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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 년 의 기 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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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 라 카 미 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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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의 기억] 프롤로그
이전부터 꼭 한번 써보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다. 살인 충동
을 느끼고 있는 남자와 자살 욕구를 지니고 있는 여자가 만
나면 어떻게 될까? 첫장부터 마지막 한 줄까지 긴박감이 지
속되는 사이코 스릴러를 쓰고 싶었다.
준비 단계에서 『아동 학대』(니시자와 사토시 지음)라는
책을 읽었다. 유아 학대 문제에 대해서, 지금까지는 사회
사업가적인 관점에서 쓴 책들밖에 읽어 보지 못했다. 그 때
문에 심리 치료 현장에서 냉정하게 관찰하고 과학적으로 분
석한 니시자와 씨의 책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실제로 나는 니시자와 씨가 몸 담고 있는 현장(오사카 부립
정신건강 종합센터)을 직접 찾아가 보기도 했다. 그곳에서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동안, 두 사람의 주인공은 ‘보통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 두 사람의 심
리 플롯은 누구나가 일으킬 수 있는 것으로 그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등장 인물들에 대해서 이만큼 겸허한 마음을 가져 본 게 처
음이다. 이 작품에 국한하지 않고 앞으로 소설을 쓸 때 중
요한 관점으로 작용하리라고 생각한다.
이 나라(일본)의 문화는 유아 학대로 상징되는 것들을 은폐
하려고 한다. 그와 같은 기능과 전통을 가지고 있는 게 바
로 이 나라의 문화다. 모든 미디어들이 경박한 정보를 마구
쏟아내고 있는 지금, 그 음지에서는 언어를 잃은 사람들이
신음소리를 토해 내고 있다. 그런 사람들의 절규와 속삭임
을 상상력의 힘으로 번역해 내는 게 작가의 임무라고 생각
한다.
이 소설은 겐토샤에서 두 번째 출간하는 신작이다. 한해에
소설을 두 권씩이나 쓰다니,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않을
것이다. 발표의 기회를 제공해 준 겐죠 토오루와 『5분 후
의 세계』에 이어서 철저하게 지원을 해준, 담당 이시하라
마사야스 군에게도 우정과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끝으로 여러 차례에 걸친 취재에 기꺼이 응해 주고, 자신의
이름을 주인공의 이름으로 쓸 수 있게 해준 치아키 양한테
진심으로 감사한다.
‘자신의 몸을 나이프로 찌르는 행위는 다시 하지 마세
요.’
[유년의 기억] 아이스 픽
유아용 침대 속에서 작은 생명체가 잠을 자고 있다. 그걸
보면서 가와시마 마사유키(川島昌之)는 직사각형의 사육 상
자 속에 들어 있는 실험 동물 같다고 생각했다. 다른 곳으
로 빛이 새지 않도록 펜라이트(만년필 모양의 회중 전등`─
`역주)를 손바닥으로 살짝 가렸다. 그리고 아기 주위만 비
추었다. 아기 쪽으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잘 자는군,
하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아내인 요코(陽子)가 임신을 했다. 그녀의 배가 자꾸만 불
러오자, 그제야 그도 자신의 아이가 태어난다는 사실을 실
감할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그 아이가 불면증에 걸리면
어떻게 하나, 하는 불안감에 휩싸이게 되었다. 가와시마 마
사유키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줄곧 불면증에 시달려 왔기 때
문에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 아기는 자
신의 피를 절반쯤 물려받았다.
갓 태어난 아기들은 거의 하루 종일 잠만 잔다고, 잠자는
게 일이라고, 언젠가 한 육아 평론가가 말했다. 그런데 그
런 녀석이 불면증에 시달려야 하다니, 세상에 이런 비극이
어디 있단 말인가.
가만히 뒤돌아서서 더블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요코의 숨소
리를 확인한다. 요코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 온다. 요
코는 이미 잠이 들었다. 요코가 잠이 든 다음에야 아기의
얼굴을 볼 수가 있다. 최근 들어서 이러한 날들이 계속되고
있다. 정확히 말해서 오늘로 열흘째이다. 요코는 하루 종일
일에 시달려서, 자정이 넘은 이 시간에는 눈을 뜨지 않는
다.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
는 불면증 따위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신체 건강한 스물아
홉 살의 요리 연구가이다. 전문적인 분야는 빵과 과자이다.
요코는 대형 제과 회사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결혼을 계기로
퇴직했다. 그리고 지금은 소형 아파트에서 이웃 사람들을
상대로 요리 교실을 열고 있다. 요코의 제과
교실은 대단한
인기를 얻고 있다. 여중생에서 주부까지 그리고 혼자 살고
있는 노인에서 중년 남성까지 몇십 명의 수강생들이 한꺼번
에 모여든다. 쉬는 날은 한달에 두 번뿐이다. 때문에 이 방
은 항상 빵 냄새로 가득 차 있다. 빵 냄새는 행복의 상징과
도 같다.
아기는 태어난 지 4개월밖에 되지 않았다. 리에(理惠)라는
이름은
요코의 어머니가 지어 주었다. 요코는 리에를 직접
키우고 있다. 요리 교실의 수강생은 대부분이 여자들이어서
요코가 아이를 돌볼 수 없는 시간에는 대신 봐주기도 한다.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펜라이트를 끄고 창가로 다가갔다. 커
튼 사이로 창백한 달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가느다랗고 희
미한 달빛이 유아용 침대 한가운데로 다가가서, 아기의 분
홍색 모포를 어루만졌다. 그리고 바로 그 옆에 걸려 있는
가와시마 마사유키의 코듀로이 바지 주머니 부분을 비추고
있다.
어렸을 때 달빛이 비친 방안에서 끝없이 펼쳐져 있는 오솔
길을 그리곤 했지…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손가락
끝이 닿지 않게끔 주의하면서, 바지 주머니에서 아이스 픽
(얼음 깨는 송곳`─`역주)을 꺼냈다. 오른손으로 아이스 픽
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그러고 나서 아기의 몸에 둘둘 말려
있는 모포를 왼손으로 살짝 걷어냈다. 아기의 몸통과 가슴
윗부분이 드러났다. 요코가 구운 빵을 연상케 했다. 아니,
빵의 속살보다도 훨씬 하얗고 부드러운 느낌을 주었다.
다시 펜라이트를 켜고 볼과 목덜미 근처를 비추었다. 방안
에 빵 냄새가 떠돌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냄
새가 갑자기 짙어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뭔가 다른
냄새도 뒤섞여 있는 것 같았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
마와 관자놀이 부근에서 땀이 배어 나왔다. 그리고 그 가운
데 한 방울이 아기의 몸을 감싸고 있는 모포 위로 툭 하고
떨어졌다.
벽면에 설치되어 있는 히터가 방 전체를 따뜻하게 해주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땀이 날 정도로 덥지는 않았
다. 아이스 픽의 끝부분이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다. 땀이
눈썹을 타고 눈끝으로 스며들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자신이 땀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땀을 흘리고 있다는 감
촉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땀이 자신의 형상을 모방한 인
형이나 자신을 빼닮은 타인의 몸에서 흘러 내리고 있는 것
같았다. 정말로 기분 나쁜 느낌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눈을 떴다. 바로 그때였다. 귀와 코, 그
리고 눈의 신경이 뒤엉킨 곳에서 뭔가가 탁 하고 튀었다.
그와 동시에 눋는 냄새가 강하게 풍겨 왔다. 털실이나 손톱
따위가 타는 냄새였다. 설마… 그가 혼자말처럼 중얼거렸
다. 언제나 그랬다. 땀을 흘린 다음에는, 이처럼 단백질 타
는 냄새가 뒤따르곤 했다. 그 뒤에는 심한 허탈감이 찾아들
었다.
그리고 끝내는 이유를 알 수 없는 통증이 엄습해 온다. 공
기를 구성하고 있는 입자들이 바늘로 바뀌어서, 온몸을 마
구 찌르는 듯했다. 마치 닭살이 돋듯이 근질근질한 통증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비명을
지른다. 공기의 입자들이 바늘로 바뀌어 가는 것을 실제로
본 적도 있다. 그때마다 시야가 뿌옇게 물들어 가곤 했다.
침착해야 돼… 마치 타이르듯이, 마사유키가 자기 자신한테
말했다. 침착해야 돼, 너는 괜찮아, 너는 요코나 아기를 절
대로 찌르지 않겠다고 맹세했으니까 괜찮다고… 손에 든 아
이스 픽을 꽉 움켜잡고, 갓난아기의 볼 근처로 가지고 간
다.
뾰족한 끝부분이 반짝반짝 빛난다. 이렇게 가늘고 긴 쇠막
대기를 볼 때마다 스스로에게 묻곤 한다. 무엇 때문에 이런
게 필요하지? 굳이 얼음을 깨야 한다면, 다른 도구를 이용
해도 되잖아? 이걸 발명하고 제조해서 다른 사람들한테 팔
고 있는 사람은 모른다. 이처럼 뾰족한 칼날을 볼 때마다
식은땀을 흘려야 하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갓난아기의 입술이 희미하게 움직이고 있다. 너무나도 작아
서 입술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복슬복슬하게 털이 난 벌
레 같다. 볼에 아주 가느다란 혈관들이 아로새겨져 있다.
그리고 붉은색 혈관 위를 솜털이 뒤덮고 있다. 가와시마 마
사유키는 솜털의 끝부분을 가만히 만져 본다. 그러고 나서
신중하게, 아이스 픽의 끝부분을 갖다 댄다.
봐, 괜찮잖아? 난 이 아기를 찌르지 않는다고… 바로 그 순
간, 등뒤에서 요코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와 동시에 그
의 손에서 아이스 픽이 스르르 미끄러져 내렸다.
「왜… 왜 그래요?」
가슴이 철렁하면서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아이스 픽의 끝
부분이 갓난아기의 볼에 살짝 닿았다. 펜라이트를 껐다. 그
는 아이스 픽을 쥔 손을 살짝 감추면서 몸을 틀었다. 그리
고 침대 위에서 상체를 절반쯤 일으켜 세운 요코에게로 다
가갔다. 그는 아이스 픽의 끝부분을 주의하면서, 그것을 바
지 주머니 속에 집어 넣었다.
「깨, 깼어? 미, 미안해.」
허리를 구부린 채, 요코의 볼에 가만히 키스를 하면서 그가
말했다.
「지금, 몇 시예요?」
「한 시 조금 지났어.」
「리에가 보고 싶어서요?」
「그, 그래… 그건 그렇고 잠을 깨워서 미안해. 자, 마음
놓고 자요. 피곤할 텐데.」
「아직도 일이 남았어요?」
「레이아웃은 대충 끝났어. 이제 포지티브(사진의 양화陽
畵. 양화용 필름)를 고르기만 하면 돼. 그것만 끝내면 프리
젠테이션(게시·설명.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이 이해하기
쉽게 눈으로 볼 수 있는 형태로 나타내는 것. 특히 광고 대
행업자가 광고주를 상대로 행하는 광고 계획의 제시나 설명
활동)이 즐거워지지.」
가와시마 마사유키가 말했다. 어느 틈엔지, 요코는 다시 깊
은 잠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후유,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화장실에 가거나 물을 마시기 위해
서 거실 쪽으로 걸어 나오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는데… 땀
을 닦는 데 정신이 나가 있었나 보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에 아이스 픽의 끝부분이 호주머니 속에서 빼꼼이 나와 있
었던 것이다.
[유년의 기억] 야경증
주방 서랍 속에 아이스 픽을 집어 넣고, 욕실에서 얼굴을
닦았다. 그런 다음에 거실 한쪽 구석에 놓여 있는 업무용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의자에 앉아서도 그의 가슴
은 좀처럼 안정이 되질 않았다. 목이 말랐지만, 아무것도
마시고 싶지 않았다.
이런 상태에 빠졌을 때는 절대로 술을 마셔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독한 술을 단번에 털어 넣었
다. 긴장을 풀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조금 지나자 스스로를 조절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는 의식을
잃을 때까지 계속해서 술을 마셨다. 그러는 동안 그의 머릿
속에는 아무런 생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심호흡을 하면서 거실을 둘러보았다. 거실은 두 사람의 작
업실로 이용하고 있다. 응접 세트 따윈 전혀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두꺼운 송판으로 만든 L자형 테이블이 공간의 절반
쯤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여덟 명에서 열 명의 수강생들
이 동시에 빵 만드는 실습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큰 테이블
이었다. 스웨덴제인 이 테이블을, 요코는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가와시마 마사유키가 저금한 돈을 털어서 결혼
선물로 사준 것이다.
이런 여자와 사귀고… 서로 종판하게 돼서, 결혼까지 하다
니… 정말로 믿어지지가 않아… 그는 줄곧 요코를 이런 식
으로 생각해 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동갑내기였다. 그들은
6년 전 초여름에 긴자에 있는 화랑에서 우연히 만났다. 그
곳에서는 니콜라 드 스탈이라는 망명 러시아인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었다. 수수한 추상 화가로, 일본에서는 그다지 유
명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 때문인지 토요일 오후였는데도
관객이라곤 그들 두 사람뿐이었다. 그때 요코 쪽에서 먼저
말을 걸어 왔다. 그림을 그리는 분이신가 보죠? 그 당시 가
와시마 마사유키는 B3 크기의 스케치북을 옆구리에 끼고 있
었다.
그림을 그리긴 하지만…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애매하게 대
답했다. 요코는 안경을 끼고 있었다. 우윳빛을 띤 안경테였
다.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걸 벗으면 더 아름답
게 보일 텐데 하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함께 화랑에서 나
왔다. 그리고 바깥이 환히 내다보이는 커피숍으로 들어갔
다.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에스프레소 커피를 더블로 주문했
다. 반면에 요코는 그 가게에서 특별히 만든 치즈 케이크와
애플 티를 주문했다.
블라인드 너머에서는 초여름의 햇살이 부드럽게 비쳐들고
있었다. 각각의 테이블 위에 놓인 유리 꽃병에는 난꽃이 한
송이씩 꽂혀 있다. 요코에게서 산뜻한 냄새가 풍겨 왔다.
향수와는 다른 무엇인가가 뒤섞인 냄새라고 생각했다. 그때
까지만 해도 빵이나 과자를 구운 냄새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 커피숍에 앉아 있다 보니까 마음이 아주 편했
다. 요코도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좋은 냄새라고 생각했는
지도 모른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거나 보기 싫은 놈과 함께
앉아 있었다면 어떤 냄새가 됐든 싫은 느낌을 가졌을 것이
다.
천천히 치즈 케이크를 먹으면서, 요코가 가와시마 마사유키
의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치즈 케이크 부스러기가 그림 위
에 떨어졌다. 냅킨을 이용해서, 요코가 그것을 조심스럽게
닦아냈다. 그런 요코의 행동을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즐거운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일주일에 한 번 꼴로
만났다. 그때마다 그들은 식사를 하거나 미술관이라든가 극
장 따윌 찾았다. 가와시마 마사유키가 그래픽 디자인 사무
실에서 일하고 있을 때였다. 그는 회사 일과는 상관없이 혼
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때는 달빛에 드러난 오솔길
을 그리는 것 말고는 달리 그리고 싶은 것이 없었다.
그런데 여름이 끝나 가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요코의 얼
굴을 떠올리면서 연필로 데생을 해보았다. 며칠 뒤 저녁 무
렵에 두 사람은 데이트를 했고 그는 데생한 그림을 요코에
게 선물했다. 그날 밤, 요코는 자기가 살고 있는 아파트로
가와시마 마사유키를 초대했다. 그리고 심각한 표정으로 한
가지 사실을 고백했다. 1년 전만 해도 요코는 같은 회사에
서 근무하던 연상의 남자와 사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결국엔 헤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날 요코는 몇십 알이
나 되는 독한 수면제를 삼켜 버렸다고 한다. 이런 여자예
요, 저는… 그러면서 그녀는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상관없다고 대답했다. 그땐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누구나 그런 경험을 가지고 있죠.
죽고 싶다거나 실제로 죽으려고 한 적이 있어요… 이렇게
말했다.
오래지 않아서 두 사람은 함께 살기로 했다. 동거를 시작한
지 6개월쯤 지났을까. 날씨가 몹시 추운 어느 날 밤이었다.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섰다. 담요가 흥건
해질 정도로 엄청난 양의 땀을 흘리고 있었다. 왜 그래
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요코가 물었다. 가와시마 마사
유키는 잠깐 산보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옷을 갈아입
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두 시간쯤 이곳저곳을 돌아다녔
다.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이따금 이런 일이 생기곤 했
다.
아파트로 돌아와서,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지금까지 아무한
테도 이야기한 적이 없는 사실들을 털어놓았다. 어른이 된
다음에 온갖 종류의 책을 사서 읽기도 하고 조사도 해보았
다. 밤, 에, 깜짝 놀란다… 이렇게 쓰여 있었다. 야경증(夜
驚症)인 것 같았다. 어렸을 때는 이보다도 훨씬 더 심했다.
한밤중에 벌떡 일어나서 엉엉 울거나 마구 소리를 질러댔
다. 정신없이 뛰어다닌 적도 있다. 그런데도 어느 것 하나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때마다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를 정
도로 극심한 공포감이 찾아들었다. 그 같은 상태에서 발작
이 2,`3분 동안 계속되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
지도 알 수가 없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꿈속으로 녹아 들어와 버린 게 아닐
까… 그들이 모두 꿈속의 등장 인물들로 바뀌어 버린 적도
있었다. 그것은 정말로 무서운 일이었다. 어른이 되자 조금
나아진 것 같았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를 정도의 상
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조금 전만 해도 그랬다. 자기한테
말을 건 사람이 요코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까지 이야기했을 때 요코가 물었다. 그런데 왜 혼자 나
갔다 왔어요, 차라리 내 품에 안기지… 자신을 조절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혼자 걷거나 심호흡을 하는 쪽이 좋아…
가와시마 마사유키가 대답했다. 그는 열아홉 살 무렵에 어
떤 여자를 아이스 픽으로 찌른 적이 있다. 그 같은 기억을
제외하고, 그는 지금까지 비밀스럽게 지켜 온 과거의 일부
를 요코에게 털어놓기로 했다. 그 여자와 아이스 픽에 대해
서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것은, 그 사건 자체가 가슴속에서
대단히 애매한 형태로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
니라 그 같은 사실을 알게 되면, 요코가 깜짝 놀라서 떠나
가 버릴 것만 같았다.
직접적인 원인은 야경증에 있다. 하지만 네 살 때 아버지가
죽고 나서 어머니가 그를 마구 때리기 시작한 데서도 원인
을 찾을 수 있다. 정말이지 어머니는 무자비하게 때렸다.
아버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억도 남아 있지 않다. 오직 드
라이브를 할 때 가족들이 함께 있었다는 느낌이 들 뿐이다.
어머니의 말을 빌면, 돈도 변변하게 벌어 오지 못한 아버지
가 차를 샀던 모양이다. 어머니는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때가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그때도 어
머니는 그에게 그 인간을 빼닮은 놈이라고 말했다. 그 인간
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아버지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사진
을 들여다보면, 동생이 더 닮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문제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는 두들겨 맞는 게
너무나도 싫었다. 아프기도 하고 무서웠다. 그럼에도 자기
가 나쁜 놈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정말이지 참을
수가 없었다. 언제부터였을까. 그는 두들겨 맞고 있는 게
자신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무리 맞아도 아프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런지 정말로 아프지가 않았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얻어맞을
때는 그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그때마다 깜박 잊고 있
었던 공포감이 찾아들었다. 어머니가 나를 때린다, 어머니
가 나를 때린다… 그는 항상 스스로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면
서 마음의 준비를 하곤 했다. 그런데 정말로 싫은 게 한 가
지 있었다. 자기만 항상 두들겨 맞는다는 것이었다. 동생은
한번도 매를 맞은 적이 없었다.
그의 집은 가나가와와 시즈오카의 접경 지역에 자리하고 있
었다. 아주 조그만 동네였다. 그곳에서 오다와라 쪽으로 걸
어 나오면 백화점을 볼 수가 있었다. 백화점 옥상에는 놀이
터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가 초등학교에 들어간 다음부터,
어머니는 동생만을 데리고 백화점을 찾곤 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방문에 자물쇠를 채웠다. 한번은 창문을 통해서
밖으로 빠져 나왔다. 그리고 집앞에 난 오솔길을 따라서 뒤
쫓아간 일도 있었다. 그는 어머니한테 붙잡혀서 질질 끌려
왔다. 그리고 목욕탕에 있는 수도 파이프에 꽁꽁 묶였다.
