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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주디스 마이클 호텔 비콘힐 (2)

by Casey,Riley 2023.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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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비콘힐 2
 주디스 마이클
 
    18장
  "오, 세상에..."
  시카고 비콘 힐 로비에 모인 손님들을 둘러보며 로자는 말을 잇지 못했다.
  "어쩌면 이렇게 멋진 개관식을 준비했을까. 그동안 샐링거 호텔을 돌아다니며 
파티에 참가했지만 이런 건 처음이야. 어렇게 널 다시 보게 되다니, 정말 너무 
기쁘다."
  로자의 뺨에 키스를 퍼부은 로라는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빵 냄새는 여전하네요."
  로자가 미소를 띠며 로라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 눈빛 속에는 슬픔이 배어 
있었다.
  "로라한테서 나는 이 냄새가 얼마나 그리웠는데요. 만나서 너무 너무 기뻐요."
  "내가 안 올 수 있나. 이렇게 우아하고 세련된 파티를 놓치다니, 말도 안되지."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난 로자는 로라를 유심히 살폈다.
  "많이 변하셨네, 우리 아가씨. 아주 세련되고 부드러워졌어."
  "겉모습은 그렇겠죠. 하지만 속은 마찬가지예요. 우아하지 못하게 말이예요."
  "괜찮아. 나한텐 잘된 일이지. 내 나이가 돼봐. 한꺼번에 많이 변하는 걸 미처 
받아들이지 못하거든. 네가 완전히 변했어봐라. 내가 어디 알아보겠어?"
  그녀는 로라의 손을 다독거렸다.
  "편지 줘서 고맙다. 애길 나누고 싶었다만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더라구. 
독자 같은 그 변호사가 법정에서 날 갖고 논 뒤로 항상 네게 전화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네가 날 이떻게 생각할지 몰라 여태껏 이랬지 뭐냐."
  그때 로라에게 젊은 커플이 다가왔다. 그들은 로라 여에 있는 로자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 로라, 정말 멋져요. 방 진짜 근사하던데, 이렇게 멋진 주말을 만들어줘서 
고마워요. 한껏 즐기다 가야겠어요."
  "감사합니다. 소개를..."
  "포리스트 호숫가에 있는 별장에서 신년축하 파티를 열 생각인데, 지금 
초청해도 늦지 않았겠죠? 꼭 와줘요. 근사한 사람들이 전부 다 모일 테니까 
기대해도 좋아요. 시카고를 손에 넣고 싶으면 그 파티만큼은 꼭 참석해야 할 
걸요. 원한다면 리무진과 기사를 보낼게요. 며칠내로 확실하게 대답해줘요."
  두 사람이 가자 로자와 로라는 어이없어 하며 서로의 얼굴을 멍하니 
바로보고만 있었다.
  "펠릭스하고 레니가 연 파티엔 순 저런 족속들만 온다구. 아주 몰지가한 
사람들이야."
  로라는 심각한 눈빛으로 떠나가는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허긴 어제 파티도 지쳤다. 내 자린 사실 여기가 아닌데. 주방쪽으로 가서 
기다리는 게 어울려."
  "여기 계셔야 되요. 내 파틴데 누가 뭐래요? 특별한 친구들만 엄선해서 
초천했어요. 나머지 사람들은 다 내 친구가 초청했구요."
  "그래, 아주 괜찮은 사람들 같긴 하구나. 로라, 이 아가씨! 정말 생각만 해도 
기쁘다. 자랑스럽구. 우리 로라가 이 호텔 지배인이라니... 이렇게 훌륭하게 
변신하다니...."
  로자에게 거짓말을 해야 한다는 게 마음 아팠지만 할 수 없었다.  펠릭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자신이 호텔 대표라는 사실만은 비밀로 해둬야 
했다. 가능한 한 오래도록,
  "그랬는데, 너한테서 초청장이 날아왔지 않겠니."
  로자는 끊어진 대화를 다시 이어갔다.
  "그걸 받아들고 이렇게 생각했지. 날 보고싶어 하는구나. 법정에서 내가 일을 
망쳐 놨는데도 그래도 날 보고싶어 하는구나. 날 용서했겠지. 고받다, 로라. 네가 
날 사랑했다는 걸 안다. 얼마나 보고싶었는지 몰라. 무엇이 진실인지 끝까지 
모른다 해도 그건 중요하지 않다. 그건 다 지나간 일이야. 거짓말을 좀 햇으면 
어때? 딴 사람도 다 그러잖아. 네가 거짓말을 좀 했대서 여태껏 주었던 사랑을 
그만 끊으란 말이냐. 그럴 순 없지. 암."
  "고마워요."
  목멘 소리로 로자에게 감사를 표하고 있는 로라에게 클레이가 다가왔다.
  "식닥에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좀 도와줄래?"
  "칵테일은 라운지에 준비됐어요. 저녁은 여덟시구요. 조금 있다 돌아올 수 
있으면 다시 올게요. 하지만 일이 워낙 많아서..."
  "어서 가보거라. 난 슬슬 구경이나 할게."
  아주 인상적인 파티야. 로자는 클레이와 함께 사라지는 로라를 보며 
중얼거렸다. 인상적인 건 파티 모습뿐만이 아니었다. 두사람의 모습도 그랬다. 
매끈한 콧수염에 금발을 부드럽게 뒤로 빗어 넘긴 클레이는 나무랄 데 없는 
미남이었고 로라 또한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다워 보였다.
로비를 구경하며 로자는 그 이유를 생각했다. 행보해서 그렇게 보이는 걸까.남자 
때문에? 모든 일이 다 지나가버려서? 글쎄, 멋진 직장이 있어서 그럴 수도 있지 
. 장식하고 꾸미는 덴 선수였으니까 이 호텔 꾸미는 데 일조를 했겠지. 그래서 
행복하고 아름답게 보였을 거야.
  로자는 호텔 라운지의 벽난로 옆에 앉아 편안히 쉬고 있었다. 그때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로라를 보았는데 흥분하거나 초조해 보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휴식을 
취할 쉬 없는 기계처럼 긴장한 모습이었다.
  로자에게 관심을 두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로라 페어차일드가 특별히 
개인적으로 초청했다는 작고 통통한 노파를 아는 체하는 사람도 없었다.
  겔리 단톤도 낯선 눌길을 받긴 마찬가지였다. 예술 기념관에서 돌아온 
손님들이 라운지에서 다과를 즐기고 잇을 때 모습을 나타낸 켈리는 장작이 
기세좋게 타오르는 벽난로 옆 로자 곁으로 다가왔다.
  "보아하니 우리 둘 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 같은데 인사할까요? 켈리 
단톤이에요."
  그녀는 로자에게 억센 손을 내밀었다.
  "로자 커렌."
  켈리의 직선적인 눈빛과 강한 힘에 호감을 느낀 로자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로라가 당신이 운영하는 휴양지 얘길 많이 하더군요. 아주 좋은 분이라는 
것도."
  "나도 얘기 많이 들엇어요. 사랑을 듬뿍 주신 분이라고 들었어요. 그런데 로라 
말대로 그렇게 좋은 사람은 아니예요. 로라는 누굴 좋아하면 무조건 칭찬하는 
친구라서."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한텐 어떻게 하던가요?"
  "그냥 조용히 침묵하죠. 옛날엔 안 그랬나보죠?"
  "어리긴 해도 감정표현은 철저한 아가씨였어요."
  "맞아요. 지금도 그래요. 안녕하세여?"
  켈리는 가까이 다가온 지니 스타렛에게 인사를 했다.
  "낮선 사람을 사귈까 해서 왔는데."
  두 사람의 양해도 구하지 않고 지니는 자단탁자 옆에 놓인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파티마다 똑같은 얼굴을 보는 게 진력이 나서요."
  켈리의 못박인 손바닥과 로자의 빵 반죽 가은 손바닥을 느끼며 지니는 지거접 
자신을 소개했다.
  "로라가 어떻다구요?"
  그녀는 케리리가 하다만 얘길 끄집어냈다.
  "은밀하다구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않아요. 다른 사람에 관한 얘기도..."
  "그러면서도 친구는 기가 막히게 잘 만드라던데..."
  로자의 말이었다. 세 사람은 서로를 살폈다. 다들 로라가 자신을 친구라 
여기고 잇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마치 짝사랑을 하는 
사람들처럼 일방적으로 마음을 터놓고 있었다. 마음을 활작 여라어놓은 그들에 
비해 로라는 그 누구에게도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고 있었다. 세 사람 모두 
로라를 사랑하고, 로라가 자신들을 사랑한다고 믿었지만 누구도 그녀를 
오나전히 알지 못했다.
  종업원이 다가오자 지니와 켈리는 세리주를 주문했다. 차를 주문한 로자는 
라운지로 시선을 돌렸다.
  "우리 로라가 꾸미길 좋아하더니 기어코 이렇게 자기 것을 멋지게 꾸며놨다우. 
예전부터 그애가 뭔가 해내리라고 생각했었지만 볼수록 놀라워요."
  시카고 비콘 힐의 아름다움은 아주 개인적인;고 은밀한 멋에 있었다. 라운지에 
스며들오온 부드러운 빛과 아늑한 벽지는 시카고의 회색빛 주말을 오아시스처럼 
만들고 있었다. 간결하고 세련되 ㄴ유니폼을 입은 종업원들은 옷차림만큼이나 
세련된 동작으로 술잔과 은빛 수레를 다루고 있었고, 황금빛 드레스를 차려입은 
로라는 이리저리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황장기 없이 크고 맑게 빛나는 눈, 파운데이션이 필요없는 맑은 피부, 
날씬하고 날렵한 로라를 보며 지니는 부러움 섞인 긴 한숨을 내뱉없다. 그러나 
그런 기분도 잠시엿다. 예순한 살의 노인네가 이십대 젊은 아가씨를 
부러워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웃기는 일어었다. 더군다나 로라처럼 젊었던 
시절에도 결코 그녀만큼 우아하지 못했던 자신을 생각하며 지니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그때 갑자기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너무나 급작스럽게 튀어나온 소리여서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돌렸다. 개 짖는 소리는 점점 커졌다. 그러나 소리의 
진원은 개가 아니었다. 하피스트 옆에 있는 2인용 소파에서 한 사내가 목에 
핏줄을 세운 채 컹컹 짖으며 울부짖고 있엇다. 그와 동행인 듯한 여자는 눈물을 
흘리며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미친놈."
  지니가 줄얼거렸다.
  "브리트 페럴리야. 마약 때문에 신세 망친 사람이지."
  "뭐하는 사람이예요?"
  "컨트리 가수예요. 드라마에도 출연할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죠. 안되겠어."
  지니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전남편 고교 후배라서 내가 잘 알아요. 둘 다 섹스하고 술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족속들이죠. 이 파티 때문에 로라가 얼마나 애썩는데,파티를 망치려구! 
내가 가서 달각거렸고, 하피스트가 재빨리 손가락을 퉁기고 있는 사이, 사람들은 
놀란 가슴을 가라 앉히고 있었다.
  지니가 페럴리가 있는 탁자에 다다랐을 때 로라는 남자를 감싸안은 채 
귓속말로 뭔가 속삭이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어깨를 다독거리며 그녀는 계속 
속삭였다.
  남자의 울부짖음이 차츰 사그라지면서 여자의 흐느끼는 소리만이 나직하게 
들려왔다.
  "더 이상 마약을 하지 말라고 했어요. 손을 안 떼면 드라마,쇼  할 것이 
일자릴 뺏어버리겠다고 협박하면 그만둘 줄 알고 방송국에서 그랬나봐요. 
그래서 끊는다고 약속했어요. 그 사람들한테도 그만하겠다고 했는데... 하지만 내 
앞에선 매일 날 깔봐서 그랬어요. 날 애숭이 여자애라고 부르면서, 바보같이 
매달리기만 하는 여자이기 때문에 함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해서..."
  여자는 계속해서 신세타령을 늘어놓고 있었다.
  "훌륭해요. 아주 멋져요. 잘 불렀어요."
  최면을 걸듯 로라는 조용한 음성으로 계속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난 알아요. 정말 잘했어요. 텔레비젼에선 컨트리 가수가 
개 처럼 짖어대는 걸 싫어하지만 난 듣기 좋았..."
  지니는 킥킥거리며 웃었다. 로라는 고개를 돌려 지니에게 눈길을 보냈다.
  "로맨틱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컨트리 음악을 좋아하잖아요. 멋진 가수를 
반드시 알아볼 거예요."
  천천히 말을 게속하면서 로라는 그를 손쉽게 의자에서 일으켰다. 팔로 그를 
둘러안고 입술을 귓바퀴에 댄 치로 덩치 큰 그를 끌고 나가기 위해 그녀는 까치 
걸음을 하고 있었다. 라운지를 빠져나갈 때까지 그녀는 계속 그런 상태를 
유지했다. 최면상태로 반쯤 눈을 감은 채 그는 얌전한 강아지처럼 그녀와 함께 
밖으로 빠져나갔다.
  손님들의 눌길이 따라오는 것을 느끼며 브리트 페럴리를 라운지 밖으로 
데리고 나간  로라는 엘리베어터 쪽으로 그를 이끌었다.
  "방으로 모실게요."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였다. 갑자기 돌변한 로라의 음성에 그는 번쩍을 
눈을 떳다.
  "저녁을 방으로 올려다 드리죠. 맑은 정신이 들 때까지 로비에 나와서는 
안됩니다.!"
  화려하게 치장된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를 부축한 로라는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몇 번이나 심호흡을 해야만 했다.
  "잠깐만!"
  끌려가지 않으려고 그는 안간힘을 썼다.
  "쫓아내진 못해... 돈 줬잖아."
  "정신차려요! 여기가 어딘지 알아요. 초대손님으로 와 놓구서. 내 말대로 
안하면 바에서도 쫓겨날 줄 알아요. 카드 내놔요!"
  그는 머뭇거렸다.
  "발리 줘요. 브리트. 안 그러면 큰일 당할 테니."
  "브리트는 큰일 당하지 않는다. 브리트는 큰일 만드는 사람이다."
  그는 초점없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계속 로봇처럼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어쨌든 빨리 문 열어요. 안 그러면 강제로 처넣을 테니까. 경찰을 부러러서 
소란죄로 감옥에 처넣겠다구!"
  그녀가 경멸을 담은 눈길로 노려보자 그는 힘없이 어깨를 떨궜다.
"젠장, 빌어먹을."
  마침내 호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낸 페럴리는 비트거리며 그것을 꽂으려 했다. 
로라는 잽싹게 카드를 배앗아 문을 열고 그를 안으로 힘껏 밀어넣었다.
  객실은 마치 폭풍이 지나간 뒤끝 같았다. 예술기념관에서 돌아와 칵테일 
라운지로 내려가기까지 불과 한 시간 사이에 페럴리와 여자 두사람이 늘어놓은 
옷가지와 신발들이 사바으로 흩어져 있었고, 스카치와 버번 위스키 빈 벼들이 
탁자와 침대에 마구 뒹굴고 있었다.
  "이런 방으 좋아하시는구만. 당신은 내 호텔에 묵을 자격도 없는 인가이야. 옷 
벗어요. 브리트!"
  그녀느 아주 단호히 명령했다.
  "옷 벗고 침대로 가서 푹 자요. 이따 전화해서 저녁 할 건지 물어볼 때까지 
조용히 자요. 여자 친구는 내가 알아서 돌볼 테니까 걱정하지 말구."
  셔츠 단추를 좌르르 뜯어내며 브리트는 졸린 듯한 목소리로 줄얼댔다.
  "또을 싸든 밥을 먹든 네까짓 게 무슨 상관이야."
  옷을 벗는 그의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로라는 직접 그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조용히 그녀의 손길을 받던 브리트가 한번 휘청거린 순간, 그의 손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젖가슴을 더듬거렸다.
  로라는 마치 파리를 쫓아버리듯 그의 힘없는 파을 옆으로 쳐냈다. 그는 아무 
저항도 하지 않았다. 욕구 때문이라기 보다는 습관 때문인 것 같았다.
  "자요, 브리트."
  그녀가 문을 닥기도 전에 브리트는 심하게 코를 골기 시작했다.
  저게 미국인의 자존심이라구? 저런 게 영웅이란 말이지. 엘리베이터로 
내려가며 로라는 고개를 흔들었다. 분노가 사그라들긴 했지만 뛰는 가슴은 
여전했다. 커리어와 함게 뉴욕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미국인들에게 굼을 
심어주는 컨트리 영웅이었다. 그러나 지금 침대에 누워 잇는 그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듯한 가여운 폐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모든 얼굴 뒤엔 다른 면이 잇게 마련인가봐. 감춰진 부분이 나타날 때까지 
그렇게 어딘가에 숨어 있겠지. 로라는 로비에 도착 할 때까지 계속 그런 생각에 
잠겨 있었다.
  폴의 사진 속에서 모래성을 쌍고 있던 세 명의 아이가 떠올랐다. 평화로운 
장면이었으나 그 속에도 싸움은 있었다. 서로 원하는 깃발을 꽂기 위한 싸움은 
있었다. 서로 원하는 깃발을 곶기 위한 싸움. 폴이 만약 브리트를 찍었다면 
분명공인의 영광 뒤에 숨겨진 다른 면을 표현했을 것이다.
  그녀는 폴의 생각이 사라질 때까지 팔짱을 낀 채 혼자 서 있었다. 끝났어. 
결혼했잖아. 우린 이제 끝난 거야. 나도 새 인생을 찾아야 돼. 사랑은 끝났어. 
끝났다는 걸 왜 받아들이지 않는 거야. 왜?
  손님 한 사람이 그녀와 부딪히기 직전에 몸을 비트는 것을 보며 그녀는 
엘리베이터 앞 로비에서 살짝 비켜섰다. 상념에서 벗어나며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어머, 죄송합니다."
  "천만에요."
  뉴욕 브로드웨이의 영화제작자였다.
  "오히려 영광입니다. 이렇게 마주쳐야 개인적으로 축하를 할 수 있잖습니까? 
정말 멋지게 꾸몄어요. 훌륭해요."
  그녀는 그에게 미소를 보냈다. 폴 생각에서 멋어나게 해준 상대가 고맙기만 
했다. 칭찬은 털코드 같은 거야. 따스하고 멋진 거지. 로라는 완전히 새로운 
기분으로 로비를 가로질러갔다.
  "아주 잘했소."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두르며 커리어는 흡족한 미소를 보냈다.
  "지니가 얘기해주더군. 미안해요. 같이 못 올라가서."
  그래, 내가 속할 곳은 바로 여기야. 이 호텔에서 웨스와 함께 열심히 일하며 
살아가는 거야.
  "어디 있었어요?"
  "주방에 문제가 있어서. 별 건 아니었어."
  "무슨 문제요?"
  "별 문제 아니라니까. 주방장이 기분이 좀 안 좋았나봐. 그래서 얘길 좀 했지. 
그래, 페럴리를 방까지 무사히 데려간 거요?"
  "네, 지금 자요. 오늘밤 쇼무대 좌석 좀 다시 손봐야 될까봐요. 페럴리 옆에 
있던 여잘 혼자 둘 순 없잖아요."
  라운지로 들어간 로라는 일시에 몰려드는 손님들에게 둘러싸였다. 페럴리의 
안부를 묻고 그를 조용하게 데리고 나간 로라를 칭찬하는 소님들로 라운지는 
한동안 소란스러웠다.
  로라는 손님들에게 일일이 예를 표한 뒤 벽나로 옆에 앉아 있는 로자의 
의자팔걸이에 살작 걸터앉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세 분이 이렇게 모여 앉아 잇는 걸 보니까 보기 
좋은데요. 서로 서먹한 기분은 겠어요?"
  "벌써 친구 다 됐는걸. 소문에 대해선 꽉 잡고 있어. 지니 말야."
  켈리는 눈을 반짝이며 신나 했다.
  "아까 멍멍개 사건보고도 눈 하나 깜짝 안하더라구. 그자가 그러는 거 벌써 몇 
번 봤대."
  "미리 알았다면 좋았을 걸 그랬네요. 재갈이랑 개줄 사놓고 대기하고 있었을 
것 아니에요."
  "그런 거 없이도 잘 하던데, 뭘. 개 길들이는 조련사처럼. 그나저나, 로라. 
자기도 우리처럼 파티를 즐기기나 하는 거야?"
  "그럼요."
  로라는 뜻밖의 질문이라는 듯 눈썹을 가운데로 모았다.
  "왜요? 안 그런 것 같아요?"
  "아름답지만 가라앉아 있는 것 가아서. 당당하게 보여야지, 여기 모인 
남자들을 다 행복하게 만들었으니 승리감을 느낄만 하지 않아? 저 삶들 얼굴 좀 
봐. 얼마나 행복해하는지. 뭘로 저렇게 만들었을까. 그 비법이 궁금하다니까."
  "그걸 알면 저도 좋겠어요. 너무 성급헤게 결론 짓지 말아요. 아직 토요일 
다섯시밖에 안됐어요. 저녁만찬도 남았죠. 그 다음엔 셰 프로마주에서 자크 브렐 
쇼도 봐야 하고 그 다음엔 내일 브런치가 있어요."
  "다 잘 해낼 거야, 내 말 믿어. 모든 게 다 완벽하게 돌아가고 있어. 처음을 
보면 나중을 다 알 수 있지."
  로라느 라운지를 둘러보았다. 지니는 그런 그녀를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았다. 
모두가 초대받은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은 비난거리를 찾아다니는 파티객들이라고 
지니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이 새 호텔을 뜯어보기도 전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막힌 마술로 그들을 휘어잡고 있었다.
  그것은 성공적인 호텔 보수공사 때문도 아니었다. 편안하게 구며진 
내부시러과 종업원들의 완벽한 서비스 때문도 몰론 아니었다. 로라가 바로 
마술의 열쇠였다.
  그녀는 상류층 사람들과는 다른 독특한 개성이 있엇다. 이 개성이 그들에게 
매혹적인 힘을 바뤼하고 있었다. 늘 보던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로라, 하나만 물어보자."
  지니는 게속 라운지를 살피고 있는 로라에게 말을 걸었다.
  "사람들 이름 말야. 손님들 이름하고, 그 사람들 애 이름, 또 휴가 때 즐기는 
스포츠, 그밖의 사소한 것들을 한 번 듣고 어떻게 다 기억하는 거지? 그 비결이 
뭐야. 그자들하고 애기할 때마다 마치 향수를 부리듯 톡톡 그런 걸 부리잖아. 
사람 부를 때도 꼭 이름 불러가면서 말야."
  "향수를 뿌려요?"
  로라가 되물었다.
  "잔짜 향수 방울 같다니까. 로라가 그렇게 향수를 뿌릴 때마다 사람들이 코를 
씰룩거리는 것 알아? 아주 기분 좋아해. 내가 주의 깊게 봤어. 처음엔 놀란 
표정을 짓다가 나중엔 눈을 반작거려. 그럴 때 그 사람들은 곡 갓난아기들 같아. 
엄마가 변기 갖다주면서 뽀뽀해주길 기다리는 애들 말이야."
  로라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비콘 힐에 모인 사람들이 정말 그런 표정이었다고 손님들한테 말해봐요. 난 
그날로 마아해버릴 거예요."
  지니는 로라의 웃음소리에 흐뭇햇다. 내가 로라 페어차일드를 크게 웃게 
만들다니. 로라느 자애로운 손길이 필요한 어린애야.엄마 같은 여자 친구가 
필요해. 그래 나 같은 사람이면 좋겠지. 내가 도울 수 있을 거야. 아들은 
둘씩이나 있지만 딸이 없잖아. 딸처럼 이애르 돌보자.
  그녀는 그런 생각을 하며 다정하게 로라를 불렀다.
  "걱정할 것 없어. 호텔 잘될거야. 진심이야. 저 삶들한테 이렇게 말해볼까? 
페르시아 왕국에 모인 왕족 같다고 말이야. 그럼 이 파티 그가 나자마자 돈 
싸들고 여기로 오겠지?"
  "그럴 것 같은데요."
  말하는 중간에 로라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롤로스 재라노가 왔어요. 테길라(멕시코 소주:역자 주)를 원할 거예요. 그 
다음엔 석유 얘길 나눌 사람 아니면, 침대에서 같이 잘 여잘 구하겠죠. 앞의 
두가지는 내가 구해볼 수 있을 것 같은데나머진 잠깐 실레하겠어요."
  "오분이라도 좋으니까 좀 쉬어."
  로자는 로라에게 애원하듯 말했다.
  "다리에 불나겠다. 사장이 해고할까봐 그래? 로라 같은 지배인이 또 어디 
있을까봐. 좀 쉬어라 응?"로자에게 사실대로 말하지 못하는 것에 또 한 번 
죄책감을 느끼며 로자는 그저 웃어보였다.
"누가 해고될까봐 그런데요?"
소근거리며 로라는 로자의 뺨에 부드럽게 키스했다.
"내 맡은 바 직분을 다하는 겁니다. 로자 주방님 가르치신대로요. 죄송해요 빨리 
갔다 올게요."
세 사람은 세라노 옆으로 다가가는 로라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로라는 그를 
시드와 아멜리아 라프톤 탁자 옆으로 안내했다. 지니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시드와 라프톤은 최근에 석유탐사 장비회사에 투자를 했을 거예요. 
오클라호마하고 텍사스에 은행을 열댓개 가진 재벌이죠."
  그녀는 잠시 눈을 돌려 켈리와 로자를 바라보았다.
  "카를로스는 기름 얘기할 사람을 찾고 있는 게 틀림없을 거예요. 여러 
각도에서 찾겠죠. OPEC, 워싱턴 등등. 그는 유전만 갖고 있는 기름 
장사꾼이라는 말을 듣기 싫어해요. 그렇게 높은 사람들을 만나고 다녀야 진짜 
유식한 티가 난다는 생각이겠죠. 로라는 정말 똑똑해."
  계속 로라를 바라보고 있던 지니는 그녀 곁으로 다가서는 커리어를 보며 두 
사람이 훌륭한 한 쌍이 될 거라는 생각을 했다.각기 다른 면에서 모든 사람 
위에 군림하는 커플이었다. 커리어는 부드럽고 온화하고 부유하고 강한 남자로 
모든 여성들의 이상향 이었다.
  아마 로라도 그럴걸. 허긴 괜찮게 생각 하니까 같이 있겠지.여자에게는 기댈 
수 있는 강한 어깨가 필요해.
  지니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 도움이 필요해. 저애를 돌봐줘야겠어. 시카고에 
자주 와 있어야겠는걸.
그때 호텔 관리인 한 사람이 당황한 얼굴로 로라와 커리어에게 다가왔다.
  "이런 말씀드리게 돼서 죄송합니다. 주방장이... 아주 심각한 것 같아서..."
  로라는 관리인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라운지 쪽으로 빠르게 걸어가고 있었다. 
커리어와 관리인은 앞서가는 그녀를 재빨리 뒤따라갔다.
  "내가 말해서 잘 돌아가는 줄 알았는데 생각보단 고집이 센 사람 같구만. 
하지만 걱정 말아요. 내가 즉시 가서 처리할 테니까."
  그녀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내가 처리할게요, 웨스. 아까 뭔지 확실히 얘기해줬으면 했는데. 나한테 제일 
먼저 말이예요."
  그녀는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관리인에게 강한 어조로 말했다.
다음번엔 제일 먼저 로라 페어차일드를 찾아오라는 무언의 압력이었다.
  "나 혼자 그 사람하고 얘길 나눌테니 그리 아세요. 누가 책임자인지 직원들이 
모르고 있다면 위계질서가 어떻게 될지 당신도 이해하겠죠."
합병이나 기업 이윤에 관해 귀재였던 커리어는 인간관계에 관한 한 로라가 더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필요하면 당장 달려갈테니 어서 가봐요."
  "고마워요."
  식당을 향해 종종 걸음치던 로라는 금빛과 크리스털이 빛나는 샹들리에 
밑에서 밍크코트를 입고 모델처럼 맴돌고 있는 마리나 애플바이와 마주쳤다.
화려한 밍크코트 탓에 로라는 바로 코앞에 다가갈 때까지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누나."
  어디서 나타났는지 클레이가 로라에게 다가왔다. 어느새 왈턴가로 통하는 
대형 유리문 밖에 나가 있는 마리나를 바라보며 클레이는 연신 싱글벙글 입을 
다물지 못했다.
  "크리스마스 선물이야. 끝내주는 모델같지?"
  "훔쳤니?"
   로라는 무뚝뚝하게 물었다.클레이는 버럭 소라질렀다.
  "빌어먹을! 무슨 얘길 그렇게 해? 내가 누군데? 누나 동생이야. 정신나갔어? 
정신 나갔어? 이 호텔 부지배인이라구. 어떻게 그런 소릴 할 수 있어?"
  "내가 물었잖니, 훔쳤냐구?"
  "젠장할, 날 그렇게 못 믿겠다면..."
  "돈이 어디서 나서 저 코트를 샀냐구?"
  "벌었지."
  "이 호텔에서? 내 밑에서 일하면서 벌었다구?"
  "나라고 땡전 한푼 없을까봐. 그동안 저금해놓은 돈이 있었어.내 통장에 얼마 
있는지 누나가 어떻게 알아?"
  "월급이 얼마진 안다. 네가 일자리 없는 마리나와 살려고 세낸 집 월세금도 
알구. 그나마 여태껏 내가 내주지 않았니? 그뿐이면 다행이게 네가 어느 곳에서 
옷을 사대는지도 알아. 돈덩어리, 금덩어리지 그게 옷이냐? 저 코트 어떻게 산 
거야? 돈 어디서 났냐구?"
  그러자 클레이는 어깨를 들썩거렸다.
  "재수가 좋았거든."
  "포커판?"
  "비슷해. 블랙잭으로 바꿔서 해봤더니 지겹지 않고 좋더군."
  "큰판 벌였겠구나. 밍크코트를 딸 만큼! 그 만큼 잃을 수도 있었겠지. 그게 
얼마나 위험한 건데,세상에!"
  "마리나가 좋아하는 걸 사줄 수 있다면 그런 위험쯤이야..."
  "정신차려, 클레이. 마리나는 결코 널 놔주지 않을 사람인 걸 모르니.너하고 
결혼하려고 해."
  "글쎄, 아마 내가 싫증나지 않게 하는 것도 마리나한테 큰 모험일걸. 벌써 
지겨운 걱 같기도 하구."
  "그래? 웬일이니. 네가 마리나한테 싫증을 다 내구."
  "누나한텐 아니야. 누난 진짜 대단한 여자니까.대단한 일을 하는 여걸. 내가 그 
대단한 일에 일조를 하고 있다는 거 아니겠수. 하지만 조심해야 돼. 그리 쉽지 
많은 않다구. 남의 호텔에서 일하다,직접 내 호텔이란 것을 운영해봐. 까딱하면 
벼랑이야. 내말 무슨 뜻인지 알지?"
  난 오웬의 꿈을 찾기 위해, 내 미래를 세워보기 위해 도박을 하고 있지만 넌 
돈과 순간적인 흥분 때문에 도박판을 드나들고 있구나, 눈빛으로 동생에게 이런 
말을 하던 로라는 잠시 후 생각을 바꿨다.
  그게 어때서? 스물네 살에 직장도 버젓이 있겠다, 여자도 있고, 친구들 사이에 
인기도 좋잖아. 나한테도 할 만큼 하는 것 같은데 단지 내 식대로 사리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비난 할 수는 없지 않을까?
  이애도 나름대로의 갊이 있겠지.그건 내가 참견할 수 없어. 어머니도 아닌 
내가 다 큰 성인한테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권한은 없을 거야."
  "맞은편에 앉은 상대가 낯선 사람일때는 아예 하지마. 포커든 블랙잭이든 낯선 
이와 하는 건 위험하니까."
로라는 말을 마치고 살짝 웃어 주었다. 클레이는 거의 살았다는 표정으로 흰 
이를 드러내며 따라 웃었다.
  "좋았어, 누나  이럴 줄 알고 내가 사랑하는 누나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비해놓지 않았습니까! 좀 이르긴 하지만 받아주십시요!"
클레이는 은빛으로 빛나는 타원형 상자를 하나 꺼내 들었다.
  "지금 열어봐야 돼. 알았지? 선물 받은 여자들이 나 없을 때 열어보겠다고 할 
때가 제일 싫어."
  은빛종이를 편 그녀는 살며시 뚜껑을 열었다. 금색이 찬란한 그물형 벨트였다. 
그녀의 밤색 머리칼과 조화를 이루는 버클이 호랑이 눈 모양으로 긴 타원형을 
그리고 있었다. 알리슨에게 옷 입는 방법을 배우고 난 뒤 과감하게 사용하던 
액세서리와 한 쌍을 이루는 종류였다.
  그녀는 발끝을 세워 클레이 뺨에 키스했다.
  "너무 예쁘다, 클레이.여태껏 본 벨트 중에서 제일 멋있어.고맙다.사랑한다."
  "우리 열심히 뛰어보자,누나.가문의 명예를 위해!"
  그의 얼굴에는 기쁨이 넘실 거리고 있었다.
  "나도 사랑해 누나.파티는 어때?잘돼가나?"
  "아주 만족해. 주방장이 밀썽을 피운다는 소리가 있는데,그건 내가 알아서 
힐께.오늘밤 리무진 스케줄 좀 다시 확인해볼래?
열시 십오분 전까지 대기하라고 일렀는데 다시 덩확히 살펴봐. 셰 프로마주    
쇼는 열시 삼십분에 시작이다. 아, 그리고 이구역 파출소에 다시 전화를
해야겠다. 열시 십오분 전부터 열두시 삼십분 사이에 우리가 그 구역으로 왕
복할 테니까 다른 차 진입 좀 어떻게 해달라고 말이야, 다시 한 번 확실하게 
해둬."
  "누난 천재야, 기막힌 천재."
  식당 쪽으로 걸러가면서 로라는 자신도 모르게 킬킬 웃었다. 꽤나 괜찮은 
동생이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화가 났다가도 금방 사랑할 수밖에 없는 매력을 
지닌 클레이었다. 
  "엔리코 가리발디가 창조해낸 작품에 훈계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
  스테인리스가 불빛에 번쩍이는 주방으로 들어선 순간 로라는 천둥 같은 
고함소리에 깜짝 놀랐다. 주방장 엔리코 가리발디의 고함소리였다.
  "교황고 왕족의 주방장인 엔리코 가리발디의 보죠상피뇽(버섯을 곁들인 
송아지 안심구이 : 역자 주 )보지 못하는 빌어먹을 경리놈이 감히 내 솜씨를 
혓바닥에 올리다니!"
  로라는 아주 엄한 얼굴로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목소리만큼은 부드러웠다.
  "커리어씨는 경리놈이 아니고 국제적으로 이름 난 은핼가예요, 엔리코."
  에니코 가리발디가 교황과 왕족 곁에 얼씬한 적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녀는 그냥 넘겨버리기로 했다. 
  "누가 훈계를 했다고 그래요. 우리 모두 에리코 작품을 얼마나 칭찬하는데요. 
엔리코 때문에 우리가 호텔을 운영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문제가 
뭔지 나한테 차근차근 얘기해봐요."
  "돈!"
  주방이 쩌렁쩌렁 울릴 만큼 큰 목소리였다.
  "빌어먹을 돈 때문이지. 두 시간 전애 그 관리인놈이, 빌어먹을 프랑스놈이 이 
위대하고 전능하신 엔리코하고 한 달에 똑같이 월급 받는다고 했소.
그 놈은 딥을 받지만, 난 주방에서 팁을 못 받잖소."
  "무슨 얘긴지 알았어요."
  눈치만 살피고 있는 수프와 빵 담당 요리사가 옆자리에 있는 것을 의식하며 
로라는 차분하게 엔리코를 달래기 시작했다.
  "엔리코, 월급문제는 이런 데서, 더군다나 이렇게 바쁜 와중에 다룰 문제가 
아니예요. 손님들이 다 떠난 다음에 내 사무실로 찾아오면 그때 가서..."
  "나는 못 기다리겠소. 지금 당장 이야기합시다."
  "나도 못 기다려요. 딴 소리 말고 월요일 내 비서를 통해서 시간 약속하도록 
하세요."
  딱부러지게 얘길 끝낸 뒤 등을 돌리려는 그녀에게 엔리코는 계속 목청을
돋웠다. 
  "난 그만 두겠소!"
  "월요일 얘기하자고 했잖아요, 그때가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보겠어요."
  당황해하는 그의 표정에서 로라는 그가 비콘 힐에 계속 머물고 싶어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냥 돈 문제요. 나는 가난하고 배고프게 살아소. 로라도 배고프고 가난하게 
살았으니 날 이해할 수 있을 거요. 다른 호텔친구들한테 들었소. 가난하기 
때문에, 배가 고프기 때문에 물건 훔치다 감옥에 들어갔고, 살던 사람들 재산 
훔친 것..."
 "닥쳐요!"
  로라의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손톱 끝이 손바닥을 파고 들었다. 
친구들한테 들었다? 누가 그걸? 삼년 전 일을, 그것도 신문에서 본 이야기를 
아직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니.
  모든 것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다. 고거를 들추어내어 흥정하려는 자는 
누구든 용서할 수 없었다. 누가 뭐래도 호텔은 그녀의 집이었고, 그녀의 아늑한 
가정이었다. 어떠한 일이 닥쳐올지라도 반드시 지켜내야 할 보금자리였다. 
 "뭘 들었는진 모르지만 그건 다 거짓말이야. 알아들어? 못 알아들어도 
상관없지. 여기서 당장 나가. 당장 꺼져!"
 "잠깐만, 얘기로 감정을 풉시다."
 "나가! 이 개자식. 네가 감히 날 협박해. 나가 ,여기서 당장 나가."
  그녀는 분노 때문에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돈은 보내줄 테니까, 여태것 일한 만큼 줄 테니까 지금 당장나가! 넌 
해고야."
 "내가 필요할걸, 여덟시에 저녁은 어떻게 하려고..."
  그녀는 눈을 부릅뜬 채 주방 구석에 있는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꺼지라고 했지! 일분내에 여기서 사라지지 않으면 경찰을 부른다. 내 말 
알아들어? 널 공갈협박죄로 잡아 넣겠다구!"
 "나쁜 년!"
  그는 거칠게 내뱉으며 주방을 나갔다.
  분노와 충격으로 몸을 떨고 있던 로라는 구석에 피해 있는 두 사람에게 
고갯짓을 했다.
 "나갔는지 확힌해보고 와요."
  다람쥐처럼 라카룸으로 달려간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쭈빗쭈빗 로라 앞으로 
돌아왔다.
  로라는 차츰 숨을 고르게 쉬고 있었다. 얼굴빛은 아직 벌겋게 달아 있었지만 
조금 전의 격정은 어느 정도 가라앉아 있었다.
  저녁 준비할 수 있어요? 어디까지 하다 만 거예요?"
  로라는 차분하게 물었다.
 "후식 담당이라서 그것밖엔 못하는데요."
  빵 담당에 이어 수프 담당도 고개를 흔들었다.
 "전채를 꾸미기엔 저도 좀 힘든데요."
 "하지만 몇 가지 끝내놓은 건 있어요."
  빵 담당이 재빨리 말했다.
 "첫코스로 세 가지 파테가 준비됐고, 가리비 크림 수프하고 소스도 됐습니다. 
그 뒤엔..."
  그는 못마땅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어께를 들썩거렸다.
 "엔리코가 뭐든 구렁이같이 감추는 통에 배워둘래도 그럴 수가있어야죠.
비법인지 뭔지 자랑만 실컷하면서..."
  그녀를 뜨겁게 했던 작자가 이제는 그녀를 서늘하게 만들고 있었다. 저녁을 
대접해야 할 이백여 명의 손님들은 함빡 미소를 가지고 돌아가 친구들에게 
최고의 호텔, 편암함과 세련의 극치를 이룬 세게 제일의 호텔이 비콘 힐임을 
홍보할 사람들이었다.
 "후식이나 철저하게 준비해요."
  그녀는 빵 담당에게 눈을 돌렸다.
 "그리고 샐러드는 당신이 만들도록 해요.샐러드 만들 줄 아죠?"
 "아, 그럼요."
 "앙트레(식사 맨 처음 전채요리로 먹는 음식 : 역자 주)가 뭐였는지 
알아요?"
 "송아지 안심에 버섯을곁들인 데다 크림소스를 얹었나? 빨간 고추 튀김..
글쎄...볶음밥 하고 옆에다 장식해서 낼 거라고 했는데..."
  로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될 수 있는 한 빨리 돌아올게요."
  거의 뛰다시피 해가며 그녀는 로비를 가로질렀다. 커리어를 찾아야만 
했다.누군가를 마술사처럼 불러낼 수 있는 능력자 커리어라면 저녁을 세 시간 
앞두고서라도 주방장을 구할 수 있을 것같았다. 
  "아니, 그가 못한다면 친구를 통해서라도. 오, 세상에, 내가 망쳤어, 내가 다 
망친 거나 같애. 모두 다 좋았는데. 다들 얼마나 만족해했는데. 이젠 큰일낫어, 
사람들이 나가서 분명 그럴 거야."
  로라 페어차일드는 호텡을 운영할 자격이 없다. 뉴욕 슬럼가 다 쓰러져가는 
아파트에서 살던 여자가 별수 있겠어? 도둑놈 주제에. 영원한 실패자야.
  종업원이 크리스마스 선물꾸러미를 분주히 포장하고 있는 탁자 옆에 잠시 선 
채 로라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라운지 안을 들여다 보았다. 잔잔한 웃음소리와 
담소가 간간이 밖으로 흘러나왔다. 몇몇 손님들은 저녁 만찬용 옷을 갈아입기 
위해 자릴 일찌감치 뜨고 있었다. 벽난로 옆에선 캘리와 로자가 너무나 편안한 
자세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캘리를 보며 웃다가 입구 쪽으로 눈을 돌린 로자는 로라의 잿빛 얼굴을 
바라보며 웃음기를 거두어들였다. 로자의 눈길을 따라고개를 돌렸던 캘리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즉시 의장에서 일어나 로라에게 달려갔다.
 "무슨 일이니?"
 "누가 죽었어?"
  로자와 캘리는 연달아 질문을 던졌다. 로라는 머리를 흔들었다.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로자를 일자리로 내몰 순 없었다 특별하게 모신 손님을.
 "왜 그렇게 머리를 흔들어? 아무도 안 죽었단 소리야 뭐야?"
  답답해하는 캘리에게 로라는 차분하게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지금 주방장을 해고하고 오는 길이에요. 제일 중요한 때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날 화나게 만들었어요. 그래서... 그 길로 내쫓아 버렸어요."
 "그 성질 또 나왔구만."
  로자는 고개를 까딱까딱 했다.
 "내가 경고했지. 로라, 응?"
  로자는 뭔가를 생각하는 누치였다.
 "그래서 고개를 흔든 거구나. 믿지 못할 직원 때문에."
 "믿을 건 하나도 없어요. 책임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하곤 일할 수 없어요 
웨스에게 주방장을 구할 수 있는지 물어봐야겟어요."
 "어떻게 된 사정인지 알겠다."
  로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이 여덟시라 그랬지?"
 "네.늦출 수는 없어요. 열시 삼십분 쇼 때문에 열시 정각엔 늦어도 여길 떠나야 
돼요."
  로라는 초조한 기색으로 라운지 안을 살폈다.
 "여기 있는 줄 알았는데. 웨스는 분명 누군가 알고 있을 거예요.늦기 전에
빨리.... 준비는 거의 됐는데 문제는 그걸 완벽하게 세팅해서 차릴 사람이
없어요."
 "내 생각도 그래."
  로자는 빛나는 눈으로 다시금 켈리를ㄹ 바라보았다. 로자와 캘리 의 눈이 
마주쳤다.
 "그참 이상하네." 
  켈리는 노래하듯 리듬에 맞춰 말했다.
 "나도 그 생각 했는데. 아직까진 확실히 어떻게 조인트 리사이틀을 하자곤 
못하겠지만, 대강 틀은 잡힌 것 같애. 우리 두 사람이 아무래도 힘 좀 써야 할 
것 같다구.로자 말로는 프로급 주방장이라고 자화자찬 하시던데 이런 때 
소질 한 번 발휘하시는 거지,뭐. 난 또 누군가? 나하고 함께 일해봐서 알지? 
명령 내리는 거야 나 따라올 삶 없지. 우리 둘이서 슬슬 노래 불러가면서 
제시간에 저녁 댈 테니까 걱정하지 마. 로라를 이렇게 멋지게 돕다니. 진짜 
신나는데."
  로라는 켈리의 팔에 손을 얹었다.
 "고마워요. 하지만 여기 즐기러 오신 거지, 일하러 오신 건 아니잖아요?"
 "내가 원하는데 왜 ㄱ래? 내가 원해서 하는 일인데 누가 하라마라 할 수 
있어?"
  로자는 어깨를 들썩거리며 말했다.
  "그래도 안돼요. 더군다나 집안 식구를 위해  일한 것과는 달라요. 여긴 
이백여 명이 기다리고 있는 호텔주방이잖아요. 한꺼번에 어떻게..."
 "나도 알아요, 아갔. 이 몸도 잘 안다구."
  로자는 그녀의 빰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하지만 날 좀 깔보는 덴 실망했어. 내 실력을 아직 모르시는구만, 저기 
저안에 있는 사람들 말야, 내가 만든 요릴 먹어보고도 나한테 인사도 없이 
멀뚱거리는 사람도 있다니까. 주방장하고 인사를 나누면 어디가 덧나는지. 
어쨌든 이백 아니라 삼백이라도 끄떡없을 게다. 케이프 코트 여름별장에서도 
이백을 치러냈는데 왜 못해? 메뉴가 뭐니?"
  "아무래도 내 생각..."
  "딴 얘기 할 것 없고 메뉴만 얘기하라구요, 아가씨."
  "버섯 곁들인 송아지 안심과 붉은 고추 튀김이에요."
  "괜찮은데, 그래도 그 주방장 멍청이는 아니 것 같다. 아주 잘 골랐어.뭐라고 
할까. 간단하면서도 인상적인 메뉴야.곰보버섯에 송아지 안심이라...내게맡겨라. 
한 손만 갖고도 할 수 있어. 아니, 눈에다 안대하고도 해낼걸. 펠릭스와 레니 
파티에 온 사람들이 얼마나 내 요릴 칭찬했는데, 그걸 못 믿겠다면 딴 사람 
찾아봐."
  "그래 , 우리한테 맡겨, 로라. 아니 맡겨야 돼. 왠지 알아? 아무말썽없이
자크 브렌쇼를 볼 수 있으니까. 저녁이 제시간에 나와야 거기 갈 것 아냐?"
  "두 분한테 뭘 떠맡기고 있어?"
  로비 쪽에서 불쑥 나타난 커리어가 로라의 등뒤에서 짓궂은 음성으로 물었다. 
  "주방을 우리한테 맡기는 문제를요."
  켈리는 로라가 설명할 시간도 주지 않고 곧장 커리어에게 대답했다.
  "주방장이 가버렸는데 로라만 허락하면 우리 둘이서 주방을 맏을 생각이에요."
  "가버렸다니? 간다고 내버려뒀단 소리요?"
  "가버린 게 아니고 해고시켰어요. 미안해요, 웨스.그자가... 아니, 그건 
그만둬요. 얘기할 필요도... 할 수 없었어요. 어쨌든 일이 그렇게 됐기에 
당신에게 누구를 좀 시간제로 쓸 수.."
  "내가 알아서 하게소. 삼십분내로 데려오리다."
세 사람 모두 그가 화를 삭이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식당 몇 개가 최근 문을 닫았는데 그곳에 있던 주방장들을 다알고 
있으니전화하면 달려올 거요, 정확히 삼십분 안에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테니 걱정 말고 라운지로 들어갑시다."
  "못 오면요? 시내 밖에 있거나 독감 때문에 못 오면 어떻게 할거예요?"
  켈리의 질문에 커리어는 날카롭게 대꾸했다.
  "그럼 다른 사람을 찾으면 됩니다. 여긴 호텔이지 대학교 여학생 클럽이 
아니예요. 우린 프로들만 고용합니다. 믿을 수 있는..."
  "공갈 협박하지 않는 프로라면 더욱 좋게죠."
로라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뭐라고?"
  "아니예요. 아무 일도 아니에요. 난 마음 정했어요, 두 분이 도와줬으며 해요. 
지금 누굴 고용한다고 해도 캘리보다는 못할 거예요. 로자도 마찬가지예요. 
엔리코가 하다만 요릴 완벽하게 끝낼 수 있다고 했어요. 두 사람 다 누구보다도 
믿는 사람들이니까요."
  "말 한 번 시원하게 잘하네."
  로자는 흐믓한 표정으로 로라를 보았다.
  "커리어씨. 계속 여기에 날 잡아둘 거요? 빨리 가서 일해야죠. 로라가 
말했듯이 난 이렇게 얘기하는 것보다 일하는 걸 더 좋아 한다우. 주방에선 눈 
감고도 일할 줄 아니까 믿어보세요."
  "그건 아무래도 좋습니다. 하지만 이건 그냥 파티가 아니라 아주 중요한 
만찬이예요. 절대 망칠 순 없어요."
  "망치지 않기 위해서 이러는 거예요. 난 로자 주방장님과 캘리단톤을 믿어요. 
이 분들도 날 믿구요."
  로라는 켈리와 로자에게 두 손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두 분 다 필요한 짓 있으면 그때그때 서슴지 말고 말씀하세요. 
가서 돕고 싶지만.. 안되겠어요. 여기서 할 일도 많고 해서. 정말 감사해요. 
얼마나 감사한디..."
   커리어와 함께 로라는 식당 쪽으로 사라지는 두 사람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재미나게 보이는 한 쌍이었다. 떡벌어진 어깨와 큰 키에 사자처럼 흑발을 
휘날리며 성큼성큼 걷는 켈리와 목주변에 철사처럼 꼬불거리는 
회색머리칼을내린 채 고개를 바짝 치켜올 리고 종종 걸음으로 켈리를 따라가는 
로자는 서로 뭔가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다.
  "잘못 행각한 거야."
  머리어는 로라에게 불만을 표했다. 차가운 목소리였다.
  "사업은 이렇게 하는 게 아니야. 아무리 친한 친구 사이라도 이러는 게 
아니라구. 두 사람이 당신 파티를 망쳐놓으면 그 소중한 우정도 단숨에 끊어질 
텐데..."
  "나는 두 사람을 믿어요, 웨스."
  "그건 믿음이 아니라 맹목적인 거야.가릴발디를 도대체 무슨 이유로 해고한 
거요?"
  "내가 도둑질을 했고,감옥에 갔다는 얘길 들었..."
  "공갈협박했다구?"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멍청이 녀석이구만. 하지만 그렇다고 만찬을 세 시간 남겨놓고 해고해버리면 
어쩌자는 건가?"
  그녀는 대꾸하지 않았다.
  "OWL 개발사란 이름을 쓰자고 했을 때 사업에는 감정이 없는 거라고 
얘기했잖소. 사사로운 개인 감저이나 느낌 같은 건 이익될 게 하나도 없소. 
사업할때 그걸 분리시키지 못하면 기다리는 건 파멸뿐이요."
  "요즘 난 내 감정을 조절하면서 살고 있어요, 하지만 중요한 일이 있을 
땐아니예요. 언젠간 당신도 날 신뢰할 거예요. 내 말 과 행동을..."
  그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말싸움하고 있을 시간도, 장소도 
아니었다.로자가 만든 저녁이 끝난 뒤에도 시간은 충분했다. 별 바보 같은 짓 다 
해보네. 커리어는 로자에게 만찬파티를 맡기고 있는 자신이 바보스럽게만 
여겨졌다. 평생 있을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것 같았다.
  만찬과 야간 쇼를 위해 옷을 갈아입으러 객실로 올라가는 손님들이 현관 앞에 
서 있는 두사람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들은 가구, 서비스, 음식, 특히 
부드럽게 진행된 주말 프로그램에 대해 한결같이 찬사를 늘어놓았다.
  "정말 기막힌 호텔이에요. 이런 덴 처음이에요."
  아멜리아 라프톤이 고개를 연신 주억러리는 남편 시드에게 환호성을 질렀다.
  "모든 게 다 매력적이요."
  카를로스 세라노가 로라의 손등에 키스를 하며 은근하게 속삭였다.
  "최고 중에 최고예요."
  이탈리아 디자이너 플라비아 구아르네리의 찬사였다. 손님들이 모두 객실로 
올라간 뒤 커리어와 로라는 텅 빈 라운지를 지키고 있었다.
  "삼주 내내 단둘이 있을 시간이 없었는데, 월요일부턴 며칠 쉴수 있겠지. 
세인트 토마스에 예약을 해놨어."
  "난 안돼요. 미안해요, 사람들이 밀려올 거예요. 플라비아도 다음달 울티모 
패션쇼를 여기서 연다고 했어요."
  "직원들은 뒀다 어디다 쓰게? 당신 동생도 있잖아. 당신이 여기 있을 필요가 
어디 있다고 그러나."
  "필요할 때마다 있어야죠. 일이 막 시작되려는데 그걸 두고 쉬러가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당신 할 일 많다면서 다 끝냈어요?"
  "그동안 나 혼자 있는 시간이 얼마난 많았는데. 그대 다 끝냈지. 밤마다 
나혼자서 생각하고 다 끝냈다구. 빈 침대에서."
  "미안해요. 너무 일만 하고 살았나봐요. 며칠만 여유를 줘요. 빨리 일 끝내고 
정상으로 돌아갈 테니까."
  "정상으로 돌아가도 멀리 여행 갈 수 있을 것 같진 않은데."
  "봄이 오면 갈 수 있겠죠."
  그녀의 마음을 바꾸기 위해 무슨 말인가를 거내려던 커리어는 미소만 짓고 
말았다.
  "옷 갈아입어야 할 텐데 같이 올라가지 않겠어?"
  "곧 갈께요. 먼저 가세요."
  커리어가 엘레베이터로 향하는 동안 로라는 그를 위해 스케줄 을 조금 바꾸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조금만 그에게 시간을 내준다면 갈등을피할 수 
있을 것이다.
  24시간 그녀를 사로잡은 것은 시카고 비콘 힐의 갈등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더 큰 꿈을 쫓고 있었다.커리어에게 아직 말하지 않았지만 오웬의 나머지 세 
호텔과 그 호텔들을 새롭게 변신시키기 위해 그와 굼꿨던 계획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돈을 어디서 구해야 할지, 세 호텔을 매입하기 위해 얼마나 오래 
기다려야 할지 정확히 알 길은 없었으나 반드시 그 꿈을 이루겟다는 
결심이었다. 급하기로 소문난 펠릭스가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들을 팔아버릴지 
모른다는 생각이나, 세 호텔을 정식으로 매입할 수 있는 자금을 영원히 구할 수 
없다는 생각들이 그녀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이 꿈을 포기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목숨과 바꾸는 한이 있더라도.

    19장
 "경비담당 부사장 자리면 됐지."
   펠릭스는 암스테르담에서 전화를 해온 딸에게 소리쳤다. 레니는 펠릭스와 
다른방에서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한 달 전에 얘기 했지? 그때하고 똑같다. 호텔 경영진들이 보낸 보고서 말고 
그자에 대해 내가 알 수 있는 게 도대체 뭐가 있어?"
  "일년 내내 그 사람 얘기 했잖아요."
  "일년 내내 사랑타령만 했지. 로맨스가 어쩌구 사랑이 어쩌구. 우리한테   
소개를 하겠다고 하고서는 이리저리 파하다가 결국 집에 올때도 혼자 왔잖니. 
파트리샤 말이 그자도 누구처럼 재산 때문에 네게 접근했다는데, 난 절대 
그자를 믿을 수 없다. 나는 그 무엇도 약속해줄 수 없어. 한 단계씩 밟아 
올라가지 않고 그렇게 부사장직으로 뛰려는 생각부터가 영 틀려먹은 게다. 
마음에 안 들어."
  "암스테르담에서 얼마나 고생을 한 사람인데요. 그 사람보다 더 밑에서부터 
올라온 사람이 어딨다구요. 더군다나 아빠 사위될 사람 아니에요?"
  "토마스 젠슨은 동서지간인데도 더 이상 우리 회사에 자릴 달라지 않..."
  "자리가 없어서 그랬나요, 뭐. 스스로 떠난 거지."
  레니가 살며시 두 사람 대화 속으로 끼여들었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뒤, 곧바로 나갔잖아요. 그래도 대주주로 이사회에 
참석하는데 뭘 그래요?"
  "아빠, 내 부탁 꼭 들어줘야 돼요."
  세 사람 사이로 침묵이 흘렀다. 그 엄마에 그 딸이구만. 이러니 내가 사랑을 
느끼겠어.
  그러나 그는 사랑 대신 두 사람으로 인해 대단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거리를 지날 때 세련되고 날씬한 모녀에게 집중되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낄 
때마다 펠릭스는 자기 호텔 로비를 지나면서 느끼는 성취감과 비슷한 감정에 
빠지곤 했다. 남이 자기를 부러워하면 할수록 그의 가슴은 뿌듯했다. 아버지를 
능가하는 아들. 펠릭스 셀링거. 가문의 황제였던 오웬 셀링거는 결혼한 지 
십년만에 아내를 잃었지만, 위대한 펠릭스에겐 여전히 빛나는 아름다움을 지닌 
아내가 있지 않은가.
  완벽한 보스턴식 억양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아내와 딸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는 뿌듯한 성취감을 느끼고 있었다. 현재의 두 사람을 만든 것은 바로 그였다. 
풍요로운 부로 온 세계를 여행할 수 있는 세련된 여인들이 바로 셀링거 
일가였다. 둘 다 부드럽게 순종하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자신이 세운 
왕국 속의 일부였다. 아니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다.
  길 건너편 주택단지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쏟아져내리는 십이월의 눈발을 
펠릭스는 말없이 지켜보았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웨딩마치라. 처녀가 아닌게 
안됐구만.
  "너 도대체 뭘 숨기고 있는 거니?"
  그는 갑자기 전화기에다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무것도 없어요. 그 사람 훌륭한 사람이에요. 나무랄 데가 하나도 없어요. 
아무 방해 받지 않고 우리끼리만 새 생활을 오래 즐기기 위해 여기 있는 것 
뿐이니까. 이해하세요. 그동안 집안에 얼마나 골치 아프고 슬픈 일이 않았어요? 
모든걸 잊고 여기서 벤하고 사는 게 너무 좋아요."
  펠릭스는 대꾸하지 않았다.
  "이해하죠, 아빠?"
  "그래 이해한다."
  그렇게 대답한 사람은 레니였다.
  "하지만 알리슨, 그래도 결혼만큼은 적어도 몇 달 전에 얘기해 줬으면 싶었다. 
나한테만이라도 얘길 해주지. 우리 둘이 같이 기뻐했으면 더 좋지 않았겠니?"
  "알아요."
  "됐다. 이제 그 얘기 그만하고 결혼 얘기나 하자."
  레니가 화제를 돌렸다.
  "결혼식 전날 저녁 만찬을 하자꾸나, 식 끝난 다음엔 점심을 준비해야겠지. 
손님들은 어떠니? 물론 가족 중심으로 치르겠지만 여기에 있는 네 친구들 부를 
거니?"
  "아뇨, 우리 식구들만 모였으면 해요. 벤이 막무가내로 작고 조촐하게 
치르자고 해요. 식구들 앞에서 그냥 조용히 치룰 거에요. 엄마, 혹시 로자가 
전화 안했어요? 은퇴하긴 했지만 로자가 우리 결혼 음식을 맡았으면 해서 편지 
보냈었는데."
  "전화 왔었다. 네가 부탁해줘서 아주 기쁘대."
  펠릭스는 묵묵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평소 같으면 그쯤에서 
수화기를 내렸겠지만 알리슨의 목소리에 스며 있는 밝은 기운과 믿음 비슷한 
것에 그는 약간 혼란을 느끼며 전화기를 계속 들고 있었다.
  "안녕, 아빠. 다음주에 뵐게요. 아빠? 벤한테 잘 해줄 거죠? 축복해주실 줄 
믿어요. 먼저 소개를 시켜드려야 했는데 죄송해요.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둘 
다 사정도 있었고, 아까도 그랬지만 우리 둘만 있고 싶어서 그랬어요. 파트리샤 
그 나쁜 기집애가 괜한 얘기..."
  "사촌동생한테 그런 말 쓰면 못쓴다!"
  레니의 꾸중에도 알리슨은 계속 욕을 해댔다.
  "미안해요, 엄마. 하지만 그애 아주 못됐다구요. 내가 행복해 하는 꼴을 못 
봐서 그래요. 매번 별 소릴 다하면서 초를 쳐대는데 웃기지도 않아요. 자기가 그 
사람을 어떻게 안다구. 내가 왜 사랑하는 사람을 굳이 숨기고 싶었겠어요? 그게 
더 편할 거라고 생각 했었거든요. 엄마를 무시하거나 믿지 못해서 그랬던 건 
절대 아니에요. 죄송해요, 엄마. 어쨌든 이제 다 끝났어요. 앞으론 잘 할게요. 
옆에 가까이 살면서 두 분 마음 다 풀어질 때가지..우리한테 잘 해주실 줄 
믿어요."
  "여태껏 애비로서 해줄 건 다 잘 해줬다. 다음주에 보자."
  오랜만에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애교를 부리는 알리슨에게 펠릭스는 딱 
부러지게 말했다. 알리슨의 애교가 말뿐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네, 다음주에 봐요."
  전화를 끊은 펠릭스는 애걸하는 딸의 태도에 매우 흡족해했다. 그런 딸에게 
감정 변화를 보이지 않고 예전과 똑같이 행동했던 자신이 만족스럽기도 했다. 
언제나 감정을 보이지 않고 자신을 조절해가는 존재. 펠릭스 셀링거의 그런 
성격은 책상에 앉아 서류를 처리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펠릭스는 철저한 
사업가였다.
  딸의 두번째 결혼은 그에게 아무 이득도 없는 사건이었다. 가문에 부를 
더하는 일도, 그렇다고 명예를 가져오는 일도 아니었다. 오히려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체드 월콧은 지금은 비록 채무자 상태로 전락해버렸지만 긍는 
메이플라워호(1620년 102명의 청교도가 영국 사우샘프턴에서 미국으로 건너갈 
때 탄 배로 이들은 그 후 미국인의 시조를 이루며 널리 미 대륙으로 뻗어나갔음 
: 역자 주) 에 탔던 위대한 선조의 자손이라는 명예를 장인에게 선물하지 
않았는가. 월콧을 차버리듯 알리슨이 다시 그자를 차버릴 때까지 벤 가드너는 
펠릭스 가문에 얹혀진 짐이었다.
  펠릭스는 알리슨이 벤 가드너란 인물을 걷어차버리길 벌써부터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까지 딸과 아내를 봐서 공식석상에서 벤 가드너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결혼식에서 멋진 아버지 노릇을 위해 여유 있는 미소를 보일 생각도 
있었다. 오래 가진 않을 거야. 가드너라... 가드너란 인물이 옛날에도 있었지. 
별볼일 없어 내 앞에서 무너진 바보 같은 인물 말이야.

  결혼 일주일 전, 유럽에서 미국으로 날아가는 벤과 알리슨이 비행기 시간과 
거의 같은 무렵에 폴은 보스턴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결혼식을 올리기 위해 
팔개월 전 보스턴을 찾은 후 처음으로 다시 고향을 찾아가고 있었다. 비행기가 
매사추세츠 해안을 지나 주택단지 위로 하강하는 동안 폴은 변함없은 풍경처럼 
자신의 인생에도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결혼 전과 결혼 후, 그 사이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물론 약간의 외적인 
변화는 있었다. 에밀리와 함께 폴은 성공의 문 앞에 발을 딛고 있었다. 그동안 
에밀리는 《아이》지에 두번씩이나 얼굴을 선보였다. 유럽을 떠나기 직전에는 
《엘》지 패션 편집장이 새 디자이너들을 위한 신선한 모델로 그녀를 선정하여 
파리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했다는 소식을 들을 정도였다. 이제 그녀는 프로 
모델계의 샛별로 떠오르는중이었다.
  맨해튼에서 내로라 하는 여성 세 명을 주인공으로 해서 초상화 사진작업을 
했던 폴은 그 작품이 알려져 유명 광고회사로부터 전화통에 불이 붙을 만큼 
끈질긴 섭외요청을 받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탄탄대로가 훤하게 뚫린 
격이었다. 폴의 서튼 아파트에 신혼생활을 차린 이래 두 사람은 사교계에서 
가장 뜨거운 커플로 알려져 자선 무도회, 저녁 만찬, 기금마련 행상에 늘 얼굴을 
내밀어야 했다.
  저녁에는 검정타이를 메야만 하는 만찬 파티로, 낮에는 팔짱을 걷어붙여햐 
하는 업무로 정신 없던 그가 알리슨의 결혼식을 위해 시간을 낸 것은 거의 
기적이었다.
  알리슨이 벤과 크리스마스에 결혼식을 올리겠다는 얘기를 한 순간, 폴은 일년 
전 메이페어 레젠트에서 레니와 젊은 사내를 만났을 때 느꼈던 감정과 비슷한 
일종의 부러움을 느꼈다. 에밀리가 한 말도 기억했다. 취할 수 있는 것보다는 
원하는 걸 얻어야 행복한 것 아니겠어요. 그렇지 못하면 영원히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떠돌게 되요.
  난 어디다 마음을 정한 거지? 그는 일터와 사교계로 미친 듯 돌아다니던 지난 
몇 달 간을 회상했다. 사교계를 리드하는 유명인사들은 폴이 찍어낸 사진 속에 
얌전하게 들어 앉아 서재나 잡지, 광고 등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술적인 
그림과 시진을 다루는 화랑에서는 폴의 그런 작품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폴은 스스로도 자신의 작품이 비예술적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몇 달 동안 그는 변화를 시도해보기도 했다. 눈 밑 주름살에 붓칠을 하지 
말고 실물을 있는 그대로 그릴 것, 카메라를 처음 잡았을 때의 열정을 다시 
갖을 것. 그러나 그 몇 달은 그냥 지나 버리고 말았다. 알랑거린다는 표현이 
적합할 듯한 고객의 찬사, 폭 넓게 돌아다니며 발을 넓혀오는 사교계, 진정한 
예술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꿈꾸지 못할 막대한 보수.
  오웬 마음에 드는 건 하나도 없구나. 폴은 긴 콧수염을 휘날리며 검은 
눈동자를 빛내던 큰 체구의 오웬을 떠올렸다. 방황하던 자신을 엄히 꾸짖던 
오웬의 목소리도 들리는 듯했다. 내 자신을 찾고 있는중이에요. 이렇게 변명할 
때마다 오웬은 고개를 흔들곤 했다.
  - 그렇게 오래 네 인생을 어질러놓고 다니면, 정작 정리할 시간이 왔을 땐 
어쩌려구. 그때 가선 손댈 수 없을 만큼 망가져 있을 게다. 어질러진 인생이다. 
폴.
  망가진 인생, 어질러진 인생. 폴은 조용히 오웬의 꾸지람을 되뇌었다. 위대한 
사진작가가 되겠다던 야망은 고작해야 잡지나 광고 시진 따위를 찍어대느라 
시들어가고 있었다. 하루 종일 서재에 앉아 난잡이란 단어를 생각했던 그는 
다음날 비서에게 아프다는 핑계로 모든 업무약속을 취소시키라고 명령했다.
  계획에도 없던 한가한 시간이 찾아왔다. 뉴욕 센트럴 파크를 산책한 뒤 
수도원을 찾았던 그는 두세 시간 넘게 중세 유럽왕국의 전쟁 장면이 그려진 
벽걸이 융단을 꼼짝 않고 지켜보았다.
  "내 자신을 못 믿겠어. 스스로 날 믿지 못하는 인생이야."
  우울하게 뉴욕을 헤매고 다닌 끝에 폴은 처음 에밀리를 만났던 
로스앤젤레스의 한 식당에서 대학 동창 래리 고울드에게 마음의 고통을 
털어놓았다. 래리는 폴의 룸메이트이자 연구 파트너였다. 대학 시절 열정적으로 
영화작업을 했었지만 작업에 회의를 느끼고 있는 폴과 달리 래리는 텔레비젼 
광고계에서 놀랄 만한 두각을 나타내며 프로 기질을 발휘하는 친구였다. 대학 
시절 인디에나 강철 노동자들이 제공하는 장학금으로 공부를 마쳤던 래리는 
서른 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국내 상업광고계에서 첫 손가락 꼽히는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었다.
  "모르긴 뭘 몰라?"
  라 쇼미에르 야외식당 의장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래리는 폴에게 핀잔을 주듯 
말했다.
  "대학 철학시간에 뭐했어? 우린 누구냐? 어디로 가고 있는 건가? 다 
배웠잖아. 까먹었냐?"
  "잘난 사람들 행복하게 만드는 일 빼고 다른 건 다 잊어버린것 같다."
  폴은 탁자 옆의 덩쿨에 섞여 있는 붉은 분꽃잎을 만지작거렸다.
  "그런데 요즘 와선 그 짓도 못하겠어. 십이월 들어서 더 그래. 다 
사기꾼들이야. 탁월하고 유명한 사람들이 이 분꽃만큼도 못되는 가짜인생을 
살고 있다면 믿을 텐가? 집 없는 고아들을 위한 광고에 나타나 애닯은 표정을 
짓고, 자신들이 벌이고 있는 사업을 자랑하지 못해안달하는 사람들이지. 
잔선이니 뭐니 그 짓거리를 하는 이유가 다 번쩍거리는 대형사진 속에 들어가기 
위해서 라니까. 쇼맨십이지."
  "그게 어쨌다는 거야?"
  가재살 샐러드를 갖고 온 웨이터가 가기를 기다리던 래리가 잠시 후 입을 
열었다. 태양에 바래 거의 흰빛으로 변해 버린 머리카락과 분위기 있게 선탠된 
래리의 긴 얼굴 모습은 금발가발을 쓰고 있는 바셋 사냥개를 연상케 했다. 
  "그 사람들이 마음에 없이 돈을 뿌리고 다니는 게 어쨌다구? 광고판에 얼굴을 
내밀든 마음에 없는 자선을 베풀든간에 고아원을 짓거나 불쌍한 사람들을 돕는 
데 들어가는 돈은 우리나라 돈이야. 미합중국 달러! 이리가든 저리가든 목표에 
도달하면 되는것 아냐?"
  "사기꾼이나 위선자가 싫단 소리다. 온당한 목적엔 반드시 온당하고 정직하게 
번 돈이 들어가야 된다는 거야."
  래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대통령은 진실만을 말해야겠고, 주식 중개상들은 늘 정직해야겠고, 부부들은 
내내 사랑만 해야겠네. 맨해튼이 드디어 널 돌게 만들었구나. 아니면 어린 
시절로 돌아가 놀이터에서 놀고 싶은거야, 뭐야."
  폴을 갑자기 크게 폭소를 터뜨렸다.
  "그래, 맞다, 맞아. 내가 돌았지, 돌았어."
  폴은 가재실 샐러드에서 야채만을 골라 천천히 입으로 가져갔다.
  "모든게 다 보기 싫어서 그래. 그게 문제야. 일년 전까지만 해도 사물이나 
사람 뒤에 숨어 있는 뭔가를 찾아보려 했는데. 장면 뒤의 장면 말이다. 그런 
야망이 있었지. 글쎄 모르겠다. 넌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나도 같은 생각이지 무슨 생각을 하겠나. 내가 뭘로 먹고 사는데."
  "넌 광고쟁이지 사진사는 아니잖아."
  "광고는 카메라 없이 나온다든" 손으로 광고를 찍어?"
  "광고는 소리와 액션이지. 한 순간, 정지된 순간을 포착하는 건 아니잖아. 
의도나 목표도 다르구."
  "잘 아시네. 영화감독 해도 되겠다. 대학 때 찍던 것 말고 영화 좀 해봤어?"
  "아니."
  "해봐라. 네가 위선자라고 부르던 사람들이 깜짝 놀랄만큼 성공할 테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너 다음 작품할 때 졸졸 따라다니면서 배워볼까?"
  "못할 것 뭐 있어? 그러지 말고 나한테 와라. 스튜디오 와서 일하라구."
  폴은 두 눈썹을 치켜올렸다.
  "네가 그렇게 절망적으로 보여?"
  "그래. 아무것도 아닌 걸 가지고 말이야. 물론 생각이야 여러 가지겠지. 하지만 
넌 너무 심각하게 대처하는 것 같다. 여기 서부지역에선 다들 느긋하게 생각해. 
내 생각에 너는 사진보다 필름제작이 나을 것 같아. 내 말 잘 생각해봐."
  지금까지 가벼운 어투로 툭툭 던지듯 말하던 래리는 진중한 표정으로 윗몸을 
똑바로 세웠다. 
  "그 감춰진 얼굴을 찾는다는 말 있지? 장면 뒤의 장면을 찾겠다는 말. 그게 
우리 대학 시절 꿈 아니었냐. 넌 사진으로 그걸 찾고, 난 필름으로 찾는 것 
아니겠어? 네 얘기 듣고 무슨 생각했는지 알아? 돈만 있으면 내 인생이 좀더 
재미있지 않을까 생각하던 중이었는데, 네 얘기를 듣고 있다가 아이디어가 
떠올랐어. 내 고민을 들어줄 사람은 바로 내 파트너, 폴 젠슨이구나라는 생각 
말이야. 네 말마따나 나도 필름을 통해 사람들에게 새롭고 멋진 세계를 
선사하고 싶어. 하지만 돈을 벌다보니가 그 비전이 저절로 사라져버렸어. 돈 
벌려면 그 소원을 버려야 되는 것 아니냐? 둘을 한꺼번에 얻을 수는 없지. 안 
그래? 여기까지 얘기했는데 뭐 머리에 들어오는 것 없냐?"
  잠시 후 폴이 입을 열었다.
  "회사 하나 따로 차릴 생각이구나."
  "맞았어."
  폴에게 생각할 여유를 주려는 듯 래리는 프랑스 바게트에 버터를 덕지덕지 
바르고 있었다. 
  "너도 뭔가 새로운 걸 원하는 것 같고. 시간과 돈이 많은 작자, 먹고 살기 
위해 아둥바둥 돈벌이하지 않아도 되는 남자, 하는 일이 좋아 들어오는 돈 
없어도 배실거리며 웃을 남자, 그런 작자가 흔하진 않지."
  "무러 얘기하는지 힌트만이라도 주지."
  폴의 은근한 눈길에 래리는 껄껄 웃었다.
  "다큐멘터리물! 장면 뒤의 장면, 베일 속에 가려진 뒷모습, 그걸 기록영화로 
찍는 거야. 한마디로 그 회사를 네가 운영하는 거지."
  "개꿈 꾸고 있네. 영화의 첫걸음도 모르는 내가 기록영화를 찍는다구? 
아마추어 사진사한테 회사를 맡기겠다는 소리야? 자금이나 댄다면 모를까.."
  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금 문제도 물론 이유가 됐겠지. 하지만 그건 나중 문제야. 돈 없어도 
시작할 수 있으니까. 왠지 알아? 네 실력을 믿기 때문이지. 자금 없어도 할 수 
있어. 둘이서 첫 작품을 멋지게 뽑아내보자. 분명 성공작일걸. 아마추어라고 
했는데, 그건 말도 안돼. 내가 누구냐, 너랑 몇 년 동안 같은 방에서 뒹군 친구 
아니냐. 원래 천재니까 모르는 것도 빨리 배울 거야."
  그는 엉덩이를 의자 뒤로 바짝 갖다대며 몸을 세워 앉았다.
 "대하 때 기억나지? 우리 둘 다 같은 꿈을 꾸고 같은 생각을 했었잖아. 우리 
둘이 따로 일하게 된 건 네 그 잘난 돈 때문이었다구. 그놈의 돈 때문에 네 
꿈을 이뤄보지도 않고 딴 길로 빠진거 아냐? 그런데 이렇게 돌아왔잖아. 지치고 
고된 몸을 이끌고 온 늙은 양이여! 네 꼴이 이게 뭐냐? 꿈과 목표가 있는 
사람이 몇 년 동안 이리저리 헤매기만 하다니. 비전을 갖는다는데 얼마나 
중요한 일인대. 세상에는 꿈 없이 살아가는 사람 투성이야. 돈 한곤 상관없이 
네가 와줬으면 싶다. 정말로 원하는 일이라면 말야..."
  잠시 숨을 몰아쉰 뒤 래리는 곧바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물론 돈이 있으면야 더 좋겠지."
  "얼마쯤?"
  "우선 착수금으로 십만, 하지만 투자금은 아니다. 기부금쯤으로 생각하면 돼. 
마음 변해 나갈 때 빼갈 수 있는 돈이 아니란 소리야. 기록영화라는 게 돈을 
쑤셔넣는 작업이거든. 감독을 유명하게 만들어주긴 하지. 하지만 돈 버러주는 
사업은 아니야."
  폴은 포크로 접시 위의 가재상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으로 
흰 살 옆에 가득 쌓여 있는 붉은 게다리 껍질이 떠오르고 있었다.
 - 당신처럼 그렇게 가재살 잘 빼먹는 사람은 처음인걸. 야, 대단해! 몸통도 
뒤집지 않고 어떻게 살을 빼낼 수 있지? 꼭 마법사 같군. 어떻게 보면 소매치기 
같애, 손놀림이.
  폴은 가재살이 남아 있는 접시를 탁자 끝으로 밀어냈다. 새로운 거라... 여기 
와서 살자고 해도 에밀리는 싫어하지 않을 거야. 어디 가든 모델일은 있으니까. 
그렇게 되면 쳇바퀴 생활은 면할 수 있겠지. 내가 누군지 되돌아볼 시간도 
있겠구. 최고의 결혼생활과 만족할 수 있는 일이 있으니 자부심도 생길 테지. 
그렇게 되면, 과거의 어두운 터널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거야.
  "미안해, 래리. 딴 생각했어. 뭐라고 했지?"
  "영화주제를 둘이서 잡아보자구. 몇 가지 생각해두긴 했는데, 네 의견을 듣고 
다시 의논해 보자. 훌륭한 작품을 위해선 귀를 활짝 열어놓겠단 소리야."

  에밀리와 함께 로스앤젤레스를 돌아다닌 폴은 도시 전체가 내려다 보이는 벨 
에어에 저택 한 채를 구입했다. 변호사들은 골드젠슨 영화사 부지를 위해 
필요한 서류를 구비해 나갔고, 이주 뒤에는 어느 정도 회사 모양이 잡혀가고 
있었다. 알리슨 결혼식에 참석할 짬이 난 것도 영화제작일을 시작한 덕분이었다. 
폴은 벤 가드너와 결혼식을 올리는 알리슨을 위해 가족들이 나와 있는 보스턴 
로간 공항에 발을 내디뎠다.
  "대단한 환영식인데요."
  그는 어머니에게 키스를 하며 말했다.
  "알리슨과 벤을 위해 나오셨겠지만."
  "벌써 눈치챘구나, 하지만 널 보려고 이루러 미리 나왔다.."
  토마스는 아들 어깨에 손을 얹은 채 그를 껴안았다. 몇 년 동안 보지 못했던 
사촌들까지 포함대 폴은 식구들을 하나식 세기 시작했다.
  "열한 명. 강제로 몰려와 있는 것 같은데."
  "분위기 좀 만들어보려고 그랬다는구나. 네 이모가 말이다. 펠릭스가 별반 
기분 내켜 하지 않는 것 같은데."
  "어디 있는데요?"
  "전화하는 중이다."
  레니가 대신 대꾸하며 그를 끌어안았다.
  "며칠 여기 묵게 됐다니 기쁘다. 에밀리는?"
  "삼일 뒤에 올 거에요. 어쩜 사일 뒤에 올지도 몰라요."
  "지금 어디 있는데?"
  파트리샤가 물었다.
  "《보그지》지 봄 패션 때문에 스코틀랜드에 있다. 간 지 아주 됐는데 거의 
끝냈댄다."
  "연착될 것 같진 않은데. 그래 다들 모였나?"
  전화박스에서 돌아온 펠릭스는 가문의 우두머리 표시를 내며 위엄 있게 입을 
열었다.
  "공항 휴게실에 가서 기다리지. 알리슨에게 세광통과한 뒤 그리로 오라고 
했으니까."
  양떼를 목고 가듯 가족들을 아래층 휴게실로 몰아가는 펠릭스의 얼굴빛은 
경직되어 있었다.
  "전화...나쁜 소식인가봐요?"
  "아니다."
  펠릭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무실 애들이 헷갈리는지...새롭게 혁신을 하느라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겠지."
  "혁신이라뇨?"
  "모든게 다 바뀌어야만 한다는 소리야. 개혁에 뒤떨어진 작자들은 마땅히 
쫓아내야 하지 않겠어."
  펠릭스가 구석에 달린 자그마한 단추를 누르자 문이 안으로 부드럽게 열렸다. 
비행기 날개처럼 생긴 탁자에 팔걸이가 편안한 의자들이 있는 귀빈 
휴게실이었다.
  "다들 뭣 좀 마시자."
  펠릭스는 휴게실에서 근무하고 있는 은퇴한 스튜어디스에게 가족들이 원하는 
음료수를 점잖게 불러주었다.
  "회사 운영체제를 바꾸겠다구요?"
  "썩은 나무르 처치하는 주이다. 김빠진 중역들 말이다. 갈고 닦고 버리고 쓸고 
해서 예전보다 더 강해지는 거지."
  음료수를 마시던 폴은 한두 번 입맛을 다셨다.
  "얼마나 많이 교체시킬 건가요?"
  "이십 퍼센트."
  "이십 퍼센트나요?"
  "회사가 효율적으로 운영될 수 있는데 이십 퍼센트가 대수냐? 흑자를 많이 
내면 네 주식량도 올라갈텐데."
  "우리 회사에서 평생 일했던 사람들이 얼마나 포함됐죠?"
  "빠르게 진보하느 시대다. 자를 건 과감하게 잘라야지. 신속하게 확장할 
계획이다. 개혁할 땐 희생자가 있게 마련이야."
  "옛 건물들을 떼어내는 거에요? 아니면 보수해서 다시..."
  "얘기 했잖니. 낡은 것들을 없애는 중이라구. 새롭게 뭘 지어보려 해도 
부지들이 너무 좁아. 아버님은 목을 매단 호텔들이지만 난 아무 매력도 못 
느낀다. 시카고는 기회가 좋아 일년 전에 팔았다면 뉴욕하고 워싱턴 쪽도 빨리  
해치울 생각이다. 벌써 구매자들이 줄을 잇고 있어. 필라델피아하고 멕피스, 
포트워스 쪽에 작은놈들이 살 사람이 나타나겠지. 그것들을 팔아버리고 오년 
안에 새 호텔 열 채를 새로 지을 계획이다."
  "굉장하네요."
  클럽 문이 열리면서 알리슨이 들어왔다. 펠릭스와 레니에게 키스하고 난 
알리슨은 풀에게 달려들어 포옹을 했다.
  "이렇게 집에 오니까 기쁘지?"
  폴이 부드럽게 속삭였다. 다른 식구들은 두 사람을 둥그렇게 에워싸고 이런 
저런 인사말들을 건네왔다. 그러나 레니는 그 지리에 얼어붙은 듯 우뚝 멈춰 서 
있었다. 그녀는 알리슨을 뒤따라 온 벤을 쳐다보고 있었다. 훤칠한 키, 화사한 
금발머리, 미끈한 얼굴선, 뿔테안경 뒤에서 푸른빛을 뿜고 있는 눈동자. 
단단하게 다문 입술.
  "저드."
  그녀와 입에서 한 남자의 이름이 맴돌았다. 레니의 굳어버린 얼굴을 보고 
있던 벤이 알리슨을 돌아보았다. 폴에게 안겨 있던 알리슨이 손을 내밀자 벤은 
그쪽으로 걸어가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폴에게 악수를 청한 뒤 다름 사람들과도 가볍게 인사를 나눈 벤은 레니에게 
몸을 돌려 두 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드디어 이렇게 만나뵙게 되는군요. 정말 기쁩니다. 이렇게 큰 기쁨을 맛보게 
해주려고 알리슨이 그동안 뜸을 들였나봅니다."
  "그런가 보지."
  까맣게 잊었던 과거의 기억들이 밀려드는 바람에 레니는 제대로 입을 열지 
못했다. 레니의 굳은 표정에 잠시 미간을 찌푸렸던 벤은 이내 얼굴을 다시 폈다.
  "다 제 잘못입니다. 제가 우겨서라도 빨리 뵈었어야 하는 건데. 우리 둘 다 
용서해주시는 거죠? 저희를 기꺼이 용서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인사 나누지."
  펠릭스는 어투만큼이나 딱딱한 자세로 손을 내밀었다. 벤이 제일 먼저 
레니에게 인사했다는 것에, 벤이 젊다는 사실에, 제일 싫어하는 금발에다 
석고상가ㅋ이 잘생긴 얼굴이란 사실에 펠릭스는 분이 나서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다. 겨우 경비부사장직에 감지덕지할 정도의 남자를 위대한 셀링거 
가문에 데려와놓고 유럽 귀족이라도 모셔온양 자랑을 헤대는 딸 아리슨을 
펠릭스는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잘 왔다."
  펠릭스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회사 직원이 나와 있으니까 짐은 그쪽에 맡겨라. 우린 우리 차로 가자."
  "좋아요, 아빠."
  알리슨은 어린아이처럼 들떠 있었다.
  "벤, 이리로 와봐요. 사촌들하고 아직 인사 못 했잖아요."
  사촌들 이름을 불러가며 소개를 시킨 알리슨은 환한 얼굴빛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벤은 당황한 얼굴로 굳어 있는 레니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특별히 시간을 내서 얘기 좀 나눴으면 합니다. 그동안 못 찾아뵌 것도 
용서드릴 겸..."
  "그래요."
  레니의 얼굴이 차츰 안정되고 있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저드와는 조그 
ㅁ다른 얼굴이었다. 저드보다 턱이 약간 각이 졌고 이마도 별반 넓게 퍼지지 
않은 데다 머릿결의 부드러움이 덜했다. 기가 막힐 정도로 흡사했지만 분명 
저드는 아니었다.
  "내가 좀 굳어 있었지? 사람들이 많으면 신경이 좀 날카로워지거든, 집에 가면 
좀 낫겠지. 차 마시면서 편하게 얘길 나눠봐요."
  벤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은근히 걱정했습니다. 제가 뭐 잘못했나 싶어서요. 어머님하고 
가까워지고 싶었는데 기분이 좋지 않으신 것 같아서 조마조마 했는걸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분처럼 친근한 느낌이 듭니다."
  비슷하긴 진짜 비슷해. 레니는 긴 낭하를 따라 내려가면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저드의 아들이라면-그의 아들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이처럼 꼭 빼닮았는데-아버지한테 내 얘길 들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벤이 어떻게 셀링거 가문을 찾아 다가설 수 있었는지, 무슨 목적으로 
다가왔는지 궁금했다.
  어쩌면 우연히 이루어진 일일지도 몰라. 세상엔 기막힌 우연은 얼마든지 있어. 
천지에 깔린 우리 호텔 중 한군데서 일을 하게 된 걸거야, 그래 맞아. 내 얘기도 
분명 모르고 있을 거야. 그때가 언젠데. 저드를 마지막으로 봤을때 벤은 겨우 
아홉 살이었을텐데 저드가 내 얘기를 들려줬다 하더라도 꼬마가 뭘 기억하겠어.
  "부모님이..."
  벤에게 고개를 돌리면 레니는 헛기침으로 음성을 가다듬었다.
 "알리슨 말로는 돌아가셨다고 하던데."
  벤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님은 제가 열 세살 때 돌아가셨고, 어머님도 몇 년 뒤 세상을 뜨셨죠."
  레니는 자신의 몸 위에서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저드의 눈빛을 떠올렸다. 저드, 
죽었구나. 레니는 그가 죽었을 거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저드, 오래전에 그리움과 함깨 마음속에서 지워버린 사람이었다. 그래, 우린 
원래 맺지 못할 사이었나봐. 안될 사이였어. 하지만 너무 좋았는데, 둘이 함께 
느꼈던 기쁨과 즐거움...다시 한번 그 시간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그 기쁨을 
다시 찾을 수 있다면...
  벤의 얼굴빛이 붉게 변해가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자신이 내내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드를 생각하는라 침묵에 잠겨 있던  그녀는 
갑자기 불쑥 큰소리로 말했다.
  "자네에게 알리슨에게 오웬, 그러니까 얘 할아버지 집을 주기로 우리 둘이 
결정봤다네."
  "어머, 엄마!"
  알리슨은 환호성을 질렀다. 가운데 앉아 있는 펠릭스를 건너 뛰어 창가 쪽의 
레니에게 키스를 한 그녀는 펠릭스의 뺨에도 입을 맞췄다.
  "고마워요. 벤, 꿈만 같아요. 얼마나 멋진 집인지 당신 상상도 못할걸요. 
할아버지 침실을 우리가... 좀 어둡긴 하지만 너무 멋진 방이에요."
  "얼마나 큰 집인데?"
  "방이 스무 개에다 대지는 삼만삼천 평방피트일세."
  펠릭스가 대신 말했다.
  "우리 둘뿐인데 그렇게 많은 방이 필요하겠습니까?"
  "아직은 그렇죠, 하지만 얘들이 생기면..."
  알리슨이 수줍은 얼굴로 끼여들었다.
  "글 큰 집을 어떻게 유지해 나가려구?"
  "할 수 있어요, 우리한테..."
  갑자기 말을 멈추고 세 사람 눈치를 살피던 알리슨은 벤에게 고개를 기울이며 
속살거렸다.
  "나중에 얘기할께요. 우선 집을 보라구요. 그걸 보면 마음이 바뀔 테니까. 내일 
당장 가요, 응? 그냥 가서 보기만 해요."
  차가 비벌리 쪽으로 선회하고 있었다. 청회색빛 해안선을 지켜보며 레니는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댔다. 벤이 뭘 원하든 알리슨에게 해가 될 것 같진 않았다. 
그가 알리슨을 사랑하고, 알리슨이 그들 백마 탄 기사처럼 숭배하는 것은 누가 
봐도 확실한 일이었다. 잘됐어. 집이나 회사나 신선하고 새로운 얼굴이 필요한 
참에 잘 왔어. 레니는 문득 로라를 떠올렸다. 가슴이 서늘해졌다. 아버님도 내 
생각과 같았을까? 로라가 들어온 뒤 신선하고 새로운 얼굴이라고...하지만 
불행으로 끝나버렸잖아.
  뭘 원하고 있을까? 무슨 이유로 알리슨에게 접근했을까? 두 사람이 우연히 
만날 수는 없었을 거야. 그럴 가능성은 정말 희박해. 철저한 계획 아래 
의도적으로 다가왔겠지. 아냐, 그건 말도 안돼. 레니는 다시금 둘의 만남을 
우연으로 뒤집었다. 우연이야. 하지만 정말 그럴까?
  장본인한테 직접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잖아. 할 수 없이. 지켜 볼 수 밖에. 
알아내야지. 무슨 이유로 우리 쪽에 접근했는지. 글쎄, 재난이 또다시 다가오진 
않을 것 같은데. 둘 다 사랑하고 너무 행복해 보이는걸.
  부드럽게 달리던 리무진이 소리없이 멈춰 섰다. 기사가 내려 차문을 열기 
전에 직적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린 벤은 알리슨이 내릴 수 있도록 손을 
잡아주었다. 흐린 달빛을 등지고 검은 하늘 아래 서 있는 벤의 얼굴은 저드와 
너무도 흡사했다. 레니는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었다.


