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다리 아저씨 전편
진 웹스터
지은이 진 웹스터
진 웹스터의 본명은 엘리스 제인 첸들러이다. 그녀는 1876년 7월 24일,
뉴욕 프레도니아에서 출판사를 경영하는 아버지와 문학애호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웹스터의 문학적 재질과 쾌활한 유머 감각은 부모의
영향을 받아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진 웹스터는 바사 대학에 다닐 때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 과정은 '키다리 아저씨' 의 주인공 주디의 작가 수업과 비슷했다. 그녀는 대학 소재지의 신문에 통신 기사를 기고했고, 대학 문예지에는 단편을 발표했다.
웹스터는 대학에서 영문학과 경제학을 전공했다. 고아원이나 소년원 등을 다니면서, 그녀는 소외된 사람들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러한 경험은 그녀의 작품 생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그녀는 역경을 이겨 나가는 과정을, 밝고 유머러스하게 표현한 소설 '키다리 아저씨'를 1912년에 출간하였는데, 이 작품은 나오자마자, 대단한 호평과 함께 대성공을 거두었다. 여기에 힘입어 그녀는 1915년 발표된 '키다리 아저씨' 속편 '키다리 아저씨 그후 이야기'에서 존 그리어 홈 고아들의 이야기를 계속 진행해 나갔다.
진 웹스터의 작품으로는 이 밖에도 '패티가 대학에 갔을 때', '밀 공주', '제리 주니어', '네 연못의 미스터리', '피터의 소동' 등이 있다.
진 웹스터는 1915년 변호사 글렌 포드 맥키니와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가지게 되었으나, 불행하게도 이듬해 1916년 딸을 출산한 후 세상을 떠났다.
우울한 수요일
매월 첫 번째 수요일은 참으로 싫은 날이다. 그것은 두려워하고 초조해
하며 맞이하여, 용기를 가지고 참아내고는, 빨리 잊어버리고 말아야 하는
것이다. 마룻바닥은 얼룩 한 점 없어야 하고, 의자란 의자는 먼지 하나
없어야 하며, 모든 침대도 구김살이 있어서는 안 된다.
잠시도 가만히 못 있는 97명의 작은 고아들을, 문질러 씻겨서 머리를
깨끗이 빗질하고, 풀이 빳빳하게 먹은, 바둑판 무늬를 넣어 굵은 실로 짠
무명 옷으로 갈아입혀 단정하게 단추를 채워 주어야 한다. 그리고는 97명
하나하나가 얌전하게 굴어야 한다는 주의를 듣고, 평의원이 말을 걸어 오면
'네, 평의원님'이라고 똑똑히 대답해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다짐을
받는다.
정말이지 고민스러운 하루였다. 가엾게도 저루샤 애벗은 가장 나이가 많은
아이이므로 자연히 그 일들을 떠맡게 된다. 그러나 이 특별한 수요일도
언제나와 같이 그럭저럭 넘어갔다.
저루샤는 고아원에 오신 손님들에게 대접할 샌드위치를 모두 만들었으므로,
주방에서 몰래 빠져나와 항상 하던 자기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2층으로
올라갔다. 그녀가 특별히 시중을 들어야 하는 방은 F실이며, 그 곳에는 네
살에서 일곱 살까지의 꼬마들이 있고, 11개의 작은 침대가 한 줄로 나란히
늘어서 있었다.
저루샤는 자기가 맡은 아이들을 불러모아, 구겨진 옷을 펴 주기도 하고
코를 닦아주기도 하면서 빵과 우유와 자두가 든 푸딩을 먹는 즐거운 30분을
보내기 위해, 들떠 있는 아이들을 식당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그녀는 창가의 의자에 쓰러지듯 주저앉아 맥박이 뛰는 관자놀이를
차가운 유리창에 갖다 댔다. 그녀는 아침 5시부터 줄곧 선 채로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 했고,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는 원장으로부터 꾸중을 듣기도 하고
재촉을 받기도 했다.
리펫 원장님은 평의원이나 손님들 앞에 나섰을 때처럼 조용하고 위엄 있는
태도를 무대 뒤에서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저루샤는 누렇게
시든 넓은 잔디밭과 그 앞의 고아원 부지의 경계가 되어 있는 높은 철책
저쪽에, 드문드문 별장이 있는 언덕과 잎이 모두 떨어진 나무숲 사이로 솟은
마을 교회의 뾰족탑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도 이것으로 끝난 것이다- 저루샤의 생각으로는 오늘은 대성공이었다.
평의원과 시찰 위원들은 고아원 안을 둘러보고 저마다 자기에게 돌아온
보고서를 읽으며 차를 마시고는, 이것으로써 앞으로 한 달 동안은 귀찮은
고아원의 일을 잊고 있어도 된다고 좋아하면서 서둘러 즐거운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저루샤는 몸을 앞으로 내밀듯이 하여 고아원 문을 미끄러져 나가는, 마차와
자동차의 물결을 얼마쯤 동경이 섞인 호기심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저루샤는
차례차례로 언덕 중턱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커다란 저택을 향해 돌아가는
사람들의 탈것을 뒤쫓아가는 것을 상상하고 있었다. 저루샤는 털외투를 입고
새의 깃털을 장식한 모자를 쓰고, 좌석 뒤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운전수에게
'집으로' 하고 차갑게 명령하고 있는 자신을 상상하였다. 그러나 자기가
돌아갈 자기 집 입구까지 가서는 상상의 화면이 흐려지고 마는 것이었다.
저루샤는 상상력이 풍부했다. 그것은 리펫 원장님으로부터 조심하지 않으면
앞으로 곤란할 거라는 주의를 들을 정도였다. 그러나 제아무리 날카로운
상상력일지라도 저루샤가 들어가려고 하는 집의 현관에서 안으로까지는
데려가 주지 않았다. 아무리 호기심이 많고 모험심이 많다고 해도, 저루샤는
가엾게도 아직 여는 가정집 안에 한 번도 들어간 적이 없었으므로,
고아들에게 시달림을 받지 않는 세상 사람들의 일상 생활을 상상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저루샤 애벗,
사무실에서 볼일이 있대요.
빨리 가 보세요.
그게 좋을 거예요!
성가대에 들어 있는 타미 딜런이 그렇게 노래하면서, 계단을 올라와 복도를
지나서 F실로 가까워 오자 노랫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저루샤는 마지못해
창가를 떠나 현실의 고통과 마주쳤다.
"누가 날 부르니?"
저루샤는 타미의 노래를 가로막으며 물었다.
리펫 원장님이
사무실에서
몹시 화를 내고 계십니다!
아-맨!
타미는 노래하듯이 가락을 붙여 말했으나, 그 말투에는 조금도 악의가
없었다. 아무리 장난꾸러기 고아일지라도 무슨 잘못을 저질러서, 기분이 상해
있는 원장 앞에 불려가는 누나를 동정하는 마음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타미는 이 누나한테 팔을 꽉 잡혀서 끌려가기도 하고, 코가 떨어져
나갈 만큼 얼굴을 박박 문질러 씻길 때도 있으나 저루샤가 좋았다.
저루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갔으나, 이마에는 주름이 두 줄 잡혀
있었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 되었을까?
샌드위치의 빵이 마음에 들 만큼 얇게 썰어지지 않았나?
호도과자에서 호도껍질이 나왔단 말인가?
여자 방문객 중 한 분이 수지 호돈의 구멍 난 양말을 발견했나? 아니면...
아아, 끔찍해!...
내가 맡은 F실의 장난꾸러기들이 평의원님에게 무슨 실례되는 짓이라도
저지른 게 아닐까?
아래층의 긴 복도에는 불이 켜져 있지 않았다. 그리고 저루샤가 계단을
내려가고 있을 때, 마지막 평의원이 막 돌아가는 중이어서 주차장으로 통하는
문가에 서 있었다. 저루샤는 그 남자의 모습을 얼핏 보았을 뿐이었으나, 그
인상은 키가 몹시 크다는 것뿐이었다.
그 사람은 구부러진 길에서 기다리고 있는 자동차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차가 갑자기 움직여 가까이 다가와서, 번쩍거리는 헤드라이트가 정면으로
비추자, 그 사람의 그림자는 집안의 벽에 뚜렷이 던져졌다. 그 그림자는
바닥에서 복도의 벽에 걸쳐 손발을 기분 나쁠 만큼 크게 그려내었다. 그것은
마치 굼실거리고 있는 거대한 긴 다리 잠자리처럼 보였다.
저루샤의 걱정스러운 듯한 찌푸린 얼굴이 갑자기 웃음으로 변했다. 그녀는
본디 쾌활한 성격이어서 대수롭지 않은 일에서도 재미를 찾아내곤 했다. 만일
평의원과 같이 위엄 있는 인물로부터 무엇이든 유쾌한 것을 찾아 낼 수
있다면 그야말로 횡재인 것이다. 저루샤는 이 조그마한 일로 매우 유쾌해져서
웃는 얼굴로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나 놀랍게도 원장 역시 겉으로
드러내어 미소짓고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눈에 띄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원장은 마치 손님을 대할 때와 다름없을 만큼 기분이 좋은
얼굴이었다.
"저루샤, 앉거라, 너에게 할 얘기가 있으니까."
저루샤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침을 삼키며 기다렸다. 한
대의 자동차가 창문에 빛을 비추자, 리펫 원장은 그것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방금 나가신 손님을 보았겠지?"
"뒷모습을 보았을 뿐이예요."
"그 분은 평의원 가운데서 으뜸가는 부자이시고 이 고아원의 경영에도 많은
돈을 기부했단다. 그러나 그분의 이름을 밝힐 수는 없어. 그분이 밝히지 말
것을 특별히 조건으로 하고 계시니까."
저루샤는 이제까지 한 번도 평의원의 이상한 점에 대해, 원장과 이야기하기
위해 사무실에 불려 온 일은 없었으므로 눈을 조금 크게 떴다.
"그분은 이 곳에 있던 몇 명의 남자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졌었지. 너는 찰스
밴턴이나 헨리 프레이즈를 기억하고 있지?
그 애들을 이 평의원님이 대학에 보내 주셨던 거야. 두 사람은 아낌없이
내준 돈의 대가로 공부를 잘 해서 좋은 성적을 얻었지. 그분은 그 이외의
대가를 바라지 않아요. 이제까지 그분은 남자아이들에게만 도움을
베풀었단다. 여기 있는 여자아이로서 얼마든지 도움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 있어도, 나는 도저히 그 분의 주의를 끌 수 없었어. 내 생각으로는
그분은 여자아이는 좋아하시지 않는 것 같아."
이쯤에서 무슨 대답이든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저루샤는
"그런가 보군요."
하고 대답했다.
"오늘의 월례회에서는 너의 장래 문제가 논의되었단다."
원장은 한동안 침묵한 뒤에 천천히 침착한 말투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것은 갑자기 긴장한 상대방에게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너도 알고 있듯이 아이들의 나이가 열 여섯 살이 되면, 이 곳에 두지
못하게 되어 있어. 하지만 너의 경우는 특별한 조치였어. 너는 열 네 살로 이
곳 학교를 졸업했어. 품행으로 본다면 언제나 좋았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매우 공부를 잘 했기 때문에 마을의 고등학교에 보내기로 했었지. 그런데
너는 그 곳도 곧 졸업하게 된 거야. 그래서 이 곳으로서는 더이상 너를
양육할 책임을 질 수가 없어. 어쨌든 너는 다른 아이들보다 2년이나 더 이
곳에 있었으니까."
원장은 저루샤가 특히 오늘과 같은 경우에는 자기 식비를 벌기 위해 열심히
대청소를 하고 있는 사실은 모른 체하고 있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너의 장래 문제가 평의원에 제출되어 너의 이력이
검토되었단다. 남김없이 샅샅이 검토된 거야."
원장은 피고석의 죄인에게 비난의 눈길을 보냈다. 피고는 자기 이력에 특히
부끄러운 무엇이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게 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두려워하는 척하였다.
"물론 지금의 네 입장으로는 당장 취직하는 것이 당연하겠지. 그러나 너는
학교에서 특히 국어 성적이 좋았던 것 같아. 여기 시찰 위원이신 프리차드
씨께서는 학무 위원도 겸하고 계시므로, 너의 작문 선생님과 이야기를 하신
모양이야. 그분이 너를 위해 좋은 보고를 해주신 거야. 그리고 프리차드
씨께서는 네가 쓴 '우울한 수요일' 이라는 제목의 글짓기를 위원님들에게
낭독해서 들려 주었어."
저루샤의 두려워하는 표정이 이제는 진짜가 되었다.
"이렇게 은혜를 입고 있는 이 고아원을 놀림감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그다지 감사의 뜻을 나타내는 방법으로는 생각할 수 없어. 우습게 썼으니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몹시 후회하게 되었을 거야.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방금 돌아가신 그분은 특히 풍부한 유머 감각을 지니고 계신 분
같아. 그 버릇없는 글짓기가 마음에 드셔서 너를 대학에 보내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거야."
"대학에요?"
저루샤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원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은 조건에 관하여 나와 의논하시기 위해 남으셨던 거야. 그
조건이라는 게 또 이상하지. 틀림없이 그분은 이상한 분이야. 그분은 너에게
창작력이 있다고 믿고, 너를 작가로 만들겠다고 계획하고 계시니까."
"작가로요?"
저루샤의 마음은 마비되어 버려, 다만 원장의 말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그것이 그분의 희망이야. 무엇이 될지 안될지는 두고 보아야 알 일이지만,
그분은 용돈도 넉넉히 주시겠대. 자기 돈이라는 것을 다뤄 본 적이 없는
사람으로서는 너무 많은 정도지. 그러나 이 일에 대해서는 그분이 세밀하게
계획을 세우셨으므로 내가 이래라 저래라 할 처지는 못 돼. 너는 이번 여름은
여기 있었으니까, 프리차드 씨께서는 고맙게도 네가 대학에 가져갈 것을
돌보아 주시겠다고 하셨어. 너의 식비와 학비는 직접 대학으로 납부해 주실
거고, 게다가 공부하는 4년 동안 매달 35달러의 용돈을 주시겠다는 거야. 그
정도면 너는 다른 학생들과 같은 생활을 꾸려나갈 수가 있을 거야. 그러한
돈들은 매달 그분의 비서가 너한테로 부치고, 그 대신 너는 매달 한 번씩
감사의 편지를 써야 해. 감사 편지라고 해서 돈 이야기를 하라는 건 아니야.
그분은 그 일에 대해 말하는 건 좋아하지 않아. 너는 학과가 얼마만큼
진행되어 가는가, 또는 너의 매일 생활에 대해 상세하게 알려 드리면 돼.
말하자면 너의 부모님이 살아 계셨으면 써 보냈을 그런 편지를 말이야. 그
편지는 비서 앞으로 하여 존 스미스 씨에게 보내게 되어 있어. 그 신사분은
존 스미스 씨는 아니지만 이름을 알리고 싶지는 않다고 하시니까, 네게
있어서 그분은 단순히 존 스미스 씨 이외의 그 누구도 아닌 것이니까. 편지를
요구하시는 까닭은 편지 쓰는 일만큼 문장 공부에 도움이 되는 것은 없다고
생각하시기 때문이며, 네게는 편지를 쓸 가족이 없으니까 이런 방법으로
편지를 쓰라는 거야. 그리고 또 네 학교 생활과 공부하는 과정을 알고
싶어하시며, 그분은 네 편지에 대해 일체 답장은 주시지 않을 것이고, 또한
그 편지 따위에는 그다지 흥미도 느끼지 않으실거야. 그분은 편지 쓰기를
매우 싫어하시고, 그리고 또 너에게 답장을 쓰는 것이 짐이 되면 곤란하다고
생각하시니까. 만일 꼭 답장을 필요로 하는 그런 일이 생기면 -이를테면 네가
퇴학 처분을 받거나 하게 된다면- 그런 일은 설마 없겠지만, 그런 경우에는
비서인 그리그스 씨와 편지를 주고받기로 되어 있어. 그리고 매월 한 번씩
보내는 편지는 너의 절대적인 의무이며, 이것만이 스미스 씨께서 요구하는
유일한 지불 방법이니까, 계산서를 지불하는 마음으로 반드시 꼬박꼬박
편지를 써 보내야 돼. 그 편지는 공손하고 또 연습한 흔적이 똑똑히
나타나도록 노력해라. 언제나 존 그리어 고아원의 평의원님께 드리는
편지라는 것을 단단히 명심하도록, 알겠지?"
저류샤의 눈은 빨리 나가고 싶어 못 견디겠다는 듯이 문쪽을 바라보았다.
머릿속에서 흥분이 소용돌이치고 있었으므로, 다만 빨리 원장의 따분한
잔소리로부터 벗어나서, 생각을 가다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래서
저류샤는 일어나서 시험삼아 한 걸음 뒤로 물러서 보았다. 원장은 손짓으로
더 있으라고 했다. 그것은 원장으로서 이렇게 좋은 웅변의 기회를 버리고
싶지 않았다.
"너는 네게 굴러들어 온 이 행운에 대하여, 그것에 대한 깊은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해. 너와 같은 환경에 있는 아이들이 누구나 다 이러한 행운을
만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언제나 이것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네, 원장님 잘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야기가 끝나셨다면 전 프레디
퍼킨스의 바지를 기워 주어야 하니까요."
저루샤의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그리고 리펫 원장은 마지막 마무리 말이
허공에 떠버려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멍하니 그 뒤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루샤 애벗 양이 키다리 스미스 씨에게 보내는 편지
9월 24일
퍼거슨 기숙사 215호실에서
고아를 대학에 보내 주신 친절하신 평의원님께
저는 이 곳에 왔습니다. 어제 기차로 4시간 동안 여행을 했습니다. 몹시
이상스럽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는
이제까지 한 번도 기차를 타 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대학이란 데는 매우 커서 몹시 어리둥절해지는 곳입니다. 저는 방을 나설
때마다 미아가 되어 버리곤 한답니다. 좀더 기분이 침착해진 뒤에 학교에
대해서 알려드릴 작정입니다. 그 때 학과에 관해서도 말씀드리겠습니다.
수업은 월요일 아침부터 시작됩니다. 그런데 지금은 토요일 밤입니다. 하지만
저는 우선 인사 편지를 쓰고 싶었던 것입니다.
알지도 못하는 분에게 편지를 쓰려니까 아주 이상한 기분이 듭니다.
첫째, 편지를 쓴다는 그것부터가 이상합니다. 저는 이제까지 태어난 뒤로
편지라는 것을 서너 장밖에 써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이것이 잘 쓴 편지가
못 되더라도 너그러이 보아 주세요.
어제 아침 떠나기 전에 리펫 원장님과 매우 중요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원장님은 제가 남은 생애를 어떻게 살아갈 것이며 또한, 저에게 이토록
친절하게 해주시는 신사분에게 어떠한 태도를 가질 것인가를 들려
주셨습니다. 저는 아주 예의바른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존 스미스 씨 따위로 불리기를 바라는, 그런 분에 대해 과연 그처럼
정중하게 대할 수 있을까요? 당신은 어째서 좀더 개성있는 이름을 고르지
않으셨나요? 마치 말을 매는 막대기 씨라든가, 빨래 장대 씨라는 분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듯 한 기분입니다.
저는 여름 동안 내내 선생님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랜 세월 뒤에 이렇게 누군가가 저의 일을 생각해 주시는 분이 생겨서, 저는
마치 가족을 찾은 듯한 기분입니다. 어쩐지 제가 누군가의 식구가 된 듯한
기분이어서 몹시 즐겁습니다. 그렇지만 선생님의 일을 생각하려고 하면, 저의
상상력을 펼 내용이 너무나 작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건 단 세가지뿐인 걸요
뭐.
1. 선생님은 키다리이다.
2. 선생님은 부자이다.
3. 선생님은 여자애를 싫어한다.
저는 선생님을 여성을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부를까 하고 생각도
해보았습니다만, 그것은 내 자신을 모욕하는 거나 다름없겠지요. '부자 양반'
이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마치 선생님에게 있어서는 돈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서, 선생님을 모욕하는 결과가 됩니다. 그리고 또 부자라는 것은 극히
표면적인 성질의 것이니까요. 그리고 또 선생님 역시 평생동안 부자로 지낼
수 있을지 아닐지도 모르는 일이구요. 매우 영리한 사람들도 월
스트리트 (뉴욕의 증권거래소가 모여 있는 곳)에서 파산하고 있거든요.
그러나 적어도 선생님은 평생 동안 키가 큰 채로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선생님을 '키다리 아저씨'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부디 기분
나쁘게 생각지 말아 주십시오. 이것은 친밀감이 담긴 극히 은밀한 이름이니까
리펫 원장님에게는 말씀 드리지 말아 주세요, 네?
이제 2분만 지나면 10시 종이 울릴 것입니다. 우리의 하루는 종소리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먹는 것도 자는 것도 공부하는 것도 종소리에 의해
움직여야 합니다. 아주 씩씩하고 시원스러워서 마치 소방차의 말(이 무렵에는
말로 소방차를 끌었음) 이 된 듯한 기분입니다. 바로 지금 종이 울리기
시작했어요! 전등을 꺼야 할 시간입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제가 얼마나 열심히 규칙을 지키고 있는가를 보아 주십시오. 이것은 존
그리어 고아원에서 익힌 덕분입니다.
아저씨를 아주 존경하는 저루샤 애벗 올림
키다리 아저씨 귀하
10월 1일
키다리 아저씨께
저는 대학이 정말 좋습니다. 그리고 저를 이 곳에 보내 주신 아저씨가 정말
좋습니다. 저는 지금 너무너무 행복합니다. 한 시간 한 시간이 즐거워서 잠잘
틈도 없을 지경입니다. 이 곳이 존 그리어 고아원과 얼마나 다른지
아저씨께서는 상상조차 하시기 힘들 거예요. 저는 이 세상에 이런 곳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몰랐습니다. 여자로 태어나지 않아서 여기에 올 수 없는
사람들이 불쌍해집니다. 아저씨가 젊은 시절에 계셨던 대학도 아마 이 곳만큼
멋있지는 않았을 거예요.
저의 방은 부속 병원이 새로 지어지기 전에는 전염병실로 쓰였던 탑 위에
있습니다. 이 탑의 같은 층에는 3명의 다른 여학생이 있습니다. 언제나
우리들에게 조금만 조용히 해달라는 안경잡이 상급생과 샐리 맥브라이드와
줄리아 러틀리지 펜들턴이라는 이름의 신입생입니다. 샐리는 머리털이 붉고
코가 들창코인데 매우 친절한 사람입니다. 줄리아는 뉴욕의 명문가의 딸로
아직 저를 본 척도 하지 않습니다. 그 두 사람은 같은 방을 쓰고 상급생과
저는 독방을 가졌습니다.
방이 모자라기 때문에 보통 신입생은 독방은 얻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부탁도 하지 않았는데 독방을 얻었지 뭐예요. 아마 서무계가
제대로 자란 아가씨와 고아를 같은 방에 두는 것은 좋지 못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거예요. 고아란 이런 득을 볼 수도 있는 거로군요!
저의 방은 북서쪽 구석에 있으며 창이 두 개인데 전망이 아주 좋습니다.
18년 동안 20명의 아이들과 한 방에서 지내 오다가 이렇게 혼자 있게 되니
몹시 편안한 느낌이 듭니다. 이번에 비로소 저는 저루샤 애벗을 사귈 수 있게
되었어요. 저는 저 자신을 좋아하게 될 것 같아요.
아저씨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화요일
지금 신입생 농구팀을 짜고 있는 중인데 저도 끼여 줄 것 같습니다. 분명히
저는 몸집이 작긴 하지만 몹시 날쌔고 힘이 세며 강인한 정신력을 갖고 있어,
다른 사람이 공중에 뛰어오른 사이, 저는 교묘하게 남의 다리 밑으로 뚫고
들어가 공을 빼앗아 버릴 수가 있습니다. 연습은 아주 즐겁습니다. 오후에
운동장에 나오면 주위의 나무들은 붉고 노랗게 물들어 있고, 낙엽 태우는
냄새가 풍겨 옵니다(미국의 대학은 새 학년이 가을에 시작되므로). 그리고
누구나 다 큰 소리로 웃고 소리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제가 여태까지
보아 온 중에서 가장 행복한 소녀들이며 그 가운데서도 가장 행복한 것은
저입니다.
긴 편지를 써서 어떤 공부를 하고 있는가를 모두 말씀드릴
작정이었습니다만 (리펫 원장님이 아저씨가 그것을 알고 싶어하신다고
말씀하였으므로), 마침 지금 일곱째 시간의 종이 울리고 있습니다. 10분
동안에 저는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운동장에 모여야 합니다. 아저씨께서도
제가 농구팀에 들어가면 좋겠다고 생각지 않으세요?
이만 펜을 놓겠습니다.
저루샤 애벗
추신(현재 시간 9시)
샐리가 방금 제 방을 들여다보면서 이렇게 말했어요.
"난 집 생각이 나서 견딜 수가 없어. 너는 그런 기분 안 드니?"
저는 미소지으며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아주 훌륭하게 해 나갈
수 있을 거예요. 저는 향수병에 걸릴 염려는 없을 겁니다. 저는 고아원이
그립다는 말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어요. 아저씨는 그런 말을 들어보신 적
있나요?
10월 10일
키다리 아저씨께
아저씨는 미켈란젤로에 대해서 들으신 일이 있으세요?
그는 중세기에 살았던 이탈리아의 유명한 화가입니다. 영문학을 하고 있는
사람은 모두 그를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그를 대천사인 줄 알았다고
하자 반 전체 학생들이 웃음을 터뜨리더군요. 미켈란젤로라니? 꼭 천사처럼
들리지 뭐예요. 대학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자기가 배운 적도 없는 온갖 것을
알고 있는 게 당연한 것으로 다루어지는 일입니다. 때로는 몹시 난처한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 가운데서,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는 것이 있으면 조용히 있다가 백과사전을 펴보기로
했습니다.
수업이 시작되는 첫날 참으로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누군가가 모리스 마테를링크(벨기에 작가 1911년 노벨문학상 수상 대표작으로
"파랑새"가 있다)라는 이름을 말했을 때 저는 그 사람이 신입생이냐고 물었던
거예요. 그것이 우스갯거리가 되어 온 학교에 퍼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어쨌든 우리반의 누구에게도 지지 않고 명랑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보다도 더 명랑할 정도입니다.
아저씨는 제가 방을 어떻게 장식하였는지 알고 싶지 않으세요? 그것은
다갈색과 노란색의 조화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벽이 황갈색으로 칠해져
있었으므로 노란색의 무명커튼과 방석, 마호가니 책상(3달러짜리 중고품)과
등나무 의자와 가운데 잉크 얼룩이 있는 갈색 융단을 샀습니다. 얼룩이 있는
곳에다 의자를 놓기로 했습니다.
창문이 높아서 보통 의자로는 밖이 보이지 않습니다만, 경대의 나사를 뽑아
거울을 떼고 위에다 헝겊을 덮어 창문에 꽉 붙여 놓으니까, 창가의 자리로서
알맞은 높이가 되었습니다.
서랍을 빼내어 그것을 계단으로 삼고 올라가 앉으니 기분이 그만이군요.
이 물건들을 4학년생들의 경매장에서 고르는 데 샐리 맥브라이드가 도와
주었습니다. 샐리는 이제까지 내내 평범한 가정에서 살았으므로, 실내 장식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물건을 사서 진짜 5달러짜리 지페를 치르고,
거스름돈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아저씨는 상상도 못
하시겠지요. 글쎄, 저는 이제까지 백동전 한 닢 이상은 가져 본 적이
없으니까요. 존경하는 아저씨, 저는 용돈을 얻은 것에 대해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지 몰라요.
샐리는 세상에서 가장 유쾌한 사람입니다. 줄리아 펜들턴은 도무지 못
쓰겠습니다. 서무계는 방을 정하는 데 왜 그토록 이상하게 짝을 지었는지
모르겠어요. 샐리는 무슨 일이든 모두 즐거워합니다. 낙제한 것마저도요.
그러나 줄리아는 모든 게 재미없는 모양입니다. 남과 잘 사귀려고는 전혀
생각지도 않습니다. 글쎄 팬들턴 집안 사람이라면, 그 사실만으로도 아무
조사도 받지 않고 천국에까지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거든요. 줄리아와
저는 서로 원수로 태어난 거나 다름없습니다.
그런데 아저씨께서는 제가 무엇을 공부하고 있는가 몹시 알고 싶으시겠죠.
1. 라틴 어-제 2차 포에니 전쟁. 해니벌과 그 군대는 어젯밤에
트라시메누스 호숫가에 야영, 로마 군에 대비하여 복병을 배치했음. 새벽
4시부터 6시 사이 전투 개시. 로마 군 후퇴함.
2. 프랑스 어-(삼총사) 24페이지째. 동사의 제 3변화와 불규칙 동사.
3. 기하-원주가 끝나고 지금은 원추.
4. 국어-서술법을 배우는 중임. 나의 문체는 나날이 간결 명료하여 가고
있음.
5. 생리학-소화 기관에 들어가서 다음 시간에는 쓸개와 췌장을 배울
예정임.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저루샤 애벗 올림
추신
아저씨께서는 술을 드시지 않겠지요.
술은 간에 매우 나쁜 영향을 미칩니다.
수요일
키다리 아저씨께
저는 이름을 바꿨습니다. 학적부에는 저루샤이지만 평상시에는 어디서나
주디입니다. 자기 애칭을 자기가 만들어야 되다니 그다지 즐거운 일은
아니군요. 하지만 주디라는 이름은 제가 만든 것은 아닙니다. 프레디
퍼킨스가 아직 말을 채 배우기 전에 저를 그렇게 불렀던 것입니다.
리펫 원장님은 아이의 이름을 지을 때 좀더 상상력을 발휘해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원장님은 성을 전화번호부에서 따오는 것입니다- 첫 페이지를
보시면 애벗이라는 성이 맨 위에 나와 있습니다- 이름은 아무 데서나 주워
오곤 합니다. 제 것은 묘비에서 따왔답니다. 저는 옛날부터 제 이름이 아주
싫었습니다. 차라리 주디가 더 낫다고 생각되는군요. 정말 시시한 이름이고
내가 아닌 다른 소녀의 이름이에요- 푸른 눈의 귀여운 소녀인데다 아무
고생도 모르고, 모든 사람으로부터 귀여움을 받으며 구김살없이 자란
아이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정말 좋겠어요. 아무리 결점이 있더라도 집에서 귀염둥이로
자랐다면, 누구도 그것을 비난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러나 자기가 그렇게
자란 척하는 것은 조금 재미있는 일일 거예요.
이제부터는 꼭 저를 주디라고 불러 주세요.
아저씨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 드릴까요? 저는 가죽 장갑을 세 켤레나
가지고 있어요. 전에 크리스마스 트리에 달려 있던 벙어리 장갑은 받은 일이
있지만, 다섯 손가락이 모두 있는 진짜 가죽 장갑은 가져본 적이 없었어요.
저는 틈만 있으면 그것을 꺼내어 손에 끼어 봅니다만, 교실에 끼고 가는
것만큼은 삼가하고 있습니다.
(식사 종이 울리고 있어요, 안녕.)
금요일
아저씨는 어떻게 생각하시죠? 국어 선생님이 지난번에 낸 저의 작문에
뛰어난 독창력이 나타나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정말로 선생님은 그렇게
말씀하신 거예요. 이건 선생님 말씀 그대로, 옮긴 것이예요.
18년 동안이나 저 같은 교육을 받은 사람에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존 그리어 고아원의 목적은 (새삼 말씀드리지 않아도 아저씨께서는 잘 알고
계시고 또 진심으로 거기에 찬동하고 계실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97명의
고아를 97명의 쌍둥이처럼 똑같은 사람으로 만드는 일이었어요.
제가 가지고 있는 비상한 그림 재주는 아주 어렸을 적에 장작을 쌓아 놓은
창고 문에 리펫 원장님의 얼굴을 낙서하는 일로써 키워진 것입니다.
제가 자기가 어린 시절의 가정에 대해 비판을 가하는 것을 아저씨는 기분
나쁘게 생각지는 않으시겠지요. 하긴 아저씨께서는 높은 지위에 앉아
계시니까요. 왜냐하면 제가 너무 건방지다고 생각될 경우에는, 아저씨께서는
언제라도 저에 대한 송금을 그만두실 수 있잖아요? 이런 말씀을 드리는 건
그다지 예의바른 일이라고는 할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저에게 예의바른 것을
기대하시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고아원은 젊은 숙녀의 마지막 마무리를 하는 학교가 아니니까요.
대학에서 괴로운 것은 공부 시간이 아니라 쉬는 시간이에요.
아저씨, 저는 남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절반도 이해할 수가 없어요. 여럿이
하는 우스갯소리는 모두 다 저만이 겪어 본 적이 없는 과거의 일에 관계되는
것인가 봐요. 저는 마치 말이 통하지 않는 세계에 있는 외국인이나
다름없습니다.
그것은 정말 비참한 기분이예요. 이 기분은 이제까지 내내 품고만
있었습니다.
고등학교에서도 모두가 한편이 되어 저를 흘끔흘끔 쳐다보는 것이었어요.
저는 좀 이상했고 모두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저의 얼굴에 존 그리어
고아원이라고 씌어 있는 듯이 느꼈습니다. 그러면 두서너 명의 상냥한 척하는
아이들이 다가와서 무엇이든 정중하게 말을 거는 것이었어요. 저는 그
아이들을 누구든 증오했습니다. 특히 상냥한 아이들이 가장 싫었어요.
여기서는 아무도 제가 고아원에서 자란 것을 모릅니다. 저는 샐리
맥브라이드에게, 아버지도 어머니도 모두 돌아가시고 친절한 노신사가 저를
대학에 보내 주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 점은 사실이니까요. 아저씨께서는
부디 저를 비겁자라고 생각지 말아 주세요.
저는 다만 다른 사람들과 같아지고 싶을 뿐입니다. 저의 무서운 고아원의
어린 시절이 마음에 버티고 있는 것만이 커다란 차이니까요. 만약에 제가
그것에 등을 돌려 버리고 그 곳의 기억을 몰아 내기만 한다면, 저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바람직한 아가씨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모든 것에 차이가 있다고는 저는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어쨌든 샐리 맥브라이드는 저를 좋아하고 있어요!
언제까지나 아저씨의 주디 애벗 올림
(옛날의 저루샤)
토요일 아침
지금 이 편지를 다시 읽어 보았더니 참으로 유쾌하지 못한 것이로군요.
하지만 월요일 아침으로 다가온 특별 과제를 앞에 놓고 있는데다가, 지독한
코감기에 걸려 있다는 것을 아신다면 양해해 주시겠지요?
일요일
깜박 잊고 이 편지를 어제 부치는 것을 잊어버렸어요. 분개해 마지않는
이야기를 더 쓰겠습니다. 오늘 아침 설교 때에 목사님이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아시겠어요?
"성서 속에 씌어 있는 가장 고마운 말씀은 '가난한 자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느니라'라는 것이며, 가난한 자가 이 세상에 있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언제나 자선을 행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뜻입니다"라지 뭐예요.
그렇다면 가난한 사람은 마치 쓸모 있는 가축이나 다름없지 뭡니까! 제가
이처럼 나무랄 데 없는 숙녀로 키워지지 않았더라면 예배가 끝난 뒤에 곧장
목사님에게로 달려가서 마음먹은 대로 말해 주었을 거예요!
10월 25일
키다리 아저씨
저는 농구부에 들어갔습니다. 어깨에 있는 타박상을 보여 드리고 싶을
정도예요. 파란색과 갈색 바탕에 오렌지 빛의 가느다란 줄이 나 있어요.
줄리아 펜들턴도 농구부에 들어가고 싶어했으나 안 되었습니다. 만세!
제가 얼마나 비열한 근성을 가진 아이인지 아셨지요?
대학은 점점 더 멋있어집니다. 친구도 선생님도 수업도 식사도 모두
좋습니다. 1주일에 두 번이나 아이스크림이 나오고, 옥수수죽 같은 것은 한
번도 먹어 보지 않았습니다.
아저씨께서는 한 달에 한 번만 편지를 쓰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사흘이 멀다 하고 아저씨에게 편지를 쓰고 있어요. 하지만
저는 이 곳에서의 새로운 모험이 너무도 즐거워서 누구에게든지, 그 이야기를
하지 않고는 못 배기겠어요. 그런데 제가 아는 분이라곤 아저씨밖에
없거든요. 부디 저의 이 벅찬 감정을 이해해 주세요. 이제 곧 가라앉게 될
테니까요.
만일 제 편지를 귀찮게 생각하신다면 휴지통에 집어넣어 버리세요.
이번에는 11월 중순 무렵까지 편지를 쓰지 않기로 약속하겠습니다.
수다쟁이
주디 애벗 올림
11월 15일
키다리 아저씨
제가 오늘 어떤 것을 배웠는지 좀 들어 보세요.
꼭지각의 옆면적은 윗면과 밑면의 둘레의 합에 빗높이를 곱한 것의 2분의
1과 같다.
정말 같지는 않지만 이것은 정말이예요. 저는 그것을 증명할 수가
있습니다.
아저씨는 저의 옷에 대하여 아직 아무것도 들으신 적이 없으시지요. 무려
여섯 벌이나 된답니다. 모두 아름다운 새 옷이고 모두 내 것으로 산 거예요.