그 일은 지금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곳에서 그는 잠
이 들어 버렸다. 문득 눈을 떴다. 주변이 깜깜했다. 창문
너머로 오솔길이 보였다. 초등학교 선생님의 소개로 그는
어떤 아동 보호 시설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곳에 수용된 다
음부터, 그는 줄곧 깜깜한 오솔길만을 그리곤 했다. 여기까
지 이야기하고 나서, 마지막으로 그가 한마디 덧붙였다. 이
런 얘길 다른 사람한테 털어놓기는 처음이라고… 이야기가
계속되는 동안, 요코는 가와시마 마사유키의 손을 꼭 쥐고
있었다.
만난 지 1년 8개월 만에 두 사람은 결혼을 했다. 요코는 그
녀의 부모를 설득하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자신들의 가치
관에 기초해서, 결혼식은 올리지 않기로 했다고… 가와시마
마사유키가 그의 어머니와 동생을 용서하지 않고 있었기 때
문이다. 그녀는 그 같은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
다.
아동 보호 시설에서 2년쯤 보낸 뒤, 그는 할머니한테 맡겨
졌다. 그리고 그곳에서 학교엘 다녔다. 고등학교를 졸업했
을 때, 어찌된 영문인지 어머니가 그에게 사과의 뜻을 전해
왔다. 변명에 가까운 말이었지만, 아무튼 사과를 했다. 엄
마를 용서해 주겠지? 하고 물었다. 그는 아무런 뜻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 먹고, 어머니를
마구 두들겨 팼다. 어머니를 때린 건 그때뿐이었다.
결혼을 계기로 요코가 회사를 그만두기로 했을 때도 가와시
마 마사유키는 반대하지 않았다. 요코가 하고 싶은 게 있으
면, 무엇이 됐든 간에 모두 인정하겠다고 마음먹었기 때문
이다. 그래서 아이를 갖고 싶다고 했을 때도 반대하지 않았
다. 가와시마 씨, 결혼을 하더니 딴 사람이 되어 버렸어?
회사 사람들이 이렇게 놀려댄 적도 있었다. 요코 씨가 만든
빵 속에 사람의 성격을 밝게 하는 약이 들어 있는 거 아냐,
이거?
하지만 본인의 입장에서 볼 때는 정말로 달라졌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알 수가 없었다. 단지 한가지 사실만은 분명한 것
같았다. 요코를 사귄 다음부터, 자기 자신을 싫게 생각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요코가 결혼하자는 이야기를 한 다음부
터 특히 그랬다. 갓 태어난 리에를 맨 처음 안아 보았을 때
도, 아니 10여 일 전날 밤까지만 해도 참을 수 없는 불안과
공포감은 찾아들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항상 누군가가 옆에 있어야 했다. 그렇지 않
고 혼자 있을 때면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러면서도 그 누군
가가 자기한테 지나칠 정도로 가까이 다가오면 무서워지는
것이었다. 그보다 더 가까이 다가오면 자신이 무슨 짓을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혼자 있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
던 것이다.
그래 그날 밤이었어…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중얼거렸다. 그
는 업무용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라이트 박스의 스위치를 켰
다. 그리고 도서관에서 빌려 온 35밀리미터짜리 포지티브
필름들을 라이트 박스 위에 늘어 놓았다. 요코하마 시가 주
최하는 재즈 페스티벌의 포스터에 쓸 사진들이었다.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재즈 포스터를 만드는 경우에도, 재즈
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그래픽을 이용하려고 했다. 큐슈에
맨 처음 인공 눈 스키장이 만들어졌을 때도 그랬다. 그때
그는 7,`8세짜리 외국 소년 소녀가 뽀뽀하고 있는 사진을
이용해서, 다른 광고 대행업자와 경쟁을 벌였다. 그리고 그
경쟁 프리젠테이션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 결과 회사 내에
서도 크게 인정을 받게 되었다.
재즈 페스티벌의 포스터를 만들기 위해서 그는 여러 가지
사진들을 모았다. 1940년대의 패션 모델이 포즈를 취하고
있는 흑백 사진들이었다. 모델이 해변에 엎드려 있거나 풀
장에 뛰어드는 사진도 있었고, 양산을 쓰고 아스팔트 위를
걷거나 테라스에서 칵테일을 마시는 사진도 있었다. 모든
사진들 속에는 건강해 보이는 여자들이 미소를 머금고 있었
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날 밤,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갓난아기를 데리고 욕실로
갔다. 목욕을 시키고 나자, 수건을 준비해 온 요코가 아기
를 건네받았다. 요코가 뭐라고 끊임없이 속삭이면서 아기의
몸을 닦아 주었다.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욕조에 몸을 담근
채 10센티미터쯤 열려 있는 젖빛 유리 사이로 그 같은 모습
을 지켜보고 있었다. 요코와 갓난아기의 모습을 지켜보는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때 갑자기 그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그와 동
시에 얼굴 근육이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설마… 내가 저
아기를 아이스 픽으로 찌르려는 건 아니겠지? 순간, 따뜻한
물 속에 몸을 담그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
다. 요코가 갓난아기를 껴안은 채 유리문을 열고 뭐라고 이
야기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왜, 왜 그래요, 마사유키… 무슨 일 있어요? 요코가 큰소리
로 물었다. 응? 요코가 저기에 있었나? 깜박 넋이 나가 있
었던 모양이군…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두 사람을 쳐다본
순간, 욕조 속에 들어 있던 발끝에서 소름이 돋기 시작했
다. 그리고 그것은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그날 밤 이후 아이스 픽의 끝부분이 눈앞에서 쉴새없이 어
른거리기 시작했다. 절대로 그런 짓은 하지 않아… 나는 그
런 짓을 하지 않는다고… 몇백 번이고 다짐을 해보았다. 하
지만 그의 가슴 속에서는 찌를지도 모른다는 목소리가 끝없
이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그날 밤부터 그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이스 픽을 들고 침실로 갔다. 난 갓난아기를 찌르지
않아… 이런 사실을 확인하지 않고서는 잠자리에 들 수가
없었다.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라이트 박스의 스위치를 끄고 업무용
책상 앞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스웨터 위에 가죽 점퍼를 걸
쳤다.
[유년의 기억] 또 다른 자신
그의 집은 4층짜리 맨션의 2층에 위치하고 있었다. 소리가
나지 않게 출입문을 닫고 나서, 열쇠를 채웠다. 출입문이
단단히 잠겼는지, 몇 번이고 확인을 했다. 그런 다음에야
계단을 내려왔다. 이 건물에는 관리인실이 따로 없었다. 출
입구 유리창에는 비밀 번호나 각각의 집에서 인터폰으로 열
수 있는 자동 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물론 안쪽에는 ‘미
시오’라는 글씨가 쓰여 있다. 이 센서에 손을 대기만 하면
출입문이 자동적으로 열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 경우에는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들어오려는 사람
한테 주의하라는 메시지가 전달된다. 그 동안 배달부를 가
장한 강도 사건이 한 건 있었다. 출입문 옆에는 어린애들
짓이라고 생각되는 스프레이 낙서가 있었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버튼은 바깥쪽에 있는데, 누군가가 라이터 불로 태운
흔적이 남아 있었다.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가죽 점퍼의 지퍼를 위쪽으로 끌어 올
렸다. 정말이지 추운 건 못 참겠어… 털이 달린 옷깃을 세
우면서 그가 중얼거렸다. 방안에 히터를 가동시키고 있어서
그런지, 몸의 윤곽이 애매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요코가
눈을 뜨긴 했지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눈치채지 못
한 것 같았다. 그래서 잠시나마 갓난아기가 잠들어 있는 방
에서 빠져나와, 고쿠분지 기타구치의 주택가를 걷고 있었던
것이다. 동네를 걷다 보니까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졌다. 인
적 없는 길을 걸으면서 노이로제가 틀림없어, 하고 작은 소
리로 중얼거렸다.
갓난아기를 찌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그는 잔뜩 겁
을 집어먹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실제로 찌르고 싶은 것
은 아니었다. 단지 그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
문에 불안감에 휩싸여 있을 따름이었다. 자신의 아이를 찌
른다는 극단적인 경우만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가령 결혼
식에서 사회자로 나섰다가 말을 더듬는다거나 말문이 막혀
서 웃음거리라도 된다면… 전철에서 마주친 눈길이 이상한
남자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뒤를 밟고, 아파트 주위를 배
회하기라도 한다면… 그가 상상할 수 있는 불안의 요소들이
주변에 얼마든지 나뒹굴고 있었던 것이다.
보통 사람 같으면 다른 사람과 상의해서 마음을 달랜다거
나, 구체적인 행동으로 불안의 요소들을 제거해 나갈 것이
다. 그래서 아주 간단하게 자유를 되찾을 수가 있는 것이
다. 보통 사람 같으면….
가와시마 마사유키가 살고 있는 맨션 옆 건물 1층에는 비디
오 대여점이 자리하고 있었다. 요코는 수업이 끝나면 식사
를 하거나 목욕을 했다. 그런 다음에 와인이나 맥주를 마시
면서, 비디오 영화를 보는 게 취미였다. 해산일이 가까워진
어느 날, 두 사람은 『싸늘한 미소』라는 영화를 보았다.
그런데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아이스 픽으로 살인을 하는 장
면이 나왔다.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어디론가 도망쳐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태교에는 좋지 않지만 정말로 재미있는 영
화예요… 하고 말하는 요코의 객관적인 태도에 힘입어서 마
지막 장면까지 볼 수가 있었다. 갓난아기를 찌를지도 모른
다는 상상에 시달리기 시작한 지도 꽤나 오래 되었다.
그런데 요코에 대해서만은 그 같은 일이 한 번도 발생하지
않았다. 어째서 요코를 찌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생겨
나지 않는 것일까. 정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싸늘한 미
소』라는 영화를 보았을 때가 생각났다. 바로 거기에 답이
있었다. 이야기하는 게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저런 건 모두 잊어 버리라는 뉘앙스를 풍기지도 않았다. 가
엾다는 태도를 보이지도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문
제점들에 대해서 일부러 피해 가려고 하지도 않았다.
「완치되지 않는 병을 앓고 있는 경우, 초조해 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난대요. 그러니까 마음 편하게 지내야 해요.」
「어른이 되면 어째서 그렇게 쉽게 잊어 버리는지 몰라. 어
렸을 때 자신이 얼마나 무력하고 약한 존재였는가 하는 점
을 말예요.」 「애를 낳아 보니까, 알 것도 같아요. 정말로
어린애가 귀찮은 존재라는 걸 말예요. 당신 어머니도 마찬
가지였을 거예요.」 요코는 늘 이렇게 이야기함으로써 가와
시마 마사유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싸늘한 미
소』의 첫 장면을 보고, 그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후반부
에 아이스 픽이 등장했을 때는 오히려 영화를 즐기고 있었
다.
비디오 대여점이 들어 있는 바로 옆 건물에는 서점이 자리
하고 있었다.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서 뭔가가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건물과 건물 사이라고는 하
지만, 어른 한 사람이 가까스로 지나갈 수 있는 너비밖에
되지 않았다. 그 안쪽에는 또 다른 건물이 들어서 있어서
매우 어둡게 느껴졌다.
하지만 분명히 뭔가가 보였다. 사람의 그림자가 틀림없었
다. 키 크기로 볼 때 어린아이임이 분명했다. 가와시마 마
사유키가 멈춰 서서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주의를 하고
있는 것일까. 세 개의 작은 그림자는 옴짝달싹 않고 있었
다. 잘 해야 초등학교 3,`4학년일 것 같았다. 가와시마 마
사유키는 소리를 지른다거나 가까이 다가가서 들여다볼 생
각 따윈 하고 있지 않았다. 설령 열 살이 되었다고 해도,
어린애들은 모두 위험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
다. 그는 발길을 돌리려고 했다. 그때였다. 뭔가 가느다란
빛이 움직였다.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는 붉은빛이었다. 연기가 나지 않는
걸로 봐서, 담뱃불은 아닌 것 같았다. 작은 동물의 눈빛일
거야… 그는 제멋대로 상상했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는 생
고무로 만든 용기가 비치되어 있었다. 또한 작은 배수구도
만들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주위에는 웅덩이가 있었다. 아
마도 아이들이 그 틈새에서 죽은 쥐를 가지고 놀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동 보호 시설에 수용되어 있을 때였다. 그곳에 동갑내기
인 다쿠라는 아이가 있었다. 어느 날, 그곳에서 기르고 있
는 토끼가 새끼를 낳았다. 그리고 다쿠가 그 중 한 마리를
돌보게 되었다. 다쿠는 어느 누구보다도 새끼 토끼를 귀여
워했다. 밤에 새끼 토끼를 껴안고 함께 자겠다면서 떼를 쓰
기도 했다. 그 바람에 그곳에서 일하고 있는 직원이 곤경에
처한 적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가와시마 마사유키의 눈앞에서 끔찍
한 사건이 벌어졌다. 새끼 토끼를 쓰다듬으면서 놀고 있던
다쿠가 여리디 여린 새끼 토끼의 귀를 붙잡고 자리에서 벌
떡 일어섰다. 그러고는 콘크리트 바닥에다가 새끼 토끼를
그대로 내동댕이쳐 버렸다. 가늘고 딱딱한 것이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새끼 토끼는 단번에 죽지 않았다. 마치 나사
가 부러진 장난감과 같이 토끼 새끼가 바둥거리면서 도망치
려고 했다.
하지만 다쿠는 새끼 토끼의 목덜미를 쓰다듬고 있던 때와
똑같은 표정으로, 그것의 머리를 몇 번이고 짓밟았다. 그런
다음에 새끼 토끼가 처음부터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흐물흐물해진 사체를 무
시해 버리는 것이었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다쿠는 다른 새끼 토끼를 보살피기 시작
했다.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다쿠와 함께 그림을 그리곤 했지만,
그애가 그리는 그림은 언제나 똑같았다. 검정색이나 어두운
자주색, 또는 청색으로 덧칠한 도화지 한가운데에 발가벗은
아이가 홀로 서 있었다. 그런데 그 아이의 몸에는 이곳저곳
에서 날아온 수십 개의 화살이 박혀 있었다. 이게 누구야?
선생님이 물었다.
「저요.」
다쿠가 대답했다.
「아닌 것 같은데? 다쿠가 아니라면 이게 누굴까?」
선생님이 다시 물었다.
「제가 아니라면, 누가 됐든지 상관이 없어요.」
다쿠가 대답했다.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24시간 영업을 하는 편의점 쪽으로 곧
장 걸어갔다. 입김이 희면서도 탁했다. 호흡이 불규칙하다
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맥박이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마음의 평온을 찾기 위해서 그는 천천히 걸었
다. 그 때문인지 포장 도로 표면에 남아 있는 냉기가 구두
밑창을 통해서 발바닥으로 전달되어 왔다.
길 건너편에 있는 콘크리트 건물이 눈에 띄었다. 건물 벽면
곳곳에 금이 가 있었다. 그 건물 3층 귀퉁이에 있는 방이
시야에 들어왔다. 창가에서 단발머리를 한 여자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난방 때문에 뿌옇게 김이 서린 유리창을 소
매로 닦으면서, 건물 아래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독신 여
성에게만 입주권이 주어지는 원룸 맨션인 것 같았다. 역광
때문에 그 여자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가 않았다. 하지만
담배를 피우고 있는 자세와 헤어 스타일로 보건대 나이든
여자가 분명했다. 삼십대 후반일 거야… 메마른 피부에 핏
줄과 주름살이 두드러져 보이는 손… 그녀의 손등과 손가락
이 가와시마 마사유키의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마른 잎과
같은 손… 박하향이 나는, 가늘고 긴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연기를 내뿜고 있는 삼십대 후반의 여자… 가와시
마 마사유키가 그 여자를 만난 게 열일곱 살 때였다.
그리고 2년 가까이 그 여자와 함께 살았다. 열아홉 살이나
나이 차이가 났던 까닭에 이따금 어머니로 착각하기도 했
다. 그 여자는 어머니나 다를 바가 없었음에도, 부자연스러
운 웃음을 머금으면서 애교스럽게 행동했다. 하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그 여자는 본색을 드러내고야 말았다. 몇 시간
씩이나 욕설을 퍼부어댔던 것이다.
가와시마 마사유키를 만날 때까지만 해도 그 여자는 고탄다
에 있는 카바레에서 일했다. 그런데 2년 동안에 무려 15차
례나 가게를 바꾸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손님을 아파트로
끌고 오는 경우가 많았다. 입을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할 정
도로 취한 그 여자가 가와시마 마사유키의 눈앞에서 손님과
시시덕거리는 일도 있었다. 그때 저 젊은 남자는 누구야?
하고 손님이 물으면 그녀는 동생, 하고 대답했다. 손님이
돌아간 다음에는 반드시 가와시마 마사유키를 두들겨 팼다.
이성을 잃었던 것이다.
넌 나를 좋아하지 않아. 나를 좋아한다면, 저런 놈이 이런
짓을 하게 내버려두지는 않았을 거야. 내 말이 틀렸니? 넌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잖아? 저런 놈은 두들겨 패서 죽여
버려야 하는 거 아냐? 이렇게 큰소리로 외쳐대면서 그를 마
구 두들겨 패는 것이었다. 손님과 싸움을 벌이고 나서, 그
책임을 그에게 물은 적도 많았다. 그때마다 그 여자는 나를
가게에서 일할 수 없게 만들 작정이냐고 하면서 두들겨 패
곤 했다. 지쳐 쓰러져 잠들 때까지, 그 여자의 히스테리는
멈출 줄을 몰랐다.
정말로 정나미가 떨어지는 여자였어…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렇게 밥맛 없는 여자가 세상에
또 있을까? 이런 여자는 어느 누구도 좋아하지 않을 거야.
그렇기 때문에 나를 버리는 일도 없을 거야. 그 여자를 아
이스 픽으로 찔렀던 날 밤의 기억은 부분적으로 아주 애매
하게 남아 있다.
그날,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한밤중에야 아파트로 돌아올 수
있었다. 친구와 함께 톨루엔(탄화 수소의 일종. 무색의 가
연성 액체로 폭약·향료·의약품·합성 수지 등의 원료)을
마시고 돌아왔기 때문에 의식이 몽롱한 상태였다. 방 한가
운데서 석유 난로가 불꽃을 태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서는 냄비가 끓고 있었다. 그 여자도 금방 돌아온 것 같았
다.
그 여자는 거울 앞에 앉아서 화장을 지우고 있었다. 껴안으
려고 했지만 그 여자가 손을 뿌리쳤다. 단지 손을 뿌리친
것이 아니라 「만지지 마!」 하고 소리까지 질러댔다. 여느
때와는 달리 말투와 태도가 너무나도 차가웠기 때문에 무서
운 느낌이 들었다. 등뒤에서 다시 한번 껴안으려고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손을 홱 뿌리치면서 거부했다. 톨루엔 냄
새가 싫다는 것이었다.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자신이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여자는 잔뜩 화가 나 있었다. 그런데 화를 내면서도 때
리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스스로 벌을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여자는 어디론가 가버릴 것이다. 가와시마 마사
유키는 그렇게 생각했다. 갑자기 그가 펄펄 끓고 있는 냄비
속에다가 오른손을 집어 넣었다. 그러고는 그 여자한테 빨
갛게 짓무른 손을 보여 주려고 했다.
미친 놈… 그 여자가 말했다. 그러고는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목욕을 한 다음에 그 여자는 외출을 할 것
이다. 그리고 한동안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는 잔뜩 위축된 상태에서 그 여자를 기다리지 않을 수가
없다. 그 여자를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 여자
가 욕실에서 나오기 전에 뭔가를 해야 한다. 바로 그때였
다.
눈과 코, 귀신경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뭔가가 탁 하고 튀었
다. 그와 동시에 손톱이나 털실 같은 게 타는 냄새가 났다.
다음 순간, 아이스 픽의 끝부분이 샤워를 하고 있는 여자의
뱃속으로 소리도 없이 빨려 들어갔다. 정말로 아무런 저항
도 없이 아이스 픽이 여자의 새하얀 뱃속에 처박혔다. 마치
스펀지에 핀을 쑤셔 넣는 것 같았다. 아이스 픽을 빼내자,
작고 둥근 구멍에서 검붉은 피가 솟구쳤다. 그때 화상입은
손에 들고 있던 아이스 픽을 떨어뜨렸는지도 모른다. 그 부
분에서 기억이 확실치가 않았다.
경찰들이 달려왔는지 그렇지 않은지도 확실치가 않았다. 아
이스 픽은 분명히 욕실 타일 위에 떨어져 있었다… 욕조 아
래쪽 타일 틈새에서 나뒹굴고 있는 아이스 픽… 이런 꿈을
몇백 번씩이나 꾸었다. 타일 위에 납작 엎드린다… 그리고
아이스 픽을 찾기 위해서 오른손을 집어 넣는다… 화상 입
은 부분이 가스 불꽃에 그을린다… 비명을 지르면서 팔을
빼낸다… 이런 꿈도 자주 꾸었다. 가위 눌려 눈을 떴을 때
실제로 오른손이 화끈거린 적도 있었다.
