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드 마운틴의 사랑
찰스 프레지어
작가의 말
사라져 버린 이들에 대한 슬픈 노래
130여년 전 남부와 북부 양쪽 체제에 무고하게 희생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간 이들의 행적을
거슬러 올라가 보며 5년 동안 이 작품에 몰두했다.
무고한 희생자들의 무덤이 전하는 쓸쓸함 앞에서 작품 구상
나는 "콜드 마운틴의 사랑"을 쓰기 6,7년 전 스모키 산맥의 한 골짜기에 가본 적이 있다.
그곳에는 먼지가 피어오르는 황톳길이 나 있었다. 그 길은 19세기에는 마차들이 오가던 길이었
고, 그보다 더 오래 전에는 인디언들이 이용하던 길이었다. 그리고 그보다도 훨씬 더 오래 전엔
버팔로 들소들이 목초지를 따라 이동하던 길이었다. 나는 공터에 차를 세우고 계곡을 따라 걸어
올라갔다.
청명하고 건조한 10월이었다. 나무 이파리들은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고 땅위에는 포플러 낙엽
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나는 무덤 하나를 찾고 있었다.
얼마 동안 올라가자 윗면이 넓고 평평한 바위가 경사진 언덕 중간에 튀어 나와 있었다. 그곳에
는 전쟁이 끝난 갈 무렵 테네시 주로부터 산을 넘어와 약탈을 일삼던 북군 습격 부대에게 살해당
한 두 민간인의 시신이 한 구덩이에 묻혀 있었다. 두 사람을 한 구덩이에 무든 것은 아마도 삽질
할 힘을 아끼려고 했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으로부터 몇마일 더 떨어진 스털링
산의 건너편에는 다른 무덤이 있었다.
거기에는 남부 시민자위대에 의해 처형당한 한 바이올린 연주자와 저능아가 함께 묻혀 있었다.
두 사람이 총살당할 때 등지고 섰던 나무는 아직까지도 살아 있을 것이다. 그 수많은 나무들 중
에 어느 것이라고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그 바이올린 주자는 최후의 순간까지도 "보나파르트
의 퇴각"이라는 곡을 연주했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나는 남북전쟁에 대한 소설을 쓸 생각은 없었다. 물론 나는 "남군의 후예들 "의 일
원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나는 전쟁 당시 각 부대의 이동
경로라든지 하늘처럼 추앙받던 장군들의 고매한 성품들이라든지, 또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대
통령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나의 관심을 끈 것은 그 두 무덤이 전하고 있는 쓸쓸함이었다.
두 무덤에 묻힌 사람들은 공존할 수 없는 두 경제 체제가 벌인 전쟁의 무고한 희생자였다. 그
들은 노예제도에 의해 뒷받침된 남부의 농업 중심 경제체제나 북부의 산업 자본주의 경제체제와
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수천 년 동안 고수해 온 독립심, 대지의 혼
그들은 아마도 몇 세대 전 쿨로덴 전투이후 미국으로 건너왔던 스코틀랜드 이민자들의 후손일
것이다.
그들 중 노예를 소유한 사람은 5퍼센트도 안 되었고. 대부분 누군가에게 고용되길 거부한 채
스스로의 땅을 일구며 살았다. 그들의 남북의 거대한 두 경제 체제 틈에서 그들만의 전통적인 생
활방식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거칠고 보수적이었다. 대개 조그만 땅에 농사를 짓거나
가축 떼를 방목하기도 하고 수렵과 열매를 채취해서 삶을 꾸려 나갔다. 그것은 인류가 수천 년
동안 살아왔던 방식이었다. 드넓게 펼쳐진 대지 위에 많지 않은 인구가 흩어져 살기에 어울리는
삶은 극단적인 독립심을 키워준다. 그리고 이 모든 기질들에는 대지의 혼이 깃들어 있다.
그들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와는 정반대 가치에 의존하며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나는 어렸을
적 그들과 비슷한 사람들을 본 적이 있는데 대부분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었다. 지금은 이제 그들
마저 남아 있지 않은 게 현실이다.
이 이야기는 단지 남부에만 관련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미국의 정신에는 이런 세계
관이 곳곳에 스며 있다. 제임스 페인모어 쿠퍼와 소로우, 휘트먼, 그리고 프로스트의 시에는 곳곳
에 이런 흔적들이 배어있다. 그리고 또한 현대의 우디 거트리나 케루악의 작품들 속에서도 눈부
시게 번득이고 있다.
부상당한 몸으로 고향 콜드 마운틴으로 돌아온 인만의 여정은 미국판 오딧세이와도 같고 사
라져 버린 세상에 대한 슬픈 노래
나는 대지의 정신에 충실했던 전통적인 삶에 대해서 쓰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과거와
나를 연결해 줄 어떤 연결고리가 필요했다. 무덤에 가보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내게
그런 고리를 선물로 주셨다.
그것은 나의 증조부에 대한 얘기였다. 인만이라는 이름을 가지 그분은 남군으로 참전했다가 탈
영하여 부상당한 몸을 이끌고 고향까지 걸어서 돌아왔다. 내게 인만의 여정은 미국판 오딧세이와
도 같은 것이며 사라져 버린 세상에 대한 슬픈 노래이다. 그래서 나는 5년 동안 그의 행적을 거
슬러 올라갔다. 그러나 그곳에는 무덤을 표시해 주는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그저 통나무 조각들
과 나뭇가지들, 낙엽들만이 어지럽게 뒹굴고 있을 뿐이었다.
만약 증조부가 아버지의 말대로 그곳에 묻혀 있다면 산 아래로 펼쳐진 피존 강과 강가의 체로
키 인디언 부락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비록 카누가라고 불렸던 그 마을을 올려다보
고 있을 것이다. 나는 증조부에게 큰 빚을 졌다. 오직 그분의 명복을 빌 따름이다.
1.상처받은 영혼
아침이 다가왔다는 첫 신호인지 파리 떼가 윙윙대기 시작했다.
인만의 목에 생긴 길다란 상처와 눈가로 몰려든 파리의 날갯짓 소리와, 파리의 다리로 전해지
는 간지러운 감촉은 무리지어 울어대는 장닭들의 소리보다 사람을 깨우는 데 더 효과가 있었다.
이렇게 병원에서의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된 것이다.
인만은 손으로 파리를 쫓으며, 침대 발치 너머로 활짝 열려 있는 3중창을 바라보았다. 밝은 낮
이었다면 보통 붉으레한 색조를띤 행길과 우뚝우뚝 서 있는 참나무들, 낮은 벽돌담, 그리고 널따
란 들판과 울창한 소나무 숲이 서쪽으로 지평선을 향해 펼쳐져 있는 모습이 보였을 터였다.
평지치고는 꽤 넓은 들판이었다. 주변에 언덕이라고는 이병원이 있는 자리밖에 없었다. 창 밖을
내다보기엔 아직 어두웠다. 창문은 차리리 회색빛으로 칠해져 있는 듯했다.
주위가 너무 어둡지 않았더라면, 인만은 아침을 먹을 때까지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을 것이
다. 그가 읽고 있었던 책은 그의 걷잡을 수 없이 착잡한 마음을 잠시나마 가라앉혀 주었다. 하지
만 어젯밤 잠이 올 때까지 책을 읽느라고 남아 있던 양초를 모두 태워 버린 뒤였고, 여가 시간을
즐기기 위해서 병실 불을 밝힐 만큼 램프불 기름도 넉넉하진 않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는, 침대가 늘어서 있는 어두운 방과 여기저기 다친 몸을
고통스럽게 지탱하며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사람들을 뒤로 한 채, 등받이가 사다리 모양으로 된
의자에 걸터앉았다. 다시 한 번 손을 내저어 파리를 쫓으면서, 창문너머로 안개 낀 새벽의 첫 풍
경을 바라보며 인만은 어둠이 걷히고 사방이 밝아 오길 기다렸다.
창문은 출입문과 거의 같은 크기였다. 인만은 그 창문을 밀고 다른 세상으로 걸어나가 그곳에
머무는 공상을 자주 하곤 했다. 처음 병원에 입원해 있던 몇 주 동안은 목을 가누기조차 힘들었
기 때문에, 줄곧 창 밖만 내다보며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고향의 푸른들녘을 떠올리곤 했었다.
수정란풀이 자라던 질퍽한 시냇가, 가을이면 갈색과 검은색 벌레들이 즐겨 찾던 목초지의 한
귀퉁이, 좁은 길 위로 가지를 드리우고 있는 히커리나무... 땅거미가 질 무렵이면 그는 나무 위로
올라가, 소떼를 몰고 마굿간으로 향하는 어버지를 내려다보곤 했었다. 소떼가 나무 아래로 지나갈
때면, 인만은 눈을 감은 채 먼지 날리는 길 위를 떼지어 걷고있는 소들의발굽 소리가 점점 희미
해지다가 마침내 여치와 청개구리 소리에 묻혀 사라져 가는 것을 가만히 듣곤 했었다. 창문은 분
명 인만에게 과거를 회상하게 해 주었다.
이미 살벌하기만 한 세상을 경험했고, 그 경험으로 인해 심신이 지칠대로 지쳐, 자신의 미래를
생각할 때면 그가 소중히 여겼던 모든 것들이 실종되거나 도망쳐 버린 세상밖에 떠올릴 수 없었
던 인만에게, 그런 회상은 그다지 싫지 않은 일이었다.
밤낮으로 후텁지근하고 눅눅한 날씨가 계속되어 마치 젖은 수건을 입에 대고 숨을 쉬는 것같았
다. 침대보도 금세 축축해지곤 했고, 탁자 위에 올려놓은 책에도 하룻밤 사이에 검은 곰팡이가 생
기곤 했다. 그는 이런 관경을 늦여름 내내 바라보며 지냈다.
그러나 인만은 그동안 지나간 시절의 모습들을 추억할 수 있게 해주었던 그홰색빛 창문도 이제
그 역할의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 아침 그 창문은 그
가 잊고 있던 기억을 새롭게 되살려 주었다.
어린 시절 학교 교실에 앉아 창밖에 펼쳐져 있는 목초지와 녹색으로 뒤덮인 작은 산등성이들이
층층지어 콜드 마운튼의 장대한 봉우리로 이어지는 광경을 바라보던 기억이 되살아난 것이었다.
9월이었다. 발자국이 어지러이 나 있는 학교 운동장 너머로 허리 높이까지 건초밭이 자라 있었고,
베어 낼 시기가 됐다고 알려주기라도 하듯 풀 끝이 노랗게 변해 있었다.
인만의 선생님은 통통한 체격에 머리는 좀 벗겨졌고 얼굴은 늘 홍조를 띤 땅딸막한 사람이었
다. 후줄그레한 검은색 정장 한벌과 , 앞코가 말려 올라간데다 너무 낡아서 굽이 거의 다 닳은 커
다란 정장용 구두 한 켤레가 그가 가진 것의 전부였던 듯했다. 아침내내 그 선생님은 구두 끝으
로 바닥을 톡톡 두드리며 교단에 서서 고학년 학생들에게 고대 영국에서 벌어졌던 여러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고 잇는 중이었다.
한동안 억지로 선생님의 말을 외면하고 있던 어린 인만은 책상밑에서 모자를 꺼내 챙을 잡았
다. 손목을 한 번 휙 젖히자, 모자는 창문 밖으로 날아가 한참 위로 치솟더니 운동장을 넘어 목초
지 가장자리에 떨어졌다. 모자는 마치 땅 위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까마귀 그림자처럼 검게 보였
다. 인만은 피터스버그 교외에서 벌어진 한전투에서 부상을 입었다. 옆에서 싸우던 전우 두명이
그에게 달려와 옷을 벗겨 내고 목의 상처를 살펴보았다. 그가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두
사람은 엄숙하게 작별을 고했었다. 더 나은 세상에서 우린 다시 만나게 될 거라며, 하지만 인만은
야전병원으로 후송될 때가지 살아남았다. 병원에서도 의사들은 인만의 전우들과 똑같은 태도를
보이며 가망이 없어보이는 그를 그냥 그렇게 죽어 가도록 간이침대로 옮겨 눕혔다.
하지만 인만은 의사들의 예상과는 달리 쉽게 죽지 않았다. 이틀후 넘쳐 들어오는 부상자들로
병석이 부족해지자. 그들은 인만을 그 고향인 테네시 주에 있는 한 일반 병원으로 보내 버리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해서 인만은 쓰레기통 같은 야전병원을 거쳐 발 디딜 틈없이 부상병들로 가득 찬 화물
열차에 실려 남쪽 고향을 향한 끔찍스러운 여정을 계속하는 동안, 어차피 자신은 살기 어렵다는
전우들과 의사들의 판단이 옳았던 것이었다고 생각했다.
그 여행에서 기억에 남는 거라곤 더위와 피비린내 그리고 대부분 설사에 걸린 부상병들이 쏟아
낸 배설물 냄새밖에 없었다. 그나마 기운이 남아 있던 사람들은 바람을 쐬기 위해 소총 개머리판
으로 나무 화차 옆쪽에 구멍을 내고는 대바구니에 갇힌 채 머리만 내민 닭처럼 밖으로 고개를 내
밀곤 했다.
병원 의사들은 그를 보며 더 이상 어떤 치료도 할 수 없다고 했다. 어쩌면 살 수도 있을 것이
고 죽을 수도 있다면서... 그리고 그에게 회색 헝겊 누더기와 작은 대야 하나를 내주면서 상처를
직접 씻어 내라고 했다.
처음 몇일 동안 인만은 의식이 돌아올 때마다 대야의 물이 완전히 핏빛으로 변할 때까지 헝겊
으로 목의 상처를 닦아 냈다. 하지만 인만의 이런 노력보다는 상처자체가 자정 작업을 했다는 표
현이 맞을 것이다.
딱지가 앉기 전 목의 환부에서 여러 가지 것들이 나왔다. 옷깃단추, 부상 당시 입고 있었던 셔
츠의 울로 만들어진 옷깃 조각, 동전만한 크기의 연회색 금속 파편, 그리고 출처를 알 수 없는 복
숭아 씨 비슷한 덩어리... ,
인만은 마지막으로 물체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는 며칠 동안 곰곰이 관찰했다. 자신의 몸에서
나온 신체의 일부인지 아닌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 결국 창 밖으로 내던졌는데 그후
인만은 그 덩어리가 재크의 콩나무처럼 땅에 뿌리를 내리고 끔찍한 괴물로 자라는 꿈을 꾸기도
했다.
인만의 목은 마침내 회복될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몇주 동안은 고개를 돌릴 수도 책
을 읽을 수도 없었다. 인만은 침대에 누운 채 창 밖으로 매일 맹인을 지켜봤다. 그 맹인은 항상
동이 틀 무렵 앞을 볼 수 있는 사람들처럼 능숙하게 수레를 밀며 나타나곤 했다. 그리고는 길 건
너편 참나무 밑에 동그랗게 돌을 쌓아 놓고 불을 지핀 뒤 쇠냄비에다 땅콩을 삶았다. 벽돌 담벼
락에 등을 기댄 채 하루 종일 의자에 앉아서 그의 수레까지 걸어올 수 있는 환자들에게 땅콩과
신문을 팔았다. 손님이 없을 때면 무릎 위에 양손을 얹고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렇게 앉아 있
는 모습은 마치 인형 같았다.
그해 여름 인만의 눈에 비친 세상은 창문 틀을 액자삼아 끼워놓은 그림이나 다름없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길 담벼락 나무 손수레 맹인이 그려진 그낡은 그림에 변화가 생기곤 했다.
인만은 이 그림에 뭔가 중요한 변화가 생기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는지 머릿속으로 천천
히 숫자를 세어 본 적이 몇번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게임 같은 것이었고 나름대로의 규칙도 있
었다.
날아가는 새가 그 그림에 끼어드는 것은 변화로 치지 않았다. 사람이 길을 걸어 가는 것은 변
화로 인정했다. 태양이 얼굴을 내민 다든지 상쾌한 비가 내린다든지 하는 날씨의 변화는 변화로
인정했지만 지나가는 구름 때문에 생기는 그늘은 변화로 인정하지 않았다.
몇천까지 세고 난 뒤에야 그림에 겨우 변화라고 인정하 수 있을 만한 움직임이 보이는 날이 있
었다. 인만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살더라도 분명히 이 장면 "담벼락 맹인 나무 수레 길 " 은 머릿
속에서 절대 떠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인이 되어 이 장면을 떠올리는 모습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이 장면은 한데 어울려 어떤 의미를 전달하는 듯했지만 인만은 그 의미를 알수가
없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인만이 삶은 귀리와 버트로 아침 식사를 시작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아니나 다를까 맹인
이 터벅터벅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제법 무거운 수레를 미느라 그의 등은 굽어 있었고 굴러가
는 수레 바퀴 밑으로 흙먼지가 일어나고 있었다. 맹인이 불을 지피고 땅콩을 삶기 시작하자 인
만은 창틀에 접시를 내려놓은 채 밖으로 나가 늙은이처럼 다리를 질질 끌면서 앞뜰을 가로질러갔
다.
맹인의 체격이 단단하고 반듯했으며 면도칼을 가는 가죽 숫돌 만큼이나 넓은 가죽 허리띠로 바
지를 단단히 졸라맨 차림새였다. 햇살이 따가운 날 이었는데도 모자를 쓰지 않았고 삐죽삐죽 깎
은 머리카락은 회색인데다 긁으면 대마로 만든 빗처럼 뻣뻣했다.
그 맹인은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다가 인만이 다가가자 앞이 보이는 사람처럼
머리를 들었다. 하지만 눈꺼풀은 축처져 생기가 없었고, 안구가 있어야 할 자리는 쭈굴쭈글하게
푹 꺼져 있었다.
인만이 인사도 건네지 않은 체 다짜고짜 물었다.
"누구에게 눈을 뽑혔습니까?"
맹인은 다정한 미스를 지으며 말했다.
"뽑히다니요...원래 없었습니다요."
처절하고 끔찍한 싸움 끝에 잔인하게 눈알이 뽑혔을 거라고 나름대로 단정하고 있던 인만은 그
말을 듣고 적잖이 놀랐다. 최근 그가 목격한 소름끼치는 행위는 모두 인간이 자행한 일들이었기
에, 인간이 초래하지 않는 불행도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완전히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어쩌다 맹인이 된 겁니까?"
인만이 물었다.
"그냥 그렇게 됐습니다."
"그것 참, 정말 담담하시군요. 가장 중요한 감각을 평생 빼앗긴 사람치고는 말임니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보고 나서 빼앗겼다면 더 끔찍했겠죠."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눈을 10분만이라도 되돌려 받을 수 있다면 돈을 얼마나 내겠습니까?
물론 큰 돈을 내겠죠?"
그는 그 말을 곰곰이 생각하는 듯 혀로 입술을 핥다가 입을 열었다.
"한 푼도 내지 않을 거요, 증오심이 생길까 봐 겁이 나거든요."
"...나도 그렇습니다. 보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 너무 많이 봤거든요."
맹인은 네모난 신문지를 뿔 모양으로 접더니 구멍 뚫린 숟가락으로 냄비를 휘휘 저으며 삶은
땅콩을 가득 담았다. 그리고 인만에게 땅콩을 건네주며 말했다.
"자, 앞이 안 보였더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순간을 한 가지만 말해 보구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까? 인만은 머뭇거렸다. 맬번힐, 샤프스버그, 피터스버그, 세
곳 모두 기억에서 지워내 버리고 싶은 곳들이다. 하지마 프레드릭스버그야말로 잊을 수 없는 전
투였다. 인만은 참나무에 기대어 앉아 젖은 땅콩 껍질을 벗기고 땅콩을 반으로 쪼개 입으로 던져
넣으며 맹인에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날 아침 서서히 걷히고 잇는 안개 사이로 깊숙이 파진 참호가 있는 돌담을 향해 언덕을 올라
오는 병력을 발견했다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돌담 뒤에 먼저 자리잡고 있던 병사들과 합
류하라는 명령을 받은 인만의 연대는 메리스 하이츠 언덕 위에 있는 흰색 대저택을 따라 진영을
만들었다. 리 장군, 로스트리트 장군, 그리고 깃털로 몸을 둘러싼 스튜어트 장군이 현관 앞 잔디
밭에 서서 번갈아 가며 망원경으로 강 건너편을 살펴보면서 저술을 논의하고 있었다.
롱스트리트는 어깨에 희색 양털을 걸치고 있었는데 다른 두 사람과 비교하면 그는 마치 뚱뚱한
돼지몰이꾼처럼 보였다. 하지만 여지껏 리의 작전을 지켜본 인만 으로서는 롱스트리트의 지휘를
받는 편이 훨씬 나았다.
롱스트리트는 멍청해 보이기는 했지만 몸을 숨길 수 있는 비교적 안전한 위치에서 적을 대량
사살할 수 있는 공격 지점을 찾아낼 수 있는 똑똑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날 프레드릭스버그에
서 벌어졌던 전투는 리의 입장에서는 내키지 않았지만, 롱스트리트입장에서는 쌍수 들어 환영할
만한 조건들을 갖추고 있었다.
진영을 갖춘 인만의 연대는 산 언 저리를 거쳐 북군의 총알이 간간이 날아오는 지점으로 다가
갔다. 그리고 멈춰 서서 한 번의 일제 사격을 가한 뒤, 돌담 뒤에 잇는 푹꺼진 길로 달려갔다. 그
와중에 총알 한 발이 인만의 손목을 스쳤지만, 고양이가 혓바닥으로 핥는 듯한 느낌만 들었을 뿐
큰 상처는 남기지 않았다.
푹 꺼진 길에 도착한 인만은 자신과동료들이 유리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먼저
이곳을 지키고있던 사람들이 단단한 돌담을 따라 참호를 파놓았기 때문에 편안하게 서 있는 상태
로도 안전하게 몸을 술길 수 있었다.
북군이 이 담 까지 오려면 넓은 평지를 거쳐야 했다. 위치가 아주 만족스러워 한 병사가 담위
에 뛰어 올라가 이렇게 소리를 질렀을 정도였다. "너희들 실수하고 있는거야. 내말 들려? 끔찍한
실수를 하고 있다니까!"총알들이 날아 오자 이 병사는 참호 속으로 다시 뛰어들어 춤을 췄다.
추운 날이었다. 길가의 진흙은 회반죽 상태로 거의 얼어붙어 있었다. 맨발인 사람도 있었다. 대
부분 집엣 풀로 염색한 칙칙한 군복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눈앞에 펼쳐진 들판에 늘어서 있는
북군은 모두 새옷을 입고 있었다. 공장에서 만든 밝고 반짝이는 군복과 새 부츠였다.
북군이 진군해 오자 담벼락 뒤에 잇던 병사들은 사격을 미룬채조롱만 퍼부었다. "좀더 가까이
와 봐, 부츠를 갖고 싶으니까"라고 소리를 지르는 병사도 있었다. 북군이 20보 정도 떨어진 곳까
지 다가오자 담벼락 뒤의 병사들이 일제 사격을 시작했다.
거리도 가까웠고 적들도 집중적으로 공격해 왔기 때문에 단 한발로도 여러 명을 쓰러뜨릴 수
있었다. 주가 여러 발을 쏘는 것은 화약 낭비라고까지 말했을 정도였다.
총알을 장전하느라 앉아 있던 인만은 총성은 물론 총알이 적군의 몸에 박히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다. 인만의 옆에 있던 한병사는 너무 흥분했는지, 아니면 너무 지친 탓인지, 총신에 달린
탄약 꽂을대를 빼놓는 걸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그 상태에서 발사된 꽂을 대를 가슴에 맞은 한
북군 병사는 뒤로 나가 떨어졌다. 마지막 숨을 내쉬는 병사의 숨결에 따라 그 깃 없는 화살이 부
르르 떨렸다.
하루 종일 수천 명이 넘는 북군이 돌담을 향해 언덕을 오르다 총에 맞고 쓰러졌다. 들판에는
벽돌집이 서너 채 있었는데, 얼마 후 시간이 지나자 북군들이 모두 집뒤로 몸을 숨기는 바람에,
먼동이 터오면서 집 뒤로 파란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집 뒤의 북군들은 일정한 시간적 간격을 두고 몰려 나왔는데 그들 뒤에는 철부지 아이들을 마
구 매질하는 선생님들처럼 기병대가 칼등으로 병사들의 등을 때리며 공격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
들은 거센 비바람을 맞으며 걸어가는 사람처럼 어깨를 잔뜩구부린 채 담을 향해 돌진해 왔다. 북
군이 하도 많이 몰려와서 인만의 부대원들은 적을 무찌른다는 즐거움을 느낄 틈도 없을 정도였
다. 인만은 아무 생각도 없는 바보들처럼 죽겠다고 달려드는 그들이 점점 미워졌다.
어떻게 보면 이 전투는 꿈만 같았다. 눈앞에는 힘센 적들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진을 치고
있고 아군은 허약하기만 한데도 적들은 쓰러지고 또 쓰러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
지는 꿈이었다.
인만은 탄약 꽂을대를 쑤셔대느라 오른쪽 어깨가 저려 오고 종이 탄약통을 뜯느라 턱이 얼얼해
질 때까지 총을 쏘아댔다. 소총이 너무 뜨거워져 탄환을 채워 넣어도 전에 화약이 터질 때도 있
을정도였다.
석양 무렵이 되자, 주변의 동료들은 뒤로 터져 나오는 화약을 뒤집어써서 갖가지 푸른색 명암
이 뒤엉킨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인만은 유랑 극단쇼에서 한 번 본 적이 잇는, 엉덩
이가 알록달록한 커다란 원숭이가 생각났다.
리와 롱스트리트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들은 하루 종일 전투를 벌였다. 담 뒤에 있던 사람들은
고개를 조금만 내밀면 바로 머리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장군들을 볼 수가 있었다. 두 장군은
오후 내낸 언덕 위에서 한 쌍의 만담가처럼 그럴듯한 문구를 지어 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롱스트리트는 아군이 구축해 놓은 방어선의 위치가 너무 좋아 포토맥 군의 모든 병사가 한꺼번
에 들판으로 몰려온다 하더라도 담에 닿기도 전에 모두 쏘아 죽일 수있을 거라고 장담햇다. 그리
고 그 기나긴 오후 내내 스러져 가는 북군의 모습이 마치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방울들 같다고
말했다.
리도 뒤질세라 전쟁이 끔찍한 것이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 전쟁을 너무도 사랑하
게 됐을 거라고 말했다. "대원수 리 장군님"이 하시는 말씀은 늘 그렇듯이, 사람들은 이 농담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되는 듯 몇 번씩이나 들먹였고 옆사람에게도 전해 주었다. 담벼락 한쪽 끝
에 있던 인만의 귀에까지 이 말이 전달되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전쟁 초기였던 그 당시부터 인만은 리와 생각이 달랐다 인만이 보기에 사람들은 전투를 마음껏
즐기고 있었고, 끔찍하면 끔찍할수록 오히려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중에서 가장 전쟁을 좋아
하는 사람은 리 장국으로, 할 수 만 있다면 기쁜 마음으로 모든 사람들을 죽음의 문턱까지 몰아
넣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인만을 가장 혼란스럽게 한 것은 리가 전쟁을 애매모호하기 짝이 없는 하나님의 뜻을
명확하게 해주는 도구로 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리는 인간의 행위 중 전쟁이야말로 기도와 성
경책 읽기 다음으로 신성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리의 논리대로라면 모든 말다툼이나 난투극에서 이긴 사람만이 하느님이 인정하신 승자가 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동료들에게 이런 생각을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또한 그날
메리스 하이츠 언덕 위에 서 있던 리가 아무리 근엄하고 품위 있게 생긴 '대원수님'이라 할지라도
그는 그런 '대원수님'을 거들겠다는 일념으로 자원 입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역시 그저
생각일 뿐, 다른 사람에게 툭 털어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북군은 공격을 멈췄고, 총소리가 차츰 잦아들기 시작했다. 담벼락 아래
비탈진 들판 위로 수많은 시체와 죽어 가는 병사들이 쓰러져 있었다. 어둠이 깔리자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일 수 있는 북군 병사들은 시체를 쌓아 엄호물을 만들었다.
그날 밤 내내 오로라가 붉게 이글거리면서 북쪽을 향해 하늘을 가로질러 갔다. 사람들은 이런
신기한 현상을 무슨 징조로 받아들인 듯, 그 속에 담긴 의미를 가장 그럴듯하게 풀이해 줄 수 있
는 사람 앞에 앞다투어 모여들었다.
언덕 위쪽 어디선가 로레나의 곡을 연주하는 구슬픈 바이올린 소리가 들렸다. 부상당한 북군들
중에는 얼어붙은 들판 위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를 내는 사람도 있었고, 울면서 사랑하는 이들
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다 낡은 신발을 신고 있던 인만의 부대는 이 소리를 신호삼아 담 너머로 부츠 사냥에 나섰다.
인만은 부츠가 그런대로 신을 만했지만, 하룻동안 어떤 전과를 올렸는지 살펴보기 위해 늦은 밤
정찰에 나섰다.
북군은 온통 피투성이인 채로 들판 여기저기에 쓰러져 있었고, 그들의 사지는 가지각색으로 잘
려 있었다. 임만과 나란히 걷던 사람은 이 광경을 보더니 "만약 내 마음대로 할 수만 있다면 포
토맥강 이북은 모두 이 꼴이 될걸"하고 말했다.
적군을 바라보고 있던 인만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일부 시체에는 군복
에 이름을 적은 쪽지를 핀으로 꽂아 두었지만, 이름을 알 수 없는 시체들이 대부분이었다. 어떤
사람이 부츠를 빼앗기 위해 시체의 발을 들고 부츠를 벗기자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
며 무슨 말인가를 내뱉았지만, 아일랜드 억양이 너무 강해 "젠장"이라는 말밖에 알아들을 수가 없
었다.
자정이 훨씬 지난 시간에 인만은 들판에 서 있던 한 집을 들여다봤다. 널빤지 끝 부분의 문틈
으로 빛이 새어 나왔다. 집 안에는 나이 많은 여자 한 명이 앉아 있었다. 머리를 온통 산발한데다
얼굴은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그 여자의 옆 테이블 위에는 몽땅 양초 한 자루가 불을 밝히고 있었다. 현관은 온통 시체투성
이었다. 집 안에도 피할 곳을 찾아 기어다니는 자세로 죽어 간 사람들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 여자는 문지방 너머 인만의 얼굴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집 안을 가로질러 뒷문으로 나와 봤더니 한 남자가 끔찍한 부상을 입은 북군들의 머리를 도끼
로 내려치고 있었다. 북군들은 머리를 한 방향으로 돌린 채 나란히 누워 있었는데, 그 남자는 줄
을 따라 움직이며 차례대로 힘차게 한 번에 한 사람씩 해치우고 있었다. 화가 난다는 표정도 아
니었고, 해야 할 일을 처리하는 사람처럼 한 사람씩 처치하고 있을 뿐이었다. 들릴 듯 말 듯 코라
엘렌의 노래를 휘파람으로 부르고 있었다.
만약 최소한의 양심을 가진 장교의 눈에 발각됐더라면 그 남자는 아마 사살되었을 것이다. 그
러나 그런 장교들 역시 지쳐 있었고 최대한 안전하게 적군을 몇 놈 더 해치우는 일에 굳이 반대
할 처지도 못 되었다. 그 남자가 맨 마지막 줄에 누워 있던 사람에게 다가서자 새벽을 알리는 아
침 햇살이 그의 얼굴 위로 비쳤는데, 그 광경을 인만은 잊을 수가 없었다.
인만이 이야기를 하는 동안 맹인은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이윽고 이야기가 끝나자 그가
입을 열었다.
"그 장면은 머릿속에서 빨리 지워 버려야겠네요."
"나도 그러고 싶습니다."
하지만 인만은 아무리 노력해도 그날 밤 그 들판에서의 일이 머릿속에서 떠나기는커녕 자꾸만
꿈속에서 되풀이되어 나타났고, 병원에 있는 동안 계속 이 꿈에 시달렸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꿈
속에서는 오로라가 번쩍하자 피투성이인 채로 따로 흩어져 있던 팔이며, 머리, 다리, 몸통이 제멋
대로 천천히 모이더니 사지가 전혀 맞지 않는 괴물로 변하는 꿈이었다.
이 괴물들은 어정쩡한 다리를 절름거리면서, 또 앞이 안 보이는 주정뱅이처럼 어두컴컴한 전장
주변을 맴돌았다. 피를 뚝뚝 흘리고 있는 쪼개진 머리를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얹고 있었다. 이따
금씩 얼기설기 짜맞춰진 팔을 허공에다 휘둘렀는데, 손가락들은 대부분 짝이 맞지 않았다. 몇몇은
연인의 이름을 불렀고, 몇몇은 노래 몇 소절을 계속 불렀다. 또 몇몇은 옆으로 서서 어둠 속을 쳐
다보며 다급한 목소리로 자신들의 개를 불렀다.
부상이 너무 심해 사람이라기보다 고깃덩어리 같던 한 사람은 일어서려고 했지만 털썩 쓰러져
버렸고, 가만히 누운 채로 머리만 돌렸다. 그는 고개를 들더니 멍한 눈으로 인만을 쳐다보며 나즈
막한 목소리로 인만의 이름을 불렀다. 이런 꿈을 꿀 때마다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검은 까마귀
만큼이나 음산한 분위기 속에서 눈을 뜨곤 했다.
인만은 걷느라 지친 몸을 이끌고 병동으로 돌아왔다. 희미한 방안에서는 밸리스가 눈을 부릅뜬
채로 앉아서 여전히 종이에 깃펜을 끄적대고 있었다. 인만은 점심 시간까지 잠을 잘까 하고 침대
에 누웠지만,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책을 집어 들었다.
바트램의 <<여행>> 3권이었다. 환자들의 육체적인 회복뿐만 아니라 지적 성장까지 바라는 한
여성단체가 기증한 책 상자에서 발견한 책이었다. 이 책은 누군가 앞표지가 없어지는 바람에 기
부한 것이 분명했다. 인만은 그냥 두기가 어색하여 뒷표지마저 뜯어 내고 가죽으로 된 등부분만
남겨 놓았다. 그리고 삼끈으로 묶어 놓았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읽을 필요는 없는 책이라고 생각한 인만은 어젯밤 병동에서 잠이 안 올 때
처럼 되는 대로 펼쳐 들었다. 주인공과 같은 외로운 방랑자의 행적을 읽으면 인만은 항상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 방랑자는 가방을 들고 다니며 온갖 풀들을 모으면서 각종 야생식물을
연구했는데, 체로키 인디언들은 그를 기려 '꽃을 돌보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그날 아침 펼쳐 든
페이지가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이었는데,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바위투성이 산봉우리의 꼭대기까지 올라갔더니, 그보다 더 높은 산비탈 사이로 골짜기가 하나
보였고, 그 골짜기 사이로 울퉁불퉁 거친 길이 이어졌다. 그 길 옆에는 물살이 빠른 여울이 이리
저리 휘감기다가 마침내는 왼쪽으로 휘어, 어두운 덤불과 울창한 숲 사이를 뚫고 절벽 아래로 떨
어져 그 밑 들판에 풍요로움과 기쁨의 물을 대주고 있었다.
바트램이 무아지경에 빠진 채 산속 깊이 자리잡은 카위 골짜기를 여행하면서 가파른 비탈길과
낭떠러지, 저 멀리 파르스름하게 사라져 가는 겹겹 산등성이를 숨가쁘게 묘사하고, 마치 효과 좋
은 약의 성분을 설명하는 것처럼 눈에 띄는 식물의 이름들을 길게 나열하는 모습을 따라가다 보
면, 인만은 그 정경이 손에 잡힐 듯 떠오르면서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잠시 후 책장을 덮고 나서 생각해 보니 인만은 자신이 머릿속으로 자신의 고향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콜드 마운틴의 모든 산봉우리와 골짜기와 물줄기, 피존 강, 리
틀 이스트 지류, 소렐 골짜기, 딥 골짜기, 파이어 스콜드 산봉우리... 인만은 그 이름들이 이 세상
에서 가장 두려운 일들을 막을 수 있는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혼자서 중얼거렸다.
며칠 후 인만은 병원을 나와 시내를 산책했다. 목에서부터 발가락까지 연결된 힘줄이 팽팽이
당겨지는 바람에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통증이 왔다. 그런데도 두 다리에는 제법 힘이 느껴졌는
데, 오히려 그것이 걱정이었다. 싸울 수 있을 만큼 원기가 회복되는 즉시 버지니아로 다시 투입될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의사 앞에서 너무 건강하게 보이지 않도록 조심하기만 하면 한동
안은 여유를 가질 수 있을 것이었다.
집에서 돈을 부쳐 왔고 밀린 월급 중 일부도 받았기 때문에, 인만은 이리저리 걷다가 붉은 벽
돌과 하얀 창틀이 보이는 가게에서 쇼핑을 할 수 있었다. 양복점에서는 촘촘한 울로 된 검은색
정장용 외투가 눈에 띄었다. 주문해 놓고 죽은 남자의 옷이었지만 입어 보니 인만에게 꼭 맞았다.
헐값에 팔겠다는 양복점 주인의 말에 인만은 값을 지불하고 외투를 입은 채 밖으로 나왔다.
잡화점에서는 뻣뻣한 남색 데님 바지, 크림색 울 셔츠, 양말 두 켤레, 접는 주머니칼, 칼집 달린
칼, 작은 주전자와 컵, 권총에 쓸 장약과 동그란 양철 뇌관을 있는 대로 모두 샀다. 그 물건들을
모두 갈색 봉투 안에 넣어 끈으로 묶고 나서 한 손으로 들고 다녔다.
모자점에서는 회색 리본 띠가 달린 검은색 소프트 모자를 샀다. 그리고 밖으로 나와 지저분한
낡은 모자를 벗어 던졌는데, 그것은 어떤 사람의 정원에 있는 콩밭에 떨어졌다. 인만은 그 모자가
아마도 허수아비 모자로 쓰일 거라고 생각했다.
인만은 새 모자를 쓰고 구두 가게로 갔다. 꼭 맞을 것 같은 튼튼한 고급 부츠 한 켤레를 샀다.
색이 바래고 찌그러진 낡은 부츠는 바닥 위에 그냥 벗어 버렸다. 문방구에서는 금색 펜촉이 달린
펜과 잉크 한 병, 종이 몇 장을 샀다. 하도 화폐가치가 떨어진 터라, 쇼핑을 미치고 계산해 보니
지폐를 신문지처럼 불쏘시개로 써도 장작 더미에 불을 붙이고도 남을 만큼의 돈을 쓴 뒤였다.
인만은 지친 몸을 이끌고 주 의회 의사당 옆 술집에 들러 나무 아래 테이블에 앉았다. 술집 주
인이 해상 봉새령을 피해 밀수해 왔다는 커피를 마셨지만, 맛이 영 아니었다. 찌꺼기를 보니 몇
톨 안 되는 커피 원두에 치커리와 태운 옥수수 가루를 왕창 섞은 게 분명했다. 금속 테이블은 가
장자리가 불그레하게 녹슬어 있었기 때문에 인만은 커피잔을 받침대에 내려놓을 때마다 새로 산
외투의 소매가 닿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인만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양쪽 허벅지 위에 주먹쥔 손을 올려놓은, 약간 경직된 자세로 앉
아 있었다. 누군가 길 한가운데서 참나무 그늘에 놓인 테이블을 쳐다보는 사람이 있었다면, 검은
외투를 입고 목에는 무슨 넥타이처럼 흰 것을 걸치고 있는 인만이 답답하고 불편해 보였을 것이
다. 마치 사진이라도 찍혀지길 기라리며 멍하니 앉아 있는 사람처럼.
인만은 맹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그날 아침 맹인이 파는 <<스탠더드>> 한 부를 샀었다.
요즘 들어 매일 아침마다 하는 일이었다. 그가 맹인이 된 이유를 알고 나서부터 인만은 맹인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다 그렇게 된 일이니 원망을 퍼부을만한 대상조차 없지 않은가.
증오할 적군이 없다는 것은 얼마나 견디기 힘든 일인가? 보복할 사람이라고는 자기 자신밖에 없
지 않은가.
인만은 찌꺼기만 남긴 채 커피를 모두 마시고 나서 마음을 돌릴만한 기사가 있길 바라며 신문
을 펼쳐 들었다. 피터스버그 외곽의 상황이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 궁금하여 기사를 읽어 보았
지만, 잘 파악할 수 없었다. 어쨌거나 그 기사는 그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세 번째 페이지를 넘기자 주 정부가 탈영병과 범죄자, 그리고 그들의 가족에게 보내는 경고문
이 실려 있었다. 명단을 작성해 시민자위대가 밤낮으로 온 지역을 뒤지면서 그들을 색출하고 다
닌다는 내용이었다.
인만은 신문의 중간 부분 아래쪽에 난 기사를 읽었다. 주 경계선이 있는 서쪽 산맥의 이곳저곳
에서 토머스가 이끄는 체로키 인디언 부대가 북군과 여러 차례에 걸쳐 소규모 전투를 치뤘다는
이야기였다.
그 부대는 사람 머리 가죽을 벗긴다는 비난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신문은, 그런 짓이 야만적일
지는 모르지만 주 경계선을 침입하면 끔찍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준엄한 경고 구실을 할수 있
다는 의견을 싣고 있었다.
인만은 신문을 내려놓은 채 북군의 머리 가죽을 벗기는 체로키 인디언 소년들을 상상해 봤다.
전쟁 전에는 제재소나 공장에서 썩었을 북군 풋내기들이 땅을 차지하겠다고 의기양양하게 내려왔
다가 오히려 숲속에서 머리 가죽을 벗기우는 모습이 한편으로 가엾게 느껴지기도 했다. 성인이
된 체로키 인디언들이 토머스의 지휘하에 전투를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던 인만은
스위머도 그 부대에 있을지 궁금해졌다.
인만과 스위머는 둘 다 열여섯이 되던 해에 처음 만났다. 그 당시 인만은 어린 암소 몇 마리를
끌고 가 발삼 산 고지대 민둥지에서 여름의 마지막 풀을 먹이는 즐거운 임무를 맡았다. 그래서
말에 취사 도구, 베이컨, 음식, 낚시 도구, 산탄총 한 자루, 담요, 천막으로 쓸 왁시칠된 캔버스 천
등을 싣고 떠났다.
혼자서 숙식을 해결하며 외롭게 지낼 거라고 생각했지만 왠걸, 도착해 보니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카탈루치에서 온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산등성이 꼭대기에다 야영지를 마련해 놓고 1주
일 정도 머물면서, 고지대의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해방감을 만끽하
고 있었던 것이다.
그 민둥지는 꽤 괜찮은 곳이었다. 동쪽과 서쪽 풍경이 근사했고, 소에게 풀을 먹이기에 좋은 목
초지가 있었으며, 송어가 사는 강도 멀지 않았다. 인만은 그 남자들 무리에 끼여들었다. 며칠 동
안 그들은 밤낮으로 장작불을 활활 지펴 놓은 채 튀긴 옥수수빵, 송어, 사냥한 짐승의 고기로 만
든 스튜 등 제법 근사한 식사를 즐겼다. 옥수수 술, 사과 브래디, 끈적끈적한 꿀 술로 입가심을
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대부분 하루종일 술에 취한 상태로 지내는 게 보통이었다.
얼마 후 코브 크릭 계곡에 사는 체로키 인디언들이 뼈만 앙상하게 남은 여러 종류의 점박이 소
떼를 이끌고 분할지 저편에 나타났다. 그들은 약간 떨어진 곳에 야영지를 만들고 나서, 키큰 소나
무를 잘라 골대를 만들고, 땅에 라인을 그리는 등 그들의 거친 공놀이를 할 채비를 갖췄다.
기형이다 싶을 정도로 손이 크고 미간이 넓었던 스위머는 카탈루치 사람들을 공놀이에 초대하
면서 게임 도중 죽을 수도 있다는 음산한 얘기를 들려 주었다. 인만과 다른 사람들은 그 도전을
받아들였다. 파릇파릇한 묘목을 잘라 라켓을 만들고 그것을 짐승 가죽으로 만든 끈과 신발끈으로
단단히 동여맸다.
양쪽 사람들은 2주 동안 나란히 야영을 하며 거의 하루 종일 내기를 걸고 게임을 했다. 시간이
정해진 것도 아니었고 규칙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한 팀이 공으로 골문을 때려 일정한 점수를
얻을 때까지 서로 몸싸움을 벌이고, 몽둥이를 휘두르듯 라켓을 휘둘러대는 게임이었다. 낮에는 거
의 게임으로 시간을 보냈고, 밤에는 모닥불가에 앉아 작은 반점이 있는 송어를 바삭 튀겨 껍질과
뼈까지 먹고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곳 고지대에서는 날씨가 대체로 화창했고 공기도 맑았다. 겹겹이 늘어선 푸른 산은 눈에서
멀어질수록 색깔이 점점 희미해지다가 맨 마지막 겹의 산은 하늘과 구분할 수 없었다. 온 세상이
골짜기와 산봉우리로만 이루어진 것 같았다.
게임 도중 휴식 시간이 되면 스위머는 주위를 둘러보며 콜드 마운틴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높
은 산일 거라고 말했다. 인만이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묻자 스위머는 콜드 마운틴이 서 있는 지
평선 쪽으로 손을 한 번 가로저으며 말했다. "저 산보다 더 높은 산이 없잖아?"
고지대 민둥지의 아침은 맑고 상쾌했다. 계곡마다 안개가 드리워져 산봉우리들이 마치 희미한
바다에 점점이 흩어져 있는 짙푸른 섬처럼 보였다. 인만은 술이 덜 갠 채로 일어나 계속에서 스
위머와 한두 시간 정도 낚시를 하다가 게임 시작 시각에 맞춰 야영지로 돌아가곤 했다.
두 사람은 낚시 바늘에 잔가지나 돌을 미끼로 걸어 놓고 흐르는 개울가에 나란히 앉았다. 스위
머는 물소리에 묻힐 만큼 낮은 목소리로 쉴새없이 이야기를 했다. 대부분 동물들이 어떻게 해서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나 하는 이야기였다. 꼬리에 털이 없는 주머니쥐, 꼬리에 털이 북
슬북슬한 다람쥐, 뿔이 가지처럼 잘라진 수사슴, 이빨과 발톱이 있는 퓨마, 곱슬거리는 털과 어금
니가 있는 큰 맹수... 세상이 어떻게 생겨났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 하는 이야기였다.
스위머는 소원을 이룰 수 있는 여러 가지 주문을 배우는 중이라고도 했다. 재앙과 질병을 물리
치는 주문, 불로 악마를 물리치는 주문, 혼자 밤길을 여행하는 사람을 보호하는 주문, 그리고 천
리길도 가깝게 만드는 주문...
그중 몇몇 주문은 인간의 영혼에 관한 것들이었다. 그는 적의 영혼을 죽이고 자신의 영혼을 보
호하는 몇 가지 방법을 알고 있다고 했다. 그의 주문에 의하면, 영혼은 끊임없이 공격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에 힘을 불어넣어 주어야 하며 언제든지 몸 속에서 죽어버릴 수도 있는 나약한 것이었
다. 인만은 인간의 영혼을 영원히 죽지 않는 것으로 가르치는 설교와 찬송가를 들으며 자라 왔기
때문에 그 말이 무섭게 들렸다.
인만은 물살이 다가와 낚싯대를 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스위머가 개울 소리처럼 소곤대는 목
소리로 늘어놓는 이야기와 주문을 들으며 앉아 있었다. 작은 송어를 배낭 가득 잡으면 낚시를 끝
내고 야영지로 돌아가 다시 게임을 하며 하루를 보냈다.
여러 날이 지나고 나서 비가 계속 내렸는데, 양쪽 모두 지친데다 술이 절을 대로 절어 있었고
온몸이 욱신거렸기 때문에 아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손가락을 다쳤거나
코뼈가 부러지는 등 갖가지 상처를 입었다.
모두들 발목에서부터 엉덩이까지 라켓으로 얻어맞아서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카탈루치
팀은 없어도 상관없는 물건 전부와 없어서는 안 될 물건 몇 가지-프라이 팬, 냄비, 음식이 담긴
주머니, 낚싯대, 엽총, 권총 등-를 인디언 팀에게 잃었다.
인만은 소 한 마리를 통째로 잃었는데, 아버지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그
는 매 점수마다 소의 각 부위를 내기에 걸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게임이 한창 열기를 띠고 있을
때, 다음 점수에 어린 암소 허리의 연한 살코기 부분을 걸겠다든지, 우리가 이기는 쪽에 왼쪽 갈
비뼈를 모두 걸겠다든지 하는 식이었다. 두 팀이 서로 헤어질 무렵 인만이 내기로 걸었던 어린
암소는 아직 살아 있었지만, 인디언들은 그 암소의 부분부분은 자기네 것이라고 장난삼아 우기기
도 했다.
보답 겸 기념품으로 스위머는 인만에게 히커리나무를 다듬어서 다람쥐 가죽으로 만든 끈에 박
쥐 수염을 꼬아붙인 고급 라켓을 선물했다. 그 라켓을 쓰면 박쥐처럼 빠르게 움직이며 상대의 눈
을 속일 수 있다고 했다. 그것은 제비, 매, 왜가리 깃털로 장식되어 있었는데, 스위머의 말로는 우
아하게 회전하고 높이 날아올라 먹이를 덮치며 오직 한 길밖에 모르는 이 새들의 특징이 인만에
게 고스란히 전달될 거라고 했다. 돌이켜보면 모두 허황된 말들이었지만, 인만은 스위머가 북군과
싸우고 있기보다는 개울가에 지어 놓은 움막집에서 살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술집 안쪽에서 바이올린 조율을 하는 지 줄을 뜯고 가볍게 활을 움직여 보는 소리가 들리더니
느릿느릿 더듬거리며 오라 리의 바이올린 곡이 흘러 나왔다. 몇 음절마다 끼익대는 형편없는 솜
씨여서 귀에 익은 아름다운 곡의 묘미를 느낄 수 없었다. 워낙 서툰 솜씨여서,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착잡한 심경을 노래한 원곡의 맛을 전혀 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인만은 커피잔을 들어 입에 댔지만, 남은 게 거의 없이 싸늘하게 식어 있는 것을 보고 다시 내
려놓았다. 몇 방울 안 남은 액체 속으로 가라앉아 있는 검은색 찌꺼기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커피
찌꺼기, 찻잎, 돼지 내장, 구름의 모양에 뭔가 중요한 의미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으로 미
래를 예견할 수 있다는 '점'이라는 것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았다.
인만은 집착에서 벗어나려고 잔을 흔들며 거리를 내다봤다. 줄줄이 늘어선 어린 나무 너머로
벽돌로 지어진 웅장한 돔형의 의사당이 보였다. 그것은 어느새 서쪽으로 기울고 있는 회색 태양
을 가리고 있는 높다란 구름보다도 더 어두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슴푸레하게 보이는 의사당
은 아주 높아 보였고, 포위 공격을 견뎌 내는 중세 시대 성의 망루처럼 웅장했다.
열린 창문 사이로 커튼이 빠져 나와 바람에 흔들렸다. 둥그런 지붕 너머로 보이는 잿빛 하늘
위에서는 시커먼 독수리 몇 마리가 원을 그리며 날고 있었는데, 뭉툭한 날개 끝에 달린 길다란
깃털이 보일 정도였다. 그 독수리들은 날개짓을 하지 않으면서도 상승기류를 타고 점점 높이 올
라가 마침내 작은 검은색 반점이 되어버렸다.
인만은 머릿속으로 독수리가 빙빙 돌며 날아오르는 모습을 커피잔 속에 남아 있던 찌꺼기의 모
양과 비교했다. 어느 누구나 제멋대로 부딪치는 사물의 모습을 놓고 점을 칠 수 있는 일이었다.
미래는 과거보다 상황이 항상 나쁘게 마련이고, 시간이란 끈질기게 달라붙는 위험으로 향하는 길
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미래를 예언하는 것쯤이야 간단한 일이었다. 프레
드릭스버그에서의 일이 현재 상황을 상징하는 것으로 가정하면, 지금과 같은 상황이 앞으로 몇
년 동안 지속될 경우 사람을 산 채로 잡아먹게 될 날도 멀지 않을 거라고 인만은 생각했다.
그리고 인간의 영혼이 갈기갈기 찢긴 후에도 육체는 계속 살아 나갈 수 있다는 스위머의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혼과 육체는 따로따로 죽는 것이다. 몸 속의 영혼은 이미 소멸된 것 같
은데도 육체는 계속 움직일 수 있는 인만 자신이 좋은 본보기였고, 그런 사람이 자기 혼자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인만은 자신이 마치 속이 뻥 뚫린 검은 고무나무와도 같다
는 기분이 들었다.
연발식 소총과 최신형 프랑스제 박격포를 만지던 그의 최근 경험을 돌이켜보면 영혼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는 이제 모두 고리타분한 과거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렵고도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인만은 영혼이 사라져 버리면서 개구리 한 마리 없는 연못가에 하염없이 서 있는 늙고 슬픈 왜
가리처럼 외롭고 낯선 존재가 되어 버린 것 같아 무서웠다. 만약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가, 뼈를 싸고 있는 육신의 껍데기만을 덩그러니 이끌고 이미 죽은 것과 다름없
이 아무 생각도 느낌도 없이 살아가야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너무 가혹한 거래라는 생각이 들었
다.
잃어버린 자신의 옛 모습을 생각하고 그리워하며 앉아 있으려니 스위머가 연못가에서 들려 주
던 이야기가 떠올랐고, 그럴듯한 얘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위머는 푸른 하늘 위에 천상의 부족
이 사는 숲이 있다고 했다. 인간은 살아 있는 동안 그곳에 머물 수 없지만, 죽은 지 얼마 안 된
영혼은 그 숲에서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했다.
그곳은 아주 높아서 오를 수 없지만. 가장 높은 산꼭대기는 그 바닥과 이어져 있다고 했다. 그
곳으로부터 여러 가지 징조와 기적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으로 전달되는데, 스위머의 말로는
동물들이 바로 그 징조와 기적들을 알려주는 주된 전령이라고 했다.
인만은 콜드 마운틴과 피스가 산, 그털링 산을 꼭대기까지 올라가 봤다면서, 그보다 좋은 산들이
별로 없을 텐데 그곳 정상에서도 천상 세계를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냥 올라가는 것만으로는 안 되지" 하고 스위머는 말했다. 영혼을 치료해준다는 그세계에 닿
으려면 또 어떻게 해야 한다고 헸는지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인만은 콜드 마운틴이야말로 상처
입은 자신의 영혼을 치유할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만은 미신을 믿는 사람이 아니었
지만.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은 믿었다.
이제는 그 세상을 천국이라고도, 사람이 죽으면 가는 곳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생각은
사라진 지 이미 오래였다. 하지만 우주가 우리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이루어졌다고, 그것도 잘못
된게 너무나 많아 보이는 세상만으로 이루어졌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서 또 다른 세계, 더
나은 세상이 있다는 믿음을 간직하고 있었고, 콜드 마운틴이 바로 그런 곳일지 모른다고 생각했
다.
인만은 외투를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걸었다. 그리고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오후 내내 커피를 몇
잔씩 마시면서 종이 서너 장을 앞뒤로 빽빽이 채운 장문의 편지를 썼다. 인만은 입에 담고 싶지
않았던 전쟁 이야기를 쓰고 있었다.
땅은 온통 피투성이였고, 피로 물든 바위, 피묻은 손자국이 찍힌 나무 등걸도 보았습니다...
이 부분에서 인만은 펜을 멈추고 여지껏 쓴 편지를 모두 꾸깃꾸깃 구겨 버린 다음 새 종이에
다시 쓰기 시작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우리 둘 사이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군요. 처음
에는 제가 돌아가기 전에 당신이 저에 대해 판단할 수 있도록 편지에 제가 한 행위와 목격한 광
경들을 모두 적을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이야기를 모두 늘어놓을 생각도 힘도 없답니다.
부엌 난롯가에서 당신이 내 무릎에 기댄 채 그렇게 영원히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싶다고 말했
던 4년전 크리스마스 이브 생각납니까? 이제 제가 무슨 짓을 했고 뭘 봤는지를 모두 알고 나면
분명히 당신은 제가 무서워져서 다시는 그렇게 다정해질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인만은 의자에 기댄 채 의사당 잔디밭을 둘러봤다. 하얀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작은 꾸러미를
들고 잔디밭을 바쁘게 가로지르고 있었다. 검은색 마차 한 대가 의사당과 붉은 벽돌로 만든 교회
사잇길을 지나갔다. 바람이 불어 길가의 먼지가 날리는 광경을 보며, 인만은 해가 한참 저물었다
는 것을 알았고 비스듬히 내리쬐는 햇살을 보며 가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꼈다. 붕대
틈새로 산들바람이 들어와 상처를 건드렸다. 상처가 다시 아파 오기 시작했다.
인만은 의자에서 일어나 편지를 반으로 접고는 칼라 부분의 딱지 앉은 상처를 만졌다. 의사들
은 이제 부상이 빠른 속도로 회복 되고 있다고 했지만, 인만은 아직도 상처에 막대를 쑤셔넣으면
썩은 호박처럼 가볍게 반대쪽으로 막대가 빠져 나올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직도 말을 하거나 음식을 먹을 때면 아팠고, 숨쉬기조차 고통스러울 때도 있었다. 습한 날이
계속 되다 보니, 몇 년 전 맬번힐에서 부상당한 엉덩이도 쿡쿡 쑤셨다. 이런 부상들로 인만은 몸
이 완전히 회복되어 평온을 되찾게 될 날이 과연 올지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편지를 부치러 갔다
가 다시 병원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그래도 가볍고 활기찼다.
병실에 들어선 순간, 밸리스가 항상 앉아 있던 테이블이 텅 비어 눈에 띄었다. 그가 쓰던 침대
도 비어 있었다. 지저분한 안경은 종이 뭉치 위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더
니 그날 오후 조용히 숨을 거뒀다고 했다. 우울한 얼굴로 테이블에서 침대로 자리를 옮기더니 벽
을 마주본 채 옆으로 누워 있다가 잠이든 것처럼 숨을 거뒀다는 것이다.
인만은 테이블로 다가가 종이를 한 장 한 장 넘겨 보았다. 첫 번째 페이지 제일 위에 "단편"이
라고 적혀 있었고, 그 아래로 밑줄이 셋이나 그어져 있었다. 그것은 혼란스럽기 짝이 없는 작업이
었다. 글씨는 거미줄처럼 가늘고 삐죽삐죽했다. 계속 써나간 부분보다 위에 고쳐 쓴 부분, 화살표
로 주석이 달려 있는 부분이 더 많았다. 게다가 문장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책장을 넘기던
인만의 눈에 이러 구절이 보였다.
"우리는 하루하루가 똑같다는 사실을 모르기에 어떤 날은 운이 좋다고, 어떤 날은 운이 나쁘다
고 생각하게 된다."
인만은 이 말을 받아들이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밸리스가 생애 최후
의 순간을 고작 바보가 남긴 말이나 연구하는 데 허비했다는 생각이 들어 슬퍼졌다. 하지만 그
때좀더 그럴듯한 문장이 눈에 띄었다.
"지구상에서 가장 그럴듯한 질서라고 해봐야 제멋대로 흩어져 있는 쓰레기들을 모아 놓은 것에
불과하다."
인만은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종이를 가지런히 정리해 원래 자리에 놓았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서 인만은 침대 밑에 있는 배낭을 열어 보았다. 이미 들어 있던 담요와
방수깔개 위에 컵과 주전자, 칼집 딸린 칼을 얹었다. 양식 자루 안에는 병원 직원에게서 구입한
말린 비스킷, 옥수수 가루,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 한 덩어리, 말린 쇠고기 등이 들어 있었다.
인만은 창가에 앉아 저물어 가는 하루를 지켜봤다. 그것은 차분하기보다 어수선한 일몰이었다.
끝없는 지평선 위로 회색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으나, 지평선에 닿은 태양은 구름 사이사이로 뜨
겁게 달구어진 히커리 석탄 색깔의 햇살을 내비치고 있었다. 소총 총신처럼 가장자리가 딱딱한
관 모양의 햇살이 5분 정도 하늘 위로 솟아오르다 이내 사라졌다.
인만도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자연은 이따금씩 매혹적인 장관을 펼쳐 보이며 그 의미
를 해석해 보라고 요구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아무리
좋게 봐도 투쟁, 위험, 슬픔 같은 것들의 징조로밖에는 해석할 수 없었다.
인만은 그런 징조를 애써 떠올릴 필요는 없다는 생각과 함께 쓸데없이 기운을 낭비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침대로 올라가 이불을 덮었다. 하루 종일 시내를 돌아다니느라 피곤했던지,
잠시 책을 읽다가 아직 햇살이 남아 있는 어스름 녘에 잠이 들었다.
그는 한밤중에 눈을 떴다. 방안은 어두컴컴했고, 주위 사람들이 숨을 쉬고 코를 골며 뒤척이는
소리만 들렸다. 창문 틈새로 아주 희미하게 빛이 스며들었고, 서쪽의 지평선 속으로 저물어 가는
목성이 약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창문 틈새로 바람이 새어 들어오자 죽은 밸리스가 남긴 종이들
이 테이블 위에서 펄럭였고, 그중 몇 장이 창문 틈새로 비친 희미한 빛을 하얗게 되비치고 있는
모습이 마치 무슨 꼬마 유령처럼 보였다.
인만은 자리에서 일어나 새옷으로 갈아입었다. 바트램이 쓴 책을 배낭에 넣어 단단히 묶고는
활짝 열려 있는 커다란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봤다. 하늘에는 그믐달이 걸려 있었고 사위는 어
두웠다. 땅 위에는 안개가 띠 모양으로 드리워져 있었지만 머리 위의 하늘은 맑았다. 인만은 창틀
을 밟고 올라서서 밖으로 발을 내딛었다.
2.양손으로 땅을 짚고
아다는 이제 자기 집이 된 현관에서 무릎위에 간이 책상을 올려놓은 채 안자 있었다. 그녀는
펜촉에 잉크를 적셔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이 사실만은 알아주세요. 아무리 오랫동안 헤어져 있더라도, 우리 두 사람의 행복한 만남을 상
징하는 햇빛이 그렇듯이, 저는 당신께 제 생각을 하나도 숨기지 않을 거예요, 그런 두려움 때문에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우리 두 사람 다 솔직하고 숨김 없는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우리, 가슴을 열고 이야기를 나눠요.
아다는 후후 불어 잉크를 말린 후에 써놓은 글을 꼼꼼히 훑어봤다. 글씨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물 흐르듯 부드럽게 쓸 수가 없었다. 그녀의 손이 빚어내는 글씨는 룬
문자 처럼 뭉툭하고 빽빽했다. 글씨도 글씨지만, 편지 내용이 더 마음에 안 들었다. 아다는 편지
를 꾸깃꾸깃 구겨서 회양목 덤불 속으로 던져 버렸다. 그리고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이건 현실과는 전혀 상관도 없는, 말만 그럴듯하게 꾸며대는 사람들이나 쓸 만한 편지야."
아다는 마당 너머에 있는 텃밭을 쳐다봤다. 완연한 수확기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콩, 호박, 토마
토 열매는 아직 소녀의 엄지손가락 크기 정도였다. 줄기에 달려 있던 이파리들은 대부분 벌레나
해충들이 갉아먹었다. 이름도 모를 잡초들이 야채들 사이로 무성히 자라 있었지만 뽑을 힘도 나
지 않았고 그럴 기분도 아니었다.
엉망이 되어 버린 텃밭 너머로 보이는 오래된 옥수수밭에는 옥수수가 자리공나무와 옻나무 어
깨만큼 자라 있었다. 아침 안개가 걷히고 나자 들판과 목초지 위로 산들이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
했다. 지평선에 발을 딛고 서있는 희미한 모습이, 실제 산이라기보다는 산에 살고 잇는 유령들 같
았다.
아다는 자리에 앉은 채로 산들이 또렷하게 보일 때가지 기다렸다. 본연의 모습 그대로 간직하
고 있는 풍경을 볼 수 있다면 안심이 될 것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눈에 보이는 모든 풍경에서
게으른 흔적이 느껴지는 것 같아 괴로웠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른 이후로 아다는 농장을 거의 관리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암놈인지 숫놈
인지도 구별하지 않고 그냥 왈도라는 이름을 지어붙인 암소의 젖을 짜고 랄프라고 이름을 지어
붙인 말에게 여물을 먹이기는 했지만, 그 이상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보살피지 못한 채
방치된 닭들은 나날이 여위어 가며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암탉들은 비좁은 닭장을 빠져 나와 나무 위로 올라가 앉았고, 기분 내키는 대로 알을 낳았다,
한곳에 머물러 있지 않는 이 암탉들 때문에 아다는 짜증이 났다. 정원의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져
야 가까스로 알을 찾을 수가 있었고. 사료를 못 먹게 된 닭들이 벌레들을 쪼아먹게 된 다음부터
는 달걀 맛도 이상해진 것 같았다.
아다에게는 요리가 커다란 골칫덩어리였다. 여름 내내 우유, 달걀 프라이, 샐러드 그리고 돌보
지 않아서 온통 잡초투성이가 된 텃밭에서 캐낸 조그만 토마토밖에 먹지 못했기에 늘 배가 고팠
다. 심지어 버터도 만들 수 없었다. 아무리 힘들여 우유를 너어도 엉긴 액체 상태를 벗어나지 못
했기 때문이다. 닭고기와 푸딩, 또는 복숭아 파이를 먹고 싶어도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아다는 저 멀리 아직도 희미하게 서 있는 산들을 다시 한 번 쳐다보다가 달걀을 찾으러 나섰
다. 정원 울타리를 따라 자라난 잡초속과 옆뜰의 배나무 발치에 있는 길다란 풀숲도 뒤졌고, 난장
판이된 뒤쪽 현관도 뒤졌으며, 헛간에 있는 먼지투성이 선반 사이에도 손을 쑤셔 넣어 보았다. 아
무것도 없었다.
요즘들어 붉은 암탉이 계단양쪽에 있는 커다란 회양목 근처를 어슬렁거릴 때가 있었다는 게 생
각났다. 아다는 편지를 던진 덤불로 달려가 빽빽한 이파리를 젖혀 가며 안을 들여다봤지만, 어두
컴컴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다는 치마를 다리 주위에 단단히 감고는 덤불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회양목 가지에 팔과 얼굴, 목을 긁혔다. 양손으로 짚고 있는 땅은 팍팍했고, 닭털과 오래된 닭똥,
썩어가는 낙엽들로 어수선했다. 안쪽에는 뻥 뚫린 공간이 있었다. 밖으로 드러난 무성한 잎사귀들
은 작은 방처럼 생긴 이 공간을 에워싸고 있는 벽인 셈이었다.
아다는 그 자리에 주저앉은 채 땅바닥과 가지 사이를 둘러보며 달걀을 찾았지만 톱니 모양으로
깨진 달걀 껍질과 그 속에서 누렇게 말라 비틀어진 노른자밖에 없었다. 아다는 두 개의 나뭇가지
사이에 앉아 등걸에 몸을 기댔다. 회양목 그늘에서 먼지 냄새와 퀴퀴한 닭 냄새가 났다.
희미하게 내리쬐는 빚을 보자. 어렸을 때 테이블 위에 천으로 덮는다든가 빨랫줄 위로 카펫을
널어서 동굴을 만들며 놀던 일이 떠올랐다. 그중 최고 걸작은 사촌 루시와 함께 삼촌 농장에 있
는 건초 더미 깊숙이 들어가 있는 여우들처럼 아늑하고 뽀송뽀송한 터널 속에 몸을 숨긴 채 비밀
을 속삭이곤 했다.
그때처럼 이 안에 숨어 있으면, 대문을 자나 현관으로 다가오는 사람이 잇더라도 그녀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자. 기분좋은 설레임이 느껴지면서 호흡이 가빠졌다. 교
회의 여신도가 잘 지내고 있는지 확인하러 누군가 찾아 온다 해도, 이름을 부르고 현관을 노크하
는 소리를 들으면서 꼼짝 앉고 앉아 있을 수 있을 것이었다. 대문 걸쇠가 찰칵 닫히는 소리가 들
리고 나서 한참 후까지도 숨어 있을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찾아올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같
았다. 그녀의 무관심한 태도 때문에 찾아오는 사람들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었다.
