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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 - 지와 사랑

by Casey,Riley 2023. 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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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와 사랑

헤르만 헤세

  지은이:헤르만 헤세
  독일의 소설가, 시인. 14세 때 부친의 뜻에 따라 마울브론 신학교에 입학했으나 
속박된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7개월 후에 탈주, 서점 점원과 시계공을 거치면서 문학 
수업을 시작했다. "향수"1904, "수레바퀴 아래서"1906, "게르트루트"1910, 예술가 
부부의 결혼 파국을 그린 "로스할데"1914, 방랑자를 주인공으로 한 "크눌프"1915, 
"데미안"1919, 동서의 세계관, 종교관을 체험 속에 융화시킨 "시타르타"1922, "황야의 
이리"1927, "지와 사랑"1930, 정신과 관능의 아름다운 조화를 시도한 "유리알 
유희"1943. 1946년에는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1

  마리아브론 수도원의 입구는 이중의 기둥이 떠받치는 아치형으로 되어 있고, 그 
앞의 길가에는 밤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그것은 옛날, 로마 순례자의 한 사람이 
가지고 온 남국의 유일한 기념품으로 줄기가 시원스럽게 뻗은 밤나무였다. 휘영청한 
가지를 길 위에 부드럽게 늘어뜨리고는 바람 속에서 가슴 가득히 숨을 쉬며, 수도원의 
호두나무까지 벌써 불그스레한 어린 잎새를 달고 있고 주위의 모든 나무들이 
파릇파릇하게 된 때에도, 이 나무만은 오랜 시간 잎이 돋기를 기다렸다가 밤이 가장 
짧을 무렵이 되면 무성한 잎새 사이로 가냘프고 희끄무레한 푸른 이삭 같은 색다른 
꽃을 내밀었다. 그 꽃은 사람에게 무엇인가 경고하듯이 가슴을 답답하게 죄는 듯한 
짙고 역한 향기를 풍겼다. 그리고 10월이 되어 과일과 포도가 수확되고 나면 가을바람 
속에 노랗게 물든 가지에서 밤송이가 떨어졌다. 그러나 해마다 완전히 익은 밤을 따본 
적은 거의 없었다. 수도원의 학생들이 이 열매를 가지려고 서로 경쟁을 벌이기도 
하거니와 이탈리아 사람인 그레고르 부원장이 자기 방의 난롯불에서 성급하게 열매를 
구워먹는 탓도 있었다. 이 아름다운 나무는 수도원 현관 앞 가득히 이국적인 우아한 
모습으로 가지를 하늘거리며 서 있었다. 산지가 다르므로 민감하고 추위에 약한 먼 
곳에서 온 손님이었지만, 정문에 쌍을 이룬 화사한 사암석의 기둥과, 아치형 창문과, 
처마 장식과, 기둥들의 석조 장식과는 은근히 조화되는 곳이 있어 보였다. 또한 
이탈리아 사람이나 라틴 계통의 사람들에게서 사랑을 받고 있었으며 이 고장 
사람들에게서는 진귀한 진품으로서 아낌을 받고 있었다.
  이 외래종 밤나무 밑을, 이미 몇 세대의 수도원 학생들이 스쳐갔다. 석판을 옆에 
끼고 지껄이고 웃으며 장난치며 다투거나 하면서, 계절에 따라 맨발이 되었다가 신을 
신기도 했다가 또 꽃을 따서 입에 물기도 하고 호두를 까먹기도 하고 손에 눈덩어리를 
들기도 하고서. 이렇듯 새로운 학생들이 끊임없이 오고갔다. 얼굴들은 이삼 년마다 
변해 갔어도 대개는 그 얼굴이 그 얼굴이었다. 다만 금발이냐 고수머리냐 하는 
차이뿐이었다. 대개는 이곳에서 남아서 수사가 되거나 아니면 보좌 신부가 된다. 
모두들 머리를 빡빡 깎이운 채 법의에 노끈 띠를 매고는 책도 읽고 학생들도 
가르친다. 그러면서 늙어 죽어간다. 나머지 학생들 중에서 학창시절이 지나면 그들 
기사의 성이나 상인 집이나 직공 집이나 부모님이 계신 집으로 제각기 돌아가곤 하는 
것이다. 바로 세상에 나가 즐기거나 사업을 하면서 한 번쯤은 수도원을 ㅊ아올 때도 
있었다. 또 어떤 이는 어른이 되어, 앳된 어린 아들을 학생이랍시고 데리고 와서 
신부에게 맡기고는 잠시 쓴웃음을 지으며 생각에 잠긴 듯 밤나무를 쳐다보다가 이내 
사라진다. 수도원의 기도실과 집회실 안에 둥근 아치형의 묵직한 창문과 석조로 된 두 
겹의 단단한 기둥이 서 있는 사이에서, 생활은 물론이고 수업이나 연구가 이루어 졌고, 
관리와 지배가 착실히 계속되어 갔다. 온갖 예술과 학문을 이곳에서 했고 세대에서 
세대로 그것을 전해 주었다. 종교적인 것도, 세속적인 것도, 밝은 것도, 어두운 것도. 
여러 종류의 책들이 저술되고 주석들이 가해졌다. 체계가 세워졌고 고인들의 문헌이 
수집되었다. 장식 문자가 그려지고, 민족의 신앙이 보호되어지고, 또한 냉소를 받기도 
했다. 지식과 신앙, 심원과 교활, 복음서의 지혜와 그리스 인들의 지혜, 이른바 상도의 
정직한 마술과 요령을 부리는 정직하지 못한 마술, 아무튼 온갖 것들이 여기서는 
번창해 갔다. 이 모든 것을 착실히 쌓아둘 자리도 있었으며 은둔 생활과 참회 생활은 
물론이요, 사교 생활을 위한 자리도 마련되어 있었다. 이것이 우선이 되어야 하느냐, 
저것이 더 지배적이냐? 이 두 가지 중 결정의 초점은 그때그때 원장의 인간됨됨이나 
지배적인 시대의 흐름에 따르고 있었다. 이 수도원은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이나 혹은 
악령 들린 사람 때문에 유명해질 때도 있었고 더러는 이름 있는 사람의 방문을 받기도 
했다. 때로는 뛰어난 음악가 때문에, 때로는 치료와 기적을 베푸는 신부님 때문에, 
때로는 잡아온 잉어 스프 아니면 사슴의 간장으로 만든 만두 때문에 그때마다 하나씩 
하나씩 유명해져 갔다. 수사나 학생들 가운데는 믿음이 강한 사람, 태도가 그저 흐릿한 
사람, 단식하는 사람, 살이 피둥피둥 찐 사람 등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었다. 여기 
와서 생활하고 또한 죽어간 많은 사람들 가운데는 늘 한 명쯤은 고립된 사람이 있게 
마련이었다. 그중 누구는 사랑을 받고 누구는 미움을 받는다. 누구는 선택된 사람처럼 
보이고 누구는 같은 시대 사람들의 기억에는 사라진지 오래더라도 그후 오래까지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진다.
  마리아브론 수도원에는 이번에도 예외없이 고립된 특별한 사람 둘이 있었다. 한 
명은 늙었고, 한 명은 젊었다. 수많은 수도자의 무리들이 대침실이나 성당이나 교실 
등을 가득 메우고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둘은 누구나가 다 알고 있었으며 
누구에게든지 주목을 받고 있었다. ㄴ은이는 원장 다니엘이요, 젊은이는 그의 제자 
나르치스였다. 나르치스는 최근에 수습 수사가 되었지만 그의 특별한 재능으로 인해 
모든 관례를 깨고 벌써 교사의 직무를 맡아 보고 있었다. 특히 그리스어에서. 한 
사람은 원장으로 한 사람은 수사로, 이 두 사람은 수도원 안에서 세력도 가졌으며 
주목도 받았고, 호기심도 일으켰으며 흠모도 받았다. 또한 부러움도 샀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뒤에서는 비방도 받았다. 
  원장을 사랑하지 않은 사람은 별로 없었다. 따라서 그에게는 적이 없었다. 원장은 
적선과 소박과 겸허가 하나로 뭉쳐진 사람이었다. 다만 수도원의 학자들만은 그 사랑 
속에 어느 정도의 멸시감도 없지 않았다. 다니엘 원장은 성자였는지는 모르지만 
학자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혜라 해도 좋을 소박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라틴어는 
그렇게 능하다고 할 수 없었고 그리스어는 전혀 못했다.
  원장의 소박성에 간혹 비웃음마저 보내고 있는 몇몇 사람은 상대적으로 
나르치스에게 매력을 느꼈다. 기품 있는 그리스어를 구사했으며 행동거지가 기사답게 
어디 하나 나무랄 데가 없고, 사색가와 같은 눈매는 조용하면서도 사물을 날카롭게 
뚫어보는 듯하고, 엄숙하지만 아름답게 윤곽이 드러나 있고 가느스름한 입술을 다문 
이 아름답고 젊은 신동에게. 이 젊은이는 그리스어를 놀랍도록 잘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학자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매우 고귀하고 우아한 점에서 그는 거의 모든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 청년에게 반했다. 반면 그의 조용한 
태도나 그의 자제하는 능력이 너무나 지나쳤기 때문에, 또한 그의 예의범절이 너무나 
궁중 풍습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좋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 둘 모두 자신들의 능력에 따라 선택된 자의 운명을 짊어지고 있어 제 분수에 
따라 지배도 하고 또한 괴로워하기도 했다. 그리고 수도원의 다른 어떤 사람을 대할 
때보다도, 서로에게 더 친밀감을 느꼈으며 또한 서로 아끼고 있었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서로 친하지도 서로 열의를 가지지도 못했다. 원장은 이 청년을 그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염려와 관심을 가지고 대했으며 또한 형제로서 배려해 
주었다. 즉 이 청년을 희귀하고 연약하고 아마 너무 이른 나이에 성숙한, 너무 일찍 
위험에 자신을 드러낸 형제로서. 청년은 원장의 어떠한 명령이나 충고, 칭찬을 어디 
하나 헛점 없는 태도로서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결코 거역하지도 않았고 또한 
불쾌하게 생각한 적도 없었다. 만약 그 청년에게 내린 원장의 판단이 옳고, 또한 그의 
유일한 결점이 거만이라면, 이 청년은 이 결점을 훌륭히 감출 수 있는 방법도 알고 
있었다. 이 청년에 대해서는 할 말이 하나도 없었다. 모든 사람보다 뛰어나고 완전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학자들을 제외하고는 그의 진실한 친구가 되는 사람은 드물었다. 
오직 그의 고귀한 품성이 냉각시키는 공기처럼 그를 둘러싸고 있을 뿐이었다.
  "나르치스."
  참회가 끝난 뒤에 원장은 그에게 입을 열었다. 
  "나는 자네한테 심한 판단을 내린 죄를 고백하겠네. 가끔 나는 자네가 거만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마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었을지도 모르네. 자네는 무척 외로워. 젊은 
형제여! 자네는 고독하네. 흠모자는 많지만 친구는 없지. 자네에게 간혹 주의를 주기 
위해 기회를 찾아볼 때도 없지 않은데 그런 기회는 없단 말일세. 으레 자네 나이 
또래의 젊은 친구들이 빠지기 쉬운 것처럼, 간혹 자네도 좀 버릇없이 굴어 주었으면 
하는 희망을 가졌단 말일세. 자네는 그런 일이 한 번이라도 있었나? 나는 말일세, 
가끔 자네가 조금 걱정스럽기도 하다네, 나르치스." 
  젊은이는 까만 두 눈을 노인에게 돌리며 말했다. 
  "원장 선생님, 저는 무엇보다도 심려를 끼치고 싶지가 않습니다. 선생님, 제가 
거만한지도 모르겠습니다. 부탁입니다. 그 점에는 벌을 내려 주십시오. 때로는 자신을 
벌주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저를 은둔자의 암자로 보내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저에게 천한 봉사를 하게 해주십시오."
  "무슨 일을 하든 자네는 아직 젊네, 형제여."
  원장이 말했다.
  "거기다 또 자네는 고도의 언어와 사색의 능력을 가지고 있거든. 그런 자네에게 
천한 봉사를 하게 한다면, 하느님의 은혜를 함부로 사용하는 결과가 될 걸세. 자네는 
아마 교사나 학자가 될 테지. 자네는 그걸 원하지 않는가?"
  "선생님, 죄송한 말씀이오나 저의 소망에는 그다지 자상한 분별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저는 언제나 학문을 기쁨으로 삼으리라 생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어떻게 
거기에 다른 생각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학문이 저의 유일한 영역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한 인간의 운명이나 사명을 결정하는 것은 반드시 희망이 아니고, 
오히려 미리 결정된 어떤 숙명은 아닐는지요."
  원장은 귀를 기울이고 심각해 졌다. 그러나 주름진 얼굴에 미소를 띠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알고 있기로는 우리네 인간은, 특히 젊은 시절에는 모두 약간씩 하느님의 
뜻과 우리의 소망을 혼돈하기 쉽지. 그러나 자네는 자네의 천직을 미리 짐작하고 있는 
것 같으니 그 점에 대해 한마디 말 좀 해줄 수 있겠나? 도대체 자네는 어떤 천직을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나?"
  나르치스가 까만 두 눈을 지그시 감아버렸기 때문에 두 눈은 기다란 까만 속눈썹 
밑에 감추어져 버리고 말았다. 나르치스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나르치스, 어서 말해 보게."
  오래 기다린 뒤에 원장이 입을 열었다. 그러자 눈을 아래로 내리깐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르치스는 말하기 시작했다.
  "저는 누가 뭐라 해도 수도원 생활을 하도록 있는 것 같습니다. 수사가 되고, 주교가 
되고, 부원장이 되고. 어쩌면 원장이 될지도 모르지요. 제 소망이라고 해서 이렇게 
믿는 것만은 아닙니다. 저는 관직에 목표를 두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제게 맡겨지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두 사람은 오래도록 말이 없었다.
  "왜 자네는 그런 것을 믿나?"
  원장은 주저하며 물었다.
  "학식을 제외하고 어떤 특성이 자네에게 있어서 그러한 신념이 나타난다는 말인가?"
  나르치스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것은 제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인간의 성질과 천직을 감지할 
수 있는 특성입니다. 이런 특성이 제 자신을 강요해 다른 사람을 지배함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는 것입니다. 저는 수도원 생활을 하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면 
법관이나 정치가가 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입니다."
  원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간과 그 인간의 운명을 안다는 자네의 능력을 실제로 시험해 보았나?"
  "네, 시험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를 나에게 말해 줄 수가 있나?"
  "있습니다."
  "알겠네. 그렇다면 형제들이 없는 곳에서 그들의 비밀에 뛰어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니 자네의 원장 다니엘, 즉 나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말해 
보게나."
  나르치스는 속눈썹을 치켜뜨며 원자의 두 눈을 쳐다보았다.
  "원장 선생님, 그 말씀은 명령이십니까?"
  "그렇다네. 명령일세."
  "원장 선생님, 그렇다면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
  "자네의 입을 강제로 열게 한다는 것은 나로서는 쉬운 일이 아닐세. 하지만 나는 
지금 어려운 일을 하고 있다네. 어서 말을 해보게!"
  나르치스는 머리를 숙이고 속삭이듯 말했다.
  "제가 선생님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단지 알고 있는 거라곤 
선생님께서는 커다란 수도원을 지배하는 것보다 하느님의 종으로 양을 지키거나 
은둔자를 암자에서 종을 치거나 사람들의 사람들의 참회를 들으시는 것을 즐기시리라 
믿습니다. 선생님께서는 특별한 사랑을 가지시고 성모께 간절히 기도드리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때문에 선생님께서는 때때로 이 수도원에서 장려되고 있는 그리스어나 
그 밖의 다른 학문이 당신을 의지하는 자들의 영혼에 혼란이나 위험을 가지고 오지 
않기를 기도 드립니다. 그레고르 부원장에 대해서도 관용을 잃지 않으시길 가끔씩 
기도드립니다. 또 때로는 고요한 죽음을 갖게 되길 기도드립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어주시어 고요한 죽음을 내리시리라 저는 믿고 있습니다."
  아늑한 원자의 응접실 안은 조용했다. 이윽고 원장이 입을 열었다.
  "자네는 몽상가일세. 또한 기우심을 갖고 있네."
  노원장이 다정하게 말했다.
  "기우심이라는 것은 경건하고 악의가 없는 것일지라도 착각을 일으키는 것이라네. 
내가 그런 것을 믿지 않는 것처럼 자네도 그걸 믿지 않도록 하게. 몽상가인 형제여, 
내가 방금 그것에 대해서 마음속으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자네는 아는가?"
  "원장 선생님께서 매우 호의적으로 생각하고 계신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이 
젊은 제자는 약간 위험에 빠져 있다. 이놈이 기우심을 가지고 있다. 아마 명상이 
지나친 탓이겠지. 이놈에게 참회를 시켜도 괜찮으리라, 그것이 이놈에게 해가 되지는 
않겠지. 하지만 이놈에게 떠맡기는 참회를 나 자신도 짊어지자.' 이것이 지금 원장 
선생님께서 생각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원장은 일어섰다. 그러고는 만면에 미소를 띠며 수습 수사에게 물러가라는 눈짓을 
했다.
  "좋아."
  원장이 말했다.
  "기우심을 너무 지나칠 정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게나. 젊은 형제여, 하느님은 
기우심을 갖는 것 이외에도 또 다른 많은 것을 우리들에게 요구하고 계시다네. 자네가 
노인에게 편한 죽음을 약속한 그것으로써 노인이 상냥하게 대했다고 해두세. 노인은 
한때 이 약속을 즐겨 들었다고 해두세. 이것으로 충분하네. 자네는 내일 아침 미사를 
드린 후 묵주를 헤아리며 기도드리게나. 형식적이 아니라 경건하게 몸을 맡기고 
묵상해야 하네. 나도 하겠네. 자 돌아가 보게나, 나르치스. 이야기는 충분하게 했네."
  또 어떤 때 다니엘 원장은, 가르치고 있는 신부 중 가장 젊은 로렌츠 신부와 
나르치스가 어떤 교안에 대해서 의견이 맞지 않기 때문에 중재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르치스는 열의를 가지고 수업에 일종의 변화를 시도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확신시킬 수 있는 어떤 근거를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정당화시키는 방법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로렌츠 신부는 일종의 질투심 때문에 거기에 동의하려고 하지 
않았다. 새로운 문제를 내세울 때마다 무뚝뚝한 침묵과 오만상을 찌푸리며 지내는 
날이 며칠간 계속 되었다. 나르치스는 이에 굽히지 않고 자기 주장의 정당성을 믿고 
또 그 문제를 끄집어냈다. 마지막에 가서 로렌츠 신부는 기분이 상한 언짢은 얼굴로 
말했다.
  "이봐, 나르치스. 말다툼은 그만두세. 자네도 알다시피 결정권은 내게 있지 자네에게 
있는 게 아니잖은가. 자네는 내 동료가 아니라 조수야. 그러니 나를 따라야 할 것 
아닌가. 그러나 자네는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고, 또 내가 자네의 약점을 
잡고 있는 건 직권에서만이지 지식이나 재주에서는 아니니까, 내 자신이 독단적으로 
결정짓는 것보다 원장님께 결정을 지어 달라고 말씀드려 보세."
  두 사람은 그렇게 하기로 했다. 다니엘 원장은 문법 수업의 해석에 대한 두 학자의 
언쟁을 꾸준히 호의를 가지고 들었다. 이들 두 사람이 그네들 의견을 자상하게 
진술하고 논증을 하고 나자 노원장은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리 언짢아 보이는 
표정은 아니었다. 하얀 머리카락을 약간 흔들어 보이며 원장은 말했다.
  "형제들, 내가 이 건에 대해 자네들과 같은 이해를 갖고 있다고 믿지는 말게. 
나르치스가 학교 일에 무척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교안을 
고쳐보겠다는 노력은 칭찬받을 만한 일일세. 하지만 상관이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면 나르치스는 그것에 대해서 말없이 복종해야 할 걸세. 만약 그로 인해 이 
수도원의 질서와 복종이 흐트러진다면 학교를 개선하려는 어떤 노력도 그것을 
보충하지는 못할 걸세. 양보를 할 줄 모른다는 점에서 나는 나르치스를 나무라는 
것일세. 자네들 젊은 두 학자를 위해서 나는 자네들보다 어리석은 상관이 언제든지 
자네들 위에 있길 바라는 사람일세. 교만을 치료하는 데 그 이상 더 좋은 약은 없을 
테니까."
  이런 쾌활한 농담으로 원장은 두 사람을 내보냈다. 그러나 이 노인은 그후 며칠 
동안을, 두 교사가 서로간에 다시 나무랄 데 없는 화목을 가지게 되었는지 어떤지 
주시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 많은 얼굴들이 오가고 잊혀지던 수도원에 새 얼굴이 하나 나타났다. 이 새 
얼굴은 주목도 받지 못하고 이내 잊혀지고 마는 그런 얼굴과는 달랐다. 벌써 
오래전부터 그의 아버지한테 신청을 받고 있던 젊은이로 수도원내의 학교에서 
공부하기 위해 어느 봄날 도착했다. 아버지와 젊은이는 우리가 잘 아는 그 밤나무에 
말을 맸다. 큰 현관에서 문지기가 마중을 나왔다.
  소년은 앙상하게 치솟아올라 아직도 겨울 모습을 아련하게 드러낸 한 그루 나무를 
쳐다보며 말했다.
  "이런 나무는 처음 보는걸. 희구하고 아름다운 나무로군! 무슨 나무일까?"
  고생도 좀 한데다가 찌푸린 얼굴에 나이가 좀 들어 뵈는 아버지는 아들의 말에 별 
관심을 갖지 않았으나 문지기는 소년이 마음에 들어 나무의 이름을 가르쳐 주었다. 
그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는 소년은 어딘지 다정스러워 보였다. 소년은 그에게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골드문트라고 합니다. 이 학교에 들어오게 되었죠."
  문지기도 정답게 미소를 지으며 신입생보다 먼저 앞장서서 큰 현관을 지나 폭이 
넓은 돌계단을 올라갔다. 골드문트는 이곳에서 벌써 두 개의 것, 즉 아까 그 나무와 
문지기를 만나 친구가 되었다는 생각을 가지고 아무 거리낌없이 수도원에 발을 
들여놓았다.
  두 사람은 우선 교장을 맡고 있는 신부에게, 저녁에는 친히 원장과도 면담을 하였다. 
그 두 곳에서 제국 관리인 아버지는 아들 골드문트를 소개했다. 수도원의 손님으로서 
아버지는 얼마간 묵고 가도록 정중히 초대받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하룻밤만 묵고 
내일은 꼭 떠나야 한다고 사정을 이야기했다. 아버지가 두 마리 말 중에서 한 마리를 
수도원에 선물로 드리고 싶다는 제의를 하자, 그 제의는 받아들여졌다. 성직에 있는 
사람들과의 대화는 내내 정중했지만 냉랭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러나 원장도 신부도 
말없이 앉아 있는 골드문트를 희열에 싸여 바라보고 있었다. 곱살하게 생긴 
붙임성있는 이 소년은 이내 그들의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튿날 아무 미련도 
없이 아버지를 보내고 그 아들을 기꺼이 맡았다. 골드문트는 선생들에게 소개되었고 
학생들이 쓰는 넓은 침실에 침대 하나를 얻었다. 말을 타고 떠나는 아버지와 이별을 
하는 골드문트의 모습은 정중하긴 했으나 얼굴에는 애수의 그림자가 역력히 드러났다. 
그냥 제자리에 멍청하게 서서 아버지가 수도원 바깥마당의 좁다란 아치 정문을 돌아 
곡물 차고와 물방앗간 사이로 사라질 때까지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몸을 돌렸을 
때는 기다란 그의 금빛 속눈썹 끝에 눈물 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때 문지기가 
어루만지듯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그를 위로해 주었다.
  "여, 학생 친구. 그런 슬픈 표정을 짓는 게 아니야. 처음에는 부모님이나 형제들을 
그리워 하지. 그러나 여기도 있을 만하고 그다지 나쁘지는 않은 곳이라는 걸 곧 알게 
될 걸세."
  "고마워요, 아저씨."
  소년이 대답했다.
  "나는 형제도 어머니도 없어요, 아버지뿐인걸요."
  "그 대신 여기에는 친구나 학문, 음악, 그 밖에 학생이 아직 모르는 새로운 놀이도 
있는걸. 이것저것 다 곧 배우게 돼. 만약 속시원하게 털어 놓고 이야기라도 하고 싶은 
사람이 필요하거들랑 내게 오게."
  골드문트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아저씨. 만약 절 기쁘게 해주시고 싶으시다면 아버지가 두고 
가신 말을 빨리 보여 주세요. 그놈도 정말 잘 있는지 어떤지 보고 싶으니까요."
  문지기는 그를 데리고 곡물 창고 옆의 마구간으로 갔다. 희끄무레한 어둠 속에서 
말과 말똥과 보리 냄새가 코를 찔렀다. 골드문트는 쭉 이어 있는 칸막이 한 곳에서 
갈색 말을 발견했다. 벌써 그를 알아차리고 머리를 쭉 뽑고 있는 말의 목을 두 손으로 
부둥켜안고 흰색 반점이 있는 넓적한 이마빼기에다가 뺨을 비벼대면서 그는 말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안녕, 블레스. 나의 용맹스런 블레스. 어때? 넌 아직도 날 좋아하니? 먹을 게 
있어서? 집 생각도 나니? 블레스, 요녀석, 네가 여기에 남아서 난 얼마나 기쁜지 몰라. 
종종 널 보로 올게."
  골드문트는 아침 식사 후 소맷부리 속에다 남겨둔 빵 한 조각을 끄집어내서는 
그것을 잘게 떼어서 말에게 먹였다. 그러고 나서 문지기를 따라 안마당을 지나갔다. 
안마등은 큰 도시의 장터처럼 넓고 한구석에 보리수가 심어져 있었다. 안쪽 입구에서 
문지기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한 다음 악수를 했다. 그때 골드문트는 어제 
알아두었는데도 벌써 교실로 가는 길을 잊어버린 것을 깨닫고 얼굴이 빨개져서 약간 
쑥쓰러운 미소를 지으며 문지기에게 안내를 부탁했다. 문지기가 쾌히 인도해 주었다. 
교실에는 약 열두 명의 소년들과 청년들이 긴 의자 위에 앉아 있었다. 조교사인 
나르치스가 얼굴을 돌렸다.
  "신입생인 골드문트입니다."
  나르치스가 웃음기 없는 얼굴로 약간 고개를 갸우뚱하며 뒤에 있는 긴 의자에 
자리를 지정해 주고는 수업을 계속했다.
  골드문트는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자기보다 두세 살 나이가 많을까 말까한 무척 젊은 
선생을 보고 그는 놀랐다. 이 젊은 선생이 어찌나 아름답고 고상하고 진실해 보이는지 
그뿐 아니라 어찌나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고 상냥한지에 대해서 놀라기도 했거니와 
또한 마음속에서 희열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문지기는 그에게 상냥했으며 원장 또한 그에게 친절하게 대했다. 저쪽 마구간에는 
한 토막 고향의 향취를 불러일으켜 주는 블레스가 있었다. 지금 여기에는 학자처럼 
진실하고 왕자처럼 기품있는, 몹시도 젊은 선생이 있다. 냉정하고 자제력이 있는, 
감탄하지 않을 수는 없는 저 목소리!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쉽게 이해할 수는 
없지만, 감사한 마음으로 그는 경청했다. 마음이 흐뭇했다. 친절하고 선량한 
사람한테로 온 것이다. 이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 우애를 나눌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 
아침에 침대에서 눈을 떴을 때에는 마음이 답답했었다. 우선 기나긴 여행에 피로가 
누적되었고, 아버지와 헤어졌을 때는 얼마간 울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만족해하고 
있다. 오랫동안  자꾸 젊은 선생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날씬한 자태, 쌀쌀하게 
반짝이는 눈, 또렷하고 앙칼지게 한마디 한마디 말을 내뿜는 그의 야무진 입술 등을 
바라보며, 하늘을 나는 듯한 피로를 모르는 그의 목소리를 듣자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수업 시간이 끝나고 학생들이 떠들썩하게 자리에서 일어날 때 골드문트는 깜짝 놀라 
일어섰다. 오랜 시간 잠을 자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약간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옆자리에 앉았던 학생도 골드문트가 자고 있는걸 보고 있다가 귓속말로 친구들에게 
알리고 있었다. 젊은 선생이 교실에서 나가자 학생들은 골드문트를 사방에서 
잡아당기며 쿡쿡 찔러댔다.
  "다 잤냐?"
  한 녀석이 물어보더니 이를 내보이며 연방 킬킬거렸다.
  "그 자식 보통이 아닌데!"
  한 녀석이 놀려대기 시작했다.
  "이 자식은 분명 훌륭한 선구자가 될 거야. 첫 시간부터 코를 골지 않나!"
  "이 아기를 어서 침대에 데려다 눕혀라!"
  한 녀석이 입을 열기가 무섭게 모두들 그의 팔과 다리를 하나씩 붙들고서는 
호들갑을 떨며 그를 떠메려고 했다.
  골드문트는 무척 놀람과 동시에 화가 났다. 그는 닥치는 대로 마구 후려치며 
빠져나오려고 했으나 몇 대 얻어맞고서는 결국 바닥에 동댕이쳐지고 말았다. 한 
녀석이 아직도 그의 발목을 꽉 쥐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호되게 걷어차고는 한 
녀석에게 덤벼들었다. 대뜸 그 녀석과 심한 격투가 벌어졌다. 그와 상대한 학생은 
힘깨나 쓰는 놈이었다. 모두가 이 두 녀석의 싸움을 재미있다는 듯 구경하고 있었다. 
골드문트가 지지 않고 주먹을 몇 대 먹였을 때 그는 아직 어느 누구의 이름도 
몰랐지만 학생들간에 친한 친구가 생겼다. 그러자 별안간 다들 달아나 버렸다. 모두 
이내 교장 마르틴 신부가 들어왔다. 그는 혼자 남아 있는 소년 앞에 와서 섰다. 
교장은 소년을 쳐다보았다. 소년이 파란 눈이 새빨갛게 되었다. 소년은 두들겨맞아서 
좀 부은 얼굴로 당황하여 마주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그는 물었다.
  "넌 골드문트구나, 그렇지? 녀석들이 네게 무슨 짓을 한 모양이로구나?"
  "아니에요, 아니에요."
  소년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제가 그 녀석을 때렸습니다."
  "대관절 누굴 때렸다는 거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아직 아무도 모릅니다. 어떤 녀석이 저와 맞붙었습니다."
  "그래? 그 녀석이 먼저 시작했니?"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먼저 시작한 것도 같습니다. 저를 보고 모들 
놀려댔기 때문에 저는 몹시 화가 났습니다."
  "그래, 그래 시작한 것은 좋아. 하지만 한 번만 더 이 교실에서 주먹다툼이 벌어지면 
그때는 벌을 받아야 한다. 그럼 점심이나 하러 가! 자, 앞으로!"
  골드문트가 부끄러운 듯 헝클어진 황금빛 머리카락을 손으로 부지런히 쓸어올리며 
나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교장은 미소를 지었다.
  골드문트 자신도 수도원 생활의 처음을 장식하는 이 행동이 정말로 버릇없는 
것이었고 또한 어리석었다고 생각했다. 속으로 후회를 하면서 친구들을 찾아 헤매다가 
점심을 먹고 있는 그들을 발견했다. 다행히 그들은 골드문트를 존경과 우애로써 맞아 
주었다. 싸운 상대방과는 신사답게 화해를 했다. 그때부터 그는 이 분위기 속에 
자신이 쾌히 받아 들여 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2

  그 동안 그는 다른 아이들과 좋은 친구가 되었지만 진정한 친구는 아직 찾아낼 수가 
없었다. 동급생들 가운데서는 특별히 친근하게 느껴지거나 혹은 마음이 끌리는 친구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네들은 이 과감한 실력자를 밉지 않는 싸움패로 돌리고 
싶었는데도 그가 오히려 모범 학생의 명성을 획득하려고 하는 듯한 극히 얌전한 
동급생이라는 것을 알고 의외로 생각하였다. 
  수도원 안에는 골드문트가 마음을 끌리고, 호감을 갖고 있으며, 언제나 머릿속에 
간직해 두고 경탄과 사랑, 존경심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 둘 있었다. 그들은 바로 원장 
다니엘과 조교사 나르치스였다. 골드문트는 가끔씩 원장을 성자라고 생각했다. 그의 
소박성과 친절, 맑고 자애가 넘치는 눈빛, 명령과 지배를 경건하게 봉사로써 실행하는 
그의 태도, 조용하고 선량한 그의 행동 등, 이 모든 것들이 커다란 힘을 갖고 그를 
끌어 당겼다. 할 수만 있다면 이 경건한 사람의 유일한 종이 되고 싶었다. 언제나 
이분 곁에 머물러서 시키는 일에 복종하고 또한 받들고 싶었다. 복종과 헌신에의 
소년다운 그의 모든 소망을 끊임없는 희생의 재물로 받치고 싶었다. 그리고 맑고 
고귀하며 또한 성자다운 생활을 이분에게서 배우고 싶었다. 왜냐하면 골드문트는 
수도원의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가능하다면 완전히, 그리고 언제까지나 수도원에 
남아서 그의 일생을 하느님께 바칠 결심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그의 
바람이기도 하거니와 아버지의 소망이며 분부이기도 했다. 또한 그것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소명과도 같았다. 아무도 이 아름답고 빛나는 소년을 보고 그런 
생각을 갖지 않는 것 같았으며 어떤 무거운 짐이 그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것은 출생의 부담, 속죄와 희생의 보이지 않는 숙명이었다. 골드문트의 아버지가 
원장에게 어느 정도의 암시적인 언질을 하면서 아들을 언제까지나 이곳 수도원에 남게 
하고 싶다는 의사를 넌지시 밝혔는데도 원장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골드문트의 
출생에는 어떤 보이지 않는 오점으로 인해 그것이 속죄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원장은 아버지에게서 별 호감을 느끼지 못했으므로 아버지의 말투와 좀 
대단하게 구는 태도 전체에 겸손한 냉담성을 가지고 대했을 뿐 그의 암시에는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골드문트의 사랑을 눈뜨게 해준 또 한 사람은 원장보다 훨씬 날카로운 관찰력을 
가지고 있어서 그 사정을 잘 알고 있었으나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나르치스는 그에게 얼마나 소중한 황금새가 날아들어 왔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 
자신의 고귀한 성품 때문에 고립되어 있었던 나르치스는 골드문트가 모든 점에 있어서 
그와 반대인 것같이 보임에도 불구하고 자기와 매우 비슷하다는 것을 이내 깨닫게 
되었다. 나르치스는 음울하고 야윈 반면에, 골드문트는 꽃처럼 눈부셨다. 나르치스가 
사색가요 분석가라고 한다면, 골드문트는 몽상가이며 동심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그 
상반되는 사람들 사이를 이어 주는 공통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두 사람이 다 같이 
고귀한 성품을 지녔다는 것, 특별한 재간과 특징에 의해서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도 
뛰어나 보인다는 점이었다. 
  나르치스는 곧 그 젊은 영혼의 성질과 운명을 꿰ㄷ어보고 열렬한 관심을 보냈으며, 
골드문트는 누구보다 뛰어나고 아름다운 그의 선생을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골드문트는 내성적이었으므로 조심성 있고 교양이 있는 동급생들이 하는 
것처럼 열심히 공부하는 방법 말고는 나르치스의 사랑을 얻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를 주저하게 한 것은 꼭 수줍음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기에게서 나르치스의 
존재가 위험할 수도 있다는 느낌이 그를 주저하게 만든 것이다. 골드문트는 겸손하고 
선량한 원장과 지나치게 명석하고 학식이 많으며 슬기로운 나르치스를 동시에 이상과 
모범으로 삼을 수는 없었다. 더욱이 골드문트는 그 젊음의 모든 힘을 기울여서 
결합하기 힘든 두 개의 이상을 향하여 노력했다. 이것이 종종 그를 괴롭혔다. 
수도원에서 들어온 처음 몇 달 동안 골드문트는 가끔씩 머릿속이 마구 혼란스러워져서 
거기서 도망치든가 아니면 친구들과 사귀고 있는 동안에 괴로움과 마음속의 분노를 
발산시켜 버리자는 강한 유혹에 빠져들었다. 선량한 골드문트는 자주 하찮은 놀림을 
당하거나 학생들 사이에 흔히 있을 수 있는 심한 말을 듣기만 해도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라서 애써 그것을 자제하느라고 눈을 감고, 창백해진 얼굴로 아무말 없이 
시선을 돌리곤 했다. 그러다가는 마구간으로 블레스를 ㅊ아가서 목에다 입을 맞추며 
울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이 괴로움은 점점 깊어져서 급기야는 눈에 띌 정도까지 
되었다. 그의 뺨은 수척해지고 눈은 생기를 잃고 움푹 들어갔다. 모든 사람들에게서 
사랑을 받던 미소조차 볼 수 없었다.
  골드문트 자신은 지금 자신의 상태가 어떤지를 알지 못했다. 그는 선량한 학생이 
되고, 이어 수사로 채용되었다가 신부들의 경건하고 조용한 형제가 되고 싶다는 
성실한 소망과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힘과 재능이 
경건하고 순탄한 목표를 향해서 정진하고 있다는 것을 믿고 있었을 뿐, 그 밖의 다른 
노력에 대해서는 어떠한 것도 관심이 없었다. 때문에 그렇게 단순하면서도 멋진 그 
목표에 도달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 그로서는 그 얼마나 
슬프고도 이해 할 수 없는지 모른다. 그는 자신에게서 자주 비난을 받아야 마땅할 
경향이나 상태를 발견하고는 얼마나 낙담하고 당황했을까! 이를테면 나태한 상태와 
학업에 대한 혐오감, 수업중에 공상에 빠진다거나 졸고 있는 것, 라틴 어 선생에 대한 
저항감과 반감, 동급생들에 대한 신경과민이라든가 화를 잘 내는 성질 등. 무엇보다도 
그의 마음을 방황하게 한 것은 나르치스에 대한 사랑과 다니엘 원장에 대한 사랑이 
서로 합치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나르치스도 자기를 사랑하고 그에 
대해 기대를 가지고 대한다는 사실에 확신을 가질 때가 많았다.
  그러나 나르치스는 소년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도 훨씬 더 많은 관심을 소년에게 
갖고 있었다. 나르치스는 이 밝고 사랑스러운 소년을 친구로 만들고 싶었다. 그리고 
그는 이 소년이 그의 성격과 반대되는 동시에 그의 모자라는 점을 지니고 있음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나르치스는 이 소년을 이끌어 그를 발전시켜 꽃을 피게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이러한 자신의 감정을 애써 누르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를 저지시킨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학생들이나 수사들한테 반한 교사나 신부들에 대해  
느끼는 골드문트의 혐오감이었다. 그 자신도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 그에게 쏟는 타는 
듯한 호의나 애무에 무언의 방위로써 대항할 때도 있었다. 이제는 그 자신도 그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자신도 골드문트를 사랑하고 귀여운 그의 웃음을 보고 
싶고 애정이 깃든 손으로 밝은 황금색 머리칼을 만져 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결코 그렇게 하지는 않으리라, 결코, 그 밖에도 그는 교사의 
직권이나 권위까지는 아직 가지고 있지 않지만 교사의 계급에 있는 조교사로서 특별한 
주의와 경계심을 갖는 버릇이 있었다. 그는 학생들보다 고작 두세 살 위인데도 마치 
스무 살이나 더 나이를 먹은 사람처럼 행동했다. 그는 또 어느 한 학생만을 편애하는 
행위를 절대 하지 않았으며, 밉살스럽고 보기 싫은 학생도 모두다 특별히 공평하게 
돌보아 주는 습관이 있었다. 그의 봉사는 정신에 대한 봉사였고, 그의 엄격함 생활은 
정신에 대해 바쳐진 것이었다. 다만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방심한 순간에만 몰래 
남보다 뛰어난 지식과 지혜에 대한 오만으로 만족해할 뿐이었다. 골드문트와의 우정은 
대단히 매력적이기는 했으나 많은 위험이 따르고 있었으므로 그것을 생활이 중심이 
되게 해서는 안 되었다. 그의 생활의 중심과 의미는 정신에 대한 봉사, 언어에 대한 
봉사였다. 자신의 이익을 단념하고 학생들의--아니, 학생들뿐만이 아니라--보다 높은 
정신적인 목표를 향해 조용히 인도하는 것이었다.
  골드문트가 마리아브론 수도원의 학생이 된 지도 벌써 1년이 넘었다. 그는 수백 
번이나 안마당의 보리수와 아름다운 밤나무 밑에서 친구들과 장난을 하고 놀았다. 
달리기, 공차기, 술래잡기, 눈싸움 등. 지금 다시 봄이 되었지만 골드문트는 지쳐서 
몸이 쇠약해진 것처럼 느껴졌다. 때때로 머리가 아팠고 수업 시간에는 졸지 않도록 
조심하느라고 애를 써야 했다. 
  그런 어느 날, 아돌프가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처음 만났을 때 대뜸 주먹다짐을 한 
그 학생이었다. 그해 겨울 그 두 사람은 유클리드 기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었다. 
저녁 식사 후의 자유 시간이어서 그 시간에는 큰 침실에서 놀거나 자습실에서 잡담을 
하거나 수도원 마당을 산보하는 것도 허락되었다. 
  골드문트를 끌고 계단을 내려가면서 아돌프가 말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줄게. 하지만 넌 모범생이라는 것이 탈이야. 언젠가는 주교가 
되겠지. 아무튼 친구와의 의리를 지켜 선생한테 고자질하지 않겠다는 약속부터 해줘."
  골드문트는 그 자리에서 약속했다. 수도원에서 수도원 자체는 명예도 있었지만 
학생들의 명예도 있어서 가끔 그 양자 사이의 충돌이 일어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어디서든지 불문율은 성문율보다 우위에 있는 법이어서 일단 학생이 된 이상 학생끼리 
규율과 명예 관념에 배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돌프는 조심스럽게 현관을 빠져나와 그를 나무 밑으로 데리고 가 소곤소곤 
이야기를 했다. 아돌프도 가입되어 있는 대담한 몇 명의 친구들이 있는데 몇 세대 
저부터 대물림해 오고 있는 이 학교의 관습대로 그들이 아직은 신부가 아니라는 
사실에 어울리도록 가끔 수도원을 빠져나와 마을로 나간다는 이야기였다. 그것은 
정상적인 남자라면 빠뜨릴 수 없는 즐거움이요, 모험이라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우리가 돌아올 때는 벌써 문이 잠겨 있을걸"
하고 골드문트가 말했다.
  "물론이지, 문은 분명히 잠겨져 있어. 그렇기 때문에 더 재미나는 거야. 하지만 
아무도 모르게 비밀 통로로 들어올 수가 있거든. 뭐 별다르게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지만 말야."
  골드문트는 생각이 났다. '마을에 간다'는 소문은 벌써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남들 모르게 여러 가지 재미나 모험을 즐긴다는 것은 밤나들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수도원의 규칙에 위배되는 일로, 엄한 벌로써 금하고 있었다. 
골드문트는 깜짝 놀랐다. 마을에 가는 것은 '정상적인 남자' 사이에서 학생의 명예로 
간주된다는 것, 그런 모험을 함께 하자는 권유를 받는다는 것은 일종의 명예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거절하고 돌아가 침대에 눕고 싶었다. 몹시 지치고 비참한 기분이어서 
오후에는 자꾸 머리만 아팠다. 그러면서도 그는 아돌프에 대해서 좀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밖에 나가 모험을 해보면 무언가 멋진 일이 있을 지도 모른다. 그 때문에 
두통과 우울증 과 침울한 기분을 씻어 버릴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것은 속세로 나가는 소풍이어서 무언가 음침하고 금지된 것이며 어쩌면 
불명예스러운 것이기도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해방이고 체험이 될 수도 있었다. 
아돌프가 설득하는 동안 골드문트는 망설이며 서 있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고는 
자기도 동행하겠다고 승낙했다.
  골드문트는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아돌프와 함께 이미 어둠이 드리워진 넓은 
안마당의 보리수 아래로 몸을 숨겼다. 마당의 바깥문은 그 시간이면 벌써 닫혀져 있을 
것이다. 아돌프는 그를 수도원의 물방앗간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거리는 어두컴컴하고 
물방아가 돌아가는 소음 때문에 몰래 빠져나가기는 아주 쉬웠다. 둘은 축축하고 
미끌미끌한 두꺼운 널빤지를 차곡차곡 쌓인 더미 위에 뛰어 내렸다. 그러고는 두꺼운 
널빤지를 한 장 빼내어 개울 위에 걸치고 개울을 건너갔다. 그런 다음 검은 숲속으로 
이어지는 희미한 한길로 들어섰다. 모든 것이 다 신비스럽고 가슴이 두근거리게 해서 
골드문트는 마음이 흡족해졌다. 근처 숲에는 이미 또 한 명의 친구인 콘라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 기다리고 있으니까 또 한 명이 요란한 발소리를 내며 달려 
왔다. 키가 큰 에버하르트였다. 네 명의 소년들은 숲을 빠져나갔다. 머리 위에서 
밤새들이 파다닥 소리를 내고 조용한 구름 사이로 밝고 축축하게 빛나는 밤하늘에는 
별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콘라트는 호들갑을 떨며 익살을 부렸고 가끔씩 다른 
친구들도 함께 따라 웃었다. 불안하면서도 축제 같은 밤의 느낌이 그들을 감쌌다. 
가슴이 두근두근 고동치고 있었다.
  약 한 시간쯤 지나자 숲 저쪽에 있는 마을이 눈에 들어 왔다. 마을 사람들은 이미 
모두 잠들어 있는 것 같았고 까만 용마루와 대들보 사이에서 조금씩 드리내밀고 있는 
나지막한 박공널이 어슴푸레 빛을 던지고 있을 뿐 아무 곳에도 불빛은 없었다. 
아돌프가 앞장서 걸어갔다. 그들은 아무 말도 없이 살금살금 몇 집을 돌아서 울타리를 
넘고 정원으로 들어가 화단의 부드러운 흙을 밟고 어느 집의 벽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아돌프가 창문을 두드렸다. 대답이 없자 한참 기다리다가 다시 한 번 
두드렸다. 그러자 안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불빛이 환히 비치며 창문이 
열렸다. 열린 창문을 통해 소년들은 차례로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검은 굴뚝이 
있는 흙바닥 부엌으로 들어갔다. 부뚜막 위에 놓인 조그만 석유 등잔의 가냘픈 불이 
바람에 흔들리며 타오르고 있었다. 거기에 한 처녀가 서 있었다. 농가의 하녀인 듯한 
빼빼마른 그 처녀가 침입자들과 돌아가며 악수를 나누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또 한 
명의 처녀가 얼굴을 내밀었다. 까맣고 긴 머리를 땋은 앳되 보이는 처녀였다. 
아돌프가 선물을 내밀었다. 수도원에서 가지고 온 흰빵 반 조각과 무엇인가를 싼 종이 
봉지였다. 골드문트는 그것이 몰래 가지고 온 향료거나 아니면 성당의 양촛대거나 
비슷한 종류의 물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머리를 땋은 처녀는 등잔도 들지 않고 
더듬어서 문을 빠져나가더니 한참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이윽고 푸른색 꽃무늬가 
새겨진 항아리를 들고 와서 콘라트에게 내밀었다. 콘라트는 그것을 한 모금 마시고 
다음 사람에게로 넘겼다. 네 사람 모두 그것을 마셨다. 독한 사과주였다.
  조그만 등잔불 밑에서 그들은 모두 자리를 잡았다. 두 명의 처녀는 딱딱하고 조그만 
의자 위에 앉고 학생들은 처녀들을 삥 둘러싸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들은 소곤소곤 
이야기를 하면서 가끔씩 사과주를 마셨다. 아돌프와 콘라트가 이야기를 계속 이끌어 
나갔다. 가끔 한 친구가 일어서서 말라깽이 처녀의 머리카락과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귀에다 대고 무슨 말인가 속삭였다. 조그만 처녀에게는 가까이 가지 않았다. 아마 
키가 큰 처녀는 하녀이고, 예쁘장한 조그만 처녀가 이 집의 딸일 것이라고 골드문트는 
짐작했다. 그렇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는 앞으로 두 번 다시 이런 
곳엔 오지 않을 테니까. 한밤중에 몰래 빠져나와 숲속을 거닌다는 것은 멋있고 
신기하고 자극적이어서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하고, 더구나 신비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위험하지는 않았다. 또한 그것은 그다지 양심에 가책이 되지 않았다. 비록 
금지된 일이었지만. 하지만 밤에 처녀들을 방문한다는 것은 단순히 규칙을 어기는 
것을 넘어서 죄악이라고까지 느껴졌다. 물론 다른 친구들에게는 약간 샛길로 빠진 
것에 불과 하지만, 신부의 생활은 금욕이 천명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그에게 있어 
처녀들과 희롱은 허용 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이제 두 번 다시는 같이 오지 
않으리라. 하잘것없이 초라한 부엌에 달린 등불 밑의 어둠 속에서 불안에 싸인 그의 
가슴은 몹시 두근거리고 있었다.
  그의 친구들은 처녀의 앞에서 영웅이라도 된 듯이 젠체하고 틈틈이 라틴어 숙어를 
인용해 가면서 신바람 난 듯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들 모두는 하녀에게 호감을 사고 
있는 듯 가끔씩 하녀에게로 다가가 서투르고 짤막한 애무를 보내고 있었는데 그중 
가장 심하다는 것은 수줍은 키스 정도였다. 그들은 어느 선까지의 행동이 허락되어 
있는가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모든 이야기를 귓속말로 해야 했기 때문에 이 장면은 
사실 어느 정도 익살스런 데가 있었다. 하지만 골드문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가만히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조그만 등장의 불빛을 바라보며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끔씩 무엇을 바라는 듯한 곁눈질로 다른 사람들이 주고받는 애정 
행위 한 토막을 잡아내곤 할 뿐이었다. 그는 가만히 앞만 쳐다보았다. 긴장으로 
온몸이 굳어졌다. 긴 머리카락을 드리운 앳된 소녀를 보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으나 
그래서는 안 된다고 자신에게 명령했다. 그러나 그의 의지가 일시에 풀려 그의 
눈초리가 그윽하고 고요한 처녀의 얼굴을 향해 쏠려질 때마다 처녀의 까만 눈동자가 
어김없이 그의 얼굴을 향해 있음을 알았다. 처녀는 매혹된 듯이 바라보았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골드문트에게 이 한 시간은 난생 처음 느껴보는 긴 
시간이었다--그들의 대화도, 애정 행위도 다 지쳐서 고요해졌다. 모두들 얼마 동안 
난처한 듯 앉아 있었다. 에버하르트가 하품을 하기 시작하자 하녀가 그만 가보라고 
재촉했다. 모두들 일어나서 하녀와 악수를 나누었다. 골드문트는 맨 마지막으로 
악수를 했다. 그 다음에는 앳된 처녀와 악수를 나누기 시작했는데 골드문트는 
이번에도 맨 마지막으로 악수를 했다. 이어 제일 앞서 콘라트가 먼저 창에서 바깥으로 
뛰어 내렸고 그 뒤를 에버하르트와 아돌프가 뒤따랐다. 골드문트가 뛰어내리려 할 때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붙잡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멈출 수가 없었다. 바깥으로 
뛰어내려서야 그는 비로소 주저하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창문에서 앳된 소녀가 
상반신을 내밀고 쳐다보고 있었다. 
  "골드문트."
  소녀가 속삭였다.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또 오실 거죠?"
  소녀가 물었다. 수줍은 그 목소리는 너무 작아 입김에 지나지 않았다. 골드문트는 
머리를 저었다. 소녀는 두 손을 뻗쳐 그의 머리를 잡았다. 관자놀이에 닿은 그녀의 
조그만 두 손에서 따스함이 느껴졌다. 소녀는 까만 그 눈이 눈 바로 앞에 닿을 때까지 
허리를 굽혔다. 
  "또 오세요!"
  소녀가 속삭였다. 소녀의 입술이 그의 입술에 가볍게 닿았다. 
  그는 재빨리 다른 친구들의 뒤를 따라 조그만 정원을 지났다. 그러다가 화단의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축축한 흙냄새와 거름 냄새를 맡았다. 장미꽃 덩굴에 찔려 
손가락에 상처가 났으나 울타리를 넘어 다른 친구들과 함께 마을을 빠져나와 숲으로 
향했다. '절대로 다시 오지 않으리라.' 그의 의지는 명령하듯 말했다. '내일 또 와요!' 
그의 가슴은 흐느껴 울듯 애원했다.
  밤놀이꾼들은 아무한테도 들키지 않고, 마리아브론으로 되돌아왔다. 개울을 건너고 
물방앗간을 지나 보리수가 우거진 마당을 거친 다음 지붕을 넘어 조그만 기둥으로 
이어져 있는 창문을 통해 침실로 들어갔다. 
  다음날 아침, 키다리 에버하르트는 몇 대 얻어맞고서야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큼 곤히 잠이 들었던 것이다. 아침 미사와 아침 식사, 수업에 그 누구도 늦은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골드문트의 안색이 말이 아니었으므로 마르틴 신부는 어디 
아프냐고 물었다. 아돌프가 경계하는 눈초리를 그에게 던졌기 때문에 골드문트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리스 어 시간에 나르치스는 그에게서 잠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나르치스는 골드문트가 병이 났을 거라고 짐작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었다. 수업이 끝나자 나르치스는 골드문트를 
불렀다. 다른 학생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기 위해 심부름을 시켜 도서실에 보내고 
그도 그의 뒤를 따라갔다.
  "골드문트"
  그가 말했다.
  "뭐든 널 도와줄 게 없을까? 너한테 무슨 곤란한 일이 생긴 것 같구나. 너 혹시 
어디가 아픈 건 아니니? 그렇다면 널 침대에 눕게 하고 환자용 스프와 포도주 한 잔 
보내 주지. 오늘은 그리스 어도 머리에 안 들어갔을 거야."
  나르치스는 한참 동안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창백해진 소년은 안절부절 못하는 
시선으로 고개를 떨구었다가는 다시 들고, 입술을 실룩거리며 무언가 말을 하려고 
했다가는 다물어 버렸다. 그러고는 갑자기 옆으로 쓰러지더니 책상에 머리를 
쳐박았다. 그가 갑자기 참나무로 된 두 개의 조그만 천사의 머리 사이에 고개를 
처박고 울음을 터뜨렸다. 나르치스는 당황하여 잠시 눈길을 딴 곳으로 돌려 버렸다. 
그는 한참 후에야 겨우 흐느껴 울고 있는 소년을 안아 일으켰다.
  "좋아, 좋아."
  골드문트가 지금껏 들어 볼 수 없었던 다정스런 말로 나르치스가 말했다.
  "좋아, 친구여, 실컷 울렴. 울고 나면 이내 좋아질 거야. 자, 앉아.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좋아. 너는 오전 내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하느라 무진 애를 썼어. 너의 
행동은 정말 용감했었다. 자, 이제는 울어라. 네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은 
우는 것뿐이야. 안 울어? 벌써 다 울었니? 벌써 다 나은 거야? 자, 그럼 병실로 가자. 
침대에 누워 있거라. 저녁이면 씻은 듯이 낳게 될 테니까. 자 어서!"
  나르치스는 학생들 방을 피해 병실로 그를 데리고 갔다. 비어 있는 두 개의 침대 
중에서 한 곳에 그는 누웠다. 골드문트가 옷을 벗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그는 
골드문트가 아프다는 걸 교장에게 알리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그는 또한 약속대로 
스프와 포도주 한 잔을 주문해 놓았다. 수도원의 오래된 관습인 이 두 가지 은혜는 
가벼운 환자들에게 좋은 호응을 받고 있었다.
  골드문트는 환자용 침대에 드러누워 어지러워진 머리를 정리해 보려고 애를 썼다. 
한 시간 전쯤만 하더라도 오늘 그를 그다지도 피곤하게 만든 원인이 무엇인지 분명히 
말을 할 수가 있었다. 머리는 텅 비고 눈은 불타는 듯 고통스럽게 했던 영혼의 아픔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밝힐 수 있었을 것이다. 어젯밤 일을 잊어버리기 위해 잡시도 
쉬지 않고 힘든 노력을 계속했다. 아니, 잊어버리려고 애를 쓴 것은 어젯밤의 일 그 
자체가 아니다. 그것은 또한 닫혀진 수도원에서의 어리석고도 즐거운 소풍도, 
숲속에서의 방랑도, 물방앗간에 이른 거무죽죽한 물이 흐르는 개울을 건너기 위해 
만든 미끌미끌한 다리도, 울타리나 창문, 골목길 등을 건너뛰어 오가던 것도 모두 
아니다. 그것은 소녀의 숨결을 느끼며 듣던 말과 소녀와의 악수, 그의 입술에 닿은 
소녀의 입술 감촉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또 어떤 새로운 공포, 새로운 체험이 더해졌다. 그것은 나르치스가 
자기를 돌보아 준 것이다. 그 곱고 고귀한 품위를 가진 나르치스가, 울 것만 같은 
가느다란 입술을 한 그 영리한 나르치스가. 자신은 그 나르치스 앞에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는 나르치스 앞에서 수줍어하다가, 머뭇거리다가 결국에는 울고 만 
것이다. 그리스 어나 철학이나 정신적인 사나이다움과 품위 있는 스토아적 평정, 
이같은 고귀한 무기로써 그 훌륭한 인물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버리기는 커녕 
보잘것없이, 그의 앞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자신은 그것을 결코 용서치 못하리라. 
그리고 나르치스의 눈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틀림없이 수치심을 느껴야만 하리라. 
  울고 나니 크나큰 긴장은 풀어졌다. 병실의 고요한 고독과 편한 잠자리는 썩 마음에 
들었다. 절망은 반 이상이나 사라졌다. 한 시간쯤 지나자 수도자가 들어와서 밀가루 
스프와 빵을 먹여 주었다. 거기다가 또 보통 때 같으면 명절날 이외에는 못 먹는 붉은 
포도주를 마셨다. 골드문트는 실컷 먹고 나서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도무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얼마 동안 시간이 흐른 뒤 문이 조용히 열리며 나르치스가 
들어왔다. 그때 그는 잠이 들어 있었다. 뺨에는 벌써 생기가 돌았고, 나르치스는 한참 
동안 사랑과 호기심과 약간의 선망의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골드문트는 병을 
앓고 있는 게 아니다. 이제 내일부터 포도주를 보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 존재했던 장막은 이제 사라지고 그들은 친구가 되리라는 것을 
확신했다. 오늘은 골드문트가 그를 필요로 하고 그의 봉사를 받고 있지만, 그 자신이 
약해져서 골드문트의 사랑과 도움을 필요로 할 때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 
일이 있다면, 나는 이 소년에게서 그것을 받을 수가 있으리라, 하고 그는 생각했다.

         3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사이에서 싹튼 이 새로운 우정은 실로 기묘한 것이었다. 
그것에 호감을 갖고 바라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때로는 두 사람 스스로도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이 일로 인해 누구보다도 괴로워한 사람은 사색가인 나르치스였다. 그에게 있어 
모든 것은--사랑까지도--정신이었다. 때문에 아무것도 의식하지 않고 끌려가는 대로 
몸을 맡긴다는 것은 그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우정에 있어서 그의 역할을 
어디까지나 이끌어 가는 정신이었다. 그리하여 이 우정의 운명과 그 넓이와 의미를 
자각하고 있었던 사람은 처음 얼마 동안은 나르치스뿐이었다. 오랜 시간 그는 사랑을 
하면서도 고독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골드문트를 깨닫게 해주었을 때 비로소 참다운 
친구로서 자신의 것이 되어 주리라고 믿었다. 골드문트는 열렬히 그 새로운 운명에 
몸을 맡겼으며 나르치스는 책임있게 그것을 받아들였다.
  골드문트에게 있어 나르치스라는 인물은 구원자요 병을 고쳐준 사람이었다. 사랑에 
대한 그의 청춘의 요구는 예쁜 처녀를 보았다는 것과 키스를 했다는 것에 의해 눈을 
크게 떴으면서도 절망했던 것이다. 그가 여태까지 생각해 왔던 꿈도, 자신이 믿고 
있었던 모든 것, 자신이 천명이요, 천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일체의 것들이 
창가에서의 지난밤의 그 키스와 까만 눈동자에 의해서 밑뿌리서부터 위태로워진 것을 
마음속에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에 의해 수사 생활을 할 수밖에 없도록 
정해지기도 했지만 스스로 자진해서 그 결정을 받아들이기도 하고 최초의 청춘의 
정열로 타올라 경건하고 금욕적이면서 사나이다운 이상으로 향한 골드문트, 그는 
최초의 보상받을 수 없는 봉변을 당해, 관능적인 것에의 최초의 호출을 당해, 또한 
최초의 여성의 인사를 받고 이곳에 자신의 적과 악마가 있으며 여자라는 것은 
자신에게 위험스런 존재라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운명은 
그에게 구원의 손을 뻗쳤다. 가장 절박한 순간에 이 우정이 그를 맞아 주었다. 그의 
소망에는 꽃이 만발한 꽃밭을, 그의 공경하는 마음에는 새로운 제단을 마련해 주었다. 
거기서는 그가 사랑하는 것을 허락했다. 죄를 저지르지 않고도 몸을 바칠 수 있었다. 
나이도 많을 뿐만 아니라 지혜로도 자기보다 월등한 흠모의 대상이 되어 있는 
친구에게 그의 마음을 바칠 수 있었다. 관능적인 것을 향한 위험한 관능의 불길을 
고귀한 희생의 불길로 바꾸고 영혼의 불길로 바꿀 수가 있으리라.
  하지만 이 우정의 첫 번째부터 그는 예상치 못했던 장애에 부딪치고 말았다. 이 
친구를 자신과 모순되는 반대 인물로 생각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두 
개를 하나로 합쳐 차이를 없애고, 대립에 다리를 놓아주기 위해서는 사랑과 성실한 
헌신만 있으면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나르치스는 얼마나 딱딱하고 침착하며 
또 얼마나 명백하고 빈틈없는 사람이었던가! 그는 무심히 몸을 바친다든가, 우정의 
나라를 감사하면서 같이 걸어간다는 것은 알지도 못하고, 바라지도 않는 것 같았다. 
목표가 없는 길이라든가 몽상적인 방랑 같은 것을 그는 모르는 것 같았고 또 참을 
수도 없을 것 같았다. 물론 그는 골드문트가 병이 난 것처럼 보였을 때는 걱정을 하며 
보살펴 주었고, 학교나 학문에 관한 것에는 모든 점에서 충실하게 도와주고 충고도 
해주었다. 책에 나오는 어려운 부분을 설명해 주고, 문법이나 논리학이나 신학의 
세계에 눈을 뜨게도 해주었다. 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친구에게 진심으로 만족한 
태도를 보인 적도, 융합한 적도 없는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친구를 예사롭게 
비웃거나 대수롭지 않게 상대해 버리는 것 같았다. 이것은 단순히 교사로서의 
근성이나 지혜로운 연장자로서의 태도가 아니고 그 배후에 더욱 중요한 그 무엇이 
있는 것이라고 골드문트는 믿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깊은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 우정은 그를 이따금 슬프게 했을 뿐만 아니라 안절부절 못하게도 했다.
  사실 나르치스는 그의 친구가 가지고 있는 힘을 잘 알고 있었다. 친구의 꽃다운 
아름다움에 대해서도, 자연 그대로의 생활력이나 꽃과 같은 충만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지 않는다. 그는 불타오르는 듯한 젊은 혼을 그리스 어로써만 살찌우려 하고, 
천진한 사랑에 논리학적인 답변만 하려는 선생은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그 
금발의 소년을 지나칠 정도로 사랑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로서는 위험한 짓이었다. 
왜냐하면 사랑한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자연의 순리가 아니라 해서는 안 되는 
기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아름다운 눈을 흐뭇하게 바라보아서도, 이 밝은 금발의 
꽃향기에 가까이에 있는 것에 만족해서도 안 되었다. 이 사랑 때문에 한순간이라도 
감히 관능적인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되었다. 골드문트가 수사가 되어 금욕자가 되고, 
평생 신성한 것을 지향해서 노력을 하게 운명지어져 있다고 느낀다면, 나르치스에게는 
물론 그런 생활이 정해져 있었다. 그에게는 오직 하나 최고 형태의 사랑만이 허용되어 
있었다. 그러나 금욕자가 된다는 골드문트의 천명을 나르치스는 믿지 않았다. 
나르치스는 누구보다도 분명하게 인간의 마음을 읽을 줄 알았다. 특히 사랑하고 있는 
이런 경우에 나르치스는 한층 더 고도의 명백함을 가지고 읽을 수 있었다. 
정반대인데도 불구하고 마음속까지 이해하고 있었던 골드문트의 성질이 그에게는 잘 
보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르치스 자신이 잃어버렸던 성질의 다른 면이었기 
때문이다. 나르치스는 그 성질이 공상이나 교육의 과오나 아버지의 훈계 등의 딱딱한 
껍질에 싸여 있다는 것을 믿고, 복잡할 것 없는 이 젊은 생명의 비밀을 모두 다 훨씬 
전부터 예감하고 있었다. 그의 임무는 확실했다. 말하자면 그것은 이 비밀을 그 
당사자에게 알게 해주고, 그 껍질에서 빠져나오게 해 본래의 성질을 다시 찾아 주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은 괴로운 일일 것이다. 그리고 더 괴로운 것은 그 때문에 이 
친구를 잃지나 않을까 하는 곳이었다.
  아주 천천히 그는 목표를 향해 다가갔다. 수개월이 지났으나 서로 진지하게 
이야기할 수도, 심오한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었다. 우정에 금이 가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 사이는 서로 떨어져서 그들의 포물선은 폭이 넓어졌다. 눈뜬 사람과 장님이 
나란히 걸어갔다. 장님 스스로가 자기 자신이 장님이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다는 
것은 차라리 그 자신을 위해서는 다행한 일이었다.
  먼저 타개책을 강구한 것은 나르치스였다. 그것은 그 당시 마음이 흔들리어 
허덕이고 있었던 소년을 자기에게 몰아댄 것은 어떤 경험이었던가를 캐물으려고 했을 
때였다. 캐내는 일은 생각한 것보다 쉬웠다. 골드문트는 벌써부터 그날 밤의 경험을 
참회하고 싶은 기분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놓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은 원장 
이외에는 없었다. 하지만 원장은 그의 고해 신부가 아니었다. 그래서 나르치스가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을 때 두 사람이 맺어지게 되었던 시초의 사건을 나르치스가 
골드문트에게 상기시켜 몰래 그 비밀을 건드리자 상대는 솔직히 말했다.
  "당신이 성직을 아직 갖지 않아서 참회할 수가 없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나는 참회를 하고 나서 그 사건에서 해방되고 싶었습니다. 그로 인해 벌을 받는 것도 
사양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의 고해 신부에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신중하고 빈틈없이 나르치스는 파고들어갔다. 지나간 발자취는 발견되었다.
  "네가 병이 난 것 같아 보이던 그날 아침을 말하고 있는 거니?"
  나르치스가 신중하게 계속 파고 들어갔다.
  "벌써 잊은 건 아니겠지? 그때 우리는 친구가 되었었지. 나는 가끔 그때 일을 
생각한단 말이야. 아마 너는 눈치채지 못했을 테지만 나는 그때 정말 당황했었어."
  "당황했었다구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골드문트는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당황한 쪽은 오히려 저였어요. 뻣뻣이 선 채 훌쩍거리며 아무 말도 못하다가 
울음을 터뜨린 것은 제 ㅉ이였으니까. 나는 아직도 그때의 일을 부끄러워하고 있어요. 
나는 두 번 다시 당신의 눈앞에 나타날 수 없으리라 생각했는걸요. 당신 앞에서 
불쌍하게 맥없이 쓰러졌다는 걸 생각하면요."
  나르치스는 조금씩 다가섰다.
  "네가 불쾌했다는 것은 알고 있어. 너처럼 야무지고 용감한 녀석이 낯선 사람 
앞에서, 더구나 선생 앞에서 울음을 터뜨렸다는 사실은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지. 아니, 
나는 그때 네가 병이 들었다고 생각했지. 열이 심하면 아리스토텔레스라도 이상한 
행동을 했을 거야. 그러나 너는 진짜로 병이 난 건 아니었어. 열도 전혀 없었거든. 
그래서 넌 부끄러워하고 있는 거야. 열에 지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없어. 안 
그래? 너는 무슨 다른 일에 대한 패배감 때문에 부끄러워한 거야. 대관절 무슨 특별한 
일이라도 있었니?"
  골드문트는 약간 주저하는 듯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다. 당신이 제 고해 신부라고 생각하게 해주십시오. 
언젠가는 말해야만 되는 일이니까요."
  고개를 숙인 채 그는 친구에게 그날 밤의 사건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에 나르치시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실 '마을에 간다'는 것은 금지되어 있지. 하지만 금지되어 있는 것이라도 
얼마든지 할 수가 있고, 또 그것을 비웃을 수도 있는 거야. 안 그러면 참회라도 할 수 
있는 일이지. 그러면 그 일은 그것으로 모두 끝나. 아무런 관련이 업어지지. 대개의 
학생들이 하는 것처럼 넌들 한 번쯤 그런 사소한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단 말이지? 그것이 그렇게 나쁜 일인가?"
  골드문트는 자제력을 잃고 화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당신은 정말 선생 같은 말씀만 하시는군요. 당신은 무엇이 문제가 되는지 잘 
알면서 말이에요. 물론 저도 수도원의 규칙을 어기고 학생들의 바보스런 장난에 
가담했다고 해서 그것이 그다지 커다란 죄악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것이 
수도원 생활의 한 가지 예행 연습은 아니었다고 해도 말입니다."
  "그만둬!"
  나르치스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을 가로막았다.
  "가정 경건하다고 하는 신부들조차도 그런 예행 연습이 필요했다는 걸 너는 모른단 
말인가! 성자의 생활에로 이로는 지름길 중 하나가 방탕한 생활이라는 사실은 너는 
모른단 말인가!"
  "그런 뜻이 아닙니다."
  "골드문트가 대들 듯이 말했다.
  "저의 양심을 무겁게 짓누르는 것은 그런 미약한 정도의 규칙을 어겼다는 사실이 
아니라는 걸 말씀드리려고 했던 겁니다. 제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그 소녀입니다. 
당신에게 설명할 수가 없군요. 이 유혹에 따르기 위해 소녀를 만져 보려고 한 
손이라도 뻗치는 날에는 두 번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라, 지옥이 저를 삼켜 버리고 
끝끝내 놓아주지 않으리라는 기분이었습니다. 모든 아름다운 꿈이, 모든 성덕이, 
하느님과 선에 대한 사랑이 끝나 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나르치스는 깊은 생각에 잠기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하고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반드시 선에 대한 사랑과 일치하지 않는 법이거든. 그 정도로 간단한 것이라면 
얼마나 좋겠느냐. 무엇이 선인가를 우리는 알고 있지. 그것은 계율에 쓰여 있거든. 
그렇지만 하느님은 계율 속에만 있는 게 아니야. 계율이란 건 하느님이 극히 사소한 
한 부분에 지나지 않아. 계율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 하느님에게서 더한층 멀리 떨어져 
있을 수도 있어."
  "제 기분을 이해해 주실 수 없습니까?"
  하고 골드문트는 탄식했다.
  "물론 이해해. 너는 네가 생각하는 '세속' 혹은 '죄악'에 대한 모든 것을 여자 속에 
성 속에 포함시키고 있어. 넌 그 외의 다른 죄는 범할 수가 없거나 혹 범했다 
하더라도 참회를 통해 사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그러나 오직 한 가지의 
죄악만은 그렇지가 않아."
  "그렇습니다. 저도 확실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 봐. 나는 너를 이해하고 있단 말이야. 너의 생각이 그렇게 틀린 것은 아니야. 
이브와 뱀에 대한 이야기는 확실히 부질없는 우화는 아니거든. 하지만 네 생각은 
바람직하지 못해. 네가 만일 다니엘 원장님이나 대부라든지 성자 
크리소스토무스라든지 주교라든지 사체라든지 그것도 아닌 평범한 수도사이기라도 
하다면 너의 생각이 옳을 수도 있지. 그러나 너는 그런 사람이 아니거든. 너는 겨우 
학생이란 말이야. 설사 네가 평생 수도원에 있고 싶어하고, 너의 아버지도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 하더라도 너는 아직 맹세를 한 것도 아니고, 성직을 받은 것도 아니야. 
그러니 네가 오늘이나 내일 어떤 아름다운 처녀의 유혹에 넘어갔다 할지라도 맹세를 
어겼다거나 그 맹세에 상처를 준 것은 아니야."
  "물론 글로 써둔 맹세는 없습니다,"
  골드문트는 매우 흥분해서 소리질렀다.
  "그러나 쓰여지지 않은 맹세, 내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가장 신성한 맹세에 상처를 
준 것입니다.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는 통할지도 모르는 것이 나에게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당신 자신도 성직을 얻는 것도 맹세를 한 적도 없지만 
당신이라면 여자를 가까이하는 어리석은 짓은 결코 하지 않겠지요? 제가 잘못 
생각하고 있나요? 당신은 제가 생각하고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까? 당신은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런 사람이 전혀 아닌가요? 당신을 말로써 윗사람들에게 맹세를 한 
것은 아니지만 마음속에서는 벌써 오래 전에 그런 맹세를 하고, 그 맹세에 의해서 
영원히 의무를 짊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당신은 저와 같은 
인간이 아니십니까?"
  "아니야. 골드문트. 내가 너와 같을 수는 없어. 그리고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도 
아니야. 물론 나는 어떤 무언의 맹세를 지키고 있어. 그 점에 있어서는 네가 말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너와 같을 수는 없어. 이 말을 언젠가는 너도 꼭 
생각해 내게 될 거야. 우리의 우정은 네가 완전히 나를 닮지 않았다는 사실을 네게 
보여주는 것 이외에는 특별한 목적도 의미도 가지지 않다는 것을 말이야."
  골드문트는 한 대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멍청하게 서 있었다. 나르치스의 시선과 
음성에는 거역할 수 없는 그 무엇이 담겨져 있었다. 그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나르치스는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나르치스의 무언의 맹세와 그 맹세는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나르치스는 그를 진심으로 대해 주는 건가, 아니면 어린아이로 취급하는 
건가? 이 기묘한 우정에서 혼란과 슬픔이 새삼스럽게 다시금 시작되었다.
  나르치스는 이제 더 이상 골드문트의 비밀이 어떠한 것인가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다. 그 배후에 있는 것은 인류 최초의 어머니인 이브였다. 그러나 그렇게 
아름답고 건강하고 향기 어린 젊음 위에 눈뜨는 성이 왜 그렇게 괴로운 반항으로 
다가와야만 한단 말인가? 어떤 악마가, 보이지 않는 반대자가 일을 하고 있음에 
틀림없으리라. 그리고 이 훌륭한 인간을 내부에서 분열시켜 그의 근본적인 본능과 
싸우게 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래, 그 악마를 발견하여 기도의 힘으로 본체를 
드러내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그 악마를 물리칠 수가 있다.
  그러는 동안 골드문트는 친구들에게서 차차 고립되었다. 그러나 오히려 친구들이 
골드문트한테 버림을 받고 배반을 당했다고 느낀 것인지도 모른다. 그와 나르치스의 
우정을 우호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남의 말 하기 좋아하는 
자들은 두 사람의 우정이 순리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악평했는데 특히 두 사람에게 
호감을 가졌던 사람들이 그러했다. 그리고 그 우정이 비난받을 만한 언덕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조차도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누구 하나 이 두 사람의 인간 
관계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두 사람의 결합에 의해 그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분리되었다. 그들이 결합은 그런 사람들에게는 동지적인 결합도, 수도원에서 흔히 있는 
그런 류의 결합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기독교적인 결합도 아니었다. 다니엘 원장의 
귀에는 두 사람에 대한 온갖 소문과 비난과 증상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원장은 40여 
년의 수도원 생활에서 수없이 많은 젊은이들의 우정을 보아왔다. 그것은 한 폭의 
수도원의 그림이었으며 아름다운 경치요, 때로는 위안이었고 반면 위험한 것이기도 
했다. 원장은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서 주시하고 있었으나 간섭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배타적이고 격렬한 우정은 드물었다. 위험하다는 생각도 해보았으나 
그들의 순결함을 한순간도 의미하지 않았기 때문에 원장은 그 예외적인 지위에 있지 
않았더라면 원장은 주저하지 않고 그 두 사람을 떼어 놓을 어떤 조치를 취했으리라. 
골드문트가 동급생에게는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고 자기보다 연장자인 선생과 유독 
친근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스스로에게 좋지 않은 일이었다. 또한 다른 사람들보다 
동등하게, 아니 오히려 더 뛰어 나간다고 간주되는 나르치스, 그가 특히 좋아하는 길을 
가는 데 있어서 방해를 받아도 좋단 말인가? 그의 우정이 그를 태만과 불공평에 젖어 
버리게 했고 그가 교사로서 열성을 보이지 않았다면 당장에 불러들였으리라. 그러나 
그에게 불리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의 질투심에 의한 오해와 소문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거기다가 원장은 나르치스의 두드러질 정도로 예리하고 
다소간은 거만하다고까지 할 그 특별한 천성을 인간에 대한 지나친 통찰력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원장은 그런 천성을 과대하게 평가하지는 않았다. 나르치스에게 
다른 천성이 있었다면 원장은 그것을 좋아하지는 않았으리라. 그러나 나르치스가 
학생에게 골드문트에게 무슨 특별한 것을 발견했다는 사실, 자신보다도 혹은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골드문트를 훨씬 더 잘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원장은 의심하지 
않았다. 원장 자신은 골드문트의 태도에 나타나 있는 애교 섞인 우아한 품위 이외에 
그에 대해 달리 아는 바가 없었다. 다만 학생으로서, 수도원의 일원이며 좀 이른 감은 
있지만 벌써부터 수도사의 일원인 것처럼 느끼고 있는 골드문트에 대해 다소 
감동적이긴 하나 미숙한 열의를 나르치스가 두둔해서 더한층 격려해 주리라는 것은 
걱정을 안 해도 된다고 믿었다. 골드문트를 위해 두려워할 것은 오히려 나르치스가 
일종의 정신적인 자부와 학자적인 거만을 전염시켜 주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위험성은 바로 이 학생에게 그다지 크지 않은 것 같았다. 무엇이든 
그대로 보고 있는 편이 낫지 않을까. 훌륭하고 강한 성품의 인간을 다스리는 것보다 
평범한 인간을 다스리는 것이 감독자에게는 얼마나 편안하고 단순하며 수월한지 
모른다는 것을 생각 할 때마다 원장은 탄식과 동시에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자신마저 불신에 감염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하여 원장은 두 사람의 예외적인 
인물을 자신에게 맡겨 준 것을 감사히 여겨야 하리라 생각했다.
  나르치스는 그의 친구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았다. 인간의 천성과 성격을 
인지하는 데 특별한 재능을 지닌 그로서는 이미 오래 전에 골드문트에 대한 해답을 
알고 있었다. 그 젊은이가 갖고 있는 모든 생명력과 빛은 분명히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 는 감각과 영혼에서 재능이 넘치는, 강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온갖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를테면 예술가로서의 특성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어쨌든 그런 위대한 
사랑의 힘을 가진 사람이, 꽃의 향기나 아침의 햇빛이나 망아지나 나는 새나 음악을 
이다지도 깊이 맛보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대관절 무엇 때문에 정신적인 것에 
열중하고 있으며 또 금욕주의자가 되는 것에 열중하고 있을까? 나르치스는 그 점에 
대해 거듭 생각해 보았다. 골드문트의 아버지가 그러한 마음을 갖는 데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어떻게 그것을 드러내게 할 수 
있었을까? 어떠한 마법을 사용해서 아들을 흘렸기에 아들은 이런 천명과 의무를 믿게 
되었을까? 그리고 아버지란 도대체 어떤 인물일까? 나르치스는 의도적으로 그 
아버지에 대해 화제를 돌렸고 골드문트 자신도 아버지의 이야기를 적지 않게 
했었는데도 불구하고 나르치스는 그의 아버지를 상상해 낼 수가 없었다. 그것은 
기묘한 일이었다. 골드문트가 어릴 적에 잡은 송어나 나비에 대한 이야기, 친구 혹은 
개나 거지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새소리를 흉내낼 때 나르치스는 그 즉시 장면을 
연상할 수가 없었다. 아니, 그 아버지가 골드문트의 생활 속에서 그만큼 중대하고 강한 
지배적인 인물이었다면 그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달리 묘사할 수도 있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에 대한 다른 모습을 그려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르치스는 골드문트의 
아버지를 그리 높이 평가하지는 않았다. 그의 아버지는 마음에 들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가 진짜 골드문트의 친아버지인가 하는 의심도 가끔씩 해보았다. 그러나 
대체 그 힘을 어디에서 얻었을까? 그는 어떻게 골드문트의 영혼에 그 영혼의 핵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 꿈을 불어넣을 수 있었을까?
  골드문트는 많은 생각을 해보았다. 친구의 마음속에 있는 진실된 사랑을 의심하지는 
않았지만 전과 다름없이 친구에게서는 하나도 진지한 대우를 받아보지 못하고 언제나 
어린아이 취급을 받고 있다는 불쾌한 감정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나르치스가 자기는 
그와 같은 인간이 아니라는 걸 이해시키려고 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도일까?
  하지만 골드문트가 이런 생각으로만 시간을 보낸 것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명상에 
잠겨 있다는 것은 그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루종일 그는 여러 가지 할 일이 
있었다. 그는 이상하게도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 문지기 수사를 자주 찾아갔다. 그는 
문지기에게 부탁을 해 한 두 시간씩 블레스를 탈 기회를 얻기도 했고, 때로는 
수도원에 딸린 주민들 집에 들러 시간을 보내기도 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물방앗간집 
주인과 무척 친하게 지냈다. 골드문트는 가끔 그 집 하인과 같이 물개를 데리고 
놀기도 하고 골드문트가 눈을 감은 채 냄새만으로 여러 가지 종류의 밀가루 가운데서 
알아맞춘 상등품의 프랠라트 밀가루로 과자를 굽기도 했다. 나르치스와 함께 있을 
때도 많았지만 그에게는 즐거움이었다. 그는 학생들과 함께 합창단에 들어가 함께 
노래 부르는 것도 좋아했고 제단 앞에서 묵주를 헤며 기도를 드리는 것도 좋아했으며, 
미사에서 사용하는 아름답고 엄숙한 라틴 어를 듣는 것도 좋아했다. 그리고 성향이 
피어 오르는 가운데서 성당의 온갖 성물들이 황금빛으로 빛나는 것을 보는 것도 
즐겼다. 가끔씩 기둥에 동물들을 데리고 있는 복음서의 저자들이나 모자를 쓰고 
순례자의 주머니를 찬 야고보 등의 조용하고 거룩한 성자들의 상을 바라보기도 했다.
  그는 성상을 보면서 황홀해했고 돌이나 나무의 모습들이 자신과 신비적인 연관성을 
갖고 있는 듯한 감정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말하자면 그에게 있어 그 성상들은 저지 
전능한 불멸의 대부이며 보호자요, 자기 생의 이정표를 제시해 주는 선지자였다. 
동시에 기둥이나 창문이나 출입문, 제단의 장식, 아름답게 측면을 보이고 있는 여러 
가지 모양의 부연 장식이나 기둥의 돌 속에서 퉁겨져 엉겨붙은 잎새 모양의 
장식에서도 자연을 모방해 돌이나 나무로 만든 제2의 동물이나 식물이 있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귀중하고 거룩한 비밀로 다가왔다. 그는 종종 동물의 머리와 잎새의 다발을 
묘사하면서 자유롭게 시간을 그려보기도 했다.
  그는 찬송가 중에서도 마리아의 노래를 특히 좋아했다. 그는 그런 노래들이 주는 
빈틈없고 엄격한 구절, 자꾸 반복되는 애원과 찬송을 좋아했다. 기도 드리면서 그 
거룩한 의미를 쫓아거가나 아니면 그 의미는 잊은 채 그 시구에서 느낄 수 있는 
장엄한 운율이나 그 반복을 좋아했다. 학문이나 문법이나 논리학은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관심의 대상은 오히려 그림이나 음의 세계였다.
  골드문트는 점점 동급생들로부터 소외감을 느꼈다. 그리고 오랜 시간에 걸쳐서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배척당하고 냉대를 받고 있다는 것은 불쾌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지루하기도 했다. 그는 이따금씩 옆자리에 앉아 있는 잔소리깨나 늘어놓을 
듯한 동급생을 웃기기도 하고 옆 침대에 자고 있는 말없는 동급생에게 잡담을 
늘어놓기도 했다. 그리하여 한 시간 가량이나 애를 써서 몇 번의 관심과 시선을 
끌기도 했지만 그런 식으로 가까워진 우정은 '마을에 가자'는 권유를 두 번이나 받는 
것으로 그 보상이 돌아왔을 뿐이다. 하지만 그는 마을에 가지 않았으면 긴 머리카락의 
앳된 소녀도 기억에서 멀어져 더 이상 그녀를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4

