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위안 지음 /
심리학자인 이 책의 저자 천위안은 현대 심리학을 무기로 새롭게 『삼국지』의 영웅들과 시대를 재
해석했다. 심리학의 관점에서 역사를 재해석한 최초의 시도라 할 수 있다. 그는 심리학을 통해 역
사 속 인물이나 사건을 분석하는 ‘심리설사(心理說史)’ 분야의 창시자로 불리는 천재 작가다. 저자
는 『삼국지』에 나오는 조조와 관련된 수많은 사건을 뽑아 흥미진진한 이야기와 함께 그 속에 담
긴 영웅의 심리를 날카롭게 포착해 낸다. 이들은 시대가 바뀌어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인간 속성
때문에 나와 내 주변 인물과 닮아 있어 나와 나를 둘러싼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
심리학이 조조에게 말하다 1
천위안 지음
▣ 저자 천위안
심리학자로 닝보대학 특임 교수이자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미디어 그룹 임원으로 재직했으며 미국, 일
본, 홍콩, 대만에서 연구 및 강의 활동을 이어 왔다. 그는 현대 사회 심리학 이론을 통해 역사 속 인물
이나 사건을 분석하는 ‘심리설사(心理說史)’의 창시자로 통한다. 주요 저서로는 『토이리즘』, 『스티브 잡
스 광기의 승부사』, 『자공의 설득학』, 『상대론에 박수를 보낸다』, 『맥도날드 패러독스』, 『뉴미디
어론』, 『어떻게 리더가 되는가-김용(金庸) 무협 관리학』 등 30여 권이 있다. 이외에 『중국-유럽 비
즈니스 평론』, 『비즈니스 스쿨』, 『중국 경제 리포트』 등에 여러 글을 발표했다.
▣ Short Summary
위ㆍ촉ㆍ오가 천하를 삼분하여 호령하던 중국의 삼국 시대에는 그 어느 시대보다 인재가 넘쳐 났다.
그로 인해 판세를 엎치락뒤치락하는 수많은 책략과 전술이 펼쳐졌다. 각 등장인물이 보여 준 파란만장
한 이야기와 그들 나름의 생존 기술과 지혜는 시대를 막론하고 교훈과 감동을 준다. 저자 천위안은 ‘현
대 심리학으로 읽는 『삼국지』 인물 열전 시리즈’의 인물로 조조, 제갈량, 관우, 유비, 손권, 사마의를
선택했다. 심리학을 통해 이들의 삶과 삼국 시대의 이야기를 재해석한 방식은 이제껏 접근하지 못한
새로운 방식이다.
심리학은 근현대에 발전한 사회 과학이다. 이것으로 2천 년 전 난세 영웅들의 심리를 분석하고 해석하
려는 시도는 대단히 흥미롭고 학문적 의미도 크다. 천위안의 ‘현대 심리학으로 읽는 『삼국지』 인물 열
전 시리즈’는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심리학적 각도에서 역사적 인물을 분석한 최초의 작품이다.
이는 마치 근대 고고학에서 탄소14를 이용해 유적이나 유물의 제작 시기를 분석하는 일에 비견할 수
있다. 과학과 수학, 통계학을 활용해 고대 역사를 연구하는 것처럼 심리학이 역사 연구의 또 다른 도
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물론 오늘날의 시각으로 고대인의 의도나 당시의 실제 논리를 완
전히 간파할 수는 없다. 이 점은 독자들이 유념해야 한다.
역사 고증의 목적은 역사 속 사실과 인물의 갈등을 찾아 대리 경험과 교훈을 얻는 데 있다. 또한, 역사
적 사실에 다양한 소재를 가미시켜 이야기로 풀어내는 역사 연구는 ‘즐거움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역
사의 재해석으로 현실의 삶을 깨닫고 전달하는 것이 바로 역사의 ‘현대적 가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역사를 통해 깨달음을 얻는 데 머무르지 않고 이를 통해 현대적 가치를 발굴하고 있다.
▣ 차례
prologue _ 조조의 심리에서 배우는 난세의 가르침
추천사 _ 현대 심리학으로 난세의 영웅 조조를 들여다보다
PART 1 조조의 승리의 기술
베푼 만큼 되돌아오기를 기대한다
도둑이 제 발 저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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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이 조조에게 말하다 1
멀리 보는 사람은 스스로 길을 찾는다
자기 합리화는 방패가 될 수 없다
한 발 물러서면 더 넓게 보인다
편견은 두 눈을 멀게 한다
PART 2 조조의 마음 다스리기
혼란한 난세에는 만사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넙죽 받기보다 거절의 매력을 발산하라
진실은 언제나 가면을 쓰고 있다
돌다리도 두드려야 할 이유가 있다
양보도 상대를 가려 가며 해야 뜻을 이룬다
하늘은 길을 찾는 자에게 길을 내준다
인적 자산은 보이지 않는 무기이다
운명이 칼을 뽑거든 몸을 숙이고 때를 기다려라
욕구의 충동질에 넘어가지 마라
위기를 무시하면 위기에 갇힌다
기대는 열정을 타오르게 한다
PART 3 조조 리더십의 원칙
맹목적인 모방은 덫에 걸리는 꼴이다
잘못을 덮으려고 속죄양을 찾지 마라
말에 책임지는 사람이 상대의 마음을 얻는다
자기가 한 일이 더 대단하게 느껴지는 법이다
오늘의 모습은 과거 삶의 결과이다
시대의 흐름에서 시대의 가치를 읽어라
설득하고 싶거든 직접적으로 말하지 마라
기회의 시점에서 망설이지 마라
PART 4 조조의 위기관리 기술
방관자가 많을수록 아무도 행동하려 들지 않는다
신중하게 행동하면 하늘이 돕는다
상대를 알기 전에 자신을 드러내지 마라
때론 위장술이 죄책감을 덜어 준다
타인의 시선에 휘둘리면 행동반경이 좁아진다
남을 헐뜯는 말에는 나를 노리는 칼이 숨어 있다
때로는 적이 기회를 만들어 준다
갈림길에 섰다면 조언 구하기를 즐겨라
속임수에 넘어가지 말고 상대 속임수를 넘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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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이 조조에게 말하다 1
심리학이 조조에게 말하다 1
천위안 지음
PART 1 조조의 승리의 기술
베푼 만큼 되돌아오기를 기대한다
지금 죽여야 하나? 아니면 살려 둘까? 동탁이 등을 보인 채 모로 누워 있다. 절호의 기회다. 조조는
이제 판단을 내려야 했다. 이토록 숨 막히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은 사도 왕윤과의 약속 때문이다. 조
조 자신의 젊은 혈기와 왕윤의 치밀한 계산이 뒤엉켜 빚어낸 결과였다.