아다는 이파리 사이로 비치는 연푸른 하늘 위로 희미하게 떠 있는 구름을 실망스런 눈으로 쳐
다봤다. 비라도 내리면 머리 위에서 잎사귀들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보호받고 있는 듯한
기분을 좀더 만끽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쩌다 이파리 사이를 뚫고 빗방울이 떨어져 먼지
위에 작은 분화구를 만들면, 밖에서는 엄청난 폭우가 몰아쳐도 이 안에서는 비를 피할 수 있다는
사실이 더 실감날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요즘들어 아다는 최근 지내온 날들을 돌이켜보며, 인간의 생존 능력이 얼마나 위대하지 놀랐기
에 이 안식처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아다는 찰스턴에서 성장했고, 아버지 먼로의 고집으로 다른 여성들보다 휠씬 많은 교육을 받았
다. 그녀는 아버지의 지적 동반자 이자 활발하면서도 세심한 딸로 자라났다. 예술과 정치와 문학
에 대해 풍부한 지식을 갖고 있었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충분히 표현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과연 어떤 실용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떤 방면에 소질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프랑스어와 라틴어에 능통, 그리스어 약간, 꽤 괜찮은 바느질 솜씨, 그리
뛰어나지는 않지만 들어줄 만한 피아노 연주, 연필로든 수채화 물감으로든 풍경과 사물을 정확히
묘사할 수 잇는 능력, 그리고 폭넓은 독서량. 이런 것들이 그녀를 칭찬할 때 얘기할 수 있는 그녀
의 재능들이었다.
하지만 거의 300에이커에 달하는 땅, 집 한 채, 헛간 하나, 여러채의 별채둘울 거느리고 있지만
어떻게 관리해야 할지 전혀 모르는 현재 상황에서, 실생활에 쓸모 있는 재능이라곤 하나도 없었
다. 피아노를 치면 기분이 좋기는 했지만, 어린 콩을 한 줄 뽑으면 그중 절반이 두드러기쑥이라는
사실에서 느끼는 절망감을 보상해 줄 정도는 아니었다. 음식을 만들 줄 알았더라면 지금 이런때,
화법의 원리에 대한 지식보다 훨씬 더 쓸모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후회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평생 동안 아버지는 그녀에게 힘든 일을 하지 못하게 했다. 항상 노예해방된 흑인이라
든가 성품 좋은 백인 소작농 등 시기 적절하게 사람을 고용했는데 혹인 노예를 쓸 경우에는 그
임금을 주인에게 지불했다.
아버지가 산속에서 선교활동을 벌이던 지난 6년 동안, 배인 남자와 체로키 인디언의 피가 절반
섞인 여자 부부가 살림을 도맡았기 때문에 아다는 일주일 식단을 짜는 것 외에는 할 일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항상 남아 도는 시간에 책을 읽고 바느질을 하며 그림을 그리거나 음악을 연주하
며 보냈다.
하지만 그 부부는 떠나 버렸다. 그 남편은 남부가 연방에서 탈퇴한 것을 못마땅해했고, 전쟁이
발발한 후 얼마 동안은 자원 입대하지 않아도 될 만큼 자신의 나이가 많은 게 다행이라고 여겼
다. 하지만 버지니아에 주둔하던 남군의 병력이 한참 부족하던 해 봄에는 자기도 언젠가 강제 징
집될지도 모르겠다며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그 부부는 모든 일을
아다에게 떠넘겨 놓은 채 한밤중에 말도 없이 산 너머 북군에게로 도망쳤다.
그때부터 아버지가 생계 수단이라기보다는 이종의 이상향처럼 운영해 오던 농장에 혼자 남게
된 아다는 살림을 꾸려 나갈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는 끔찍한 사실을 깨달았다. 아버지는
농사일 중에서 힘들 일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사료용 옥수수와 음식을 살 돈이 있는데 뙤약볕
아래서 땀 흘려가며 농사 지을 필요가 있느냐, 베이컨과 고기를 살 돈이 있는데 귀찮게 돼지를
키워야 하느냐는 것이 아버지의 생각이었다.
한 번은 아버지가 일꾼에게 양을 열 마리 정도 사서 암소와 함께 앞마당 아래쪽 목초지에 풀어
놓으라고 지시하는 걸 본 적이있다. 그 남자는 암소와 양을 섞어 놓으면 풀을 잘 먹지 못한다며
반대했다. 그는 양을 키우려는 이유가 털 때문인지 고기 때문인지 묻기도 했다. 아버지는 분위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사람이 분위기를 먹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회양목이, 언젠가는 필요해질
피난처 처럼 느껴졌다. 아다는 적어도 세 가지 이상 이유가 생각나기 전에는 덤불 속에서 나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몇 분간 생각해 봐도 이유가 단 한 가지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회양목
덤불 속에서 죽을 수는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바로 그 순간 붉은 암탉이 조금 펼친 날개를 먼지 위로 질질 끌면서 이파리를 헤치고 나타났
다. 암탉은 아다의 머리 바로 옆에 있는 나뭇가지 위로 펄쩍 올라가더니 꼬꼬댁 하며 울어댔다.
바로 뒤이어 성질이 너무 사나워서 아다가 늘 무서워하던, 검은색과 황금색 털이 섞여 있는 수탉
이 따라 나왔다.
그 수탉은 암탉의 뒤를 따라가려다가 뜻밖에도 아다를 만나자 놀랐는지 잠시 움찔했다. 그러더
니 고개를 갸우뚱하며 번들거리는 검은 눈으로 아다를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서
서 땅바닥을 긁었다.
수탉은 노란색 다리의 주름 사이에 있는 먼지가 보일 정도로 가까운 곳에 서 있었다. 호박색
며느리발톱이 손가락만큼이나 길었다. 머리와 목덜미에 있는 황금색 깃털이 부풀어오르자, 마치
마카사르기름을 바른 것처럼 번들거렸다. 수탉은 몸을 부르르 떨며 깃털을 원래 상태로 되돌려
놓았다. 검은색 몸통에서 물 위에 뜬 기름처럼 청록색 윤기가 흘렀다. 노란색 부리가 열렸다 닫혔
다 했다.
'저놈 무게가 150파운드만 됐어도, 아마난 이 자리에서 죽었을 거야' 하고 아다는 생각했다. 소
녀는 무릎을 꿇은 채 자세를 바꾸고 손을 흔들며 "훠이" 하고 외쳤다. 그러자 수탉은 아다의 얼굴
을 향해 달려들면서 며느리발톱이 앞으로 나오고 날갯죽지가 뒤를 향하도록 허공에서 몸을 비틀
었다. 아다는 공격을 막으려고 손을 내저었다가 며느리발톱에 손목을 긁혔다.
아다의 손에 맞은 수탉은 땅 위로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서서 날개를 퍼덕거리며 아다 쪽으로
다가왔다. 아다가 게처럼 기어서 덤불 밖으로 빠져 나오려고 하자 수탉이 며느리발톱으로 치맛자
락을 할퀴었다.
아다는 젖먹던 힘을 다해 덤불 속에서 빠져 나와 일어서서 달렸다. 수탉은 무릎 언저리께에 매
달린 채 종아리를 쪼았고, 나머지 한쪽 다리에 달려 있는 며느리발톱으로 계속해서 공격하면서
날개로 때렸다. 그녀는 손을 여러 번 휘둘러 수탉을 떼어 낸 후에 집 안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팔걸이 의자에 앉아 상처를 살펴봤다. 손목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핏자국을 닦아 내
고 보니 다행히도 약간 긁힌 정도 였다. 치마는 먼지 투성이인데다 닭똥이 여기저기 묻어 있었고,
세군대나 찢겨 있었다.
아다는 치마를 올리고 다리를 살펴봤다. 군데 군데 긁히고 물린 자국이 있었지만 피를 흘릴 정
도로 깊은 상처는 없었다. 덤불에서 빠져 나올 때 긁힌 얼굴과 목이 따끔거렸다. 머리는 온통 헝
클어져 있었다.
"이 지경까지 왔구나, 달걀 하나를 찾는데도 이런 대가를 치러야 하는 세상에 살게 됐다니"
자리에서 일어난 아다는 2층에 있는 자기 방으로 가서 옷을 벗었다. 대리석 세면대에 주전자에
있던 물을 붓고, 라벤다 비누 조각과 수건으로 몸을 씻었다. 머리에 묻어 있던 회양목 이파리를
손으로 털어 낸 뒤 머리카락을 어깨 아래까지 풀어 내렸다. 머리를 양갈래로 모아 사냥개 귀처럼
양쪽에 동그랗게 말거나 진흙투성이가 된 말꼬리처럼 뒤쪽으로 바짝 묶는게 유행이었지만, 두 가
지 모두 포기한지 오래였다. 이제는 그렇게 정성을 들일 필요도 없었고, 그럴 기운도 없었다. 일
주일, 혹은 열흘 동안 사람을 만나지 않을 때도 있었기 때문에 정신나간 여자처럼 보인다 해도
상관없었다.
아다는 서랍장을 열고 깨끗한 속치마를 찾았지만 며칠 동안 세탁을 하지 않아서 남아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쌓아 놓았던 옷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방금 벗어 던진 옷보다 깨끗해졌을지도 모
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지저분한 옷 더미 밑 부분에서 린넨 옷을 꺼내 입었다. 그 위에 좀 깨끗한
드레스를 입으면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남아 있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를 걱정했다.
전에는 하루를 어떻게 하면 즐겁게 혹은 보람있게 보낼 수 있을가를 생각했는데, 지금은 고작
어떻게 또 하루를 견딜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변한 건지 아다는 생각해
보았다.
뭔가를 하고 싶다는 의욕은 거의 사라져 버렸다. 아버지가 돌아 가시고 나서 한 일이라곤 아버
지의 물건과 옷과 서류를 정리한 것밖에 없었다. 장례식을 치르고 난 후 오랫동안 아버지의 방
안에 들어간다는 사실조차 두렵고 무서웠다. 하지만 그동안 절벽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사람처
럼 방문 앞에 서서 안을 들여다보기는 했다. 세면대 옆 주전자에 담겨 있던 물은 저절로 없어졌
다.
마침내 용기가 생기자 아다는 방 안으로 들어가 침대 위에 앉아서 눈물을 흘리며 흰색 고급 셔
츠와 검은색 정장, 바지를 곱게 접었다. 아버지가 남긴 설교문, 식물에 대한 기록, 평범한 글 등은
종류에 따라 분류한 뒤 이름표를 붙인 상자 안에 넣었다. 하찮은 일을 하게 될 때마다 아버지의
죽음을 또다시 슬퍼했고, 허무한 날들이 흘러갔다. 침대에 누워 오늘 뭘 했는가를 가만 생각해 보
면 정말 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나날이 이어졌다.
아다는 테이블 위에 있던 책을 집어들고 2층 거실로 나가 아버지의 침실에서 꺼내 온 푹신한
의자에 앉아,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잘 받을 수 있도록 자리잡았다. 비가 자주 내렸던 지난
석 달동안은 날씨가 우중충해서 그녀는 7월에도 으슬으슬 느껴지는 한기를 막기 위해 의자에 앉
아서 담요로 몸을 감싸고는 책을 읽었다.
그녀가 읽는 책은 대부분이 현대 소설이었다. 지난 여름 동안 아버지의 서재에서 이것저것 손
에 잡히는 닥치는 대로 읽었다. 로렌스의 검과 제복 따위의, 읽고 나서 하루만 지나면 내용을 잊
어버리는 시시한 소설들이었다. 그러나 좀더 유명한 책을 읽다 보면 소설 속 여주인공들이 겪는
가혹한 운명 때문에 슬픔이 깊어지기만 했다. 불쌍한 검은머리 여자가 잘못을 저질러 벌을 받고
쫓겨나는 것으로 생을 마감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라 한동안 책장에서 책을 꺼내기가 무섭기도 했
다.
플로스의 방앗간 을 시작으로 나타니엘 호손의 얇고 골치아픈 내용의 작품까지 단숨에 읽어 내
려갔다. 아버지도 다 읽지 않은 책인지, 3장 이후부터는 책장이 서로 붙어 있었다. 아버지는 이
책이 지나칠 정도로 음울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 듯했지만, 아다로서는 앞으로 다가올 세
계에 대해 미리 준비를 할 수 있게 하는 책이었다. 그렇긴 해도 그녀만큼 궁핍한 생활을 하는 주
인공은 한 명도 없었다.
처음엔, 앉아서 책을 보던 그 자리가 좋았던 이유는 그저 그 자리에 편안한 의자가 있었고 볕
이 잘 든다는 이유 정도였다. 그러나 여러 달 동안 서글픈 내용의 소설들만을 읽으며 지내다 보
니 그 자리에서 창문을 통해 보이는 풍경이 마음의 위안을 주었다.
침울한 내용으로 가득 찬 책으로부터 고개를 들면 창문 너머로 젋은 들판과 안개 낀 산등성이
들을 따라 그 한가운데 우뚝 솟아있는 웅장하고 푸른 콜드 마운틴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의
자에서 바라본 창밖의 모습은 현재 아다의 처지와 비슷한 점이 많았다.
여름 내낸 콜드 마운틴과 주변의 분위기는 어둡고 음울할 때가 많았다. 창문 너머로 불어 들
어오는 젖은 바람에는 뭔가 썩어 가는 냄새와 새로이 자라나는 냄새로 가득 찼고, 밖을 내다봤을
때도 마치 망원경으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물체를 볼 때처럼 희미하기만 했다.
공기는 습기를 잔뜩 머금어 질이 안 좋은 렌즈처럼 거리와 높이를 왜곡하며 모양을 늘리거나
확대하고 줄여 놓았으며, 시시각각 눈을 어지럽게 했다 창문을 내다보면 습기의 여러 가지 형태
를 모두 볼 수 있었다. 엾은 아지랑이, 골짜기에 드리워진 자욱한 안개, 콜드 마운틴의 어깨자락
에 행주처럼 늘어져 있는 누더기 구름, 하늘에부터 늘어져 내려온 삼실마냥 하루 종일 일직선으
로 퍼붓는 회색비.
구름이 잔뜩 낀 굴곡진 이 땅을 좋아한다는 건 아주 어렵고 미묘한 일이었다. 저 멀리 바닷바
람에 이 파리를 흔들고 있는 야자수를 배경으로 서 있는 하얀색 대저택을 옆에 끼고 섬터 요새가
보이는 배터릴 거리를 저녁 무렵에 산책하면서 찰스턴의 잔잔한 바람 소리를 감상하는 것보다 훨
씬 어렵고 복잡했다. 찰스턴에 비해, 이 비탈진 풍경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더 시끄럽고 무뚝뚝했
다. 골짜기와 산등성이, 산봉우리는 꽁꽁 닫혀 있어서 이해할 수가 없었고, 몸을 숨기기에나 알맞
은 곳처럼 보였다.
지금 아다가 들고 있는 책 역시 아버지의 서재에서 꺼내 온 것으로, 심스라는 사람이 쓴 서부
개척지의 모험극이었다. 심스라는 작가는 찰스턴 사람이고 아버지의 친구여서, 에디스토에 있는
농장에서 지내다 가끔 찰스턴을 방문할 때 아다도 그를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아다가 그를 기억
하고 있는 이유는 찰스턴에서 살고 있는 그녀의 친구가 보낸 편지에서 얼마 전 아내가 세상을 떠
나 그가 몹시 슬퍼하고 있다는 소식이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친구는 그가 진정제로 겨우 연명하
고 있다고 했는데, 그녀는 이 말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아다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내용은 재미있었지만, 머릿속에서 끼니 문제에 대한 걱정이 떠나질
않았다. 달걀을 찾는 거도 헛수고 였고, 시계는 벌써 정오 가까이를 가리키고 있는데 아직 아침도
먹지 못했다. 그녀는 몇 페이지를 더읽다가 책을 호주머니에 넣고 부엌으로 들어가 먹을 게 없는
지 식료품 저장실을 뒤졌다. 거의 두 시간에 걸쳐 오븐에 보리빵을 만들어 봤다.
마침내 오븐에서 나온 빵은 엉망으로 만든 커다란 비스킷 같았다. 가장자리는 크래커처럼 딱딱
했고 나머지 부분은 눅눅하면서 밀가루 냄새가 났다. 아다는 조금씩 뜯어먹다가 포기하고는 닭이
나 쪼아먹도록 마당에 던져 버렸다. 점심으로는 작은 토마토와 잘게 썰어서 식초에 절여 소금을
뿌린 오이만 먹었다. 거의 아무것도 먹지 않은 것과 다름없었다.
아다는 지저분한 접시와 포크를 테이블 위에 그냥 내버려둔 채, 소파 속에 구겨져 있던 숄을
펴서 어깨에 둘렀다. 그리고 현관 쪽으로 걸어가 밖을 내다봤다. 안개로 푸른 하늘색이 엷고 희미
하게 보이긴 했지만, 구름은 한 점도 없었다. 헛간 옆에 검은색과 황금색 털이 섞인 수탉이 서성
거리고 있었다. 그 닭은 땅을 발톱으로 긁어 그곳을 부리로 쪼다가 다시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아다는 집을 나와 오솔길을 걸었다. 요즘엔 지나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어 오솔길 한가운데 까
실쑥부쟁이와 뚝새풀이 웃자라 있었다. 길 양쪽에는 노란색과 주황색의 조그만 꽃모양 풀들이 늘
어서 있었다. 아다는 꽃을 꺾어 자세히 들여다보고 나서 씨를 털었다.
"똑딱풀이구나."
그녀는 이름을 알고 있는 풀이 하나라도 있다는 게 기뻐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 이름 역시 자
신이 마음대로 지은 것이었지만.
아다는 오솔길을 1마일 정도 걸어가다가 블랙 코브 농장을 지나 강가로 뻗은 길로 접어들었다.
걸어가면서 봉망초, 맷두릅, 기생초, 만병초 등 야생화를 눈에 보이는 대로 꺾어 꽃다발을 만들었
다. 강에 이르자 상류 쪽에 있는 교회를 향해 걸어갔다.
이 길은 많은 사람들이 지나 다니는 통행로였기 때문에 마차 바퀴 자국으로 홈이 패여 있었고
여기저기가 푹 꺼져 있었다. 마, 소, 돼지 같은 것들이 지나가는 바람에 패인 곳엔 시커먼 진흙이
있었고, 그 옆으론 부츠가 빠지지 않도록 빙 돌아간 사람들의 발자국이 나 있었다.
길가에 서 있는 나뭇가지들은 늦여름의 마지막을 알리는 이파리들 때문에 몸이 무거워 보였다.
계속 성장하느라 지쳤는지 축 처진 모습이었다. 여름 내내 내린 많은 비로 길가를 따라 흐르는
검은 강물이 부드럽게 넘실거릴 정도였기 때문에, 날이 가물어서 그런 것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15분 후 아다는 아버지가 관리하던 작은 교회에 도착했다. 찰스턴에 있던 근사한 석조 건물과
비교해 보면, 건축상으로는 지극히 단순한 구조의 새덫만큼이나 간단했지만 우뚝 솟은 널판 지붕
이며 길이, 넓이, 높이, 단순한 뾰족탑의 위치 등 비례면에서는 아주 아담하고 우아했다. 말년엔
단순한 것을 좋아한 아버지는 기하학적으로 엄격하게 만든 이 교회를 무척이나 아꼈었다. 아다와
함께 강을 따라 교회로 걸어갈 때면 아버지는 하느님께서 이 지방에 바로 이런 모습으로 찾아오
셨다고 했다.
언덕을 올라간 아다는 교회 뒤쪽에 있는 묘지로 다가가서 아버지의 무덤 앞에 섰다. 잔디가 아
직 자라지 않아 검은흙이 듬성듬성 보였다. 비석도 없었다. 강가에서 주운 매끈한 돌이나 참나무
로 만든 널빤지에 이름과 날짜를 기록하는 이 지방 풍습이 싫었기 때문에 시내에서 화강암을 조
각해 만든 비석을 주문했는데, 도착이 늦어졌다. 아다는 무덤 앞에 새 꽃다발을 내려놓고는 예전
에 놓고 갔던, 이젠 시들어 흐물흐물해진 꽃다발을 치웠다.
아버지는 5월에 돌아가셨다. 그날 오후, 아다는 수채화 물감과 종이를 들고 개울 아래쪽으로 가
서 새 꽃망울을 활짝 피운 철쭉나무를 그릴 생각이었다. 집을 나서기 전, 배나무 아래 줄무늬 캔
버스 천으로 된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아버지에게 가보았다.
아버지는 지친 모습으로, 한 페이지를 다 읽기도 전에 잠이 들 것 같다면서 축축한 저녁 공기
를 마시며 자고 싶지 않으니까 돌아오면 깨워 달라고 말했다. 이제는 이렇게 푹 꺼진 의자에서
혼자 일어설 수 없는 나이가 된 것 같다는 말도 했다.
아다는 한 시간도 안 되는 동안 나가 있었다. 들판을 걷다가 돌아와 봤더니 아버지는 편안한
자세로 누워 있었다. 아버지가 입을 벌린 체 자고 있는 것 보자 코를 골고 있다고 지레 짐작간
아다는 저녁 식사 때 그렇게 단정치 못한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 줄 수 있느냐며 놀려야겠다
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니 아버지는 눈을 뜨고 있었고 책은 풀밭에 떨어져 있었다. 아다가 남
은 세 걸음을 단숨에 달려가 아버지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지만, 이미 숨이 끊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손으로 느껴지는 감촉에 전혀 생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다는 산등성이를 가로지르는 지름길을 거쳐 강가로 나 있는 길을 뛰다시피 해서 스왱거 부부
의 농가로 갔다. 그 길로 가면 스왱거 부부네 종가가 가장 가까운 집이었다. 그들은 아버지가 세
운 교회의 신도들로, 이 산으로 왔던 때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아다는 숨을 헐떡이며 눈물 범벅이 된 얼굴로 이 집에 도착했다. 에스코 스왱거가 2륜 마차를
끌고 아다와 함께 멀리 돌아가는 길로 나서기 전부터 서풍이 불고 있었다. 아다가 집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주위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고, 아버지는 온몸이 축축히 젖어 있었으며, 얼굴 위엔 말
채나무 꽃잎들이 떨어져 있었다. 아다가 배나무 밑에 떨어뜨렸던 수채화는 분홍색과 녹색이 뒤섞
인 추상화로 변해 있었다.
아다는 그날 밤을 스왱거 부부 집에서 보냈다.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고, 이리저리 뒤척이며 아
버지보다 내가 먼저 세상을 떠나고 자식들이 그 뒤를 잇는 게 자연의 섭리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도 슬픔은 가시지 않았다. 그 순서대로라면, 섭리에 따른 사람들은 늘 고아가 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틀 후, 아다는 피존 강 리틀 이스트 지류 위쪽 야산에 아버지를 묻었다. 아침 햇살은 따스했
고 콜드 마운틴에서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에 온 세상이 흐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여느 때와는
달리 습기가 거의 없어 모든 사물의 색과 모양이 그럴 수 없이 또렷하게 보였다.
검은색 옷을 차려입은 마흔 명의 사람들이 교회를 가득 메웠다. 설교단 앞쪽 단상 위에는 뚜껑
이 열린 관이 놓여 있었다. 아버지의 얼굴은 숨을 거둔 이후 축 늘어져 버렸다. 힘이 없는 피부에
뺨과 눈동자 부분이 푹 꺼졌고, 살아 있었을 때보다 코가 더 날카롭고 길게 보였다. 한쪽 눈꺼풀
이 살짝 열려 있어서 흰자위가 희미하게 보였다.
아다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고개를 숙이며 통로 건너편에 앉아 있던 남자에게 뭐라고 말을 건
넸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머니를 짤랑거리더니 갈색 동전 두 개를 꺼냈다. 그러고는 아버지
의 양쪽 눈에 동전을 하나씩 올려 놓았다. 열린 쪽 눈만 가리면 장난으로 그런 것처럼 보이고, 해
적처럼 보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부근 지역에 같은 교파의 정식 목사도 없었고, 이 지방 침례교 목사들은 하나님의 인내심과 자
비심에도 엄연히 한계가 있다는 교리를 거부해 온 아버지를 못마땅히 여겨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
에 장례식은 단출하게 진행되었다.
실제로 아버지는 하나님이 우리와 같은 존재도 아니고, 흰 옷이 피투성이가 될 정도로 인간을
무자비하게 짓밟는 변덕스러운 분도 아니며, 잘난 사람이든 못난 사람이든 똑같이 가엾게 여기시
는 분이라고 설교를 했었다.
그래서 교회 신도들의 조사로 장례식을 치르는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한 사람씩 쭈뼛쭈뼛
설교단 위로 올라가, 모인 사람들 특히 여성 신도석 제일 앞줄에 앉아 있는 아다와 눈이 마주치
지 않도록 턱을 가슴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장례식 전날, 숫오리의 머리를 덮고 있는 깃털처럼 암녹색으로 염색을 한 아다의 상복은 아직
도 염색약 냄새가 났다. 온몸이 싸늘하게 얼어 버릴 것만 같은 슬픔 때문에 얼굴은 백짓장처럼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사람들은 떠듬떠듬 먼로의 위대한 가르침과 본받을 만한 점에 대해 이야기를 늘어 놓았다. 찰
스턴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이 마을을 밝게 비췄다고 말 했다. 먼로의 친절과 현명한 가르침에 대
해서도 이야기 했다. 에스코 스왱거도 그들 중 한 사람이었는데, 다른 사람들처럼 긴장하기는 했
어도 훨씬 분명한 태도로 말했다. 아다가 아버지를 잃다니 끔찍한 일이고, 찰스턴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 버리면 많이 보고 싶을 거라는 이야기도 했다.
이야기가 끝난 후 사람들은 무덤 가에 모여, 남자 신도 여섯 명이 교회에서 메고 온 관이 묻히
는 광경을 지켜봤다. 관이 밑바닥에 닿자 또 다른 남자 함 명이, 먼로는 열정적이었고 교회와 마
을을 위해 끊임없이 봉사를 했으며 죽음이라는 영원한 잠에 빠져들게 되어 슬픔을 금할 수 없다
는 마지막 기도문을 읊었다. 그남자는 마치 이 간단한 의식 속에서,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과 이 자리를 교훈으로 삼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라도 한 듯한 엄숙한
표정이었다.
사람들은 관 위로 흙이 덮이는 모습을 서서 지켜봤다. 하지만 그 절차가 절반쯤 진행되었을 때,
아다는 더 이상 볼 수가 없어 고개를 돌려 구불구불한 강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동그랗게 봉
분이 완성되자 사람들은 모두 자리를 떠났다. 샐리 스왱거가 아다의 팔을 잡고 언덕 아래로 끌고
왔다.
"찰스턴으로 돌아갈 준비가 될 때까지 우리랑 함께 있자."
아다는 걸음을 멈추고 샐리를 쳐다봤다.
"지금 당장은 찰스턴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어요."
"저런, 그럼 어딜 가려고?"
"블랙 코브 농장이요. 당분간은 거기 있겠어요."
샐리는 아다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어떻게 지내려고?"
"잘 모르겠어요."
"오늘은 그 어두컴컴한 큰 집에서 혼자 있을 수 없을 거야, 그러니까 우리랑 점심을 먹고, 기운
을 차릴 때까지 함께 있자."
"고맙습니다. 아줌마."
아다는 스왱거 씨 집에서 3일 동안 있다가 텅 빈 집으로 돌아갔다. 석 달이 지나자 두려움은
어느 정도 사라졌지만, 새로운 생활이 쇠약해져 가는 몸을 이끌고 외로이 늙어 가는 미래의 모습
을 미리 보여 주는 것 같아 전혀 위안이 되지 않았다.
묘지를 떠나 언덕을 내려오던 아다는 강 위쪽으로 계속 걸어 지름길로 집에 돌아가기로 했다.
그 길로 가면 더 빠를 뿐만 아니라 도중에 우체국에 들를 수도 있었다. 또한 스왱거 씨 집을 지
나다가 점심을 얻어먹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도중에 아다는 불그레한 돼지 한 마리와 칠면조 두 마리를 몰고 가면서 이것들이 우왕좌왕할
때마다 버드나무 회초리로 때리는 할머니를 만났다. 뒤에서 삽을 든 채 구부정한 자세로 종종걸
음으로 뒤따라오던 한 남자가 앞질러 가기도 했다. 삽에는 뜨거운 석탄이 엉겨붙어 김을 뿜어 내
고 있었다. 그 남자는 씩 웃더니 계속 걸어 가면서 어깨 너머로, 불이 꺼졌기 때문에 불씨를 빌리
러 나왔다고 말했다.
또 무거운 삼베 자루를 밤나무 가지에 대롱대롱 매단 채 걷고 있는 남자와도 마주쳤다. 까마귀
세 마리가 나무꼭대기에 앉아 있었지만 물끄러미 내려다보기만 할 뿐 소리는 내지 않았다. 몸집
이 큰 그 남자는 부러진 괭이 자루를 먼지가 잔뜩 묻은 삼베 자루를 두들기며 욕을 해댔다. 마치
그 삼베 자루 때문에 그가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없다는 투였다. 괭이 자루로 내리치는 둔탁한 소
리와 그의 헐떡거리는 숨소리, 뭐라고 중얼거리는 소리, 먼지투성이 길을 밟고 있는 발이 움직이
며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다는 그를 그냥 지나쳤다가 다시 돌아가서 지금 뭘 하는 거냐고 물었다. 콩줄기를 까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루에 들어 있는 콩알 하나하나를 모두 증오한다고 했다.. 증오심 가득찬
마음으로 콩줄기를 막대에 감고 잡초를 뽑았으며, 증오심 가득 찬 눈으로 꽃이 피고 꼬투리가 맺
히는 걸 지켜봤다고 했다. 손가락에 닿을 때마다 저주를 퍼부으며 콩알을 땄고, 손에 마치 더러운
물건이 묻기라도 할 것처럼 잽싸게 버드나무 광주리 속에 집어 던졌다고 했다. 지금 이렇게 때리
는 것은 콩을 먹기까지의 과정 중 일부에 불과하다고 했다.
방앗간에 도착할 무렵에도 안개는 가시지 않았지만 숄을 두르기 에는 너무 더운 듯했다. 아다
는 숄을 벗어 돌돌 말아 겨드랑이 밑으로 쑤셔 넣었다. 물레방아가 돌아가며 방수로에 물을 쏟아
내고 있었다. 문에 손을 대자 물레방아, 기어, 전동 장치, 굴대, 회전 숫돌 때문에 온 방앗간이 진
동하고 있었다. 아다는 문 안으로 고개를 삐죽 들이밀고는 삐걱대는 기계소리보다 더 큰 소리로
외쳤다.
"픽 아저씨"
방앗간 안에서는 말린 옥수수 냄새와 오래된 나무 냄새. 떨어지는 물 냄새가 났다. 안은 어둑어
둑했고 작은 창문 두 개와 출입구를 통해 들어오는 빛이 옥수수 가루 사이를 비치고 있었다. 회
전 숫돌 뒤에서 방앗간 주인이 나오면서 손을 비비자 더 많은 먼지가 날렸다. 햇빛이 비치는 문
가로 다가온 그의 머리며 눈썹, 속눈썹, 팔뚝은 온통 뿌연 옥수수 가루투성이였다.
"편지 때문에 왔구나?"
그가 물었다.
"예, 혹시나 있을까 해서요."
그는 방앗간 옆에 어설프게 헛간 지붕을 얹어 만든 조그만 우체국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편
지 한 장을 들고 나와 앞뒤를 살펴 봤다. 아다는 편지를 주머니에 있던 심스의 책 사이에 끼워
넣고는 스왱거 씨 집으로 향했다.
에스코는 헛간 옆에 서서 허리를 구부린 채 쥐엄나무 가지를 깎아 만든 나무못을 손망치로 마
차 바퀴에 박고 있었다. 아다가 다가가자 그는 허리를 펴며 망치를 내려 놓고는 마차 지붕을 양
손으로 잡았다. 마차 지붕이나 손이나 색깔이나 거친 정도에서 별 차이가 없었다. 땀으로 셔츠가
흠뻑 젖어 있어 가까이 다가가자 젖은 질그릇 냄새가 났다. 에스코는 키가 크고 마른데다 머리가
작았으며, 푸석푸석한 회색 머리카락이 박새처럼 정수리 쪽으로 부스스 솟아 있었다.
그는 잠시 쉴 수 있는 핑계거리가 나타난 걸 매우 기뻐했고, 아다는 담장에 달린 문을 넘어 마
당으로 걸어갔다. 에스코는 담장을 마굿간으로 사용했는데, 따분해진 말들이 발길질을 해대는 통
에 뾰족했던 울타리 끝이 모두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마당에는 커다한 참나무 대여섯 그루와 우
물이 하나 있을 뿐, 덤불도 장식품 역할을 할 만한 꽃밭도 없어서 깨끗하다 못해 황량하기까지
했다.
사방에 물이 넘쳐나는 이 지방에서 우물은 보기 힘든 진기한 것이었지만, 이 부부는 "개울 없
는 골짜기" 라는 곳에 보금자리를 틀었기 때문에 우물을 만들어 놓을 수밖에 없었다. 집은 규모
가 컸고 한때 흰색 페인트가 칠해져 있었지만, 지금은 손바닥만하게 드문드문 페인트가 떨어져
나가 버려서 얼룩말처럼 보였다. 그나마 머지않아 온 통 회색으로 변할 게 뻔했다.
샐리는 현관에 앉아 콩을 꿰고 있었다. 서까래에는 이미 다섯 줄로 길게 걸린 콩들이 마르기만
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전체적으로 동그란 인상에 피부는 쉬 양초처럼 반짝반짝 빛났고, 회
색으로 바래어 가는 머리카락을 노새 등에 있는 줄무늬처럼 붉은색으로 물들였다.
에스코는 빈 의자를 아다에게 권하고 나서 집 안으로 들어가 다른 의자를 들고 나왔다. 그리고
는 콩껍질을 까기 시작했다. 점심은 먹었냐는 인사도 없었다. 약간 실망한 아다는 흐릿한 하늘을
올려다봤다가 태양의 위치를 보고는 벌써 늦은 오후라는 걸 알았다. 스왱거 부부는 이미 오래 전
에 점심 식사를 마쳤을 터였다.
세 사람은 잠시 동안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콩껍질 까는 소리와 샐리가 바늘에다 실을 꿰
어 콩 엮는 소리, 집안 선반 위에서 시계가 손등으로 상자를 두드리듯 또각또각 흘러가는 소리만
들렸다. 에스코와 샐리는 스스럼없이 함께 일했다. 콩이 담긴 광주리 안으로 동시에 손을 뻗다가
서로 손이 스치기도 했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천천히, 콩깍지가 마치 아주 조심스럽게 다뤄야
할 물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부드러운 손길로 일을 해나갔다.
두 사람은 자식이 있으면서도, 아이가 없는 부부처럼 늘 다정해보였다. 연애 기간을 끝낼 생각
이 없는 것 같았다. 아다는 두 사람이 잘 어울리는 부부라고는 생각했지만,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느껴지는 게 전혀 없었다. 늘 홀아버지와 함께 지내기만 해서 모범으로 삼을 만한 결혼 생활을
지켜본 적도 없었고, 부부가 매일 얼굴을 맞대고 사는 삶이 어떤지도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전황이 어두운 것 같다는 둥, 북쪽으로는 북군이 산을 넘어오고 있다는 등, 신문에 실린 피터스
버그 전투 기사가 믿을 만하다면 버지니아의 상황이 점점 악화되고 있는 것 같다는 둥, 첫 번째
화제는 전쟁 이야기였다. 에스코가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으면 농장을 꾸려 나갈 수 없는
나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다른 여러 가지 이유로도 전쟁이 하루 빨리 끝나서 아이들이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했
다. 스왱거 집안에서도 두 아들이 전투에 참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다는 둘 중 누구의 소식이라
도 들은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두 아들이 모두 몇 달째 소식이 끊겼고 지금 어느 주에
있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스왱거 부부는 처음부터 전쟁을 반대했고, 산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얼마
전까지도 북군의 입장에 동조하는 쪽이었다. 하지만 북군이 북쪽으로 이어진 큰 산맥의 자락까지
진군해 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에스코는 똑같이 무서워 했다. 북군들이 먹을 것을 달라며
찾아와 모든 걸 약탈해 가지는 않을까 걱정했다.
얼마 전 시내를 다녀왔는데, 커크 수하의 북군 병사들이 이미 주 경계선 부근에서 약탈을 시작
했다는 소문이 무성하더라고 했다. 어슴프레한 새벽 무렵에 농가를 습격해 가축은 물론 가져갈
만한 건 모두 빼앗고, 떠날 때는 옥수수 창고에 불까지 질렀다고 했다.
"그런 사람들이 해방군이라니, 하긴 우리 쪽도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아. 티그가 이
끄는 시민자위대가 약탈자들처럼 돌아다니면서 제멋대로 법을 집행하는데, 내 눈엔 입대하지 않
으려고 발버둥치는 쓰레기들로밖에 안 보이더라구."
시민자위대가 한 번은 점심 무렵에 어느 집의 식구들을 모두 마당으로 끌어낸 적도 있었다고
한다. 아이언 더프 근처에 사는 오웬스 집안 사람들이었다. 티그는 그 집안 사람들이 북군을 지지
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으며 "붉은 띠" 일당의 패거리가 아닌가 하는 의심도 가기 때문에, 감춰 둔
보물을 모두 몰수해야 한다고 했다. 그들은 집안을 샅샅이 뒤지고, 최근에 땅을 판 곳이 있나 마
당을 이곳저곳 칼로댔다.
그리고 처음에는 남편만 때리더니 나중에는 부인까지 때리기 시작했다. 사냥개들을 한 마리씩
목 매달아 죽여도 남편이 눈 하나 깜짝 않자, 부인의 양손 엄지손가락을 등뒤로 묶고 나서 그 끈
을 나뭇가지에 매달았다. 그러고는 발가락이 겨우 땅에 닿을 때까지 자아 당겼다. 그래도 남편이
한 마디 말도 없자 부인을 내려놓고 엄지 손가락 위에 뾰족한 울타리 끝을 올려놓았는데도, 남편
은 전혀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아이들은 계속 울음을 터뜨렸고 마침내 부인은 엄지손가락이 울타리 밑에 눌린 채, 남편이 전
쟁이 터지자 은식기 세트와 남아 있던 금붙이들을 숨겨 놨다고 소리질렀다. 어디에 숨겼는지는
모르지만 숨겼다는 건 확실하다고 했다.
부인은 처음엔 남편에게 털어놓으라며 빌다가 나중에는 시민자위대에게 살려 달라며 빌었다.
그래도 오웬스가 아무 말이 없자 부인은 시민자위대에게 죽는 광경이라도 볼 수 있게 남편을 먼
저 죽여 달라고 애원했다.
이때 시민자위대원 중 버치라는 금발 소년이 이제 그만 하고 떠나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지
만, 티그는 오웬스에게 총구를 겨누며 이렇게 말했다.
"빌 오웬스와 아내, 그리고 그들의 어린 자식 같은 인간들을 다루는 문제는 어느 누구의 지시
도 따르지 않겠다. 이런 인간들이 응분의 대가를 치르지 않는 마을에 사느니 차라리 북군 쪽으로
넘어가는 게 낫겠어."
"결국에는"
에스코가 끝맺음을 했다.
"아무도 죽이지 않았고 은도 못 찾았다는구나. 흥미를 잃고 그냥 떠나 버렸대, 부인은 그 자리
에서 오웬스에게 결별을 고하고는 아이들을 데리고 시내로 돌아와 오빠네 집에서 살고 있는데,
만나는 사람마다 이 이야기를 들려준단다."
에스코는 몸을 앞으로 숙여 무릎 위에다 팔꿈치를 얹고 양손을 축 늘어뜨린 채로 잠시 앉아 있
었다. 현관 바닥을 찬찬히 들여다 보거나 부츠 밑창이 얼마나 닳았나 살펴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다가 알기로 에스코는 발치에 침을 뱉고는 놀랍다는 표정으로 침이 떨어진 자리를 뚫어져라 쳐
다보는 버릇이 있었다.
"이 전쟁은 남다른 의미가 이지."
잠시 후 그가 입을 열었다.
"모든 인간의 땀방울에는 대가가 있는 법인데, 목화 농장주인들은 그 대가를 매일 훔치고 있잖
니, 언젠가는 그들도 자기 손으로 직접 망할 놈의 양털을 깎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겠
지. 난 그저 아이들이 돌아와 강가의 나즈막한 땅을 괭이로 갈고, 나는 현관에 앉아서 시계가 30
분이 지났다고 알려줄 때마다 잘한다! 하고 외쳤으면 좋겠구나."
샐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고말구요."
그걸로 전쟁에 대한 이야기는 끝난 듯했다.
다른 화제가 이어졌다. 아다는 에스코와 샐리가 이번 겨울은 여러 정황으로 봐서 유난히 추울
것 같다며 그 이유들을 말하자 귀담아 들었다. 회색 다람쥐가 도토리를 전에 없이 많이 모으려고
히커리나무 사이를 미친 듯이 뛰어다니고, 야생 사과에 밀랍이 잔뜩 묻어 있고, 모충들의 모뚱아
리 한가운데 널따랗게 검은색 띠가 보이고, 손으로 서양톱풀을 뭉개 보면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
처럼 서늘한 냄새를 풍기고, 산사나무에 핏빛처럼 새빨간 열매가 열린 다는 등등....
"다른 나쁜 조짐들도 있단다" 하고 에스코가 말했다. 그는 이지역 근방에서 불길한 조짐이 일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전했다. 카탈루치 근처에서 노새가 새끼를 낳았는데 사람 손을 달고 나온
돼지였다는 이야기. 코브 개울가에 사는 어떤 사람이 양을 잡았는데 심장이 없더라는 이야기, 빅
로렐에서 사냥을 하던 사람들이 올빼미가 사람처럼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것이 무슨 말
이었는지는 제각각 이었지만 올빼미가 입을 여는 순간 하늘에 달이 두 개 보였다는 건 분명하다
는 이야기, 그리고 3년째 계속 겨울에는 이상한 늑대 울음 소리가 들여왔고 여름에는 어김없이
흉작이었다는 이야기. 모두 다 힘겨운 때가 오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에스코는 여지껏 전쟁
의 소용돌이 속에서 얼마쯤 벗어난 채 지낼 수 있었지만, 머지않아 이 지역에도 공출이 부과되어
사람들의 숨통을 조일 것 같다고 했다.
잠시 침묵이 흐르다 샐리가 입을 열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 결정했니, 아다?"
"아뇨"
"아직 집으로 돌아갈 준비가 안 된 거야?" 하고 샐리가 물었다.
"집이라뇨?"
아다는 여름 내내 갈 곳 없는 고아가 된 기분으로 지냈기 때문에 그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
했다.
"찰스턴 말이다."
"네, 아직 준비가 안 됐어요."
"찰스턴에서 소식은 없고?"
"네, 아직까지는요, 하지만 방금 픽 아저씨가 주신 편지에 재산문제에 대한 내용이 있을지도 몰
라요. 아버지 변호사가 보낸 편지 같거든요."
"지금 뜯어서 읽어 보렴" 하고 에스코가 말했다.
"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아요. 사실 제가 앞으로 살아갈 만한 돈이 남아 있는지 어떤지 하
는 이야기가 고작일 테니까요, 앞으로 1년 후 제가 어디에 있을지, 뭘 하고 있을지를 알려주는 편
지는 아니란 말예요. 전 그 두 가지가 제일 걱정되는걸요."
에스코는 양손을 비비더니 씩 웃었다.
"이 마을에서 널 도와 줄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 같구나. 거울을 들고 우물을 등지고
서서 몸을 뒤로 구부려 우물에 비친 자신의 뒷모습을 보면, 물 위로 자신의 미래가 보인다는 전
설이 있단다."
잠시 후 아다는 이끼가 잔뜩 낀 우물을 등지고 서서 몸을 뒤로 굽혔다. 등을 활처럼 구부리고,
배를 앞으로 쑥 내밀고, 균형을 잡기 위해 양쪽 다리를 벌린, 우스꽝스럽고 불편한 자세를 취한체
손거울을 머리 위로 들어서 수면이 보이게 각도를 잡았다.
아다는 우물 속을 들여다보는 것이 이 지방의 다양한 풍습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우울한 기분을 떨쳐 버릴 수 있는 기분전환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오랫
동안 멍한 상태로 계속 지나간 일들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분위기를 떨쳐 버리고 미래
에 대한 생각을 해보고 싶었다. 물론 우물 바닥밖에 보이지 않으리라는 예상도 하고 있었다.
아다는 좀더 안정적인 자세를 취하기 위해 다리의 위치를 바꾸고 나서 거울 속을 열심히 들여
다봤다. 안개가 걷힌 하얀 하늘은 진주, 아니 은색 거울만큼이나 한하게 보였다. 우물가에 서 있
는 참나무의 짙은 잎사귀가 하늘을 담는 액자역할을 하고 있었고, 앞으로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
을까 궁금한 마음에 우물 밑바닥을 열심히 비추고 있는 거울 위로 나무틀 속에 갇힌 하늘이 똑같
이 비쳤다. 검은 우물에 담긴 맑고 동그란 수면이 또 하나의 거울이 었다. 가장자리에 여기저기
물때가 끼여 있고, 돌틈에 이끼가 끼인 그 우물은 하늘 빛을 그대로 반사하고 있었다.
아다는 손잡이 달린 거울에 온 신경을 집중하려 해도, 머리 위로 펼쳐진 맑은 하늘로 자꾸만
시선이 향했다. 빛과 그늘, 우물과 거울 속에서 포개지는 여러 가지 그림자와 테두리 때문에 머리
가 어질어질했다. 이것들이 사방에서 한꺼번에 달려드는 바람에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었다. 여러
가지 그림이 우물과 거울 사이를 왔다갔다 해서 그 모습들 때문에 현기증이 났다. 순간 이대로
우물속에 빨려 들어가 죽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가 빙빙 돌았다. 아다는 한 손으로 우물가를 잡았다. 바로 그때, 모든 장면들이 사라지더니
거울 속으로 정말 그림이 하나 보였다. 형편없는 솜씨로 찍은 사진 같았다. 자세히 보이지도 않았
고, 명암도 제대로 나타나지 않았으며, 상도 얼룩져 있었다. 동그란 빛이 보였고 가장자리는 온통
잎사귀였다.
나무가 양쪽으로 늘어서 있는 비탈길을 암시하는 것 같았다. 그빛 한가운데서 검은색 그림자가
움직이고 있었는데, 상이 너무 희미했기 때문에 이쪽으로 오는 것인지 어디론가 가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느 쪽이든 간에 결심을 한 듯한 태도였다. 따라가야 하는 걸까, 아니면 여기서
기다려야 하는 걸까? 아다는 궁금했다.
다시 현기증이 찾아왔다. 아다는 무릎이 꺾이며 쓰러졌다. 잠시 주변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는
듯했다. 귀가 멍멍했고 "여행하는 이방인" 이라는 찬송가 가사말고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정신을 잃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빙빙 돌아가던 세상이 갑자기 멈추더니 움직이지 않
았다. 쓰러지는 걸 본 사람이 있을까 주위를 둘러봤지만, 새리와 에스코는 세상만사 잊은 채 일에
만 푹빠져 있었다. 아다는 정신을 가다듬고 현관으로 걸어갔다.
"문가 보였니?"
에스코가 물었다.
"아무것도 보이는 것 같은데요."
아다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새리는 다시 코를 꿰려다 생각이 바뀌었는지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안색이 안 좋구나, 아디 아프니?"
아다에겐 귀를 기울이려고 애써도 샐리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머릿속은 온통 거울 속에서
본 사람의 어두운 영상과 귓가에 들리던 힘찬 찬송가 가사뿐이었다.
"발 아래 펼쳐진 이 세상을 지나가겠네. 고생도 없고, 질병도 없고, 위험도 없는 아름다운 땅으
로 나는 가겠네."
그 사람이 자기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인물인 것만은 확실했지만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우물 속에서 뭐가 보였지. 그렇지?"
샐리가 물었다.
"잘 모르겠어요."
"저 애 안색이 창백하지 않아요?" 하고 샐리가 에스코에게 물었다.
"그냥 사람들 사이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일 뿐이야, 나도 몇 번씩이나 들여다봤지만 아무
것도 안 보이던걸."
"네, 아무것도 안 보였어요."
아다가 말했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그 그림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나무, 나무 사이로 난 길,
개간지, 걷고 있는 남자, 따라가야 할 것 같은 느낌, 아니면 기다려야 할 것 같은 느낌.
망치로 창을 내리치는 것처럼 아무런 음악도 없이 시계가 종을 네 번 쳤다. 아다가 가려고 자
리에서 일어서자 샐 리가 다시 않혔다. 그러고는 손등을 아다의 뺨에 갖다대며 물었다.
"열은 없는데. 오늘 뭘 좀 먹었니?"
"그냥 이것 저것 먹었어요."
"별로 못 먹었겠지. 따라오렴, 줄 게 있으니 가져가."
아다는 샐리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말린 약초 냄새와 길다란 거실에 줄줄이 늘어놓은 후
추 냄새가 났다. 여러 가지 요리와 소스, 피클, 샐 리가 자랑하는 처트니 양념으로 쓸 수 있게 마
련해 놓았을 것이었다. 난롯가, 문가, 거울 주위까지 붉은 리본투성이었고, 거실 난간의 기둥은 이
발소 간판처럼 하얀색과 붉은색 줄무늬가 섞여 있었다.
부엌으로 들어간 샐리는 찬장에서 밀랍으로 봉한 검은딸기 절임 항아리를 꺼내 아다에게 건네
주며, "저녁으로 남겨 놓은 비스킷에 발라 먹으면 맛있을 거야"하고 말했다. 아다는 비스킷을 만
들줄 모른다는 말은 하지 않은 채 고맙다는 인사만 했다. 그리고 현관으로 나와서, 마차를 타고
블랙 코브 농장 근처로 올 일이 있으면 꼭 들러 달라고 인사를 하고 나서, 숄과 딸기 절임 항아
리를 팔에 끼고 걸어 나왔다.
산등성이를 가로질러 블랙 코브 농장으로 향하는 오래된 길은 스왱거 농장에서 500야드가 채
안 되었는데, 강가에서 점점 멀어지는 가파른 오르막길이었다. 먼저 널따란 참나무, 히커리나무,
포플러나무 숲을 지나 산등성이로 갈수록 사람들이 아직 베어 가지 않은 나무들이 빽빽히 들어차
있고, 전나무, 솔송나무, 짙은 발삼나무가 드문드문 보이기 시작했다. 썩은 정도가 각기 다른 낙엽
들이 뒤죽박죽 땅을 덮고 있었다. 아다는 단숨에 그 길을 걸어 올라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
직도 귓가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여행하는 이방인" 가락에 맞춰 걷고 있었다. 걷다 보면 그 시커
먼 사람을 만나는 게 아닌가 조금은 겁이 나기도 했지만, 씩씩하고 힘찬 가사 덕분에 기운이 솟
았다.
산등성이 위에 이르자 아다는 강이 흐르는 계곡이 내려다 보이는 바위에 걸터 앉아 숨을 돌렸
다. 저 아래로 강과 길이 보였고, 오른 쪽으로 파란 들판 위에 하얀 반점처럼 서 있는 교회가 보
였다.
아다는 고개를 돌려 저 멀리 희미한 회색으로 보이는 콜드 마운틴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고
개를 돌려 블랙 코브 농장을 내려다 봤다. 멀리서 본 그녀의 집과 밭은 제대로 돌보지 않은 흔적
은 드러나지 않았다. 그저 깔끔하고 단정하게 보였다. 그녀의 숲, 그녀의 산등성이, 그녀의 개울에
둘러싸여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식물들이 정글처럼 빨리 자라나기 때문에, 이곳에서 살려면 다른 사람의 도
움이 필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얼마 안 있어 밭이며 마당이 잡초와 숲과 덤불로 온통 뒤덮여, 잠
자는 숲속의 공주가 누워 있던 들장미로 뒤덮인 궁전처럼 집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일할 수 있는 남자들은 모두 전쟁터로 나가고 없는 지금 도와 줄 사람을 구할 수 있을지
의문 이었다.
아다는 바위에 앉은 채 농장의 경계선을 눈으로 훑어 나갔다. 처음 시작했던 곳으로 다시 눈길
이 돌아와 보니 땅이 꽤 넓어 보였다. 저 땅이 어떻게 자신의 소유가 되었는지 아직도 수수께끼
처럼 느껴졌다. 그 과정을 하나도 빠짐없이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기는 했지만... .
먼로가 폐병에 걸려 하루에도 손수건을 대여섯 장씩 적실 정도로 각혈을 하던 6년전, 아다 부
녀는 요양을 할 수있을까 하는 희망에 이 산을 찾았다. 서늘하고 맑은 공기와 운동을 최고의 처
방으로 치던 담당 의사는 근사한 식당과 치료에 좋다는 미네랄 온천을 갖추고 있는 유명한 휴양
지를 추천했다.
그러나 먼로는 병에 걸린 부자들이 득실대는 따분한 속에서 휴양을 한다는 건 내키지 않았다.
유황물 냄새를 풍기는 것보다는 유익한 일을 하는 게 치료에 훨씬 좋을 거라는 생각에, 자신과
같은 교파이면서 목사가 없는 산속 교회를 찾았다.
두 사람은 즉시 짐을 챙겨서 기차를 타고 주의 북쪽 끝이자 종착역인 사파턴버그에 도착했다.
여러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그 황량한 마을의 호텔 비슷한 곳에서 며칠 동안 머물던 먼로
는 마침내 두 사람의 짐을 블루 산맥을 넘어 콜드 마운틴이 있는 마을까지 운반해 줄 노새몰이꾼
을 만났다.
마차와 말을 사러 나섰는데,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운이 좋았다. 방금 만든 예쁜 2륜 포장마차
에 마지막으로 검은색 라커로 칠을 해서 반짝반짝 광을 내고 있던 사람을 우연히 만난 것이다.
게다가 그는 마차에 잘 어울리는 얼룩 거세마까지 한 마리 가지고 있었다. 먼로는 흥정하고 말
것도 없이 지갑을 열어, 누렇고 울퉁불퉁한 손을 내밀고 있던 마차 주인에게 대금을 지불했다. 그
가 잠시 후 마무리 작업을 끝내자 먼로는 시골 목사에게 잘 어울리는 화려한 마차의 주인이 되었
다.
준비를 마친 두 사람은 짐은 그곳에 두고 먼저 길을나서 브레바드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그곳
엔 호텔은 없고 여인숙만 있었다. 두 사람은 새벽이 찾아오기도 전에 푸르스름한 달빛을 밭으며
그 마을을 떠났다. 화창한 봄날 아침이었는데, 먼로는 마을을 가로질러 가던 중에 저녁 무렵이면
콜드 마운틴에 도착할 수 있다는 마을 들었다.
말은 소풍이라도 나선 듯이 즐겁고 활기차게 발을 내딛으며 가벼운 마차를 힘있게 끌었다. 반
짝이는 커다란 바퀴 두 개가 그 속도에 맞춰 빙글빙글 돌아갔다.
두 사람은 아침 내내 비탈길을 올라갔다. 마차가 다니는 길은 나무 그늘 속을 왼쪽 오른쪽으로
왔다갔다 하면서 좁다란 산골짜기를 따라 지그재그로 하염없이 뻗어 있었다. 어두컴컴한 오르막
길 위로 조각진 푸른 하늘이 언뜻언뜻 보였다. 두 사람은 프렌치 호수의 상류를 건넜다가 다시
또 건넜고, 폭포 바로 옆을 지날 때는 얼굴 위로 물이 튀기도 했다.
아다는 산이라고는 험준한 알프스 산밖에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험한 바위 틈새마다 저지대
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이파리 많은 식물이 자라고 있는 이상한 곳에 어떤 것들이 살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널따랗게 가지를 펼치고 있는 참나무, 밤나무, 목련나무가 한데 모여 햇빛을 가리는
차양 역할을 하고 있었다. 땅에서는 진달래, 철쭉이 줄줄이 늘어서 두꺼운 담장을 이루고 있었다.
초라하고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길 때문에 아다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침에 지나 왔던 널찍
하고 모래가 갈린 도로와 비교하면, 사람이 아니라 가축이 밟고 지나가면서 생긴 듯한 형편없는
길이었다. 게다가 모퉁이를 돌 때마다 폭이 좁아져, 아다는 얼마 안 있어 길이 모두 사라지고, 하
나님이 천지창조의 7일 동안 "숲"이라고 처음 말했을 때 생겨났을 법한, 길도 없고 으슥한 황야에
서 헤매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먼로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피를 토하던 사람같지 않게 활기가 넘쳤다. 죽기 전에 모든
땅과 나무를 기억해 두려는 사람처럼 주위를 둘러봤다. 이따금씩 워즈워스의 시 구절을 큰소리로
암송해 말을 깜짝 놀라게 만들기도 했다. 어느 모퉁이를 돌자 그 날 아침 떠나온 평지가 저 멀리
희미하게 내려다보였는데, 그것을 본 그는 그 자리에 서서 이렇게 외치기도 했다.
"이보다 멋진 장관은 없으리라, 이 웅장함에 감명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우둔하기 짝이 없는
영혼이니라"
동풍에 휘몰려 온 회색 구름이 하늘을 가득 메우기 시작한 오후, 두 사람은 골짝기로 향하는
길이 시작되는 검은 발삼나무숲 한가운데 서 있었다. 피존 강 지류를 향해 폭포수처럼 흘러내리
는 물가를 따라 가파른 내리막길이 있었다. 눈앞에 우뚝 솟아 있는 콜드 마운틴은 높이가 6천피
트도 넘게 보였고, 어두운 구름과 하얀 안개에 가려 꼭대기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 을씨년스러운
곳에서 먼로는 다시 좋아하는 시구를 읊었다.
"현란한 풍경과 현기증 나도록 노호하는 강물, 족쇄가 풀린 듯한 구름과 천상 세계, 격정과 평
화, 어둠과 빛. 이 모든 것은 한사람의 심경이요, 한 얼굴을 이루고 있는 이목구비요, 영원, 시작,
끝, 종간의 표상이며 상징과도 같도다."
아다는 웃음을 터뜨리며 먼로의 뺨에 입을 맞췄다. 그 순간 아다는 아버지의 부탁이라면 라이
베리아까지 따라나설 수 있다고 생각했다.
먼로는 하늘 가득 몰려온 구름을 바라보다 그동안 접혀 있었던 마차 지붕을 씌웠다. 캔버스에
페인트와 왁스를 칠해 만든 것으로, 검고 네모난 조각을 이어 놓은 게 박쥐 날개 같았다. 새것이
어서 씌울 때 끼익 소리가 났다.
먼로가 고삐를 흔들자 땀을 흘리던 말은 내리막길을 만나 반갑다는 듯한 걸음으로 걸어 나갔
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급경사가 펼쳐졌기 때문에 마차가 말 엉덩이 위로 기울어지지 않도록
자꾸 제동을 걸어야 했다.
비가 내렸고 어둠이 찾아왔다. 달빛도 없었고 인가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도 보이지 않았다. 콜
드 마운틴 마을로 가는 길이라지만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두 사람은 말이 낭떠러
지 쪽으로 달리지 않기만을 바라며 어둠 속을 뚫고 지나갔다. 외딴 오두막 한 채 없는 걸 보면
아직도 마을까지는 한참 가야 할 모양 이었다. 길을 잘못 들어선 게 분명했다.
비는 옆에서도 들이쳤기 때문에 마차 지붕도 그다지 쓸모가 없었다. 말은 고개를 푹 숙인 채
걸어갔다. 몇 번이나 모퉁이를 돌았지만 표지판이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갈래길이 나올 때
마다 먼로는 어느쪽을 택해야 할지 짐작으로 맞추는 수밖에 없었다. 자정이 훨씬 지나서 비로소
길과 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서 있는 어두컴컴한 교회가 나타났다. 두 사람은 비를 맞으며
교회 안으로 들어가 젖은 옷을 입은 채 신도석에서 잠을 청했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안개가 서려 있었지만 얼마 안 있어 사라질 것처럼 옅었다. 먼로는 뻣뻣한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잠시후 그가 웃음을 터뜨리며 "하나님의 인도가 있었던 거야, 고맙습
니다." 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다는 밖으로 나갔다. 교회 앞에 서 있던 먼로가 씩 웃으며 위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고개
를 돌려 봤더니 이렇게 적혀 있었다.
"콜드 마운틴 예배당."
"모든 위험을 물리치고 마침내 집에 도착했구나" 하고 먼로가 말했다. 하지만 아다는 그 말이
그다지 미덥지 못했다. 찰스턴에 사는 친구들 말마따나 이곳은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 괴팍한 이
교도들이 살고 있으며 그들은 남자건 여자건 아이건 거침없이 폭력을 휘둘러댈 만큼 무시무시하
고 끔찍스러울 것 같았다. 게다가 황량하고 흐린데다 비가 많이 내린다는 지역이었다.
상류층 남자들만 속옷을 입으며, 유모를 두는 세련된 풍습을 모르는 여자들이 어디서나 아이에
게 젖을 물린다고 했다. 아다의 친구들은 이 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거진 떠돌이 야만인 수준
의 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다.
도착하고 나서 몇 주 동안 아버지와 함께 장차 신도가 될 만한 사람들을 방문하던 아다는, 찰
스턴 사람들이 말한 정도까지는 아니라도, 이지역 사람들이 정말 괴팍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호별
방문을 통해 만난 사람들은 까다롭고, 정이 들지 않는데다 거리감이 느껴졌고, 대부분 속마음을
터놓지 않았다.
그들은 종종 모욕이라도 당했다는 표정이었는데, 아다도 먼로도 무엇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밭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전쟁이라도 하는 표정들이었다. 두 사람을 맞이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남자들이었고, 때때로 안으로 초대받기도 했지만 그냥 밖에 서 있어야 하는 경우도 있었
다. 안으로 초대받았을 때도 삭막 하기만 한 집안 분위기에 섬뜩함을 느끼기가 일쑤여서 차라리
앞마당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편이 훨씬 나았다.
집 안은 바깥의 화창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항상 어두웠다. 덧문이 있는 집은 항상 덧문을 닫고
있었다. 커튼이 있는 집은 항상 커튼을 치고 있었다. 집 안이 지저분하지는 않았지만 음식 냄새,
가축 냄새, 일하는 사람들 냄새 등 온갖 이상한 냄새를 풍겼다. 한쪽 구석이나 난로 위 또는 문
위에 박힌 나무못에는 엽총이 걸려 있었다. 먼로는 자신을 소개하고, 교회의 임무에 대해, 그리고
성경에 쓰여진 이야기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을 늘어놓으며, 기도회나 예배에 참석해 달라고 당부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시종 의자에 곳곳이 앉아 말없이 장작불을 쳐다볼 따름이었다. 신발을 신
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모두들 전혀 부끄럼 없이 맨발을 내보였다. 표정을 보면, 마치 이
방엔 자기 외에는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같았다.
그들은 장작불만 쳐다보면서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고, 먼로가 어떤 말을 늘어놓아도 표정에
변화가 생기는 법이 없었다. 먼로가 뭔가를 물으면 자리에 앉은 채 한참 동안 생각하다가 애매모
호한 말을 짤막하게 내뱉거나, 모든 대답이 들어 있다는 듯한 눈빛으로 먼로를 물끄러미 쳐다보
곤 했다.
방에서 나오지 않고 숨어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렸지만 아무도 밖으로
나와 보지 않았다. 아마도 여자들, 아이들, 노인들인 모양이었다. 그들은 그들대로 골짜기 너머의
세상을 무섭게 생각해서 외부 사람들과의 접촉을 일절 피하고, 친척이 아닌 사람들은 적으로 간
주하는 것 같았다.
그런 식으로 방문을 마치고 나면 아다와 먼로는 늘 서둘러 지을 빠져 나왔다. 마차를 타고 길
을 내려가면서 먼로는 사람들을 잘 몰랐다며 작전을 세워야겠다는 말을 했다. 아다는 바퀴를 힘
차게 돌리며 재빠르게 굴러가고 있는 마차에 몸을 맡긴 채, 자신과 아버지가 무엇을 하러 왔는지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들이 조금은 부러웠다. 그들은 삶이라는 것에 대해 나름대로 분명한
결론을 내려 두고 자기들 방식대로 살아가고 있었다.
먼로의 선교 활동이 가장 처참한 꼴을 당한 건 그해 늦여름으로, 상대는 샐리와 에스코 부부였
다. 어느 날 신도들 중 미즈라는 남자가 먼로에게 스왱거 부부의 무지몽매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고 말했다. 그는 에스코가 거의 문맹에 가깝고 창세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천지창조 이후의 역사
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고 했다. 하나님이 빛을 창조하신 것까지만 알고 있다는 것이었
다.
그는 샐리 스왱거가 한 술 더 뜬다고도 했다. 두 사람은 성경을 마법사의 책 정도로 보고 있고
손금을 봐주는 집시처럼 성경을 사용한다고 했다. 아무페이지나 펼친 후에 그 페이지를 손가락으
로 짚어 나가며 그 안에 적힌 단어의 의미를 해석한다는 것이다. 단어의 의미를 늘 예언으로 받
아들였고, 하나님이 직접 내리신 계명인 듯 그 예언에 따라 산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가라고 하면 갔고, 기다리라고 하면 멈춰 섰다. 하나님이 죽이라고 하면 에스
코는 도끼를 들고 어린 암탉을 찾아 헤맸다. 그렇게 무식한 사람들인데도, 잡초만 뽑아 주면 팔뚝
만한 고구마가 나올 만큼 기름진 계곡 바닥에 농장이 있어 아주 잘 살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미즈는 먼로가 그 두 사람을 계몽시킬 수만 있다면 그들은 정말 독실한 신도가 될 거라고도 했
다.
그 말을 들은 먼로는 아다를 데리고 방문에 나섰다. 두 사람을 거실로 안내한 에스코는, 먼로가
그를 신앙 이야기에 끌어들이려고 열을 올리는 동안 몸을 앞으로 숙인 채 열심히 듣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믿음을 털끝만큼도 버리지 않으려고 했다. 먼로가 본 에스코의 종교란 동물, 나무,
바위 날씨 따위를 숭배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는 고대 켈트족의 원시인 같은 사람으로, 그의 머릿
속에 들어 있는 몇 가지 안 되는 생각은 선사 시대에나 어울린다는 것이 먼로가 내린 결론이었
다.
희귀한 종족을 만났다는 생각에 먼로는 종교가 가진 숭고한 점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삼위일
체 부분에 이르자 에스코가 고개를 들더니 이렇게 말했다.
"세 개가 하나라고요? 칠면조 발처럼 말이죠?"
에스코가 기독교 교리의 기본 상식도 모르고 있는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든 먼로는, 예수의 성
스러운 탄생에서부터 십자가에 못박힌 사건에 이르기까지 예수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늘
어놓았다. 유명한 일화를 모두 얘기해 주면서, 자신의 모든 말솜씨를 동원해 알기 쉽게 설명했다.
마침내 이야기를 모두 끝내고 그는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반응을 기다렸다. 드디어 에스코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그게 얼마 전에 일어난 일이라구요?"
"2천 년 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2천 년을 얼마나 먼 옛날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
지만요."
"아, 그 정도면 꽤 오래전 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러고는 에스코는 자신의 손목을 들여다봤다. 손가락을 구부리더니 새로운 도구를 실험해 보
는 것처럼 날카로운 시선으로 쳐다 뫘다. 그러다 방금 들은 이야기에 대해 잠시 생각하는 것 같
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를 구하러 그 사람이 내려왔다는 거죠?"
"그렇습니다."
"우리의 나쁜 본성, 뭐 그런 것 때문에 말이죠."
"그렇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런 짓을 했단 말예요? 그를 십자가에 못박고 배신하는 짓을 했단 말인가
요?"
"네" 하고 먼로가 대답했다.
"하지만 그 이야기가 2천 년 전 이야기라고 하셨죠."
"거의 2천 년 전 이야기죠."
"말하자면, 아주 오래 전에 일어난 일이란 말이죠?"
"그렇습니다. 아주 오래 전이죠."