  나르치스는 오랫동안 골드문트를 방치해 두었다. 그의 비밀을 캐내려고 벼르고 
있었지만 허사로 돌아간 것 같았다.
  골드문트가 그의 내력이나 고향에 관해 그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도무지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그림자 같이 형태가 없는 아버지 이야기와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에 대한 전살 같은 이야기뿐이었다.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것에 
뛰어났던 나르치스는 점점 그의 친구가 생활의 한 부분을 잃어버린 사람, 다른 어떤 
괴로움이나 마력의 압박 밑에서 과거의 일부를 잊어버리기로 작정한 사람 중의 
하나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런 그에게 무엇을 묻거나 깨우친다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또 자신이 이성의 힘을 과시한 나머지 잔소리만 늘어놓게 
되리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를 친구로 결합시킨 사랑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때때로 같이 있는 
습관도.... 두 사람의 본성이 서로 상충되는 점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서로가 
상대방으로부터 많은 것들을 배웠다. 그리하여 그들 사이에 이성의 언어와 더불어 
영혼과 상징의 언어가 생겨나기에 이르렀다. 마치 두 개의 주택 사이에 마차나 말탄 
사람이 달릴 수 있는 한길이 있을지라도 그 옆에 놀기 위한 조그만 길이나 골목이나 
사잇길이 수없이 생기는 것과 마찬가지로--어린이들을 위한 조그만 길이나 애인들을 
위한 오솔길, 거의 눈에도 띄지 않는 개나 고양이의 길이 생기는 것처럼--. 
  골드문트의 풍부한 상상력은 차츰 마술 같은 길을 지나서 친구의 생각과 두 사람의 
말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그의 친구는 또 골드문트의 마음과 여러 종류의 상태를 
침묵으로써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사랑이라는 빛 속에서 
영혼과 영혼의 새로운 결합이 차츰 익어간 뒤에야 비로소 언어라는 사다리가 
놓여졌다.
  수업이 없는 어느 날이었다. 도서실에서 불시에 두 사람을 우정의 핵심과 의미의 
한가운데에 갖다놓고 멀리까지 새로운 빛을 던지는 것과 같은 대화가,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대화가 이루어졌다
  그들은 수도원에서 언급하는 것조차 금지되어 있었던 점성술에 관해 이야기한 
것이었다. 나르치스는 점성술이란 인간의 운명과 천명에 질서와 조직을 부여해 주는 
시도라고 말했다. 그러자 골드문트가 이의를 제시했다.
  "당신은 언제나 차이에 대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그것이 당신의 가장 특별한 
성질이라는 것을 나는 차츰 깨달았습니다. 가령 당신과 나 사이에 있는 커다란 차이에 
대해서 당신이 말씀하실 때, 그 차이는 언제나 차이를 발견하려고 열중하고 계시는 그 
묘한 태도 속에 있는 거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확실히 자네는 핵심을 찔렀네. 사실 자네에겐 차이라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지. 하지만 내게는 중요한 일이야. 나의 본성은 학자이고, 나의 천직은 학문일세. 
학문이라는 것은 자네 말을 인용한다면, '차이를 발견하려고 열중하는' 것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란 말일세. 이보다 더 학문의 본질을 내세울 수 있는 말은 없을 거야. 
학문적인 인간에게 있어서는 차이의 확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단 말일세 학문이라는 
것은 차이의 기술일세. 이를테면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서 그 사람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짓는 특징을 발견하는 것, 즉 사람을 인식하는 것이지."
  "그건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농부의 신을 신고 있기 때문에 농부이고, 어떤 
사람은 왕관을 쓰고 있기 때문에 왕입니다. 그것은 확실히 차이죠. 하지만 그런 
것쯤은 아직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어린아이라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농부와 왕이 똑같은 차림을 하고 있다면 그때는 어린아이도 구별할 수가 
없지 않겠나?"
  "학문이라고 해서 그런 구별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 학문이 어린아이보다 현명하다고 말할 수 없겠지. 그것은 
인정하겠네. 하지만 학문은 어린아이보다 끈질기단 말일세. 학문은 가장 단순한 
특징에만 주의를 하진 않아."
  "아니에요. 영리한 아이라면 그것도 가능하죠. 어린애는 눈짓이나 태도로 왕을 
알아낼 수 있을 겁니다.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당신네 학자들은 너무 거만하다는 
겁니다. 당신들은 우리 같은 사람들은 당신들보다 어리석다고 생각할 테죠. 하지만 
지식은 없어도 지혜는 가질 수 있거든요."
  "자네가 그걸 깨닫기 시작했다는 건 기쁜 일일세. 그래서 내가 우리 둘 사이의 
차이점에 대해 이야기 할 때, 현명하다는 것을 뜻하고 있지 않다는 것도 좋다느니 
나쁘다느니 하는 말은 하지 않아. 다만 자네는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있을 뿐이지."
  "그것을 이해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특징의 차이에 관해서는 
물론 천명의 차이에 대해서도 때때로 말씀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당신은 왜 나와 다른 
천명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신이나 나나 똑같이 크리스찬입니다. 나와 
마찬가지로 당신도 수도원 생활을 하실 결심을 결심을 하고 계십니다. 나와 똑같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십니다. 우리 두 사람의 목표는 똑같습니다. 우리들의 
천명은 똑같습니다. 즉, 하느님한테 돌아가는 겁니다."
  "대단히 좋은 말이야. 교리학 책에 의하면 인간은 모두 똑같지. 그러나 모든 인생이 
그런 건 아니야. 구세주를 가슴에 안고 있는 사랑하는 제자와 구세주를 배반한 다른 
제자, 이 두 사람은 아마 같은 천명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단 
말일세."
  "당신은 궤변가입니다, 나르치스. 계속 이런 길을 가는 한 우리는 서로 다가설 수가 
없습니다."
  "어떤 길을 가더라도 우리는 다가설 수 없네."
  "그런 말씀을 하지 마십시오."
  "그건 진심일세. 해와 달이, 바다와 육지가 서로 접근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서로 
접근하지 않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란 말이네. 이봐, 우리 두 사람은 해와 달, 
바다와 육지란 말이야. 우리의 목표는 서로 합쳐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인식하고 
상대방에게 그 사람이 무엇인가를, 즉 상대방인 반대자들과 그 보충을 보고 그것을 
서로 존경하는 걸 배우는 것이지."
  골드문트는 어리둥절해져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곧 슬픈 표정이 되고 말았다. 
그는 간신히 말했다.
  "당신이 나의 생각을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주시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인가요?"
  나르치스는 약간 주저하다가 잠시 후 딱딱하지만 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그 때문이야. 이봐 골드문트, 내가 너 자신만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에 
너는 익숙해져야만 해. 네 목소리의 모든 음조, 네 모든 몸짓, 네 모든 미소를 진실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걸 믿어 줘. 하지만 너의 생각을 나는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이진 
않아. 너의 본질적이고 필연적이라고 생각하는 그 점을 나는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거야. 너는 그토록 다른 많은 천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네 생각에만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 달라는 것은 무엇 때문이지?"
  골드문트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그렇게 말했었지요. 당신은 언제나 나를 어린아이처럼 생각하고 있다구!"
  나르치스는 그래도 변함이 없었다. 
  "나는 네 생각의 일부만을 어린아이의 생각이라고 본다. 아까 서로 이야기한 것 
중에서 영리한 아이는 학자보다 못할 것이 없다는 바로 그 점을 생각해 봐. 
어린아이가 학문에 대해서 말하려고 한다면 학자는 아마 그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테지."
  골드문트는 날카롭게 소리 질렀다.
  "학문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을 때도 당신은 나를 비웃었습니다! 가령 내 신앙 
전체는, 학습에 있어서의 진보를 위한 내 노력은, 수사가 되기 위한 내 소망은 단지 
어린아이의 소망에 불과 하다는 듯이 당신은 날마다 비웃고만 계셨습니다."
  나르치스는 심각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만약 네가 골드문트라면 나는 너를 진정으로 받아들이겠어. 그러나 네가 늘상 
골드문트라는 법은 없어. 나는 네가 완전한 골드문트가 되기를 원할 뿐이야. 너는 
학자도 수사도 아니야. 학자나 수사는 아주 보잘것없는 사람도 될 수 있어. 너는 
스스로가 나보다 학문도 모자라고 논리가도 아니고 경건한 마음 또한 모자란다고 믿고 
있어. 당치 않은 생각이야. 내가 보기에 너는 너 자신이라는 생각이 모자란단 말이야."
  이런 대화가 끝난 후 골드문트는 당황하고 자존심까지도 상해서 돌아갔으나 며칠 
뒤에는 벌써 자신이 앞장서서 계속 대화할 의향을 보였다. 이번에는 나르치스가 두 
사람의 성격의 차이에 관해서 구체적인 관념을 제공하는 데 성공했다. 골드문트도 
그것을 이전보다 더 잘 받아들였다.
  나르치스는 열심히 이야기를 했다. 그는 골드문트가 오늘은 전보다 더 많이 마을 
털어놓고 자발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받아들이고 있으며 자신이 골드문트를 제압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그 성공에 매혹되어서 자신이 의도한 것 이상으로 많은 
이야기를 했고, 또 스스로의 이야기에 도취되어 버렸다.
  "내 말을 좀 들어봐. 내가 너보다 우월한 것은 단 한 가지밖에 없어. 말하자면 네가 
눈을 지그시 감고 졸고 있고 때로는 완전히 잠을 자고 있는데도, 나는 깨어 있다는 것 
뿐이야. 내가 깨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지성과 의식을 가지고, 자기 자신과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비이성적인 힘이나 충동이나 약점을 감지하고, 그것을 계산에 넣을 줄 
아는 사람을 말하는 거야. 그것을 배우는 것만이 네가 나를 만난 의미를 가질 수가 
있는 것이지. 골드문트, 너에게는 정신과 자연, 의식과 꿈의 세계가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 너는 너의 유년 시절을 잊어버리고 있어. 네 영혼의 깊숙한 곳에서 유년 시절이 
너를 빼앗아 가지려고 해. 네가 그것을 들어 줄 때까지 너는 괴로워할 거야. 그것은 
이 정도로 하지!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깨어 있다는 점에서만은 너보다 강해. 그 점은 
너보다 우월하지. 그러니까 내가 너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거야. 하지만 다른 모든 
점에 있어서는 네가 나보다 훨씬 우월해. 네가 네 자신을 발견하면 그 순간 너는 
나보다 우월하게 되는 거야."
  골드문트는 한편 놀라면서 귀를 기울이고 있었으나, '너는 너의 유년 시절을 
잊어버리고 있다'는 말을 듣자 화살에 맞기라도 한 듯 전신을 움츠렸다. 나르치스는 
그러나 그것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이야기를 하고 있을 동안, 그렇게 하는 
것이 말하는 것보다도 더 잘 이해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한참 동안 눈을 감거나 먼 
곳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골드문트의 얼굴에 별안간 경련을 일으키며 창백해진 것도 
몰랐다. 
  "우월하다구요? 당신보다 내가!"
  골드문트는 중얼거렸다. 무슨 말을 하기는 해야겠는데 온몸이 굳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야."
  나르치스는 말을 계속했다.
  "너와 같은 종류의 사람, 강하고 예민한 감각을 가진 사람, 영감을 받은 사람, 
몽상가, 시인, 연애하는 사람, 그와 같은 사람은 우리들 다른 인간, 즉 정신적 
인간보다는 대개 우월해. 너희들의 본성은 모성적이지. 너희들은 충실한 것 속에서 
생활하며, 너희들에게는 사랑과 힘과 체험할 수 있는 능력이 제공되어 있어. 우리들 
정신적인 인간은 가끔 다른 사람들을 인도하고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충실한 것 속에 살고 있지 않고 메마른 생활을 하고 있어. 충실한 생활, 
과실의 즙, 사랑의 뜰, 예술의 아름다운 나라는 너희들 것이지. 너희들의 고향은 
대지이지만 우리들의 고향은 관념이야. 너희들의 위험은 감각의 세계에 빠지는 
것이지만 우리들의 위험은 진공의 공간에서 질식하는 것이야. 어는 예술가지만 나는 
사색일 뿐이야. 그리고 네가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잠들어 있을 때 나는 황야에서 깨어 
있어. 나에게는 해가 비치고 있으나 네게는 달과 별이 비치고 있고 너의 꿈속에는 
소녀가 나타나지만 나의 꿈속에는 소년이 나타난다."
  두 눈을 똑바로 뜨고 골드문트는 나르치스가 웅변가처럼 자기 도취에 빠져서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 말의 대부분이 송곳처럼 그를 찔렀고 마지막 말을 
듣고서는 더욱 얼굴이 창백해져 눈을 감았다. 나르치스가 눈치를 채고 놀라서 물어 
보자 몹시 창백해진 골드문트는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요전에 있었던 일이지만 내가 당신 앞에 쓰러져서 울지 않을 수 없었던 때를 
기억하시겠지요. 그런 일이 두번 다시 일어났다가는 큰일입니다. 그랬다가는 결코 내 
자신을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당신에게도 용서받지 못할 테구요! 이젠 나가 주세요. 
혼자 있고 싶습니다. 당신은 저를 두렵게 만드는 말을 하셨습니다."
  나르치스는 잠시 망설였다. 그는 말에 이끌리어 다른 어떤 때보다 더 말을 잘한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지금 그 어떤 말이 친구를 이렇게도 깊이 감동시킨 것과 동시에 
어딘지 아픈 데를 찌르기도 했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이런 때 그를 혼자 내버려 두는 
것이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한참을 망설였다. 골드문트의 찡그리면서 괴로운 표정이 
그를 재촉하고 있었다. 그는 친구가 원하는 대로, 어지러운 생각을 간직하고 그를 혼자 
놔두기 위해 얼른 그 자리에서 떠났다.
  골드문트는 혼자 남았다. 전신이 떨려왔다. 이번에는 긴장된 마음을 눈물로 
대답하지 않았다. 친구가 불시에 그의 가슴 한복판에 비수라도 꽂은 것처럼, 깊고 
절망적인 상처를 받은 감정으로 숨을 간신히 내뿜으며 장승처럼 서 있었다. 심장은 
금방이라도 멎을 것처럼 죄어들고 얼굴은 밀납같이 창백해지면서 두 손은 감각을 잃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지난번의 비참한 상태의 재현이었으며 그것도 몇 배나 심한 
것이었다. 마음속에서는 마치 목을 조르는 듯했고 무슨 흉악스러운 것을, 도무지 참을 
수 없는 것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으면 안 되는 심정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구원의 
방편인 흐느낌조차 그 비참한 상태를 이기는 데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 성모 
마리아여, 어찌 된 일입니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내가 살해를 당한 것일까요? 
내가 죽인 것일까요? 어떤 무서운 말을 한 것일까요?
  그는 헐떡이며 숨을 내뿜었다. 자신의 내부 속에 깊숙이 감추어져 있는 어떤 
치명적인 것으로부터 자신을 구출해 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감정에 가득 찬 채 마치 
독약을 마신 사람처럼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그는 물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듯한 몸짓으로 방에서 뛰쳐나가 수도원에서 제일 조용하면서 사람의 그림자라곤 
보이지 않는 곳으로 달려갔다. 복도를 빠져나가 계단을 지나 지붕이 없는 곳으로, 
하늘이 보이는 곳으로, 그는 수도원의 제일 구석진 피난처, 즉 안마당을 둘러싸는 
회랑으로 들어갔다. 몇 개의 파랑색 화단에는 밝은 빛으로 하늘이 펼쳐져 있고 돌과 
같이 서늘한 대기 속에는 감미롭고 수줍은 듯한 장미꽃 향기가 스며 있었다.
  나르치스는 아무런 예상도 하지 못하고 벌써 오래 전부터 하려고 애태우고 있던 
말을 한 것이었다. 즉 그의 친구에게 달라붙어 있는 마귀의 이름을 불러내어 
때려눕히고 만 것이었다. 골드문트는 마음속 비밀은 이 말의 어떤 것에 의해서 
혼란스러워지고 미칠 듯한 고통으로 뒤덮여 버렸다. 나르치스는 오랫동안 수도원 안을 
헤매다니면서 친구를 찾았으나 어느 곳에서도 친구를 찾을 수가 없었다.
  골드문트는 회랑에서 마당으로 통하는 둥글고 묵직한 아치형 둘문 아래서 있었다. 
그 이치를 받친 둥근 기둥에서 동물의 머리가 조각된 세 개의 석상이 그를 뚫어지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돌로 만든 이 조각은 개인지 늑대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밝음으로 인도하는 길도, 이성으로 이르는 길도 없고 오직 고통만이 있었다. 죽음의 
공포가 그의 목구멍과 가슴을 죄었다. 반사적으로 위를 쳐다보니 세 마리의 동물의 
머리가 사나운 이빨을 내밀고 그의 내장을 물어뜯을 듯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제 나는 죽는구나.' 그는 전율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 짐승들이 나를 잡아먹을 거야.'
  그는 벌벌 떨면서 기둥 아래에 주저앉고 말았다. 고통이 너무 심해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곤 의식을 잃어 그가 그렇게도 소망하던 무아의 경지에 빠져들었다.
  다니엘 원장은 그날 하루를 그리 유쾌하게 보내지 못했다. 나이깨나 먹은 수사 둘이 
그를 찾아와 해묵은 질투 때문에 흥분해서 서로 상대방을 비난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원장은 그들의 말을 한참 동안 듣고 나서 두 사람을 나무랐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할 수 없이 두 사람에게 엄한 벌을 내린 다음 엄숙히 물러가라 일렀다. 그러나 
소용없는 짓을 했다 싶은 감정이 가슴속에 남아 있었다. 원장은 힘없이 아래채 성당의 
예배실에 들어가서 기도를 드렸으나 마음이 개운치 못한 채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가물거리듯 풍겨 오는 장미꽃 향기에 이끌리어 회랑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그는 
실신해서 쓰러져 있는 골드문트를 발견했다. 평소에는 그렇게도 아름답고 젊음에 넘친 
얼굴이 창백해져서 까무러친 것에 놀라 원장은 슬픈 얼굴을 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유쾌한 날도 아닌데 오늘 또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원장은 소년을 안아 일으키려고 
했으나 너무 무거워서 손을 댈 수가 없었다. 한숨을 깊이 쉬면서 이 노인은 좀더 젊은 
수사 두 사람을 불러 소년을 옮기라고 이르고는 곧 의술에 능한 안젤름 신부를 그곳에 
보냈으며 동시에 나르치스도 부르러 보냈다. 나르치스는 곧 원장에게로 왔다.
  "자네는 이미 알고 있겠지?"
  원장이 나르치스에게 물었다.
  "골드문트 말씀입니까? 네, 원장 선생님. 지금 막 병이 났는지 다쳤는지 실신해 
있는 것을 업어 왔다는 소릴 들었습니다."
  "그렇다네. 회랑에 쓰러져 있는 걸 내가 발견했지. 그런 곳에서는 아무것도 못 찾을 
텐데. 다치지는 않았어. 기절했지. 좋지 않은 일이야. 이 일에는 자네도 틀림없이 
관련이 있을 것 같은데 아니면 뭔가를 알고 있을 거라고 짐작되네만. 그는 자네와는 
절친한 사이니까 말일세. 그래서 자네를 보자고 한 걸세. 무슨 말이든 좀 해보게나."
  나르치스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스스로를 억제한 태도와 말로써 골드문트와의 
오늘 있었던 대하 내용, 또 그것이 골드문트에게 예상 외로 얼마나 커다란 영향을 
끼쳐주는가에 대해서 간단히 들려주었다. 원장은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것은 이상한 대화였군."
  원장은 말을 하면서도 억지로 진정하려고 애썼다.
  "자네 설명을 들어보니 그것은 다른 사람의 영혼에 대한 간섭이라고도 할 수 있네. 
영혼의 구제에 대한 대화라고도 말할 수 있을 정도인 것 같네. 하지만 자네는 
골드문트의 영혼 구제자가 아닐세. 아니, 무엇보다 자네는 영혼 구제자가 아니네. 아직 
성직을 받고 있지 않단 말일세. 영혼 구제를 맡아 보는 성직자에게만 관계가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조언자로 학생과 그런 대화를 할 수 있었는가? 결과는 
보다시피 좋지 않았다는 것만은 사실이지 않는가?"
  "원장 선생님."
  나르치스는 부드러운 말씨로 그러나 명확하게 말했다.
  "결과는 아직 모릅니다. 심한 충격을 일으켰다는 것에 대해서 저도 퍽 놀랐습니다. 
우리들의 대화의 결과가 골드문트를 위해서 좋은 일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결과는 곧 알게 되겠지. 그러나 나는 지금 결과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네의 행동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중일세. 어떤 이유로 자네는 골드문트와 그런 대화를 나누게 
되었지?"
  "알고 계시겠지만 그는 제 친구입니다. 그에게 특별히 마음을 두고 있습니다. 그를 
특히 잘 이해하고 있는 줄 믿습니다. 선생님께서 그에 대한 저의 태도를 영혼 
구제자라 하십니다. 저는 성직자의 권위를 넘어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단지 그가 
자기 자신을 알고 있는 것보다는 어느 정도 제가 더 잘 그를 알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원장은 어깨를 으쓱했다.
  "자네의 특별한 재능에 대해선 나도 잘 알고 있네만, 자네가 한 행동이 나쁜 결과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좋을 텐데. 골드문트는 병이 난 건가? 혹시 어디가 아프다거나 
허약한 게 아닌가 하는 거야. 잠을 잘 이루지 못하는가, 아무것도 먹지 않는가? 
그것도 아니면 어디 특별한 통증이라도 있단 말인가?"
  "아닙니다. 오늘까지 건강한 몸이었습니다. 육체적으로는 아무 이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영혼의 병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그는 지금 성욕과의 싸움을 시작할 그런 
나이니까요."
  "내가 알기로는 열입골일 텐데?
  "열여덟입니다."
  "열여덟. 그렇군. 충분히 그럴 나이지. 하지만 그것은 누구나 거치지 않으면 안 되는 
자연스런 싸움이야. 그러니 그의 영혼이 병들었다고는 말할 수 없네."
  "아닙니다, 선생님. 그것만이 아닙니다. 골드문트는 벌써 오랫동안 영혼의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 싸움은 다른 사람보다도 그에게 있어서는 훨씬 위험한 
것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그는 과거의 일부를 잃어버린 것에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그래? 어떤 부분이란 말인가?"
  "그의 어머니와 관계된 모든 것입니다. 그것에 관해서는 저도 아는 게 없습니다. 
거기에 병의 원인이 틀림없이 있다는 것을 짐작할 뿐입니다. 이유를 말씀드리자면 
골드문트 자신이 어머니를 일찍 잃었다는 것 외에 어머니에 대해서는 한 가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가 자신의 어머니를 부끄러워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그의 재능과 그 모든 것은 어머니에게서 비롯된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그의 아버지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그의 아버지는 그렇게도 
아름답고 재간덩어리인 개성이 남다른 아들을 둘 그런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저의 이런 일체의 것을 들어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징조에서 추론한 데 불과합니다."
  원장은 처음에는 마음속으로, 나르치스는 골드문트보다 좀 우월한 생각을 갖고 
있구나, 하고 비웃으며 이 사건 전체를 귀찮게 여기고 있었으나 차츰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원장은 골드문트의 아버지, 어느 정도 허식이 심하고 신뢰감이 가지 않는 그 
사나이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비로소 그 남자가 골드문트의 
어머니에 대해서 암시한 몇 마디 말이 갑자기 떠올랐다. 그 여자는 자신에게 치욕스런 
행동을 하고 도망쳐 버렸다. 아버지는 어린 자식의 마음속에서 어머니에 대한 기억과 
어머니한테서 이어받았을지도 모르는 악덕의 모든 기억을 지워버려고 애를 썼다. 
그것이 어느 정도 성공해서 소년은 어머니가 저지른 죄악이 보상을 위해서 한평생을 
하느님한테 바칠 결심을 한 것 같다. 그 사나이는 그런 말을 했었다.
  원장은 오늘처럼 나르치스에게 혐오를 느낀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이 생각 깊은 
젊은이는 얼마나 훌륭한 추측을 내린 것일까! 사실 얼마나 자세하게 골드문트를 알고 
있는 것일까!
  마지막으로 오늘 일어난 일에 대해서 다시금 질문을 받자 나르치스는 말했다.
  "오늘 골드문트가 빠져들어간 걱정은 제가 의도한 바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그의 
생각을 일깨우게 한 것은 그가 자기 자신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 자신의 유년 
시절이며 자신의 어머니를 망각했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한 어떤 말이 그의 
마음에 충격을 주고 제가 벌서 오랫동안 싸움의 목표로 하고 있었던 암흑 속을 밀고 
들어간 테 불과합니다. 그는 마치 방심한 사람처럼 저이 것은 인식하나 자기 자신이 
것은 인식하지 못하는 듯이 저를 쳐다보았습니다. 저는 그에게 자주, 너는 잠을 자고 
있다, 정말로 깨어 있지 않다, 하고 말해 주었습니다. 지금 그는 깨어났습니다. 저는 
그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는 훈계는 받지 않고 물러났으나 당분간 골드문트를 찾아가는 것은 금지당했다.
  그 동안 안젤름 신부는 정신을 잃은 소년을 침대에 눕히고 옆에서 지켜보았다. 
무리한 방법을 써서 의식을 돌아오게 한다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았다. 
소년이 병세는 무척이나 좋지 못했다. 인정 많은 노인은 주름살투성이의 선량한 
얼굴로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우선 맥을 짚어 보고 심장에 귀를 갖다대었다. 
이 소년은 확실히 무슨 뜻하지 않은 어떤 것, 이를테면 찬 것을 먹었거나 아니면 무슨 
독초를 먹었다고 생각했다. 그런 것을 추측하면서도 혓바닥을 볼 수는 없었다. 안젤름 
신부는 골드문트를 좋아했으나 그의 친구인, 너무나 젊고 조숙한 그 조교사 
나르치스는 좋아하지 않았다. 결국 큰 일을 저지르고야 말았다. 나르치스가 이 
어리석은 사건이 공범이라는 것이 확실했다. 이다지도 귀엽고 시원한 눈매를 한 
소년이, 이다지도 귀여운 자연이 아들이, 하필이면 저 거만한 학자, 이 세상의 생명이 
있는 어떤 것보다도 그리스 어를 더 소중히 여기고 있는 공허한 문법학자와 친하게 
되었단 말인가.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문이 열리면서 원장이 들어왔을 때에도 안젤름 신부는 여전히 
자리에 앉아서 정신을 잃고 있는 소년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얼마나 
귀엽고 앳되고 사심 없는 얼굴인가! 이렇게 옆에 앉아서 도와주어야만 하는데도 그럴 
수가 없다니! 원인은 확실히 복통일 것이다. 향료가 든 포도주를 따뜻하게 데워먹이고 
아마 대황을 달여먹여야 하리라. 그러나 유록색으로 창백해지고 찌푸린 얼굴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그의 마음에는 의혹이 솟아나는 것이었다. 안젤름 신부는 경험이 
있었다. 오랜 생애를 통해서 그는 악마에 홀린 사람을 몇 번이나 본 일이 있었다. 
그는 그 의심이 되는 증세를 입에 담기를 주저했다. 좀더 참을성 있게 관찰해 보는 게 
좋겠지. 하지만 이 가엾은 소년이 악마에 홀린 것이 사실이라면 그 범인을 찾아내어 
가까이 할 수 없도록 막아야 한다고 신부는 생각하고 있었다.
  원장은 한걸음 다가서서 환자를 들여다보다가 한쪽 눈꺼풀을 젖혀 보았다.
  "깨워도 괜찮을까요?"
  원장이 물었다.
  "좀 기다려 보는 게 좋을 듯합니다. 심장은 거의 정상입니다만 아무도 가까이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위험하지는 않겠죠?"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상처도 없고, 타박상을 입었거나 어디서 떨어진 흔적도 
보이지 않습니다. 단지 정신을 잃었을 뿐입니다. 아마도 복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통증이 너무 심하면 의식을 잃을 수도 있으니까요. 만약 약물 중독이라면 열이 높을 
것입니다. 아니, 다시 눈을 뜰 것입니다. 생명에는 별 지장이 없으니까요."
  "혹시 마음의 상처에서 비롯될 병은 아닐는지요?"
  "그럴 수도 있겠지요. 혹시 아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군요. 심한 충격을 
받았다든지 누가 죽었다는 통지를 받았거나, 심한 싸움을 했거나 모욕을 받았거나 한 
것이 아닐까요? 그걸 알면 모든 것은 해결할 수 있을 텐데요."
  "모르겠는걸요. 아무도 가까이 하지 못하도록 주의를 해야겠어요. 그애가 눈뜰 
때까지 곁에 있어 주시오. 위험하거든 밤중에라도 상관없으니 나를 부르도록 하시오."
  나가기 전에 원장은 한 번 더 환자에게로 몸을 굽혔다. 원장은 이 소년의 아버지와 
이 예쁘장하고 밝은 금발의 소년이 수도원에 온 그날 그리고 모두가 얼마나 그를 금세 
좋아하게 되었나 등 여러 가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원장도 이 소년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그러나 나르치스가 한 이야기도 사실은 옳았다. 이 소년의 어떤 면에서도 
아버지를 머릿속에 그리게 할 수 없었다. 아, 근심 걱정이 없는 곳이 어딘가! 우리들의 
행위는 얼마나 무력한가! 이 가엾은 소년에 대해 소홀한 점이 내게는 없었단 말인가! 
그에게 적당한 고해 신부가 있었을까? 수도원 안에서 나르치스 외에는 아무도 이 
학생에 대한 사정을 알고 있지 못했는데 그래도 괜찮단 말인가? 아직 수습 수사의 
처지에 있는 사람이, 수사도 아니고 성직도 얻지 못한 사람이 그를 도울 수 있었단 
말인가? 사물을 보고 생각하는 것에도 불쾌한 우월감이 아니, 적개심 같은 것까지도 
가지고 있는 사나이가, 하지만 그 나르치스도 상당히 오래 전부터 잘못된 대접을 받고 
있지 않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단 말인가? 나르치스가 복종이란 가면의 배후에서 
악의를 숨기고 있었는지 아닌지, 잘못 생각한 것이겠지만 혹 이교도가 아니었는지 
누가 알겠는가? 이 젊은 두 사람이 장차 어떤 사람이 되든 거기에도 원장 자신의 
책임이 있었다.
  밤이 되자 골드문트는 의식을 회복했다. 머리는 텅 비고 어지러웠다. 침대에 
드러누워 있다는 것은 짐작이 갔지만 이곳이 어딘지는 통 알 수가 없었다. 그는 그런 
것을 생각해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좋았다. 그러나 대체 어딜 갔다 왔을까? 
온갖 것을 보고 부딪쳐 보았던 그 낯선 나라는 어디였을까? 어딘지 무척 먼 곳에 
있었다. 무엇을, 무슨 이상한 것을, 무슨 으리으리한 것을, 무슨 흉악스런 것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을 그는 보았다. 그러나 그것을 잊어버렸다. 그곳은 어디였을까? 
거기서 그의 앞에 그토록 커다랗게, 안타깝도록 즐겁게 솟아났다가는 또 잠기어 
버리고 만 것은 무엇이었을까?
  오늘 무언가가 찢어져서, 무언가가 발생한 곳을 향해 그는 주의를 집중시키고 
있었다. 그것은 무엇이었나? 아무렇게나 그저 혼돈된 온갖 형태가 솟아올랐다. 세 
개의 머리가 보였다. 장미꽃 향기가 났다. 아, 얼마나 무서운 고통이었던가! 그는 다시 
잠이 들었다.
  그는 다시금 눈을 떴다. 그는 재빨리 미끄러지면 떠나가는 꿈나라가 소멸하는 그 
순간에 그것을 잡았다. 그러고는 그 모습을 재차 발견하고 끝없는 환희에 젖어 
있기라도 한 듯 전신을 떨었다. 그는 보았다. 볼 수 있었다. 그 여인을 보았다. 
커다랗고 눈부신 여인을, 꽃이 만발한 듯한 입술과 빛나는 듯한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을, 어머니를. 동시에 '너는 너의 유년 시절을 망각해 버렸어' 하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누구의 목소리였을까? 그는 귀를 기울이고 생각하다가 마침내 
깨달았다. 그것은 나르치스였다. 나르치스? 그 순간 모든 것을 기억해 냈다. 이제야 
알게 되었다. 아, 어머니, 어머니! 쓰레기의 산, 망각의 밝고 푸른 여왕 같은 시선으로 
이미 죽어 버린 그 여인은 그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리운 
여인이.
  침대 곁의 안락 의자에 기대 졸고 있던 안젤름 신부가 눈을 떴다. 소년이 움직이며 
호흡하는 소리가 들렸다. 조심스레 그는 일어섰다.
  "누구세요?"
  골드문트가 물었다.
  "나야, 걱정하지 마. 불을 켤 테니."
  그는 걸어 놓은 등잔에 불을 켰다. 주름살투성이의 그 인정 많은 얼굴이 불빛에 
드러났다.
  "제가 지금 앓아 누운 건가요?"
  소년이 물었다.
  "정신을 잃었었단다, 골드문트, 손을 이리 다오. 맥을 좀 짚어 보자꾸나. 기분은 
어때?"
  "좋습니다. 안젤름 신부님, 감사합니다. 이 친절을 어떻게 갚지요? 이젠 아무 데도 
아프지 않습니다. 좀 피곤할 뿐입니다."
  "물론 피곤할 테지. 하지만 곧 다시 잠이 들 게다. 그 전에 포도주나 한잔 마시렴. 
여기 준비한 게 있어. 같이 마실까? 우정의 표시로 말이다."
  그는 조심스레 포도주에다 향료를 넣은 다음 따뜻한 물을 컵에 따랐다.
  "우리 둘은 실컷 한숨 잤단 말이야."
  의사인 신부는 호쾌하게 웃었다.
  "잠에 흠뻑 빠져서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인간이라고, 큰 일 날 간호인이라고 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같은 인간이란 말이야. 안 그래? 자, 이 마법의 음료수를 
좀 마시자꾸나. 에야, 밤중에 몰래 조금씩 마시는 것만큼 기분좋은 일은 없는 
법이거든. 자 건배!"
  골드문트는 미소를 지으며 서로 잔을 부딪치고 맛을 보았다. 따뜻한 포도주는 
계피와 정향나무 향료가 들어 있고 설탕을 넣어서 달콤했다. 이런 술은 아직 한 번도 
마셔본 적이 없었다. 지난번 그가 앓아 누워 있었을 때는 나르치스가 그를 보살펴 
주었다. 그때 일이 머리에 떠올랐다.
  희미한 등잔불 아래에서 한밤중에 늙은 신부와 따뜻하고 달콤한 포도주를 마신다는 
것은 정말 유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직도 배가 아프냐?"
  노신부가 물었다.
  "아뇨."
  "그래? 나는 복통이라 생각했는데. 그럼 아무것도 아니군 그래. 혀를 좀 내밀어 봐. 
그래 좋아, 이 늙은 안젤름이 또 잘못 짚었는걸. 내일도 가만히 누워 있어야 한다. 
내가 와서 봐 줄 테니. 포도주는 벌써 다 마셨지? 그래야지. 틀림없이 효과가 있을 
거다. 어디 보자, 얼마나 남았나? 사이좋게 나누면 반 잔씩은 더 마실 수 있겠구나. 
골드문트! 넌 정말 우릴 얼마나 놀라게 했는지 모른다. 어린 송장처럼 회랑에 쓰러져 
있었으니 말이야. 정말 배는 아프지 않니?"
  두 사람은 킬킬대고 웃으며 나머지 환자용 포도주를 사이좋게 나누어 마셨다. 
신부는 농담을 늘어놓았고 골드문트는 감사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다시 맑아진 눈매로 
신부를 쳐다보았다. 잠시 후 신부는 잠자리에 들기 위해 자리를 떴다.
  골드문트는 한참이나 눈을 뜬 채로 누워 있었다. 환영들이 다시금 그의 마음속에서 
서서히 걸어나왔다. 친구의 말이 다시금 떠올랐으며 영혼 속에서 금발로 반짝거리는 
여인이, 어머니가 또 나타났다. 그 모습은 흡사 미풍과도 같이, 생명과 온기, 용기와 
예감의 구름처럼 그의 가슴속으로 스며들었다. 아, 어머니! 내가 어떻게 어머니를 
잊은버릴 수 있었단 말입니까!

         5

  지금까지 골드문트는 그의 어머니에 대한 것들을 조금 알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의 
이야기 가운데서 들은 것에 불과했다. 어머니의 모습은 머릿속에 하나도 들어 있는 
것이 없다. 어머니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몇 개 있기는 했으나 그 대부분은 그를 
나르치스한테는 말하지 않았다. 어머니라는 것은, 그런 것에 대해서 이야기해서는 안 
되는 무엇이었다. 수치스런 일이었다. 어머니는 댄서였다. 품위는 있었으나 좋지 못한 
이교도 출신의 아름답고 야성적인 여인이었다. 골드문트의 아버지는 그 여인을 가난과 
굴욕 속에서 구출해 주었다고 늘 이야기했다. 그 여인이 이교도인지 아닌지 몰랐기 
때문에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세례를 받게 하고 종교를 갖게 했다. 그러고는 결혼식을 
하고 존경을 받을 만한 여인으로 만들어 놓았다. 어머니는 몇 년 동안 얌전하게 질서 
있는 생활을 꾸려갔으나 지난 날의 생활 습관이 다시 머리에 떠올랐음인지 추문을 
일으킨다. 남자들을 유혹한다, 며칠 혹은 몇 주일씩 집을 비운다, 무서운 여인이다, 
하는 소문이 퍼지더니 몇 번이나 남편한테 붙들려 왔다가 끝내는 영영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어머니의 소문은 그 후에도 계속 사라질 줄을 몰랐다. 악평은 혜성의 
꼬리와도 같이 하늘거리다가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그 여인의 남편은 불안과 공포, 
치욕과 놀라움으로 시달리다가 몇 년이 지나서야 안정을 회복했다. 그러고는 배반한 
여자를 대신해서 아들의 교육에 정성을 쏟았다. 아들의 모습은 그 어머니를 무척이나 
닮았다. 아버지는 슬픔으로 몸은 초췌했지만 마음은 이전보다 경건해졌다. 그는 아들 
골드문트의 마음속에 어머니의 죄악을 보상하기 위해 일생을 하느님에게 헌신해야 
한다는 신념을 불어넣어 주었다.
  골드문트의 아버지는 행방을 감춘 아내에 대해서 말하기를 싫어했지만 언제나 대개 
이런 이야기를 했다. 그것은 골드문트를 떠맡길 때 원장도 암시를 준 내용이었다. 
아들은 그 모든 것을 마음속에서 완전히 지워 버려야 한다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그런 
이야기들은 아직도 두려움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정말로 완전히 잊어버린 
것은 아버지나 하인들의 이야기, 어둡고 욕된 소문에서 된 것이 아니라 아주 다른 
모습이었다. 말하지만 그 자신의 어머니, 실제의 어머니, 체험한 어머니에의 추억을 
그는 아주 잊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 모습이, 그가 아주 어릴 때의 별이 다시 
떠올랐다.
  "어떻게 그 영상을 잊어버릴 수 있었는지 모를 일입니다."
  골드문트가 친구한테 말했었다.
  "지금까지 내가 가장 사랑한 사람은 어머니였습니다. 그만큼 무조건적으로 열렬히 
사랑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나에게 있어 태양이며 달이었습니다. 내 영혼 
속에 빛나는 그 모습이 어떻게 점점 희미해져갔고 끝내는 형태없는 매춘녀처럼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미 여러 해 전부 터 어머니는 나와 아버지에게는 그런 
존재가 되어 버렸으니까요."
  그 후 얼마 안 되어 나르치스는 수습 수사 기간을 마치고 법의를 입게 되었다. 
골드문트에 대한 그의 태도는 두드러지게 달라졌다. 골드문트는 전에는 나르치스의 
주의나 조언에 대해 귀찮은 지식이나 행동의 우월감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거부했으나, 요전의 커다란 체험 이래로 친구의 예지에 대해 흠모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친구의 말 중에서 얼마나 많은 말이 예언과도 같이 실현되었던가! 이 통찰력 
있는 인간은 얼마나 깊이 그의 생활의 비밀이나 그의 보이지 않는 상처를 정확하게 
추측했던가! 얼마나 영리하게 그의 병을 고쳐 주었던가!
  그 이후로 소년은 완쾌된 것처럼 보였다. 그때의 기절은 나쁜 결과를 남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골드문트의 태도 속에 있던 일종의 유희적이며 건방지고 또한 불순한 
점과 어느 정도 조숙해 보이는 수사다운 태도, 아주 특별한 예배의 의무를 짊어지고 
있다는 신념은 마치 눈 녹듯이 사라지고 말았다. 소년은 자기 자신의 길을 깨닫고 난 
뒤부터는 한층 더 젊어지는 동시에 점잖아진 것처럼 보였다. 그 모든 것이 나르치스 
덕택이었다.
  그러나 나르치스는 며칠 전부터 그의 친구에 대해서 특별하게 신중한 태도를 갖기 
시작했다. 골드문트는 그를 매우 흠모하고 있는데도 나르치스는 대단히 겸손하게 
그전처럼 사람을 깔보는 듯하고 가르치는 듯한 태도를 친구에게 보이지 않았다. 
나르치스는 골드문트가 자신에게는 아무 상관도 없는 힘을 보이지 않는 원천에서 
가져다 주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 힘의 성장을 촉진시켜 줄 수는 있었으나 
거기에 참견할 수는 없었다. 친구가 자기의 지도에서 벗어나는 것을 그는 기쁜 
마음으로 바라보았지만 한편으로는 슬펐다. 그는 어떤 단계를 뛰어넘는, 언젠가는 
벗어버려야 할 껍질 같은 것을 느꼈다. 지금도 그는 골드문트에 대해서 골드문트 
자신이 그 자신을 알고 있는 이상으로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골드문트는 자신의 혼을 
재차 발견하고 그의 부름에 따라갈 준비는 되어 있었어도 그것에 의해서 어디로 
이끌려갈지 아직 예상을 못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르치스는 그것을 알고 있었으나 
힘이 없었다. 사랑하는 친구의 길은 나르치스 자신이 결코 밟고 들어가지 않을 나라로 
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골드문트는 학문에 대해 전보다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친구들과 대화를 할 때 
논쟁을 하던 버릇도 없어졌다. 옛날에 나누던 대화에 대해 생각할 때면 그는 
부끄럽기까지 했다. 한편 나르치스의 마음속은 최근 수습 수사로서의 수련기를 
끝마쳤기 때문인지, 또는 골드문트와의 체험 탓인지, 은거나 금욕이나 종교적인 
수련에의 욕구에 눈이 떠져 단식이나 기나긴 기도, 빈번한 참회와 자발적인 고행을 
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리고 그런 나르치스의 행위에 대해 골드문트도 이해심을 
가지고 동참하기도 했다. 기운을 회복하고 나서부터 그의 본능은 아주 예민해졌다. 
자신의 앞으로의 목표에 대해서는 조금도 알고 있지 못했으나 그래도 그는 강한, 가끔 
가슴이 답답할 만큼 분명하게 자신의 운명의 바탕이 이루어져 천진과 휴식의, 
말하자면 일종의 금욕 생활은 지나가 버리고 그의 몸 속에 있는 온갖 것들이 긴장해서 
곧바로 튀어나올 태세를 갖추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 예감은 가끔씩 마음을 들뜨게 
해서 연애하는 심정과도 같이 달콤하게 밤늦게까지 그를 잠들지 못하게 했다. 또한 
그것이 가끔씩 그의 가슴을 짓누르기도 했다. 어머니가, 오랫동안 잊어버렸던 어머니가 
그를 다시 찾아온 것이었다. 그것은 흐뭇한 행복이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유혹하는 
목소리는 어디로 통하고 있었을까? 확실치 않은 것 속으로, 덫 속으로, 괴로움 속으로, 
아마 죽음 속으로 통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 목소리는 고요함과 부드러움, 
기도실에서 느낄 수 있는 안정감이나 평생으로 이어질 수도원 생활로 돌아가게 하지는 
않으리라. 어머니의 부름은 그가 그토록 오랫동안 자신의 소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아버지의 가르침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것이었다. 골드문트의 신앙심은 격렬한 육체적 
감정과도 같아서 더욱 경건하게 자라났다. 성모 마리아를 향한 기나긴 기도를 되풀이 
하는 가운데 그는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에게 자신을 끌어당겨 주는 감정의 물결을 
넘쳐흐르게 했다. 그러나 그의 기도는 가끔 그 기괴하고 장엄한 꿈속에서 끝나 
버렸다. 그는 그것을 지금 마음껏 경험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지그시 눈을 감은 
오관의 헛된 꿈이요, 온갖 감각이 달라붙어 있는 어머니의 꿈이었다. 그 속에서는 
향기를 지닌 어머니의 세계가 그를 휘어감고 있었다. 때로는 수수께끼 같은 사랑의 
눈매로 조용히 쳐다보기도 했고 바다나 천국처럼 웅성거렸으며, 감미롭고 씁쓸한 맛을 
느끼게도 했고, 기갈에 허덕이는 입술과 눈매를 명주실 같은 머리카락으로 어루만졌다. 
어머니는 고운 것은 하나도 남김없이 가졌고, 달콤하고 푸른 사랑의 눈매를 지녔을 
뿐만 아니라, 행복을 약속하는 부드러운 미소, 애정이 넘치는 위안이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내부에는 무언가 성스러운 베일 밑에 모든 공포, 암울, 욕망, 불안, 죄악. 
출생과 죽음에 대한 인간의 숙명이 있었다.
  소년은 영혼의 눈을 뜨게 해준 몇 겹이나 되는 감각의 실에 감긴 꿈속으로 깊이 
빠져들어갔다. 그러나 그곳이 눈부신 생명의 아침인 유년 시절이나 어머니의 사랑과도 
같이 그리운 과거가 매혹적으로 되살아나는 곳만은 아니었다. 그 속에서는 협박, 약속, 
유혹, 위험, 이런 것들이 있는 미래도 함께 떠돌고 있었다. 이 꿈속에서는 어머니와 
마돈나와 애인이 하나였으나 그것은 후에는 때때로 끔찍스런 범죄와 하느님에 대한 
모독과도 같이, 또한 결코 보상할 수 없는 죄와도 같이 생각되었다. 또 다른 때는 그는 
그 속에서 일체의 구원과 조화를 발견하기도 했다. 신비에 가득 찬 생명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어둡고 측량할 수 없는 세계가, 동화적인 위험에 가득 찬,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가시덤불의 숲이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머니의 
신비였다. 어머니에게서 오고 어머니한테로 통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머니의 
신비였다. 어머니에게서 오고 어머니한테로 통해 있었다. 어머니의 맑은 눈 속에 있는 
조그맣고 어두운 흑점, 조그마한...., 그러나 무서운 심연이었다.
  기억 속에 묻어 두었던 유년 시절이 어머니의 꿈속에 자주 나타났다. 끝을 모르는 
깊이와 망각 속에서 수많은 추억의 꽃들이 피어 황금빛 무늬를 그리며 풍부한 예감을 
실은 향기를 풍겼다. 그것은 유년 시절에 대한 감정, 어쩌면 체험이나 꿈에 대한 
추억들이었다. 그는 물고기의 꿈을 꿀 때가 많았다. 물고기들을 새까맣게, 무리를 
이루어 그를 향해 헤엄쳐 왔다. 차갑고 매끄럽게 그의 내부로 헤엄쳐 와서는 재빨리 
지나갔다. 그것들은 보다 아름다운 현실로부터 행운의 소식을 가지고 오는 
심부름꾼처럼 왔다갔다 꼬리를 치다가는 그림자처럼 사라지고 소식 대신에 새로운 
비밀을 남겨 주었다. 종종 그는 헤엄치는 물고기나 날아가는 새의 꿈을 꾸었다. 
물고기와 새는 자신이 만든 창작물이었다. 자신의 호흡처럼 자신이 마음 내키는 대로 
자신이 조종하는 대로 움직였다. 자신의 눈초리나 생각처럼 그에게서 방사하고 그의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때때로 정원에 대한 꿈을 꿀 때도 있었다. 동화 속에서나 
나옴직한 나무들과 엄청나게 큰 꽃들과 깊고 검푸른 동굴이 있는 기괴한 뜰이 
나타났다. 풀 사이로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짐승들이 눈초리가 검은 빛으로 빛나고 
가지마다 커다란 뱀들이 매끄럽게 기어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덩굴마다 이슬을 머금은 
커다란 딸기들이 햇빛에 반짝이며 달려 있었다. 그 딸기는 꺾어들자 이내 손바닥에서 
부풀어올라 피같이 따뜻한 즙을 쏟았다. 혹은 눈을 지니고 있어 그 눈이 애타는 듯 
빈틈없이 움직였다.
  그는 더듬거리며 어느 한 나무에 기대어 가지를 하나 휘어잡았다. 그러자 줄기와 
가지 사이에서 뒤얽힌 두툼하고 곱슬곱슬하게 달라붙어 있는 털이 보이기도 했고 
느껴지기도 했다. 어느 날 그 는 자신에 대한 꿈을 꾸기도 하고 그와 같은 이름의 
성자에 대한 꿈을 꾸기도 했다. 골드문트, 즉 크리소스토무스(둘다 '황금의 입'이라는 
뜻)가 꿈속에 나타나서 황금으로 말을 하자 그 말들이 작은 새떼들처럼 무리지어 
날개를 파닥거리며 날아가 버렸다.
  어떤 때는 이런 꿈도 꾸었다. 그는 커서 어른이 되었으나 어린아이처럼 땅바닥에 
주저앉아 앞에다 흙을 쌓아 놓고, 어린애처럼 그것을 가지고 조그만 말이나 황소, 혹은 
조그만 남자나 여인 같은 형상을 빚고 있었다. 그는 그런 행위가 재미있었다. 
동물이나 사나이들에게는 우스꽝스럽도록 성기를 크게 만들었다. 꿈속에서는 그것이 
매우 익살맞게 보였다. 마지막에는 그 장난도 싫증이 나서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자기 뒤쪽에 어떤 살아 있는 것이, 무슨 소리도 나지 않는 큼직한 것이 가까이 오는 
느낌을 받고 그는 뒤를 돌아다보았다. 순간 놀라움과 공포와 기쁨의 감정이 복잡하게 
교차했다. 거기에는 조그만 점토 형상들이 커다랗게 변해 있었다. 그 커다란 거인들은 
묵묵히 행렬을 지어 그의 곁을 지나 점점 커지다가 마침내는 거대한 탑처럼 우뚝 
솟더니 속세로 들어가고 말았다.
  그는 현실 세계에서보다도 꿈의 세계에서 더 많이 생활했다. 강당, 수도원의 뜰, 
도서실, 침실, 예배당 등 현실의 세계는 껍질에 불과했다. 이 현실 세계는 꿈에 충만된 
초현실적인 형태의 세계 위에서 벌벌 떨고 있는 얇은 껍질이나 다름없었다. 이 얇은 
껍질에다 구멍 하나 뚫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따분한 수업시간에 들려오는 
그리스 어의 음향 속에서 느껴지는 어떤 예감에 충만된 것, 식물 채집을 하는 안젤름 
신부의 약초 주머니 속에서 풍기는 향내의 물결, 아치형 창문의 기둥 위로 불쑥 솟은 
돌기둥의 담쟁이덩굴, 그런 보잘것없는 자극들이 현실 세계의 표피를 뚫고 평화롭고 
메마른 현실이 뒤편에, 저 영혼의 사납게 날뛰는 형상 세계의 심연과 격류와 은하수를 
풀어헤쳐 놓기에 충분했다. 라틴 어의 머리글자 하나가 어머니의 향기로운 얼굴이 
되었다. 성모를 부르는 길게 끄는 기도 소리는 천당으로 가는 문이 되었다. 그리스 
어의 자모는 달리는 말이 되고 똑바로 선 뱀이 되더니 그것은 몰래 꽃잎 밑으로 
사라져 버리고 문법책의 두꺼운 표지가 나타났다.
  그는 이러한 꿈에 대해서 좀처럼 이야기하지 않았다. 단지 몇 번 나르치스에게 이 
꿈의 세계에 대한 암시를 했을 뿐이었다.
  어느 날 그는 말했다.
  "나는 꽃잎 한 개나 길 위의 조그만 벌레 한 마리가 도서실 전체의 모든 책보다도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하며 더 많은 내용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문자나 
말로써는 아무것도 말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가끔 델타라든지 오메가라든지 하는 
그리스 문자의 어떤 것을 씁니다. 펜을 약간 돌리기만 해도 문자는 꼬리를 치며 
고기가 되어 대뜸 세상의 크고 작은 냇물의 온갖 시원한 것이나, 눅눅한 것이나, 
호메로스의 대양이나, 베드로가 걸어다닌 물로 생각되기도 합니다. 혹은 그 문자는 
새가 되어 꼬리를 치기도 하며, 깃을 곧추세우기도 하고 몸을 부풀리는가 하면 웃으며 
날아가 버리기도 합니다. 나르치스 선생님, 당신은 그런 문자를 그다지 별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겠지요? 그러나 그런 문자로 하느님은 세계를 쓰셨다고 나는 
말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나도 대단한 거라고 생각해."
  나르치스는 슬픔에 잠겨 말했다.
  "그것은 마법의 문자일세. 그 문자를 가지고 어떠한 악마라도 불러낼 수가 있단 
말이야. 물론 학문을 하는 데만은 적합하지 않지. 정신은 고정된 것을, 형성된 것을 
사랑하는 법이니 그 기호에 신뢰심을 갖기 바라네. 또 생성되는 것이 아닌 존재하는 
것을 사랑하고, 가능한 것이 아닌 현실의 것을 사랑하지. 오메가라는 글자는 뱀이나 
새가 되기를 용납치 않아. 정신은 자연 속에서는 생존할 수 없는 까닭이지. 정신은 
자연을 거역하고서야 자연의 반대물로 생존할 수가 있어. 골드문트, 이제 네가 결코 
학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겠지?"
  정말 그 말대로 골드문트는 오래 전부터 그것을 믿고 있었으면서 그것에 동의하고 
있었다.
  "나는 당신들의 정신으로 향하는 학문적인 노력을 좇아 공부하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빙긋 웃으며 골드문트는 계속 말했다.
  "나의 정신이나 학문에 대한 태도는 아버지에 대한 태도와 같습니다. 말하자면 나는 
아버지를 무척 사랑하고, 아버지를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가 말씀하신 것은 
절대적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다시 나타나자 나는 비로소 사랑이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어머니의 모습과 나란히 선 아버지의 모습은 갑자기 
조그마하고 불쾌하게 보였으며 가엾게 여겨지기까지 했습니다. 지금 나는 모든 
정신적인 것을 부정적인 것, 모성적이 아닌 것, 모성에 적대되는 것이라고 보며 또한 
그것을 어느 정도 경시하는 영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농담 비슷하게 말했으나 친구의 슬픈 얼굴을 밝게 해줄 수는 없었다. 
나르치스는 잠자코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초리는 일종의 애무처럼 보였다. 드디어 
그가 말했다.
  "네가 하는 말을 잘 알겠어. 이제 논쟁이란 불필요 한 거야. 너는 눈을 떴어. 지금은 
너 자신도 너와 나이 차이를, 어미의 혈통과 아버지의 혈통 사이의 차이를, 영혼과 
정신과의 차이를 인식했다. 결국 이제는 수도원에 있어서의 네 생활이나 수사의 
생활을 지향하는 네 노력이 잘못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너의 아버지의 
생각이었다는 것을 인식하겠지? 너의 아버지는 그것에 의해서 너의 어머니를 기억을 
씻게 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최소한 어머니한테 복수만이라도 해보겠다는 결심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한평생 수도원에 있는 것이 너의 천명이라고 여전히 믿고 
있지는 않겠지?"
  골드문트는 친구의 우아하면서도 섬세하고 수척한 흰 손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것이 금욕주의자의 손, 학자의 손이라는 것은 누구도 의심할 수가 없었다.
  "나는 모르겠습니다."
  그의 어조는 노래를 부르듯, 더듬거리며 하나하나의 음절에 오래도록 머물었다. 조금 
전부터 그는 그런 투로 이야기했다.
  "나는 정말 모릅니다. 당신은 나의 아버지에 대해서 냉혹한 판단을 내리고 
계십니다. 아버지는 큰 슬픔을 겪으셨습니다. 그러나 이 점에 있어서는 당신의 말이 
정당할지도 모릅니다. 내가 이 수도원에 온 지3년이 지났는데도 아버지는 지금껏 한 
번도 나를 찾아 주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영원히 여기 있기를 아버지는 바라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아마 최선책일 겁니다. 나 자신도 그렇게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내가 실제로 무엇을 원하는지 통 
모르겠습니다. 전에는 독본 속에 있는 문자나 마찬가지로 모든 게 간단했습니다. 
지금은 어느 것 하나 간단한 것이 없습니다. 문자조차도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온갖 것이 많은 의미와 얼굴들을 갖게 되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되었으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그런 것을 생각할 수조차 없습니다."
  "생각할 필요는 없을 거야."
  나르치스가 말했다.
  "너의 행로가 어디로 향하게 될지 꼭 알게 될 거야. 너의 행로는 너를 어머니에게 
데리고 가기 시작했어. 너를 어머니에게 더욱 가깝게 해줄 거야. 그러나 너의 
아버지한테도 지나치게 냉혹한 판단을 내리지는 않는다. 너는 아직도 아버지에게 
돌아가고 싶은 거야?"
  "아녜요. 나르치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학교를 마치자마자 곧 그렇게 
할 겁니다. 혹은 지금 당장이라도. 왜냐하면 나는 학자가 되지 않을 것이므로 라틴 
어나 그리스 어, 수학 같은 것은 지금으로도 충분합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생각에 잠겨 먼 곳을 쳐다보고 있다가 갑자기 그는 소리쳤다.
  "대체 당신은 무엇 때문에 자꾸 내 마음속을 비치고 나를 나 자신에게 분명하게 
해주는 것과 같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질문을 던지는 겁니까? 지금도 또 아버지에게 
가고 싶으냐 안 가고 싶으냐 하는 당신의 질문이, 내가 가고 싶지 않다는 것을 갑자기 
내가 확신시켜 주었습니다. 어째서 그런 짓을 하십니까? 당신은 모르는 게 없는 것 
같습니다. 당신은 당신과 나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그 이야기는 
듣는 순간에는 잘 알아듣지 못했지만 나중에 가서 매우 중대하게 되었습니다. 나의 
혈통은 어머니 쪽이라고 말씀하신 이는 당신이었습니다. 내가 어떤 마력의 지배를 
받고 있으며, 유년 시절을 망각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신 것도 당신이었습니다. 
어째서 당신은 인간을 그다지도 잘 아십니까? 그것을 나도 배울 수는 없습니까?"
  나르치스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돼. 너에겐 불가능한 일이야.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인간도 있으나 너는 
그렇게 할 수 없단 말이다. 너는 결코 학자는 될 수 없을 거야. 또 무엇 때문에 그럴 
필요가 있겠나? 너는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고 있단 말이야. 너에게는 다른 재능이 
있어. 너는 나보다 풍부한 자질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나보다 약해. 너는 내가 하는 
이야기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을 때가 많았어. 가끔 너는 망아지처럼 거역했고, 너를 
달래는 것은 확실히 쉽지 않았지만 나는 너에게 자주 고통을 주지 않으면 안 되었지. 
나는 또 너를 깨우지 않으면 안 되었어. 너는 잠을 자고 있었으니 말이야. 너에게 
어머니를 생각하게 한 것도 처음에는 심한 고통을 주었지. 너는 회랑에 시체처럼 
쓰러졌었어. 너는 틀림없이 이랬을 거야. '아니,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지 마! 아니, 
그만둬! 난 참을 수 없어'라고."
  "그럼 나는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는 말씀입니까? 자꾸 바보만 되어가고 어린아이로 
있어야 한다는 말씀인가요?"
  "너에게 가르쳐 줄 만한 사람이 또 나타나겠지. 나한테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이제 
이걸로 끝이야, 골드문트."
  "아닙니다."
  골드문트가 소리쳤다.
  "그 때문에 우리가 친구가 된 건 아닙니다! 짧은 도정의 길을 지난 다음, 목표에 
도달하자 간단하게 끝나 버리고 마는 것은 도대체 어떤 우정입니까? 당신은 벌써 
나한테 싫증을 느끼셨나요? 당신은 내가 싫어졌단 말씀입니까?"
  나르치스는 시선을 땅바닥에 떨어뜨린 격한 동작으로 왔다갔다했다. 그러고는 
드디어 친구 앞에 걸음을 멈추어 섰다.
  "이 정도로 그만해 줘."
  나르치스는 부드럽게 말했다.
  "내가 네게 싫증이 안 났다는 것은 네가 잘 알고 있지 않니."
  이상하다는 듯이 나르치스는 친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계속 왔다갔다했다. 
그러다가 매섭고 여윈 얼굴에 날카로운 눈초리로 골드문트를 응시한 다음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러나 야무지고 매정하게 말했다.
  "이것 봐, 골드문트! 우리들의 우정은 좋았었어. 목표가 있었고, 네가 눈을 떴기 
때문에 거기 도달했단 말이야. 이 우정이 끝나지 않길 바라네. 그것이 자꾸만 
소생되고 새로운 목표에 도달하길 바라지. 그러나 지금은 목표가 없어. 너의 목표는 
확실치 않아. 나는 너를 그곳으로 인도할 수도 없고 따라갈 수도 없어. 네 어머니한테 
물어 봐! 어머니의 모습에 물어 봐! 네 어머니에게 귀를 기울여 봐! 그러나 나의 
목표는 확실해. 그것은 여기 수도원에 있고 매일 매시간 나를 요구하고 있단 말일세. 
내가 너의 친구가 되는 것은 허락되어 있지만 반해도 좋다는 허락은 없어. 나는 
수사야. 맹세를 했거든. 나는 성직을 얻기 전에 교직에서 물러나 단신과 예배로 몇 
주일을 낼 거야. 그 동안 세속적인 것에 관해서는 일체 말해선 안 돼. 물론 너하고도."
  골드문트는 이해할 수 있었다. 슬픔에 잠겨 그는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영원히 교단에 들었다고 한다면 내가 했을지도 모르는 것을 당신이 
하게 됩니다. 당신의 수업이 끝나고 기도도 철야도 완전히 끝맺는다면, 당신은 무엇을 
목표로 할 겁니까?"
  "너도 알고 있을 텐데?"
  나르치스가 말했다.
  "아, 그렇군요. 당신은 이삼 년 안에 교무주임, 아니 어쩌면 교장이 될 테지요 
수업을 개선하고 도서실을 확장하시겠군요. 아마 책도 쓰시겠지요. 그렇잖다구요? 
그럼, 그렇다고 합시다. 그러나 목표는 어디에 있을까요?"
  나르치스는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목표? 나는 교장으로 죽을지도 모르고 안 그러면 수도원장 혹은 사교로서 죽을지도 
모르지. 그것은 어쨌든 마찬가지야. 내가 제일 열심히 봉사드릴 수 있는 곳에, 내 
성질이나 특성이나 천분이 최상의 지반과 최대의 활동 분야를 발견할 수 있는 곳에다 
나를 갖다놓는 거야. 그 밖에 다른 목표는 없어."
  "수사들에게 다른 목표는 없습니까?"
  골드문트가 물었다.
  "그래, 목표는 그걸로 충분해. 수사 신부한테는 헤브라이 어를 배우는 것, 
아리스토텔레스를 주석하는 것, 혹은 수도원의 성당을 꾸미는 것, 혹은 들어앉아서 
명상을 하거나 그 밖의 여러 가지 일을 하는 것이 생활의 목표일 수 있지. 내게 
있어서는 그런 것들이 목표가 아니란 말이야. 나는 수도원의 재산을 늘리려 한다거나 
교단과 교회를 개혁하려거나 하지는 않아. 나에게 가능한 범위 내에서 내가 
이해하려는 대로 정신에 봉사하려는 것뿐, 그 밖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단다. 
목표란 바로 이런 것을 말하는 게 아닐까?"
  골드문트는 오랫동안 그 대답을 음미해 보았다.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당신이 목표를 향하여 가는데 내가 방해라도 
됐습니까?"
  "방해가 되었느냐구? 아, 골드문트, 너보다 더 내 갈 길을 재촉해 준 사람은 
없었단다. 너는 나에게 여러 가지 어려움을 맛보게 했지만 나는 그런 어려움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냐. 나는 어려운 고비를 통해 배움을 얻고 때로는 그걸 정복했단 
말이야."
  골드문트는 상대의 말을 가로채어 반 농담조로 말했다.
  "당신은 아주 훌륭하게 어려움을 극복하셨습니다. 그렇지만 나를 돕고 인도하시고 
해방시켜 주시고 또한 나의 정신을 건강하게 해주셨다고 해서 그것으로 당신은 정말 
정신에 봉사하셨단 말입니까? 아마 당신은 그것으로 열의가 있고 선한 마음을 가진 한 
사람이 수사를 수도원에서 빼앗고 정신에 대해서는 한 사람의 적을, 당신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것을 행하고, 믿고, 노력하는 적을 하나 만들어 낸 셈이 될 
겁니다!"
  "어째서 그렇게 말할 수가 있나?"
  아주 심각하게 나르치스는 말했다.
  "이봐, 너는 아무래도 나를 잘 이해하지 못해! 나는 장차 수사가 될 너를 망쳤을지 
모르지만 그 대신 비범한 운명에의 길을 네 마음속에 터놓아 주었어. 가령 내일 네가 
우리들의 아름다운 수도원을 송두리째 태워 없애 버린다 하더라도, 혹은 미치광이 
같은 사교를 세상에 퍼뜨린다 하더라도, 너를 도와서 그 길을 향하게 한 것을 난 
한순간이라도 후회하지 않을 거야."
  그는 다정스럽게 친구의 어깨에 두 손을 얹었다.
  "이봐, 골드문트, 이것도 내 목표의 하나이거나 다른 어떤 것이든간에, 강하고 가치 
있는 특별한 인간을 만나서 그 사람이 이해력을 터줄 수도, 발전시켜 줄 수도 없는 
그런 상태에 빠지기는 싫단 말일세. 감히 나는 네게 말해 두겠어. 너와 내가 무엇이 
되든, 우리가 어떻게 되든, 네가 나를 진지하게 필요로 생각하는 순간에 나는 결코 
너를 향해 마음의 자물쇠를 채우지는 않겠어, 결코,"
  그것은 고별의 소리처럼 들렸다. 사실 그것은 이별의 전주곡이었다. 골드문트는 
친구 앞에 서서 친구의 확고한 얼굴을, 목표로 향한 눈을 보고 있으려니 두 사람은 
이제 형제도 친구도 또는 그것과 유사한 아무것도 아니라 두 사람의 길이 벌써 갈라져 
버렸다는 것을 확실히 느꼈다. 여기에 있는 그 사람, 그의 앞에 서 있는 이 사람은 
몽상가도, 운명의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수사였고, 맹세도 끝내 
버린 사람, 굳은 질서와 의무에 얽매인 사람, 교단과 교회의 정신의 봉사자요, 
병사였다. 이와 반대로 자신은 여기에 있어야 할 일원이 아니라는 것이 오늘에야 
분명해졌다. 그에게는 고향도 없고 오직 미지의 세계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날의 그의 어머니도 마찬가지 신세였다. 어머니는 가정을, 남편과 아들을, 공동 
생활과 질서를, 의무와 명예를 저버리고 정처 없는 세계로 뛰쳐나가 이미 오래 전에 
그 속에 빠져들어가고 말았으리라. 어머니도 그와 마찬가지로 목표를 가지지 않았다. 
목표를 가진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주어진 것일 뿐 그에게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아, 나르치스는 이 모든 것을 벌써 아득한 옛날부터 얼마나 잘 통찰하고 있었던 
것인가! 그가 말하는 소리는 얼마나 정당하였던가!
  이런 일이 있고 난 며칠 뒤 나르치스는 사라져 버렸다. 대신 다른 선생이 수업에 
들어왔다. 도서실에 있는 그의 책상은 텅 비어 있었다. 그는 아직 있기는 했다. 완전히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화랑을 지나가는 것을 가끔 볼 수 있었으며 
예배당의 돌바닥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중얼거리고 있는 소리를 들을 때도 간혹 
있었다. 그가 커다란 수업을 시작했다는 것도, 단식을 하며 밤중에 예배를 드리기 위해 
세 번 일어난다는 것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는 다른 세계로 옮겨지고 있었다. 간혹 
그를 볼 수가 있었지만 그에게 가까이 갈 수도, 무엇을 함께 할 수도, 말을 걸 수도 
없었다. 나르치스가 언젠가는 다시 나타나 책상과 식당에 있는 의자를 다시 차지하고 
다시 이야기하게 되리라는 것을, 그러나 지나간 것은 두 번 다시 그의 것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골드문트는 알고 있었다. 그런 것을 생각해 보니 수도원이나 수사의 
신문, 문법이나 논리학, 연구나 정신 등이 그에게 중요하고 또한 흥미있게 생각되었던 
것은 오직 나르치스 덕분이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나르치스의 모방이 그를 유혹한 
것이었다. 나르치스처럼 되는 것이 그의 이상이었다. a물론 원장도 있었다. 그는 
원장을 존경하고 사랑했으며 고귀한 모범으로도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나 교사, 학생, 침실, 식당, 학교, 수업, 예배 등 전 수도원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내가 더 이상 여기에 남아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처마끝이나 
나무 밑에 걸음을 멈추어 비를 피하면서 가야 할 길도 모르는 나그네처럼, 그는 
수도원의 처마 끝에 서 있었다. 다만 지금에야 절실히 다가오는 타향의 낯설음이 
두렵기 때문에.
  이 시기에 있어서의 골드문트의 생활은 망설임과 이별이 연속이었다. 그는 중요하게 
생각되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다녔다. 헤어지는 것을 섭섭하게 생각할 사람들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알고 그는 뭐라 말할 수 없는 이상스런 마음의 충격을 받았다. 
나르치스와 다니엘 노원장과 선량하고 다정스런 안젤름 신부, 친절한 문지기와 쾌활한 
이웃 제분업자도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사람들이 현실과는 거리가 먼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들에게서보다도 예배당에 있는 커다란 돌로 만든 마돈나나 현관문에 그려진 
사도들과 헤어지는 것이 훨씬 괴로우리라. 오랫동안 그는 그것들 앞에서, 회랑이 샘물 
앞에서, 세 개의 동물의 머리를 가진 기둥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안마당 보리수에, 
밤나무에 기대섰다. 어느 때는 그 모든 것이 그에게 있어 한 번의 추억으로 그의 
가슴속에 조그만 그림책이 되리라. 그 한복판에 있는 아직까지도 현재의 그것들이 
그에게서 벗겨져 나가기 시작하며 현실성을 잃고 유령처럼 과거의 것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는 그를 가까이에 두기를 좋아하는 안젤름 신부와 약초를 캐기도 하고, 
수도원의 물방앗간에서 하인들과 어울려 가끔씩 포도주나 구운 물고기를 먹으며 같이 
지내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서먹서먹하고 추억처럼 어슴푸레해져갔다. 황혼이 
깔린 저쪽 성당의 기도실에서는 친구인 나르치스가 이리저리 서성거리며 살아가고 
있었으나 그에게 있어서는 그림자가 되어버린 것처럼 주위의 일체가 현실성을 잃고 
가을의 조락과 무상의 냄새일 뿐이었다.
  현실에서 그의 내부에 있는 생명, 심장의 불안스런 고동, 그리움의 아픈 가시, 꿈의 
기쁨과 불안만이 생생하게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마치 그것들과 하나인 것처럼 
거기에 몸을 맡겼다. 독서나 학습을 하는 도중에 그는 자신 속으로 가라앉아 모든 
것을 망각하고, 그를 싣고 가는 내심이 흐름이나 소리에만 몸을 맡겼다. 아직도 어두운 
멜로디에, 깊은 샘물에, 동화 같은 체험으로 충만한 심연 속으로 빠져들어갈 수가 
있었다. 그 소리들은 모두 다 어머니의 목소리처럼 울리고,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눈은 
모두 어머니의 눈이었다.

         6

  어느 날 안젤름 신부는 골드문트를 그의 약초실로 불러들였다.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이 좋은 향내가 풍기는 아담한 약초실이었다. 아무리 구석진 곳이라도 
골드문트는 그 방을 잘 알고 있었다. 신부는 그에게 책장 사이에 깨끗이 보관되어 
있는 바싹 마른 식물을 보여 주면서 이 식물을 아는지, 그리고 들판에 피어 있을 때는 
어떤 형태로 보이는지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골드문트는 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식물의 이름은 고추나물이라고 했다. 그는 그 
특징을 하나도 남김없이 자세하게 설명했다. 늙은 신부는 만족한 표정으로 그것이 
많이 자라고 있는 곳을 가르쳐 주면서 오후에 그 약초를 한아름 잔뜩 모아 오라고 
부탁했다.
  "그대신 오후 수업을 쉬게 해주마. 거절하진 않겠지? 별다르게 손해를 보는 것도 
아니니까 말이야. 미련하고 지루한 문법만 학문이 아니라, 자연의 지식도 학문이란 
말이다."
  골드문트는 수업을 받는 대신 두세 시간 식물을 모으라는 그 고마운 분부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기쁨을 완전하게 하기 위해 그는 마구간지기에게 블레스를 
타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식사를 끝낸 그는 블레스에 올라타고 느긋한 마음으로 
햇볕이 따스하게 비치고 있는 들판으로 달려나갔다. 거의 한 시간 동안이나 그는 
이리저리 달리며 대기와 들판의 향내를, 그리고 무엇보다도 승마 그 자체를 즐겼다. 
그런 다음 신부가 일러준 장소를 찾았다. 그는 그늘진 단풍나무 밑에 말을 맨 다음 
말과 장난을 하다가 말 먹이를 주고 나서야 약초를 모으기 시작했다. 손이 가지 않은 
탓인지 몇 뙈기의 밭두둑엔 갖가지 잡초들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조그마하고 
호리호리한 양귀비풀이 많은 양귀비씨 벙거지를 둘러쓴 채 바싹 마른 완두 덩굴과 
하늘색의 꽃이 피어 있는 국화 상치와 색이 변한 여뀌 사이에 서 있었다. 두 개의 밭 
사이에 차곡차곡 쌓여진 경계석에는 도마뱀이 살고 있었다. 거기에는 벌써 노란 꽃을 
피우고 있는 한 무더기의 고추나물이 보였다. 골드문트는 그것을 뽑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한아름 잔뜩 모은 후 돌 위에 앉아 쉬었다. 무척 더운 날씨였다. 먼 숲 
기슭의 어둡게 그림자진 곳을 건너다보자 그곳으로 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으나, 
고추나물이나 말에서 멀리 떨어지기는 싫었다. 여기서라면 말도 잘 볼 수가 있었다. 
햇빛에 달구어진 작은 둘 위에 앉은 채 가만히 숨을 들이키며 달아난 도마뱀이 또 
나오지 않나 하고 살피고 있었다. 또 고추나물의 냄새를 맡으며 그 조그만 잎새들을 
햇빛에 갖다대고 바늘 구멍처럼 송송 뚫린 조그만 점을 관찰하기도 했다.
  무수하게 달린 작은 잎사귀 한 개 한 개에 좁쌀만한 별하늘이 수를 놓은 듯 
정교하게 붙어 있었다. 골드문트는 신기한 눈으로 자세히 바라보았다. 도마뱀도, 
약초도, 돌도 그 모두가 얼마나 신비로운가. 그를 사랑하는 안젤름 신부는 이제는 직접 
약초를 캐러 나올 수가 없었다. 다리가 아파서 꼼짝할 수 없는 날이 많았고 자신의 
의술로도 그것을 고칠 수가 없었다. 아마 머잖아 죽게 되겠지. 약초실의 약초는 계속 
냄새를 풍기겠지만 노신부는 이제 거기에 없으리라. 아니 그 노신부는 더 오래 
살는지도 모른다. 10년이나 20년쯤 여전히 그 성성한 백발과 눈가에 여전히 익살맞은 
주름살을 지으며 살아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골드문트는 자신이 20년 뒤의 모습은 
어떻게 될 것인가? 아,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모든 것이 불가사의하고 슬프기만 
하구나! 사람은 아무것도 모른다. 인간은 그저 이 지상에서 뛰어다니며 생활하고 
숲속으로 말을 타고 달릴 뿐이다. 약속하듯,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듯 쳐다보았다. 
밤하늘을 별 하나, 초롱꽃, 갈대가 자라는 호수, 인간이나 황소의 눈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이나 아득한 먼 옛날부터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이 당장이라도 베일을 
벗을 것만 같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고 수수께끼는 풀려지지 
않으며 숨은 마력은 없어지지도 않는다. 그리하여 끝내는 늙어서 안젤름 신부처럼 
꾀가 많아지거나 다니엘 원장처럼 현자가 되지만, 결국 아무것도 모르고, 기다리며 
자꾸 귀를 기울일 것이다. 
  그는 속이 텅 빈 달팽이 껍질을 주워들었다. 돌 사이에서 가느다랗게 소리가 났다. 
내리쪼이는 햇빛으로 달팽이는 속까지 따뜻해져 있었다. 껍질의 굴곡, 잔금이 새겨진 
나선형, 이상스럽게 꼬불꼬불한 벙거지, 진주처럼 반짝반짝거리는 텅 빈 구멍 등을 
관찰하는 것에 그는 온 정신이 팔렸다. 그는 손가락으로 더듬어서 형태를 느껴 보려고 
눈을 감았다. 그것은 오랜 습관이자 장난이었다. 느슨한 손가락 사이로 달팽이를 
돌리면서 누르지 않고 굴려 가며 어루만지듯 형태를 더듬으면서 그 모습의 기묘함과 
매력에 행복을 느꼈다. 이것이야말로 학교나 학문에서 얻을 수 없는 귀한 것이라고 
그는 꿈꾸듯 생각했다. 이를테면 모든 것을 수평적인 이차원의 세계를 보고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이성의 결함과 그 무가치처럼 여겨지기는 했으나 확신을 가질 수는 
없었다. 달팽이 껍질은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미끄러져 떨어졌다. 그는 몸이 피곤했고 
잠시 후 졸음이 왔다. 시들자마자 진한 향내를 풍기기 시작한 약초 위에 고개를 
숙이고 그는 햇빛을 받으며 잠이 들었다. 그의 신발 위를 도마뱀이 지나다녔고 무릎 
위에서는 약초가 시들어갔으며 블레스는 단풍나무 밑에서 그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누군가가 저쪽 숲에서 걸어왔다. 색이 바랜 파란 치마와 검은 머리에 붉은 리본을 
매고 햇볕에 그을은 얼굴의 한 여인이었다. 여인은 손에다 꽃다발을 들고 붉게 타는 
듯한 조그만 카네이션을 입에 물고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여인은 멀리서부터 거기에 
앉아 있는 사람을 이상스런 눈으로 살펴보다가 그가 잠이 든 것을 알고 햇볕에 탄 
맨발로 조심스레 가까이 가서 골드문트 바로 앞에 걸음을 멈추고 그를 바라다보았다. 
그러자 그녀의 의혹은 사라졌다. 자고 있는 예쁘장한 청년은 위험스럽게 보이지 
않았고 그 여인의 마음에 썩 들었다. '어떻게 해서 이런 잡초가 무성한 곳에 
찾아왔을까?'
  반쯤 시든 꽃을 보고 여인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골드문트는 눈을 떴다. 그의 고개는 부드럽게 옆으로 젖혀져 있었다. 여인의 무릎에 
베고 누워 있었던 것이다. 잠이 덜 깨어 어리둥절해하는 눈을 낯선 갈색의 눈이 바로 
가까이에서 따스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골드문트는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위험은 
없다. 따스한 갈색의 눈동자가 부드럽게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여인은 
놀라는 그의 눈길과 마주치자 생긋이 웃었다. 무척이나 정다운 미소였다. 그도 차차 
입가에 미소를 띠기 시작했다. 생긋 웃는 그의 입술 위에 그 여인의 입술이 내려왔다. 
둘은 살포시 키스를 하였다. 그때 골드문트는 문득 마을에서의 그날 저녁과 머리를 
땋은 조그만 처녀를 생각했다. 그러나 키스는 아직 끝나지 않고 있었다. 여인의 
입술은 그의 입술을 떠나지 않고 자꾸 비벼대고 유혹하더니, 나중에는 갈증에 
허덕이는 사람처럼 그의 입술로 덤벼들었다. 그의 피에 달려들어 마음속 밑바닥까지 
눈을 뜨게 했다. 길게 이어진 침묵의 유희 속에서 갈색의 여인은 소년에게 천천히 
타이르듯 그가 찾아내고 발견하는 대로 몸을 맡겨버리고, 그를 불타오르게 하는가 
하면 정열의 불을 식혀 주기도 했다. 매혹적이며 짧은 사랑의 행복은 뭉게뭉게 
피어올라 황금빛으로 붉게 탔다가는 기울어지며 꺼져 버렸다. 그는 두 눈을 감은 채 
여인의 가슴속에 얼굴을 묻고 누워 있었다. 한마디의 이야기도 할 수 없었다. 여인은 
몸을 움직이지 않고 그의 머리카락을 살짝 어루만지며 그가 서서히 제정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얼마 후 그는 눈을 떴다.
  "이봐요! 도대체 당신은 누구예요?"
  "나는 리제예요."
  여인이 말했다.
  "리제라고?"
  그는 음미하듯 그 말을 되풀이했다.
  "리제, 당신은 예쁘군요."
  여인은 입술을 그의 귀에 갖다대고 소곤거렸다.
  "당신, 처음이었지요? 이전에 사랑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그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재빨리 일어나서 주위를 둘러본 뒤 들판과 하늘을 
쳐다보았다.
  "아! 벌써 해가 기울었어. 이젠 돌아가야지."
  "어디로요?"
  "수도원으로. 안젤름 신부한테로."
  "마리아브론 수도원으로요? 당신 그곳에서 살아요? 내 곁에 더 있고 싶지 않아요?
  "물론 그러고 싶어."
  "그럼 가지 말아요!"
  "아니, 그건 안돼. 약초를 더 캐야 하는걸."
  "당신은 수도원에 있나요?"
  "응, 난 학생이야. 하지만 이젠 거기서 떠날 거야. 당신한테 가도 될까, 리제? 대체 
당신 집이 어디야?"
  "내 귀여운 사람, 집은 없어요. 나한테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을래요? ... 그래, 
'골드문트'라구요? 키스해 줘요. 그럼 보내줄게요."
  "정말 당신 집이 없어? 그럼 어디서 자지?"
  "괜찮다면 숲이나 건초더미 위에서 나와 함께 지낼 수도 있어요. 오늘밤에 올 수 
있어요?"
  "오고 말고. 그런데 어디서 만나지?"
  "부엉이 소리 낼 수 있어요?"
  "한 번도 해보지 않았는걸."
  "그럼 한번 해보세요."
  그는 곧 부엉이 소리를 흉내냈고 여인은 킬킬대며 흐뭇해했다.
  "그럼, 오늘밤 수도원에서 나와 부엉이 소리를 내요. 난 근처에 있을 테니. 귀여운 
아기, 골드문트. 내가 마음에 들어요?"
  "응, 내 마음에 꼭 들어. 리제, 꼭 나올게. 안녕, 지금은 가봐야겠어."
  재촉해서 말을 달려 골드문트는 해질 무렵에 수도원으로 돌아왔다. 안젤름 신부가 
매우 분주한 것은 다행스런 일이었다. 수사 한 사람이 맨발로 개울을 거닐다가 유리 
조각에 발이 찔렸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나르치스를 찾아야만 했다. 그는 식당에서 일하는 수사 한 사람을 붙들고 
나르치스가 어디 있는지  물어 보았다. 그는 금식하는 중이어서 식당에 오지 않거니와 
밤에 예배를 보기 위해 지금쯤은 잠을 자고 있을 것이라고 전해 주었다. 골드문트는 
달려갔다. 기나긴 수양 기간 동안에 나르치스의 침실은 수도원 안쪽의 고해실 중 
하나를 사용했다. 골드문트는 주저하지 않고 달려가 문에 귀를 갖다대었다. 엄격히 
금지되어 있는 일이지만 그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좁다란 나무 침대에 나르치스가 누워 있었다. 어둠 속에서 창백하고 수척한 얼굴에 
두 손을 가슴 위에 포갠 채 가만히 드러누워 있는 모습은 마치 송장과도 같았다. 그는 
눈을 뜬 채 아무 말도 없이 골드문트를 쳐다보았다. 비난도 하지 않고 명상에 잠겨 
어떤 다른 시대와 세계 안에 들어가있는 것처럼 친구를 알아내는 데 애를 먹고 
있었다.
  "나르치스! 용서해 주십시오. 당신을 방해한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당신이 지금 
나와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 이야기를 들어 
주세요. 제발 부탁입니다."
  나르치스는 생각에 잠겼다가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쓰는 사람처럼 눈을 깜박였다.
  "그렇게 절실한 일인가?"
  나르치스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습니다. 지금 저는 당신과 작별을 해야 하거든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네가 온 것을 헛되이 할 수는 없지. 이리 와서 내 옆에 
앉아. 15분쯤은 시간이 있어. 밤기도가 시작될 시간이거든."
  그는 수척한 몸을 일으켜 아무것도 깔지 않은 나무 침대 위에 앉았다. 골드문트도 
그 옆에 나란히 앉았다.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골드문트는 잘못을 자각하며 말했다. 그 골방, 아무것도 깔지 않은 나무 침대, 며칠 
밤을 새워 야위고 지친 얼굴, 방심하고 있는 듯한 시선, 나르치스의 그 모든 표정이 
그가 얼마나 당황했는가를 역력히 보여 주고 있었다.
  "그럴 것까지는 없어. 나를 염려할 것은 없다. 나는 아무 곳도 아픈 데는 없으니까. 
너는 방금 작별을 고하러 왔다고 했지? 그렇다면 여기를 떠나겠다는 말인가?"
  "오늘 떠날 겁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순식간에 모든 것을 결정하고 
말았어요."
  "아버지한테서 무슨 소식이라도 왔는가?"
  "아니요. 아버지가 아니라 인생 그 자체가 내게 왔습니다. 아버지와는 상관없이 
나는 떠납니다. 당신에게 부끄러움을 끼쳐 죄송합니다만 나는 여기를 떠납니다."
  나르치스는 그의 기다랗고 하얀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손가락은 넓은 법의의 
소맷자락에서 유령처럼 가느다랗게 내밀어져 있었다.
  "시간이 없으니까 필요한 것만 말해. 간단히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네 신상에 
일어난 것을 내가 말해 볼까?"
  이렇게 말했을 때 그의 준엄하고 지친 얼굴에서 전혀 느낄 수가 없었던 부드러운 
미소를 그의 목소리에서 느낄 수가 있었다.
  "말씀해 보십시오."
  골드문트는 간청하듯 말했다.
  "너는 사랑에 빠진 거야. 여자를 알았고."
  "어떻게 그걸 아셨습니까?"
  "네 표정에 나타나 있어. 너의 모습이 사람들이 사랑할 때 갖는 도취된 특징을 모두 
풍기고 있어. 그러니 이제 말해 보렴."
  골드문트는 망설이면서 친구의 어깨 위로 손을 얹었다.
  "전에도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나르치스, 하지만 이번만은 틀렸습니다. 이건 전혀 
다릅니다. 나는 들판에 나가 따스한 햇살 아래서 잠이 들었습니다. 눈을 떠보니 내 
머리는 아름다운 어느 여인의 무릎 위에 눕혀져 있었습니다. 나는 나의 어머니가 
이제야 나를 데리고 왔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 여인을 어머니라고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 그녀는 짙은 갈색눈에 검은 머리였으나 어머니는 나처럼 금발이었기 때문에 
전혀 달랐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머니였고 어머니의 부름이었으며 어머니로부터 온 
심부름꾼이었습니다. 내 마음을 꿈속에서 찾아온 것처럼 아름다운 한 여인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 나의 머리를 그녀의 무릎 위에 얹고 꽃 같은 미소를 띠며 나를 사랑해 
주었습니다. 맨 처음 키스를 할 때, 나는 나의 마음속에서 무언가 녹아 내리는 듯한 
형언할 수 없는 전율을 느꼈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느꼈던 모든 그리움, 모든 꿈, 모든 
달콤한 불안, 내 마음 속에 잠자고 있던 모든 비밀, 그 모든 것이 눈뜨고 모든 것이 
변하고 모든 것이 마법에 걸려 모든 것이 의미를 얻었습니다. 그 여인이 나에게 
여자의 본질과 비밀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 여인은 불과 30분 동안에 몇 해 
만큼이나 나를 성숙하게 했습니다. 이제 나는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 
수도원에 단 하루도 머물러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을 갑자기 깨달았습니다. 어두워지면 
곧 떠나겠습니다."
  나르치스는 조용히 끝까지 들은 후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적인 일이었군. 하지만 내가 예상했던 대로야. 나는 자주 너를 생각할 것이다. 
너는 내가 옆에 있어 주었으면 하고 생각할 것이다. 친구여, 너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될 수 있으면 나를 완전히 못된 놈으로 단정해 버리지 않도록 원장님께 잘 말씀해 
주십시오. 이 수도원에서 나에게 관심을 가진 사람은 그래도 그분과 
당신뿐이었습니다."
  "알았네.... 또 다른 소원은?"
  "네, 소원이 하나 있습니다. 훗날 내 생각이 나거든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그리고....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무엇 때문에 골드문트?"
  "당신의 우정, 당신의 인내, 그 모든 것에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어려운 
처지에서도 내 이야기를 들어 주신 것에 대해서도. 또 나를 만류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어떻게 내가 자네를 붙잡겠는가?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너도 알 텐데. 
그건 그렇고 어디로 갈 작정이지, 골드문트? 목적지가 있는 거야? 그 여인한테 갈 
것인가?"
  "네, 그 여인과 같이 가겠습니다. 목적지는 없습니다. 그 여인은 낯선 사람이며 
유랑인입니다. 보기에도 집시인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러나 골드문트, 그 여인과 동행하는 것은 극히 짧은 동안일는지 모른다. 
너무 그 여인을 의지해서는 안 될 거야. 그 여자에게는 친척이나 남편이 있을지도 
모르지. 그들이 너를 어떻게 맞이해 줄지 누가 알겠니?"
  골드문트는 그에게 기댔다.
  "잘 알고 있습니다. 여태 그런 생각은 해보지 않았지만 압니다. 제겐 목표가 없다고 
당신에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 여자가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 하더라도 나의 목표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 여자에게 가기는 합니다만 아닙니다. 가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무언가가 나를 부르기 때문에 가는 것입니다."
  그는 거기서 말을 끊고 한숨을 쉬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기대 앉았다. 슬픔에 
잠겼으나 변함 없는 우정을 가진 감정 속에서 행복한 마음으로 앉아 있었다. 잠시 후 
골드문트는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내가 눈이 멀어 아무것도 예견치 못한다고는 생각지 말아 주세요. 나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오늘 실로 기이한 경험을 했기 때문에 기꺼이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행복과 만족에 가득 차서 떠나는 건 아닙니다. 이 행로는 
어려우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아름답기도 할 것입니다. 한 여인의 사람이 되고, 
사랑을 준다는 것은 대단히 아름다운 것입니다! 내 이야기가 어리석게 들리더라도 
비웃진 말아 주십시오. 그러나 한 여인을 사랑하고 그 여인에게 몸을 맡기고 그것을 
완전히 껴안음과 동시에 그 여인에게서 포옹을 받는다는 것은, 당신이 약간 비웃는 
듯한 말투로 '반했다'라고 말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것은 결코 조롱거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내게 있어서는 인생에의 행로, 인생 의미에의 행로입니다. 아, 
나르치스, 나는 당신한테서 떠나야만 합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르치스, 
당신이 나를 위해 잠자는 것을 조금 희생해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당신과 
헤어진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입니다. 나를 잊지는 않겠지요?"
  "서로의 마음을 괴롭게 하지 말자! 나는 너를 결코 잊지 않겠다. 너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렇게 되기를 바라겠어. 나는 그걸 기다리고 있을 게. 형편이 안 좋을 때는 
내게 오든가, 나를 부르든가 해. 잘 가거라, 골드문트. 하느님이 너와 함께 하기를!"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골드문트는 그를 껴안았다. 그는 친구가 애무를 싫어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키스는 하지 않고 다만 두 손을 어루만지기만 했다. 
  밤이 되었다. 나르치스는 골방을 나와서 문을 닫고 성당 쪽으로 걸어갔다. 포장된 
돌 위에 신발이 덜그럭거리며 소리를 냈다. 골드문트는 다정스런 시선으로 수척해진 
친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모습은 드디어 복도 끝에 이르러 어둠을 뚫고 
그림자같이 성당 안으로 사라졌다. 수련과 의무와 덕성에 빨려들어 재촉을 받듯 
사라졌다. 아, 모든 것이 얼마나 이상 야릇하고, 끝없이 기묘하고, 혼란 속에 있는 
것일까! 바로 명상에 잠겨 단식과 철야에 온몸이 초췌해진 친구가 청춘과 마음과 
감각을 십자가에 걸고 희생으로 복종의 가장 엄격한 단련을 받아서 온 마음을 정신에 
봉사드려, 온전히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자가 되어 있는 이 시간에, 용솟음쳐 흐르는 
가슴을 안고 꽃봉오리 움트는 사랑에 취하여 그 친구를 찾아오다니, 이것은 또 얼마나 
기묘하고 놀라운 사실인가! 친구는 여위어 지치고 창백한 얼굴에 앙상한 뼈마디만 
남은 손을 하고 드러누워 있어 보기에도 시체 같았다. 그렇지만 이내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다정스레 친구의 상대가 되어 주었다. 그리고 여인의 체취를 몸에 지닌 
연애하는 벗에게 귀를 기울이고 참회와 수양 사이의 얼마 안 되는 휴식 시간을 
희생하여 주었다! 이런 종류의 사랑, 이런 자아를 버린 완전히 정신적인 사랑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뭐라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햇볕이 내리쬐는 들판에서 
맛본 사랑, 감각의 앞뒤를 분간하지 못했던 사랑의 유희, 흠뻑 취한 유희와는 얼마나 
판이한 사랑이었을까! 그렇지만 둘 다 사랑이었다. 아, 나르치스는 이제 사라지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거듭거듭 두 사람이 서로 닮지 않았다는 것을 그에게 보여 주고 
나서, 지금 나르치스는 제단 앞에서 지친 무릎을 꿇고 기도와 성찰의 밤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으리라. 밤에는 두 시간 이상 쉬는 것도, 자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한편 골드문트는 리제를 만나 달콤하고 동물적인 행위를 반복하기 위해 그 여인과 
달아나 버렸다! 나르치스라면 거기에 대해서 주목할 만한 말을 할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골드문트는 나르치스가 아니었다. 이 아름답고도 소름이 끼치는 수수께끼와 
혼란을 캐내고, 거기에 대해서 중대한 사실을 이야기할 의무가 그에게는 없었다. 
그에게는 자신의 막연하고 어리석은 골드문트의 행로를 걸어나가는 이외의 의무는 
없었다. 그에게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아름답고 따뜻한 젊은 여인을 사랑하는 것과 
밤의 성당에서 기도드리고 있는 친구를 사랑하는 것 이외의 의무는 없었다.
  여러 가지로 혼란스런 감정으로 안마당의 보리수를 지나 물방앗간으로 이르는 
출구를 찾았을 때, 그는 '마을에 가기' 위해 콘라트와 함께 똑같은 사잇길을 지나서 
수도원을 빠져나온 그날 밤이 문득 머리에 떠올라 미소를 지었다. 그 당시 그는 
얼마나 흥분된 가슴을 두근거리며 금지된 소풍에 나섰던가. 그런데 지금은 영원히 
나가 버리는 것이었다. 훨씬 더 엄격하게 금지되고, 위험한 길을 가면서도 두려움도 
없이 문지기도 원장도 선생도 생각하지 않고 말이다.
  지금은 개울에 널빤지가 놓여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대로 건너가야 했다. 그는 
옷을 벗어서 건너편으로 던진 다음 가슴까지 차올라 깊숙하고도 세차게 흘러가는 
차가운 개울을 건넜다.
  둑을 건너 옷을 입는 동안 그의 사념은 다시 나르치스에게로 향했다. 지금 그는 
나르치스가 예견하고 인도했던 그 길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자 
수치스런 감정이 들었다. 지혜롭고 약간 조소 어린 나르치스의 모습이 똑똑히 그의 
눈앞에 떠올랐다. 아주 어리석은 이야기를 했는데도 그것을 들어준 나르치스, 지나간 
날 중요한 시간에 고통 가운데서 그의 눈을 뜨게 해준 나르치스, 그가 들려준 몇 마디 
말이 분명하게 들렸다. '너는 어머니의 품속에서 잠을 자지만 나는 황야에서 깨어 
있어. 너는 소녀의 꿈을 꾸지만, 나는 소년의 꿈을 꾼다.'
  그의 가슴은 잠시 얼어붙을 듯이 죄어들었다. 옆에는 아무도 없었고 오직 홀로 어둠 
속에 서 있었다. 뒤에는 수도원이 있었다. 형식상의 고향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역시 
오래 살아 정든 집이었다. 동시에 그는 또 다른 것을, 나르치스가 이제는 그를 
충고하거나 우월한 식견을 가지고 있는 인도자나 선각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오늘 그는 아무도 인도할 수 없는, 오직 혼자서 행로를 발견한 나라로 발을 들여 
놓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이것을 자각하게 된 것이 기뻤다. 독립하지 않았던 
시절을 되돌아본다는 것은 답답하기도 하거니와 부끄럽기도 했다. 이제 그는 어린 
아이도, 학생도 아니었다. 이제야 그는 볼 수 있었다. 그것을 깨달았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었다. 그렇지만 이별을 고하는 그 순간은 얼마나 어려운 고비였던가! 친구가 
건너편 성당에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것도 줄 수가 없고, 도와줄 수도 
없고,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은, 그리고 이제부터 기나긴 세월을 어쩌면 영원히 
그와 헤어져서 살고 그에 관한 소식을 듣지도 못하고, 그의 목소리도, 그의 고귀한 
눈도 볼 수가 없다는 것은 그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
  그는 체념한 듯이 자갈길을 더듬어 나갔다. 수도원의 벽에서 백여 발짝쯤 걸어간 후 
그는 멈추어 서서 숨을 가다듬고 부엉이 소리를 냈다. 이어 똑같은 소리가 저편 개울 
밑에서 들렸다.
  '짐승들처럼 소리를 지르는구나' 그는 이렇게 생각하며 사랑의 유희를 하던 오후의 
한때를 더듬어 보았다. 그와 리제 사이에는 애무가 끝나는 마지막에야 겨우 몇 마디 
오고 갔을 뿐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와 반면에 나르치스와는 얼마나 기나긴 
대화가 오고갔던가! 그러나 지금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부엉이 소리로 
꾀어 내는, 언어가 아무런 뜻을 갖지 않는 세계로 들어왔다. 그는 그 사실을 인정했다. 
그는 오늘 언어와 사념에 대해서는 아무런 욕구도 느낄 수 없었다. 다만 리제에 
대해서, 언어는 필요 없는 맹목적인 감정과 탐색에 대해서, 한숨을 쉬며 서로가 녹아 
없어져 버리고 마는 것에 대한 욕구를 가질 뿐이었다.
  리제는 그곳에 있었다. 그 여자는 숲에서 그를 맞으러 나왔다. 그는 두 손을 벌렸다. 
애정에 넘쳐 두 손을 더듬으며 여인의 머리와 머리카락, 목, 뺨, 날씬한 몸과 탄력 
있는 허리를 안았다. 한 팔로 여자를 안은 채, 어디를 가느냐고 묻지도 않고 아무 말 
없이 앞으로 계속 걸어갔다. 여자는 어두운 숲을 잘도 해치고 나갔다. 발걸음을 
맞추어 나가는 데 진땀이 흘렀다. 여자는 여우나 담비처럼 밤눈이 밝은지 아무것에도 
부딪치거나 걸리지 않고 걸어갔다. 그는 언어, 사고도 없이 어둠 속으로 숲속으로, 
신비가 가득 찬 나라로 이끌리는 대로 자신을 맡기고 있었다. 그는 이미 생각이라는 
것조차 망각해 버렸다. 떠나 온 수도원도, 나르치스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았다.
  때로는 쿠션처럼 부드러운 이끼 위를, 때로는 광대뼈같이 불거진 딱딱한 뿌리가 
튀어나온 어두운 숲길을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달려갔다. 아주 캄캄했다가 때로는 
높다란 곳에 매달린 잎새 사이로 밝은 하늘이 보였다. 관목들에 얼굴을 부딪히기도 
하고 나무딸기의 덩굴이 옷에 걸려 그를 붙잡아 놓기도 했다. 어디든 리제가 알고 
있는 길이어서 어려움없이 길이 열렸다. 멈추어 서거나 주춤거릴 때는 거의 없었다. 
한참 후에 두 사람은 듬성듬성한 솔밭에 이르렀다. 희뿌연 밤하늘이 열리고 숲이 
끝나며 초원으로 뒤덮인 골짜기가 두 사람을 맞이했다. 달콤한 건초 냄새가 났다. 
그들은 소리없이 흘러가는 개울을 건너갔다. 활짝 트인 이곳은 숲속보다 한층 더 
고요했다. 관목들의 속삭임도, 짐승의 울음소리도, 고목들의 가지가 부러지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커다란 건초더미 옆에 리제는 멈추었다.
  "여기서 쉬어요"
  두 사람은 건초에 주저앉아서 우선 숨을 내쉬고 휴식을 즐겼다. 얼마간의 피곤이 
몰려왔다. 두 사람은 팔과 다리를 마음껏 뻗고 이 밤의 정적에 귀를 기울였다. 차츰 
이마의 땀이 마르고 얼굴이 식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골드문트는 흐뭇한 피로 속에 
웅크리고 앉아 무릎을 끌어 당겼다 폈다했다. 그러면서 깊은 심호흡으로 밤과 건초 
냄새를 들이마시곤 했다. 과거도 생각하지 않고 미래도 생각하지 않았다. 애인의 
향기와 따스함에 서서히 이끌리고 매혹 당할 뿐이었다. 때때로 여자의 애무에 
답하기도 하며, 그녀가 차츰 열이 오르기 시작하여 자꾸 몸을 밀어붙이자 그의 몸은 
서서히 녹아 내렸다. 언어도 사고도 필요 없었다. 그는 중요하고 아름다운 온갖 것을, 
여자의 싱싱하고 포동포동한 힘과 단순하고 건강한 아름다움을, 그 몸이 뜨거워져서 
욕정으로 차오르는 것을 똑똑히 느꼈다. 또 이번에는 그 여자가 첫번째와는 다른 
방법으로 사랑을 받고 싶어하고 있는 것을, 이번에는 그를 유혹하거나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공격과 욕망을 원하고 있다는 것도 똑똑히 알 수 있었다. 그는 거센 
물결이 흐르는 대로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소리도 없이 서서히 자라나는 불길이 두 
사람의 마음속에 살아서, 두 사람의 아늑한 침상을 침묵의 온 밤이 호흡하고 타오르는 
중심으로 만드는 것을 느끼곤 행복에 잠겼다.
  리제의 얼굴 위에 허리를 굽히고 어둠 속에서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하자 갑자기 
그녀의 눈매와 이마가 부드러운 빛 속에서 흔들리는 것 같았다. 놀라움에 눈을 번쩍 
뜨고, 그 빛이 보얗게 비치다가 급속도로 강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기다랗게 줄을 지어 있는 어두운 숲 기슭 위에 달이 떠 있었다. 하얗고 
보드라운 빛이 리제의 이마와 볼 위에, 동그스름한 하얀 목 위에 흐르는 것을 보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는 나지막이 꿈결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정말 아름다워."
  리제는 듯 미소로 답했고 그는 여자의 몸을 반쯤 일으켜 조심스럽게 여자의 몸에서 
옷을 벗겼다. 리제는 차디찬 달빛 속에 어깨와 가슴이 노출되어 빛날 때까지 옷을 
벗었다. 그는 도취되어 눈과 입술로 그녀의 몸을 더듬었다. 여자는 마술에 걸린 듯 
눈길을 아래로 향한 채 엄숙한 표정으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아름다움이 이 
순간에 처음으로 발견되기라도 한 듯이.

