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3ㆍ1 운동의 뜨거운 심장부터 대한민국 임정, 일제 시대, 8ㆍ15 광복, 유신 체제, 6월 민
주 항쟁 등 우리가 겪은 사건과 정치 상황, 경제 개발 5개년 계획과 금융 실명제, IMF 외환 위기
등의 경제 상황, 프로 야구 개막, 미니스커트와 장발, BTS 현상과 <오징어 게임> 신드롬 등의 문
화 현상까지 우리가 꼭 알아야 할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101개의 사건으로 담아냈다. 대한민국의
지난 삶의 기억이 궁금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읽어야 할 필독서라 할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더 나은 내일을 위해 끊임없이 싸웠던 한국, 그
리고 한국인의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사건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 Short Summary
이 책은 2019년 3ㆍ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해 냈었던 『한국 현대사 100
년 100개의 기억』의 개정판이다. 이 작업을 할 때 한국 현대사를 당한 자로서의 아픔으로만 간주해 기
억조차 힘들어하는 것이 아닌, 이전의 상처를 사랑으로 껴안고 과거의 우리와 화해해 기억을 추억으로
만들자며 ‘용감하게’ 다짐했었다. 사실 지난 몇 년은 우리 스스로 현대사에 당당하게 마주 설 만큼 성
장한, 그런 역사가 새겨진 시간이었다. 한 마디로 새로운 한국 현대사가 쌓인 셈이다.
미처 기억으로 남지 못한 것들도 있고 일어난 일이 모두 다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공동체가 선택
해 공유하고 이어 가는 기억이 그 공동체의 역사가 된다는 의미에서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어떻게
얼마나 오래 기억할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알기’와 ‘기억하기’를 포기한 사실은 사라지고 역사
속에서 지워진다. 사라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잊혀지고 있다는 것을 모르기에, 그리고 그것
이 대부분 약자에 관한 기억일 가능성이 크기에 이 문제는 사실 심각하다. “진정한 죽음은 기억에서 사
라질 때 온다.”라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속담은 비단 사람에게만이 아닌 민족이나 국가 역사에도 적용
될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21세기를 헤쳐 나갈 대한민국 국민인 우리가 알고 기억해 꼭 역사로 남길 바라는 한국
근현대사를 사건으로 모았다. ‘현재 대한민국 사람이 궁금하다면 이 정도는 알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채록의 기준이 되었다. 넘쳐 나는 한국 현대사 관련 서적 속에서도 ‘사건을 시간순으로 정리해 어떤 단
계든 평가를 준비하는 이들에게 도움 될’, ‘많은 이가 옆에 두어 궁금할 때마다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그런 편안하고 가까운 책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더했다.
1919년 ‘2ㆍ8 독립 선언’에서 시작된 한국 현대사 사건들은 2021년 대미를 장식했던 ‘오징어 게임 신
드롬’으로 끝난다. 둘 사이 느껴지는 온도 차가 심한 것에 기쁘기도 하고 마음이 먹먹하기도 하다. 그
래도 자부심이 더 크다 믿는다. 큰 영토는커녕 엄청난 인구수도 자랑하지 못하는 우리에게 국가 발전
의 이상은 ‘대한 제국’이라는 국호에서 고종 황제가 표현하고 싶었던 것처럼, 또한 김구 선생님의 소원
처럼 문화와 문명의 강대국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일 테고, 지난 몇 년은 그 길을 잘 내는 우리를 볼 수
있던 시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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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앞으로 더 많은 사건은 현대사가 되어 쌓일 것이며, 대한민국은 나아갈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역사
가 그랬던 것처럼 굽이굽이 어려움 역시 맞닥뜨릴 것이다. 그때마다 지나온 과거에 비추어 미래의 방
향을 바르게 잡아 가기를 소망하면서, 같은 마음으로 이 책과 시간을 나누길 결정해 준 우리에게 반가
움과 고마움을 전한다.
▣ 차례
프롤로그
1장 | 절망 속에서 희망으로 탄생하다 1919~1930년
001 2ㆍ8 독립 선언 - 적국의 심장부에서, 부르짖다
002 3ㆍ1 운동 - 이천만의 함성,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다
003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 - 대한민국, 국체와 국호의 탄생
004 문화 통치와 친일파의 탄생 - 조선을 지배하라! 영원히, 교묘하게
005 의열단 - 강도 일본에게 고함
006 조선일보ㆍ동아일보 창간 - 한글 신문에 대한 기대와 현실 사이
007 회사령 철폐 - 한국 최초의 홈 스위트 홈 Made in Japan
008 봉오동 전투ㆍ청산리 대첩 - 승전보를 알려라!
009 간도 참변 -피 젖은 만주 땅, 일제가 행한 대학살
010 자유시 참변 - 러시아에 뿌려진 독립군의 눈물
011 물산 장려 운동 - 조선 살림, 조선 것으로
012 민립 대학 설립 운동 - 한민족 1천만 한 사람이 1원씩
013 3부 수립 - 참 정 신 군정부, 전열을 가다듬다
014 암태도 소작인 항쟁 - 소작인, 지주의 무릎을 꿇리다
015 관동 대지진과 한인 학살 - 지진을 맞는 일본의 자세
016 대중목욕탕의 등장 - 다 함께 벗는 시대의 탄생
017 조선 공산당 창당 - 숨은 독립운동 장면 찾기
018 6ㆍ10 만세 운동 - 또 하나의 6월 10일
019 영화 <아리랑> 개봉 - 식민지 조선, 영화에 담기다
020 토막촌의 형성 - 신석기 시대로의 귀환
021 신간회 - 독립운동, 좌우 날개로 날자꾸나
022 신여성과 근우회 - 모던 걸, 그녀들은 누구인가
023 원산 총파업 - 한국 노동자들의 그 뜨거운 단결
024 백화점의 탄생 - 경성 한복판, 근대를 진열하다
025 광주 학생 항일 운동 - 항일의 외침, 광주에서 전국으로
2장 | 긴 밤이 끝나고 빛이 돌아오다 1931~1945년
026 브나로드 운동 - 민중 속으로 들어간 학생들
027 한인 애국단 - 애국의 폭탄, 독립을 부르짖다
028 만주 한중 연합 작전 - 한국군과 중국군이 하나가 되어
029 명월관과 기생 - 우리가 몰랐던 요릿집과 기생 이야기
030 다방과 카페 - 식민지 시대, 아픈 청춘들이 머물던 장소
031 진단 학회 - 현대 한국 사학, 시작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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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032 민족 혁명당과 조선 의용대 - 민족 독립운동 세력 통일의 예고편
033 민족 말살 통치 - 일상 깊은 곳까지 스며든 정신적 말살의 시작
034 병참 기지화 정책 - 전쟁과 함께 사라지다
035 전향과 친일파 확대 - 포기가 낳은 어리석은 선택
036 국가 총동원 - 아직도 현재 진행형
037 가격 정지와 암거래 - 소비,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웠던 시대
038 애국반 - 일상도 전쟁처럼
039 한국광복군 - 광복을 향한 임정의 군대
040 「별 헤는 밤」ㆍ「광야」 - 암흑 속에서 빛을 노래하다
041 민족 독립운동 세력의 통일 - 임정, 독립운동의 중심에 서다
042 조선 독립 동맹과 조선 의용군 - 팔로군의 은인, 북한의 정통이었지만
043 조선어 학회 사건 - 말모이를 없애라!