전날 저녁, 생일을 맞은 왕윤이 집으로 대신들을 불러 모아 연회를 열었다. 사실 오늘의 연회는 한나
라 조정의 오랜 대신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으기 위한 핑계에 불과했다. 동탁을 제거할 방법을 의논할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서는 그럴듯한 명분이 필요했다. 한나라 조정의 충신들은 동탁의 만행에 분개하
며 동탁을 몰아낼 방법을 찾았지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사태를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
었던 사도 왕윤이 생일을 핑계로 믿을 만한 사람들을 불러 모아 대사를 도모하려 한 것이다.
왕윤은 한나라 황실을 오랫동안 섬겨 온 사람들만 가려 뽑아 초대장을 보냈다. 조상 대대로 한나라에
충성해 온 그들 역시 동탁의 편에 서지 않았다. 왕윤의 행동을 통해 우리는 인지 메커니즘에 어떤 요
소가 강하게 작용하는지 알 수 있다. 바로 이것과 저것을 구분하려는 욕구다. 우리는 자신과 타인을
다른 그룹으로 구분 짓고 ‘우리’와 ‘그들’이 당연히 다르다고 믿는다. 또 우리가 속한 그룹을 감싸고 그
외의 그룹은 배척하기도 한다. 가치관이나 행동 방식, 사물에 대한 기호 등에서 나와 다른 선택을 한
사람들은 다른 그룹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왕윤이 사용한 판단 기준은 ‘오랜 신하’였다. ‘오래된’이라는 단어는 ‘새로운’과 반대된다. ‘오래된’ 사람
들은 동탁이 조정을 장악하기 이전부터 한나라 조정을 위해 일하던 이들이고, 그 충성심은 여러 대에
걸쳐 이어져 왔다. 반대로 ‘새로운’ 사람들은 동탁의 출현 이후에 나타난 이들로 동탁의 세력에 봉사하
는 그룹이다.
왕윤이 ‘오랜 신하는 충성스러운 신하’라는 기준을 적용한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마터면 주인
공 조조가 초대받지 못할 뻔했기 때문이다. 동탁이 득세한 이후 조조는 동탁과 급격히 가까워졌을 뿐
아니라 유능한 일 처리로 동탁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그러나 ‘오랜 신하’라는 기준에서 본다
면 조조는 한나라 개국 공신인 조삼의 후손이자 400여 년간 한나라의 녹을 먹어 온 조씨 집안 출신이
기도 했다. 왕윤의 기준에서 볼 때 조조는 당연히 충신이었다. 한바탕 울음으로 시선을 집중시킨 왕윤
이 본론을 꺼냈다.
“오늘은 이 늙은이의 생일이 아니오. 역적 동탁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생일이라는 핑계를 댄 것입니다.
내가 우는 것은 나 때문이 아니라 400년간 이어져 온 한나라를 위한 것이오. 동탁이 저리도 날뛰고 있
는데 막을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어찌 내일을 장담할 수 있겠소.” 왕윤의 말은 장내에 있던 한나라 신
하들의 가슴을 후볐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 가진 것이라곤 충성심 하나뿐 동탁과 맞설 준비는 되어 있
지 않았다. 술을 마시며 울분을 삼키거나 왕윤처럼 얼굴을 가리고 우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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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이 조조에게 말하다 1
모두가 울고 있는 와중에 돌연 커다란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순간 울음을 멈추고 웃음의
진원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호탕하게 웃는 사람은 다름 아닌 조조였다. 한바탕 웃고 난 조조가 입
을 열었다. “대신들께서 그렇게 밤을 꼬박 새워 운들 동탁이 죽겠습니까?” 장내는 순식간에 물을 끼얹
은 듯 조용해졌다. 그러자 옆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왕윤이 크게 화를 냈다. “네 이놈! 네 조상이
400년 넘게 한나라의 녹을 먹었거늘 참으로 배은망덕하구나!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함부로 입을 놀린
단 말이야? 동탁에게 가서 밀고를 하려느냐? 우리는 죽어도 한나라의 귀신이 될 것이다!”
화를 내고는 있지만 사실 왕윤은 깜짝 놀라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자칫하면 이 젊은 녀석 때문에 대사
를 그르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퍼뜩 뇌리를 스친 것이다. 왕윤은 그제야 ‘오랜 신하’라는 기준에 중
대한 결함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조조는 충신의 조건을 갖추었지만 현재 동탁 정권에서 가
장 빠르게 부상하는 스타였기 때문이다. 왕윤은 속으로 조조를 부른 걸 후회하기 시작했다. 잘못하다
간 이 자리에 모인 대신들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위기였다.