         7

  들판이 서늘해지고 달이 시시 각각으로 중천을 향하는 동안, 두 연인은 사랑의 유희 
속으로 빠져들어가 함께 누워 달빛이 부드럽게 비치고 있는 침상에서 쉬고 있었다. 
눈을 뜨면 또다시 마주 누웠다. 서로 불꽃을 튀기며 부둥켜안았다가는 다시 잠이 
들었다. 마지막 포옹을 하고 나서는 두 사람 모두 지칠 대로 지쳐 버렸다. 리제는 
건초에 깊이 몸을 파묻고 이따금 소리내어 숨을 쉬었다. 골드문트는 꼼짝도 하지 않고 
똑바로 드러누워 희멀건 달과 하늘을 언제까지나 쳐다보았다. 그들은 크나큰 슬픔에 
휩싸여 거기서 도망치려 다시 잠에 빠졌다. 깊은 잠을 탐욕스럽게 맞아들였다. 마치 
그것이 마지막인 것처럼, 그리고 영원히 깨어 있어야만 하는 선고를 받고, 이 세상의 
온갖 잠이란 잠을 모두 자신들의 내부로 끌어넣기라도 할 듯이 깊이 잠들었다.
  골드문트가 눈을 떴을 때 리제는 그 검은 머리카락을 손질하고 있었다. 그는 
멍청하게 겨우 반쯤 뜬 눈으로 잠시 그녀를 쳐다 보았다.
  "벌써 일어났어?"
  골드문트가 먼저 말했다.
  여자는 깜짝 놀란 듯이 그에게로 몸을 돌렸다.
  "이젠 가봐야겠어요."
  하고 여자는 당황하고 속절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을 깨우기 싫었어요
  "벌써 일어났는걸. 우리는 이제 길을 나서야겠지? 하기야 우리는 갈곳도 없는 
처지니까."
  "나야 그렇지만."
  리제가 말했다.
  "당신은 수도원으로 돌아가야 할 사람이잖아요?"
  "이제는 수도원 같은 곳에 가지 않아. 나도 당신과 같아. 아주 외로운 몸이고 
목표도 없거든. 당신하고 같이 가고 싶어. 정말이야."
  여인은 돌아보았다.
  "골드문트, 당신은 나와 같이 갈 수가 없어요. 이제 난 남편에게 돌아가야 해요. 
밤에 집을 비웠기 때문에 남편한테 두들겨맞을 지도 몰라요. 길을 잃었다고 
말하겠지만 그 말을 믿지 않을 거예요."
  그 순간 골드문트는 나르치스가 이미 이런 예상을 하고 말했던 사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렇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여인에게 악수를 청했다.
  "내 계산이 틀렸어."
하고 그가 말했다.
  "나는 우리 둘이 함께 살게 되리라 믿었어. 그건 그렇고, 당신은 정말로 나를 
깨우지도 않고 도망칠 작정이었나?"
  "당신이 화를 내며 나를 때릴 거라고 생각했어요. 남편에게 매맞는 건 어쩔 수 
없다지만 당신한테는 맞기가 싫었어요."
  그는 여자의 손을 꼭 잡았다.
  "리제, 나는 당신을 때리지 않아. 오늘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야. 당신에게 매질하는 남편 대신 차라리 나와 같이 떠나는 게 어떻겠어?"
  여자는 얼른 손을 뿌리쳤다.
  "안 돼요, 안돼!"
  여자는 거의 울부짖든 소리를 질렀다. 여자가 그에게서 떠나고 싶어한다는 것, 
그로부터의 다정스런 말을 듣는 것보다는 차라리 남편에게 얻어맞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는 손을 놓아 주었다. 여자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음을 
터뜨리면서 떠나 버렸다. 그는 아무 말도 없이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베어 댄 풀밭 위로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의 부름을 받고 빨려들어가듯 달아나는 리제가 
가여웠다. 그 미지의 힘이 무엇인가 그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여자가 가엾어 
보이는 동시에 자기 자신도 측은해 보였다. 아무래도 그는 불운한 것 같았다. 이제 
버림을 받아 이렇게 혼자 남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는 동안 그는 몸이 피곤한 
탓인지 졸음이 왔다. 이렇게 피곤에 지쳐 보긴 처음이었다. 슬퍼할 날은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그는 다시 잠속으로 빠져들어갔다.
  그가 눈을 떴을 때, 해는 벌써 중천에 떠올라 따갑게 그를 내리쪼이고 있었다. 
  휴식은 이제 충분했다. 재빨리 일어나서 개울로 달려가 얼굴을 씻고 물을 마셨다. 
수많은 추억이 되살아났다. 어제 저녁의 유희의 갖가지 장면과 귀엽고 애정에 넘친 
감정이 마치 낯선 꽃향기와 같이 풍겨 왔다. 기운차게 걸어가면서 그는 그 생각을 
되풀이하고 모든 것을 다시 되새겨 보았다. 모든 것을 되씹어 보고 그 향기를 느끼며 
더듬어 보았다. 그 갈색의 여인은 얼마나 많은 꿈을 실현시켜 주었으며 얼마나 많은 
봉오리를 꽃피우게 했고, 얼마나 많은 호기심과 그리움을 진정시켜 주고 또 새삼스레 
일깨워 주었던가?
  그의 눈앞에는 들판과 황야가 펼쳐져 있었다. 바싹 마른 휴간지와 어두컴컴한 숲이 
있었으며, 그 뒤에는 농가나 물방앗간, 마을이나 도시가 있을지도 몰랐다. 처음 대하는 
낯선 세계가 광범위햐고 막막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맞이하여 그를 즐겁게 하고, 
괴롭혀 줄 준비를 잔뜩 한 채.... 그는 더 이상 세상을 창에서 내다보고 있는 학생이 
아니었다. 이제 그의 방랑은 싫든 좋든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이전의 산책은 
아니었다. 이 거대한 세계가 지금은 현실인 것이다. 그는 세계의 일부가 되었다. 그의 
운명은 그 속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으며, 그 하늘은 그의 하늘이며, 그 날씨는 그의 
날씨였다. 이 커다란 세계 안에서 그는 보잘것없는 존재였다. 토끼처럼, 하찮은 
벌레처럼 작았으며 푸름과 무한의 세계를 향해 그는 달렸다. 여기서는 기상이나 
미사나 수업이나 점심때를 알리는 종은 더 이상 울리지 않았다.
  그는 무척이나 배가 고팠다. 보리빵과 한 잔의 밀크와 밀가루 스프, 그것은 얼마나 
매혹적인 기억이었던가! 그의 배고픔은 늑대와 같이 눈떴다. 보리밭을 지나갔다. 
이삭은 절반쯤 익어 있었다. 그는 껍질을 손과 이로 벗기고 그 미끌미끌한 보리 
알맹이를 부지런히 비벼 가며, 호주머니에 가득 채웠다. 그러다가 개암을 발견하고 
아직 새파랬지만 그것도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숲이 다시 시작되었다. 떡갈나무와 물푸레나무가 섞인 전나무 숲이었다. 여기서는 
월귤나무가 무수히 자라고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며 가느다랗고 딱딱한 
풀 사이로 푸른 초롱꽃이 피어 있고 반짝반짝 빛나는 갈색 나비가 이리저리 날다가는 
저 멀리로 사라져 버렸다. 성녀 게노베바는 이런 숲속에 살고 있었을 것이다. 성녀의 
이야기가 그는 언제나 좋았다. 아, 성녀 게노베바를 만날 수가 있다면! 어쩌면 숲속에 
은둔자나 암자 같은 것에 있어 백발이 성성한 노신부가 동굴이나 나무 껍질로 지은 
오두막집에서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숲속에는 숯 굽는 사람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만나기만 한다면 반갑게 인사를 할 텐데. 혹 도둑이라도 아무짓도 
안 하겠지. 아니, 사람을 만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기나긴 동안을, 오늘도 내일도 며칠까지도 이 숲속에서는 아무도 만날 수가 
없으리라는 것을. 무엇이든지 닥치는 대로 내버려 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딱다구리 소리를 듣고 그놈을 잡아 보려고 했다. 딱따구리가 있는 곳을 
찾아내느라고 오랫동안 애를 썼다. 딱따구리 한 마리가 나무둥지에 달라붙어서 나무를 
쪼며 부지런히 고개를 움직이는 것을 그는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동물과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딱다구리를 불러 내어 다정스런 말을 걸어서 나무 
속의 생활이나 그의 일이나 기쁨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어볼 수가 있다면 좋을 텐데. 
아, 변신을 할 수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는 한가할 때 꽃이나 잎새, 나무, 사람의 머리 등 온갖 것을 스케치하며 그리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렇게 하면서 자주 긴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때때로 그는 아기 
하느님처럼, 제 마음 내키는 대로 생물을 만들었다. 꽃잎에는 눈이나 입을 그려 넣고 
가지에서 봉오리를 내고 있는 잎새의 다발을 손가락 모양으로 만들고 나무 위에 
머리를 만들어 놓았다. 자주 이런 장난을 하며 몇 시간 동안을 즐겁게 보내곤 했었다. 
그는 요술을 부릴 줄도 알았다. 선을 긋고 시작된 형태가 나뭇잎이 될 것인지, 
물고기의 주둥이가 될 것인지, 여우의 꼬리가 될 것인지, 사람의 눈썹이 될 것인지.... 
결국 자신으로서도 알지 못할 뜻밖의 형태가 되곤 했었다. 그때 조그만 널빤지 위에 
장난삼아 그어진 선이 여러 형태가 되었듯이 변신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그는 지금 
생각했다. 골드문트는 하루나 아니 한 달쯤 딱다구리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나뭇가지에 살면서 미끌미끌한 줄기를 높이 기어올라가 강한 주둥이로 나무 껍질을 
쪼며, 꽁지깃으로 전신을 곧추세우고, 딱따구리의 말을 하며 나무 껍질 속에서 맛있는 
것을 빼먹으며 살고 싶었다. 소리가 잘 울리는 나무 속에서 달콤하고 날카로운 음향을 
보내고 있었다.
  숲속을 지나는 동안 골드문트는 갖가지 동물들을 만났다. 덤불 속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여러 마리의 토끼도 보았다. 그가 가까이 가자 토끼들은 그를 
쳐다보다가는 쫑긋이 귀를 세워 반대쪽으로 쏜살같이 달아나 버렸다. 조그만 빈터에서 
기다란 뱀을 보았으나 뱀은 달아나지 않았다. 살아 있는 뱀이 아니라 허물만 남은 
뱀이었다. 그는 그것을 손에 들고 살펴 보았다. 회색과 갈색의 아름다운 무늬가 
들판에 이어져서 거미줄처럼 보였다. 노란 부리를 한 까만 티티새도 보였다. 그 
새들은 불안에 찬 까만 눈동자로 그를 응시하다가는 바닥에 닿을 듯 나직이 떠서 
날아가 버렸다. 멧새와 피리새들도 많았다. 숲 한 곳에 구덩이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시퍼런 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그 위를 기다란 다리를 가진 거미가 이상한 장난에 
도취되어 미친 놈처럼 뒤엉키며 부지런히 달리고 있었다. 그 뒤를 진한 물색의 날개를 
가진 잠자리가 몇 마리 날아다니고 있었다. 벌써 저녁때가 가까워졌다. 그때 그는 
뭔가를 보았다. 아니, 이미 그것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발 밑에는 흐트러진 
나뭇잎뿐이었다. 나뭇가지가 꺾어지고 젖은 흙덩어리가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뚜렷이 보이진 않았지만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커다란 짐승이 맹렬한 기세로 덤불을 
꺾으며 돌진해 갔다. 사슴이거나 멧돼지였을 테지만 그는 자세히 알 수는 없었다. 
그는 오랫동안 무서움에 떨며 장승처럼 서 있었다. 흥분한 탓에 그 짐승이 달려간 
쪽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만물은 다시 고요해졌는데도 아직도 가슴을 두근거리며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숲에서 나가는 길을 찾을 수가 없었으므로 이곳에서 밤을 새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잠자리를 찾고 이끼로 침상을 만들고 있는 동안, 언제까지나 이곳에 있어야 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고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커다란 불행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딸기 같은 열매로만 생활해야 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이끼 위에서 
자는 것도--그 밖에도 오두막을 짓는다거나 불을 피우는 것까지도 틀림없이 해낼 수 
있으리라. 하지만 고요한 잠에 빠진 나무들 사이에서 사람을 피해 달아나는 동물들 
틈에서 언제까지나 혼자 살아가야 한다는 건 참을 수 없을 만큼 슬픈 일일지도 
모른다. 사람의 얼굴이라고는 볼 수 없고, 어느 누구와도 인사를 나눌 수가 없으며, 
여자도 볼 수가 없고, 키스도, 입술과 손발이 주는 그 사랑의 유희도 즐길 수가 없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기 싫은 일이다! 그런 신세가 될 몸이라면 차라리 곰이나 사슴 같은 
짐승이 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 때문에 내세의 행복을 단념하는 한이 있더라도, 
수곰이 되어 암곰을 사랑하는 것도 괜찮다. 이성이나 언어 등 온갖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혼자 쓸쓸히 사랑도 받지 못하고 목숨을 이어나가는 것보다는 훨씬 
낮겠지.
  이끼로 만든 침상에 누워 잠들기 전에 그는 뜻도 모를 수수께끼 같은 숲속의 온갖 
이야기를 호기심과 불안한 마음으로 듣고 있었다. 그들은 지금 그의 친구였다. 그들과 
함께 살고 그들의 습성에 따르고 그들과 내기를 하고 화합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시간부터 그는 여우나 작은 사슴, 전나무, 그리고 노송나무와 하나가 
되었다. 그들과 같이 살고 그들과 같이 대기와 태양을 나누고 그들과 함께 굶주려야 
하고 그들의 손님이 되어야 했다.
  이윽고 그는 잠이 들어 동물과 인간의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자신이 곰이 되어 
애무를 하다가 리제를 잡아먹었다. 한밤중에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그는 눈을 떴다. 왜 
그런지 알 수 없었으나 가슴은 한없는 불안감에 싸이고 어지러운 마음속에서 오랜 
시간을 곰곰이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러자 어제도 오늘도 밤기도를 드리지 않고 잠이 
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그는 일어나서 무릎을 꿇고 어제와 오늘 못한 
기도를 합해서 두 번 저녁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나서 이내 다시 잠이 들었다.
  아침이 되어 눈을 뜨자 그는 이상한 생각에 잠겨 숲속을 두리번거렸다. 자신이 지금 
어디 있는지조차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숲이 주는 불안감은 점차 가시기 
시작했다. 새로운 기쁨으로 그는 해가 뜨는 방향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한참을 
가다가 이윽고 평평한 장소를 발견했다. 가지가 전혀 없는 굵고 곧은 전나무만 자라는 
곳이었다. 그 나무들 사이로 잠시 걸어가고 있으려니 수도원 대성당 기둥들이 
생각나기 시작했다. 바로 얼마 전에 성당의 검은 현관문으로 그의 친구 나르치스가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그게 언제의 일이던가? 그게 정말 불과 이틀 전의 
일이란 말인가?
  3일째 되는 날에야 그는 겨우 숲속에서 빠져 나왔다. 반갑게도 가까운 곳에 사람이 
있다는 흔적을 발견했다. 갈아 놓은 토지, 밀이나 귀리가 자라는 길다란 밭이랑, 초원, 
그리고 멀리까지는 안 보이지만 여기저기에 사람이 지나다니는 좁다란 오솔길이 나 
있었다. 골드문트는 밀이삭을 훑어서 씹었다. 손질된 밭들이 정답게 그를 바라보았다. 
황량한 숲속에서 오랫동안 지낸 그에게는 오솔길도, 귀리도, 시든 꽃이 하얗게 매달린 
깜부기도 모두 다정하게 다가왔다. 이제 곧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갈 수 있겠지. 
한참 후에야 밭이랑 옆을 지나갔다. 그곳에 십자가가 서 있었다. 그는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다. 언덕에 불쑥 튀어나온 능선을 돌아 그늘이 많은 보리수 앞에 섰다. 
그는 황홀한 마음으로 샘물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 물은 나무 틈으로 해서 기다란 
나무 통에 떨어지고 있었다. 차갑고 맛있는 물을 마셨다. 말오줌나무의 열매는 벌써 
까맣게 익어 있었다. 말오줌나무 사이에서 두세 채의 초가지붕이 솟아 있는 것을 보자 
한없이 기뻤다. 그리고 이런 그리운 정경보다도 한결 더 깊숙이 그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암소의 울음소리였다. 그 암소는 반가운 환영의 인사라도 해주듯 흐뭇하고, 
따스하고, 평화로이 그 울음소리를 바람에 실어 그의 귀에 들려 주었다.
  그는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오두막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빨간 머리와 담청색의 눈을 
한 조그만 사내아이가 먼지투성이가 되어 문 앞에 앉아 있었다. 사내아이는 물이 가득 
든 옹기 항아리를 놓고 흙에 물을 섞어 반죽을 하고 있었다. 그의 맨발은 벌써 
반죽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반죽을 한 손가락 사이에서 그 진흙이 불쑥 비어져 나와 
있었다. 사내아이는 그것을 가지고 공을 만들었다. 소년은 턱까지 동원하여 그 진흙을 
주물렀다.
  "꼬마야, 안녕."
  골드문트는 정답게 말을 건넸다. 그러나 웬 낯선 사람을 발견한 꼬마는 입을 크게 
벌리고 통통한 얼굴을 찌푸리고는 울상이 되어 집안으로 들어갔다. 골드문트는 뒤를 
쫓아서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매우 어둠침침해서 한낮의 햇빛 아래 있다가 
들어선 그로서는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았지만 만일을 위해 그는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러자 대답은 없고 사내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곳에서 연신 꼬마를 달래고 있는 
노인의 가냘픈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한참이 지난 다음에야 키 작은 노파가 어둠 
속에서 일어서더니 가까이 다가와 한 손을 눈에다 대고 손님을 올려다보았다.
  "실례합니다, 할머니."
  골드문트는 소리쳤다.
  "성자들께서 당신의 선량한 얼굴에 축복을 내리시기를! 사흘 만에 처음으로 사람의 
얼굴을 보게 되었습니다."
  노파는 희미한 시선으로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대체 무슨 일이시오?"
  노파는 불안스레 물었다. 골드문트는 악수를 청하여 노파의 손을 조금 어루만져 
주었다.
  "쉴 자리를 얻어서 불을 피우는 심부름이나 해드리려고 생각했습니다. 빵 한 조각만 
얻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뭐 급할 것은 없지만요."
  그는 벽에 붙여 놓은 긴 의자에 앉았다. 노파는 꼬마에게 줄 빵을 한 조각 잘랐다. 
꼬마는 긴장과 호기심을 가지고, 그러나 금방이라도 울며 달아날 대세를 갖추고 낯선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노파는 빵을 한 조각 더 잘라서 골드문트에게 가져갔다.
  "정말로 고맙습니다."
  그는 말했다.
  "하느님이 은총이 있으시길!"
  "배가 고프오?"
  노파가 물었다.
  "아뇨, 그렇지는 않아요. 딸기로 얼마간 요기를 했으니까요."
  "우선 들어요! 어디서 왔나?"
  "마리아브론의 수도원에서 오는 길입니다."
  "그러면 수사인가?"
  "아뇨, 학생입니다. 지금은 여행하는 중입니다."
  노파는 반은 비웃고, 반은 넋나간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주름살투성이가 
된 말라빠진 목을 늘이고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노파는 그가 빵을 먹는 동안 
꼬마를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 호기심을 가득 담은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새 소식을 알고 있수?"
  "뭐 별로.... 안젤름 신부를 아시나요?"
  "몰라. 그 사람은 왜?"
  "앓고 있습니다."
  "앓아? 죽게 됐나?"
  "모르겠어요. 다리가 상했어요. 잘 걷지 못하시거든요."
  "죽을까?"
  "모르겠어요.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럼, 죽게 내버려 두지 그래. 국을 끓여야겠는걸. 나무 쪼개는 걸 좀 도와 주게."
  노파는 아궁이 옆에서 꺼낸 바싹 마른 전나무 장작과 도끼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노파가 시키는 대로 땔나무를 쪼갰다. 노파는 장작을 타나 남은 불 속에 집어 
넣었다. 그 위에 허리를 구부리고 불이 붙을 때까지 연신 불어대는 노파를 그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노파는 반듯하면서도 독특한 배열로 전나무와 죽도화나무를 
차곡차곡 쌓았다. 아궁이에서는 불이 활활 타올랐다. 그을음으로 온통 까매진 삼발이 
위에 매달아 놓은 까만 솥을 불꽃 위에서 빙빙 돌렸다.
  골드문트는 노파가 시키는 대로 샘물에서 물을 길어 오기도 하고 우유 그릇에서 
크림을 떠내기도 하며, 연기가 자욱한 어둠 속에 앉아서 현란한 불꽃과 그 위로 
주름살투성이인 노파의 광대뼈 얼굴이 불빛을 받아서 나타났다가 또 사라지는 것을 
쳐다보았다. 판자벽 저쪽에서 암소가 죽통을 파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마음은 평온해졌다. 보리수, 샘물, 가마솥 밑에서 넘실대는 불꽃, 암소의 
되새김질, 죽통 소리, 테이블이며 긴 의자가 있는 어두컴컴한 방, 한시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움직이는 노파나 그 모든 것이 아름답고 선량했으며 평화, 인간의 온정, 고향 
등의 냄새를 발산하고 있었다. 이 농부 할머니는 사내아이에게는 증조할머니가 
되었다. 꼬마의 이름은 쿠노인데, 가끔씩 부엌으로 들어와서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겁먹은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처음에처럼 울지는 않았다.
  이윽고 아들과 그의 처가 들어왔다. 그들도 농부였다. 그들은 낯선 사람이 집 안에 
있는 것을 보고 몹시 놀라는 눈치였다. 농부는 당장 달려들 기세로 이상하게 여기면서 
골드문트의 팔을 붙들고 문간으로 끌고 나가 한낮의 햇빛에서 청년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러더니 웃음을 지으며 청년의 어깨를 정답게 툭툭 치고는 식사나 
함께 하자고 했다. 그들은 곧 자리에 앉아서 자기 몫의 빵을 우유에 적셔 먹었는데 
우유가 거의 바닥이 나자 농부가 나머지를 훌쩍 마셔버렸다.
  골드문트가 하룻밤 묵어 갈 수 없겠느냐고 하자 농부는 방이 없어서 곤란하다며 
바깥에 나가면 건초더미가 있을 거라며 괜찮다면 그곳에서 자고 가라고 했다.
  꼬마를 옆에 안은 농부의 아낙은 이야기에는 끼여들지 않았으나 식사를 하는 동안 
호기심 가득 찬 눈초리는 젊은 나그네를 붙들고 놓지 않았다. 그의 고수머리와 눈매는 
처음부터 아낙의 마음을 끌었다. 그리고 깨끗한 그의 하얀 목과 품위 있어 보이는 
매끈한 손, 그 손의 시원스럽고 아름다운 동작도 그녀의 마음에 들었다. 나그네이긴 
하지만 훌륭하고 품위 있는 사람이었다. 거기다가 정말 젊었다. 무엇보다도 아낙의 
마음을 강하게 끌어당기고 반하게 한 것은 나그네의 목소리였다. 그윽하게 사랑을 
구하는 듯한 젊은 남자의 목소리는 애무와도 같이 감미롭게 들렸다. 좀더 오래이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식사가 끝나자 농부는 외양간에 볼일이 있다며 나갔다. 골드문트는 집 밖으로 나가 
우물에서 손을 씻고 나지막한 물통 위에 앉아서 몸을 식히며 물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마음을 정할 수가 없었다. 벌써 여기를 떠나야 한다는 것은 서운한 일이었으나, 
여기서는 이제 아무것도 구할 것이 없었다. 그때 농부의 아낙이 물통을 들고 나와 
물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이봐요, 오늘 밤에 멀리 가지 않을 거면 내가 먹을 것을 갖다줄게요. 저기 기다란 
보리밭 뒤에 건초가 있어요. 그 건초는 내일에야 가져올 것인데 거기 있겠어요?"
  그는 주근깨가 박힌 여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굵직한 여인의 팔이 물통을 
들어올렸다. 여인이 맑고 커다란 눈에는 온기가 서려 있었다. 그는 여인에게 빙그레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여인은 물이 출렁출렁 넘치는 물통을 들고 대문 안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고마운 일이라 생각하고 만족한 마음으로 흐르는 물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잠시 후 그는 안으로 들어가 농부와 노파를 찾아 악수를 나누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연기와 그을음과 우유 냄새가 났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 
오두막은 밤이슬을 피하는 피난처이자 고향이었는데 지금은 서먹서먹한 타향이 되고 
말았다. 그는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오두막 건너편으로 교회가 보였다. 그 근처에는 아름다운 숲과 굵직굵직한 고목 
참나무가 있었다. 밑에는 키가 작은 풀들이 나 있었다. 그는 그늘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굵직한 나무 줄기 사이를 하릴없이 왔다갔다 했다. 여인과의 사랑이란 묘한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것은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 여인은 그에게 밀회의 
장소를 가르쳐 줄 때만 언어를 사용했을 뿐 다른 일체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대체 뭘로 말하나? 눈으로? 그렇다. 그리고 어느 정도 당황한 목소리의 
음향으로, 또는 피부에서 미묘하게 발산되는 냄새로 말했다. 남녀가 서로를 갈구할 
때는 그것만으로도 금세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그것은 밀어처럼 야릇한 것이었다. 
그는 오늘 밤을 흥분에 차서 기다렸다. 그 커다란 금발의 여인은 어떠할까? 어떤 
눈매와 음향과 몸매와 동작과 키스를 가지고 있을까에 잔뜩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확실히 리제와는 다를 것이다. 지금쯤 리제는 어디 있을까? 단정하고 까만 머리와 
갈색의 살결과 짤막한 한숨을 쉬는 리제, 남편한테 얼마나 얻어맞았을까? 지금도 나를 
생각하고 있을까? 내가 오늘 새로운 여인을 발견한 것 같이 리제도 지금쯤 새로운 
애인을 발견했을까? 왜 모든 순간이 그다지도 빨리 지나갔을까? 왜 그리 아름답고 
뜨겁고 기묘하게 변하고 말았나! 그것은 죄악이며 간음이었다. 며칠 전만 하더라도 
그런 죄악을 저지르니 차라리 맞아죽기를 원했다. 그러나 지금 그는 벌써 두 번째의 
여인을 기다리고 있으니 그의 양심은 정지했단 말인가! 그러나 그 양심이 조용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양심이 간혹 침착성을 잃고 중압감을 갖는 것은 간음이나 환락의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이 저지르게 되는 죄의 감정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갖고 
나오는 죄의 감정인지도 모른다. 이것이 신학에서 말하는 원죄라고 하는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사실 살아 있는 그 자체가 죄와 같은 무엇을 내부에 간직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나르치스는 같은 순결하고 지혜로운 인간이 무엇 때문에 
심판을 받는 인간처럼 참회의 수양에 따라야 했을까? 왜 골드문트 자신 역시 어딘지 
마음속에 그 죄를 느끼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그는 행복하지 않았단 말인가? 젊고 
튼튼치 못했단 말인가? 하늘을 나는 새와 같이 자유롭지 못했단 말인가? 여인들이 
그를 사랑하지 않았단 말인가? 그가 느낀 은밀한 즐거움은 애인인 아낙에게 주어도 
좋다는 것을 느끼는 것을 느끼는 것이 아름답지 못하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왜 완전히 행복하지 못했을까? 왜 그의 젊은 행복 속으로 때때로 그 기묘한 
괴로움이나 가냘픈 불안이나 무상의 애통이 들어왔을까? 그는 사색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그다지도 자주 명상에 잠기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하지만 역시 산다는 것은 즐거웠다. 그는 풀밭에 앉아 보랏빛의 조그만 꽃을 따서는 
눈 가까이에 갖다대고 조그맣고 좁은 줄기 속을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핏줄 같은 
줄이 있고 모든 것이 섬세했다. 여인의 태속같이 혹은 생각하는 사람의 뇌 속과 같이 
생명이 약동하고 있었고, 기쁨이 있었다. 아! 왜 인간이란 이다지 무지할까? 왜 이런 
꽃과 이야기를 나눌 수 없을까? 인간끼리조차도 진실한 대화를 나누려면 거기에는 
행운과 특별한 우정과 준비가 필요하지 않았던가. 그렇지만 사랑이 언어를 필요로 
하지 않는 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 만약 사랑이 언어를 필요로 했다면 오해와 
어리석음으로 가득찼을 테지. 아, 리제의 눈, 지그시 감은 그녀의 눈, 넘쳐흐르는 환희 
속에 왜 그리 애끓는 흐느낌이 있었던가! 학문이나 시의 언어로 갖가지를 표현한다 
해도 그것을 표현해 수는 없었다. 도대체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야기하고 싶은 욕구와 생각하려고 하는 
영원의 충동을 마음속에 쉴새없이 가지고 있었다.
  그는 조그만 식물의 잎이 줄기 둘레에서 아름답고 기묘하게 줄을 지어 있는 것을 
관찰했다. 버질의 시는 아름우나 그 시구 속에는 나선형으로 가지런히 줄을 지은 이 
줄기의 조그만 잎새의 반만큼의 분명함도 영리함도 없었고, 아름답거나 의미 없는 
것들이 얼마든지 솟아나 있었다. 이런 꽃을 단지 한 개라도 만들어 낼 수가 있다면 
얼마나 즐겁고 행복하고 매혹적이며 고귀하며 의미가 깊은 행위가 될까? 그러나 그런 
짓은 아무도 할 수가 없다. 어떠한 영웅도, 황제도, 교황도, 성자도....
  해가 기울자 그는 농부의 아낙이 일러준 장소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이렇듯 한 
사람의 여인이 오직 사랑만을 좇아서 찾아온다는 것을 알고 기다린다는 것은 흐뭇한 
일이었다.
  여인은 빵과 베이컨 한 토막을 보자기에 싸가지고 와서 그에게 내밀었다.
  "당신을 위해 가져왔어요. 먹어요."
  여인이 말했다.
  "나중에 먹겠어요. 내가 바라는 것은 빵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야. 당신이 얼마나 
멋진 것을 가지고 왔는지 보여 줘요!"
  여인은 멋진 것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허덕이는 입술, 반짝이는 이, 햇빛에 
그을려서 붉지만 튼튼한 팔, 그리고 목 아래로 보이는 하얗고 보드라운 살결, 여자는 
언어로 기쁨을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사람이 간장을 녹이는 야릇한 가락을 토해 냈다.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보드랍고 애정과 감정이 담뿍 어린 두 손이 자기 몸에 
닿자 여인의 살결은 소름이 돋으며 목젖으로는 울부짖는 듯한 소리를 냈다. 그녀의 
성희는 리제보다는 서툴렀지만 힘차게 애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녀의 사랑은 
어린아이처럼 단순하면서도 탐욕스러웠다. 골드문트는 만족스러웠다.
  이윽고 여인은 한숨을 쉬면서 돌아갔다. 뿌치치고 떠나가는 것이 괴로웠지만 
언제까지 있을 수는 없었다.
  골드문트는 한동안 혼자 남았다. 행복에 도취되고 슬픔에 잠겨 있다가 나중에야 
비로소 빵과 베이컨이 불현듯 머리에 떠올라 그것을 먹어치웠다. 벌써 밤은 
이슥해졌다.

         8

  골드문트의 방랑은 계속되었다. 어느 한 곳에서 이틀 밤 이상 머무는 경우가 좀처럼 
없었으며 도처에서 여인들의 환영을 받고 행복에 젖었다. 그의 얼굴은 햇빛에 그을러 
갈색이 되고, 방랑과 거친 음식 때문에 수척해졌다. 수많은 여자들이 이른 아침에 
그에게 작별을 고하며 떠났다. 어떤 여자들은 눈물을 흘리며 떠나곤 했기 때문에 그는 
몇 번이나 이런 생각을 했다. '왜 한 여자도 내 곁에 머무르지 않는가? 나를 사랑해서 
간통을 저지르고 있는 건가? 그 여자들은 왜 모두가 매맞는 것을 염려하면서도 
남편에게로 이내 돌아가는 걸까?' 그를 진심으로 붙드는 여인은 한 사람도 없었고 
자기를 데려가 달라고 사정하는 사람도 없었으며 방랑의 기쁨과 괴로움을 함께 나눌 
각오를 하는 사람도 없었다. 물론 골드문트가 그렇게 하자고 유혹하거나 어떤 
여인에게도 그런 생각을 갖도록 강요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마음도 자유를 원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다른 여자의 품에 안기었을 때 이미 어제의 애인에 대한 
그리움이 남아 있는 기억은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디를 가나 여자들의 
사랑은 그 자신의 사랑과 마찬가지로 헛되다는 것, 그리고 여인들이 불꽃처럼 열렬히 
타오르다가 곧 식어버린다는 것을 알고 그는 얼마쯤 의아해하기도 했고, 약간 
슬퍼하기도 했다. 그것은 옳은 일인가?
  그것은 자신의 책임이었나? 여자들이 그를 탐내어 감미롭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건초나 이끼 위에서 짧은 순간의 말없는 교제를 원할 뿐, 그와 함께 살기를 바라지 
않토록 운명이 정해진 것은 아닌가? 아니면 그가 방랑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인가? 
정확하고 있는 사람은 유랑자의 생활에 공포감을 갖고 있을 수도 있다. 그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여자에게서 배우는 성희가 싫증나지 않았다. 물론 남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남편이 없는 나이 어린 처녀들에게 마음이 끌렸고, 또 열렬히 
사랑했으나 대개의 경우 애인이 있는 수줍은 처녀한테는 손이 미치지 못했다. 그는 
부인들한테 즐겨 배웠고 어느 여자나 무엇 하나쯤은 그에게 남겨 주었다. 몸짓, 독특한 
키스, 독특한 기교, 혹은 몸을 맡기거나 사리는 독특한 방법 등.... 골드문트는 그 어느 
경우에도 응해 주었다. 싫증내지 않고 어린아이처럼 어떤 유혹도 받아주었다. 그렇게 
함으로서 비로소 그 자신도 유혹적이 되었다. 그의 외모만으로는 부인들을 그다지도 
쉽게 유혹할 수는 없었으리라. 그것은 순진한 행동, 공개적인 행동, 욕망의 거리낌 
없는 천진성, 여자가 그에게 무엇을 요구하든 그것에 대해서 언제든지 응하는 마음의 
준비, 그런 것 때문이었다. 그는 스스로 깨닫지는 못하지만 애인 하나하나가 그에게 
바라는 대로, 꿈꾸는 대로 해주었다. 어느 여인한테는 부드럽고 조심성 있게, 다른 
여인한테는 재빨리 또한 집어삼킬 듯이, 어느 때는 처음 여자를 안 소년과도 같이, 또 
어느 때는 노련한 경험자처럼. 그는 유희와 싸움, 탄식, 그리고 웃음과 수줍음, 
뻔뻔스러움도 자유 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다. 그는 절대로 여자가 원하지 않는 행위를 
하지 않았다. 바로 그 점이 예민한 감각을 가진 모든 여성이 재빨리 그이 마음속에서 
낚아채는 소재였고 그 여성들에게 호감을 가져다주는 사나이로 만든 것이다.
  그는 짧은 시기에 수많은 사랑의 형태와 사랑의 기교를 배웠다. 수많은 애인에게서 
경험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여성을 보고, 느끼고, 만지고 냄새를 맡는 방법까지 
배웠다. 어떤 종류의 목소리도 알아들을 수 있는 민감한 귀를 갖게 되었으며 많은 
여성의 목소리를 듣고 벌써 그 여자의 사랑의 능력과 종류, 범위를 정확히 알아맞출 
수 있는 방법을 배웠다. 머리가 목 위에서 어떠한 형태로 윤곽을 드러내고 있는가, 
무릎이 어떠한 모양으로 움직이는가, 그는 그 무한한 갖가지 모양들을 새로운 
황홀감을 갖고 관찰했다. 그는 어둠 속에서 눈을 감고 가만히 손가락을 더듬어 여자의 
털의 종류를 하나하나 구별해 내는 방법도 배웠다. 그런 것에 그의 방랑 생활의 
의미가 있으며 그 때문에 이 여자에게 저 여자로 편력을 하며 인식과 구별의 능력을 
섬세하고 더욱 다양하고 깊게 배우고 연습하는 것이라고 그는 오래 전부터 느끼기 
시작했다. 마치 대개의 악사들이 한 가지 악기뿐만 아니라 세 가지나 네 가지 혹은 더 
많은 악기를 연주할 줄 아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어디에 쓰이고 어디에 연결 
되는가 하는 것은 알지 못한 채. 그는 다만 자신의 행로 위에 서 있다는 것만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라틴 어나 논리학에 어느 정도의 능력은 있다고 하지만 그 
능력과 재능이 놀라울 정도로 특출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랑과 여자와의 
행위에서는 능력을 부여받고 있었다. 그 점에 있어서 그는 고생하지 않고 쉽게 배우고, 
뭐든 잊어버리지 않고 저절로 경험이 쌓여지고 정리가 되었다.
  방랑 생활을 한 지 1년이 지난 어느 날, 골드문트는 아름답고 멋진 두 딸을 가진 
어느 유복한 기사의 저택에 이르렀다. 때는 이른 가을이어서 밤이 되면 추위를 느낄 
정도였다. 지난해 가을과 겨울을 겪은 바 있어 앞으로의 생활을 생각하니 기분이 
우울해졌다. 겨울의 방랑 생활은 어려웠다. 기사의 저택에 이르러 그는 식사와 
잠자리를 청했다. 모두 그를 정중히 맞아주었다. 나그네가 학문을 한 사람이요, 그리스 
어를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기사는 그를 하인들의 식탁에서 옮기도록 
분부하고 정중하게 대접했다. 딸들은 눈을 내리깔고 있었는데 그중 언니 리디아는 
열여덟 살이었고, 동생 율리에는 열여섯 살이었다.
  이튿날 골드문트는 길을 떠나려고 했다. 그 아름다운 두 아가씨 중에서 누구도 손에 
넣을 가망이 없을 뿐더러 그를 붙잡아 둘 만한 다른 어떤 여자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아침 식사 후 기사가 그를 옆에 앉게 했다. 특별한 목적이 있는 
것처럼 그를 방안으로 안내한 노기사는 학문이나 책에 대한 자신의 특별한 취향에 
대해 젊은이에게 점잖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지금까지 모은 책으로 
가득한 조금만 책장, 일부러 만들어 놓은 책상, 책상 위의 종이와 양피지 꾸러미 등을 
보여 주었다. 골드문트가 뒤에 들은 이야기지만 이 경건한 기사는 젊었을 땐 학교에 
다닌 일이 있었으나 그 후에는 계속 전쟁과 세속적인 생활에 몸을 바치다가 결국 
중병에 걸려 하느님의 계시를 받고 순례길에 나섬으로써 젊은 시절의 죄악을 
참회했다는 것이다. 그는 로마를 거쳐 콘스탄티노플까지 갔었는데 집에 돌아와 보니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잡은 텅텅 비어 있더라는 것이었다. 그는 그 후 고향에서 결혼을 
했으나 부인을 잃은 뒤에는 딸들의 양육에만 정성을 쏟았다고 했다. 그리고 이제 
황혼기에 접어들어 그 옛날 자신의 순례 행각의 자세한 보고를 쓰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몇 장을 적어 나갔지만--젊은이에게 고백한 것에 의하면--라틴 어 실력이 
부족해서 여러 가지로 막히는 것이 많다고 했다. 그래서 만약 골트문트가 지금까지 쓴 
그의 글을 정서하면서 앞으로도 계속 그를 도와준다면 새 의복과 숙식을 제공하겠다는 
것이었다.
  가을의 유랑자에게 그것이 어떤 의미인가를 골드문트는 알고 있었다. 새로운 
옷차림도 그가 원하던 것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기쁜 것은 오랫동안 두 자매와 
한집안에 있게 된 것이었다. 그는 즉석에서 승낙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참 하녀는 
옷장에서 고운 무늬의 갈색 천을 찾아 골드문트의 의복과 모자를 만들어야만 했다. 
기사는 까만 색깔로 학생복같이 만드는 게 좋다고 고집했으나 골드문트는 무엇이든 
상관없다고 했다. 그래서 반은 관리인, 반은 사냥꾼 같은 멋진 옷이 만들어졌고 그 
옷은 그에게 썩 잘 어울렸다.
  글쓰기도 생각보다 쉽게 진행되었다. 지금까지 쓴 것을 그들은 함께 훑어나갔다. 
골드문트는 정확치 못하고 불충분한 많은 단어를 정정했을 뿐 아니라 여기저기에서 
기사의 짧고 서툰 문장들을 분명한 구조와 세련된 표현을 사용해 아름답고 완전한 
문장으로 고쳤다. 기사는 무척 만족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들은 그 일로 매일 
최소한 두 시간씩 바쁘게 보냈다.
  그 고성에서--그것은 엄격한 의미에서 견고한 농부의 넓은 
저택이었지만--골드문트는 여러 가지 소일거리를 발견했다. 그는 사냥을 하기도 하고, 
사냥꾼 힌리히를 따라다니며 활쏘는 방법을 배우기도 하고, 개와 친구가 되었으며, 
말도 마음껏 탈 수가 있었다. 혼자 있을 때는 별로 없었다. 이야기 상대는 대개 개나 
말, 혹은 힌리히나 고참 하녀 레아 였는데, 이 여자는 남자 목소리를 내며 농담을 무척 
잘 하고 호들갑스레 웃는 살찐 노파였다. 개를 돌보는 소년이나 양을 지키는 목동이 
이야기 상대가 될 때도 있었다. 이웃에 사는 방앗간의 부인과 밀애를 즐기기도 쉬운 
일이었지만 그는 자중하고 순진한 숫총각 행세를 했다.
  또한 그는 기사의 딸들에게 완전히 매혹 당했다. 동생 쪽이 더 아름다웠으나 
새침데기여서 골드문트와는 거의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극도의 조심성과 은근한 
태도로 두 처녀에게 접근해 갔는데, 처녀들은 그의 접근을 그칠 줄 모르는 구애라고 
느끼고 있었다. 동생은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는데 그것은 거만해 보이기까지 
했다. 언니 리디아는 그에 대해서 특별한 것을 발견했다. 별스런 학자라도 대하듯이 
반은 존경으로, 반은 조롱으로 여러 가지 흥미있는 질문을 하며 수도원에서의 생활에 
대해 물었다. 그럴 때 그녀는 언제나 귀부인 같은 우월감을 드러냈다. 그래서 그는 
리디아를 대할 때는 귀부인과 같이, 율리에를 대할 때는 어린 수녀를 대하듯이 했다. 
저녁 식사 후 그의 이야기로 평상시보다 오랜 시간 두 딸을 식탁에 붙잡아 두거나, 
정원에서 리디아가 그에게 말을 걸 때면 그는 만족해하며 그것이 일종의 발전이라고 
생각했다.
  이 가을, 저택 안마당에 있는 높다란 물푸레나무의 잎은 오랫동안 떨어지지 않았고 
정원에는 들국화와 장미꽃이 오래도록 피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손님이 왔다. 
이웃 영주와 그의 부인이었다. 그들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햇살에 이끌리어 평소에는 
안 하던 먼 소풍을 하다 보니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며 하룻밤 숙박을 청했다. 기사는 
매우 공손히 그들을 맞았다. 자연히 골드문트의 침대는 객실에서 서재로 옮겨지고 그 
방은 손님을 위해 꾸며졌다. 몇 마리의 닭과 물방앗간에서 얻은 고기로 요리를 하느라 
법석이었다. 골드문트는 즐거이 손님 접대에 참석해 낯선 귀부인이 그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것을 이내 알아차렸다. 그 귀부인의 목소리나 눈매에 의해서 그는 
부인의 호감과 탐욕을 눈치챘으나 반면에 리디아는 뾰로통한 얼굴로 그와 귀부인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알아채곤 더욱더 긴장하기 시작했다. 저녁 
만찬이 시작될 때 귀부인의 발이 테이블 밑에서 골드문트의 발을 희롱하기 시작했다. 
그 희롱과 더불어 그 이상으로, 리디아가 호기심이 가득 담긴 시선으로 그 희롱을 
관찰하고 있는 침묵의 음울한 긴장이 그를 매혹시켰다. 나중에 그는 일부러 나이프를 
마룻바닥에 떨어뜨리고 테이블 밑으로 허리를 굽혀 그것을 주으면서 귀부인의 
허벅지와 발목을 애무해 주었다. 그러자 리디아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지더니 입술을 
깨무는 것이 그의 눈에 띄었다. 그는 수도원의 일화에 대해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었으나 손님인 귀부인은 이야기보다는 그의 구애의 소리를 마음속으로 애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도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기사는 호의를 가지고, 
이웃에 사는 영주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젊은이 속에 불붙고 있는 불길에 
감동되고 말았다. 리디아는 그가 이토록 열변을 토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는 만발한 꽃과 같았다. 허공에는 기쁨이 춤추고 눈은 빛나며 목소리는 행복을 
노래하고 사랑을 애원을 하고 있었다. 세 여자는 그것에 대해 각기 다른 감정을 
느꼈다. 어린 율리에는 격렬한 저항감으로, 영주의 부인은 황홀한 만족감으로, 
리디아는 괴롭게 파동치는 가슴으로, 마음속에서의 동경과 가냘픈 저항, 격렬한 질투가 
뒤얽혀서 급기야는 그녀의 얼굴은 열로 들떴고 눈동자는 불타기 시작했다. 골드문트는 
그 모든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그의 구애에 대한 은밀한 대답으로 
되돌아왔으며 마치 새처럼, 몸을 맡기고 저항하고 서로 싸우는 사랑의 사념들이 그를 
에워싸고 날아다녔다.
  식사가 끝난 뒤 율리에는 들어가 버렸다. 벌써 밤은 이슥해졌다. 율리에는 촛대에 
불을 켜들고 어린 수녀처럼 쌀쌀하게 방에서 나가 버렸다. 다른 사람들은 그 후 한 
시간이 지나도록 자리에서 일어날 줄을 몰랐다. 두 사나이가 추수와 황제와 사교의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을 동안 리디아는 골드문트와 귀부인이 아무런 일도 아닌 것에 
대해서 쓸데없는 잡담을 나누고 있는 것에 온 신경을 모아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길게 이야기를 끄는 동안, 말의, 눈초리의, 억양의, 하늘하늘한 몸짓의 질기고 달콤한 
그물이 만들어져갔다. 그 어느 것이나 의미 심장한 것이요, 높은 열을 띠고 있었다. 
리디아는 그 분위기를 호기심으로 동시에 혐오스러운 감정으로 호흡하고 있었다. 
골드문트의 무릎이 테이블 밑에서 낯선 귀부인의 무릎에 닿는 것을 보거나 느끼기라도 
하면 리디아는 자신의 몸에 닿기라도 한 듯 깜짝 놀랐다.
  그날 밤 리디아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저 두 사람은 분명히 같이 잘 거라고 
확신하며 깊은 밤중까지 가슴을 졸인 채 귀를 기울였다. 두 사람이 이루지 못한 것을 
리디아는 상상 속에서 실현시키고 말았다. 리디아는 두 남녀가 부둥켜안는 것을 보고 
서로 키스하는 소리를 들었다. 동시에 배반당한 기사가 사랑의 유희를 하고 있는 
그들을 불의에 습격하여 뻔뻔스러운 골드문트의 가슴에 칼을 꽂지나 않을까 
두려워하기도 하고, 동시에 바라기도 하면서 흥분으로 몸을 떨었다.
  이튿날 아침에는 날씨가 흐린데다가 눅눅한 바람까지 불었다. 좀더 머물고 가라는 
권고를 뿌리치고 손님들은 출발을 서둘렀다. 그들 부부가 말을 탈 때 리디아는 옆에 
서서 악수를 하고 작별의 인사를 했으나 정신은 다른 데에 가 있었다. 그녀의 모든 
감각은 시선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기사의 부인이 말에 오르는 것을 골드문트가 
손으로 받쳐주는 것을 보았고 그의 오른쪽 손이 부인의 구두를 꽉 잡는 것을 그녀는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손님들이 떠나자 골드문트는 서재로 가서 하던 일을 계속했다. 반 시간 쯤 후에 
리디아가 하녀에게 말을 끌어내 오라고 이르는 소리가 들렸다. 주인은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며 싱긋이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리디아가 말을 타고 
달려나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날의 라틴 어 저술은 거의 진도가 나가지 않았고 
골드문트의 마음은 산란했다. 주인은 친절하게도 평소보다 빨리 그를 해방시켜 
주었다.
  골드문트는 몰래 말을 타고 저택을 빠져나와 차갑고 눅눅한 가을 바람을 맞으며 
퇴색한 풍경 속으로 달려나갔다. 점점 빨리 달리고 있으려니까 안장으로 말의 체온이 
전해져 그 자신의 피도 뜨거워오는 것을 느꼈다. 추수가 끝난 들판을 지나고 초원을 
넘어 갈대가 자라는 늪지대를 지나쳐 그는 숨을 헐떡이며 음산한 날씨 속으로, 
오리나무가 자라는 조그만 골짜기로, 이끼 냄새가 풍기는 전나무 숲을 뚫고 갈색의 
적막한 들판을 넘었다.
  그는 하늘 아래 높다란 언덕빼기로 천천히 말을 몰아가는 리디아를 발견했다. 그는 
곧 그녀를 향해 달려갔고 그녀는 그의 추적을 눈치채고는 속력을 내어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녀의 모습은 사라졌다가는 나부끼는 머리카락과 함께 모습을 나타내곤 
했다. 그는 미끼를 쫓듯 추격해 가면서 속으로 웃고 있었다. 그는 다정스럽게 작은 
소리로 말을 격려하면서 기꺼운 눈으로 풍경을 눈여겨 보았다. 웅크리고 앉은 밭이랑, 
오리나무 숲, 단풍나무, 늪의 진흙탕 기슭 등. 그러나 그의 눈초리는 쉴새없이 목표를 
향해서, 달아나는 아름다운 여인을 향하여 있었다. 이제 곧 잡히리라.
  그가 바짝 따라온 것을 안 리디아는 달리는 것을 단념하고 말의 속도를 줄였다. 
리디아는 추격자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날렵하게, 태연하게, 마치 거기에 있는 
사람은 자기 혼자뿐인 것처럼 말을 앞으로만 계속 몰았다. 그는 리디아와 나란해졌다. 
두 마리의 말은 서로 나란히 걸어갔다. 말과 기사 모두 땀을 흘리고 있었다.
  "리디아!"
  그는 나지막이 불렀다.
  리디아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리디아!"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리디아, 당신이 말을 타고 달리는 모습을 멀리서 보니 정말 멋있더군요. 당신의 
나부끼는 머리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는지! 그리고 당신이 내게서 도망친 
모습이란! 이제야 나는 당신이 나를 조금은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소. 여태껏 
그걸 눈치채지 못했었지. 어제 저녁까지만 해도 의심하고 있었으니까. 당신이 
나에게서 도망치려고 했을 때 비로소 나는 알았소. 아름답고 사랑스런 리디아! 힘들 
텐데 말에서 내리지 않겠소?"
  그는 말에서 얼른 뛰어내리는 것과 동시에 리디아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고삐를 
잡았다. 눈같이 하얀 그녀의 얼굴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말에서 안아 내려주었을 때 
리디아는 왈칵 눈물을 쏟았다. 그는 리디아를 조심스럽게 몇 발자국 이끌고 가다가 
마른 풀 위에 앉히고 그 옆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그녀는 앉아서 울음을 그치려고 
애써 자신과 싸웠다. 한참 후에야 그녀는 울음을 그쳤다.
  "아, 당신은 정말 나쁜 사람이에요."
  그녀는 간신히 말했다.
  "내가 그렇게 나쁜 사람이오?"
  "골드문트, 당신은 여자를 유혹하는 사람이에요. 조금 전에 당신이 나에게 한 말은 
없었던 걸로 해줘요. 그렇게 뻔뻔스러운 말이 어디 있어요? 그리고 나에게 그런 말을 
할 자격도 없는 사람이에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다니요. 어떻게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지요? 잊어 주세요! 하지만 내가 어제 저녁에 본 것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요?"
  "어제 저녁에 도대체 무엇을 보았다는 말이오?"
  "흥, 시치미 떼지 말아요! 제발 그런 거짓말은 그만 둬요! 내 눈앞에서 그 여자한테 
추파를 던지다니, 정말 너무해요! 당신은 수치스럽지도 않았나요? 심지어 당신은 
테이블 밑에서 그 여자의 다리를 쓰다듬기까지 했어요. 내가 보는 앞에서! 그리고 
지금은 그 여자가 가버리자 내 뒤를 쫓았어요! 당신은 정말 수치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에요."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의 옆에 무릎을 꿇었다. 그를 쳐다보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고 애처로워 보였으므로 그녀의 고통이 그에게 전해졌다. 그도 
무엇을 호소하지 않으면 안 될 심정이었다. 그녀가 뭐라든 그는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떨리는 그녀의 입술에는 사랑이 있었다. 그는 그녀의 말보다 
그 눈을 믿었다. 
  리디아는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아무 대답이 없자 충혈된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거듭 말했다.
  "정말로 당신은 수치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에요!"
  "용서해요."
  그는 조용히 말했다.
  "우리는 지금 해서는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 책임입니다. 
수치를 모르느냐고 당신은 묻고 있지만 물론 나는 수치가 무엇인지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사랑은 수치라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 
법입니다. 화내지 마십시오!"
  리디아는 아무 말도 듣고 있지 않는 것 같았다. 주저앉은 채 꼭 다문 입술로 옆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까마득히 먼 곳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그가 이런 상황에 
놓여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는 가만히 리디아의 무릎에 얼굴을 댔다. 그 감촉은 그에게 쾌감을 가져다 
주었다. 하지만 감히 그녀에게 손을 댈 수가 없어 이내 슬퍼졌다. 리디아는 여전히 
꼼짝하지 않고 앉아서 아무 말도 없이 먼 곳만 응시하고 있었다. 말할 수 없는 거북함, 
말할 수 없는 슬픔이었다! 그러나 리디아의 무릎은 그가 비벼대는 따스한 볼을 
다정스레 받아 주었다. 그는 가만히 무릎에 기댄 채 서서히 그 고귀하고 기다란 
형태를 자신 속에 받아들였다. 품위 있고 맵시 있는 이 무릎이 리디아의 기다랗고 
아름답고 팽팽한 반월형 손톱과 얼마나 잘 어울리는가를 생각하고 골드문트는 환희와 
감동을 맛보았다. 그는 감사한 마음으로 무릎에 얼굴을 비벼대면서 볼과 입술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자 망설이는 듯한 리디아의 손이 나는 새와 같이 사뿐하게 그의 머리카락 위에 
얹혀졌다. 부드러운 손이 가만히 그의 머리카락을 마지작거렸다. 길고 날씬한 
손가락과 곱게 반월형을 이룬 장미빛 볼록한 손톱, 그는 리디아의 손을 자기 자신의 
손인 양 잘 알고 있었다. 지금 리디아의 보드라운 손가락이 수줍게 그의 고수머리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리디아의 말은 어린아이처럼 조심스러웠으나 그것은 사랑이었다. 
감사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는 그는 얼굴을 리디아의 손바닥에 대고 비비며 목덜미와 
뺨으로 그녀를 느꼈다.
  리디아가 말했다.
  "이제 갈 때가 됐어요."
  그는 고개를 들어 애정어린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며 손가락에 가만가만 입을 
맞추었다.
  "제발, 일어나요. 돌아가야 해요."
  그는 그녀의 말을 따랐다.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말에 올라탔다. 
  골드문트의 가슴에는 행복이 물결치고 있었다. 리디아는 얼마나 아름다우며 또 
얼마나 어린아이같이 순진하고 부드러운가! 아직 한 번도 리디아와 키스한 적은 
없었지만 그의 마음은 리디아로 가득 충만되어 있었다. 두 사람은 질풍같이 달렸다. 
저택 입구 근처에 와서야 비로소 리디아는 깜짝 놀라서 말했다.
  "둘이 함께 들어가서는 안 돼요. 참 어리석었어요!"
  그리고 그들이 말에서 내리고 마부가 달려나오는 아슬아슬한 순간이 되어서야 
리디아는 얼른 그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당신, 어젯밤에 그 여자한테 갔는지 안 갔는지 말해요!"
  그는 몇 번이나 고개를 저으면서 안장을 풀기 시작했다.
  오후에 아버지가 외출하자마자 리디아는 그의 서재에 나타났다.
  "정말이에요?"
  리디아는 정열적인 어조로 재빨리 물었다. 그 말의 뜻은 그는 이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추잡한 짓을 해서 그 여자를 홀딱 반하게 했어요?"
  "사실은 당신한테 반했던 거예요."
  그가 말했다.
  "그 여자의 발보다 당신의 발을 간절히 더 만지고 싶었오. 하지만 당신의 발은 
테이블 밑에서 한 번도 나한테 오지 않았고 또 당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어 주지도 
않았어요."
  "골드문트, 정말 내가 좋아요?"
  "물론이오."
  "하지만,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거죠?"
  "모르겠소, 리디아.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고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오. 어떻게 된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있소. 당신의 모습을 보고,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당신의 손이 나의 머리를 만져 줄 때 나는 행복하오. 키스를 
하게 되면 기쁠 거요."
  "약혼자한테만 키스할 수 있어요, 골드문트. 그렇게 생각지 않나요?"
  "그런 걸 생각해 본 적은 없소. 당신이 내 약혼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당신도 잘 
알고 있을  거 아니오?"
  "그래요. 당신이 내 남편이 될 수도 없고 항상 내 옆에만 있을 수도 없기 때문에 
나에게 사랑 이야기를 하는 것이 옳다고 할 수 없어요. 당신은 나를 유혹할 수 있다고 
믿었나요?"
  "나는 그런 걸 믿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생각해 본 적도 없소. 리디아, 나는 
당신이 키스를 받고 싶다는.... 우리는 너무 이야기가 많군요. 사랑하는 사람은 이런 
짓을 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나를 좋아하지 않죠?"
  "오늘 아침에 당신은 반대의 말을 했어요."
  "그리고 당신은 반대의 행동을 했구요."
  "내가? 그것은 무슨 뜻이죠?"
  "처음에 당신은 내가 오는 것을 보자 나를 피해 달아났소. 그래서 나는 당신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지. 그 다음에 당신은 울고 말았소. 이것 또한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소. 또 내가 당신의 무릎 위에 머리를 비볐을 때 당신은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는데, 나는 그것이 사랑이라고 믿었소. 그런데 그것이 이젠 아무 
의미도 없단 말이오?"
  "나는 어젯밤 당신이 발을 만진 여자하고는 달라요. 당신은 벌써 그런 여자한테 
익숙해 있는 것 같아요."
  "그렇지 않아요. 당신은 그 여자보다 훨씬 아름답습니다."
  "나는 그런 걸 말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나한테도 거울은 있어요."
  "리디아, 당신은 당신의 이마를 거울에 비추어 본 적이 있기나 한가요? 그리고 
어깨를, 손톱을, 무릎을. 그 모든 것들이 서로 잘 어울려서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는지 알고나 있나요?"
  "어쩌면 그런 말을! 당신 속셈을 알 것 같아요. 당신은 바람둥이여서 나한테 
허영심을 불어넣으려 하는 거예요."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절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당시한테 허영심을 일깨울 필요가 
있겠어요? 당신은 아름다워요. 나는 거기에 대해 감사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겁니다. 당신은 억지로 그 말을 하도록 하지만 나는 말을 하는 것보다 몇 배나 더 잘 
내 마음을 나타낼 수가 있어요! 말로는 서로에게 아무것도 배워 줄 수가 없어요."
  "도대체 당신한테서 뭘 배우라는 거죠?"
  "리디아, 나는 당신한테서, 당신은 나한테서 서로 배우는 거요. 하지만 당신은 그걸 
원하고 있지 않아요. 당신은 당신을 신부로 맞아들이려고 하는 사람만을 사랑하려고 
하니까. 하지만 그 사람은 당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 심지어 키스조차 할 줄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되면 웃을 거요."
  "그래요? 그렇다면 당신은 나한테 키스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려는 거군요? 학사님."
  그는 리디아에게 빙긋이 웃어 보였다. 리디아의 말은 그의 기분을 상하게 했지만 
그녀의 얼마간 과격하면서 진심이 아닌 영리한 말솜씨 뒤에는 소녀다운 정욕에 휩싸여 
몸을 떨면서 그것을 거역해 나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리디아에게 싱긋 웃어 주며 그녀의 불안한 
시선을 자신의 시선으로 감싸안았다. 리디아가 저항을 하면서도 긴장이 풀릴 때 그는 
서서히 리디아의 얼굴에 그의 얼굴을 갖다대었다. 드디어 입술이 맞부딪쳤다. 그는 
가만히 리다아의 입술을 스쳤다. 리다아의 입술은 어린아이의 키스처럼 가볍게 
응답했으나 그가 놓아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놀라면서도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그 입술을 살며시 열었다. 그는 부드럽게 사랑을 구하면서 여자의 입술이 
다시 그에게로 돌아올 때까지 쫓아갔다. 그리하여 별다른 어려움없이 키스를 주고 
받는 방법을 가르쳤다. 마침내 리디아는 힘없이 그의 어깨에다 얼굴을 파묻었다. 그는 
가만히 그녀를 내버려 둔 채 짙은 금발의 냄새를 맡으면서 부드러운 음성으로 그녀의 
귀에다 속삭였다. 그리고 그 순간, 그가 아직 아무것도 모르던 학생 시절에 집시 여인 
리제를 통해 그 비밀을 깨달았던 일이 떠올랐다. 리제의 머리카락은 얼마나 까맣고, 그 
살결은 얼마나 매끄러웠던가! 햇볕은 내리쬐고 시든 고추나물은 또 얼마나 향기를 
풍겼던가! 그것은 벌써 얼마나 아득한 옛날 일이고 얼마나 멀리에서 반짝여 온 
것이었을까! 이다지도 빨리, 꽃도 피기 전에 온갖 것들은 시들고 마는 것이었다!
  리디아는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나 그 표정은 조금과 사뭇 달랐다. 리디아의 
열망하는 듯한 커다란 눈이 그를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가게 해줘요, 골드문트 너무 오래 당신 곁에 있었어요. 아, 사랑하는 내 사람!"
  그들은 매일 비밀의 시간을 찾아내었고 골드문트는 사랑하는 여인의 사랑의 노예가 
되어 버렸다. 처녀의 사랑은 그로 하여금 신비로운 행복에 잠기도록 했고 그를 
감동시켰다. 리디아는 거의 한 시간 동안이나 그의 두 손을 붙들고 그의 눈을 
쳐다보기만 하다가 어린아이처럼 살짝 입을 맞추고는 자리를 뜨곤 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때는 완전히 긴장을 풀고 싫증이 날 정도로 키스를 하지만 몸을 만지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다. 또 언제는 수줍어하면서 그를 기쁘게 해줄 생각으로 유방을 보여 
주기도 했는데 그가 거기에다 키스를 하자 리디아는 목까지 새빨개지며 조심스럽게 옷 
속으로 감추었다. 그들의 대화는 처음과는 완전히 다르게 진행되어 스스로 그 방법을 
터득해 갔다. 리디아는 자신의 유년 시절의 꿈과 유희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했으며 또 
그가 리디아와 결혼할 수 없기 때문에 두 사람의 사랑은 참다운 사랑이 아니라는 말도 
자주 했다. 그런 이야기를 할 때면 그녀는 슬픔에 잠겼고 그들의 사랑은 슬픔의 
배일로 장식되어갔다.
  골드문트는 처음으로 한 여자에게 단순한 욕정만이 아닌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어느 날 리디아는 말했다.
  "당신은 정말 아름답고 명랑해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당신의 두 눈 
속에는 슬픔만이 가득 차 있어요. 마치 이 세상에는 행복 같은 것은 존재하지도 않고, 
아름다운 것도 사랑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 곁에 오랫동안 있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아요. 당신의 눈처럼 아름다운 눈은 없겠지만 당신의 눈만큼 
슬픈 눈도 없을 거예요. 그것은 당신이 고향을 가지지  않는 탓인가 봐요. 당신은 
숲에서 나와 나한테 왔어요. 그리고 언젠가는 다시 이끼 위에서 잠자는 방랑을 
계속하겠죠. 하지만 나의 고향은 어디에 있는 걸까요? 당신이 떠나더라도 나는 
아버지와 함께 동생과 함께 방에 앉아 당신을 생각할 수 있는 창문을 가질 테지만, 
절대로 고향은 가질 수 없을 거예요."
  그는 리디아의 이야기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가끔씩 미소나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는 말로써 위안을 주지 않고 단지 가슴에다 여자의 머리를 안고, 어린아이를 달래는 
엄마처럼 아무 뜻도 없는 소리를 나직이 읊조렸을 뿐이었다.
리디아가 말했다.
  "골드문트, 당신이 어떻게 될지 나는 알고 싶어요. 나는 그런 생각을 자주 해요. 
정상적인 편안한 생활은 하지 않겠지요? 아, 당신이 제발 행복하게 지내시기를! 
당신은 틀림없이 시인이 될 거라고, 환상과 꿈을 가지고 그것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시인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할 때도 있어요. 아, 당신은 온 세상을 헤매 다닐 
테지요. 그리고 모든 여자가 당신을 사랑할 거예요. 그래도 당신은 외로울 거예요. 
차라리 수도원의 친구들한테 돌아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당신이 늘 말씀하시는 
친구한테로! 나는 당신이 쓸쓸히 숲속에서 죽어가지 않도록 당신을 위해 기도드릴 
거예요."
  리디아는 이런 진지한 말을 하다가도 이내 큰 소리로 웃으면서 농담을 하거나 그와 
함께 늦가을의 들판으로 말을 몰고 나가 그에게 재미있는 수수께끼를 내며 시든 잎과 
윤기나는 도토리를 그에게 집어던지곤 했다
  골드문트의 마음은 하염없는 슬픔으로, 넘치는 사랑으로 혼란스러웠다. 겨울 바람이 
지붕을 흔들며 다가왔다.
  잠들기 전에 오랜 시간을 그런 감정에 휩싸이는 것이 벌써 습관이 되어 있었다. 
매일 밤의 습관대로 그는 나지막한 소리로 마리아의 노래를 불렀다.

  당신은 정녕 아름다워라, 마리아여
  더러운 흔적은 가슴속에 없어라
  당신은 정녕 이스라엘 땅의 기쁨,
  죄 많은 자들의 어머니여라!

  노래는 그의 영혼의 한가운데로 가라앉았다. 밖에서는 바람이 불화와 방랑의 노래를, 
숲의 노래를, 가을의 노래를, 유랑자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는 리디아와 
나르치스를, 어머니를 생각했다. 그의 가슴은 불안으로 답답해 졌다.
  그때 방문이 열리고 어둠 속에 하얀 잠옷을 입은 모습이 나타났다. 리디아가 
소리없이 맨발로 걸어와서 가만히 문을 닫고 그의 침대에 앉았다.
  "리디아 나의 사슴, 나의 하얀 꽃, 리디아, 어쩐 일이지?"
  "당신한테 왔죠. 골트헤르츠, 나의 골드문트가 침대에서 자는 모습을 보려구요. 내 
황금의 심장."
  리디아는 그의 곁에서 바싹 다가와서는 가슴을 두근거리며 가만히 드러누웠다. 그가 
마음대로 키스하는 것도 막지 않았으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그의 두 손이 
리디아의 몸을 마음껏 애무하는 것도 막지 않았으나 그 이상은 허락하지 않았다. 잠시 
후 그녀는 그의 두 눈을 부드럽게 뿌리치고 그의 눈에 키스한 다음 조용히 사라졌다. 
문이 덜커덩 소리를 내고 처마가 바람을 받아 가볍게 흔들리는 소리를 냈다. 모든 
것이 마법에 걸린 듯 비밀과 불안과 약속과 위험에 가득 차 있었다. 골드문트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불안에 싸인 채 잠이 들었다가 깨어 보니 베개는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며칠 후 그녀는 감미롭고 흰 유령처럼 나타나서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그의 옆에 
드러누웠다. 그의 팔에 안기어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이야기할 것이, 호소할 것이 
너무나 많다고. 그는 다정하게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서 그의 왼팔에 위에 
눕히고 오른손으로는 그녀의 무릎을 만지작거렸다.
  "골드문트."
  리디아는 그의 볼에 입술을 대고 소리를 낮춰 말했다.
  "이제 두 번 다시 당신하고 같이 있을 수 없게 되어 무척 슬퍼요. 우리들의 아늑한 
행복과 비밀은 이제 더 이상 계속 될 수 없어요. 율리에가 의심을 하고 있어요. 얼마 
안 가서 나한테 고백하라고 강요할 거예요. 그렇지 않다면 아버지가 눈치챌지도 
모르구요. 당신 침대에 드러누워 있는 사실이 발각되면 나의 사랑과 당신의 리디아는 
혼날 거예요. 두 눈은 눈물로 부어오르고,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목이 나무에 매달려 
바람에 나부끼는 걸 보게 될 테죠. 아, 당신, 차리라 달아나요. 차라리 지금 빨리 
달아나요. 아버지가 당신을 묶고 목을 매달지 않게. 전에도 그런 것을 보았어요. 
도둑이었지요. 당신이 그런 모습이 되는 것은 도저히 볼 수 없어요. 이봐요, 차라리 
달아나 나를 잊어요. 당신이 죽지 않도록. 당신의 파란눈이 새들이 쪼지 않도록! 아니, 
아니, 그리운 님. 가서는 안돼요.... 아, 당신이 나를 버려 두고 가면 나 어쩌면 
좋아요."
  "리디아, 나하고 함께 도망치지 않겠어? 세상은 넓으니까!"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리디아는 탄식했다.
  "당신하고 같이 온 세상을 돌아다닌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어요. 숲속에서 잠을 자거나, 천사가 되거나, 지푸라기를 머리카락에 붙게 하는 그런 
짓은 못해요. 아버지께 수치를 줄 수는 없어요.... 아니, 그런 말은 그만해요. 공상이 
아니에요. 난 할 수 없어요! 난 더러운 쟁반에 든 것을 먹지도 못하거니와 문둥병 
환자의 침대에서 잠잘 수도 없어요. 아, 우리한테는 좋은 것은 아름다운 것은 모두다 
금지되어 있어요. 우리 두 사람은 고통만을 받기 위해 태어났어요. 가엾은 내 사랑! 
결국 나는 당신의 비참한 모습을 봐야만 할 거예요. 그리고 나는 감금되어서 
수도원으로 보내지게 될 테지요. 이봐요, 나한테서 떠나 집시나 농부의 아낙 곁에서 
주무세요. 네? 아, 가요, 가요! 잡혀서 매달리기 전에 가요! 우리는 절대 행복하지 
못할 거예요, 결코!"
  그는 살며시 리디아의 무릎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그녀의 음부를 부드럽게 
만지면서 부탁했다.
  "나의 꽃봉오리여!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어요. 왜 안되겠소?"
  리디아는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그의 손을 가볍게 뿌리치면서 살짝 비켜났다.
  "안 돼, 안 돼요. 그런 일은 허락할 수는 없어요. 당신 같은 집시는 아마 모를 
거예요. 그래요, 나는 나쁜 짓을 하고 있었어요. 나는 나쁜 계집애예요. 온 집안에 
불명예를 가져왔어요. 하지만 마음속 어느 한 구석에는 지키고 싶은 것이 있어요. 
거기는 아무도 들어와서는 안 돼요. 그걸 인정해 주어야만 해요. 그렇지 않으면, 나는 
두 번 다시 당신 방에 들어오지 않을 거예요."
  리디아의 긍지나 소망, 암시를 그는 결코 무시하려 들지 않았다. 그 자신도 리디아가 
그를 지배하는 힘이 얼마나 강한 것인가를 알고 놀랐다. 그러면서도 그는 
고통스러웠다. 그의 관능은 진정될 길이 없었고 그의 마음은 안주하는 생활에 
저항감을 느꼈다. 그것을 탈피하려고 여러 번 시도했고 지나칠 정도로 공손하게 
율리에에게 호감을 사려고 노력했다. 율리에는 매우 기묘한 존재였다. 그녀는 
어린아이같이 순진해 보이다가도 한순간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율리에가 리디아보다 아름답다는 사실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 처녀는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그것이 얼마나 어린아이 같은 순진성과 함께 골드문트에게는 크나큰 
매력으로 느껴졌다. 그리하여 그는 율리에에게 매혹 당할 때가 많았다. 그 처녀가 
그의 관능에 대해 갖는 강한 매력 때문에 그는 욕정과 사랑의 구별을 알고는 놀라고 
했다. 처음 그는 똑같은 의미로 두 자매를 보고 율리에 쪽이 더욱 아름답고 유혹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으나 둘 다 손에 넣을 만하지만 구별 없이 그녀들의 사랑을 
구하는 동시에 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리디아가 그를 사로잡을 힘을 
획득하고 말았다. 지금 그는 그녀를 수중에 넣는 것을 단념할 만큼 리디아를 사랑하고 
있었다. 리디아의 어린애다운 순진성, 보드라운 애정, 슬퍼하기 쉬운 성향 등 모든 
것이 자기를 닮은 것 같았다. 그는 몇 번이나 그 영혼이 그녀의 육체와 상응하고 
있는가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모든 일을 할 수가 있으며 소원을 말할 
수도 비판을 가할 수도 있었다. 그녀의 말이나 정신적인 자세는 눈매나 손가락의 
생김새와 어쩌면 그렇게도 같을 수가 있단 말인가.
  골드문트는 리디아의 몸과 마음을 형성하고 있는 원형과 법칙을 발견한 순간부터, 
가끔 그 모양의 어떤 환상을 붙들고 묘사해 보려는 욕망이 싹텄다. 그는 남몰래 
깊숙이 보관하고 있었던 몇 장의 종이에다 기억을 더듬어 여자의 머리와 눈매의 선, 
손과 무릎 등을 소묘해 보려고 시도했다.
  율리에와의 관계는 어려워졌다. 율리에는 언니가 사랑의 큰 파도에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느꼈다. 율리에의 고집센 각오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관능은 호기심과 욕정에 넘쳐서 낙원으로 향했다. 율리에는 골드문트에 대하여 과장된 
냉담성과 반감을 보였지만 어떤 순간에 있어서는 경탄과 야릇한 호기심을 가지고 그를 
열중해서 바라볼 때도 있었다. 그녀는 리디아에게 매우 친절히 대했다. 때때로 
리디아의 침실로 찾아와 타는 듯한 욕정을, 금단의 비밀을 들여다보려 호흡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때는 찌를 듯한 태도로 리디아의 비밀을 알고 있으며 거기에 대해 
경멸을 나타내기도 했다. 그 아름답고 변덕스러운 처녀는 사랑을 속삭이는 리디아와 
골드문트 사이에서 하늘하늘 타오르면 자극을 주기도 하고 방해를 하기도 하며 두 
사람이 속삭임을 엿들었다. 때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처녀로 가장하기도 하고 때로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위험한 존재로 비치기도 했다. 갑자기 율리에는 어린아이라는 
존재에서 위세 있는 존재로 바뀌게 되었다. 골드문트는 식사 때 이외에는 절대로 
율리에와 얼굴을 마주치지 않아 덜했지만 리디아는 율리에의 그와 같은 태도로 인해 
괴로워했다. 골드뮨트가 율리에의 매력에 대해서 전혀 무관심하지 않다는 것은 
리디아도 눈치채고 있었다. 그의 감탄에 가득 찬 시선이 동생에게로 쏠려 있는 것을 
리디아는 자주 목격했다. 그녀는 뭐라고 말할 수도 없었고 모든 것은 매우 어렵고 
위험에 가득 차 있었다. 특히 율리에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괴롭혀서는 안 되었다. 아, 
어느 날 리디아의 사랑이 발각되어 괴로움과 불안에 찬 행복에 종말을 고하게 되면 
얼마나 무서운 벌이 내려질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골드문트는 가끔씩 왜 진작 떠나지 않았는가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했다. 지금과 
같은 생활을 계속하기는 힘들었다. 영원한 사랑도 지금까지 그에게 습관이 되어 있던 
사랑에 대한 가벼운 실현도 바랄 수 없었다. 계속되는 자극을 받고 허덕이면서 끝내 
풀릴 길 없는 충동을 안고, 1년 내내 위험 속에 몸을 드러내야 하는 것이다. 왜 
떠나지 않고 여기 이대로 머물러서 온갖 혼란과 갈피없이 뒤얽힌 감정을 참고 
살아나가야 하느냐? 그것은 정착하고 있는 사람들이나 합법적인 사람들이나 따뜻한 
방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체험과 감정일 뿐이다. 나는 그런 까다롭고 복잡한 
상태를 벗어나 그런 것들을 증오하는 욕심 없는 유랑자의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가? 그렇다, 그는 그런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고향과 같은 무엇을 여기서 
구하기 위해 참을 수 없을 만큼의 고통과 불쾌감으로써 그 값을 치른다는 것은 정말 
어리석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렇게 했고 고통을 기쁘게 받아들였으며 행복에 젖기도 
했다. 그런 식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어리석고 복잡하며 고통스런 일이었으나 경이로운 
일이기도 했다. 사랑이 주는 어둡고 아름다운 비애. 어리석음과 절망감은 놀라운 
것이었다. 잠시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생각에 잠겨 가슴을 두근대는 밤, 그런 밤은 
정말 아름다웠다. 리디아의 입술이 짓는 괴로운 표정과도 같이, 그녀가 사랑한 우수에 
대해 이야기할 때의 그 목소리의 무심한 음향과도 같이, 모든 것이 아름답고 즐거웠다. 
몇 주일 사이에 리디아의 보드라운 얼굴에 고통의 그림자가 생기더니 결국 빠져나올 
수 없는 고뇌의 늪 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이 표정을 그림으로 묘사한다는 것은 
그에게는 매우 아름답고도 중요한 일로 생각되었다. 그리고 몇 주일 동안에 그 자신도 
변하고 훨씬 성장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다지 현명한 것은 아니지만 경험을 쌓게 
되었고, 그다지 행복해지지는 않지만 마음속이 훨씬 더 성숙해지고 풍부해진 것만 
같았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소년이 아니었다.
  리디아는 부드럽지만 자신을 잃은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당신은 나 때문에 슬퍼해서는 안 돼요. 나는 당신을 즐겁게 해드리고 싶고 당신이 
행복하게 지시는 걸 보고 싶을 뿐인 걸요. 당신을 슬프게 하고 나이 불안과 슬픔을 
당신에게 건네 드린 걸 제발 용서해 주세요. 나는 밤에 참 이상한 꿈을 꾸어요. 매일 
밤 막막하고 어두운 황무지를 걸었어요. 그곳을 걸어가며 당신을 찾았지만 당신은 
없더군요. 당신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았지만 나는 자꾸만 그렇게 혼자서 
걸어다녔어요. 그러다가 눈을 떠 당신이 옆에 있는 것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얼마나 감사하고 좋아했는지 몰라요. 그러다가 당신이 머지않아 떠날 것이란 생각을 
하면.... 하지만 괜찮아요! 지금 이렇게 곁에 있으니까요."
  어느 날 아침, 일찍 잠이 깬 골드문트는 침대에 누운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꿈속이 
온갖 광경들이 서로 아무 연관성도 없이 아직 그의 주위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 
꿈속에서 어머니와 나르치스를 보았는데, 두 사람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꿈에서 벗어나자 이상한 빛이 새어들어왔다. 조그만 창으로 들어오는 빛이 오늘은 
독특했다. 그는 일어나서 창가로 달려갔다. 창틀과 마구간의 지붕, 저택의 입구와 그해 
첫눈으로 뒤덮인 푸르고 흰 풍경들이 빛을 발했다. 불안한 마음과 고즈넉한 겨울 
풍경이 이루는 조화가 그를 망연하게 만들었다. 밭과 숲, 언덕과 황무지가 태양과 
바람, 비, 눈에 쌓여서 고요히, 감동적으로, 그리고 거룩하게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그리고 단풍나무와 물푸레나무들도 아름답고 온화하게 가지 위에 내려앉은 겨울의 
짐을 조심히 떠받고 있었다. 사람들도 그들과 같을 수는 없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그는 안마당으로 나가 눈 속을 걸으며 두 손으로 눈을 움켜쥐어 보기도 하면서 
정원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그러고는 눈덮인 장미덩굴 울타리를 쳐다보았다.
  아침으로 모두들 스프를 먹으며 첫눈 이야기를 했다. 두 딸도 바깥의 풍경을 감상한 
모양이다. 올해는 첫눈이 늦게 내렸다. 벌써 크리스마스가 눈앞에 다가왔다. 기사는 
눈이 내리지 않는 남국의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골드문트로 하여금 이 겨울의 첫날을 
잊지 못하게 한 일은 밤이 이슥해서였다.
  그날 자매는 싸움을 했으나 골드문트는 그것을 몰랐다. 밤이 되어 집안이 
고요해지고 어두워졌을 때,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리디아가 그에게 와서는 그의 옆에 
조용히 드러누웠다. 그의 심장이 고동 소리를 듣고 그에게 몸을 부딪치며 머리를 그의 
가슴에 갖다대었다. 리디아는 불안스러워 보이기도 했고 슬퍼 보이기도 했다. 그녀는 
율리에의 배반을 겁내고 있었지만 골드문트에게 그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가만히 그의 가슴에 기대어 누운 채 애인이 속삭이는 사랑의 말을 들으며 그녀의 
머리를 만지는 손의 움직임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별안간--누운지 얼마 되지 않아서--리디아는 소스라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골드문트도 누군가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적지 않게 놀랐다. 
그리고 그 그림자가 침대 머리에 서서 허리를 굽혔을 때, 비로소 율리에라는 것을 
알고 그의 가슴은 일시에 죄어들었다. 율리에는 잠옷 위에 걸치고 있던 망토를 벗어서 
마룻바닥에 집어던졌다. 마치 단검이 꽂히기나 한 듯 비명을 지르며 리디아는 뒤로 
넘어지면서 골드문트에게 매달렸다.
  멸시와 조소가 섞인 말투로, 그러나 약간은 떨리는 음성으로 율리에가 말했다.
  "나 혼자 쓸쓸히 방에서 뒹굴고 싶진 않아. 나도 여기에 같이 눕고 싶어. 안 그러면 
아버지를 깨울 테야."
  "좋습니다. 자, 와요."
  골드문트가 말하면서 이불을 들쳤다.
  율리에는 침대로 올라왔다. 그는 비좁은 침대에 빈 자리를 만드는 데 진땀을 뺐다. 
리디아가 얼굴을 파묻고 드러누운 채 꼼짝도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들 셋은 함께 
누웠다. 골드문트를 가운데로 하고 두 자매가 양쪽 옆자리를 차지하고 누운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골드문트는 그런 상태를 바라고 있었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는 그의 옆구리에 와 닿는 율리에의 엉덩이를 느끼면서 불안하나 남 모르는 
희열로 몸을 떨었다.
  "언니가 그렇게도 자주 찾아드는...."
  율리에는 잠시 멈췄다가 입을 열었다.
  "당신의 침대 속이 어떻게 생겼는지 꼭 한 번은 봐야 할 것 같았어요."
  골드문트는 율리에를 진정시키기 위해 그의 뺨을 가만히 그녀의 머리에 비벼댔다. 
그리고 마치 고양이를 쓰다듬듯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엉덩이와 무릎을 어루만졌다. 
그녀는 그의 손이 가는 대로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맡겼다. 마술에 걸린 듯이 황홀하고 
경건한 감정 속에서 그녀는 조금도 반항하지 않았다. 골드문트는 그렇게 주술을 
외우는 한편 리디아에게도 마음을 쓰고 있었다. 그는 리디아의 귀에다 사랑을 
속삭이며 그녀의 얼굴을 그에게 향하도록 했다. 그는 소리나지 않게 리디아의 입술과 
눈에 키스를 하는 한편 손은 반대쪽이 동생을 꼼짝 못 하게 붙들고 있었다. 그러한 
견딜 수 없을 만큼 숨막히는 상태가 이상 야릇하게 느껴졌다. 그의 왼손이 그것을 
깨닫게 했다. 그 손이 기다리고 있는 아름다운 율리에의 손발과 익숙해지고 있을 동안, 
그는 처음으로 리디아와의 사랑이 아름답기는 하지만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만 아니라 가소롭기까지 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의 입술이 리디아에게, 
그의 손이 율리에에게 옮겨지고 있을 동안 리디아로 하여금 자신에게 몸을 맡기게 
하든가 아니면 자신이 떠나 버리든가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녀를 사랑하면서도 단념해야 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요, 정당치 못했다.
  "리디아."
  그는 리디아의 귀에다 속삭였다.
  "우린 쓸데없이 괴로워하고 있어. 지금 우리 셋이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을까! 우린 
욕망이 원하는 걸 해야 돼."
  리디아가 부들부들 떨며 몸부림을 쳤기 때문에 그의 욕망은 또 다른 한사람에게로 
옮겨갔다. 그의 손이 율리에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주었기 때문에 율리에는 떨리는 
기나긴 탄식으로써 쾌감을 표시했다.
  그 소리를 듣자 마자 마치 독약이라도 마신 듯 리디아의 가슴은 질투로 죄어들었다. 
리디아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이불을 침대에서 벗겨 던지며 장승처럼 서서 
고함쳤다.
  "율리에, 가자!"
  율리에는 온몸을 오들오들 떨었다. 셋 다 발각될지도 모를, 그 생각 없는 흥분이 
위험스럽다는 것을 깨닫고 아무 말도 없이 일어섰다. 그러나 욕망이 짓밟히고 
기만당한 골드문트는 일어나는 율리에를 재빨리 얼싸안고 양쪽 젖가슴에 번갈아 입을 
맞추며, 타는 듯이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내일예요. 율리에, 내일 또 만나요!"
  리디아는 맨발에다 잠옷 바람으로 서 있어서 추위로 발가락이 얼어붙었다. 그녀는 
율리에의 외투를 마룻바닥에서 집어들고 괴롭고도 비굴한 몸짓으로 동생의 몸에 걸쳐 
주었다. 어둠 속이었지만 동생은 그것을 알아보고 감동한 나머지 언니와 화해할 
마음이 생겼다. 자매는 방에서 소리없이 나가 버렸다. 골드문트는 모순된 감정에 
휩싸여 두 자매가 사라진 뒤의 정적 속에 묻혀 있다가 집안이 고요해졌을 때에야 
한숨을 쉬었다.
  이처럼 젊은 세 사람의 기묘하고도 부자연스런 동침이 있은 다음 골드문트는 온갖 
생각이 뒤얽힌 고독과 적막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녀들도 침대에 들어간 후 아무 말 
없이 오직 쓸쓸하게 눈만 깜박이고 있었다. 불행과 모순의 귀신이, 고독과 영혼의 
혼란이 집안 전체에 둘러싸여 있는 것만 같았다. 한밤중이 되어서야 골드문트는 겨우 
잠이 들었다. 율리에는 새벽녘이 되어서야 겨우 잠이 들었고, 리디아는 한잠도 이루지 
못한 채 뒤척이는 사이에 희미한 아침이 찾아들었다. 리디아는 얼른 일어나서 옷을 
바꾸어 입고 나무로 만든 조그만 그리스도 상 앞에 무릎을 꿇고 오래오래 기도를 
했다. 아버지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달려가서 이야기할 것이 있다고 청을 
드렸다. 율리에의 순결을 걱정하는 기분과 자신의 질투를 구별하려 들지 않은 채 
리디아는 이 사건이 종말을 맺으려는 결심을 한 것이다. 아버지에게 모든 것을 
일러바쳤을 때까지도 골드문트와 율리에는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리디아는 이 
사랑의 모험에 율리에가 관계하고 있다는 것만은 밝히지 않았다.
  골드문트가 여느 때나 다름없는 시간에 서재에 나타나자, 평소 같으면 덧신에다 
펠트 웃옷을 입고 글쓰기에 한창일 기사가 그날은 장화와 자켓 차림을 하고 칼을 차고 
있었다. 골드문트가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가를 이내 짐작했다.
  "모자를 써!"
  기사가 말했다.
  "너희들하고 같이 갈 곳이 있다."
  골드문트는 못에 걸린 모자를 벗겨들고 계단을 내려가는 주인을 따라 갔다. 
안마당을 지나서 바깥으로 나갔다. 살짝 얼어붙은 눈 위로 미끄러지는 그들의 발 
밑에서 눈이 바스락거렸고 하늘엔 아직도 아침 노을이 가시지 않았다. 기사는 아무 
말도 없이 앞장서서 걸어갔다. 젊은 친구는 따라가면서 몇 번이나 저택을, 자기 방의 
창문을, 눈이 쌓인 경사진 지붕을 되돌아보았다. 마침내 그들은 그 모든 것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저 지붕을, 저 창문을, 서재를, 두 자매를 이제 두 번 다시 보지 
못하리라. 갑작스럽게 헤어지리라는 것은 오래 전부터 예감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의 
가슴은 터질 듯 아파왔다. 이 이별은 그에게 심한 고통을 주었다.
  그들은 그렇게 한 시간이나 걸었다. 기사가 앞장 서고 젊은이가 뒤따르면서, 
골드문트는 자신이 운명에 대해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기사는 어쩌면 그를 죽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골드문트는 그렇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위험하지는 않다. 
도망치기만 한다면 기사는 단검을 휘두른다 하더라고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 
절대로 그의 생명에는 위험이 없었다. 하지만 모욕을 받고 그것으로 가득 차 있는 이 
사나이 뒤에서 이렇게 묵묵히 걸어간다는 것이, 이렇게 말도 없이 끌려간다는 것이, 
그로서는 견디기가 힘들었다. 마침내 기사가 걸음을 멈추고 섰다.
  "이제부터는 너 혼자서 가라."
  갈라진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이쪽으로 계속 가거라. 너를 길들인 유랑 생활로 인도할 것이다. 또다시 내 집 
가까이에 얼굴을 내밀었다가는 그대로 쏘아죽일 테다. 너에게 보복할 생각은 없다. 
내가 좀더 생각이 깊었어야 했어. 너같은 젊은 놈을 내 딸 곁에 두지 말았어야 했다. 
감히 다시 돌아온다면 네 생명은 끝이다. 이젠 가라! 하느님이 널 용서해 주시길!"
  기사는 버티고 서 있었다. 눈 내린 아침의 희미한 빛 속에 회색 수염에 뒤덮인 그의 
얼굴이 그것과 일부가 되어 사라진 것 같았다. 기사는 유령처럼 그렇게 서서 
골드문트가 언덕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구름이 낀 하늘에는 붉은 
햇살이 점점 힘을 잃어 보이지 않았다. 눈발이 천천히 내리기 시작했다.