044 조선 건국 동맹 - 광복을 예상하고 국내 세력 모이다
045 8ㆍ15 광복 - 일제의 패망! 한국의 승리?
3장 | 세계가 그은 선, 비극의 시작 1945~1961년
046 신탁 통치 파동 - 신탁 통치, 이것이 문제로다
047 좌우 합작 운동 - 분단 시대 최초의 통일 정부 구상
048 대한민국 단독 정부 수립 - 대한민국으로서의 첫발을 내딛다
049 4ㆍ3 항쟁과 남북 협상 - 단독 선거 단독 정부 수립, 난 반댈세!
050 반민족 행위 조사 특별 위원회 - 그 시작은 눈부셨으나
051 농지 개혁 - 소작제, 사라지다
052 한국 전쟁 - 한반도, 가장 아픈 상처를 얻다
053 발췌 개헌과 사사오입 개헌 - 영구 집권을 향한 첫걸음
054 시발 자동차 - 처음 ‘시’ 일어날 ‘발’
055 인공 조미료의 탄생 - 밥상 위의 총성 없는 전쟁
056 대한 방송국 개막 - 새로운 대중 매체 시대, 시작을 선포하라!
057 공장제 빵의 출현 - 공장제 빵과 그에 대한 이유 있는 도전
058 3ㆍ15 부정 선거 - 이승만 정권, 그 붕괴의 시작
059 4ㆍ19 혁명 - 피의 화요일, 승리를 향하여
060 제2공화국 - 경제 제일주의 내각의 9개월
4장 | 앞만 보고 달리는 나라 1961~1987년
061 5ㆍ16 군사 정변과 군정 -18년간 이어진 독재 시대의 개막
062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 한국은 소망한다, 검은 연기로 뒤덮인 하늘을
063 한일 국교 정상화 - 비정상적으로 정상화된 한일 관계
064 베트남 전쟁 참전 - 빛과 그림자 온전히 껴안기
065 미니스커트와 장발 - 짧아서 문제? 길어도 문제!
066 재벌 형성과 삼성전자 - 성장을 위한 선, 분배를 위한 악
067 주택 복권과 와우 아파트 붕괴 - 내 집 마련, 그 하나를 위하여
068 새마을 운동 -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069 포항제철(POSCO)과 경부 고속 도로 - 한국 경제의 틀, 새로 짜여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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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070 여성 근로자와 전태일 - 조국의 경제 건설에 청춘을 바치고
071 7ㆍ4 남북 공동 성명 - 남북한의, 최초의, 평화의, 대화의
072 유신 체제 - 겨울 공화국, 한국 민주주의를 얼리다
073 어린이 대공원과 창경궁 - 놀이터, 한국인과 역사를 공유하다
074 제사상 인플레이션 잡기 - 거품은 빼고 효심은 차리고
075 혼ㆍ분식 장려 운동과 통일벼 - 한국인의 밥상, 그때를 아십니까
076 부마 항쟁과 서울의 봄 - 겨울이 가고 봄은 왔지만
077 5ㆍ18 광주 민주화 운동 - 빛고을 광주, 민주주의의 빛이 되어
078 언론 통폐합 - 땡전 뉴스, 뚜뚜전 뉴스의 탄생
079 야간 통행금지 해제 - 열려라! 24시간
080 프로 야구 개막 - 한국인 최애 스포츠의 탄생
081 해외여행 자유화, 교복 자율화 - 시야의 확대, 시각의 다양화
082 이산가족 찾기 -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083 3저 호황 - 3마리의 토끼를 다 잡다
084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 - 대한민국, 세계에 알려지다
085 6월 민주 항쟁 - 호헌 철폐! 독재 타도!
5장 | 대한민국, 세계 속에 우뚝 서다 1988~2021년
086 북방 정책 - 북북 북대문을 열어라!
087 신도시 건설 - 집을 짓는 속사정
088 3당 합당 - 보수 대연합? 보수 대야합?
089 금융 실명제 - 검은돈, 베일을 벗겨라!
090 대학 수학 능력 시험 - 최고를 위해? 행복을 위해!
091 역사 바로 세우기 - 직진 정부의 역사의식 세우기
092 IMF 외환 위기- 빚지고, 닥치고, 경제 개혁
093 E-Sports의 시작, 스타크래프트 - 게임, 현실을 움직이다
094 일본 대중문화 개방 - 한국 대중문화의 일본 침투 작전
095 한ㆍ일 월드컵 - 국가 부심의 시작
096 참여 정부 - 대통령, 틀을 깨다
097 촛불 집회 - 피 대신 빛으로
098 저출산ㆍ고령 사회 - 36년 가족 계획, 그 끝은 어디로
099 BTS 현상 - Love Yourself!
100 남북 정상 회담 - 한반도 모든 고향에 하나의 바람이 부는 날
101 오징어 게임 신드롬 - 세계의 한국화?!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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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사건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모지현 지음
1장 | 절망 속에서 희망으로 탄생하다 1919~1930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 - 대한민국, 국체와 국호의 탄생
3ㆍ1 운동은 민족 독립운동의 전환점이 되었다. 3ㆍ1 운동으로 민족의 독립 염원을 느낀 많은 애국지
사들이 독립운동에 구심점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고 이에 임시 정부 수립을 추진하면서 독
립운동에 불을 지폈다.
최초의 정부 형태를 띤 블라디보스토크의 대한 국민 의회와 국내의 한성 정부,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
시 정부가 다양한 움직임으로 수립된 7개 임시 정부 중 대표 격이다. 프랑스 조계 상하이 보창로에 임
시 독립 사무소를 설치, 1919년 4월 11일 ‘임시 의정원’으로 출발한 임정은 각 도 대의원 30명이 만든
헌법 격인 ‘대한민국 임시 헌장’을 통해 행정, 입법, 사법 3권 분립 형태의 민주 공화 정부를 선포한다.
헌장(헌법)과 국호, 연호가 선포되면서 정식으로 임정이 수립된 후에 한성 정부 수립 소식을 들은 지도
자들은 세 임정들의 통합을 추진했다. 그 결과 근거지는 상하이에 두고 임시 의정원과 대한 국민 의회
를 합병한 의회를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9월 상하이 대한민국 임정을 중심으로 대한 국민 의회와 한성 정부가 통합되면서 한성 정부의 이승만
을 임시 대통령, 대한 국민 의회 이동휘를 국무총리로 하는 정부가 출범했다. 임정은 외교, 군사, 교육,
문화, 재정, 사법, 교통 등 10여 개 부분에 걸친 중앙 부서를 조직하고 국내 각지를 연결하는 교통국
과 비밀 연락망인 연통제를 시행했다. 국내와 해외에서 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모으고 독립 공채를 판
매하기도 했으며 운동가들 사이의 비밀 연락 업무와 소식 교환들을 수행하기도 했다. 역사 편찬부를
설치하고 박은식의 『독립운동지혈사』를 간행해 일본 침략 사실을 기록, 세계인에게 알리고 독립의 당
위성을 호소하고, 《독립신문》과 잡지들을 발행해 독립운동의 전개 상황을 알리기도 했다.
