 그녀의 이름을 속삭일 것이다. 퍼스트 네임과 라스트 네임, 낙원과 모음. 이덴 산타나, 이덴 산타나, 그래, 고혹적인 기도의 말같이 소리내어 말할 것이다.
그녀의 근무는 여섯 시에 끝난다. 6시 10분 전에 나는 일어나 가든 스트리트를 가로질러, 시어즈쪽으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게 옆의 골목 앞에 당도했을 때, 머릿속이 멍해짐을 느꼈다. 항상 그곳에 놓여 있는 그녀의 자전거가 없다. 자전거가 없다는 것은 그녀가 결근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심장이 갑자기 몹시 두근거리는 것을 의식하면서, 가게 앞을 천천히 걸어 애써 천연덕스럽게 진열창 너머로 안을 들여다 보았다. 이덴의 모습은 없다. (어딘가로 가 버린 것이다)고 생각했다. 정처 없는 고독감이 갑자기 더해져 간다. 어쩌면 그녀는, 토요일 밤에 나 같은 애송이와 데이트하는 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하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 도시에는 멋진 남자가 얼마든지 있다. 주머니가 두둑한 남자들, 조종사, 사관, 세계의 모든 곳에서 전투 임무를 맡고 죽음에 직면하여 살아 난 남자들. 그래, 정말로 멜카도 같은 남자들이 앞쪽에는 <트레이드 존즈>의 밝은 네온이 깜빡거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하지만 내 머리속에는, 차례차례로 어두운 망상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녀는 분명히 오늘 아침 잠을 깨어, '아, 오늘 밤은 그 유치한 해군과 데이트가 있구나.' 하고 생각한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나와 만나지 않으려고 아파서 결근한다는 전화를 했을 것이다, 분명히, 그녀가 거짓 전화를 걸고 있는 동안 그녀 옆에는 어떤 남자가 누워 담배를 피우고 있다.
나중에 그는 스페인어로 뭔가 말을 건다. 그녀는 남자의 얼굴에 손을 대고 웃으면서 말한다. '오늘은 시내에 나가지 않을래요.' 그리고 자신도 담배에 불을 붙이고나서 덧붙이는 것이다. '오늘은 종일 여기에 있을래요.' 물론 남자도 이의는 없다. 그도 그녀와 쭉 있고 싶었기 때문이다. 남자는 손을 뻗어 핑크색 유두에 손을 대고 그녀의 이름을 속삭인다.
시어즈를 지나간 곳에 있는 교차로에서 멈춰서자, 나는 전주에 기대어 앞뒤로 살펴 보았다. 여기에 있는 모습을 기지 사람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다. 펜서콜라의, 이런 인기척이 없는 모퉁이에 서서 뭘하고 있는 거야 하고 질문 받고 싶지 않다. 그들은 나를 변질자 취급 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나를 강제로 끌고 <트레이드 존즈>나 <다트 바>에 데리고 가려고 할 것이다. 그 양쪽 다, 지금은 가고 싶지 않다. 이 시간은 내 것인 것이다. 게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에게 사실대로 얘기할 수 없다. '나는 이덴 산타나라는 여성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 말은 도저히 할 수 없다. 만일 말한다면, 그 음성에서 내가 그 여자를 사랑하고 있고, 게다가 바람맞은 것을 들켜 버리기 마련이다. 우리는 모두 해군인 것이다. 나는 잘 기억하고 있지(하고 고참병들은 말한다), 사내들은 사내답고 여자들은 융단같이 부드럽고, 배가 모두 목조였을 때 '병사들아, 닻을 올려라. 나팔바지, 짙은 감색의 수병복. 나는 해군을 사랑한다'. 안 돼, 역시 그들에게는 아무 것도 말할 수 없다.
브랜트 빌딩의 시계가 6시 10분을 가리키고 있다. (좋아, 5분 동안 더 기다리자) 하고 생각했다. (5분 지나도 안 오면, 이제 안 오는 거다). 역시 처음부터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그녀도 적극적으로 응해 주었던 것은 아니다. 억지를 부려서는 안 되었다. 자, 이제 돌아가자. 오늘은 어차피, 수염도 깨끗이 깍았다. 주머니에는 돈도 있다. 어디에든지 갈 수 있잖은가. 바보같이 언제까지나 이 곳에서 기다릴 필요는 없다.
차의 경적이 울렸다. 한 번, 두 번.
소리가 나는 쪽을 보았다. 도로 맞은편이다. 낡아빠진 진초록색 차의 운전석에서, 그녀가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거기서 재주넘기를 하고 싶어졌다. 큰 소리로 소리치고 도로 표지판을 마구 때리고 싶었다. 급히 조수석쪽으로 돌아가자 그녀가 문을 열어 주었다.
"자, 타요. 당신 운전할래요?"
"아뇨, 괜찮아요." 조수석에 앉는 것만으로도 기뻤다는 뜻을 나타내고 싶어서 사알짝 문을 닫았다.
"난 여기로 만족해요."
그녀는 차를 출발시키고 왼쪽 골목으로 꺽었다.
"미안해요, 늦어서. 오늘 밤은 가게 여직원이 모두 데이트하는 것 같고, 탈의실은 풋볼 스타디움 같은 야단법썩이었어요. 그리고나서 이 차를 가지러 가게 뒤로 가서, 길을 잘못 들어서...... 어때요. 기분 어때요? 베이비."
"최고예요. 말할 수 없이."
머리 모양도 전과는 달라 있다. 오늘 밤의 머리는 백만 개나 되는 컬이 정연하게 쌓아 올려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옷은 연한 연보랏빛이고, 솔기가 있는 스타킹. 게다가 하얀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 그녀가 기어를 바꿔 어두운 골목을 삐져 나가는 동안에, 그것만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때요, 어떻게 생각해요?"
"응. 멋있어요. 그 옷도 근사하고. 머리 모양도 좋고. 게다가....."
"나 말고요! 이 차 말예요!"
"이 차라구요......"
"75달러 줬어요. 웨스트 세르반테스의 바겐빌에서 샀는데. 1940년형 포드. 13년 전 차치고는, 제법 잘 달린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네, 꽤 좋군요."
대답하면서 생각하고 있었다. (이 차가 새 차였을 때, 나는 4살, 그녀는 18살이었던 것이다). 흘끗 그녀쪽을 보았다. 그녀는 핸들을 꺽고나서 똑바로 달려 다른 길로 들어간다.
"하지만, 실은 말해 둘 게 있어요."
"포드가 싫군요."
"우습겠지만, 실은 나, 포드이든 뭐이든간에 운전을 못해요."
"뭐라구요?"
"차 운전을 못 해요."
"설마!"
이유를 설명하자 그녀는 주의깊게 듣고나서 수긍하고 백 안의 럭키 스트라이크에 손을 뻗었다.
"하지만" 나는 말했다.
"역시 부끄럽군요."
"부끄러워 할 것 없어요. 충분한 이유가 있는 걸요. 이곳 시골쪽에서는 모두 어릴 때부터 운전을 배우는데, 그건 집안 사람들이 아주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아직 차를 이용하지 않고 걷고 있는 사람도 많이 있어요. 가끔 옛날같이 마차를 보는 경우도 있구요. 지금은 대부분의 사람이 차를 갖고 있지만, 그건 부득이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당신의 경우는 그럴 필요가 없었던 걸요. 부끄러워할 거 없어요."
그녀는 그 때 상당히 빠른 속도로 말하고 있었다. 그건 그녀도 나와 똑같이 긴장하고 있던 탓이라는 것은, 상상도 못 했다. 그녀가 홍분하리라고는, 그것도 나를 앞에 두고 흥분하는 일이 있다는 것은, 상상도 못 했다.
담배를 입에 물었지만 핸들에서 손을 못 떼기 때문에, 그는 불을 붙일 수가 없다. 내가 붙여 주기로 했다. 하지만 두 번 다 바람이 불어 꺼져 버렸다.
그러자 그녀가 담배를 내쪽에 건네주고,
"당신이 물고 피워요, 마이클." 하고 말했다.
불을 붙여 빨자 굉장히 아릿했다. 담배를 그녀의 손에 건네주었다.
"그래요, 좋은 생각이 있어요." 거기에서 다시 깊숙히 담배를 빨았다.
"내가 가르쳐 줄께요, 차 운전. 전에도 남에게 가르쳤던 적이 있고-
이걸로도 잘하는 편이에요. 차 운전은. 그래요, 내가 가르쳐 줄께요."
"그것 참 반가운 얘기군요."
대답하면서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당신을 다시 만날 수 있다. 평일에도, 주말에도. 그래, 당신한테 모두 배우는 거야. 그 때는 당신 머리가 향기가 날 거야. 당신 웃음소리가 귓가에서 들릴 거야. 오늘밤은 시작에 불과한 거야.)
오른쪽에는 바다가, 아득히 지평선까지 펼쳐져 있었다. 작은 보트의 불빛이 점점이 떠 있고, 먼 곳에는 등대의 불빛이 보인다. 바다는 새까맣게 가라앉아 있었다.
"어디에 가죠?"
"해변이요." 이덴은 대답했다.
코즈웨이를 통해 산타로사 섬까지 가는 거예요, 거기에 말이죠, 요전에 봤는데 아주 맛있는 새우요리를 하는 식당이 있어요. 새우와 맥주. 단지 그것뿐. 하지만 가격도 적당하구요. 1달러로 배불리 실컷 먹어요.
"정말이에요?"
"새우를 좋아한다면 좋겠는데."
"아주 좋아해요."
그리고나서 우리는 코즈웨이, 바다에 걸린 긴 이차선 다리에 올라갔다. 해상에서 한층 더 서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그녀쪽을 보자 열심히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 것같이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머리는 바람에 휘날려 흔들리고 연보라빛 드레스는 햇빛에 그을린 발등 위에서 펄럭이고 있다.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 이 여자와 둘이서, 미풍에 날리면서 바다 위를 달리고 있다. 지금 이 순간, 내 인생은 비할 데 없이 아름답다). 그건 거짓도 과장도 아니었다.
그날 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삶은 새우를 먹었던가, 어두운 바다를 내려다보는 창문 옆의 금속제 테이블에서, 몇 천 마리, 몇 만 마리나 먹어 치워 버렸다. 그릇은 금세 새우 껍데기로 수북했다. 나는 잭스 비어를 마시면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그녀는 내게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진다. 나는 그럭저럭 대답해 갔다. 그녀 입술의 루즈가 지워지고, 머리가 바람에 휘날려 흩어졌다. 몇 명이나 되는 손님이 들어와 식사를 하고 돌아가도 우리는 여전히 그 곳에 있었다. 나는 냅킨에 그림을 그리고, 사인과 날짜를 적고나서, 날짜 밑에 '팝스 슈림프 플레이스'라는 가게 이름을 써넣었다. 내가 그렸던 것은 하얀 제복의 하사관, 콧수염을 기른 몹시 야윈 남자와 동행하던 뚱뚱한 여성, 게다가 어부와 같은 모습의 늠름한 남자 그림이었다. 그리고나서 두 사람은 다시 새우를 주문하여 계속 먹었다. 그것을 해치운 후 그녀는 장난기 어린 웃음을 띠우고 의자에 기대어, 배를 문지르면서 말했다.
"좀 걸어요, 소화도 시킬 겸,"
나는 일어나, 트림이 나오려 하는 것을 참으면서 1달러의 팁을 놓았다. 이건 너무 많을까 허세를 부리는 것으로 생각될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녀는 말없이 내 손을 잡더니 모래 사장으로 나 있는 문으로 향했다. 밖으로 나가자 그녀는 구두를 벗어 한 손에 들고나서 내 손에 손가락을 감고 걷기 시작했다. 모래는 눈부실 정도로 하얗고 물가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녀는 하늘에 가득한 별을 올려다보았다. 우리는 레스토랑의 불빛에서 멀리 벗어나 한없이 펼쳐진 모래사장 위에 둘만 있게 되었다.
그때 그녀가 커다맣고 새하안 유목을 발견했다. 그 줄기에 둘이 나란히 앉았다. 그녀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당신은 결혼했죠?" 말하고나서 괜히 말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요." 앞을 응시한 채 그녀는 대답했다.
"남편은 뭐하고 있어요?"
"집에 있어요."
"하지만 당신은 여기에 있어요." 애써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그녀는 내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네, 여기에 있어요. 당신과 함께요, 베이비. 몰랐어요?"
"난 별로 당신의 개인적 문제에 말참견할 생각은 없어요."
"그럼, 하지 말아요."
"단지...... 요전 날 밤, 당신은 나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고 말했어요. 그렇잖아요. 난 아무 것도 몰라요, 당신에 관해서."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 없는 중요하지 않은 일을 알아봤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나는 나. 그리고 지금은 이렇게 유목 위에 앉아 있어요. 그 이외의 것은 어떻게 되든 좋아요, 나한테는. 이렇게 지금 당신과 함께 있는 것만이 중요해요."
"난, 나에 대해 모두 얘기했는데."
"그건 분명히 얘기할 게 조금밖에 없기 때문이잖아요. 나에 비하면." 그녀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나는 침묵했다.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었다. 내 얘기 따위는 대수로운 것이 아니다. 나는 아직 애송이이고 그녀는 성숙한 여자인 것이다. 내가 2살일 때, 그녀는 이미 16살이었으니까. 내가 아장 아장 걸음마하고 있을 무렵 그녀는 이미 언제라도 남자와 잘 수 있는 연령이었던 것이다. 아니, 이미 결혼해 있었다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다. 16살이었으니까. 내가 해군에 입대한 연령과 거의 비슷하니까. 더 어린 나이에 결혼하는 여성이 남부에는 많이 있다고 들었다. 정말이지 그녀에게는 나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얘깃거리가 많이 있을 것이다.
그녀는 내 손을 꽉 잡았다.
"불쾌해요, 베이비?" 낮은 소리로 말했다.
"아뇨, 별로......"
"기분이 상했군요? 미안해요.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것만은 알아 주길 바래요. 나한테는 말이죠, 나쁜 버릇이 있어요. 누군가에게 심한 말을 들으면 금방 응수하고 싶어져요. 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난 아주 얌전하고 순박한 여자애였어요, 오랫동안.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지금처럼 응수하는 버릇이 생겨 버렸어요."
"응수하다니, 그에게요? 남편에게요?"
그렇다고 분명히는 대답하지 않고, 그녀는 미소지었다.
"아마 언젠가, 모든 걸 얘기할 수 있는 날이 올 거예요. 하지만 오늘 밤은 안 돼요. 오늘밤은 그만 두기로 해요. 너무나 아름다운 밤이잖아요."
일어나서 달과 별을 올려다보면서, 그녀는 계속했다.
"이쪽을 보지 말아요, 알았죠?"
시키는 대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자 뒤에서 그녀가 움직이고 있는 기척이 들렸다. 곧 내 옆에 선 그녀로부터 뭔가를 건네 받았다. 스타킹이었다.
"일 분도 더 못 신고 있겠어요."
두 손에 쥔 스타킹은 아주 여성적이고 부드러운 촉감이 느껴졌다. 살살 어루만지며 걸어가면서, 이 스타킹으로 여태껏, 자기가 아직 모르는 부분을 가리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걸 둘둘 말아 주머니에 살짝 밀어 넣었다.
"저, 저 모래 언덕에 씨 오트(sea oats)가 나 있죠. 보여요? 저 거무스름한 것. 저것 때문에 모래 언덕도 무너지지 않는 거예요. 아주 깊숙히 뿌리를 내리고 모래 밑으로 뻗어 가요. 콘크리트 속의 철근 같은 거라고 설명하면 좋을까요."
그녀는 내 손을 끌고 또 빛을 받고 있는 검은 나무 그루가 잘 보이는 지점으로 데리고 갔다.
"누군가 저걸 뽑아내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엉덩이를 차버려 줘도 돼요. 씨 오트가 없어지면 해변가 그 자체가 사라져 버리니까요."
"처음이에요, 저걸 보는 건."
"뉴욕에도 해안은 있겠죠?"
"네, 그야 많이 있죠. 코니 아일랜드, 로커웨이, 줏스 비치. 많이 있어요."
"씨 오트가 없어지면, 그런 해안도 모조리 사라져 버린다니까요."
두 사람은 모래 언덕에 올라갔다. 섬은 어둡고 쥐죽은 듯 고요하고, 만 저편 마을의 불빛만이 어둠 속에서 깜박거리고 있다. 바람이 강해져 가고 있었다. 그녀는 별을 올려다보았다.
"해 보고 싶은 일이 있어요. 어릴 때부터, 해 보고 싶었던 일"
나와 바람과 어둠을 향해, 그녀는 말했다.
"지금부터 해 볼 거예요."
그리고 내게 등을 돌리더니 드레스 밑으로 손을 뻗어 팬티를 내려갔다. 발을 빼내면서 내게 살짝 미소짓고 팬티를 건네주었다.
"나 말이죠, 바람을 느껴 보고 싶어요." 속삭이듯이 말했다.
그녀는 바다쪽을 향해 두 다리를 벌리고 드레스 자락을 허리까지 젖혀 올렸다. 단단히 앙버틴 발이 복사뼈까지 모래에 파묻혀 있다. 크게 머리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더니 부들 부들 몸서리쳤다. 허벅지 사이를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둥그스름하고 검은 언덕이 거기에 보이는가 싶더니 그녀는 다시 떨었다. 다시 한번 더. 바람이 속삭이고 조금 떨어진 해상에서 부표가 칭칭 울고 있다. 그녀의 목에서 신음하는 듯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나는 손에 든 팬티에 얼굴을 갖다 대었다. 염기가 스민 어두운 바다 내음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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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슨 비행장까지 그녀가 차로 바래다 주었다.
"당신과 함께 집에 들러도 괜찮은데,"
"안 돼요. 당신을 유혹하고 싶지 않아요."
"당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예요."
"몰라요."
"진실을 얘기해 줘요. 설사 내키지 않는다 해도."
"이렇게 해요. 당신한테 얘기할 만한 것이라면 뭐든지 얘기할께요. 이젠 됐죠?"
"알았어요."
차는 술집과 주차장과 교회 앞을 지나간다. 주머니에는 둘둘 말은 그녀의 스타킹이 들어 있다. 그것을 꺼내어 시트 위에 폈다.
"당신도 가끔 말 수가 적어지는 군요, 베이비"
"아마 내게도 당신에게 얘기할 수 없는 진실이라는 것이 있는 거겠죠."
"하지만 너무 가슴 속에 간직해 두지 않는 게 좋아요. 오히려 더 초조해지니까요......"
아직 말하고 싶은 것이 남은 듯이, 길게 어미를 끄는 독특한 어조가 높아졌다. 하지만 금새 체념한 듯 고개를 흔들고,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앞에 가는 땅딸막한 트럭은 아까부터 느릿 느릿 달리고 있다. 곧 그녀는 좀 중앙선에 다가가 앞쪽을 보았다. 그리고 추월하려다 말고, 허둥대며 원래 차선으로 되돌아왔다. 뒤에서 강렬한 라이트를 퍼부으면서, 다른 차가 추월해 갔다. "제기랄-" 다시 한번 앞쪽을 보더니,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악셀을 힘껏 밟아 단숨에 앞의 트럭을 추월했다. 화가 치민 듯이 경적을 크게 울린다. 그런데 맞은편 차가 한 대, 라이트를 번쩍이며 달려 온다. 간발의 차로 그녀는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어 원래 차선으로 되돌아왔다. 십대같이 즐겁게 웃고 고개를 흔들더니, 그녀는 다시 속도를 낮추었다. 그녀의 그런 면이, 나는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에 넘치고, 동작이 기민하고, 위험과 그것으로부터의 탈출을 시도하고 즐기는 듯한 일면이 있다. 이 여자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그녀쪽을 향해 나는 말했다.