여자는 경찰들한테 사실대로 이야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
와시마 마사유키는 사실 확인조차 받지 않았다. 퇴원한 다
음에도 그 여자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가와시마 마사
유키는 자진해서 아파트를 나왔다. 그 뒤로도 몇 번인가 아
파트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여자는 만나 주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어디론가 이사를 해버
렸다. 지금도 그 아파트 욕조 밑에서는 아이스 픽이 나뒹굴
고 있는 게 아닐까…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생각한다. 그 점
을 확인하기 위해서 언젠가는 그 아파트엘 찾아가 봐야 한
다고….
24시간 편의점의 출입문을 밀치는 순간, 가와시마 마사유키
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열아홉 살이나 많은 여자를 생각
하면서 돌아다니는 동안 맥박이 정상으로 되돌아와 있었던
것이다. 이게 어찌된 일일까… 이렇게 생각하면서 그는 가
게 안으로 들어갔다. 히터가 따뜻한 바람을 뿜어내고 있었
다. 온몸이 따뜻한 공기에 휩싸였다. 그 순간, 몸의 윤곽과
경계선이 애매해졌다. 그는 두세 발짝 걸어가서 바구니를
집어 들었다. 그때 왼쪽 카운터 앞에 서 있던 점원이 가와
시마 마사유키 뒤에 들어온 손님한테 어서 오세요,라고 말
했다. 두 명의 젊은이였다. 그들은 어이 추워, 어이 추워
하면서 팔짱을 낀 채 잡지 코너 쪽으로 걸어갔다.
점원이 두 명의 손님한테서 곧장 시선을 거두어 갔다. 단지
그뿐이었다. 그런데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이상한 감각에 사
로잡혀 있었다. 정말로 내가 이곳에 존재하고 있는 걸까…
영혼이 어찌되었다는 게 아니다. 몸에서 떨어져 나온 자기
자신이 가까운 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듯한 감각이었다. 어
려서 경험한 일이 생각났다. 어머니한테 실컷 두들겨 맞고
있을 때였다. 그는 고통과 공포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지금 얻어맞고 있는 게 실제로는 자기 자신이 아니
라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아프지 않다… 이렇게 강하
게 부정했다. 스스로 그렇게 믿게끔 훈련도 했다. 그가 아
프다는 말도 않고 울지도 않자, 어머니는 더욱더 세차게 때
렸다. 이건 내가 아냐… 강하게 부정하니까 정말로 아프지
않았다. 통증을 마비시킬 수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너무 멀리 쫓아 보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
게 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
서 그는, 가까운 곳에서 기다려… 금세 다시 만나야 하니
까…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반드시 그런 흔적이 남아 있을 거야… 이렇게 생각하면서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몇 미터 앞에 있는 진열대 쪽으로 걸
어갔다. 진열대 가장 위쪽에는 일회용 기저귀 세트가 진열
되어 있었다. 그는 그것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언젠가 요코가 이렇게 이야기한 적이 있다. 일회용 기저귀
는 아무리 많아도 상관없어요… 그래, 저걸 사 가는 거야…
그는 결심했다. 바로 그때였다. 어떤 뚜렷한 감각이 그의
몸을 감싸고 돌았다. 자신이 육체에서 떨어져 나왔던 것이
다. 그러고는 일회용 기저귀가 진열되어 있는 곳에서, 자신
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혼자말로 중얼거리면서 쓴웃음을 지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질 않았다. 뭐야 이건 또…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또 다른 자신이 일회용 기저귀 세트
를 손에 든 채, 2미터 앞에 서서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또 다른 자신이 기저귀 세트에 그려져 있는 갓난아기의 모
습을 가리키면서,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그가 손짓을 했
다. 빨리 와… 재미있는 걸 가르쳐 줄 테니까… 또 다른 자
신한테 이끌려 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진열장을 향해서 멍하니 서 있었다.
잘 생각해 보라고… 그놈이 말했다. 언젠가 너는 『싸늘한
미소』라는 영화를 평온한 상태에서 볼 수가 있었어.
왜 그랬을까? 그걸 생각하면서 내내 걷고 있었지, 그렇지?
다쿠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있었어, 넌… 제가 아니라면 누
구든 상관없어요… 다쿠는 이렇게 말했어. 그리고 그 여자
를 찔렀던 일도 생각해 냈어.
그랬더니 맥박이 정상으로 돌아왔어, 그렇지? 찌르지 않았
는데도 불안감이 사라지니까, 기분이 좋아? 또 다른 자신이
중얼거리면서 일회용 기저귀 세트에 그려져 있는 갓난아기
그림을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빨리 와, 중요한 걸 가르쳐
줄 테니까. 빨리 와서 나하고 합치자고… 또 다른 자신이
기저귀 세트의 비닐을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갓난아기의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갓난아기의 얼
굴이 기분 나쁜 형태로 바뀌었다. 제발 부탁이야, 그만둬!
가와시마 마사유키가 큰소리로 말했다. 아니, 그렇게 말하
려고 했지만 목이 바싹 말라서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공포감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은 단 한가지뿐이야… 또 다른
자신과 겹치기 직전에, 어디선가 이런 소리가 들려 왔다.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뭔가 계시를
받은 사람처럼, 그는 멍한 상태로 서 있었다. 또 다른 자기
자신과 겹쳐진 다음에도 그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여전히 웅
웅거렸다. 갓난아기를 찌를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서 해방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누군가 다른 사람을 아이스 픽
으로 찌르는 거야.
[유년의 기억] 거짓말
뭔가 좋은 일이라도 있나 봐…? 오전반 수업 준비를 하느라
고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요코가 물었다.
「얼굴빛이 아주 좋아 보여요.」
푹 자서 그런가 봐… 입에 크로와상을 잔뜩 집어 넣으면서
가와시마 마사유키가 대답했다. 정말로 푹 자서 그런지, 식
욕이 왕성했다. 가와시마 마사유키 자신도 놀랄 정도였다.
빠져 나갈 방법은 없어…라는 생각과 함께 눈을 떴다. 하지
만 찌르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 여자가 지껄여
대는 순간, 모든 게 끝나고 말아… 그렇게 생각하면서 이를
닦고 세수를 했다.
「우리 회사엔 특별 휴가 제도가 있어. 대기업의 제도를 본
딴 것이기는 하지만 말야.」
회사에 나갈 채비를 하면서 가와시마 마사유키가 요코에게
말했다.
「그럼, 강제로 쉬어야 한다는 거예요?」
「물론이지. 회사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대형 출판사들
은 한달이나 두달씩 휴가를 준다고. 그런데 우리 회사는 규
모가 작아서, 일주일이나 열흘 정도밖에 안 돼.」
가와시마 마사유키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는 디자인 사무실
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그곳에는 분명히 그런 제도가 있었
다. 3년에서 5년 사이에 한 번은 특별 휴가를 얻어야 한다.
이를 위한 특별 자금도 적립되어 있다. 휴가 비용의 일부는
회사에서 지원해 준다. 그리고 그것은 휴가를 보내는 방법
에 따라서 조금씩 달라진다.
「머리를 좀 식혀야 할 것 같아. 그러기 위해서는 특별 휴
가가 필요하지.」
「날짜는요?」
「모레쯤.」
「그렇게나 빨리요? 집에서 쉬면 안 되는 거예요, 그 휴가
는?」
「물론이지. 휴가가 끝날 때까지는 회사에 나가서도 안 돼.
그만큼 정확한 목표를 세우고 있어야 한다구. 언젠가 보니
까, 인도로 가는 녀석도 있고 뉴욕에 가서 뮤지컬을 구경하
는 녀석도 있더군. 오키나와에 가서 다이빙 면허증을 따온
여자도 있고 말야.」
「당신도 외국엘 다녀오려구요?」
「어젯밤에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시내에 있는 시티 호텔
이 좋을 것 같아. 도쿄에 살고 있으면서도, 좀처럼 그런 기
회를 갖지 못했어. 될 수 있으면 지방으로 가볼 생각이야.
그래서 중견 샐러리맨들이 묵곤 하는 호텔에 들 참이야.」
「시티 호텔에서 뭘 하시려구요?」
「특별한 건 아니구… 샐러리맨들의 생태에 대해서 연구를
해볼 생각이야. 정말로 알고 싶었어. 호텔 커피숍이나 스탠
드바 같은 데 가서, 주위에 있는 샐러리맨들의 이야기를 들
으면 얼마나 신선한지 알아? 그 사람들은 그런 곳에서 절실
한 문제점들을 토로한다구. 그런 모습을 철저하게 관찰해
보고 싶어. 사실은 내후년부터 3년 동안 외국 자동차 회사
의 그래픽 전략을 담당하게 되었거든. 그게 삼십대 샐러리
맨들을 타깃으로 삼고 있는 대중차야. 그런데 샐러리맨들의
생리에 대해서, 나는 별로 아는 게 없어.」
계획을 세운 뒤,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자유로운 시간
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곳에 머무르면서 작업 구상을 한다
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곳에 가 있는 사이, 요코가
회사에 전화라도 거는 날이면 모든 게 끝장이다.
요코는 그런 종류의 거짓말과 다른 장소에서 일어나는 사건
을 결부시켜서 생각하는 유형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른 문제에 신경을 쓰지 않기 위해서라도 회사 사람들과
요코한테만은 신뢰감을 얻어내야 한다. 특별한 회의가 있는
것도 아닌데, 시티 호텔에서 일주일씩이나 머문다… 보통은
바람을 피우거나 도박을 하기 위한 것으로 의심하게 마련이
다.
하지만 요코는 자기를 의심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요코는 다른 사람의 말을 의심하는 여자가 아니었다. 더군
다나 6년 동안 함께 살아 오면서 거짓말을 한 적이 단 한번
도 없었다. 숨겨 온 게 한 가지 있긴 하지만… 그는 요코를
매우 소중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거짓말 따윈 절대로 하고 싶지 않았다. 바람을 피우
는 일 따윈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거실 공간의 절반 가
량을 차지하고 있는 L자형 테이블 위에는 가방과 요리 교실
에 필요한 것들이 가지런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그럼 옷을 갈아입고 준비를 하셔야죠… 자연스럽게 미소를
머금으면서 요코가 말했다. 하지만 전화는 해주셔야 돼요,
알았죠? 물론이지…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가와시마 마사유
키가 말했다. 침실로 가서 유아용 침대 위에 누워 있는 갓
난아기를 자세히 들여다본다. 그러고는 상체를 구부려서,
보드라운 볼에 가볍게 손을 대본다. 요코의 귀에 들리지 않
게끔 그가 중얼거린다.
됐어, 이젠 괜찮아….
[유년의 기억] 치밀한 계획
4일 후,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 신관에
서 체크인 했다. 그는 JCB 카드를 사용하면서 본명을 기록
했다. 도쿄 타워가 멀리 내다보이는 트윈룸으로, 예약 기간
은 일주일이었다.
지금까지 휴가다운 휴가를 얻은 적이 없다는 점과 요코하마
재즈 페스티벌의 포스터 프리젠테이션에서 우승했다는 점
때문에 회사에서도 금세 휴가를 내주었다. 가와시마 마사유
키는 적립해 둔 돈까지 포함해서 90만 엔 가량의 현금을 가
지고 있었다. 샐러리맨들을 관찰해 보고 싶다고? 호, 정말
로 좋은 아이디어야. 하지만 혼자 보내기엔 일주일이 너무
길어. 에이즈에 걸리지 않게끔 조심하라구… 휴가를 보내
주면서 사장이 이렇게 말했다.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간에 체크인을 했다. 그러고는 곧장 요
코한테 전화를 했다. 중년 부인들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수화기 안에서 빵 굽는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요코는 물
론 회사 사람들도 전혀 의심을 하고 있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까… 소파에 앉은 채, 천천히 저물어 가고 있는 겨울
도심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생각했다.
언제부턴가 나는 의심받을 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어… 열아
홉 살이나 많은 그 여자와 헤어진 뒤,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전문 대학엘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
작했다. 졸업 후에 회사에 취직을 하고, 요코를 만났다.
그때부터 뭔가가 달라져 버렸는지도 모른다. 10대 무렵과
비교하면 자신이 너무나도 달라졌다는 느낌이 든다. 만약에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다면 어느 쪽이 자신의 진짜 모습일
까. 어디선가 둘 다 너의 모습이라는 소리가 들려 온다. 그
는 심한 이질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도서관에서 복사해 온 낡은 주간지 기사를 읽었다. 그
리고 아이스 픽만이 아니라 나이프도 준비하기로 했다. 8년
전, 어느 러브 호텔에서 서른두 살의 접대부가 살해당했다
고 한다. 그런데 그 여자의 사체를 살펴보니까 아킬레스건
이 잘려 나갔더라는 것이다.
나이프로 아킬레스건을 끊으면 툭 하는 이상한 소리가 나
죠… 범인은 그걸 즐기려고 한 게 틀림없어요… 경찰 관계
자의 말도 함께 실려 있었다.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매춘부
의 배를 아이스 픽으로 찌르기 전에`─`물론 찌르고 난 다
음이라도 상관은 없지만`─`나이프로 아킬레스건을 잘라 봐
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이프를 준비하기로 했던 것이다. 아킬레스건을 끊
으면 어떤 소리가 날까… 정말로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
었다. 매춘부의 표정이 어떤지를 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렇
게 생각하면서도 맥박이 빨라지는 걸 느끼지는 못했다. 히
쭉히쭉 웃으면서 군침을 흘리지도 않았다. 재즈 페스티벌에
어떤 사진을 이용할까… 그래, 그 사진을 이용하는 거야…
이렇게 마음 먹었을 때도 아무런 변화는 없었다.
갓난아기를 찌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을 때는
맥박이 불안정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다르다. 여자의 아킬
레스건을 끊기 위해서 나이프를 사도록 하자… 어떤 소리가
나는지 확인하려고 냉정하게 관찰을 하는 남자… 그리고 빵
굽는 냄새가 가득한 방에서 아내에게 미소를 보내는 남자…
이 두 사람은 너무나도 이질적이다. 그런데 그 같은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면서도,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잘 모른
다.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커튼을 쳤다. 그리고 가방 속에서 주
간지 복사본과 SM(가학 피학성 변태 성욕sadomasochism의
약자`─`역주) 잡지, 풍속 정보지 따위를 꺼냈다. 그는 책
상 앞으로 걸어가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노트에 메모
를 하면서, 계획을 하나하나 세워 나가기로 했다.
두 가지 점이 아주 중요했다. 첫째는 어떤 종류의 매춘부를
대상으로 삼을 것인가 하는 점이었고, 둘째는 구체적인 장
소를 어느 곳으로 정하느냐는 점이었다. 지난날 톨루엔을
흡입해서 훈방 조치가 취해졌을 때는 지문을 찍지 않았다.
우발적인 범행을 저질렀는데 그 사람한테 전과 사실이 없을
때, 경찰은 고민을 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찌르는 것만으로
는 안 된다. 확실하게 죽여야 한다.
물론 어느 누구한테도 들키지 않는 게 좋다. 하지만 사체를
버리는 행위는 피해야 한다. 오히려 위험성을 증가시키기
때문이다. 일정한 조직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뜨내기 매춘
부를 인적이 뜸한 장소에서 칼로 찌른다. 흥정하는 척하면
서 사람들의 왕래가 뜸한 골목길로 데리고 가 찌르고 또 찌
른다. 간단하고 자연스러운 방법이긴 하지만, 아이스 픽이
쑥 들어가는 걸 볼 수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킬레스건을 끊을 수가 없다. 어젯밤
신주쿠 거리를 걸으면서 보았지만, 가부키쵸 뒷골목을 서성
거리는 매춘부들의 경우는 외국인이 많다. 주로 동남 아시
아 여자들이다. 그런 여자가 죽임을 당하면 어떤 형사라도
진지하게 수사에 나서지는 않을 것이다. 더구나 그 여자의
신원을 파악할 수도 없다.
하지만… 이러한 장점도 필요가 없다. 피부가 희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얀 피부에 아이스 픽을 푹 찔러 넣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외국인들은 안 된다. 일본어로 의사 소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여자가 일본어로 공포와 고
통을 호소해야 한다. 어째서 일본인이어야 하는가…? 가와
시마 마사유키는 생각했다.
갑자기 어머니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
다. 죽이는 일만을 생각해야 한다. 노상과 공원, 공터 등
건물 밖에서 그런 행위를 하는 건 바보짓이나 다를 바 없
다. 실내여야 한다. 따라서 출장 서비스를 이용해야 한다.
콜걸이나 성감(性感) 마사지, 그리고 SM 클럽… 아이스 픽
을 본 순간, 여자는 기겁을 하면서 도망칠 것이다. 비명을
지른다.
심장을 찌르는 건 아니기 때문에 단번에 죽지는 않는다. 피
를 철철 흘리면서 천천히 죽어 가야 한다. 그게 가장 이상
적이다. 하지만 아이스 픽으로 찔러서는 그만큼 많은 양의
피가 흐르지 않는다. 내장을 찢어서 죽일 수도 있지만, 그
건 밖에서 볼 수가 없기 때문에 안 된다. 먼저 여자의 몸을
꽁꽁 묶고 시작하는 게 어떨까? 발가벗은 상태에서 몸을 꽁
꽁 묶어 버리면, 찌르는 순간이나 찌르고 난 뒤에도 저항을
할 수가 없다.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SM 클럽의 여자들은 러브
호텔까지 출장을 나오지 않는다. 러브 호텔은 프런트에서
얼굴을 보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프런트는 항상
문제가 발생하는 걸 경계하고 있다. 그래서 뭔가 이상한 점
을 발견하거나 여자가 소속되어 있는 사무실에서 의뢰를 하
면 곧바로 달려온다. 그리고 상황이 어떤지를 살펴보는 것
이다. 주간지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어떤 돌발적인 문제가 발생할 경우 출입구가 좁기 때문에
도망치기도 쉽지 않다. 거꾸로 누군가에게 발견당할 가능성
이 높을지도 모른다. 주목받는 장소라서 사람들 틈에 끼어
들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시티 호텔은 프런트에서 얼굴을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숙박 카드에 필적이 남는다. 다만 가
명과 가짜 전화 번호로 예약을 할 경우, 지정된 시간까지
체크인만 하면 별도의 확인을 하지 않는다.
그건 지금 묵고 있는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에서 확인을 했
다. 회사 전화 번호를 알려준 다음, 오후 2시 경에 체크인
하기로 예약했다. 그리고 오후 1시 45분까지 기다렸다. 하
지만 회사로 전화가 걸려 오지 않았던 것이다. 운전 면허증
과 명함, 주소록, 회사의 주소가 쓰여 있는 봉투, 원고 용
지, 레이아웃 용지, 영수증, 청구서 따위를 현장에 남겨 두
는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필적은 거의 문제가 되지 않을 것
이다.
그리고 가방을 들고 가는 경우는 벨보이의 서비스를 받을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도 생각해 두어야 한다. 서류 가방만
달랑 들고 간다고 해도, 벨보이가 그것을 들고 방안까지 안
내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체크인을 하면서 슬쩍
확인해 두었다. 그런데 거의 모든 일본인 손님들이 벨보이
한테 가방을 들고 가게 했다.
팁을 주고 있는 습관 때문인지, 외국인 손님들은 그렇지가
않았다. 직접 들고 갈 수 있는 작은 짐은 벨보이한테 맡기
지를 않았던 것이다. 그래, 벨 보이 문제는 나중에 결정하
기로 하자…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노트에 ‘보류’라고 썼
다.
노트에는 가와시마 마사유키의 깨알 같은 글씨가 가득 채워
져 있었다. 가방은 얼마만한 걸로 사야 하나? 우선은 필요
한 것들을 이중으로 포장해서 종이 봉투에 집어 넣자. 그리
고 이 호텔을 빠져나가자. 현장이 될 다른 호텔로 가는 도
중에 큰 역이나 공항 매점에서 가방을 사도록 하자. 될 수
있는 대로 작은 것을 선택하도록 하자. 그래야 눈에 띄지
않으니까. 대량으로 생산해 내는 게 좋긴 하지만, 비튼과
같이 고급스럽고 일반적인 게 효과적일지도 모른다.
사건 현장은 곧바로 다른 시티 호텔로 옮기자. 그 경우 간
단한 변장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시
선을 끄는 효과를 가져올지도 모르기 때문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선글라스를 이용하는 것도 좋다. 하지만 이 호텔에서
관찰한 결과는 별로 효과적이지 않았다. 선글라스를 낀 채
체크인 하는 손님이 오히려 눈에 쉽게 띄었던 것이다. 얼굴
을 감추고 싶어하는 인상을 풍겨 버리기 때문이다.