누군가 큰 사람이 입던 것을 물려받은게 아니라구요. 이런 일이 고아의
생애에 얼마나 큰 행복을 가져왔는지 아저씨는 모르실 거예요. 이 옷을 준
것은 모두 아저씨예요. 진실로 마음 속 깊이 감사하고 있어요. 교육을
받는다는 것도 고마운 일이지만, 여섯 벌의 새 옷을 갖는다고 하는 현기증이
날 만큼 기쁜 경험은 그 무엇에다가 비길 바가 못 됩니다. 이 옷을 골라 주신
분은 다행스럽게도 리펫 원장님이 아니라 시찰관인 프리차드 씨예요.
분홍빛 얇은 비단을 씌운 야회복(이걸 입으면 저는 정말 아름다워집니다),
교회 갈 때 입는 파란 드레스, 다과회 때 입는 동양풍의 장식이 달린 엷은
빨간 비단 드레스(이걸 입으면 마치 집시 같습니다), 그리고 또 장미빛
메린스 옷감의 드레스 한 벌, 외출용 회색 나들이옷과 수업 시간에 입는
평상복이 있습니다. 이건 줄리아 펜들턴에게는 대단찮은 의상일지도 모르나
주디 애벗에게 있어서는... 뭐라고 해야 좋을지!
아저씨는 제가 경박한 계집아이라고 또, 여자아이를 교육시킨다는 건 정말
돈의 낭비라고 생각하지는 않으실는지요? 하지만 아저씨 역시 만일 한평생
동안, 바둑 무늬의 무명 옷만 입고 살았다면 제가 지금 어떤 기분인지 알아
주실 겁니다. 더구나 제가 고등학교에 들어갔을 때에는 바둑 무늬의 무명 옷
시대보다도 더욱 나쁜 시대에 들어갔던 거예요.
자선 상자! 비참한 자선 상자에서 나온 옷을 입고 학교에 모습을 나타내는
것을, 제가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아저씨는 상상도 못 하실 거예요. 저는
반드시 그 옷의 처음 임자인 아이 옆자리에 앉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친구들과 소곤거리거나, 킥킥 웃으며 제 옷을 손가락질하는
것이었어요.
자기의 적이 버린 옷을 입어야 하는 비참함은 저의 영혼에 깊이 사무치는
것이었습니다. 그 상처는 비록 앞으로 남은 생애를 비단 양말을 신고 산다고
해도, 지울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새로운 전쟁 소식 -현장 취재 뉴스-
11월 13일 목요일 이른 새벽
해니벌 장군은 로마 군의 전위를 격파한 뒤, 카르타고 군을 이끌고 산악
지대를 넘어 카실리눔 평야에 도착했다. 경무장한 누미디아 군은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보병대와 교전, 두 차례 대전투를 벌였으며 한 차례 소전투를
벌인 뒤 로마 군에게 큰 손해를 입히고 패주하였음.
전선특별 보도원의 영광을 안은 주디 애벗 올림
추신
저는 어떠한 종류의 회답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또 질문
등으로 괴롭혀 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도 미리 주의 받고 있습니다.
아저씨께서는 부디 이번 한 번만은 대답해 주시지 않겠어요? 아저씨는 아주
나이가 많은 분이신지요. 아니면 조금만 늙으셨는지요? 그리고 또 머리가
모두 대머리이신지 아니면 조금만 벗겨지셨는지? 아저씨에 대하여 기하의
정의처럼 추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키가 크시고 부자이시고 여자아이를 싫어하시는 남자, 그러면서도 어느
건방진 계집아이에 대해서는 매우 너그러우신 아저씨는 도대체 어떤
분이신지요?
목이 빠지도록 회답을 기다리겠습니다.
12월 19일
키다리 아저씨께
결국 답장은 주시지 않으시는군요. 매우 중요한 질문이었는데도!
아저씨께서는 대머리이신가요?
저는 아저씨가 어떤 분인지 생각나는 대로 그려 보았습니다. 매우
만족스러운 것이 되었어요. 그런데 머리 꼭대기에 가서 그만 꽉 막히고
말았습니다.
저는 아저씨의 머리가 흰지, 검은지, 흰머리가 섞였는지, 아니면 머리칼
따위는 하나도 없는지, 전혀 짐작할 수가 없군요.
이것이 아저씨의 초상화입니다만, 문제는 머리카락을 좀더 그리느냐
어쩌느냐에 있습니다.
아저씨의 눈이 어떤 빛인지 알고 싶지는 않으세요?
아저씨의 눈은 회색이고 눈썹은 현관의 처마처럼 튀어나오고(소설에서는
흔히 짙은 눈썹이라고 하지요), 입술은 한일자인데 양끝이 약간 아래로 쳐져
있습니다. 이처럼 저는 아저씨를 잘 알고 있어요! 아저씨는 괴팍스럽고
신경질적인 노인이시죠.
(예배종이 울립니다).
오후 9시 45분
저는 새로 한 가지 규칙을 정했습니다. 절대로 지키기로 하겠어요. 그것은
결코 밤에는 공부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내일 아침에 복습 시험이 많더라도 말이에요. 그리고 공부 대신에
아주 쉬운 책을 읽는 거예요. 제게는 꼭 필요하니까요.
어쨌든 과거 18년 동안의 공백을 메워야 하니까요. 저의 머리는 깊고 깊은
굴이 생긴 것처럼 텅 비어 있어요. 아저씨께서 아시면 기가 막히실 거예요.
저 역시 이제야 겨우 그 무지의 심연을 깨달았으니까요. 가족이 있고 가정이
있으며, 친구나 책에 모자라는 것이 없었던 여자아이라면, 대개는 너무 잘
알고 있을 일들을 저는 전혀 본 일 조차도 없습니다.
이를테면, '어미거위의 노래(영국의 동요집)' '데이비드 카퍼필드(영국의
소설가 찰스 디킨스의 소설, 1850년)'도 '아이반 호(영국 스코틀랜드의
소설가 월터 스콧 경의 소설, 1820년)'도 '신데렐라'도 '푸른 수염(중세
프랑스의 이야기 주인공으로 아내를 6명이나 죽였음)'도 '로빈슨 크루소
표류기(영국의 소설가 다니엘 디포의 소설, 1719년)' '제인에어(영국의
소설가 샬롯 브론테의 소설, 1847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도 읽은 적이
없으며, 루드야드 키플링이라는 이름도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헨리 8세가
몇 번이나 결혼한 것도, 셀리가 시인이라는 것도 몰랐었습니다.
인간은 아주 먼 옛날에는 원숭이였다는 사실도, 에덴 동산은 아름다운
신화라는 사실도 몰랐습니다. R.L.S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을 말하는
약자인 것도, 조지 엘리엇이 여자라는 것도 몰랐었습니다. '모나리자'의
그림을 본 적도 없으며 (아마 아저씨께서는 곧이듣지 않으시겠지만
정말이에요), 그리고 또 셜록 홈즈라는 이름을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어요.
이제는 이미 그런 것을 모두 알고 있고 그 밖에도 여러 가지 많이 알고
있습니다. 이제 뒤처진 것을 회복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아시겠지요. 아아, 그러나 그것은 즐거운 일이에요! 빨리 저녁이 되었으면
하고 하루 종일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녁이 되면 '공부 시간'이라는 팻말을 방 문에 달고 편안히 빨간 가운을
입고 털이 푹신푹신한 슬리퍼를 신고서 쿠션을 있는 대로 소파 등에 기대어
놓고 대는 것입니다. 한 권으로는 모자랍니다. 한꺼번에 네 종류의 책을 읽는
거예요.
지금은 테니슨의 시와 '허영의 도시(새커리의 소설)'와 키플링의 '고원
이야기'와 그리고 또 -웃지 마세요- '작은 아씨들'입니다. 소녀 시절에 '작은
아씨들'을 읽지 않고 자란 사람은 학교 전체에서 저 혼자뿐입니다. 하긴 저는
아무에게도 그런 말은 하지 않습니다(그런 말을 하면 전 이상한 아이로
낙인이 찍히고 말 테니까요). 저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살짝 지난 달의
용돈 가운데서 1달러 12센트를 내고 사왔습니다. 이번에는 누가 소금에 절인
라임(레몬과 비슷한 신 열매로 '작은 아씨들'중에서 에미가 학교에
가져갔다가, 선생님에게 꾸지람을 듣는 장면이 있음) 이야기를 해도 저는
얼른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 있을 거예요.
(10시를 알리는 종이예요. 이 편지는 정말 몇 번이나 중단된 것입니다.)
토요일
안녕하십니까?
기하학에서 새로운 분야로 들어간 결과를 보고 드리겠습니다. 지난 주
금요일로서 평행 6면체를 마무리짓고 절단형 각주를 시작하였습니다. 학문의
길은 매우 험준하고 가파른 것으로 생각됩니다.
크리스마스 방학이 다음 주일부터 시작되므로 여행 가방이 복도에 수북이
쌓여 지나다니지 못할 정도입니다. 그리고 모두가 몹시 들떠 있어 공부 같은
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저는 멋진 휴가를 보낼 생각입니다. 텍사스 주에서
온 1학년 학생 한 명이 기숙사에 남게 되어 있으므로, 둘이서 소풍도 가고
얼음이 얼면 스케이트를 타러 갈 계획입니다.
그리고 또 도서관에 있는 책들을 모조리 읽어야겠어요. 그런데 3주일간이나
된답니다.
안녕!
아저씨께서도 저처럼 행복한 방학을 느끼기를 기원합니다.
언제나 아저씨의 주디 올림
추신
저의 물음에 대한 회답을 잊지 마세요. 만일 편지를 쓰시는 것이
귀찮으시다면 비서를 시켜 전보를 쳐 주세요. 다음과 같이 말씀해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스미스 씨는 대머리임
아니면
스미스 씨는 대머리가 아님
또는
스미스 씨의 머리는 백발임
전보 요금 25센트는 제가 다달이 받는 용돈에서 빼셔도 좋습니다.
1월까지 안녕.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시길.
크리스마스 휴가가 끝나 갈 무렵
(날짜를 분명히 기억 못 해서 미안합니다)
키다리 아저씨
아저씨가 계신 곳도 눈이 오고 있는지요? 제가 있는 탑에서 바라보는
세계는 흰 천으로 덮이고, 팝콘과 같은 큰 눈송이가 내리고 있습니다.
지금은 벌써 저녁때여서 태양(썰렁한 황색)은 더욱 썰렁해 보이는 보랏빛
언덕 저쪽으로 지고 있습니다. 저는 마지막 광선을 이용하여 이 편지를 쓰기
위해 창가의 가장자리에 앉아 있는 중입니다.
아저씨께서는 선물로 주신 다섯 개의 금화를 받고 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는 것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아저씨는
이제까지 아주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제가 가진 것은 모두 아저씨가 주신
거잖아요. 그것도 부족해서 또 이렇게 받는 것은 잘못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역시 저는 기뻐하고 있어요. 그 돈으로 제가 무엇을 샀는지 알고
싶지 않으세요?
1. 가죽 케이스에 든 은딱지 손목시계(시간에 늦지 않게 수업에 들어 나갈
수 있도록).
2. 메슈 아널드의 시집.
3. 보온병.
4. 담요(무릎을 덮는 것. 저의 방은 몹시 춥습니다).
5. 노란 원고지 5백장(저는 이제 곧 작가의 길을 걸을 셈입니다).
6. 동의어 사전(작가로서 어휘를 풍부하게 하기 위하여).
7. (이 마지막 물건 이름을 고백하는 것은 그다지 마음이 내키지
않습니다만) 비단 양말 한 켤레.
이제 아저씨께서는 제가 숨기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비단 양말을 산 동기는 정말 야비한 것이었어요. 줄리아
펜들턴이 매일 밤 기하 공부를 하러 내 방에 와서는, 소파에 다리를 포개고
앉는데 언제나 비단 양말을 신고 있지 뭐예요. 하지만 이제 두고 보세요.
그녀가 휴가에서 돌아오기만 하면, 저는 이 비단 양말을 신고 가서 그녀의
소파에 앉아 줄 테니까요. 글쎄 아저씨, 저는 이렇게 고약한 인간이랍니다.
그러나 저는 조금 정직하긴 하죠. 그리고 고아원 시절의 기록을 보더라도
제가 완전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은 아저씨도 이미 잘 알고 계실 거예요.
요컨대(이건 국어 선생님이 다음 말을 시작할 때 잘 쓰는 입버릇입니다)
저는 이 일곱 가지 선물에 대하여 매우 감사하고 있는 바입니다. 저는 이
물건이 모두 캘리포니아 주에 살고 있는 저의 가족으로부터 상자에 담겨서
부쳐 온 것으로 하고 있습니다. 시계는 아버지로부터, 작은 담요는
어머니로부터, 보온병은 이 곳 기후때문에 감기에 걸리지나 않을까 하고
언제나 걱정하고 계신 할머니로부터, 그리고 원고 용지는 남동생
해리로부터의 선물이에요. 이사벨 언니는 비단 양말을 주었고, 수잔
아주머니는 메슈 아널드의 시집, 해리 아저씨(남동생은 숙부님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로부터는 사전, 해리 아저씨는 초콜릿을 보내 주시겠다고 하셨지만
제가 굳이 동의어 사전으로 해달라고 고집을 피웠지요.
아저씨께서는 혼자서 저의 온 가족 역활을 하시는 것을 싫다고 하시진
않겠지요?
그러면 저의 방학 동안의 이야기를 해볼까요? 아니면 아저씨께서는 저의
교육 그 자체에만 흥미가 있으신지요? 이 (그 자체)라는 말의 미묘한 뜻을 잘
음미해 보십시오. 이건 요즈음 저의 용어 속에 더해진 것입니다.
텍사스 주에서 와 있는 아이의 이름은 리오노러 펜턴이라고
합니다(저루샤에 못지 않게 이상한 이름이죠?). 저는 이 아이가 좋습니다만
샐리 맥브라이드만큼은 아닙니다. 저는 샐리만큼 좋은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저씨는 예외로 하고 말이예요. 저는 누구보다도 아저씨가 가장
좋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저씨는 혼자서 저의 온 가족을 한데 합친
분이거든요.
리오노러와 저는 2학년 학생 두 명과 함께 날씨만 좋으면 짧은 치마에
스웨터, 운동화 차림으로 시니 스틱(하키와 비슷한 경기용 막대기)을 한
자루씩 들고서, 시골길을 누비고 다니며 부근 일대를 답사했습니다.
한 번은 6킬로미터쯤 떨어진 도시로 가서 여대생들이 잘 가는 음식점에
들어갔습니다. 새우구이(35센트), 그리고 후식으로는 메밀가루로 만든
핫케이크에 메이플 꿀을 친 것(15센트), 영양가 많고 가격도 저렴했습니다.
아아, 그 즐거움이란! 특히 저는 더했습니다. 고아원 생활과는 하늘과 땅
차이거든요. 저는 언제나 학교를 나올 때는 탈옥수와 같은 기분을 맛보는
것이었어요. 저는 곧잘 자기가 지금 어떤 경험을 하고 있는가를 주책없이
이야기하려다가, 깜짝 놀라 마치 자루에서 튀어나오려는 고양이의 꼬리를
잡아당기듯이 슬그머니 집어넣곤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일을
무엇이든 말해 버리지 못한다는 것은 몹시 괴로운 일입니다.
본디 저는 대단히 개방적인 성격이니까 말이에요. 이렇게 아저씨에게
무엇이든 털어놓기에 다행이지 그렇지 않다면 저는 터지고 말 것입니다.
지난 주 금요일 밤에 퍼거슨 기숙사의 사감이 다른 기숙사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초대하여, 당밀 캔디 파티를 열어 주셨습니다. 총인원 22명.
1학년생에서 4학년생까지 모두 사이좋게 사귀었습니다. 부엌은 아주 넓어서
돌벽에는 구리로 된 주전자와 냄비가 죽 걸려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작은 스튜 냄비도 세탁용의 큰 솥만한 크기입니다. 퍼거슨
기숙사에는 4백명이나 되는 여학생이 생활하고 있거든요. 새하얀 모자와
앞치마를 두른 주방장이 별도로 하얀 모자와 앞치마를 가지고 와서- 어디서
그렇게 많이 가져왔는지 저는 짐작도 못 하겠습니다.- 우린 모두 요리사로
둔갑했습니다.
아주 맛있는 캔디를 얼마든지 보아 왔지만 정말로 즐거웠습니다. 드디어
파티가 끝나서 우리의 몸도, 부엌문의 손잡이도 성한 데 없이 끈적끈적해졌을
때, 모두들은 모자와 앞치마를 입은 채 손에 손에 커다란 포크와 스푼,
프라이팬을 들고, 일렬로 서서 텅 빈 복도를 지나 교수 휴게실로 갔습니다.
그 곳에서는 여러 명의 교수와 직원이 조용한 저녁 한때를 즐기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교가를 부르고 캔디를 증정했습니다. 선생님들은
정중하게 그러나 조금 수상쩍은 듯한 얼굴로 캔디를 받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우리가 그 곳을 나왔을 때에는 모두들 커다란 당밀 캔디를 빠느라고 입이
끈적거려 말도 제대로 못 하였습니다.
아저씨! 저의 교육이 얼마나 진지하게 되어가고 있는지 아시겠지요?
아저씨께서는 제가 작가가 되기보다는 화가가 되는 편이 낫다고 생각지
않으세요?
휴가도 이제 이틀이면 끝납니다. 다시 친구들과 만날 것이 기다려집니다.
제가 있는 탑은 조금 쓸쓸합니다. 4백명이 사는 기숙사에 겨우 9명만이
산다는 것은 너무나 쓸쓸합니다.
어머나! 11페이지나 썼군요. 미안하게도, 아저씨는 지루해서 혼이 나셨죠.
저는 아주 짤막한 인사 편지를 쓸 작정이었는데, 한 번 쓰기 시작하면 저의
펜이 저절로 척척 써 버리는 모양입니다.
그럼 안녕! 저를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눈 앞의 지평선에 작은 먹구름이 떠 있지만 않다면, 저는 아주아주
행복하겠는데!
시험이 2월에 있을 예정입니다.
애정을 드리며
주디로부터
추신
애정을 드리며라고 쓰는 건 예의에 어긋난 짓인지도 모르겠군요. 만일
그렇다면 용서하십시오. 저는 누구든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데, 그
대상으로서 아저씨든 리펫 원장님이든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한다면... 저는
아무래도 원장님을 사랑할 수는 없어요. 그러니 아저씨가 참아 주시는 수밖에
없을 것 같군요.
그 전날 밤
키다리 아저씨께
우리 대학에서 어떻게 공부하고 있는지 아저씨께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휴가라는 것이 있었다는 사실마저 깨끗이 잊고 있습니다. 지난 4일
동안 저는 불규칙 동사를 57개나 머릿속에 집어넣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시험이 끝날 때까지 모두 머릿속에 남아 있어 주어야 될 텐데요.
친구들 가운데는 소용이 없어진 교과서를 팔아 버리는 아이도 있지만, 저는
모두 모아 둘 작정입니다.
그렇게 하면 졸업한 뒤 자기가 받은 교육 전체를 책장에 죽 늘어놓고
무엇이든 상세한 설명이 필요할 때는 주저없이 거기서 찾을 수 있을
테니까요. 그 편이 머릿속에 모두 넣어 두려고 애쓰는 것보다 훨씬 쉽고
정확합니다.
줄리아 펜들턴이 저녁때 사교적 방문을 하러 와서 한 시간 동안이나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가족 이야기를 꺼냈으므로, 저는 이야기를 다른 데로
옮기려고 애를 썼습니다만 안 되더군요. 줄리아는 제 어머니의 처녀 시절의
성을 알고 싶다는 거예요. 고아원 출신에게 이런 실례되는 질문을 하다니.
저는 모른다고 할 용기가 없어서 비참한 기분으로 맨 먼저 떠오른 이름을
대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몽고메리라는 것이었어요. 그러자 줄리아는
매사추세츠 주의 몽고메리 집안이냐, 버지니아 주의 몽고메리 집안이냐 하고
묻지 않겠어요?
줄리아의 어머니는 러더퍼드 집안 출신입니다. 그 조상은 노아의 방주(구약
시대의 대홍수 이야기에서 노아라는 사람이 하느님의 지시에 따라 만든 배)로
건너갔다는 것이며, 헨리 8세와 먼 친척이 된다나요? 그리고 아버지 쪽의
조상은 아담(구약 성서에 씌어 있는 인류의 조상) 보다 더 옛날부터 이어지고
있다는 거예요.
줄리아의 집안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아마도 명주실같이 아름다운 털이
있고 특별히 긴 꼬리를 가진 우수한 원숭이였을 겁니다.
오늘 밤에는 유쾌한 편지를 쓸 작정이었으나 졸려 죽겠어요. 게다가 또
시험도 걱정스럽고... 1학년짜리의 신분이란 그다지 행복하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시험을 앞둔
주디 애벗 올림
일요일
키다리 아저씨께
아주 아주, 나쁜 소식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맨 처음에 꺼내는 것은 삼가하겠습니다. 그전에 우선
아저씨의 기분을 좋게 해드려야겠지요.
저루샤 애벗은 작가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탑에서'라는 제목의 ,저의
시가 교지 2월호에 발표되었습니다. 그것도 제일 첫 꼭지에 실리다니,
1학년으로선 카다란 영예인 것입니다.
어제 저녁 교회에서 돌아오는 도중에 국어 선생님이 저를 불러서, 그 시는
6행째가 다소 서툴지만 그것만 없으면 아주 휼륭한 작품이라고 하셨어요.
만일 읽어 주시겠다면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 밖에 또 뭐 재미있는 소식이 없을까요? 아참, 저는 스케이트 연습을
시작했어요. 혼자서 아주 멋있게 얼음판을 다닐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체육관 지붕으로부터 밧줄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오는 기술도 배웠고,
높이뛰기를 1미터나 뛸 수도 있습니다. 이제 곧 1미터 반으로 끌어올리려고
생각중입니다.
오늘 아침 앨라배마의 목사님이 아주 좋은 설교를 하셨습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신약성서 '마태복음' 7장 1절)는 제목으로
남의 과실을 너그러이 볼 필요와, 가혹한 판단으로 남의 기를 꺽지 말라는
설교를 하셨습니다. 아저씨에게 들려 드리고 싶었어요.
지금은 겨울치고는 보기 드물 만큼 햇볕이 눈부신 오후로, 전나무에 달린
고드름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습니다.
눈에 띄는 온 세상은 무거운 눈때문에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다릅니다. 저는 슬픔의 무게로 고개 숙이고 있습니다.
자, 그럼 드디어 뉴스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주디야, 용기를 내어라!
이야기 안 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아저씨는 정말 지금 기분이 괜찮으신가요?... 저는 수학과 라틴 어
산문에서 낙제 점수를 받고 말았어요. 저는 이 두 과목을 개인 교수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 달에 다시 한 번 시험을 볼 것입니다. 아저씨가
실망하실 걸 생각하면 몹시 괴롭지만, 그렇지만 않다면 저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수업 과목에도 없는 다른 공부를 많이 했거든요.
저는 17권의 소설과 30킬로미터나 되는 시를 읽었습니다. '허영의 도시'며
'리처드 피버릴'이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며 모두가 읽을 만한
것들뿐입니다. 그리고 또 애더슨의 수필과 록허트의 '스콧의 생애' 기번의
'로마 제국 제1권' 벤베누토 첼리니의 '자서전'을 절반...첼리니란 사람은
매우 유쾌하더군요. 그는 언제나 아침 식사 전에 슬그머니 밖에 나가서는
살인을 하고 오거든요.
아저씨, 보시는 바와 같이 저는 라틴 어에만 매달려 있는 것보다 훨씬
유식해졌습니다. 앞으로는 절대로 낙제하지 않겠다고 약속드릴 테니 용서해
주세요, 네.
회개하려고 노력하는...
주디 올림
그림설명: 주디가 그림을 그려서 간단한 설명을 붙여놓음. '이달의 소식'
이라고 제목을 쓰고 빵모자를 쓰고 스케이트를 타고 있는 주디. 스케이트를
배우는 주디. 높이뛰기 하는 주디(다리가 몹시 불편해요). 두 과목에
낙제하여 눈물 흘리는 주디. 하지만 열심히 공부할 것을 다짐합니다. 라고
적어둠.
키다리 아저씨께
이건 이번 달 중간에 또 쓰는 임시편지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오늘 밤
웬지 쓸쓸합니다. 심한 폭풍이 불고 제가 있는 탑엔 눈보라가 치고 있습니다.
학교 안의 건물은 모두 불을 껐습니다만 저는 블랙 커피를 마셔서 잠이 오지
않습니다.
오늘 밤 저는 샐리와 줄리아와 리어노리 팬턴을 초대하여 만찬회를
열었습니다. 기름에 잰 정어리와 토스트 빵과 샐러드, 초콜릿, 우유가 든
케이크와 커피였어요. 줄리아는 매우 즐거웠다고 말했을 뿐이었으나, 샐리는
남아서 뒷설거지를 거들어 주었습니다. 오늘 같은 밤이야말로 라틴 어
공부에다 시간을 유효하게 써야겠지요. 그러나 저는 분명히 라틴 어엔 게으른
학생이에요. 리비와 '데 세넥추티(노년에 대해)'를 마치고 지금은 '데아
미키티아(우정론)'에 들어갔습니다(이건 담 키티아... 얄미운 키티아! 라고
발음하고 있습니다).
아저씨 잠깐 동안만 저의 할머니가 되어 주시지 않겠어요?
샐리에게는 한분, 줄리아와 리어노러에게는 할머니가 두 분씩이나 계셔서
오늘 밤은 모두 한 마디씩 자랑을 했어요. 저는 그 밖에는 아무것도
필요없다고 생각될 만큼 할머니가 가지고 싶어졌어요. 할머니란 매우 존경할
만한 친척이거든요.
그래서 만일 아무 지장만 없으시다면, 어제 시내에 나갔을 때 연보랏빛
리본으로 장식된 매우 아름다운 레이스 모자를 보아 두었으므로, 그것을 83세
생일 선물로 할머니에게 드릴 수 있게 해주셨으면 해요!
교회 시계가 12시를 알리고 있습니다. 졸음이 오는 것 같군요. 할머니
안녕히 주무세요.
할머니를 무척 사랑하는
주디 올림
3월 15일
D.L.L. 께
저는 라틴 어 작문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라틴 어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공부할 겁니다. 열심히 공부를 계속할 거예요.
시험은 다음 주 화요일 일곱째 시간인데, 저는 합격하든가 아니면 실패하든가
두 가지 중의 하나입니다.
무조건 합격이라는 기쁜 편지냐, 아니면 산산이 부서진 가련한 것이
되느냐?
시험이 끝나는 대로 정중한 편지를 쓰겠습니다. 오늘 밤은 라틴 어 문법과
씨름을 해야 하므로 이만 총총.
시간에 쫓기는
J. A.
3월 26일
D.L.L. 스미스 아저씨께
아저씨께서는 결국 질문에 대답을 해주시지 않으셨군요. 아저씨께서는 제가
하는 일 따위에는 조금의 흥미도 보여 주시지 않는군요. 아저씨는 저 고약한
평의원 가운데서도 가장 고약한 분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저씨께서는 저를 교육시키는 것은 저를 위해서 하시는 게 아니라 다만
의무적으로 하시는 것이 분명합니다. 저는 아저씨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릅니다. 성함조차도 모릅니다. 어떤 '물체'에다 편지를 쓴다는 건 정말
재미가 없습니다. 아저씨께서는 저의 편지 따윈 보시지도 않고 휴지통에 던져
버리실 거라고 생각됩니다. 앞으로는 공부에 관해서만 쓰겠어요.
라틴 어와 기하의 재시험은 지난 주일에 끝났습니다.
양쪽 다 합격하였으므로 조건부 낙제에서 해방된 셈이죠. 삼가 알려
드립니다.
삼가 문안드립니다.
저루샤 애벗 올림
4월 2일
키다리 아저씨께
저는 어쩌면 그렇게도 철이 없을까요.
지난 주일에 부친 저의 무례한 편지는 부디 잊어 주십시오.
그것을 쓴 밤, 저는 너무도 쓸쓸하고 비참해서 목이 아팠던 거예요. 저는
몰랐습니다만, 편도선염과 유행성 감기와 그 밖의 여러 가지 병에 걸릴
뻔했던 거예요. 지금은 병원에 있습니다.
여기 온 지 벌써 엿새째 됩니다. 오늘에야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난 앉게
되어, 펜을 잡는 것을 겨우 허락받았습니다. 간호사께서 매우 까다로운
분이에요. 저는 내내 그 편지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저씨께
용서를 받기 전에는 이 병이 결코 낫지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저는 이 그림처럼 붕대를 칭칭 감아 머리 위에다 토끼 귀처럼 매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걸 보시면 아저씨께서도 가엾은 생각이 드시겠지요. 혀
밑샘(혀 아래서 침을 분비하는 곳 중의 하나)이 이렇게 부어 있는 거예요.
1년 동안이나 생리학 공부를 했으면서도 혀 밑샘이란 들은 적도 없다니
교육이란 정말 쓸모 없는 거예요! 더 이상은 쓸 수가 없습니다. 너무 오래
일어나 있으면 어질어질합니다. 제가 그렇게 건방지고 배은 망덕했던 것을
부디 용서해 주세요. 저는 가정 교육이 매우 안돼 있거든요.
주디 애벗 올림
4월 4일
병원에서
가장 존경하는 아저씨께
어제 저녁때, 밖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침대 위에 일어나 앉아,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며 커다란 건물 안에서 사는 쓸쓸함을 절실히 느끼고 있을 때,
간호사가 제게 온 길쭉한 흰 상자를 들고 왔습니다. 그 안에는 멋진 분홍빛
장미 송이가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멋있는 건 어깨가
올라가고 뒤로 눕힌 묘한 글씨(하지만 매우 개성적인 글씨였어요)로 무척
친절한 편지가 곁들여져 있는 일입니다.
아저씨,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아저씨로부터의 꽃다발이야말로 제가 이 세상에 나와 처음 받는 진실한
선물이었어요. 제가 얼마나 어린애였나 말씀드려 볼까요... 저는 너무 기뻐서
그만 엎드려 울고 말았습니다.
이제 아저씨께서 저의 편지를 읽고 계시다는 걸 알았으므로 앞으로도 빨간
리본으로 묶어서 금고 속에 넣어 둘 가치가 있을 만큼 재미있는 편지를
쓰기로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무서운 편지만은 부디 빼내어 불태워
주십시오. 어쩌다 아저씨께서 그것을 다시 읽어 보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견딜 수가 없군요.
몹쓸 병으로 기분이 나쁘고 비참해졌던 1학년생을 위로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아저씨께서는 가족이나 친구분이 많이 있어서 외톨박이로 자란
고독한 자의 기분을 잘 모르실 거예요. 하지만 저는 알고 있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앞으로는 절대로 그런 실례되는 짓은 하지 않겠어요.
아저씨가 실존하는 인물이란 걸 알았으니까요. 그리고 또 이제 절대로
아저씨에게 질문 공세는 하지 않겠어요.
아저씨는 아직도 여자아이를 싫어하시는지요?
언제나 변함없는
주디 올림
월요일 여덟째 시간
키다리 아저씨께
설마 아저씨께서는 두꺼비 위에 앉아 버린 평의원님은 아니시겠지요?
두꺼비가 팡 소리를 내며 터졌다고 들었으니까... 아마 좀더 살이 찐
평의원님이셨겠지요.
아저씨는 존 그리어 고아원의 세탁장 창 가까이에 격자판을 덮은 작은
하수구 같은 것이 몇 개 있었던 일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해마다 봄에 두꺼비가 나오는 계절이 되면 우리는 두꺼비를 채집하여
창가의 그 구멍 속에 잡아 넣었는데, 그것이 가끔 세탁장에 튀어 들어와서
세탁날에 유쾌한 대소동이 벌어지곤 했지요.
그 방면의 활약으로 덕분에 심한 벌을 받았습니다만, 아무리 의기
소침해지는 꼴을 당하여도 여전히 두꺼비를 채집하는 거였어요.
그런데 어느 날 -아저씨가 귀찮아하실까 봐 자세한 이야기는 쓰지
않겠습니다만- 어쨌든 가장 크고 살이 찌고, 가장 배가 튀어나온 두꺼비가
평의원실의, 가죽으로 된 안락의자에 버티고 앉았다가, 그 날 오후의
평의원회에서- 아저씨께서는 아마 그 자리에 계셨을 테니까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 기억하고 계시겠지요? 냉정하게 과거를 돌이켜보아, 그 벌은 당연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고, 만일 저의 기억이 정확하다면 실로 타당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봄이라는 계절과 두꺼비의 재현이 언제나 옛날의 수집욕을 불러 일으킨다는
것 밖에는, 어째서 이런 회고적인 기분이 되었는지 저 자신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제가 어째서 지금 두꺼비 채집을 시작하지 않느냐 말씀드린다면 그건
채집해서는 안 된다는 규칙이 없기 때문입니다.
목요일 예배가 끝나고 나서
제가 가장 즐겨 읽는 책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지금 현재를 뜻합니다.
저는 사흘마다 달라지거든요. 지금은 '폭풍의 언덕'입니다. 에밀리
브론테가 그것을 썼을 때는 아직 젊디젊은 나이여서 하워드 교회 안에서
밖으로 나간 적이 없고, 태어난 뒤로 남자 친구 같은 것은 한 명도 없었다고
하는데, 어떻게 히드클리프 같은 남자를 상상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저는 아직 새파랗게 젊고 존 그리어 고아원
밖에는 한 걸음도 나간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유명해질 기회는 충분히
있을 거예요. 그런데 저는 가끔 저에게는 그러한 능력이 없는가 하는 무서운
불안에 사로잡힙니다. 만일 제가 대작가가 못 된다면 아저씨께서는 몹시
실망하실까요?
봄이 되어 모든 것이 이렇게 아름답게 파릇파릇 새싹이 돋아나니까, 저는
학교 공부 같은 건 팽개치고 날씨와 손을 맞잡고 달아나 버리고 싶은
기분입니다. 들판에는 여러 가지 신기한 것들이 잔뜩 있습니다. 책을 읽으며
사는 것보다는 책을 쓰며 사는 편이 훨씬 즐겁다고 생각합니다.
으악!
이 비명을 듣고 샐리와 줄리아와, 또 몹시 쑥스럽게도 복도 저쪽 방에 있는
4학년생이 달려왔습니다. 그건 이 그림과 같은 지네때문이었어요.
꼭 이렇게 생긴, 아니 더 기분 나쁜 것이었어요. 마침 마지막 줄을 다 쓰고
나서 다음은 뭐라고 쓸까 하고 생각중인데 툭! 하고 그것이 천장에서 떨어져
저의 곁에 착륙한 것입니다. 저는 달아나다가 그만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을
두 개 떨어뜨려 깨고 말았습니다. 샐리는 얼른 저의 머릿솔 등으로 그것을
때려서- 그 솔은 앞으로 쓸 기분이 안 납니다- 앞의 반쪽을 죽였습니다만,
나머지 반쪽은 50개의 다리로 양복장 밑으로 달아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기숙사는 오래된 건물인데다 벽 전체가 담쟁이덩굴로 꽉 덮여 있어서
지네가 많습니다.
그놈은 아주 징그러워요. 침대 밑에서 호랑이가 나타나는 게 차라리 낫다고
생각합니다.
금요일 오후 9시 30분
정말로 재수없는 날이었어요. 오늘 아침 저는 기상 종이 울린 걸
몰랐습니다. 그래서 재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구두를 신으려 하는데, 구두끈이
끊어졌으며, 칼라의 단추가 등허리 쪽으로 떨어진 데다 아침식사 시간에도
늦었으며. 첫째 시간의 암기수업에도 지각했으며, 만년필에서는 잉크가 새고
공교롭게도 압지는 잊어버리고.
기하 시간에는 삼각 함수의 사소한 문제로 교수와 저의 의견이
대립하였습니다. 잘 검토해 보니 교수가 옳았어요. 점심 식사는 양고기
스튜와 대황(다시마 대용으로 사용됨) 요리- 두 가지 다 가장 싫어하는
거예요. 꼭 고아원 맛이 나는 것 같아서요.
우편물이라곤 계산서뿐(하기야 저의 가족은 편지를 쓰는 사람들이 아니므로
그 밖의 것은 올 리도 없겠지만). 국어 시간에는 갑자기 필기 시험이
있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것도 거절하지 않았다
내가 그 대가로서 나의 생존을 지불했더니
위대한 상인을 미소지었다.
브라질? 상인을 나를 본 척도 않고
단추를 빙빙 돌리면서
부인, 오늘은 뭐 다른 것을
보고 싶지 않으세요
이건 시입니다. 누가 쓴 것인지 무슨 뜻인지도 저는 모릅니다. 교실에
들어가니까 칠판에 씌어 있었고, 그것을 설명하라는 것이었어요.
처음 1절을 읽었을 때 저는 위대한 상인이라는 것은 덕행에 대한 보수로서
축복을 주시는 하느님을 말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나 제 2절에
단추를 빙빙 돌린다는 구절이 있으므로 이건 신에 대한 모독이라 생각하고
재빨리 그 생각을 지워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 모두가 같은 곤경에 빠져서
45분 동안이나 백지를 앞에 놓고 백지와 같은 텅 빈 머리로 가만히 앉아
있었어요. 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정말 귀찮은 과정을 밝아야 하는
것이로군요.
그러나 이것으로 이 불행한 날이 끝난 건 아닙니다. 더 나쁜 일이 기다리고
있었던 거예요.
비가 오기 때문에 골프를 칠 수 없게 되었으므로, 체육관에 갔다가 옆
사람이 휘두른 단벨로 팔꿈치를 눈물이 쑥 빠지도록 얻어맞았습니다.