"한 가지, 질문을 해도 돼요?"
"좋아요, 어서 해요."
"지난 주 래드 캐논과 마주쳤을 때, 그 녀석이 당신한테 시비를 걸어 왔죠. 산 카로스 호텔의 바에서 멕시코인 조종사와 함께 있는 모습을 봤다든가 뭐라든가 했죠. 그 조종사란 토니 멜카도를 말하는 건가요?"
"당신, 정말로 알고 싶어요?"
"네."
깊이 숨을 들이쉬고나서, 그녀는 입을 열었다.
"좋아요, 그럼 얘기해 주죠...... 거기에는 직장 동료와 갔어요. 로버터 스톤이라는 친구죠. 일이 끝난 다음에 한 잔 하러. 그것 뿐이었어요. 단지 한 잔 하고 싶어졌던 것 뿐. 남자를 찾으러 갔던 건 아니었어요, 알겠어요? 마침 월급날이었기 때문에 한숨 돌리고 싶어졌던 것 뿐. 이 펜서콜라에 오고나서는 차를 사기 위해서 돈을 모으고 있어서, 술마시러 간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우린 구석 테이블에 앉아 있었어요. 그랬는데 그 토니 멜카도라는 남자가 카운터에서 있다가 나를 발견했어요. 그런데 웨이터를 통해 내게 술을 보내고 생긋 미소지었어요. 로버터는 그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나 봐요. 솔직히 말하면 그 이상으로 맘에 들어한 것 같았지만...... 아마 얼굴에 그녀의 감정이 그대로 드러났을 거예요. 그가 우리 테이블로 다가왔어요. 그런데 난처하게도 그는 내게 유혹을 걸어 왔어요. 로버터한테가 아니라. 그래서 그녀는 불쾌해져, 술의 취기가 올라 버렸어요. 취기로 자기쪽에서 먼저 멜카도에게 다가갔던 거예요. 그는 질려 주춤해 버렸죠. 그때 그는 산 카로스의 이층 객실의 열쇠를 들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것을 내 손에 살짝 밀어 넣었어요. 난 얼마 동안 남자와의 교제는 멀리하고 있었죠...... 꽤 오랫동안 독신 생활을 계속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이유가 없는 게 아니라......"
작은 지포 라이터로 담배에 불을 붙이더니, 서늘한 밤공기 속에 연기를 내뱉고 그녀는 계속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사절이었어요. 무엇보다도 너무 건방졌거든요. 낯선 남자가 다가와, 방 열쇠를 건네주다니. 게다가 나보다 로버터쪽이 그 사람을 맘에 들어했구요. 나는 로버터를 슬프게 만드는 그런 일 따윈 할 생각이 없었어요. 정말 그 사람은 미남이더군요. 그 나름대로의 매력도 있었지만 그런 식의 접근 방법이 어디 있나요? 술집에서 낯선 여자를 낚아채듯이? 나는 사양이에요. 그 때 술집에는 해군과 해병대원이 많이 있었어요. 그 미스터 캐논을 포함해서요. 그래서 난 토니 멜카도에게 열쇠를 되돌려 주고 말했죠. 테이블 밑으로, 그의 손에 열쇠를 되돌려 주었어요. 그 때 그의 태도도 침착했고, 굉장히 정중한 웃음을 띠우고, 이번에는 로버터쪽을 보았어요."
깊이 들이마신 연기를 그녀는 천천히 내뱉았다.
"로버터는 그 열쇠를 받았어요. 그가 나가자, 그녀도 그 뒤를 따라 이층으로 올라 갔어요. 나는 혼자서 돌아왔지만."
그녀는 담배를 고속도로에 내던졌다. 로커클럽이 앞으로 1마일 가량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게 전부예요. 꽤 장황한 대답이었죠? 그 때 내가 화가 난 이유를 알고 싶어요? 그 시체 같은 얼굴을 한 빨강 머리 해군 말예요. 그 남자, 나를 술집에 진치고 사는 창부 취급했잖아요. 난 그런 여자가 아니라구요."
"그런 건, 새삼 말할 필요도 없어요."
"하지만 로버터도 달라요. 이 세상에는 돈을 위해서 하는 그런 행동을, 외로워서 해 버리는 그런 여자도 있는 거예요."
"그녀는 금발인가요?"
"그래요...... 완벽한 금발이죠."
"그럼 아직 멜카도와 사귀고 있군요. 나도 봤어요."
"당신, 좋은 탐정이 될 수 있을 것 같네요, 베이비,"
"아니, 처음부터 그럴 생각으로 감시하고 있던 것이 아니예요. 우연히 봤어요."
"다 왔어요, 로커클럽에."
그녀는 주차장에 차를 타고 들어갔다. 그 버스터와 그 동료들이 잠복하고 기다리고 있지 않으면 좋겠는데 하고 생각하면서,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다.
"다시 만나고 싶어요."
그녀는 외면하여 고속도로쪽으로 눈을 돌렸다.
"언제?"
"내일"
"그건 무리예요."
"그럼, 모래."
침묵.
"좋아요."
"또 영화 보러 가요."
"그것보다 내 그림을 그려 주지 않을래요?"
"정말이에요? 그거."
"영화 속에서 화가가 흔히 하듯이. 그런 식으로 누가 나를 그려준 적은 한 번도 없어요."
내 로커 앞에 섰을 때, 주머니 속에는 아직 그녀의 팬티가 들어 있었다. 나는 다시 그것을 얼굴에 바싹 갖다 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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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단편적으로나마 지금이 내 인생에 있어서의 '그때, 그 순간'이라고 느낀다. 그래서 나는 한 발 물러나 어떻게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이야기의 형식을 거기에 붙이려고 하고 있다. 이건 즉, 한길을 벗어나, 샛길을 조심스럽게 달리고 있는 것 같은 것이다. 다음 모퉁이를 왼쪽으로 꺾으면 더 깊숙이 과거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고, 오른쪽으로 꺾으면 황량한 미래로 헤매이며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마 그 당시의 일을, 기억의 엷은 편린 없이 그때를 기억할 수 있다면 그 후에 계속된 모든 세월에 적합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래, 그 후 내가 카메라맨으로서 기록하거나 목격하거나 했던 우연한 죽음과, 잃어버린 친구들과, 너무나도 경솔하게 사랑했던 여인들에게, 그에 걸맞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기억이라는 것은, 명석한 논리에 따라 정연하게 질서있게 나열되어 있는 건 아니다. 그 점이 문제인 것이다. 만일 기억이 논리와는 무관하다고 하면, 거기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녀가 자기 그림을 그려 달라고 말한 날, 그래, 심야에 멕시코만에서 불어 오는 미풍에 그녀가 육체를 드러냈던 그 날 다음날의 일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지금도 그 날을 회상하면, 몸서리가 쳐질 정도이다.
오전중, 나는 걷잡을 수 없이 초조해져, 마치 헝클어진 코드 다발같이 머리속은 엉망이 되었다. 아무튼 도화지와 목탄을 사기 위해서 화구점에 가야만 했다. 그녀의 부탁은, 나에 대한 하나의 도전이었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만일 당신에게 진짜 소질이 있다면, 당신의 유치함도, 미덥지 못한 점도, 딱딱한 동작도, 모두 너그러이 봐 주겠다는 말로 이해되었다. 그래서 뭐라 해도 진짜 화구가 필요했다. 양질의 목탄과 도화지가 필요했다. 그렇다고 해서 시어즈에는 갈 수 없다. 그곳의 화구 매장에 가면, 반드시 그녀에게 들켜 버린다. 그녀는 분명히 허둥대며 화구를 사는 나를 보고, 역시 그는 유치한 남자야 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녀를 슬쩍 감시하러 왔다고까지 생각할지도 모른다. 역시 어디 다른 화구점을 찾아야만 한다. 펜서콜라의 전화번호부에서 한 상점을 발견하였다. 웨스트 사반티즈 스트리트의 아트랜드 화구점. 재빨리 다이얼을 돌렸다. 째지는 목소리의 여자가, 가게는 5시에 닫는다고 말한다. 지금부터 걸어 간다면, 아마 제시간에 당도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웨스트 사반티즈 스트리트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알고 있는 건 시내의 거리이고, O스트리트 정도까지라면 찾을 수 있는 자신이 있다. 하지만 그 이외의 거리라면, 거의 자신이 없다.
난처해하고 있을 때, 베케트가 찾아 왔다.
"이봐, 메인사이드에 함께 안 가겠어?"
그 순간, 그를 껴안고 싶어졌다.
베케트가 이중 주차하고 있는 동안에, 나는 아트랜드 화구점에 뛰어갔다. 목탄, 그림 물감, 펜 등은 가운터 뒤에 진열되어 있었다.
"어서 오세요" 통로 안에서 나온 여자가 꽤 심한 남부 사투리로 말했다. 꾀죄죄한 얼굴, 여리디 여린 푸른 눈동자, 실망한 듯한 표정이, 그 얼굴에는 나타나 있었다. 뭐야, 해군이야. 게다가 진즈 따위를 입고 있다. 이런 남자가 화구 같은 걸 살 리가 없잖은가.
"저말이죠" 필요한 도구를 생각해내면서, 나는 말했다.
"목탄 몇 개하고, 그 다음에 그 뭐죠. 더 단단한 게 있잖아요. 갈색이나 적갈색의"
"콩테요" 카운터 뒤로 돌아가면서 여자는 말했다.
"그거하고 도화지 좀 주세요."
"도화지는 손님 뒤에 있어요. 바로 뒤에."
손님은 나 외에는 없다. 가게 안의 전등도 거의 꺼져 있다. 여기에서 보면, 밖의 거리는 작열하는 햇빛에 탄 것같이 바래서 희끄무레해져 있다.
"손님, 목탄지를 원하세요, 아니면 갱지를 원하세요?"
솔직히 말해서 몰랐다. 하지만 진열되어 있는 종이를 보자, 갱지가 79센트, 목탄지가 2달러. 주저하지 않고 갱지쪽을 택해, 카운터로 가져 갔다.
"이걸로 하죠"
그녀는 카운터에, 콩테 크레용과 목탄 상자를 놓았다. 목탄은 정말이지 무르고 약하게 보인다. 그녀는 컴프레스 타입의 목탄이라든가 하는 것이 채워진 상자도 내게 떠밀었다. 한 개씩 집어들어 본다. 컴프레스 타입쪽이 검고 단단해 보였다.
"이거, 두 개씩 주시면 좋겠는데요"
"두 개씩요?"
"부탁해요"
"저희 가게에서는 대개, 한 상자 단위로 팝니다만"
"그럴 겁니다. 하지만 지금 갖고 있는 돈이 조금밖에 없어요. 다음에 다시 와서 나머지를 모두 살게요. 약속하죠. 하지만 아무튼 이것이 지금 필요해요."
맙소사 라고 말할 듯이 한숨을 쉬더니, 그녀는 목탄, 컴프레스 타입의 목탄, 그리고 갈색 콩테 크레용을 두 개씩 집어들어, 의도적으로 조심스럽게 싸기 시작했다. 밖에서 베케트가 경적을 울리고 있다. 그녀는 아주 불쾌한 듯이, 각각의 물품명을 영수증에 기입하고나서, 물건과 함께 봉지에 넣었다.
"픽사티프를 살 돈 같은 것도 없겠죠?" 그녀는 말했다.
"네." 사실 픽사티프가 뭔지도 몰랐던 것이다. 요금은 전부 1달러 90센트. 2달러 건네주고, 거스름돈 10센트를 받고 트럭으로 뛰어돌아 왔다.
"혹시 그때 내 그림을 그렸던 건 너 아냐" 베케트가 말했다.
"마일즈가 아니고."
"아니, 그건 마일즈야."
베케트는 지연된 시간을 조금이라도 회복하려고, 점심 시간의 붐비는 차의 행렬 사이를 누비며 달려 간다.
"그런 물건을 산다는 건, 너도 화가라는 얘기냐?" 그는 물었다.
"글쎄." 풍자 만화와 코믹에 대해서, 자연히 설명할 처지가 되었다. 풍자 만화를 그리는 것은 어른의 일이고, 코믹에 열중하는 애들한테는 적합하지 않다고 하는 설명을 나는 했다. 밀턴 캐니프 등은, 일 년에 10만 장 이상을 그리고 있을 것이다. 그것보다 더 벌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베케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듣고 있었다.
"저 말야." 그는 말했다.
"어쩌면 너, 병영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겠구나. 노포크에 있었을 때, 어떤 녀석이 있었지. 그 녀석도 그림을 잘 그려서, 사진을 보고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어. 한 장에 2달러 받고 말하자면 녀석들의 여자 친구 그림을 그려 주는 거야. 아니면 병사들의 그림을 그려 주거나. 그걸로 제법 수입이 짭짤했지. 물론 일 년에 몇 십만 달러나 벌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 버지니아 주 전체에서도 그런 큰 돈이 뒹굴고 있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맥주값 정도는 쉽게 벌 수 있었지."
"한데 어떻게 해서 그런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거지?"
"뭐, 처음에는 누군가의 그림을 그려주었을 테고, 그것이 점점 평판이 되었던 게 아닐까?"
"그래, 그건 시도해 볼 만하겠군."
"나부터 그려 봐."
말하면서 그는 속도를 떨어뜨리고, 메인사이드 게이트에 접근해 갔다.
"나중에 내 여자친구 사진을 건네줄테니까."
한 장당 2달러. 그때까지 내 그림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은, 생각한 적도 없었다. 그건 장래에 해군을 제대하고 난 다음의 얘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베케트는 모든 일을 현재형으로 받아들이는 남자이다. 머리 속이 갑자기 장미빛 영상으로 꽉 찼다.
그 날 오후 늦게, 위엄 있는 기계공이 조종간의 스페어가 필요하다고 보급부에 찾아왔다. 나와 함께 근무중이던 대니 레이와 할레르슨은 둘 다 서류에 뭔가를 기입하고 있었다. 내가 가지러 가는 수 밖에 없다. 맨 윗단의 서랍에 얼마 전에 산 화구가 들어 있는 내 책상 앞을 지나 창고로 향했다. 석양빛이 들어오고 있는 창고는, 언뜻 보기에도 음울했다. 짐받이과 골판지 상자를 헤치고 조종간이 들어 있을 나무 상자를 찾는다. 쉽게 찾았다. 짐차를 갖고 와 나무 상자를 그 위에 얹고, 입구쪽으로 밀고 가기 시작했을 때, 나무 상자 벽의 벌어진 틈새로, 이젤이 보였다. 분명히 이젤이었다.
골판지 상자과 나무 상자로 만들어진 작은 방. 거기에 세워진 이젤에는, 제작중인 그림이 걸려 있었다. 낮은 나무 상자가 의자 대용으로 놓여 있다. 또 하나의 나무 상자에는 판유리가 깔려 있고, 그 위에 그림 물감과 물을 넣은 빈 깡통 등이 놓여 있었다. 주둥이가 큰 컵에는, 열 몇 개의 붓. '벽'에는 이미 완성된 그림도 몇 개인가 세워져 있었다. 놀랍게도, 이 보급부 안에 누군가가 비밀의 아뜨리에를 마련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일즈구나 하고 직감했다.
무엇인가 보물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는 알라딘의 동굴에서 해매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벽'의 틈새로 다른 나무 상자를 억지로 밀어넣고나서, 나는 조종간을 갖고 카운터로 되돌아왔다. 마일즈는 화가인 것이다. 나 자신의 비밀이 간직되어 있는 책상에 앉아, 줄곧 그 일을 생각했다. 마일즈는 언제쯤 돌아올까? 그는 존스와 보즈웰과 함께 메인사이드에 나가 있다. 그런데도 어째서 그는 요전 날, 베케트의 그림에 관해서 부인했던 것일까?
카운터에는 그 뒤에도 몇 명인가의 '손님'이 찾아왔다. 그들을 상대하거나, 서류를 작성하거나, 사양서를 읽거나 하면서도, 그 비밀의 아뜨리에로 다시 가고 싶어 견딜 수가 었었다. 내가 본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었다. 신기루란 그런 것을 가리키는 게 아닐까? 하지만 아무튼, 데니 레이가 남아 있는 동안에는, 어떻게 할 수도 없다. 당직은 할레르슨이다. 그놈에게 발견되면 귀찮게 된다. 군대 규칙이니 뭐니하며, 시시한 조항을 내세우려고 할 것이다. 그래서 폐업시각이 되었을 때, 나는 일단 밖에 나가 맞은편 병영으로 되돌아가, 문 안쪽에 서서, 데니 레이가 돌아가기를 기다렸다.
다시 한번 길을 건너, 한가운데의 문을 열었다. 살-짝 소리가 나지 않도록 닫고 나서, 안으로 발소리를 죽이며 다가갔다. '벽'에 등을 꽉 누르듯이 하여 빠져 나가면, '아뜨리에'에 들어갈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단 한 개 있는 창에는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다. 외부 세계로부터 격절된 안락한 '비밀 소굴', 어릴 때 공원 수풀에 숨어 있었을 때 같은 이상한 안도감이 있다. 또 하나 다른 감정도 솟구쳐 왔다. 이건 아무도 없는 교회에 있을 때의 기분과 비슷하다. 나는 이미 신 같은 건 믿지 않고 있었지만. 고요한 정적에 싸인 오후, 교회의 그 독특한 분위기에도 늘 매료되었던 것이다. 나무 상자로 만들어진 이 작은 동굴은, 그와 똑같은 준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이젤에 세워져 있는 그림은, 아직 미완성이었다. 하지만 무너진 집을 나타내는 굵은 선, 마른 나무, 아득히 먼 푸른 지평선까지 한없이 계속되어 있는 들판 등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건 표면에 그림물감을 칠해 매끄럽게 만든, 두꺼운 판자 같은 것에 그려져 있었다. 나머지 그림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한 장의 그림에는 광대가 그려져 있었다. 물방울 무늬의 극채색 옷을 입고, 푸른 눈이 가면밖으로 엿보이고 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르겠다. 또 한 장의 그림에는, 시골길가에 서 있는 할머니가 그려져 있었다. 그녀는 화가쪽에 등을 돌리고 있고, 그 머리 위에는 위협하듯이 나무가 우뚝 서 있다. 세 번째 장에는, 머리를 양손으로 감싼 진즈 차림의 해군이 그려져 있었다. 그가 있는 방에는, 마치 병영같이 블라인드가 딸린 창이 있고, 그 블라인드 바깥쪽에는 감옥 같은 철격자가 끼워져 있고, 벽에는 작은 검은 가면이 걸려 있다. 이상한 것은, 그 방의 모든 것을 제압하듯이 거대한 오렌지가 데굴 데굴 나뒹굴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밖에는, 피부가 늘어진 얼굴에 눈만 아주 싱싱하게 빛나는 중년 여자를 그린 그림이 두 장, 그것과 론 레인저 마스크를 한 네 명의 해군이 바다를 등 뒤로 하고, 아주 황폐해진 부둣가에 서 있는 그림도 있었다.