경찰은 몽타주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간단히 변장을 한 몽
타주가 공개되었을 때 사건 현장인 호텔에서 우연히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게 된다면… 또는 모습을 보고 확인하려 들
면 어떻게 하나… 이런 종류의 위험성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는 또 어떻게 해야 하나… 우선 체크인을 할 때 회사
동료나 요코의 요리 교실 학생 등 대충 넘어가는 게 불가능
한 사람들을 만난다거나 그런 사람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는
계획이 자동적으로 중지된다.
간단한 변장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말하는가? 헤어 스
타일을 바꾸고 도수 높은 근시용 안경을 낀다…? 얼굴에 관
해서는 그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옷차림새도 꼼꼼히 생각
해 두어야 한다. 몇 번쯤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뒷모
습만 보고도 알아 차릴 것이다. 그러니까 평소에 잘 입지
않는, 감색이나 회색의 샐러리맨용 양복을 사 입도록 하자.
얇은 코트도 함께 착용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바지 길이도
바로잡아야 하기 때문에 샐러리맨용 양복은 서둘러서 구입
해야 한다. 키가 커 보이게 하기 위해서 굽이 높은 구두를
사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피를 뒤집어쓸지도 모르기 때문
에 갈아입을 옷도 필요하다. 맨몸으로 시도하는 것도 생각
해 보았지만, 여자의 저항에 부딪칠 가능성이 있다.
그때 맨몸은 안전하지가 못하다. 뿐만 아니라 의식의 희생
물이 되는 순간, 여자가 이것을 성적인 문제로 보아 버릴
우려도 있다. 이 남자의 성욕을 채워 주기 위해서 자기 자
신의 아킬레스건이 잘려 나가는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건 정말로 참을 수 없는 일이다. 자기의 피와 고통에 어
떤 의미가 깃들어 있는지 의아스럽게 생각해야 한다. 폭력
에 희생당하면서도 그 폭력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
각해 보아야 한다. 가혹하긴 하지만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
이다.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노트에다 이렇게 썼다. ‘그래서 갈아
입을 옷이 필요한 거야…’ 그는 이 말에 이어지는 부분을
지워 버렸다. 그리고 그 아래쪽에다가 ‘준비 과정에 필요
치 않은 말은 쓰지 말 것’이라고 크게 썼다.
벌써 해는 기울고 있었다. 시계를 쳐다보았다. 저녁 8시를
가리키고 있다. 시간은 총알같이 지나가고 있었다. 지금까
지 이렇게 열중해 본 적이 있었던가, 하고 생각했다. 그는
냉장고에서 콜라를 꺼내 한모금 마셨다.
이 같은 계획을 준비하고 실행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여러
가지 일을 해왔던 게 아닐까… 아니 모든 것들이 이 같은
계획을 탄생시키기 위해서 존재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가
와시마 마사유키는 한 가지 사실을 이미 잊어 버리고 있었
다. 갓난아기를 찌를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으로부터 벗어나
기 위해서, 이 같은 계획이 수립되었다는 사실을….
그는 평범해 보이는 청바지와 스웨트 셔츠(보온이나 땀 흡
수를 쉽게 하기 위해 입는 옷)로 갈아입기로 했다. 가급적
이면 스웨트 셔츠는 천이 얇은 게 좋다. 청바지도 마찬가지
다. 펑퍼짐한 건 피해야 한다. 장갑은 꽉 끼는 가죽 제품으
로 두 짝을 선택한다. 장갑을 사용하는 일에 대해서만큼은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숙박 카드에 펜으로 기록할 때는
장갑을 벗는 게 자연스럽다.
다행스럽게도 10년 전에 화상으로 인한 흉터도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체크인 카운터에서 지문을 남기는 건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카운터는 물론이고 펜에도 다른 사람들의 지
문이 마구 찍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체크인은 어느 카운
터에서나 할 수 있다. 펜으로 기록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프런트 담당 직원은 그런 것들을 전혀 기억할 수가
없다. 가죽 장갑을 낀 채 펜을 사용하면 안 된다. 선글라스
를 낀 것과 마찬가지로 눈에 띌 염려가 있다. 이것도 이미
확인해 두었다. 상대방이 뭔가를 감추려 한다고 생각할 것
이다.
장갑을 낀 채로 기록하면 프런트 담당 직원이 주의를 기울
일 게 틀림없다. 호텔 직원들은 남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
다. 상대방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면서 자세히 살펴볼 수가
있다. 벨보이 서비스를 거절한다면…? 이때는 장갑을 낀 채
로 열쇠를 건네 받아야 한다. 그리고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다음에도 계속해서 장갑을 끼고 있어야 한다. 지문
을 남겨 두면 안 된다. 가능한 한 프로 범죄자라는 인상을
심어 주어야 한다. 이렇게 하면 경찰이 전과자들한테 시선
을 집중할 것이기 때문이다.
강간범, 변태 성욕자, 치한들의 리스트가 만들어질 것이다.
여자를 꽁꽁 묶기 전에는 장갑을 벗고 있어야 한다. 경계심
을 품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꽁꽁 묶은 다음에야 검정색
가죽 장갑을 낀다. 물론 무표정하고 여유 있는 동작으로…
그러고 나서 여자의 입에 재갈을 물린다. 재갈은 완전한 밀
폐형을 선택하면 안 된다. 어느 정도는 소리가 새나와야 한
다. 피 묻은 장갑은 청바지나 스웨트 셔츠와 마찬가지로,
준비해 온 비닐 봉지에 담는다. 그리고 곧장 새로운 장갑으
로 갈아 낀다.
이중 삼중으로 포장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비닐 봉지는 편
의점 등에서 파는 보통 것으로 여러 개 준비한다. 접착 테
이프는 천으로 만든 걸 산다. 아이스 픽의 끝부분이나 나이
프 날을 친친 동여매야 하기 때문에 신축성 있는 종이도 준
비해야 한다. 개천에 버릴 때는 추를 달아야 하는데, 다이
빙용으로 이용되는 소형 추가 바람직하다. 아이스 픽이나
나이프를 담은 보따리에도 반드시 추를 달아야 한다. 모든
걸 처리한 다음에는 공원을 찾는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부
랑자한테 가방을 선물로 준다. 이 방법이 가장 안전하다.
물론 가방이 비튼 제품일 때는 그 방법을 쓰지 않는다. 나
이프와 아이스 픽은 교외에 있는 슈퍼마켓에서 따로따로 산
다. 그것도 토요일 오후나 일요일을 택해야 한다. 사람들이
붐빌 때를 이용하는 것이다. 일을 저지르기 전에 한 번쯤
연습을 해보는 게 어떨까? 다른 SM 클럽의 여자를 불러서
연습해 보는 것이다. 아주 좋은 생각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다소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연습 상대로
부른 여자와 희생양이 될 여자가 친한 친구 사이라도 된다
면…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SM 플레이를 어떻게 하는지 잘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겼을 때는 곧
바로 계획을 중지해야 한다.
그는 허기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조금 지나자 객실
담당자가 전화를 걸어 온다. ‘방해하지 말라’는 팻말을
출입문 손잡이에 걸어 두었는데, 룸서비스는 어떻게 하느냐
고 묻는다. 그래서 지금은 작업중이기 때문에, 침대 정리
등은 스스로 하겠노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담당자는 필요하면 언제든지 불러 달라고 한다. 이
런 서비스는 24시간 가능하다면서. 그 남자는 너무나도 친
절하다. 그래서 정말로 고맙다는 인사말을 전한다. 자기와
전혀 관계 없는 사람들까지도 응원의 박수를 보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메모를 계속해 나갔다.
간단한 변장과 함께 효과를 볼 수 있는 게 위장이다. 프런
트 담당 직원 등 대인용(對人用)으로 이용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예가 바로 소리를 내서 껌을 씹는 것이다. 프런트
담당 직원과 이야기를 나눌 때도 간사이 지방의 악센트를
섞는다. 또한 자주 기침을 하고 슬그머니 발을 끌면서 걷는
다. 하지만 이런 행동을 하면 쉽게 눈에 띈다.
따라서 역효과를 낼 우려도 있기 때문에 일단 보류하기로
한다. 사건 현장을 위장하는 건 아주 중요하다. 하지만 이
문제는 의식의 최종 단계와 관련시켜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원칙적인 방법은 목을 조르는 것이다. 이 방법을 선
택할 경우에는 가는 스테인리스 철사를 사용하도록 한다.
나이프로 손목이나 목을 자르는 방법은 다소 번거롭다. 지
나치게 출혈이 심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장을 하는 데
는 그만이다. 각성제 상용자와 중독자 및 정신 이상자들한
테로 경찰의 관심을 돌릴 필요도 있다. 이때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메모를 남겨 두어야 한다. 주간지를 보면 이런 이
야기들이 소개되어 있다.
신(神)이라든가 하늘의 뜻, 계시, 명령, 지시, 천국 따위의
말이 리얼리티를 갖는다고 한다. 그것들을 조합해서 짧은
문장을 만든다. 지시에 따라서 했을 뿐이다, 계시를 받았
다,
이것이 하늘의 뜻이다, 신을 만났다, 명령을 거역할 수가
없다, 천국이 보인다… 이런 식으로 위장할 때는 여섯 개의
항목 가운데서 하나를 선택한다. 그리고 호텔에 비치되어
있는 펜과 메모지를 사용한다. 일부러 왼손으로 글씨를 쓴
다거나 손을 떨면서 쓸 필요는 없다.
정상적으로 글씨를 써서 방안 이곳저곳에 흩뿌려 놓아도 상
관없다. 지하철 선반에서 경마나 경륜, 또는 모터 보트 경
주 신문 따위를 주워 가지고 온다. 그리고 그것들을 방안에
남겨 두는 방법도 효과적이다. 예를 들어 간사이 지방의 경
륜 신문과 샐러리맨 금융 광고지를 현장에 남겨둔 다음, 프
런트에서 간사이 지방의 악센트를 사용하면 큰 효과가 있을
지도 모른다.
실제로 간사이에 다녀올 만한 시간 여유는 없다. 하지만 가
방을 사기 위해서는 도쿄 역이나 하네다 공항엘 다녀와야
한다.
그때 오사카에서 온 여행객이 버린 게 있는지 찾아볼 수도
있다. 단, 위장을 하는 데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위장
한 사실이 탄로났을 경우, 경찰은 거꾸로 지능적인 사람을
찾기 시작할 것이다. 사건 현장으로 이용할 호텔에는 택시
를 타고 가지 않는다. 그냥 걸어가도 부자연스럽지 않은 신
주쿠 부도심의 호텔을 선택한다.
파크 하얏트, 센트리 하얏트, 워싱턴, 힐튼, 게이오 플라자
등에 제각기 다른 이름으로 예약을 해둔다. 그리고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그곳으로 가서 예비 답사를 한다. 프런트
주위가 시끌벅적하고 서비스도 형편없는 호텔이 가장 좋다.
왜? 그런 호텔은 손님한테 주의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곳은 분위기가 산만하다.
이렇게 쓴 다음,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펜을 내려놓았다. 그
리고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시계 바늘이 11시를 가리키고
있다. 요코가 잠자리에 들 시간이다. 전화를 걸까, 하고 생
각했다. 하지만 이내 그만두기로 했다. 하루에 두 번씩이나
전화를 하는 게 오히려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전히 배가 고프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냉장고에는 위
스키와 맥주가 들어 있다. 그는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그
래서 가장 값이 싼 국산 위스키를 꺼내서 한모금 마셨다.
지금까지 마셔 본 어떤 술보다도 맛이 있었다. 그는 노트에
써놓은 글씨들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이미 7쪽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는 몇 군데를 보충했다. 그리고 그것을
서류 가방 속에다가 집어 넣은 뒤, 다이얼을 돌려서 잠갔
다.
커튼을 활짝 열어제쳤다. 이미 불이 꺼져 버린 도쿄 타워를
바라보면서 그는 위스키를 한모금 더 마셨다. 목구멍과 위
장이 화끈거렸다. 성욕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그는 술을
그만 마셔야겠다고 생각했다. SM 클럽에서 여자를 부르고
싶은 유혹에 빠질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까
몇 살 먹은 여자를 대상으로 할 것이냐는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다.
삼십대 후반의 여자도 상관은 없지만, 아이스 픽으로 찌를
때, 배가 불룩하지 않은 게 좋다고 생각했다. 하얗고 탄력
있는 피부를 가진 젊은 여자로 하자… 그는 이 같은 요구
사항을 SM 클럽에 전달하기로 했다. 삼십대 후반의 여자…
그는 강한 성적 욕망을 느꼈다. ‘젊은 여자로 한다.’
노트에다 이렇게 적으면서 그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강한 성
욕에 사로잡혔다. 한번 고조된 기분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
았다. 이런 상태에서는 잠을 이룰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
렇게 되면 내일부터 시작할 준비 작업에도 막대한 지장이
초래된다.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풍속 정보지를 펼쳐 들었
다. 그리고 ‘요염한 여인`─`성감 마사지’라고 쓰여 있는
곳에 전화를 걸었다.
「예, 에센스 치료원입니다.」
남자 목소리였다.
「시내 호텔에 있는데, 지금 마사지 서비스를 받을 수 있습
니까?」
이런 종류의 클럽에 전화하는 게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런
데 그는 스스로도 놀랄 만큼 침착한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어느 호텔에 묵고 계시는데요?」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 신관요.」
「객실 번호를 알려 주세요. 일단 확인을 해야 하니까요.
그리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곧바로 전화를 드릴 테니
까….」
그는 수화기를 내려 놓고 기다렸다. 10초나 지났을까. 금세
전화가 걸려 왔다. 목소리와 말투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서른여덟 살 먹은 과부는
어떠세요? 괜찮으시다면 지금 당장 보내 드릴 수도 있는데
요?」
매끄럽고 침착하긴 하지만 기계적인 목소리였다. 직접 보지
않고서는 얼굴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한 시간만 기다리시면 사십대 초반의 여자를 보내 드릴
수도 있구요.」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매끄러운
목소리가 이야기를 계속해 나갔다.
「지금 당장 달려올 사람이 필요해요.」
「기본 마사지는 7,000엔이고 성감 마사지는 17,000엔입니
다.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17,000엔 쪽을 선택하겠다고 대답했
다. 그러면서 그는 생각했다. 매끄러운 목소리의 남자가 갓
난아기를 껴안은 채 이야기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게 아
니면 중병에 걸린 노인이 주사 바늘을 꽂은 채 바로 옆에서
잠을 자고 있는 게 아닐까…? 이런 느낌이 들었다.
「그럼, 삼십 분쯤 기다려 주십시오. 찾아가는 여자한테는
왕복 택시비도 주셔야 합니다.」
나이 든 여자를 부르는 남자들이 많은가 보죠? 전화를 끊기
전에 그 남자한테 물어 보았다. 매끄러운 목소리의 남자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수화기를 내려 놓았
다.
혹시 그 여자가 찾아오면 어떻게 하지…? 가와시마 마사유
키는 생각했다.
꼭 10년이 지났으니까, 그 여자는 이미 마흔여덟 살이나 되
었다. 그 여자는 아닐 거야. 분명히 서른여덟 살이라고 했
어… 하지만 그런 데 있는 여자가 자기 나이를 곧이곧대로
밝혔을 리 없다. 실제로 그 여자는 일하고 있던 바에서 스
물여덟 살짜리로 통했다. 스물여덟 살과 서른여덟 살의 차
이는 크게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다. 정말로 그 여자가 찾
아온다면 첫마디를 뭐라고 하지? 상처는 다 나았을까? 퇴원
한 다음부터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언젠가 아이스 픽에 찔린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필요할 거라고 했다. 그 말만은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 여자한테 나쁜 감정 따윈 전혀 품고 있
지 않다. 정말로 그 여자가 찾아온다면 오랜만이군요, 하고
말을 건네면 된다. 상처가 나았는지도 물어 보아야 할 것이
다.
[유년의 기억] 연습상대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위스키를 조금만 더 마시기로 했다.
조금 있으면 서른여덟 살짜리 여자가 찾아온다는 기대감 때
문에 SM 클럽에 소속되어 있는 여자 따윈 부르고 싶지가 않
았다. 작은 양주병을 꺼내서 글라스에 따랐다. 세 병째였
다. 만족하실 거예요… 매끄러운 목소리가 되살아났다. 히
터 때문에 창문에는 물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그 너머로 한밤중의 도쿄 거리가 펼쳐져 있었다. 창가에 서
서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이 무수
한 점처럼 보였다. 어머니 또래의 여자들밖에 사랑할 수 없
는 젊은이… 아주 최근에 이런 내용을 주제로 한 텔레비전
와이드 쇼가 방영되었다. 변태라고 해도 될 만한 것이었다.
피터팬 증후군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죠, 어린 여자애들을
상대로 못된 짓을 하는 청년도 있어요, 그런 병리 현상과
동일한 거죠, 정상적인 인간 관계를 유지할 수가 없어요,
이런 사람들은… 나비 넥타이를 맨 심리학자가 이렇게 설명
했다. 만약에 계획이 성공한다면 그 심리학자 놈도 찔러 버
리고 말 거야. 그놈은 변태라고 했어, 나이 차이가 많이 나
는 여자와 사귈 수밖에 없는 젊은이들을….
보호 시설에서 함께 생활했던 아이들하고는 이야기를 나눈
적이 거의 없었다. 2년 동안 줄곧 함께 지내 왔지만 다쿠와
도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짧은 대화를 주고받은 적이
있긴 했다. 그곳에서 나오기 직전의 일이었다. 하지만 무슨
말을 주고받았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는 지금 스
물아홉 살 먹은 어른의 눈으로 그들을 생각하고 있다.
놀이방과 하얀 모래가 깔려 있는 모형 정원, 봉제 인형과
꼭두각시 인형, 기관차와 자동차 및 전화 완구, 집짓기 놀
이용 나무, 트램폴린, 그림 도구, 그리고 아이들… 마치 스
물아홉 살이나 먹은 자기 자신이 놀이방에 서서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모든 기억이 생생했다.
어른들이 싫어할 만한 요소를 모두 가지고 있었다. 그곳 아
이들은… 그런 아이들이 옆에 있을 경우, 백이면 백 모두
‘뭐 이런 놈이 다 있어?’라고 할 것이다. 그애들은 인사
를 하지 않는다. 말을 걸어도 대답조차 않는다. 몇 번이고
이름을 부른 뒤에야 대꾸를 한다.
난 바보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말아
요… 시선을 외면한 채 대답한다. 어른들이 주의를 기울이
면 곧바로 난폭해진다. 장난감을 내동댕이치거나 부숴 버린
다. 어떤 때는 손을 물기까지 한다. 먹을 것에 대한 욕심도
많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것까지 와구와구 먹어대기가 일
쑤다. 방 한쪽 구석에서 넋을 놓고 있다가도, 다른 사람이
1미터 이내로 다가가면 불에 덴 것처럼 깜짝 놀라서 울어대
기 시작한다.
그런가 하면 늘 겁먹은 눈길로 어른들의 표정을 살피는 아
이도 있다. 그런 아이는 주인의 명령을 기다리는 노예처럼,
극단적으로 순종적인 태도를 취한다. 처음 보는 어른한테
찰싹 달라붙는 여자 아이도 있다. 어리광을 부리면서 자신
의 속옷 속에다가 손을 집어 넣으려고도 한다.
반면에 자신의 팔을 깨무는 아이도 있다. 어떤 아이는 갑자
기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벽에다가 머리를 부딪치기도 한
다. 피가 나는데도 그만두려고 하지 않는다. 지저분한 팬티
때문에 심한 악취가 나는데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아
이… 부모가 이런 아이들을 때리는 게 뭐가 문제란 말인가.
이런 애들을 싫어하는 게 당연하잖은가. 이런 애들을 집 밖
으로 내쫓아 버리고 나서, 다른 형제들한테는 뜨거운 사랑
을 베풀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원인과 결과가 뒤바뀌어 있다. 원래 아이들이 이래
서 때리는 게 아니다. 부모들한테 얻어맞아서 아이들이 이
렇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런 사실을 정확하게 인
식하는 사람이 없다. 아이들은 힘이 없다.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어느 틈엔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는 위스키를 단번에 털어넣었다. 아이들은 힘이 없기 때
문에 마구 두들겨 맞으면서도 대항을 하지 못한다. 구둣주
걱과 진공 청소기의 호스, 식칼 자루 등으로 마구 얻어맞는
게 일상사처럼 되어 있다. 그리고 목을 조르고 뜨거운 물을
끼얹어도 어머니한테서 도망을 치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어머니를 마음속으로 미워할 수도 없다.
오히려 좋은 감정을 갖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그
결과 하나의 방법을 선택하게 된다. 부모를 미워하기 보다
는 차라리 자기 자신을 미워하게 되는 것이다. 이들의 가슴
속에는 항상 애정과 폭력성이 뒤엉켜 있다. 그 때문에 자신
이나 상대방이 히스테리 증세를 보이면 오히려 안심을 하는
것이다.