         9

  골드문트는 말을 타고 이 지방을 몇 번이나 달려본 일이 있어 조금만 더 가면 그가 
알고 지내던 농가가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곳 아무데서나 잠자리를 얻을 수가 
있으리라. 그리고 그 다음날도 잠자리에 곤란을 겪지는 않으리라. 차츰 자유스러움과 
방랑의 느낌이 돌아 왔다. 얼마 동안 잊었던 감정이었다. 이렇게 얼음과 같이 쌀쌀한 
겨울날엔 타향이란 별반 고마운 것이 아니었다. 고생과 굶주림과 가난의 냄새가 
심하게 풍겨 왔다. 하지만 그 넓이와 크기와 가차없는 무자비 등이 도리어 걷잡을 수 
없이 뒤얽힌 그의 가슴에 안정과 위로의 음향을 전해 주었다.
  그는 지치도록 걸었다. 이젠 말을 탈 수 없게 되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아, 얼마나 
넓은 세계냐! 눈은 그다지 내리지 않았다. 먼 곳에서 숲 등성이와 구름이 잿빛으로 
엇갈리고 있었다. 정적이 세계의 끝까지 가로놓여 있었다. 그 가엾은 겁쟁이 리디아는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리디아가 갑자기 불쌍해 졌다. 공허한 갈대 늪 한가운데 
외로이 혼자 서서, 잎마저 떨어진 물푸레나무 밑에 앉아 쉬면서도 생각은 아련히 
리디아에게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나 너무 추워 가만히 있다가는 굳어버릴 것만 
같았으므로 서서히 힘있게 발걸음을 옮겼다. 구름 낀 해의 가냘픈 빛은 벌써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인적이라곤 없는 광막한 들판을 터벅터벅 걷고 있는 동안에 
떠오르는 생각은 아무것도 없었다. 애정이 깃든 것이든 아름다운 것이든 간에 이제는 
그에게 아무런 생각도, 감정도 가져다 주지 못했다. 몸을 따뜻하게 하고 얼른 잠자리에 
드는 것, 담비나 여우와 같이 이 차갑고도 광막한 세계를 뚫고 지나가는 것, 이런 
들판에서 얼어죽지 않도록 하는 것, 그것만이 문제였다.
  먼 곳에서 말발굽 소리가 나는 것 같아 이상하게 여기며 뒤를 돌아보았다. 추격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는 주머니에서 사냥할 때 쓰는 조그만 단검을 꺼내들고 
나무로 만든 칼집에서 반쯤 뽑았다. 말을 탄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그 기사의 
마구간에 있던 말이라는 것을 멀리서도 알 수 있었다. 말은 끈질기게 그를 쫓아왔다. 
달아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었으므로 그는 걸음을 멈추고 기다렸다. 두렵지는 
않았지만 극도의 긴장과 호기심 때문에 가슴은 심하게 고동쳤다. 순간 그의 머리를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만약 말을 타고 오는 저놈을 처치할 수가 있다면 얼마나 
형편이 좋아질 건가! 말 한 마리가 생기고, 그 다음은....' 하지만 말을 타고 온 사람은 
나이 어린 마부, 맑고 푸른 눈을 가진 얌전한 얼굴의 한 한스라는 것을 알자 그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착하고도 귀여운 그를 죽이자면 돌처럼 단단한 심장이 
필요할 거다. 그는 한스에게 정답게 인사를 하고 '한니발'이라고 부르는 말에게도 
정다운 인사를 보냈다. 말도 이내 그를 알아보았다. 그는 땀에 젖은 말의 목덜미를 
어루만져 주었다.
  "한스, 너 어딜 가려고 그러니?"
  하고 그가 물었다.
  "당신한테 왔습죠."
  그는 이를 내보이며 웃었다.
  "벌써 많이도 걸었군요! 저는 지금 꾸물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당신에게 인사나 
전하고 이것을 드리면 이제 제 일은 끝납니다."
  "누가 나에게 인사를 전하라고 했지?"
  "리디아 아가씨가요. 골드문트 학사님, 당신 덕분에 오늘은 조마조마한 하루를 
보내게 되겠군요. 이렇게 빠져나오기라도 했으니 괜찮지만요. 제가 부탁을 받고 나온 
것을 주인은 모르고 계십니다. 아시면 내 목이 날아갈 거예요. 그럼, 자 받아요!"
  그는 조그만 꾸러미를 내밀었다. 골드문트는 그것을 받았다.
  "얘, 한스! 혹시 지니고 온 빵 없나? 있으면 줘."
  "빵요? 아직 조금 남았을 겁니다."
  그는 주머니에서 까만 빵을 한 조각 꺼냈다.
  "아가씨는 무얼 하고 있지?"
  골드문트는 계속 물었다.
  "너한테 아무 부탁도 안 하던? 혹 편지 같은 것은 없나?"
  "아무것도요. 잠깐 보았을 뿐이데요. 아실 거예요. 집안 분위기는 험악하죠. 주인은 
무척 노해 있답니다. 저는 그것을 전해 드리라는 분부를 받았을 뿐인 걸요. 그 밖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전 이만 돌아가 봐야 됩니다."
  "좋아, 하지만 잠시만 기다려 줘! 한스, 사냥할 때 쓰는 그 단검 말이야. 나에게 줄 
수 없겠니? 내가 가진 것은 조그만 것뿐이라서. 늑대라도 만나게 되면.... "
  하지만 한스는 그 부탁만은 거절했다. 그는 골드문트 학사님에게 무슨 변이라도 
생긴다면 참 안 된 일이지만 단검은 줄 수 없다고 단호히 했다.
  그리곤 이별의 인사를 했다.
  두 사람은 악수를 나누고 한스는 말을 타고 가버렸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골드문트의 가슴은 야릇한 슬픔에 잠겼다. 그는 그나마 꾸러미가 남겨진 것을 
다행스럽게 여겼다. 꾸러미 안에는 회색 털실로 짠 튼튼하게 보이는 재킷이 들어 
있었다. 틀림없이 리디아가 그를 위해 손수 짠 것임에 틀림없었다. 재킷 안에는 또 
무슨 딱딱한 것이 잘 싸여서 들어 있었다. 한 조각의 햄이었는데 햄 가운데에는 
조그맣게 자른 자국이 있었고, 그 속에는 빛나는 금화 한 닢이 들어 있었다. 편지는 
없었다. 골드문트는 리디아의 선물을 손에 들고 허공을 달리는 마음으로 눈 속에 
멍하니 서 있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 웃옷을 벗고 재킷을 갈아입었는데, 따뜻한 게 
기분이 좋았다. 그 위에 얼른 웃옷을 껴입고 제일 안전한 주머니에다 금화를 숨기고는 
가죽끈을 맨 다음 들판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이제 좀 쉬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발은 
아프고 피곤했으며 온몸이 무거웠지만 농부의 집에는 가고 싶지 않았다. 그곳에 가면 
따뜻하게 몸을 녹일 수 있고 우유도 얻어먹을 수 있을 테지만 가기가 싫었다. 
너절하게 늘어놓고 꼬치꼬치 캐묻는 것에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그는 곳간에서 
하룻밤을 새우고 이른 아침 찬서리와 매서운 바람을 받으며 추위에 쫓기듯 걸어갔다. 
그는 밤마다 기사나 혹은 그 기사가 지녔던 칼이나 두 자매의 꿈을 꾸었다. 날마다 
외로움과 침울한 여신이 그의 가슴을 누르고 놓아주기 않았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밤, 그는 한 마을에 이르러 잠자리를 구했다. 그곳은 가난한 
농부 집이었는데 빵은 없고 그 대신 옥수수 스프가 나왔다. 새로운 체험이 이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집 안주인이 밤중에 애기를 낳은 것이다. 골드문트도 그 
자리에 있었다. 짚단에서 쉬고 있는데 농부가 도움을 청하러 왔고, 그는 산파 옆에서 
등잔을 비춰주었다. 생전 처음으로 그는 해산하는 광경을 보았다. 놀라움과 불타는 
시선으로 산모의 얼굴을 보고 뜻밖에 하나의 새로운 체험을 얻었다. 그리고 그는 그 
얼굴에서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진통의 비명을 지르며 고통 속으로 나자빠진 
여인의 얼굴을 불빛에서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예기치 않던 무엇이 그의 눈에 띄었다. 
울부짖는 여인의 표정은 사랑의 절정에 다다른 여인의 얼굴에 비친 표정과 다를 것이 
없었다. 얼굴에 나타난 커다란 고통의 표정은 크나큰 쾌락의 표정보다 물론 격하기도 
했고 훨씬 더 흉해 보였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다를 바가 없었다. 오만상을 
찌푸리다가 잠잠해지는 점도, 이글이글 타오르다가 사그라지는 점도 같았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지만 고통과 쾌락이 형제같이 닮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그는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를 놀라움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또 다른 무엇을 이 마을에서 체험했다. 해산한 밤이 지나고 이튿날 아침, 그가 
발견한 이웃집 아낙이 유혹하는 그의 눈짓에 금세 응했기 때문에, 그 마을에서 하룻밤 
더 쉬어서 그 아낙을 대단히 즐겁게 해주었다. 최근 몇 주일 동안 어지간히 몸과 
마음이 자극을 받은 터라 오래간만에 그의 정욕은 겨우 안정을 얻었다. 이렇게 
머무르고 있는 동안에 그는 새로운 체험을 얻게 된 것이다.
  이틀째 되는 날, 빅토르라는 키가 크고 염치도 어지간히 좋은 한 친구를 같은 
마을에서 만났다. 언뜻 보면 신부 같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부랑자 같기도 한 그는 
어디서 주워 모은 것 같은 라틴 어로 그에게 인사를 걸어왔다. 학교 다닐 나이는 벌써 
지났지만 유랑 학생이라고 떠들어대면서.
  뾰족한 턱에 수염이 난 이 사내는 일종의 성실성을 보이기도 하고 방랑자의 익살을 
섞어 가며 골드문트에게 재빠르게 접근해왔다. 골드문트가, 대체 어느 학교 
학생이었으며 여행의 목적지는 어디냐고 물어 보자, 이 별난 친구는 연설조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맹세코 말하거니와, 이 사람은 여러 대학에서 수학하고 쾰른이나 파리에서도 
수학한 일이 있었다구. 그리고 또 라이덴의 학위 논문 중에서 내가 작성한 '간장의 
형이상학' 보다 충실한 내용으로 언급된 것은 없을 겁니다. 친구여, 그 이후 불쌍한 이 
사람은 견딜 수 없는 배고픔과 괴로운 마음으로 독일 제국을 헤매다닌다오. 이 사람은 
농부의 눈물을 흘리는 자라 불리기도 하며, 젊은 아낙네들한테 라틴 어를 가르치고 
요술을 부려서 밥을 얻어먹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있다오. 이 사람의 목표는 시장 
부인의 침대이며, 까마귀 밥이 되지 않는다면 대승정의 나른한 직무에 내 몸을 바치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에 이를 테지. 젊은 친구여! 손을 놀려 입에 풀칠을 하며 
하루하루를 산다는 것은 그 밖의 다른 생활보다는 나은 것이라네. 결론으로 토끼 
불고기만큼 이 사람의 불쌍한 위 속을 흐뭇하게 해준 것은 없었다오. 보헤미아 신은 
이 사람의 형제라네. 우리 모두의 아버지는 이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를 길러 주고 
있지요. 하지만 그것을 완성하는 것은 이 사람 자신에 맡겨져 있는 것이라오. 
그저께도 우리들의 아버지는 무정하게 이 사람을 학대하여 주린 배를 움켜쥐고 있는 
늑대의 생명을 구해 주려고 하였다오. 만약 이 사람이 그놈의 짐승을 때려 죽이지 
못했던들 그대는 이 사람과 만나게 될 영광을 입지 못했을 것이오. 영원한 아멘을." 
이런 종류의 자포 자기적인 익살과 유랑자의 라틴 어에 아직 익숙하지 못한 
골드문트는, 망나니 같은 덥수룩한 모습과 유쾌하지 못한 웃음소리에 얼마간 겁을 
집어먹기는 했지만 유랑자의 어딘가가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설득을 당해서 같이 
여행에 동참하게 되었다. 늑대를 때려죽였다는 이야기가 농담이든 아니든, 둘이 있는 
것이 마음 든든하고 무섭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출발하기 전에 빅토르는 그의 
라틴 어로 농부와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해서 어느 소작농의 집에서 하룻밤 더 묵기로 
했다. 그런데 빅토르는 골드문트가 지금까지 나그네길에 오를 때마다 농부의 집이나 
마을에서 손님으로 대접받을 때와는 전혀 다른 행동을 했다. 그는 이 농가에서 저 
농가로 기웃거리며 아무 아낙네나 붙들고 지껄이다가는 마구간이나 부엌 등 닥치는 
대로 들어가서 어느 집에서나 그에게 무엇인가를 주기 전에는 그곳을 떠나지 않을 
작정인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농부들에게 이탈리아의 전쟁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부뚜막 옆에서 전투의 노래를 불러 주기도 했으며, 할머니들에게는 
관절염이나 치통에 잘 듣는 약을 권하기도 했다. 그는 무엇이든지 알고 있었고 
어디든지 안 가본 데가 없는 것 같았다. 그는 빵조각이나 호두, 배 쪼갠 것을 잔뜩 
얻어 가지고 바지춤에 처넣었다. 그가 방랑하는 것에 싫증도 내지 않고 사람들을 놀래 
주기도 하고, 환심을 사기도 하고, 잘난 체 뽐내다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기도 하고, 
라틴어 부스러기를 주워모아서는 학자 행세를 하고, 엉터리 같은 도둑의 암호로 
탄복을 시키기도 하고, 쉴새 없이 이야기하거나 학자 행세를 하는 중에도 날카롭고 
빈틈없는 눈으로 각자의 얼굴과 열려져 있는 책상서랍들, 열쇠나 빵 덩어리를 
눈여겨보는 것을 골드문트는 어이없이 지켜보고만 있었다. 교활하면서도 어디 하나 
빈틈없는 유랑자로 온갖 것을 보고 체험하고 굶주림에 허덕일 때도, 전신이 꽁꽁 언 
때도 자주 있고 위험에 악착같이 몸을 들이밀고 인색하게 살기 위한 고투를 거듭해 
왔기 때문에 영리해지고 당돌해진 사나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기나긴 세월 동안 
유랑생활을 한 자는 이렇게 되는 것이다. 언젠가는 이런 사나이와 같이 될 것이란 
말이다!
  이튿날 두 사람은 출발했다. 골드문트는 처음으로 두 사람이 함께 하는 유랑을 
경험했다. 그들은 사흘 동안 같이 걸어갔다. 골드문트는 빅토르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유랑자에게는 세 가지 중요한 사항, 즉 생명의 위협에 대한 안전과 잠자리의 
발견과 식량의 입수에 만사를 결부시킨다는 습관이 기나긴 세월 동안 본능이 되어, 
유랑하는 사나이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겨울이든 밤이든 어떤 미미한 
징조에서도 인가가 가깝다는 것을 알거나, 숲이나 밭의 어떤 모퉁이에서도 휴식하는 
장소 혹은 잠자리로서 적당한가 어떤가를 자세히 조사하거나, 방에 들어서는 순간 
주인의 빈부의 정도, 그의 친절과 호기심과 염려의 정도를 알아내는 것, 그것은 
빅토르의 기술이 대가의 경지에 들어서고 있다는 것을 입증해 주었다. 교훈이 될 만한 
여러 가지를 그는 젊은 친구에게 들려주었다.
  어느 날 골드문트가 빅토르에게 자기는 그런 빈틈없는 준비 태세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가까이 가고 싶지는 않다, 자기는 그런 기술을 조금도 알지 못하거니와 
자기가 겸손하게 부탁을 하면 손님으로서 대접받는 것을 거절당한 일은 극히 
드물었다고 말하자, 키다리 빅토르는 웃으면서 악의 없이 말했다.
  "그거야, 골드문트 너라면 잘돼 나갈 테지. 너는 앳되고 예쁘고 순진해 보여. 그게 
너의 훌륭한 숙박권인 셈이야. 여자들은 널 밉지 않게 보고, 남자들은 이놈은 악의가 
없다.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는 않을 거다, 하고 생각할 테지. 하지만 생각해 봐. 
인간은 나이를 먹는 법이야. 어린아이의 얼굴에 수염이 나고 주름이 잡히지. 바지에는 
구멍이 뚫려. 생각지도 않은 사이에 밉살맞고 환영받지 못하는 불청객이 되어가는 
거야. 젊음과 순진 대신 굶주림만이 모든 걸 대신하게 되지. 그럴 때를 생각하면 
인간은 지금대로만 있을 수 없단 말이야. 다소 세상을 알고 있지 않으면 안 돼. 안 
그러면 이내 거름더미 위에서 잠을 자거나 개에게 오줌벼락을 맞게 될 거야. 하지만 
보아하니 너는 언제까지고 떠돌아다닐 인간은 아닌 것 같다. 돌아다니는 놈치고는 
손이 너무 곱고 고수머리 또한 너무 탐스럽단 말이야. 그래서 언젠가는 좀더 편안히 
살 수 있는 구멍으로 기어들어갈 거다. 아늑하고 따스한 침실이라든가, 환경이 좋은 
훌륭한 수도원이든가, 훈훈한 서재로 말이야. 너는 차림이 말쑥한 편이야. 귀공자라고 
해도 의심하는 사람이 없을 거야."
  빅토르는 자꾸 웃으면서 골드문트의 옷을 하나하나 조사했다. 골드문트는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호주머니 속에 감추어 둔 금화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는 기사의 
저택에 잠시 머물렀다는 것과 라틴 어 문장을 쓰는 것을 도와주어서 좋은 옷을 얻어 
입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빅토르는 왜 이 추운 겨울에 그런 따스한 보금자리를 
떠났느냐고 물었다. 골드문트는 거짓말을 할 줄을 몰랐기 때문에 기사의 두 딸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두 사람 사이에 처음으로 말다툼이 벌어졌다. 빅토르는 
골드문트에게 그런 좋은 기회를 놓치다니, 멍청이 같은 인간이라며 이제는 그 잘못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골드문트에게 둘이서 산성을 찾아가, 골드문트는 
물론 얼굴을 보여서는 안 되지만 리디아에게 보내는 편지를 빅토르 자신이 가지고 
가서 돈이나 재물을 반드시 손에 넣겠다고 했다. 골드문트는 빅토르의 이러한 
이야기에 반대했고, 나중에는 화를 내며 그의 이야기를 들은 체도 안 하고 기사의 
이름이나 그곳으로 가는 길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빅토르는 그가 화가 잔뜩 난 것을 보자 능글맞게 웃으면서 악의는 없었다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이봐, 그렇게 신경쓸 것 없어. 난 그저 자네가 훌륭한 미끼를 놓쳐 버렸다는 것을 
말한 것뿐이야. 하지만 자네는 친구의 호의를 받아들이는 데에 너무 인색하군 어쨌든 
너는 싫단 말이지? 훌륭한 신사처럼 말을 타고 산성으로 돌아가서 그 아가씨와 결혼할 
수도 있을 텐데.... 젊은이, 자네는 왜 그다지도 귀하신 바보 같은 머리만 가지고 있지? 
할 수 없군. 어쨌든 발가락이 얼어붙을 때까지 함께 걸어가자구."
  저녁때까지 골드문트는 화난 얼굴을 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은 
인가도 사람의 발자국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빅토르가 전나무 가지를 잔뜩 
쌓아올려서 잠자리를 만들어 준 것을 고맙게 여겼다. 그들은 빅토르의 두둑한 
주머니에서 빵과 치즈를 꺼내어 먹었다. 골드문트는 화낸 것을 미안해하며 리디아가 
보내준 재킷을 벗어서 빅토르에게 입고 자게 했으며, 또 교대로 짐승이 오는지 파수를 
보기로 정하고 자신이 먼저 보초를 서겠다고 자청했다.
  골드문트는 오랫동안 소나무 줄기에 기댄 채 친구의 단잠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잠자코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 몸이 너무 차가워져 그는 주위를 왔다갔다하며 몸을 
풀었다. 그가 걷는 범위는 점차 넓어져갔다. 그는 전나무 가지 끝에 걸린 희멀건 
하늘을 보며 겨울 밤의 깊은 정적이 장엄하면서도 두렵게 느껴졌다. 그의 뜨거운 
심장만이 메아리 없는 차가운 정적 속에서 고동치고 있었다. 그는 발소리를 조심스레 
죽이면서 잠들어 있는 친구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어느 때보다도 더 강하게 
유랑자의 애환이 가슴 깊이 느껴져왔다. 이 무지한 공포에서 그의 몸을 지킬 만한 
성벽도 집도 수도원의 벽도 이제는 없었다. 알지 못할 사람들 사이에 오직 홀로, 
냉혹하고 조소적이기까지 한 짐승들과 함께 변함없이 서 있는 나무 사이를 걸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유랑자의 심정, 집이 없다는 생각이 여느 때보다도 더 강하게 
골드문트의 마음을 옥죄었다.
  나는 결코 빅토르처럼 되지 않을 것이다. 한평생 방랑을 계속하다 하더라도, 하고 
그는 생각했다. 이 공포에 저항하려고 도둑 같은 교활함과 호들갑스럽고 밉살맞은 
행동과 저 허풍선이의 자포 자기적인 익살을 배울 수는 없었다. 또 그는 영원한 
방랑자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언젠가는 집을 구할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지금은 집이 없다. 진정 안전하게 보호받지도 못한다. 결국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는 하나의 아름다운 수수께끼인 것이다. 이상한 힘을 가진 풀 수 없는 
수수께끼. 그리하여 그는 드디어 침묵에 귀를 기울이고 뛰노는 심장을 누르면서 
자신의 덧없음과 허약함을 자꾸 느끼게 되었다. 몇 개의 별이 머리 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저 멀리서 구름이 움직이는 것 같았으나 바람은 불지 않았다.
  밤이 이슥한 후에야 빅토르는 눈을 뜨고--골드문트는 그를 깨우고 싶지 
않았다.--골드문트를 불렀다.
  "이리 와."
  그는 소리쳤다.
  "이번엔 네가 잘 차례야. 좀 자지 않으면 내일은 망치고 말 거야."
  골드문트는 그가 시키는 대로 잠자리에 누워 눈을 감았다. 몸은 몹시 고단했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여러 가지 생각으로 그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무언지 확실히는 알 
수 없지만 친구에 대한 어떤 불안한 의혹이 그를 잠들지 못하게 했다. 그는 자기가 왜 
리디아의 이야기를 이 악당에게 얘기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친구에게, 
아니 자기 자신에게 화를 냈다. 그리고 이 친구와 떨어지는 제일 좋은 방법과 기회를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다가 그는 잠이 들었다. 얼마가 지났을까, 빅토르의 두 손이 그의 몸을 더듬으며 
여기저기 뒤지고 있는 것을 느끼고 그는 깜짝 놀랐다. 그의 한쪽 호주머니에는 칼이 
다른 쪽에는 금화가 들어 있었다. 빅토르가 그것을 눈치채면 틀림없이 둘 다 훔쳐갈 
것이다. 그는 일부러 깊이 잠든 척하며 몸을 뒤척이다가  빅토르의 팔을 눌렀다. 
빅토르는 살며시 손을 빼냈다. 골드문트는 마음속으로 내일은 헤어져야겠다고 결심을 
했다.
  그런데 다시 한 시간쯤 지났을 빅토르가 다시 그의 몸을 뒤지기 시작하자 
골드문트는 너무 화가 난 나머지 꼼짝도 하지 않고 눈을 뜨고 비웃는 어조로 말했다.
  "비켜, 아무리 뒤져도 훔칠 건 아무것도 없으니."
  골드문트의 소리에 깜짝 놀란 빅토르의 손이 그의 목을 졸랐다. 골드문트가 
저항하며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그는 그의 가슴 위에 올라앉아서 그의 목을 힘껏 
졸랐다. 숨을 쉴 수 없게 된 골드문트는 혼신의 힘으로 버둥거리며 갑자기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그는 가까스로 손을 호주머니 속에 집어 넣어 칼을 뽑아 들고 
빅토르를 연이어서 찔렀다. 잠시 후에 빅토르의 두 손이 느슨해지고 그는 숨을 쉴 
수가 있었다. 골드문트는 깊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몸을 일으켜 세우려고 
하자 길쭉한 빅토르의 몸이 무섭게 앓는 소리를 내면서 맥없이 털썩 그의 몸 위에 
넘어졌다. 피가 골드문트의 얼굴 위로 흘러내렸다. 그는 간신히 일어날 수 있었다. 
빅토르는 피투성이였다. 그가 일으켜 세우려 했으나 빅토르의 몸은 마치 자루처럼 
나동그라졌다. 그의 가슴과 목에서는 자꾸 피가 흘러내렸고, 입에서는 점점 약해져가는 
숨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나는 사람을 죽이고 말았구나.'
  죽어가는 그의 곁에서 무릎을 꿇고 그 얼굴에 죽음의 빛이 번져가는 것을 보며 
계속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성모 마리아여! 저는 지금 사람을 죽였습니다.'
  갑자기 그는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참을 수 없어졌다. 그는 칼을 집어들고 리디아가 
손수 짜서 보낸--그것은 빅토르가 입고 있었다--재킷에다 피를 닦고 호주머니에다 
쑤셔 넣었다. 그리고 재빨리 일어나 그곳에서 달아났다.
  이 유랑자의 죽음은 그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날이 새자 그는 몸을 
덜덜 떨며 빅토르가 흘린 피를 눈으로 깨끗하게 닦아냈다. 그리고 하루 종일 불안 
속에서 정처 없이 헤매었다. 그의 마음을 가라앉게 하고, 희한과 두려움을 잊게 해준 
것은 굶주림, 그것이었다.
  눈 덮인 황무지를 헤매며 살 곳도, 잘 곳도, 먹을 것도, 잠조차도 제대로 이룰 수 
없게 되자 그는 마침내 절망적인 생각에 광포하게 변했다. 굶주림이 그의 온몸에서 
야수처럼 울부짖고 있었다. 몇 번이나 지친 몸을 들판 한가운데 누이고 두 눈을 
감고는 이제는 끝장이다, 잠자고 싶다, 눈속에서 죽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굶주림은 그에게 조금도 포기하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는 살겠다는 욕망만으로 그저 
미친 듯이 달렸다. 극도의 절망 속에 이성은 사라지고 생명을 구하려는 힘과 광포한 
욕망과 야성의 힘만이 솟았다. 눈이 쌓여 있는 두송나무 숲에서 얼어붙은 손으로 바짝 
마른 조그만 열매를 따서 혓바닥에 대기도 힘든 씁쓸한 것을 전나무 잎으로 싸서 
먹었다. 맛이 지독하게 아렸다. 그는 갈증을 덜기 위해 한 움큼의 눈을 집어삼켰다. 
뻣뻣해진 두 손에 입김을 불면서 언덕 위에 앉아 애타게 사방을 휘둘러 보았다. 
보이는 것은 황무지와 숲뿐이고 사람의 발자취는 어디에도 없었다. 머리 위를 몇 
마리의 까마귀가 날고 있었다. 그는 원망스레 까마귀를 쳐다보았다. 조금이라도 이 
다리에 힘이 남아 있는 동안은, 그리고 이 피가 한 방울이라도 따뜻할 동안에는 
너희들의 밥이 되지 않겠다. 그는 일어서 무서운 죽음과 싸우면서 달리고 또 달렸다. 
이 마지막 안간힘 때문에 열이 열에 타는 듯한 피로가 몰려왔다. 수많은 기괴한 
생각이 거의 마음을 사로 잡아 어느 때는 거의 들릴락말락, 어느 때는 큰 소리로 
혼자서 뇌까렸다. 그는 자기가 찔러 죽인 빅토르를 향하여, 그의 죽음에 커다란 예리한 
조롱의 인사를 내던졌다.
  '교활한 형제여, 너의 늑골에는 달빛이 잘 비치고 있느냐? 여우가 네 옆에서 냄새를 
맡고 있지는 않느냐? 너는 늑대를 죽였다지? 그놈의 목을 물어뜯었나? 안 그러면 
꼬리를 쥐어뜯었나? 너는 내 금화를 훔치려고 했지? 욕심 많은 돼지 같은 자식! 
하지만 이 귀여운 골드문트한테는 놀랐겠지, 그렇지? 빅토르, 골드문트는 용케 네 
늑골을 찔렀다! 하지만 너는 언제나 배낭 속에 치즈며 소시지를 가지고 다녔지.'
  골드문트는 헉헉거리며 이러한 독백을 외쳤다. 그는 저 불쌍한 바보같은 한때의 
동행자를 비웃었다.
  드디어 그는 불쌍한 빅토르의 일은 잊어버렸다. 그것은 율리에가 그날 밤 그에게서 
멀어져가던 모습이 환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율리에를 향하여 사랑의 말을 
부르짖고 천한 말로 유혹하면서 애무를 하며 율리에의 육체를 요구하였다. 그의 
곁으로 끌어당겨 옷을 벗기고 비참하게 횡사하기 전의 한동안을 같이 지내고 천국으로 
가려 했다. 애원하듯이, 재촉하듯이, 율리에의 봉긋 솟아오른 젖가슴과 그 다리며 
겨드랑이 밑의 곱슬곱슬한 털과 이야기했다.
  그는 광야의 눈 속에 숨어 있는 풀밭에 넘어지기도 하고 고통으로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 생명에 타오르는 갈망에 미쳐가면서 또다른 사람을 향하여 속삭이기 
시작했다. 이제 그의 대화 상대는 나르치스였다. 그는 새로운 생각과 지혜와 농담을 
나르치스를 향하여 던졌다.
  "나르치스, 당신은 무서운가요? 몸이 떨려요? 무엇을 깨달았나요? 그렇습니다. 
선생님, 세상은 죽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울타리 밖에도 나무 그늘에도 죽음은 
기다리고 앉았습니다. 아무리 두꺼운 벽을 쌓고 있다 해도, 기숙사나 성당이나 교회라 
할지라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죽음이 창문 밖에서 당신을 노리고 있습니다. 
죽음은 웃고 있습니다. 죽음은 당신네들 모두를 잘 알고 있습니다. 한밤중에 
당신네들의 창 밖에서 죽음이 킬킬대며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을 겁니다. 찬송가를 
불러요! 제단에 정성스레 촛불을 켜 놓으십시오! 저녁 예배나 아침 미사를 드리고 
처방실에 약초를 모으고 서가에는 책을 높이 쌓아 두십시오! 당신은 단식을 하고 
계십니까? 자지도 않고 있습니까? 죽음의 사자가 손을 써서 뼈다귀만을 남기고 모든 
것을 당신에게서 빼앗아갈 겁니다. 이봐요, 나르치스! 빨리 달아나십시오. 뼈를 단단히 
붙드십시오. 뼈라도 흩어지지 않게.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사방으로 흩어집니다. 뼈를 
꽉 쥐고 있지 않으면! 불쌍한 인간의 뼈여! 아아! 불쌍한 인간의 창자여, 위여! 아아! 
가련한 두 개골 밑의 뇌수여! 모두 다 없어져 버립니다. 모든 게 전부 끝장입니다. 
나무 위에서 까마귀들이 기분 나쁜 울음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길을 잃고 헤매는 사나이는 지금 자신이 어디를 향해 달리는지, 어디에 있는지, 누워 
있는지, 서 있는지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그는 덤불 위에 쓰러지기도 하고 나무에 
부딪히기도 하면서 손으로는 쌓인 눈과 가시를 무의식적으로 쥐었다. 그러면서도 
죽음으로부터 도망치고자 하는 의지가 무엇보다도 강해서 그를 앞으로 내닫게 했다. 
마침내 그가 정신을 잃고 기절해 누워 있던 곳은 며칠 전 유랑 학생 빅토르와 만난 
곳, 밤중에 산모 옆에서 불을 들고 있었던 바로 그 조그만 마을이었다. 그는 거기에 
쓰러졌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그를 빙 둘러싸고 수군거렸으나, 그는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그때 그와 잠깐 사랑을 나누었던 여자가 그를 알아보고 그 
형색에 놀랐다. 그녀는 남편한테 욕을 얻어먹어 가며 측은한 마음에서 생명이 다하는 
그를 마구간으로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골드문트는 다시 일어나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마구간이 
온기와 잠과 그 여자가 그에게 먹여 준 양의 젖 덕분으로 정신이 돌아왔고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단지 방금 전까지 체험하고 난 모든 것이 기나긴 시간이라도 흘러간 
것처럼 뒤로 멀어지고 있었다. 빅토르와의 유랑, 전나무 밑에서의 불안에 찬 추운 
겨울잠, 잠자리 위에서의 무시무시한 싸움, 길동무의 끔찍한 죽음, 전신이 꽁꽁 
얼어붙은 채 굶주림에 허덕이며 헤매 다닌 낮과 밤, 그 모든 것이 과거가 되었고 거의 
잊어버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잊어버린 것이 아니고 극복해서 뚫고 지나온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공포는 역시 떠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과거의 일로 밀쳐내 버리려고 했으나 그 공포는 무언가 어떤 울림으로 남아 있었다.
  2년도 채 안 된 사이에 그는 방랑 생활의 온갖 즐거움과 괴로움을 구석구석까지 
맛보았다. 고독과 자유와 숲과 온갖 동물의 소리를 듣는 법과 방황하는 사람과 죽도록 
쓰디쓴 고생을, 며칠간 여름이 들판을 헤맸고 몇 주일간 숲의 손님으로 살았다. 눈 
속에서, 죽음의 불안 속에서, 죽음에 직면해서 며칠을 살았다. 그중에서도 제일 강하고 
기이하게 여긴 것은 자신이 죽음에 거스르면서, 스스로 나약함과 비참함을 잘 
알면서도 이 절망적임 죽음에 부딪혀서는 자신의 내부에서 생에 대한 아름답고 무서운 
생명의 힘이 죽음의 두려움보다 훨씬 크고 진실하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하여 이 
투쟁의 메아리가 그의 마음속에 새겨졌으며 쾌락의 몸짓이 아이를 낳고 있는 
어머니나, 죽어가는 사람들이 몸짓과 똑같다는 사실이 절실하게 통감되었다. 해산하는 
아낙네는 얼마나 울부짖었으며 얼마나 얼굴을 찌푸렸던가! 길동무 빅토르는 어떻게 
쓰러지고, 고요히, 그리고 순식간에 얼굴에 피를 흘리고 죽어갔던가! 아, 굶주림에 
허덕이던 날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자기를 둘러싸고  기웃거리던 것을 얼마나 
가까이에서 느꼈던가! 굶주림은 얼마나 큰 고통이었던가! 그리고 얼마나 추위에 떨고 
사지가 얼었던가! 그리고 이러한 모든 죽음에 반항해서 어떻게 싸웠고 죽음의 공포에 
어떤 비참한 광포를 일으켜서 저항했던가! 그에게는 이 이상이 체험은 절대 없을 것 
같았다. 이 체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상대는 나르치스 밖에 없을 것 같았다.
  마구간이 짚더미에서 겨우 제정신이 돌아왔을 때 골드문트는 금화가 없어진 것을 
알았다. 기갈에 허덕이며 무섭고 몽롱한 상태에서 비틀거리고 헤매 다닌 마지막 날에 
잃어버린 것일까? 오랫동안 그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 금화는 그에게 매우 
귀중한 것이었다. 도저히 단념해 버리고 싶지 않았다. 사실 돈은 그에게 별 대단한 
의미도 없었다. 그는 돈의 가치를 전혀 알지 못했지만 그 금화는 두 가지 이유에서 
그에게는 귀중한 것이었다. 그것은 그에게 남겨진 리디아의 유일한 선물이었다. 
재킷은 빅토아르의 시체에 감긴 채 피로 범벅이 되어 숲속에 버려졌다. 그러니까 
금화는 리디아의 유일한 기념물이었다. 무엇보다도 빅토르와 싸우고 마침내 그를 죽인 
것이 모두 그 금화 때문이었다. 지금 금화가 없어졌다면 그날 밤의 잔인한 행동은 
모든 의미와 가치를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생각한 끝에 농부의 
아내에게 이 사실을 고백했다.
  "크리스티네, 호주머니 속에 넣어 둔 금화가 없어져 버렸어."
  "그래요? 그걸 이제 알았어요?"
  그 여자의 얼굴에는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애정이 넘쳤고 또한 다정한 미소가 담겨 
있었다. 그 미소가 너무도 매혹적이어서 그는 몸이 쇠약해진 것도 잊고 한쪽 팔로 
여자의 목덜미를 휘감았다.
  "당신도 어지간히 딱한 사람이군요."
  애정 어린 여자의 말이었다.
  "그토록 영리하고 멀쩡한 사람이 무척 바보 같은 짓도 하셨군요! 아무렇게나 금화를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어요? 순진한 아기! 요 사랑스런 바보! 
당신을 짚단 위에 눕혔을 때 바로 그 금화를 내가 주었단 말예요."
  "당신이 가졌나요? 지금 어디 있지요?"
  "찾아봐요."
  여자는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한참이 지난 다음에야 금화를 꼭꼭 숨겨 꿰매 놓은 웃옷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그 여자는 어머니처럼 친절한 충고를 수없이 늘어놓았다. 그는 그녀의 
충고는 이내 잊어버렸으나 그 여자의 친절과 농사꾼 같은 얼굴에 깃든 
능청스러우면서도 선량한 미소만은 결코 잊지 않았다. 그는 그 여자에게 감사를 
표하고자 애썼다. 며칠이 지나자 그는 다시 걸을 수가 있었으므로 방랑의 길을 
떠나려고 했다. 그러자 그 여자는 며칠 내로 날씨가 따뜻해질 것이라며 골드문트가 
출발하는 것이 좋겠다고 그를 말렸다. 사실이 그러했다. 골드문트가 출발했을 때는 
습기를 머금고 있었고, 하늘에는 미풍이 귓전을 스치고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10

  다시 얼음이 녹아 냇물이 흐르고, 썩은 낙엽 아래에서 오랑캐꽃 냄새가 풍겨 
왔다. 골드문트는 또다시 변해가는 계절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숲과 산과 
구름에 휘감기는 태양을 느끼면서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이 여자에게서 저 여자에게로 헤매다녔다. 차가운 밤, 가슴에 슬픔을 안고 창문 
밑에 웅크리고 안자 밤을 새운 적도 몇 번 있었다. 창문 안에는 불이 켜져 있고 
그 불빛 속에는 이 지상에 존재하는 행복과 고향과 평화 등이 그를 부드럽게 
위로해 주었지만 그것은 그의 손도 미치지 않는 곳에서 빛나고 있었다. 그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다시 되풀이되자면 그때마다 그는 그것이 
변하고 있는 것을 알았다. 들판이나 황무지나 혹은 자갈길 위를 오래도록 
헤매고, 여름철 숲속에서 잠을 자고, 손에 손을 맞잡고 건초를 뒤집거나 홉을 
따서 돌아오는 고운 처녀들의 행렬을 뒤따라 마을을 거닐고.... 이러한 모든 
것이 알록달록한 실꾸리가 되어 그의 눈앞에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몇 년이 지난 어느날 골드문트는 벌써 유록색의 싹이 움트고 있는 
느티나무 숲 산등성이에 올라 새로운 경치가 눈앞에 전개되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그의 두 눈을 즐겁게 해주고 희망과 욕정과 기대와 
즐거움에 부풀게 했다. 며칠 전부터 그는 자기가 지금 보이는 저곳과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고, 이 지방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이 한낮의 
경치를 보고 그는 놀라움을 느꼈다. 그는 회색의 줄기와 간간이 흔들리고 있는 
나뭇가지 사이로 골짜기와 그 가운데를 흐르는 폭이 넓은 푸른 강을 
굽어보았다. 이제는 황무지와 숲과 고독뿐인 길을 헤매는 방랑을 당분간은 하지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골짜기 한가운데를 흐르는 강을 따라 전국에서 제일 
아름답고 유명한 도로가 뻗어 있고, 양쪽에는 기름지고 풍요한 대지가 있었다. 
그 강에는 뗏목과 나룻배가 떠다니고 있고, 도로를 걸어가면 아름다운 마을과 
산성과 수도원과 번화한 도시를 통하고 있었다.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 것 같아 
그의 가슴은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날 저녁나절에 그는 벌써 어느 아름다운 마을에 도착했다. 큰 도로를 
따라서 붉은 포도밭 언덕과 강 사이에 있는 마을이었다. 집집마다 지붕에는 
빨간 색칠이 되어 있었고, 아치형 대문과 돌계단이 있는 골목길이 있었다. 
대장장이가 빨갛게 단 모루를 두들기는 망치 소리가 한길까지 들렸다. 이제 막 
도착한 골드문트는 호기심에 넘쳐 집집마다의 처마나 모퉁이에서 발을 멈췄고, 
술집 문 앞에서는 포도주 냄새를, 강가에서는 물냄새를 맡았다. 예배당과 묘지를 
구경하고 밤을 지낼 수 있을 만한 잠자리도 찾아 두었다. 그리고 그 전에 
목사한테 찾아가서 먹을 것을 청해 보려고 생각했다.
  뚱뚱하고 붉은 머리의 목사가 나와서 골드문트에게 이것저것 찬찬히 
캐물었다. 그는 얼마간은 감추고 얼마간은 이야기를 꾸며대서 그의 경험담과 
자신의 상황을 들려주었다. 그러자 목사는 친절하게 그를 맞았고 그는 맛있는 
음식과 포도주를 대접받고, 주인과 이야기를 하며 그날 밤을 목사와 함께 
보내게 되었다. 이튿날 그는 강기슭을 따라서 도로를 타고 자꾸 내려갔다. 강 
위에는 뗏목과 화물선도 보였고, 그가 걸어가는 길로는 많은 짐마차가 
지나가기도 하였다. 그를 태워 주는 마차도 가끔 있었다. 봄날은 다채롭게 
지나갔다. 마을이나 조그만 읍들이 그를 맞았고 여자들은 화초를 심으려고 
웅크리고 앉은 채 미소를 보냈으며, 해가 질 무렵에는 처녀들이 노래를 
부르면서 마을로 돌아갔다.
  어느 물방앗간집 젊은 처녀가 그를 사로잡아서 그는 이틀 동안이나 그곳에 
머무르면서 그녀의 주위를 돌아다녔다. 그 처녀는 항상 웃는 얼굴로 기꺼이 
그를 상대해 줬다. 그는 그녀의 곁에 오래 있고 싶었으므로 물방앗간의 
심부름꾼이 되어 언제까지나 그곳에 살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는 
어부들 옆에 앉아 쉬기도 하고, 마부들이 말먹이를 주거나 솔질하는 것을 
돕기도 했다. 그 대신 빵과 고기를 얻어먹기도 하고 같이 마차를 타고 가기도 
했다. 기나긴 시간을 혼자서 지낸 뒤라 길동무가 있는 방랑길은 그를 즐겁게 
했다. 숲속에서 고독과 명상과 굶주림에 허덕인 뒤라 먹을 것 걱정이 없는 
사람들과 유쾌한 이야기를 하며 매일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것이 그는 즐거웠다. 
그리하여 주교가 살고 있는 도시에 가까워질수록 보이는 풍경은 더욱 풍요롭고 
활기있게 느껴졌다.
  밤이 되었을 때, 그는 어느 마을에 도착하여 잎이 우거진 나무 밑 강가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물은 기슭의 나무 뿌리 밑을 훑어내리면서 조용히 
흘러갔다. 언덕 위로 달이 떠올라 강물을 밝히고 나무의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는 거기서 한 처녀가 앉아 울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처녀는 애인과 
말다툼을 해 애인은 가버리고 혼자 남아 있었다. 골드문트는 처녀 옆에 앉아 
하소연을 들으며 그녀의 손을 어루만져 주었다. 그리고 숲이며 어린 사슴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처녀를 위로해 주었다. 처녀는 그가 입맞춤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잠시 후에 처녀의 애인이 그녀를 찾기 위해 다시 돌아왔다. 남자는 
마음의 안정을 되찾고 자신의 경솔함을 후회했다. 그 남자는 골드문트가 자기 
애인의 옆에 앉아 있는 것을 보자 대뜸 달려들어 주먹으로 쳤다. 갑작스럽게 
당한 봉변에 골드문트는 당황했으나 얼른 방어 자세를 취해서 그를 때려눕히고 
말았다. 그 남자는 욕을 퍼부으며 마을로 달아났다. 처녀도 벌써 달아나고 
없었다. 골드문트는 고요한 달빛을 받으며 마음껏 즐기면서 힘이 다할 때까지 
걸어갔다. 그는 자신이 힘깨나 쓰게 된 것을 흐뭇해하며 매우 뿌듯한 
기분이었으나, 밤이슬이 신발을 적시어 무겁게 느껴졌을 때에는 갑자기 피곤이 
찾아들어 나무 밑에서 잠들고 말았다.
  무엇인가 얼굴을 간지럽히는 바람에 눈을 떴다. 벌써 한낮이 되어 있었다. 
그는 또 잠이 들었다. 그런데 무엇인가가 얼굴을 자꾸 간지럽혔다. 그는 얼굴을 
비비며 눈을 떴다. 눈앞에는 농가의 처녀가 서서 그를 내려다보며 버드나무 
가지 끝으로 그를 간지럽히고 있었다. 다리를 비틀거리며 그는 일어났다. 두 
사람은 서로 쳐다보며 웃었다. 처녀는 그를 좀더 좋은 곳으로 안내하겠다고 
말하면서 어느 헛간으로 그를 데리고 갔다. 두 사람은 거기서 같이 잠을 잤다. 
잠시 후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막짜온 듯한 따뜻한 우유를 조그만 통에 
가득 담아 가지고 다시 들어왔다. 그는 골목길에서 주운 파란 리본을 그녀에게 
선물로 주었다. 그는 떠나기 전에 한 번 더 키스를 했다. 그 처녀의 이름은 
프란치스카였다. 그는 그녀와 헤어지는 것이 마음 아팠다.
  그날 밤 그는 어느 수도원에 잠자리를 얻고 아침 미사에도 나갔다. 그의 기억 
속에서 무수한 추억이 되살아났다. 아치형 천장의 차디찬 돌에서 스며나오는 
냉기나, 돌로 된 복도를 걸을 때마다 나는 신발 소리, 그 모든 것들이 고향의 
향기를 풍기며 그의 속을 타게 했다. 미사가 끝나 성단 안이 고요해진 후에도 
골드문트는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의 가슴은 이상스레 뛰고 있었다. 그는 지난 
밤에 여러 가지 꿈을 꾸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과거를 탈피하고 생활을 바꾸고 
싶다는 욕망을 느끼고 있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그를 움직인 것은 
아마도 마리아브론 수도원와 순진했던 소년 시절의 추억이었을 것이다. 그는 
고해를 하고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겠다는 충동을 강하게 느꼈다.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소한 죄악이나 악행은 셀 수 없이 많았다. 하지만 어느 
무엇보다 그의 가슴을 짓누른 것은 그의 손으로 죽인 빅토르의 최후였다. 
그래서 그는 신부를 찾아가 고해를 했고, 특히 빅토르를 죽인 것에 대해서 
참회를 했다. 아, 얼마나 오랫동안 고해를 하지 않았던가! 그의 죄악은 끝을 
헤아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그 대가로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고 싶었다. 
그러나 고해 신부는 놀라지도 않고 조용히 듣고만 있다가 엄하게, 그러나 
정답게 그를 훈계했다. 마치 그런 방랑 생활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신부는 그가 지옥에 갈 것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골드문트가 홀가분한 마음으로 일어나서 신부의 지시에 따라 제단 앞에서 
기도를 드리고 성당을 떠나려고 하였다. 그때 한줄기 빛이 창살 틈으로 
새어들어왔다. 그의 눈은 그 빛 줄기를 따라갔다. 그 빛은 성당 벽에 서 있는 
입상을 비추었다. 매혹 당한 골드문트는 사랑에 넘치는 눈길로 그 쪽을 향해 
경건하게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고개를 숙인, 나무로 만든 성모 마리아 
상이었다. 마리아 상은 부드럽고 온화했다. 파란 망토가 연약한 어깨에서 축 
늘어져 있는 형상, 상냥한 소녀같이 손을 벌리고, 다소곳이 아래쪽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는 눈매와 둥그스름하게 보이는 아름다운 이마의 모습, 이런 것은 
그가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다고 생각할 만큼 생기 넘치고 아름다웠으며 
또한 그윽한 영혼을 감추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입술과 이 목덜미 사랑스럽고도 
깊이가 있는 동작은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았다. 그는 그 목상에서 
자신의 꿈과 예감으로 지금까지 몇 번이나 보아 왔고 그리워한 무엇을 본 
듯했다. 물러서서 돌아가려 하다가 그는 몇 번이나 자꾸만 뒤돌아보곤 했다.
  마침내 돌아서려고 했을 때, 그의 뒤에는 조금 전 그의 고해를 들어 준 
신부가 서 있었다.
  "저것이 아름답다고 생각합니까?"
  신부는 정답게 물었다. 
  "뭐라고 표현할 수 없이 아름답습니다."
  골드문트가 대답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많지요. 그러나 이것은 진짜 성모 마리아 상이 
아니오. 지나치게 현대적이고 세속적이며, 모든 점에서 과장이 있고 사실과 
다르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때문에 뜨거운 논쟁이 벌어지지요. 
아무튼 당신 마음에 들었다니 기쁩니다. 마리아 상이 우리 성당에 세워지게 된 
것은 겨우 1년밖에 안 되죠. 우리 성당의 독지가가 기부한 것인데, 
니콜라우스라는 조각가의 작품입니다."
  "니콜라우스요? 그분이 누구세요? 어디 계시죠? 당신은 그분을 아십니까? 아, 
제발 그분에 대해서 무엇이든 얘기해 주세요! 이런 것을 만들 수 있는 것 보니 
훌륭하고 은혜입은 분임에 틀림없을 겁니다."
  "나는 그분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들 주교가 사는 도시의 
조각가입니다. 여기서 한나절쯤 걸리죠. 예술가로서 높은 평판을 받고 있습니다. 
예술가는 성자가 아닌 것이 보통이죠. 이분도 성자는 아니지만 천성이 매우 
고매하신 분입니다. 나는 여러 번 만나본 일이 있습니다."
  "네에, 만나본 일이 있었군요. 어떤 분이셨나요?"
  "당신도 그분한테 반한 모양이군요. 그렇다면 찾아가 보시죠. 그리고 
파티우스 신부가 안부 전하더라고 전해 주십시오."
  골드문트는 넘칠 듯이 기뻐 감사를 드렸다. 신부는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떴으나 골드문트는 신부가 자리를 뜨고도 한참이나 이 신비로운 입상 앞에서 
떠나지 못했다. 성상의 가슴은 호흡하는 것 같았고, 얼굴에는 괴로움과 
감미로움이 똑같이 깃들어 있는 듯하여 그의 가슴은 죄어들었다.
  그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성당에서 나왔다. 그리하여 그가 걸어가는 
세계가 모두 변모해 버렸다. 나무로 깎아 만든 감미롭고 거룩한 입상 앞에 선 
그 순간부터 골드문트는 지금까지 한 번도 가져 보지 못한 무엇을, 다시 말해 
하나의 목표를 가지게 되었다! 그는 목표를 가진 것이다. 아마 그 목표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쩌면 그의 지리멸렬된 생활 전체가 
고귀한 의미와 가치를 얻게 될 것이다. 이 새로운 감정은 기쁨과 두려움으로 
다가와 그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가 걸어가는 이름답고 밝은 도로는 이제 더 
이상 어제와 같은 길이 아니었다. 축제의 기분으로 들뜬 명랑한 곳도 단순한 
체류지도 아닌 스승이 사는 거리로 이어지는 하나의 길에 불과 했다. 그는 
서둘러 해가 지기 전에 그 도시에 도착했다. 성벽 뒤에는 탑들이 우뚝 서 있고, 
성문들 위에는 끌로 새겨 놓은 문장들과 색칠한 문패들이 보였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그는 이 길 저 길을 빠져나갔다. 골목길의 혼잡이나 떠들썩한 
장삿군들이나 말을 탄 기사나 의장 마차 등 그 어느 것도 그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성문 밑에서 맨 처음에 만난 사람에게 다짜고짜로 니콜라우스 
스승이 어디 사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그가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골드문트는 
상당히 실망을 했다.
  그는 큰 집들이 들어차 있는 광장으로 나왔다. 대개의 집들이 그림이나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밝은 색으로 채색되어진 멋들어진 병정의 큼지막한 
입상이 눈부시게 세워져 있는 대문이 보였다. 병정 상은 그 성당의 입상처럼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종아리를 드러내고, 수염투성이 턱을 보란 듯이 내밀고 
있는 자태가 아주 독특했으므로 골드문트는 이것도 그 선생이 만든 것이리라 
짐작했다. 그는 그 집으로 들어가 계단으로 올라갔다. 거기서 모피 웃옷을 입은 
사람과 마주쳤다. 그에게 니콜라우스 선생에 대해 묻자 그 사람은 선생에 대해 
알고 있는 듯 무슨 용건이냐고 물었다. 골드문트는 마음을 가다듬고 선생에게 
부탁드릴 것이 있다고 간신히 말했다. 그 사람은 니콜라우스 선생이 살고 있는 
골목길의 이름을 가르쳐 주었다. 그가 길을 물어 찾아가는 도중에 해가 지고 
말았다. 불안하긴 했으나 그래도 마음은 무척 행복했고 즐거웠다. 그는 스승의 
집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창으로 들여다보다 하마터면 안으로 뛰어들어갈 
뻔했다. 하지만 날도 저물고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된 자신을 떠올리자 마음을 
억제하고 기다리기로 했다. 방안에 불이 켜지는 것이 보였다. 그가 막 떠나려고 
몸을 돌렸을 때 어떤 그림자가 창문 앞으로 다가왔다. 무척이나 아름다운 
금발의 처녀였다. 처녀의 등 뒤로 방안의 부드러운 등잔불 빛이 금발 사이로 
흘러나왔다.
  다음날 아침, 거리가 다시 밝아지고 떠들썩해지자 골드문트는 수도원에서 
세수를 하고 옷과 신발의 먼지를 털어 낸 다음 어제의 그 골목길을 찾아들어 
대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어 준 하녀는 선생한테 그리 쉽게 데려다주려고 하지 
않아서, 그는 간신히 이 노파의 마음을 돌리는 데 성공했다. 노파는 그를 안으로 
안내했다. 작업장으로 쓰고 있는 조그만 응접실에 선생이 앞치마를 두르고 서 
있었다. 골드문트의 짐작으로 마흔 살이나 쉰 살쯤 되어 보이는, 수염이 나고 
키가 큰 남자였다. 그는 검푸른 눈으로 날카롭게 골드문트를 쳐다보며 무슨 
용건이냐고 간단히 물었다. 골드문트는 파티우스 신부의 안부를 전했다.
  "용건은 그뿐인가?"
  "선생님"
  숨가쁘게 골드문트는 말했다.
  "저는 수도원에서 선생님이 만드신 성모상을 보았습니다. 아, 그렇게 싸늘하게 
절 쳐다보지 말아 주십시오. 저는 다만 사랑과 존경의 인도를 받아 당신한테 온 
것입니다. 저는 어느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기나긴 세월 동안 유랑 생활을 
하며 숲속이나 눈 속에서 굶주림의 쓰라림도 실컷 경험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저는 무섭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신 앞에서는 무섭습니다. 아, 저는 단 한가지 
큰 소원이 있습니다. 그것이 저를 괴롭힙니다."
  "대체 어떤 소원인가?"
  "선생님의 제자가 되어 선생님 밑에서 배우고 싶습니다."
  "그런 소원을 가진 자는 자네만이 아닐세. 하지만 나는 제자를 원치 않네. 
내게는 조수만 해도 두 사람이네. 도대체 자네는 어디서 왔는가? 부모님은 
누구지?"
  "부모님은 없습니다. 저는 어느 수도원의 학생이었습니다. 라틴 어와 그리스 
어를 배우다가 도망을 친 놈입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유랑을 하고 있습니다."
  "왜 조각가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 지금까지 그런 일을 해본 
경험이라도 있나? 데생이라도 해본 적이 있나?"
  "스케치는 많이 했습니다. 지금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요. 그렇지만 왜 조각을 
배우고 싶은가는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저는 여러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 
가지 얼굴이나 모습을 보고 거기에 대한 명상도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생각 
가운데서 몇 가지가 저를 계속해서 괴롭히면서 저에게 평온을 가져다주지 
않았습니다. 특히, 한 사람의 모습에서도 항상 어떤 형태라든가 일정한 선이 
자꾸만 반복해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이마가 무릎에, 어깨가 허리에 
상응해 들어가는 것, 모든 것이 가장 깊숙한 내부에 있어서는 똑같고, 그리고 
그와 같은 무릎이나 어깨나 이마를 가지고 있는 인간의 성질과 감정은 
근본적으로 하나라는 것입니다. 어느 날 밤 해산을 하는 산모 곁에서 심부름을 
해주면서 본 사실이지만, 최대의 고통과 최고의 쾌락은 완전히 비슷한 표정을 
가진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선생은 마음을 꿰뚫기라도 할 듯이 날카롭게 나그네를 바라보았다.
  "자네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알고 있나?"
  "네, 스승님. 바로 얼마 전에도 스승님의 성모상에 표현되어 있는 것을 보고 
더없는 기쁨과 즐거움을 느꼈습니다. 아, 그 아름답고 우아한 얼굴에는 너무도 
많은 괴로움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동시에 온갖 괴로움이 그대로 행복과 미소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것을 본 순간 저의 마음속에서는 섬광과 같은 것이 
스쳐지나갔습니다. 기나긴 세월 동안 생각하고 꿈꾸던 것이 확실해진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무엇을 해야 하며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를 
깨달았습니다. 니콜라우스 선생님, 진정 소원입니다. 제발 선생님 밑에서 배울 
수 있도록 해락해 주십시오."
  니콜라우스는 무뚝뚝한 표정 그대로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여보게 젊은 친구?"
  니콜라우스가 말했다.
  "자네는 예술에 대해서 놀라울 정도로 훌륭하게 알고 있군. 자네 나이에 
쾌락이니 고통이나 하는 것을 그만큼 알고 있다니 정말 놀랍네. 저녁에 자네와 
포도주를 마시면서 그런 것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면 흥미로울 테지. 그렇지만 이 
사람아! 함께 재미난 이야기를 기분좋게 하는 것과 몇 년 동안 같이 생활을 
하고 일을 한다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야. 여기는 일터란 말일세. 여기는 일을 
하는 곳이지 담소를 나누는 곳은 아니란 말이야. 여기서는 무엇을 생각해 
내었다거나 무엇을 입으로 말할 줄 아느냐 하는 것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손으로 무엇을 만들어 낼 줄 아는가 하는 것에 가치가 있어. 자네의 
이야기가 매우 진실돼 보이므로 간단하게 쫓아 버리고 싶지는 않네. 어디 
자네가 뭘 할 수 있는지 한번 보기로 하지. 점토나 밀랍을 가지고 무얼 만들어 
본 적은 있나?"
  골드문트에게 꿈속에서 본 광경이 떠올랐다. 꿈속에서 그는 점토로 남자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벌떡 일어나더니 이내 거인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고 한 번도 그런 일을 해본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좋아, 그럼 무엇이든지 스케치라도 한번 해보게. 저기 책상에 종이와 목탄이 
있네. 앉아서 스케치를 해봐! 시간은 걸려도 자네가 무슨 일에 소용이 닿나 
알게 될 테지. 그럼 이제 이야기도 끝났을 테니 나는 일을 시작하겠네. 자네도 
스케치를 시작하는 게 어때?"
  니콜라우스가 지정해 준 의자에 앉아서 골드문트는 스케치를 할 채비를 했다.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얌전하고 근면한 학생처럼 가만히 기다렸다 그리고 
그에게 반쯤 등을 돌린 채 조그만 모양을 다듬고 있는 선생의 일하는 모습을 
호기심과 애정에 넘친 눈으로 바라보았다. 선생의 엄숙하고 약간 희끗희끗한 
머리칼과 딱딱하지만 품위 있는 정력이 깃들어 보이는 손에서 미묘한 마력이 
풍겨 나오고 있었다. 골드문트가 상상하고 있던 것과는 모습이 달랐다. 생각한 
것보다 나이도 많았고 겸허하기도 하고 냉정하고 메마르고 무뚝뚝해서 조금도 
행복한 것 같지 않았다. 요모조모 뜯어보는 눈초리가 어디 하나 빈틈없이 
날카롭게 일에 쏠려 있었다. 덕분에 골드문트는 선생의 모습 전체를 주의 깊게 
관찰할 수가 있었다. 골드문트는 이 사람을 학자라고 해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사람보다 먼저 수많은 선진들이 착수했던 일, 몇 세대에 걸친 
사람들의 노고와 헌신이 집중되는 것 같은 끈기도 있을 뿐 아니라 기나긴 
세월이 걸려도 결코 완결을 볼 수 없는 일, 그런 일에 심신을 바치고 있는 
고요하고도 엄격한 탐구자라고도 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선생을 
관찰하고 있는 동안에 그는 선생이 얼굴에서 적어도 그런 것 정도는 읽어낼 수 
있었다. 무한한 인내, 수양과 심사 숙고, 그리고 인간이 하는 일에 대한 
불가사의한 가치에 대한 겸허한 마음과 깨달음 등이 그 얼굴에 나타나 있었다. 
그러나 그의 두 손의 언어는 또 별개였다. 그의 손과 얼굴 사이에는 모순이 
있었다. 그 두 손은 매우 단단하지만 매우 민감한 손가락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손가락을 점토 속에 집어 넣어 모양을 만들고 있었다. 점토를 주물럭거리는 
솜씨는 사랑을 하는 남자의 손이 몸을 맡기고 있는 연인의 온몸을 다루고 있는 
것 같았다. 반해서 부드럽게 뛰노는 감정으로 가득 차 있으며, 열성적이긴 
하지만 받는 것과 주는 것 사이에 구별이 없고, 욕정을 품고 있으나 그런 대로 
경건하고, 매우 오래된 깊은 경험에서 우러난 것처럼 안전하고 대가다웠다. 
넋나간 듯 감탄하며 골드문트는 그 뛰어나 난 두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과 
손 사이의 모순만 없었더라도 기꺼이 선생을 스케치했을 텐데, 그 모순이 그를 
무력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는 거의 한 시간 가량이나 정신없이 일에 몰두해 있는 예술가를 관찰하며 
이 인물의 비밀을 캐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혀 있었으나 그의 마음속에서는 
다른 모습이 형성되어 그의 영혼 앞에 드러나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한 
인간의 영상, 그가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거니와 마음속으로 흠모해 
마지않던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는 분열은 물론 모순도 없었다. 그 
형태도 다양한 특징을 갖추고 있어 여러 가지 갈등을 기억하게 해주었다. 
그것은 친구인 나르치스의 모습이었다. 그것은 하나의 영상으로 통일되었다가 
점차 전체적인 모습으로 뚜렷이 그려지고 있었다. 고귀한 머리는 정신에 의하여 
형성되었다. 자기를 억제한 아름다운 입과 애수가 깃든 눈은 정신에의 봉사에 
의해서 꼭 다물어져 기품을 더해 주고 있었다. 그리고 수척해진 어깨와 기다란 
목덜미, 부드럽고 품위 있는 손은 정신화를 위한 싸움에 의해 영적으로 변해 
있었다. 골드문트는 수도원을 도망친 이래, 친구를 이다지도 똑똑히 보고 친구의 
모습을 이처럼 완벽하게 그의 마음속에 지녀본 적은 없었다.
  골드문트는 꿈이라도 꾸고 있는 것처럼 의지는 없으나 그래도 필연성에 가득 
찬 마음으로 열심히 스케치를 시작했다. 그는 스승도, 자신도, 그가 지금 앉아 
있는 장소도 잊어버리고 애정에 넘친 손으로 가슴에 깃들이고 있는 모습을 
경건하게 다듬었다. 그는 실내의 광선이 서서히 이동하는 것도, 선생이 몇 
번이나 넘겨다보는 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그는 마치 희생된 제물을 바치는 
의식과도 같이 그에게 부여된 과제를, 그의 마음이 자신에게 가져다 준 과제를, 
즉 자신의 마음속에 살고 있는 친구의 모습을 그대로 그렸다. 이렇게 하는 것이 
마음에 진 빚을 갚는 길이며 감사의 뜻을 표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니콜라우스가 스케치 대 앞에 다가와서 말했다.
  "점심 시간일세. 이제 식사를 해야 하겠는데, 같이 하는 게 어때? 어디 보세. 
무얼 어떻게 그렸나?"
  그는 골드문트의 뒤로 돌아가서 커다란 목탄지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그를 옆으로 제쳐 놓고 조심스레 민감한 손으로 그림을 집어들었다. 골드문트는 
환상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불안한 기대를 가지고 선생을 쳐다보았다. 선생은 
스케치를 두 손에 들고 섰다. 그는 엄숙하게 검푸른 눈으로 약간 매서운 
눈초리를 던지며 매우 자세하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자네가 그림 이 사람은 누군가?"
  얼마 있다가 니콜라우스가 물었다.
  "제 친구입니다. 젊은 수사이자 학자입니다.
  "좋아, 저쪽 안마당에 샘이 있으니 손을 씻게. 그후 식사하러 가세. 조수는 
지금 없네. 바깥에서 일을 하고 있지."
  골드문트는 선생이 하라는 대로 했다. 안마당에 있는 우물을 발견하고 손을 
씻었다. 그리고 '선생의 생각을 알기만 한다면 좀더 기분이 좋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그가 들어오자 선생은 그곳에 없었다. 그는 선생이 옆방에서 
왔다갔다하는 소리를 들었다. 바깥으로 나왔을 때 스승도 손을 씻고 있었고 
작업복 대신 아름다운 나사 웃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참으로 당당해 보였다. 
선생이 앞장서서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의 손잡이 기둥은 호두나무로 되어 
있었으며 조그만 천사의 머리가 새겨져 있었다. 새로 만들어진 입상과 오래 전 
입상의 행렬이 줄지어 서 있는 복도를 지나서 깨끗한 방으로 들어갔다. 방은 
마룻바닥도 벽도 천장도 단단한 나무로 되어 있었으며, 창문 한쪽에 식탁이 
준비되어 있었다. 처녀가 들어왔다. 골드문트는 그 처녀를 알고 있었다. 
어젯밤의 그 아름다운 금발의 처녀였다.
  "리스벳."
  선생이 말했다.
  "한 사람분을 더 가져와야지. 손님을 모시고 왔단다. 그건 그렇고.... 참, 
이름을 아직 모르는군."
  골드문트는 선생에게 자기의 이름을 댔다.
  "음, 골드문트의 식사 준비는 되어 있니?"
  "잠시만 기다리세요, 아버지."
  처녀는 쟁반을 들고 나가더니 잠시 후 돼지고기와 완두콩과 흰 빵을 하녀한테 
들려서 돌아왔다. 식사를 하면서 선생은 딸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골드문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앉아서는 음식을 조금밖에 먹지 않았다. 매우 불안스럽고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선생의 딸은 그의 마음을 몹시 끌었다. 딸은 그의 
아버지만큼이나 키가 크고 탄탄하고 아름다운 몸매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얌전하게 앉아 있어서 유리그릇 옆에라도 앉아 있는 것처럼 도무지 
가까이하기가 어려웠을 뿐 아니라 골드문트에게 한 마디 말도, 시선 한번 
던져주지 않았다.
  식사가 끝나자 선생은 말했다.
  "지금부터 나는 반 시간쯤 쉬겠네. 자네는 작업장으로 가든지 나가서 거리를 
산책하든지 마음대로 하게나. 용건은 나중에 말하기로 하고."
  골드문트는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선생은 그의 스케치를 본 지 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거기에 대해서는 한 마디의 말도 언급해 주지 않았다. 
게다가 또 반시간이나 기다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하지만 달리 어떻게 할 수도 
없었으므로 그는 기다렸다. 그는 작업실로 들어가지 않았다 .자신의 스케치를 
다시 볼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안마당에 나가서 우물가에 앉아 
대롱에서 끊임없이 흘러내려 깊은 돌그릇 속으로 떨어지는 물줄기를 
바라보았다. 물은 홈으로 떨어지면서 쉴새없이 하얀 방울로 변하곤 했다. 그는 
어두운 샘물 속 수면에 떠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물 속에서 그를 쳐다보고 
있는 골드문트는 그 옛날 수도원에 있던 골드문트가 아니었다. 리디아의 
골드문트도 아닌 듯했다. 숲속을 헤매던 골드문트도 아니었다. 그의 생각에는 
모든 사람은 다 흘러가 버리고 또한 자꾸 변화해서 마지막에는 녹아 없어지고 
말지만 예술가에 의해서 만들어진 형상은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고 똑같은 
형상을 지니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생각으로는 모든 예술의 근본과 모든 정신의 근본이 죽음에 대한 공포인 
것 같았다. 우리는 죽음을 겁낸다. 생명이 덧없음에 대해 몸서리를 친다. 꽃이 
시들고 잎이 떨어지는 것을 슬픔에 잠긴 마음으로 쳐다보며, 우리들 자신도 또 
그렇게 되어가는 것을 생각한다. 우리가 예술가로서 형상을 만들거나 
사상가로서 법칙을 세우고 사상을 공식화할 때 우리는 커다란 죽음의 의식에서 
최소한 무엇인가를 세우고 우리들 자신이 존재를 창조하기 위해서이다. 선생이 
아름다운 마리아 상을 만들 때 모델이 된 여자는 아마 벌써 늙었거나 
죽었는지도 모른다. 스승 자신도 결국은 죽고 말 것이다. 그의 집에는 다른 
사람이 살고 그의 식탁에서는 다른 사람이 식사를 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언제까지나 그대로 남아서 조용한 수도원의 성당에서 백 년이나 
혹은 그 이상의 오랜 후에라도 빛을 발할 것이다. 언제까지나 아름다움은 변치 
않고 언제까지나 꽃향기를 풍기면서 슬픔이 가시지 않는 듯한 입가에는 똑같은 
미소를 머금고 있으리라.
  스승이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를 듣고 그는 작업실로 얼른 되돌아갔다. 
니콜라우스 선생은 왔다갔다하면서 골드문트의 스케치를 들여다보다가는 
창가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망설이는 듯 하면서도 무뚝뚝한 
소리로 말했다.
  "이 지방 관습은 이렇네. 즉 수습공은 최소한 4년간은 교육을 받으며 
스승한테 사례금을 내야 하는 걸세."
  선생의 말소리가 잠시 뚝 그쳤기 때문에 골드문트는 그가 선생한테 사례금을 
내지 않는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갑자기 그는 호주머니에서 
주머니칼을 꺼내 꿰맨 곳을 뜯은 다음 감춰 둔 금화를 끄집어냈다. 
니콜라우스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골드문트가 돈을 내밀자 큰 소리로 웃었다.
  "허허, 자네는 내 말을 그렇게 받아들였나?" 선생은 또다시 웃었다.
  "아니, 이보게, 금화는 그대로 넣어 두게. 자, 내 말을 들어봐! 나는 우리들 
조합에서 제자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를 말했을 뿐이야. 하지만 나는 그런 
저속한 선생도 아니고 자네 또한 너저분한 제자는 아니란 말일세. 즉 그저 보통 
평범한 제자라면 열세 살이나 열네 살, 혹은 아무리 나이를 많이 먹었다 
하더라도 열다섯 살에는 제자로 들어서는 게 관습이야. 그리고 제자 시절의 
반은 계속 일꾼 노릇을 해야 되고 막도 해야 되지. 하지만 자네는 벌써 기골이 
있는 청년이네. 나이로 보아서도 벌써 직공이 되었거나 선생이라도 돼 있어야 
해. 이 지방 조합에서는 나는 제자 같은 걸 둘 마음이 없네. 보아하니 자네는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한 사람 같지도 않구먼."
  골드문트는 초조해서 몸을 가눌 수조차 없었다. 선생의 신중한 말 한마디 한 
마디가 그를 꼼짝도 못하게 붙들어 매었다. 그리고 그 말이 지루하기도 했고 
고지식한 말처럼 답답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분통을 터뜨리며 소리쳤다.
  "저를 제자로 맞이할 의사가 전혀 없으시다면서 왜 그렇게 하나하나 따지고 
드십니까?"
  선생은 꼼짝도 하지 않고 지금까지의 태도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나는 한시간 동안이나 자네의 소망에 대해서 숙고해 보았네. 그러니 자네도 
참고 내 이야기를 들어 주게. 나는 자네 스케치를 보았네. 결점은 있지만 
아름다운 그림이었네. 안 그랬더라면 잔돈푼이나 던져 주고 자네를 쫓아 버렸을 
거야. 자네의 스케치에 대해서 더 이상 언급하고 싶지는 안네. 자네가 예술가가 
되는 것을 도와주고 싶을 뿐이네. 하지만 방금 말한 것처럼 자네는 내 제자가 
될 수는 없네. 또 도제 수업을 끝마친 자가 아니면 우리들 조합에서는 직공도 
선생도 될 수가 없다네. 이걸 미리 자네한테 이야기해 두는 걸세. 하자만 
자네를 시험해 보는 것을 허락해 주게. 잠시 이 도시에 머무를 수 있게 되거든 
나한테 와서 좀 배워도 좋아. 의무도 계약도 없이. 그리고 언제 떠나도 좋네. 
조각끌을 여기서 몇 개쯤 부러뜨려도, 통나무를 몇 개쯤 망가뜨려도 상관없어. 
그리고 자네가 조각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때 다른 길을 
가더라도 아무 말 하지 않겠네. 뭐 이쯤으로 불만은 없겠지?"
  골드문트는 고마움으로 감격해하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저는 집도 없는 사람입니다. 숲속에서도 지낸 놈이 여기 
이 도시에서 못 살 이유가 있겠습니까? 당신께서 저게 제자를 대할 때처럼 애를 
쓰시거나 책임을 지시거나 할 의무도 갖고 싶지 않으시다는 것을 잘 
알겠습니다. 단지 저는 당신 밑에서 수업을 받는 것을 허락받았다는 것만으로도 
무한한 행복이라 생각합니다. 당신께서 제게 그것을 허락해 주신 것에 대해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11