어느 걸 봐도, 얼마나 색다른 그림이란 말인가. 그런 그림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예를 들면, <코스모폴리탄>과 <맥콜>에 실려 있는 일러스트와도 다르고, 크레인과 캐니프가 그리는 그림과도 다르다.
바닥에는 검은 스케치북이 한 권 있다. 집어서 페이지를 넘겨 보니, 낯익은 얼굴이 차례로 나타났다. 베케트, 할레르슨, 보즈웰, 맥데드 상등 하사관에 래드 캐논, 모두 연필로 정밀하게 그려져 있다. 몇 백 개의 아주 자그만 선으로 명암을 표현하고 있었다. 거기에 나타나 있는 것은, 사진과 같은 유사성이 아니었다, 일련의 스케치는, 사진보다도 더 깊게, 각 모델의 개성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베케트의 호인성, 할레르슨의 박정함, 술고래인 보즈웰의 흐리멍덩한 눈, 그리고 래드와 맥데드의 악한 기질. 스케치는 아직 더 있었다. 묵직해 보이는 유방을 가진 마녀 같은 얼굴의 나부, 마치 기름을 뒤집어 쓴 것같이 몸이 빛나고 있는 짧은 팬츠 차림의 흑인, 한 그루 나무의 세밀한 스게치, 쇳덩어리로 변한 것 같은 폰 코츠차, 유화에 그려져 있던 것과 똑같이, 황폐해진 부두, 주도하게 그렸으면서도 미완성인 많은 오렌지 그림들 그리고 세부까지 면밀하게 그려 넣어진 가면. 모두 훌륭한 그림이면서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웬지 모르게 불안해져 간다. 내가 부족해서라기보다 그 제재 탓이다. 학교 시절, 나는 항상 그림에서는 최고점을 받았지만 이런 그림은 못 그렸다. 아니, 이런 그림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내가 그리는 그림은 대개 남자가 맞붙어 싸우거나 치고 받거나 하는 그림이었다. 말하자면 코믹한 소재이다. 그러나 여기에 있는 것은, 미술관과 화집 등에서나 봤음직한 그림인 것이다. 그리고나서 공백의 페이지를 몇 장 뒤로 하고-, 나는 갑자기 손을 멈추었다. 이번에는 내가 그려져 있는 게 아닌가. 세 페이지에 걸쳐. 첫 그림은 내가 정면으로 책상에 앉아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밖을 바라보고 있는 옆 모습이 비스듬히 뒤에서 그려져 있다. 턱 주위가 이완되어 있고, 나는 뭔가 갖가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두 번째 그림은 바닥을 대걸래로 청소하고 있다. 상체를 급각도로 구부리고, 막대기같이 대걸레를 휘두르고 있다. 등과 팔의 근육이 팽팽해져 있는 모습이 훌륭하게 그려져 있었다. 세 번째는 미완성이었다. 몇 개인가의 선이 조심스럽게 중복되어, 내 턱과 뺨의 윤곽을 그려내고 있다. 코 윤곽선은 지우개로 지워진 흔적이 있었다.
하지만 눈은 분명히 내 눈이었다.
거기에는 어딘가 겁에 질린 듯한 빛이 나타나 있었다.
갑자기 가슴이 답답함을 느꼈다. 나는 다음날, 이덴 산타나의 그림을 그리기로 되어 있다. 하지만 내게는 그런 자질이 없다는 것을, 이 그림들이 깨우쳐 주는 게 아닐까. 이 모든 그림을 그린 것이 분명히 마일즈라고 하면, 마일즈야말로 그녀의 그림을 그려야 하는 것이다. 그녀에게는, 나 같은 풋내기보다 더 우수한 사람에게서 그림을 받을 자격이 있다. 수치심과 동시에 선망의 마음이 가슴 속에 퍼졌다. 나와 똑같이 시시한 일을 참으면서도, 마일즈는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추구하는 방법을 발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이 내 그림을 그리는 시간까지 짜내고 있었다. 그는 진지했던 것이다. 이 에리슨 비행장에 온 지 6주일, 나는 몇 군데의 레스토랑에서 단 한 장의 그림을 그리고, 그것을 과시했다. 그녀는 분명히 내 그림을, 재미 있는 아마추어 정도로밖에 생각하고 있지 않을 게 틀림없다. 실제로, 여기에 있는 그림을 그녀가 본다면, 내 그림이 얼마나 유치한지 알 것이다. (나는 결국, 인생의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있던 것에 불과한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 (나는 마일즈의 발밑에도 미치지 못한다. 아무리 올라가려고 해도, 그를 따라잡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앞방에서 발소리가 났다. 누군가의 신음 소리에 이어, 나무 상자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제기랄, 빌어먹을 것" 보즈웰의 목소리이다.
그리고나서 다시 신음 소리가 나나 싶더니, 그가 나가는 기척이 들렸다. 마일즈와 함께 매인사이드에서 돌아온 것일 거다. 멀리서 할레르슨의 불명료한 목소리도 났다. 문이 쾅-하고 닫히는 소리. 보즈웰이 떠난 것일 거다.
나도 그 때 나가야만 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안쪽 방에서 몰래 나가는 모습을 누군가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고, 여기에서 본 일련의 그림에 아직껏 마음이 끌리고 있기도 했다. 그래서 계속 머물러 있었다. 5분, 10분. 마일즈는 되돌아오지 않는다. 안 돌아오면, 좀더 있어도 괜찮을 거다. 옛날에 미사에 대비하여, 사제보다 훨씬 빨리 교회에 왔을 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무에게도 의심 받지 않는 편한 마음으로, 나는 거기에 있는 것을 모조리 만져 보았다. 사제의 옷, 성배, 호스티아(성별된 빵). 신성한 의식의 도구를 차례대로 손대어 갔다. 그 때, 한편으론 반항심이 작용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만일 하나님이 정말로 실재한다면, 의도적으로 화나게 만들어 보자. 그렇게 하면 모습을 나타낼 게 분명하다. 그리고 나에게 호통치고는 벌을 내릴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 때 나는 그 물건들의 성스러음에 감동하기도 했다. 그 물건들을 만짐으로써, 사제가 된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마치 그 때와 같은 기분으로, 나는 그림물감 튜브를 집어들었다. 상표에 '카세인'이라고 쓰여 있다. 뚜껑을 열어 킁킁대며 냄새를 맡아 보았다. 이상한 냄새는 나지 않는다. 오히려 젖 내음 같은 향기가 풍겨났다. 전에 57가의 <미술학생연맹> 로비에 갔던 적이 있다. 풍자 만화 코스도 있는지 어떤지 살피러 갔던 것이다. 그때 그 건물 속은 온통 기름과 테레빈유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카세인은 그런 냄새는 안 난다. 빈 깡통에 들어 있는 물은, 도료를 녹이는 데 사용하는 것일 거다.
한순간, 붓을 들어, 미완성인 그림에 뭔가 그려 넣어 볼까 하고 생각했다. 이 건물 속에는 그가 하고 있는 작업을 알고 있는 화가가 또 한 명 있다고 마일즈에게 알려 주고 싶었다. (그저 한 군데라도 좋다)고 생각했다. (콘크리트 벽에 벽돌을 한 장 그려넣는다든가, 지평선에서 태양을 떠오르게 한다든가). 그리고나서 이렇게도 생각했다. (아니, 그만두자. 만일 내 그림에 누가 그런 짓을 한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하지만 결국 해 버리자 라는 충동으로 붓을 들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무겁다.
그 때, 문이 찰칵 하고 닫히는 소리가 났다. 정적. 다음 순간, 통로 하나를 가벼이 걸어 오는 발소리가 났다. 발소리가 멈췄다. 신음소리. 뭔가에 몸이 마찰하는 소리. 그리고 눈앞에 마일즈 레이필드가 서 있었다. 그 얼굴에는 충격과 망설임의 빛이 역력했다.
"뭘 하고 있지?"
정말이지 자신의 비밀을 침해 받은 것 같은, 화난 음성으로 그는 말했다.
"어떻게 이런 것이 있나, 생각하고 있었어"
한 바퀴 빙 돌려 작은 아뜨리에를 가리키면서 나는 말했다.
"나무 상자를 하나 치웠더니......"
마일즈는 뒷걸음질도 치지 않고, 벽가의 좁은 통로에 서 있다. 그 눈은 그림물감과 그림과 이젤을 둘러보고 있었다. 속삭이듯이 목소리를 죽이고, 그는 말했다.
"누구한테 얘기했어?"
"아니. 다른 나무 상자를 틈새에 잘 메꾸어 놓았어"
"사실을 이야기 해 줘. 알고 싶어"
"어째서 내가 누구한테 얘기해야만 하는 거지?"
작은 아뜨리에에 마일즈가 발을 들여넣자, 공간이 갑자기 좁게 느껴졌다. 붓을 하나 집어들고, 그걸로 허벅지를 가볍게 치면서 그는 말했다.
"이것이 발견된다면, 큰일나게 돼. 엄청난 소동이 벌어질 거야."
마일즈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결국은 발견되겠지. 어느 개인 날 아침, 할레르슨과 보즈웰과 존스 같은 멍청이가 나무 상자를 치워 버린다면, 그리고 나는 체포될 거야. 이 그림도 몰수될 거구. 나는 영창행이 되고, 그림은 자네가 항상 경비하고 있는 그 쓰레기 회수차행일 거야. 분명히......"
섬약해 보이는 웃음을 띠우고, 내쪽을 보았다.
"하지만 어째서 자네는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않았지?"
나는 간신히 말을 짜냈다.
"저어, 나도 어쩌면 화가랄 수 있어서......"
마일즈는 눈을 깜박거렸다.
"저어, 잠깐 함께 걷지 않겠어?"
희미한 석양빛을 뒤로 하고, 두 사람은 기지 안을 거닐었다. 만화를 그리는 것이 취미라고 내가 설명하자, 마일즈는 말했다-만일 자네에게 그림에 대한 재능이 있다면, 만화 따위를 그리는 것은 재능의 낭비야. 실은 내일 밤, 어떤 여자를 스케치해 주기로 했어 하고 나는 말했다. 상대는 누드 모델인가 하고 그가 물었다. 아니, 그냥 아는 여자야 하고 대답하자 그는 말했다-정말, 최악의 모델이군. 상대가 아는 여자일 경우, 그녀가 설사 아름답지 않다 할지라도 아름다운 것처럼 그려야만 할 거야. 이 펜서콜라에 회화 교실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그렇다면, 훌륭한 모델을 선택할 수 있을텐데. 하지만 거의 불가능해, 그럴 가능성은 없어. 하긴 누드 모델을 그리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 당장 침례파 신자들이 우르르 몰려올 게 분명해. 저어, 하고 나는 물었다. 어째서 자네는 부인을 데려와 기지 밖에서 살려고 하지 않는 거지? 둘이서 아파트를 빌리면, 그곳에서 부인을 그릴 수 있잖아. 그는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아냐, 안돼.
"그녀는 예수한테 혼을 뺏겨 버려 있으니까."
식당을 향해 걸으면서, 그는 말을 이었다.
"크리스찬이 제일 싫어하는 것은, 자기 육체를 남에게 드러내는 것이니까."
"하지만 자네 부인이라면......"
"그 사람은 말야, 모델 생활하는 동안 줄곧, 자신은 영원히 지옥에서 괴로워하게 된다고 생각할 거야."
그는 화제를 바꾸어, 유화 그리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카세인은 유제품에서 생기는 것으로, 희석하는 데는 반드시 물을 이용한다고 한다. "나는 카세인으로 표면을 덮은 분위기를 좋아해. 하지만 카세인은 기름만큼 섬세하지도 않고, 습기도 없어. 내가 사용하고 있는 판자는 메조나이트라는 것인데, 게소(아교로 만든 그림 바탕용, 조각용의 석고가루)라는 하얀 바탕칠로 처리해야만 해. 거친 표면을 내기 위해서 바탕칠을 모래와 섞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매끄러운 편이 좋기 때문에, 붓을 사용하여 그림의 표면을 칠하지."
자네 그림은 무엇을 나타내고 있냐고 질문하자, 그는 머뭇거리면서 말했다. "글쎄, 나도 모르겠어. 오렌지가 많이 쌓인 방에 있는 해군은, 자기는 감옥에 처박혀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거야. 그래서 플로리다에 억지로 짓눌린 것같이 표현되어 있지. 하지만 시골길에 서 있는 노파는 누구인지 모르겠어. 그 그림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다른 그림은 모두 단순해. 그 나무는 <백설공주> 가운데에서 훔친거구."
"그 나무는 어떻게 할 거야?"
"태울 거야. 아니면 래드 캐논에게 줘도 좋고. 그놈은 그 나무를 어머니로 믿고, 죽을 때까지 소중히 여길 거야."
갱지 도화지와 목탄을 샀는데-, 하고 털어놓자 그는 말했다.
"갱지는 스케치하기에는 적합하지만, 종이결이 너무 섬세하기 때문에 여러 번 지우거나 할 수 없고, 목탄도 생각대로 쓸 수 없어. 우선 그리는 대상에게 제일 적합한 것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해.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우리는 식당에 들어가, 회색 불고기 접시를 들고 와 자리에 앉았다.
"이런 고깃덩이는 그릴 수 없어. 차라리 채색한다는 기분이지, 이 징그럽고, 생기 잃은 색을 충실하게 재현하기 위해서는 말야. 만약 이런 낯빛을 하고 있는 놈이 있다면, 즉각 병원행일 거야."
나는 소리내어 웃었다. 그는 고기를 작게 썰어, 앞니로 씹으면서 천천히 먹고 있다.
"에너지야" 그는 중얼거렸다. "이건 에너지라고 생각하면 돼."
참고가 되는 책이 있으니까, 몇 권 빌려줄 수도 있어 라고 그가 말했다. "하지만 자네가 진심으로 그림을 하고 싶다면, 매일 그려 보는 거야. 책을 몇 권 읽든, 미술관에서 얼마만큼 그림을 보든, 그런 것은 아무래도 괜찮아. 그림을 잘 그리고 싶으면, 우선 그림을 그려야만 해. 어떤 그림이라도 좋고, 갈겨 그리든 뭐든 좋으니까 아무튼 그리고, 그 다음에 완성하면 돼. 그리고 어떤 것이든지 정확하게 관찰하고 다음에는 그것을 느끼고 이해해야만 해. 자기 그림에서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다면, 그 그림은 이 고기와 똑같이 죽어 있다는 얘기야."
조금 후에 나는 말했다. "그림 그리는 방법을 가르쳐 줄 수 있어?"
"그러고말고." 그는 말했다. 가습이 갑자기 팽창되는 느낌을 받았다. 새로운 희망, 이미지, 야심. 내게는 마침내 친구가 생겼다. 게다가 그는 그림에 관한 한 베테랑이다. "단지-" 하고 그는 계속했다.
"자네가 그, 야구라는 것을 내게 철저히 가르치려고 들지 않는다면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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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일즈가 고백한 이야기
내가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미쳐 버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지. 이유는 그뿐이야. 아버지는 1930년에 자살해 버리고 내 모든 뒷바라지는 어머니 차지였지. 나는 그 때 생후 1년 2개윌밖에 되지 않았어. 살고 있던 곳은 조지아주 마리에터라는 곳이었는데 애틀랜타 교외의 자투하고 답답한 거리였지. 아버지는 가구 판매업에 종사하고 계셨다는데 그것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지억나지 않아. 아버지의 사진이나 편지, 그의 가련한 생애에 대한 흔적들은 모조리 어머니가 감춰 버리고 말았거든. 어머니는 쓰지도 못하게 된 얄팍한 여행용 트렁크에-불쌍한 어머니!-그것들을 모조리 치워버리고 말았어. 내가 비로소 그것을 발견한 것은 이미 성인이 되었을 나이였어. 하지만 그러한 사진이라면 조지 워싱턴의 사진을 보여주는 편이 더 나았을 테지만.
어머니는 최선을 다해 주었다고 생각해. 그건 틀림 없어. 아무튼 당시는 대불황이었고 미국인 모두가 경제적인 시련을 당하고 있었을 테지만 남부에서는 더욱 심했거든. 가구 체조 회사는 아비지가 죽기 전에 도산해 버렸어. 그것이 아버지가 죽음을 택한 원인이기도 한 것 같아. (어쨌든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고 있다. 상당히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어머니는 아버지의 일을 단편적으로 얘기해 주었지만. 그 얘기는 엔제나 어머니가 자살 직후의 아버지를 발견한 대목에서 끝나 버리고 만다. 그 때 아비지가 엄지손가락으로 엽총의 방아쇠를 당기자 의자에 앉아 있던 아버지의 얼굴은 날아가 버렸던 것 같다. 거기서 다시 어머니의 얘기는 과거로 돌아가고 아버지의 자살 대목에 이르면 또다시 함구하는 것이 상례였다.)
아버지의 친척들은 어머니를 경원하고 있었지. 어머니에게 자기들의 모습을 보이면 아버지를 생각나게 하는 것이 아닌가라든가, 어머니에게 돈을 강요당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라든가 그런 따위를 염려하고 있었던 모양이야. 그렇지 않으면 어머니에게도 아버지의 자살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보고 있었든지. 정말이지 매정한 사람들이야. 하지만 정확한 건 나도 알 수 없어. 아무래도 좋아. 확실한 것은 그 자들이 우리들 모자를 업병(전생의 업보에 의한 난치병)에 걸린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취급했다는 점이지. 그들은 죽을 때에 고생고생하다가 죽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해. 당시의 기억은 다소 희미한 부분이 있어. 내가 해군에 입대할 때까지 우리 집에서는 공공연히 얘기할 수 없는 터부가 남아 있었던 셈이지.
그러나 어쨌든 우리들에게는 집이 있었어. 아버지의 생전에 산 집으로 대금도 완불되어 있었지.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남긴 재산은 그것 뿐이었던 거야. 대금은 아직 아버지의 가구 판매 회사의 경지가 좋았을 때 지불된 것 같아. 기둥만 있는 복도를 갖춘 박공 지붕의 집으로 바닥은 조각나무 세공으로 깔았고, 거실에는 피아노가 있었으며, 곳곳에 그림이 걸려 있었지.
나는 처음에는 내 방을 가지고 있었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
그 때는 일곱 살이었는데 언제나 부모님과 함께 있는 자신을 그리고 있었던 것 같아. 아아, 프로이트식으로 분석하진 말아줘-어머니는 작은 방 하나를 작은 아뜨리에로 개조해 주셨지. 그곳에는 테이블과 많은 도화지와 크레용과 수채화 용구가 있었어. 나는 밤 늦게까지 그곳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어머니가 아래층에서 피아노를 가르치고 있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곤 했지. 어머니가 피아노를 칠 때는 대단히 멋진 선율이 흘러 나오지만 아이들이 칠 때는 음악이라고 할 수가 없었지. 연습곡이라 단조롭기 짝이 없고 멜로디도 엉망이었지. 그런 멜로디를 듣고 있으면 내가 그리고 있는 그림도 덩달아 엉망이 되고 마는거야.