    20장
  첫 번째 절도 사건은 뉴욕에서 발생했다. 크리스마스 바로 직전 모두가 정신 
없이 바쁜 시간대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도둑맞은 플라비아 구아르네리보다도 
오히려 보험회사 직원들과 뉴욕 경시청이 혈안이 되어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고 
있었다. 플라비아는 사건 직후 불편할 것을 각오하고 가정부와 집사를 해고시켜 
버렸다. 사건 당시 두 사람이 휴가 중이어서 그녀의 5번가 집에 머물지 
않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하지만 아파트 안으로 들어온 흔적이 없는 상황에서 
두 사람은 가장 유력한 용의자였다. 플라비아 구아르네라는 도난당한 툴루즈 
로트렉의 그림 세 장에 관한 정보를 경찰청에 넘겨준 뒤, 소더비 경매장으로 
달려가 허전해진 벽을 채워줄 새 그림 석 장을 구입했다.
  블루즈 로트렉의 그림들을 훔치라고 부추긴 그림 중개상을 찾은 클레이는 
도박 빚과 마리나가 입고 싶어하던 털 달린 가죽잠바를 너끈히 살 수 있는 
현찰을 손에 쥐었다. 마리나와 로라에게 크리스마스 기념으로 멋진 선물을 살 
수 있는 돈도 충분했다.
  일년 전 시카고 비콘 힐을 성공리에 개장시킨 로라는 처음으로 시카고를 떠나 
뉴욕으로 갔다. 연말휴가를 즐기기 위해서였다. 로라는 그 곳에서 커리어에게 
처음 그 소식을 들었다.
  "어제 플라비아와 얘길 해봤는데 경찰은 아직 단서 하나 잡지 못했다는 구만."
  뉴욕 타임지를 읽던 커리어가 신문을 집어 들며 말했다.
  "그녀가 제일 좋아하던 그림들이었는데. 내가 보기엔 그림 찾는 일보다 
가정부와 집사 구하는 데 더 신경을 쓰는 것 같더군."
  로라는 멍한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매일 아침 다섯 개 도시에서 배달되는 
신문 중에서 그녀는 시카고 신문을 집어 들어 사교계면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최근 유명명소로 꼽힌 시카고 비콘 힐은 유명인사 동호인 클럽이 아지트로 
삼은 클럽 바와(그 곳을 방문할 기회가 있다면 절대 멍하니 바라보는 것은 금물. 
부와 권력이 숨쉬는 분위기에 빠져 들어 그 곳의 일부분이 됐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 가장 중요함)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육대주의 진귀한 성찬이 
제공되는 레스토랑에 의해 그 주가가 더욱 올라가고 있다. 한마디로 국제적인 
문화와 예술, 초특급 경영자들이 왕래하는 최고의 호텔이다. 호텔이 제공하는 
서비스의 진수를 처음부터 끝까지 맛보고자 한다면, 총지배인 로라 
페어차일드가 직접 장식한 천국 같은 특실을 예약해야 할 것이다. 주의할 점은 
예약은 반드시 이 개월 전에 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평생 호텔 
문턱만 드나드는 신세가 될 것이다.
  신문을 커리어에게 넘기며 로라는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문체가 마음에 안 들어요."
  "이만하면 더할 나위 없지. 당신 이름, 호텔 이름, 바, 식당, 안 들어간 게 어디 
있어? 더 잘 쓸 수는 없잖아."
  집사가 커피를 내오고 따스한 그루아상과 양념한 배요리를 탁자 우이에 
차리는 동안, 로라는 창문 너머 맨해튼의 뾰족탑과 둥근 지붕, 상록수와 
벌거벗은 활엽수가 서 있는 옥상 테라스 등을 지켜보고 있었다.
  "손님들은 프라이버시를 원해요, 하룻밤에 오백 달러, 특실이 이천오백인데, 
이런 기사를 읽고 그렇게 비싼 돈을 치르겠어요. 나 같으면 그런 호텔에 안 
가겠어요."
  그는 어깨를 한 번 들었다 올렸다.
  "그렇게 비싼 호텔비를 치를 수 있는 정도라면 그 사람은 상당한 호사가일걸. 
그런 부류들한텐 하룻밤 이천오백은 아무 것도 아니지. 기사가 어떻게 나오든 
신경 쓰지 않아. 오히려 돈 없는 사람들이 신경 쓰지. ㅂ2ㅣ콘 힐에 묵지 못하는 
사람들 말야. 선망의 대상으로 우리 호텔을 바라보는 사람들이지. 그들은 
호사가나 권력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비콘 힐을 노리고 
있다가 호텔 비수기에 바와 식당을 채워줄 미래의 손님들이라고 할 수 있어."
  커리어는 그루아상을 반으로 자른 뒤 꿀을 발랐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그 사람들이야말로 은행에 들어가 있는 돈이라 할 수 
있지."
  로라와 켈리가 훌륭하게 만찬을 차려냈던 개막 전 파티를 로라는 두고두고 
잊지 못했다. 더 이상 완벽할 수 없는 저녁만찬이었다. 두 사람을 믿지 못했던 
커리어는 나이트 쇼장에 나타난 그들에게 뒤늦게 찬사를 퍼부었고, 로라와 
켈리도 브로드웨이 연극무대에서 주연 대신 대역을 맡아 성공시킨 것처럼 
들떠서 야단이었다. 그러나 커리어는 그뒤 두 사람의 공로를 두 번 다시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는 두 사람이 다 운이 좋아 그날 저녁파티를 미칠 수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모든 게 잘 굴러갔어요."
  지니 스타렛의 따스한 정을 떠올리며 로라가 중얼거렸다. 전혀 뜻밖에 다가온 
따스하고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한 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는 지니의 성격 탓에 
아직 서로를 속속들이 알지는 못했다. 그러나 지니는 뜬구름처럼 세계를 
떠돌아다니다가 불쑥 로라를 찾아오곤 했다. 그런 지니를 기다리는 일이 
로라에게는 작은 기쁨이었다. 로라는 그런 그녀에게 속마음을 조금 드러내기도 
했다. 정말 좋은 사람이야. 지니에 대한 생각을 하며 접시 위에 있는 그루아상을 
집던 로라에게 집사가 시카고로부터 전화가 왔다는 얘기를 전했다.
  전화를 들자마자 흥분으로 숨을 헐떡이는 클레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나, 드디어 왔어. 펠릭스 사무실에서 전화가 왔다구. 뉴욕 샐링거에 관심이 
있다는 걸 알고 전화했다면서 이쪽으로 와서 우릴 만나겠대."
  그자가 드디어 나한테 다가왔다구. 오웬 호텔을 사라고 왔어.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커리어는 두 눈을 감고 있는 로라에게 근심스럽게 물었다.
  "약속했어?"
  "수요일 아침으로 했는데, 잘했지? 그 쪽에서 원한다고 금방 달려들면 
안되잖아. 그래서 느긋하게 약속했지."
  "잘했어. 우선 먼저 여기서 호텔을 살 핀 다음 화요일 밤 시카고로 날아가면 
될 거야."
  뭔가 얘기하려던 커리어는 마음을 바꿔 로라의 얼굴을 말없이 들여다보았다.
  "미안해요."
  수화기를 내리며 로라는 커리어에게 사과부터 했다.
  "오랜만에 가진 휴가를 이렇게 만들다니. 하지만 웨스, 내가 얼마나 이 순간을 
원했는지 잘 알죠?"
  "시카고 비콘 힐이 개장되자마자 그랬지."
  비꼬듯 내뱉는 그의 말투에 로라는 화가 났다.
  "내가 하나로 만족할 거라고 생각했죠? 맞아요? 제풀에 지쳐 허덕이다 그 
탈출구로 당신과의 결혼을 꿈꿀 줄 알았어요? 시카고 호텔처럼 하찮은 일에 
신경 쓰는 대신 내 시간과 정열을 웨스커리어란 사람에게 쏟아 부을 거라고 
행각했나요?"
  "하찮다는 얘긴 한 번도 안했어."
  "그 얘긴 그럼 취소하죠. 당신은 날 도와줬죠. 모든 걸 가능하게 만들었어요. 
그런데, 지금껏 목숨 걸고 원했던 일에서 발을 빼라구요? 왜 내가 그래야만 
되죠? 당신은 당신 계획을 하나도 바꾸지 않으면서 왜 난 그래야만 하냐구요?"
  "왜냐하면 당신 꿈은 너무 위험하기 때문이야. 부서지기 쉬운 꿈이니까."
  "그게 꿈이라면 현실로 나타내 보이겠어요. 어떤 위험이 다가와도."
  "성공시킨 게 있지 않아. 그 하나에 인생을 세우면 되는 거야."
  "당신은 그랬겠죠. 하나로 합병해 놓고 그 곳에 모든 걸 다 투자 했다면 
서요."
  "필요없는 일에 왜 헛되이 시간을 낭비하는 거야? 멋진 세계로 돌아다니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데. 이런 싸움은 이제 그만해. 더 이상 하고 싶지도 않고 
하지도 않을 테니까. 필요없는 일이야."
  "필요없는 일이라뇨? 더 이상 하고 싶지도, 하지도 않겠다구요? 말할 가치도 
없단 소리예요?"
  그녀는 의자를 거칠게 뒤로 밀치며 벌떡 일어났다.
  "하나 성공했으면 충분하다 이거죠? 세상에, 관대하가도 하셔라. 그래서 이제 
당신 그늘 밑에서 행복하게 지내라 이거 아니예요? 내가 원치 않는다면 
어쩔래요? 미친 듯 일만 하고 싶은데, 그럼 어쩔래요? 날 뭘로 생각하는 거죠? 
합병할 회사로 생각해요?"
  "앉아."
  커리어는 냉정하고 침착했다.
  "그 펄펄 뛰는 성격 언제쯤이면 고칠 수 있을까? 그러다간 주방장 해고시킬 
때처럼 날 쫓아낼지도 모르겠군. 그러면 분명 골치 아플 텐데."
  "그래요?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요?"
  그녀는 창에 등을 기대고 서서 씩씩거리며 커리어에게 대들었다. 그녀의 
등뒤에는 겨울태양이 창백하게 걸려 있었다.
.."당신이 바보 중의 바보라는 걸 알고 있나?"
  커리어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차분히 말했다.
  "뭐든 강요하지는 않겠어. 편안함 대신 투쟁과 고통을 원한다 할지라도. 난 
당신을 위해 어떤 계획도 세워놓지 않았어. 당신 계획에 질질 끌려 다녔을 
뿐이지. 시카고를 사고 싶다고 해서 그 계획에 따라줬어. 당신을 믿었기 
때문이었지. 결국 내 믿음이 옳았다는 것도 확인했어. 그리고 나에게는 당신한테 
물어볼 수 있는 권리…"
  "권리?"
  그녀는 차갑게 그의 말을 되받았다.
  "돈에 대한 권리 말이에요? 우리 사이가 돈 때문에 맺어진 게 아니란 걸 오래 
전에 확인했잖아요."
  냅킨을 탁자에 내려놓은 커리어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미안하오."
  두 팔로 끌어안으려고 하는 커리어를 밀치며 로라는 뒷걸음질쳤다. 그는 순간 
분통을 터뜨렸다.
  "젠장! 내 말은 그게 아니었어. 당신이 새로운 계획을 세울 때 상의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이야? 난 투자가인 동시에 애인이자 남편…"
  "남편이라뇨?"
  "미래의 남편이란 소리야. 당신도 인정하고 있잖아?"
  "아뇨."
  그녀는 한 발자국 더 뒤로 물러났다.
  "웨스. 당신하고 결혼할 생각 추호도 없어요. 그런 소리 한 적도 없구요. 단지 
당신 혼자서 시간이 해결해주겠지 하고 착각…"
  "착각이 아니야. 당신을 아내로 꼭 맞아 들일거야. 이봐, 로라. 얼마나 힘든 
사업인지 알잖아. 한 번 그렇게 고초를 겪었으면 됐지, 뭐 하러 사서 고생을 
하겠다는 거야?"
  그녀는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당신은 날 모르고 있어요. 난 안전보다 거친 투쟁을 원해요. 원하는 건 
그것뿐이에요. 나한테 그럴 권리가 없다고 생각해요? 왜 남자들만의 영역이라고 
생각하죠? 날 보호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말아요. 피를 흘려도 해야 될 일은 
피하고 싶지 않아요. 그건 내 꿈이에요. 웨스. 화요일 밤, 시카고로 가겠어요. 
그리고 수요일엔 뉴욕 샐링거를 내 손에 넣겠어요. 계약이 끝나자마자 다시 
돌아와 호텔 수리하고 맨해튼에서 쓸 아파트를 구하겠어요, 제일 힘든 
일이겠지만…"
  "내가 도와줄 수 있을 텐데. 그쪽 방면에 아는 사람…"
  "웨스, 아직도 내 말 못 알아들어요? 당신 도움 필요없어요."
  "바보 같은 소리 말아. 결혼이나 동거생활하고는 관계 없는 일이니까. 우린 
OWL 개발사를 위해 뛰는 동업자 아닌가? 게다가 우린 친구야, 로라. 어떤 
상황에서건 당신한텐 내가 필요해. 혼자서 뉴욕 샐링거를 사들이려구? 시카고를 
사들이듯 그렇게 저가에 매입할 수 있을 것 같은가? 은행에서 대부를? 그것도 
이미 선을 넘어섰는데? 아무리 뉴욕 호텔 가격이 내려간다고 해도 도저히 살 수 
없을걸."
  "그렇겠죠. 하지만 투자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는걸요."
  그녀는 차가운 얼굴로 그를 뚫어지게 보았다.
  "몇 달 전에 얘기한 것 기억 안 나요? 내가 건성으로 들었는지 알아요? 
은행가, 개발업자들, 비콘 힐 체인을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잖아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있지. 하지만 그 사람들이 돈을 투자할 것 같아?"
  "한 명이라도 있겠죠. 그럼 다른 사람들도 따라올 거예요. 당신을 따라가는 
것처럼 줄줄이."
  "내가 그런 믿음을 갖도록 만들었나?"
  "맞아요. 하지만 그보다 호텔을 성공시킨 뒤 갖게 된 믿음이에요. 라운지나 
식당에서 만난 손님들이 던진 찬사와 충고, 곳곳에서 날아온 편지들, 한 번 묵은 
뒤 다시 찾아온 손님들. 내가 인전을 받는구나, 그런 느낌을 주는 손님 
말이에요."
  "사랑받는다는 느낌은 없었어?"
  "아뇨, 사랑은 당신이 줬죠."
  미소 짓는 로라에게 손을 올리려던 웨스는 두 손을 힘없이 내렸다. 
  "당신, 정말 고집불통이야. 길들일 수 없는 말과 같아. 왜 그렇게 고집 부리는 
거야? 나하고 결혼하면 호텔 사십 개가 생기는데. 당신 원하는 걸 뭐든지 해줄 
텐데."
  "당신하고 결혼 안해요, 웨스. 하고 싶지 않아요."
  웨스는 시궁창에 빠진 기분이었으나 로라의 그런 확실한 면을 미치도록 
사랑했다.
  "그리고 나한테 모든 걸 주겠다는 소리도 싫어요. 안 진짜 싸움을 원해요. 
그리고 이기고 싶어요. 직접 싸워 내 것으로 만드는 승리를 원해요."
  오랫동안 그녀를 바라보던 커리어는 탁자로 돌아가 아직도 따뜻한 커피포트를 
들어 올렸다.
  "한 잔 더?"
  "네, 고마워요."
  "이러면 어떨까?"
  두 잔 가득 커피를 따르던 그가 그녀를 등지고 말했다.
  "뉴욕에 오게 되면 이 아파트를 쓰지. 거의 비어 있으니까. 편하게 쓸 수 있을 
거야. 그 투자가들 만나는 일도 돕겠어. 뉴욕 호텔 매입도 우리 둘이 같이 하는 
거야. 그 다음 즉각 나머지 두개도 손을 보자구. 자금단을 구성해서 말야. 그 
다음부터는 당신 혼자 알아서 해. 그전까지인 둘이 함께 시카고를 일궜듯 뉴욕 
비콘 힐을 성공시켜보는 거야. 가끔 데이트하는 정도는 괜찮겠지."
  로라는 커리어 뒤편으로 돌아가 그를 두 팔로 껴안았다.
  "당신 정말 멋진 친구 에요, 웨스."
  로라의 목소리는 아주 부드러웠다.
  "고마워요. 말만 그랬지 나 혼자 투자가들을 만날 생각은 없었어요. 정말 
고마워요. 하지만, 웨스. 여기서 살진 않겠어요. 맨해튼에 있는 아파트들이 
얼마나 시끄럽고 지저분한지 잘 알아요, 여기하곤 비교할 수 없겠죠. 하지만 
혼자 사는 게 나을 것 같아요. 당신하고 저녁도 먹고 극장도 갈게요. 같이 가고 
싶어요. 하지만 더 이상은 싫어요. 좋은 친구로 남았으면 해요."
  "할 수 없구먼."
  모든 걸 다 내던지고 떠나가려는 로라를 보며 그는 미칠 듯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칼하게도 그녀의 쌀쌀한 태도와 고집을 그는 사랑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내 생각을 바꿀 수 있을까, 그걸 생각하고 있는 거죠?"
  "당신의 결심을 내가 어떻게 바꾸겠소. 맹목적인 믿음인걸."
  "그럼 뭘 생각했어요?"
  그는 그녀가 그들 관계의 끝을 묻고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 둘이 서로 기뻐하면서 만날 수 있는 길이 없을까 생각했어. 모든 걸 
포기하라고 하진 않겠어. 대신 당신도 호텔 사업 때문에 날 단지 친구라고만 
여기지는 말아. 우리 둘 다 그걸 확실히 하고 싶어."
  그녀는 그를 잠시 바라보았다.
  "지금 정해야 돼요?"
  "급한 건 아니니까. 시간 충분히 갖고 생각해봐."
  아침 내내 긴장에 휩싸였던 두 사람은 비로소 서로 마주보며 웃을 수 있었다.
  물론 접근하는 남자들이 있겠지. 커리어는 그녀를 바라보며 골똘히 생각했다. 
두 사람 다 그 문제를 거론하진 않았다. 약혼자 없이 혼자 살아가는 몸인데 
얼마든지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내가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으면, 
너무 바빠서 다른 남자 만날 시간이 없다면, 자주 나타난 시간을 같이 한다면, 
그럼…."
  "뉴욕 샐링거를 구경하는 게 어떨까? 상의 도피행각을 벌이는 젊은 연인 
흉내를 내면서 샅샅이 호텔을 살피는 재미, 어때?"
  로라는 커리어가 사랑하는 그 아름다운 웃음을 떠뜨렸다.
  "아마 우릴 마약중개인으로 볼걸 요. 그 지저분한 잡지에 화제 인물로 
오르내리는 마약 범 대부 말이에요. 어쨌든 가보고 싶어요.  오래 전에 로비를 
한 번 구경한 뒤론 근처에도 못 가봤는데."
  커리어는 의자에서 몸을 털며 일어났다.
  "또 하나 있군. 플라비아하고 어제 저녁 한번 같이 했으면 좋겠는데. 잃어버린 
걸 어쩌겠냐고 체념하긴 했어도 지금 속이 여간 불편하지 않을 거야. 친구들 몇 
명 더 불러서 조촐하게 파티를 하는 게 어때? 파티의 내 여주인 돼 주겠어?"
  주저하는 로라에게 그는 얼른 덧붙였다.
  "물론 아파트 찾는 일 막지 않아. 그리고 당신이 원한다면 그 친구들에게 
우리가 친구 이상의 관계가 아니라는 걸 밝히겠어. 플라비아가 당신을 
좋아하잖아. 아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라 그녀를 좀 위로해줄까 해서 부탁하는 
건데."
  그녀는 다시 환하게 얼굴을 폈다.
  "그럴께요. 플라비아를 위해서 기꺼이 하겠어요. 당신을 위해서두요. 당신과 
함께 하는 자리, 여전히 사랑하고 아낄 거예요, 웨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한 팔로 안았다. 그는 로라가 그렇게 나오리라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펠릭스는 몇 년 동안 뉴욕 샐링거를 한번도 찾지는 않았다. 그는 현대식 건물 
사이에 초라하게 서 있는 맨해튼의 샐링거를 수치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오웬이 청년 시절에 그 호텔을 지었을 때만 해도 명성을 날렸었다. 그러나 
아이리스의 죽음 이후 뉴욕 샐링거는 중세 암흑시대로 하강해야 했다. 아름답던 
조각들은 황량하게 변해갔고 가끔씩 집회가 열리는 로비는 평범한 역 구내를 
연상케 했다. 오웬이 다시 정신을 차려 책상 위에 앉았지만 금광을 찾아 떠나는 
행렬처럼 현대화를 부르짖으며 올라가는 다른 호텔들로 인해 뉴욕은 샐링거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러나 명성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하나 둘씩 쓰러져가는 옛 호텔들과 
달리 뉴욕 샐링거는 편안한 호텔로 알려져 맨해튼 관광 가이드 책자에 계속 
올라 있었을 뿐 아니라,얄팍한 출장비로 여행하는 사업가들과 여행객들에게 
아늑하면서도 저렴한 호텔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개장 이래 몇 십 년이 
흘렀어도 장부책에 붉은 글씨가 오른 적은 한번도 없었다. 게다가 플라자 
옆이라는 기가 막힌 호텔 위치는 손님들로 하여금 극장, 쇼핑, 사무를 수월하게 
끝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주요 요소였다.
  그러나 그런 조건에서도 호텔은 팔리지 않았다. 객실이 백구십 개밖에 되지 
않은 호텔이 특히나 맨해튼 지역에서 큰돈을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과 
턱없이 올라간 저당권 대문이었다. 펠릭스는 단가를 낮춰볼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새 회의장 건물 여유에 있는 웨스트 사이드 쪽에 부지를 구입해야 했던 
펠릭스로선 상당한 자금이 필요했다. 앞뒤 가리지 않는 확장 문제에 대해 
급제동을 걸기 시작한 이사진들의 불평도 만만치는 않았다.
  그러나 뉴욕 샐링거를 그룹 발전의 기생충이라 여겼던 펠릭스는 어떻게든 
호텔을 발리 처리하고 싶었다. 부친 사후 스스로 맹세까지 하며 계획했던 
자신의 확장사업에 일침을 가하기 시작하는 그룹 이사진들을 무시하고 그는 
결국 회사 전용 부지중개인 대신 비밀리에 직원을 시켜 시카고 OWL개발사와 
직접적인 접촉을 시도했다.
  겨우 호텔 하나만을 소유하고 있는 하찮은 개발사이긴 해도 웨스 커리어의 
막강한 실력을 훤히 알고 있던 펠릭스는 매매대금의 정확과 신용 등에 확신을 
갖는 한편 더 나아가 뭔가 도움이 될만한 발판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까지 하고 있었다. 자신의 육감과 본능을 철저히 믿고 있던 그는 비록 
OWL이 생각보다 낮은 단가를 제시하긴 했어도 협상 테이블에서 마음에 둔 
가격으로 매매금을 올릴 수 있다는 여유까지 갖고 있었다. 
  결국 이월 중순경 많은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고 뉴욕 샐링거는 OWL의 
손으로 넘어갔다. 《월 스트리트 저널》이 뉴욕 비콘 힐이라 불리는 호텔 보수 
내용과 십이월 개장식 등에 관해 제법 상세하게 기사를 다뤘지만 펠릭스는 눈길 
하나 돌리지 않았다. 이미 손을 떠난 사안이기 때문이었다. 자축하는 의미로 
레니, 벤 그리고 알리슨을 로치 오버로 데려가 저녁을 함께 한 펠릭스는 평소와 
달리 사업 얘기를 기본 좋게 꺼냈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 호텔들을 팔고 한 곳에 크게 투자하는 게 좋은 생각 
같진 않습니다. 국내의 새로운 동향과 반대로 나가는 게 아닐까?"
  벤은 심사숙고한 듯한 표정으로 펠릭스에게 말했다.
  "새로운 동향?"
  경멸하는 듯한 말투로 벤의 말을 받아 치며 그는 목청을 높였다.
  "여기 온 지 겨우 십사 개월밖에 안됐으면서 국내 사정과 신동향가지 
읽어냈다는 건가?"
  "그 동안 열심히 눈여겨봤겠죠."
  레니는 부드럽게 남편을 달랬다.
  "관심 있게 보면 짧은 시간에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지 않겠어요?"
  "무슨 동향인 데요?"
  알리 슨 의 물음에 벤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소형화되는 추세지. 요즘엔 작고 아담한 걸 좋아해. 소형파티, 소형극장, 
소형가게 등등. 호텔이라고 소형화되지 말라는 법은 없겠지."
  "멋진 상상이구만."
  오웬이 세상을 뜬 직후부터 기르기 시작한 수염을 냅킨으로 살짝 두드리며 
펠릭스는 또 비아냥거렸다.
  "저녁파티나 극장, 영화관 같은 것들은 작아도 유지될 수 있지. 하지만 호텔은 
절대 안돼. 건물에 들어간 총 건축 비…"
  "보수비는 건축비보다 훨씬 덜 들어가지 않습니까."
  "건물에 들어간 총 건축비를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평방 피트 당 최고로 
뽑아내야 하기 때문이지."
  펠릭스는 벤의 의견을 아예 묵살해 버렸다.
  "그 때문만은 아니다. 내 언젠가 얘기했지? 대중은 절대 소형이나 우아한 걸 
원치 않아. 크고 눈부시고 밝은 걸 좋아하지. 대형수영장, 비디오 게임기, 
냉난방이 잘된 대형 주차장, 비서와 오후시간을 즐겨도 들키지 않을 정도의 
대형호텔을 원한단 소리다."
  "어머, 아마. 그런 사람이 어딨어요. 있어도 소수지."
  "잘 알면서 그렇게 시치미 데기냐? 점심시간과 가정으로 돌아가기 전 오후를 
즐기는 남자들이, 여자도 물론 그렇지만 호텔에 들락거리는지 모르고 하는 
소리야?"
  레니는 의도적으로 펠릭스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진짜예요?"
  "그렇다니까."
  "아반, 참. 사람들을 믿지 않나봐."
  "그자들이 원하는 걸 이해는 하지. 빠르고 쉽게 일을 끝내야 하거든. 그게 
우아한 것하고 통할 리 있어?"
  벤은 어깨를 으쓱했다.
  "레제트 인터내셔널 체인은 소형주의로 번창하고 있습니다. 시카고에 새로 
생긴 호텔, 뭐라더라. 아 그래, 비콘 힐 호텔. 그 호텔도 잘 나가잖아요. 다들 
가보고 싶어 하던데…"
  "그럼 메리잇, 하이야트, 힐튼은 다 죽어간다는 소리구만."
  펠릭스는 다시 빈정거렸다.
  "대형빌딩을 짓지 말자는 게 아니라 둘 다 병행하자는 의견이었습니다."
  저녁이 다 끝날 때까지 입을 꽉 다물고 있는 펠릭스를 보다못해 레니는 
슬며시 화제를 바꿨다. 뉴욕 근교에 새로 산 아파트 얘기였다. 이년 동안  
마음이 맞지 않아 계속 미뤄 오던 끝에 겨우 아파트를 구했다는 레니의 
얼굴빛과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벤은 그녀가 뭔가 불편해하고 있다는 것을 
육감으로 느끼고 있었다. 좋게 말하면 철저하게 자신을 조절한다고 할 수 
있지만 어떻게 보면 전혀 이해하기 힘들었다.
  벤은 레니를 이해하지 못했다. 가문이나 성장과정에 관한 질문을 할 때마다 
레니는 벤의 질문을 교묘히 피해 화제를 돌리기 일쑤였다. 왜 펠릭스와 
결혼했을까?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정말 어떤 것일까? 일년 넘도록 두 사람을 
지켜보며 느낀 의문이었다. 알리슨과 자신의 결혼을 레니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궁금했다.
 벤가드너란 인물은 또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따뜻하게 대해주긴 해도 레니는 마치 다른 사람을 쳐다보듯 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곤 했다. 그녀가 자신에게 뭘 원하고 있는지 벤에겐 수수께끼였다. 
일 년이 지나도록 벤은 레니에 관한 수수께끼를 풀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 건지 과묵한 사위를 자세히 살피기 위해 단순히 
눈여겨보는 건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레니는 대하기 힘든 존재였지만, 펠릭스는 아주 쉬운 상대였다. 모멸과 치욕을 
느끼게 하는 태도에 분이 나기도 했지만 벤은 그런 그를 어깨 짓 하나로 무시해 
버리곤 했다. 펠릭스는 장인어른과 사위, 고용주와 고용인이라는 관계를 
시시때때로 벤에게 강조함으로써 군림하려 했다.
  날 보면 아버지가 생각나서 그런 걸까? 보스턴에 도착한 이래 펠릭스는 벤을 
계속 적대시했다. 벤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펠릭스가 저드의 회사를 
말아먹은 지도 어언 삼십 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였다. 게다가 펠렉스를 속이고 
이용해 먹었던 희생물을 결코 뒤돌아보지 않는 성격이었다. 펠릭스는 아마 
전쟁에서 돌아온 저드가 굳게 닫힌 문을 두드리며 울부짓던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할 터였다.
  벤이 펠릭스에게 저드 가드너란 인물을 떠올리게 하는지 여부를 정확하게 알 
수 없었던 것은 그가 부친의 얼굴을 정호가하게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사진도 기억도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버지를 얼마나 닮았을까? 
내가 아버지와 꼭 닮아 펠릭스에게 옛일을 생각나게 하는 존재라면? 하지만 
그게 어쨌단 말이야? 알리슨과 결혼하고 임신까지 시켜 이제는 샐링거 가문에 
완전히 속해 있었다. 그분만이 아니었다. 누가 보더라도 그는 업무면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는 아주 빠르게 회사 업무에 적응했다. 펠릭스에게 약점을 잡히지 않기 
위해 집안과 회사 업무를 철저히 단속해 나가는 한편, 일 년만에 샐링거 호텔 
체인의 절반 이상을 도둑으로부터 철저히 무장하는 개가를 올렸다. 호텔업계 
전체가 충격을 받을 정도였다. 객실마다 새로운 안전 잠금장치를 설치하고 
객실청보들을 주시할 수 있는 컴퓨터 시스템과 복도와 로비에 텔레비전식 
카메라를 설치했으며 경비원에게 사복을 입도록 추진해 나갔다. 펠릭스는 
지배인들이 보낸 월말보고서를 통해 벤의 진가를 알고 있었다. 강화된 경비상태, 
급격히 줄어든 도난 횟수, 화기애애한 호텔분위기 등에 만족하는 각 지배인들은 
한결같이 벤 가드너 경비부사장을 극찬하고 있었다.
  개인적 호감 여부와 상관없이 펠릭스는 결국 벤의 월급을 두배 높여 연봉 
육만 달러를 지급했다. 두 배로 올라간 월급에도 불구하고 벤은 고개만 가볍게 
까닥거릴 분이었다. 철저한 복종을 원하는 펠릭스의 심사가 좋을 리 없었다.
  "감사하다는 생각 안 드나?"
  "듭니다. 장인어른도 그러리라 생각되는 데요. 제가 만든 경비 시스템, 
대단하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칭찬에 인색한 펠릭스였으나 별수없이 수긍해야 했다
  "그런 것 같더군. 보고서 받아 봤네."
  벤은 작긴 하지만 눈에 보인 승리에 미소지었다.
  "이만하면 경비대에서 손을 털어도 될 것 같은 데요. 개발기획부에 전무가 
없는데 그 곳에 자릴 만들면 어떨까요?"
  "내가 직접 하는데 그런 자립 만들어서 뭘 하겠나. 혹 좋은 부지가 있다 
싶으면 나한테 직접 보고를 해. 그럼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자넨 그냥 
경비부장에 있게 자네 말마 따나 대단한 실적을 올린 존재니까?"
  "제가 드린 말씀 다시 한 번 고려를 해주시죠. 이사회의에 올리기 전에 허락을 
해주시면…"
  벤의 말투에서 협박 비슷한 것을 느낀 펠릭스는 갑자기 굳은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고려했네. 묵살됐으니 그런 줄 알게나. 어서 일자리로 돌아가지. 일할 시간 
아닌가?"
  사무실로 돌아온 뒤 벤은 다음으로 밟아나갈 단계를 생각했다. 개발기획부가 
그룹의 심장이란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는 펠릭스 바로 밑자리 전무직을 원하고 
있었다. 미래를 위해 가장 확고한 자리였다. 월급도 경비와 비교할 수 없을 만틈 
상당한 액수였다. 펠릭스에게 직접 돈 문제를 얘기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마음 
속을 차지하고 잇는 것은 돈이었다. 샐링거 가문에서의 위치를 확신하지 못했던 
벤은 돈에 대한 집요한 욕망을 항상 가슴에 담고 있었다.
  비콘 힐 저택에서 로라의 채취를 느꼈던 벤은 그녀가 쓰던 방에 들어가 
추억에 잠기곤 했다,. 보스턴에 도착하자마자 법정 관련기사를 자세히 읽고 난 
벤은 그 후로 부쩍 로라 생각을 많이 했다. 그녀에게 연락을 하고 싶었지만 
알리슨과의 결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로라의 분노 어린 
음성을 듣지 않고 마음속의 얘기를 차분히 할 수 있는 길은 편지뿐이었다. 결국 
그는 장문의 편지를 시카고 비콘 힐이라는 호텔로 - 신문을 통해 그녀가 그 
호텔 지배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 보냈으나 끝내 답장은 오지 않았다. 화가 
나도 단단히 났구나. 벤은 펄펄 뛰며 고함을 질러댈 로라를 상상할 수 있었다.
  그녀가 묵었던 방 세 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그냥 내버려둬도 
괜찮을만한 곳까지 적지 않은 돈을 들여 철저하게 손을 본 알리슨은 로라의 
체취가 배어 있는 부분만은 손대려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알리슨은 
벤에게 로라의 방을 아기방으로 쓰자는 제의를 했다.
  "육아실로 쓰면 어떨까요?"
  "뜯어내고 다시 꾸미게?"
  "아뇨. 그냥 이대로요. 왕자님이 태어나면 여동생 볼 때까지 쓰다가 다른 
방으로 옮기면 되고, 공주님일 경우는 더 좋겠죠. 그냥 이대로 쓰면 되니까. 
저기 거실은 유모 쓰라고 하면 되겠네요. 어때요?"
  "그러지. 좋은 생각인데."
  금전문제를 제외하고는 벤과 알리슨은 항상 의견이 같았다. 돈과 관련해 벤은 
항상 짜디짜게 굴었다. 가질 수 있는 한 애들은 많이 갖자. 아이들과 유모, 그 
밖의 시중 들 사람들을 데리고 여행을 가자. 정원이 차기 전에 사립학교를 
미리부터 알아보자…벤은 알리슨의 이런 요구를 항상 계산기로 두드리곤 했다. 
그의 월급으로는 턱도 없는 요구였다.
  그는 월급을 두배 넘게 올려 받았지만 알리슨이 주식에서 얻는 수입의 십분 
의 일 수준이었다. 펠릭스부터 그룹 주식 중 단 한 주도 배당 받지 못했던 
남편에게 자신의 샐링거 호텔그룹 주식의 일부분을 넘겨준 알리슨은 그룹 
회장의 사위가 빈털터리란 사실에 불평을 하곤 했다. 자신의 수입과 지출을 
철저히 조절하며 살아 나갔지만 벤은 몇 년 안가 수입과 지출이 뒤빠귀리란 
사실을 미리부터 알고 있었다. 알리슨과 함께 암스테르담 침대에 누워 꿈꾸던 
결혼생활이 아니었다. 태어날 아이들 양육비, 가족들과 함께 할 해외 나들이, 
그런 지출을 망설인다면 그건 사나이가 아니었다. 문제는 알리슨과 자신이 속해 
있는 환경, 그 환경이 앗아가는 돈이었다. 사교계를 리드하는 가문답게 모든 
것을 화려하게 갖춰야 하고 여행도 최고로, 옷과 선물도 최고로, 파티도 최고로 
해야 하는 데 그의 고민이 있었다.
  미리 짐작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보스턴에 정착하자마자 나름대로 그 
문제를 풀어보려고 했지만 벤은 금세 두 손을 들어야 했다. 결론은 아주 
간단했다. 문제를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만큼 돈을 벌지 않는 한 알리슨의 
남편이나 샐링거 가문의 일원으로 지탱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결국 샐링거 호텔 체인을 이끌어가는 펠릭스의 경영방식이 탐탁지 않아도 
벤은 그걸 묵인해야 했다. 반기를 들고 나설 수 없는 처지였다,. 뉴욕 샐링거를 
팔아 치웠다는 명목하에 펠릭스가 자축을 베푼 로치 오버에서 알리슨과 레니가 
자기편이라는 것을 확인하고서도 그는 펠릭스의 주장에 결국 침묵을 지키고 
말았다. 그건 무언의 동의였다. 파면 안될 것 같았지만 벤은 내버려둘 수 밖에 
없었다.
  "왜 이렇게 조용하지?"
  와인 담당 지배인이 직접 최급이며 희귀품임 버간디를 따르는 것을 지켜보며 
커리어가 침묵을 갰다.
  "시카고 호텔을 매입했을 때 보여줬던 흥분감은 다 어디간 걸까?"
  "예전에 다 사라져버렸어요."
  그녀는 다소 긴장한 것 같았다.
  "이번엔 얼마나 해야 할 일이 많은가 그 걱정뿐이에요."
  "나도 일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인데. 할 일이 산더미처럼 밀려 있어서 생각만큼 
당신 일에 신경을 못 쓸 것 같은데. 될 수 있는 한 빨리 돌아오겠지만 급한 건 
이번 달에 혼자 마무리해야겠어. 인터뷰했던 건축가들 말인데, 시몬스가 제일 
낫더군. 일단 시몬스하고 브레버를 다시 한 번 보자구. 호텔 전체를 특실로 
하자는 당신 의견도 물어볼 겸 해서."
  웨스는 포도주잔을 살며시 쥐었다.
  "맨해튼 한복판에 아무도 그런 호텔을 시도하지 않았지만 되기 하면 아마 
근사할 거야. 혁신적인 생각이야. 시기도 적절하고. 구식호텔에 특실이라…"
  이번 주에 투자가로부터 삼백만 달러를 얻는 대신 OWL조정권을 잃게 될 
것이다. 그들은 분명 돈을 그렇게 많이 투자하면서 웨스와 내 의견을 무작정 
따르진 않을 걸. 그 세 사람 분명 결정권을 쥐려 하겠지. 삼백만 달러 때문에 
OWL주식가지 담보물로 저당 잡혔잖아. 호텔이 잘못 돌아가면, 대부금을 갚지 
못하면 난 진짜 끝장이야. 완전히 거지 신세가 될거야, 로라는 이 생각을 하면 
가슴이 떨려왔다.
  "몇 주 안에 빨리 건축업자를 설정하면 시카고처럼 크리스마스를 전후해서 
개장식을 치를 수 있을 거야. 아예 그렇게 하지. 앞으로 계속 연말에 개장하면 
어떨까? 그럼 행운이 따를 거야."
  웨스는 호텔 하나로 만족하라고 했었지. 하지만 멈출 순 없어. 모든 게 위험 
직전이지만, 끝을 보기 전에는 결코 그만둘 수 없어. 끝까지 해 보는 거야. 
로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저녁 파트너가 혼자 떠들고 있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혹시 새로운 저녁 
파트너를 찾기 위해서일까?"
  연기하듯 얘기하는 커리어 때문에 로라는 웃고 말았다.
  "다 듣고 있었어요, 웨스. 시몬스하고 브래버를 다시 한 번 본다면서요? 
그리고 매해 크리스마스 때마다 호텔들을 개장하겠다는 소리도."
  "좋았어. 내내 침묵한 것 용서해주지. 뉴욕 비콘 힐 꼭대기에 식당을 차리자는 
아이디어는 어때?"
  "글쎄… 그 말은 … 생각 안 나는데. 미안해요, 웨스. 그 소린 내가 못 
들었나봐요."
  커리어는 장난스러운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안했으니까 못 들은 게지. 대단한 걸. 딴 생가에 빠져 있었으면서도 
내가 한 소릴 다 들었다니."
  그는 로라의 턱을 손바닥으로 어루만졌다.
  "뭐가 그렇게 걱정돼?"
  "돈이오."
  "훌륭한 생각이야. 똑똑한 사업가는 사업체 숫자가 늘어갈수록, 또 성공할 
확률이 낮아질수록 걱정이 많아지는 법이거든. 현식적으로 변해가는 거야. 
괜찮아. 스타트가 좋으니까 잘될거야."
  그는 잔을 들어 올렸다.
  "과거와 미래를 위해."
  약간 놀란 눈빛으로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전 과거를 위해 건배한 적은 없어요."
  "먼 과거 말고, 가까운 과거 말이오."
  커리어는 재빨리 말을 바꿨다.
  "시카고 비콘 힐, 우리의 동업, 우리의 우정…"
  "알았어요. 그건 좋아요."
  로라는 달콤한 와인을 입술에 축겼다. 웨이터가 다가와 저녁을 주문 받는 
동안 그녀는 또다시 생각에 잠겨 들었다. 메뉴판을 앞에 놓고 그 날의 
특별메뉴를 논하는 웨스와 웨이터의 음성을 흘려 들으며 그녀는 벤을 생각하고 
있었다.
  벤은 먼 과거이자 가까운 과거이기도 했다. 이 개월 전 결혼식을 올린 직후 
벤이 보내온 편지는 로라는 웨스 앞에서 마음의 눈으로 다시 읽고 있었다. '제가 
왔었으면 했다.' 벤은 맨 처음에 그렇게 적고 있었다.
  널 초대하고 싶었다. 하지만 네가 결코 샐링거 일가가 모인 자리에 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 그 사람들도 널 환영할 것 같지 않았고. 그 사람들, 네게 대한 
생각을 바꿔야 할 거야, 내가 분명 그 생각을 바꿀 테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해, 로라. 조심도 해야겠구. 여동생이 있다는 사실, 더군다나 그게 
바로 로라 너란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거든. 자칫 잘못하면 크게 의심 받을 것 
같아 몸조심하고 있다. 이런 날 이해해주겠지. 어쩔 수 없었다. 의심받을 순 
없잖니. 좀더 빨리 움직여서 네 누명을 벗겨주고 싶지만 아직은 안돼. 모두 다 
차가운 시선으로 날 보고 있다. 레니는 친절하고 따스하지만, 차갑기 그지없이 
생선눈깔로 날 쳐다보는 펠릭스는 한시도 마음 놓고 대할 수 없는 존재다. 
사무실 업무조차 못 믿어 날 감시하고 있어. 샐링거 호텔 
경비부사장자리에서-괜찮은 자리지. 안 그래, 로라?- 일한다. 펠릭스 사무실 
한층 아래인데 아주 멋지다. 괜찮은 자리야. 만족한다. 그룹이 커가니까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 매일 형사처럼 문제를 풀어가는 맛이 괜찮아. 문제는 
돈인데, 조만간에 어떻게 해결되겠지. 그보다 진짜 내가 심각하게 고민하는 문젠 
바로 너다. 보고 싶다 로라. 미치게 보고 싶어. 그 동안 여러 가지가 많이 
변했지. 우리 역시 변했을 거다. 얼마나 변했을까 궁금할 뿐이다. 크리스마스 때 
여기 도착해 비콘 힐 저택으로 들어 갔을 때 - 편지 보고 이미 눈치 챘겠지. 
그래 우리 여기 산다. 레니와 펠릭스가 결혼선물로 우리한테 줬지- 네가 살았던 
방들을 보면서 속으로 얼마나 놀랐는지 아니? 진짜 기막히게 꾸며 놨더구나.
  나와 클레이로부터 멀리 떠나 혼자만의 거처를 가져봤으면 원이 없겠다고 
했던 말 생각나니? 결국 혼자만의 방을 찾아내 그렇게 멋지게 꾸며놓다니. 그 
방을 보며 생각했다. 네가 왜 나한테 돌아오지 않겠다고 그렇게 우겼는지를. 
하지만 동시에 울고 싶었지. 더 이상 네가 그 방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에 
말이다. 널 다시 데려오겠다는 결심도 했다. 몇 년 전 내가 했던 것처럼. 물론 
너는 새 삶을 찾아 잘 살고 있을 지만. 비콘 힐 네 방보다 더 멋진 방에서 
살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 집에 다시 돌아와야만 돼, 로라. 쓰디쓴 기억과 
슬픔을 없애버려야 해. 네가 꾸며놓은 방들을 보며 달라진 네 모습과 네 인생을 
상상해 볼 수는 있다만, 정작 나한테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지 몰라 안타깝기만 
하구나. 날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다고 외친 그 결심을
바꿀 수 있겠지. 나도 많이 변했으니까. 꼭 하고 싶은 얘기였다. 설명해야 될 
일도 많고 서로 얘기를 나눠야 할 것도 많다. 우습지? 내가 여기 몸담고 사는 
게.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사랑하는 네가 생각나나 보다. 로라 우리 둘 
얼마나 사랑했었니? 그 사랑은 사라질 수 없는 거잖아. 안 그래? 다시 만나 
옛정을 확인해보고 싶지 않니? 사랑이 사라졌다면 다시 사랑하면서 살자. 여기 
보스턴까지 올 필요없어. 내가 시카고로 갈게. 오늘의 호텔이란 책자에서 네 
얘길 알게 됐어. 진짜 자랑스럽다. 네 입으로 직접 더 자세히 들려줄 수 없겠니? 
답장 부탁한다. 정말 보고 싶다, 클레이도. 물론 녀석이 원한다면 말이다.
  로라는 편지지를 뒤집었다. 주소가 인쇄된 편지지는 오웬이 쓰던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그녀 자신이 쓰던 편지지…그것을 노려보던 로라는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그녀가 사랑하고 꿈꾸고 잃어버렸던 것을 벤이 차지해버린 격이었다. 그가 
살고 있는 곳은 비콘 힐 저택이었다. 그의 소유가 돼 버린 오웬의 저택 샐링거 
일가와 결혼은 한 벤 가드너. 샐링거 호텔 체인의 고급 간부.
  그녀에게 주어진 행운을 파괴해 놓고 동기가 어떻든 끝내 그 손에 행운을 
대신 잡아버린 사람. 나와 함께
나누고 싶었다구? 날 초대하고 싶었어? 그 곳이 누구 집인데? 날 이렇게 
만들어놓고서 날 초대한다구?
  가방 구석에 아무렇게나 그 편지를 쑤셔 박은 그녀는 항상 그 가방을 들고 
다녔다. 언젠가 그 편지에 답장할 것을 생각하면서.
  초가을, 황금 같은 날씨에 스타브드 록으로 하이킹을 떠난 로라는 떡갈나무 
밑에 앉아 벤의 편지를 또 읽었다.―우리 둘 얼마나 사랑했었니? 그 사랑은 
사라질 수 없는 거잖아, 안 그래?
  껍질이 투박한 떡갈나무 둥치에 머리를 기댄 로라는 무섭고 어둡던 시절 
자신을 돌봐주던 벤의 모습을 더듬었다. 화가 나면서도 자신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벤을 차마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둘 사이에 아무리 높은 장벽이 
있어도 그 기억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실타래가 부드럽게 풀려가듯 
벤에 대한 생각은 자연스럽게 폴로 이어졌다. 그의 목소리, 미소, 볼 때마다 
아름답다고 느꼈던 그의 검은 눈동자를 그녀는 여전히 생생하게 느끼고 있었다. 
함께 있을 때 그에게 속해 있다는 느낌은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이었다.
  아냐, 사라질 수 있어. 없앨 수 있어.
  벤의 편지를 갈기갈기 찢어버린 그녀는 축축한 땅에 그 조각들을 
파묻어버렸다. 손톱 밑에 낀 검은 흑을 보자 케이프 코드 온실에서 일하고 있던 
클레이가 떠올랐다. 옛 추억에서 영영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자 그녀는 두려웠다.
  "미래를 위해 한 잔 더 하죠."
  로라는 커리어에게 잔을 내밀었다. 새해 이월, 시카고 비콘 힐이 성공적으로 
문을 연 지 일 년하고도 이 개월이 지나고 있었다. 벤과 알리슨이 결혼식을 
올린 것도 벌써 일 년이 지나 있었다. 두 사람은 잔을 부딪쳤다.
  "우리의 과거와 미래를 위해서."
  그래,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나밖에 더 있겠나. 커리어는 느긋한 얼굴로 
로라를 지켜보았다. 그녀 주위에는 아무도 없어. 유독 로라에게 관심을 보이는 
지니 스타렛이 있긴 했지만, 지는 친구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로라가 동생 클레이에게 의지하는 것도 아니었다. 클레이는 오히려 
골칫덩어리였다.
  "우리의 과거와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
  커리어는 로라가 한 건배에 단어 하나를 추가했다. 순도 높은 크리스털 잔이 
맑고 정교한 소리를 냈다.
  "미래를 얘기해요, 웨스. 워싱턴과 필라텔피아에 남아 있는 샐링거 호텔 
얘기요."
  로라 페어차일드가 OWL개발사의 주요 주주라는 사실을 펠릭스가 알게 된 
날은 오월의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이었다. OWL개발의 필라텔피아 샐링거 
매입의뢰 건에 대해 그에게 직속돼 있는 필라텔피아 부동산 중개업자로부터 
날아온 소식이었다.
  "시카고에 있는 친구한테 얘긴데, 거의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정확한 
소식농이니까요."
  "시카고 호텔 지배인일 분이야."
  펠릭스는 아주 단호하게 중개인의 정보를 부인했다. 호텔업계에서 나오는 
잡지에서 수시로 시카고 비콘 힐이 오르내리곤 했으나, 펠릭스는 애써 그 
기사들을 외면해왔다. 자신의 뒤꿈치를 물 듯 샐링거 호텔이었던 곳에서 제법 
신나게 헤엄치는 못된 계집이 증오스럽긴 했지만 피해볼 것 없다는 
계산에서였다. 시카고에서 영원히 썩어 문드러져 죽겠지. 그런 생각으로 그는 
로라에게 쏟아지는 호텔계의 찬사를 한쪽 귀로 흘려 내보고 있었다.
  "처음 얼마간은 말씀대로 직접 지배인으로 뛰었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자가 그 잘릴 맡았더군요. 증거는 찾아봐야겠지만 제가 들은 얘기가 거의 
확실합니다  커리어와 OWL개발을 세운 뒤 상당량의 주식을 소유했다고 하던데, 
괜찮겠는지요?"
  펠릭스의 침묵에 중개인을 확인하기 위해 다시 물었다.
  "이년 동안의 매입자 중에서 가장 괜찮은 조건을 내걸어왔습니다. 십일로 
시작해서 십으로 결정지을까 하는데 의견이 어떠신지요? 우리측 예상가 보다는 
낮지만 요즘 필라델피아 경기가 아주 낮아서요. 하지만 십은 꼭 받아내겠습니다. 
한 시간 내에 모든 서류가 준비될 것 같은데…"
  "다른 사람으로 찾아봐."
  창밖의 폭풍우처럼 거센 분노를 가까스로 억누르며 그는 짧게 명령했다. 
그녀를 무시했던 자신에게 발등을 찧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 계집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니. 자신이 대주주로 관여했던 회사의 대주주가 로라라는 사실을 
그는 용납할 수 없었다. 정보에 관한 한 제일인자로 자부하던 펠릭스였다. 
진흙탕에 떨어졌다는 생각, 실수를 했다고 자인해야 하는 상황이 그를 폭발 
직전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그 동안 찾아왔던 매입자들을 다시 한 번 살펴봐. 그들 중 최고가로 
정해버려. 더 이상 얘긴 그만두지."
  중개인이 뭐라고 하려는 순간 펠릭스는 매몰차게 마지막 한마디를 추가했다.
  "일주일 안에 다시 연락하게. 그 호텔 즉시 팔아버리고 싶으니까."
  회의실에서는 정기 월차회의를 위해 모인 이사진들이 펠릭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라고 해. 분노를 웬만큼 식히기 전엔 들어갈 수가 없었다. 분노를 
조절하기는 그리 쉽지 않았다. 특히나 타인에게 그 분노를 감추어야 할 땐 더 
더욱 그랬다. 게다가 필라델피아 호텔 매매 건에 대해 이사진에게 설명을 
해야만 했다. 그는 심호흡을 해가면 계속 분노를 삭이고 있었다.
  "처 처 처 천만 달러를 더 더 던졌다구?"
  펠릭스가 맨 처음 꺼낸 사안에 이사는 예의 그 버릇대로 말을 더듬었다.
  "천만이고 천 백만이고 그건 우리 생각이지, 그 쪽에선 가격 결정 
안했다던데."
  "하지만 그 쪽에서 그렇게 제안했으니 그렇게 마무리 짓겠다고 중개인이 
그랬다면서요?"
  콜 해튼이 바짝 달려들며 공격해왔다. 샐링거. 일가가 아닌 세 명의 이사 
중에서 가장 입바른 소리를 잘하고 까다로운 사람이었다.
  "천 주겠다고 나온 사람이 어디 있었소?"
  "처 처 처 천 주겠다고 한 사람 없었어. 일곱 장이 제일 높았지. 안 그래?"
  "일곱 장 내민 측 얘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잖아!"
  펠릭스는 이사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고 근엄하게 사람들을 한 바퀴 휘 
둘러봤다.
  "어떤 매입자든 적극적으로 끌어당겨 천으로 끝맺을 테니 그렇게 
받아들이시오."
  "일부러 그럴 것 뭐 있소?"
  콜 해튼이 항의했다.
  "벌써 천 내겠다는 매입자가 나왔잖소."
  "그렇게 다른 사람들이 높은 금액을 내면서까지 눈독을 들이는 것 보면 
괜찮은 호텔인 것 같은데, 그냥 두면 안되겠소?"
  해튼 옆자리에 앉은 아사가 한마디 거들었다.
  펠릭스는 창문 밖으로 퍼붓는 회색 빗줄기를 바라보았다. 그 계집에게 샐링거 
호텔을 내줄 순 없어. 그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무슨 얘기야. 벌써 두개나 
넘겨주고서. 내 호텔을 두개나 가졌어. 돈 많은 남자들을 유혹해서. 옛날에 
아버지를 꼬셔 먹었듯 분명 나이든 노친네를 농락했겠지. 하지만 어림 없어. 
앞으론 먼지 하나 내주지 않겠어.
  "OWL개발사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러니까 그 문젠 일단락 지읍시다. 
그자들과 거래하기 싫소. 그러니 다른 업자를 찾아서…"
  "난 생각이 다른데."
  동그란 안경 속에서 빛나는 토마스 젠슨의 눈빛에는 의심이 가득했다.
  "믿을 수 있는 업자를 물리치다니, 그 이유를 알아야겠소."
  "미 미 미 믿을 수 있는 업자가 아닌가보지?"
  아사는 펠릭스를 두둔했다.
  "믿을 수 없다니? 시카고, 뉴욕 호텔을 그렇게 매끄럽게 인수한 실력을? 
담보물, 건축대금뿐 아니라 시카고 호텔로 호텔계 돈을 빗자루로 쓸어 담고 
있는데? 그런 회사를 믿을 수 없다니? 중개인에게 다시 전화해요. 다시 
협상으로 끌어들이라구요."
  그는 의장인 펠릭스에게 명령조로 말했다.
  "천만으로 결정 봤다고 얘길 하란 말이오. 무엇 때문에 OWL개발과 이를 갈고 
있는 지 내 알 바 아니오. 사사로운 문제는 버리고 당장 그 호텔을 팔아야 되는 
것 아니겠소? 우리는 이년 동안 그 일에 매달렸소. 기회 생겼을 때 빨리 팔고 
뉴욕에 새 호텔을 세웁시다. 다른 덴 모르지만 뉴욕만큼은 반드시 새 건물을 
지어야 한다고 봅니다."
  펠릭스의 입술은 분노와 싸우느라 새파랗게 변했다. 로라 페러 차일드, 
자신에게 반기를 들며 대항하는 이사진, 망할 놈의 호텔을 지어 놓은 아버지에 
대한 분노였다.
  "이미 결정 본 일이오. 다른 매입자를 찾아보겠소."
  "OWL이 어때서요?"
  벤이 대화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상한 이름이긴 하지만 이름이 이상하다고 상대 못할 건 없죠. 뭣 때문에 
그쪽을 싫어하시는데요?"
  "그자들 사업방식이 마음에 안 들어서 그렇네."
  펠릭스는 벤에게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대꾸했다.
  "결정 본 일이라고 얘기했지 않나. 그렇게 오래 얘기할 필요없는 안건일세."
  "하지만 대답만큼은 들어야 되겠소."
  해튼은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뭣 때문에 그래요? 시카고 뉴욕 호텔 때문에 그런 건 아닐테고. 개발본부 
자체에 뭔가 변화가 있는 거요? 경영자가 누군데? 상대가 누구요?"
  "웨스 커리어."
  "그럼 두말 할 것도 없지 않소? 믿을만한 사람이니까. 내 회사 문제도 
해결해준 사람이요. 커리어와 무슨 문제 있소?"
  "그런 건 아니오."
  "그럼 누구 딴 사람을 싫어하는구만. 이렇게 좋은 조건을 밀치는 걸 보면 싫어 
하긴 아주 싫어 하나보지. 그자가 대체 누구요?"
  노크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온 비서가 타원형 탁자를 돌아 벤의 귀에 뭔가를 
열심히 속삭인 순간, 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사들에게 고개를 약간 
숙였다.
  "죄송합니다."
  에의 바르게 행동하면서도 그는 연신 싱글거리고 있었다.
  "아내가 병원에 갔다는데, 출산할 때 옆에 있었으면 합니다. 회의중에 
죄송합니다만 이해해주신다면…"
  환호 소리에 벤은 뒷말을 끝내지 못하고 축하 악수를 받아야 했다. 토마스 
젠슨은 자리에서 일어나 벤을 두팔로 끌어안기까지 했다.
  "알리슨에게 우리가 축하한다고 전해주게나. 결과 나오자마자 알려주는 거지?"
  "그럼요. 감사합니다."
  "그래, 누굴 그렇게 싫어해요?"
  해튼은 벤이 몸을 돌리자마자 펠릭스를 다시 추궁했다.
  "좋은 계획이 구덩이 속으로 떨어져버리는데 내가 가만히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요., 펠릭스? 잘난 자존심을 누구한테 다쳤길래…"
  "대주주요!"
  펠릭스는 결국 분통을 터뜨리고 말았다.
  "내 정보통으로 대주주가 누군지 알아냈어요. 로라 페어차일드. 그 여잔 
뒷구멍에 숨어…"
  순간 쿵 소리가 들려왔다. 벤이 비틀거리다 문턱에 넘어진 것이다.
  "어이쿠, 저런!"
  토마스는 벤에게 뛰어갔다. 벤은 어느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의자 때문에 넘어졌어요. 죄송합니다."
  "아빠가 되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 택시를 타게나. 운전 하지 말라구. 
그런 정신으로 어디 차 몰겠나."
  해튼은 시원스럽게 웃어 젖히며 벤을 놀렸다. 벤은 고개를 끄덕이며 분노로 
씩씩거리는 펠릭스를 힐끗 쳐다보았다. 토마스는 벤이 염려됐는지 그의 어깨 
위에 손을 얹고 있었다.
  "괜찮은 건가?"
  "그럼요."
  벤은 낮은 목소리로 토마스에게 속삭였다.
  "애기 본 다음 전화하면 회의 결과 알려주시는 거죠?"
  "그러지."
  얼마만큼 상세히 들을 수 있을까? 펠릭스가 토마스, 아사와 사사로이 나눌 
개인적인 얘기까지는 아니더라도…"
  "도대체 그 여자가 누군데 우리 사업방향을 바꾸겠다는 거요?"
  중구난방으로 떠들어대는 이사들을 향해 해튼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누구한테 오든 돈은 돈이잖소. 메뉴판에서 음식 고르듯 회사를 고르겠단 
소리요?"
  벤이 회의실 밖으로 나와 문을 닫자 목소리들이 일시에 사라졌다. 복도를 
빠져나가는 벤의 머릿속에서 두 가지 생각이 동시에 떠오르고 있었다.
  로라 페어차일드. OWL개발사.
  알리슨은 지금 병원에 있겠지.
  어떻게 대주주가 될 수 있었을까?
  운전하지 말자, 해튼 말이 맞아. 택시 타는 게 낫겠어.
  원래 뛰어난 애긴 했지만 어떻게 그렇게 규모가 큰 회사를? 돈은 다 어디서 
났을까?
  의사가 모든 게 다 괜찮다고는 했지만, 알리슨이 만약 잘못되면….
  플레이는 어디 있는 거지?
  아무 일 없을 거야. 괜찮을 거야. 알리슨도, 애기도….
  로라를 만나 봐야겠어. 뭘 하는지, 뭘 꿈꾸는지….
  "가드너씨."
  생각에 빠져 있는 그를 안내데스크 아가씨가 불러 세웠다.
  "아래층에 택시 대기시켰는데요. 필요하실 것 같아서요."
  "잘했어요. 생각해줘서 고마워요."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분으로 그는 엘리베이터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 로라. 알리슨. 우리 애기. 제정신을 잃은 펠릭스.
  벤은 자신이 뭘 하는지 전혀 의식 없는 상태로 알리슨이 입원해 있는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당신 흥분해 있군요."
  키스하는 남편에게 알리슨은 속삭였다.
  "아빠가 된다고 생각해 그래요? 몇 시간 동안 난 엄마가 된다는 생각만 
했어요. 엄마가 된다는 게 어떤 건지 모르겠어요. 당신은요? 우리 애기 볼기 
때릴 자신 있어요?"
  "아니."
  미소짓던 알리슨은 진통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녀는 두 다리를 
직각으로 세웠다.
  "왜… 웃음이… 나는지… 모르겠네. 정말… 너무… 웃기는거 있죠."
  벤도 이를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숨쉬어봐. 그 동안 연습한 것 기억나지?"
  그녀는 있는 대로 얼굴을 찌푸렸다.
  "아프지 않을 땐… 쉬웠… 는데."
  "내가 셀 테니까 쉬라구."
  벤은 될 수 있는 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표정을 짓기 위해 이를 악물고 
있었다. 고통스러워하는 알리슨을 지켜보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전혀 
상상해보지 않았다.
  "연습할 때 생각하면서 깊게, 천천히…"
  "두 분, 참 보기 좋아요."
  침대 옆으로 나타난 간호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대부분 다 잊어버리는데. 가드너 부인은 대단하시네요. 아주 잘하고 있어요."
  알리슨은 반쯤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 때문이에요. 옆에 있으니까…"
  "좋아요."
  간호사는 알리슨의 맥박을 재기 시작했다.
  "괜찮은 거죠?"
  벤은 바보처럼 굴어서는 안된다고 자신을 다독거렸다. 알리슨과 함께 임산부 
교실에 참가했던 벤은 그녀가 아주 건강한 상태란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병원 입원실에 앉아 고통과 싸우는 알리슨을 바라보는 일은 
연습과는 전혀 달랐다.
  "모든 게 다 정상이냐구요?"
  "여보, 간호사한테 소릴 지르다니. 일하고 있잖아요."
  "모든 게 다 정상이에요. 그러니까 침착하게 앉아서 호흡이나 조절시키세요. 
두 분 다 훌륭하게 잘 견뎌내고 있으니까 계속하세요."
  "간호사에게 좀더 친절하게 대할 수 없어…"
  벤은 고통 때문에 말을 끝맺지 못하는 알리슨의 손을 힘껏 쥐었다.
  "당신 잘 견디고 있어. 사랑해."
  "벤."
  알리슨은 킬킬거리면 웃었다.
  "당신 목소리 어떤지 알아요? 아내한테 그런 목소리로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가만히 드러누운 채 알리슨은 다음 진통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든 게 다 준비돼 있다니 너무 행복해요. 유모침대는…"
  진통이 다시 찾아들었다. 벤은 고통과 싸우는 알리슨의 얼굴을 괴로워하며 
지켜보았다.
  "유모에게 전화해줘요. 잊지 말고… 며칠…"
  "그만 말하고 쉬라구. 알았지? 내가 셀 테니까 들어."
  알리슨의 손을 잡고 박자를 맞춰 그녀와 함께 숨을 쉬는 동안 벤은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펠렉스에 대한 적대감, 새롭게 옮겨가고 싶은 전무 자리, 
돈, 로라, 부친을 위한 복수. 모든 것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는 알리슨의 불룩한 
배를 손으로 다독거렸다. 얄팍한 병원 가운 밑으로 크게 부풀어 있는 그녀의 
가슴에 키스를 하는 벤의 긴 머리카락이 그녀의 잿빛 섞인 금발과 섞이는 순간, 
그는 깊은 만족감을 느꼈다. 자신을 사랑하는 아내, 집, 애기와 새로 이룰 가정.
  로라의 답장을 기다리며 우편함을 뒤지곤 했으나, 끝내 답장이 오지 않자 
실망했던 벤은 애기가 태어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편지를 보내리라 
결심했었다. 그러나 로라가 끝내 연락을 해오지 않더라도 그에겐 기쁨으로 
가득찬 새 생활이 있었다. 행복을 나눌 수 있는 편안한 장소, 희망찬 미래. 
펠릭스와 대결해가며 샐링거 제국에서 자리를 차지하는 일도 알리슨 곁에 
있으면 모두 무의미해 보였다. 그런 일들은 나중에 해결할 문제였다. 알리슨을 
만나기 전에는 꿈조차 꾸지 못했던 행복이었다. 부모가 사고로 세상을 떠난 후 
로라 외에 자신에게 매달린 사람은 알리슨이 처음이었다.
  "사랑해."
  그는 다시 알리슨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 순간 그는 울고 웃고 싶은 
감정을 동시에 느껴야만 했다.
  "당신은 나한테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준 사람이야. 이처럼 누굴 사랑해본 
적이 없어. 누굴 이처럼 강하게 필요로 한 적도 없어. 죽음이 우리를 갈라 놓을 
때까지 사랑하고 지켜줄게. 항상 당신 곁에 있을게. 절대 떠나지 않아."
  진통 간격이 짧아짐에 따라 간호사들의 출입도 잦아졌다. 밤 열한시가 되자 
간신히 숨을 몰아쉴 정도로 진통 간격이 더욱 짧아졌다. 뱃속이 소용돌이에 
밀려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는 알리슨에게 벤은 끊임없이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그로부터 한 시간 뒤, 자정이 거의 다 되어 알리슨의 손을 잡은 채 산고를 
지켜보던 벤은 마침내 그의 아들인 저드 가드너를 팔에 안을 수 있었다.

    21장
  두번째 절도사건은 파리에서 발생했다. 미국 순회공연을 끝내고 돌아온 
브리트 페럴리가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벽난로 선반이 텅 비어 있었다. 
그가 가장 아끼는 레밍톤 조각상 석점을 빼고는 집안 어디에도 손댄 흔적은 
없었다. 밖에서 들어온 흔적도, 범인을 추적할 단서도, 머리카락 한 올도 
발견되지 않았다.
  페럴리의 아파트 열쇠를 정교하게 복사할 수 있었던 클레이는 마치 자기 
집으로 들어가듯 아무 문제없이 그의 아파트로 들어갈 수 있었다. 페럴리의 
포켓수첩에서 그의 파리 도착 시간까지 알아냈기 때문에 느긋한 마음으로 
레밍톤 조각품을 가지고 나왔다.
  희귀품만을 수장하는 고객들 구미를 맞추기 위해 혈안이 돼 있는 
미술중개상에게 넘어간 조각들은 콩고드 비행기에 실려 고향인 뉴욕으로 
감쪽같이 다시 되돌아왔다. 수사도 하기 전에 미결로 종결됐음 만큼 완벽한 
도난사건이었다.
  페럴리는 일년 내내 파리를 떠나지 않은 채 술과 코카인을 멀리하려 애쓰고 
있었다. 그는 25년 넘게 가수와 배우 활동으로 펜들의 사랑을 받았다. 야성미가 
넘치는 그는 상큼한 미소로 사람들을 휘어잡았다. 부모들은 그처럼 멋지고 
사랑스런 아들을 꿈꿨다. 그러나 인기 하강과 더불어 술과 마약에 찌들어 가는 
그를 발견한 뒤부터 여자들은 그를 쓰레기로 취급했다.
  "아무 약속도 줄 수 없대."
  로스앤젤레스행 비행기에 오른 그에게 매니저는 엄한 눈빛을 보냈다.
  "텔레비전 드라마도, 심지어 콘서트 초대손님 자리도 못 준다더라. 새롭게 
변신했다는 걸 증명하기 전까진 말야."
  매니저는 자기 머리를 톡톡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이러면 어떨까? 굶주린 사람들을 위한 자선 모금식으로 세계 
순회연주를 다니는 거야."
  "그건 다들 하는 일이잖아?"
  "그렇다고 전세계가 행복해지지 않았어. 몇 십 년씩, 아니 몇 천년씩 무수한 
가수들이 돌면서 모금을 해도 기아는 계속 존재해. 관중들의 호응을 얻기 위해 
그만큼 좋은 방법은 없어. 새롭게 변했다는 걸 스스로 증명해 보이는 거야. 
새로운 브리트 페럴리, 가수, 배우, 인도주의자! 어때, 더 좋은 생각 있으면 
말해보지."
  결국 그렇게 해서 브리트 페럴리는 기존 밴드에 무명 연주가 세 사람을 
보강시켜 순회공연 계획을 잡았다. '기아와 싸우는 페럴리!'라는 활자가 전세계 
신문을 장식해 나갈 무렵, 텔레비전 카메라들은 서로 다퉈가며 피난민 캠프촌과 
슬럼가에서 죽어가는 앙상한 아이들에게 앵글을 맞추기 시작했다. 세계 연주를 
위해 기부금을 대겠다는 후원자들도 줄을 섰다. 순회연주 맨 마지막으로 워싱턴 
대형 홀에서 열리는 연주회 실황 녹화중계권과 주제가 음반을 위한 저작권 
계약까지 경쟁이 치열했다.
  티켓은 기록적으로 팔려나갔다. 브리트 돌아오다!라고 외치는 《뉴스위크》와 
《피플 앤 타임지》기사에다 목표액이 달성됐는가를 묻는 독자들의 문의 전화가 
쇄도했다.
  "달성됐습니다."
  패럴리는 라디오 방송쇼에 나와 쩌렁쩌렁하게 외쳐댔다.
  "물론 제반 경비 때문에 약간 지출하긴 했지만 모든 게 기대 이상으로 
들어왔습니다. 절약하면서 돌아다녔기 때문에 지출도 별로 없었지요. 대단히 
감사합니다!"
  그는 원고를 넘기며 열변을 토했다.
  "아주 만족합니다. 대성황리에 기금모금이 끝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서로 믿고 사는 사회, 우리 모두가 서로 사랑합시다!"
  네 번의 콘서트를 통해 기부금과 입장권 판매로 들어온 돈은 이백만 달러 
이상이었고, 일차 순회공연은 성공리에 끝났다. 페럴리 그룹은 2차 연주회가 
열리기 전에 이주 동안 휴가를 받고 각자 흩어졌다. 페럴리가 파리로 돌아와 
레밍톤 조각상이 없어진 것을 발견한 것도 바로 그때였다.
  도난사건이 일어난 지 며칠 뒤. 로스엔젤레스의 한 칼럼니스트는 브리트 
페럴리가 정신 차린 지 몇 달만에 파리에 있는 술집에서 난투극을 벌였다는 
기사를 신랄한 어투로 싣고 있었다. 그 기사로 인해 페럴리는 TV시리즈 
출연계약권을 놓쳐버렸다. 페럴리의 미래는 또다시 어두운 구름 밑으로 
숨어버린 것이다.
  "운을 차버렸구만."
  래리 고울드는 폴에게 신문을 넘기며 혀를 찼다.
  "가만히 있었으면 좋았을 걸. 억울해도 할 수 없지. 굴러 들어온 복을 발로 
차버렸으니."
  기사를 대강 읽어나가던 폴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우리 필름에 이 사람을 넣어보면 좋겠는데. 미국 영웅의 흥망성쇠. 어때?"
  래리는 골똘히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 것 같은데."
  지저분하게 어질러진 폴의 책상에 마주 앉아 두 사람은 서로 눈을 반짝였다.
  "잘만 하면 우리 인생살이가 모두 나타날 것 같아. 누구나 다 위대해지고 싶은 
욕망이 있는 것이고, 또 누구나 쇠락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잖아."
  "그걸 진짜 스타를 통해 나타내 본다…"
  래리도 폴의 흥분된 목소리에 보조를 맞추고 있었다.
  "알려진 인물이니까 그런 흥망을 더 확실히 현실감 있게 느낄 수 있겠지. 
하지만 문제가 없진 않아. 관중들은 이미 다 눈을 돌려버렸거든."
  "그래도 표현만 잘하면 시선을 다시 돌릴 수 있어. 분명 그럴 듯한 작품이 
나올 거야. 아무리 많이 접해도 절대 지겹지 않은 주제거든. 신나는 흥밋거리지."
  "무슨 주제? 실패?"
  "그냥 실패가 아니지. 극적인 실패. 화려하고 눈부신 실패, 추락하는 우상, 
왕좌를 떠나는 왕, 거지가 된 억만장자, 아가멤논(트로이 전쟁 때 그리스군의 
총사령관을 주제로 한 그리스신화:역자주)을 사람들이 왜 읽는데? 외디푸스는? 
리어왕은?"
  "맞는 말이다. 난 브리트를 무너져 내린 왕족처럼 생각하진 않았어. 그냥 높이 
올라갔다가 떨어져 내린 자라고만 생각했지."
  "좋아, 한 번 해보자. 우리의 영웅이라!"
  "왕좌에 앉힌 왕에게 등을 돌린 뒤 결국 평민으로 몰락하는 것을 지켜보는 
시민들의 모습도 잡아넣구 말야."
  래리와 얘길 주고받는 동안 폴은 이미 나름대로의 기본 틀을 짜고 있었다. 
특이한 음성과 영상, 클라이맥스의 연주 장면….
  "일단 제일 처음 해결할 문제는 페럴리를 끌어들이는 일이야"
  "별 문제 있겠어? 안하면 뭐 하게? 컴컴한 층계 위에 있는 신세잖아. 분명 
달려들 거야. 그자 여태껏 안 만나 봤지? 난 한 번 만나보긴 했는데, 기억할 지 
모르겠군. 어쨌든 내일 그쪽 매니저한테 연락해보자구. 전화 한 다음에 네가 
직접 파리로 가보는 게 어때? 에밀리 괜찮을까?"
  "요즘 시대장르별 패션 찍느라고 정신 없어. 내가 없어져도 모를 텐데."
  에밀리 얘기를 하는 폴의 얼굴은 그리 밝지 않았다.
  "그래, 좋아. 그럼 개요만 우선 얘길 해보자. 마약, 술, 달보고 짖었다는 소리 
말고 다른 얘기 또 없을까?"
  "짖어? 짖는 건 몰랐는데."
  "몇 년 전에 그랬대. 영국산 순종 세터처럼 짖어댔다는구만, 얼룩개 같았다는 
소리도 있었구. 뉴욕인가 시카고 호텔 파티에서 그랬다는데. 아마 일년 전 
일이지. 그자 아마 그건 영화에서 빼달라고 사정할걸."
  "내가 먼저 사양하겠어. 그런 데다 초점을 맞추진 않을 거야. 관중들로 하여금 
불쌍한 느낌이 들도록 만드는게 중요하거든."
  "불쌍하긴 해. 명성없인 살지 못할 테니."
  "모르지. 사람들이 도와주면 다시 살아날지."
  "힘들걸. 어디부터 시작할 건데. 물론 파리겠지? 도시 불빛 속의 외로운 
남자라. 여자도 같이 찍으려구?"
  "글쎄."
  "여잔 없는 걸로 하자. 외롭게 도시 불빛 속을 걷는 남자. 그 다음엔 이번 
연주장면을 넣지. 영우의 시선과 사랑을 갈구하는 관중들의 모습…"
  "미친 듯한 표정을 집어넣는 거야. 언젠가 콘서트장에서 옆 사람들 얼굴을 
봤는데 꼭 미친 사람 같았어. 어쨌든 환호하는 팬들 뒤로 다시 영웅에게 
포커스를 돌려, 택시타고 혼자 호텔로 가는 장면도 좋겠지."
  폴은 서둘러 작업에 착수하려고 했다.
  "지금 매니저한테 전화 하자. 그 사람하고 같이 대강 윤곽을 잡은 다음 내일 
다시 검토해보게."
  래리는 히죽거리며 폴을 추켜세웠다.
  "폴의 열정 하나는 끝내주지. 그리스 비극만 죽어라 연구하는 친구가 방송국에 
있는데, 그 각본을 한 번 보여주는 게 어떨까? 매끄럽게 손 좀 봐 달라고 말야?"
  페럴리의 매니저 루이 글라스는 폴의 제안에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파리로 온다구요? 아니, 약속은 못합니다. 비행기에서 얘기하죠."
  할 거야, 말은 그렇게 했어도 속은 안 그럴걸. 폴은 매니저의 속마음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루이 글라스와 이야기를 나눈 다음날 그와 함께 뉴욕으로 날아간 폴은 다시 
파리로 가는 콩코드에 몸을 실었다. 기내 여행 중 두 사람은 충분히 의견을 
교환했다. 비행기가 파리에 거의 도착했을 즈음 폴은 루이로부터 영화대본과 
촬영 일정에 대한 약속을 구두로 받아낼 수 있었다.
  페럴리는 아파트에서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도난사건 이후 신경이 
날카로워졌던 페럴리는 이제 어느 정도 차분해져 있었다.
  "기록 영화라구요?"
  거실로 두 사람을 안내하던 페럴리가 폴에게 물었다. 굵고 묵직한 음성이었다. 
마치 그와 함께 침대에라도 드러누워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젊은 아가씨가 
팔걸이 소파에 앉아 놀란 눈으로 웅크리고 있었지만 페럴리는 그녀를 소개하지 
않았다. 그녀는 내내 침묵을 지켰다.
  "학교 교실 구석에서 다리 배배 꼬면서 보던 영화가 기록영화 아닌가요? 
노조운동은 어떤 건가, 북극곰이 얼음 위에서 어떤 식으로 새낄 만드는가, 이런 
식 말이에요. 그 북극곰 속에 날 집어 넣으려고 그러슈?"
  "대중들은 좋아하는 스타들 속을 들여다보고 싶어하니까요."
  "겉모습을 통해 속을 들여다볼 만큼 똑똑하지 못한 이들이 엿같은 
대중들이오."
  페럴리는 정중한 폴의 이야기를 비꼬듯 한 번 뒤집었다.
  "멋있는 아파트군요."
  가구로 가득 차 있는 길쭉한 방을 폴은 찬찬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키 큰 
창문 너머로 포치 스트리트가 살짝 엿보였다.
  "꽤나 높은 지대 같은데 어떻게 도둑이 들어왔을까 싶네요."
  "창문으론 아닐 거요."
  페럴리는 북극곰처럼 으르렁거렸다.
  "그 죽일 놈은 마치 제집 드나들듯 저 현관으로 들어왔어요. 칼질이나 
흠집없이 들어온 걸 보면 분명 그 잡새끼가 열쇠를 가지고 있었던 게 틀림없어. 
내 집을 제 집인 줄 알고, 감히 여기가 어딘데 내 집을 털어. 내가…"
  그는 갑자기 도중에서 말을 끊었다.
  숨어 있는 곳. 폴은 그의 뒷말을 가만히 속으로 생각했다. 숨어 있을 곳이 
없어져버려 속이 상하셨구만, 그래서 술과 마약을 다시 시작했겠지.
  "본격적으로 영화 얘길 해볼까요."
  폴은 느긋하게 말했다.
  "하루 일과를 자연스럽게 찍을까 합니다. 연주하고 쉬는 시간, 배우나 가수인 
친구들과 얘길 나누는 시간. 꼭 연예계가 아니라도 좋아요. 연기나 노래할 때 
어떤 마음가짐인지도 보여주어야 합니다. 제일 좋은 방법은 카메라가 주인공을 
쫓아다니는 겁니다. 만남의 자리라든가 리허설, 나이트 클럽…"
  나이트 클럽이란 단어에 페럴리가 놀란 표정을 짓자 폴은 재빨리 그것을 
레스토랑으로 고쳐 말했다.
  "식당, 연주 전 무대 뒷모습 등등, 카메라가 있다는 것을 못 느끼게 자연스런 
영상을 잡을 생각입니다. TV드라마나 쇼 제작진들, 그리고 지금껏 친분이 
있었던 사람들도 인터뷰해야겠죠. 괜찮겠어요?"
  "잠깐 실례."
  불쑥 자리에서 일어난 페럴리는 화장실로 달려갔다.
  "뭘 잘못 먹었나 봅니다. 곧 올 겁니다."
  루이는 어색한 표정으로 사과했다. 페럴리가 돌아올 때까지 두 사람은 말없이 
앉아 있었다.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관계자들과 인터뷰를 하겠…"
  "아, 인터뷰, 그래."
  페럴리는 초조한 빛이 사라지고 느긋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문제없소. 인터뷰하려면 날 좋아하는 사람만 찾아 다녀야지 알겠소? 날 갖고 
노는 사람 쫓아다니면 절대 안돼요."
   폴이 고개를 끄덕이자 페럴리는 동의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에피소드나 
잡스런 얘기로 자꾸만 빠져 들어가는 페럴리를 폴과 루이는 애써 다시 본론으로 
되돌리곤 했다. 이런 제기랄. 양몰이 하는 개도 아니고 말야. 폴은 속으로 혀를 
찼다. 자꾸만 횡설수설하며 사잇길로 빠지는 페럴리 탓에 네 시간이 더 
걸렸지만 페럴리와 루이, 톨 세 사람은 영화작업에 필요한 임시 계약서를 
서명한 뒤 악수를 나누었다.
  "내일 아침 일찍 다시 만나뵙죠."
  "오래 만나야 되는 건가?"
  폴의 인사에 페럴리는 귀에 거슬리는 어조로 질문을 했다. 흥분된 음성이었다. 
눈은 묘하게 빛나고 있었다.
  얘기 도중 그가 화장실을 두세 번 들락거린 사실을 폴은 주시하고 있었다.
  "얘기하는 만큼이죠. 얘기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얼마든지 얘기해도 좋습니다. 
사십 년 인생을 담아낼 생각이니까요."
  "서른 일곱!"
  페럴리는 즉시 폴의 말을 고쳤다. 잠시 숨을 멈춘 뒤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뭐 숨길 것 없는 인생이니까 솔직히 다 말해주겠소. 스무 시간 짜리 미니 
시리즈물로 만들면 어떨까. 어쨌든 다 얘기할 테니 기대해요. 진실과 정직, 그게 
내 생명 아니겠소."
  그는 짧은 윙크로 화려한 연설을 끝냈다.
  택시 안에서 폴은 페럴리가 지껄인 말들을 생각나는 대로 모두 종이에 
옮겼다. 그는 기록영화가 아니라 사교계에 내놓을 위선적인 선전물을 원하는 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 분노를 느끼기보다는 웃음이 먼저 나왔다. 대중에게 
혹이나 사미귀를 숨기고자 하는 그가 우스웠다.
  아이디어와 영상을 혼합해 하나의 대형 화면을 창조하는 작업. 선과 악, 꿈과 
현실을 조화롭게 섞어 새롭게 만드는 일은 지금까지 했던 그 어떤 일보다 더 큰 
만족감과 자극을 그에게 선사했다. 드디어 내가 원하던 일을 하고 있구나. 숨어 
있는 얼굴을 잡아내 여러 사람에게 속속들이 보여주는 일을.
  페럴리를 인터뷰해 나갈수록 그가 마음속으로 생각했던 영화는 단단하게 
여물어 갔다. 페럴리의 거실 구석에 카메라맨을 두고 인터뷰는 매일 진행됐다. 
파리에서 캘리포니아로 돌아올 즈음 폴은 거의 윤곽이 드러난 영화 필름 일부를 
가져올 수 있었다. 인터뷰해야 될 인물들이 가득히 적혀 있는 종이는 이주일 
뒤에는 두꺼운 노트로 변했다. 달이 지나갈수록 귀 접힌 노트장수는 늘어갔다. 
영화 대본이 완성되었을 때 노트에는 뛰면서 점심을 한 흔적들인 양념자국, 
겨자, 커피자국들이 곳곳에 배어 있었다.
  시간 없다고 울상 짓던 래리도 폴과 함께 내슈빌을 찾았다. 공항에서 호텔로 
달려가는 도중 래리는 물었다.
  "또 집을 비운다고 에밀리가 화내지 않던가?"
  "영화 마무리되면 둘이 어디든지 떠날 생각이야. 그 동안 같이 있었던 시간이 
별로 없었거든."
  "잘 생각했다. 나도 결혼 같은 걸 해봐야겠는데 마땅한 사람이 있어야지."
  "보니하고 살면서 왜?"
  "좋아하긴 해. 하지만 그립거나 보고 싶은 기분은 안 들어. 그런 상대랑 
어떻게 결혼을 해?"
  폴은 입을 다물었다. 가장 보고 싶은 여자. 로라를 두고 에밀리와 결혼 사람도 
있는데. 폴은 여전히 로라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지금도 유일하게 보고 싶은 
여자였다.
  "우리 오늘 파티하자. PBS가 우릴 후원해준다고 결정 봤는데 여태 건배를 
안했잖아. 우리 둘 다 무디긴 참 무디다."
  "돈이 들어와서 좋다만 발목 잡힌 건 생각 안하니? 족쇄 찬 꼴이야."
  호텔에 도착할 즈음 그는 노트를 집어 들었다.
  "자, 파티는 나중에 하고 일부터 하자."
  그러나 제2차 순회연주에 페럴리와 동행했던 폴은 내슈빌, 댈러스, 덴버, 
그리고 솔트 레이크 시티 등에서 페럴리를 둘러싼 팬들 때문에 한동안 작업을 
중단해야만 했다. '브리트 돌아오다!'라고 쓴 티셔츠가 곳곳에서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머리 회전이 빠른 장사꾼들은 페럴리의 히트곡 제목을 수놓은 
인형을 잽싸게 만들어 팔았다. 댈러스에서 커튼 콜을 받고 허리를 굽혀 
인사하던 페럴리가 펜이 던진 장미가시에 이마를 찔린 장면을 두고 한 신문사는 
'브리트, 빈곤을 위해 피 흘리다'라는 제목으로 대서특필했다.
  페럴리는 가는 곳마다 뉴스를 만들었다. 공연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에게 그는 
미소와 손짓으로 노래를 불렀다.
  "그들은 날 사랑해. 앞으로도 계속 날 사랑할 거야."
  페럴리는 폴에게 감개무량한 얼굴로 말했다. 그는 낯선 이들을 마구잡이로 
식당에 데려가 퍼 먹이거나 택시를 잡아주기도 했고, 서른 명 가량 되는 
이들에게 저녁 파티를 열기도 했다. 밤마다 페럴리는 여자를 갈았다.
  "나랑 같이 못 자서 안달들이야."
  그는 폴에게 윙크까지 하며 우쭐거렸다.
  "돈은 다 어디서 나는 거지?"
  폴의 질문에 페럴리는 우물쭈물 했다.
  "파티며, 향수며, 저녁 같은 걸 브리트가 다 무슨 돈으로 메우냐구요?"
  폴은 매니저인 루이에게 다시 물었다.
  "브리트는 부자예요. 여태껏 저축한 걸로…""
  "나는 제일 꼭대기에 있어. 더 이상 올라갈 데가 없단 말이야."
  페럴리는 미친 듯 소리 질렀다.
  "이게 바로 왕이 느끼는 기분이야. 난 다시 왕이 됐어."
  그는 코카인을 하고 싶어서 눈을 번득였다.
  "이것 봐. 오늘 쇼 있잖아. 좀 참지."
  루이는 부드럽게 말했다.
  "참을 만큼 참았어."
  "언제 했는데?"
  "오분 전에."
  "그래 잘했어. 한 번만 더 참아. 쇼 끝날 때까지."
  페럴리는 어깨에 올라온 루이의 손을 노려보며 버럭 소리 질렀다.
  "망할 놈의 손 치우지 못해!"
  페럴리는 씩씩거리며 거칠게 숨을 토했다.
  "이거 해라 저거 해라 명령하지 마. 내가 싫어하는지 알잖아. 난 서른 일곱 
살의 성인이야."
  "저녁 하러 가는데 같이 갑시다. 스테이크 살 테니까."
  폴은 재킷을 집어 들며 페럴리를 달랬다.
  "배 안 고파. 그냥 여기 있을래."
  "그걸 마셨으니 배가 고플걸!"
  비꼬는 루이를 눈짓으로 제지한 폴은 페럴리를 계속 부드럽게 달랬다.
  "아무튼 나갑시다. 혼자 먹기 싫으니까."
  "나 데리고 가서 억지로 먹일 거지?"
  "그럴 가능성이 많은데 일단 접시가 나오면 먹어야 되니까."
  페럴리가 껄떡거리며 웃었다.
  "솔직해서 좋아, 폴. 그런 점 때문에 내가 좋아하지."
  페럴리는 마치 몽유병 환자처럼 복도 쪽으로 걸어 나갔다.
  "정말 뭘 좀 먹일 수 있을 것 같소?"
  루이는 폴에게 속삭였다.
  "그럴려고 이 짓하고 있지 않소."
  복도 끝에 나가 있는 페럴리를 쫓아 폴은 급히 호텔방을 나섰다.
  매일매일이 전쟁이었다. 모두 다 하루만 더 일하면 지쳐 스러질 것 같은 
상황이 됐을 즈음, 일주일의 휴가를 내고 폴은 로스앤젤레스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에밀리?"
  현관문을 열자마자 그는 에밀리를 찾았다. 차가운 침묵만이 집안에 감돌로 
있었다. 그는 두툼한 유리로 칸막이가 돼 있는 외팔보(한쪽만 받쳐져 있는 
베란다식 기둥:역자 주)위에서 오랫동안 로스엔젤레스 시내를 내려다봤다. 멀리 
보이는 시내는 뿌연 매연막을 뚫고 비치는 칠월의 기울어가는 햇살로 안개라도 
낀 듯 창백한 모습이였다. 몸 안으로 스며드는 정적 속에서 그는 페럴리가 준 
긴장과 피곤을 조금씩 녹여가며 몸과 마음을 이완시켰다.
  그는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베란다를 오래도록 거닐었다. 깔끔하게 
정리된 집안을 둘러보며 폴은 자신들이 마치 집보다는 호텔에서 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을 하기도 했다. 집주인처럼 사는 게 아니고 일시적으로 
묵으러 온 사람들 같았다.
  "어머, 당신 왔네요!"
  기쁘다기 보다는 뜻밖이라는 말투였다. 헐렁한 원피스에 샌들차림으로 베란다 
바깥쪽에 서 있는 에밀리의 머리카락은 주간촬영을 하다 혹사를 당했는지 마구 
흐트러져 있었다.
  "전화를 왜 안했어요?"
  거실을 가로질러 그녀에게 다가간 폴은 그녀를 두 팔로 끌어 안았다.
  "어젯밤에 전화했는데 안 받더라구. 아름답긴 한데 머리는 영 아니다."
  그녀는 배시시 웃었다.
  "러시아산 흑모피를 입고 침대에서 방금 나온 몰골로, 그것도 맨발로 해변을 
걸었어요. 도대체 누구 아이디언지 모르겠어요. 이 몰골로 어디 모피 팔 수 있을 
것 같대요?"
  "최특급 모델이라 뭐든 팔 수 있을걸 내가 장담하지."
  그의 키스를 받자마자 에밀리는 즉시 뒤로 물러섰다.
  "어젯밤에 베리 마켄을 만났어요. 잠시 다니러 왔다면서 저녁식사 같이 
하자길래 나갔어요. 하지만 열시에 들어왔어요."
  "누가 보고하랬나?"
  "당신 없을 때 나 어디 있었나 물어볼 권리 있잖아요. 다음 번엔 베리랑 저녁 
하지 말라고 얘기할 권리도 있구."
  "그럴 권리가 어딨나? 있다 해도 안 물어볼 거야. 내가 당신 간수야? 날 
그렇게 봤다면 유감인데."
  "화났어요? 미안해요. 휴, 오늘 힘들었어요."
  "한잔 어때? 마시면서 힘들었던 얘기 다 털어놓으라구."
  "좋아요. 보드카 줄래요. 얼음하구."
  그녀는 그가 잔을 들고 올 때까지 멍하니  있었다.
  "신나게 할 얘기도 없어요. 모델일 지겨워 죽겠어요. 당신 모를 거야. 
안해봤으니까."
  그녀는 꽃 상자 사이에 있는 나지막한 돌 위에 앉았다. 지는 해가 그녀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다음엔 또 뭘 원할지 그 사람들 속을 알 수 있어야죠."
  "새 모델을 원한다는 얘기야?"
  "모델들은 새로 바뀌니까 그건 걱정 안해요. 그런 면에선 아직 자신도 있구. 
체계나 질서 없이 그냥 떠오르는 대로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은 정말 질색이야. 
다음 번 계획이 어떨지 감조차 잡을 수 없다니까."
  폴은 에밀리가 무질서나 체계가 없는 것을 몹시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새로운 건 좋아하잖아. 몇 년 전만 해도 더 좋은 게 없나 찾아 다니더니."
  "이젠 다 알아버린 것 같아요."
  갑자기 폴은 두 사람의 인생살이가 서로 반전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둘이 
처음 만났을 때 에밀리는 확실하게 원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델이 되는 일과 
결혼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만족감 없이 유럽을 떠돌아다녔다. 
하지만 지급은 비록 하고 있는 일이 국한되긴 했지만 폴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디. 그런데 그의 눈에 비친 에밀리는 방향을 잃고 
어디론가 헤매는 돛단배 같았다.
  오후 적막감 속에서 두 사람은 잠시 말을 멈췄다. 이웃집에서 달그락거리는 
식기소리가 들려왔다.
  "여행 얘기 안 물어볼 거야?"
  "아, 참 어떻게 됐어요.?"
  "좋았어."
  "잘됐네. 다 끝난 거예요?"
  "아직 사주 남았다고 얘기했을 텐데."
  "뭔가 비슷한 얘긴 들은 것 같네요. 하지만 매번 그렇게 콘서튼마다 
쫓아다녀야 돼요? 어딜 가든 노래 부르는 건 마찬가지잖아요. 미워 죽겠어. 날 
두고 그자만 쫓아다니다니."
  "미안해. 누군 가고 싶어서 가나. 해야 되니까 가는 거지."
  "해야 되니까 하는 게 아니라 좋아하니까 하는 거겠지. 사랑하니까. 영화일에 
푹 빠져서 말야."
  그는 그녀의 화난 듯한 눈동자를 응시했다.
  "이해하는 줄 알았는데. 내가 어떤 감정으로 그 일을 하는지 얘기했잖아."
  두 사람은 잠시 말을 잃은 채 저물어가는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영화 언제 끝날 예정이에요?"
  "사 개월에서 육 개월쯤. 그거 끝나면 어디든지 날아가자. 약속할게."
  "그 다음엔 뭘 만들건 데요? 영화?"
  "글쎄."
  "난 어때요? 래리도 날 괜찮게 생각할 걸. 날 주제로 영화 만들면 어때요?"
  이맛살이 찌푸려졌으나 폴은 금새 표정을 바꿨다.
  "못할 것은 없지. 언젠가 해보지. 한 잔 더 하고 싶은데. 당신은?"
 , "나도 한 잔 더 할래요."
  그가 술을 가지러 안으로 들어가자 그녀는 그를 따라 들어갔다.
  "그렇게 되면 나한테 큰 이득이 올 거예요."
  "영화 때문에? 모델업계의 흑과 백을 기록영화로 찍는 게 도움이 되겠어?"
  "밝은 면만 찍어야죠."
  "우린 양면을 다 찍어야 돼. 기록물은 픽션과는 다른 분야야."
  그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어떻게 도움이 된다고 자꾸 우기시나, 모델아가씨?"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뭔가 딴 이유가 있는 것 같은데."
  에밀리는 그의 셔츠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냥 행복하지 않아서. 내가 원하는 건…"
  폴은 그녀를 꼭 겨안았다. 불안한 얼굴로 원한다는 단어를 자주 쓰는 
에밀리에게 폴은 그녀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뭔데, 뭘 원해?"
  "행복하고 싶어요."
  순간 그는 온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난 여태껏 당신이 행복한 줄 알았는데."
  "가끔은 그래요. 노력해요. 행복해지려구. 하지만 모델일 쪽에선 그게 조절이 
안돼요."
  그녀를 위해 무러 어떻게 해줘야 될지 몰라 그는 가만히 그녀를 끌어안기만 
했다.
  "여태껏 다른 사람들보다 내가 특별한 줄 알았어요. 그 사람들이 내 
겉모습보다는 속에서 풍기를 미를 알아주기 바랐는데…"
  울음이라도 터뜨릴 듯 그녀의 음성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폴은 그녀의 
자리에 자신을 대입시켜 생각해보았다. 얼굴에만 의지해서 살아가는 인생이라면 
어떤 심정이 될까….
  "영화, 생각해볼께. 에밀리."
  폴은 에밀리를 조심스레 다독거렸다.
  "장담은 못하지만 고려해볼꼐. 알았지?"
  에밀리는 폴의 머리를 끌어내렸다. 깊고 부드러운 키스를 나눈 뒤 그녀는 
비로소 웃음을 머금었다.
  "고마워요, 폴. 날 위해 무슨 일이든 해주리란 걸 알고 있었어요. 당신을 
믿어요."
  그런 식으로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을까. 에밀리의 뜨거운 키스를 받으며 
폴은 애써 그런 생각을 지우려 했다. 그녀의 작은 혀끝이 불꽃처럼 그의 입술 
언저리를 맴돌고 있었다.
  "보고 싶었어요."
  그의 뒷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며 그녀는 뜨거운 입김을 토했다. 한 
손은 그의 목부분을, 한 손은 셔츠 속의 무성한 털을 애무하며 그녀의 손길은 
점차 대담해졌다. 그녀는 폴의 셔츠 단추를 거칠게 뜯어냈다. 따스한 가슴털을 
어루만지던 손가락은 벨트 밑으로 미끄러지듯 파고들었다.
  "밤마다 당신을 찾았어요"
  그녀의 숨결에서는 달콤한 단내가 풍겼다. 다리 사이에서 리듬에 맞추듯 
각력하게 움직이는 여체를 느끼며 폴은 그녀의 원피스를 벗겨내렸다. 그녀는 
그를 거실 건너편 침실로 이끌고 갔다.
  "그래, 허니문 잘 지내셨나, 친구?"
  미니애폴리스행 비행기에서 래리가 폴에게 짖궂은 표정으로 물어왔다.
  "허니문은 허니문이지."
  폴은 모든 것을 성적으로 풀어버리려는 남자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에밀리와 
함꼐 한 일주일간의 휴가는 허니문이 될 수 없었다. 침대에서만은 하나가 될 수 
있었지만 얘기는 거의 나누지 못했다. 어쩌다 입을 열어도 서로 동문서답을 
하고 있기 일쑤였다. 만난 지 이틀 뒤부터 에밀리는 작업이다, 쇼핑이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그를 홀로 내버려두다시피 했다.
  "사실 집에서 실컷 작업만 하다 왔다."
  "잘했어. 내 신세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서류철을 내미는 래리에게 폴은 껄껄거리며 자신의 서류철을 내밀었다.
  "자, 이건 내가 끝낸 거구. 필름 정리한 건데, 열네장…"
  서로의 서류철을 바꿔 읽은 후 두 사람은 인터뷰할 명단과 촬영장소, 
패럴리의 공연일정 등을 다시 한 번 검토해 나갔다.
  "이번주엔 어디로 다니는데?"
  "뉴욕과 로스앤젤레스를 돌아다니면서 레밍톤의 새 조각품을 구하겠대. 그 
다음엔 카우보이들 만나서 말타는 장면 연습하구, 그리고, 어디 보자, 아, 
도난사건 때문에 보험회사 직원 만나기로 돼 있군. 약 하는 건 여전한가봐. 다른 
사람들 눈치 못 채게 조심해야 될텐데. 그래도 우리 영화 제작 때문에 꽤나 
신경 쓰는 눈치야."
  래리는 이번에도 광고제작 건으로 모든 짐을 폴에게 맡겨야만 했다.
  "워싱턴 연주 땐 내도 시간 내볼게. 페럴리랑 잘해봐."
  연주회는 디트로이트, 버펄로, 피츠버그로 계속 이어졌다. 버펄로 공연은 
최악이었다. 밤에 잠을 설친 페럴리는 박자를 번번이 놓친 데다가 가시까지 
얼버무렸다.
  "빌어먹을!"
  루이는 마침내 설질을 내고 말았다.
  "그렇게 귀가 닳도록 얘기했는데 그걸 다 잊어 먹어! 이 순회 연주에 목숨이 
달려 있는 걸 몰라서 그러는 거야?"
  "알아. 알았어. 앞으론 잘할게. 잠간 머리가 어떻게 됐나봐. 괜찮아질 거야."
  "빨리가서 자! 푹 쉬어야 돼. 다음 연주까지 며칠 쉬면서 정신차려야 된다구."
  그러나 패럴리는 다음날, 또 다음날도 틈만 나면 파티장으로 내빼곤 했다. 
함꼐 잠잘 여자를 찾아 선물공세는 계속되고, 루이가 야단을 칠 때마다 그는 
똑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앞으론 잘할게."
  그러나 그는 끝내 피츠버그 콘서트마저 죽을 쒀버렸다. 자기가 불러야 할 
곡들을 잊어버린 패럴리를 위해 그룹 반주자들은 같은 곡만을 계속 연주해야 
했다.
  "괜찮았었는데."
  다음날 패럴리는 어린애 같은 얼굴로 폴에게 동의를 구했다. 워싱턴 호텔에 
앉아 초대형 맘모스 홀에서 행해질 자기의 마지막 연주회에 관한 텔레비젼 안내 
광고를 지켜보던 그는 상당히 긴장된 모습이었다.
  "끝에서 두번번까지는 좋았다구. 잘 따라갔었잖아. 안 그래, 폴? 아주 좋진 
않았지만 그래도 웬만했잖아. 관객이 그만큼 있었으면 됐지. 브리트 팰럴리란 
인물을 보러 그렇게 모였으면 된 거야. 안 그래? 제기랄!"
  "맞는 소리야."
  구석에는 필름을 돌리고 있는 카메라맨을 패럴리가 의식하고 있는지 궁금하게 
여기며 폴은 그레게 맞장구쳤다.
  "허긴 그리 많이 모이진 않았지. 그렇지? 솔트 레이크 시티는 괜찮았는데 
말야. 삼십만 인파가 뭘 보고 날 찾아오겠나? 경외감 때문이야. 가난한 이들에 
대한 책임의식으로 연주하는 왕을 향해 경외감을 느끼는 거야. 에이전트가 
그러더군. 이런 제기랄! 저 카메라 좀 치워."
  폴은 카메라 기사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서 커피 마시라 그래"
  폴은 또다시 카메라 기사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가 떠나자 패럴리는 다시 
입을 열었다.
  "에, 여기…"
  패럴리는 옆에 있는 책상서랍을 뒤적거렸다.
  "여기 어디 있을 텐데… 꼬마 마귀가 어딜 갔나?"
  그는 폴 앞에서는 코카인이란 단어를 입에 담지 않았다. 팰러리는 얇은 
빨대를 통해 콧구멍으로 코카인 가루를 힘껏 들어마셨다.
  "삼십만 명, 핫 핫! 난 다시 왕이 됐다구
  폴의 눈빛에서 뭔가를 느꼈는지  그는 금새 풀이 죽어 눈치를 살폈다.
  "미안해. 좀 할래? 점심 전에 해두면 좋지."
  "고맙지만 사양하지."
  "그렇게 정중할 필요없어. 거리감 느끼잖아. 내가 얼마나 자넬 좋아하는데. 자, 
한 번만 장난으로 해봐."
  그는  손을 내밀었으나 폴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제기랄, 실망시키네. 빌어먹을, 내가 지금 메리 포핀스하고 앉아 있는 건가? 
뭘 원해? 뭐든지 해줄 테니까. 제기라, 자넨 도대체 뭘 좋아하는 거야?"
  "자, 우리 그런 얘기 그만하지."
  "날 믿지 않는 거지?"
  "글쎄 믿는다곤 생각하는데. 하지만 원래 난 마약 같은 걸 싫어해. 그러니까 
그 얘낀 그만두지."
  "자넬 믿어도 되는 거지?"
  "그래. 왜? 뭐 특별한 얘기 있나?"
  "중요한 얘긴 아니구…"
  그는 잠시 입맛을 다셨다.
  "돈 좀 빌려줘."
  "얼마나?"
  "몇언. 삼천이면 돼."
  "호주머니엔 없지만 구해보지. 언제까지면 되겠나?"
  "오늘 오후까지."
  잠시 망설이던 끝에 폴은 가만히 물었다.
  "파티랑 선물비용 때문에 그런 건가?"
  패럴리는 어깨를 들썩 거렸다.
  "왕은 원래 씀씀이가 큰 거야. 나중에 갚을게. 제기랄,갚을 수 있어!"
  그는 제풀에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것봐. 이 순백색 가루. 이게 뭔지 알아? 해결사지. 새 아이디어를 만드는 
물건이라니까. 마누라 있지? 나도 있었어. 하나가 아니라 한 짝이나 있었다구. 
하지만 다 쓰잘 데 없는 것들이야. 마누라보다 친구가 낫지. 이 친구 말야. 하얀 
친구. 똑똑한 채하는 마누라 대신 이게 얼마나 좋은가. 자네 똑똑한 여자 
좋아하나?"
  "나만큼 영리하면 좋지."
  "그건 괜찮지. 하지만 말야. 문제는 남편보다 더 똑똑한 채하는 여자들이야. 
제깐 것들이 말야. 똑똑한 체하면서 남자 인생을 쥐고 흔들어댄다니까."
  패럴리의 얼굴에 아련한 추어깅 서렸다.
  "내가 사랑한 숙녀가 있었지. 사랑한다고 했지만 그 여잔 나하고 관계를 맺기 
싫어했어. 그 여자가 주선한 파티를 내가 망쳐놨거든. 아주 망나니로 굴었어. 
그래도 호텔에서 쫓아내진 않더라구. 도망간 마누라들하곤 진짜 달랐어. 그 
여자들은 엉덩이만 커 갖고 멍청이 짓만 했지. 하지만 그 기막힌 여잔 천사야. 
진짜 속녀였어. 얼마 동안 그 여잘 쫓아다녔지. 사라해, 로라. 매일 당신 호텔에 
묵을게. 이젠 짖지도 않을 거야. 당신은 정말 너무 사랑스러워. 하지만 그 여잔 
일편단심이더군. 딴 여자들은 나랑 침대에 들려고 안달을 떠는데 그 여잔 날 
외면했어. 날 필요로 하지 않았지. 자넨 어떻게 생각해? 그 여자 마음속 말야?"
  폴은 창 밖을 내다 보고 있었다. 패럴리도 폴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으나 
언제나 다름없는 워싱턴 거리가 을씨년스럽게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헤이, 친구. 내 말 듣 있는 거야?"
  폴은 그에게 눈을 돌렸다. 깊고 쓸쓸한 눈빛이었다.
  "그 홀텔 여자를 생각하고 있었네."
  "그래, 멋진 여자라니까. 자네도 만나면 좋아할 거야. 영리하고 아름다운 
숙녀라구."
  "성이 뭐지?"
  "페어차일드(아름다운, 순결한 듯의 Fair가 child와 복합돼 아름다운 아기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음:역자 주). 멋진 이름이지. 그녀에게 딱 어울리는 성이야. 
자네 모르지? 자네도 만날 수 있어. 순호 끝내고 팔티 열 거니까. 우리의 성공을 
축하하는 파티지. 그때 로라를 초청할 거야. 그러니까 만날볼 수 있어. 좋지? 
하지만 그전에 약속해주. 돈 꿔달라구. 삼천 주는 거지?"
  "그러지"
  "고마워, 친구. 자네밖에 없어."
  "잠깐만 곧 돌아올 테니까 기다려."
  폴은 한층 아래 루이가 묵고 있는 객실을 찾았다.
  "패럴리가 빈털터리가 된 것 같아요. 어찌된 일인지 알아요?"
  "아닐텐데. 얘기했죠, 부자라구."
  "얼마 전까지 그랬겠죠. 하지만 지금은 아닌 것 같은데. 나한테 돈을 꿔달라고 
했어요."
  루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루이. 언제 한번 물어본 것 같은데, 그 돈 다 어디서 난 건지 말해봐요."
  "나도 몰라요."
  "그게 말이 되는 겁니까? 브리트에 관한 걸 매니저가 모르다니! 매니저가 
뭐하는 사람인데. 루이, 그러지 말고 얘길하지."
  "이것보라구, 폴. 카말레 들고 영화나 찍으면 됐지, 상관없는 일로 왜 이러는 
거요?"
  "브리트와 관계되는 일인데? 그건 동시에 내가 찍는 영화일이기도 하고."
  루이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냐, 그 부분은 절대 아냐. 착각하지 말아요. 거긴 제한구역이야."
  창문턱에 엉덩이를 살짝 기댄 폴은 루이를 똑바로 쳐다봤다.
  "연주모금에서 꺼내 스는 거죠? 맞지요? 입장권 판매금하고 후원금에서…"
  "내버려둬요. 어디서 돈을 스든 상관할 바 아니잖소! 도대체 당신이 뭔데 
그래? 십자군 전사쯤 된 줄 알아? 영화나 찍으면 됐지 뭐 그렇게 말이 많은 
거야. 연주기금이 얼마 들어왔든 그건 당신 문제가 아니야. 빌어먹을, 뭔 그따위 
질문으로…"
  "좋소, 빌어먹을 질문을 다시 하겠소. 이기적으로 변해가는 사회에 경각심을 
불어넣기 위해 시작한 연주여행이 어떻게 끝을 맺고, 어떤 겨로가를 가져왔는지 
알아야 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래 그걸 감추겠다는 소리요?"
  "난 잘못 없으니까 그렇게 알아요. 경리가 빼내 먹는지도 모르지. 조사는 
해보겠지만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거요."
  "거짓말 계속할 거요?"
  루이는 대답 없이 어깨를 한번 들어올렸다. 객실로 돌아온 폴은 기아를 위한 
브리트 패럴리 연주모금기구 뉴욕사무실에 전화를 걸었다.
  "마지막 연주회 전까지 모인 금액 좀 알고 싶습니다. 영화 때문에 그래요. 
각본에 집어넣어볼까 해서요. 입장권 판매량, 후원금 총액, 그리고 지금까지 
나간 지출 총액을 받을 수 있을까요"
  "안 돼요."
  딱 잘라 거절을 한 경리는 재빨리 토를 달았다.
  "지금은 안돼요. 아래 직원 하나 없이 혼자 이 일을 다 맡고 있으니, 뭐가 
어디 붙었는지 정말…"
  "도대체 경리가 그걸 모른단 소리가 말이나 돼요?"
  날카롭게 몰아치는 폴에게 경리는 악을 쓰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내가 무얼 잘못했소? 내 업무가 뭔지 아니까 잔소리 집어치우소. 
그 빌어먹을 놈의 마약중독자놈 때문에 내가 이짓을 한단 말야. 루이가 
뭐랬는지 알아? 그 잘난 놈을 행복하게 만들어야 월급도 나온대. 돈을 보내서 
그 잘 난 놈이 매번 그 잘난 햐얀 가루…"
  그는 갑자기 입을 다물어버렸다.
  "…아니, 내 말은…"
  "무슨 소린지 알아요. 누구 또 알고 있는 사람 있소?"
  "잠깐, 영화에 이것도 집어넣으려구요?"
  "누가 또 아냐구 물었을 텐데."
  "루이."
  "루이 말고."
  "글쎄, 없을 것 같기도 하고. 하나님 맙소사, 없길 바래야지. 젠장할…잠깐, 
약속해줘야죠. 영화에 이 얘길…"
  "패럴리가 쓴 돈이 모두 얼마요?"
  "아니, 그걸 내가 왜 얘길…"
  "얘기해야 할걸. 루이가 뭐랬는지 알아요? 겅리가 슬쩍 돈을 훔친다고 
하던데…자, 빨리!"
  "정말 그랬어요? 그 개자식이 날보고…"
  "얼마?"
  "나쁜 놈 같으니라구, 루이 그 개자식! 정확히 이심이만 오백 육십일 달러. 
어쩔 수 없었어요. 루이가 패럴리를 위해선 그럴 수 밖에 없다고 하길래…또 
패럴리가 돌려준다고 약속해서…. 제기랄! 영화엔 안 넣을 거죠? 넣을 겁니까? 
내 밥줄 끊을 거예요? 이건 내 잘못이 아니야. 난 그저 지시에 따랐을 뿐이야. 
설마 패럴리를 무너지게 하진 않을 거죠? 대답해봐요. 내 말은 그 작자가 
싫더라도 돈하고 음식하고, 뭐 그딴 걸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불쌍하지도 
않소? 그 가난한 사람들 마음을 아프게 하면 안돼요. 내 말 틀려요?"
  "아직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이 서지 않았으니까 그런 줄 알아요. 나중에 또 
얘기합시다."
  팔주 동안 텔레비젼 중계료와 입장권 판매금으로 들어온 금액은 총 오백만 
달러였다. 패럴리측은 마지막 연주지인 워싱턴 소핑몰에서 들어올 모금액을 
오백만 달러의 두배로 잡고 있었다. 빠져나간 이십만 달러가 비록 적은 
액수이긴 했지만 문제는 그 비율이 아니었다. 모금액 중 일부가 패럴리 개인 
호주머니로 들어갔다는 얘기가 새어나갈 경우, 세금면제가 취소되는 것은 물론 
그 즉시 TV 중계와 쇼장 허가까지 취소될 판이었다.
  폴은 패럴리가 세계 가나노가 기아를 위해 신경을 쓰고 있다고는 결코 생각지 
않았다. 루이 말처럼 패럴리가 기아상태에 빠진 사람들을 위해 뛰든 말든, 그건 
영화업자가 관여할 일이 아니었다. 폴 젠슨이 해야 할 일은 스파의 허와 실에 
관한 영화제작이었다. 그러나 싫든 좋든 이미 발은 들어가 있었다. 아무리 
모른다고 부인해봐도 사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쇼핑몰에서의 공연은 이틀 뒤로 잡혀 있었다. 재수없이 취소되지지만 
않는다면….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TV연속극을 보고 있던 패럴리는 폴이 들어오자마자자 
몸을 바로 일으켜 앉았다.
  "돈 갖고 있나? 해낼 줄 알았지. 자, 한 잔 하자. 얼마나 갖고 왔어?"
  "그냥? 이 친구. 지금 장난하는 거야? 약속했잖아!"
  꿔주면 어떻게 갚을 건데?"
  "이런, 젠장할. 브리트 패럴리가 어떤 사람인데 꾼 돈을 안 갚아?"
  "이번 연주 여행에서 빼간 이십이만 달러를 갚은 다음 말인가?"
  "지금 뭔 개 같은 소릴 하는 거야? 뭘 빼갔다구?"
  폴은 입을 다물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 자식, 그 쥐새끼 같은 경리가 그랬구나. 그자하고 얘길 한 거야? 
아무한테도 얘기 안한다고 해놓구선. 이놈의 자식, 약속해놓구선. 아냐, 
거짓말이야. 그 자식 새빨간 거짓말쟁이라구."
  폴은 여전히 대꾸가 없었다.
  "우라질! 그래서 뭐 어쨌다는눈 거지? 그만큼 다시 채워넣으면 되잖아. 이번 
워싱턴 연주기금으로 다시 채워넣겠어. 한꺼번에 두배로 들어올 텐데 뭐가 
걱정이야. 아, 누가 알아채겠어. 콩알만큼 떼먹은 걸!"
  패럴리는 주변에 누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갑자기 주변을 살피며 폴에게 눈을 
깜빡였다.
  "알았어. 폴. 내가 깜박했어.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천지에 깔려 있는데 
말야. 다 돌려놓을게.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그게 대수야, 뭐. 젠장할, 그 돈 
갚으려면 일년 더 걸리겠다. 그래도 시리즈물 맡으면 꽤 큰돈도 만질 수 
있으니까 걱정 마. 꼭 채워 넣을 테니까. 그리고…"
  그는 자꾸만 구석을 살폈다.
  "카메라 없지? 아무도 없지?"
  그때 갑자기 방문이 벌컥 열리며 루이가 헐레벌떡 뛰어들어왔다.
  "그놈이 IRS(미 재무부 내국세국:역자 주)에 전화했어!"
  푸이는 폴을 잡아먹을 듯 으르렁댔다.
  "당신이 완전히 우릴 망쳐놓았어. 그 쥐새끼가 세무서 직원을 불러들였어. 
내일 회계감사원이 쳐들어올 거야."
  팰러리는 루이에게서 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어떻게 된 거야?"
  "그 개자식, 경리놈이 우릴 배신했다니까. 폴, 당신 때문에 우린 망했어. 우린 
완전히 망해버렸다구. 세무서놈들이 가만 있겠ㅎ어?"
  "에, 에, 이봐, 루이. 왜 그래?"
  패럴리는 뜻밖에도 침착하게 루이의 흥분을 가라앉히려 했다.
  "세무서 사람들은 원래 그러는 것 몰라? 멸 달 동안 숫자 갖고 씨름하다 
철수하겠지. 걱정없어."
  "바보같이들 구는구만."
  폴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이번 연주여행을 성공시킨게 뭔지 아나? 바로 신뢰야. 군중들의 믿음 때문에 
이만큼 성공한 거야. 국세청 세무조사가 쳐들어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모든 
걸 다 잃ㄹ게 될 텐데. 그 소문이 새어나가봐. 모든게 끝장이야. 연주도 
끝장이고, 자네 컴백도 끝장이야."
  "입닥쳐!"
  루이는 벌벌 떨며 소리쳤다.
  "끝장난 건 아무것도 없어. 알아들어? 그러니 입닥치고 있어! 줄이 있으니까 
문제없어. 세무조사 못 나오게…"
  "막으려면 철저히 막아야 할 걸. 안 그러면 더 크게 소문…"
  "잠깐, 잠깐!"
  패럴리는 싸움이라도 할 듯한 두 사람을 막고 나섰다.
  "둘 다 미치지 않았으면 입 좀 다물고 있어. 나한텐 팬이 있어. 세무조사가 
나오든 말든 팬들은 아무것도 신경 안 써. 날 보러 와서 브리트, 브리트 외칠 
뿐이야. 알아들어? 문제 없어. 모든게 다 잘될거야!"
  그의 두 손은 뭔가 열심히 더듬고 있었다. 포로가 루이를 바라보면서 그는 
손을 뒤로 돌려 서랍을 뒤지고 있었다.
  "그래, 그래 너만 있으면 모든게 잘될거야."
  "하지 마, 브리트!"
  폴의 제지에 브리트는 빽 소리를 질렀다.
  "정신 차리려면 이게 있어야 돼. 자넨 메리 포핀스래서 내 기분 이해…"
  "도대체 어쩌만 좋아. 이 일을…"
  루이는 혼잣말로 분을 삭이고 있었다. 폴은 몸을 조금 일으켜 패럴리 손을 
세게 쥐었다.
  "하지 말라고 했지! 자, 내 말 잘 들어. 앞으로는 가만 있지 않겠어."
  "무슨 수로? 어떻게 막아낼려구?"
  루이가 소리치듯 물었다.
  "생각중이니까 흥분 풀어요. 우선 브리트가 연주를 할 수 있는지…"
  "물론 할 수 있지. 얘기 했잔항. 팬들이 날 보러 와! 내가 무슨 짓을 하든 
상관 안한단 말야. 그냥 나 때문에 다들 좋아 날뛰는 거야. 완벽한 사람이 
어딨나? 난 완벽하고 싶지도 않아. 공연, 문제없어."
  "그게 공연인가?"
  폴은 약 기운이 떨어져 횡설수설하는 패럴리를 노려보았다.
  "진짜 콘서트장을 꾸며야 돼. 하이애나처럼 울부짖고, 새처럼 나루띠면서 
난장판을 만들라는 소리가 아냐. 무슨 소린지 알아들어? 아무튼 지금부터 다음 
무대 올라갈 때까지 한시도 자네 겉을 떠나지 않을 테니까 그런 줄 알아."
  그때 갑자기 패럴리가 개처럼 짖기 시작했다. 머리를 뒤로 젖힌 채 컹컹 
짖어대는 그의 얼굴은 뻘겋게 달아올랐다. 캥캥거리는 울음 소리가 끝날 때까지 
폴은 완강하게 패럴리의 손을 붙들고 있었다.
  "약 기운을 완전히 없앤뒤 맑은 정신으로 콘서트 하는 거야."
  "차라리 날보고 죽으라 그래!"
  패럴리는 거의 울부짖고 있었다.
  "맑은 정신으론 연주 못해! 내 말 알아들어, 이 멍청아? 그걸 안먹으면 난 
죽어. 노랠 못해. 말도 못하고 목소리가 안 나온단 말이야."
  폴은 대꾸하지 않았다. 진자인지 협박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도대체 그게 무슨 상관이야? 패럴리가 약을 하든 말든 무슨 차이가 있대? 
IRS가…"
  푸이는 폴에게 있는 대로 성질을 부려대고 패럴리는 어떻게든 폴을 설득하려 
들었다.
  "폴, 내걱정은 말라구. 루이가 내 곁에 있을 테니까. 아주 철저한 매니저야. 
솔트 레이크에서도 날 얼마나 철저하게 감시했는데. 안 그래, 루이? 기억나지? 
내가 얼마나 착하게 굴었는지 말야. 그러니까 적정할 필요없어.콘서트도 
잘될거고, 영화도 무사히 끝날꺼야. 돈 문제는 루이가 알아서 처리할텐데., 뭐. 
정부측 인사하고 친한 친구가 있대. 그러니까 잘 알아서 해줄거야. 문제는 
돌려줄 돈이 없다는 거야. 그런 돈이 나한테 있겠어? 워싱턴 쇼는 자네에게 
보여줄 수 있지만 이십만인지 얼만지 그 돈은 채워 넣을 수 없다구. 이해하지?"
  이런 인간이 우리 미국의 영웅이시라. 겁에 질려 곤두박질치는 허약한 영웅.
  "약속 하나 해주면 돈은 내가…"
  "돈? 무슨 돈, 삼천 달러?"
  "삼천이 아니고, 이십이만 달러를 채워 넣겠어. 세무조사기 나오ㅘ도 감쪽같이 
장부를 채워 놓으면 될거니까."
  생선가시라도 목에 걸린 듯 갑자기 루이가 캑캑러렸다. 폴을 바라보는 
눈동자는 거의 밖으로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그 돈을 어디서 구하게?"
  패럴리의 멍청한 질문에 폴은 아주 짧게 대꾸했다.
  "그건 내 문제니까 신경 끊어. 입 꽉 다물란 말야. 할 수 있지? 얌전히 콘서트 
준비하는 거지?"
  "어린애 다루듯 하는구만. 젠장할. 황제 중의 황제, 브리트 패럴리한테 그런 
식…"
  "그 소린 못 들은 걸로 하겠네."
  폴은 상대를 완전히 제압해버렸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긴 했지만 패럴리는 
폴에게 항복하듯 대답했다.
  "알았다구, 젠장할! 알았어."
  "연주를 무사히 끝내겠다고 맹세하는 거지?"
  패럴리는 오래도록 그를 바라보았다.
  "어쨌든 좋은 일이니까, 맹세하지."
  자리에서 일어난 폴은 정직하게 대답하는 패럴리 어깨에 손을 얹었다. 폴은 
이상하게도 그 한심한 영웅 패럴리에게 이끄리고 있었다.
  "전화 한 통 해야겠는데. 이따 다시 보자구요."
  "좋았어. 아주 좋았어. 친구, 잠깐만!"
  패럴리는 돌아서려는 폴을 얼른 붙잡았다.
  "누구한테 돈 부탁하혀는 것 같은데, 돈 부탁할 땐 아주 부드럽고 
사근사근하게 굴어야 돼. 그거 알지?"
  패럴리느 학생를 가르치듯 폴에게 조목조목 돈 빌리는 법을 설명했다. 폴은 
피식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충고 고맙군."
  "잠깐, 엘리베이터까지 같이 나가지. 곧 돌아올게."
  루이는 폴의 뒤를 따라 나왔다.
  "정말 그 돈을 구할 수 있는 거요?"
  "그렇다니까요."
  "이유가 뭐요? 그까짓 콘서트 대문에 빚을 지겠다니¨"
  폴은 말없이 웃었다. 루이의 말투에서 천박함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이기 때문이오."
  루이는 고개를 푹 꺾었다.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폴은 보스턴에 있는 주식중개인에게 전화르 ㄹ걸었다.
  "이십이만 잘러? 개인계좌로 입금시키라구요?"
  "아니, 전신환으로 보내요."
  그는 호텔 주소를 중개인에게 불러주었다.
  "지금 당장 보내요."
  폴은 다음날 그 전신환을 브리트  패럴리 이름으로 뉴욕에 있는 기아를 위한 
연주 모금단체에 보낼 생각이었다. 경리 장부에 단순 전도금식으로 나타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전화를 끊고 지하 바로 내려간 폴은 구석진 곳에 앉아 스카치를 마시며 
사람들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누구를 선택하든 영화나 소설의 주인공이 될만한 
이야깃거리를 가졌을 터였다. 유일하게 자신만이 영화의 주인공이라는 패럴리의 
착각이 우스꽝스러웠다.
  에밀리, 루이, 브리트, 모두 비슷한 사람들이었다. 결코 남의 일에 결부되지 
않으려는 성격들. 그는 자신만의 쾌락과 안주를 찾아다니면서 타인의 문제를 
애써 외면했던 예전의 자신을 떠올렸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에게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폴 젠슨, 그는 분명 변하고 있었다. 조금 전 
루이를 다그치던 폴의 태도는 플레이 보이로 전전하는 그를 나무라던 오웬과 
흡사하게 닮아 있었다.
  스카치가 혈관을 두어 차례 돌았을 즈음 몇몇 말들이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책임의식, 보호, 가치, 모든 개 로라를 위한 단어들이었다.
  의자에 등을 기댄 채 그는 처음으로 로라 생각을 떨쳐버리지 않고 있었다. 
패럴리가 묘사했던 로라 폴은 그녀의 영상을 그려 보았다. 식당에 앉아 있는 
그녀가 떠올랐다. 패럴리와 함꼐 브런치를 하며 그를 기분좋게 만들었을 로라의 
부드러운 음성. 사랑스럽고 친절한 숙녀.
  로라. 몇 년 동안 애써 부르지 않았던 그 이름을 폴은 가만히 불러보았다. 
로라.
  "폴 젠슨씨?"
  그는 고개를 들어싸ㄷ. 호텔 로비 직원이 전화기를 든 채 서 있었다.
  "보스턴에서 전화가 왔는데요."
  "아, 그래요요. 감사합니다."
  그는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폴 젠슨입니다."
  "오빠, 알리슨이야. 중요한 일 하는데 방해한 건 아니겠지? 얘기할 사람이 
필요해서 말야. 오빠밖에 생각나는 사람이 없었어. 밴한테 들었는데 로라가 
할아버지 호텔을 모두 사들였대. 네개다. 거짓말 같지 않아? 그 말 듣고 났는데 
기분이 이상했어. 내 마음을 나도 모르겠어. 화가 난 건지, 아니면…어쨌든 
굉장한 애야. 세상에, 그걸 다 사들였다니. 물론 아빠는 나한테 그런 얘기 
안하셔. 화가 나서 요새 말도 못 붙일 정도야. 막지 못할 사정이 있었나봐‥"
  폴은 알리슨이 말하는 것을 거의 흘려 듣고 있었다. 로라, 잘했어. 아주 
잘했어. 그는 중얼거리며 수화기를 꽉 쥐었다.