온화함… 이것이 언제 깨질지 모른다… 이처럼 온화함이 긴
장과 불안, 공포의 재료로만 존재한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
는 사이에 상대방이 싫어하고 화낼 만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미움받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는 것이다. 이들은 그 같은 과
정을 거치면서 성장해 나간다. 그런데도 나비 넥타이의 남
자는 이들을 변태라고 부르고 하나의 병리 현상으로 단정지
어 버렸다.
유리창에는 물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가와시마 마사
유키는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그러고
나서 그 반대쪽에 펼쳐져 있는 한밤중의 도쿄 거리를 내려
다보았다. 도쿄 거리는 모형 정원과도 같았다. 그래, 내가
대표로 나선 거야…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두운 모형 속에서 한 개의 점으로 존재하는 아이들… 그
런데 그애들은 거대한 적을 가지고 있다. 그 적에게 맞서기
위해서 나는 아이스 픽을 움켜쥐고 나섰다. 순교자인 것이
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불끈 하고 몸 속에서 힘이 솟
구쳐 올랐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금만 기다려라… 유리창에 얼굴을 댄 채, 아동 보호 시설
에서 함께 생활했던 아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리면서
그가 중얼거렸다. 유리창에 입술을 대자, 물방울들이 주르
르 미끄러져 내렸다. 작은 벌레들이 일제히 도망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놈들을 모두 죽여 버릴 테니까… 가와
시마 마사유키는 쉴새없이 중얼거렸다.
「누구하고 닮으신 것 같은데… 영화 배우 누구하고 닮았다
고 하지 않아요, 사람들이?」
성감 마사지를 하러 온 뚱뚱한 여자가 말했다. 아이스 픽으
로 찔렀던 열아홉 살 연상의 여자와는 닮은 데가 하나도 없
었다. 얼굴을 보자마자, 그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반짝
거리는 바지와 털실로 짠 화려한 색깔의 스웨터, 그리고 은
빛 여우털 반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배우나 가수를 닮았다는 소리는 전에도 들은 적이 있다. 하
지만 그것은 치명적일 정도의 특징이 아니다. 헤어 스타일
을 바꾸고 안경을 끼면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는다. 마실
것을 권하자, 여자가 맥주를 선택했다. 그도 맥주를 마시기
로 했다. 낯선 남자만 있는 방에 찾아오는 게 무섭지 않으
세요? 아무래도 위험할 것 같은데…? 맥주를 마시면서 그가
물었다.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눈빛을 보면 대충 알 수가 있
잖아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저는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없어요. 솔직히 말씀 드려서 위험한 것보다는 병을 얻는 경
우가 더 큰 문제죠. 더러운 손가락을 집어 넣는 바람에, 염
증이 생겼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어요. 제가 들은 거라곤
그런 얘기들뿐이었어요.」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불을 껐다. 그러고 나서 옷을 벗고 침
대 위에 납작 엎드렸다. 여자가 침대 옆에 앉아서 손가락으
로 등과 옆구리, 넙적다리 등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여자
는 손가락의 힘을 빼고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살갗을 어
루만지고 있었다. 마치 원을 그리고 있는 듯했다.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간호를 받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 함
께 사는 남자가 있어요, 모피도 그 남자가 사주었어요… 가
와시마 마사유키의 고개를 뒤로 젖히면서 여자가 말했다.
여자가 티슈 상자를 허벅지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왼손에 오일을 바르기 시작했다. 가와시마 마사유키의 성기
는 이미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여자가 오른손으로 그의 성
기를 붙잡았다. 그리고 그것의 끝부분을 왼쪽 손바닥으로
살살 문질렀다.
당신은 옷을 벗지 않아요? 고개를 쳐들면서 가와시마 마사
유키가 물었다. 나중에 10,000엔을 더 주신다면요… 손 동
작을 멈추지 않은 상태에서 여자가 말했다. 드릴게요, 하고
가와시마 마사유키가 말했다. 그러자 여자가 티슈에 손을
가볍게 닦고 나서, 옷을 벗기 시작했다. 하지만 만지면 안
돼요…
팬티 스타킹의 흔적이 남아 있는 부드러운 뱃살을 좀더 자
세히 보려고, 가와시마 마사유키가 침대 곁의 스탠드를 켰
다. 여자는 몸을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 친밀감을 느끼게
하는 몸이야…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이렇게 생각했다.
조금 세게 만지면 손가락이 그대로 파묻혀 버릴 것만 같은
피부… 혈관이 드러나 있는 유방, 거무스름한 빛을 띤 채
아래쪽으로 축 늘어져 있는 유두, 미세한 움직임에도 쉽게
요동을 치는 팔과 옆구리와 넙적다리의 피부, 잔혹한 인상
을 풍기는 음모(陰毛), 누렇게 변색되고 한가운데에 금이
가 있는 엄지발가락의 발톱… 이런 몸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맨 처음 요코를 껴안았을 때, 그는 엄청난 위화감을
느껴야 했다.
요코는 스물아홉 살이다. 아이를 낳긴 했지만, 요코의 피부
는 탄력성을 지니고 있다. 목덜미와 팔, 그리고 엉덩이를
만지면 손가락이 튕겨나올 정도였다. 침대 위에 납작 엎드
려 서른여덟 살짜리 여자의 엉덩이를 곁눈질하면서 가와시
마 마사유키는 생각했다. 이런 피부는 공격성을 갖게 하지
않아… 쇼 윈도에 진열되어 있는, 팔다 남은 크리스마스 스
펀지 케익… 그런 느낌을 주었다.
무르디 물러서 만지는 사람의 손가락을 그대로 빨아들여 버
릴 것만 같았다. 세포가 늙었다는 걸 자각하고 있어서 그런
지, 여자는 선뜻 다가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 여자의 알
몸을 바라보면서,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마침내 사정을 했
다. 여자가 뜨거운 타월로 성기와 그 근처 부위를 닦아 주
었다.
여자에게 30,000엔을 건네 주었다. 여자가 돌아가고 난 뒤
에도,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맨몸인 상태로 침대 위에 드러
누워 있었다. 공허하면서도 평화로운 뭔가가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옛날부터 그는 순
간적으로 죽어 버리는 신경에 대해서 생각해 왔다. 엄청난
놀람과 공포, 격렬한 분노, 그것들이 뒤섞여서 자기 자신을
컨트롤하지 못하게 되는 순간… 그 다음에는 반드시 기분이
나빠져 버린다. 절대로 죽지 않는 신경을 가질 수 없을까…
이렇게 생각한 적도 있다.
아마도 이런 상태가 영원히 계속될 거야… 천장을 올려다보
면서 그는 생각했다. 전혀 흥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엄청난
양의 정자가 사방으로 튀었다. 그때의 느낌이 아직까지도
남아 있다. 천장을 올려다보면서 그는 쾌감을 느끼고 있었
다. 하지만 그 속에는 등골을 오싹하게 하는 적막감이 깃들
어 있었다. 이것도 나쁘지는 않아… 이렇게 생각하면서 가
와시마 마사유키는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문득 생각이 떠
올랐던 것이다. 그는 서류 가방을 열어제쳤다. 그리고 그
안에서 노트를 꺼내, 마구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의식용(儀式用)으로 써야 하기 때문에, SM 클럽에서 불러
올 여자는 젊고 몸집도 아담해야 한다. 뚱뚱한 여자는 안
된다. 그런 여자는 힘이 세다. 뭔가 문제가 생겼을 때 강력
하게 저항할 우려가 있는 것이다.
[유년의 기억] 피어스
사나다 치아키(佐名田千秋)는 눈을 떴다. 하지만 침대 위에
그대로 드러누워 있기로 했다. 전기 담요의 다이얼을
‘강’으로 맞추고 있는데,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냉기가 스
치고 지나갔다.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게다가 무겁기까지 했다. 할시온(수면제의 일종`─`역주)의
약효 때문일 것이다. 전화벨이 울렸다. 외출중이라는 것을
알리는 기계적인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러고는 작은 스피
커를 통해서 작고 느릿느릿한 남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야 씨, 오늘은 나와야 하지 않겠어요? 일단 연락이라도
주세요. 몸이 좋지 않아서 그런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만, 전화는 해주셔야죠. 오늘은 예약이 들어와 있어요. 저
녁 여섯 시까지 게이오 플라자 2902호실로 가세요. 손님의
성함은 요코야마 씨예요. 처음 대하는 손님인데, 목소리를
들으니까 젊은 신사분인 것 같더군요. 곧바로 게이오 플라
자로 가주세요. 여섯 시간을 예약하셨어요.
자정에 끝나기 때문에 좀 늦은 시간이긴 하지만, 그래도 사
무실엔 반드시 들러 주시구요… 벨의 전원이 끊어졌다. 1회
분량의 테이프가 끝났던 것이다. 조금 지나자 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 갑자기 전화가 끊어져서 다시 걸었어요. 전원을
끊지 마세요. 밖에서 제 목소리를 듣고 계실지도 모르겠군
요. 그럼 플레이 도구를 갖고 있지 않을 테니까, 사무실로
와주시든가 집으로 돌아가세요.
도구는 반드시 지참하셔야 하니까요. 아무튼 기다릴 테니
까, 연락 주세요. 귀찮으면 게이오 플라자로 곧장 가세요.
그곳에 도착해서 전화 주셔도 상관없으니까요… 또다시 전
원이 끊어졌다. 테이프가 다 된 것 같았다. 하지만 전화벨
은 다시 울리지 않았다. 일어나서 뭔가를 먹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시계를 쳐다보았다. 벌써 오후 3시를 가리키
고 있었다. 게이오 플라자까지는 택시로 12,`13분 정도 걸
린다. 하지만 혈액 순환이 정상적인 상태로 되돌아오기까지
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할시온을 세 알씩이나 먹고 잠이 들어 버린 탓이었다. 할시
온의 양이 조금씩 증가하고 있다.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
다. 우선은 돈이 많이 든다. 그리고 시부야에 있는 그 가게
는 안전하지가 않다. 누군가가 그렇게 이야기해 주었다.
사나다 치아키는 몸을 옆으로 틀었다. 그리고 팔을 쑥 내밀
어서 오디오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녹색의 파워 램프에 불
이 들어왔다. 그녀는 CD를 돌렸다. 그런데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음악이 흘러 나왔다. 일어나서 현악기 소리를 들을 생
각이었다. 그래서 잠들기 전에 모차르트 CD를 넣어 두어야
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들려온 소리는 영화 『와일드 앳 하트』의 테
마 음악이었다. 묵직하면서도 끈적끈적하게 신경을 휘감는
테너 색소폰 소리… 이것은 바로 마스터베이션을 위한 음악
이다. 기억이 희미해… 그렇게 생각하고 사나다 치아키는
오디오를 꺼버렸다. 수면제 탓인가?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하지…? 불안했다. 잠들기 전에 했던 일들을 모두 다 기억
해 내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오늘은 금요일이다… 그러고 보니까 50시간 가량을 잠들어
있었잖아? 할시온을 먹은 게 수요일 새벽이었다. 150,000엔
에 올나이트를 했다. 그런데 사무실에는 아직까지도 입금을
시키지 않았다. 그 때문에 사장이 집요하게 전화를 걸어 왔
던 것이다. 손님은 중년 남자였는데, 별다른 짓을 하지 않
았다. 적당히 묶거나 바이브레이터(여성용 성구性具의 하
나. 음경을 본떠서 만든 전기 진동 장치)를 이용하는 정도
였다.
그러고 나서 손을 잡고 잠만 자면 된다고 했다. 하지만 그
녀는 졸리지가 않았다. 또한 한달쯤 전부터 성욕마저 사라
지고 없었다. 얼굴과 몸집, 성격 등으로 미루어 보건대 중
년 남자는 싫은 타입이 아니었다. 그래서 콘돔을 사용하는
조건이라면 섹스를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성인
남자가 바로 옆에 누워서 잠자는 모습만은 도저히 보고 있
을 수가 없었다.
그 남자는 담배를 피우지는 않았지만 입에서는 약간의 술
냄새와 입 냄새가 났다. 나중에 그는 코까지 골았다. 잠을
자면서도 그는 손을 놓아 주지 않았다. 아직 돈을 받지 않
은 상태여서 도망칠 수도 없었다. 꾹 참고 그대로 누워 있
을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나자 근육이 뻣뻣해지기 시작
했다. 잠을 자야 하는데… 초조해 하면 할수록 눈 안쪽이
바짝 말라 가는 듯했다.
아무런 일도 없어야 할 텐데…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정말
로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무서웠다. 천장 한쪽 구
석에서 누군가가 침대 위에 드러누워 있는 남자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중학교에 다닐 때였다.
그 사람이 이런 식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게… 네 눈
에는 보이지 않을 거야, 하고 말했다. 그러고는 그녀의 귓
가에 대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껄껄껄 웃었다. 그날 밤에는
그 누군가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는 할시온을 마시
고 싶었다. 하지만 바로 옆에 가방이 없어서 그렇게 할 수
가 없었다. 그래서 새벽녘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잠을 자지 못해서 그런지, 근육이 뻣뻣했다. 나중에는 아프
기까지 했다. 무서운 생각을 하는 데 익숙해져 있긴 하지
만, 성욕이 0.1그램도 솟구쳐 오르지 않는 게 싫었다. 성격
을 바꾸기 전까지만 해도 그게 가능했다. 그랬다면 아마도
자기가 먼저 남자를 깨웠을 것이다. 그러고는 섹스를 하자
고 이야기했을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전문 대학에 들어간 게 열여덟 살 때
였다. 그녀는 그 해 생일날부터 계산해서 꼭 124일 되는 날
자신의 성격을 바꾸었다. 대학에 들어간 뒤 함께 차를 마시
거나 노트를 빌려 주고 빌리는 친구가 하나 생겼다. 그녀는
그 친구한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러자 친구가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하루 만에 성격을
바꿀 수 있다구…? 그래, 난 하루 만에 성격을 바꾸었어…
소극적인 성격에다가 말도 신중하게 하는 타입으로 변했기
때문에 한 사람 한 사람과 오랜 시간 동안을 만날 수 없었
다. 그럼에도 친구들의 숫자는 늘어만 갔다. 자신을 소극적
인 성격의 소유자로 바꾼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아주 단순했다. 자기가 먼저 섹스를 하자고 제안하는 게 좋
아 보이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가 먼저 제안을 해야 하
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피하는 게 좋다. 남자
가 그걸 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때 남자는 상냥
하고 부드럽게 대해 주지도 않는다. 따라서 자신의 얼굴이
사랑스러워 보일 리가 없다.
무엇 때문에 서로의 피부를 맞대면서 이런 식으로까지 해야
하는가. 결국에는 혼자 있을 때보다 더 쓸쓸해져 버린다.
섹스를 끝내고 나서 남자는 얼굴을 일그러뜨린다. 이런 여
자야, 너는… 이렇게 생각하는 표정이다. 이런 여자야 너
는, 이런 여자야 너는….
정말이지 기분이 더러워, 정말이지 기분이 더러워… 남자의
목소리를 흉내내면서, 사나다 치아키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
켜 세웠다. T셔츠로 둘러싸인 가슴에 유두와는 다른 돌기가
존재하고 있다. 71일 전에 그녀 스스로 만든 피어스(‘꿰뚫
는’`‘관통하는’의 뜻. 여기에서는 유두를 관통하고 있는
링)였다. 찌를 때와 빼낼 때는 아주 큰 고통이 따랐다.
하지만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일주일쯤 계속되던 통증도
마침내 사라졌다. 33일이 지나자 상처 자국도 완전히 아물
었다. 사나다 치아키는 그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시부야에 있는 도큐 펀즈 입구에서 163보쯤 걸어가면, 보디
피어싱을 하는 상점이 나온다. 정말로 좋은 사람들이야, 그
들은… 다음번에는 몸에 문신을 새겨야지… 나는 스스로 고
통을 선택할 수 있어… 다소 두려우면서도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나다 치아키는 T셔츠의 목덜미 부분을 잡아당겼다. 그리
고 유두를 들여다보았다. 모든 남자들은 사정만 하면 그만
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가슴 설레는 행위는 하지 않았다.
사귀고 있는 남자는 세 명이었다. 그런데 이 방을 더럽힌다
고 그녀가 불평을 하자, 최근 들어서 세 사람 모두 연락을
하지 않았다. 『와일드 앳 하트』 CD가 넣어져 있고, 팬티
도 벗지 않았어… 이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보건대, 잠들기
전에 오랫동안 자위 행위를 했던 모양이다. 기분만 고조되
었을 뿐, 성욕은 끝끝내 발동하지 않았다.
헐떡거리는 소리가 아주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마치 다른
사람이 토해 내고 있는 소리처럼 들렸다. 어떻게 하지…?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세 번째 삼킨 할시온이 수마(睡
魔)의 소용돌이를 몰고 왔다. 그러고는 곧장 잠이 들었다.
이렇게 엉망진창인 상태에서 지금 당장 믿을 수 있는 건 단
하나… 사나다 치아키는 목덜미 쪽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
그러고는 은색으로 빛나는 피어스를 집게손가락으로 가만히
만져 보았다. 분명히 자신의 손이었다. 그런데도 마치 다른
사람이 만지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피어스는 유두를 직통으로 관통하고 있었다. 그것은 14번
규격, 직경 12.7밀리미터의 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소재
는 의료용 스테인리스였다. 보름달처럼 생긴 것에 작은 틈
이 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작은 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런 걸 하다니, 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만나는
손님마다 모두 이런 소리들을 했다. 그들은 야쿠자 조직원
의 문신이라도 본 것처럼 피어스를 보고 크게 위축되었다.
그럴 때마다 사나다 치아키는 그들을 비웃었다. 그렇게 벌
벌 떠는 걸 보기 위해서 이걸 한 거야, 재밌잖아…? 빠른
시간 내에 다른쪽 유두에도 피어스를 해야지… 이렇게 생각
하자, 할시온 때문에 차가워진 몸에 피가 통하기 시작했다.
피어싱을 하려면 용기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용기를 얻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성욕을 회복시켜야 한다.
아무한테도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성욕이 없어지면 그 사이
클이 시작된다. 나 때문에 주위에서 나쁜 일들이 생겨나고
있어… 그걸 깨닫는 순간, 한꺼번에 몰려드는 불안의 사이
클… 그렇게 되면, 자신은 이미 고통을 선택한 사람이 아니
다. 용기도 사라져 버린다.
사나다 치아키는 침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러고는 카펫 위
에 서서 잠시나마 현기증과 구토 증세를 느꼈다. 한기도 찾
아들었다. 비타민 C와 위장약을 먹기 위해서 냉장고와 찬장
쪽으로 걸어갔다. 거기까지는 꼭 다섯 발짝이면 도달할 수
있었다.
118일 전에 8,935엔 주고 산 큼직한 컵에 미네랄 워터를 따
른다. 그러고 나서 세비앙 정제와 알카셀투어를 두 개씩 퐁
퐁퐁퐁 떨어뜨린다. 물이 튄다. 아주 작은 물보라들이 무수
히 솟구쳐 오른다… 그걸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가라앉을
거야. 이렇게 생각하면서 정확히 다섯 발짝 앞에 놓여 있는
냉장고 쪽으로 걸어갔다. 바로 그때였다.
붉게 빛나는 스위스제 아미 나이프가 눈에 확 띄었다. 그것
은 등나무로 만든 작은 바구니 속에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바구니는 2인용 다이닝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아미
나이프에는 나이프와 가위, 깡통따개, 마개뽑이, 병따개,
줄 따위가 모두 갖추어져 있다. 사나다 치아키는 생각했다.
반드시 저걸 가지고 가야 해… 깜박 잊고 있었어. 171일 전
에 함께 놀았던 손님이 그랬어. 호텔 욕실에 있는 샤워기의
뚜껑을 자르라고… 가위를 이용해서 반드시 고무로 된 부분
만을 잘라 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허리에 감고 있는 로프에 연결한다. 마지막
으로 그것을 가랑이 사이에다가 단단히 고정시킨다. 손님한
테 부탁을 한다. 고무가 파고들어서 클리토리스를 노출시킬
정도로 단단하게 조여 달라고… 마침내 그것이 흥분을 한
다. 이렇게 하면 성욕이 용솟음칠 것이다. 사나다 치아키는
냉장고 문을 열기 전에, 핸드백 속에다가 아미 나이프를 집
어 넣었다.
[유년의 기억] 초조한 기다림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그러고 나
서 사이드 테이블에 설치되어 있는 디지털 시계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단 2분 만에, 시간을 몇십 번이나 확인했는지
모른다. 시계가 6시 2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런 일을 하
는 여자가 시간을 제대로 지킬 리 없다. 택시를 타고 오다
가 길이라도 막히는 경우, 30분 정도는 금세 지나가 버린
다.