피아노 레슨 외에도 어머니는 여러 돈벌이를 하셨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었으니까. 나와 어머니 두 사람의 식비를 벌어야 했고, 난방비를 벌어야 했고, 세무서에 집을 압류당하지 않기 위해서도 돈이 필요했던 거야. 그 중 한 가지가 삯바느질이었어. 어디서 주문을 받아 오는지는 모르지만 이웃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어. 어머니는 자존심이 몹시도 강하셔서 절대로 이웃에게 궁색한 티를 내지 않으셨지. 어머니는 그 대불황기 동안에도 일주일에 한 번 흑인 파출부를 불렀어. 청소를 하기 위해서 말이야. 그녀 이름은 마헤리아, 여위었지만 근골이 우락부락한 여성이었는데 어머니가 밖에 일하러 나가는 날이면 왔지. 지금도 기억하고 있지만 흑인 취향의 라디오를 들으면서 집안에서 자주 춤을 추곤 했지. 몸은 여위었지만 눈빛만은 강했어. 그 눈으로 노려보면 까무러칠 정도였으니까. 틀림없이 여윈 여자 내부에는 강한 그 무엇이 자리하고 있는 것 같아. 어쨌든 그녀의 눈은 매섭기 짝이 없었어. 탐욕스럽고 도전적이며 위협적이었지. 그녀가 싫다는 것을 억지로 시킨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지. 한 번은 내가 다른 흑인을 '니그로'라고 부른 일이 있었는데 그 때 별안간 그녀가 나의 얼굴을 냅다 후려치는 거야. 세게! 나는 한 사람의 여자, 한 사람의 흑인이지 '니그로'는 아니란 의미로. 당시에 나는 열 살쯤이었는데 그 사건을 어머니에게는 말하지 않았어. 어머니에게 나를 두둔해 달라고 하기 싫었거든.
어머니는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지. 이 불황은 언제 끝날까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원래대로 될 텐데 하고. 그 진의는 지금도 잘 알 수 없지만 그건 이미 아무래도 좋았지. 불황은 좀체로 끝나지 않았어. 그러자 어머니도 마음이 약해 지셨는지 루즈벨트가 아무리 힘을 쓴다 해도 뉴딜 정책을 아무리 추진하긴 한다 해도 불황이 끝나지는 않을 것 같다고 말하기 시작하셨지. 그리고 드디에 내가 열두 살이 되었을 무렵 레스토랑에 나가기 시작하셨지. 핑크색의 웨이트리스의 제복을 입고 말이야. 출근하는 것은 일 주일에 닷새 밤. 자존심 강한 어머니였던 만큼 그것을 자신의 명예의 실추로 파악했던 것이 틀림없었지만 신세 한탄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 아마도 어떤 굴욕을 당하든 그것을 입에 담지 않으면 굴욕 당한 것으로 되지는 않는다고 믿고 계셨겠지. 그래서 어머니는 당시 웨이트리스로, 삯바느질로, 피아노의 레슨으로 우리들의 생활을 지탱하고 있었던 거야. 하지만 불황이 깊어감에 따라서 우리의 피아노를 구박하러 오는 개구갱이들의 수는 자꾸만 줄어들었어. 나로서는 대환영이었지만 어머니는 상당한 타격을 받으셨어. 즉 그것은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부인당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신 모양이야.
어머니가 웨이트리스의 일을 시작한 것은 완전히 나 때문이었지. 나에게 그림의 재능이 있다고 굳게 믿으신 거지. 어머니는 나를 다빈치 이래의 천재, 아니 거기까지 미치지는 못하더라도 노먼 록웰 이래의 천재라고 믿고 계셨어. 그래서 내가 그린 그림은 모두 소중하게 보존하셨지. 모든 그림에 날짜를 기입하게 했으며 그 중의 몇 장은 액자에 넣어 간수했을 정도였어.
그림을 그리는 데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다 사 주셨지. '귀여운 마일즈'를 위해서라면 아무리 돈을 써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하신 거야. 그러면서 나를 애틀랜타의 예술학원에 입학시켰어. 매주 토요일 오전의 아동 클래스였지만. 그 때문에 어머니는 교통비. 재료비. 점심값을 연출해야만 했지. 그래서 웨이트리스의 일을 시작했던 거라구. 토요일 이외에는 안제나 일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그 레스토랑을 나는 이제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그것도 역시 자신으로선 만지거나 냄새를 맡거나 눈으로 보거나 확인하거나 할 수 없는 비밀, 상상으로밖에 그려볼 수 없는 비밀이었지.
마침 그 무렵이었어. 몸 속에 기묘한 감각이 싹트기 시작한 것은. 자신은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다, 다른 존재라고 느끼기 시작했던 거야. 내가 야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언젠가 얘기했을 거야.
그 당시에는 물론 또한 소년 시절조차 나는 야구가 싫었어. 게임의 룰을 알 수 없었고 다른 아이들과 함께 노는 일조차 없었어.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어. 아마도 타이밍의 문제였던 것 같아. 그해 여름에 나는 성홍열에 걸려 다른 아이들이 야구를 배울 무렵 줄곧 집에 틀어박혀 있어야만 했거든. 병이 나아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되었을 때에는 완전히 뒤쳐지고 말았지. 게다가 나는 그 때부터 머리만 크고 운동이 서툴었어. 그러한 자신에게 혐오감도 갖고 있었고. 어쨌든. 공을 던지는 것마저 제대로 할 수 없었으니까. 그래서 야구라는 것은 자기의 성미에 맞지 않는 것이라고 단정해 버렸지. 하지만 다른 애들보다 뛰어난 것이 적어도 하나는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어. 그것이 그림이었지. 나에게는 그림이 있었으며 다른 아이들에게는 없다. 그 후 풋볼 시즌이 다가왔을 때도 나의 반응은 야구와 마찬가지였지. 수영에 관해서도 그랬고. 그리고 어머니는 입버릇처럼 공영 풀장은 어디나 다 소아마비 바이러스의 불결한 배양장 같은 곳이라고 말씀하셨어. 그건 그리 틀린 얘기가 아니야. 그리고 어머니로 부터는 이런 주의를 듣지도 했어. 풋볼 따위를 하면 소중한 기능이 있는 팔이나 어깨뼈를 다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이떻게서든 피해야 한다고. 만약 그림 붓을 쥘 수 없게 되면 그 마법 같은 것이 불가능하게 되고 마니까. 그래, 종이에 여러 가지 것을 그리는 것에 의해 사람이나 장소나 빛을 소생케 하는 그 마법과 같은 작업이 말이야.
어머니는 나의 일을 염려하고 있었고 나는 어머니가 걱정하는 것을 걱정하고 있었어. 그렇기 때문에 운동은 일체 하지 못했던 거야. 지금도 운동의 규칙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관전하는 방식도 몰라. 그러니까 자네 말대로 그것은 아마 슬퍼해야 할 일일지도 모르지만 난 상관 없어. 스포츠의 매력을 알 수 없다 해도 전혀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실제로 나는 그런 것에는 흥미가 전혀 없으니까.
하지만 나는 별난 아이란 실감을 느낌을 가지고 성장한 것만은 확실해. 아버지가 없다. 스포츠와는 인연이 없다. 친구도 없다. 또한 나를 굶주리게 하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일하고 있던 어머니는 나를 기쁘게 해 주고 나를 예술의 길로 인도하는 것만을 삶의 보람으로 삼고 계셨으니까. 그래, 우리 두 사람만을 위해 그 커다란 통풍이 잘 되는 저택을 유지해 왔던 어머니는.
그건 그렇고, 그 토요일의 회화 교실은 나의 그 때까지의 생활을 일변시켰다고 말해도 좋을 거야. 나는 비로소 나와 같은 부류의 아이를 만났거든. 그 교실은 진짜 유별난 아이들의 사교장이었어. 모여든 아이들은 여느 아이들처럼 버스에 돌을 던지거나 철도의 레일 위에 1센트짜리 돈을 놓거나 하는 대신에 가만히 집에 틀어박혀 있는 그런 아이들이었으니까. 모두들 제각각 흩어져 살고 있었지만 공통점이 한 가지 있었지. 그것이 뭐냐하면, 온전한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는 한 명도 없었다는 거야. 부모님이 이혼한 아이가 상당히 많았고, 아버지가 돌아가셨거나 혹은 실종된 아이도 몇 명인가 있었어. 그렇기 때문에 곧 그림을 그리지 않는 아이나 혹은 부모님이 온전한 아이를 도리어 이상한 녀석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지.
아무튼 어머니는 그야말로 분골 쇄신하며 나의 성장을 도와주셨어. '수전노' 라는 말 알지? 어머니는 진짜 구두쇠였어. 어머니가 투자하는 것 중 가장 비싼 물건은 미술 관련 서적이었지. 그것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어.
우리가 살던 곳의 공공 도서관은 너무 시시한 것이었지. 일류 미술 서적이나 화집에는 대개 누드가 실려 있는데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거야. 무지 몽매한 침례교파의 바보 녀석들은 공공 시절에서 누드를 전시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거야. 틀림없이 녀석들은 마리에터의 모든 남성이 흥분해 자위 행위를 한 나머지 얼간이가 되어버릴 것이라고 염려한 것이겠지. 도서관에 미술 서적이 비치되어 있지 않으니 하는 수 없이 어머니가 그러한 책을 사주신 거야. 어머니가 미술 관계의 책이나 잡지를 적어도 주간에 한 권 정도 반드시 사 주었어. 대개는 급료를 타는 날에 사 주었다고 기억이 되는군.
나와 같은 또래의 소년들이 만화책이나 스포츠란의 기사를 읽고 있을 때 나는 주로 월터 페이터라든가 유젠느 델라끄로아의 일기라든가 루벤스나 레오나르도나 드가에 관한 책을 읽고 있었지. 그러한 사람들이 어떻게 하여 그러한 그림을 그리는지 알고 싶어 열심히 그들의 그림을 묘사하기도 하고 말이야. 그리고 보헤미안에 관한 책도 탐닉했지. 파리의 칼테라탄이나 뉴욕의 그리니치 빌리지에도 언젠가 가보고 싶다고 꿈꾸고 있었어. 나는 무엇보다도 마리에터라는 거리에서 조지아 주에서 후진적인 남부권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거야. 그리고 예술의 향기가 감도는 거리에서 진짜 예술가들과 사귀고 싶었어.
하이스쿨을 졸업하자 나는 망설이지 않고 예술 학교에 입학했지. 그 때 어머니는 이미 상당한 액수의 돈을 모아 놓고 있었어. 결국 전쟁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던 것 같아. 일본군이 진주만을 폭격했을 때 녀석들은 미국의 불황에 종지부를 찍어 주었던 거야. 전쟁이 시작되자 어머니는 리벳 공으로 변신해 버리셨어. 머리카락을 스카프로 동여매고 마리에터의 그렌 L. 마틴 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하셨거든.
전쟁이 끝났을 때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시더군. 나는 처음에는 두려워서 그러시는줄 알았어. 이제부터 다시 실직해 불황이 다시 찾아들고 그 괴로운 나날이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두려우신 것이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물어보니 그렇지 않았어. 어머니는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한 그 폭격기 '에노라 게이'가 마틴 공장에서 제작되었다고 하는 것을 알게 되신 모양이야. 그래서 자기도 그 저주스러운 폭격에 가담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 것 같아. 어머니의 얘기를 듣고 있자니 그 폭격기의 꼬리 부분에 리벳을 박은 것으로 인해 몇 만 명이란 인명들을 어머니 혼자 죽여버린 것처럼 들리더군. 피묻은 돈을 받았다고 하며 어머니는 흐느끼셨지. 이제부터는 모든 것이 바뀌고 말 것이다. 그 원폭에 의해 세계는 새로운 시대로 돌입했으니까 라고 말씀하셨지. 그리곤 다시 또 울음을 터트리시고! 하지만 피묻은 돈이든 어떻든 어머니는 많은 돈을 저축하셨어. 그래서, 내가 본격적으로 그림 공부를 할 만한 자금이 충분히 준비되어 있었던 거지. 나는 유화를 하고 있었고 카세인이나 구아슈(고무 수채화용의 불투명 물감)의 공부도 했어. 그 공부를 하는 데는 실제로 만만치 않은 돈이 필요하지. 그 학교에는 굉장한 소질을 가진 학생들도 있었고 엉터리 같은 녀석도 많이 있었어. 마침 '추상 실험주의'가 개화하고 있던 때로 <라이프>지 등의 날개에 커다란 첫머리 그림이 실리지도 했지. 화가들은 으레 기회만 있으면 공간이니 투상면이니 하는 얘기로 온통 날을 지샜고 잭슨 폴록이나 프란츠 크라인의 묘사법을 흉내내려고 기를 썼지. 나는 누구의 흉내도 내지 않았어. 나는 사람의 얼굴이나 육체나 무드나 날씨나 분위기를 좋아했거든. 내가 좋아한 것은 어디까지나 그리는 것 그 자체였으며, 그림물감을 드리우거나 흘리는 것이 아니었어. 아마 나는 모험을 시도하는 것도 두려워 했던 모양이야. 하지만 여하튼 나는 소신대로 밀고 나갔으며 옛부터의 화법을 계속 추구했지.
지금 생각해 보면 18세의 젊은이가 유행에 등을 돌린다는 것은 보기 드믄 일이었다고 생각해. 하지만 그곳은 남부였지. 사람들은 받드시 뉴욕에서 밀려온 참신한 화법에 친근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구.
어쨌든간에 내가 처음으로 개인전을 연 것은 1950년 6월 아직 예술 학원의 1년생인 때였어. 장소는 마리에터의 작은 화랑이었지만. 그 때 전시한 그림은 한국 전쟁이 발발했을 그때까지도 장식되어 있었어. 한국 전쟁 발발 소식을 전해 듣고 나는 몹시 화가 났지. 왜냐하면 나는 제2차 세계대전이 인류 사상 마지막 전쟁, 적어도 미국이 관여하는 최후의 전쟁이 될 것이라고 믿으며 자라 왔으니까. 나는 순진하게도 그러한 잠꼬대 같은 소리를 믿고 있었으니까 말이야.
그러나 그 아름다운 여름 날. 이제부터 나의 미래가 활짝 열리려고 하는 때 한국이란 엉뚱한 곳에서 그 전쟁이 일어나고 말았어. 남자들이 다시 죽어가기 시작했어. 언젠가 나의 차례도 올 것이 분명했지.
그것은 실제로 모든 것을 일변시키고 말았어. 나는 그것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전쟁이 시작된 그 6월 말의 밤, 엉엉 울음을 터트렸지. 자신이 어처구니 없는 바보처럼 생각되었어. 그럴 줄도 모르고 나는 이제까지 진지하게 인생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니 말이야. 불황이 끝나고 전쟁도 끝났다. 이것들은 평화가 영원히 계속되고 우리들은 모두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진지하게 장래의 계획을 세우고 있었거든. 그 계획을 깨끗이 종이에 정리까지 해 놓았어. 먼저 미술 코스에서 본격적으로 그림 공부를 하고 그런 다음 2,3년쯤 파리에서 지낸다. 그 후 피렌체로 가서 르네상스 거장들의 그림을 포용하고 그들의 비밀을 배운다. 틀림없이 로마의 태양에 타서 살갗은 갈색으로 변해 있을 것이다. 그리고 1962년경 빌리지와 뉴욕의 화랑에 개선하고 미술관이나 예술지에 실려 있는 나의 작품과 대면한다. 나는 나름대로의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지. 어리석은 로맨티시스트처럼.
겨울이 됨 즈음에는 몇 천 명이란 전사자가 나기 시작했지. 나도 언젠가 징집될 것이라고 각오를 했어. 그래서 어차피 징집될 바에야 해군에 들어가고 싶다고 생각했지. 어째서인지는 몰라. 아마도 윈슬로 호머라든가 터너의 그림을 보고 영향을 받았을 거라고 생각해. 일단 그렇게 생각이 들자 이미 다른 가능성 따위는 생각할 수 없게 되더군. 마리에터의 집 침실에서 나는 침대에 가로누어 밤 늦게까지 생각했어. 아래충의 방에서는 어머니가 치는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고. 그 무렵에는 이미 돈에 대한 걱정은 없었으므로 어머니는 자기만의 즐거움으로 연주를 하셨지. 그것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동안에 머리 속에서는 망망한 바다의 광경이 자꾸만 떠오르더군. 나는 멋진 전함에 서 있다. 그리고 파도의 구조를 관찰하고 있는 것이다. 하늘의 색조라든가 색채도 익혀 둔다. 위대한 전함의 갑판에 선 마일즈 레이필드.
어쨌든 나를 해군으로 내보낸 것은 보병 부대와 압록강에 대한 공포만은 아니었던 것은 확실해. 다른 사정도 여러 가지가 있었지.학교 동급생과의 트러블이라든가 아내와의 문제라든가로. 하지만 그런 얘기는 자네에게 할 필요는 없겠지. 어쨌든 나는 어느 날 아침 보병부대보다는 나으리라고 생각한 끝에 해군에 입대했어. 그야말로 이 답답한 남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 생각해서. 이윽고는 그 위대한 전함의 함교에 설 수 있다고 생각해서 말이야. 내가 품게 된 가장 어리석은 몽상이었다고 말할 수 밖에 없지. 말보다 증거이며 난 지금 가련한 생쥐처럼 남의 눈을 피하면서 그림을 그리고 있으니까. 이런 어두운 움막에 숨어서 말이야. 이 꼴로는 로마의 태양을 우러러 볼 날이 올 리가 없겠지.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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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오후 4시경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고 헬리콥터는 전부 이륙을 금지당했다. 도화지와 목탄을 고기 싸는 종이로 싸고 그것을 마스킹 테입으로 동여 맨 다음 밖으로 나섰다. 랠리 파슨스가 차를 몰고 나가려던 참이어서 로커클럽까지 편승하기로 했다, 파슨스는 금발의 거한으로 그리 친구가 많은 편은 아니었다. 결혼하고 기지 밖에서 지내고 있는데 무슨 일이든 남들보다 서너 템포쯤 빗나가곤 했다.
"그런 봉지를 들고 어딜 가나?" 그는 물었다.
"친구한테."
"허어, 친구가 있어? 이런 곳에?"
"그럼, 있고말고, 자네는 없어?"
"응, 그야 글쎄 있기는 하지만." 당혹한 듯이 그는 말했다.
"실은 말이야, 나보다는 여편네 쪽이 친구가 더 많아서 말이야. 여편네는 교회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어서 언제나 행사가 많다구. 이번엔 빵굽기 콘테스트다 해안가의 피크닉이다 하면서 말이야."
"그것 참 재미있겠는걸."
차가 로커클럽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서둘러 뛰어내렸다. 재빨리 옷을 갈아 입고 세면대의 거울 앞에서 머리를 매만졌다. 잠시 문 안쪽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멕시코만에서 밀려오는 빗방울이 비스듬히 흐르고 있다. 하이웨이의 저쪽에서는 <빌리즈>의 네온이 지지직하는 소리를 내고 있는 것 같았다.
이덴 산타나.
그녀와 만나면 뭐라고 할까.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머리 속으로 시나리오를 엮어 나가려다 그만두었다. 그런 짓을 해 보았자 소용없다. 그녀에게 통할 리가 없다. 그녀는 나보다 훨씬 세상 물정에 훤하다. 신파조의 행동이나 말 따윈 곧 간파당하고 말 것이 뻔하다. 나는 그 때부터 그릴 그림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기억하고 있다. 그렇다, 일단 사생이 시작되게 되면 그녀는 단순한 모델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나에게 앞을 예측할 수 없는 두려운 존재는 아닌 것이다. 그 때 나는 이미 마일즈로부터 목탄의 측면을 사용한 포름과 양감을 표출하거나 인체의 윤곽을 데생하는 방법을 배웠다고 기억한다. 하지만 지금 새삼 돌이켜 생각해 보니 기억이 흐리다. 그에게서 배운 것은 이덴을 만나러 가기 전이었을까? 아니면 후였을까? 그로부터 몇 십 년이 지난 나는 지금 이렇게 노상 주차한 채 해 저무는 하늘과 축축한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노쇠한 나무 한 그루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지금 진실로 그 때 로커클럽 안에 서 있던 젊은이의 흉중을 회상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멋대로 지어내고 있는 것일까?