    22장
  저드 가드너
  그 리름은 불에 달군 쇠꼬챙이처럼 펠릭스를 찔렀다. 잠들어 있는 아기의 
금빛 고수머리는 동그랗게 말려 있었고, 입ㅅ술은 작은 핑크빛 꽃처럼 수줍게 
다물어져 있었다.
  "아빠가 아무래도 최면에 걸렸나봐."
  알리슨은 벤에게 놀랍다는 듯한 눈길을 보냈다.
  "아기라면 원래 고개부터 흔드는 분인데."
  벤은 고개를 끄덕이면 펠릭스를 주시했다. 오래도록 아기를 바라보던 
펠릭스가 등을 돌렸을 때 벤은 그의 광포한 눈길에 자신도 모르게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저드의 아들, 어떻게 그걸 눈치 채지 못했을까?
  아기 이름을 들었을  때 레니는 펠릭스 몰래 눈물을 닦았다.
  "당신은 알고 있었어?"
  처음으로 아기를 보고난 후 비콘 힐을 떠나는 리무진 안에서 펠릭스는 레니를 
다그쳤다. 태어난 지 이틀 된 갓난아이를 알리슨과 벤이 집으로 데려온 
직후였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
  "그랬어요."
  차창 밖을 바라보며 레니는 힘없이 대답했다.
  "그 얘긴 하고 싶지 않아요. 알리슨이 행보해하잖아요. 그애 결혼 잘했어요. 
아주 행복한 가정을 구몄잖아요. 그냥 이대로 평온하게 넘깁시다."
  "하고 싶은대로 해. 어찌 됐든 난 녀석을 회사에서 쫓아낼 생각이니까. 우리 
가문에서도 내쫓겠어. 나쁜 놈, 그냥 내버려둘 순 없어."
  "벤이 알리슨을 얼마나 사랑하는데요? 어떻게 당신이 그런 짓을…"
  "웃시는 소리! 그앨 이용해서 날 치려는 것도 모르다니, 쯧쯧. 아직도 그 
로맨스에 빠져 뭘 볼 줄 모르는구만."
  "펠릭스, 애들은 그냥 내버려둬요. 아니, 하고 싶어도 절대 손 대지 못할설요. 
뭐라고 얘길 하려구요? 내가 벤 아버지와 한 침대를 섰다구요? 그래서 
내쫓겠다군요?"
  레니가 숨을 돌리느라 잠시 말을 끊었지만 펠릭스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왜 대답 못해요? 그런식으로 이사들한테 얘길 할 거예요? 개발기획 전무로 
앉힌 사위를 갑자기 회사 밖으로 내쫓아버리려면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해요."
  "건수를 만들어야지. 어찌 됐든 우리집에 머물 수는…"
  "벤은 우리 사위예요. 우리 가문 사람이예요, 펠릭스. 알리슨을 행복하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고요. 도대체 뭘 두려워하는 거죠? 마지막으로 한 마디 
하겠는데 아무 일 없을 테니까 내버려둬요."
  낮지만 서랏발 같은 목소리였다.
  "날 위협하는 건가?"
  그녀는 오래도록 그를 쳐다보았다.
  "위협이라뇨? 난 한번 한다고 하면 소리없이 하는 사람이예요."
  펠랙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레니에게 위헙당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자제심을 잃고 분통츤 터트렸다.
  "당신 울었잖아. 알리슨이 얘 이름을 부를 때 눈물을 흘리더군. 그 빌어먹을 
놈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건가?"
  "죽을 때까지 기억할 건데요."
  레니는 싸늘하게 그를 노려보았다.
  "당신도 마찬가지 아니예요? 그 사람을 잊을 수 있겠어요?"
  "그자, 그렇게 고집 세다는 소린 못 들었는데 웬일인지…"
  필라델피아 부동산 중개인은 로라에게 펠릭스가 필라델피아 샐링거 매입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별 짓을 다 해봤지만 꿈쩍도 안해요."
  "왜 그랬을까?"
  "매입신청 받을 땐 펄쩍펄쩍 좋아했었는데,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요. 다른 
매입자들하고 의논해보겠다는 소리만 되풀이 하고…"
  "다른 매입자들은 없다고 했잖아요."
  "바싹 다가드는 측은 별로 없었어요. 어쨌든 저쪽에서 능구렁이 작전으로 
나오는데, 아무래도 이십오만 정도는 올려야 되지 않을까요. 아니면 아예 
오십만을 올려서…"
  "아직은 그대로 둬요요."
  "미리 생각은 해두시라는 거죠."
  "나중에 다시 의논하기로 합시다."
  도대체 뭐야? 그만큼 좋은 가격을 제시했으면 됐지. 뉴욕 샐링거는 순순히 
내놓더니 뭣 때문에…. 말도 안돼. 내 계획을 알아 챈 걸까? 전화기를 집어든 
로라는 뉴옥으로 커리어를 찾았다.
  "웨스, 샐링거 홀텔 그룹 이사진 중에 아는 사람 있다고 했죠?"
  "해튼이라는 사람을 알아. 그 사람 회사 합병시키는 일을 좀 봐 줬지."
  "그 사람한테 전화 좀 해줘요. 펠릭스가 왜 우리한테 필리델피아 호텔을 
넘기지 않으려는지 알아야겠어요."
  "거절했대? 뜻밖인데. 목매달고 기다리는 줄 알았는데."
  "나도요."
  "좋아, 해튼한테 얘기해보지."
  한시간 뒤 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당신 OWL 개발사 주인이란 걸 알아냈다는구만. 그래서 중지시킨 모양이야. 
당신한텐 죽어도 팔지 않겠대. 이사회의에서 전쟁까지 치렀나보던데. 그 문제 
때문에 이차 회의까지 열었다는데 펠랙스가 결사 반대했대. 결국 미친 말처럼 
뛰는 그자에게 모두 다 손들어버리고 말았다더군."
  "미친 말처럼 뛰더라도 할 수 없어요. 그 호텔을 꼭 내 손에 넣고 말겠어요."
  "로라, 그렇다 하더라도 팔지 않겠다는 사람한테선 살 수 없어. 어쨌든 
다음주에 만나 자세히 얘기해. 비서가 당신 살 집 몇게 골라 놓았다니까 같이 
가서 한번 둘러보고 그때 펠릭스 일도 의논하도록 하지."
  "좋아요. 그럼 그때 만나요."
  로라는 밖으로 ㄴ왔다. 찬 공기라도 쐬어야 제정신이 들 것 같았다. 오월의 
아침은 따사로웠다. 양동이를 엎어놓고 그 위에 앉아 낚싯줄을 감아 올리는 
낚시꾼들, 조깅하는 사람들과 자전거 타느 사람들, 웃통을 벗고 몸을 태우는 
시민들로 호숫가 공원은 오전부터 술렁거리고 있었다. 산들바람에 잔잔하게 
흔들리는 은빛 호수에는 작은 돛단배들이 흰 삼각돛을 펄럭이며 조용히 떠 
있었다.
  로라는 신발과 스타킹, 그리고 재킷까지 벗어 들고 호수 주변 모래밭을 걷기 
시작했다. 밀가루처럼 고운 모래 위를 마음껏 뛰고 싶었다. 정장스커트 
차림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는 제법 뜨거운 햇빛이 내리쬐는 
모래사장을 천천히 거닐었다.
  여름까지 호텔 네개를 매입하고 뉴욕에 거주지를 정할 생각이었는데….
  미시간호 주변을 따라 길게 이어진 서고히암 둑 위에 앉은 로라는 깊은 
상념에 빠졌다. 그녀는 펠릭스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도 사업가인 
이상 상대가 로라라고 해도 재빨리 좋은 조건에 물건을 넘겨야 한다는 것쯤은 
능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그를 잘 알고 있었다.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성격과 사업가가 갖춰야 
할 철저함을 지니긴 했지만 아무도 신뢰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늘 남을 
의심하며 부친보다 자신이 월등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데 혈안이 된 인물이었다. 
게다가 독선적이었다. 다른 사람과의 협의없이 재빨리 그리고 단호하게 결정을 
내린다.
  방법은 바로 그것이었다. 로라는 펠릭스로 하여금 재빨리 단호하게 결정을 
내리도록 유도해야 하는 것이다.
  태양이 정수리를 쪼아대는 시각, 산들거리던 바람조차 완전히 잠잠했다. 
유치원 선생들은 점심시간에 맞추어 꼬마애들을 집으로 데려가고 있었다. 
돛단배를 타고 멀리 소풍을 나가려는 듯 몇몇 선주들은 점심을 배위로 실어 
나르고 있었다. 지니를 만날 시간이었다. 로라는 얼굴을 찌푸린 채 약간 
부어오른 발에 간신히 신방을 끼웠다.
  "그래, 문제는 풀었어?"
  비콘 힐 식당 구석진 자리에 마주앉은 로라에게 지니는 시원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반쯤은. 어떻게 알았어요?"
  "눈을 보면 알아. 내가 그런 덴 도사가 아니니. 문제가 뭔데?"
  "어떤 남자로 하여금 빨리 호텔을 팔게 만드는 문제."
  "그자가 팔지 않으려 한다는 소리구만."
  "우리가 낸 협상 가격을 거절했어요. 빨리 처리할 필요가 없다는 거겠죠."
  "그 호텔 약점을 알고 있으면 될텐데. 예를 들면 그 호텔에서 수백 명이 죽어 
나갔다고 소문이 나면 금방 치워버리려 들걸."
  로라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겠죠. 하지만 죽었다는 얘긴 없던대요."
  "그래 함부로 사람을 죽이다니, 나도 참…이러면 어떨까. 호텔 자체가 썩어 
문드러졌다.! 벽에 금이 가고 손도 쓸 수 없게 다 망가져버렸다. 영원히 못 
고친다. 그럼 누가 사겠어?"
  "그런 호텔을 누가 사겠어요? 나도 안 사겠네."
  로라는 다시 깔깔거렸다.
  수프 숟가락을 든 채로 한동안 창문 밖을 지켜보던 로라는 눈을 빛내며 
지니를 보았다.
  "만약 그 호텔을 현대식으로 바꿀 수 없다는 걸 얘기하면 어때요? 예를 들어 
그린벨트처럼 그 건물 공사를 묶어두는 식 말이에요."
  "그런 게 어딨어. 개인 건물을 무슨 권리로?"
  "필라델피아 시 당국이 그렇게 하라고 하면 할 수 없죠. 그렇게 되면 
뜯어내거나 확장할 수 없거든요. 내부수리는 되지만 외장공사는 절대 
금지라구요. 그런 건물을 누가 사려고 그러겠어요."
  "완전히 똥값 되겠구만. 괜찮은 생각인데."
  "그러잖아도 그 호텔이 재건축 금지 후보 명단에 올라가긴 했어요. 하지만 
아름답긴 해도 역사적인 가치가 없다고 추천에서 제외돼 버렸죠. 펠릭스로 
하여금 필라델피아가 그 추천건을 재검토하고 있다고 믿게 만들면…"
  "그런 사실이 없는데 그자가 그걸 왜 믿어? 아니, 오!"
  지니는 마치 소꿉친구들이 비밀을 나누듯 로라의 반짝이는 눈길을 교환했다.
  :누굴 통해서 그게 사실이라고 믿게 만들자, 이거구만."
  "그래요. 신용 있는 사람들을 통해 그 말을 흘리는 거라구요. 펠릭스 그 
사람은 원래 결정내릴 때 남과 상의하지 않고 혼다 독단적으로 신속하게…"
  지니는 함박 웃음으로 로라의 말꼬리를 잘랐다.
  "아주 근사한데. 진짜 멋진 생각이다. 그래, 누가 그 얘길 할 수 있을까?"
  "아직 그런 생각은 못했어요. 혹 필라델피아 시의회에 아는 사람 없어요?"
  "없어. 군민회에 몇 명 있긴 한데, 소용없겠지."
  "재건축 금지위원회의 흐름을 알 수 있는 사람만이 펠릭스를 움직일 수 
있어요. 아니면 위원회 내용을 기사화할 수 있는 기자…아, 양크 보스워드!"
  "누구?"
  "보스턴에 있는 신문기자예요. 몇 년 전에 만났던 사람인데."
  "필라델피아 사람이 아니잖아."
  "누가 알아요? 필라델피아 쪽 사람을 알고 있을지. 지니, 미안해요. 전화 좀 
해야겠어요. 곧 올게요."
  재관 뒤로 그와는 연락이 끊어진 상태였다. 그러나 배심원 판결이 있고 난 
다음날 아침 손을 굳게 잡아쥐며 친구에게나 줄 수 있는 미소를 던진 양크에게 
그녀는 기대를 갖고 있었다.
  "보스워드예요. 말씀하세요."
  그의 음성이 톡톡 튀고 있었다.
  "양크, 로라 페어차일드예요. 너무 오래돼서 잘 기억…"
  "로라! 이게 얼마만이에요? 어디 있어요?"
  "시카고에 있어요. 문제가 좀 있는데 잠깐 얘기 들어줄 수 있어요?"
  "얘기 듣는 게 내 직업이죠."
  로라는 간략하게 그간의 경위를 얘기했다.
  "충분한 가격인데도 안 판다? 로라한테 죽어도 넘기기 싫다이거구만.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그자 마음을 돌려야겠다는 얘기 아닙니까? 그나저나 소문이 
들어먹을까요?"
  "소문처럼 하면 안되죠. 진짜처럼 그럴 듯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알겠어요. 가만 있어봐라. 누가 좋을까? 필리가 어떨까? 아냐, 필리까지 갈 
것도 없어. 로라, 내가 하고 싶은데 그래도 되겠어요?"
  "보스턴에서 필라델피아 쪽 기사를 쓸 순 없잖아요? 더군다나 건축 분야를…"
  "상관없어요. 난 도시 쪽 파트니까. 어드 도시, 무슨 일이든 잡을 수 있어요. 
주 도시기자 파워 몰라요?(미국내 오십여 개 주는 주 수도를 중심으로 
연방정부와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어 연방수도:역자 주)내 실력 믿어보세요. 
로라를 도울 수 있는 일인데 다른 사람한테 넘길 순 없지. 친구니깐 일 값도 
공짜요. 정 고마우면 보스턴 오는 길에 술 한잔 사요."
  "뉴욕에서 살 거예요. 다음달 뉴욕으로 이사해요."
  "그것도 괜찮겠구먼. 아무튼 지금 그자한테 전화를 해야겠어요."
  "글쎄, 양크. 필라델피아 기자가 아닌데…"
  "보스턴에 있어도 두루 만진다니까. 날 믿어요. 실망 안할 거요. 그럼, 안녕!"
  전화를 끊자마자 보스워드는 양 손바닥을 비벼댔다. 기자에게 있어 유일한 
불만은 사건을 만들어 나가는 대신, 이미 일어난 일을 보도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드디어 실제 행동으로 해 낼 수 있는, 그것도 멋진 여자를 
구하는 흑기사처럼 신나게 뛸 수 있는 일이 생긴 셈이다.
  사년 동안 그녀가 얼마나 변했는지 그는 자못 궁금했다. 얼음처럼 차갑게 
느껴지던 손가락, 돌같이 굳은 얼굴, 그는 침대 속에서 그녀를 끌어안고 모든 
것이 잘될거라고 격려하고 싶었던 충동을 되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진짜 
남자라면 번민에 싸인 여자를 침대로 무작정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그에게는 사랑하는 아내와 어린 아들이 있었기에 그 충동을 자제해야만 했었다. 
그러나 이번 일만큼은 꼭 로라를 위해 잘 되게 하고 싶었다. 그녀를 위한 
일인데 펠릭스 샐링거에게 바가지를 좀 씌운다고 해도 큰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힘 있게 전화통을 붙들었다.
  "보스턴 글로브 소속 양크 보스워드입니다."
  펠릭스 비서에게 한 말을 그는 펠릭스에게 그대로 반복했다.
  "팔십 군데 건축물을 주제로 기사를 만들고 있는데요. 특히나 옛날 고전식 
건물주들과 도시지역 토지 효과를 높이기 위해 재개발식으로 현대화를 추진하는 
의견을 취재중입니다. 필라델피아 샐링거 호텔에 관한 재건축 금지명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지 의견을 좀 들을 수 있을까요?"
  "그건 취소됐소. 후보명단에서 탈락됐으니 거론할 소지도 없는것 아니겠소?"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도시확장 금지 측면에서 재건축 금지 대상을 
확대시키고 있는 것도 알고 있습니까? 다시 말해 역사적 가치가 없더라도 
건축공학적 특출난 건물들을 다시 그 명단…"
  "그걸 어디서 들었단 소리요?"
  "바로 몇 분전, 구식건물만 사들이는 업자한테 들었습니다. 믿을 만한 
소식통이죠. 재건축 금지건에 대해 훤히 알고 있는 분인데 지금 그 위원회 측이 
추가명단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답니다."
  정확하고 단호한 음성이었다.
  "물론 그 움직임을 확실하게 추적하기 원하신다면 몇 주 뒤 선생님께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만, 일단 오늘 이렇게 전화를 드렸으니 그 안에 대한 
의견을 말씀해주십시오. 아무도 모르는 일이겠죠. 얼마나 빨리 그 안이 채택돼 
실행될지 말입니다. 물론 건물주들의 반발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원래 정부가 
하는 일이 다 그렇듯 결국 재건축금지위원회 측의 승리로 끝날 거라고 자신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필라델피아 시가 어떤 곳입니까?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도시일 뿐 아니라, 독립선언문이 낭독된 독립기념관에…"
  "할 말 없소!"
  펠릭스는 수화기를 집어던지듯 내려놓았다. 호흡이 가빠졌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옛 영광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바보짓만 하고 앉아 있는 
시 관리들이 국민의 눈길을 끌기 위해 미친 짓을 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팔지 
않을 것도 아니요. 로라라는 계집을 제외한 매입자가 나타날 경우 당장이라도 
내동댕이 쳐버려야 할 건물에 재건축 금지령이 떨어진다면 볼장 다 본 장사가 
될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펠릭스의 두뇌는 빠르게 움직였다.
  구백만 달러.
  펠릭스는 분노를 삭였다. 그의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가 떠올랐다. 구백만을 
받고 그 계집한테 넘겨? 금지령이 떨어진 건물을 잡고 통곡하겠지? 아무도 
원하지 않는 쓰레기에 구백만을 털어 넣었으니 죽음이라도 택할걸. 그래, 
던저주자.
  그는 필라델피아에 있는 부동산 중개인에게 연락했다.
  "OWL쪽에 연락 없나?"
  "없는데요. 하지만 연락은 했습니다. 안 팔겠다고 하시길래…아무튼 저쪽에서 
그 이상은 못 준다고 하더군요."
  "그쪽 말일세. 그 호텔이 재건축 금지법에 걸려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눈치던가?"
  이내 대답하려던 중개인은 순간적으로 입을 다물어버렸다. 누군가 루머를 
퍼뜨린 것이 틀림없었다. 부동산 업계야 늘 소문이 풍성한 곳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실로 기적 같은 소문이었다. 경기 침체 때문에 수입도 변변치 않은 
상황이었다. 그는 샐링거 매매 이후 챙기게 될 엄청난 금액을 재빨리 
계산해보았다. 아내와 함께 바하마로 가서 삼년 동안 느긋하게 놀고 먹을 수 
있는 돈이었다.
  "글쎄 알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오늘 당장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으니까 시카고로 달려가는 한이 있더라도 
문제를 해결하도록! 결과는 오늘 밤 듣겠네. 집으로 전화하게나. 알아들었지?
  "알겠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샐링거씨, 아주 현명하신 판단입니다."
  "알면 됐네."
  전화를 끊은 그의 얼굴은 승리감으로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필라델피아 
샐링거가 드디어 팔리게 될 것이다.
  "저녁 근사했어요."
  로라는 워싱턴 샐링거 식당 주방장인 제라르 리옹에게 찬사를 보냈다.
  "이 호텔에서 가장 신나게 운영되는 곳 같군요."
  "맞습니다. 호텔은 가난하지만 내가 있는 이 식당은 무럭무럭 자랍니다."
  "그렇겠죠. 최고 도시에도 제일 번화한 거리에 속해 있는 호텔인데…"
  로라는 상대방의 기분을 뛰워가며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이끌어 갔다. 리옹은 
프랑스인답게 손바닥을 펴 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경영방식이 안 좋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건물 주인이 살 사람을 찾고 
있다는데 가격이 워낙 센가 봅니다. 위에서 신경을 써 주지 않으니 우린 고아 
같은 기분이죠. 그래도 나는 상관 안해요. 식당하고 개인적인 문제들 때문에 
다른데 신경 쓸 여유가 없거든요.
  "개인적인 문제들이라면…좀 들어보고 싶은데요. 저랑 같이 커피 한잔 
하실래요?"
  리옹은 빠르게 그러나 아주 품위 있게 식당을 한번 둘러보았다. 자정이 다 된 
시간이었다. 몇몇 손님들만이 한가롭게 커피를 마시고 있을 뿐 식당은 거의 
비어 있었다.
  "영광입니다."
  그는 로라 맞은편 안락의자에 와 앉았다. 신속하게 모습을 드러낸 급사장에게 
리옹은 음식의 제왕 프랑스 국민답게 세련되게 주문했다.
  "감사합니다. 한 잔 하죠. 영어가 아주 완벽하시네요. 여기 계신 지 
오래됐나보죠?"
  "칠년 됐습니다. 영어는 열 살 때 학교에서 배웠죠. 세계적인 주방장이라면 
영어쯤은 기본으로 알아둬야겠죠."
  "열 살 때부터 주방장을 꿈꿨나보죠?"
  "그때부터 아니었지만 언젠가부터 이 직업데 빠져들었죠."
  로라 눈에는 너무 난잡하고 밝게 느껴졌지만 어느 한 군데 소홀함이 없는 
실내 장식이었다.
  "그래서 모든 게 원대로 됐군요."
  "모든 게 아니라 많은 것이겠죠. 모든 걸 가질 수는 없지 않겠어요. 만약 
원대로 다 이룰 수 있다면 인간은 자만심에 빠지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신은 자기처럼 되려는 우릴 벌주려 할 겁니다."
  두 사람은 서로 바라보며 웃었다. 웨이터가 커피와 술을 탁자위로 내리는 
순간 리옹은 아주 날카로운 눈으로 작고 동그란 술잔을 살폈다.
  "이건 살구가 아닌데."
  "예, 저기, 살구가 아니라 복숭아…"
  웨이터는 당황하여 말을 더듬거렸다.
  "왜 복숭아지?"
  "급사장께서 주방장님이 이걸 시키셨다구 해서…"
  "난 살구를 주문했네. 도대체 어떻게 돼먹은 식당질서야! 내가 얘기한 걸로 
다시 가져오게!"
  그는 로라에게 다시 눈을 돌렸다.
  "죄송합니다. 질서는 잡아야 됩니다. 어디까지 얘기하다가…"
  "모든 걸 다 가질 수 있느냐에 대해서 얘길 했죠. 갖기 못한 게 있나봐요. 
그게 뭐죠?"
  "아, 그건."
  그는 잠시 주춤거렸다. 그러나 로라가 탁자에 팔꿈치를 대고 살짝 웃는 순간 
리옹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않은 이야기를 술술 
풀어내기 시작했다. 보통여자와는 다른 여자 같았다. 아름다운 건 둘재였다. 
그녀는 남의 말을 주의 깊고 성의 있게 들을 줄 아는 여자였다. 다리를 꼬거나, 
몸을 비비 틀다가 갑자기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바르는 여자도 아니었다. 
그녀는 상대에게 눈을 고정시키고 이야기를 들었다.
  웨이터가 다시 내온 살구 브랜디와 커피를 섞어 마시면서 그는 남프랑스에서 
보낸 소년 시절과 전설적으로 유명한 로제 베르제에서의 주방장 실습 교육 및 
미국으로 건너오게 된 동기까지 로라에게 자세하게 이야기했다.
  "꿈이 다 이루어지진 않았죠. 아내와 함께 직접 우리 식당을 운영해보는 꿈 
말입니다. 그대신 이렇게 야하게 장식된 식당에서, 보세요, 현란한 무늬 보이죠? 
마음에 안 들지만 어쩌겠습니까? 더군다나 식당 장식이 현란해서 그런지 
급사장은 살구하고 복숭아도 분간 못할 정도로 덤벙거리죠. 경영진은 코빼기도 
안보이니 신이 나겠어요? 보스턴에 있다는데 아직 한번도 못 만나 봤습니다."
  "여기 머물러 계시는 이유가 따로 있나보죠"
  로라는 아까부터 그에게 묻고 싶었던 질문을 자연스럽게 꺼냈다.
  "다른 곳에서 많은 제의를 받을 텐데…"
  "제 자랑 같지만 맞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아들놈이…아주 착하고 순한 
녀석인데 학교에서 문제가 있어서…그래도 여기선 아주 잘 지내죠. 아내가 
여기저기 옮겨다니면 애한테 안 좋다고 하는 바람에 그냥 여기 있는 겁니다."
  "하지만, 다른 도시도 그런 특수학교를 많이 운영하고 있어요."
  그는 어깨를 들썩였다.
  "동감입니다. 하지만 아들이 잘 적응해 나가고 있는데 굳이 다른 곳으로 옮길 
필요 있느냐고 아내가 극구 반대를 해서요."
  두 사람의 대화가 끊겼다. 식당은 완전히 텅텅 비어 있었다. 로라는 마시기 
전부터 강하게 코를 자극해오는 살구 브랜디향을 느끼며 술잔을 들었다. 꽤나 
독한 브랜디는 그녀의 혈관을 따스하게 덥히고 온 몸으로 퍼져갔다.
  "최근에 호텔 두개를 사들였어요. 필라델피아하고 뉴욕에서요. 두 군데 다 
낡은 데다가 거의 돌보는 손길이 없었던 탓인지 특급 호텔에 비하면 뒤떨어진 
상태죠. 하지만 돈이 얼마가 들든 그 두 호텔을 옛 영광 그대로 재현할 
생각입니다. 시카고에서 그런 작업을 이미 해봤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으르 
걸로 봅니다. 문제는 뉴욕 호텔에 커피라운지와 바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곳에 최고의 식당을 만들려고 해요. 부드러운 색조를 배경으로 피아노와 
하프를 설치해놓고, 모든 브랜디르르 대번에 알아맞히는 급사장에, 수입 중 
일부를 직접 가져갈 수 있고 새 메뉴부터 식당 준비물 일체를 직접 자신의 
것처럼 진행시킬 수 있는 주방장, 저는 이런 식당을 꿈꾸고 있어요. 원한다면 
주방장 아내가 직접 나와 운영하는 것도 좋은 생각이겠죠.
  리옹은 넋이 빠진 것처럼 보였다.
  "물론 최선을 다해 주방장 가족이 살 집과 아들이 다닐 수 있는 특수학교를 
알아봐줄 생각입니다. 첫 일년 동안 그 아들을 위해 학비 전액을 보조해주구요. 
단 한 가지 문제는 그 주방장이 당장 날 따라와줄 수 있느냐는 거예요. 주방, 
식당, 새 커피숍 등등을 나하고 직접 꾸며야 되거든요. 봉급은 주방장이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나갈 겁니다. 식당 개장 전에도 말이죠."
  그녀는 웃음을 머금었다.
  "므슈(영어에 sir에 해당되는 프라스식 존칭:역자 주), 저랑 함께 뉴욕에서 
일하실 생각 없으세요?"
  "마담!"
  리롱은 크게 숨을 들어마셨다.
  "정말 감명 받았습니다. 식당을 내 손으로 직접 만들다니. 그것도 뉴욕에서! 
그것은 모든 주방자으이 꿈이지요. 물론 아내하고 의논해야 할 일이지만, 우리 
아들 학교까지 알아봐주신다니 아무 문제 없을 겁니다. 사표를 내고 나서 여길 
한 달만 돌봐주고 뉴욕으로 떠나…"
  "의사가 정확하게 전달된 것 같지 않군요. 난 즉시 떠났으면해요."
  "하지만, 마담. 몸담아 일하던 곳을 그렇게 배신할 수 없습니다. 적어도 한달 
전에 의사를 통보하고 새 주방장과 인수…"
  로라는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안돼요. 다른 건 모르지만 이것만은 확실히 해둡시다."
  리옹은 예의바르게 나오던 그녀의 목소리에서 단호함을 읽어냈다. 지금까지의 
부드러운 태도는 비지니스를 위한 쇼맨십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아름다운 
모습은 여전했지만 그녀는 어느새 식당이 아닌 사무실 책상에 앉아 있었다.
  "다음주 뉴욕에서 보는 걸로 합시다. 호텔 경비는 다 내가 처리할 테니까 
주거할 곳을 찾기 전까지 최고급 호텔에 머물러도 좋아요. 이삿짐 정리를 위해 
뉴욕에서 다시 이리로 와야 할 때도 경비문제는 걱정 마세요. 최대한 빨리 
아드님 학교 문제도 정리할 테니까 그것도 신경쓸 것 없어요. 다음주 
월요일부터 나하고 일할 수 있는지 그것만 확정지으세요."
  "사일밖에 안 남았는데."
  리옹은 중얼거렸다. 그는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한 말을 다시 
되뇌며 식당을 둘러보기도 했다. 이윤을 분배한다. 모든 걸 자영식으로 운영하고 
아내가 나와서 일할 수도 있고…그는 로라에게 눈을 돌렸다. 그래, 해보자.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다시 오기 힘들거야.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월요일 아침 뉴욕에서 만나는 걸로 하죠."
  로라는 상냥하게 웃으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기뻐요. 이제부터 우리 둘이서 같이 일하는 거예요."
  리옹은 그녀의 손을 맞잡으며 웃었다.
  삼주 뒤, 워싱턴 샐링거 호텔은 삼십오 퍼센트나 떨어진 객실 투숙률과 
주방자의 돌연한 사퇴로 식당문까지 닫아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호텔 신용이 
땅에 떨어진 워싱턴 샐링거로 인해 펠릭스는 분노할 힘마저 잃어버렸다. 결국 
이사회 결정에 의해 워싱턴 샐링거는 OWL 개발사 측에 천만 달러에 방매될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밤 로라는 지니 커리어와 함꼐 맨해튼과 뉴저지, 브루클린, 퀸스까지 
내려다보이는 원도스 언더 월드에 앉아 느긋한 저녁을 나눌 수 있었다.
  "마지막 호텔을 손에 넣을 때 돈 걱정 많이 했을텐데."
  커리어의 은은한 음성에 로라는 꿈꾸듯 대답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하지만 이 순간만은 모든 걸 잊고 싶어요."
  그녀는 오웬을 떠올렸다. 이젠 내 호텔이야. 지니, 클레이, 켈리, 그리고 날 
기다리고 있는 웨스. 이들은 내 가족이나 마찬가지야, 내 가족.
  샴페인 거품이 그녀의 입술을 적시며 입 안으로 흘러들었다. 제라르 리옹을 
끌어들일 때 마셨던 살구 브랜디만큼 진한 맛이었다. 꽃이 가득한 길을 
뛰어가다 진한 향기에 취해 현기증을 일으키는 것처럼 그녀가 해낸 일들은 
그녀를 취하게 만들었다.
  원하는 것을 다 이루었다고 느낄 만큼 그녀는 아주 진하게 취해 있었다. 
그렇게 강하게 열망하던 가정도 더 이상 그녀 머리에 남아 있지 않았다. 아이도 
원치 않았다. 모든 방해물을 물리치고 끝내 목표를 손에 쥐었다는 성취감만이 
그녀의 몸 속에 가득했다.
  창문 밖 하늘이 점차 어두워져 갔다. 맨해튼의 창문들과 거리 불빛은 더욱 
선명하게 빛을 내기 시작했다. 펠릭스를 상대로 한 게임에서 아직 결정적으로 
승리한 건 아니었지만 로라는 오웬의 꿈을 어느 정도 이루었다는 자부심을 
느꼈다.
  필라데피아 샐링거에 대한 재건축 금지령 건을 조사했던 벤은 이사회의에 
모임 임원들에게 맥빠지는 보고를 해야 했다.
  "글로브 신문사 기자한테 전화까지 해봤는데, 재건축 금지안에 대해 조사를 
하다 위원회 측이 안건을 조절할 경우 필라델피아 호텔이 해달될 것 같아서 
문의차 전화를 했을 뿐이라고 주장하더군요. 어쨌든 그 기자, 위원회 명단이 
바뀌었다는 얘길 절대 한적이 없답니다."
  "이런 젠장할!"
  헤튼은 책상을 내리쳤다.
  "그 기자가 무슨 말을 했든간에 문제는 펠릭스가 명단 병견 얘길 했다고 믿은 
데 있어. 그러니까 자기 마음대로 그것도 신속하게 칼을 휘둘렀는데, 도대체 
이사회의는 두었다 어디 쓰려고 그렇게 하는 거요?"
  그로부터 한달 뒤, 다시 열린 이사회는 십오분만에 워싱턴 샐링거 방매결정을 
내버렸다.
  "그 여자를 어떻게 생각하든 내 알 바 아니야."
  헤튼은 의안투표 전 펠릭스에게 자기 의사를 똑부러지게 밝혔다.
  "돈 깨끗한데 뭐가 싫다는 거요? 난 그 여자를 만나 똑똑하고 당찬 그 얼굴을 
구경하고 싶을 정도요. 어쨌든 천만이면 만족스런 가격이오. 그나저나 주방장이 
왜 기가 막힌 쇼를 부렸는지 아는 사람 없어요?"
  아무도 몰랐지만 펠릭스는 리옹이 혼자 식사를 한 여자와 함께 자정 넘게 
이야기를 나우었다는 급사장의 전언으로 대강 짐작을 하고 있었다. 펠릭스는 
굳은 얼굴을 워싱턴 샐링거 방매에 찬성표를 던지는 이사들과 함께 투표를 
했다. 겉은 얼음처럼 차가웠의나 속은 분노와 좌절로 용광로처럼 끓어넘치고 
있었다. 그는 로라에게 모욕적인 패배감을 느끼고 있었다. 한달 후 벤 가드너의 
정체를 알고난 뒤 그의 모멸감은 극에 달했다. 아무도 그를 위로해주는 이가 
없었다. 그에게 심한 피로가모가 좌절감뿐이었다.
  눈길도 마주치치 않고 얘기조차 걸지 않는 펠릭스를 내내 티켜보던 벤은 
이사가 새 예산안을 놓고 설명에 들어갈 무렵부터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 
헤튼이 만나보고 싶다는 똑똑하고 당찬 여자는 바로 그의 여동생이었다. 자신을 
배신했다며 목메어 흐느끼던 여린 동생이었다. 그런 로라가 유능한 사업가로 
우뚝 서다니…벤은 그녀가 어떤 모습으로 변해 있는지 상상할 수 없었다.
  그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로라는 깜찍할 정도로 도둑질을 잘해내고, 큰 눈을 
반작이며 자신을 졸졸 따라다니던 어린 여동생일뿐이었다. 그땐 정말 좋았지.
  벤은 예산안이 적힌 서류를 넘겨가며 계속 로라를 생각했다. 그때로 다시 
되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산산이 부서져버린 관계를 어떻게 다시 꿰맞춰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로라에게 다가갈 수 있다고 하더라도, 가족에게 어떻게 
로라가 여동생이라는 것을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호텔 네개를 빼앗기고 이를 가는 펠릭스, 유산을 다시 되찾으려 집념에 
불타고 있을지도 모를 로라. 두 사람이 만날 장면을 생각하는 일만으로도 
머리가 빠개지듯 아팠다. 그렇게 되면 그의 위치가 어떻게 변할까? 로라의 
거짓말에도 똑같은 반응이 날아올 건 뻔한 일이었다. 로라를 여동생으로 
소개한다? 그것은 폭판을 지고 불속에 뛰어드는 것과 같았다.
  알리슨에게 얘기해? 벤은 그날 저녁 비콘 힐 현관문을 열며 다시 고심했다. 
여러 번 생각했었지만, 그럴 때마다 너무 복잡하고 어지러워서 포기하고 말았다. 
원하는 것을 다 취한 로라는 행복할 것 같았다.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이대로 멀리 떨어져 지금처럼 살아가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생가해도 뭔가 목에 걸린 듯 찜찜한 기분이었다.
  "가드너 부인께선 정원에 계십니다."
  그는 뒷정원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 조용히 알리슨을 지켜보았다. 장미꽃밭 
사이의 낮은 의자에 앉아 그녀는 저드에게 젖을 먹이고 있었다. 붉은 스커트를 
장미꽃잎처럼 펼쳐 놓고 않은 그녀의 젖가슴은 흰 블라우스만큼 하얗고, 저드의 
금빛머리는 타오르는 불빛처럼 그녀의 젖무덤에서 빛나고 있었다. 돌담에 
떨어진 낙조는 진한 금색으로 사랑하는 모자를 어루만지고 있었으며, 긴꼬리로 
정원에 부드러움을 더하는 홍관조가 머리 위 나무가지에서 노래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풍경에 벤은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고개를 돌린 알리슨은 벤을 
보고 환하게 웃었다.
  "당신 욕심쟁이 아들 둔 것 알아요?"
  벤은 아름다운 그림 속으로 끼어들었다. 알리슨 옆 잔디 위에 주저 앉은 벤은 
작은 입을 오물거리는 아들을 지켜보았다.
  "이 녀석 몇 달 있으면 걸어다닐 수 있을 것 같은데."
  알리슨은 어이없어 하면서도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육개월만에 걷는 애도 있어요?"
  웃는 아내를 보면서 벤은 편안함과 만족함을 한껏 느꼈다.
  "오늘 뭐하고 지냈어?"
  "몰리하고 화랑 자리 보러 다녔어요."
  작은 실망이 그의 뿌듯한 만족감을 흐트러뜨렸다.
  "당신 진짜 할건가보지?"
  "진짜 해보고 싶어요. 도전적이면서도 마음에 드는 일이에요. 많이는 모르지만 
그래도 이십세기는 알아요. 몰리는 십구세기 쪽을 알구요. 한 팀이 돼서 뛰면 
멋질 거예요."
  그녀는 벤의 표정을 조심스럽게 살피며 말을 이어갔다.
  "당신하고 저드가 불편하지 않도록 할게요. 내가 밖에 나가서 일하는 거 
싫어서 그래요?"
  "싫긴. 당신 말마따나 돈 있는 사람인데 뭘 못해."
  "벤, 그러지 말아요."
  "뭘 그러지 마?"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라구요. 그런 말투로 싫어요. 오랫동안 돈 걱정 하지 
않고 살아온 건 사실이잖아요?"
  "언젠 돈 걱정한 적 있니?"
  "맞아요. 돈 걱정 같은 건 해보지 않았어요. 당신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면 
되잖아요. 당신 봉급으로 충분하게 살고 있는데 뭐가 걱정이에요? 따로 뭘 
안하면…"
  "주변에 과한 게 너무 많다고 생각지 않아? 휴가비, 집 보수비, 내 생일날 
당신이 사준 차도…"
  "알았어요. 맞는 말이에요."
  그녀는 화난 목소리로 벤의 말 허리를 잘랐다.
  "그게 그렇게 싫다면 화랑 문젠 없었던 걸로 해요. 그럼 되잖아요. 하지만 
이미 들어간 돈 얘긴 꺼내지 말아요. 나름대로 멋지게 쓴 돈이니까요."
  "미안해, 알리슨."
  벤은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래, 모든 게 좋았어. 화랑 하고 싶으면 해. 도울 수 있을 만큼 도와줄게. 
누가 알아? 그림도 사줄지."
  "최고로 좋은 건 남겨둘게요. 할인도 해드릴텐데."
  "할인 좋지. 많이 깎아줘야 돼. 이렇게 미리부터 깎아대면서 장사를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몰라."
  "당신 멋진 사람이에요. 여기 이렇게 당신이 있어서 너무 좋아요. 출장갈 
때마다 얼마나 속상한지 모르죠? 당신 없으면 집이 텅텅 빈 것 같아요. 다른 
사람이 가면 안되는 건가?
  "당신 아버님이 원하는 일이야. 개발기획부 전무자리를 줬으니 실컷 
부려먹어야지."
  날 박살내지 못해 안달이라구. 내가 실수할 때를 기다리고 있는 거야. 벤은 
뒷말을 속으로 삼켜버렸다. 미국인으로서 유럽 호텔계를 손바닥 보듯 안다는 건 
힘든 일이었다. 실수를 저지를 확률도 높았다. 벤은 펠릭스의 심증을 훤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빠른 시일 안에 뭔가 결정을 내리면 당신 
곁은 떠날 필요도 없어질 테니까."
  "그렇게 안되면 앞으로 나도 따라갈래. 저드하고 유모도 같이."
  벤은 알리슨의 응석에 웃음을 터뜨렸다.
  고개 숙여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춘 벤은 한 손으로는 안내를 안고 또 한 
손으로는 아기를 싸안은 채, 정원에 어둠이 내려 유모가 아기를 데리러 나올 
때까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핑크와 회색으로 물든 연한 하늘 아래 붉은 
장미를 둘러보며 집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벤은알리슨의 말을 다시 되새겼다.
  그래, 알리슨이 맞아. 완벽한 평화야. 집, 아내, 아들. 그러나 부족한 게 하나 
있었다. 회사만은 아직 그의 손에 완벽하게 쥐어진 상태가 아니었다.
  클레어는 물침대 위에서 반가부좌를 한 채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창문 
밖으로 새로 수리된 소호 창고와 맨해튼의 마천루가 한눈에 들어왔다.
  이른 새벽이었다. 잠이 덜 깬 그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낯선 방이었다. 
자신이 어느 곳에 있는지 도통 생각을 해낼 수 없었다. 옆에서 알몸으로 자고 
있는 여자 이름조차 생각 나지 않았다. 그는 시카고에 있는 마리나를 떠올렸다.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결혼신청을 하고 싶을 만큼 그는 그녀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다.
  아무 움직임 없이 그는 물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그가 있는 곳은 길가에서 
연주를 하고 있던 음악가에게 빌린 다락방이었다. 임시로 몇 달 기처할 수 있는 
곳이 필요했던 것이다.
  클레이 페어차일드. OWL 개발사 기획전무이사. 사업과 쾌락을 위해 세계를 
휘젓고 다니는 인물. 여자들의 수상. 손길 빠른 포커꾼.
  그는 씩 웃었다. 십년 전 사람들 호주머니를 뒤지고 다니던 아이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로라에게 매달려야 되는 신세였지만 그건 상관없었다. 그는 로라 없는 
자신을 좀처럼 상상할 수 없었다. 지니 스타렛이 누누이 장조하지 않아도 
스스로 너무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로라가 아니었다면 벤이 알리슨 
샐링거를 낚아채기 전까지 그를 따라다니며 허드렛일과 딱딱한 빵으로 굶주린 
배를 채웠을 인생이었다.
  그러나 로라 덕분에 그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었다. 재능이 아주 없지는 
않아서 로라의 칭찬을 받아가며 승승장구했던 그는 신형 코베트를 몰고 다녔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한꺼번에 무너뜨릴 수 있을 만큼 성량 좋은 
스테레오는 물론 로돌표 정장 두벌을 망설임없이 구입할 수도 있었다.
  물침대가 흔들리자 여자는 잠시 낑낑거리는 소리가 내다가 말았다. 클레어가 
샤워를 끝내고 옷을 갈아입은 뒤 뉴욕 비콘 힐 맨 꼭대기의 일터를 향해 나갈 
때까지 그녀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맨 콘크리트 바닥, 지저분한 벽지, 깨진 도자기처럼 구석에 쳐박혀 있는 낡은 
욕조와 변기들, 달랑거리는 전구알, 구석을 당식한 먼지와 거미줄, 반시간도 
지나지 않아 그의 로돌포 정장은 먼지투성이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싱글거렸다. 신비스러운 작업이었다. 찢어진 벽지 뒤에 숨어 있는 비밀. 걷어낸 
카펫밑과 뜯어낸 벽장 속에 있던 이야기들, 옛것과 새것이 교차되는 순간들을 
그는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책상에 앉아 멍청하게 서류를 정리하는 일보다 훨씬 신나는 일이었다. 
클레이는 맨 꼭대기층에 있는 자기 사무실보다 시끄럽게 벅적거리는 신나는 
보수공사판을 더 좋아했다.
  그는 하루종일 사무실 밑에서 들려오는 뚝딱 소리를 즐기곤 했다. 연말까지 
필라델피아, 워싱턴 호텔 내부 재공사를 끝내고 뉴욕 비콘 힐을 개장하겠다는 
게 로라의 목표였다. 덕분에 클레이와 로라는 날이 갈수록 점차 가까이 
올라오는 작업인부들의 공사 소음을 음악처럼 즐겨야 했다. 그러나 소리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던 클레이는 자주 로라를 충돌질해 함께 작업현장을 순시하곤 
했다.
  로라가 진행시켜나가는 모든 계획은 오웬과 함께 치펜데일 책상에서 꾸민 
원안보다 더 새롭고 고급스러웠다. 로라의 욕심 때문이었다. 그려는 주말마다 더 
새롭고 고급스러웠다. 로라의 욕심 때문이었다. 그녀는 주말마다 다른 호텔 관련 
잡지책을 샅샅이 읽어 가며 메모를 해나갔다. 그녀는 모든 호텔의 장점들을 
자시느이 호텔 곳곳에 주입시켰다. 결국 시간이 흐를수록 호텔 보수계획은 점점 
더 복잡해졌고, 그곳에 들어가는 경비 또한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났다.
  그러나 돈 때문에 계획을 포기할 수 ㄴ없었다. 시카고 비콘 힐의 폭발적인 
성공과 나머지 세 호텔에 관한 꿈으로 그녀는 압박해오는 걱정을 잠재우고자 
했다. 돈이 필요하면 그만큼 구해다 쓰면 문제였다. 시카고의 성공을 무기로 
나머지 세 곳도 기어코 정상에 올려보겠다는 결심이었다.
  병 마개가 있으면 병 속의 술이 절대로 날아가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녀는 
굳게 믿고 있었다.
  "보고 드리러 왔습니다!"
  아홉시 정각, 클레이는 로라의 사무실을 두드렸다.
  "예쁘긴 한데 너무 생각에 빠진 모습이네."
  웃음으로 대답하는 그녀에게 클레이는 키스를 했다.
  "그래, 간밤에 영화는 잘 봤니?"
  "굉장히 재미있었어. 누나도 언제 한번 봐."
  "그래 언젠가 시간이 나겠지."
  "시간 날 때를 기다리지 말고 만들어야지. 그렇게 머리만 굴리고 있으면 진짜 
큰일 난다구."
  "머린 안 굴려, 그냥 일하는 거지."
  "너무 많이 하니까 탈이지. 웨스는 요즘 어딨어?"
  "상담 때문에 출장갔어. 돌아오면 전화주겠지."
  "여태 그래?"
  "뭐가?"
  "만나서 데이트하는 사람."
  "그 얘긴 하지 말자."
  "그게 므슨 데이트야? 디너파티에다 자선모금 파티, 그런 거 말고 진짜 데이트 
말야. 저녁 먹고 나이트 클럽 간 다음 침대로 가는 데이트 말이야. 그런 식으로 
데이트 했어?"
  "나이트 클럽은 가끔씩 갔다."
  "그게 다야?"
  "그래"
  "그것봐. 내 말이 맞지. 그건 데이트라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야. 왜 그래? 
웨스하고 결혼할 거 아니야?"
  "아니야. 하지만 괜찮은 사람이야. 오랫동안 같이 지냈지만 진짜 괜찮아. 
변함없구. 원하지 않는다고 말은 했지만 가끔씩 잠을 자긴 해. 넌 마리나와 
어때?"
  "아직 결정하지 못했어. 그 얘긴 그만두고 누나 얘기나 하자구. 외롭거나 아주 
근사한 보디가드가 필요하면 언제든지 나한테 전화해. 알았지? 누나가 이렇게 
외롭게 지내는 걸 생각만 해도 영 살 맛이 안 나니까."
  "항상 외롭게 지내는 건 아니니까 걱정 마. 아무튼 고맙다. 넌 네 인생을 
살아야지. 일주일에 한 번씩 누나랑 데이트 해주는 착한 동생인데 더 이상 뭘 
바라겠니?"
  그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냉장고에 뭐 먹을 것 없어?"
  "소프트 케이크하고 과일 있을 거야. 그 다음에 이 구매보고서 좀 봐줄래? 
시카고에서 왔는데 헨리가 업자를 바꿨나봐. 네가 직접 가서 얘기해보는 게 
좋겠다."
  "아, 참 클레이. 또 한 가지 있다. 어제 경비원 하나 그만두게 했니"
  "이런, 젠장. 말한다고 해놓고 까먹었네. 일하는 자세가 전혀 돼먹지 
않았더라구. 그래서 내보냈어. 시카고 가서 괜찮은 사람 있으면 데려올까 하는데 
괜찮겠어?"
  "내 허럭 없이 해고시키지 말라고 했을텐데."
  "그래, 알아. 하지만 너무 머저리 같았어. 미안해 누나. 다신 그런 일 없을 
거야. 약속할게. 내가 누구 밑에서 일하는데. 동생을 극진히 사랑하고, 강한 
인내심으로 참아내는 멋진 숙녀님 아닙니까?"
  클레이의 능청 어린 사과에 결국 로라는 어이없이 웃고 말았다.
  "다신 그러지 마, 클레이."
  "알았어. 이젠 아침 먹어도 되지?"
  "누가 보면 내가 하나밖에 없는 동생 아침 굶기는 줄 알겠다. 허락 받고 
말고가 어딨니? 자, 이 서류 갖고 어서 없어져."
  그녀에게 경례를 붙인 그는 냉장고에서 꺼낼 것을 꺼낸 뒤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로라는 턱을 손바닥으로 고인 채 창 밖 마천루를 바라보았다. 
클레이에게 화를 낸 게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동생이 철없는 짓을 할 때마다 
그녀는 실망감 때문에 화가 났다. 똑똑하긴 하지만 너무 게을렀다. 좀 참을걸. 
한꺼번에 호텔 세개를 수리하느라 꽤나 복잡할 텐데. 그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는 이유도 사실은 그 때문이었다. 더 이상 사생활에 개입하지 않는 그녀에게 
클레이는 가끔 사귀는 여자애들과 심지어 포커케임까지 털어놓곤 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는 사업에 관한 경제문제-자신이 몸담아 일하고 있는 
회사인데도-나 어려움 등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는 걱정이라는 것 
자체를 싫어했다.
  그는 로라의 어린 꼬마 동생역을 자청하곤 했다. 아니, 어쩌면 아들 
역할인지도 모르지. 로라는 힘없이 웃었다.
  클레이가 그렇게 된 배경에는 로라의 잘못도 없지 않았다. 그녀는 나이 차이 
많은 큰누나나 엄마처럼 클레이를 대해왔다. 그가 설령 재정관계를 물어봤다 
하더라도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그녀의 재정상담역은 단 한 
사람, 힘 있고 믿을 만한 웨스 커리어뿐이었다. 지니조차 그 축에 끼지 못했다. 
서로 모든 것을 숨김없이 이야기하는 사이였으나 지니에게 돈 문제만은 꺼내지 
않았다. 그러나 지니는 로라가 자금문제를 상의해올 경우 기꺼이 발벗고 나설 
마음이었다. 직접 OWL 개발에 투자할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우정에 돈이 
끼어들었다가 파국에 이른 것을 많이 보았기 때문에 좋은 때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생각해봤는데요."
  로라는 리무진에 오른 지니에게 눈을 반짝거리며 말했다.
  "뭘 생각했는데?"
  팔월 중 제일 뜨거운 날이었다. 호텔을 떠나 그리니치 빌리지로 가고 있는 
리무진의 회색 벨벳 시트는 에어컨 덕분에 기분좋게 차가웠다.
  "몇 가지 되는데, 제일 값나가는 건 맨 나중에 얘기하기로 하고…"
  그녀는 비밀을 털어놓으려는 소녀처럼 맑고 수줍게 웃었다. 지니는 그녀가 
맑게 웃는 모습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뛰웠다. 로라가 그런 식으로 웃을 
때마다 미소 짓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없다. 자신의 기쁨과 흥분을 타인에게 
전염시키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호텔 특실 디자인과, 청소부들이 수레를 밀고 다닐 필요없이 침대보와 
청소도구 등을 한 곳에 출납할 수 있도록 복도 끝에 골동품식으로 수납장을 
꾸미자는 얘기를 시낭게 늘어놓은 로라를 지니는 물끄러미 보았다. 호텔이 
아니라 남자 때문에 저렇게 생기가 돌아야 하는데 하긴 어디 그냥 호텔인가? 이 
아이의 꿈이자 삶 전체라 할 수 있겠지.
  "자, 이제 맨 마지막이 하나 남았는데 들을 준비됐죠?"
  "지금껏 한 얘기, 다 최고 중의 최고 같은데 또 최고가 있어?"
  뉴욕 비콘 힐을 가장 호사스럽게 만들 생각이에요. 지금까지 꾸민 것하곤 
비교도 안될 정도로요. 한 번 묵었던 손님 추천 없인 아무도 숙박할 수 없는 
특급 호텔 말이에요."
  "아주 대담한 생각인데. 위험하기도 하지만 아주 멋져!"
  로라의 상기된 얼굴을 바라보며 지니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호텔 정리 다 끝나면 무슨 낙으로 살까, 우리 아가씨."
  "어머, 무슨 걱정이에요, 호텔 또 사면 되잖아요. 그것보다 더 좋은 생각이 
있어요."
  그녀는 잠시 머뭇거렸다.
  "호텔 네개가 궤도에 오르면 진짜 하고 싶은 일이 있어요. 샐링거 주식을 사고 
싶어요."
  지니는 그녀늘 뚫어지게 응시했다. 시카고 비콘 힐 개장 직후 한동안 
시카고에 머물러 로라의 엄마 역할을 자청한 적이 있었다. 로라의 입을 통해 
샐링거 일가에 얽힌 이야기를 들은 것은 바로 그때였다.
  상세한 이야기도 아니었고 감정도 개입되지 않은 이야기였지만, 지니는 
로라의 가슴에 엉킨 한을 쉽게 읽어낼 수 있었다. 그래도 그렇지. 가문이 
독점으로 운영하는 회사 주식을 매입하려 하다니…" 아무리 그녀를 이해하려 
해도 쉽게 인정할 수 없는, 터무니없는 바람이었다.
  "뭐하러? 이사회 자리 한구석에 앉아 그 사람들 눈초리를 다 받아들이겠다는 
거야?"
  "오웬이 원했던 방식으로 회사가 운영되도록 정정당당하게 이사회 투표권을 
통해 싸우고 싶어요."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닌 것 같은데."
  "할 수 있다고는 하지 않았어요. 하고 싶다는 얘기죠."
  "여태껏 원하는 걸 다 얻어냈으면서 뭘. 어찌 어찌해서 그 회사 주식을 팔 
사람을 만났다 하더라도 돈이 꽤 필요할텐데."
  "닥친 문제는 아니니까 두고두고 생각하겠어요. 아까도 말했지만 아직은 그냥 
생각뿐이에요."
  "그래. 내가 보기에도 그런 것 같다. 어쟀든 결정하면 얘기해줘. 알았지?"
  "그럴게요."
  그녀는 차창으로 몸을 기울여 밖을 내다보았다. 재건축 금지가 내려진 역사물 
보호지구였다.
  "다 온 것 같은데. 지니도 좋아했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마음에 드는 곳은 
처음이었으니까요."
  "본인이 그렇게 좋아하는데 내 생각은 들어서 뭐하나?"
  "눈이 밝으시잖아요. 집세가 너무 싸서 좀 찜찜해요. 내 생각엔 무슨 하자가 
있을 것 같아요. 내가 모르는…"
  "웨스가 안 봤나보지?"
  "봤어요. 계약하라 그러던대요. 하지만 지니가 먼저 본 다음 결정하려구요."
  그로브가에 차를 세운 지니와 로라는 회색 덧문과 작은 자갈이 깔린 샛길로 
들어섰다. 폭 좁고 길게 올라간 삼층 벽돌집과 지붕 장식은 새들이 노래하는 
나무둥지를 연상시켰다.
  "세상에, 누가 여길…"
  "웨스가 찾아냈어요."
  로라는 열쇠로 벽돌집 문을 열었다.
  "집 주인은 이년 예정으로 유럽엘 갔대요. 오늘 결정하지 않으면 열쇠를 
돌려줘애 돼."
  1830년에 지어진 집이었다. 현대식으로 개조된 주방과 벽난로 네개, 삼층에 
있는 대형 침실, 깔끔하게 정리된 꽃밭과 대형 화분이있는 옥상 가든을 
차례차례 살피는 동안 지니의 높은 하이힐은 소나무 송판 바닥 위에서 내내 
부드러운 소리를 냈다.
  "백만 달러짜리다."
  이층에 있는 거실로 다시 내려가면 지니는 탄성을 질렀다.
  "백만 달러 불러도 사겠어. 임대료가 얼마라구?"
  "한달에 이천이오."
  "말도 안돼. 세 배는 더 불러야 되겠는걸."
  "내 말이 그말이에요. 너무 싸니까 이상한 기분이 들어요."
  지는 창턱에 앉아 집안을 살폈다. 넓은 집은 아니었다. 거실, 주방, 서재, 부엌, 
침실 등이 전부였다. 그러나 부엌과 욕실은 현대식으로 개조되었고, 지하실과 
벽난로, 옥상 정원도 웬만큼 손을 본 듯했다. 게다가 그로브가가 주는 정적과 
푸근함도 무시 못할 장점이었다.
  커리어가 구해준 집인데 어련하겠는가. 커리어를 생각한 순간 지니는 
임대료가 저렴한 이유를 대번에 눈치챘다. 집주인이 요구한 액수와 로라가 
치러야 할 월세 사이의 차액은 결국 웨스 커리어의 개인 수표책에서 나갈 
것이다.
  지니는 로라가 그로브가를 삶의 보금자리로 정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케이프 코드에 있던 별장 근처, 보스턴 비콘 힐 주변의 좁고좁고 꼬불꼬불한 
뒷골목, 시카고의 드폴 지역이 주는 안정감 등 로라의 과거가 한 곳에 섞인 
듯한 인상이었다. 냉혹하고 번잡한 비즈니스 세계를 전전하며 작고 소박한 
공간을 꿈꿨을 로라의 내면 세계를 들여다보며 지니는 찡해 오는 코끝을 애써 
손가락으로 문질러야 했다.
  "어찌 보년 이상하지 않을 수도 있지. 믿을만한 사람한테 싸게 월세를 줄 수 
있는 문제 아냐? 자기 집처럼 깨끗하게 돌보면서 쓸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럴거야."
  로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럴 수 있지만 난 자꾸 웨스가…"
  "아냐. 그런 것 같지 않아."
  지니는 재빨리 로라의 말허리를 잘라버렸다.
  "아주 좋으니까 두말 말고 계약해."
  거실 창문으로 다가간 로라는 나무 사이를 날아다니며 노래하는 눈부신 
흥관조와, 바퀴 달린 나무차를 끌고 가는 어린 꼬마와, 그 뒤로 털복숭이 개를 
데리고 책을 읽으며 걸어가는 할머니 등을 차례로 내려다보았다.
  그래, 여기 살기로 하자. 내 집이야. 평화로운 집.
  "고마워요, 지니."
  창문에서 몸을 돌린 로라의 표정을 밝았다.
  "정말 고마워요. 지니.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죠? 제일 먼저 저녁 파티에 
초대할게요. 가구 들여놓자마자 즉시요."
  기분 좋은데. 가구 문제도 도와줄까? 새 살림 준비는 내 돈으로 할테니 딴 
소리 않는 거다. 내 딸이나 마찬가지니까 말이야. 여기 말이야. 이쪽엔 긴 
소파가 있어야겠어. 큰 원형탁자도 있으면…이런, 내가."
  지니는 갑자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웨스처럼 굴었지? 로라 일을 다 떠맡아서 하는 척 말야. 미안. 이젠 
아무 말 안할게."
  "웨스 같진 않아요."
  로라는 활작 웃었다.
  "그 사람은 지니처럼 그렇게 의식하지도 못해요. 난 지니가 정말 좋아요. 이번 
주 해줄 수 있는 거죠?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들여왔으면 좋겠어요."
  "내일 당장 하지 뭐. 열시 괜찮지? 내일 사무실로 데리러 갈게."
  다음날 아침 지니와 가구를 보러 나가던 로라는 뜻하지 않은 전화를 받았다.
  "미안해요."
  로라는 지니에에 양해를 구한 뒤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안녕, 로라. 잘 있었어요. 브리트예요.
  그의 목소리는 밝고 경쾌했다.
  "파티 초대를 하고 싶어서 전화를 했어요."

    23장
  세번재 절도사건은 구월 일일 팜 스프링스에서 일어났다. 클레이는 로라에게 
노동절 휴일을 맞아 친구들과 로스엔젤레스에서 주말을 보내겠다고 말했다. 
시내에서 팜 스프링스로 가는 길은 교통 장애없이 아주 수월했다. 큰 나무들과 
관목을 배경으로 설 있는 저택 거시로가 주인 침실이 그의 목표였다.
  밤 아홉시 삼십분, 아멜리아 라프톤 지갑에서 그가 훔처낸 수첩에 의할 것 
같으면 하루도 빠짐없이 라프톤 부부가 외출을 하는 시각이었다. 게다가 그들 
부부는 이주 동안 집을 비울 예정이었다. 문 옆에 그림들을 쌓아가며 그는 
여유있게 휘파람까지 불었다. 너무 흥에 겨워 그는 장물아비들한테 넘기지 않고 
직접 자신이 다질 만한 물건까지 골라냈다. 뒤러 그림 두장이었다.
  그로부터 사주 뒤, 시드와 아멜리아 라프톤은 브리트의 맨해튼맨션 파티장에 
모인 사람들에게 침을 튀겨가면 도난사건을 들려주고 있었다.
  "피카소도 한장 들어 있었다니까요."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아멜리아는 에밀리젠슨에게 억울해 
죽겠다는 듯이 도난품을 열거했다.
  "미로 그림도 있었구. 브라크 것 세장에 뒤러 것도 두개씩이나! 세상에, 
여름내 가만 있다가 우리가 집을 비우자마자…"
  "밖에서 들어온 흔적이 전혀 없는 걸 보면 분명 열쇠를 이용한게 틀림없어요. 
경보장치 번호도 알…"
  남편 시드가 말을 맺기도 전에 아멜리아는 잔뜩 흥븐해서 말했다.
  우리 부부가 이주 내내 집에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요."
  그녀는 그 와중에도 쟁반을 들고 지나가는 웨이터 손에서 새우 하나늘 익숙한 
손길로 집어들었다.
  "집을 내내 지키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시드는 형사 같은 눈초리로 말했다.
  "단서가 없으니 알 길이 있나. 한 가지 정확한 건 우리 집 구조를 아록 있는 
자가 분명하다는 거야. 어것저것 뒤진 흔적이 전혀 없었으니까."
  "그래도 한 가지 희망이 있잖아요. 보험회사가 수사를 하니까 마음이 좀 
놓여요. 숙련된 조사관을 보냈더라구요. 그 사람하고 두번씩이나 얘길 해봤는데, 
베테랑 수사관 저리 가라더라구요. 조만간에 무슨 결말을 낼 것 같은 사람이야."
  문간에서 술렁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브리트 패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장식용 허리띠와 빨간 타이에 흰색 턱시도, 그것도 모자라 흰색 망토를 걸친 
채 현관 앞에서 손님들을 바라보는 그의 표정은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국민들 
앞에 명령을 내리기 위해 나타난 황제 같은 모습이었다.
  "어디 한번 왕대접을 해줘?"
  주변사람에게 들릴 만큼 큰소리도 떠들어댄 아멜리아는 궁녀가 왕에게 
인사하는 것처럼 정중하게 허리를 꾸부렸다.
  순간 파티장에는 시끌벅적한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아멜리아에게 손으로 
키스를 날려보낸 브리트는 연주여행에 관한 축하와 멋진 모습을 칭찬하는 
손님들에게 둘러싸여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라프톤의 도난사건은 
순식간에 잊혀지고 브리트에 관한 수근거림으로 파티장은 들썩거렸다. 이야기의 
초점은 이상해 보이는 브리트의 외무였다. 홀쭉해진 얼굴과 누렇게 뜬 빛깔, 
불안하게 흔들리며 유난히 빛을 내는 눈빛 등, 분명 뭔가 달라졌다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그런 이야기를 본인에게는 하지 않았다. 그의 
옆에서 모두 그를 이르며 진짜 왕이 됐다는 느낌을 갖게 만들었다.
  바에 기대 선 폴은 브리트 곁에 몰려 있는 손님들을 멍하니 구경하고 있었다. 
사주 전에 모든 일정을 끝낸 연주여행은 워싱턴에서 거둔 크나큰 성공에 힘입어 
기아모금액 최고기록을 세우며 무난히 목표액을 달성할 수 있었다. 연주 결과에 
대한 사람들의 평판은 기대 이상르로 좋은 편이었다. 그러나 패럴리를 돌아온 
스타로 인정해 새 TV 시리즈물에 출연해달라고 하는 전화는 아직 한 건도 
걸려오지 않았다. 파티에 관한 모든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주관한 사람은 
루이였다.
  "취소시키려고 했는데 브리트가 말을 들어먹어야지."
  그는 폴에게 브리트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았다.
  "파티를 열어서라도 스타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는지 막무가내로 나오는 
통에…"
  파티는 성공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파티에 살다 파티에 죽는 뉴욕 시민답게 
사람들은 나름대로시간을 재미있게 보내고있었다.
  나는 왜 여기 왔을까? 브리트와 루이가 초청했기 때문에? 에밀리가 오자고 
해서? 아니면 혹 나중에 필요할지 모를 장면을 찍기 위해서? 그것도 물론 
이유가 되겠지만, 진짜 이유는?
  바로 그 순간 폴은 그녀늘 발견했다.
  어깨가 완전히 드러난 흰 드레스와 밝은 불빛에 짙은 고동색으로 빛나는 밤색 
머리카락, 폴은 숨을 쉴 수 없을 지경이었다. 짧은 머리-폴은 그녀의 긴 
머리채가 짧게 변해 있으리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때문인지 깊은 눈과 
부드러운 입술은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그녀는 약간 성숙해 보이는 대신 훨씬 
세련되어 보였다.
  하긴 당연하지. 육녀이 흘렀는데….
  로라 옆에서는 누군가 연신 사람들에게 그녀를 소개하고 있었다. 로라는 소개 
받는 사람들에게 웃음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옛 기억의 급류에 휘말려 폴은 
자신도 모르게 사람들을 헤치며 그녀 쪽으로 다가갔다. 마시고 웃고 떠드는 
사람들의 물결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폴이 간신히 현관 근처에 다다랐을 때 로라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뒤였다. 
한참 두리번거리던 폴은 패럴리의 팔에 안긴 로라를 찾아냈다.
  "로라, 와줘서 정말 고마워요. 오, 세상에 이렇게 신날 수가.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일이 밀려서 나올 수가 있어야죠. 근데 웬일이에요?"
  "뭐가?"
  "피곤해 보여요. 몸이 많이 축난 것 같은데. 날보고 왜 이렇게 기뻐하는지도 
모르겠구요."
  "그거야 내가 못되게 글었는데도 날 좋아해준 사람이니까 그렇지."
  그는 잠시 두 눈을 감았다.
  "똑똑한 사람 앞에서 숨길 순 없지. 맞아요. 몸무게도 빠지고 피곤해. 하지만 
문제 없어요. 모든 게 정상이야. 나 황소처럼 씩씩하게 일했어. 믿지 못할거요, 
로라. 내가 영화 만든 거 알아요? 아니 내가 만든 게 아니라, 영화 속으이 
주인공이 됐지."
  "멋지네요, 브리트."
  "그 영화 만든 천재 소개해줄까, 여기 어디 있을텐데…"
  독특하게 빛나는 눈빛을로 파티장을 돌아보던 그는 폴을 발견하고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봐, 친구! 여기 내 사랑스런 로라를 소개하지. 언제 얘기했던 그 
숙녀님이셔."
  로라의 눈동자가 크게 벌어졌다. 비 내리는 창문 밖 풍경처럼 손님들의 
들끊는 방이 부옇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는 페럴리의 팔에 잠시 의지해 
정신을 가다듬어야 했다. 페럴리는 아무런 눈치도 채지 못하고 여전히 걸쭉하게 
떠들어댔다.
  "두 사람 다 날 깔보지 않았지. 나한테 좋은 친구들이야. 다들 날 바보로 
생각하는데 두 사람은 안 그랬으니까. 그래서 좋아. 그러니까 둘 다 서로 
친구하라구. 폴, 이 숙녀님에게 마실 것 좀 갖다드리지."
  폴은 이미 그녀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페어차일드양에게 기쁜 마음으로 갖다드리겠네."
  로라는 그의 손을 살짝 잡았다.
  페럴리는 둘을 남겨둔 채 어느새 등뒤에 나타나 아양을 떠는 사내와 다른 
곳으로 사라졌다.
  폴과 로라는 서로 손을 놓지 못한 채 석고처럼 굳어 있었다. 어쩌면 이렇게 
나이가 들어 보이지? 변해도 너무 많이 변했어. 로라는 계속 폴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짙게 변한 피부색 때문에 얼굴선이 더욱 날카롭고 각져 보였다. 
그러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모습보다 훨씬 잘생긴 얼굴이었다. 더 자랐을 리도 
없는데 키도 옛날보다 훤칠해 보였고, 짙게 변한 피부빛도 올 굵은 머리카락에 
더욱 잘 어울려 보였다.
  "뭣 좀 마시겠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조용한 자릴 찾읍시다."
  그녀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그의 손에서 손을 거두어들였다.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네요/"
  "난 안 그래."
  그는 그녀의 어깨에 팔을 얹었다.
  "부탁이야, 로라."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이 목소리에 그녀는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벼락 같은 
충격이었다. 아냐, 이게 아냐. 난 이 사람을 잊고 살았어.
  그녀는 갑자기 뜻모를 미소를 지었다. 그녀 자신도 알 수 없는 미소였다.
  "왜 웃소?"
  왜 웃소? 폴은 언제나 그렇게 물었다. 그녀가 웃는 이유를 알고 같이 
웃어야만 직성이 풀리던 폴이었다. 순식간에 과거의 거센 파도가 그녀의 
가슴으로 밀려들었다.
  "위층으로 가지. 한 시간 더 있어야 저녁할테니까. 그곳에는 아무도 없을 
거요."
  그는 에밀리를 찾았다. 그녀는 행복한 모습으로 사람들 속에 파묻혀 있었다. 
결코 남편을 찾지 않을 눈치였다. 로라의 팔목을 잡고 폴은 인파를 헤쳐나갔다.
  로라는 파티 자체를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폴에게 잡혀 있는 손목은 불에 
덴 듯 뜨겁기만 했다. 삼층 전체를 차지한 대형 식당은 그들이 있을 만한 
공간이 아니었다. 사백여 명에게 식사를 제공하기 위해 종업원들이 
시끌벅적하게 식탁을 준비하고 있었다.
  "한 층 더 올라갑시다."
  두 사람은 무도회장을 향해 카펫이 깔린 넓은 층계를 올라갔다. 그곳은 
오케스트라를 기다리고 있는 빈 의자와 악보대가 주변 나무들과 함께 어두운 
조명을 받고 있을 뿐 텅 비어 있었다. 폴이 이끄는 대로 벽을 따라 놓여 있는 
긴 소파 구석에 앉은 로라는 어린아이처럼 두 발을 가슴에 모은 채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로라의 반대쪽에 자리한 폴은 입을 다물고 있는 그녀를 보며 역시 침묵했다.
  "미안해."
  그는 마침내 긴 침묵을 깨며 로라를 바라보았다.
  "몇 년 동안 내내 당신에게 할 말을 생각했었는데 막상 이렇게 만나고 보니 
할 말이 없군. 미안…하다는 말밖엔. 당신한테 너무나 큰 죄를 지었어. 그러는 
게 아니었는데. 나도 그렇지만…우리 모두…미안하다는 말을 얼마나 하고 
싶었는지 몰라."
  "고마워요."
  또다시 둘은 바닷속처럼 깊고 어두운 침묵 속에 빠져들었다.
  "축하한다는 소리도 하고 싶었소. 그 호텔들을 다 사들였다니 정말 대단한 
일이오. 시카고 호텔 잘된다는 소리도 들었소. 벤이 알리슨에게…"
  "벤이…"
  "아, 참, 누군지 모르겠지. 벤 가드너라고 알리슨 남편이지. 휴, 너무 오랜 
세월이…벤, 그사람 참 좋은 친구야. 기대했던 것만큼 가까워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난 괜히 좋더라구. 지금은 회사 전무로 있어. 호텔 얘길 그 사람한테 
들었다면서 알리슨이 얘기해주길래…벤 말로는 시카고 호텔이 국내 최상급 
호텔로 성장…"
  "맞는 말이에요."
  차갑게 대꾸했지만 그녀는 떨고 있었다. 벤이 그 일가와 내 얘기를 
나누었다구? 샐링거 일가와? 십호흡을 한 뒤 그녀는 방을 한번 빙 둘러보았다.
  "결혼했다면서요."
  로라는 드디어 가슴에 담고 있던 말을 토해냈다.
  "했소. 모르고 있는 줄 알았는데."
  "지니 스타렛이 얘기해주더군요."
  "모르는 사람인데."
  "레니를 안대요."
  "아주 아름답군. 당신 여전히 사랑스러워. 예전에 비해…"
  더욱 세련되고, 더욱 거리가 느껴지고, 차가워졌다는 소리를 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머리가 짧아졌군."
  어색함을 메우기 위해 말하는 그에게 그녀는 억지로 웃어보였다.
  "오래전에 잘랐어요. 달라 보이고 싶어서."
  "아주 달라 보이는데."
  보스턴을 떠나야 했을 때, 사랑했던 사람들이 모두 다 내게 등을 돌린 채 
욕을 했을 때, 난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폴은 그녀에게 다가가듯 손을 내밀며 몸을 움직였다. 두 팔로 그녀를 
끌어들여 가슴에 안고 싶었다. 성적인 욕망은 아니었다. 그녀의 담담한 목소리 
뒤에 숨겨진 고통을 씻어주기 위해 순수한 마음으로 끌어안고 싶었다.
  그 욕망이 너무도 강렬해 그녀를 실제로 안고 있다는 착각에 사로잡힐 
정도였다. 그러나 그녀는 폴이 내민 손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브리트 말로는 영화를 만들었다면서요? 당신이 그런 것에 관심 갖고 있는지 
예전에…"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둘과 함께 나눈 과거를 결코 입에 담고 싶지 않았다.
  "사진은 그만뒀어요?"
  "언젠가 돌아갈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으로선 영화제작이 최고 같애. 전에 
몰랐던 자유와 활력을 느끼거든. 짧은 공간에서 세계를 창조해낼 수 있다고나 
할까…"
  그녀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폴은 자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그녀를 
보면서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그녀로부터 위로받던 때를 기억했다.
  "삶을 조명하고 창조해내는 일이 얼마나 신나는지 처음엔 숨조차 못 
쉬겠더라구. 동적인 면과 정적인 면, 소리와 침묵 등 반대요소를 사용해 
인간이나 사물의 다른 면을 표현하는 거지. 여태껏 인간들이 옳다고 믿어온 
것을, 그러니까 지금까지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던 것에서 숨어 있는 비리를 
찾아내기도 하고. 또 진실이든 거짓이든 사람들 앞에 나타난 부분을 정확하게 
진단할 수도 있고…"
  로라는 열정적으로 말하고 있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많이 달라진 
모습이었다. 오웬이 지금 이 사람을 보면 얼마나 좋아할까, 이렇게 말하겠지.
  -내 생각이 틀림없었더. 녀석에겐 단지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야.
  그러나 폴이 말을 끝내고 침묵에 잠긴 순간, 로라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현실을 쓰라리게 인정해야만 했다.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든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호텔 얘기 좀 해보지. 어떻게 그것들을 다 사들이게 됐어?"
  "다른 사람들 돈으로요."
  "오웬이 가르쳐준 첫번째 사업철직이구만."
  그는 미소를 지었다.
  "마음엔 들구?"
  "빚진 상태가요?"
  폴은 처음으로 크게 웃었다. 빈 무도회장이 쩌렁쩌렁 울릴 만큼 호탕한 
웃음이었다.
  "호텔을 갖게 된 기분 말이야. 호텔 경영하는 게 마음에 들어?"
  "좋아해요. 나무랄 데 없는 가정 네개를 소유한 기분이에요. 나무랄 데 없다는 
표현을 쓸 수 있을지 그건 두고봐야겠죠. 하지만 자신 있어요, 네 군데 다."
  "네 군데 다 수리를 한 거야?"
  "그럴 수 밖에 없었어요. 외부 건물장식과 고풍스런 로비 말고는 건질 게 
없었거든요. 아, 복도도 있군요. 복도는 폭만 좀 넓히고 색만 다시 
칠했어요.나머진 다 오웬이 제안했던 대로… 그거 알아요? 우리 둘이서 같이 
계획했었다는 것? 그대로 했어요."
  "알고 있지."
  그는 재빨리 대꾸했다.
  "아주 멋진 계획이었어요. 원안보다 좀더 호화롭게 꾸미긴 했지만."
  "어떤 식으로?"
  로라는 그에게 차근차근 설명해 나갔다. 상대가 샐링거 가문이란 사실도, 
자신이 경영하고 있는 호텔들과 예전에 관계됐던 인물이란 사실도 다 잊은 듯 
그녀는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제라르리옹에 관한 이야기와 그의 아들을 위해 
뉴욕에서 특수학교를 찾아준 이야기까지 모두 다 그에게 털어놓았다. 그녀는 
그로브 지역에서 찾아낸 자그마한 주거지를 이야기하기도 했다.
  "뉴욕은 마음에 들구?"
  "그럴려고 노력해요. 그렇게 되겠죠. 나 많이 변했어요."
  그녀는 그에게 미소를 보냈다. 아무리 지우려 해도 지울 수 없었던 바로 그 
장난기어린 미소였다.
  "빨리 걷고, 빨리 말하고, 숨도 빨리 쉬어요. 사람들이 붐빌 땐, 특히 사람들이 
점심 먹으러 쏟아져 나올 땐 옆으로 몸을 이렇게 세워서 빠져나갈 줄도 알구요. 
안되면 되게 하라. 그게 뉴욕식이잖아요. 숨쉬기가 답답하면 며칠 동안 시카고로 
도망갔다 오기도 해요."
  두 사람은 소리내어 웃었다. 빈 공간으로 공명된 웃음소리가 메아리처럼 두 
사람에게 돌아와 내려앉았다. 그러나 그 메아리가 사라지자 로라의 얼굴은 다시 
어두워졌다.
  "좋아하든 안하든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그 대답이 뭔지 알아낼 시간도 
없었구요. 여기서 자랐는데도… 알잖아요."
  도전적이면서도 반항적인 목소리였으나 폴은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이젠 모든 것이 다 달라졌어요.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인데도 전혀 낯설어요. 
언제 시간 있으면 자세히 뉴욕을 알아보려고 해요. 지금은 일 때문에 모든 
시간을 거기에 다 쏟고 있어요."
  "원했던 일 아닌가? 오웬이 가르쳐준 호텔 사업. 당신 호텔이잖소. 모든 게 다 
원대로 된 것 같은데."
  "훨씬 더 많이요. 직접 운영해보는 기쁨, 다른 사람은 모를 거예요. 내가 만든 
호텔에서 편안함을 즈기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기분, 그건 아무나 느끼지 못하는 
기쁜일 거예요. 편안하고 행복하게 지낸 후 날 기억하고 다시 찾아준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얼마나 신나는데요."
  들뜬 기분으로 정신없이 떠들던 그녀는 순간 당황해하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아래로 내려가야 되지 않아요?"
  "누구 기다리는 사람 있소?"
  "아뇨."
  혼자 외롭게 지낸다는 사실을 그에게 알리기 싫다는 듯 그녀는 즉시 한마디를 
더했다.
  "오늘은 아니예요. 하지만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있어요. 이번주 출장을 
가서… 아내가 기다리지 않겠어요?"
  "저녁 식탁에 앉을 때까지 날 찾지 않을 거야."
  그녀는 맥빠진 얼굴로 그를 주시했다.
  "뭐 하는 사람이에요?"
  "모델이야. 프로급이지."
  "어디서 한 번은 봤겠네요, 그럼. 아기는 있어요?"
  "아니 에밀리가 원치 않아서…"
  폴은 재빨리 뒷말을 덧붙였다.
  "모델직에 최선을 다하려는 모양이지. 내가 하고 싶은 얘긴 그게 아니라…"
  "영화 얘기 좀 더 해줘요. 같이 일하는 사람 있어요?"
  그는 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의 질문에 대답했다.
  "동업자가 있어. 래리 고울드라고."
  "고울드? 당신 대학 친구잖아요."
  "맞아. 야, 그걸 아직도 기억하다니. 당신 대단한데."
  과거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그에게 알리다니… 그녀는 얼른 대화를 다른 
곳으로 도렸다.
  "얘기 계속해요."
  "그 친구 원래 광고회사 주인인데, 나랑 따로 기록 영화사를 만들었지."
  뉴욕 사교계에서 사진사로 일하던 이야기, 래리와의 결합, 첫 영화 실패, 
브리트 페럴리에 관한 영화 제작 등 그는 로라에게 순서대로 차근차근 이야기를 
해나갔다.
  "내가 원했던 것을 다 표현해낼 수 있었어. 대중 뒤에 숨어 있는 비밀스런 
얼굴 말이야.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면을 포착해냈거든…"
  "로스엔젤레스는 어때요, 마음에 들어요?"
  "모르겠어. 당신이 뉴욕을 보는 눈하고 비슷한 것 같애. 일에 빠져 지내느라 
좋다 싫다 느낄 틈도 없었구. 아름다움도 있겠고 추한 것도 있겠지. 한번 
돌아다녀보면 재미있을 거야. 하지만 일이 워낙 바쁘고, 에밀리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않고 해서… 당신하고 케이프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던 때가 생각나곤 
했어. 로스엔젤레스에서도 한번 그래보고 싶은데…"
  순간 두 사람은 똑같이 움찔 놀랐다. 폴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온 
소리였다. 하지 말아야 할 소리를 내뱉고 어쩔 줄 몰라하는 폴에게 로라는 
차가운 비수를 꽂았다.
  "웬일이실까? 결혼하신 몸으로 재산을 탐냈던 도둑년과 데이트를 
하시겠다니?"
  "이런 빌어먹을!"
  그는 손으로 자기 무릎을 내리치며 버럭 소리질렀다.
  "아까 얘기하지 않았어! 미안하다고 말야."
  "오해하고 있었단 소린 안했잖아요."
  "오해를 한 건지 안한 건진 모르겠어. 하지만…"
  "그럼 뭣 때문에 사과를 한 거죠. 뭐가 미안했냐구요? 당신이나 당신 가족들 
모두 다 오해를 했으면서…"
  "펠릭스가 한 말이 맞다고 하지 않았어! 기억이 안 나는가보지? 잊어버렸나? 
그때 사실이냐고 내가 물었잖아? 그런데 당신은 뭐라고 했어? 맞다고 했잖아. 
당신은 잊었는지 모르지만 난 결코 잊지 않았어. 아니 잊을 수가 없었어."
  "잊다니요? 내가 그걸 왜 잊어요?"
  그녀의 음성은 얼음보다도 더 차가웠다.
  "당신은 뭐가 옳은지 알려고도 하지 않았어요. 스타 뒤에 숨어있는 비밀스런 
얼굴을 찾는다고 해놓구서, 감춰진 장면을 찾는다고 해놓구선… 내 이야기가 
감춰진 얘기라고 생각진 않았나요? 영웅이 아니라서요?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서 
하찮게 여겼어요? 날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펠릭스 말만 듣고 날 
쫓아낸 거 아니예요? 내 집에서, 내가 찾아낸 평화스런 가정에서 당신이 날 
나가게 만들었어요."
  "맞는 말이야, 아무 노력도 없이…"
  폴은 쓴 웃음을 지었다.
  "자존심이 너무 상했었나보지. 당신이 내 자신이 아니라 나한테 있는 재산과 
부를 사랑했다는 펠릭스 말에 머리가 일순간 돌아버렸나봐."
  "우리가 나눈 사랑, 우리가 어떤 사이였는데… 날 그렇게 믿지 못했다니."
  "당신이 부정했다면 난 펠릭스 말을 믿지 않았을 거야."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부정하든 긍정하든 내가 당신을 사랑했는데, 이년 
넘게 난 당신 사람이었어요. 당신은 내 사람이었구, 그 정도면 서로 간에 신뢰가 
있어야 되는 것 아닌가요? 아니었어요? 그거면 충분하잖아요."
  "너무 오만했어, 당신 자존심이 너무 강했다구. 우릴 털러 들어왔다고 했지만 
그건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어. 난 그렇게 생각해. 중요한 건 로라 페어차일드가 
날, 그리고 우릴 사랑한다고 얘길 해주는 거였어. 날 사랑한다고 했으면서, 
솔직했었나? 왜 솔직하게 얘길 못한 거야? 우리 모두 다 당신을 가족으로 
생각하고 사랑했잖아. 모든 걸 다 줬다구! 집, 가정, 학교, 우정… 난 당신에게 
내 모든 것을 다 줬어. 사랑을 줬는데, 날 믿지 않고…"
  "그땐 누구 하나 믿을 수 없었어요."
  "우리 쪽 생각은 안하구? 배신 당해 머리가 돌아버릴 것 같은 심정이 이해 
안된단 소리야?"
  "그런 식으로 얘기하지 말아요."
  로라의 표정은 표독스러웠다.
  "손가락질 당하고 법정에서 치욕스런 일을 당한 사람은 나였어요. 당신 
가족들이 아니예요, 폴."
  "비난 받고 손가락질 당했다구? 그게 어쨌는데? 그럴 수 있는 일 아냐? 다른 
이들은 완벽한 것 같나? 당신보다 두배 세배 더 심한 일로 비난 받은 사람들이 
변호하기 위해 싸우는 것 못 봤어? 당신은 왜 못 그래? 로라 페어차일드가 
그렇게 도도한 여자야? 그렇게도 완벽해? 일이 터진 뒤 그렇게 걸어나갔어야 
했나? 수습해볼 노력도 하지 않고 혼자 밖으로 뛰쳐나가다니. 뒤에 남은 우리도 
로라만큼 치욕적인 기분이었어. 당황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우릴 좀 도와줄 수 
없었어? 그럼, 언제가 됐을진 몰라도 우린 당신 말을 받아들이고 계속 사랑하며 
살았을 거라구. 왠지 알아? 당신은 당신이었으니까, 로라 페어차일드! 도둑질을 
했으면 어떻고 재산을 탐냈으면 어때? 솔직히 얘길 해줬으면 얼마나 좋았게, 
당신을 사랑했는데. 내 목숨보다 더. 그런 사람에게 좀더 자세한 설명을 해줄 수 
없었단 소리야?"
  "꼭 그렇게 내 설명이 필요했을까요?"
  "당신도, 그리고 우리들도 모두 다 우리들한테 일어난 일을 자세히 알아야 될 
필요가 있었다는 말이야."
  "그게 믿음보다 더 중요하단 소리예요? 날 믿지 않는데 아무리 설명을 해야 
무슨 소용이 있었을까요? 아직도 날 믿지 않으면서…"
  "뭐니뭐니 해도 내 가족들이야, 로라. 그 사람들을 믿지 않는다면…"
  "난 누구였는데요? 난 당신의 결혼 신청을 받은 여자였어요. 무슨 소린지 
알아들어요. 그런 날 믿지 않았잖아요."
  "오해라고 당신이 한마디만 해줬어도 난 믿지 않았을 거야."
  "믿었어야죠. 무슨 소린지 알아요? 내 남편 될 사람이 날 믿지…"
  로라는 말을 중간에서 멈춰버렸다. 흥분이 갑자기 가셔버린 얼굴이었다.
  "말해봤자 무슨 소용이겠어요. 오래전 얘긴데. 얘기해봐도 달라질 게 
없잖아요? 각자 나름대로 잘살고 있는데 과거를 꺼내 꼬치꼬치 따질 필요 
있겠어요?"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래로 내려가겠…"
  "잠깐만, 로라. 미안해. 그럴 뜻이 아니었어. 정말이야. 맞아. 당신 말 다 맞아. 
서로 신뢰해야 됐는데. 우리 둘 말이오. 둘 다 어려서 그랬는지도 모르지. 
하나님은 아실 거야. 우리 둘 다 너무 어렸다는 걸. 하지만 그건 이제 문제가 
아니야. 서로 얘기하면서 서로에 대한 감정이 아직도 남아 있나를 알아보…"
  "그만, 그만해요! 다 필요없어요. 알고 싶지도 않아요. 그걸 알아서 뭐하게요? 
우리 둘 다 과거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워질 순 없을 거예요. 어쨌든 결혼도 
했잖아요. 나도 너무 바빠요. 내 생활도 있어요. 친구들, 동생, 나하고 결혼하고 
싶어하는 남자도 있고…"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떨리는 몸으로 그녀는 간신히 폴을 바라보았다. 
로라는 우뚝 선 채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그를 강렬히 원했다. 그의 
가슴에 안겨 뜨거운 키스를 나누고 싶었다. 폴 앞에 약해진 모습을 보인 듯해 
순간 그녀는 몹시 부끄러웠다. 그녀는 자신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위해 고조된 
감정을 눌러버려야만 했다. 과거를 없애버릴 수 있는 길은 단지 그것뿐이었다. 
그것이 그녀에게 남겨진 유일한 통로였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으니 
앞으로도 살아갈 자신이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 손을 힘없이 내밀었다.
  "안녕."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에 담겨있는 슬픔을 느꼈다.
  "브리트하고 만든 영화 잘됐으면 해요… 다른 일도 모두 다."
  폴은 천천히 그녀가 내민 손을 잡았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확실히 알지 
못했다. 누군가 뒤에서 자기를 갖고 노는 기분이었다. 두 사람 뒤에 서 있는 
과거. 그 과거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내 사랑…"
  그는 말을 잊지 못했다. 서로에게 남아 있는 것을 찾아내야 되지 않은가, 그런 
생각이었으나 입이 들어붙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애인이었던 그녀를, 다른 
여인으로 자라난 그녀를 폴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를 다시 찾아낼 
길도 알지 못했다. 비록 에밀리와 결혼한 사이긴 하지만 서로 신뢰하고 있나 
알아보기 위해 조심스럽게 우정을 나눠보자는 얘기라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말도 나오지 않았다. 어렵사리 그 말을 꺼낸다 할지라도 그녀가 수락해줄지 
의문이었다. 더군다나 로라에 대한 사랑이 여전하다고 해도 그는 에밀리를 
생각해야 했다.
  회상에 잠긴 그를 지켜보고 있던 로라는 충동적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자신도 
모르게 취해진 행동이었다. 그녀는 두 손을 그의 얼굴에 댔다. 그의 사랑이 
손바닥으로 전해져 왔다. 그녀의 가슴속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또다시 헤어져아 한다는 슬픔과 허전함에 가슴이 메어졌다. 멋진 두 뺨과 
피부결, 손가락에 전해진 따스한 감촉, 올 굵은 머리카락. 그녀는 추억 속에 
있는 폴을 현실로 끌어내고 있었다. 몸 속, 아니 영혼 속의 일부분으로 그를 
받아들이려는 듯 그녀는 그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나의 사랑, 내 사랑 폴. 
왈츠를 추기 위해 정중하게 인사를 하듯 두 사람은 오래도록 그렇게 무도회장 
한쪽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안녕, 폴. 아래로 내려가서는 만나고 싶지 않아요. 그냥 이렇게 헤어져요. 
그냥 집에 갈 거예요."
  그는 그녀에게 달려가는 육체를 느끼고 있었다. 꼭 끌어안아 키스를 하면서 
아무것도 문제될 게 없다고 속삭이고 싶었다. 그녀의 눈 속에 담긴 슬픔을 
끌어안아 다 마셔버린 뒤 그 속에 환한 미소를 담아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두 손은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미안해."
  그는 무기력하게 두 손을 늘어뜨렸다.
  "바보스럽게도 이 말밖에 할 수 없다니. 좀더 괜찮은 말을 하고 싶었는데. 
하지만 사과보다 축하할 일이 더 많은 것 같군. 호텔 잘 해나가길 바래."
  "고마워요. 브리트 영화 구경할께요, 나중에."
  그녀가 등을 돌리자 그는 의외로 담담하게 오래도록 참아왔던 말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로라. 당신 알아?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야. 결코 한 순간도 잊지 
못했어. 아무리 노력해도 당신을 잊을 수 없었어. 우리 사이에 어떤 일이 
생겼든, 무슨 변화가 일어났든 그 사랑은 변하지 않을 거야."
  오랫동안 꼼짝 않고 서 있던 로라는 고개만 살짝 돌려 마지막 인사를 던졌다.
  "안녕."
  그녀는 문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당신도 같은 느낌인지 알고 싶어. 물어볼 자격은 없겠지. 하지만 듣고 싶어. 
느낌이 다른지, 아니면… 같은 느낌인지."
  로라는 천천히 등을 돌렸다. 조금 전에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었던 무도회 
공간에는 컴컴한 정적만이 고여 있었다. 그 속에 우뚝 서 있는 폴을 바라보며 
로라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내 마음 다 바쳐 당신을 사랑해요, 폴."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미끄러지듯 문 밖으로 사라져버렸다.