기숙사에 돌아와 보니까 푸른 새 옷이 든 상자가 배달되어 있었습니다.
스커트가 너무 좁아서 앉을 수가 없었습니다. 금요일은 대청소날이므로
청소원이 저의 책상위에 놓인 서류를 뒤섞어 놓고 말았습니다. 식사 뒤
디저트로는 묘석(밀크에 바닐라 향료를 섞어 젤라틴으로 굳힌 것)이 나왔고,
예배 시간에는 (여자다운 여자)에 대한 설교를 듣기 위해 여느 때보다
20분이나 더 강당에 붙잡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겨우 한숨을 돌리고
지금 '어느 부인의 초상'을 읽으려 하고 있는 참에, 애컬리라고 하는
무기력하고 형편없이 멍청한 아이가 (이 아이의 이름이 A로 시작되므로 라틴
어 시간에는 제 옆자리에 앉습니다. 리펫 원장님이 제 이름을 A.B.C. 의
마지막인 Z로 시작되는 자브리스키라고나 지어 주셨으면 좋았을 거예요)
월요일에는 69절부터 시작하는지 아니면 70절부터인지를 물어 보려고
찾아와서 한 시간이나 있었지 뭐예요. 이제 막 돌아갔습니다.
아저씨께서는 이렇게 의기 소침해지는 사건만의 연속이란 걸 들으신 적이
있으신지요. 훌륭한 정신을 필요로 하는 것은 인생의 커다란 난국에 부딪쳤을
때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보다도 막상 큰일을 당하면 용기를 내어 큰
비극에 대처할 수가 있지만, 여느 때의 시시한 재앙을 처리해 나가는 데는
상당한 정신력이 필요합니다. 저는 이제부터 그런 정신을 길러 갈
생각입니다. 저는 인생을 모두 게임으로 보고 교묘하게 그리고 공평하게
처리해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지면 어깨를 움츠리고 웃겠습니다-
이겨도 마찬가지죠. 아무튼 저는 씩씩한 사람이 될 작정입니다. 비록
줄리아가 비단 양말을 신고 있든 지네가 벽에서 떨어지든, 아저씨께서 두 번
다시 제 불평을 듣는 일은 없으실 거예요.
회답을 기다리겠습니다.
영원한 주디
빠른 답장을 기다립니다.
5월 27일
키다리 아저씨
안녕하십니까. 리펫 원장님에게서 온 편지는 잘 보았습니다. 여사께서는
제가 품행과 공부에 우수한 성적을 거둘 것을 희망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아마도 이번 여름에는 제가 아무 데도 갈 곳이 없으리라고 생각하시고,
고아원에 돌아와서 학교가 시작될 때까지 식비 대신 일을 하라는 제의를
하셨습니다.
저는 존 그리어 고아원은 정말 싫습니다.
그 곳에 돌아가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저루샤 애벗
친애하는 키다리 아저씨
당신께서는 정말 마음이 좋은 분이시군요. 농장 이야기는 얼마나 반가운지
모르겠어요. 저는 이제까지 한 번도 농장이라는 곳에 가 본 적이 없습니다.
존 그리어 고아원에 돌아가서 여름 내내 접시닦기를 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집니다. 그런 일을 하게 되면 저는 아주 끔찍한 사건을 저지를지도
모릅니다. 고아원에 있는 밥그릇, 접시, 찻잔 같은 것을 모조리 부숴
버릴지도 모르니까요.
이렇게 간단한 편지를 드려서 죄송합니다. 저의 소식을 알려 드릴 수가
없군요. 왜냐하면 지금은 프랑스 어 시간인데 이제 곧 선생님이 제 이름을
부르실 테니까- 그것 보세요. 지금 막 제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럼 친절하신 분이여, 안녕
주디로부터
5월 30일
키다리 아저씨께
아저씨는 이 곳 교정을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이건 단순히 수사학적
질문에 지나지 않으니까 신경쓰시지 마세요) 5월이 되면 마치 천국과
같답니다. 온갖 꽃나무들은 꽃을 피우고 나무들은 모두 아름다운 잎으로
치장했습니다- 고목 소나무마저도 싱싱하고 신선하게 보입니다. 푸른
잔디밭에는 온통 노란 민들레꽃과 하늘색, 분홍, 흰색 드레스를 입은
소녀들이 여기 저기에 흩어져 있습니다. 누구나 다 기쁨에 넘쳐 구김살이
없습니다. 곧 방학이 오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기다리는 기쁨으로 시험 같은 건 그다지 걱정도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행복한 마음의 상태가 또 있을까요? 아저씨, 그 가운데서도 저는
가장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이미 고아원 아이가 아니고, 어느 집의
아기보는 아이도 아닐 뿐더러, 타이피스트도 경리도 가정부도
아니거든요(아저씨라는 분이 계시지 않았다면 저는 그 중의 어느 것이 되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이제 와서 저는 과거의 제 잘못을 뉘우치고, 리펫 원장님에 대해 건방진
태도를 취했던 일을 후회하고 있습니다.
프레디 퍼킨스의 뺨을 때린 것을 후회하고 있습니다.
사탕 단지에 소금을 넣어둔 것을 후회합니다.
평의원님 등 뒤에서 혀를 내밀었던 일을 후회합니다.
저는 누구한테나 상냥하고 친절한 사람이 될 작정입니다. 이렇게도 저는
행복한걸요! 그리고 올 여름에는 글을 쓰고 또 써서 대작가가 되기 시작할
작정입니다. 얼마나 멋진 환경이에요.
저는 아름다운 성격을 자꾸 키워가는 중이랍니다, 추위나 서리를 만나면
얼마쯤은 풀이 죽겠지만 태양이 빛나면 무럭무럭 자랍니다.
이건 누구나 그러리라고 생각합니다. 재난이나 슬픔이나 실망이 도덕적
정신을 기른다는 말에는 저는 찬성할 수가 없습니다. 행복한 사람이란
친절함이 마음에 넘치고 있는 법입니다. 저는 염세주의자라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멋진 말이죠? 요즈음에 배웠어요). 아저씨는 염세주의자이신가요?
저는 교정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이었죠. 정말로 아저씨께서 갑자기
찾아오셔서 제가 안내하며, "저게 도서관이예요. 튜더풍의 로마식 건물이
새로 지은 부속 병원이예요."하고 이야기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저는 안내역을 매우 잘 합니다. 고아원에 있을 때도 계속 해왔고, 여기서도
매일처럼 하고 있습니다. 정말이에요.
그리고 저는 남자분한테도 안내를 했었답니다.
그건 커다란 경험이었어요. 저는 이제까지 한 번도 남자분과 이야기한 일이
없었던 겁니다(때로는 평의원님과 이야기한 적이 있었지만 그까짓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어마나, 미안해요.
제가 평의원님의 욕을 했다고 해서 뭐 아저씨의 감정을 상하게 할 생각은
아니니까요. 사실 저는 아저씨를 평의원의 한 사람이라고는 생각지 않고
있으니까요. 아저씨는 아마 뭔가 잘못되어서 평의원이 되셨을 거예요.
평의원이란 그 그림처럼, 뚱뚱하고 거만하며 금시계줄을 늘어뜨리고 자비롭게
고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인물입니다.
이건 마치 풍뎅이처럼 생겼지만 아저씨 이외의 평의원의 초상화인
셈입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 그러니까 한 남성과 같이 걷고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차를 마시고 하였습니다. 더구나 그것도 아주 멋있는
남성, 즉 줄리아 집안의 저비스 펜들턴 씨라는 분이에요. 간단하게 말하자만
줄리아의 삼촌이지요(길게 말하자면 아저씨처럼 키가 큰 분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이 도시에 볼일이 있어 온 김에 대학까지 잠깐 와서 조카를 찾아보자는
마음이 생긴 모양이나, 줄리아와는 그다지 친밀하지는 않더군요. 아마
줄리아가 갓난아이였을 때 얼핏 한 번 보고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그
뒤로는 계속 줄리아에게 관심이 없었나 봐요.
아무튼 그분은 모자와 지팡이와 장갑을 옆에 놓고 응접실에 단정하게 앉아
계셨습니다. 줄리아와 샐리도 거기 있었습니다. 만 일곱째 시간의 암송과목을
아무래도 빼 먹을 수가 없어, 줄리아가 저한테 뛰어와서 학교 구내를 안내해
드리고, 일곱째 시간이 끝나거든 자기와 다시 만나자고 부탁을 했으므로,
저는 친절한 마음에서 맡긴 했습니다만, 정말은 별로 내키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펜들턴 집안 사람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나 보니 그분은 매우 온화하고 상냥한 분이었어요. 조금도 펜들턴
집안 같은 냄새는 풍기지 않고, 인간미가 있는 분이었습니다. 우리는 멋있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삼촌이라는 것을 몹시 갖고 싶어졌습니다.
아저씨, 저의 삼촌이 되어 주시지 않겠어요? 할머니보다 격이 높다고
생각되는 데요.
펜들턴 씨는 얼마쯤 아저씨를 생각나게 합니다. 20년 전의 아저씨를
말이에요. 어때요? 한 번도 만나지 않아도 저는 아저씨를 이처럼 잘 알고
있지 뭡니까.
펜들턴 씨는 키가 크고 마른 편으로 조금 거무스름한 얼굴에 주름이 몇
개나 있고, 입 가장자리를 약간 치켜올릴 뿐으로 표면에는 나타나지 않는,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미소를 띠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태도는 상대방에게 전부터 잘 알고 있는 사람을 대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매우 호감이 가는 분입니다.
우리는 안뜰에서 운동장까지 학교 안을 두루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다가
펜들턴 씨는 피로하여 차를 마셔야겠다면서 소나무 가로수 저쪽에 있는 대학
구내 식당에 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줄리아와 샐리가 있는 곳에 가야 한다고 말하니까, 펜들턴
씨는 조카에게는 차를 마시게 하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다고 하셨어요.
신경질을 내면 안 된다나요. 그래서 우리 둘만 빠져나가 베란다에 나와 있는
깨끗한 작은 테이블에서 홍차와 빵과 마멀레이드와 아이스크림과 케이크를
먹었습니다. 마침 월말이어서 용돈이 떨어질 무렵인지라 식당은 텅텅 비어
있었습니다.
우린 매우 유쾌했어요. 그러나 펜들턴 씨는 돌아오자마자 기차 시간에
늦겠다며 뛰어갈 판이어서 줄리아와는 제대로 이야기할 틈도 없었습니다.
줄리아는 제가 삼촌을 납치했다고 몹시 분해하였어요. 매우 부자이고 좋은
삼촌인가 봅니다. 그분이 부자라기에 저는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차와 그 밖의 것으로 한 사람 앞에 60센트나 들었거든요.
오늘 아침(지금은 월요일입니다)에 세 상자의 초콜릿이 줄리아와 샐리와
저에게 각각 속달편으로 배달되었습니다. 아저씨는 어떻게 생각하시죠?
남자한테서 초콜릿을 선물받다니!
저는 이제 고아가 아니라 어엿한 처녀다운 기분이 되기 시작했어요.
언젠가 아저씨께서 여기에 오셔서 저와 차를 마시고 제가 아저씨를
좋아할는지 어떨지는 보게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만일 아저씨가
좋아지지 않는다면 큰일이겠지요! 그러나 좋아질 것이 틀림없어요.
그럼 이쯤에서 아저씨께 경의를 표하겠습니다.
"저는 결코 아저씨를 잊지 않을 거예요"
주디 올림
추신
오늘 아침 거울을 보다가 전에는 보지 못하던 전혀 새로운 보조개를 하나
발견했습니다. 이상하군요. 아저씨, 어디서 온 거라고 생각되시나요?
6월 9일
키다리 아저씨
아주 행복한 날이에요! 지금 막 마지막 시험을 끝마쳤어요.
마지막 과목은 생리학이었답니다.
그리고 앞으로 시작될 3개월의 농장 생활!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레입니다.
저는 농장이 어떤 곳인지 모릅니다. 아직까지 한 번도 가본적이 없거든요
(자동차의 창문으로 본 것 밖에는 한 번도 본 일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아마
좋아질 거예요. 그리고 또 자유를 즐길 수 있으니까요.
저는 아직도 완전히 존 그리어 고아원 밖에 있다는 기분이 들질 못합니다.
언제나 고아원 일을 생각할 때마다 무언가가 등줄기에서 쫓아오는 듯한
한기를 느낍니다. 마치 리펫 원장님이 저를 데려가려고 팔을 뻗쳐서
쫓아오지나 않나 하면서 어깨 너머로 뒤를 돌아보며 좀더 빨리, 더욱 빨리
달아나야 할 듯한 기분입니다.
이 여름에 저는 아무에게도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거겠죠. 아저씨의
명목상의 권한 같은 건 조금도 저를 괴롭히지 않습니다. 무엇을 가할 수 없을
만큼 멀리 떨어져 있는걸요.
리펫 원장님은 저에 관한 한 영원히 죽고 없으며, 셈플 씨들은 저의 품행
같은 걸 감독하는 건 아니겠죠. 그렇고 말고요.
저는 이제 완전히 어른이 되어 버린걸요. 만세!
그럼 이제부터 짐을 꾸리겠습니다. 주전자며 접시며 쿠션, 책 등을 세 개의
상자에다 꾸려 넣어야 하므로 이만 줄이겠습니다.
당신의 영원한
주디 올림
추신
생리학 시험 문제를 함께 보냅니다. 아저씨라면 합격될 것 같아요?
토요일 록 윌로 농장에서
가장 좋아하는 키다리 아저씨
지금 막 도착해서 아직 짐도 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농장이 얼마나
제 마음에 들었는가 이야기하고 싶어 참을 수가 없군요. 여기야말로 정말
천국과 같이 멋진 곳입니다. 집은 이 그림처럼 네모난 것인데 매우
고풍스러운 건물입니다.
백년 이상이나 되었답니다. 옆쪽에 베란다가 달려 있지만 그림으로는 못
그리겠습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현관이 정면에 있습니다. 이 그림은 진짜
모습을 표현하지는 못합니다- 새의 깃털로 된 먼지 떨이 같은 것은
단풍나무이고, 현관으로 가는 통로를 따라 심어져 있는 삐죽삐죽한 것은
바람에 솔솔거리는 소나무와 솔송나무입니다. 이 집은 언덕 위에 있어서
언덕과 언덕과 언덕이 끝없이 이어진 푸른 목장을 훤히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코네티컷 주는 이처럼 물결 모양으로 주름잡힌 굴곡이 심한 물결 모양의
지형인데 록 윌로 농장은 그 물결의 꼭대기에 있습니다. 전에는 도로 저쪽에
창고가 나란히 있어서 전망을 방해하고 있었는데, 하늘에서 친절한 번개가
그걸 태워 버렸습니다.
이 곳에 사는 사람은 셈플 씨 부부와 일하는 아가씨 한 명과 일꾼 두 명이
있습니다. 일하는 사람들은 부엌에서 식사를 하고 셈플 씨와 주디는 식당에서
먹습니다. 저녁에는 햄, 계란, 비스킷, 꿀, 젤리, 버터, 치즈를 먹고
홍차까지 마시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사람을 즐겁게
해주기는 처음입니다.
제가 하는 말은 무엇이든 다 우스운 모양이에요. 그도 그럴 것이 저는
이제까지 시골에 온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 저의 질문은 틀림없이 무식함을
드러내고 있을 테니까요.
앞 그림의 *표가 있는 곳은 결코 살인 사건이 일어난 곳은 아닙니다. 제
방이에요. 크고 널찍하고 멋진 옛날식 가구와 막대기로 밀어서 열게 되어
있는 창문과 금빛 테두리를 한 녹색 차양- 잘못해서 이걸 건드리면
떨어집니다- 그 밖에 네모진 큰 마호가니 책상이 있습니다.
저는 여름 내내 이 책상에 팔꿈치를 대고 소설을 쓸 작정입니다.
아저씨, 저는 아주 흥분하고 있습니다. 여기저기를 탐험하고 싶어 밤이
새기를 기다릴 수 없을 정도예요.
지금은 오후 8시 30분, 저는 촛불을 끄고 자려는 참입니다.
우린 5시 기상이에요. 이렇게 유쾌한 일이 또 있을까요? 이게 진짜
주디라고는 믿을 수 없는 기분입니다. 아저씨와 자비로우신 하느님이 저에게
분에 넘치는 선물을 많이많이 주셨습니다.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저는
매우 착한 사람이 되어야겠어요. 저는 반드시 그렇게 될 겁니다. 두고
보세요. 안녕.
안녕히 주무세요.
주디
추신
개구리 소리와 아기돼지의 울음 소리를 아저씨에게 들려 드리고 싶습니다.
초승달도 보여 드리고 싶고요. 저는 지금 오른쪽 어깨 너머로 초승달을 보고
있습니다(오른쪽 어깨 너머로 초승달을 보며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함).
7월 12일
록 윌로에서
키다리 아저씨
어떻게 아저씨의 비서가 록 윌로를 알고 있었는지요(이건 수사학적 질문이
아닙니다. 저는 몹시 그걸 알고 싶은 거예요). 들어 보세요. 왜냐하면 이
농장은 전에 저비스 펜들턴 씨의 소유였던 것을 옛날 자기 유모였던 셈플
부인에게 주었다는군요. 이렇게 이상한 우연의 일치가 있을까요? 부인은
지금도 펜들턴 씨를 '저비 도련님'이라고 부르며 얼마나 귀여운 아이였는가를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아직까지 펜들턴 씨가 아주 어린아이였을 때의
곱슬머리를 상자 속에 넣어 두고 있습니다. 빨갛다기보다는 불그스레한
빛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제가 펜들턴 씨를 알고 있다는 것을 안 뒤로부터는 저에 대한 평가가
올라갔습니다. 펜들턴 집안의 한 사람과 안다는 것은 록 윌로에서는 최고의
소개장이 됩니다. 더구나 저비 도련님은 가족들 중에 최고로 인기가 좋다는
군요- 줄리아의 집이 훨씬 격이 낮은 가문이라는 걸 듣고 저는 기뻤습니다.
농장 생활은 더욱더 재미가 있어집니다. 어제는 건초 마차를 타보았습니다.
이 곳에는 세 마리의 어미돼지가 아홉 마리의 귀여운 아기돼지가 있습니다.
그 왕성한 식욕은 아저씨에게 보여 드리고 싶을 정도예요.
돼지처럼 잘 먹는다는 말은 정말 그럴 듯한 말이에요. 그리고 작은
병아리와 오리, 칠면조와 암탉 등이 많이 있습니다. 아저씨는 농장에서 사실
수 있는 신분인데 도시에서 사신다니 정신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돼요.
저의 일과는 달걀을 모으는 일입니다. 저는 어제 검은 암탉이 숨어든
둥우리에 접근하려다가 창고 2층 대들보에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무릎이 까져서 안채에 들어갔더니 셈플 아주머니는 개암나무 즙을
바르고 붕대를 감아 주면서 계속해서 "원 쯧쯧, 저비 도련님이 그 대들보에서
떨어지셔서 같은 데를 다친 것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하고 중얼거리고
있었습니다.
이 근처의 경치는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골짜기가 있고 시냇물이 있고
곳곳에 나무가 우거진 언덕이 있으며 저 멀리엔 입에 넣으면 녹아내릴 듯한
푸른 산이 솟아 있습니다.
우리는 1주일에 두 번 버터를 만듭니다. 그리고 크림은 냉장실에 넣어
둡니다. 그 곳은 돌로 지어져 있으며 밑에는 시냇물이 흐릅니다.
이 근처 이런 농가에서는 거의 다가 분리기를 쓰고 있습니다만, 우린 그와
같은 새로운 방법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냄비로 크림을 만드는 것은 힘이
듭니다만 그 대신 훨씬 비싼 값으로 팔립니다. 송아지가 여섯 마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녀석들에게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1. 실비아- 숲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2. 레스비아- 카툴루스(로마의 시인)의 시에 나오는 레스비아의 이름을
따서.
3. 샐리.
4. 줄리아- 아무런 특징도 없는 얼룩 송아지.
5. 주디- 제 이름을 붙였어요.
6. 키다리 아저씨- 언찮게 생각하지 않으시겠죠. 이 송아지는 순수한 저지
종이고 성질이 아주 온순합니다.
농장 일이 너무 바빠서 아직 불후의 명작을 쓰기 시작할 틈이 없습니다.
언제나 아저씨의
주디가
추신(1)
저는 도넛 만드는 법을 배웠습니다.
추신(2)
아저씨께서 병아리를 기르실 생각이 있으시면 버프오핀튼 종을 권해
드립니다. 이 종의 병아리는 전혀 솜털이 없습니다.
추신(3)
제가 어제 만든 버터를 한 덩어리 보내드릴 수 있으면 좋겠군요. 저는
훌륭한 젖짜는 아가씨예요.
추신(4)
이건 미래의 대작가 저루샤 애벗 여사가 소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는
그림입니다.
일요일
키다리 아저씨
매우 재미있는 일이 있습니다. 어제 오후 저는 아저씨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는데 '키다리 아저씨'하고 쓰기 시작할 무렵, 저녁 식사에 쓸
검정딸기를 따오기로 약속했던 것이 생각나서, 책상 위에 편지를 올려 놓은
채 갔었지요. 그리고 지금 돌아와 보니 편지지 한 가운데 무엇이 앉아 계신지
아시겠어요? 그야말로 진짜 키다리 아저씨(장님 거미)였지 뭐예요!
저는 조심조심 다리 하나를 잡아 창 밖으로 내보내 주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저는 이 장님 거미의 다리를 하나라도 다치게 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이걸 보면 언제나 아저씨가 생각나니까요.
우리는 오늘 아침 스프링이 달린 짐마차를 타고 읍내를 지나 교회까지
갔습니다. 교회는 조그맣고 아름다운, 흰 목조 건물로 뾰족탑이 한 개 있고,
정면에는 도리아 식(어쩌면 이오니아 식인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언제나
혼동하고 말거든요)의 기둥이 세 개나 있습니다.
기분 좋게 잠이 솔솔 오는 설교인지라 모두가 반은 졸면서 종려나무잎
부채를 부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의 목소리 외에 들리는 것이라곤 정원의 나무에서 맴맴 우는
매미 소리뿐이었어요. 저는 일어서서 찬송가를 부를 때까지 눈이 떠지질
않았어요. 그 때서야 저는 설교를 듣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찬송가를 고르게 된 목사님의 심리 상태를 알고 싶었던
거예요. 그 찬송가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어요.
이 세상의 즐거움과 위안을 버리고
천국의 기쁨을 나와 같이 할지어다
그렇지 않으면 친구여 지옥에 떨어져도
나는 그대를 돌아보지 않으리
저는 셈플 씨 내외와는 종교를 논하지 않는 것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분들은 하느님(글쎄 먼 옛날에 청교도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하느님이거든요)은 마음이 좁고 불합리하고 불공평하고, 천하며
복수심이 강한 고집스러운 인물입니다. 다행하게도 저는 누구에게도 하느님을
물려받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저는 마음대로 제가 좋아하는 하느님을 만들어
낼 수가 있습니다.
저의 하느님은 친절하고 동정심이 있고 상상력이 풍부하며, 죄를 용서해
주고 이해심이 많으며, 게다가 유머를 아는 하느님이예요.
저는 셈플 씨 내외분을 무척 좋아합니다. 그분들은 말보다도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 아주 훌륭합니다. 제가 그런 말을 하니까 두 분 다 몹시
당혹해하고 계셨습니다. 셈플 씨 내외분은 제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제 생각으로는 그분들이야말로 그렇다고 생각됩니다. 어쨌든
우리는 종교를 화제 삼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일요일 오후입니다.
하인 애머사이는 보랏빛 넥타이에 화려한 노란색 사슴 속가죽 장갑을 끼고,
수염을 말끔히 깎은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캐리(하녀)를 마차에 태우고
조금전에 놀러 갔습니다. 캐리는 푸른빛 모슬린 드레스를 입고, 머리전체를
파마머리로 바꾸어 가지고 장미꽃을 장식한 카다란 모자를 쓰고 갔습니다.
애머사이는 오전 내내 사륜 마차를 닦고 있었고, 캐리는 겉으로는 저녁
준비를 해놓아야 한다는 이유로 교회에 가지 않았습니다만, 정말은 모슬린
드레스에 다림질을 하고 있었던 거예요.
앞으로 2분 동안에 이 편지를 다 써버리고 저는 다락방에서 발견한 책을
읽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책은 '추적'이라는 제목인데 속표지에는
어린이다운 우스운 필적으로,
만약 이 책이 길을 잃고 돌아다니고 있으면
따귀를 때려서 집으로 돌려보낼 것.
저비스 펜들턴
이라고 씌어 있습니다.
펜들턴 씨는 열 한 살쯤 되었을 때, 병을 앓은 후 한여름 동안 여기서 보낸
적이 있어 돌아갈 때 '추적'을 남겨 놓고 간거예요. 아주 즐겨 읽은 모양으로
더러운, 작은 손가락이 여기 저기 묻어 있습니다.
다락방에는 아직도 물레방아와 풍차, 그리고 활과 몇 개의 화살이
있습니다. 셈플 아주머니가 너무 저비 도련님 이야기만 하므로, 저는 이
도련님이 아직도 이 근처에 있는 듯한 기분이 되는군요. 실크해트를 쓰고
지팡이를 든 어른이 된 저비스 씨가 아니라 수선스럽게 계단을 우당탕
뛰어오르고, 덧문을 환히 열어 젖히기도 하며 언제나 과자를 달라고
졸라대는, 귀엽고 때묻은 머리가 마구 엉클어진 소년입니다(셈플
아주머니라면 조르기만 하면 언제든지 과자를 얻을 수 있었을 거예요).
이 소년은 모험을 좋아하고 용감하고 정직했던 것 같아요.
저는 저비 도련님이 펜들턴 집안의 한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유감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않았었다면 그분은 아마 좀더 훌륭한
인물이 되셨을 거예요.
내일부터 보리 탈곡이 시작됩니다. 증기기관이 오고 인부들도 올 것입니다.
실로 통탄할 일입니다만 버터컵(뿔이 하나 있는 얼룩소로, 레스비아의
어미입니다)이 부끄럽기 짝이 없는 짓을 저질렀습니다.
금요일 저녁때 과수원에 들어가서, 나무에 달려 있는 사과를 얼마나 많이
따먹었던지 머리가 멍해지도록 먹고, 이틀 동안 취해서 곤드레만드레입니다.
이건 정말이에요. 이런 고약한 소를 보신적이 있으세요?
애정이 넘치는 고아
주디 애벗 올림
추신
'추적'은 매우 유쾌한 책입니다. 제1장에 인디언, 제2장에 노상 강도가
등장합니다. 제3장에는 무엇이 나타날까요?
'붉은 독수리는 6미터 상공으로 날아올랐는가 싶더니 툭 하고 땅 위에
쳐박혔다.'
이건 책 첫머리 그림의 제목입니다. 주디와 저비는 매우 유쾌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9월 15일
키다리 아저씨
저는 어제 네거리에 있는 잡화점에서 밀가루 저울로 달아 보았는데
4킬로그램이나 늘었지 뭡니까?
록 윌로를 좋은 휴양지로서 추천해 드리겠습니다.
변함 없는
주디 올림
9월 25일
키다리 아저씨
이제 저도 2학년이 되었어요. 지난 주 금요일에 학교로 돌아왔습니다. 록
윌로를 떠나는 것은 슬펐습니다만, 다시 또 교정을 보게 된 것은 기뻤습니다.
무엇이든 정든 곳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저는 이제야 대학을
내 집처럼 느끼기 시작하여 마음 편히 행동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말 저는 온 세상이 내 집으로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동정심으로
마지못해 끼어 준 것이 아니라, 세계 속의 일원으로서 당당하게 들어 있다는
기분이에요.
아저씨께서는 아마도 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을 겁니다. 평의원님처럼 높으신 분들에게는 버려진 아이와 같이 비천한
자의 기분 같은 걸 아실 까닭이 없거든요.
그런데 아저씨, 잘 들어 보세요. 제가 도대체 누구하고 한방이 되었다고
생각하세요. 샐리 맥브라이드와 줄리아 펜들턴이에요. 정말입니다! 보세요.
우린 서재와 침실을 세 개 갖고 있어요.
지난 봄에 샐리와 저는 같은 방에 있자고 의논했었지요. 그러자 줄리아가
샐리와 같이 있겠다는 거예요. 어째서인지 저는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이 두
사람은 조금도 공통점이 없거든요. 그러나 펜들턴 집안 사람들의 천성이
보수적이어서 변화를 적대시(멋진 말이죠?)하고 있어요. 어쨌든 우리 세
사람은 같은 방에 있게 되었습니다. 존 그리어 고아원 출신인 저루샤 애벗이
펜들턴 집안 사람과 한 방에 있게 되었다니까요. 확실히 여긴 민주적인
나라예요.
샐리는 과대표로 입후보하였습니다. 지금의 상황으로는 꼭 당선할 것
같아요. 여러 가지 작전을 짜고 있는 이 분위기란- 우리가 얼마나
정치가적인가 보여 드리고 싶을 정도랍니다. 앞으로 우리 여성들이 참정권을
획득한 그 때에는 아저씨들은 남성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해 크게 운동해야 될
거예요. 선거는 이번 토요일에 있습니다. 그 밤에는 누가 이기든지 횃불
행렬을 할 것입니다.
저는 화학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매우 진귀한 공부입니다. 지금까지 이런
것은 본 적도 없습니다. 분자와 원자가 교재로 취급됩니다만, 다음 달이 되면
이런 것을 분명히 논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변론과 논리학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계사도
또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들도,
그리고 또 프랑스 어도.
이런 식으로 몇 년 동안 계속하면 저는 아주 영리해질 거예요. 사실은
프랑스 어보다 경제학을 하고 싶었는데, 감히 그럴 용기가 나지 않더군요.
왜냐하면 1년 더 프랑스 어를 계속하지 않으면 프랑스 어 선생님이 낙제점을
주실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실 지난 6월의 시험 때는 가까스로 낙제를
면했거든요.
저는 솔직히 말씀드려 고등학교 때의 준비가 많이 부족했었어요.
우리 클라스에 프랑스 어를 영어나 다름없이 자유롭게 구사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애는 어릴 때 부모님을 따라 외국에 가서 프랑스의 수도원에서
3년을 지냈다는군요. 그러니 클라스의 다른 학생들에 비해 얼마나
뛰어나겠는지 상상하실 수가 있겠지요. 불규칙 동사쯤은 장난감 다루듯
합니다. 생각할수록 나의 부모가 나를 고아원에 버리지 말고 프랑스의
수도원에나 던져 놓았더라면 좋았을걸 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아니에요,
그럼 안 되겠지요. 만약에 그랬다면 저는 아저씨를 못 만났을지도
모르니까요. 저는 프랑스 말 같은 것보다는 아저씨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이
훨씬 다행스럽다고 생각합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아저씨. 저는 이제부터 핼리에트 마틴을 방문하여 화학
문제를 토의한 뒤에 슬쩍 이번 과대표 선거에 대해 두서너 마디 언급하고 올
작정입니다.
정치 운동중인
J. 애벗 올림
10월 17일
키다리 아저씨
만약 체육관 수영장에 레몬 젤리가 가득 차 있다면, 그 속에서 헤엄치는
사람은 표면에 떠 있을까요, 아니면 가라앉아 버릴까요?
우리가 식사 후 레몬 젤리를 먹고 있을 때, 이런 문제가 화제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반 시간이나 이 문제에 대해 격론을 벌였습니다만,
아직도 결론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샐리는 그 속에서 헤임칠 수 있다고
말했지만, 저는 아무리 수영에 뛰어난 사람일지라도 가라앉고 말 거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젤리 속에서 익사하다니, 무척 재미있는 일이 아니에요?
그 밖에 두 가지 문제가 우리 식탁에서 의제가 되었습니다.
첫째, 팔각형으로 된 집의 방은 어떤 형태가 될까요? 4각형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저는 파이의 한 조각 같은 모양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아저씨도 그렇게 생각지 않으세요?
둘째, 거울로 만든 아주 커다란, 속이 빈 둥근 물체가 있다고 가정하고 그
안에 앉으면, 어디쯤에서 얼굴이 비치지 않고 등이 비치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인데, 이건 생각할수록 더욱 모르겠군요. 아저씨는 우리가 얼마나 깊이
있는 철학적 고찰로 여가 시간을 이용하고 있는지 잘 아셨겠지요?
선거에 대해 말씀드렸는지 모르겠군요.
3주일 전에 있었어요. 하지만 너무 바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보니,
3주일 전에 있었던 일 따위는 고대사에 속해 버리고 맙니다. 샐리가
당선되었어요. 그래서 '맥브라이드 만세!'라는 글씨가 든 플래카드를
둘러메고, 14악기로 편성된 악대- 하모니카 3개와 콤(빗 모양으로 된 악기의
일종) 11개- 로 횃불 행진을 하였습니다.
258호실의 우리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줄리아와 저까지 그
후광을 입고 있습니다. 과대표와 한 방이라는 사실은 사교상으로 상당히
신경이 쓰입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아저씨. 저의 경의를 받아 주시기를.
가슴 속 가득히 존경을 담은
아저씨의 주디 올림
그림 설명: 맥 브라이드 만세(치마 입은 여자아이 셋이 손을 잡고 있음)
11월 12일
키다리 아저씨
이제 농구시합에서 1학년을 이겼습니다. 물론 우리는 크게 기뻐했지요-
하지만 3학년에게 이겼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그렇다면 저는 기꺼이
온몸에 멍투성이가 되어 개암나무 즙으로 찜질을 하면서 일주일쯤 누워
있었을 거예요.
샐리가 크리스마스 휴가에 저를 초대해 주었습니다. 샐리의 집은
메사추세츠 주의 우스터에 있습니다. 정말 친절한 아이예요. 저는 꼭 가고
싶습니다. 저는 이제까지 록 윌로 이외에는 한 번도 다른 가정에 들어가 본
적이 없거든요. 그리고 또 셈플 씨 부부는 어른이고 나이가 든 분들이라
문제가 되지 않지만, 맥브라이드 집안에는 아이들이 가득합니다(적어도 둘
아니면 셋). 게다가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에 앙고라 고양이가 한마리,
그야말로 완전한 가정이지요. 짐을 꾸려 가지고 가는 것이 기숙사에 남아
있는 것보다 얼마나 유쾌한지 모르겠어요. 저는 그 때를 기대하며 매우
흥분하고 있답니다.
일곱째 시간입니다- 연극 연습을 하러 뛰어가야겠습니다. 저는 추수 감사절
연극에 나가게 되었거든요. 우단으로 만든 웃저고리를 입고 노란 곱슬머리를
늘어뜨린 왕자가 되어 탑에 있는 것입니다. 멋있지요?
아저씨의 J. A
토요일
제가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지 않으세요? 이것이 리오노러
펜턴이 찍어 준 우리 세 사람의 사진입니다. 얼굴이 희고 웃고 있는 것이
샐리, 또 한 사람 키가 크고 거만헤 보이는 건 줄리아, 그리고 머리카락이
얼굴에 덮여 있는 것이 주디예요- 사실 저는 이보다 훨씬 미인이지만, 햇빛이
비쳐 눈이 부셨던 겁니다.
12월31일
매사추세츠 주 우스터 스톤 게이트에서
키다리 아저씨
좀더 빨리 크리스마스 선물에 대한 감사 편지를 쓸 생각이었습니다만,
맥브라이드 집안의 생활이 너무도 마음을 빼앗는 일뿐이어서, 2분 이상 책상
앞에 앉아 있을 틈이 없었습니다.
저는 새 드레스를 샀습니다.-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만 가지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올해의 크리스마스 선물은 아저씨한테서 받은 것뿐이고 가족들은
사랑이 담긴 말을 보내왔을 뿐이에요.
저는 샐리의 집을 방문하여 아주 멋있게 휴가를 보내고 있습니다. 샐리네
집은 흰 장식이 달린 고풍스러운, 벽돌집으로, 큰 길에서 좀 들어간 곳에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옛날 존 그리어 고아원에 있을 때, 호기심에 가득 차
바라보며, 그 안에 들어가 보았으면 하고 생각하던 집과 꼭 같습니다. 저는
제 눈으로 그걸 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런데 지금 이렇게 여기에
있습니다. 모든 게 마음에 들고, 차분하여 정말 가정다운 곳입니다. 저는
이방 저방 돌아다니며 마음껏 가구들을 구경합니다.
그야말로 아이를 키우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집입니다. 숨박꼭질하기에 꼭
좋은 어두컴컴한 구석과 팝콘을 만들기에 그만인 난로, 비오는 날 장난치기
좋은 다락방과, 매끈매끈한 난간 맨 아래에는 납작한 난간 기둥머리가 달려
있으며, 매우 넓고 양지바른 부엌이 있습니다. 13년이나 이 집에 있었다는
요리사는 항상 반죽한 밀가루덩이를 남겨 두었다가 아이들에게 줍니다. 얼핏
보기만 해도 다시 한 번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그런
집입니다. 모든 가족들은 또 어떻고요! 이렇게 좋은 사람들일 줄은 미처
몰랐어요. 샐리에게는 아버지와 어머니, 할머니 그리고 곱슬머리의 너무나
귀여운 세 살짜리 여동생과, 항상 발씻기를 잊어버리는 중간키의 남동생, 또
지미라고 하는 잘 생긴 오빠가 있답니다. 이분은 프린스턴 대학 3학년입니다.