갑자기 클랙슨이 울렸다. 그건 확실하다. 곧 빗줄기를 통해 밖을 보았다. 포드의 김으로 흐려진 창문 안에 그녀가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그 광경을 회상해 보면 지금도 명치 근처가 싸르르하다. 그녀는 약속을 지켰던 것이다. 도화지를 단단히 겨드랑이 곁에 밀어붙이며 나는 흙탕을 튕기면서 그녀에게 달려갔다.
'당신이 이곳에 있을지 어떨지 자신이 없었어요."
미소를 지으면서 도어를 열며 그녀는 말했다.
"날씨가 이렇게 지독하니까요. 하지만 가보자고 생각했죠. 당신에게 전화를 걸 수도 없으니까요."
"고마워요,"
그녀는 하이웨이를 타고 거리에서 멀어져 갔다. 시계는 그리 좋지 않았다. 거리의 경계선을 넘어서자 빛은 거의 사라졌고 차의 하이빔이 빗속에서 아른대고 있는 것같이 보였다. 포드의 엔진은 그르릉거리기도 하고 쿨럭거리기도 했지만 윙윙대는 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연달아 담배를 피운 까닭인지 회색빛으로 떠오르는 얼굴이 약간 여위어 보였다. 오늘은 그 섣달 그믐 날 밤에 버스 안에서 입고 있던 것과 같은 까만 터틀넥 스웨터였다.
"나의 머리카락은 마치 전기 소켓에 손가락을 질러넣은 것 같죠?"
힐끗 나를 보며 미소지었다. 웃어 보이니까 여윈 느낌은 지워져 버린다. 확실히 그녀의 머리는 고슴도치처럼 곱슬곱슬했다.
"하지만 그 느낌도 좋은데요."
"난 말예요, 전부터 그 여배우 같은 헤어스타일을 동경하고 있었어요. 그 리자베스 스코트란 사람 있잖아요? 알아요? 그런 헤어스타일. 하지만 나에게는 그런 행운이 없나봐요. 생각한 대로 스타일이 나오지 않아요. 비에 젖거나 하면 금새 망가져 버려요. 이렇게 여기저기 솟아오르고. 길게 기르든 짧게 컷을 하든 마찬가지예요. 뻣뻣하게 일어나서 제멋대로 흩어지고 말아요."
그녀는 웃었다. 그 약간 갈라지는 듯한 웃음 소리는 지금도 귓가에 남아있다.
"정말 애를 먹여요, 이 머리는."
어두운 강에 걸려 있는 다리를 건넌 지점에서 그녀는 오른쪽으로 꺾었으며 차는 자갈을 튕겨대기 시작했다. 나무숲에 양쪽이 차단된 1차선 도로에 우리들은 접어 들고 있었다. 차는 전후 좌우로 흔들렸다. 타이어가 공전하고 스피드가 떨어졌는가 했더니 다시 가속되었다. 그녀는 입을 꽉 다물고 양손으로 단단히 핸들을 쥐고 있었다.
"젠장!" 욕이 그 입에서 새어나왔다.
"이런 제기랄!" 그런 다음 힐끗 내쪽을 향해,
"미안해요." 하고 말했다.
차는 수목이 무성한 공터로 미끌어져 들어갔다. "가능한 한 가까이까지 대겠어요." 일단 좌측으로 돌자 그녀는 기어를 변경해 후진했다. "자아, 빠듯해요."
엔진을 껐다. 주위가 잘 보였다. 차는 길다란 트레일러 하우스 앞에 멈춰 있었다. 트레일러 차체는 청색과 은색으로 테를 두르고 있었다. 입구의 화분에 꽃이 심겨져 있었지만 비를 맞아 모두 고개를 떨구고 있다.
"자아." 그녀가 말했다. "달리는 거예요."
시어즈의 재킷을 머리에 쓰고는 그녀는 흙탕을 튕기며 입구를 향해 달려갔다. 승강구의 계단에 서서 자물쇠를 열고 두 사람 모두 안으로 들어갔다. 나의 등 뒤로 손을 뻗어 도어를 쾅하고 닫았다. 그리고 자물쇠를 잠그고 불을 켰다.
"대단한 집은 아니지만 여유있게 지낼 만해요."
온통 꽃 세상이었다. 작은 화분의 꽃, 도자기 꽃병에 꽂은 꽃, 물을 담은 우유병에 꽂혀 있는 꽃. 그것들이 도처에 놓여 있었다. 개수대 옆 카운터에, 소형 냉장고 위에도, 창틀 위 차광막이 닿을락말락한 곳에. 벽에서 돌출되어 있는 작은 테이블의 꽃병에 심어진 것은 양아욱이었다. 비의 내음과 짙은 꽃향기가 트레일러 안에 자욱하다.
"이 트레일러는 원래 어느 해군의 것이었어요. 그 사람 제2차 대전이 끝날 무렵 이걸 샀는데 한국전쟁이 시작되어 해상 근무로 나가게 되고 말았어요. 그 후 남에게 빌려 주고 있어요. 집세는 월 35달러구요. 그쪽에서는 좀더 원했지만 에누리했죠. 이 근처는 흑인들의 거주 구역이니까."
폭이 좁은 화장대에서 옷걸이를 꺼내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면서 나는 어딘지 모르게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젖은 시어즈 백화점의 유니폼을 옷걸이에 건 다음 작은 화장실에 가져다 걸어놓고 있다. (좀 도와주려고 해도 조금만 움직이면 화분을 걷어차고 말것 같군.) 하고 생각했다.
"아, 참! 하마터면 잊어버릴 뻔했군......"
가스렌지 밸브를 열고 그녀는 두툼한 무쇠 냄비를 약한 불에 올려 놓았다.
"어제 말예요, 검보 수프(아욱의 일종인 오크라가 들어있는 닭고기 수프)를 만들어 놓았어요. 해군의 맛 없는 식사만 먹다 보면 가정 요리가 그리워질 것 같아서. 검보는 만든 다음 날 저녁에 먹어야 제일 맛이 있거든요."
그리고 그녀는 머뭇거리듯 나를 보았다. 그 표정을 보고 안심이 되었다. 그녀도 역시 그녀 나름대로 긴장하고 있는 것이리라. 잠깐 실례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화장실로 사라졌다. 조금도 쉬지 않고 지붕을 두드리고 있는 빗소리만이 들려왔다. 단조롭게 반복되는 그 소리와 졸음을 부추기는 꽃향기가 섞여 모종의 나른한 분위기가 트레일러 안에 가득했다. 나는 손가락으로 머리를 빗으며 머리카락을 세우려고 했다- .
생전 처음으로 어른의 관능 세계로 들어가려 하고 있는 그 젊은이의 모습이 지금도 나의 뇌리에 또렷이 살아있다. 그는 입수염도 기르지 않았거니와 귀밑털도 자라지 않았으며 젖은 머리카락은 찰싹 머리에 달라붙어 있었다.
화장실에서 그녀가 돌아왔다. 나에게 의자에 앉으라고 재촉하고는 자기는 소형 냉장고에서 양상추와 양파와 토마토를 꺼냈다. 그리고 샐러드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은 기민하게 쉬지 않고 움직였다. 양상추의 잎을 떼고 토마토를 잘랐으며 기름과 소금과 식초를 가미시켰다. 그리고 순수한 보리빵 두 조각을 토스터에 넣었다. 양손을 계속 움직이면서 그녀는 빠르게 때로는 긴장한 목소리로-그래서 도리어 나는 침착해질 수 있었지만-떠들어 대면서 샐러드를 믹스하거나 검보를 섞거나 했다. 그동안 나는 쭉 그녀의 맨발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몸집이 작았다. 반면 발은 비교적 컸다. 그녀가 맨발로 리놀륨 바닥을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는 그 소리에 나는 무언의 자극을 받고 있었다. 그녀는 잇따라 숨을 거칠게 내쉬며 질문을 던졌고 나를 줄곧 계속해서 떠들게 했다. 그녀는 모든 것을 알고 싶어했다. 어느 학교에 다녔는지, 양친은 어떤 사람인지, 형제의 이름은. 어머니가 죽은 것을 알게 되자 어머나, 안됐군요 라고 했다. 내가 카톨릭 신도로 자란 것을 알게 되자 기뻐했다.
"카톨릭 교도들은 대단히 아름다운 음악을 창조했잖아요."
두 개의 하얀 그릇에 그녀는 검보를 갈라 놓았다. 게와 새우와 라이스의 내음이 뒤섞인 짙은 냄새가 코를 찌른다. 이어서 샐러드를 접시에 담아 내 자리에 놓고 자기 것도 접시에 담았다. 그녀가 맞은편에 앉는 것을 기다려 나는 맹렬히 먹기 시작했다.
"너무 소금을 많이 치면 안 돼요." 그녀는 말했다.
"어느 요리에나 간은 이미 되어있으니까. 그리고 내가 보니까 당신은 평소에도 소금을 너무 많이 치더군요."
그녀는 가만히 나를 관찰하며 결점을 지적하고 있었다. '당신은 평소에도 소금을 너무 많이 치더군요.' 소금을 너무 친다든가 적게 친다든가 하는 따위를 한 번도 염두에 둔 적이 없었다. 다만 무의식적인 행동일 뿐. 달걀에, 고기에, 샐러드에. 조금 먹는 속도를 떨어뜨리고 그녀를 힐끔힐끔 쳐다보면서 그녀가 먹는 속도에 맞추기로 했다. 그 당시 나는 에티켓이라는 것에 관해 그리 아는 바가 없었다. 집에서는 나이프나 포크를 어떻게 사용하든 상관하지 않았고, 해군에 들어와서도 우선 기억해 둬야 할 규칙이나 군기가 너무나 많아 에티켓 따위는 생각할 틈도 없었다. 어쨌든 그녀를 모범으로 삼기로 결정했다. 그녀가 검보를 먹는 모습을 나는 지긋이 지켜보았다. 소금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그녀의 향수의 희미한 향기와 검보 스프의 짙은 향기가 뒤섞여 트레일러 안은 안온한 분위기가 넘쳐 있었다. 그리고 물론 꽃향기도 감돌고 있었으며 지붕을 계속 빗방울이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뉴욕에 관해 알고 싶어했다. 뉴욕에서는 누구에게나 성공할 기회가 있다든데 사실인가. 나는 자못 뉴욕에 정통한 사람인 양 대답했다. 물론 태어난 이래 브로드웨이의 연극은 두 번밖에 본 적이 없다는 얘기 따위는 하지 않았다. 브룩클린은 맨해튼과는 다르다는 것도 덮어두었다. 그리고 누구라도 성공할 기회가 있는지 어떤지 하는 것도. 사실은 이제까지 알고 있는 사람 중 성공한 녀석은 한 사람도 없다. 물론 나를 포함해서.
나는 좀더 안전한 화제로 바꾸어 파라마운트 극장이나 메트로 폴리탄 뮤지엄, <린디즈>나 <투츠 쇼즈> 등, <밀러>지에 실리는 월터윈첼의 컬럼을 읽거나 라디오에서 수박 겉핥기식으로 알게 된 것에 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나의 대답이 어쩐지 미심쩍은지 지긋이 귀를 기울이고는 다시 질문을 던지곤 했다. 그러는 동안에 나는 머리 속에서 좀더 요긴한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마침내 포즈를 취하게 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쪽은 어떤 타이밍으로 도화지의 보자기를 풀어놓아야 하는가. 이 식사가 언제까지나 계속되면 좋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면 다음에 던져올 볼에 관한 것이라든가 예상을 할 수 없는 반응 따위에 관해 고민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뉴욕에는 당신이 보고 싶어하는 것은 무엇이든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정신을 차리자 나는 말하고 있었다. "그래요, 어떠한 것이든 말예요."
"어머나, 그래요? 꼭 그렇다고 단언할 수는 없을 걸요." 그녀는 말했다. "왜냐하면 내가 보고 싶은 것 중에는 이집트의 피라미드 같은 것도 들어 있으니까."
"피라미드?" "어머나 당신은 보고 싶지 않아요? 토토왕과 그의 보물이 발견된 무덤을 보는 것은 멋지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리고 난 스핑크스도 보고 싶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스핑크스'라고. 냅킨으로 입을 닦은 다음 그녀는 계속했다.
"난 말예요, '세계의 일곱 가지 불가사의'를 전부 보고 싶어요. 하나도 빠짐 없이!" 한숨 돌리더니, "물론 지나친 욕심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전에 백과사전에서 보았어요. '세계의 일곱 가지 불가사의'의 모든 것을. 지금은 모두 기억해 낼 수 없지만 다시 한번 조사해 리스트를 만들어 보고 싶어요. 비록 현실로 볼 수는 없을지라도 꿈속에서 생각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겠어요......"
이 베이비가 이제 드디어 느긋해진 걸까? 마이클 데블린은 실컷 먹었고 배가 불렀다. 그는 소금을 지나치게 치는 것도 피했다. 그리고 그녀의 얘기를 들으면서 생각하고 있다-. (그녀는 나보다 그다지 연상으로 보이지도 않는군.)
비오는 밤 트레일러 속에서 그녀는 줄기차게 나에게 얘기를 걸어왔다. 연기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파티에 데려가 달라고 아양을 떨고 있는 것도 아니다. 물론 영화 스타인 체하고 거드름을 피우는 것도 아니다. 의자를 뒤로 물리고 천천히 다리를 꼬고 그녀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그때 나는 그녀와 대등하게 서로 얘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을 비로소 발견했던 것이다. 그녀는 확실히 자기보다 연상이지만 내가 알고 있는 것을 그녀가 알지 못하는 일도 있을지 모른다. '세계의 일곱 가지 불가사의'를 모두 열거하는 것 따위는 불가능하지만 그녀가 얘기하는 것을 듣고 있으면 자기 또래의 여성과 얘기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것이야말로 세계의 미지의 불가사의에 관해 두 사람이서 찬탄하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녀는 일어나 커피를 끓였다. 그러자 다시 가슴이 빨리 고동치기 시작했다. 그녀는 테이블을 정리하고 담배를 재떨이에 놓고 진지한 얼굴로 접시 위에 뜨거운 물을 붓기 시작했다. 타올로 양손을 닦고 이쪽으로 등을 보이며 오랫동안 개수대를 내려다 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그러는 동안 크게 심호흡을 했나 하고 생각했는데 이쪽을 돌아보며 미소지었다.
"그럼 시작해 볼까요."
"그래요, 좋아요."
나는 도화지의 보따리에 손을 가져갔다.
"도구를 모두 준비해 왔어요." 내심으론 굉장히 당황하고 있었다.
"하지만 만약 지쳐 있다면......"
"난 이런 경험은 처음이에요."
조용히 말하고 어수선한 트레일러 안을 둘러보더니 제일 안쪽의 소파 같은 침대로 눈길을 보냈다.
"그래서 해보고 싶어요."
"저어." 가슴을 두근거리며 말했다.
"무리해 가며 할 것까지는......"
"어머나, 나보다 당신이 더 상기되어 있네요, 베이비."
"아니 난 별로..... "
"그럼 당신도 처음이에요? 사실대로 말해보......"
"아아, 여자를 그리는 것은 처음이에요."
"여하튼 해보기로 해요."
빙그르르 트레일러의 안쪽을 향하자 그녀는 그 커다란 발로 거침없이 침실의 구획된 곳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커튼을 당겼다. 나는 도화지와 목탄을 꺼내 침실과 식당 사이에 둔 카운터 위에 놓았다. 땀이 배이기 시작한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비는 여전히 지붕을 두드리고 있다. 트레일러 속의 공기가 한층 더 습기를 띠기 시작했고 짙게 느껴졌다. 나는 생각했다. (그녀와 나는 이 방의 공기를 모조리 빨아들이려 하고 있다. 창문을 열어 놓는 편이 좋겠다. 아니 그것보다 이곳을 나가는 편이 좋다. 이대로 있다가는 질식해 버리고 만다. 꼭 오늘 밤이 아니라도 좋지 않은가. 그리고 만약 형편없이 그린다면 어떻게 하지? 그 때는 끝장이다. 모든 희망이 단절되고 만다. 일막의 끝이다. 나는 정체를 폭로당하고 만다. 진실로 그녀를 알기 전에 이쪽의 정체를 간파당하고 만다. 아무리 실력 발휘를 한다 해도 나는 마일즈처럼 그릴 수는 없다. 하지만 그녀는 대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만약 내가-. 만약 그녀가-. 만약-.)
커튼이 둘로 갈라지고 헐렁한 남자용 셔츠를 입은 그녀가 나타났다. 머리카락은 전기를 띠고 있는 것처럼 곤두 서 있다. 지긋이 이쪽 얼굴을 응시하고 있는 동안에 그녀의 얼굴에도 붉은 기운이 돌았다. 한쪽 발을 다른 한쪽 발로 덮듯이 하고 서 있는 그 자태는 몹시 싱싱했다.
"어떻게 하면 될까......" 중얼대듯 그녀는 말했다.
"그래, 그렇지...... 그 소파에 앉을게요. 이 의자를 이렇게 이곳으로 옮길 테니까...... 그런데, 어때요 담배 한 대 피울래요?"
"아뇨, 지금은 괜찮아요. 이렇게 하는 건 어떨까요?"
소파에 앉자 베개 둘을 옆에 끌어당기자 그곳에 팔을 짚고 기대었다.
"그래요, 좋아요. 대단히 좋아요. 그렇게 하고 편히 있어요."
"이것도 벗는 편이 좋을까?"
침착해 라고 그 때 마이클 데블린은 자기에게 말했다. (침착해, 도기 호건처럼, 캐니언 소여처럼, 찰리 파커처럼. 침착하라구. 이건 과일이나 항아리나 산 따위를 그리는 것과 다를 것 없으니까.) 그리고 목탄 가루로 검게 물든 엄지손가락이나 집게손가락을 응시하면서 대답했다, "그래요, 그 편이 좋으면."
그녀는 단추를 끄르고 스르르 손을 소매에서 빼내어 셔츠를 등 뒤로 떨어뜨렸다. (드디어 나타났다. 그녀의 육체가 지금 나의 눈앞에 있다.) 그녀는 순간 거의 본능적으로 가슴 위로 양팔을 교차시켰다. 그곳에서 한쪽 다리를 끌어올렸고 다른 한쪽 발을 소파 끝에서 늘어뜨려 근육을 풀려고 하듯이 어깨를 움추렸다.
"어떨까 이 포즈는." 그녀는 말했다. (이미 팬티도 브래지어도 장식 벨트도 걸치고 있지 않다. 슬립도 드레스도 입고 있지 않다. 비에 갇혀버리고 만 꽃향기가 감도는 이 답답하고 옹색한 장소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내 앞에 서 있다.)
"그래요, 좋군요 분위기가."