    24장
  쇄도하는 초청장으로 우체통은 늘 차고 넘쳤다. 로라는 초청장더미에 빠져 
죽을 지경이었다. 멘해튼 사교계는 합법적이든 불법적이든 목표를 향해 
저돌적으로 달려가는 새로운 얼굴들을 원하고 있었다. 로라가 거느린 호텔들과 
그녀 주변에 얽힌 이야기가 《월 스트리트 저널》, 《뉴욕 타임스》, 
《뉴스위크》 《보그》지에 실리고 몇몇 TV 토크쇼가 그녀를 초청손님으로 
모신 이래, 도시안의 모든 사교장은 그녀에게 문을 활짝 열어놓고 손짓을 하기 
시작했다.
  젊고 아름다운 미혼녀라는 그녀의 신분 외에도, 웨스 커리어와 지니 
스타렛이라는 거물급 재벌이 후방에 포진돼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더욱 빛나게 
했다. 그러나 그녀가 주목 받는 더욱 큰 이유는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철저하게 
거절하는 그녀의 신비스러운 분위기에 있다.
  그녀는 사교계 진출도 마다하지 않았다. 아침 일곱시부터 저녁 일곱시까지 
사무실 일을 끝낸 뒤 그로브 집으로 달려가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나면, 
저녁 파티와 자선무도회 등을 향해 뛰는 밤 일과가 시작되곤 했다. 그렇게 
하루에 세 곳 이상을 뛰고 집으로 돌아가면 손가락 하나 까딱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녀는 침대에 기어들어가 다섯 시간 정도 죽음처럼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시월 마지막 토요일, 일에 치여 사는 주인에게 버림받고 있던 집안은 
손님들을 치르기 위해 오랜만에 북적거리고 있었다. 로라가 퇴근하기 전부터 
이미 집을 장악해버린 주방진들은 거실과 옥상 정원에 바를 차리고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듯한 접시들과 쟁반을 찬장에서 찾아내 부산하게 요리를 
준비했다. 그다지 쌀쌀하지 않은 저녁이었지만 찾아올 손님들의 여흥을 돋우기 
위해 벽난로마다 가을밤의 불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정말 멋져 보여."
  플라비아 구아르네리는 작은 현관에 서 있는 로라를 디자이너다운 눈길로 
뜯어보았다.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웨스."
  로라 옆에 서 있는 웨스에게도 그녀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옷 입는 방법을 연구하나보지. 볼 때마다 점점 멋있어져요, 로라. 옷을 잘 
입어서 그런 건가 호텔이 잘 돼서 그런 건가. 도대체 비결이 뭘까?"
  "둘 다예요."
  눈빛과 같은 톤의 푸른 드레스는 로라의 흰 살결과 밤색 머리카락을 강조하며 
부드럽게 몸의 곡선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는 조용하고 잔잔하게 고개를 똑바로 들고 손님을 맞아들였다.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은 얼굴 표정이었다.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이층 거실로 올라가는 로라를 바라보며 웨스 
커리어는 옆 손님의 이야기를 흘려 듣고 있었다. 더 이상 그의 옆에 서 있지 
않으려 하는 옛 애인. 커리어는 그녀가 사라진 계단을 멍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로라는 한 달 동안 떨어져 있던 커리어가 집에 들어서자마자 마치 
바깥주인처럼 현관에 자신과 나란이 서서 손님들을 맞아들이는 것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아직도 날 기다리고 있다니. 로라는 커리어의 끈질긴 기다림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로자, 뭣 좀 갖다 드려요?"
  로자가 앉아 있는 의자 팔걸이에 비스듬히 걸터앉으며 로라는 부드럽게 
물었다.
  "마실 거라든가 뭐 간단하게 요기라도? 아니면 얘길 나눌 사람이 
필요하세요?"
  로자는 그녀의 뺨을 다독이며 미소로 대답했다.
  "아주 행복한걸. 더 바랄 나위 없이 말야. 너무 늙어서 이젠 써먹을 데도 없을 
텐데 이렇게 잊지 않고 불러줘서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 기분이 너무 좋아."
  마주보는 두 사람의 얼굴에는 다정한 미소가 퍼지고 있었다.
  "그래, 늙었다는 게 실감이 안 나긴 해. 마음은 청춘이니까. 하지만 미래보다 
과거를 회상하는 사간이 많은 걸 보면 늙긴 늙었나보다 하는 생각이 든단다. 
방금 내가 무슨 생각했는 줄 아니? 오웬님 저택에서 네가 집들이, 아니 
방들이라고 해야겠구나. 알리슨하고 체드 약혼식을 축하해준다고 열었던 파티 
말이다. 물론 나야 주방에서 있었다만, 그래도 그날 밤 네가 불러들였던 
사람들이 누구였다는 건 기억나는구나. 아주 특색 있는 파티였지."
  로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도 참 특색 있는 것 같은데, 안 그러냐? 저기 저 젊은이는 길 건너에서 
식당하는 사람 아냐? 그 옆은 정원 만들어줬다는 정원사구. 백작부인에다 목에 
이 세상 보석이란 보석은 주렁주렁 달고 있는 플라비아 구아르네리에다, 또 
누구냐, 세상 모든 여자들하고 다 자본 듯이 나발 불며 떠들어대는 카를로스 
뭐시기도 있구, 또…"
  "로자!"
  "안다, 알아. 이게 바로 내가 늙었다는 증거야. 나일 먹으면 말이 많아진다 
그러잖든. 지니하곤 얘기 좀 많이 했다. 저번에 시카고 호텔에서 켈리하고 
셋이서 많이 사귀어놨거든. 요즘 켈리하곤 얘기 좀 해봤니?"
  "아뇨.바빠서 전화를 못 해봤는데, 켈리도 바쁜가봐요. 몇 달 동안 전화도 
없었어요. 오늘 초대는 했는데 아직…"
  "저기 오는데."
  로자의 턱짓에 로라는 뒤를 돌아보았다. 층계에 서 있던 사람들을 헤치며 
다가온 켈리는 로라 앞에 서자마자 그녀를 힘껏 껴안았다.
  "기가 막힌 집이야. 세상에, 뉴욕에 이런 집이 있다니 꿈에도 상상 못할 
일인데."
  "존은요?"
  로라는 두리번거리며 존 단톤을 찾았다.
  "안 왔어. 나중에 한가해지거든 얘기해줄게."
  로라는 착 가라앉은 켈리의 음성에서 무었인가를 눈치챘다. 켈리의 왼손을 
들어올린 로라는 반지 없는 손가락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언제 그랬어요?"
  "오늘로 꼭 한 달 됐다. 나중에 얘기해줄게. 내일 점심? 아니면 언제 따로 
만날까?"
  "그래야죠. 단톤스는 누가 경영해요?"
  "팔아버렸어. 지금 얘기해도 괜찮겠어? 바쁠텐데."
  "아니, 안 바빠요. 얘기해줘요, 켈리."
  "그렇게 됐어. 기가 막힌 조건에 누가 팔라고 하는데. 존이 얼마나 그걸 팔고 
싶어했는지 로라도 잘 알잖아. 그래서 팔았어. 돈더미에 파묻혔지. 그리곤 
세계일주라는 것을 했지. 잘도 빠져나가더군. 돈 말야. 존은 계속 놀고먹자는 
주의였고, 난 나머지 돈으로 뭔가 하고 싶었어. 하지만 그것도 그만… 
월요일쯤해서 자기 사무실 찾아가 일자릴 부탁해보려 했는데 이렇게 먼저 
얘기가 나왔네."
  두 사람은 동시에 육년 전 로라가 단톤스에서 일자리를 구하던 때를 생각하고 
있었다.
  "걱정 말아요. 확실한 자린 지금 생각나지 않지만 켈리한테 딱 들어맞는 자릴 
찾아줄 수 있으니까요. 같이…"
  그녀는 갑자기 말을 멈추더니 생각에 잠겼다.
  "잠깐만, 켈리. 워싱턴에 사는 일 어때요?"
  "글쎄, 생각해보지 않아서… 왜?"
  "호텔이 거기 있잖아요. 지배인, 부지배인, 주방장이 아직 없어서 새로 뽑아야 
되는데."
  "지배인하고 주방장이라…"
  켈리의 얼굴은 순식간에 밝아졌다.
  "주방장이 있지. 아니 정확히 말하면 빼올 수 있어. 단톤스에 있던 주방장이 
새주인하고 뭐가 안 맞아서 그런지 자꾸 호텔 하나 구해서 자기 좀 데려가 
달라고 하거든. 워싱턴이면 근사하겠는데."
  두 사람은 손을 붙들고 웃었다.
  "내일 점심 같이 해요. 얘기해보고 사정이 되면 바로 워싱턴으로 갔으면 해요. 
켈리."
  "안될 것 없어. 곧장 가지. 뭐."
  로라는 그녀의 뺨에 키스했다.
  "전보다 훨씬 자주 보게 돼서 너무 기뻐요. 가까우니까 이웃처럼 지낼 수 
있구."
  "다시 같이 일하니까 또 좋고."
  아래층에서 올라온 클레어가 켈리를 보자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를 힘껏 
끌어안았다.
  "오랜만이에요, 켈리. 존은 어딨어요?"
  "못 왔어. 아주 좋아 보이네. 콧수염도 아주 근사해. 이 사람이 우리 섬에서 눈 
크게 뜨고 고물차 몰던 바로 그 소년이란 말야?"
  클레이는 윙크로 켈리의 농담을 받아들였다.
  "그동안 좀 자랐죠. 다른 사람 차 대신 자기 차 몰고 다닐 줄도 알죠. 켈리, 
로라와 좀 얘길해도 되죠? 몇 분이면 되는데."
  "그럼, 물론이지. 혹시 파티에서 사업 얘기 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 있겠습니까."
  켈리에서 키스를 한 뒤 클레어는 로라의 팔을 살며시 끌어당겼다.
  "미안해 누나. 하지만 즉시 얘기하는 게 아무래도…"
  층계 아래 조용한 자리로 로라를 끌고 간 클레어는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까 사무실에서 들었는데 몇 달 전에 내가 해고시킨 경비원이 샐링거 
밑에서 일한다는데…"
  "그래서?"
  "별로 기분 좋은 일 아니잖아. 더군다나 우리 호텔 카드 코드라든가, 복도 TV 
모니터, 객실 안전금고를 다 알고 있는데…"
  "무슨 소리야. 그래서 그 사람이 우리 호텔에 도둑질이라도 하러 온다는 거니, 
뭐니?"
  "누가 알아?"
  "무슨 첩보전 하는 것도 아니고 그게 무슨 소리야?"
  "펠릭스는 아니고 벤 형이라면…"
  "오빠가? 아내하고 잘 사는 사람이 무슨 할 짓이 없어서 남의 호텔을… 그건 
말도 안돼, 클레어. 오빤 지금 행복하게 잘 살고 있어. 다신 우릴 해치지 않을 
사람이야. 더군다나 도둑질 같은 건 옛날 일이야. 부유한 가문하고 손을 
잡았는데 뭐하러 위험을 사서 해."
  "돈이 필요할지 알게 뭐야?"
  "필요한 만큼 벌어들일 거야. 만의 하나 아직도 계속 훔치고 산다 할지라도 
세상에 어디 훔칠 곳이 없어서 내 호텔을…"
  "털기 쉽다고 생각하면 하는 거지."
  "그만해! 더 듣고 싶지 않으니까. 별걱정 다 한다. 그렇게 생각할 일이 없니? 
오늘 데려온 여잔 누구니?"
  "로즈메리. 자기밖에 없대. 날 돌봐줘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맞는 말이네."
  "마리나도 그런 말 자주 했는데. 처음엔 괜찮았는데 나중엔 그 소리가 
죽기보다 싫더라구."
  "사랑하고 위해주는 사람이면 감지덕지하지 뭘 더 원하니?"
  "누난? 그렇게 그런 것들이 좋으면서 왜 웨스하고 결혼 안하는 거야?"
  "사랑하지 않으니까. 사랑하면 결혼했겠다. 결혼은 좋은 거야. 결혼하면 너도 
좀…"
  그녀는 그쯤에서 입을 다물었다.
  "철이 든다구. 그 말이 하고 싶다 이거지? 좀더 자라라 이 말 아냐?"
  "가끔씩 그렇게 느낄 때가 있긴 있었지."
  어느새 다가온 커리어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손님들 내버려두고 이 구석에서 뭘 하는 거야?"
  화가 치밀어 올랐으나 그녀는 간신히 감정을 삭이고 클레어를 보고 
웃어주었다.
  "이따 보자, 클레어. 재미있게 놀구."
  "알았어. 염려마십시요!"
  클레어는 소년처럼 금세 함박웃음을 보냈다.
  "파티 근사해. 누나, 사랑해. 마리나를 불러들였으면 하는데 누나만 괜찮다면."
  로라는 그의 뺨에 키스를 했다.
  "나도 사랑한다, 클레어. 네 맘대로 해. 원하는 대로. 난 괜찮으니까."
  옥상 정원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커리어가 입을 열었다.
  "동생 잘못 가르치는 거 아냐?"
  그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왜요?"
  "잡을 땐 세게 잡아야지. 앞날이 있는데."
  "클레어를 몰라서 하는 소리예요. 걔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래 늘 의지할 
사람을 찾았어요. 처음엔 벤 오빠한테 의지했었죠. 하지만 일이 그렇게 된 뒤 
클레어는 날 부모처럼 의지하고 살았어요. 이래아 저래라 물론 명령할 수 
있겠죠. 그러면 따라할 거예요.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더 성숙해지진 않을걸요. 
자신의 인생을 책임지지 못하긴 해도 난 그애를 사랑해요. 힘닿는 대로 내가 
도와줘야죠."
  "나도 좀 도와줬으면 하는데. 당신 힘들 때 말이요."
  그러나 로라는 커링에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손님들이 시끌벅적하게 
환담을 나누고 있는 옥상문을 열었다.
  마지막 손님이 돌아간 새벽 다섯시, 주방진들이 집안 구석구석에 남아 있는 
후식 찌꺼기들을 치우는 동안 로라와 커리어는 단둘이 거실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다.
  "훌륭한 파티였소, 모두 다 만족한 눈치 같던데."
  "고마워요."
  그녀의 음성은 척 가라앉아 있었다. 껄끄러운 침묵의 시간이 흘러갔다.
  커리어는 머뭇거리며 로라를 불렀다.
  "오늘 오후 돌아오자마자 느낀 건데 뭔가 좀 이상하군. 무슨 할 말이 있는 
거야?"
  그녀는 어둠 속에서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더 이상 함께 있고 싶지 않아요, 웨스."
  커리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얼어붙어버린 것 같았다.
  "따로 살면서 친구로 있자는 줄 알았는데…"
  "맞아요. 진짜 친구요.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그냥 친구. 가끔씩 같이 저녁 먹고, 
가끔씩 같이 잘 수 있는 친구요. 근데 갑자기 내 집들이 파티에서 바깥주인 
행세를 한 건 뭐죠? 나하고 결혼을 포기한 사람이 남편처럼 구는 이유가 
뭐예요? 사는 주소만 달랐지 그전과 달라진 게 뭐 있어요?"
  그녀는 갑자기 헛웃음을 터트렸다.
  "당신이 왜 사업적으로 성공했는지 알만해요. 절대 포기할 줄 모르는 
사람이니까요. 상대가 다인 뜻한 바대로 고개를 숙일 때까지 계속 밀어붙이니 
안될 일이 어디 있겠어요."
  그는 여유를 되찾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 아니었나? 그동안 다른 사람을 만났다 해도 난 
아무렇지 않아. 그렇다고 해서 우리 관계가 허물어진다고는 생각지 않으니까."
  "다른 사람 만나지 않았어요. 새로운 사람 만나고 싶지도 않구…"
  잠시 망설이던 끝에 그녀는 커리어를 똑바로 응시하며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당신 출장갔을 때 폴을 만났어요. 몇 주 전에."
  순간 커리어의 얼굴빛이 확 달라졌다. 늘 자신감을 갖고 대화를 이끌어가던 
사업의 명수가 얼굴도 모르는 로라의 과거 남자 이야기를 듣는 순간,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자에게 다시 돌아갈 생각인가?"
  "아니예요. 말도 안되죠. 결혼한 사람인데…"
  "결혼? 그 얘긴 안했던 것 같은데."
  그녀는 엷게 웃었다.
  "당신이 모르는 얘기가 수천 수만 가지예요. 그 사람을 사랑해요. 이 마음 다 
바쳐서.그런 마음을 갖고 있는 날 계속 만나야겠어요, 웨스? 그건 말도 안돼요. 
언젠가 내가 당신을 사랑하길 바라는 건… 당신을 이해 못할 때가 많았어요. 왜 
날 사랑하는지.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난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거예요. 
아니 사랑이 느껴지지 않아요. 좋아하긴 해요. 하지만 그뿐이에요. 더 이상 진전 
되지 않는 걸 어떡해요. 왜 시간 낭비하고 있어요? 나 때문에 시간과 정열 
낭비하지 말고 당신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을 찾아봐요, 제발."
  "빌어먹을!"
  감정이 그대로 드러난 웨스의 음성은 아주 거칠었다.
  "난 한 순간도 당신을 잊지 않았어. 당신을 원하고 사랑하고, 당신과 가정을 
꾸미고 싶었어. 애정과 흔들림이 없는 우리 가정을.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그렇게 말해도 되는 건가? 그래도 되는 거야? 내가 정상이 아니란 소리지? 
그래, 좋아. 사랑에 빠지면 미치지. 그래, 난 당신 때문에 미쳤어. 당신을 이렇게 
멋진 집과 가정으로…"
  "혹시 이 집 임대료 당신이 일부분을 내는 건 아니예요?"
  로라는 불쑥 물었다.
  "아냐."
  혼란스런중에도 웨스는 재빨리 그리고 능숙하게 부인했다. 그러면서 그는 
평정을 찾고 있었다.
  "부탁했으면 도와주었겠지."
  "고맙군요. 그럼 다른 식으로 물어볼까요. 임대계약 전에 미리 주인과 무슨 
얘기가 있었죠?"
  "그래, 솔직해지지. 집주인과 미리 얘기를 해서 집값을 내렸소. 자그마한 내 
정성이었어. 당신을 위해서 말이오. 사랑하는 당신을 위해. 그것뿐이야. 그래, 
내가 임대료를 내렸어. 남자 데리고 와 밤새 놀며 집 망가뜨릴 사람도 아니고 
정직하고, 깨끗하고, 착한 여자니까 집값 좀 내려 달라 그랬어."
  그녀는 그의 차분한 음성에 깔린 아픔과 고뇌를 읽을 수 있었다.
  "고맙군요. 아주 고마워요, 웨스. 언제쯤이면 내가 당신한테 감사하단 말 
안하고 살 수 있을까요? 이젠 내 발로 혼자 설 수 있을 여자라고 생각 
안했나보죠. 그래요?"
  "당신은 이미 오래전에 홀로 섰어. 다른 사람 도움 필요없이 말이야."
  "계속 당신이 날 그렇게 한다면 난 여기 있을 수 없어요."
  "왜 없다는 거지? 난 당신을 미치도록 사랑해. 몇 년 동안 착각 속에 빠져 
사랑했지. 좋아 인정해."
  잠시 말을 멈추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에게서 로라는 다시금 그의 고뇌를 
읽었다.
  "그래, 착각에 빠지긴 했어. 당신도 날 사랑하게 될 거라구 말야. 당신을 
잃어버릴 순 없어. 내 마음을 그렇게도 몰라주나?"
  "웨스. 제발, 제발 그만둬요. 그런 소릴…"
  "젠장, 로라. 내가 이런 소릴 가는 곳마다 할 것 같애? 날 제발 이해해줘. 난 
당신 없인 못살아…"
  "아니예요. 당신은 날 소유하고 싶은 거예요."
  "그게 그거지. 그렇게 고개 흔들지 마. 오년 동안 당신을 소유했잖아. 내가 
원할 땐 내 곁에 있었고, 내가 필요한 것을 채워주면서 또 원하는 것을 
나한테서 가져갔잖아. 그런 삶이 어때서? 서로 믿고 의지하는 삶 아니야?"
  그는 몸을 더 숙여 로라의 손목을 잡았다.
  "들어봐, 로라. 당신도 나한테 아주 감정이 없는 나하고 그럴 수 있었단 
말이야?"
  "맞아요. 그러나 그건 당신과 내가 얘기하는 그런 사…"
  "그 감정에 굳이 이름 붙일 필요는 없어. 내가 그걸 사랑이라 부르면 사랑이 
되는 거야. 뭐가 됐든 당신은 느꼈지 않았어? 그건 쉽게 없어질 수 없는 
감정이야, 로라."
  그는 로라의 얼굴빛이 변하는 것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당신도 알고 있지. 시인을 안할 뿐이야. 그런 감정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계속 당신을 붙들고 싶어. 여태껏 함께 누렸던 삶을 계속 지켜 나가고 싶단 
말이야."
  "그만해요!"
  손을 힘차게 빼낸 로라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를 보며 소리쳤다.
  "왜 그렇게 품위 없이 굴어요? 왜 이런 식으로 대강 마무리 짓는 거죠?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이 주는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자를 찾아요. 원할 때 
당신에게 모든 걸 주고, 모든 걸 받아들일 수 있는 여자를요. 왜 나랑 이런 
식으로 있으려 해요? 날 잡아보고 싶어서요?"
  "이유는 간단해, 로라. 당신을 사랑하니까. 날 사랑하지 않아도 당신은 내게 
크나큰 걸 주었어. 여태껏 내가 사랑했던 여자들이 주지 못했던 것들을 말이야."
  "뭘 주었는데요? 내가 뭘 그렇게 특별한 걸 허락…"
  "그걸 몰라서 묻는 거야. 아직도 내 맘을 몰라? 목표를 갖고 자신만을 위해 
살면서도 남자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독립적인 여자. 그 여자를 통해 난 많은 
걸 배웠어. 사랑, 우정, 아름답고 멋진 교제… 우린 모든 면에서 파트너였어. 
당신은 파트너가 필요해. 당신도 그건 인정할걸. 혼자 잘난 척 뛰다가도 막상 
중요한 결정은 다른 사람하고 의논하길 좋아하지."
  "당연하죠. 파트너가 있으니까요."
  그는 여유를 찾으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맞아요. 사업면에선 아직도 파트너를 원해요. 하지만 나머진 여태껏 말한 
대로 해요. 미안해요, 웨스. 털어놓고 나니까 속이 편하네요."
  그녀는 현관으로 가 손잡이를 잡았다.
  "그만 가줘요, 웨스. 혼자 있고 싶어요."
  그러나 그는 꼼짝하지 않았다.
  "당신은 추억 속에 살고 있어. 멀리 가버린 추억. 유령하고 말야. 현실을 
받아들여."
  "난 재 자신하고 살아요.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랑하는 척할 수는 없잖아요. 
솔직해지고 싶었어요. 사무실에선 서로 같이 일하고, 서로 좋아하고, 서로 
존경하면 돼요. 아주 멋진 우정이겠죠. 진짜 우정. 그걸로 만족했으면 해요, 
웨스."
  순간 웨스 커리어는 수치심에 몸을 떨었다. 로라보다 현명하고 감정을 잘 
다스린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상대에게 굴복을 하고 쫓겨나야 한다는 수치심 
때문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문간에 있는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며칠내로 전화하겠소. 분기별 결과보고서 같이 보면서 의논해 봅시다. 이번 
분기는 늦어진 것 같은데."
  "아…"
  그녀는 갑자기 변해버린 그의 태도에 자신도 모르게 놀랐다. 좀더 끈질기게 
나오길 바랐나? 그녀는 자신에게 놀란 이유를 묻고 있었다. 그러나 어찌 됐든 
그녀는 견뎌야만 했다. 혼자 식당을 찾을 때마다 그가 그리울지 모를 
일이었으나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일이고 지금으로서는 해방된 느낌뿐이었다.
  "안녕, 웨스. 고마워요… 모든 걸 고맙게 생각해요."
  그는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곧 다시 얘기합시다."
  집 앞 마당으로 내려선 그는 미명이 깔린 새벽 거리로 사라져 버렸다. 로라는 
멀어지는 그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있었다.

      완전한 여인
    25장
  네번째 도난사건은 파도가 출렁이는 아카폴코 해변, 카를로스 세라노 
아파트에서 일어났다. 세라노가 멕시코 인상과 그림들을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사교계에 널리 알려진 일이었다. 바로 그 소장품 중 여섯 점이 액자에서 
칼로 정교하게 도려진 채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뉴욕, 마이애미, 팜비치 
등에서 친구들을 만나고 돌아온 직후 세라노가 직접 신고한 도난사건을 두고, 
최대 인력을 동원해 조사에 착수했던 경찰은 아무런 단서도 잡지 못하고 두 
손을 들어버렸다.
  카를로스 세라노의 직속 부하들과 부유층을 상대로 상품을 팔았을 
중개인들까지 샅샅이 뒤졌으나 소득은 전혀 없었다. 브리트 페럴리 집 도난사건 
대 투입됐던 보험담당 조사원도 사력을 다해 뛰고 있었다. 그는 사년 전에 
은퇴한 예순다섯 살의 샘 콜비 수사관이었다. 오래전에 이혼한 그는 자녀들이 
성장하고 나름대로 생활을 꾸려감에 따라 점차 권태로움을 느꼈다. 몇백만 
달러를 배상해야 하는 상황에서 몇 번씩이나 보험회사들을 구해냈던 그의 
전설적인 무용담은 아직도 보험업계에서 잊혀지지 않은 상태였다. 무료한 
생활에 지친 그는 은퇴 전 바로 밑에 있던 부하-현재는 중역이 된 
인물이지만-에게 전화를 해 파트 타임식으로라도 말라 비틀어진 버섯 신세를 
면하게 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전국 보험회사 
협회장에게서 뉴욕으로 와달라는 전화를 받았다.
  그곳에서 그는 두 가지 사건을 부탁받고 즉시 현장으로 달려갔다. 뉴욕의 
플라비아 구아르네리 집에서 사라진 툴루즈 로트렉 그림 세장과 파리에 있는 
브리트 페럴리의 레밍턴 조각상 도난사건이었다.
  "농담하시는 거요?"
  얼지로 서류를 넘기며 콜비는 걸죽한 음성으로 물었다.
  "사건발생 일자가 일년이나 차이가 나는 데다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일어난 
사건인데, 그것도 하나는 그림이고 하나는 조각인데, 뭔 공통점으로 이걸 한 데 
묶은 거요?"
  "수법이 똑같아요."
  협회 이사장이 그의 질문에 날카롭게 대꾸했다.
  "수법이라니? 단서 하나 안 남기고 도망간 수법? 그건 그런 놈들한텐 
기본으로 통하는 방법이외다."
  "그럴 수도 있겠죠. 어쨌든 전설적인 영웅을 불러들였으니 곧 해결될 것으로 
믿고 있겠소."
  "기대해도 좋소."
  그는 작은 키에 등까지 구부정했다. 게다가 그의 손가락은 관절염 때문에 
마디가 한결같이 꼬부라져 있었다. 그러나 그의 검은 눈빛은 법망을 피해 
다니는 사람들을 끄집어낼 듯 무척이나 날카로웠다.
  그는 플라비아 구아르네리와, 그녀가 해고시킨 가정부와 집사를 만난 다음 
브리트 페럴리를 만나기 위해 전화를 했다. 연주여행과 영화제작인가 뭔가 하는 
것으로 바쁘다는 그를 지겨워도 당분간 기다려야만 했다.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콜비는 뉴욕에서 날아오는 정보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 중 하나는 시드와 
아멜리아 라프톤의 팜 스프링스 집에서 발생한 그림 도난사건이었다. 그가 
조사하고 있는 사건과 수법이 똑같았다.
  처음으로 콜비는 전율과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분명 공통점이 있었다. 파리, 
뉴욕, 팜 스프링스, 프로급 도둑이라면 얼마든지 옮겨다닐 수 있는 거리였다.
  유월에 페럴리, 구월에 라프톤. 불과 사개월만에 연속으로 일어난 사건이었다. 
누군지 모르지만-단독이든 그룹이든-급하게 돈이 필요한 자의 범행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로부터 두 달 우ㅐ인 십일월, 아카폴코의 카를로스 세라노 아파트에서도 
똑같은 수법의 절도사건이 발행했다. 샘 콜비는 자기의 직감을 믿었다. 샘 
콜비는 수사망을 계속 좁혀 갔다. 그의 일생에 가장 큰 절도사건을 해결한다는 
집념으로.
  부부동반으로 크리스마스 휴가여행을 보낼 계획이었지만 감기든 저드를 두고 
갈 수 없다는 알리슨 때문에 벤은 혼자 뉴욕행 비행기에 올랐다. 알리슨을 위해 
크리스마스 선물을 고르며 혼자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다는 생각으로 벤의 
마음은 아주 가벼웠다. 따로 시간을 내 젊은 화가들이 운영한다는 화실도 
구경할 예정이었다.
  그림은 벤의 새로운 취미생활이었다. 알리슨과 결혼한 뒤 그림을 사 모으기 
시작한 벤은 투자식으로 그림을 고르는 알리슨에게 여러 가지를 배우기도 했다. 
알리슨이 보스톤에 화랑을 낸 이후 그림을 접할 기회는 더 많아졌다.
  다행히 그에게는 그림을 보는 안목이 있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성공한 그림을 
찾아내곤 했다. 감정을 배제한 채 아주 조심스럽게 그가 골라낸 그림의 
주인공들은 일이년 뒤 화랑가와 예술 비평가들 사이에 새로 발굴된 화가들로 
우대받고 있었다.
  포천업에서 알리슨을 위해 사파이어가 박힌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산 벤은 
레니를 위해 루스 블럼카에서 크리스털 찻주전자를 구입했다. 화물항공기 
편으로 레니에게 선물을 보내기 위해 주소를 적는 순간, 벤은 갑자기 밀려든 
외로움에 당황했다. 그는 레니의 사랑을 원하고 있었다. 사랑이 아니면 
인정이라도 받고 싶었다. 집안 행사 때나 또는 따로 조용히 만날 때도 레니는 
항상 친절했다. 크리스마스나 그의 생일에는 정성이 깃든 선물도 보냈지만 벤은 
그녀가 자신을 경계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웃기는 
생각이라고 매번 자신을 꾸짖기도 했지만, 그는 늘 레니가 자신을 지켜본다는 
생각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곤 했다.
  하루만에 간단한 사무와 쇼핑을 끝낸 뒤 그는 한가하게 시내를 돌아다녔다. 
십이월 치곤 꽤 따스한 날씨였다. 벤은 뚜렷한 목적없이 이리저리 걸어다녔다. 
도둑질할 곳과 숨을 곳을 찾아 헤매던 옛일을 생각하며 그때와는 다른 기분으로 
그는 고향을 거닐고 있었다.
  다섯시경 58번가로 발길을 돌린 그의 눈에 낯선 간판이 눈에 띄었다. '비콘 
힐'이라는 선명한 글씨가 현관 바로 옆의 동판에 새겨져 있었다. 뉴욕 비콘 힐. 
그는 호텔 이름을 속으로 되뇌었다.
  충동적으로 자그마한 로비에 발을 들여놓은 벤은 한참동안 크리스털 샹들리에 
밑에 선 채 쇼핑과 관광을 끝내고 돌아와 고풍스럽게 꾸며진 안내 데스클에서 
메모와 극장 티켓 등을 받아가는 숙박객들을 지켜보았다. 붓꽃 그림이 새겨진 
카펫과 아이리스 무늬의 벽걸이 등으로 꾸며진 로비는 연회색과 보라, 녹색으로 
고요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고, 구석에 알맞게 놓여 있는 가구들은 
바로크풍으로 엄숙하고 품위 있어 보였다.
  구석진 곳에서 왈츠를 연주하고 있는 사중주단과 함께 라운지는 빈틈없이 
가득 메워져 있었다. 한 번 묵어보고 싶은 호텔이군. 벤은 자신도 모르게 떠오른 
생각에 웃음이 났다.
  로라가 그리웠다. 호텔에 있다면 찾는 것은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아직 샐링거 가문에 둘의 관계를 이야기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막상 로라와 마주칠 일도 부끄러웠다. 동생을 동생이라고 소개시키지도 
못하는 지산이 부끄러웠다. 함부로 움직이다가는 오히려 일을 망치게 될 거야. 
다 잃어버릴 거라구. 알리슨의 믿음도 중요했다. 비밀의 벽을 허물어뜨릴 만큼 
서로가 서로를 확실하게 믿고 있는지 아직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너무 
늦어버린 건 아닐까? 지금이라도 다시 가족이 될 수 있을까? 자신도 알 수 
없었지만 로라의 마음 역시 알 수 없었다.
  호텔을 뒤로 한 벤은 비콘 힐에서 한 블록 떨어져 있는 플라자 호텔로 
들어갔다. 새로 지을 샐링거 호텔 건축문제로 담당자와 저녁을 할 예정이었다. 
그때까지 두어 시간이 남아 있었다. 한가하게 술 한 잔 한 뒤 레니와 펠릭스가 
휴가 때 사용하는 뉴욕 외각 집으로 가 샤워나 사고 옷을 갈아입을 생각이엇다. 
그러나 로비를 가로질러 라운지로 향하던 벤은 갑자기 우뚝 멈추어 섰다. 
위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무리 속에서 레니 샐링거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여기는 웬일이지? 벤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펠릭스 말로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버지니아에 갔다고 했다. 51번가에 집을 갖고 있는 사람이 플라자 
호텔에서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다는 말인가? 그녀를 향해 다가가던 벤은 
걸음을 멈추었다. 레니에게는 동반자가 있었다.
  다른 사람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벤에게는 뒤에 서 있는 
키 큰 젊은이가 그녀를 호위하듯 모시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손을 그녀 
팔꿈치에 댄 채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는 시내는 마치 뒤에서 누가 
밀기라도 하듯 레니 등뒤에 붙어 있었다. 앞을 바라보고 있기는 해도 레니 역시 
뒤편으로 약간 몸을 기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검은 드레스 위에 밍크코트를 
걸친 레니는 코치뮈제트 가방을 들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레니와 젊은 사내는 사람들이 빠져나오기를 기다리기 
위해 옆으로 잠시 몸을 비켰다. 아무 생각없이 미끄러지듯 그쪽으로 다가간 
벤은 레니의 팔목을 붙잡았다.
  치한인줄 알고 매몰차게 고개를 돌린 레니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벤."
  그녀는 간신히 한 마디를 내뱉았다.
  "여긴 웬일이지? 뜻밖이네."
  "아버님이 뉴욕 집에 머물라고 해서 휴가차 왔습니다. 버지니아에 가셨다면서 
여긴 웬일이세요?"
  "계획을 바꿨어."
  엘리베이터 안으로 사람들이 몰려가는 동안 어쩌지도 못하고 멍하니 서 있는 
젊은 사내를 벤은 의도적으로 강하게 쏘아보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세 
사람만 남았다. 레니는 한숨을 쉬었다.
  "이쪽은 윌 베이커, 여긴 벤 가드너."
  사내가 손을 내밀었으나 벤은 그 손을 잡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장모님하고 차 한잔 하고 싶은데 괜찮겠소?"
  "아…"
  사내는 시선을 어느 곳에 두어야 할지 몰라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리고 
있었다.
  "좋습니다. 전… 약속이 있으니까. 어서… 어서 가보세요."
  겁까지 집어먹은 얼굴로 그는 두 사람을 뒤로 한 채 북적이는 로비로 
사라져버렸다.
  레니는 벤이 잡고 있는 팔을 가볍게 빼내며 숨을 크게 내쉬었다.
  "차보다 술 한잔 하는 게 낫겠군."
  "좋습니다. 그러잖아도 한잔 하려던 참입니다."
  아무 말없이 두 사람은 오크 룸 바로 들어갔다. 처음 와본 것인 양 레니는 
입을 다물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늘하늘한 실크 블라우스와 우아한 리본 
넥타이 그리고 분노인지 당혹감인지 전혀 모를 감정을 숨긴 채 앉아 있는 
레니의 아름다운 모습에 벤은 마음속으로 경탄을 보냈다. 볼 부분이 평소보다 
상기된 것 외엔 레니의 표정에는 아무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보드카에 토닉 하실래요?"
  레니가 좋아하는 칵테일이었다.
  "고맙네."
  술잔이 나올 때까지 두 사람은 또다시 말을 잃었다.
  "아까, 꼭 그래야만 했었니?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잘 모르겠어요. 생각없이 부지불식간에…"
  "그럼 지금 생각해보게."
  "그러죠."
  그는 나무라는 듯한 레니를 잠시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겠죠. 생각해보라구요? 좋습니다. 생각해보죠.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까. 제 생각을 듣고 싶으세요? 고매하신 분께서 마치 함부로 몸을 
굴리는 여자들처럼…"
  그녀가 쥐고 있던 술잔이 마구 흔들렸다.
  "나한테 그런 식으로 말해도 되는 건가? 자네가 뭔데? 아무것도 모르면서 
어떻게…"
  "알리슨 아머니 아니세요? 그 사람이 얼마나 어머님을 사랑하는 줄 아세요? 
완벽하고 나무랄 데 하나 없는 여인의 표상…"
  "그만 해. 그만 하지. 난 완벽하지 않아."
  그녀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렇게 되고 싶지도 않아. 너무 큰 짐이야. 너무 무겁고 힘들단 소릴세."
  "이젠 걱정할 필요없겠군요. 짐을 벗어 던졌으니까."
  그녀는 차갑게 대꾸하는 그를 세밀하게 살폈다. 분노 때문인지 평소보다 그가 
어려 보였다.
  "너무 많아… 자네가 이해 못하는 일이 너무 많아."
  "당연하죠. 얘길 안해주시는데 내가 어떻게 이해하겠어요?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겁니까? 생각만 해도… 얼마나 많은 침대 위에서… 얼마나 많은 사내들과 
싸구려 창녀처럼…"
  "닥쳐!"
  그녀는 술잔으로 탁자를 내리치며 외쳤다.
  "자넨, 꼭 마치…"
  그녀는 갑자기 미친 듯이 웃어댔다.
  "마치 내 애인이나 된 것처럼 구는 이유가 뭐지?"
  "사위니까요. 나는 장모님을 염려하는 가족입니다. 얼마나 자주 이런 곳에 
와서 그런 사람을 만나셨죠?"
  "기분이 동할 때마다, 쾌락을 느끼고 싶을 때마다."
  딱 부러지게 대꾸하는 레니에게 이번에는 벤이 언성을 높였다.
  "왜죠? 도대체 왜 이런…"
  "나도 그 이유는 모르겠네"
  레니는 자신의 솔직한 대답에 스스로도 놀랐다.
  "어쨌든 자네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니까 그 얘긴 그만두지. 내가 만족하면 
그…"
  "그래요? 만족하고 행복하고 자신감에 넘친다구요? 이런 짓하고 다니니까 
활력이 넘쳐나던가요?"
  "얘기했지? 자네가 상관할 일 아니라구!"
  "상관이 왜 없어요? 사랑하는 사람의 일인데요. 상관이 있어도 한참 있어요."
  벤은 레니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낮게 그러나 엄숙하게 말했다.
  "우리 둘 다에게 상관없는 일이에요. 장모님을 처음 뵌 순간부터 느낀 게 
있어요. 뭔지 모르지만 아무튼 이상한 기분이었어요. 나한테 아주 중요한 
분이에요. 아내도 어머님을 사랑하고 있어요. 이유야 어찌 됐든 사랑하는 사람이 
이렇게 콜걸처럼…"
  "오, 벤! 하나님 맙소사. 제발 그만 하지 못하겠나."
  레니는 절망적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정말 왜 이래. 창피하게. 변한 건 아무것도 없어. 자네가 알리슨하고 결혼할 
때 본 그 사람, 레니 셀링거하고 변한 게 아무것도 없다네. 실망했다면 미안해. 
하지만 시간이 지나가면 차츰 잊혀지겠지. 우린 신도 아니고 성자도 아니잖은가. 
너무 완벽한 걸 기대하지 말게."
  벤은 술잔을 내려다보았다. 샐링거란 이름 하나만으로도 분노와 배신감이 
생기던 옛 시절을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가족이 된 몸, 자신이 속한 
가문이 훌륭하고 깨끗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완벽하지 못한 사람이 타인에게 완벽을 원할 순 없겠지."
  생각에 잠겨 있는 벤에게 레니는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자네는 항상 정직하고 솔직하다고 생각하나? 비난 받고 정죄 받을 일이 
없다고 생각해?"
  그년와 마주친 눈을 아래로 내리깔며 벤은 속삭이듯 말했다.
  "결혼 후 난 늘 샐링거 가문의 한 사람이길 원했죠. 하지만 장모님은 그걸 
허락치 않으셨어요. 뭔가를 앗아가려고 노리는 사람처럼 나를 대하셨단 
말입니다. 단순히 알리슨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받아줄 순 없었습니까? 난 
알리슨 한 사람을 원한 게 아니라 샐링거의 모든 가족을 원했어요. 하지만 
장모님은 날 싫어하시더군요. 장인이 날 받아들이지 않는 건 이해가 가요. 
하지만 장모님은 도대체 왜 날 멀리하는 겁니까?"
  "자네는 왜 여기 있는 거지?"
  "여기라뇨?"
  "알리슨과 결혼한 이유를 묻고 있네."
  "사랑하니까 결혼을 한 거죠. 그 사람은 아내예요. 아들도 있어요. 무슨 뜻으로 
그런 질문을 하는 겁니까?"
  "알리슨을 왜 만난 건가?"
  벤의 음성이 조심스러워졌다. 우리가 어떻게 만나게 됐는지 알리슨이 
얘기했을텐데요."
  "그앨 만나려고 일부러 일을 만든 게 아니구?"
  "일부러 일을? 그게 무슨 뜻이죠? 그 사람이 누군지 알고 접근했단 소리예요? 
내가 그걸 어떻게 알고, 그 사람이 누군지 알고 일부러 일을 만들었겠어요?"
  그는 잠시 입을 다문 채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 사람 전남편한테도 이러셨나요?"
  "아니 이러지 않았네. 한 가지 묻겠는데 자네 알리슨하고 돈 때문에 결혼 하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하고 계세요?"
  "모르겠네. 자네가 우리한테서 뭘 원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사랑을 원해요. 날 사랑해주고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을 원하고 
있어요."
  "그게 다라구? 처음부터?"
  "처음부터요."
  그는 레니에게 거짓말을 하면서도 개의치 않았다. 알리슨과 사랑에 빠진 
이상-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결국 그렇게 되고 만 것이 사실이었으므로-그게 
전부였다. 중요한 건 바로 그것 하나뿐이었다.
  레니는 머리를 가로 저었다.
  "미안하지만 벤. 난 믿을 수 없네. 공항에서 처음 본 순간, 뭔가 자네한테서 
냄새가 났지. 알리슨과 사랑에 빠진 얼굴이 아니었지. 그애보다는 우리 나머지 
가족들한테 더 관심이 많은 눈치였어. 아주 조심스럽게 살피고, 뭔가 케내려, 
아니 속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이었어. 누굴 사로잡아 내 편으로 
만들까 살피는 눈빛 말일세."
  "말도 안돼요. 내가 어떤 눈빛으로 어떻게 행동했는지 모르겠지만 처음 
가족들을 만나 흥분하고 들뜬 기분이야 있었겠죠. 누구나 다 그렇지 않겠어요? 
어떻게 이런 식으로 비난하실 수 있죠? 장모님은 사랑 받는 아내, 사랑 받는 
엄마, 고고하고 청결한 마나님이지만 실은 호텔방을 찾아 이리저리…"
  "어쩌면 그렇게 자네 아버지를 쏙 빼 닮았나! 불 같은 성질하며…"
  "아버지요?"
  "성질뿐 아니라 외모도 똑같아. 애써 그 생각을 버리려 해도 안돼. 두 사람이 
너무 닮았어."
  "아버지라뇨? 도대체 장모님이 우리 아버질 어떻게 알죠?"
  "우린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네. 난 열아홉이었고, 그 사람은…"
  "뭐라구요? 자, 잠깐, 아버지하고 장모님하구… 지금 농담하는 거예요?"
  "농담으로 들릴 일이겠지만…"
  "아버지하고 연인 사이였다뇨? 그럼 우리 어머님은요? 난 그때 어디 있었죠?"
  "자네 어머니는 저드가 술주정뱅이라는 이유로 그 삶을 버렸다네. 자넨 어머닐 
따라갔구. 여덟 살, 아니 거의 아홉 살 때였으니까 기억 못하는 게 무린 
아니겠지. 저드, 그 사람을 만나 사랑에 빠진 뒤 꿈 같은 일년을 보냈는데… 
정말 그 사람을 사랑했어."
  레니는 목이 메이고 있었다.
  "그래, 정말이야. 그 사람만큰 사랑했던 사람은 없었지."
  벤은 레니의 고백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버지를 알면서도, 왜… 왜 그 말을 나한테 안한 거죠?"
  "그냥 기다렸어. 자네가 저드를 위해 우릴 찾아낸 것이라 생각해서였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지금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런 생각이 
들었다네. 우연치곤 너무나 인위적인 우연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사람을 알고 
있다고 자네한테 얘기할 수도 없었어. 그 사람하고 함께 한 세월, 그 사람을 
죽도록 사랑했던 그 심정을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에 마음속에 고이 
두고 있었나보지."
  그녀는 벤을 바라보았다.
  "자네 머리카락, 얼굴 윤곽, 눈 사이의 가는 선, 웃는 모습… 너무 똑같애. 
고뇌에 빠진 불행한 사람이었지만 한동안 우린 정말 행복했었지."
  벤은 손가락을 내려다보며 세상을 뜨기 몇 달 전 내내 퀭한 눈으로 세상을 
증오했던 부친을 떠올렸다.
  "우리가 사랑했던 시간이 길고 길다 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충분하지 않으리."
  벤의 중얼거림에 레니는 눈을 크게 떴다.
  "무슨 소리지?"
  "아버지가 좋아했던 시구였어요. 꿈을 말씀하시곤 했죠. 한 소녀가 있었다, 
부드러운…"
  벤은 레니의 굳어진 눈동자를 응시했다.
  "부드러운 손길과 사라지지 않을 사랑을 준 아름다운 소녀. 그게 바로 레니 
샐링거였다니… 믿을 수 없어요. 부러진 의자가 나뒹구는 그 빌리지 어두운 
방에서 아버지와 함께 있었던 소녀가 바로…"
  "그래, 부러진 의자와 바닥엔 매트리스가 있었지."
  그녀는 추억이 담긴 미소를 지으며 옛일을 회상했다.
  "집을 뛰쳐나온 뒤 처음 내 마음을 시험했던 게 바로 그 매트리스였다네. 
저드는 내가 그 시험을 이겨낼 수 없다고 얘기했지. 하지만 난 내 자신을 
이겨보고 싶었다네. 장난으로 저항을 하려했는지, 아니면 진정 고상한 부모들을 
넘어뜨려볼 생각으로 뛰쳐 나왔는지 알고 싶었어.하지만 저드는 그런 날 
떠밀어버렸지. 결국 난 부모한테 다시 돌아가 펠릭스와 정식결혼을 올리게 
됐구… 이제 날 알겠나, 벤? 난 한번도 용감하고 씩씩하게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야."
  "아버진 어떤 분이셨죠? 당ㅇ신에 관한 얘길 별로 하지 않던 분이셨어요. 
그나마 들은 것도 지금은 다 까맣게…"
  레니는 저드에 관해 알고 있는 이야기를 모두 그에게 들려주었다.
  "이제야 보든 게 기억이 나는군요."
  레니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옛 꿈을 이야기하는 동안 벤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하고 이야기에 휘말려 들어갔다. 자신보다 부친을 더 잘 
알고 있는 레니가 부러웠다.
  벤은 그날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버지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열세 살 
나이로 아고시 밖 거리 서적대에서 책 한 권을 훔쳐 허물어진 아파트를 찾았던 
바로 그날, 그는 차디찬 몸으로 매트리스 위에 누워 있던 아버지를 
끌어안아야만 했다. 감겨 있는 눈을 뒤집으려 애썼지만 두 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눈꺼풀에서는 아직 온기가 느껴졌으나 아버지는 영영 깨어나지 않았다. 
벤은 아버지의 시신 옆에서 홀로 흘렸던 눈물을 잊을 수 없었다.
  "내부를 갉아먹던 분노와 원한을 내게 얘기해주곤 하셨죠. 그런 자신이 정상이 
아니란 것도 알고 계셨어요. 잃어버린 것을 내가 찾아줄 거라 얘기했던 것도 
기억납니다. 내가 반드시 복수를, 도둑질한…"
  벤은 순간 크게 숨을 들이키며 뒷말을 잘랐다.
  "왜 말을 하다 마는 거지?"
  벤은 가늘게 치뜬 눈으로 레니를 보았다.
  "모르는 일이라구요?"
  "누군가 저드 회사를 통째로 가져갔다는 소린 들었네. 그 때문에 그 사람이 
술을 시작했다는 것도. 있는 돈 다 털어 세운 그 회사를 잃어버린 뒤 사랑했던 
가족마저 잃고 심하게 흔들릴 때 그 사람을 만났지. 그날 그 사람하고 펠릭스가 
만나서 얘길…"
  이번엔 레니가 말을 하다 멈췄다.
  "누가 있었다구요? 아버지가 펠릭스 샐링거를 또 만났다니, 그 사건 이후에… 
그 얘기 좀 들어야겠는데요."
  레니는 웨이터를 불러 술을 한 잔씩 더 주문했다.
  "들어봤자 마음만 아플걸세."
  "들어야겠어요, 모두 다 전부!"
  그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저녁 약속 취소시켜야겠어요. 장모님도 전화 걸 사람 있으면 하시죠."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자네가 이미 내 저녁시간을 다 취소해버리지 않았나."
  엷게 웃고난 그는 웨이터에게 전화기를 부탁했다. 레니는 전화하고 있는 벤을 
유심히 지켜보앗다. 금발, 푸른 눈, 넓고 얇게 다물어진 입술. 저드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러나 뿔테안경 뒤편에서 빛나고 있는 눈빛은 저드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렬했다. 저드에게 없던 자신감이 몸 전체에서 풍기고 있었다. 
어쩌면 회사를 뺏기기 전 저드에게도 저런 자신감이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것을 
벤은 이어받았을지도 모른다. 아니며 아버지를 잃고난 뒤 험한 세상과 
싸워나가기 위해 스스로 개발해낸 것일까?
  "자, 말씀 계속하시죠. 장인은 어떻게 만나게 된 거죠?"
  벤은 전화를 끊자마자 레니를 다그쳤다. 그녀는 하나도 숨김없이 모든 것을 
자세히 털어놓았다.
  "둘이서 물건을 흥정을 하더군. 난 그때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지. 뭐가 뭔지 
지금도 이해가 안될 정도니, 그땐 어땠겠나? 저드가 날 보낸다는 사실에 그냥 
죽고만 싶었으니까. 대학 때 룸메이트였다는 사람이 무슨 소릴 하는지도 귀담아 
듣지 않았어. 중요한 건 저드가 날 밖으로 내쫓아버린다는 사실 하나뿐이었어. 
날 보내면서 그 사람이 뭐랬는지 아냐?"
  그녀의 목소리는 꿈을 꾸듯 달콤하고 부드러웠다.
  "당신에게 줄 게 아무것도 없어. 당신은 왕국을 받아야 마땅한데 말야. 그는 
아 말을 몇 년 동안 되뇌고 살았지. 그 왕국을 나한테 주기 위해 펠릭스한테 
돈을 받은 거야. 펠릭스가 왜 그 거래를 원했는지 모르지만 그 제안을 
받아들여야 했던 저드의 심정은 알만해. 그 돈을 왜 받았겠나? 내 도움 없이도 
그 돈으로 살아갈테니 걱정 말라는 뜻이었겠지. 그래서 그 사람은 치욕감을 
감춘 채 펠릭스가 내민 수표를 받았어. 그리곤 날 보내버렸어."
  벤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댔다.
  "누가 아버지 회사를 뺏어갔는지 얘기 안하던가요?"
  "아들한테 얘길 했다고 하더군. 아들이 복수를 해줄 거라고."
  순간 레니는 말을 뚝 끊었다. 아주 오랫동안 그녀는 벤의 눈을 뚫어지게 
보았다. 그녀의 얼굴빛은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펠릭스인가? 세상에, 펠릭스가 그랬어? 그때 좀더 두 사람 얘길 신경 써서 
들었다면… 펠릭스가 그래서 그 사람에게 돈을 준거로군. 그 사람은 아무 
말없이 날 보냈구. 하나님! 몇십 년 동안 저드를 죽게 만든 사람과 살았다니."
  몸을 숙여 이마를 손바닥으로 고이고 있던 레니는 잠시 후 자세를 바로 했다.
  "그래서 알리슨과 결혼한 거구만. 저드를 위해 복수하려고."
  벤은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이번에 또 거짓말을 한다면 레니하곤 영영 
돌아설 수 없는 길로 들어서게 될 것 같았다. 의심을 더욱 강하게 키워 결국은 
알리슨마저 흔들어놓을지 모를 일이었다. 정면 대결을 하는 편이 훨씬 나을 듯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긴 했습니다."
  벤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자마자 레니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의자를 뒤로 
밀며 일어나려 했다.
  "잠깐, 잠깐만요. 알리슨을 만난 건 절대 계획된 건 아니었어요. 사실 복수할 
생각은 오래전에 잊고 있었어요. 어렸을 적에 그런 생각을 하긴 했어요. 샐링거 
가족들이 탄 리무진에 거미를 던져버릴 생각 말입니다. 그럼 아버지 재산을 
훔쳐간 펠릭스란 도둑이 후회하리라 생각했었죠. 하지만 흐르는 세월과 함께 그 
생각도 사라져갔죠. 유럽으로 건너가 좋아하는 직장을 찾아 일하고 있는중에 
알리슨을 만나게 된 겁니다. 그 사람과 사귀면서 아버지가 얘기해주던 것을 
다시 떠올리게 됐죠. 오웬, 펠릭스, 아사… 결혼할 때만 해도 난 알리슨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어요. 맞는 말씀이에요. 그냥 셀링거 일가가 되고 싶은 
마음이었죠. 하지만 지금은 아니예요. 알리슨을 사랑하고 있어요."
  그러나 레니의 표정은 여전히 쌀쌀했다.
  "말솜씨가 좋군. 이제 가족의 일원이 되어서 회사까지 품고보니까 알리슨을 
사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는 건가?"
  "그게 아니예요."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지산에게 벤은 절망을 느꼈다.
  "알리슨을 사랑하지 않고 그녀와 계속 살 생각이었어요. 복수할 때까지 
말이죠. 하지만 그게 아니었어요. 그 사람을 내 목숨보다 사랑하게 됐으니까요. 
알리슨이 병원에서 저드를 낳던 날,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 내 마음을 알 수 
있었죠. 그 사람이 내 인생 전부라는 것을 확인했단 말입니다."
  "멋들어진 설명이었네."
  레니는 당장이라도 자리를 뜰 기세였다.
  "우리 모두 앞으로 어떻게 자넬 믿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
  "모두가 사실이에요!"
  분통을 터뜨리는 벤을 바라보며 레니는 그가 어려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난 알리슨에게 내내 성실했고 신의를 지켰어요. 호텔방을 전전하며…"
  "오, 세상에, 벤."
  "그런 얘기하는 거 듣기 싫으시죠? 그럼 난요? 내가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소릴, 난 듣고 싶은 줄 아세요? 믿지 않아도 살 수 없어요. 더 이상 
강요할 생각도 없으니까요. 하지만 알리슨을 생각해보세요. 그 사람이 내 사랑을 
믿지 않는다고 생각합니까? 그 사람은 과거를 몰라요. 현재만 알고 있다구요. 
자신과 저드가 바로 내 인생이라는 걸 철저히 믿고 있단 말씀이에요. 그러니 
장모님도 내 마음을 믿고 가족의 일부분으로 받아주세요. 그것밖에 원하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야지. 그것밖엔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
  레니는 의자를 당겨 앉았다. 벤의 손짓을 보고 술잔을 채우기 위해 다가온 
웨이터를 쳐다보며 레니가 벤을 나무랐다.
  "너무 많이 마시는 것 같은데."
  "집까지 모셔다드릴테니 염려 마세요."
  벤은 굳은 얼굴로 대꾸했다.
  "저랑 같이 한 지붕 밑에서 밤을 보내는 게 싫으시다면 호텔로 짐을 
옮기겠습니다."
  짧게 웃음을 터뜨리며 레니는 두 사람 사이의 긴장을 풀었다.
  "짐을 옮기다니 무슨 소린가? 우리 가족 모두 다 이용할 수 있도록 둘이 
의논해가며 고른 집인데."
  잠시 침묵한 뒤 그녀는 다시 나지막이 속삭였다.
  "우리 둘 말일세. 펠릭스하고 레니라는 사람, 이십팔년간 같이 살았지. 저드가 
날 보내버린 뒤 오개월만에 결혼식을 올렸어. 뭐가 뭔지 몰랐으니까. 부모님은 
날 제대로 버릇 들이는 길이라면서 허락했고."
  그녀는 손가락으로 우리잔을 뱅글밸글 돌렸다.
  "펠릭스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겠네. 어떻게 해야 할지를."
  "두 분이 서로 안 맞는 것 같던데…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필요한 건가요?"
  신경을 써 가며 단어를 고른 벤에게 레니는 희미한 웃음을 보냈다.
  "펠릭스하고 같이 자질 않으니까 다른 사람들을 찾았던 거겠지. 나도 사람이고 
여자야. 그 젊은이들을 통해 쾌락과 젊어졌다는 기분을 느끼곤 하지. 이 소릴 
듣고 싶어서 그렇게 집요하게 물어본 건가?"
  "죄송합니다. 그자들이 열아홉 살로 돌아가게 해주던가요? 아버지와 함께 
사랑을 나눴던 시절로 말입니다."
  그녀는 벤을 응시했다.
  "모르겠네. 듣고 보니 그럴 듯한 말 같군. 잘 모르겠어."
  "우린 둘 다 과거에 사로잡혀 있군요. 서로 믿을 수 있다면 그 과거를 떨쳐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잠시 침묵 후 벤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장모님이 아버지를 사랑하셨다니 괜히 기분이 좋네요. 아버지도 분명 열아홉 
소녀를 사랑하셨어요. 그분이 들려준 얘기를 생각해보면 분명 그랬던 것 
같아요."
  레니는 미소를 지었다.
  "고맙네."
  레니는 갑자기 피곤함을 느꼈다. 몇 시간 사이에 몇 년은 더 늙어버린 것 
같았다.
  "진짜 고맙네. 아까 엘리베이터에서 날 잡아준 것도 고맙구. 너무 오래 
방황했지. 지금 생각해보니 웃기는 일이야. 내 나이에… 그만둬야지, 이젠."
  "그럼 이제 외로움이 닥치겠군요…"
  그녀는 그를 뜯어보듯 주시했다. 그의 강렬한 눈빛이 점점 부드럽고 촉촉하게 
잦아들었다.
  "그래도 외로움하고 살 생각이네."
  벤은 탁자 위로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따뜻하고 강한 손이었다.
  "힘껏 도와드릴께요. 원하신다면 말입니다."
  레니는 다른 한 손을 벤의 손등에 올렸다.
  "물론이지. 원하고 말고. 자네가 우리 가족이 된 걸 기쁘게 생각하네."
  "우리 둘 다 오늘 저녁 펑크냈는데, 우리끼리 멋지게 저녁할까요? 갑자기 배가 
고파지는데요."
  루이는 샘 콜비의 전화를 받고 있었다.
  "페럴리씨하고는 몇 주 후에나 통화를 할 수 있을 겁니다. 새 TV시리즈 
계약문제 때문에 협상중이거든요. 그게 끝나야 될 것 같아요. 불확실한 상태를 
워낙 싫어하는 성격이라서 그럽니다. 이해하십시오."
  "나도 불확실한 걸 싫어하는 사람이오."
  궁시렁거리긴 했어도 콜비는 더 이상 루이를 밀어붙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과 먼저 이야기하면 되는 문제였다. 그는 루이에게 페럴리의 스케줄을 
물었다.
  "이주 후에 다시 전화할 테니 그때 시간을 정합시다. 국내에 있을 예정이죠?"
  "삼월까진요. 그 다음엔 파리에 갑니아. 페럴리씨가 주연한 기록영화가 그곳 
영화제에 출품됐거든요."
  "아, 그 영화 나도 듣긴 들었어요. 이름이 뭐더라? 그 감독이 내내 쫓아다니며 
찍었다든데."
  "폴 젠슨. 로스엔젤레스에서 활동하는 유명한 감독인데, 물론 알고 계시겠죠?"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제임스 본드 영화나 서부영화, 많이 양보해 
SF영화라면 모를까, 기록영화라니 이름만 들어도 고개가 설레설레 흔들어지는 
분야였다.
  "그래, 직접 주연한 영화를 보기 위해 파리로 가신다구요?"
  "그렇다고 볼 수 있죠."
  "영화를 아직 안 봤나보죠?"
  "네, 아직요. 젠슨씨하고 그렇게 계약이 됐거든요. 개봉 전까진 참기로요. 이게 
다 페럴리씨 아파트 도난사건과 관계있는 질문들인가요?"
  "나는 시간 낭비하는 사람이 아니오."
  콜비는 멋지게 받아칠 말을 생각하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수사할 땐 모든 정보가 다 씨앗이죠. 어떤 씨는 뿌리를 내리고, 어떤 씨는 
헛되이 그냥 날아가버릴 수도 있겠죠. 하지만 훌륭한 수사관은 그 씨앗을 한 
톨도 소홀함 없이 대하는 법이예요. 그중 어떤 놈이 땅에 떨어져 싹을…"
  "알겠어요. 이주 후에 다시 전화를 해보세요. 그때 가서 최대한 협조할 
테니까."
  콜비는 천천히 수화기를 내렸다. 매니저들이란 원래 바쁜 사람들이라는 것을 
미리 알아야만 했다. 그에게 가장 큰 문제는 정보를 줄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예전의 끄나풀들은 은퇴했거나 아예 세사을 떠나버렸고, 사무실에 
있는 보험사 젊은이들은 샘 콜비와 바에 마주앉아 있기 보다는 마누라와 
자식들이 있는 집으로 달려가는 것을 더 좋아했다.
  빨리 적당한 사람들을 찾아내야지. 그럴려고 여기까지 왔지 않나. 그러나 
그에겐 만날 사람이 없었다. 플라비아 구아르네리는 이월까지 이탈리아에 있을 
예정이었고, 시드와 아멜리아 라프톤은 일주일 예정으로 팜 스프링스로 떠난 
상태였다. 카를로스 세라노는 멕시코에, 브리트 페럴리는 무슨 일이 결정되지 
않아 코빼기도 안 보여주겠다는 상황이었다.
  "그래, 맞아. 폴 젠슨이 있구만!"
  그는 무릎을 쳤다.
  "그 잘난 페럴리보다 페럴리를 더 잘 알고 있을 꺼야."
  하지만 폴은 로스앤젤레스에 있었다.
  "그럼 내가 가면 되지, 뭐."
  콜비는 우선 폴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밤 떠날 테니 내일 아침 봅시다."
  "내가 도와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시간을 얼마나 낼 수 있을지도 
말입니다. 데드라인에 걸린 편집 때문에 도통 시간이 안 나는데, 아무튼 
오십시오. 아침 식사 때 같이 만나는 걸로 하죠."
  그가 말하는 벨 에르 주소를 받아적으며 콜비는 콧노래를 부르고 있ㅇㅆ다. 
할 일이 생겨 바쁘게 움직일 수 있다는 생각에 그는 너무나 뿌듯했다.
  다음날 아침 일곱시 정각 폴의 집을 찾아간 콜비는 그와 함께 베란다에 
마주앉았다. 벨 에르라는 말 그대로(벨 에르는 아름답고 신선한 공기라는 프랑스 
어 : 역자 주) 분수가 뿜어오르듯 상큼하게  다가오는 아침 공기를 마시며 
콜비는 주변 경관에 감탄어린 눈길을 보냈다.
  "새가 아니라 사람으로 태어난 걸 감사해야 되겠는데요. 새들도 이 멋진 
광경을 볼 수는 있겠죠. 하지만 어디 우리처럼 느끼기야 하겠소?"
  폴은 그를 보며 웃었다.
  "커피 드시죠? 다른 것들도 마음껏 드십시오."
  식탁에는 계피 롤빵, 아몬드 크루아상, 건포도 머핀(살짝 구운 둥글 넓적한 빵 
: 역자 주)이 들어 있는 바구니, 여러 종류의 과일이 듬뿍 담긴 오목한 접시가 
놓여 있었다. 빠짐없이 완벽한데 여자가 없구만. 콜비는 바구니에서 빵을 
집어들며 폴 젠슨이 결혼했는지 궁금해졌다.
  "어떻게 도와드리면 될까요?"
  콜비는 긴 회담을 준비하는 자처럼 등받이에 느긋하게 몸을 기댔다.
  "브리트 페럴리에 관한 질문을 좀 하고 싶어서요. 영화 찍어가면서 내내 
그자를 관찰했을텐데, 딴 건 모르지만 한 가진 확실하게 얘기해줄 수 있을 
겁니다. 사람들 말로는 그 사람 빈털터리라던데, 그게 사실입니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인데요."
  폴은 일언지하에 콜비의 질문을 묵살했다.
  "본인한테 직접 물어보시죠."
  "그런 건 직접 물어서 될 일이 아니잖소. 젠슨씨, 나는 보험수사관입니다. 
페럴리가 가짜로 레밍턴 도난을 신고했다면 어떻게 생각하시겠소?"
  "보험료 때문에?"
  콜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생각조차 해보지 않은 일아라서. 그게 
없어졌다는 걸 알고 그 사람 무척 화를 내던데."
  "하지만 그게 다 쇼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소? 내 말은 
의도적으로…"
  손가락을 쪽쪽 빨아가며 계피빵을 다 먹은 그는 다시 침 묻은 손으로 머핀을 
집어들었다.
  "모든 것에 가능성을 두고 수사를 하기 때문에 하는 소리오. 원래 주굴 
빈정대거나 비난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그런 질문했다고 날 이상한 사람으로 
보진 말아요. 내가 얼마나 사랑이 많고 정이 많은지 모를 거요. 특히나 일 당한 
사람한테는 끔찍할 정도지. 그건 하나님도 아실 거요. 하지만 수사망에 걸린 
사람들에게는 가차없지. 그러니 이 방면에서 최고가 괸 것 아니겠소?"
  "최고라구요?"
  폴은 재미나다는 듯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띄웠다.
  "최고지. 돌아다니면서 물어보시오. 상장도 받았고, 감사장은 부지기수지. 어떤 
이는 가짜 예술품이란 책을 쓰면서 내 얘길 써 놓았더군. 책 속에세 내 이름을 
읽으니까 기분이 진짜로 근사하던군. 주책 없다고 할지 모르지만 나도 명성을 
지닌 사람이 됐구나 하는 느낌이었죠."
  "주책이 없다뇨.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폴은 콜비의 잔에 커피를 채웠다.
  "아무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페럴리가 가짜 도난신고를 할 수 있었을까, 
돈이 필요했나, 머리가 잘 돌아가는지 등등 그런 걸 종합해보면 뭔가 나올 듯 
싶은데 말입니다."
  "브리트가 가짜로 신고하진 않았을텐데요."
  "다음 질문은 그럼..."
  "직접 물어보라니까요."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인가요?"
  "그렇다라고 대답하면 어쩌실 건가요?"
  "끝내주는 머핀인데, 부인께서 직접 만들었나보죠?"
  콜비는 대답 대신 딴 소리를 했다. 부엌에 있는 에밀리를 상상하는 순간 폴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아닙니다. 집 사람은 일 때문에 로스앤젤레스에 없소. 질문 또 있습니까?"
  콜비는 아무 수확도 없이 떠나는 아침 시간을 안타깝게 붙잡으려 했다.
  "에, 또, 몇 가지가 더 있긴 합니다만, 우선..."
  그는 폴이 대답할 수 있는, 아니 그보다 그가 흥미를 느낄 수 있을 만한 
질문을 찾기 위해 회색빛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연신 긁어댔다. 여행할 때 
호텔방이나 파리 아파트 등지에 루이가 얼마나 자주 나타났는지, 연주 여행 
동안 페럴리가 열었던 파티와, 기아를 위해 그가 벌어들인 모금 총액, 그 총액 
중 페럴리가 개인적으로 빼내 쓴 경비 등에 관해 콜비는 전반적이고도 날카로운 
질문을 퍼부었다.
  "일 달러도 없었어요."
  콜비의 마지막 질문에 짧게 대답한 뒤 폴은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예기를 아주 재미있게 하시네요. 하지만 이젠 진짜 가봐야 돼요. 한 시간 
전에 스튜디오에 도착했어야 되는 건데."
  "같이 가도 되겠소? 필름 편집은 한 번도 구경 못 해봤는데."
  폴은 말도 안된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곤란해요. 죄송합니다. 내 동업자와 영화 기금을 낸 PBS 중역진만 볼 수 
있습니다. 개봉 전까진 모든 게 다 비밀이거든요."
  "영화제 나가나보죠? 루이 글라스가 그러는데, 아카데미상 같은 건가?"
  "그건 아니고, 기록영화만 모인 영화제죠."
  그는 콜비에게 손을 내밀었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저녁 어떻소? 나야 사람 만나는 게 직업이고 가진 거라곤 시간뿐이니, 저녁 
살 기회를 좀 줘봐요. 영화 얘기도 좀 들려주구. 어떻소? 부인도 멀리 갔다면서 
저녁 혼자 할 순 없잖소?"
  폴은 마지못해 승낙하고 말았다.
  "그러죠. 일곱시까지 스튜디오로 오시겠어요? 거기서 직접 식당을 찾으면 
되겠네요."
  그는 메모지 위에 스튜디오 주소를 적었다.
  "자, 주소 여기 있습니다. 그럼 그때 다시 뵙죠. 보험수사관의 인생행로에 대해 
말씀해주실 거죠?"
  "아, 원하다면 얼마든지 해드리겠소. 뭐든 예길 해야 얻어지는 것 아니겠소. 
대신 도움될 예길 꼭 해주길 바래요. 진짜 ㄷ둑이 누군지 밝혀내야 되지 
않겠소."
  "브리트에 관한 얘긴 다 해드렸는데."
  "그 얘기 말고 다른 얘길 물어보려고 그래요. 지금 난 페럴리씨 도난사건만 
맡고 있는 게 아니예요. 네 사건을 하나로 묶어 보고 있거든 네개가 아주 
비슷한 케이스이기 때문이오."
  이미 베란다를 벗어나 걸아가는 폴을 따라 콜비는 짧은 다리를 바쁘게 
움직였다.
  "이따 저녁 때 다시 예기합시다. 단서를 찾도록 도와줄 수 있을 거요. 오십년 
넘게 일한 경력과 예리한 육감을 갖고 하는 소리니까 틀림없는 거요."
  폴은 연신 혼자 떠돌며 따라오는 콜비를 뒤에 달고 거실을 거쳐 차고로 
내려갔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샘 콜비를 과소평가하지.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들 
자신들이 바보였다는 걸 알게 된다니까. 이따 저녁 때 그것도 얘기해줄 테니 
기대해보시오."
  폴이 차문을 열어젖히자 상대없이 떠들어대던 콜비도 하릴없이 렌터카 쪽으로 
등을 돌렸다. 
  "중요한 건 말이오. 내 별명이 끈끈이주걱인데 한번 물면 절대 놓치지 않는 
성격이란 소리요. 연관성이 있는 걸 빤히 알면서 손을 놓을 수는 없지 않겠소. 
도둑 뒤에 누가 있는지 꼭 찾아내겠소. 그것만은 확신해도 좋아요."
  속으로 빙그레 웃어가면 폴은 차를 출발시켰다. 찾긴 찾을 것 같아. 폴은 내심 
그의 끈기에 감탄했다. 그에게서 프로급 추적자만이 지닐 수 있는 완고하고 
빈틈 없는 집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어느새 콜비와의 저녁을 기다리고 있었다. 샘 콜비라는 인물과 미술품 
도둑의 어두운 세계를 보다 더 상세히 알고 싶은 욕망에서였다.
  진한 흥분이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 숫구치고 있었다. 화려한 경력으로 
매혹적인 분야에서 뛰고 있는 수다스런 노인, 예술품과 금전이 국제적으로 
연결된 세계, 미궁에 빠져 있는 네가지 도난사건...그는 다음번 영하 주제를 
찾아낸 기쁨에 액셀러레이터를 더욱 힘껏 밟았다.

    26장
  정말 난 운이 좋은 사람이야. 엄마 같은 친구가 있다니 말이야. 주문을 끝낸 
지니가 고개를 돌려 텍사스 사투리로 이야기를 걸어 올 때까지 로라느 푸근한 
마음으로 지니에게 고마움을 보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지금 파리 여행중이었다. 지니가 일에 지친 로라를 위해 마련한 
여행이었다.
  "자, 우리 어디까지 얘기하다 말았지?"
  "고맙고 감사하단 소릴 제대로 못했다구요."
  "그래, 거기까지 말했지. 감사하긴. 따지고 보면 내가 오히려 고마운 걸. 
사람들 데리고와 파리가 내 고향인 양 소개하는 재미도 얼마나 좋은데. 
더군다나 로라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인 걸. 정말이야. 나한테 이런 기횔 
줘서 고마워하고 있어. 사람들은 말야, 돈 많은 사람한텐 지나치게 허릴 굽히지. 
마치 내가 자기들 인생을 만들어주기라도 한 것처럼 떠받들고 난리를 떤다니까. 
돈을 좀더 달라는 얘기지. 모두 다 쓰레기 들이야. 하지만 로라는 그 사람들하곤 
완전히 달라. 정말로 감사하는 마음이 나한테 확실하게 전해졌으니까. 감사하단 
소리도 자주 안하구 말야. 그래서 나도 정말 이번 여행을 신나게 즐길 수 
있었지. 한마디 더 해볼까? 난 지금 로라를 통해 교육 받고 있는중이야. 파리에 
와서 호텔들 뒤지며 탁자보까지 검사해본 적이 몇 번이나 있을까? 쇼핑 
일정중에 커튼 가게를 몇 번이나 가봤나? 여태 한 번도 없었어. 매일 단 한 
시간도 쉬지 않고 일하는 여자. 로라는 원더우먼이야."
  "왜 쉬지 않아요? 이건 일이 아니예요. 일은 여기서 배운 걸 실제 이용할 
때부터 시작되는 거죠."
  "그럼 우리 마지막 날을 아주 신나게 보내보자. 지금 보다 더 신나게 말야. 
저녁은 르도양에서 먹자. 가보면 아마 기절할걸. 너무 근사해서. 그 다음엔 뉴 
모닝으로 재즈를 추러 가자구. 점심을 먹고 다시 퐁피두로 갈까? 가까우니까 
그게 낫겠어. 파리 예술에 질리지만 않았다면 말야."
  "질리긴요. 아주 신나는데요."
  지니는 로라의 감탄에 만족감을 표시했다.
  "내가 짠 계획을 인정해주는 사람하고 여행하는 기분이 어떤지 모르지? 계속 
이게 좋다 저게 싫다 하는 사람은 정말 피곤하다니까"
  그러나 로라는 다음 파리여행만큼은 혼자 오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번 
여행은 지나가 주관한 지나의 여행이었다. 남이 만들어놓은 건 별 흥미가 
당기지 않는 그녀였다. 파리는 그녀에게 매우 특별한 도시였다. 물론 여느 
도시들처럼 슬럼가와 부촌이 존재하고 쓰레기가 뒹굴기는 했으나 다른 도시가 
흉내낼 수 없는 파리만의 독특한 맛이 있었다. 파리에 발을 디딘 지 일주일만에 
그녀는 마치 고향에 있는 듯한 기분을 맛보고 있었다.
  지니와 함께 점심을 끝낸 뒤 로라는 그녀가 이끄는 대로 볼거리가 산재해 
있는 드넓은 퐁피두 건물을 가로질러 나갔다.
  "야외 박물관 같지. 건물 밖도 좋지만 여기도 대단한 곳이야. 생기발랄하잖아. 
그림, 조각, 텔레비전, 영화, 오디오가 모두 한 곳에..."
  "로라!"
  바리톤의 굵고 낯익은 음성이 지니의 말을 끊게 했다.
  "세상에. 파리 한복판에 우리 로라 아가씨께서 나타나시다니!"
  주변 사람들이 로라와 지니를 동시에 얼싸안고 떠드는 브리트 페럴리를 
구경하고 있었다.
  "두 숙녀분들께서 여기 웬일이실까. 세상 참 좁다. 안 그래요? 두 사람 재수 
끝내주게 좋은 거 알아요? 제 때 나타나셨다구! 여기서 영화제가 열리고 있거든. 
다큐멘터리, 기록영화! 시네마 뒤레엘."
  그는 프랑스어를 난도질하며 버럭버럭 소리 질렀다.
  "우리 영화가 본선에 일등으로 올라갔어. 폴이 이겼어! 아직 구경도 못해본 
영화지만, 안 봐도 훤해. 멋진 영화가 틀림없다니까. 예선 통과했으니까 뻔할 
뻔자 아니겠어. 아주 잘됐어. 우리랑 오늘 같이 다닙시다. 로라는 내 옆자리에 
앉아서 보면 돼요. 내가 흥분하면 손도 좀 잡아주고. 대답 좀 해봐요. 왜, 
싫어서? 나랑 영화보는 게 싫어?"
  "글쎄, 갑작스러워서..."
  "폴도 여기 있을 거야, 감독이 영화제에 안 왔겠어? 분명 여기 왔을 거야"
  "브리트, 아무래도 안되겠어요."
  페럴리가 연 파티 이후 그녀는 될 수 있는 한 폴 생각을 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지니하고 다른 델 가기로 했어요. 미안해요."
  "꼭 한 시간인데 뭘. 지니, 같이 가자고 얘기 좀 해줘요."
  "로라 마음이지 내 마음인가?"
  "젠장, 로라! 내가 영화에 나왔는데, 그것도 처음으로... 제발 내 옆에 
앉아줘요."
  손을 잡아쥔 채 자꾸만 가슴으로 끌어당기는 브리트의 애걸에 로라는 
난감했다. 그냥 영화만 보고 나오면 괜찮치 않을까.
  그녀의 얼굴 표정을 지켜보며 지니는 재빨리 결정을 내렸다. 가고는 싶은데 
겁이 난다, 이거지. 그런 생각으로 지니는 로라를 부추겼다.
  "가보지, 뭐. 천상 이 근처에서 여섯시까지 있다가 저녁을 먹을 생각이었거든."
  "저녁도 우리랑 함께 먹자구.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그건 신경쓰지 말고. 
세상에, 이렇게 재수가 좋다니..."
  결국 로라는 브리트를 따라나서고 말았다. 지니는 엘리베이터 창문 밖을 
멀거니 쳐다보고 있는 로라를 안쓰럽게 보았다.
  강당에 들어서자마자 브리트는 사람들을 헤쳐가며 로라를 씩씩하게 안내했다.
  "폴!"
  브리트는 주위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목청을 돋우었다.
  "여기 보라구. 내가 누굴 모셔왔나! 기적 같지? 내가 기적을 일으켰어."
  앞자리에 앉아 있던 폴은 브리트를 돌아보았다. 로라는 폴 옆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자 멈칫했다. 폴의 아내인 에밀리가 있었고 그 옆에는 토마스와 
바바라 젠슨, 레니가 너무 놀라서 입을 벌린 채 로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달아날 구멍은 없었다. 아니, 도망가고 싶지는 않았다. 어떻게 되든 한번 
부딪쳐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제 옛날의 로라가 아니지 않은가.
  "로라, 세상에... 반가워라. 못 알아보겠네. 너무 아름다운걸. 영화 끝난 다음 
같이 얘기하기로 하고 우선 여기 앉자."
  예전과 다름없이 레니는 로라를 향해 따뜻하게 웃고 있었다. 소개를 시키려고 
했던 브리트는 마치 희극배우같은 멍한 얼굴로 토마스와 바바라가 로라와 
인사를 나누는 것을 지켜보았다.
  "원래 아는 사이였어요? 세상 참 좁네. 하지만 지니는 모를 거야."
  그는 신나게 지니를 소개시켰다.
  "자, 난 또 잠깐 실례를 해야겠습니다. 누가 날 밖에서 기다리거든. 금방 
돌아올 테니 기다리시라."
  브리트는 홍해를 가르는 모세처럼 인파를 헤치며 밖으로 나갔다.
  폴은 레니 옆에 앉은 로라와 이야기를 나누려고 그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브리트를 만났다니 참 잘됐네요. 휴가중인가 봐요? 여기 와줘서 고마워요."
  마치 연애를 처음하는 소년처럼 어색하지 짝이 없는 자신에게 폴은 화가 
치밀었다.
  "영화 축하해요. 브리트가 그러는데 본선 진출했다면서요."
  맞부딪힌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엉겨붙었다.
  "고마워요."
  잠시 후 자리에서 일어난 폴은 에밀리를 로라에게 소개했다.
  "집사람을 소개하고 싶은데. 에밀리 젠슨, 로라 페어차일드."
  "안녕하세요."
  에밀리의 눈빛에는 신경질이 어려 있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골치 아프다는 식으로 눈썹을 곤두세운 채 자리에서 일어난 에밀리는 토마스, 
바바라, 레니를 사이에 두고 로라의 손을 잡았다.
  "사진에서 많이 봤어요. 아주 대단한 모델이더군요."
  그제서야 에밀리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어떻게 해서 모두다 로라를 알고 
있는지 알 순 없지만 모델직에 찬사를 보내는 것만으로도 에밀리의 짜증은 
순식간에 달아나버렸다.
  "고마워라..."
  여왕처럼 느긋하게 찬사를 받아들이며 에밀리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때서야 바바라와 토마스가 로라에게 아는 체를 해왔다.
  "아주 근사한데, 로라. 정말 아름다워."
  "감사합니다."
  짧게 대답한 로라는 입을 다물었다. 토마스와 바바라도 더 이상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다들 어색한 얼굴로 영화 프로그램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레니와 로라는 한동안 서로의 얼굴을 살폈다.
  "젊은 여자가 품위있기가 쉽지 않은데 진짜 우아하고 멋지네."
  로라에게서 대답이 없자 레니는 다시 말했다.
  "몇 년만이지?"
  "칠년이요. 아니, 육년이군요. 법정에서 서로 만났으니까."
  레니는 로라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나이 들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확실히 
스물여덟 살 보다는 성숙해 보였다. 알리슨과 동갑이지만 훨씬 더 세월의 
흐름을 타, 고통과 절제가 배어 있는 모습이었다. 최고급 디자이너 의상을 입고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로라 페어차일드. 레니는 그녀의 가슴속에 
담겨있을 독기와 분노가 궁금하기만 했다.
  "성공했다면서? 얘기 가끔, 아니 자주 듣고 있지. 호텔 건 축하해도 되겠지?"
  "감사합니다."
  무대 위에 대형스크린에 영상이 비치기 시작할 즈음 로라는 자세를 똑바로 
세웠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레니를 사랑했다. 그녀의 
사랑을 바라고 있었고, 계속 그녀처럼 되길 원했다. 정열과 감정을 완벽하게 
제어할 줄 아는 레니의 조용하고 침착한 성품을 로라는 정말 닮고 싶었다.
  "호텔 얘기 좀 해줄래? 너한테 그게 다 돌아갔다는 게 당연하단 생각이 든다.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하기도 하구. 그동안 다들 너무 힘든 시간이었지. 안 
그러니? 우리 모두 그러는 게 아니었는데. 사과하고 싶다, 로라."
  그녀는 안타깝다는 듯 갸날픈 손가락을 허공에서 몇 번 흔들었다.
  "이런 얘기 할 만한 적당한 장소와 시간이 아니란 건 안다만..."
  "알리슨은 어때요?"
  "오, 잘 있지. 아주 행복해. 결혼했단다. 알고 있니? 벤 가드너란 사람하고 
말이다. 처음엔 별로 였는데 알고보니 아주 괜찮은 사람이더라. 정직하고, 곧고. 
알리슨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어머, 그러고 보니까 두 사람이 좀 닮은 것 같네. 
머릴 돌릴 때라든가 누굴 바라볼 때 눈빛이라든가..."
  그녀는 말 중간에 눈을 반짝이며 로라를 유심히 살폈다.
  "말해놓고 보니까 진짜 비슷한걸. 벤하고 비슷해. 아기도 있단다. 아주 아주 
귀여운 녀석이지. 오월이면 한 살이 된다. 알리슨은 친구하고 화랑 하나를 
경영하고 있지. 오늘 여기 같이 올 생각이었는데 시간이 나질 않아 못 왔단다. 
네가 여기 왔다는 것 얘기하면 아주 속상해할걸. 널 못 만나서 말야. 널 
그리워하고 있는 것 같더라. 우리 가족 모두 힘들었던 과거는 잊어야 한다고 
생각해."
  "펠릭스는요?"
  로라의 어조는 여전히 평이했다.
  "펠릭스도 과거를 잊자고 하던가요?"
  "아니. 하지만 펠릭스하고 난..."
  그녀는 갑자기 말을 삼켜버렸다.
  "네 얘기나 좀 해주련? 호텔들, 그리고 회사 말이다. 궁금하구나. 그렇게 짧은 
시간에 그만한 일을 해내다니. 기적이야."
  "직접 가서 확인해보지 그러세요?"
  로라는 레니에게 차갑게 쏘아 붙였다.
  "얼마만한 기적인지, 얼마만큼 믿을 수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잖아요? 언제 오시겠다고 말씀만 하세요. 뉴욕 비콘 힐에 예약해드릴 
테니까. 원하시는 만큼 머물러도 좋습니다. 최선을 다해 우리 고객으로 모실 
테니까요."
  분노가 섞여 있긴 했지만 레니는 그녀의 말이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아주 
과감하고 재치있는 초대였다. 못 갈 것도 없지. 펠릭스가 알면 펄펄 뛰겠지만 
그건 내 알 바 아니잖아. 레니는 로라가 세운 호텔을 직접 구경하고 싶었다.
  "내 생각..."
  그녀가 입을 연 순간, 사회자가 조명을 받으며 무대에 나타났다. 인사말을 
시작으로 사회자는 분야별 본선에 오른 폴 젠슨의 영화를 간략하게 소개했다. 
조명이 사라지며 영화가 시작되는 순간 어딘선가 젊은 여자를 데리고 들어온 
페럴리가 앞열 맨 끝 좌석에 앉는 모습이 보였다.
  미국의 영웅이라는 영화제목이 워싱턴 쇼핑몰 무대 위의 브리트 페럴리를 
배경으로 큼지막하게 나타났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로라는 레니를 향한 분노도, 
폴이 아내와 부모 옆에 앉아 있다는 사실까지 모두 까맣게 잊었다. 완전히 
영화에 빨려들어간 느낌이었다.
  카메라와 해설자는 텔레비전에 뻔질나게 나왔던 브리트 페럴리의 초창기 
시절부터 팔개월 전에 끝난 기아돕기 연주여행까지를 긴장감 있게 보여주고 
있었다. 관중들이 숨이 넘어갈 듯 환호하던 초창기 시절, 환하게 빛나던 
브리트의 백만 달러짜리 미소가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옛 앨번 사진들, 
((피플))과 ((에스콰이어지))에서 발췌된 부분, 심야 토크쇼 장면들이 그의 
고교와 대학 시절의 부드러운 반주에 맞춰 흘렀고, 빛이 점점 사라져가면서 
빠른 노랫가락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영웅이 전락하는 시기였다. 연속 드라마에 나오던 영웅이 갑자기 사라진 뒤 
기자회견장에 나와 떠드는 장면이 나왔고, 수렁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필사적으로 달라붙었던 그의 기아돕기 연주여행이 펼쳐졌다. 그리고 수천 명의 
팬이 다시 모여들어 그에게 다시금 환호를 보내는 워싱턴 연주회장 장면이 
마지막을 장식했다.
  군중 너머 지평선을 바라보며 마이크에 매달린 패럴리. 군중들이 기억하고 
있는 노래를 부르던 그의 목소리가 일순간 커졌다 사그라드는 순간, 갑자기 
브리트 옆으로 또 하나의 브리트 페럴리가 나타났다. 젊고 강인하고 자신만만한 
페럴리와 현재 워싱턴에서 군중과 노래하고 있는 페럴리. 전혀 다른 인간이었다. 
어느 순간, 젊은 페럴리가 화면에서 서서히 사라지고 현재의 브리트 페럴리가 
쫓기는 듯한 퀭한 눈으로 화면 속에서 커지기 시작했다. 그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아무도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퀭한 얼굴의 브리트 영상이 정지한 순간 장내에는 박수가 쏟아져나왔다.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불이 들어왔지만 박수는 그칠 줄 몰랐다. 사회자는 폴을 무대로 끌어올렸다. 
레니와 로라는 박수를 치며 서로를 보고 웃었다. 한순간이지만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다가 로라는 갑자기 두 손을 차갑게 내렸다.
  관중들은 기립박수를 보내며 폴에게 환호성을 질렀다. 로라는 브리트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영화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분들께, 특히나 
브리트 페럴리에게 모든 감사를 드린다는 폴의 짧은 인사말을 주인공은 끝내 
들을 수 없었다.
  무대로 올라간 에밀리는 폴의 품에 안겨 그에게 환호를 보내는 관중들의 
열기를 나누고 있었다. 레니는 바바라와 연신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로라는 
자신이 일어날 시간이 지금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샐링거 가족들과 함께 
있었지만 그들과 기쁨을 나눌 수는 없었다. 저 사람들의 기쁨이지, 내 기쁨은 
아니야.
  "폴한테 축하한다고 전해 주세요. 훌륭한 작품이에요. 우린 그만 가봐야겠어요. 
최고라고 말씀해주세요."
  "그러지."
  로라가 젠슨 부부와 짧게 인사를 나누는 동안, 레니는 지니에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다시 로라에게 얼굴을 돌렸다.
  "또 볼 수 있겠지?"
  로라는 그녀를 깊게 들여다 보았다.
  "그러길 바래요. 제 호텔 구경오시라고 초청드렸죠?"
  "그랬지."
  그녀는 웃으며 로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래, 한 번 가볼께. 비콘 힐 호텔 손님이 되다니, 무척 기쁜데."