에스코는 수수께끼를 푼 사람처럼 가볍게 씩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난 먼로의 어깨를 툭 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길 바라는 것밖에 없겠네요."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먼로는 어떻게 하면 에스코에 제대로된 교리를 전달할 수 있고 우상
숭배로부터 벗어나게 도와줄지 고민하면서 계획을 세웠다. 에스코 자신이 놀림을 당했다고 생각
한다는 사실, 먼로가 현관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무지한 사람을 깨우치러 왔다는 인상을 짙게 풍
겼기 때문에 에스코가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는 사실은 전혀 깨닫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은 무시당했다는 느낌이 들 경우 눈앞에서 문을 꽝닫아 버린다든다. 발을 씻었던
구정물을 끼얹는다든가, 엽총을 들이댄다든가 했지만, 천성이 착한 에스코는 먼로의 예상에 발맞
춰 무식한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는 걸 재미로 삼았기 때문에 먼로는 이 사실을 더욱 모를 수밖
에 없었던 것이다.
에스코는 어느 누구에게도 그 일을 떠벌리고 다니지 않았다. 사실 그들 부부가 독실한 침례교
신자라는 사실을 먼로가 알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지 신경을 쓰지도 않는 것 같았다. 그 이야기를
퍼뜨린 쪽은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이 또 있느냐며, 있으면 이름을 가르쳐 달라며 묻고 다니던 먼
로였다.
사람들이 그 사건을 재미있게 받아들이고, 상점이나 길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이야기를 들
려 달라고 하는 모습을 보며 먼로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듣는 것처
럼, 먼로가 에스코의 마지막 대사를 옮길 때까지 진득하게 기다리는 식이었다. 먼로가 그 마지막
말을 빠뜨리면, 어떤 사람들은 그 말이 있어야 이야기가 된다는 듯 스스로 마지막 대사를 덧붙이
곤 했다. 그런 일은 꽤 오래 계속되었으며 결국 그런 먼로를 불쌍하게 여긴 샐리가 먼로에게 자
초지정을 알려주었다. 그가 지금 사람들의 놀림감이 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먼로는 자신이 이지역 사람들이 비웃음거리가 됐다는 사실을 알고 난 며칠 동안 의기소침해져
있었다. 아다가 "사람들을 대하는 올바른 교훈을 얻었으니 이제 그 교훈에 따라 행동해야죠" 라는
말을 하기 전가지 먼로는 자기가 과연 이곳에 정착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일단 그렇게 결심하고 나자 모든 게 확실해졌다. 두 사람은 스왱거 씨 집으로 찾아가 사과를
했고, 그후 친구처럼 지내며 자주 식사를 함께 했다. 에스코는 자신의 장난을 사과하는 뜻에서 전
에 다니던 침례교회를 등지고 먼로가 세운 교회의 신도가 되었다.
처음 1년 동안 먼로는 찰스턴 집을 처분하지 않았고, 이들 부녀는 7월과 8월이면 곰팡이 냄새
가 코를 찌르는 축축한 강변 목사관에 서 살았다. 이곳의 좋은 공기 덕분에 폐가 호전되고 마을
사람들도 마침내 그를 이해하게 되어 언젠가는 받아들일 것 같다는 조짐이 보이자, 먼로는 이곳
에 정착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찰스턴집을 팔고, 갑자기 텍사스로 이사를 가게 된 블랙 일가의
땅을 사들였다.
먼로는 20에이커에 달하는 밭과 목초지보다 그림 같은 풍경, 특히 평평하고 널찍한 골짜기 아
래가 더 마음에 들었다. 중간중간에 등성이와 계곡이 있고 콜드 마운틴가지 굽이굽이 뻗어 올라
가는 수풀 우거진 언덕이 마음에 들었다. 여름에도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갑고 상큼한 바위 맛이
나는 샘물도 좋았다.
특히 그곳에 만들어 좋은 집이 마음에 들었다. 앞으로 적어도 이곳에서 몇 년 동안 펼쳐질 자
신의 미래에 대한 신념을 상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먼로는 새 집을 직접 설계하고 공사도 감독
했다. 겉에는 판자에 회반죽을 칠하고 안에는 구슬 무늬가 있는 어두운 벽이 있으며, 앞쪽에는 움
푹 꺼진 현관이 잇고 뒤쪽에는 부엌이 넓게 연결되어 있으며, 거실에는 커다란 벽난로가, 침실에
는 나무로 만든 난로가 있는, 산간 지방에서는 보기드문 현대식 건물이 만들어졌다. 블랙 씨 가족
들이 살던 통나무집은 새집에서 안일을 도와 주는 사람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다.
먼로가 골짜기를 사들였을 당시 그곳은 완벽한 농장이었지만. 그는 직접 농사를 지을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 그대로 방치해 놓았다. 그의 생각처럼 찰스턴에서 쌀과 인디고 목화에 투
자한 자금의 배당금이 순조롭게 계속 지급되는 한, 직접 농사를 지을 필요는 없었다.
그러자 배당금은 계속 지급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다가 산마루에 앉아 집과 농장을 내려다보
다가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책에서 편지를 꺼내 읽어 보고 내린 결론이었다. 장례식을 치르고 나
서 며칠 후 아다는 찰스턴에 있는 아버지의 친구인 변호사에게 편지를 보내 아버지의 사망 소식
을 알리면서 재산 문제에 대해 물었다.
오랫동안 기다린 후에야 도착한 이 편지는 쓸데없이 말이 많았고 말투가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전쟁, 통상금지 조치 등 기타 어려운 시대 상황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을 늘어놓고 나서, 이것들이
아다의 수입에도 영향을 미쳐서 전쟁에서 승리하지 않는 한 거의 무일푼이 될지도 모른다는 내용
을 담고 있었다. 아다가 아직 경험이 없으니 농장을 대신 관리해 줄 수도 있다는 말이 편지의 마
지막이었다. 그리고 아다와는 달리 판단력과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 관리를 맡겨야 할 거라는 말
도 살짝 덧붙여져 있었다.
아다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머니 속으로 편지를 구겨 넣고 나서 블랙 코브 농장으로 향하는 길
을 내려갔다. 현재 상황만 으로도 충분히 힘들고 앞으로 어떤 끔찍한 일들이 찾아올지 모르는데,
도대체 어떻게 희망과 용기를 추스려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커다란 나무들이 울창하던 산등성이에서 나와 보니 안개가 걷혀 있었다. 하늘은 맑았고 콜드
마운틴은 손을 뻗으면 잡힐 듯 가깝게 느껴졌다. 서서히 어두워지는 하늘 아래로 해가 저물고 있
었다. 두 시간 후면 태양이 산 너머로 모습을 감추면서 황홀한 노을이 펼쳐질 것이었다. 히커리나
무 밑을 지자갈 때는 높다란 가지 위에서 해오라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호두 껍질이 옆으로 후두
둑 떨어졌다.
고지대 목초지의 꼭대기에 위치한 돌담에 도착하자 아다는 다시 걸음을 멈췄다. 그곳은 그녀가
농장 주변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으로, 분위기가 아늑했다. 이끼가 돌을 뒤덮고 있어, 불과 몇십
년 전에 생긴 돌담이 아주 오래 전에 만들어진 것처럼 보였다. 블랙 일가의 조상들 중 한 사람이
밭에 있는 돌을 치우면서 쌓기 시작 했지만 겨우 20피트를 만들고 나서 폐기해 버렸고, 담이 끝
난 지점에서 길이 두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남북으로 뻗어 있는 이담은 오늘처럼 화창한 날이면 오후 햇살 덕분에 축축한 표면이 따뜻했
다. 근처에는 맛있는 황금색 사과나무 한 그루가 잇엇는데. 일찍익은 사과 몇 개가 웃자란 풀밭위
에 떨어져 있었다. 썩어 가는 사과의 달콤한 냄새를 맡고 찾아온 별들이 햇빛 속에서 윙윙댔다.
이 담벼락에서 보면 수목 재배용지 한쪽 귀퉁이와 검은갈기 덤블, 그리고 커다란 밤나무 두 그루
만 보여 경치가 그다지 뛰어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다에게는 이곳이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
운 곳이었다.
아다는 담밑에 깔린 풀 위에 자리를 잡고 솔을 돌돌 말아 베개로 삼았다. 주머니에서 책을 꺼
내 "찌르레기 잡는 법 " "찌르레기가 나는 법"을 읽기 시작했다. 그녀는 전쟁과 재산 문제는 까
맣게 잊는 채 계속 책을 읽다가, 점점 기울어 가는 햇볕 속에서 별들의 윙윙대는 소리를 들으며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아다는 꽤 오랫동안 잠을 자면서 꿈을 꿨다. 열차를 기다리는 수많은 승객들과 함께 기차
역에서 있는 꿈이었다. 기차 역 한가운데에는 우리 상자가 있었고, 그 안에는 언젠가 박물관
인체 해부도에서 본 것과 같이 생긴 남자의 뼈가 들어 있었다. 자리에 앉아서 열차를 기다
리는데, 푸른빛이 상자 안을 가득 메우더니 유리 등잔불 심지처럼 배배 꼬이며 천천히 위로
솟아올랐다. 아다는 뼈에 살이 붙어 가는 섬뜩한 광경을 지켜봤다. 어느 정도 살이 붙고 난
후에 봤더니 그 남자는 아버지였다.
다른 사람들은 겁이 난 표정으로 대합실 벽 쪽으로 물러섰다. 아다도 무섭기는 했지만 유
리 상자로 다가가 손을 올려놓고 기다렸다. 하지만 아버지의 모습은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
다. 양피지처럼 얇은 살갗이 뼈를 덮고 있는, 움직이는 시체였다. 움직임은 느렸지만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처럼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유리에 입을 갖다대고는 아다에게 다급한 표정으로 뭐라고 말했다. 자신이 간직한 가장
중요한 비밀을 알리려는 사람 같았다. 하지만 아다가 유리 상자에 아무리 귀를 바짝 들이대
고 들어 봐도 중얼거리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때 폭풍을 예고하는 바람 소리가 들리
더니 상자 속에 들어 있던 아버지가 갑자기 사라졌다.
역무원이 나타나 승객들에게 어서 열차에 탑승하라고 알렸다. 열차의 종착역은 찰스턴이
었는데, 그 기차를 타고 아다는 20년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 어린 시절로 되돌아갈 수 있
었다. 사람들은 즐거운 얼굴로 열차에 올라타고는 미소를 지으며 창 밖으로 손을 흔들었다.
어느 칸에서인지 노랫소리도 들렸다. 하지만 아다는 선로에 혼자 서서 멀어져 가는 열차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다가 눈을 떠보니 밤하늘이 보였다. 늘어선 나무 밑에서 적갈색으로 반짝이는 화성이
서쪽을 향해 움직인 걸 보면 한밤중인 게 분명했다. 하늘에는 반달이 높이 떠 있었다. 건조
하고 약간 쌀쌀한 밤이었다.
아다는 숄을 풀어 어깨에 들렀다. 숲속에서 혼자 밤을 지샌 적은 함 번도 없는데다 심란
한 꿈까지 꾸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무섭지가 않았다. 달이 나무와 들판 위로 푸른빛을 드
리웠다. 콜드 마운틴은 하늘을 가리고 있는 컴컴한 휘장처럼 보였다. 멀리서 메추라기 우는
소리만 들릴 뿐 사방은 아주 고요했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갈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아다는 검은 딸기 절임이 담긴 항아리를 꺼내 두 손가락으로 딸기를 떠먹었다. 약간 달짝
지근하고 신선하며 짜릿함 맛도 났다. 그녀는 한참동안 자리에 앉은 채로 달이 하늘을 가로
질러 움직이는 모습을 바라보며 딸기 절임을 모두 먹었다.
아다는 꿈속에 나타났던 아버지와 아까 우물가 거울 속에서 봤던 컴컴한 사람을 생각했
다. 아다는 아버지를 끔찍이 사랑 하기는 했지만 꿈속에서 본 모습은 너무나 이상했다. 그녀
는 아버지가 찾아와 주길 바라지도 않았고, 너무 빨리 아버지의 뒤를 따라가고 싶지도 않았
다.
아다는 오랫동안 그 자리에 앉아서 날이 밝아 오는 광경을 지켜봤다. 먼저 회색빛이 희미
하게 퍼지기 시작하다가 주의를 가득 메우자 삼들이 어슴푸레하게나마 조금씩 보이기 시작
했다. 산봉우리를 감싸고 있던 안개는 아침이 되어 따뜻해지자 말끔히 걷혔다. 나무밑둥에서
자라는 풀이 머금은 이슬 속으로 나무가 비쳤다. 아다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
어섰다. 두 그루의 배나무 밑에는 아직도 어둑한 밤기운이 날아 있었다.
집에 도착한 아다는 간이 책상을 들고 책을 읽던 의자로 갔다. 거실은 컴컴했지만 무릎
위에 얼려 놓은 책상 위로 아침을 알리는 황금빛 햇살이 조금씩 비치기 시작했다. 창문살
때문에 조각조각 나뉘어진 햇살 사이로 먼지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아다는 네모난 햇살위로 종이를 올려놓고 나서 단숨에 변호사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말씀은 고맙지만, 아무것도 남 있지 않은 곳과 다름없는 농장을 관리할 만한 자격을 이미
충분히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므로 사양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날이 점점 어두워지는 동안 아다는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 봤다.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었다. 사겠다는 사람이 거의 없는 이 불황기에 어찌어찌 해서 농장을 팔고
찰스턴으로 돌아간다고 해봤자 몇 푼 안되는 그 돈으로는 오래 버틸 수도 없을 것이었다.
얼마 안 있어 아버지 친구분 댁에 식객으로 들어가 아이들 공부나 음악 등을 가르치는 수밖
에 없을 터였다.
아니면 결혼을 하든가. 절박한 상황에 놓인 끔찍한 노처녀 신세로 찰스턴으로 돌아가는
상황은 생각함 해도 소름끼쳤다. 어떤 광경이 펼쳐질지 눈에 선했다. 그려 또래의 남자들은
모두 전쟁터로 끌려가고 난 지금 제대로 된 옷조차 살 수 없을 정도로 돈이 바닥 나면, 찰
스턴 사회에서 상류층 축에도 못 끼는 늙고 힘없는 낙오자와 결혼 협상을 벌이게 될 것이었
다. 겉으로는 누군가에게 살아한다고 말은 하지만 속으로는 당신이 마침 필요하던 때 나타
난 사람일 뿐이라고 중얼거리겠지...... . 지금 상황이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그런 사람과 결
혼한다고 상상하면 숨이 막힐 것처럼 답답했다.
이렇게 비참한 모습으로 찰스턴에 돌아간들 반갑게 맞아 주는 사람도 없을 테고 자존심
상하는 일만 당할 게 뻔했다. 인생의 절정에 달한 젊은 여자들, 그 앞에서 존경의 예를 갖추
는 남자들, 결혼이야말로 우주를 이끌어 나가는 도덕적인 원동력이라고 믿는 모든 사교계
사람들...... .그들은 한 쌍의 젊은 남녀가 부부로 맺어지게 되기까지의 그 가슴설레는 과정에
아다가 너무 무관심하다고 생각했다. 먼로의 친구들은 결혼에 별 관심을 두니 않는 아다를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쳐다보곤 했었다.
아다도 그런 사람들을 이해시키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파티가 끝나고 나서 감옥 같은 여
성용 응접실에서 결혼하는 커플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평가가 오갈 때마다 아다는 사업, 사
냥, 말에만 관심이 있는 것 같은 구혼자들은 정말 따분하다며, "남자 사절"이라는 팻말을 현
관에 걸어 놓아야 할 것 같다는 말까지 했다. 그럴 때마다 모인 사람들 중 가장 나이가 많
은 여자나, 나마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유부녀가 지녀야 할 최고의 덕목이라고 여기
는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는 사교계의 햇병아리들은 아다에게 "결혼은 여자의 마지막
목표"라며 훈계를 하곤 했다.
그러면 아다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 말에 전도 공감해요, 두 번째 단어와 네 번째 단어만 빼면 말이죠."
듣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입을 다문 채. 문제의 그 단어가 무엇인지 열심히 되짚어 가는
모습은 참 볼 만했다.
그러다 보니, 이들 부녀들로부터 얘기를 전해들은 사람들은 먼로가 딸을 남자와 여자가
어울려 사는 사회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괴물로 길렀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다가 열
아홉 살 되던 해에 청혼을 두 번씩이나 그 자리에서 거절하자, 사람들은 혀를 끌끌 차면서
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상대방이 생각이나 감정, 인간적인 측면에서 깊이가 없고 반짝이는
재치가 부족한 것을 외모로 보상하려는 둣 머리에 잔뜩 포마드 기름을 바르고 나타났다는
게 그녀가 청혼을 거절한 이유였다.
아다의 친구들은, 뚜렷한 결점이 없는 한 어느 정도 지위를 갖춘 사람의 청혼을 거절한다
는 건 상대방에겐 대단한 실례를 범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다가 산속으로 이사
오기 1년 전부터 그녀의 퉁명스러움과 유별남을 꼬집으며 대부분 그녀를 멀리했다.
지금 아무리 사정이 어려워도 찰스턴으로 돌아간다는 건 생각만 해도 마음이 씁쓸했고 자
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곳으로 돌아갈 이유가 없었다.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가장
가까운 친척으로 사촌이 루시가 있었을 뿐 따뜻하게 맞아 줄 다정한 이모나 할아버지, 할머
니도 없었다. 산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광범위한 친족 관계로 끈끈하게 얽혀 있어서 지척
에 여러 친척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가까운 친척이 아무도 없는 자신이 몹시
도 처량하게 느껴졌다.
아다는 이곳이 고향은 아니었지만 푸른 산이 모이는 이 마을이 고향보다 더 가깝게 느껴
졌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결론은 단 한가지였다. 적어도 이곳은 믿을 수 있다는 석, 이곳에
서 평범하고 만족스런 삶을 한 번 구려가 보겠다는 의지와 저 산들만 있어 준다면 좀더 행
복하고 넉넉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삶이 어떨지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자신의 본능을 따르고 그 본능에 충실하기만 하면 만족스런 삶을 살 수 있다고 아버지는
누차 말씀하셨다. 아다도 그 말은 믿고 있었다. 하자만 자신의 본능이 어떤 것인지조차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그 말을 따르기란 어려운 문제였다.
아다가 아침 내내 창가에 앉아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 길
을 따라 걸어 올라오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키가 작고 닭 모가지만큼이나 비쩍 말랐고 골
반 부분만 상당히 젊은 여자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다는 현관으로 달려나가 그 사람
이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 기다렷다.
현관으로 다가온 그 여자는 말도 없이 아다 옆에 있는 흔들의자에 앉더니 가로대에 발을
걸쳤다. 그러고는 의자를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단단한 몸집에 하체는 통통하지만 손발에 마
디가 많고 가는 여자였다. 거친 흠스펀을 두드러기쑥즙으로 염색해서 지저분한 파란색으로
만든, 네모꼴로 목이 패인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스왱거 아줌마에게 들었는데, 도와줄 사람을 구하고 있다구요?"
아다는 그 여자를 좀더 자세히 관찰했다. 목과 두 팔은 힘줄로 울퉁불퉁하고 까무잡잡했
고 상체는 금세 꺾어질 것만 같았다. 머리카락은 검었는데 말꼬리처럼 거칠었다. 코도 납작
했다. 커다랗고 까만 눈은 동공이 없는 것과 다름없었고, 휜자위가 눈에 띄게 선명했다. 신
말을 안 신고 있었지만 발은 깨끗했다. 발톱은 생선 비늘처럼 은색이었고 투명했다.
"그래요, 도와 줄 사람을 구하고있어요, 하지만 힘든 일을 도와 줄 사람이 필요해요, 밭
갈고, 씨 뿌리고, 추수하고, 나무 베고, 그런 일 말예요. 이제 이곳에서 종사를 지어먹고 살
아야 하거든요. 그런 일에는 남자가 필요할 것 같은데요."
그 여자가 입을 열었다.
"첫째, 나는 말만 있으면 하루 종일이라도 밭을 갈 수있어요. 둘째, 스왱거 아줌마한테서
당신의 딱한 사정을 들었어요, 쓸 한함 남자들은 모두 끌러 나가고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셔
야 할 것같은데요, 가혹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게 바로 현실이죠. 현실은 그런 법이에요."
잠시 후 그 여자는 루비라고 자기를 소개하면서, 겉보기엔 믿음직스럽게 보이지 않아도
농사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제법설득력이 있게 얘기했다. 아다는 그려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것은 중요한 사실이었다.
루비는 적극적인 성격의 여자 같았다. 그리고 비록 단 하루도 학교라는 곳엔 다녀 본 적
이 없고 자기 이름조차 읽거나 쓸 줄도 몰랐지만, 부싯돌이 서로 부딪칠 때만큼이나 밝고
강한 불꽃을 마음속에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아다처럼 루비도 태어날 때부터 엄마 없이 자
란 아이였다. 서로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자란 두 사람이었지만, 상대방을 이해할만한 공감대
가 있었던 것이다. 놀랍게도 아다는 바로 루비와 계약을 맺었다.
"난 일군이나 하녀로 일해 본 적이 없어요, 그런 일들에 대래 그리 졸은 인상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구요. 하지만 샐리 아줌마 말씀이 당신은 도와 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던데,
그 말씀이 맞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면, 이제 계약을 맺자, 이거죠."
"이제 돈 이야기를 하자는 말이구나" 하고 아다는 생각했다. 아버지는 사람을 고용하는
문제로 그려와 상의한 적이 없었지만, 아다가 알기로는 대개 일자리를 원하는 쪽이 먼저 고
용조건에 대해 얘기를 꺼내는 일은 없었다. 마침내 아다가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도 그렇고, 앞으로도 돈이 많이 모자랄 거예요."
"돈 이야기가 아니에요. 말했다시피 난 돈을 받고 일해 줄 생각은 없어요, 당신을 도와주
겠다는 말은 곧, 두 사람 각자 자기 요강은 알아서 치워야 한다는 뜻이라고요."
아다는 웃음을 터뜨렸지만 농담이 아니라는 건 곧 알 수 있었다. 인격적으로 동등하게 대
우해 달라는 것이 루비의 요구였다. 아다에게는 이 함이 엉뚱하게 들렸다. 하지만 도와 줄
사람이 아무도 없고, 여름 내내 형편없는 음식만 계속 먹어 왔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무
리한 조건은 아니었다.
두 사람이 나머지 세세한 조건들을 이야기 하고 있는 동안, 황금색과 검은색 털이 섞인
수탉이 현관 옆을 지나가다가 걸음을 멈추고는 빠니 쳐다봤다. 고개를 배배 꼬더니 붉은 볏
을 이쪽저쪽으로 뒤집었다.
"난 저 닭이 싫어요. 날 무시하거든요."
아다가 말했다.
"나라면 날 무시하는 닭을 가만 두지 않을 거예요."
"그럼 어떻게 해요?"
루빈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아다를 쳐다보더니 의자에서 일어나 현관 밖으로 나가 단숨
에 수탉을 낚아채 왼쪽 겨드랑이 사이에 끼워 놓고는 오른손으로 머리를 잡아 뺐다. 수탉은
겨드랑이 밑에서 잠시 버둥대다 축 늘어졌다. 루비는 울타리 옆 매자나무 덤불 속으로 닭을
던져 버리고는 말했다.
"근육이 많아서 쫄깃쫄깃할 테니까 스튜를 만드는 게 제일 좋겠어요."
점심 무렵에는 그 닭의 살이 뼈에서 떨어져 나왔고, 고양이 머리만한 비스킷 덩어리가 노
란 국물 속에서 익어 가고 있었다.
3.고향 콜드 마운틴으로
이런 처지가 아니었더라면, 정말 즐거운 마음으로 적어 놓을 만한 풍경이었다. 시원하게
뚫린 길은 무한한 자유로움을 한껏 만끽할 수 있게 했고, 새벽 무렵이면 황금빛 태양이 비
스듬히 비추며, 마차가 지나다니는 길 한쪽에는 붉은 단풍나무, 또 한쪽에는 울타리가 있고,
챙 넓은 모자를 쓴 키큰 남자가 배낭을 짊어진 채 서쪽을 향해 걷고 있는 그런 풍경... .
하지만 요즘들어 끔찍한 밤들을 지내 인만은 하나님의 가장 끔찍한 저주를 받은 난쟁이
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그는 가던 길을 멈추고 울타리 아래쪽을 한쪽 다리로 밟고 서서 이
슬 맺힌 벌판을 쳐다봤다.
인만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아침을 맞이하고 싶었지만, 새벽이 서서히 밝아 올 무렵 처음
으로 마주친 건, 길가에 있던 징그런 갈색 독사가 벌꽃 무더기 속으로 배설물처럼 흐물흐물
기어가는 광경이었다.
들판 너머로는 널찍한 숲이 펼쳐져 있었다. 뱅크스소나무, 카리브로나무, 삼나무 등 모두
쓸모없는 나무들뿐이었다. 인만은 대패질 당한 채 이리저리 엉켜 있는 나무들이 싫었다. 이
부근에 있는 것들은 모두 싫었다. 붉은 흙, 초라한 마을들.
인만은 산록 지대에서 바다에 이르기까지 이런 땅을 놓고 전투를 벌여 왔다. 지저분하고
더러운 온갖 것들이 모두 흘러 내려와 웅덩이 가득 쌓이는 보잘것없는 땅이었다. 온 나라의
쓰레기와 구정물과 오물이 모이는 지방, 진흙투성이의 진창길이라고밖에 표현 할 길이 없는
지방.
숲속 여기저기서 매미들이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냈다. 말라비틀어진 뼈다귀가 부서지는
소리 같았다. 귀가 멍멍할 지경이었고, 마음속에서 여러 목소리가 티격태격 말다툼을 벌이고
있는 소리 같기도 했다. 세상 사람 모두가 들을 수 있는 소리가 아니라 혼자서만 들으며 괴
로워해야 하는 소리와도 같았다.
목덜미의 상처가 또다시 아파 왔고, 매미 울음소리에 맞춰 욱신거렸다. 생선 아가미처럼
빨갛게 벌어진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붕대 밑을 손가락으로 더듬어 봤지만 커다란 딱지밖
에 느껴지지 않았다.
며칠 동안 여행을 했는데도, 병원에서 그다지 멀리 온 것 같지는 않았다. 건간 상태 대문
에 천천히 걸을 수밖에 없었고 마음과는 달리 중간에 자주 휴식을 취하지 않고서는 몇 마일
밖에 갈 수가 없었는데, 그렇게 느릿느릿 걷는 것조차도 힘들었다. 몹시 피곤했고 방향 감각
도 상실했지만 고향이 있는 서쪽으로 곧장 갈 수 있는 길을 찾으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작은 농가들로 이루어진 이 마을은 뒤죽박죽으로 얽힌 길이 이리저리 마구 나 있
는데도 서쪽으로 가고 있는 게 맞는 지 확인해 볼 표지판 하나 보이질 않았다.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남쪽으로 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여기까지 걸어오는 동안 거센 비가 내렸다 그쳤다 했고, 밤낮으로 갑자기 천둥과
번개가 쏟아지는 등 날씨가 매우 좋지 않았다. 판자로 만든 조그만 농가들은 서로 다닥다닥
붙어 잇엇고, 끝없이 펼쳐진 옥수수밭에는 울타리만이 유일하게 경계선 역할을 하고 있었다.
농가마다 사나운 사냥개를 두세 마리씩 기르고 있었는데, 이 사냥개들은 자그마한 소리만
들려도 대번에 달려와 길가에 서 있는 나무의 어두운 그늘에 숨어 있다가 낫처럼 생긴 이빨
로 인만의 다리를 물어뜯곤 했다. 첫날 밤에는 몇 차례 공격을 물리쳤지만, 점박이 암캐가
가죽 구멍을 뚫는 기계처럼 거칠게 달려드는 바람에 종아리에 상처를 입었다.
개에게 물리고 나서 인만은 호신용 무기를 찾아 나섰고, 어느 구덩이 속에서 단단한 쥐엄
나무 몽둥이를 발견했다. 그후로는 새로 박아 놓은 기둥 주변의 땅을 다지는 것처럼 몽둥이
를 아래쪽으로 휘두르기만 해도 덤비려는 개를 쫓아 낼 수 있었다. 그후론 매일 밤 몽둥이
만 휘두르면 개들은 아무 소리 없이 잽싸게 달아났다. 그런 개들과, 탈영병을 추적하고 있을
시민자위대에 대한 걱정, 구름과 잔뜩 낀 우울한 밤 때문에 여행은 이래저래 피곤할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서도 어젯밤은 최악이었다. 구름이 조금 걷히면서 하늘 어디선가 나타나 떨어지는
유성이 보였다. 휘잉 궤도를 그리고 있는 유성들은 인만을 향해 날아드는 작은 탄환 같았다.
그후 어둠속 어디선가 커다란 불똥이 솟아올라 정확히 인만의 머리 위쪽을 겨냥하면서 천천
히 움직여 왔다. 하지만 목적지에 도달하기도 전에 침을 묻힌 손가락으로 꺼버린 촛불처럼
그냥 사라져 버렸다.
그 불똥이 사라진 뒤 돼지 같은 얼굴을 한 박쥐 한 마리가 머리 쪽을 향해 푸덕이며 날아
왔다. 인만은 고개를 웅크린 채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바로 그때 나방 한 마리가 코 바로 앞쪽으로 커다란 원이 점점이 박힌 날개를 확 펼쳤고,
인만은 이상하게 생긴 녹색 전령이 무슨 메시지라도 전달하러 불쑥 나타난 건 아닌가 착각
했다. 쉭쉭 소리를 내며 손을 크게 휘둘렀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잠시 후, 느릿느릿 걸어오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 인만은 급히 나무 위로 몸을 숨겼다. 인
만과 같은 사람들을 붙잡아 다시 군대로 복귀시키러 나선 시민자위대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지나가자 인만은 나무에서 내려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나무 등걸마다 어둠 속에
잠복해 있는 사람처럼 보였고, 한 번은 커다란 모자를 눌러쓴 뚱뚱한 남자처럼 보이는 풀숲
덤불을 향해 총을 들이대어 보기도 했다.
자정이 훨씬 지났을 때 움푹 꺼진 개울을 건너던 인만은 진흙을 손가락에 묻혀 재킷 가슴
에 점을 하나 찍고, 그 주변에 동심원을 몇 개 그린 후에 계속 걸어갔다. 이 여행이야말로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될 거라는 생각을 하며 하늘 나라의 과녁, 밤을 틈타 여행하는 사람, 도
망자, 탈영병의 표지를 새긴 것이다.
그 기나긴 밤을 보내고 나자, 인만은 숲속으로 가려진 조용한 탁 트인 지역에 도착했으니
발걸음을 재촉하는 수밖에 없었다.
태양이 하늘 위로 솟아올라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인만의 몸에서 흐르는 액체가 맛있다는
사실이 벌레들에게 알려졌는지 줄무늬 모기들이 귓가에서 윙윙댔고, 셔츠를 뚫고 등을 물었
다. 덤불 위에서 진드기가 떨어져 목덜미와 바지 허리춤에 달라붙더니 피를 빨아대기 시작
했다. 눈을 향해 달려든 모기도 있었다.
얼마 동안 말파리 한 마리가 쫓아오면서 목덜미를 괴롭혔다. 엄지손가락 마지막 마디만큼
커다란 몸집에 시커먼 공처럼 생겼고 윙윙 소리를 내는 놈이었는데, 살점과 피를 노리고 달
려들 때마다 아무리 몸을 비틀고 손으로 찰싹 때려도 잡을 수가 없었다. 헛손질만 할 뿐이
었다. 멀리서 보면 새로운 타악기를 실험해 보는 음악가나, 착한 본성대로 살지 못하는 자신
에 대한 혐오감에 몸을 찰싹찰싹 때리는 미치광이로 보였을 것이다.
인만은 걸음을 멈추고 소변을 눴다. 볼일을 다 끝마치기도 전에 봄하늘색 나비들이 그 위
로 내려앉았다. 햇살을 받은 날개가 푸른 금속 조각처럼 빛나는 그 나비들은 소변 따위를
마시기에는 너무 아름다운 생물로 보였지만, 그런 모습이 발로 이 지역의 생태였다.
오후가 되자 교차로에 자리잡은 마을에 도착했다. 인만은 마을 어귀에 선채로 사방을 둘
러봤다. 상점 하나, 집 몇 채, 대장장이가 바퀴를 밟으며 길다란 낫을 갈고 있는 오두막 한
채밖에 보이지 않았다. 낫을 바퀴와 직각이 아니라 사선이 되게 잡고 있어야 하는데, 대장장
이는 날을 갈고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무뎌지게 만들고 있었다.
마을을 돌아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인만은 벽에 회칠을 한 상점으로 들어가 먹을
것을 사는 모험을 감행해 보기로 결심했다. 우선 평범한 행인처럼 보이도록 돌돌 만 담요
속에 권총을 숨겼다.
가게 출입구 쪽에는 남자가 둘 앉아 있었는데, 인만은 계단을 올라가도 쳐다보지 않았다.
한 남자는 모자를 안 쓰고 있었고, 아침에 일어나서 머리를 손질한 적이 없는 지 머리카락
이 모두 한쪽으로 누워 있었다. 소총에 달려 있는 뾰족한 가슴쇠로 손톱 청소 거위 발바닥
처럼 색깔이 희끄무레한 혓바닥 끝이 입술 한쪽에서 빠끔히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또 다른 남자는 신문을 읽고 있었다. 군복 같은 것을 몸에 걸치고, 머리에는 앞 챙을 뜯어
회색 타부시처럼 몸체만 덩그라니 남은 보병모를 쓰고 있었다. 모자를 아주 삐딱하게 쓴 품
이 건달처럼 보였다.
그 남자 뒤쪽 벽에는 고급 위트워스 소총이 있었다. 놋쇠로 정교하게 만들어졌고, 마찰로
인한 편차와 양각을 조절하기 위해 작고 복잡한 바퀴와 나사가 많이 달려 있는 고급 소총인
데, 먼지가 끼지 않도록 단풍나무로 만든 덮개가 육각형 모양의 총신을 감싸고 있었다.
인만은 지금까지 위트워스 소총을 몇 자루밖에 본 적이 없었다. 저격수들이 가장 좋아하
는 총으로, 영국 수입품이며, 희귀하고 비싼 종이 큐브 탄약통 역시 영국에서 수입되었다.
45구경으로 화력이 그다지 세지는 않았지만, 1마일 정도 떨어진 목표물도 해치울 수 있는
놀라운 정확성을 자랑하는 총이었다. 웬만큼 사격술을 익힌 사람이라면 이 총으로 목표물을
정확히 맞출 수 있었다. 인만은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고급 소총을 손에 넣을 수 있었
는지 의아스러울 뿐이었다.
인만이 옆을 지나 가게 안으로 들어가는데도 두 사람은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가게 안에
서는 노인 두 사람이 난롯가에 앉아 술통 위에서 게임을 하고 있었다. 한 사람이 동그란 나
무통 위로 손가락을 쫙 펼쳐 놓으면, 다른 사람이 주머니칼 끝으로 손가락 사이사이를 찌르
는 게임이었다. 인만은 잠시 그 게임을 지켜보았지만, 규칙이 어떻게 되는지, 어떤 식으로
점수를 매기는지, 그리고 어떻게 승자를 가리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인만은 이 상점에서 갖추어 놓은 얼마 안 되는 물건들 중 옥수수가루 5파운드, 치즈 한
조각, 말린 비스킷 몇 조각, 커다랗고 달콤한 피클 하나를 사들고 밖으로 나왔다. 좀전의 두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금방 자리에서 일어났는지 흔들의자가 아직도 흔들리고 있었다. 인만
은 음식을 먹으며 서쪽으로 향한 길을 따라 걸어갔다. 검은 개 두 마리가 이쪽 그늘에서 저
쪽 그늘로 사라졌다.
마을 입구에 도착했을 때, 아까 가게 현관 앞에 앉아 있던 두 남자가 대장간 뒤에서 나타
나더니 인만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바퀴를 밟고 있던 대장장이가 일손을 멈추며 그 광경을
지켜봤다.
"어디로 가는 거야, 이 개자식아!"
모자를 쓴 남자가 말했다. 인만은 아무 대꾸도 않은 채 피클을 한 입에 먹어치우고는 남
아 있던 치즈와 비스킷을 양식 자루 안에 넣었다. 손톱을 청소하던 남자가 옆으로 다가왔다.
무거운 가죽 앞치마를 두른 대장장이가 낫을 들고는 오두막에서 뛰어 나와 다른 쪽을 막고
섰다.
두 사람 모두 덩치가 크지는 않았다. 대장장이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봐도 그는 대장장
이로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술에 취한 부랑자들처럼 보였는데, 자기들이 수적으
로 우세하니 낫만 있어도 인만을 해치울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인만이 돌돌 말려 있던 담요로 손을 대는 순간 세 사람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주먹질을 하
고 머리로 받았다. 인만은 배낭을 내려놓을 틈조차 없었기 때문에 고함을 지르며 몸을 감쌌
다.
그는 뒷걸음질치면서 그들의 매질을 피했다. 땅바닥 위에 쓰러져서 매질을 당하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기 때문에 상점 벽이 등에 닿을 때까지 뒤로 물러섰다.
대장장이가 한 걸음 물러서더니 장작을 패는 사람처럼 인만의 머리 위로 낫을 휘둘렀다.
그는 인만의 몸을 쇄골에서부터 사타구니까지 세로로 가를 작정이었지만, 동작이 서투른데
다 낫의 생김새도 그리 신통치 않아 보였다. 인만을 제대로 찌르지도 못하고 낫은 그대로
땅에 꽂히고 말았다.
인만은 대장장이의 손에서 낫을 빼앗아 들고는 낫의 본래 쓰임새대로 땅에서 가까운 곳을
훑듯이 길게 휘둘렀다. 낫이 자신들의 발치를 왔다갔다 하는 것을 보며 세 사람은 발목이
잘리지 않도록 뒤로 물러서야 했다.
인만은 그들의 뼈를 자를 생각에 꼴을 벨 때보다 훨씬 더 거칠게 낫을 휘두르고 있었지만
오랜만에 잡아 보는 낫이 익숙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위험한 상황인데도 손으로 낫을 잡고
다리를 넓게 벌려 땅 쪽으로 날을 약간 기울이는 기본 자세가 다시 되살아 나면서, 꼴을 베
고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세 남자는 깡충깡충 뛰며 긴 날을 피하다가 다시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인만은 대장장이
의 정강이뼈를 향해 낫을 휘둘렀지만, 돌로 만든 상점 건물과 부딪치면서 하얀 불꽃을 튀기
더니 자루만 남긴 채 날이 부러져 버렸다. 자루만이라도 무기로 사용하려고 했지만, 길고 균
형이 안 맞는데다 휘어져 있어 몽둥이로도 쓸 수 없었다.
하지만 결국 세 사람을 때려눕혀 지저분한 땅바닥 위에 기도하는 가톨릭 신자들처럼 무릎
꿇게 했으므로 낫자루는 임무를 다한 셈이다. 낫자루를 곤봉삼아 세 사람이 얼굴을 바닥에
댄 채 납작하게 엎드리도록 만들었으니 말이다.
세 사람이 항복하는 자세를 보이자 인만은 길 건너 두드러기쑥덤불 속으로 낫자루를 던졌
다. 그러자마자 대장장이가 미적미적 일어나 앞치마에서 소구경 리볼버를 꺼내더니 부들부
들 떨면서 인만을 향해 가늠쇠를 잡아 당기려 했다.
"헛수작 집어 치우시지."
인만은 재빨리 그 조그만 권총을 빼앗아 대장장이의 머리에 들이댔다. 그러고 나서 고집
불통 인간 쓰레기 같은 그들에게서 좌절감을 느끼며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뇌관이 젖었
거나 잘못됐는지 찰칵 소리가 네 번 날 때까지 총알이 발사되지 않았다. 인만은 그를 죽이
기를 포기하고 총으로 대장장이의 뒤통수를 한 번 내리치고 상점 지붕 위로 휙 내던진 후
떠나 버렸다.
마을을 벗어난 인만은 쫓아오는 사람들을 따돌릴 생각에 숲으로 방향을 틀어 길이 없는
쪽으로 걸어갔다. 오후 내내 이따금씩 걸음을 멈춰 뒤따라오는 사람이 없나 귀기울이면서
소나무 등걸과 덤불 사이를 뚫고 서쪽으로 향했다.
가끔 저 멀리서 사람 말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지만 희미했다. 어쩌면 강물 흐르는
소를 목소리로 착각했을는지도 모른다. 개 짖는 소리도 들리지 않아서 인만은 그게 마을 사
람들이 쫓아오는 소리라 하더라도 이제는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밤도 찾아오고 있었
다. 인만은 소나무 가지 사이로 빛을 뿌리며 머리 위로 움직이는 태양을 따라 걸음을 옮겼
다.
걸어가면서 스위머가 강력한 효과가 있다며 가르쳐 준 주문을 떠올렸다.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주문이었는데, 한 구절 한 구절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스위머는 체로키 인디언 말이
아닌 영어로 외워서는 효과가 없기 때문에 배워 봐도 아무 쓸모가 없다고 했었다. 하지만
인만은 모든 언어가 통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걸어가면서 세상과 적들을 향해 이 주문을
외웠다. 절망에 빠졌거나 기적을 바라는 사람이 한 가지 기도문을 계속 외우다 보면 마침내
머릿속에 기도문이 완전히 각인되어 일을 하거나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자연
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처럼, 인만은 그 주문을 혼자서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들어라, 너는 밤의 땅으로 향하는 길을 가고 있다. 너는 홀로 될 것이다. 한여름의 개처럼
될 것이다. 양손을 한데 오므려 그 위에 개똥을 들고 다닐 것이다. 밤의 땅을 향해 외로이
걸어가면서 개처럼 짖을 것이며, 너에게서는 개똥 냄새가 날 것이다. 그 냄새가 떠나지 않을
것이다.
너의 검은 내장이 사방에서 떠다니게 도리 것이다. 그 내장이 걸어가고 있는 네 다리를
때릴 것이다. 너는 죽었다 살아났다 할 것이다. 네 영혼은 거무죽죽한 절망의 빛깔로 색이
바랠 것이다. 네 영혼은 멀리 사라져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네가 가는 길은 밤의 땅
으로 향하는 길이다. 이것이 네가 가야 할 길이다. 다른 길은 없다.
인만은 잠시 주문을 외며 걷다 보니 주문이 거꾸로 날아와 자신을 공격하는 것 같은 기분
이 들었다. 게다가 얼마 후에는 먼로의 설교와 통하는 데가 잇다는 생각도 들었다. 먼로는
늘 그렇듯이 성경 구절이 아니라 에머슨의 장황한 글에서 다양한 성인들의 이야기를 인용해
설교했는데, 이 주문과 유사한 점이 있었다. 인만으로서는 어느 면으로 봐도 스위머의 주문
이 훨씬 마음에 들었다. 인만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먼로가 설교 도중 극적 효과를 위해
일정한 간격으로 네 번씩이나 말했던 이런 구절이었다.
내게 하느님을 보여 주는 것들은 나를 강하게 만듭니다. 내게서 하나님을 앗아가는 것들
은 나를 사마귀나 혹으로 만듭니다. 존재의 이유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게 됩니다. 망각이
라는 긴 그림자가 나를 덮치게 되고, 나는 영원히 소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만은 이 구절이야말로 평생 동안 들었던 설교 중 가장 마음에 와닿는 구절이라고 생각
했다. 그리고 그것은 인만이 아다를 처음 만날 날 들었던 설교였다.
인만은 아다를 보기 위해 교회를 찾았다. 아다가 콜드 마운틴에 오고 나서 몇 주 동안 인
만은 그녀를 만나 보기도 전에 그녀에 관한 무성한 소문들을 먼저 접했다. 이들 부녀는 새
로 이사 온 마을에 오랫동안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고, 이집 저집에서 웃음거리가 되고 있었
다. 현관에 앉아 아다와 먼로가 마차를 타고 지나가는 모습이나 길을 따라 산책하고 있는
아다를 지켜보는 것은 연극 구경을 하는 것만큼 재미있었다. 그녀는 도크 거리에 있는 오페
라 극장에서 새로 선보인 작품만큼이나 화젯거리였다.
아다가 예쁘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찰스턴식 옷차림이나 화려한 색
에 감탄하거나, 허리를 굽혀 흰독말풀 이파리에 달려 있는 가시라도 만질 때면 사람들은, 자
신들이 알 수 없는 그 무엇에 홀린, 정신이 약간 이상한 여자가 아닌지 모르겠다고 수군대
곤 했다. 공책과 연필을 들고 다니며 새나 덤불, 잡초, 일몰, 산을 쳐다보다가 종이 위에 뭔
가를 끄적거린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런 모습이 마치, 기록으로 남겨두지 않으면 중요한 걸
잊어버릴 만큼 멍청한 사람으로 보인다고들 했다.
어느 일요일 아치 인만은 새로 산 검은색 정장, 흰 셔츠, 검은색 넥타이, 검은색 모자로
정성스럽게 차려 입고 아다를 보러 교회를 찾았다. 겨울이었고, 사흘 동안 쉴새없이 차가운
비가 내렸다. 간밤에 비가 멈췄지만 아침 햇살이 아직 구름에 가려 있었고, 산봉우리 사이로
살짝 보이는 하늘은 어둡고 낮게 드리워져 있었다.
도로가 온통 진흙탕이었기 때문에 늦게 도착한 인만은 신도석 뒷줄에 앉았다. 사람들은
이미 찬송가를 부르고 있었다. 난로에서는 장작불이 타고 있었다. 연기가 천장까지 올락 회
색으로 넓게 퍼진 모습이 마치 실제 하늘을 축소해 놓은 것처럼 보였다.
인만이 앉은 쪽에서는 사람들의 뒤통수밖에 안 보였지만 한눈에 아다를 알아볼 수 있었
다. 검은 머리를 위로 틀어올려 이곳 사람들에게는 낯선 최신 스타일로 화려하게 땋아 놓았
기 때문이었다. 땋아 올린 머리 아래로 보이는 하얀 목덜미에는 양쪽으로 하나씩 머리를 지
탱하고 있는 근육 두 가닥이 희미하게 솟아 있었다. 그 근육 사이로 움푹 패인 어두운 부분
이 있었고, 땋기에는 너무 가는 곱슬머리가 보였다.
찬송가를 부르는 동안 인만의 시선은 아다의 뒷모습에 고정되어 있었다. 아다의 얼굴을
보기 전부터 그 신비로운 부분을 두 손가락을 살짝 눌러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먼로는 방금 부른 찬송가로 설교를 시작했다. 사랑이라는 바다에 흠뻑 빠질 때를 열심히
기다린다는 가사 같지만, 세상 만물이 모두 우리를 사랑해 줄 거라고 착각한다면 노래를 잘
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며, 정말 필요한 것은 우리가 세상 만물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신도들은 과연 그런 행동이 가능할까 의아해하며 실망스럽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그 다음 설교는 먼로가 콜드 마운틴으로 옮겨 온 이후 해왔던 설교와 똑같은 주제였다.
먼로는 일요일과 수요일마다 천지창조의 가장 큰 수수께끼라 여겨지는 의문에 대한 이야기
를 되풀이했다. 즉 인간은 죽을 운명이면서 왜 태어나는가 하는 것이 그 주제의 초점이었다.
그 두 가지는 얼핏 보면 앞뒤가 맞지 않았다. 몇 주 동안이나 먼로는 여러 각도에서 근본
적으로 그 질문을 풀어 보려고 애썼다. 성경에는 그 문제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또
한 유구한 세월 동안 수많은 나라의 현자들은 그런 의문에 어떤 결론을 내렸는지, 먼로는
모든 지식을 동원해서 그 문제를 집중적으로 연구했지만 허사였다.
몇 주가 지나자 신도들 사이에서 불평이 터져 나왔다. 이곳 사람들은 먼로처럼 죽음이라
는 문제를 놓고 고민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먼로처럼 죽음을 비극으로 받아
들이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하늘나라로 가는 기꺼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죽
음을 영원한 안식으로 여기면 오히려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세상을 떠나고 없는 예전의 목사가 했던 식으로 설교를 하면 먼로의 마음이 진정
될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죄인을 꾸짖거나, 갈대숲에 버려진 아기 모세, 돌팔
매로 거인 골리앗을 거꾸러뜨린 꼬마 다윗의 기적 같은 성경 이야기들을 흥미진진하게 늘어
놓는 식으로 말이다.
먼로는 자신의 사명은 그런 것이 아니라며 그 충고들을 거절했다. 그 말이 온 동네로 퍼
지자, 사람들은 그 '사명'이라는 말이야말로 신도들을 무지몽매한 미개인으로 몰아붙이는 말
이라고 단정했다. 이 마을 사람들은 피부색도 까맣고 이 지역보다 훨씬 외진 곳에 살고 있
는 진짜 미개인들에게 선교사를 파견하기 위해 돈을 모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말을 못
마땅했다.
신도들 사이에 번진 불평을 잠재우기 위해 먼로는 모든 남녀에게 사명이 있다는 말로 일
요 예배의 설교를 시작했다. '사명'이라는 말은 일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인간은 어차피 죽을
운명이면서도 왜 태어나는지 그 이유를 밝히는 것이 자신의 일이며, 끈기 있게 말을 길들이
고 밭에서 돌을 골라 내는 사람처럼 그 문제를 파고들 생각이라고 했다.
그리고 먼로는 자신의 말대로 행동했다. 그것도 아주 장황한 설교였다. 그날 아침 설교가
진행되는 동안 인만은 아다의 목을 쳐다보면서 먼로가 사마귀, 혹, 영원히 소멸한다는 에머
슨의 구절을 네 번 반복하는 소리를 들었다.
예배가 끝나자 남자와 여자들은 각자 다른 문을 통해 교회 밖으로 나갔다. 흙탕물을 뒤집
어쓴 말들이 줄에 묶인 채 졸고 있었고, 그 뒤로 서있는 마차의 수레바퀴살은 온통 진흙투
성이였다.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잠을 깼는지, 밤색 암말 한 마리가 더러워진 카펫 터는
소리를 내며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교회 앞마당은 진흙과 젖은 잎사귀, 젖은 옷과 젖은 말
냄새로 가득 찼다.
남자들은 한 줄로 서서 먼로와 악수를 나눈 후에 질퍽한 교회 마당을 서성대며 비가 완전
히 그친 것인지, 아니면 잠시 멈춘 것인지 살펴봤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 몇몇은 낮은 목소
리로 먼로의 설교가 이상하다는 둥, 성경 구절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는 둥, 다른
사람들의 희망사항을 고집스럽게 외면하다니 정말 대단하다는 둥 수군거렸다.
결혼하지 않은 남자들은 진흙이 잔뜩 묻은 신발과 밑단에 흙탕물이 잔뜩 튄 바지 차림으
로 빙 둘러 모여 섰다. 일요일 아침보다는 토요일 저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모두들
한쪽 귀퉁이에 서 있는, 이 지방에는 전혀 안 어울리는 이국적인 매력을 가진 아다를 힐끔
힐끔 쳐다봤다.
축축하고 으슬으슬한 날씨 때문에 다들 양모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녀만 유독 칼
라와 소매와 치맛단에 레이스가 달린 아이보리색 린넨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날씨에 상관
없이 달력에 따라 옷을 선택한 것 같았다.
아다는 팔꿈치를 감싸 안은 채로 서 있었다. 중년 부인들이 그 쪽으로 다가가 뭔가 이야
기를 하다가 어색한 침묵이 흐르자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인만은 사람들이 다가올 때마다
아다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면서 독립 전쟁에 참전했다는 어떤 남자의 비석에 몸을 기댄
다는 걸 눈치챘다.
"내가 저 여자한테 말을 걸면 뭐라고 대꾸할까?"
인만과 똑같은 이유로 교회를 찾은 딜라드가 인만에게 물었다.
"글쎄."
인만이 말했다. 그때 흡 마스가 딜라드에게 말했다.
"넌 저 여자에게 어떤 식으로 청혼해야 하는지도 모르잖아. 나한테 맡겨 두라고."
마스는 키가 작고 가슴이 넓었다. 조끼 주머니가 볼록하게 튀어나올 정도로 커다란 시계
를 넣고, 바지 허리춤까지 연결된 은색 줄에는 시계 주머니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딜라드가 말했다.
"무슨 뾰족한 수라도 잇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군."
"착각이 아니라 사실이야."
그러자 호리호리하고 못생긴 한 남자가 듣고만 잇다가 입을 열었다.
"나는 찰스턴에 저 여자 신랑감이 있다는 쪽에 백 달러짜리 생강 케이크 반쪽 내기를 걸
겠다."
"그런 신랑감은 과거의 남자가 되어 버릴 수도 있지. 많은 신랑감들이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 하고 흡이 말했다.
그러다 홉은 옷을 차려입고 온 인만을 훑어봤다.
"무슨 법관처럼 차려입고 오셨군 그래. 하지만 청혼하는 남자라면 뭔가 색깔 있는 옷을
입어야 하지 않겠어?"
그 남자들은 한 사람이 용기를 내어 아다에게 접근했다가 망신을 당할 때까지 그런 이야
기를 계속할 게 분명했다. 아니면 서로 말다툼을 하다가 결국엔 길가에서 싸움을 벌이거나,
인만은 이마에 손가락을 갖다대며 "녀석들 하고는" 하더니 자리를 떴다. 그는 곧장 샐리 스
왱거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그녀를 제게 소개해 주시면 새 땅 1에이커를 깨끗하게 갈아 드리겠습니다."
샐리는 앞창이 긴 보닛 모자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뒤로 물러서며 괘를 삐딱하게 돌려 눈
이 가리지 않도록 하면서 인만을 올려다봤다. 그러고는 씩 웃으며 칼라에 단 싸구려 브로치
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누구한테 소개를 시켜 달라는 건지 말 안 해도 알겠네."
"지금 해주세요" 하고 말하며 인만은, 사람들을 등지 채 몸을 약간 앞으로 구부리며 놀랍
다는 표정으로 비문을 읽고 있는 아다를 쳐다봤다. 드레스 끝자락이 무덤가에 웃자란 풀 때
문에 젖어 있었고, 뒤쪽 끝 부분은 진 흙 바닥에 끌리고 있었다.
샐리는 인만의 검은색 외투 소맷자락을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으로 살짝 잡더니 마당을
가로질러 아다가 잇는 쪽으로 데리고 갔다. 샐리가 손을 놓자 인만은 한 손으로 모자를 벗
었다. 그리고 다른 쪽 손으로 이리저리 눌려 있던 머리 모양을 다듬었다. 머리를 양쪽 관자
놀이 뒤로 쓸어 넘기고 나서 얼굴을 손바닥으로 훔쳤다. 샐리가 헛기침을 하자 아다가 돌아
봤다.
"먼로 양."
얼굴에 웃음을 띠며 샐리 스왱거가 입을 열었다.
"인만 씨께서 먼로 양과 인사를 나누고 싶다는 군요, 인만 씨 부모님은 뵌 적이 있죠? 그
집안 사람들이 교회를 세웠답니다.'
샐리는 존경스럽다는 듯이 이 말을 덧붙이고 나서 자리를 비켜 주었다.
아다가 인만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제야 인만은 무슨 말을 할지 미리 생각해 좋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머릿속에서 미터 한 문장을 만들어 보기도 전에 아다가 입을 열
었다.
"무슨 일이시죠?"
짜증이 배어 잇는 듯한 목소리였지만, 왠지 그는 그녀의 말투가 재미있었다. 고개를 돌려
언덕을 굽이굽이 흐르고 있는 강물을 내려다보면서 웃음을 참아야 할 정도였다. 강둑에 난
철쭉과 나무 잎사귀들은 반짝반짝 빛이 났고, 맺혀 있는 물방울이 무거워 고개를 숙이고 있
었다.
물이 엄청나게 불어난 시커먼 강물은 녹아 내린 유리처럼 곡선을 그리면서 숨어 있는 바
위를 휘감고 돌다가 골짜기 사이로 흘러 들어갔다. 모자 윗부분을 잡고 있던 인만은 달리
할 말이 없었기 때문에 모자만 내려다봤다. 마치 모자 안에서 뭔가가 튀어나오기를 기다리
는 사람처럼.
아다는 그의 얼굴을 잠시 들여다보다가 모자도 함께 쳐다봤다. 인만은 자신이 지금 마르
모트 굴 입구에 앉아 있는 개 같은 표정을 짓고 있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인만은 아다를 쳐다봤다. 그녀는 왜 그러느냐는 듯 손바닥을 위로 들어 보이며 눈썹을 쫑
긋 세웠다.
"모자를 쓰고 말씀하셔도 돼요."
아다가 입을 열었다.
사람들이 당신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상상들을 하고 있어요."
"나와 이야기하는 게 무슨 특별한 경험이라도 된다는 말인가요?"
"아뇨"
"그럼 도전장인 모양이군요. 저기 서 있는 멍청이들이 던지는."
"아닌데요."
"그럼 알기 쉽게 비유를 들어 설명해 주시죠."
"밤에 달린 깔쭉깔쭉한 가시를 만지는 것과 가타고들 하고 이죠, 지금까지는."
아다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깔쭉깔쭉하다'라는 단어를 알고 있으리라고
는 생각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물어 볼게요. 일전에 어떤 여자분이 요즘 날씨 이야기를 하면서 '양을 죽이기엔
딱 좋은 날씨'라는 표현을 썼거든요. 그후로 계속 궁금했어요, 양을 잡기에 알맞은 날씨라는
말인가요. 아니면 어떤 조처를 하지 않으면 양이 물에 빠진다거나 페렴에 걸려서 죽어 버릴
정도로 궃은 날씨라는 말인가요?"
"양을 잡기에 알맞은 날씨라는 뜻이에요."
이 말을 한 후에 아다는 몸을 돌려 아버지 쪽으로 걸어갔다. 인만은 그녀가 먼로의 팔을
잡고 무슨 말인가를 나누다가 함께 마차에 올라타더니 꽃이 만발한 검은딸기가 양쪽으로 울
창하게 늘어서 있는 길 너머로 사라져 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드디어 저녁 무렵에 인만은 꼴보기 싫은 소나무 숲에서 나와 엄청나게 물이 불어나 있는
커다란 강둑에 나설 수 있었다. 건너편 강둑의 나즈막한 지평선 바로 위에 태양이 머물러
있었고, 안개 때문에 주변의 모든 사물이 짙은 노을빛을 띠고 있었다.
상류 쪽에서 비가 엄청나게 내렸는지 강물이 둑위로 넘칠 정도로 넘실대고 있어, 수영을
잘하는 인만으로서도 헤엄쳐서 건너기에는 강폭이 너무 넓고 물살이 빨랐다. 사람이 없는
다리나 버팀목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그는 오른쪽으로 음산한 소나무 숲, 왼쪽으로
지긋지긋한 강물이 잇는 좁다란 길을 따라 위쪽으로 올라가 봤다.
황토색 진흙 속으로 깊이 패인 도랑 몇 개만 있을 뿐 평평하고 지저분한 지역이었다. 키
작은 소나무들이 여기저기 있었다. 예전에는 훨씬 보기 좋은 나무였겠지만, 오래 전에 벌목
당해선지 지금은 동그란 식탁처럼 넓고 단단한 등걸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소나무를 타고 올라가 가지를 휘감은 담쟁이가 숲을 온통 뒤덮고 있었다. 한데 뒤엉킨 담
쟁이 덩굴 사이로 솔잎이 떨어져 박히면서 등걸과 가지를 부드럽게 감쌌고, 이 때문에 나무
는 땅속에서 솟아 나온 녹색 괴물처럼 모였다.
숲은 온갖 병균이 모여 있는 위험한 곳처럼 보였다. 해안가에서 전투를 할 때, 어떤 남자
가 습지에서 자라고 있던 작고 털이 북슬북술하고 이상하게 생긴 식물을 가리키며 육식식물
이라고 알려 줬던 것이 생각났다. 두 사람은 나뭇가지 끝에 돼지 비계를 끼워 이 식물에게
대어 봤다. 그 남자 말로는 손가락 끝을 입처럼 생긴 곳에 갖다대면 덥석 물어 뜯는다고 했
다. 이 숲도 조만간 대규모로 그런 기술을 익힐 것 같았다.
인만은 어서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황토색 강물이 앞길을 막고 있었다. 물이라
기보다는 금세 굳어 버리는 당밀처럼 보였다. 인만은 그렇게 보기 싫은 강물을 머릿속에 기
억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기억하고 있는 강물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인만이 살던 고향에서는 '강물'이라고 하
면 바위와 이기와 중력이라는 주문에 따라 하얀 물이 빠르게 흘러가는 소리를 위했다. 나뭇
가지를 던지면 건너편까지 닿지 않을 만큼 넓은 강도 없었고, 바닥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강
도 없었다.
이 널따란 웅덩이는 주위 풍경에다 지저분한 점을 하나 찍어 좋은 것에 불과했다. 통나무
가 박혀 있는 상류 쪽 하늘에 둥실둥실 떠다니고 있는 노란색 구름과 대조적으로 이 강물은
갈색 페인트칠을 한 양철판처럼 불투명하고 별다른 특징이 없었다. 집밖에 고요 있는 시궁
창처럼 더러웠다.
인만은 이 지방을 여행하면서 본 것들이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떻게 이런 곳을 조
국이라 생각하며 그 조국을 위해 싸울 생각을 했을까?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이라는 말 외에
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지금 싸워서 쟁취할 말한 가치가 잇는 것이라곤 피존 강의 서쪽 지
류, 스케이프캣 지류가 흐르는 콜드 마운틴에서 어느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살 권리 그
것밖에 없었다.
인만은 고향을 떠올렸다. 아름드리 나무가 자라고 1년 내내 가볍고 서늘한 공기가 느껴지
는 곳, 똑바로 세워 좋은 기관차를 연상시킬 정도로 몸통이 굵은 목련이 자라는 곳.
인만은 고향으로 돌아가서, 가을이면 구름 사이를 날아다니는 쏙독새만이 자신의 구슬픈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 만큼 높은 곳에 오두막을 세우는 모습을 상상해 봤다. 귀가 필요
없을 만큼 한적한 생활도 상상해 봤다. 만약 아다가 함께 있어 준다면, 지금의 이 절망감이
점점 사라져 흔적조타 남지 않게 될 날이 찾아올 것 같았다. 비록 실낱 같은 희망이긴 하지
만... .
인만은 어느 한 가지를 간절히 염원하면 현실로 이루어진다는 말을 믿고 있기는 했지만,
이 상상만큼은 아무리 애를 써도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았다. 마치 산꼭대기에 조그만 촛
불을 세워 놓고 저 멀리서 그 촛불이 잇는 곳을 찾아오라는 주무처럼 불가능한 일이라는 생
각이 들었다.
인만은 계속 걸어갔다. 곧 날이 저물었고 드문드문 떠 잇는 구름 사이로 달빛이 비쳤다.
길과 강이 만나는 곳에 이르자 강가에 누군가가 세워 놓은 팻말이 서 있었다. '나룻배. 5달
러. 소리를 크게 지를 것.'
두꺼운 기둥에 묶인 튼튼한 밧줄이 강 건너편까지 이어져 있었다, 밧줄 중간 부분은 물에
빠져 보이지 않다가 건너편 강둑에 거이 다다르자 다시 기둥에 연결되어 있는 게 보였다.
선착장 너머로 최고 수위 지점보다 높은 곳에 집이 한 채 있었다. 불이 켜져 있었고 굴뚝에
서 연기가 새어 나왔다.
인만이 소리를 지르자 한 사람이 집에서 나와 손을 흔들더니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집 뒤에서 통나무로 만든 카누를 질질 끌면서 나타났다. 사공은 강에 카누를 띄우고 올
라타더니 몰살이 비교적 약한 강둑 근처에서 상류 쪽을 향해 열심히 노를 젓기 시작했다.
물살이 거셌지만 허리를 뒤로 젖히고는 노로 힘차게 물살을 갈랐다.
그러다 동쪽 강둑으로 방향을 돌린 후 손을 놓고는 물살에 배를 맡겼다. 노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도 저절로 떠내려 온 것이다. 햇볕에 색이 하얗게 변했을 정도로 낡은 배였다.
후 구름 사이로 달이 비추자 뭉툭하고 조잡한 배의 양쪽으로 카누가 다가왔다. 배를 저은
사람은 남자가 아니라, 인디언 피가 섞여서 머리며 피부색이 까맣고 볼이 발그스름한 소녀
였다. 희미한 달빛 아래서 본 소녀는 손으로 직접 짠 듯한 노란색 드레스를 입고 잇는 것
같았다. 커다란 손이 단단해 보였고, 노를 저을 때마다 양쪽 팔뚝의 근육이 불끈불끈 움직였
다. 어깨까지 내려온 까만 머리는 풀어헤친 채였다.
소녀는 휘파람을 불면서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강둑에 도착하자 맨발로 진흙탕 속에 뛰
어들더니 뱃머리에 달린 줄을 잡아당겨 배를 둑 위로 올려 놓았다. 그는 주머니에서 5달러
짜리 지폐를 꺼내 밀었다. 소녀는 손을 내밀지도 않은 채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지폐를 쳐다
보고만 있었다.
"5달러로는 아저씨를 저쪽까지 건너주기는커녕, 목마른 사람한테 강물 한 국자도 떠 먹일
수 없다구요."
'저기 팻말에는 나룻배 값이 5달러라고 쓰여 있던걸."
"아저씨 눈에는 이게 나룻배로 보여요?"
"그럼 나룻배를 태워 주면 되잖아."
"그거야 아빠가 계셨을 적 이야기죠. 아빠는 한꺼번에 여러 사람과 짐마차를 실을 수 있
는 커다란 너벅선으로 이 끈을 붙잡고 왔다갔다 하셨어요. 하지만 강물이 불어나는 바람에
그렇게 할 수 없어서 물이 빠질 때까지 사냥하러 가셨어요. 그때까지는 내가 요금을 몇 배
더 받아야 한단 말예요. 쇠가죽을 샀는데, 그걸로 안장을 만들어야 하거든요. 그리고 안장이
생기면 말을 살 돈을 모으기 시작할 거고, 또 말이 생기면 안장을 얹고 이 강을 영원히 떠
날 거라구요."
"이 강 이름이 뭐지?"
"그 위대한 케이프피어 강이지 뭐겠어요?"
"그래, 얼마를 주면 강을 건널 수 있겠니?"
"50달러요."
"20달러면 안 될까?"
"할 수 없죠, 뭐. 타세요."
배 위로 올라타기 전, 강둑에서 30피트 정도 떨어진 곳 수면 위로 커다랗고 번들거리는
물방울이 떠올랐다. 달빛을 받아 반짝이던 그 물방울들은 남자의 걸음걸이와 비슷한 속도로
물살을 거슬러 상류 쪽으로 움직였다. 바람 한 점 없는 잔잔한 밤이었고, 물방울이 튀는 소
리와 소나무숲에서 벌레들이 우는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저거 보이니?"
인만이 물었다.
"네."
"뭣 때문에 저런 게 생긴 걸까?"
"몰라요. 강바닥에 있는 것 때문에 생기는 거겠죠."
물에 빠진 소가 내뿜는 콧김처럼 크고 다급한 소리를 내며 물이 부글거렸다. 물방울은 천
천히 상류 쪽으로 올라가다가 구름이 달을 가리면서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강 밑바닥에 사는 메기가 먹이를 뜯어 먹는 소리일지도 몰라요, 그것들은 독수리를 잡아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먹성이 좋다는데. 한 번은 수퇘지만한 메기도 본 적이 있어요, 어쩌다
죽었는지 물살에 떠밀려 모래톱 위로 올라왔더라구요, 수염이 먹구렁이만 했어요."
'어린 강에는 돼지 비계처럼 살이 흐물흐물한 괴물 같은 물고기가 살겠지... .' 인만은 머
릿속으로 콜드 마운틴을 뚫고 흘러나오는 피존 강 상류의 작은 송어를 떠올려 봤다. 그 송
어는 길이가 손바닥보다 짧은 게 보통이었다. 몸통이 은막대에서 나오는 대팻밥처럼 반짝반
짝하고 단단했다.