그러나 다양한 세력으로 정부가 출범한 데서 예견되었던 대로 곧 내재되었던 갈등이 표출된다. 만주의
무장 독립 투쟁 세력이 이승만을 중심으로 추진된 외교 독립 노선과 독립 청원 운동에 반대하여 임정
을 배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무장 독립 투쟁 세력은 이동휘를 중심으로 1920년을 독립 전쟁 원년으로
선포하고 실력 양성과 독립 전쟁을 병행하는 노선을 채택했다. 하와이에서 활동하다 임정 수립 직후
상하이로 왔던 이승만은 자신의 국제 연맹 위임 통치 발언과 외교 독립 노선에 대한 반발이 거세지자
미국으로 돌아간다. 이후에도 임정 내부의 대립은 계속되었다. 결국 임정은 국민 대표 회의를 개최, 기
존의 임정을 해체하고 새로운 임정을 수립하자는 ‘창조파’와 정부 자체를 두고 조직만 개조하자는 ‘개
조파’로 분열되었고 이승만 대통령 탄핵안을 통과시켰다.
이후 십여 년간 대한민국 임정은 독립운동 세력 사이의 통일을 이뤄 내지 못하고 침체 상태에 놓이게
된다. 임정은 ‘정부’라 이름 붙이기에는 민족 운동 전체를 결집시킬 역량을 담보해 내지 못하면서 독립
운동 단체 중 하나로 전락했고, 무장 독립 투쟁과 외교 독립운동은 각자의 길을 걷게 된다. 이후 8ㆍ
15 광복을 맞기까지 27년 동안 5차에 걸친 개헌을 비롯한 각 세력 간의 분열과 재정난, 그리고 8차례
에 걸친 상하이를 포함한 중국 각지 이동 등 극심한 부침을 겪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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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임정을 탄생시켰던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떠난 뒤 약화된 임정의 자리를 지킨 것은 ‘임시 정부의 문지
기’를 자처했던 김구였다. 대통령제를 국무령제로 변경하면서 임정의 명맥을 이어 간 김구는 1930년대
중반 이후 변화되는 정세 속에서 임정의 위상이 변모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만주의 무장 독립 투쟁
세력이 만주 사변 이후 활동 입지가 좁아짐에 따라 중국 관내로 이동한 뒤 임정을 중심으로 독립운동
세력 간 통일을 이루어 낸다. 이후 임정은 광복에 이르기까지 군사와 외교 활동까지 담아내면서 독립
운동의 구심점으로서 정부 역할을 하게 된다.
봉오동 전투ㆍ청산리 대첩 - 승전보를 알려라!
3ㆍ1 운동을 겪으며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비폭력적ㆍ평화적 방법으로 독립을 달성하는 것이 불가능하
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중국 관내 독립운동 세력이 임정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동안 만주와 러시
아 영내에서는 1919년 상반기에만 70여 개의 단체를 결성하고 군사력을 키울 만큼 무장 독립 투쟁 노
선을 택한 운동가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무장 독립 전쟁을 통한 조국 광복, 이것이 그들의 최종
목표가 되었고 국권 피탈을 전후해 형성된 이주민들의 망명촌이 이들의 근거지가 되었다. 특히 간도
지역이 키워 낸 독립군은 1920년대를 전후해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 국내 진공 작전을 전개해 나간다.
관공서를 습격하며 일본 군대, 경찰과 전투를 벌였던 것이다. 이에 일제는 군대를 만주로 보내 독립군
을 토벌하려고 했고, 그 중심에 독립군이 대승을 거둔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이 있다.
1920년 6월 독립군 부대가 북간도에서 출발해, 함북 강양동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 헌병 국경 초소를
습격해서 격파한다. 급보를 받은 일본군은 참패를 거듭하면서 반격을 시도했고 독립군의 유도 작전에
말려 두만강에서 40리 거리에 위치한 봉오동으로 들어온다. 최진동을 사령관으로, 홍범도를 제1연대장
으로 한 독립군 부대는 100여 호에 달하는 봉오동 주민을 미리 대피시키고 일본군이 포위망에 들어오
자 3면에서 공격한다. 잠복해 있던 700여 명의 독립군이 협공해 일본군 157명의 전사자와 200여 명
의 부상자를 낸 데 비해 독립군은 장교 1명, 병사 3명의 전사와 소수의 부상자를 내며 크게 승리한다.
이 전투가 바로 첫 정규전의 쾌거로서 독립군의 사기를 드높인 봉오동 전투다.
그동안 청일 전쟁, 러일 전쟁에서의 승리로 승승장구하던 일제는 봉오동 전투에서 정규군이 대패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간도에 토벌군을 투입해 항일 단체와 독립군을 말살하려는 대규모 작전을 수립한
다. 일제는 조선 내 주둔 부대, 관동 및 연해주 주둔 부대들을 독립군 토벌대 병력으로 만주 지역에 투
입시킨다. 일본의 병력 이동을 중국 측으로부터 통고받은 독립군 부대들은 청산리(중국 지린성 이도구
-삼도구) 방면으로 이동하게 된다.
북간도 독립군 부대인 북로 군정서는 10월 10일경 삼도구에 도착, 20일 백운평 계곡에 매복해 있다 공
격하여 200여 명의 일본군 전사자를 내는 등 큰 전과를 거둔다. 일본군 수가 늘어나자 밤새 행군해
160여 킬로미터 떨어진 갑산촌으로 이동했는데, 그동안 홍범도 부대는 이도구에서 일본군 한 부대를
전멸시키고 있었다. 다음 날인 21일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 군정서와 홍범도 연합 부대는 함께 어랑촌
에서 전투를 벌여 일본군을 격파했고, 이로부터 26일 새벽까지 백운평 전투를 시작으로 완루구, 어랑
촌, 천수평, 고동하 등 동서로 약 25킬로미터에 달하는 청산리 계곡에서 대소 10여 회 전투를 벌여 승
리하고 많은 무기를 노획했다. 이것이 청산리 대첩이다.
이 전투에서 1,600여 명의 김좌진 부대와 홍범도 연합 부대 1,400여 명의 독립군은 5천여 명의 일본
군과 싸워서 전사자 60여 명, 부상자 90여 명만 낸 데 반해 일본군 전사자 1,200여 명, 부상자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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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여 명을 내며 대승을 거두었다. 1907년 군대 해산 이후 13년 만에 총을 든 우리 군대가 한 사람당 겨
우 감자 3개와 한 줌의 쌀로 연명하면서 일제의 정규군을 물리친, 독립군 사상 최대 전과를 거둔 빛나
는 승리였다.
2장 | 긴 밤이 끝나고 빛이 돌아오다 1931~1945년
한국광복군 - 광복을 향한 임정의 군대
대한민국 임정은 초기 외교 독립론에 치중한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1919년에 이미 군사 조직법을 제정
하는 등 수립 당시부터 군사 활동에 관심을 두었다. 1920년대에 침체기를 지낸 임정은 한인 애국단 윤
봉길의 거사를 계기로 장제스가 중앙군관학교 뤼양 분교에 한인 특별반 설치를 배려하면서 중국 국민
당 정부와 가까워지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이에 따라 만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군 92명이
독립 전쟁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사관이 되기 위해 한인 특별반에 입학했고, 1935년 4월 지청천과 이
범석의 주관하에 62명이 졸업하게 된다.