  오월, 필라델피아 병원 부인회 측은 연례 자선 패션쇼와 축하 점심 파티를 
비콘 힐 신축호텔 개장 하루 전에 호텔 식당에서 개최했다. 혼자 또는 남편과 
함께 패션 쇼에 참가한 삼백여 명의 회원들은 로라 페어차일드가 특별히 
준비해둔 프로그램에 따라 화려하고 우아하기 이를 데 없는 호텔 견학을 끝낸 
뒤 초대손님 명부에 일일이 서명을 했다. 비콘 힐 호텔 어느 곳이나 자동적으로 
예약이 가능한 신분으로 인정 받은 격이었다.
  완숙한 프랑스 와인 몽트라셰가 곁들여진 점심 식탁에는 탁자, 냅킨 등과 
조화를 이룬 붉은 장미가 향기를 뿜고 있었다. 고개를 움직이지 않고 쇼를 
구경할 수 있도록 높게 설치된 쇼 무대도 독특했지만 여느 패션 쇼장과는 달리 
배경음악도 무대를 죽이지 않는 한도내에서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기부금으로 백만 달러가 모아졌을 뿐만 아니라 로라의 제안에 따라 쇼에 
참가했던 톱 디자이너들과 손님들에게 팔린 무도복, 스포츠 용품, 란제리 판매액 
이백만 달러 중 상당액이 병원 측에 헌납됐다.
  로라는 호텔 개장 후 일주일간 필라델피아에 머물렀다. 그녀는 시카고와 뉴욕 
호텔 개장 때 주의 깊게 기억해두었던 세부사항들을 새 호텔에 적용시켜가며 
호텔을 꼼꼼히 둘러보았다. 클레이는 리넨 제품에 생긴 하자 문제 때문에 
남부지장으로 날아가 생산 라인을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따스한 햇빛과 함께 수요일 오후 뉴욕 비콘 힐을 찾은 레니 샐링거는 로라 
대신 완벽한 친절을 베푼 지배인의 안내로 펜트 하우스로 올라가는 절차를 
밟았다.
  "필요하신 일이 있으시면 이십사시간 어느 때고 절 찾아주십시오, 부인."
  지배인은 비콘 힐 호텔 전 체인에서 사용하는 플라스틱 카드를 레니에게 주면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수화기만 들어주시면 됩니다. 제가 아니면 부지배인들이라도 항상 대기하고 
있습니다. 자, 그럼 올라가시지요. 부지배인이 부인을 모실 겁니다."
  레니가 돌아섰을 때 한 남자가 카운터로 다가왔다. 갈색 피부에 웃는 모습이 
눈부신 남자였다. 모든 여자를 사로잡을 만한 미소였다.
  "아, 세라노씨."
  레니는 호텔 데스크 관리인이 하는 소리를 들었다.
  "방금 전에 받은 메모가 있습니다. 샘 콜비라는 분이 오늘 저녁에 
만나뵙겠다면서 전화를 부탁하셨습니다. 전화번호가, 잠깐만..."
  관리인이 메모지에 전화번호를 적어주자 세라노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안되는데, 나 대신 전화 좀 해줘요. 다음 시간 있을 때 다시..."
  로비 뒤편 엘리베이터 쪽으로 다가가느라 레니는 그의 말을 끝까지 듣지 
못했다. 그곳에는 마호가니로 장식된 엘리베이터 네대가 우아하게 빛나고 
있었다. 레니는 그 마호가니를 기억하고 있었다. 오웬이 호텔을 처음 지었을 
당시 무리하게 투자를 했다던 마호가니였다. 프랑스제 벽걸이는 새것이었지만 
레니는 오웬의 모든 것을 최대한도로 지켜내려 애썼던 로라의 노력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런 노력은 로비뿐이 아니었다. 고풍스런 벽 촛대, 새것이긴 했지만 옛 
분위기를 그대로 표현해낸 붓꽃 카펫, 일세기 전 풍경을 그린 잔잔한 
풍경화들이 옛시절을 회상시켜주고 있었다.
  그녀는 부지배인을 따라 펜트 하우스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펜트 
하우스는 박하향이 나는 녹색과 아이보리로 치장된 객실로 이루어져 있었다. 
프랑스식 커피탁자 위에는 난초가 놓여있었다.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색깔과 
꽃이 어우러진 방이었다. 난초 옆 차주전자에서는 모락모락 따스한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난초화병 앞에는 아이리스 무늬가 새겨진 메모 카드가 
세워져 있었고, 그 속에는 로라가 남긴 인사말이 적혀 있었다.
  "편안하게 머무세요. 로라/"
  공단 베개가 올라 있는 대형 침대를 곁눈으로 바라보며 거실 한가운데 서 
있던 레니는 마치 집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인들이 주야로 대기하고 
있는 편안한 집. 세계 어디를 다녀보았어도 뉴욕 비콘 힐만큼 아늑한 호텔은 
처음이었다.
  삼일 정도 묵으면서 로라가 경영하는 호텔을 살필 생각이었으나, 자단 상자에 
들어 있는 에르메스 거품 삼푸로 목욕을 하고나자 생각이 달라졌다. 모든 
걱정을 떨어버리고 맨해튼을 느긋하게 배회하면 한달쯤 머물고 싶은 
마음이었다.
  록펠러 센터 자선단체에 가기 위해 세시반경 로비로 내려간 레니는 친구와 
함께 저녁식사 후 극장으로 갈까 하는 생각으로 티켓 부탁을 위해 프런트 
데스크 쪽으로 걸어갔다. 표 부탁을 해둔 뒤 친구에게 전화를 해 나오라고 할 
작정이었다.
  데스크 관리인은 단단한 체격을 가진 키 작은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끝내기를 기다리면서 레니는 로비를 한바퀴 
둘러보았다. 펠릭스와 함께 사업이야기가 오갔던 하와이의 투자가 다니엘 
인우티, 세계적으로 유명한 양조장을 운영하는 샌프란시스코 거부, 보스턴 
샐링거에 자주 묵곤 했던 콜롬비아의 억만장자, 왕자에서 물러난 유럽의 왕과 
왕비 등 비콘 힐 호텔에 묵은 손님들을 레니는 찬찬히 살폈다. 하긴 꽤나 비싼 
호텔인데 저런 사람들이 아니면 누가 여길 오겠어.
  "죄송합니다, 뒤에 누가 있는 줄 모르고 계속..."
  그녀 앞에 있던 사람이 관리인과 이야기를 하다 그녀의 인기척을 느꼈는지 
사과를 했다.
  "아니예요, 급할 것 없으니까 어서 마저 끝내세요."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아닙니다, 먼저 하시지요. 호텔 업무문제로 뭣 좀 물어보던 중이었는데 별로 
중요하진 않습니다. 먼저 하세요."
  레니보다 약간 작은 키였으나 풍기는 분위기로 인해 실제보다 크게 보이는 
인물이었다. 그는 작은 키와 넓은 어깨의 단점을 보완할 목적으로 재봉선이 
날렵하게 들어간 양복을 입고 있었다. 날카로운 콧대로 인해 사자처럼 근엄해 
보였고 회색 머리카락은 아주 굵었다. 그는 말없이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그가 
로라 호텔과 관련해 뭘 알아보던중이었을까 궁금했다.
  일부러 카운터에서 약간 물러나 있는 신사를 옆에 둔 채 레니는 특유의 
잔잔한 음성으로 관리인에게 극장 티켓을 부탁했다.
  "염려 마십시오, 샐링거 부인."
  관리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남자가 화들짝 놀라는 것을 레니는 곁눈질로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실례지만, 레니 샐링거 아니십니까?"
  "그런데요?"
  "웨스 커리어라고 합니다."
  그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비콘 힐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모든 게 다 만족하셨으면 하는데 
어떠신지요?"
  그녀는 그의 손을 가볍게 맞잡았다.
  "이 호텔하고 어떤 관계가 있으신지..."
  "아, 투자를 좀 했죠. 이렇게 귀하신 분을 만나게 되다니 영광입니다."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 같았다. 펠릭스는 반드시 알고 있을 만한 사람인데. 
레니는 커리어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자선기금과 관련되지 
않은 재산가들 이름을 구태여 외우지 않았기에 커리어는 레니에게 낯선 이름일 
수밖에 없었다.
  "멋진 호텔이에요. 아주 편안하고 훌륭합니다. 질문에 대답이 됐는지 
모르겠네요. 약속이 있어서 이만."
  "아, 택시를 같이 타고 가실까요? 저도 시내에 볼일이 있는데."
  "아니예요. 걸아갈 생각이거든요. 만나서 반가웠..."
  "그럼 저도 같이 걷겠습니다. 괜찮으시다면."
  레니는 그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이미 뜻이 정해졌다는 눈빛이었다. 나보다 
나이 많은 남자와 함께? 새롭긴 한데. 레니는 속으로 배시시 웃고 있었다.
  "그러시죠, 그럼."
  정체현상으로 횡단보도까지 차지하고 있는 차량 사이를 이리저리 
빠져나가면서 커리어는 레니의 팔목을 잡고 있었다.
  "뉴욕엔 오래 계실 겁니까?"
  "삼일 예정으로 호텔에 묵었어요."
  인도 위에 담요를 펼쳐놓고 지갑과 스카프를 파는 장사꾼을 피해 그는 계속 
레니를 인도해 나갔다.
  "뉴욕엔 얼마나 계실 건데요?"
  "뉴욕 시민에겐 합당한 질문 같지 않은데요."
  레니의 웃음소리에 커리어는 환한 미소를 보냈다.
  "샐링거 가문은 다 보스턴에 사는 줄 알았죠."
  "요샌 대부분 여기서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호텔 말구요?"
  "집이 이스트사이드에 있어요. 그쪽도요?"
  "아파트가 있긴 한데 거의 사용을 안하죠. 비콘 힐에 묵게 된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신지요?"
  "호텔 가문에 있다 보니까 자연히 그렇게 됐네요. 어떤 곳인가 보러왔죠. 
묵어보는 게 제일 좋은 방법 아니겠어요?"
  "그래, 보신 소감이 어떠세요?"
  "집 같더군요. 편안하고 아늑하고 아름다운 집 말이에요. 로라가 대단하다는 
걸 느꼈어요. 시카고 호텔도 아주 멋지다든데."
  "맞습니다. 아주 멋진 주인이 운영하니까요."
  "그래서 투자를 하셨나보죠? 어디서 돈이 생겨 그렇게 호텔들을 사들였나 
했어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인가요?"
  "투자가는 저말고 몇 명 또 있죠. 모두 다 로라를 신임하고 있습니다. 맨해튼 
생활이 어떻습니까?"
  "괜찮아요. 처음이 아니어서 신선미는 없지만. 몇 년 동안 여기에 
살았으니까요. 아파트가 있다면서 왜 자주 사용을 안하는거죠?"
  "대부분 여행을 하거든요."
  장사꾼과 그 앞에 몰려 있는 사람들을 피해 보도 바깥쪽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온 두 사람은 핫도그 수레 앞에서 고개를 하늘로 치켜올린 채 핫도그를 
먹고 있는 어린 소년을 동시에 바라보았다.
  "꼭 칼 삼키는 요술쟁이 같네요. 칼보다 핫도그 먹는 모습이 더 재미있을 줄을 
몰랐네."
  레니는 소년을 바라보며 깔깔거렸다.
  "맛도 훨씬 나을걸요."
  "보통 출장으로 나가는 건가요, 아니면 그냥 여행?"
  "일 때문이죠. 시간을 따로 내서 일 하지 않고 즐기려곤 하지만 어디 쉽게 
돼야죠. 선택의 자유가 있고, 또 충분한 자금이 있는데도 막상 원하는 걸 
결정하지 못하는 때가 참 많죠."
  레니는 걸음을 멈춘 채 커리어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힘들어도 결정을 내리면 나중에 좋죠. 뭔가 결정 내릴때까지 자신의 
마음을 분명히 알면 말이에요."
  레니는 록펠러 센터를 이루고 있는 여러 건물 중 한 곳을 올려다보았다.
  "자, 다왔어요. 여기가 제 미팅 장소에요. 얘기 즐거웠어요."
  "몇 시에 끝나죠?"
  "여섯시."
  "그때 아래층 로비 레인보우룸에서 만나면 안될까요? 같이 한잔 하면서 저녁 
먹을 곳 생각해보고 싶은데요."
  "그러죠. 그럼 여섯시에."
  레니는 주저없이 커리어의 청을 받아들였다. 레니가 건물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죽 지켜본 후, 커리어는 택시를 잡아타고 시내로 들어갔다. 처음부터 
저녁을 생각하진 않았다. 자기도 모르게 갑자기 튀어나온 저녁약속이었다. 
부드럽고 차분한 분위기를 가진 레니는 그를 사로잡고 있었다. 안정되고 침착한 
눈빛에 비해 그녀의 표정은 뭔가 새로운 미지를 꿈꾸고 있었다. 그녀는 아직 
정해지지 않은 목표, 무엇이 나올지 모를 그곳을 향해 뛰어가려는 여자였다.
  혼자 있다는 그녀의 말을 커리어는 곰곰이 되씹었다. 보스턴에 있는 친구들을 
통해 진상조사를 할 수도 있었지만 사람들을 통해 그녀에 관한 소문을 듣고 
싶진 않았다. 레니 샐링거, 본인을 통해 직접 듣고 싶었다. 그는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그는 십대처럼 굴지 말고 천천히 원하는 목표를 향해 진중하게 
나아가야 한다고 자신을 다독거렸다. 칠개월 전 로라와 완전히 헤어진 이후 
그는 내내 흐릿한 정신으로 여자들을 대하고 있었다. 때때로 여자들과 잠자리를 
같이 하면서도 그는 아예 마음조차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몇 번씩 이혼을 
되풀이하며 이별의 고통을 충분히 맛본 그였지만 로라와의 이별 뒤에 찾아온 
허전함은 어찌 해볼 염두가 나지 않았었다. 지난 일곱달 동안 그는 막막한 
사막에 혼자 서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런 상황에 레니 샐링거가 나타난 것이다. 그의 가슴은 처음으로 사랑하는 
십대 소년처럼 뛰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도 반응을 보여주었다. 그녀를 철저하게 
알고 싶었다. 그녀와의 잠자리도 함께 하고 싶었다. 그녀의 눈빛은 새 사람을 
받아들일 준비가 완료됐다는 듯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녀에게 펠릭스란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전혀 상관없었다. 결혼 생활을 하고 있더라도 이미 두 
사람의 관계는 금이 가 있는 상태가 분명했다.
  택시가 믈리커가를 지날 즈음 커리어는 몇 블럭 떨어진 그로브가의 로라를 
떠올렸다. 전화로 그녀에게 경비지출에 관해 이야기를 해야겠지만 급하게 
서두를 문제는 아니었다. 잠시 그는 로라와 함께 했던 과거를 돌아보았다. 
그녀와 결혼하고 싶다는 그 뜨거운 욕망, 어쩌면 그것은 로라 말대로 자기 
손아귀에 잡히지 않는 것에 대한 정복욕인지도 몰랐다. 그는 로라를 향했던 그 
질긴 집착이 순식간에 허물어지는 것을 느꼈다. 잠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처럼 
로라에 대한 꿈이 희미하게 사그라들었다. 로라는 단지 동업자요, 친구일 
뿐이었다.
  월 스트리트로 가 자문을 구한 고객에게 상담을 끝낸 그는 록펠러 센터 
레인보룸으로 달려갔다. 입구가 잘 보이는 자리를 골라 앉은지 몇 분 안에 그는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레니 샐링거를 볼 수 있었다. 일어나서 의자를 
빼주는 그에게 레니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27장
  다섯번째 도난사건이 발생한 것은 새벽이었다. 옆집에 사는 여자는 꽤 더웠던 
그날 새벽도 조깅을 하기 위해서 집을 나섰다. 클레이를 보긴 했지만 그녀는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펠릭스와 레니가 집을 비울 때면 친구나 
가족들에게 집을 빌려주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옆집 여자는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가는 클레이가 가족이나 친구일 거라고 생각했다.
  클레이가 조용히 안으로 들어갔을 때 무슨 소리를 들은 사람은 없었다. 
경보음이 울리는 문이었으나 장갑 낀 손으로 코드 번호를 눌러 경보를 제거시킨 
클레이는 그림자처럼 안으로 스며들었다. 바로 앞에 거실로 올라가는 좁은 
층계가 있고, 층계 옆으로는 주방과 베란다 식으로 된 정원이 있었다. 계단을 
두개씩 밟아 올라간 그는 벨벳 커튼을 뚫고 들어온 가로등 빛이 희미하게 
빛나는 거실에 잠시 우뚝 서 있었다.
  작은 손전등으로 벨벳 소파와 거실 한가운데에 놓인 원형탁자를 비추어본 
클레이는 벽지에 매달린 그림에 조명을 맞추었다. 멋진데 펠릭스한테는 너무 
멋져. 그러나 그의 목표물은 그 그림이 아니었다. 그는 아치 밑  통로를 통해 
서재로 들어갔다.
  벨벳으로 꾸며진 한 쌍의 소파 위 벽감(벽이 움푹 들어간 곳: 역자 주) 속에 
걸려 있는 루오 그림 석 점을 조심스럽게 가죽 케이스에 담았다. 그러고는 다시 
플래시로 방안을 비추었다. 그림 뒤편에 숨어 있는 안전금고가 보였다. 
호주머니에서 꺼낸 종이쪽지를 보면서 그는 금고를 열었다. 레니의 지갑 속에서 
꺼내 그대로 베껴낸 금고번호였다. 그러나 금고 안에는 집문서 같은 종이들만 
잔뜩 들어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아무것도 없는데 금고는 무슨 금고야. 
꼴값하고 있네. 분통을 터뜨리며 그는 제법 세차게 금고문을 닫았다. 그 순간 
바깥에서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온 몸이 얼어붙은 듯 꼼짝하지 않았다.
  밖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이 집 뒷마당 아니면 옆집 문에서 난 소리 같았다. 
그는 숨을 죽인 채 다음 소리가 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고 그는 가만히 서 있었다. 창문 닫는 
소리였나? 근처 이웃집 사람이 열어놓았던 창문을 냅다 잡아당긴 소리 같기도 
했다.
  아무튼 이 집에서 소리는 아냐. 괜찮아. 못난이 같이 겁내긴. 제기랄. 하긴 벤 
형은 늘 조심하라고 했잖아. 언제 위험에 빠질지 모르니가 조심해야 돼.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그의 심장도 제대로 뛰기 시작했다. 가죽가방을 들고 
나가려던 그는 책상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냥 갈 순 없지. 아직도 캄캄한데. 
얼른 살펴보자구. 현금이 나올지 누가 알아.
  책상은 두 사람이 일할 수 있을 만큼 컸다. 그는 서랍들을 차례로 뒤져나갔다. 
그러나 돈은 나오지 않았다. 레니가 쓰는 책상인지 그녀의 서류들이 많았다.
  클레이는 맞은편 서랍 제일 위 칸을 열었다. 서류철 밑에서 레니의 
신용카드와 구십오 달러가 들어 있는 뱀장어 가죽지갑을 발견했으나 그는 
콧방귀를 뀌며 지갑을 책상 위로 던져버렸다. 샅샅이 이 서랍 저 서랍을 
뒤졌으나 나오는 것은 서류뿐이었다. 뒤편에 뭐가 걸려 있는지 빼낸 서랍 
하나가 도대체 움직이지를 않았다. 이런 우라질 뭐야 도대체? 신경질을 내다 
말고 번개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숨겨진 비밀금고! 흥분이 밀려왔다. 그것밖에 
더 있겠어? 구식 책상인데 옛날에는 이런 식으로 돈을 숨겼을 거야.
  그는 문제의 서랍을 아예 책상 몸통에서 빼내 바닥으로 내려놓았다. 맨 뒤편 
금이 난 곳에 봉투 하나가 매달려 있었다. 그는 팔을 그 속으로 집어넣어 
비밀금고를 찾았다. 플래시를 비추자 나사 네개가 달려 있는 칸막이 하나가 
보였다.
  창문으로 새벽 여명이 스며들고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그는 재빨리 
호주머니에서 꺼낸 드라이버로 나사를 돌렸다. 그러나 칸막이 뒤편은 텅 비어 
있었다. 칸막이는 금이 난 부분이 더 벌어지지 않도록 붙여놓은 것인 
모양이었다. 틈 사이 끝에 매달린 봉투가 그를 놀리듯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저것 때문에 시간을 낭비했다니. 간막이를 다시 같다 붙이려던 
그는 눈앞에 매달려 있는 봉투에서 낯익은 이름을 발견하였다.
  '로라 페어차일드'
  그는 단숨에 그 봉투를 서랍구멍에서 뜯어냈다. 제법 두툼한 봉투 위에는 
오웬의 굵고 낯익은 글씨가 씌여져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누나가 찾아내지 못했다는 바로 그 서류?
  방이 점점 밝아짐에 따라 클레이는 다급해졌다. 그를 감추어줄 어둠이 
사라지고 있었다. 잠바 호주머니에 편지를 넣은 뒤 칸막이를 다시 붙여 재빨리 
서랍을 끼우고 편지, 서류, 그리고 책상 위 지갑까지 제자리에 갖다놓은 
클레이는 마지막으로 서재를 다시 한 번 둘러보았다. 모든 것이 처음 
그대로였다. 가죽가방을 낀 채 아래 현관으로 내려가 경보장치를 다시 올린 
그는 미끄러지듯 현관을 빠져나와 열쇠로 문을 돌렸다.
  거리 좌우를 살핀 뒤 그는 여전히 잠에 취해 있는 레싱톤 주택가를 
빠져나갔다. 블록 맨 끝쪽 구석에서 택시 한 대가 나타나자 다시금 주위를 
둘러본 클레이는 조심스럽게 택시를 타고 미명 속으로 사라졌다.

  레니는 칠월 초 연례행사로 떠나는 케이프 행 가족 여름휴가를 마지못해 
따라가야 했다. 펠릭스도 문제였지만 뉴욕에서 꽁꽁 숨어 얼굴 한 번 보여주지 
않는다는 알리슨의 불평 섞인 투정에 그녀는 뉴욕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레니는 육개월 전 플라자에서 벤과 이야기를 나눈 이래 계속 펠릭스를 피하고 
있었다.
  일년 이상 잠자리를 하지 않는 사이였으니 육개월쯤 얼굴을 보지 않는 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니었다. 예전과 달리 레니는 구태여 근사한 변명을 
찾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냥 마음이 안 내킨다는 이우 하나만으로 계속 
얼굴을 피하는 아내 때문에 펠릭스가 어느 정도 분통 터져 있는지 레니는 
제삼자의 입장에서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펠릭스는 진퇴양난의 입장에 빠져 
있었다. 회사일이 잘 안 풀리고 있었던 것이다. 마구잡이 식으로 확장한 결과, 
쓰러져 가는 호텔들이 생겨났다. 그것들을 신속하게 재정비해야 한다는 
이사들의 책망 섞인 요구가 그를 벼랑 끝으로 몰고 있었다.
  물론 펠릭스는 이런 사실을 레니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레니는 벤과 
토마스를 통해 주변상황을 듣고 있었다. 그녀는 말없는 남편에게 역시 차가운 
침묵만을 보여줄 뿐이었다. 맨해튼 집보다 웨스 커리어의 아파트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진 이래 자신이 무의식중에 보였을 변화를 남편이 눈치채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그녀는 이내 그런 생각을 지워버렸다. 눈치 
챘어도 이야기할 사람이 아니었고, 알아채고 할 기회조차 없었던 까닭에서였다. 
만약 그런 변화를 눈치 챘어도 지드에게서 떼어냈던 것처럼 다시 낚아챌 수 
있다고 확실할지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여기가 이렇게 아름답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구나."
  레니는 주위를 돌아보며 아침 식탁에 앉은 알리슨에게 말했다. 칠월의 네번째 
주말이었다. 케이프 상단 쪽은 관광객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오스터빌 
주민들은 아예 집에 눌러앉아 가족들과 조촐하게 시간을 나눠야 하는 
계절이었다. 반바지와 폴로 셔츠 차림으로 알리슨과 레니는 잔디밭에 차려진 
식탁에 앉아 크루아상과 커피를 들면서 알리슨의 무릎과 철제 의자를 붙들고 
발을 떼어놓는 저드를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케이프를 그리워했다는 걸 모르고 살았다니까. 여기 와서야 그걸 알겠구나."
  "뉴욕에 푹 빠져 있었잖아요."
  레니는 한숨을 내쉬었다.
  "비평가 따님께서 엄마를 완전히 낙오자 취급하시는구만."
  알리슨은 맑고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비평하듯 말했나? 그랬다면 죄송해요. 엄마가 보고 싶다는 말이었는데. 
뉴욕을 사랑하면서 보스턴에 살고 싶은 거죠?"
  "그래. 어떻게 그리 내 맘을 잘 아니?"
  알리슨은 주의깊게 그녀를 살폈다.
  "재미있었나봐요, 뉴욕생활이."
  "그래 재미있었다. 파리도 괜찮았구. 파리 얘기 내가 안해줬지?"
  "다 얘기 해놓구선. 빠진 게 있어요?"
  "로라하고 나눈 얘기는 안해줬지?"
  본능적으로 그녀는 레니 뒤편, 로라가 일하곤 했던 주방을 바라보았다. 
그리움과 분노가 섞인 눈길이었다.
  "우리가 너무 앞뒤 안보고 질책했다는 얘길 했다면서요? 그애가 아주 예쁘고 
또 우리한테 여전히 화를 풀지 못한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자기 호텔에 언제 한 번 와서 묵어보라고 당당히 얘길 하더라. 와서 어떤가 
구경하라구. 그래서 그러마 했지."
  그녀는 레니를 뚫어지게 보았다.
  "그 얘긴 안했잖아요?"
  "그금 하잖니."
  "그래서 진짜 갈 거예요? 그럼 나도 같이 가요."
  "벌써 갔다왔다. 몇 달 전에 가서 묵어봤어. 너한테 일부러 얘길 안했다. 
우르르 몰려가면 샐링거 가문에 대한 초청을 받아들인 격이잖니. 그래서 혼자 
갔다왔지."
  "그래, 느낌이 어땠어요?"
  벤이었다. 강렬한 햇살 때문에 눈을 찡그리며 두 사람은 그를 올려다보았다.
  "세상에. 소리도 없이 어쩜 그렇게 사람을 놀라게 해요."
  "신발 때문인가?"
  그는 알리슨과 레니에게 입을 맞추었다.
  "토마스 이모부하고 테니스 한판 했지. 샤워하자마자 나갈 생각인데 호텔 
얘기부터 듣고 싶은데요."
  "엄마가 로라 호텔에 가봤단 소릴 들었나보죠"
  "응, 어느 호텔이었는데요?"
  "뉴욕. 아주 근사하더라."
  "그래요? 대체 어느 정도길래 그러실까?"
  자리에 앉아 알리슨이 내민 잔에 커피를 따른 벤은 뒤뚱거리며 다가온 
저드에게 두 손을 내밀었다.
  "야. 이 녀석 봐라! 곧 뛰겠는데!"
  저드를 들어올린 벤은 예뻐 죽겠다는 듯 아들의 금발머리에 뺨을 부벼댔다.
  "우리 아드님, 벌써 뛰실려구? 그래, 아빠 닮았으면 뜀박질은 아주 잘할거다. 
쑥쑥 자라야지, 우리 아들!"
  지드를 땅에 내려놓은 뒤, 벤은 레니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땠는데요?"
  레니는 객실 꾸밈새, 서비스 수준, 완벽한 경영체제 등을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개인적으로 열명 가량 친구를 불러-커리어도 그 속에 들어 
있었으나 그 얘긴 하지 않았다-근사하게 파티를 한 얘기까지 자신도 모르게 
흥이 올라 신나게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최특급 호텔로 만들기 위해 직원들 모두 특수훈련을 시킨 게 아니라면, 분명 
다들 마술봉 때문에 최면에라도 걸린 것 같더라니까. 여태껏 그런 호텔은 진짜 
처음이었다. 직원들 서비스만 괜찮은 게 아냐. 호텔 분위기가 말도 못하게 
좋더라. 물론 직원들 서비스가 중요하지만 말이다."
  벤은 고개를 끄덕였다. 로라가 자랑스럽기도 했고, 부럽기도 했다. 알리슨과 
결혼하고 난 뒤 샐링거 호텔 체인에 전적으로 매달려 나름대로 서비스도 
향상시키고 모든 면을 개선시켰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레니에게서 샐링거 
호텔에 관한 칭찬을 한마디도 들어보지 못했다. 어찌 됐든 레니의 입에서 로라 
칭찬이 나왔다는 건 좋은 징조였다.
  파리에서 로라를 만난 이래 레니는 로라에 대한 호감을 갖고 있었다. 레니가 
그렇다면 무조건 엄마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알리슨도 비슷할 터였다. 드디어 
로라와의 관계를 털어놓을 만한 기회가 온 것이었다.
  "그애가 우릴 위해 일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었다. 아니, 우릴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와 함께라고 해야겠지. 상황이 얼마나 변했는데. 같이라면 모를까. 
나도 참 바보지. 안 그러냐? 호텔 나오면서 편지를 써놓긴 했는데 답장이 
없구나. 좋은 시간 보내 고맙다는 말끝에 언젠가 함께 일했으면 좋겠다는 말도 
써놨는데... 아직도 우릴 미워하나보지? 우리도 마찬가지야. 계속 그애한테 맘을 
풀지 못하고 있는 거잖니? 네 아빠는 로라 이름조차 입에 못 담게 하니, 원. 
슬픈 일이지. 과거를 잊지 못하고 서로 가슴 속에 미움을 담고 산다는 일이..."
  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사실을 고백할 시간은 아닌 듯 싶었다. 
적당한 시간이 찾아줄지 그로선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너무 오래 기다린 
것 같았다. 로라와의 관계뿐 아니라 이제는 그 이야기를 빨리 하지 못한 이유를 
설명하는 일도 힘에 겨울 듯싶었다.
  "샤워를 해야겠어."
  허리를 구부려 그는 아들을 들어올렸다.
  "이따 봐요, 장군님. 엄마 잘 돌봐드려요. 이 아빠가 제일 사랑하는 분이니까. 
알았지?"
  알리슨의 무릎에 저드를 내려놓은 그는 테라스를 건너 집안으로 들어갔다.
  뜨겁게 달구어진 태양이 주변 공기를 휘젓고 있었다. 레니는 나뭇가지 사이로 
알록달록한 윈드 서퍼들과 흰 돛단배들이 수놓고 있는 짙푸른 바다를 
바라보았다. 엄마라기보다 친구 같은 기분으로 레니는 편안하게 딸과 함께 앉아 
있었다. 아마도 알리슨이 결혼해 애를 가졌기 때문에 전보다 엄마의 마음을 더 
잘 이해해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서 그런 느낌이 든 건지 몰랐다. 
이유가 뭐든, 레니는 예전에 가졌던 두려움을 버린 채-혹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는 어머니로 인해 자신의 결혼마저 부성하고, 두려워할까 하는 두려움-딸에게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있었다.
  "결혼을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었다는 생각이야. 네 엄마 말이다. 또 이렇게 
오랫동안 잘못된 결혼을 계속 유지하는 것도 아니었고. 무서워서 그랬어. 
차선책이 없었으니까 그냥 두렵기만 해서 이렇게 살아온 거야. 네 아빠가 
그러길 원했으니까."
  "뭘 원해요?"
  "결혼 말이다. 나하고 결혼하고 싶어했지."
  "엄마가 원하지도 않는대요?"
  "네 질문을 이해할 수도 없는 사람일걸. 날 그냥 원한 거야.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그런 타입이었나보지. 사업이나 과시용으로 필요한 여자 말이다. 하긴 
그랬어. 모든 남자들이 우러러봤으니까. 자기가 경멸하는 남자와 사랑에 빠진 
여자를 취해보려고 나하고 결혼한 거란다."
  "그랬어요? 그런 얘긴 처음인데 그 사람이 누구였어요?"
  "옛날 얘기지. 젊었을 때 사랑한 얘긴걸, 뭐. 알리슨, 내가 아빠하고 이혼하면 
너 상처 많이 받을 것 같니?"
  "별로 큰 차이는 없을 것 같아요. 엄만 오래전에 아빨 떠났잖아요. 아빠한테 
이혼 얘기 해봤어요?"
  "아니, 그냥 생각만 하고 있어. 그 사람하고 아무 얘기도 하고 싶지 않아서 
말이다. 이혼 얘기조차 얼굴 맞대면서 하기 싫다. 이혼은 하고 싶지만 그 과정이 
싫어. 그래서 이 모양으로 산다. 너한테 부끄럽다, 알리슨. 알아, 내가 얼마나 
바보라는 걸. 하지만 얼마나 화를 잘 내는 사람이니. 네 애비란 사람..."
  "여태껏 그런 줄 알면서 살아왔잖아요. 싫어하면서도 아니 척 잘 견디시더니 
왜 갑자기 얼굴조차 안 보려는 거예요? 아빠가 더 심하게 나왔어요? 내가 
보기엔 사업에 매달려 있느라 정신없는 것 같던데."
  레니는 혀끝에서 뱅뱅도는 말을 삼키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저드를 향해 
내리쳤던 펠릭스의 비겁하고 잔인한 행위를 알리슨에게 굳이 알릴 필요는 없을 
듯했다.
  "전에 몰랐던 것을 알았다고나 할까. 희미하게 느끼고 있던 감정을 확실하게 
알았다고 해두자. 아니면 내 자신에게, 수십 년을 그대로 수챗구멍 속에서 
버둥거린 내 자신에게 갑자기 화가 났는 지도 모르지."
  레니는 뒤뚱거리며 다가온 저드를 품에 안았다. 신선한 풀내음이 나는 손자의 
보드라운 턱에 뺨을 비빈 순간, 레니는 갑자기 잃어버린 세월에 대한 회한으로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풀밭으로 내려놓으려 했으나 저드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레니의 무릎 
위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걸어다니는 것이 싫증난 모양이었다. 식탁 위에 있는 
나무인형을 집어들고 저드는 인형 귀퉁이를 씹어대기 시작했다.
  "장모님."
  베란다 안쪽에서 벤이 걸어왔다. 창백한 얼굴에 약간 긴장된 목소리였다.
  "왜 그래요? 무슨 일이에요, 벤?"
  알리슨은 벤의 얼굴빛으로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경찰이 전화를 해왔는데, 간밤 뉴욕집에 도둑이 들었답니다. 경찰말로는..."
  "말도 안돼! 정말 말도 안돼!"
  알리슨의 비명에 레니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오, 하나님. 이런 일이 또 일어나다니..."
  레니는 말을 끝내지 못한 채 벤을 올려다보았다.
  "뭐가 없어졌대?"
  "서재에 있던 루오가 없어졌답니다. 다른 건 장모님이 직접 확인하셔야 
된다는데요. 그래도 다행이죠. 그 자리에 안계셨길래 망정이지. 뭐니 해도 그게 
제일 다행이에요. 뭐가 없어졌든 사람이 안 다친 게 제일이죠."
  레니는 벤의 위로에도 계속 얼굴을 찡그렸다.
  "누군지 모르지만 그림을 아는 자들 소행일거야. 집에서 제일 값나가는 
물건들이었는데. 어떻게 들어왔을까? 경보장치를 어떻게 껐지."
  "글쎄 말입니다. 관리인이 제일 먼저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했다는데, 경찰 
말로는 경보에 이상이 없었답니다."
  "말도 안돼. 경보장치를 끄지 않고선 누구든 계단 근처에도 못 올라가는데."
  "뉴욕으로 가보셔야죠?"
  "그래야 될 것 같네."
  자리에서 일어난 레니는 알리슨에게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웬일이냐, 알리슨. 한 번 당했으면 됐지, 또 이런 일을 겪다니..."
  "경찰 조사론 흔적없이 들어왔다 나갔다던데요."
  "열쇠를 갖고 있었다는 말 아니야?"
  "그랬나봅니다."
  "열쇠 잃어버린 사람도 없는데..."
  레니는 여전히 정신나간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가봐야겠다. 알리슨, 미안하다. 얘기 더 하고 싶었는데. 내일 
돌아오마."
  그러나 레니는 그로부터 일주일 뒤에야 케이프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녀는 방을 샅샅이 뒤져가며 서랍 옷장 등을 검사했다. 그러나 처음 조사 
발표와 마찬가지로 도난품은 루오 석 점 외에는 없었다. 오웬의 책상이 도둑의 
손을 탄 흔적이 있었지만 지갑과 돈도 그대로 있었고 서류만 흐트러져 있을 뿐 
도난품은 없는 것 같았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 깨끗하게 청소된 집안은 예전의 평화로움을 
되찾고 있었다.
  커리어가 메인에 마련해둔 여름 별장에서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레니는 대부분 케이프에 머물렀다. 주말이면 찾아오는 펠릭스를 보스턴 
사무실에 묶어둘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이었다. 레니가 어디에 있든 계속 
뉴욕 경찰의 연락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별다른 진전은 없었다.
  "분명 우리 집과 관계가 있는 자야. 안 그러면 두 번씩이나 이렇게 할 순 
없어."
  우거지상을 짓고 있는 펠릭스에게 알리슨은 될 수 있는 한 부드럽게 말했다.
  "십년 전 일인데요, 아빠. 설마 이번 일도 그자가 했겠어요?"
  "그 여자겠지."
  알리슨의 눈꼬리가 치켜올라갔다.
  "정확하지도 않은 일을 갖고 아빤 왜 그래요? 두 번씩 당하긴 했지만 우연의 
일치예요. 이젠 잊어버려요. 엄마가 순찰대를 고용했다니까 다신 이런 일 없을 
거예요."
  펠릭스는 여러 날이 지나자 도난사건 때문에 일어난 흥분과 분노를 차츰 
누그러뜨리기 시작했다. 오웬이 병원에 입원해야 했던 첫번째 도난사건과 달리 
아무도 상처를 입지 않았고, 그림에 대한 보험금이 지급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보험담당자가 직접 케이프까지 와서 사건에 관한 질문을 하겠다는 전화에 
가족들은 혹시나 그림을 다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레니는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제일 아끼던 목걸이를 찾아내기 위해 
현상금까지 걸었지만 첫 도난사건 때 없어진 보석들중 팔찌 하나를 제외하고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던 까닭이었다. 영영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게 레니의 
생각이었다.
  "그 생각이 어쩜 맞을 것 같은데요."
  케이프를 찾아온 샘 콜비가 레니의 의견에 일단 동조했다.
  "요즘 미술품 도둑들은 주문을 받고 도둑질..."
  "주문을 받다뇨?"
  벤의 질문에 콜비는 특유의 느긋한 태도로 계속 말을 이어갔다.
  "미술품을 아는 개인소장가들의 주문을 받는 거죠. 다시 말해 소장가들의 
브로커들이 시키는 짓이죠. 소장가와 도둑이 직접 연결되는 수도 있지만 대부분 
안전을 위해 중매인을 끼고 활동합니다. 그렇게 해도 물건이 몇몇 친구들 
눈에만 선보일 테니 그게 어디 우리한테 띄겠습니까? 그 친구들도 그래요. 그 
물건들이 도난품인 줄 알면 서로 입을 다물죠. 왜냐? 언제 자기품에 그런 
물건이 들어올지 모르거든. 괜히 입 잘못 놀렸다가 손해보기 싫다는 거죠."
  "그런 얘길 듣긴 들었어요."
  알리슨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우리 화랑 고객 중 몇 사람도 어떤 사람 집에서 도난 당한 물건을 봤대요. 
경매장이나 공개상점에 한번도 드나들지 않았던 사람이 그런 그림을 갖고 있는 
걸 보면 분명 누구 집에 걸려 있던 걸 그런 식으로 갖게 된 거라고 하더군요."
  "정확한 말씀입니다."
  콜비는 자신의 주장이 다른 사람에 의해 확인받았다는 사실이 즐거운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자, 그럼 샐링거 부인. 그 루오 그림 얘기부터 해볼까요? 제일 처음 어디서 
구하신 겁니까?"
  그는 레니를 통해 그림을 구입하게 된 경로, 뉴욕 집의 경보 시스템, 관리인이 
한 진술, 레니의 스케쥴까지 상세히 알아냈다.
  "거긴 자주 가시나요?"
  "거의 있다시피 해요. 이번 여름엔 여기 있었지만, 평상시엔 일주일 내내, 
주말이나 특별한 날을 제외하고 늘 그곳에 있죠."
  "하지만 댁은 보스턴에 있는 걸로 아는데요?"
  "보스턴 외곽지대에 있어요. 하지만 뉴욕에 사무 볼 일이 많아서요. 영화나 
콘서트도 좋아하고 모든 게 편해서 주로 뉴욕에서 살고 있어요."
  "그러니까 스케줄이 노출돼 있겠군요. 언제 어디에서 뭐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런 행사에 다니시니까 다른 사람들도 부인의 스케줄을 대체로 알고 있을 것 
같은데요?"
  "그런 편이죠. 하지만 가끔씩 끝에 가서 마음을 바꾸기도 해요. 보스턴으로 안 
돌아오고 뉴욕에서 다른 데로 갈 수도 있고, 아니면 보스턴에서 곧장 다른 
곳으로 여행할 때도 있구요."
  "국외 여행인가요?"
  "가끔은요."
  "친구들 집이나 호텔에서 머무시나요?"
  "네, 사정봐 가면서요."
  "여행할 때 샐링거 호텔에 머무십니까?"
  "항상 그렇죠."
  "한 번도 안 그랬으면서."
  알리슨의 중얼거림에 레니는 다시 말을 바꿨다.
  "아, 한 번은 다른 곳에 묵어봤죠. 비콘 힐에. 하지만 그건 예외였어요."
  "왜 비콘 힐에 묵으셨나요?"
  "그냥 어떤가 보고 싶어서요. 새로 개장된 호텔이거든요. 우리 호텔 체인을 
위해 우린 항상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아야 하니까요."
  "그게 어디였습니까?"
  "뉴욕이요."
  콜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이번엔 회사 업무에 대해서 좀 말씀해주시죠. 여행은 순간적인 
기분에 따라 떠나시겠지만, 그래도 회의 같은 건 규칙적으로 이루어지겠죠? 
매달 두번째 수요일, 맞습니까?"
  "네, 정기회의죠. 비정기적으로 열리는 것도 있어요."
  "그럼, 그런 것들 메모해두는 달력이 있습니까? 냉장고에 매달아둔다든가, 
아니면 전화기 옆에 적어두나요?"
  레니는 살짝 미소를 지어보였다.
  "냉장고에 그런 걸 메모해둘 만큼 부엌을 자주 드나들진 않아요. 보스턴과 
뉴욕에 각각 업무일지를 두고 일하죠."
  "다른 건 없구요?"
  "없어요. 아, 물론 개인 수첩이야 있죠."
  "개인 수첩이라... 회의시간, 점심약속 뭐 그런 것들 메모해두는 수첩입니까?"
  "네."
  "다른 중요한 건 없구요?"
  "없어요."
  "예를 들면 집 경보장치 번호 같은 것 말입니다."
  "아, 예. 그건 적어놨어요. 매해 새 수첩을 바꿀 때마다 그 번호를 적어두곤 
하는데 왜 적어두는지 나도 모르겠어요. 외우고 있는데도 말이에요."
  "대부분 사람들 습성이 그렇죠. 그밖에 다른 건 없나요? 은행 계좌 
번호라든가?"
  "그건 수표책 앞장에 적어놨어요."
  "그럼 개인수첩엔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단 말씀이죠."
  "네, 없어요. 아니, 있어요. 서재 안전금고 번호가 적혀 있는데, 그건 상관없는 
일이죠. 개인수첩하고 수표책은 가방 속에 항상 들고 다니니까요."
  "항상 갖고 다니신다구?"
  "항상요."
  "가방을 바꿔 들 때도?"
  "물론이죠."
  "옷에 따라 가방을 바꾼다구요? 립스틱, 머리빗, 거울, 지갑, 열쇠, 수첩 등 
가방속에 있는 모든 걸 다 빼서 새로운 가방에 집어넣는다구요?"
  "맞아요."
  "하지만 밤에 무도회나 파티장에 갈 땐 안 그러시겠죠. 무도복엔 소형백을 
들어야할텐데. 방 열쇠, 수첩 등등은 자연히 빠지겠네요?"
  "그래요."
  "그렇다면 보스턴과 뉴욕 집에 근무하는 고용인들이 그럴 때마다 수첩을 볼 
수 있겠군요."
  "우리집 고용인들은 그럴 사람이 아니예요, 콜비 씨!"
  "아, 물론 그렇겠죠. 하지만 칠월 이일 아침 네시 삼십분에 부인께서 뉴욕 
집에 안 계신다는 것을 누가 알아냈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벤이 레니 대신 콜비의 말을 받았다.
  "어떻게 그렇게 정확한 시간을 알아냈죠? 그 얘긴 처음 듣는 얘긴데요."
  "이웃집 사람이 네시 삼십분에 누군가 문 앞에 서 있는 것을 목격했답니다. 
날이 어슴프레 밝자마자 조깅을 나가던 길이었는데, 그때 그자를 봤다는군요."
  "그자라구요? 모두들 그자들이라고 하던데."
  "글쎄, 그거야 또 한 명 있을 수 있는 일이겠죠. 어쨌든 이웃집 여자는 한 
명밖에 못 봤대요. 다른 사람은 어디 안 보이는 데서 망을 봤을지도 모르죠."
  질문은 계속 이어졌다. 무엇이든 콜비는 계속 물고 늘어졌고, 그럴 때마다 
알리슨은 은근히 부아를 삭여야만 했다. 이미 지나가버린 문제를 다시 
끄집어내보았자 소용없는 일 같았고, 더 이상 그 문제에 말려들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내버려두지. 그냥 잊어버리면 될 걸. 유모방으로 들어가며 
알리슨은 괜히 콜비에게 속으로 짜증을 부렸다. 앞으로 중요한 일이 얼마나 
많은데 지나가버린 일을 가지고 저 야단일까? 콜리란 사람이 떠나고 나면 모든 
걸 그냥 잊어버리자고 해야겠어.

  비콘 힐의 네번째 체인 비콘 힐 워싱턴 호텔은 가을이 짙어가는 시월 초에 
문을 열였다. 개장식에 참석한 로라와 커리어는 비콘 힐 호텔 고정고객들과 
한두 달 먼저 예약을 해둘 정도로 출발이 순조로왔다. 켈리는 완벽한 
경영체제로 로라의 근심을 일시에 사그러뜨렸다.
  "걱정말고 나한테 맡겨."
  개장식을 무사히 마친 뒤 켈리는 잔을 치켜들며 확신에 찬 어조로 로라에게 
말했다.
  "단톤스를 없애기 전까진 나도 그 섬을 팔아치우고 싶어했다는 걸 몰랐어. 
존한테서 떨어져나가고 싶은 마음에, 그 마음을 속죄한다는 의미로 무조건 일만 
하려고 했었나봐. 고마워 로라, 내 인생을 다시 찾아줘서."
  로라는 잔을 들어 켈리의 잔에 부딪쳤다.
  "정말 멋진 개장식이었어요, 켈리. 공연히 걱정을 했네."
  "그래도 걱정 하나는 남아 있을걸. 개장식 비용 계산 해보면 눈이 
튀어나올거야. 하지만 그것도 생각하기 나름이지. 추수감사절까지 예약이 다 
끝난 상태니까 돈 걱정은 그걸로 땡이다."
  "난 땡이 아니예요, 켈리. 늘 돈 때문에 걱정되는걸요. 비용 많이 초과됐어요?"
  "눈이 나올 정도는 아니니까 염려 마. 계획대로 개장하느라고 무리는 좀 했지. 
삼주 동안 나간 지출이 좀 되거든. 어쨌든 내일 아침 같이 계산해보자."

  워싱턴 비콘 힐 개장기념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위한 자선공연은 일주일 동안 
계속됐다. 자선공연장에는 각계 최고의 인사들 오백명이 모여들었다. 가을철 
사교계 시즌을 여는 행사였다. 로라의 첫 춤상대자는 커리어였다.
  "당신은 역시 흰색 옷을 입을 때가 제일 아름다워."
  "고마워요, 웨스."
  얌전한 칼라가 붙어 잇는 흰색 평직물 블라우스 밑에 달린 호박색 비단 
스커트가 왈츠를 출 때마다 바닥을 쓸었다.
  "당신도 좋아 보이는데요.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이예요. 사업때문이에요? 
아니면 여자?"
  "여자 때문이라면 기분이 어떨 것 같아?"
  한바퀴 원을 그리면 돌 때까지 그녀는 잠시 침묵했다.
  "부러운 기분이 들겠죠. 그 여자한테. 하지만 그게 다예요. 난 당신이 
행복했으면 해요. 아주 좋은 사람이길 바래요. 내가 아는 사람이에요?"
  "아는 사람이지. 하지만 확신이 서기 전까진 비밀로 해두고 싶은데. 그 사람 
유부녀야. 하지만 요즘 뭐 크게 대수는 아니잖아. 참 아름답군, 로라. 진짜 
사랑스러워."
  로라는 얼굴을 붉히며 커리어의 뺨에 키스했다.
  "이런 찬사를 보내는 동업자가 있다니 기분 나쁘지 않은데요."
  두사람은 말없이 춤을 추었다.
  "동업자끼리 얘기 좀 하지."
  커리어는 로라를 자리로 이끌며 간결하게 얘기를 했다.
  "출장 가지 전에 회계장부를 좀 살폈으면 하는데, 내일 아침 어때?"
  "좋아요. 그렇잖아도 켈리한테 얘길 해뒀어요. 열시에 켈리 사무실에 있을게요. 
어머 클레이!"
  마리나와 춤을 추고 있는 클레이를 본 순간 로라는 자신도 모르게 크게 
소리쳤다.
  "세상에, 클레이. 뉴욕에 있는줄 알았는데 여긴 웬일이니? 마리나하구... 두 
사람 다 웬일이야?"
  "결정볼 게 있어서요. 클레이가 그렇게 하자고 해서..."
  "실은 마리나가 뉴욕에 오고 싶어해서 말야. 나랑 같이 다락방에서 살기로 
했어. 시간을 갖고 좋으면 계속 살고 아니면 다시..."
  "시카고에서도 좋았으니까 계속 괜찮을거야, 자기."
  그는 어깨를 한번 들썩였다.
  "당분간 살아보자구. 힘들 땐 누가 옆에 있는 게 좋거든. 아무튼 마리나랑 
살게 돼서 기분 좋아."
  "그게 무슨 소리니? 힘들다니? 왜 힘들어?"
  잔뜩 긴장한 로라에게 클레이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일도 그래. 기대했던 것보다 좀 힘들거든. 책임도 
그렇고. 내 손가락 하나에 돈이 왔다갔다 하는 것도 두렵고. 자꾸 그러지 마, 
누나. 편해도 일은 일이잖아. 아무리 누나 호텔이지만 놀고 먹는 것보다야 
편하겠어? 사람들은 누구나 더 좋은 걸 원하는 것 아니야? 아무튼 좀 
스트레스가 있어. 이럴 땐 좀 쉬는 게 나을 것 같애. 나 알잖아, 누나. 너무 일이 
많으면 미친다구. 좀 느긋하게 일도 하면서 놀기도 하면서..."
  "그만 좀 의젓할 수 없니? 남자라면 말야."
  마리나는 여섯살 아래 클레이를 마치 동생 나무라듯 꾸짖었다.
  "로라, 여자 없는 남자들은 무너지기 쉬워요. 클레이를 사랑해요. 난 돌봐주고 
싶은데, 로라만 괜찮다면."
  "누나한테 그런 허락 받을 필요없어."
  클레이는 기가 막히다는 듯 짧게 웃었다.
  "누난 내 보호자가 아냐. 사랑하는 누나에다 내 상관이긴 하지만 보호자는 
아니라구."
  쟤 왜 저래? 왜 이상하게 굴지? 마치 마약 먹은 페럴리 같네. 로라는 흥분해 
있는 클레이를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마약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평소보다 조금 흥분하고 있을 뿐이었다. 여전히 클레이는 여자에게 
의존해 한꺼번에 모든 걸 붙잡으려는 철부지였다. 예전에 자신과 결혼을 하려던 
폴보다 약간 어린 나이였지만, 그때의 폴과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클레이는 
철부지였다. 로라는 한숨을 쉬었다. 자라기를 거부하는 만년 소년. 어쩌면 
결혼마저 두려워하는지도 몰랐다. 마리나를 좋아하면서도 결혼 얘기는 계속 
피하고 있었다. 형편이 힘든 것은 도박 때문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브리트가 
마약을 이겨내야 하듯 클레이는 도박을 이겨내야 한다. 마리나가 그걸 도와줄 
수만 있다면 로라로서는 대환영이었다.
  "두사람 어떻게 결정했든 그대로 하면 되겠지. 도움이 필요하면 얘기해, 
클레이. 하지만 그전에 한 가지 확실히 해둘 게 있는데 여긴 진짜 웬일이니? 
이번주는 필라델피아 쪽을 맡아주기로 했잖니?"
  "그랬지. 하지만 마리나한테 여기 파티 약속을 했기 때문에 올 수밖에 없었어. 
좀 봐주라. 일 그렇게 많이 빼먹지 않았어. 내일 오전에 다시 가면 되지 뭐. 
그렇게 찡그리지마, 누나. 바로 옆에서 파티가 열리는데 두고 볼 순 없잖아."
  로라는 간신히 화를 참았다.
  "알았으니까 재미있게 놀아. 네가 여기 있길래 놀라서 그런 거지. 내일 가기 
전에 전화 좀 해줄래? 켈리 사무실에 있을 테니까."
  "알았어."
  무도회장 끝에서 지니가 다가오고 있었다. 로라는 클레이에게 재빨리 
키스하며 두 사람을 보냈다. 클레이와 마리나가 마치 서로 섹스 하듯 몸을 배배 
꼬며 춤추기 시작했다.
  지니는 샹들리에 불빛을 한몸에 받아들이려는 듯 금박 박힌 검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어때. 섹스 심볼로 보여? 아니면 야밤에 돌아다니는 마귀할멈 같애?"
  "처음 표현이 더 근사한데요."
  로라는 지니를 보며 처음으로 푸근하게 웃어보였다.
  "언제 왔어요."
  "조금 전에. 브리트도 왔더군. 어때? 브리트와 결혼할 거란 소문이 
요란하던데."
  로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비콘 힐이 워싱턴에서 제일 가는 호텔이란 소문이 그렇게 나돌았으면 
좋겠네요. 그게 아니면 로라 페어차일드는 미국의 호텔 사장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경영자다. 이런 말은 없었어요? 꼭 누구 누구가 한 침대에 들었다, 누가 
결혼한다, 아니면 잠을 따로 잔다. 왜 사람들은 이런 소문만 좋아할까? 안 
그래요?"
  "다들 사업보다는 섹스를 더 좋아하니까 그렇지. 당연한 것 아냐? 불도저같이 
매몰차게 나갈 땐 사업에서도 희열을 느끼겠지. 하지만 그래도 섹스를 첫손에 
꼽지. 제일 좋은 건 로라와 웨스 같은 타입이지. 같이 자면서 같이 사업하고 
같이 돈 만들고. 제일 근사한 쌍 아니겠어?"
  "우린 그렇지 않아요."
  "그래? 뭣 좀 같이 마실까? 할 말이 있는데."
  "섹스 아니면 비즈니스?"
  "비지니스."
  "그럼 좋아요."
  두 사람은 빅토리안 바로 갔다. 비콘 힐을 보수할 때 호텔 뒤편에 있던 구식 
맨션을 구입해 호텔과 연결하고 새로 치장한 고풍스러운 바였다.
  "아르마냑크(프랑스 아르마냑크 지방에서 개발된 브랜디:역자 주) 두 잔 
부탁해요."
  그녀의 독특한 음성은 평소와 달리 약간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파티 장소에 나와서 사업 얘길 꺼낸다는 게 좀 그렇긴 한데. 그래도 마음 
먹은 걸 빨리 얘기해야지. 괜히 점잔 빼고 있다간 말라죽을 것 같더라구."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는 바 건너편에서 손인사를 보내고 있는 다니엘 
인우티에게 손을 흔들었다.
  "샐링거 호텔을 두개나 세운다고 하던데, 저 사람 여기 정탐하러 온 것 아냐?"
  로라는 지니 말이 우습다는 듯 크게 웃었다.
  "뭐하러 정탐을 해요? 우리 호텔 얘긴 호텔계 잡지책에 이미 다 나와 있는데. 
더군다나 펠릭스는 우리같은 작은 호텔엔 관심없어요. 대형 호텔에 정신 팔린 
사람이니까요. 하룻밤 자고 떠나는 손님들 위주로요."
  지니의 눈빛이 순간 반짝거렸다.
  "그거 괜찮은 소린데. 펠릭스 아직 싫어하지?"
  "다 아는 사실인데, 뭘 새삼스럽게."
  "하자만 그자 회사주식은 원하잖아."
  "얘기해드려서 알잖아요."
  "그러니까 그 사람 주식에 여전히 관심있다 이거지? 좋아, 좋다구."
  주문한 브랜디가 나오자 지니는 한 모금 홀짝거렸다.
  "아주 맛 좋은데. 비콘 힐 바는 어딜 가나 솜씨 좋은 바텐더가 있나봐."
  "지니 오늘 좀 이상해요. 왜 말을 빙빙 돌리는 거예요? 하고 싶은 얘기가 
뭔데요?"
  "샐링거와 로라 페어차일드 얘길 하는 거야. 아직도 그쪽 회사 맘에 있다 
이거지?"
  "물론이죠. 하지만 돈 문제도 아직 그렇고, 돈이 된다 하더라도 어떤 방식으로 
사야 할지 모르겠어요."
  "지금부터 그걸 나랑 얘기하자 이거야. 나한테 OWL 개발에 투자하란 소리 
여태껏 한번도 안했지. 물론 좋긴 좋지. 우정하고 사업은 섞이지 않는 게 
좋거든. 하지만 비콘 힐 네 군데를 죽 지켜보면서 나름대로 마음 먹은 게 
있어서 하는 소린데, 객실 투숙률이 지금 어느 정도지?"
  "전체 다요? 칠십오에서 팔십팔 퍼센트 가량 돼요."
  "그만큼은 될 거라 예상은 했지. 다른 호텔에 비해 아주 높은 거지?"
  로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니가 무슨 소리를 하려는지 대강 눈치챈 그녀는 
흥분으로 가슴이 뜨거워졌다.
  "좋아. 이미 알고 있던 얘기지만 본인한테 직접 듣고보니까 더 확실해졌어. 
우리 쪽 회계사를 통해 미리 조사를 했거든. 그래서 결정은 미리 다 해놨어. 
샐링거 호텔 주식 사고 싶다 했지? 내가 도와줄께. 지금은 염려 말고 한 번 
해봐."
  말이 끝나기도 전에 로라는 지니의 목에 팔을 두르고 빰을 비벼댔다.
  "여태껏 너무 도움만 받고 살아온 것 같애요. 정말 운이 좋은 가봐요. 이렇게 
좋은 분들만 만나다니..."
  "그건 운이 아니야. 로라가 다른 사람들에게 베푼 건 생각 안해? 진심으로 
다른 사람들 문제를 풀어줬잖아. 상대가 누구든 사려깊게 대해주고. 시카고 
기억하지? 난 처음 로라를 못났다고 생각했었어. 브리트가 그렇게 엄청난 
소란을 피웠는데 다음날 브런치 때 마주앉아 식사를 했다니, 정말 저 아가씨가 
제정신인가 하고 말야. 하지만 내 생각이 틀린 걸 알았지. 브리트 그사람 
로라라는 사람을 평생지기로 여기며 살아갈걸. 로라는 그 사람한테 받은 게 
하나도 없으..."
  "뭘 받으려고 그렇게 하진 않았죠."
  "그게 바로 포인트야. 바라는 것 없이 그냥 다른 사람들을 위해주고 
염려해준다는게 어디 쉬워? 물론 알지. 어려운 시절을 겪은 사람이 어려운 
사람을 도울 줄 안다는 걸 말이야. 하지만 사람들이란 원래 망각의 동물이지. 
모든 걸 쉽게 잊어버리거든. 자신의 일인데도 말야."
  그녀는 브랜디를 한 모금 들이켰다.
  "사람들이 잘 해준다고 해서 놀랄 필요없어. 당연한 거야. 주면 돌아오게 되어 
있으니까. 하지만 로라가 나한테 마음 써줬다해서 자금을 대겠다는 건 아냐. 
훌륭한 사업가고 전망 있는 종목이니까 그런거지. 내가 다소 감정적인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천만 달러를 기분으로 투자하겠어?"
  충격을 받은 듯 로라는 지니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바의 웃음소리와 웅성거림, 
오케스트라의 음악소리가 갑자기 파도처럼 흔들리며 다가오는 듯했다.
  "어, 얼마요?"
  "천만. 그걸 건네주면 얼마쯤 살 수 있을거야."
  "어떻게... 어떻게요? 누가 판대요?"
  지니는 흐믓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의 친구가. 거기 좀 문제가 있나봐. 펠릭스란 작자 마구잡이로 
확장하더니, 수익도 보기 전에 벌써 몇 개가 흔들린다던데. 이사회는 가격 좋을 
때 팔아치우자고 그러나봐. 아무튼 그 친구란 사람 말야. 회사 주식 이 퍼센트 
가량 되는 걸 천만에 판다고 내놨으니까 당장 사라구. 천만 내가 빌려줄게. 
이자하고 계약기간 같은 건 나중에 얘기하자. 그건 걱정 마. 부담 안 되는 
조건으로 해줄테니까. 자, 마음에 들어?"
  -내게 속한 샐링거 호텔 법인주식 삼십 퍼센트 중 이십팔 퍼센트를 정확하게 
똑같이 반분해, 아들 펠릭스와 아사에게 각각 남긴다. 샐링거 호텔 법인주식 
삼십 퍼센트 중 나머지 이 퍼센트와, 육십년 전 뉴욕, 시카고, 필라델피아, 
워싱턴에서 샐링거 체인으로 시작된 백 퍼센트 오웬 샐링거 소유분 호텔 네 
개와 그녀가 사년 넘게 생활했고, 또 앞으로 생의 보금자리로 여기며 평생 
살아나갈 비콘 힐의 대저택, 그리고 그곳에 소유된 부속물 전체 등 모든 것을 
최근 내 인생에 사랑과 기쁨을 가져다준, 사랑하는 나의 로라 페어차일드에게 
유증한다.
  이 퍼센트, 로라는 오웬의 유언을 생각해내며 나직히 중얼거렸다.
  오웬, 드디어 해냈어요, 로라는 오웬의 유언을 생각해내며 지니의 손가락을 
자신의 손에 깍지낀 채 다시 한 번 그녀의 뺨에 키스했다.
  "사랑해요, 지니. 마음에 들고 말구요. 너무 고마워요."

    28장
  여섯번째 도난사건은 다니엘 인우티의 하와이 저택에서 일어났다. 도난품은 
마티스의 선화 넉 점이었다. 주인 인우티는 부활절 휴가로 흩어졌다 모인 
가족들과 런던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림 외에는 아무것도 손댄 흔적이 없었고, 
본채에 연결된 별채의 관리인도 밤새 아무것도 모른 채 새벽을 맞이했다고 
했다. 단서는 예전 사건과 마찬가지로 하나도 없었다.
  샘 콜비는 분노의 바닷속을 헤매야 했다. 여섯번이나! 두 대륙에 걸쳐 모두 
다른 장소에서 흔적이나 단서 하나 없이 똑같은 방식으로 일어나다니. 도대체 
여태껏 뭘 조사했단 말인가? 샘 콜비의 명성이 땅바닥에 떨어져 뭉개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독하게 마음 먹은 샘 콜비는 런던에서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인우티를 만나기 위해 하와이로 날아갔다.
  "뭐든 다 말해보시죠."
  샘 콜비는 흥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뭘 말이요?"
  인우티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뭐든 다. 젠장할! 들어야 조사를 할 것 아니겠소."
  "푸른 바다가 보이는 베란다에는 무궁화와 난초들이 눈부시게 만발하고, 구름 
한 점 없는 바다 위로 새들이 날고 있었다. 그러나 콜비의 눈에는 그런 풍경이 
들어오지 않았다. 마치 창문 없는 골방에 갇힌 심정이었다.
  "관리인 얘기부터 하시죠. 사건이 발생했을 때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이니까. 
일단 의심을 해봐야 될 것 아닙니까? 본채까지 건물이 몇 개 있죠?"
  "네 채요."
  인우티의 사무실 네 군데에 고용된 직원들, 그와 관계한 사업가들, 예순네 
명이나 되는 그의 가족들, 사교적으로 만나는 사람들까지 콜비는 수사견처럼 
끈질기게 물고늘어졌다.
  "다음엔 여행 스케줄인데, 그걸..."
  "비서 외에 다른 사람은 몰라요."
  "하지만 알려면 알 수 있겠죠. 비서한테 물어보면 선생 위치가 확실하게 나올 
것 아니겠소?"
  "그렇죠. 연락이 닿을 수 없는 곳에서 사업을 할 수는 없으니까. 숨어 있을 
필요도 없구."
  "허허, 맞는 소리군요. 그렇다면 과거 일 년 동안 스케줄부터 조사해볼까요?"
  "그건 알아서 뭐해요?"
  "왜냐하면 단독범행인지 공범이 있는 범행인지 모르지만 그쪽은 이미 
선생께서 하와이를 언제 어느 때 비웠다는 걸 알고 있었을 테니까요. 그놈들이 
아는데 내가 몰라서야 되겠습니까? 이만하면 충분히 설명됐겠죠?"
  뻣뻣하기 짝없는 보험 수사관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인우티는 할 수 
없다는 듯 호주머니에서 두툼한 가죽 수첩을 꺼내들었다.
  "어디 있었는지 불러주면 됩니까?"
  "네."
  인우티가 읽어주는 것을 부지런히 적어 가던 샘 콜비는 처음으로 주변 
풍경을, 아니 보다 더 정확히 말해 태양이 지는 것을 느꼈다. 하와이에 가면 
반드시 낙조를 구경하라던 어떤 사람의 말이 생각났으나 그에게는 작조든 
일출이든 그게 그거였다. 젠장, 놓쳤으니 할 수 없지 뭐. 내일 저녁 때 시간 
나면 보지.
  "불 좀 켤까요?"
  샘 콜비의 청이 떨어지자마자 인우티는 종이 달린 줄을 잡아당겼다. 바람처럼 
베란다로 달려온 하인이 머리 위의 중앙 랜턴을 켜자 주변은 대낮처럼 환하게 
밝아졌다. 베란다 난간 줄에 칸칸이 매달린 기름램프에도 불이 켜졌다.
  인우티의 오개월치 스케줄을 듣는 동안 한 시간이 후딱 지나갔다. 인우티는 
콜비에게 저녁 식사를 같이 하자고 했다.
  "난 약속 없는데 괜찮다면 함께 식사 하시겠소?"
  "그러죠."
  콜비는 인우티가 식후에 담배를 한 대 피우고 나자 곧장 식탁의자를 뒤로 
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또 시작할까요?"
  샘 콜비로서는 뒤끝이 타는 느낌일 수밖에 없었다. 망할 놈의 도둑을 
잡아내느냐, 아니면 다시 지겹고 한심한 은퇴생활로 돌아가느냐, 사생결단하고 
달려들어야 할 판국이었다.
  거실로 자리를 옮기고 콜리븐 코냑을 손에 쥔 콜비는 메모 수첩을 
펼쳐들었다.
  "마드리드까지 했었죠? 그 다음은 어딥니까?"
  "결혼한 딸과 샌프란시스코에서 한 달 있었고, 그 다음 홍콩으로 가 
아들가족하고 지낸 다음 팔월부터는 방콕에 있었습니다."
  "숙소는요?"
  "방콕 리젠시."
  "회의가 많았었나요?"
  "아주 많았어요."
  "그 다음엔?"
  "암스테르담, 암스테르담 샐링거에 묵었어요. 특실에서 미팅을 몇 번 했는데 
거기 모였던 사람들한테 뉴욕으로 간다는 얘길 했으니 다들 알았겠죠."
  "뉴욕에선 어느 호텔을 이용했죠?"
  "비콘 힐. 거기서도 미팅이 있었죠. 마찬가지로 워싱턴으로 간다고 했던 것 
같구. 그 다음 워싱턴으로 가서, 여기 보니까 정확하게 시월로 돼 있군요. 또 
비콘 힐에 묵었어요. 신축호텔이죠."
  인우티의 빠른 어투를 쫓아가느라 정신없이 볼펜을 놀리던 콜비는 순간 손을 
멈춘채 중얼거렸다.
  "비콘 힐..."
  "맞아요, 비콘 힐. 어딜 다녀봐도 그 호텔만한 곳은 없을 거요. 한번 
묵어봤어요?"
  "아직... 자, 계속하죠. 시월 다음부터."
  "이월까지 여기 있다가 제네바로 가서 제네바 마키에 묵었고, 그 다음은 
어디보자. 아, 로마로 가서 친구들을 만난 다음 부활절 휴가로 가족들 만나러 
런던으로 갔어요."
  "여행은 보통 누구랑 합니까?"
  "아, 콜비씨. 그건 개인 프라이버시 같은데."
  인우티를 설득해서 기어이 알아내고 싶었지만 콜비는 생각 끝에 한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그동안 찾아다니던 실마리가 보인 까닭이었다. 그러나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뉴욕으로 돌아와 다시 수첩을 읽어 내려가던 그는 여섯개 중 
다섯개만 실마리와 짝을 이룬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다시 한 번 실마리와 
연결되는 않은 사건의 주인공인 세라노를 찾아가기로 했다. 폴은 자기도 
따라나서겠다며 끝까지 억지를 부렸다.
  "전에 얘기했잖아. 인터뷰 장면은 안된다구. 아니 어떤 골 빈 사람이 머리통 
위에서 카메라가 믹서기 돌아가듯 돌아가는데 솔직하게 대답을 해주겠어?"
  "믹서기라뇨? 소리 안 내면서 한다니까요."
  폴은 막무가내로 콜비에게 매달렸다.
  "브리트 페럴리도 해냈는데 뭘 그래요. 카메라 기사가 있는지 잘 의식하지 
못한다니까요. 샘, 부탁해요, 제발. 일하는 장면을 안 찍고 어떻게 영화를 
만들어요?"
  "다 만들었잖아. 사무실에서 유럽에 있는 조사관들과 보험사 직원들 하고 
얘기하는 걸 찍고서 뭘 그래? 도둑맞은 집까지 들어가서 찍어댔잖아. 사실 
그렇게 하면 안되는 거야. 불법이야. 피해자들한테 해가 갈 수도 있어. 아무튼 
불법이든 적법이든 다 찍었잖아. 그럼 됐지. 그것뿐인가, 내 인생 스토리랑 
일하는 방법은 또 얼마나 얘기했게? 수천번은 더 했을..."
  "아직 삼십분 내지 사십분용밖에 못 찍었어요. 다행히 다 멋지게 나왔어요. 
긴박감과 현장감을 더하면 진짜 근사할 거예요, 샘. 이번 영화의 포인트는 
진행중인 사건을 추적해가는 맛에 있습니다. 이미 끝난 걸 재연하는 게 
아니잖아요. 관객들은 실제 사건에 반응을 보여요. 샘, 부탁할게요. 실험적으로 
딱 한 번만 해봅시다. 만약 해봐서 안되면 다음번엔 다른 방법으로 알아서 
할테니까, 오케이?"
  콜비는 마음이 흔들렸다. 카메라가 있더라도 상대방으로부터 노련하게 질문에 
대한 답을 얻어내리라는 자신감 외에도 자신이 담겨 있는 영화를 남기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다.
  "좋아요. 하지만 두 가지 조건에 먼저 약속을 하지. 첫째, 세라노가 원치 
않으면 즉시 돌아간다. 둘째, 인터뷰 자리에서 들은 얘기는 귀신한테도 얘기 
안한다. 마누라, 엄마, 단골 이발사한테도 절대 안돼요. 손들고 맹세할 수 
있어요?"
  "맹세합니다. 날 믿어요, 샘."
  "좋아, 한번 믿어보지. 아카풀코, 내일 아침 여덟시 삼십분 비행기!"

  카를로스 세라노의 별장은 아카풀코의 붐비는 해안과 시끌벅적한 거리의 
소음을 벗어나 공중 위에 붕 떠있는 느낌이었다. 절벽 위라는 지형 탓에 돌 
대신 잔디로 담장을 이룬 별장이었다. 베란다 소파에 앉은 폴의 시야에는 구름 
한 점 없는 시월 아침의 하늘과 바다, 끼룩거리는 갈매기와 푸른 산호초를 
가르는 흰 파도가 보였다. 벽에 걸린 유화가 풍기는 현란한 색조가 페루 
유적지에서 캐낸 듯한 선반 위의 도자기가 그 집안의 풍요로움을 상징하고 
있었다. 액자와 여러 장식물로 빽빽하게 장식된 사방 벽 중 가장 단순하고 
밋밋한 벽을 가리키며 세라노가 콜비에게 고래를 돌렸다.
  "그냥 저대로 놔두고 있죠. 볼 때마다 도둑 맞은 걸 생각하면서 다신 방심하지 
말자는 교훈을 얻기 위해서 말입니다."
  "좋습니다."
  콜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이렇게 다시 만나주셔서 감사합니다. 속이 상하시겠지만 몇 가지 질문을 
다시 하려는데 괜찮겠죠? 이미 한 질문도 있을 텐데..."
  "아 그럼요. 내 그림 찾는 일인데 질문 몇 가지 더 못 받겠습니까? 하시죠."
  수첩을 펼친 뒤 콜비는 흰 여백의 맨 꼭대기에 시월 달 날짜를 적었다.
  "다시 한 번 선생 스케줄을 점검하려고 하는데, 여행 간 장소, 만난 사람들, 또 
여기 초청했던 손님 등등..."
  "만난 사람은 저번에 다 얘기했을텐데요. 다 끝났잖아요, 그 얘긴."
  "죄송합니다만 다시 한 번 말해주세요. 수사에 꼭 필요한 일이라서요."
  "그렇다면..."
  세라노는 가까이 있는 책상에서 서류철을 하나 들고 왔다.
  "여기 써놓은 게 있는데... 그러잖아도 오신다고 해서 미리 준비해놨죠. 
잊어버리고 얘기 안한 것들이 있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어디서부터 시작할까요, 
그럼?"
  "작년, 정확히 말해 십이월에 사건이 있었죠. 그때부터 시작할까요?"
  이미 대형 거실과 별장내의 열두 개가 넘는 객실 소장품들을 촬영한 
카메라에게 지시를 내린 폴은 여러 호텔내 미팅에 관해 계속 질문을 퍼붓는 
콜비의 날카로운 머리회전까지 필름에 담으려 했다.
  "아스펜에선 어디 묵었다구요?"
  "레드 마운틴에 있는 산장에 세냈어요.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은 것 같은데, 
미팅은 없었어요. 거기서는 푹 쉬기만 했으니까."
  "두달 내내?"
  "스키 타기에 무척 좋은 곳이니까요. 아, 요한 리옹에 있는 화랑에서 그림 
두장을 샀으니까 그것도 일조의 사업이라면 사업일 수 있겠죠. 하지만 미팅은 
없었어요."
  "좋습니다. 여름은 어때요?"
  세라노는 서류철을 봐가며 여름 스케쥴을 이야기했다.
  "구월에 시카고에서 목축없자들을 만나..."
  "지난번에 시카고 얘긴 없었는데?"
  "그걸 잊고 얘길 안했나봐요. 아까 그랬죠? 잊어버린 게 있었다구. 비콘 힐에 
며칠 묵었어요. 회의실에서 두번 미팅을 가졌구요."
  "며칠이면 얼마..."
  "오일쯤?"
  "그 다음은요?"
  세라노는 계속 말하고 있었지만 콜비의 마음은 이미 다른 곳에 가 있었다.
  폴은 얼굴빛이 달라진 콜비를 주시하며 세라노와 그가 나눈 대화를 
생각해보았다. 아스펜, 요한 리옹에 있는 화랑, 스위스와 이탈리아에 있는 
친구별장, 시카고 비콘 힐에서의 목축업자 회담. 그 중의 무엇일까? 뭐가 됐든 
콜비는 단서를 찾은 눈치였다.

  "뭐예요?"
  뉴욕행 비행기에 오른 뒤 폴은 콜비에게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그러나 
콜비는 고래를 흔들었다.
  "아직 얘기할 수 없어."
  아예 입다물고 있으라는 듯 콜비는 폴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메모수첩을 
펴들었다.
  공통분모 속에 들어온 여섯 사건을 어떻게 풀어내느냐, 그것이 콜비에게 
남겨진 숙제였다. 해당 피해자 여섯 명 모두 피해 당하기 몇 개월 전 비콘 
힐이라는 호텔에 묵었다는 사실을 토대로 콜비는 범인을 쫓기 시작했다.

  여름이 되기 전에 지니는 은행에 있는 자금을 정리해서 샐링거 호텔 그룹 
주식을 이 퍼센트를 구매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지니 스타렛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매매였다. 물론 사들이자마자 로라에게 형식상으로 되팔릴 
주식이었지만 지니는 그전까지 모든 것을 완벽하게 정리해 넘겨줄 생각이었다. 
결국 그녀는 이 퍼센트 주식매매 동의안을 다룬 유월 정기 회의에 모습을 
드러내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스타렛이란 명성 때문인지 이사들은 아예 
의논조차 하지 않고 무기명 투표로 동의안을 가결시켰다.
  "축하해요."
  오래전부터 서로 친하게 지내왔던 콜 해튼이 그녀에게 악수를 청했다.
  "우리 사업에 많은 도움 바랍니다."
  펠릭스는 공식적인 인사를 했다. 몇 년 전부터 펠릭스는 윌리 스타렛과 
친분을 유지해오고 있었다. 윌리 스타렛은 늘 대형규모로 사업을 벌여야 성공할 
수 있다는 경영설에 찬동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이혼한 사이기는 해도 그런 
남편 밑에서 사업수단을 배웠다면 지니도 윌리와 비슷한 사업관을 갖고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펠릭스는 호텔 재정이 어려워지자 일부를 떼어 
팔자는 이사들을 막았다. 지니가 자신의 호텔 제국을 지켜주리라고 기대했다.
  "극복할 수 있는 어려움인데 이사진들은 그걸 이해 못해요."
  펠릭스는 지니에게 커피를 대접하며 자신의 전략을 설명해나갔다.
  "붕괴라는 건 말도 안되죠. 사업하다 보면 올라갈 때도 있고 내려갈 때도 
있는데 그걸 못 참다니. 물론 현금이 잘 안 돌아가긴 해요. 하지만 그것도 곧 
풀릴 거라고 봅니다. 신축중인 호텔 두 개가 돌아가면 자금 문제도 마무리 될 
테고."
  "하지만 아까 보니까 몇몇 이사들은 계속 경매를 주장하던데요."
  해튼과 다른 이사들이 자신에게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지만 지니는 슬쩍 
펠릭스의 신경을 건드려 보았다.
  "몇몇은 그래요. 하지만 절대 그럴 수 없을 겁니다."
  펠릭스는 화제를 바꾸어 다른 얘기로 지니를 끌어갔다. 최근에 펠릭스는 
골치를 썩고 있었다. 집안 구석으로 파고들어와 진을 치고 있는 사기꾼 같은 
녀석인 사위. 뉴욕에서 거의 시간을 보내다 집에 가끔 와도 얼굴조차 마주치지 
않으려는 레니. 아내가 아니라 마치 낯선 사람 같았다. 예전과 다름없이 
차분하고 우아했으나 이제 그녀를 잡을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 같았다. 실력 
있는 사업가로 받들어주던 예전의 부드러운 순종마도 더 이상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남아 있는 희미한 관계마저 부서질까 두려워 함부로 할 수도 
없었다.