성감 마사지를 하는 여자는 40분도 더 지난 다음에나 도착
할 거야…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히터는 오래 전에 꺼버렸
다. 그 때문에 방안의 온도가 상당히 낮아져 있었다. 그런
데도 장갑을 낀 손만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땀 때문에 손가락 주변에 얼룩이 져 있었다. 새로 산 가죽
장갑에 틈이 벌어져 있다니… 왠지 모르게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 것 같았다. 마음이 찜찜했다. 그래서 그는
노트를 살펴보면서 확인하기로 했다. 예정대로 신주쿠 니시
구치에서 호텔 버스를 탔다. 그리고 3시 5분 전에, 게이오
플라자의 현관 앞에 도착했다.
금요일 오후인 데다가 길일이어서 그런지, 결혼식에 참석하
려는 단체 손님들로 버스는 만원이었다. 신주쿠 구의 회계
사 모임과 컴퓨터 회사들의 협의회가 겹치는 바람에 체크인
하는 카운터 주변이 엄청나게 혼잡스러웠다. 마치 화가 난
사람처럼, 프런트 담당 직원은 벌개진 얼굴로 정신없이 일
을 처리하고 있었다. 그는 가와시마 마사유키한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벨보이도 나타나지 않았다. 가와시마 마사유
키는 몇 번씩이나 로비를 둘러보았다. 다행스럽게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의 방은 29층에 있었다. 도청 청사와 마주보고 있는 방이
었다. 아이스 픽과 나이프, 그리고 갈아입을 옷은 종이 봉
투에 넣어서 가방 속에다가 처박아 두었다. 가방은 아주 흔
해 보이는 암갈색의 합성 피혁 제품으로 골랐다. 하네다 공
항 구내 매점에서 산 가방이었다. 그는 공항 화장실에서 옷
을 갈아입고 안경을 썼다. 그러고는 간사이 스포츠 신문을
주워서 가방 속에다 쑤셔 넣었다. 어찌나 복잡하던지, 체크
인 할 때는 프런트 담당 직원과 대화다운 대화도 나눌 수가
없었다. 그때 그는 간사이 지방의 악센트를 흉내내서 말했
다.
하지만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스포츠 신문을 방안에 놓아둠으로써 위장 재료로 삼을 것인
지, 그렇지 않을 것인지는 모든 일이 끝난 다음에 결정하기
로 했다. 그런 점들을 확인하고 나자, 다소 마음이 놓였다.
그는 도청 건물의 창등(窓燈)을 바라보았다. 몇백 개는 될
성싶었다. 도로에는 몇 대의 관광 버스가 정차해 있었다.
그리고 그 주위에는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서 있다.
도청 건물을 배경으로 해서, 가족 사진이나 비디오를 찍으
려는 것 같았다. 유리창 너머에서 초겨울의 찬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지방에서 올라온 관광객들이라서 그런지, 동지
바로 전의 추위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여기저기에서
플래시가 터졌다. 마치 화약 놀이를 하는 것처럼 플래시 불
빛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요코와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그런 생각은 거의 없어졌다. 하지만 지금도 가족들끼리 놀
러 다니는 걸 보면 몸 속 어딘가에서 싸늘한 파문이 일곤
한다. 기억을 자극하는 파문이다.
항상 그 물결은 의식을 과거로 되돌아가게 한다. 어머니가
동생을 데리고, 현관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한낮인데도
플래시가 터진다. 어머니는 미소를 머금고 있다. 동생이 이
쪽을 보면서 손짓을 한다. 내가 고개를 가로 젓는 순간, 어
머니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진다.
양손에 카메라를 든 채 어머니가 무표정하게 바라본다. 나
는 생각한다. 화를 내, 빨리 때리란 말야! 어머니는 무표정
한 얼굴로 꼼짝하지 않는다. 나는 생각한다. 빨리 때리라니
까! 그런데도 어머니는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다. 인간이 아
니라 가구나 돌 또는 벌레를 보고 있는 듯한 눈길이다.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머릿속에서 어머니의 영상을 털어내
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하얗고 팽팽한, 젊은 여자의
뱃살을 떠올렸다. 몸집이 아담하고 피부가 아주 하얘요. 게
다가 성격까지 온순해요… 수화기 저편에서 SM 클럽의 남자
가 말했다. 성감 마사지를 하는 곳의 전화 목소리나 말투로
는 안성맞춤이었다.
주사 바늘을 꽂은 채 잠들어 있는 환자… 바로 그 옆에서
전화를 받고 있는 듯한 목소리… 그런 목소리로 아무 염려
마세요,라고 이야기했다면 틀림없이 불안했을 거야. 이렇게
생각하면서 그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6시 20분을 막 넘어
서고 있었다.
이 방에서는 요코한테 전화를 걸 수가 없다. 호텔 컴퓨터에
전화 번호가 기록되기 때문이다. 요코에 관한 문제는 의식
이 끝날 때까지 잊어 버리도록 하자. 지금 이 방에 머물고
있는 사람은 가와시마 마사유키가 아니라 요코야마 토오루
인 것이다. 그는 스스로를 격려했다. 그러자 정말로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SM 클럽에 전화를 하려는 순간, 도어 차임벨이 울렸다. 가
와시마 마사유키는 히터의 스위치를 켰다. 그러고 나서 출
입문 쪽으로 걸어갔다. 여자가 옷을 벗을 수 있게끔 실내
온도를 높여 놓아야 한다. 그는 장갑을 끼었다. 그리고 주
머니에 손을 집어 넣은 다음, 손수건을 꺼내서 꽉 움켜쥐었
다.
[유년의 기억] SM 클럽의 여인
시티 호텔은 정말로 오랜만이야… 니시신주쿠의 높다란 빌
딩숲을 올려다보면서 사나다 치아키는 생각했다. SM 전용
호텔은 마룻바닥에 딱딱한 밀(꿀벌들이 집을 짓는 밑자리
에, 밀랍을 붙여 지은 벌집)이 달라붙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 때문에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대단한 신사분이더군요…오늘은 사장이 이렇게 말했다. 그
래서 쥰코 시마다의 미니 원피스와 검정색 스타킹을 착용하
기로 했다. 뿐만 아니라 베이지색 캐시미어 코트도 입기로
했다. 물론 화장도 열심히 했다. 약속 시간에 늦지 않으려
고, 사나다 치아키는 5시 40분에 신오쿠보에 있는 맨션에서
나왔다. 육교를 지나면서 약간 지체되긴 했지만, 그래도 약
속 시간 5분 전까지는 게이오 플라자의 정면 출입구 쪽에
당도할 수 있었다.
차례를 기다리느라고 택시 승차장에는 사람들이 죽 늘어서
있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오늘은 도어맨이 달려오질
않았다. 빈 차를 유도하느라고 넋이 나가 있는 것 같았다.
여느때 같으면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어서 오십시오. 짐은
저한테 맡겨 주십시오’라고 말하면서 재빨리 달려왔을 것
이다. 대개 그들은 덩치가 크다. 그리고 어깨에는 몰(직물
의 일종, 단자緞子와 비슷하게 돋을 무늬가 들어가 있는 직
물) 장식을 하고 있다. 덩치 큰 도어맨이 앞장을 선다면,
자연히 긴장할 수밖에 없다.
도구가 들어 있는 가방을 주시할 게 틀림없기 때문이다. 바
이브레이터의 전지는 빼놓았고 가방을 들여다보더라도 단번
에 알아보지 못하게, 불투명한 비닐 가방에 나누어 보관해
두었다. 그럼에도 도어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
었다.
호텔 로비는 그야말로 초만원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검
정색 예복과 드레스 또는 전통 의상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 호텔 이름이 새겨진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 사람들
의 말소리가 로비에 가득 차서, 자기 자신의 발소리마저도
들을 수가 없었다.
처음 이용하는 손님이에요… 사장이 했던 말을 머릿속에 떠
올리면서, 사나다 치아키는 로비에 설치되어 있는 공중 전
화 박스 쪽으로 걸어갔다. 사무실로 연락을 취하기 위해서
였다. 손님 바로 앞에서 ‘지금 막 들어왔어요’라고 사무
실로 전화를 할 경우 손님한테 창녀라는 인상을 심어줄 수
가 있다. 그렇게 되면 손님이 기분을 망쳐 버린다.
네 대의 전화기가 설치되어 있는데 모두가 사용중이었다.
사나다 치아키는 지갑에서 공중 전화 카드를 꺼냈다. 카드
에는 눈〔雪〕으로 만든 토끼가 인쇄되어 있었다. 그녀는
녹색 전화기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어떤 사람이 빨리
끝낼까, 하고 생각하면서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오른쪽 두 번째 박스에 들어가 있는 남자가 히쭉히쭉 웃으
면서 자기를 쳐다보고 있었다. 삼십대 후반에서 사십대 초
반의 나이인 것 같았다. 걸치고 있는 코트가 꽤나 더러워
보였다. 그가 사나다 치아키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
러고는 이내 머리카락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훑어보는 것이
었다. 그가 미소를 머금었다.
그 정도는 확실하게 준비를 해뒀어야지!
갑자기 그가 큰소리로 말했다.
그와 동시에 수화기를 난폭하게 내려놓았다. 양쪽에서 전화
하던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마치 수화기를 내팽
개칠 듯한 몸짓이었다. 남자의 얼굴에는 이미 미소가 사라
지고 없었다. 금방이라도 안면 근육이 끊어질 것처럼 얼굴
이 푸르락누르락했다. 그러고는 낯선 사람들만 있는 곳에서
곧바로 폭력이라도 휘두를 듯한 자세를 취했다.
사나다 치아키는 그가 수화기를 내팽개칠 때까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남자가 자기 쪽으로 한 발짝 내딛었다.
하마터면 그녀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녀는 그의 몸을 밀
치려고 잔뜩 웅크렸다. 바로 그 순간, 그녀가 들고 있던 공
중 전화 카드가 바닥에 툭 하고 떨어졌다.
그것을 주우려고, 코트 차림의 남자가 상체를 구부렸다. 사
나다 치아키는 잔뜩 긴장을 한 채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서둘러서 걷기 시작했다. 1초라도 빨리 그곳에서 떠나고 싶
었다. 모르는 남자야… 사나다 치아키는 자기 자신한테 이
렇게 말했다. 저런 남자는 본 적도 만난 적도 없어, 그러니
까 신경쓸 거 없다구…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서둘러 걸어갔
다.
솔직히 말해서 마구 내달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스스
로를 달랬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호텔 이름이 뭐고,
무슨 일로 자기가 이곳에 와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스
물한 걸음째 걷고 나서, 그녀는 제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
다.
그러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주위에는 검정색 예복을 차려
입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그녀의 키는 157센
티미터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서 멀리 내다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발뒤꿈치를 들고, 주위를 빙 둘러보았다. 코트를 입
은 남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시 걸었다. 그리고 화
장실을 찾았다. 조용한 곳으로 가서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
정시키고 싶었다.
코트를 입은 채 덮개가 내려져 있는 좌변기 위에 털썩 주저
앉았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녀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모르는 사람이야,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남자라구…
스스로에게 수도 없이 확인을 시켰다. 아마도 그 남자를 보
는 순간 무슨 생각이 떠오른 것 같았다.
몸 속 여기저기에 흩어진 채 조용히 잠들어 있던 기억들이
일제히 활동을 시작한 느낌이었다. 가슴이 좀처럼 진정되질
않았다. 일어서서 코트를 벗었다. 문에 갈고리가 달려 있었
다. 그녀는 코트를 거기에 걸었다. 선 채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남자의 인상 착의를 곰곰이 되새겨 보았다.
원피스 밑으로 피어스가 만져졌다. 여름이라면 직접 닿았을
텐데… 두꺼운 옷감이라서 피어스를 만질 수가 없었다. 가
까스로 딱딱한 금속성의 촉감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가만
히 잡아당겨 보았다. 갑자기 그날 밤 일이 생각났다. 그와
동시에 가벼운 통증이 되살아났다. 아아… 피어스를 만지면
서 사나다 치아키는 신음을 토해 냈다.
성욕을 잃고 난 다음부터 이런 일이 자주 벌어졌다. 온몸에
흩어진 채 잠들어 있던 기억의 덩어리들이 꿈틀거리기 시작
했다. 그럴 때마다 반드시 무서운 일이 벌어지곤 했다. 사
나다 치아키는 피어스를 만지작거리면서, 다른 곳으로 옮겨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때였다. 자기가 지금 게이오 플라
자 호텔에 와 있다는 사실이 퍼뜩 떠올랐다.
그리고 29층에서 손님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도 생각났다.
현실 감각이 회복되어 가고 있었다.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시계 바늘이 6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혹시… 29층에서
기다리고 있는 젊은 신사가 성욕을 자극해 줄지도 몰라. 그
래서 꿈틀거리고 있는 뭔가를 다시 잠들게 해줄지도 몰
라….
[유년의 기억] 각자의 일
「아야라고 해요.」
출입문을 열어준 가와시마 마사유키한테 사나다 치아키가
말했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면서 방안으로 들어갔다.
「반갑습니다.」
출입문을 닫으면서 가와시마 마사유키가 말했다. 그는 손수
건으로 감싼 상태에서 출입문 손잡이를 돌렸다. 그런 다음
에 보조 잠금 장치를 걸었다. 바깥쪽 손잡이에는 팻말이 걸
려 있었다.
「늦어서 죄송해요.」
사나다 치아키가 말했다. 그녀가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사
무실에 전화를 걸기 위해서였다. 면적이 꽤나 넓어 보이는
트윈룸이었다. 양복도 비싸 보이지 않는데, 이렇게 좋은 방
에서 묵고 있다니… 이상한 사람 다 보겠군… 사나다 치아
키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남자의 얼굴은 괜찮아 보였다. 그녀가 싫어하는 타
입이 아니었던 것이다. 뚱뚱하지도 않고 불결한 느낌도 주
지 않았다. 아까부터 손수건을 꼭 움켜쥐고 있던데… 무엇
때문이지?
「마실 것 좀 주시겠어요?」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사나다 치아키가 출입문 쪽으로 시선
을 돌렸다. 그녀의 행동이 가와시마 마사유키의 신경을 자
극했다. 그는 손수건을 두른 상태에서 냉장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냉장고 안에서 캔 콜라를 꺼내, 그녀한테 건네 주었
다.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불안했다. 아는 사람이 밖에서 기
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이리로 오는 도중
에 가이드맨 등으로부터 질문 공세를 받았던 게 아닐까?
「좀 이상하신 것 같아요.」
출입문 쪽을 바라보면서 가와시마 마사유키가 물었다.
「뭐가…요?」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거야…? 사나다 치아키는 이렇게 생각
하면서 콜라를 절반쯤 마셨다.
「바깥쪽에 신경을 쓰고 계신 것 같아서요.」
정말로 몸집이 아담하고 피부도 하얗다고 생각하면서 가와
시마 마사유키가 말했다.
「그런 적 없어요.」
그 남자의 얼굴을 두번 다시 떠올리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
서 거짓말을 하기로 했다.
「이 방에 들어오기 전에 잠깐 화장실엘 들렀어요. 그런데
그곳에서 여자 둘이 수화로 대화를 주고받고 있지 않겠어
요? 이전부터 저는 수화하는 동작을 아름답다고 생각해 왔
어요. 그래서 넋을 잃고 쳐다보았죠. 엘리베이터 타는 곳에
서 그 여자들을 다시 만났어요. 그때도 저는 물끄러미 쳐다
보고 있었죠. 신기하다고 생각지 않으세요? 전혀 소리를 내
지 않고서도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게 말예요. 정말로 인상
깊은 장면이었어요. 지금도 저 밖에서 두 사람이 소리 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만 같아요.」
사나다 치아키는 크게 감탄했다. 정말로 멋진 거짓말이었
다. 18일 전에 수화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두 명의 여자
를 본 적이 있긴 했다. 자기가 살고 있는 맨션 근처의 슈퍼
마켓에서 있었던 일이다. 소란스러운 슈퍼마켓 안에서 그들
두 사람이 서 있는 곳만 조용했다. 뭔가 특별한 보호막이
두 사람을 지키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이처럼 싸구려
양복과 싸구려 구두를 신고 있는 남자한테 들려 주기에는
다소 아까운 거짓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화라….」
가와시마 마사유키가 중얼거렸다. 그는 생각했다. 지금 이
여자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머리 모양도 단정하고 옷 맵
시도 나쁘지가 않다. 몸집이 작긴 하지만 균형미도 갖추고
있다. 약간 작아 보여서 그렇지, 얼굴 생김생김도 괜찮은
편이다. 게다가 말투까지 차분하다. 하지만 눈에는 안정감
이 없었다. 근시여서 그런가…? 눈빛이 흐릿해 보였다. 뭐
라고 지껄일 때는 시선을 딴 데로 돌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 여자는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시선과 의식
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그것도 텅
빈 의자를 마주한 채 똑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여자다.
겁먹은 사람이 거짓말을 할 때 나타나는 특징이다. 무엇에
대해서 겁을 내고 있는 걸까, 그리고 왜 거짓말을 했을까…
아무튼 1초라도 빨리 묶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SM은 처음이라서 아무것도 몰라요. 뭘 어떻게 해야 하는
지….」
가와시마 마사유키가 말했다.
「저, 발가벗은 상태에서 몸을 묶어도 되나요?」
인상이 괜찮아 보여서 안심했는데… 하지만 수준이 밑바닥
인지도 몰라. 사나다 치아키는 경계심을 갖기 시작했다. 능
숙한 솜씨로 성욕을 자극해 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의 결과를 가져다 줄지도 모른다. 갑자기 무서운 생각
이 들었다. 조금 전에 본 코트 입은 남자처럼 행동을 한다
면… 그래서 자신의 기억을 송두리째 흔들어 버린다면… 남
자가 들고 있는 손수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남성적인 몸
매를 갖고 있으면서도, 마치 장례식이나 맞선을 볼 때 함께
나온 중년의 아줌마처럼 보였다.
「보통은 약간의 얘기를 나누죠. 서로가 좋아하는 것을 알
아야 하니까요. 그런 다음에 플레이를 하는 게 부드럽죠.」
「얘기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시계를 쳐다보면서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초조감을 느꼈다.
시계 바늘이 7을 가리키고 있다. 의식이 끝난 다음에 뒤처
리를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1초라도 빨리 묶어야 하
는 것이다. 하지만 여자한테 불안감을 심어 주어서는 안 된
다.
「아무 거나 상관없어요. 아니, 음란한 얘길 해주세요. 지
금까지 해본 것 중에서 가장 변태적인 섹스라든가….」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사나다 치아키는 마음속으로 생각했
다. 싸구려 양복을 입고 있는 이 남자한테 성욕을 자극받는
거야. 그래, 거기에 고무를 끼워 넣자. 그러고는 그것을 들
여다보게 하는 거지. 그런 다음에 그것을 핥거나 만지게 하
는 거야. 클리토리스가 노출될 정도로 강한 자극을 줘야
해. 그런 행동이 서로에게 얼마나 강한 흥분을 가져다주는
지 가르쳐 줘야 해….
변태적인 섹스라는 말을 듣고,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기분이
상해 버렸다. 자기가 아이스 픽으로 배를 찔렀던 여자… 열
아홉 살이나 더 먹은 여자가 갑자기 생각났기 때문이다. 마
구 때리거나 흠씬 두들겨 맞은 후에, 그 여자는 반드시 울
었다. 그러고는 싹싹 빌면서 상처 난 자리나 피가 나는 곳,
또는 멍든 곳을 어루만지거나 그곳에다 키스를 하는 것이었
다. 그러면서 하나씩 하나씩 옷을 벗는 게 그 여자의 습관
이었다. 그 뒤에 곧바로 여길 핥아 달라면서 마구 때린 적
도 있었다. 손등에 주름살 하나 없는 여자가 눈앞에 서 있
다.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이 여자의 아킬레스건을 빨리 자
르고 싶었다.
「여자가 자위 행위하는 장면을 보신 적 있어요?」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사나다 치아키가 미소를 머금었다. 그
와 동시에 혀를 내밀어서 입술을 핥았다. 변태적인 이야기
는 카바레나 소프랜드(유흥 시설의 하나. 개별적으로 방이
딸려 있는 특수 목욕탕) 따위엘 가야 들을 수 있다. 이런
이야기를 듣는 순간, 곧바로 욕정이 솟구칠 거라고 생각했
던 것이다.
싸구려 양복 차림의 남자를 바라보면서 소파에 앉은 채 허
리를 약간 쳐들었다. 그런 다음에 치맛자락을 걷어올렸다.
그녀는 한쪽 다리를 팔걸이 위에다가 올려 놓았다. 검정색
스타킹 아래쪽에서 속이 환히 비치는 보라색의 팬티가 나타
난다. 손가락을 빨아서 침을 묻힌다.