  이 도시에서는 새로운 모습들이 골드문트를 에워쌌다. 그에게 새로운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이 지방과 도시가 그를 유혹하듯 맞이해 준 것처럼 이 새로운 
생활은 기쁨과 여러 가지 약속으로써 그를 맞이해 주었다. 그의 영혼 속에 깃든 
비애와 예지의 밑바닥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으나 그의 생활의 표면은 
갖가지 색채로 빛나고 있었다. 지금 시작된 이 생활은 골드문트의 일생을 
통해서 가장 즐거운 시절인 동시에 가장 마음 가뿐한 시절이었다. 외부의 
세계는 무수한 유희와 정경으로 그를 맞이해 주었고, 내부의 세계는 이제 막 
눈뜨기 시작한 예술가적 정신이 새로운 감정과 경험을 그에게 깨닫게 해 
주었다. 그는 선생의 도움으로 생선 시장 근처, 어느 도금공장의 주인집에 
하숙을 구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선생 밑에 가 있을 때도, 도금공장 
주인집에서도 통나무나 석고, 물감, 옻칠, 금도금법 등을 다루는 기술을 익혔다.
  골드문트는 고도의 천분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데 적당한 방법을 
찾지 못하는 그런 불행한 예술가들과는 달랐다. 세계의 아름다움을 깊고 넓게 
느끼는 동시에 영혼 속에 고귀한 형상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천성을 부여받고 
있으면서도 그 형상을 단념해 버리고 다른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한 길을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 법이다. 그러나 골드문트는 그런 문제 
때문에 괴로워하지는 않는다. 평범한 사람들은 하루 일이 끝난 저녁, 몇몇 
친구들이 모인 가운데서 기타 치는 법을 배우고 또 일요일 같은 때는 을의 
무도장에서 춤을 배운다. 이런 놀이가 사람들한테는 매우 쉽듯이 
골드문트에게도 두 손을 놀리는 법이나 공작품을 다듬는 방법, 그것을 
완성시키는 방법을 습득하는 것이 수월하기도, 즐겁기도 했다. 쉽게 몸에 익히고 
혼자서도 잘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나무를 새기는 데는 온갖 
성의를 다해 노력을 해야 했고 어려움이나 실망도 겪어야만 했다. 그뿐만 
아니라 아름드리 나무를 다 망치기도 하고, 몇 번이나 손가락에 큰 상처를 
내면서도 계속 노력해야 했다. 하지만 초보 과정 정도는 금방 끝내고 제법 
어려운 것도 다루어 나갈 수가 있었다. 그렇지만 선생은 가끔 그에게 매우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골드문트, 자네가 내 수습공도 직공도 아닌 것이 다행한 일일세. 자네가 
시골길과 숲속에서 헤매다 내게 찾아왔듯이 언젠가는 또 그곳으로 돌아갈 
거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도 좋은 일일세. 자네는 이곳 주민도, 일꾼도 
아니네, 고향도 없는 유랑자라네. 그런 사정을 모르는 사람은 이런저런 것을 
자네한테 요구할 걸세. 사실 자네가 마음만 단단히 먹는다면 정말 훌륭한 
일꾼도 될 수도 있네. 하지만 자네는 지난 주일에는 이틀이나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 또 어제는 안마당 일터에서 천사상 두 개를 매끈하게 닦을 
예정이었는데 반나절 동안이나 잠을 자니 않았나?"
  선생의 비난은 당연했다. 골드문트도 변명하지 않고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는 자신이 신뢰를 받을 수 있는 인간도, 부지런한 인간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어떤 일이 그에게 어렵게 느껴지거나 그 완성이 확실하다고 
느낄 때는 그는 부지런한 일꾼이었다. 그러나 힘들지는 않지만 시간과 근면을 
요구하는 일, 충실하게 또는 끈기 있게 해놓지 않으면 안 될 일, 그런 일을 하는 
데는 도무지 견디어 낼 수 없을 때가 많았다. 그리고 스스로도 거기에 대해서 
의심을 가질 때가 많았다. 불과 이삼년간의 방랑 생활이 그로 하여금 게으름과 
불신에 가득 찬 인간으로 만들어 버렸는가? 그것이 아니라면 그의 내부에서 
성장하고 있는 어머니로부터의 유전 때문인가? 혹은 그에게 무엇이 결핍되어 
있었던가?
  그는 이따금 부지런하고 선량한 학생이었던 초기 수도원 시절의 그를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지금은 그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끈기가 도대체 그때는 
왜 그다지도 많았던가? 마음 한구석에서는 사실 그다지 대단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도 왜 라틴 어의 문장론에 그리 싫증도 내지 않고 심신을 
바칠 수 있었으며, 또한 어떻게 그리스 어의 과거형을 모조리 외워 버릴 수가 
있었던가? 그는 몇 번이나 그때의 자신을 돌이켜 보았다. 그때 그를 격려해주고 
기운도 내게 해주었던 것은 사랑이었다. 그의 학습은 나르치스의 사랑을 
얻으려는 꾸준한 노력에 불과했다. 나르치스의 사랑을 얻는 방법은 그의 주의를 
끄는 것과 그의 인정을 받는 것 두 가지가 있었다. 그때는 몇 시간 혹은 며칠을 
사랑하는 선생님에게서 인정을 받으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다. 그리하여 그가 
동경했던 목표에 간신히 도달함으로써 나르치스를 그이 친구로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바로 그 나르치스가 골드문트에게 
학자로서의 부적합성을 지적하고, 묻혀 있던 어머니의 영상을 불러내 주었다. 
학식이나 수사의 생활이나 이성 대신 그를 강렬하고 근본적인 충동, 즉 
성욕이나 여인의 사랑이나 자유에의 추구나 유랑 생활 등이 그를 지배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선생이 만든 마리아 상을 보고 나서 자신 안에 깃든 
예술가적인 천분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길로 걸음을 옮겨 다시 
정착하게 된 것이다. 그럼 지금의 상태는? 앞으로의 길은 어디로 이어질 
것인가? 장차 어떤 장애가 나타날까?
  무엇보다도 그 점을 알 수가 없었다. 이런 것만은 알 수 있었다. 한때 
나르치스를 사랑한 것만큼은 결코 사랑하고 있지 않지만, 니콜라우스 선생을 
무척이나 흠모하였다. 아니, 선생을 실망하게 하고 화나게 해주는 것이 때로는 
그의 기쁨이었다. 그것은 마치 선생이 본성 안에 있는 분별과 관련을 맺고 있는 
것 같았다. 니콜라우스의 손으로 이루어지는 형상, 적어도 그중에서 제일 잘된 
것, 그것이 골드문트에게서 존경을 아끼지 않을 정도로 모범적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선생, 그 자체는 모범이 될 수 없었다.
  입가에 더할 수 없는 괴로움과 아름다움이 떠도는 성모상, 그 성모상을 새긴 
예술가적인 요소와 함께 깊은 경험과 예감을 형상화할 수 있는 그 불가사의한 
두 손을 가진 인간, 이런 인간과 나란히 니콜라우스 선생 속에는 또 한 사람의 
선생이 살고 있었다. 즉, 어느 정도는 엄격하고 예민한 성질의 주인이며 조합장, 
딸과 늙고 못생긴 하녀와 같이 조용한 집에서 세파에 시달림이 없이 다소 
침울한 생활을 보내고 있는 사람, 골드문트의 과격한 충동에 대해서 강력히 
거부하는 사람, 정직과 억제, 규율과 체면 등이 도사리고 있는 생활에 순응하는 
이런 사람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골드문트는 선생을 존경했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에게 선생의 인격을 세워 
꼬치꼬치 캐물어 본다거나 다른 사람 앞에서 선생의 인격을 비판하는 따위의 
말들은 그 스스로도 결코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1년 후에는 사태가 
달라졌다. 니콜라우스에 대해서 무엇이든 아주 자세한 부분까지를 사랑하고 
있었다. 이 선생은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존재였다. 선생은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만큼 또 미워도 했기 때문에 그에게 조금의 휴식도 주지 
않았다. 제자 역시 사랑과 불신으로 스승을 대하게 되었고 또한 점차 눈떠 가는 
호기심을 가지고 스승의 특성과 생활의 비밀을 파헤쳐 들어갔다. 골드문트는 
니콜라우스가 빈 방에 있는데도 집에 수습공이나 직공을 재우지  않았고 더구나 
외출하는 일도, 집에 손님을 초대하는 일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선생은 
아름다운 딸을 감동과 질투심에 얽힌 감정으로 사랑하고 있었다. 어느 
누구에게도 딸을 보이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겉늙은 홀아비의 
엄격한 본성의 배후에는 아직도 왕성한 충동이 잠재되어 있었다. 간혹 간청에 
의한 여정에 오를 때면 며칠 동안 이상하게 사람이 변하고 특히 젊어질 때가 
많다는 것도 그는 알게 되었다. 어느 땐가, 니콜라우스는 조각한 설교단을 
설치해 주러 간 마을에서, 하루 저녁 몰래 창부를 찾아갔었다. 그후 며칠 동안은 
무슨 일에도 초조해져 얼굴만 찌푸리고 있다는 것도 골드문트는 눈치챘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런 호기심 이외에도 또 다른 무엇이 골드문트의 선생의 
집에 붙들어 매서 초조하게 하였다. 그것은 그의 마음을 흐뭇하게 해준 
아름다운 리스벳 때문이었다. 그녀의 모습은 보기는 어려웠다. 그녀는 좀처럼 
작업장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의 냉정한 태도는 아버지에게서 강요를 받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녀 자신의 천성에 의한 것인가? 그에게는 확실치가 않았다. 
선생이 재차 그를 식탁에 초대하지 않았다는 것과 딸과 만날 기회를 전혀 주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리스벳은 매우 소중하게 길러지고 있는 
딸이라는 것을 그는 알게 되었다. 결혼을 전제로 하지 않는 사랑을 즐길 가망이 
그녀에게는 전혀 없었다. 그리고 그녀와 결혼하고 싶은 사람은 첫째 품위 있는 
집 아들로서 상급층에 속하는 조합원의 일원이어야 했다. 최소한 넉넉한 돈과 
집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했다.
  리스벳의 미모는 유랑의 여인이나 농가 아낙들의 미모와는 전혀 달랐다. 
그녀는 첫날부터 골드문트의 눈을 매혹시켰던 것이다. 그녀 내부에는 그에게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그를 과격하게 끌어당기는 동시에 의혹을 품게 하는 것, 
아니 화를 내게 하는 묘한 것이 있었다. 즉, 지나친 침착성과 순진성, 규율과 
순결성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어린아이 같은 데가 없고, 그 은근한 태도 뒤에 
보이지 않는 싸늘한 공기와 오만이 숨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의 
순진성은 그를 감동시키지도, 그렇다고 무력하게 해주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를 
자극시키고 분발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리하여 그녀의 자태가 그에게 마음 속의 
형상으로서 점차 친근감을 갖게 되자, 그는 언제 한번 그녀의 형상을 만들어 
보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 그대로의 그녀가 아닌 눈을 뜬 
여인, 관능적인 여인, 괴로워하고 있는 모습이 한 여인, 어린 소녀가 아닌 
성숙한 처녀로서 그리고 싶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 찬란하고 아름다운 얼굴, 
그러면서도 무표정한 얼굴, 그것이 쾌감에 의해서든 고통에 의해서든 싹을 트게 
하여 그녀의 비밀을 폭로하는 것을 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 사로잡혔다.
  그 밖에도 또 하나 다른 얼굴이 있었다. 그의 영혼 속에서 둥지를 틀고 있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완전히 그의 소유자가 되지 못하고 한 번은 붙들어서 
예술로써 표현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혀 있는데도, 그때마다 자꾸만 꽁무니를 
빼고 달아나서는 안개처럼 숨어 버리고 마는 얼굴, 그것은 어머니의 얼굴이었다. 
이 얼굴은 지난날 나르치스와의 대화를 통해서 아득한 어린 시절부터 그 모습을 
드러냈던 그런 얼굴은 아니었다. 이곳 저곳을 떠돌던 나날들, 사랑을 소곤대던 
밤마다 그리움과 생명이 위험과 지옥이 사자와 친근하던 시절, 어머니의 얼굴은 
서서히 변모하여 풍요와 깊이와 복잡성을 더해갔다. 이제 그 얼굴은 자신이 
어머니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 표정과 빛깔에서 그 혼자만의 것이 아닌 
어머니의 형상, 즉 인간의 어머니인 이브의 형상으로 변모해갔다. 니콜라우스 
선생이 만든 몇 개의 마리아 상 가운데는 골드문트가 도저히 표현해 낼 수 없을 
것 같은 표현의 완벽함과 극치로써 제작된 애처로운 성모 마리아 상이 있다. 
선생이 이런 형상을 다듬어 놓은 것과 같이 골드문트 자신도 언젠가 한번은 
지금보다 더 성숙하고 더 확실한 능력을 갖게 되면 세속적인 어머니 이브의 
상을 가장 오래고 사랑스런 것의 거룩한 상징으로서 그의 마음속에 존재하고 
있는 그대로 만들어 보겠다는 희망을 가졌다. 한때 그의 마음속에 있는 이 
형상은 그 자신의 어머니와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깃든 추억이 형상에 
불과했지만 그것은 끊임없는 변모와 성장을 거듭해갔다. 집시 여인 리제의 표정, 
기사의 딸 리이다의 표정, 그리고 수많은 여인들이 얼굴들, 그것들은 모두 그 
근원적인 형상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그가 사랑했던 모든 여인들이 얼굴뿐만 
아니라 그가 체험했던 온갖 경험과 경악과 감동이 이 형상에 특성을 부여해 
주었다. 이 형상을 구체적으로 표현해 낼 수 있는 날이 온다면 그것은 어느 
특정한 여인이 아닌 모든 사람들이 어머니로서 생명 그 자체를 표현할 
작정이었다. 그는 가끔 그것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꿈속에는 자주 나타났다. 
하지만 이 이브의 얼굴과 그것을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에 대해서 그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런 것뿐이었다. 즉, 그것은 고통과 죽음과의 내면적 친화력을 갖는 
생명이 쾌감을 표현해 내는 것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일 년이라는 기간 동안 골드문트는 스케치하는 것에는 재빠르고 완숙한 
솜씨를 갖추게 되었다. 니콜라우스는 나무 조각을 하게 하는 한편 골드문트에게 
틈틈이 점토로 모형을 만들어 보라고 지시했다. 제일 처음으로 그가 만든 
작품은 높이가 한 자는 됨직한 점토의 모형이었다. 그것은 리디아의 동생, 
조그만 율리에의 감미롭고 매혹적인 형상이었다. 선생은 이 작품을 칭찬해 
주었다. 하지만 주물을 부어 넣고 싶다는 골드문트의 소망을 들어주지는 
않았다. 선생은 그 모형을 순결성이 너무 없고 또한 세속적이라고 평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소망을 들어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 다음 그는 나르치스의 
모형을 제작하는 일에 착수했다. 골드문트는 그것을 목조로 조각하기로  했는데 
그것은 사도 요한의 모형으로 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잘만 된다면 니콜라우스가 
이전부터 부탁을 받아 벌써 오래 전부터 조수들한테 떠맡겨 놓은 십자가 군상에 
그것을 포함시켜 보고 싶은 희망을 가졌기 때문이다.
  골드문트는 나르치스의 모형을 제작하는 일에 깊은 애정을 기울이고 해 
나갔다. 그는 탈선을 할   때마다 이 작업에서 자기 자신을, 그의 예술가로서의 
천직을, 그의 혼을 다시 발견하곤 했다. 그러니 이 일도 그리 열심히 매달리지는 
못했다. 여인들의 춤, 친구들과의 술자리, 노름, 그리고 간혹 주먹다짐이 
싸움까지도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루나 혹은 여러 날 작업장에 떠나 
있다거나, 혹은 일에 착수했다 하더라도 불안하고 불쾌한 사람처럼 우두커니 서 
있을 때가 많았다. 사랑하는 사도 요한의 명상에 잠긴 형상이 점차 순수한 
입김을 내뿜으며 통나무 속에서 터벅터벅 걸어 나오기는 했지만 마음의 준비를 
갖추었을 때만 그는 경건하게 몸을 바쳐 작업에 임했다. 그런 시간에는 
즐겁지도 슬프지도 않았고 생의 환희도 인생의 무상함도 생각하지 않았다. 한때 
그 친구에게 몸을 내던져 그의 인도를 기꺼워했던 때, 어두운 그림자 하나 
드리워지지 않았던 그때의 감정이 새로이 그의 가슴속을 찾아주었다. 그런 
감정의 의지로 형상을 새기고 있는 사람은 골드문트가 아니고 오히려 다른 
사람, 나르치스였다. 그 나르치스가 끊임없이 변천하는 생활에서 빠져나와 그의 
본질의 순수한 형성을 표현하기 위해 예술가 골드문트의 손발을 이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친 후에야 참다운 작품은 완성되는 것이다. 골드문트는 간혹 
그런 생각을 하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잊을 수 없는 선생의 마리아 상도 
그렇게 만들어졌으리라. 골드문트는 일을 시작하고부터 수도원에 그 입상을 
보러 간 날이 수없이 많았다. 선생이 2층 복도에 쭉 세워 놓은 먼지 앉은 
입상들 가운데서도 최상의 것으로 꼽히는 것들은 신비에 가득 차고 거룩한 이런 
과정을 거쳐서 완성된 것이다. 그리하여 똑같은 과정을 거쳐 언젠가는 신비에 
가득 차고 거룩하며 유일한 것이 될 형상인 이브의 초상이 완성될 테지. 아, 
인간의 손에서 그러한 예술 작품이, 그와 같이 거룩하고 필연적이며 어떠한 
욕망이나 허영에도 더렵혀지지 않는 형상이 만들어 질 수가 있다면....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다른 
형상도 만둘 수가 있었다. 아주 교묘하게 보이는 말쑥하고 매혹적인 것을. 
그것은 예술 애호가들을 즐겁게 해주고 성당이나 회의실의 장식이 되는 
아름다운 것이기는 하겠지만 거룩하고 참다운 영혼의 형상은 아니었다. 
니콜라우스나 다른 대가들이 만든 작품에는 그 착상의 고상한 품위라든지 그 
작품의 빈틈없는 조심성이 결핍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한때 
무관심하게 만든 그런 작품 같은 것이 무수히 많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가 부끄러워하고 슬퍼한 사실을, 아무리 예술가라 하더라도 자신의 능력에 
도취되거나 명예욕에 들뜨거나 제 기분에 휩싸여 있을 때도 그런 순수한 것을 
세상에 내놓을 수가 있다는 것을 뼈에 사무치도록 알고 있었고 또한 자신의 
손끝에서도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것을 처음으로 자각했을 때, 그는 견딜 수 없이 슬펐다. 아, 아무리 
순수하다고 하더라도 예쁘장한 천사의 형상이나 혹은 다른 쓸데없는 것을 
만들기 위해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아무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아마 다른 
사람들 가령 일꾼이나 소시민들이나 혹은 조그마한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평범한 사람들한테는 위안을 줄 수 있는 일일지는 모르지만 그에게는 아무 
보람도 없는 일이었다. 그에게 예술이나 예술가라는 것도, 가령 그것이 태양처럼 
이글이글 타오르지 않는다면, 또한 폭풍우와 같은 힘을 갖지 않고 일시적인 
쾌락이나 하찮은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에 불과하다면, 아무 쓸모도 없는 
것이었다. 그는 다른 것을 찾았다. 가령 아무리 보수가 좋다 하더라도 
레이스처럼 곱디곱게 만든 마리아의 화관을, 반짝이며 빛나는 금박으로 보기 
좋게 도금한다는 것은 그가 할 일이 아니었다. 왜 선생 니콜라우스는 그런 
주문을 일일이 받아들였을까? 왜 조수를 둘이나 데리고 있었던가? 시 
참의원이나 수도원의 원장들이 정문이나 설교단을 주문할 때 왜 그는 몇 
시간이고 자를 손에 든 채 그네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을까? 하찮은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게 한 것이었다. 주문이 산더미 같은 유명한 예술가라는 것을 
중히 여긴 것이 그 한 가지 이유겠고, 돈을 모으고 싶은 것이 또 한 가지 
이유일 것이다. 돈이라고 해도 큰 사업이나 사치를 위해서가 아니다. 벌써 
예전부터 부자가 된 딸을 위해서, 큰 딸을 시집보내기 위해서, 호두나무로 만든 
침대에 값비싼 이불을 잔뜩 쌓아 두기 위해서였다. 마치 그 예쁜 처녀가 어떤 
건초 더미 위에서도 사랑을 즐길 수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런 생각이 들 때면 골드문트의 마음속에서는 어머니의 피가 들끓어 
정착하고 있는 사람이나 물건을 가진 사람에 대해서 가지는 유랑민의 궁지와 
멸시의 감정이 불꽃같이 튀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나 선생이 제작한 작품이 
보기가 싫어서 도망치고 싶은 때도 가끔 있었다.
  니콜라우스 선생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벌써 몇 번째나 화를 삭이고 있었다. 
이렇게도 다루기 힘들고 신용할 수 없는 그를 데리고 있게 된 자신이 
후회스럽기도 했다. 이놈은 가끔 그이 인내력을 실험대에 올려놓은 듯했다. 
골드문트의 행적, 돈이나 소유에 대한 그의 무관심, 낭비하는 버릇, 셀 수 없는 
애정 관계, 흔한 주먹다짐 등, 이런 것을 듣게 되었을 때는 그 마음을 너그럽게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일개 집시를, 믿을 수 없는 직공을 불러들인 셈이었다. 
이 유랑자가 그의 딸 리스벳을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가도 니콜라우스는 놓치지 
않고 주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참고 있는 것은 어떤 의무나 
불안해서 그러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이제 거의 완성되어가고 있는 사도 
요한이 형상 때문이었다. 니콜라우스는 그가 완전히 자인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사랑의 감정으로 제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숲속에서 그에게 달려온 이 
집시 골드뮨트가 변덕스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섬세하게 어디 하나 삐뚤어진 곳 
없이 사도상을 완성해가는 것을 보고 있었다. 사실상 이전에 이 유랑자를 
붙들어 놓은 이유도 좀 서툴기는 하지만 언젠가는 그것이 완성되는 날에는 
이제껏 그의 직공 가운데서 어느 누구도 만들어 낼 수가 없었던 그런 작품, 
위대한 대가들도 좀처럼 성공할 수 없는 그런 작품이 탄생될 테지. 그러면서도 
선생은 이 제자에 대해서 여러 가지 불만스런 점이 많아 꾸지람을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사도 요한의 초상에 대해서만은 한 마디 말도 던지지 
않았다.
  골드문트는 그의 청년다운 품격과 어린애 같은 솔직성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호감을 받아 왔으나 그 자취도 이 몇 해 동안에 점차 그의 모습에서 사라져가고 
있었다. 이제는 제법 어른스러워졌고 믿음직한 사나이가 되어, 여자들에게서는 
자주 유혹을 받았으나 남자들한테서는 도무지 호감을 받지 못했다. 나르치스가 
수도원 시절 골드문트의 단잠을 깨워 주던 날, 세상과 유랑 생활에 몸을 던졌던 
그날 이후 그의 심장이나 내면적인 용모는 크나큰 변화 경험하게 되었다. 
말끔하고 온화한, 누구에게서나 사랑을 받는, 경건하며 충실한 수도원이 학생은 
벌써 아득한 옛날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르치스는 그를 깨워 
주었고, 여자들은 그를 자각시켜 주었고, 유랑 생활은 소년 같은 티를 말끔히 
씻어 주었다. 그는 친구를 만들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여자들의 것이었다. 
여자들은 별 힘도 들이지 않고 그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원하는 눈짓 한 
번이면 충분했다. 그는 여자에겐 언제나 무력해서 아무리 사소한 추파에도 
응대를 했다. 그는 아름다움에 대해 아주 섬세한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도 솜털에 싸여 있는 어린 소녀들을 언제나 사랑했지만 그다지 
아름답지도, 젊지도 못한 여자에게도 마음이 끌리고 유혹을 받았다. 춤추는 
모임에서는 간혹 마음이 약한 나이든 처녀들에게 걸릴 때도 있었다. 그 
처녀들은 대개 아무도 탐내는 사내가 없거나 동정심, 아니 동정심뿐만 아니라 
일종의 호기심에 찬 눈망울로 골드문트에게 추파를 던지는 것이었다. 그가 아무 
여자에게나 일단 몸을 맡기기 시작하면 몇 주일이 계속되든 불과 몇 시간에 
불과하든 그 여자는 그에게 있어서는 아름다운 여자가 되는 것이다. 그 또한 
완전히 자신을 맡겨 버리는 것이었다. 어떤 여자라도 미워하지 않고 또한 
행복하게 해줄 수가 있었다. 남자들에게서 멸시를 받고 있는 여자라 할지라도 
불꽃 같은 정염으로 타오를 수가 있고 방금 피어나는 여자일지라도 모성적인 
애정 이상의 달콤한 애정을 보여줄 수가 있다. 또한 어떤 여자라도 그녀들 
나름의 비밀과 매력을 지니고 있어 그런 매력의 열쇠를 여는 것은 정말 즐겁다. 
이런 사실들은 그는 경험으로 깨우치게 되었다. 그 점에 있어서는 어떤 여자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젊음이나 아름다움이 모자란다 해도 그것은 어떤 독특한 
몸짓에 의해서 보완되었다. 하지만 어떤 여자도 한결같이 그를 오래 붙들어 
두지는 않았다. 그는 나이가 아무리 어린 여자나 아무리 아름다운 여자라고 
해서 애정의 표시에 차이를 두지 않았다. 그는 결코 중도에서 슬며시 
때려치우는 그런 사랑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를 둘러싼 여자들 가운데에서는 
사흘이나 혹은 열흘 정도의 사랑의 밤을 보낸 다음에야 비로소 그를 묶어 놓은 
여자도 있었고, 첫날밤부터 흡족하게 해주는 여자도 있었다.
  그에게 사랑과 성의 쾌락은 생명의 참으로 따뜻하게 해줄 수 있을 뿐 아니라. 
더불어 가치를 가지고 채워 줄 수 있는 오직 하나의 것이었다. 그는 
명예욕이라는 것을 몰랐다. 그에게는 주교나 거지나 똑같은 인간이었다. 소득도 
재산도 그를 붙들어 놓을 수는 없었다. 그는 그런 것을 업신여겼다. 그런 것을 
위해서라면 조금도 희생을 하지 않으리라. 간혹 돈을 좀 벌 기회가 있어도 
아낌없이 던져 버렸다. 여자와의 사랑과 성의 유희가 그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그리하여 그가 가끔 슬픔과 권태의 늪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원인을 캐내고 보면 결국 성적 쾌락의 무상함이 그 내면에 자리잡고 있었다. 
헛되고 황홀한 애정의 연소, 그리움에 애태우는 한순간의 불꽃, 순식간에 꺼져 
버리는 소멸, 이것이 그에게는 모든 체험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 같았으며, 
이것이 그에게는 인생의 모든 환희와 번뇌의 상징이 되었다. 그 비애와 무상의 
전율에 대해서도 그는 사랑을 대하는 것과 다름없이 몸과 마음을 바치고 
있었다. 이 우수도 또한 사랑이요 둘도 없는 쾌감이었다. 애정의 환희가 그 
순간에 있어서는 가장 고귀하고 가장 행복한 것이라 하더라도 또한 다음 
순간에는 사라져 소멸해 버리듯이, 아무리 몸에 밴 고독과 우수에 젖어 있어도 
별안간 소망에 휩쓸려 들어가 인생의 밝은 면으로 새롭게 몸과 마음을 맡기게 
되는 것이었다. 죽음과 쾌락은 하나였다. 생명의 어머니를 사랑이나 환희라고 
부를 수도 있고, 그것을 무덤이나 부패라고 부를 수도 있었다. 어머니는 이브요, 
행복의 원천인 동시에 죽음의 원천이기도 했다. 어머니는 영원히 생산하는 
동시에 또한 영원히 죽었다. 그가 어머니의 자태를 그의 마음속에 오래오래 
간직하고 있으면 있을수록 그것은 비유가 되고 거룩한 상징이 되었다.
  그는 언어나 의식으로서가 아니라 보다 깊은 피의 자각을 통해서 자신의 
행로가 어머니를 향해 쾌락을 향해 죽음을 향해 치닫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버지에게서 이어받은 생명적인 것, 즉 정신이나 의지는 그의 보금자리가 
아니었다. 그런 곳은 나르치스의 보금자리일 뿐이었다. 골드문트는 비로소 
친구의 말이 전신에 와닿고 있음을 느낀 것은 물론, 그 친구의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으며 그 친구가 자신의 대립자라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이것을 요한 상에다 새겨 형상화시켰다. 눈물을 쏟으며 나르치스를 그리워할 
수는 있었다. 그의 꿈을 꿀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를 따라가거나 그와 같이 
되는 것은 불가능했다.
  골드문트는 어떤 보이지 않는 감각으로 자신이 예술가적 기질의 비밀이나 
예술에 대한 일시적이며 과격한 증오심 같은 것을 어슴푸레 짐작하고 있었다. 
생각도 없이, 막연히 감정적인 기분에서 여러 가지 비유의 형태로 그렇게 
짐작을 하고 있었다. 즉 예술은 아버지의 세계와 어머니의 세계의 결합, 정신과 
피의 결합이라는 것을. 예술은 가장 감정적인 세계에서 시작하여 가장 추상적인 
세계로 흘러갈 수가 있었다. 혹은 순수한 관념의 세계에서 시작하여 가장 
풍부한 피의 살덩이로 끝날 수도 있었다. 정말 숭고한 예술 작품, 교묘한 마술일 
뿐 아니라 영원의 비밀로 가득 차 있는 예술 작품, 이를테면 선생이 만든 
성모상과 같은 예술 작품, 너무나 완벽해서 오류가 하나도 없는 순수한 예술 
작품, 그런 작품은 그 위험하기 이를 데 없는 그리고 부드럽게 웃음 짓는 
이중의 얼굴을, 그 남성적이며 여성적인 면을, 본능적인 것과 순수한 정신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만 약 골드문트가 어느 때든 인류의 어머니 이브의 형상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하는 날에는 그 이중의 얼굴을 가장 잘 표현해낼 것이다.
  골드문트에게는 예술과 예술적 활동 속에서만 가장 심오한 그 대립을 융화할 
가능성, 혹은 그의 성질의 분열을 상징하는 훌륭하고 언제나 새로운 비유의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예술은 결코 순수한 선사품은 아니었다.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어디서든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예술은 수많은 값을 
치러야 하는 것이었다. 예술은 희생을 요구했다. 골드문트는 3년 이상이나 
애정의 쾌락 다음으로 알고 있는 최고의 불가결한 것, 즉 자유를 위해 
희생되었다. 자유와 방랑, 유랑 생활의 자유 분방함,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독립성, 이런 모든 것을 그는 포기했던 것이다. 그가 간혹 발작을 일으켜 
작업실이나 작업을 소홀히 한다든가 하면 사람들은 그를 변덕쟁이에다 
고집불통에 이기적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그 자신에게 있어서는 그런 
생활이 가끔 그를 참을 수 없는 경지에까지 몰고 가는 것이었다. 그것은 굴종적 
생활을 의미했다. 그가 복종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은 선생이나 장래, 생활의 
필요성 때문도 아니었다. 그것은 예술 그 자체 때문이었다. 겉으로 보아서는 
매우 정신적인 것 같은 예술도 얼마나 많은 하찮은 것들을 필요로 하는가! 
예술도 비바람을 막는 지붕이나 연장, 통나무, 점토, 물감을 원했고 모두 돈을 
필요로 했다. 또한 노동과 인내도 필요했다. 그는 예술을 위해 야성적인 숲속의 
자유를, 허허벌판의 도취를, 위험하기는 하지만 쓰디쓴 쾌감을, 불행에의 긍지를 
희생하고 말았다. 그는 숨이 막힐 것 같은 고뇌 속에서도 다시금 새롭게 자기의 
희생을 바쳐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이미 희생으로 바쳐진 일부분을 후에 다시 생각해 냈다. 그는 현재의 
노예적인 질서와 뿌리를 내린 생활에 대해서 사랑과 연관성을 가진 일종의 
모험이나 경쟁 상대와의 격투로써 조그만 복수를 했다. 감금된 그의 본성인 
야만성과 억압된 힘은 온통 들고 일어서서 탈출구를 찾아 헤맸다. 그는 
무법자로 널리 알려져 있기도 했는데 심지어는 그를 무서워하여 피하는 이도 
있었다. 처녀를 찾아가는 길목이나 무도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별안간 어두운 
골목길에서 습격을 받아 몇 대 얻어맞는 때도 있었다. 이럴 때 그는 으레 
번개처럼 날쌔게 몸을 솟구쳐 막아 내며 공격을 취했다. 숨이 차서 헐떡거리는 
놈을 때려눕히고는 주먹으로 턱밑을 한 대 갈기곤 했다. 그러고는 머리카락이나 
멱살을 쥐어잡았다. 이렇게 하면 침울한 기분을 잠시 동안 잊을 수 있었고 그런 
것들은 또 여자들에게 호감을 사기도 했다. 그러한 모든 사건들이 그의 
일상들을 풍요롭게 채워 주고 있었다.
  사도 요한의 제작이 계속되고 있을 동안에는 모든 일에도 의미가 이었다. 
작업은 오래 끌었다. 얼굴이나 손발의 모형을 제작하는 맨 마지막의 미묘한 
작업은 엄숙하고 끈기 있게 정신을 집중시켜야 했다. 직공들이 일하는 작업실 
뒤켠의 조그만 통나무집에서 그는 일을 끝마쳤다. 날이 새자 조상은 
완성되었다. 골드문트는 비를 꺼내어 집안을 말끔하게 쓸었다. 요한의 머리카락 
속에 쌓인 나무밥을 하나 남기지 않고 조심조심 털어 냈다. 그리고 그 앞에서 
한참 동안을 서 있었다. 그는 흔히 경험할 수 없는 위대한 체험의 감정에 
엄숙하게 젖어 있었다. 한평생을 사는 동안에 이런 감정을 아마 한번쯤 더 겪을 
수가 있을는지, 어쩌면 이것으로 끝맺을지도 모른다. 남자는 결혼식날이나 
기사로 임명되는 날에, 여자라면 첫 해산을 한 다음에 이 같은 감동을 마음속 
깊이 느낄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 그것은 드높은 감격이며 심오한 엄숙함이지만 
동시에 벌써 그 숭고한 단 한 번의 체험이 지나가서, 틀에 박힌 평상시의 
생활에 휩쓸려 들어가고 말 것을 은근히 두려워하는 그런 감정이었다.
  그는 그대로 선 채 고개를 들어 무엇을 기웃거리는 얼굴, 아름다운 사랑의 
사도처럼, 꽃봉오리가 방긋 웃는 듯한 미소, 고독하고 적막한 헌신과 경건으로 
아로새긴 표정.... 이런 모습의 형상에서 그의 소년 시절의 지도자이며 친구인 
나르치스가 서 있는 것을 보고 있었다. 이토록 아름답고 경건하고 정신적인 
얼굴, 허공에 뜬 것 같은 날씬한 이 모습, 품위와 믿음의 상징인 듯 위로 
쳐들어진 기다란 두 말.... 이 온갖 것들은 젊음과 내면적인 음악에 충만해 
있으면서도 번뇌와 죽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하지만 절망과 혼란과 반항은 알지 
못했다. 그 영혼은 그런 고귀한 표정의 이면에서 즐거움이나 슬픔을 가지고 
있겠지만 순수한 균형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 영혼은 너무 순수하여 조화에 
시달리고 있지 않았다.
  골드문트는 서서 작품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최초의 청춘과 우정의 기념에 
대한 기도로서 시작된 것은 걱정과 우울한 생각의 폭퐁우로서 끝을 맺었다. 
지금 이곳에 그의 작품은 서 있다. 이 아름다운 사도는 언제까지나 여기 남겨질 
것이요, 그 버들가지처럼 보드라운 젊음은 끝없이 계속될 테지. 하지만 그것을 
만들어 놓은 그는 벌써 그 작품과 이별을 나누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내일이면 
이미 그것은 그의 것이 아니다. 이제는 그의 손길을 기다리지도 않을 것이다. 
이제는 그의 손길을 기다리지도 않을 것이다. 이제는 그의 손길에서 자라나 
꽃을 피우지도 않을 것이다. 이제는 그에게 생활의 피난처나 위안이나 의미를 
가져다주지도 않을 것이다. 그는 허무한 생각에 잠겼다. 그는 오늘이라도 이 
요한 상과 이별을 고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곳에서는 
이제 더 이상 할 일이 없었다. 그가 만들어야 할 형상은 그의 영혼 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도 동경하던 조상, 인류의 어머니 이브의 형상에는 
아직도 좀처럼 그의 손이 미치질 못했다. 이제부터 다시 천사의 입상을 
문지르거나 장식을 새겨 가야만 하는가?
  그는 용기를 내어 그 자리를 떠나 선생의 작업실로 들어갔다. 조용히 안으로 
들어가서 니콜라우스가 그를 알아보고 말을 건네올 때까지 그는 문에 서서 
기다렸다.
  "골드문트, 무슨 일이지?"
  "제가 만든 조각상이 완성되었습니다. 식사하러 가시기 전에 한번 들러봐 
주십사 하구요."
  "가구말구, 지금 당장 가보지."
  두 사람은 건너가서 실내가 더 환해 보이도록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니콜라우스는 이미 잊어버릴 정도로 이 작품의 진행 상태에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골드문트의 일에 방해를 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골드문트는 선생의 
정색한 푸른 눈동자가 기쁨에 차오르는 것을 보았다.
  "잘했네."
  선생의 말이었다.
  "썩 잘됐어, 골드문트. 이 작품으로 이제 수습은 졸업일세. 자네는 벌써 
수업을 끝마쳤어. 나는 자네의 이 조각품을 조합 사람들에게 보여, 선생이 되는 
자격증을 자네에게 내어 주길 신청하겠네. 자네는 그만한 일을 해내었으니 
말일세."
  골드문트는 조합을 별로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선생의 말이 얼마만큼의 
칭찬을 의미하고 있는가를 알고는 기뻐했다.
  니콜라우스는 다시 한 번 천천히 요한 상의 주위를 돌아보면서 한숨을 내쉬며 
말을 내뱉었다.
  "이 조상은 경건함과 밝음에 충만해 있네. 엄숙하지만 그 속에는 행복과 
평화가 깃들어 있어. 사람들은 이 상을 보고 매우 명랑하고 쾌활한 심성을 가진 
사람이 이것을 만들었으리리고 생각할 거야."
  골드문트는 빙긋이 웃었다.
  "제가 이 작품에서 모델로 취한 사람은 제 자신이 아니고 저의 친구라는 것을 
선생님은 알고 계실 겁니다. 이 조상에 밝음과 평화를 가져다 준 사람은 그 
친구이지 제가 아닙니다. 이것을 만든 것은 사실 제가 아니고 그 친구가 저의 
영혼 속에다 이것을 불어넣어 준 것입니다."
  "그렇다고도 할 수 있겠지."
  니콜라우스가 말했다.
  "어떻게 해서 이런 형상이 만들어진 것인가 하는 것은 하나의 비밀이야. 나는 
겸손하지는 않지만 이렇게 말해야만 하겠네. 기교라든가 정성에 있어서는 
자네한테 뒤지지 않지만 진실성에 있어서는 자네의 작품에 미치지 못하는 
것들을 많이 만들었다는 것을. 아마 자네 자신도 이런 작품을 두 번 다시 
만들어 낼 수가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을 테지. 결국 이것은 비밀이란 
말일세."
  "이 조상을 완성되었을 때 저도 이것을 보고 이런 것을 다시는 만들지 
못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 저는 며칠 후에 다시 유랑의 길에 
오르려 합니다."
  니콜라우스는 깜짝 놀라 못마땅한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다시 
준엄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세. 자네에게는 지금부터 진짜 일이 시작되는 
걸세. 지금은 떠날 생각을 할 때가 아니란 말이야. 아무튼 오늘은 좀 쉬게나. 
점심은 내 집에서 함께 하도록 하세.'
  점심때, 골드문트는 머리에 빗질을 하고 말쑥한 차림으로 스승의 집을 
찾아갔다. 그는 선생으로부터 식사 초대를 받는 것이 얼마만한 의의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얼마나 드문 호의인가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입상들로 꽉 차 
있는 복도를 향해서 계단을 올라갈 때, 그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아담하고 
고요한 방으로 들어갔었던 지난날만큼 존경과 불안스러운 기쁨으로 가득 차 
있지는 않았다.
  리스벳도 정성스럽게 화장을 하고 반짝거리는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식탁에는 잉어와 포도주 이외에 또 하나 뜻하지 않은 것이 놓여져 있었다. 
선생이 그에게 선사하려고 가죽 지갑을 준비했던 것이다. 그 안에는 금화가 두 
닢 들어 있었다. 완성시킨 조각품에 대한 보수였다.
  부녀는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골드문트에게 이야기를 건네기도 하고 서로 
건배를 하자고 제의하기도 했다. 골드문트의 눈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품위도 있고 다소 거만하다 싶은 그 아름다운 처녀를 
요모조모 뜯어보았다. 그의 두 눈은 그녀가 그의 마음을 얼마나 뜨겁게 
사로잡고 있는가를 감추지 않았다. 그 처녀가 그에게 공손한 태도를 보여 
주기는 했지만 얼굴이 빨개지기는커녕 따스한 느낌조차 주지 않는 데 그는 크게 
실망했다. 그는 다시 아름다운 그 얼굴로 하여금 이야기를 하게 하고 또 그 
비밀을 고백하도록 해보고 싶은 마음이 불현듯 일어났다.
  식사 후 그는 자리를 물러나 잠시 복도에 진열된 입상들을 구경했다. 
오후에는 갈 곳이 없는 부랑자처럼 걷잡을 수 없는 허전한 가슴을 안고 시내를 
한바퀴 돌았다. 그는 정말 뜻하지 않게 스승으로부터 분에 넘치는 칭찬을 
받았다. 그런데도 왜 그는 그것이 기쁘지 않을까? 왜 그 후한 경의를 마음껏 
음미하지 못하는 것일까?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라 그는 말을 빌려서 그가 처음으로 스승의 작품을 
보고서 그의 이름을 알게 됐던 수도원으로 향했다. 그것은 불과 몇 년 전의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되돌아 생각해 보니 까마득한 옛날 같았다. 그는 
성당에서 성모상을 찾아내서는 다시 자세히 뜯어보았다. 그 작품은 지금도 
그때와 같이 그의 마음을 빼앗고 무서운 힘으로 압도해왔다. 그것은 그의 요한 
상보다 더 아름다웠다. 그 깊이와 신비에 있어서는 그의 것과 마찬가지였으나 
기교에 있어서는 어디 한 군데 부자유스런 데가 없고, 섬세한 점에 있어서는 
그의 것보다 훨씬 훌륭했다. 그는 지금 이 작품에서 예술가만이 볼 수 있는 
깊은 면을 보았다. 형태의 미묘한 움직임, 유연한 두 손과 손가락의 시원스런 
선, 통나무의 부드러운 구조와 예민한 감각 등과 그런 여러 가지 아름다운 면은 
전체와 그 환상의 단순함이나 깊이와 비교해 본다면 문제도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틀림없이 거기에 존재하고 있었으며 대단히 아름다웠다. 그것은 은혜를 
받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손재주를 근본부터 체득하고 있을 경우에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되기까지는 그의 영혼 가운데 형상을 
품고 있을 뿐만 아니라 눈과 손의 수련을 쌓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지만 
체험과 관찰과 사랑의 잉태에서 뿐만 아니라 세밀한 부분까지 완전히 솜씨에 
의해서 만들어질 수 있는 것, 그런 아름다운 것을 언젠가 한번 창조해 내기 
위해서, 자유를 희생하고 크나큰 체험을 희생해서까지 일생을 그것에 바칠 
가치가 있을까? 그것은 하나의 커다란 의문이었다.
  골드문트는 밤이 이슥해진 다음에야 지친 말을 끌고 시내로 돌아왔다. 어느 
목로주점 하나가 아직 문을 닫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그곳에 들어가 빵을 먹고 
포도주를 마셨다. 그런 다음 그는 어시장 가에 있는 그의 방으로 올라갔다. 
자신의 마음을 종잡을 수도 없었고 모든 것이 의혹에 가득 차 있었다.

         12

  다음날, 골드문트는 작업장에 나갈 마음이 내키지 않아 마음이 울적한 날이면 
언제나 그러했듯이 시내를 거닐 셈으로 밖으로 나왔다. 그는 여인들이나 
하녀들이 시장에 가는 것을 구경하기도 하고, 어시장에 있는 우물가에서 걸음을 
멈추고 생선 장수들이나 선머슴처럼 억센 아낙네들을 쳐다보기도 했다. 그들은 
생선전을 벌여 흥정을 붙이며 은빛의 신선한 생선을 통 속에서 끄집어내어 
손님들에게 내보이고 있었다. 생선들은 괴로운 듯 아가리를 벌리고 황금색 
눈알을 불안스레 치뜨고 소리없이 죽어가거나 맥없이 버둥대며 죽음에 저항하고 
있었다. 지금껏 몇 번이나 느껴온 것이었지만 이들 물고기에 대한 동정과 
인간에 대한 슬픈 불만이 그의 가슴에 충격을 주었다. 왜 그들은 이다지도 
멍청하고 얼간이 같고 생각도 못할 만큼 어리석고 눈치가 없는 것일까? 왜 생선 
장수들이나 그 아낙네들, 값을 깎는 손님들은 모두 다 그 점을 깨닫지 못할까? 
어째서 이 생선의 아가리가,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는 눈알이, 한없이 버둥대는 
꼬리가, 소용도 없는 그 무거운 절망적인 투쟁이, 무어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신비에 가득 찬 물고기의 참을 수 없는 이 움직임이, 가냘픈 마지막 
떨림이, 그리고 숨이 끊어져 흐뭇해하는 대식가의 식탁을 위해 애처로운 토막 
신세가 되어 가는 꼴이 그들의 눈에는 아무렇지도 않단 말인가? 인간들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일까? 불쌍하고 사랑스런 물고기가 그들 눈앞에서 죽어가도, 그의 스승이 
성자의 얼굴에다 인간 생활의 모든 희망이나 고귀함이나 괴로움이나 가슴 죄는 
듯한 어두운 불안을 전신이 오싹하도록 뚜렷하게 나타내 주어도, 그들은 여전히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것도 그들 마음을 동요시키지 않는가? 그들은 모두 
즐거워하고 있거나 일을 하고 있으며, 점잔을 빼거나 서두르며, 울부짖거나 
수군거리며, 트림을 하며, 호들갑을 떨거나 익살을 부리며, 한두 푼 때문에 
으르렁거리며 싸운다. 모두들 기분이 좋아 아무 불평도 하지 않은 채 자신과 
세계가 크게 만족하고 있다. 그네들은 돼지였다. 아니, 돼지보다도 훨씬 더 
흉악하고 막된 것들이다. 골드문트는 자신도 적지 않게 그네들과 자주 어울려 
즐거운 기분에 날뛰었으며 여자 뒤를 쫓아다녔었다. 연방 킬킬거리면서 태연히 
구운 고기를 접시에다 집어먹었다. 하지만 언제나 별안간 신이 내린 사람처럼 
즐거움과 침착성을 잃고 자기 만족이나 영혼의 안일과 자아 도취는 언제나 
그에게서 없어져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그는 고독 속이나 명상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고통이나 죽음이나 모든 영위하는 것의 의심스런 점을 관찰하고 
심연을 굽어살피는 것이었다. 그러다가도 의미가 없는 것이나 무시무시한 것을 
응시하고 있는 데에 몰두하고 있으면 갑자기 어떤 기쁨, 격렬한 열정,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고, 스케치를 해보고 싶은 욕망이 불현듯 일어나는 것이었다. 
꽃향기를 맡거나 고양이와 장난을 치고 있는 가운데서 인생과의 참된 화합이 
회복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오늘에라도, 내일에라도, 아니 모레라도 회복되리라. 
그렇게 되면 세계는 다시 살 만한 곳이 되리라. 하지만 또다시 정반대의 것이, 
비애나 명상이나 죽어가는 고기라든지 시들어가는 꽃에 대한 절망적이면서 
동시에 가슴 쓰린 사랑을 느끼게 되고 돼지처럼 멍청하게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하릴없이 먹기만 하는 인간에 대한 공포 등이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그럴 때는 
한결같이 안타까운 호기심과 가슴 답답한 심정을 가지고, 그가 늑골 사이를 
칼로 찔러 피투성이가 된 시체를 전나무 숲에 그대로 팽개친 빅토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빅토르는 그 뒤 어떻게 되었을까? 산짐승들한테 송두리째 
먹히고 말았을까, 흔적이라도 남아 있을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히는 것이었다. 
물론 뼈다귀와 머리카락은 남아 있을 테지. 그것이 형태를 버리고 흙으로 변해 
버릴 때까지 얼마쯤 걸릴까? 수십 년? 아니면 불과 몇 년?
  아, 오늘도 동정의 눈길을 고기한테 보내고 목에서 치밀어오르는 욕지기를 
참으며 그는 시장 상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견딜 수 없는 우울증의 세계와 
자기 자신에 대한 쓰디쓴 적개심으로 가슴이 꽉 차오를 때마다 빅토르를 
생각한다. 어쩌면 그의 시체는 사람들에게 발견되어 묻히지 않았을까? 머리에는 
머리카락이, 눈두덩 위에는 눈썹이 남아 있을까? 모험과 사건과 뛰어난 익살과 
특이한 농담으로 충만되어 있었던 빅토르의 생활 중에서 대체 무엇이 남아 있단 
말인가? 그의 살해자가 가지고 있는 몇 가지 단편적인 추억 이외에 보통 사람 
같지 않았던 이 인간의 존재 가운데서 그 무엇이 생존을 계속하고 있을까? 그가 
지금껏 사랑한 여자들의 꿈속에 빅토르와 같은 인간이 있었을까? 아, 모든 것은 
지나가고 흘러가버렸다.
  몇 년 전, 예술에 대한 열망과 니콜라우스 선생에 대한 불안스럽고 깊은 
존경을 어찌할 길이 없어 이 도시를 ㅊ아왔을 때 그 자신의 가슴속에는 세상 
모든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꽃이 되어 피어나고 있었던가? 하지만 그중에서 
아직 살아남아 있는 것은 무엇인가? 물건을 훔치려 하던 불쌍한 빅토르의 모습 
이외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누구든 당시의 그에게, 니콜라우스가 그를 
자기와 동등한 사람이라고 인정해 주고 조합에 대해서 그를 위해 스승의 
자격증을 요구하는 날이 오리라고 말해 주었더라면, 그는 아마도 이 세상의 
모든 행복을 손아귀에 쥐었다고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보니 그것도 
시들고 말라 버린 꽃, 고적한 적막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골드문트는 순간적으로 하나의 얼굴을 보았다. 
그것은 단지 순간적인 번뜩임에 지나지 않았지만, 생명의 심연에 웅크리고 앉은 
이브의 얼굴이었다. 희미한 미소를 띤 아름답고도 무서운 눈초리로 탄생, 죽음, 
꽃, 속삭이는 가을 잎사귀, 예술, 부패, 이런 것들을 향해서 방긋이 미소짖고 
있는 얼굴을 본 것이다. 인류의 어머니에게는 모든 게 다 마찬가지였다. 그 
음울한 미소는 달처럼 만물 위에 걸려 있었다. 우울하게 명상에 잠겨 있는 
골드문트나 생선 시장의 돌바닥 위에서 죽어가는 잉어나, 쌀쌀한 처녀 
리스벳이나, 그렇게도 그의 금화를 훔치고 싶어 못 견뎌 하던 빅토르 모두 
이브에게는 사랑스런 존재였다.
  순간 번뜩임은 사라지고 신비에 가득 찬 어머니의 얼굴은 안개에 걷히듯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그 창백한 빛은 골드문트의 영혼 한가운데서 사라지지 
않고 생명의 고동과 숨막히는 그리움의 큰 파도가 되어 그의 가슴을 
도려내기라도 하듯 밀려왔다. 아아, 그는 생선 장수들이나 부지런한 사람들과 
같은 그런 종류의 행복과 배부름을 원하지 않았다. 그런 것들은 아무려면 
어떤가. 아, 실룩거리는 창백한 이 얼굴, 익을 대로 익어 통통한 늦여름철과 
같은 입, 무거운 그 입술 위에 이름 지을 수 없는 죽음의 미소가 바람과 
달빛처럼 스쳐가 버렸다.
  스승이 사는 집 쪽으로 골드문트는 걸음을 옮겼다. 니콜라우스가 안에서 
작업을 마치고 손을 씻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기다리다가 곁으로 다가갔다.
  "선생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손을 씻으시고 웃옷을 입으실 
때까지의 시간이면 충분합니다. 두 번 다시 이런 말씀을 드릴 수 없으리라고 
미리 알려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한 사람의 인간과 이야기하지 않고는 못 견딜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그것을 이해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입니다. 하지만 
제가 이야기를 하고 싶은 분은 유명한 작업장을 가지고 여러 도시나 수도원에서 
명예로운 의뢰를 받고 있고 두 사람의 조수와 훌륭하고 안락한 가정을 가지신 
그런 사람은 아닙니다. 제가 알고 있는 제일 아름다운 조각품, 즉 저 수도원의 
성모상을 만드신 바로 그 예술가를 향해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저는 그분을 
존경하고 받들어 그분처럼 되는 것이 이 세상에서 최대 목표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지금 하나의 조각품, 요한 상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스승님의 성모상만큼 
완전무결하게 만들 수 없었지만 그와 비슷하게는 되었습니다. 저는 다른 입상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저에게 어느 것을 만들라고 강요해도 전 아무런 입상도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요원하고 거룩한 하나의 입상만은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저는 언제든지 한번 만들어 내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만들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만들 수 있으려면 저는 더욱 많은 
경험과 체험을 쌓아올리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삼사 년 안에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며 십 년 후, 혹은 더 많은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며, 어쩌면 
영원히 못 만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스승님 저는 그때까지 입상을 칠하거나 
제단을 문지르기는 싫습니다. 일터에서 직공 생활을 하기도, 돈을 벌기도, 보통 
직공들처럼 지내기도 싫습니다. 저는 방랑 생활을 하며 여름과 겨울을 느끼고, 
세상을 구경하고, 그 세상의 아름다움과 무서움을 체험해 보고 싶습니다. 
배고픔과 갈증에 허덕이고, 여기 선생님 밑에서 생활하고 습득한 모든 것을 
털어버리고 해방되고 싶습니다. 저도 언젠가는 선생님의 성모상처럼 아름답고 
마음을 깊이 감동시키는 작품을 만들고 싶지만, 선생님처럼 되고 선생님의 생활 
방식을 본받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니콜라우스는 손을 씻고 물기를 닦은 다음, 돌아서며 골드문트를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정색을 하고 하고 있었으나 화가 나 있지는 않았다.
  니콜라우스가 말했다.
  "자네가 하는 이야기를 나는 들었네. 이제 그쯤으로 어지간히 해두지. 일은 
많이 쌓여 있지만 자네한테 시키고 싶지는 않아. 나는 자네를 조수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으니까 말일세. 자네는 자유를 절실히 원하고 있어. 이봐, 골드문트. 
나는 여러 가지 것에 대해 자네하고 의논을 하고 싶어. 그러나 지금은 아니야, 
한 이틀 정도 시간을 갖기로 하지. 그 동안 자네는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게나. 
이봐, 나는 자네보다 훨씬 나이도 많이 먹고 여러 가지 경험도 해봤어. 나는 
자네하고 생각은 다를지 몰라도 자네의 기분이나 의도는 이해하겠네. 며칠 안에 
자네를 부르러 보내지. 그때 자네의 장래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세. 나는 여러 
가지 계획을 세우고 있다네. 그때까지만 참고 기다리게! 마음을 쏟고 있었던 
작품을 완성시켰을 때, 그때의 마음이 어떤가를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 그 
허탈한 느낌 말이야. 하지만 그것도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야."
  골드문트는 어수선한 마음으로 그 자리를 떠났다. 선생은 그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그에게 무슨 도움이 될 수 있을까?
  그가 늘 찾는 시냇가가 있었다. 수심은 그리 깊지도 않았으며 온갖 
잡동사니들이 바닥을 꽉 메우고 있는 그런 곳이었다. 어부들의 집에서 그 
시냇물 속에 여러 가지 잡동사니를 던졌던 것이었다. 그곳을 찾아 둑에 자리를 
잡고 앉아 그는 물 속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물을 무척 좋아하는 편이었다. 
어떤 물이라도 그의 마음을 끌었다. 힘차게 흘러가는 물 속을 들여다보니 잘 
보이지도 않는 어둠침침한 밑바닥 여기저기에 무언가 어슴푸레 황금빛을 내며 
마치 사람의 마음을 홀리려는 듯 반짝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분명히 무엇인지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부서진 낡은 쟁반 조각이거나 팽개쳐 버린 굽은 
낫이거나 투명하고 미끌미끌한 돌멩이거나 유리를 입힌 벽돌이거나, 아무튼 
그런 것 같았다. 어쩌면 연꽃 줄기 같은 것인지도 몰랐다. 혹은 모래무지와 
같은 놈이 물 속에서 돌아누울 때 잠시 광선을 받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구별할 수 없었으나 아무튼 까만 물 밑에 가라앉은 황금 
보물처럼 어렴풋이 잠깐 비치는 그것은 이상스레 아름답고 매혹적이었다. 참된 
비밀이나 영혼의 실제 형상은 사소한 이런 물 밑의 비밀과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하자면 윤곽도 형태도 없는 요원하고 아름다운 가능성을 잠시 비춰만 
줄 뿐 포장으로 둘러쳐 있고 뜻도 애매했다. 물 밑바닥의 어둠 속에서 잠시 
동안 표현키 어려운 황금색 혹은 은색을 지닌 그 무엇이 반짝 비쳐 온다.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라 하더라도 거룩한 약속에 충만되어 있다는 것은, 마치 
반쯤 가리워진 어떤 사람의 어렴풋한 실루엣에 때로는 한없이 아름다운 
무엇이거나 듣도 보도 못한 슬픈 무엇을 알려 주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혹은 
밤길을 가는 짐 실은 마차 밑에 달린 램프가 수레바퀴가 회전하는 거대한 
그림자를 벽에 그리는 것처럼, 그 그림자의 움직임이 일순간 버질의 작품 
전체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정경이나 사건이나 이야기로 충만될 때도 있었다. 꿈 
같은 비현실적인 마법의 소재로 짜여져 그것은 무이면서도 동시에 세상의 모든 
형상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 속에서 모든 인간과 동물과 천사와 마귀의 형태를 
지니고 있으며 항상 깨어 있는 가능성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는 다시 그것에 몰두했다. 지신을 잊어버리고 흐르는 강물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형태도 없는 미광이 물 밑바닥에서 떨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왕관이나 발가벗은 여자의 어깨를 연상시켰다. 언젠가 마리아브론 
수도원 시절, 라틴어나 그리스 어의 문자 속에서 똑같은 형태의 꿈과 변화의 
마술을 본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그 이야기를 두고 나르치스하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던가? 아, 그것은 언제쯤이었을까? 몇백 년 전의 일이었을 테지? 아, 
나르치스! 그를 만나 그와 한 시간만이라도 같이 이야기를 하고, 그의 손을 
잡고, 그의 나지막하면서 영리한 목소리를 들을 수만 있다면 나는 금화 두 개를 
기꺼이 던져 버릴 수도 있으리라.
  물 밑의 금빛 반짝임이나 그림자, 넘실거리는 빛깔 등, 비현실적이며 요정의 
환상과도 같은 모든 것이 어쩌면 이다지도 아름다울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런 
모든 것들은 예술가들이 심혈을 쏟아 만들어 낸 모든 아름다운 것들과는 
정반대의 의미가 있는데도 대관절 어쩌면 그렇게도 아름답고 또한 영롱한 
것일까? 그 이름도 지을 수 없는 아름다움에 모두 형태라는 것이 없고 완전히 
신비에서만 성립되었는데 예술품의 경우는 그와 정반대로 완전하고 뚜렷한 
언어를 발산하고 있었다. 스케치되었거나 통나무에 새겨졌거나 한 것 중 머리나 
입의 선보다 더 명확한 것은 없었다. 정확하게 또한 극도로 정밀하게 그는 
니콜라우스의 작품, 마리아 상의 아랫입술이나 눈꺼풀을 묘사할 수가 
있었으리라. 거기에는 분명치 않은 것, 혼동 된 것, 흐리멍텅한 것은 한 군데도 
없었다.
  골드문트의 머리는 오직 한 가지 일로 꽉 차 있었다. 가장 명확하고 형태가 
뚜렷한 것이 가장 파악하기 힘들고 형체도 없는 것과 아주 동일하다는 것이 
어쩐지 그에게는 분명치가 않았다. 그런데도 그런 생각에 자꾸 골몰해 있을 
동안 한 가지가 명백해졌다. 즉, 어디 하나 흠잡을 만한 여지가 없이 잘 
만들어진 예술 작품의 대부분이 전혀 그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지 못하고, 
일종의 아름다움이 있는데도 지루하며 거의 보기 싫게 생각되는 이유를 알게 
되는 것이다. 일터나 성당이나 궁전은 불쾌하기 그지없는 예술품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자신도 그중 몇 개를 만드는 데 협력했다. 그런 작품은 최고의 
것으로 욕망을 돋우면서도 그것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또한 그런 작품에는 
신비라는 주제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심한 환멸감을 갖게 했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꿈과 최대의 예술 작품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신비스러움 외에 
그 무엇도 없었다.
  골드문트는 계속 생각을 이어 나갔다. 내가 사랑하고 추구하는 것은 신비라는 
것이다. 나는 때때로 신비가 번뜩이는 것을 보았다. 언제든 그것이 가능한 날이 
있게 된다면 나는 그 신비를 예술로 표현하고 이야기시키고 싶다. 그것은 
위대한 산모 이브의 형상이다. 그 신비의 본질은 다른 형상과는 달라서 
이런저런 개개의 점, 특별히 풍만하거나 수척하거나 선머슴 같거나 뛰어났거나 
힘차거나 우아하거나 한 그런 점에 있는 것이 아닌, 아무래도 융합하기 어려운 
세계 최대의 대립, 즉 출생과 사망, 호의와 잔인, 생명과 파괴 등이 이 형체 
속에서 설로 관계를 맺어 공존하고 있다는 점에 있는 것이다. 내가 이런 형체를 
생각해 낸 것이거나 또 그것이 단지 나의 사고의 유희이거나 야심에 차 있는 
예술가의 소망에 불과한 것이라면, 그다지 서운해하지도 않고 그 결점을 깨달아 
그 형상 자체도 잊을 수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생각해 낸 것이 
아니라 보았기 때문에 이브는 이미 관념이 아니다. 그것은 내 자신 속에 살아 
있다. 나는 그것을 몇 번이나 만나보았다. 내가 처음으로 이브를 어렴풋이 
감지한 것은 겨울 밤, 해산을 하는 어느 아낙네의 침대 옆에 등잔을 들고 있을 
때 였다. 그때 이브의 형상이 나의 마음속에서 호흡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따금 한동안 멀리 가버려 눈에 보이지 않게 되지만 어느 틈에 또다시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타났다. 오늘도 그렇다. 한때는 내가 가장 
사랑하던 어머니의 형상이 이 새로운 형상으로 송두리째 변해 버려 그 속에 
들어가 있다. 그는 이렇게 생각을 더듬었다.
  그는 지금 분명히 그의 현재 위치를 결정하는 데 불안을 느꼈다. 그는 지금 
나르치스와 수도원에서 이별하던 그때에 못지 않은 중대한 행로에 서 있는 
것이다. 아마 언젠가는 어머니가 모든 사람의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그의 두 
손에 의해 작품으로 탄생될 테지. 거기에 그의 목표가 있고 생활의 의미 또한 
거기에 숨어 있으리라. 그것은 그도 알 수 없었으나 단 한 가지만은 알고 
있었다. 즉, 어머니를 따르고, 어머니를 향해서 나아가고, 어머니한테 끌려가고, 
어머니에게 불려간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생명이기도 했다. 어쩌면 그는 
어머니의 형상을 만들지 못할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언제라도 항상 꿈과 예감과 
유혹으로만, 그리고 거룩한 비밀이 황금빛 반짝임으로만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쨌든 이제는 어머니를 따라야 했으며, 그의 운명을 어머니에게 
맡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머니는 그의 별이기도 했으니까.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모든 것을 결정할 때다. 모든 것은 명백해졌다. 예술은 
아름다운 것이었지만 여신도 아니요, 목표도 아니었다. 적어도 그에게는 그랬다. 
그가 따라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예술이 아니라 어머니의 부름이었다. 
손가락을 익숙하게 움직이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나? 그것의 결과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 니콜라우스 선생의 예로 보아서도 알 수가 있었다. 명예와 명성, 돈과 
안정된 생활에 이르는 것이 다른 한편으로는 그 신비를 터놓는 유일한 방법인 
내적 감각을 고갈시키고 위축시키는 길이기도 하다. 값비싸고 예쁘장한 
장난감을, 각종 사치스런 제단이나 설교단이나 성세바스찬이나 예쁘장한 
고수머리 천사의 머리를 만들 뿐이다. 정말로 잉어 눈알 속에 황금빛이나 
나비의 날개 가에 있는 부드럽고 엷은 은색이 잔털 같은 것은, 예술 작품으로 
가득 찬 화려한 응접실보다도 한없이 아름답고 훌륭했다.
  어떤 소년 하나가 노래를 부르면서 둑길을 따라 내려오고 있었다. 간간이 
노래가 멎었다. 소년은 손에 들고 있던 커다란 흰 빵을 물어뜯었다. 골드문트는 
소년을 보자 빵 한 조각을 달라고 청한 후 두 손가락으로 부드러운 쪽을 좀 
뜯어가지고는 그것을 조그맣고 동그랗게 만들었다. 그러고는 둑에 나서서 빵을 
하나씩 천천히 물 속으로 집어던졌다. 어두컴컴한 물 속에서 하얀 공 모양의 
빵이 가라앉으면서 재빨리 몰려드는 고기들에 둘러싸이는 것을 보았다. 
그러더니 결국 어느 한 마리의 입으로 삼켜지고 말았다. 그는 동그란 빵이 
차례차례로 가라앉아 사라지는 것을 흐뭇한 만족감으로 바라보았다. 그런 다음 
그는 배고픔을 느껴 그의 애인 한 사람을 찾아갔다. 푸줏간의 하녀로 있는 
여자인데 그는 그 여자를 '소시지와 햄의 여왕'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평소처럼 
휘파람을 불어 그 여자를 부엌 창문으로 불러내어서 먹을 것을 얻어 강 저쪽의 
포도밭에 올라가서 먹을 작정이었다. 포도밭의 기름지고 빨간 흙은 싱싱한 
포도나무 잎새 밑에서 힘차게 빛나고 있었다. 봄이 되면 거기에는 포도 냄새를 
은근히 풍겨주는 파랗고 조그만 히아신스가 핀다.
  하지만 오늘은 결의와 각성의 날인 것 같았다. 카트리네가 창가에 나타나 
야무지고 약간은 선머슴 같은 얼굴로 이쪽을 향해서 방긋이 웃었다. 그래서 
평상시처럼 신호를 보낼 필요가 없었다. 그는 전에 바로 이곳에 서서 그 여자를 
기다렸던 때를 잠시 떠올렸다. 그리고 동시에 지루할 만큼 확실하게, 잠시 후에 
일어날 모든 광경이 눈앞에 그려졌다. 그 여자는 그의 신호를 알아차리면 쏙 
들어가서 얼른 불에 구운 어떤 것을 손에 들고 집 뒷문으로 나타날 테지. 
그러면 그는 그것을 받아들고 동시에 그녀의 손을 어루만져 주며 그녀가 원하는 
대로 지그시 안아 준다. 그러나 그런 것이 별안간 너무나 어리석고 추잡한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는 갑자기 그녀의 선량하고 선머슴 같은 얼굴에서 넋빠진 
표정을 너무 자주 보아온 어떤 기계적인 것을, 신비가 깃들지 않은, 그에게 
적합하지 않은 것을 본 것 같았다. 그는 끝까지 평상시의 암호를 손으로 그릴 
수가 없었다.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얼어붙어 버렸다. 아직도 그 여자를 
사랑하고 있단 말인가? 아직도 정색한 태도로 그녀를 탐내고 있단 말인가? 
아니, 그는 너무 자주 이곳을 찾아들었고 너무 자주 똑같은 웃음을 보아 왔고, 
마음속에서의 소망도 없이 거기에 응해 준 것이다. 어제까지도 주저하지 않고 
할 수 있었던 것들이 오늘은 갑자기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녀는 아직도 창가에 
서 있었으나 그는 벌써 돌아서서 이제 두 번 다시는 그곳에 가지 않을 결심을 
하고 골목길 안으로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어떤 다른 놈이 그 젖가슴을 
어루만질 테지! 어떤 다른 놈이 그 훌륭한 소시지를 먹고 말 테지! 도대체 이 
포만한 도시에서 매일 먹기만 하고 낭비만 일삼는 것은 아니었던가? 돼지 같은 
이곳 시민이 왜 그리 게으르고, 사치에 물들고, 까다로운 성미만 갖고 있는 
것인지! 그들 때문에 거의 매일 수많은 돼지들과 송아지들이 도살되고, 수많은 
생선들이 강물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신도 얼마나 사치에 물들고 
타락하였으며, 타락한 이곳 주민들과 구역질 날 정도로 표정이 달라지고 
있었던가! 그래도 유랑하던 때, 눈으로 하얗게 뒤덮인 들판에서 맛본 바싹 마른 
오얏이나 묵은 빵껍질이 여기서 편안하게 맛보는 조합이 성찬보다도 더 맛이 
있었다. 오, 유랑이여! 자유여! 달빛이 교교한 황무지여! 아침이 되어 이슬이 
맺힌 풀밭에서 희미하게 보이던 짐승의 발자국이여! 이곳 도시의 
주민들에게서는 모든 것이 값싸고 가볍기만 했다. 사랑마저도, 그는 그러한 
것에는 어느새 싫증이 나버렸다. 그는 순간적으로 그런 것에 굴욕을 느꼈다. 
이곳 생활은 이에 의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그것은 앙상한 뼈다귀와 같았다.
  스승이 모범이었고, 리스벳이 공주였을 동안에는 그 생활은 아름다웠으며 
의의가 있었다. 그가 요한 상을 만들고 있을 동안은 그래도 견딜 만했다. 
이제는 그것도 끝나고, 향기는 바닥이 드러났고, 꽃은 시들고 말았다. 한없이 
그를 괴롭히고 한없이 그를 도취시키기를 그치지 않던 무상의 감정이 격심한 
파도로 그를 사로잡고 말았다. 뼈다귀와 먼지밖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하지만 한가지는 남았다. 그것은 영원한 어머니, 슬픈 사랑의 미소와 신비스런 
사랑의 미소를 머금은 태고적의, 그리고 영원히 앳된 어머니였다. 잠시 동안 
그는 다시 어머니를 보았다. 머리 위에 별이 이고 있는 거대한 여인이었다. 
세상의 끝에서 꿈꾸듯 웅크리고 앉아 부드러운 손으로 꽃을 하나씩 하나씩, 
생명을 하나씩 하나씩 따서는 천천히 그것을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있는 
것이었다.
  골드문트가 한 가닥 시든 생명이 자신의 등 뒤에서 퇴색해가는 것을 느끼며 
고별의 슬픈 광기 속에서 정든 마음을 떠돌고 있을 때, 니콜라우스 선생은 
골드문트의 장래를 걱정하며, 안절부절 못하는 그를 언제까지나 정착시켜 놓기 
위해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그는 골드문트를 위해 자격증을 발부하도록 
조합을 설득하는 것은 물론, 그를 제자로서가 아닌 협력자로서 언제까지나 자기 
집에 붙들어 놓아 중요한 주문에 대해서는 일일이 그와 의논해서 만들고, 
거기에서 얻어지는 수입을 분배할 계획까지 세웠다. 그것은 리스벳을 위해서도 
하나의 모험일 수가 있었다. 그렇게 되면 이 젊은이는 그의 사위가 될 것은 
물론이었다. 요한 상과 같은 조각품은 니콜라우스가 이제껏 고용해 본 제일 
솜씨 있는 조수도 결코 만들 수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그 자신도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착상과 창조력에 부족을 느끼고 있었던 터라 그의 유명한 
작업장이 그저 너절한 수공업자들로 들끓는 곳으로 전락되는 것을 보기가 
싫었다. 골드문트를 붙잡기 힘들겠지만 크게 작정하고 설득시켜야 했다.
  그래서 선생은 깊게 생각을 거듭했다. 골드문트를 위해서 뒤뜰에 있는 
작업장을 개조하여 확장하고 다락방을 그에게 내어 줄 거고 조합에 가입시키기 
위해 훌륭한 새옷을 마련할 것 등. 그리고 미리 리스벳의 의사도 물어 보았다. 
리스벳은 점심식사를 같이 한 이래 똑같은 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터라 아무 
반대도 하지 않았다. 그 젊은이가 정착을 하여 선생이라 불리게 된다면 
그녀로서도 그에게 아무 불만이 없었다. 니콜라우스 선생이나 일로서는 이 
집시를 길들이지 못한다 하더라도 리스벳이라면 꼭 성공하고 말리라.
  이렇게 모든 것은 치밀히 계획되어 목표인 새를 잡기 위한 미끼가 그물 뒤에 
교묘하게 달려 있었다. 그리하여 어느 날 골드문트는 다시 식사에 초대되어 
아름답게 새로 단장한 방에 앉아서 스승과 그의 딸과 잔을 나누었다. 드디어 
딸이 자리를 뜨자 니콜라우스는 그의 크나큰 계획과 제안을 꺼냈다.
  "자네는 내 말을 이해해 주겠지."
  스승은 뜻밖의 말을 하고 난 다음에 이렇게 덧붙였다.
  "말할 것도 없지만 젊은 사람이 일정한 수업 연한도 마치지 않고 이렇게 빨리 
스승이 되어 따뜻한 둥지 속에 들어가 본 예는 지금까지 전혀 보지 못했어. 
크게 성공한 것이라고나 할까, 골드문트."
  골드문트는 놀랍고 답답한 마음으로 스승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아직도 
반쯤 남아 있는 잔을 옆으로 밀어 놓았다. 하는 일 없이 나날을 보냈기 때문에 
니콜라우스로부터 심한 소리나 듣지 않으면 조수로서 스승의 집에 남아 
있으라는 제안을 받을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사태는 이렇게 되고 말았다. 
스승과 이렇게 마주 않아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슬프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답답한 노릇이기도 했다. 그는 얼른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선생의 호의에 찬 그의 제안이 금세 기쁨과 겸양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자 
얼마간 긴장되고 실망한 얼굴로 일어서면서 말했다.
  "나의 제안이 뜻밖이었기 때문에 우선 자네는 잘 생각해 보고 싶겠지. 그러나 
그게 내 마음에 들지 않는군. 자네가 크게 기뻐해 주리라 믿었네. 하지만 
상관없어. 그럼, 생각할 기회를 주지."
  "선생님"
  골드문트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진정해 주십시오! 선생님의 호의에 대해서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이 미숙한 저를 제자로서 대우해 주신 선생님의 인내심에 대해서도 감사를 
드립니다. 선생님께 받은 은혜를 저는 결코 잊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생각해 
볼 필요는 느끼지 않습니다. 저는 벌써부터 결심한 바가 있으니까요."
  "어떤 결심을 하고 있나?"
  "스승님의 말씀에 따르기 전에, 스승님의 친절한 제안을 받기 전에 저는 
결심한 바가 있었습니다. 저는 더 이상 이곳에 머무르지 않을 겁니다. 저는 
떠나렵니다."
  니콜라우스는 얼굴이 창백해지며 어두운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스승님"
  골드문트는 간절하게 호소했다.
  "스승님께 심려를 끼쳐 드리고 싶진 않습니다. 제가 결심한 것을 스승님께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그것을 이제 변경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떠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나그네가 되어 자유를 찾아가야 합니다.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정답게 헤어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는 스승에게 손을 내밀었다. 눈물이 금방 쏟아질 것만 같았다. 
니콜라우스는 그의 손을 뿌리쳐 버렸다. 얼굴빛은 창백해지고 분노로 들끓는 
발걸음으로 방안을 왔다갔다하기 시작했다. 골드문트의 얼굴도 보지 않고 토해 
내듯이 말했다.
  "좋아, 그렇다면 가! 자네 얼굴을 두 번 다시 보지 않도록! 내가 나중에 가서 
후회할 만한 짓이나 이야기를 하지 않도록 가! 나가라!"
  다시 한 번 골드문트는 스승에게 악수를 처했다. 스승은 내민 손에 침이라도 
내뱉을 것처럼 보였다. 얼굴빛이 핼쑥해진 골드문트는 돌아서서 조용히 방을 
나왔다. 방을 나와 모자를 쓰고는 계단을 조심스레 내려갔다. 내려가면서 
조각을 한 기둥의 머리 위에 손을 대 보았다. 그러고는 뒤쪽 작업장으로 들어가 
잠시 요한 상 앞에 서서 이별을 고했다. 몇 년 전 기사와 성과 가엾은 
리디아로부터 떠날 때보다 더 깊은 상처를 가슴에 안고 그 집을 나섰다.
  모든 것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최소한 불필요한 말은 하나도 주고받지 
않았다. 그것이 마음을 위로해 주는 유일한 것이었다. 문을 열고 밖에 나서 
보니 골목길과 거리가 갑자기 변한 듯하고 서먹서먹해 보였다. 인간의 마음은 
익숙해진 것들과 이별을 하게 되면 그런 기분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인가. 그는 
고개를 돌려서 현관문을 쳐다보았다. 이제는 아무 인연도 없고 그에게는 폐쇄된 
문이 되어 있었다.
  하숙방으로 들어가서 골드문트는 떠날 채비를 했다. 물론 그다지 준비할 것도 
없었다. 이제는 이별을 알리는 것 이외에 아무 할 일도 없었다. 벽에 자신이 
그린 한 장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마리아였다. 그의 소유물인 물건들이 걸려 
있기도 했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것도 있었다. 나를 이할 때 쓰는 모자, 
댄스용 신발 한 켤레, 목탄지 한 뭉치, 조그만 기타, 그가 빚은 조그만 점토상 
몇 개, 여인들로부터 선사 받은 조화 다발, 루비같이 빨간 술잔, 하트 형의 
딱딱한 사탕과자와 그 밖의 잡동사니들이었다. 그중의 어느 하나라도 가지고 갈 
수는 없었기에 집주인에게 가서 루비 술잔을 아주 멋진 사냥칼과 바꿔 안마당의 
숫돌에 날을 세웠다. 마리아의 초상은 하숙집 여주인에게 주었고 대신 쓸만한 
것들을 받았다. 가죽으로 만든 낡은 여행용 가방과 휴대용 식량이 그것이었다. 
그는 그 가방 속에 두세 벌의 속옷과 몇 장의 조그만 스케치 용품과 식량을 
집어 넣었다. 이것 외에 다른 자질구레한 것들은 남겨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별을 고해야 하는 여자가 시내에는 몇 있었다. 그중에서 한 여자와는 어제 
저녁에도 잤지만 자신의 계획에 관해서는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막상 
떠나려 하자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나 그것을 마음에 
두어서는 안 된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는 하숙집 주인 내외하고만 작별 
인사를 하고 다른 사람은 찾아보지도 않았다. 새벽에 떠날 수 있도록 밤에 
준비를 해두었다.
  그런데도 막상 그가 새벽에 막 집을 떠나려고 하는데 누군가 일어나서 그를 
부엌으로 불러들여 우유 스프를 대접하는 것이었다. 이 집의 열다섯 살짜리 
딸이었다. 잔잔하고 시원스런 눈매를 가지고 있었으나 관절을 다쳐 다리를 
절름거리고 있는, 마리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였다. 뜬눈으로 밤을 새운 듯 
핼쑥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단정한 차림에 머리를 빗고 있었다. 소녀는 
부엌에서 따뜻한 우유와 빵을 가져다 주었고 그가 떠나는 것을 매우 서운하게 
생각했다. 그는 소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동정심을 가득 담고 입술에 
이별의 키스를 해주었다. 소녀는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그의 키스를 받았다.