  "다음달 탱글우드 축제 티켓 두 장을 구해놨는데."
  아사, 캐롤, 토마스, 바바라 젠슨이 알리슨, 벤과 함께 비콘 힐에서 식사를 
하는 자리였다. 펠릭스는 오랜만에 레니에게 시선을 맞추려고 했다. 오래전부터 
두 사람은 다름 사람을 끼고 식사를 할 정도로 둘만의 시간을 피해오고 있었다.
  "아침에 갔다가 몇 군데 돌아보면 좋을 것 같아. 어때? 휴가 가본 지 오래된 
것도 같구."
  "시간이 없을 거예요. 더구나 거긴 많이 가본덴데... 알리슨, 벤하고 가면 
어떻겠니? 가보면 좋을 텐데."
  "글쎄, 나쁘진 않은데요. 남동생인지 여동생인지 모르지만 아무튼 지드 
동생한테 태교로 무도회 구경 시켜주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알리슨!"
  레니는 기쁨과 놀라움으로 외쳤다. 알리슨과 벤은 서로 쳐다보며 연신 
웃어대고 있었다.
  "언제 알았는데?"
  "오늘 아침입니다."
  "출산은 언제니? 오, 세상에. 정말 축하한다. 저드한테도 축하한 일 아니겠니. 
하긴 처음엔 샘 꽤나 낼 게다. 정말 기쁘다, 알리슨."
  펠릭스는 벤 때문에 속이 부글부글 끊어올랐다. 오웬의 자리에 앉아 있는 
저드 가드너의 아들. 오웬의 저택을 차지한 채 회사를 말아먹으려는 도둑놈. 콜 
해튼과 토마스 젠슨까지 자기 편으로 끌어들인 교활한 놈. 심지어 아사까지 
끌어가다니! 펠릭스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파도가 아무리 높아도 지금껏 포기한 단어를 모르고 
살아온 펠릭스였다. 그는 기회를 타 망할놈의 사기꾼을 제거해버릴 생각이었다. 
다음달 다가올 이사진들의 강력한 압박도 당장 문제였지만, 그에겐 벤 가드너를 
없애는 것이 최고의 목표로 느껴졌다.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면서도 그는 그 문제에 깊이 빠져 있었다. 옆자리의 
캐롤과 이따금씩 이야기를 나누며 운전하는 아사뒤로 펠릭스와 레니는 말없이 
떨어져 앉아 있었다.
  "진짜 탱글우드에 안 갈 건가?"
  현관에 발을 디딘 순간 펠릭스는 레니에게 불쑥 입을 열었다.
  "사람들이 당신 왜 안 보이냐고 물어. 가만히 듣고 있을 순 없잖소?"
  "뭐라고 하는데요?"
  "우리가 별거중이라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말도 안되는 소리라뇨? 그럼 우리가 함께 있다는 소린가요?"
  "당신은 내 아내잖소. 실컷 자유를 줬을 텐데. 당신한테 어울리는…"
  "당신한테 어울리지 않구요?"
  "우리 둘 다에게 합당한 자유겠지."
  "아뇨. 당신한테만 어울리는 자유였어요. 필요할 때를 제외하곤 날 무시해버릴 
수 있었으니까요. 그게 왜 날 위한 자유죠? 누구에게 과시하고 선보이기 위해 
날 필요로 할 때까지 그냥 내버려둔 게 날 위한 자유였다구! 당신은 내 마음을 
원한 게 아니었어. 내 몸뚱이만을 원했지.
  "말도 안되는 소리요. 난 당신을 완전히 갖고 싶었소. 변한 건 당신이오, 레니. 
당신 진청 식구들처럼 차갑고 오만하게 변해버렸어."
  펠릭스는 현관구멍에 열쇠를 밀어넣는 레니의 손을 붙잡았다. 손을 대자 
움츠러드는 아내를 향해 그는 기어이 분노를 터뜨렷다.
  "나한테서 달아나려구? 어림없어! 내 말대로 해. 다른 건 아무래도 좋아. 
아무런 요구도 안할테니까. 탱글우드에 가서 나랑 춤을 춰야 돼. 알았어? 지금 
간다고 대답해, 지금 당장!"
  레니는 가슴속으로 저며드는 고통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의 신체 일부가 자신에게 닿아 있다는 느낌은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펠릭스 샐링거는 남편이었다.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뉴욕에 집이 있는데. 친구들도 그쪽에 있는데, 
알리슨과 그애가 이룬 가족, 토마스, 바바라 그리고 웨스….
  이혼, 홀로 된다느것. 아내 자리를 떠나 홀로 된다는 사실. 모든 것이 
두려웠다. 너무 나이가 들었다. 모험을 하기엔 너무나… 하지만 다른 여자들은 
잘도 해나가잖아. 비록 위험할지 모르지만 삶 같지 않은 생활을 과감히 버리는 
여자들이 셀 수 없이 많은걸.
  "대답하라니까!'
  펠릭스는 악문 이빨 사이로 쇳소리를 냈다. 레니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듣고 있지 않았다. 현관 조명 아래 가까이 서 있는 남자의 강한 팔 힘을 
어깻죽지에서 느낄 뿐이었다.
  "가게 내버려둬요, 펠릭스. 날 내버려둬요."
  그토록 하고 싶었던 말이 드디어 튀어나왔다.
  "처음에도 이런 식으로 시작했잖아요. 끝은 제발 이런 식으로 하지 말아요."
  "지금 도대체 무슨 애길하는 거야?"
  "내 팔을 이렇게 잡고 날 저드 아파트에서 끌어냈잖아요. 날 때리기까지 했죠? 
처음은 그렇게 시작했지만 끝만은 이렇게 하고 싶지 않아요, 제발!"
  갑자기 힘차게 팔을 빼내는 레니의 힘에 놀라 그는 그녀를 잡지 못했다. 
재빨리 문을 딴 뒤 그녀는 미끄러지듯 실내로 들어갔다.
  그는 거실로 들어가는 그녀를 곧바로 뒤따라갔다. 켜두고 갔던 구석의 
램프빛이 거식을 푸근하고 부드럽게 매만지고 있었다. 사랑과 행복이 깃들여 
있어야 할 공간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마치 적처럼 마주 서 있었다.
  "끝이라니?"
  그의 음성은 몹시 거칠었다.
  "사람들이 결혼 후에도 끝없이 사랑하며 살아간다는 낭만적인 생각을 아직도 
갖고 있는 건가? 왜 그렇게 유치한지? 내 말 잘 들어, 레니. 어떤 짓을 하든 
좋으니까 이혼만은 안돼. 그냥 지금처럼 살아도 좋아. 뉴욕에서 애인하고…"
  "뭐라구요?"
  "한두 번 눈에 뛴 게 아니더군. 하지만 상관없어. 내 옆에서 조용히, 우아하게 
사는 모습만 보여주면 돼. 다른 변화는 인정 안해. 인정 못해."
  "싫어요. 난 변화를 원해요."
  낮고 단호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대들고 소리치는 것보다 더 위협적이었다.
  "이혼해요, 펠릭스. 이렇게 살 순 없어요, 아니 이렇게 살면 안돼요. 결혼이 
뭔데요? 우린 여태껏 한순간도 결혼생활을 해보지 못했어요. 왜 이런 생활을 
원하는지 이해가 안돼요. 바람난 아내를 그대로 받아들이겠다구요? 그만 놔줘요, 
펠릭스. 당신하고 싸우기 싫어요. 싸워봤자 남을 게 뭐 있겠어요?"
  "나한테서 떠나진 못해. 당신은 내 거야. 계속 내 옆에…"
  "아니에요. 한 번 팔렸으면 그걸로 충분해요. 당신에게 속했다고 믿어보려 
했어요. 그래서 믿은 적도 있어요. 하지만 이젠 아니예요. 벌써 내 나이 
마흔여덟이에요. 더 이상 반쪽 인생을 살면서 아까운 세월을 흘려보낼 순 
없어요."
  "나와 결혼해서 전에 느껴보지 못한 걸 다 느끼고 살았잖아. 그 시궁창에서 
빼내고 모든걸 다 줬는데…"
  "당신이 도둑질 해내고 파괴시킨 사람의 품에서 날 빼냈겠죠!"
  순간 펠릭스는 새파랗게 질려서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벤, 그 자식이 얘길했군. 그 교활한 사기꾼 때문에 나한테서 등을 
돌리겠다구! 이런 음모를 꾸미기 위해 그놈이 우리 집안엘 들어왔어! 그걸 몰라? 
그놈은 사기꾼이고 거짓말쟁이야. 뭘 얘기했는지 모르지만 그건 다…"
  "벤한테 얘기 들은 건 하나도 없어요. 내가 알고 있는 것만 얘기했지."
  "그럼 저드가 그랬군. 결혼한 뒤에도 그 녀석을 만났단 말이야? 그자가 얘기한 
거지? 거렁뱅이 같은 놈, 배신자! 돈 받아 처먹고 떨어진다 그러더니, 나쁜…"
  "그만둬요, 펠릭스. 그 사람은 약속을 지켰어요. 당신이 날 끌고 나온 뒤로 
저드와 난 영영 이별을 했으니까요."
  "그럼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그걸…"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그날 제대로 귀만 기울였다면, 저드 회사를 말아먹은 
장본인이 당신이란 걸 눈치챘다면 분명 모든 것이 달라졌을 거예요. 하지만 
지금 와서 후회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더 이상 당신하고 살고 싶지 
않다는 내 마음이 중요한 거예요."
  왜 이리 떨릴까 하는 마음으로 레니는 무릎 위에 두 손을 보았다.
  "당신에 대한 감정은 이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아요. 사업에 대한 당신의 
강력한 추진력에 매료돼서 난 그게 사랑인 줄 착각하고 살아왔어요. 그게 
남편에 대한 존경심인 줄 착각했다구요. 하지만 그건 단지 꿈이었어요, 멍청한 
꿈. 사랑은 커녕 당신을 좋아할 수도 없어요."
  "이런, 우라질. 창녀 같으니라구! 뉴욕에서 그 지랄하고 다니다가 여기와서 
얌전한 척…
  "얌전하게 속해 있으라 그런 게 누군데요? 당신에게 속해 있으라 명한 
사람이…"
  그녀는 분을 참아내기라도 하듯 손바닥으로 입을 가렸다. 누구나 다 레니 
셀링거는 감정을 다스릴 줄 아는 여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마땅히 그래야만 
되는 줄 알고 그녀는 큰소리 한 번 치지 않고 살아왔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바락바락 악을 쓰고 있었다.
  "맞아요, 말 잘했어요. 여길 오는 게 아니었어요. 왜 그런 날 내버려뒀죠? 왜 
날 계속 옆에 두기 원하냐구요? 여자가 싫다는데 왜 그 여잘 원하는 거죠? 당신 
도대체 어떤 사람이에요?"
  그는 그녀를 뚫어지게 보았다. 펠릭스는 영원히 아내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당신이 필요해. 전혀 예상하지 않은 일들이 터지고 있는데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단 말이야."
  레니는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믿을 만한 친구 하나, 의지할 만한 친구 하나 
없는 실패자의 얼굴이었다.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던 오웬 샐링거처럼 되고 
싶어서 수염까지 길렀지만, 그의 회색빛 머리카락은 초라한 인생 낙오자를 더욱 
쓸쓸하게 만들고 있었다.
  "당신이 필요해. 내 말 알아들어?"
  "너무 늦었어요."
  그녀의 음성은 이제 놀랍도록 차분했다.
  "그 얘길 이십년 전 아니 십년 전, 아니, 오년 전에만 들었어도… 아니 입 
밖으로 말하지 않고 그런 생각만 갖고 있었더라도 당신은 지금과는 달랐을 
거예요. 이젠 너무 늦었어요."
  "아냐, 안 늦었어."
  그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안 늦었어. 그 바보 녀석은 기억할 가치도 없어. 그 아들 녀석도 애비보다 
교활하긴 하지만 역시 별 볼일 없다구. 당신은 그저 우리 둘이 나눴던…"
  "만지지 말아요!"
  그녀는 그의 손길을 피해 이층으로 올라가는 층계참으로 갔다.
  "둘이 나눈 건 아무것도 없어요. 내 말 무슨 뜻인지 몰라요? 괜히 내가 
장난하는 줄 알아요?"
  그녀는 층계에 발을 올렸다.
  "다시 한 번 얘기해줘요? 펠릭스, 난 이혼하겠어요. 몇 년 동안 내내 이 소릴 
마음속에만 담아두고 있었던 점 사과하라면 사과할게요. 하지만 지금 확실히 
얘기할 수 있어요. 이혼해요, 이혼할 거예요. 무슨 수를 써도 내 뜻을 바꿀 순 
없어요. 그리고 날 건드리지 못해. 무서워서도 못 그럴걸요.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눈으로 쳐다보길 원하는데, 그런 사람이 스캔들 일어나는걸 
좋아하겠어요? 조용히 끝내요!"
  "잠깐만!"
  그의 얼굴은 칠흑처럼 변해 있었다.
  "도대체 어딜 가는 거야?"
  내 집이요. 내일 아침 변호사 만나 깨끗하게…"
  "이집에선 안돼."
  "왜요?"
  "내 집이야. 지금 당장 나가!"
  "무슨 소리예요? 이건 우리 집이에요."
  "내가 샀어. 나가! 내가 허락했기 때문에 여기서 살 수 있었지. 하지만 지금은 
안돼. 당장 내 집에서 나가!"
  그녀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맞는 말이었다. 가구를 고르고 그림을 사고 
파티를 열긴 했지만 그건 다 펠릭스의 돈으로 한일이었다.
  "좋아요. 알리슨과 벤하고 자겠어요. 그런 뒤 아침 일찍 뉴욕으로…"
  "지옥으로 가든 상관 않겠지만 어떡하지? 그 집도 안되겠는데."
  "그건 내 집이에요. 아버님을 위해 내가…"
  "내 거야. 내 돈으로 사서 내 돈으로 유지비를 낸 집이야. 내 허락 없인 절대 
그곳에 못 들어가!"
  "펠릭스. 이럴 순 없어요."
  "이럴 수 없어? 꿈에 빠진 멍청이 로맨티스트 주제에 감히 나한테 이럴 수 
없다구? 뉴욕 집에 경비원을 집어넣은 사람이 누군데! 그 집도 내 거야. 
그러니까 그 잘난 애인한테나 가봐!"
  "비콘 힐 호텔로 들어갈 거예요!"
  그녀는 그에게 도전하듯 소리쳤다.
  "매춘부, 갈보 같은 년! 여기서 빨리 꺼지지 못해."
  분노로 시커멓게 변한 얼굴을 그는 손바닥으로 가렸다. 울지 않으려고 애쓰는 
어린애 같은 펠릭스를 레니는 계속 지켜보았다. 스스로 부끄럽기도 했다. 
소꿉장난하다 토라진 아이처럼 치사하게 로라 호텔 운운하면서 펠릭스를 
조롱하다니.
  "미안해요. 그런 얘길 하다니. 펠릭스, 제발 부탁이예요. 우리둘을 위해, 아니 
가족들을 위해 이러지 말아요, 서로 협조해서…"
  "협조!"
  그는 구역질을 하듯 말을 토했다.
  "감사할 줄 모르는 매춘부하구 협조를? 마룻바닥에 깔려 있던 거적에서 
끌어내 최고의 여자로 만들어줬는데 나한테 단 한마디 감사도 없었잖아. 언제 
한 번 감사하단 소리 했어? 협조? 나한테 언제 협조를 했다구? 항상 여기 
있어달라는 것도 아니고, 속을 털어놓으라는 것도 아니고, 하루종일 뭐했는지 
캐묻지도 않았느데, 도대체, 도대체… 단지 날 자랑스럽게 만들어달란 소리밖에 
안했잖아. 당신이 날 자랑스럽게 만들어준
적이 있어? 아무것도 없었어, 아무것도. 내 스스로 했다구. 모든 걸 나 혼자서…"
  그는 말을 끝맺지 못한 채 거칠게 숨을 토했다.
  "여기서 나가. 이젠 필요없으니까 나가라구."
  레니는 소파에 파묻혀 등을 보이고 앉아 있는 펠릭스를 지켜보았다. 결혼생활 
처음으로 그녀는 남편을 측은하게 여겼다. 그가 한없이 불쌍해 보였다. 그러나 
위로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굿바이, 펠릭스!"
  레니는 현관 탁자 위에 두었던 가방을 어깨에 맨 채 집을 빠져 나왔따. 차에 
오르기 전에 그녀는 잠시 망설였다. 내 돈으로 샀고, 내 돈으로 유지한 집이야. 
펠릭스의 말이 귓가에 생생히 울렸으나 그 차 아니면 보스턴으로 갈 방법이 
없었다. 그녀는 시동을 걸었다. 불과 한 시간 전에 달려왔던 그 고속도로를 
그녀는 홀로 다시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잡아냈어. 확실한 걸 잡아냈다구."
  커피와 휴식을 드는 자리에서 샘 콜비는 폴에게 뿌듯한 얼굴로 자랑스럽게 
털어놓았다. 에밀리는 이미 침대에 든 시각이었다. 서튼 광장에 있는 폴의 
아파트에 저녁 초대를 받아 나타난 샘 콜비는 식사하는 동안 내내 세상을 
떠났거나 은퇴한 친구들 이야기와 돌아가신 양친에 관한 그리움을 좀 지겹다 
싶을 정도로 늘어놓았다. 에밀리가 침실로 들어갈 후 폴은 미술품 도난사건에 
관한 질문으로 콜비를 몰아갔다.
  "드디어 잡아냈다니까…"
  콜비는 가정부가 내온 신선한 커피향을 맡아가며 자신에게 중얼거리듯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내 기분이 어떨 것 같나? 여태껏 단서 하나 못 잡다가 큰 걸 잡아챈 기분이 
말일세. 그동안 진짜 기가 막혔지. 어떤 놈인지 모르지만 날 갖고 노는 것 같은 
기분, 당해보지 않고선 모를걸. 진짜 뭐 씹는 맛이지."
  "앉아서 이렇게 얘기 듣는것보다 직접 범인 잡는걸 찍어야겠어요, 샘. 카메라 
스케줄이 내일 어떻게 되는지 먼저…"
  "아냐, 안돼. 진짜 안돼 폴. 당분간 날 혼자 내버려두어야 해. 나중에 내가 다 
얘기해줄게."
  "안되다뇨? 영화 만든다고 했을 대 뭐라 했어요. 최선을 다해 도와준다고 
했잖아요. 세라노 것도 직접 찍었는데 왜 다른 건 안된다는 거죠? 내가 약속 안 
지킬까봐 그래요? 진짜 왜 그래요? 이러지 말자구요. 사건 결말날 때까지 입 꽉 
다물고 있을 테니까."
  "이런 젠장할. 왠만하면 자네 소원 들어주지, 내가 뭇하러… 좋아, 생각 좀 
해볼테니 기다려봐."
  "이번 영화를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잡아나갈 생각이에요. 두가지 인생, 즉 
샘 콜비란 인물에 관해, 또 가지는 미술품의 삶을 조명하는 거죠. 화가 손에 
의해 태어난 미술품이 도둑을 통해 소장가에게 넘어가…"
  "도둑한테 물건을 훔치라고 의뢰한 중개인은 빼놓나?"
  "글쎄, 그런 사람이 실제 있을까요?"
  "있는 정도가 아니라니까. 명품들의 상당수가 그자들 손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인다 해도 과언이 아닐걸세. 내 일은 반 고흐를 들고 직접 브루클린 
전당포로 뛰겠냐 이 말이지. 큰돈은 전당포가 아니라 오천만, 백만을 눈 깜짝할 
사이에 내놓을 수있는 미술소장가들한테 있으니까. 그자들은 세배 네배 아니 
열배 넘게 가격을 불러도 선선히 돈을 내놓거든. 그 돈이 아까우면 물건에 눈독 
들이지 말고 아예 꺼져달라 이런 배짱이겠지. 왜냐, 그런 명품들은 시중에 나와 
돌아다닐 수 있는 매물이 아니거든. 소장가유언에 따라 박물관에 기증되기가 
쉬운 물건이니까."
  폴은 고개를 끄덕이며 연신 콜비의 설명을 따라 적었다.
  "그러니까 매물로 안 나온 물건들을 갖기 위해선 경매장이나 화랑을 통해 
연결된 중개인들이 도둑한테 지시를 내려 빼내오는 것이라 이거군요. 그럼 그 
중개인을 만나봐야겠네요. 그 중개인들을 찾아내서 영화 속에 담겠어요. 그럼 
다음 샘에게 넘겨드리죠."
  "도둑한테 지시를 내린 중개인을 찾아내시겠다구요?"
  "그래요. 직접 뛰어보겠다구요. 영화를 위한 일이라면 뭐든 하겠어요. 그러니까 
나도 수사에 끼워줘요. 앉아서 사람 인터뷰 하는 것보다 차근차근 같이 
다니면서 수사하는 게 더 빠를 거예요. 나눠서 해도 좋을 겁니다. 그럴 경우엔 
샘 혼자 만난 사람들을 나중에라도 내가 다시 만나야겠죠."
  "약속은 못해. 하지만 최선을 다해서 도와줄 테니 자꾸 이러지 말라니깐 
얕잡아볼 게 아닐세, 폴. 아주 큰 놈을 물었어. 큰 사건이라구. 어쨌든 다른 
사람보다 제일 먼저 자네한테 정보를 줄테니까 조금만 기다려봐. 영화 마감 
전에 꼭 알려줄께."
  "얼마나 가디려야 해요?"
  "나 원참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나? 수사는 연애하고 똑같은 거야. 손에 잡힐 
때까진 아무도 몰라. 근사한 영화 만들 수 있는데 뭘 못 기다리나."
  "좋습니다. 그럼 당분간 계속 촬영해 가면서 기다려보죠. 하지만 어느 정도 
됐다 싶으면 즉시 얘기해줘야돼요. 카메라 들고 기다릴 테니까요."
  "실망 안할 테니 두고봐. 기다리면서 심심하지 않게 해줄 ㅔ니가. 도둑하고 
얘길 해보고 싶다고 했지? 시애틀 자동차 수리점에 일하는 친구가 하나 있는데 
그런 쪽에서 손 씻고 나와 착실하게 일하고 있는데 한번 만나보지 그래. 
화랑가에서 물건 훔쳐내며 썩고 있길래 내가 빼내온 친군데 만나보면 자네 
영화에 제법 도움이 될 걸세. 여기 그 친구 이름이 있네. 가서 내가 보냈다고 
하면 성의껏 도와줄 걸세. 만나고 돌아온 다음 나한테 전화를 해. 그동안 알려줄 
게 있으면 메모했다가 즉각 보고를 드릴 테니까."
  다음날 오전 내내 사무실에 틀어박힌 채 콜비는 비콘 힐 호텔에 관련된 
자료들을 샅샅이 챙겨나갔다. 직접 달려가 알아보고도 싶었지만 목표물에 
접근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정확하게 손끝으로 꼬집어낼 수 있는 확실한 목표 
지점이 어딘지 모르는 상황에서 괜히 경보음을 울릴 필요는 없었다.
  그는 수첩에 적힌 사항들을 퍼즐하듯 들여다봤다. 시카고, 뉴욕, 필라델피아, 
워싱턴. 어떻게 네 군데가 연결됐을가? 누군가 네 곳에 근무하는 객실 청소부를 
각각 매수해서 호화 특실에 묵은 손님들이 외출할 때마다 집 열쇠를 훔치게 
한다? 아냐, 훔쳐낸 건 아니겠지. 열쇠를 복하해냈겠지. 경보장치하고 금고번호 
같은 것도….
  그너나 콜비는 객실 청소부를 고용해 열쇠를 복사해냈다는 가설을 포기해야만 
했다. 너무나 위험한 가설이었다. 비밀리에 진행시켰을 일에 많은 사람이 
개입됐을 리 없었다. 그 방법은 아무래도 아니었다.
  청소부가 아니라면 그럼 누구란 말인가? 누가 객실까지 들어가 열쇠를 
복사하고 수첩까지 뒤져 비밀번호를 알아낼 수 있단 말인가? 호텔 경비원? 모든 
객실에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는 신분이니 그럴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네 군데로 흩어져 일하는 경비원들을 모두 다 규합해 일을 진행시킨다는 
것 역시 너무 위험한 방법이었다.
  사무요원, 예약관리인, 벨보이, 식당 종업원 등도 그런 이유에서는 다들 
마찬가지였다. 각 호텔마다 단 한 명을 심어놓는다 해도 벌써 네 명이다. 극도의 
비밀을 원하는 직업에서 네 명은 너무 나 큰 위험을 동반한 숫자였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중역진들뿐이었다. 호텔 사장과 경비, 영업, 관리담당 
부사장들, 그리고 비서진들이 있었다. 그러나 비서진들은 대상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었다. 네 곳을 연결 짓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이동성 있는 자리가 더 
정확할 듯했다.
  그렇다면 결국 남은 사람은 로라 페어차일드, 클레이 페어차이드, 그리고 
나머지 부사장 두 명뿐이었다.
  손바닥에 오른 네 명을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던 콜비는 드디어 황금을 캐낼 
수 있었다.
  우연히 굴러들어온 황금을 앞에 둔 채 그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흥분했다. 
뉴욕에서 절도죄로 체포된 로라와 클레이의 전과 사실과 오왠 샐링거의 유언장 
재판 사실을 열두 번도 넘게 읽어나가던 샘 콜비는 자신에게 나타난 행운의 
여신에게 엎드려서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보스턴으로 날아간 그는 철 
지난 신문과 사교잡지 등을 통해 샐링거 일가에 관한 뒷 얘기를 샅샅이 
조사했다. 그곳에도 로라와 클레이 페어차일드 얘기가 나와 있었다. 십일년 전 
샐링거 여름별장에서 사라진 보석 도난사건에 페어차일드 남매가 연결됐다는 
소문도 실려 있었다. 필요한 것은 수첩에 모두 옮겨 적은 뒤 그는 펠릭스 
샐링거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비서한테 무슨 내용인지 말을 남기지 그랬소?"
  펠릭스는 콜비가 책상 건너편 의자에 앉자마자 대뜸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뉴욕 도난사건이라면 할 말 없으니까 그대로 돌아가시오. 그 때 당신 난 그 
집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으니까."
  알고 있습니다. 오늘 찾아뵌 것은 그 일하곤 좀 다른 얘긴데요. 아, 물론 
사건과 연결된 사항이긴 합니다."
  콜비는 책상 위로 몸을 기울이며 소근거리듯 말했다.
  "지금 말씀드리고자 하는 건 아주 아주, 대단히 중요하면서도 예민한 
문제입니다. 샐링거 선생. 그래서 말씀인데, 우선 먼저 약속을 해주셔야 
되겠습니다. 비밀을 지켜주신다고 말입니다."
  "난 소문내고 다닐 사ㄹ마도, 그럴 시간도 없는 사람이오."
  펠릭스는 차갑고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도난사건은 레니가 부주의해 일으킨 
그녀의 문제일 뿐이었다. 버젓이 남편과 가정이 있는데도 혼자 살다 그렇게 
변을 당했으니 당해도 싸다는 생각이었다 그런 상황에 도난수사가 어떻게 
돼가고 있는지 알 봐도 아니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호텔계가 파리를 날리는 칠월의 한가하고 지겨운 시간에 한참 화가 나 있던 
펠릭스는 시간이 비기도 했지만 그 누구에게라도 화풀이를 하고 싶어서 콜비를 
사무실 안에 들엿다. 사업도 잘되고 집안도 문제가 없었다면 결코 수다스런 
보험수사관을 만난 펠릭스가 아니었다. 자신이 죽고 싶을 만큼 심란해진 이유는 
그는 레니에게 돌리고 있었다. 아내에게 외면당한 남자에게 남은 것은 절망과 
허탈감뿐이었다. 여름 동안 이사회의를 최소시켜버렸기 때문에 회의서류를 
넘겨가며 바쁜 척할 핑계도 없었다. 자기 식으로 회사를 운영해나가기 위해 
싸운 끝에 돌아온 것은 외로움과 휴식없는 피곤함뿐이었다. 구월에 다시 만나게 
될 이사진들을 막아내기 위해 힘껏 머리를 짜내야 했지만 그래도 그때까지 
시간이 있었다. 한가한 시간이 견딜 수 없게 지겨웠던 참에 콜비가 나타났던 
것이다.
  "소문 같은 걸 내고 다닐 생각은 없소. 한 번 들은 건 그대로 속에 담아두는 
사람이니까."
  펠릭스는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콜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뉴욕에서 일어나 그 사건 외에 다섯 가지를, 그러니까 여섯사건을 수사중인데 
모두 유형이 같습니다. 그래서 모든 걸 한 사람이나 한팀이 해치웠다고 보고 
있는중이요."
  "그래요?"
  "그래서 말씀인데, 수사를 위해 선생 밑에서 일했던 아니, 같이 살았다는 편이 
옳겠군요, 그 두 사람에 대해 몇 가지…"
  콜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펠릭스는 의자를 뒤로 밀치며 벌떡 일어났다. 
책상을 치며 일어나는 바람에 책상 위에 있던 펜접시가 뒤집어져 연필, 핀, 
클립, 편지, 따개칼 등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같이 살았다구요?"
  "대략 사년 가냥 되나… 잠깐, 어디 여기 보면…"
  콜비는 수첩을 들추어 정확한 햇수를 찾기 시작했다.
  "누구 얘긴지 아시겠죠? 로라 페어차일드하고 클레이라는 남동생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하고 싶은데…"
  "할 얘기 없으니 그만 가보지 그래요. 아무 말하고 싶지 않소."
  딱딱하기 이를 데 없구만. 콜비는 말없이 펠릭스를 바라보았다. 그래, 네가 
그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아직 확실한 증거는 없어요. 그냥 수사에 도움이 될까 해서 정보를 모으고 
다니는중이죠. 아까 그렇게 비밀을 부탁한다고 강조했던 이유도 다 그런 
맥락에서 나온 얘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펠릭스는 차분하게 설득조로 나오는 콜비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잔뜩 긴장한얼굴이었다.
  "어쨌든, 아무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여섯 사건을 한 선에 놓고 조사를 하고 
있는데…"
  콜비는 주의깊게 듣고 있는 펠릭스에게 그동안 정리해두었던 가설을 얘기해 
나갔다.
  "뭔가 수상한 냄새가 나는데 마냥 손놓고 있을 순 없지 않겠어요? 그냥 
멀뚱하게 의심만 하고 있다가 또 한차례 뒤통수를 얻어 맞을지도 모르죠. 
페어차일드 사람들하고 나머지 부사장 두 명을 놓고 한정없이 의심만 할 순 
없습니다. 빨리 조사를 끝내 그 네명이 다 아니라는 결론이 나오면 그 즉시 
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야 된다는 얘깁니다. 문제는 그 도움을 줄 수 있는 분이 
바로 선생이십니다. 뭘 얘기해도 괜찮습니다, 그냥 생각나는대로 페어차일드에 
관한 얘기를 한번 해보시죠."
  기분 내키지 않은 일이었지만 펠릭스는 어렵게 입을 열었따. 케이프 코드 
별장에 동생과 함께 나타나 오웬에게 접근한 로라의 교묘한 술수, 내부소행으로 
보이는 레니의 보석 도난 이야기 등을 클레이와 로라의 숨겨진 범행으로 묘사해 
나갔다. 별장 일이 끝났는데도 거머리처럼 보스턴으로 따라온 이야기도 물론 
했다.
  "거미리가 아니라 흡혈귀란 얘기가 옳을 거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우리 가문에 달라붙었으니까. 내 조카하고 약혼까지 했던 걸 보면 모르겠소?"
  "조카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폴 잰슨이라고 지금은 켈리포니아에서 영화를 만들고 있소."
  세상에, 일이 꼬여도 어떻게… 콜비는 무의식적으로 폴의 이름을 수첩에 
적었다.
  "아직도 약혼중인가요?"
  "하나님이 보호하사 조카 녀석이 그 여잘 차버렸소. 우리 가족을 따라 말이오. 
조카는 지금 보스턴의 유명한 가문 출신과 결혼해 잘 살고 있소. 그 도둑년과 
헤어질 수 있었다니 다행 중의 다행이지."
  "약혼기간은 그럼 얼마 동안 지속 됐었나요?"
  "일년? 거의 이년인가?"
  "이년 동안 약혼상태로 있었다구요?"
  "아버님이 돌아가신 뒤 우린 그 도둑을 쫓아냈고 그 후 두 번 다시는 보지 
못했소."
  "법정에선 봤을 것 아닙니까?"
  "아, 그걸 잊고 있었군."
  콜비는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폴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젠장할! 콜비는 안타까웠다. 마음에 꼭 들었던 젊은이가 사건에 휘말려들 것 
같은 기분에 속이 상하기까지 했다. 그를 믿고 영화에 출연해 전국 방송을 타고 
싶었는데. 젠장할, 일이 꼬여도 어쩌면 이렇게… 콜비는 찜찜한 기분으로 수첩을 
넘겼다.
  "주방에서 일하던 하녀가 호텔 네개를 거느린 사장이 될 수 있었다니, 놀랍지 
않습니까? 무슨 돈으로 그 건물들을 사들였을까요?"
  "그 여자 재정관계를 내가 어찌 알겠소?"
  "그거야 물론 그렇겠죠. 하지만 그 호텔들은 원래 선생 소유물 아니었소. 오웬 
샐링거씨 유언장에 있던 바로 그 호텔들일텐데."
  깍듯하게 나오던 콜비가 약간 반격조로 나오자 펠릭스는 딱딱한 눈초리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니까 대충은 재정관계를 눈치챌 수도 있지 않겠어요. 보수비도 대략 
뽑아낼 수 있을 테구. 호텔 객실에 들어간 직원들 숫자를 추정해보면 고용비도 
나올텐데… 객실이 백개쯤 되죠?"
  "일반 객실이 아니라 특실이오."
  펠릭스는 차갑게 대꾸했다.
  "시카고 하나만 객실과 특실로 꾸며졌지 세 호텔 다 응접실 낀 특실로 
꾸며졌소."
  "글쎄, 특실이든 객실이든 내가 뭘 원하는지 대강 아시겠죠? 그 여자가 지금 
빚에 몰려 있나, 아니면 어떤 상황인가를 알아내야 뭔가 좀 분명해질 것 
같습니다."
  "대략 호텔 한개당 천만에 구입했다고 보면 될거요. 적게 잡아도 보수비는 
각각 이밸에서 삼백만… 아니 더 들어갔을걸. 정확한 금액은 보고자료를 보면 
될거요. 호텔 한개당 현찰이 천만 있어야 됐을 거요. 뉴욕쪽은 천사백이 들어 
갔을 거로 보고 있소. 운영비도 있었겠죠. 그중 큰 비율은 고용비가 될거요."
  "그럼 적어도 사천사백이 되겠군."
  "그럴거요."
  "그 돈은 어디서 구했을까요? 선생 주방에서 일하다 아무것도 없이 쫓겨났을 
텐데. 법정 진술을 볼 것 같으면 그 당시 에디런덱스에 있는 유원지 호텔에서 
부지배인으로 일했다는데, 그런 사람이 갑자기 사천사백을 들고 나타나 
여기저기서 호텔을 사들였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거죠?"
  딱딱하게 굳어 있던 펠릭스의 얼굴이 풀어지기 시작했다. 레니가 떠난 지 
육주만에 처음으로 펠릭스는 기분좋은 흥분감을 맛보고 있었다.
  "빌릴 수 있는 문제 아니겠소?"
  "빌렸다고 칩시다. 하지만 유원지 부지배인 명함 하나밖에 없는 사람이 어떻게 
사천사백만 달러를 빌릴 수 있었을까요?"
  "큰 놈을 하나 물어 꼬드긴 거겠지."
  펠릭스는 퉁명스러우면서도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런 덴 끝내주는 요부니까요. 내 부친을 손에 잡아 흔들어댄 솜씨니 하나 더 
못잡아냈겠소? 더 솜씨좋게 붙들어 뗐겠지."
  ""돈이 있으면 나도 한 번 붙잡히고 싶은 여자로군요."
  콜비가 우스갯소리를 건넸지만 펠릭스는 미소조차 짓지 않았다.
  '그래, 노인네를 하나 붙들었다 칩시다. 그자를 이용해 어떻게 했을까요?"
  천장을 계속 응시한 채 실제 있던 일을 얘기하듯 펠릭스는 또박또박 로라가 
돈을 얻게 된 과정을 설명했다.
  "시카고 호텔을 위해 천만이 필요하다면 어떻게 하겠소? 그 여자는 우선 
회사를 형식상으로 만든 다음 반을 나눈 거요. 오백은 그 후원자 몫으로 오백은 
자기 몫으로."
  "물론 그 천만은 모두 다 후원자 것이겠죠."
  "그렇소. 이자와 원금을 갚지 못하면 그 회사는 자동적으로 모두 다 그 후원자 
손에 들어가는 거요."
  게속 그런 식으로 돈을 빌려나가는 거요. 다른 투자가들을 계속 불러들이면서 
갖고 있는 주식 일부를 파는 식이죠. 그렇게 하다보면 회사 주인이면서 회사 
주식을 반도 갚지 못하는 셈이 되는 거요. 필요한 돈을 얻기 위해 계속 주식을 
파는 셈이니까. 나중엔 삼십 아니 이십 퍼센트까지 내려갈 수도 있죠. 물론 
회사를 설립할 때 도와주었던 최초의 후원자를 계속 손 안에 둘 수 있다면 둘이 
힘을 합쳐 새 투자가들의 힘을 누룰 순 있겠지요. 글쎄, 그 여자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 난들 알 수 있겠소만, 내가 볼 땐…"
  펠릭스는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어쨌든 그 빚에 대한 이자로만 일년에 오십만 달러가 필요할거요."
  콜비는 휘파람 소리를 길게 뽑았다.
  "다시 말해, 일년 동안 생활비하고 이자를 갚기 위해 오십만 달러가 필요하단 
소리 아닌가요?"
  "그런 셈이오."
  "호텔 네 군데에서 그 많은 돈을 끌어낼 수 있을까요?"
  펠릭스는 잠시 뜸을 들였다.
  "글쎄, 가능할 수도 있죠. 호텔 운영이 잘 된다는 가정하에 네군데서 나오는 
월급과 보너스를 합쳐보면 가능해요. 하지만 거의 불가능한 얘기일 거요. 그렇게 
돈을 빼내려면 네 군데 다 다른 호텔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객실료를 물려야 
할텐데 어떤 손님이 그렇게 기막힌 돈을 치르고 들려 하겠소?"
  "뉴욕 특실이 하룻밤에 어느 정도 됩니까?"
  펠릭스는 일부러 머뭇거리며 시간을 끌었다.
  "글쌔, 천에서 아마 일이백 떨어지는 금액일거요."
  콜비는 한번 더 휘파람을 길게 불었다.
  "그래도 돌아가나 보죠?"
  "숙박률이 어느 정도 되는진 모르겠소. 들어가는 사람이 몇 있긴 하겠지만."
  콜비는 혼자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이자만 일년에 오십만 달러라. 그림을 
훔쳐낸 대가로 부족분을 메울 수 있다면… 일년에 여섯개 내지 열개만 
훔쳐내면, 계속 그렇게 나간다면 이자뿐만 아니라 원금까지 갚아나가리라. 아니, 
호텔 한두개를 더 사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콜비는 거기서부터 상상을 펼치기 
시작했다. 원한다면 직접 투자가로 변신해 다른 회사, 예를 들어 
샐링거호텔기업까지 사들일 수 있는 여자라는 상상이었다.
  그만, 그만하자. 성급한 결론은 내리지 말자, 샘. 콜비는 상상을 중단시켰다. 
로라가 아니라 클레인지도 모르고 나머지 부사장 두 명에게 혐의가 돌아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솔직히 다른 세 사람보다 로라에게 더 많은 동기가 
주어졌다. 그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어쨌든 잠시 시간을 두면서 네 명의 
행적을 쫓아나가는 일이 중요했다. 네 명의 용의자들이 전혀 눈치채지 못하게 
그들의 행적을 파헤쳐야 했다.
  수첩을 덮은 뒤 펠릭스와 악수를 나누면서 그는 수사방향을 더 넓히기로 
했다. 로라 페어차일드한테 원한을 가진 누군가 일부러 꾸민 범행일 수도 있는 
일이고, 아니면 정말 단순히 큰돈이 필요해서 오래도록 호텔에 묵어가며 열쇠와 
비밀금고를 얻어낸 자의 소행일 수도 있었다. 그것이 아니면 비콘 힐과는 아예 
상관이 없을지도 몰랐다.
  보스턴 샐링거 꼭대기 츠에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속에서 샘콜비는 골똘히 
생각했다. 어쨌든 지금 당장으로서는 비약적인 성공을 한 로라 페어차일드에게 
혐의를 둘 수밖에 없었다.

    29장
  팔월의 태양이 저무자 제법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지니와 로라는 지니의 
변호사가 넘겨준 서류 내용을 얘기하면서 옥상 정원으로 오르고 있었다.
  "굉장히 간단한 것 같애요. 액수가 클수록 더 간단한 느낌이 드는 게 
이상하네요."
  로라는 다시 서류를 읽어 가며 중얼거렸다.
  "십 달러보다 천만 달러 투자하는 게 더 쉬워보이다니, 참 우스워요."
  새 한 마리가 옥상 위 저물어가는 하늘로 날아오르며 지저귀고 있었다. 
맨해튼의 소음을 배경으로 골목에서는 아이들의 경쾌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옥상 주변에는 관목과 장미의 은은한 향이 맴돌고 있었다. 천만 달러에 관한 
약속어음에 서명을 한 로라는 지니와 함께 매매 서류양식에 서명을 주고받았다. 
로라 페어차일드가 버지니아 스타렛의 샐링거 호텔 주식을 매입한다는 정식 
서류였다.
  "됐다."
  친구를 도왔다는 만족감에 지니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하지만 아직도 한 가지가 남아 있어. 다음달 첫 주쯤 그쪽 회의실에 찾아가서 
상견례를 하고 확실하게 인정을 받아야 해."
  "샐링거 일가와 첫 대면은 아닌데요 뭘."
  "내가 따라가서 응원해주고 싶지만 그럴 순 없지 않겠어?"
  "안되죠. 둘이 나타나봐요, 어떻게 되겠나."
  "어쨌든 가긴 갈거지?"
  "네."
  "경고 사인없이 직접 갈거요?"
  "그럴 생각이에요."
  "야, 대단한데, 아주 용감해! 복수에 불을 당기느라 정신이 다 그곳에 쏠려 
있겠구만."
  로라는 대꾸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큰 잔에 든 아이스 홍차와 로라가 
후식으로 만든 아몬드 쿠키를 먹었다.
  "저녁 아주 근사했다. 주방장으로 나서도 되겠는데."
  "로자한테 배운 거예요. 하나부터 열까지 다 가르쳐준 분이죠."
  로라는 웃으며 대답했다.
  "아직도 매주 식단표를 보내주고 있는걸요. 노동절 휴가 때 여기 올 거예요. 
그때 한번 와보세요. 로자가 있으면 난 부엌엔 얼씬도 못해요. 최고 중의 최고 
주방장이예요."
  "그분을 볼 때마다 엣 시절도 생각나겠지?"
  그래요, 하지만 지금은 예전처럼 그렇게 가슴 아프진 않아요. 날 행복하게 
만들어준 분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지나, 켈리, 클레이,그리고 웨스…"
  자기도 모르게 웨스 이름이 나오자 그녀는 씁쓸하게 웃었다.
  "웨스도 참 좋은 사람이었죠. 요즘 그 사람과 지냈던 시간들이 자꾸 생각나는 
거 있죠."
  "보고 싶어서?"
  "가끔은요. 아니, 실은 많이 보고 싶어요. 아마 다른 사람을 만나지 않아서 
그런가봐요. 내 반쪽이다 할만한 사람이 없으니까…"
  "가끔 여러 사람 만나긴 하잖아?"
  "그렇긴 하죠. 하지만 같이 자고 싶은 남자는 한 명도 없었어요. 맨해튼에서 
혼자 사는 여자들은 다들 남자에 굶주려 있다고 생각하는지, 그런 남자들일수록 
손가락 하나만 까닥 하면 여자들이 침 흘리고 달려든다고 여기잖아요. 어휴, 
그런 남자랑 자느니 아예 이집에서 혼자 고독을 씹는 게 낫지."
  "그래도 안 그럴걸."
  "매일 밤 그럴 순 없겠죠. 하지만 대개는 괜찮아요. 남자 없이도 견딜만해요."
  "로라가 너무 차분하고 조용한 여자라서 그래."
  차분하고 조용한 여자. 로라는 지니의 말을 되씹었다. 분노와 야망 그리고 
그리움이 언제나 가슴에서 소용돌이치는 그녀로서는 타인이 자신을 그렇게 
느끼지 못하는 이유가 궁금할 뿐이었다.
  "하지만 멋진 남자를 찾아낼 테니까 염려 마. 다른 건 모르지만 그건 내가 
장담한다."
  "그래야죠, 벌써 거의 삼십인데…"
  "늙은이지, 뭐."
  지니는 놀리듯 맞장구를 쳤다.
  "늙어가는 중이에요. 하지만 맘에 맞는 남잘 끝내 못 찾아내면요? 그럼 어떻게 
되는 거죠? 말라 비틀어져 바람에 날아가나요? 아니면 구덩이에서 녹아 없어져 
증발해버리나요? 나는 그래도 여전히 여기 살아남아서 내 나름대로 인생을 
꾸려나갈 거예요. 친구들도 많이 만들고, 여행도 하고, 콘서트나 극장도 가고, 
테니스도 치면서 즐겁게 살면 되잖아요. 그런 인생은 별로예요?"
  "별로는 아니지, 내가 사는 방식 그대론데 뭘. 난, 내 인생에 아주 
만족스러운걸. 하지만 나한테 남편이란 사람이 있었고 애들고 있잖아. 깨지기야 
했지만 그래도 행복한 가정이 어떤 것인가하는 걸 느껴봤단 소리지. 우리 
인생살이가 그렇듯 나도 그런 평범한 인생살이를 해봤다는 뜨싱야. 가족이란 게 
싫은 거요? 결혼해서 가족을 가져보고 싶지 않아?"
 "물론 갖고 싶어요.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벌써 가족이 있는걸요. 지니와 
로자는 나한테 어머니 같은 분이고, 클레이는 동생이지만 꼭 아들같이 굴잖아요. 
켈리는 또 어때요. 친언니 같아서 좋아요. 다른 사람처럼 결혼해서 정식으로 
가족을 이룬 건 아니지만 어느 면에서는 더 든든한 가족이에요."
  "늘 비어 있는 마음은 어쩌려구?"
  "괜찮아요. 별로 생각할 시간이 없으니까요. 더 중요한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가끔은 십일년 전 그때하고 지금의 날 비교하곤 해요. 모든 게 너무나 
빨리 변한 느낌이에요, 그래서 겁도 나요. 그만큼 순식간에 무너져내릴까봐서요."
  "별 걱정 다한다. 잠깐만, 이게 무슨 소리지? 거기 누구요?"
  발자국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클레이가 나타났다.
  "문이 열려 있던데. 도둑이 들어와서 물건 다 쓸어가도 모르겠어."
  클레이는 로라의 양복에 키스를 했다.
  "누나 더 이뻐 보이는데? 머리가 자라니까 훨씬 낫다."
  "그래, 좀 자랐지? 안녕, 마리나. 어서와요. 아이스티 한 잔 할래요?"
  "네. 그러잖아도 걸어오느라, 더워서 혼났는데 여긴 좀 시원하네요."
  아이스 홍차를 단숨에 들이마신 클레이는 다시 빈 잔 가득 홍차를 따랐다.
  "이제 좀 살 것 같네. 정말 죽는 줄 알았다니까. 어디가서 뭣 좀 마시고 
가자고 해도 마리나가 말을 들어먹여야지. 나 꼴깍거리는 거 보면서도 
막무가내야. 진짜 대단한 여자야."
  "그 대단한 여자와…"
  마리나가 끼어들었으나 클레이는 그녀에게 틈을 주지 않았다.
  "우리 결혼하기로 했어, 누나. 이 대단한 여자가 나한테 자기가 꼭 필요하다구 
계속 떠들잖아. 그래서 결정봤어."
  로라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너무 잘됐다. 기쁘다, 클레이."
  그녀는 일어나 동생과 마리나에게 키스를 했다.
  "언젠데?"
  "빠를수록 좋아요 클레이는 막판에 가서 마음 바꾸는 선수거든요. 융통성 있는 
사람은 원래 그러는 거라나 뭐, 그러면서 계속 이리 뒤집고 저리 뒤집고 
하는데…"
  "마리나는 그게 융통성이 아니라 덜 익어서 그런거래. 휴, 근데 이 결혼 진자 
희망있는 건가?"
  클레이가 애교스럽게 한숨을 내쉬자 마리나는 미소지었다.
  "클레이 페어차일드를 위해선 희망이 보이니까 걱정 말아요. 지금보다 훨씬 
성숙해 보이도록 만들테니 두고보세요."
  로라는 순간 날카로운 눈으로 마리나를 쏘아보았다. 마리나를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클레이에게 필요한 여자라는 생각에 말없이 지켜봐왔던 로라는 
그녀의 태도가 못마땅했다. 클레이에게 필요한 건 아내지 직장 상사 같은 
트레이너가 아니었다. 그러나 클레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즐거운 표정이었다.
  "하긴 결혼한다고 마음 먹은 것도 나한테 기적이니까. 수도원에 있는 
수도승보다 더 많이 서약했을걸. 결혼같은 건 안한다고 말이야. 하지만 누나를 
생각했지. 누나한테 신세 많이 진 몸 아니겠수. 누나 없었으면 분명 어딘가에서 
헤매고 다녔겠지. 그래서 마음을 고쳐먹었어. 날 위해 걱정하는 누나를 위해서 
이젠 정착하자고 생각한 거야."
  마리나는 만족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로라는 눈살을 찌푸렸다.
  "누나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하는 게 더 좋지 
않겠니?"
  로라는 될 수 있는 한 분위기를 깨뜨리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맞는 말씀입니다."
  클레이는 마리나의 손을 잡아 무릎 위로 올렸다.
  "우리 둘 다 사랑하니까 결혼을 생각한 거지."
  "그래, 생각 잘했다. 기쁘다."
  로라는 그쯤에서 얘기를 끝내고 싶었다. 클레이 인생에 끼여들수 없다고, 아니 
끼어들고 싶지 않다고 몇 번씩이나 다짐하지 않았던가. 아무리 친동생이라 해도 
자신의 일처럼 마음대로 할 수는 없었다.
  "네 얘기 끝났으면 이제 내 얘기 좀 해볼까? 나 방금 샐링거 호텔 주주 됐다."
  "뭐라구?"
  클레이는 완전히 넋이 나간 표정으로 벌떡 일어났다.
  "샐링거 호텔? 누나가? 아니 어떻게? 거긴 가족으로 운영되잖아. 가족 아니면 
꿈도 못꿀걸."
  "이방인이 세 명이래, 가족 아닌 사람이 말야. 아주 오래전 오웬이 일년에 
호텔을 두세 개씩 지으면서 급하게 현찰이 필요해서 친구들한테 주식을 나눠 
팔았대. 단 한 가지 조건을 붙였는데…"
  클레이는 로라 얘기를 더 이상 들으려 하지 하지도 않고 환호성을 질렀다.
  "샐링거 호텔 주주가 됐다구? 누나가 그 주식을 샀구나? 와! 이젠 소원 
풀었네. 그 나쁜 자식이 누나한테서 뺏어간 호텔과 주식을… 그 늙다리 
펠릭스하고 마주앉아 이사회의를 할 수 있다니. 다신 그 자식 누날 쫓아낼 수 
없을 거야. 와, 이거 뭐라고 해야 되는 거야! 우리 축하해야 되는 것 아냐. 가만, 
조건이라고 했지? 무슨 조건이지?"
  "내부조항에 의해 샐링거 일가와 관련된 친척에겐 자유로운 매매가 
가능하지만, 주주 모두 다 다른 사람에게 매매를 원할 때에 이사진 전체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조건이래."
  클레이의 양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런 걸 누나가 어떻게? 펠릭스가 잘도 승인해주겠다. 그 멍청한 동생놈도 
마찬가질걸. 아무도 승인하지 않을 거라구."
  지니와 로라는 은밀한 미소를 주고받는 것을 보며 클레이는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뭔데 그래?"
  "샐링거 일가와 연결된 인척한테 동의안 없이 매매가 가능하다고 했잖니?"
  "그래서? 누나가 그 얼어줄을 집안과 무슨 인척관계까 있어? 폴하고 
결혼했으면 모를까? 그것도 아니잖아."
  "알아, 알아. 하지만 알리슨 샐링거의 시누이라면 어떻겠니?"
  로라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클레이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세상에, 기막혀라. 이런, 핫핫, 벤 형이 드디어 큰 역할을 하는군."
  "벤이 누구예요?"
  클레이는 마리나에게 벤 가드너를 설명했다.

  구월말경 샘 콜비는 클레이 페어차일드와 비콘 힐 호텔 부사장이자 OWL 
개발 부사장직을 맡고 있는 두 인물들에 관한 참고서류를 가득 쌓아놓고 
있었다. 부사장 두 명은 재미없고 특징도 없는 밋밋한 친구들이었다. 그러나 
클레이 페어차일드, 그작자만은 털어내면 뭔가가 분명 나올 듯한 인물이었다.
  도박이라… 콜비는 다시 한 번 자료철을 들여다보았다. 단순놀음이 아니었다. 
판돈이 어마어마하게 컸다. 씀씀이도 만만치 않았다. 최고의 스포츠카에 최고급 
양복, 집세 비싸기로 소문난 소호가에 거주하고 있다. 게다가 그에게 줄줄이 
매달린 여자들, 클레이가 선물한 보석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는 그 여자들은 
꽤 잘 알려진 모델들이었다.
  더군다나 클레이가 누나를 위해 단골로 드나드는 티파니 보석상 점원은 
페어차일드 남매를 잘 알고 있었다. 펠릭스 말이 사실이라면 호텔 부사장 
월급으로는 가당치도 않은 씀씀이였다. 결국 신출귀몰한 카드꾼이거나 아니면 
수입원이 따로 있다는 소리였다.
  완전히 한패구만. 콜비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누나와 남동생이 함께 일을 
한다? 비밀이 새나갈 리 없는 완벽한 팀이었다. 폴에겐 더할 나위 없는 영화 
소재일 것이다. TV미니시리즈물로 꾸며도 흠잡을 데 없는 소재였다.
  하지만 문제가 없는 건 아니었다. 어떻게 폴에게 그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그 여자를 싫어하고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렇다면 아무 문제도 아닐 텐데. 
하지만 옛 시절의 추억을 그리워할 경우에는 어쩌지? 그래, 지금 얘기 할 순 
없어. 좀더 확실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해.

  폴이 자주 들르는 동호인 클럽으로 그를 만나러 간 콜비는 칵테일 시간을 
저녁까지 연장시키려 했으나 폴은 다른 때와 달리 에밀리와 약속이 있다면서 
그의 청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시애틀은 어땠나?"
  "아주 좋았어요. 촬영도 제대로 했고, 미술품 도난에 관한 뒷얘기를 많이 
나눴어요. 샘한테 안부도 전하던데요."
  "괜찮은 사람이야. 늦었지만 마음 잡고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이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콜비는 폴이 소속되어 있는 메트로 폴리탄 클럽 내부를 
꼼꼼히 살폈다. 선택받은 부유층 남성만이 드나들 수 있는 클럽이었다.
  "그 손씻은 도둑 말고 딴 일을 없었나?"
  "특별한 건 없었어요. 대학동창들 만나 배 좀 탔어요. 조서는 얼마나 더 나간 
거죠? 내가 빼낼 수 있을 정도는 됐겠죠?"
  콜비는 껄껄거렸다.
  "샘 콜비한테서 뭘 빼내시겠다구? 폴, 천천히 해. 미안하지만 아직 확실한 건 
못 주니까. 우선 하나만 알려주지. 하지만 이상은 안돼. 가정이니까 지금 말하는 
것도 확실한 건 아니야. 하지만 몇 달 넘게 모아온 정보를 아주 정확하게 
판단…"
  "샘, 서론이 너무 길어요. 얘기 안해도 샘 콜비가 영웅적인 수사관이란 건 
이미 알고 잇으니까 빨리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그래, 알았어."
  콜비는 두 다리를 앞으로 길게 뻗었다.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과 얘기를 
나눈다는 것, 생각만 해도 멋진 일이었다.
  "여섯 사건과 관련된 범인들은 도둑질하기에 아주 좋은 위치에 있더라구. 
이리저리 옮겨다니고 돌아와도 아무런 의심을 받지 않는 위치. 오대양 육대주를 
돌아다녀도 끄덕없는 위치. 그만큼 돈이 필요했겠지. 게다가 그 사람들 
전과사실이 있었어."
  폴은 빙빙 곁가지만 치는 콜비에게 미간을 찌푸렸다.
  "도대체 몇 사람인데요? 어떻게 여섯 사건에 끼어들었구요?"
  "두 명. 두명 다 여섯 사건과 관련있는 기업을 운영하는 중역이지."
  폴은 여전히 양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먹이를 가운데 두고 신중하게 
움직이는 고양이처럼 자꾸만 주변을 맴돌고 있는 콜비가 이상했다. 그러나 뭔가 
잡아낸 것은 분명했다. 폴은 웨이터를 불러 새 잔을 가져오게했다.
  "기업 중역이거나 여행을 많이 하거나 또 많은 돈을 필요로 하고, 전과 사실이 
있다 해서 전적으로 의심할 순 없죠."
  "그렇긴 하지."
  "하지만 가능성은 다른 사람보다 더 많다 이 말이겠군요."
  "맞았어!"
  "그래서 그 두 사람하고 얘기해봤어요?"
  "아니, 생각이야 있지만 섣불리 얼굴을 드러낼 필요는 없지."
  "그럼 몰래 추적해보죠."
  "그 생각도 해봤네.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몇 달이고 끝이 없을 것 같아서…"
  "그 사람들 집을 뒤져보죠. 혹 누가 알아요? 도난품을 감춰두고 있을지…"
  "그럴 수도 잇겠지. 하지만 만약 아무것도 안 나오면, 아무 증거도 찾아내지 
못하면 어쩔 건가? 괜히 내가 쫓고 있다는 것만 알려주는 셈 아냐?"
  "어쩌면 괜한 사람들을 의심하는지도 모르죠."
  "물론이지. 하지만 내 육감은 틀림없어."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새로 채워진 잔을 들어 오리며 콜비는 
느긋하게 클럽 분위기를 즐기고 있었다.
  "샘, 그나저나 그 두 중역진이 누군지 말 안해줄 겁니까?"
  "지금 그건 알아서 뭣하게?"
  "뭣하다뇨? 왜 자꾸 숨기는 거죠? 무슨 큰 비밀처럼 말입니다. 내가 그걸 
광고하고 다닐 것 같애요? 난 적군의 스파이가 아니예요. 아군이에요. 누가 
알아요? 수사에 도움되는 일을 할지."
  "아군? 핫핫핫 그래, 맞어. 내가 가장 아끼는 친구니까. 하지만 그래도 말 
못해. 얘기가 잘못 나가면 너무 위험해…"
  폴은 말끝을 흐리는 콜비의 표정을 살피다 문득 뭐가 떠올랐는지 안색이 
변했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인가본데."
  폴은 천천히 뜸을 들였다.
  "내가 아는 사람이죠? 내가 듣게 되면 실망할까봐 그런 거죠?"
  콜비는 입술에 잔을 댄 채 오래도록 때지 않았다.
  "거의 비슷해."
  "이런, 샘! 그 사람들한테 혐의가 없다면 모를까 이번 사건과 직접 관계가 
있다면 친구인 나로서도 알 권리가 있어요. 누구예요? 내 친구 중에 누가 
도둑놈으로 몰려 있어요?"
  "폴, 자꾸 그렇게 밀어붙이지 말라구.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야. 아주 복잡해. 
인생이란 게 원래 그런 것 아니겠나? 더군다가 그 친구들 이제 자네와는 멀리 
떨어져 있는걸. 내가 보기엔 그 사람들이 어떻게 되든 자넨 눈하나 깜짝 안할 
걸세. 그 여잘 더 이상 만나지 않잖…"
  순간 그는 얼른 일을 다물었다. 그러나 이미 입 밖으로 흘러나온 뒤였다.
  "하나님, 세상에…"
  폴은 창백한 얼굴빛으로 콜비를 바라보았다.
  "지금 로라 페어차일드 얘길 하는 겁니까?"
  "그 여자 동생도 있다네."
  "뭔지 모르지만 지금 잘못 짚고 있어요, 샘. 로라가… 말도 안되는 소리예요. 
지금 무슨 애길 하고 있는지 아세요? 국내에서 제일가는 여성기업가예요, 
호텔을 하나가 아니라 네개씩이나 거느린 사장을…"
  잠시 숨을 돌린 뒤 폴은 다시 콜비를 몰아세웠다.
  "피하재들이 다 비콘 힐에 묵었나보죠? 맞아요? 그래서 그런 가정을 
세웠다구요? 하나님 맙소사. 그 사람들은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는 
기업가예요. 제일 호사스런 호텔을 골라서 대부분 시간을 보내요. 그래 그것 
때문에… 말도 안 나오네, 기가 막혀서."
  폴의 거센 반응에 잠시 주춤하던 콜비는 그러나 윗몸을 똑바로 세우고 폴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 여섯 사람 모두 사건이 나기 육개월 전 비콘 힐에 묵었네. 물론 다른 
호텔에도 묵었지, 하지만 동일하게 여섯 명 모두 묵은 건 비콘 힐 하나뿐이야. 
범인이 누가 됐든 그잔 분명 열쇠와 비밀번호를 갖고 있었다네. 객실에 들어가 
밀랍판에 열쇠를 본뜬 뒤 수첩이나 수표책에 적혀 있던 비밀번호같은 걸 그대로 
베껴냈을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그 방법밖에 없어. 그런 다음에 그냥 느긋하게 
방을 빠져나왔겠지. 의심할 사람이 누가 있겠나? 모든게 그 자리, 그 위치에 
그대로 있는데 말야. 그런 다음엔 어떻게 했겠나? 몇 주 또는 몇 달 뒤 
호텔에서 수천 마일 떨어진 곳에서 뭔가가 휙 없어지는 거라구. 그래 이 가정이 
완전히 미친 소리란 말인가?"
  "그럴 듯한 가정이네요. 하지만 그 사람이 바로 로라라는 말은 절대 믿을 수 
없어요. 그 여잔 도둑이 아니예요. 만의 하나 도둑이라 해도 자기 호텔 손님들을 
털겠어요? 여태껏 공들여 쌓아올린 걸 하루 아침에 무너뜨릴 심산이 아니라면 
뭐 할 게 없어서, 몇 달러가 탐이 나서?"
  "몇 달러라니? 수십만 달러가 된다는 걸 잘 알면서 왜 그러나. 도난품이 뭔지 
몰라서 그래? 그 여자, 호텔 때문에 지금 빚더미 위에 올라 앉아 있네. 동생이란 
작자는 도박판에 미처 있는데 짤짤이가 아니라 집 말아먹는 큰 판에 들어가 
있어. 매번 이기하는 법 있나? 그런데도 그잔 정신없이 돈을 쓰고 있다네. 
더군다나 그 작자 직함이 뭔가, 운영조정을 맡고 있잖은가, 다시 말해 호텔 네 
군데를 총괄한다는 소리지. 이것보게, 폴."
  콜비는 폴을 불러놓고 잠시 망설였으나 결국 입을 열고 말았다.
  "그 여자가 도둑이 아니라고 했는데, 그걸 자네가 어떻게 안다고 그래? 솔직히 
그런 전과가 있잖은가. 자네도 언젠가 그 여잘 믿지 못했잖아. 근데 이제와서 
생각이 바뀐 이유가…"
  폴은 의자를 뒤로 밀며 조용히 일어섰다.
  "펠릭스하고 얘길 했군요?"
  "그래 얘길 했다. 그러면 안된다는 법이라도 있나? 이런 젠장할.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좋아, 내가 원망스럽다 이건데 하지만 이건 내 일이야. 어찌 됐든 
범인을 잡아내야 될 것 아닌가."
  클렙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양미간을 찌푸리며 돌아보자 콜비는 곧바로 
목청을 낮추었다.
  "좀 앉지 그래. 차근차근 얘기하자구, 폴. 로라라는 여자가 그 양반 주방에서 
일했다면서? 그래서 만난 거야. 내가 펠릭스를 만난 게 잘못된 건가?"
  "펠릭스가 로라에 대해 뭘 안다구요? 왜 나한테 얘길 안했어요. 로라는 
누구보다 내가 잘 알아요."
  "그럼 왜 그 여자와 결혼 안했지?"
  폴은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듯 파랗게 질린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그 여자가 도둑이라고 생각했기 때문 아닌가? 오웬 샐링거를 꼬셔 돈을 
갈취한 뒤 자네한테 달려들었다고 생각한 것 아냐?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난 그렇게 생각하면 안된다는 건가?"
  "내가 잘못 생각했던 거예요."
  폴은 처음으로 머릿속에 있던 말을 털어놓았다. 창문을 열고 신선한 바깥 
바람을 들이마시듯 폴은 순간 한없는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그토록 
오랫동안 지고 온 무거운 짐을 벗은 기분이었다. 가족들이 모여 있던 그날, 
그녀가 무슨 말을 했든, 아니 무슨 이유가 됐든, 그녀는 도둑도, 재산을 
탐닉하는 사냥꾼도 아니었다. 그녀는 오웬을 사랑했고, 오웬은 그런 그녀에게 
사람을 주었을 뿐이었다. 외식이 불분명한 노인이었다 해도 유언장에 들어갈 
추가조항이 뭔지 정도는 분명 알고 있었을 오웬 샐링거였다. 폴은 그걸 
확신하고 또 확신했다. 오웬 뿐 아니라 나도 진심으로 사랑했었어. 폴은 로라가 
준 사랑을 굳게 믿고 있었다.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어요. 우리 식구 모두 다요. 근데 이제 샘 콜비라는 
보험수사관까지… 시간 낭비예요."
  콜비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글쎄, 그거야 두고봐야겠지. 자네 말만 듣고 여기서 내팽개칠수는 없네. 할 
수만 있다면 내팽개치고 싶어. 진짜야. 자네 마음까지 상해가면서 이래야 되나 
싶기도 하지만 어쩌겠나. 미안하네."
  "모르겠어요 영화건도 다시 생각해봐야겠어요."
  생각해본다고는 했지만 그는 이미 영화를 포기하고 있었다.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영화 포기하면 안돼. 몇 달내로 끝마치라구. 그리고 
TV망도 전국으로 뜬다면서? 돈 벌써 받았잖아. 해야 돼. 얼마나 기대를 하고 
있는데 그 ㅁ낳은 사람들을 실망시키겠단 소린가?"
  "해라, 하지마라, 그런 소리 마세요."
  폴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난 절대 영화 계속할 수 없습니다. 샘하고 한 팀이 돼 그녀를 올가미 속에 
잡아둘 순 없어요. 방향이 잡히면 그때 다시 전화하세요. 로라 말고 ㅈ다른 
작자가 나설 때까지 영화는 무기한 보류시킬 겁니다. 샘이 날 좋아하듯 나도 
좋아해요. 둘이 힘을 합해 영화를 만들고 싶었어요. 하지만 이건 안돼요. 절대, 
절대로 안됩니다."
  "텔레비젼…"
  "그건 내 문제니까 상관 마세요. 망해도 내가 망할 테니까."
  폴은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아내 때문에 이만 가봐야겠어요."
  찬바람을 일으키며 등을 돌린 폴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져버렸다.
  콜비는 멍하게 폴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실수도 보통 실수가 아니었다. 
로라에 대해 왜 직접 붇지 않았냐던 폴의 말이 떠올랐다. 왜 그렇게 하질 
못했을까? 왜 폴에게 직접 정보를 부탁하지 않았을까?
  기운 빠진 눈길로 그는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앗다. 에밀리와의 약속시간은 
아직도 한 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콜비는 입구로 가는 대리석 계단을 급하게 
달려 내려갔다.
  "폴! 잠깐 얘기 좀 해."
  그러나 폴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모퉁이를 돌아서는 폴을 보며 콜비는 그 
자리에서 멈춰섰다. 젠장할 걸음 한번 되게 빠르네. 듣지 못한 건가…
  폴은 그가 부르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그러나 멈출 수가 없었다. 로라를 
만나야만 했다.
  그녀가 있는 호텔은 세 블록도 채 안되는 가까운 곳에 있었다. 출장중이 
아니라면, 사무실에 있다면 만나준다면….
  비콘 힐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폴은 따스함과 풍요로움을 느꼈다. 그러나 
호텔을 구경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는 곧 바로 로비 구석의 관리인 쪽으로 
걸어가 페어차일드양을 만나야겠다고 말했다.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긴급히 만나야 됩니다."
  지갑에서 명함 하나를 꺼낸 뒤 그는 뒤편에 "제발'이라는 단어를 급하게 
휘갈겨 썼다.
  "이걸 갖다 보이면…"
  "잠깐만 기다려주십시요."
  잠시 후 관리인 뒤편 쪽문을 통해 폴은 로라의 사무실로 안내되었다. 널찍한 
방 한쪽에 소파와 원형탁자, 의자 네 개, 서류들이 올라가 있는 타원형 자단 
탁자가 한줄로 길게 늘어서 있었다. 사무실에 당연히 있어야 할 책상은 보이지 
않았다. 로라는 타원형 자단 탁자 뒤에 서 있었다. 얼굴엔 아무런 감정도 나타나 
있지 않았다. 흰 블라우스에 검정 비즈니스 정장, 머리는 둥글게 말아올려져 
있었다. 폴은 문 바로 앞에 서서 숨이 막히도록 아름다운 로라를 지켜보았다. 
힘이 있는 아름다움, 예전에는 결코 느껴보지 못한 아름다움이었다.
  "들어오세요."
  낮지만 똑부러지는 음성이었다. 모든 것이 변해 있었다.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그 부드러운 음성까지도.
  소파에 앉으라는 고갯직을 한 뒤 로라는 폴 옆자리에 앉았다.
  "관리인 말론 긴급이라 하던데요."
  "그렇소."
  로라는 폴이 머뭇거리는 이유가 몹시 궁금했다. 그러나 그녀는 마음을 
느긋하게 먹고 그가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사무실에 앉아 있는 사랑하는 
사람. 단 한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나 있었다. 검정 바지에 회색 실크 재킷을 입고 나타난 키 큰 남자, 
로라는 문득 현실 밖으로 상대를 밀어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옛추억으로 
자신을 끌어들여 다시는 미래로 향할 수 없게 만들지도 몰랐다. 로라는 그가 
두렵기까지 햇다.
  "무슨 일인데요?"
  그는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오새 보험회사 쪽을 맡아 수사하는 사람을 주제로 영화를 만들고 있소. 
특히나 도난품, 그러니까 도난당한 미술품이나 그런 것들을 추적하는 
수사관인데 그 사람이 맡은 건은…"
  그는 숨을 크게 들어마시며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
  "삼년 동안 몇 달 간격으로 일어난 여섯 가지 도난 사건을 수사중이라고 
하더군. 같은 수법이어서 아마 여섯개 모두 동일범으로 보고 있나봐. 피해자는 
플라비아 구아르네리, 브리트 페럴리, 시드와 아멜리아 라프톤, 카를로스 세라노 
그리고 펠릭스 샐링거, 맨 마지막으로 다니엘 인우티가 있지."
  로라는 놀란 얼굴로 폴을 바라보았다.
  "다 아는 사람들이에요. 우리 호텔에 한 번 이상씩 묵었던 손님들인데. 물론 
펠릭스는 아니지만 레니는…
그 사람들이 다 도둑을 맞았대요?"
  "그것 때문에 내가 여길 온 거요."
  폴은 재빨리 그러나 두서없이 콜비의 수사내용을 로라에게 얘기했다.
  "증거는 없다지만 계속 이 건을 물고 늘어질 삼산 같아 당신에게 얘길 
해줘야겠다 생각했소. 그 사람이 당신하고 클레이, 아니 둘다 의심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오."
  로라의 눈빛에는 힘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얼굴도 핏기 하나없이 창백했다.
  "아냐."
  거의 속삭임 같았다.
  "아냐, 아냐, 아냐."
  왜 난 이 사람에게 항상 고통을 주는 걸까. 그도 절망감에 로라처럼 무너지고 
있었다.
  "할 수 있다면 도와주고 싶소, 로라."
  그녀의 얼굴은 돌처럼 굳어 있엇다.
  "왜요? 이번엔 왜  날 돕겠다고 나서는 거예요? 어쩌면 당신네 그 수사관 
말이 맞는지도 몰라요. 한 번 도둑은 영원한 도둑 아니겠어요? 내가 그 여섯 
건을 다 계획해 훔쳤다는 소릴…"
  "아냐, 당신은 아냐. 이 건과는 관계없어. 예전 것도 당신과는 관계없어. 난 
알아."
  "알아요? 뭘 알아요? 다른 사람은 지금 나한테 두번째 혐의를 씌우고 있는 
판인데 갑자기 당신은 첫번 것마저 부인하겠다구요?"
  "이상하게 들려도 할 수 없어. 설명할 순 없지만 어쨌든 난 알아. 당신을 
믿었어야 하는 건데. 나한테 당신이 거짓말을 할 수 없다는 걸 확실하게 
믿었어야 했어. 늦었지만 지금은 믿어. 그땐 내 잘못이 컸어. 왜 그래는지 몰라. 
지금 ㅗ아서 그게 내 잘못이라고 믿어지는 이유도 모르겟구. 그때보다 더 
자랐기 때문이라고 해두지. 칠년이잖소. 그동안 우리 두사람, 그리고 내 자신에 
대해 생각 많이 해봤소. 난 어떤 사람인가? 나한테 가장 중요한 것 뭘까? 
과거에 잘못한 일은 뭔가… 젠장, 깨끗하게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어. 꼭 내가 
이렇게 얘길 해야 되는 건가?"
  그녀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당신에게도 문제가 있었어. 당신 과거나 그리고 우리 집에 클레이와 함께 
나타난 이유를 나한테 숨겼으니까. 사실 그대로, 있는 그대로 털어놨다면, 우린 
이렇게 몇 년 동안 헤어져 있을 필요도 없었을 테구."
  로라는 벤을 생각하며 침묵했다. 사실 하나가 아직도 과거와 연결된 채 
숨어있는 셈이었다.
  "내 말이 틀렸소?"
  "맞아요. 모든 걸 당신한테 얘기했어야 했어요. 어더ㅎ게 해야할지 몰라서 
그랬나봐요. 당신을 잃어버릴까봐, 당신이 떠날까봐 두려워서 그럴 수가 
없었어요."
  그에게 안기려는 듯 두 손을 약간 무릎 위로 들어올렸으나 그녀는 힘없이 
다시 손을 떨구었다.
  "지금 이런 소릴 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다 핑계로 들릴텐데, 미안해요, 
폴. 모든 걸 숨김없이 얘기해야 했어요. 그랫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뒷말을 힘없이 입 안에서 우물거리며 그녀는 한동안 말을 잃었다.
  "하지만 당신이 날 믿는다는 소린… 모르겠어요, 생각해 봐야겠어요. 그 
수사관이란 사람, 그 얘길 나한테 하는 이유가 뭐죠? 그 사람이 날 잡아 
넣겠다는데 왜…"
  "샘이 어떻게 나갈 진 나도 몰라. 증거가 없으니까 망설이긴 하겠지. 난 그저 
당신에게 조심하란 소릴…"
  "그게 무슨 소린지 난 모르겠다구요!"
  그 소리가 마치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것처럼 들렸다. 폴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가슴으로 끌어안았다. 잠시 그의 품속에 안겨 있던 로라는 두 팔로 그의 
가슴을 밀어내려 했다.
  "안돼요. 이런다고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어요… 상황만 더 나쁘게…"
  "아냐. 그렇지 않아. 당신을 돕고 싶어, 로라."
  그는 그녀에게 키스를 했다. 그녀와 하나가 되려는 듯 그는 두팔로 그녀를 
힘껏 끌어안았다. 몇 년 동안 한시도 잊지 못했던 여자였다. 그는 입술과 혀를 
그녀 입 속으로 깊숙이 들여보냈다. 그리고 그녀의 숨결을 한껏 들이마셨다.
  로라는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열어 그를 빈 
공간 속으로 받아들였다. 그녀는 가슴속에 그대로 남아 있는 마른 공간, 오웬의 
집을 걸어나오던 그때 그대로 채워지지 않고 비어 있는 공간으로 그를 
인도했다. 그렇게 원하고, 그렇게 보고 싶던 그를 온 힘을 다해 끌어안은 채 
그녀는 안간힘을 다해 부인했던 폴의 사랑이 자신의 일부분이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영원히 그를 자기 안에 안주하게 만들고ㅗ 싶었다. 오웬이 
자신감과 신뢰감을 주며 자라게 한 뒤 사라져간 존재였다면, 폴은 완전한 여인, 
완전한 충만감을 느끼게 한 사랑의 화신이었다. 사랑하는 사람. 로라는 더 이상 
그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 그대로를 인정하고 
싶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짧은 키스. 그것이 순간이라 할지라도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
  "사랑해."
  그의 입술은 그녀의 입술 위에서 뜨겁게 불타고 있었다.
  "사랑해, 로라. 사랑해, 사랑해, 로, 내 사랑. 한순간도 당신을 잊지 못했어. 
단한순간도. 당신을 원하고, 당신이 보고 싶어서 그동안…"
  순간,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로라는 그의 품에서 떨어져나갔다.
  "결혼했잖아요. 당신 스스로 택한 삶이 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몹시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몇 년 동안 내내 날 , 날 그런 여자…"
  "내가 잘못했어. 얘기했잖아, 로라. 오,로라, 제발 날 이해해달라고 그렇게 
얘기했건만…"
  "이해할 수 없어요."
  그녀는 흔들리는 발걸음으로 사무실을 이리저리 서성거렸다.
  "나보고 어쩌라구요? 당신을 다시 연인으로 받아들이라구요? 아니면 
남편으로? 설령 당신한테 아내가 없다 해도 이제와서 나보고 도대체 
어쩌라구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나한테 나름대로의 생활이 있었어요. 내가 
직접 만들고, 믿을 수 있고, 즐길 수 있는, 절대 쫓겨나지 않을 그런 
인생이었어요. 그런데, 당신이 이렇게 나타났다고, 이렇게 나온다고 당신을 내 
일부분으로 인정할 것 같아요? 어떻게, 어떻게 하란 말이예요?"
  창문을 등지고 선 그녀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조금 전의 모든 생각을 
떨쳐버리고 자신이 만든 인생 위에 다시 선 그녀는 마음의 평정을 찾기 
시작했다.
  "당신을 생각할 시간조차 없었어요. 당신이 나한테 가져다준 상처 때문에, 
당신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어요. 도둑… 고소… 재판…, 십일년 동안 그 단어를 
떨쳐내기 위해 얼마나 피흘리며 싸웠는지 알아요? 그런데 이제 와서 사랑을 
원한다구요. 나한테?"
  그는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사랑이 아니면 친구는 될 수 있잖소. 다른 건 원치 않아. 그냥 당신을 돕고 
싶어."
  로라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조심하란 소린 무슨 뜻이었죠?"
  "누군가 당신을 함정에 빠뜨릴 수도 있단 소리야. 아니면 이용하든가. 샘은 
당신뿐 아니라 한 사람을 더 수사선에 올리고 있어. 그쪽한테 이용을 당해…"
  순간 로라는 두 눈이 휘둥그래 벌어졌다.
  "클레이? 아니 그럼 지금 나보고 클레이를 경계하란 소리예요?"
  "그렇소. 정확히, 그리고 솔직하게 말하면 그래요. 가능성이 많아. 어느 
호텔이든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신분이잖소. 도박판에도 손대고 있다든데, 
그것도 아주 큰 판에. 무시해버리기엔 너무나 그럴싸 한 것들이…"
  "그럴싸 하다구? 누군한테 그럴싸 하단 소릴 하는 거예요. 클레이느 절대 그럴 
애가 아니예요. 날 이용하거나 함정에 빠뜨려가며 그런 직을 하지 않아요. 날 
사랑하고, 내가 여기 이렇게 손수 일으킨 호텔들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애라구요. 호텔을 망치는 일이 자신을 망하게 하는 길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어요? 그앤 내 일부분이예요. 결혼도 할 거구요. 이젠 
옛날의 철없던 애가 아니예요."
  자신이 내지른 소리가 진실이 아니란 것을 그녀는 알고 있어싸ㄷ. 그러나 
그녀는 폴을 향해 불타오르는 사랑과 열정을 차갑게 끊어버렸다. 묵은 기억이 
그녀를 뒤흔들고 있었다. 그녀는 폴과 그의 일가 친척들이 클레이와 자신을 
향해 도둑이라고 소리치던 그때 그 심정으로 돌아가 있었다.
  "당신이 클레이를 어떻게 알아?"
  그녀는 거의 울부짖고 있었다.
  "날 얼마나 안다구? 아무것도 모르면서…"
  "맞아, 몰라. 모른다구, 하지만 이제라도 알고 싶어."
  폴은 성큼성큼 사무실을 가로질러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제발, 이러지 마, 내 마음을 좀 알아줘. 잃어버린 세월을 지금부터라도 
찾아나가면 안되겠어? 다시 한 번 당신을 알고 싶어. 변한 당신을, 변한 나를 
다시금 확인해보잔 말이오. 당신 말이 맞아. 클레이에 관해 내가 뭘 알겠소. 
하지만 샘은 확신하고 있단 말이오. 내가 아예 눈 딱 감고 샘한테 아무 소리 안 
들은 철해야 되겠소?  당신 상처 알아. 내가 만든 상처니까. 그러니까 두 번 
다시 또 상처입게 하고 싶지 않단 말이오. 내 마음 좀 알아줘. 사랑해. 내 
목숨보다도 당신을 사랑해. 미치도록 사랑해. 당신을 도와주고 싶어. 당신을 
보호하고 싶어. 당신을 해치려는 사람이 있는데 날보고 그냥 두란 소리…"
  "그만해요. 제발 그만해요."
  그녀는 그에게 등을 돌려 블라인드 사이로 창 밖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날 도와주려는 마음 알아요. 하지만 클레이를 그런식으로 몰아세울 수는 
없어요. 그앤 내 가족이에요. 날 떠나지 않고 지금껏 내 곁에 남아 날 도와준 
동생이에요. 누가 뭐라 하든 그애를 향한 내 마음은 흔들리지 않아요. 내가 
당신과 당신 가족을 신뢰하길 원했죠? 지금도 당신을 믿어달라고 애원하고 
있잖아오. 그런데 내 가족, 내 동생 클레이를 믿지 말라는 소린 뭐예요? 그 앤 
피가 섞인 내 동생이에요."
  긴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거리으 자질한 소음이 희미하게 들려왔고, 사무실 
밖 복도에서는 남자의 굿 나잇 소리에 대답하는 여자의 밤인사가 들려왔다. 
폴은 로라의 자단 탁자 위에 있는 탁상시계를 흘깃 쳐다보았다. 에밀리와의 
약속 시간은 이미 지나버린 뒤였다.
  "미안해, 로라."
  그녀의 음성만큼이나 낮고 조용한 목소리였다.
  "당신 말이 맞는지 모르지. 아냐 진자 맞는 말이야. 서로 믿어야지. 맹목적인 
믿음은 의심보다 해롭다지만 동생이니까 잘 알겠지. 나하고 샘은 실제로 
클레이를 잘 모르잖아. 당신 말이 맞을거야. 로라."
  폴이 손을 잡자 그녀는 그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그녀 눈 속에서 폴은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었다.
  "가야 할 것 같소. 내내 여기 당신과 함께 있을 수 있다면… 그만 가보겠소."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 가보세요. 도와주러 와서 고마웠어요, 폴. 또 이렇게 싸우다니… 이럴 
뜻은 없었는데. 우린 싸우는 일에 소질이 있나봐요."
  "아냐, 사랑하는 데 소질이 있겠지. 서로 마음을 열기만 하면 그렇게 될 수 
있을텐데. 한 번 사랑했던 사이 아니오. 난 결코 잊지 못할거요. 당신도 그럴 
거라 생각하는데."
  "맞아요, 영원히 간직할 거예요. 하지만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어요. 그동안 
서로 너무 많은 일이 있었잖아요."
  그녀는 상냥하게 미소지었다.
  "당신과 헤어진 뒤로 과거를 지워버리느라 얼마나 애썼는지 몰라요. 그런데 
지금 되찾는 걸 얘기하고 있다니, 우습죠? 난센스잖아요."
  그는 미소로 그녀에게 대답했다.
  "둘이 같이 되찾는다면 난센스가 아닐 거요. 둘이 함께 넌센스를 현실로 
만듭시다."
  로라는 폴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하지만…"
  그녀는 말 끝을 가슴속으로 삭이며 힘없이 팔을 내렸다.
  "잘 가요, 폴."
  그녀를 끌어안으려던 폴은 조용히 돌아섰다.
  "잘 있어요, 로라. 다시 볼 수 있겠지?"
  "생각해봐야겠어요. 생각할 일이 너무 많아요. 전화할 게요."
  그는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전화 안해주면 전화통 속에 들어가 앉아 일을 거요, 아니면 이 사무실 밖에다 
텐트치고 숙박하든가."
  "전화할게요. 할 얘기 생기면 진짜 전화할 거예요."
  "진짜 바로 연락해야 돼."
  폴을 내보낸 뒤 문을 닫은 로라는 책상으로 이용하는 자단 탁자에 앉아 일을 
하기 시작했다. 할 일이 너무나 많아. 잔뜩 쌓여 있는 서류를 내려다보며 그녀는 
혼자 중얼거렸다. 호텔과 관련된 보고서류들, 샐링거 호텔 이사회의에 필요한 
자료도 만들어야 했다. 이사회의는 바로 내일로 다가와 있었다. 그러나 로라의 
머릿속에는 폴이 던진 얘기가 계속 맴돌고 있었다.
  -맹목적인 믿음은 의심보다 해롭다고 생각해.
  어느 일자리건 진득하게 앉아 있지 못했던 클레이였다.
  자꾸 그러지 마, 누나. 편해도 일은 일이잖아. 아무리 누나 호텔이라지만 놀고 
먹는 것보다야 편하겠어? 사람들은 누구나 더 좋은 걸 원하는 것 아냐?
  비싼 승용차에 고급 양복, 소호가에 있는 넓은 물침대에 고급 가구들. 툭하면 
가져오곤 하던 선물, 도박….
  도박판에도 손대고 있다는데 그거 알고 있소? 그것도 아주 큰판에. 그걸 폴이 
어떻게 알았을까? 물론 수사관이 얘기 했겠지. 그럼 콜비라는 사람은 어떻게 
그걸 알았지?
  손에 쥐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그녀는 두 손을 머리에 받친채 목을 뒤로 
젖혔다. 폴이 한 얘길 믿지 않으면 그만이야.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렸지만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도저히 일을 할 
수가 없었다.
  확실히 ㅇ라기 전에는 일이 손에 잡힐 것 같지 않았다.
  그녀는 금장 시계를 보았다. 클레이가 선물한 시계였다. 일곱시 사십오분, 
집에 있을 시간이었다. 그녀를 클레이를 찾기 위해 전화기로 손을 뻗었다.
  단지 그냥 확인해보는 거야.

  아틀란티스 바에 도착한 폴은 먼 발치에서 여러 명의 남자에게 둘러싸인 
에밀리를 발견했다.
  "늦어서 미안해. 시간이 이렇게 된 줄 몰랐어."
  에밀리는 폴을 주변 남자들에게 소개했다.
  "이 분들이 동무해줘서 다행이었지, 안 그랬으면 나 혼자 여기서 말뚝될 뻔 
했어요."
    폴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텔레비전 탤렌트 세 명, 패션 모델, 브로드웨이 
영화 스타들이었다.
  "당신이 매번 여길 약속장소로 고른 이유가 바로 그거 때문 아냐? 다른 
남자들이 몰려드는 걸 나한테 보여주고 싶었겠지. 자, 저녁하러 가지."
  "왜 이렇게 서둘러요, 당신 좀 이상하다."
  일번가 거리로 내려서며 에밀리는 폴에게 중얼거렸다.
  "나 때문에  그래요? 아니면 피곤해서 그래요?"
  "일이 많아서 그래."
  에밀리는 대꾸하지 않았다.
  "베리는 만나봤어?"
  "아뇨. 로마에서 누가 왔대요. 비서 말로는 월요일쯤이나 시간이 날 것 
같다는데, 날 피하는 것 같기도 하고… 왜 그런지 몰라요."
  "바쁘니까 그렇겠지. 곧 만나줄거야. 당신 제일가는 모델 아니야?"
  "그렇게 대접을 안해주니까 문제죠."
  "오늘은 하루 종일 뭐했어?"
  "여행갈 때 입을 옷 샀어요."
  "여행가려구?"
  "십이월에 세인트 토마스로 탐험여행 가는 팀이 있대요. 우리도 같이 가요. 
당신 그때까지 영화 끝낼 수 있잖아요."
  "글쎄."
  "그때까지 끝내겠다고 하구선! 폴 나 세인트 토마스에 가고 싶어요. 왜요, 
가족하고 같이 모여야 돼요? 이번 크리스마스는 좀 다르게 지내요, 폴. 가족 
말고 우리끼리 보내자구요."
  가족 생각은 안했어."
  "그래요? 그럼 다른 일이 있어요?"
  레스토랑에 이른 폴은 에밀리를 먼저 문안으로 들여보냈다. 아름다운 
여자들이 들끓는 맨해튼 한가운데서도 에밀리의 아름다움은 타인의 눈길을 
한순간에 끌어모을 정도였다. 급사장은 모든 사람들이 두 사람을 눈여겨볼 수 
있는 자리로 에밀리와 폴 부부를 안내했다. 식사를 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몇 
달 전 오스카상을 받은 남자배우와 감독도 있었고 디자이너들이 드문드문 섞여 
있었다. 에밀리는 늘 명사들과 함께 있고 싶어했다. 그것은 그녀의 취미이자 
특기였다. 그녀와 결혼한 뒤에야 폴은 유명인사가 그렇게 많다는걸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폴이 포도주를 주문하자마자 에밀리는 대답을 재촉했다.
  "딴 이유가 뭐냐구요? 가족 때문이 아니라면서요?"
  "영화 때문에. 포커스를 좀 바꿔볼려구."
  "반이나 끝냈다면서요? TV스케줄을 어쩔려구 그래요? 이미 다 잡혀있을 
텐데, 그걸 펑크내면 다음 번엔 스폰서 기금 어림없을걸요."
  "그래도 할 수 없지 뭐. 시간에 쫓겨 대강대강 해치울 수는 없어."
  "샘 콜비가 뭐래요?"
  "아직 어떻게 하겠다는 건 아냐. 생각중이란 거지."
  급사장이 다가와 포도주를 잔에 채울 때까지 에밀리는 가만히 입술을 
오므리고 있었다.
  "그래요. 당신말이 맞아요. 포기해버려요."
  "그런 뜻으로 얘기한 게 이닌데."
  "어쨌든 포기하는 쪽으로 나가고 있잖아요. 방송국이 당신을 포기해도 어쩔 수 
없다는 식 아니예요? 그럴 거면 차라리 새 걸 시작하는 게 낫죠."
  "지금 그대로 밀어붙이느니 포기해버리는 게 낮긴 하지. 하지만 샘 콜비를 
주제로 하는 건 괜찮아."
  "왜 있는 걸 버리려고 해요?"
  "지금 진행되는 상황이 마음에 안 드니까 그렇지."
  "난 이해가 안되네. 그럼 다른 종류를 해봐요. 기록 영화 말고 진자 영화를."
  "뭐하러? 난 기록영화가 좋아."
  "하지만 기록영화 ㅁ라고 진자 영화, 아니 상업영화라고 해두죠. 그런 영화 
쪽에서도 배울 게 많지 않겠어요?"
  그녀는 윗몸을 탁자 위로 기울이며 폴의 손등에 손을 얹었다.
  "폴, 누가 나보고 텔리베젼에 출연해보래요, 미니시리즈 같은거요. 요새 모델들 
영화나 TV로 많이 빠지잖아요. 나도 그렇게 하고 싶어요. 자신도 있어요.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애요. 날 주인공으로 원고를 써 주겠다는 친구가 있어요. 
이름 있는 감독만 구할 수 있다면 그 친구가 NBC나HBO에 어떻게 줄을 넣어볼 
수 있대요."
  폴은 상기된 에밀리를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설마 나한테, 아니 나보고 그걸 맡으란 소린 아니겠지?"
  "안될 게 뭐 있어요? 유명한 당신 이름을 댔죠. 당신한테도 멋진 일이 될 
거예요."
  "말도 안돼, 에밀리.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격한 음성이었다. 에밀리는 석고상처럼 굳은 얼굴로 쏘아붙였다.
  "당신 지금 하는 일, 그것해서 얻은 게 뭐 있었어요? 알려지지도 않은 프랑스 
영화제에서 받은 상?"
  "알려지진 않았지만 난 그걸 자랑스럽게 생각하는데."
  폴의 가라앉은 음성에 에밀리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미안해요, 물론 그렇겠죠. 나도 그래요, 폴. 하지만 이번 기회 아주 좋잖아요. 
자주 있는 일도 아닌데 진짜 근사할 거예요. 이번 기회를…"
  "기회라니?"
  "날 미니시리즈 스타로 만들 수 있는 기회요."
  폴이 술잔을 비우자마자 웨이터가 즉시 달려와 잔을 채웠다. 폴은 에밀리를 
바라보았다.
  "날TV 드라마 연출가로 만들겠다구? 당신이 스타가 되기 위해?"
  "로스엔젠레스에서 당신 얘기 많이 들었어요. 제법 유명한 감독으로요. 
모델로선 나도 빠지지 않잖아요. 내 친구도 스크립터로선 이름 꽤나 있어요. 
우리 셋, 진짜 근사한 팀이 될 거예요. 정말 하고 싶은 일이예요."
  "그래서 모델계에서 작년만큼 분주하게 뛰질 않았어?"
  "그것보단 유행이 변했거든요. 요즘은 팔 다리 길고 늘씬한 모델이 판치는 
시대예요. 힘있는 미국을 상징하는 거겠죠. 하지만 유행이니까 그것도 금세 
사라질 거예요. 그런 건 걱정 안해요. 문제는 내가 영화일에 관심이 있다는 
거예요. 당신도 도와주리라 믿었어요. 당신 항상 새로운 걸 찾아다니는 
사람이잖아요."
  "난 기록영화 감독일 뿐이야."
  그의 눈빛은 아주 어두웠다.
  "그런 사람한테 다른 걸 해보라니… 전혀 관심 없어 하는 걸 말야."
  "어떻게 알아요? 관심 없어 하는지 해보지 않고 어떻게 알아요?"
  "솔직해져, 에밀리. 당신은 이름 있는 감독을 원할 뿐이잖아. 이용할 수 있는 
자, 같이 밥먹고 같이 잠잘 수 있는 남자를 원할 뿐이라구."
  "그게 무슨 소리예요?"
  후식이 날라져 왔지만 두 사람 다 서로를 노려본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모델이 되고 싶어서 나를 사진사로 이용했고, 내 사진첩을 이용해서 마켄을 
꼼짝 못하게 한 것 아니야? 이젠 모델직이 흔들리니까 내 이름을 이용해 
미니시리즈 스타로 탄생하겠다는 건가?"
  그녀는 머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폴을 쏘아보앗다.
  "아내가 남편한테 좀 도와달라는 게 그렇게 잘못된 건가요?"
  "나한테 사진찍어 달라고 할 때 우린 부부가 아니었어, 에밀리."
  폴은 씁쓸하게 웃었다.
  "얘기 하나 해볼까, 에밀리.칠년 전, 아니 그보다 좀더 전이었겠군. 미치도록 
사랑했던 여인을 재산이나 노리는 사냥꾼으로 몰아버린 적이 있었지. 그것 
때문에 그녀한테 등을 돌렸는데 결국 결혼해서도 다른 식으로 당하는구만."
  "지금 무슨 소릴하는 거예요?"
  "당신은 돈이 많았지. 그래서 돈 대신 당신은 다른 걸 요구하더군. 결혼을 
원했구, 모델을 원했구, 이젠 TV스타가 되려고 하니, 난 언제까지 당신 뜻대로 
살아야 되는 거지?"
  "다른 남편들도 다 하는 일이예요. 당신이 이렇게 나올 줄 정말 몰랐어요, 폴. 
나 같은 아내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요. 정치 얘길 나누고 싶어 할까봐 신문 
사설도 빠지지 않고 봤구요. 다른 직업 여성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집을 
지키려 최선을 다했어요. 그뿐이예요? 집안 일도 모두 내 힘으로 하려고 
노력했어요. 난 내 힘껏 최선을 다해 살아왔어요? 아내 자릴 지키면서. 좋은 
아내, 훌륭한 아내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고 생각해요."
  "그랬지, 나도 인정해.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좋아하는 걸 그렇게 무시해버릴 
수 있단 소린가? 그 꿈 같은 스타환상에 젖어…"
  "알아요, 무슨 얘길 하고 싶어하는지. 당신 애를 원하죠? 하지만 그건 문제가 
안돼요. 아직 살아갈 날이 많은데…"
  "에밀리."
  너무나 부드러운 그의 목소리에 에밀리는 순간 겁을 집어 먹었다 소리를 
지르는 편이 차라리 더 나을 것 같았다. 폴의 얼굴은 너무나 평온해 보였다.
  "저녁 파티도 있잖아요. 당신을 위해 파티를 벌였다구요. 그 파티에 왔던 
사람들한테 도움 많이 받았잖아요. 날 찍어서 성공시켰다고 그랬죠? 그만큼 난 
그 사람들을 소개시켜줬잖아요. 뉴욕에서 제일가는 사진작가로 만들어준 게 
누군데요? 그런데 이런 법이 어딨어요? 마치 내가 당신 생각 같은 건 전혀 
안한다고 얘기하잖아요. 아뇨, 오히려 반대 아닌가요? 당신한테 당신뿐이에요. 
당신 자신하고, 그 빌어먹을 영화뿐… 내가 뭘 원하는지, 나한테 뭐가 필요한지 
생각이나 해봤어요? 그저 자신이 하고 있는 일, 원하는 일, 그것만이 중요하죠, 
안 그래요? 폴 젠슨이란 사람은 천하의 이기주의자예요. 자기만 알고, 자기만 
생각하고, 고집불통에 어거지…"
  "에밀리, 그만해."
  폴은 언성을 높여 히스테리를 부리기 시작하는 에밀리에게 다가갔다.
  "집에 그만 갑시다."
  폴은 구석진 곳에서 내내 에밀리와 자신을 지켜보고 있던 급사장을 손짓으로 
불렀다.
  몇 분 뒤 에밀리와 폴은 몇 블록 떨어진 서튼 광장을 향해 걷고 있었다.
  "그렇게 흥분하고 싶진 않았어요. 조용히 얘기할 수도 있었을텐… 내가 뭘 
바라고 결혼했다구? 그게 말이 돼요? 도와달라는 말 한마디 했다가 웬 
봉변이람. 말 나온 김에 끝까지 하자구요. 다른 여자들은 안 그런 줄 알아요? 
여자는 원래 남자들처럼 직접 자기 길을 개척하는 동물이 아니예요. 다른 
사람이 부드럽게 닦아 놓은 길을 가려고 하지. 그러니까 남자들보다 더 오래 
사는 거예요. 이 지구상 모든 여자들이 다 그래요, 알겠어요, 폴?"
  "모든 여자들은 아냐."
  문을 열어주는 현관수위에게 고갯짓으로 인사를 대신한 폴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어두운 거실로 들어갈 때까지 침묵으로 일관했다. 거실 통유리창 밖으로 
맨해튼의 화려한 밤이 빛나고 있었다. 갑자기 밀려드는 그리움과 기쁨의 물결이 
폴을 에밀리와 분리된 세계로 이끌고 있었다.
  전화할게요. 할 얘끼 생기면 진짜 전화할 거예요. 전화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기다리다 못해 이쪽에서 전화를 해도 만나주지 않을지도 몰랏다. 그러나 몇 년 
동안 얼굴도 보지 못하고 막막해 있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즐거운 
기대감이었다. 그리움이 섞인 기대감.
  "에밀리, 우리 이만 헤어졌으면 하는데. 이혼해."
  "뭐라구요?"
  에밀리는 질린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무슨 소리예요? 괜히 해본 소리죠. 알아요, 우리 둘 다 문제있고 모든 게 
완벽하지 않다는 걸 안다구요. 하지만 그것 때문에 이혼한다는 말도 안돼요. 
원한다면 어느 정도 생각할 시간을 가지면서 따로 살 순 있어요. 당신은 여기 
있고 난 벨 에르로 가면 되잖아요. 하지만 이혼은 안돼요. 다시 사랑할 수 잇는 
시간이 있을 거예요. 당신한테 다른 사람이 생긴 게 아니고 나한테도 그런 
사람은 없어요. 오직 우리 둘뿐인데 문제가 좀 있다고 해서 헤어질 수는 없어요. 
그건 말도 안돼요, 폴."
  "우리 둘 중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졌다면 어쩌겠소?"
  "그 사랑이 심각한 거라면 이혼을 생각해볼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때도 
서두를 필요는 없어요."
  폴은 대형 창문 밖에 별처럼 빛나는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지평선 끝까지 
화려한 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오로지 아름답기 그지없는 
불빛 바다뿐이었다.
  "지금 그 얘기를 해. 이혼에 관해. 때가 온 것 같아, 심각한 때가."

  클레이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한 시간 간격으로 계속 전화를 했지만 
마찬가지였다. 로라는 집으로 가는 도중에 마음을 바꿔 클레이 집으로 갔다. 
아무래도 얼굴을 마주보며 이야기를 나누는것이 더 나을 듯 싶었다.
  "외출중인데요, 페어차일드양."
  "알아요. 그래도 올라가서 기다려보려구요."
  구식 인쇄소 건물이 멋지게 새로 꾸민 대형 건물을 지키고 있는 현관 
수위에게 로라는 미소와 함께 부드럽게 말했다.
  빈 방에는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로라는 한동안 키 큰 나무화분들과 
가구들로 크게 이등분된 대형 원롬 아파트를 이리저리 거닐었다. 잘 정리된 
실내였다. 탁자 옆에 앉아 잡지책을 뒤적여 가며 그녀는 그린가를 지나는 
차량들의 움직움과 위층계단을 밟아 올라가는 이웃들의 발자국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녀는 다시 몸을 일으켜 초조하게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방 맨 끝에는 일자식 책꽂이로 벽과 평행으로 길게 세워 놓아 침실을 가렸다. 
뒤쪽 벽면을 장식한 옷장에는 마리나의 신발과 옷가지들이 깔끄맣게 정돈돼 
있었다. 그 옆의 옷장은 클레이의 성격 그대로를 나타내듯 반쯤 열려 있었다. 
클레이의 최고급 정장과 신발들이 보였는데 특히 신발은 한두 켤레가 아니었다. 
하여튼 못 말려. 로라는 어이없이 웃고 말았다. 한동안 자동차에 열을 올리더니 
요즘은 신발을 수집하는 모양이었다. 로라는 반쯤 열려 있는 미닫이 옷장문을 
무심코 오른쪽으로 밀어붙여보았다. 신발장 옆 구석에는 소형 메탈 케비닛이 
있었다. 옷장 속에 서류 캐비닛이라. 넓은 구석 다 두고 하필 왜 옷장 속에 
서류함을 갖다놓았을까? 다른 여자들한테 받은 연애편지를 마리나 모르게 
숨겨둔 건가?
  옷장문을 닫은 뒤 로라는 벽을 채운 책들을 둘러보았다. 심심풀이로 읽을 
만한 책 한 권을 골라 거실 쪽으로 나온 로라는 안락의자에 기댄 채 책에 
정신을 쏟으려 노력했다. 그러나 자정이 다가오자 마음속의 불안은 점점 
켜져갔다. 별 일 아닌지도 몰라. 아무것도 아닌 일에 왜 이렇게 진을 빼고 
있는지 모르겠네. 할일이 산더미 같은데, 클레이는 내일 만날까.
  그러나 내일은 중요한 날이었다. 샐링거 이사회의가 있었다. 보스턴행 여덟시 
비행기를 타야 했다. 그래, 그럼 내일 새벽에 다시 오자, 아침 먹으면서 
조용하게 얘기해보지.
  뭔가 찜찜한 생각이 현과문을 나서던 그녀를 붙잡아 세웠다.
  왜 옷장 구석에 서류함이 있을까? 아무래도 이상했다. 반들반들하게 광을 
내고 혹시 가죽이 구겨지기라도 할까봐 일일이 신문지를 속에 뭉쳐 넣을 만큼 
알뜰살뜰 간직하는 구두 옆에 왜 하필 서류함을 두었을까? 아파트 다른 편 
구석에도 벽장은 많은데.
  답은 그리 어렵지 않게 나왔다. 열쇠로 잠글 수 있는 벽장은 침실 옆에 있는 
옷장 하나뿐이었다.
  아파트 가구를 정리할 때는 무심히 지나쳤던 옷장 열쇠구멍을 로라는 다시금 
살피기 시작했다. 동거를 시작한 마리나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서류함을 열쇠 
달린 옷장 구석에 보관한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연애편지는 아닐 거야. 오히려 더 이상하지. 이런 데다 연애편지를 
감춘다는 게 더 이상하지.
  로라는 흔들리는 마음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클레이의 옷장, 누나라 해도 
함부로 들여다볼 수는 없었다. 집으로 그냥 가는 것이 옳은 일이었따. 그러나 
그녀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폴의 음성이 자꾸만 고개를 옷장쪽으로 돌리게 
했다.
  확실하게 하는 게 낫잖아. 그래서 여기 온 거구.
  다시 침실로 돌아간 그녀는 천천히 옷장문을 열어 서류함의 첫번째 서랍을 
잡아당겼다. 쉽게 빠져나온 첫번째 서랍을 들여다본 순간 로라는 자신도 모르게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무럭무럭 피어오르던 의심과 고민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서랍에는 낯익은 글씨가 적힌 편지가 여러 통 들어 있었다. 필라델피아에 살고 
있던클레이에게 보냈던 그녀의 편지들. 뉴욕으로 오기 전 시카고 쪽으로 
날아갔던 편지… 이걸 버리지 않고 뒀구나. 그녀는 자신이 보낸 편지묶음을 
간직해준 클레이의 뜨거운 애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머리를 자르기 전에 찍은 
그녀의 사진도 있었다. 켈리와 존 단톤, 고교시설 사귀었던 여자친구들의 사진도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너무나 순박하고 순진한 동생이었다. 폴은 틀린거야.
  편안하고 푸근한 마음으로 그녀는 맨 끝서랍을 마지막으로 잡아당겼다. 
그러나 윗서랍과 달리 그것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그 서랍만이 잠겨 
있었다.
  그녀는 서류함 앞에 무릎을 꿇었다. 집에 갈 걸, 이게 무슨 짓이람. 쪼그리고 
앉아 그녀는 잠겨 있는 서랍을 들여다보았다. 불빛에 금속면이 반짝거렸다.
  그냥 확인해보는 거야, 단순히 확인해보는 거야. 신용카드를 이용해 그녀는 
어렵잖게 서랍을 딸 수 있어싸다. 젠장, 이런 솜씨는 없어도 되는 건데. 
잊어버려야 된다구.
  로라는 천천히 서랍을 빼냈다. 두꺼운 편지 봉투와 - 뒤집어봤으나 이름이나 
주소가 없는 흰 봉투였다 - 마흐가니로 만든 상자가 들어 있을 뿐 서랍 안은 
깨끗했다. 손 안에 들어온 상자는 실크처럼 부드러웠다. 그녀는 목재 상자뚜껑을 
열어젖혔다. 푸른색 밸벳으로 장식된 상자 속에서 루비와 다이아몬드가 
천장으로 빛을 쏘아올리고 있었다. 목걸이, 레니 샐링거의 목걸이였다.