그러나 조조는 동탁에게 밀고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조조의 마음은 아직 한나라에 있었다. 그 또한
동탁이 조정을 장악하고 안하무인으로 날뛰는 것을 마땅찮게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원대한 포부를 품
고도 좀처럼 기회를 잡지 못한 조조는 자신의 꿈을 위해 동탁을 도우면서 성공의 발판을 닦을 수밖에
없었다. 조조가 동탁과 가까이한 것은 순전히 정치적인 필요에 의해서였다.
사실 조조는 굳이 대신들이 ‘충심’을 비웃으며 도발할 필요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렇게 한 것은 나약하
고 무능한 그들의 울음소리가 조조의 영웅심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조조의 눈에 비친 대신들은 늙고
힘이 없을 뿐 아니라 의지를 행동으로 옮길 열정도 없어 보였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이 문제를
거뜬히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조조 자신밖에 없었다. 이러한 심리를 바탕으로 조조는 모두가 깜짝 놀
랄 만한 발언을 한다. “저는 다만 여러 대신 누구도 동탁을 죽일 방법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 우스웠던
것뿐입니다. 제가 대단한 재주는 없으나 머리는 좀 쓸 줄 압니다. 곧 동탁의 목을 치고 그 머리를 성문
에 걸어 천하에 내보이겠습니다!”
이 말은 과도한 자신감을 보여 주는 전형적인 예다. 물론 조조는 동탁과 가깝게 접촉할 수 있으니 마
음만 먹으면 어렵지 않게 동탁을 암살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동탁의 주변에는 무장한 군사가 둘러싸고
있었다. 특히, 천하제일의 명장 여포가 동탁의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니 동탁을 죽이더
라도 조조 또한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동탁의 목을 성문에 걸겠다는 조조의 말
은 현실성이 떨어지는 허풍에 불과했다.
하지만 왕윤은 조조의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그의 원래 목적이 바로 조조 같은 인물을 찾는 것이었
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아직 조조에 대한 의심이 남아 있어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왕
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조에게 다가가 공손히 물었다. “맹덕 공, 한나라 왕실을 구해 낼 방법이 있으
신가?” 그러자 조조가 자신감 넘치는 말투로 대꾸했다. “제가 동탁과 가까이 있으니 기회를 엿보아 해
치우면 됩니다. 동탁은 저를 신임하여 무슨 일이든 저와 상의하려 합니다. 사도께서 갖고 있는 보검을
제게 빌려주십시오. 그 검으로 역적 동탁을 죽이겠습니다.”
조조는 어째서 왕윤의 보검을 언급한 것일까? 보통 검으로도 충분히 동탁을 죽일 수 있었는데 말이다.
조조가 굳이 보검을 빌려 달라고 한 까닭은 왕윤의 신임을 얻기 위한 일종의 수단이었다. 만약 왕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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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완전히 신임하지 않는다면 동탁을 죽이겠다는 조조의 용기는 명분을 잃게 되고 목숨까지 위태
로워질 수 있었다. 만약 왕윤 등이 조조가 밀고하리라 확신한다면 아무리 힘없는 늙은이들이라 해도
한꺼번에 달려들어 조조의 입을 막고자 할 게 뻔했다. 그래서 조조가 생각해 낸 방법이 바로 보검이었
다. 이 아이디어의 원조는 사실 전국 시대 진나라의 노장 왕전이다.
당시 왕전은 진나라의 60만 대군을 이끌고 출전하게 되었다. 천하 통일을 눈앞에 둔 최후의 일전이었
던 만큼 나라의 모든 병력이 왕전의 손아귀에 있었다. 의심이 많은 진시황은 이것을 불안해했다. 장수
한 사람이 온 나라의 군대를 이끌게 되었으니 왕으로서 걱정되는 것이 당연했다. 이를 잘 알고 있던
왕전은 출정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행군을 멈추게 하고 말을 돌려 궁으로 돌아갔다. 진시황이 깜짝
놀라 연유를 묻자 왕전이 대답했다. “저는 이미 늙어 앞으로 전하를 보필할 기회가 많지 않을 것 같습
니다. 아직 힘이 남아 있을 때 자손들을 위해 전답을 마련해 두고 싶습니다.”
그 말을 들은 진시황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대장군이 천하를 평정한다면 그까짓 전답이 문제겠는
가?” “아닙니다. 부디 지금 제게 비옥한 전답을 내려 주십시오.” 진시황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수도 함양 서쪽의 기름진 땅 200만 평을 하사했다. 그 후 왕전은 행군 도중 두 번 더 왕에게 저택과
땅을 요구했고, 왕은 매번 그의 뜻대로 해 주었다. 노장군 왕전은 어째서 출정을 대가로 미리 상 줄 것
을 요구했을까? 그가 여러 차례에 걸쳐 지나칠 정도로 많은 땅과 재물을 요구한 것은 왕과의 관계 때
문이었다.
준 것만큼 받으면 서로 빚진 것이 없는 상호 교환 관계가 된다. 상호 교환은 오랜 역사를 거치며 형성
된 인간의 대표적인 행동 양식 가운데 하나다. 쉽게 말해 은혜는 은혜로 갚고 원수는 원수로 갚는 것
이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신세를 지게 되면 어떤 형식으로라도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한다. 그렇지 않
으면 기분이 영 찜찜하고 불안하기 때문이다.