인만은 배낭을 먼저 던져 넣고는 배 위로 올라가 뱃머리에 자리를 잡았다. 뒤따라온 소녀
가 튼튼하고 믿음직스러운 손으로 계속 한쪽으로만 열심히 노를 저었다. 노가 물살을 가르
는 소리에 묻혀 벌레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소녀는 강둑 근처가 물살이 빠르지 않다는 점을 이용해 배를 댔던 곳보다 훨씬 위쪽으로
배를 몰고 갔다. 그러다가 노젓기를 멈춰 서서는 노를 물속에 담가 방향키처럼 썼다. 물살에
따라 강 중심을 가리키도록 가만히 내밀고 있었던 것이다.
달이 구름 뒤로 숨자 강둑 너머로 펼쳐져 있던 땅도 사라졌고, 두 사람은 장님이 된 것
같은 기분으로 칠흑같은 어둠 속으로 흘러갔다. 동쪽 선착장 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다른 사람들이겠지.' 인만은 마을에서 마주쳤던 사람들이 여기까지 쫓아올 리가 없다고 생
각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고개를 돌리며 소녀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저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게 좋겠다."
하지만 그 순간 구름을 뚫고 하얀 달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아직도 구름
이 드문드문 떠 잇는 하늘 위로 하얀 달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햇빛에 색이 바랜 카누
옆면이 깜깜한 물을 배경으로 횃불처럼 빛났다.
코듀로이 면직물의 결을 손톱으로 긁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요란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
했고 곧이어 포화가 그 뒤를 이었다.
'위트워스로군' 인만은 속으로 생각했다.
카누 뒤쪽에 구멍이 뚫렸다. 소가 오줌이라도 싸듯이 빠르게 흙탕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강둑 쪽엔 대여섯 명 정도의 남자들이 달빛 속을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자은 권총을 쏘는
사람도 있었지만, 권총은 여기까지 총알을 날릴 힘이 없었다.
하지만 소총을 들고 있던 남자는 총신을 똑바로 세운 체 다시 총알을 장전하기 위해 꽂을
대를 움직이고 있었다. 아마도 저 사람들은 너구리 사냥처럼 일종의 스포츠를 즐기는 마음
으로 자신을 쫓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다면 오래 전에 마을로 돌아갔
을 것이다.
소녀는 몸무게를 이용해 카누를 세게 흔들어 뱃머리 쪽으로 물이 고이도록 앞쪽을 기울이
면서 사태를 잽싸게 수습했다. 인만이 셔츠 소맷부리를 찢어 구멍을 틀어막는 순간, 또다시
총알이 날아와 옆쪽에 손바닥만큼이나 커다란 구명을 뚫어 놓았다. 순식간에 카누엔 강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강물 속으로 뛰어드는 수밖에 없겠네요" 하고 소녀가 말했다.
인만은 이 말을 건너편까지 헤엄쳐 가자는 말로 받아들였다. 이렇게 깊은 강물을 겪어보
지 않은 그로서는 그렇게 멀리까지 자신이 헤엄칠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소녀의
말은 물속으로 뛰어들어 카누를 붙잡고는 보호막으로 사용하자는 뜻이었다.
인만은 배낭을 방수천으로 돌돌 감싸고 나서 카누가 완전히 가라앉을 경우에 대비해 주둥
이를 단단히 묶었다. 그리고는 소녀와 함께 강물로 뛰어들어, 저 멀리 상류 쪽이든 하류 쪽
이든 흘러가도 상관없다는 둣 물살에 몸을 맡겼다.
강물은 표면이 거울처럼 잔잔해 물 흐름이 늪지와 비슷할 듯했지만 물방아에서 "쏟아지는
물처럼 빠르게 휘몰아쳤다. 카누는 물로 가득 차 삽 모양으로 생긴 뱃머리 부분만 간신히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물을 삼킨 인만은 더러운 강물이 입 속에 남지 않도록 하얀 거품이
남을 때까지 계속 침을 뱉었다. 여지껏 마셔본 물중 제일 지저분했다.
달이 구름 사이로 나왔다가 다시 사라졌다. 목표물이 보일 정도의 달빛만 있어도 위트워
스 소총의 총알이 카누를 뚫거나 물을 때리면 수면 위를 스치고 날아갔다. 두 사람은 열심
히 다리를 저어 뒤집힌 카누를 서쪽 강변으로 끌고 가려 했지만 묵직한 그 배를 끌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두 사람은 배를 끌고 가기를 포기하고 고개만 물 위로 내민 채 물살을 따라
흘러갔다. 카누에 매달린 채 강이 구부러지는 곳이 나오길 기다리며 사태가 두 사람에게 유
리한 쪽으로 진행되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물속에 들어가서 보니 강은 둑에서 봤을 때보다 훨씬 넓게 느껴졌다. 양쪽으로 지나가는
지저분한 마을은 달빛 속에서 희미하고 불길하게 보였다. 인만은 몸을 담그고 있는 강물처
럼 이 지방에 대한 인상이나 기억도 머릿속에 하나도 남지 않길 빌었다.
강물에 빠져 있는데도 담쟁이 속에서 울어대고 있는 벌레 소리가 끊임없이 들렸다. 인만
은 독초가 자라는 시커먼 정글 한쪽에 자리잡은 커다란 강물 위로 떠가는 조그만 머리통에
불과했다. 지금 단장이라도 입가에 길다란 수염이 달린 괴물 같은 메기가 나타나 그를 집어
삼킬 것만 같았다. 찌꺼기로 가득 찬 이 강물 바닥에 메기가 싸 놓은 배설물 신세처럼 삶을
마감하게 될 것만 같았다.
그는 물살을 따라 흘러 내려가면서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세상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뿌듯한 일이었다. 세상에 대해 증오심을 품는 쪽이 그
보다 훨씬 쉬웠기 때문이었다. 지금 주의를 둘러보기만 해도 품을 수 있는 감정이었다. 주변
에 마음에 드는 것만 있어야 만족하는 것은 나약한 태도라고 솔직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말 그런 곳이 없는 건 아니었다. 콜드 마운틴이 있었고, 스케이프캣 지류가 있었
다. 그런데 지금 현재로서는 그곳으로 가려면 먼저 백 야드나 되는 강물을 건너야 했다.
잠시 후 달이 다시 구름 뒤로 숨자 사람들이 선착장을 왔다갔다했다. 인만은 마치 그 사
람들 사이에 섞여 있는 것처럼 그들의 말을 또렷하게 들을 수 있었다. 위트워스 소총의 주
인이 분명한 남자가 말했다.
"제기날, 낮이었다면 이걸로 그놈 귀를 잘라 낼 수도 있었을 텐데."
한참 후에 달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인만은 고개를 들고 카누 건너편을 바라봤다. 선착
장 조금 뒤에서 사람들이 화가 나서 손을 휘휘 내두르면서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이 보였
다. 멀리 사라져 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인만은 그 사람들처럼 영영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다 싶은 것들을 여러 가지 떠올렸다.
이따금씩 번쩍하는 불빛이 보이고 잠시 후 길다란 총성이 들리는 걸 보면 그들은 아직 가
까이에 있었다. '천둥 번개 같군.' 인만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며, 총알이 반짝하고 나서 희
미하게 펑소리가 들릴 때가지 몇 초가 걸리는지 짐작해 봤다. 하지만 그 시간으로 거리를
가늠하는 공식이 생각나지 않았다. 게다가 그 공식을 이 상황에 적용시켜도 되는지 알 수
없었다.
마침내 강이 구부러지면서 선착장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제서야 안전하게 카누 반대편
을 잡고 열심히 다리를 저었더니 글세 강둑에 닿을 수 있었다. 카누는 한쪽이 완전히 망가
져 버려서 두 사람은 카누를 그 자리에 버려 둔 채 상류 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소녀의 집에 도착한 인만은 낡은 통나무배의 변상조로 돈을 좀더 많이 지불했고, 소녀는
서쪽으로 가는 길을 알려 줬다.
"몇 마일 걸어가다 보면 이 강은 '호'와 '디프'로 갈라져요, '디프'가 왼쪽 지류인데, 서쪽으
로 흘러가고 있으니까 그걸 따라가면 될 거예요."
인만은 강을 따라가다 두 갈래로 나뉘는 지점에 도착하자 덤불 속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
다. 불을 지펴 옥수수죽 같은 것을 만든다는 것을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인만은
길가에 떨어져 있던 푸르스름한 사과와 케이프피어 강물 맛이 짙게 배어 있는 치즈와 딱딱
한 비스킷을 먹었다. 그리고 바닥의 습기를 막을 수 있을 만큼 두텁게 낙엽을 쌓아 올리고
는 잠을 청했다.
세 시간쯤 잤을까, 잠에서 깨어났을 땐 얻어맞은 얼굴이 얼얼했고 멍들어 있었다. 담쟁이
를 헤치며 숲을 뚫고 와서 팔이 온통 생채기투성이었다. 목을 만져 보니, 세 남자한테 맞아
선지 물에 불어선지 상처가 터져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인만은 배낭을 집어들고 다시 걷
기 시작했다.
4.생존을 향한 첫 걸음
아다와 루비가 처음 만난 날 아침에 맺은 계약은 '루비는 골짜기로 거처를 옮기고 아다에
게 농장 경영법을 가르쳐 줄 것이며, 보수는 거의 받지 않는다. 식사는 대부분 함께하지만,
루비가 다른 사람과 함께 사는 걸 싫어하므로 오래된 오두막집을 루비의 숙소로 삼는다' 라
는 내용이었다.
닭고기와 푸딩으로 점심 식사를 마친 후, 루비는 집으로 돌아가 옮길 만한 물건을 모두
보자기에 넣었다. 그리고 양쪽 끝을 묶어 어깨에 멘 후 뒤돌아보지 않고 블랙 코브 농장으
로 떠낫다.
처음 며칠 동안 두 여자는 남아 잇는 물품을 목록을 함께 만들고, 시급히 해야 할 일들을
순서대로 적었다. 아다와 함께 농장을 둘러보던 루비는 주위를 샅샅이 둘러보면서 여러 가
지 의견을 내놓았고, 끊임없이 말을 했다. 아다는 그 뒤를 따라다니면서 루비의 말을 모두
받아 적었다. 여지껏 시나 인생에 대한 생각, 하루에 있었던 일들을 적었던 공책에 이렇게
적었다.
즉시 해야 할 일 :겨울용 작물-순무, 양파, 양배추, 상추, 푸성귀-을 심을 수 있게 밭을 갈
것
양배추 씨가 잇던가?
조만간 해야 할 일 :헛간 지붕널 잇기. 커다란 나무망치와 끌이 있나?
토마토와 콩을 보관해 질그릇 구입.
약초를 모아 말에게 먹일 구충제 만들기.
기타 등등.
루비는 모든 땅을 구석구석 적극적으로 활용할 계획이었기 때문에 할 일이 산더미 같았
다. 건초밭을 자주 솎아 주지 앓아서 등대풀, 서야톱풀, 두드러기쑥으로 뒤덮일 지경이었지
만 완전히 못 쓰게 되지는 않을 거라고 루비는 말했다. 오래된 옥수수 밭은 오랫동안 농사
를 짓지 않아 잡초도 뽑아야 하고 쟁기질을 해야 한다고 했다.
바깥채는 상태가 괜찮지만 닭이 너무 적다고 했다. 양철 창고의 지하 저장실은 깊이가 1
피트 정도 얕다는 말도 했다. 더 깊이 파놓지 않으면 혹한이 찾아올 경우 저장해 둔 감자가
모두 얼어 버릴 수도 있다고 했다. 조롱박에 휜털발제비를 심어 뜰을 빙 둘러놓으면 까마귀
를 쫓아낼 수 있을 거라고도 했다.
루비의 제안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밭에는 어떤 작물을 번갈아 가며 심어야 하는지 스케
줄을 정하기도 했고, 방앗간을 만들면 옥수수를 수확했을 때 개울물의 수력을 이용해 직접
빻을 수 있으니까 방앗간 주인에게 수확량의 10분의 1을 뺏길 필요가 없다고도 했다. 어느
날 밤 루비는 자신이 머무는 오두막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뿔닭이 몇 마리 있어야겠어요. 뿔닭이 낳은 달걀은 프라이를 만들면 다른 달걀과 별 차
이가 없지만, 빵을 만들 때는 이야기가 다르거든요, 달걀은 둘째치고서라도 뿔닭이 있으면
여러 모로 좋아요, 집을 지키는 개 역할을 할 수도 있고, 콩줄기에 달라붙어 잇는 벌레를 잡
아먹기도 하거든요. 이런 건 다 그렇다치고 뿔닭이 마당을 돌아다니고 있는 모습을 보면 얼
마나 행복하겠어요."
그 다음날 아침 루비는 오자마자 말했다.
"혹시 돼지... 숲에 풀어 놓은 돼지 있어요?"
"아니, 우린 늘 햄을 사다 먹었거든."
"돼지는 햄말고도 쓸모가 얼마나 많은데요, 예를 들어 돼지 기름을 생각해 보세요. 앞으로
한도 끝도 없이 필요할 텐데."
먼로가 블랙 코브 농장을 안일하게 운영하기는 했어도 아다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손질이
훨씬 잘 되어 있었다. 어느 날 주변을 돌아보던 루비는 넓은 사과 과수원을 보고 즐거움을
감추지 못했다. 블랙 씨 식구들이 관리하던 속이었는데, 관리 상태가 퍽 양호했다. 가지치기
를 재대로 하지 않았는데도 익어 가는 열매가 가득 했다.
"10월이 되면 이 사과로 여러 가지 물건들을 바꿔 올 수 있을 거예요. 그럼 한결 수월하
게 겨울을 날 수 있겠는데요?"
루비는 걸음을 멈추고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참, 압착기 없죠?"
아다가 잇는 것 같다고 대답하자 그녀는 반색을 하며 좋아라 했다.
"다른 물건과 바꿀 때 그냥 사과보다는 사과즙이 더 인기가 좋거든요. 그냥 만들기만 하
면 되는데 말이죠."
루비는 담배밭을 보고도 좋아했다. 지난 봄, 먼로는 일하는 사람에게 조그만 담배밭을 만
들어 마음대로 사용해도 좋다는 허락을 한 적이 있었다. 여름 내내 손질을 안 했어도 담비
는 병충해 피해 없이 놀랄 만큼 풍성하게 자랐다. 고랑마다 잡초가 잔뜩 나있고 가지치기도
서둘러야 할 상황이기는 했지만.
루비는 하늘이 내린 신호에 따라 제대로 심었기 때문에 돌보니 않아도 이렇게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운좋게 조금이나마 수확할 수 있다면, 잎을 사탕수수즙에 담갔다가 씹
는 담배로 돌돌 말아서 씨앗이나 소금, 효소 등 직접 재배할 수 없는 다른 물건들과 바꿀
수 있겠다고 했다.
아다는 물물교환이라는 개념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원리를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갑자기 화폐경제라는 굴레를 벗어나 듯한 기분이 들었다. 루비를 확실한 동반자로 믿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그녀는 빈약한 재정 상태에 대해 솔직히 털어놓았다. 수중에 남아 잇
는 돈의 액수를 들은 루비는 말했다.
"난 1달러보다 큰 돈을 만져 본 적이 없는 걸요."
아다는 현금이 별로 없다고 크게 걱정했지만 루비는 그 돈이 없어도 이 농장 정도면 부자
에 속한다고 생각했다. 루비는 항상 주변 사람들로부터 물건을 구입했고 평상시에도 돈이라
는 것을 거의 믿지 않았다. 사냥하고, 있는 것을 모으고, 씨를 뿌리고 수확하는 것에 비해
돈은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고 했다.
현재 상황은 루비의 믿음과 꼭 들어맞았다. 1달러짜리 소액 지폐라는 말에 가치가 너무
떨어져서 그 돈으로는 아무것도 살 수 없을 정도였다. 처음으로 함께 시내로 외출했던 날,
소다 1파운드에 15달러, 세 개짜리 바늘 한 꾸러미에 5달러 , 종이 한 묶음에 10달러라는 말
에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돈이 없어서 못 사기는 했지만 옷감 한 필이 50달러나 했다.
루비는 양을 길러서 털을 깎고 빗질해 실을 만들어 염색해 그 실로 양모를 짜서 드레스와
속옷을 만들면, 옷을 사는 데 단돈 1센트도 들일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아다는 루비가
별일 아니라는 투로 늘어놓는 이 모든 단계를 거칠 때마다 며칠 동안 거친 작업을 해야 하
고, 그래 봐야 고작 삼베처럼 거친 천을 조금 얻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돈
이 있으면 모든 일이 좀더 쉬울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돈이 잇다해도 상인들은 현금 거래를 꺼렸다. 현금 가치가 오전 오후에 따라 달랐
기 때문이다. 지폐는 들어오는 즉시 얼른얼른 서버려야지, 안 그랬다가는 그 무게만큼의 여
물을 살 수 없다. 물물 교환이 훨씬 믿을 만하다는 게 일반적인 분위기였다. 이런 상황을 완
전히 꿰뚫고 잇던 루비는 그런 분위기에 발맞춰 블랙 코브 농장을 어떤 식으로 가꿔나가야
하는지 계획을 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루비는 방금 전에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다며 아다에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다.
농장에 잇는 물건 중 값비싸고 옮길 수 있으면서 별로 필요가 없는 두 가지 물건이 잇는데,
바로 마차와 피아노라면서 두 가지 중 하나만 없애면 겨울을 나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을 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다는 이틀 동안 두 가지 물건을 놓고 저울질했다. 아다가 "멋진 얼룩말을 쟁기 끄는 데
쓰면 부끄러운 일이겠지" 하고 말했더니, 루비는 "시키는 대로해야지 별수있어요? 여기 사
는 다른 동물처럼 밥값을 해야지"라고 대꾸했다.
아다는 마침내 피아노를 없애기로 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뜻밖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사실 아다는 피아노 솜씨가 특별히 좋은 것도 아니었고, 피아노를 배우게 한 사람도 아버지
였다. 먼로는 피아노 교육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해 입주 가정교사를 둘 정도 였다. 가정교사
는 팁 벤슨이라는 남자 선생님이었는데, 늘 가르치는 학생에게 치근덕거리는 바람에 한 집
에 모래 머물러 있는 법이 없었다.
아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가 열다섯 살이던 어느 날 오후 바흐의 곡을 익히느라
진땀빼고 있을 때, 벤슨이 피아노 의자 옆에 무릎을 끓더니 건반을 두드리고 있던 아다의
손을 잡고는 자신의 동그란 뺨에 손등을 살짝 갖다대는 것이었다. 그는 당시 나이가 많아
봐야 스물네 살 정도였고, 퉁퉁한 몸집에 비해 손가락이 굉장히 길었다.
그는 입술을 아다의 손등 위에 대고 아주 정열적으로 입을 맞췄다. 그 또래의 다른 여자
아이였다면 어느 정도 그 순간을 즐겼겠지만, 아다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아버지에게 방
금 벌어졌던 일을 낱낱이 말했다. 벤슨은 저녁 무렵에 쫓겨낫다. 그리고 먼로는 즉시 다른
사람을 고용했다. 옷에서 나프탈렌 냄새와 암내가 나는 노처녀 였다.
아다가 피아노를 처분하기로 한 또 다른 이유는, 앞으로 피아노를 칠 여유가 별로 없을
것 같았고, 시간이 나면 그림을 그리는게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연필과 종이만으로도
여가를 즐기기에는 충분했다.
아다가 피아노를 팔기로 한 이유는 이것 말고도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그런데 왜 마차를
남겨 놓기로 결정했는지는 자신도 분명히 알지 못했다. 아버지의 유물이긴 했지만 그 이유
가 전부는 아니었다. 아다는 마차가 있으면 이동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걱정이 생겼다. 상황을 견딜 수 없으면 마차를 타고 멀리 달아날 수 잇다는 생각 때문은 아
닌지... .예전에 블랙 씨 일가 는 어깨에서 내려놓을 수 없는 짐은 없는 법이라고 했다. 달아
나기만 하면 아무리 엉망진창이었던 생활도 도두 해결이 되는 법이 라고 생각했던 건 아닌
지... .
아다가 결정을 내렸다고 알리자 무비는 지체없이 서둘렀다. 그녀는 주가 가축과 농작물을
특히 많이 가지고 있고, 누가 좋은 조건을 내걸지 모두 꿰뚫고 있었다. 이스트 지류에 사는
존스가 적당한 상대였다. 그 부인이 꽤 오랫동안 피아노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기 때문이었
다. 이 사실을 알고 있던 루비는 가격을 높게 불렀다.
존스는 얼룩덜룩한 잡종 암퇘지 한 마리, 새끼 돼지 한 마리, 옥수수 가루 100파운드를 제
시했다. 루비는 지금처럼 천값이 비쌀 때 양털이 있으면 여러 모로 쓸모가 있을 것이고, 완
전히 다 자란 중간 크기의 잡종 개와 몸집이 비슷한 양을 산에 몇 마리 풀어 놓으면 좋겠다
고 생각해 왔다. 그래서 존스에게 양을 여섯 마리만 더 얹어 달라고 했다. 그리고 짐마차 한
대 분에 해당되는 양배추도 더 달라고 했다. 또 햄과 11월에 제일 처음 잡은 돼지로 만든
베이컨 10파운드도 추가로 요구했다.
불과 며칠 만에 루비는 돼지와 작은 양들을 데리고 블랙 코브농장으로 돌아왔다. 그러고
는 가을 동안 바름을 피하면서 주위에 널려 잇는 도토리를 먹고 토실토실 살이 찔 수 잇도
록 콜드 마운틴 언덕에 풀어 놓았다. 루비가 칼로 왼쪽 귀에 가벼운 표시 두 개 와 길게 상
처를 내자 이 가축들은 머리가 온통 피투성이가 된채 꽥꽥, 매애매애 울움소리를 내며 산으
로 도망쳤다.
존스는 어느 날 오후 늦게 짐마차와 노인 한 사람을 데리고 피아노를 가지러 왔다. 탄력
이 좋은 마차가 바퀴자국이나 돌을 밟을 때마다 피아노는 귀에 거슬리는 불협화음을 크게
연주하면서 작별인사를 대신했다. 아다는 별로 후회하지 않았지만, 사라져 가는 짐마차를 보
며 전쟁이 일어자기 바로 전 해 겨울, 크리스마스 나흘 전에 아버지가 열었던 파티를 떠올
렸다.
거실에 있던 의자를 모두 벽 쪽으로 치우자 춤을 출 만한 공간이 마련되었고, 피아노를
칠 줄 아는 사람들이 캐롤과 왈츠와 슬픈 실내악을 번갈아 가며 연주했다. 식탁 위에는 얇
은 햄을 얹은 비스킷, 케이크, 갈색빵, 다진 고기 파이, 오렌지와 계피 정향향기가 나는 차
주전자가 놓여 있었다.
먼로가 준비한 샴페인 때문에 조그만 소동이 있기는 했지만, 참석한 사람들 중 침례교도
는 없었다. 유리로 만든 등유 램프가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막 벌어진 꽃봉오리처럼
등피에 주름이 잡힌 디자인이 아직 일반화되지 않았던 때라 사람들은 램프를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샐리 스왱거는 터질 것 같다며 무서워했고, 빛이 너무 밝다며 자기 같
은 노안에는 가는 초나 벽난로가 훨씬 낫다고 말했다.
초저녁 무렵부터 사람들은 끼리끼리 모여 이야기꽃을 피웠다. 아다는 다른 여자들과 함께
앉아 있었지만, 신경은 방 안 전체로 분산되었다. 난롯가에는 나이 낳은 남자 여섯 사람이
앉아 주 의회의 심각한 분열 사태를 놓고 이야기를 나누며 길쭉한 잔에 담긴 술을 홀짝이다
램프가 비치는 곳으로 잔을 들어 올려 거품을 자세히 들여다 봤다. 에스코가 말해다.
"전쟁이 터지면, 북군이 우릴 모두 죽이고 말 걸세."
다른 사람들이 무슨 소리냐며 펄쩍 뛰자 그는 술잔을 들여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거품나는 술을 만드는 사람들이라면 믿을 수 없는 사람들 아니겠지."
아다는 교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잇는 신도들의 자녀들인 젊은 남자들 쪽도 쳐다
봤다. 그들은 거실 한쪽 구석에 앉아 큰 소리로 떠들어대고 있었다. 대부분 샴페인을 외면한
채 주머니 속에 감추어 둔 옥수수술만 몰래 홀짝였다.
아다에게 청을 했다가 단번에 거절당한 적이 있는 홉 마스는 방 안에 있는 사람모두가 들
으라는 듯, 큰 소리로, 지난 일주일 동안 밤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자축했다고 말했
다. 새벽이 되기도 전에 끝낼 정도로 지루한 파티가 끝날 때마다 권총에서 뿜어 나오는 불
꽃을 횃불삼아 집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그러더니 다른 사람의 병에 담긴 술을 마시고는 손
등으로 입을 닦고 나서 병을 다시 한 먼 쳐다보며 입을 닦았다.
"맛이 정말 끝내 주는군!"
그는 큰소리로 말하며 병을 돌려줬다.
다른 한쪽 구석에는 여자들이 나이 구분없이 모여 있었다. 샐리스왱거는 새로 산 신발을
자랑하느라 다리를 접을 수 없는 인형처럼 두 발을 내민 자세로 앉아 있었다. 어느 중년 부
인은 끔찍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딸의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딸아이가 아버지 때문에 너구리 사냥철 이외에는 늘 집에서 빈둥대는 불량배 집안으로 시
집을 갔다는 이야기였다. 고깃국물에 늘 개털이 빠져 있어 찾아가 보기도 싫다고 했다. 젊었
을 때는 그렇게 결혼하고 싶어 안달이더니, 몇 년 동안 아이를 줄줄이 낳는 바람에 이제는
결혼 생활을 지긋지긋하게 여기고 있다고도 했다. 아이들 똥구멍이나 닦아주는 신세가 됐다
면서 신세 한탄을 했다. 다른 여자들은 그 말에 웃음을 터뜨렸지만 아다는 한동안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얼마 후 사람들은 한데 어울리기 시작했다. 몇몇은 피아노 주변에서 노래를 불렀고 젊은
사람들은 춤을 췄다. 아다는 차례를 넘겨 받아 피아노를 쳤지만, 신경이 다른 데로 쏠리고
있어서 왈츠를 몇 곡 치다가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넘겨 줬다. 그리고는 에스코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휘파람 소리에 맞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면서 머리를 까딱까딱 움직이며
혼자 스텝을 밟고 있는 모습을 재미있게 쳐다봤다.
밤이 점점 깊어 가는 동안 아다는 아무 생각없이 샴페인을 홀짝이다 한 잔 넘게 마셔 버
렸다. 얼굴이 화끈거렸고, 녹색 벨벳 드레스의 칼라에 달린 레이스로 덮여 잇는 목에서 땀이
배어 나왔다. 코가 부어 오른 듯해서 두 손가락으로 얼마나 부었는지 짚어 보다가 복도에
잇는 거울로 가서 살펴봤는데, 아무렇지도 않은 걸보고 내심 놀랐다.
역시 먼로가 준비한 샴페인에 취한 샐리 스왱거가 아다를 한쪽구석으로 잡아 끌더니 조그
만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인만이라는 사람이 방금 전에 도착했어, 내가 뭐라고 말할 처지는 아니지만 넌 그 남
자랑 결혼해야 돼. 두 사람이 결혼하면 갈색 눈동자를 가진 아주 예쁜 아이들이 태어날 거
야."
아다는 이 말에 깜짝 놀라 얼굴을 붉히다가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부엌으로 도망갔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속을 더 복잡하게 만들려는 계획이라도 미리 세워져 있었는지, 식당
한쪽 구석 난로 앞에 인만이 혼자 앉아 있었다.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겨울비를 맞아. 파티
에 참석하기 전에 먼저 몸을 덥히고 옷을 말리려고 했던 것이다.
인만은 검은 정장 차림으로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고, 뜨거운 난로에 바짝 갖다 댄 정장
구두 코에는 젖은 모자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난롯불을 쬐느라 양손을 앞으로 내밀고
있어서 뭔가를 밀어 내고 잇는 것처럼 보였다.
"어머나, 이런."
아다가 말했다.
"여기 계셨군요, 당신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여자분들이 벌서부터 좋아하고 있어요."
"나이 많은 여자분들인가요?"
"글쎄요, 모두들 당신을 기다린 것 같아요. 특히 스왱거 부인이 반가워했어요."
스왱거 부인이 했던 말이 갑자기 생생하게 떠오르자 아다는 머릿속으로 뭔가가 밀려오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녀는 다시 얼굴을 붉히다 바로 말을 덧붙였다. "스왱거 부인은 물론 다
른 분들도 반가워했어요."
"혹시 어디 아프세요?"
아다의 태도에 당황한 인만이 물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이 방 안이 좀 답답해서요."
"얼굴이 붉어졌는걸요."
아다는 손등으로 화근거리는 얼굴을 만져 봤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도무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손으로 다시 한 번 코를 만져 봤다. 그러다가 입구 쪽으로 걸어가 문을 활짝
열고 상쾌한 공기를 들이 마셨다.
문 밖에서는 썩어 가고 있는 축축한 풀냄새가 났고, 어두컴컴해서 현관 바로 앞쪽에 떨어
지는 물방울만이 식당 불빛에 비칠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거실에서 위대하신 웬서슬
로스 페하 첫 소절이 흘러나왔다. 피아노를 치시는 아버지의 딱딱한 손놀림이 느껴졌다. 그
러다 어두컴컴한 문 밖 저 멀리 어느 산 틈에서 회색 늑대 한 마리가 울부짖는 수리가 들렸
다.
"외로워서 우는 소리예요"
인만이 말했다.
아다는 문을 연 채로 서서 그 외로움에 화답하는 소리가 들리기를 기다렸지만 아무 소리
도 들리지 않았다.
"불쌍하네요."
그녀는 문을 닫고 인만 쪽으로 몸을 돌렷다. 다로 그 순간 방안의 열기와 샴페인, 그 어느
때보다 다정한 인만의 표정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바람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아다는 비틀
거리며 몇 걸음을 걷다가 인만이 절반쯤 일어선 자세로 부축하려고 손을 내밀자 그 손을 잡
았다. 그러다 인만의 무릎에 앉아 버렸다.
인만은 잠시 양손으로 아다의 어깨를 붙잡고 있었다. 그녀는 인만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영원히 이렇게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까지는 기억이 나지만, 그런 생각을 말로 표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인만도 그녀처럼 행복한 표정이었고 팔로 그녀의 어깨를 감쌌을 뿐 더 이상을 바라지 않
았다는 것만 생생하게 기억날 뿐이다. 축축한 양모 셔츠 냄새와 희미한 말과 마구 냄새도
생각났다.
아다는 30초 정도 인만의 무릎에 앉아 있다가 일어나서 문 쪽으로 걸어갔다. 문틀에 손을
얹은 체 뒤돌아봤더니 인만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미소를 지으며 앉아 있었고, 모자는 바닥
위에 뒤집힌 채 놓여 있었다.
아다는 피아노로 다가가 아버지를 옆으로 밀치고 잠시 연주했다. 마침내 거실로 들어온
인만은 벽에 어깨를 기대고 서 있었다. 샴페인 잔을 채운 술을 마시며 그녀를 잠시 바라보
다 아직 난로 앞에 앉아 있던 에스코 쪽으로 다가가 말을 걸었다. 그날 저녁 인만과 아다
두 사람은 잠시 어색하게 이야기를 나눴을 뿐, 양쪽 다 식당에서 있었던 일을 입에 담지는
않았다. 그러다 인만은 일찍 집으로 돌아갔다.
한참 후 새벽녘에 파티가 끝나자 아다는 거실 창가에 서서 젊은 남자들이 하늘에 권총을
소며 걸어가는 모습을 어렴풋이 비춰 주고 있었다.
아다는 피아노를 실은 짐마차가 모퉁이를 돌아가 보이지 않을 때가지 한참 동안 그 자리
에 앉아 있었다. 그러다 아버지가 샴페인을 한두 병정도 남겨 놓았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손전등을 들고 지하실로 내려갔다.
가끔씩 샴페인을 마시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술은 없었지만 물물교환에 요긴하게 쓸
수 있는 귀중한 보물을 발견했다. 아버지가 커피 원두를 담아 놓은 100 파운드 짜리 불룩한
마대 자루가 한쪽 구석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아다는 루비를 불러 기계에 원두 2분의 1파운드를 넣고 볶은 후 갈아서 두 사람 모두 일
년 만에 처음으로 원두 커피를 마셨다. 커피를 여러 잔이나 마신 두 사람은 밤늦게 까지 말
똥말똥한 얼굴로 미래에 대한 계획과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아다는
지난 여름에 읽었던 책 중에서 꼬마 소녀 도리트의 줄거리를 재미있게 엮어서 들려주었다.
그후 며칠간 두 사람은 커피를 2분의 1파운드나 한 잔 분량으로 덜어서 이웃 사람들과 물
물교환을 했다. 두 사람 몫으로는 10파운드만 남겨 놓았다. 마대 자루가 비어 가는 대신 베
이컨, 아일랜드 감자 열 말, 고구마 여덟 말, 베이킹 파우더 한 깡통, 닭 여덟 마리, 호박,
콩, 오크라 여러 광주리, 조금만 손 보면 쓸 수 있는 낡은 물레바퀴와 베틀, 껍질을 안벗긴
옥수수 열두 말, 훈제실 지붕을 다시 만들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널빤지를 수중에 넣었다.
그중 가장 소중한 것은 5파운드짜리 소금 한 부대였다. 소금은 이제 귀하고 값진 물건이
어서, 사람들은 훈제실 땅바닥을 긁어 끓인 후 먼지를 걸러 내고 졸인 후 다시 먼지를 걸러
내서 쓸 정도였다. 이렇게 몇 번 반복하다 부면 먼지가 모두 걸러지고 수부니 모두 증발해
지난 해에 만든 햄에서 떨어져 나온 소금을 조금씩이나마 다시 추출해 낼 수 있었다.
이런 물물 교환뿐 아니라 다른 모든 방면에서 루비는 놀랄 만한 수완을 발휘했고, 얼마
후엔 아다의 생황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루비는 동이 트기도 전에 오두막에서
나와 말에게 여물을 먹이고, 소젖을 짜고, 부엌에 잇는 냄비와 프라이팬을 바쁘게 달그락거
리고, 난로에 뜨거운 물을 지펴 놓고, 냄비에 노랗게 간 옥수수 가루를 끓이고 새까만 프라
이팬에 달걀과 베이컨을 굽곤 했다. 지난 여름 내내 열 시 전에 일어나 본 적이없는 아다는
어스름 새벽녘에 일어나기가 쉽지 않았지만 별수 없었다. 그녀가 침대에서 꾸물대면 루비가
들이닥쳐 밖으로 몰아냈다.
루비는 누구를 기다리거나 다른 사람의 지시에 따르는 게 아니라 일을 스스로 알아서 하
는 게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어쩌다 한 번씩 아다가 끼어들어 주인처럼 명
령을 내리면 루비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아다를 쏘아보다가 하던 일을 사시 시작하곤 했다
그때 루비의 표정은 어느날 갑자기 안개처럼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루비가 정해 놓은 규칙 중에는, 아다가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건 기대하지도 않지만 적어
도 루비가 부엌에서 식사 준비를 할 때 지켜보기는 해야 한다는 것이었었다. 그래서 아다는
잠옷을 입은 채 부엌으로 가 커피 한 잔을 손에 든 채 따뜻한 난로 앞 의자에 앉아 있곤 했
다.
그러면 창문 너머로 흐릿하고 희미하게 동이 터오기 시작했다. 화창한 아침에도 안개 때
문에 부엌 앞 텃밭을 에워싸고 있는 울타리가 보이지 않을 때가 있었다. 어느 순간 루비가
노란 램프불을 훅 불어 끄면 부엌은 곧 어두워졌고, 밖에서 빛이 새어 들어와 부엌 안을 가
득 메우곤 했다. 새벽을 맞이해 본 적이 별로 없는 아다로서는 퍽이나 경이로운 장면이었다.
아직 창 밖은 어둑어둑한데 요리를 하고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루비는 그날 하룻동안 해
야 할 일들을 쉴새없이 늘어놓았다. 여름이 막바지로 접어들자 루비는 겨울잠을 자려고 가
을 내내 밤낮으로 먹어 대는 곰처럼 다급하게 월동 준비를 했다.
루비는 그저 일을 해야 한다는 말만 할 뿐이었다. 겨울을 이기고 살아남을 수 있도록 힘
을 길러야 한다는 말뿐이었다. 루비의 독백은 온통 지루하기 짝이 없는 동사들로만 이루어
져 있었다. 쟁기질하다. 씨뿌리다. 괭이질하다. 베다 통조림으로 마들다. 먹이다. 죽이다 등.
아다가 겨울이 오면 그런 대로 쉴 수 있겠다고 하자, 루비가 말했다.
"아, 겨울이 모녀 울타리를 고치고, 이불을 만들고, 여기저기 망가진 것들을 손볼 거예요.
손봐야 할 게 많아요."
아다는 산다는 게 그렇게 피곤한 일인지 처음 알았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나면 두 사람
은 끝도 없이 일을 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는 생활을 꾸려 나간다는 게 은행에서 돈을
찾는 것보다 약간 번거로울 뿐, 추상적이고 멀게만 느껴졌었다. 그러나 지금 루비와 함께 헤
쳐 나가는 생활은 의식주 모두가 불쾌할 정도로 구체적이고 직접 나서서 처리해야 했으며,
하나같이 힘들기만 했다.
물론 예전에는 아버지가 항상 사람에게 일을 시켰기 때문에 밭일을 거들어 본 적이 거의
없었고, '밭' 하면 그곳에서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그곳에서 나는 작물이 먼저 생각났었다.
이제 루비는 처음 한 달 동안 아다에게 미일 식사를 하고 삶을 유지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가르쳐 주려는 것 같았다.
루비는 아다에게 먼지에 코를 박고 그 땅의 목적이 무엇인지 눈으로 확인하게 했고, 기분
이 내키지 않을 때도 일을 시켰다. 드레스를 먼지투성이가 되도록 했고, 손톱이 맹수 발톱처
럼 거칠어질 때까지 땅을 파게 했다. 높은 훈제실 지붕위로 올라가도록 했고, 콜드 마운틴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녹색 삼각형처럼 보이는데도 지붕널을 깔게 했다.
루비는 아다가 우유를 저어 버터를 만드는데 선공한 것을 첫 번째 승리의 순간으로 꼽았
다. 두 번째 승리의 순간은 아다가 밭으로 괭이질하러 나갈 때 더 이상 주머니에 책을 넣고
다니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였다.
루비는 별로 달갑지 않은 일을 할 때는 혼자 하는 법이 없었다. 예를 들면 아다에게 버둥
대는 닭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도마 위에 꼭 누르고 있는 일을 시켰고, 도끼로 머리를 자르
는 일도 시켰다. 목 없는 닭이 피를 흘리며 주정뱅이처럼 마당을 비틀비틀 걸어다닐 때면
거친 칼로 닭을 가리키며 "저기 네가 먹을 음식이 걸어가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래도 아다가 루비의 말을 순순히 따랐던 것은 루비만큼은 그녀를 쓰러지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을 고용했다가는 점점 일을 게을리하다가
그녀가 지쳐 쓰러지도록 내버려둔 채 떠나 버릴 것 같은데, 루비만큼은 그러지 않을 것 같
았다.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끝낸 후에야 쉴 수 있었다. 그럴 때면 아다는 루비와 함께 현관에
앉아 해가 완전히 저물 때까지 큰소리로 책을 읽었다. 책이라든가 그 안에 담긴 내용이 루
비에게는 신기한 것들이었기 때문에, 아다는 그의 기초부터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우선 루비에게 그리스인이란 어떤 사람들인가를 알려주고 나서 호모부터 읽기 시작했다.
하룻저녁에 보통 열다섯에서 스무 쪽정도 읽었다. 그러다 글씨가 안 보일 정도로 날이 어두
어지고 주위가 푸른색으로 바뀌며 안개가 밀려들기 시작하면, 아다는 핵을 덮고 루비에게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했다. 아다는 몇 주에 걸쳐 루비의 이야기를 조금씩 들을 수 있었다.
루비는 고기 가죽으로 프라이팬을 닦아 거기서 얻어 낸 기름으로 요리를 할 정도로 가난
한 생활에 염증이 났다고 했다. 어머니 얼굴은 본 적도 없었고, 아버지는 그 마을에서 건달
에다 상습범으로 악명 높은 스토브로드 튜이스라는 사람이었다. 루비와 스토브로드 두사람
은 외양간에 지붕만 씌운 것과 다름없이 지저분한 오두막에서 살았다. 작기도 작았지만 보
온도 거의 되 않는 집이었다.
집시가 사는 마차와 다른 점이 있다면 바퀴와 바닥이 없다는 것 뿐이었다. 다락같은 곳에
서 잠을 잣는데, 사실상 선반이나 다름없었다. 말린 이기로 속을 채운 낡은 매트리스가 침대
였다. 천장이라고는 널빤지를 얼기설기 엮어 놓은 것에 분과해, 아침에 눈을 떠보면 나아 다
니는 밀가루처럼 널빤지 틈새로 눈이 들어와 이불 위로 1인치나 쌓여 있을 때도 많았다.
그런 날 아침이면 잔가지로 불을 피워도 금세 후끈후끈해질 정도로 오두막이 작다는 것에
오히려 감사했다. 스토브로드가 만들어 놓은 굴뚝이 형편없어서 집안에 있으면 훈제 햄 같
은 냄새가 몸에 배기는 했지만 ... . 그 때문에 루비는 날씨가 아주 추울 때말고는 밖으로 나
가 나무 그늘 아래서 요리하는 쪽을 더 좋아했다.
작고 보잘것없어도 스토브로드는 그 오두막을 애지중지하게 생각했다. 그는 걸리적거리는
딸만 없었더라면 속이 빈 나무를 집으로 삼고도 남을 인물이었다. 루비는 '뭔가를 기억할 수
있는 동물'이라는 말 정도가 아버지를 가장 소강하게 표현하는 말이라고 했다.
루비는 어느 정도 자랐을 때부터 먹을 것을 스스로 마련하기 시작했다. 스토브로드의 생
각으로는 걷기 시작하는 시기가 바로 그 어느 정도의 나이 였다. 루비는 아주 어렸을 때부
터 이곳 저곳 농가와 숲속을 헤매며 먹을 것을 찾아 다녔다.
어린 시절을 떠올릴 때 가장 선명하게 남아 있는 기억이 있다면, 강둑길을 따라가다가 샐
리 스왱거 집에서 하얀 콩으로 만든 수프를 얻어 먹고 나서 선물받은 잠옷을 들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길가에 있던 벚나무 가지에 옷이 걸린 사건이라고 했다. 그후 몇 년 동안 루비
는 낮에도 그 잠옷을 평상복으로 입고 지냈다고 한다.
그 덩굴은 수탉의 며느리 발톱에 끼우는 쇠발톱만큼이나 가시가 길었기 때문에 옷을 빼낼
수가 없었다. 그날 따라 지나가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드문드문 구름이 흘러갔고, 기름
이 다 되어 희미한 빛을 발하는 램프처럼 날이 어두워 졌다. 밤이 찾아 왔지만 5월 의 첫
달이 드는 날이어서 주위는 캄캄했다. 그 당시 네 살이던 루비는 옷이 걸린 벚나무 밑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컴컴한 밤을 밖에서 혼자 보내는 건 처음 겪는 일이었는데, 시간이 그냥 멈춰 있는 것 같
았다. 강가에 옅은 안개가 끼여 있는 추운 밤이었다. 루비는 몸을 떨다가 한참 동안 도와 달
라고 소리를 질렀다.
콜드 마운틴에서 표범이 내려와 잡아먹을까 봐 겁이 났다 .아버지의 술친구들이 표범은
산 채로 어린아이를 잡아간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들 말을 들어 보면, 산속은 어린아
이 고기에 굶주린 동물들로 가득 찬 것같았다. 곰이나 늑대들이 어슬렁거린다고 했다. 산돼
지도 많다고 했다. 무섭게 생긴 가지각색의 동물이 나타나 아주 끔찍한 곳으로 채어간다는
말도 했었다.
한 늙은 체로키 인디언 여자 말로는 강에 사람 고기를 먹는 귀신들이 살고 있는데, 새벽
무렵에 사람을 잡아다가 물속으로 끌고 들어간다고 했다. 아이들을 가장 좋아하며, 아이들과
똑같이 생긴 그림자를 대신 만들어 좋고 물 속으로 데리고 간다고 했다. 생명이 없는 그 그
림자는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도 하고 말도 하다가 7일 만에 죽는다고 했다.
밤이 으슥해질수록 이런 무서운 말들이 생각나 아린 루비는 추위에 몸을 떨다가 세상 모
든 것들이 약한 자를 덮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으며 거의 숨을 쉴 수 없을 때까지 계
속 울었다.
하지만 잠시 후 어둠 속에서 어떤 소리가 들렸다. 철썩거리는 강물 속에서 들려오는 듯했
지만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악마의 소리는 아닌 것 같았다. 주위 풍경이나 하늘, 동물 요정,
수호신이 그 순간부터 루비의 안부를 걱정해 주는 것 같았다.
루비는 그날 밤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하늘 위로 별들이 어떻게 펼쳐져 있었는지, 그날
밤 자신을 품에 안고 달래 주고 지켜주던 다정한 목소리가 어떤 말을 했는지 또렷하게 기억
하고 있었다. 이렇게 얇은 보호막을 입게 된 루비는 더 이상 몸을 떨지 않았고 울음도 그쳤
다.
그날 아침 낚시를 하러 온 사람의 도움으로 집으로 돌아온 루비는 아버지에게 그 사건에
대해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아버지도 어디 있었느냐고 묻지 않았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아
직도 머릿속에 생생히 남아 있었고, 그날 밤 이후로 루비는 신비하게 태어난 아이 처럼 다
른 사람들은 절대 모르는 일일 알았다.
루비는 점점 나이가 들어 가면서 비탈진 조그만 땅을 일궈 거기서 얻은 양식으로 아버지
와 함께 살았다. 아버지는 다른 곳에서 되는 길을 걸어서 파티에 참석하는 것이었다. 댄스
파티가 열린다는 소문만 들으면, 음을 제대로 켤 줄도 모르는 바이올린을 짊어지고는 터벅
터벅 길을 떠나곤 했다. 그러고는 며칠 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 유흥거리가 없으면 숲으로 사냥을 하러 갔다. 하지만 어쩌다 다람쥐나 마르모트를
한 마리씩 잡아와 스튜로 끓이라고 내놓을 뿐이었다. 야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사람이
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쥐가 없을 때면 밤이나 장군풀, 아메리카자리공, 루비가 주워 온 다
른 풀들을 먹고 살았다. 나무 열매가 주식에 가까울 정도였다.
스토브로드는 그렇게 술을 좋아하면서도 농사일을 하지는 않았다. 옥수수를 직접 기르는
것보다 이삭이 잘 여물면 컴컴한 달밤에 삼베 자루를 들쳐 메고 나가 훔쳐 오는 쪽을 택했
다. 그리고 훔쳐 온 옥수수를 증류해서 번들거리는 노란색 술을 만들었다. 그의 친구들은 진
하고 독한 그 술을 따라갈 술이 없다고 했다.
어쩌다 한 번 일을 하러 나간 적이 있는데, 끔찍한 사고만 일으키고 말았다. 강 아래쪽에
사는 어떤 남자가 봄이 되면 씨를 뿌릴 수 있도록 땅을 깨끗하게 개간하는 일을 도와 달라
며 그를 부른 적이 없었다. 큰 나무들을 이미 베어 내서 숲 한쪽에 잔뜩 쌓아 놓은 상태였
고, 스토브로드에게 나무 태우는 일을 도와 달라고 한 것이다. 그 남자와 함께 커다란 불을
지펴 놓고 그 안으로 굴릴 수 있게 나무에서 가지를 베어 내고 있던 스토브로드는 갑자기
생각보다 일이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자 걷어 붙였던 셔츠 소매를 다시 내리고는 떠
나 버렸다.
하는 수 없이 그 남자는 혼자서 통나무로 만든 갈고리를 이용해 나무 등걸들을 불 쪽으로
굴렸다. 그러다 불 옆에 가까이 서 있던 그의 다리 위로 불 쪽으로 굴렸다. 그러다 불 옆에
가까이 서 있던 그의 다리 위로 불 붙은 통나무 몇 개가 굴러와 덮쳤다. 아무리 애를 써도
빠져 나올 수가 없던 그는 목소리가 더 이상 나오지 않을 때가지 도와 달라고 소리를 질렀
다.
불길이 점점 다가오자 그는 불에 타죽느니 가지 베어 내는 데 쓰던 도끼로 다리를 잘라
내는 쪽을 택했다. 그러고는 바지를 갈갈이 찢어 한쪽을 막대에 묶어 꼬고 출혈 부위를 잡
아 맨 후에 갈라진 나뭇가지를 목발삼아 집으로 걸어갔다. 간신히 목숨을 부지 할 순 없었
지만 다리 병신이 된 후였다.
그후로 몇 년 동안 스토브로드는 그 남자가 사는 집으로 걸어다닐 때마다 조심했다. 의족
을 단 그 남자가 원한을 품고 현관에서 총을 쏜 적이 몇번 있었기 때문이었다.
루비는 성인이 되고 나서야 어머니가 도대체 어떤 여자였길래 아버지 같은 남자와 결혼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때쯤 아버지의 머릿속에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거
의 남아 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루비가 어머니가 어떤 분이었냐고 물을 때마다 전혀 생각나
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네 엄마가 말랐는지 뚱뚱했는지조차 모르겠는걸' 하고 말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스토브로드는 전쟁의 열기가 불어닥친 전쟁 초기에 자원 입대했다. 어느
날 아침, 늙은 버새를 타고 전쟁을 하러 간다며 떠난 이후로 전혀 소식이 없었다. 부츠 위로
하얀 정강이를 반짝이며 흔들흔들 사라지던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루비는 그가 막사 생활을 오래 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번째 전투에
서 죽었거나 영영 도망친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와 같은 연대에 있다가 한쪽 팔을 잃
고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 말에 의하면, 샤프스버그에서 만난 이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아버지의 운명이 어떻게 됐건, 뒷덜미에 미니에식 총알을 맞았건, 서쪽으로 도망을 쳤건,
루비는 전혀 관심없었다. 버새마저 가지고 가버렸으니 지긋지긋한 밭을 쟁기질할 수도 없었
다. 외발쟁기와 괭이만 가지고 손으로 직접 작은 텃밭을 가꾸는 것 외에는 달리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전쟁이 터졌던 첫해는 힘들었지만, 스토브로드가 빈손으로 가면 총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남겨 놓고 간 구식 머스킷총이 있었다. 지금의 소총보다는 화승총에 가까
운 골동품이었지만 루비는 그걸로 겨울 동안 야생 칠면조와 사슴 사냥을 했고, 인디언처럼
고기를 불에 말렸다. 아버지가 칼마저 가지고 가버렸기 때문에 누군가 버린 톱으로 칼을 만
들어 고기를 잘라야 했다.
주로 망치를 이용해 칼을 만들었는데, 먼저 톱날을 불에 달구고 길에서 주운 구부러진 편
자로 그 위에 칼 모양을 그렸다. 톱날이 식으면서 선 바깥 부분을 망치로 두드려 때어 내고,
칼날과 손잡이의 거친 부분을 줄로 다듬었다. 구리 조각으로 만든 못을 다시 망치로 박아서
두꺼운 사과 나무를 톱질해 만든 손잡이를 고정시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강가에 잇는 반
질반질한 바위 에 대고 날카롭게 칼날을 갈았다. 이렇게 만든 칼은 조잡해 보이긴 했지만
상점에서 파는 칸만큼 들기는 잘 들었다.
여기가지 이야기하던 루비는, 열 살이 되면서부터 정원사가 자신이 기르는 콩 모양을 알
아볼 수 있는 것처럼 사방 25마일 이내에 잇는 모든 지형을 훤히 알게 됐다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자세한 설명은 피했지만 아직 어른이 되기도 전에, 한 손으로 남자들을 때려
눕힌 적도 있다고 했다.
루비는 올해로 자기 나이가 스물한 살이 도니 것 같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자신의 딸 생
년월일은커녕 태어난 계절도 모른다고 했다. 루비 자신도 생일 파티를 하고 싶은 마음도 없
었다. 살아남는 것만이 유일한 목적이던 생활 속에서 뭔가를 축하하는 파티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5. 고향과 연인에게로 가는 먼 길
밤이 깊었을 때 인만은 디프 강의 강둑을 따라 나 있는길 비슷한 곳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 길은 곧 울퉁불퉁한 저지대로 이어졌고 얼마 후 절벽 사이로 좁은 골짜기가 나타났다.
온통 크고 작은 바위와 나무 사이로 손바닥만한 하늘이 보였고, 주변에 보이는 빛이라고는
은하수뿐이었다.
계곡 안이 어두컴컴해서 그는 발로 부드러운 땅을 짚어 가며 길을 찾아야 했다. 수면에
비친 빛도 너무 약해 어디가 물이고 땅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인만은 물에 빠지지 않기
위해 그저 물가의 가장자리를 가늠하며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마침내 바위 투성이 골짜기를 빠져 나오자 부서진 바위들로 뒤덮여 잇는 험준한 강둑 아
래로 강물이 흐르고 있었고, 먼지를 잔뜩뒤집어쓴 덤불 사이를 가르는 좁다란 길이 나타났
다. 인만은 현재 위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시민자위대가 주변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을 것
만 같았다.
숨을 곳을찾기도 전에 말을 탄 시민자위대가 나타날 것만 같았지만, 강둑이 온통 부서진
바위투성인데다 경사가 심해 소리를 내지 않고 올라갈 수도 없었다. 무장한 사람들과 대치
하기에는 형편없이 불리한 자리였다. 땅을 긁어 놓은 듯한 이곳을 한시라도 빨리 빠져 나가
는 게 가장 현명한 방법이었다.
조금씩 조금씩 힘겹게 앞으로 걸어가던 인만의 오른쪽 앞으로 어디선가 깜빡이는 불빛이
보였다. 그는 조금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챙이 넓은 모자를 쓴 어떤 남자가 길가에 서 있었
다. 인만은 남자의 모습이 훤히 보일 정도로 가까이 다가갔다. 나뭇가지를 꺾어 만든 횃불에
서 쏟아져 나온 노란 불빛이 주위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인만은 살금살금 걸어가다가 10
야드 정도 떨어져 잇는 바위 옆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 남자는 검은색 겉옷 속에 하얀 셔츠를 입고 있었다. 말의 목에 매달린 밧줄을 붙잡고
있었다. 말 등 위에 린넨 꾸러미 하나가 가로로 축늘어져 잇는 것이 보였다. 인만은 그 남자
가 바닥에 앉더니 한쪽 팔로 무릎을 안아 세워 가슴에 끌어나는 모습을 지켜봤다. 횃불을
들고 잇는 팔꿈치를 무릎 사이에 꽂고는 촛대에 곶아 팔에 모자챙이 닿을 정도로 고개를 푹
숙였다. 길위로 시커먼 그림자가 하나 드리워졌다.
'저렇게 활활 타는 횃불을 든 채로 잠이 들겠군. 저러다가 얼마안 있어 발에 불이 붙을 텐
데' 하고 인만은 생각했다.
하지만 그 남자는 졸고 있지 않았다.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는 말을 올려다보며 신음소리
를 냈다.
"부여. 오, 주여, 저희 한때 기쁜 나날을 보냈건만."
그는 이렇게 중얼거리더니 앉은 채로 몸을 양쪽으로 흔들면서 다시 한 번 말했다.
"주여. 오, 주여."
'어떻게 하지?' 인만은 고민했다. 새로운 장애물이 등장한 것이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갈
수도 없었다. 멀리 돌아서 지나갈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우리에 갇힌 암소처럼 밤새
서 있을 수도 없었다. 인만은 권총을 꺼내 들고 횃불에서 새어 나오는 빛에 비춰 총알이 얼
마나 남았는지 체크해 봤다.
인만이 막 앞으로 움직이려는 순간 그 남자가 고개를 들더니 땅에다 횃불을 똑바로 꽂았
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이러나 말 쪽으로 다가가 불안한 듯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 말안장
위에서 짐을 내려놓으려고 했다. 말은 귀를 바짝 눕히면서 눈의 흰자위를 하얗게 드러냈다.
그 남자는 말 안장에 놓여 있던 짐을 어깨 위에 얹은 후 비틀거리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남자가 짊어지고 있는 것은 어떤 여자였다. 축 늘어진 한쪽 팔이 흔들거렸고 검은 머리카락
이 땅바닥까지 스치고 있었다. 남자는 횃불이 비치는 곳을 벗어나 거의 안 보일 정도였지만
절벽 끝으로 다가가고 잇는 것은 분명했다. 어둠 속을 걸어가면서 남자가 흐느껴 우는 소리
가 들렸다.
인만은 달려가 횃불을 집어들어 우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가볍게 던졌다. 불꽃이 땅을
때리자 여자를 품에 안은 채 절벽 바로 끝에 서 있던 남자의 모습이 비쳤다. 그는 난데없이
주위가 밝아지자 어리둥절해서 뒤를 돌아보려 했지만, 여자를 안고 있었기 때문에 비틀거리
며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인만을 쳐다봤다.
"여자를 내려놓으시오."
인만이 말했다.
그 남자는 벌채에 여자를 떨어뜨렸다.
"무슨 권총이 그렇게 생겼소?"
그 남자는 크기가 서로 다른 초구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 여자에게서 손을 떼시지. 그리고 내가 얼굴을 볼 수 있도록 이쪽으로 나와."
남자는 여자의 몸을 넘어 인만이 잇는 쪽으로 다가왔다. 이글거리는 횃불의 불빛을 피하
느라 고개를 숙여 모자챙으로 눈을 가리고 있었다.
"이제 그만, 거기 서."
남자가 가까워지자 인만이 말했다.
"하나님께서 이러면 안 된다고 당신을 보내신 모양이군."
남자는 이렇게 말하면서 두걸음 더앞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더니 인만의 다리를 감싸 안았
다. 인만은 권총을 남자의 머리에 대고는 총알이 발사되기 직전까지 방아쇠를 당겼다. 그때
남자가 고개를 들었고, 아직도 땅 위에서 활활 차고 있던 횃불에 얼굴이 비쳤다. 양쪽 뺨을
차고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그이 얼굴을 보자 인만은 방아쇠를 당기려 했던 걸 후회
하며, 길다란 권총의 총신으로 남자의 광대뼈 부근을 기리 세지 않게 내리쳤다.
남자는 눈 바로 밑 부분에 가벼운 상처를 입은 채 뒤로 벌렁 넘어졌다. 모자가 벗겨지면
서 사과처럼 매끄럽게 포마드 기름을 발라 뒤로 넘긴 머리와 어깨 부근에서 곱슬머리는 금
발이 보였다. 남자는 상처를 만져 보더니 손가락에 묻은 피를 쳐다봤다.
"난 맞아도 할 말이 없소."
남자가 말했다.
"죽어도 좋단 말이군."
인만은 이렇게 말하며 절벽 끝에 누워 있는 여자를 쳐다봤다. 여자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당신을 죽여야겠다는 생각은 아직 버리지 않았어."
"살려주시오. 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들 말로는 우리 모두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라고 하지."
"내 말은 내가 목사라는 뜻이오. 난 목사라구요."
인만은 이 말에 콧방귀를 뀔 수밖에 없었다. 목사는 다시 몸을 일으켜 무릎을 꿇었다.
"저 여자 죽었나?"
"아뇨."
"그럼 왜 저렇게 누워 있는 거지?"
"별일 아니에요. 임신중이고 제가 약을 먹였기 때문이에요."
"약이라니?"
"어떤 행상인한테서 네 시간 동안 재울 수 있다는 작은 가루약 한 봉지를 사먹였거든요.
그 약을 먹인 지 한 30분 지났어요."
"그리고 당신이 애 아빤가?"
"그렇죠."
"물론 여자와 결혼하지는 않았겠지?"
"네."
인만은 여자 쪽으로 걸어가 무릎을 꿇고 머리를 들어 올렸다. 여자는 휘파람 비슷한 소리
를 내며 신음하고 있었다. 의식을 잃어 얼굴이 축 늘어져 있었고, 횃불 때문에 움푹 꺼진 눈
과 뺨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그는 여자
를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 여자를 다시 말에 태워."
인만은 권총을 남자에게 겨눈 채 옆쪽으로 비켜서며 말했다. 남자는 총구를 계속 쳐다보
며 벌떡 일어섰다. 그러고는 달려가 무릎을 꿇더니 여자를 낑낑대며 안아 올려 비틀거리며
걸어가서 다시 말 위에 올려 놓았다. 인만은 커다란 권총을 잠시 불빛에 비춰 봤다. 간단한
명령 한 마디로도 충분히 위협할 수 있는 다급한 분위기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이제 어떻게 하죠?"
명령대로 일을 마치자 남자가 물었다. 결정내려 줄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안심하는 눈치
였다.
"조용히 해."
그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도 생각나지 않았고, 잠도 제대로 못 잔 채 줄곧 걸었기 때
문에 머리속이 멍했다.
"당신, 어디서 살고 있지?"
인만이 물었다.
"여기서 멀지 않은 마을이오."
남자는 인만이 가고 있던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앞장서서 길을 안내하시지."
인만은 횃불을 집어들어 절벽 아래로 던졌다. 목사는 어둠 속에서 점점 멀어져 가는 불빛
을 내려다봤다.
"여기 아직도 디프 강 부근인가?"
"마을 사람들은 아직도 그렇게 부르죠."
목사가 대답했다.
두 사람은 함께 걷기 시작했다. 인만은 한 손으로는 권총을 , 한 손으로는 말을 잡고 있었
다. 말의 목에 걸린 밧줄은 대마로 두껍게 만든 것으로, 말의 목을 조르지 않도록 넉넉하게
매듭이 묶여 있었는데, 인만은 밧줄을 잡다가 엄지손가락을 베이는 바람에 피를 약간 흘렸
다.
인만은 엄지손가락을 입에 문 채로 길을 걸어가며, 만약 자신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이
여자는 치맛자락을 잔뜩 부풀린 채 시커먼 강물 위를 떠가는 하얀색 반점 신세가 됐을 것이
고, 목사는 길가에 선 채로 어서 빨리 떠내려가거라, 어서 빨리 떠내려가거라 하는 소리나
되풀이하고 있었을 게 분명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곧 오르막길이 나타났고 작은 산등성이를 넘자 강이 보이지 않았다. 낮은 언덕을 여러 개
넘으면서 길이 꼬불꼬불 이어졌다. 달이 떠오르자 화전밭이 드문드문 보였다. 하지만 숲에
불을 지르는 일말고는 전혀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멀리 지평선까지 펼쳐진 점토 위로 까만
그루터기가 박혀 있었다. 숯덩어리처럼 새까맣게 변한 그루터기들이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주위를 둘러보던 인만은 자신이 가려는 곳과는 전혀 다른, 지구 정반대편에 와 있는 것 같
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리온 별자리가 지평선 동쪽 위에 떠 있는 걸 보면, 자정이 훨씬 지난 시각이었다. 인만
은 사냥꾼이자 전사인 오리온이 하늘 위에서 자신의 남자답지 못한 태도를 나무라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오리온은 무기를 휘두를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자세로도 성격을 알
수 있다고 한다면, 이 오리온 신은 아주 자신만만하고 매일 밤 서쪽으로 옮겨 가며 유쾌한
시간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인만은 오리온 별자리에서 가장 환한 별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았다. 그
는 프레데릭스버그 전투가 끝난 후 테네시에서 왔다는 한 소년과 별자리들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돌담 뒤에 파놓은 구덩이 가장자리에 앉아 있을 때였다. 밤은 춥고 건조했다.
별들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고, 오로라는 이미 활활 타오르다가 사라진 후였다. 두 사람은
담요로 머리며, 어깨를 둘둘 감은 채 앉아 있었는데, 바람 한 점 없는 허공으로 입김을 뿜을
때마다 지상을 떠날 준비를 하는 영혼처럼 하얀 김이 서리곤 했다.
"정말 춥네. 혀로 총신을 핥으면 혀가 딱 들러붙을 것 같아요."
소년이 말했다. 그 소년은 엔필드 소총을 바짝 들고는 총신에 대고 입김을 불더니 손가락
으로 서리를 떼어 냈다. 인만을 쳐다보면서 다시 한 번 되풀이한 후 보라는 듯 손가락을 들
어 보였다.
인만은 "봤어"라고 말했다. 소년은 발치에 침을 뱉은 뒤 몸을 숙여 그게 얼었나 보려 했
지만 참호 바닥이 너무 캄캄해서 볼 수 없었다.
두 사람 앞으로는 전장이 되어 버린 마을과 강이 펼쳐져 있었다. 여기저기 시체가 흩어져
있고 포격을 받아 엉망이 된 땅은 무시무시한 악몽처럼 소름끼쳤고, 새로 떠맡은 끔찍한 역
할을 위해 모습을 탈바꿈한 것처럼 보였다. 어떤 사람은 이곳을 일컬어 '지옥용 신축 부지'
라고 불렀다. 인만은 이런 생각들을 떨쳐 버리기 위해 오리온 별자리를 바라보며 별 이름을
하나하나 불렀다. 테네시에서 왔다는 그 소년은 별을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저 벼 이름이 리겔이라는 걸 어떻게 아시죠?"
"책에서 읽었어"
"그럼 사람들이 붙인 이름이군요. 하나님이 지어 준 이름이 아니라... ."
인만은 잠시 생각한 후 입을 열었다.
"하나님이 저 별을 뭐라고 부르는지 인간인 우리가 알 방법이 있을까?"
"없죠. 하나님이 비밀로 하셨으니 절대로 알 수 가 없죠. 우리가 무지한 존재라는 걸 알려
주는 교훈인 셈이요. 인간이 자신들의 지식을 갖고 만든 건 고작 저런 광경들뿐이죠."
소년은 황폐해진 땅을 턱으로 가리켰다. 손으로 가리킬 만한 가치도 없다는 듯한 태도였
다. 그 당시 인만은 소년을 바보 같다고 생각했고, 하나님이야 뭐라고 부르던 간에 오리온
별자리 가운데 가장 반짝이는 별에 사람들이 붙인 이름을 자신이 알고 있다는 사실에 만족
스러워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소년이 인간의 지식이라는 것에 대해 일리 있는 말을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만과 목사는 잠시 동안 아무 말 없이 걸었다. 그러다 목사가 입을 열었다.
"나를 어떻게 할 작정이오?"
"생각중이야. 그런데 어쩌다 이런 지경에 빠져들었지?"
"말로 설명하긴 힘들어요. 지금까지도 우리 사이를 의심하는 마을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이 여자는 할머니랑 살고 있는데, 할머니는 늙고 귀가 멀어서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야 겨우
말귀를 알아듣죠. 그러니까 우린 한밤중에 집을 빠져 나와 새가 새벽을 알리며 울 때까지
건초 더미나 이끼가 낀 강둑에서 사랑을 속삭이며... 식은 죽 먹기였어요. 여름 내내 우리 둘
은 밤마다 숲속에서 만났죠."
"사냥감을 훔치러 나선 흑표범만큼이나 교활한 방법이었다, 그런 뜻인가?"
"그렇다고 할 수 있죠."
"어떻게 그런 사이가 됐지?"
"다른 사람들이랑 똑같죠. 일요일 예배를 마치고 나서 점심을 먹을 때 서로의 눈빛을 읽
게 되고, 말투에 담긴 감정을 눈치채고, 닭고기 요리를 건네주다가 손이 마주치면서 그렇게
된 거죠."
"그렇다고 해서 다들 건초 더미 속에서 바지춤을 내리는 건 아니잖아."
"그야 그렇죠."
"콜레라에 걸린 돼지 새끼처럼 골짜기에 여자를 내던지는 건 더욱... ."
"네, 그렇긴 하죠. 하지만 당신이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에요. 먼저 내
사회적 지위가 걸려 있어요. 사람들에게 들통나면 난 마을에서 쫓겨날 거예요. 우리 교회는
엄격하거든요. 신도들이 집안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것도 간신히 용납하는 사람들이에요.