나는 호흡을 멈추었다. 거치른 숨을 토해 내거나 하여 자신이 그녀의 나신에, 성숙한 여체에 홍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 순진한 카톨릭 베이비'라고 여겨지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상대가 알아차리지만 않으면 어떻게 즐기든 꺼릴 것이 없다.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육체는 고향의 여자애들의 아직 소년 같은 육체와는 완전히 달랐다. 그 애들의 몸은 가볍게 접촉하거나 냄새를 맡거나 쓰다듬거나 하긴 했어도 타고난 그대로의 모습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그리고 지금 눈앞에 있는 육체는 잡지에서 본, 뼈가 여기저기 튀어나온 패션 모델의 육체하고도 다르다. 이것이야말로 아름다운 여자의 육체다. 나는 미친 듯이 그리기 시작했다. 단아한 유방과 우아한 어깨의 윤곽을 그리고, 적당히 긴장된 복부의 느낌을 포착했다. 가슴과 히프 부분은 다른 부분보다 훨씬 뽀얗다. 얼굴, 등, 다리 그리고 팔 등은 햇빛에 그을려 보랏빛이었다. 하지만 요전날 밤 해안에서 언뜻 볼 수 있었던 그 숨겨진 피부, 그 부분이 지금은 분명히 보인다는 점이었다. 풍요롭고 칠흑 같은 음모는 두발보다도 더 곱슬거렸고 전등의 불빛을 받아 촉촉히 빛나고 있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흥분을 참고 있었다. 자아 인체의 데생의 기본을 상기해 보라고 스스로에게 명령했다. 머리 부분을 정확히 그리면 자연히 정확한 비율이 생겨나게 된다. 가슴을 과장하는 것이 아니야, 그렇지 않으면 가슴에 이상하게 집착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니까. (하지만 굉장해, 저런, 바로 눈앞에 그녀의 가슴은) 채색된 동그스름한 가슴. 다음은 다리다. 다리를 바르게 그려. 발잔등의 곡선, 밋밋하게 커브지고 있는 발목.
그녀는 조용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뺨의 붉은 기운도 가시고 뭔가에 매료된 듯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전체의 윤곽, 포름, 가느다란 묘사선 등에는 갈색의 목탄을 사용했다. 힘을 너무 지나치게 넣어 세 번을 부러뜨리고 말았다. 눈 그릴 차례가 되었을 때 좀더 까만 목탄으로 바꾸었다. 목탄의 측면을 사용해 그림자를 그리고 까만 머리카락이나 음모의 양감을 표출시켰다. 각진 곳은 손가락으로 흐리게 했으며 양 발도 흐리게 해 육체감을 살렸다. 좋아, 이것으로 어떨까. 그녀를 보고, 그림을 보았다. 더 이상 첨가할 것은 없다. 다시 한 가닥이라도 불필요한 선을 그리면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 종이를 뜯어내 카운터에 놓았다.
"그럼 포즈를 바꾸어 보겠어요?"
냉정한 프로의 화가를 자처하며 말을 걸었다. 그림을 보여 달라고 말하지 않았으므로 안심했다. 그녀는 몸을 움직여 소파의 끝에서 내리고 있던 발을 완전히 바닥에 내리 짚고 트레일러의 벽에 기대었다.-그리고 꿈틀 몸을 떨었다.
"어머, 차가워라. 저어 이런 건 어때요?" 이번에는 얼굴을 젖혔다.
턱 밑에 길이 3센티 정도의 상처 자국이 보였다. 거무스름한 살갗에 하얗게 돋보이는 옥죄임. 하복부의 까맣게 큰 V자 위에도 상흔이 있다. 크기는 작지만 턱의 상처보다 훨씬 또렷했다.
"아, 좋아요." 그렇게 대답하긴 했어도 마음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의식적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구나. 어딘가에서 본 핀업 사진을 떠올린 듯이.) 하지만 그 포즈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면 그녀는 틀림없이 면박당했다고 생각하겠지. 마치 이쪽이 소금치는 일로 주의를 당했을 때 느꼈던 것처럼. 그래 어차피 대단한 거짓말은 아니니까......"
"그것 참 멋진 포즈군요."라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이번에 전보다 좀더 세심하게 그렸다. 그녀의 속눈썹은 대단히 길었다.
"지금 어딜 그리고 있죠?" 눈을 감은 채 그녀는 속삭였다.
"목."
그녀는 목으로 손을 미끄러뜨렸다. 나는 마침 그 부분에 음영을 넣고 있었다.
"이번에는?"
"당신의 쇄골. 저 목의 밑부분에서 양 어깨로 뻗어있는 뼈가 있잖아요."
그녀는 한 손가락으로 쇄골을 더듬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멈추었다.
눈은 감은 채 호흡이 미묘하게 흐트러지기 시작하고 있다.
"이번에는?" 쉰 목소리로 그녀는 속삭였다.
"당신의 가슴."
그녀의 손이 가슴으로 옮겨갔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굴곡을 따라 누군가 다른 사람의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애무했다. 나는 열심히 그리는 손에 의식을 집중했다. 하지만 그것을 비읏기라도 하듯 굳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번엔 배."
그녀의 손이 배로 내려지고 눈을 꼭 감은 채 긴장된 살갗과 배꼽의 우묵한 곳을 쓰다듬었다. 그러는 동안에 까만 풀숲을 꾹 손바닥으로 누르면서 그녀는 말했다. "저어 이쪽으로 와요, 베이비."
나는 그 촉촉히 젖은 사랑 속으로 이끌려갔다.
그녀는 조용히 옷을 입었고 고무장화를 신은 다음 노란 레인코트를 걸쳤다.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좀더 그녀를 그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저 옷 아래 감춰져 있는 비밀들을 자신은 알고 있다고 생각하자 섬칫한 전율에 사로잡혔다. 옷을 입고 있는 그녀는 대단히 사랑스럽다. 그녀는 지금 머리를 뒤로 흔들어 넘기고 로커클럽까지 나를 차로 전송해 주기 위해 세찬 빗속에 뛰어들려 하고 있다. 그녀는 나를 향해 생글생글 미소짓고 있다. 반짝이는 불빛을 받으며 그녀의 얼굴은 싱그럽게 빛나고 있었다. (저어...... 당신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죠? 가르쳐 주지 않겠어요? 당신은 진정으로 만족한 건가요, 아니면 날 슬프게 하지 않으려고 만족한 척 한 건가요. 다음이라고 말하지 말고 지금 말해 줘요.)
"자아 서둘러야 해요."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 "폐문 시간에 늦겠어요."
그녀가 문을 열자 바람에 쾅하고 문이 다시 닫혀 버렸다. 이번에는 내가 밀고 계속 버티고 있었다. 빗줄기는 여전히 내리치고 있었다. 나무들이 윙윙 소리를 내며 울어댔고 보이지 않는 수면에 메아리치고 있었다.
"저기에는 있잖아요, 호수가 있어요."
트레일러 뒤편의 어두운 곳을 그녀는 가리켰다.
"아기자기한 호수예요. 연못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너무나 작아 이름도 없어요. 스틱스 강으로 흐르고 있지요. 이상한 이름이죠, 스틱스란?"
트레일러의 문을 세차게 닫은 다음 두 사람은 차가 있는 곳까지 달려갔다. 난 조수석에 올라 탔고 그녀는 비에 젖은 채 핸들 앞으로 미끌어져 들어갔다. 그녀는 차를 스타트시켰다.
"스틱스 강이란 철자는 혹시 s-t-y-x?" 나는 물었다. "그렇다면 '삼도내'란 의미군요?"
"아마 고대 이집트라면 그랬겠죠. 그리고 그리스도 들어갈지도 모르고. 하지만 이 플로리다의 돌출부에선 그런 일 없어요. 그건 틀림 없어요. 아마 이곳 녀석들은 sticks라고 말하려던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닐까."
그녀는 가소로운 듯이 읏음을 터뜨렸다. 나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녀는 트레일러에서 섹스를 한 뒤 차에 달려가 자연스레 시동을 걸고 와이퍼를 움직이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스틱스 강을 화제로 농담을 해댈 수 있는지를, 그녀는 마치 영화관에서나 볼 수 있는 줄거리 속의 주인공 같았다.
나 자신은 그 때 전혀 다른 정신 세계를 헤매고 있었다. 머리 속은 온갖 생각으로 들끓고 있었다. 몸이 무거워진 것 같은 기분. 그렇다. 단번에 20년쯤 시간이 지난 것 같으면서도 지금 막 이 세상에 태어난 것 같은 그런 기분이라고 하면 적당한 표현이 될까. 그녀의 얼굴에서는 변화를 암시하는 아무런 징후도 내비치지 않았다.
아아, 마이클, 동정을 잃은 지 불과 얼마 안 되는 이 철부지야- 나는 생각했다.
그녀가 운전하는 포드는 때때로 바퀴를 공전시키면서 자갈길을 터덜거리며 달리고 있었다. 하이빔의 라이트가 퍼붓고 있는 비의 깊숙한 저쪽의 어둠을 꿰뚫고 있다. 그 때 하이웨이에 통하는 길로 꺾어드는 직전에 있는 모퉁이에 흑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우산을 손에 들고 나무 밑에 서 있었다. 바비였다.
"잠깐만요!"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저쪽 가까이에 대줄 수 없을까요. 저 남자는 같은 기지의 병사거든요. 친구죠."
그녀는 순간 주저하는 듯했지만 결국 한숨 섞인 말투로 좋아요 라고 하며 길가에 차를 바싹 대고 창문을 내리면서 말했다.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눈치챌텐데요, 베이비?"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볼덴이 천천히 그러면서도 신중히 다가와 차를 바라보았고 안에 있는 우리들을 들여다 보았다.
"KKK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있군요 틀림없이. 자아 빨리 타세요."
그는 겨우 나의 얼굴을 알아보고 끄덕이며 우산을 접기 시작했다.
내가 문을 열어 주었다.
"이거, 실례합니다." 그는 올라탔다.
"이 분이 로커클럽에서 내려줄 거예요." 나는 말했다.
"그곳에서부터는 달려야 해요."
"서둘러서 옷을 갈아입고 오면 게이트까지 바래다 줄 수 있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들은 흠뻑 젖을 거예요."
"할 수 없이 신세를 져야겠군요."
로커클럽으로 서둘러 달리는 동안 세 사람은 말이 없었다. 그녀는 핸들을 덮어 씌우듯이 하고 전방의 빗속을 꿰뚫고 있었다. 로커클럽 앞에 이르렀다. 볼덴과 나는 곧장 뛰어 나갔다. 클럽에 들어선 순간 생각이 났다. (이거 어쩌지, 도화지와 목탄을 트레일러에 놓아두고 왔군.) 즉, 그 그림을 마일즈에게 보여줄 수 없게 된다. (하지만 괜찮아.) 라고 곧 고쳐 생각했다. 어차피 잘 그려지지 않았을 것이 뻔하고 그 여자가 누구냐고 모두에게 질문당하는 곤혹스러운 상황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누구한테도 참견당하고 싶지 않다. 이건 비밀인 것이다. 나만의 비밀. 꽃향기가 그윽한 비에 갇힌 그 작은 트레일러 안에서 가진 비밀인 것이다. 하얀 제복을 입고 사복을 옷걸이에 걸었다. 볼덴은 벌써 갈아입고 나를 기다리고 있다.
"정말 괜찮겠나?" 그는 물었다.
"뭐가요?"
"머리가 모자라는 녀석들이 떠들어댈 거야, 나 같은 흑인을 그런 여자가 차로 게이트까지 바래다 주었다는 것이 알려지면 말이야."
"무슨 소리예요, 빨리 갑시다!"
그녀는 우리들을 게이트까지 바래다 주었다. 볼덴이 먼저 내려서 수위실로 달려 들어갔다. 앞으로 1분만 지나면 자정이었다.
"다음에는 언제 만날 수 있죠?" 서둘러 물어 보았다.
"글쎄요."
"글쎄라니요, 글쎄가 무슨 뜻이죠?"
"생각을 좀 해봐야겠어요. 오늘 밤의 일에 관해.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지만......"
"토요일에 만나줘요. 부탁이에요. 그때 서로 얘기하면 되잖아요. 앞으로 1분 내에 게이트로 들어가지 않으면 무허가 부대 이탈이 되고 말아요. 부탁해요......"
"일요일로 해요." 그녀는 말했다.
그 얼굴에는 망설이는 빛이 있었지만 그녀는 내 팔을 꼭 쥐어 주었다.
"오전 10시. 둘이서 피크닉 가요."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는 게이트로 달려가 휴가 허가증을 경비병에게 보였다.
"슬라이딩 세이프군 그래, 세일러." "흐음." 나는 말했다.
볼덴이 다가왔다.
"저 녀석도 머리가 모자라는 편이야. 조심하는 것이 좋아."
그는 이쪽의 팔꿈치를 붙들고 우산을 폈다. 두 사람은 빗속을 헤치며 병영으로 향했다. 흘끗 뒤를 돌아보자 하이웨이의 출구에 멈춰 있는 그녀 차의 후미등이 반짝였다. 그녀는 지금부터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볼덴이 나를 보고 머리를 흔들어 보였다.
"여간 내기가 아니군 그래, 자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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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온 세계가 맥시코 만에서 몰아치는 빗속에서 잠들어 있을 때 바비는 나를 식당 위의 흑인용 병사, '암흑의 왕국'이라고 그들이 부르는 커다랗고 길다란 방으로 데려가 주었다. 문간을 들어서자 바로 코앞에 테이블, 의자, 버너가 넷이나 있는 가스렌지와 냄비와 프라이팬과 접시, 그리고 냉장고 등이 있었다. 끈적한 공기에 튀겨낼 베이컨 냄새가 온통 뒤섞여 있었다. 볼덴의 얘기에 의하면, 요리사들은 식품 창고나 식기 창고의 열쇠를 가지고 있어서 자신들의 음식은 이곳에서 만든다고 한다.
"모두들 먹고 있을 때 녀석들은 일해야만 하지." 그는 말했다.
"그러니까 먹고 싶을 때 언제든지 먹을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어. 지금처럼."
내부의 소리가 전 기지에 새나가지 않도록 모든 창문에 검정 칠을 한 튼튼한 차광막이 내려져 있고 문에도 틈새를 막는 것이 설치되어 있다. 대형의 소란스러운 에어컨이 창문 하나를 막아 버리고 있었다.
"저게 망가져 버리면," 그가 말했다.
"그야말로 C-47 수송기의 폭음 같은 소리가 날 것 같지 않나?"
이쪽에서 들어가자 프레디 헤러드가 책 너머로 얼굴을 내밀고 '어이' 하며 손을 흔들고는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당시 필리핀은 아직 독립한 지 4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루손의 산중에서는 하크 게릴라가 전투를 계속하고 있었다. 미국 해군은 그들을 아직 요리사나 잡역 담당으로밖에 적합하지 않은 식민지의 시종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그는 다른 동료들에게도 나를 소개해 주었다.
"어이 자넨가"라든가 "얘긴 들었어"라든가 등의 친밀감 있는 말들이 오갔다. 틀림없이 그가 전에 내 얘기를 해 두었던 것이리라. (하지만 나에 대해 어떻게 소개해 주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음악을 잘 알고 있다며 으시대는 백인, 뉴욕에서 온 백인 철부지, 말주변이 좋은 백인 창고계, 그런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흑인들의 반응에서 짐작하건대 그렇게 심할 정도의 설명이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모두들 다정하게 악수해 주었다. 그들의 신체적 특징과 이름을 관련지어 머리에 새겨두려고 마음을 썼다. 만약 녀석의 이름을 잘못 부르기라도 하면, 이 녀석도 어차피 니그로의 얼굴은 모두 같은 것이라 여기는 편이라고 취급할지도 모른다.
주된 얼굴들을 들면 먼저 탬버와 라이트닝이 있었다. 탬버는 배가 불룩 나온 팔이 가느다란 붉은 기운이 있는 머리카락의 남자, 라이트닝은 키가 작은 근육질의 금니가 하나 있는 남자. 그리고 로드 아일랜드 프레디에 범퍼하고 리틀 엘로이. 로드아일랜드 프레디는 곱슬머리를 약품으로 똑바로 핀 가느다란 입수염의 뚱뚱한 남자, 범퍼는 금속테 안경을 쓴 입술이 얇은 남자, 엘로이는 커피색의 가슴에 누드 여인의 문신을 새긴 대머리의 거한이었다. 그밖에도 자고 있는 녀석이나 침대 주위를 어슬렁거리고 있는 녀석들이 있었고 시내에 나간 패거리도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암흑의 왕국'의 주요 맴버는 대충 이쯤이었다.
그날 밤은-여느 날 밤도 그렇다는 것을 언젠가 알게 되지만-까만 살갗에 눈부실 만큼 하얗게 빛나는 T셔츠를 입은 로드아일랜드 프레디가 조리를 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로커 룸에서 게임이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풋볼 선수에 비유하면 맞을까? 떠들어 대거나 농담을 하거나 서로의 어머니에 관해 어처구니 없는 농담을 주고 받거나 쓸데 없이 왔다갔다하거나 때때로 앉아 음악에 귀를 기울이거나. 마침 그 때 로이드 프라이스란 가수의 노래가 들려왔다.
로디, 로디, 로디,
미즈 크로디
모두 함께 합창하고 있었다. 나는 맥주와 베이컨, 에그가 담겨 있는 접시를 받았다. 검보를 먹었을 때의 만복감은 이미 희미한 것이 되어 있었다. 아니, 그보다 그 후의 비밀스러운 일 덕분에 아직 공복이라는 편이 옳을 것 같다. 프레디 헤러드가 다가와 맛이 어때 하고 물었다. 아, 최고 최고인데요 라고 대답했다. 로드아일랜드 프레디는, 너 할렘의 민턴스 플레이하우스에는 가 본 적이 있느냐고 물어왔다. 아니, 애석하지만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아직 어려서 연령 제한에 걸려서 말이야. 하지만 52번가쪽에는 자주 갔으며 클럽 아이비스의 열려진 문 너머로 테이텀의 피아노를 들은 적은 있지. 그리고 한 번 빌리 할러데이가 리무진에서 내려서는 것을 본 적이 있고 말이야."
그 때 그녀가 백인과 함께였다는 것은 말하지 않았다. 얼굴을 들자 바비는 케이스에서 색소폰을 꺼내고 있는 중이었다. 자아 시작이야 라고 로드아일랜드 프레디가 말했다.
볼덴은 로이드 프라이스의 곡에 맞추어 색소폰을 불기 시작했다. 프라이스의 레코드를 그들은 몇 번씩이나 되풀이해 걸어 놓고 있었다. 그는 저음부로 흐릿한 땀 냄새가 나는 듯한 더티한 음을 내게 했다. 지금은 거기 모인 모두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볼덴은 가사의 템포를 일부러 벗어나도록 연주하고 있었다. 로디, 로디, 미즈 크로디. 45회전 플레이어의 두툼한 회전판에 또다시 레코드가 갈아 끼워졌다. 내가 맥주를 다 마시자 누군가가 다른 또 하나를 건네주었다. 레코드가 바뀌어 패츠 도미노의 노래가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내일은 집에 돌아가련다 너의 매정한 마음을 견딜 수 없어
내일은 집에 돌아가련다 너의 매정한 마음을 견딜 수 없어
패츠 도미노의 얼굴은 머리에 떠오르지 않는다. 당시는 패티 페이지, 조 스태포드, 조니 레이, 더불어 틴 팬 알리가 전성 시대를 뽐내던 마지막 해, 소위 '건전하고 상식적인' 미국 음악의 마지막 해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동시에 로큰롤이 탄생하기 1년 전이기도 했지만.
도미노의 노래를 듣고 있는 동안에 범퍼가 말했다.