         13

  골드문트는 새로운 유랑을 시작한 얼마 동안 되찾은 자유를 만끽하며 우선 
나그네들만의 고향도 시간도 잊은 생활 방식을 다시 배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유랑자들은 아무에게도 복종하지 않고, 날씨와 계절에만 예속되어 하늘을 
지붕삼을 뿐 아무런 목표도 없이,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우연에 대해서는 아무 
저항도 없이 자신을 드러내 놓고, 어린애 같고, 초라하나마 굳센 생활을 한다. 
그들은 낙원에서 쫓겨난 아담의 후예들이며 아무 죄도 없는 동물들의 주인이다. 
그들은 하늘이 시시각각 그들에게 주는 것을 받는다. 태양을, 비를, 안개를, 
눈을, 더위와 추위를, 안락과 괴로움을 받는다. 그들에게는 시간도 역사도 
노력도, 집을 가진 자들이 맹목적으로 믿고 있는 발전이라든지 진보라든지 하는 
우상도 없다. 유랑자들은 스스로 멍들기 쉬운 감정을 가지든, 선머슴 같은 
마음을 가지든, 솜씨가 뛰어나거나 우둔하든, 용감하거나 겁쟁이든 항상 그 
마음은 어린아이와 같으며 항상 그는 첫날과 같은 세계 역사의 시작 이전처럼 
생활하고, 그의 생활은 얼마간의 단순한 본능과 필요에 의해서 인도되어진다. 그 
사람이 영리하든 어리석든, 일체의 생활이 얼마나 나른하고 허무한가를, 또한 
살고 있는 모든 것이 따뜻한 그의 피로써 얼음장같이 차가운 세계를 얼마나 
보잘것없이 근심에 차서 참아가고 있다는 것을 깊이깊이 깨닫고 있든, 혹은 
불쌍하게도 단지 어린애처럼 배고픔을 알려 주는 위장의 명령에 침을 흘리고 
있든, 그는 언제나 소유자인 인간이나 정착한 인간이 반대자요, 동시에 
언제까지나 적일 뿐이다. 소유하고 정착한 인간은 모든 존재의 허무함이라든지, 
모든 생명의 쇠퇴라든지, 우리를 빙 둘러싸서 온 누리에 가득 차 있는, 용서의 
여지가 없고 얼음장같이 차디찬 죽음 같은 것을 상기시켜 주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유랑자를 미워하고 멸시하고 두려워하는 것이다. 유랑 생활의 
천진성, 어머니의 혈통, 규율과 정신에서 오는 혐오, 체념, 자꾸만 죽음을 
향해가는 태도, 그런 것들이 골드문트의 영혼을 오래 전부터 붙들고 그 특색을 
형성하고 있었다. 또한 정신과 의지가 그의 가슴속에서 굳건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가 예술가였다는 것이 그의 생명을 윤택하게 해준 것은 물론이요, 
동시에 그의 생명을 고통스럽게도 해주었다. 모든 생활은 분열과 모순에 의해서 
기름지게 되는 것이요, 꽃이 피게 되는 것이다. 도취라는 것을 모르는 이성과 
냉정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죽음들 등뒤에 지니고 있지 않은 감각의 기쁨은 
무엇일까?
  여름이 지나고 또 가을이 지나갔다. 골드문트는 암울한 몇 개월을 간신히 
보낼 수 있었다. 감미롭고 향기로운 봄을 정신없이 보내고 말았다. 계절은 
빠르게 흘러갔다. 여름의 태양은 쫓기는 사람처럼 서산으로 달려갔다. 한 해가 
지나고 또 한 해가 지났다. 골드문트는 이 지상에 굶주림과 사랑과 무섭도록 
조용한 사철의 빠른 변화 이외에는 어느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는 
사람 같았다. 그는 어머니의 본능의 원시 세계에 완전히 가라앉고 만 것 
같았다. 하지만 가끔 꿈속에서 헤매든, 꽃이 피고 지는 골짜기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든, 그는 관조의 세계에 시선을 둔 예술가가 되어 있었다. 
그러다가는 사랑스럽지만 허무하고 무의미한 인생을 정신의 힘을 빌려 불러내고 
의미 있는 것으로 바꾸고자 하는 못내 그리운 아쉬움에 가슴을 태우는 
것이었다.
  빅토르와의 피투성이 모험을 펼친 이래 언제나 혼자 헤매다니던 그는 어느 날 
친구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 사나이는 이상스럽게도 골드문트를 줄곧 
따라다니며 좀처럼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빅토르와 같지는 
않았다. 로마 순례복을 걸치고 모자를 깊숙이 눌러 쓴, 아직도 젊은 청년이었다. 
이름은 로베르트, 고향은 보덴 호반으로 어느 수공업자의 아들이었다. 한때 
성갈루스의 수사 학교를 다녔으며 어릴 때부터 로마 순례를 꿈꾸어 왔던 
소년이었다. 이 소년이 그것을 실행에 옮길 최초의 기회를 얻은 것은 아버지의 
죽음이었다.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는 그의 일터에서 가구사로 아버지의 일을 
도왔다. 이런 로베르트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자 대뜸 어머니와 누나에게 그이 
용솟음치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그의 죄와 그의 아버지의 죄를 참회하기 
위해서 즉시 로마를 향해 순례 행각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결코 단념할 수 
없다고 이야기했다. 어머니와 누이가 울며 달래기도 하고 때로는 노여움에 
윽박질러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는 계속 고집을 부렸고 결국 어머니의 
축복도 받지 못하고 누이의 분노에 찬 말만 실컷 들으며 순례길에 올랐던 
것이다. 그를 몰아댄 것은 무엇보다 그의 방랑적 성격이었다. 말하자면 성당이 
있는 장소나 종교적인 행사가 거행되는 근처를 헤매는 것을 좋아하며, 예배나 
세례나 장례나 미사나 향내음이나 촛불 등을 좋아하는 것이었다. 라틴어를 좀 
하기는 했지만 천진한 그의 영혼이 지향하고 있는 것은 학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아치형 천장 그늘에서 명상에 잠기거나 고요히 무아지경에 
접어드는 풍경이었다. 어릴 때는 복사로서 열성적으로 봉사도 했었다.
  골드문트는 이 청년에게 성실한 태도를 가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싫지는 
않았으며 타향을 헤매 다닌다는 충동적인 본성에 있어서는 다소 공감도 가지고 
있었다. 그때까지 로베르트는 아무 불만 없는 방랑을 계속하고 있었다. 
로마까지도 갔었다. 수많은 수도원이나 목사들의 집에서 신세를 졌다. 산맥도, 
남쪽 나라도 다 구경했다. 로마에서는 성당이란 성당은 모조리 들어가 보았다. 
종교적인 의식에 참례해서 한결 흐뭇한 마음도 경험할 수 있었다. 미사도 몇 백 
번 드렸다. 가장 유명하다는 곳, 가정 신성하다는 곳에서 예배를 보고 성례를 
받았다. 그의 보잘것없는 청춘의 죄와 아버지의 죄의 참회를 위해 필요 이상의 
향연을 빨아들였다. 1년 이상이나 나그네 길에 올랐다가 결국 돌아와서 아늑한 
옛집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어머니와 누이는 그를 성서에 나오는 방탕한 
아들처럼 맞이하지는 않았다. 그가 집을 비우고 있을 동안 누이는 집안일의 
의무와 권리를 마음대로 행사해 부지런한 일꾼을 고용해서 그와 결혼한 후 
집안과 일터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었다. 그래서 집에 돌아온 로베르트는 얼마 
있지 않아서 그가 없어도 집안은 잘 돌아간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가 다시 
나그네 길에 오르고 싶다고 이야기를 끄집어냈을 때 아무도 그를 말리거나 
붙들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서운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어머니에게 
얼마만큼의 푼돈을 얻어 다시 순례복을 걸치고 새로운 영지를 향해 순례 행각을 
떠났다. 목표도 없이 유랑자가 되었다. 저명한 영지의 기념 메달이나 정성들인 
묵주가 그의 순례복에서 짤랑거리며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렇게 되어 그는 골드문트를 만나게 된 것이다. 한나절을 그와 같이 
걸어가면서 유랑자의 경험담을 나누었다. 바로 다음 읍에서 두 사람은 
헤어졌지만 또다시 이곳저곳에서 만나 결국 완전히 어울리고 말았다. 두 사람은 
서로 돌보는 다정한 길동무가 되었다. 골드문트는 전혀 부족한 것이 없었다. 
그는 약간의 봉사를 제공해서 골드문트의 호감을 사려고 애썼다. 골드문트의 
학문이나 대담성이나 정신 등, 무엇하나 부럽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한 건강, 
힘, 공명심도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골드문트의 천성은 그리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단지 한 가지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골드문트가 비애나 명상에 사로잡히는 날이면 완강하게 입을 다물어 
버려 전혀 열려 들지 않고 길동무 같은 게 언제 있었더냐는 듯 무시해 버릴 
때였다. 그럴 때는 무슨 말을 물어서도 위로해 줘서도 안 되었다. 그저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고 잠자코 있어야 했다. 로베르트는 이것을 이내 
알아차렸다. 골드문트가 라틴 어의 시구나 노래를 굉장히 잘 왼다는 것을 안 
이래로, 또 그들이 빈 벽에 기대어 쉬고 있을 때 골드문트가 빨간 분필로 벽에 
대고 슬슬 굵은 선을 그어 자기 크기만큼의 소묘를 하는 것을 본 이래로 그는 
골드문트를 하느님의 총아라고, 아니 마법사라고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골드문트가 여자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다는 것을, 흘깃 쳐다보고 웃기만 
해도 많은 여자들이 끌리고 마는 것을 로베르트는 동시에 알았다. 그것은 좀 
좋지 않을 일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날, 그들의 행로는 뜻하지 않게 멈추어졌다. 그들이 마을 어귀에 
접어들었을 때의 일이다. 한 무리의 농부들이 어떤 이는 곤봉을 들고, 어떤 이는 
막대기를 들고, 또 어떤 이는 도리깨를 들고 그들을 맞이했던 것이다. 그들의 
지휘자인 듯한 한 남자가 빨리 돌아가라, 한 발짝도 다가오지 마라, 얼른 꺼져 
버려라, 그렇잖으면 때려죽인다, 하고 고함치고 있었다. 골드문트가 도대체 무슨 
일인가 알아보려고 하는 순간 벌써 날아온 돌이 가슴을 때렸다. 뒤를 돌아보니 
로베르트는 벌써 저쪽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농부들은 달려들 듯이 몰려왔다. 
골드문트는 별 도리없이 도망치는 친구의 뒤를 어정어정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로베르트는 들판 한가운데 서 있는 예수의 십자가 밑에서 오들오들 떨면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 용감하게 도망치더구나."
  골드문트는 껄껄대고 웃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저 망할 녀석들, 돌대가리로 대관절 뭘 생각한 것일까! 전쟁이라도 
났나? 무장한 보초들을 마을 어귀에 세워 놓고 아무도 안 들여 보내다니, 무슨 
곡절이지! 아무래도 이상한걸."
  두 사람 다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겨우 이튿날 아침이 되어서야 그들은 
외딴 어느 농가에서 그 이유를 알았다. 그 농가는 오두막이 하나, 외양간과 
헛간이 둘, 높다란 풀과 수많은 과일나무가 있는 녹지에 둘러싸인 집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인기척 하나 없이 다들 잠이 든 것 같았다. 사람의 목소리, 
발소리, 아이들의 울음소리, 낫을 가는 소리 등 이러한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풀밭에 암소 한 마리가 서서 울고 있었다. 젖을 짜야 할 시간 같았다. 
두 사람은 집 앞에 가서 문을 두드렸으나 안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외양간에 
가봤으나 그곳은 문이 활짝 열어젖힌 채 텅 비어 있었다. 헛간의 지붕 위에서는 
초록색 이끼가 햇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거기에도 사람의 그림자는 하나 
없었다. 허물어질 대로 허물어진 이 집을 보니 놀랍고 어이가 없어 두 사람은 
다시 안채로 돌아왔다. 다시 주먹으로 문을 두드려 보았으나 역시 대답이 
없었다. 뜻밖에도 문에는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그는 문을 밀고 어둠침침한 
방으로 들어갔다.
  "실례합니다. 아무도 안 계십니까?"
  이상하게도 안은 쥐죽은 듯이 고요했다. 로베르트는 문 앞에 그대로 선 채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골드문트는 호기심에 끌려 안으로 들어갔다. 오두막집 
안에서는 지독한 냄새가 풍겼다. 이상 야릇하고 가슴이 답답한 냄새였다. 
아궁이에는 재가 잔뜩 쌓여 있었는데 입김으로 호호 불어 보니 밑바닥에 있는 
곳의 뒤쪽 어슴푸레한 곳에 누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누군가 의자에 앉아 
자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노파였다. 불러도 아무 기척이 없었다. 앉아 있는 
노파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쳤으나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그 여자는 
거미줄 한가운데 앉아 있었다. 몇 오라기의 거미줄이 그 여자의 머리카락과 
무릎에 단단히 엉켜 있었다.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속을 스치자 갑자기 
무서워졌다. 그는 확인을 하기 위해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휘저으며 
남겨진 기다린 막대기에 불똥을 불어대자 활활 피어올라 기다란 막대기에 불이 
붙었다. 그것을 가지고 앉아 있는 여인의 얼굴을 비춰 보니 퍽 나이 들어 
보이는 푸르죽죽한 시체의 얼굴이 나타났다. 희멀겋게 치켜 뜬 한쪽 눈이 
보였다. 노파는 의자에 앉은 채 죽은 것이었다.
  활활 타는 막대기를 손에 들고 골드문트는 자세히 이곳 저곳을 훑어보았다. 
뒷방으로 통하는 문지방 위에 또 한 구의 시체가 드러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다. 
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으로, 퉁퉁 부어오르고 찌푸린 얼굴에 속옷만 입은 
채로 문지방 모서리 위에 엎어져 있었다. 두 손 다 조그만 주먹을 단단히 
무섭게 쥐고 있었다. '두 사람째다' 하고 골드문트는 생각했다. 악몽이라도 꾸고 
있는 듯했다. 창문이 열려서 밝은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조심스레 
불을 마룻바닥에 문질러 껐다.
  뒷방에는 침대가 세 개 놓여 있었다. 하나는 비어 있고 남루한 회색 이불 
밑에 짚이 그냥 드러나 있었다. 두 번째로 침대에 또 한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텁석부리 사나이로 반듯이 누운 채 뻣뻣하게 죽어 있었다. 머리를 뒤로 젖히고 
턱과 수염을 곧추세우고 있었다. 이 집 주인임에 틀림없었다. 움푹 들어간 
얼굴은 가까이할 수 없는 죽음의 색채를 띠고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한쪽 
팔은 바닥까지 축 늘어져 있었다. 거기에는 물통이 동그라져 거기서 쏟아진 
물이 아직 바닥에 완전히 배지 않아서 움푹 들어간 쪽으로 몰려 괴어 있었다. 
또 하나의 침대에는 리넨 홑이불에 묻히듯이 뚤뚤 감긴 튼튼하고 큰 키의 
여자가 드러누워 있었다. 그 옆에는 그 여자를 부둥켜안고 리넨 이불에 목이 
졸린 것처럼 보이는 아직 채 자라지 않은 소녀가 누워 있었다. 소녀의 머리카락 
역시 금발이었고 얼굴에는 청회색 주름이 있었다.
  골드문트의 시선은 시체에서 시체로 옮겨갔다. 소녀의 얼굴은 벌써 무척이나 
변형되어 있었으나 아직도 얼마간은 비참한 죽음의 공포를 남기고 있었다. 침대 
속에 아무렇게나 푹 파묻혀 있는 어머니의 목덜미와 머리에서는 분노와 불안과 
도망치려고 하는 초조를 읽어낼 수가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아무래도 
이대로 죽을 수 없다는 듯 빳빳이 곤두서 있었다. 농부의 얼굴에는 이를 악물고 
참아 견딘 반항과 고통이 나타나 있었다. 그는 죽기는 힘들었으나 사나이답게 
죽은 것 같았다. 털투성이의 그의 얼굴은 전선에서 쓰러진 병사의 그것과 같이 
허공을 찌르듯 뻣뻣이 치켜올려져 있었다. 가만히 그리고 꿋꿋이 뻗은 채 이를 
악물고 있는 그 자세는 아름다웠다. 이렇게 죽음을 맞이한 사나이는 비겁한 
인간은 아니었으리라. 하지만 문지방에 엎어져 쓰려져 있는 소년의 조그만 
주검은 애처로웠다. 그 얼굴은 아무것도 말하고 있지 않았으나 문지방 위에 그 
자세는 단단히 쥐고 있는 조그만 주먹과 함께 어찌할 수 없는 고뇌와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고통에 대한 하염없는 저항 등 많은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는 
듯했다. 그의 머리 바로 옆에는 고양이가 드나드는 구멍이 뚫려 있었다. 
골드문트는 모든 것을 자세하게 관찰했다.
  이 오두막집 속에서 전개된 광경은 정말 끔찍스러웠다. 송장 냄새가 
지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골드문트를 잡아당기는 크나큰 힘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것이 위대함과 운명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다지도 
진지하고, 거짓 하나 없는 그 속의 무엇인가가 그의 사랑을 물고 늘어져 그 
영혼 속에까지 밀고 들어왔다.
  그러는 동안 바깥에서는 로베르트가 겁이 났는지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골드문트는 로베르트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그 순간 불안과 호기심과 아무것도 
아닌 일에 사로잡혀 있는 살아 있는 인간이, 시체들과 비교해 얼마나 가엾고, 
한줌 흙의 가치조차도 없는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예술가만이 가질 수 있는 진정한 공감과 냉정한 관찰이 묘하게 혼합된 감정으로 
시체를 살펴보는 데 정신을 팔고 있었다. 드러누워 있는 모습, 앉아 있는 모습, 
머리며 손, 행위를 하다가 그대로 뻣뻣해진 모습, 어느 것 하나 자세하게 
관찰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무서운 공포가 휩싸인 이 집은 왜 이다지도 
조용할까! 왜 이다지도 이상하고 구역질나는 냄새가 날까! 아궁이의 불똥이 
아직도 희뿌옇게 비치고 있는 이 조그만 인가, 시체가 널려 있고 죽음이 차 
있는 이 집, 왜 이다지도 무섭고 슬퍼질까! 움직이지 않는 이 사람들의 볼에서 
이내 살이 떨어지고 굶주린 쥐들이 그 손가락을 물고 늘어지리라. 다른 
사람들이 관이나 무덤 속에서 잘 감추고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데서 해치우는 
최후의 가장 비참한 것을, 즉 파멸과 부패를 여기 이 다섯 사람은 자기 집 
방에서, 대낮에 문을 잠그지 않은 채 태연히, 부끄럼도 없이 당해 버린 것이다. 
벌써 골드문트는 몇 차례나 시체들을 보아 왔었지만 죽음이 이토록 가차없는 
역할을 한 광경을 만난 적은 없었다. 그는 그것을 깊이 마음속에 받아들였다.
  문 앞에서 울부짖듯 외쳐대는 로베르트의 고함 소리에 결국 방해를 받아 
바깥으로 나왔다. 친구는 벌벌 떨며 그를 쳐다보았다.
  "왜 그래요?"
  공포에 질린 로베르트는 목소리까지 낮추어 물었다.
  "안에 아무도 없어? 당신은 왜 그런 눈을 하고 있지? 이야기 좀 해줘!"
  골드문트는 냉정한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들어가서 네 눈으로 확인해 봐. 이상한 농가야. 나중에 저기 있는 암소의 
젖이나 짜자. 그럼, 들어가 봐!"
  로베르트는 한동안 망설이다가 집 안으로 들어가서는 아궁이가 있는 곳까지 
더듬어갔다. 거기서 앉아 있는 노파를 발견했다. 그것이 시체라는 것을 알자 
그는 고함을 질렀다. 그는 눈이 휘둥그래져서 얼른 밖으로 뛰어나왔다.
  "아이구! 죽은 노파가 아궁이 옆에 앉아 있단 말야. 어떻게 된 거야? 왜 
아무도 옆에 없지? 왜 묻어 주지 않아? 아이구 이 냄새!"
  골드문트는 빙그레 웃었다.
  "넌 말이야, 로베르트. 대단히 용감해. 하지만 너무 빨리 서둘러 나왔어. 죽은 
할머니도 저렇게 의자에 앉아 있으면 정말 볼 만하거든. 하지만, 한두 발짝 더 
가보면 더 볼 만한 것이 있을 거야. 다섯이야, 로베르트. 침대에 있는 것 셋이고 
문지방 한가운데 어린애가 죽어 있단 말이야. 모두 죽었어. 가족은 모두 쓰러져 
죽었어. 이 집엔 시체밖에 없단 말이야. 그래서 아무도 저 암소의 젖을 짜지 
못한 거야."
  어이가 없다는 듯 그는 골드문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별안간 
숨이 막힐 듯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옳아, 이제야 난 어제 농부들이 우릴 마을에 안 들여 놓으려 한 이유를 
알았어. 그래 그래, 이제야 모든 게 확실해졌어. 페스트야! 목숨을 걸고 
말하겠는데 확실히 페스트야. 골드문트, 당신은 오랫동안 그 안에 있었으니 
틀림없이 시체를 만졌겠지. 비켜, 내게로 다가오지 마! 당신은 틀림없이 균이 
묻었어. 골드문트, 섭섭하지만 난 떠나야겠어. 당신 옆에 더 이상 있을 수 없단 
말야."
  그는 황급히 달아나려고 했지만 순례복 깃을 단단히 붙들렸다. 골드문트는 
로베르트를 무언의 비난 속에서 준엄하게 쳐다보며 빠져나가려 발버둥치는 그를 
가차없이 단단히 붙들었다.
  "요 꼬마야"
  그는 정겨움과 멸시가 섞인 어조로 말했다.
  "넌 생긴 것보담 똑똑하구나. 네가 말한 그대로일지도 모르지. 이 다음 
집이나 마을에 가면 알게 될 거야. 아마 페스트가 이 지방에 퍼져 있을지도 
몰라. 우리가 이곳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지 어떨지는 곧 알게 될 테지. 
하지만 널 그냥 보낼 수는 없단 말이야, 요 꼬마 로베르트야. 난 널 놓칠 수는 
없어. 이봐, 나도 인정이 있는 놈이야. 내 마음은 너무나 약하단 말이야. 너 
역시 저 집안에서 벌써 전염이 됐을지도 몰라. 만일 여기서 널 놓치고 만다면 
너는 어느 이름 모를 들판에 쓰러져서 혼자 죽어갈 거야. 그렇게 되면 너의 
눈을 감겨 주는 사람도, 너의 무덤을 파주는 사람도, 흙을 덮어 주는 사람도 
없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아니, 로베르트, 이봐 난 불쌍해서 숨이 막힐 
지경이야. 그러니 말이지, 난 두 번 다시는 말하지 않을 테니까 정신을 바짝 
차려 내가 말하는 것을 잘 들어 두란 말이야, 알겠니? 우리 두 사람은 똑같은 
위험 속에 놓여 있어. 네 가슴에 화살이 꽂힐지 내 가슴에 꽂힐지 그것은 몰라. 
그러니 같이 있잔 말이야. 우리에겐 같이 죽거나 같이 이 저주받은 페스트를 
빠져나가든가 하는 두 가지 길밖엔 없어. 네가 병이 들어 죽게 되면 내가 묻어 
줄 거야. 꼭 그렇게 할 거야. 만일 내가 죽게 된다면 네 마음대로 하려무나. 
나를 묻어 주든 도망쳐 버리든 나에게는 아무 상관없어. 하지만 그 전에는 
놓치지 않는단 말이야. 알아 둬! 우리는 서로 친구가 필요하단 말야. 자, 그만 
지껄이자. 나는 아무 말도 듣기 싫어. 이쯤 해두고 어디 아무데서나, 
외양간에서라도 통을 찾아 우유를 짜지 그래."
  로베르트는 그대로 했다. 이때부터 골드문트는 명령하는 사람이 되고 
로베르트는 복종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두 사람 다 불편없이 지냈다. 이제 
로베르트도 도망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변명하듯 말했다.
  "난 그때 당신이 약간 무서웠어. 당신이 시체 있는 집에서 돌아왔을 때의 
얼굴이 보기 싫었어. 페스트를 묻혀 가지고 왔구나 하고 생각했지. 하지만 
페스트가 아니더라도 당신 얼굴은 변해 있었어. 그 집에서 본 게 그토록 
무시무시했어?"
  "무섭긴. 내가 거기서 본 것은 말이야, 나한테도 너한테도, 아니 어떤 
사람한테도 절박한 것이었어. 우리가 페스트에 걸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유랑을 계속하는 동안 이내 두 사람은 여러 곳에서 그 지방을 휩쓸고 있는 
페스트와 부딪쳤다. 다른 지방 사람을 들여놓지 않는 마을은 많았다. 어떤 
마을에서는 아무 방해도 받지 않았고 어떤 오솔길도 지날 수가 있었다. 텅 비어 
있는 집들도 많았고 수많은 시체들이 묻히지도 못한 채 밭이나 방에서 썩고 
있었다. 외양간에서는 암소가 울부짖고 있었으며 어떤 가축들은 들판을 
이리저리 헤매고 있었다. 두 사람은 몇 번이나 암소와 염소의 젖을 짜주고 
먹이를 주었다. 또 숲기슭에서 염소 새끼나 돼지 새끼를 잡아 구워먹고 주인이 
죽은 지하실에서 포도주나 과일주를 꺼내서 마셨다. 무척이나 풍족한 생활을 
보냈다. 어딜 가도 먹을 것은 넘치도록 있었다. 하지만 맛은 별로 없었다. 
로베르트는 자꾸만 페스트를 무서워했다. 시체를 보면 그는 구역질을 했다. 
공포 때문에 실신할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몇 번이나 그는 전염됐다는 
생각을 가져 머리와 손발을 긴 시간 야영 모닥불 속에 집어 넣기도 
했다--그것이 그 병에 효과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그 뿐만이 아니라 
자다가도 발이나 팔이나 어깨에 종기나 있지 않은가 하고 온몸을 비벼댔다.
  골드문트는 몇 번이나 로베르트를 나무라고 멸시했다. 그렇지만 공포와 
구역질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았다. 골드문트는 광범위한 죽음의 광경에 심하게 
압도되고, 가슴은 음습한 장송가 소리가 무겁고, 긴장되고 음산한 마음으로 
죽음의 나라를 지나쳤다. 간혹 영원한 어머니의 형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보는 
사람을 돌로 만들어 버리는 요괴 메두사의 눈을 가진, 또한 괴로움과 죽음에 
가득 찬 무거운 웃음을 머금은 희뿌옇고 크나큰 얼굴이었다.
  어느 날, 두 사람은 조그만 마을에 이르렀다. 집 높이만한 성벽이 마을을 빙 
둘러싸고 그 위에는 망보는 통로가 나 있었으나 위에는 누구 하나 보초를 서는 
사람이 없고 활짝 열어젖힌 성문에도 사람 그림자 하나 없었다. 로베르트는 
마을로 들어가기 꺼려 골드문트한테도 들어가지 말라고 애원했다. 그때 종 
소리가 들렸다. 성문에서 신부가 십자가를 손에 들고 나왔다. 그의 뒤에서 세 
대의 짐마차가 따라 나왔는데, 두 대는 말이 끌고 한 대는 황소가 끌고 있었다. 
마차엔 위에까지 차곡차곡 시체가 쌓여 있었다. 몇 사람의 인부가 이상한 
망토를 입고 깊숙이 두건을 써 얼굴을 감추고 마차 옆에서 말과 소를 몰고 
있었다. 
  로베르트는 얼굴빛이 파래져서 곧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골드문트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시체 실은 마차 뒤를 따랐다. 이삼백 발짝쯤 걸어갔는데 거기에는 
묘지도 없고 전혀 아무것도 없는 들판 한가운데에 구덩이가 있었다. 골드문트는 
그대로 서서, 막대기나 쇠갈퀴를 든 인부들이 시체를 마차에서 끄집어내려 
그것을 그냥 흙더미째 구덩이에 처넣는 것을 보고 있었다. 신부는 그 위에서 몇 
마디 중얼중얼하다가 십자가를 흔들며 떠나가 버렸다. 인부들은 밋밋한 무덤의 
사방에 불을 놓고 아무 말도 없이 시내로 사라져갔다. 누구 하나 무덤을 덮어 
주려고 하지 않았다. 내려다보니 쉰 구 이상의 시체들이 그 안에 처박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알몸뚱이가 많았다. 굳어버린 체 무엇인가 애원하듯이 
손이나 발을 허공에 뻗고 있었다.
  그가 성문 앞으로 돌아오니 로베르트는 당황스레 서두르면서 먼저 가겠다고 
거의 무릎을 꿇다시피 애원하고 있었다. 사실 그가 애원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는 골드문트의 방심한 눈초리 속에서 그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바로 그 
명상에 잠긴 고집과 무서운 것에의 집착, 가공할 만한 호기심을 보았기 
때문이다. 결국 골드문트는 혼자서 시내로 돌아갔다.
  보초도 서 있지 않은 성문을 지나갔다. 그는 돌바닥에 울리는 자신의 
발소리를 들으며, 이제까지 그가 지나온 수많은 소읍이나 성문들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오는 것을 느꼈다. 그곳에서 울부짖던 아이들, 소년들의 장난, 여인들의 
싸움, 아름다운 음향을 던져 주는 대장간의 모루채 소리, 덜거덩거리는 마차 
소리, 그 외에도 무수한 소리들과 그를 맞이해 주었던 광경들이 그의 머릿속에 
펼쳐진다. 부드러운 소리, 딱딱한 소리들이 한데 뒤얽혀 인간의 노동이나 환히, 
일, 사교 따위를 알려 주었다. 하지만 여기 텅 빈 집 문과 사람 하나 없는 
거리에는 그 어느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모든 것이 죽음에 침묵 속에 굳게 
갇혀 펑펑 솟구치는 샘물의 멜로디가 너무도 높고 크게 울려왔다. 활짝 열어 
놓은 창문 뒤에는 여러 가지 빵이 진열되어 있었고 그 한가운데 빵 장수가 있는 
것이 보였다. 골드문트는 제일 좋은 빵을 가리켰다. 빵 장수는 기다란 집게로 
조심스레 빵을 내주며 돈을 내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골드문트가 돈도 내지 
않고 빵을 베어 물며 그냥 가버리자 빵 장수는 창문을 쾅 닫기는 했어도 
투덜대지는 않았다. 어느 아담한 집의 창문 앞에 점토 화분이 줄을 지어 
있었다. 보통 때면 거기에는 꽃이 만개해 있을 텐데 지금은 시든 잎새들만 텅 
빈 화분 위에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어느 집에서 어린애들의 흐느낌과 
통곡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다음 골목에서 골드문트는 예쁘게 생긴 처녀 
하나가 선 채로 빗질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여자가 그의 시선을 느끼고 
내려다볼 때까지 골드문트는 여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여자에게 미소를 
던지자 여자의 빨갛게 상기된 얼굴에서 서서히 그리고 희미하게 웃음이 
스쳐갔다.
  "빗질은 금세 끝나니?"
  골드문트는 위를 쳐다보고 소리쳤다. 여자는 생글거리며 얼굴을 창틈으로 
내밀었다.
  "병에 아직 안 걸렸었니?"
  그가 물었다.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나와 함께 이 죽음의 도시에서 도망치자. 숲속에 들어가서 
재미있게 살자구."
  여자는 무슨 말을 하려고 했다.
  "뭘 망설이는 거지? 나는 진심으로 말하고 있는 거야."
  골드문트는 소리쳤다.
  "넌 부모님과 같이 있니? 아니면 이 집에 세들고 있니? 남의 집이로군. 그럼 
나오렴. 늙은 것들도 죽도록 내버려 두지 그래. 우리는 젊고 몸도 튼튼하잖아. 
잠깐 동안이나마 좀 재미있게 지내자꾸나. 이리 와요, 갈색 눈의 아름다운 
아가씨! 농담이 아니라구"
  처녀는 놀라 망설이면서 그를 뚫어지게 내려다보았다. 그는 슬금슬금 
물러나서 인적 없는 골목길을 한 바퀴 돌다가 다시 돌아왔다. 처녀는 여전히 
창가에 고개를 내밀고 서 있었다. 그가 돌아온 것이 무척이나 반가운 
모양이었다. 그 처녀는 이내 따라와서 성문에까지 가기도 전에 조그만 보퉁이를 
손에 들고 빨간 수건을 머리에 친친 감고서 그와 한데 어울렸다. 
  "이름이 뭐지?"
  그가 물었다.
  "레네. 당신하고 같이 갈 테야. 이 도시는 아주 지독해. 전부 죽잖아. 어서 
가요, 가요!"
  성문 근처에서 로베르트가 얼굴을 찌푸리고 땅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는 골드문트가 오자 벌떡 일어나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처녀를 바라보았다. 
이번만큼은 그도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불평을 토하다가 급기야 말다툼이 
벌어졌다. 저주받은 페스트 소굴에서 사람을 데리고 나와 길동무가 되라고 
강요하다니, 이건 정신이 나갔어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시험하는 거다, 나는 싫다, 이제 같이 가지 않겠다, 나의 인내도 이제는 
마지막이다, 하는 내용이었다. 골드문트는 그가 이성을 되찾을 때까지 저주를 
하건 울부짖건 그냥 내버려 두었다.
  "로베르트, 잠꼬대는 실컷 한 것 같으니 이제는 그만 같이 가자. 아름다운 
길동무가 생긴 걸 너도 기뻐하게 될 거야. 이름은 레네고 내 곁에 있을 거다. 
그렇지만 이제 너도 기쁘게 해주마. 로베르트, 알겠니. 우리는 좀 쉬었다가 
건강한 생활을 하자꾸나, 페스트를 피하는 거다. 빈 오두막집이 있는 아담한 
장소를 찾든지 우리가 새 집을 세우든지 해서 거기서 난 레네와 같이 부부 
생활을 할 거야. 너는 친구로서 같이 사는 거란 말이다. 좀 정답고 즐겁게 
지내자꾸나. 알겠어?"
  로베르트는 승낙했다. 레네와 악수를 하라거나 그녀의 옷을 만지라고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알았어."
  골드문트는 말했다.
  "그런 것은 요구하지 않겠어. 아니, 그뿐만이 아냐. 레네한테 손가락을 대는 
것까지도 엄금이다. 그런 건 꿈도 꾸지 마라!"
  세 사람이 짝이 되어 앞으로 걸어갔다. 처음에는 아무 말도 없었던 처녀가 
차차 입을 열기 시작했다. 다시 하늘과 나무와 풀밭을 보게 된 것이 얼마나 
기쁜가를, 페스트의 도시, 그곳의 공포를 어떻게 표현해야 좋은가를 그녀는 
이야기를 해서라도 그녀가 목격해야만 했던 비참하고 오싹 몸서리치는 광경에서 
자신의 마음을 해방시키려고 했다. 그 마을들은 지옥임에 틀림없었다. 의사 둘 
중에서 하나는 죽고, 다른 한 사람은 부자집에만 간다는 것, 거의 집집마다 
시체가 뒹굴고 있으나 실어내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시체가 썩고 있다는 것, 
어느 집에서는 시체를 갖다 묻는 인부들이 도둑질을 하고 음탕하게 간음도 
했다는 것, 또 그들이 가끔 아직도 목숨이 남아 있는 병자도 시체와 함께 
구덩이 속에다 내동댕이쳤다는 것 등을 이야기했다. 그 외에도 그녀는 여러 
가지 끔찍한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누구도 처녀의 이야기를 막지는 않았다. 
로베르트는 놀라는 가운데도 흥미있게 듣고 있었으며, 골드문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조용한 표정이었다. 레네는 결국 지치고 말았다. 눈물은 마르고 알고 
있는 모든 이야기를 다 해버린 듯했다.
  골드문트는 천천히 걸어가면서 몇 절이나 되는 긴 노래를 나직하게 부르기 
시작했다. 그는 점점 목청을 돋우어갔다. 레네는 방긋이 웃음을 띠었다. 
로베르트는 즐겁고, 또 한편으로는 매우 이상하다는 듯 듣고 있었다. 이제껏 
골드문트가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듣지 못했었다. 골드문트는 어찌 된 영문인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이상한 인간이다! 미묘하고 맑은 노랫소리. 하지만 목청. 
둘째 절 노래에서는 레네도 가만가만 따라 불렀고 이내 모두들 목청을 돋우어 
합창했다. 저녁 무렵 저 멀리 황무지 너머에는 까만 숲이, 그 건너에는 푸르고 
낮은 산들이 있었다. 산들은 안쪽에서 더욱 푸르러 가는 듯 했다. 걸음을 
옮기는 박자에 따라서 두 사람의 노래는 어느 때는 즐겁게, 어느 때는 장엄하게 
들렸다.
  "오늘은 기분이 썩 좋은 것 같아."
  로베르트가 말했다.
  "응, 그렇고말고. 오늘은 즐겁지. 요런 예쁜 아가씨를 발견하잖았어. 오, 레네. 
시체 치우는 인부들이 너를 남겨두었다니 정말 다행이지 뭐야. 내일쯤은 아담한 
우리만의 보금자리가 발견될 테지. 그럼 우린 즐거운 생활을 보낼 거고, 서로 
건강하다는 것을 기뻐하게 될 거야. 레네, 달팽이가 제일 좋아하고 사람도 먹을 
수 있는 두툼한 버섯을 숲속에서 본 적이 있니?"
  "응, 있어."
  레네는 웃었다.
  "몇 번씩이나 봤는걸."
  "네 머리카락은 바로 그것하고 똑같은 갈색이란 말이야, 레네. 냄새도 똑같이 
좋거든. 노랠 또 하나 불러 볼까? 넌 배고프니? 내 가방 속에는 아직도 먹을 
만한 게 있지."
  이튿날, 그들은 좋은 곳을 발견했다. 조그만 자작나무 숲속에서 통나무로 지은 
오두막이 있었다. 아마 예전에 나무꾼들이나 사냥꾼들이 지은 듯 했다. 쇠를 
비틀고 문을 열었다.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로베르트도 마음에 들었다. 그들은 
오는 길에 목동도 없이 서성대고 있는 염소 떼를 만났다. 그중에서 통통하게 
살찐 암놈을 한 마리 데리고 왔다.
  "자, 로베르트."
  골드문트가 말했다.
  "넌 목수는 아니었지만 가구사였으니 우리들 궁성에 칸막이 벽을 
만들어야겠어. 방이 두 개 되도록 말이야. 레네와 내가 쓸 방 하나, 너와 염소가 
쓸 방 하나, 너와 염소가 쓸 방 하나. 먹을 것도 이젠 얼마 없으니 오늘은 
염소젖만 가지고 만족해야만 해. 많든 적든간에 말이야. 너는 벽을 만들어라. 
우리 둘은 잠자리를 마련할 테니. 내일은 먹을 것을 찾으러 나가야겠구나."
  세 사람은 서둘러 일을 시작했다. 골드문트와 레네는 잠자리에 깔 것을 
찾으러 나섰다. 로베르트는 벽을 만들 나무를 자르기 위해 들판 아무 데나 널려 
있는 돌에 대고 칼날을 세웠다. 하지만 그 공사는 하루 안에 끝마칠 수가 
없었다. 그날 밤 로베르트는 밖에서 잤다. 골드문트는 레네가 아직 남자를 
모른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부끄러움을 탔다. 하지만 애정이 풍부한 
감미로운 놀이 상대임을 알았다. 그는 레네를 어린애 안 듯 가슴에 안고 
오랫동안 잠들지 않고 레네의 가슴의 고동을 듣고 있었다. 레네가 벌써 오래 
전에 지쳐서 깊이 잠이 들고 난 뒤에도, 그녀의 갈색 머리 냄새를 맡으며 
힘차게 끌어당기면서 한편으로는 그 커다랗고 평평한 구덩이를 생각하고 
있었다. 가면을 둘러쓴 악마가 몇 대의 마차에 가득 차 있던 시체를 처넣은 
구덩이를. 살아 있다는 것은 아름답지만 이내 시들고 마는 것이었다.
  오두막의 칸막이 벽은 매우 훌륭하게 완성되었다. 나중에는 세 사람이 함께 
달라붙어서 일을 했다. 로베르트는 그의 역량을 과시하려고 했다. 대패질하는 
받침과 연장과 자와 못만 있다면 무엇이든 만들어 줄 텐데 하고 자꾸만 
이야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가지고 있는 것은 기껏 칼과 손뿐이므로 열두 개의 
자작나무를 잘라서 그걸로 오두막 마룻바닥에 단단한 울타리를 만들어 두는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 그리고 칡덩굴로 얽어매어서 사이를 막는 길밖에 
별도리가 없다고 덧붙였다. 그것은 시간이 좀 걸렸지만 즐겁고 재미가 있었다. 
모두 같이 도왔다. 틈틈이 레네는 딸기를 찾고 염소를 돌보러 갔다. 골드문트는 
근처를 뒤져 이것저것 가지고 돌아왔다. 그곳 주변에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특히 로베르트는 매우 안심했다. 전염에 대해서도, 적대 행위에 대해서도 
안전했다. 하지만 먹을 것이 아주 조금밖에는 발견되지 않는다는 불리한 조건도 
있었다. 근방에 비어 있는 농가가 하나 있었다. 골드문트는 그들의 통나무집 
대신에 그곳을 숙소로 정하자고 제의했으나 로베르트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가지고 나온 것은 무엇이든 일일이 불에 그을려서 소독하기 전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골드문트가 거기서 발견한 것은 그리 많지 않았으나 그래도 작은 
의자가 둘, 우유를 짜 넣는 통 하나, 그릇이 몇 개, 도끼가 하나였다.
  어느 날 그는 들에서 달아난 닭을 두 마리 잡았다. 레네는 골드문트를 
사랑하며 행복해했다. 셋이서 아담한 고향을 만들어가며 나날이 조금씩 보기 
좋게 가정을 세워간다는 것은 큰 즐거움이었다. 빵은 없었다. 하지만 그 대신 
또 한 마리의 염소를 키웠다. 순무를 갈아 놓은 조그만 밭도 발견했다.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칡덩굴로 엮은 벽도 완성되었다. 잠자리를 다시 고치고 
아궁이도 만들었다. 시내는 멀지 않고 물은 맑고 달콤했다. 일을 하면서도 
그들은 노래를 불렀다.
  어느 날. 같이 우유를 마시며 가족적인 분위기에 잠겨 있을 때 레네가 별안간 
꿈꾸는 듯한 소리로 말했다.
  "이러다가 겨울이 오면 어떠하지?"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로베르트는 깔깔대고 웃고 있었으며 골드문트는 
아무 말 없이 앞만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도 겨울 걱정을 하지 않는다. 아무도 
긴 시간 여기 그냥 주저앉아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다. 고향이라고 
하지만 참다운 고향이 아니라는 것, 단순히 유랑의 길동무가 되어 있다는 것을 
레네는 차차 깨달았다.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골드문트는 어린아이를 상대로 말하는 것처럼 농담과 격려의 말을 
섞어 가며 이렇게 말했다.
  "넌, 농부의 딸이라서 그런지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구나. 레네, 걱정할 것 
없어. 페스트의 만연기가 끝나면 꼭 집에 갈 수 있을 거야. 페스트도 언제까지 
퍼져 있진 않아. 그게 끝나거든 부모님께 가든지 딴 친척한테 가든지 해. 안 
그러면 마을로 다시 돌아가서 식모살이를 하든 돈을 벌든 하면 돼. 하지만 
지금은 여름이야. 어디에도 죽음만이 널 기다리고 있어. 하지만 여긴 깨끗하고, 
우리하고 편하게 지내잖아. 그러니 그냥 여기 있어. 마음이 내킬 때까지 여기 
있으란 말이야."
  "그리고 그 다음은요?"
  레네가 소리쳤다.
  "그 다음은 만사가 다 끝이에요? 당신은 가버리나요? 그러고 나면 난?"
  골드문트는 그녀의 긴 머리를 가만히 잡아당겼다.
  "바보 같은 꼬마야, 넌 벌써 시체 치우는 인부도, 집안 사람이 다 죽어 없어진 
집도, 불이 활활 타고 있는 교외의 크나큰 구덩이도 다 잊어버렸니? 그 
구덩이에 엎어져 속옷이 비에 젖는 것을 면한 은혜에 감사드려야 할 판이야. 
너도 도망쳐서 손발이 포동포동해지고 웃으며 노래부를 수 있는 자신을 고맙게 
생각해야 된다구."
  그래도 여자는 좀처럼 만족해하지 않았다.
  "하지만 난 전혀 이곳에서 떠나고 싶지 않은걸."
  레네는 힘없이 내뱉었다.
  "당신은 놓치기도 싫어. 싫어요. 금방 모든 것이 끝나버린다는 것을 생각하면 
하나도 즐겁지가 않아요!"
  골드문트는 정답지만 위협하듯 나지막하게 다시 한 번 대답했다.
  "레네, 그것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모든 성헌들이 다 생각을 거듭했어. 오래 
지속되는 행복 같은 건 있지도 않아. 만약, 우리들이 갖고 있는 것이 네 마음에 
들지 않거나 기쁨을 가져다주지 않는 거라면 나는 서둘러 이 오두막에다 불을 
놓겠어. 그리고 우리 다같이 각기 좋아하는 곳으로 가자꾸나. 이제 그만두자, 
레네, 이야기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해."
  그녀는 고분고분 말을 듣고 있었으나 그녀의 행복 위에 검은 그림자가 하나 
드리워진 셈이었다.

         14

  여름이 아직 완전히 다 가기도 전에 오두막집 생활은 그들이 생각지도 않았던 
형태로 종말을 고했다. 어느 날 골드문트는 새를 잡는 돌화살을 가지고 
소쩍새나 그 밖의 다른 짐승을 잡으려고 그 근방을 어슬렁거렸다. 먹을 것이 
별로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레네는 가까이에서 딸기를 따고 있었다. 때때로 
그는 레네 곁을 지나치며 레네 속옷 밑으로 드러나 보이는 목덜미 위로 레네의 
빨개진 얼굴을 보기도 하며 그녀의 노랫소리를 들었다. 때로는 레네가 갖고 
있는 딸기를 조금씩 훔쳐먹으며, 그녀를 쳐다보지 않고 그냥 앞으로 가기도 
했다. 그는 그리움과 권태의 감정을 번갈아 느끼며 레네를 생각하고 있었다. 
레네가 장래 이야기를 끄집어낸 것이었다. 임신한 것 같다고도 했고 그를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고도 했다. 이제 모든 것은 끝났어. 그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때는 로베르트도 남겨두고 혼자 떠나겠어. 겨울쯤에는 니콜라우스 
스승한테 가기로 하고 겨울을 거기서 보내자. 이듬해 봄에는 좋은 신발이나 
사서 뛰쳐나와 고생을 하더라도 마리아브론 수도원으로 가서 나르치스한테 
인사라도 하자. 아마 그를 보지 못한 것이 10년쯤 되었을까? 하루만이라도 
좋아. 그를 만나야겠다.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그를 명상에서 깨어나게 해주었다. 별안간 그는 온갖 
생각과 희망을 가지고 멀리 떠나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귀를 곤두세우고 
그 소리를 들었다. 불안에 가득 찬 소리가 되풀이되었다. 분명 레네의 
목소리였다. 레네는 크나큰 곤경에 빠져 있는 것처럼 그의 이름을 불렀던 
것이다. 그는 여전히 얼마간 짜증을 내며 발걸음을 다급히 옮겼다. 레네의 
울부짖는 소리가 반복되자 그의 마음속에서 동정과 연민이 우러나왔다. 겨우 
레네를 발견했을 때 그녀는 갈기갈기 찢어진 속옷 바람으로 그녀를 정복하려는 
사나이와 격투를 하고 있었다. 골드문트는 단숨에 달려갔다. 그의 마음속에 
있는 화와 불안, 슬픔이 알지 못하는 이 폭한에 대한 미칠 듯한 분노로써 
폭발하고 말았다. 사나이가 레네를 완전히 땅바닥에 눌러 덮치려는 순간 
골드문트는 놈을 불시에 습격했다. 드러난 레네의 젖가슴에선 피가 흐르고 
있었다. 무뢰한 강한 욕정을 참을 길 없어 레네를 끌어안았던 모양이었다. 
골드문트는 그를 잡아 눌러 분노에 찬 두 손으로 그의 목을 졸랐다. 그의 목은 
말라빠졌고 염소같이 털만 자라 있었다. 골드문트는 희열을 느끼며 계속 
졸라댔고 결국 그는 레네를 놓고 힘없이 늘어지고 말았다. 그래도 그는 힘없이 
기절한 사나이를 땅바닥 위로 솟아나와 있는 바위까지 끌고 갔다. 거기서 그는 
굴복한 사나이를 두세 번 일으켜 세워서, 그 사나이의 머리를 칼날 같은 
바위에다 쥐어박았다. 마침내 그는 목이 부러진 몸을 들어 던졌다. 그래도 그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레네는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젖가슴에서는 피가 계속해서 흐르고 있었다. 
아직도 몸을 부들부들 떨며 괴로운 듯 할딱거리고 있었으나 이내 일어나서 
기쁨과 경탄에 찬 황홀한 눈빛으로 믿음직한 애인이 하는 행동을 바라보고 
있었다. 성긴 수염과 듬성듬성한 머리카락을 가진 창백한 얼굴이 비참하게 
쓰러져 있었다. 레네는 환호성을 지르며 일어서서 골드문트의 가슴에 안겨 
왔으나 별안간 얼굴빛이 변하고 말았다. 공포가 아직도 레네의 가슴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구역질이 날 것 같아 레네는 풀밭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하지만 
레네는 곧 정신을 차리고 골드문트와 함께 오두막으로 갔다. 골드문트는 
상처투성이가 된 레네의 젖가슴을 씻어주었다. 한쪽 젖가슴에는 침입자의 이에 
물린 상처도 있었다.
  로베르트는 그 사건에 매우 흥분을 하고는 격투에 관해서 자세하게 이것저것 
열심히 물었다.
  "죽었다구? 굉장한데 골드문트! 모두 당신을 두려워할 거예요."
  하지만 골드문트는 그 이야기를 더 이상 계속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 그도 
어느 정도 진정되어 있었다. 시체에서 떠나올 때 그는 가엾은 빅토르를 
생각했고 이것으로 자기가 죽인 사람이 둘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로베르트한테서 물러나기 위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너도 뭘 좀 해보지 그래. 가서 시체를 처리하는 것이 어때. 구덩이를 
파는 것이 힘들거든 갈대 숲에 갖다 버리든지 돌이나 흙을 잘 덮어 주든지 
해라."
  하지만 그런 부당한 주문은 거절당했다. 로베르트는 시체를 만지는 것을 
싫어했다. 어떤 시체든지 페스트균이 묻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레네는 방안에서 뒹굴고 있었다. 젖가슴에 물린 상처가 욱신거렸으나 마음은 
이내 가뿐해져서 일어나 불을 피우고 저녁 식사로 우유를 끓였다. 레네는 몹시 
기분이 좋았으나 일찍 침실에 들어가야 했다. 레네는 골드문트한테 아주 
탄복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린 양과도 같이 고분고분 시키는 대로 말을 들었다. 
골드문트는 말도 하지 않고 음울한 얼굴빛을 하고 있었다. 로베르트는 이 
증상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골드문트는 밤이 깊어진 
다음 잠자리에 들려다가 레네 쪽으로 허리를 굽히고 귀를 기울였다. 레네는 
잠들어 있었다. 그의 마음은 침착함을 잃고 빅토르를 생각하며 불안과 방랑의 
충동에 휩싸이고 있었다. 그의 생각은 자꾸만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도 이제는 
마지막이라는 것으로 흘러갔다. 하지만 한 가지의 사실이 특히 그를 생각에 
잠기게 했다. 그가 죽은 사나이를 흔들어서 밀쳐 버렸을 때 그를 쳐다보고 있던 
레네의 눈초리를 그는 놓치지 않았다. 그것은 기묘한 눈초리였으며 결코 잊을 
수 없는 눈빛이었다. 동그랗게 뜬 놀란, 황홀한 눈에는 긍지와 개가가 빛나고 
있었다. 복수와 여자의 얼굴에서 본 적도 없거니와 예상한 적도 없었다. 그 
눈초리가 아니었더라면 아마 레네의 얼굴은 언젠가 세월이 흐르면 잊어버리고 
말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 눈초리가 농부의 딸 같은 그녀의 얼굴을 크고 
아름답고 무섭게 했다. 수개월 이래로 그의 눈이 '이걸 그려야지!' 하는 소망에 
물결쳐 흘러내린 적은 전혀 없었다. 그 눈초리를 보았을 때, 그는 일종의 공포와 
함께 그 소망이 다시 넘쳐나는 것을 느꼈다.
  잠을 이룰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는 결국 몸을 일으켜 오두막에서 나왔다. 
바깥은 시원했다. 바람이 약하게 자작나무 가지를 흔들고 있었다. 어둠 속을 
이리저리 거닐다가 그는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그냥 명상에 잠겨 깊은 비탄 
속으로 젖어들어갔다. 빅토르가 가엾게 여겨졌다. 오늘 때려죽인 그 사나이도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진함과 동정심을 잃은 것을 원망스러워 했다. 
수도원을 도망치고 나르치스를 버리고, 니콜라우스 스승을 화나게 하고, 
아름다운 리스벳을 단념한 것이, 이렇게 황무지에서 잠을 자고, 길 잃은 가축을 
기웃거리고, 불쌍한 사나이를 때려죽이기 위해서인가? 그러한 것에 의미가 
있었던가?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인가? 골드문트는 무의미와 자기 경멸 때문에 
가슴이 미어질 듯했다. 그는 반듯이 누워 다리를 길게 뻗고 희뿌연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렇게 오랫동안 골드문트는 가만히 있었다. 나중에는 하늘의 
구름을 쳐다보고 있는 건지, 자신이 마음속에 있는 구름 낀 세계를 보고 있는 
건지 구별할 수가 없을 정도로, 그러다가 돌 위에서 잠이 든 순간, 갑자기 
달음박질치는 구름 속에서 번갯불처럼 커다랗고 희뿌연 얼굴이 나타났다. 
이브의 얼굴, 깊숙하게 베일을 뒤집어쓰고 내려다보고 있었으나, 육욕과 살인의 
쾌감에 찬 눈빛이었다. 골드문트는 이슬이 내릴 때까지 잤다.
  이튿날, 레네는 병이 들었다. 두 사람은 레네를 가만히 눕혔다. 할 일이 
많았다. 로베르트는 아침에 숲에서 두 마리의 양을 보았으나 곧 놓치고 말았다. 
그는 골드문트를 데리고 갔다. 두 사람은 반나절이나 쫓아가서 한 마리를 
붙잡았다. 저녁 무렵에 양을 끌고 왔을 때 그들은 지칠 대로 지친 몸이었다. 
레네의 상태는 몹시 나빴다. 골드문트가 자세히 살펴보니 페스트의 종기가 
있었다. 그는 그 사실을 숨겼으나 로베르트는 레네가 아직까지도 앓고 있다는 
소리를 듣자 의심을 해 오두막에 더 이상 그대로 머무르려 하지 않았다. 그는 
밖에서 잠자리를 찾겠다, 염소를 데리고 가겠다, 염소라고 옮지 말라는 법은 
없다, 하며 법석을 떨었다.
  "그렇다면 나가 버려."
  골드문트는 화를 내며 소리쳤다.
  "너하곤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다."
  그는 염소를 붙들어 측백나무 뒤로 끌고 갔다. 로베르트는 염소를 두고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렇지만 로베르트는 페스트에 대한 공포, 골드문트에 
대한 공포, 외로움과 밤에 대한 공포 때문에 참을 수 없는 기분이었다. 그는 
오두막 부근에서 드러누웠다.
  골드문트는 레네에게 말했다.
  "난 네 옆에 있을 거야. 걱정하지 않아도 돼. 다시 꼭 건강하게 될 거야."
  레네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당신도 병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는 게 좋겠어요. ! 이제 내 옆에 와서는 
안 돼요. 날 위로해 주려고도 애쓰지 말아요. 나는 죽어야 해요. 언젠가 
당신한테서 버림을 받는 것보다는 죽는 게 차리라 나아요. 아침마다 당신이 
떠나시자 않았나 하고 애를 태웠어요. 그래요, 저는 죽는 게 차리리 나은 걸요."
  이튿날 아침 레네의 상태는 더욱 나빠졌다. 골드문트가 간혹 레네한테 물을 
먹여 주면서 틈틈이 눈을 붙인 것은 겨우 한 시간 정도였다. 날이 훤히 밝은 
그는 레네의 얼굴에 확실히 죽음이 드리워진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완전히 
시들고 마른 얼굴이 되어 있었다. 그는 바깥으로 나와 잠시 동안 숨을 들이키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구부정한 몇 그루의 소나무 줄기가 벌써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공기는 맑고 감미로운 향기를 실어다 주었다. 멀리 보이는 
고개는 아직도 아침 구름에 뒤덮여 보이지 않았다. 그는 몇 발자국 앞으로 
걸어가 지친 팔다리를 뻗으며 심호흡을 했다. 이 슬픈 아침에도 세계는 
아름다웠다. 곧 방랑은 다시 시작되리라. 이별을 고할 때가 된 것이다.
  숲속에서 로베르트가 소리치고 있었다.
  "좀 나았나? 페스트가 아니면 나도 그냥 있겠다, 골드문트, 화내지 마라. 나는 
그 동안 양을 지키고 싶어."
  "양과 함께 지옥이나 가버려!"
  하고 골드문트가 소리쳤다.
  "레네는 다 죽어가고 있다. 나도 전염되었어."
  마지막 말은 물론 거짓이었다. 로베르트를 멀리 떨쳐 버리기 위해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설령 이 로베르트가 마음이 상냥한 사나이였다더라도 
골드문트는 이제 진절머리가 났다. 이 친구는 너무나 겁이 많고 소심했다. 
이렇게 숙명적인 동요가 격심한 시기에는 너무 부적합한 사나이였다. 
로베르트는 이제 보이지 않았다. 해가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레네 있는 곳으로 다시 왔을 때 그녀는 잠을 자고 있었다. 그도 다시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지난날 그의 말 블레스와 수도원의 탐스런 밤나무가 
나타났다. 그는 끝도 없는 먼 나라의 황무지에서 잃어버린 고향을 되돌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눈을 떠보니 갈색의 수염이 나 있는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희미한 소리로 레네가 무엇이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자기를 부르는 소리로 믿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으나 레네는 
누구에게 말을 거는 것이 아니라 애욕의 말, 저주스러운 말을 혼자서 입 속에 
담아 주워섬기고 있을 뿐이었다. 혼자 웃다가는 또 하늘이라도 꺼질 듯 한숨을 
쉬고, 흐느껴 울다가는 다시 잠잠해졌다. 골드문트는 벌떡 일어나서 찌푸리고 
있는 레네의 얼굴 위로 허리를 굽혔다. 타는 듯한  죽음의 입김 아래 비참하게 
흩어진 선을 씁쓸한 호기심으로 지켜보았다. 사랑하는 레네여! 귀여운 아가씨여! 
너도 나를 버리는구나! 그의 가슴은 그렇게 소리치고 있었다. 너도 벌써 나한테 
싫증이 났느냐?
  도망치고 싶었다. 헤매고 헤매며, 새로운 공기를 마시고, 새로운 형상을 볼 
수만 있다면 그러면 마음도 한결 가벼워지고 깊은 우울증도 가라앉을 테지. 
하지만 그렇게는 하지 못한다. 여기 이 아가씨를 혼자 죽게 한다는 것은 차마 
할 수 없었다. 맑은 공기를 마시기 위해 두세 시간마다 잠시 동안 바깥에도 
나갈 수가 없었다. 실컷 마실 수 있는 것은 우유뿐, 그밖에 달리 먹을 것은 
없었다. 염소를 몇 번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풀을 뜯게 하고, 물을 먹이고, 
운동을 하게 했다. 그러고는 다시 레네의 잠자리 곁에 와서 섰다. 정답게 
이야기도 해주고 아무 두려움도 없이 그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절망적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침착하게 레네가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레네의 의식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간혹 잠들었다가 어렴풋이 눈을 뜨곤 하였다. 
눈꺼풀이 지쳐서 맥이 없어 보였다. 야들야들하던 그녀도 눈과 코의 주변이 
차츰차츰 쇠퇴해가는 듯했다. 물이 방울져 떨어질 듯 윤이 나던 목덜미 위에 
자꾸만 시들어가는 얼굴이 얹혀지고 있었다. 레네는 어쩌다가 '골드문트,' 
'사랑스러운 이' 라고 지껄이거나 창백해진 입술을 혓바닥으로 간신히 축이려고 
들었다. 그럴 때는 레네의 입술에다 물방울을 적셔 주었다.
  그날 밤, 레네는 죽었다. 울거나 슬퍼하는 기색도 없었다. 약간 몸을 움찔했을 
뿐 호흡은 멎고 말았다. 피부 위를 숨결이 흘러갔다. 그의 가슴은 파도쳤다. 
생선 시장에서 몇 번이나 보면서 불쌍하다고 생각한 빈사상태에 빠진 물고기 
생각이 났다. 물고기가 죽어가는 모양도 바로 이러했다. 움찔했다가는 
파닥거리는 고통의 소름이 살갗 위를 달려들면 광택도 생명도 쓸려가고 마는 
것이었다. 그는 한참 동안 레네의 옆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염소 생각이 나서 
다시 한 번 들어가 염소를 데리고 나왔다. 염소는 풀을 찾아내자 땅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는 염소 옆구리에 머리를 기대고 날이 밝을 때까지 잤다. 마지막으로 
오두막에 들어가 엮어 놓은 뒤 벽 뒤에 가서 불쌍한 레네의 얼굴을 보았다. 
시신을 그대로 거기에 둘 수는 없었다. 그는 다시 바깥으로 나가 한아름 의 
마른 장작과 시든 잔가지를 긁어모아 그것을 오두막에 집어던지고 불을 붙였다. 
오두막 속에서 그는 불 붙일 도구 이외에는 아무것도 꺼내지 않았다. 바싹 마른 
칡덩굴 벽은 순식간에 빨갛게 타올랐다. 그는 멍하니 서서 용마루가 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염소는 겁을 집어먹고 울면서 날뛰었다. 염소를 잡아서 그 한 
조각을 구워 먹으면 힘이 솟구칠 것 같았다. 하지마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염소를 들로 내쫓고 떠났다. 숲속에까지 죽음을 삼킨 연기가 따라왔다. 
이렇게 비참한 마음을 가지고 방랑길에 오르기는 처음이었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나빴다. 맨 처음에 당도한 
농가나 마을마다 갈수록 악화된 상황뿐이었다. 그 지방 어디에고 죽음의 구름, 
전율과 불안과 영혼의 암흑에 싸여 있었다. 죽음으로 폐허가 된 집들, 사슬에 
매인 채 굶어죽어 썩어 버린 개, 묻히지도 못하고 뒹굴고 있는 송장들, 거지 
행각에 나선 어린애들, 교외에 있는 수많은 무덤들, 그러나 더욱 지독한 것은 
무서움과 죽음의 불안을 안고 눈도 영혼도 상실해 버린 채 살아 있는 산 
사람들이었다. 아이들이나 아내가 병들면 부모는 아들을, 남편은 아내를 버렸다. 
시체 치우는 인부들이나 병원지기들은 사형 집행인처럼 날뛰었다. 그들은 
사람이 죽어 텅 빈 집에서 강도질을 하고, 제멋대로 시체를 묻지도 않고 두거나 
빈사 상태에 빠진 병자를 숨도 거두기 전에 침대에서 끌어내려 마차에 싣기도 
했다.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혼자서 겁을 집어먹고 인간과의 접촉을 피해 가며 
죽음의 촉수에 내쫓기며 헤매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한데 
휩쓸려서 어이없는 향락에 빠져 주연을 벌여 넣고 죽음의 귀신이 연주하는 
바이올린을 반주로 춤과 애욕의 향연을 베풀고 있었다. 또 무덤 앞이나 사람이 
다 죽어버린 빈 집에서 광란의 눈초리로 웅크리고 앉아서 거들떠 보는 이하나 
없이 통곡하다가 막 호통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지독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이 불행에 대해서 책임질 사람을 찾고 있다는 것, 모두 다 이 
전염병에 책임이 있고 마음씨가 나쁜 장본인이 극악 무도한 자는 누구누구라고 
주장한 것이었다. 악마와 같은 페스트의 시체에서 병균을 받아서 문이 손잡이에 
발라 놓거나 또 우물에 독을 넣거나 가축들에게 독을 먹여 죽음의 잔치를 위해 
애쓰면서 많은 사람들의 불행을 보고 기쁨에 젖어있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런 
잔인한 짓을 했다고 의심을 받는 사람은 재판소나 폭도들에 의해 사형 당했다. 
또 부자는 가난뱅이한테 죄를 뒤집어씌웠으며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또 
유태인이나 남쪽 나라 사람, 혹은 의사의 소행이라고도 했다.
  어느 도시에서 골드문트는 유태인 거리에 집집마다 화재가 난 것을 보고 말할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그 주위를 사람들이 빙 둘러싸고 있었다. 울부짖으며 
달아나는 사람이 있으면 무기를 이용해 화염 속에 도로 집어넣었다. 불안과 
분노에 눈이 뒤집힌 사람들에 의해, 도처에서 죄 없는 사람이 살해되고 
추방되고 고문당했다. 골드문트는 화가 나서 속이 뒤집힐 것 같은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온 세계가 파괴되고 몰살되었다. 환희도 순수도 사랑도 이 
땅위에는 전혀 존재하질 않는 것 같았다. 이따금 그는 향락가의 과격한 
향연으로 몸을 피했다. 저승 사자의 바이올린이 울려 나오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이내 그도 소리에 익숙해지고 말았다. 그는 자주 자포 자기에 빠진 연회에 
참석하여 기타를 치거나 관솔불 밑에서 무더운 밤을 같이 춤추고 노래하며 
지새우기도 했다.
  그는 두려움을 몰랐다. 한때 죽음의 공포를 맛본 적은 있었다. 언제이던가, 
겨울 밤 전나무 아래에서 빅토르의 손가락이 그의 목을 죄어 왔을 때, 또 살을 
에는 방랑 시절의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하지만 그것은 그것을 상대로 하여 
싸울 수 있는 죽음이요, 그것을 상대로 막을 수 있는 죽음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떨리는 손발과 지친 사지로 싸워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하지만 이 페스트의 
죽음과는 싸울 방도가 없었다. 마음대로 날뛰는 대로 내버려 두고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골드문트는 벌써부터 몸을 맡기고 있었다. 그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타오르는 통나무 집에 레네를 남겨두고 온 이래, 죽음으로 온통 
짓밟힌 도시와 이곳 저곳을 매일 헤매 다닌 이래, 이제 생명 같은 것은 문제도 
안 되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하지만 누를 수 없는 호기심이 그를 내몰아 정신을 
바짝 차렸다. 그는 무수한 죽음을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았다. 어떠한 곳에서도 
걸음을 멈추어 눈을 뜨고 지옥을 빠져나간다는 고요한 정열에 사로잡혔다. 
죽음으로 폐가가 되어 버린 집에서 곰팡이가 슨 빵을 뜯어 먹었다. 
미치광이들의 집합소 같은 술자리에서 노래도 부르고 술도 마셨다. 쾌락으로 
시들어지기 쉬운 꽃을 땄다. 여인들의 취한 듯 응시하는 눈길을 보았다. 
주정뱅이들의 퀭한 눈길을 보았다. 숨이 끊어져가는 사람들의 가물거리는 
눈길도 보았다. 열에 들뜬 절망에 빠진 여인을 사랑했다. 한 접시의 스프를 
받고 시체를 나르기도 했고 한두 푼의 돈을 받고 시체 위에 흙을 덮어 주는 
일도 했다. 세상은 암흑과 공포의 세계로 변했다. 저승 사자가 울부짖으며 
죽음의 노래를 불렀다. 골드문트는 정열을 불사르며 그 노래를 들었다.
  그가 가야 할 곳은 니콜라우스 스승이 사는 마을이었다. 그의 가슴속의 
목소리가 그를 그곳으로 끌고 갔다. 길은 멀었다. 죽음과 쇠약과 세상의 곳곳에 
충만하고 있었다. 슬프게 끌려갔다. 죽음의 노래에 취하고, 세상의 울부짖는 
고뇌에 자신을 내맡기고, 슬프면서도 행복하다는 듯 오관을 활짝 열어젖혀 
놓고서.
  그는 어느 수도원에서 새로 제작된 벽화를 구경했다. 오랫동안 관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죽음의 춤이 벽에 그려져 있었다. 그림에서는 희멀겋고 피골이 
상접한 저승 사자가 왕, 사교, 수도원장, 백작, 기사, 의사, 농사꾼, 용병 등 온갖 
인간 군상을, 춤을 덩실덩실 추면서 이승 밖으로 끌고 나갔다. 뼈다귀만 남아 
있는 악사들이 뼈다귀를 악기 삼아 연주하고 있었다. 호기심에 찬 골드문트의 
눈길은 그 그림을 깊숙이 빨아당기고 있었다. 이름 모를 예술가 중의 하나가 
페스트에서 본 것 중에서 얻은 것이리라.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한 
가차없는 설교를 사람들의 귀에 쨍쨍 울리도록 외치고 있었다. 훌륭한 
그림이었고, 좋은 설교였다. 이 낯서 동료의 안목이나 채색법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그 과격한 그림에서는 처참한 음향이 울려나오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은 골드문트 자신이 겪고 체험한 것은 아니었다. 그 벽에 그려져 있는 
그림은 준엄하고 용서의 여지가 없는 불가피한 죽음이었다. 하지만 
골드문트라면 다른 그림을 그렸으리라. 저승 사자의 광포한 노래는 그의 
가슴속에서는 완전히 다른 가락을 연주하고 있었다. 마르지도 준엄하지도 않고, 
오히려 달콤하고 유혹적이고 고향으로 데려가듯, 어머니와 같은 가락을 
연주하고 있었다. 죽음의 손아귀가 생명을 향해 뻗쳐올 때 매섭게 도전적으로 
가락을 연주할 뿐만 아니라 애정에 푹 젖고 결실의 가을처럼 기름지게 가락을 
울리는 것이었다. 죽음은 다른 사람에게는 병사요, 판관이요, 죽음과의 접촉은 
사랑의 몸부림이었다. 골드문트가 벽화에 그려진 죽음의 무도를 다 보고 나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을 때 무언가 새로운 힘이 스승이 있는 데로, 창작이 
기다리는 곳으로 자신을 몰고 갔다. 하지만 곳곳에서 새로운 광경과 체험에 
부딪혀 자꾸 늦어졌다. 열린 콧구멍으로 죽음의 공기를 들이마셨다. 도처에서 
동정과 호기심이 한 시간 혹은 한나절을 지체하라고 그에게 요구했다. 울어대는 
농사꾼의 조그만 사내아이를 사흘씩이나 돌봐 주었다. 굶주림에 허덕이는 
대여섯 살 되는 아이 때문에 진땀을 흘리다가 간신히 숯굽는 여인에게 아이를 
맡기기도 했다. 그 여자는 남편이 죽었기 때문에 어린애를 가까이에 두고 
싶어했던 것이다. 또 며칠 동안 주인 없는 개 한 마리가 그를 따라와서 
그에게서 뭔가를 얻어먹었다. 잠잘 때는 그의 몸을 따스하게 해주었으나 어느 
날 아침에 없어지고 말았다. 그는 서운했다. 그는 개와 이야기하는 버릇이 
들었던 것이다. 그는 곧잘 그 개한테 명상적인 이야기를 해주곤 했다. 인간이 
나쁜 점에 대해서, 신의 존재에 대해서, 예술에 대해서, 그가 젊은 시절에 한때 
알고 지냈던 율리에라는, 기사의 아름다운 딸의 유방과 엉덩이에 대해서. 물론 
골드문트도 죽음의 방랑을 계속하고 있는 동안에 마음이 약해졌다. 페스트가 
창궐하는 지방의 인간은 모두 어느 정도 정신 상태가 이상하게 되어 있었다. 
완전히 미친 사람도 많았다. 그 가운데 유태계의 젊은 처녀 레베카도 아마 
정신이 좀 이상한 것 같았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듯한 눈을 갖고 있는 까만 
머리의 아름다운 이 처녀와 그는 이틀 동안이나 시간을 허비하고 말았다.
  레베카를 발견한 곳은 어느 소읍의 교외 들판이었다. 까맣게 숯이 된 불탄 
자리에 그녀는 웅크리고 앉아 구슬프게 통곡하고 있었다. 제 얼굴을 때리며 
머리를 쥐어 쥐어뜯고 있었다. 그 머리카락을 보고 그는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아름다운 머리카락이었다. 그는 그 여자의 부들부들 떠는 손을 꽉 
쥐었다. 이야기를 건네 본 후에 얼굴도 몸매도 대단히 아름답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아버지를 가엾게 여기면서 통곡하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다른 
14명의 유태인들과 함께 관청의 명령에 의해서 화형당했던 것이다. 그녀는 
간신히 도망쳐 나갈 수가 있었으나 자포 자기 상태에 빠져 자기도 함께 타죽지 
못한 것을 애통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는 심하게 떨리는 그녀의 손을 단단히 
쥐고 온화하게 타일렀다. 동정과 보호의 말들도 속삭였다. 마지막엔 무엇이든 
도와주겠다고 제의했다. 그녀는 아버지를 묻는 것을 도와 달라고 했다. 두 
사람은 아직 후끈후끈한 잿더미 속에서 뼈를 모두 주워 모아 들판 저쪽,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운반해서 흙을 덮어 주었다. 밤이 되었다. 골드문트는 
잠자리를 찾았다. 처녀를 위해 어느 참나무 우거진 숲속에다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보초를 서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귀를 곤두세우고 있으려니 그 여자는 
드러누워서도 한참을 흐느끼더니 나중에야 잠을 잤다. 그도 좀 잤다.
  아침이 되자 그는 그녀를 달래기 시작했다. 넌 혼자서 지낼 수가 없는 
처지이다. 유태인이라는 것이 발각되면 맞아 죽을 것이다. 거칠고 사나운 
유랑자들은 널 납치해 갈 거고, 숲속에는 집시나 늑대가 있다. 그러기에 나는 
너를 데리고 가주겠다. 늑대나 인간으로부터 지켜준다. 나는 너를 매우 가엾게 
여기기 때문이다. 얼마든지 귀여워도 해준다. 나는 정상적인 평범한 인간이고 
어떤 것이 아름다운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어여쁘고 영리한 눈꺼풀이나 
홀딱 반할 것 같은 이 어깨가 짐승한테 잡아먹히거나 차곡차곡 쌓인 장작개비 
위에서 태워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그녀는 음울한 얼굴로 듣고 
있었으나 별안간 일어나더니 내쳐 달아나 버렸다. 그는 쫓아가서 그녀를 
잡았다.
  "레베카, 내가 너한테 나쁜 마음을 품고 있지 않은 것은 알지? 너는 슬퍼하고 
있어. 아버지만을 머릿속에 그리고, 사랑 같은 건 도무지 엄두도 내지 않으려 
하는구나. 하지만 나는 내일이나 모레, 아니면 훨씬 나중에 너에게 의사를 
물어볼 거야. 그때까지 나는 널 지키고 먹을 것도 갖다주기는 하겠지만 네 
손가락 하나도 건드리지 않을 거야. 마음이 가라앉을 때까지 실컷 울어라. 내 
옆에 있을 때는 슬퍼하든 기꺼워하든 난 상관 않겠다만 내 마음은 언제든 널 
기쁘게 하는 데만 힘쓸 거야."
  하지만 아무리 달래며 되풀이해도 도무지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미친 사람처럼 이렇게 말했다. '자기를 즐겁게 해주는 것은 무엇이든 
싫다, 무엇이든 괴로움을 갖다주는 것이 좋다, 즐거움 같은 것은 이제 절대 
생각하지도 않으리라, 늑대한테 물리는 것이 빠르면 빠를수록 고마운 일이다, 
이제 가다오, 소용없는 일이다, 이제 그런 이야기는 귀가 따가울 정도다.' 라고.
  "이것 봐."
  그는 말했다.
  "네가 어디를 가도 죽음이 도사리고 앉아 있다는 것을, 집집마다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만인이 비탄 속에 잠겨 있다는 것을 모른단 말인가? 네 
아버지를 태워 죽인 어리석은 자들의 울분도 괴로움도 비탄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야. 다들 고통이 너무 큰 탓이야, 알겠나. 우린들 별수 있어? 머잖아 저승 
사자에게 붙잡혀 들판에서 썩어갈 운명에 놓여 있어. 그 다음에는 우리들 
뼈다귀를 가지고 두더지가 장난을 칠 거란 말이야. 그렇게 되기 전에 인생을 
즐기고 서로 사랑을 하자구. 아, 하얀 네 목덜미와 예쁘장한 발이 애처로워 못 
견디겠어! 귀엽고 고운 레베카, 나하고 같이 가. 난 네 얼굴이나 쳐다보면서 
너의 시중을 들어 주고 싶을 뿐이라구."
  그는 오랫동안 애원을 했으나 말로써 설득해 나가는 것이 얼마나 무익한가를 
순간 깨달았다. 그는 입을 꼭 다물고 슬픈 눈으로 레베카를 바라보았다. 긍지와 
교양미에 가득 찬 그녀의 얼굴은 거절 때문에 얼음장같이 싸늘했다.
  "당신들은 그런 사람이에요."
  그녀는 드디어 증오와 멸시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들 크리스찬들은 모두가 그렇고 그런 사람이라구요! 아버지를 
장사지내는 처녀를 도와준다지만 그 아버지도 결국 당신들 종족이 살해한 
거예요. 당신 같은 사람은 우리 아버지의 손톱만큼의 가치도 없어요. 장례를 
치른 지 몇 분도 채 되지 않아 그 처녀에게 자기와 같이 지내자느니 해요. 
처음에 말예요, 난 당신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뭐가 좋은 
사람이에요! 아, 당신네들은 짐승만도 못해요."
  그녀가 정신없이 지껄이고 있는 동안, 골드문트는 그녀의 눈 속을 
들여다보았다. 증오심의 한쪽 구석에 그를 감동시키고 참회하게 하고, 가슴속 
깊이 파고들어오는 무엇인가가 보였다. 그녀의 눈에 보인 것은 죽음이었다. 
하지만 죽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체념이 아니고 죽고 싶다, 죽음을 
불사한다는 의지였으며 대지의 어머니의 부름에 조용히 따라가고자 하는 
헌신이었다.
  "레베카."
  그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네가 말하는 것이 맞을지도 몰라. 나는 너에 대해 선의를 가지고 있지만 
결코 좋은 인간은 아니야. 용서해 줘. 나는 지금 그것을 깨달았어."
  그는 모자를 벗고 여왕에게라도 하듯 깊숙이 고개를 숙여 작별 인사를 한 
다음 무거운 가슴을 안고 그 자리를 떠났다. 그 여자를 자멸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오랫동안 그의 슬픈 마음은 가시지 않았다. 어느 누구하고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서로 닮은 점도 조금도 없었으니 기질에 세고 불쌍한 
유태계의 처녀는 어딘지 모르게 기사의 딸 리디아를 생각나게 했다. 이런 
여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괴로움을 동반하는 것이었으나. 그는 리디아와 이 
유태계의 처녀 이외의 여자를 사랑한 적은 전혀 없는 것 같은 기분까지 들었다.
  그의 생각은 그 후에도 며칠 동안이나 그 까만 머리카락의 뜨겁게 타는 듯한 
처녀를 찾아가고 있었다. 며칠 밤이나 꿈속에서 늘씬한 몸매와 불타는 듯한 그 
모습의 아름다움을 보았다. 그 아름다움은 행복과 꽃다움에 운명지워져 있었던 
것 같은데도 벌써 죽음에 손이 닿아 있었다. 아, 저 입술과 젖가슴이 '짐승들'의 
밥이 되고 들판에서 썩어가지 않으면 안 되다니! 저 소중한 꽃을 구경할 힘과 
마력은 없는 것일까? 아니, 마법은 있다. 즉 그 여자가 그의 영혼 속에서 계속 
존재하고, 그에 의해서 형성되고 간직되어진다면 그만이다. 그의 영혼이 얼마나 
많은 형상으로 채워져 있는가, 죽음의 언덕을 기나긴 시간 헤매 다닐 동안 
얼마나 많은 형상이 그의 마음속에 그려졌는가를 느끼고 놀라움과 환희를 감출 
길이 없었다. 그의 마음속의 충만은 얼마나 긴장을 느끼게 하였는가! 그것을 
조용히 생각하고 잘라내어 영속적인 형태로 변화시키기를 그는 얼마나 애타게 
갈망하고 있었던가! 그런 마음은 연달아 불꽃을 튀기는 듯 자꾸만 
강렬해져갔다. 그는 아직도 사방으로 흩어진 눈길과 호기심에 찬 감각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종이와 연필과 점토와 통나무와 일터와 제작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동경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여름이 지나갔다. 가을이나 적어도 초겨울쯤에는 페스트도 가라앉으리라고 
많은 사람들은 예측했다. 즐거움이 없는 가을이었다. 골드문트의 흔적이 지나간 
지방에서는 과실을 거둬들일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과실들은 나무에서 바로 
떨어져 풀밭에서 썩고 있었다. 어떤 지방에서는 다른 마을에서 밀려온 험상궂은 
부랑자들이 과실들을 제 마음대로 노략질하고 못쓰게 만들어 놓았다.
  골드문트는 서서히 그의 목적지를 향해 접근해갔다. 간혹 그는 거의 막바지에 
가서 도착하기 전에 페스트에 걸릴지도 모르고, 어딘가 낯선 외양간에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싸여 있었다. 지금은 죽기가 싫었다. 한 번 더 
일터에 서서 작업에 온 마음과 몸을 바치는 행복을 맛보기 전에는. 이제야 
비로소 그는 세계가 너무나 넓고 이치가 너무도 큰 것을 깨달았다. 어떤 
아름다운 도시도 그를 휴식으로 유혹하는 힘을 가지지 않았다. 아무리 예쁜 
농사꾼의 딸도 하룻밤 이상 그를 붙들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어느 낯선 성당 앞을 지나갔다. 그 현관 옆, 조그맣게 
장식한 기둥으로 괴어 있는 벽감 속에 고대의 수많은 석상들이 서 있었다. 천사, 
사도, 순교자 등 자주 본 적이 있는 것과 똑같은 석상들이었다. 마리아브론의 
수도원에도 이런 종류의 석상은 얼마든지 있었다. 젊은 시절,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즐겨 본 것들이었다. 언뜻 보기에 그것들은 
아름답고 품위 있어 보였으나 다소 지나치게 정중하고 얼마간 뻣뻣한 데다 
곰팡이 냄새도 났다. 맨 처음 기나긴 유랑생활의 종말에, 그 감미롭고 슬픔에 찬 
니콜라우스 스승의 마리아 상에 큰 충격을 받고 매혹된 이후로, 그는 그것들을 
일종의 경멸하는 듯한 시선으로 보곤 했다. 스승의 새로운 기법에서 훨씬 더 
약동적이고 내면적인고 영감적인 예를 발견한 것이다. 하지만 오늘, 새로운 
갖가지 형상들로 마음이 충만되어 격심한 모험과 체험의 상흔이 자취를 영혼에 
새겨 두고, 명상과 새로운 작업에의 끝없는 그리움을 가지고 돌아와 보니, 이 
원시적이며 동시에 준엄한 석상들이 별안간 과격한 힘으로 그의 가슴을 
휘저었다. 그는 경건한 마음으로 신성한 석상들 앞에 섰다. 그 석상들 속에는 
오래 전에 없어진 종족들의 불안과 도취가 몇 세기 뒤에 돌에 엉겨붙어 
굳어졌어도 아직 인생이 덧없다는 데 대한 반항을 드러내고 있었다. 즉 그 
옛날의 삶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다. 말라빠진 그의 가슴속에 외경의 감정과 
낭비하고 헛되이 보내고 만 생활에 대한 불안이 몸부림치며 끓어올랐다. 그는 
그가 오랜 시간 잊고 있었던 고해를 하기 위해 고해석을 찾았다.
  성당 안에 고해석이 있기는 했으나 어디에도 신부는 없었다. 신부들은 
죽었거나, 병원에 드러누었거나, 전염병을 겁내어 도망을 쳤을 것이다. 성당은 
텅 비어 있었고, 골드문트의 발소리가 돌로 만든 아치형 천장에 부딪쳐서 
메아리쳤다. 그는 텅 빈 고해석에 끓어 엎드려 눈을 감은 채 창살에다 대고 
속삭였다.
  " 거룩하신 하느님. 제가 지금 어떤 모습인가를 보십시오. 저는 속세에서 
돌아왔습니다. 흉악하고 쓸모없는 인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는 젊은 시절을 
방탕자처럼 헛되이 지냈고, 이 청춘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는 살인을 
하고, 도둑질을 하고, 간음을 하고, 되는 대로 살았으며, 다른 사람의 빵을 
빼앗았습니다. 거룩하신 하느님, 당신은 왜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으며 이와 같은 
행로를 걷게 하시는 겁니까? 우리는 당신의 아들이 아니란 말씀입니까? 우리를 
인도해 줄 성자와 천사는 없습니까? 아니면 그런 것은 모두 적당히 꿰어 맞춘 
거짓이었고 어린아이들한테 얘깃거리로 들려줄 그런 것이며 신부들은 사람들 
자신이 웃음거리로 여기는 장난에 불과 하옵니까? 저는 당신을 알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하느님이시여, 당신은 세상을 흉악하게 만드시고 광포한 
질서 속에 두고 계십니다. 저는 집집마다 골목길마다 시체가 깔려 있는 것을 제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부자들이 자기네들 집에다 담을 쌓거나 도망치거나 
하는 것을, 가난한 사람들이 그들 형제들을 묻어 주지 않고 그냥 팽개쳐 두는 
것을, 그들이 서로 의심을 해서 유태 사람들을 짐승처럼 때려 죽이는 것을, 아무 
죄도 없는 수많은 사람이 괴로워하고 파멸해가는 것을, 수많은 악인들이 안락에 
젖어 있는 것을 제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습니다. 당신은 우리들을 모두 
잊으시고 버리셨습니까? 당신께서 만드신 우주에 완전히 싫증을 느꼈나요? 
우리들 모두 멸망의 구렁텅이로 빠트릴 작정이십니까?"
  가라앉을 듯한 깊은 한숨을 쉬며 그는 높다란 입구로 걸어나갔다. 천사나 
성자의 석상들이 꼼짝하지 않고 줄이 간 법의를 걸치고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 도달하기 어렵고 초인간적으로. 하지만 인간이 인간의 
손으로 만들고 인간의 정신으로 만들어져서 준엄하고 동시에 무감각하게 어떤 
원망이나 물음에도 꼼짝하지 않고 그들 석상들은 좁디좁은 자리에 서 있었다. 
하지만 품위와 아름다움을 잃지 않고 서서 차례차례로 죽어가는 인간에게 
그들의 초연한 모습은 끝없는 위로요, 죽음과 절망에 대해 개가를 올리는 
승리였다. 아, 여기에 불쌍하고 아름다운 유태계 처녀 레베카나 통나무집과 함께 
타죽은 불쌍한 레네나 정다운 리디아나 니콜라우스 스승도 나란히 같이 설 수가 
있다면! 언젠가 그네들도 한번쯤은 여기 이곳에 나란히 서게 되리라. 그에게 
있어서 오늘의 애정과 고뇌와 불안과 저열을 의미하는 그들의 모습은 후세 
사람들 앞에, 비록 이름이나 사연은 전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고요하고 말없는 
상징으로 서 있게 되리라.