    30장
  아파트에서 한 블록 떨어진 지하주차장에 차를 세운 뒤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클레이는 마리나와 파티장에서부터 시작한 입씨름을 계속하고 있었다. 요즘 
들어 자주 있는 일이었다. 시시껄렁한 일로 언쟁이 시작되면 서로 고함을 
질러대며 유리컵을 집어던지기도 하지만 침대로 같이 들어가 마리나가 오래도록 
애무하는 걸로 두 사람의 애정은 다시 불붙곤 했다.
  "싫으니까 싫은 거지. 다른 이유없어. 가기 싫단……"
  현관 수위가 열어준 문을 통과하는 순간 클레이는 수위가 뭐라고 하는 바람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페어차일드양께서 오래전부터 기다리시다가 한 시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여기 왔었다구? 무슨 일이라는 얘긴 없었어요?"
  "아무 말씀 없었습니다. 댁에서 기다리시다가 그냥 가셨습니다."
  "메모는 남겼겠지. 급한 일인가…"
  혼자 중얼거리며 엘리베이터에 오른 클레이는 마리나에게 하던 말을 
계속했다.
  "죽을 놈의 자선파티는 이제 싫어. 빌어먹을 놈의 턱시도 입는 것도 귀찮고, 
음식도 맛대가리 없단 말야. 이리저리 다니면서 날쳐다보는 사람들한테 썩은 
미소나 실실거려야 하는 게 뭐가 좋아서 그래?"
  "자기 좋아서 바라보는 사람들인데 그게 어때서? 그 사람들이 누군데? 신문에 
나오는 사람들이야. 누가 알아요? 좀 있으면 우리도 신문에 대문짝 만하게 
날지."
  "난 내 얼굴 신문에 내보이기 싫단 말야. 신문도 읽기 싫구. 그 사람들이 
신문에 나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라구. 젠장할. 꽉 낀 셔츠 입고 돈지랄하는 놈들 
만나서 뭐가 재미나다고…"
  현관 문을 따면서도 그는 계속 궁시렁거렸다.
  "자기 좋으면 가라구. 하지만 날 데리고 갈 생각은 마. 젠장할, 바가지나 박박 
긁고 사교계에 못 끼어서 안달내는 마누라를 데리고 살아야 하다니."
  "그런 마누라도 감지덕지래, 자기한텐… 다 자기 잘 되라고 하는 건데 그걸 
모르고. 제대로 된 그룹에 들어가야…"
  "그만둬. 내가 어때서? 그냥 이대로가 좋으니까 참견하지 마!"
  "그랬으면 나도 좋겠네. 아예 결혼하자는 것도 없던 걸로 하지. 다 
엎어버리자구."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아주 반가워!"
  그녀는 찬바람을 일으키며 옷장 뒤 주방 쪽으로 돌아나갔다. 로라가 남긴 
메모가 있나 싶어 클레이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전화해야 
되나? 무슨 일인데 여기까지 왔을까? 그러나 시계는 새벽 두시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일 사무실에서 봐야 할 듯했다. 턱시도에 딸린 허리밴드와 
검정 보타이를 풀어낸 클레이는 더러운 물건을 휴지통에 버리듯 그것들을 침대 
위로 내던졌다.
  "꼭 쇠사슬 같아, 젠장할."
  셔츠 버튼을 풀면서도 그는 내내 중얼거렸다.
  "이놈의 셔츠는 또 어떻구, 빳빳하게 풀먹여 고개도 못 돌리게 해놓구선 이…"
  셔츠 단추에 올라간 손을 그대로 멈춘 채 클레이는 옷장을 주시했다. 
옷장문을 안 닫고 나갔었나? 빠끔히 열린 문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그는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분명 닫고 나갔다.
  눈을 감은 채 그는 다시 생각을 모았다. 아냐, 안 닫고 나갔나봐. 늦었다고 
현관에서 소리치는 마리나 때문에 서둘러 나갔던 것이 생각났다. 닫긴 닫았는데 
끝까지 닫았는지는 확실치 않았다. 열어놓고 나갔더라도 아무도 없었으니… 
아니 누나가 있었지. 혹 호기심 때문에 저길 열어 봤다면….
  클레이는 급하게 옷장 문을 열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모든 것이 그대로 
있었다. 서류함 위에 두고 나갔던 커프스 단추까지 자리 하나 바뀌지 않은 채 
그대로 있었다. 맨 밑서랍을 잡아당겼다. 언제나처럼 변함없이 잠겨 있었다. 
다행이군.
  하지만 혹시….
  그는 열쇠고리에 달린 열쇠 중에서 황동으로 된 작은 열쇠를 서랍 열쇠구멍에 
맞췄다. 봉투는 그대로 있었다. 나무 상자도 그대로였다. 그는 상자 뚜껑을 
열었다. 속은 텅 비어 있었다.
  갑자기 현기증을 느낀 클레이는 한쪽 무릎을 땅에 꿇은 채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땅바닥에 머리를 박고 사시나무처럼 떨기 시작했다. 찾아냈구나. 가져 
갔어. 여태껏 날 믿고 사랑해줬는데. 이제, 이제 모든 걸 다 알았으니….
  아냐, 모든 건 아냐. 십일 년 전 케이프 코드에서 그 멍청한 늙은이를 때려 
눕힌 사실은 알아냈겠지. 하지만 다른 건 모를 거야. 그런 사건이 있었는지도 
모를걸. 어떻게 그걸 알겠어? 파리, 아카풀코, 팜 스프링스에서 일어난 걸 
어떻게 알아? 말도 안돼. 그럴 순 없지, 그래, 그럴 순 없어.  그러나 어찌됐든 
더 이상 신뢰 받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은 분명했다. 더 이상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 만의 하나 여섯 건을 알아낸다면….
  누가 방망이로 머리를 두드려대는 것 같았다. 그는 한없이 떨고 있었다. 
죽음이 두려웠다. 당장 아파트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다. 로라가 아침에 전화를 
할 지도 몰랐다. 아니면 사무실에서 그 큰 눈에 독기를 뿜은채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었다.
  그는 로라가 자신에게 등을 돌릴까봐 두려웠다. 몇 년 내내 속았다는 사실에 
두 번 다시 얼굴을 보려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로라 성격이라면 충분히 그럴 것 
같았다.
  날 해고시킬 거야. 그럼 난….
  그는 울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사랑했던 사람인데, 제일 염려하고 
제일 좋아했던 사람인데, 이제 그 사람으로부터 버림받게 된 것이었다.
  우라질 놈의 목걸이는 팔아버렸어야 했다. 그러나 그게 쉽지 않았다. 나머지 
보석들과 함께 돈으로 만들려고 해봤지만 박물관에 보관될 만큼 유명하고 
값비싼 보석이어서 살 사람이 잘 나서지 않았던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는 
로라와 자신을 발길로 차버린 악당들을 향한 승리의 표상으로 그 목걸이를 
간직하고 싶어졌다. 샐링거 모두를 겁에 질리게 했던 영웅. 그는 스스로 자신의 
도둑질에 박수를 보냈었다. 가끔씩 손가락으로목걸이를 만지며 이걸 찾고 
있겠지, 하지만 어림없다. 영원히 못 찾을 거라라고 중얼거리곤 했다. 누나 
재산을 뺏어내고 우릴 발로 찼지. 우리 걸 훔쳤지. 좋아, 난 너희들 걸 훔쳤다구.
  "클레이?"
  언제 싸웠냐 싶은 목소리로 마리나가 부엌에서 그를 불렀다.
  "치즈하고 비스킷 있는데 좀 먹을래?"
  대답을 하려고 했지만 울음이 목에 걸려 말이 나오지 않았다.
  "클레이?"
  "응, 기다려."
  "포도주를 뜨겁게 끓여볼까 하는데… 브랜디 좀 넣구."
  "그래."
  "그럼 장에서 브랜디 병 좀 꺼내와."
  "응, 조금 있다."
  "먼저 소스 넣고 끓일 테니까 천천히 갖고 오시라. 랄랄랄. 침대로 눕히기 
전에 우리 님을 뜨겁게 뜨겁게 만드는 길이라…"
  여기서 나가야 돼. 금세 터질 것처럼 심장이 요동치고 있었다. 나가야 돼. 
여기서 나가야 돼… 로라를 볼 순 없었다. 그는 자신을 증오할 로라가 두려웠다. 
안돼, 안돼. 나가야 돼, 도망가야 돼.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그는 떨리는 손으로 
침대 밑에 있는 가방을 끌어냈다. 그리곤 손에 잡히는 대로 바지와 스웨터, 
셔츠, 속옷, 양말, 신발 등을 쳐넣었다. 예복용 셔츠와 턱시도 바지를 거칠게 
벗어던진 뒤 그는 리바이스 청바지에 모자 달린 스웨터, 양말 그리고 검은 색 
모자를 들었다.
  서류함 맨 마지막 서랍 뒤편에 숨어 있던 마닐라 봉투 두 장도 집어 들었다. 
그는 두번째 서랍을 열어 가장 좋아했던 로라 사진을 꺼내 봉투 사이에 끼웠다.
  모두 순식간에 끝낸 동작이었다. 맨 아래 서랍에 있던 로라의 이름이 적힌 
오웬의 편지봉투도 빠지지 않고 챙겼다. 이건 못 봤나본데. 클레이는 주먹으로 
눈물을 닦아내며 생각했다. 눈앞에 나타난 목걸이 때문에 다른 건 제대로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 편지를 어떻게 해야 할 지는 몰랐지만 언젠가 다시 
남매간의 정을 찾을 때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봉투를 여행가방속에 
집어넣었다.
  "클레이, 다 돼가는데."
  "기다려."
  그는 재빨리 가방 지퍼를 닫았다. 계속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눈물 때문에 
뿌옇게 흐린 눈으로 대형 거실을 빠져나갔다. 몇년 동안 도둑질로 익힌 재빠른 
발걸음이 그렇게 도움이 될 줄 누가 알았던가. 현관 앞에서 그는 옷장에서 
꺼내온 가죽잠바를 등에 걸쳤다. 그리곤 뒤돌아보지 않고 소리없이 문을 닫았다. 
다른 집을 털 때와 똑같이 소리없이, 아주 조용하게.
  폭풍우로 요동치는 보스턴행 비행기 안에서 로라는 앞으로 있을 회의 생각을 
포기해야만 했다.
  오빠가 아니라 클레이였어. 밤새 그녀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폴의 말대로 
다른 사건도 클레이가….
  새벽 세시부터 일기 시작해 계속 거세지고 있는 폭풍우처럼 그녀의 머릿속도 
일대 혼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렇게 갖고 싶어했던 가족이었는데. 가족이 
너무나 소중했기 때문에 그 너머에 있는 진실을 바라볼 경황이 없었다. 바로 눈 
앞에 있는 걸 무시한 채 맹목적으로 믿기만 했다니. 새벽 일찍 마리나는 전화를 
걸어 흥분한 목소리로 떠들어댔다.
  "없어졌어요… 째째하게 내가 포도주 끓이고 있는데 사라졌어요. 세상에 
남자가 뭐 그런지. 처음엔 잠깐 어디 나갔겠지 했는데 옷이 없어진 걸 보고 
알아챘어요. 아무것도 아닌 걸로 잠깐 언쟁한 것뿐인데… 하긴 남자가 다 
그렇지 뭐. 가긴 어딜 갔겠어요? 누나한테 갔겠지. 아이처럼 쪼르르 쫓아가구. 
얘기 좀 하게 바꿔줘요."
  "여긴 안 왔는데요."
  클레이가 사라진 이유를 알고 있었지만 로라는 마리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해봤자 도움될 게 없었다. 우선 클레이를 어떻게 찾아낼지 생각해야 
했다. 한편으로는 돌아올 때까지 내버려두는 게 최선의 방책같기도 했다. 
머릿속에서 더 이상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샐링거 이사회의가 더 급한 
문제였다.
  그곳에 가서 어찌해야 할지 전혀 생각하지 않은 상태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당당하게 회의실로 걸어들어가 스스로 벤의 정체를 밝힐 생각이었다. 샐링거와 
한편이 된 사람이니 해가 간들 어떠랴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거두어들여야만 했다. 자신에게 해를 끼친 사람에게 
복수하겠다는 생각이었으나, 클레이가 범인인 이상 벤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었다. 벤은 샐링거를 턴 사람도 아니었고, 오웬을 쓰러뜨린 장본인도 
아니었다. 자신과의 약속을 저버린 사람은 더더구나 아니었다. 사실만을 말했고 
약속을 지켜주었다. 잘못이라면 그 사실을 믿지 못한 로라 자신에게 있었다.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에게 두 번 다시 만나지 않겠다고 했으니 기가 막힐 
일이었다. 샐링거가 자신을 차버렸듯, 그녀 또한 그를 매몰차게 차버린 
격이었다.
  모든 사실을 안 이상, 어떻게 그의 앞날을 막을 수 있단 말인가? 그가 이룬 
새로운 인생을 무너뜨릴 권리가 그녀에게는 없었다. 그러나 자신과 벤의 관계를 
밝히지 않는 한 주주 매입 승인을 받을 길은 전혀 없었다.
  어찌해야 좋을지 정말 막막했다. 벤의 여동생이라고 밝힐 수 없다면 
보스턴행은 헛고생이 되고 말 것이다. 오랫동안 펠릭스와 대결해왔던 
그녀로서는 주식을 포기해야 된다는 것은 마음 한구석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만드는 일이었다. 욕심을 부리면 안돼. 이미 손에 쥔 게 많은데. 오빠를 
생각해야지… 그러나 펠릭스를 향해 달려온 길, 그 길 맨 끝에서 차를 돌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묘책을 떠오르지 않았다.
  보스턴에 도착해 낯익은 거리를 달려가는 동안 로라는 심한 욕지기를 느꼈다. 
머리가 빙글도는 듯했다. 비행기 멀미도, 부족한 잠 때문도 아니었다. 그냥 
펠릭스와 벤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보스턴 샐링거는 예전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았다. 시립공원을 향해 우뚝 
솟아 있는 호텔 로비에는 회색과 밤색 정장에 똑같은 서류 가방을 든 
사업가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었고, 한쪽 구석에서는 쥘 르클레어가 손님들에게 
열쇠와 메모 등을 전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추억 속의 로비보다는 휠씬 
좁아보였다. 그렇게 기죽이던 쥘도 별로 높아 보이지 않았고 화려한 샹들리에도 
그전만큼 호화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반짝이던 재떨이도 빛이 사라진 채 
지저분한 꽁초가 몇 개 들어 있었다. 머릿속이 완전히 뒤죽박죽이었지만 로라는 
잠시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변한 것은 호텔이 아니라 로라 페어차일드였다.
  폭풍우로 인해 회의 시간에 늦을 수밖에 없었던 그녀는 쥘이 그녀를 알아챌 
수 없을 만큼 빠른 걸음으로 엘리베이터로 갔다. 옛일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위층 회의실 앞에 다다른 로라는 회의실 문을 힘차게 열어젖혔다. 긴 탁자에 
앉아 있는 남자들이 모두 쳐다볼 때까지 그녀는 문앞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
  그녀를 맨 처음 본 사람은 벤이엇다. 서류를 뒤적이던 그는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을 향해 찌푸린 얼굴을 돌렸지만, 이내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고는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곤 최면에 걸린 듯 의자를 서서히 뒤로 밀었다. 
그가 뭐라고 입을 열기 전에 펠릭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회의장에 
펠릭스의 고함소리가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감히… 나가!"
  "안녕하세요, 펠릭스."
  속에서는 증오가 끓어올랐으나 그녀의 몸에 걸친 푸른 색 정장만큼이나 
차분한 음성이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회의 탁자로 다가간 그녀는 옆자리 남자에게 악수를 청했다.
  "로라 페어차일드라고 합니다."
  눈썹을 치켜세우며 일어난 남자는 정중하게 그녀의 손을 받아쥐었다.
  "콜 해튼이오."
  해튼 건너편에 앉아 있는 토마스 젠슨에게 그녀는 다시 손을 내밀었다.
  "다시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로라."
  젠슨은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그녀의 손을 잡아 흔들었다.
  "이게 무슨 짓인가? 당장 나가지 않으면 쫓아낼 테니 빨리 나가."
  로라는 펠릭스의 고함소리를 무시하고 토마스 옆에 앉아 있는 아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로라가 내민 손을 바라볼 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냥 
보보처럼 정신 나간 얼굴로 고개만 까딱이다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잠시 
망설이던 끝에 그녀는 직접 나머지 낯선 두 사람에게 인사를 했다. 두 사람 다 
일어나 정중하게 그녀의 손을 받아 잡았다. 마지막으로 그녀 앞에 나타난 
사람은 벤이었다.
  "안녕하세요."
  두 사람의 눈빛은 오래도록 서로에게 붙박혀 있었다. 영원처럼 아득한 
시간이었다. 얼마 후 벤은 그녀의 손을 받아 쥐었다.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가워요."
  그는 그녀에게 의자를 권했다.
  "여기 앉으시죠."
  "앉긴 어딜 앉아!"
  펠릭스는 입술을 가느다랗게 떨고 있었다. 콜 해튼이 그를 제지하고 나섰다.
  "페어차일드 양이 여기에 나타나신 이유를 들어야 하지 않겠소?"
  벤이 내준 자리에 앉아 로라는 서류를 꺼냈다. 지니와 계약이 끝난 매매 
서류였다.
  "버지니아 스타렛이 갖고 있던 샐링거 호텔 주식회사 주식을 제게 팔았습니다. 
매매가 성립되기 위해선 이사진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기에 일을 매끄럽게 
처리하는 의미로 이렇게 직접 이 자리에…"
  "매끄럽게 처리해?"
  펠릭스의 이마에 퍼런 핏줄이 돋아 있었다.
  "쇼하는 건가? 우리 이사진이 그 매매를 수락할 것 같애?"
  "펠릭스."
  콜 해튼이 다시 끼여들었다.
  "처음 듣는 얘긴데 들어봅시다. 페어차일드양이 구매한다는데 반드시 거절해야 
한다는 뜻…"
  "말도 안되는 소리요. 반드시 부결될거요, 이 여잔…"
  "내 소리가 말도 안되는 소리라니?"
  해튼은 지지 않겠다는 듯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언성을 높였다.
  "이 여잔 도덕적으로 믿을 수 없는 여자요. 우리 회사 주식을 이런 여자에게 
맡길 수 없어요."
  "그 얘긴 옛날에 한 번 했지."
  토마스 젠슨이 부드럽게 끼여들었다. 그는 로라를 바라보았다. 벤 옆에 똑바로 
앉아 있는 로라를 젠슨은 그녀가 사무실로 뛰어들었을 때와 똑같이 놀란 눈으로 
계속 주시했다. 두 사람 비슷한 데가 있어 눈빛이 아주 닮았는걸.
  "하지만 이젠 로라한테도 말할 기회를 줍시다. 펠릭스. 오래전 일 아닌가? 
로라의 원숙한 사업가 기질이 우리한테 이익이 될 지 누가 알겠나."
  "아무튼 오늘 회의건이 아니니까 다음에…"
  펠릭스는 또다시 다른 이사 때문에 뒷말을 삼켜야 했다.
  "뭐가 오래전 일인데요?"
  "무슨 일인데 사업 얘기에 도덕적 소양 운운하는 거요?"
  옆자리 이사가 또 끼여들었다.
  "저 여자가 운영하는 호텔이 지금 범죄조직과 연관된 혐의로 수사 받고 있단 
소리요."
  펠릭스도 연설하듯 목소릴 높였다.
  "범죄?"
  토마스의 질문에 펠릭스는 손짓까지 해가며 설명했다.
  "미술품 도둑. 아주 유명한 고가품을 훔쳐…"
  "호텔이 미술품을 훔친다구? 잘 차린 호텔이 도둑질을 한단 말이오?"
  해튼은 우습다는 듯 로라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래요? 페어차일드양? 직접 말씀해보시지. 그런 식으로 법을 위반했나요?"
  "아뇨."
  "귀하의 호텔이 미술품 도난사건과 관련돼 경찰조사를 받고 있어요?"
  "경찰서라고 하면서 전화가 왔었어요?"
  "아뇨."
  "페어차일드양의 명성은 익히 알고 있소. 펠릭스가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엔 펠릭스가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고 있는 것 같소. 
페어차일드양이 버지니아 스타렛하고 매매 계약서를 체결했다면 내가 
건의하겠소. 투표로 동의를 결정합시다. 간단하게 거수로 하지. 난 찬성이오."
  "그렇게 원한다면 못할 것도 없지."
  펠릭스는 뜨거운 콧김을 쏟아내며 씩씩거렸다.
  "난 반대, 아사, 넌?"
  아사는 탁자를 바라본채 중얼거렸다.
  "반대."
  "그럼 결정된 것 아니오? 찬성표는 사분의 삼을 얻어야 되는데, 아사하고 날 
합치면 거의 삼십 퍼센트니 그 건은 부결됐소. 우린 회의를 계속합시다."
  로라는 탁자 위에 올려놓은 두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모두들 기다리고 있으니까 빨리 나가요."
  "물론 두 사람이 반대하면 어쩔 수 없겠지."
  토마스는 로라를 대신해 펠릭스를 마주보았다.
  "하지만 내 생각엔 좀더 신중하게 의논하는 게 좋을 듯 싶어요. 여러분에게 
제안하는데 어떻습니까?"
  좌중을 둘러본 뒤 토마스는 펠릭스에게 눈을 맞추었다.
  "펠릭스, 난 두 번 다시 서둘러 로라건을 매듭짓긴 싫네. 이번엔 그때와 
다르네. 다른 일이야. 이번 매매가 정식으로 이루어진 일이라면 내가 보기엔 
반대할 이유가 없다는 거지. 그 주식을 사기 위해 엄청나게 돈을 치렀을 텐데 
사실 개인적으로 난 로라가 이룬 성공에 경이로움…"
  "우리 모두 경의와 찬사를 보냅시다. 왜 안 그렇겠습니까?"
  펠릭스는 비아냥거리는 어투로 좌중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어쨌든 투표는 치러진 거고, 새로운 제안은 두 번 다시 채택될 수 
없어요. 경이로움? 핫! 훔친 돈으로 샀을 텐데 그 매매는 절대 성립될 수 
없어요."
  "훔쳤다뇨!"
  칼로 째듯 날카로운 음성이었다. 로라는 모든 사람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유리창 앞으로 걸어가 똑바로 섰다. 그녀의 어조에는 설득력과 확신이 있었다.
  "여기 계신 여러분, 모두 편견없이 내 주식 소유권에 대해 찬성을 하리라 
믿습니다. 특히 아사… 특히 아사 샐링거씨가 날 위해 찬성을 하리라 굳게 
믿었죠. 이 매매는 정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녀는 정식매매 얘기를 꺼낸 토마스에게 간접적으로 대답하듯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필요하시면 지니 스타렛에게 문의해보시죠. 전화번호를 드리겠습니다. 
더군다나 제가 이 그룹에 이사로 참여하게 되면 여러분 모두에게 이익이 돌아갈 
겁니다. 여러분 모두 다 제 능숙한 호텔 영업관리를 필요로 하리라고 믿어요. 
아까 오다 보니 로비 재떨이에 담배 꽁초가 가득 차 있더군요."
  비웃는 듯한 로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자릴 박차고 일어난 펠릭스는 
문간으로 뛰어가며 격하게 손을 흔들었다.
  "휴회합시다."
  그는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는 계속 소리쳤다.
  "모두 다 정신 다시 차리고 돌아올 때까지 휴회하는 걸로…"
  "잠깐만요!"
  자리에서 일어나 탁자를 돌아나간 벤은 펠릭스가 서 있던 의장 자리로 가서 
꼿꼿하게 몸을 세웠다.
  "휴회하자는 데 동의안이 없는 걸로 아는데요."
  벤은 이사들을 둘러보았다.
  "누구 재청하실 분 계세요?"
  "내가 휴회하자는데! 내 소리 안 들려!"
  "재청이 없질 않습니까!"
  벤은 펠릭스가 언성을 높일수록 더 차분하게 목소리를 낮췄다. 그의 눈빛은 
아사에게 꽂혀 있었다. 어느 쪽에 힘이 있는지 몰라 눈동자를 돌리던 아사는 
탁자로 눈을 내려 깐 채 아예 입을 다물어 버렸다.
  "재청이 없는데요. 그러므로 이 회의는 계속돼야 된다고 봅니다. 로라?"
  그는 로라가 신분을 밝히기를 기다렸다. 펠릭스의 수모를 받아가며 로라가 왜 
진실을 말하지 않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실을 말하지 않는 한 주식을 가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를 처음 본 순간 그는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여인이 
자신의 여동생이라는 사실이 너무나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서로를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동생이야. 그는 사랑과 자부심을 동시에 느꼈다. 
그러고는 그녀가 좌중을 향해 오빠를 소개하겠다는 말을 언제나 꺼낼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말을 꺼내지 않았다.
  "로라, 할 말 있잖아."
  그녀는 눈으로 그를 찾았다. 도저히 자신의 입으로는 밝힐 수 없는 일이었다. 
샐링거의 일부분을 손에 쥘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그 떡이 코앞으로 다가온 순간 그녀는 손을 내밀 수 없었다. 그곳엔 벤이 
있었다. 사랑하는 오빠. 오해 때문에 몇 년 동안 미워하며 가슴 아프게 했던 
오빠였다. 그에게 두 번 다시 쓰린 가슴을 맛보게 할 수는 없었다. 시간이 되면 
스스로 알아서 하겠지. 아니면 그냥 영원히 이대로 지내든가. 그건 내 일이 
아냐, 오빠가 할 일이지. 내 손으로 내가 할 순 없어. 그동안 연락조차 안하고 
괴롭혔는데, 클레이한테만 눈이 멀어 있었는데. 폴, 미안해요. 당신 말이 다 
맞아요. 맹목적인 믿음이었어요.
  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 사과만 하다 인생 끝나겠네, 하지만 어떡해. 다 내 
잘못인 걸.
  "로라."
  벤은 차분한 음성으로 로라를 불렀다.
  "기다리잖아."
  그녀는 두 눈을 번쩍 떴다. 모두 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오직 벤에게 눈을 맞춘 채 고개를 가로 젓고 있었다.
  "뭐야?"
  콜 해튼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뭘 기다리는데?"
  벤은 심호흡을 하며 숨을 골랐다. 젠장할. 이렇게 일이 꼬일 줄이야. 오래전에 
터뜨려야 했는데. 그랬으면 이렇게 벼랑 끝에 선 기분을 안 느꼈을 거 아니야.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버지니아 스타렛 주식을 로라 
페어차일드에게 양도하는 건에 관해 의논하기 앞서, 먼저 정식으로 소개를 
하고자 합니다."
  그는 문간에 얼어붙어 있는 펠릭스를 슬쩍 쳐다보았다. 펠릭스는 분노 때문에 
씩씩거리면서도 잔뜩 긴장해 보였다. 뭔가 대단한 일이 터지리란 걸 알고 있는 
눈치였다. 벤은 로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몇 발자국 나가 벤의 손을 
잡았다. 벤에 대한 고마움으로 그녀는 떨고 있었다.
  "제 여동생을 소개합니다."
  그녀의 허리를 팔로 감아안은 벤은 로라를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마침내 두 
사람은 샐링거 호텔 주식회사 이사진 앞에 얼굴을 나란히 한 채 똑바로 서게 
되었다.
  방 세개는 떠날 때 모습 그대로였다.
  "네가 이렇게 멋지게 꾸며놨다면서."
  로라는 터진 봇물처럼 가슴으로 흘러드는 추억에 잠겨 있었다.
  "한동안 저드 녀석이 여길 사용했지. 지금은 손님 방으로 사용하고 있다. 
알리슨은 저드 여동생이 태어나면 여길 쓰자고 하던데."
  "딸인지 어떻게 알구?"
  로라는 자신의 말에 스스로 놀라고 말았다. 계속 같이 살아온 오빠를 대하듯 
평범하고 어리광 섞인 말투였다.
  "예감이 그렇다는데, 모르지."
  로라는 벽난로 앞에 서서 폴이 찍은 모래 위에 있는 세 어린아이 사진을 한참 
동안 올려다보았다.
  "이걸 보면서 우리 셋을 떠올리곤 했어. 오빠하고 클레이는 해적기를 꽂으려 
했고, 난 리본을 꽂아 내 방을 만들려 했지."
  "멋진 사진이라고 생각했다. 폴은 그 뒤 안 만났구?"
  "가끔씩."
  벤은 로라의 핏기 없는 목소리가 안타까웠다.
  "아직도 사랑하고 있구나?"
  "바빴어. 누구를 사랑하고 그럴 사이도 없었어. 정신없이…"
  폴에 대해서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벤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목걸이 사건에 관한 오해를 풀어보고도 싶었지만 그 역시 당장 해결해야 할 
일은 아니었다. 우선 같이 있는 시간에 서로 익숙해야만 했다.
  "로라, 기분 괜찮니? 사업은 어때?"
  "응, 괜찮아."
  그녀는 살짝 미소지었다.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어. 이사회의 말야. 그건 괜찮아, 지난일인데. 하지만 
오빠를 만나 이렇게… 오빠, 우리 할 얘기 많잖아."
  "아니, 나중에. 제일 보고 싶은 거 벌써 봤잖아. 오웬 방하고 내 방. 점심 
간단히 만들게. 거실에서 먹으면서 얘기하면… 하, 웃긴다"
  그녀의 얼굴은 발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미안해. 이 집 주인처럼 굴었네, 나도 모르게."
  벤은 두 팔로 그녀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여기 살아야 당연하지 않니? 우리 같이 생각해보자. 이 집을 너한테…"
  그녀는 벤의 품에서 몸을 빼내며 차분하게 말했다.
  "오빠가 이 집을 나한테 넘겨준다 해도 난 여기서 못 살아. 뉴욕에 일이 
있잖아. 오빠하고 알리슨 그리고 저드, 저드 여동생, 넷이 여기서 사는 게 
얼마나 보기 좋은데. 그런 소리 두 번 다시 하지 마. 그나저나 언제 돌아와?"
  "몰라. 뉴욕에서 레니가 왔거든. 아, 레니 뉴욕에 있는지 모르겠구나. 
펠릭스하고 헤어졌어."
  "그래? 몰랐어. 기분이 이상하다. 나만 변한 줄 알았거든. 세월이 가는데도 난 
샐링거를 예전처럼 생각했어, 모두 다."
  "똑같은 사람이 어딨니? 세월과 함께 누구나 변해가는 거지. 알리슨 올 때까지 
기다리는거다? 모르긴 해도 다섯시까진 돌아올거야. 모녀가 모여 쇼핑하면 
반나절이 걸린다니까. 저드도 공원에서 돌아올텐데. 비 때문에 아마 어디 들어가 
있다가 올거다. 유모가 네시나 다섯시 사이에 데리고 오거든. 오늘 주방장 쉬는 
날이라서 천상 우리 둘이서 점심 만들어야겠는데, 괜찮지?"
  "그럼, 더 좋지."
  로자 대신 들어온 주방장이 그릇과 주방 용기들의 자리를 다 바꿔놓은 
모양이었다. 로라는 낯선 주방을 돌아보며 속상해했다.
  침묵 속에서 두 사람은 접시 위에 음식을 담았다. 풀어내야 할 얘기가 너무나 
많았다. 어디서부터 얘기를 풀어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뉴욕으로 돌아가 
콜비라는 수사관의 수사를 받아야 하는 부담감이 있었지만 로라는 일단 비콘 
힐에서 다시 찾은 벤과 함께 재회의 기쁨에 잠겨 있었다.
  "왜 이사들한테 누군지 밝히지 않았니?"
  찻잔에 물을 채우며 벤이 물었다.
  "네가 직접 말하길 바랐는데."
  "오빠 곤란할까봐. 필요하면 직접 가족들한테 말하겠지 생각했어. 뜻하지 않게 
비밀이 폭로되는 게 얼마나 무서운건데. 경험해 봐서 알아. 그걸 알면서 내가 
어떻게…"
  "그래도 이해가 잘 안되는걸."
  그는 그녀에게 잔을 넘겼다.
  "날 미워하는 줄 알았는데. 케이프 코드에서 일어난 일로 말이다."
  "그랬어.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 때까진. 하지만 어젯밤, 어젯밤에… 
클레이가 그 일을 했다는 걸 알았어. 레니 보석을 그애가 훔쳤더라구."
  충격으로 잠시 얼어붙어 있던 벤은 조심스럽게 바게트를 잘라 버터를 발랐다.
  "그럴 줄 알았다. 그 녀석한테 물어보라 했지? 유혹을 참지 못하는 녀석이야. 
그래, 어떻게 알아냈니?
  "아직도 그 목걸이를 갖고 있었어."
  그녀는 목걸이를 발견하게 된 경위를 상세히 설명했다.
  "잘했다. 직접 돌려주면 되겠네. 그런데 가버리다니, 그건 무슨 소리냐?"
  "마리나라고, 그애하고 같이 사는 여잔데, 오늘 아침 전화를 했어. 옷가지가 
없어진 걸 보면 아예 나간 게 틀림없다구 말야. 내 생각엔 수위한테 내가 왔단 
소릴 듣고 목걸이가 있던 곳을 뒤진 것 같애. 하지만 내가 갖고 왔는데 거기 
있겠어. 그래서 도망갔겠지. 내가 야단치는 걸 원래 무서워했거든. 왜 그런지…"
  로라의 목소리에는 촉촉한 물기가 어려 있었다.
  "걱정돼. 그애는 어른이 되는 걸 무서워하는 애처럼 영 자랄 생각을 안해. 잘 
되길 바라면서 지켜봐 왔는데. 언제 철이 들까 걱정하면서 말야. 오빠, 나 진짜 
무서워 죽겠어. 여태까지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딴 짓을 한 것 같다구…"
  그녀는 간략하게 폴의 영화 얘기와 샘 콜비에 관한 것을 이야기 했다.
  "클레이가 진짜 그랬으면 어떡해? 도무지 실감이 안 나. 그애가 호텔 손님들을 
뒤져…"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거라 생각했을 게다. 매일매일 새로운 먹이감이 
다가왔는데 그 유혹을 물리칠 순 없었을 거고. 그 녀석 말고 다른 사람일 
가능성도 생각해봤니?"
  "아무도 없어. 나밖엔. 샘 콜비 생각도 그렇대."
  "멍청이 자식. 그렇게 고생해서 호텔을 세웠는데 뭐하러 네가 그 모험을 
하겠니. 그 수사관 머리가 돌인가보다. 멍청하긴 클레이도 마찬가지다. 결과를 
전혀 생각 못하는 녀석이니까."
  "샘 콜비가 그걸 어떻게 알아냈을까?"
  "직접 물어봐야지."
  "클레이는 어쩌구? 잡혀가면 어떡해?"
  "그것도 생각해봐야지. 이런, 로라. 지금 클레이 걱정할 여유없어. 클레이가 널 
생각했다면 그런 망할 짓을 했겠니? 젠장할, 이런 구덩이에 널 차넣고…"
  "아직 그애가 그랬는지 확실히 모르잖아."
  "모르긴 뭘 몰라. 아직도 클레이를 그렇게 몰라?"
  로라는 손가락을 불안하게 끼었다 뺐다 했다."
  "내가 아무래도 그애를 잘못 돌봤나봐. 안 그래?"
  "꼭 부모 같은 말투다. 너는 보호자도 아니고 엄마도 아니야, 누나일 뿐이지. 
잘못은 나한테 있다. 처음부터 내가 못할 짓을 가르쳤어. 그 짓을 가르치는 게 
아니었는데."
  "오빤 손씻고 그럼 뭘 했어?"
  "뭐 했냐구? 또 도둑질하며 살았을까봐? 네 전화 받고 많이 생각했지. 가진 건 
그 실력뿐이었는데. 모든 게 뒤죽박죽이었지만 두 번 다시 그 짓은 하지 않았어. 
로라, 얼마나 보고 싶었는줄 아니? 넌 모를거다. 얼마나 널 그리워하면서 만나고 
싶어했는지. 한동안 화도 났지. 날 믿어주지 않는다고 말이다. 내가 보낸 편지 
받았니?"
  "응. 오빠가 여기서 산다는 말에 얼마나 미워했는데."
  "그럴 줄 알았다. 그걸 보낸 다음에야 알았지. 제일 바보스런 짓을 했다고 
말야. 편지보단 전화를 하는 게 나았을 텐데, 그걸 못했어. 바보 같지?"
  "나도 그랬는 걸 뭐. 생각은 많이 했어. 하지만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어. 너무 
화가 나서 제대로 말 한마디 못할 것 같았으니까. 그러다 어느 순간 그런 
생각이 들덜라구. 그냥 이렇게 떨어져 남남으로 살자. 그러면 어때. 더 이상 
서로 상관없이 그냥 그렇게 사는 거야. 그렇게 생각했어. 하지만 그게 그렇게 
돼? 우린 서로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았어. 서로 그리워하고 애타게 가슴 
아파하구…"
  "그래. 아직도 폴 생각하니?"
  로라는 쓸쓸하게 웃었다.
  "생각하는 정도가 아냐. 너무 너무…"
  "너 많이 달라진 거 아니? 차분하고 침착하고 자신이 넘쳐. 옛날엔 어디 
상상이나 했게?"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세상사가 다 그런 것 아냐?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겠지. 안은 부글부글 끓는데 
밖으로만 차갑고 침착하게 보이는 거야. 오빤 안 그런 줄 알아? 오빠도 많이 
변한 것 같애. 더 부드럽고, 차분하고… 아주 아주 핸섬한 데다 특출나 보이는 
걸. 두 나라를 연결시키는 외교관처럼 아주 뜸직하고 의젓해 보여."
  그는 씨익 웃어보였다. 너무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미소였다.
  "두 나라보다 우리 둘 사이를 연결시키고 싶은데?"
  "연결된 것 아냐? 거의 근접했지 뭐. 완전히는 아니지만. 왜냐하면 아주 낯선 
기분이 드니까. 오빠하고 있는 게 아직도 낯설어. 어쨌든 그래. 오빠 얘길 듣고 
싶어… 편지에서 못다한 얘기 말야. 하지만 그전에…"
  로라는 접시 위의 닭고기를 집으며 말했다.
  "로자가 뭐랬는지 알아?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일은 배를 채우는 일이라 
그랬어. 그러니까 먹고 얘길 하자구요."
  "얼굴은 못 봤지만 아주 현명한 주방장인데."
  "얼마나 좋은 사람인데. 정말이야. 오빠, 내가 한 말 다 잊어버려. 정말 미안해. 
케이프에서 내가 한 소리들 다 잊어버려야 돼. 그땐 너무 어렸어. 너무 몰랐어. 
오빠 말을 믿어야 하는건데. 그렇게 끊어버리기 전에 적어도 조금은 생각했어야 
했다구. 정말이야, 진짜 미안해. 그렇게 마음 상하게 만들고 오빠를 
떠나보내다니… 몇 년씩이나 떨어져 미워하고…"
  "로라, 됐다. 이젠 끝난거야, 다 이해하마. 이해할께."
  "아냐. 얼마나 속이 상했을까. 상처받고 화내고. 오, 세상에 진짜… 상상만 
해도 몸이 떨려. 난 그래도 속으론 오빠를 사랑했어. 끝없이 사랑할거라구 
생각하면서 말야. 하지만 오빤 날 사랑하지 않을거라구, 날 미워할거라구 
생각했어."
  벤은 한 팔로 로라를 감싸 안았다. 로라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두 
눈을 살며시 감았다.
  "그때 상황이 널 그렇게 만들었겠지. 오웬을 사랑했잖니. 나보다 그 사람을 더 
필요로 했으니까 그랬겠지."
  "그랬나봐. 생각해보면 너무 이기적이었어. 나만 알고, 내가 원하는 것만 
생각했으니까. 클레이나 오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어. 클레이가 그 보석을 
훔쳐내리라곤 상상도 못했거든. 그만큼 관심이 없었다는 소리야. 내 자신이 
어찌될까봐 내내 그것만 걱정했어. 나한테 다가온 행운이 순식간에 달아날까 
두려워…"
  "그만, 쉿 로라."
  벤은 부드럽게 로라를 달랬다.
  "그만해라. 알았지? 사과하고 싶으면 앞으로도 얼마든지 시간있으니까 천천히 
해. 가끔 나한테도 기회를 좀 주고 말야."
  로라는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오빠 사랑해. 이렇게 다시 만나서 얘길 나누다니 정말 꿈만 같아."
  벤의 가슴에 안겨 있던 로라는 고개를 들어 그의 뺨에 키스를 했다. 바로 그 
순간 알리슨과 레니가 거실로 들어섰다.
  "하나님 맙소사!"
  알리슨은 충격 때문에 하얗게 질려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벤?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야. 딴 여자랑…"
  로라와 벤 두 사람은 아무 설명없이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깔깔거리기 
시작했다.
  알리슨은 감히 두 사람이 있는 베란다 쪽으로 나갈 생각도 못하고 혼이 나간 
상태로 거실 중간에 못박혀 있었다. 그녀가 볼 수 있는 건 오로지 깔깔거리며 
웃고 있는 남편과 정체 모를 여인의 어두운 실루엣뿐이었다.
  "우스워? 우습다구?"
  알리슨의 음성에 독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누가 나한테 이 상황 좀 설명해…"
  "알리슨, 로라다."
  레니는 긴장된 목소리로 딸을 불렀다.
  "뭐라구? 로라? 로라? 오, 하나님, 하나님 맙소사. 어떻게, 어떻게, 네가 그럴 
수가?"
  그녀는 폭포수처럼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나쁜 년, 우리 집 남자를 아예 싹 쓸어 먹으려고 작정한 거니?"
  순간 벤과 로라는 똑같이 웃음을 뚝 멈췄다. 소파에서 일어나 베란다 안쪽 
거실로 들어온 벤은 알리슨을 두 팔로 감싸 안았다.
  "당신 잘못 생각하는 거야. 우선 내 말 듣고 차근…"
  "웃어요? 당신 웃었어요."
  "그래, 웃었어. 하지만 다 이유가, 오, 복잡하구만."
  "복잡할 것 하나 없어요. 간단해요, 간단하다구! 당신이 날, 날.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는데 다른 여자와…"
  "알리슨, 잠깐. 벤은 오빠야. 친오빠."
  로라는 알리슨의 말을 뚝 잘라버렸다.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릴 정도의 정적이 흐른 뒤 알리슨은 벤의 두 손에서 
매몰차게 몸을 빼냈다.
  "오빠? 여동생? 세상에, 구식 스토리 쓰고 있네! 여동생? 좀 그럴싸한 각본을 
꾸미지 그랬니? 왠일이야? 너같이 영리한 애가 그따위 삼류소설을 쓰다니. 날 
뭘로 보고 하는 소리니? 내가 바보 등신인 줄 알아?"
  "아니, 그렇게 생각한 적 한 번도 없었어. 알리슨."
  로라는 벤이 뭐라 입을 열기 전 재빨리 알리슨에게 다가갔다.
  "알리슨, 네가 날 도와줬지. 세상을 새로 알게 했고, 내 눈을 뜨게 만든 사람. 
진실되게 만든 사람도 너였어. 알리슨 진짜야 난 벤 여동생이야."
  "듣기 싫어!"
  "알리슨, 내 말 들어. 진짜야. 진실을…"
  "듣기 싫어! 그만해. 거짓말이야. 뭐가 모자라 내 남편까지, 내 남편까지…"
  "거짓말이 아냐. 믿지 않을 게 따로 있지."
  "믿지 않겠다면요?"
  "알리슨, 내 말을 못 믿겠다구? 로라가 하는 말을 좀 들어볼 수 없겠소? 몇 
분만이라도. 로라 스스로 얘길하도록 놔둬보잔 말이오."
  그제야 알리슨은 입을 다물었다. 로라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오래전에 여기 살면서 너한테 거짓말을 했지. 인정해. 그러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솔직히 말하고 싶었어. 그때 얼마나 솔직해지고 싶었는지 알리슨, 넌 
모를거야. 그동안 서로 얼마나 상처를 받았니. 그렇지만 지금도 늦지 않았잖아. 
거짓 없는 진실을 말하는 거야., 알리슨. 벤은 오빠야. 정확히 말하면 
이복오빠지. 우리 엄마가 재혼한 뒤 클레이와 내가 태어났으니까. 하지만 
우리한텐 그런게 아무것도 아니었어.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우리 셋이 서로 
정을 나누면서 자랐으니까. 하지만 언젠가부터 우린 떨어져 살아야 했어. 
왜냐하면 클레이와 난 오빠가 그해 여름 케이프, 그러니까 우리 둘이 들어와 
일하던 첫해였지. 그때 오웬을 밀쳐내고 강도질을 했다고 믿었거든. 그래서 그 
이후로 다시는 오빠를 보지 않았어. 오빠 대신 널 택한 거나 마찬가지였어. 
어쨌든 그때 이후로 오빠와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했어. 십일 년 동안… 우리 둘 
다 아니 클레이까지 셋 모두 그 비밀을 유지하는 데만 급급해서 계속 거짓말을 
해온 거야. 미안해, 알리슨. 레니한테두요. 모두 다 미안해요. 하지만 이것만은 
믿어줘, 알리슨…"
  로라는 애써 억지로 웃었다.
  "네 생각처럼 연애놀이가 아니라 남매간의 재결합이란 것을."
  로라가 입을 다문 뒤로 침묵은 오래 지속됐다.
  "말도 안돼. 진짜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오네."
  알리슨의 기가 막히다는 반응에 레니도 일조를 했다.
  "진짜 터무니가 없구나. 그렇다면…"
  벤과 로라를 번갈아 바라보는 레니의 목소리에는 의구심이 가득 차 있었다.
  "알리슨, 당신한테 모든 걸 털어놓으려고 얼마나 망설였는지 몰라.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게 더 힘들어지더군."
  "할 말 없어요, 벤. 잘 속였잖아요. 날 처음 만난 순간부터 내내 날 
속였다구요!"
  벤은 난감한 얼굴로 레니를 찾았다.
  "어떻게 좀 도와주세요."
  로라도 애원을 했다.
  "제발 기회를 줘봐요, 두 사람 다. 우린 그동안 쌓여 있던 거짓을 다 
풀어버리길 원해요. 모든 걸 얘기할 수 있게 기회를 줘요."
  레니는 로라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냉정한 눈빛으로 로라의 얼굴을 응시했다. 
두 눈을 맞춘 채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눈으로 얘기를 나누었다. 얼마 뒤 레니는 
웃지도 않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들어보자꾸나."
  베란다 앞 소파로 다가간 레니는 모자와 웃옷을 벗은 뒤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미니 찻주전자 뚜껑을 열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 잘 됐네, 여기 차도 있다. 알리슨, 이라와서 좀 앉으련? 벤, 의자 두개 
갖고 와서 로라하고 함께 앉지."
  레니는 벤이 안락의자 두개를 갖고 와 앉을 때까지 묵묵히 벤과 로라를 
지켜보았다. 차를 따르면서 레니는 특유의 잔잔한 음성으로 말했다.
  "자, 나도 그렇지만 알리슨도 그럴 게다. 시원하게 모든 걸 얘기해보지."
  로라는 레니가 예전과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예전보다 훨씬 적극적이었다. 
펠릭스와 이혼하고 난 뒤의 변화인 것 같았다. 잠시 후 로라는 벤이 시작한 
얘기 속으로 차츰 빨려들어가기 시작했다.
  "내 잘못이 컸어요. 케이프 별장을 털 계획을 내가 세웠으니까요. 어린 아이의 
복수심, 저드를 위한 유치한 복수심 때문이었습니다. 이 얘긴 그때 호텔에서 
빼놓을 수밖에 없었어요."
  레니와 벤의 눈길이 마주쳤다.
  "그 복수심 때문에 로라와 클레이를 이용했단 말인가?"
  "네. 두 동생을 이용했죠. 절대 용서받을 수 없단 것도 알고 있습니다. 어린 
동생들을 이용하다니…"
  "저드라니?"
  알리슨은 당혹감으로 레니와 벤을 번갈아 보았다.
  "우리 아들이 아니라 내 아버님 얘기오."
  어머니가 회사를 뺏긴 뒤 술과 절망으로 살아가는 아버지를 버리고 떠난 
이야기를 시작으로 그는 모든 얘기를 속시원히 털어놓았다. 알리슨뿐 아니라 
로라에게도 펠릭스와 저드 가드너의 스토리, 부친이 죽은 후 피맺힌 복수를 
부르짖던 어린 벤의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벤의 이야기가 오스터 빌에 이를 즈음, 로라는 그의 이야기를 이어받아 
한숨도 쉬지 않고 차분하게 그때 이야기를 해나갔다.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해가며 두 남매는 그날 아침 있었던 주주 이사회의까지 
모든 얘기를 끝마쳤다. 그런 두 사람은 입이라도 맞춘 듯 콜비의 수사건만은 
입에 담지 않았다.
  두 사람의 얘기가 끝났을 때 알리슨은 눈물을 펑펑 쏟으며 흐느끼고 있었다.
  "말해줬으면, 나한테 얘길 했으면…"
  그녀는 꼴깍 눈물을 삼키며 간신히 말을 이었다.
  "널 얼마나 좋아했는데, 널 얼마나 믿고 싶었는데… 아빠가 너한테 그렇게 
퍼부어댈 때 넌 한마디도 부정하지 않았잖아. 나로선 아빠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구. 그때 네 얼굴 어땠는지 아니? 세상에 차디차기가 얼음장 같은데, 
그런…"
  "로라뿐이었겠니? 차갑긴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레니는 로라의 손목을 부여잡았다.
  "미안하구나, 로라. 정말 미안하다. 사랑과 가정을 줘놓고 다시 순식간에 
빼앗다니 우리 잘못이 컸어. 그것만큼 큰 비극이 또 어디 있겠니."
  "얼마나 얘기하고 싶었는지 몰라요. 진심으로 솔직해지고 싶었어요. 하지만 
가까어지면 가까워질수록 더 무서워졌죠, 모든 걸 잃어버릴까 두려웠거든요. 
집을 나오게 된 이후로는 두려움 대신에 상처와 미움만이 가득했어요."
  "하지만 지금도 미워하진 않잖아?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 있는거지, 우리?"
  "그럼."
  알리슨에게 그렇게 대답한 순간 로라는 가슴이 한껏 부풀어오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알리슨과 다시 친구가 될 수 있다니, 전혀 불가능해 보였던 일이었다.
  "서로 느낌이 통한다면, 충분히…"
  알리슨의 얼굴이 순간 어두어졌다. 그녀는 레니에게 고개를 돌렸다.
  "서로 모든 걸 완전히 잊어버릴 수 있을까요? 우리 모두 다? 아니면 또 다른 
비밀이 있을까, 또 다른 거짓이 있을까 의심하고 고민할까? 그렇게 되면 우린 
서로 신뢰없이…"
  레니는 알리슨의 고민을 즉각 알아차렸다. 로라 때문이 아니라 남편 때문에 
염려하는 딸에게 레니는 잔잔하지만 확신 있는 어조로 격려를 했다.
  "모든 걸 잊을 수는 없을 것 같은데. 아니 잊어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과거를 
잊는다면 우리가 어디서 온 것을 잊는다는 소리지. 하지만 서로 충분히 
이해하고 신뢰할 수는 있을 게다, 알리슨. 일어났던 일을 되새기며 반성하고, 
우리에게 나타난 감정을 존중하고 지켜 나간다면 분명 신뢰할 수 있을 거야. 
사랑과 우정, 그리고 행복한 결혼생활은 보호하고 지켜나갈 가치가 있는 
거란다."
  알리슨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 옛날처럼 다정한 눈으로 로라를 바라보았다.
  "항상 여동생 있는 친구를 부러워했는데, 기억나니, 로라? 우리 두 사람, 
자매처럼 붙어다녔던 것 말야? 우리 이제 진짜 자매가 됐다!(영어에는 시누이, 
올케 대신 한 단어 sister in law가 사용된다 : 역자 주) 정말 근사하지, 
신나지?"
  "그래, 진짜 근사하고 신난다."
  알리슨이 내민 손을 잡은 로라는 서로 마주보며 웃었다. 벤이 헛기침을 하며 
둘 사이로 끼여들었다.
  "그 근사한 일에 남편도 끼워주는 거지?"
  "글쎄…"
  가까이 다가와 앉는 남편에게 알리슨은 생글거리는 미소를 보냈다.
  "사랑해요, 벤. 당신없이 내가 어떻게 살겠어요. 상상도 안되는걸."
  알리슨에게 벤이 입을 맞추는 순간 로라는 부러움을 감추며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레니는 그녀의 그런 마음을 정확히 읽어냈다.
  "아, 참, 깜박했네…"
  로라는 레니의 목걸이를 꺼내들었다.
  "이거 갖고 왔어요. 처음엔 오빠를 통해 드리려 했는데 직접 돌려드리는 게 
나을 듯 싶네요. 죄송해요. 그런 못된 계획을 세워서…"
  레니는 손바닥 위에 목걸이를 올려놓았다.
  "그런 계획이 없었다면 널 못 만났을 것 아니냐."
  정이 뚝뚝 떨어지는 레니의 미소 때문에 로라는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십일 
년을 순식간에 삼켜버린 미소였다.
  "돌아온 걸 축하한다, 로라. 우리 모두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오늘밤 여기 
머물 수 있겠지? 내일 가렴. 나도 내일 갈란다. 둘이 같은 비행기 타고 
가자꾸나. 밤새껏 얘기해도 모자라겠지만, 그래도 어디 한번 실컷 신나게 
얘기해보자."
  그녀는 일어나 로라에게 두 팔을 내밀었다. 기대 이상으로 아름답게 끝난 
재회였다. 그 기쁨에 아찔해하면 로라는 레니에게 다가갔다.
  "그럴께요. 오늘밤 여기서 밤새 있고 싶어요."
  작은 꼬마를 껴안듯 레니는 함박 미소와 함께 로라를 품에 안았다.
  "기분 정말 근사하다, 로라. 서로 오해를 풀고 이렇게 사랑을 되찾다니 정말 
다행이야. 암, 다행이고 말고. 기다리고 기다린 가치가 있었어."
  돈이 어디서 났을까?
  두 번씩이나 그녀에게 당한 꼴이었다. 한 번은 부친 유언장을 통해, 이번엔 
주주 이사회의를 통해 큰 망신을 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그냥 넘길 
수 없었다.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만큼 짓밟아버릴 심산이었다. 방법은 
돈이었다. 돈을 추적해 그 계집을 잡아 처넣을 수밖에 없었다.
  땡전 한푼 없는 도둑년이 무슨 돈으로 호텔 네개를 사들여 일류로 
만들었을까? 어떻게 미국의 톱기업 주식을 이 퍼센트나 사 들였지? 훔쳤을 
거야. 수표를 가짜로 발행했을까? 지하실에서 가짜 돈을 찍어냈나? 이런 젠장할, 
지금 장난하고 있는 게 아니야. 그것보다는 다 죽어가는 영감을 골라잡아 침대 
위에서 꼬리를 쳐댔겠지. 그 작자한테 결혼하겠다고 매달렸을까? 그렇다면 그건 
죄가 아니잖아. 그걸로는 못 잡아넣지.
  사기죄가 성립돼야 돼. 분명 사기를 쳤을 텐데. 그렇지 않고서는 그 많은 돈을 
빼낼 순 없었을 거야. 사기도 사기지만 도둑질일 수도 있어. 그래, 바로 그거야. 
보석, 아니면 미술품을 훔쳐냈을 거야. 콜비 말로는 도둑질을 한다고 했는데, 그 
정도로 그렇게 큰돈을 만들 수 있을까? 콜비한테 무슨 그림이냐고 물어볼 걸 
그랬나? 경매장에 나갈 만큼 값비싼 루오 그림 세 장이긴 해도, 이미 정식 
경매장에서는 종이 값이 된 그림이었다.
  비밀조직을 통했다면 오십만, 평균 오십만 달러는 받았을텐데. 그러나 호텔과 
주식을 사기에는 턱없는 값이었다. 또 다른 길이 있어야 했다.
  어쩌면 이곳저곳에서 긁어모았을 수도 있겠지. 사기질, 도둑질, 남자들을 
꼬셔서 받아낸 돈, 그걸 다 합치면 그렇게 될까?
  그로선 그녀의 재정상태를 한눈에 알아내야 했다. 길은 있었다. 그는 돈을 
주고 정보꾼을 살 작정이었다.
  돈이 들어가고 난 뒤 삼사일째 되는 날, 그는 모든 정보를 손에 쥘 수 있었다. 
담보금, 보수비, 개인개좌 내역들, 그녀가 관계한 모든 은행정보가 비싼 대금과 
함게 맞바꿔진 것이었다. 그를 통해 그는 그녀가 빚더미 속에 빠져 있다는 걸 
알아냈다.
  그의 입가로 잔인한 미소가 스쳐갔다. 콜비에게 일 년 이자로 오십만 달러가 
갈거라는 둥 확실한 자료 없이 로라를 몰아세웠지만 이제 그의 손바닥 안에는 
수사관보다 더 정확한 정보가 들어있었다. 예상치 오십만 보다는 적지만 그래도 
삼십오만 달러나 되는 돈이었다. 결국 호텔 네 군데에서 나오는 수입이 그 
금액보다 휠씬 상회해야만 된다는 얘기였다. 만일 그 이하로 떨어진다면 
당장이라도 나가떨어져야 된다는 결론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네 군데 다 공실률 (전체 객실 중 비어 있는 객실수 : 역자 
주)이 거의 제로에 가까워야 한다는 얘기였다. 서령 그런 기적이 사실이라고 
해도 깨뜨릴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손님을 위해 정성을 다 한다는 신뢰 높은 
호텔….
  만약 미술품 절도사건 주범으로 호텔 여주인이 경찰 조사를 받고 있다는 
소문이 퍼진다면? 그런 소문을 듣고 하룻밤에 천 달러 이상을 뿌릴 사람이 
있을까?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문제는 단 한 가지, 어떻게 그 사실을 널리 
퍼뜨리느냐가 마지막으로 남은 숙제였다.
  다음날 오후 펠릭스 샐링거는 보스턴 호텔 삼층, 에어컨이 가동된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자청해 열고 있었다. 짙은 정장 차림의 그는 그럴싸하게 보였다.
  다음날 모든 일간신문에는 '호텔 업계의 동지의식'이란 제목하에 로라 
페어차일드를 옹호하고 나선 펠릭스 샐링거에 관한 글이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샐링거 호텔 주식회사 대표이사 국제호텔연합회 부회장인 펠릭스 샐링거는 
어제 오후 기자회견을 자청한 자리에서 한창 명망에 오른 비콘 힐 호텔 그룹 
사장인 로라 페어차일드양이 호텔 경영을 이용하여 문화재급에 해당될 만한 
최고 미술품들을 전문으로 훔쳐내고 있다는 소문을 일언지하에 일축했다.
  "소문을 조사해봤지만 근거없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 근거없는 소문은 
우리 호텔업계의 전체 신용도를 떨어뜨리는 동시에 예전보다 더욱 확고히하고 
있는 경비 및 안전성을 의심케 하는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하고 그는 보스턴 
샐링거 호텔 사무실에서 밝혔다.
  샐링거씨는 또한 미술품 소장가로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몇몇 인사들이 모두 
다 비콘 힐 호텔 네 곳에 투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한결같이 유명한 
소장품들을 도난당한 점을 언급하기도 했다. 지금껏 비공개로 수사되고 있다가 
처음으로 샐링거씨를 통해 공개된 여섯 가지 도난사건들은 지난 삼 년간 두 
대륙에 걸쳐 여러 곳에서 일어난 바 있으나, 샐링거씨는 수사진의 말을 
인용하여 모두 다 동일범의 소행으로 드러나고 있다고 밝혔다. 아직까지 범인도, 
범인의 배후자도 찾아내지 못했다고 얘기한 그는 "하지만 우리 
국제호텔연합회는 자체적으로 이를 위해 나름대로 조사를 하고 있고, 이에 따라 
우리 고객들도 변함없이 호텔의 안정성과 견고성을 다시금 확인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만약 이 연속 도난사건들이 호텔업계 전면에 연결된 것이라면 
분명코 전국에 흩어져 있는 비콘 힐 호텔 네곳에 숙박하여 피해를 보신 손님 
명단 외에 다른 사실들이 곧 바로 나타나리라 생각합니다."하는 말을 끝으로 
덧붙였다.
  미술품 도난사건은 현재도 수사진에 의해 활발히 조사중에 있다.
  다음날, 로라의 사무실에는 하루 종일 쉴 틈 없이 전화벨이 울려댔고 네 호텔 
모두 예약 취소건이 물밀듯 쏟아져 들어왔다.

    31장
  신문사, 텔레비젼 방송국 뉴스 편집실은 그 이야기를 '펠릭스의 더러운 
짓'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의 '옹호설'은 결국 로라 페어차일드의 등판에 
칼을 찍어내린 격이었다.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는 사람이라면 호텔업계에 깔린 
암투가 빚어낸 뒷이야기라는 걸 단번에 알아챌 만한 기사였다. 그러나 국제적 
사교계, 미술품 도둑, 아름답고 젊은 아가씨, 최고급 호텔 등등은 기자로서는 
진짜 군침 당기는 소재들이었다. 결국 펠릭스 샐링거의 농간을 알면서도 
신문사와 방송국 기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로라에게 연속적으로 '전화질'을 
해댔다. 결국 로라의 전속비서는 똑같은 말을 하루 종일 되풀이해야만 했다.
  "죄송합니다, 페어차일드양은 지금 회의중이십니다. 아직 신문기사를 보지 
못하셨으나, 보는 즉시 무슨 말씀이 계시겠죠. 그때 가서 자세히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러나 기자들이 비서의 말만 듣고 앉아 있을 리 없었다. 뉴욕 비콘 힐로 
모여든 기자들은 로비에 진을 치고 있었다.
  "로라."
  비서가 인터폰으로 로라를 불렀다.
  "샘 콜비 전화예요. 이번 전화는 직접 받으셔야 될 것 같은데요."
  "알았어요. 고마워요."
  로라는 맞은편 소파에 앉아 있는 지니에게 재빨리 눈길을 준 뒤 수화기를 
들었다.
  "네, 콜비씨."
  "좀 뵙고 싶은데요, 페어차일드양. 일직 전화해야 되는 건데 미안하게 됐어요."
  "그렇네요. 나한테 먼저 얘길 해줬으면 이렇게까진 되진 않았을 텐데, 안 
그래요?"
  "미안하다고 했지 않소."
  자기 의도와는 달리 신문에 터진 사건으로 샘 또한 심사가 편하지 않았다. 
펠릭스에 대한 분노 때문에 샘 콜비는 괜히 로라에게 버럭 소릴 질렀다.
  "조심스럽게 수사를 하고 있었어요. 관련 인물들한테 해가 가지 않도록 애써 
가면서. 근데 망할놈. 이런 일은 평생 처음 있는 일이오. 내 얘길 배배 비틀어서 
신문을 장식하다니, 나쁜…"
  그는 간신히 화를 억누르며 뒷말을 끊었다.
  "어쨌든 미안하게 됐어요. 오늘 아침은 된통 당한 느낌이오."
  "그런가요? 오늘은 만날 수 없어요, 콜비씨. 내일이 될지 모레가 될지, 내 
비서한테 얘기해보세요. 바꿔드릴 테니."
  "나는 오늘이 좋은데 페어차일드양."
  "그럴 수 없어서 유감이군요. 나도 오늘 아침 된통 당하고 있습니다."
  비서에게 신호를 보낸 뒤 그녀는 콜비에게서 온 전화를 매몰차게 끊어버렸다.
  "오늘 만나야 되는 건데 그랬나봐. 안 그래요?"
  로라는 지니에게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글쎄, 오늘이나 내일이나 별 차이 있겠어?"
  지니는 커피포트를 들어올린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 잔 더?"
  "네, 부탁해요."
  그녀는 한기를 느끼는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시월초밖에 안됐는데 왜 이렇게 추운 거죠? 스웨터 입을 걸 그랬나봐."
  "펠릭스 주방에서 일할 때 그놈의 자식한테 독약을 먹이지 그랬니? 망할 놈의 
자식! 초조하고 걱정이 되니까 추운 게지, 괜찮을 거다. 날씨탓이 아니야. 동생 
찾아내서 모든 걸 자백하게 하면 한결 나아질 테니 염려 마."
  "언제 그앨 찾아낼지 막막해요. 그애가 도둑이 아닐지도 모르잖아요."
  "클레이가 우릴 찾아와 아니라고 했으면야 얼마나 좋겠니. 아무튼 클레이를 
찾아내는 일이 우선이야. 벤이 탐정을 고용했으니 곧 찾아내겠지. 걱정하지 
말자."
  로라는 다시 한 번 부르르 몸을 떨었다..
  "정말 상상만 해도 싫어요. 클레이를 찾기 위해 탐정을 풀다니…"
  "로라, 클레이가 저지른 일을 보고서도 그런 소리야?"
  로라는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알아요, 알아요."
  인터폰으로 다시 비서가 로라를 찾았다.
  "벤 가드너씨라는 분이 친척이라면서 자꾸 전화를 대 달라는데요."
  로라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친척 맞아요. 대줘요."
  "오늘 오후쯤이면 거기 도착할거다. 그래서 전화했어. 탐정한테 전화가 오긴 
했다만 아직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는구나. 하지만 열심히 뛰고 있다니까 
좀더 기다리자. 알리슨이 안부 전하랬어. 사랑한대."
  어려울 때 감싸줄 수 있는 가족, 로라는 목이 메었다.
  "오빠, 전화해줘서 고마워. 하지만 여기까지 올 필요 없어. 진짜야. 나 때문에 
기 죽거나 고민하지 마. 싫어, 난. 예약취소는 최대한으로 막고 있어. 너무 걱정 
마. 여기가 안전하다는 걸 입증하면 고비를 넘길 수 있을 거야."
  도난사건을 즉각 해결하지 않으면 어려움이 가중되리란 사실을 벤은 구태여 
얘기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이미 로라 스스로 알고 있을 터였다.
  "도움이 필요하면 빨리 전화할거지?"
  "물론이지. 고마워, 오빠. 도움이 필요 없어도 전화할께."
  그는 일부러 밝게 웃었다.
  "그래 이따 오후에 다시 얘기하자."
  인터폰이 다시 울렸다. 커리어였다.
  "전화했더니 비서가 받던데, 출장중이라면서요."
  "댈러스에 있소. 두시까지 뉴욕에 갈 생각이고, 세시경엔 우리 투자가들하고 
회의를 해야 될 것 같은데, 당신하구."
  "회의라뇨?"
  "발 빼겠다는군. 모든 걸 취소시키겠다는 거야. 그래도 할 말없지 않소. 욕할 
순 없지."
  "웨스, 한두 달도 아니고 겨우 어제 터진 일이에요. 숨쉴 틈은 줘야 되지 
않아요?"
  "회의 때 그 얘길 할 생각이요. 어쨌든 각오하고 있어요. 미리 귀뜸해주는 게 
좋을 것 같아 말했소. 고비라고 생각하면 힘이 날거요. 이런 난국을 딛고 일어난 
호텔도 있으니까 걱정 말아요. 어쨌든 계획을 세워두는 게 좋을거요. 다들 당신 
입술만 바라보고 있을 테니까."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로라는 단호한 음성으로 물었다.
  "알았어요, 회의는 어디서 하죠?"
  "내 사무실에서 하지. 당신한테 그쪽이 편할 것 같아 그리로 정했는데."
  "고마워요, 웨스. 시간 맞춰 갈께요."
  지니는 심각한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사들 말야? 투자가들?"
  로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투자한 돈이 날아갈까봐 걱정들이래요."
  "그래도 로라는 담담해 보이는데."
  "담담해야죠. 막대한 자금을 투자한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한테 감정 처리도 
제대로 못하는 여자로 보여서야 되겠어요. 그렇게 걱정하진 않아요, 지니. 
이성적이고 머리 잘 돌아가는 사람들이에요. 처음부터 날 믿고 투자한 
사람들이니까 그리 쉽게 등 돌리진 않을 거예요."
  "깍쟁이. 나한테 하는 소리구만. 내 돈 걱정하지 마라 이거야 지금? 이것봐 
로라, 내 말 잘 들어. 그깐 일로 내가 걱정할 사람이면 벌써 죽었게. 내 돈 
걱정은 안한다. 그것 없이도 살 수 있어. 죽는 한이 있어도 내 투자한 돈 
돌려달라는 소리 안할게 걱정 마. 오히려 딴 소리 하려는데 난. 나한테 주는 
이자 말야, 그거… 그래, 육개월쯤 없는 걸로 하자. 그럼 월별 지출비에 좀 
도움이 될걸. 아마. 숨통 좀 트일거라구. 기간 같은 건 정하지 말고, 호텔이 차고 
넘칠 때까지 잊어먹고 살자. 서류하나 남기지 뭐. 내 쪽 회계사는 원래 서류를 
좋아해서 말야."
  "고마워요, 지니."
 로라는 목이 메어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육개월 안에 모든 게 제대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볼게요."
  "그래,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노력하다 안돼도 실망하지 않을테니까 마음 푹 
놓고 싸워봐. 이따 가서 투자가들한테 뭐라고 할 생각인데?"
  "신문기자들한테 할 얘길 되풀이 하겠죠. 할 수 있는 한 힘껏 싸워볼께요.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간단하게 얘기할 생각이에요."
  그러나 커리어 사무실에서 로라는 투자가들로부터 자기가 한말을 그대로 
들어야 했다.
  "복잡할 것 없어요. 간단하게 합시다."
  로라가 뉴욕 샐링거를 매입할 당시 대표격으로 나왔던 팀 알코트의 첫 
반응이었다. 세계적으로 정평이 나 있는 최대 냉동식품 회사인 알코트 식품사를 
운영하는 팀은 모든 일을 제품만큼이나 단단하고 차갑게 추진할 뿐 아니라 
성격도 냉정한 편이었다.
  "OWL 개발의 미래가 확실한가 그것만 알면 돼요. 우리 모두 사당한 액수를 
투자한 이상, 그에 걸맞는 안전성이 보장되어야 하는 것 아니겠소? 근데 지금 
보시다시피 안정성이 없다 이 소리요. 듣기론 전후좌우에서 예약 취소가 
들어온다는데, 하루 이틀 사이에 그 상황이 바뀌지 않는다면 볼장 다 본 거 
아니겠소? 그러니까 어디 한번 그 대책을 들어봅시다. 대책이 있다면 말이오."
  그녀는 두 손을 마주잡은 채 탁자 위에 올려놓고 자세를 바로 잡았다.
  "솔직히 비콘 힐 호텔에 도둑이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누군지 
지목하고 있는중이죠. 회사내 지위와 정보를 이용해서 투숙했던 손님들의 
집으로 다가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 장본인은 우리 회사에 없습니다. 
우리 회사에 더 이상 몸담고 있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더 나아가 경비원 수를 
확대하여 안전에 만전을 기하고 있습니다. 내일 도난사건을 수사중인 
보험회사직원 샘 콜비를 만날 작정입니다. 곧 결말이 날거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곧이 언제를 말하는 거요?"
  "범인이 누군데 그래요?"
  "그잔 어디 있는 거요?"
  "누군지 알고 있단 소리오, 아니면 추측이오?"
  동시에 질문들이 날아왔다.
  "로라가 직접 말할 수 있도록 잠시 기다리기로 합시다."
  커리어가 분위기를 진정시키기 위해 끼여들었다.
  "누군지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증거를 찾을 때까지."
  "증거가 없다구?"
  "아직은요. 아직 조사중에 있습니다."
  "그럼 추측이란 소린데, 어디서 나온 추측이요?"
  "그것보다는 중요한 건 고객들과의 신뢰회복이라고 생각하는데요. 편지 발송 
외에도 지니 스타렛의 도움으로 예약 취소를 한 사람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고 
있는중입니다. 백 명이 넘지만 정성을 다해 설득하고 있어요. 대부분 다시 
돌아올 걸로 확신합니다. 그 사람들이 돌아와 모든 게 다 완벽한 것을 확인하게 
되면…"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모든 게 다 완벽하다니! 스캔들을 뒤집어쓴 호텔이 어떻게 완벽하다는 거요? 
편지고 전화고 그런 자질구레한 나부랭이는 집어치워요. 우리는 효과가 있는 
결과을 원하오. 그뿐인가? 우리뿐만 아니라 대중이 공개적으로 그 결과를 
인정해야지. 뒤로 빼돌린 도둑놈이 도대체 누구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이 확실하게 범죄를 저질렀다는 걸 알기 전엔 
공개적으로 얘기 못해요."
  "이건 공개적이 아니잖소. 이건 비밀회의란 말야!"
  "아까 뭐라고 했는데요? 공개적으로 원한다면서요. 그렇게 말씀해놓고 나한테 
비밀스러운 대답을 원한단 말인가요?"
  "빌어먹을!"
 그는 기세등등했다.
  "내가 누군데 그렇게 까불고 있나? 내가 누군데 그렇게 도도하게 나와! 지금 
당장 그 작자가 누군지 얘기해야 될걸. 똑똑한줄 알았더니 머리가 영 안 
돌아가는구만. 그 머저리 같은 범인이 누군지 당장 말하지 못하겠나! 우리가 
각자 댄 돈이 얼마지? 구백만, 각자 구백만씩 들었어. 그래도 권리가 없다구, 
구백만 달러를 댔는데 그 범인이 누군지 들을 권리가 없다는 거요!"
  "말씀 못 드려요. 미안해요, 팀."
  "좋아 놀자구? 우리하고 놀자는 거지? 직접 말하기가 쉽지 않겠지. 자기 
입으로 어떻게 말하겠나, 범인은 나요 하고 어떻게 털어놓겠어. 그런 식으로 
여기저기 털고 다니다니, 세상이 다 아는 사실…"
  "팀.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린가?"
  커리어는 매섭게 소리쳤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소릴 하는 거요? 로라는 절대…"
  "오, 절대로 안한다? 빚이 얼만데? 웨스, 자네 모른다곤 하지 않겠지? 이곳 
저곳 쑤시고 다니면서 챙긴 돈으로 그 빚을 갚아 나가겠지! 삼년 동안 그 여섯 
군데를 싸돌아다니면서 돈을 마련했어. 안 그래? 내 말이 맞지?"
  "아니예요. 틀려도 한참 틀렸어요, 팀!"
  로라의 눈에서는 시퍼런 불꽃이 튀었다.
  "그런 식으로 매도하지 말아요. 처음부터 지금까지 지켜보고서도 그런 소릴 
해요? 내가 네 군데를 일으켜 가는 걸 지켜보구서? 여태 아무 사고 내지 않고 
지금껏 크게 일궈왔잖아요. 내가 뭣 때문에 물건을 훔치겠…"
  "하, 그래? 그럼 참고로 한마디 해줄까, 아가씨? (데일리 뉴스)사에 친구가 
하나 있는데, 내일 아침 기사가 큼지막하게 나갈거라더군. 그것도 두 번씩이나 
전과사실이 있더구만. 게다가 누굴 꼬셔서 재산을 뺏으려 했다면서? 유명해도 
한참 유명하신 아가씨더구만!웨스가 괜찮다고 해서 그 말 한마디만 믿고 구백만 
달러씩 투자했지만 도둑한테 그 돈을 더 이상 맡겨 놓을 수는 없어."
  로라는 커리어를 찾았지만 커리어 역시 크나큰 충격에 완전히 넋이 나가 
있었다. 로라는 아무 생각없이 회색, 청색, 흑색이 섞여 있는 대형 추상화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저 그림이 저렇게 우울해 보일 줄이야. 세상의 모든 
어둠을 모아놓은 것 같애. 로라는 그 와중에 그림 감상을 하고 있었다.
  어둠은 그곳에만 있지 않았다.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어둠이 그녀의 길목 
위로 자꾸만 덮어내렸다. 아무리 빨리 달라도 덮쳐오는 어둠 밖으로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에게 말할 기회를 주려는 듯 커리어는 로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입을 열 수 없었다. 결국 커리어가 그녀 대신 침묵을 깨야만 했다.
  "로라가 도둑이란 소리는 진심이 아니겠지, 팀. 로라를 제거해 버리려고 
일부러 한 소리…"
  "잘 맞췄네, 웨스."
  알코트는 고개를 시원스럽게 끄덕였다.
  "맞아. 이 아가씨를 눌러버리고 싶어서 그랬어. 도둑질을 했는지 내 알 바 
아니야. 중요한 건 호텔이야. 신비에 싸인 도둑이 나타날 때까지 호텔이 제대로 
굴러갈 것 같은가?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모든 걸 깨끗하게 하려면 새 사장을 
영입하는 길 밖에 없다는 소릴세."
    커리어는 다시 로라를 바라보았다. 자기 방어를 해야 할 중요한 순간에 
로라는 얼어붙은 듯 알코트이 자그마한 입술의 움직임에 넋을 잃고 앉아 
있었다.
  "우리 세 명 모두 이천칠백만을 투자하고 있어. 로라가 말도 안되는 짓을 하고 
있는데, 우리 보고 그 거름더미 속에 처박혀 있으라는 소린가? 젠장, 우리보다 
잘 알면서 자네 왜 그러나? 그래서 결심했네. 로라 페어차일드를 OWL 개발사 
대표자리로부터 축출해내자는 동의안을 내고 싶은데, 재청 있으면 말씀들 
하시지."
  "재청이오."
  알코트 오른쪽에 앉아 있던 이사가 엄숙하게 입을 열었다.
  "규정에 의하면 투표 전에 반드시 토의가 있어야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로라의 쨍한 목소리가 드디어 터져나왔다. 의자를 뒤로 제낀 뒤 로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도 할 말이 없다면 내가 하겠어요."
  그녀는 이사들을 한 번 죽 훑어보았다.
  "내가 만든 회사에 세 사람 다 이년 동안 천만 달러가량 투자했어요. 그동안 
만족에 만족을 했겠죠? 제 때 이자 받아챙겨, 투자가치 올라가, 얼마나 
좋았겠어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돈다발을 챙겨간 사실을 설마 부인하진 
않겠죠. 당신들은 내가 사창굴을 운영하든 경마장에 가 도박을 하든 마약밀매를 
하든, 당신들 계좌에 돈이 들어가는 한 나한테 눈길 한 번 안 줬어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더더욱 상관없었죠. 처음 날 만났을 때 지금처럼 내 인간성이 
어떻구, 과거 전적이 어떻구를 따졌나요? 관심있는 건 오로지 돈이었죠."
  "쓸데없이 우리 귀중한 시간만 낭비하고 있군."
  알코트의 오른쪽에 앉은 이사가 시계를 들여다보며 불평했다.
  "이건 내 시간이에요."
  순간 로라는 얼른 숨을 삼켰다. 소리치면 안돼. 그럼 히스테리컬한 여자라는 
말밖에 못 들ㅇ.
  그녀는 느슨하게 배 밑으로 두 손을 마주잡았다.
  "잠시만이라도 시간을 내서 내 얘길 들어주세요. 간단한 문제가 아니잖습니까? 
몇 분이라도 좋으니 좀 들어주세요."
  알코트 왼쪽에 있는 사람이 로라를 바라본 뒤 입을 열었다.
 "들을 건 들어야지. 계속해요."
  그때부터 로라는 그 사람만 직시하며 말을 해나갔다.
  "열네 살 때 도둑질을 하다가 잡힌 적이 있었죠. 그 일로 단 한 번도 도둑질을 
하지 않았어요. 아니, 남의 것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어요. 고등학교와 대학을 
졸업한 뒤 현재 내 손에 쥔 것을 갖기 위해 혼자 얼마나 열심히 일해 왔는지 
몰라요. 과거 없는 사람이 있나요? 다들 한쪽으로 치워놓고 사고 있죠. 팀, 
당신도 마찬가지잖아요, 이혼경력에다 두번째 부인은 자살미수로…"
  "그만하지 못해! 도대체 네깐 것이 뭔데 그런…"
  "다 아는 사실인데 뭘 그러나."
  커리어는 적재적소를 공격해 들어간 로라의 기지에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부드럽게 알코트를 막았다.
  "자, 편히 앉아서 나머질 듣자구, 팀. 발언권은 로라에게 있지않나."
  로라는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계속 말했다.
  "서로 상대방의 과거를 향해 손가락질 하면 끝이 없을 겁니다. 과거는 단지 
과거일 뿐이에요. 선택은 여러분 본인이 한 것 아닙니까? OWL 개발사에 투자를 
한 사람은 바로 여러분 자신이지요. 그리고 지금까지는 그 선택에 
만족해왔습니다."
  그녀는 세 명의 투자가들을 신문하듯 뚫어지게 직시했다.
  "마리화나를 피우고 맥주를 퍼마시고 상점에 들어가 슬쩍 물건을 훔쳐 내던 
십대의 치기를 나무라고 있나요? 여러분들이 직접 투자했던 그 방식으로 날 
책망해주세요. 지금껏 내가 이뤄놓은 결과를 보고 날 평가해달라는 것입니다. 
돈을 만들어줄 땐 내게 극찬을 보냈던 분들 아닙니까? 여태껏 손해본 적 
있어요? 나한테 투자해 한 푼이라도 억울하게 뺏긴 적 있나요?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어요. 앞으로도 절대 손해나지 않게 해드리겠습니다. 누굴 새로 내 자리에 
데려오든 그 사람보다…"
  "웃기는 소리!"
  알코트는 코웃음치며 로라의 말허리를 잘랐다.
  "힐튼, 메리엇, 코카 콜라에 시이오(CEO : CHIEF EXECUTIVE OFFICER의 
경제 용어 약자로 최고 경영자, 전무이사라는 뜻:역자주)들이 얼마나 
득실거리는데, 핫! 그자를 데려다놔보라구. 기적을 일으킬 테니까. 이건 
비즈니스야, 비즈니스. 애들 소꿉장난이 아니예요, 아가씨."
  "알아요, 소꿉장난이 아니란 걸. 시이오가 들어와 OWL 개발을 경영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비콘 힐은 똑같지 않을걸요. 천지에 널린 호텔들과 전혀 다른 
식으로 경영하는 내 사업철학을 모방할 순 없어요. 아무도 몰라요. 그건 바로 
나만의 노하우니까요. 유능하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코카 콜라의 시이오도 지난 
몇 년간 내가 고객들과 쌓아올린 끈적끈적한 관계만은 해낼 수 없을걸요. 
숙박전후를 기해 내가 손님들에게 직접 보낸 편지가 어떤 결과를 내는지,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서비스 방식으로 종업원들을 철저히 훈련시키는 것도, 
열거할 수 없을 만큼 사소한 정성들이 호텔을 지탱해 나간다는 것도 아무도 
흉내낼 수 없습니다. 호텔이 그냥 굴러가는 줄 아십니까? 빌딩들이 그냥 저렇게 
땅에서 솟아난 줄 아세요? 그냥 호텔이 아니예요, 그냥 하찮은 빌딩이 아닙니다. 
그건 로라 페어차일드에게 속한 호텔이에요. 누가 오든 단 일주일 만에 
쓰레기창고로 바뀔걸요? 그 잘난 시이오들이 들어와도 내 식으로 못할 겁니다."
  "변화를 언하는 일인데 잘된 일이구만, 그럼."
  알코트 오른편에 앉아 있는 자가 궁시렁거렸다.
  "도둑들이 판치는 소굴이라고 생각들 하고 있을 텐데 바뀌면 딱 좋지 뭐가 
걱정이야?"
  "새로운 시이오가 진을 치고 있으면 손님들 마음이 바뀔 거라고 생각하는 
거에요? 뭐가 바뀌겠어요? 맨 꼭대기 자리? 꼭대기 하나가 바뀌었다고 주변을 
서성거릴 도둑들이 도망갔다고 생각하겠어요? 손님들 생각을 말씀드릴까요? 
자기들이 좋아하던 여사장을, 그래서 다른 친구들에게 비콘 힐에 묵으면서 꼭 
만나보라고까지 권유했던 그 여사장을, 회사 자체 경영이사들이 못 믿어 
잘라냈다고들 할 겁니다. 회사 경영진이 신용하지 못하는 사장을 손님들이 
어떻게 믿고 찾아오겠습니까? 생각해보세요. 만의 하나 찾는 손님이 있다 해도, 
추억 속의 비콘 힐은 아니겠죠. 그렇게 되면 지금보다 상황은 더 나빠질 거예요. 
하지만 내가 이 자리에 그냥 머물 수 있다면, 아니 우리 모두, 우리 다섯 사람이 
이대로 현 자리를 묵묵히 지켜낸다면, 손님들은 큰 시련을 이겨낸 비콘 힐에 
찬사와 격려를 보내며 자신들의 판단이 옳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계속 몰려들 
겁니다. 튼튼하고 안전한 호텔, 완벽한 경영지에 의해 운영되는 호텔이 길이길이 
기억될 것입니다."
  그녀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조용히 이 회사 밖으로 걸어 나갈 생가, 추호도 없어요. 우리 모두 한방 
얻어맞은 셈이 됐네요. 알아요, 얼마나 크게 얻어맞았는지. 세심한 치료가 
필요할 만큼 큰 상처라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승승장구하던 비콘 힐 호텔 
그룹의 명성이 흔들렸을 정도니까요. 하지만 우리 고객들이 나에게 믿음을 
유지시켜야 합니다. 시련과 고난이 닥친 뒤엔 더욱 단단해진다는 걸 알 만큼 
현명한 사람들이에요. 시련이 지나고 꽃을 피울 땐 더더욱 관심을 쏟아 붓겠죠. 
분명 그 꽃을 피워보겠어요. 믿어보세요."
  그녀는 앞에 앉아 있는 사업가들을 한 사람씩 차례로 바라보았다. 한결같이 
부유하고 권위 있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동시에 로라 페어차일드에게 승리를 
안겨주기 싫다는 눈빛이었다.
  "권력을 달라 이건가? 그래 하고 싶은 말 다했소?"
  로라는 채찍을 내려치듯 몰인정하게 받아치는 알코트를 강하게 노려보았다.
  "호텔과 OWL 개발사를 운영하도록 허락해주시면 초창기와 다름없이 튼튼한 
황금오리로 만들 것을 약속합니다. 내 말 다 끝났어요, 팀."
  "자, 그럼 난 투표를 하자고 제안하고 싶은데. OWL 개발사장 자리에서 로라 
페어차일드를 내보내자는 동의안을 내겠소. 난 찬성이오."
  하나마나 뻔한 것, 형식적인 일 아니냐는 식으로 느긋하게 앞자리에 있는 
메모판에 찬성 표시를 한 알코트는 오른쪽 이사에게 고개를 돌리고 대답을 
기다렸다.
  "나도 찬성이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뒤 그는 서류에 표식을 했다. 모든일이 순식간에 
이렇게 무너지다니, 단 몇 사람의 입술 위에서 이렇게…
  "웨스?"
  "반대."
  "물론 그럴 테지."
  알코트는 당연하다는 듯 커리어의 부결안을 기록하고는 마지막으로 왼쪽 
이사를 바라보았다.
  "반대요, 나도."
  순간, 좌중에는 충격적인 침묵이 찾아왔다. 로라는 OWL 개발사 대표자리에 
자신을 계속 앉게 해준 이사에게 감사의 눈길을 보냈다.
  "로라 말이 맞긴 맞아요. 호텔은 사실 로라가 만들어낸 기적아니겠소? 계속 그 
자릴 지키게 하는 게 최선의 도리자 최선의 방책이라 생각해요."
  혀를 끌끌차며 오른쪽 이사가 막 일어서려는 순간 알코트가 재빨리 손을 
들었다.
  "잠깐, 마지막으로 한 가지 결정을 해둡시다.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러리라 믿어요. 확신이 없기에 마음이 흔들리는 것 아니겠소? 그래서 하는 
말인데 제안을 하나 하겠소. 현 상황을 타개할 수 있도록 로라에게 삼십일간의 
기간을 주는 거요. 변화가 없으면 그땐 떠나는 걸로 합시다. 삼십일도 과분하지. 
알게 뭐야. 그전에 망해버릴지. 어때, 재청 있어요?
  오른쪽 이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찬성이요."
  "왜? 또 할 말 있소?"
  알코트는 로라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로라가 입을 열기 전에 커리어가 먼저 
제안을 하고 나섰다.
  "삼십일이면 타당할거요. 하지만 그 뒤에 자동으로 축출하자는 안에는 찬성 
못하겠는데, 팀? 우리 이렇게 하는 게 어떨까? 삼십일 뒤에 신임투표를 
다시하기로."
  왼쪽 이사를 바라본 알코트는 역시 그가 자신에게 반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할 수 없다는 듯 어깨짓으로 커리어의 안을 받아들였다.
  "좋아, 그럼 그렇게 하지."
  네 명 다 수궁하자 알코트는 의자를 뒤로 밀며 일어섰다.
  탁자 옆에 선 채 이사들이 빠져나가는 걸 지켜보던 로라는 진공 청소기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녀는 완전히 탈진한 상태였다. 몽롱한 
의식 속으로 삼십일이라는 숫자가 어지럽게 떠다니고 있었다. 삼십일… 한 달… 
어렸을 땐 그렇게 길게, 그렇게 길게 보였는데.
  뉴욕에 있는 샘 콜비와 붙어 다녀야 할 폴 젠슨이 혼자서 연락도 없이 유럽을 
떠도라다니는 사실을 두고 방송국 중역진들은 이구동성으로 우려를 표시하고 
있었다.
  "며칠 안으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폴은 전화를 해온 방송국 중역에게 일방적으로 자기말만 하고는 전화를 
끊으려 했다. 그에게 중요한 건 로라가 남긴 메모였다. 호텔로 돌아오자마자 
발견한 쪽지를 손에 든 채 폴은 안절부절했다. 빨리 방송국 전화르 ㄹ끊고 
그녀에게 연락을 해야만 했다.
  "급하게 전화할 데가 있어요. 몇 분 있다 다시 연락할 테니, 이만."
  "잠깐, 잠깐! 영화 찍던 일 마무리도 하지 않고 도대체 거기서 뭐하고 있는 
건가?"
  폴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콜비 수사건을 다른 각도에서 찾아본다고 했잖아요. 경찰 쪽과 희생자 전원을 
다시…"
  "다른 각도? 여긴 지금 난리가 아닌데. 이미 사람들 눈이 한곳으로 모여 있어. 
각도는 이미 잘 잡아놨는데 뭐하러 다른 쪽에 눈을 돌리나?"
  "한 곳으로 몰려 있다뇨? 무슨 얘깁니까?"
  "이런 젠장. 아직도 그걸 모르고 있다니… 기다려봐요, 신문 읽어줄 테니."
  그는 콜비라고 씌어진 파일 속에서 자료를 꺼내 펠릭스의 기자회견소식과 
(데일리 뉴스)에 나온 뒷얘기 등을 폴에게 빠르게 읽어주었다.
  "자네가 자릴 비우고 있지만 콜비한테 연락을 할 생각이네. 카메라 기사 
데려가서 페어차일드라는 그 여자하고 면담하라구 말일세. 콜비가 그걸 마치는 
대로 곧 바로 편집해보는 게 어떨까? 어떻게 생각해요? 뜨거울 때 잡아야지 
식어버리면 그만큼 손해야. 무슨 각도로 새 얘길 잡는지 모르지만 그건 
잊어버려."
  "이번 사건은 영화에서 뺄 생각입니다. 이주 전에 메모를 남겼죠? 다른 
사건으로 각도를 바꿀 새각이에요. 잡히는 대로 즉시 연락드리죠."
  "메모? 무슨 메모? 아무튼 그건 중요한 게 아니잖은가. 중요한 건 닷새 전부터 
여길 달구기 시작한 호텔 건이냐. 원래 의도대로 나가는 거야."
  "비콘 힐 사건은 영화에 집어넣지 않겠다구요. 샘하고 그러잖아도 얘길 
해봤어요. 확실치가 않답니다. 아무도 모르는 걸 어떻게 기록영화에 넣겠어요? 
증거도 없는데. 확실한 증거가 있는 걸 넣겠어요. 아무튼 일 마치는 대로 다시 
연락…"
  "다른 건 절대 안돼, 내 돈 투자해서 만드는 영화 내 뜻대로 하겠네. 무슨 
이유 때문에 몸을 사리는지 모르겠지만 투자한 돈 생각도 해줘야지, 젠장. 그 돈 
투자했으니 해달라는 대로 해야될 것 아닌가!"
  "그럴 권리가 누구한테 있다구요? 확실하게 말해 두겠는데, 투자했다고 해서 
제작자나 검열가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건 내 영화예요.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시작해서 내 뜻대로 끝마칠 겁니다."
  더 이상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는 전화를 끊었다. 급하게 로라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외부회의를 마친 뒤 곧바로 퇴근할지 모른다는 대답뿐이었다.
  "폴 젠슨이라 전하세요. 오늘 안으로 돌아가겠다구.
  폴이 초조한 기분으로 수화기를 내린 바로 그 시각 클레이는 멕시코 시내, 
페레스트리트 신문 판매대 옆에서 고향소식이 그리워 뉴욕 (데일리 뉴스)지를 
읽고 있었다. 신문을 펼쳐든 순간 신문을 가득 메운 로라의 사진을 발견하고 
그는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기분이었다.
  클레이는 그 신문기사를 읽고 또 읽고 저녁까지 반복해서 읽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신문을 채운 까만 활자는 꿈이 아니었다.
  기가 막힌 정도가 아니었다. 쓰레기 하치장에 내동댕이쳐진 느낌이었다. 계속 
쏟아져 내리는 쓰레기, 그걸 뒤집어쓴 채 끝없이 쓰레기 더미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울면서 뉴욕을 떠난 이래 이주 동안 방황했던 시간들, 그것만으로도 
그는 이미 무릎을 꿇어야 했다. 다시는 자신을 사랑할 것 같지 않은 누나, 
어쩌면 두번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은 누나 생각에 그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세상에, 그걸 어떻게 알아냈을까? 같은 도시엔 두 번 다시 가지 
않았는데. 지문은 말할 것도 없이 다른 건과 연결되지 않도록 그토록 
조심했는데. 중개인에게 물건을 넘길 때도 이름은 물론 비콘 힐과 관련된 
얘기조차 비추지 않았건만 도대체 어떻게? 모든 걸 완벽하게 처리했는데 도대체 
왜 호텔이 말려들었단 말인가? 그는 자신이 잡힐 수도 있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었다.
  호텔뿐 아니라 사랑하는 누나, 로라 페어차일드에게 불똥이 튀고 있었다. 
멕시코 시티 대학의 도서관에 처박혀 클레이는 뉴욕 (데일리 뉴스)지를 
면밀하게 다시 읽어나갔다. 그의 얘긴 한 마디도 나와 있지 않았다. 빌어먹을, 
도대체 날 뭘로 아는 거야. 난 병신이다 이거야, 뭐야? 왜 누나가 했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를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처음엔 벤이 최고였고, 그 
뒤로는 로라가 왕좌를 차지한 격이었다. 젠장할, 케이프 건도 내가 했어. 
근사하게 말야. 삼 년 동안 내내 단독으로 그 고가품을 훔쳐 냈다구. 누나가 그 
빌어먹을 목걸이를 찾아내기 전까진 모든 게 완벽했는데. 망할 놈들. 이럴 수는 
없어.
  오, 클레이, 언제까지 네 생각만 하고 있을거니.
  머리를 파고들 듯 가까이에서 들려오는 로라의 목소리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좌우를 둘러봤다.
  한 번이라도 다른 사람 생각을 좀 해봤니? 문제는 누구한테나 있는 거야. 
문제 있는 사ㅏ람이 너하나뿐인 줄 알면….
  도서관을 빠져나와 그는 마데로가를 거닐었다. 고향 뉴욕보다 더 붐비는 
거리였으나 집 같은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들리는 건 스페인어뿐, 그 속에서 
그는 이방인일 수밖에 없었다.
  스카치 위스키를 내려다보며 그는 자신에 관해 깊이 생각했다. 그래야만 했다. 
자기 자신이 아니면 누가 생각해주랴? 그를 보살피고 걱정해주는 사람은 더 
이상 아무도 없었다.
  예전에는 로라가 있었다. 오랫동안 염려해주고 돌봐주었던 유일한 혈육. 
그러나 이젠 아무도 그의 곁에 남아 있지 않았다.
  돌아갈 수 없는 길, 더 이상 몸담을 곳 없는 불쌍한 신세. 일자리도 없고 
누나도 없고… 아무도 없었다.
  그래, 젠장. 돌아갈 수 없는 길이라면 아예 터뜨려버려? 내가 범인이라고 하면 
누나는 빠져나올 수 있겠지? 여기서는 안전할 거야. 여기 있는지 누가 알겠어? 
전화를 거는 거야, 그래서 내가 했다고 털어놓으면 모든 게 끝나는 거라구. 
그렇게 해도 다음 문제가 생길 것도 아니고….
  그는 남아 있는 위스키를 단숨에 들이켰다. 문제는 증거가 있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누나를 보호하기 위해 거짓으로 꾸민 자백이라고 오해받을 수 
있었다. 증거? 증거라면 간단하지. 보여주면 될 것 아냐. 여섯 건의 범행을 다 
털어놓고 누런 대형봉투를 첨부해 보내면 될 것이다. 중개인을 통해 돈을 받고 
처리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라프톤 집에서 가져온 뒤러 원판 두 장이 마음에 
들어 내내 봉투 속에 보관하고 있었다. 다른 증거물도 있었다. 비콘 힐 호텔에 
묵었던 손님들이 저녁 파티로 특실을 비웠을 당시 밀납으로 복사를 해놓은 열쇠 
여섯개였다. 열쇠 위에는 각각 이름이 적힌 꼬리표까지 붙어 있었다. 
구아르네리, 라프톤, 페럴리, 세라노… 결정적인 증거품이었다. 그는 그것들을 샘 
콜비에게 보낼 생각이었다.
  물론 로라를 위해서였다. 그렇게 하면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산다는 
소리는 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같은 걸로 한 잔 더."
  그는 다시 골똘히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 증거물로도 안되면 어쩌지? 그래도 
손님들이 호텔로 돌아오지 않으면? 도망간 손님들이 돌아오려면 몇 달 아니 일 
년도 더 거릴지 몰라. 그렇게 되면 누난 빚 때문에 당장… 기껏 마음먹고 
자백했는데 그게 누나에게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다면 도대체 어쩌란 말야. 
이자, 호텔 경비, 월급 등 다 합치면 적은 돈은 아닐 텐데.
  아니, 주식이 있지. 샐링거 호텔 주식이 있잖아. 그걸 팔면 돈 걱정은 안해도 
될걸. 아냐. 그건 죽어도 안 팔거야. 그것 때문에 얼마나 좋아했는데….
  "펠릭스 개새끼! 핫 핫 핫! 그건 문제가 아냐, 내가 해결한다구!"
  사람들이 모두 다 그를 돌아다보았다. 한시간 이상 스탠드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외롭게 술을 마시는 이방인을 그들은 오래전부터 이상하게 보고 있었던 
것이다.
  "완벽하게 끝내겠다구 세상에, 오, 와!"
  뒤러 그림과 열쇠 외에도 샘 콜비에게 보낼 물건이 하나 더 있었다. 오웬의 
편지, 오웬이 로라에게 남긴 편지였다. 이미 열두번도 넘게 읽어본 편지였다. 
오웬이 똑바른 정신상태에서 로라에게 호텔 네 곳과 그의 비콘 힐 저택, 그리고 
회사 주식 이 퍼센트를 남겼다는 명백한 증거물이었다. 호텔하고 주식을 사들인 
이상, 비콘 힐 저택을 언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아직도 주식 이 퍼센트는 더 
받아낼 수 있었다. 천만 달러, 와! 천만 달러를 받아내면 당분간 그걸로 
견디어낼 거야. 너무 오래되어서 무효가 된건 아닐까? 변호사, 변호사를 
만나봐야겠어. 클레이는 다시 크게 웃기 시작했다.
  다음날 아침 그는 심각한 얼굴로 법학과 교수를 찾아갔다.
  "UCLA(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 역자 주) 법학과 
학생입니다."
  클레이는 착실하게 공부하는 법학돛럼 공손하게 머리까지 수그렸다.
  "좀 알쏭달쏭한 문제가 있어서, 교수님께서 좀 도와주신다면…"
  "미국의 법률 관계는 모르겠는데 이거 어쩌죠. 도와주질 못해서."
  "아니, 이건 일반적인 문제 같은데요. 새로운 증거가 나타나서 예전의 재판 
결과가 잘못 되었음을 알았을 때 몇 년이 지났더라도 배심원은 전에 내린 
결정을 취소시킬 수 있나 해서요."
  "아, 그 문제는 대답해줄 수 있겠네. 불가능해요. 한 번 내린 배심원 결정은 
취소될 수 없어요. 물론 결정 즉시 그게 발견됐다면 가능해요. 하지만 완전히 
결정된 뒤엔 도리가 없다고 봐야 할거요."
  "하지만 그 결정이 틀린……"
  "그럴 경우도 마찬가지예요. 삶과 죽음에 대한 경우라면 모를까. 새로 나타난 
증거 그 자체만으론 아무것도 뒤바꿀 수 없는 거지."
  "제기랄."
  "길이 없진 않아요. 만약 학생이 그 재판에 관계 됐다고 가정해볼 때, 
그러니까 뒤늦게 새 증거를 찾았다고 해봐요. 그럴 경우 배심원측이 그 
증거물을 고의적으로, 그러니까 의도적으로 무시해버렸다는 걸 밝힐 수만 
있으면 가능해요. 왜냐? 그건 사기재판이니까. 사기라는 걸 밝힐 수만 있으면 그 
상대를 찾아 기소를 할 수 있는 거지. 무슨 소린지 설명이 충분히 됐어요?"
  "사기라…"
  "그렇지, 학생이 그걸 원한다면. 그런데 내가 보기엔 법학도가 아닌 것 같군. 
개인적인 문제 아닌가?"
  "아니예요. 아니 그런 것 비슷해요. 친구를 위해 알아보고 있으니까 내 
일이라고 할 수 있겠죠."
  사기죄로 펠릭스를 감옥에 처넣어버려? 사탕보다 더 달콤한 기분이었다. 대학 
캠퍼스를 빠져나와 클레이는 시내로 들어가는 버스를 탔다. 사기죄로 펠릭스를 
감옥으로 보낸다. 로라 페어차일드에게 한 짓을 그대로 돌려줄 수 있는 
길이었다. 감옥에 들어가기 싫으면 천만 달러 상당의 주식을 내놓겠지. 아니, 
그것보다 더한 것이 나올 수도 있어.
  기가 막히게 멋진 방법이었다. 목숨이 달랑달랑한 펠릭스 샐링거.
  그러나 방법이 문제였다. 편지를 로라에게 보낼 경우, 그 편지를 왜 재판에 
공개하지 않았는지 누구나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콜비나 제삼자에게 편지를 
동봉해 보내면서 훔쳤다고 얘기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믿을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길은 단 하나, 펠릭스 손에 그 편지를 다시 들어가게 만든 뒤 
누군가로 하여금 그 편지를 발견하게 하는 방법이었다.
  점심을 먹기 위해 카페 코르도바로 들어간 그는 후에보스(스페인식 달걀요리 : 
역자 주)와 맥주를 시켰다. 주문한 맥주가 오자 클레이는 아주 천천히 맥주를 
따랐다. 맥주 거품을 보자 한 가지 기막힌 생각이 떠올랐다. 뉴욕 오십일번가에 
있는 집, 그 집 서재 그림 뒤편에 비어 있던 금고가 떠올랐던 것이다. 펠릭스 
금고에 펠릭스도 모르게 그 편지를 넣어두고 증인들 앞에서 그 편지를 꺼내게만 
할 수 있다면 승리는 그의 것이었다. 로라로부터 유산을 빼앗기 위해 그걸 
감췄다는 것을 아무리 부인해봤자 소용없는 일이 되고 말 것이었다.
  해보자, 해보자구. 클레이는 맥주를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로라를 위한 
일이었다. 펠릭스를 말아먹는 길이기도 했다.
  그는 온몸에 퍼져가는 흥분으로 이를 드러내며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물론 
사랑하는 누나를 위해 하는 일이었으나, 스릴이 있어 더욱 좋았다. 어렵고 
위험한 일이었지만 쾌감도 클 터였다. 생애 처음으로 물건을 훔쳐 내는 대신 
물건을 갖다두기 위해 남의 집으로 침입하는 스릴이었다.