"이건 대단한 노래야. 하지만 북부의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흑인이 모든 것이 싫어져 남부로 돌아가고 싶다는 것이겠지."
그러나 리틀 엘로이가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 이건 말이야 너 같은 변변치 못한 해군을 노래한 걸거야."
그러한 응수가 교환되고 있는 동안에도 바비는 계속 색소폰을 불어대고 있었다.
모두들 유쾌하게 마시고 먹고 하면서 음악에 맞추어 약간씩 건드렁 건드렁 몸을 흔들어대고 있다. 프로페서 롱헤어와 샤프링 헝가리 안즈라고 하는 밴드의 '그녀에겐 머리카락이 없다'고 하는 곳이 있었다. 이 녀석은 모두를 속이고 있어 라고 탬버가 말했다.
"왜냐하면, 이 녀석은 헝가리인이 아니라 우리들과 같은 니그로 거든."
이어 로이 브라운과 마이티 마이티 맨에 의한 'Gocd Rockin' 'To-
night'. 또한 같은 멤버에 의한 'Cadillac Baby' 그리고 'Trouble at Midnight'이라고 하는 울부짖는 듯한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은 노래가 흘러 나왔다. 그 노래를 듣는 순간 그 트레일러 안에서 이덴과 지냈던 때와 같이 필링이 한 순간에 바뀐 것을 기억해 냈다. 같은 마이클 데블린이면서도 그 노래를 듣기 전과 듣고 난 후에는 자신이 일변해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무튼 생전 처음으로 들어보는 곡이었던 것은 틀림 없다. 노래의 내용은 여자와 어울리거나 취하거나 실수도 한다는 그러한 일상적인 것이었지만 리듬이 별난 것이어서 일종의 백 비트라고 할까 4분의 4의 박자도 아닌 '심포니 시드'에서 연주되는 비밥의 믹스트 템포와도 달랐다. 그런 생각에 빠져 있는데 어느새 '핏발이 선 눈을 내게 향하지 말아요'라는 남자의 노래로 바뀌어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위노니 해리스였지만 그 때는 몰랐다.
바비는 여전히 자기의 피치로 연주하고 있었다. 마치 별천지에의 여행티켓을 받은 것 같은 느낌으로 나는 다시 잔을 비웠다. 누군가가 스테이크를 바비에게 가져오자 그는 연주를 멈추었다. 침대 끝에 앉아있던 나를 알아보고 그는 다가왔다. 그의 색소폰도 자취를 감추었고 음악은 순간 싱거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업템포의 절규하는 것 같은 노래에 맞추어 작고 복잡한 스텝으로 춤추는 탬버를 그는 바라보고 있었다. 이 음악, 참 좋군요. 나는 그에게 말했다.
"그래, 벤 웹스터하고는 완전히 다르기는 하지만 이 음악은 살아있어." 그는 말했다.
"모든 사람이 꽤꽥 떠들어대면서 즐기는 음악이지. 블루스에서 직접 탄생되어 가스펠 사운드도 약간 들어 있으니까 말이야. 이건 클럽에서 들으면 좋을 거야. 비록시라든가 메이콘과 같은 장소에서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뉴올리언스의 듀 드롭 인이라든가...... 흑인이 모이는 술집이 좋은데. 그곳에서 버본을 마시거나 마리화나를 피우는 거야. 그래야 비로소 진가를 느끼게 되는 거지. 저런 레코드로 들으면 느낌이 많이 달라. 이 사운드는 마치 들판에서 연주하고 있는 것처럼 들리지. 이렇게 파워도 없거니와 생동감도 없어. 필링이란 것이 없는 거야......"
그는 의자에 기대려고 했다. 충만함과 졸음이 오는 그런 얼굴이었다. 레코드는 다시 패츠 도미노로 바뀌었다. 나는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서든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억하려고 힘쓰고 있었다. 그 때의 나는 자기의 인생에 있어 외부 세계와 모두 단절되어 있었다. 그렇다, 해군이나 이덴으로부터도.
"만약 래드 캐논이 이곳에 들어오면 그 녀석은 어떻게 할까요?"
"놈은 오지 않아 여기는."
"어째서죠?"
"오게 되면 우리들이 잡아먹고 말 테니까."
그는 웃었다.
"돈을 내고서라도 그런 구경은 하고 싶군요."
"놈에게는 밉보이지 않는 편이 좋아." 그는 말했다.
"내가 걱정하고 있는 것은 그 녀석이 아네요. 이 해군이란 집단에게 타락하게 되지 않을까 하고 그쪽이 걱정이죠."
"해군에도 밉보이지 않도록 해."
스테이크를 모두 먹어 치우고 그는 나를 향해 돌려 앉았다. 주위에는 여전히 음악이 쾅쾅 들려오고 있었다,
"그 교외에서 나를 태워준 것은 어째서지?"
"그야 당신이 비에 젖어 서 있었기 때문이지요."
"비에 젖었다고 해서 어쨌다는 거지? 이보라구, 이곳에서는 여자가 운전하는 차로 흑인을 태워 주면...... 맞아 죽어도 불평할 수 없어."
"하지만 내가 들은 바로는 당신은 평소에도 언제 맞아죽어도 어쩔 도리가 없는 짓을 하고 있는 것 같던데요?"
그는 갑자기 의아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누구한테 들었지?"
"누구한테나마나 이 기지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것 같더군요."
"놈들이 뭐라고들 하지?"
"글쎄요 정확한 것은 모르지만. 다만 바비는 백인 여자와 교제하고 있다고......"
"저 니그로인 바비가 백인 여자와 사귀고 있다고 하겠지."
그의 목소리는 갑자기 험악해졌다.
"아네요, 그런 식으로 말하지는 않았어요."
"그럼 네가 주의 깊게 듣고 있지 않았던 거야, 베이비."
"자아, 타협을 하나 해야겠군요."
약간 긴장된 기분을 드러내며 나는 말했다.
"나를 '베이비'라고 부르지 말아요. 그러면 나도 당신을 '베이비'라고 부르지 않을 테니까."
순간 치려고 덤벼들 것 같은 눈으로 그는 쳐다 보았다. 그리고 나서 웃음을 터뜨렸다.
"이 녀석 입담 하나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래드 캐논한테도 똑같은 말을 들었죠."
"좋아 알았어. 그렇게 하도록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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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비가 고백한 이야기
난 나프타운에서 태어났지. 인디애나폴리스의 조그만 마을이지. 그곳은 사 계절이 뚜렸했지. 물론 겨울도 있었고. 나는 눈을 치우거나 썰매 놀이를 하거나 쓰레기통 뚜껑으로 언덕의 경사면을 미끌어져 내려오거나 하는 따위의 놀이를 하면서 자랐지. 이 나라의 평범한 아이들과 마찬가기로 말이야. 그래, 너하고 마찬가지로 말이야. 하지만 이젠 남부가 좋아, 설령 인종편견으로 똘똘 뭉친 멍천한 녀석들이 많더라도. 왜냐구? 여긴 더우니까. 여름에는 숨도 쉴 수 없을 정도로 더워지니까. 이곳은 겨우 40년 만에 한 번쯤 눈구경할 수 있을 정도라구. 난 그게 마음에 들어. 눈 같은 것은 이제 사진으로 보는 것조차 싫어. 술잔에 얼음을 넣는 것도 싫을 정도라구. 눈을 보면 난 침대로 기어들어가지. 그리고 눈이 사라지면 머리에 떠오르는 시체 사이에서 일어나지. 그리고는 반드시 한국에서의 추억으로 연결되어 버려. 모든 것이 한국으로 되돌아가 버린다구.
얘기가 너무 앞질러갔군. 너는 내가 어떤 남자인지 알고 싶어하는 데 난 쓸데 없는 눈 얘기만 하고 있군. 아마도 한국 때문에 내 대가리가 돌아비린 것 같아, 하긴 미쳐 버리는 원인은 또 있지만 말이야. 예를 들면 여자 문제라든가.
그야 어쨌든 고향인 나프타운에서는 피부색은 그다지 화제가 되지 않았어. 그 전쟁, 제2차 세계대전까지 그 마을 사람들은 백인과 흑인이 꽤 사이좋게 살고 있었다구. 내가 살고 있던 구역에도 백인의 아이가 있었구 말이지. 난 그들하고 놀았고 녀석들도 나하고 놀곤 했어. 학교에서는 백인의 아이들과 함께 밴드도 했었는데 당시 나는 트럼펫을 불었지. 그 무렵의 분위기는 대부분 이런 느낌이었다고 생각해. 너의 머리는 빨갛다, 나의 피부는 까맣다, 그래서 어떻다는 얘기지? 그런데 그런 분위기가 어느새 변하기 시작했어. 전쟁이 시작되자 군수 공장에서 일하기 위해서 흑인이 남부에서 많이 왔어. 그런데 새로운 주택을 세울 여유가 없으니까 이주해 온 흑인들은 원래부터 있던 흑인들의 집에서 동거하기 시작했지. 그러자 백인들이 다른 곳으로 이사가기 시작했다구. 겉으로는 이사가는 이유에 대해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지만 나의 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이유는 간단했어. 즉, 우리 흑인보다 백인이 많을 때에는 괜찮지만 흑인 수가 많아지면 녀석들은 견디질 못한다고 하더군. 그리고는 여러 가지 차별이 일어나기 시작했어. 처음에는 사소한 차별이었어. 예를 들자면 백인 아이들에게 배급되는 것은 새 교과서인데 우리들에게는 다 떨어진 낡은 교과서가 배급된다든가 말이야. 그리고 흑인의 주거구에서는 도로나 하수도의 수리도 만족하게 받을 수가 없게 되었어.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우리들 거주구는 슬럼으로 변해가고 있었다구. 살고 있는 백인이라고 해야 고작 이사도 갈 수 없는 노인들이었지.
나는 마을을 떠나는 일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지. 나는 장남이었고 그때는 17세, 하이스쿨 4학년이었어. 사촌인 찰리 닐이라는 녀석이 있었는데 우연히 그 녀석이 해군에서 주방장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어. 휴가 나온 그의 모순은 절도가 넘치고 정말이지 멋져 보였어. 그래서 그와 의논을 했지, 해군 입대에 관해서. 47년이었는지 48년이었는지, 전쟁이 끝난 직후의 일이지. 당시 라디오에서 여러 가지 뮤지션의 연주를 들으면서 이렇게 생각했다구. 좋았어, 길은 두 가지야. 처음부터 뉴욕으로 가서 버트나 디지 같은 사람들과 '미톤즈'와 공연할 수 있는 위치가 되도록 노력하든가 아니면 일단 해군에 입대해서 GI 장학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하든가. 장학금을 받을 수 있다면 음악 학교에 돌아가서 하모니나 컴퍼전 등의 음악 이론의 기초나 악기의 연주를 본격적으로 공부할 수 있으니까 말이야. 그렇게 하면 위대한 음악가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린다는 생각이었어.
어느 쪽으로 할 것인지 나는 결정해야만 했어. 처음부터 뉴욕으로 뛰어 들어서 그 재즈의 괴물들과 공연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는 것은 역시 무모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렇다기보다는 두려웠지. 맨손으로 버틴다는 일이 말이야. 그렇다면 이제 장학금을 받아서 음악 학교에서 배우는 길밖에 남아 있지 않았어. 그런데 해군에 들어가는 것도 내키지 않았어. 몇 넌 동안 백인을 위해서 주방장 노릇을 한다는 것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어. 그것은 제복을 입은 잡역부나 마찬가지잖아. 그건 '개봉취소'의 기분이었다구.
그런데 문제가 또 하나가 있었어, 알아듣겠어? 내가 하는 말을? 난 약간 성가신 일에 말려들어 있었지. 사귀고 있는 여자 아이가 임신을 해 버렸거든. 그녀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나를 찾고 있었어. 그 사람들한데 사살되든가 아니면 그녀하고 결혼을 하든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했지. 어느쪽 길을 선택하든 난 끝장이라구. 왜냐하면 나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지 않았으니까. 하긴 그녀가 불쌍하다는 느낌은 있었지. 하지만 그런 느낌만으로 결혼할 수는 없잖아. 그래서 사촌이 돌아간 뒤에 잠시 생각하고는-기껏해야 2,3시간 정도였지만-
나는 다운타운으로 가서 징병 담당관과 이야기를 했지.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하더군. 잘 듣게, 지금 해군은 옛날과는 달라, 인종 차별은 철폐되어서 자네는 주방장을 할 필요도 없어, 물론 뮤지션이 될 수도 있지...... 그래서 나는 입대를 결정한 거야.
내가 화가 치민 것은 신병 훈련소를 나갈 때가 되니까 군악대에는 빈 자리가 없다는 말을 들었던 일이야. 지망자가 너무 많아서 대기자 명단이 58년까지 쌓여 있다는 거야. 그리고는 죽어도 주방장이 싫다면 위생병이 되는 길이 있다더군. 즉, 군의관을 돕는 일이지...... 그래서 생각했어, 까짓것, 그것도 괜찮잖아. 그것도 전역했을 때 도움이 될지도 몰라. 뮤지션이 되는 꿈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에는 말이지. 그리고 마음이 있다면 재즈쪽은 혼자 공부할 수도 있지. <다운바트>나 <메트로놈> 등의 잡지를 읽거나 새로운 음악을 듣거나 하면서 말야. 어디에서 제대를 하든 그곳에서 어딘가의 악단에 들어가도 되는 것이고.
그래서 나는 위생병 학교에 들어갔어. 위생병의 일이라는 것은 간호사와 똑같은 일이라는 것은 금방 알았지만, 까짓것 어떠냐고 생각했어. 난 자신에게 말했어. 이건 임시방편에 불과해. 덱스타 고든의 아버지도 의사였잖아. 마일츠 데이비스를 보더라도 그의 아버지는 치과 의사였다구. 의학과 재즈라는 녀석은 어떤 정점에서 관계를 맺고 있을지도 모르겠는걸....... 나는 잭슨빌 기지에서 일했지. 1년이 지났어. 일류 맘보 악단의 연주도 들었고 말이야. 위대한 색소폰 연주자의 연주도 들을 수 있었고. 그러던 차에 한국전쟁이 일어난 거야.
나는 제1 해병대대에 배속되었어. 왜냐하면, 해병대는 언제나 위생병이 부족했기 때문이지. 왜냐하면, 위생병이 필요할 때라는 것은 언제나 격렬한 총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라서 위생병 자신도 엄청나게 위험하다구. 11월에 들어섰을 때 그 대대에 살아남은 건 나 하나였어. X대대는 초신 저수지 옆을 눈과 얼음을 헤치고 행군해 나갔지. 그때까지 40마일이나 행군을 계속해서 전 대원이 모두 꽁꽁 열어 있었어. 아무튼 지면이 무쇠처럼 딱딱해서 참호도 팔 수가 없을 지경이었거든. 가토라는 곳은 영하 17도였어. 더군다나 기온은 점점 더 내려갔지. 그래도 우리는 행군을 계속했다구, 그 별것도 아닌 압록강을 향해서, 멍청한 중국을 향해서. 어느날 유담이라는 마을에 들어간 적이 있었지. 그곳은 포병대의 공격으로 엉망진창으로 날아가 버린 마을이었어.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데, 그 마을 모퉁이의 기와 조각 더미에 앉아서 한 노파가 울고 있더라구, 몸뚱이가 꽁꽁 얼어붙은 채 한국말로 뭔가 노래하고 있었어. 그것은 한국의 블루스 같은 음률이었어. 그런데 우리는 아무 도움도 줄 수가 없었어. 물론 함께 데리고 갈 수도 없었지. 그때 목표 지점은 더욱 그렇다구. 그렇다고 해서 그 노파는 되돌아갈 수도 없었어. 돌아갈 곳이 없었으니까. 어쩔 도리가 없었던 우리는 노파를 그곳에 내버려두었어, 죽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아아, 혼자석 얼어 붙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때 우리는 터무니없이 두꺼운 옷을 입고 있었지. 털모자에 파카에 두꺼운 내복에. 계속해서 땀을 흘리고 있었어. 그래서 멈춰서면 땀이 얼어붙는 거야. 양말을 벗으려다가 살갗이 주욱 벗겨진 녀석도 있었다구. 발도 얼어서 군화에 달라붙어 버릴 지경이었지. M-1 캐빈을 맨손으로 만지기라도 할라치면 살갗이 벗어져버리는 거야. 아무튼 브로닐 오토매틱 라이플조차도 얼어붙어 버렸으니까. 그래서 어떻게든 발사할 수 있도록 소변을 뿌린 사람도 있었고 정발용 와일드루트 크림 오일을 바르는 사람도 있었어. 아니면 크레물이지. 그 크레물은 최상이었어. 그래, 그 하얀 끈쩍끈적한 크레물은.
엄청나게 추운 밤. 우리는 403고지의 칠흑에 휩싸여 있었어. 그러자 유난히 빠른 말투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구. 이해하겠어?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을? 한국말이 아닌 것은 분명했어. 한국어는 대충 짐작할 수 있게 되어 있었거든. 그건 중국말이었다구. 하지만 중국어일 리가 없다고 누군가가 말했지. 중국은 참전하지도 않았고 우리들도 아직 중국을 침입한 일은 없었으니까 하고. 그런데 10시가 조금 지난 무렵부터 녀석들은 진격해 오기 시작했어. 그래, 그 중국군이. 녀석들은 일제히 사격을 중지하더니 이싱한 나팔을 불기 시작했어. 미친 놈이 불고 있는 것같이, 박자를 무시한 단조로운 울림이었지만 말이야. 그것을 신호로 녀석들은 꾸역꾸역 밀려온 거라구. 하얀 군복을 입은 병사들이 눈도 얼음도, 그 냉혹한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밀려왔어.
해병대는 끝에서 끝까지 사격했지. 쏘고 쏘고 또 쐈다구. 그래도 녀석들은 밀려왔어. 쌓인 눈이 피로 물들어도 계속 공격해 왔어. 어떤 해병대원은 총의 볼트가 얼어붙어서 화가 난 모양인지, 참호에서 일어나서 녀석들에게 총을 던졌어. 그 녀석은 곧바로 배에 구멍이 뚫렸지만 말이야. 그러는 사이에 드디어 녀석들은 우리 위생병들에게도 공격해 오기 시작했어. 그 빌어먹을 고지에 남아 있던 위생병은 고작 6명. 하지만 부상병을 간호할 틈도 없어. 자신들이 살아 남는 것도 힘든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손에 잡히는 대로 무기가 될 만한 것을 붙잡고 싸웠지. 참호 파는 삽, 나이프, 총검 등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서 말이지, 제일 중요한 총이 얼어 붙어서 도움이 되질 않으니까 정말 화가 치밀더군.