         15

  드디어 목적지에 다다랐다. 골드문트는 지난날 스승을 찾기 위해 들어간 문을 
지나서 동경하던 도시에 발을 들여놓았다. 주교가 사는 이 도시에서 떠도는 
수많은 소식은 이곳으로 오는 길목에서 벌써 들었다. 거기서도 페스트가 
만연하고 있었던 것을, 아마 아직도 창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또 그는 
백성들의 소요로 도시가 황폐해졌고, 그 때문에 황제가 임명한 총독이 질서 
회복을 위해 파견되고 긴급 명령을 내려서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조처를 취했다는 것도 전해 들었다. 페스트가 발생하자 주교는 즉시 도시를 
버리고 먼 지방에 있는 그의 성으로 옮겨 사태는 더욱 복잡해졌다고 한다. 그런 
소식을 이 나그네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마을과 그가 작업할 수 있는 
일터만 남아 있다면! 다른 것은 어느 것도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당도했을 때는 페스트도 고개를 숙인 때였다. 사람들은 주교의 귀환을 기다리며 
총독의 퇴거와 평화로운 일상 생활이 다시 오기를 꿈에서조차 그리고 있었다.
  이 마을을 다시 보았을 때, 재회의 기쁨이 고향의 그리운 정을 지금껏 맛본 
적이 없었던 것처럼 격심하게 골드문트의 가슴에 파도쳤다. 그는 자신을 
억제하기 위해 평소와는 다른 정색한 표정을 지었다. 아, 하나도 변한 것이 
없구나! 성문도, 그리웠던 우물도, 대사원의 우스꽝스러운 낡은 탑도, 마리아 
성당의 높다란 탑도, 성로렌츠의 맑은 종소리도, 햇빛이 내리쬐는 시장도! 그 
모든 것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 여기에 도착할 때까지 
그는 모든 것이 파괴되어 부서졌거나 새로운 건물이나 반갑지도 않은 묘한 표지 
때문에 모든 것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낯설게 변했으리라고 상상했었는데, 
한 집 한 집을 추억 속에서 끄집어내면서 골목길을 돌아가니 저절로 눈물이 
글썽글썽해졌다. 아담하고 안전한 집에, 불만 없는 소시민의 생활 속에 고향을 
가지고 안방과 일터에 주저앉아 아내와 아이들, 하인, 이웃 사람들과 어울려 
생활하고 있다는 믿음직한 안정감 속에 있는 사람들은 결국 부러운 존재가 
아닐까?
  오후도 한고비 지난 때였다. 골목길 남쪽에 위치한 집, 음식점, 조합의 간판과 
조각한 대문, 화분들이 따스한 볕을 받고 있었다. 이 도시의 어디에도 광란에 
떠는 죽음이나 제정신을 잃은 인간들의 공포가 한때 뒤덮였었다는 것을 회상케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메아리가 곧잘 울리는 아치형의 다리 밑을 맑은 
강물이 유록의 빛을 띠며 흘러가고 있었다. 골드문트는 잠시 둑 위에 앉았다. 
여전히 유록색의 수정과 같은 물 속에서 환상적인 까만 고기들이 재빠르게 
달려가거나 물결을 거슬러 가거나 가만히 있기도 했다. 지금도 변함없이 
어슴푸레한 밑바닥 이쪽저쪽에서 그 가냘픈 황금빛을 번쩍거리며 온갖 것을 
암시하며 자꾸만 환상을 북돋운다. 그것은 다른 시냇가에도 있었거니와 
보기에도 말쑥한 다리와 도시는 딴 곳에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벌써 기나긴 
시간 이런 것을 본 일도 없고 똑 같은 감정을 가진 적도 없는 듯했다.
  푸줏간의 두 사내가 연방 킬킬대며 송아지를 몰고 갔다. 그들은 2층 
발코니에서 빨래를 걷고 있는 하녀와 눈짓과 농담을 주고받고 있었다. 왜 그리 
빨리 만사는 지나가고 마는가!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페스트의 불이 붙어 
별것도 아닌 병원의 급사들이 뽐내고 있었을 것인데, 지금은 생활의 흐름이 제 
길을 찾아 사람들은 농담을 하며 킬킬댔다. 그 자신도 그 길을 따라갔다. 그도 
거기에 앉아 재회에 마음을 빼앗기고 감사한 마음을 가지며 마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공감하고 있었다. 마치 불행도 죽음도 없었던 것같이, 레네도, 
유태계의 처녀도 없었던 것처럼.
  그는 미소를 지으며 일어서서 곧장 걸어갔다. 니콜라우스 스승이 사는 
골목길로 접어들며 몇 년간 매일같이 일하러 다니던 그 길을 다시 걷자니 그의 
가슴은 감회에 젖어 두근거리기만 했다. 그는 걸음을 재촉해 당장이라도 스승을 
찾아뵙고 사정을 듣고자 했다. 내일까지 기다린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기라도 
한 듯, 한시의 지체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스승은 아직도 그에게 화를 내고 
계실까? 이미 오래 전의 일이었으니까 뭐 대단치는 않을 테지. 스승이 화를 
낸다손 치더라도 참을 수 있을 테지. 스승만 계시고 그리고 일터만 무사하다면 
만사는 뜻대로인 것이다. 거의 다 왔을 무렵이 되자 그는 마치 무엇을 놓칠 
염려라도 있기나 한 듯 정든 집을 향해 서둘러 걸어갔다. 문은 잠겨 있었다. 
그때 그의 가슴은 한없이 울렁거렸다. 무슨 좋지 않은 일이라도 생긴 것이 
아닌가? 옛날에는 대낮에 이 문이 잠겨 있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다. 세차게 
문을 두드리고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별안간 가슴은 불안에 싸였다.
  나이 먹은 하녀가 나왔다. 옛날에 그가 처음 이 집에 들어섰을 때 맞이해 준 
하녀였다. 나이도 더 들었으며 추하고 인정미도 없어 보였다. 그녀는 
골드문트를 잘 알아보지 못했다. 그는 불안한 목소리로 스승의 안부를 물었다. 
그녀는 이상하다는 듯이 그를 쳐다보았다.
  "스승이라뇨? 여긴 그런 사람 없어요. 어서 가요, 아무도 들여놓지 않으니까."
  그녀는 그를 문 앞에서 밀어내려고 했다. 그는 노파의 팔을 잡고 귀에다 대고 
고함을 질렀다.
  "마르그리트, 제발 말 좀 해줘! 나 골드문트야! 모르겠어? 니콜라우스 스승을 
만나러 왔단 말이야."
  그녀의 눈망울엔 여전히 반가운 기색조차 내비치지 않았다.
  "여기는 이제 니콜라우스 선생은 없어요."
  여자는 내뱉듯이 말했다.
  "니콜라우스 선생은 이미 죽었어요. 가세요. 여기 서서 당신하고 이야기만 
하고 있을 여유가 없어요."
  골드문트는 마음속에서 모든 것이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그는 노파를 밀쳐 
버리고 어두운 복도를 지나서 작업장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하녀는 덤빌 
듯이 뒤따라왔다. 작업장에는 자물쇠가 잠겨져 있었다. 고래고래 소리치며 욕을 
퍼붓고 있는 노파에게 쫓기면서도 그는 계단을 뛰어올라가 좀 어두컴컴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눈에 익은 장소에 니콜라우스가 모아 놓은 목상들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큰 소리로 니콜라우스의 딸 리스벳을 불렀다.
  방문이 조용히 열리며 리스벳이 나타났다. 자세히 들여다본 뒤에야 그녀라는 
것을 겨우 알아낼 수가 있었다. 그 애처로운 모습에 그는 가슴이 미어졌다. 
문에 자물쇠가 채워진 것을 알고 놀란 순간부터 이 집안에 들어 있는 모든 것이 
도깨비라도 나올 듯 심상치가 않았고, 답답한 꿈이라도 꾸는 듯했다. 하지만 
지금 리스벳의 모습을 보니 정말 전신이 오싹해졌다. 아름답고 기품이 있던 
그녀는 무슨 일에도 공포에 떨고 지친 듯한 여인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얼굴은 창백하고 아무 장식도 없는 까만 옷차림으로 눈초리는 불안정했으며 
불안에 차 있었다.
  "실례합니다."
  그는 말했다.
  "하녀가 들여보내 주질 않았어요. 날 알아보지 못하겠소? 골드문트입니다. 아, 
말 좀 해봐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니 정말인가요?"
  그녀의 시선으로 보아 그를 겨우 알아보는 듯했고, 또한 그가 이 집에 좋은 
인상을 남겨두고 떠나지 않았다는 것도 알고 있는 듯했다.
  "골드문트라구요?"
  그녀가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여전히 예전의 그 오만한 티를 엿볼 수 
있었다.
  "애써 오셨는데 안됐군요. 아버님은 돌아가셨어요."
  "그럼 작업장은 어떻게 되었죠?"
  그는 안타깝게 말했다.
  작업장이라뇨? 잠궜어요. 일자리를 찾으려거든 딴데 가서 알아봐요."
  그는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썼다. 그는 정이 듬뿍 담긴 소리로 말했다.
  "리스벳, 난 일자리를 찾고 있는 게 아니에요. 스승과 당신의 안부를 묻고 
싶었을 뿐이라구요. 이런 소식을 들어야 하다니 정말 슬픕니다! 무척 
고생하셨겠군요. 당신 아버지의 은혜를 고맙게 여기는 제자에게 부탁할 일이 
있으면 무엇이든 말해 주세요. 기쁘게 생각하겠습니다. 아, 리스벳! 당신이 
이렇게 지독한 고생을 하고 있는 걸 보니 제 가슴은 미어질 듯합니다."
  그녀는 방으로 들어가며,
  "고마워요."
  하고 짧게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이제 아버님이나 저에게 아무것도 도와줄 일이 없어요. 
하녀가 당신을 바깥으로 안내해 드릴 겁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정상이 아닌 것 같았다. 노여움과 불안이 섞여 있었다. 만약 
그녀에게 용기가 있었더라면 그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쫓아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벌써 아래층에 내려가 있었다. 노파는 그가 밖으로 나가자마자 
문을 소리나게 닫고 빗장을 질렀다. 빗장 두 개가 닫히는 거센 소리가 아직도 
그의 귓전에 울렸다. 마치 관뚜껑에 못을 박는 소리처럼.
  그는 어슬렁어슬렁 둑 있는 쪽으로 돌아와서 강가의 아까 그 자리에 다시 
주저앉았다. 해는 이미 서산으로 넘어갔다. 물결을 타고 찬바람이 불어왔다. 
그가 앉아 있는 돌은 차가웠다. 강가의 오솔길에는 인적이 끊어지고 교각에 
부딪치는 물소리만 들렸다. 물 밑바닥은 어둡고 황금빛 미광조차도 빛나지 
않았다. '아, 내가 지금 곧 넘어져서 강물에 빠져 버리고 만다면!' 하고 그는 
생각했다. 다시 세계는 죽음으로 차 있었다. 한 시간이 지났다. 밤이 되었다. 
눈물이 흘렀다. 주저앉아 그냥 울었다. 그의 손과 무릎 위에 미더운 눈물 
방울이 떨어졌다. 그는 고인이 된 스승을 위해, 아름다움을 잃고 만 리스벳을 
위해, 레네를 위해, 로베르트를 위해, 유태계 처녀를 위해, 공연히 낭비하고 
시들어 버린 그의 청춘을 위해 눈물을 흘렸다.
  늦게야 그는 이전에 그가 친구들과 자주 술을 마셨던 목로주점으로 들어갔다. 
그 집 주인 여자는 골드문트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한 덩이의 빵을 
청했다. 그녀는 그것을 내다준 접시에다 친절하게 한 잔의 포도주까지 서비스해 
주었다. 그는 빵도 포도주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는 그 가게의 의자에서 그날 
밤을 꼬박 새웠다. 이튿날 아침, 주인 여자가 그를 깨웠다. 그는 일어나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그 자리에서 빵을 먹었다.
  생선 시장에 가보니 그 전에 하숙을 했던 집이 있었다. 우물 옆에서 몇 명의 
생선 파는 여인들이 아직도 살아 있는 물고기를 팔고 있었다. 그는 통 속의 
반짝거리는 싱싱한 물고기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지난날에도 가끔 본 일이 
있었다. 물고기한테 곧잘 동정을 해서 파는 여인들이나 사는 사람에게 화를 
냈던 것이 생각났다. 어느 땐가 역시 아침이었는데 여기를 이렇게 걸으며 
물고기를 아주 멋있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불쌍하다고 생각하기도 하며 몹시 
서러워했던 때를 생각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고 많은 물이 강을 흘러 
내려갔다. 그때 서러웠던 것은 잘 기억하고 있으나 무엇 때문에 그렇게 
서러워했던가를 이제는 기억하지 못한다. 슬픔도 사라져갔다. 고통도 절망도 
사라져갔다. 환희와 함께 그것들도 지나가고 퇴색하고 깊이와 가치를 잃고 
말았다. 결국에는 한때 그의 가슴을 그토록 쓰리게 했던 것이 무엇이었던가를 
이젠 생각할 수조차 없게 된 것이었다. 아, 고통도 시들어 말라버리는 것이다. 
오늘의 그의 고통도 언젠가는 시들고 소용없는 것이 되고 말 테지. 스승은 
고인이 되었다. 그에 대한 원망을 품은 채 죽은 것이다. 이제는 그를 맞아줄 
일터가 없는 것이다. 더 이상 창작의 기쁨도 맛볼 수도, 가슴 가득 쌓여 있는 
형상들을 재창조할 수도 없게 될 것인가? 그렇다. 이 고통, 이 쓰디쓴 괴로움도 
언젠가는 낡고 시들고 말 것이다. 그것들도 잊어버리고 말 것이다. 아무것도 
영원한 것은 없다. 괴로움까지도.
  물고기를 내려다보며 그런 생각에 골몰하고 있을 때 그의 이름을 나지막한 
목소리지만 정답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골드문트."
  새침한 소리였다. 소리나는 곳을 쳐다보니 다소 부석부석하고 핼쑥한, 그러나 
까맣고 고운 눈을 한 나이 어린 소녀 하나가 서 있었다. 그 소녀가 그를 
불렀지만 그는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골드문트! 당신 골드문트죠?"
  그녀는 새침한 소리로 물었다.
  "언제 다시 마을로 돌아왔나요? 날 모르겠어요? 나 마리예요."
  하지만 그는 기억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가 전에 하숙하던 집의 
딸이라는 것, 그가 가방을 어깨에 메고 길을 떠나던 날 아침 일찍, 부엌에서 
우유를 끓여 주었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그 이야기를 다 하고 난 후 그녀의 
얼굴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래, 마리였다. 허리를 제대로 못 쓰는 연약한 아이였는데 그때는 정말 
따뜻하게 그를 돌봐 주었다. 그는 이제서야 모든 것이 다시 생각났다. 그녀는 
어느 추운 날 아침 그를 기다리고 있다가 그가 떠나는 것을 몹시 서운하게 
생각하고 우유를 끓여 주었던 것이다. 그가 키스를 해주자, 그녀는 성례라도 
받는 것처럼 조용히 그리고 정중하게 받아들였다. 그 후 그는 그녀를 생각한 
일이 없었다. 그때 그녀는 어린애였으나 지금은 커서 시원한 눈매를 지닌 
아가씨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다리를 절며 걸어다니는 게 가없게 
보였다. 그는 그녀와 악수를 나누었다. 이 마을에 아직도 그를 기억하고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반가웠다.
  마리는 그를 데리고 갔다. 그는 그것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의 그림이 아직도 
걸려 있고 그의 빨간 루비 술잔이 난로 위 서가에 얹혀져 있는 방, 그는 그녀 
부모의 방에서 점심을 먹고 며칠 묵어 가기를 권유받았다. 그를 다시 만나게 
되어서 기쁘다는 것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스승의 집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니콜라우스는 페스트로 인해 죽은 것이 아니었다. 페스트에 걸린 
것은 리스벳이었다. 그녀는 빈사 상태에 빠졌다. 리스벳의 아버지인 
니콜라우스는 죽음을 각오하고 간호했으나 딸이다 낫기도 전에 죽어 버렸다. 
리스벳은 목숨은 거졌지만 그녀의 아름다움은 없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일터는 비어 있어요."
하고 하숙집 주인이 말했다.
  "솜씨 있는 조각가한테는 좋은 보금자리가 될 거야, 돈도 넉넉히 있을 테고. 
잘 생각해 보세요, 골드문트! 그녀는 싫다고는 하지 않을 거예요. 이 사람 저 
사람 가릴 처지가 못 되니까요."
  그는 다시 페스트가 유행했던 때의 이야기를 이것저것 물어 보았다. 폭도들이 
우선 병원에 불을 놓고, 다음에 부잣집 몇 채를 습격해서 약탈했다는 것, 주교가 
도망치고 없었기 때문에 잠시 동안 동시는 질서와 안정을 잃고 말았다는 것 
등을. 그때 마침 가까이에 계셨던 황제가 하인리히 백작을 총독으로 파견했다. 
이 사람은 매우 과감한 사람이어서 몇 사람의 기사와 군인만으로도 도시의 
질서를 회복했다. 하지만 이제는 총독의 통치가 끝나고 모두들 주교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다. 총독은 시민들에게 너무나 많은 부담을 강요했다. 총독의 애첩 
아그네스도 이제 질색이다. 그 계집은 정말 요녀다. 하지만 그들은 곧 물러갈 
테지. 시의 참사회는 온정 많은 주교 대신에 저런 궁정 출신의 군인을 
떠받들어야 하는 일에 벌써부터 싫증을 느끼고 있었다. 아무튼 총독은 황제의 
총아요, 매일같이 공사다, 사절이다 해서 마치 왕후 장상을 맞이하듯 하고 있다. 
대충 이런 내용의 이야기였다. 그들은 이번에는 골드문트에게도 그의 체험담을 
들려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씁쓸한 듯 말했다.
  "이야기할 게 별로 없어요. 나는 너무도 많은 길을 걷고 또 걸어다녔죠. 
하지만 어느 곳엘 가도 페스트예요, 시체가 아무 데나 뒹굴고 있었지요. 어디를 
가나 사람들은 공포 때문에 제정신을 잃고 흉악한 마음을 품고 있었어요. 나는 
요행히 살아남았죠. 언젠가는 모두 잊혀질 테죠. 돌아와 보니 스승도 이미 
돌아가셨군요! 한 이틀 묵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떠나겠습니다."
  그는 쉬기 위해 묵는 것은 아니었다. 실망을 해서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었기 
때문이요, 행복했던 시절의 추억과 불쌍한 마리의 사랑이 고마웠기 때문이다. 
그는 거기에 보답해 줄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겨우 우정과 
동정뿐이었다. 하지만 조용하고 차근차근한 그녀의 사모의 정은 그의 마음을 
따스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를 이곳에 단단히 붙들어 매어 둔 
것은 일터는 없을지라도, 그리고 이것저것 아쉬운 것이 많을지라도, 다시 
예술가가 되고 싶은 타는 듯한 욕구였다.
  며칠을 두고 골드문트가 한 일이라고는 겨우 스케치가 고작이었다. 마리가 
종이와 펜을 주선해 주었다. 그는 방안에 틀어박혀 스케치만 했다. 아무렇게나 
회칠을 한 형상이나 기가 막힐 듯한 섬세한 형상 등으로 큼직한 종이에 하나 
가득 채웠다. 충만된 마음속의 그림책을 종이 위에 옮겨 놓은 셈이었다. 그는 
몇 번이나 레네의 얼굴을 스케치했다. 그 부랑자가 맞아 죽은 후, 만족과 사랑과 
살인의 환희에 젖어 방긋 미소 짓던 레네의 얼굴을. 마지막 밤, 벌써 무형의 
것으로 녹아버리고 말아 대지에 돌아가려 하던 레네의 얼굴을 스케치했다. 
부모가 있는 데로 가까이 가려고 문턱 위에 주먹을 불끈 쥔 채 숨이 끊어진 
농부의 아들을 스케치했다. 시체가 차곡차곡 쌓여 있는 마차, 그것을 무거운 듯 
끌고 가는 세 마리의 비쩍 마른 말, 그 옆에 페스트 예방용 까만 마스크의 
틈새에서 음울한 눈알을 굴리며 기다란 막대기로 시체를 처리하던 인부들을, 
그리고 레베카도. 까만 눈을 가진 늘씬한 유태계의 처녀, 그 뾰족하고 고집 센 
입을, 고통과 분노에 찬 얼굴을, 사랑스럽고 곱상하고 부드러운 자태를, 
거만하고 신랄한 입을. 그는 또한 자기의 모습을 스케치했다. 방랑자로서, 
애인으로서, 생명을 앗아가는 저승 사자에게 도망친 사람으로서, 생명의 기갈에 
허덕이는 자들의 뒷그늘에서 춤추는 자로서. 옛날에 본 리스벳의 거만하고 
단단한 얼굴을, 늙은 하녀의 찌푸린 얼굴을, 니콜라우스 스승의 정답지만 무섭게 
보이던 얼굴을, 온 정신을 다해서 백지 위에 그려 나갔다. 그리고 또 간혹 
가느다랗고 어렴풋한 선으로 커다란 여인의 자태를 그렸다. 두 손을 무릎에다 
공손히 얹고 우수에 잠긴 눈 아래 미소를 짓고 있는 대지의 어머니를 그는 
윤곽만 그렸다. 스케치를 하는 동안 그의 마음은 물결을 타는 듯 했고, 손에는 
감정이 넘쳐 흘렀으며 , 얼굴에는 자제의 기쁨이 번뜩였다. 며칠 사이에 그는 
마리가 마련해 준 종이를 한 장도 남기지 않고 써버렸다. 마지막 종이의 한 
조각을 잘라서 그는 거기에다 간략하고 가벼운 선으로, 고운 눈매와 체념한 
입을 가진 마리의 얼굴을 스케치하여 그녀에게 선물했다.
  이런 작업을 함으로써 울적함으로 꽉 막혀 넘쳐 버릴 듯한 그의 마음속 
감정은 풀어지고 홀가분해질 수 있었다. 스케치를 하고 있는 동안에 그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잊고 있었다. 그의 세계는 책상과 하얀 종이뿐이었으며 
밤이며 촛불이 더해졌다. 겨우 눈을 뜨고 근래에 체험한 것들을 기억 속에 
더듬어 보았다. 그러고는 예외없이 새로운 방랑이 눈앞에 다가와 있는 것을 
보고, 재회와 이별이 반반씩 뒤섞인 기묘한 분열을 일으킨 감정으로 시내를 
거닐기 시작했다.
  그러는 도중 그는 한 여인을 만났다. 그녀를 보는 순간 혼란된 그의 모든 
감정에 새로운 중심이 잡히게 되었다. 말을 탄 여인은 무언가를 탐내는 듯한 
쌀쌀하고 푸른 눈, 어디 하나 나무랄 데 없는 몸매, 자만심과 관능의 호기심에 
찬 화려한 얼굴, 키는 후리후리하고 밝은 금발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갈색 말을 
타고 거만한 모습으로 남을 부리는데 익숙한 쌀쌀한 눈빛으로  온 세계의 
냄새를 향해서 탐욕스럽게 코를 벌름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큼직한 입은 받는 
것도 주는 것도 무한히 가능할 것처럼 보였다. 골드문트가 처음 그녀를 
쳐다보았을 때 그는 눈이 번쩍 뜨였다. 이 여자를 가까이해 보고 싶다는 욕정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이 여자를 정복한다는 것은 고상한 목표처럼 여겨졌다.
  이 미녀 때문에 자유를 잃는 것도 아름답다. 이 여자 때문에 그의 생명도 
아름답고 멋진 일이라 생각했다.
  사흘째 되는 날 아침, 아그네스는 시종을 데리고 성문에서 나왔다. 그녀의 
눈초리는 호전적인 동시에 얼마간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뒤를 밟는 사나이를 
찾았다. 그는 이미 거기에 와 있었다. 그녀는 시종을 보내 버렸다. 혼자서 
터덕터덕 말을 몰고 천천히 다리를 건넜다. 뒤를 한 번 돌아보았다. 낯선 이가 
따라오는 것이 보였다. 순례 사원인 성파이토로 가는 길 위에서 그녀는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근방은 그때쯤 매우 한적했다. 여자는 얼마 동안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낯선 사나이는 천천히 걸었다. 숨을 헐떡거리며 가기는 
싫었던 것이다. 얼굴에는 싱싱한 미소를 지으면서 진홍색 들장미의 열매가 달린 
작은 가지를 입에 물고 그는 다가왔다. 그녀는 말에서 내려 말을 붙들어 매고 
거치 돌담의 담쟁이덩굴에 기대서서 뒤에서 다가오는 사나이를 쳐다보았다. 
그녀와 마주치자 그는 모자를 벗었다.
  "왜 내 뒤를 밟는 거예요?" 그녀가 물었다.
  "나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있나요?"
  "오." 그가 말했다.
  "나는 당신에게 무엇을 받는 것보다 오히려 당신에게 무엇인가를 주고 
싶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나 자신을 선물로 드리고 싶습니다. 아름다운 
부인이여, 그런 다음에 당신 뜻대로 날 처분해 주십시오."
  "좋아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요. 하지만 이런 바깥에서 아무런 
위험도 없이 꽃을 꺾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했다가는 큰 오산이에요.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것은 만일의 경우 생명까지도 내걸 수 있는 사나이뿐이니까요."
  "당신은 날 지배할 수가 있습니다."
  그녀는 천천히 자신의 목에서 황금 목걸이를 풀어 그에게 내밀었다.
  "당신의 이름은 대관절 무엇이죠?"
  "골드문트."
  "좋아요. '황금의 입술!' 당신의 입술이 얼마나 달콤한지 맛보겠어요. 이 
목걸이를 저녁때 성에 가져와서 당신이 찾은 거라고 말하세요. 이걸 손에서 
놓치면 안 돼요. 내가 당신 손에서 건네받을 테니까요! 사람들이 당신을 
거지라고 생각하더라도 지금 입고 있는 그대로 와야 해요. 하인들 가운데 누가 
당신에게 고함을 질러도 그대로 있어야 하구요. 내가 안전하다고 믿을 수 있는 
부하는 성 안에 단지 둘 밖에 없다는 것을 명심하세요. 마부 막스와 시녀 
베르타 둘 중에 하나를 붙들어야만 내가 있는 데로 안내를 받을 수 있어요.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은 백작도 포함해서 경계해야 해요. 모두 적이니까 말이에요. 
당신의 생명이 안전하기를 바라겠어요."
  그녀는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손을 잡고 가볍게 
입맞추고 그의 뺨에 대고 살짝 문질렀다. 그러고는 그 목걸이를  집어넣고 
언덕을 내려가 마을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포도밭은 벌써 잎의 색깔이 
변해가고 있었다. 나무들에서 누런 잎사귀들이 하나씩 하나씩 바람에 밀려왔다. 
골드문트는 거리를 내려다보며 그립고 사랑스런 도시라는 생각이 들자 이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며칠 전만 해도 그렇게 고통과 괴로움조차 무상하다는 
생각으로 서러워했는데, 지금은 마치 황금빛 잎사귀가 가지에게 떨어지는 
것처럼 그때의 감정은 다 사라지고 말았다. 그 여자에게서 비쳐 나오는 
사랑만큼 강하게 그에게 다가온 사랑은 지금껏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았다. 그 
고귀한 자태와 황금색의 화려하고 충만된 생명은 어릴 적 마리아브론에서 
가슴에 지니고 있었던 그의 어머니의 형상을 생각나게 했다. 세계가 다시 한 번 
기쁨으로 그의 눈에 비쳤으며, 생명과 기쁨과 청춘의 물결이 넘쳐흐를 듯 
밀어닥치며 그의 핏속을 흘러내리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이제까지 
살아있다는 것, 흉측스런 이 수개월 동안에 죽음을 피할 수가 있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저녁때, 그는 성으로 들어갔다. 성의 안마당에는 갖가지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말에서 안장을 내리기도 하고 심부름꾼들이 바쁘게 오가기도 했다. 
신부들이나 고위 성직자들의 조그만 행렬이 하인들의 인도로 이쪽 문을 지나서 
계단을 올라갔다. 골드문트는 그 뒤를 따라가려고 했으나 곧 문지기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그는 황금 목걸이를 꺼내서 이것을 부인 자신과 시녀 이외의 
사람한테는 내주지 말 것을 분부받고 왔다고 했다. 문지기는 하인 한 사람으로 
하여금 그를 지키게 하고 현관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잠시 후 하녀 한 명이 
나타나 옆을 지나치면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당신이 골드문트인가요?" 하고 
묻더니 그에게 따라오라고 눈짓했다. 그녀는 문 하나를 지나서 안으로 그를 
안내했다.
  그는 조그만 방에 안내되었다. 향수 냄새가 코를 찔렀다. 옷과 망토가 잔뜩 
걸려 있었다. 갖가지 구두가 활짝 열어 놓은 장롱 속에 줄을 지어 있었다. 그는 
여기서 잠시 동안을 서서 기다렸다. 향수를 뿌린 옷의 냄새를 맡기도 하고, 
손으로 털가죽을 만져 보기도 하고, 호기심을 가지고 거기에 걸려 있는 
아름다운 것들을 돌아보고 있었다.
  이윽고 한쪽 문이 열렸다. 아그네스였다. 그녀는 흰 모피 깃을 단 엷은 
하늘색 옷을 입고 골드문트에게로 한 발짝 한 발짝 천천히 걸어와서는 차디찬 
눈매를 하고 그를 노려보았다.
  "기다리게 했군요."
  아그네스는 나지막히 말했다.
  "하지만 안심해도 돼요. 교구의 사신이 백작한테 와 있거든요. 백작은 그와 
식사도 하고 또 오래오래 이야기도 할 거예요. 신부들과의 이야기는 언제나 
오래 걸리지요. 그 동안 당신과 나의 시간이에요. 자, 이리 오세요, 골드문트."
  그녀는 그에게 허리를 굽히며 다가왔다. 애틋하게 목말라 하는 그녀의 입술이 
그의 입술 가까이에 왔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최초의 키스를 나누었다. 
잠깐 동안 주저하다가 그는 아그네스의 목덜미에 손을 휘감았다. 그녀는 문을 
지나서 그녀의 침실로 그를 안내했다. 거기는 높은 곳에 밝게 양초가 밝혀져 
있었다. 식탁에는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두 사람은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익숙하게 빵과 버터와 약간의 고기를 그의 앞에다 갖다놓고 아름답고 푸른색이 
감도는 술잔에다 백포도주를 따랐다. 그들은 똑같이 푸른 잔으로 포도주를 
마시고 고기를 먹었다. 두 사람의 손은 서로를 더듬으며 애무했다.
  "당신은 도대체 어디서 날아온 거죠?"
그녀는 물었다.
  "아름다운 나의 새여, 당신은 군인인가요? 그렇지 않으면 노름꾼인가요? 
그것도 아니라면 단지 불쌍한 떠돌이인가요?"
  "나는 당신이 원한다면 모든 것이지요."
그는 웃으며 말했다.
  "나는 완전히 당신 것이요. 원하신다면 나는 노름꾼이 되겠소. 당신은 나의 
달콤한 기타예요. 내가 손가락을 당신 목덜미에 놓고 당신을 악기로 켜면 
천사의 노랫소리가 들린답니다. 자, 그리운 이여, 나는 당신의 맛있는 과자를 
먹고, 당신의 백포도주를 마시기 위해 온 것은 아니오, 나는 단지 당신 때문에 
온 거라오."
  그는 그녀의 목에서 모피 깃을 풀고 옷을 천천히 벗겼다. 바깥에서 
수도사들이 의논을 하고 있든, 하인들이 발소리를 죽이고 걸어가든, 가느다란 
초승달이 숲 그늘로 온통 사라지든 사랑을 나누는 두 사람은 개의치 않았다. 
낙원 동산이 그들의 위해 꽃을 피우고 있었다. 서로 끌어당기고 서로 
부둥켜안으며 향내나는 낙원 동산의 어둠 속으로 헤매어 들어갔다. 하얀 꽃의 
비밀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며 애정과 감사의 정이 얽힌 손으로 목말라 애태우는 
낙원 동산의 과실을 땄다. 이 노름꾼은 이런 기타를 여태껏 켜본 적이 없었다. 
기타는 기타대로 이처럼 강하고 익숙한 손가락 밑에서 올려 본 적이 없었다.
  "골드문트."
  아그네스는 숨을 내쉬며 타오르듯 그이 귀에 대고 소곤댔다.
  "아, 당신을 무엇이라고 부르면 좋을지 모를 마술사 같아요! 달콤한 금붕어, 
난 당신이 아이를 갖고 싶어요. 아니 그보다도 차라리 당신 옆에서 죽고 
싶어요. 날 삼켜 버리세요. 그리운 내 님이여, 아니, 날 죽여 줘요!"
  차디찬 그녀의 눈 속에 있는 오만이 눈 녹듯 없어져가는 것을 보자 그의 
목구멍 한복판에서 행복의 가락이 웅얼대고 있었다. 애욕을 이기지 못하는 
몸부림과 죽음, 바로 그것처럼 그 여자의 두 눈동자 속에서 떨림이 스쳐 
지나갔다. 숨이 끊어져가는 물고기의 비늘 위에서 은빛 떨림이 꺼져가듯, 물 
밑바닥이 이상 야릇한 그 미광이 노란 금빛으로 깜박이듯, 무릇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모든 행복이 이 한순간에 응결되고 만 것 같았다.
  아그네스가 아직도 눈을 감은 채 몸을 사시나무 떨듯 누워 있을 동안, 그는 
살짝 일어나서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었다. 그리고 그는 한숨을 내쉬며 여자의 
귀에다 대고 말했다.
  "아름다운 내 사랑이여, 나는 널 버릴 것이다. 난 죽고 싶지 않아. 당신의 
백작에게 맞아 죽기는 싫어. 그보다 나는 오늘 한 것처럼 한 번 더 당신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 한 번 더, 아니 몇 번이라도 몇 번이라도!"
  그가 옷을 다 입을 때까지 아그네스는 아무 말도 없이 그대로 누어 있었다. 
그는 그녀 위에 이불을 살짝 덮어 주고 그녀의 눈에 키스해 주었다.
  "골드문트."
  그녀는 말했다.
  "오, 당신은 꼭 떠나야만 하나요! 내일 또 와요! 위험하면 미리 내가 알려 
줄게요. 또 와요! 내일 또 와야 해요!"
  그녀는 방울끈을 당겼다. 의상실 문에서 아까 그 시녀가 그를 맞이해 
성밖으로 내보내 주었다. 시녀에게 금화 한 잎을 건네주고 싶었으나 그는 
자기의 빈곤을 느끼고 부끄럽게 여겼다.
  자정이 될 무렵에야 그는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밤이 깊어서 모두들 자고 
있겠지 하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바깥문이 열려져 있었다. 조심스레 들어가서 
문을 잠갔다. 그의 방은 부엌을 통해야만 갈 수 있었다. 거기에 불이 켜져 
있었다. 희미한 석유 등잔불에 비치어 마리가 조리대 옆에 앉아 있었다. 오랜 
동안 기다리다가 깜빡 잠이 든 것이었다. 그가 들어서자 그녀는 깜짝 놀라 
일어섰다.
  "아."
  그는 말했다.
  "마리, 아직 안 잤니?"
  "자지 않았어요."
  그녀가 말했다.
  "안 그러면 당신이 돌아왔을 때 문이 잠겨져 있었을 테니까요."
  "기다리게 해서 미안한걸, 마리. 너무 늦었어. 화내지 마, 응?"
  "난 당신한테 화내지 않아요, 골드문트, 좀 서운할 뿐인 걸요."
  "서운할 것 없어."
  "아, 골드문트. 내가 몸도 튼튼하고 아름답고 다리를 절지 않는다면, 하고 
생각할 때가 있어요. 그렇다면 당신은 밤에 다른 집에 가서 다른 여자를 
사랑하지 않아도 되잖아요. 그렇게 되면 당신은 내 곁에서 조금은 사랑도 
해주실 테니까요."
  그녀의 부드러운 음성에는 희망의 느낌이 없었다. 슬픔만이 있을 뿐이었다. 
어찌 할 바를 몰라 하며 그는 그녀 옆에 서 있었다. 그는 그녀가 한없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뭐라 말할 수도 없었다. 조심스럽게 그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녀는 선 채 몸을 바르르 떨더니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수줍은 듯 말했다.
  "자리로 들어가요, 골드문트. 내가 바보 같은 소리를 했군요. 이제 졸려서요. 
안녕히 주무세요."

         16

  행복하고 초조한 하루를 골드문트는 언덕 위에서 보냈다. 말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스승이 만든 아름다운 마리아 상이 있는 수도원에 당장이라도 
찾아갔을 텐데. 그것을 한 번 더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지난 밤에는 
니콜라우스 스승을 꿈속에서 본 것 같았다. 그 꿈을 재현시킬 수는 없을까? 
아그네스와의 사랑이 아무리 짧더라도, 그리고 그것이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 
하더라도, 그는 그것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오늘은 아무하고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마음을 산란하게 하기 싫었다. 따스한 가을날을 나무와 구름 
밑에서 보내고 싶었다. 그는 마리에게 시골길을 한없이 걷고 싶다며 빵을 많이 
부탁했다. 그리고 늦을 거라며 그를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마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낡은 그이 가방에다 빵과 사과를 잔뜩 채워 주며 낡은 
그의 웃옷을 손질해 주었다. 그것은 그가 돌아온 첫날 꿰매 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녀는 그를 보냈다.
  그는 개울을 건너고 빈 포도밭을 지나 경사진 높은 계단을 올라갔다. 높은 
숲속에 들어가고 말았으나 산머리에 올라설 때까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산머리에 올라서 보니 앙상하게 서 있는 나무가지들의 사이에서 햇빛이 
희미하게 새어들어오고 있었다. 그이 발소리에 놀란 티티새가 수풀 속으로 
날아가 겁을 먹은 듯 웅크리고 앉아 눈을 반짝이고 있었고 발아래 쪽으로는 
푸른 활 모양으로 강이 흘러가고 집들이 차곡차곡 쌓아올린 장난감처럼 
조그맣게 깔려 있었다. 그곳에서는 기도 시간의 종소리 이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곳 산머리에는 옛날 이교도 시대의 적운 성벽과 보루가 
잡초에 뒤덮여 있었다. 그것은 성 같기도 하고 무덤 같기도 했다. 그는 보루 
위에 걸터앉았다. 말라서 바스락바스락 소리를 내는 가을 풀밭에 앉아 널찍한 
골짜기 전체와 강 저쪽의 언덕과 산들을 건너다보았다. 산마루들이 굽이쳐 흘러 
마지막에는 산맥과 하늘의 푸른색을 띤 색깔 속에 융합되어 산인지 하늘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는 한때 이 넓은 강산을 하나 남기지 않고, 눈이 가 닿지 
않는 아득한 저쪽까지 그의 발자국을 남겼던 것이다. 이제는 멀리 떨어져 있고 
추억 속에 잠겨 있는 이 강산 전부가 한때는 현실로서 그의 가까이에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숲속에서 그는 수없이 많은 잠을 잤고, 굶주리고 헐벗었던 
것이다. 이들 산들의 중턱과 황무지의 벌판을 떠돌며 슬퍼하기도 하고 기운을 
얻기도 했던 것이다. 머나먼 저곳 어디에, 선량한 레네의 불에 탄 뼈다귀가 놓여 
있을 것이다. 저쪽 어딘가에 그의 길동무였던 로베르트가 페스트에 걸리지 
않았다면 여전히 배낭을 둘러메고 떠돌아다니고 있을 테지. 저쪽 어딘가에 죽은 
빅토르가 누워 있을 것이다. 저쪽 어딘가 머나먼 곳에는 요술에 걸린 것 같았던 
그의 소년 시절의 수도원이 있었다. 아름다운 딸들이 있던 기사의 성이 있었고, 
불쌍한 레베카는 애처롭게 쫓겨 달아나다가 죽었을 것이다. 멀리 흩어져 있는 
그 수많은 곳, 이들 황무지의 들판이나 숲, 도시들이나 여러 마을들, 산성이나 
수도원, 모든 사람들, 그것들이 모두 살았든 죽었든 그의 마음속에, 그의 추억 
속에, 그의 사랑 속에, 그의 회한 속에 그의 동경 속에 존재하고 서로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구는 알고 있었다. 그가 죽음의 사자에게 잡혀간다면 여자도 
사랑도 여름철 아침과 방랑의 밤으로 가득 찬 그림책 전체가 뿔뿔이 흩어지고 
말 테지. 아, 지금 무엇인가를, 나 자신보다도 더 오래갈 수 있는 무엇인가를 
만들어 둘 시기라는 것을 느꼈다.
  오늘까지의 이런 생활 가운데서 이런 방랑을 통해서, 이 세상을 두루 
편력하기 시작한 긴 세월 동안 결과로 남아 있는 것은 전혀 없었다. 겨우 남아 
있다는 것이란 그가 지난날 일터에서 만들었던 한두 개의 조각품, 특히 요한 
상과 그 그림책, 그의 머릿속에 있는 비현실적인 세계, 아름다우면서도 고통스런 
추억만 그려진 세계뿐이었다. 이 마음속의 세계에서 몇 개를 밖으로 표현해 낼 
수가 있을까? 항상 새로운 도시, 새로운 경치, 새로운 여자, 새로운 체험, 
새로운 형상 등이 차례차례로 쌓여갈 뿐, 그 사이 그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불안정하면서 동시에 아름다움과 괴로움에 넘쳐 흐르는 마음뿐일까?
  일생 동안 바보 취급을 받는다는 것은 매우 모멸적인 것이다! 그는 웃고 
싶었고, 그리고 울고도 싶었다. 생활을 즐기거나 감각을 만족시키기도 하고, 옛 
어머니 이브의 젖가슴을 애무하는 방법도 있었다. 그렇게 한다면 물론 더할 
나위 없는 향락은 얻을 수 있겠으나 인생의 덧없음을 막을 재주는 없었다. 그런 
경우에는 숲속에 있는 버섯과 마찬가지로 오늘은 아름다운 색깔로 뽐낼 수는 
있으나 내일은 썩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또 세속으로 나와서 일터에 틀어박혀 
덧없는 생명을 위해 기념비를 세울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생활을 
단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게 할 경우 인간은 단순한 도구에 불과하다. 
물론 영구적인 것에 봉사하고 있기는 하지만 감각은 바싹 말라 버리고 생활의 
자유와 충실과 즐거움을 잃고 만다. 니콜라우스 스승의 생활 방식이 바로 
그러하지 않았는가?
  아, 이 전체적인 생활은 그 두 가지를 다같이 얻을 수 있고 그런 멋없는 양자 
택일에 의해 분리되어 있지 않은 경우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생활을 
희생시키지 않는 창작! 창조의 고귀함을 버리지 않는 생활! 그것은 불가능하단 
말인가.
  그것인 가능한 인간은 아마 존재하지 않았을 테지. 충실하면서도 관능의 
향락을 잃어버리지 않는 남편, 그런 가장이 있었을까 안정된 사람으로서 자유와 
위험의 결여 때문에 마음을 메마르게 만들어 버리지 않는 사람이 있었을까? 
필경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을 그는 아직 보지 못했다.
 무릇 생존은 이원과 대립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 같았다. 여자와 남자, 
떠돌이와 평범한 시민, 이성과 감정, 끌어당기는 입김과 토해내는 입김, 남자인 
것과 여자인 것, 자유와 질서, 충동과 정신, 그 양자를 동시에 체험할 수는 
도저히 없다. 항상 어느 한 쪽을 메우기 위해서는 다른 쪽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더욱이 그 어느 것이나 동시에 중요하고 열망할 가치가 있었다. 여자 
편이 그 점에 있어서는 훨씬 쉬운 것 같았다. 여자에게는 천성, 즉 쾌락이 
자연히 결실을 맺고, 사랑의 행복에서 어린애가 태어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남자의 경우를 보면 이 단순한 잉태 대신에 영원한 동경이 있었다. 
모든 것을 이렇게 만들어 놓은 하느님은 대관절 어떤 적개심에 불타고 있는 
것일까? 자기 자신이 창조한 것에 대해서 돌아서서 심술궂게 웃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 하느님이 새끼사슴이나 수사슴, 물고기나 새, 숲과 꽃, 사계절 
등을 만들었다고 한다면 심술궂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하느님이 만드신 것에도 
결점이 있었다. 그것이 실패를 했든, 불완전하든, 또 인간이라는 존재의 
틈바구니와 동경에 대해서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있든, 혹은 이것이 악마의 싹, 
즉 원죄이든. 하지만 도대체 왜 이 동경과 불만을 원죄라고 하는 것일까? 
인간이 만들고 감사의 제물로서 하느님에게 돌려 준 모든 아름다운 것과 신성한 
것은 그 동경을 충족시키지 못한 것에서 발생했단 말인가?
  그런 생가에 머리가 어지러워져 그는 눈길을 시내로 돌려 생선 가게며 다리, 
성당 등을 살펴보았다. 거기에는 성도 있었다. 지금 하인리히 백작이 통치하고 
있지만 당당한 주교의 본부였다. 그 탑과 길쭉한 지붕 밑에 아그네스가 살고 
있다. 아름다운 여왕 같은 그의 애인이 살고 있다. 그녀는 몹시 거만해 
보였지만 사랑에 있어서는 자신을 내던질 줄 아는 그런 여자였다. 그 여자 
생각이 떠오르자 기쁨이 솟았다. 기쁨과 감사의 마음이 뒤섞여 그는 지난 밤의 
일을 머리 속에 그려 보았다. 그 밤의 행복을 맛보기 위해서는, 그 굉장한 
여자를 그처럼 행복하게 해줄 수 있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그의 생활 전체가 
필요했던 것이다. 여자들한테서 얻은 모든 경험, 모든 방랑의 괴로움, 날마다 
밤을 새우며 헤매이던 눈덮인 허허벌판의 밤, 짐승, 꽃, 나무, 물, 물고기, 
나비들과의 우정어린 교제 등, 그런 모든 것이 필요했다. 거기다가 또 쾌감과 
위험 속에서 예민해진 감각, 고향을 잃은 생활, 마음속에 다녀간 쌓여진 그림의 
세계 전체가 필요했다. 그가 아그네스처럼 마법의 꽃이 피는 정원에서 생활할 
동안에는 그는 탄식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가을이 짙은 언덕 위에서 방랑과 휴식과 굶주림과 아그네스와의 저녁 
등을 생각하거나 혼자 중얼거리며 하루 종일을 보냈다. 땅거미가 질 무렵 그는 
다시 시내로 내려와서 성 가까이로 갔다. 밤은 싸늘했다. 집집마다 고요한 
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노래를 부르며 가는 소년들의 작은 행렬과 마주쳤다. 
그들은 홍당무를 막대기에 끼워서 메고 갔다. 홍당무에는 얼굴들이 새겨져 있고 
불이 켜진 양초가 꽂혀져 있었다. 그 작은 가장 행렬은 겨울의 냄새를 싣고 
왔다. 골드문트는 눈가에 웃음을 띠면서 그들을 바래다 주었다. 오랜 시간을 
그는 성 앞에서 서성거렸다. 교구의 사신은 아직 머물고 있었다. 그 근처 어느 
창문 앞에 신부인 듯한 사람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드디어 그는 성안으로 
기어 들어가서 시녀 베르타를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의상실에 숨어서 
아그네스를 기다렸다. 아그네스가 와서 그를 방안으로 안내했다. 그 여자는 
애정 어린 눈으로 그를 맞이했다. 그러나 애정은 있었지만 조금도 기쁨은 
없었다. 그녀는 어쩐지 슬픈 표정이었다. 상심한 것 같기도 하고 자연스럽지 
못한 것 같기도 했다. 그녀의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 골드문트는 진땀을 빼야만 
했다. 그의 키스와 사랑의 속삭임을 듣고 있는 가운데 그녀는 서서히 힘을 얻고 
자신을 회복하게 되었다.
  "당신은 정말 친절하신 분이군요."
  그녀는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말했다.
  "나의 아름다운 새여. 당신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그윽해요. 골드문트, 당신을 
사랑해요. 여기서 멀리 도망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난 여기 있기가 견딜 
수 없이 싫어요. 그렇잖아도 어차피 끝난 거예요. 백작은 불려갈 테니까요. 이제 
곧 주교가 돌아올 거예요. 백작은 오늘 신부들한테 시달렸기 때문에 화가 나 
있어요. 아, 당신이 백작에게 발각되지 않으면 좋겠어요! 만약 발각되는 날이면 
한 시간도 더 살 수가 없겠지요. 난 무엇보다 당신이 걱정이에요."
  그의 기억 속에서 거의 살졌던 목소리가 솟아올랐다.
  리디아가 사랑과 불안에 휩싸여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사랑과 불안과 
근심에 휩싸여 공포의 흉악스런 정경을 머리에 그리면서도 리디아는 밤에 그의 
방을 찾아왔던 것이다. 그는 그런 말을, 애정과 불안에 들뜬 말을 듣는 것이 
좋았다. 비밀이 없는 사랑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위험이 없는 사랑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는 아그네스를 그의 가슴에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머리를 어루만지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귀에 대고 사랑을 속삭였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다 
가벼운 키스를 해주었다. 그녀가 자신을 그렇게 걱정해 주는 것을 보니 마음이 
울렁거리고 가슴이 뛰었다. 그녀는 그의 애무를 받아들이고, 사랑에 몸부림치며 
그에게 안겼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좀처럼 밝아지지 않았다.
  갑자기 그녀의 온몸이 와들와들 떨렸다. 가까이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급한 발자국 소리가 방 쪽으로 가까워졌다.
  "아, 그 사람이에요."
  아그네스는 절망적으로 소리쳤다.
  "백작이에요. 빨리요. 의상실을 나가면 도망칠 수 있어요. 얼른 들키지 않도록 
해줘요!"
  그녀는 다급히 그를 의상실로 밀어넣었다. 그는 혼자서 머뭇거리면서 어둠 
속에서 손을 더듬었다. 백작이 아그네스와 큰소리로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옷 사이로 손을 더듬어 출입문을 향해 소리를 죽여 걸음을 옮겼다. 겨우 
복도로 통하는 문 옆에 와서 살짝 열려고 했을 때 바로 그 순간 바깥에서 
자물쇠를 채운 것을 알고 그의 가슴은 심하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그가 여기에 
들어오고 나서 누가 문에 자물쇠로 채워 버렸다는 것은 나쁜 우연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함정에 빠진 것이다. 이제는 
마지막이었다. 그가 이곳으로 남몰래 들어왔을 때 누가 그를 본 것이 
틀림없었다.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그는 어둠 속에 서 있었다. 그러자 '들키지 
않도록 해줘요!'라고 한 아그네스의 작별 인사가 생각났다. 그렇다, 그녀가 봉변 
당해서는 안 된다. 그의 심장은 쉴새없이 고동치고 있었다. 하지만 굳은 결심이 
그의 마음을 단단하게 했다. 그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것은 모두가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윽고 저쪽에서 문이 열렸다. 
아그네스의 방으로부터 백작이 들어왔다. 왼손에는 촛대를, 오른손에 칼을 빼어 
들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에 골드문트 가까이에 걸려 있는 옷가지와 외투 
따위를 재빨리 걷어내려 팔에 걸었다. 도둑이라고 생각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어떻게 보면 그게 유일한 해결책인지도 모른다.
  백작은 곧 그를 발견하고는 그에게 천천히 걸어왔다.
  "누구냐? 여기서 대체 무얼 하느냐? 대답을 해. 안 그러면 찌르겠다."
  "용서해 주십시오."
  골드문트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가난뱅이입니다. 나리께서는 이렇게 부자가 아니십니까? 제가 훔친 
것은 몽땅 돌려드리겠습니다. 나리! 자, 여기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그 옷가지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래, 도둑놈이란 말야. 이런 것에 생명을 내걸다니 영리하지 못한 
자식이구나. 네 이놈, 이 도시에 사는 놈이냐?"
  "아닙니다. 저는 집도 갈 곳도 없는 놈입니다요. 가난뱅이입죠. 한 번만 
용서해 주신다면...."
  "닥쳐라! 네놈이 귀부인을 욕보이려고 할 만큼 대단한 놈인지 어떤지를 난 
알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네놈은 아무튼 죽은 몸이니 그런 건 조사할 필요도 
없다. 도둑놈인 것만으로 충분해."
  그는 잠겨져 있는 문을 세게 두들기며 문을 열라고 소리질렀다. 밖으로부터 
문이 열리고 부하 세 사람이 칼을 빼들고 준비하고 있었다.
  "이놈을 잘 묶어라."
  백작은 조롱과 거만에 섞인 거친 소리로 고함쳤다.
  "여기서 도둑질을 한 부랑배다. 이놈을 감금해 두었다가 내일 아침에 
교수대에 매달아라."
  골드문트는 저항도 하지 않고 두 손을 밧줄에 묶였다. 그는 그렇게 묶인 채 
긴 복도를 지나고 계단을 내려서 안마당을 지나갔다. 하인 하나가 등불을 들고 
앞서갔다. 그들은 쇠창살을 두른 지하실의 둥그런 문 앞에서 멈췄다. 말이 
오가고 야단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문의 열쇠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부하 
하나가 등불을 받아들었다. 하인이 열쇠를 가지러 달려갔다. 이렇게 하여 
무장한 세 사람과 묶인 그는 함께 문 앞에서 기다리고 서 있었다. 그때 이 성에 
손님으로 와 있던 많은 사제들 가운데서 두 사람이 그 옆을 지나가게 되었다. 
성 안의 성당 쪽에서 온 그들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세 사람의 부하와 
묶인 사나이를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골드문트는 사제도, 그를 지키고 있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불을 얼굴 바로 
앞에 갖다대어서 그의 두 눈이 타오를 듯했기 때문에 가물거리는 불빛 외에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어둠 한 가운데 도사리고 있는 불빛 뒤에서 그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와들와들 떨면서 죽음을 본 것이다. 그는 두 눈을 한곳에 
집중시킨 채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않고 서 있었다. 사제 중에서 한 사람이 
열심히 부하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놈은 죽이지 않으면 안됩니다. 도둑놈입니다."
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 사제는 이 사람이 고해 신부한테 고해를 했느냐고 
물었다.
  "아뇨, 현행범으로 지금 곧 잡혀왔습니다."
  "그렇다면,"
하고 사제는 말했다.
  "내일 아침 미사 전에 성병을 가지고 이 사람한테 와서 고해를 들어 주겠다. 
너희들은 그 전에 이 사람을 데리고 가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해야 돼. 
백작하고는 오늘중으로 이야기를 하겠다. 이 사람은 도둑질을 했을지 모르지만 
모든 그리스도 교도나 마찬가지로 고해 신부에게 고해를 하고 성병을 받을 
권리가 있다."
  부하들은 감히 반대하려 들지는 않았다. 그들이 이 신부들을 알고 있었다. 
백작한테 오는 사신들 중의 하나로, 백작의 식탁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것을 
자주 본 일이 있었다. 가난한 도둑놈이라고 해서 고해를 받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사제들은 물러갔다. 골드문트는 여전히 서서 두 눈을 한 곳에 모으고 있었다. 
이윽고 하인이 열쇠를 가지고 와서 문을 열었다. 그는 아치형 천장의 지하실 
안으로 끌려갔다. 그는 이리저리 비틀거리면서 몇 개의 계단을 미끄러져 
내렸다. 등받이 없는 의자 몇 개와 테이블이 있었다. 그곳은 포도주 저장 창고 
앞에 있는 방이었다. 그들은 조그만 의자를 테이블 옆으로 가지고 와서 거기에 
앉으라고 명령했다.
  "내일 아침 일찌감치 신부님이 올 거다. 그러면 고해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부하 중 한 사람이 그에게 말했다. 그런 뒤 그들은 문 밖으로 나가서 육중한 
문에 조심스레 자물쇠를 채웠다.
  "이봐요, 불은 놓고 가줘요."
  골드문트가 부탁했다.
  "안 돼, 이런 게 있으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도 몰라. 얌전하게 벌을 받도록 
마음이나 단단히 먹고 있어. 이 불을 준대도 한 시간도 채 못 돼서 다 타버리고 
말걸. 자, 그러니 잠이나 푹 자도록 해."
  그는 어둠 속에 혼자 남겨졌다. 조그만 의자에 앉아서 테이블 위에 엎드렸다. 
이런 식으로 앉아 있다는 것은 처량하기 그지 없었다. 너무 꽉 졸라매 손목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그저 앉아서 머리를 테이블 위에 얹어 놓고 
있었다. 이제는 운명에 따를 수밖에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영원처럼 기나긴 시간을 그렇게 앉은 채 비통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고 인식하고, 그것을 가지고 자신을 채우려고 
했다. 곧 밤이 시작된다. 이 밤의 종말은 곧 그의 종말이기도 했다. 그는 
내일이면 살이 있는 목숨이 아닐 것이다. 그는 목이 매달려 새들이 와서 앉거나 
주둥이로 쪼아 먹는 시체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도 죽은 니콜라우스 스승처럼, 
통나무집에서 불에 타죽은 레네처럼, 그리고 마차 위에 실려간 수많은 
송장들처럼 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그것을 인식하고 그것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을 인식한다는 것은 정말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가 아직 헤어지지 못한 것이, 이별을 고하지 않은 것이 너무나 많았다. 그것을 
하기 위해서 고작 몇 시간의 밤이 그에게 주어져 있었다.
  그는 아름다운 아그네스와 이별을 고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탄력 있는 
몸집을,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차갑고 푸른 두 눈을, 향기로운 살갗의 달콤한 
황금빛 잔털을 이제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다. 잘 있거라, 그 푸른 두 눈이여! 
잘 있거라, 이슬에 촉촉히 젖은 가냘프게 떠는 입술이여! 아직도 몇 번이나 더 
그 입술에 키스하리라고 믿었는데. 아, 오늘도 언덕 위의 늦가을의 햇볕에서 
그는 얼마나 그녀 생각을 하고 그 여자를 보고 싶어하고 그리워했던가. 그리고 
그는 언덕에게, 나무에게, 숲에게, 흰구름이 떠도는 푸른 하늘에게, 사계절에게 
이별을 고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마리는 지금도 자지 않고 있을까? 선량한 
사랑의 눈길을 가진 마리, 다리를 절뚝거리며 걷는 불쌍한 마리. 그녀는 앉아서 
기다리다 부엌에서 새우잠을 자거나 이따금 눈을 뜰 것이다. 하지만 이제 
골드문트는 집에 돌아갈 수가 없다.
  아, 종이와 연필이, 지금부터 만들 예정이었던 수많은 형상에의 희망이 그 
모두가 저 멀리 가고 말았다! 나르치스와, 그리운 사도 요한과의 재회의 희망도 
포기해야만 한다.
  그는 자신의 두 손에게, 자신의 두 눈에게, 배고픔과 목마름에게, 먹는 것과 
마시는 것에게도, 사랑과 슬픔에게도, 기타를 치는 것에도, 잠에도, 눈이 떠 
있는 것에도, 모든 것으로부터 이별을 고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내일은 새가 
하늘을 날더라도 볼 수가 없으리라. 창가에 기대어 소녀가 노래를 불러도 이제 
그는 그 노래를 들을 수가 없으리라. 시냇물은 흐르고 물고기는 묵묵히 
헤엄쳐간다. 바람이 불어 땅바닥의 노란 잎사귀를 쓸어간다. 태양이 빛나고 
하늘은 맑다. 젊은 사람들은 춤추는 곳을 찾아가고, 첫눈이 먼 산에 쌓인다. 
모든 것이 그렇게 계속된다. 나무들은 모두 그림자를 드리우고, 사람들은 모두 
생기에 가득 찬 눈으로 즐겁거나 슬프게 쳐다본다. 개들은 짖어대고, 암소들은 
이 마을 저 마을의 외양간에서 음매 하고 운다. 모든 것이 그대로 인데 그만 
없다. 이제 모든 것은 그의 것이 아니고 모든 것에서 그는 떨려나고 말았다.
  그는 황야의 아침 냄새를 맡았다. 달콤하고 신선한 포도주와 고소하고 단단한 
호두 맛도 보았다. 하나의 기억과 다채로운 세계 전체의 눈부신 반사가 
가위눌린 그의 가슴을 뚫고 지나갔다. 아름다우면서도 뒤엉킨 생활 전체가 
가라앉을 듯, 이별을 고하듯 하며 그의 마음 전체를 한 번 더 뚫고 비쳤다. 
치밀어오르는 고통에 그는 몸이 오그라들었다. 그는 두 눈에서 하염없는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흐느껴 울면서 격동에 자신을 맡겼다.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쓰러질 듯 그는 끊임없이 고통에 몸을 맡겼다. 아, 
골짜기여, 수풀에 뒤덮인 산이여, 푸른 오리나무 숲속을 흘러내리는 개울이여, 
소녀들이여, 다리 위의 달밤이여, 아, 빛에 춤추는 아름다운 그림의 세계여, 
어쩌면 너를 잃어버릴 수가 있단 말이냐! 그는 울음을 그치지 않고 
어린아이와도 같이 테이블 위에 쓰러졌다. 고뇌하는 가슴 밑바닥에서 한숨과 
애원에 비명이 치밀어 올라왔다.
  "아아, 어머니, 어머니!"
  그가 이 마법의 이름을 부르자 그의 기억의 한구석에서 하나의 형상, 즉 
어머니의 형상이 그에게 대답을 해왔다. 그것은 이제껏 그의 사상이나 예술가의 
꿈으로 그린 어머니의 모습이 아니라 그 자신의 어머니 형상이었다. 수도원 
생활 이후에 그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 같은 자신에 찬 아름다운 어머니의 
형상이었다. 그는 그 어머니한테 그의 애달픔을 호소하고 죽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을 참을 수 없는 괴로움을 눈물로 호소했다. 그는 그 어머니한테 몸을 
맡겼다. 숲과 태양과 두 눈, 그리고 그의 두 손과 그의 전 존재와 생활을 그 
어머니의 두 손에 모두 돌려줬다.
  흐느끼면서 그는 어느덧 잠이 들었다. 극도의 피로와 졸음이 어머니처럼 그를 
팔에 안아들였다. 한두 시간 잠을 자고 나면 비참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심한 고통을 느꼈다. 묶인 손목이 무척이나 쓰리고 
아팠다. 등과 목덜미를 잡아당기는 듯한 고통이 스쳐갔다. 그는 간신히 
일어나서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처지를 다시 인식했다. 그의 주변은 완전한 
암흑이었다. 그가 얼마나 잠을 잤는지 자신은 알 수가 없었다. 바로 이 순간에 
백작의 부하들이 달려와서 그를 죽음의 장소로 데리고 가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 그는 문득 신부가 그를 찾아온다는 약속이 되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하지만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완전한 석방과 
죄악의 용서도 그를 천국으로 이끌고 갈 수는 없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는 
이런 것에는 벌써 오래 전부터 확신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영원이라는 것이 있든 없든--그는 그러한 것을 원하지도 
않았다--불안하고 무상한 이 생명, 이 호흡이 피부 속을 내 집으로 삼고 있다는 
것, 그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그는 바라지 않았다. 산다는 것 이외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미친 듯 그는 일어나 어둠 속을 비틀거리며 벽에까지 
더듬어가서 벽에 똑바로 기대어 생각하기 시작했다. 구원의 손길이 없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신부가 구원의 손길이 될지도 모른다. 어떻게 하면 신부한테 
그의 무죄를 믿게 할 수가 있을까? 그를 위해 말이라도 좀 해줄까? 연명이나 
혹은 도망치는 데 작은 도움이라도 되어 주지 않을까? 그는 열심히 생각에 
몰두했다. 그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손 치더라도 그는 단념하고 싶지 않았다. 
승부에서 졌다고만 단정할 수 없었다. 우선 신부를 내 편에 끌어넣는 데 애를 
써본 후 그 다음은 그를 매혹시켜 놓고, 그를 납득시키고. 신부만이 그의 유일한 
숨겨진 카드 였다. 다른 가능성은 모두가 다 허황된 꿈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우연이.... 형리가 심한 복통을 일으킨다든가, 교수대가 망가진다든가, 미리 
생각지도 않던 도망칠 가능성이 생길 수도 있었다. 골드문트는 죽음을 
거부했다. 죽음의 운명을 받아들이려고 했으나 솟구쳐오르는 삶의 욕망은 
소용없었다. 그는 방위에 저력을 다해 마지막 고비까지 싸울 결심을 했다. 
문지기의 발을 걷어차거나, 형리를 넘어뜨리거나, 최후의 순간까지 모든 힘을 
다하여 생명을 보전해 나갈 것이다. 아, 신부를 움직여서 두 손의 포승을 끄를 
수만 있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어떤 것이라도 할 수 있을 텐데.
  그 동안에도 그는 고통을 무릅쓰고 이로 포승을 풀려고 애를 썼다. 사나운 
개와도 같이 필사적인 노력으로 기나긴 시간을 들여 포승이 어느 정도 
늦추어졌다고 생각될 때까지 계속했다. 그는 습기찬 지하실의 벽을 더듬으며 한 
발 두 발 옮기면서 튀어나온 모서리는 없는가 하고 자세히 찾아보았다. 그때 이 
지하실 감옥에 들어왔을 때 헛디딘 계단이 문득 머리에 떠올랐다. 그것은 쉽게 
발견되었다. 그는 무릎을 꿇고 앉아 돌계단의 모서리에다 온힘을 다해 포승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려웠다. 포승 대신에 손의 관절이 모서리에 닿아 
불덩이같이 달아올랐다. 그는 피가 흐르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문틈으로 아침의 햇살이 희미하게 비칠 때쯤 드디어 그는 목적에 달성했다. 
포승이 끊어진 것이다. 그는 포승을 풀어 버렸다. 그러나 두 손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됐지만 손가락을 제대로 놀릴 수가 없었다. 두 손은 부르텄고 
감각이 없었다. 팔은 어깨까지 뻣뻣이 굳어져 있었다. 그는 손과 팔을 움직이며 
피가 다시 제대로 돌도록 무리를 해서 눌러 보았다. 방금 그는 썩 훌륭하게 
계획을 짰다.
  신부에게 전혀 도움을 받지 못할 때에는 잠시라도 단 둘이 있게 될 때 신부를 
죽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의자 하나만 가지고서라도 목적을 달성할 수가 있을 
테지. 목을 졸라 죽일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팔의 힘이 모자랐으니까. 어쨌든 
신부를 죽여서 얼른 신부의 옷을 바꾸어 입고 탈출하는 것이다. 신부가 맞아 
죽은 것을 다른 사람이 발견하기 전에 그는 성에서 빠져나가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다음에는 쉬지 않고 달아나는 것이다. 마리가 집안에 숨겨 줄 테지. 
그렇게 하도록 애써야만 한다. 그것은 가능한 일이었다.
  골드문트는 그의 생전에 지금처럼 날이 새는 것을 애타게 기다리며,. 더구나 
이 시간만큼 무서워 전신을 떤 적은 없었다. 긴장과 기대로 이를 달달 떨었다. 
그는 사냥을 하는 포수의 눈초리로 문의 틈에서 새어들어오는 가냘픈 빛줄기가 
차츰차츰 밝아오는 것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고는 테이블 있는 데로 
돌아갔다. 두 손을 무릎 사이에 끼우고, 조그만 의자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시늉을 해보려고 했다. 포승이 풀어져 있는 것을 눈치채게 해서는 안 되었다. 
두 손을 마음대로 놀릴 수 있게 되고부터 그는 죽음을 믿지 않았다. 탈출할 
생각이었다. 설령 그 때문에 전세계가 산산조각이 난다거나 또다른 어떤 희생을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의 몸은 자유와 생명에의 
염원에 떨고 있었다. 바깥에서 도와주러 오는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는 상관할 
바가 아니다. 아그네스는 여자요, 그 여자의 힘은 별 것 아니다. 아마 그녀의 
용기도 그럴 것이다. 그녀가 그를 저버린다 해도 별로 이상할 것은 없다. 
하지만 그녀는 그를 사랑하고 있었으니까 어떻게 좀 도와줄 수도 있을 것이다. 
바깥에 시녀 베르트가 살며시 찾아왔는지도 모른다. 또한 아그네스가 심복같이 
부리고 있다던 마부가 있지 않은가? 아무도 나타나지 않고 아무 신호도 없을 
때에는 그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면 된다. 실패한다면 의자를 가지고 보초서는 
놈을 때려 죽인다. 둘, 셋, 아니, 몇이라도 오는 대로 죽일 것이다. 확실히 
유리한 점이 한 가지 있었다. 즉, 그의 눈은 어두운 데 익숙해져 깜깜한 
속에서도 어떤 형태나 크기를 대충 짐작할 수 있지만 다른 자들이 여기 처음 
들어오면 얼마쯤 더듬거릴 것이다.
  들뜬 사람처럼 그는 테이블 앞에 웅크리고 앉았다. 그는 신부를 구원자로 
만들기 위해서 무슨 말을 할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했다. 그것이 제일 첫단계일 
테니까. 동시에 그는 문틈으로 새어들어오는 빛이 조금씩 밝아 오는 것을 
집어먹으면서 무서워했던 순간을 그는 이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는 
참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다다랐다. 무시무시한 긴장으로 이제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체력도 주의력도 결단력도 기력도 차츰 쇠퇴해졌다. 긴장된 이 
준비 태세와 살아보자는 결의가 왕성하게 용솟음치고 있을 동안에 문지기가 
어서 신부를 데리고 와야만 했다.
  바깥 세계도 이윽고 눈을 떴다. 드디어 발소리가 들렸다. 안마당의 발자국 
위에서 발자국 소리가 메아리쳐 왔다. 열쇠가 구멍에 넣어지고 비틀어졌다. 그 
소리는 천둥과 같이 크게 울려 왔다.
  이윽고 육중한 문이 서서히 열리면서 돌쩌귀가 삐그덕 소리를 냈다. 신부는 
문지기조차 앞세우지 않고 혼자 들어왔다. 혼자서 양초가 두 개 꽂혀 있는 
촛대를 가지고 들어왔다. 그가 처음 계획했던 것과는 아주 딴판이었다.
  이 얼마나 이상하고 감동적인 광경이 되고 말았는가! 들어온 신부의 뒤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 다시 문을 닫았는데, 사제가 입고 있는 옷은 마리아브론 
수도원의 교단복으로, 옛날 다니엘 원장이나 안젤름 신부, 마르틴 신부가 입고 
있었던 눈에 익은 그리운 차림이었다.
  그 신부의 옷차림은 골드문트의 가슴속에 뭐라 말할 수 없는 충격을 주었다. 
그는 시선을 옆으로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눈에 익은 수도복의 출현은 
뜻밖에 일이 순조로이 된다는 것을 약속해 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좋은 
징조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신부를 때려죽이는 방법 이외엔 도망칠 길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 교단의 신부를 때려죽인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 무척이나 힘드는 일일 것이다.

         17

  "찬미 예수!"
  신부는 이렇게 말하며 촛대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골드문트는 눈을 
내리깐 채 입안에서 중얼거리며 대답했다. 사제는 가만히 있었다. 골드문트가 
불안해져서 무엇을 더듬듯이 두 눈을 치켜올릴 때까지 사제는 그 자리에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이 사람은 마리아브론 수도원 신부들의 복장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원장 직위의 표지를 달고 있었다. 골드문트는 더욱 
어리둥절해졌다.
  그는 원장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윤곽이 뚜렷하고 수척한 얼굴에 가느다란 
입술을 하고 있었다. 알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골드문트는 홀린 듯 저도 
모르게 그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것은 전적으로 정신과 의지에 의해서 형성된 
듯한 얼굴이었다. 그는 더듬거리며 손으로 촛대를 움켜쥐고 쳐들어서 그 얼굴을 
보기 위해 신부의 얼굴 가까이에 그것을 갖다대었다. 그리고 그의 두 눈을 
보았다. 촛대를 도로 내려놓았을 때, 그것은 그의 손 안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나르치스."
  그는 거의 들릴 듯 말 듯 속삭였다.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이 어지럽게 돌기 
시작했다.
  "그래, 골드문트, 나는 한때 나르치스였었지. 하지만 그 이름은 벌써 오래 
전에 쓰지 않는다. 자네는 기억할지 모르지만, 나는 성직을 받은 이래 요한이라 
부른다네."
  골드문트는 마음속까지 흔들렸다. 갑자기 전세계가 변화하고 말았다. 그의 
초인적인 긴장이 별안간 뒤집혀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는 부들부들 
떨었다. 어지러운 감정이 그의 머리를 텅 빈 기포와 같은 느낌으로 만들었다. 
가슴은 오므라들었다. 눈에서는 치밀어오르는 흐느낌과 같은 것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가 바라던 모든 것이 그 순간 정신을 잃고 눈물과 혼수 상태에 
빠져드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르치스를 다시 봄으로써 불러일으켜진 소년 시절의 깊은 추억에서 
하나의 경고가 끓어올랐다. 소년 시절 한때 그는 이 아름답고도 엄숙한 
눈앞에서, 무엇이든지 다 알고 있는 이 까만 눈앞에서 소리치며 크게 운 적이 
있었다. 그는 그것을 다시 되풀이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지금 그의 일생을 
통해서 가장 절박한 순간에 이 나르치스가 홀연 나타난 것이었다. 그런데 
생명을 구하기 위해 다시 나르치스 앞에서 울거나 실신 상태에 빠져 버리는 
것이 좋단 말인가? 아니, 안 된다. 그는 억지로 버티었다. 마음을 억제하고, 
가슴을 움켜잡고 현기증을 쫓아 버렸다. 이제 약점을 보여서는 안 되었다.
  골드문트는 억지로 자제한 목소리로,
  "당신을 여전히 나르치스라고 부르는 것을 용서해 주지 않겠나?"
  하고 겨우 말할 수가 있었다.
  "그렇게 부르게. 악수를 해주지 않겠는가?"
  골드문트는 다시 자신을 억제했다. 소년답게 고집 세고 약간 조롱이 섞인 
어조로 학생 시절에 자주 한 것처럼 대답을 했다.
  "용서해 주게, 나르치스."
  그는 싸늘하면서 다소 무뚝뚝하게 말했다.
  "보아하니 자넨 원장이 됐나 보군. 하지만 나는 여전히 방랑자일세. 게다가 
내가 아무리 바랐던 것이라 하더라도 우리들의 대화는 섭섭하지만 오래 끌 수가 
없네. 나르치스, 아무튼 나는 교수대에 목을 매달 처지가 되었으니 말일세. 한 
시간 뒤에, 혹은 그보다 전에 목이 매달려 있을 걸세.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다만 
상황을 명백히 해두기 위해서야."
  나르치스는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친구의 몸짓 가운데 약간의 소년다운 
건방진 말투와 허풍이 그를 우습게도 했고 동시에 감동시켜 주었다. 그 배후에 
있는 자존심이 골드문트를 억제시켜 울면서 그의 가슴에 뛰어드는 것을 금하고 
있다는 것을 나르치스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사실 그도 이처럼 뜻밖의 
재회를 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지만 이 조그만 희극을 이해할 수는 
있었다.
  "아니, 좋아."
하고 그는 침착하게 말했다.
  "그것은 그렇다 치고, 교수형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자네는 
특사를 받았네. 자네한테 그것을 알리고 자네를 데리고 갈 책임을 내가 맡았네. 
자네가 이 도시에 머무르지 못할 형편이 됐으니 말일세. 지난 이야기를 나눌 
시간은 넉넉히 있을 거야. 그러니 어때, 이번에는 악수해 주겠나?"
  두 사람은 서로 손을 맞잡고 한동안 감회 깊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서로 깊은 
감동을 느꼈으나 그들의 이야기 가운데는 아직도 어느 정도의 장난기가 
계속되었다.
  "좋아, 나르치스, 그럼 이 기분나뿐 숙소를 나가세. 나는 자네 일행에 한몫 
끼겠어. 마리아브론에 돌아갈 건가 응? 그것은 좋은 일이지. 어떻게 말을 타고 
가나? 그럼 내가 타고 갈 말을 어떻게 구하느냐가 문제로군."
  "말쯤이야 손에 넣을 수 있지. 우리는 두 시간 안에 출발하게 되네. 아, 
그런데 자네 두 손은 왜 그런가? 저것 보아, 온통 벗겨지고 부르트고 
피투성이군! 아, 골드문트, 자네는 도대체 어떤 대접을 받았길래!"
  "나르치스, 그만두게. 두 손을 내 스스로 이렇게 한 거라네. 나는 묶여져 
있었다네. 그것을 푸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어. 그건 그렇고 자네는 혼자서 
나한테 들어오다니 이만저만한 용기가 아니었는데."
  "무슨 뜻이야, 용감하다니? 위험할 게 뭐가 있나?"
  "아, 나한테 맞아 죽는다는 조그만 위험 말이야. 나는 그런 것까지도 생각하고 
있었다네. 사제가 나한테 온다는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에, 그자를 때려죽여서 
그의 의복을 바꾸어 입고 도망치려고 했었지. 썩 좋은 계획 아닌가?"
  "그럼, 자네는 죽고 싶지 않았군? 죽음에 반항할 작정이었나?"
  "확실히 그렇게 할 작정이었지. 자네가 그 사제일 것이라고는 물론 생각지도 
못했지만."
  "아무튼,"
  망설이듯 나르치스는 말했다.
  "그것은 정말 몹쓸 계획이었군 그래. 고해 신부로서 자네한테 오는 사제를 
자네는 정말 때려죽일 수 있었을까?"
  "나르치스, 자네라면 물론 죽일 수가 없겠지. 그가 마리아브론의 법의를 입고 
있었더라면 자네의 신부를 꼭 죽일 수야 있었겠나. 하지만 누구라도 할 것 없이 
다른 사제였더라면 꼭 해냈을걸."
  갑자기 그의 목소리는 슬픔에 잠겼다.
  "그랬다 해도 그것이 내가 한 최초의 살인은 아니야."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두 사람 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 일에 대해서는 나중에 말하지."
  하고 나르치스는 차디찬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는 언제든지 나한테 그것을 고해할 수가 있어. 혹은 그 밖의 자네의 
생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도 좋아. 나도 자네한테 이것저것 이야기할 것이 
있어. 즐거움을 가지고 기대하겠네. 갈까?"
  "잠깐만, 나르치스! 어떤 생각이 떠올랐는데, 내가 자네를 요한이라고 부른 
적이 있었다네."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가는군."
  "물론 그럴 테지. 자네는 아직 아무것도 모를 테니까. 벌써 몇 년 전에 나는 
자네한테 요한이라는 이름을 붙인 적이 있었어. 그것은 언제까지나 변치 않을 
거야. 말하자면 나는 전에 조각가 노릇을 한 적이 있는데, 또 그렇게 되려고 
생각했구, 그때 내가 만든 제일 좋은 형상은 실제 인물이 크기와 똑같은 목조로 
그것은 자네의 형상이었어. 하지만 그것은 나르치스라는 이름이 아니고 
요한이라는 이름이었지. 십자가 아래의 요한 사도란 말일세."
  그는 일어서서 문 있는 쪽으로 갔다.
  "그럼, 자네는 아직도 나를 생각하고 있었단 말인가?"
  나르치스가 나지막이 물었다. 골드문트도 똑같이 나지막한 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나르치스, 나는 언제나 자네를 잊지 않고 있었다네."
  그는 육중한 문을 요란스레 밀고 나섰다. 희뿌연 아침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두 사람은 이제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나르치스는 그를 그의 객실로 
데리고 갔다. 그를 수행하는 젊은 수사가 거기서 부지런히 짐을 꾸리고 있었다. 
골드문트가 요기를 한 뒤 두 손을 닦고 약간의 붕대를 얻어 상처가 난 부위에 
감았다. 벌써 말이 끌려나왔다.
  그들이 말에 올랐을 때. 골드문트가 말했다.
  "또 하나 소원이 있네. 생선 시장으로 해서 길을 잡아 주지 않겠나? 거기에 
좀 볼일이 있어."
  그들은 출발했다. 골드문트는 성 안의 창문을 살펴보았다. 혹시나 아그네스가 
어딘가에 보이지 않을까 해서. 그는 이제 그녀를 볼 수 없으리라. 그들은 말을 
타고 생선 시장을 향해 갔다. 마리는 골드문트 걱정을 무척 많이 하고 있었다. 
그는 마리와 그녀의 양친에게 이별을 고하고 감사의 인사를 수없이 하며, 기약 
없는 약속을 하고 말에 올라탔다. 골드문트 일행이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마리는 문 앞에 서 있다가 천천히 집 안으로 절룩거리며 들어갔다.
  일행은 모두 넷이었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그리고 젊은 수사와 무장한 마부 
한 사람이었다.
  "내 말 블레스를 아직 기억하고 있나?"
  하고 골드문트가 물었다.
  "수도원의 마구간에 있던 말 말이야."
  "기억하고말고. 하지만 그 말은 이제 없어. 자네도 기대하고 있지는 않을 
테지. 블레스가 죽은지 아마 칠팔 년은 됐을걸."
  "자네가 블레스를 잊지 않고 있었다니!"
  "물론 기억하고 있지."
  골드문트는 블레스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다. 동물 같은 것을 염두에 두어 
본 적이 없는 나르치스가 블레스만은 잊지 않고 있어 준 것이 골드문트한테는 
반가웠다.
  "자네는 나를 비웃을 테지."
  골드문트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수도원에 대해서 내가 제일 먼저 알고 싶은 것이 그 불쌍한 말이었다니. 
실은 아주 다른 것을, 특히 다니엘 원장 안부를 물어 보고 싶었지만, 그분이 
죽었다는 것은 벌써 알았어. 자네가 후계자가 돼 있으니 말일세. 죽은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처음에는 피하고 싶었다네. 나는 사실 죽음을 빼놓곤 할 
말이 없어. 싫증이 나도록 본 페스트 때문이지. 하지만 한 번은 이야기해야 
되지 않겠는가? 언제 어떻게 다니엘 원장이 돌아가셨는지 말 좀 해주게나. 나는 
그분을 아주 존경했었지. 안젤름 신부와 마틴 신부도 아직 생존해 계신가? 
아니, 아무리 끔찍한 말이라도 들을 각오가 돼 있네. 아아, 자네가 페스트를 
모면할 수 있었다는 것은 참 다행한 일이야. 물론 나는 자네가 죽었으리라고는 
아예 생각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도리어 재회를 굳게 믿고 있었지. 그러나 
섭섭하게도 기대가 어그러진다는 것을 나는 체험했어. 니콜라우스 스승, 그 
조각가가 죽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 했었지. 하지만 막상 가보니 그 
사람은 이미 죽어 버렸더군."
  "대강 말하자면."
  나르치스가 말했다.
  "다니엘 원장은 이미 8년 전에 병도 괴로움도 없이 돌아가셨다네. 나는 그의 
후계자가 아냐. 내가 원장이 된 것은 겨우 1년 남짓이지. 다니엘 원장의 
후계자는 마르틴 신부였어. 전에 교장하던 사람 말이야. 그는 지난해 일흔을 
채우지 못하고 돌아가셨어. 안젤름 신부도 이제는 없네. 그분은 자네를 
좋아해서 가끔 자네 이야기를 했다네. 결국에는 전혀 걸을 수도 없게 되어 누워 
있는 것조차 매우 괴로워했었지. 그는 수종으로 돌아가셨어. 그래, 페스트가 
우리 수도원에 번져와서 많이들 죽었지. 거기에 대해서는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네! 아직도 궁금한 게 남아 있나?"
  "물론 잔뜩 있지. 그중에서도 어떻게 자네가 주교의 도시이며 총독이 
다스리는 그곳으로 오게 됐는가 궁금하군."
  "거기에는 긴 설명이 필요하네. 자네는 싫증만 날 테지, 정치에 관한 것이니 
말이야. 백작은 황제가 무척 신임하고 있어 여러 가지 문제에 관해서 전권을 
맡기고 있지. 현재 황제와 우리들 교단 사이에 조정해야 할 여러 가지 일들이 
많아. 교단에서 백작과 교섭할 사신의 역할을 나한테 맡겨 버렸어. 그러나 
성과는 없었지."
  그는 입을 다물었다. 골드문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어젯밤 나르치스가 
백작에게 골드문트를 구해 내기 위해 협상에서 얼마나 양보를 했을까 하는 것을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들은 계속 말을 몰았다. 골드문트는 이내 피로를 느껴 안장에 앉아 있는 
것도 힘들게 되었다. 
  한참 후에 나르치스가 물었다.
  "자네가 도둑질을 하다가 잡혔다는 것이 사실인가? 백작은 자네가 거기서 
도둑질을 했다고 주장하던데."
  골드문트는 말 위에서 웃어댔다.
  "물론 도둑놈처럼 보였을 테지만 실은 백작의 애인과 같이 있었다네. 백작도 
틀림없이 그것을 알고 있었을 텐데 나를 석방시켜 주다니 정말 이상한 일이야."
  "그야, 그도 얘기가 통하는 사람이니까."
  그들은 계획한 하루의 여정을 끝낼 수가 없었다. 골드문트는 너무나 피로해서 
두 손으로 고삐조차 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어느 마을에서 숙박했다. 
골드문트는 잠자리에 눕자 약간 열이 났다. 그래서 이튿날도 거기서 그냥 
드러누워 있었다. 마침내 하루가 지나고 두 손이 회복되자 그는 말을 타고 하는 
여행을 즐기기 시작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말을 타보지 못했던가. 그가 생기가 
돌고 젊어지고 명랑해졌다. 간혹 마부와 달리기를 하고,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 
내키면 친구 나르치스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연달아 퍼부었다. 나르치스는 
차근차근히, 그러나 흐뭇한 마음으로 질문에 응해 주었다. 그는 또다시 
골드문트한테 반하여 그 과민하고 어린애 같은 질문을 좋아했다. 그 질문들은 
친구들의 정신과 총명에의 무한한 신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나 물어 보겠네, 나르치스. 자네들도 유태인을 태워 죽인 일이 있나?"
  "유태인을 태워 죽인다구? 어째서 우리가 그런 짓을 하겠나? 그리고 우리 
있는 곳엔 유태인이 없다네."
  "하지만, 자네는 유태인을 태워 죽일 수가 있을까? 그런 경우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냔 말일세."
  "아니, 왜 우리가 그런 짓을 하지! 자네는 나를 광신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해 줘, 나르치스! 자네는 어떤 경우에 있어서 유태인을 
죽이라는 명령을,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그 승인을 내린다는 것을 생각할 수가 
있느냐고 나는 묻고 있는 거야. 그런 명령을 내린 후작이나 시장이나 주교나 
또는 다른 관헌들이 얼마든지 있는 걸."
  "나는 그런 종류의 명령은 내리지 않았어. 그것에 반해서 그런 잔인성을 
방관하고 참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는 생각할 수 있겠지."
  "그럼 자네는 그것을 참을 수가 있나?"
  "확실히. 만약 그것을 막을 권리가 내게 주어지지 않는다면 자네는 유태인을 
태워 죽이는 것을 본 적이 있었나, 골드문트?"
  "응, 있고말고."
  "그래, 자네는 그것을 막았는가?....그렇지 않았단 말인가? 그것 보게."
  골드문트는 레베카의 이야기를 자세하게 했다.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그는 
흥분해 버렸다.
  "그래."
  그는 과격하게 결론을 맺었다.
  "우리가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세계는 어떤 종류의 세계일까? 지옥이 아닐까? 
화도 나고 흉측스럽기도 하단 말이야."
  "그래, 세상은 확실히 흉측스럽게 변해 버렸지."
  "변했다구?"
  골드문트는 퉁명스럽게 소리쳤다.
  "자네는 예전에 세상은 거룩하다, 세상은 여러 개의 크나큰 원의 조화다, 그 
중앙에 조물주가 군림하고 있다. 존재하는 것은 좋다 등등을 몇 번이나 
주장했었지! 아리스토텔레스에 그렇게 씌어 있다느니, 성토마스에도 씌어 
있다느니 하면서 자네는 말했어. 그 모순이 설명을 무척 듣고 싶군."
  나르치스는 크게 웃었다.
  "자네 기억력은 정말이지 놀랍군. 하지만 자네는 좀 오해를 했네. 나는 
조물주를 항상 완전한 것으로 떠받들었으나 창조된 것을 떠받든 적은 결코 
없네. 나는 세상의 악을 부정한 적이 없어. 지상의 생활이 조화적이고 옳다, 
또는 인간은 선량하다, 진실한 사색가라면 결코 그런 주장은 하지 않을 걸세. 
도리어 인간의 마음이 지향하는 것이 악이라는 것은 성서에 뚜렷하게 씌어 
있지. 우리는 날마다 그 실증을 보고 있네."
  "대단히 좋은 말이야. 이제야 겨우 자네들 학자들의 생각이 어떤가를 알았네. 
말하자면 인간은 나쁘단 말이지. 지상의 생활은 평범과 더러움에 꽉 차 있다는 
것을 자네들은 인정한다는 얘기군. 자네들 사상의 배후 어느 한구석에는 정의와 
완전함이 존재해 있어. 그것은 존재해 있을 뿐 아니라 증명할 수도 있다네. 
하지만 단지 소용없는 것들만 있다네."
  "자네는 우리 신학자에 대해서 증오심만 가지고 있는 것 같군! 하지만 자네는 
여전히 사색가가 되지 못했어. 자네는 무엇이든 한데 모아 얽어 놓기만 했네. 
자네는 무엇이든 좋으니 좀 배워서 터득하지 않으면 안 될 걸세. 하지만 자네는 
왜 우리가 정의의 사상을 선용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가? 우리는 언제나 그렇게 
하고 있네. 이를테면 나는 원장으로서 수도원을 관리해야 하네. 그 수도원은 
바깥 세계와 마찬가지로 완전하지도 않고 죄악을 벗어나지도 못하고 있네. 
하지만 우리는 정의의 관념에 의해 원죄와 싸우며, 불완전한 우리네 생활을 
정의로 측정하고 악을 시정하며, 우리네의 생활을 자꾸만 하느님과 
결부시키려고 시도하고 있네."
  "그거야 그럴 테지, 나르치스. 나는 자네 말을 하고 있는 것도, 자네가 좋은 
원장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도 아니야. 하지만 레베카라든가, 불에 타죽은 
유태인이라든가, 공동 묘지라든가, 무수한 주검이라든가, 페스트의 시체가 
너저분하게 깔려 지독한 냄새를 풍기고 있던 골목이라든가, 방이라든가, 
허물어진 지방이라든가, 오갈 데 없는 아이들이라든가, 사슬에 매인 채 굶어죽은 
개라든가, 이런 온갖 것들을 생각하고 그 광경을 눈앞에 그려 보면 내 가슴은 
아프다네. 그리고 우리들의 어머니는 우리들의 절망과 공포와 악마로 가득 찬 
세계 속에 풀어 놓고 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일세. 어머니들이 우리를 낳지 
말고, 하느님이 이 무서운 세상을 만들지 말고, 구세주가 이 세상을 위해 
무익하게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지 않았더라면 더 나으리라 생각했네."
  나르치스는 친구를 향해 정답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말이 모두 옳아."
  나르치스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제발 말 좀 해보게. 빠짐없이 죄다 털어놓고 이야기해 주세. 하지만 자네는 
한 가지 점에 있어서 대단한 곡해를 하고 있네. 즉 자네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자네는 사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그것은 사상이 아니라 
감정이라네. 생존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는 인간의 감정 말일세. 그 슬픔과 
절망에 찬 감정에 완전히 다른 감정이 대립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도록 
하게나. 자네가 말을 타고 기분좋게 아름다운 지방을 돌아다닐 때라든가, 혹은 
경솔하게 백작의 애인과 사랑을 나누기 위해 땅거미가 질 무렵 성 안에 
숨어들어 갔을 그런 때는 세상은 자네에게 완전히 다른 형상을 제시해 주었을 
걸세. 페스트의 집도, 불에 타죽은 유태인도 모두다 자네가 쾌락을 얻는 것을 
조금도 방해하지 않았을 거야. 안 그런가?"
  "확실히 그렇긴 해. 세상이 죽음과 공포로 뒤덮여 있었기 때문에 나는 나의 
마음을 위로시켜 주고 이 지옥의 한가운데 피어 있는 아름다운 꽃을 꺾으려고 
했던 거야. 나는 쾌락을 발견하게 되면 잠시 동안은 두려움도 잊어버리지. 
그렇다고 해서 공포가 감소되는 것은 아니지만 말야."
  "계속 그럴 듯한 말을 하는군. 말하자면 자네는 이 세상이 죽음과 공포로 
뒤덮여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군. 그리고 거기서 도망치기 위해 쾌락 속에 
뛰어들지만 쾌락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세상 사람들은 자네를 다시 황무지로 
쫓아 버린다, 이런 말이지?"
  "그렇지, 사실이 그렇다네."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럴 거야. 단지 자네만큼 그것을 지나치게 강하게 
느끼는 사람은 드물지. 그 감정을 의식하려고 하는 욕구를 가진 사람은 적단 
말일세. 하지만 이봐, 자네는 쾌락과 공포 사이의 절망적인 방황이나 생의 
쾌락과 죽음의 감정 사이의 엇갈림 이외에 또 다른 어떤 행로를 시도해 본 일은 
없나?"
  "음, 물론 있었지. 나는 그것을 예술로써 시도해 보았다네.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조각을 했었지. 바깥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지 아마 3년쯤 됐을까? 그 
동안에는 줄곧 방랑자로서만 떠돌고 있었어.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어느 
수도원의 성당에서 나무로 새긴 마리아 상을 보았다네. 어찌나 아름다웠는지 
첫눈에 내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겠나. 그래서 그것을 만든 스승을 찾아냈지. 
나는 그분을 만나 보았어. 유명한 분이었네. 나는 그분의 제자가 되어 몇 년을 
그분 밑에서 일했어."
  "그 이야기는 나중에 좀더 자세히 들려주게나. 그런데 예술이 자네에게 
가져다 준 것, 다시 말해 자네에게 의미가 있었던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나?"
  "그것은 무상의 극복이었다네. 인간 생활의 기만성과 죽음의 유희에서 
무엇인가가 살아남는지를 알게 됐지. 그것은 말하자면 예술품이었어. 그것도 
언젠가 한번은 없어지고 말겠지. 타서 없어지거나 망가지거나 부서지거나 할 
거야. 하지만 어쨌든 예술품은 몇 세대의 인간 생활보다는 영속적이고 순간의 
피안에 형상과 거룩하고 고요한 나라를 만든다네. 거기에 협력하는 것은 
나한테는 귀중하고 위안이 되리라고 생각했지. 왜냐하면 그것은 무상한 것을 
영원화시키는 데 가깝기 때문이야."
  "내 마음에 드는군, 골드문트. 자네가 더욱더 아름다운 작품을 많이 만들기를 
바라네. 자네 역량에 대해 나는 깊은 신뢰심을 가지고 있네. 자네가 
마리아브론에서 오랫동안 나의 손님이 되고, 자네를 위해 일터를 장만해주는 
것을 동의해 주게나. 우리 수도원이 예술가를 가져 보지 못한 지도 퍽 오래 
됐네. 하지만 예술의 기적에 대한 자네의 정의는 아직도 부족하다는 느낌이 
드는군. 예술의 본질은 돌이나 나무나 색채에 의해서 현존하는 것, 사멸하고 
마는 것에서 죽음을 빼앗아 보다 더 오래 존속시킨다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하네, 여러 가지 예술품, 즉 성자나 마돈나 상을 보아 오기는 
했지만 그것들이 단순히 한때 생을 가지고 있었던 한 개인의 충실한 
초상화라고는 생각지 않아. 개인의 형태나 색채를 예술가가 전달하고 있다고는 
보지 않는단 말일세. "
  "자네 말이 옳아."
  골드문트는 흥분하여 소리쳤다.
  "자네가 예술에 대해서 그토록 조예가 깊은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네! 훌륭한 
예술품의 원형은 실존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원형은 살과 피가 아니고 
정신이야. 그것은 예술가의 영혼 속에 깃든 하나의 형상이지. 나르치스, 내 영혼 
속에서도 그와 같은 형상이 꿈틀거리고 있어. 나는 그것을 언젠가 한번 
표현해서 자네에게 보여주고 싶어."
  "훌륭해! 골드문트, 방금 자네는 자신도 모르게 철학의 한가운데를 뚫고 
들어가 그 비밀의 하나를 이야기한 거야."
  "자네는 나를 놀리는군."
  "아니, 진심이네. 자네는 '원형'에 대해 이야기했어. 말하자면 창조적인 정신 
분야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물질 안에 실현되고 구체화될 수 있는 형상에 
대해서 언급한 거야. 예술의 형태는 구체화되고, 현실성을 갖기 전에 벌써 
예술가들의 영혼 속의 형상으로 존재하고 있지! 그 형상, 즉 '원형'은 옛날 
철학자들이 '이데아'라고 명명한 것과 꼭 일치하고 있어."
  "그래. 그렇게 말하니 이젠 완전히 믿을 수 있을 것처럼 들리는군."
  "그런데, 저네가 이데아와 원형을 신봉한다는 것을 공언하는 걸 보니 
정신적인 세계, 즉 우리네와 같은 철학자와 신학자의 세계에 들어와 있기도 
하고 혼란과 괴로움이 심한 생활, 즉 육체적 존재의 무한정하고 무의미한 
죽음의 한복판에 창조적인 정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도 인정하고 있는 걸세. 
골드문트, 자네가 어렸을 적에 내게 왔을 때부터 나는 자꾸만 자네 내부에 있는 
그 정신을 호소해 왔었네. 자네 같은 경우로 생각해 볼 때 그 정신은 사색가의 
정신이 아니라 예술가의 정신일세. 하지만 그 정신이야말로 감각 세계의 미묘한 
뒤얽힘, 즉 쾌락과 절망 사이에 있는 영원한 딜레마에서 탈출하는 길을 
자네에게 제시하는 걸세. 이보게, 골드문트. 자네한테서 그 고백을 들으니 나는 
정말 기쁘네. 나는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네. 그때부터 말이야. 자네가 
선생이었던 나르치스와 작별하고 자네 자신이 되는 용기를 발견하게 되기를 
말이야. 이제 우리는 다시금 새롭게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네."
  골드문트의 생각은 이 순간에 마치 그의 생활이 의미를 얻은 것 같기도 했고, 
높은 곳에서 그의 생활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것처럼 그의 생활의 커다란 세 
세계, 즉 나르치스에의 의존 생활과 거기에서의 이탈--자유와 방랑 
생활--귀환과 성숙과 수확의 시초가 확실히 보이는 듯도 했다.
  환상은 다시 사라졌다. 하지만 그는 지금부터 나르치스에게 일방적인 
의존적인 관계가 아닌 자유와 상호 대등한 관계를 발견하게 됐다. 그는 이제 
나르치스가 그를 대등한 자, 예술가로서 인정해 주었기 때문에 비굴해지지 않고 
월등한 정신을 지닌 손님 대접을 받을 수 있게 됐다. 그는 이 여행 중에 조각을 
나타낼 수 있는 그 무엇을 간절히 소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따금 근심이 
생기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나르치스, 자네가 진실로 어떤 귀찮은 녀석을 수도원에 데리고 가는가를 
모르고 있지 않나 염려되는군. 나는 수사도 아니요, 그렇다고 또 수사가 되고 
싶은 생각도 없네. 물론 나야 크나큰 세 가지 맹세를 잘 알고 하는 말일세. 
빈곤이야 충분히 알고 있지. 하지만 순결과 복종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이 
두 가지 덕은 정말 사나이답다고 생각되지 않거든. 이제 나에게는 신앙심이라는 
것은 전혀 없네. 벌써 몇 년 전부터 고해한 일도, 기도드린 일도, 성찬을 받은 
적도 없으니까."
  나르치스는 잠자코 듣고 있었다.
  "보아하니 자네는 이도교가 된 것 같군. 하지만 그 문제는 조금도 염려 할 것 
없어. 자네는 수많은 자신의 죄악을 더 이상 뽐낼 필요는 없네. 자네는 이 
허무한 세상의 생활을 그럭저럭 해왔어. 이제 자네는 규율이 무엇이며 질서가 
무엇인가를 전혀 모를 걸세. 자네는 확실히 제멋대로의 수사가 될 테지. 하지만 
자네를 교단에 집어 넣기 위해 초대하는 것은 아닐세. 단지 우리들의 손님이 
되어 우리가 자네를 위해 일터를 만들어주는 영광을 갖기 위해 초대하는 
것뿐일세. 그리고 또 한 가지가 있네. 우리들의 청년 시절, 자네를 눈뜨게 
해주고 세속적인 생활을 하도록 내보낸 장본인은 바로 나였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것일세. 자네가 좋은 사람이 됐든 나쁜 사람이 됐든 이점에 대해서, 
본인인 자네 다음으로 나에게 책임이 있는 거야. 나는 자네가 무엇이 되어 
있는가를 보고 싶었네. 자네는 그것을 나한테 글과 생활과 작품 등으로 보여 줄 
테지. 만약 자네가 그것을 보여주는 날에는, 그리고 이 수도원이 자네가 있을 
만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날에는 내가 먼저 자네에게 다시 
수도원을 떠나 달라고 부탁할 걸세."
  골드문트는 자신의 친구가 원장으로서 행동하고, 세속적인 사람들과 세속적인 
생활을 대하는 태도에, 침착하게 자신을 가지고 이야기할 때마다 경탄하는 
마음이 가득했다. 왜냐하면 그럴 때는 나르치스가 사나이답다는 것이 역력했기 
때문이다. 부드러운 두 손과 학자의 얼굴, 정신과 확신과 용기에 가득 찬 사람, 
지도자, 책임을 지는 사람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나르치스는 이제 그때의 
청년도, 부드럽고 열의 있는 사도 요한도 아니었다. 이 새로운 나르치스, 
사나이답고 기사다운 나르치스, 그는 이 사람을 자신의 손으로 조각하고 싶었다. 
수많은 형상들이 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르치스, 다니엘 원장, 안젤름 
신부, 니콜라우스 스승, 미모의 레베카와 아그네스, 그밖에도 많은 친구와 적들, 
살아 있는 사람이며 이미 죽은 사람들.... 하지만 그는 교단의 친구가 되고 싶지 
않았다. 경건한 일원에도, 학식 있는 일원에도 포함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다만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 한때 청년 시절의 고향이 그들 작품의 고향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예감은 그를 행복하게 해주었다.
  그들은 서늘한 늦가을의 대기를 가르며 말을 몰았다. 낙엽이 다 떨어져버린 
나무들 위에서 하얀 된서리가 내린 어느 날 아침, 그들은 인적이라곤 없는 
늪지대의 굽이진 넓은 들판을 지나고 있었다. 기나긴 능선이 야릇한 감정으로 
눈에 익어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들판이었다. 높다란 물푸레나무 수풀과 
시냇물의 흐름과 낡은 곡식 창고가 눈앞에 나타났다. 그때 골드문트의 마음은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한때 기사의 딸 리디아와 말을 달렸단 고개라는 것을 
이내 알게 됐다. 이 벌판은 그때 기사에게 쫓겨 나와 하염없는 슬픔 속에서 
방랑하던 벌판이었다. 오리나무 숲속, 물방앗간, 성이 눈앞에 나타났다. 형언키 
어려운 슬픔으로 서재의 창문을 바라보았다. 그는 저기서 기사의 순례 행각을 
청년 시절의 이야기를 듣고 그 기사의 라틴 어 수기를 고쳐 주었었다. 일행은 
그 안마당으로 들어갔다. 그 집은 그들 여행의 일정에 있었던 숙박소였다. 
골드문트는 여기서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도록, 또한 마부와 같이 하인들이 
있는 곳에서 음식을 함께 먹을 수 있도록 나르치스에게 부탁했다. 지금은 
노기사도 리디아도 없었지만 사냥꾼들과 하인은 몇 사람 그대로 있었다. 집안은 
미모와 기품 있고 화려한 귀부인 율리에가 남편과 함께 생활하고 또한 집안을 
다스리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녀의 미모에는 얼마간 
심술이 있어 보였다. 그 여자도 하인들도 골드문트를 알아보지 못했다. 식사 후, 
어두워진 정원을 빠져나와 벌써 겨울빛이 완연한 울타리 너머 화단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마구간에 가만히 들어가 말들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마부와 함께 짚단 위에서 잤다. 무거운 추억이 그의 가슴을 짓눌렀기 때문에 
자다가 몇 번이나 눈을 떴다. 아, 그의 생활은 왜 이다지도 산산이 흩어져서 
열매를 맺지도 못한 것일까! 훌륭한 추억은 산더미처럼 많은 것 같았으나, 
어느새 산산이 부서지고 가치도 사랑도 보잘것 없었다.아침에 출발할 때 그는 
행여나 율리에를 한 번 더 볼 수 있을까 하고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창문을 
쳐다보았다. 며칠 전 주교의 성 안마당에서 아그네스의 모습을 기대하던 때와 
같은 심정으로. 아그네스는 나오지 않았다. 율리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의 일생은 그런 것 같았다. 이별을 고하는 것, 도망치는 것, 잊어버리는 것, 
빈 주먹으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그 자리에 서 있는 것, 그것뿐이었다. 그는 
온종일 그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음산한 얼굴을 
하고 안장에 기대 있었다. 나르치스도 그를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일행은 며칠 후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수도원의 탑과 지붕이 보이기 바로 
전에, 일행은 바로 그 자갈투성이의 황폐하고 오래된 밭을 지나갔다. 아, 얼마나 
오래 전의 일이었던가! 그곳에서 한때 안젤름 신부를 위해 약초를 찾고, 집시 
여인 리제에 의해서 성년이 되었던 그때가! 이윽고 일행은 마리아브론의 정문을 
지나 이탈리아산 밤나무 밑에서 말을 내렸다. 골드문트는 그 나무줄기를 추억 
어린 손으로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러고 나서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갈색의 
밤송이를 줍기 위해 허리를 굽혔다.