식탁에서의 떠들썩함이란 말할 수 없을 정도예요. 모두가 한꺼번에
이야기를 하고, 농담을 하고 웃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식사 전에 기도 같은 것도 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한입 먹을 때마다
아무개 씨에게 감사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정말 마음이 편합니다(저는
분명히 신을 존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저씨도 저처럼 진저리가 나도록
감사 기도를 강요당해 본 적이 있다면, 저와 똑같이 생각할 거예요).
무척 많은 일을 했어요. 어느 것부터 말씀드려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맥브라이드 씨는 공장을 가지고 계시는데,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종업원의
자녀들을 위해 트리를 세워 주셨습니다. 파티장은 공장의 길쭉한 포장실로서
사철 나무와 호랑가시 나뭇잎으로 장식하였습니다. 지미 맥브라이드가
산타클로스로 분장하고 샐리와 제가 아이들에게 선물 나누어 주는 것을
도왔습니다.
그런데 아저씨, 정말 묘한 기분이에요. 어쩐지 제가 존 그리이 고아원의
평의원처럼 인자한 마음이 되었거든요. 저는 엿으로 얼굴이 진득진득해진
사내아이에게 키스를 해주었습니다. 하지만 머리를 쓰다듬는 일 따위는
절대로 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이틀 뒤, 맥브라이드 씨 댁에서 저를 위해 댄스
파티를 열어 주셨습니다. 제게는 이것이 최초의 본격적인 무도회였어요.
여자끼리 추는 학교의 댄스 파티 따윈 문제도 안 됩니다.
저는 흰색의 새 야회복을 입었습니다(이건 아저씨께서 보내 주신
크리스마스 선물이에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희고 긴 장갑을 끼고 하얀
비단 무도화를 신었습니다. 흠 잡을 데 없는 완전한 행복이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웠던 것은 지미 맥브라이드와 팔을 끼고 맨 앞에 서서 춤을 추는 제
모습을 리펫 원장에게 보여주지 못한 점입니다. 아저씨가 다음에 존 그리어
고아원에 가시거든 리펫 여사에게 말씀해 주세요, 네?
언제나 당신의 벗인
주디 애벗
추신
어저씨, 만약 제가 앞으로 대작가가 되지 못하고 단지 평범한 여자가 되어
버린다면, 아저씨는 무척 서운해 하시겠지요?
토요일 오후 6시 30분
우리는 오늘 시내까지 걸어갔습니다. 비가 어떻게 억수같이 오는지! 저는
역시 겨울답게 비가 아니라 눈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줄리아의 호감 가는 삼촌께서 오늘 오후에 또 찾아오셨습니다. 2Kg이나
되는 초콜릿 상자를 갖고 오셨습니다. 줄리아와 한 방에 있는 득을 톡톡히
보는 셈이지요. 우리들의 시시한 얘기가 재미있으신지, 삼촌은 예정했던
기차도 한 번 보내버리고 서재에서 차를 마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허락을 받아내는 데 무척이나 힘이 들었어요. 기숙사 안에서 아버지나
할아버지를 대접하는 것도 쉽지 않고 보니, 삼촌쯤 되면 더 어렵지요. 형제나
남자 사촌쯤 되면 이건 이미 불가능에 가깝답니다. 줄리아는 공증인 앞에서
분명 삼촌이라는 걸 맹세하고, 또 군청 서기의 증명서를 교부받아야 했어요.
(제가 무척 법률에 밝죠?) 그 정도의 수속이 끝났어요, 만일 저비스 씨가 잘
생기고 젊다는 게 사감 선생님 눈에 띄었더라면, 함께 차를 마실 수 있었을지
의심스럽군요.
어쨋든 우리는 검은 빵과 스위스 치즈의 샌드위치로 차를 마셨습니다.
저비스 씨께서는 그것을 거들어 주시고 네 개나 드셨습니다. 제가 이번 여름
록 윌로에서 지낸 이야기를 하자, 우리는 셈플 씨 이야기, 말과 소, 병아리
이야기를 하면서 매우 유쾌했습니다. 저비스 씨가 알고 있는 말은 다 죽고
그로버가 한 마리 남았을 뿐인데, 그 말은 저비스 씨가 마지막으로 농장에
가셨을 때엔 아주 어린 송아지였다는 거예요. 가엾게도 그로버는 이제
늙어버려 지금은 가까스로 절름거리면서 목장을 걸어다니고 있습니다.
저비스 씨는 지금도 셈플 씨 댁에서는 맨 아래쪽에 있는, 파란 접시로
뚜껑을 닫은 노란 단지에 도넛을 넣어 두더냐고 물으셨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리고 야간용 목장의 바위를 쌓아올린 밑에 지금도 들쥐 구멍이
있을까 하셨습니다만, 있고 말고요!
지난 해 여름에 살찌고 큰 회색 들쥐를 잡았는데, 그것은 저비 도련님이
어린 시절에 잡은 것의 25대째 자손이었대요.
저는 그분 앞에서 저비 도련님이라고 말했습니다만, 별로 기분 나쁜 표정은
보이지 않으시더군요. 줄리아는 이렇게 부드럽게 행동하는 삼촌은 본 적이
없다고 말했어요. 여느 때는 상당히 사귀기 힘든 분이래요. 하지만 제
생각에는 줄리아가 전혀 재치가 없었기 때문이에요. 저는 재치가 남자들을
다루는 데는 매우 필요하다는 걸 느꼈습니다. 털이 난 대로 살살 쓰다듬어
주면 목구멍을 울리며 좋아하고, 거꾸로 쓰다듬으면 씩씩 화를 내는
물건이에요(이건 그다지 고상한 비유는 못 되지만, 저는 비유로 쓴 거예요).
오해하지 마세요.
우리는 마리 바쉬키르헤프(러시아의 요절한 천재적 여류 화가)의 일기를
읽고 있습니다. 한 번 들어 보세요. 정말 놀랄 일이에요. '어젯밤 나는
발작적 절망감에 사로잡혀 신음 소리를 내었으나, 결국 참을 수 없어 식당의
시계를 바다 속에 집어던지고 말았다.'
이걸 읽고 저는 제가 천재가 아닌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천재
같은 사람을 곁에 두었다가는 신경이 닳아 빠지고 말 거예요. 게다가 너무
파괴적인 것 같아요.
원 세상에 비가 잘도 오는군요. 오늘 밤은 교회까지 헤엄쳐서 가야 할까
봐요.
언제나 당신의 벗인
주디 올림
그림 설명: 치마 입은 여자 아이가 빗 속에 우산 쓰고 가는 모습
1월 20일
키다리 아저씨
아저씨는 혹시 요람 속에서 도둑 맞은 예쁜 여자 아기를 가진 적이
없으세요? 제가 그 아기인지도 모릅니다. 만약에 소설이라면 이쯤 해서
대단원이 시작되겠지요.
자기의 출생의 비밀을 모르다니, 정말 이상한 기분입니다. 약간 가슴이
두근거리는 로맨틱한 느낌이에요. 여러 가지 경우를 생각할 수 있겠지요.
저는 어쩌면 미국 사람이 아닐지도 몰라요. 그런 아이들이 많이 있거든요.
고대 모라인 직계의 자손일지도 모르고, 북유럽 해적의 딸일지도 모르죠.
어쩌면 당연히 시베리아의 감옥에 있어야 할 러시아 사람의 아이일지도
모르며, 또한 집시일지도 모릅니다. 정말 그럴지도 몰라요. 아저씨는 저의
경력 가운데에서 저의 부끄러운 오점을 알고 계시는지요? 제가 과자를 훔친
죄로 벌을 받고 고아원을 도망친 얘기 말예요. 이건 평의원님이라면 마음대로
보실 수 있는 기록부에 씌어 있습니다.
그러나 아저씨는 이런 일들을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지 않으세요?
겨우 아홉 살밖에 되지 않은 배고픈 계집아이를, 바로 손이 닿는 비스킷
그릇이 있는 곳에서 칼을 닦게 해 놓고, 더구나 혼자 거기다 남겨 두고
나갔다가 느닷없이 들어와 보니, 그 아이 입가에 비스킷 가루가 조금 묻어
있었다고 해서 이상할 것도 없겠지요... 그래서 그 아이의 팔을 잡아 흔들고
따귀를 찰싹 때리고는, 식탁에 식후의 푸딩이 나왔을 때 일으켜 세워서 다른
아이들에게 이애는 도둑질한 벌을 받는다고 했으니, 그 아이가 도망치려고 한
것도 당연하지 않을까요?
저는 겨우 6킬로미터 정도 달아났다가 끝내 잡혀오고 말았습니다. 그 뒤
1주일 동안 저는 다른 아이들이 노는 시간에는 마치 장난을 한 강아지처럼
뒷마당의 말뚝에 묶여 있었어요.
아차! 예배 종이에요. 예배가 끝나면 위원회에 출석해야 합니다. 이런
편지를 써서 죄송합니다. 이 다음 번에는 아주 재미있는 편지를 쓸
작정입니다.
다시 만날 때까지 사랑하는 아저씨에게 평화가 있으시기를
주디로부터
추신
단 한 가지 확실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저는 중국 사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2월 4일
키다리 아저씨
지미 맥브라이드가 프린스턴 대학의 교기를 부쳐 주었습니다. 그건 우리
방의 한쪽 벽을 덮어 버릴 정도로 크답니다. 저는 매우 고맙다고 생각은
합니다만, 도대체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막연합니다. 샐리와 줄리아는
그것으로 방을 장식하는 것에 반대예요. 무리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방을 올해는 빨간색으로 장식해 놓았으므로, 거기다 오렌지와 검정의 깃발을
걸면 어떤 결과가 되겠는가 상상하실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그것은 포근하고
따뜻한 아주 멋진 것이므로, 버려두는 것도 아까운 생각이 듭니다. 이것으로
목욕 가운을 만든다면 괘씸한 일일까요? 지금까지 쓰던 것은 빨았더니
줄어들고 말았거든요.
요즘은 무슨 공부를 하고 있는지 알려 드리는 것을 게을리했군요. 그러나
아저씨께서는 저의 편지에서 공부하는 자취를 발견 못하셨을지라도, 저는
시간을 대부분 공부하는 데 쓰고 있습니다. 한꺼번에 다섯 과목에 걸친
강의를 듣는다는 것은 무척 어리둥절해지는 일입니다.
'참된 학생의 증거는 어떤 고통도 감수하고, 세밀한 것까지의 연구에
정열을 쏟는 데 있다.'라고 화학 교수님이 말씀하시는가 하면, 역사
교수님은, "세밀한 것에 사로잡히지 말고 전체를 파악할 수 있도록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화학과 역사 사이를 배워가면서 얼마나 교묘하게 피해가는지 잘 알
수 있으시겠지요? 저는 역사적인 방법이 가장 좋습니다. 가령 제가 정복자
윌리엄이 영국에 건너간 것은 1492년이고, 콜럼버스가 미국을 발견한 것이
1100년 또는 1066년이라고 해도 역사 교수님은 너그럽게 보아 주신다는 거죠.
그래서 역사 공부에는 안전감과 편안함을 느끼고 있습니다만, 화학에는 그런
느낌이 전혀 없습니다.
여섯째 시간의 종이 울립니다. 이제 실험실에 가서 산과 염, 그리고
알칼리의 상태를 조사해야 합니다. 저는 화학 시간에 에이프런을 염산으로
태워서 구멍을 내고 말았습니다. 이론대로 된다면 이 구멍을 강한 암모니아로
중화시키면 메꿀 수 있을 텐데요. 그렇지 않아요?
시험이 다음 주에 있습니다만, 조금도 겁나지 않아요!
언제나 당신의 벗인
주디 올림
그림 설명: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많이 잡는데요
벽에 시계가 오전 6시를 가리키고 있음
3월 5일
키다리 아저씨
3월의 바람이 불고, 하늘에는 나직이 검은 구름이 바쁘게 움직이고,
솔밭에서는 까마귀떼가 요란스럽게 울어대고 있습니다. 기분이 좋아지고
마음이 들떠서, 한몫 끼고 싶은 유혹을 느낄 정도로 소란합니다. 교과서 같은
건 탁 덮어 버리고 언덕으로 뛰어나가, 바람과 함께 달리기 시합이라도
벌이고 싶습니다.
지난 번 토요일에는 질척한 시골길을 7킬로미터나 종이뿌리기 경주를
했답니다. 여우(잘게 썬 종이를 30킬로미터쯤이나 가진 사람들 3명) 들은
27명의 사냥꾼보다 30분 미리 출발했어요. 저는 그 27명 가운데 하나인데,
도중에서 8명이 떨어져 나가 나중에는 19명이 되었습니다.
여우 발자국은 언덕을 넘어, 옥수수 밭을 가로질러 늪지대에 들어가
있었으므로, 우리는 높직한 발판을 찾아 깡충깡충 뛰어 넘어가야 했습니다.
물론 절반은 무릎까지 진흙탕 속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자꾸만
발자국을 잃어버려 늪지에서 25분이나 헤맸습니다. 그리고 나서 언덕을
오르고 숲 속을 빠져나가 닿은 곳은 어느 집 창고의 창문이었어요.
창고문에는 모두 자물쇠가 채워져 있는 데다 창문도 높은 곳에 있고 아주
작은 거였어요. 이러한 것이 공평하다고는 할 수 없겠죠? 안 그래요?
하지만 우린 그따위 창문에 기어 들어가지는 않았답니다. 창고 주위를
보았더니, 나직한 헛간 지붕을 지나 울타리 밖으로 나간 발자국을
발견했거든요.
여우는 거기서 사냥꾼을 따돌렸다고 생각했겠지만, 우린 오히려 그들의
의표를 찔러 주었지요. 거기서부터 높았다 낮았다하는 목장을 3킬로미터나
추적해 갔으나, 색종이가 차츰 뜸해져서 발자국을 찾는데 무척 힘이
들었어요. 규칙상으로는 아무리 뜸해도 2미터 간격으로 색종이를 뿌려 놓게
되어 있었는데, 그 2미터라는 것이 이제까지 본 적도 없을 만큼 긴 거리지
뭐예요. 그러나 두 시간이나 끈기 있게 걸어다닌 결과, 마침내 여우 씨
일행이 크리스털 스프링 씨의 부엌으로 들어간 것을 알아 내었습니다(그 곳은
농가인데 우리 학생들이 흔히 긴 썰매나 건초 마차를 타고 가서 닭요리나
핫케이크를 먹고 오는 곳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세 마리의 여우가 태연하게
우유와 벌꿀과 비스킷을 먹고 있는 현장을 발견했죠. 여우들은 설마 우리가
거기까지 쫓아오리라고는 생각지 않고 있었어요. 우리가 아까 그 창고
창문에서 걸리고 만 것으로 생각했던 거예요.
양쪽이 다 자기네가 이겼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분명히 우리가
이겼다고 생각해요. 아저씨도 그렇게 생각하시지요? 글쎄 우린 여우들이
학교에 돌아가기 전에 잡았거든요. 어쨌든 우리 19명은 메뚜기처럼 의자와
테이블에 달라붙어 꿀을 주세요! 하고 떠들어댔습니다. 꿀은 모두에게 돌아갈
만큼 없었지만, 크리스털 스프링 부인(이건 우리가 붙인 애칭이고, 정말은
존슨 부인이에요)이 딸기잼 한 병과 지난 주에 만든 당밀 한 통과 검은 빵
3개를 가져다주었습니다.
학교에 돌아온 시간은 저녁 식사 시간을 30분이나 넘긴 6시
30분쯤이었어요. 우리는 모두 옷도 갈아 입지 않은 채 곧장 식당으로
갔습니다. 언제나와 같이 매우 왕성한 식욕을 가지고 말이예요!
그리고 우리들 모두 저녁 예배는 생략했습니다. 우리 구두의 상태가 충분한
핑계가 된 거예요.
아직 시험에 대해 말씀드리지 않았지요? 저는 어느 과목이나 다 쉽게
통과했습니다. 이젠 요령을 터득했으므로 결코 낙제 같은 건 하지 않습니다.
1학년 때 그 얄미운 기하와 라틴어 산문 시험만 실패하지 않았더라면
우등으로 졸업했을지도 모를 텐데... 하지만 저는 그런 건 상관없어요.
'행복하기만 하다면 그 밖에 무슨 말이 또 있으랴'예요(이건 지금 공부하고
있는 고전에서 잠깐 인용해 본 거예요).
고전이란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요, 아저씨는 햄릿을 읽으신 적이 있으세요?
만일 아직 읽지 않으셨다면 꼭 읽어 보세요. 정말 멋있습니다. 저는 이제까지
몇 번이나 셰익스피어에 대해 들어 왔습니다만, 이렇게 멋있게 씌어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명성만 높겠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겁니다.
저는 그 전에, 비로소 독서하는 것을 배운 뒤로 멋진 유희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매일 밤 잘 때에 자기가 읽고 있는 책중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되는 거예요.
현재 저는 오필리아입니다. 그러나 매우 생각이 깊은 오필리아예요. 저는
항상 햄릿을 즐겁게 해주고, 그 응석을 받아주고, 나무라고, 감기가 들면
목에 찜질을 해주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우울병 같은 건 완전히 고쳐 주고
말았어요.
그 뒤 임금님도 왕비도 둘 다 죽었지요. 바다에서 조난당한 거예요. 그래서
햄릿과 저는 아무런 지장도 없이 덴마크를 다스리고 있습니다. 지금 두
사람은 왕국을 훌륭하게 다스리고 있답니다. 햄릿은 정치 쪽을 맡고 저는
자선 사업을 맡고 있어요. 저는 모범적인 고아원을 몇 군데에 세울
생각입니다. 아저씨나 아니면 다른 평의원님이라도 참관을 희망하신다면
기꺼이 안내해 드리겠어요. 평의원님들이 이 곳을 견학하시고 나면 많은 것을
느끼실 거예요.
당신에게 가장 상냥한
덴마크의 왕비 오필리아로부터
3월 24일 - 25일인지도 모름
키다리 아저씨
저는 아무래도 천국엔 갈 수 없을 것 같군요. 이 세상에서 너무 좋은 것을
많이 받고, 죽은 뒤에까지 좋은 것을 받는다는 건 불공평하다고 생각해요.
도대체 어떤 일이 생겼는지 들어 보세요.
저루샤 애벗이 우리 학교 교지에서 해마다 모집하는 현상 단편소설(상금
25달러)에 당선된 거예요. 더구나 2학년으로서! 응모자는 대개
4학년생이거든요. 제 이름이 나붙은 걸 보았을 때, 저는 이게 정말인가
믿어지지 않았어요.
어쩌면 저는 작가가 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군요. 곰곰이 생각할수록 리펫
원장이 왜 저에게 저루샤 애벗이라는 시시한 이름을 붙여 주었나 생각됩니다.
그야말로 여류 작가 같은 냄새가 나지 않아요? 그렇죠?
그리고 올 봄의 야외극 '뜻대로 하세요(세익스피어의 작)'에 뽑혔습니다.
저는 로절린드의 친사촌인 실리아가 됩니다.
끝으로 이번 금요일에 줄리아와 샐리와 저는 뉴욕에서 봄상품을 사기 위해
하룻밤 묵고, 이튿날은 저비 도련님과 극장에 가기로 되어 있습니다. 저비스
씨의 초대랍니다. 줄리아는 자기 집에 가지만 샐리와 저는 마더 워싱턴
호텔에 갑니다. 이보다 더 멋진 일이 또 있을까요?
저는 이제까지 한 번도 연극 구경이나 호텔에 간 적이 없거든요. 언젠가 한
번 카톨릭 교회의 축제 때 고아들을 초대해 주었지만, 그 때의 것은 정말
연극이라고 할 수 없으므로 문제가 되지 않겠지요.
그런데 우리가 보러 가는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햄릿이에요. 좀 생각해
보세요. 세익스피어 클라스에서 4주일 동안이나 공부했으므로 저는 모조리
외어 버렸답니다.
이런 여러 가지 기대 때문에 저는 마음이 들떠서 잠이 오지 않을
정도입니다.
아저씨 안녕, 세상은 참으로 즐거운 곳이에요.
언제나 당신의 벗인
주디로부터
추신
지금 달력을 들쳐 보았더니 그 날은 28일이에요.
추가추신
오늘 시내 전차에서 한쪽은 푸르고 한쪽은 갈색 눈을 한 안내원을
보았습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탐정 소설의 악당에 안성맞춤이 아닐까요?
4월 7일
키다리 아저씨
정말 놀라고 말았어요! 뉴욕이란 도시는 정말 아주 큰 곳이로군요. 우스터
따윈 비교도 안 됩니다. 아저씨는 정말로 그렇게 눈이 빙빙 도는 혼잡 속에서
살고 계시나요? 거기서 지낸 이틀 동안 놀랄 일만 계속되어 그 흥분에서
완전히 깨어나자면 앞으로 몇 달이나 더 걸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본 눈이 휘둥그래지는 멋진 일들을 일일이 다 이야기 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아저씨는 다 알고 계시겠지요. 직접 뉴욕에 살고 계시니까요. 하지만
어느 거리에 가도 재미있는 일뿐이에요. 사람들도, 가게도, 진열장에
진열되어 있는 것만큼 아름다운 걸 저는 아직 본 일조차 없답니다. 그런 걸
보면 누구든지 죽을 때까지 옷치장에만 정신을 쏟고 싶어지기도 할 거예요.
샐리와 줄리아와 저는 토요일 아침 같이 쇼핑을 했습니다. 줄리아는 제가
난생 처음 보는, 그야말로 호화로운 가게에 들어갔습니다. 하얀 색과
황금색의 벽, 푸른 양탄자, 푸른 비단 커튼, 번쩍번쩍하는 황금색 의자,
그리고 나무랄 데 없는 금발의 미인이 검은 비단 드레스 자락을 길게 끌며
나와, 애교 있게 미소를 띠며 맞이해 주었습니다.
저는 인사하러 남의 저택을 방문한 것으로 착각하여 하마터면 악수를 할
뻔했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우리는 모자를 사려고 온 것뿐입니다.
적어도 줄리아는 그랬습니다. 줄리아는 거울 앞에 앉아서 모자를 한 다스나
써 보았습니다. 그런데 쓸 때마다 앞의 것보다 더 아름다웠어요. 그리고는 그
가운데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으로 두 개를 샀습니다.
이렇게 거울 앞에 앉아서 마음에 드는 모자를 값 따위는 따지지도 않고
마음대로 고를 수 있다니, 인생에 이보다 더한 기쁨이 또 있을까요!
정말이에요, 아저씨. 뉴욕이라는 곳은 존 그리어 고아원이 그렇게도 끈기
있게 훈련시켜 준 이 훌륭한 금욕적 성격을 순식간에 무너뜨리고 말 것
같습니다.
우리는 쇼핑이 끝나자 셸리 레스토랑에서 저비 도련님과 만났습니다.
아저씨도 셸리 레스토랑에 가본 일이 있으시겠지요? 그럼 먼저 셸리
레스토랑을 상상해 주세요. 그리고 또 기름 먹인 천으로 덮은 테이블과
깨어질 염려가 없는 하얀 사기그릇과, 나무손잡이가 달린 나이프와 포크가
있는 존 그리어 고아원의 식당을 상상해 보시고, 그 때 제가 어떤 기분으로
앉아 있었겠는가 상상해 봐 주세요!
저는 생선 포크를 잘못 썼으나, 심부름하는 사람이 친절하게도 살짝 다른
포크를 갖다 주어서,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채 넘어갔습니다. 점심이 끝난 뒤
우리는 극장에 갔습니다. 눈이 부시게 황홀해서 이 세상 같지가 않았습니다.
앞으로 매일 밤 그 곳의 꿈을 꿀 정도예요.
셰익스피어는 정말 훌륭해요!
햄릿은 교실에서 배웠을 때보다도 무대에서 보는 편이 훨씬 좋았습니다.
전에도 훌륭한 작품이라고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지금은 무어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 더 좋아졌어요! 저는 아저씨만 허락해 주신다면 작가가 되기보다는
여배우가 되고 싶습니다.
대학을 그만두고 배우 학교에 들어가면 안 될까요? 배우가 되면 공연하는
동안은 언제나 아저씨에게 관람석을 하나 마련해 드리고, 조명등 너머로
아저씨께 미소를 보내겠어요. 그 때엔 단추구멍에 빨간 장미를 꽂는 것을
잊지 마세요. 제가 틀리지 않고 아저씨를 알아보고 미소지을 수 있게요.
잘못 보고 다른 사람에게 미소를 보낸다면 정말 민망할 테니까요.
우리는 토요일 밤에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저녁은 기차 안 핑크색 램프를
켠 작은 테이블에 앉아 흑인 안내원의 시중을 받으면서 먹었습니다. 저는
이제까지 기차에서 식사가 나온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으므로, 저도 모르게
그만 그 말을 입밖에 내고 말았어요.
"도대체 넌 어디서 자랐니?"
하고 줄리아가 제게 말했습니다.
"응, 조그만 마을이야"
저는 머뭇머뭇 대답했어요.
"하지만 여행한 일도 없니?"
줄리아가 또 묻잖아요.
"대학에 올 때가 처음이었어. 그것도 겨우 250킬로미터의 여행인걸 뭐.
식사 같은 건 하지 않았어"
하고 제가 대답했습니다.
줄리아는 제가 이상한 소리만 하므로 차츰 제게 흥미를 갖기 시작했어요.
저는 뚱딴지같은 말은 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지만, 무엇에 놀라거나 하면
그만 입 밖에 튀어나오고 마는 군요. 게다가 저는 1년 내내 놀라고만 있지
뭐예요. 존 그리어 고아원에서 18년이나 살던 사람이 갑자기 세상에
뛰어들다니, 정말 정신이 아찔해지는 듯한 경험이에요.
아저씨, 하지만 저는 차츰 익숙해지고 있어요. 이젠 전에 저지른 것과 같은
어처구니없는 실수는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조금도 불안해지지는 않습니다. 전에는 누구든 저를 보면
머뭇머뭇하곤 했지요. 가짜 새 옷을 통해 체크무늬의 무명 옷(고아원의 제복)
이 들여다 보이는 듯한 기분이었어요. 그러나 이제는 무명 옷 따위로
괴로움을 받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그 날의 고생은 그 날로서 족하다'예요.
꽃다발 이야기를 하는 걸 잊고 있었군요. 저비 도련님이 우리 모두에게
오랑캐꽃과 백합 꽃다발을 주셨습니다. 정말 친절하신 분이에요. 저는
이제까지 남자는- 평의원님들로 판단하여-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만,
지금은 그 생각을 고쳤어요.
11장이나 썼군요. 세상에, 이런 것을 편지라고 쓰다니! 하지만 참아
주세요. 이제 이 정도로 끝낼 테니까요.
항상 당신과 함께 하는
주디로부터
4월 10일
부자 아저씨께
보내주신 50달러짜리 수표를 여기 같이 동봉합니다. 매우 감사합니다만, 이
돈은 받을 수 없습니다. 매달 부쳐 주시는 것만으로도 제게 필요한 모자를
사기에는 충분합니다. 모자점에 관해 그와 같이 시시한 소리를 쓴 것을
후회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제까지 그런 곳을 보지 못했다는 것뿐이었어요.
어쨌든 저는 돈을 얻으려고 그런 말을 한 건 아니니까요. 저는 꼭 필요로
해서 받는 돈 이외의 것은 받고 싶지가 않아요.
당신의 안녕을 바라며
저류샤 애벗 올림
4월 11일
가장 좋아하는 아저씨
어제 드린 편지는 아무쪼록 용서해 주십시오. 우체통에 넣고 난 뒤 바로
후회스러워 되찾으려고 했지만, 그 얄미운 우편 배달부가 돌려 주지
않았어요.
지금은 한밤중입니다. 저는 제가 얼마나 못된 벌레 같은 인간이었나 하고
생각하니, 몇 시간이나 잠도 못 자고 있습니다.
벌레 중에서도 가장 더러운 발이 천 개나 달린 징그러운 벌레- 이 이상 더
나쁘게 말할 수는 없겠지요? 저는 줄리아와 샐리가 잠이 깨지 않게, 살며시
서재의 문을 닫고 침대 위에 앉아, 역사 공책을 잘라서 아저씨에게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중입니다.
저는 아저씨가 보내 주신 수표에 대해 그런 무례한 태도를 취한 걸
후회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아저씨가 친절한
마음에서 보내 주셨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자 따위의 시시한
일에까지 이렇게 신경을 써 주시다니, 아저씨는 정말 좋은 분이라고
생각해요. 돌려 드리더라도 좀더 정중하게 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쨌든 돌려 드려야 했어요. 제 경우는 다른 사람과는 사정이
다르니까요. 다른 소녀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남에게서 물건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아버지나 오빠나 삼촌이나 숙모가 계십니다.
그러나 제게는 아무도 그런 관계에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저는 아저씨가 저의 친척인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좋습니다만, 단지 그런
생각을 즐길 뿐이지 아저씨가 친척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외톨박이입니다. 사실 아무런 뒷받침도 없이 벽에다 등을
대고 세상과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걸 생각하면 숨이 막힐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생각을 마음 속에서 쫓아 내고 여전히 그런 척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저씨는 알아 주시겠지요? 저는 아무래도 필요 이상의 돈을 받을 수가
없군요. 왜냐하면 저는 언젠가는 돈을 돌려 드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그러므로 설사 대작가가 된다 할지라도 너무 많은 부채가 있으면
곤란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모자와 그 밖의 아름다운 일용품을 매우 좋아하긴 합니다만, 그것을
사기 위해 자기 장래를 저당잡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렇게 무례했던 것을 제발 용서해 주세요. 저는 무슨 생각이 나면
앞뒤 가리지도 낳고 곧장 써버리는 나쁜 버릇이 있답니다. 그리고 그 편지를
우체통에 넣고 나서는 후회하는 거예요. 만약에 때때로 제가 하는 일이
생각이 없고 배은 망덕하게 보이더라도, 결코 그런 생각은 없습니다. 마음
속으로는 언제나 지금의 생활과 자유와 독립을 주신 아저씨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저의 어린 시절을 길고 음침한 반항심의 연속이었으나, 지금은
이렇게 하루의 1분 1초가 너무도 행복해서 도무지 이것이 진실로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저는 마치 이야기 속에 나오는 여주인공과 같은
기분입니다.
벌써 2시 15분입니다. 저는 이제 살금살금 발끝으로 걸어서, 우편함이 있는
곳으로 가서 이 편지를 넣고 올 겁니다. 아마 먼저 보낸 편지 바로 뒤이어
배달될 테니까, 아저씨가 저를 나쁘게 생각하신다 해도 그다지 오랜 시간은
아니겠지요.
안녕히 주무세요. 아저씨.
언제나 아저씨를 사랑하는
주디 올림
5월 4일
키다리 아저씨
지난 주 토요일은 운동회였어요. 정말 아주 볼 만한 광경이었어요. 맨 먼저
전교생이 새하얀 운동복을 입고 행진하였습니다. 4학년생은 푸른색과 금색의
일본식 종이 우산을 들고, 3학년생은 흰색과 황색의 기를 들고, 우리 학년은
빨간 풍선을 들었는데, 자칫하면 실이 끊어져 날아갈 것 같아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어요. 그리고 1학년생은 녹색의 셀로판지 모자에 긴 꼬리를
달았습니다. 그리고 하늘색 제복을 입은 악대도 시내에서 초청해 왔고,
프로그램 사이사이에 구경꾼을 웃기려고 서커스의 광대와 같은 우스꽝스러운
사람이 열 두명이나 나왔습니다.
줄리아는 마직의 헐렁한 코트를 입고, 수염을 달고, 고물 우산을 들고,
디룩디룩 살이 찐 시골 영감으로 분장했습니다. 팻시 모리아티(정말은
패트리샤라고 하는데, 아저씨는 이렇게 괴상한 이름을 들은 적 있으세요?
리펫 원장님도 미처 못따라 올 정도죠?) 라는 비쩍 마른 키꺽다리가
이상야릇한 초록빛 모자를 한쪽 귀가 가려질 만큼 비스듬히 쓰고 줄리아의
마누라가 되었어요. 이 두 사람이 가는 곳마다 웃음보가 터지는 것이었어요.
줄리아는 특히 그 역을 잘 해냈습니다. 저는 설마하니 펜들턴 집안 사람이
이런 희극적 재질을 발휘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답니다.- 저비
도련님에게는 실례되는 말이지만- 하긴 제가 아저씨를 진짜 평의원으로 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저비 도련님도 진짜 펜들턴 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샐리와 저는 경기에 나가기 때문에 행진에는 참가하지 않았어요. 아저씨,
어떠세요. 우리 두 사람 다 우승했답니다! 적어도 어떤 종목에서는 말이에요.
넓이뛰기에서는 두 사람 다 졌습니다만, 샐리는 장대높이뛰기(2미터
20센티미터) 에서 1등이었고 저는 50미터 단거리 달리기에서 8초를 뛰어
우승했습니다. 나중에 무척 숨이 찼지만 클라스 전체가 풍선을 흔들면서,
주디 애벗은 어떻게 되었니!
이겼다!
누가 이겼니?
주디 애벗이 이겼다!
하고 외치며 응원을 보내 주는 것은 정말 유쾌했어요.
아저씨, 이건 정말 명예로운 일이 아니에요? 그리고 탈의실로 되어 있는
천막으로 달려가서 온몸을 알코올로 마사지해 받고, 레몬을 입에 넣고 빠는
거예요. 우리는 이처럼 모든 일을 본격적으로 했답니다. 자기 반을 대표해서
우승한다는 것은 멋진 일이에요. 제일 우수한 반이 그 해의 우승컵을
차지하기 때문이에요.
올해는 4학년이 일곱 종목에 우승해서 우승컵을 땄습니다. 체육부에서는
우승자들을 위해 체육관에서 파티를 열어 주었습니다. 게튀김과 농구공
모양의 초콜릿아이스크림이 나왔습니다.
저는 어젯밤 한밤중까지 자지 않고 제인 에어를 읽었어요. 아저씨는 60년
전의 일을 얘기할 수 있을 정도로 노인이신가요? 만약에 그렇다면 여쭈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은 어떤 말씨를 썼나요?
거만한 여인 블랑쉬가 하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못난 녀석 같으니라고! 시시한 소리 집어치우고 빨리 내가 하라는 대로나
해!"
그리고 로체스터 씨는 하늘을 금속 창공이라고 합니다. 또한 미친 여자는
하이에나와 같은 웃음 소리를 내며, 침실 커튼에 불을 지르고 결혼 의상을
찢고, 사람들에게 달려들어 마구 무는 등 정말 멜로드라마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은 하면서도 역시 정신 없이 읽게 되는군요.
젊은 여성이, 더구나 교회 안에서만 자란 몸으로 어떻게 이런 것을 쓸 수
있었을까, 저는 이해가 안 갑니다. 이 브론테자매(샬롯 브론테, 에밀리
브론테, 엔 브론테 세 자매는 19세기 영국의 여류작가) 에게 저는 마음이
끌립니다. 쓴 소설에도, 그 생애에도, 또 그 정신에도. 도대체 이 세 자매는
어디서 이런 지식을 몸에 익혔을까요.
제인이 자선 학교에서 고생하는 대목에 오자 저는 너무 화가 나 견딜 수가
없어서, 산책을 나가 마음을 가라앉혀야 했어요. 제인이 어떤 기분이었는지
저는 잘 알 수가 있었거든요. 리펫 원장님을 알고 있는 제게는 브로클허스트
씨(제인 에어 속의 등장인물)가 눈에 선히 보이는 듯했습니다.
아저씨, 너무 기분 나쁘게 생각지는 마세요. 저는 뭐 존 그리어 고아원이
로드 자선 학교와 같다고 비꼬고 있는 건 아니니까요. 거기에는 먹을 것도
충분하고 옷도 많았고 세숫물도 많았으며, 지하실에는 난로까지 있었거든요.
그러나 단 한 가지 존 그리어 고아원과 아주 똑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건
우리의 생활이 너무 단조롭고 변화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제가 거기서 지낸
18년 동안에 만난 모험이라면 장작 창고에 불이 났던 일 한 가지뿐이었어요.
그 때는 본관에 불이 옮겨 붙었을 경우에 대비해서 우린 한밤중에 일어나서
옷을 입었지요. 그러나 불을 옮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다시 잠자리로
돌아갔습니다.
누구든 약간은 신기한 일을 좋아합니다. 이건 인간이 타고난 욕구입니다.
하지만 저는 리펫 원장님으로부터 사무실에 불려 가서 존 스미스 씨가 저를
대학에 보내 주신다는 말을 듣기 전까지는 한 번도 놀라운 일을 당한 적이
없습니다. 게다가 그 때마저도 리펫 원장님은 그 뉴스를 서서히 들려
주었으므로 그렇게 충격은 받지 않았어요.
그런데 말예요, 아저씨. 저는 누구에게 있어서나 가장 필요한 것은
상상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상상력은 우리를 다른 사람의 입장으로 바꿔 놓아
줍니다. 그렇게 되면 누구나 친절하고 동정심이 많아져서 남을 잘 이해할
수가 있지요. 아이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상상력을 길러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존 그리어 고아원에서는 조금이라도 상상력이 비치면 얼른 밟아 끄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서 장려하는 것은 의무뿐이었어요. 저는 아이들에게는 의무 같은 것은
알려 주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의무란 기분 나쁘고 호감이 안 가는
말입니다. 아이들에게는 무엇이든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럼 제가 원장이 될 고아원을 구경해 보시겠어요. 이건 제가 매일 밤 자기
전에 하는 가장 좋아하는 놀이에요. 저는 아주 작은 문제에 이르기까지
계획을 세우고 있답니다. 식사, 옷, 공부, 오락, 그리고 벌칙까지도요-
아무리 착한 고아일지라도 때로는 장난을 하니까요.