그러고는 넙적다리 근처를 살살 문지른다. 이런 광경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것이다. 너의 물건 끝에서 액체가 나온
다. 그래, 싸구려 팬티를 적실 만큼 흥분하는 거야. 그러고
나서 함께 샤워를 하는 거지. 그때 샤워기 뚜껑에 달려 있
는 고무를 어떻게 이용하는지 가르쳐 줄게….
이상하게 생긴 구두를 신고 있군…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이
렇게 생각했다. 가까스로 복사뼈를 가리고 있는 짧은 부츠.
색깔이 검고 뒤축도 매우 가늘다. 구두를 신긴 채로, 몸을
묶자. 그 상태에서 아킬레스건을 자르는 거야. 그러기 위해
서는 아킬레스건이 팽팽하게 늘어나 있어야 해.
그래, 구두 뒷굽이 높아서 됐어. 저걸 이용하면 돼. 저기에
다가 나이프를 힘차게 쑤셔 넣는 거야. 그 다음에 천천히
옆으로 돌리는 거야. 그럼 어떻게 될까? 힘이 빠져서 축 늘
어질까? 그렇지 않으면… 고무를 자를 때처럼 묘한 소리를
내지르면서 펄쩍펄쩍 뛸까? 여자는 눈을 감은 채, 쉴새없이
신음소리를 토해 내고 있었다. 검정색 스타킹 때문에 그런
가? 너무한다 싶을 정도로 다리가 가늘어 보였다.
넙적다리와 엉덩이에도 살이 별로 없다. 누군가가 가르쳐
주었을 것이다. 저런 짓을 해보이면 손님이 좋아할 거라
고… 저 짓이 끝나면 간드러진 목소리로 옷을 벗겠다고 하
겠지. 정말로 기막힌 연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희미한 소리와 함께 가와시마 마사유키가 웃음소리를 토해
냈다. 웃음소리를 듣고 사나다 치아키는 깜짝 놀랐다.
그와 동시에 팬티 위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던 그녀의 손
놀림도 함께 멈추었다. 눈을 떴다. 싸구려 양복 차림의 남
자가 손수건으로 입을 가린 채 웃고 있었다. 그녀는 모욕감
을 느꼈다.
「그런 짓, 이제 그만해요.」
가와시마 마사유키가 말했다. 여자가 팔걸이 위에 올려 놓
았던 한쪽 다리를 황급히 내려 놓았다. 바로 그 순간 구두
뒷굽이 테이블에 콰당 하고 부딪쳤다. 우당탕 하고 시끄러
운 소리가 났다.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던 캔 콜라가 나자빠
졌던 것이다. 정말로 자기도 모르게 손이 나갔다. 가와시마
마사유키가 손수건을 들지 않은 손으로 캔 콜라를 붙잡았
다.
「무슨 짓이야, 이게!」
캔 콜라를 들고 있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면서 가와시마 마
사유키가 꽥 하고 소리를 질렀다. 관자놀이와 눈 안쪽이 화
끈 달아올랐다. 사나다 치아키는 움찔했다. 심장이 경련을
일으켰다. 시계가 뿌옇게 흐려졌다. 모든 것이 뿌옇게 보였
다. 욕정을 불러일으키려고 했는데, 오히려 그 반대로 되었
어… 이렇게 생각하면서 그녀는 알 수 없는 갑작스러운 공
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버렸다. 그리고 그 같은 현상에 저
항을 할 수 없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하나씩 하나씩 등불이 사라져 가는 것처럼 언어 또한 자기
자신으로부터 하나씩 하나씩 멀어져 가고 있었다. 성욕, 자
위 행위, 섹스, 그런 것들로부터 싸구려 양복, 모욕, 수화,
화장실… 이런 글자들이 네온사인처럼 사라져 갔다. 이와
같은 광경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말이 사라지고, 그 대신 기억들이 되살아
나고 있다… 언제 시작될까 하고 상상하는 순간,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그런데 그 같은 현상이 실제로 시작되고 나면
두려움도 사라져 버렸다. 그래, 화장을 고쳐야 해….
[유년의 기억] 잃어버린 성감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여자한테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지를 알지 못했다. 자위 행위하는 걸 보고 웃었지. 그러다
가 나중에는 큰소리를 내고 말았어. 그것 때문에 화가 났
나?
그는 약간 불안감을 느꼈다. 하지만 아담한 체구를 가진 여
자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눈을 보니, 그 어느 곳에도 초점
을 맞추지 않았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갑자기 그 여자가 발밑에 놓아 둔 핸드백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그것을 무릎 위에 올려 놓았다. 그
여자가 핸드백을 마구 뒤져서 립스틱을 꺼냈다.
왼손에는 콤팩트가 들려 있었다. 그 여자가 오른손으로 립
스틱을 바르기 시작했다. 화가 나 있는 게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일단 마음을 놓았다. 립스틱의 끝부분이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립스틱이 입술 선과 어긋난
형태로 칠해져 있었다. 하지만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그런
데 신경을 쓰지 않았다. 립스틱을 핸드백 속에 집어 넣고
나서, 사나다 치아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샤워를 해야겠어요.」
조금은 다른 목소리로 사나다 치아키가 말했다.
「샤워를 한 다음에, 몸을 묶어도 되겠어요?」
가와시마 마사유키가 물었다.
「그러죠, 뭐.」
이렇게 대답하면서 사나다 치아키가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
고는 이내 핸드백을 껴안고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딸깍 하
는 소리가 들려 왔다. 욕실문을 잠그는 소리였다.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입술을 새빨갛
게 칠해 가지고 욕실 안으로 들어갔던 여자가 30분이 지났
는데도 나오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무심결에 붙잡
았던 캔 콜라의 표면을 닦고 또 닦았다. 이로써 의식에 필
요한 모든 도구들이 갖추어진 셈이었다.
그는 새로운 가죽 장갑을 꺼내 끼었다. 그리고 나이프와 아
이스 픽의 포장을 풀면서 여자의 날씬한 두 다리를 머릿속
에 떠올렸다. 뱃가죽도 아주 얇을 거라고 상상했다. 아이스
픽은 금속의 끝부분이 가장 긴 것으로 선택해서 샀다. 15,
16센티미터는 족히 될 성싶었다. 여차 하면 등까지 뚫어 버
릴지도 모른다. 원래는 소파에 묶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등을 뚫고 나온 아이스 픽의 끝부분을
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묶는 방법을 바꾸는 게 좋다고 생
각했다. 천장에 매달 수만 있다면… 하지만 이 방에서는 그
렇게 할 수가 없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가슴이 두
근거리기 시작했다.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장갑을 끼었다 벗
었다 하면서, 욕실로 통하는 좁다란 통로 벽에 기대어 서서
초조해 하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머리라도 감고 있는 걸까? 먼 곳을 쳐다보는 듯한 그 여자
의 시선이 마음에 걸렸다. 눈동자가 흐릿했다. 의식과 시선
이 균형 감각을 상실한 채 불안정해 보였다. 언젠가 본 적
이 있는 것 같았다. 어디서 봤을까, 저런 여자를…? 하지만
이내 그만두기로 했다. 과거의 기억들을 되살리고 싶지가
않았다. 요코 이외의 다른 여자들은 하나 같이 나쁜 추억밖
에 남겨 주지 않았던 것이다.
「이봐요, 괜찮아요?」
욕실 출입문에 노크를 하면서 가와시마 마사유키가 물었다.
안에서 예, 하고 대답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예, 곧 나가
요… 목소리가 새되고 억양마저도 이상한 느낌을 주었다.
축 늘어진 테이프에서 들려 오는 소리 같았다. 그때까지도
물소리는 멈추지 않고 있었다.
립스틱을 잘못 발랐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
보면서, 사나다 치아키는 이렇게 생각했다. 립스틱만큼은
온갖 정성을 다해서 발라야 한다. 그녀는 티슈를 뽑아 들었
다. 그리고 입술 주위를 거칠게 닦아냈다. 입술이 한꺼풀
벗겨질 정도로 강하게 문질러댔지만 아무런 감각도 느낄 수
가 없었다. 모든 감각이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그녀는 원피스를 벗은 다음, 그것을 몇 번이고 접어서 세면
대 위에 올려 놓았다. 슬립도 벗어서 세면대 위에 올려 놓
았다. 그녀는 샤워기의 온도 조절 핸들을 C에서 H로 천천히
돌렸다. 그러고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물을 손바닥
으로 받았다. 앗 뜨거! 사나다 치아키는 자기도 모르게 비
명을 지르고 말았다. 온도 조절기의 핸들을 H에서 C로 천천
히 돌렸다. 그리고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손바닥에 물을 받
았다. 사나다 치아키는 양쪽 손을 이용해서 똑같은 행동을
10여 차례나 되풀이했다.
샤워기를 틀어 놓은 상태에서, 그녀는 다시금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그래, 최초로 이런 경험을 한 게 고등학교 때였
어… 브래지어를 벗으면서 그녀는 생각했다. 이런 일을 겪
는 순간에만 과거에 경험했던 똑같은 일들을 기억해 낼 수
가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친구 집에 놀러 간 적
이 있었다. 그날 따라 어른들이 밖에 나가고 없었다.
그래서 성인용 비디오를 보게 되었다. 비디오 테이프를 되
감지 않았는데도 스위치를 켜는 순간 섹스 장면이 텔레비전
화면에 곧장 나타났다. 얼마나 오랫동안 보았는지 모른다.
갑자기 배가 아팠다. 복통을 참고 있는 동안, 이유를 알 수
없는 공포감이 엄습해 왔다. 눈앞에서 누군가가 카메라의
스트로보(섬광 전구의 일종, 방전관放電管을 발광시켜서,
광도를 높게 하는 것이 특징)를 터뜨리고 있는 듯이 느껴졌
다.
바로 그 순간, 다른 영상이 시작되었다. 이와 같은 일이 지
금까지 일곱 번이나 벌어졌다. 성욕이 사라지고 있다… 이
것이 바로 문제의 시작이었다. 잘생긴 젊은 남자를 보고서
도, 어딘가를 핥고 싶다든가 어딜 핥아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게 구체적으로 어떤 부위를 가리키
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단지 자신의 몸 깊은 곳에서 얼얼
한 허기가 느껴질 뿐이었다.
그런데 그게 표면으로 드러나지를 않는 것이다. 혈관과 신
경이 끊어져 버림으로써 허기와 성욕을 느낄 수가 없었다.
이런 상태가 상당히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938일 동안이나
계속된 적도 있었다. 그때마다 마음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 사람 저 사람과 섹스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남자의 페니스가 질이나 항문이 아닌 전혀 다른 구
멍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결과 오르가
슴은 고사하고, 마지막에는 자기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
지조차도 모르는 경우가 있었다. 이런 식으로 섹스를 할 때
마다, 천장에서 누군가가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었다. 정말로 기분 나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게 누구인지 나는 알고 있어… 팬티를 벗으면서
사나다 치아키는 생각했다. 천장에서 섹스하는 광경을 내려
다보고 있는 건 바로 나 자신이야… 이런 사실을 최초로 자
각했을 때 그녀는 보지 마, 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상대는
깔깔거리고 웃을 따름이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아예 말을 걸지 않았다. 늘 대화를
주고받을 경우, 자기 자신이 둘로 갈라져 버릴 것만 같아서
두려웠다. 결벽증 환자라도 되나…? 아주 잠깐 동안, 사나
다 치아키는 싸구려 양복 차림의 남자를 생각했다. 이상한
놈이야. 내내 손수건을 움켜쥐고 있다니… 단 한순간도 손
수건을 손에서 뗀 적이 없었어. 저런 남자들은 대부분 병을
앓고 있어.
사실은 더러운 것을 좋아하고, 그런 행동을 하고 싶은 거
야. 저놈도 마찬가지야. 저놈…? 저놈이라고…? 지금 내가
누굴 생각하고 있는 거지? 다른 사람들 앞에 설 때마다, 그
놈은 항상 풀까지 먹인 새하얀 와이셔츠를 입곤 했어. 바지
도 그랬지. 손이 벨 정도로 날카롭게 주름을 잡았어.
그러고는 어딜 가든지 간에 새하얀 손수건을 꽉 움켜쥐고
있었어. 마치 장례식이나 맞선 장소에 나온 중년의 여자처
럼 보인다고, 놀림을 당한 적도 있다고 했어. 그래, 그놈은
그랬어… 몸을 아주 깨끗이 씻어야 한다고. 그런 다음에 와
이셔츠가 빳빳해지고 새하얗게 될 때까지 풀을 먹여야 한다
고. 뿐만 아니라 새하얀 손수건까지 움켜쥐고 있어야 한다
고.
이렇게 하면 마음까지 새하얘지지… 틀림없이 이렇게 이야
기했어. 그래, 그놈은 바로 나의 아버지야. 그놈은 더러운
걸 아주 좋아했어. 그러니까 더러운 곳을 모두 핥아 주었
지. 기분이 묘할 거야. 하지만 무서워할 거 없다구. 그리고
아무한테도 이야기해선 안 돼.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해야
돼, 알았지? 엄마한테도 이야기해선 안 돼. 다른 사람이 알
게 되면, 그 순간부터 치아키도 엄마도 모두 뿔뿔이 흩어지
게 되는 거야.
그러니까 절대로 이야기해선 안 돼. 중학교 때 나는 친구한
테 그 같은 사실들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어머니한테도 이
야기해 버렸다. 그러자, 그놈이 새하얀 와이셔츠를 입고 내
앞에 나타났다. 어머니와 함께… 그놈은 그날도 새하얀 손
수건을 움켜쥐고 있었다. 갑자기 그놈이 화를 버럭 냈다.
어머니한테서 무슨 소릴 들은 모양이었다. 너 정말 이상한
놈이로구나! 거짓말도 거짓말 나름이지! 그런 해괴한 소리
가 어딨어! 그놈이 그렇게까지 화를 낸 건 처음이었다. 그
때부터 그놈은 무슨 일이 있으면 버럭버럭 화를 내곤 했다.
마음까지 새하얘지는 거야, 마음까지 새하얘지는 거야, 마
음까지 새하얘지는 거야, 마음까지 새하얘지는 거야… 헛소
리 하지 마! 언어야, 모두 사라져 버려라! 사나다 치아키는
몇 번이고 되풀해서 소리쳤다.
욕실문 밖에서 이봐요, 괜찮아요?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예, 괜찮아요! 사나다 치아키가 큰소리로 대답했다. 잠깐만
기다려요, 금방 나갈 테니까… 이제 곧 언어들이 완전히 사
라져 버린다. 사라져 가는 것을 실감할 때만 안다. 언어라
는 건 바싹 말라서 파삭파삭하다. 길가에 내버려진, 꾸깃꾸
깃하고 너덜너덜한 종이 돈과 같다. 그래도 사용해 보려고,
정성껏 주름을 편다.
그러고는 뭔가를 사기 위해서 누군가에게 내민다. 하지만
절대로 받아 주질 않는다. 아니, 거들떠 보려고도 않는다.
맥이 빠져서 손에 힘을 준다. 그와 동시에 소리를 내면서
그것이 찢어져 버린다. 바람에 마른풀이 둥글게 굳듯이, 사
라져 가는 언어도 그렇게 굳어 버린다. 그러고는 좋지 않은
펄프 냄새를 풍기면서 작은 마분지 모양으로 바뀌어 간다.
그것은 성대(聲帶)에서 출발하여 혈관과 신경을 타고 이동
해 간다. 흉하게 나뒹굴고 있는 언어… 그것은 파친코의 구
슬이나 인단(仁丹) 정도의 크기를 갖고 있다. 지금, 그것이
마구 나뒹굴면서 사라져 가고 있다. 그러다가 갑자기 몸 속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와 충돌을 한다. 그 바람에 그 무엇인
가가 잠에서 깨어난다.
기억… 그렇다, 바로 기억이다. 기억이 잠에서 깨어났던 것
이다. 기억은 언어와 달리 미끈미끈하다. 사정을 한 직후의
페니스나 생리 때의 그것처럼 끈적끈적한 액체로 뒤덮여 있
다. 형태는 물 속을 헤엄치는 작은 벌레나 뱀과 같다. 기억
들은 몸 속 깊은 곳에서 잠을 자고 있다가, 깜짝 놀라서 눈
을 뜬다. 그러고는 천천히 헤엄을 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몸 표면까지 맹렬한 속도로 헤엄쳐 나온다.
기억이 도착하는 순간, 감각이 사라져 버린다. 맨 처음 물
결이 밀려든 곳은 입술이었다. 그 다음에는 손바닥과 발끝,
겨드랑이 주변으로 밀려들었다. 모공으로 튀어나온 기억은
영상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몸 주변을 둥둥 떠돈다. 남은
부분이 헤엄쳐 올 때까지 떠돌면서 기다리는 것이다.
마침내 모든 게 갖추어진다. 그러면 눈앞에 텔레비전이 있
어서 스위치를 켜면 프로그램이 시작되듯이, 밑도 끝도 없
이 영상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헐떡거리면서 나의 거기를
핥고 있는 바로 그놈의 얼굴이다.
[유년의 기억] 자해
그놈의 얼굴. 썩은 채소에 누더기를 뒤집어씌워 놓은 듯한
그놈의 얼굴. 아아, 좋아라. 그놈이 중얼거린다. 쉴새없이
중얼거리고 있다. 좋아라, 좋아라, 좋아라, 좋아, 좋아, 좋
아, 좋아, 좋아, 좋아… 어느 틈엔지, 다른 목소리가 겹쳐
있다. 계집아이의 목소리, 바로 나 자신의 목소리다.
사나다 치아키는 유두 아래쪽에 있는 금속 링을 잡아당겼
다. 통증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그것을 더욱더
강하게 잡아당겼다. 유방이 텐트와 같은 형태로 한없이 부
풀어 올랐다. 유두를 관통하고 있는 구멍에서 피가 새나왔
다.
계속해서 물소리가 들려 왔다. 방송 시간이 끝난 라디오를
연상케 하는 소리였다.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애가 타다 못
해서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욕실문 앞에 서서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벌써 50분이나 지났다. 조금 전까지 여러 차
례 물어 보았다. 하지만 더 이상 대답이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장갑을 낀 채로, 욕실문의 손잡이를 만져 보았다.
그러고는 깜짝 놀랐다. 문이 잠겨 있지 않았던 것이다. 욕
실문을 살짝 밀어 보았다. 물소리가 아주 크게 들렸다. 3센
티미터쯤 되는 출입문 틈새로 수증기가 빠져나왔다. 이봐
요, 뭘 하고 있는 거예요…? 대답이 없다. 욕실문을 활짝
열어제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욕실 안은 안개가 낀 것처럼
자욱했다.
그 때문에 처음에는 사람의 형체도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
었다. 사나다 치아키는 발가벗은 모습으로 욕조 옆에 서 있
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까, 샤워기를 틀어 놓은 채 아미
나이프에 달린 가위로 자신의 오른쪽 허벅지를 찌르고 있는
게 아닌가. 가와시마 마사유키가 욕실 안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인식한 것 같았다.
사나다 치아키가 다리를 넓게 벌리면서 희미한 미소를 머
금었다. 그녀의 음모에는 검붉은 빛깔을 띤 자잘한 살점들
이 잔뜩 달라붙어 있었다. 가위로 찔러서 그런지, 상처는
그렇게 깊은 것 같지 않았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서 허벅지
가 조금 파여 있었다. 그리고 욕실 바닥에는 피가 흥건하게
고여 있었다.
제지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한 발 앞으
로 다가섰다. 바로 그때였다. 사나다 치아키가 입을 벌리고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고는 샤워 커튼이 흔들릴 정도
로 크게 소리쳤다.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온몸에 닭살이 돋
는 것을 느꼈다. 이 소릴 듣고 누군가가 달려올지도 모른
다… 더 이상은 가까이 다가가지 않겠다는 뜻을 온몸으로
나타내 보일 필요가 있었다.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원래 서 있던 위치까지 뒷걸음질을 쳤
다. 그걸 보고 사나다 치아키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원래의
멍한 표정으로 되돌아갔다. 가방을 열면 나이프와 아이스
픽이 발견되고 만다. 이 여자가 소속되어 있는 사무실에 전
화를 걸어서 상담이라도 해야 한단 말인가? 욕실 벽면에 전
화기가 걸려 있었다. 하지만 그건 수신 전용 전화기였다.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슬며시 뒷걸음질을 쳤다.
욕실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사나다
치아키가 표정을 바꾸었다. 눈과 눈썹, 그리고 입가에 공포
의 빛이 감돌았다. 다시금 입을 벌리고 크게 숨을 들이마시
려 하고 있었다. 어어… 또다시 소리를 지르면 큰일 나는
데…?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아무데도 가지 않겠다고 말했
다.