믿어 주세요. 저도 이 문제를 며칠 밤 동안 고민했단 말입니다."
"비가 오는 밤마다? 건초 더미나 이끼 낀 강둑이 너무 축축한 그런 밤에나 고민했겠지."
목사는 계속 걸어갔다.
"더 간단한 방법도 있잖아."
인만이 말했다.
"생각이 안 났어요."
"이 여자랑 결혼하면 되지."
"그러니까 복잡한 문제라고 하지 않습니까. 전 이미 약혼녀가 있는 몸이라고요."
"뭐야?"
"제가 목사가 될 생각을 했다니 직업을 잘못 선택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군. 당신은 그런 일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얼마 동안 걸어가자 골짜기 밑에서 흐르던 그 강물 옆쪽으로 마을이 보였다. 목조 건물을
한데 모아 놓은 듯한 마을이었다. 판자 벽에 회칠을 한 교회 하나, 상점 한두 곳, 그리고 집
들... .
"이제 간밤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 여자를 침실로 돌려 보내야겠군. 손수건 있
나?"
인만이 물었다.
"네."
"그걸로 입을 막고 땅바닥에 엎드려 있어."
인만은 이렇게 말하고 목사가 땅에 엎드리는 동안 말 고삐에서 철사를 풀어 냈다. 그러고
는 목사 뒤로 다가가 등을 어깨로 누르고는 머리에 실을 여러 번 감은 뒤 끝을 단단히 묶었
다.
"당신이 소리를 질러서 사람들이 달려오면 나한테 모든일을 뒤집어씌울 수도 있잖아. 이
마을 사람들이 내 말을 믿으리라는 보장이 없으니 별수없지."
두 사람은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개들이 짓기 시작했다. 하지만 밤마다 산책을 하던 목사
의 냄새를 알아차리자 곧 잠잠해졌다.
"어느 집이지?"
인만이 물었다.
목사는 길 건너편을 가리키더니 포플러나무가 작은 숲을 이루고 있는 마을 끝으로 인만을
데리고 갔다. 나무 사이로 하얗게 페인트칠한 널빤지로 만든 방 하나짜리 조그만 집 한 채
가 서 있었다. 목사가 그 쪽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밧줄로 입 양쪽을 잡아매어 그는 활짝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인만의 기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었다.
"이 포플러나무에 등을 대고 서 있어."
인만은 이렇게 말하고 나서 말의 고삐를 끌러 나무에 목사의 목을 잡아맸다. 그러고는 한
쪽 끝을 목사의 어깨 뒤로 넘겨 손목을 등뒤에서 단단히 묶었다.
"여기 잠자코 서 있으면 일이 잘 해결될 거야."
인만은 말에 얹혀 있던 여자를 들어 올려 제대로 균형을 잡을 수 있도록 한쪽 팔로는 허
리, 또 한쪽 팔로는 부드러운 허벅지를 안았다. 머리는 어깨에 기대게 했는데, 걸음을 옮길
때마 까만 머리카락이 팔뚝을 쓸고 지나갔다. 그 여자는 잠을 자다가 잠깐 꿈을 꾸는 사람
처럼 나지막이 신음소리를 냈다.
자신이 살해당할 처지에 있었던 것도 모른 채 그렇게 누워 있다니 참 딱한 여자였다. 온
갖 위급한 상황이 닥치고 있건만 제멋대로 돌아가는 세상에서 어쩌다 한 번씩 마주치는 착
한 사람 외에는 지켜 줄 사람이 하나도 없다니. 인만은 그 형편없는 목사를 죽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인만은 집 쪽으로 여자를 안고 가다가 계단 옆에 핀 쑥국화 위에 잠시 내려놓았다. 그리
고 현관으로 걸어가 창문으로 어두침침한 방안을 들여다봤다. 벽난로에서 조그맣게 장작불
이 타고 있었고, 난로 옆에 놓인 초라한 침대에서 할머니가 잠을 자고 있었다.
얼마나 나이가 들었는지 양피지 색 피부가 거의 투명하게 보일 정도였고, 불 앞에 세워
놓으면 얼굴 뒤에 놓인 종이에 적힌 글씨까지 읽을 수 있을 것처럼 창백해 보였다. 할머니
는 입을 벌린 채 코를 골며 잠들어 있었다. 벽난로에 남아 잇는 희미한 불빛에 비친 모습을
보니, 남아 있는 이빨이 위아래로 두 개씩밖에 없었다. 위쪽 앞니 두 개와 아래쪽 앞니 두
개. 그런 모습은 사람이라기보다 산토끼처럼 보였다.
손잡이를 비틀자 문이 열렸다. 인만은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고는 그리크지 않은 목소리로
"여보세요" 하고 불러 봤다. 할머니는 계속 코를 골았다. 손뼉을 두 번 쳐봤지만 여전해 꿈
쩍도 하지 않았다.
안전하다고 판단한 인만은 안으로 들어갔다. 난롯가에 옥수수빵 반쪽과 튀긴 돼지고기 두
조각이 접시에 담겨 있었다. 그는 음식을 집어 자신의 양식 자루 안에 넣었다. 난로에서 멀
리 떨어진 방 한쪽 구석에 빈 침대가 놓여 있었다. '저 여자 침대겠군.' 인만은 그쪽으로 다
가가 이불을 젖혀 놓고 밖으로 나가 머리카락이 새까만 여자를 내려다봤다. 옅은색 드레스
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검은 땅 위에 누워 있는 한 점 불빛처럼 보였다.
인만은 여자를 안아 올려 집 안으로 데려가 침대에 눕혔다. 신발을 벗기고 턱까지 이불을
덮어 주었다. 그리곤 이불을 걷고 여자를 옆쪽으로 돌려 눕혔다. 같은 연대에 있던 한 소년
이 술에 취한 채 자다가 질식사를 할 뻔한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다행히 다른 사람이 발
견하고 등을 때리지 않았더라면 게워 낸 구토물에 목이 막혀 목숨을 잃을 뻔했었다.
이렇게 옆으로 돌려 눕히면 아침에 눈을 뜨고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목사와 함께
건초 더미에서 사랑을 속삭이고 있었는데 집으로 어떻게 돌아왔는지 궁금해하겠지.
바로 그때, 벽난로 안에 있던 통나무들이 쩍하는 소리와 함께 무너져 내리면서 불이 환해
졌다. 여자가 눈을 뜨더니 고개를 돌려 인만을 똑바로 쳐다봤다. 불빛에 비친 얼굴은 백짓장
처럼 창백했고 머리카락은 온통 흐트러져 있었다. 겁에 질리고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비명
을 지를 듯 입을 열었지만 아무 소리도 지르지는 않았다. 인만은 몸을 굽혀 손으로 여자의
이마를 만지며, 관자놀이 부근에 헝클어져 있던 머리카락을 쓸어 주었다.
"이름이 뭐예요?"
"로라예요."
"내 말 잘 들어요, 로라. 저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아무도 그
런 일을 할 수는 없죠. 이제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가 아침에 눈을 뜨면 꿈속에 내가 나타
나 저 남자를 잊어버리라고 했던 게 생생하게 떠오를 거예요. 저 남자는 좋을 게 없는 사람
이에요. 내 말 명심해요."
그는 사람들이 죽은 이의 눈을 감겨 나쁜 것을 못 보게 할 대처럼 두 손가락 끝으로 여자
의 눈을 감겼다. 여자는 살며시 눈을 감더니 다시 꿈나라로 빠져들었다.
인만은 여자를 그대로 내버려둔 채 집을 나와 목사가 묶여 잇는 나무 쪽으로 걸어갔다.
칼을 꺼내 목사를 난도질하는 게 마땅했지만 인만은 배낭 안에서 펜과 잉크와 종이를 꺼냈
다. 그리고 나무 사이를 뚫고 달빛이 비치는 곳을 찾아가 푸른 달빛을 받으며, 머리를 쓸 필
요도 없이, 화려한 수식구도 없이, 거의 살인이나 다름없었던 사건을 간단히 적어 내려갔다.
글을 다 쓰고 인만은 목사의 손이 닿지 않는 나뭇가지에다 종이를 꽂아 놓았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가 인만의 의도를 알아차린 목하는 나무에 목이 묶인 채 몸을 이
리저리 비틀었다. 글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 짐작하고 있는지 인만을 발로 걷어차기도 했다
그리고 손수건으로 재갈이 물린 채 신음소리를 내며 비명을 지르려고 했다.
"변명이라도 하고 싶다는 거냐?"
"우윽!"
목사가 소리를 냈다. 인만은 권총을 꺼내 목사의 귀에 갖다댔다. 노리쇠를 뒤로 잡아당기
고는 작은 레버를 꺾어 아래 총신을 발사구로 바꾸어 놓았다.
"큰 소릴 냈다간 머리가 날아갈 줄 알아."
인만은 이렇게 말하면서 철사를 풀었다. 목사는 손수건을 뱉어 냈다.
"당신은 지금 내 인생을 망쳐 놨어요."
"나한테 뒤집어씌울 생각은 하지 마. 나도 이 일에 끼여들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내
일이나 모레 밤쯤 당신이 다시 여자를 말에 태우고 컴컴한 골짜기로 가지 않을까 걱정하고
싶지는 않아."
"그럼 날 쏴요. 나무에 이렇게 매단 채 쏴버리라고요."
"그러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는 건 아냐."
"나한테 이런 짓을 하다니, 하나님한테 벌을 받고 지옥으로 떨어질 거요!"
인만은 땅바닥에 떨어져 있던 손수건을 주워 목사의 입을 강제로 틀어막은 후 다시 철사
로 묶고는 걸음을 옮겼다. 등뒤로 희미하게 웅얼대는 소리와 낑낑대는 신음소리가 들렸다.
소리 없는 저주와 주문도 이어졌다.
인만은 그 이름 모를 마을에서 조금이라도 더 멀리 가기 위해 밤새도록 열심히 걸었다.
등뒤로 황금빛 아침이 밝아 올 때까지 구불구불한 산길을 걷느라 지쳐 쓰러질 지경이었다.
지금 있는 곳이 어딘지도 알 수 없었고, 그 기나긴 밤 동안 족히 100마일은 걸은 것 같지만
사실은 겨우 12마일에 불과하다는 것도 알 리가 없었다.
그는 숲속으로 들어가 땅바닥에 있던 잡동사니들로 이부자리를 말들었다. 나무에 기대고
앉은 채로 여자의 집에서 들고 나온 옥수수빵 조각과 기름기 많은 돼지 고기를 먹었다. 그
리고는 아침 내내 땅바닥에 누워서 잤다.
눈을 떠 보니 소나무 가지 사이로 푸른 하늘이 보였다 그는 권총을 꺼내 걸레로 닦고 장
전되어 있음을 확인한 후 손에 쥐었다. 르매트 권총이었다. 초기에 나온 조잡한 벨기에산 모
델이 아니라 총신에 '버밍햄'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 모델이었다. 피터스버그 외곽에서
부상을 입기 직전에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을 주워 허리띠 안에 꽂아 놓은 것인데, 야전
병원을 거쳐 부상병들로 가득 한 화차를 타고 남쪽에 있는 주도로 실려 가는 와중에도 잃어
버리지 않았다. 몸집이 너무 커서 균형이 잘 안 맞는 것처럼 보이는 이상하게 생긴 무기였
지만,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권총이었다. 탄창은 주먹만큼이나 컸고 40구경짜리 총알을 아홉
발이나 장전할 수 있었다.
다른 권총과 또 다른 특징이 있다면, 본총신 아래 조잡하고 굵은 엽총용 총신이 달려 잇
고 탄창을 돌리면 이 총신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적군이 가까이 있을 경우 필사적
인 마지막 몸부림으로 커다란 사냥용 총알이나 산탄을 한 방 날릴 수가 있는데, 효과는 적
을 향해 납으로 만든 오리알을 날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큼직한 몸집에도 불구하고 르매
트를 손에 쥐고 있으면 쇠덩어리처럼 든든하고 균형이 잘 잡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잡고 있으면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는 생각만 해도 어느 정도 마음이 편안해지곤 했다.
인만은 탄창과 총신을 닦으면서 마을에서 싸움을 벌였던 일, 강을 건너던 순간 목사를 떠
올리며 그때 어떻게 다른 대처 방안이 있었을지를 생각해 봤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일로
몸을 더럽히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길에서 멀리 떨어진 숲속에 몸을 숨긴 채 올빼미처럼,
혹은 유령처럼 밤에만 움직이고 싶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허리춤에 커다란 권총을 차
고 대낮 거리를 활보하면서 싸우겠다고 덤비는 사람들 모두와 대적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벌어질 때마다 자신의 분노를 터뜨리고 싶기도 했다.
인만은 전쟁이 터지기 전까지는 결코 싸움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일단 입
대를 하고 나자 쉽게 전투 기술을 익힐 수 있었다. 인만은 그 사실을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
로, 자신의 타고난 재능이라고 생각했다. 나무를 깎아 새를 만들 수 있는 사람처럼, 아니면
밴조를 연주할 수 있는 사람처럼, 아니면 청산유수 같은 말솜씨를 타고난 목사처럼... .
그런 것들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그것은 보통 사람이라면 얼이 빠질 만큼 격렬한 전
투 속에서도 민첩한 손놀림과 냉철한 사고를 유지해 주는 치밀한 신경 조직의 문제였고, 그
런 것은 타고날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인만에겐 적과 육탄전을 치르더라도 밀리지 않을
만큼의 덩치도 있었다.
오후가 반쯤 흘러갔을 때 인만은 소나무숲에서 나와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겨우 한
시간쯤 걷고 나자 너무 피곤해 쓰러질 지경이었다. 한 발 내딛는 것조차도 힘에 부쳤다. 저
멀리 얕은 개울 옆쪽으로 두사람이 길가에 서 있는 게 보였지만, 멀리서 봐도 노예임이 분
명했기 때문에 숲속으로 숨을 필요도 없이 계속 걸어갔다.
한 남자는 진흙탕 위에서 뒹굴고 있는 붉은 돼지를 일으켜 세우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
다. 또 다른 남자는 콩 받침대를 한아름 안고 있었다. 돼지를 몰던 남자는 아무리 발로 걷어
차도 돼지가 움직이지 않자 콩 받침대로 돼지를 쿡쿡 찔러댔다. 돼지는 겨우겨우 몸을 일으
키더니 어기적어기적 걷기 시작했다. 두 남자는 인만의 옆으로 지나쳐 가면서 모자에 가볍
게 손을 대면서 "안녕하세요, 나으리."라고 인사했다.
인만은 너무 지쳐서 붉은 돼지가 되어 사람이 콩 받침대로 찌를 때까지 누운 채 뒹굴었으
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부츠를 벗고 얕은 개울을 건넌 후,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게 옥수수죽을 끓여 먹을 수 있을 만한 장소가 나타나길 기대하며 길을 따라 강 하류 쪽
으로 걸어갔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서 강 아래 어디선가 정말 음식다운 음식을 만들고 있
는 냄새가 풍겨 왔다.
그는 곰처럼 고개를 바짝 들고는 코를 킁킁대고 눈을 깜빡이면서 고기 냄새를 따라갔다.
잠시 후 강이 꺾어지는 모퉁이에서 야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자작나무 숲 사이에
짐마차 한 대와 말이 몇 마리 서 있었고, 회색 캔버스 천으로 만든 천막이 피라미드식으로
몇 개 세워져 있었다.
인만은 덤불 속에 쭈그리고 앉아서 천막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사람들을 지켜봤다. 피부
색이 다른 사람들이 뒤섞여 있었다. 인만처럼 노숙을 하거나 떠돌아 다니는 사람들인 것 같
았다. 서커스단 사람과 범법자, 말을 팔러 돌아 다니는 아일랜드계 집시들이 한데 모인 것처
럼 보였다.
말들이 이리저리 걸어다니면서 나무 밑에 자란 풀을 뜯어먹었다. 몸집이 큰 놈부터 거의
죽기 일보 직전인 놈까지 다양했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한낮의 황금빛 태양을 받고 있는
모든 말들이 그저 아름답게만 보였다. 아래로 숙인 목의 우아한 곡선과 얇은 피부 밑으로
볼록 솟아 있는 가냘픈 정강이뼈까지. 아마도 상인들은 이 말들을 숨기고 있는 것 같았다.
전투중에 수없이 죽어 나갔기 때문에 말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천정부지로 말 값
이 솟았고 군인들은 헐값에 말을 강탈하듯 끌고 가곤 했다.
인만은 다리가 길고 몸집이 큰 거세마를 한 마리 사고 싶었다. 뚜벅이 신세를 면하고 싶
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럴 만한 돈도 없을뿐더러 말이 있으면 몸을 숨기기도 힘들 터였다.
숨기기에는 몸집이 너무 클 뿐만 아니라 말을 잘 듣지도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인만은 꿈을
접었다.
같은 부랑자라는 일종의 유대감 비슷한 호의를 기대한 인만은 양손을 펼쳐 보이며 그 사
람들에게로 걸어갔다. 집시들은 기회만 있으면 부츠를 벗겨 가는 사람들이기는 했지만 그를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그들은 작은 모닥불에 토끼, 다람쥐, 도둑질해 온 닭, 여기저기서 훔
친 야채-양배추가 대부분이었지만-를 넣은 쇠냄비에 거무스름한 스튜를 끓이고 있었다. 숯
불 위엔 냄비를 올려 놓고 당밀에 푹 젖은 호박을 익히고 있었다. 천 조각을 이어서 만든
밝은색 치마를 입고 있던 여자가 인만에게 양철 그릇에 음식을 떠주고는 돼지 기름을 두른
프라이팬에 옥수수를 튀기러 갔다. 그 여자가 기름을 젓자 옥수수가 펑펑 소리를 내며 튀었
는데 마치 멀리서 들리는 총소리 같았다.
나무에 기대 앉은 인만은 강바닥에 있는 바위 때문에 생긴 작은 여울과 바람이 불 때마다
몸을 가볍게 떠는 자작나무 노란 이파리와 모닥불 연기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바라보며 음
식을 맛있게 먹었다. 한 남자가 통나무 위에 앉아 담배 상자로 만든 바이올린으로 경쾌한
댄스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물이 얕은 쪽 강가에서 물놀이를 하며 놀고 있었다. 다
른 접시들은 말을 손질하고 있었다.
한 소년이 회색 털 색깔에 맞도록 잿물에 담갔던 옥수수 속대로 늙은 암말의 털을 벗겼
고, 쥐꼬리로 만든 줄로 이빨을 다듬었다. 인만이 보는 앞에서 그 암말은 순식간에 몇 년이
나 나이가 젊어 보였다. 한 여자가 자작나무 등걸 쪽으로 커다란 적갈색 말 한 마리를 끌고
가더니 고삐를 확 잡아채고는, 아마도 절름거리는 버릇을 고치려는 듯 발굽에 램프 기름을
붓고 불을 붙였다. 뭔가 치료를 해줘야 할 만큼 절름거리지 않으면 피부병에 걸렸거나 천식
에 걸린 말들이 대부분이었다.
인만은 예전에도 집시와 만난 적이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의 물건을 훔치며 늘 창고에 있
는 구멍을 찾아다닌다고 스스로 말하는 모습에서 정말 솔직하다는 인상을 받았었다. 하지만
이곳에 모여 있는 조용한 사람들은 모두 선량해 보였다. 그들은 전쟁에서 어느 쪽이 이기든
상관없었다. 어느쪽이 이기든 간에 말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전쟁이란 자신들의 사
업을 일시적으로 방해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인만은 그날 내내 집시들과 함께 있었다. 배가 고플 때마다 스튜를 떠먹었다. 잠시 잠을
자기도 했고 바이올린 소리를 듣기도 했다. 찻잔 속에 담긴 찻잎 모양을 보며 이래를 점치
는 어떤 여자의 예언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미래를 점쳐 주겠다는 말은 거절했
다. 이미 지긋지긋한 일은 모두 겪었다는 생각에 서였다.
느즈막한 오후가 되자 까만 여자가 말 사이로 걸어가더니 고동색 암말에게 고삐를 씌웠
다. 검은색 긴 치마 위에 남자용 스웨터를 입고 있는 외모가 그저 평범한 젊은 여자였다. 머
리 색깔 때문인지, 걸음걸이 때문인지, 가느다란 손가락 때문인지, 인만은 그 여자를 보는
순간 잠깐 아다가 떠올랐다. 인만은 자리에 앉은 채, 그 여자가 길다란 치마와 페티코트 자
락을 들어 이빨로 물고 암말 위로 올라타는 모습을 지켜봤다. 하얀 허벅지가 드러났다.
그녀는 말을 몰고 강둑으로 가서는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강물이 꽤 깊은지 말은 중간쯤
에서 중심을 잃고 한두 번 허우적대다가 가까스로 강을 건넜다. 말의 등과 옆구리에서 물이
줄줄 흘러내렸고, 여자는 엉덩이까지 젖어 있었다. 중심을 잡기 위해 얼굴을 거의 말 잔등
위에 붙인 상태였다. 머리카락이 암말 위로 흘러내려 어느것이 머리카락이고 어느것이 말갈
기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건너편 강둑에 다다르자 여자는 발뒤꿈치로 말의 옆구리를 걷어
차며 널따란 숲속으로 달려갔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인만은 힘이 솟고 기분이 좋아졌다.
어두어둑해지자 이런 집시 소년들이 강가에서 자라는 자작나무 가지를 깎아 작살을 만들
더니 강물이 고여 있는 곳으로 가서 한 양동이 가득 개구리를 잡아 왔다. 그리고 개구리 다
리를 모두 떼어 낸 후에 막대에 끼워 장작불에다 구웠다.
개구리 다리가 익는 동안 한 남자가 다른 물건과 바꾼 것이라며 샴페인 한 병을 들고 다
가왔다. 손에 들고 있는 것이 샴페인인지 뭔지도 잘 모르면서 비싼 값에 팔고 싶어하는 눈
치였다. 인만은 돈을 몇 푼 세어서 건네주고는 개구리 다리와 와인으로 저녁 식사를 했다.
그럭저럭 맛있는 식사였지만 자신처럼 굶주린 사람에겐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다.
인만은 먹을 게 없나 천막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가 묘기를 보여 주는 사람들이 있는 짐
마차 쪽으로 걸어갔다. 마술을 보여 주는 사람들이었다. 천막 옆에 앉아 있던 백인 남자가
인만에게 말을 걸며 뭘 하러 왔느냐고 물었다.
몸집이 호리호리하면서 키가 컸고, 눈밑이 창백하면서 축 늘어져 있고 머리카락을 검게
염색한 걸로 보아 어느 정도 나이가 든 사람이었다. 무리의 대장 격인 사람 같았다. 인만이
먹을 걸 살 수 있겠냐고 묻자 그 남자는, 그럴 순 있지만 아직 햇빛이 남아 있을 때 연습해
야 하기 때문에 한참 후에야 식사를 할 수 있을 거라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인만에게 앉아
서 구경해도 좋다고 했다.
잠시 후 강에서 말을 타던 까만 머리의 여자가 천막 안에서 나왔다. 인만은 남자 옆에서
그 여자가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 자세히 관찰하면서, 두 사람이 어떤 사이인지 열심히 살폈
다. 처음에는 부부일 거라고 추측했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꿨다.
두 사람은 나무 널빤지를 무대처럼 세웠다. 여자가 널빤지 앞에 서자 남자가 그쪽을 향해
칼을 던졌고, 칼은 여자를 아슬아슬하게 비껴서 널빤지 위에 꽂혔다. 인만이 보기에는 그 묘
기만으로도 관객을 충분히 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과거에 무슨 아프리카의 왕이었을 것 같기도 한 귀족적 자태를 한 에티오피안인이 나타났
다. 그는 회색 수염을 기르고 자주색 옷을 입고 있었다. 그가 밴조 비슷한 악기를 연주하자,
조롱박에 줄을 하나 매단 것에 불과한 그 악기에서 죽은 사람도 일어나 춤을 출 만큼 흥겨
운 가락이 흘러 나왔다.
뿐만 아니라 이 악단에는 플로리다에서 온 세미놀족, 크릭족, 에코타에서 온 체로키족, 예
마시족 여자 등 눈요깃감을 제공하는 다양한 부족의 인디언들이 있었다. 그들의 역할은 재
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북을 치고, 춤을 추고, 노래하는 것이다.
그들이 타고 다니는 짐마차에는 조그맣고 색깔이 예쁜 약병들로 가득 찼는데, 각각 암, 폐
병, 신경통, 말라리아, 악액질, 뇌졸중, 경련, 발작 등을 치료하는 약들이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그들은 저녁 식사를 함께하자며 인만을 초대햇다. 모닥불을 쬐며 땅바닥
에 앉아 피가 뚝뚝 떨어지는 비프 스테이크와 베이컨 기름에 튀긴 감자와 감자를 튀기다 남
은 기름으로 드레싱한 야채를 먹었다.
에티오피아 사람과 인디언들도 모두 다 피부색에 상관 없이 함께 어울려 식사를 했다. 사
람들은 돌아가면서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했고, 이야기를 해도 되겠냐고 허락을 구하고 말하
는 사람도 없었다.
식사가 끝나자 사람들은 모두 강가로 나가 쪼그리고 앉아서 모래로 자신의 접시를 문질러
닦았다. 그런 뒤 백인이 요리를 했던 불 속으로 아낌없이 나뭇가지를 던져 어깨 높이가 될
때까지 불을 지폈다. 사람들은 자리를 잡고 앉아서 술병을 옆으로 돌리며 인만에게 끊임없
이 자신들의 여행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길이라는 것은 세상과 떨어져 잇는 곳이요, 정부가 아니라 자연의 섭
리에 지배를 받는 하나의 국가요, 자유로 가득 찬 곳이었다. 그들은 뿔뿔이 흩어졌었던 순간
과 뜻밖의 횡재를 만났던 순간에 대해 이야기했다. 카드 게임과 말 경매를 화제로 삼기도
했고, 세상에는 기쁘게도 멍청한 사람이 더 많다는 말도 했다.
어떤 지방에서는 법률이 대단히 엄격하더라는 이야기, 끔찍한 재앙을 물리친 이야기, 장사
를 하면서 이러저러한 바보들을 속였던 이야기, 그리고 길거리에서 현인들을 만났으나 서로
반대되는 생각들을 갖고 있더라는 이야기도 했다. 멍청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과 아주
사악한 사람들이 사는 마을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들은 여지껏 거쳐 왔던 야영지와 그 야영지에서 먹었던 음식 이야기를 하다가 몇 년 전
에 마주쳤던, 바위 밑으로 꽤 커다란 강이 곧게 흘러내리던 곳이 그중 제일 좋았다고 입을
모았고, 그 절벽 그늘에서 먹었던 닭고기 튀김보다 더 맛있는 음식은 생전 없었다고 말했다.
인만은 시간이 흐를수록 머리카락과 보드라운 피부 위로 모닥불이 비춰서 더 예뻐 보이는
그 여자에게만 관심이 쏠렸다. 그때 백인 남자가 이상한 말을 했다. 언젠가 세상이 질서를
찾으면, '노예'라는 말이 비유로만 사용될 날이 찾아올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날 밤 늦게 인만은 배낭을 들고 야영지에서 조금 떨어진 숲속으로 들어가 집시들의 음
악과 목소리가 들리는 곳에 잠자리를 만들었다. 잠을 청해 보려고 했지만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인만은 쓰다 남은 초를 켜고 남아 있던 술을 양철 컵에 모두 따르고 배낭에서 바트
램의 책을 꺼냈다.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는 처음 눈에 띈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 그가 아는
지식을 총동원해 보면, 만병초 비슷한 식물을 묘사해 놓은 것 같았다.
이 키 작은 나무는 잡목숲이나 작은 숲, 사방이 트인 곳, 고지대 등 키 큰 나무들이 듬성
듬성 있는 곳에서 자란다. 뿌리 하나에서 밋밋한 여러 줄기들이 뻗어 나와 4, 5, 6 피트까지
곧게 자란다. 줄기에서 뻗어 나온 가지들은 줄기 꼭대기를 향해 거의 수직으로 자라고, 약간
크고 타원형으로 끝이 뾰족하며 옅은 녹색 혹은 연두색 빛깔의 이파리가 자란다. 가지 끝에
는 길고 엉성한 원추 모양이나 이삭 모양의 하얀 꽃이 열리는데, 그 꽃에는 다섯 개의 길고
좁은 꽃잎들이 달려 있다.
인만은 꽤 오랫동안 이 긴 문장을 즐겁게 음미했다. 그는 먼저 각 단어가 나름대로의 무
게를 지니도록 머릿속에 각인시켰다. 그렇지 않으면 다음 문장으로 넘어 가면서 방금 읽은
단어들이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그게 성공하면 머릿속으로 부족한 부분
을 메꿔 가면서 사방이 뻥 뚫린 높다란 숲을 떠올렸다. 그 숲에서 자라는 나무들, 그 나뭇가
지를 종종 찾아오는 새들, 나무 아래서 자라는 고사리류 식물 등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이
런 그림이 머릿속에 확실하고 선명하게 자리잡으면, 이 글에서 말한 특징들을 모두 갖추고
있는 나무가 생생하게 떠오를 때까지 그려 나갔다. 비록 그런 나무는 알지도 못했고, 몇몇
부분은 상상으로 메꾼 것이었지만.
인만은 촛불을 껐다. 그는 모포로 온몸을 감싸고 남은 술을 마시면서 잠을 청하려 했지만,
까만 머리의 여자와 이름이 로라라고 하던 여자와 그 여자를 안았을 때 양쪽 팔에 부딪치던
부드러운 허벅지가 생각났다. 그리고 아다와 함께 보냈던 4년 전 크리스마스가 떠올랐다. 그
때도 샴페인을 마셨기 때문일 것이다. 인만은 나무 껍질을 베고 누운 채 술을 들이키며 난
로가 있던 부엌 한 쪽 구석에서 아다가 무릎 위에 앉았을 때의 느낌을 떠올렸다.
그 기억이 마치 다른 세상 일처럼 느껴졌다. 무릎에 앉아 있던 아다의 감촉도 생각났다.
부드러우면서도 그 밑으로 딱딱하고 모난 뼈가 느껴졌었다. 아다가 어깨 위에 머리를 기댔
을 그녀의 머리에서 라벤다 향과 함께 그녀 특유의 향기가 났었다. 그러다 아다가 몸을 일
으키자 인만은 양쪽 어깨 위로 손을 올려놓았고, 피부로 덮인 근육과 울퉁불퉁한 관절이 느
껴졌었다.
인만은 아다의 몸을 감싸며 꼭 끌어안고 싶었지만, 아다는 꼭 다문 입술 사이로 한숨을
내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치맛자락에 잡힌 주름을 폈고, 흩어져 있던 머리카락을 단정히
가다듬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그를 내려다봤다.
"자, 그럼." 그녀는 이렇게 말했었다.
인만은 몸을 앞으로 숙여 아다의 손을 잡고 엄지손가락으로 손등을 문질렀다. 손가락 마
디에서 손목으로 이어지는 가느다란 뼈가 피아노 건반처럼 움직였다. 손바닥 쪽으로 돌려
구부러져 있던 손가락을 하나씩 펴주려고 했지만, 아다는 손을 다시 오므리며 주먹을 쥐었
다. 그는 암청색 핏줄이 꼬여 있는 주먹에 입을 맞췄다. 그녀는 천천히 손을 잡아 빼더니 멍
한 눈으로 손바닥을 쳐다보며 서 있었다.
"손바닥에 미래가 쓰여 있지는 않아요. 쓰여 있다 해도 우리가 읽을 수도 없구요." 하고
인만은 말했다.
아다는 손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사실이군요."
그리고는 멀리 사라졌다.
그런 추억을 떠올리며 잠든 인만은 현실처럼 생생한 꿈을 꿨다. 꿈속에서 인만은 현실 세
계에서 그랬던 것처럼 숲속에 누워 있었다. 나뭇가지들은 여름 내내 자라느라 피곤한 기색
이 역력했고, 불과 몇 주만 지나면 가을 단풍이 들 것 같았다. 큰 나무들 사이사이로 바트램
의 책을 읽으며 상상했던 키 작은 나무들이 섞여 있었다. 사람을 어지럽게 만드는 5각 모양
의 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가느다란 빗방울이 축 늘어진 이파리 사이로 쏟아져 내리면서 커튼처럼 서서히 움직였지
만, 빗줄기는 안 보일 정도로 가늘었기 때문에 옷 속가지 젖지는 않았다. 나무 등걸 사이로
아다가 나타나더니 빗속을 천천히 걸어왔다. 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어깨와 머리를 검
은 천으로 덮고 있었지만, 눈빛과 걸음걸이만 봐도 한눈엔 아다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인만은 누워 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떻게 아다가 이곳에 나타났는지 놀랍기는 했지만,
끌어안고 싶은 마음에 달려갔다. 그러나 손을 세 번이나 내밀어도 아다는 희미한 회색빛으
로 깜빡거리며 사라질 뿐이었다. 하지만 네 번째 손을 내밀자 아다는 사라지지 않았고, 인만
은 그녀를 꼭 끌어안으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을 만나기 위해 힘든 길을 걸어왔어요. 이제 다시는, 다시는 당신을 절대로 놓치지
않을 겁니다. 절대로."
아다가 인만을 바라보며 머리에 쓰고 있던 천을 벗었다.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이 말에 동의하는 표정이었다.
인만은 아침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어났다. 아다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고 떠나 보내고 싶지 않았다. 일어나 보니 풀 위로 이슬이 잔뜩 내려 있었고, 태
양은 벌써 나무 꼭대기에 걸려 있었다.
인만은 숲에서 나와 야영지가 있던 곳으로 갔지만 아무도 없었다. 약병을 실은 짐마차 옆
에서 활활 타고 있던 모닥불도 꺼져 있었다. 모닥불에 검게 그을린 자국과 일렬로 패인 마
차 바퀴 자국 외에는 사람들이 머물렀다는 그 어떤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인만은 그들
에게 작별 인사를 하지 못해 미안했지만 지난 밤 선물받은 선명한 꿈을 떠올리며 홀가분한
기분으로 다시 먼 길을 떠났다.
6. 옅은 장밋빛 드레스
가을로 들어서는 어느 따스한 오후, 루비와 아다는 루비가 겨울에 뜰로 사용하겠다던 밭
에서 일했다. 등골나무가 7피트나 자라 있었는데 가을을 알리는 꽃망울이 갑자기 터지며 햇
빛을 받아 반짝였다. 아직 태양은 뜨거웠고 소들은 한낮이면 목초지를 따라 움직이며 커다
란 히커리나무 그늘을 찾아다녔지만, 터지 꽃망울은 서리가 내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얘기해 주고 있었다.
아다와 루비는 겨우내 식량 구실을 할 어린 양배추, 순무, 양파 사이에 난 잡초를 뽑았다.
몇 주 전 두 사람은 밭을 갈고, 밭의 산성화를 막이 위해 벽난로에서 나온 재와 헛간에서
나온 비료를 뿌렸다. 루비가 말을 몰고 아다가 무게를 더하기 위해 써레 위에 앉아서 흙투
성이 땅을 고르는 등 조심스럽게 텃밭을 가꿨다.
써레는 블랙 씨네 사람들이 갈라진 참나무로 만들었던 것인데 조잡했다. 끝이 양쪽으로
나뉜 참나무 줄기에다 구멍을 뚫고는 말린 검은 아카시아 나무의 긴 가시를 꽂아 넣었는데,
참나무가 마르면서 날카로운 아카시아 나무를 꼭 조이자 접착제를 쓸 필요없이 고정된 것이
다.
갈퀴가 시작되는 곳에 앉아 있던 아다는 써레가 덜컹거리며 흙을 부드럽게 빗질하는 동안
떨어지지 않도록 손과 발로 몸을 지탱했다. 써레가 지나간 자리를 훑어보던 그녀는 엎어 놓
은 흙 속에서 부러진 화살촉 세 개와 부싯돌 가는 기구 하나, 형체가 완벽하게 남아 있는
새사냥용 화살촉 하나는 주웠다. 파종할 때가 되자 루비는 작고 새까만 씨앗을 한 움큼 건
네주며 말했다.
"별로 많은 것 같지 않죠? 그래도 이걸로 몇 주 후에 지하 창고를 순무로 가득 채우려면
자신감이 있어야 해요. 뿐만 아니라 일을 늦게 시작했기 때문에 이번 가을은 따뜻해야 할
텐데... ."
농작물은 대부분 잘 자랐다. 루비는 자기식대로 파종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루비는 울
타리 말뚝을 박고 양배추를 소금에 절이고 돼지를 잡는 등 모든 일이 하늘의 뜻에 달렸다고
믿었다.
"땔나무는 달이 점점 기울어 갈 때 베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겨울에 쉿쉿 소리를 내며 튀
기만 하죠. 포플러 이파리가 다람쥐 귀만해지는 내년 4월이 되면 별자리에 맞춰 옥수수를
심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옥수수가 썩어서 축 늘어져 버리거든요. 또 11월에는 달이 점점
차오를 때 돼지를 잡을 거예요. 안 그러면 고기에 기름이 모자라서 고깃덩어리가 프라이팬
에서 오그라들거든요."
물론 먼로였다면 루비의 이런 주장들을 말도 안 되는 미신으로 일축해 버렸을 것이다. 그
러나 이 지역에 사는 생물들에 대한 루비의 놀라울 정도의 박식함을 곁에서 보아 온 아다는
점성술에 따라 일을 처리해 나가는 루비의 모습에 어떤 상징성들이 내포되어 있다고 그녀
나름대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런 지식들을 농장을 운영하는 루비의 책임감과 신중함, 그리고 엄격함을 보여 주고 있
었다. 별자리를 따르다 보면 점성술은 물질로 이루어진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
에 대해 마치 그것들이 다른 세계와 연결되어 있는 듯했다. 결국 점성술이니 별자리니 하는
것들은 정신을 깨어 있게 만드는 한 방법인 것 같았고, 이런 뜻에서 아다는 루비의 믿음을
존중하기로 마음먹었다.
두 사람이 그날 오후 채소밭을 누비며 일하고 있는데, 바퀴 소리, 말 소리, 금속통이 부엌
찬장에 쨍그렁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늙은 노새 한 쌍이 끌고 있는 짐마차가 길모퉁이를
돌아 나오더니 울타리 옆에 섰다. 짐마차 안에는 가방이며 상자가 가득 차 있어서 사람들은
모두 걷고 있었다.
아다와 루비는 울타리 쪽으로 다가갔다. 그 사람들은 테네시에서 사우스 캐롤라이나로 가
는 중인데, 강을 따라 오다가 몇 번이나 길을 잘못 드는 바람에 골짜기로 가는 길을 놓치고
이렇게 막다른 곳까지 왔다고 했다.
일행은 중년 여자 셋과 대여섯 명의 어린아이들이었다. 순해 보이는 노예 부부가 여자들
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시중을 들고 있었다. 그래도 누가 마음만 먹으면 그들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을 것이다.
세 여자는 남편들이 모두 전쟁터에 나갔고, 테네시에 있는 북군을 피해 그중 한 여자의
언니가 있는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캠던으로 가는 길이라며 건초칸에서 하룻밤 묵어도 되겠느
냐고 물었다. 그들이 건초 더미로 잠자리를 만드는 동안 아다와 루비는 음식을 만들었다.
루비는 닭을 세 마리나 잡았다. 마당이 온통 병아리 천지라 항상 서늘하게 유지되는 식량
창고까지 걸어가려면 병아리들을 밟지 않게 신경써야 할 정도였고, 대부분이 조만간 수탉으
로 자랄 수놈 병아리들이라 잡아먹을 수 있는 숫자가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닭고기를 잘라 튀기고, 콩을 요리하고, 감자를 삶고, 호박을 쪘다. 루비가 세 가
지 비스킷을 만들어 저녁 준비를 끝내고 손님들을 식탁으로 불렀다. 노예에게도 똑같은 몫
이 돌아갔지만, 바깥의 배나무 아래서 따로 식사를 했다.
그들은 허겁지겁 음식을 먹어치웠다. 식사가 끝나자 닭고기 접시에는 날개 두 개와 다린
한 조각밖에 안 남았고, 1파운드가 넘는 버터와 적지 않았던 양의 수수 시럽이 모두 사라졌
다. 한 여자가 입을 열었다.
"휴, 정말 맛있었어요. 두 주 동안 버터나 베이컨 기름, 당밀이 없어서 마른 옥수수빵만
먹었거든요. 목이 메어서 넘어가질 않았죠."
"어떻게 길을 떠나게 됐나요?"
아다가 물었다.
"북군이 습격해서 흑인들까지 데리고 갔답니다. 올 한 해 동안 수확한 곡식도 모조리 빼
앗아 갔죠. 심지어 어떤 사람은 외투 주머니에다 돼지 기름까지 한 움큼씩 집어서 잔뜩 쑤
셔 넣더라고요. 음식을 모두 약탈한 후에 여군이라는 사람이 우리 몸까지 샅샅이 뒤졌어요.
그런데 여군이 아니었어요. 울대뼈가 불룩 솟아 있던걸요. 숨겨 놓았던 보석까지 모조리 빼
앗겼어요. 비가 내리고 잇엇는데 우리 집에 불을 지르고는 떠나더군요. 얼마 안 있어 지하실
은 악취를 풍기는 시커먼 물로 가득 찼고 굴뚝만 달랑 남았죠.
수중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지만, 우리는 집을 떠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머물러 있
었죠. 3일째 되던 날, 막내딸과 함께 우리의 전재산이 페허로 변해 버린 그 지하실을 쳐다보
고 있었죠. 딸아이는 깨진 접시를 들더니 엄마, 좀 있으면 풀만 먹고 살아야 겠네요, 하더군
요. 그 순간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북군은 그런 식이에요. 새로운 전술을 고안해 낸 거죠. 여자들과 아이들을 못 살게 굴어
서 죽은 자기네 병사들에 대한 보상을 받으려나 봐요." 하고 다른 여자가 말했다.
"요즘은 심장이 콩알만해지는 것 같다니까요." 또 다른 여자가 말했다. "이런 외딴곳에 숨
어 있다니 아가씨는 정말 운이 좋은 거예요."
아다와 루비는 손님들에게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다음날 아침에는 남아 있던 계란을
톡톡 털어서 옥수수죽과 비스킷을 만들었다. 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들에게 골짜기로 가는
약도를 그려주고 떠나 보냈다.
그날 정오 무렵 루비가 사과 과수원을 살펴보고 싶다고 해서, 아다는 그럼 거기서 점심
식사를 하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두 사람은 피크닉 음식으로 어제 저녁에 먹다 남은 닭튀
김과 루비가 마요네즈를 넣어 만든 감자 샐러드 한 접시와 피클을 준비했다. 나무상자 안에
넣어 사과 과수원까지 들고 가서 풀 위에 담요를 깔고 점심을 먹었다.
환한 아지랑이가 아른거리고 햇볕이 따사로운 오후였다. 나무를 살펴본 루비는 사과가 아
주 잘 자라고 있다고 자못 진지하게 말했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아다에게 북쪽을 가리켜 보
라고 했다. 아다가 태양이 어느 쪽으로 지는지 기억을 더듬으면서 한참 동안 헤매는 모습을
보며 루비가 씨익 웃었다. 요즘 루비는 습관적으로 이런 질문을 던졌다. 아다가 얼마나 방향
감각이 없는지 꼬집어 내는 게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한번은 개울가를 걸어가다가 이렇게
물었던 적도 있다.
"저 물은 어떻게 흐르지? 어디서 흘러와서 어디로 흘러가지?"
또 어떤 날은 이런 말도 했다.
"산중턱에서 나는 식물들 중 먹을 수 있는 것 네 가지만 말해봐. 다음번 새 달이 뜰 때까
지 며칠이 남았지? 요즘 꽃을 피우는 식물 두 가지와 요즘 열매가 익는 식물 두 가지만 말
해 봐."
아다는 이런 질문에 바로 대답할 재간이 없었지만, 대답할 수 있을 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지식면으로는 루비가 교과서나 다름없었다. 매일매일 일
하면서 아다는 루비가 농사일뿐만 아니라 비실용적인 분야에도 지식이 많다는 사실을 알았
다.
루비의 머릿속에는 쓸데없는 동식물의 이름이나 그들의 생활 방식이 가득 차 있었다. 세
상의 한쪽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조그만 생물들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돼지풀 줄기에 붙
어 있는 버마 재비, 인주솜풀 이파리로 작은 천막을 만들어 놓고 붙어 사는 조명충나방, 실
개울 바위 밑에서 다정하게 웃고 있는 줄무늬 점박이 불도마뱀까지도 놓치는 법이 없었다.
죽어 가는 나무의 축축한 껍질에서 자라는 작고 복슬복슬하고 독이 있어 보이는 암갈색 식
물과 곰팡이, 나뭇가지나 돌멩이나 풀잎에 집을 짓고 혼자 사는 유충, 곤충, 벌레까지 루비
는 모두 다 알아봤다. 자연이 잉태해 낸 모든 생명에 루비는 관심을 두었다.
점심 식사를 마친 후에 배가 불러서 꾸벅꾸벅 졸며 담요위에 앉아 있다가 아다는 루비에
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있는 게 부럽다고 말했다.
"농사며, 요리며, 야생 생물에 대란 지식까지 어떻게 그런 걸다 알게 됐어?" 아다가 물었
다.
루비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알게 됐다고 대답했다.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대답
해 줄 만한 할머니에게도 물어보고, 그분들이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질문도 하는 식으
로 배웠다고 했다. 샐리 스왱거를 도와 주면서 얻게 된 것도 있다고 했는데, 루비는 샐 리가
아주 단순한 잡초에 이르기까지 온갖 식물의 이름등 숨겨진 지식을 아주 많이 알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혼자서 얻게 된 지식도 있다고 했다. 결국 관심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라는
것이다.
"우선 무슨 식물과 비슷한지부터 살펴보자." 아다는 이 말을 자연의 인척 관계는 어떻게
되는지를 관찰하고 이해하라는 뜻으로 해석했다.
루비는 푸른 산등성이 중턱에 있는 붉은 부분을 가리키며 옻나무와 말채나무가 다른 나무
들보다 먼저 색깔을 바꾸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왜 옻나무와 말채나무가 다른 나무들보다 거의 한 달이나 먼저 저렇게 색깔을 바꾸기 시
작하는지 아니?"
루비가 물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는 거 아냐?"
쯧쯧, 루비가 혀를 끌끌 찼다. 사람들은 이유를 알 수 없는 현상과 마주칠 때마다 우연의
탓으로 돌리는 경우가 많지만 실은 그게 아니라고 했다.
"옻나무와 말채나무는 때가 되면 잘 익은 열매가 잔뜩 열려. 그러면 마땅히 이것과 관계
있는 것 중 이시기에 벌어지는 또 다른 현상이 무엇인지 궁금하게 여겨야 하지 않겠어? 새
들이 이동한다는 걸 들 수 있지. 낮뿐만 아니라 밤에도 분주하게 왔다갔다 한다구. 고개만
들어도 알 수 있어요. 새가 얼마나 많이 날아다니는지 머리가 아찔해질 거야, 그럼 높은 곳
에서서 새의 눈으로 나무들을 내려다본다고 상상해 봐. 나무들이 다들 녹색이고 생김새마저
똑같은 걸 보면 깜짝 놀랄 걸. 서로 너무 똑같이 생겼으니 먹을게 있는지 없는지 분간못할
거 아냐? 철새들 눈에도 그렇게 보일꺼야. 철새들은 이 숲을 잘 모르잖아. 어떤 열매가 아디
서 자라는지 모르지. 그러니까 말채나무랑 옻나무는 시 숲을 잘 모르는 대고픈 새들에게 내
열매를 먹으라는 말을 하기 위해 색깔이 빨갛게 변하는 거라구."
"마치 말채나무가 나름대로 계획을 세운 것처럼 들리네."
"글세, 그럴지도 모르지."
루비는 여러 가지 새들의 배설물을 자세히 들여다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거의 없어."
"그런 적이 거의 없다는 걸 그렇게 자랑스럽게 말하지는 마."
그녀는 새들의 배설물에 그 문제에 대한 대답이 있다고 했다. 작은 말채나무는 큰 말채나
무 밑에 있으면 제대로 자랄 수가 없다. 일단 뿌리를 내리고 나면, 새들을 이용해 조건이 더
좋은 땅으로 움직여 간다는 것이다. 나무 열매를 먹은 새는 씨를 그대로 배설 하는데, 이 씨
는 거름으로 뒤덮인 상태에서 움을 틔울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루비의 말로는 이런 것
들을 곰곰이 생각하다 보면 그 안에서 교훈을 얻을 수도 있다고 했다. 생물들은 대부분 비
슷한 목적을 위해 이런 방법을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잠시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그러다 한낮의 따뜻한 기운이 느껴지자 루비
는 담요 위에 누워 자기 시작했다. 아다도 피곤했지만 잠자리에 들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어린아이처럼 무거운 눈꺼풀과 싸웠다.
아다는 자리에서 일어나 과수원과 맞닿아 있는 숲의 가장자리로 걸어갔다. 매역취, 의나
무, 등골나무 등 키가 큰 가을 식물들이 노란색, 파란색, 회색의 꽃을 활짝 피우고 있었다.
제주왕나비와 산호장나비가 꽃머리 위에서 분주하게 일하고 있었다. 파리새 세 마리가 이미
밤색으로 변한 검은딸기 줄기 위에 기우뚱거리며 앉아 있다가, 노란 등 양쪽에 달린 검은
날개를 펄럭이며 밭과 숲의 경계선에 있는 말채나무와 옻나무 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아다는 멍한 눈으로 서 있었다. 무리지어 모여 있는 꽃과 줄기와 땅속에서 수많은 작은
생명체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진동이 느껴졌다. 날아다니고, 기어다니고, 기어오르고,
뭔가를 먹는 곤충들. 이 곤충들의 에너지가 축적되면서 환한 생명의 고동소리가 들렸고, 아
다는 가슴이 한껏 부풀어올랐다.
아다는 어제 왔던 그 여자가 "아가씨는 정말 운이 좋은 거예요."라고 말한 것을 떠올리며,
반쯤은 몽롱한 상태로, 반쯤은 정신을 바짝 차린 상태로 서 있었다. 이런 날이면, 아무리 전
쟁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고 농장에 할 일이 넘쳐난다 해도 그다지 물만이 없었다.
지금 상태로도 너무나 완벽했기 때문에 더 좋게 만든다는 건 불가능할 것 같았다.
그날 저녁 식사를 마친 무 아다는 루비와 함께 현관에 앉아 큰 소리로 책을 읽었다. 호머
가 거의 끝나 가고 있었다. 페넬로페의 이야기가 나오는 부분에서는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
하던 루비가, 신들이 던진 돌로 인해 오딧세이가 고난을 겪는 부분에서는 오랫동안 열심히
귀기울이며 웃고 또 웃었다.
호머는 모르고 썼겠지만 오딧세이가 스토브로드와 닮은 구석이 많다며, 특히 여행을 시작
한 이유가 가장 의심스럽다고 했다. 결국 등장 인물들이 돼지 치는 사람의 오두막에 모여
술을 마시면서 웃고 떠드는 부분이 나오자 짐작이 맞아떨어졌다는 게 증명된 것이라고 말했
다. 루비는 결국 시간이 아무리 많이 흘렀어도 사람들은 거의 변한게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아다는 책을 내려 놓고 가만히 앉아 하늘을 쳐다봤다. 하늘의 빛깔
때문인지 밤 공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찰스턴을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 참석했던 파티
가 생각났고, 그때 있었던 일을 루비에게 들려 주었다.
완도 강이 넓게 굽이쳐 들아가는 곳에 자리잡은 사촌의 대저택에서 열린 파티는 3일 동안
이나 계속되었다. 3일 동안 사람들은 새벽부터 정오까지만 잠을 잤고, 굴과 샴페인과 패이스
트리만 먹고 지냈다. 매일 저녁 댄스 파티가 벌어졌고, 밤이 으슥해지면 점점 차오르는 달빛
을 받으며 노를 저어서 느릿느릿 흘러가는 강물위로 나갔다.
전쟁의 열 리가 몰아닥치던 평상시와는 다른 시기였기 때문에 예전에는 멍청하고 매력 없
게 느껴지던 남자들까지도 갑자기 황홀한 오로라 빛을 은은하게 풍기는 것처럼 보였다. 얼
마 안 있어 그 남자들 대부분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짧은 기간 동안에는 어떤 남자든 지원하기만 하면 누군가의 연인이 될 수있었다.
파티의 마지막 날 밤, 아다는 잘 어울리는 색깔로 가장자리를 염색한 레이스가 달린 자주
색 실크 드레스를 입었다. 날씬한 몸매가 돋보이도록 허리 부분이 잘록하게 만들어진 옷이
었다. 먼로는 그 색깔이 아다의 검은 머리색과 완벽하게 어울리고, 평범한 분홍색이나 옅은,
파란색이나 노란색보다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긴다며, 다른 사람이 똑같은 색깔의 옷을 입지
못하도록 그 드레스천을 모두 사버렸다.
그날 밤 사반나에서 왔다는 남자가 계속 추근대는 바람에 아다는 학께 강가에 나가기로
했다. 돈이 많은 인디고 상인의 둘째 아들로, 멋있기는 했지만 머리가 비어 있는 그런 남자
였다. 그 남자에 대해 알고 있는 몇가지 사실을 종합해 보면, 겉만 번지르르한 멍청이인 건
분명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 남자의 이름은 블론트였는데, 완도 강 가운데 부분까지 노를 저어 나간 후에는 물살에
보트를 내맡겼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앉아 있엇고, 아다는 보트 바닥에 새인 틈을
막고 있는 타르에 가장자리가 닿지 않도록 옅은 자주색 드레스 자락을 단단히 쥐고 있었다.
두 사람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블론트는 노로 물을 떠서 다시 강물 속으로 쏟아 붓고
만 있었다. 노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마음에 들었는지, 아다가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그
장난을 계속했다.
그는 후텁지근한 날씨 때문에 흘린 땀을 식혀 줄 수 있을 만큼 시원한 샴페인 한 명과 잔
두 개를 들고 나왔다. 아다에게도 잔을 권했지만 그녀가 거절했기 때문에, 한 명을 혼자서
다 마시더니 빈병을 강물 속으로 던졌다. 물살이 잔잔해서, 술병이 떨어진 속에서 동그라미
가 생겨 보이지 않는 곳까지 계속 이어졌다.
집 안에서 음악 소리가 흘러 나왔지만, 워낙 희미하게 들려 왈츠라는 것밖에는 알 수가
없었다. 어두컴컴한 데서 보니 해안선이 제법 멀게 느껴졌다. 주변 풍경은 아무것도 알아볼
수가 없었고, 평면, 동그라미, 직선 등 그러 단순한 기하학적 무늬로만 보일 뿐이었다.
잠시 후 보름달이 휘영청 하늘 한 가운데로 떠올랐는데 습한 고기 때문에 달 가장자리가
흐릿하게 보였다. 은빛으로 빛나는 하늘이 워낙 밝아선지 별은 보이지 않았다. 넓은 강도 하
늘보다 약간 어두운 은빛이었다. 새벽이 되려면 아직 멀었지만, 아침 안개가 물위로 슬슴슬
금 피어오르고 있었다. 양쪽 지평선에 서 있는 시커먼 나무들만이 강과 하늘을 구분짓는 유
일한 경계선이었다.
블론트가 마침내 입을 열더니 자미 자기 소개를 했다. 콜롬비아 대학을 졸업했고, 아버지
가 찰스턴에서 하고 있는 사업을 배우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됐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모
두들 예상하고 있겠지만, 조만간 전쟁이 터지면 당연히 자원 입대할 거라고 했다. 남부 주를
정복하려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물리치겠다며 자신만만한 어조로 말했다. 아다는 파티 내낸
그런 이야기를 들었던 처라 다소 신물이 났다.
하지만 블론트는 말을 계속 이어갈수록 살아서 돌아올 수 있는 확신이 안 서는 모양이었
다. 전쟁 이야기를 드문드문 하다가 결국에는 입을 다물었다. 그가 고개를 숙이고 보트 밑바
닥을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아다에게는 그의 정수리 근처밖에 안 보였다. 그러다 술기
운과 그날 밤의 이상한 분위기 때문이었는지, 그는 암으로 닥칠 전쟁이 무섭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제대로 적응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떳떳하게 입대를 기피함
방법도 없다고 했다. 요즘들어 갖가지 모습으로 끔찍한 죽음을 맞이하는 꿈을 계속 꾸고 잇
는데, 언젠가는 그 꿈 종 하나가 현실이 될 게 분명하다고 덧붙였다.
블론트는 구두코에 대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계속 고개를 숙인채 말하다가 창백한 얼굴을
들었다. 두뺨 위로 눈물이 반짝이며 흐르고 있었다. 아다는 그가 용감한 군인이 아니라 장사
꾼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갑자기 그가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다는 손을 내밀
어 무릎위에 얹혀 있던 그의 손을 잡았다. 고향을 지키는 의무와 영광을 다하려면 용감해야
한다는 말을 하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파티 내내 여자들이 읊어대던 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다는 목이 메어 그런 말을 내뱉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걱정하지 말라
든가, 용감해야 한다든가 하는 간단한 말이라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위로의
말들이 그 순간에는 거짓말처럼 느껴져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아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그의 손등만 쓰다듬었다. 블론트가 그런 위로의 표현을 그 이상의 의미로 받아
들이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남자가 접근해 오면 아다는 본능적으로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뒤로 물러서는데, 보트에는
물러설 만한 공간이 없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구애할 생각조차 못하는 블론
트의 모습을 보며 아다는 안심했다.
두 사람은 강이 굽이돌아가는 곳까지 흘러갔다. 보트가 불쑥 튀어 나온 강변을 향해 곧장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에 달빛을 받으며 희미하게 빛나고 있는 모래둑에 부딪칠 위험이 있었
다. 블론트는 자신의 감정을 가다듬고는 다시 노를 잡고 상류 쪽에 있는 선착장으로 보트를
저어 갔다.
그는 아르강식 램프가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는 집 현관까지 아다를 바래다 줬다. 노란
창문 너머로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고, 이제는 곡목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또
렷하게 음악 소리가 들렸다.
첫 번째 곡은 정글의 곡이었고, 두 번째 곡은 스트라우스의 곡이었다. 블론트는 문간에서
걸음을 멈추고 아다의 뺨을 약간 들어 올려 앞으로 몸을 굽히며 입을 맞췄다. 형제끼리 간
단하게 인사를 나누는 식의 키스였다. 그리고는 걸어가 버렸다.
2층에 있는 자기 방으로 올라가던 아다는 거울에 비친 어떤 여자의 뒷모습을 보고 놀라
걸음을 멈추고 쳐다봤다. 그 여자는 옅은 장밋빛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아다는 그 여자의
드레스와 예쁜 등, 숱 많은 검은색 머리카락, 몸에 배인 자신만만한 분위기를 부러워하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다가 발을 내밀자 그 여자도 똑같이 발을 내밀었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이 부러워하고
있던 그 여자가 바로 자신이었고, 거울이 등 뒤쪽 벽에 달린 거울에 비친 모습을 반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램프 불빛과 거울의 색깔 때문에 옅은 자주색이 장밋빛으로 보인
것이었다.
아다는 방으로 올라가 잠자리에 들었지만 새벽녘까지 음악 소리가 계속 이어졌기 때문에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리저리 뒤척이면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감탄하
다니 참 어이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다음 날 아침, 파티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시내로 돌아가는 마차에 올라탈 대 아다는 현관
앞 계단에서 우연히 블론트와 마주쳤다. 그는 어젯밤에 보인 행동이 무안했는지 아다의 눈
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않았고 말도 거의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다는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비밀로 해달라는 부탁을 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그에게 후한 점수를 줬다.
그후로 다시는 그를 만나지 못했는데, 사촌인 루시가 보낸 편지에 따르면 게티스버그 전
투에서 전사했다고 했다. 게티스버그 전투에서도 세미트리 힐의 고지를 빼앗기 위한 접전이
가장 치열했는데, 그는 그 전투에서 퇴각하다 얼굴에 총을 맞았다고 했다. 불명예스럽게 뒤
통수를 맞고 싶지 않았던 마음에 그는 뒤로 걷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 이야기를 다 들은 루비는 명예를 지키려고 노력한 블론트의 태도에 감탄하기는커녕,
어떻게 잠도 안 자고 재미삼아 보트를 타고 강물 위를 떠다니면서 허송세월할 수 있냐고 놀
라워했다.
"그런 뜻에서 한 이야기가 아닌데"하고 아다는 말했다.
두 사람은 해가 지면서 산등성이에 서 있는 나무들이 점점 희미해져 가는 모습을 바라보
며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러다 루비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이제 밤일을 해야 할 시간이야."
잘 자라는 인사였다. 루비는 마지막으로 가축들을 점검하고, 바깥채 문단속을 하고, 부엌
난로 불씨가 죽지 않게 잘 묻어 놓았다.
그러는 동안 아다는 무릎 위에 책을 올려놓은 채 현관에 앉아서 마당 너머에 있는 헛간을
쳐다봤다. 들판 너머로 나무가 자라고 있는 산비탈을 쳐다봤다. 어두워져 가는 하늘을 올려
다봤다. 찰스턴을 생각나게 했던 빛깔이 이제는 가라앉아 있었다. 모든 게 정적 속으로 묻혀
가고 있었다. 하지만 추억은 사라질 생각이 없는지 이곳으로 이사온 지 얼마 안 되던 어느
날 밤, 아버지와 함께 이렇게 앉아 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지금은 익숙해진 주변 풍경이지만 그 당시 두 사람의 눈에는 낯설게만 느껴졌었다. 이 마
을은 너무나 컴컴했고 찰스턴에 비해 산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아버지는 그때 자연이라는
게 원래 그렇듯이 웅장한 풍경도 우리 모두가 동경하는, 좀더 심오한 삶이 기다리고 있는
또 다른 세상을 상징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말을 했었다. 그리고 아다도 그 말에 동의했었다.
하지만 이제 주변 풍경을 둘러보니, 그것이 상징이 아니라 실제로 그 안에 모든 삶이 들
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아버지의 생각과 정반대 같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모든
생명체들도 나름대로 동경하는 바가 있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고 볼 수 있었다. 그들이 동
경하는 바가 무엇인지 확실히 정의를 내릴 수는 없지만.
루비는 마당을 가로질러 가다가 대문 앞에서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소를 헛간 안으로 집어 넣어야겠어."
그리고는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고 오두막 쪽으로 걸어갔다.
아다는 현관 앞에서 일어나 헛간을 지나 풀밭으로 걸어갔다. 산등성이 아래쪽은 이미 어
두워진 지 한참 지났고, 금세 주변이 어두워졌다. 어둑어둑한 햇빛을 받으며 잿빛 유리창에
서림 입김처럼 희미했고, 금방이라도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마치 엄청난 외로움이 자리
잡고 있는 곳처럼 보였다.
이곳에서 오래 살았던 사람들은 산속에서 혼자 지내면 마음이 무거워지는 법이라고 했다.
황혼 무렵이야말로 얼마 안 있어 어둠이 찾아온다는 두려움이 가장 크게 느껴지는 시간이기
때문에, 달도 없이 칠흑같은 밤보다 훨씬 더 마음이 우울해진다는 것이었다. 아다는 이곳에
처음 도착했을 때부터 그런 기운을 느꼈고, 그 점에 대해 불평을 늘어 놓았었다.
아버지는 이곳에 산다고 더 외로울 리는 없다며 그녀를 애써 달랬다. 외로움이란 아다에
게나 이곳에만 한정된 감정이 아니라 일상 생활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잇는 요소라고 아버지
는 말했었다. 체질적으로 더위나 추위를 잘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아주 단순하거나 아주
강한 사람은 외로움울 잘 타지 않지만 그런 사람은 드물다고 했다.
언제나 그렇듯 아버지는 그럴듯한 설명을 곁들였다. 아주 오래 전에는 하나님이 어느 곳
에나 사람들과 항상 함께하셨는데, 하나님이 한 걸음 먼 곳으로 물러나면서 생긴 공간 때문
에 사람들이 외로움을 느낀다는 것이었다.
밤공기가 차가웠다. 잔디에 맺힌 이슬에 젖어, 울타리를 따라 무성히 자란 풀밭 위에 누워
있던 소 왈도에게 다가갔을 때 이미 아다의 치맛자락은 축축해져 있었다. 소는 뻣뻣해진 다
리 관절을 풀며 자리에서 일어나 대문 쪽으로 갔다.
아다는 왈도가 누워 있던 자리에 앉았다. 땅바닥에 남아 있던 소의 체온이 다리를 감고
올라왔다. 한 달 동안의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들면서 갑자기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피곤
해진 아다는 그 자리에 누워 쉬고 싶었다. 하지만 잠시 허리를 굽혀 한낮의 열기와 소의 체
온 덕분에 아직도 살아 있는 것처럼 따뜻한 풀 밑 흙 속으로 손을 넣어 보았을 뿐이다.
개울 너머에 있는 나무 위에서 올빼미 한 마리가 울었다. 아다는 싯구절을 훑어보는 것처
럼 다섯 가락의 리듬을 헤아려 보았다. 길게 한 번, 짧게 두 번, 다시 길게 두 번. 사람들은
올빼미를 죽음의 새라고 하지만 아다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희끄무레한 밤중에 들리는
올빼미의 울음소리는 부드러우면서도 사랑스러웠고, 비둘기 울음소리와 비슷하지만 더 깊이
가 있었다. 왈도가 대문 앞에서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음메 하고 아다를 불렀다. 아다는
땅에서 손을 떼고 몸을 일으켰다.
7. 방랑의 나날들
인만은 며칠 동안 시원한 날씨와 푸른 하늘을 만끽하며 아무도 없는 길을 걸었다. 여지껏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곳을 피해 다니느라 이리저리 돌아갈 수밖에 없었지만, 산속 깊이 자
리잡은 마을과 넓게 펼쳐진 농장은 그냥 지나가도 별 문제가 없었다. 마주치는 사람도 별로
없었고 그나마 만나는 사람도 대부분 노예들뿐이었다.
밤에도 따뜻했고, 점점 차올라서 보름달이 됐다가 기울어 가는 달이 있어서 어둡지 않았
다. 잠을 잘 수 있는 건초 더미가 있을 때마다 인만은 그 위에 누운 채 달과 별들을 쳐다보
면서, 자신이야말로 세상에 두려울 것 없는 자유로운 방랑자라고 생각했다.
어제와 오늘, 오늘과 내일을 다르게 기억하려고 애썼지만 특별한 사건 없이 하루하루가
흘러갔다. 방향 잡기가 어려웠다는 기억밖에 없는 날도 있었다. 지금까지 이리저리로 구부러
지는 길이 많았지만 표지판이나 팻말이 없어 몇 번씩이나 길을 묻는 수밖에 없었다.
인만은 먼저 현관으로 길을 거의 가로막을 정도로 양 갈래길 입구에 바짝 붙어 있는 집으
로 다가갔다. 피곤해 보이는 여자 양다리를 벌린 채 의자에 앉아 쉬고 있었다.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었는데, 지평선에서 희미하게 벌어지고 있는 뭔가 큰 사건을 쳐다 보는 듯한 눈빛
이었다. 무릎을 덮고 잇는 치마는 푹 꺼져서 커다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이쪽으로 가면 솔즈베리가 나옵니까?"
인만이 물었다.
그 여자는 마디 굵은 양손을 무릎 위에 올려 넣은 채 주먹을 쥐고 있었다. 움직임을 최대
한으로 절제하는 연습이라도 하듯이, 오른쪽 엄지 손가락을 눈에 보일락말락하게 까딱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신경성 경련으로 생각될 정도였다. 그 여자는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았지만, 인만은 여자가 가르쳐 준 방향으로 발을 옮겼다.
얼마 후 소합향나무 그늘에 앉아 잇는 회색 머리 남자와 만났다. 셔츠는 입지 않고 노란
색 고급 실크 조끼만 입고 있었는데, 단추를 잠그지 않아서 암퇘지처럼 축 늘어져 있는 젖
꼭지가 보였다. 양 다리를 쭉 내민 채 버릇 나쁜 애완견을 혼내 주듯 손바닥으로 한쪽 허벅
지를 때리고 있었다. 그 남자의 말은 모음으로만 이루어져 있어서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이 길이 솔즈베리로 가는 길 맞습니까?"