진시황은 나라의 모든 병력을 손에 넣게 된 왕전이 엉뚱한 마음을 먹지 않을까 매우 걱정했다. 예로부
터 많은 군주가 바로 이 점을 우려하여 공을 세우고 돌아온 장수를 죽여 후환을 없앴다. ‘토사구팽’이
라는 말도 바로 여기서 나왔다. 그런데 왕전은 자진해서 왕에게 재물을 요구함으로써 앞으로 세울 공
에 대한 대가를 미리 받아 두었다. 진시황의 입장에서는 이미 가장 좋은 땅과 저택을 주었으니 그가
받은 만큼 공을 세우고 돌아올 일만 기다리면 되었다. 게다가 많은 재물을 얻은 왕전이 자리에서 물러
난 후 편안히 여생을 보내게 되었으니 딴마음을 품을 가능성도 적었다. 이것이 바로 왕전이 왕에게 먼
저 상을 요구한 이유였다. 설사 그가 결코 배신하지 않겠다고 맹세를 했다고 한들 의심 많은 진시황으
로부터 진정한 믿음을 얻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보검을 요구한 조조 역시 이와 비슷한 목적에서였다. 보검이 암살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해도 암살에 따르는 여러 가지 다른 위험을 어느 정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보검은 왕윤이 조
조의 용기를 격려하고 지지한다는 상징이 되기도 했다. 이렇게 양측이 ‘등가 교환’을 하면서 상호 간의
신뢰 관계도 탄탄하게 맺어진다.
PART 2 조조의 마음 다스리기
진실은 언제나 가면을 쓰고 있다
유비는 굉장히 운이 좋았다. 조조가 유비의 손발을 묶어 놓을 작전을 궁리하고 있을 때 갑자기 여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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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를 몰아 연주를 공격하려 한다는 소식이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서주를 공격하느라 본거지인 연주
를 잃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조조는 서둘러 군사를 돌리기로 했다. 하지만 조조는 상황
을 활용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이왕 군사를 물리게 된 마당에 생색이라도 내야겠다고 생각하
고 유비에게 편지를 썼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유비를 괘씸해하며 분통을 터트렸던 것과 달리 백팔십
도 돌변한 모습이었다.
내 아버지가 변을 당하셨는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었겠소? 나는 군사를 일으켜 도겸의 집안을 몰살
하고 그 죄를 물으려 했소. 그러나 황실의 종친이요, 재덕을 겸비한 현덕 공께서 특별히 편지를 보내
내게 천하를 생각하라 하니 즉시 군사를 물리겠소.”
조조는 편지에서 자신의 원래 의도를 부풀린 동시에 모든 것이 유비의 덕인 것처럼 한껏 치켜세웠다.
철군이 불가피했던 조조였지만 모든 공을 유비에게 돌려서 체면을 살려 준 것은 그에게 은혜를 베풀기
위해서였다. 호혜의 원칙에 따라 나중에 어떤 형식으로라도 되돌려 받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
이다. 그렇게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 했던 원래의 의도는 물거품이 되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알리는
비보를 듣자마자 군대를 일으켰던 불타는 복수심도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그리고 그는 죽을 때까지 두
번 다시 이 일을 구실 삼아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렇다면 조조는 ‘배알도 없는’ 불효자인 것일까?
아니면 ‘안 되면 할 수 없고’ 식의 흐리멍덩한 마음을 먹은 것일까?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좌절을 겪는다. 한 번 넘어졌다고 해서 두 번 다시 일어서지 못한다면 인생을 살
아갈 수 없다. 인류는 수천 년간 진화하면서 정신적인 충격을 받더라도 무의식중에 그 영향력을 제한하
고 망각하는 일종의 ‘심리 면역력’을 갖추게 되었다. 우리가 각종 실패를 딛고 일어설 수 있는 것도 바
로 이 심리 면역력 덕분이다. 다만 이는 매우 신속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대부분 인식하지 못한다. 미국
심리학자 티머시 윌슨과 대니얼 길버트는 이 같은 현상을 ‘심리 면역 망각’이라고 정의했다. 좌절을 겪
었을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빨리 적응하고 잘 극복해 내는 것은 이 현상 때문이다. 나쁜 기억을 잊는
것은 배알이 없거나 성격이 흐리멍덩하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선천적인 특성 때문이다.
심리 면역 망각은 사건의 종류나 그것을 겪는 개개인의 특질에 따라 차이가 난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
은 감옥에서도 밤하늘의 아름다움을 감상하지만, 어떤 사람은 호화 저택에 누워 있어도 인생의 무미건
조함을 불평할 수 있다. 또 같은 사람도 불의의 사고로 얻은 신체적 장애는 받아들이면서도 첫사랑의
상처는 평생 잊지 못하고 괴로워한다.
조조는 매우 강한 심리 면역력을 타고났다. 이 같은 선천적인 특질 덕분에 그는 모든 종류의 충격에서
쉽게 벗어났고 아무리 나쁜 일이 벌어져도 오랫동안 끙끙 앓지 않았다. 조조는 일생을 통틀어 수많은
실패를 겪었다. 죽을 고비에서 살아난 경우도 부지기수지만 단 한 번도 의기소침하거나 용기를 잃는
법이 없었다. 아버지를 잃은 슬픔은 어느새 저 멀리 사라져 버렸다. 조조는 다시 천하를 도모하는 데
온 신경을 집중했다.