중일 전쟁을 전후한 시기 임정은 조국 광복을 위해, 또 국제 정세상으로도 일본과 일전을 벌이는 것이
불가피하며 그 시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이에 임정은 충칭 도착 1년 전쯤 시안에 군사 특
파단을 파견해 병력을 모집하는 한편, 중국 정부와 군대 조직에 대한 양해와 재정 지원을 교섭했다.
그 결과 임정이 중국의 임시 수도 충칭으로 옮긴 직후인 1940년 9월 17일 대한민국 임정 산하 군대인
한국광복군 총사령부가 창설되었다. 당시 임정을 이끌던 주석 김구는 “한국과 중국 공동의 적인 일제
를 타도하고 독립을 회복할 목적으로 연합국의 일원으로 항전하기 위해서”라는 한국광복군 창설 취지
를 선포했다.
총사령관 지청천, 참모장 이범석의 한국광복군 창설은 대한민국 임정의 군사 활동이 더욱 확대되는 계
기가 되었고, 1941년 일제가 태평양 전쟁을 도발했을 때 대한민국 임정은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하기에
이른다. 여기에 1942년 4월 김원봉이 이끌던 조선 의용대 병력이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통합되면서
이범석의 제2지대와 함께 지청천 사령관 휘하 3개 지대로 한국광복군은 그 병력이 증강되었다.
한국광복군은 항일 전투에 참가한 것을 포함하여 다양한 활동을 전개해 국제적 위상을 높이려 했다.
특히, 일본군에 강제로 편입되어 중국 등의 전선에 배치되었던 한국 청년들을 광복군에 복귀시키는 활
동을 펼쳤다. 일본군이 미얀마를 점령하자 미얀마, 인도 전선에까지 파견되어 영국군과 함께 대일 투
쟁을 전개했고, 한국광복군이 독립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국내 동포들에게 알려 독립에 대한
의욕을 높이기도 했다.
더 나아가 일본의 패망이 예견되자 한국광복군은 우리 손으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국내 진공 작전을
계획했다. 미국에서 독수리 작전이라 불렀던 이 작전을 위해 한국광복군은 중국에 주둔하고 있던 미국
전략 사무국과 연합해 비행 편대를 편성하고 국내에 침투해 활동할 특수 요원을 훈련시켜 미국 잠수함
이나 전투기를 이용해서 국내에 잠입한 뒤 중요 지역을 파괴하거나 점령하려는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가 예상보다 빨리 패망하면서 1945년 8월 20일에 예정되어 있던 국내 진공 계획은 무산되
었다. 김구 주석은 8ㆍ15 광복 소식을 접하고 “내게는 이것이 기쁜 소식이라기보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라고 개탄하면서 “가장 걱정되는 일은 우리가 이번 전쟁에서 한 일이 없기 때문에 장
차 국제 정치에서 발언권이 박약하다는 것이다.”라고 우려했다. 그리고 이것은 광복 이후 한반도의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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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세를 정확히 예견한 것이었다. 한국광복군은 광복 이후 미군정의 요구에 따라 무장을 해제한 채 귀국
했고 1946년 6월에는 완전히 해체되었다. 다만 그 일부가 국방 경비원 요원으로 흡수되어 이후 국군
창설에 이바지한다.
3장 | 세계가 그은 선, 비극의 시작 1945~1961년
한국 전쟁 - 한반도, 가장 아픈 상처를 얻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조선 인민군은 선전 포고 없이 38선을 넘어 남침했다. 당일 12시에 포
천을, 다음 날 의정부를 점령했고 불과 3일 만인 28일에는 서울을 점령한다. 이처럼 초반에 북한이 파
죽지세로 내려올 수 있었던 것은 북한이 남한에 비해 군사력이 우세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국 정부
가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던 이유도 크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최초 전황을 보고받고 긴급 명령
제1호를 하달하는 등 필요한 조치를 강구했지만, 상황 파악이 미처 안 돼 계엄령이나 전시 체제로 전
환하지 않았다. 심지어 북한군의 공격을 받은 한국군 전방 사단들은 사단장들이 며칠 전 단행된 인사
이동으로 자리를 비우고 있어 전황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비록 미국의 즉각적 대응과 참전에 존 무초
주한 미국 대사를 통한 이승만 대통령의 강력한 요구가 있었다는 점을 감안한다 할지라도, 정부는 이
미 1949년부터 북진 통일을 주장하고 있었고 5ㆍ30 선거 기간 동안에도 당시 정황상 북의 침공 가능
성을 높게 보았으면서도 충분히 대비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전쟁 초기 민심의 동요를 막는 것만을 중요하게 생각해 비상 철수 계획을 수립하지 못한 것도 부적절
한 대응이었다. 정부 지도자와 관료들은 우왕좌왕했고 서울 시민을 포함한 피란민은 보따리를 매다 풀
다를 반복하며 초조한 시간을 보냈다. 무질서로 일어날 불상사를 최대한 막기 위해 전쟁 발발 당일 시
민들에게 군경을 신뢰해 동요하지 말라는 포고문을 발표했지만, 그런 속에서 대통령과 국무 위원들,
정부 기관과 요원들의 철수는 진행되었다. 그리고 철수 과정에서 북한군의 진군을 막는다는 명목으로
28일 새벽 2시 30분 한강 인도교를 폭파시키면서 다수의 사상자를 발생시키고 서울 시민들의 피란도
함께 막았다. 이 때문에 피란을 간 ‘도강파’와 가지 못한 ‘잔류파’가 나왔으며, ‘잔류파’는 그날부터 3개
월간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에게 맞닥뜨리게 된다. 이 과정에서 많은 우익 인사들이 체포되거나 인민재
판을 받아 희생되었고, 서울 수복 후 도강파가 잔류파를 인민군에 협력한 부역자로 몰면서 한때 좌익
에 가담했던 국민 보도 연맹원들의 전국에 걸친 처형과 맞물려 많은 희생자를 낳았다.
부산으로 피란한 한국 정부는 7월 14일, 미국으로부터 지휘권을 인수받은 지 1년여 만에 미 극동군
사령관이자 유엔군 사령관인 맥아더에게 한국 작전권을 양도한다. 이제 한국군은 법적으로는 유엔군이
아니지만 실질적으로는 유엔군의 일원처럼 전쟁을 수행했고 이때부터 전쟁은 북한군 대 남한군의 싸움
에서 북한군 대 유엔군의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9월 15일, 맥아더 사령관이 인천 상륙 작전에 성공하면서 전세는 역전된다.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한
유엔군과 한국군이 38선에 도착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 명령을 하달하며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 유엔군도 이에 동의했다. 반면 중국은 유엔군이 북진하면 전쟁에 개입하겠다고 경고했고, 소련
은 즉각적인 휴전 및 외국군의 철수를 제안한다. 그럼에도 유엔군과 한국군은 10월 1일 38선을 통과,
10월 20일 평양을 장악하고 청천강을 넘어 압록강을 눈앞에 두었고, 동부 전선에서도 청진 지역까지
진출했다.