그러나 어쨌든 아이들은 모두 행복하게 해주겠습니다. 어른이 되어서 많은
고생을 하게 될지라도, 적어도 어린 시절을 회상해 보고는 행복했다는 추억을
갖도록 해주어야 하니까요. 만약에 제가 어린아이를 갖는다면 자신이 아무리
불행하더라도 아이들에게만은 성장할 때까지 고생을 시키지 않을 작정입니다.
(예배 종이 울립니다- 가까운 장래에 이 편지의 끝을 맺겠습니다)
그림 설명: 50미터 달리기를 하는 주디
목요일
오늘 오후 실험실에서 돌아와 보니 티 테이블 위에 다람쥐가 한 마리
앉아서 점잖게 아몬드를 잡수시고 계시지 뭐예요. 따뜻해져서 창문을 열어
놓기 때문에, 우리는 종종 이런 종류의 손님을 대접하게 됩니다.
그림 설명: 티 테이블에 여자와 새와 지네와 다람쥐가 둘러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음. "지네 씨, 설탕은 하나를 넣을까요? 둘을 넣을까요?"
토요일 아침
아저씨는 아마 어젯밤은 금요일이고 오늘은 수업이 없는 날이므로, 제가 그
상금으로 산 스티븐스 전집을 끼고 기분 좋게, 조용한 저녁을 독서로
보냈으리라 생각하셨겠지요.
그러나 만약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그건 아저씨가 여자 대학을 구경한 적이
없다는 증거예요. 어쨌든 여섯 명의 여학생이 느닷없이 사탕과자를 만든다고
몰려와서는 그 중 한 명이 아직 채 굳지 않아 물렁물렁한 것을 우리의 가장
좋은 융단 한가운데에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이 귀찮은 얼룩을 완전히
없애버릴 수는 없을 거예요.
최근에는 공부 얘기를 전혀 쓰지 않았습니다만, 우리는 변함없이 매일
공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해진 학과를 벗어나서 자유롭게 인생 문제를
토론하는 것은 일종의 기분 전환이 됩니다. 토론이라고는 하지만 아저씨와 저
사이에 있어서는 일반적인 것인데, 이건 아저씨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언제든지 마음이 내키실 때 반박해 주세요.
이 편지를 쓰다가 말다가 하는 동안에 사흘이나 지나고 말았습니다.
아저씨는 무척 지루하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안녕, 좋은 아저씨
주디로부터
키다리 스미스 씨 귀하
근계
금번 토론의 연구와 논제를 항목별로 분류하는 방법을 습득하였기에 그
형식을 이 편지에 응용코저 합니다. 필요한 것은 전부 기술되어 있사오며
필요 없는 말은 한 마디도 없사옵니다.
1. 이번 주의 필기 시험
A. 화학
B. 역사
2. 새 기숙사 건축중.
A. 재료
(a) 붉은 벽돌
(b) 회색 돌
B. 수용 인원
(a) 사감 1명, 교사 5명
(b) 여학생 2백 명
(c) 관리인 1명, 요리사 3명, 여급사 20명, 하녀 20명
3. 오늘 저녁의 디저트는 크림 치즈.
4. 저는 '셰익스피어 희곡의 역사 자료에 대해'라는 특별 논문을 집필중.
5. 루 맥마흔은 오늘 오후 농구를 하다가 미끄러져 넘어졌음.
(a) 어깨뼈가 어긋나고
(b) 무릎이 까짐.
6. 모자 하나 새로 샀음.
(a) 푸른 비로드 리본
(b) 푸른 새털깃 2개
(c) 빨간 방울솔 3개
7. 지금은 9시 30분
8. 안녕히 주무세요.
-끝 -
주디 애벗 드림
6월 2일
키다리 아저씨
아저씨도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아주 멋진 일이 생겼습니다.
맥브라이드 씨 집에서 저를 이번 여름에 애디론택스 산(뉴욕에 있는 산)에
있는 그분들의 산장에서 지내지 않겠느냐고 초대해 주셨습니다. 숲 속에 있는
아름다운 작은 호숫가에 클럽 같은 것이 있는데 맥브라이드 씨네도 거기에
속해 있다는군요. 모든 회원은 여기저기 나무 사이에 흩어져 있는 통나무
집에 살고 있어, 호수에 카누를 띄우기도 하고, 긴 오솔길을 걸어 다른 집을
방문하기도 하고, 일주일에 한 번 호수의 클럽에서 댄스 파티를 열기도
한다는군요. 지미 맥브라이드 씨는 여름 동안 잠시 초대한 대학 친구를 한
사람 데리고 온대요. 그러니까 함께 댄스할 남자도 많은 셈이지요. 저를
초대해 주시다니, 맥브라이드 부인은 정말 친절한 분이로군요. 크리스마스
때에 방문했을 때 제가 좋아지신 모양이에요.
이렇게 짧은 편지여서 죄송합니다. 이건 진짜 편지가 아니에요. 다만 이번
여름의 계획이 정해졌다는 걸 알려 드리는 것뿐입니다.
몹시 만족해 있는
주디 올림
6월 5일
키다리 아저씨께
방금 당신의 비서라는 분으로부터 편지가 왔는데, 스미스 씨는 제가
맥브라이드 부인의 초대를 받지 말고, 작년 여름과 마찬가지로 록 윌로에 갈
것을 바란다는 거예요.
아저씨!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인가요?
아저씨는 이번 일에 대해 잘 이해하시지 못하는 것 같군요. 맥브라이드
부인은 진심으로 저를 필요로 하고 있는 거예요. 저는 결코 그 댁에 폐를
끼칠 염려는 없습니다. 오히려 도움이 되지요. 그 댁에서는 일할 사람을
그다지 많이 데리고 가지 않기 때문에 샐리와 제가 여러 가지로 도와 줘야
합니다. 저로서는 집안 일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요. 여자는
누구든지 가정 살림을 해낼 줄 알아야 합니다만, 저는 고아원 살림밖에
몰라요.
산장에는 우리 나이 또래는 없습니다. 그래서 맥브라이드 부인은 제가
샐리의 친구로 와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거예요. 우리는 같이 많은 책을 읽을
계획을 세우고 있어요. 둘이서 다음 학기에 배울 국어와 사회학 준비로 여러
가지 책을 읽기로 했습니다. 교수님은 여름 방학 동안에 참고서를 모두 읽어
놓으면 크게 도움이 될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이서 같이 책도 읽고,
그것에 대해 얘기도 나누고 하면, 혼자서 하는 것보다 훨씬 쉽게 머리에
들어갑니다.
샐리의 어머님과 한 집에 산다는 일만으로도 좋은 교육이 될 거예요.
그분은 보기 드물게 유쾌하고 손님대접을 잘 할 줄 알고 사교성이 있고
매력있는 부인이에요. 그분은 무엇이든 잘 알고 계세요. 제가 리펫 원장님과
얼마나 많은 여름을 보냈는가를 생각해 보시고, 제가 그와 정반대되는
맥브라이드 부인을 얼마나 좋아하는가를 짐작해 주십시오.
제가 그 댁에 폐를 끼치리라고 염려하실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왜냐 하면
그 댁은 탄력 있는 고무와도 같습니다. 손님이 늘면 숲 속에 여기저기
텐트를 치고, 남자들을 밖으로 내쫓아 버립니다. 하루 종일 집 밖에서 운동할
수 있다니, 무척 건강한 여름을 보내게 될 거예요. 지미 맥브라이드 씨는 제게
승마와 카누 젓는 법과 엽총 쏘는 방법, 그 밖에 제가 당연히 알아두어야 할
일을 많이 가르쳐 주실 거예요.
저는 이제까지 경험한 적이 없을 만큼 유쾌하고 한가로운 시간을 보낼
겁니다. 어떤 처녀라도 평생에 한 번쯤은 그런 생활을 시켜도 좋을 거예요.
물론 저는 아저씨가 하라는 대로 행동할 작정입니다만, 제발, 제발
소원입니다. 꼭 허락해 주세요, 네? 저는 지금까지 이처럼 자기 희망대로
해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은 미래의 대작가 저루샤 애벗이 아니라 한 소녀인
주디 애벗입니다.
6월 9일
존 스미스 님
7일자로 보내주신 귀하의 편지를 비서를 통해 받았으며, 지시대로 록 윌로
농장에서 이번 여름을 보내기 위해, 오는 금요일 출발할 예정입니다.
언제나 당신의 뜻을 따르는 (미스)저루샤 애벗
8월 3일
록 윌로 농장에서
키다리 아저씨
두 달 가까이나 소식 전해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사실은 이번
여름에는 아저씨를 그다지 좋아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저는
정직해요.
맥브라이드 씨의 산장을 단념해야 했기 때문에 제가 얼마나 실망했는지
상상도 못 하실 거예요. 물론 아저씨는 저의 후견인이므로 무엇이든 아저씨의
의사를 따라야 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만, 저는 도무지 반대하시는
까닭을 납득할 수 없었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저로서는 정말 좋은 기회였는데! 만약에 제가 아저씨이고
아저씨가 주디였다면, 저는 이렇게 말했을 거예요. "주디야, 잘됐구나, 가서
즐겁게 지내고 오너라. 새로운 사람을 많이 사귀고, 새로운 일도 많이
배우고, 야외에서 지내며 앞으로 1년 동안 열심히 할 공부에 대비하여,
충분히 쉬고 튼튼해져서 돌아오너라."
그런데 천만에 말씀. 아저씨는 비서를 통해 매정스럽게 록 윌로에 가라고
명령했을 뿐이에요.
제가 기분이 상한 것은 아저씨의 명령에 인간미가 조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제가 아저씨를 생각하는 마음을 털끝만큼이라도
알아주신다면, 멋도 아무것도 없는 타이프라이터로 비서를 시켜 쓴 한 조각
통고장 대신에, 가끔 아저씨가 손수 쓰신 편지 한 장쯤 주셔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만약 아저씨가 털끝만큼이라도 저를 생각해 주신다는 것을 알면,
저는 아마 아저씨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할텐데 말이에요.
저는 답장을 받으리란 기대는 조금도 하지 않고, 재미있고 긴, 자세한
편지를 아저씨에게 써야 한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아저씨 쪽에서는 그
약속을 지키고 계십니다. 이렇게 저를 교육시켜 주시니까요. 그래서 아마도
아저씨는 제가 오히려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생각하실 거예요. 하지만
아저씨, 이건 저로서는 매우 괴로운 약속입니다. 정말이에요. 저는 매우
쓸쓸해요. 제가 이 세상에서 친근감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단지 아저씨 한
분인걸요. 그러나 아저씨마저도 그늘의 인물입니다. 아저씨는 저의 공상이
만들어 낸 인물로, 어쩌면 사실은 제가 상상하고 있는 분과 전혀 다를지도
모르거든요.
그러나 아저씨는 단 한 번 제가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편지를 주셨지요.
지금도 저는 제가 몹시 잊혀진 듯한 기분이 들 때 그 편지를 꺼내 다시
읽어본답니다.
저는 아저씨에게 말씀드리려고 생각하던 것을 조금도 쓰지 않았어요. 그건
이런 것이에요. 저는 지금까지도 기분이 상해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거만하고 독단적이고 비합리적인 눈에 보이지 않는 신에게 붙들려서 그 사람
마음대로 아무 곳에나 옮겨지다니, 이보다 더한 굴욕이 어디 있겠어요.
하지만 돌이켜 보면, 제게 그렇게도 친절하고 관대하고 이해심을 보인
분이었으니까, 때로는 거만하고 독재적이고 비합리적이며,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이 될 권리가 있는지도 모르지요. 그래서 저는 아저씨를 용서해 드리고,
다시 또 쾌활한 주디가 되겠습니다.
그렇지만 샐리로부터 산장에서 즐겁게 지내고 있다는 편지를 받을 때마다
저는 아무래도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앞으로 이 문제는 땅 속 깊숙이 숨겨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해요.
올 여름에 저는 계속 많이 썼습니다. 단편소설을 4개 완성하여 각각 다른
잡지사에 보냈습니다. 이것으로 아저씨도 제가 작가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걸 아셨겠지요? 저는 옛날 저비 도련님이 비오는 날에 놀이터로
삼았던 다락방 한쪽 구석을 작업장으로 쓰고 있습니다. 그 곳에는 두 개의
창문이 있고, 단풍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으며, 통풍이 잘 되어 아주
시원합니다.
4, 5일 안으로 좀더 좋은 편지를 써서 농장 소식을 여러 가지로 알려
드리겠습니다.
비가 한 차례 왔으면 좋겠어요.
변함 없는 당신의
주디 올림
8월 10일
저는 지금 목장의 연못가에 있는 버드나무의 둘째 줄기에 걸터앉아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 발 밑에서 개구리가 울고, 머리 위에서는 매미가 노래하고
장난꾸러기 아기다람쥐 두 마리가 날쌔게 나무 줄기 위로 올라왔다
뛰어내려갔다 하고 있습니다.
저는 벌써 한 시간 동안이나 여기에 있습니다. 매우 편한 나무 줄기인데
소파의 쿠션을 두 개 가져다가 깔았더니 더욱 편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후세에 길이 남을 명작을 쓸 생각으로 펜과 종이를 가지고 여기에
왔습니다만, 저는 그 작품 안의 여주인공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습니다.
도무지 제 생각대로 잘 움직여 주지를 않는군요. 그래서 그 쪽은 잠시 팽개쳐
두고 아저씨에게 편지를 쓰기로 했어요(이것도 그다지 제 마음을 평안하게 해
주지는 않습니다. 아저씨 역시 제 생각해도 움직일 수가 없는걸요).
만약 아저씨가 저 무서운 뉴욕에 계신다면, 바람 향기롭고 햇빛 반짝이는
이 아름다운 경치의 한 부분이나마 보내 드리고 싶습니다. 일주일 동안이나
내린 비로 말끔히 씻겨진 전원은 바로 천국입니다.
천국이라고 하니 생각나는데요. 작년 여름에 말씀드린 켈로그 씨를
기억하고 계신지요? 모퉁이에 있는 작은 흰 교회의 목사님 말예요. 가엾게도
그 노인은 지난 해 겨울, 폐렴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대여섯 번 그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기 때문에 그분의 신학론에 대해서는 정통해졌었지요.
그 노인은 처음 출발할 때 얻은 신앙을 끝까지 바꾸지 않고 그대로
지키셨어요.
제 생각으로는 한 번 믿은 것을 47년 동안이나 조금의 변화도 없이 그대로
간직할 수 있는 사람이란, 골동품으로서 진열장 안에 넣어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분이 황금 면류관과 하프를 손에 넣고 기뻐하신다면 좋겠어요.
그분은 천국에서 그 두 가지를 얻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입니다.
이번에 켈로그 씨의 후임으로 현대적인 젊은 분이 오셨습니다. 신도들은 이
새로 오신 목사님에 대해 상당히 회의적입니다. 특히 커밍스 집사를 둘러싼
몇몇이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교회는 무서운 분열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근처 사람들은 종교상의 혁신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아요.
비가 오는 일 주일 동안 저는 다락방에 틀어박혀 독서에 열중하였습니다.
주로 스티븐슨을 읽었어요. 이 작가 자신이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그
누구보다도 재미있습니다. 스티븐슨을 주인공으로 소설을 쓰면 멋지게 될
거예요. 아버지 유산으로 받은 1만 달러를 전부 요트에다 투자하여 남양
제도를 항해하다니, 과연 스티븐슨답지요? 그분은 자기의 신조이던 모험을
몸소 실천했던 거예요.
만약에 우리 아버지가 1만 달러를 남겨 주셨더라면 저 역시 똑같은 짓을 할
거예요. 바일리마(스티븐슨이 남양의 사모아 섬에다 지은 집의 이름)을
생각만 해도 저는 몹시 흥분을 느낍니다. 저도 열대 지방을 보고 싶어
죽겠어요. 저는 온 세계를 다 보고 싶어요. 저는 언젠가 꼭 가볼 작정입니다.
아저씨, 정말이에요. 대작가가 되거나 화가가 되거나 아니면 여배우건
극작가건 유명한 인물이 되면 실행할 생각입니다. 저는 굉장한 방랑벽을 갖고
있습니다. 지도만 보아도 곧 모자를 쓰고 우산을 들고 떠나고 싶어집니다.
'남양의 종려나무와 사원을 죽기 전에 찾아가 보리라.'
목요일 저녁
황혼 무렵 문간의 돌층계에 앉아서
이 편지에 알리기에는 매우 곤란합니다. 주디는 요즘 매우 철학적이
되어서, 일상 생활의 시시하고 자질구레한 이야기를 늘어놓기보다는 주로
사회 전반에 걸쳐 논하고 싶거든요. 하지만 아저씨가 꼭 알기를 원하신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농장의 새끼돼지 아홉 마리가 지난 화요일에 시내를 건너 도망하여 여덟
마리밖에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함부로 남을 의심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다우드 미망인 댁에 한 마리 더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위버 씨는 자기네 헛간과 건초 창고에 호반 같은 화려한 노랑색을
칠했습니다. 매우 보기 싫은 색입니다. 하지만 위버 씨는 오래 가니까 좋다는
거예요.
브루어 씨 댁에는 이번 주에 손님이 오신답니다. 아주머니 여동생과 두
조카딸이 오하이오 주에서 온대요.
로드아일랜드 레드 종의 암탉이 달걀을 50개 품었는데, 겨우 병아리 세
마리를 깠습니다.
무엇이 원인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어요. 생각건대 로드 아일랜드
레드라는 건 아주 열등한 종류인가봐요. 저는 비프오핑턴 종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보니리그 네거리 모퉁이에 있는 우체국에 새로 온 직원이, 저장해 두었던
자메이카 생강주- 값 7달러- 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마신 것을
아내에게 들켰대요.
아이러 해취 할아버지는 류머티즘으로 일을 못 하게 되었습니다. 급료를
많이 받았을 때 조금도 저금해 두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은 마을 사람들의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다음 주 토요일 밤에 마을 학교에서 아이스크림 친목회가 열립니다.
아무쪼록 가족 동반으로 참석해 주십시오.
저는 우체국에서 25센트를 주고 모자를 새로 구입했습니다. 뒤의 그림은
저의 요즘 모습으로 건초를 긁으로 가는 그림입니다.
벌써 어두워졌군요. 마을의 뉴스 거리도 이제는 바닥이 나고 말았어요.
안녕히 주무십시오.
주디
그림 설명: 치마 입은 여자 아이가 모자를 쓰고 쟁기를 들고 있는 모습
금요일
안녕하십니까?
뉴스가 있습니다. 무엇인지 아시겠어요? 누가 록 윌로에 오는지
아저씨께서는 도저히 상상도 못 하실 거예요. 셈플 아주머니에게 팬들턴 씨의
편지가 온 거예요. 펜들턴 씨는 버크셔 지방으로 자동차 여행을 하고
계셨는데, 피로해서 어디 기분 좋은 조용한 농장에서 휴식하고 싶다나요.
만약 어느 날 밤 갑자기 현관에 자동차를 들이대더라도 곧 재워 줄 수 있도록
방을 마련해 주겠느냐는 거예요. 머무는 기간은 1주일이 될지 2주일, 아니면
3주일이 될지 모르지만, 하여간 이 곳에 와 보시고 여기가 휴양하기에
적합한지 어떤지 보아서 결정하시겠답니다.
우리는 야단 법석을 떨고 있습니다. 온 집 안을 대청소하고 커튼은 있는
대로 다 빨았습니다. 저는 지금 모퉁이의 가게에까지 마차로 달려가서 현관에
깔 깔개(기름 먹인 것)와 현관과 뒷계단에 칠할 갈색 페인트 두 통을 사러
가는 중입니다. 다우드 미망인이 내일 아침 창문을 닦으러 옵니다(급한
때이므로 돼지새끼에 대한 의심은 그만두기로 하였어요).
이런 말을 들으시면 아저씨는 이 집이 여태까지는 깨끗하지 않았나 하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결코 그렇지는 않습니다. 설사 셈플
아주머니에게 모자라는 점이 있다 할지라도 어쨌든 가정부로서는 완전
무결합니다.
그런데 아저씨, 남자분의 하는 짓이란 다 그런가 봐요. 펜들턴 씨는 현관
층계에 오늘 내려설 것인지 아니면 지금부터 2주일 뒤에 올 것인지 한 마디도
언급이 없지 뭡니까! 정작 도착하실 때까지 우리는 늘 조마조마해서 가슴을
죄어야 한단 말이에요. 빨리 오시지 않으면 우리는 다시 한 번 대청소를 해야
됩니다.
아래층에서 애머사이가 그로버를 마차에 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는
혼자서 마차를 몰고 갈 겁니다. 하지만 아저씨가 늙은 그로버를 보신다면, 제
몸의 안부 같은 건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실 거예요.
가슴에 손을 얹고 안녕!
주디로부터
추신
이 마지막 인사말 참 멋있지요? 이긴 스티븐슨의 편지에서 옮겨 적은
것입니다.
그림 설명: 말이 서 있음. 늙은 그로버는 아주 안전합니다.
토요일
또 한 번 안부를 여쭙겠습니다. 어제 우편 배달부가 왔을 때에는 아직 이
편지를 봉투에 넣지 않았으므로 좀더 쓰기로 하겠습니다. 이 곳에서는 매일
정오에 한 번 우편물이 배달될 뿐입니다. 시골의 우편 배달부는 농부들에게는
매우 소중한 존재입니다. 우리 배달부는 편지를 배달해 줄 뿐만 아니라, 한
번에 5센트의 삯을 받고 여러 가지 시내의 볼일도 보아 줍니다.
어제는 10센트로 구두끈과 콜드 크림(모자를 새로 사기 전에 이미 햇볕에
타서 콧잔등이 벗겨졌으므로) 한 통과 하늘색 넥타이와 구두약 등을 시내에서
사다 주었습니다. 이렇게 여러가지 주문에 대해 10센트란 터무니없이 싼
거래였어요.
그리고 또 우체부 아저씨는 넓은 세상 일을 이야기해 줍니다. 배달
구역에는 일간 신문을 보는 집이 몇 집 있으므로, 우체부 아저씨는 터벅터벅
걸으면서 그것을 읽고, 신문을 보지 않는 사람들에게 뉴스를 들려 줍니다.
그러므로 미합중국과 일본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거나, 대통령이
암살당하거나 아니면 록펠러(미국의 대부호)가 존 그리어 고아원에 백만
달러를 주었다는 따위의 일이 있었다 해도, 일부러 아저씨께서 알려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어차피 그런 식으로 제 귀에 들어 오고 마니까요.
저비 도련님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 집이 얼마나 청결한지,
우리가 집 안에 드나들 때 얼마나 깨끗이 신바닥을 닦는지, 보여 드리고 싶을
정도예요. 빨리 오셨으면 좋겠어요.
저는 말 상대가 그리워 못 견디겠어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셈플
아주머니에게 약간 싫증을 느끼고 있는 중이거든요.
그분은 쉴새없이 지껄일 뿐 절대로 도중에 생각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그
점이 이 집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여기 사람들의 세계는 이 언덕배기
위뿐인걸요. 그래서 전혀 사회성이 없습니다. 제가 말하는 뜻을 아저씨께서는
아시겠지요. 그 점은 존 그리어 고아원과 꼭 같습니다. 우리 고아들의 생각은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철책으로 제한되어 있었어요.
다만 그 때 저는 아직 어린아이였고 게다가 너무 바빴으므로,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던 거예요. 내가 맡은 침대를 전부 정돈하고, 아기의 얼굴을
씻어 주고, 학교에 다녀와서는 꼬마들의 얼굴을 또 한 번 씻겨 주고, 애들의
양말을 꿰메고, 프레디 퍼킨스의 바지를 기워 주고(그 아이는 1년 내내
바지를 찢어 가지고 다녔거든요), 그 틈틈이 학교 숙제를 하다보면, 그
동안에 저는 벌써 침대에 들어가 눕고 싶어지고 마니까요. 바깥 세상이
부족하다는 것 따위는 느끼지도 못하고 있었지요.
그러나 2년 동안이나 화제가 풍부한 대학 생활을 한 오늘에 와서는 참된
의미의 이야기 상대가 없는 것을 쓸쓸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누구든 제 이야기를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나면 기쁠 거예요.
아저씨, 이 편지도 이쯤으로 마치겠습니다. 이젠 더 생각나는 것도
없으니까요. 이 다음에는 좀더 긴 편지를 쓰겠어요.
당신의 변함 없는
주디
추신
올해는 상추가 잘 되지 않았어요. 파종을 할 무렵 비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8월 25일
아저씨, 저비 도련님이 와 계세요. 우린 매우 즐겁게 지내고 있습니다.
적어도 저는 말이에요. 그분도 역시 그럴 거예요. 왜냐 하면 벌써 열흘이나
머무르면서 아직 떠날 기색도 보이지 않거든요. 셈플 아주머니가 그분을
얼마나 아끼는지 정말 보기 민망할 정도예요. 그분이 어렸을 때 그렇게
응석받이로 자랐다면, 어떻게 이렇게 훌륭한 어른이 되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분과 저는 식사 때 작은 테이블을 베란다나 나무 밑에 가져다 놓을 때도
있고, 비가 오는 날엔 식사를 제일 좋은 객실에서 할 때도 있습니다.
저비 도련님은 마음 내키는 대로 식사하고 싶은 장소를 정하기만 하면,
캐리가 그 뒤에서 테이블을 정중하게 두 손으로 들고 따라갑니다. 그러나 그
장소가 매우 귀찮은 곳이어서 멀리까지 그릇들을 날라야 할 때에는, 캐리는
언제나 설탕 그릇 밑에서 1달러의 팁을 발견하게 된답니다.
저비스 씨는 매우 호감이 가는 분입니다. 얼핏 보아서는 아저씨는 믿지
않으실 거예요. 처음 만났을 때에는 펜들턴 집안의 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조금도 그런 점이 없습니다. 깔끔하고 겸손하고 그리고 매우 다정하신
분이에요. 남자분을 이렇게 표현하는 건 우스울지 모르겠습니다만, 정말
그런걸요.
그분은 이 곳의 농부들에게도 매우 잘 해주십니다. 누구든지 다 똑같게
대해 주기 때문에 곧 상대방이 경계심을 풀게 됩니다. 처음에는 모두들
그분을 수상쩍게 대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옷차림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예요.
그러고 보니 분명히 그분의 옷차림을 보면 누구나 놀라고 말지요.
니커보커즈(무릎까지 오는 헐렁한 반바지) 나 주름 잡힌 윗저고리. 흰 플란넬
옷과 바지가랑이가 불룩한 승마복 따위를 입기도 하거든요. 언제나 그분이
무엇이건 새로운 것을 입고 내려오시면 셈플 아주머니는 자랑스러운 듯이
얼굴을 빛내면서, 그분의 둘레를 빙빙 돌며 이쪽 저쪽으로 바라보고는,
먼지라도 묻지나 않을까 걱정하며, 앉는 자리에 조심하라고 거듭거듭
잔소리를 한답니다.
그것이 또 그분을 귀찮게 만듭니다. 그럴 때마다 그분은 언제나 "리지,
가서 자기 일이나 해요. 언제까지나 나를 마음대로 하려고 해도 그건 안 돼.
난 이제 어른이니까."
하고 말씀하신답니다.
저렇게 키가 크고(그분은 아저씨와 같을 정도로 키다리예요) 훌륭한 분이
셈플 아주머니 무릎에 안겨서 얼굴을 씻었겠지 생각하면 여간 우습지가
않아요. 아주머니 무릎을 보면 더욱 우스워져요. 아주머니는 이제는 무릎이
2단계로 부풀어오르고 턱도 3단으로 잘룩해져 있거든요. 그러나 저비 씨
이야기로는 그 아주머니도 옛날에는 날씬하고 민첩해서 도련님보다 빨리
달렸다는 거예요.
우리는 온갖 모험을 다 하고 있습니다. 이 부근 일대 몇 군데를
답사하였습니다. 저는 새의 깃으로 만든 기묘한 제물 낚시로 고기를 낚는
법도 배웠어요. 그리고 또 총과 피스톤 사격도 배웠습니다. 그리고 승마도,
저 늙어빠진 그로버는 놀라운 기운을 갖고 있더군요. 사흘 동안 보리만
먹였더니 송아지한테 놀라서 저를 태운 채 도망해 버릴 뻔했어요.
수요일
우리는 월요일 오후에 스카이 산에 올라갔습니다. 그것은 이 근처에 있는
산이에요. 그리 높은 산은 아닌 것 같습니다. 꼭대기에 눈이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산꼭대기에 이르렀을 때에는 상당히 숨이 찼어요. 기슭의 사면은
숲으로 싸여 있었으나, 꼭대기는 바위만 겹겹이 쌓인 넓은 황무지였습니다.
우리는 해가 지기를 기다려, 모닥불을 지펴 저녁 식사를 만들었습니다. 저비
도련님이 요리를 맡아 주었습니다. 그분이 저보다 더 요리를 잘 할 줄
알아요. 정말이에요. 그분은 늘 캠핑을 다녔기 때문이래요. 그리고 나서 우리
두 사람은 달빛을 의지하여 산을 내려왔는데, 숲 속의 오솔길로 들어갔을 때,
캄캄했지만 그분이 주머니에 준비해 두었던 손전등으로 비춰 주었습니다.
아주 유쾌했어요. 내려오면서 내내 그분은 우스갯말을 해서 웃기기도 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들려 주시기도 했습니다.
그분은 제가 지금까지 읽은 책은 물론이거니와 그 밖에도 많은 책을 읽고
계셨어요. 그분이 그렇게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데는 정말 놀랐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소풍을 갔다가 폭풍을 만났습니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두
사람 다 물에 빠진 생쥐가 되었습니다만, 우리의 기분은 조금도 우울하지
않았어요.
두 사람이 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부엌으로 들어갔을 때의 셈플
아주머니의 표정을 보여 드리고 싶어요.
"아이구, 저비 도련님, 주디 아가씨도, 두 분 다 흠뻑 젖으셨군요. 글쎄
이걸 어쩐담! 새로 맞춘 코트가 못쓰게 되었으니!"
아주머니는 정말 우스웠습니다. 마치 우리가 열 살 먹은 아이들이고,
아주머니는 기가 막혀 있는 어머니 같았어요. 저는 잠깐 동안 이래서는 간식
시간에 잼을 얻어 먹지 못하지나 않을까 하고 걱정했을 정도였어요.
토요일
이 편지는 훨씬 전에 쓰기 시작한 것인데, 마칠 틈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건 스티븐슨의 시의 한 구절인데 매우 멋진 생각인 것 같아요.
이 세상엔 이렇게도 많은 것이 넘쳐 있으니
우리는 모두 왕자처럼 행복할지이다
정말 그래요. 세상에는 행복이 넘쳐 있어, 자기 앞에 온 것을 무엇이든
받아들일 마음만 있다면, 행복은 누구에게나 고루 돌아갈 만큼 충분히 있는
거예요. 다만 그것을 받는 비결은, 구김살없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특히 시골에는 즐거운 일이 많이 있습니다. 저는 누구의 땅이건
자유로이 걸을 수 있고, 어느 집에서나 마음대로 경치를 즐길 수 있으며
누구의 시내든 물놀이를 할 수가 있어요. 그리고 마치 지주가 된 듯한 기분을
맛볼 수 있지요. 세금은 한 푼도 내지 않고 말이에요!
지금은 일요일 밤 11시경입니다. 지금 저는 미인을 만들어 주는 잠에 빠져
있어야 할 때예요. 그런데 저녁 식사 때 프림을 타지 않은 진한 커피를
마셨기 때문에, 제게는 미인의 잠이 찾아오질 않는군요.
오늘 아침 셈플 아주머니가 매우 결연한 태도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11시까지 교회에 닿도록 10시 15분에는 떠나야 합니다."
"응. 알았어. 리지. 마차 준비를 해두어요. 그리고 내가 옷 갈아입는
시간이 오래 걸리거든 기다리지 말고 먼저 가요."
하고 저비 도련님이 말했습니다.
"기다리고 있겠어요."
아주머니가 말했습니다.
"좋도록 해요. 하지만 말을 너무 오래 세워 두지는 말아요."
라고 말하면서, 저비 도련님은 셈플 아주머니가 옷을 갈아입고 있는 동안
캐리에게 도시락을 싸게 하고, 저에게는 산책 옷을 걸치고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뒷문으로 빠져 나가서 낚시를 갔습니다.
이것은 집안 일에 심한 차질을 가져왔습니다. 왜냐하면 록윌로 농장에서는
일요일 만찬은 2시로 정해져 있는데, 도련님은 7시에 하도록 명령했어요.
그분은 언제나 자기 마음대로 식사를 가져오라고 하지요. 마치 여기를
음식점으로 생각하고 있나 봐요. 그 때문에 캐리와 애머사이는 드라이브를 못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비 도련님은 그 젊은이들이 보호자도 없이 단
둘이서 드라이브를 가는 건 좋지 않으니까, 오히려 잘 되었다나요? 어쨋든
그분은 저를 데리고 가기 위해 말을 독점하고 싶었던 거예요. 이런 억지가
어디 있겠어요?
가엾게도 셈플 아주머니는 일요일에 낚시질을 가는 따위의 사람은, 죽은
다음 활활 불을 뿜는 지옥에 떨어진다고 믿고 있지 뭐예요. 또 아주머니는
도련님이 아직 어려서 뜻대로 길들일 수 있었을 때, 좀더 잘 가르치지 못한
것을 몹시 후회하고 계신답니다. 게다가 아주머니는 저비 도련님을 교회에
데리고 가서 여러 사람에게 자랑하고 싶었던 겁니다.
어쨌든 우리는 낚시질을 하여(그분은 작은 것을 네 마리 낚았어요), 그것을
점심때 모닥불로 요리했습니다. 물고기가 굽는 꼬챙이에서 자꾸 떨어져서,
조금 재 냄새가 났습니다만 둘이서 모조리 먹어치웠습니다.
우리는 4시에 집에 돌아와서 5시에 드라이브를 하고, 7시에 저녁을 먹은 뒤
10시에 저는 침실로 돌아와서, 이렇게 아저씨에게 편지를 쓰는 중이에요.
그런데 조금 잠이 오기 시작하는군요. 안녕히 주무세요.
제가 한 마리밖에 못 낚은 것을 여기에 보여 드립니다.
어어이 그 배의 키다리 선장!
기다려! 멈춰! 어기여차! 럼 주 한 병!
제가 지금 무얼 읽고 있는지 아시겠어요? 이틀 동안 우리들의 대화는
항해와 해적 이야기뿐이었어요. '보물섬'은 정말 재미있군요. 아저씨도 읽어
보셨어요? 아니면 아저씨가 어렸을 때엔 아직 이 책이 나오지 않았었나요?
스티븐슨 씨는 이 연속물의 판권으로 겨우 30달러밖에 못 받았다는군요.
대작가가 되어도 그다지 많은 돈을 벌지는 못하는군요.
저는 학교 선생님이 될까 봐요.
이 편지에 스티븐슨의 이야기만 늘어놓아 미안합니다. 지금 제 머리는 이
작가로 가득 찼어요. 록 위로 농장의 도서실은 이 작가가 독차지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편지를 2주일이나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 정도면
충분한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저씨 부디 제가 상세하게 쓰지 않았다고는
말씀하지 마세요. 저는 진심으로 아저씨도 여기에 오셔서 우리들과 함께 이
유쾌한 기분을 맛보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저의 완전히 다른 두
친구가 서로 사귀어 주었으면 하고 생각합니다. 저는 펜들턴 씨에게 뉴욕에서
아저씨를 아시는지 여쭈어 보고 싶었습니다. 아마 알고 계실 거예요.
아저씨는 분명히 그분과 같은 상류 사회에서 생활하고 계실테고, 두 분 다
사회 개선이니 뭐니 하는데 흥미가 있으니까요. 그런데 저는 아저씨의 본명을
모르는걸요. 그분에게 아무것도 물어볼 수가 없었어요.
제가 아저씨의 이름을 모르다니, 이런 이상한 이야기가 또 있을까요? 리펫
원장님으로부터 아저씨가 괴짜라는 이야긴 들었습니다만, 저 역시 분명히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애정이 담긴 마음으로
주디
추신
이 편지를 다시 읽어 보고 스티븐슨에 대해서만 씌어 있지는 않다는 걸
알았어요. 두서너 가지 저비 도련님에 대한 이야기도 조금 쓰여졌으니까요.
9월 10일
아저씨
그분이 이제 돌아가 버려 몹시 쓸쓸해졌습니다. 사람이든 장소든 또는 생활
양식이든 모처럼 정이 들었는데, 갑자기 사라진 뒤에는 심한 공허감과 뼈에
스미는 고통이 남는 것입니다. 셈플 아주머니와의 대화는 마치 간이 맞지
않는 음식처럼 싱거워졌어요.
앞으로 2주일 뒤에는 학교 수업이 시작됩니다. 또다시 공부를 시작한다는
건 고마운 일이에요. 하기야 이번 여름에 저는 아주 아주 많은 일을 했어요.
단편 소설 6편과 시를 7편이나 썼습니다.
그것들을 여러 잡지사에 보냈더니, 모두 예의바른 신속함으로
되돌려졌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좋은 연습이 되었거든요.
저비 도련님은 저의 원고를 읽어보시고- 그분이 우편물을 받아 가지고
오셨으므로 숨겨둘 수가 없었어요- 어느 작품이나 모두 형편 없다고
말씀하셨어요. 제가 자신이 무얼 쓰고 있는지 도무지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그분은 진실을 이야기할 때는 실례 같은 것을 염두에 두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마지막 한 편- 대학 생활에서 취재한 스케치 형식의 것-
은 괜찮다고 하시면서 타이프로 고쳐 주셨으므로 그것을 어떤 잡지사에
부쳤습니다.