한편 조조의 답장을 받은 서주는 모든 공을 유비에게 돌렸다. 편지 한 장으로 100만 대군을 물리쳤으
니 여간 큰 공이 아니었다. 도겸은 크게 기뻐했다. 서주를 유비에게 넘겨줄 기회가 다시 온 것이다. 저
번에는 유비가 아무런 공도 세우지 않아 거절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서주 백성들을 전
쟁으로부터 구해 냈으니 유비가 서주를 다스릴 이유는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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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이 조조에게 말하다 1
도겸은 확신에 찬 말투로 입을 열었다. “나는 이제 늙었고 두 자식은 능력이 모자라 큰일을 해낼 수 없
소. 현덕 공은 황실의 종친으로 덕과 재주가 뛰어나니 서주를 맡아 주시오. 이제 나도 관직에서 물러
나 조용히 살고 싶구려.”
그러나 유비는 또다시 사양했다. “저는 공융의 부탁으로 서주를 돕기 위해 온 것입니다. 모두 의를 위
한 것이지요. 그런데 만약 서주를 차지하게 되면 천하가 저를 불의한 자로 여길 것입니다.” 그러자 미
축이 말을 받았다. “지금 한나라는 무너지고 있습니다. 큰 뜻을 세우려면 지금만 한 때가 없지요. 서주
는 땅이 기름지고 백성의 수가 100만이 넘으니 이곳을 근거지로 삼아 힘을 키우시지요.” 미축은 실리
를 내세워 유비를 설득하려 했지만 의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유비가 실리의 유혹에 넘어갈 리
없었다. 유비는 고개를 힘껏 가로저었다.
이번에는 진등이 나섰다. “태수께서는 몸이 편찮아 더 이상 공무를 수행하기가 어렵습니다. 공께서는
거절하지 마십시오.” 진등은 도겸의 건강을 이유로 유비를 설득하려 들었지만 아쉽게도 거기에 그쳤다.
지금 유비는 ‘의’라는 글자에 손발이 묶여 있었다. 그를 풀어 주려면 더 큰 의를 가져다주는 수밖에 없
었다. 그것은 바로 국가적인 대의였다.
진등은 서주 태수가 되는 것이 나라를 위한 일이라는 데 초점을 맞춰야 했다. 백성들에 대한 책임을
들어 유비에게 용기가 없어 임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다며 ‘질책’했다면 유비는 내적 갈등이 풀리면서
요구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런데 진등의 말은 도겸 개인의 건강 상태에 머물러 있었으니 유비가 겪
고 있는 인지 부조화를 극복하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유비라고 먹음직스러운 고깃덩이가 결코 싫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리에 맞는 명분 없이 결코 손
댈 수 없는 것이 문제였다. 유비가 끝까지 고개를 젓자 도겸이 급기야 눈물을 흘리며 그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도겸의 눈물은 관우와 장비를 움직였다. 떠돌이 생활로 잔뼈가 굵은 유비, 관우, 장비는 이 풍
족한 서주를 그냥 넘겨주겠다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도겸이 처음 말을 꺼냈을 때 유비뿐만
아니라 관우와 장비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도겸과 그 부하들까지 유비에게 서주를 넘겨주어야 한다고 입을 모으자 그들
의 진심에 감동한 관우와 장비도 거들기 시작했다. 관우가 말했다. “태수께서 이렇게까지 간청하시니
형님께서 잠시 서주를 맡으시면 어떻겠습니까.” 훌륭한 타협안이었다. 먼저 대리 자격으로 서주를 다
스리다가 서서히 정식 태수로 자리를 잡는다면 유비도 한결 부담을 덜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유비가
채 대답하기도 전에 장비가 끼어들었다. “억지로 뺏는 것도 아니고 태수께서 스스로 넘겨주시겠다는데
사양할 건 뭐요?”
장비의 그 말이 유비를 벼랑 끝으로 몰았다. “너희들까지 이 형을 불의에 빠뜨리려고 하는구나! 그렇다
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 이렇게 말한 유비가 정말로 검을 뽑아 목숨을 끊으려 하자 좌중은 깜짝
놀라며 유비의 검을 빼앗았다. 서주를 넘겨주려는 두 번째 시도는 이렇게 끝나 버렸다. 도겸의 호의가
또다시 좌절된 까닭은 무엇일까?
우리는 누구나 일관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어 한다. 말과 행동, 처음과 끝이 일관되어야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사람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유비는 언제나 덕과 의를 앞세웠다. 그에게 인의란
자신의 대명사와 같았고 사람들의 머릿속에도 그 같은 이미지로 남아 있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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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이 조조에게 말하다 1
하는 관계이므로 유비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사회적 평가가 가져오는 구속력도 강해졌다.
그래서 도겸이 처음 말을 꺼냈을 때 거절했던 유비는 두 번째 역시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그가
서주를 차지한다면 처음의 거절은 위선이자 입바른 소리가 되어 버린다. 그렇게 되면 단번에 서주를
받아들인 것보다 훨씬 더 나쁜 평가를 받게 된다. 이런 계산이 서자 유비의 마음속에는 극단적인 인지
부조화가 발생한 것이다. 그런데 미축이나 진등, 공융 등은 하나같이 이 같은 인지 부조화를 극복하도
록 도와주지 못하고 오히려 기름을 부어 버린 꼴이 되었다. 그러니 유비가 설득당하지 않을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유비가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자 도겸은 어쩔 수 없이 청을 거두었다. 대신 근방의 소패에 머물며 서
주를 지켜 줄 것을 부탁했다. 도겸은 자신도 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효과적인 부탁하기 전략을 사
용한 셈이다. 어려운 부탁을 거절했을 경우 거절한 사람은 일정한 죄책감을 갖게 된다. 이것을 이용해
처음보다 조금 쉬운 부탁을 하면 이번에는 받아들여질 확률이 높다. 유비는 애초에 서주를 도우러 왔
던 일이 마무리되었으니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앞서 도겸의 성의를 두 차례나 거절한 그는 차마 고개
를 가로젓지 못하고 소패에 머물렀다.