결국 중국군이 11월 전면적인 개입에 나서자 이제 전쟁은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맞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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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세계 최초의 전쟁이 되었다. 중국군에게 패배하면서 11월 30일을 기해 철수가 시작된 서부 전선의 미
8군은 평양에서 38선 부근까지 철수했고 동부 전선의 미 10군단과 한국군 1군단은 중국군에게 퇴로가
차단되어 흥남 부두에서 부산으로 해상 철수를 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맥아더는 원자폭탄의 사용을
포함한 화학 무기 사용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하지만 3차 세계 대전으로의 확산을 우려한 영국 등 여
러 나라의 반대와 압력으로 그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고 트루먼은 확전론자인 맥아더를 해임시키고 리
지웨이를 임명했다.
중국군의 남진은 리지웨이 장군이 이끈 유엔군의 반격으로 평택-제천 선에서 저지되었으며 이후 유엔
군은 반격을 거듭해 서울을 재탈환(1951. 3. 15)하고 3월 하순에는 문산-임진강 선까지 진출한다. 이
후 휴전이 될 때까지 2년여 동안 현재의 휴전선 근처에서 전선은 교착되었고 일진일퇴하는 소모전은
계속되었다. 팽팽한 힘의 균형이 유지되는 가운데 38선 부근의 치열한 전투는 피의 능선, 단장의 능선,
백마고지, 저격 능선, 금성 전투 등 수많은 고지 쟁탈전으로 남았다.
4개월에 걸친 휴전 협정 끝에 휴전선의 위치가 결정되자 다음에는 포로 송환 문제가 18개월간 휴전을
지연시켰다. 중국군과 북측은 제네바 협정에 따라 자동 송환을 주장했지만 미국 측은 인도주의를 내세
워 자유의사에 따라 처리하자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1953년 1월 미국 아이젠하워 신임 대통령이 휴
전하도록 압박했고 3월 휴전을 반대하던 스탈린이 사망하자 회담은 급진전된다. 그동안 휴전을 반대해
온 이승만 대통령은 6월 17일 반공 포로 2만 명을 석방시켜 휴전 회담을 저지하고자 했다. 하지만
1953년 7월 27일 결국 휴전 협정은 체결되었고 한국 대표가 빠진 채 미군, 중국군, 북측 대표가 이에
서명을 한다. 한국 정부는 휴전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해 대표를 참석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 전쟁은 전쟁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인명 피해와 물적 피해를 입힌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아픈 상
처라 할 수 있다. 유엔군을 포함한 한국군 119만 명이 전사, 전상 또는 실종되었고, 북측에서는 중국
군을 포함한 북한군 약 204만 명의 손실을 입었다.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이 전쟁의 참화를 당했고 가
족 구성원 중 최소한 한 명 이상의 전쟁 피해를 입었다. 전장이 전 국토를 오르내렸기 때문에 부산 교
두보를 제외한 전 국토가 전쟁터가 되었다. 이로 인해 남한의 공업 시설은 전쟁 직전의 42%가 파괴되
었고, 포격의 피해가 컸던 북한은 60% 이상 파괴되었다고 한다.
한국 전쟁은 그 피해가 전쟁 자체로 끝나지 않은 데 더 큰 비극이 있다. 전쟁이 종전이 아닌 휴전으로
끝나면서 이후 남북한 모두 냉전 대결과 유지, 분단의 교착에 많은 비용을 들여야 했다. 여기에 더해
전쟁 중 발생한 부역자 문제로 인한 대립, 이산가족 문제, 그리고 보도 연맹원 대학살이나 국민 방위
군 사건과 같은 문제들은 국민들 사이에 씻지 못할 상처들을 남겼고 이 모든 것은 지금까지도 한국 역
사가 해결해야 할 큰 짐들이 되었다.
4장 | 앞만 보고 달리는 나라 1961~1987년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 한국은 소망한다, 검은 연기로 뒤덮인 하늘을
“황량한 벌판에 기계음이 가득 차고, 이 하늘이 검은 연기로 뒤덮일 때 우리는 가난에서 벗어날 것입
니다.” 1962년 2월 울산 공업 단지 기공식에서 했던 박정희의 연설이다. 당시 서독이나 영국의 유명
공업 지역을 견학하고 돌아온 사람들은 그곳의 하늘이 대기 오염으로 거무튀튀한 것을 보고 울산의 하
늘도 그렇게 되어야 일류 공업 단지가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푸른 하늘이 국민에게 주는 행복이 무척
이나 소중해진 현재 한국과는 그 기준이 판이하게 달랐던 가난한 1960년대 한국인의 소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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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박정희는 정권을 잡기 위해 일으킨 군사 정변과 18년의 장기 집권, 이를 유지하기 위한 탄압 정치로
많은 이들에게 비난을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한국 경제 발전을 이룩한 주역이라는 것은 부
정할 수 없기도 하다. 오늘의 한국 경제를 있게 한 경제 치적에 대해 역대 대통령 중 1위로 평가를 받
는 이유이다. 박정희가 정권을 잡은 1961년 남한 1인당 소득은 82달러였는데 이는 세계 125개국 중
101번째로, 아프리카의 우간다 같은 나라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박정희와 군사 정권은 정권 연장의 명
분을 위해서도 혁명 공약에서 내걸었던 것처럼 당시 한국에서 가장 시급했던 경제 살리기에 전력투구
를 해야 했다.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은 그 부정적 부분에도 불구하고 한국 경제 발전 과정의 기본 매뉴얼로 경제 성
장의 밑받침이 되었다. 5ㆍ16 정변 다음 해인 1962년부터 1차 계획을 시작한 이래 7차에 걸쳐 35년간
이나 실시되다가 김영삼 대통령 시대에 폐지되었지만, 박정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제3공화국
을 대표하는 상징과도 같다. 원래 장면 내각의 경제 관료들이 완성해 발표하기 직전, 정변의 발생으로
사장되었다가 군사 정권이 집권 6개월 만에 워싱턴에서 원조와 차관을 요청할 사업 계획서를 작성하면
서 빛을 보게 된다. 당시 경제를 알지 못했던 군인들에게 경제를 꾸릴 목표와 계획표의 역할을 해 준
셈이었다.
1962년부터 시작한 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의 핵심 내용은 수입 대체 산업 중심의 산업화 전략으로,
성공한다면 외부 자본도 덜 유입되고 달러도 덜 쓰면서 내수 시장도 키울 수 있는 이상적 정책이었다.
하지만 이는 기술도 없고 외자 유치에도 실패한 박정희 정권이 거의 시작도 못 해 보고 접은 계획이
되었다. 특히, 돈이 국민들의 장롱 속에 숨어 있을 것이라고 추측해 그를 꺼내 자본을 마련해 보려고
했던 화폐 개혁이 처참하게 실패로 돌아간 것은 박정희 경제 정책 수립에 큰 계기가 되었다. 그는 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의 실패를 겪으며 수출 지상주의자로 변모하게 된다.
박정희가 수출 드라이브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1963년 정식으로 대통령 자리에 앉으면서부터이다.