그러는 사이에 나팔이 울리자 녀석들은 순식간에 철수하기 시작했어. 저 서툰 나팔을 부는 녀석이 누구든 난 그 녀석의 엉덩이에 키스하고 싶었다구. 정말이지 끔찍한 상황이었어. 여기저기에 부상병이 널브러져 있었으니까. 나는 즉각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기 시작했어. 그게 또 쉽지 않더라구. 왜냐하면, 응급용 몰핀 주사기가 얼어붙었거든, 수혈용 혈액도 얼어붙었고 그러는 사이에 혈액병이 추위 때문에 뻥뻥 깨지기 시작하더라구. 부상병은 모두 54명, 전사자는 엄청나게 많았어. 일단락 끝난 다음에 죽은 중국병의 무기를 빼앗으러 갔는데 녀석들이 가지고 있는 무기를 보고 졸도할 뻔했다구. 말도 안되게 녀석들은 1903년형 스프링필드총으로 싸우고 있었어. 우리는 최신형 총을 가지고 있었는데 얼어붙어서 도움이 되질 않고. 녀석들은 활과 같은 유물로 싸우고 있었던 거야. 더군다나 우리를 압도하기 직전까지 갔으니! 나는 즉시 거기에서 벗어나고 싶어졌어.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겠지. 아무튼 그 고지에서 벗어나 어딘가로 도망치고 싶었다구. 하지만 그렇게 할 수도 없었지. 우리는 그 아래 계곡의 도로를 확보하기 위해서 고지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받았거든. 아무튼 증원 부대를 기다리라는 거야.
그래서 우리는 중국군의 시체를 끌고 와서 그것을 방벽으로 삼았고, 침낭에 눈을 담아서 경사면에 놓았어. 바람은 점점 세차게 불어닥쳤지. 그날 밤, 녀석들은 또다시 나팔을 불면서 밀려왔어. 이쪽은 이제 죽을 힘을 다해서 사격했어. 녀석들이 침낭을 총검으로 찌르고 있는 것을 쐈고 공격해 오는 것도 쐈어. 탄환이 계속되는 한은 쐈다구. 나는 19명 정도를 넘어뜨렸다고 생각되는데 얼굴 하나 제대로 보지 않았어. 그러는 사이에 또다시 나팔이 울리더니 녀석들은 재빨리 철수했어. 그로부터 1시간 후에 다른 해병대원들이 합류해 왔어. 그 수가 59명, 아니 100명 정도는 되었지. 그자들도 고립되어 간신히 퇴로를 개척해 온 것이었어. 우리와 마찬가지로 기진맥진해 있었지만 말이야.
그제서야 아침이 다가왔고 하늘이 강철처럼 회색으로 변하기 시작했어. 그리고 완전히 날이 밝자 아군의 비행기가 날아와서 물자를 투하하기 시작했어. 탄약, 식량, 약품, 필요한 것을 차례 차례로. 나는 빈사 상태의 병사에게 몰핀을 주사했고 환자들에게 붕대를 감기 시작했어.
중국군은 꼬박 하루 동안 접근하지 않았어. 그래서 나는 이거 어쩌면 살아 남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고 생각했지. 그동안 3일은 이제 죽은게 틀림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본능적으로 그렇게 믿고 있었다구. 그렇게 생각하니까 실제로 살아 있으면서도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로 느껴졌어. 무슨 일을 해도 이젠 소용이 없다고 생각해 버렸다구. 그런데 갑자기 희망이 솟구치기 시작했어. 어쩌면 살아 남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무서워졌어. 그 때까지는 생각할 여유도 없이 그저 무의식적으로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어. 그러다가 생각할 여유가 생긴 거라구. 그러자 무서워졌어. 죽고 싶지 않았던 거야. 살아서 집으로 돌아가서 재즈를 연주하고 싶어졌다구. 자신의 오줌에 범벅이 되어 동사하는 것은 정말이지 싫다, 저 중국군 녀석들에게 살해당하는 것은 정말이지 싫다. 그런 욕심이 생겨났어. 나중에 알았지만 이틀 싸우고 하루 쉬는 그것이 중국군의 전법이었더군. 하지만 그 저주 받은 고지에 붙잡혀 있던 우리들은 그런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그저 떨고 있었어. 크래커를 먹으면서 말이야. 그 나팔이 울리길 기다리고 있었어.
그러는 사이에 이동한다는 연락이 들려왔지. 전술적 퇴각이라고 누군가가 말하더군. 다른 방향으로 전진한다고 말한 해병대원도 있었지만 요컨대 퇴각한다는 것은 누구나가 알고 있었지. 전선의 전역에서 우리는 중국군에게 공격당해 어쩔 수 없이 퇴각하는 거였어. 그리고 통로는 하나밖에 없었어, 퇴로하는 통로말이야. 우리도 중국군도 모두 알고 있었지. 우리는 간신히 전사자들을 매장했어. 전부 85명. 그자들은 아직도 유담 마을의 땅속 깊은 곳에 잠들어 있다구. 제7연대, 제2대대, 폭스 중대의 병사들. 그 녀석들은 아직도 한국에 있다구. 영원히 말이야.
그리고 우리는 출발했지. 우리가 타고 갈 트럭도 몇 대 있었고 도중에서 합류하는 트럭도 늘어나기 시작했어. 이곳저곳의 언덕에서 지칠대로 지친 해병대원이 비틀거리며 내려왔어. 중상을 입은 병사들은 동사를 방지하기 위해 트럭의 라디에터에 붙잡아 맸어. 모두들 누가 죽었고 누가 살아 있는지 구별조차 할 수 없는 몰골이 되어 있었어. 너무나 추워서 맥도 잡을 수가 없어. 옷을 갈아입을 수도 없지. 난 이내 알아차릴 수 있었다구, 그 녀석의 눈동자가 움직이면 살아 있고 만약에 움직이지 않으면 이제 가망이 없다, 놓고 갈 수 밖에 없다 하고 말이야.
걸을 수 있는 녀석은 걸을 수 있는 녀석대로 설사 때문에 죽을 지경이었지, 모두 미친 놈 같은 눈이었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걸었어. 모두 죽고 싶지 않았던 거지. 어떻게든 살고 싶었던 거라구. 얼음을 피해서 따뜻한 곳으로, 고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구. 나는 이미 발의 감각이 마비되어 버려서 그저 기계적으로 걸음을 재촉하고 있을 뿐이었어. 발을 향해서 필사적으로 말했어. 자아, 제발 움직여 줘. 하고. 자아, 잘 들어. 오른발을 내밀고 다음엔 왼발 하는 식으로. 좋아, 그렇게, 양 발을 계속해서 움직여다오. 약속의 땅으로 나를 데리고 가 다오. 나를 죽게 내버려 두지 말아 다오.
트럭의 짐칸에서 낙하산을 깔고 그 위에 부상차를 눕혔어. 모두 줄로 붙들어매서 말이야. 그러는 사이에 어떤 다리에 이르러 건너기 시작했는데 도중에 그 다리가 무너져 버렸어. 모두들 열심히 후퇴했지만 트럭 한 대가 강으로 떨어져 버렸어. 얼음으로 덮힌 절반은 꽁꽁 얼어붙은 강이었지. 그러자 목숨을 걸고 두 사람의 해병대원이 강으로 뛰어 들어서 트럭에 타고 있던 사람들을 구해냈지. 짐칸에 붙잡아 매두었던 줄을 절단하고 사람들을 강가로 끌어 올렸다구. 훌륭하게 목숨을 구해냈던 거야. 내가 해병대원을 욕하는 녀석을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지. 하긴 나도 녀석들은 좋아하지는 않아. 특히 플로리다에서 경비를 맡고 있는 멍청한 녀석들은. 그렇다고 해서 해병대 그 자체를 나쁘게 말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 아무튼 녀석들은 목숨을 내걸고 싸웠으니까.
하갈에 당도한 것은 12월 3일이었어. 그곳은 꽤 큰 마을이었어. 마침 눈이 심하게 내리고 있었고 우리는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서 한숨 돌리고 있었어. 그러는 사이에 눈 사이로 희미하게 비행장이 보이기 시작했어. 그곳에는 비행지가 착륙해 있었고, 성조기가 펄럭이고 있었고, 텐트가 있었고, 트럭이 도열해 있었어. 비로소 깨달았다구, 빌어먹을, 드디어 해냈다. 정말로 이제 살아 남았다 하고 말이야. 그러자 그때 그 미친 듯한, 빌어먹을 해병대원들이 행진 대형을 짜지 시작했어. 부상을 입고 절반은 얼어붙고 녹초가 된 녀석들이 말이야. 그리고 놀랍게도 보조를 맞추면서 그 마을로 행진하기 시작한 거라구. 어떤 대위는 턱이 절반은 날아가 있었어. 머리며 뭐며 온통 붕대 투성이라서 그야말로 미이라도 그런 미이라가 없었는데 역시 행진하기 시작하더라구, 보조를 맞추어서 자랑스럽게. 정말이지 빌어먹을 해병대원들이란!
내가, 총상을 입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그때였어. 동상에 걸리고 탈수 증상이 온 데다가 더군다나 왼쪽 대퇴부에 총탄을 맞고 있었지. 언제 어디에서 맞았는지 전혀 기억이 없었어. 물론 나는 영웅이 되려고 했던 거는 아니야. 단지 죽고 싶지 않았을 뿐이지.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어, 그 혹한의 밤에도 말이야. 그야, 적도 몇 명인가 죽였지. 그건 분명해. 숫자는 기억하고 있지 않고 이름도 모르지만 말이야. 나는 그저 마구 쐈을 뿐이야. 그때 고지에 얼어붙어 있던 몇 십 명이나 되는 가련한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이 경험으로 내가 변했다고 생각하나? 그래, 자네 허연 엉덩이를 걸고 맹세하지만 나는 변했어. 이제 앞으로 두 번 다시는 속지 않겠다고 가슴에 맹세했고 나는 고향으로 돌아갔어. 이제 두 번 다시 백인을 위한 니그로가 되지는 않겠어. 설령 그로 인하여 문제아 취급을 당해도 상관없어. 나는 한국에 갔구, 미국에 대한 의무는 제대로 다했다구. 이제 더 이상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하는 지시는 받지 않아. 백인한테서 지시는 받지 않아. 백인에게 굽실굽실 머리를 숙이고만 있는 흑인에게도 지시를 받지 않아. 녀석들이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네가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나는 미국인이야. 그러니까 미국인답게 살겠어. 앞으로 6개월이면 이 해군도 제대하지. 9월에는 GI장학금을 받아서 어딘가 학교에 다닐 생각이야. 그래, 한 사람의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말이야. 어딘가의 음악 학교에라도 다닐 생각이라구.
어딘가 따뜻한 곳에 있는 음악 학교에 말이야.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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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사로 돌아가려고 바깥의 어둠 속으로 걸어 나가자 날씨는 개어 있었다. 나는 여러 가지 사실에 만족해하고 있었다. 저녁 식사나 그리고 이덴에게. 새로 접했던 상스러운 듯하면서도 다이내믹한 음악에. 자신이 아직 '니그로'라고 부르는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형성된 친밀한 접점에. 머리 속에는 한국의 동토에 누워 있는 병사들의 모습도 가득 채워져 있었다. 더불어 젖은 대지의 향기로운, 농밀한 내음도.
나는 보도를 걸어갔다. 구름이 이동해서 별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꽁꽁 얼어붙어 자신과 동년배의 젊은이들이 죽었다는데 자신은 지금 이렇게 살아 있다. 이 막사에는 아내도 없고 연인도 없는 병사들이 가득한데 자신은 이덴 산타나를 찾아냈다. 웬지 손을 뻗으면 별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별을 한손에 쥐고, 우주의 눈덩이처럼 느슨하게 잡고 그것을 또다시 우주를 향해 던질 수 있을 것 같은 가능성이 느껴졌다.
"잠깐 이리로 오게, 수병." 하는 목소리가 갑자기 들렸다.
보니까 식당 옆의 지면에 카키색 제복을 입은 사관 한 사람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 등을 이쪽으로 향하고 있었으나 사령관인 프리체트 대령임이 분명했다. 그는 이쪽을 올려다 봤다.
"나를 좀 도와 주지 않겠나?"
"넷 !"
순간 경례를 해야 되는지 어떤지 생각했으나 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무슨 관목 주위의 흙을 파고 있었다. 옆에 커다란 토기 화분이 놓여 있다. 작은 삽을 내 손에 건네주고는 대령은 말했다.
"잘 듣게, 그쪽을 파라구. 알았지? 단, 뿌리를 건드리면 안 돼. 이 아이를 어떻게든 구해 주고 싶으니까."
어두컴컴한 빛 아래서 한 손으로 뿌리를 더듬으면서 나는 조심스레 파기 시작했다.
"이건 협죽도야. 눈보라 때문에 완전히 약해져 버렸어."
그리고 이번에는 그 협죽도를 향해서 대령은 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잘 들어라, 무서워하지 않아도 괜찮아. 널 구해 줄 테니까. 지금 이렇게 열심히 도와주고 있잖니. 정말이지 착한 아이구나."
마치 갓난 아기에게 말하는 것처럼 상냥한 말투였다.
"널 화분에 옮겨 심어서 관제탑으로 데리고 가 주지. 그곳이라면 얼마든지 햇빛을 쪼일 수 있단다. 물도 듬뿍 마시게 해 주고 엉덩이를 항상 따뜻하게 만들어 주지. 넌 아주 오래오래 살 거야. 착하지, 그래, 벽돌벽처럼 오래 살고 말고."
나와 대령은 깨끗히 뿌리를 파냈다. 작은 종이 봉지를 꺼낸 대령은 화분 밑에 조약돌을 드문 드문 떨구었다.
"좋아, 이번에는 흙을 조금 넣게." 갑자기 명령조의 말투로 바꾸어 지시한다.
"네."
대령은 파낸 협죽도를 들었다.
"좋아, 화분을 이곳으로 가지고 와, 내 옆으로. 그래, 좋았어, 그럼 내가 이 줄기를 들고 있는 동안에 조금만 흙을 더 넣어. 이번에는 그다지 단단하게 하지 않는 것이 좋아. 푸석 푸석하게 넣으라구. 지면의 지표 쪽의 흙이야, 그 검은 부분. 밑쪽의 고운 흙이 아니구. 그래 그래, 좋아, 이젠 됐어. 잔말이 필요없군!"
한 걸음 뒤로 물러 서서 기쁜 듯이 협죽도를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새삼스럽게 이쪽의 존재를 깨달은 듯 찬찬히 나의 얼굴을 응시했다.
"이름은, 수병?" 무뚝뚝하게 묻는다.
나는 이름을 알렸다.
"좋아, 고맙다 데블린. 그런데 자네는 왜 이런 시각에 돌아다니고 있나? 소등 시간이 지났는데"
"네, 식당 요리병들의 방에 가 있었습니다."
"식당의 요리병이라구? 자네는 백인이잖나, 수병 !"
"네."
"그런데 그 머리가 돈 조리장의 노예 녀석들을 방문하다니,-도대체 뭘 했지?"
"음악을 들었습니다."
갑자기 홍미롭다는 표정이 대령의 얼굴에 떠올랐다.
"정말인가? 그 녀석들, 최근에는 어떤 음악을 듣고 있지? 이제 글렌 밀러나 빙 크로스비는 아니겠지."
"네, 아닙니다."
"그럼 어떤 음악을 듣고 있지?"
생글생글 웃으며 나는 말했다.
"네, 예를 들자면 '장발 교수와 사뿐사뿐 걷는 헝가리인' 이라든가, 그리고......"
대령은 껄껄 웃기 시작했다. "장발교수에다가 사뿐사뿐 걷는 알바니아인이라구?"
"아닙니다. 헝가리인입니다."
"그거 걸작이군. 그밖에는?"
나는 다른 가수나 그룹의 이름을 헤아렸다. 그는 화분을 자신의 방까지 운반하는 것을 도와주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이쪽에서 가르쳐 준 이름 하나하나를 대령은 마치 시험을 위해서 암기하는 것처럼 되풀이한다. 나는 바비 볼덴의 일도 말했다. 한 번 하사관 클럽에서 연주시켜야 합니다 하고 말하자 그는 짧은 신음을 토하며 볼덴의 이름을 되풀이했다. 우리는 화분의 양끝을 들고서 끙끙 신음을 토하면서 본부의 3층 계단을 올라갔다. 대령을 보고는 입구의 경비를 담당하고 있던 해병대의 이등병이 재빨리 경례를 올렸다.
"내 방으로 들어 갈 수 있도록 도중의 문을 전부 열어 주게 이등병."
대령은 말했다. 이등병은 앞장 서서 복도를 걸었고 구석의 사무실까지 선도해 준다. 전기 스위치를 켜고는 그는 또다시 경례하고는 뒷걸음질쳤다. 나와 대령은 화분을 들고서 사무실로 들어갔다. 실내는 무척 청결하고 장식품 종류는 거의 없고, 굳이 말한다면 화분이 거기에 해당할 것이리라. 그것은 방안에 놓여 있었다. 이덴 산타나의 트레일러를 장식하고 있던 꽃화분을 떠올렸다.
"좋아, 그 구석에 놓게 데블린. 아침이 되면 관제탑으로 옮길 테니까."
화분을 놓자 대령은 또다시 다독이는 듯한 말투로 협죽도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자아, 오늘밤은 이곳에서 자자. 알았지? 날이 밝으면 햇님이 따뜻하게 비추는 곳으로 옮겨 줄 테니까. 내일 뿐만이 아니야, 앞으로 네가 이 지상에 있는 한 그곳에서 사는 거라구. 어때, 알았지? 약속할께. 꼭 그렇게 해 주겠다고."
나는 실내를 둘러봤다. 한쪽 구석에 책장이 있고 액자가 몇 개인가 올려져 있었다. 배의 함교에 서 있는 대령, 어떤 여자와 나란히 있는 대령, 그 여자의 사진. 해군의 소위 후보생이 떠받드는 검의 아치 밑을 통과하는 대령과 그 여자, 책장에는 몇 권인가 책이 놓여 있었다. <작전사관요강> <수병전범> 근무 규정이나 군규에 관한 몇 권인가의 책, 데일 카네기 저의 <어떻게 친구의 신뢰를 얻고 사람들을 감화하는 힘을 몸에 익히는가>.
"아내야." 무뚝뚝하게 대령은 말했다.
"이미 죽었지만 말이야."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아내와는 고등학교 때부터 서로 사랑했지. 결혼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였어. 그리고 내가 어뢰를 맞기도 하고 해서 아내에게 얼마나 정신적 고생을 시켰는지 몰라. 그러던 끝에 나보다 먼저 가 버렸어."
천천히 고개를 젓고는 대령은 또다시 협죽도로 눈길을 돌렸다.
"원예를 하게 된 것도 아내의 영향이지. 전쟁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까 아내가 정성스럽게 만든 훌륭한 정원이 날 맞이하고 있었어. 그리고 나도 원예에 빠져들게 되었지. 이제는 이 방의 화초를 건강하게 살려 두면 아내도 살아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구. 저곳의 분재가 보이나?"
윤기나는 잎을 가진 커다란 분재를 대령은 가리켰다.
"저건 원래 소살리트에 있던 우리 집 정원에 심어 두었던 거야. 집을 판 뒤에도 이렇게 가지고 다니지. 아내는 저나무가 되어 계속해서 내 곁에 살아 있는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일세."
다음 순간에, 대령은 자신의 약점을 불필요하게 노출시켜 버렸다고 갑자기 생각한 듯 나를 봤다. 그는 재빨리 경례를 했다. 나도 답례를 했다.
"여러 가지로 미안했네."
이제 나가도 좋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잘 들어 수병, 이 일을 한 마디라도 발설하면 그냥 두지 않겠다. 상륙부대로 전출시켜 버리겠다구."
"네, 알고 있습니다."
나는 문으로 향했다.
"장발 교수에 사뿐사뿐 걷는 알바니아인이라."
대령은 키득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이름도 제멋대로군......"
"아닙니다, 알바니아인이 아니라 헝가리인입니다."
다시 한번 경례를 하고는 나는 어둠 속으로 걸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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