PART 3 조조 리더십의 원칙
시대의 흐름에서 시대의 가치를 읽어라
지금 죽여야 하나? 아니면 살려 둘까? 지난날 자신의 목숨을 살려 준 은인이고, 의를 쫓아 관직을 버
리고 자신을 따른 첫 번째 수하였으며, 남다른 정을 주었기에 더욱 미워할 수밖에 없었던 진궁. 그런
그가 지금 온몸이 묶인 채 눈앞에 서 있었다. 그는 조조의 영웅심에 불을 붙인 최초의 사람이자, 조조
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긴 장본인이다. 그래서 조조는 언젠가 진궁에게 호되게 복수하리라 다짐해
왔다. 그런데 막상 진궁이 포박되어 끌려오자 조조의 마음속에는 미묘한 변화가 일었다. 승리자에게
자주 나타나는 일종의 우월 심리였다.
솔직히 조조는 진궁을 죽이고 싶지 않았다. 진궁이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지난날 그를 버리고 떠난 것
이 어리석은 행동이었다고 인정하기를 바랐다. 진심으로 조조의 넓은 아량에 호소하며 과거를 용서받
고 목숨을 바쳐 충성으로 보답하겠노라 사정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리하여 진궁에 의해 상처받은
자존심을 더 확실히 회복하고 더 큰 쾌감을 얻고 싶었다. 물론 진궁이 그렇게 한다면 조조는 그를 용
서하고 받아들여 중책을 맡길 생각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천하를 도모하는 데 필요한 인재를 얻는 것
은 물론 도량 있는 지도자로서 후광까지 더할 수 있었다. 그래서 조조는 진궁을 몰아세우지 않고 간단
한 안부 인사로 말문을 열었다. “공대는 그간 안녕하셨소?”
‘나를 떠나더니 잘 살았느냐? 보아하니 사정이 좋지는 않은 듯한데.’라고 빈정대듯 속이 빤히 보이는
말이다. 만약 조조가 정말로 넓은 도량을 보이려 했다면 진궁을 보자마자 직접 포박을 풀어 주고 상석
에 앉혀 예를 다해 그를 맞이해야 했다. 고집스럽고 자존심 강한 진궁이 조조의 조롱 섞인 말을 그냥
들어 넘길 리 없었다. 잡혀 올 때 이미 죽을 각오를 한 만큼 모욕은 절대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진궁
은 망설임 없이 입을 열었다.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해 너를 버리고 떠난 것이다.” 그러자 조조가 웃으며 말했다. “내 마음이 바르지
못하다면 그대는 왜 여포의 밑에 있었소?” 세상 사람의 눈에 비친 조조는 적어도 동탁 암살을 시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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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한나라를 살린 영웅이었다. 동탁을 죽인 진짜 영웅 여포는 오히려 의붓아버지를 죽인 비열한이었다.
그래서 조조는 ‘여포의 사람됨이 나보다 낫더냐.’라고 되물은 것이다. 진궁이 반박했다. “여포가 비록
지략이 없기는 하나 너처럼 간사하지는 않다.” 여기까지 들은 조조는 화제를 계속 이어 나갈 수 없었
다. 진궁을 계속 몰아세웠다가는 자신이 여백사 가족을 몰살한 과거사가 공개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조조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대는 스스로 지모가 깊은 사람이라고 하더니 오늘은 어째서 이렇게 잡
히셨소?” 대놓고 약을 올렸지만 진궁은 물러서지 않고 대꾸했다. “여포가 내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
다. 그가 내 말만 들었다면 오늘 이 자리에는 다른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진궁이 자신의 신세를 조금도 낙담하지 않자 조조는 ‘죽음’으로 겁주려 했다. “그럼 오늘의 일은 어떻
게 처리하면 좋겠소?” 이미 죽을 각오를 한 진궁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신하로서 불충하고 자식으로
서 불효했으니 죽어도 할 말이 없다.” 죽음도 두렵지 않은 수준에 오른 사람을 더 어떻게 할 수 있을
까? 하지만 제가 죽는 것에 담담하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죽음에도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이 점을 잘 아는 조조가 차갑게 물었다. “그대가 죽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대의 노모는 어떻게 하면 좋겠소?”
진궁은 여전히 차분하게 대꾸했다. “인으로 천하를 다스리는 자는 남의 대를 끊어 놓지 않는다고 했소.
내 아내와 자식의 생사 또한 명공께 달렸소이다.” 매우 훌륭한 대응이었다. 진궁은 가족을 들먹이며
겁을 주려는 조조에게 욕하며 대들지도, 또 구차하게 빌며 가족의 목숨을 구걸하지도 않았다. 더욱 중
요한 것은 조조가 가족의 안위를 빌미로 위협해도 진궁은 굴복하지 않고 더욱 차분하게 말을 했다는
점이다.