수출을 위해서라면 기업들에게 관치 금융, 정책 금융, 수출 금융 등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해 주었고,
그 결과 1964년 한국은 수출 1억 달러를 기록하게 된다. 와이셔츠 수출로 시작해 세계 시장을 누빈 재
벌로 성장한 김우중이 수출로 성공한 대표적인 사례다. 박정희는 경제 모델의 윤곽을 잡은 뒤 치밀하고
용의주도하게 준비해 수출 주도형 공업화를 실시했다. 정부가 주도해 정부와 기업의 협업 체제를 만들
고 외자를 도입했으며 직업 관료의 소신 있는 정책들이 실천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이 과정에서 미국과 베트남전 특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한국은 경제 개발 계획을 실행하는 과
정에서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미국은 자본 조달만이 아닌 계획의 수정과 입안에도 영향을 미쳤
다. 베트남전 참전 이후 베트남과 동남아시아의 수출 증대를 가능케 할 차관을 추가로 대여한다는 ‘브
라운 각서’(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에 대해 미국의 군사 원조 및 경제 원조를 약속한 문서)의 내용에 따
라 수출이 경제 개발 계획의 핵심적인 축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는 ‘수출입국’이라는 단어를 만들어
냈고, 이를 통해 한국 경제를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수출’만이 살길이라는 신화가 창조된다.
결국 1970년 10억 달러 수출을 돌파했고, 중화학 공업 육성을 통해 1977년 100억 달러 수출을 달성
하면서 한국의 경제 발전은 세계 속에 빛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정권과 밀착하며 각종 특
혜를 받았던 기업들이 재벌이 되면서 외형적 성장에만 치중한 부실 부패 기업들이 양산되었다. 또한
오직 수출을 위한 저임금 저곡가 정책의 희생양이 되었던 노동자와 농민들의 생활고는 여전했고, 인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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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레이션과 집값 폭등 등 경제 발전 뒤의 그늘은 상당히 어둡고 추웠다. 한국의 경제 성장 뒤 보이지 않
는 곳에서 곪아 가고 있었던 상처들은 앞으로의 정권들이 해결하고 치유해야 할 큰 시대적 과제가 되
었다.
재벌 형성과 삼성전자 - 성장을 위한 선, 분배를 위한 악
1945년 8월 15일 패망한 일본인이 도망치듯 떠나며 남기고 간 그들의 재산은 당시 남한 총자산의 80%
이상에 달했다. 미 군정청이 광복 당시 총 29만 4,167건의 귀속 재산을 불하한 뒤 나머지는 대한민국
정부에 이양했다. 그리고 이는 1949년 귀속 재산 처리법이 제정되면서 불하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연고
자 우선권이 적용되었음에도 당시 대부분의 귀속 업체는 정치권력과 밀착된 특정인, 혹은 수의 계약을
통해 연고가 전혀 없는 사람들의 차지가 된다. 원가에 못 미치는 저렴한 가격에 극심한 인플레이션 상
황에서 장기 분할 납부가 허용되면서 실시된 불하는 거의 무상에 가까웠고 그 대금도 특혜 융자를 허용
했기 때문에, 귀속 재산 불하는 한국 재벌 형성의 중요한 물질적 토대가 된 셈이다.
당시 한국의 공업화는 원조로 도입된 원료를 가공해 파는 이른바 삼백 산업(면화, 설탕, 밀가루)을 중
심으로 진행되었다. 원조 물자는 ‘실수요자 배정 원칙’에 따라 시설을 보유한 업자에게 들어갔는데, 이
에 적용된 공정 환율은 실제 시장 환율과 2배 정도나 차이가 났기 때문에 원조 물자를 불하받은 기업
은 폭리를 보장받은 것과 같았다. 1950년대 활동했던 50대 기업 중 귀속 재산을 불하받은 기업은 13
개에 달했고 귀속 재산으로 부를 축적한 그들은 원조 물자를 통해 다시 부를 축적했다. 결국 이들은
1960년대 이후 경제 개발 과정에서 형성된 재벌의 모태가 되었다.
1938년 대구에서 자본금 3만 원으로 삼성상회를 세우고 능금과 건어물을 취급해 온 이병철은 서울에
삼성물산공사를 설립(1948)하고 무역업에 뛰어든다. 1947년부터 마카오를 통한 중계 무역, 이어 홍콩
과의 무역이 본격화되고 텅스텐, 망간 등을 수출하는 대신 페니실린, 사카린, 생고무 등을 수입하는 무
역이 활기를 띠면서 화신 무역의 박흥식을 선두로 많은 기업이 무역업을 시작했다. 삼성상회는 1950
년 국내 무역업계 1위로 올라설 만큼 사업이 번창했고, 이후 상호를 삼성물산주식회사로 변경(1951)한
다. 이후 모기업인 삼성물산을 기반으로, 무역업뿐만 아니라 내수 시장을 중심으로 한 다른 업종에도
진출해 제일제당(1953), 제일모직(1954)을 세우고 안국화재(1958, 삼성화재)를 인수한다.
한편 5ㆍ16 군사 정변 세력은 ‘부정부패 일소’라는 혁명 공약대로 대기업 간부들을 체포했다. 당시 도
쿄에 있었던 이병철은 체포를 면했지만 현지에서 “모든 재산을 국가에 헌납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의 예상과는 달리 박정희는 귀국하는 이병철을 만나 그의 의견을 경청했고, 부정 축
재 처벌보다 경제 재건에 활용해 달라는 건의를 수락해 기업인들을 석방한다. 이들의 부정 축재 재산
을 경제 개발 계획을 위한 전략적 산업 분야에 투자한다는 조건으로 준 면죄부는 이후 공업 단지 건설
의 배경이 된다.
삼성은 동화백화점(1963, 신세계백화점), 동방생명(1963, 삼성생명), 한국비료(1964), 동양방송(1964),
중앙일보(1965), 새한제지(1965, 전주제지) 등 각종 사업에 투자하며 그룹의 면모를 일신했고, 수원의
대규모 부지를 매입해 삼성전자공업(삼성전자)을 건설했다(1969.1.). 당시 금성사(LG전자)와 대한전선
(대우그룹에 불하)이 이끌고 있던 가전업계에서 삼성은 후발 주자였기 때문에 1970년 흑백 TV와 선풍
기를 첫 번째 상품으로 출시하면서도 몇 년간 적자를 면하지 못했다. 그러다 1975년, 세계에서 세 번
째로 ‘이코노 TV’를 출시하면서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성공한다. 당시 TV는 전원을 켜고 20~30초간
예열 후 화면이 나타나는 형태였는데, 이코노 TV는 바로 화면이 뜨는 것으로 미국에서 선풍적인 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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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를 끌어 삼성에게 효자 상품이 되었다. 삼성전자가 가전 분야 선두 주자인 금성사를 이기고 신흥 강자
로 부상할 즈음인 1983년, 미국와 일본에 이어 세계 세 번째로 64K D램을 개발하면서 반도체 사업에
본격 진출한다. 삼성전자를 글로벌 회사로 만든 건 바로 이 반도체였다.