그 회사에서 원고를 받은 지가 벌써 2주일이나 되었을 것이므로, 지금은
아마 고려중인가 봐요.
저 하늘을 아저씨께 보여 드리고 싶어요! 매우 이상한 오렌지빛 광선이
모든 걸 물들이고 있습니다. 아마 폭풍우가 될 모양이에요.
그러는 사이, 벌써 25센트짜리 은전만한 굵은 빗방울과, 덧문을 쾅쾅
후려치는 바람과 함께 폭풍우가 닥쳤습니다. 캐리가 비 새는 곳에 놓을 우유
냄비를 몇 개나 양팔에 안고 다락방으로 뛰어 올라오는 동안, 저는 창문을
모두 닫으려고 뛰어다녔습니다.
그리고 다시 펜을 든 순간, 저는 과수원 나무 밑에 방석과 담요와 모자와
매튜 아널드의 시집을 두고 온 것을 생각해 내고, 허둥지둥 가지러
달려갔습니다만 모두 흠뻑 젖고 말았어요. 시집의 빨간 표지가 안쪽으로
흘러들어갔으므로 이후 도버해안은 핑크빛 물결로 씻길 거예요.
시골에서의 폭풍우란 참으로 귀찮기 짝이 없는 존재입니다. 그 때마다 집
밖에 내놓은 온갖 것을 생각해야 되고, 또한 그것들이 언제나 손해를 입기
때문입니다.
목요일
아저씨, 아저씨!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방금 우체부가 두 통의 편지를 갖고
왔어요.
첫째, 저의 소설이 팔렸어요. 50달러로.
오오, 저는 드디어 작가가 되었습니다.
둘째, 또 한 통은 대학의 서무과로부터 온 것인데 앞으로 2년 동안 제가
기숙사비와 수업료를 포함한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는 통지서예요. 이건 우리
학교 동문 한 분이 일반 학과의 성적이 좋으며, 특히 국어에 뛰어난 자를
위해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그것을 따낸 거예요! 올 여름 이
곳으로 떠나오기 전에 신청해 두었는데, 1학년 때 수학과 라틴 어가 나빴기
때문에 행여 받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어요. 그러나 저는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었던 모양입니다.
저는 몹시 기쁩니다. 왜냐하면 아저씨, 앞으로는 아저씨께 폐를 덜 끼쳐
드리게 되었거든요. 매달 용돈만 주시면 충분합니다. 그것도 차츰 가정교사를
하거나 좀더 창작을 하여 스스로 마련하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빨리 학교로 돌아가서 공부를 시작하고 싶어요.
언제나 당신의 벗인
저류샤 애벗
'2학년생이 우승했을 때'의 책자. 전국 서점에서 판매중. 정가 10센트.
9월 26일
키다리 아저씨
또 대학에 돌아왔습니다. 이젠 상급생이에요. 올해의 우리 서재는 이제까지
보다 훨씬 좋습니다. 남쭉으로 난 큰 창문이 둘, 게다가 훌륭한 가구까지
있어요! 용돈이 얼마든지 있는 줄리아가 저보다 이틀 먼저 도착하여 방을
꾸미느라고 정신이 없더군요.
벽지를 새로 바르고, 동양식 융단을 깔고, 마호가니 의자를 놓고, 그건
지난 해까지 우리가 자랑스럽게 쓰던 마호가니 빛으로 칠한 가짜가 아닌
진짜예요. 매우 호화로운 것입니다만, 어쩐지 저는 이 방에서는 마음이
차분해지지 않아요. 늘 어디다 잉크칠이나 하지 않을까 하고 조마조마해야
되니까요.
그리고 아저씨의 편지- 실례했습니다- 비서 되시는 분의 편지가 저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아저씨, 어째서 장학금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까닭을, 제가 납득이 가도록
설명해 주시지 않으시나요? 아저씨께서 무슨 이유로 반대하시는지 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요. 하지만 아무리 항의하신다 해도 아무 소용없어요.
왜냐 하면 저는 이미 그걸 승낙했고, 결심을 바꿀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요.
이런 말씀을 드리면 몹시 건방지게 들리시겠지만, 저는 결코 그런 마음은
없습니다.
아마도 아저씨께서는 제게 교육을 시키겠다는 일에 손을 대신 이상은,
마지막으로 졸업 증서라는 형식의 종지부를 찍어, 깨끗이 마무리 짓고 싶은
심정이시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의 입장도 좀 생각해 주세요. 물론
저는 아저씨께서 학비 전액을 대주신 것과 똑같이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될 수 있는 한 아저씨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
아저씨가 제게서 돈을 돌려 받으려고는 생각지 않으신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로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갚아 드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래서 그 경우 장학금을 받아 두면 저의 부담이 그만큼 가벼워지는
셈이죠. 저는 아저씨께서 대주신 학비를 모조리 갚는 일에 나머지 온 생애를
바쳐야 한다고 각오하고 있었는데, 이로써 저의 생애의 절반만 바칠 수 있게
된 거예요.
아저씨, 부디 저의 입장도 이해해 주시고, 그렇게 기분 언짢게 생각지
마세요. 용돈은 전과 다름없이 깊은 감사로써 받겠습니다. 저는 줄리아나 이
방에 어울리는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아저씨로부터 받는 돈이
필요합니다. 생각할수록 줄리아가 좀더 검소하게 자랐거나 아니면 줄리아가
저와 한방이 아니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그다지 대수로운 편지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좀더 여러 가지 말을 할
셈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창문의 커튼 넉 장과 문에 걸 두터운 커튼 석
장의 가장자리를 꿰매고 있는 중입니다(이 거친 바느질 솜씨를 아저씨께서 못
보셔서 다행이에요). 그리고 책상 위에 놓을 놋쇠 잉크스탠드와 펜꽂이를
치약으로 닦아야 합니다(이건 몹시 힘이 드는 일이에요).
그리고 매니큐어 용 가위로 액자를 걸 철사를 자르고, 네 상자에 가득 든
책을 꺼내고, 두 개의 트렁크에 가득 들어 있는 옷을 정리해야 합니다
(저루샤 애벗이 두 개의 트렁크에 가득 옷을 가지고 있다니 믿기 어려운
일이죠. 그러나 사실이 그런걸요!). 그 사이사이에 돌아온 그리운 친구들
50명과 인사도 나누어야 합니다.
개학날은 정말 즐거운 것이에요!
안녕히 주무세요, 아저씨. 병아리가 스스로 모이를 찾기 시작했다고 해서
그렇게 당혹해 하진 마세요. 이 병아리는 힘찬 작은 암탉으로 자라가고
있습니다. 매우 또랑또랑한 소리로 울기도 하고, 아름다운 것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이것도 모두 아저씨의 덕택이에요).
애정을 담아서
주디 올림
9월 30일
아저씨께
아저씨는 아직도 장학금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고 계시나요? 저는 아직까지
아저씨처럼 완고하고 고집스럽고 이해심이 없고 끈질기고 불독처럼 콧대가
세어, 남의 입장을 몰라주는 사람은 본 적이 없어요.
아저씨는 제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으로부터 은혜 같은 건 받지 말라는
거죠? 알지도 못하는 남! 그럼 그렇게 말씀하시는 아저씨 자신은 도대체 뭐란
말예요? 이 세상에 아저씨만큼 제게 있어 알지도 못하는 남인 사람이 또
있을까요? 길에서 만나도 저는 아저씨인 줄 모르고 있을 거예요.
아시겠어요? 아저씨. 만일 아저씨께서 분별 있고 상식 있는 분이어서 어린
주디를 격려할 만한 아버지다운 편지를 주시거나, 때로는 학교에 찾아오셔서
주디가 착한 처녀가 되어 기쁘다면서 머리라도 한 번 쓰다듬어 주셨더라면,
아마 주디는 나이 드신 아저씨를 모욕하는 따위의 짓은 하지 않고,
기대하시는 대로 효녀가 되어 아저씨의 아무리 작은 소망이라도 복종하였을
거예요.
알지도 못하는 남이라니, 말씀 참 잘 하셨어요. 그렇게 말씀하시는 우리
스미스 씨께서는 저 유리로 된 집에 살고 계시나 보지요! (속담에 유리 집에
사는 이는 돌을 던지지 말라는 것이 있다. 즉 자기 허물이 있으면서 남을
비판하지 말라는 뜻임.)
그리고 이건 남의 은혜와는 다른 것이에요. 제가 열심히 공부해서 획득한
것이에요. 위원회에서는 국어 성적이 우수한 사람이 아니면 장학금을 주지
않아요. 장학금을 전혀 주지 않는 해도 있을 정도에요! 게다가 또- 하지만
남자를 상대로 이치를 따진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특히 우리 스미스
씨께서는 이론 관념이 거의 없는 남성 가운데 한 분이시죠. 남성을 동의하게
하는 방법은 두 가지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비위를 맞추거나 아니면 자기가
토라져 버리거나. 저는 자기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남성의 비위를 맞추는
따위는 경멸합니다. 그래서 저는 토라지기로 했어요.
저는 장학금을 단념할 것을 거절합니다. 만일 아저씨께서 더 이상
반대하신다면 저는 매달 보내 주시는 용돈을 받지 않기로 하고, 앞으로는
머리 나쁜 1학년생의 개인 교수를 하여, 너무 지친 나머지 신경쇠약에 걸리게
하겠어요.
이건 저의 마지막 통첩입니다.
그리고 저는 좀더 생각하는 바가 있습니다. 아저씨께서 걱정하시는 것과
같이 제가 이 장학금을 받음으로써, 누군가 다른 사람의 교육비를 가로채는
것이 된다면 그런 걱정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아저씨께서 저에게 쓸 작정으로 가지고 계신 돈을 존 그리어 고아원의
누구든 다른 여자아이에게 주면 되지 않겠어요. 이건 좋은 생각이 아닐까요?
그러나 아저씨, 그 새 여자아이를 어떻게든 마음대로 교육하시는 건 좋지만,
부디 그 아이를 저보다 더 좋아하지는 말아 주세요, 네?
아저씨의 비서가 자기가 써 보낸 걸 제가 무시했다고 언짢게 생각지 않기를
빕니다. 그러나 만일 언짢아하더라도 도리가 없어요. 아저씨의 비서는
고집쟁이인걸요, 뭐. 저는 이제까지는 그분의 고집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이번만은 단호히 물리칠 작정입니다.
절대로 번복하지 않고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결심을 가진
저루샤 애벗 올림
11월 9일
키다리 아저씨
오늘 저는 구두약 하나, 칼라 두세 개, 새로 맞출 블라우스 옷감, 향료가
든 크림 한 병, 그리고 카스틸 비누 한 개를 사려고 시내에 갔습니다.
저에게는 모두 매우 필요한 물건으로 이것 없이는 하루도 못 견딥니다.
그런데 차비를 내려고 할 때에서야 지갑을 다른 외투 주머니에 넣어 두고 온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중간에 내려서 다음 전차로 되돌아 가야
했으므로, 체조 시간에 늦고 말았어요.
돈이 한 푼도 없다는 것도, 외투를 두 개 갖고 있다는 것도 매우 귀찮은
일이에요.
줄리아 펜들턴이 크리스마스 휴가에 저를 초대해 주었습니다. 아저씨의
의견은 어떠신지요? 존 그리어 고아원 출신의 저루샤 애벗이 그 부잣집
사람들과 한 식탁에 앉다니요! 어째서 줄리아가 저더러 오라는 건지
모르겠어요. 줄리아는 요즘 저를 매우 좋아하는가 봐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샐리네 집에 가는 편이 훨씬 좋지만 줄리아가 먼저 초대해 주었거든요.
그래서 저는 이번 휴가에 어디든 가게 된다면, 우스터가 아니라 뉴욕으로
가게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펜들턴 집안의 사람들과 만날 것을 생각하니 저는 조금 겁이
납니다. 게다가 드레스도 많이 만들어야 되겠고 말예요. 그러니까 만일 제가
기숙사에 남아서 조용히 보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신다면, 그 뜻을 편지로
알려 주십시오. 그러면 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사랑스럽고 얌전하게 아저씨의
희망을 따르겠습니다.
저는 틈틈이 토머스 헉슬리(영국의 생물학자이며 저술가- 현대 영국 문단에
활약한 올더스 헉슬리의 할아버지)의 전기와 서간집을 읽고 있습니다. 이건
잠깐 틈을 내서 읽기에 가볍고 좋은 책이에요. 아저씨는 아르케오프테릭스
(시조새)가 무엇인지 아세요? 이건 새입니다. 그리고 스테레오그나투스가
무엇인지 아세요? 저도 확실한 건 모르지만 이건 유인원과 사람의 중간에
있었던 것으로 상상되는 동물인데, 이빨이 있는 새나 아니면 날개가 있는
도마뱀 같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니에요. 틀렸어요. 지금 잠깐 책을
들여다보았더니 중생대에 살던 포유 동물입니다.
올해는 경제학을 선택했습니다. 경제학은 대단히 많은 성장을 가져다 주는
학과입니다. 이것이 끝나면 자선 사업과 감화사업을 택할 작정입니다. 그렇게
하면 평의원님, 저는 고아원을 어떻게 경영할 것인가를 분명히 터득하게
되겠지요.
만일 저에게 투표권이 있다면 훌륭한 유권자가 될 거라고 생각지 않으세요?
저는 지난 주일에 만 21세가 되었습니다. 저처럼 정직하고 학식 있고
양심적이고 총명한 시민에게 선거권을 주지 않다니, 이 나라는 정말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군요.
변함 없는
주디 올림
그림 설명: 이것이 스테레오그나투스의 단 하나뿐인 그림입니다.
머리는 뱀 같고 귀는 개 같고 꼬리는 도마뱀 같고 날개는 백조 같으며 털은
고양이처럼 부드럽고 깨끗합니다.
12월 7일
키다리 아저씨께
줄리아를 방문하도록 허락- 아저씨의 침묵을 저는 동의하시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린 사교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는 중입니다.
지난 주일에는 개교 기념일 댄스 파티가 있었습니다. 이 무도회에는
상급생밖에 참석이 허락되지 않으므로, 우리는 올해 처음으로 참석하게 된
겁니다.
저는 샐리의 오빠인 지미 맥브라이드를 초대했습니다. 샐리는, 프린스턴
대학에서 오빠와 룸메이트이며 이번 여름캠프에 찾아왔던 사람을
초대했습니다. 머리털이 붉은 아주 인상이 좋은 사람이에요. 줄리아는
뉴욕에서 어떤 남성을 불렀습니다. 사교적으로는 나무랄 데 없지만, 그다지
흥미 있는 인물이 아닙니다. 치체스터 집안의 친척이라나 봐요. 이 사실은
아마도 아저씨에게는 의미심장한 것일지는 모르지만, 저에게는 의미 없는
사실입니다.
어쨋든 우리 손님들은 금요일 오후 4학년 복도에서 있는 다과 시간에 맞게
도착했다가, 만찬 시간에 맞춰 호텔로 달려갔습니다. 호텔을 초만원이어서 그
사람들은 당구대를 늘어놓고 잤다는군요. 지미 맥브라이드는 다음에 이
대학의 사교적 모임에 초대받아 올 때에는 애디론댁스의 캠프용 천막을
가져와 교정에 치겠대요.
7시 반에 남자 손님들은 학장이 주최하는 환영회와 무도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되돌아왔습니다. 우리의 축제는 그 전에 벌써 시작되고 있었어요.
우린 남자분을 위해 카드를 준비해 두었다가 댄스가 한 곡 끝날 때마다
파트너를, 저마다의 머리 글자를 표시한 밑에 남겨 두고 오기로 했어요.
그렇게 해두면 다음 파트너를 금방 찾을 수가 있는 거예요. 이를테면 지미
맥브라이드는 다음 파트너가 올 때까지 참을성 있게 M자 밑에 서 있는
겁니다. 그런데 맥브라이드 씨는 금방 자기의 자리를 떠나 A나 S자가 있는
곳에 섞여 버리곤 했어요.
매우 신경이 쓰이는 손님이었어요. 그분은 저와 세 번밖에 못 추었다면서
기분이 좋지 않더군요. 모르는 여자와 춤 추는 것이 쑥스럽다나 봐요.
다음 날 오전에는 글리 클럽(합창대)의 음악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날
합창하기 위해 특별히 작곡된 노래의 재미있는 가사는 도대체 누가 썼다고
생각하세요? 바로 저예요. 정말입니다. 아저씨가 돌봐 주신 조그만
고아아이는 지금은 상당한 인물이 되어 있다구요.
어쨌든 우리들은 이틀 동안 매우 유쾌하게 보냈어요. 남자분들도
유쾌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가운데는 천 명이나 되는 여학생과 만날 것을
생각하고 주눅이 든 사람도 있었지만, 그런 사람들도 금방 익숙해져서
예사로워졌어요. 우리가 초대한 두 프린스턴 대학생도 몹시 즐겁게
지냈습니다. 적어도 두 사람은 예의바르게 즐거웠다고 인사를 하고, 내년
봄의 댄스 파티에 우리를 초대해 주었어요. 저는 그걸 승낙했습니다. 아저씨
반대하지는 마세요. 네?
줄리아와 샐리 그리고 저는 새 드레스를 맞춰 입었어요. 어떤 것인지
아저씨는 물어 보고 싶으시죠? 줄리아 것은 크림빛 새틴에 금실로 수를 놓은
것으로 가슴에 보랏빛 난초를 달았습니다. 그것은 파리에서 부쳐 온 것으로
백만 달러짜리라나요. 정말 꿈같이 아름다웠어요. 샐리는 엷은 청색에
페르시아 자수를 놓은 것으로 붉은 머리와 잘 어울렸어요. 그건 백만
달러짜린 되지 않았지만 줄리아에 못지않게 보기 좋았어요.
저는 연한 분홍빛 비단옷으로 갈색 레이스와 장미빛 공단 장식이 달려
있었어요. 그리고 저는 지미 맥브라이드 씨가 선사해 준 진홍빛 장미꽃
다발을 들었어요(샐리가 저의 드레스색을 지미 씨에게 알렸던 거예요).
우리 셋 다 비단 양말에 공단 무도화를 신고 저마다 드레스에 조화되는
얇은 비단 스카프를 맸어요. 이런 여자의 장신구에 대해 자세하게 들으시고
아저씨는 감탄하시겠죠.
그런데 아저씨, 얇은 비단이니 베니스 레이스니 수직 레이스니 아일랜드의
크로스뜨기니 해도, 남자 분들에게는 아무런 의미 없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니, 남자들의 생활이란 정말 무미건조한 것 같습니다.
여자라는 것은 그 관심이 아기에게 있든 병균에 있든 남편에게 있든, 시에
있든 평행 사변형에 있든 정원에 있든 플라톤의 철학에 있든 또는 카드놀이에
있든, 근본적인 흥미는 언제나 옷에 있습니다.
이 자연적인 천성 때문에 온 세계가 동포가 되는 것입니다. 이건 저의 말이
아닙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서 따온 말이랍니다.
그건 그렇다치고 요즘에 제가 발견한 것을 아저씨는 듣고 싶지 않으세요?
그러나 저를 허영심이 많은 아이로 생각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네? 그럼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아름다워요.
정말이에요. 방에 삼면 거울이 있는데 그것도 모른다면 저는 정말
바보게요.
한 친구로부터
추신
이건 소설 같은 데 잘 나오는 고약한 익명의 편지입니다.
12월 20일
키다리 아저씨
조금밖에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부터 두 과목의 강의를 듣고, 트렁크와 슈트케이스를 챙겨서 4시
기차를 타야 하거든요. 보내주신 크리스마스 선물에 대해 제가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지 아저씨에게 한 마디 인사도 없이 떠날 수는 없습니다.
모피 목도리도 목걸이도 비단 스카프도 장갑도 손수건도 책도 지갑도, 모두
제가 좋아하는 것뿐입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아저씨예요. 그러나 아저씨가 이런 선물로 저의 마음을 들뜨게 만드는 것은
잘못이에요. 저 역시 평범한 인간이며 더구나 젊은 처녀거든요. 아저씨가
이렇게 속된 것으로 저의 마음을 다른 데로 옮기게 하신다면, 어떻게 한눈
팔지 않고 공부에만 열중할 수 있겠어요.
저는 이제 와서야 존 그리어 고아원에 해마다 크리스마스에는 선물을 매단
아름다운 트리를, 그리고 일요일마다 아이스크림을 선물해 주신 분이 어느
평의원님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선물의 임자는 언제나 익명이었으나, 그
방법으로 보아 저는 알 수 있어요. 아저씨는 이런 갖가지 선행에 어울리는 큰
복을 받을 것이며 항상 행운이 따를 것입니다.
안녕.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맞으시기 바랍니다.
언제나 당신의
주디 올림
추신
저도 자그마한 선물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아저씨께서 저를 만나게 된다면
저를 좋아해 주실지 모르겠어요.
1월 11일
뉴욕에서 편지를 드리려 했지만, 그 큰 도시는 사람의 혼을 빼 버리는
곳입니다.
저는 화려하고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제가
그러한 가정의 한 사람이 아니었음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저는 존 그리어 고아원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편이 훨씬 낫다고까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비록 저의 태생에 커다란 열등의식을 갖는다 하더라도, 적어도
가문을 가지고 허세를 부리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저는 이번에 처음으로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물질의 중압감에 신음한다는
말의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가정의 물질적인 분위기에 심한 중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돌아오는 급행열차를 탈 때까지 마음 편히
숨도 쉴 수 없었습니다.
그 집의 가구는 모두 조각이 되어 있고, 호화롭게 꾸며진 것이었습니다.
거기서 만남 사람들은 모두 아름답게 차려입고,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교양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아저씨, 저는 그 집에 갔다가 돌아올
때까지, 그 사람들이 진정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을 들어 본 일이
없습니다. 일찍이 사상 따위는 한 번도 그 집 문턱을 넘어온 일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펜들턴 부인은 보석과 드레스 메이커와 사교상의 약속 이외의 일은
아무것도 생각해 본 일이 없는 사람 같습니다. 그 부인은 맥브라이드
부인과는 전혀 다른 형의 어머니처럼 생각되었습니다. 만일 제가 결혼하여
가족을 가지게 된다면, 맥브라이드 집안과 똑같은 가정을 만들 작정입니다.
저는 온 세계의 모든 돈을 쌓아 놓아도, 제 아이는 펜들턴 집안 사람처럼
만들진 않겠습니다.
제가 손님이 되어 간 집안 사람들을 이렇게 악평한다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것이겠지요? 만일 그렇다면 용서해 주세요. 그리고 이건 아저씨와
저만의 비밀로 해 두세요.
저비 도련님과는 단 한 번, 그분이 다과회에 오셨을 때 뵈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분과 친하게 이야기할 기회는 없었습니다. 지난 해 여름에는 그렇게
즐겁게 지냈는데, 이번엔 매우 실망했습니다. 그분은 친척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또 그 집안 사람들도 확실히 그분을
좋아하고 있지는 않는 것 같았어요!
줄리아 어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저비스 씨는 괴짜이고 사회주의자랍니다.
머리를 길게 하거나 빨간 넥타이를 안 매는 것만도 다행이며, 펜들턴 집안은
대대로 영국 성공회의 신자였었는데, 도대체 어디서 저런 사상이 그 사람의
머릿속에 담기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분은 요트라든가
자동차라든가 폴로(말을 타고 공을 치는 경기)용의 당나귀라든가 하는 제대로
된 일에는 돈을 쓰지 않고, 온갖 엉뚱한 개혁에만 돈을 버리고 있다는군요.
하지만 그분은 자기 돈으로 초콜릿 같은 것을 사는 일도 있습니다.
크리스마스 때엔 줄리아와 저에게 초콜릿을 한 상자씩 선물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아저씨, 저는 사회주의자가 될 작정이에요. 괜찮겠죠. 사회주의는
무정부주의 따위와는 전혀 다릅니다. 폭탄을 던져서 사람을 살상하는 것
같은, 그런 방법에는 찬성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저는 태어나면서부터
사회주의자의 일원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무산계급이니까요.
그러나 아직 무슨주의자가 될지 확실히 정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일요일에
깊이 생각하고 난 다음에, 편지로 저의 주의를 발표하겠습니다.
저는 극장, 호텔, 아름다운 저택을 많이 보았습니다. 제 머릿속은
줄마노라든가 금박이라든가, 쪽나무 마루라든가, 종려나무 따위로 혼란되어
있습니다. 저는 아직도 정신이 없어 멍한 상태지만, 대학에 돌아와서 다시
공부를 시작하게 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근본부터
학생으로 되어 있는가 봐요. 이 곳의 차분하고 지성적인 분위기가 뉴욕보다
오히려 더 긴장감을 주니까요. 대학이란 곳은 매우 충족된 생활을 하게
합니다.
책이며 공부며 규칙적인 수업은 사람을 정신적으로 신선하고 활기 있게
해줍니다. 그리고 머리가 피로해졌을 때는 체조라든가 야외 경기를 하기도
하고, 게다가 서로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쾌적한 친구가 언제나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밤새도록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실컷 지껄인 다음에,
의기양양한 기분으로 잠자리에 듭니다. 그리고 조금의 틈이라도 생기면
그것을 메꿀 웃음거리를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정말 시시한 우스갯소리지만
우리는 그런 재담에 우쭐해서 크게 만족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은 크고 멋진 기쁨이 아니라 조그마한 기쁨을 발견해
나가는 일입니다. 아저씨, 저는 행복해질 수 있는 진정한 비결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현재에 사는 일이랍니다. 언제나 과거의 일을
후회하거나 미래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으로부터 최대의 기쁨을
찾는 일입니다. 그것은 꼭 농사와 같은 것입니다. 자본과 노력을 적게 들여
경작하는 조방농업과 한정된 토지에 많은 자본과 노력을 들여서 생산증대를
꾀하는 집약 농업이 있습니다. 저는 앞으로 집약적 생활을 할 생각입니다.
저는 순간순간을 즐거워하고, 더구나 자신이 즐거워하고 있는 것을 스스로
느끼고 있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생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경주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평선 저 멀리 있는 결승점에 한시바삐 도달하는 데에만
열중하여 헐떡거리며 달리고 있어서, 자신이 지나가고 있는 아름답고 고요한
전원 풍경 같은 것은 눈에 띄지도 않는 겁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자신이 너무
늙었고 피로에 지쳐 버려, 결승점에 도달하든 말든 아무래도 좋은 상태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저는 비록 유명한 작가가 안 되어도 좋으니까, 인생의 길가에 앉아서
조그마한 행복을 많이 쌓아올리기로 했습니다. 아저씨는 저같이 사상의
발전을 이룩하고 있는 여자 철학자를 보신 일이 있으세요?
변함 없는
주디
추신
오늘밤은 억수같이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강아지 두 마리와 아기고양이 한
마리가 방금 창틀에 매달렸습니다. (우리 말에 억수같이 비가 내린다는 것을
영어로는 고양이와 개의 비라고 하기 때문에 빗발이 창에 붙는 것을 강아지
두 마리, 고양이 한 마리라고 표현한 것이다)
친애하는 동지여!
만세! 저는 페이비언 사회주의자입니다. 즉 느긋하게 기회가 성숙할 때까지
기다리는 사회주의자인 것입니다. 이 일파는 내일 아침 당장 사회혁명을
일으키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갑작스러운 짓을 하면 사회의 혼란을
불러일으킵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놀라지 않을 마음가짐이 될 때까지, 먼
앞날을 향해서 꾸준히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선은 산업, 교육, 고아원 등 여러 분야의 개혁에 착수함으로써 그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2월 11일
D.L.L.께
친애하는 그대여, 이 글이 너무 짧다고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이것은
편지가 아니라, 이제 곧 시험이 끝나는 대로 편지를 올리겠다는 말을 전하는
것뿐입니다. 저는 다만 시험을 치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우수한 성적을 얻고 싶습니다. 어쨌든 저는 장학금을 받고 있는 몸이니까요.
공부에 여념이 없는
주디로부터
3월 5일
키다리 아저씨께
오늘 밤 커일러 총장님이 현대 젊은이들의 언행이 경솔하고 신중하지
못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총장님은 우리들이 옛날 사람들처럼 진지하게
노력한다든가 학문에 모든 힘을 쏟는 이상을 잃어가고 있으며, 그것이 특히
학교 당국자에 대한 우리들의 불손한 태도에서 뚜렷하게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이제 손윗 사람들에 대한 당연한 경의를
표하지도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매우 진지한 기분이 되어 교회를 나왔습니다. 아저씨, 제가
아저씨에게 너무 버릇없이 굴지는 않았을까요? 아저씨에게 좀더 정중하고
예의 바르게 대해야 할까요? 그렇죠?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새로
시작해 보겠습니다.
스미스 씨 귀하
귀하께서는 제가 제 1학기의 시험을 무사히 마치고, 지금은 새 학기의
공부를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들으시고 기뻐해 주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이번에 화학을 그만두고- 정성 분석의 과정을 마쳤으므로- 이번 학기부터
생물학에 관한 연구를 시작할 참입니다. 이 학과를 선택함에 있어서 저는
조금 망설였습니다. 왜냐하면 낚시질의 미끼로 쓰는 지렁이나 개구리 같은
것을 해부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지난 주 교회에서 남프랑스에 있는 로마 유적에 대해 흥미있고 귀중한
강연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 때까지 이 문제에 관해서 이만큼 명확한 해설을
들은 일이 없었습니다.
우리들은 영문학 공부에 관련하여 워즈워스의 '틴틴 사원'을 읽고
있었습니다. 정말 우아한 작품이군요! 셀리, 바이런, 키이츠, 워즈워스와
같은 시인의 작품이 증명하고 있는 19세기 초기의 낭만주의 운동은 그 이전의
고전 시대보다 저의 마음을 끌어당깁니다.
시에 대한 말이 났으니까 여쭈어 보겠습니다만, 귀하께서는 테니슨의
'록슬리 홀'이라고 하는 아름다운 단시를 읽어 보신 일이 있으신지요?
요즘 저는 아주 규칙적으로 체육관에 나가고 있습니다. 학생 감사 제도가
생기고부터는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매우 좋지 못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체육관에는 작년도 졸업생이 기증한 대리석과 시멘트로 만든, 아주
아름다운 수영장이 완성되었습니다. 저와 한 방을 쓰는 맥브라이드 양이
작아져서 못 입게 된 수영복을 저에게 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수영 연습을 시작할 생각입니다.
어젯밤은 식사 뒤에 있는 맛있는 핑크빛 아이스크림이 나왔습니다. 이
곳에서는 음식물의 물감에는 식물성만이 쓰여지고 있습니다. 아닐린 염료의
사용은 미학상이나 위생상의 문제로 모두 크게 반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의 날씨는 아주 이상적입니다. 맑게 갠 날과 흐린 날 사이에 적당한
눈보라가 섞입니다. 저와 저의 기숙사 친구들은 교실과 기숙사 사이를 거니는
것을 즐기고 있으며, 특히 기숙사로 돌아올 때의 산책은 매우 즐겁습니다.
귀하가 언제나 건승하시기를 빌면서.
당신의 성실한
저루샤 애벗
4월 24일
아저씨
봄이 또 왔습니다! 이 교정의 아름다움! 보여드리고 싶어요.
지난 주 금요일에 저비 도련님이 또 들렸습니다. 그러나 정말 기회가 나쁜
때 오셨어요. 마침 샐리와 줄이아와 제가 기차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뛰어나가던 참이었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어디로 가려고 했었다고
생각하시죠? 프린스턴 대학이에요. 이래봬도 볼 게임(댄스 파티를 하기
전이나 뒤에 야구라든가 또는 농구 따위를 구경하는 수가 있다)과 무도회에
갔었단 말입니다! 저는 아저씨에게 참석해도 좋으냐고 여쭙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아저씨의 비서가 틀림없이 또 안 된다고 써 보낼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식으로 절차를 밟고, 했던 일이에요.
우리는 학교로부터 휴가를 허락받았고 맥브라이드 부인이 보호자로서 함께
가주었습니다. 매우 즐거웠습니다. 그러나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하겠습니다.
너무 많은 일들이 있어서 복잡하니까요.
토요일
해 뜨기 전에 기상! 야간 당번이 우리들- 모두 6명- 을 깨워 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냄비(풍로가 달린)로 커피를 끓였습니다. 이렇게 찌꺼기가
많은 커피란 구경한 일도 없습니다! 그리고 나서 해돋이를 보기 위하여
2마일쯤 걸어서 외나무 언덕 꼭대기까지 올라갔습니다! 자칫했으면 해님한테
질뻔했어요. 그런데 아저씨는 설마 우리가 배가 고프기도 전에 아침 식당에
돌아왔으리라곤 생각하지 않겠지요!
어머나, 아저씨, 오늘 편지는 참으로 감동적이군요. 마치 감탄사를 마구
뿌린 것 같은 편지가 되었네요.
저는 새싹이 돋아난 나무와 운동장에 새로이 만들어진 석탄찌꺼기를 깐
도로와 폐렴에 걸린 캐서린 프렌티스와, 프렉시의 앙고라 아기 고양이가 집을
뛰쳐나와서 식모가 알려 줄 때까지 2주일 동안이나 퍼거슨 기숙사에 기숙했던
일과, 제가 새로 맞춘 세 벌의 드레스(흰 빛과 핑크 빛과 파란 물방울 무늬의
것)와 그것이 맞춰 만든 모자 등에 관한 이야기들을 많이 쓸 작정이었으나,
너무나 졸려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언제나 이런 식의 변명만 늘어놓고 있군요. 그렇지만 여자대학이란 정말
바쁜 곳이어서 하루가 끝날 무렵이면 지쳐 버린답니다! 특히 하루의 일과가
새벽부터 시작된 날에는!
사랑에 넘치는
쥬디로부터
그림: 털복숭이 고양이그림 해설(이것이 프렉시의 아기 고양이입니다.
그림을 보시면 앙고라 고양이란 것을 아시겠지요.)
5월 15일
키다리 아저씨
차에 탔을 때 똑바로 앞만 본 채, 다른 사람들은 거들떠 보지도 않는 것은
예의 바른 일인지요?
오늘 아주 아름다운 벨벳 드레스를 입은 대단히 아름다운 부인이 전차를
타고는, 15분 동안이나 전혀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고, 바지 멜빵의 광고
포스터만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 가운데서 마치 자기만이 뛰어난 인물이기라도 한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는 그런 태도는 예의바른 일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군요.
어쨌든 이런 사람들은 매우 손해를 보고 있답니다. 그 부인이 쓸데없는
광고만 쳐다보고 있는 동안, 저는 차 안에 넘치고 있는 흥미로운 사람들을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앞의 그림은 처음으로 공개하는 것이에요.
얼핏 보기엔 실에 매달린 거미같이 보이지만 천만이에요. 이것은 제가
체육관 수영장에서 수영 연습중인 그림입니다.
수영 선생님은 제 벨트의 뒷고리에 줄을 매고서, 그것을 천장의 도르래에
달아맵니다. 이것은 자기 교사의 성실성을 완전히 신뢰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매우 그럴 듯한 방법입니다. 그러나 저는 계속 선생님이 줄을 느슨하게
풀지나 않을까 겁이 나서, 한쪽 눈으로는 선생님을 보며 한쪽 눈으로 헤엄을
친답니다. 이런 식으로 주의를 분산시키니, 수영을 제대로 익힐 수가
없습니다.
요즘은 날씨가 몹시 변덕스럽군요. 이 편지를 쓰기 시작했을 때는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지금은 햇빛이 비치기 시작했습니다. 샐리와 저는 지금부터
테니스를 치러 갈려고 해요. 그러면 체조 시간에 나가지 않아도 됩니다.
일주일 뒤
이 편지는 벌써 끝냈어야 했는데, 아직 끝내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불규칙하여도 아저씨는 언짢아하시지 않겠지요. 저는 아저씨에게 편지 쓰는
것이 정말 즐겁습니다.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노라면 나에게도 가족이 있는,
훌륭한 신분이 될 듯한 기분에 젖을 수 있으니까요.
아저씨에게 좋은 일을 알려 드릴까요? 정말은 제가 편지를 쓰는 것은
아저씨뿐이 아니에요. 그밖에도 두 사람이 있답니다. 올 겨울에 저는 저비
도련님으로부터 긴, 즐거운 편지를 몇 통이나 받았습니다. 줄리아에게 필적이
알려지지 않게 겉은 모두 타자로 쳐 있습니다. 이 사실에는 아저씨도 무척
놀라시겠죠? 그리고 거의 매주일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노란 편지지에 서투른
글씨로 갈겨쓴 편지가 프린스턴에서 옵니다. 그러한 편지에 대해 저는
사무적으로 꼬박꼬박 답장을 쓰고 있습니다.
아저씨, 저의 이 기분은 아실 수 있겠지요?
이처럼 저는 세상 다른 아가씨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저도
이렇게 남자로부터 편지를 받고 있는 걸요.
제가 4학년 연극클럽 회원으로 뽑혔다는 것을 말씀드렸는지 모르겠어요?
클럽은 우수한 사람들로 짜여져 있어, 전교 1천명 가운데 불과 75명만이
회원에 선발되는 것입니다. 아저씨, 항상 사회주의자라고 생각해왔던 제가 이
회원이 되어야 할까요?
지금 제가 사회학에서 어떤 일에 열중하고 있는지 상상하실 수 있으세요?
맞춰 보세요.'부양자 없는 아동의 보호'에 대해서 논문을 쓰고 있답니다.