인만이 물었다.
"에에에에에?"
남자가 말했다.
"솔즈베리요. 이쪽이냐고요."
"아아아아아!"
남자가 맞다는 듯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인만은 계속 걸어갔다.
잠시 후 밭에서 양파를 캐고 있는 나자와 만났다.
"솔즈베리로 가려면 ... 이 길 맞습니까?"
인만이 물었다.
그 남자는 말한 마디 없이 양파를 든 손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하늘은 하얀색 이었고, 하늘을 날다 숨이 끊어졌는지 풀썩 먼지를 일으키며 길바닥으로
떨어진 까마귀는 검은색 부리를 벌린 채 회색 혀를 쑥 내밀고 있었다.
좀더 걸어가다 보니 농장주인집 딸처럼 보이는 소녀 셋이 색바랜 면 드레스를 입고 먼지
투성이 길 위에서 맨발로 춤을 추고 있었다. 아이들은 인만이 걸어오는 모습을 보고 울타리
위에 걸터 앉았다. 인만이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기만 할 뿐, 인만이 손을 들어 인사를 건네
도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어느 날 아침, 인만은 어린 포플러나무 숲 사이를 걸어가고 있었다. 아직 때가 안 됐는데
도 포플러 잎사귀가 노랗게 변해 있었다. 인만은 먹을 생각만 했다. 여지껏 그럭저럭 버텨
오기는 했지만 몸을 숨긴 채 옥수수죽, 사과, 감, 훔친 멜론만 먹는 것이 점점 지겨워졌다.
고기와 빵을 먹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고기와 빵을 먹고 싶다는 욕구와 그에 따르는
위험을 저울질해 보고 있던 순간, 강가에서 빨래하고 있는 여자들을 보았다. 그는 숲 가장자
리로 몸을 숨기고 그들을 지켜봤다.
여자들은 종아리까지 와닿는 강물 속에 서서 반질반질한 돌에 빨랫감을 때리고 헹구고 비
틀어 짠후 근처에 있는 덤불에 널어 말리고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며 웃는 여자들도 있었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여자들도 있었다. 여자들은 치맛자락을 양다리로 모아 물에 젖지 않도
록 허리띠로 묶고 있었는데 마치 주아브 연대에서 입는 펑퍼짐한 바지처럼 보였다. 주아브
병사들은 전장에서 아주 환하고 밝은 표정으로 숨을 거두는 게 특징이라는 얘기가 생각났
다.
훔쳐보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는 여자들은 치마를 허벅지까지 걷어붙였다.
빨래에서 나온 물이 창백한 살갗 위로 흘러내리면서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다른 때 같으면 이 광경이 매력적으로 보였겠지만, 지금 인만은 여자들이 들고 온 점심에
관심이 쏠려 있었다. 나무 광주리에 담거나 보자기로 묶은 음식이 강둑에 놓여 있었던 것이
다. 처음에 인만은 여자들에게 음식을 팔라고 해볼까 생각했지만, 서로 똘똘 뭉쳐 돌팔매질
을 하며 쫓아 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계속 숨어 있기로 작정했다.
인만은 나무와 돌 사이를 걸어 강둑까지 다가갔다. 이파리가 무성한 커다란 자작나무 등
걸 뒤에 숨었다. 조심조심 손을 내밀어 점심 보자기들을 들어 보아 가장 무거운 것을 골라
적당하다 싶은 액수보다 훨씬 많은 돈을 그 자리에 살며시 놓았다. 그 순간에는 인심을 넉
넉하게 쓰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걸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인만은 보자기 꾸러미를 흔들며 길을 걸어가다가 강에서 웬만큼 멀어졌을 때 매듭을 풀고
열어 봤다. 데친 생선 세 덩어리, 삶은 가자 세 개, 설익은 비스킷 두 개가 들어 있었다.
비스킷과 생선?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음식이었다. 게다가 구운 고기와 빵을 기해했던 인
만으로서는 성에 안 차는 점심이었다.
어쨌든 인만은 걸어가면서 음식을 먹었다. 아무도 없는 길을 걸어가며 마지막 감자를 두
입 정도 남겨 놓고 있었을 때 뒤통수가 근질근질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주
위를 둘러봤다. 멀리서 빠르게 걸어오고 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인만은 남아 있던 감자를
마저 입에 집어넣고는 얼른 모퉁이 쪽으로 걸어갔다. 모퉁이를 돌아 숲속으로 들어간 인만
은 길 쪽을 잘 볼 수 있도록 쓰러진 나무 등걸 뒤로 몸을 숨겼다.
잠시 후 그 남자가 모퉁이를 돌아 나왔다. 모자는 쓰지 않고 펄럭이는 길다란 회색 외투
를 입고 있었고, 축 늘어진 가죽 배낭을 메고 자기 키만큼이나 긴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옛
날 걸식하는 수도승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지팡이로 앞을 더듬으며 걸어왔다.
가까이서 본 그 남자의 얼굴엔 상처가 나 있었고 온통 얼룩덜룩한 멍투성이였다. 찢어진
입술 위에 검은색 딱지가 엉겨 붙어 있어 언청이처럼 보였다. 금발이 듬성듬성 한 무더기씩
뽑혀 있었고 여기저기 길다란 딱지가 보였다. 바지가 너무 큰지 허리 부근에 겹겹이 주름이
접혀 있었고, 허리춤이 길다란 끈으로 묶여 있었다. 남자는 땅만 보고 걷다 고개를 들었다.
여기저기 부상을 입어 좀 다르게 보이긴 했지만, 지난번에 만난 그 목사가 분명했다. 인만은
통나무 뒤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안녕하시오."
목사는 걸음을 멈추고 인만을 말똥말똥 쳐다봤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제가 찾던 사람을 만나게 해주시다니."
인만은 칼을 꺼내 칼끝이 땅바닥을 향하도록 잡았다.
"복수를 하려고 찾아오셨나 본데, 총알을 낭비할 필요 없이 이 자리에서 배를 갈라 드리
지."
"아, 아니에요.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려고 왔어요. 끔찍한 죄에서 저를 구해 주셨으니까."
"겨우 그 얘기하자고 여가까지 쫓아왔다는 건가?"
"아뇨. 여행중입니다. 선생처럼 순례자가 됐어요. 아, 물론 선생이 꼭 순례자란 말은 아닙
니다. 이리저리 떠돌아다닌다고 해서 다 순례자는 아니니까. 그런데 어디로 가십니까?"
인만은 목사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물었다.
"얼굴은 어쩌다 그렇게 된 거요?"
"선생이 써놓은 쪽지를 발견한 교회 남자들이 존스톤 집사의 주도하에 제 옷을 모두 벗기
고는 흠씬 두들겨 패더군요. 제 옷을 모두 강물에 던지고 칼로 머리카락을 잘랐지요. 그렇게
처참한 지경을 당하자 삼손과 데릴라의 이야기가 떠오르더군요. 제 물건을 챙기고 말고 할
시간도 없었어요. 사람들이 등뒤로 제 팔을 붙잡고 있는 데, 저와 결혼하기로 했던 여자가
나와 제 얼굴에 침을 뱉더니, 저같은 사람과 결혼하지 않도록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고 하더라고요. 전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답니다. 사람들은 당장 마을을 떠나지 않으면 벌
거벗긴 채 교회 뾰족탑에 매달겠다고 하더군요. 저로선 어쨌거나 상관없었어요. 어차피 그
마을에 계속 머물러 있을 생각이 없었으니까요."
"당연히 그랬겠지. 그럼 그 여자는 어떻게 됐소?"
"아, 로라 포스터 말씀인가요? 사람들이 진실을 말해 보라고 다그쳤지만, 그 여자는 아직
도 상황을 제대로 모르고 있었어요. 아이를 가진 지 얼마나 지났는지 밝혀지면... 잠시 동안
교회에서 지낼 거예요. 그러니까 한 1년 정도 말이죠. 그리고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다
한 2, 3년 후에 홀아비를 만나 살림을 차리겠죠, 뭐. 예쁜 여자와 결혼할 수만 있다면 사생
아까지 기꺼이 떠맡겠다는 늙은 홀아비 말입니다. 나 같은 놈과 사는 것보단 훨씬 나을 겁
니다. 저는 이제 그 여자도 약혼녀도 없는 신세입죠."
"당신을 살려 둔 게 잘한 건지 아직도 확신이 서질 않는군."
인만은 칼을 칼집에 넣고는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비시 목사가 옆으로 다가왔다.
"서쪽으로 가시는 모양인데, 괜찮으시다면 저도 함께 가고 싶은데요."
"솔직히 말하면, 괜찮지 않소."
인만은 이런 멍청이를 길동무로 삼느니 혼자 걷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손으로 비시를 때
리려는 시늉을 했지만, 그는 달아나지도, 반격을 취하거나 심지어는 지팡이를 들어 막으려
하지도 않았다. 그저 겁먹은 개처럼 어깨를 움츠리며 맞을 준비를 할 따름이었다. 인만은 손
을 내리고 말았다. 이 남자를 반드시 떨궈 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았기 때문에 걸어가
면서 상황이 어떻게 될지 살펴보자고 마음먹었다.
비시는 인만 옆에서 쉴새없이 떠들어댔다. 든든한 보호자를 얻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
다. 예전의 생활에서 품고 있던 마음의 짐들을 인만에게 털어놓음으로써 홀가분해지겠다는
심사인 모양이었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저지른 수없이 많은 잘못들을 인만에게 들려주려고
했다. 가엾은 인간이었다. 자신도 그걸 아는 모양이었다.
"전 목사 이외의 일에는 정말 소질이 없었죠. 하지만 그 방면에서는 정말 괜찮았어요. 선
생 손가락과 발가락 숫자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영혼들을 구제했지요. 하지만 이제는 손
털고 텍사스로 가서 다시 시작할랍니다."
"그런 사람들 참 많지."
"성서의 사사기에 보면, 이스라엘에 법이 없어서 모든 사람들이 자기가 보기에 옳은 일을
하던 때가 있었다는 구절이 있죠. 텍사스도 그렇다고 들었어요. 자유의 땅이라고."
"그렇다고들 합디다. 거기서 뭘 할 생각이오? 농사일?"
"아, 전 땅 파는 일에는 소질이 없습니다. 가서 무슨 일을 할지는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
어요. 뚜렷한 천직이 없으니까 일단 가서 얼마간 땅을 얻어 소를 기를 거예요. 하루 종일 밭
에 흙을 묻힐 필요도 없이 소를 타고 다녀도 될 정도로 잘될 거라고 봐요."
"소는 무슨 돈으로 살 생각이오?"
"이걸루요."
비시는 외투 밑에서 마을을 빠져 나오는 길에 훔친 길다란 콜트제 군용 리볼버를 꺼냈다.
"유명한 총잡이가 되도록 훈련을 쌓아야겠죠."
"그건 어디서 난 거요?"
"존스톤 부인이 일의 내막을 알고 저를 불쌍하게 여겼어요. 덤불 속에 몰래 숨어 있던 저
를 불러서 창가로 오게 했죠. 그 부인이 내게 줄 옷을 가지러 침실로 간 사이 지금 입고 있
는 이 옷이 그 옷입니다만 부엌 식탁 위에 이 권총이 놓여 있는 게 보이더라고요. 창문 너
머로 손을 뻗어 훔쳐서 풀 속에 던져 두었다가 옷을 입고 난 후 다시 주워 왔죠."
그는 창턱에서 식히고 있던 파이를 훔친 소년처럼 아주 좋아하면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때 총잡이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게 있으면 대게 괴상한 발상이 떠오
르죠."
그는 반짝이는 총신 속에서 밝은 미래라도 본 것처럼 콜트를 들고는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날 오후엔 먹을 것을 구하는 데 행운이 따랐다. 얼마쯤 걸었을 때 참나무숲을 등지고
있는 폐가가 나타났던 것이다. 문은 열려 있었고 창문도 깨져 있었다. 마당에는 현삼과 우엉
과 인디언 담배가 가득했다. 집 주변은 온통 꿀벌집이었다. 검은 고무나무 등걸에서 나오는
고무에 구멍을 뚫어서 만든 벌집도 있었다. 짚으로 만든 꿀벌집은 퇴색한 초가집처럼 회색
이었고, 녹아서 꼭대기 부근에 구멍이 뚫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꿀벌집은 방치되어 있었지만
벌들은 햇볕 아래서 분주히 왔다갔다 하며 일하고 있었다.
"고무로 만든 벌집을 하나 따올 수만 있다면 아주 맛있는 음식이 될 텐데"하고 비시가 말
했다.
"그럼 가서 하나 가져와 봐."
"벌에 쏘여 퉁퉁 부을 텐데요. 저 벌떼한테 물어 뜯기긴 싫다구요."
"그래도 내가 가서 따오면 먹어주기는 하시겠다, 그 말인가?"
"꿀을 먹을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고... 걸어갈 기운도 날거다, 이 말이죠."
인만의 생각도 같았다. 그는 접어 올렸던 셔츠 소매를 내리고, 바짓단을 부츠 안으로 쑤셔
넣고, 앞이 보일 만큼만 틈을 만들어 놓고 외투로 머리를 감쌌다. 그러고는 벌통 쪽으로 다
가가 넘쳐흐를 때까지 한 움큼씩 꿀과 벌집을 냄비에 옮겨 담았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움직
여서 거의 쏘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현관에 걸처앉아 냄비를 사이에 놓고 숟가락으로 꿀을 떠먹었다. 온갖 꽃에서
모은 꿀이라 커피색처럼 검었고, 벌의 날개투성인데다, 퍽 오랫동안 묵은 꿀이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야생 벌들을 밤나무에서 양봉해 얻어 낸 깨끗한 꿀에 비할 바는 못되었으나, 인만과 비시
는 허겁지겁 맛있게 먹었다. 꿀이 거의 바닥나자 인만은 벌집을 한 덩어리 들고 한 입 뜯었
다.
"벌집도 먹나요?"
비시가 뜻밖이라는 말투로 물었다.
"왜, 내가 못 먹을 거라도 먹는다는 건가?"
인만은 밀랍이 묻은 벌집을 씹으며 말했다.
"아니, 그러다 입이 붙어 버리기라도 하면 어쩌려구... ."
"몸에 좋아, 강장제거든,"
인만은 이렇게 말하며 함 입 더 뜯어 한 조각을 비시에게 건네 줬다. 그는 마지못한 듯이
받아 먹었다.
"간에 기별도 안 가는군."
냄비 안이 말끔히 비워지자 비시가 말했다.
"총으로 먹을 걸 잡지 않는 한 배가 고플 수밖에 없어, 그리고 우린 계속 걸어가야지, 사
냥하러 온 게 아니잖아. 이런 식으로 여행하려면 허기가 져도 꾹꾹 참아야해."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경지, 식욕을 놓아버리는 경지에 다다르는 것이야말로 만족을 얻
을 수 있는 길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요, 하지만 재가 보기에는 말도 안되는 소리예요.
훔친 음식으로 굶주린 배를 채워도 하나님이 눈감아 주실 거라고 믿는 게 만족감 아닌가요?
심판의 날이 요면 달이 핏빛으로 변할 거라는 말을 믿어서 득 본 사람을 여지껏 본 적이 없
어요. 나도 그 말을 별로 믿고 싶지 않구요."
인만은 자리에서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한 시간쯤 걷다가, 길이 울퉁울퉁한 언덕 꼭대기
쪽으로 뻗어 올라가다 구불구불 흐르는 조그만 개울 옆쪽을 따라갔다. 개울은 땅이 계단 같
은 모양이 거나 꺾어지는 부분에서는 조용한 곡선이나 자은 웅덩이를 이루고 하얀 잔물결을
만들면서 언덕 아래쪽으로 흘러 내려갔다. 언뜻 보면 큰 계곡으로 착각할 수도 있었다. 인만
은 축축한 길에서도 산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썩은 이파리, 축축한 땅 냄새. 인만은 비시에
게 이런 느낌을 말했다.
비시는 고개를 돌리며 킁킁댔다.
"사람 엉덩이에서 나는 냄새랑 비슷한데요."
인만은 이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지친데다 생각이 제멋대로 떠다녔다. 그저 눈앞
으로 펼쳐진 밝은 실개천만 쳐다볼 뿐이었다. 개울은 돼지 내장처럼 구불거리며 낮은 곳을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인만은 책에서 중력은 직선으로 작용할 때 가장 큰 힘을 갖는다고 배운 적이 있었다. 하
지만 이렇게 꼬불꼬불 언덕 아래로 흘러 가는 개울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런 말은 공허한
발상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개울을 보며, 모든 사물이 자신들의 의사와는 상관없
이 움직이면서도 어떤 일관된 모습을 이뤄 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땅이 평평해지자 개울은 흐름이 느려지면서 진흙 구덩이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변했고, 산
속을 흐르는 시내로 착각을 일으킬 만한 요소들이 모두 없어졌다. 비시는 걸음을 멈추며 말
했다.
"저쪽을 보세요."
깊기는 하지만 한 걸음에 넘을 수 있을 정도로 폭이 좁은 개울안에 메기 한 마리가 있었
다. 길이는 소의 봇줄을 매는 가름대보다 더 길고, 몸통이 물통만큼이나 굵은 놈이었다. 눈
이 작고 입가에 옅은 색 수염이 달려 있는 못생긴 놈으로, 물속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개울
바닥의 잡동사니를 훑어먹기 쉽게 아래턱이 뒤로 쑥빠져 있었고, 녹색 기가 감도는 검은색
등은 단단해 보였다. 깊은 진흙투성이 케이프피어 강에는 대단한 크기의 물고기들이 살고
있을 거라고 인만은 상상했었지만 몸집이 작은 물고기들뿐이었다. 그러나 물고기들은 아주
무거워 보였다. 불쌍하게도 어디서 방향을 잘못 잡았는지, 몸을 틀어 방향을 바꿀 수도 없을
만큼 좁은 틈에 갇혀 있었다.
"맛있겠는데요."
비시가 말했다.
"낚시 도가가 없잖아."
"막대와 줄, 그리고 기름진 밀빵 덩어리를 단 미끼만 있으면 될텐데."
"아무튼 하나도 없잖아."
평지에서 낚시를 한다는 것이 왠지 꺼림칙했던 인만은 이렇게 말하며 걸음을 옮겼다. apl
는 물 위로 비친 인만의 그림자에 놀라 개울 상류 쪽을 향해 몸부림쳤다.
비시는 인만의 뒤를 따라 나서긴 했지만, 계속 고개를 들리며 매우 쪽을 쳐다봤다. 인만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굳이 감추려고 하지도 않았다. 100야드쯤 움직일 때마
다 정말 큰놈이었는데, 하고 말을 했으니 말이다.
반 마일 정도 갔을 떼 비시가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잠깐만요, 그 메기를 꼭 잡아야겠어요."
그는 왔던 대로 터벅터벅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인만도 그 뒤를 따라갔다. 비시는 메기가
있던 근처까지 오자 숲속으로 들어가더니 빙 돌아서 훨씬 상류 쪽으로 나왔다. 그러고는 숲
속으로 들어가더니 빙 돌아서 훨씬 상류 쪽으로 나왔다. 그러고는 숲속에서 나뭇가지를 주
워 개울가에 쌓아 놓고는 지근지근 밟더니 결국 나뭇가지로 온통 삐죽삐죽한 어살을 완성했
다.
"그걸로 뭘 하게?"
인만이 물었다.
"거기 서서 보기나 하세요."
비시는 숲속으로 다시 들어가더니 이번에는 메기가 있을 것 같은 하류 쪽으로 나왔다. 그
러더니 개울 안으로 뛰어들어가 물살을 발로 차며 상류 쪽으로 걸어갔다. 메기가 보이지는
않았지만 상류쪽으로 몰고 있는 것이었다.
마침내 비시가 얼마쯤 걸어갔을 때 메기가 나뭇가지에 얼굴을 들이대고는 통로를 찾는 모
습이 보였다. 비시는 개울 옆으로 모자를 벗어던지고는 허리를 굽혀 상반신을 물속에 담그
며 물고기를 향해 덤벼들었다. 물고기와 사람이 물을 사방으로 튀기며 함께 솟아올랐다. 드
디어 비시가 메기의 하얀 배 위에 양손을 깍지껴서 곡 끌어안은 것이었다.
메기는 온 힘을 다해 몸부림쳤다. 목 없는 머리로 비시의 머리를 쳤고 수염으로 얼굴을
때렸다. 그러다 팽팽한 활처럼 몸을 잔뜩 구부리더니 다시 꼿꼿하게 펴면서 물속으로 첨벙
들어갔다.
비시는 숨을 씩씩 몰아쉬며 서 있었다. 메기 수염에 맞은 얼굴에는 길다랗게 벌건 채찍
자국이 나 있었고, 양팔은 등지느러미에 베인 상처투성이였지만, 다시 한 번 물속으로 들어
가더니 메기를 끌어안고 나와 싸움을 벌였다. 이렇게 몇 번이나 메기와 싸움을 벌였지만 번
번이 실패로 돌아갔고, 사람이나 물고기나 양쪽 다 기진맥진해서 움직일 수 없을 정도였다.
비시는 비틀거리며 개울에서 나와 털썩 주저앉았다.
"물속에 들어가 직접 싸워 보실 생각 없으세요?"
비시가 물었다. 인만은 허리춤에서 르매트 권총을 꺼내 메기의 머리를 명중시켰다. 메기는
잠시 동안 퍼덕거리다 축 늘어졌다.
"와!"
비시가 소리를 질렀다.
두 사람은 그날 밤 그곳에서 잤다. 비시는 요리뿐만 아니라 모닥불을 만들고 지피는 일까
지 인만에게 맡겼다. 수다떨고 먹는 것밖에는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메기의 배를 갈라 보았
더니, 뱃속에서 끝이 둥근 망치 머리와 통째로 삼킨 지빠귀 한 마리가 나왔다.
인만은 메기와 지빠귀를 납작한 바위 위에 올려놓은 후에 생선의 등과 옆구리쪽 껍질을
벗기고 몇 조각으로 썰었다. 비시가 들고 있던 배낭 속에 종이에 싼 돼지 기름이 있었는데,
그것을 프라이팬에 녹이고 생선 덩어리에 옥수수 가루를 입혀서 튀겼다. 식사하는 동안 비
시는 바위를 쳐다보며 메기의 식성에 대해 추측하기 시작했다.
"오래 전에 망치를 통째로 삼켰는데, 위액으로 자루 부분만 녹아 없어진 거겠지요?"
비시가 물었다
"그럴 수도 있겠지. 그보다 더 믿기지 않는 소리도 많이 들었으니까."
하지만 지빠귀는 더 알 수 없는 수수께끼였다. 힘좋은 물고기, 가령 커다란 송어 같은 것
이 물에서 튀어 올라 개울가 나무의 낮은 가지에 앉아 있던 지빠귀를 먹었지만, 그 즉시 숨
이 끊겨 바닥에 가라앉은 것을 메기가 집어 삼켰는데, 겉에서부터 소화가 되어 지빠귀만 남
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두 사람은 요리한 음식과 돼지 기름이 모두 없어질 때까지 저녁을 먹었다. 살덩어리를 꼬
챙이에 꿰어 모닥불 위에 구워 먹기도 했다. 쉴새없이 입을 놀리던 비시는 자기 이야기만
하는 게 싫증이 났는지 인만더러 이야기를 해보라고 했다. 고향이 어딘지, 어디로 가는 중인
지, 어디서 오는 길인지... . 하지만 비시는 대답을 한 마디도 들을 수 없었다. 인만이 다리를
꼬고 앉은 채 모닥불만 쳐다보며 전혀 대꾸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로마 병사만큼이나 삶이 힘드셨나 보군요."
마침내 비시는 이렇게 말하며 상처받은 영혼을 예수님이 달래 주었다는 한 로마 형사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예수님과 만났을 당시 그는 벌거벗은 몸으로 황야 속을 숨어 다니며 비
석을 이빨로 물어 뜯고 돌로 몸에 상처를 내며 자학에 빠져 있었다. 불행이 계속되면서 성
격이 거칠어졌고 머릿속은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사람은 밤낮으로 산과 무덤을 헤매고 다니며 개처럼 울부짖었죠. 이 소리를 들은 예
수님은 그에게로 다가가 순식간에 그의 마음을 치유해 주었답니다. 그 병사는 새 사람이 되
어 집으로 돌아갔죠."
인만이 잠자코 듣기만 하자 비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전쟁터에서 도망쳐 나왔다는 거 알아요. 그런 면에서 우리 두 사람은 똑같이 도망자라고
할 수 있죠."
"뭐가 똑같다는 건지 모르겠군."
"전 군대 생활에 부적합한 사람이에요."
"멍청이라도 그쯤은 알 수 있지."
"그게 아니라 의사 소견이 그랬다는 겁니다. 하긴 내가 많은 경험을 놓친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긴 해요."
"많이 놓쳤고 말고."
인만이 말했다.
"쳇, 저도 그 정도는 압니다."
"당신이 놓친 기막힌 장면을 하나 알려줄까? 그 상황에서 바보 같은 목사 하나가 얼마나
쓸모 있었을지 한번 생각해 보라구."
인만은 피터스버그에서 있었던 폭발 이야기를 꺼냈다. 북군의 공병대가 사우스 캐롤라이
나 연대를 통채로 날려 버렸을 때 인만이 속한 연대는 그 바로 옆에 있었다. 자신의 오른쪽
으로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을 때 인만은 참호 안에서 커피 같은 걸 한 주전자 만들기 위해
호밀을 바짝 말리고 있던 중이었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먼지 기둥이 치솟고 병사들의 몸
이 하늘로 솟구쳤다가 사방으로 떨어졌다. 아직도 부츠가 붙어 있는 다리 한쪽이 인만의 바
로 오른쪽에 떨어졌다. 참호 저쪽에 있던 어떤 남자가 뛰어오며 외쳤다. "제기랄, 폭탄이야,
폭탄!"
폭탄이 터진 구덩이의 양옆에 잇던 병사들은 적들이 공격해 오리라는 생각에 뒷걸음질쳤
다. 그러나 북군은 자신들의 새로운 무기의 위력에 어리둥절해졌는지 폭탄이 터진 자리에
몰려들어 그 파괴력에 감탄하며 떠들어대고 있었다.
하스케이 잽싸게 박격포를 폭발 현장에 들이댄 후 정량보다 훨씬 적은 화약을 장정했다.
이마에 도끼가 박힐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돼지 새끼처럼 떼지어 모여 있는 북군이 있는 곳
까지 50피트만 포탄을 날리면 됐기 때문이다.
박격포가 터지자 북군은 대부분 몸이 갈갈이 찢겨 나갔고, 포견이 멈춘 후에 인만의 연대
는 신형 포탄의 폭발로 생긴 거대한 구덩이 속으로 들어가 여지껏 겪었던 것과는 생판 다른
전투를 치뤘다. 남자 수백 명을 동굴 안에 빽빽하게 집어넣고 서로 죽이라는 식의 가장 원
시적인 전쟁이었다. 머스킷 총을 쏘거나 장전할 만한 공간도 없었기 때문에 병사들은 총을
몽둥이처럼 휘둘러댔다. 어떤 북치는 소년은 탄약통으로 남자의 머리를 내리치기도 했다.
북군은 제대로 방어하지도 못했다. 발에 밟히는 것이 시신이요 신체 일부분이었고, 폭격으
로 많은 병사들의 몸이 산산조각났기 때문에 땅바닥이 미끈거렸고, 터져 나온 내장들이 끔
찍한 악취를 풍겼다. 사방이 흙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머리 위로 동그란 하늘밖에
없었는데, 그 구멍 안이 세상의 전부인 것 같았고, 그 안에서 할 일이라고는 싸우는 것밖에
없는 것 같았다. 그들은 달아나지 못한 적군을 모조리 죽였다.
"당신은 그런 장면들을 놓친 거야. 왜, 아쉽나?"
인만이 말했다.
인만은 잠자리에 누워 잠을 청했다. 아침이 밝자 다시 생선을 먹었다. 남아 있는 덩어리
중 일부를 구워서 점심용으로 가지고 출발했지만 먹은 것보다 남긴 게 더 많았다. 까마귀
세 마리가 히커리나무 위에 앉아 있었다.
다음날 오후 늦게부터 구름이 몰려들고 바람이 불더니 비가 세차게 퍼붓기 시작했다. 도
무지 멈출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비를 피할 곳을 찾으면서 계속 빗속을 걸어갔는
데, 비시는 계속 뒤통수를 문지르며 조금 전에 인만이 휘두른 마차 바퀴통에 맞고 쓰러지는
바람에 머리가 쑤신다며 투덜댔다.
두 사람은 그날 아침 음식을 사러 인적이 뜸해 보이는 시골 가게로 들어갔는데, 문을 들
어서자마자 비시가 총을 꺼내며 주인에게 돈을 모두 내놓으라고 했다. 다급해진 인만은 아
무거나 손에 잡히는 무거운 물건-문 옆 선반 위에 놓여 있던 마차 바퀴통이었다-을 들어
비시를 때려눕혔다. 총이 마룻바닥에 떨어지면서 음식 자루에 부딪혔다. 가게 주인은 비시와
인만을 번갈아 쳐다보며 눈썹을 쫑긋 세우고는 말했다.
"지금 뭣들 하는 거요?"
인만은 재빠르게 사과를 하고 권총을 집어들고는 비시의 외투깃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거의 끌다시피 밖으로 데리고 나와 현관에 앉힌 후에 물건을 사러 다시 상점 안으로 들어갔
다. 하지만 그 사이 엽총을 꺼내든 가게 주인은 계산대 뒤에 쭈그리고 앉아서 입구 쪽을 겨
누고 있었다.
"썩 꺼져. 돈이라고는 땡전 한 푼도 없지만 너희같은 놈들은 다 죽여 버릴 테니까."하고
주인은 말했다.
빗속을 뚫고 걸어가는 동안 비시는 투덜거리면서 소나무 아래서 비를 좀 피했으면 좋겠다
고 말했다. 하지만 인만은 방수 깔개로 몸을 감싼 채 계속 걸으면서 헛간 비슷한 곳을 찾아
보았다. 그런 곳은 보이지 않았지만 잠시 후 나이가 많은 뚱뚱한 여자 노예와 마주쳤다. 커
다란 개오동나무 이파리를 얼기설기 엮어 만든 커다란 모자가 우산처럼 비를 막아 주고 있
었다. 두 사람의 처지를 알아본 그 여자는 조금만 더 가면 여관이 하나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 여관 주인은 전쟁엔 아무런 관심도 없으며 이것저것 캐묻지도 않는다고 덧붙였
다.
1마일 정도 더 걸어가자 어두침침한 여인숙 겸 마구간 비슷한 곳이 나타났다. 짐작컨대
여행자들이 마차 말을 바꾸고 쉬어 가는 역사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나즈막한 헛간 지붕이
덮여 있고, 곧 쓰러질 것 같은 L자형 건물이 본채였다. 적갈색 페인트칠이 되어 있었고, 지
붕 위로 커다란 참나무 두 그루가 보였다. 전쟁이 터지기 전, 철도 역 부근의 가축 시장이
번창하던 시절, 가축 상인들인 이곳에서 며칠씩 머무르다 가곤 했을 터였다. 하지만 그런 시
절은 이미 과거가 되어 버렸고, 보기 흉하게 뻗어 있는 축사는 거의 텅 빈 채 돼지풀로 뒤
덮여 있었다.
인만과 비시는 문고리를 잡아당겨 보았다. 안에서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잠겨 있었다. 문
을 두드리자 널빤지 틈새로 눈동자가 보였고, 잠시 후 문이 열렸다. 창문도 없이 빛이라고는
난롯불뿐이었고, 젖은 옷과 지저분한 머리카락에서 나는 악취로 가득 찬 축축한 동굴 같은
곳이었다. 두 사람은 불을 밝히고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하지만 비시는 마치 이 여인숙을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는 사람들이라도 많다는 듯
이 만면에 웃음을 가득 띄우며 앞장서서 걸어 갔다. 그러다 낮은 의자에 앉아 있던 어느 노
인 바에 걸려 비틀거리면서 노인을 넘어지게 했다. 바닥에 쓰러진 노인이 욕지거리를 내뱉
자 여기저기 테이블에 앉아 있던 다른 사람들도 중얼중얼 맞장구쳤다. 인만은 비시의 어깨
를 잡아 뒤로 밀쳐 내고는 넘어졌던 의자를 바로 세우고 노인을 부축해 일으켰다.
두 사람은 방 안쪽으로 걸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눈이 어둠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얼마 전 굴뚝에서 불이 나 타버린 듯 지붕 한쪽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게 보였다. 틈을 아직
메꾸지 않아서 벽난로 가까이는 바깥과 마찬가지로 굵은 빗방울이 떨어져서, 몸이 젖은 손
님들이 불가에 앉아 있어도 녹이거나 옷을 말릴 수 없었다. 한쪽 벽을 거의 채우고 잇는 큼
지막한 벽난로를 보면 지난해에 이곳을 데웠을 엄청난 불길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
금은 안장 방석으로 가릴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불밖에 없었다.
잠시 후 덩치가 큰 한 흑인 매춘부가 뒷방에서 나왔다. 한손에는 술병을, 다른 손에는 두
꺼운 손가락 다섯 개로 술잔 다섯 개를 들고 있었다. 오른쪽 귀 위쪽, 머리카락이 엉켜 있는
부근에는 손잡이가 빨간 일자 면도칼이 꽂혀 있었다. 뚱뚱한 허리 위로 가죽 앞치마를 두르
고 있었고, 옅은 갈색 드레스는 가슴선이 깊게 패여 있었을 뿐 아니라 어마어마한 가슴을
자랑하기라도 하듯 단추가 몇 개 풀려 있었다.
그녀가 작은 불 앞으로 지나가자, 방 안에 있던 남자들이 모두 얇은 드레스 밑으로 움직
이는 근사한 허벅지의 윤곽을 보려고 고개를 돌렸다. 드레스가 짧아 단단한 근육의 종아리
가 훤히 보였다. 신발을 신지 않아서 발이 온통 진흙투성이였다. 난로 뚜껑만큼이나 얼굴이
검었다. 그렇게 몸집이 큰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가 보기엔 예쁜 여자였다. 여자는 방 안을
돌아다니며 술을 따라 주다가 인만이 앉아 있는 테이블까지 왔다. 잔 두 개를 내려놓고 가
득 채우더니, 의자를 잡아당겨 다리를 벌리고 치마를 끌어올리며 앉았다. 허벅지를 안쪽 무
릎 위로 난 희미한 칼자국이 보였다.
"신사 양반들."
그녀는 어느쪽이 나을지 두 사람을 쳐다보며 씩 웃었다. 곧고 하얀 이빨과 파란색 잇몸이
보였다. 비시는 잔을 단숨에 비우더니 가슴 사이에 패인 홈을 계속 들여다보며 잔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 여자는 잔을 다시 채워 주며 물었다.
"자기, 이름이 뭐야?"
"비시, 솔로몬 비시."
그는 가슴 사이의 골짜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두 번째 잔도 비웠다. 발정이라도 난 것
처럼 몸을 심하게 떨고 있었다.
"자, 솔로몬 비시. 자기 자신에 대해 할 말이 있나요?"
여자가 물었다.
"별로 없는데."
"좋아요. 할 말이 있는 사람같지도 않았어요. 하지만 상관없어요. 이 빅 틸디가 저 뒤에
가서 재미 좀 보게 해주면 뭘 주겠어요?"
"많은 걸 주지."
비시는 정말 진지한 태도였다.
"하지만 얼마나 줄 건지가 문제죠."
"아, 그건 걱정하지 마."
틸디가 인만을 쳐다보며 말했다.
"당신도 같이 갈래요?"
"너희들이나 가."
인만이 말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방 한쪽 구석에 앉아 있던
지저분한 가죽 재킷 차림의 남자가 박차를 저벅거리며 다가오더니 틸디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관자 놀이 부근에 붉은 혹이 있었고 어지간히 취한 듯했다.
인만은 본능적으로 먼저 그 남자의 무기를 살폈다. 한쪽 허리춤에는 권총이, 다른 쪽 허리
춤에는 칼집에 넣은 단도가 있었고, 가죽 곤봉 비슷한 수제품이 허리띠 버클에 가죽끈으로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그 남자는 틸디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리 온, 덩치 큰 아가씨. 저쪽에 너랑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남자들이 있어."
그는 틸디의 어깨를 세게 잡아당겼다.
"난 여기 볼 일이 있는데."
그녀가 말했다.
그 남자는 비시를 보고 씩 웃으며 말했다.
"넌 가만히 있어."
이 말에 비시가 벌떡 일어나더니 외투 속에서 총을 꺼내 남자의 복부에 갖다대려고 했다.
하지만 동작이 너무 느리고 뻔했기 때문에 권총에 손이 닿았을 때는 이미 상대방이 먼저 권
총을 뽑은 후였다. 그 남자는 팔을 쭉 뻗어 비시의 코에서 손가락 하나 거리에 총구를 들이
댔다.
비시는 머뭇머뭇 손을 흔들었다. 총신이 아래쪽으로 축 처져 있어 총을 쏴도 남자의 발이
나 맞출 수 있을 정도였다.
"그 물건 치우시지."
인만이 말했다. 두 사람이 인만을 쳐다보는 사이에 틸디가 손을 뻗어 비시의 권총을 손에
서 낚아챘다. 그 남자는 비시를 쳐다보며 입술을 핥았다.
"이 더러운 개 같은 것." 그는 틸디에게 욕을 내뱉더니 비시를 보며 말했다.
"저년 덕에 목숨 구한 줄 알아. 괜히 총도 없는 사람을 쏴죽였다간 결국 나만 옥살이하게
될 테니까."
"내 권총 돌려 줘." 비시는 어느 누구에게라고 할 것 없이 말했다.
"이제 입 좀 닥치지 그래."
인만인 말했다. 그는 비시에게 이 말을 하면서도 혹 달린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총 안 쏜다니까." 그 남자가 말했다.
인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비시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있었고 이 사태
를 어떻게 마무리지을지 모르는 기색이었다.
"대신 이걸로 좀 맞아 봐." 이 말과 함께 그 남자는 권총으로 비시의 얼굴을 가볍게 내리
쳤다.
"이봐." 인만이 말했다.
그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이제 르매트 권총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고 인만이 그 위에
손을 얹어 놓고 있었다.
인만은 나머지 한쪽 손 집게손가락으로 남자에게 옆으로 비켜서라고 손짓했다. 그 남자는
오랫동안 서서 인만의 권총을 쳐다봤다. 그가 쳐다볼수록 인만은 점점 더 차분해졌다. 마침
내 그 남자는 총집에 권총을 넣더니 뭐라고 중얼거리며 방을 가로질러 한쪽구석으로 걸어갔
다. 그러더니 자신의 패거리를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그거 이리 주지." 인만이 틸디에게 말했다. 그녀가 비시의 권총을 건네주자 인만은 그 총
을 허리춤에 꽂았다.
"당신 때문에 다 죽을 뻔했잖아." 인만이 비시에게 말했다.
"글쎄요. 그래도 2대 1이었는데."
"2대 1이라니. 내가 뒤를 봐줄 거라고 기대하지 마."
"글쎄요, 방금 전에는 그랬잖아요."
"어쨌든 나한테 기댈 생각은 하지 말란 말이야. 다음번에는 가만히 앉아 있을 테니까."
비시는 씩 웃으며 "안 그럴 것 같은데요."라고 말한 후에 틸디의 허리를 팔로 감싸 안고
나갔다. 인만은 뒤에서 공격당하지 않도록 의자를 벽에다 바짝 붙였다. 그러고는 바텐더처럼
보이는 사람에게 빈잔을 들어 보였다.
"벽난로가 참 크네요." 그가 술병을 들고 다가오자 인만이 말했다.
"여름에는 저길 하얗게 칠하고 안에다 침대를 만들죠. 세상에서 제일 시원한 잠자리에요."
"그렇겠군요."
"저녁 드실 건가요?"
"네, 며칠 동안 숲속에서 식사를 했거든요."
"두 시간 안으로 준비가 될 겁니다."하고 남자가 말했다.
날이 저물자 여행객들이 몇 명 더 찾아왔다. 짐마차 가득 농작물을 싣고 근처 시장에 팔
러 나온 노인 두 명. 프라이팬, 리본 뭉치, 양철 컵, 아편이나 기타 약초를 알코올에 담은 갈
색 병 등을 손수레에 들고 온 백발의 행상인 한 명, 나그네 몇 명, 모두들 길다란 테이블에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술을 마셨다. 향수가 짙게 배인 목소리로 가축을 몰고 다니던
옛날을 회상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 예전에는 수많은 소떼를 몰고 이곳을 지나갔었는데." 또 다른 남자는 "거위와 오리떼
를 몰고 이곳을 지나간 적이 한 번 있었는데 말야, 물갈퀴가 닳지 않도록 거위와 오리의 다
리를 뜨거운 카르에 담갔다가 모래에 담가야 했었지."라고 말했다. 모두들 제각기 사연이 있
었다.
하지만 인만은 오후 내내 비에 젖지 않은 방 한쪽 구석 의자에 앉은 채 버번이라고는 하
지만 알코올 말고는 버번의 특징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갈색 술을 홀짝홀짝 마셨다. 그러면
서 방 한쪽 끝에서 제 구실도 못하면서 타고 있는 장작불을 초조하게 바라봤다. 다른 사람
들은 인만이 언제든지 총을 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인만은 헛간에서 잠을 자는 값으로 5달러를, 저녁 값으로 다시 5달러를 지불했다. 저녁은
토끼와 닭고기로 끓인 거무스름한 스튜 반 접시와 옥수수빵 한 조각이었다. 화폐 가치가 아
무리 떨어졌다고는 해도 너무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을 먹고 난 후 황혼의 마지막 빛이 남아 있을 무렵, 인만은 여관 뒤쪽의 축사로 갔다.
그러고는 걸쇠가 달려 있는 축사의 문에 기댄 채로 진흙투성이 마당과 길 위로 세차게 퍼붓
고 있는 빗방울을 쳐다봤다. 시원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서까래에는 램프가 두 개 걸려 있
었다.
비 때문에 불빛이 흐려진 램프는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 내고 있었다. 이런저런 사물의 밝
은 부분과 모서리 부분이 램프 불빛 때문에 더욱 두드러지게 보였다. 지붕널 위로 계속 떨
어지는 빗방울을 보며, 인만은 프레드릭스버그에서 롱스트리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쓰러
지는 북군의 모습이 마치 처마 끝에서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 같다는... . 인만은 속으로 말했
다. '전혀 그렇지 않아. 닮은 데라곤 없어.'
역사의 목재는 오래되어 나뭇결이 튀어 나왔고, 축축한 날씨인데도 손바닥에 가루가 묻어
나왔다. 진흙탕길 너머에 있는 또 다른 마굿간 앞에는 흠뻑 젖은 말 두 마리가 고개를 숙인
채 비를 맞고 서 있었다.
우리 안에는 운이 좋은 편에 속하는 말들이 칸막이 안에 서 있었는데, 옆으로 사람이 지
나가면 덥석 무는 말들이 었다. 인만은 발을 도려 잠자리로 가다가 한 늙은 말 장수가 호두
만한 고깃조각을 황갈색 암말에게 먹이는 모습을 지켜봤다.
어두워져 가는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며 서 잇던 인만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서 갈 길을
계속 가기로 마음먹었다. 사다리를 타고 건초칸으로 올라갔더니 그와 한 방을 쓸 삶이 와
있었다. 행상인 이었다. 다른 여행객들과는 달리 머릿결이 허옇게 센 그 행상인은 침대를 얻
지 못한 모양이었다. 행상인은 손수레에 있던 여러 종류의 작은 가방과 상자를 건초칸까지
모두 옮겨 놓았다. 인만은 처마 밑에 잇는 건초 더미 위로 배낭을 던졌다. 그리고는 그 행상
이 여관에서 빌려 온 기름 램프의 노란 불빛이 닿지 않는 곳에 건초를 깔았다. 그 램프는
대들보에 박힌 길다란 못에 매달려 있었다.
인만은 행상인이 흔들리는 불빛 아래 앉아서 부츠와 양말을 벗는 것을 지켜보았다. 행상
인은 발뒤꿈치와 발가락 쪽에 물집이 나있었다. 그는 가죽 상자 안에서 바늘을 꺼냈다. 강철
로 된 그 날카로운 바늘은 램프 불빛이 비치자 황금 갈고리처럼 반짝였다. 그는 바늘로 발
을 찔러 물집을 터뜨리고 나서 손가락으로 고름을 짜냈다. 고름을 다 짜낸 후 부츠를 다시
신으면서 "자, 됐다."라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바지에 손을 닦고는 아주 조심스럽게 절름거
리며 왔다갔다 걸어 보았다.
"자, 됐다." 행상인이 다시 한 번 말했다.
"저만큼이나 열심히 걸으셨던 모양이군요." 인만이 말했다.
"그런 것 같소." 행상인은 외투 주머니에서 시계를 쳐다보다가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더
니 귀에 갖다댔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시간이 꽤 된 줄 알았는데 . 여섯 시밖에 안 됐
군,"
행상인은 못에 걸려 있던 램프를 바닥에 내려 놓고 인만이 있는 건초 더미 쪽으로 다가
왔다. 두 사람은 잠시 동안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머리 위를 덮고 잇는 널빤지 위로 빗
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자 든든한 지붕과 뽀송뽀송한 짚단이 얼마나 좋은 가를 새삼
느꼈다.
두 사람이 앉아 있는 자리를 제외한 넓은 건초 칸은 곧 어둠에 싸였다. 칸막이 사이에서
움직이는 말 소리와 콧김 소리가 아래쪽에서 드려 왔다. 사람들이 졸린 목소리로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소리도 들렸다.
행상인이 상자를 다시 뒤지더니 백합 모양의 병을 꺼내 마개를 열고는 한 모금 쭉 들이
켰다. 그리고 인만에게도 권했다.
"테네시에 있는 한 가게에서 산 거요." 그가 말했다. 인만은 한모금 마셨다. 가죽과 연기
의 향내, 뭔가 갈색의 느낌, 기리고 진한 농도의, 꽤 괜찮은 술이었다.
밖에서는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어둠 속으로 바람이 이고 지붕널을 흔들었다. 널빤
지가 삐걱거렸다. 틈새로 불어오는 바람에 불빛이 흔들렸다. 그날 밤 폭풍우는 오랫동안 계
속되었다. 두 사람은 폭풍우 속에서 짚단 위에 길게 누운 채 천둥과 번개가 요란한 가운데
술을 마시며, 떠도는 짐승들처럼 방랑 생활을 하게 된 이야기를 나눴다.
그의 이름은 오델이었고, 비록 머리는 파뿌리처럼 허옇게 세었지만 결코 나이가 많지는
않았다. 기껏해야 인만보다 떠돌았던 세월이 몇 년 더 많은 정도였다.
"사는 게 그리 쉽지는 않았죠. 온갖 풍상을 다 겪었습니다."
오델이 말했다.
"예전에는 내가 이런 꾀죄죄한 몰골이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말아요. 이래 봬도 꽤 넉넉
한 집안에서 태어났어요. 조지아 주 남부에 있는 목화와 인디고 농장을 물려받을 아들로 태
어났죠. 엄청 난 재산이었어요. 아버지가 늙으셨으니까 지금이라도 물려받을 수 있을지 몰라
요. 그 늙은이, 벌써 죽었을지도 모르겠군요. 모두 다 내 것이 됐을 거라고요. 면적을 세어
보기도 귀찮을 정도로 넓은 땅. 경계선 한쪽은 10마일이고 다른 쪽은 6마일이죠, 그리고 남
아 돌아갈 만큼 많은 검둥이들. 그게 다 내 것이 됐을 거라고요."
"그럼 왜 이런 곳에 와 있는 거죠?"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저녁 내내 계속되었다. 램프 기름이 다떨어지자 오델이라는 남자
는 어둠 속에서 어설프기 짝이 없던 사랑이 담긴 슬픈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오델은 행복한 소년이었다. 장남으로 태어난 농장을 물려받을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그러
나 스무 살이 되던 해에 루신다라는 흑인 노예와 잘못된 사랑에 빠진게 문제였다. 사람들은
다들 그런 여자를 사랑한다는 것부터가 이상하다고 여겼지만, 오델은 열병에 걸린 사람처럼
미친 듯이 사랑에 빠졌다. 당시 루신다는 스물 두 살이었고 혼혈아였다. 그녀의 피부색은 약
간 변색된 사슴 가죽 정도일 뿐 그다지 검지는 않았다. 마치 노란색 장미 같았다.
일이 더 복잡하게 꼬인 것은, 오델이 그런 사랑에 빠진 것이 그가 그 마을에서 큰 농장을
경영하는 또 다른 집안의 딸과 결혼한지 얼마 안 된 때였기 때문이다. 그는 장래가 유망한
청년이었기에 인근 지역뿐만 아니라 먼 마을에서까지 청혼이 줄을 이었었다. 그가 부인으로
선택했던 여자는 작고 연약하며 쉽게 피로를 타, 오후가 되면 거실에 있는 어두운 소파에
앉아 있기만 해야 하는 여자였다. 그래도 오델이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게 된 것은 그녀가
미인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혼식을 오리고 난 후, 겹겹으로 몸을 덮고 있던 드레스를
모두 벗기고 나자 나은 게 아무것도 없다시피 했다. 너무 가냘펐던 것이다. 오델은 방황할
수밖에 없었다.
오델은 신부, 부모님, 남동생, 여동생과 대저택에서 함께 살았다. 아버지가 아직 일에서 손
뗄 나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오델이 해야 할 일은 별로 없었다. 아버지는 젊었을 적에 프랑
스를 다녀온 이후로 쓴 쑥이 들어간 위스키에 맛을 들여, 인생의 최대 목표가 그런 위스키
를 음미하는 것이라고 스스럼없이 말할 정도였다. 그런 아버지였던지라 농장을 경영하는 데
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달리 신경 쓸 일이 없었던 오델은 스콧의 소설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시원한 계절엔
사냥을 했고 따뜻한 계절엔 낚시를 했다. 말의 품종을 개량시키는 일에 관심을 가져 보기도
했다. 하지만 점점 따분해졌다.
아버지가 가을에 곰 사냥을 나갔다가 도박판을 벌여 이긴 덕분에 루신다가 집안에 들어왔
다. 저녁 내내 벌인 카드 게임에서 이겨 수많은 돼지, 노예들, 안장 달린 말 한 마리, 새 잡
는 사냥개 몇 마리, 영국제 고급 엽총, 그리고 루신다의 주인이 되었다. 루신다는 전재산이
라곤 호박 크기 정도의 보따리 하나만 달랑 들고 나타났다.
그녀는 부엌일을 하게 되었고, 바로 그 부엌에서 오델은 그녀를 처음 만났다. 부엌에서 처
음 만난 순간부터 그녀의 까만 머리카락, 예쁘장한 손발과 발목, 가슴을 팽팽하고 덮고 있는
피부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그녀는 주로 맨발로 지냈는데, 오델은 루신다의 작고 예쁜 발을
내려다볼 때마다 아내가 죽어 버렸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그후로 몇 달 동안 오델은 난로가 있는 한쪽 구석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거나 루신다를
멍하니 쳐다보면서 하루를 보냈다. 집안 사람들 모두 상황을 눈치챘다. 하루는 아버지가 그
를 불러 루신다를 바깥채로 내보내야겠다고 말했다. 오델은 깜짝 놀랐다.
"전 루신다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바보를 키웠구나."
그 다음날 오델의 아버지는 루신다를 마을 변두리에 있는, 노예를 살 만한 돈이 없는 어
느 농가에 빌려 줬다. 이들은 오델의 아버지에게 루신다의 품삯을 지불하고 밭일, 소 젖짜는
일, 장장 나르는 일 등 온갖 일을 시켰다.
오델은 절망했다. 매일 침대에 누워 있거나 마을을 돌아다니며 술을 마시거나 도박을 하
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다 농부의 아내와 루신다가 일주일에 두 번 계란을 팔러 시내
로 나온다는 사실을 알았다.
오델은 그런 날 아침이면 아주 상쾌한 기분으로 일어나 사냥을 하러 가겠다고 말했다. 말
에 안장을 얹고 장전한 엽총을 들고 개 한두 마리 준비했다. 현관에서 말을 타고 천천히 걷
기 시작하면, 개들이 따라오면서 정말 사냥을 떠나는 것처럼 신나게 숲속을 뛰어다니며 킁
킁 냄새를 맡았다.
오델은 숲속을 지나 계란이 든 광주리를 옆구리에 끼고선 맨발로 걸어오는 루신다를 만날
때까지 계속 길을 따라갔다. 그러다가 루신다가 보이면 말에서 내려 함께 걸었다. 광주리도
대신 들어 주었다. 적당한 화제를 꺼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처음에는 숲속으로 데리고 갈 생각도 없었다. 루신다는 두 사람 모두를 위해 제발 그러지
말아 달라고 애원했다. 시내 끝에 도착하면 오델은 광주리를 돌려 주며 루신다의 손을 잡았
고 두 사람은 고개를 떨군 채 헤어지곤 했다.
하지만 결국 오델은 루신다를 숲속으로 데리고 가서 소나무 가지로 만든 침대 위에서 사
랑을 나누었다. 그후로 한 달에 며칠 밤씩 루신다의 오두막집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는 멀
리 말을 타고 숲속으로 가서 나무에 개를 묶어 두었다. 오두막집이 있는 소나무 숲속 개간
지로 오델이 들어서면 루신다는 얇은 잠옷 차림으로 뛰어나왔고, 오델은 루신다를 꼭 끌어
안고 집 안으로 들어가 날이 새도록 함께 누워 있곤 했다.
그는 주로 너구리 사냥을 한다는 핑계를 대며 집 밖으로 나오곤 했는데, 얼마 안 있어 인
근에 살고 있는 노예들 사이에서 오델이 방금 잡은 너구리를 후한 값에 사들인다는 소문이
퍼졌다. 재수가 좋은 날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방금 잡은 너구리를 한 마리 사서 밤새 사
냥한 증거로 삼았다. 그렇지 못한 날엔 사격 솜씨가 없다는 중, 개들이 서투르다는 둥, 사냥
감이 점점 안 보인다는 둥 변명을 늘어놓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 식으로 1년이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루신다가 임신을 했다고 말했다. 더 이상
사실을 감출 수 없게 된 오델은 다음 날 농장의 수입 장부를 살펴볼 때만 사용하는 서재로
아버지를 찾아갔다. 두 사람은 벽난로 옆에 앉았다. 오델은 아버지에게 루신다를 사겠다고
말했다. 원하는 대로 값을 드릴 것이며 흥정도 하지 않겠다고 했다. 아버지는 놀랍다는 듯이
눈을 깜빡였다.
"정확하게 짚고 넘어가자. 그 검둥이에게 밭일을 시키러 사겠다는 거냐, 아니면 그 짓을
하려고 사겠다는 거냐?"
오델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아버지의 왼쪽 뺨을 세게 한 대 때렸다. 아버지는 쓰러졌다가
일어나더니 다시 쓰러졌다. 귀에서 피가 흘러 나왔다. "사람 살려!" 아버지가 소리를 질렀다.
오델은 남동생과 노예 감독에게 얻어맞아 머리와 갈비뼈에 멍이 든 채 일 주일 동안 통조
림 만드는 창고에 갇혀 있었다. 이틀째 되던 날 아버지가 찾아와 널빤지 틈으로 말했다.
"그 계집아이를 미시시피로 팔아 넘겼다."
오델은 몇 번이고 문에 몸을 던졌다. 그날 밤 내내 너구리 사냥 개처럼 울부짖었고 그후
로도 며칠 동안 주기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진이 다 빠져 더 이상 소리를 지를 수 없었을 때 아버지가 문을 열었다. 오델은 환한 햇
볕에 눈이 부셔서 눈을 깜박거리면서 비틀비틀 걸어 나왔다.
"이제 정신 좀 차렸겠지."
아버지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말 채찍으로 잡초와 야생화를 때리며 밭 쪽으로 걸어갔다.
오델은 집 안으로 들어가 짐을 꾸렸다. 그리고 아버지 집무실에 있는 금고에서 눈에 보이
는 대로 현금을 모두 긁어 냈다. 금화와 지폐가 꽤 많았다. 어머니 방에 들어가 다이아몬드
와 루비 브로치, 에메랄드 반지, 진주 목걸이 몇 개를 훔쳤다. 그리고는 말 등에 안장을 얹
고 미시시피를 향해 떠났다.
전쟁이 터지기 전 몇 년 동안 오델은 목화가 재배되는 지방을 샅샅이 찾아다녔다. 그러는
동안 말이 세 마리나 죽었고 가지고 있던 보석도 모두 팔았다. 그래도 루신다를 찾지 못했
고 그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지금도 찾고 있는 중이었다. 그 때문에 돈이 필요하여 떠돌이 생활을 택한
것이었다. 말과 짐마차를 끌고 다니던 상인에서 손수레를 끄는 행상으로 전략했다. 이제 모
든 것이 바닥나기까지 얼마 남아 있지 않았고, 언젠가는 바퀴 없는 썰매나 들 것을 끌고 다
니거나 보따리를 지고 다니며 자질구레한 장신구를 파는 자신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했
다.
이야기를 계속하면서 술도 바닥이 났다. 오델은 배낭 안에서 에틸알코올이 주원료인 작은
약병 두 개를 꺼냈다. 잠시 인만과 함께 그 약을 홀짝거리다 오델이 입을 열었다.
"당시은 상상도 못할 끔찍한 광경들을 봤어요."
그는 루신다를 찾으러 미시시피를 돌아다니다가 루신다도 피를 흘리며 처참하게 저 세상
으로 떠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광경을 목격했다. 저 세상으로 떠나지 못했
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광경도 목격했다.
산 채로 불에 타죽는 흑인들도 있었다. 여러 가지 죄목으로 귀와 손가락이 잘린 흑인들도
있었다. 그중 가장 참혹했던 처벌 광경은 내치스 근처에 있는 한적한 길을 걷고 있었는데,
숲속에서 요란한 대머리수리 소리와 섬뜩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는 엽총을 꺼내 들고 무
슨 일인가 살펴보러 갔다. 떡갈나무 아래 콩섶으로 만든 새장이 놓여 있었고 그 안에 여자
가 갇혀 있었다. 나무는 대머리수리들로 새까맣게 보일 지경이었다. 새장 위에 앉아 있는 새
들이 안에 갇혀 있는 여자를 쪼아대고 있었다. 이미 한쪽 눈알을 뽑힌 상태였고 등과 양쪽
팔의 살갗도 벗겨지고 있었다.
그 여자는 남아 있는 한쪽 눈으로 오델을 보며 소리를 질렀다.
"제발 절 죽여 주세요."
하지만 오델은 총알 두 방을 나무에 대고 쐈다. 새들이 땅바닥 위로 떨어졌고 총알에 맞
지 않은 새들은 우르르 날아갔다. 오델은 갑자기 그 여자가 루신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 겁이 났다. 그는 새장으로 다가가 엽총으로 개머리판으로 문을 열고는 여자를 꺼내
주었다. 그리고 땅바닥 위에 눕히고 나서 물을 먹였다.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랐고,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그 여자는 피를 토
하더니 죽었다. 오델은 여자를 쳐다보다 발과 가슴과 머리카락을 만져 봤다. 루신다는 아니
었다. 피부색도 달랐고 발도 마디가 굵었다.
오델은 술에 취한 채 이야기를 마쳤고 셔츠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훔쳤다.
"정말 미친 듯이 돌아가는 세상이로군요." 달리 할 말이 없었던 인만은 이렇게 말했다.
회색 안개로 뒤덮인 아침이 밝아 오자 인만은 여관을 나서 길을 떠났다. 잠시 후 비시가
따라왔다. 한쪽 눈 밑에 생긴 얇은 면도칼 자국에서 피가 흘러내려 외투 자락으로 계속 눈
밑을 닦아 내고 있었다.
"밤새 난리들을 쳤군 그래?" 인만이 물었다.
"날 해치려고 했던 건 아니에요. 하룻밤 화대를 갖고 너무 실랑이를 벌였더니 면도칼로
긋더라고요. 내 물건에 그 칼을 들이댈까봐 제일 겁났는데, 다행히 그러지는 않더라구요."
"그래, 그렇게 상처를 입어도 괜찮은 밤이었길 바랄 뿐이야."
"그랬고말고요. 몸을 함부로 굴린 행실 나쁜 여자가 더 끝내 준다는 말이 정말이더라고요.
난 그 여자의 매력적인 몸매에 완전히 반해 버렸다니까요. 어젯밤 그 여자가 드레스를 벗고
내 앞에 서 있는데, 정말 기절할 것 같았어요. 멍해졌다는 게 맞을 거예요. 나중에 나이 들
어서 기분이 우울해질 때 어젯밤 그 모습을 떠올리면 기분이 좋아질 것 같을 정도였다니까
요."
8. 출생의 비밀
두사람은 차가운 이슬비를 맞으며 시내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아다는 비를 막기 위해 초
칠한 포플린(면, 레이온 등으로 짠 직물)으로 만든 긴 외투를 입었고, 루비는 양모지가 섞인
펑펑한 울 스웨터를 입었다. 기름이 물을 막아 줘서 방수 외투로 충분하다는 게 그녀의 주
장이었다. 그 스웨터의 단점이라면 축축해졌을 때 암양 냄새가 난다는 것이었다.
아다는 우산을 쓰고 가자고 했지만 길을 나선 지 한 시간 만에 구름이 걷히면서 태양이
얼굴을 내밀었다. 나무에서도 더 이상 빗방울이 떨어지지 않게 되자 두 사람은 우비를 벗어
돌돌 말았다. 루비는 소총을 멘 사냥꾼처럼 스웨터를 어깨에 걸쳤다.
비가 갠 하늘에서는 이 지방의 텃새들과 더 추워지기 전에 남쪽으로 떠나려는 각종 철새
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여러 가지 무늬의 오리, 흰색과 회색 기러기, 휘파람 소리를
내는 백조, 쏙독새, 지빠귀, 어치, 메추라기, 종달새, 물총새, 쿠퍼매, 빨간 꼬리매. 그 새들의
사소한 습관만 봐도 그것들이 어떤 말을 하는지, 성격이 어떤지 알 수 있다고 루비가 걸어
가면서 말했다. 루비는 새들의 지저귐이 인간의 말처럼 의미를 담고 있는데, 특히 여름에 다
시 돌아와 노래를 부를 때면 자기들이 어딜 갔었는지, 무엇을 했는지 종알대는 거라고 했다.
누런 그루터기 가장자리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갈가마귀 대여섯 마리가 보이자 루비가 말
했다.
"갈가마귀는 수백 년을 산대.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직접 확인해 본 사람이 있는 건
아니지만 말야."
큼지막한 자작나무 가지를 부리에 문 홍관조 암컷이 지나가자 루비는 부쩍 호기심을 보였
다.
"아마 정신없는 새인가 봐. 둥지를 지을 게 아니면 저런 나뭇가지를 옮길 필요가 없잖아?
지금은 둥지를 지을 시기도 아닌데."
강가에 서 있는 너도밤나무 열매를 따먹기 때문에 피존 강이라는 이름이 가진 거라며, 아
버지가 며칠씩이나 집을 비우는 바람에 혼자 살아야 했던 어린 시절에 비둘기를 많이 잡아
먹었다고 했다.
"비둘기는 아이들이 제일 잡기 쉬운 사냥감이거든. 총을 쏠 필요도 없어. 나뭇가지로 쳐서
나무에서 떨어뜨리고 제정신으로 돌아오기 전에 목을 잡고 비틀면 되지."
하늘에서 까마귀 세 마리가 매 한 마리를 못살게 구는 광경을 보면서 루비는 사람들이 싫
어하는 까마귀지만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본받을 점이 많다며 칭찬을 늘어놓았다. 다른 새
들은 맛없는 걸 먹느니 차라리 죽겠다는 식이지만, 까마귀는 앞에 놓인 먹거리를 모두 맛있
게 먹는다며, 사람들이 왜 싫어하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말했다.
제법 재치가 있고, 잘난 척하지 않으며, 짓궂은 장난을 좋아하고, 싸울 때 날렵한 모습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이런 모습을 갖추고 있는 까마귀야말로 새들 중 으뜸이고, 그들이 입고
있는 쓸쓸한 깃털 옷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처럼, 씁쓸하고 우울할 수밖에 없는 자연의 진정
한 주인이라고 했다.
"우린 모두 까마귀한테서 배워야 해."
맑은 하늘을 보면서도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잇는 아다를 꼬집기라고 하듯 루비가 말했다.
아침 내내 아다는 기분이 가라앉아 있었기 때문에 소매에 검은 비단을 달아 온세상에 그
사실을 알리고 싶을 정도였다. 지난 일주일 동안 힘든 일을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지난주에
두 사람은 제대로 돌보지 않았던 밭에 건초 더미를 만들었다. 나중에는 돼지풀과 등대풀이
온통 섞여 거의 쓸 수 없을 정도가 돼 버리기는 했지만.
어떤 날은 벌초할 때 쓸 낫을 몇 시간 걸려 준비하기도 했다. 공구를 넣어 두는 창고 서
까래 부근에서 낫을 찾아내기는 했지만 이가 빠지고 녹이 잔뜩 슬어 있었다. 낫을 쓸 수 있
으려면 우선 그것을 갈 줄과 숫돌이 필요했다. 아다는 아버지가 줄이나 숫돌 같은 도구를
가지고 있었는지도 생각나지 않았다. 낫이 아버지의 물건이 아니라 블랙 집씨네 안 사람들
이 두고 간 물건이었으므로 숫돌같은 것은 없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아다와 루비는
창고 안을 샅샅이 뒤져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낡은 옥수수 속대를 자루삼아 꽂혀 있는 좁고
긴 줄 하나를 발견했다. 하지만 잡동사니들을 아무리 뒤져 봐도 숫돌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
자 루비가 말했다.
"우리 아빠는 말야. 한 번도 숫돌을 산 적이 없어. 돌조각 위에 침을 뱉고 칼을 한두 번
쓱쓱 문지르는 게 끝이었지. 날카로워지든 말든 그 정도면 충분했어. 팔에 나 있는 털이야
깎이지 않으면 어때? 그걸로 씹는 담배를 자를 수만 있으면 그만이었지."
결국 두 사람은 숫돌 찾는 것을 포기하고 스토브로드의 방식대로 납작하고 반질반질한 돌
멩이를 개울가에서 주워다 쓰기로 했다. 아무리 열심히 갈아도 날이 날카로워질까 말까였지
만, 아다와 루비는 그 낫을 들고 밭으로 나가 오후 내내 풀을 베고, 벤 풀을 긁어 모아 건초
단을 만들었다. 해가 지고 나서도 한참 더 일을 했고, 황혼빛이 다할 무렵에야 일이 끝났다.
게다가 어제는 땅 위에서 말린 건초를 썰매로 몇 번씩이나 날라다 헛간에 쌓았다. 딱딱하
고 날카로운 그루터기가 신발을 찔렀다. 두 사람은 양쪽 끝에서 번갈아 가며 쇠스랑으로 썰
매에 건초를 옮겼다. 박자가 엇갈려 쇠스랑이 서로 부딪치면서 쨍 소리를 내면, 밧줄에 매달
린 채로 졸고 잇던 랄프가 깜짝 놀라며 고개를 젓곤 했다. 날씨는 그다지 덥지 않았지만 일
을 하면서 땀이 줄줄 흘렀다. 먼지가 풀풀 날렸고 머리카락이며 드레스 주름 사이, 땀을 흘
린 팔과 얼굴 위로 온통 풀포기가 들러붙었다.
일이 다 끝나자 아다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지경이었다. 풀에 찔리고 긁힌 팔은 홍역을 앓
는 사람처럼 벌겋게 얼룩덜룩했고,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 사이에 커다랗게 물집이 잡혔
다. 아다는 딱딱하게 굳어버린 비스킷과 버터, 설탕으로 저녁을 대신하고 어두워지기도 전에
씻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몸은 피곤했지만 잠들었다 반쯤 깨다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현실과 꿈속을 오가며 깊이
잠들지 못했다. 밤새 건초를 긁어 모으고 쌓는 기분이었다. 가까스로 눈을 떴을 땐 달빛에
비친 나뭇가지 그림자가 천장에 길게 드리워져 있었는데, 그 모습이 뭐라고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섬뜩하고 불길하게 느껴졌다. 그러다 구름이 달을 가리고 빗방울이 세차게 몰아치기
시작하자 마침내 다시 잠이 들었다.