         18

  골드문트는 처음 며칠 동안은 수도원 안에 있는 외빈실에서 지냈다. 그 다음 
그의 간청대로 커다란 마당을 빙 둘러싸고 있는 부속 건물의 대장간 건너편에 
숙소가 마련됐다.
  재회는 그 자신도 놀랄 만큼 격렬한 마력으로 그의 마음을 끌어당겼다. 
원장을 빼놓고 여기서는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가 누구인지 
아무도 몰랐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수사건 속인이건 엄격한 질서 속에서 
분주하게 생활했으므로 어느 누구도 그를 방해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원의 
나무들과 정문과 창문, 물방앗간과 보도에 깔린 포속이나, 회랑에 있는 시든 
장미꽃 덤불, 곡물 창고와 식당 위에 있는 황새의 둥지는 그를 알고 있었다. 
어느 구석에서든 그의 과거와 청년 시절의 추억이 꿈과 감동의 향기를 싣고 
풍겨 왔다. 사랑이 모든 것을 다시 보게 하고 모든 소리를 다시 듣도록 
재촉했다. 저녁 기도의 종소리와 일요일의 종소리를, 비좁고 이끼가 잔뜩 낀 
돌다 속의 컴컴한 물레방아가 돌아가면서 내는 물소리를, 문지가 수사가 저녁때 
정문을 닫으러 갈 때의 철렁대는 열쇠꾸러미 소리를. 식당의 낙숫물이 떨어지는 
돌 홈 곁에는 질경이 같은 잡초들이 여전히 무성했다. 대장간 뜰의 오래된 
사과나무는 길게 늘어뜨린 가지를 여전히 뒤틀고 있었다. 하지만 종이 울리고 
쉬는 시간에도 수도원의 학생들이 계단을 내려서며 안마당으로 떼지어 나올 
때마다, 골드문트는 다른 어느 것보다도 더 큰 감동을 받았다. 소년들의 얼굴은 
왜 그리 한결같이 앳되고 순진하고 귀여운지, 그도 한때는 저들처럼 순진하고 
귀여운 어린애 같았을까?
  하지만 그는 이 정든 수도원의 온갖 낯익은 것들 외에 전혀 미지의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처음 며칠 동안에 벌써 그의 시선을 끌었는데, 그 
이후 점차 중요함을 더해 갔고 이미 알고 있었던 것과 천천히 결합되어갔다. 
사실 수도원에는 무엇 하나 새로운 것이 더해진 것은 없었다. 모든 것이 그의 
학창 시절이나 마찬가지로 똑같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은 이미 
그 시절의 눈이 아니었다. 그는 이 건축의 규모, 성당의 아치형 천장, 옛날 
그림, 제단이나 정문의 석상이나 목상 등을 보고 다시 느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위층에 있는 예배당의 낡은 석조 마리아 상을 바라보았다. 그는 소년 
시절에 벌써 그것을 즐겨 스케치도 했었으나, 이제야 그는 그것을 올바른 두 
눈으로 보았다. 그리고 제일 성공적이요, 제일 잘된 그의 작품일지라도 그것을 
능가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작품이라는 것을 그는 알았다. 그런 훌륭한 
것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리고 그 각각이 그것들만의 우연이 아니고 어느 
것이나 똑같은 정신에서 출발하여 벽이나 기둥이나 아치형 천장 사이에서 
자연스럽고 고향 속에 있는 것처럼 서 있었다. 여기에서 수백 년 동안 세워지고 
새겨지고 그려지고 살고 생각하고 가르쳐진 것은 하나의 계통이며 하나의 
정신이었다. 한 그루의 나무에 가지들이 서로 얽혀 있듯 그것들은 서로 얽혀 
있었다.
  골드문트는 이토록 조용하고 힘찬 통일이 세상 한가운데서 자신은 너무나 
작은 존재라고 느꼈다. 그의 친구 나르치스가 원장 요한으로 힘차면서도 
조용하고 다정하게 수도원 내부에 질서를 세워 나가고 있는 것을 볼 때는 더욱 
그랬다. 입술이 얇은 학자풍의 요한 원장과 단순하고 인심 좋고 소박한 다니엘 
원장 사이에는 개인적으로 크나큰 차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똑같은 통일과 
똑같은 사상과 똑같은 질서에 봉사하는 것은 물론이요, 그것에 의해서 지위를 
얻고 거기에 자신의 전부를 던지고 있었다. 수도원의 복장이 꼭 그러하듯 두 
사람은 닮아 있었다.
  나르치스가 이 수도원의 한복판에 있다는 것을 새삼 지각하고 난 후 
골드문트의 눈에는 그가 엄청날 만큼 크게 보였다. 물론 나르치스는 그에게는 
다정한 친구요, 주인으로서의 태도를 바꾸지는 않았지만, 그는 다정히 
'자네'라든가 '나르치스'라든가 하는 식으로 그를 부르는 것도 어딘지 모르게 
서먹서먹해졌다.
  하루는 그가 나르치스에게 말했다.
  "요한 원장, 나는 서서히 자네의 이름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안될 거야. 여기가 
정말 있기에 편하다는 걸 자네한테 일러두고 싶네. 자네에게 모든 것을 
참회하고 회개한 다음에 속계의 수도자로서 수도원에 넣어 주었으면 하는 
희망도 가지고 있다네. 하지만 그렇게 우리들 우정도 끝나고 말 테지. 자네는 
원장이고 나는 속계의 수도자니까 말일세. 하지만 이렇게 자네 있는 데서 
무위식도하고 자네가 일하는 것을 구경만 할뿐, 나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요, 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도무지 견딜 수 없는 일이야. 나도 일을 해서 나 
자신과 나의 능력을 자네에게 보여줌으로써 교수형에서 구제받은 것이 보람이 
있는지를 시험해 주었으면 하는 생각일세."
  "그것은 반가운 말이군."
  하고 나르치스가 어느 때보다 더 정확하고 간명한 어조로 말했다.
  "자네는 언제든지 작업을 시작해도 되네. 곧 대장장이와 목수에게 자네 일을 
돕도록 이르지. 여기 있는 재료 중에서 쓸 만한 것이 보이거든 무엇이든지 갖다 
쓰게나! 바깥에서 운반해 와야 할 것은 목록을 만들어 주게. 그리고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자네와 자네의 의도에 대한 것들을 들어주게! 내가 생각하는 
것을 다 이야기하는 데 시간을 내달라는 걸세. 말하자면 나는 학자이니 내 
사상의 세계에서 사실적인 표현을 시도해 보겠다는 말일세. 그밖에 달리 할말은 
없어. 그러니 전에도 꾸준히 참아준대로 한 번 더 나를 따라와 주게."
  "자네를 따라가도록 노력해 봄세. 말해 주게나."
  "내가 자네를 예술가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학생 시절에 이따금 
자네에게 이야기한 것을 기억하겠나? 그때 나는 자네가 어쩌면 시인이 될지도 
모른 거라고 생각했었네. 자네는 공부를 할 때 개념적인 것이 나 추상적인 것에 
대해서 일종의 반감을 가지고 있었지. 말 가운데서도 특히 감각적이며 시적인 
성질이 갖추어져 있는 말과 음향을, 말하자면 그것에 의해 무언가 머릿속에 
그려질 수 있는 말을 자네는 즐겼었지."
  골드문트는 말을 가로챘다.
  "미안하네만 자네가 특히 즐기는 개념과 추상도 따지고 보면 심상이나 형상이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자네는 정말 사색을 하기 위해서 머릿속에 그릴 수가 
없는 어휘만을 사용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무엇을 머리 속에 그리지 않고 
생각할 수가 있단 말이야?"
  "자네가 그걸 물어 주다니 고맙군! 하지만 확실히 사람들은 심상을 가지지 
않고서도 생각할 수가 있어! 사색은 심상과 아무 관계도 없지. 사색은 형상에 
의해서가 아니라 개념과 공식에 의해서 행해지지. 즉 형상이 끝나는 데서 
철학이 시작되는 거야. 이것은 우리들이 전에 간혹 논쟁했었던 걸세. 다시 말해 
세계란 자네한테서는 형상에서 생겼고, 나한테는 개념에서 생겼지. 나는 
자네한테 자네는 언제든지 사색가로서 아무런 쓸모가 없다고 말했었네. 물론 
그것은 결함이 아니라고도 말했지. 그 대신 형상의 영역의 지배자라고 했었지. 
알아듣겠나? 나는 그것을 자네한테 명백히 해두겠네. 자네가 그 당신 속세로 
뛰쳐나가는 대신 사색가가 되었더라면 불행을 초래했을지도 모르지. 간단히 
말해서 자네는 신비주의자가 됐을 거야. 신비주의자는 심상의 세계에서 떠날 수 
없는 사색가이므로 결국은 사색가가 아니라고 할 수 있네. 신비주의자는 
표면으로 나타내지 않는 예술가, 즉 시를 쓰지 않는 시인, 화필을 가지지 않는 
화가, 소리를 내지 않는 음악가인 셈이야. 그네들 가운데는 더할 수 없는 천성을 
타고난 고귀한 정신도 있지만 그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불행한 인간들이지. 
자네도 그중 한사람이 됐을지 누가 알겠나. 다행히도 자네는 예술가가 되어 
형상의 세계를 다루게 되었네. 그래서 자네는 창조자가 되고 지배자가 될 수 
있지. 사색가로서 불충분한 세계에 머무르고 있는 대신에 말일세."
  "심상의 작용 없이 생각하는 자네의 사색의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나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하네."
  하고 골드문트는 말했다.
  "그렇지 않네. 곧 될 수 있을 거야. 들어 보게. 사색가는 세계의 본질을 
논리에 의해서 인식하고 표현하려고 드네. 사색가는 우리들 지성과 그 도구인 
논리학이 불완전한 도구라는 것을 알고 있어. 마찬가지로 현명한 예술가는 그의 
화필이나 끌이 천사나 성인의 눈부신 본질을 결코 완전하게 표현해 내지 
못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 더욱이 사색가도 예술가와 마찬가지로 각자의 
방법으로 그것을 시도하고 있네. 그들은 그렇게 하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을 
테니까. 왜냐하면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주어진 천성을 가지고 자신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데 따라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것과 비할데 없이 의미 
깊은 것을 이루기 때문일세. 그렇기 때문에 나는 전에 자주 자네한테 말했었지. 
사색가나 혹은 금욕주의자를 선망하지 말고 자네 자신이 되라, 자신을 
실현시키도록 노력하라고 말이네."
  "자네가 하는 말이 어느 정도 이해는 가지만 자신을 실현시킨다는 말은 대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지?"
  "그것은 철학적인 개념이므로 달리 표현할 수가 없는 거야. 우리들 
아리스토텔레스와 성토마스의 제자들에는 모든 개념의 최고는 완전한 존재가 
되는 거야. 완전한 존재는 신일뿐, 그 밖의 존재하는 일체는 반 정도의 존재에 
불과하거나 부분적인 존재에 불과해. 그것은 변화 과정에 있고 혼합되어 있고 
여러 가지 가능성에서 생겼어. 그러나 신은 혼합되어 있지 않고 하나야. 
가능성을 가진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현실이지. 그러나 우리는 덧없는 존재요, 
변화 과정에 있는 존재라네. 우리에게는 완전이라든가 완전한 존재라든가 하는 
것은 불가능해. 우리들이 힘에서 행위로, 가능성에서 실현을 항해 나아갈 때 
진실과 가까워지고, 완전한 것, 신성한 것을 한 단계쯤 닮게 되는 거지. 즉 
자신을 실현하는 거야. 자네는 그 과정을 자신의 경험으로만 알고 있는 것이 
분명해. 자네는 사실 예술가로 여러 가지 형상을 만들었네. 그런 형상이 정말로 
잘 됐다면, 인간의 초상을 우연적인 것에서 해방시키고 순수한 형상으로 표현해 
낼 수 있었다면, 자네는 예술가로서 그 인간상을 실현한 셈이지."
  "잘 알겠네."
  "골드문트, 보다시피 나는 스스로를 실현시키는 데 있어서 다소 용이하게 
되어 있는 장소와 직위에 놓여 있어. 즉 나는 나에게 알맞으며 나를 도와줄 
단체와 전통 속에서 살고 있지. 수도원은 천당이 아니야. 불완전으로 가득 차 
있지. 하지만 수도원 생활은 나 같은 종류의 인간에게는 세속적인 생활보다 
훨씬 유익하다네. 나는 도덕적인 설교를 하고 싶지는 않지만, 사실 순수한 
사색은 실제로도 속세에 대해서 어느 정도 보호될 것을 필요로 하네. 그 순수한 
사색을 행하고 가르치는 것이 나의 과제이기 때문에 나는 이 수도원 안에서 
자신을 실현시키는 것이 자네보다 훨씬 수월하게 된 걸세.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네가 길을 찾아 예술가가 된 것은 나는 크게 기뻐하네. 왜냐하면 자네가 
그렇게 되기까지는 어려운 일이 많았을 것이기 때문이지."
  골드문트는 칭찬을 받고 당황해서 얼굴이 새빨개졌다. 기쁘기도 했다.
골드문트는 이야기를 돌리기 위해 그의 말을 가로챘다.
  "자네가 나한테 말하려는 것을 대강 짐작하겠어. 단 한 가지 이해되지 않은 
것이 있네. 그것은 자네가 '순수한 사색'이라고 표현한 말일세. 말하자면 형상을 
가지지 않은 사색과 아무것도 머릿속에 그릴 수 없는 어휘의 조작 말이야."
  "그건 하나의 예를 들어 설명할 수 있네. 수학을 생각해 봐! 숫자는 어떤 
심상을 내포하고 있을까? 플러스와 마이너스의 부호는? 전혀 포함하고 있지 
않다네. 자네가 산수나 대수 문제를 풀 때, 자네는 심상이 도움없이 사고 형식의 
내부에서 문제를 완성시키는 걸세."
  "옳아, 나르치스. 자네가 한 줄의 숫자와 부호를 써준다면 나는 심상을 쓰지 
않고 계산을 해낼 수 있지. 플러스와 마이너스, 곱하기, 괄호 등에 의해서 
문제를 풀 수가 있네. 하지만 그런 형식적인 문제를 푼다는 것이 학생들을 위한 
지력의 수련이라는 가치 이전의 가치를 갖는다는 것은 나로서는 도무지 생각할 
수가 없네. 수학을 배운다는 것은 정말 좋은 거야. 하지만 한 사람의 인간이 
일생 동안 그런 계산 문제에만 파고들어 언제까지나 숫자의 줄을 종이에 잔뜩 
써둔다면 무의미하고 어린애 같은 짓이라고 나는 생각할 걸세."
  "그것은 자네가 잘못 생각한 거야, 골드문트. 그 근면한 학생은 선생이 그에게 
내주는 과제만 풀 거라고 자네는 가정하고 있네. 문제는 그 학생이 스스로 어떤 
과제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는 점이야. 그런 것은 거역할 수 없는 힘으로 그의 
내부에서 생길 수도 있지. 사람들은 사색가로서 공간의 문제에 부딪혀 나갈 수 
있는 힘이 있기 전에는 실제의 공간과 가설의 공간을 자주 수학적으로 계산하고 
측정하지 않으면 안 될 걸세."
  "그거야 그럴 테지. 하지만 순수한 사색의 문제로서 공간의 문제는 한 사람의 
인간이 그이 일생을 바쳐서 노력할 대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군. 
'공간'이라고 하는 말은 실제의 공간을 머릿속에 그리지 않는 한, 나에게는 
무요, 사색의 가치조차 없어. 실제의 공간을 관찰하고 측정하는 것이 보다 가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하네."
  나르치스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자네는 사색을 별로 대수롭게 생각지는 않지만, 그것이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세계에 응용시키는 것은 상관없다고 말하려고 하고 있네. 우리들이 사색을 
응용하고 또 그렇게 말하려는 의지가 부족한 것은 아니라고 자네에게 말할 수가 
있네. 이를테면 사색가 나르치스는 그의 사색의 결과를 그의 친구 
골드문트한테도, 수사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수백 번이나 응용했네. 또한 
매시간 그렇게 하고 있지. 하지만 미리 배우고 연마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렇게 응용할 수가 있을까. 예술가도 그의 눈과 공상을 부단히 연마하고 있네. 
가령 그것이 실제의 작품에는 아주 작은 효과를 내고 있다고 해도 우리들은 
예술가의 훈련을 높이 평가하네. 자네는 사색 그 자체를 배척할 수는 있지만 그 
'응용'만은 시인해야 하지 않을까? 그 모순은 명백해. 그럼 곰곰히 생각해 보게. 
그리고 그 성과에 따라서 나의 사색을 판단해 주게. 즉 내가 자네의 
예술가로서의 존재를 자네의 작품에 의해서 평가하는 것처럼 말일세. 자네와 
자네의 작품 사이에는 아직도 장애가 있기 때문에 자네는 지금 집착하지 못하고 
흥분해 있네. 그 장애를 제거시키고 일터를 꾸미도록 하게! 그리고 자네의 
작품에 열성을 기울이게! 그렇게 하면 자연히 많은 문제가 해결될 걸세."
  골드문트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그는 지금 비어 있어서 일터를 만들기에 적합한 장소를 안마당 문 옆에서 
발견했다. 그는 이젤이며 그 밖의 도구를 세밀하게 제도해서 목수한테 
주문했다. 또한 인접한 도시에서 차차 운반해야 될 물품들의 목록을 작성했다. 
상당한 물량이었다. 그는 목수들이 숲속에서 잘라다가 저장하고 있는 목재를 
그의 일터 뒤 잔디밭으로 운반하여 거기서 건조시켰다. 그는 목재 위에 
덮어씌울 지붕을 손수 만들었다. 대장간에서도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는 그 
집 아들인 몽상가인 듯한 청년을 설득시켜서 동료로 만들었다. 그 청년과 함께 
반나절 동안, 대장간의 모루나 물통, 숫돌 옆에서 목재를 다듬는 데 필요한 둥근 
조각칼이며 구부러진 조각칼, 끌, 송곳, 깎아내는 칼 등을 만들었다.
  대장장이 아들 에리히는 스무 살쯤 돼 보이는 청년이었는데 곧 골드문트의 
친구가 되었다. 그는 무엇이든 도와주었고, 끓어오르는 흥미와 호기심으로 가득 
찬 젊은이였다. 골드문트는 그에게 기타 치는 방법을 가르쳐 주마고 약속했다. 
청년은 그것을 애타게 기다렸다. 골드문트는 간혹 수도원이나 나르치스에게서 
그 자신이 정말 필요도 없고 귀찮고 답답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 때면, 
수줍어하면서도 그를 사랑하고 한량없이 존경하는 에리히에게서 원기를 
회복했다. 간혹 에리히는 니콜라우스 스승이나 주교의 도시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골드문트를 졸랐다. 골드문트는 몇 번이고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그럴 
때면 언뜻, 여기 앉아서 노인처럼 과거의 여행이나 추억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자신이 야릇하게 느껴졌다. 그의 생활은 이제 비로소 시작되려고 하는데도 
말이다.
  이 몇 년 동안에 그의 용모가 몹시 달라진 것, 나이에 비해 겉늙어 버린 것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전에는 아무도 그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유랑과 
불안정한 생활의 고초가 그를 나이보다 늙어 보이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공포스러웠던 저 페스트의 시대와 마지막으로 백작의 성에서 붙잡혀 지하실에서 
더할 수 없는 공포의 밤을 지새웠던 일이 그를 이다지도 마음속 밑바닥까지 
뒤흔들고 말았다. 그 여파가 여러 곳에 그대로 남았다. 황금색의 수염 속의 
새치, 얼굴의 잔주름, 불면의 밤, 때때로 느끼는 피로감, 쇠퇴한 쾌감과 호기심, 
만족과 포만 상태의 미적지근한 감정 등. 일할 준비를 하거나 에리히와 
이야기를 하거나 바쁘게 일하고 있으면 마음도 가라앉고 생기가 나고 젊어졌다. 
모두들 그를 흠모하고 그를 좋아했지만, 그 사이에도 종종 몇 시간 동안 
기진맥진하여 엷게 미소를 짓기도 하고 꿈꾸기도 하면서 무감각과 무관심의 
상태에 놓여질 때가 많았다.
  정확하게 어디서부터 일을 착수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그에게는 매우 
중요했다. 그는 여기서 만들게 될 첫작품으로 수도원의 후한 대우에 보답을 
하고 자 했기 때문에, 그것은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다른 곳에 비치해 두는 것 
같은 막연한 것이어서는 안 되었다. 수도원 안에 있는 옛날 작품들처럼 그 
건물과 생활에 파고들어가 그 일부가 되어야만 한다. 그래서 그는 제단이나 
설교단을 만들고 싶었지만 그 대신 그는 다른 것을 발견했다. 신부들의 식당 벽 
좀 높은 곳에는 움푹 들어간 곳이 있었다. 거기서 식사하는 동안 젊은 수사들은 
언제나 성인들의 전설을 낭독했다. 거기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었다. 그래서 
골드문트는 낭독대 계단과 낭독대에 목각 장식을 입혀 설교단과 똑같은 반쯤 
부각된 형상 하나와 외부에 모양을 드러낸 몇 개의 목각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는 그 계획을 나르치스 원장에게 말했다. 원장은 그것을 칭찬하고 또한 
환영했다.
  일에 착수하려고 할 때는 눈이 제법 쌓였다. 크리스마스는 이미 지났다. 
골드문트의 생활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의 존재는 수도원에서 
연기처럼 사라지고 만 것 같았다. 아무도 그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는 이제 
수업을 끝난 후에 학생들의 무리를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숲속을 거닐지도 
않았고 회랑을 걷지도 않았다. 식사는 방앗간에서 했다. 그곳은 그 옛날 그가 
자주 드나들던 그곳이 아니었다. 그는 일터에 조수 에리히 이외에는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에리히도 하루 종일 골드문트로부터 한 마디 말도 듣지 
못할 때가 많았다.
  첫작품인 낭독대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구상한 끝에 다음과 같은 계획을 
세웠다. 즉 작품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그 하나는 속세를, 또 다른 하나는 
신성한 언어의 세계를 표현할 계획이었다. 아랫부분, 즉 계단 은 두툼한 참나무 
둥치에서 성장해서 둥치 둘레를 돌고, 피조물, 즉 자연과 족장들의 단순한 
생활과 여러 가지 형상을 나타낼 작정이었다. 윗부분, 즉 흉란은 네 분의 복음서 
저자의 상을 받치게 될 것이다. 복음서 저자 가운데 한 사람은 고 다니엘 
원장의 모습을, 다른 한 사람은 그 후계자인 고 마틴 신부의 모습을 상징하고, 
누가 상에는 스승 니콜라우스를 형상화시키고자 했다.
  일을 시작하자, 그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힘들었다. 하지만 그는 여인의 
사랑을 구하듯 자신을 잃어버리고 절망적인 감정 속에서 작품을 위해 온 정성을 
쏟았다. 어부가 커다란 준치와 싸우듯, 성난 사자처럼 그는 작품과 싸웠다. 온갖 
난관이 그를 가르치고 동시에 예민하게 해주었다. 그는 다른 것은 모두 
잊어버렸다. 수도원도, 나르치스도. 나르치스는 몇 번 방문했으나 스케치한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골드문트가 자기의 고해를 들어 달라고 청했으므로 
나르치스는 놀랐다.
  "지금까지 여러 번 결심했었으나 그렇게 하지 못했네."
하고 그는 고백했다.
  "내 자신이 너무나 하잘것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나는 자네 
앞에 고개를 똑바로 들 수 없는 심정이었어. 지금은 좀 나아졌지만, 나는 이제 
일거리를 손에 들고 있거니와 무위 도식하고 있는 자도 아니야. 나는 
수도원에서 생활하소 있으니 규율에 따르고 싶단 말일세."
  그는 이제야 고해를 할 시기가 됐다고 느꼈고 더 이상 기다릴 수도 없는 
심정이었다. 최초의 몇 주일 동안은 은자다운 생활을 하면서 재회와 청춘의 
회상에 젖었었다. 그리고 에리히에게 이야기를 해주는 사이에 그의 회고는 그의 
생활에 일종의 질서와 밝음을 가져다 준 것 같았다.
  나르치스는 담담하게 골드문트의 고해를 받아들였다. 고해는 두 시간 가량 
걸렸다. 그는 얼굴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친구의 모험과 고생과 죄악을 들으며 
여러 가지 질문을 했다. 그는 계속해서 골드문트가 하느님의 정의와 선의를 
믿는 마음으로 소멸을 고백하는 부분을 조용히 듣고 있었다. 그는 고해하는 
친구의 여러 가지 고백에 마음을 사로잡혔다. 그는 상대가 얼마나 마음이 
흔들리고 놀라고 때로는 파멸에 가까이 갔는가를 알았다. 그러다가 다시 그는 
친구의 사심없는 순진성에 감동되어 미소짓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의 의혹과 사색의 심연과 비교해 봐서 어처구니없는 불성실한 신앙으로 
인해 친구가 걱정하고 후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골드문트가 이상하게 생각한 것은, 아니 실망한 것은 고해 신부가 그의 죄악 
자체에 대해서는 그다지 중대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오히려 그가 기도와 
고해와 성례를 게을리한 것에 대해 가차없이 경고하고 벌을 내렸다는 사실이다. 
친구에게 성례를 받기 전 4주일 동안 절제와 금욕의 생활을 보내고 매일 아침 
미사를 드리고, 매일밤마다 세 번씩 주의 기도와 마리아의 찬송을 부르게 하여 
속죄를 하게 했다. 그런 다음 원장은 그에게 다시 말했다.
  "이 고해를 소홀히 여기지 않도록 자네에게 경고하고 또한 바라네. 난 자네가 
미사 문구를 아직도 정확하게 외우고 있는지 어떤지 모르겠네. 자네는 그 문구 
한 마디 한 마디의 뜻을 새겨 그 말의 정신에 헌신하지 않으면 안 되네. 
오늘이라도 둘이서 주의 기도와 찬송가를 같이 부르세. 그중에서 자네가 어떤 
말과 의미에 특히 주의력을 집중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겠네. 성스러운 말을 
속세의 말과 같이 이야기하고 들어서는 안 되네. 자네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더 자주 일어날 걸세만, 만약에 성스러운 문구를 중얼거리다가 그냥 흘려 
버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서 내가 가르쳐 준 대로 
문구를 읊고 마음속에 새겨두기 바라네."
  이 고해와 속죄 덕분인지 골드문트에게는 한 동안 충만된 평화의 시기가 와서 
그를 행복에 가득 차게 했다. 긴장과 근심과 만족에 가득 찬 제작이 한창일 때 
그는 매일 가볍기는 하지만 그래도 양심적으로 행하는 종교적인 수련에 의해서 
한낮의 흥분에서 구출되고, 그의 인생 전체가 보다 높은 질서를 향해서 
끌어올려져 가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됐다. 그 질서는 그를 예술가의 위험한 
고독으로부터 끌어내린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성을 부여해 주고 하느님의 나라로 
이끌어 주었다. 그는 작품을 위한 싸움에는 끝까지 고독한 인간으로 견디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고, 감각과 영혼의 모든 정열을 거기에 쏟아 넣지 않으면 
안 되었지만, 기도하는 시간만은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성으로 되돌아가소 
있었다. 그는 일하는 동안에는 간혹 격정과 초조에 가슴을 죄거나 육체적인 
쾌감을 느낄 정도로 도취됐지만, 경건한 수련 시간에는 깊고 차디찬 물 속에 
가라앉은 것처럼 감격의 경지에서와 똑같이 절망의 경지에서 되벗어났다.
  그러나 매사가 그렇듯 잘 되어 나가지는 않았다. 불붙는 듯한 제작의 몇 
시간을 보낸 저녁때면 마음이 산란해지고 안절부절 못할 때도 있었다. 기도의 
수련도 몇 번이나 잊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또 때로는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해도, 그의 기도는 결국 존재하지도, 또 자기를 도울 수도 없는 하느님을 
찾는 부질없는 노력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를 괴롭혔다. 그는 그것을 친구에게 
하소연했다.
  "계속해야 해."
  나르치스는 말했다.
  "자네는 약속했으니 지켜야만 하네. 하느님이 자네 기도를 들어줄지 어떨지, 
자네가 상상하는 하느님이 존재하는지 어떤지 그런 것을 생각해서는 안 되네. 
자네의 노력이 허망된 것인지 어떤지 그런 것도 생각하면 안 되네. 우리들의 
기도가 향해질 수 있는 것에 비교한다면 우리들의 행위는 모두가 허망된 
것이야. 자네가 기도할 동안에는 그런 어리석고 허황된 생각을 완전히 
없애버리지 않으면 안 되네. 주의 기도와 마리아의 찬송을 부르고, 그 문구에 
몰두하고, 그리고 그것들로 충만해 있지 않으면 안 된단 말일세. 마치 자네가 
노래를 부르거나 기타를 칠 때, 어떤 현명한 생각이라든가 사색을 쫓지 않고 될 
수 있는 대로 순수하고 또한 자연스럽게 소리를 내고 손가락을 놀리듯이 말일세 
사람이란 노래를 부를 동안에는 그것을 부르는 것이 유익한가 아닌가를 
생각지도 않고 노래를 부르지. 그것과 똑같이 자네는 기도를 올려야 되네."
  모든 것이 다시 잘 진행되었다. 긴장하고 열중한 그의 자아는 다시 넓은 
아치형 천장의 질서 속으로 스며들었다. 신성한 말은 별처럼 그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골드문트가 참회의 기간을 넘기고 성례를 받은 후에도 날마다 수련을 
계속하여 수주일을 넘어 수개월에 이른 것을 보고, 나르치스는 크게 만족해하고 
있었다.
  그 동안 그의 작품은 잘 진척되었다. 두꺼운 나선형의 계단 축에 동식물과 
인간들의 갖가지 형태가 하나의 세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 중앙에는 여러 
민족의 조상인 노아가 포도 잎사귀와 포도 송이 사이에 서 있었으며 그림책과 
창조주의 찬가와 그 아름다움이 자유로우면서도 즐거움을 그치지 않고 숨은 
질서와 규율에 인도되어 있었다. 이 수개월을 통해 에리히 이외에는 아무도 그 
작품을 보지 못했다. 물론 그도 때때로 시중드는 것을 허락받고 한결같이 
예술가가 된다는 생각에 다른 생각은 갖지 않았다. 일터에 들어서지 못하는 
날이 있었지만. 그는 그런가 하면 또 골드문트는 자신도 한 사람의 제자를 
가졌다는 것을 기뻐하며 에리히를 그의 아버지께 부탁드려 영구적인 조수로 
삼을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네 복음서 저자 상의 제작은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고 동시에 의혹의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는 가장 좋은 날을 택했다. 다니엘 원장의 모습을 새긴 
목상이 제일 잘 되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그것에 대단한 애착을 가졌다. 
그 얼굴에서는 순수함과 선의가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니콜라우스 스승의 
목상에는 그리 만족하지 못했다. 에리히는 그것을 보고 제일 탄복했으나 그 
목상은 분열과 비애를 나타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창조자의 계획에 충만한 
것처럼 보이면서도 창조의 허무감에 대한 절망적인 지식과 잃어버린 통일과 
순진성에 대한 비애로 가득 찬 그런 상이었다.
  다니엘 원장의 목상이 완성되자, 그는 에리히를 시켜 작업장을 깨끗하게 
청소하게 했다. 그는 다른 작품에는 천을 둘러씌웠으나 그 목상만은 밝은 빛에 
내놓았다. 그러고는 나르치스에게로 갔으나 그가 분주하게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참을성 있게 그 이튿날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점심때 나르치스를 
작업실로 데리고 와서 그 목상 앞으로 안내했다.
  나르치스는 가만히 선 채 바라보았다. 그대로 서서 몇 분이고 학자답게 
조심조심 그 목상을 관찰했다. 골드문트는 나르치스 뒤에 서서 묵묵히 마음속의 
폭풍우를 가라앉히려고 애쓰고 있었다. '오!' 하고 그는 속으로 탄식했다. 만약 
여기에서 우리 두 사람 중의 어느 한쪽이라도 이해를 못한다면 큰일인데.... 내 
작품의 솜씨가 좋지 못하거나 나르치스가 이것을 이해할 수 없을 때에는 여기서 
나의 제작은 모두가 가치를 잃고 마는 것이다. 내가 좀더 기다려야 했을까?
  골드문트에게는 이 몇 분간이 몇 시간이나 된 것처럼 길었다. 그는 
니콜라우스 스승이 그의 최초의 스케치를 손에 들었을 때를 생각하고 땀에 
촉촉히 젖은 두 손을 긴장한 나머지 힘있게 눌렀다.
  나르치스는 골드문트 쪽을 돌아보았다. 그 순간 골드문트는 맥이 탁 풀리는 
듯했다. 그는 친구의 수척한 얼굴 속에서 소년 시절 이래 그에게 한 번도 
그처럼 눈부시게 빛나본 적이 없는 무엇을 발견했다. 그것은 미소였다. 정신과 
의지로 가득 찬 얼굴에 나타난 그의 수줍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은 미소, 
사랑과 헌신의 미소였다. 그 얼굴에는 고독과 긍지가 한순간 깨어져서 사랑에 
가득 찬 마음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겨나지 않는 듯했다.
  "골드문트."
  나르치스는 아주 나지막한 소리고 음미하듯 말했다.
  "자네는 내가 단번에 예술에 통달한 사람이 되리라고는 기대하고 있지 않을 
테지. 내가 예술에는 안목이 없다는 걸 자네도 잘 알고 있을 걸세. 나는 자네의 
이 작품에 대해서 자네가 우습게 여길 정도밖에는 아무것도 이야기할 수가 
없다네. 하지만 나에게 한 가지만 말하도록 허락해 주게. 단번에 나는 이 사도 
상이 다니엘 원장이라는 걸 알았지. 아니, 원장 그 사람일 뿐만 아니라 그가 
당시 우리들에게 의미한 모든 것, 즉 품위와 선의와 단순성 등도 나타나 있다는 
것을 알았네. 지금은 고인이 되고 없지만 우리 청년들에게 존경받던 모습으로, 
다시 여기 내 앞에 서 있네. 그분과 함께 우리들에게 잊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이 여기에 있네. 자네는 이것을 내 눈앞에 보여줌으로써 부족함이 없는 
선물을 해주었네. 우리들의 다니엘 원장을 다시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자네는 
처음으로 흉금을 터놓고 자네 자신을 완전히 나에게 보여준 걸세. 이제는 
자네가 누구라는 걸 나는 분명히 알았네. 이제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도록 
하지. 아니, 이야기할 필요도 없네. 아, 골드문트, 이런 때가 오다니!"
  넓은 작업장 안이 고요해졌다. 골드문트는 그의 친구가 진정으로 감동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어딘지 모르게 쑥스러워서 이 순간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정말,"
  그가 짤막하게 말했다.
  "나도 기쁘다네. 하지만 자네, 이제는 식사하러 갈 시간이 되었지?"

         19

  골드문트가 이 작품을 제작하는 데는 2년이 걸렸다. 그 후부터는 에리히를 
완전히 제자로 쓸 수 있게 되었다. 계단의 나무에다 그는 조그만 낙원을 
만들었다. 그는 아늑한 기분 속에서 나무라든가 무성한 잎사귀라든가 잡초 같은 
것이 자라고 나뭇가지에는 들새들이 노는 평화로운 들을 새겼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동물들의 몸체나 머리 등이 보이도록 했다. 평화롭게 움트는 이 
낙원의 한복판에 그는 족장의 생활 중 몇 가지 단면을 표현했다. 부지런한 이 
작업이 중단되는 때는 드물었다. 제작을 할 수가 없는 날은 거의 드물었다. 
괜히 안절부절 못하거나 싫증이 나든가 해서 작품에 염증을 느끼는 날도 
드물었다. 그러한 날이면 그는 제자에게 일을 맡겨 버리고 시골에 가 
있는다든가, 말을 탄다든가 해서 숲속에서 자유와 생활의 향기로운 냄새를 
맡았다. 또한 이곳 저곳 농사꾼의 딸을 찾아가거나 푸른 풀밭에 몇 시간이고 
드러누워 아치형 천장 같은 나뭇가지나 양치식물, 금잔화들로 뒤덮인 들판을 
바라보기도 했다. 하루나 이틀 이상 작업장을 비운 적은 없었다. 그런 순간이 
지나면 그는 새로운 정열을 가지고 일을 시작했다. 잡초처럼 무성하게 뒤덮인 
식물을 황홀한 감정으로 마음에 새기는 것은 물론이요, 사람의 머리를 애정을 
기울여 조각하기도 하고 손에 힘을 주어 입이나 눈이나 엉킨 수염 등을 
새기기도 했다. 이 작품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에리히와 나르치스뿐이었다. 그는 
자주 찾아왔다. 나르치스에게는 골드문트의 작업장이 간혹 수도원 안에서 제일 
좋은 장소가 되었다. 기쁨과 놀라움으로 그는 구경했다. 거기에서는 그의 
친구가 불안과 긍지와 순진성으로 피워 내는 꽃이 자라고 있었다. 거기에는 
하나의 창조물, 아늑하고 샘솟는 하나의 세계가 자라나서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는 어느 날 생각에 잠겨 이같이 말했다.
  "골드문트, 나는 자네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 있네. 예술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된 것 같아. 전에는 예술이라는 것은 사색이나 학문과 비교해 봐서 
정말 진정으로 받아들일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었네. 안간이란 정신과 물질로 
구성되어 있는 불안정한 혼합물이며, 정신이 영원한 것에의 인식을 열어 주는 
것에 반해 물질은 인간을 끌어내려 무상한 것으로 묶어 놓는 것이기에, 생활을 
높이고 생활에 의미를 주기 위해서 인간은 감각으로부터 떠나 정신적인 것을 
향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라고 말이네. 내가 예술을 존중한다고 
했었지만 그것은 습관에서 그런 것이지 진짜 속으로는 예술을 경시하고 
있었다네. 지금에야 비로소 나는 인식으로 향해 가는 길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를, 정신의 길은 유일의 길이 아니며 또한 최상의 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게 됐네. 물론 나는 그 길에 남게 되겠지만 자네는 그 
반대의 길, 즉 감각을 통해서 대다수의 사색가들이 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존재의 비밀을 더 깊이 파악하고, 훨씬 더 생생하게 표현해 낼 수가 있단 
말일세."
  "그렇다면 심상을 가지지 않는 사색이란 대관절 무엇인지 내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자네도 이제 알게 되었군?"
  하고 골드문트가 말했다.
  "나는 벌써부터 그것을 알고 있었네. 우리의 사색은 끊임없이 추상이요, 
감각적인 것에의 무시오, 동시에 순수한 정신적인 세계를 건설하기 위한 
시도라네. 하지만 자네는 바로 그 반대로 가장 변하기 쉬운 것과 가장 속된 
것을 가슴에 받아들이기도 하고, 무상한 것도 소홀히 하지 않고 거기다 심신을 
바치고 있다네. 자네의 헌신에 의해서 그것이 최고의 것이 되기도 할 뿐만 
아니라 영혼의 비유로도 될 수가 있네. 우리들 사색가는 세계를 하느님으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하느님에게 가까워지려고 노력하고 있지. 자네는 하느님의 
창조물을 사랑하고 재창조함으로써 하느님에게 가까워지려고 해. 사색이나 
예술이나 인간인 만든 것으로서 불충분하기는 하지만, 예술 쪽이 더 사심이 
없네."
  "나는 모르겠네, 나르치스. 하지만 인생의 문제에 대한 결말을 짓거나 절망을 
방지하는 데는 자네들 사색가나 신학자들이 그래도 더 잘 성공할 것 같은데. 
나는 오래 전부터 자네의 학문을 부러워하지 않았다네, 나르치스. 그렇지만 나는 
자네의 그 침착성이라든가 평정이라든가 평화 같은 것들을 무척 부러워하고 
있네."
  "골드문트, 자네가 나를 부러워할 것까지는 없네. 자네가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 그런 평화는 존재하지 않아. 평화라는 것이 확실히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우리들 내부에 지속적으로 존재하고 언제까지나 우리들을 떠나지 않는 그런 
평화는 존재하지 않아. 항상 계속되는 부단한 투쟁에 의해서 획득되고 
매일매일의 투쟁에 의해 새로이 쟁취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평화가 있을 
뿐이야. 자네는 내가 싸우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해. 자네는 내가 연구하고 있을 
때의 그 싸움을 모르네. 기도실에서의 나의 싸움도 모르지. 자네가 그것을 
모른다는 것은 그리 나쁘지 않아. 자네는 내가 자네만큼 혼자서 방황하지 않는 
것을 봤을 뿐인걸. 그걸 자네는 평화라고 생각하고 있네. 하지만 그것은 
싸움일세. 올바른 모든 생활이 그러하듯이, 자네 생활도 그러하듯이 싸움과 
희생일 뿐이지."
  "우리가 그것으로 논쟁을 하려는 것은 아니야. 자네도 나의 싸움이 전부를 
보고 있지 않기 때문일세. 이 작품이 곧 완성될 때 내 마음이 어떨지를 자네가 
이해할지 모르겠군. 되기만 하면 어딘가에 놓여지겠지. 다들 나에게 얼마간의 
칭찬의 말을 할 거야. 그리고 나는 나의 작품 속에서 잘 되지 못한 여러 가지 
점, 더욱이 자네들한테 전혀 보이지도 않는 여러 가지 점, 그런 모든 점에 
대해서 슬픔을 감추지 못하고 텅 빈 일터로 다시 돌아갈 거야. 나의 마음속은 
일터나 마찬가지로 텅 비고 껍질만 남아 있겠지."
  "그건 그럴지도 모르지."
  나르치스가 말했다.
  "그 점에선 소로 완전히 상대방을 이해하지는 못하겠지만 하지만 선의를 
가지고 있는 모든 인간의 공통적인 것은, 결국 우리들의 우리들의 작품을 
부끄럽게 여기고, 계속해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지. 
항상 새로운 희생을 바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지."
  몇 주일 후 골드문트의 대작은 완성되어 저마다의 자리에 놓여졌다. 그가 
벌써 몇 해 전에 경험한 적이 있었던 일들이 반복되었다. 그의 작품을 다른 
사람의 소유로 옮겨져서 관찰되고 비평받고 칭찬받았다. 사람들은 그를 
칭찬하고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과 일터는 텅 비어 있었다. 
그 작품이 그 희생과 똑같은 무게였는지는 그도 알 수 없었다. 제막하던 날, 
그는 신부들의 식탁에 초대되었다. 그날 여러 가지 음식과 수도원에서 제일 
오래 묵은 포도주가 나왔다. 골드문트는 맛있는 생선과 고기를 마음껏 먹었다. 
오래 묵은 포도주 이상으로 나르치스가 그의 작품을 경의로 맞이해 준 열의와 
기쁨이 그이 마음을 더 포근하게 해주었다.
  원장의 희망과 주문에 의한 새로운 일거리가 벌써 마련되었다. 이 수도원에 
소속되어 있는 마리아브론의 신부 한 사람이 사제로 일하고 있는 노이첼 마리아 
성당에 제단을 만드는 것이었다. 골드문트는 이 제단을 위해 잊을 수 없는 그의 
청년 시절의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 아름답고 겁많은 기사의 딸 리디아로 
마리아 상을 만들어 영원화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이 주문은 그에게 그리 
중대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에리히에게 수습공 졸업 기념작으로 만들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에리히가 그 일을 잘해 내기만 한다면 그는 에리히를 
언제까지나 좋은 협력자로 곁에 두리라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에리히는 그를 
보좌해 주고, 그가 염원하고 있는 제작을 위해 몰두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해 
주리라. 이윽고 그는 제단을 만들기 위해 에리히와 함께 통나무들을 골라 놓고 
그것을 에리히한테 정돈시켰다. 골드문트는 자주 에리히를 혼자 있게 했다. 
다시 방랑이 시작되어 그는 숲속을 멀리까지 돌아다녔다.
  어느 날 골드문트가 며칠 동안이나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에리히는 그것을 
원장한테 알렸다. 원장은 이제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까 염려했다. 그러나 
골드문트는 돌아와서 일주일 동안 마리아 상을 제작했다.
그러나 다시 방랑이 시작됐다.
  그는 걱정이 있었다. 대작을 완성시키고 나서 그의 생활은 무질서해졌다. 
그는 아침 미사를 게을리 하고 심한 초조와 불안 속에 파묻히고 있었다. 그는 
니콜라우스 스승을 머릿속에 몇 번이나 그려 보았다. 그리고 자기 자신도 이내 
니콜라우스처럼 성실하고 충실하고 또한 교묘하지만 자유와 젊음을 
잃어버리지나 않을까 하고 걱정했다. 최근의 조그마한 체험이 그를 명상에 
잠기게 했다. 그는 방랑 생활을 하는 도중에 프란치스카라는 귀염성 있는 어느 
농사꾼의 딸을 만났다. 마음에 썩 들어서 그 여자를 가까이하려고 애썼다. 물론 
사랑을 구하는 지난날의 구애의 기술을 모두 발휘했다. 처녀는 그의 잡담을 
즐겨듣는 것은 물론이고 그의 익살에도 싫지 않은 듯 깔깔 웃었으나 구애는 
거절했다. 처음으로 그는 자신이 젊은 여인들한테는 늙은이로 보인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이제 그곳에 가지는 않았지만 잊지는 않았다. 프란치스카가 
옳았다. 그는 변해 있었던 것이다. 스스로도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흰머리나 눈가에 잡힌 몇 줄의 주름살보다는 오히려 태도나 심정 속에 있는 그 
무엇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나이를 먹었다는 생각을 가지기도 했고 
니콜라우스 스승을 매우 닮았다고도 느꼈다. 그는 불쾌감을 갖고 자기 자신을 
관찰했고 자신에 대해서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이제 자유스러운 몸이 아니고 
정주한 몸이 되고 말았다. 이제는 독수리도 토끼도 아니고 가축이 되고 말았다. 
그는 밖으로 떠도는 날에도 새로운 방랑과 새로운 자유보다는 과거의 향수나 
지난날의 유랑의 회상을 더듬는 때가 많았다. 그는 그러한 것을 사라진 먹이의 
냄새를 더듬는 개처럼 무기력한 애달픔으로 추적했다. 하루나 이틀, 바깥에서 
날을 보내고 좀 거닐면서 일을 잠시 쉬려다가도 할 수 없이 무엇엔가 끌려 
돌아오고 말았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은 물론이요, 일터가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고, 일하기 시작한 제단이나 준비한 통나무가 조수 에리히에 
대해서도 책임을 느꼈다. 그는 이제 자유로운 신세가 아니었다. 이젠 젊지도 
않았다. 마리아 상이 완성되면 다시 방랑의 길을 떠나자. 그는 한 번 더 방랑의 
생활을 해보자고 굳은 결심을 했다. 이렇게 오랫동안 남자만이 사는 수도원에서 
생활하는 것은 좋지 않았다. 신부들에게는 좋을지 모르지만 그에게는 좋지 
못했다. 사나이들 하고는 마음을 터놓고 같이 이야기할 수가 있었다. 그들은 
예술가의 일에 대한 이해심을 갖고 있기는 했지만 유희나, 사랑, 애무 등 그밖의 
그가 원하는 것을 그들에게선 찾을 수가 없었다. 거기에는 여인이라든가 방랑, 
혹은 항상 새로운 풍경들이 필요했다. 여기서는 그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약간은 회색을 띠고 있었으며 무겁고 남성적이었다. 그는 거기에 전염되었다. 
그것이 그의 핏속에 스며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다시 유랑을 떠난다는 계획이 그를 위로했다. 그는 하루바삐 자유로운 
신세가 되기 위해 기운차게 일을 시작했다. 통나무 속에서 리디아의 모습이 
차츰 그를 향해 다가옴에 따라서, 고귀한 그녀의 무릎에 엄숙한 차림의 주름을 
밑으로 새겨감에 따라 깊고 하염없는 기쁨, 즉 그 목상의 수줍은 미모의 
주인공인 처녀의 몸집이나 그 당시 첫사랑이며 첫 여행이었던 청춘에의 
슬프고도 가엾은 애착심이 그를 황홀하게 했다. 그는 경건한 마음으로 그 
목상의 제작을 계속했다. 그것이 그의 최상의 것과 그의 청춘과 더없이 아늑한 
추억과 한 덩어리가 되어 있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갸우뚱한 목과 
다정다감하고 애수가 깃든 입과 얌전한 두 손과 길쭉한 손가락과 아름다운 
반월형 손톱 등을 만들어 간다는 것은 무척 기쁜 일이다. 에리히도 찬탄과 
공경에 찬 애착심을 가지고 될 수 있는 한 자주 그 목상을 관찰했다.
  작품이 거의 다 되어갈 때 골드문트는 그것을 원장한테 보였다. 나르치스는 
말했다.
  "여보게, 이것이 자네의 제일 아름다운 작품일세. 온 수도원 안에 이것과 
비교할 만한 것은 하나도 없단 말일세. 나는 이 몇 개월 동안 자네 때문에 
얼마나 걱정을 했었는가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네. 자네는 초조와 괴로움 속에 
빠져 있는 듯했지. 자네가 자취를 감추어서 하루라도 돌아오지 않을 때면 나는 
걱정이 돼서 이제는 영영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지. 하지만 
자네는 지금 이렇게 훌륭한 목상을 만들었네! 나는 자네를 기쁨으로 여기는 
동시에 자랑으로 여기고 있네!"
  "그렇군"
  골드문트가 말했다.
  "이 목상은 썩 잘됐어. 하지만 나르치스, 내 말을 들어보게! 이 목상이 이렇게 
되기까지는 내 모든 청년 시절과 나의 방랑과 연애와 수많은 여인에의 사랑, 
그런 것이 필요했었다네. 이것은 그 우물에서 퍼올린 것이라네. 하지만 우물은 
이제 텅 비게 될 테지. 나의 마음속은 허물어진 성터같이 될 걸세. 나는 이 
마리아 상을 완성시킬 거야. 하지만 이 작업이 끝나면 잠시 휴식을 취하겠네. 
얼마나 오랜 시일이 걸릴지 나도 모르겠네. 나는 나의 청춘과 한때 내가 애착을 
기울이고 있었던 모든 것을 다시 찾아 나서겠어. 자네는 그것을 이해하겠는가? 
아니, 좋아. 나는 자네의 손님이었지. 그리고 여기서 한 나의 일에 대해서 
보수를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고."
  "나는 여러 번 자네에게 보수를 받으라고 요구했었네."
  나르치스는 항의했다.
  "그랬지. 그것을 지금 받겠네. 새로운 의복을 주문하겠어. 옷이 다 되면 말과 
몇 푼의 돈을 얻어서 세상에 나갈 작정이야. 아무 말도 하지 말게, 나르치스. 
슬퍼하지 말게. 이곳이 내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아닐세. 어디를 간들 여기보다 
더 편한 곳이 있겠는가? 그렇지 않네. 하지만 내가 떠나고자 하는 것은 그런 
것과는 의미가 다르다네. 내 소원을 들어주겠지?"
  둘 사이에 그것에 대한 말은 더 이상 언급되지 않았다. 골드문트는 단촐한 
승마복과 장화를 만들게 했다. 그리고 여름이 가까워오기 전에 그는 그의 
마지막 작품이기라도 하듯 마리아 상을 만들어 갔다. 모든 애정을 다 기울여 두 
손과 얼굴과 머리에 마지막 손질을 서둘렀다. 그는 출발을 망설여 연기하고 
있는 듯, 또한 이 미묘한 마지막 일 때문에 떠나는 것이 자꾸만 조금씩 
미루어지고 있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하루하루가 지났다. 여전히 이것저것 정리할 것이 있었다. 나르치스는 다가온 
이별을 쓰디쓰게 느끼고 있었으나 골드문트가 마리아 상에 애착심을 기울여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가끔 희미하게 미소를 던지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 골드문트는 갑자기 나르치스를 방문했다. 새로운 옷을 입고, 
새 비로드 모자를 쓰고 나르치스에게 작별하러 왔다. 그것은 하룻밤 사이에 
결정한 것이었다. 그는 조금 전에 벌써 고해도 하고 성례도 받았다. 지금은 잘 
있으라는 인사말을 하고 여행의 축복을 얻기 위해 온 것이었다. 두 사람의 
이별은 서글펐다. 골드문트는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보다 더한 용기와 
태연을 가장하고 있었다.
  "자네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나르치스가 물었다.
  "그거야 멋진 자네 말이 내 목을 비틀지 않는다면 분명히 다시 만나게 될 
걸세. 나만 없다면 이곳에서는 아무도 자네를 나르치스라고 부르고 걱정을 
끼치지는 않겠지. 그 점은 믿어도 좋아. 에리히를 돌보아 주길 바라네. 그리고 
내 목상에 아무도 손을 대지 않도록 그것은 전에도 말했듯이 내방에 그냥 두어 
주게. 열쇠를 잃어버리지 않길 부탁하네."
  "여행을 기뻐하고 있나?"
  골드문트는 두 눈을 깜박거렸다.
  "응, 그래. 확실히 그래. 하지만 막상 떠나려고 하니 생각했던 것보다는 
즐겁지 않은 것 같네. 바보 같은 녀석이라고 자네는 비웃을 테지. 하지만 
이별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란 말일세. 이 집착이 아무래도 마음에 안 들어. 
이것은 병과 같은 것이어서, 젊고 튼튼한 사람에게는 찾아볼 수 없다네. 
니콜라우스 스승도 그랬었어. 아, 쓸데없는 말을 지껄여서 무엇하나! 여보게, 날 
축복해 주게. 나는 떠나겠어."
  그는 인사를 마치자 말을 타고 가버렸다.
  나르치스는 자꾸만 친구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를 걱정도 하고 그에 대한 
그리움도 가졌다. 골드문트는 다시 돌아올까? 달아난 그 새가? 귀여운 그가? 
기묘하고 사랑스런 그 사나이는 또 제멋대로 분방한 궤도에 몸을 던졌다. 그는 
다시 싫증도 모르고 탐욕스럽고 신기한 듯이 어둡고 강한 충동에 따라 
폭풍우와도 같이, 커다란 아이와 같이 세상을 떠돌아다닐 것이다. 하느님이 그와 
함께 하시기를! 그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기를! 지금 그는 범나비처럼 
날아다니며 여자를 유혹하고 욕정 때문에 감옥 속에서 죽게 될지도 모른다. 이 
금발이 소년은 나이 먹는 것을 슬퍼하면서도 왜 이렇게 납의 애를 태우는 
것일까! 왜 사람들은 그 때문에 걱정하지 않으면 안 될까! 하지만 나르치스는 
진정으로 그에 대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 짓궂은 어린아이는 정말로 
제어하기가 어려웠던 것, 굉장히 외곬이었던 것, 이제 다시 세상으로 뛰쳐나가서 
울분을 풀어 버릴 것, 그런 것을 나르치스는 마음속으로 유쾌히 받아들였다.
  어느 시간이고 매일 원장의 생각은 친구에게로 되돌아갔다. 사랑과 그리움과 
감사와 걱정 속에서, 때로는 자책 속에서. 그가 얼마나 친구를 사랑하고 있으며 
친구가 변하지 않길 바라고 있었던 가를, 그가 친구와 친구의 예술을 통해서 
얼마나 윤택해졌는가를 고백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는 친구에게 그것에 
대해서 별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아마 지나칠 정도로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만약에 그 말을 했더라면 친구를 붙잡아 둘 수도 있었을 것을.
  그는 골드문트에 의해서 풍부해졌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빈약해지기도 했다. 
그것을 친구에게 보여주지 않은 것은 확실히 다행한 일이었다. 그가 살고 있는 
세계와 고향, 그의 세계, 그의 수도원 생활, 그의 직함, 그의 학식, 훌륭하게 
조직된 사상의 구성, 이런 것이 모두 친구에 의해서 이따금 크게 동요를 받고 
또한 의심을 받았었다. 틀림없이 수도원, 즉 이성과 도덕면에서 본다면 그 
자신의 생활은 보다 좋고 옳으며, 보다 안정되고, 보다 규율이 있었으며, 보다 
모범적이었다. 그것은 질서와 준엄한 봉사의 생활과 부단한 희생, 밝음과 
옳음에의 끊임없는 노력이었다. 예술가나 유랑자나 바람둥이들의 생활보다는 
훨씬 깨끗하고 나았었다. 하지만 위에서, 즉 하느님의 세계에서 본다면, 과연 
모범적인 생활이 질서와 규율, 속세와 감각적 행복에의 단념, 더러움과 
피부로부터의 이탈, 철학과 신에 대한 공경에의 침잠 등은 골드문트의 생활보다 
과연 나을까? 인간은 과연 기도의 종소리가 시간이나 행사 등을 알려 주는 
것대로 규칙적인 생활을 하도록 만들어져 있단 말인가? 인간은 과연 
아리스토텔레스와 토마스 아퀴나스를 연구하고, 그리스 어에 정통하고, 관능을 
억제하고, 속세에서 달아나도록 만들어져 있단 말인가? 인간이 하느님에 의해 
만들어졌을 때 그는 관능의 충동, 죄악이나 향락이나 절망으로 치닫는 능력 
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나르치스의 생각이 친구에게 달려가고 있을 
때, 그는 이런 의문점에서 끊임없이 맴돌곤 하였다.
  그렇다, 골드문트와 같은 생활을 한다는 것은 인간적일 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보다 용감하고 활기찬 생활일는지도 모른다. 속세를 떠나 깨끗한 생활을 하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조화롭고 아름다운 사상의 화원을 설계하고 안전한 화단 
사이를 몸에 티끌 하나 묻히지 않고 다니는 대신 무자비한 격류와 혼돈 속에 
몸을 맡겨서 죄악을 범하고 그 쓰디쓴 결과를 받아들이는 편이 보다 용감하고 
위대한 것이었으리라. 낡아서 닳아빠진 신발을 신고 숲속이나 시골길을 
헤매기도 하고, 관능의 향락에 빠지기도 하며 살아나간다는 것이 더 많은 
용기와 더 고귀한 희생이 강요되리라.
  아무튼 골드문트는 나르치스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보여주었다. 즉 고귀한 
위치에 서도록 정해진 인간은, 정열적이고 도취적인 생활이 혼란 속에 깊숙이 
잠겨 피투성이가 되더라도 비겁해지거나 혼란 속에 빠지지 않으며 동시에 
내부의 신성한 것을 죽이지 않으며,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길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거룩한 그의 영혼 속에서는 신성한 빛과 창조력이 결코 꺼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나르치스는 친구의 복잡한 생활 속을 깊숙이 
들여다보았으나 친구에 대한 그의 사랑이나 존경은 줄어들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골드문트의 때묻은 두 손에서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게 살아가는 내면의 
형식과 질서에 의해서 빛을 발하는 목상이 만들어져 가는 과정을 두 눈으로 본 
이래, 영혼에서부터 빛을 발하는 얼굴, 또는 정갈한 식물이나 꽃이, 애원을 하는 
손이나 은혜를 받는 두 손, 대담하고 온화한 동시에 자랑스럽고 거룩한 자태로 
완성되어 가는 과정을 본 이래, 나르치스는 이 불안정한 예술가인 동시에 
유혹자의 마음속에서 넘쳐흐를 듯한 빛과 신의 은총이 잠재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화로써 그의 규율과 사상의 질서를 친구의 정열에 대비시킴으로써 친구에 
대해 우월감을 갖기는 용이한 일이었다. 하지만 골드문트가 만든 목상의 조그만 
자태 하나하나, 눈, 입, 곱슬곱슬한 수염, 의복이 주름살 하나하나는 사색가가 
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현실적이고 약동적이었으며 동시에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마음은 언제나 저항과 고난에 차 있는 그 예술가가 현재와 
장래의 무수한 인간들을 위해 그네들의 고난과 노력의 상징을 높이 들지 
않았던가! 무수한 사람들의 기도와 외경과 마음의 고뇌와 그리움의 표적이 되고 
위안과 신뢰와 격려를 발견할 수 있는 그런 목상을 만들어 내지 않았던가!
  나르치스는 감회에 젖어서 청년 시절의 처음부터 친구를 인도하고 가르친 
장면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회상해 냈다. 친구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친구는 그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언제나 그의 우월성과 지도성을 인정했었다. 그런 다음에 친구는 한없는 정적 
속에서, 채찍질 받는 그의 생활의 폭풍우와 고뇌 속에서 태어난 작품을 높이 
쳐들었다. 말도 가르침도 설명도 경고도 하지 않은, 높이 쳐들어진 참다운 
생활이었다. 거기에 비한다면 그의 지식과 규율과 변증법은 그 얼마나 빈약한 
것이란 말인가!
  그가 곰곰이 생각하는 문제들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그가 지난날 골드문트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고 경고해 주어 그의 청춘에 관여하고 그의 생활을 새로운 
세계로 옮기게 해주었듯이, 이제 그 친구는 수도원으로 돌아가도록 만들어 놓고 
말았다. 친구는 그와 똑같이 되고 말았다. 나르치스가 친구에게 주었던 것들이 
모두 그 몇 배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길을 떠난 친구는 그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 몇 주일이 흘러갔다. 
밤나무꽃은 벌써 오래 전에 까맣고 딱딱하게 굳어져 버렸다. 황새는 어느덧 
정문의 탑 위에서 알을 까 새끼를 데리고 다니면서 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골드문트가 떠나 있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나르치스는 자기에게 친구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알았다. 그는 수도원 안에 박식한 몇 분의 신부를 모시고 
있었다. 그 중의 한 분은 플라톤의 정통자, 한 분은 훌륭한 문법 학자, 그리고 
두세 분의 주도 면밀한 신학자였다. 수사들 가운데도 진지하고 언제나 변치 
않는 성실한 사람이 몇 있었다. 하지만 자기와 대등할 수 없는 사람, 성실하게 
대결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골드문트뿐이었다. 그 친구를 이제 또 잃어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은 
정말 견디기 어려웠다. 생각은 자꾸만 멀리 떠나간 친구를 향한 그리움으로 
가득 찼다.
  그는 자주 작업장으로 가서 조수 에리히를 걱정했다. 에리히는 제단을 만드는 
일을 계속하며 스승이 돌아올 날만 고대하고 있었다. 때때로 나르치스는 마리아 
상이 있는 골드문트의 방문을 열고 목상을 덮은 천을 조심조심 걷어내고 그 
옆에 웅크리고 앉았다. 그는 이 목상의 유래를 알지 못했다. 골드문트는 그에게 
리디아에 관한 이야기를 해준 적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르치스는 모든 
것을 감각으로 느껴서 알고 있었다. 그녀의 자태가 오랫동안 친구의 가슴속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알았다. 그녀의 자태가 오랫동안 친구의 가슴속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알았다. 친구는 그녀를 유혹하고, 기만하고 버렸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친구는 그녀를 그의 영혼을 속에 숨겨 두고 가장 훌륭한 남편보다도 더 
충실하게 지켜나가 이후 그녀와 두 번 다시 만나지 않고 기나긴 세월을 보낸 
다음, 이윽고 아름답고 감동적인 그녀의 목상을 만들어 그 얼굴과 모습에 두 
손목에 사랑하던 사나이의 모든 애정과 흠모와 그리움을 쏟아넣은 것이리라. 
식당의 낭독대에 새겨진 목상에서도 그는 친구에 대한 것을 이것저것 읽었다. 
그것은 충동적인 한 인간의 생애였다. 그것은 고향 없는 사나이, 정처없는 
사나이의 생애였다. 충실하고 생명에 가득 차고 사랑에 가득 차 있었다. 그 
생명은 왜 그다지도 신비에 가득 차고, 그의 물결은 왜 그다지도 흐리고 
거세었던가! 그리고 여기에 서 있는 그이 작품은 왜 이다지도 고귀하고 
아름다운가!
  나르치스는 싸웠고, 그는 그것을 이겼다. 그는 자신의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며 그의 엄격한 봉사를 조금도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친구를 잃고 슬퍼했다. 그의 마음은 하느님과 그의 직무에만 바쳐야 하는 
것인데도 친구에게 너무나 집착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괴로워했다.

         20

  여름이 지나갔다 양귀비꽃, 도깨비부채꽃, 선옹초, 과꽃 등은 시들어 없어지고 
말았다. 연못의 개구리도 조용해지고, 황새는 높이 날아 떠나갈 준비를 했다. 
그때 골드문트가 다시 돌아왔다.
  보슬비가 내리는 어느 날 오후, 그는 돌아와서 수도원으로 들어가지 않고 
정문에서 곧장 작업장으로 들어갔다. 말을 타지 않고 걸어서 도착한 것이다.
  에리히는 골드문트가 들어왔을 때 깜짝 놀랐다. 단번에 그가 골드문트라는 
것을 알고, 그의 가슴은 스승을 향해 심하게 고동쳤다. 하지만 다시 돌아온 
사람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골드문트가 아닌, 무척 나이가 든 반쯤 
사라져 없어진 듯한 먼지투성이의 회색 얼굴, 움푹 들어간, 또 병으로 시달리고 
있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얼굴에 떠오르는 것은 고통이 아니라 오히려 
인자해 보이는 늙은이의 지긋한 미소였다. 그는 간신히 두 다리를 끌다시피 
하여 걸음을 옮겼다. 병들고 몹시 지친 것 같았다.
  이처럼 달라지고 모습이 말이 아닌 골드문트는 이상하다는 듯 젊은 조수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는 자신이 마치 옆방에서 나온 듯, 그리고 여전히 
거기에 있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그는 악수 이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인사도 질문도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단지 '자야지' 했을 뿐이었다. 극도로 
지친 것 같았다. 그는 에리히를 내보내고 작업장 옆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그는 모자와 신발을 벗고 침대를 향해 걸어갔다. 방 한구석에 마리아 
상이 여전히 천을 쓰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그쪽을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으나, 가서 천을 벗기려고도, 살펴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조그만 창가에 서서 에리히가 바깥에서 당황해서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고 
소리쳤다.
  "에리히, 내가 돌아온 것을 아무한테도 이야기하지 마라. 나는 너무 지쳤어. 
시간은 내일도 있으니 말이야."
  그러고는 입은 그대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누워 있어도 여전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는 다시 일어나서 괴로운 듯 조그만 거울이 걸려 있는 벽 
쪽으로 가서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거울 속에서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기진맥진한 골드문트, 하얗게 센 수염을 가진 사나이, 지치고 
나이 먹고 시들어 버린 사나이였다. 작고 흐릿한 거울의 표면에서 그를 향해 
바라보고 있는 사나이는 얼마간 제정신을 잃은 듯한 노인이었다. 눈에 익은 
얼굴 같기도 하지만 서먹서먹하기도 한 얼굴이었다. 그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 같았다. 그것을 그가 알고 있는 이 얼굴 저 얼굴을 기억하게 했다. 어느 
정도는 니콜라우스 스승을, 어느 정도는 지난날 그를 위해 시동옷을 만들게 한 
노기사를, 또 어느 정도는 성당에 있는 성야곱--순례 모자를 쓰고 지독한 
노령에다 회색빛이기는 하지만 명랑하고 친절하게 보이는 그 늙은 털보의 
야곱을 회상케 했다.
  이 낯선 사람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아 두는 것이 중요한 일인 것처럼, 그는 
거울 속의 얼굴을 요모조모 뜯어보았다. 잠시 후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 
그렇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렇다, 그것은 다름아닌 그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가 
그 자신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감정과 딱 들어맞았다. 몹시 지친데다 어느 정도 
둔해진 노인이 여행에서 돌아왔던 것이다. 보기에도 허름한, 어디 하나 뽐낼 
것이 없는 사나이. 하지만 그는 그 사나이에게 아무런 반감도 가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호감을 가진 듯했다. 그 사나이는 예전의 아름답던 
골드문트가 가지지 못했던 그 무엇을 가지고 있었다. 지쳐서 기력과 정력은 
찾아볼 수 없었지만, 만족감 혹은 그렇지는 않더라도 조용한 표정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아무 뜻 없이 빙긋이 웃었을 때 거울 속에 있는 모습이 같이 
웃었다. 정말로 멋진 사나이를 여행에서 데리고 온 것이다. 누더기옷을 걸치고 
돈 한푼 없이 돌아왔다. 말과 짐과 돈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것도 잃고 
말았다. 청춘, 건강, 자신, 얼굴의 홍조, 눈초리의 힘 등이 그에게서 떠나가고 
말았다. 하지만 그 모습만은 마음에 들었다. 거울 속의 이 나이 먹고 쇠약해진 
사나이가 오히려 그가 오랫동안 지니고 다녔던 골드문트보다 그의 마음에 
들었다. 그 사나이는 나이 들고 쇠약하고 애처로웠지만 그럴수록 더 악의도 
불만도 없이 친해질 수 있었다. 그는 웃다가 주름 잡힌 눈꺼풀을 내리고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튿날, 그가 방안에 놓인 책상에 기대어 스케치를 하고 있는데 나르치스가 
그를 찾아왔다. 그는 문 앞에 서서 말했다.
  "자네가 돌아왔다는 말을 들었네. 고맙네. 정말 기뻐. 자네가 나에게 찾아와 
주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자네한테 왔지. 자네 일에 방해라도 되는가?"
  그는 가까이 왔다. 골드문트는 이젤에서 몸을 일으키며 손을 내밀었다. 
에리히가 귀뜸을 해주었는데도 그는 친구를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친구는 
정답게 웃음으로 인사를 했다.
  "음, 돌아왔네. 잘 있었나, 나르치스? 오랜만일세그려. 진작 찾아보지 못한 
것을 용서해 주게."
  나르치스는 친구의 두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친구의 얼굴이 빛을 잃고 
애처로울 정도로 시들어 버린 것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것, 즉 평정과 
무관심, 노인들의 얼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체념의 표정도 보았다.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는 데 경험을 쌓고 있는 그는 친구가 낯설게 변해 버린 것을 
느꼈고, 이제는 그가 알고 있던 골드문트는 이 세상에선 완전히 존재하지 
않으며, 그의 영혼이 현실에서 까마득히 먼 곳으로 떠나서, 꿈길을 걷고 있거나 
혹은 벌써 피안의 세계로 통하는 문턱에 서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디 아픈가?"
  그는 신중하게 물었다.
  "응, 아프기도 해. 나는 여행을 시작한 지 며칠 되지 않아 벌써 앓기 
시작했네. 하지만 내가 금세 돌아오고 싶지 않았던 심정은 짐작할 테지. 내가 
그렇게도 빨리 나타나서 승마화를 다시 벗어던졌으면 자네들은 나를 웃음거리로 
삼았을 거야. 그렇지, 나는 그게 싫었단 말이야. 나는 곧장 길을 재촉해 
떠돌아다녔지. 여행에 실패했기 때문에 부끄러웠던 거야. 내 말이 너무 지나친 
것 같네. 좋아, 말하자면 나는 부끄러웠지. 그거야 자네는 벌써 알고 있을 테지. 
자네는 매우 현명한 사람이니 말일세. 실례지만, 무슨 말을 물었나? 아무래도 
도깨비한테 홀린 것 같군. 나는 언제나 무엇이 문제의 초점인지를 잊어버리고 
만단 말이야. 하지만 내 어머니 말인데, 그건 자네가 말한 것이 맞았어. 정말 
슬펐지만, 그래도....
  그의 중얼거리는 소리는 미소 속에 사라지고 말았다.
  "우리는 자네를 다시 건강하게 해주겠네, 골드문트. 자네를 부자유스럽게 
하지는 않겠어. 그런데 왜 몸이 불편해졌을 때 얼른 돌아오지 않았나. 자네가 
우리를 부끄러워할 게 뭐 있어? 좀더 빨리 돌아왔더라면 좋았을 텐데."
  골드문트는 웃었다.
  "응, 이제 겨우 알겠어. 정말이지 깨끗이 돌아올 용기가 없었던 거야. 정말 
수치스러운 행동이었을 테지. 하지만 지금은 돌아왔잖나. 건강도 다시 좋아질 
걸세."
  "몹시 앓았었나?"
  "앓았느냐구? 응, 지독하게 앓았었네. 하지만 앓는다는 것은 아주 좋은 거야. 
그것이 내 본심으로 돌아가게 한걸. 이젠 부끄러워하지 않네. 자네한테도 
자네가 내 생명을 구하기 위해 감옥으로 나를 찾아왔을 땐 어찌나 부끄러운지 
입술을 깨물지 않을 수 없었단 말이야. 지금은 그것도 지나가고 말았지만."
  나르치스는 친구의 팔을 잡았다. 친구는 이내 입을 다물고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원장은 깜짝 놀라 줄달음쳐 수도원의 의사인 안톤 신부를 부르러 
갔다. 의사를 데리고 돌아왔을 때 골드문트가 화가에 기대어 잠들어 있었다. 두 
사람은 그를 침대로 눕혔다. 의사는 그의 병이 절망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병실로 옮겨졌다. 에리히가 시중을 들기 위해 옆에 남아 지키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 여행의 우여 곡절은 결국 하나도 명백해지지 않았다. 토막토막은 
그가 이야기했으나 많은 것을 추측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멍하게 
누워 있을 때가 많았다. 때로는 열이 오르고 헛소리까지 했지만 의식은 
분명했다. 그럴 때마다 골드문트는 나르치스를 불렀다. 나르치스에게는 
골드문트와의 마지막 대화가 매우 중요했다.
  "내가 언제부터 앓기 시작했는가 하면, 떠나던 첫날부터였어. 나는 숲속으로 
말을 몰고 있었지. 나는 말과 함께 넘어져서 냇물에 빠져 하룻밤을 차디찬 물 
속에 자빠져 있었네. 거기서 갈빗대가 부러지고서부터는 고통이 시작되었어. 
그때 나는 아직도 여기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았었지만 돌아오기가 싫었지. 
유치한 생각 같겠지만 비웃음을 살 거라고 생각했지. 그래서 나는 자꾸 말을 
몰고 갔지. 너무나 아파서 더 이상 말을 탈 힘도 없어지자 말을 팔고 말았네. 
그런 다음에 어떤 병원에서 기나긴 시간 누워 있었지. 나는 거기서 그냥 
주저앉았네, 나르치스. 이젠 말을 탈 수도, 방랑 생활을 할 수도 없었어. 춤도, 
여자도 마지막이야.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나는 더 오래, 아마 몇 년이고 바깥 
세계에 있었을 거야. 하지만 이젠 바깥 세계가 더 이상 나에게 기쁨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내 목숨이 다하기 전에 스케치나 더 하고 목상이나 
몇 개 더 만들어서 무슨 기쁨이라도 갖고 싶다고 생각했지."
  나르치스는 그에게 말했다.
  "자네가 돌아와 주어서 무엇보다도 기쁘네. 자네가 없는 것이 얼마나 
서운한지. 나는 날마다 자네를 생각하고 있었네. 이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아마 자네는 모를 거야."
  골드문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없어졌다고 해도 별로 대수로운 것은 없었을 테지, 안 그런가?"
  나르치스는 슬픔과 애처로움에 가슴을 태우며 천천히 골드문트 쪽으로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두 사람의 우정이 계속되던 기나긴 동안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것을 지금 하고 있었다. 그는 골드문트의 머리와 이마에 그의 입술을 
갖다대었다. 처음에는 미심쩍은 듯, 그 다음은 갈망하는 듯, 골드문트는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알아차렸다.
  "골드문트."
  친구는 그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좀더 일찍이 자네에게 이야기할 수 없었던 것을 용서해 주게. 주교의 성에 
있는 감옥으로 자네를 찾아갔을 때, 아니, 자네가 만든 최초의 목상을 보게 
되었을 때 나는 자네에게 이 이야기를 했어야 했네. 오늘 자네한테, 내가 그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해주게. 말하자면 내가 자네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었는지 자네가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 자네가 내 생활을 얼마나 
윤택하게 해주었는가 하는 것 등을 말일세. 하지만 자네에게는 별다른 의미도 
없을는지 모르지. 자네는 사랑에 익숙해 있으니 말이야. 자네는 수많은 
여인들한테서 사랑도 받고 좋은 대우도 받았어. 그러나 나는 달랐어. 내 생활은 
사랑에 굶주리고 있었네. 나는 항상 그 최상의 것에 굶주리고 있었지. 다니엘 
원장은 나에게 거만하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어. 아마 그분 말씀이 옳았을 거야. 
나는 사람들에게 부당하지는 않았다고 자부할 수 있어. 사람들에게 정당하게 
대하려고 무척 애를 썼지. 하지만 사람을 사랑한 적은 없다네. 수도원 안에 
박식한 학자와 약한 학자가 있다면 나는 박식한 쪽을 좋아하지. 그런데도 
사랑이 무엇인가를 안다고 한다면 그것은 모두 자네 덕분일세.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유독 자네만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네는 짐작할 수 없을 걸세. 그것은 사막 속에 있는 오아시스를 의미하는 
동시에 황량한 들판에서 꽃이 피는 나무를 의미하는 걸일세. 내 가슴이 
메마르지 않고 하느님의 은총이 찾아들어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나에게 남아 있다는 것은 오직 자네 덕분이네."
  골드문트는 기쁜 듯, 그러나 다소 당황한 듯 빙그레 웃었다. 의식이 또렷했을 
때 나지막하고 침착한 목소리로 그는 말했다.
  "내가 교수대에서 구출되어 같이 귀로에 접어들었을 때 내가 블레스의 안부를 
묻자 자네는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지. 그때 나는 보통 말을 분별도 잘 할 줄 
모르는 블레스를 염려해 주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네. 나를 위해 그렇게 
해주었다는 것을 알고 이만저만 기쁘지 않았다네. 그리고 지금, 난 자네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네. 나도 자네를 언제나 사랑하고 있어, 나르치스. 내 
생활의 절반은 자네의 사랑을 구하는 일이기도 했다네. 자네도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자네와 같이 자아가 강한 사람이 그것을 나에게 
말할 때가 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치도 못했었네. 그것을 지금 자네는 나에게 
말했네. 내가 이제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이 순간에, 방랑과 자유와 속세의 
여인들이 나를 버리고 만 지금 자네의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자네에게 
감사를 전하네."
  마리아 상이 방 한가운데 서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자네는 언제나 죽는다는 것을 머리에 새기고 있구먼."
  나르치스가 말했다. 
  "응, 생각하고 있지. 그리고 내 일생이 어떻게 됐는가를 생각했네. 내가 
아직도 희망을 가졌었지. 자네는 그것이 나의 천직이 아니라는 것을 지적해 
주었어. 그래서 나는 그 생활의 반대편, 즉 관능의 세계로 몸을 던졌네. 
여인들은 내가 쾌락을 발견하는 것을 쉽게 해주었지. 여자들은 전혀 싫은 내색 
없이 기꺼이 응해 주었네. 하지만 나는 지금에 와서 여인들이나 관능의 향락을 
경멸하는 것 같은 그런 언사는 쓰고 싶지 않아. 나는 때로 매우 행복했었지. 
관능적인 것을 정화시키는 일에서 행복을 맛볼 수 있었으니까. 거기에서 예술이 
생기는 거야. 하지만 이제는 관능의 불꽃도 예술의 불꽃도 꺼져 버리고 말았네. 
이제는 여자들이 나를 향해 줄달음질쳐 온대도 나는 그 행복을 가지지 않을 
거야. 예술품을 만드는 것도 이젠 나의 소망이 아니야. 형상은 이제 싫증나도록 
만들었어. 목숨은 문제도 되지 않아. 그러니 나는 이제 죽어야 할 시기지. 나는 
기꺼이 죽겠네. 왠지 죽는다는 것에 대해 흥미가 생기는군."
  "흥미가 생기다니 무슨 뜻이지?"
  나르치스가 물었다.
  "그런 말이 어리석게 들리겠지. 하지만 나는 진짜 흥미를 가지고 있단 
말이야. 피안에 대해서가 아니야, 나르치스. 그것은 거의 생각지도 않아. 
고백해도 좋다면 나는 피안 같은 것을 믿고 있지도 않네. 피안 같은 것은 
존재하지도 않는단 말일세. 말라 버린 나무는 영원히 죽고, 얼어 죽은 새는 두 
번 다시 깨어나지 않아. 사람도 죽으면 마찬가지일 테지. 없어지고 나면 잠시 
동안은 그 사람을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도 오래 가진 않겠지. 아니, 내가 
죽음에 흥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내가 어머니를 향해 가는 길목에 있다는 것이 
언제나 변치 않는 나의 신앙 혹은 나의 꿈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지. 죽음은 
크나큰 행복이리라. 맨 처음 사랑이 이루어졌을 때의 행복과 마찬가지로 크나큰 
행복일 거라고 나는 생각한단 말일세. 나를 다시 받아들여서 허무와 순결 
속으로 인도해 주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어머니일 것이라는 생각을 나는 뿌리칠 
수가 없단 말일세."
  그날 이후 골드문트는 며칠째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뒤 나르치스가 
마지막으로 찾아갔을 때 그는 생기가 돌아온 듯 말을 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나르치스는 이렇게 물었다.
  "안톤 신부에게 자네가 자주 무서운 고통을 느끼고 있을 게 틀림없을 거라고 
하더군. 골드문트, 자네는 어쩌면 그렇게 조용히 참아 나갈 수가 있나? 자네는 
이제 평화를 되찾은 것인가?"
  "하느님과의 평온 말인가? 아니, 나는 그 평온은 발견하지 못했네. 그리고 난 
하느님과의 평온 같은 건 바라지도 않는단 말일세. 하느님은 세상을 지독하게 
만들었어. 우리는 하느님을 찬양할 필요도 없어. 내가 하느님을 찬양하든 하지 
않든 하느님에게는 그다지 문제도 되지 않을 거야. 하느님은 세상을 지독하게 
만들었네. 하지만 내 가슴의 고통은 평화로이 가라앉았어. 그것은 옳아. 나는 
전에는 고통을 그다지 잘 견디어 내지 못했어. 죽는다는 것은 나에게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닐 거라고 종종 생각했었지만 아무튼 그것은 과오였단 말일세. 
그날 저녁 하인리히 백작의 감옥에서, 죽는다는 것이 정말 심각한 문제가 됐을 
때 그것을 알았네. 나는 쉽사리 죽을 수만은 없었단 말이야. 그러기에는 나는 
너무나 강하고 과격했었지. 그놈들은 나의 손발을 하나씩 잘라내어 죽이지 
않으면 안 됐을 거야.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네."
  누워서 말하는 것이 그를 피로하게 했다. 그의 목소리는 차츰 기력을 
잃어갔다. 나르치스는 그가 무리하지 않도록 타일렀다.
  "아니."
하고 그는 말했다.
  "나는 그것을 자네한테 얘기해 주겠어. 예전 같았으면 자네한테 이야기하는 
것을 부끄러워했을 거야. 자네는 분명 웃을 걸세. 말하자면 내가 말을 얻어 
타고 여기에서 나섰을 그 당시 무턱대고 간 것만은 아니었네. 하인리히 백작이 
귀국해서 그의 애인 아그네스가 곁에 있다는 소문을 나는 들었단 말일세. 아니 
좋아, 자네한테는 그것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겠지. 지금에 와선 나한테도 뭐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하지만 그때 그 소식은 나를 가만히 있게 하질 
못했단 말이야. 내 머릿속은 아그네스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찼었는걸. 그 
여자는 내가 알고 있는 여자 중에서, 그리고 또 내가 사랑한 여자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였어. 나는 그녀를 다시 만나서 한 번 더 그녀와 사랑을 나누고 
싶었어. 나는 말을 타고 갔지. 일주일 후에 나는 그녀를 찾아냈네. 거기서, 바로 
그때 나에게 변화가 일어난 것이었어. 나는 그 여자를 찾아냈네. 그녀의 
아름다움은 여전했지. 나는 그녀를 찾아내고 그녀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그녀와 
이야기할 기회를 노렸지. 하지만 나르치스, 그녀는 나 같은 인간은 상종도 하지 
않으려 들었어! 나는 그녀에게는 이미 쓸모가 없었던 거지. 나이가 든데다 
무기력해 보였던 거야. 그녀는 이미 나 같은 존재한테 아무런 기대도 가지지 
않았던 걸세. 그래서 나의 여행도 사실상 종말을 고하고 말았지. 하지만 나는 
자꾸 앞만 보고 말을 몰았네. 그처럼 실망하고 초췌한 몰골로 자네가 있는 
곳으로 돌아오기는 정말 싫었지. 그처럼 비참한 모습으로 말에 몸을 싣고 있을 
때, 힘도 젊음도 영리한 재주도 벌써 나를 떠나가고 말았네. 아무튼 말과 함께 
낭떠러지에서 굴러 개울 속에 떨어졌고 갈빗대가 부러진 채 물 속에 처박혀 
있었으니 말일세. 그때 나는 생전 처음으로 고통이라는 것을 알았어. 떨어질 때 
나는 내 가슴속에서 무엇이 뚝 끊어지는 것을 느꼈지. 그런데 그렇게 뚝 
끊어지는 그것이 나한테는 기뻤다네. 즐거이 그 소리를 듣고 거기에 만족했지. 
물 속에 나자빠져서 나는 죽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감옥 안과는 
모든 게 달랐어. 나는 조금도 거역하지 않았네. 죽는다는 것은 이제 당연하다고 
생각되었지. 나는 심한 고통을 느꼈네. 나는 그 뒤에도 그 고통을 가끔 겪고 
있네.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꿈이나 환상이라고 할 만한 것을 나는 가지고 
있었던 셈이지. 나는 쓰러져 있었어. 불이 붙은 것처럼 가슴속이 아팠네. 나는 
저항해서 고함을 쳤지. 하지만 거기서 깔깔대는 한 여인의 웃음소리를 들었네. 
유년 시절부터 통 듣지 못했던 소리였어. 그것은 내 어머니의 목소리였다네. 
육체적인 쾌락과 사랑에 가득 찬 그윽한 여자의 목소리였어. 그래서 나는 
그것이 어머니라는 것을 알았네. 어머니가 내 옆에 와서 나를 무릎에 앉히고는 
내 가슴을 풀어헤쳐 손가락을 갈빗대 사이에다 넣고 내 심장을 끄집어내려는 
것을 알았네. 그것을 이해했을 때는 벌써 아픈 것도 사라진 뒤였네. 지금 그 
고통이 다시 찾아온다 해도 그것은 고통의 원수도 아닐 걸세. 그것은 내 심장을 
끄집어내는 어머니의 손가락이야. 어머니는 부지런히 그 일을 계속하고 있었어. 
어머니는 때때로 와서는 쾌감을 맛보듯이 신음하기도 하지. 때때로 어머니는 
웃으면서 애정에 담뿍 젖은 속삭임을 던지기도 한다네. 때로는 내 옆에 있지 
않고 높은 하늘에 계셔. 구름 사이에서 그녀의 얼굴이 구름처럼 크게 보이지. 
그곳을 떠돌면서 슬픈 미소를 띠고 있네. 그 슬픈 미소가 나를 끌어당기고 
심장을 가슴속에서 끄집어내지."
  계속해서 그는 그 여자, 즉 어머니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아직도 자네는 기억하고 있나?"
  그는 마지막날 물었다.
  "내가 나의 어머니를 잊고 있었을 때 자네가 이상한 힘을 가지고 불러내 
주었지. 그때도 사나운 짐승의 이빨이 내 심장을 물고 늘어진 것처럼 무섭게 
아팠어. 그때 우리는 아직 소년이었지. 그러나 그때 어머니는 나에게 소리치고 
있었어. 나는 그 뒤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네. 어머니는 어디든지 있었어. 
그녀는 집시의 여인 리제였고, 니콜라우스 스승의 아름다운 마리아 상이었네. 
그녀는 생명이요, 사랑이요, 쾌감이었지. 그녀는 불안이요, 굶주림이요, 
충동이었네. 그녀는 이제는 죽음이어서, 손가락을 내 가슴속에 쑤셔 넣고 있네."
  "너무 많이 말하지 말게, 이 사람아."
  나르치스는 말했다.
  "내일 또 하면 되잖나."
  골드문트는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며 나르치스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여행에서 가지고 돌아온 새로운 미소였다. 지독하게 늙어서 볼품없이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좀 멍청하게 보이기도 했지만 선의와 지혜가 가득 찬 듯한 그런 
미소였다.
  "여보게 이 사람."
  그는 소곤댔다.
  "나는 내일까지 기다릴 수가 없네. 나는 자네하고 작별을 고해야만 해. 
작별을 위해 나는 자네에게 모두 다 이야기해야만 하네. 조금만 더 들어주게. 
나는 어머니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해. 어머니가 손가락으로 내 심장을 꼭 
누르고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단 말일세. 어머니의 형상을 만드는 것은 
몇 해 전부터 나의 가장 소중하고 가장 신비한 꿈이었지. 그것이 내겐 모든 
형상 가운데서도 가장 신성한 것이었어. 언제나 나는 그것을 내 가슴속에 품고 
있었네. 얼마 전까지만 어머니의 형상을 만들지 못하고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도무지 견딜 수가 없더군. 나의 일생 전체가 무익한 것같이만 생각됐네. 
어머니와의 관계는 실로 이상하지 않은가? 나의 손이 어머니를 만들어 내는 
대신에, 나를 만들어 내는 것은 바로 어머니란 말일세. 그녀가 그 두 손을 내 
심장 둘레에 대고 심장을 끄집어내어 나를 텅텅 비게 해버렸네. 그녀는 나를 
유혹해서 죽음에의 길로 인도했네. 나와 함께 나의 꿈도 아름다운 형상도, 
위대한 인류의 어머니 이브의 상도 죽어 버리고 말았다네. 또 그것이 보이는군. 
만약 손을 움직일 수만 있다면 나는 그것을 만들어 낼 수가 있었을 텐데.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원하지 않는단 말일세. 오히려 그녀는 내가 죽는 것을 
바라고 있어. 나는 기꺼이 죽겠네. 그녀가 그것을 나에게 용이하게 해줄 걸세."
  나르치스는 두려움 속에서 친구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고 있었다. 이야기를 잘 
알아듣기 위해 그는 친구의 얼굴 위에 허리를 굽히지 않으면 안되었다. 자세히 
들리지 않는 말도 많았다. 그리고 또 어떤 말은 잘 들렸다. 하지만 그 비밀은 
그냥 감추어진 대로였다.
  병자는 다시 한 번 눈을 뜨고 친구의 얼굴을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그는 
눈짓으로 친구와 작별을 고했다. 그리고 애써 고개를 흔들려는 듯한 동작을 
하며 그는 소곤거렸다.
  "나르치스, 자네가 만약 어머니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언젠가 한 번은 죽을 
텐데, 자네는 대관절 어떻게 죽을 작정인가? 어머니가 없어서야 어떻게 사랑을 
할 수 있고, 어머니가 없어서야 어떻게 죽을 수가 있느냐 말일세."
  그러고 나서 다시 무어라고 중얼거렸으나 그것은 이미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마지막 이틀 동안 나르치스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친구의 침대 옆에 
앉아 숨이 끊어져가는 친구를 지켜보고 있었다. 골드문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그의 가슴속에서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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