여기서 진궁이 사용한 작전은 ‘꼬리표 효과’다. 사회에 속한 개인은 사회 주류 가치관의 영향과 구속을
필연적으로 받게 된다. 당시는 비록 난세였지만 ‘충, 효, 인, 의, 예, 지, 신’의 주류 가치관이 여전히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가치관을 위반함으로써 막대한 물질적 이득을 얻을
수도 있지만 공개적으로 어기지는 않았다. 특히 조조처럼 천하를 도모하고 민심을 얻으려는 사람은 표
면적으로라도 이들 가치관을 따라야 인격적인 매력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일곱 가지는 일곱 개의 꼬리
표가 되어 사람들의 공개적인 행위를 구속하는 힘을 가졌던 것이다.
진궁은 권력과 힘을 가진 조조가 반드시 천하를 도모할 야심을 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효로 천
하를 다스리는 자는 다른 사람의 부모를 해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만약 조조가 진궁의 어머니를 죽
인다면 ‘효’라는 가치를 위배하게 된다. 그러면 사람들은 조조가 말로는 효로 천하를 다스린다고 하면
서 실제로는 전혀 다른 행동을 한다고 여길 것이다. 조조가 괜히 진궁의 어머니를 죽여 자신의 후광에
흠집을 낼 리 없었다.
그래서 진궁은 ‘내 어머니의 생사가 명공께 달렸다.’라고 했다. 겉으로는 조조에게 모든 권한을 넘긴
것 같지만 사실 ‘효’가 가지는 구속력 때문에 조조에게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처자식의 생사를 두고 ‘인’을 언급한 진궁은 역시 조조에게 또 다른 꼬리표를 붙여 준
것이다. ‘인’이 작용하는 한 조조는 진궁의 아내와 자식에게 나쁜 짓을 할 수 없었다. 결국 진궁은 ‘효’
와 ‘인’으로 그의 손발을 효과적으로 옭아맸다. 과연 조조는 이들 ‘꼬리표’가 시키는 대로 진궁의 어머
니와 아내, 자식을 모두 허도로 보내 돌보도록 했다. 진궁은 자신의 설득이 제대로 효과를 거두었음을
알고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죽음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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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싸움은 조조로서도 잃은 것이 없었다. 비록 진궁을 굴복시키지는 못했으나 적의 가족들을 우대함으
로써 자신의 명성에 한층 빛을 더했기 때문이다. 이 또한 조조의 일관된 자원 분배 및 운용의 원칙이
었다.
PART 4 조조의 위기관리 기술
때로는 적이 기회를 만들어 준다
‘유비 너도 재주가 좋지만 나도 보통은 아니다!’ 조조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의 손에는 두 장의
히든카드인 진등 부자가 있었다. 이들을 시켜 차주와 함께 유비를 처리하면 일은 의외로 쉽게 끝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조가 미처 깨닫지 못한 사실이 있었다. 바로 유비의 스파이 실력도 타의 추종을 불
허한다는 사실이다.
조조는 즉시 차주에게 밀서를 내려 상황을 설명하고 진등과 의논하라고 지시했다. 이야기를 들은 진등
은 깜짝 놀랐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차주에게 말했다. “유비를 죽이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장군께서는 군사들과 함께 성벽 안에 숨어 있다가 유비를 맞아들이는 척하면서 끌어들여 해
치우면 됩니다. 저는 성 위에서 화살을 쏘아 유비를 뒤따르는 자들을 쫓아 버리겠습니다.” 그 말을 들
은 차주는 크게 기뻐하며 진등의 말에 따랐다. 그러나 사실 진등은 유비의 사람이었다. 이 사실을 까
맣게 모르는 조조와 차주는 진등을 철석같이 믿었다.
진등은 아버지 진규에게 상황을 알린 다음 곧바로 유비에게 소식을 전하러 가다가 앞서 오던 관우와
장비를 만났다. 자초지종을 들은 장비가 당장 달려가 차주를 죽여 버리겠다며 펄쩍 뛰자 관우가 붙잡
으며 말했다. “차주가 이미 성안에 매복해 있을 것이다. 그를 죽이겠다고 들어간다면 함정에 빠지는 꼴
이 아니냐. 내 생각에는 이렇게 해야 할 것 같구나.”
관우의 작전은 이랬다. 자신의 군사들을 조조의 병사로 꾸며 승상이 보낸 지원군이라 속이고 성안으로
들어가 차주를 죽이는 것이다. 물론 이 작전은 유비에게 알리지 않는다는 전제가 따랐다. 유비의 성격
을 잘 아는 관우는 그가 결코 조조에게 정면으로 맞서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더구나 조조의 명을
받아 그의 군사를 거느리고 온 유비가 이런 식으로 조조를 배신한다면 도의적으로도 옳지 않은 일이었
다. 만약 유비가 알았다면 결코 작전대로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
진작부터 유비의 성격에 혀를 내두르던 장비도 기회가 있을 때 잡아야 한다며 얼른 찬성했다. 관우와
장비의 군사들은 원래 조조의 군사라 깃발이나 복색을 따로 준비할 필요가 없었다. 두 사람은 3경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조용히 군사를 이끌고 서주성 앞으로 갔다. 성문을 지키는 자가 누구냐고 묻자 관
우는 병사 하나를 시켜 승상의 장수인 장료의 군대라고 대답하게 했다.
장료는 조조의 휘하에 있는 장수 가운데 관우가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관우는 어째서 전
혀 안면이 없거나 싫어하던 장수 중 아무나 골라 대지 않았던 것일까? 여기에는 매우 흥미로운 심리적
현상이 숨어 있다. 얼른 거짓말을 만들어 내야 하는 긴박한 상황에서 우리는 반사적으로 우리에게 가
장 익숙한 정보를 내뱉는다.