아다는 새벽녘 빗소리에 눈을 떴다. 여기저기 근육이 욱신거리는 바람에 절름발이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양손은 쇠스랑을 잡고 있는 것처럼 구부러져 있어서 힘을 줘야 펼 수가
있었고, 머릿속이 지끈거렸다. 오른쪽 눈 위와 눈꺼풀 안쪽 부분이 특히 심했다.
그래도 예정대로 시내로 나가기로 했다. 몇 가지 소소한 물건도 사야 했지만 가는 길이
재미있기 때문이었다. 루비는 날씨가 선선해지면 야생 칠면조와 사슴 사냥을 하고 싶어진다
면서, 새 사냥용 산탄, 굵은 산탄, 일반 산탄 등 엽총에 넣을 총알을 사고 싶다고 했다.
아다는 신간이 도착했나 문방구 뒤켠에 있는 책꽂이를 훑어보고 싶었고, 식물 연구를 기
록으로 남길 수 있도록 가죽 제본이 된 공책과 스케치용 연필 몇 자루도 사고 싶었다. 하지
만 무엇보다도 몇 주 동안 일을 했더니 농장에 얽매인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에, 몸은 욱
신거리고 기분도 우울한데다 날씨도 나빴지만 굳이 나들이를 나선 것이었다. 지난 며칠 동
안 일을 하느라 말이 발굽을 다쳐서 마차를 끌 수 없게 됐다는 달갑지 않은 사실도 대수롭
지 않게 여겨졌다.
"기어서라도 시내에 갈 테야."
아다는 비를 맞으며 허리를 굽혀 진흙투성이 말발굽을 손으로 쓰다듬고 있는 루비의 등에
다 대고 말했다.
분위기를 띄우려고 루비가 갖은 애를 써도 아다는 그날 아침 내내 우울한 기분이었다. 두
사람은 작은 계곡과 골짜기에 자리잡은 농장과 나무 많은 언덕 사이로 넓게 펼쳐져 있는 밭
을 지나갔다. 젊은 남자들은 모두 전쟁터로 나갔기 때문에 여자와 아이들과 노인들만이 밭
에서 일하고 있었다.
옥수수 줄기에 달린 이파리는 끝과 가장자리가 갈색이었고, 줄기에 달린 열매는 태양과
서리를 받으며 한창 익어 가고 있었다. 옥수수 줄기 사이로 호박이 탐스럽게 영글어 가고
있었다. 메역치풀과 등골나무와 뱀풀이 울타리를 따라 웃자라 있었고, 검은딸기 줄기와 말채
나무에 달린 이파리는 어느새 밤색이었다.
시내에 도착한 아다와 루비는 먼저 시내를 돌아다니며 가게와 가축과 짐마차, 그리고 시
장 바구니를 든 여자들을 구경했다. 아다가 초칠한 포플린 외투를 벗어 돌돌 말아 겨드랑이
사이에 낄 정도로 날씨가 따뜻해졌다. 루비는 스웨터를 허리에 묶고 말꼬리를 꼬아 만든 끈
으로 머리를 질끈 동여맸다. 아직도 안개가 약간 남아 있었다. 콜드 마운틴은 저 멀리 능선
위로 푸르게 솟은 혹처럼 보였고,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작게 보였다. 하늘색 종이 위
에 조각그림을 붙혀 놓은 것처럼 평면적으로 보였다.
이곳은 세련된 도회지가 아니었다. 길 한쪽에는 떡갈나무 판자로 만든 건물 네 개가 나란
히 서 있고, 그 옆으로 돼지우리, 진흙 웅덩이, 상점 두 곳, 교회, 말을 묶어 두는 곳이 있었
다. 다른 쪽에는 가게 세 곳과 법원-둥근 지붕을 얹은 하얀 건물로, 건물 앞 잔디밭이 있었
다-외에도 가게가 네 곳 더 있었는데, 그중 두 곳은 벽돌로 만든 건물이었다. 그 옆으로는
울타리가 있는 말린 옥수수밭이 있었다. 기마다 마차 바퀴 자국이 깊게 패여 있었고, 말발굽
때문에 생긴 수많은 웅덩이에 고인 물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아다는 루비와 철물점으로 가서 장약, 총알, 산탄, 뇌관, 화약을 샀다. 문방구에서 아다는
무리를 해서 아담 베이드 세 권과 목탄화 연필 여섯 자루, 외투 주머니에 넣을 수 있는 정
도로 크기가 작은 고급 공책을 샀다. 거리 가판대에서는 마을 신문과 애쉬빌에서 배달되는
신문을 샀다. 손수레에 통을 놓고 탄산음료를 파는 여자에게서 미지근한 루트 비어(알코올
성분이 거의 없는 음료)를 사 마신 후 여자에게 양철 컵을 돌려줬다. 딱딱한 치즈와 신선한
빵을 사서 강가로 들고 가 바위에 앉아 점심으로 먹었다.
두 사람은 오후 일찍 맥케넷 부인 집에 들렀다. 그녀는 돈 많은 중년의 과부였는데, 대여
섯 달 정도 먼로를 짝사랑하다가 먼로가 별 관심을 보이지 않자 그냥 알고 지내는 사이로
남게 된 여자였다.
차를 마실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오랜만에 아다를 만나자 반가워하며 융숭한 대접을
했다. 습기가 많고 시원했던 여름이 다간 지 한참 되었는데도 아직 그 지에는 지하 얼음 창
고에 얼음이 남아 있었다. 지난 2월에 꽁꽁 얼어붙은 강에서 커다랗게 덩어리로 잘라내 톱
밥으로 단단히 감싸 놓았던 얼음이었다. 그리고 비밀을 꼭 지켜 달라고 당부하면서, 전쟁이
시작되기 훨씬 전부터 소금 네 통과 설탕 세 통을 숨겨 두었다고 털어놓았다.
아이스크림을 대접하기 위해 그녀는 하인-징집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약한 늙은이였다-
을 시켜 얼음을 자르고 기계를 돌리게 했다. 그리고 예전에 만들어 놓았던 설탕 친 크레이
프(아이스크림을 담아 먹는 얇은 과자)를 고깔 모양으로 만들어 그 안에 아이스크림을 담아
줬다. 아이스크림을 한 번도 먹어 본 적이 없었던 루비는 뛸 듯이 기뻐하면서 마지막 한 방
울까지 핥아먹은 후 크레이프를 맥케넷 부인에게 건네 주며 말했다.
"여기 작은 뿔 돌려 드릴게요."
화제는 전쟁과 그 전쟁이 끼친 영향 쪽으로 흘러갔고, 맥케넷 부인은 아다가 4년 동안 읽
었던 신문 사설과 똑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했다. 전쟁이 명예롭고 비극적이고 영웅적이며, 말
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고결하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얼만 전에 벌어진 전투를 다룬 기
사라며 감상적인 이야기를 길게 늘어 놓았는데, 아다는 그것이 지어낸 이야기인 줄 알면서
도 짐짓 모르는 듯했다.
그 이야기의 배경은 요즘 전투가 다 그렇듯이 승산이 거의 없는 싸움이었다. 전투가 막바
지로 치달아 가고 있을 무렵, 위세 당당했던 젊은 장교가 안타깝게도 가슴에 부상을 입고
심장에서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는 것이다. 곁에 있던 동료가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두 팔로
장교의 머리를 감싸안고 있었는데, 전투가 점점 치열해지자 거의 숨이 끊겨 가던 그 젊은
장교가 벌떡 일어나더니 적진을 향해 총알을 한 방이라도 더 날려야 한다며 권총을 발사했
더라는 것이다. 그러고는 총알이 다 떨어져 찰칵거리는 총을 손에 쥔 채로 전사했다는 것이
다.
게다가 말도 안 되는 또 한 가지 일이 있었다. 나중에 시신에서 자신의 애인에게 보내는
편지가 발견되었는데, 편지에서 자신의 죽음을 정확히 예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
라 전령이 이 편지를 들고 애인의 집에 도착해 보니, 그 장교가 숨을 거둔 날 같은 시각에
그 여자도 갑작스런 심장마비를 일으켜 죽었단다. 이야기가 끝나 갈수록 아다는 양쪽 코 옆
이 점점 간질거렸다.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간지러운 부분을 긁으면서, 웃음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고 있었다.
맥케넷 부인은 이야기를 다 마치자 아다는 가구와 카펫, 램프 등 힘들이지 않고 정리한
가구와 양쪽 머리를 동그랗게 말고 통통한 몸으로 벨벳 의자에 편하게 앉아 있는 맥케넷 부
인을 쳐다봤다. 아다는 자신이 계속 찰스턴에 머물러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시
절 자신의 유별났던 성격을 맥케넷 부인에게도 한 번 보여 줘야겠다고 생각한 그녀는 말했
다.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 중 가장 말도 안 되는 얘기네요."
아다는 더 나아가 전쟁이 비극과 상류 계급의 고상한 특성을 드러내 주는 역할을 한다는
일반적인 견해가 한 마디로 근거 없는 상상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자신은 비록 전쟁터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양쪽 모두 잔인하고 무지해 보인다며 양쪽 다 비난했다.
아다의 목적은 그녀에게 충격을 주거나 화를 돋구려고 한 것이었는데, 맥케넷 부인은 오
히려 더 재미있어 하는 표정으로 아다를 향해 슬그머니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
"내가 너에게 각별한 애정을 품고 있다는 거 알고 있겠지? 하지만 너처럼 뭘 모르는 아이
는 처음 봤다."
아다는 이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자 루비는 그날 아침에 보
았던 새들을 하나하나 나열하기 시작했고, 늦게 파종한 작물이 얼마나 자랐는지 이야기했고,
에스코 스왱거의 검은 땅에서 순무가 어찌나 크게 자랐는지 광주리 하나에 여섯 개밖에 담
지 못할 정도라는 말을 꺼냈다. 하지만 맥케넷 부인은 얼른 말허리를 자르며 입을 열었다.
"너도 우리처럼 전쟁에 대한 생각을 이야기해 보렴."
루비는 머뭇거리는 기색도 없이 전쟁엔 그다지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북부 지방은 신이
없는 땅이거나 신이 하나밖에 없는 땅이라고 하는데, 그 신이 발로 돈이라는 이야기를 들었
다고 했다. 또한 탐욕의 지배를 받게 된 사람들은 점점 비열하고 냉혹하고 정신이 이상해져
서 정신적인 안식처가 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온 집안 식구들이 모르핀 중독자가 되어
간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했다. 루비는 그 사람들이 추수감사절이라는 명절을 만들었다는 소
리를 얼마 전에 들었다고 했다. 또한 그 명절에 대해 들은 얘기를 종합해 보건대 그날 하루
만 감사를 한다는 건 너무 염치 없는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아다와 루비는 오후 늦게 시내를 빠져 나오는 길을 걷다가 법원 옆쪽 벽에 서서 고개를
들고 있는 사람들을 봤다. 무슨 일인가 하도 다가가 봤더니 2층 창문에서 어떤 죄수가 사람
들에게 연설을 하고 있었다.
그 사람은 양손으로 쇠창살을 부여잡고 그 사이로 최대한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검고 기
름기 많은 머리카락이 아래턱까지 늘어져 있었고, 검은색 수염이 프랑스 스타일로 입술 아
래쪽을 살짝 덮고 있었다. 창턱에 가려 있었기 때문에 옷은 목까지 단추가 잠겨 있는 허름
한 군복 재킷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사람은 거리에서 설교하는 목사처럼 다급한 말투로 이야기했고 분노를 띤 목소리로 사
람들을 끌어 모았다. 그는 전쟁 내내 열심히 싸웠다고 했다. 북군을 많이 죽였고 윌리엄즈버
그에서 어깨에 총상까지 입었지만, 얼마 전 전쟁에 대한 믿음을 잃었고, 아내가 보고 싶어졌
다는 것이었다. 징병된 것이 아니라 자원 입대한 것이니 죄목이라고는 자원 입대 의사를 포
기하고 집으로 돌아온 것밖에 없는데 이렇게 감옥에 가둔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사연이
었다. 듣고 보니 전쟁 영웅이었던 사람이 이제 교수형을 받을지도 모르는 위기에 처한 것이
다.
그는 며칠 전 발삼 산 비탈의 계곡에 있는 아버지의 농장에서 시민자위대의 손에 어떤 식
으로 끌려왔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늘어 놓았다. 그는 다른 탈영병들과 함께 그곳 숲속에 숨
어 있었다며, 지금까지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로서 감옥 창살 너머로 자세한 이야기를 모
두 들려 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다와 루비는 그 이야기를 끝까지 들었다. 그
야말로 피비린내 나는 이야기였다.
동이 트기 직전의 새벽녘, 자욱한 회색 구름이 산봉우리를 덮고 있었다. 비가 내리기 시작
했지만 아주 가는 비였고 바람도 없었기 때문에 밤새 맞고 있어도 몸이 젖지 않을 정도였
다. 가랑비는 그저 포플러나무 잎새와 흙먼지 색깔을 좀더 짙게 보이게 할 뿐이었다.
그 남자와 그 남자의 아버지, 그리고 다른 탈영병 두 사람이 집안에 있었는데, 길 모퉁이
를 돌아 집 쪽으로 다가오는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가 산탄총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네 사람이 가지고 있던 유일한 무기였다. 숲으로 달아날 시간도 없었기 때문에 세 사람은
농기구를 무기로 들고 사료를 모아 두는 헛간에 숨어서 벽 틈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허름한 옷차림을 하고 말을 탄 사람들이 아무 말 없이 모퉁이를 돌아서 천천히 농장 쪽으
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 사람들은 옷차림이 제각각이었다. 살갗이 까무잡잡하고 얼굴이 서로
닮아서 쌍둥이일 수도 있겠다 싶은 커다란 몸집의 두 남자는 전쟁터의 시체들에서 벗겨낸
듯한 너덜너덜한 군복을 입고 있었다. 호리호리한 은발의 소년은 캔버스천으로 만든 반바지,
갈색 울셔츠, 짧은 회색 울재킷 등 농삿군 차림을 하고 있었다.
또 다른 남자는 순례중인 목사처럼 꼬리가 긴 검은색 외투, 몰스킨(염직물의 일종) 바지,
하얀색 셔츠, 검은색 넥타이 차림이었다. 타고 있는 말들은 등뼈가 튀어 나오고, 목 부근에
피부병이 나 있고, 엉덩이 부근이 시퍼렇고, 눈이며 코며 입에서 누런 액체를 흘리는 형편없
는 상태였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위협적으로 생긴 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고, 안장 총집에
는 엽총과 산탄총까지 꽂고 있었다.
그 남자의 아버지는 문밖에 서서 그들을 기다렸다. 회색 하늘 밑에서 가랑비를 맞으며 서
있는 모습이 마치 풀숲에 걸터앉아 있는 회색 유령 같았다. 그는 버터호두 열매로 염색한
손으로 짠 양모옷을 입고, 잠잘 때 쓰는 보닛(챙이 없는 모자)처럼 부드러운 모자를 납작하
게 쓰고 있었다. 턱은 사냥개의 윗입술처럼 축 늘어져 있었고, 다리 뒤로 길다란 총을 들고
있었다.
"거기 서!"
사람들이 스무 발자국쯤 떨어진 곳까지 다가왔을 때 그 노인이 말했다.
몸집이 큰 두 남자와 은발의 소년은 이 말을 무시한 채 말의 옆구리를 걷어차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오려 했다. 목사처럼 보이는 남자는 길가 쪽으로 빙 돌아 가더니 무릎에 차고
있는 짧은 스펜서 카빈총이 몸에 가려 보이지 않도록 말을 돌렸다. 나머지 세 사람은 노인
앞에서 말을 세웠다.
누군가가 잽싸게 움직였고 비명소리가 들렸다. 노인이 등뒤에서 총을 꺼내 단숨에 몸집
큰 남자의 턱 밑에 들이댔다가 총구를 계속 겨눈 채 뒤로 물러섰다. 그 총은 구식 사냥총이
었다. 노리쇠가 뒤로 젖혀져 있고, 총구가 길다란 위스키잔의 둘레만큼이나 컸다. 몸집 큰
남자의 목에서 피가 한 줄 흘러나와 셔츠의 칼라 안으로 사라졌다.
또 다른 거구의 남자와 은발의 소년은 말 위에 앉은 채 작년에 베어 원뿔 모양으로 쌓아
둔 회색빛 옥수수단 더미를 쳐다봤다. 그 속에서 뭔가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을 예견하는
것처럼 미소를 지었다.
노인이 소리쳤다. "너, 울타리 옆에 있는 놈, 난 네놈이 누군지 알아. 티그지? 이리 나와."
그러나 티그는 꼼짝하지 않았다.
"안 나오겠다는 게냐?" 또다시 노인이 말했다.
티그의 태도는 여전히 변함없었다.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두 눈은 재마저 치워 버린 차가
운 벽난로처럼 냉정해 보였다.
"네 검둥이들이냐?" 노인이 티그에게 물었다.
"적절한 표현인지는 잘 모르겠군요. 하지만 제가 주인은 아닙니다. 검둥이들도 돈이 있어
야 살 수 있으니까요."
"그럼 누가 주인이지?"
"자신이 주인이겠죠."
"여긴 뭐하러 왔나?"
"숲 옆에서 좀 쉬려고요."
"난 신경에 거슬려. 네놈들을 모두 쏴 버릴 테다."
"총이 하나뿐이잖아요." 티그가 비웃듯이 말했다.
"이 총은 한 방만 쏴도 여러 놈 다치게 하지." 노인은 세 남자가 모두 산탄총의 사정 범
위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고 나서 다시 말했다. "너희들 모
두 말에서 내려 한 곳으로 모여 서!"
티그만 제외하고 나머지 세 사람은 말에서 내렸다. 말들은 고비를 땅 위에 늘어뜨린 채
재미있다는 듯이 귀를 앞으로 쫑긋 세우며 서 있었다. 상처를 입은 바이런이라는 남자는 상
처 부위를 손으로 만져 보더니 손가락에 묻은 피를 한 번 보고는 셔츠 자락에 쓱쓱 문질러
닦았다. 아이런이라는 또 다른 남자는 고개를 옆으로 갸우뚱하며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
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겠다는 듯이 입술 끝을 앞으로 내밀었다.
은발의 소년은 푸른 눈을 비비며 잠에서 방금 깨어난 사람처럼 옷을 이리저리 잡아당겨
주름을 폈다. 그러고 나서는 감탄하는 얼굴로 왼쪽 검지 손톱을 열심히 쳐다봤다. 버터를 자
르거나 돼지 기름을 떠내고, 기타 용도로 기르는 사람들처럼 손톱이 손가락만큼이나 길었다.
노인은 총으로 세 남자를 겨냥한 채 가지각색인 그들의 옷차림을 살펴봤다.
"저 검둥이들이 왜 길다란 기병검을 가지고 있는 거야? 그걸로 고기를 꿰어 불에 구워 먹
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노인이 티그에게 물었다. 티그의 대답이 없자 노인이 다시 물었다.
"다시 묻겠다. 여긴 뭐 하러 왔나?"
"잘 아시잖습니까. 탈영병을 잡으러 왔죠." 하고 티그가 대답했다.
"다 떠나 버렸어. 오래 전에 떠났다고. 저 숲속 어딘가에 숨어 있을 거야. 아니면 산을 넘
고 주 경계선을 넘어 북군에 투항했을지도 모르고... ."
"아, 지금 우리더러 마을로 돌아가는 게 나을 거라는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그런 건가
요?"
"그럼 너희나 나나 모두 수고를 덜겠지."
"말조심하시지. 노인네를 교수형에 처할 수도 있으니까. 그 사람들이 모두 떠났다면 우리
가 이렇게 총을 들고 나타나지도 않았어."
그때 은발의 소년이 땅바닥에 넙죽 엎드리면서 소리를 질렀다. "위대하신 말씀입니다!"
노인이 소년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아이런이 그 큰 몸집에 어울리지 않는 유연한
동작으로 왼쪽 주먹을 들어 노인의 머리를 내리쳤다. 그리고는 손을 쳐서 총을 떨어뜨리게
했다. 노인은 뒤로 넘어졌고 모자는 땅바닥에 떨어졌다.
아이런은 노인을 타넘어 총을 줍더니 그것으로 노인을 패기 시작했다. 개머리판이 부서지
자 총신으로 내리쳤다. 잠시 후 노인은 뻣뻣하게 굳은 채로 땅위에 쓰러졌다. 의식은 있었지
만 두 눈은 무자비한 매질 때문인지 넋이 나간 듯했다. 노인의 한쪽 귀에서는 케첩과 끈적
끈적한 고기 국물을 섞은 듯한 피가 흘러 나왔다.
바이런은 땅바닥에 침을 뱉고 목에서 흐르는 피를 닦아 내더니 기병검을 꺼내 노인의 축
늘어진 턱에 갖다대고는 자신과 똑같은 양의 피가 흘러내릴 때까지 꾹 누르며 말했다.
"고기를 찔러서 불에 구울 때 쓰는 거라고?"
"내버려둬. 이제 꼼짝도 못할 테니까." 아이런이 말했다. 두 남자는 몸집은 컸지만 목소리
는 자못 새되었다.
바이런은 턱을 찌르고 있던 칼을 거두었다가 말릴 겨를도 없이, 양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버터 만드는 통에 우유 젖는 기구를 꽂는 것처럼 아주 가볍게 노인의 가슴에 칼을 푹 꽂았
다.
바이런은 양손을 펴서 들어 보이며 옆으로 물러섰다. 칼날은 몸속에 박혀 보이지 않았고,
소용돌이 모양의 날 밑 부분과 철사가 감겨있는 손잡이 부분만 노인의 가슴 밖으로 나와 있
을 뿐이었다. 노인은 일어서려고 했지만 머리와 무릎만 간신히 들어 올릴 수 있을 뿐이었다.
바이런이 티그를 보며 말했다. "끝내 버릴까?"
"내버려둬. 저놈을 만든 조물주가 저놈을 어떻게 할지 한 번 보자구." 티그가 바이런을 말
렸다.
땅바닥 위에 엎드려 있던 소년이 일어나 노인에게로 다가가 그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이제 곧 숨이 넘어갈 거야. 영감은 지금 호롱불을 들고 저승사자를 맞고 있는 중이거든."
노인과 티그를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티그가 소리쳤
다.
"입 닥쳐, 버치. 자, 이제 어서 가자구."
그들이 말에 올라타고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오기 시작하자 노인은 마지막 숨을 내뱉더
니 신음을 내며 죽어 갔다. 바이런은 곡마단에서 묘기를 부리던 사람처럼 말잔등 위로 바짝
몸을 붙인 채 장검을 뽑아 말갈기에 쓱 문지르고 나서 칼집에 넣었다.
바이런이 대문을 발로 차서 걸쇠를 부수자 다른 사람들은 말을 탄 채 현관까지 다가갔다.
"나와라." 티그가 말했다. 흥분이 고조된 목소리였다. 아무도 밖으로 나오지 않자 티그는
바이런과 아이런을 보며 앞문을 턱으로 가리켰다.
두 사람은 말에서 내려 현관 기둥에 말을 묶고는 권총을 겨눈 채 서로 반대쪽에서 집 안
을 뒤지기 시작했다. 사냥에 나선 늑대처럼 아무 말 없이 공통의 목표를 향해 서로 협조했
다. 거대한 몸집이었지만 두 사람은 천성적으로 날렵했고 움직임도 부드럽고 유연했다. 하지
만 둘이 힘을 합하면 한 사람의 팔 다리쯤은 쉽게 꺾을 수 있을 만큼 주먹이 단단했다.
두 사람은 빈집을 세 번 둘러보고 나서 동시에 앞문과 뒷문에서 나왔다. 아이런은 심지
달린 초를 한 주먹 가득 쥐고 있었고 바이런은 하얀 정강이뼈가 보이는 돼지고기를 닭다리
처럼 들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말 위에 얹어 놓은 광주리 속에 그 물건들을 담았다.
그러자 한 마디 말도, 명령을 내리는 듯한 손짓도 없이 티그와 버치가 말에서 내려 마굿
간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안에는 늙은 노새 한 마리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다락에 쌓여
있는 건초 더미를 장검으로 찔러 보다가 밖으로 나와서 사료를 모아 두는 헛간으로 눈길을
돌렸다. 두 사람이 그쪽으로 다가가려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탈영병 세 명이 뛰쳐 나와 도
망치기 시작했다.
세 사람은 뾰족하게 갈아서 쇠사슬에 매단 쟁기끝, 줄로 갈아서 창 비슷하게 만든 삽, 한
쪽 끝에 편자못을 박은 소나무 곤봉 등을 되는 대로 들고 있었고, 그래서 제대로 도망칠 수
도 없었다.
티그는 세 사람이 어느 정도까지 달아나도록 내버려두다가 카빈총을 들어 앞에서 달리던
두 사람을 쐈다. 두 사람은 쨍그랑 하는 무기 소리와 함께 쓰러졌다. 마지막으로 남은 남자
는 걸음을 멈추고 양손을 번쩍 들며 몸을 돌렸다.
티그는 그 남자를 잠시 쳐다봤다. 부츠도 신지 않은 채 편안한 자세를 찾기라도 하는 것
처럼 발가락으로 흙을 파고 있었다. 티그는 핥던 엄지손가락으로 가늠쇠에 침을 쓱 바르고
스펜서 카빈총을 들어 조준했다. 남자는 꼼짝 않고 서 있었다. 머리 위로 못이 박힌 곤봉을
꼭 쥐고 있는 폼이 책에 나오는 야만인처럼 보였다. 티그는 들고 있던 카빈총을 내려 개머
리판이 아래쪽을 향하게 하고 말했다.
"그 곤봉 버려. 안 그러면 이 두 사람을 보내 몸을 갈갈이 찢어 놓을 테니까."
남자는 몸집이 큰 두 남자를 쳐다보다가 소나무 곤봉을 발치에다 떨어 뜨렸다.
"좋아. 이제 거기 가만히 서 있어."
네 사람 모두 그 남자 쪽으로 걸어갔고, 아이런이 강아지 잡듯이 남자의 뒷덜미를 휙 낚
아챘다. 그러고 나서 네 사람은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두 남자에게 고개를 돌렸다. 한 사람
은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고 옷 밖으로 배어 나오지 않을 정도로 피를 거의 흘리지 않았
다. 하복부에 총을 맞은 또 다른 남자는 아직 살아 있었지만 죽은 거나 다름없었다. 그는 팔
꿈치에 기댄 채 몸을 반쯤 일으켜 바지와 속바지를 무릎까지 끌어내렸다. 그리고 손으로 상
처를 더듬어 보다가 다시 눈으로 확인하고는 소리를 질렀다. "난 죽는다!"
시민자위대는 그 남자를 에워싼 채 서 있다가 화약 냄새가 풍겨나자 뒤로 물러섰다. 붙잡
혀 있던 남자가 죽어 가는 친구에게로 다가가려는 듯 몸을 비틀자 아이런이 주먹으로 그의
머리를 세 번 갈겼다. 버치는 시커먼 씹는 담배를 꺼내 이빨로 물더니 칼을 꺼내 입술 근처
에서 바짝 자르고는 나머지를 다시 주머니 안에 넣었다. 그리고 침을 뱉고 나서, 땅바닥에
꼼꼼하게 흔적을 남기려는 사람처럼 누런색 침이 떨어진 부분을 부츠 끝으로 동그랗게 표시
했다.
총에 맞은 남자는 땅바닥에 반듯하게 누운 채 체념한 듯이 하늘을 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말을 하려는 듯이 입을 열었지만 마른 입술이 달짝거리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잠시 후
그 남자는 눈을 감았다. 이따금씩 손가락을 움직이지만 않았더라면 죽은 것으로 보였을 것
이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피가 흘러 나왔다. 주변 풀이 온통 핏빛으로 엉겨붙었고,
옷은 기름을 먹인 천처럼 축 늘어진 채 반질거렸다. 희미한 햇빛 속에서도 빛을 내며 번쩍
일 정도였다. 그러다 피가 멎었고 그 남자는 다시 눈을 뜬 채로 멍하니 허공을 쳐다봤다. 숨
을 거둔 것 같았다.
버치가 눈을 깜빡이는지 확인하고 남자의 눈 위에 침을 뱉으려고 다가갔지만 티그가 말했
다.
"확인할 필요 없어. 죽었으니까."
"이 자식도 당신 애비랑 똑같이 죽었네?"
버치가 유일하게 살아 남은 남자에게 말했다.
남자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티그가 말했다.
"버치, 입 다물고 이놈 손 묶을 거나 가지고 와. 끈으로 묶어서 마을로 데리고 가야지."
소년은 말이 서 있는 곳으로 가서 밧줄을 가지고 왔다. 하지만 티그가 손을 묶으려고 하
자 그 남자는 미친 사람처럼 날뛰었다. 묶이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
다. 남자는 펄펄 뛰며 발로 땅을 차다가 티그의 허벅지에 대로 헛발길질을 했다.
티그와 몸집이 큰 두 남자가 한꺼번에 달려들었지만, 남자가 어찌나 심하게 몸부림치는지
한동안은 어느쪽이 이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남자는 사지를 휘둘렀고 머리까지 들이밀
었다. 사람들의 신경을 곤두서게 할 만큼 큰소리로 비명을 질러댔다. 하지만 세 사람은 마침
내 남자를 땅바닥에 눕히고 손목과 무릎을 함께 묶었다. 그때까지도 남자는 몸을 비틀며 머
리를 휘두르다 티그의 손을 깨물어 피가 나오게 했다. 티그는 코트 자락에다 손을 닦고 나
서 상처를 쳐다봤다.
"사람한테 물린 게 아니라 꼭 돼지한테 물린 것 같군."
그는 버치를 시켜 의자를 가지고 오게 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남자의 팔을 양쪽 옆구리
에 고정시키고 목에 밧줄을 건 후 의자에 묶었다. 남자는 그저 뒤집힌 거북이처럼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거나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자, 또 한 번 깨물어 보시지" 하고 티그가 말했다.
그러자 버치가 말했다. "미친 개 같은 놈 같으니라구. 완전히 정신이 나갔어요."
네 사람은 땅 위에 퍼져 앉아서 숨을 가다듬었다. 남자는 밧줄에 묶인 채 발버둥치다가
목에서 피가 흐르자 잠잠해졌다. 바이런과 아이런은 육중한 허벅지 위에 팔을 얹어 놓고 잠
시 쉬었다. 티크는 상처를 입으로 빨다가 손수건을 꺼내 검은 외투에 묻은 먼지를 털고 빛
바랜 바지에 남자가 남긴 발자국을 닦아 냈다. 버치는 왼손을 들고 쳐다보다 싸우던 와중에
반이 꺾여 버린 길다란 손톱을 발견하고는 투덜대며 칼을 꺼내서 깨끗하게 다듬었다.
"저기 썰매 위에 저놈을 실어서 의자에 묶어 끌고 갈 수 있겠는걸." 아이런이 말했다.
"그래도 되겠지. 그런데 난 건초칸으로 데리고 가서 서까래에 목을 밧줄로 매단 후에 문
밖으로 밀어 버리고 싶어." 티그가 말했다.
"저렇게 의자에 앉힌 채로 목을 매달 수는 없잖아요." 버치가 말했다.
"그럴 수는 없다고? 왜? 전에도 그렇게 교수형 당하는걸 본 이 있는걸?"
"그래도 가끔씩은 사람을 끌고 가는 게 훨씬 보기 좋잖아요." 하고 버치가 말했다.
네 사람은 일어서서 의논하다가 버치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의자를 들어 올려
썰매 쪽으로 옮겼다. 그러고는 썰매에 의자를 묶고 노새에 썰매를 매단 후에 마을로 출발했
다. 남자는 머리가 심하게 흔들렸지만 똑바로 가누고 말고 할 생각도 없었다-
"이런 세상은 곧 끝납니다."
감옥에 갇혀 있던 그 남자가 이야기를 마무리지으며 외쳤다. "하나님이 이런 꼴을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을 거라고요!"
그가 이야기를 다 마쳤을 때는 태양이 서쪽으로 꽤 기울어 있었다. 아다와 루비는 법원을
떠나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두 사람 모두 처음에는 우울한 얼굴을 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나중에는 걸어가면서 내내 그 남자의 이야기를 놓고 입씨름을 벌였다. 아다는 과장
된 이야기로 받아들이고 싶었지만, 루비는 남자들의 본성이 원래 그렇다며 분명 사실일 거
라는 결론을 내렸다. 두 사람은 1, 2마일 정도 걸어가면서 위험과 공포로 가득 차 있는 이
세상을 우울한 곳으로 여겨야 하는지, 검은 손이 언제라도 주먹을 내리칠 준비를 하고 있지
만 빛과 기쁨을 향해 열심히 싸워 나가야 하는지를 좋고 입씨름을 벌였다.
두 사람이 피존 강 서쪽 지류에 도착해 길을 따라 강가를 걸어 가기 시작할 무렵 주위는
점점 어두워졌고, 블루 산맥의 우람한 봉우리들이 만들어 낸 그림자가 빅 스톰프라 불리는
작은 산 너머로 드러나 있었다. 강물은 검고 차갑게 보였고, 강물과 채소가 반반 섞여 있는
듯한 강 냄새가 사방에서 풍겼다. 아침보다 강물이 좀 줄어들긴 했지만 어젯밤에 내린 비로
여전히 넘쳐흘렀다. 양쪽 강둑에서 자라는 나무들의 줄기가 강을 덮고 있어 그 안의 모든
것들이 어둡게 보였다.
얼마쯤 걸어갔을 때 루비가 걸음을 멈추더니, 강물 쪽으로 몸을 돌리며 총을 조준하는 것
처럼 물속을 쳐다봤다. 그러고는 공격하기 위해 자세를 낮추는 무사처럼 무릎을 약간 꺾으
며 말했다.
"자, 저기 좀 봐. 자주 볼 수 있는 게 아니라구."
강물 저편에 커다랗고 파란 왜가리가 한 마리 서 있었다. 원래 큰 새였는데, 고개를 꼬고
있는 각도라든지 저물어 가는 태양 때문에 더욱 키가 커보였다. 물 위로 길게 드리워진 그
림자를 보면 비스듬하게 햇빛을 받고 서 있는 남자만큼이나 크게 보였다. 다리와 날개 끝이
강물처럼 검었다. 부리 끝은 검은색, 그 아래쪽은 노란색이었고, 공단이나 부싯돌 조각처럼
반짝였다. 그 왜가리는 아주 열심히 강물 속을 들여다봤다. 한쪽 발을 들고는 물이 다 떨어
지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잠시 서 있다가 오랜 고심 끝에 선택한 새로운 자리를 다시 밟으면
서 아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루비가 말했다.
"개구리나 물고기를 찾는 거예요."
하지만 물속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는 왜가리의 모습을 보면서 나르시스가 떠오른 아다
는 그리스 신화에 대한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루비에게 그 이야기를 간단히 들려 줬다.
"하지만 저 새는 자기 모습을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니야."
아다가 이야기를 마치자 루비가 말했다.
"저 부리를 봐. 날카롭게 보이지? 그게 저 새의 본능이야. 뭘 잡아 먹을까 생각하는 중이
라구."
두 사람이 천천히 강가 쪽으로 다가가자 왜가리는 고개를 돌리며 재미있다는 듯이 두 사
람을 쳐다봤다. 부리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다는 듯이 좁다란 얼굴을 살짝 움직였다. 아다는
왜가리가 자신의 생김새를 곰곰히 뜯어보는 것 같았다.
"여기서 뭐하니?" 아다는 왜가리에게 큰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그 표정을 보면 왜가리는
선천적으로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동물이었다. 몰려 다리기를 좋아하는 다른 새들과는 다른,
외로운 나그네. 아다는 왜가리 암컷과 수컷이 어떻게 만나 새끼를 가질 수 있을지 궁금해졌
다. 지금까지 보아 온 몇 안 되는 왜가리들은 모두 혼자였다. 방랑 생활을 하는 새들. 어디
에 있는지 그들은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왜가리는 두 사람이 서 있는 강가 쪽으로 다가와 진흙 위에 섰다. 10피트도 채 안 되는
거리였다. 왜가리는 고개를 약간 갸우뚱 하더니 손톱만큼이나 큰 비늘이 달린 검은 다리 한
쪽을 살짝 들었다. 아다는 진흙 위에 남은 이상한 발자국을 쳐다봤다. 고개를 들어 보니 왜
가리가 오랜만이라는 듯 아다를 쳐다보고 있었다.
왜가리는 천천히 날개를 폈는데, 마치 경첩과 지레와 크랭크와 도르래를 움직이는 듯한
모습이었다. 날개를 펴자 깃털과 살갗 밑에 숨겨져 있던 길다란 뼈들이 모두 선명하게 보였
다. 완전히 펼쳐진 넓은 날개를 보며 아다는 왜가리가 과연 나무 사이를 제대로 날아다닐
수 있을지 상상이 되질 않았다.
왜가리는 아다 쪽으로 한 걸음 다가와 커다란 날개를 한두 번 펄럭이더니 나뭇가지들 너
머로 높이 날아갔다. 푸드덕하는 날개짓과 바람. 그리고 땅과 그녀의 얼굴 위로 차가운 푸른
색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다는 왜가리가 사라질 때까지 하늘을 계속 지켜
봤다. 그리고는 집으로 놀러 왔던 친척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것처럼 손을 흔들었다. 그 새
가 무슨 뜻이었을지 궁금했다. 축복이었을까? 경고였을까? 영적인 세계에서 파견 나온 경계
병이었을까?
아다는 새 공책을 꺼내고 주머니칼로 목탄 연필을 뾰족하게 깎았다. 그리고는 진흙 위에
서 있던 왜가리의 모습을 빠르게 스케치했다. 목선과 부리의 각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다리와 깃털과 눈빛은 정확하게 묘사되었다. 그 페이지 아래쪽에 뭉툭하고 뻣뻣한 특유의
필체로 '푸른 왜가리, 피존 강 지류, 1864년 10월 9일' 이라고 적었다.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
보다가 루비에게 말했다.
"지금 몇 시쯤 됐을까?"
"다섯 시가 조금 지났을 거야." 루비는 서쪽으로 고개를 돌며 대답했다.
아다는 '다섯 시'라고 적고 공책을 덮었다.
강가를 따라 걸어가며 왜가리 이야기를 나누던 중, 루비는 왜가리와 자신이 사연 많은 관
계라고 털어놓았다. 루비가 어렸을 적에 스토브로드는 루비의 아버지가 인간이 아니라는 말
을 여러 번 했었다고 한다. 루비의 어머니가 임신중 술에 취해 화가 나면 남편을 약올릴 생
각에 아이의 아버지는 키가 크고 푸른 왜가리라고 했다는 것이다.
루비의 어머니 말로는, 어느 날 아침 왜가리가 개울가로 날아와 오전 내내 가재를 잡아다
그녀가 오래된 옥수수빵을 잘게 부수어 닭모이로 뿌리고 있던 마당으로 찾아왔다고 한다.
스토브로드는 그 왜가리가 길다란 뒷다리로 서서 루비 어머니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는데,
녀석의 목표는 뻔했다고 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루비의 어머니는 몸을 돌려 달아났지만 집
안까지 쫓아왔고, 침대 밑으로 숨으려고 엎드려 있는 사이 왜가리가 뒤에서 덥쳤다. 루비의
어머니는 그후 겁탈을 당하는 듯한 기분이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그 이야기를 수도 없이 되풀이했어. 거짓말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왜가리를
볼 때면 궁금해졌어."
아다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나지 않았다. 강가에 서 있는 나무 밑으로 내리쬐는 햇
빛은 황금색으로 변했고, 너도밤나무와 포플러나무 잎들이 소슬바람에도 몸을 떨었다. 루비
는 걸음을 멈추고 스웨터를 입었고, 아다는 외투 주름을 펴서 망토처럼 어깨 위에 걸쳤다.
두 사람은 계속 걸어가다가 여울 근처에서 체크 무늬 식탁보로 아이를 감싸서 어깨 위에
걸머지고 있는 젊은 여자를 만났다. 그 여자는 사슴처럼 우아하게 징검다리를 건넜고, 두 사
람 곁을 지나 가면서 말을 건네지도, 심지어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다. 아이는 머리 위에 얹
혀 있던 도토리 껍질과 색깔이 똑같은 갈색 눈으로 아무런 표정 없이 멀뚱멀뚱 두 사람을
쳐다봤다.
여울을 건너자마자 해묵은 들판에 혼자 서 있는 사과나무에 앉아 있던 작은 새들이 땅 위
로 낮게 날더니 숲속으로 사라졌다. 루비는 저물어 가는 태양이 정면에서 내리쬐고 있었기
때문에 눈이 부셔서 어떤 새인지 알 수 없었고 그저 추측만 할 뿐이었다. 일기예보를 예측
하는 면에서 보면 새의 종류까지 정확히 알 필요는 없었다. 새가 그런 식으로 날아간다는
것은 비가 더 내릴 거라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길을 좀더 올라가서 침례교 신자들이 세례식을 치루는 지점에 거의 도착했을 때, 불타는
듯 붉게 물든 단풍나무 위에서 흰털발제비가 떼지어 날아올랐다. 태양은 산등성이에 거의
닿을락말락 걸쳐 있었고, 하늘은 군데군데 얼룩진 백합꽃 색이었다. 흰털발제비들은 얼마 전
까지 앉아 있던 동그란 단풍나무 모양을 그대로 유지한 채 일심동체인 것처럼 하나가 되어
날아 올라갔다. 그러다 날개를 활짝 펴고는 바람을 맞으며 옆으로 비스듬히 날았다. 늘씬한
옆모습이 보였고 새들 사이사이로 은빛 하늘이 보였다. 그러더니 갑자기 신호라도 받은 것
처럼 쭉 뻗은 날개로 하늘을 가리며 위로 솟아올랐다. 붉은 단풍나무가 새까맣게 변해 하늘
을 찌르고 있는 것 같은 장면이었다. 길다란 풀밭 위로 새들의 그림자가 너울거렸다.
강물 속에 숨어 있던 어둠이 하늘을 향해 스며 나오는 것처럼, 주변에 슬금슬금 밤기운이
깔리기 시작했다. 왜가리와 출생에 얽힌 이야기를 루비에게서 듣고 난 아다는 돌아가시기
얼마 전 아버지가 해주신 이야기가 떠올랐다. 아버지가 어떻게 어머니에게 청혼했는지, 점점
어두워지는 길을 걸어가며 아다는 루비에게 이 이야기를 조금 들려 주었다.
아다는 아버지가 마흔다섯, 어머니가 서른여섯의 비교적 늦은 나이에 결혼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함께 지낸 날이 짧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
떤 연애 기간을 거쳐 결혼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었고, 다만 특이한 노총
각과 노처녀들이 흔히 그렇듯이 잔잔한 우정을 쌓다 백년가약을 맺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만
갈 뿐이었다. 그리고 슬프게도 계산을 잘못해서 자기를 낳게 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해 겨울, 어느 늦은 오후였다. 그날은 하루 종일 촉촉한 눈송이가
땅에 부딪치자마자 녹아 내리는 날이었다. 아다는 오후 내내 난롯가에 앉아 아버지에게 에
머슨의 새 책 <삶의 방식>을 읽어 드렸다. 아버지는 오랫동안 에머슨이 발표한 모든 책을
관심 있게 탐독해 오던 터였다. 그날도 에머슨이 예전부터 늘 그랬던 것처럼 노령에도 불구
하고 필요 이상으로 극단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을 했다.
창 밖으로 하루가 저물고 있을 무렵 아다는 책을 내려놓았다. 아버지는 눈이 푹 꺼진 피
곤한 얼굴로 천천히 재로 변해 가는 불꽃을 바라봤다.
"내가 어떻게 네 엄마와 결혼했는지 얘기한 적 없지?"
"네."
"요즘 들어 그때 생각이 자꾸 나는구나. 왜 그런지 모르겠어. 사실 우린 네 엄마가 열여섯
살, 내가 스물다섯 살이었을 때 처음 만났단다. 모르고 있었지?"
"네."
아버지는 처음으로 엄마와의 만남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래, 난 네 엄마를 처음 본 순간 정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단다.
2월이었지. 춥고 흐린 날이었고 약간 축축한 바닷바람이 불어 오고 있었어. 난 그때 말을 타
고 나갔단다. 멋진 하노버 말을 사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거든. 키도 무척 컸고,
짙은 밤색이었지. 무릎 힘줄이 약간 끊기기는 했지만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었어. 갈기가 바
람에 나부낄 때면 정말 멋졌단다.
나는 그놈을 타고 찰스턴을 나와서 애슐리 강을 따라 북쪽으로 미들턴까지 갔었지. 거기
서 해너핸을 거쳐 집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단다. 꽤 오랜 시간이 걸린 여행이었지. 서늘한 날
씨였는데도 말은 땀에 흠뻑 젖어 있었고, 난 배가 고파 저녁을 먹었으면 하는 생각밖에 없
었어. 아마 지금 이 시간쯤이었을 게다. 사방이 잿빛으로 어두워져 가고 있었으니까. 막 시
골을 빠져 나와서 시내로 들어섰을 때였어.
나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아담한 집으로 다가갔단다. 널따란 현관 양쪽으로 늙은 야자수
가 서 있는, 길가에 바짝 붙어 있는 집이었어. 창문은 캄캄했고 마당에 샘물이 하나 있더구
나. 난 그때 집안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고 말에게 물을 먹이려고 했지. 그때 현관에서 어
떤 여자가 이렇게 말하더구나.
"먼저 허락을 받으셔야죠."
창문 아래 놓인 벤치에서 혼자 앉아 있었나 봐. 나는 모자를 벗으며 죄송하다고 말했지.
그녀는 어두컴컴한 현관 계단을 걸어 내려 오더니 제일 아래 계단에서 걸음을 멈췄단다. 회
색 울로 만든 겨울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어깨엔 검은색 숄을 두르고 있었어. 머리카락은
흑단처럼 까만색이었단다. 머리를 빗고 있었는지 거북이 등껍질로 만든 손잡이가 달린 빗을
들고 있었고,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흘러 내려와 있더구나. 얼굴은 대리석처럼 창백했지... 모
든 게 검은색이나 흰색, 아니면 회색이었어.
초라한 옷차림이었지만 난 넋을 잃고 말았단다. 그렇게 예쁜 여자를 본 적이 없었거든. 얼
마나 아름다워 보이던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어. 난 그저 "아가씨,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만 정말 죄송합니다." 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지. 그리고는 당황해서 말 위에 올라
타고는 온통 머릿속이 뒤죽박죽된 채 길을 떠났단다. 그날 밤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었을
때 그 여자야말로 하늘이 내려 주신 배필이라는 생각이 들더구나.
그 다음날 청혼할 결심을 하고는 아주 조심스럽게 준비를 시작했지. 먼저 그녀에 대한 정
보를 수집했어. 이름이 클레어 데슈트 라는 걸 알아냈지. 아버지는 프랑스 사람으로, 프랑스
와 미국을 오가며 와인을 수입하고 쌀을 수출하는 일을 하고 있었단다. 큰 재산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였지.
난 쿠퍼 항 근처에 있는 그분의 가게에서 처음 만남의 자리를 마련했단다. 바다 냄새가
나는 축축하고 어두운 곳이었어. 고급 와인과 싸구려 와인이 들어 있는 나무상자와 쌀자루
가 줄줄이 놓여 있더구나. 예전에 데슈트 씨와 거래를 한 적이 있는 친구 애스웰이 중간에
서 소개했지.
네 외할아버지인 데슈트 씨는 키가 작고 뚱뚱한 분이었어. 비만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게다.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프랑스인에 가깝더구나. 네가 이 말 뜻을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모르겠다만, 너나 네 엄마는 그분의 특색을 전혀 닮지 않았지.
나는 처음부터 찾아간 목적을 분명하게 밝혔단다. 따님과 결혼하고 싶으니 승낙해 달라
고... . 친분 관계나 재정 상태를 알리는 등 사위로서 적합한 사람이라는 걸 알리기 위해 모
든 방법을 동원했단다. 마음속으로 이리저리 따져 보시는 눈치더구나. 넥타이를 잡아당기면
서 눈동자를 굴리셨거든. 애스웰을 한쪽 구석으로 데리고 가서 의논하기도 했어. 그러다 내
쪽으로 다시 돌아오셔서 손을 내밀며 "힘 닿는 데까지 도와 주겠네"라고 말씀하셨지.
하지만 그분은 한 가지 조건이 있다고 하셨어. 클레어가 열여덟살이 된 후에 결혼했으면
한다는 것이었지. 난 그 자리에서 좋다고 했어. 2년이라는 세월이 그다지 길게 느껴지지 않
았을 뿐더러 당연하신 말씀이라고 생각했어.
며칠 후에 그분은 손님 자격으로 나를 집으로 초대했고 저녁 식사를 함께 했단다. 직접
네 엄마에게 소개시켜 주셨지. 네 엄마는 내가 그날 밤 마당에서 봤던 남자라는 걸 알고 있
는 눈치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더구나. 나는 처음부터 네 엄마가 내 마음을 받아 들였다
고 믿어 의심치 않았지.
우리는 봄, 여름, 가을, 몇 달 동안 연애를 했단다. 네 엄마가 초청받을 수 있도록 주선해
서 파티장에서 만났지. 하노버 말을 타고 몇 번씩이나 데슈트 씨 집으로 찾아가기도 했어.
네 엄마와 나는 습기로 끈적끈적해진 여름 밤이면 넓은 현관에 있는 벤치에 앉아서 마음속
에 품고 있는 이야기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털어놓았단다. 내가 말을 타고 찾아갈 수 없을
때면 서로 편지를 주고받았지. 늦가을에 나는 반지를 만들었어. 네 새끼손가락 끝마디만큼이
나 커다랗고 푸른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는 백금 반지였단다. 11월 하순 어느 저녁 무렵에
그 반지를 선물해서 깜짝 놀라게 해줄 생각으로 말이야.
마음속으로 정해 두었던 날이 되자, 나는 땅거미가 깔릴 무렵 반지를 벨벳 주머니 안에
넣고 조끼 주머니에다 단단히 챙겨 하노비 말을 타고 북쪽으로 떠났단다. 찰스턴에서 지내
던 사람에겐 추운 겨울날이었어. 어느 면으로 보나 우리 두 사람이 처음 만난 날과 비슷했
지.
데슈트 씨 집에 도착했을 때 하늘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어. 하지만 집 안은 환하게 불
이 켜져 있었고 나를 환영하는 듯 모든 창문이 반짝이고 있었지. 안에서 바흐를 연주하는
피아노 소리가 들리더구나. 나는 잠시 동안 길가에 앉은 채 지난 한 해 동안의 노력이 결실
을 맺는다는 생각을 했단다. 손만 뻗으면 원하는 걸 모두 얻을 수 있을 것 같았었지.
그때 현관에서 나즈막하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어. 사람이 왔다갔다 하는 모습도 보였
고. 그때 노란 불빛이 새어 나오는 창문 너머로 클레어의 검은 그림자가 보이더니 몸을 앞
으로 숙이더구나. 분명히 클레어였어. 창문 저쪽에서 역시 어떤 사람이 앞으로 몸을 숙이더
구나. 남자였어. 두 사람의 그림자가 마주치더니 입을 맞췄지. 아주 길고 열정적인 키스였단
다. 얼굴이 서로 떨어지자 클레어가 손을 뻗어 남자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다시 앞으로 끌어
당기더구나. 난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지. 주먹을 움켜쥐었어. 현관으로 달려가 소리를 지르
면서 아무나 때려 눕히고 싶었지. 하지만 배신당한 애인이라는 수치스러운 역할은 하고 싶
지 않았어.
더 이상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나는 말에 박차를 가해 전속력으로 북쪽으로 달렸단다.
끝도 없이 계속 달렸지. 키가 큰 말은 다리를 힘껏 뻗으며 힘차게 내달렸어. 보통 말이 아니
라 날개 돋힌 말을 타고 있는 꿈속 같은 기분으로 컴컴한 세상을 뚫고 지나갔지. 떡갈나무,
소나무, 감탕나무숲을 지나고 바랭이와 참먹새가 나 잇는 뻥 뚫린 황무지를 지나 소귀나무
덤불이 길 양쪽을 잔뜩 덮고 잇는 지점에 다다르자 말이 걸음을 늧추더니 머리를 내리깐 채
숨을 거칠게 몰아쉬더구나.
거기가 어딘지 알 길이 없었어, 길을 꺾어 왔는지, 심지어는 어느쪽을 향해 가는지 방향조
차 제대로 몰랐으니까. 애슐리 강이나 쿠퍼 강을 만나 물에 빠지지 않았으니 대충 북쪽이라
는 것왜에는 알 수가 없었어, 희미한 달빛을 받으며 땀을 흘리고 있는 밤색말이 흑단처럼
새까맣고 윤기가 흐르는 것처럼 보였지.
미친 사람처럼 말머리를 서쪽으로 돌려 인적이 없는 텍사스 땅에 묻혀 살 생각이 없는
한, 집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어,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한 순간, 소귀나무 덤불
너머로 보이는 하늘이 횃불에 비친 것처럼 노할게 번쩍이더구나, 온 세상이 내 마음속처럼
활활 타오르는 것 같았어, 나는 그 불꽃이 길잡이 구실을 하는거라고 생각했지.
그 불빛이 있는 곳을 향해 길모퉁이를 한두 번 꺾었더니 화염에 휩싸인 교회가 보이더구
나. 지붕과 뾰족탑은 활활 타고 있었지만 건물 전체는 아직 괜찮았어, 나는 말에서 내려 교
회 안으로 들어가서 통로를 지나갔지. 호주머니에서 반지가 다긴 주머니를 꺼내 제단 위에
올려놓고는 역기와 불길에 휩싸인 채 서 있었어, 지붕이 떨어져 내리면서 불길이 옮겨 붙더
구나. '난 제단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신랑이야. 여기서 잿더미가 되어 버려야지' 하고 나는
생각했단다.
그때 한 남자가 뛰어 들어왔어, 엉망이 된 옷차림을 하고 술이 1인치 정도 남은 호박색
술병을 들고 있더구나.
"여기서 뭐하는 거요? 당장 나가요." 그 사람은 잃게 소리쳤단다.
나는 아마도 자존심 때문이었는지, "지나가다 도와드릴 일이 있나 하고 들어왔습니다"라
고 말했단다.
"글세, 나가라면 나가요." 그 사람은 다급하게 말했지.
그 사람은 취해 있었고 나는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였지만, 위는 함께 그 자리를 빠져 나
와 교회를 살려 보려고 애썼단다. 근처에 있는 개울에서 그 사람이 들고 있던 술병으로 물
을 떠 날랐지. 개울가에 쭈그리고 앉아 작은 주둥이를 통해 술병에 물이 가득 찰 때까지 기
다리고 나서 함께 교회로 걸어가 물을 뿌렸어, 정말 불을 끄겠다는 생각보다는 누가 물어
보면 불을 끄려고 노력했다는 대답을 하려는 정도의 생각이었을 거야, 새벽이 찾아오자 그
남자와 나는 검댕이 묻어 새까매진 얼굴로 검은 동그라미 자국을 쳐다봤지.
"결국 이렇게 됐군요. 경첩과 문 손잡이를 빼고는 모두 잿더미가 되고 말았어요," 그 남자
가 말했어.
"네." 내가 대답했지.
"하지만 우린 할 만큼 했어요."
"그럼요,"
"우리더러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고 욕할 수 잇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그럼요, 아무도 없구 말구요." 내가 말했지.
그 남자는 술병에 들어 있던 마지막 물을 시커멓게 그을린 풀위에 쏟아 부은 후 술병을
외투 주머니에 넣고 걸어가기 시작했단다. 난 말을 타고 찰스턴으로 돌아갔지.
일 주일 후 나는 영국으로 가는 배표를 예약했고, 그러고 나서 일 년 동안 낡은 교회와
그림을 감상하며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만 했지. 고향으로 돌아왔더니 네 엄마는 현관에서 봤
던 그 남자와 이미 결혼을 한 후였어. 네 외할어버지와 함께 일하는 프랑스인 와인 도매상
이었어. 네 엄마는 그 남자를 따라 프랑스로 떠나 버렸단다. 세상의 모든 문이 닫혀 버린 것
만 같았지
나는 예전부터 영적인 문제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집안일에서 손을 떼고는 반쯤은 체념
하는 듯한 심정으로, 또 반쯤은 기쁜 마음으로 성직자의 길을 택했단다. 그후론 내가 살아온
이 길을 한순간도 후회해 본 적이 없어.
19년이 흐른 어느 봄날, 클레어가 혼자서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남편이 세
상을 떠났다는 거야. 두 사람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고 소문은 들으니 그렇게 행복하지 못했
던 결혼 생활이었다더구나. 아니 끔찍한 결혼 생활이었다는 거야. 그 땅딸막한 프랑스 남자
덕분에 나의 이기적인 소망이 충족된 셈이었지.
이 소식을 들은 며칠 후에 나는 쿠퍼 항에 있는 가게를 찾아가 다시 데슈트 씨를 만났단
다. 그분은 이제 허리가 뚱뚱하고 턱살이 축 늘어진 노인이었고, 나는 머리가 벗겨지고 관자
놀이에 흰머리가 보이기 시작하는 나이였지. 그때 그분의 태도는 '거만'이라는 단어가 딱 어
울리는 태도였어. "뭘 도와 줄까?"라고 말을 했는데, 예전 같았으면 결투를 신청하게 만드는
말투였지.
"예전 과정을 다시 한 번 되풀이하죠. 이번에는 확실하게 할 생각입니다." 난 그렇게 말했
어.
그해 가을에 네 엄마와 나는 결혼을 했고, 2년 동안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
로 지냈단다. 그리고 네 엄마도 행복하게 해줬다고 생각한다. 첫 남편이었던 그 땅딸막한 프
랑스 남자는 모든 면에서 실망스런 존재였어. 아이가 없는 걸 네 엄마 탓으로 돌리며 점점
더 퉁명스럽고 딱딱하게 굴었다는구나. 나는 네 엄마가 받았던 모진 대접을 모두 변상해 주
는 걸 내삶의 목표로 삼았단다.
네가 세상에 태어날 날을 기다리는 시간은 과거의 상처를 안고 있는, 우리처럼 나이 든
부부에게는 낯설게 느껴지는 축복이었어. 네 엄마가 너를 낳다 세상을 떠났을 때, 나는 하나
님이 우리에게 너무하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단다. 난 몇 주 동안 아무것도 할 수
가 없었어. 친절한 이웃 사람들이 유모를 구해 줬고 난 침대에 드러눕고 말았지, 다시 일어
났을 때 나는 너를 위해 내 삶을 바치겠다는 결심을 했단다."
이야기가 끝나자 아다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버지의 의자 뒤로 다가가 아버지의 머리를 쓸
어넘기며 입을 맞췄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나지 않았다. 놀랍고도 충격적인 이야기였
다. 그때까지 아다는 자신을 어쩌다 잘못 태어난 아이쯤으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그녀는 많은 역경을 딛고 오랜 시간 동안 지속되어 언 한 열정의 소중한 산물이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야기를 아버지로부터 처음 들었을 때 아다는 새로운 사실을 쉽
게 받아들이지 못했었다.
아다의 이야기가 끝났을 즈음 주변은 거의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고 동쪽 구름 위로 달이
아련한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시커먼 새 한 마리가 달을 가로질러 날아갔다. 그러다 또 한
마리, 그 뒤로 여러 마리가 줄지어 날아갔다.
아다는 농병아리나 도요새같이 밤을 틈타 날아다니는 새들이 남쪽으로 가는 중일 거라고
생각했다. 벌은 아직 보이지 않았지만 서쪽으로 두 행성이 쪽빛 하늘 위에서 환한 빛을 밝
히며 콜드 마운틴 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저기 푸르고 가장 밝은 게 금성이야."
블랙 코브 농장으로 향하는 길로 접어들며 아다가 루비에게 말했다.
9.낯설지 않은 죽음
정오 무렵, 인만과 비시는 갓 베어 낸 커다란 히커리나무가 있는 길을 지나고 있었다. 나
무 옆으로 커다한 톱이 있었는데, 얼마 전에 갈았는지 날이 번들거렸고 녹슨 자국이 전혀
없었다.
"저것 좀 보세요, 누가 톱을 버리고 같네요. 저걸 팔면 얼마라도 생기겠죠?"
비시가 톱을 주으러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인만이 말했다.
"나무꾼들이 일하다 점심 먹으러 갔을 거야. 잠시 후 돌아와서 이 히커리나무를 또 톱질
하기 시작할걸?"
"전 모르는 일이에요. 길가에 톱이 하나 떨어져 있는 걸 봤다는 것 외에는."
비시는 톱을 주워 어깨에 짊어지고는 걷기 시작했다. 한 걸음 내대댈 때마다 양쪽 끝에
달린 나무 손잡이가 흔들거렸고, 톱날이 휭휭대며 유태인들의 하프 비슷한 소리를 냈다.
"맨 처음 만나는 사람한테 팔아야지." 비시가 말했다.
"다른 사람의 재산을 훔쳐 놓고도 정말 태연하군, 자네 같은 사람이 복음을 들먹이며 설
교할 때 좀도둑질에 대해서는 뭐라고 할지 정말 궁금하군."
"착각하지 마세요. 재산 면에서는 하나남도 별반 다를 바 없으니까. 하나님은 재산이라는
걸 대단치 않게 여기셨을 뿐더러 재산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계셨다는 사실이 성경 곳곳에
나타나 있다구요. 특히 불과 물을 사용하신 부분을 보세요. 불과 물을 사용하실 때 공평하셨
던 것 같던가요?"
"아니, 그렇다는 생각은 안 들었는데."
"그렇다니까요. 신학의 길을 택한 사람은 어떤 톱이 누구의 것인가 하는 건 별로 신경 쓸
수가 없다구요. 좀더 넓은 시각을 가지는 데 방해만 될 뿐이니까요."
"넓은 시각이라고?"
인만은 딱지가 앉은 비시의 머리와 몸집이 큰 창녀에게서 얻은 눈 밑 상처. 디프 강에서
권총에 맞아 생긴 자국을 쳐다봤다. 그렇게 매를 맞고도 넓은 시각이라는 말을 입에 담다니.
개다가 상처 하나가 아직 그대로 남아 있는데... .
"재가 억울하게 매를 맞았다는 말을 하는 건 아니에요. 게다가 저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더 심한 매질을 당한 경우도 있구요. 하지만 앞으로는 그렇게 쉽게 매를 맞지 않을 거예요."
비시는 방어네 대한 문제가 떠올랐는지 다시 이런 말을 꺼냈다.
"선생이 가지고 있는 그 굉장한 권총 좀 보여 주세요."
"안 돼."
에이, 망가뜨리지 않을게요."
"안 돼."
"총잡이용 무기로 괜찮을까 보기만 한다니까요."
"너무 크고 무거워. 그런 용도라면 네이비 권총이 적당하지. 콜트나 스타도 괜찮아. 가벼
워서 잽싸게 꺼낼 수 있으니까."
"그럼 제 총만이라도 돌려 주세요."
"헤어질 때까지는 내가 보관할 거야."
"갑자기 헤어질 수도 있잖아요, 그럼 저는 무기도 없는 상태가 된다구요."
"무기 없이 사는 게 더 좋아."
이윽고 길가 쪽으로 비스듬히 서 잇는 커다란 쥐엄나무가 나타났다. 두 사람은 음식이 다
떨어졌기 때문에 허리를 굽히고는 길다란 적갈색 꼬투리를 주머니 가득 주워 담았다. 그리
고 계속 길을 걸으며 엄지 손톱으로 꼬투리를 쪼개고 이빨로 문질러 달콤하고 하얀 과육을
먹었다.
잠시 후 길 아래 서 잇는 어떤 한 남자가 보였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며 고민하는
듯한 표정이었는데, 개울 속에 커다란 검은색 소 한 마리가 죽어 있었다. 그는 두 사람이 지
나가는 걸 보고 인사를 건네며 도움을 청해 왔다. 인만이 개울 쪽으로 내려 갔다. 비시도 톱
을 길가에 내려 놓고 따라 내려 갔다.
두 사람은 그 사람 옆에 서서 몸이 퉁퉁 불어 있는 소를 쳐다봤다. 개울물이 배를 덮고
있었고 입과 엉덩이에온통 파리투성이였다. 세 사람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맡게 된 일꾼처
럼 팔짱을 낀채 눈을 내리깔았다.
그 남자는 늙은 건 아니었지만 나이가 꽤 들어 보였다. 원숭이 에서부터 말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포유류 수컷들이 나이를 먹으면 그렇듯이, 배에 살이 많았다. 원뿔 모양의 검은색
울 모자를 쓰고 있었고, 날씨가 별로 춥지 않았는데도 삼끈으로 넓은 챙을 동여매 보닛처럼
귀를 덮고 있었다. 턱수염이 무성했고 동그란 입을 본 순간 인만은 전쟁 초 해안가에서 짧
은 전투를 겪었을 때 봤던 주먹코 생선의 숨구멍이 떠올랐다.
근처 나무 옆에는 총신 하나짜리 10인치 구경 엽총이 하나 세워져 있었다. 사정 범위를
더 넓히기 위해 총신을 짧게 자른 것 같았다. 엉뚱한 도구로 잘랐는지 총구 부분이 울통불
퉁했고 사선으로 자른 것처럼 비스듬했다.
"저놈을 어떻게 꺼낼 생각 이세요?" 하고 비시가 물었다.
이 말을 들은 그 남자는 대답없이 엄지와 검지로 집게 모양을 만들더니 바지 속으로 손을
집어 넣어 사타구니를 간지럽히고 있는 벌레를 잡았다. 그러고는 손을 꺼내 눈앞에 들이대
고 자세히 들여다보다가 누렇고 두꺼운 손톱으로 벌레를 찍 눌렀다. 커다란 손에는 하얗게
각질이 일어 있었다. 나자가 입을 열었다.
"이 소는 며칠 전에 길을 잃고 헤매다가 원인 모를 병으로 죽었다오. 이 개울물이 식수인
데, 물에서 시큼하고 고약한 맛이 나길래 이유를 알아보러 여기 까지 오게 된 거죠, 밧줄을
가지고 왔으니까 힘을 합하면 소를 끌어 낼 수 있을 것도 같은데... ."
인만은 그 남자와 비시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리고 덩치 큰 쇠를 쳐다봤다. 말이 ax 마리
는 있어야 소를 끄러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노력은 해보겠지만 소가 너무 큰데요.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는 편이 났겠네요" 하고 인
만이 말했다.
하지만 그는 인만의 말을 무시한 채 소 목에 밧줄을 걸었고 세사람은 밧줄을 끌어당겨 보
았다. 시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막대가 있으면 지렛대로 써서 끄집어 낼 수 있을 텐데."
'굳이 막대를 찾을 필요없어요. 입맛에 맞게 자르면 되니까. 저한테 좋은 톱이 있거든요.
이 일이 다 끝나고 나면 당신에게 파게요."
비시는 길 위로 올라가 톱을 들고 왔다. 처음으로 어른들과 함께 일을 해보는 소년처럼
흥분된 얼굴이었다.
인만은 이 아이디어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쓰러진 통나무 위에 걸터앉은 채
두 남자가 신나게 일하는 모습을 재미있게 지켜봤다. 다리를 만들라는 임무를 받고 열심히
일을 하긴 하지만 결국 엄청난 노력 끝에 하지 않은 것보다 못한 결과를 낳는 공병 대원들
이 생각났다.
인만이 지켜보는 가운데 비시와 그 남자는 두꺼운 막대를 세 개 잘라 냈다. 그리고는 곧
장 물이 종아리까지 와닿는 개울에 뛰어들어 커다란 바위를 받침대로 삼았다. 두 사람은 힘
을 합해 소를 들어 올리려 애썼지만, 아무리 막대에 힘을 쏟아도 황소는 축 늘어질 뿐이었
다. 막대 끝을 물속 깊숙이 넣어도 겨우 30샌티미터 정도 들어올릴까 말까였다. 두 사람이
지친 나머지 막대에서 손을 떼자 소는 다시 첨벙 소리와 함께 물속에 빠졌다.