지금의 삼성전자로 명칭을 변경(1984)한 삼성전자공업은 1990년대에는 반도체 산업 이외에 휴대 전화
기기, LCD, LED, TV 등 첨단 디지털 가전으로 사업 영역을 확대해, 2010년 이후로는 안드로이드 스마
트폰 분야에서 확고한 세계 1위 기업 자리를 굳혔고, 반도체에서도 인텔을 꺾고 1위가 된다. 삼성전자
가 세계 최대 전자 회사로 처음 등극한 2010년에는 매출 153조 원을 돌파하였고, 이후 2017년 12월
말 매출액으로 239조 5,753억 7,600만 원을 기록했다. 이는 같은 해 우리나라 정부 예산 400조 원의
절반을 훨씬 웃도는 수치라고 하니 한국 경제에서 그들이 차지하는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성장과 분배라는 가치 사이의 단골 주제 ‘재벌’ 그리고 그 선두 주자 ‘삼성’, 때로는 한국인의 자부심으
로 느끼게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아성에 대한 경계의 필요성을 느끼게 만드는, 한국의 경제 발전 모
습을 그 역사에 집약적으로 담고 있는 존재인 듯하다.
5장 | 대한민국, 세계 속에 우뚝 서다 1988~2021년
IMF 외환 위기- 빚지고, 닥치고, 경제 개혁
“금고 열쇠를 받아 보니 천 원짜리 한 장 없고, 빚 문서만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G7조차 약속했던
80억 달러를 못 주겠다고 한다. 외채 만기를 연장해 주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모라토리엄(채무 불이행)
으로 갈 수밖에 없다.”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 전 ‘국민과의 대화’에서 한 말이다. 그는 훗날 자서전에서 “달러가 생긴다면 지
구 끝까지라도 찾아가야 했다.”라고 당시를 회고했다. 청와대 집무실에 들어가기 66일 전, 그는 당선
자 신분이었지만 사실상 대통령으로서 IMF와의 협상을 지시하고 주도하면서 외환 위기 극복에 팔을
걷어붙였다.
문민정부 수립 후 한국 경제는 노태우 정권에 비해 눈에 띄게 좋아졌다. 이 시기 한국 경제는 수출
1,000억 달러를 돌파(1995)했고, 1인당 국민 소득은 1만 달러를 넘겼으며, 종합 주가 지수는 1,000선을
돌파하는 등 역사적인 이정표를 세웠다. 연평균 경제 성장률 7%에 달했던 김영삼 정부 시기를 한국 경제
의 최고 절정기라고 평가하는 전문가도 있다. 1970~80년대가 경제 부흥기였다면 90년대 초ㆍ중반은 ‘고
도 성장기’로 한국이 개발 도상국을 벗어난 시기로 본 것이다. 여기에 금융 실명제와 같은 계획을 성공적
으로 실시했으니 정부는 자신만만할 만했다. 김영삼은 ‘세계화’의 구호를 내세우며 OECD에 정식으로 가
입(1996)해 선진국이 되었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그가 내세웠던 ‘세계화’는 ‘국경 없는 세계 시장 속 무한
경쟁’이 아닌, ‘우리는 적극적으로 세계 시장에 진출해야 하지만 외국 자본이 한국에 들어오는 것은 최소
화해야 한다.’는 전략이었고 이것은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순진한 생각이었다.
한국 경제는 노태우 시대를 거치며 이미 ‘고비용-저효율’ 시대에 접어들고 있었다. 임금도 오르고 민주
화되는 과정에 들어섰지만 그와 함께 비용은 오르고 생산성은 떨어지면서 그동안 싼 비용으로 경제를
발전시켰던 한국 경제에 경고등이 켜진 것이다. 3저 호황 때 기업 구조를 건전하게 변화시키고 발전시
킬 수 있는 기회가 왔었지만 그 기회를 놓쳐 버린 대가를 치러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노태우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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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대 이후 기업들은 해외 투자라는 명목으로 외국으로 탈출을 시작했고, 국민에게는 ‘소비가 미덕’이 되
어 갔다. 성장률은 절반으로 꺾였지만 물가는 상승했고, 부동산 투기는 반복되었다.
이런 와중에도 김영삼 정권 중반까지 경제 외견상 문제가 없어 보였기에 자본 시장은 과감히 개방되었
고, 신생 종금사들이 외국 금융 시장에서 외자를 빌려 기업에게 빌려주는 일도 예사였다. 국내 금리보다
낮은 외채가 들어오자 기업들이 신규 사업에 경쟁적으로 뛰어들면서, 30대 재벌들의 부채 비율은
300~400%로 높아졌다. 수출은 줄며 무역 수지는 적자로 돌아섰지만 달러는 계속 들어와 평균 환율이
달러당 800원 선을 유지하고 있어, 수출은 더욱 줄어드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여기에다 소비재 수입
의 급증과 해외여행 완전 자유화까지 겹치면서 1996년에는 237억 달러의 경상 수지 적자를 기록했는데,
이는 외환 보유고에 육박하는 적자였다. 해외 영업 규제에서 풀려난 금융 기관들은 마음대로 외자를 끌
어들이는 상황에서 단기 차입만 허용되는 바람에 1년 만기 이하의 단기 외채가 급격히 증가했고, 총외
채는 1993년 439억 달러에서 1996년에는 1,047억 달러로 급속히 불어난다. 먹구름이 끼고 있었지만
하늘은 보지 않은 채 한국 경제에는 영원히 맑은 날만 있을 것처럼 살던 시기였다.
1997년, 드디어 올 것이 왔다. 1월 한보철강 부도를 시작으로 대기업의 연쇄 부도 사태가 벌어졌고 이
어서 은행들도 부도 위기에 빠지기 시작했다. 3월 삼미그룹에 이어 다음 달 진로 그룹이 부도를 냈다.
재계 7위 기아자동차, 쌍방울, 해태, 뉴코아, 한라 그룹이 그 뒤를 이었다. 10월 국제 신용 평가사들은
한국 경제의 신용 평가를 떨어뜨리기 시작했고, 이를 신호탄으로 달러가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했
다. 한국의 은행들은 상환 만기 연장을 거부당했고, 정부가 나서서 미국과 일본 등에 구조를 요청했으
나 거절당했다. 결국 IMF(국제통화기금)에 구제 금융을 신청하고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IMF는 한국을 지원하는 대신 기업의 구조 조정과 공기업의 민영화, 자본 시장의 추가 개방, 기업의 인
수 합병 간소화 등 여러 조건들을 내걸었다. 정부는 조건을 수락함과 동시에 IMF의 관리를 받아 국가
경제를 운영하기로 약속한 뒤 자금을 지원받는다. 한국이 이미 스스로 해 나갔어야 하는 개혁이었음에
도 시기를 놓치자 IMF라는 기관의 감시를 받으며 일명 ‘IMF 신탁 통치 체제’하에서 개혁해 나가야 하
는 굴욕적인 상황에 처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1998년 대선이 열리고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되어 마침내 대한민국 건국 이후 최초로
선거에 의한 평화적인 여야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고, 세계 신문들은 이를 대서특필했다. 그러나 국정
을 넘겨받은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는 역사상 가장 큰 빚더미를 넘겨받은 정부였다. IMF의 요
구대로 독점 재벌의 해체, 공기업의 민영화, 부실기업 정리, 노동자 정리해고의 간편화, 소비 촉진 등
경제 구조를 개편하고 경제 정책을 바꿔야 했다. “한국,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며 IMF 외환 위
기 이후 외신에서는 한국을 향해 조소했다. 하지만 한국 국민들은 위기에 닥쳤을 때 발휘되는 특유의
집중력으로 ‘금 모으기 운동’과 같은 전 국민의 고통 분담에 뼈를 깎는 구조 조정 등을 통해 2001년 8
월, 지원받은 자금을 3년이나 앞당겨 상환한다. 이를 통해 IMF 관리 체제를 예정보다 일찍 끝냈고 이
로써 IMF 외환 위기도 막을 내리게 된다.