교수님들이 문제들 여러 개 쓴 종이를 섞어서 아무렇게나 나눠 주셨는데도,
이런 문제가 저에게 돌아오다니, 참으로 재미있는 일이지요.
저녁 식사 종이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우체통 앞을 지날 때 이 편지를
넣기로 하겠어요.
사랑이 가득 찬
J.
그림1: 실에 매달린 거미그림(선으로 단순화해서 그림)
그림2: 쥬디의 얼굴모습(머리를 길게 따고 무표정한 모습)
6월 4일
아저씨
너무너무 바쁘군요. 졸업식은 열흘 후에 있습니다. 시험은 내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공부해야 할 일도 산더미 같고, 짐을 꾸릴 일도 산더미 같은데, 창
밖은 너무 아름다워, 방안에 틀어박혀 있는 것이 고통스러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괜찮아요. 곧 휴가니까요. 줄리아는 이번 여름에는 외국 여행을
한답니다. 이번으로 네 번째의 외국 여행입니다. 아저씨, 부가 공평하게
나누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은 의심할 나위가 없군요. 샐리는 전과 같이
애디론댁스 산장에 갑니다.
그런데 저는 어디로 갈 거라고 생각하시죠? 아저씨는 아마 세 가지 상상을
하실 거예요. 록 윌로 농장? 아닙니다. 샐리와 함께 애디론댁스에? 아닙니다.
저는 거기엔 두번 다시 가려고 생각지 않습니다(지난 해에 가려고 하다가
그렇게 실망을 맛보았으니까). 그 밖에 짐작이 가는 데는 없나요. 아저씨는
그다지 상상력이 풍부하지 않은가 봐요.
만일 아저씨가 여러 가지 잔소리를 하시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신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비서님에게 저의 결심은 이미 굳어져 있다고 미리
통고해 두었습니다.
저는 찰스 패터슨 부인이라는 분과 함께 바닷가에서 한여름을 보내기로
했어요. 그래서 이번 가을에 대학에 입학하는(미국 대학은 새 학년이 가을에
시작된다.) 따님의 수험공부를 돌봐 주기로 했죠. 그 부인은 맥브라이드
부인의 소개로 알게 된 분인데, 정말 인상이 좋은 분입니다. 작은 따님에게도
국어와 라틴어를 가르쳐 주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얼마쯤은 제 자신의 시간도 있을 겁니다. 그리고는 한 달에
50달러를 받게 되어 있어요. 이건 엄청나게 많은 돈이라고 아저씨도
놀라시겠어요? 그렇지만 부인이 먼저 그만큼 주겠다고 제안해 왔던 것입니다.
제 쪽에서 25달러 이상을 요구한다는 건 생각만 해도 얼굴이 붉어집니다.
저는 9월 1일로 매그놀리아(패터슨 부인의 별장이 있는 곳)를 떠나 남은
3주일간은 록 윌로에서 지내게 될 것입니다. 저는 셈플 씨 내외분과 그 곳의
친숙한 동물들이 보고 싶어 못견디겠습니다. 아저씨는 저의 이 계획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는 이처럼 점점 혼자 모든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저씨가 저를 그렇게 만들어 주신 겁니다. 저는 이제 거의 혼자 독립해서
살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프린스턴의 졸업식과 우리들의 시험이 우연히 겹치게 되었습니다. 이건 큰
타격입니다. 샐리와 저는 어떻게 해서든 시간에 닿게 달려가고 싶지만,
도저히 불가능할 거예요.
아저씨, 안녕! 부디 멋진 여름 휴가를 보내시기 바랍니다(정말은 아저씨
쪽에서 저에게 이렇게 편지를 주셔야 할 텐데요). 저는 아저씨가 여름에는
무엇을 하시는지 어떤 일을 하면서 즐기시는지 전혀 짐작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아저씨의 환경을 마음 속에 그려볼 수가 없습니다. 아저씨는 골프를
하시나요? 아니면 사냥을 하세요? 승마는? 그렇지 않으면 가만히 햇볕을
쬐면서 명상에 잠기는 것을 좋아하시는지요?
무엇을 하시든 간에 즐겁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디를 잊지
마시기를!
6월 10일
아저씨
제가 이렇게 거북스러운 편지를 쓰는 것은 처음입니다. 그러나 저는 자신이
취해야 할 길을 확고하게 결정해 버렸기 때문에, 이제 와서 그 결심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이번 여름, 저를 유럽에 보내주시겠다고 하는 친절하신
제안은 정말 기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얼마 동안 저는 그 뜻에 취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가라앉혀서 조용히 생각해 보니, 이것을 제가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깨달았습니다. 대학에서 공부하기 위해 보내주시는 돈도
사양했는데, 여행을 위해 돈을 받다니 그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
아니겠어요? 저에게 너무 여러가지 사치를 배우게 해주시는 일은 부디
그만두시기 바랍니다.
인간이란 것은 가져 본 경험이 없는 것은 가지고 있지 않아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낼 수 있는 법입니다. 그러나 한 번 그것을 당연한 권리로서 자신의
것이라고 마음먹기 시작하면, 그것 없이 산다는 것은 몹시 괴로운 일입니다.
샐리나 줄리아와 함께 지낸다는 것은 저의 금욕주의를 위해서는 매우 큰
장애가 됩니다. 그 두 사람은 갓난아이 때부터, 원하는 건 무엇이든 가지는
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행복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이 자기에게서 빚을 지고 있으므로, 무엇이든지 바라는 것은 줄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일지도 모르지요. 어쨌든
세상은 그들로부터 빚을 졌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무엇이든지
꼬박꼬박 그들에게 치르고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제게 관한 한, 세상은
저에게 아무런 빚이 없습니다. 그러한 사실을 저는 처음으로 깨닫고
있었습니다. 저에게는 신용대부를 받을 권리가 없습니다. 왜냐 하면 언젠가
세상이 저의 요구를 거절할 때가 올 테니까요.
말을 하다가 보니 은유의 바다속에서 버둥거리는 꼴이 되어 버렸습니다만,
아저씨는 제가 하려고 하는 말의 참뜻을 이해해 주시겠지요. 어쨌든 저로서는
이번 여름은, 남을 가르쳐서 독립된 생활을 시작하는 게 가장 올바른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4일뒤
매그놀리아에서
제가 여기까지 편지를 끝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세요?
하녀가 저비 도련님의 명함을 가지고 왔던 거예요.
그분도 이번 여름은 외국 여행을 하신답니다. 줄리아와 그 가족들과 함께
가는 게 아니고 혼자 가신다는군요. 그래서 아저씨가 젊은 아저씨들의
감독으로서 유럽에 가는 어떤 부인과 함께, 저도 가도록 말씀하신 일을
이야기했어요.
그분은 아저씨에 대한 일을 알고 계시더군요. 즉 그분은 저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돌아가셨다는 사실, 어떤 친절한 신사가 저를 대학에 보내주고
있다는 일, 같은 것까지 잘 알고 있는 거예요. 그렇지만 저는 존 그리어
고아원이며, 그밖의 일을 그분에게 털어놓을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분은
아저씨가 정말로 옛날부터 우리 집안과는 친한 사이였던 분이며, 그래서 저의
후견인이 되어 주시고 있는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저씨와
만난 일조차 없다고 말할 수는 없었어요. 정말 이상하게 생각하실 테니까요.
어쨌든 그분은 끈질기게 저에게 유럽 여행을 권했습니다. 그분은 이 여행은
저의 교육의 일부로서 필요한 일이기 때문에, 거절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그 무렵 그분도 파리에 가게
되므로, 때때로 보호자의 눈을 피해, 파리의 멋진 레스토랑에서 함께
식사라도 하면 어떠냐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아저씨, 그 말에는 정말 마음이 끌렸습니다. 저는 잘못 생각했으면 유혹에
빠질 뻔했어요. 만일 그분이 그렇게 독재적으로 나오지만 않았던들 저는
틀림없이 지고 말았을 거예요. 저는 순순히 설득을 받으면 꺾여 버리지만,
강제적으로 나오면 반항해 버린답니다. 그분은 저를 바보며 얼간이고 분별
없고 괴짜며 고집쟁이고(이건 그분이 한 욕설의 겨우 일부분이며 나머지는
잊어 버렸습니다) 무엇이 자기를 위하는 일인지 자신이 모르니까, 나이먹은
손윗 사람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고도 말씀하셨습니다. 둘이는 하마터면
싸움을 할 뻔 했습니다. 정말 싸움을 했던 건지도 모르지요!
어쨌든 저는 더이상 끌지 않고 척척 짐을 꾸리고는 이 곳에 와 버렸습니다.
저는 아저씨에게 편지를 쓰기 전에, 다시 돌아갈 수 없도록 이 근처의
다리들이 불타 버리기를 바랐어요. 유럽으로 건너가는 다리는 이제 완전히
불타 버리고 없어졌습니다. 저는 지금 클리프 탑(패터슨 부인의 별장 이름)에
있습니다. 짐도 모두 풀어 버렸고, 플로렌스(작은아가씨)를 상대로 벌써
라틴어의 제1어미 변화와 격투중입니다. 확실히 이건 격투감입니다!
어쨌든 이 아가씨는 말할 수 없을 만큼 응석받이여서, 우선 공부하는
자세부터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아가씨는 이때까지 아이스크림,
소다수 먹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란 아무것도 생각해 본 일이 없었던 것
같아요.
우리는 벼랑 위의 조용한 한쪽 구석을 교실로 쓰고 있습니다. 패터슨
부인은 아가씨들을 될수 있는 대로, 옥외에 두도록 해주었으면 하고
바라십니다. 그래서 푸른 바다와 그 위를 달리는 배들을 눈앞에 두고는 우선
제쪽에서 마음이 산란해지지 않도록 자제하기에 꽤 힘이 듭니다! 제가 그
배의 하나를 타고 외국을 향해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따위의 일을 생각해
버리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저는 라틴어 문법이외의 일에는 단호히 마음을
쓰지 않기로 하고 있습니다.
전치사 a 또는 ab,absque,coram,cum,de,e
또는 ex,prae,pro,sine,tenus,in,subter,sub
그리고 super는 탈격을 지배한다.
아저씨, 저는 이처럼 단호히 유혹으로부터 눈을 돌려, 일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부디 기분 언짢게 생각지 말아 주세요. 그리고 제가 아저씨 친절에
감사하고 있지 않다고는 절대로 생각지 말아 주세요. 저는 언제나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정말 언제나!
아저씨에 대한 유일한 은혜의 보답은 제가 참으로 쓸모 있는 시민(여자도
시민이 될 수 있었던가요? 그렇지 않은 것 같은 생각도 듭니다만)이 되는
일입니다. 어쨌든 크게 쓸모 있는 인간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아저씨가 저를
볼때마다, "저와 같은 유용한 인물을 사회에 내보낸 것은 나다."라고
말씀하실수가 있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멋있지 않겠어요? 그러나 저는 아저씨에게 착각을 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언제나 자신이 조금도 훌륭한 데가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자신의 앞날에 대한 여러 가지 계획을 세우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저는 자꾸 흔히 있는 여는 사람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평범한 인간이 되어 버릴것만 같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장의사나
하는 사람 따위와 결혼하여 남편이 하는 일에 무언가 좋은 착상이라도 해주는
아내가 되는 게 고작일지도 모릅니다.
주디로부터
8월 19일
키다리 아저씨께
제 방 창문에서 보이는 풍경- 물과 바위뿐이니까 해경이라고 해야겠지요-
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여름이 자꾸 지나가고 있습니다. 저는 오전중에는 라틴어와 국어와 기하와,
두 사람의 머리 나쁜 아가씨와 함께 지내고 있습니다. 마리온이 과연 대학에
들어갈 수 있을지, 또 들어갔다 해도 무사히 다닐 수 있을는지 불안한 생각이
듭니다. 더구나 플로렌스는 정말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이렇게도 예쁠까요! 예쁘고 아름답기만 하면, 머리가 나쁜
것쯤은 아무것도 아닌게 아닐까요? 그렇지만 이런 사람들의 대화는 그들의
남편들을 얼마나 지루하게 만들까하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행히
똑같은 만큼의 모자라는 남편을 만나면 되겠지만(그런 일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는 바보 같은 남자가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저는 이번
여름에 그런 남자를 많이 만났습니다.
오후에는 벼랑을 산책하기도 하고, 조류가 순조로우면 헤엄을 치기도
합니다. 바닷물에서는 아주 쉽게 헤엄칠 수 있습니다. 아저씨, 보시다시피
저는 교육을 유용하게 써먹고 있습니다.
파리에 있는 저비 도련님으로부터 편지가 왔습니다. 아주 짧고 멋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의 충고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도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분은 혹시 때맞춰 귀국할 수 있으면, 학교가
시작되기 전의 며칠을 록 윌로에서 저를 만나 주겠으며, 그리고 제가 매우
착하고 상냥하고 얌전하면, 다시 그 전처럼 잘 봐주겠다는 것으로 제게는
생각되어요.
그리고 샐리에게서도 편지가 왔습니다. 9월에 산장으로 2주일동안 오지
않겠느냐고 합니다. 제가 아저씨의 허가를 얻지 않으면 안 될까요? 제가 아직
자기 마음대로 행동할 나이가 되어 있지 않을까요? 아니예요. 되어 있고
말고요. 전 이제 4학년인걸요! 한 여름동안 일했는데, 조금은 건강에 좋도록
기분을 바꾸어도 괜찮을 거예요.
저는 애디론댁스가 보고 싶어 못 견디겠으며, 샐리도 몹시 만나고
싶습니다. 그리고 샐리의 오빠도 만나고 싶습니다. 카누 젓는 법을 가르쳐
주신대요. 그리고 이것은 제가 산에 가고 싶다는 가장 큰 동기입니다. 매우
비겁한 일이지만, 저는 저비 도련님이 록 윌로에 도착했을때, 제가 없다는
걸로 한 대 먹여 주고 싶은 거예요.
저는 그분에게 마음대로 저를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꼭 알려주고 싶은
겁니다. 아저씨 말고는 아무도 저에게 명령 따위를 할 수 없습니다. 아저씨
말에도 언제나 복종하는 것은 아닌데 말이에요! 저는 지금 숲에 나갈
참입니다.
주디
9월 6일
맥브라이드 캠프에서
아저씨께
(고맙게도)
아저씨의 편지는 늦었습니다. 아저씨의 명령에 따르도록 하시려면 비서에게
그 명령을 2주일 안에 전달하도록 말씀하시지 않으면 안 됩니다. 보시다시피
저는 이 곳에 온 지 벌써 5일이나 되었습니다.
숲은 멋지고, 산장도 그렇고, 날씨도 그렇고, 맥브라이드 집안 사람들도
그렇고, 모두가 다 멋집니다. 저는 지금 몹시 행복합니다!
보세요, 지미가 카누를 타러 가자고 부르고 있습니다. 안녕. 명령에
복종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러나 아저씨는 왜 제가 조금쯤 기분 전환하려는
것에 대해 그렇게 정색하고 반대하시지요? 한 여름 내내 일했는데 2주일쯤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저씨는 꼭 그 심술궂은 개(이솝이야기에서 나오는
말, 자기가 쓸수 없는 물건을 남에게도 이용 못하게 하는 사람을 말함)
같으시군요.
그렇지만 저는 역시 아저씨가 가장 좋아요. 비록 여러가지 결점이 있다고
해도.
주디
10월 3일
키다리아저씨
학교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오늘부터 4학년생- 그리고 교지의 편집장이
되었습니다. 이렇게도 세상살이에 능숙한 인물이 4년 전에는 존 그리어
고아원생이었다니, 믿을 수 없군요. 미국은 참으로 사물의 진보가 빠른
곳입니다!
아저씨,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비 도련님이 록 윌로에 보낸 편지가
우송되어 왔는데, '이번 가을에는 유감스럽게도 농장에는 갈 수 없다, 사실은
친구로부터 요트에 초대받았다, 당신은 전원의 여름을 즐기고 있도록
빕니다'라고요!
그분은 제가 맥브라이드 집안의 손님이 되어 있는 것은 뻔히 알고
계셨는데! 왜냐하면 줄리아가 그분에게 알려 주었으니까요. 모름지기
남성들은 모략을 꾸미는 일 따위는 여성에게 맡겨 두어야 해요. 남자들은
어차피 그런 재주를 부릴 줄은 모르거든요.
줄라아는 보기만 해도 황홀해지는 새 드레스를 가방에 가득 채우고
돌아왔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무지개빛의 리베르떼(프랑스의 으뜸가는 견직물
전문점) 비단 야회복은 천사들의 의상으로 어울릴 정도입니다. 저는 올해의
제 드레스의 아름다움은 전무후무(이런 말이 있었던가요?)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품삯이 싼 양장점에 가서 패터슨 부인의 옷모양과 똑같이 만든
것입니다. 진짜와 같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줄리아가 가방을 열 때까지는
크게 만족하고 있었는데, 눈앞에 화려한 드레스를 갖다대는데는 어쩔 수
없죠!
아저씨는 자기가 여자가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아마도
아저씨는 옷 같은 것으로 야단법석을 떨다니 너무도 바보스러운 짓이라고
생각하고 계시겠지요? 그야 물론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남자쪽에도
잘못이 있습니다.
아저씨는 불필요한 장식을 멸시해야 하는 것으로 단정하고, 실용적인
의복을 여성에게 권장하던 훌륭한 대학 교수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신 일이
있으세요? 그 학자의 부인은 온순한 여성이어서 그 개량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 그녀의 남편이 어떻게 되었다고 생각하시죠?
코러스 걸(합창단의 여자 단원)과 함께 도망치고 말았대요.
당신의
주디로부터
추신
이곳의 복도 청소를 맡고 있는 하녀는 푸른빛 바둑 무늬의 앞치마를 입고
있습니다. 저는 갈색 앞치마를 사주고는 그것을 호수 밑에 집어넣어 버릴
작정입니다. 저는 그것을 볼 때마다 고아원 시절이 생각나서 몸이
오싹해집니다.
11월 17일
키다리아저씨께
저의 문학 과정에 하나의 좌절을 가져오게 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일을 아저씨에게 말씀드려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저에게 위로를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부디 무언의 위로를 보내 주세요. 그러나 다음 편지에서
이런 일을 또 끄집어 내어 묵은 상처가 다시 아파지는 일은 하지 않도록
약속해 주세요.
저는 지난 해 겨울 동안 매일 밤, 그리고 이번 여름에도 계속 머리가 나쁜
두 학생에게 라틴어를 가르치고 있을 때 이외엔 장편소설을 써 왔습니다.
그것을 마침 개학이 되기 바로 전에 다 끝마쳤으므로, 어떤 출판사에 보냈던
것입니다. 두 달 동안이나 원고가 되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저는 채택해
주는 것으로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제 아침 속달 소포로(30센트 선불로) 출판사 편집장으로부터
편지와 함께 원고가 되돌아온 것입니다. 그것은 아버지 같은 매우 친절한
편지였으나 몹시 노골적인 것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주소로 미루어 보아,
당신은 아직 재학중인 학생인것 같아서 충고드리지만, 지금은 자신의 모든
정력을 학업에 바치고, 소설을 쓰는 일은 졸업한 뒤가 좋으리라 생각한다고
씌어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원고 담당자의 비평이 덧붙여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었습니다.
-줄거리는 매우 현실 부정적. 인물은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음. 대화는
부자연스러움. 유머는 다분히 있으나 약간 악취미. 앞으로도 꾸준히 써
나가도록 충고함. 그러면 뒷날 참된 작품을 낳게 될지도 모름-
이런 건 전혀 아무런 위안도 안 되는군요. 아저씨, 저는 이래봬도 진심으로
아메리카 문학에 이바지하고 있는 기분이었으니까요. 졸업하기 전에 훌륭한
소설을 써서 아저씨를 깜짝 놀라게 할 계획이었는데, 저는 이 자료를 지난 해
크리스마스, 줄리아의 집에 갔을 때 모았습니다. 그래서 출판사 편집장이 한
말이 옳을지도 모릅니다. 큰 도시의 풍속습관을 관찰하는데 2주일 동안으로는
충분하다고 할 수 없으니까요.
어제 오후, 저는 그 원고를 가지고 밖에 나가 거닐다가, 가스 공급소 안에
들어가서 난로를 빌려 달라고 기사에게 부탁했습니다. 기사가 직접 난로문을
열어 주었으므로 저는 제 손으로 그 원고를 불길 속에 던졌습니다. 마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화장이라도 하는 듯한 기분이었어요!
어젯밤은 완전히 비참한 기분으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나는 이제 변변한
사람이 될 수 없다. 아저씨는 돈을 헛되이 버리신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그런데 아저씨, 어찌 된 일일까요? 오늘 아침 깨어나 보니 제
머릿속에는 멋진 줄거리가 떠오르고 있는게 아닙니까? 그래서 오늘은 온종일
등장인물에 대해서 여러가지로 구상하며 매우 즐겁게 보냈습니다.
저를 염세주의자라고 공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요! 저는 비록 남편과
열 두명의 자식을 하루아침에 지진으로 잃는다 해도, 다음 날 아침에는
빙그레 웃으며 힘차게 일어나서, 또 다른 남편과 아이들을 찾기 시작할
거예요!
사랑하는
주디
12월 14일
키다리 아저씨께
어젯밤에 참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제가 어떤 서점에 갔답니다. 그러자
점원이 저에게 '주디 애벗의 생애와 편지'라는 신간 서적을 가져다 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지금 그것을 뚜렷이 눈으로 기억할 수 있습니다. 빨간
천으로 된 겉표지에는 존 그리어 고아원의 그림이 있고, 첫 머리에 실려 있는
제 사진 아래에는 '당신의 진실한 주디 애벗'이라고 서명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책장을 넘겨나가다가 마지막에 나와 있는 저의 묘지명을 읽으려 할
때 그만 잠이 깨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어요. 당장 제가 누구와
결혼하여 언제 죽는지 알 수 있었을텐데.
만일 누군가가, 무엇이든지 알고 있는 작가가 사실 그대로 쓴 자신의
일생을 실제로 읽을 수 있으면, 정말 재미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그것도 다음과 같은 조건이 아니면 읽을 수 없습니다. 읽은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모두 자신이 지금부터 하는 일과 어떤 결과가
된다는 것을 미리 분명히 알고 살아가는 겁니다. 그리고 또 자기가 언제
죽는가 정확한 시간까지 알고서 일생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몇 사람이나 그 책을 읽을 용기를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하세요? 또 희망이 없고 놀라는 일도 없이 한평생을 보낸다는 대가를
치른다 하더라도, 그 책을 보고 싶어하는 호기심을 억누를 수 있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인생은 가장 좋은 것이라도 꽤 단조로운 것입니다. 사람은 먹고, 자고,
그것을 몇 번이나 되풀이하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그 식사와 식사 시간
사이에 무엇 하나 뜻밖의 일이 생겨나지 않는다면, 인생은 그 얼마나 싱거운
것이 되겠는지, 그 지루한 권태감을 상상해 보세요. 이걸 어째, 잉크가
종이에 떨어졌군요. 그렇지만 3페이지에 걸친 건데 다시 쓸 수도 없네요.
저는 이번 학년에도 또 생물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매우 흥미로운
과학입니다. 지금은 소화 조직을 공부중입니다. 현미경 아래에서 보는 고양이
십이지장의 횡단면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아저씨에게 보여 드리고 싶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철학에도 들어갔습니다. 재미는 있습니다만 허무한
것입니다. 저는 연구중의 재료를 하나하나 핀으로 꽂아 둘 수 있는 생물학이
더 좋습니다. 어머 또 잉크가! 또 한 방울! 이 만년필은 언제나 울고 있어요.
부디 이 펜의 눈물을 용서해 주세요.
아저씨는 자유의지라는 것에 대하여 믿음을 가지고 계십니까? 저는 믿고
있습니다. 솔직하게. 저는 인간의 모든 행동은 여러 가지 원인이 모여서
나타나는 필연적 결과이며, 절대로 불가피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철학자들에게는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무슨 짓을 하든 누구도 나무랄 수
없다니, 그렇게 엄청나게 부도덕한 말을, 저는 들어 본 일이 없습니다. 만일
숙명론을 믿는다고 하면, 자연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주여, 주의 뜻과 같이
하옵소서'하고는, 죽어서 넘어질 때까지 가만히 앉아만 있겠지요.
저는 절대로 자신의 자유의지와, 무엇이든지 해낼 수 있는 자신의 힘을
믿고 있습니다. 이것이 산이라도 움직일 수 있는 신앙입니다.
아저씨, 저는 대작가가 될 테니 보고 계세요! 저는 새로운 소설은 4장까지
끝맺었습니다. 벌써 나머지 5장의 초안이 작성되어 있습니다.
이건 정말 난해한 편지가 되어 버렸군요. 아저씨, 머리가 아프시지
않으셨어요? 이쯤에서 끝내고 지금부터 설탕과자를 만들겠습니다. 아저씨에게
하나도 보낼 수 없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우린 진짜 크림과 버터볼 3개를
넣고 만들기 때문에, 특별 고급과자가 될 것입니다.
애정을 바치며
주디로부터
추신
체조반에서 환상 댄스를 배우고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진짜 발레단처럼
추고 있는지, 우리의 발레하는 그림에서 알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맨 끝
쪽에서 우아하게 한 쪽 발로 돌고 있는게 저예요.
그림:5명의 소녀와 발레동작을 취하고 있다.(선으로만 이루어진 단순한
그림)
12월 26일
제가 가장 좋아하는 아저씨께
아저씨는 상식 같은 건 가지고 있지도 않으시는군요? 한 여학생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열 일곱 가지씩이나 준다는 게 말도 안 되는 일이란 걸
모르시나요. 제가 사회주의자라는 것을 부디 기억해 주세요. 아저씨는 저를
금권주의자로 만드실 작정인가요? 만일 아저씨와 싸움이라도 했을 경우,
이렇게 많은 선물은 처치 곤란이겠군요! 아저씨한테서 받은 선물을 돌려
드리는 데는 가구 운반차를 부르지 않으면 안 되겠으니까요.
아저씨에게 보내 드린 넥타이가 몹시 구겨져서 죄송합니다. 그것은 제가
손으로 짠 것입니다(보시면 금방 아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아무쪼록
외투의 단추를 모두 단단히 채우는 추운 날에만 그것을 매어 주세요. 아저씨,
정말 고마웠습니다.
아저씨는 세상에서 가장 친절하신 분입니다. 또한 세상에서 가장
바보이기도 해요!
주디
새해가 아저씨에게 행복을 가져오도록 맥브라이드 산장에서 따온 네 잎
클로버를 함께 부칩니다.
그림:마부가 마차에 키다리아저씨라고 씌어있는 선물상자꾸러미들을 싣고
있다
1월 9일
아저씨는 자신의 영원한 구원을 보장해 줄 어떤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시지 않으세요?
여기 말할 수 없이 가난한 한 가족이 있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와 네
아이가 있으나, 위의 큰 남자아이 둘은 사회에 나가서 성공하겠다고 집을
나가 버린 뒤로 소식이 없습니다. 아버지는 유리공장에서 일하고 있습니다만,
폐병에 걸렸습니다.
몹시 건강에 해로운 직장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입원중입니다.
따라서 저금은 모두 다 써 버리고, 집안의 생활은 스물 네살 된 큰딸에게
의존하고 있답니다. 그 딸은 낮에는 하루 1달러 50센트로(일이 있을 때에는)
삯바느질을 하고, 밤에는 꽃병 깔개에 자수를 놓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몸도
그다지 건강하지 않고, 종교에 대한 신앙심만 있었지, 생활엔 아무 도움도 안
되는 사람입니다. 딸이 과로와 책임감과 걱정으로 지쳐 있는데도, 그녀의
어머니는 마치 인종의 화상처럼 두손을 끼고 가만히 앉아만 있을 뿐 아무일도
하지 않는 거예요.
그 딸은 이 겨울을 어떻게 견뎌 내야 할까 하는 생각에 잠겨 있으나 속수
무책입니다. 저도 막연하기만 합니다. 백 달러만 있으면 학교에 보낼수도
있으며, 게다가 일이 없을 때에도 며칠 동안은 지탱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기게
됩니다.
아저씨는 제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부자이십니다. 아저씨, 그 백
달러를 주실 수는 없을까요? 그 처녀는 저 같은 사람보다도 훨씬 더 구원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이기 때문에 저는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저는 그녀의 어머니 같은 사람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습니다. 그
따위 어리석은 멍청이는!
그런 것은 절대로 진실이 아니란 걸 알고 있으면서도, 하늘을 쳐다보고
"이것도 또한 모두 하느님의 뜻이옵나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그런 사람을
보면, 저는 울화통이 터져서 견딜 수가 없답니다. 복종이라고 하는 건지,
인종이라고 하는 건지, 또는 달리 무어라고 하는 건지 모르지만, 그런 건
무기력한 게으름에 지나지 않습니다. 저에게 맞는 것은 보다 전투적인
종교입니다!
우리는 가장 괴롭히고 있는 학과는 철학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내일 공부할
쇼펜하우어는 참으로 진저리쳐집니다. 이 교수님은 우리가 다른 과목도
공부하고 있다는 걸 모르시는 것 같아요. 이 교수님은 이상한 노인이예요!
머리를 구름 속에 박고 다니며 때로 딱딱한 땅에 발이 부딪치면, 눈을
깜박거리며 어리둥절해 합니다. 또 때로는 제법 우스갯소리도 해서 강의를
재미있게 하려고 합니다. 우리도 억지로 웃어 보이긴 하지만, 이 늙은
교수님의 우스갯소리 같은 건 아예 웃음거리도 되지 않아요. 교수님은 수업과
수업중간 시간에는 언제나, 물질은 실재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다만 자신이 실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지나지 않는가, 따위의 문제를 밝혀
보려고만 생각하면서 살고 계시는 거예요. 삯바느질 하는 아가씨같으면
틀림없이 그 자리에서 물질은 실재하고 있다고 대답할텐데!
제가 이번에 새로 쓴 소설이 지금 어디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쓰레기통
속이에요. 전혀 틀렸다는 것을 저는 알게 된 것입니다. 스스로의 작품을
사랑하는 작가 자신이 이렇게 깨달았을 정도니까 사정없는 세상의 비평이
어떨 것인가는 아마 대략 짐작이 가시겠지요.
며칠 뒤
아저씨, 괴로운 병상에서 인사드립니다. 이틀 동안 편도선이 부어서 누워
있습니다. 목으로 넘길 수 있는 것은 따뜻한 우유뿐입니다. 의사는 "당신
부모님께서는 무슨 생각으로 편도선을 어릴 때 떼어 버리지 않았을까?"하고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저도 모를 일이지만 저의 부모님이 저에 대한 것을
생각이나 해 보았었는지 그것부터가 의심스럽습니다.
당신의
주디올림
다음날 아침
이 편지를 봉하기 전에 다시 한 번 읽어 보았습니다만, 어째서 이렇게
세상을 어두운 눈으로만 보고 썼는지, 자신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급히
곁들여 말씀올립니다만, 저는 젊고 행복하며 기운이 넘쳐 있습니다. 아저씨도
그러리라 믿습니다. 젊음이란 것은 몇 번의 생일을 보냈는가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정신이 발랄한가 아닌가가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저씨의
머리가 백발이 되어 있다 해도, 마음만 그렇게 가지신다면 아직 소년으로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애정과 함께
주디 올림
1월 12일
자선가님
가엾은 가족들에게 주신 수표가 어제 도착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점심을 먹은 뒤 체육시간을 빼먹고, 이내 그 집에 전해주고 왔습니다. 그
아가씨의 표정을 보여 드리고 싶었어요. 그 아가씨는 놀라움과 기쁨과
안심으로 갑자기 젊어진 것 같았어요. 이제 겨우 스물 네 살인데! 참
불쌍하지요. 아무튼 그 처녀는 지금 좋은 일이 모두 한꺼번에 손을 잡고,
자기를 찾아온 기분이 되어 있답니다. 앞으로 두달 동안은 확실한 일거리도
생겼다나봐요. 누군지 결혼하는 사람이 있어서 혼수 준비를 부탁받고
있답니다.
그 어머니는 작은 종이 조각이 백 달러라는 걸 알게 되자,
"자비로운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했지요.
"하느님이 아니라 키다리 아저씨랍니다!" (아저씨를 스미스씨라고 말해
두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분에게 이런 생각을 갖게 하신 건 하느님입니다"
그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그래서 전 확신에 찬 목소리로
"천만에요. 제가 스미스씨에게 부탁한 거예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자비로운 하느님께서는 아저씨에게 알맞은 보답을
해주시리라 믿습니다. 당연히 지옥에서 보내시게 될 시일 가운데 1만 년쯤은
면제될 만한 자격이 있으십니다.
깊이 감사하며
주디 애벗
2월 15일
삼가 폐하께 말씀 올리나이다.
오늘 아침 저는 칠면조 냉육파이(전)와 거위로 아침식사를 하고, 아직 한
번도 맛본 일이 없는 차(중국엽차)를 청하였사옵나이다.
아저씨, 걱정은 하시지 마세요. 제가 머리가 돈 것은 아니니까요. 다만
사무엘 피프스의 글귀를 인용했을 뿐입니다. 우리는 영국사 연구에 관한
역사의 자료로서 사무엘 피프스를 읽고 있는 것입니다. 샐리와 줄리아와 저는
요즈음 1660년 무렵의 말투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걸 한 번 들어 보세요.
"나는 차링크로스에 행차하여, 해리슨 소령이 교수형으로 처형되어 창자를
빼내고, 사지를 찢기는 광경을 보고 왔도다. 이러한 형을 당하고서도, 그는
더할 나위 없이 유쾌한 듯이 보였도다!"
또 이런 것도 있었습니다.
"나는 마나님의 초대로 만찬을 함께 하였는데, 마나님의 남동생께서 어제
뇌척수막염으로 사망하였기에 참으로 아름다운 상복으로 단장하고 계셨소."
동생이 어제 죽었는데 오늘 손님을 초대하다니, 너무 빠르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피프스의 친구 한 사람이 국왕의 빚을 갚기 위해, 오래 되어
부패한 식량품을 사람들에게 팔아 먹는 아주 나쁜 꾀를 내었습니다. 사회
개혁자이신 아저씨는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는 요즘 세상의 사람들은
신문에서 떠드는 만큼 나쁘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사무엘 피프스는 여자와 마찬가지로 옷에 대한 관심도 대단했나 봐요. 자기
의상에 관한 돈을 부인의 다섯 배나 더 썼답니다. 아마도 그 무렵은
남편들에게는 황금시대였던가 봅니다. 다음 구절은 정말 애처롭다고 생각되지
않으세요? 이것으로 피프스는 확실히 정직했다는 것을 알수가 있습니다.
"오늘 황금 단추가 달린 호화로운 모직 망토가 오다. 이것은 막대한 돈이
든 것이로다. 하느님이여, 바라건대 저로 하여금 이 대금을 갚을 수 있게
하옵소서."
피프스 이야기만 해서 미안합니다. 지금 저는 그에 대해서 특별 논문을
집필중입니다.
아저씨, 이걸 어떻게 생각하세요? 학생 자치회가 10시 소등의 규칙(밤의
일정한 시간에 불을 끄는 규칙)를 폐지했어요.
이제부터는 다른 사람에게 방해만 되지 않는다면, 밤새도록 불을 켜놓아도
괜찮은 것입니다. 공개적으로 놀 수는 없지만, 그런데 그 결과는 인간의
심리를 참으로 뚜렷하게 반영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지 않고, 일어나 있고
싶으면 언제까지든지 안 자도 좋다고 하게 되니까, 이제는 아무도 일어나
있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게 된 거예요. 우리는 9시에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여, 9시 반쯤만 되면 우리들의 감각을 잃은 손에서 펜이 굴러 떨어지고
맙니다. 지금 9시 30분입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일요일
지금 막 교회에서 돌아왔습니다. 조지아 주에서 설교사가 오셨답니다.
그분이 말하기를 우리는 천성의 감정을 희생해서까지, 지성을 발달시키려고
하는 그런 짓은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답니다. 그것은 참으로 빈약하고
메마른 설교였나이다. 또 피프스의 말투가 튀어나와 버렸군요. 우리는 어차피
언제나 같은 설교만 듣고 있으므로, 설교사가 합중국의 어디에서 오든,
캐나다에서 오든, 어떤 종파에 속해 있든, 문제가 안 됩니다.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저 사람들은 남자 대학에 가서는 공부에 너무 머리를
써서, 남자다운 성질을 못 쓰게 만드는 일이 없도록 충고해 주지 않을까요?
오늘은 기분이 상쾌한 날입니다. 땅이 꽁꽁 얼어붙고, 공기가 깨끗합니다.
점심식사를 마치는 대로 샐리와 줄리아와 마티 킨과 앨리너 프랫(이 두
사람은 친구인데 아저씨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과 저는 짧은 치마를 입고,
시골길을 걸어서 크리스털 스프링 농장까지 갈 참입니다. 우리는 거기서
닭고기튀김과 와플로 저녁을 먹고, 돌아오는 길은 크리스털 스프링씨의
사륜마차를 탈 계획입니다. 우리는 7시에 기숙사에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만, 오늘 밤은 시간을 늦추어 8시로 할 작정입니다.
다정하신 님이여, 안녕.
님의 가장 아름답고 충실,성실하고 또 순종하는 신하로서의 영광을 지니고
있는
주디 애벗
3월 5일
평의원님
내일은 이 달의 첫째 수요일입니다. 존 그리어 고아원 아이들에게는 우울한
날입니다. 오후 5시쯤 되어 평의원님 일행이 고아들의 머리를 쓰다듬고
돌아가신 뒤, 저희들은 얼마나 마음을 놓고 긴장을 풀었을까요! 그런데 참
아저씨는 손수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신 일이 있었는지요? 저는 그런 일이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뚱뚱한 평의원님 밖에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신
기억이 없으니까요.