"그래, 지렛대로 들어올리고 지레를 발로 밟은 상태에서 그 아래에 쑤셔 넣어야 해요. 그
런 식으로 차츰 받침대를 높여가는 거죠, 그렇게 반박하다 보면 굴릴 수 있을 거예요."
"한 번 굴려도 말 밖으로 꺼내지 못하겠는걸."
"그럼 두 번 굴리죠"하고 비시가 말했다.
"그럼 개울가까지는 오겠군. 그래도 거기서 썩으면 개울을 오염 시키기는 마찬가지요."
"세 번 굴리면 되잖아요."
비시는 지렛대의 원리와 자신이 하고 있는 역할에 흠뻑 빠져 있었다. 인만은 날이 어두워
질 때까지 두 사람이 소를 조금 들어올렸다가 바위를 잔뜩 쌓고 또 조금 들어올리는 모습을
상상해 봤다. 길을 걷거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시간을 몇 시간이나 낭비하는 셈이었다.
인만은 비시가 톱을 내려놓은 개울가로 걸어갔다. 그리고 톱을 집어 소가 있는 곳으로 가
서는 목에 톱날을 들이댔다.
"누가 저쪽 좀 잡아요."
비시는 몹시 실망한 얼굴이었지만 남자가 한쪽 끝을 잡았고 얼마 후엔 황소 머리가 잘려
나갔다. 그리고 또 얼마 후엔 앞다리가 달려 있는 가슴 부위가 잘려 나갔다. 그리고 또 잠시
추 뒷다리가 떨어져 나갔다. 배가 터지면서 내장과 시커먼 액체와 가스가 엄청나게 흘러 나
왔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비시는 허리를 굽히더니 개울에 대고 먹은 것을 게워 냈다. 쥐엄
나무 열매가 든 거품이 흘러 내려갔다.
그 남자는 비시를 보며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낄낄대며 웃었다.]
"비위가 약하시군."
"목사거든요. 이런 광경은 저 사람 직업이랑 워낙 거리가 먼 것이라서" 하고 인만은 대답
했다.
톱질이 모두 끝나자 개울은 조각난 소로 가득했다. 두 사람은 덩어리들을 개울 밖으로 꺼
내 멀찌감치 떨어진 땅 위에 올려 놓았다. 그래도 아직 피로 흥건한 물을 보며 인만은 샤프
스버그에 있던 개울을 떠올렸다.
"앞으로 며칠 동안 이물을 마시지 말아야겠네요."
인만이 말했다.
"네, 그래야겠지요."
남자와 인만은 위쪽의 깨끗한 물로 손과 팔을 씻었다.
"저녁 식사나 같이 하죠, 하룻밤 묵어 갈 수 잇는 건초칸도 있으니."
"저 톱을 가지고 가주시면 그렇게 하죠."
인만이 말했다.
"연방정부 돈으로 2달러 주세요."
비시가 고개를 꼿꼿이 세우며 말했다.
"그냥 드려, 거저 드리라구."
남자는 톱을 어깨위에 올려놓고 나서 서툴게 개조된엽총을 집어들었다. 인만과 비시는 그
남자를 따라 개울가 옆으로 난 길을 걸어갔다. 남자는 식수를 더럽히던 소의 시체를 치워서
기분이 좋은지 아주 재미있는 사람으로 변했다. 조금 걸어가다가 남자가 걸음을 멈추더니
손가락을 코에 갖다대며 눈을 찡긋했다. 그리고 눈높이쯤에 구멍이 뚫려 있는 커다란 참나
무 쪽으로 걸어가 구멍 안으로 손을 넣더니 마개가 닫힌 갈색 명을 하나 꺼냈다.
"필요할 때를 대비해 이 주변에 이런 비밀 장소를 몇 군데 마련해 두었소이다."
세 사람은 나무에 기대고 앉아 술을 마셨다 그는 주니어라고 자신의 이름을 밝히면서 젊
었을 때 이야기, 닭싸움꾼들과 함께 돌아다니던 시절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싸움질과 암
탉들을 못살게 구는 일밖에 모르던 도미니크라는 수탉 이야기도 했다. 그 닭은 몇 달 동안
물건을 던지기만 하면 휙 낚아챘다고 했다. 싸움에 서 질 것 같으면 야유를 보낼 때까지 앉
아 있다가, 야유가 절정에 달하면 상대편 닭 머리 위로 날아들어 온몸을 쪼아대서는 주변을
온통 핏자국과 깃털로 뒤덮이게 만들었다고 했다.
주니어는 이렇게 돌아다니던 시절 자신이 여자들에게 무척이나 인기 있었다고 말했다. 마
치 그 도미니크 싸움닭이 적을 덮치는 기세로 자기에게 달려들었다는 것이다. 그중 기억에
남는 여자는 닭싸움 대회 동안 일행이 묵고 있던 집의 안주인이었다고 했다.
그 여자는 주니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고 기회 있을 때마다 몸을 비벼댔다. 어느 말
남편이 쟁기질하러 나갔을 때 그 여자도 우물로 물을 길러 갔다. 여자가 물통을 잡느라 허
리를 숙였을 때 주니어가 뒤에서 덮쳐 여자의 치마를 올렸다. 그 여자는 속옷을 입지 않은
데다 엉덩이를 들어올리면서 까치발로 섰다고 한다. 주니어는 그렇게 우물가에 허리를 굽히
고 있던 여자를 취했고, 여자가 물통에 매단 줄을 다감아 올릴 때까지 일을 벌였다. 그러고
나서 싸움닭을 팔 위에 얹은 채 길을 떠났다. 그는 젊은 시절에 그렇게 꿈만 같던 순간이
자주 있었다고 했다.
"근사한 대접을 받은 게 한두 번이 아니지."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집 속에 술을 마셔 알딸딸하던 비시는 이야기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주니어가 이야기를
끝내자 와! 하는 감탄사를 내뱉으며, 남자란 모름지기 그렇게 살아야 한다며 떠들어댔다.
"싸움닭처럼 사는 것, 그게 제 목표예요."
그는 부러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니어는 자기한테는 떠돌아다니는 생황이 어울렸다면서, 결혼해 정착하자마자 문제가 생
기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결혼한 지 3년이 되었을 때 아내가 검둥이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
다. 부인이 아이 아버지를 끝내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복수조차 할 수 없었다. 이혼하려고
했지만, 판사는 그가 아내될 사람의 행실이 나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결혼했기 때문에 이
혼을 허락할 수 없다고 했다.
얼마 후 아내는 여동생 둘을 불러 함께 살기 시작했는데, 그들도 몸이 헤프다는 면에서는
언니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중 한 사람은 핏줄조차 알 수 없는 쌍둥이 아들을 낳았으니 말
이다. 게다가 두 아이는 이제 나이가 꽤 됐는데도 -몇 살인지도 정확히 모르겠다고 했다-
산돼지 한 쌍 외에는 관심을 가져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아이 엄마도 집안의 어느 누구
도 아직까지 이름을 지어 주지 않아서, 부를 때면 아이 쪽으로 엄지 손가락을 구부리며 너,
라고 한다는 것이다.
주니어는 결혼 생활을 해보니 차라리 열세 살짜리와 결혼해서 길들이며 사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밤마다 뜬눈으로 지새며 죽을 때까지 1분 1초가 먹구름 같은 생활을
하든가, 아니면 잠자는 틈을 이용해 한 명도 남김없이 목을 잘라 버리고 자신도 엽총으로
자살하든가, 그것도 아니면 숲속으로 달아나서 개에게 쫓기다가 너구리처럼 총을 맞고 죽는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을 하는 게 하루 이틀이 아니라고 했다.
얼굴을 환히 밝히고 주니어의 얘기를 듣던 비시는 이 말을 듣더니 풀이 죽었고, 잠시 후
주니어는 술병을 원래 자리에 숨겨 놓고는 톱을 들고 일어섰다. 길모퉁이를 한두번 꺾어들
자 저지대 습지에 있는 주니어의 집이 나타났다. 높은 널로 만든 커다란 집이었는데, 제대로
돌보지 않아 끝 쪽에서 초석 역할을 하고 있는 평평한 바위 더미가 무너져 있었다. 그 결과
집은 땅속으로 꺼져 가는 것처럼 한쪽으로 기울어진 형상이 되었다.
마당에는 껍질을 벗기지 안은 나뭇가지를 인동덩굴로 엮어 만든 피라미드 모양의 싸움닭
장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그 틈으로 깃털색이 화사한 닭들이 온세상을 적으로 여기는
듯한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보고 있었다. 굴뚝에서 하얀 연기가 새어 나왔고 집 뒤쪽 어딘가
에서 검은색 연기 기둥이 하늘 위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세 사람이 늪지대 쪽으로 내려가자 털이 듬성듬성 난 다리가 셋밖에 없는 테일러 종 비슷
한 개가 현관에서 몸을 일으키며 큰 소리로 짖었다. 그리고는 몸을 납작하게 내리깐 채 소
리없이 곧장 인만 쪽으로 달려왔다. 짖는 개보다 조용한 개를 더 조심해야 한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던 인만은 개가 덮치기 전에 부츠 앞쪽으로 개를 걷어 찼다. 뒤로 나가 떨어진
개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인만은 주니어를 보며 말했다.
"어쩔 수 없었어요."
"개가 도둑만 보고 짖는 건 아니니까" 하고 비시가 말했다.
주니어는 그 자리에 꼼짝않고 서서 쳐다보기만 했다.
마침내 그 개는 비실비실 일어나더니 비틀거리며 현관으로 돌아 갔다.
"죽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인만이 말했다.
"죽어도 그만, 살아도 그만이라오" 하고 주니어가 말했다.
집 안으로 들어간 세 사람은 부엌을 지나 식당으로 갔다. 주니어는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찬장에서 술병과 양철 컵 세 개를 꺼내 왔다. 바닥이 비탈길처럼 경사가 졌기 때문에 인만
은 테이블 앞에 놓인 의자에 앉으면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바닥을 꼭 밟고 있어야 했다. 굴
뚝 쪽에 있는 침대는 평행을 유지하도록 밑바닥을 괴기는 커녕 머리가 높은 쪽을 향하게 침
대를 돌려 놓았을 뿐이었다.
책과 신문에서 오려낸 그림들이 벽에 걸려 있었는데,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이
제각각 비뚤비뚤이었다. 난로 안에서는 불꽃이 연기를 피우고 있었고 숯불 위에 놓여 있는
냄비에서는 이상한 고기 냄새가 났다. 벽난로 역시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에 연기는 굴뚝이
있는 위로 올라가기 전에 먼저 난로벽과 부딪쳤다.
집안 모든 것의 축이 그렇게 삐딱하다 보니 병에 담겨 있는 술을 컵에 따르는 것도 힘들
어, 인만은 술을 따르면서 신발을 적셨다. 마침내 술을 따르는 데 성공해 한 잔 마시고 식탁
에 컵을 내려놓으면서 봤더니, 접시며 컵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자작나무 가지를 톱으로 잘
라 만든 작은 혹들이 못으로 박혀 있었다.
비시는 술을 홀짝홀짝 마시며 집 안을 위아래로 왔다갔다 하다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집 아래쪽에 지렛대를 끼워 넣으면 기울어진 걸 바로잡을 수 있을 텐데요."
비시는 머릿속에 온통 지렛대라는 물건 생각밖에 없는지, 인간에게 던져진 모든 수수께끼
를 해결할 수 있는 기계라도 발명한 것처럼 말했다. 잘못된 것마다 지렛대를 받치기만 하면
세상과 평행을 이루도록 똑바로 세울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그러 수도 있겠지요."
주니어가 말했다.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이렇게 지내다 보니까 이젠 익숙해졌어요. 평평
한 곳에서 살면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세 사람은 계속 술을 마셨다. 인만은 어제 저녁부터 쥐엄나무 열매밖에 먹은 게 별로 없
어 금세 취기가 돌았다. 비시는 술기운을 더욱 심하게 느끼는지 고개를 묘하게 꼰 채 컵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잠시 후 여덟 살이나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 아이가 걸어 들어왔다. 발목과 어깨가 가
느다란 조그만 아이였다. 얼굴은 짙은 크림색이었고 갈색 머리카락이 어깨 바로 아래에서
곱슬거렸다. 인만은 이렇게 예쁜 아이를 본 적이 없었다.
"엄마 집에 있냐?" 주니어가 물었다.
"네."
"어디 있지?"
"뒤쪽에 계세요. 방금 전에 나가셨는데."
비시는 고개를 들어 아래를 쳐다보더니 주니어에게 말했다.
"전 얘보다 피부가 까만 백인 이이도 본 적이 있는걸요, 왜 저애의 아빠가 흑인이라고 생
각하시죠?"
"아빠가 흑인이든 할아버지가 흑인이든 상관없소이다. 내 눈에는 검둥이 자식이라는 것밖
에 안 보이니까."
비시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침대 위에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이름이 뭐니?" 인만이 소녀에게 물었다.
"룰라요."
"아냐. 룰라라니."
주니어는 이렇게 말하며 소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제대로 말씀드려."
"엄마는 룰라라고 하셨어요."
"아니라니까, 그건 네 엄마가 지어 낸 창녀 같은 이름이지, 이집에서 이름을 짓는 사람은
나야. 네 이름은 채스티티(정숙이라는 뜻)라고."
"어느쪽이나 예쁜 이름이네요."
"내가 지은 이름에 비하면 룰라라는 이름은 쓰레기 같은 이름이올시다. 왜냐하면 그 이름
은 이 아이의 엄마가 어떤 창녀인지를 기억하는 뜻에서 지은 거니까."
그는 컵에 남아 있던 술을 마저 마시고는 밖으로 나가자고 말했다. 그리고 인만이 따라
나오는지 쳐다보지도 않고 현관으로 나가 흔들의자에 앉았다.
인만은 마당으로 나가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저녁 무렵이라 희미한 햇빛이 낮게 깔려 있
었고, 동쪽 하늘에는 조각달과 금성이 떠 있었다. 날씨는 건조하고 서늘했다. 인만은 가슴깊
이 숨을 들이쉬며 냄새와 감촉을 느껴보다가 문득 가을이 바로 코앞으로 다가왔음을 떠올렸
다. 시간의 바퀴가 또 한 눈금 움직였다는 게 느껴졌다.
"라일라."
주니어가 소리를 질렀다.
금세 젊은 여자가 집 뒤쪽에서 나와 인만과 주니어 사이의 현관 계단에 앉았다. 그녀는
무릎을 꼿꼿이 세우며 뭔가를 평가하려는 듯한 눈으로 인만을 쳐다봤다. 머리카락은 칙칙한
금발이었고 엉덩이가 컸다. 아주 얇고 오래되어 빛이 바랜 면드레스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양피지색 옷감 너머로 피부가 비칠 정도였다. 한때는 작은 꽃무늬가 있었던 모양이지만 지
금은 모두 희미해져셔 희미한 글자 같은 것이 수직으로 그려져 있는 것 같았다.
여자는 전체적으로 선이 둥글둥굴했고 치맛자락이 현관 계단에 걸려 있었기 때문에 햐얀
종아리가 훤히 드러나 보였다. 눈은 초롱꽃처럼 옅은 파란색이었다. 머리는 빗지 않앗는지
온통 헝클어져 있었다. 발은 맨발로 가시나무에 긁힌 자국투성이었는데, 뭔가 기묘한 분위기
를 잔뜩 풍기고 있었기 때문에 인만은 여자의 동그란 발에 진흙투성이 발가락을 더해 보면
서 발가락이 원래 다섯 개가 맞는지 확인해 볼 정도였다. 주니어가 주머니에서 옥수수 뼈와
진흙으로 만든 파이프를 꺼냈다. 쭈글쭈글한 담배 쌈지도 꺼냈다. 그는 파이프 속을 채워 입
으로 가져가면서 인만에게 담배 쌈지를 흔들어 보였다.
"황소 가죽으로 만든 거라오. 인간이 하나님보다 쌈지를 더 잘 만들 수는 없지요. 하나님
은 이런 물건들을 통해 인간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물건을 가지고 살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
의 권위를 외면한 채 본인이 직접 만든 허술한 도구들을 통해 발전해 나갈 것인지 시험하시
는 거죠."
그러더니 주니어는 젊은 여자를 보며 "불!"이라고 말했다.
여자는 소란스럽게 드레스 자락을 펼쳐들며 일어서더니 집 안으로 들어가 옥수수 깍지에
불을 붙여 가지고 나왔다. 그러고는 허리를 굽혀 파이프에 깍지를 갖다대면서 엉덩이를 인
만 쪽으로 삐죽 내밀었다. 얇은 드레스가 엉덩이 사이로 꼭 끼면서, 봉굿 솟아오른 양쪽 엉
덩이와 척추와 골반이 만나 움푹 패이는 지점이 선명하게 보였다. 드레스 아래 감춰져 있던
신체 구조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다. 인만은 외계인의 얼굴이라도 보고 있는 듯한 기분
이었다. 비록 기분나쁘게 생긴 얼굴은 아니었지만.
바로 그때 여자가 올빼미에게 붙잡힌 토끼처럼 몸을 꼬면서 비명을 질렀다. 집게 모양을
하고 있는 주니어의 손이 여자의 가슴에서 나오는 게 보였다.
"주니어!이 나쁜 자식." 여자가 소리쳤다.
라일라는 원래 자리로 돌아가 한 팔로 가슴을 꼭 끌어안은 채 계단 위에 앉았다. 주니어
가 담배를 피워대자 라일라는 팔을 내렸다. 드레스 앞쪽으로 까만 핏자국이 배어 나왔다.
주니어가 말했다.
"저 계집년들에게 먹을 걸 달라고 해요. 난 암말을 대리고 목초지로 내려가서 할 일이 있
어서 말이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 끝으로 가더니 바지를 내리고는 까마귀밤나무 덤불에다 대고
소변을 봤다. 용건이 끝나자 몸을 부르르 털며 바지를 다시 입고 나서 파이프 줄기를 문 채
담배를 피우고 노래를 부르며 마당을 가로질러 점점 희미해져 가는 길을 따라 걸어갔다. 인
만이 들은 가사는 이런 내용이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무지개를 보여 주셨지. 다음에는 물이 아니라 불이 찾아온다는 신호
로."
인만은 라일라를 따라 집 뒤쪽으로 갔다. 훈제실, 통조림 저장 창고, 냉동 창고, 닭장, 옥
수수 창고 등 바깥채가 가득 늘어서 있었다. 그 한가운데에 커다란 모닥불이 있었다. 높이가
라일라의 머리까지 와닿았고, 그보다 더 높이 불똥을 날리고 있었다. 밤이 슬금슬금 다가오
면서 잡초투성이 옥수수밭과 잘 손질된 콩밭 너머로 보이는 나무 위로 검은 그림자를 드리
웠다.
바로 옆에 채소밭이 있었는데, 가지각색으로 썩어 가고 있는 울타리의 뾰족한 끝 위로 힘
없어 보이는 까마귀들이 앉아 있었다. 노란 모닥불이 어둠 속으로 솟아오르면서 페인트칠이
안 되어 있는 바깥채 벽 위로 선명한 그림자를 만들었다. 하지만 머리 위로 보이는 하늘은
아직도 은빛이었고 별은 보이지 않았다.
"얘들아." 라일라가 소리를 질렀다.
훈제실에서 안색이 창백한 두 여자가 나왔는데, 라일라의 동생들임이 분명했다. 이목구비
가 너무 닮았기 때문에 세 쌍둥이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냉동 창고에서 까만 머리의
두 남자 아이가 나왔다. 모두 모닥불 쪽으로 다가오자 라일라가 물었다.
"저녁 준비 됐니?"
대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라일라의 동생 중 한 명이 모닥불 근처에 놓여 있던 질
그릇 항아리를 한쪽 팔로 감싸안고 들어 올려 꿀걱꿀꺽 마셨다.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한 사
람씩 마시고 나서 차례가 돌아오자, 인만은 집에서 만든 싸구려 술이 들어 있을 거라고 예
상했었지만 지금까지 마셔 본 술과 맛이 전혀 달랐다. 기름진 땅과 나무에서 자라는 곰팡이,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약효를 지니고 있는 동물의 분비물에서 추출한 물질을 섞어 놓은 듯
한 맛이었다. 그 항아리는 몇 번씩 돌아갔다.
여동생 중 한 명이 모닥불을 등진 채 살금살금 다가가 드레스 자락을 바짝 잡아당기고는
몸을 구부려 엉덩이를 불 쪽으로 내밀더니 기쁨이 넘쳐나는 푸른 눈으로 인만을 쳐다봤다.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가슴이 얇은 옷을 찢고 튀어 나올 것만 같았다. 인만은 무슨 이런 매
춘부 소굴이 다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다른 여동생은 한 손을 둥글게 오무려 사타구니 부분을 덮더니 옥수수밭을 쳐다보다가
훈제실 안으로 뛰어들어가 나무 살이 달린 갈퀴를 들고 나왔다. 그녀는 모닥불 가장자리에
흩어져 있는 재를 쓸어 모으고 새까맣게 탄 옥수수 껍질을 뒤집기 시작했다. 두 남자 아이
는 재미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잠시 쳐다보다가 한 아이가 앞으로 다가가며 높낮이가 없는
목소리로 '밀가루 반죽 덩어리'라고 말했다.
두 아이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움푹 꺼진 눈으로 아무말 없이 모닥불 주변을 뱅
뱅 맴돌 뿐이었다. 발을 질질 끌면서, 모닥불이 이글거리고 있는 주위를 발자국으로 어떤 무
늬를 그리려는 듯이 계속 돌았다. 말을 걸어도 둘 다 대답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말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눈도 깜빡이지 않았기 때문에, 인만은 한 아이가 모닥불에 대고 한 말 외에
는 아는 단어가 없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세 자매가 옥수수 껍질을 쪼개기 시자하자 시원한 밤하늘 위로 김이 솟아올랐다. 껍질을
모두 벗기자 머리가 큰 난쟁이를 닮은 검은 빵 여섯 덩어리가 들어 있었는데 볼록 솟은 배
까지 난쟁이와 닮은 꼴이었다. 여자들이 껍질을 모닥불 속으로 던지자 활활 타오르다가 단
숨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당신이 오실 줄 알고 있었어요." 라일라가 말했다.
두 여동생이 남자애들에게 빵을 한 덩어리씩 건네줬다. 두 아이는 주먹만큼이나 빵을 크
게 뜯어 입 안으로 쑤셔 넣었다. 빵을 다먹고 난 후에는 희미하게 남아 있는 발자국을 따라
또다시 모닥불 주위를 뱅뱅 돌기 시작했다.
인만은 두 아이를 보며, 도대체 뭘 남기려는지 열심히 쳐다뫘다. 그 발자국 모양 안에 놓
쳐서는 안 될 표시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금 보고 있다 포기하고 말았다.
아무리 쳐다봐도 도무지 의미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두 여동생은 남은 빵 세 덩어리를 들고 집으로 들어갔다. 라일라가 인만 옆으로 다가와
섰다. 그러더니 인만의 어깨 위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참 키가 크기도 하지."
안만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 잠시 후 돈과 르매트 총
이 들어 있는 양식자루를 발치에 내려 놓았다. 사방이 이제 완전히 캄캄해졌다. 저 멀리 산
허리에서 노란 불빛이 나무 사이로 흔들거리면서 한 순간에는 뿌옇고 흐리게 보이다가 또
어느 순간에는 밝고 또렷한 점으로 보였다. 그 모습이 너무 이상했기 때문에, 그는 불빛이
실제 그렇게 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시의 눈이 이상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저건 뭐죠?" 인만이 물었다.
라이라가 불빛을 잠시 쳐다보더니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오늘 밤에는 작네요, 달처럼 클 때도 있는데... . 제가 어렸을 때 주니
어가 저 산허리에서 어떤 남자를 죽였어요. 개도 같이요. 손도끼로 남자와 개의 머리를 쪼개
고 나서 히커리나무 등걸 위에 나란히 올려놓았죠. 모두들 가서 구경했었죠. 남자 얼굴은 검
둥이처럼 시커멓게 변해 있었고, 눈빛이 재미있더라고요. 그후부터 밤에 불빛이 나타나 움직
일 때가 있죠. 저기에 막상 가보면 아무것도 안 보여요. 하지만 늙고 퍽퍽한 암소 엉덩이처
럼 뭔가가 몸을 비벼댈 거예요."
"그 사람을 왜 죽인 거죠?"
"이유를 말한 적이 없어요. 성깔 있는 사람이거든요. 게다가 몸이 날렵하죠. 자기 엄마를
총으로 쏴서 죽이기도 했는걸요. 자기 말로는 앞치마를 두르고 있어서 백조인 줄 알았다지
만, 그게 어디 말이나 되는 소리예요?"
"이 근방에선 백조가 보이지 않던데요."
"누가 아니래요."
불빛은 푸른색으로 날카롭게 변하더니 빠르게 나무 사이를 왔다갔다 하며 깜빡였다. 그러
더니 갑자기 사라졌다.
"저 불빛의 정체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인만이 물었다.
"하나님이 성경에서 분명히 말씀하신 바에 의하면, 죽은 사람은 머릿속에 생각을 담아 두
지 못한대요, 모든 생각이 날아가 버린다는 거죠. 그러니까 그머리가 잘린 남자는 아니에요.
사람들의 말처럼 유령개가 머리에 전등을 달고 다니는 것 같아요. 물론 아닐수도 있지만. 늙
은이들 말로는, 예전에는 지금보다 유령이 더 자주 보였답니다."
라일라는 인만을 한참동안 물끄러미 쳐다보고는 그의 팔을 문질렀다.
"당신은 어느 편이죠?"
"난 그 어느쪽도 지지하지 않아요" 하고 인만이 말했다.
"와서 저녁 먹어." 여동생 하나가 뒷문 현관으로 나와 소리를 질렀다.
인만이 양식 자루를 둘러매고 현관으로 걸어가자, 라일라가 인만의 어깨와 팔 너머로 가
죽끈을 벗기더니 배낭 옆으로 양식 자루를 내려 놓았다. 인만은 양식 자루를 내려다보며, 이
러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더 이상 생각을 정리할 수가 없었다.
라일라와 그녀의 여동생이 집으로 걸어가는 동안 인만은 현관에 쌓여 있는 통나무 더미
사이로 양식 자루를 쑤셔 넣었다. 그러고는 두 여자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이 아
까보다 훨씬 더 크게 보였다. 페인트칠이 되어 있지 않은 널빤지 벽으로 둘러싸인 비탈길
같은 복도를 걸어거던 인만은 힘이 풀려 금방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어두컴컴한 집 안은 양쪽 벽에 문이 달린 작은 방이 수도 없이 늘어서 있는 황량한 미로
처럼 느껴졌다. 인만과 라일라는 제멋대로 놓여 잇는 듯한 방들을 지나 마침내 작은 혹들이
박혀 있는 테이블이 있는 기울어진 거실로 들어갔다. 비시는 굴뚝이 있는 한쪽 구석에서 시
체처럼 잠을 자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서 램프 하나가 연기를 피우며 벽, 바닥, 식탁보를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라일라가 인만을 테이블 상석에 앉히며 목에 체크 무늬 냅킨을 묶어 줬다. 테이블 가운데엔
아까 모닥불에서 꺼낸 빵 한 덩어리가 냅킨 위에 얹혀 있었다.
여동생이 벽난로에서 접시를 들고 왔는데, 맑은 기름 국물 속에서 고기 뼈 하나가 떠 있
었다. 무슨 고기인지 알 수가 없었다. 돼지고기라기에는 너무 크고, 쇠고기라기에는 색깔이
너무 옅었다. 끝이 공처럼 볼록하게 튀어나온 뼈로, 양쪽 끝에 고깃덩어리가 붙어 있었고,
허연 근육과 인대가 고기 사이사이로 엉켜 있었다. 여동생은 인만 앞에 접시를 내려 놓고는
요리용 숟가라으로 꾹꾹 눌렀다. 테이블 위에는 녹슨 나이프밖에 없었다. 인만은 나이프를
집어들고 라일라를 쳐다봤다.
"우리 집에는 고기용 포크가 없어요" 하고 라일라가 말했다.
인만은 왼손으로 뼈를 잡고 뜯고 또 뜯었지만 이빨 자국조차 남지 않았다.
세 여자는 식탁에 앉아 인만의 행동을 지켜봤다. 함께 모여 앉아 있는 모습이 축축한 암
매꽃 더미에서 흘러나오는 것처럼 색정적인 냄새를 풍겼고, 썩은 고기에서 풍기는 악취를
능가할 정도였다. 라일라는 인만 옆으로 다가오더니 어깨에다 대고 배를 문지르다 이번에는
발꿈치를 세워 얇은 드레스에 가려진 사타구니를 비벼댔다.
"미남이시네. 뭐가 파리를 부르는 것처럼 여자들이 잔뜩 꼬이겠어" 하고 라일라가 말했다.
그러자 여동생 하나가 인만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
"신음소리가 터져 나올 때까지 날 꼭 끌어안아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남자는 내 거야, 넌 그저 구경이나 하라구."
라일라가 말했다. 인만은 몸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아직도 고기 뼈를 뜯고는 있었지만 팔
이 무거웠다. 램프 불빛이 어두운 방안에서 이상하게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인만은 아까 그
질그릇 항아리를 떠올리며 그 안에 들어 있었던게 무엇이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라일라는 고기 뼈를 들고 있던 인만의 기름 묻은 왼손을 잡아 자신의 치마 속으로 집어넣
어 허벅지 위에 올려 놓았다. 속옷을 입지 않고 있었다.
"저리 썩 꺼져 버려."
라일라가 말하자 여동생들은 복도 쪽으로 걸어 나갔다. 한 명이 문가에서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언니는 목사님이 하신 말씀 그대로야. 언니의 교회가 서있는 믿음의 반석이란 바로 남자
의 그것이니까."
라일라는 엄지손가락으로 고기가 담긴 접시를 이쪽으로 밀었다. 숟가락을 떨어지면서 회
색 고깃국물이 테이블 끝까지 흘러내려 바닥으로 똑똑 떨어졌다. 라일라는 테이블 위에 걸
터앉으면서 양쪽 다리를 벌리고 맨발을 인만이 앉아 있는 의자 팔걸이 위에 얹었다. 치마를
허리까지 걷어올리고 팔꿈치에 기댄 채 뒤로 누우면서 물었다.
"어때요? 맛 괜찮아요?"
'고기 맛이 다 그렇지 뭐.' 인만은 생각했지만 말이 나오진 않았다.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정신이 없었다. 허연 허벅지와 그 위로 입을 벌리고 있는 계곡에 기름 손자국이 묻어 있었
다. 그 계곡은 살에 구멍이 뚫린 것에 불과 한데도 아주 황홀하게 보였다.
"다른 음식도 드릴게요."
라일라는 이렇게 말하며 드레스에서 어깨를 꺼냈다. 항아리 주둥이만큼이나 넓고 둥그런
젖꼭지가 달린 젖가슴이 쏟아져 나왔다. 라일라는 몸을 앞으로 숙이며 인만의 머리를 가슴
사이로 가져갔다.
바로 그때 문이 열리면서 한 손에는 횃불을, 한 손에는 엽총을 들고 있는 주니어가 들이
닥쳤다.
"이게 무슨 짓들이야?"
인만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주니어는 그를 향해 엽총을 겨누며 노새 귀만큼이나
길고 뾰족한 노리쇠를 잡아당겼다. 짧은 총신 끝에 달린 구멍이 까맣고 커다랗게 보였다. 그
구멍에서 총알이 나오면서 한쪽 벽면이 거의 전부 날아갈 것 같았다. 라일라는 테이블 옆으
로 내려서면서 드레스를 잡아당겨 원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이런 곳에서 죽는다면 기분이 정말 더럽겠군.' 하고 인만은 생각했다.
오랜 침묵이 흘렀다. 주니어는 송곳니를 혀로 빨며 선 채로 뭔가를 열심히 쳐다보다가 입
을 열었다.
"이곳에 진통제 따위는 없다는 걸 알게 될 거야."
인만은 테이블 앞에 앉은 채 총구를 쳐다보며 생각했다.
'뭔가 조처를 취해야 할 텐데. 뭔가 방법이 있을 텐데.'
하지만 그 방법이 무엇인지 떠오르질 않았다. 머리가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버린 기분이
었다. 식탁보 위에 놓여 있는 손을 쳐다보자 쓸데없는 생각이 들었다. '손이 아버지를 닮았
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안 그랬는데.'
주니어가 말했다.
"내 마음에 들게 이 사태를 해결하는 길은 두 사람이 결혼하는 방법밖에 없어. 아니면 죽
어 주든지."
그러자 라일라가 말했다. "아이, 좋아라."
"잠깐만요." 인만이 말했다.
"잠깐만? 잠깐만이라는 말을 하기에는 너무 늦었어."
주니어는 비시가 누워 있는 구석 자리를 쳐다보더니 라일라에게 말했다.
"가서 저놈 깨워."
"잠깐만요."
인만이 다시 한 번 입을 열었지만 더 이상 말을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마음과는 달리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앞뒤가 안 맞고 뒤죽박죽이었다. 인만은 모닥불 옆에 있던 항아리
속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 또다시 궁금해졌다.
라일라는 구석으로 걸어가 몸을 구부리며 비시를 흔들어 깨웠다. 잠에서 깨어난 비시는
눈앞에 커다란 젖가슴이 있는 것을 보고는 새로운 세상을 만난 것처럼 황홀한 표정을 지었
다. 적어도 엽총 구멍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제 가서 다른 계집년을 데리고 와."
주니어는 이렇게 말하며 라일라 쪽으로 걸어가 뺨을 때렸다. 라일라는 점점 빨개져 가는
뺨을 손으로 가리며 밖으로 나갔다.
"할 일이 하나 더 있지." 주니어가 인만에게 말했다.
"일어나."
인만은 일어서긴 했지만 다리가 후들거려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 주니어는 인만에게 총
을 겨누고 비시에게 걸어가 그의 외투깃을 잡아 일으켜 세운 다음 천천히 가운데로 걸어 나
오게 했다. 주니어가 외투깃을 너무 높게 잡아채는 바람에 비시는 살금살금 걸어가는 사람
처럼 발 끝으로 걸을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이 한 자리에 모이자 주니어는 울퉁불퉁한 총
신 끝으로 인만의 엉덩이를 쿡쿡 찔렀다.
"내가 누굴 데리고 왔는지 저쪽 좀 보시지."
인만은 물속에서 움직이는 사람처럼 부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천천히 현관으로 걸어갔다.
컴컴했긴 때문에 길가에서 뭔가가 움직이고 있는 것만 희미하게 보일 따름이었다. 말이 콧
김을 내뿜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의 기침 소리도 들렸다. 말발굽이 돌을 밟는 소리도 들렸
다. 휙 불똥 튀는 게 보이더니 횃불이 활활 타올랐다. 횃불이 또 하나 타오르면서 이글거리
는 노란 불빛이 비치자 시민 자위대가 보였다. 그 뒤로 고개를 푹 숙인 남자들이 밧줄에 묶
인 채 어둠 속으로 꼬리를 물고 있었다.
"내가 여기서 잡은 놈이 네가 처음은 아니지. 탈영병을 한 놈씩 넘길 때마다 5달러씩 받
거든." 주니어가 인만에게 말했다.
"자, 이제 출발해도 되겠소?" 말을 타고 있는 남자들 중 한 사람이 말했다.
하지만 그들은 한 시간 후에도 출발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른 죄수들을 연결한 밧줄에 인
만과 비시를 묶고는 훈제실 벽에 등지고 한 줄로 세웠다. 밧줄에 묶인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체처럼 맥없이 훈제실 벽 쪽으로 걸어갈 뿐이었다. 군인에서 탈영병으로, 그
리고 이제는 또 죄수로 이어지는 생활을 하느라 지쳐서 모두들 멍한 눈으로 발을 질질 끌며
걷다가, 벽에 등을 대자마자 입을 벌린 채 코 한 번 골지 않고 잠들었다. 하지만 인만과 비
시는 밤이 깊어 가는 동안 뜬눈으로 서 있었다. 이따금씩 느슨해질 기미가 없는지 손을 묶
고 있는 밧줄을 비틀어 보기도 했다.
시민자위대는 말을 귀 높이까지 활활 타올라 건물 벽 위로 눈부신 빛과 그림자를 만들 때
까지 모닥불을 키웠다. 모닥불 때문에 별빛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고, 컴컴한 하늘 위로 불기
둥이 솟아올랐다. 이 모습을 본 인만은 별들이 좀더 정감 넘치는 세상을 비추러 다들 떠나
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허리춤에서 유령개가 달고 다닌다는 횃불이 호박처럼 주
황색으로 빛나며 나무 사이로 깜빡였다.
인만은 고개를 돌려 모닥불을 쳐다봤다. 그 앞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왔다갔다 하더니 잠
시 후 시민자위대원 중 한 사람이 바이올린을 꺼내 들고는 줄을 튕기며 음을 맞췄다. 음이
다 맞자, 만족스런 표정으로 활을 잡고 웅얼웅얼거리듯이 간단한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같은 소절이 계속 반복되는 곡이었는데, 춤을 추기에도 적합한 것 같았고 오래 듣다 보면
넋을 잃을 것 같기도 했다. 모닥불 주위에 앉아 있던 보초들은 엉덩이를 들썩들썩하면서 항
아리나 대접을 꿀꺽꿀꺽 들이켰다. 그러다 잠시 후에는 모닥불을 뱅뱅 돌며 춤을 췄는데, 라
일라나 여동생들과 짝을 이루어 땅 위에 어지러운 발자국을 남겼다.
"그때 그 빌어먹을 헛간이나 여기나 별 차이가 없네요."
비시가 말했다.
"아직 돈 달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는 점만 빼놓으면 말이죠."
라일라나 여동생들을 차지하지 못한 남자들은 혼자서 춤을 췄다. 허리를 구부린 채 껑충
껑충 뛰거나 쪼그리고 걸으면서 모닥불을 뱅글뱅글 돌았고, 이에 따라 얼굴도 발을 쳐다보
거나 뒤로 젖혀져서 깜깜한 하늘을 쳐다봤다. 이따금씩 노래에 취해 부상이라도 당한 것처
럼 비명을 지르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이 숨을 몰아쉬며 춤추기를 끝내자 술에 얼큰하게 취
한 주니어가 나타나 인만과 라일라의 결혼식을 주선했다.
"내가 집으로 들어왔더니 저 키 큰 놈이랑 라일라가 그 짓을 막 시작하려는 찰나가 아니
겠어? 저 둘을 결혼시켜야 한다구." 주니어가 말했다.
"결혼을 시키려면 목사가 있어야 하는데, 당신은 목사가 아니잖아." 시민자위대 대장이 말
했다.
"아, 저 조그만 놈이 목사라는군." 주니어가 비시를 보며 말했다.
"그래? 전혀 목사 같이 안 보이는데?"
"증인이 되어 주겠나?"
"그럼 증인이 되어 주면 우릴 보내 주겠소?"
그들은 인만과 비시를 끌고 나와 밧줄을 풀어 주고 나서 총을 겨눈 채 모닥불가로 끌고
왔다. 세 여자와 까만 머리의 두 소년이 기다리고 있었다. 옆에서 구경하고 있는 시민자위대
들의 그림자가 벽 위로 크게 흔들렸다.
"이쪽으로 와."
주니어가 말했다. 인만은 라일라 쪽으로 발을 내딛으면서 아까 머릿속에서 뱅뱅 맴돌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떠올랐다.
"하지만 저 여자는 이미 결혼한 몸이잖아요."
"법률적으로는 그렇지. 하지만 하나님이나 내 눈으로 보기에는 안 그래. 이쪽으로 오라니
까."
인만은 할 수 없이 라일라 옆으로 가서 섰다.
"야유, 멋져라." 라일라가 말했다.
그녀는 머리를 목덜미 부근에서 하나로 묶어 쪽을 지어 놓은 차림새였다. 얼굴은 화장을
한 흔적이 있었지만, 왼쪽 뺨에는 아직도 주니어에게 맞은 손자국이 남아 있었다. 옥수수밭
울타리 근처에서 따온 메역취와 버들엉겅퀴로 만든 꽃다발을 꼭 쥐고 있었다. 그리고 기쁘
다는 듯이 발가락으로 땅바닥에 작은 원을 그렸다. 주니어와 비시가 옆에 섰다. 엽총이 비시
의 척추 끝을 겨누고 있었다.
"내가 말하면 너는 그렇지, 하고 맞장구를 치면 되는 거야. 알겠지?" 주니어가 비시에게
말했다. 주니어는 턱에 묶여 있던 끈을 풀고 모자를 벗어 땅바닥에 내려 놓았다. 가는 머리
카락이 듬성듬성 머리를 덮고 있었는데, 머리카락이라기보다는 항문 주변에 나 있는 털에
가까웠다. 그는 팔로 엽총을 끌어안은 채 자세를 가다듬더니 거친 목소리로 결혼 축하 노래
를 부르기 시작했다. 노래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딱딱하고 음울하고 음산한 가락이 귀에
거슬렸다. 인만이 알아들은 바로는 죽음의 필연성과 삶의 어쩔 수 없는 귀결이 가사 내용이
었다. 두 사내 아이는 이미 노랫가락을 알고 있다는 듯이 발장단을 맞췄다.
노래를 끝낸 후에 주니어는 주례사를 시작했다. '책임감' '죽음' '질병'이라는 단어가 제일
많이 들렸다. 인만은 산허리로 눈을 돌렸다. 유령불이 다시 나무 사이로 움직이고 있었다.
인만은 그 불이 여기까지 날아와 자기를 어디론가 멀리 데려가 줬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결혼식이 끝나자 라일라는 불 속으로 꽃다발을 던지고는 인만을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인만의 양쪽 다리 사이로 허벅지를 들어올리더니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안녕, 잘 가요."
시민자위대가 옆으로 다가와 인만의 머리에 권총을 들이대며 말했다.
"지금이야 새 마누라라지만 내가 방아쇠를 당기고 나면 저 여자는 신바람이 나서 네 놈의
골을 푹푹 떠서 냅킨에다 담을걸?"
"당신들, 정말 이해 못할 족속들이로군."
인만은 이렇게 말했다. 시민자위대는 인만과 비시를 다른 남자들과 함께 밧줄에 묶고는
동쪽으로 길을 떠났다.
인만은 꼬리가 긴 망아지처럼 열다섯 명의 남자들과 함께 길다란 밧줄에 묶인 채 며칠 동
안 계속 길을 걸었다. 인만의 바로 앞에 묶여 잇던 비시는 뜻밖의 불행에 놀랐는지 고래를
푹 숙인 채 터벅터벅 걸었다. 행렬이 출발하거나 멈출 때마다 비시는 묶여 있던 손이 앞으
로 휙 잡아당겨졌기 때문에 마치 갑자기 기도를 올리는 사람처럼 보였다.
앞쪽에 묶여 있는 사람들 중에는 수염이 하얗게 세었을 정도로 나이를 먹은 사람도 있었
고 이제 막 사춘기를 넘긴 듯한 청년도 있었는데, 모두들 탈영병이거나 그 동조자로 낙인
찍힌 사람들이었다. 집에서 짜만든 옷을 입고 있는 시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모두들 감
옥에 갇히거나 전쟁터로 다시 끌려가겠지.' 인만은 생각했다.
가끔 시민자위대를 불러 변명을 늘어 놓으며 자신은 시민자위대가 생각하고 있는 그런 사
람이 아니라고,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손이 묶
여 있지 않고 도끼만 있다면 시민자위대를 머리 꼭대기에서 사타구니까지 딱 절반으로 잘
라, 그 위에 소변을 보고 나서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며 혼자 중얼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흐
느껴 울면서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풀어 달라고 애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처럼, 분명 이 포로들도 별다른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게
될 것이다. 이들을 모두 땅에 묻고 나서 참나무 판자에 칼로 이름을 새겨 땅 위에 꽂아 두
면, 널빤지의 글씨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지워지면서, 이들의 비열했던 행위나 친절했던 행
위도, 비겁했던 행위나 용감했던 행위도, 이들의 두려움이나 희망도, 얼굴 생김새까지도 모
두 흙 속에 묻혀 버릴 것이다. 이 때문에 이들은 예전에 살다 간 모든 사람들의 짐을 짊어
지고 있는 것처럼 허리를 숙인 채 걸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인만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묶여 있는 것도 무기가 없는 것도 싫었고, 무엇보다도 원하는
곳과 정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는 것이 싫었다. 동쪽을 향해 한 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나락의
구렁텅이로 빠지는 것처럼 가슴이 쓰라렸다. 몇 마일이 지나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조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인만은 자신의 참담한 심정을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기 때문
에 정면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침을 뱉을 뿐이었다.
죄수들은 며칠 동안 거의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하루 종일 걷기만 했다. 어느 날 오후
한 시민자위대가 심심했는지 행렬을 따라 걸어가며 총으로 사람들의 모자를 쳐서 땅바닥에
떨어뜨리고는 허리를 굽혀 모자를 주으려는 사람이 있으면 개머리판으로 내리쳤다. 그들은
마치 발자국처럼 길 위에 검은 모자 열다섯 개를 남겨 놓은 채 계속 걸어가는 수밖에 없었
다.
먹을 거라고는 주는 법이 없었고 음료수라고는 개울을 만날 때마다 떠마시는 물밖에 없었
다. 특히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점점 기운이 빠져 소총으로 쿡쿡 찔러도 걸을 수 없을 정도
가 되자 그들은 오래된 옥수수빵을 잘게 부숴 버터밀크와 섞은 죽을 이들에게 나눠 주었다.
간신히 허기를 달래고 나서야 그들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두 다른 사람들처럼 고생을 하다가 재수 없는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기
면서 이렇게 빠져 나갈 구멍이 없는 뜻밖의 상황에 빠져든 것이었다. 인만의 머릿속에는 그
런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도망치는 것보다 더 바라는 게 있다면, 주니어가 피를 흘리는 모습
을 보는 것뿐이었다.
시민자위대는 어떤 날에는 죄수들을 아침 저녁으로 걷게 하다가 밤엔 잠을 잤다. 또 어떤
날에는 해가 저물어 갈 무렵에 일어나서 밤새도록 걸었다. 하지만 매번 도착하는 곳은 거의
똑같았다. 대부분 너무나 울창해서 한낮에도 태양이 비치지 않는 소나무숲이었다. 주변 풍경
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인만은, 꿈속에처럼 느릿느릿 어둠 속을 걸어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무서운 것을 피해 달아나지만 아무리 발버둥쳐도 여전히 그 자리인 꿈.
인만 역시 힘든 여행으로 지쳐 버렸다. 기운도 없고 어지러웠다. 배도 몹시 고팠다. 목에
난 상처가 심장 박동에 따라 들썩거렸다. 상처가 다시 벌어지면서 병원에서 그랬던 것처럼
물건들을 쏟아 내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쌍안경 렌즈, 코르크 마개 뽑는 송곳,
피 묻은 포켓용 성경 시편... .
인만이 이제껏 그렇게 고생을 하면서 서쪽으로 나아갔던 것이 물거품이 되어 가고 있었
다. 며칠 동안 계속 걷다가 시민자위대는 물거품이 되어 가고 있었다. 며칠 동안 계속 걷다
가 시민자위대는 땅거미가 질 무렵 걸음을 멈추었고, 죄수들은 음식이나 물도 없이 밧줄에
묶인 채 그대로 방치되었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시민자위대는 담요를 주거나 불을 피워 주
는 등 잠자리를 마련해 주는 법이 없었다. 죄수들은 지쳐서 개떼처럼 밧줄에 묶여 땅바닥에
쓰러져 잠을 자야 했다.
인만은 예전에 성 안에 갇혀 있던 죄수들이 막대나 바위에 금을 그어 며칠이 지났는지를
표시했다는 글을 읽으면서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하고 생각했었지만, 지금은 머릿속에 담고
있는 달력이 헷갈리기 시작하면서, 날짜를 표시해 두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더 이상 날짜를 기록할 필요가 없었다. 바로 그날 한밤중에 시민자위대 한
명이 선잠을 자고 있던 죄수들 얼굴 위로 횃불을 비추면서 일어나라고 깨웠기 때문이다. 대
여섯 명쯤 되는 다른 시민자위대들은 엉성하게 모여 서 있었다. 몇몇은 담배를 피우고 있었
고 모두들 머스킷(심지어 불을 붙혀 발사하는 구식 화승총)총을 땅바닥에 댄 채로 잡고 있
었다. 그들의 대장이 말했다.
"우리들이 의논한 결과 너희들은 우리의 시간을 잡아먹는 쓰레기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내
렸다."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다른 시민자위대원들이 소총을 들었다. 열두 살도 안 되어 보이는
소년 하나가 무릎을 꿇더니 울음을 터뜨렸다. 머리카락이 하얗게 센 늙은 남자가 말했다.
"설마 우리를 여기서 죽이겠다는 말씀은 아니겠죠?"
시민자위대 한 명이 총을 내리더니 대장을 보며 말했다.
"할아버지와 어린 소년들을 죽이는 일에는 찬성하지 않았는데요."
대장이 말했다.
"총을 다시 들어. 그게 싫으면 저 사람들 옆으로 가서 서고!"
인만은 어두운 소나무숲을 쳐다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여기서 죽는구나.'
학살은 일제 사격으로 시작되었다. 포로들이 사방에서 픽픽 쓰러졌다. 비시는 밧줄에 묶인
채 최대한 앞으로 나서며 빗발치는 총알 속에서 질렀다. "이 악랄한 놈들아!"
여러 차례에 걸쳐 총알이 그의 몸을 뚫고 지나갔다.
다행히도 인만을 향해 날아든 총알은 비시의 어깨를 뚫고 날아 온 것이었기 때문에 기세
가 한풀 꺽여 있었다. 관자놀이를 스치면서 살가죽과 뼈 사이로 기세가 얕은 홈을 만들어
놓았을 뿐이었다. 인만은 뭔가에 맞은 것처럼 쓰러졌지만 정신을 완전히 잃지는 않았다. 눈
을 깜빡일 수조차 없었고, 또 그럴 생각도 없었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가며 인간을 조롱하
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모두 한 덩이로 묶인 채 사방으로 쓰러져 숨을 거뒀다.
사격이 끝나자 시민자위대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처럼 가만히 서 있었
다. 한 사람이 발작을 일으켰는지 아니면 무슨 주문에 씌였는지,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뛰어 다니다가 다른 사람의 개머리판에 척추 끝 부분을 얻어맞았다. 마침내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저놈들을 땅에 묻는 게 좋겠어요."
그들은 대충대충 얕은 무덤을 파고 사람들을 한꺼번에 밀어 넣은 후 대충 보이지 않을 정
도만 흙은 덮었다. 작업이 끝나자 모두들 말을 타고 떠나 버렸다.
인만은 팔을 굽힌 채로 쓰러져서 그 공간으로 숨을 쉴 수 있었다. 덮고 있는 흙이 그리
많지 않아서 며칠 동안 누워 있더라도 굶어죽으면 질식해서 죽지는 않는 상황이었다. 그는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가운데 그대로 누워 있었다. 흙 속에 박힌 머리를 들고 일어날 힘이
없었다. 여기서 죽는 편이 차라리 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새벽이 되기도 전에 피 냄새를 맡은 멧돼지들이 숲에서 내려왔다. 멧돼지들이 땅
에다 코를 대고 킁킁대며 손과 발과 머리로 땅을 파헤쳤고, 드디어 인만은 커다란 뻐드렁니
가 달린 수퇘지의 살기 등등한 긴 얼굴과 마주쳤다.
"아아!"
인만의 비명 소리에 깜짝 놀란 수퇘지는 몇 걸음 달아나다가 멍한 표정으로 조그만 눈을
깜빡이며 인만을 돌아봤다. 그는 억지로 몸을 비틀었다. 인만이 몸을 일으키려고 다시 애쓰
는 동안 수퇘지는 슬금슬금 다가와 다시 땅을 하기 시작했다.
인만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 하늘을 쳐다봤다. 뭔가 이상했다. 달이 보이지 않는 하늘에는
별들이 빛나고 있었지만 예전에 알고 있던 별자리를 하나도 찾을 수가 없었다. 누가 막대로
온통 휘저어 놓는 바람에 모두 뒤죽박죽되어 버린 것 같았다.
머리에 상처를 입으면 그렇듯이, 인만은 피를 많이 흘렸다. 온통 피투성이인 얼굴에 흙마
저 엉겨붙었기 때문에 얼굴빛이 황토색이었고, 이목구비는 유인원의 얼굴을 떠놓은 점토 조
각 같았다.
인만은 머리에 생긴 구멍 두 개를 손가락으로 만져 봤다. 아무런 감각도 없었고 피가 응
어리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셔츠 자락으로 얼굴과 머리를 닦아 보았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허리를 뒤로 젖히며 밧줄을 힘주어 잡아당겼더니 잠시 후 낚싯바늘에 걸린 농어가 진흙투성
이 호수에서 끌려 나오는 것처럼 비시가 나타났다. 당황한 듯한 표정 그대로 굳어 있었다.
눈을 뜨고 있었고 눈 속에 흙이 들어가 있었다.
비시를 바라보면서 인만은 슬프다는 생각은 별로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가 마땅히 치러야
할 죄값을 치뤘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이미 갑작스레 찾아오는 죽음을 너무도 많이 목격
한 터였다. 최근만 해도 그가 본 시체는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수천 명은 족히 될 것이었다.
평범하게 죽은 사람도 있었고 며칠 동안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죽은
사람도 있었다. 인만은 시체를 쳐다보고, 시체 사이를 걸어다니고, 시체들과 함께 잠을 자고,
자신이 직접 죽음의 문턱을 이미 여러 번 체험해 봤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것이 이제는 우울
하다거나 신비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총칼이 난무하는 광경을 너무 자주 목격해서, 다시는
평범한 시민이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느껴질 정도였다.
인만은 주위를 둘러보다 날카로운 돌을 발견하고는 그 돌로 손목을 묶고 있는 밧줄을 썰
었다. 해가 뜰 때가 되어서야 마침내 밧줄이 잘라졌다. 인만은 다시 한 번 비시를 쳐다봤다.
이제는 한쪽 눈이 거의 감겨져 있었다. 인만은 비시의 시체를 묻어 주고 싶었지만 땅을 팔
마땅한 도구가 없었기 때문에 그저 얼굴이 땅을 향하도록 굴려 놓는 수밖에 없었다.
인만은 막 떠오르는 태양을 등진 채 서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아침 내내 멍하고 기운
이 없었다. 맥박 소리에 맞춰 머리가 아파 왔고, 두 개골이 땅바닥에 땅바닥으로 떨어지면서
산산히 부서지는 것만 같았다. 길가에서 솜털 많은 서양가새풀 이파리를 주워서 줄기를 길
게 찢어 머리에 동여맸다. 서양가새풀은 통증을 없애 주는 효과가 있다고 들었는데, 아닌게
아니라 통증이 다소 가시는 느낌이었다. 이파리가 지친 발걸음에 맞춰 흔들렸고 인만은 아
침 내내 그림자에 이파리가 움직이는 것을 지켜보며 비척비척 걸어갔다.
정오 무렵이 되자 교차로가 나타났는데, 머릿속이 온통 몽롱했기 때문에 세 갈래 길 중
어느쪽으로 선택해야 할지 결정내릴 수가 없었다. 분명한 것은 왔던 길로 되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뿐이었다. 방향을 가늠하기 위해 하늘을 쳐다봤지만 해는 중천에 솟아 있었다. 해
가 어느쪽으로 저물지 알 수가 없었다.
인만은 관자놀이 부근으로 손을 대 머리카락이 시작되는 부분에 엉겨붙은 피를 만지며 조
만간 딱지가 앉을 것을 생각했다. 피터스 버그 전투에서 얻은 상처가 새로 생긴 상처와 박
자라도 맞추려는 듯이 아파 오기 시작했다. 상반신 전체가 욱신욱신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인만은 길가의 소나무 등걸에 앉아 어느쪽 길이 더 나은지를 알려 주는 신호나 표적이 찾아
오기를 기다렸다.
잠이 들었다 말았다 하는 상태로 잠시 동안 앉아 있는데, 서로 안 어울리는 붉은 송아지
와 송아지 한 쌍을 몰고 흑인 노예 한 명이 다가왔다. 두 송아지는 깨끗한 술통과 거무스름
한 멜론이 통나무처럼 깔끔하게 차곡차곡 담겨 있는 썰매를 끌고 있었다. 그 남자는 인만을
보더니 송아지를 세웠다.
"이런, 하나님 맙소사. 온통 먼지를 뒤집어쓰셨네요."
그는 멜론 두세 개를 주먹으로 두드려 그중 하나를 고르더니 인만에게 던졌다. 인만은 날
카로운 돌로 멜론을 쪼갰다. 검은 씨가 점점이 박혀 있는 분홍색 과육이 양쪽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인만은 굶주린 개처럼 멜론에 머리를 처박고는 허겁지겁 먹어 치웠다.
고개를 들었을 때에는 얇은 껍질밖에 남지 않았고 수염에서 분홍 즙이 땅으로 뚝뚝 떨어
졌다. 인만은 즙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며 앞날을 예언해 주는 의미가 담겨 있진 않을까 살
펴보았다. 그 어떤 이상한 것에서라도 자신이 살아남으리라는 징조를 발견하고 싶었다. 하지
만 땅 위로 떨어진 방울은 아무리 여러 각도에서 쳐다봐도 그 어떤 표식도, 상형 문자도, 동
물 모양도 아니었다. 결국 그는 온갖 장애물로 가득 찬 조각난 세상 속에서 어느 누구의 도
움이나 인도도 없이 혼자 떠돌아 다니는 집시가 되라는 듯 버림받은 몸이라고 결론지을 수
밖에 없었다.
인만은 땅바닥을 쳐다보고 있던 고개를 들어 남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는 마른
체구에 사지가 후리후리했지만 회색 울셔츠를 팔꿈치까지 걷어올린 팔뚝은 근육으로 울퉁불
퉁했다. 캔버스천으로 만든 바지는 키가 더 큰 사람을 위해 만들어졌는지 맨발 위로 여러
겹 접혀 있었다.
"이 썰매를 타고 저랑 함께 가시죠." 하고 그 남자가 말했다.
인만은 썰매 끝에 올라타고는 갓 쪼갠 하양 참나무 향기가 솔솔 풍기는 술통에 몸을 기댔
다. 잠깐 눈을 붙이려고 했지만 잠이 오지 않아서 비몽사몽간에 흙길 위로 썰매가 남기는
자국을 쳐다보았다. 점점 멀어질수록 한 점을 향해 합쳐져 가고 있는 듯했다. 그러다 머리를
감싸고 있던 서양가새풀 잎을 바퀴가 남긴 평행선 사이로 하나씩 떨어뜨렸다.
그는 주인이 살고 있는 농장에 가까워지자 인만을 술통 안에 숨긴 채 썰매를 헛간까지 끌
고 갔다. 그러고는 처마 밑에 쌓아 놓은 건초 더미 속에 숨게 했다.
인만은 건초 더미 속에서 며칠 동안 쉬면서 다시 날짜 개념을 놓쳐 버렸다. 하루 종일 잠
을 자거나 노예들이 가져다 주는 돼지 기름에 튀긴 옥수수빵, 신선한 야채, 숯이 되어 버린
기름 때문에 탁탁 소리가 나는 구운 돼지 등심을 먹었다.
어느덧 다리에 힘이 생기자 인만은 다시 길을 떠날 준비를 했다. 옷은 깨끗하게 삶아 빨
았고, 상태가 좀 나아진 머리는 노예가 준 검은 모자로 가렸다. 그 모자는 노예가 흘린 땀으
로 리본 부분에 시커먼 얼룩이 생긴 낡은 것이었다. 반달이 뜨던 날 인만은 헛간 입구에서
그 남자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이제 가야 해요.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요. 가다가 처리해야 할 일도 있고 일처리가 끝나
면 집으로 돌아가야 하거든요." 인만이 말했다.
"내 말 잘 들으세요. 지난주 북군들이 솔즈베리 감옥을 탈출했는데, 그들을 잡으러 다니는
치안대가 사방에 쫙 깔렸어요. 아주 조심하지 않으면 잡힐 거예요. 아니, 조심해도 잡힐지
몰라요." 그 남자가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제일 좋을까요?"
"어느 쪽으로 가시죠?"
"서쪽이요."
"그럼 북쪽으로 돌아 윌크스 쪽으로 가세요. 그쪽으로 가면 아마 모라비아 교파(15세기
얀 후스의 신봉자들이 중부 유럽에서 일으킨 신교 교파) 사람들이 나 퀘이커 교도들의 도움
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블루 산맥을 만나면 작은 언덕을 따라 남쪽으로 가세요. 아니면 산
속으로 들어가서 산마루를 따라 원하는 쪽으로 가시던지요. 하지만 산속은 춥고 길이 험하
니 단단히 각오하셔야 할거예요."
"난 그곳 출신인걸요."
남자가 종이로 싸서 실로 단단히 묶은 옥수수 가루와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 한 조가, 구
운 돼지고기 몇 조각을 건넸다. 그리고는 종이에 지도를 그려 주었는데, 다 그려 놓은 걸 보
니 무슨 미술작품 같았다. 작은 집, 이상하게 생긴 헛간, 구부정한 나무-등걸이 사람 얼굴처
럼 생겼고 나뭇가지가 팔과 머리카락처럼 생긴-등 세세한 것까지 모두 그려져 있었다.
한쪽 구석에는 작게 나침도까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믿어도 되고 어떤 사
람은 믿어서는 안 되는지, 간단한 설명까지 적혀 있었다. 그러나 지도는 서쪽으로 갈수록 내
용이 띄엄띄엄해졌고 더 왼쪽으로 가서는 산을 의미하는 겹겹의 원호들만 그려져 있었다.
"난 여기까지밖에 안 가봤어요. 산맥 가장자리까지밖에." 그 남자가 말했다.
"글을 아나 보죠?"
"주인님이 특이하시거든요. 노예에게 글을 가르치면 안 된다는 법은 그분한테 아무 의미
가 없죠."
인만은 돈을 주려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후하게 지불해야겠다고 생각했었지만 주머니
가 비어 있었다. 그제야 주니어의 집 장작 더미 사이에 숨겨 놓은 양식 자루 속에 돈을 넣
어 두었다는 게 생각났다.
"돈을 좀 드리려고 했는데... "하고 인만이 말했다.
"주셨다고 해도 안 받았을 겁니다."
며칠 후 인만은 그 기울어진 집 앞에 서 있었다. 두꺼비처럼 낮은 습지 위로 납작하게 엎
드려 있는 그 집 창문은 모두 어두컴컴했다. 인만은 다리가 셋밖에 없는 개를 조심조심 불
러서는 플라타너스 이파리에 싸서 주머니에 넣고 온 돼지 뼈를 던졌다. 개는 코를 킁킁대며
소리 없이 다가왔다. 그러고는 뼈를 낚아채더니 현관 밑으로 사라졌다.
인만은 개를 따라 집 쪽으로 다가가서는 뒷마당 쪽으로 살그머니 돌아갔다. 커다란 모닥
불이 있던 자리에는 시커먼 자국만 남아 있었다. 인만은 뒤쪽 현관으로 걸어갔다. 장작 더미
사이로 배낭이 보였다. 열어보았더니, 비시의 콜트 권총말고는 모두 그대로 있었다. 인만은
장작 더미 안으로 팔을 집어 넣어 양식 자루를 잡았다. 천 너머로 르매트의 손잡이가 느껴
졌다. 인만은 양식 자루를 잡아당겼다. 권총의 무게와 균형감을 손으로 느껴 보고 노리쇠를
잡아당길 때의 소리를 듣고 보니 힘이 솟구쳤다.
훈제실 문 아래로 얇은 불빛이 보이길래 인만은 훈제실로 다가가서 문을 열고 안을 살펴
봤다. 주니어가 선 채로 돼지고기에 소금을 문지르고 있었다. 그의 옆으로 흙바닥엔 대검이,
그리고 세워 놓은 소총의 총구엔 타고 있는 양초가 꽂혀 있었다. 훈제실 바닥은 기름기가
가득 찼기 때문에 촛불이 그 위로 반짝였다. 주니어는 고기 위로 허리를 굽힌 모습이었다.
모자챙 때문에 그늘이 져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인만은 문을 활짝 열고 불빛 속에 섰다. 주니어가 고개를 들고 그를 쳐다봤지만 알아보지
못하는 눈치였다. 인만은 주니어에게 다가가 르매트 권총의 총신으로 귀 부분을 때리고 나
서 뒤로 넘어져 뻗을 때까지 손잡이로 계속 내리쳤다. 코와 머리에 생긴 상처와 양쪽 눈가
에서 피가 흘러내릴 뿐 쓰러진 주니어는 옴짝달싹도 하지 않았다. 피는 훈제실의 검은 땅바
닥 위로 고였다.
인만은 무릎 위에 팔을 얹은 채 쪼그리고 앉아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총구에서 양초를
빼내 바퀴벌레가 갉아먹어 오톨도톨해진 부분을 손가락으로 만졌다. 그는 양초로 주니어의
얼굴을 비춰보았다. 처참했다. 결국 사람의 본성이란 거의 모두 비슷한 게 아닐까 하는 두려
움이 일었다.
인만은 촛불을 끄고 밖으로 걸어 나왔다. 달이 떠오를 준비를 하고 있는 동쪽 지평선 위
로 V자 모양의 회색빛이 보였다. 산허리에서는 희미한 유령불이 깜빡이고 있었다. 점점 빛
이 사위어지더니 어느덧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날 밤 인만은, 창문마다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고 개들이 짖어대고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어느 마을을 비껴 가기 위해 북쪽으로 빙 돌아갔다. 그 남자 노예의 말이 맞았다. 말을
탄 사람들이 어둠 속으로 몇 번씩이나 지나갔던 것이다. 인만은 말발굽 소리가 들리기만 하
면 얼른 덤불 속으로 몸을 숨겼다.
아침이 찾아오자 안개 덕분에 연기가 조금 나도 별로 걱정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인만
은 숲속에서 불을 지펴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를 삶고 옥수수 가루를 물에 부어 죽을 한 접
시 만들었다. 그러고는 그날 하루 종일 덤불 속에 누워 잠도 자고 이리저리 뒤척이기도 했
다.
머리 위로 드리워진 나뭇가지 위에는 까마귀 서너 마리가 앉아 있었는데, 나무에서 만난
뱀 한 마리를 괴롭히고 있었다. 까마귀들은 뱀보다 높은 가지에 앉아 까악까악 울다가 이따
금 한 마리씩 가까이 날아가서는 반짝이는 부리로 공격하는 척했다. 뱀은 마치 무서운 적과
싸우는 것처럼 몸을 꼿꼿이 세우고 목을 앞으로 내밀고 쉿쉿 소리를 내며 대응하며 매서운
동작을 보였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까마귀들이 재잘대며 비웃자 뱀은 곧 자취를 감추고 말
았다.
그 까마귀들은 오후 내내 그 자리에서 오락가락 하며 승리를 자축했다. 인만은 눈을 뜰
때마다 까마귀들을 쳐다보며 움직임이나 표현 방식을 관찰했다. 그리고 눈을 감을 때마다
꿈을 꾸었다. 사람이 원하기만 하면 까마귀로 변해서 무거운 짐을 훌훌 털어내 버리고 하늘
로 날아올라 땅 위에 있는 모든 것들을 조종할 수 있는 꿈. 그런 식으로 잠시 시간을 보내
며 밤이 찾아오는 숲을 지켜봤다. 마치 까마귀들이 날개를 펴서 온 세상을 까맣게 덮어 버
리는 것 같았다.
'책,영화,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시노다 볼린 우리 속에 있는 여신들 (0) | 2023.01.21 |
---|---|
짐머맨 테마가 있는 20가지 과학 이야기 (0) | 2023.01.21 |
카르멘 베리 그래,여자에겐 정말 여자친구가 소중해 (0) | 2023.01.21 |
카알 힐티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 (0) | 2023.01.20 |
앨런 와츠 UFO탐구 (0) | 2023.01.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