한편, 보고를 받은 차주는 고개를 갸웃했다. 조금 전에 도착한 조조의 밀서에는 장료를 보낸다는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밤중에 군대를 끌고 와 문을 열라니 더더욱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만약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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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 장료라면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가 나중에 무슨 벌을 받을지 몰랐다. 섣불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던
차주는 무슨 일이든 진등과 상의하라는 조조의 말을 떠올렸다. 차주는 진등을 불렀다. 진등은 어서 문
을 열도록 차주를 부추겼지만 차주는 신중하게 움직였다. “밤이 깊어 분별하기 어려우니 날이 밝거든
다시 오시오!” 그러자 성 아래에서 다시 소리쳤다. “유비가 알까 두렵소. 어서 문을 여시오.” 그러나 차
주는 5경까지 기다렸다가 문을 열기로 했다. 5경이 되자 성 아래가 소란스러워졌다. 밤새 잠을 설친
차주는 갑옷 차림으로 무기를 들고 성 밖으로 나갔다.
“문원은 어디에 계시오?” 그는 서둘러 장료부터 만나 사정을 설명하고 간밤의 무례를 사과하고자 했다.
그런데 함성을 지르며 달려 나오는 장수는 장료가 아닌 관운장이었다. “이 하찮은 놈, 감히 우리 형님
을 죽이려 하다니!” 호통을 친 관우가 청룡도를 휘두르며 다가오자 놀란 차주는 그를 당해 내지 못하
고 몸을 돌려 성으로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성 위에서는 어느새 진등이 나타나 병사들을 지휘하며 화
살을 쏘아 댔다. 차주는 그제야 유비와 진등이 쳐 놓은 올가미에 걸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차주는
성을 돌아 도망가려 했지만 관우의 칼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서주에 들어간 관우와 진등은 군사들과 백성들을 안심시키고 사람을 보내 유비를 데려오도록 했다. 서
주를 차지할 생각은 했지만 이런 식의 작전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유비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
다. 차주의 머리를 본 유비가 무거운 얼굴로 말했다. “큰일이구나. 조조가 군대를 몰고 온다면 어찌한
단 말이냐?” 도겸 태수 시절, 조조가 직접 대군을 몰고 서주를 침공했을 때 벌어진 참상을 기억하는
유비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유비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황망한 가운
데 수하들을 모아 대책을 논의했다. 그때 진등이 말했다.
“조조는 원소를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원소는 기주, 청주, 병주, 유주 네 곳을 호랑이 굴로 삼고 있습
니다. 군사가 100만이고 거느린 문관과 무장도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와 손을 잡는다면 조조를
막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유비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나는 원소와 교분이 깊지 않을 뿐 아니라 얼마 전에는 그의 동생 원술을
죽였소. 그런데도 원소가 나를 도우려 하겠소?” 이 같은 질문을 예상하고 있던 진등이 대답했다. “이곳
에 환제 때 상서를 지낸 정현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원씨 가문과는 삼대에 걸쳐 교분이 두터우니 그분
께 부탁해 글을 얻는다면 원소는 반드시 주공을 도울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유비는 진등과 함께 정
현을 찾아가 원소에게 보낼 편지를 얻었다. 그렇다면 유비는 정현을 어떻게 설득했을까?
유비는 더 이상 예전의 빈주먹 무장이 아니었다. 만천하에 공인된 황숙이라는 신분이었다. 역적 조조
를 토벌하라는 천자의 밀서에도 이름을 올렸으므로 조조를 반역자로 몰아갈 충분한 근거도 갖추고 있
었다. 이렇게 국가적 대의를 내세우자 한나라의 신하인 정현은 당연히 유비를 도울 수밖에 없었다.
“역적 조조가 천자를 속이고 사직을 위험에 몰아넣어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소. 공이 유현덕을 도와 이
나라를 구한다면 그 옛날 이윤(상나라 재상으로 탕왕을 도와 하나라 걸왕을 치고 통일을 이루었음)이
탕왕을 돕고 주공(주나라 문왕의 아들이자 문왕의 동생. 무왕이 일찍 죽자 그의 어린 아들을 도와 나
라의 기틀을 마련했다. 공자를 비롯한 여러 위인들이 흠모했던 고대 중국의 최고 성인이다.)이 성왕을
도운 것과 다름없을 것이니 공의 이름도 역사에 길이 남아 영원히 빛나게 될 것이오.”
정현이 그 자리에서 이 같은 내용의 편지를 써 주자 유비는 무척 기뻤다. 즉시 손건에게 편지를 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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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냈지만 뜻밖에도 원소의 반응은 차가웠다. “유비는 내 아우를 죽였소. 지금 당장 달려가 복수하지 않
는 것만도 감사해야 할 일이거늘 감히 군사를 내어 달라고?”
손건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그는 정현의 편지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까워 변명하듯 입
을 열었다. “우리 주공이 원술을 해한 것은 조조의 명령 때문이었습니다.”
누가 들어도 억지스러운 변명이었다. 조조의 명령을 받아 원술을 죽이고, 조조의 군사로 서주를 빼앗
은 뒤 후환이 두려워 원술의 형에게 도움을 청한다는 건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 소리였다. 그러나
손건이 찾아와 변명을 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원소는 세력이 자신만 못한 조조가 단지 헌제를 차지
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손발을 묶어 놓았다고 생각했다. 만약 황숙 유비와 손을 잡는다면 조조를
역적으로 몰아 군사를 일으킬 수 있었다. 그리고 우선 조정을 장악했다가 기회를 봐서 황제의 자리를
빼앗을 수도 있었다. 여기까지 계산이 서자 원소는 동생의 원수를 갚을 생각을 버리고 유비와 동맹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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