부디 고아원 식구들께 안부 전해 주세요. 저의 마음 속에서 솟아나온
애정을 4년 동안의 세월을 어렴풋이 되돌아보면 고아원 시절도 그리운 생각이
듭니다. 대학에 온 첫 무렵에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같은 온당한
소녀시절을 잃어버린것 같아서 고아원을 미워하고 있었습니다만, 지금은 그럼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아니 그보다도 두번 다시 겪을 수 없는 훌륭한
경험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한쪽 옆에서 조용히 바라보기에
편리한 자리를 얻은 거와 같습니다.
저는 완전히 성인이 되고 나서 세상에 나온 덕택으로, 세상을 그림을 보듯
전망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풍족한 가운데서 자라온 사람들에게는
결핍되어 있는 사실입니다.
저는 자신들이 행복하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소녀들(이를테면
줄리아처럼)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행복이 몸에 익숙해져서
행복에 대한 감각이 둔해져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자신의 생애의
순간순간이 행복하다는 것을 뚜렷하게 의식하고 있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이를테면 어떤 불쾌한 일을 당해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생활해 나갈 생각입니다. 저는 불쾌한 것은 모두 흥미로운 경험으로 여겨
나갈 작정입니다. 이가 아픈 것조차도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일 작정입니다.
'내 머리위에 어떤 하늘이 있을지라도, 나에게는 모든 운명과 맞설 용기가
있노라' 이것은 바이런의 시 구절입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아저씨, 부디 J.G.H(존그리어 고아원) 에 대한 애정을,
너무 글자 그대로만 받아들이지는 말아주세요.
저는 제 아이가 다섯이 있다고 해도 루소(프랑스의 철학가이며
평론가)처럼, 그 아이들이 검소하게 자라나도록 고아원 입구에 두고 오는
그런 짓은 하지 않겠습니다.
아무쪼록 리펫 원장님에게 저의 호의를 전해 주십시오(저의 애정을 전해
달라고 하려니, 말의 효과가 조금 지나친 것 같으니까요). 그리고 제가
얼마나 아름다운 성격의 소유자가 되었는가 하는 것도 잊지 마시고 전해
주세요.
사랑하는
주디올림
4월 4일
록 윌로에서
아저씨
이 겉봉의 소인을 눈여겨 안 보셨어요? 샐리와 저는 부활제의 휴가중, 이
록 윌로 농장을 화려하게 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주어진 10일 동안을 가장 유효하게 보내는 데는, 이 조용한 곳에
오는 게 가장 좋다고 결정지었던 겁니다. 우리들의 신경이 퍼거슨 기숙사의
식사에는 이제 한 끼도 더 참을 수 없는 지경까지 온 거예요. 지칠대로
지쳤을때, 4백명의 여학생과 한 곳에서 식사를 한다는 것은 일종의
수난입니다. 그 소란스러운 정도는 바로 마주 앉은 친구와 이야기를 하는
데에도, 두손으로 메가폰을 만들어 큰 소리를 지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랍니다! 이건 정말이에요!
두 사람은 날마다 이 언덕 저 언덕을 돌아다니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하고
글을 쓰기도 하면서 즐겁고 편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전에 한 번 저비 도련님과 함께 저녁식사를 만들어 먹은
일이 있는, 스카이 산의 꼭대기에 올라갔습니다. 그로부터 벌써 2년이
지나다니 믿을 수 없는 기분이에요. 우리들이 피웠던 모닥불 연기로 검게
그을은 바위가 아직 그대로 있는데 말이에요.
어떤 사람과 관계가 있는 어떤 장소를 찾아가서, 그 사람들이 생각나지
않는다는 것은 드문 일이지요. 그분이 함께 있지 않은 것을 정말 쓸쓸하게
생각했습니다. 2분쯤이었지만.
아저씨, 요즈음 저의 활동이 주로 어떤 일이라고 생각하세요? 아저씨는
틀림없이 더 이상 가르쳐 줄 것이 없는 인물이라고 저를 인정하기 시작하실
거예요. 왜냐하면 저는요, 또 소설을 쓰고 있으니까요. 3주일 전부터 쓰기
시작하여 지금 한창이랍니다.
저는 비결을 알아냈습니다. 저비 도련님이나 그 편집장이 하신 말씀이
옳습니다.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일을 쓰는 것이 가장 감명을 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이번에는 밑바닥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일에 대해서 쓰고
있습니다. 어디에서 취재했다고 생각하세요? 존 그리어 고아원이에요. 잘
되어 가고 있습니다. 아저씨, 정말 잘 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날마다
거기서 일어나는 조그만 일들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사실파입니다.
이제 낭만주의는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내 자신의 신상에 모험에
찬 앞날이 펼쳐지게 된다면 또 낭만파로 되돌아가겠지만요.
이 새로 쓰는 소설은 꼭 완성되어 출판될 것입니다. 어떤 것인가 기대하고
계세요. 무언가를 소망했을때, 그것을 열심히 찾아 노력을 계속하면,
마지막에는 반드시 그 바램이 이루어지게 마련입니다. 저는 이 4년동안
아저씨로부터 편지를 받는 것을 끊임없이 바라고 지내왔습니다. 그리고 아직
그 소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안녕, 그리운 아저씨
(저는 말이예요, 그리운 아저씨라고 쓰는 게 좋아요. 어감이 좋아서)
사랑하는
주디
추신
농장소식을 알려 드리는 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슬픈
소식이에요. 만일 심하게 신경이 자극되기 싫으시면 이것을 보시지 말고 그냥
넘게 주셔요.
지난 주 아홉 마리의 병아리가 족제비에게인지, 스컹크에게인지, 또는
들쥐에게인지, 아무튼 무엇인가에 잡아먹혀 버렸습니다.
암소 가운데 한 마리가 병들었습니다. 그래서 보니리그 네거리에서
수의사를 불렀습니다. 애머사이는 이 암소에게 아마인기름과 위스키를 먹이기
위해 하룻밤 내내 곁에 붙어 있었답니다. 그러나 불쌍하게도 병든 소는
아미인기름만 조금 먹고 위스키는 한 방울도 먹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센티멘털 토미(삼색털 고양이)는 행방불명입니다. 아무래도 덫에 걸린 것
같습니다.
이 세상에는 왜 이리도 걱정되는 일이 많을까요!
5월 17일
키다리 아저씨
이건 아주 짧은 편지가 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펜만 보아도 어깨에
통증을 느낄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낮에는 계속 강의 필기를 하고, 저녁엔 또
저녁대로 불후의 창작을 너무 많이 썼던 탓입니다.
졸업식은 다음 수요일로부터 3주일째입니다. 아저씨, 그 때에는 오셔서
저와 직접 만나 주시겠지요? 만일 와주시지 않는다면, 저는 아저씨를 미워할
거예요! 줄리아는 저비 도련님을 초대합니다. 친척이니까요. 샐리는 지미
맥브라이드를 초대합니다. 역시 가족의 일원이니까.
그런데 저는 누구를 초대하면 좋을까요? 제가 초대할 수 있는 사람은
아저씨 이외엔 리펫 원장님뿐이며 저는 그분은 초대하고 싶지 않아요.
아저씨, 손가락의 근육경련으로 인해 아픈 손으로 글씨를 쓰면서 사랑을
보냅니다.
주디로부터
6월 19일
록 윌로에서
마침내 저는 교육을 끝마쳤습니다! 졸업증서는 두 벌의 가장 좋은 드레스와
함께 장롱의 맨 아랫서랍에 잘 넣어 두었습니다. 졸업식은 여느 해와
같았으며, 중요한 때 소나기가 두세 번 있었습니다. 장미꽃 봉오리의
꽃다발(이제 막 피려고 하는 봉오리만 골라 묶은 값진 꽃다발)은 정말
고맙습니다. 참 아름답더군요. 저비 도련님과 지미 도련님도 모두 장미를
선물해 주었습니다. 둘 다 목욕탕의 물에 넣어 두고 저는 아저씨가 보내 주신
꽃다발을 안고 졸업식 행렬에 참가했습니다.
저는 지금 록 윌로 농장에 와 있습니다. 이번 여름 내내, 아니면 영원히
여기서 살지도 모릅니다. 식비가 싸고 주위가 조용해서 작가생활에 도움이
되니까요. 어엿한 작가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는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을 바랄 수 있을까요? 저는 자신의 소설에 열중한 나머지 정신이
없답니다. 깨어 있을 때는 끊임없이 그것을 생각하고 밤에는 꿈에서 보고
있습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평화와 조용함과 일을 많이 할 수 있는
시간뿐입니다.(영양분이 많은 음식이 그 사이에 저를 즐겁게 해주지요.)
8월에는 저비 도련님이 1주일쯤 머무르실 계획으로 이 곳에 오실
예정입니다. 그리고 지미 맥브라이드도 이번 여름에는 여기 들르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지금 증권 회사와 관계하고 있어서, 증권을 은행에
매각하러 지방을 돌아다니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네거리의 국립 농업
은행에 대한 용무와 저에 대한 방문을 겸해서 출장 오는 셈입니다. 이처럼,
록 윌로라고 해서 전혀 사교면이 없다는 건 아닙니다.
저는 언젠가 아저씨가 자동차 여행을 하는 도중 여기에 들러 주실지도
모른다고 마음 속으로 은근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마는, 이제는 이미 그럴
가망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의 졸업식조차도 와 주시지 않았으니
말이예요. 저는 아저씨를 마음 속에서 영원히 파묻어 버리기로 했습니다.
문학사
주디 애벗
7월 24일
사랑하는 아저씨
일한다는 건 어쩌면 이다지도 유쾌한 것일까요? 가만, 아저씨는 일이란
것을 아예 해보신 일조차 없는 건 아닌지요? 특히 자신이 무엇보다도 가장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종류의 일인 경우에는 더욱 즐거운 법입니다. 저는
이번 여름 저의 펜이 미치는 한, 최고의 속력으로 쓰고 있습니다. 인생에
대한 유일한 불만은 하루의 길이가 자신의 머리에 떠오르는 아름답고 귀중한
사랑을 모두 다 쓰는 데에 모자란다는 것입니다.
저의 소설은 제2권이 끝났으며, 저는 내일 아침 7시 반부터 제3권을 쓰기
시작할 예정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아저씨가 이때까지 보신 것 중에서 가장
훌륭한 작품입니다. 정말이에요.
저는 아침에 일어나서 일에 뛰어들기 전에 옷을 갈아입거나 식사하는 게
초조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는 쓰고, 쓰고, 또 쓰고, 갑자기 정신이
들면 완전히 지쳐서, 그 때는 온몸이 녹초가 되어 있답니다. 그러면 저는
콜린(새로 여기서 기르고 있는 양떼를 지키는 개)을 데리고 밖에 나가서,
들판을 뛰어 돌아다니기도 하고, 내일 쓸 새로운 소재를 구상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아저씨가 지금까지 본 일이 없을 만큼 훌륭한 작품입니다. 어머나
죄송해요. 이 말은 앞서도 말씀드렸는데 말이에요. 아저씨는 제가 자만심에
빠져 있다고 생각하시지 않겠지요. 그렇지요. 아저씨?
저는 자만심에 빠져드는 일은 정말 없습니다. 다만 지금 열광적 단계에
있을 뿐입니다. 아마 조금만 지나면 냉정을 되찾고 비평적이 되어, 자신의
작품에 대하여 코웃음을 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결코 그런 짓은 하지
않겠습니다! 이번에야말로 저는 본격적인 작품을 썼으니까요. 아무튼 가만히
보고만 계세요.
잠깐 동안, 작품 이외의 것을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아저씨에게
애머사와 캐리가 이번 5월에 결혼했다는 것을 알려 드렸던가요? 두 사람 다
그 뒤로도 이 농장에서 일하고 있습니다만, 제가 관찰한 바로는 결혼은 두
사람을 아주 못쓰게 만들어 버린 것 같습니다. 캐리는 애머사이가 흙탕 속을
걸어가거나 마루에 재를 엎지르거나 하면, 전에는 웃고 있을 뿐이었으나,
지금은 그 야단치는 모습을 보여 드리고 싶을 정도예요. 게다가 이젠 머리를
곱슬곱슬하게 하지도 않습니다. 애머사이쪽에서는 또, 전에는 캐리가 시키는
대로 깔개의 먼지를 털어내고 장작을 나르기도 했는데, 지금은 그런 것을
넌지시 비추기만해도 투덜거리는 거예요. 게다가 넥타이까지 우중충해지고,
전에는 빨강이라든가 보랏빛이었는데, 요즈음은 검정이라든가 갈색 따위만
매고 있습니다. 저는 결혼을 하지 않을 각오를 했습니다. 결혼은 분명히
인간을 퇴보시키는 과정입니다.
농장 소식은 별로 없습니다. 암소들은 만족스러운 모양이고, 암탉들은 알을
잘 낳고 있습니다. 아저씨는 양계에 흥미를 가지고 계십니까? 만일 흥미가
있으시다면 '한마리의 닭에서 1년에 2백개의 달걀'이라고 하는, 유익한 작은
책을 읽어 보시도록 권합니다. 저는 내년에는 부화기를 사용하여 육용 닭을
부화해 볼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처럼 록 윌로에 정착해 버렸어요.
저는 앤터니 트롤럽(영국의 소설가 1815-82)의 어머니처럼 1백 14권의 소설을
쓸때까지는 이곳에 머무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면 저도 필생의 대작을
완성하고 나서는 은퇴하여 여행을 즐길 수 있게 되겠지요.
지미 맥브라이드 씨는 지난 주 일요일을 우리와 함께 보냈습니다. 저는 그
젊은이를 만날 수 있어서 몹시 기뻤습니다. 잠깐 동안이지만 저에게 보다 더
큰 세계가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지미는 증권을 파는 일로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네거리의 국립 농업 은행에서는 6부 이자, 때로는
7부까지도 되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아예 상대를 하지 않는답니다. 그
사람은 아마 결국은 우스터로 돌아가서 아버지의 공장에서 일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는 아주 정직하고 개방적이며 친절하므로, 도저히
금융업자로서는 성공할 것 같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성대한 작업복 제조 공장
지배인의 지위 같으면, 꼭 알맞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저씨도 그렇게 생각하시지요? 그 사람은 지금은 작업복을 멸시하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머리를 숙일때가 꼭 올 것입니다.
이 긴 편지를 손가락이 아파서 고생하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아저씨는 상기해 주세요.
그건 그렇고, 저는 역시 아저씨가 좋아요. 그리고 저는 매우 행복해요.
아름다운 경치에 싸여 있고, 먹을 것은 풍부하며, 네발이 달린 푹신한 침대가
있고, 원고용지는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잉크는 큰병에 가득차 있으니,
세상에 더 이상 바랄게 있을까요! 안녕.
변함없는
주디올림
추신
우편배달부가 또 하나의 뉴스를 가지고 왔습니다. 저비 도련님이 다음 주
금요일에 1주일 동안 머무를 예정으로 오시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기쁜
일입니다만, 불쌍하게도 저의 소설은 수난입니다. 그 도련님은 아주 주문이
많은 분이니 말이에요.
8월 27일
키다리 아저씨
아저씨는 도대체 어디에 계시는 거예요? 아저씨가 세계의 어느 곳에
계시는지 도무지 짐작할수 없습니다만, 이 지독한 더위동안은 뉴욕에 계시지
않기를 빕니다. 아저씨가 높은 산꼭대기에 계셔서(그러나 스위스가 아니라,
어딘가 더 가까운 곳) 설경을 바라보면서 저에 대한 생각하고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부디 저를 생각해 주세요. 저는 정말 외로워서, 누군가 저에
대한 것을 생각해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아아, 저는 정말 아저씨를 만나고 싶어요! 그러면 슬플때, 서로 위로해 줄
수 있는데 말이에요. 저는 이제 록 윌로에 있는게 괴로워 견딜 수가
없습니다. 어딘가로 옮겨 갈까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샐리는 이번 겨울에는 보스턴에서 이웃돕기 사업을 할 예정입니다. 아저씨,
저도 샐리와 함께 가는 게 좋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그렇게 하면 둘이 같은
방에서 살고, 샐리가 일하러 나간 동안 저는 집에서 창작을 하며, 밤에는
둘이 함께 잘 수 있는 겁니다. 샘플 씨 내외분과 애머사이와 캐리 말고는
아무도 이야기할 상대가 없어, 밤이 너무 길어서 도무지 견딜 수가 없습니다.
아저씨가 이 새 작업장에 대한 저의 생각에 찬성하지 않을 것은 지금부터
벌써 알고 있습니다. 아저씨 비서의 편지가 눈에 보이는 것 같아요.
저루샤 애벗 귀하
스미스씨는 귀양이 록 윌로에 머무르고 있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친애하는 앨머 H.그리그스.
저는 아저씨 비서가 정말 싫어요. 앨머 H.그리그스란 이름을 가진 남자는
아마 싫은 사람일게 틀림없어요. 그렇지만 아저씨, 저는 정말 보스턴에 가지
않으면 안 되겠어요. 여기 있을 수가 없답니다. 곧 무슨 일인가 생겨 주지
않는다면, 저는 자포자기가 되어 높은 탑에서 투신 자살을 해 버릴지도
모릅니다.
정말 이 무슨 지독한 더위예요. 풀이란 풀은 모두 타버리고, 시냇물은 모두
말라 버렸으며, 길이란 길은 모두 먼지 투성이 입니다. 몇주일 동안이나,
그리고 또 몇 주일 동안이나 비가 내리지 않았던 거예요. 이 편지는 마치
제가 공수병이라도 걸린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런 게 아닙니다. 저는
다만 누군가 가족이 그리운 것입니다.
제가 정말 좋아하는 아저씨, 안녕.
제가 정말로 아저씨를 알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주디올림
9월 19일
록 윌로에서
아저씨
어떤 일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저씨의 충고가 필요합니다. 그
충고를 다른 사람이 아닌 아저씨에게 듣고 싶은 거예요. 아저씨를 만나 뵐
수는 없을까요? 편지로 쓰기보다는 직접 만나서 말씀드리는 편이 훨씬
쉽습니다. 아저씨의 비서가 혹시 뜯어 볼지도 모른다는 염려도 있고요.
주디
추신
저는 정말 비참합니다.
10월 3일
록 윌로에서
키다리 아저씨
아저씨가 직접 쓰신, 꽤 떨린 필적의 편지가 오늘 아침 도착했습니다. 앓아
누워 계셨다는데 정말 죄송했습니다. 그런 줄 알았으면, 자신의 사사로운 일
따위로 염려를 끼쳐 드리는 게 아닌데. 그 고민이란 것을 말씀드리지요.
그러나 또한 절대 비밀로 해주셔야 되겠기에...
부디 이 편지는 보관하시지 말고 태워 주세요.
그것을 말씀드리기 전에 먼저 천 달러짜리 수표를 함께 보냅니다. 제가
아저씨에게 수표를 보내다니 정말 우스운 일이지요? 이 돈을 제가 어떻게
해서 손에 넣었다고 생각하세요?
아저씨, 저의 소설이 팔린 거예요. 연속물로서 7회에 걸쳐 발표되고 그
다음에 단행본이 된답니다! 아저씨는 제가 기뻐서 정신없이 날뛰고 있다고
생각하시겠지요? 그런 일은 없습니다. 저는 아주 냉정합니다. 물론
아저씨에게 돈을 돌려드릴수 있게 된 것은 기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도 2천 달러 이상이나 빚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나누어서 갚게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부디 이것을 받는데 대해 이러쿵 저러쿵 말씀하지 말아
주세요. 받아 주시는 게 저를 행복하게 해주는 거니까요. 저는 돈보다도 훨씬
더 큰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그 은혜는 한평생동안 감사와 사랑으로 보답할 생각입니다.
그건 그렇고, 이번에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아무쪼록 제가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간에 아저씨의 상식적인 의견을 들려주십시오.
아시다시피 저는 아저씨에게 대하여 언제나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쨌든 아저씨는 제 가족을 모두를 대표하고 계시니까요. 그러나
제가 아저씨 이외의 남자에 대해서, 아저씨보다 더 특별한 감정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말씀드려도, 아저씨는 섭섭해하시지 않겠지요. 그 상대가
누구라는 것을 아저씨는 아마 쉽게 상상하시리라 믿습니다. 저의 편지에는 꽤
오래전부터, 계속 저비 도련님에 대한 것이 씌어 있었던 것 같으니까요.
저비 도련님이 어떤 분이며, 우리가 얼마만큼 마음이 서로 맞는가를
아저씨가 알아 주시면 좋겠습니다. 둘은 무슨 일에 대해서나 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저는 자신의 생각을 그분의 생각에 맞추려는 경향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분의 생각은 대개 옳습니다. 또 그럴 수 밖에,
그분은 저보다도 14년이나 먼저 인간 세상에 발을 내딛었으니까요. 그렇지만
다른 점에서는 그분은 마치 큰 어린아이 같으므로, 여러 가지를 돌봐 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분은 비가 내리고 있어도, 고무 장화를 신어야 한다는
생각조차 가지고 있지 못한 거예요.
그분과 제가 언제나 같은 일을 생각한다는 것은 묘한 일입니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점입니다. 두 사람이 사물에 대해서 느끼는 게 서로 다르다면
큰일입니다. 그러한 거리가 있는 마음의 도랑에 걸 수 있는 다리는
없으니까요!
그리고 그분은-아아, 이젠 괜찮아요! 그분은 그분 그대로이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그분이 계시지 않는 것을 몹시 쓸쓸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너무나 쓸쓸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마치 세상이 텅 비고 몸이
욱신욱신 쑤시며 아픈 것 같은 기분입니다. 저는 달빛을 증오합니다.
왜냐하면 아름다우니까요. 그분이 곁에 있어 저와 함께 저 아름다움을 보고
있지 않으니까 말입니다.
아저씨도 반드시 누군가를 사랑하신 일이 있으실테니까 이런 마음은 알아
주시겠지요. 그렇다면 설명할 필요가 없고, 만일 그런 경험이 없으시더라도
달리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어쨌든 제 마음은 그렇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그분의 결혼신청을 거절했던
것입니다.
그 까닭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저는 비참한 마음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무어라고 말해야 좋을지 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제가 지미 맥브라이드 씨와 결혼하고 싶어한다고 생각하시곤 가버렸습니다.
저는 지미 씨와 결혼한다는 따위 생각은 해본 일도 없습니다. 그분은 아직
어른이 되어 있지 않은걸요.
그래서 저비 도련님과 저는 무서운 오해의 혼란 속에 빠져들어가, 서로
감정을 해지고 말았습니다. 그분을 돌아가 버리게 한 까닭은, 제가 그분을
사랑하고 있지 않기 떄문이 아니라, 그분을 너무나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그분이 앞으로 이 결혼을 후회할 것이라는, 그 사실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저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을 테니까요!
저같이 가문도 혈통도 분명치 않은 사람이 저비 도련님과 같은 가문의
사람과 결혼한다는 것은, 옳은 일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저는 그분에게
고아원에 관한 일을 하나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자신이 어디의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을 그분에게 설명하는 것은 정말 싫습니다. 어쩌면 저는
꺼림찍한 출신인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그분의 가족은 자존심이 강하기도
하고, 하지만 저 또한 자존심이 몹시 강하거든요!
그리고 또 저는 아저씨에 대하여 의무와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습니다.
작가가 되도록 교육을 시켜 주신 한, 적어도 작가가 되도록 노력만은
해야겠습니다. 모처럼 교육을 받게 해주신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활용하지
않고, 다른 데로 가버린다는 것은 정당한 일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저씨에게 돈을 갚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 조금은 어깨의 짐이
가벼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게다가 저는 이를테면 결혼을 한다 해도,
작가로서 활동을 해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분은
사회주의자이고, 인습에 사로잡히지 않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므로,
무산계급에 속하는 사람들과의 혼인을 어떤 종류의 사람만큼은 신경쓰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두 인간이 완전히 일치하여, 함께 있을 때에는 언제나 행복하며, 떨어져
있을 때는 외롭게 느끼는 이상, 그 사람들은 서로의 사이엔 세상의 아무것도
끼어들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더 말할 나위도 없이 저도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저씨의 냉정한 의견을 물어보고 싶은 거예요. 아저씨도
반드시 상류계급에 속하고 계실 것이므로, 단순한 동정적인 입장에서가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보는 입장에서 이 문제를 생각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이 문제를 아저씨의 재량에 맡기려 하고 있으니, 저는 정말
용감하지요?
제가 그 분이 있는 곳에 가서, 이 문제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지미가
아니라 존 그리어 고아원이라는 것을 말씀드린다면 어떨까요? 그런 무서운
일은 하지 않아야 할까요? 그것을 하는 데는 너무나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저는 그런 일을 하느니, 차라리 평생 비참하게 살아가는 편이 더 낫다는
기분입니다만.
이것은 벌써 두 달 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분이 가버린 뒤, 저는 아무런
소식도 받지 못했습니다. 겨우 실연의 괴로움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는데,
줄리아한테서 온 편지가 또다시 저의 가슴을 어지럽히는 것이었습니다.
줄리아의 편지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저비 삼촌은 캐나다로 사냥을 가서
하룻밤 내내 심한 비를 맞고는, 그 뒤로 폐렴을 앓고 있어'라고 씌어
있었어요.
그런데 저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한 마디
말도 없이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저는 기분이 상해 있습니다.
그분도 몹시 비참한 심정이 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런데
말이에요!
아저씨는 제가 어떻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주디
10월 6일
그리운 키다리 아저씨
네, 꼭 방문하겠습니다. 다음 주 수요일 오후 4시반에, 물론 길은 압니다.
뉴욕에서 세 번이나 간 일이 있고, 그리고 저는 어린아이가 아니니까요. 이제
정말로 아저씨를 만나려 가게 되다니 믿어지지 않는군요. 너무나 오랫동안
아저씨를 머릿속에서만 생각해 왔기 때문에, 피와 살로 된 손으로 만져 볼 수
있는, 현실 세계의 사람 같은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아직 별로 건강하지도 못하신데, 저에 대한 일을 염려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감기에 걸리시지 않도록 조심해 주시기 바랍니다. 요즘의
가을비는 습기가 많아서 좋지 않으니까요.
애정을 바치며
주디
추신
저는 갑자기 걱정스러워졌습니다. 댁에는 집사가 있는지요?
저는 집사라는게 무서워요. 만약 집사가 현관문을 열어 주거나 하면, 저는
아마 돌층계 위에서 기절해 버릴 거예요. 저는 그 사람에게 무어라고 말하면
될까요? 아저씨는 저에게 이름을 가르쳐 주시지 않았으니까요. "스미스 씨를
뵙고자 합니다."라고 말하면 될까요?
목요일아침
가장 사랑하는 저비 도련님이며, 키다리 아저씨이고, 펜들턴씨인 스미스 씨
지난 밤, 주무실수 있었어요? 저는 한 잠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이제
두 번 다시 잘 수도, 먹을 수도 없을 것 같군요. 그렇지만 당신은
주무셨겠지요. 잠을 자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잘 주무셔야만 빨리 나아서,
제가 있는 데로 오실 수 있답니다.
당신의 병세가 얼마나 나빴는지, 생각만 해도 견딜 수가 없군요. 더구나
저는 그동안 내내 조금도 모르고 있었으니 말이에요. 어제 의사 선생님이
현관으로 저를 바래다 주러 나와서는 마차에 태워 주시면서, 사흘 동안이나
살아날 수 있는 희망이 없어 체념했을 정도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아, 만일 진정으로 사랑하는 분이 그렇게 되었다면, 저는 세상에서 빛이
사라져 버렸을 것입니다. 언젠가는- 먼 장래에- 우리 두 사람 중 어느 한쪽이
한 사람을 남겨 놓고 저승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되겠지만, 적어도 그 때까지
두 사람은 행복을 맛보고 있을 것이며, 또 살 보람이 될 추억도 가지고 있을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당신에게 기운을 북돋아 드릴 생각이었는데, 오히려 자신의 정신을
가다듬기에 더 바빴습니다. 저는 꿈에도 생각 못했을 만큼 행복해졌으나,
그와 함께 이 때까지보다 더 진지한 기분이 되었습니다. 당신에게 무슨
일이나 생기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 언제나 그림자처럼 제 마음 속에 붙어
다닌답니다. 저는 지금까지 속이 좁고 무사 태평하고 무관심했으나, 그것은
잃어버릴 걱정이 있는 소중한 것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탓이었어요. 그렇지만
지금은- 저는 지금부터 한평생 매우 큰 불안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둘이 서로 떨어져 있을 때는 언제나 저는 당신이 자동차에 치이지나
않을까, 가난이 당신의 머리 위에 떨어지지나 않을까, 우글거리는 병균이 든
음식을 먹지나 않을까 하고 끊임없이 걱정할 것입니다. 저의 마음의 평화는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본디부터 평범한 평화 따위는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았습니다.
어서 빨리! 빨리! 빨리 건강을 되찾아 주세요! 저는 당신을 곁에 두고
손으로 만져 보면서, 당신이 실재의 사람인지 확인하고 싶은 겁니다.
함께 보낸 그 30분이 어찌 그다지도 짧았을까요! 꿈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만일 제가 당신 가문의 한 사람(육촌동생이든 그 육촌동생의
또 사촌이든)이었다면 매일이라도 문병하러 가서, 책을 읽어 드리기도 하고,
베개를 돋우어 드리기도 하며, 당신 이마에 있는 그 두 줄의 주름살을
쓰다듬어서 퍼주기도 하고, 양쪽 입가에 있는 구김살을 유쾌한 미소로 바꾸어
줄 수도 있을 텐데.
그러나 당신은 이제 좀 건강해지셨겠지요. 네? 어제 헤어질때는 기운이
있어 보였으니까요. 의사 선생님은 제가 오고 나서부터 당신이 열 살이나 더
젊어졌으니까, 저는 아마 틀림없이 좋은 간호사일 거래요. 그렇지만 사랑을
한다는 게 사람을 열 살이나 젊게 해버린다면, 그것도 곤란하다고 생각해요.
제가 겨우 열 한 살밖에 안 되는 소녀가 되어도 당신은 여전히 저를 사랑해
주시겠어요?
어제는 생각지도 못했던 멋진 날이었습니다. 제가 비록 아혼 아홉살까지
산다고 해도, 어제의 일은 사소한 것이라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밤에 록 윌로에 돌아온 처녀는, 새벽에 록 윌로를 나선 처녀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4시 반에 셈플 씨 부인이 저를 깨우기에 어둠
속에서 눈을 떴을때, 맨 먼저 제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키다리아저씨를
만나러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주방에서 촛불을 켜고 아침 식사를 들고, 그리고 역까지의 8킬로미터 길을,
찬란한 10월의 빛 속을 뚫으며 마차를 몰아갔답니다. 도중에서 태양이
솟아오르자, 단풍나무며 산수유 등이 빨간빛과 오렌지빛으로 빛나기
시작하고, 돌담이며 옥수수밭은 서리로 반짝거렸습니다. 공기는 몸에 스며들
만큼 맑고 희망에 넘쳐 있었습니다.
저는 무언가 어떤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습니다.
기차를 타고 있는 동안에도 레일이 '너는 키다리 아저씨를 만나러 가는
거란다!'라고 잇달아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저에게 안도감을
주었습니다. 저는 아저씨에게는 무슨 일이든지, 반드시 좋게 해주는 힘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어디에선가 또 한 사람,
아저씨보다도 더 저에게 소중한 분이 저를 만나고 싶어하고 있으며, 웬지 이
여행이 끝나기 전에, 그 분과 만나게 될 것 같은 생각이 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대로였습니다!
매디슨 댁에 가 보니 너무 크고 오래 되고 어마어마해서, 도저히 안에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불러일으키기 위하여
조금 걸어갔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두려워할 건 없었던 거예요. 당신의
집사는 아주 친절한 아버지 같은 인상의 노인으로, 곧 저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으니까요.
"애벗 양이십니까?" 하고 묻기에 저는 "네"라고 대답했을 뿐 스미스씨를
뵙고자 한다는 말은 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저더러 응접실에서 기다려 달라고
하더군요. 그 곳은 매우 차분하고 호화로웠으며, 보기에도 남자분의 방인
듯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저는 커다란 의자에 앉아서 "키다리 아저씨를
만나는거야! 키다리 아저씨를 만나는 거야!"하고 자신에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이윽고 집사가 돌아와서, 어서 서재로 들어가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너무 흥분해서, 정말 발이 앞으로 옮겨지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서재의 문
앞에서 집사는 저를 뒤돌아보며 "주인님께서는 건강이 매우 안 좋으셔서,
오늘 처음으로 일어나 계셔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어요. 아가씨께선 아무쪼록
주인님께서 흥분하시지 않도록, 너무 오래 있지 않아 주셨으면 합니다."하고
속삭였습니다. 그 말투에서 그분이 당신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있는지 알
수가 있었습니다.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그리고 집사는 방문을 두드리며 "애벗양입니다."라고 말하고 제가 안에
들어가자 뒤에서 문을 닫았습니다.
등불이 휘황하게 켜진 복도에서 들어왔기 때문에 방 안이 어두워서,
얼마동안 저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잠시 뒤에 난로 앞에 커다란
안락의자, 번쩍번쩍 빛나는 테이블과, 자그마한 의자가 놓여 있는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남자분이 무릎에 담요를 덮고, 등에 새털 베개를
대고 안락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남자분은 제가 말릴 틈도 없이 일어섰습니다. 조금 비틀거리면서,
그리고는 의자를 잡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저를 똑바로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제가 그분이 당신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던
거예요. 그래도 아직 저는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저는
아저씨가 저를 깜짝 놀라게 할 생각으로 당신을 불러 둔 것으로 생각했던
거예요.
그러자 당신은 웃으며 손을 내밀고 "주디 양, 내가 키다리 아저씨였다는
것을 몰랐어?"라고 하셨습니다.
그 순간 제 머릿속에 그 사실이 번쩍였습니다. 그렇지만 저란 사람은
어쩌면 이렇게도 둔할까요. 좀 더 민감했더라면, 무수한 작은 사건들이 저로
하여금 그 사실을 알게 했을 텐데! 저는 도저히 명탐정이 될 수는 없겠군요.
아저씨... 아니, 저비스 씨, 저는 당신을 무어라고 부르면 좋을까요?
저비라고 불러서는 실례가 될 것 같아, 저는 당신에게 버릇없는 짓을 할 수는
없군요!
의사가 와서 저를 쫓아 낼 때까지 30분 동안은 정말 즐거웠습니다. 저는
완전히 멍청해져서, 역에 닿았을때 깜박 세인트루이스 행의 열차를 탈
뻔했답니다. 그러고 보니 당신도 꽤 정신이 없었나봐요. 저에게 차를
대접하는 것도 잊어버리고 있었으니까요. 그렇지만 우리 둘은 정말, 정말
행복했지요?
저는 록 윌로까지 어두운 밤길을 마차로 올라왔습니다. 별이 어쩜 그렇게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을까요! 오늘 아침에는 콜린을 데리고 당신과 함께
갔었던 장소를 모조리 찾아다니면서 당신이 한 말들과, 그때의 당신의 모습을
되새겨 보았습니다. 오늘의 숲은 잘 닦여진 청동처럼 번쩍거리고, 대기는
상쾌하게 차웠습니다. 등산에 알맞은 날씨예요.
당신이 이 곳에 오셔서 함께 여기저기 낮은 산에 올라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당신이 여기 계시지 않는 게 저에겐 몹시 쓸쓸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행복한 외로움입니다. 이제 곧 함께 지낼 수 있으니까요. 이제는
공상이 아니라, 실제로 당신과 저는 서로의 것이군요. 저에게도 드디어
가족이 생기다니 이상야릇하지 않아요? 이것은 정말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즐거운 기분입니다. 저는 이제 결코 단 1초 동안이라도 당신에게 후회
같은 것은 느끼지 않도록 할 거예요.
영원히, 영원히 당신의 것인
주디
추신
이것은 제가 난생 처음 쓰는 연애편지입니다. 제대로 쓸 줄 알다니 정말
우습지요?
키다리 아저씨 속편
'키다리 아저씨 그 후 이야기'에서 만나요
작품 소개
편지형식으로 씌어진 소설 '키다리 아저씨'만큼 세계적으로 폭넓은
독자층을 가진 작품도 드물 것이다.
주인공 주디의 발랄하고 총명한 성격 묘사와, 다른 등장인물들의 개성이
너무나 생동감있게 표현되어 있어, 마치 실존 인물의 편지를 받는 듯한
착각을 느끼게 한다.
또한 많은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조금도 진부하지 않고,
참신함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도 이 작품의 큰 장점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큰, 이 작품의 가치는 작품 전체에서 물씬 풍겨나는
인간애와 박애사상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1912년 출간되어 대단한
호평을 받았으며, 사회 사업에 큰 영향을 미치는 등, 많은 화제를 낳았다. 진
웹스터는 '키다리 아저씨'를 각색하여 희곡을 만들었는데, 그 후, 무성영화와
뮤지컬로 상연되기도 했으며, 그 밖에도 두 편의 영화로 만들어졌다.
또한 이 작품은 1915년 속편 '키다리 아저씨 그 후 이야기'로 재탄생했다.
재미있는 독서의 기쁨과 읽은 후의 잔잔한 감동을 동시에 느끼게 해주는
'키다리 아저씨'
이 작품을 새롭게 만들어 독자들에게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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