BTS 현상 - Love Yourself!
‘전 세계 최초 뮤직비디오 24시간 내 1억 이상 조회, 빌보드 핫 100/200/아티스트 100 동시 1위 석권,
빌보드 핫 100/200 1위 통산 5주, 아티스트 100 1위 13주, 미국 3대 음악 시상식 노미네이트 및 공연,
한국 가수 최초 웸블리 스타디움 공연, 한국 가수 역대 최대 규모 콘서트 개최, 앨범 누적 판매량 한국
1위, 국내 주요 시상식 최초 대상 전 부문 수상, 한국 가수 역대 최다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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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2013년 데뷔한 보이 밴드 방탄소년단(BTS) 수상 기록(2022.3.)의 일부다. BTS는 국내 대형 기획사가
아닌 중소 기획사 HIT 엔터테인먼트 출신으로 ‘아이돌계의 흙수저’라 불리며 활동을 시작했다. 해외를
염두에 두고 기획된 그룹이 아니었는데, 2017년부터 해외 인기 관련 기록들에서 K-POP 최대 결과물
을 내더니 2018년 결국 세계 최고의 자리에 선다. 빌보드는 ‘2018년 올해의 차트 기록들’이라는 기사
에서 이들의 발매 앨범 두 장이 모두 ‘빌보드 200’ 1위에 오른 점을 그해 가장 주목할 만한 기록으로
뽑았다. 한국 가수 최초, 최고의 기록을 보여 주며 K-POP 장르를 뛰어넘었고, 과거 한국 가수가 보여
주지 못했던 방식으로 빌보드 주요 차트에서 급성장했다고 평가한 것이 주 내용이었다.
국내보다 해외에서 먼저 ‘21세기 팝 아이콘’으로 진가를 인정받으며 일으킨 그들의 전 세계적 열풍은
이후 수그러들기는커녕 계속 확산 중이다. 이 세대가 지나면 비틀스처럼 클래식의 반열에 설 거라는
전망도 함께한다. 2019년 포브스에서는 그들의 경제 효과에 관해 주목하는 기사를 썼다. 한국 가수 최
초 ‘빌보드 핫 100’ 1위를 한 <Dynamite>가 대한민국에 최소 1조 7천억 원의 경제 효과를 가져다준다
고 밝혀, 이들에게 붙은 ‘걸어 다니는 대기업’이라는 표현이 전혀 무색하지 않음을 보였다. 현대경제연
구원 보고서는 2021년 기준 그들이 매년 한국에 50억 달러(약 5조 7천억 원)의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
주고 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하지만 경제 효과 못지않게 주목할 만한 현상이 있다. 사실 ‘총알을 막아 낸다’라는 ‘방탄’ 팀명은 십
대가 살아가며 겪는 힘든 일, 편견과 억압을 막아 내겠다는 뜻을 담아낸 것이라 한다. 이런 그들의 마
음은, ‘남들과 비교하면서 최고가 되고 싶었지만 결국 최고가 아닌 위로와 감동이 되어, 팬들의 슬픔과
아픔을 거둬 가고 싶다’라는 가사 등에 그대로 담긴다. 노래 속에 담긴 팬들을 향한 진심과 사랑, 친절
을 통해 그들의 팬은 치유와 기쁨을 얻는다.
그런 팬들의 마음은, 한국 전통을 주제로 한 퍼포먼스나 아름다운 한글 가사를 접하면서 한국에 관한
관심으로 확대된다. 해외 공연 매회 몇 분도 채 안 돼 전 공연장 좌석을 매진시키고, 스탠딩 구역 차지
를 위해 공연 며칠 전부터 노숙을 감수할 만큼 BTS에 매료된 팬들은 자연스럽게 한국에 애정을 가지
게 되는 것이다. BTS가 한국어 학습이나 한국 유학 또는 생활을 원하는 세계인이 급격하게 증가하는
현상에 혁혁한 공을 세웠음을 인정받아 2018년 문화 훈장을 수훈한 배경이다.
수훈 결정 직전 BTS는 뉴욕 유엔 본부에서 유니세프의 새로운 청소년 어젠다 파트너십 출범 행사에 참
석했다. 리더 RM은 그들 앨범 명인 <Love Yourself>처럼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을 이야기하라.”라는 연
설을 통해 큰 감동을 주었다. 이런 메시지는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팔과 다리, 심장, 소중한 영혼을,
조금 부족해도 아름다운 자신을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라는 가사와 함께 수많은 청소년의 삶을 긍정적으
로 변화시켜 내기도 했다. 팬데믹으로 팬들을 직접 만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일곱 명의 청년은 “내가 나
이게 하는 것들의 힘,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라며 ‘삶은 계속된다.’라는 메시지를 보낸다.
이들은 SNS 계정 운영과 인터넷 개인 방송을 통해 자신을 자연스럽고 솔직하게 표현하기로도 유명하
다. 앨범 발표나 활동이 없는 기간에도 다양한 자체 제작 콘텐츠를 보여 주는데, 팬데믹 기간에는 더
욱 그랬다. 충만한 흥만이 아니라 고민과 노력의 과정도 함께하는 이들의 결과물 공유에 팬들은 마치
손 내밀면 같이 놀아 주고 함께 울어 줄 듯 친근함을 가지게 된다.
ARMY와의 소통도 마찬가지다. 실제 BTS 인기는 팬클럽 ARMY의 노력과 궤를 같이했다고 해도 과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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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이 아니다. 역대 유명인 단일 팬카페 최초로 회원 백만 명을 돌파한 ARMY는 자발적으로 소셜 미디어
를 활용해 BTS 활동을 국내외로 전파했고, 결국 이들을 최고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자신의 최애 멤버
생일에 그의 이름으로 기부하는 등 새로운 팬 문화를 만들며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려는 멤버들의
행보에 동참하기도 하고, BTS를 향한 날 선 공격 등에 대해서는 혼신으로 방어하며 돕기로 유명하다.
BTS가 모든 활동에서 ARMY에게 지극한 애정을 표현하는 것이 당연한 이유다.
BTS는 국내 언론과의 한 인터뷰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추락”이라고 답했다. 그렇게 ‘피땀 눈물’ 끝에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고공비행을 하게 된 이들이지만,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없음 또한 알기 때문
일 것이다. 20~30대 최고의 자리에 선 젊은이들이 느끼는 두려움의 무게를 어떻게 가늠할 수 있겠는
가. 추락이 아닌 ‘착륙’을 하고 싶다고 말하는 그들에게 ARMY는 답을 보낸다. “우리가 도와줄게. 안전
하게 착륙할 수 있도록.”
이들의 모습에서, 그리고 이런 따뜻한 장면들에 힘을 보태는 청소년의 모습 속에서 21세기 젊은 한국
의 희망을 본다. 십 대만이 아닌 어른들에게도 역시 위로와 감동이 되는 그들의 한결같은 노력과 최선
에, 언젠가 있을 그들의 착륙이 안전하고 멋지게 이루어지길, 그리고 그것이 가능한 한 아주 먼 훗날
이길 이들을 응원하는 어른의 한 명으로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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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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