    32장
  프런트 데스크에서 관리인과 이야기를 나구고 있는 로라는 그녀의 뒤편에 서 
있는 폴을 볼 수 없었다.
  "모든 게 똑같아야 돼요. 빈 객실이 있다고 해서 서비스가 달라지면 안됩니다. 
전과 똑같이 만전을 기해주세요."
  "알고 있습니다, 사장님."
  "그리고 또 한 가지, 아, 잠깐만."
  관리인은 로라 뒤편을 보기 위해 고개를 옆으로 뺐다.
  "네, 손님. 뭘 도와드릴까요?"
  "페어차일드양을 기다리는데요."
  팽그르르 날렵하게 몸을 돌린 로라는 어느새 폴의 두 팔 안에 안겨 있었다. 
서주 마주보며 로라는 그의 손에 깍지를 꼈다. 서로의 손가락을 어루만지며 
그녀는 폴에게 나지막히 소근거렸다.
  "돌아와서 기뻐요."
  "그녀의 얼굴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로라는 지난 몇 년의 세월이 산산히 
부서져 내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참 있어야 되나......"
  "다 끝났어요."
  폴의 손에 깍지 낀 채 로라는 관리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다른 건 내일 다시 얘기합시다. 특별한 건 없어요?"
  "없습니다, 사장님. 모든 게 완벽하게 준비됐습니다."
  "좋아요."
  그녀는 폴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디 갈까요?"
  "당신 집 구경해보고 싶은데."
  "나도 그러길 바랐어요."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의 손을 잡고 로비를 빠져나갔다. 할 말이 너무도 
많았지만 택시 안에서 그들은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그냥 손을 깍지낀 
채 서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밀려드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집앞에 도착하자 폴을 잡아채듯 재빨리 현관 안으로 끌어들인 로라는 문을 
안으로 걸어잠갔다.
  "얼마나 키스하고 싶었는지 몰라요."
  폴은 두 팔로 그녀를 안았다.
  "아, 내 사랑......"
  두 사람은 오랜 포옹 속에 키스를 나누었다.
  "멀리 떨어져 얼마나 고민했는지 몰라."
  "하지만 이렇게 돌아왔잖아요. 돌아와주길 기다렸어요. 전화한 뒤로......"
  눈 앞에 서 있는 로라가 실제의 로라인지 확인하듯 폴은 그녀의 온몸을 
구석구석 어루만졌다. 그리고 오래도록 입을 맞췄다.
  "이렇게 하고 싶어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알아? 당신을 안고 키스하는 것을 
수도 없이 상상했어. 내가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는지 모를 거야."
  "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선 뒤 로라는 그를 응시했다.
  "에밀리는 어쩌구요? 내 머릿속에서 에밀리를 지울 수는 없잖아요. 어떻게......"
  "아, 그걸 모르다니. 아니, 모르는 게 당연하지. 에밀리는 캘리포니아로 갔어. 
우리 이혼하기로 합의봤어. 곧 정리될거야. 나중에 얘기해줄게. 지금은 그 얘기 
하지 말자구."
  "그래요, 지금은 그 얘기 하지 말아요."
  그녀의 눈빛에는 기쁨이 터질 듯 넘쳐 흐르고 있었다.
  "침대로 가고 싶어요, 폴."
  로라는 폴이 기억하고 있던, 가슴이 저리도록 그립던 바로 그 생기발랄한 
미소를 머금었다.
  "당신 정말 여자가 모든 걸 요구하게 만들 거예요? 왜 그렇게 쭈뼛거리죠? 
기대하지 않았나봐?"
  폴은 기분좋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걸 말이라고 하시나."
  폴이 내민 손을 잡고 로라는 침실을 향해 계단을 올랐다.
  "멋지군. 비콘 힐에 있던 당신 방과 똑같애. 따스하고 아늑한 느낌이야."
  "편안하게 만들려고 했어요."
  호박색 가로등 불빛이 구석구석 스며든 침실에서 폴은 온몸으로 그녀를 
안았다.
  "우리가 어딜 가든, 우리가 뭘 하든 당신에겐 이제 기쁨뿐일거야. 약속하지."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로라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떤 고통이 있을지라도 당신을 사랑하고 믿고 따를께요."
  "아......"
  폴은 로라의 속삭임에 기쁨 어린 탄식을 내뱉었다.
  "그 소리를 얼마나 듣고 싶었는지 당신은 모를 거야."
  두 사람은 첫 키스를 하는 어린 연인들처럼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헤어져 
있던 어둡고 긴 시간들이 달콤한 입맞춤을 통해 현재의 시간으로 완벽하게 
이어졌다.
  "그 밤 기억해 당신? 모든 게 흰색이었지. 커튼도, 달빛도, 당신 옷도 
흰색이었어. 난 그런 당신의 모습을 사랑했구."
  어깨 밑으로 그녀의 재킷을 벗긴 뒤 캐시미어 스웨터 밑으로 두 손을 
밀어넣은 폴은 풍만한 가슴을 부드럽게 두 손으로 감쌌다.
  "너무 아까워. 서로 헤어져 그대로 흘러보낸 세월이."
  "괜찮아요, 폴. 다시 시작하고 있잖아요."
  그에게 매달려 있는 몸이 버터처럼 녹아버릴 것 같았다. 로라는 그를 향해 
문을 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 한 가지가 남아 있었다.
  벤. 깨끗하게 처리하지 못한 일이었다. 이제 손톱만큼의 비밀도 갖고 싶지 
않았다. 비밀이 남아 있는 한 그와 다시 사랑을 나눌 수도, 새로 시작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폴."
  그녀의 음성이 심상치 않았다. 폴은 그녀의 허리에 둘렀던 팔을 풀며 
대답했다. 조금 전의 흥분이 일시에 가신 목소리였다.
  "말해요."
  창문가 의자에 앉아 두 사람은 잠시 밖을 내다보았다. 나뭇가지 사이로 하얀 
달빛이 은은하게 떠 있었다.
  "얘기할 게 하나 남았어요. 침대로 가기 전에 그 얘길 하고 싶어요. 우리 
사이에 더 이상 거짓을 남기긴 싫어요."
  그는 그녀의 말이 이어지길 묵묵히 기다렸다.
  "오빠가 있는 사실을 숨기고 있었어요. 이복 오빠기 때문에 비록 성은 
달랐지만 아주 가깝게 지낸 남매였어요. 서로 싸운 뒤 유럽으로 떠났던 오빠를 
몇 년 동안 보지 못하고 지냈어요. 얼마전에야 겨우 다시 만나게 됐죠. 왜 오빠 
얘길 못했는지, 그 이유를 당신이 이해해줬으면 해요."
  잠시 망설이던 끝에 그녀는 폴을 똑바로 응시하며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벤. 벤이 바로 그 오빠예요."
  "벤 가드너?"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로라는 긴장하기 시작했다.
  "맞아요. 지난 주 보스턴에서 오빠를 만났어요. 설명할게요. 어떻게 된 건지."
  로라는 알리슨과 레니에게 들려줬던 얘기를 하나도 빠짐없이 폴에게 
얘기했다. 그리고 다시 한 가지를 덧붙였다.
  "또 한 가지 있어요. 당신이 올았어요. 클레이 말이에요. 몇 년전 케이프에서 
레니 목걸이를 훔쳐낸 걸 알아냈어요. 샘 콜비가 찾고 있는 그 도둑인지는 아직 
확실치 않아요. 내가 눈치 챈 걸 알고는 집을 나가버렸어요. 믿을 수가 없어요, 
폴. 그애가 그런 일을 했다니...... 전날 사무실에서 화냈던 일 사과할게요. 당신이 
옳았어요."
  비로소 개운한 마음이었다. 이제 그녀의 마음속에 더 이상의 비밀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로라. 그동안 얼마나 괴로웠을까? 내 사랑이 혼자 괴로움을 당했다니. 
그렇게 사과할 필요없어요. 이젠 다 끝났어, 로라."
  로라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온몸의 긴장이 일시에 풀렸다. 손바닥 
안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우리 모두 다 겁먹은 꼬마였어. 잘못된 것을 인정하는 게 무서워서 그걸 내내 
고집했잖아. 내가 제일 심했지. 겁을 집어 먹고 달아났잖소. 날 가장 원하고 
필요로 하는 순간 당신을 구덩이 속에 버린 채 모든 걸 잊어버리려고, 당신을 
사랑했던 것까지 모두 다 잊어버리려고 도망다녔지."
  "그만해요, 폴. 내가 자꾸 사과하니까 오빠가 그러더군요. 헤어셔츠(고행자가 
고행과 참선을 하기 위해 알몸에 걸치는 말총 속옷 : 역자 주) 입을 
필요없다구요."
  웃으면서 로라는 한없는 기쁨을 느겼다.
  "헤어셔츠?"
  폴도 로라를 따라 웃음을 터뜨렸다.
  두 사람은 마주보고 선 채로 하나씩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마치 과거의 
허물을 벗겨내듯이. 그 옛날 한 몸이 됐던 순간을 기억하며 두 몸은 부드럽고 
강하게 한 몸이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보고 싶었어. 얼마나 당신을 원했는지 몰라......"
  폴의 두 손은 로라의 온몸을 구석구석 더듬었다. 로라는 그의 등을 
쓸어내렸다. 그의 입밖으로 기쁨에 가득찬 신음 소리가 새어 나올 때까지 
로라는 계속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러나 폴의 손가락이 은밀한 곳으로 미끄러져 
들어온 순간, 로라는 온몸의 힘이 일시에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탈진한 것처럼 몸을 완전히 그에게 맡겨버렸다.
  "당신을 꿈꿨어요. 이런 순간을, 우리의 이런 순간을 한없이 꿈꿨어요."
  두 사람은 서로를 깊이 애무해 나갔다.
  "아, 로라."
  폴은 뜨거운 숨을 토해내었다. 오직 두 사람의 뜨거운 욕망뿐이었다. 로라는 
주체할 수 없이 격한 욕망으로 숨을 몰아 쉬었다. 그녀는 그를 위해 두 다리를 
넓게 벌렸다. 드디어 그가 그녀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좋아."
  폴의 리드미컬한 움직임에 따라 로라의 숨소리도 점점 거칠어 졌다.
  "아...... 훨씬 더...... 꿈보다 훨씬 더......"
  열린 창문으로 시원한 밤바람이 스며들었다. 바람은 두 사람의 뜨겁게 달궈진 
몸 위에서 살랑거렸다. 서로 한시도 잊지 못했던 육체가 드디어 하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침대 옆 벽에 둥그런 두 사람의 그림자가 불빛에 일렁이고 
있었다.

  눈을 뜬 순간 로라는 창문 밖으로 스쳐가는 달을 보았다. 바로 머리 위에서는 
폴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로라는 그에게 졸린 듯한 미소를 보냈다.
  "이것도 꿈꿨어요. 내가 눈을 떴을 때 당신이 이렇게 날 지켜보고 있는 장면 
말이에요. 나 오래 잤나봐."
  등 밑으로 팔을 넣어 로라를 안은 폴은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한 시간쯤. 꿈인지 생시인지 확인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시간이었지."
  "너무 좋았어요. 지난 주에 한잠도 못 잤거든요."
  폴과의 섹스는 언제나처럼 그녀에게 강한 힘과 사랑을 맛보게 해주었다. 
새롭게 시작된 관계, 다시 찾은 사랑. 손을 뻗쳐 침대 옆 램프에 불을 밝힌 
로라는 그림자가 벽 위에서 춤추는 것을 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내 친구였어요. 저 그림자. 저걸 보면서 긴 밤을 보내곤 했죠. 무서운 게 너무 
많았어요."
  "이젠 더 이상 무섭지 않을 거야. 항상 밝은 빛만이 있을 거야."
  그는 로라의 웃는 입술에 또다시 입을 맞췄다.
  "꼼짝말고 여기 있어. 곧 돌아올게."
  침대에서 빠져나가 침실을 가로질러가는 폴을 로라는 흐뭇한 눈길로 
지켜보았다. 우리 둘은 참 많이 닮은 것 같애. 로라는 엷게 미소 지으며 
중얼거렸다.
  "여기 나 입을만한 가운 없을까? 배가 고파서 뭘 좀 먹어야겠는걸."
  화장실에 다녀온 폴이 물었다.
  "맞는 게 없을걸요."
  "남자가 없었다는 소린가, 아니면 나한테 다 작다는 소린가?"
  그녀는 그에게 짓궂은 미소를 보냈다.
  "남자가 없었다는 소리예요."
  그녀는 소매 긴 아리보리색 실크 가운을 걸친 뒤 계속 짓궂은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럼 할 수 없지."
  폴은 엷게 한숨쉬며 바지와 셔츠를 주워 입었다.
  "식탁에 신발을 신고 앉아야 합니까, 주인 마님?"
  "오늘은 특별히 맨발을 허락하네!"
  로라는 깔깔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결국 두 사람은 맨발로 아래층 
주방으로 내려갔다.
  자정이 지나고 있었다. 참나무 주방 세트와 펜실베이니아산 타일이 깔린 
부엌은 밝고 따스하게 꾸며져 있었다. 로라는 냉장고에서 달걀과 샐러드 재료를 
꺼냈다.
  "당신 샐러드 만들래요? 난 오믈렛 만들게요. 바게트가 있는데 딱딱해서 
레인지에 데워야겠다. 포도주도 있어요."
  가스레인지 주변에서 같이 손을 놀리던 폴이 로라에게 물었다.
  "벤 얘기 좀 해보지. 보스턴엔 웬일로 간거지?"
  약간 굳은 얼굴로 그녀는 폴을 보았다. 며칠 새 너무나 많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폴로선 결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샐링거 이사회의가 있었어요."
  그녀는 OWL 개발사의 회의 내용을 포함해 지난 몇 주 동안에 있었던 얘기를 
총괄해 그에게 들려주었다.
  "너무나 많은 게 변했어요.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두렵고 무서워요."
  "무슨 일이 일어나든 걱정할 것 없어요. 우린 이제 늘 옆에 있을 거니까 
나중에 얘기해야 하는 일은 없을 거야. 뭐가 닥쳐오든 함께 나누고 함께 
해결합시다. 과거에 못 다한 걸 화복시켜 가면서."
  "얘기했죠, 폴. 과거를 회복시킬 생각은 없어요. 모든 걸 새로 시작할 거예요. 
너무 오랫동안 과거 속에 잠겨서 무너진 걸 회복시키려고만 했어요. 땜질하려 
했다는 얘기가 맞겠조. 이젠 그런 식으로 살지 않을래요. 과거는 모두 다 
끝났어요, 폴. 사랑하고 사랑받고 당신과 내 인생을 나누고 싶어요. 서로에게 
빚진 것을 계산하고 사죄하고 미안해하고 그러면서 살기는 싫어요. 다 
잊어버려요, 폴."
  근심스러운 눈빛으로 로라는 그를 바라보았다.
  "내 말이 별로예요?"
  "아니, 나도 그러고 싶어.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줘. 난 과거를 부인하고 싶지 
않아. 너무 잘못한 일이......"
  "오, 그만."
  그녀는 손가락으로 그의 입술을 가렸다.
  "그건 둘 다 마찬가지예요. 하지만 이제 후회는 그만해요. 다 잊고 살기로 
해요. 당신에게 오빠와 클레이 얘기를 들려주고 싶어요. 서로 사랑하면서 아끼고 
살펴주던 그 시절, 정말 너무 좋았어요.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았는데요. 당신은 나한테 모든 걸 다 얘기해주는데 난 그럴 수가 없었죠. 
얼마나 괴로웠게요? 하지만 이젠 그럴 필요없잖아요. 처음 느끼는 기분이에요. 
경계할 필요없이 날 편하게 다 내보일 수 있다는 거, 정말 해방된 느낌이에요. 
하지만 클레이는......"
  로라의 눈은 순간 빛을 잃은 채 어두워졌다.
  "지금껏 누구한테도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지 못했어요. 심지어 누나인 
나한테까지."
  "클레이 얘기 좀 더 해보지."
  로라는 그에게 클레이와의 어린 시절 얘기를 들려줬다. 서로 지극하게 위하고 
사랑했던 두 사람의 얘기를 들으면서 폴은 로라가 클레이를 맹목적으로 믿게 된 
이유를 알게 되었다. 게다가 클레이의 부드러움과 독특한 매력은 모든 사람들이 
그를 전적으로 신뢰하도록 만들었다.
  "우린 서로 누가 용감한지 내기를 하듯 자라났지만 실은 그게 아니었어요. 
몸은 다 컸지만 마음은 여전히 사랑과 가정에 굶주린 아이들이었어요. 오빠는 
그걸 이해해줬어요. 헤어져 있긴 했지만 난 클레이에게 오빠가 가족이란 것을 
강조하곤 했어요. 하지만 그앤 그걸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너무 큰 굶주림이라 
형이 주는 사랑으로 채워지지 않았나봐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앤 
과거로부터 깨끗이 벗어나려 하지 않았어요."
  옛추억에 잠긴 그녀의 눈이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그애가 행복해 했던 때가 기억나요. 켈리와 존이 갖고 있던 구식 자동차들, 
그 차를 만지면서 너무 행복해 했죠. 그애한테 기가 막힌 장난감이었을 거예요. 
그걸 보고 있을 때면 세상 전체를 가진 것처럼 뿌듯해 했어요. 그걸 몰고 다닐 
때마다 그앤 모든 사람들이 자길 쳐다본다는 환상에 젖곤 했죠. 아니 사실 
그랬어요. 박물관에 들어갈 구식자동차를 모두 다 쳐다보곤 했으니까요. 
단톤스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면 남의 물건에 손대는 일은 없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도박은 그 전에도 했잖아."
  로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단톤스를 떠나서 그랬을까? 그렇지 않아, 로라. 호텔 일 때문에 바빠서 그런 
것도 아냐. 클레이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껴서도 아니구, 가장 무도회에 나온 
꼬마가 마스크를 쓰고 장난을 치는 그런 기분이었을 거야. 당신으로선 어쩔 수 
없었어. 그런 자책은 쓸데없는 거야."
  "글쎄."
  폴은 그런 로라가 안타까웠다. 그러나 동생에 대한 자책감이 하루 아침에 
사라지지는 않을 터였다. 폴은 재빨리 화제를 바꿨다. 어떻게든 로라의 기분을 
풀어주고 싶었다.
  "아, 참. 어제 런던에서 부모님하고 통화를 했는데 레니 이모가 재혼을 
한다는구만. 이혼 수속이 끝나는 대로 말야. 그 얘기 들었어?"
  "아뇨, 잘 됐네요. 지난 주 만났을 땐 아무 소리 없었는데. 상대가 누구래요? 
당신 아는 사람이에요?"
  "아니. 당신은 알걸? 웨스 커리어라구. 어머니 말론...... 왜, 왜 그래?"
  깜짝 놀란 표정을 짓던 그녀가 갑자기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폴은 
멍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진짜예요? 농담 아니구?"
  "그럼 진짜지. 농담할 게 따로 있지. 어머니말로는 두 사람 다 행복해서 어쩔 
줄 모르더라든데. 커리어가 이모한테 빠져도 이만저만이 아니래. 세상 모든 걸 
다 줄 것처럼 위한대요. 잘됐지. 그런데 뭐가 그렇게 우스워?"
  "회사 세울 때 웨스가 나한테 투자했던 것 알아요?"
  "아버지가 그러시더군. 그걸 보더라도 사업 센스는 있는 사람같더라구."
  "그게 다예요?"
  달걀을 뒤집을 뿐 로라는 고개를 그에게 돌리지 않았다.
  "다른 게 뭔데?"
  그녀는 잠시 망설였다. 비밀은 더 이상 없어. 더 이상 거짓은 안돼.
  "우린 오래도록 연인 사이였어요. 그 사람, 나와 결혼하고 싶어했어요. 많이 
생각해봤지만 그렇게 되질 않았어요. 무지개 뒤편에 누군가가 있을 거란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거든요."
  로라는 익숙한 솜씨로 오믈렛을 접시에 담았다.
  "한 장 더 만들 동안 이걸 빨리 먹어요."
  폴은 그녀가 잡고 있는 프라이팬을 빼앗아 싱크대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두 손으로 로라의 얼굴을 감싸안은 뒤 그녀에게 키스했다.
  "먼저 축배를 듭시다."
  "무지개를 위해, 그리고 우리 둘이 찾아낸 황금을 위해."
  주방의 작은 탁자에 앉아 사랑을 주고받으며 두 사람은 자정의 정찬을 
나누었다. 샐러드와 오믈렛뿐인 식탁이었으나, 두 사람에겐 최고의 정찬이었다. 
자정을 한참 넘긴 뒤 두 사람은 서로를 얼싸안은 채 침실로 돌아갔다. 폴이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한 가지 더. 클레이를 찾아내겠어. 벤과 함께 힘을 합쳐. 누굴 고용하든 
반드시 빠른 시일 안에 찾아내겠다고 약속할게."

    33장
  열쇠는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었다. 도독이 들면 새 자물쇠를 구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경보장치의 비밀번호도 새롭게 변경됐을 것이 틀림없었다. 
어쨌든 경비원이 서 있으니 앞 현관으로는 들어갈 수 없었다. 길 건너편 어둠 
속에서 경비원을 지켜보던 클레이는 자정 무렵 새 경비원이 순번을 이어받는 
것을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다.
  한시 반경, 인도 위로 나온 경비원이 거리 쪽으로 걸어갔다. 그들은 정확한 
시간에 움직이고 있었다. 한시 사십오분경 경비원은 근처 식품가게에서 술병과 
먹을 것이 든 봉투를 들고 다시 나타났다. 십오분. 충분하진 않지만 해볼만 해.
  전날 오후, 클레이는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뒤러 원판과 열쇠 꾸러미를 샘 
콜비에게 발송했다. 그는 하나 남겼던 열쇠로 경비원이 자리를 비운 사이 
현관을 열어보려 했지만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경비원도 경비원이고 열쇠 
때문에라도 현관 쪽으로는 침투가 불가능했다.
  거리와 인도를 헌꺼번에 실필 수 있는 자리로 몸을 옮긴 그는 두시가 조금 못 
되어 조심스럽게 홈통을 타고 벽을 기어올라가기 시작했다. 찬바람이 한두 차례 
휘몰아쳤다. 오렌지색과 황갈색 나뭇잎들이 바람을 타고 지붕꼭대기로 날아와 
앉았다. 나트륨 가로등이 보도 위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으나 지붕 뒤는 거대한 
대로 어둠 속이었다.
  지붕 가장자리에 쪼그린 채 클레이는 뒷담 중앙에 있는 다락방 창문을 
내려다보았다. 허드슨 강가에서 채석된 회색대리석만 밋밋하게 뒷벽을 장식하고 
있을 뿐, 홈통도, 담쟁이덩굴도, 아무것도 붙어 있지 않았다. 뒤쪽에는 
경보장치선이 없다는 소리였다.
  머리 위로 밧줄 꾸러미를 벗어내린 클레이는 지붕선 안쪽에서 몇 피트 떨어져 
있는 굴뚝에 밧줄의 한쪽 끝을 단단히 잡아맸다. 굴뚝 옆의 밧줄은 내린 뒤 
그는 지붕을 가로질러 현관이 있는 앞쪽, 거리가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자리를 
잡았다. 경비원을 살피기 위해서였다. 정확하게 시간을 맞춰서 움직이는 탓에 
클레이에게는 작업하기가 오히려 수월했다.
  그는 두 다리를 길게 뻗고 흉벽에 편한 자세로 기대앉았다. 그리고 로라를 
생각했다. 그가 하는 일을 결코 좋아하지 않을 로라였다. 이런 식의 해결은 
절대로 원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클레이는 어둠 속에서 어깨를 
한 번 들썩거렸다. 다른 길이 있더라도 이만큼 즐겁고 스릴 넘치지는 않으리라 
생각됐다. 로라는 그런 클레이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오히려 더 
골치 아픈 일을 저질렀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아예 입다물고 있는 게 나을 거야. 그는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그래, 
편지는 괜찮을 거야. 편지에다 모든 설명을 하지. 그럼 날 혼내지는 못하겠지.
  그는 자신이 대견해 고개를 끄덕였다. 길은 반드시 있는 법. 어둠 속에서 길을 
찾아낸 자신이 너무나 대견스러웠다. 속으로 노래까지 흥얼거리면서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다. 한 시간이 흘러 세시 몇 분 전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흉벽 너머로 그는 경비원이 거리로 느긋하게 걸아나가는 것을 엿볼 
수 있었다. 바보 같은 놈. 그는 어둠 속에서 이를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지붕을 
다시 가로질러 굴뚝으로 돌아간 클레이는 조심스럽게 장갑 낀 손으로 밧줄을 
풀기 시작했다.
  환호성을 지르고 싶을 만큼 그는 진한 흥분으로 전율하고 있었다. 위험이 
클수록 스릴 역시 컸다. 지금껏 느껴보지 못했던 생동감, 확실하게 살아 있다는 
느낌이었다. 심장은 평소보다 거의 두배나 빨리 뛰었고 숨소리는 깊이 없이 
아주 얕고 빠르게 반복되었다. 다락창문을 행해 밧줄을 잡고 벽에 두 발을 
내디딘 그는 어둠 속에서 계속 흰 이를 드러낸 채 실실 웃었다. 발바닥을 
돌벽에 단단히 붙인 후 한 손에 감아든 꼬마 손전등을 다락방 창문 안으로 
들여보냈다. 창문들도 샅샅이 살펴보았다. 전선은 아무 곳에도 없었다. 전선이 
없다고 해서 경보장치가 없다는 얘긴 아니었지만, 어쨌든 일반적 통념으로 볼 
때 없을 확률이 훨씬 더 높았다. 숨 죽이며 창문을 소리 안 나게 들어올린 뒤, 
그는 잠시 경보음이 들리길 기다렸다. 생각대로였다. 아무 소리도 없었다. 기가 
막히게 고마운 정적이 계속되자, 그는 창문을 더 열어젖히고 다락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펠릭스 서재까지는 일 분 거리도 되지 않았다. 소파 위 벽에 새로 
걸린 그림들이 그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젠장 저걸 못 가져가다니 아깝구만. 
그림 한 장을 밀어내 금고를 찾은 그는 예전에 사용했던 번호로 금고를 
돌려봤다. 이럴 수가. 늙다리 펠릭스 녀석 이걸 바꿀 생각은 못했구나. 집 문서 
나부랭이가 들어 있을 뿐 금고 안은 여전히 비어 있었다. 스웨터 속에 입은 
남방 호주머니에서 오웬의 편지를 꺼내든 그는 될 수 있는 한 깊숙이 
집어넣었다. 금고문을 닫아 감쪽같이 뒤처리를 끝낸 뒤 그는 다시 다락방으로 
가는 계단에 발을 디뎠다. 이것보라구, 얼마나 신나는 게임이야.
  그러나 다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일은 다 끝냈지만 심장은 계속 빠르게 뛰고 
있었다. 창가에 매달린 밧줄을 다시 손바닥에 말아잡아 창 밖으로 몸을 내민 채, 
그는 한 손으로 여유 있게 창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뒷담벽을 차근차근 
기어올라갔다. 지붕으로 올라가 굴뚝에서 밧줄을 풀어낸 그는 어깨에 밧줄을 
둘러메고 홈통을 통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갑자기 경비원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하, 너무 늦었어. 그의 움직임을 
가려주던 은행나무 그림자가 돌아오는 경비원까지 가려준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거기, 누구야!"
  경비원의 고함소리에 클레이는 일이초간 벽홈통에 매달린 채 꼼짝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일순간, 클레이는 무조건 땅으로 뛰어내렸다. 땅에서 
한두 번 구른 그는 쏜살같이 내빼기 시작했다. 오렌지빛 가로등 불빛 아래 
클레이를 정확하게 찾아낸 경비원은 다시 고함을 쳐댔다.
  "야, 거기 서!"
  클레이는 보도 위로 총알처럼 달려갔다. 제대로 훈련받은 경비원은 그 순간 
총을 뽐아들었다. 요란한 총성이 밤거리로 울려퍼졌다. 그러나 어둠 속에 꺾어진 
검은 물체는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집집마다 불빛이 켜지더니 동네주민 몇몇이 쏟아져나왔다.
  "뭐예요?"
  "무슨 일이오?"
  "어떤 놈이 기웃거리길래 한방 쐈어요. 도망 갔지만 경찰을 불러야 될 것 
같습니다. 알아서 할테니 다들 들어가세요. 모든 게 괜찮습니다."
  밖에서 뭘하고 있었지? 들어가던 길이었나? 아니면 안에서 밖으로 나와...... 
경비원은 경찰에 신고를 하기 전에 대강 상황을 정리해야 했다.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 확인차 나갔다가 담장을 기어올라가던 녀석이 있어서 총을 쐈다. 
그러면 되겠지. 잡았어야 하는 건데. 아무튼 아무 일 없었겠지. 집안을 한번 휘 
둘러보면서 경비원은 경찰에 신고를 하기 위해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아무 일도 
없었어, 아무 일도.

  달칵거리는 소리는 아래층에서 들려왔다. 벤이 손님방에 있었으나 - 
에밀리와의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해 폴이 로스앤젤레스로 가 있는 동안 벤이 
로라와 함께 주말을 보내기 위해 와 있었다 - 로라는 굳이 그를 깨우려 하지 
않았다. 웃옷을 걸친 뒤 아래층 현관 쪽으로 내려가면서 중간 창을 통해 
내다보았으나 앞 마당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새벽 네시, 누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나 뭔가 긁는 듯한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벤도 옷을 어깨 위에 
걸치며 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무슨 소리냐? 개가 긁어대는 소리 같은데."
  "몰라. 아무것도 없는데."
  순간 두 사람 다 작게, 아주 작게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었다. 로라를 부르는 
소리였다.
  "클레이 같애!"
  고함을 치며 계단을 거의 구르다시피 해서 내려간 로라는 문을 열었다. 그 
순간 검은 물체가 로라의 발 앞으로 푹 쓰러졌다. 로라는 비명을 질렀다.
  "오빠!"
  벤은 현관 스위치를 올려 불을 밝힌 뒤 무릎을 꿇었다.
  "오, 클레이! 피가...... 어떻게 된 거니?"
  "이게 누구야?"
  바닥에 누워 클레이는 벤을 노려보았다.
  "빌어먹을...... 여기 뉴욕까지 와서 뭘 해먹을려고 나타난 거지...... 더러운 손 
치우지 못해!. 나쁜 자......"
  "클레이, 나 여기 있다. 오빠, 옮겨야 되나 어쩌나? 서재 소파로 옮길까?"
  "피가 많이 나. 누나."
  클레이의 심장은 매우 빠르게 불규칙적으로 뛰고 있었다.
  "구멍이 났어, 셔츠로 막아보려 했는데. 구멍에서 피가 자꾸, 자꾸...... 아, 아파, 
아파 죽겠어......"
  "앰블런스를 불러야겠어."
  "내가 부를게, 넌 여기 있어."
  서재로 달려간 벤이 911을 부르고 있는 동안 로라는 재빨리 그의 검정모자와 
검정 신발을 벗겼다. 모든 것이 검정빛이었다. 로라는 검정색을 뒤집어쓰고 있는 
클레이를 기가막히다는 듯 내려다보았다.
  "어디서 당한 거니?"
  어느새 다가와 무릎을 꿇은 벤이 급하게 클레이에게 물었다.
  "시내 밖에서"
  벤은 로라를 바라보았다.
  "일단 서재 소파로 옮기는 게 낫겠다. 다리를 들 수 있겠니?"
  "웃기지 마. 걸을 수 있으니까."
  몸을 일으키려 애쓰는 클레이를 내려다보며 벤은 엄하게 그를 꾸짖었다.
  "입 다물고 가만히 있어."
  클레이를 들어 서재 소파 위로 옮긴 뒤 벤은 가위를 찾았다. 로라가 
책상서랍에서 꺼내온 가위로 벤은 조심스럽게 클레이의 스웨터를 아래로부터 
잘라나갔다. 등판 옆구리 쪽에 피에 젖은 셔츠가 붙어 있었고, 그 사이로는 피가 
꿀꺽꿀꺽 쏟아져나왔다. 손님방 욕실에서 가져온 수건을 로라가 건네자, 벤은 
상처 위에 수건을 댄 채 로라에게 당황스런 눈빛을 보냈다.
  "총상은 처음 대해보는 거라 진짜 모르겠다. 다른 데가 부러진건지, 아니면 
다순히 피만 흘리는 건지, 아니면 둘 다......"
  "앰블런스 보낸데? 언제쯤 올까?
  "몇 분 안으로 온댔어."
  "안돼, 빌어먹을! 앰블런스는 안돼...... 경찰이 알면...... 하지 마, 부르......"
  "불렀어. 잠자코 있어, 클레이. 피 흘리다 죽을지도 모르는데 우리 보고 가만히 
앉아 있으란 소리냐?"
  잡아채는 듯한 벤의 목소리에 클레이도 지지 않겠다는 듯 대들었다.
  "시끄러! 아, 젠장, 아파. 누나, 아파 죽겠어. 너무 아파. 나좀 살려줘......"
  "오빠, 어떡해."
  로라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안되겠어. 안고 있어야겠어. 좀 도와줘."
  벤이 클레이의 상처를 받치고 있는 동안 로라는 소파 맨끝에 앉아 클레이를 
두 손으로 받아 안았다. 가슴으로 동생의 머리를 끌어안은 그녀는 자장가를 
부를 때처럼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가볍게 몸을 규칙적으로 움직였다.
  "클레이, 병원으로 옮겨줄 테니까 조금만 참아."
  그는 머리를 흔들었다.
  "싫어, 이렇게 있을래. 여기."
  두 눈을 감은 채 클레이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너무 졸려. 이렇게 있으니까 너무 좋다. 나 잘래...... 굿나잇 키스 좀 해줄래, 
누나. 응?"
  그녀는 한 손으로 클레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어디 있었니?"
  그는 로라의 질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펠릭스 집으로 들어가 위대한 
공적을 남긴 일을 얘기하려던 클레이는 지붕 위에서 결심했던 생각을 떠올리며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이마를 찌푸렸다. 모든 걸 다 기억해내기 
힘들었으나 얘기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것은 분명하게 떠올랐다.
  "마지막 인사를 하려고 왔어. 키스해주고 떠나려구. 어디 갈 생각이었는데...... 
멕시코, 유럽 어디 먼 데로...... 아직 정하지 못했는데......"
  벤은 소파 가까이 무릎 방석을 갖고와 클레이 밑에 쪼그리고 앉았다.
  "새벽 네시에 로라를 만나러 왔단 소리니. 일 벌이다 당한 게지!"
  "아냐! 빌어먹을. 그런 짓 아니었다구. 훔친 게 아냐! 돌아다니면서 
생각했다구."
  "그럼 이 총상은 뭐냐?"
  "그건...... 강도한테 당했어. 날 턴 놈을 잡았는데...... 그 놈이 날 쐈단 말야......"
  "등에다 말이지?"
  "총 보고 달아나다 그럴 수도 있지."
  클레이는 그늘진 미소를 미금었다.
  "우리 두 사람, 내빼는데 선수잖아. 안 그래? 도망치는 덴 아주 끝내줬는데, 둘 
다."
  "그래."
  벤은 사람을 끌어당기는 듯한 클레이의 독특한 매력에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랬지. 하지만 이번 건은 말이 안된다. 거짓말이지?"
  "이런 빌어먹을!"
  클레이는 벤에게 소리치다 말고 통증 때문에 얼굴을 심하게 찡그렸다.
  "오빠, 그냥 놔둬. 지금 따지는 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맞아."
  클레이는 로라에게 미소를 보내며 맞장구를 쳤다. 몇 번 짧은 숨을 쉰 뒤 
그는 로라를 올려다보았다.
  "할 말이 있는데...... 아, 누나, 왜 이렇게 졸리지. 이상해, 자꾸 졸려. 웃겨 
진짜. 자는 게 그렇게 좋았는데 이젠 이상해. 내 말 잘 들어...... 나 뭣 좀 마시고 
싶은데. 목말라 죽겠다."
  "내가 가져오마."
  벤은 식당문을 통해 주방으로 사라졌다.
  클레이는 다시금 눈을 감았다.
  "미안해. 이 말 하려고 왔어. 내가 저지른 일, 다 미안해. 진짜야. 정말 병신 짓 
했어...... 누날 그런 곤경에 빠뜨리다니. 그럴 뜻은 전혀 없었는데, 미안해......"
  끝소리는 한숨과 함께 나왔다.
  "그만두려고 노력도 많이 했어. 진짜야. 하지만...... 그게 안되더라구."
  "클레이."
  벤이 가져온 잔을 받아 들고 로라는 클레이를 내려다보았다.
  "이거 한번 마셔볼래?"
  그는 미친 듯 물을 입술 사이로 빨아들였다.
  "아, 좋다. 이젠 살 것 같애."
  두 눈을 열어 잠시 위를 올려다보았으나 숱 많은 눈썹은 잠자리 날개처럼 
힘없이 내려앉았다.
  "벤 형. 오랜만이야. 안 그래? 잘 있었수? 이젠 자리 좀 비켜줘...... 누나한테 
할 말이 있으니까. 누나? 내가 누나 사랑하는 거 알지? 누나가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생각......"
  뒷말은 나오지 않았다. 입안이 바싹바싹 타들어갔다. 잠시 후 그는 간신히 
입술에 침을 적시고 로라를 찾았다.
  "그만두려 했어. 놀음판, 도둑질. 다, 다, 다 말야. 하지만 죽어야 할 것 
같더라구. 내 말 무슨 소린지 알아? 젠장, 내 말 못 알아듣나......"
  몸을 일으키려 애쓰는 클레이를 로라는 더 단단히 부여잡았다.
  "쉿, 클레이. 알아. 다 이해해. 일어나지 마. 나 여기 있어."
  "알아? 내 맘 아냐구? 누날 해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단 말야."
  다시 벌어진 눈에는 밝은 기운이 있었다. 그는 아주 빠르게 입술을 움직였다.
  "내 맘 이해해야 돼, 누나. 정말이야. 그렇게 될 줄은 몰랐어. 누나가 그렇게 
되리라곤...... 그럴 줄 알았으면 절대, 절대 그런 짓 안했지...... 내 맘 알아줘. 
제발......"
  그는 찡그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얘기하려고 했어. 하지만 무서웠어. 누나가 날 미워하고 사랑하지 않을까봐. 
아, 가엾은 누나. 가족을 꾸며보려고 이 클레이한테 온 정성을 다 퍼부었는데 
물건이 안 좋았지. 하지만 내가 그래서 누날 얼마나 사랑했는데. 날 
붙잡아주려고, 나한테 그렇게 항상 잘 해줬는데. 미안해. 모든 걸 망쳐놔서......"
  희미한 미소를 내보이며 클레이는 로라가 손을 잡아줄 때까지 어렵게 손을 
위로 들고 있었다.
  "나도 누나만큼 가족을 원했어. 하지만 그게 생각만큼 잘 안되더라구. 제발 
알아줘, 누나. 그만두려고 엄청 노력했단 말야. 하지만 안되는 걸, 안되는 걸 
나보고 어쩌래. 그걸 그만 두면 난 빈껍데기가 됐을 거야. 허전해서 죽어버렸을 
거라구. 말라 비틀어진 시체 봤어? 미라처럼 변해 돌아다녔을 거야. 그건 
클레이가 아니지. 안 그래? 새로운 걸 해봤어. 모든 게 끝내줬는데. 스릴, 
서스펜스, 살아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구. 그런 흥분감은 처음이었어. 그 
자식 지붕꼭대기에서......"
  "누구네 지붕?"
  벤의 날카로운 질문에 클레이는 말을 더듬거렸다.
  "그냥...... 지붕. 있어, 그런 게. 왕이 된 기분 알아? 누나, 어렸을 때 기억나지? 
둘이 꼭대기까지 기어올라갔다 그곳에서......"
  그는 얘길하다 킬킬거렸다.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었나봐. 다시 살아나고 싶어서 말야. 근데 이젠 
죽으려나봐. 나 죽을 것 같지?"
  "아냐, 그럼 안돼. 다시 새로......"
  로라는 울고 있었다. 펠릭스가 오웬의 집 밖으로 끌어낸 이후로 처음 그녀는 
눈물을 내보이고 있었다. 소파 팔걸이 위로 옮겨 앉은 벤의 허벅지에 이마를 
기댄 채 로라는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클레이를 내려다보며 눈물을 펑펑 
쏟았다.
  "울지 마, 누나. 싫어. 누나 우는 건 못 봐. 행복한 모습을 보면서 갈래. 제발, 
제발 울지 마. 나 때문에 우는 누날 내가 어떻게 보라구. 아냐, 난 안 죽어. 안 
죽을 거야. 운좋은 녀석이잖아. 나...... 잠깐 잘래. 왜 이렇게 졸리지......"
  그는 힘없이 눈을 감았다.
  "잠깐만."
  그는 갑자기 두 눈을 번쩍 떴다.
  "우라질, 그걸 잊어먹었네. 잘 들어. 펠릭스 불러서 금고 열라 그래. 사람들 
모이게 하구. 알았지?"
  "무슨 소리니?"
  "오웬 편지. 거기있어."
  "오웬 편지라니? 펠릭스 금고 속에?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클레이? 그게 
어떻게 거기에? 네가...... 하나님, 클레이 네가 그걸......"
  "아냐, 아냐, 아냐."
  숨이 가빠지며 그는 허공을 끌어안듯 손을 힘없이 허우적거렸다.
  "금고 속에서 봤어. 루어 훔칠 때."
  그는 로라의 몸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미안해, 미안해. 그건 이제 상관없잖아. 제발 내 말 들어. 중요해! 펠릭스, 
금고 열게 해, 사람들 앞에서. 오케이?"
  로라는 벤을 오려다보았다.
  "그게 지금 와서 무슨 소용 있어. 몇 년 전 일인데."
  "변호사."
  클레이는 숨을 헐떡이며 간신히 단어를 끌어모으고 있었다.
  "변호사 구해...... 이유 지금 말 못...... 졸려, 졸려...... 그놈의 총알이 날...... 
약속해! 약속해!"
  "그래 약속할게, 클레이 걱정 마. 약속할게."
  순간 클레이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됐어, 잘됐어."
  창백한 입술 가장자리로 희미한 미소가 반짝거렸다.
  "편지를 쓰려고 했는데, 이렇게 말 대신 편지로 말야. 이렇게 누나 무릎 
베고...... 얘기할 줄 몰랐어. 진짜 웃기지? 사랑해, 누나. 누나가 날 사랑하고...... 
날 자랑스럽게 여기길 바랐어."
  점점 가늘게 나오던 말이 완전히 사라졌다. 클레이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순간 로라는 목청을 다해 동생을 불렀다.
  "클레이!"
  클레이 얼굴 위로 떨어져 내린 로라의 눈물이 먼지로 얼룩진 그의 이마 
가장자리를 타고 소파 밑으로 흘러내렸다.
  "클레이, 괜찮을 거야. 넌 죽지 않아. 살 수 있어. 다시 시작할 수 있어. 모든 
사람들처럼 다시 시작할 수 있어. 네가 얼마나 착한 앤데. 클레이, 안돼. 다시 
시작하자, 다시......"
  눈물 속에 잠긴 소리는 그러나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동생과 나누었던 꿈과 
사랑. 너무나 연약해 부서지기 쉬웠던 클레이의 아름다움을 생각하며 로라는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로라."
  벤의 음성은 아주 부드러웠다.
  "일어나자. 내가 도와줄게. 자......"
  그녀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싫어, 이렇게 안고 있을래."
  고개를 들어 클레이를 내려다본 순간에야 그녀는 벤이 의미하는 뜻을 알아챌 
수 있었다.
  "안돼. 안돼! 이럴 순...... 이럴 순 없어."
  자신의 눈물로 흠뻑 젖어 있는 클레이의 두 뺨과 이마에 그녀는 키스를 했다. 
그리고 그의 입술에 살며시 손가락을 댔다.
  "불쌍한, 클레이. 진짜 남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아, 클레이"
  그녀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흐느끼며 중얼거렸다.
  "시간은 얼마든지 있을 줄 알았는데. 곧 자라겠거니 생각했는데. 이젠, 이젠 
영영...... 죽으면 안되잖아!"
  그녀는 벤을 올려다보며 통곡했다.
  "죽을 순 없어. 아직 어린데, 아직 어리잖아!"
  벤의 두 눈에도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그는 로라의 머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아주 어린애였어. 그래, 아주......"
  로라는 벤의 허벅지에 다시 이마를 기댄 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앰뷸런스가 올 때까지 세 사람은 그렇게 한 자리에 모여 있었다. 십일 년 전 
케이프 코드에서 함께 저녁을 하기 위해 모였던 이래 처음으로 모인 세 
남매였다. 그리고 그것이 영원한 이별이었다.

    34장
  로라의 집 문앞에서 콜비는 장례식에서 돌아올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사람은 로라를 안고 나타난 폴 젠슨이었다. 이런 젠장할, 
이제야 뭔가 돌아가네. 저래서 영화를 도중에 포기했구만. 콜비는 자신을 보고 
놀라는 로라의 눈빛을 놓치지 않았다.
  "경황이 없을 텐데 이렇게 찾아와서 미안해요, 페어차일드양. 하지만......"
  "빌어먹을, 샘!"
  폴은 샘에게 분통을 터뜨렸다.
  "하루 이틀 기다리면 뭐 어디가 어떻게 된답디까?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었어요. 로라는 아니니까 돌아가요. 제발...... 나중에 다 얘기해들릴 테니까. 내 
말 믿어요, 샘. 로라는 아니예요."
  "알아. 제발 그렇게 성질 돋우지 말게, 폴.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이렇게 
무례하게 찾지도 않았어. 페어차일드양한테 조용히 할 얘기가 있어서 왔다니까."
  "지금은 글쎄 안된다니까. 친구하고 점심 하기로 했으니까 내일이나 모레 다시 
오세요."
  로라는 폴의 손을 잡았다.
  "괜찮아요, 폴. 지니 집인데 어때요. 좀 늦어도 괜찮을 거예요."
  로라는 콜비를 서재로 안내했다.
  "무슨 일이죠, 콜비씨."
  로라와 폴, 두 사람 아무도 의자를 권하지 않아 서 있을 수밖에 없었던 
콜비는 심각한 얼굴로 로라를 쳐다보았다.
  "먼저 페어차일드양, 심심한 조의를 표합니다. 동생분하고 사이가 유달리 
각별했다고 들었습니다. 더군다나 일도 같이 하면서 항상 가까이 지냈을 텐데, 
충격이 크겠습니다. 아주 큰 충격이겠죠. 강도한테 습격을 당해 총상 입은 일은 
그리 흔하지 않은 일이지만, 어쨌든 안됐습니다.
  로라는 침묵한 채 콜비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오늘 이렇게 찾아온 이유는 동생분이 나한테 편지를 보냈기 때문입니다."
  로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라구요?"
  "어제 오후 늦게 편지 한 통을 받았어요. 맨해튼에서 발송됐는데, (데일리 
뉴스) 신문사로 보냈더군요. 내 손에 들어온 건 어제였지만, 발송된 건 며칠 
됐다 싶더군요. 그 문제로 얘기해보고 싶은데 어떨는지...... 도움도 청하고 
말입니다."
  "로라는 자신도 모르게 모직담요로 덮은 피묻은 소파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녀는 한기를 느꼈다.
  "좀 앉으시죠."
  그는 안락의자 바깥쪽에 엉덩이를 걸치듯 엉성하게 앉았다. 폴은 로라 어깨에 
팔을 두른 채 그녀와 나란히 피 묻은 소파 중앙에 자리했다.
  "동생분이 열쇠 다섯개를 보냈더군요. 여섯번째, 그러니까 오십일번가에 있는 
샐링거 집 열쇠만 빼고 여태껏 내가 조사중이던 도난사건 피해자 다섯 명의 
이름이 적힌 열쇠 다섯개가 고스란히 내게 배달된 셈이죠. 물론 그 사람들이 
누군진 다 알고 있겠죠?"
  로라는 주의깊게 그를 바라보았다. 샐링거 이름이 언급될 때 잠시 양미간을 
찌푸렸을 뿐, 아무 표정 없이 의도적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편지에 씌어 있더군요. 동생분이 직접 귀하의 호텔 손님들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열쇠를 복사하고 비밀번호, 여행계획 등을 적어 집을 털었다고 
말씀입니다. 다른 물건도 있었어요. 팔지 않고, 그러니까 좋아해서 지니고 
있었다는 십오세기 그림 두 장도 보내왔어요. 그동안 훔쳤던 물건들은 중개상을 
통해 도둑질한 물건이라도 소장하길 원하는 사람들에게 전해졌다고 써 
있었어요."
  로라는 고개를 흔들었다.
  "중개상이라뇨? 그애가 그 사람을 어떻게 안다고 그런 말씀을...... 그런 건 
프로들만이 하는 일 아니예요? 클레이를 몰라서 하시는 말씀이에요. 그앤 아직 
그럴 만한...... 아니 너무 어려요."
  "다른 면은 모르지만 그런 일엔 프로였어요, 아가씨. 아주 똑똑하고, 주의깊고, 
영리했죠."
  흐느낌같은 작은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애가 살아서 그 소릴 들었다면 아마 크게 기뻐했을 겁니다."
  어깨짓으로 내 알 바 아니라는 모습을 보였으나 콜비는 이내 몸가짐을 바로 
했다. 유가족 앞인데 적어도 슬픈 기색이라도 보여야 할 것 같아서였다. 로라의 
눈은 심하게 충혈되어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똑바로 걷고 말하고 
행동했지만 속에 흐르고 있는 슬픔을 참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뭔가 
숨기는 것 같긴 했지만, 그렇다고 사건과 연결된 것 같진 않았다. 편지, 
열쇠건은 전혀 모르는 듯 싶었다. 진짜 모르긴 모르는 것 같군. 느낌이 그래. 
콜비는 로라를 살펴보며 결론을 내렸다.
  "열쇠, 그림, 이 모든 것들, 아니 편지까지 합해 볼 때 지금껏 조사해왔던 여섯 
군데 도난사건 주범은 동생인 게 확실합니다. 아가씨가 동생하고 같이 행동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물론 찾아내지 못했죠. 다시 말해 둘이 공모했을 수도 있다 이 
말이에요. 하지만 난 원래 본능으로 일하고 본능으로 도둑을 잡아내는 
수사관입니다. 내가 볼 때 아가씨는 아닌 것 같군요. 그래서 사과하는 건데 정말 
미안하게 됐어요. 신문에 난 기사들, 호텔일...... 내 의도가 아니었다는 걸 
알아줬으면 합니다. 도와드릴 수 있는 한 힘껏 도와드리겠습니다."
  "어떻게요? 이 얘길 신문사에 넘기긴 아직 이를 텐데."
  "맞는 말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아까 그랬지 않습니까? 
페어차일드양한테 도움 좀 받을까 한다구요. 신문사에 이 얘길 넘길 수 없다는 
건 아직 내 수사가 끝나지 않았다는 얘기지요. 도둑 잡는 게 내 목표가 
아니거든요. 난 경찰이 아니라 보험회사를 위해 일하는 수사관이에요. 속상한 
일이지만 회사 쪽은 도둑보다 도난품 회수에 관심이 더 많아요. 그게 내 
일입니다. 그놈들의 물건들을 찾아내지 못하면 우리 회사는 이미 나간 보험료를 
다시 돌려받지 못해요. 아무튼 그래서 소호에 있는 아가씨 동생 아파트를 
뒤져볼 생각도 있어요. 하지만 그전에 혹 동생이 여기 왔을 때 뭐 도움될만한, 
그러니까 물건이라든가 아니면......"
  로라는 이마를 찌푸리며 물었다.
  "중개상 이름을 원하는 건가요?"
  "바로 맞췄어요."
  콜비는 활짝 웃었다. 말이 통하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언제든 
즐거웠다.
  "중개상 얘길 하긴 했어요. 하지만 이름 얘긴 못 들었어요. 아마 계속 그자와 
함께 일하려 했나보죠."
  그는 로라 얼굴에 서린 냉기를 보았다.
  "그래요? 그럼 할 수 없군요.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 그 이름을 알아내야 해요. 
그것만 있으면 며칠내로 모든 걸 완결지을 수 있어요. 확신은 못하지만 충분한 
가능성이 있어요. 그렇게 되면 신문사에 내 수사건을 돌릴 수 있을 텐데. 다시 
말해 아가씨 호텔로 손님들이 다시 모여든다는 소리가 되겠죠."
  "신문......"
  텔레비전 방송국과 신문 지상을 통해 수없이 반복될 클레이의 이름을 
생각하면서 로라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웅얼거렸다.
  "분명 그렇게 될 거예요."
  콜비는 로라에게 최면을 걸듯 부드럽게 입술을 움직였다.
  "어쨌든 호텔이 안전하단 증거를 보여줘야 할 것 아니겠어요? 분명 중개상 
이름과 전화번호를 외워뒀을 테지만 그래도 습관상 어딘가에 끄적거렸을 
거예요. 그러니까 그걸 알아내봐요. 아주 중요한 거니까......"
  "잠깐만요."
  로라는 일어나 서재 밖으로 나갔다. 콜비는 곁눈질로 계속 폴을 훔쳐보았다.
  "힘든 시간일텐데 좋은 남자 친구가 옆에 있어 주다니 운이 좋은 아가씨로군."
  폴은 능청스러운 콜비를 향해 웃을 수밖에 없었다.
  "샘, 이러지 말아요. 나하고 로라 관계는 수사하곤 아무 상관없는 일이니까."
  "그래 누가 뭐래나? 하지만 내 영화건에는 영향이 지대해. 저 여자한테 푹 
빠져 있는데 날 텔레비전에 내보내줄 수 있겠어?"
  "TV는 놓쳤을지 모르지만 영화는 끝내볼 생각입니다. 유선 방송국에 팔든지 
아니면 극장 쪽으로 배급해볼까 해요. 어떤 방식으로든 유명하게 만들어드릴 
테니 마음 놓고 있어요, 샘."
  계단 쪽에서 로라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클레이한텐 이 지갑밖에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경찰 말로는 공항 래커룸 
열쇠가 나왔다고 하던데. 여행용 가방 하나하고 멕시코행 편도비행기표가 들어 
있었대요. 거기까지 가 있었는 줄 몰랐어요......"
  바닥을 내려다보며 설레설레 머리를 흔들던 그녀는 콜비에게 다시 눈을 
돌렸다.
  "그 가방 결찰서에 있는데, 원한다면 내일 갖고 오겠어요."
  "지갑을 우선 먼저 봤으면 하는데요."
  그는 로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여기서 보는 걸로만 하세요. 가져갈 순 없어요."
  "그럽시다. 아, 한 가지 부탁이나 합시다. 여기서 뭘 찾아낸다 해도 당분간 
비밀로 해뒀으면 합니다. 기자회견뿐 아니라 개별적인 기자 질문에도 입 다물고 
있기예요. 부탁해도 되겠죠? 내가 깨끗이 마무리 지을 때까지?"
  "얼마 동안인데요?"
  "글쎄, 며칠 이상 걸리진 않을 텐데."
  "며칠이라면 기다릴 수 있어요."
  "고마워요."
  버릇대로 그는 두 사람에게 등을 돌려 수첩 겸용의 클레이 지갑을 살피기 
시작했다. 로라 사진, 몇 가지 메모, 오백 달러와 전화번호가 적힌 작은 메모 
쪽지가 들어 있었다. 뉴욕, 제네바, 파리, 로마, 런던, 콜비는 뛰는 가슴을 
진정시켜야 했다. 이중 하나가 맞아떨어진다면 일은 완전히 끝난다.
  콜비는 메모 쪽지를 몰래 손바닥에 쥔 채 지갑을 넘겼다.
  "고마워요, 페어차일드양."
  "그 종이는요? 그게 뭐죠?"
  그는 한숨과 함께 로라에게 그걸 넘겼다.
  "이거 알아본 다음 얘길 해줄 거죠?"
  "아, 그럼요. 알아내자마자 즉시 연락할게요. 믿어도 돼요. 여러 가지 도워줘서 
정말 고마워요. 폴, 곧 만나서 얘기 한 번 나누자구. 괜찮겠지?"
  "연락할게요."
  문이 닫히는 순간 콜비는 로라 페어차일드의 얼굴이 폴에게 향하는 것을 
보았다. 재주 좋아, 저런 여자를 옆에 두다니.
  그러나 폴에 대한 부러움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전화번호가 그의 가슴에 
불을 당겨댔기 때문이었다. 사무실로 가는 택시안에서 그는 내내 그 종이를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대륙간의 시간차 때문에 그는 새벽까지 기다려야 했다. 다섯개는 아예 
불통이었고, 세개는 계속 전화벨만 울렸다. 제네바와 로마 쪽 가게번호 네개는 
모두 번호가 변경되어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었고, 그중 두개는 새로 바뀐 
번호가 녹음돼 있었다. 로마와 밀라노였다. 그곳으로 번호를 눌러댔으나 번호가 
잘못 입력된 탓인지 사용자 없는 번호라는 안내만이 나올 뿐이었다. 우라질놈의 
이탈리아 전화국놈들. 욕질을 해가며 한 번 더 눌러봤으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녹음된 걸 잘못 적었나 싶어 확인해봤지만 분명히 정확했다.
  그는 유심히 번호 두개를 살폈다. 둘 다 39로 시작해 93으로 끝나는 숫자였다. 
아 이런, 세상에, 콜비는 미소를 지었다. 이탈리아 국가 번호는 39였다. 결국 
콜비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번호를 거꾸로 눌러갔다. 그렇게 해서 콜비는 몇 
번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 사람의 관리인과 통화를 할 수 있었다. 희귀한 
화폐와 미인을 모으고 다닌다는 플레이보이. 그뿐 아니라 경마, 포커 등 
도박판에도 즐겨 나타나는 인물이었다.
  신께 감시기도를 올리는 마음으로 콜비는 로마 인터폴에 전화를 걸었다. 
그리곤 의자 깊숙이 몸을 눕혔다. 국제경찰로부터 걸려올 전화를 기다리며 그는 
폴에게 고개를 돌리던 아름다운 로라 페어차일드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래, 폴 
그 작자 최고의 행운을 잡았어. 하지만 몇 년씩 미궁에 빠져 있던 사건을 
풀어낸 이 샘 콜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걸. 클레이, 고맙구만. 그는 
클레이에게 영광의 잔을 올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가까운 사람을 
실망시켰을지는 모르지만 한판 멋지게 놀고 사라진 영웅이라 아니할 수 없다. 
증거 가득한 편지 봉투 하나로 사람 하나를 끝내주게 살려주다니. 하나가 
아니었다. 구덩이 속에 빠져 있는 누나를 구한 데다 은퇴해야 할 샘 콜비를 
다시 영웅으로 떠오르게 만든 일등공신이었다.
  클레이의 일생 중 가장 멋진 행동이라 할 수 있었다. 콜비는 정말 클레이에게 
깊은 감사를 보냈다.

  며칠 동안 잠잠하던 기자들은 클레이가 죽자 다시 늑대들처럼 짖어대기 
시작했다. 몇몇은 아예 호텔 밖에 스물네시간 진을 치고 있었다. 로라 대신 
그녀의 비서가 클레이의 총격 사건을 한마디로 요약해 계속 되풀이하고 있었다. 
샘 콜비가 클레이 페어차일드를 뒤쫓고 있다는 것을 알아낸 (데일리 뉴스)사 
기자가 있었지만 그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콜비에게서 제일 먼저 핫뉴스를 
제공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오히려 소문이 새어나갈까 
전전긍긍하고 있는 판이었다. 결국 다른 기자들은 며칠이 지나자 별수없이 
철수를 해야만 했다.
  기자들이 떠나간 그날 밤, 텅빈 로비를 자유롭게 빠져나온 로라는 폴의 
가족을 만나기 위해 샹트렐의 우아한 조명 아래로 얼굴을 내밀었다. 폴과 
로라는 서로 번갈아가며 바바라와 토마스에게 클레이가 했던 얘길 들려줬다.
  "아직은 모르겠어요."
  폴이 식탁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왜 사람들 앞에서 금고를 열라고 했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펠릭스로 하여금 
그 편지를 부인 못하게 하도록 만들라는 것 같은데요."
  토마스 젠슨은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세월이 흘렀는데 그게 그렇게 중요할까? 유언장에 있던 걸 결국 다 찾은 
셈인데."
  "클레이는 그걸 그래도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죽기 전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한 
이상 하고 싶어요. 그 편지를 내 손으로 간직하고 싶어요. 그럴 수 있었으면 
해요."
  "우리들이 도울 수 있을 거야, 로라."
  폴은 로라를 다둑거렸다. 그러고는 토마스를 바라보았다.
  "뉴욕 그 집에서 주주회의를 하면 어떨까요? 대부분 다 여기서 생활하니까 
그럴 듯 할 것 같은데, 어때요? 아버님이 제안해 보시겠어요?"
  "십자가를 지라 이거냐?"
  토마스는 아들의 미소를 받아들였다.
  "그래. 그래도 내가 제일 낫겠지. 펠릭스를 가족으로 대할 수 있으니까. 
오래전부터 회사 안에서도 펠릭스 그 사람에 대한 원성이 있긴 있었지. 어쨌든 
한번 해보자."
  결국 토마스 젠슨은 펠릭스에게 전화를 해 가족끼리 모여 특별 주주회의를 
열자는 제의를 했다.
  "뉴욕이 어떨까 싶은데, 자네 몇 주 동안 여기 머물 작정 아닌가? 우리 식구도 
마찬가지일세, 어때? 모두 다 편할 것 같은데."
  "편할 것 없어요. 연례 회의가 삼월인데 그때까지 기다립시다."
  "이번에 임시회의를 열자는 의견이 많아. 회사 앞날에 걱정이 많아서 
그런가보네, 펠릭스. 뉴욕 호텔은 계획보다 육개월이나 늦어지지 않았나? 
기대했던 것보다 공사대금과 규모는 더 커지고 말일세. 다른 곳도 계속 수입이 
줄고 있잖나. 사람들의 평판이 많이 떨어졌구. 다들 야단들이라 봄까지 기다릴 
순 없을걸세. 심각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아예 얘기도 꺼내지 않았을 걸세."
  펠릭스는 한동안 대꾸하지 못했다.
  "몇 명이 원하는데? 도대체 누구예요? 누가 그렇게 원합답디까?"
  "지금 말할 순 없지. 회의 때 만나면 될 것 아닌가."
  "생각해봅시다. 하지만 뉴욕에선 안돼요. 회의 장소도 없는데 거기서 무슨 
회의를 한다구."
  "호텔 공사가 제대로 끝나 그곳에서 하면 오죽 좋을까? 그래서 하는 소린데 
자네 집에서 하는 게 어떻겠나. 다 모이면 스물 두 명 될까? 서재정도면 충분할 
것 같은데."
  "그 집에서? 말도 안되는 소리!"
  펠릭스는 소리를 버럭 질렀다.
  "레니도 그렇고, 페어차일드도 있는데. 절대 내 집에 그런 여자들을 들일 수 
없어요. 절대로."
  "그럼 어느 곳이든 호텔 회의실을 빌려 볼 수밖에. 그렇게 되면 기자들이 
몰려들텐데 그래도 괜찮겠나?"
  "기자들? 그게 무슨 소리요?"
  "요즘 샐링거 이름 듣고 가만 있을 기자들이 있다고 생각하나? 펠릭스 샐링거, 
뉴스 거리 아닌가?"
  펠릭스는 잠시 침묵했다. 누구 하나 기자회견과 그 회견의 파문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는데 토마스가 처음으로 그 얘기를 꺼낸 것이다. 지금까지 
기자들이나 사회적 시선을 무서워하는 가족들을 바보로 취급해 왔으나, 순간 
펠릭스는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아찔함을 느꼈다. 가족들이 심하게 반기를 
들어올 것 같은 두려움 섞인 암시를 받은 것이다. 뭣 때문에 토마스가 뉴욕에서 
특별주주회의를 열자는 걸까?
  "회의를 해도 보스턴에서 합시다. 한두 달 기다리라고들 하세요. 더 이상 
논쟁할 것 없으니 그리 알라고 말입니다."
  "논쟁할 게 없진 않을텐데."
  토마스는 부드럽게 펠릭스의 말을 받아쳤다. 그는 묘한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샐링거 일가족이긴 했으나 여지껏 먼발치서 구경만 하던 토마스였다. 
펠릭스에게 반대입장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이 상쾌하게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토마스는 조금 더 펠릭스를 조여 갔다.
  "오늘부터 일주일 뒤, 오후 세기 정각 뉴욕에서 회의를 치를 걸세 자네도 
왔으면 하네. 안 와도 할 수 없지. 의장이 없어도 회의는 회의니까."
  "그럴 순 없을걸!"
  "할 수 있다는 걸 알면서 왜 그러나? 아사가 출장중이지만 돌아오는 대로 
부의장 자격으로 회의를 진행할 걸세."
  펠릭스로선 결코 회의에 빠질 수 없는 노릇이었다.
  "좋아요. 가겟어요, 하지만 집에선 안돼요. 다른 곳을 찾아봐요."
  "노력해봄세. 하지만 신문기자들이 우리 회사 사장 재선출 문제를 놓고......"
  "뭐라구요?"
  "아까 내가 얘기했을 때 눈치챘을 걸로 생각했는데. 모두 회사 장래를 
걱정한다고 했지 않나?"
  펠릭스는 아무 소리 하지 않았다.
  "그 소식을 기자들이 알면 어떻게 되겠나? 경제계 뉴스엔 핫스토리가 되겠지. 
경제계 기자들한테 이미 자네 표적이 되지 않았나."
  "좋아요."
  직감이 맞아들어가고 있었다. 모든 게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희망은 
있었다. 아사, 아사를 찾아야 했다. 어디 가 있든 빨리 찾아내 선수를 쳐야만 
했다. 늘 그랬듯 아사만 손에 쥘 수 있으면 꼭대기 자리를 뺏으려는 사람들에게 
기권패를 안겨줄 것이 틀림없었다. 무슨 수를 쓰든 빨리 아사를 찾아 행동을 
같이 해야했다.
  "내 집으로 모이는 걸로 합시다. 하지만 단 한 번, 이번 한 번 뿐입니다."
  "그럼 다음주에 보세."
  전화를 끊자마자 토마스는 폴에게 전화했다.
  "일단 계획을 짜두는 게 좋겠다. 내일 점심 같이 하는 게 어떻겠니? 콜도 
나오라 그럴 참이다. 아사한테도 전화를 해서 잘 살펴놔야지. 지금 펠릭스가 뭘 
결정하라고 다그칠까봐 숨어 있는 중이다. 다음주까지 잘 잡아놔야 될텐데, 어디 
한번 해보자."
  "할 수 있을 겁니다. 고맙습니다."
  전화를 끊고 난 폴은 로라에게 모든 것을 상세히 설명했다. 그녀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으나 온몸이 조여드는 느낌은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이사회의에서 
주어진 한 달 중에서 벌써 보름이 달아나버린 상태였다. 커리어와 레니에게 
축하전화를 했던 로라는 그가 빌려준 자금으로 간신히 급한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커리어는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갈 때까지 이자를 
거절하겠다는 얘기도 했다.
  "미안해요, 로라. 더 이상 자금을 돌려줄 수 없는게......"
  "말도 안돼요, 웨스."
  "당시능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 하지만 내 마음은 안 그런걸. 할 수 있는 한 
돕긴 했지만."
  "알아요, 웨스. 너무나 감사하고 있어요."
  지니도 돈 얘기를 했다.
  "천만 달러쯤 더 보태줬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게 어떻게 돼야 
말이지."
  "돈이 있어도 안 받았을걸요. 마음만이라도 너무 고마워요. 진짜예요. 
사랑해요, 지니."
  "어떻게 할거니, 이젠?"
  "이번 달 치를 건 돼요. 그 다음엔 어떻게든 해봐야죠."
  "클레이 얘길 해보는 건 어떨까? 사람들한테 말야."
  "샘 콜비가 당부난 비밀로 해달라고 그랬어요. 잠깐 동안 입다물어 달래요."

  이틀 뒤 로라는 아침 일찍 샘 콜비의 전화를 받았다. 폴은 커피를 만드는 
중이었고, 로라는 신문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무심코 전화를 받아들었던 로라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뭐라구요?"
  "기자 회견장에 있어요. 로라양이 여기 왔으면 하는데...... 걱정 말아요. 발표는 
물론 내가 맡아야 하니까. 하지만 얘길 듣다보면 좀 마음 아프긴 할텐데, 
어때요?"
  "싫어요. 가기 싫어요. 그냥 전화로 잠깐 얘기해줄 수 없어요?"
  로라는 폴이 콜비의 설명을 들을 수 있도록 전화기를 귀에서 약간 떨어지게 
들고 있었다.
  "간단해요. 아주 깨끗하게 끝났어요. 중개인을 찾아냈어요. 클레이가 맨 
마지막으로 훔쳤던 걸 아직 갖고 있었어요. 그 사람한테서 고객 명단도 
알아냈어요. 불법으로 물건을 취득했으니까 다 토해낼 수밖에. 한마디로 다 
돌려받았어요. 횡재한 거지, 뭐. 그래서 전화했어요. 기자들도 그래서 
긁어모았죠. 이름, 장소, 날짜 모든 걸 확실하게 밝혀줄 생각이에요. 아, 물론 
아가씨 얘기도 해줘야지. 이 사건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말야. 호텔사업에 도움될 
것 같지 않아요?"
  "맞아요. 그럼요. 도움이 되다 말다요."
  그러나 그녀는 클레이 때문에 울고 있었다. 다른 길이 있었으면......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망친 것도 클레이고, 풀어낸 것도 클레이였다.
  "샘, 한가지 더 부탁합시다."
  폴이 울고 있는 로라에게서 전화를 받아든 뒤 급하게 입을 열었다.
  "클레이가 한 행위를 알게 되자마자 로라가 그를 해직시켰단 얘길 확실하게 
해줄 수 있겠어요?"
  "걱정 말게. 두 번이라도 되풀이해줄 테니까. 다른 건 없나?"
  "로라?"
  폴의 물음에 로라는 고개만 가로저었다.
  "끝나고 전화좀 해주세요. 로라 사무실에 있을 테니까."
  "그것도 염려 말구."
  콜비는 하늘로 날아갈 듯 신바람난 목소리로 소리 질렀다.
  "페어차일드양한테 준비하고 있으라고 얘기좀 해주게나. 폭탄세례 맞을걸세. 
뉴스야 내가 만들었지만 기자들은 늙다리 영감보다 예쁜 여자를 좋아하잖나. 
스포트라이트는 그쪽으로 떨어질 걸세. 하지만 난 괜찮아. 나 계속 영화 
찍어주는 거지?"
  "가능성이 있으니까 계속 희망가져도 돼요, 샘."
  껄껄거리는 웃음과 함께 폴은 몇 분 간 더 콜비와 얘기를 나누었다.
  "로라 오늘 당신하고 있고 싶은데?"
  전화를 끊고 난 폴은 로라를 두 팔로 안았다.
  "몇몇 사촌들한테 주주회의 얘길 해야 되거든. 당신 사무실에서 일봐도 될까?"
  "그럼요. 일부러 나 때문에 그러면서...... 고마워요."
  폴은 그날도, 그 다음날도 계속 묵묵히 로라 곁을 지키면서 몰려오는 
기자들과 회견하는 그녀를 돌봐주었다. 샘 콜비가 이미 한 얘기를 반복한 뒤, 
그녀는 동생에 관해 어떤 심정이었는지 짧은 코맨트를 해야 했다.
  "슬퍼요. 동생이 많이 보고 싶구요."
  "대책없이 몰려든 기자들 때문에 그녀는 결국 분노를 터뜨렸다.
  "동생 잃어버린 슬픔 같은 건 아랑곳 하지 않아요. 이따 뉴스를 지켜보면 알 
거예요. 기자들이 나에게 뭘 원했는지."
  로라 말대로 TV화면에 그녀의 슬픈 얼굴은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기자들은 지극히 현실적으로 사건 보도를 해나갔을 뿐이었다.
  콜비가 기자회견한 지 삼일째 되는 날, 계속 로라 곁에 있던 폴은 그녀에게 
걸려온 전화를 엿들을 수 있었다. 예약이 쇄도하고 있다는 기쁜 소식이었다. 
정오경에는 켈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고 다섯시경엔 시카고와 필라델피아 
지배인들이 역시 같은 소식을 전해왔다. 다섯시 삼십분경엔 플라비아 
구아르네리가 전화를 해왔다.
  "로라."
  그녀의 음성은 달콤한 꿀같이 부드러웠다.
  "다시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 조만간 만났으면 해요. 로라 호텔에서."

    35장
 오웬의 책상 앞에 앉아 펠릭스는 돌같이 굳은 얼굴로 서재에 모여 앉은 스무명 
가량의 주주를 노려보고 있었다. 폴과 함께 나타난 로라 - 도대체 폴하고 
어떻게 된거야?  -새 밍크코트를 입고 나타난 레니도 뚫어지게 지켜보았다. 몇 
분 뒤 아사의 아내 캐롤에 이어 그동안 목메게 찾던 아사가 자신의 눈길을 피해 
들어오는 모습도 빠짐없이 노려보았다.
  "아사, 잠깐 나 좀 보자."
  "그 그 그 글쎄, 내 생각엔......"
  쫓기듯 이리저리 눈길을 돌리던 아사는 긴박한 토마스 젠슨의 음성 덕분에 
펠릭스의 시선을 피할 수 있었다.
  "더 이상 기다릴 필요없을 것 같은데. 모두 다 모인 것 같지 않아요?"
  "잠깐 기다리도록 해요."
  펠릭스는 토마스의 부드러운 음성에 날카롭게 쐐기를 박았다.
  "아사!"
 그는 동생에게 문 쪽으로 눈짓을 했다. 사냥꾼에게 쫓기는 사슴처럼 아사는 
떨리는 발걸음으로 펠릭스를 뒤쫓았다.
  두 사람이 빠져나간 자리에 약간 불안한 기운이 돌고 있었다. 벽 쪽에 면해 
있는 의자 두개를 차지한 채 폴과 벤은 두런거리며 얘길 나누고 있었고, 루오가 
사라진 곳에 대신 붙어 있는 새 그림 밑의 소파에는 알리슨과 레니가 로라를 
왼쪽에 둔 채 앉아 있었다. 다른 가족들은 눈길만 보낼 뿐 로라에게 가까이 
다가오려하지 않았다. 로라에게 형식적인 인사를 건넨 뒤 한결같이 고개를 
돌리고들 앉아 있었다. 레니와 알리슨이 나란히 앉아 있긴 했지만, 바로 이 
서재에서 오웬의 유언장이 공개되던 날 수치스럽게 쫓겨났던 그녀의 모습을 
잊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최근의 변화가 너무 많아서 샐링거 일가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펠릭스를 사임시키자는 의견이 분분한 속에서 레니와 펠릭스와의 
이혼, 재등장한 로라. 게다가 그녀는 벤과 남매 사이였다. 그리고 로라와 폴 
사이에 흐르고 있는 이상한 기운, 캘리포니아로 날아가서 꼼짝 않는다는 에밀리. 
로라와 함께 앉아 있는 레니와 알리슨. 그건 그녀의 모든 과거를 용서한다는 
의미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누구하나 나서서 확인해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모든 것이 
확실하게 나타날 때까지 침묵하고 있기로 작정했다.
  서재로 다시 들어온 펠릭스는 로라와 레니, 알리슨을 흘깃 쳐다보고는 재빨리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사를 몇 걸음 뒤에 둔 채 펠릭스는 방을 
가로질러 오웬의 자리로 돌아갔다. 폴은 아사의 얼굴에서 뭔가를 읽으려 했으나 
찌푸린 얼굴에서 아무것도 읽어내지 못했다. 분노 때문에 일그러진 것인지 
아니면 겁쟁이가 됐다는 부끄러움 때문인지 아사의 얼굴빛은 몹시 창백했다. 
아사는 분명 겁에 질려 있는 듯했다.
  모두 다 뻣뻣하게 경직됐구만. 폴은 서재에 모여 있는 얼굴들을 하나씩 
살폈다. 누군가 뭘 뺏어갈까봐 다들 겁에 질려 있어. 돈이 좀 덜 있었다면 
그만큼 마음이 편했을 텐데. 우리 애들한테는 제대로 가르쳐야겠어. 나누어 주고 
나누어 받는 세상을 알게해야 돼. 재산보다 신뢰와 사랑을 잃어버리는 것이 
진짜 비극이란 것을 알게 해야 돼.
  순간 펠릭스는 크게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오웬 책상 뒤편에 
우뚝 선 채 그는 회의 시작을 알렸다.
  "토마스, 이 회의를 열자고 했죠. 샐링거 호텔에 관한 의문사항이 있다고 
했는데."
  "그래요. 하지만 그전에 우선 우리한테 도움될 만한 서류가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걸 좀 꺼내줬으면 해요. 금고 속에 있는 서류 말일세."
  펠릭스는 그를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금고? 지금 무슨 소리하는 거요?"
  "그 속에 뭐가 들어 있을텐데."
  토마스는 차분하게 쏘아붙였다.
  펠릭스는 실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사람들이 단순히 궁굼하다는 
듯한 눈길을 보내고 있는 반면, 벤과 폴, 콜 해튼은 뚫어지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들 작당을 했구나. 순간 펠릭스는 가슴이 뜨끔해짐을 느꼈다. 아사가 
자신의 편이긴 했지만 뭔가 이상하게 진행되는 것이 분명했다. 도대체 뭐 
하자는 거야? 그는 날카롭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토마스, 할 말 있으면 애기해도 좋아요. 하지만 쓸데없이 수상한 짓으로 
투표니 뭐니 떠들어대면 지금이라도 회의를 무기한 연장시킬테니 그리 알아요,"
  콜 해튼이 노장답게 펠릭스에게 대항하고 나섰다.
  "금고 속에 뭐가 있다면 봤으면 하는데. 어때요 다들?"
  "나도 보고 싶은데."
  바바라 젠슨이 입을 열었다.
  "열어봐도 될 것 같은데요. 뭐가 있는진 모르지만."
  폴이 끼여든 순간 펠릭스는 완전히 포위당한 기분이었다.
  "그럼 보죠? 뭐가 있는지."
  사촌 하나가 제안을 하자 또 다른 사람들이 끼여들었다.
  "금고 속에 뭐가 있다구 그래? 주인이 없다면 없는 거지. 안그래요?"
  "열어보면 확실하게 알겠지. 뭐가 들어 있든 회의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빨리 
그렇게 합시다."
  "그렇게 하죠."
  "도대체 뭣 때문에 이 난리들이야?"
  각자 한 마디씩 떠들어대는 바람에 서재 안이 시끌벅적했다. 펠릭스는 불 
같은 성미를 터뜨리고야 말았다.
  "금고엔 아무것도 없어! 그렇게 다들 원한다면 시원하게 보여주지."
  펠릭스는 벽에 매달린 대형 액자를 옆으로 밀어붙였다. 번호를 차례대로 돌려 
금고문을 연 펠릭스는 안을 들여다보지도 않고 가족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자, 보다시피 집문서 밖에 아무......"
  "저 봉투는 뭐지?"
  어느새 뒤로 다가온 토마스가 금고 안을 가리키며 물었다.
  "뭐요?"
  "안에 봉투 하나가 있는데. 그 서류 밑에 깔려 있는데. 집문서 말고 뭔가 
분명히 있어."
  아무 생각없이 금고문을 더 크게 열어젖힌 펠릭스는 금고 뒤편에 깔려 있는 
두터운 봉투를 꺼내 들었다. 로라. 긁은 대문자로 씌어 있는 그녀의 이름이 
펠릭스 뒤에 있는 사람에게 여실히 드러났다.
  펠릭스는 놀라고 어리둥절한 얼굴로 봉투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여기 없었는데. 몇 년 전 쓰레기와 함께 없어진 줄......"
  그 순간 그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런 것 같진 않은데."
  토마스의 엄숙한 음성이 알리슨의 커다란 외침소리에 가려졌다.
  "할아버지 글씨야. 로라한테 남긴 편지야."
  당황과 충격이 가득한 눈길로 알리슨은 펠릭스 손에 들어 있는 봉투를 
보았다.
  "로라 편지를 왜 아빠가 갖고 있는 거죠?"
  레니는 옛일을 기억해내며 펠릭스를 노려보았다.
  "오래전 로라가 얘기했던 편지군요.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해 그걸 찾으러 
나갔다가 다시 돌아왔었죠. 기억나요."
  계속 얼굴을 찡그리며 레니는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게 그 편진가보지?"
  바바라 젠슨이 물었다. 로라는 손을 내밀어 조용히 펠릭스를 바라보았다.
  "그것 좀 볼 수 있을까요?"
  드라이버가 뇌 속으로 파고드는 듯 했다. 펠릭스는 숨조차 쉴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꿈을 꾸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일이. 잠겨 있던 
금고 속으로 이 서류가 어떻게 들어갈 수 있단 말인가.
  "주세요."
  말이 되지 않는다는 듯한 충격으로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가족들 앞에서 
펠릭스는 그답지 않게 꿈꾸듯 로라를 바라보았다. 로라도 펠릭스도 충격 
때문인지 멍하게 서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토마스는 펠릭스에게서 그 봉투를 
빼내 로라에게 넘겼다. 두 눈을 감은 채 손가락으로 제법 두꺼운 봉투를 
만지작거리던 로라는 봉투가 질기지 않다고 늘 불평하던 오웬을 기억해냈다. 
봉투 한쪽 끝에 작은 구멍이 뚫려 내용물이 튀어나와 있었다. 칠년 전 오웬이 
건네줬던 그 봉투를 어루만지며 로라의 두 눈 가득 눈물이 차올랐다.
  누군가 먼저 읽은 게 분명했다. 뚜껑이 벌어져 있었다. 마룻바닥과 금고 
책상을 수없이 반복해 바라보는 펠릭스를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로라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흔들리듯 그려져 있는 오웬의 긁은 
필체를 보았다. 편지를 꺼내든 순간 로라는 책상 앞 맞은편에 오웬이 앉아 
자신에게 미소를 보내고 있다는 착각에 사로잡혔다. 노트 가득 호텔 보수계획을 
써내려가며 여러 가지를 상의하던 오웬.
  "좀 읽어줬으면 하는데, 어때?"
  폴이 잔잔하게 로라에게 소근거렸다.
  "굉장히 길어요. 호텔 보수 계획들일텐데."
  "그래도 조 읽어봐, 조금만이라도."
  알리슨이 눈물을 흘리며 울먹였다.
  "너무 창피해. 너무 부끄러워. 믿을 수가 없어. 네가 어떻게 우릴 용서할 수 
있겠니. 우리 식구들이 이럴 줄 몰랐어. 어떻게 너한테, 널 그렇게 내보낼 수 
있었을까? 우리 모두 용서받지 못할 일을 저지른 거야."
  "나도 너한테 거짓말을 했잖니."
  로라는 흐느끼는 알리슨을 위로했다.
  "자, 사과는 서로 나중에 하기로 하자꾸나. 우선 로라가 편질 읽었으면 하는데, 
어떻겠니 로라? 사적인 편지라서 안되겠지?"
  "모르겠어요. 한 번도 읽어보지 않은 거라서...... 사적이면 어때요. 읽어볼께요, 
레니."
  사랑하는 로라에게
  바깥 날씨만큼이나 기분이 아주 상쾌하다. 죽음을 앞에 둘만큼 오래 산 
노인으로서 할 일이 산더미같이 있기에 신중을 기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글을 
쓰기로 했다. 정신이 맑고 손에 힘이 있을 때, 그리고 이렇듯 확고하게 마음이 
정해졌을 때, 더 늦기 전 너와 함께 계획했던 호텔사업에 관해 써놓는 것이 
아무래도 현명한 일이 아닌가 싶다. 내가 그 호텔들에 애착을 가지는 것만큼 
너도 그곳에 사랑과 관심을 보이는 걸 알고 있단다. 호텔 증측에 관한 계획을 
얘기하기 전에 유언장을 좀 조정해놓으려 한다는 사실을 먼저 얘기하마. 
문중들이 운영하는 그룹 중 일부분과 이 집, 그리고 내 소유로 돼 있는 회사 
전체를 네게......"

  울먹이며 편지를 읽던 로라의 음성 위로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끼여들었다.
  "펠릭스!저 편질 언제 읽은 거죠?"
  바바라 젠슨이 물었다.
  펠릭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로라가 쥐고 있는 오웬의 편지 위에 초점 
잃은 시선을 떨어뜨릴 뿐이었다.
  "계속해요."
  폴은 로라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남기고자 한단다. 그 말은 뭔고하니, 내가 죽게 되면 네가 그 호텔들을 맡아 
네 것으로 운영하라는 소리다. 그러니 내가 뜻을 못 이루고 가더라도 그것들을 
다시 멋지게 일으켜주렴.

  "그대로 해냈구나, 로라. 똑같이 그대로. 그분이 널 신뢰한 대로 말이다."
  레니는 로라의 손목을 잡으며 감격에 겨워 어쩔 줄 몰라 했다. 편지를 넘겨 
대강 홅어본 뒤 로라는 다시 입을 열였다.
  "대부분 호텔 보수에 관한 얘기예요. 다 기억나요. 아, 이건 내가 깜빡 잊고 
안했군요. 호텔 밖에 있는 가로등을 바꾸고 싶어 하셨는데......"
  로라가 편지를 읽고 있는 동안 방안에는 깊은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아무도 
그 침묵을 깨뜨리려 하지 않았다. 그녀가 훅 짧은숨을 들이마신 순간 가까이 
있던 폴이 물었다.
  "뭔데?"
  "알고 계셨어요."
  고개를 숙인 채 그녀는 맨 마지막 장을 읽어내려 갔다.

  네 프라이버시를 존중한다만 고백할 게 하나 있구나. 어렸을때 누구나 한번쯤 
실수를 하듯, 너도 도둑질하다 잡혀 보호관찰을 받았다는 걸 알게 됐단다. 내가 
어떤 사람인 줄 알고 있지? 뭐든 비밀에 싸여 있는 걸 싫어하는 노인네 아니냐. 
항상 답이 있는 세계를 좋아하지. 뉴욕경찰청에 연락을 해 옛 서류들을 뒤지게 
했다. 그래서 네가 혼자 끌어안고 있던 비밀을 알아내게 됐지. 이렇게 몇 년 
동안 같이 살았는데 나한테 그걸 숨기다니 한순간 슬픈 생각이 들었다. 널 
완전히 보여줬으면 했는데 말이다. 한편으론 이해했지. 얼마나 두려움이 
깊었으면 나한테 그 얘길 못했을까. 로라, 약속할 수 있다. 똑똑하고 착하고 
사랑스런 여인으로 네가 원하는 일을 성취했을 때, 분명 넌 그 두려움 많은 
과거로부터 벗어나 그걸 너의 일부분으로 가꿔 나갈 수 있을 게다. 두고 보렴. 
그걸 지켜볼 수 있다면 좋으련만 글쎄, 내가 그때까지 살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하지만 넌 분명 그런 날을 만나게 될게다. 로라야, 사랑한다. 네가 아주 
자랑스럽다. 오랫동안 난 널 내 딸로 생각해왔단다. 아이리스와 내게 없었던 
공주님으로 말이다. 그래서 이미 써놓은 유언장에 덧붙여 뭔가를 네게 주고 
싶었단다. 내가 죽은 뒤에도 늘 네게 남아 있을 깊은 사랑과 널 자랑스럽게 
여기는 내 뿌듯한 마음을 네게 남기고자 한다.

  끝부분을 읽는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폴은 흐르끼는 로라를 가만히 
안았다.
  "위대한 분이셔. 진짜 대단한 분이야. 그분처럼 그렇게 살 수 있을까......"
  폴은 혼잣말철럼 중얼거렸다.
  방안에는 계속 침묵이 흘렀다. 눈물을 흘리며 로라는 생각을 되씹었다. 내가 
원했던 건 단지 복수만이 아니었어. 오웬의 신뢰와 사랑을 받을 만한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거야. 날 신뢰하고 사랑했던 그분 뜻에 적합한 사람이 되길 
원했어. 그걸 몰랐어, 절말 모르고 있었어.
  "로라가 저 편질 찾는 걸 알면서 왜 잠자코 있었을까. 왜 모른척 
했었죠,펠릭스?"
  "정말 그런 건가? 진짜 그랬어요? 로라한테 유산 주기가 싫어서?"
  "그건 말도 안돼. 그건 한마디로......"
  너도나도. 들고 일어나는중에 토마스 젠슨이 엄숙하게 입을 열었다.
  "사기꾼이지, 한마디로."
  금방 잠에서 깨난 듯 한번 세차게 몸을 흔든 펠릭스는 흔들리는 시선으로 
토마스를 노려보았다.
  "뭐라구?"
  "법정에서 요긴하게 쓰일 수 있는 서류를 뽑아낸 건 사기에 속한다는 소릴세. 
이 서류가 있는 걸 알았으면 배심원은 결코 자네한테 승리의 월계관을 주지 
않았을 걸세."
  "난 뽑아낸 적 없어. 훔치지 않았어. 보지도 못했어."
  "쓰레기더미에 쓸려 없어졌다는 소린 그럼 뭐였소?"
  콜 해튼이 매섭게 다그쳤다.
  펠릭스는 어깨를 한 번 들썩거렸다.
  "한 번 보긴 했지만...... 하지만 그건 아버지 책상 위에 있었어."
  "책상 위에?"
  토마스가 물었다. 펠릭스는 다시금 어깨를 올렸다.
  "위든 아래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소. 그건 서랍 속에 있었어요. 뭘 찾다가 그 
서류를 봤소. 하지만 다시 돌아가봤을 땐 사라져버렸어."
  그는 로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분명 누가 갖고 갔다구. 누가 내 금고 속에 숨겨 놓은 거야. 이건 분명 
음모야, 날 교묘하게 죽이려고 일부러 그랬단 말야."
  펠릭스는 거의 이성을 잃고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그걸 증명할 수 있겠소?"
  해튼이 물었다.
  "지금 신문하는 거요? 저 편진 누가 분명 일부러 여기 갖다놓은 거야. 몇 년 
동안 내가 저걸 숨겨 놓은 것처럼 꾸미기 위해서 일부러! 난 저걸 몰라. 왜 저게 
내 금고 속에 들어 있는지 정말 몰라!"
  "한 가지 물어봄세. 오웬의 책상에서 저걸 봤다면 로라가 그 편지 얘길 했을 
때 왜 잠자코 있었던 건가? 로라가 오웬 서재로 저걸 가지러 달려갔을 때 우린 
함께 있지 않았나? 그때 왜 아무 소리도 안한 거지? 법정에서도 마찬가지야. 왜 
저 편지 얘길 입다물고 있었나? 아니, 그 전에 왜 법정까지 일을 몰아간 거지? 
저 편지를 읽었다면 유언장을 재조정했을 당시 오웬의 정신이 말짱했다는 걸 
알았을텐데, 유언장 공개 때 왜 가만 있었나? 우리 모두 그 대답을 들었으면 
하네, 지금 당장! 우리 가문 모두 기자들 앞에 노출된 채 고통스런 재판을 
지켜봐야 하지 않았나? 사랑했던 사람한테 농간당했다는 슬픔에 잠긴 채. 설마 
그게 얼마나 큰 고통인지 몰랐단 소린 아니겠지? 펠릭스, 어디 한 번 설명해 
보시지."
  "아빠?"
  알리슨은 강한 의혹이 담긴 목소리로 펠릭스를 불렀다.
  "진짜 그걸 숨겼단 말이예요? 우리한테 거짓말을 한 거예요?"
  "젠장."
  누군가 한숨과 욕설을 내뱉았다.
  "뭐하러 그랬을까. 로라가 유산을 받아도 그게 얼마나 된다구 그런 짓을 해."
  "아빠!"
  알리슨이 고함을 쳤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목소리였다.
  "왜 훔쳤어요, 그걸! 로라가 도둑질했다고 비난했던 아빠가 왜 로라 유산을 
훔친 거죠? 왜 그랬어요!"
  펠릭스는 광기 어린 눈길로 사람들을 둘러보앗다.
  "설명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야. 저 편진 금고 속에 몰래 들어와 있었어. 바로 
저 계집이 갖다놨다구!"
  그는 로라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원래 도둑이었잖아. 안 그래? 치밀한 음모 아래 그걸 집어넣었다구! 
그래놓고선 저기 저렇게 당당하게 앉아 날 바보로, 날 병신으로 우롱하다니! 
도대체 저 계집을 믿다니, 다들 정신 나간 것 아냐?"
  "로라한테 그런 얘길 하다니, 할 소릴 해야지 펠릭스."
  토마스가 조용히 나섰다.
  "금고 속에 저 편지가 들어가 있었다는 건 사실 중요한 게 아니예요. 문제는 
자네가 저걸 보고서 침묵했다는 거지. 그게 중요 한 거야. 그것만으로도 의도적 
행위를 했다는 게 증명된 셈이지. 더 나아가 사기죄가 성립될 수 있네. 로라가 
고소한다면 말일세. 그렇게 되고 말걸세. 로라, 고소할 생각이니?"
  로라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요. 그럴 수 있을까요? 이렇게 세월이 흘러갔는데"
  "물론 가능하지. 사기죄엔 유효기간 같은 게 없거든."
  펠릭스의 얼굴은 완전히 일그러져 있었다.
  "소송같은 건 없을 거요. 그러잖아도 회사가 어려운 판에......"
  펠릭스는 끝말을 얼른 삼켜버렸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누구든 소송 같은 건 꿈도 꾸지 말아요. 우리 함께 힘을 모아 회사를......"
  해튼은 펠릭스의 말을 잘라버렸다.
  "로라?"
  "모르겠어요. 생각해봐야겠어요."
  클레이가 노린 게 이거였구나. 펠릭스를 단번에 무너뜨리기 위해서 금고 
속에서 그 편지를 본 뒤 나한테 그 말을 해주려고......
  "로라가 고소를 않겠다 해도, 글쎄......"
  캐롤은 머뭇거리며 아사와 토마스를 차례로 돌아보았다.
  "이렇게 일 벌인 책임은 져야 하지 않을까요?"
  "누군가 벌을 받아야 된다는 소리예요?"
  토마스가 물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떡였다.
  "펠릭스를 계속 대표 자리에 둔다면 회사 입장에서 볼 때 손해가 막심할 것 
같은데요."
  "그런 것 같소. 현명한 대표가 있어야 회사가 제대로 돌아갈 것 아니겠소. 
오랫동안 생각했던 문제요. 이 서류 사건 전부터 말이요."
  해튼의 응원에 토마스는 계속 말을 이었다.
  "이 회의를 갖자고 한 이유도 거기 있었어요. 그래서 말인데, 펠릭스. 자네가 
일단 이사회 의장과 회사 대표자리에서 물러나......"
  "웃기는 소리, 절대 그런 일 없을 테니 다들 똑똑히 들어요. 이 사기극을 
이용해 날 회사에서......"
  "내 말을 이해 못한 것 같은데 다시 말하지. 현 이사회 의장과 회사 
대표자리에서 자네가 물러나야 된다는 게 모든 사람의 의견일세. 자네 입으로 
직접 얘기하지 않았나. 지금 회사가 대단히 어려운 상황이라는 건 누 구나 다 
아는 사실이야. 그런데 자네 힘으론 그 문제들을 풀 수 없을걸세."
  "오늘 여기서 이 문젤 논의할 순 없어요. 회의 안건에 없었잖아. 나한테 미리 
귀띔도 안해주고......"
  "잘못 알아들었나보군. 회의 소집 건으로 전화했을 때 자네 위치를 논할 거라 
얘기했었는데."
  "그런 기억없어. 투표도 없이 어떻게......"
  "그럼 내가 동의안을 내겠소."
  해튼이 펠릭스를 응시하며 비수를 들이대듯 말했다.
  "하지만 그 전에 우선 방안 분위기를 살펴보는 게 어떻겠소. 주주들이 지금 뭘 
생각하고 있는지 한 번 느껴봐요. 모두 다 회사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걸 
알고 있어요. 지난 몇 주 동안, 아니 몇 달 전부터겟지. 그 문제를 놓고 
얘기들이 분분했는데, 이제 오웬의 편지를 앞에 두고 보니 생각들이 확실하게 
굳어졌으리라 보는데...... 이러면 어떻겠소. 토마스 젠슨을 이사회 의장으로 두고 
벤 가드너를 회사대표로 하는 게......"
  "망할 놈, 어떻게 그런 소릴! 그런 소릴 지껄이다니, 다들 작당을 해서 날 
죽이려고 해!투표도 없이!"
  "그럼 하지. 투표하자구."
  아사가 정확한 발음으로 침묵을 깼다.
  처음으로 더듬지 않고 얘기한 아사를 모두 다 한 번씩 돌아보았다.
  펠릭스의 얼굴에서는 핏기가 가시고 있었다.
  "투표 전에 한 가지 더 제안해봅시다."
  해튼이 정적을 깨며 다시 입을 열었다.
  "호텔 체인을 하나로 합쳤으면 하는데. 만약 벤이 사장으로, 그리고 토마스 
젠슨이 이사회 의장으로 선출된다면 로라와 함께 샐링거와 비콘 힐을 
합병했으면 어떨까 싶군요."
  질문과 각자의 견해들이 터져나왔다. 소란이 조금 가라앉은 후 해튼이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두 체인은 각자 개별적으로 운영되지만 물론 비콘 힐 이름도 남아 있겠죠. 
하나의 합일체로. 그러니까 한 그룹으로 통일시키자는 의견입니다."
  "저드 아들과 오웬 딸이 뺏긴 걸 되찾아 하나로 만든 셈이네......"
  레니의 중얼거림을 들은 펠릭스는 벤에게 천천히 눈을 돌렸다. 두 사람은 
오래도록 마주보고 있었다. 먼저 눈길을 피한 쪽은 펠릭스였다. 너무도 낯설게 
느껴지는 남녀 가족 스무명을 일일이 돌아보며 펠릭스는 끝없는 절망감을 
느꼈다. 모두 다 적이었다. 오웬이 죽고 난 후 드디어 부친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지만 오웬은 여전히 살아 그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드 녀석도 마찬가지야. 그는 마지못해 그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펠릭스 
샐링거를 제거하기 위해 무덤에서 다시 살아 나온 저드 가드너.
  토마스 젠슨과 벤 가드너를 회사 우두머리로 두자는 해튼의 설명이 계속되고 
있었다. 온갖 생각들로 인해 펠릭스의 머릿속은 폭퐁우가 휘몰아치는 
망망대해의 조각배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유언장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였다면 
이런 일까진 안 일어났을 걸. 아냐, 유언장 때문이 아냐, 그전, 그전에 저 편지 
얘길 했으면...... 아냐, 그 전일지 몰라. 저드한테 그 허술한 회사를 뺏지만 
않았어도...... 하지만 그걸 그냥 놔둘 순 없었어. 눈 앞에 있는 걸. 더군다나 
허술한 회사도 아니었어. 크게 부상할 준비가 다 되어 있었지. 여태껏 그 회사를 
통해 벌어들인 돈이 얼만데. 그 멍청이가 그걸 계속 운영했다면 어림없었어.
 뭐가 됐든 상관없어. 이젠 다 끝났어. 뒤를 돌아보다니, 과거는 이미 끝났어. 이 
모욕적인 상황을 빠져나가야 돼.
 그러나 해결책이 조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웅웅거리는 목소리 밖에 들리지 
않았다. 눈앞에서는 벤이 아기를 임신한 알리슨을 껴안고 있는 모습이 보일 
뿐이었다. 벤 가드너, 샐링거 호텔 대표, 샐링거 가문의 왕.......
  담즙처럼 쓰디슨 생각들이 가득 차올랐다.
  벤과 알리슨에게 멈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로라에게 향하고 있었다. 
펠릭스는 그녀의 눈빛과 마주친 순간, 격한 분노를 느꼈다. 연민. 그녀의 
눈빛에는 분노가 아니라 연민이 담겨 있었다. 아무것도 없이 걸어들어와 훔치고 
속이고 거짓말로 온 가족을 우롱해 먹은 주제에 누구한테 연민의 눈길을 던져!
  누구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고 단 한마디 말도 없이 서재 밖으로 빠져나간 
펠릭스는 계단을 내려가 어둠 속으로 걸어갔다. 보스턴, 그의 사무실이 있는 
그곳으로 가야만 할 것 같았다. 그런 뒤에야 뭔가 떠오를 것 같았다.
  펠릭스가 문 밖으로 사라진 뒤 한동안 서재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계속 
되었다. 가족들 모두 비슷한 기분이었다. 오래도록 펠릭스의 경영 방식에 
길들여져 있었으나, 변화가 다가온 것을 받아들이며 쉽게 사라져준 그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한참 뒤 폴이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지난번 유언장 공개 땐 로라가 집을 떠났는데, 이번엔 펠릭스가 나가게 
됐구만. 보통 우연이 아닌 것 같은데."
  "다들 그만 나가야 되는 것 아니예요."
  로라가 폴을 바라보며 물었다.
  "여긴 펠릭스 집이잖아요. 회의를 해도 다른 데서 했으면 좋겠는데."
  "우리 아파트에서 다시 모이면 어떻까 싶은데, 벤이 괜찮다면 그렇게 하죠."
  폴의 제안에 벤은 그를 향해 싱긋 웃었다.
  "아직 선출된 것은 아닌데...... 토마스 의견을 따르도록 합시다."
  토마스는 그러나 머리를 흔들었다.
  "선출되지 않긴 나도 매한가진걸. 아사가 부사장이니까 부사장 결정에 따르지. 
서튼 광장에서 다시 만나는 게 어때요, 아사?"
   "내가 내릴 결정도 아닌 것 같은데."
 쉰 목소리로 입을 연 아사는 헛기침으로 꽉 메인 목구멍의 가래를 긁어냈다.
  "난 과거 인물 아니겠소? 여태껏 펠릭스하고 같은 노선을 밟아왔지.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난 형이 무서웠어요. 형 얘길 이렇게 하는 게 아니겠지만 
우리 가문의 독이었소. 더군다나 나한테 지독한 독이었지. 무용지물로 만들어 
벌벌 기게 만들었으니까. 내 생각엔 이젠 은퇴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캐롤과 
함께 멀리 떨어져 새롭게 변해가는 회사를 지켜보겠소. 그렇게 하고 싶어. 
그러니까 회의 연기는 다른 사람이 결정들 하시오. 난 못해. 과거로 묻혀 
버려야지."
  "그런 말씀 마세요,"
  폴은 부드럽게 아사를 위로했다. 한마디도 더듬지 않고 그렇게 길게 얘기한 
것은 놀라운 변신이었다. 그런 아사의 모습에 가족 모두 미소로 축하해주고 
있었다.
  "우리 모두 그건 원하지 않을 겁니다. 이사회가 투표로 사임을 승인하기 
전까진 안됩니다."
  결국 아사는 폴과 다른 사람의 권유에 힘입어 삼십분 뒤 폴의 서튼 광장 
아파트에서 회의를 재개하자고 결정했다. 한꺼번에 우르르 일어나 웃옷과 지갑, 
가방들을 챙기던 가족들은 한결같이 로라에게 다가가 사과하기 시작했다. 
문앞으로 가기 전에 다가와 인사를 하고 떠나는 사람들을 보내며, 폴과 로라는 
마치 파티장의 주인이 되어 샐링거 가문을 맞아들이는 착각에 사로잡혔다.
  벤과 알리슨이 로라에게 키스를 하고 떠난 뒤 레니는 폴과 로라를 양팔로 
한꺼번에 안고는 행복한 미소를 보였다.
  "근사한 가족 같지? 안 그러니? 문제가 있긴 했지만, 이렇게 한자리에 모여 
사랑을 확인할수 있다니 진짜 행복하구나."
  로라와 폴, 두 사람만이 서재에 남아 있었다. 그의 두 팔에 안겨 로라는 그의 
가슴에 오래도록 얼굴을 묻었다. 어린 시절부터 내내 가슴 한 구석에 또아리 
틀고 있었던 이방인으로서의 외로움과 두려움 섞인 흔적이 완전하게 사라지고 
있었다. 그대신 그 자리에 진실과 행복이 가득 차올랐다. 난 이제 이방인이 
아냐.
  그녀 옆에서는 오웬의 마호가니 책상이 소형 스탠드 불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고, 그녀의 손에는 그의 편지가 바스락거리며 오웬의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똑똑하고 강하고 사랑스런 여인으로 네가 원하는 일을 성취했을 때 분명 그 
두려움 많은 과거로부터 벗어나 그걸 너의 일부분으로 가꿔 나갈 수 있을 게다. 
두고보렴.
  그녀는 오웬의 눈빛에 담긴 사랑을 읽을 수 있었다. 머리카락을 만지던 
오웬의 손길도 느낄 수 있었다. 환한 미소와 함께 그는 그녀에게 축하를 보내고 
있었다.
  네가 해낼 수 있으리란 걸 난 알고 있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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