아, 아무데도 가지 않을 테니까, 안심해요, 안심해… 이렇
게 말하고 나서, 욕실에 들어왔을 때와 똑같은 포즈로 욕실
문에 기대어 섰다. 내 말 알아듣겠어요…? 가와시마 마사유
키가 말했다. 마치 슬로 모션을 취하듯이 사나다 치아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데 왜 저러는 거지…?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저 여자는 겁을 내고 있는 거야. 보호 시
설에 수용되어 있던 소년과 유아들도 그랬어. 그애들하고
똑같아, 저 모습은… 내가 여기에 있어 달라는 뜻이야, 저
건…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면 패닉 현상에 휘말려 버린다.
그리고 그와는 반대로 멀어져 가는 것도 패닉 현상을 불러
온다. 허벅지를 마구 찌르는 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사나다 치아키가 잠시나마 축 늘어뜨리고 있던
오른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그러고는 이미 피범벅이 되어 있는 자신의 허벅지를 가위로
푹 찔렀다. 철퍽,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진흙탕 속에 발
이 빠질 때 나는 소리 같았다. 사나다 치아키의 시선은 허
벅지와 가위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그대로
가와시마 마사유키에게 맞추어져 있었다.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깜짝 놀라서 가와시마 마사유키의
몸이 휘청했다. 욕실문에 몸을 기대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대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그걸 보고 사나다 치아키가 얼
굴을 일그러뜨리면서, 나지막이 웃음소리를 토해 냈다. 요
코야마 씨죠? 혹시 불편한 점 없으십니까? 프런트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 사나다 치아키의 비명 소리를 듣고, 옆방 손
님이나 가이드맨이 연락을 한 것 같았다.
아뇨, 그런 거 없어요.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두근거리는 가
슴을 억누르면서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하려고 노력했다. 오
늘은 객실이 모두 찼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조용히 쉬실 시
간이기 때문에 텔레비전이나 음악 소리도 최대한 작게 해주
시길 바랍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이
렇게 이야기하고 나서 프런트 담당 직원이 전화를 끊었다.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퍽이나 점잖게 주의를 주는군, 하고
생각했다. 어떤 곳에서는 밤중에 오줌을 쌌다는 이유만으
로, 어린애가 머리통이 으깨질 정도로 얻어맞는다. 그리고
어떤 곳에서는 규칙을 무시하고 여자까지 불러들여서, 다른
사람들한테 보여줄 수 없는 짓을 하고 있다. 그런데도, 혹
시 불편한 점 없으십니까?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
랍니다… 마치 사과라도 하듯이 주의를 준다.
「누구죠, 당신은?」
가느다란 목소리로 사나다 치아키가 물었다.
「누구냐구요?」
증오에 찬 목소리…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욕실문에 기댄 채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답을 하면 안 된다. 뭐라고 대답을
하든지 간에 이 여자는 꽥 하고 소리를 지를 것이다. 상대
방의 이야기는 귀담아 들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부상을
당한 야수와 같다. 가까이 다가서려고 하면 곧바로 적의를
드러내고, 반대로 멀어지려고 하면 끙끙거리면서 도움을 요
청한다.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오른손 집게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조
용히 하라고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보호 시설에서 나온 뒤 주변에 있는 어른들을 보면서, 내가
무슨 생각을 했더라…? 그래, 빙긋이 미소를 머금은 채 우
아한 언어를 구사하면서 가까이 다가오는 놈들은 모두 적이
라고 생각했어. 지금은 미소를 띠면서 좋은 말만 골라서 하
고 있지만, 언제 태도를 바꾸어서 때리려고 할지 몰라. 자
신이 그놈들한테 뭘 잘못했는지도 알지 못하는데… 하지만
어른들한테 버림을 받는 게 훨씬 더 무서웠다.
태어난 지 몇 년밖에 안 되었는데도, 그 동안 배운 게 있었
다.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무력감과 주변 사람들이 한
결같이 자신을 싫어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여자한테 가까이 다가가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달아나려고 해서도 안 된다. 직접 말을 걸
어도 저 여자는 제대로 대답을 않을 것이다. 어쨌든 간에
저 여자는 지금 구원을 바라고 있다. 이걸 어쩐다…? 저 여
자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은 채 나의 동작 하나하나에 신경
을 곤두세우고 있다….
가와시마 마사유키가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내자, 사나다
치아키가 그의 동작을 흥미로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러
고는 아미 나이프를 들고 있는 오른손을 슬며시 내려 놓았
다.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장갑을 벗었다. 그리고 그것을 쓰
레기통 속에 내던져 버렸다. 마음 놓아요, 마음 놓아. 난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아요… 양손으로 이런 뜻을 표시하면서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활짝 열려 있는 핸드백 속을 살짝 들
여다보았다. 핸드백은 고급스러운 악어 가죽 제품이었다.
화장품과 작은 수첩 사이에 병원 이름이 새겨진 약봉지가
들어 있었다. 시로야마 내과 의원, 원장 시로야마 야스히로
라는 글씨가 고딕체로 인쇄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쪽
에는 사나다 치아키라는 이름이 가느다란 펜 글씨체로 쓰여
있었다. 직접 묻는다고 해도 대답을 해주지 않을 것이다.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눈앞에 있는 전화기를 사용하기로 했
다.
교환원과 연결된 게 아니라고 가장하기 위해서, 전화기를
왼쪽 어깨로 가린다.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훅 버튼을 누른
채 가공의 상대에게 말을 건넨다. 여보세요, 지금 사나다
치아키 씨와 함께 있어요… 이렇게 이야기하고 나서 살며시
뒤를 돌아본다. 예상했던 대로, 사나다 치아키는 아미 나이
프가 들려 있는 손을 축 늘어뜨린 채 무슨 일이 있나 하고
주의를 기울인다. 우선은 저 나이프를 빼앗아야 한다.
치아키 씨는 나를 신뢰하고 있지 않아요. 하지만 날 믿어
요. 난 치아키 씨한테 절대로 못된 짓을 하지 않아요. 치아
키 씨 편이라구요. 그런데도 치아키 씨는 그걸 모르고 있어
요….
사나다 치아키는 알고 있었다. 가와시마 마사유키가 욕실에
들어왔을 때, 자신도 모르게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고 있었
던 것이다. 항상 병원으로 데려다 주던 사람일지도 모른다
고 생각했다. 여느때와 다름없이, 허벅지에 최초의 공격을
가했을 때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물론 통증도 느끼지 못했다. 그녀는 스위스 아미 나이프에
서 가위를 골라냈다. 그리고 날을 세우면서, 가위를 가지고
뭔가 재미있는 걸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구
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고 있었는지, 전혀 기억을 해낼 수
가 없었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 그 문제에 대
해서 만큼은 그녀도 분명하게 인식을 하고 있었다.
새하얀 와이셔츠를 입은 그놈의 얼굴이 눈앞에 나타나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확실하게 결정되어 있었
다. 그런데 내가 누구지…?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
다. 단지 그놈이 치아키, 하고 눈앞에서 헐떡거리는 소리를
쏟아낼 때 그 이름이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만은 알고 있었
다. 그래, 내 이름은 치아키야… 나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치아키라고 불리는 여자야. 그놈이 그렇게 불렀어.
그놈이 나의 거기를 핥고 있기 때문에 나는 치아키야… 하
지만 사나다 치아키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있었
다. 여기가 어디인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구냐는
게 아니라, 내가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내가 진짜 나인 것이다. 치아키라는 이름
에는 아무런 의미도 깃들어 있지 않다.
‘치’와 ‘아’와 ‘키’가 나란히 존재할 뿐이다. 죽어,
라는 소리가 들려 온다. 죽어, 하고 입술을 움직여서 목소
리를 내고 있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다. 확실한 건 그뿐
이다. 내가 나한테 죽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 확실한 건
그뿐이다. 죽어, 넌 죽어야 돼. 자기 자신한테 그렇게 소리
치고 있는 내가 진짜 나인 것이다.
정말로 죽일 수만 있다면 나는 나 자신을 칭찬할 것이다.
허벅지를 찌른다. 피부가 갈라진다. 그 소리가 들린다. 햄
이나 소시지의 비닐 포장을 찢는 소리와 유사하다. 조금 지
나자 의식이 희미해진다. 그리고 병원에서 눈을 뜬다. 항상
누군가가 병원까지 데려다 준다. 제가 구급차를 불렀어요…
서로 마주보고 있던 세 명의 남자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 말
한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말을 거짓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모르는 누군가가 이곳으로 데려다 주었어. 물론 그놈은 아
니야. 그놈은 나의 거기나 엉덩이를 핥다가 갑자기 꽥 하고
소리를 지를 뿐이다.
항상 병원으로 데려다 주는 사람은 아직 만나본 적이 없는
누구이다. 그 사람을 만나고 싶다, 그 사람의 얼굴을 보고
싶다… 늘 이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아마도 만날 수 없을
것이다. 그 사람은 정말로 특별한 인간이다. 특별한 인간은
그렇게 쉽게 만날 수가 없다.
[유년의 기억] 몸부림
사나다 치아키는 욕실 안으로 들어온 가와시마 마사유키를
보고, 그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의식 중
에 미소를 머금었던 것이다. 하지만 가와시마 마사유키가
그 사람이라는 확증을 가질 수가 없었다. 그 사람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지도 모른다. 아니, 나를 어디론가 내쫓아 버리
기 위해서 찾아온 나쁜 인간일지도 모른다.
누구냐고 물어 보았지만, 그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내쫓아
버리기 위해서 찾아온 나쁜 인간이라면 반드시 거짓말을 할
것이다. 하지만 저 남자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사나다 치
아키는 다소나마 안심을 했다. 남자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나의 이름까지 알고 있다. 누구랑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걸까? 병원일까…?
예, 치아키 씨는 이곳에 있습니다. 그런데 부상을 당했어
요. 어떻게 해서든지 그녀를 도와주고 싶습니다. 하지만 치
아키 씨가 저를 신뢰하지 않고 있어요. 예? 아, 그래요? 그
럼, 치아키 씨를 바꿔 드리겠습니다… 가와시마 마사유키가
사나다 치아키한테 수화기를 건넸다. 누, 누구지…? 깜짝
놀라서 사나다 치아키가 자리에서 비슬비슬 일어섰다.
상처에 괴어 있던 피가 발끝으로 한꺼번에 쏟아져 내렸다.
사나다 치아키가 수화기를 건네 받기 위해서 앞쪽으로 한
발짝 내딛었다. 바로 그 순간, 가와시마 마사유키가 아미
나이프를 확 나꿔챘다. 사나다 치아키의 오른쪽 손목을 양
손으로 붙잡고 손가락을 벌렸다. 아미 나이프가 욕실 바닥
에 떨어졌다. 사나다 치아키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녀는 손목을 붙잡힌 채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온몸을 바둥거리면서 난폭하게 굴기 시작
했다. 가와시마 마사유키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아미 나이
프를 한쪽 구석으로 차버렸다. 그러고는 사나다 치아키의
등을 감싸고 돌았다. 그는 물에 흠뻑 젖어 있는 그녀의 몸
을 감싸 안았다. 그러고 나서 두 팔을 고정시켰다.
사나다 치아키가 목을 비틀었다. 그리고 눈을 부릅뜨면서
가와시마 마사유키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비명을 지르기 위
해서 그녀가 휴우 하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가와시마 마
사유키가 그녀의 입을 왼손으로 틀어막았다. 비쩍 말라서
그런지, 왼손만 가지고도 상체의 움직임을 제지할 수가 있
었다. 그녀가 양쪽 발뒤꿈치로 가와시마 마사유키의 정강이
를 걷어차려고 했지만 체력이 달려서 그런지 힘이 없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왼손이 문제였다. 어느 틈엔지 사나다 치
아키가 입을 벌리고, 꽉 누르고 있던 왼손의 엄지손가락 근
처를 물어 버렸던 것이다. 미친 개 같았다. 그녀는 눈을 꼭
감은 채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모든 힘을 턱과 이빨에 집중시키고 있다. 나중에는 송곳니
로 가운뎃손가락을 물어뜯기까지 했다. 신경 조직이 모두
끊어져 버린 것 같았다.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등골이 오싹
함을 느꼈다.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억누르고 있던 손
을 풀고 말았다.
이 아픔은 나의 것이 아냐… 그는 자기 자신한테 이렇게 이
야기했다. 그가 사나다 치아키의 귓가에 대고 아무런 일도
없을 테니까 안심해요, 하고 말했다. 안심해요, 안심해. 난
절대로 나쁜 짓을 하지 않아요. 나쁜 짓 따윈 절대로 하지
않는다구요… 손가락이 빠져 나가는 것처럼 아팠다.
그런데 통증을 도저히 마비시킬 수가 없었다. 가와시마 마
사유키의 가슴속에서 적개심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지금
당장 아이스 픽으로 찔러 버리고 싶었다. 바로 그 순간, 그
의 귓가에서 온화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화내지 말아요,
화내지 말아요, 화내지 말아요. 안심해요, 안심해요, 안심
하라구요. 두려워할 거 없어요, 두려워할 거 없어요, 두려
워할 게 전혀 없어요… 가와시마 마사유키의 목소리는 차분
하면서도 부드러웠다.
상체를 꼭 껴안긴 상태에서 사나다 치아키는 생각했다. 누
군가가 나를 컨트롤하려 하고 있다… 입 안에서 끈적끈적한
피의 감촉이 느껴졌다. 화내지 말아요, 하고 귓가에서 웅웅
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목소리는 톤도 볼륨도 전혀 변함
이 없었다. 화내지 말아요, 화내지 말아요. 안심해요, 두려
워할 게 전혀 없어요… 웅웅거리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
왔다. 그 소리를 들으면서, 비로소 자기 자신이 화가 나 있
다는 사실을 자각할 수 있었다.
그리고 뭔가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도 자각할 수 있었
다. 이런 일은 처음이야. 지금까지 이런 경험을 한 적이 단
한번도 없었어. 그래, 마음을 놓아도 될 거야. 안심해도 될
거라구.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온몸에서 긴장감이 일제히
빠져 나갔다.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녹초가 돼서 축 늘어진 사나다 치아키
를 소파 위에 눕혔다. 반쯤 감긴 눈에는 힘이 전혀 없었다.
입술도 열려 있다. 입술과 이에는 피가 묻어 있다. 호흡이
매우 느리고 약했다. 목욕 타월로 몸을 닦고 나서, 상처난
자리를 살펴보았다.
허벅지에만 10여 개 이상의 상처 자국이 나 있었다. 하지만
아미 나이프에 달린 작은 가위로 찔러서 그런지 생각했던
것보다는 상처가 깊지 않았다. 상처 자국마다 피가 송글송
글 맺혀 있었다. 그래, 이 순간을 이용하는 거야. 그럼 쉽
게 죽일 수 있어… 전혀 움직임이 없는 사나다 치아키를 내
려다보면서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이렇게 생각했다. 가방을
열면 곧바로 스웨트 셔츠가 보인다. 그리고 그 아래쪽에는
아이스 픽이 놓여 있다. 그것은 언제든지 꺼낼 수가 있다.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상처 자국 중에서 한 곳을 만져 보았
다. 그러고 나서 생각했다. 인형을 찌르는 것과 똑같아. 이
여자는 모든 감각을 마비시키고 있음이 틀림없어. 아킬레스
건을 끊는다고 해도, 비명 따윈 결코 지르지 않을 거야. 그
래, 배를 푹 찔러도 지금과 같은 표정을 지은 채 죽어갈 거
야. 그런데… 티슈를 왼손에 말아 쥐면서 가와시마 마사유
키가 중얼거렸다.
손가락에서는 계속해서 피가 흘러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저 여자는 나와 동일한 종류의 인간이다. 피투성이가 된 채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여자를 죽이겠다구…? 가와시마 마사
유키는 단념했다. 사나다 치아키를 아이스 픽으로 찔러 죽
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되면, 계획이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다.
양복은 물에 푹 젖었고, 바지자락에는 피가 묻어 있다. 장
갑을 벗었기 때문에 여기저기에 지문이 묻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왼손을 물리는 바람에 출혈도 심했다. 따라서 상처
자국을 감출 수도 없다. 어디 그뿐인가. 이 여자의 이빨에
는 나의 살점들이 달라붙어 있다. 이번에는 단념을 하고,
다시 도전하자….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와이셔츠를 벗은 다음, 나이프로 그것
의 일부를 잘라냈다. 그리고 붕대를 만들었다. 그는 새 수
건을 이중으로 접어서, 사나다 치아키의 허벅지에 덮어씌웠
다. 붕대를 감싸기 위한 조치였다. 이젠 더 이상 피가 나지
않을 거야… 그는 청바지와 스웨트 셔츠로 갈아입었다.
칼날의 길이만 10센티미터가 넘는 나이프로 싹둑 자른 게
고작 싸구려 와이셔츠라니… 그 여자의 아킬레스건은 건드
려 보지도 못했다. 이게 무슨 꼴이람… 고개를 가로저으면
서, 가와시마 마사유키가 중얼거렸다. 사나다 치아키는 눈
을 감은 채 그대로 드러누워 있다.
오직 맨살이 드러난 가슴에서 천천히 파도가 치고 있을 뿐
이었다. 잠을 자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확실히 알 수가
없었다.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벽장에서 담요를 꺼냈다. 그
리고 그것을 가지고 와서, 사나다 치아키의 몸을 덮어 주었
다.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자신의 왼손에도 붕대를 감았다. 그러
고 나서 나이프와 아이스 픽을 다시 종이로 둘둘 말았다.
그리고 거기에다가 접착 테이프를 붙였다. 그렇게 하고 나
니까 부피가 상당히 커졌다. 지금 당장 이것들을 버려야 한
다. 가능한 한 먼 곳에다가 버리고 싶지만, 지금은 그럴 만
한 여유가 없다. 다른 층 엘리베이터 홀에 있는 쓰레기통에
버리도록 하자.
그런 다음에 SM 클럽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서, 사나다 치아
키를 데려가게 하자. 그놈들은 호텔에 통보를 한다거나 경
찰에 연락을 할 수가 없어. 하지만 일행을 데리고 올지도
모르기 때문에 나이프와 아이스 픽은 방에서 치워 버리는
게 좋아… 노트는 버리고 싶지가 않았다. 그 작업을 다시
한번 한다는 게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선은 아이
스 픽과 나이프만 발견되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사나다 치아키가 잠들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가와시
마 마사유키는 포장한 아이스 픽과 나이프가 든 비닐 봉지
를 집어 들었다. 그는 열쇠를 호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그
런 다음에 방을 나섰다. 2902호실은 29층에 있는 방들 중에
서 가장 후미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긴장이 풀린 탓일까. 방문을 나서자마자, 갑자기 손가락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손가락에는 티슈를 댄 다음에, 와이
셔츠로 만든 붕대를 친친 감아 두었다. 그런데도 피부가 깊
이 찢어진 탓에, 피가 멈추지 않았다. 기다란 호텔 복도는
현실감이 없었다. 어느 방인지는 모르지만, 희미하게 텔레
비전 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다. 마치 귀울림 현상처럼 느껴
졌다. 일시적이긴 하지만 사나다 치아키와 떨어져 있음으로
인해서 긴장감이 풀린 것 같았다.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동안, 복도 바닥
만을 내려다보면서 걸었다. 그 때문에 외국인 노부부가 복
도에 서서 이야기하고 있는 광경을 보지 못했다. 그들은 영
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옷차림새로 보건대, 두 사람
모두 골프를 치고 돌아오는 길인 것 같았다. 그들 앞을 막
지나치려는 순간, 노부인이 말을 걸어 왔다. 가슴이 철렁했
다.
노부인은 비닐 봉지 속에 들어 있는 것과 왼손의 상처를 유
심히 살펴보는 듯했다. 하지만 자세히 들어 보니까, 그녀는
식사라든가 레스토랑 등에 대해서 질문을 하고 있는 것 같
았다. 도쿄에 있는 호텔 내 레스토랑은 값이 매우 비싸서
밖에서 식사를 하고 싶은데, 어떤 식당이 좋은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될 수 있는 대로 가벼운 이탈리안 식당이나
유럽풍의 레스토랑이 좋겠다고 한다.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노부인이 미소를 머금었다. 바로 그
때, 노신사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런 건 프런트 담당 직원
이나 지배인한테 물어 보아야 한다고 했다. 처음 보는 사람
한테 그런 걸 물으면 실례가 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나서 노신사도 얼굴 가득히 미소를 머금었다.
실례했소, 젊은이. 그 문제는 우리들이 알아서 할 테니까,
젊은이는 가던 길이나 가시오… 노신사가 이런 뜻의 몸짓을
해보였다. 아주 오래된 옛날 영화에 출연한 노부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이 작은 목소리로, 뭐라고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러고는 이내 그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이들 노부부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
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로비나 레스토랑이 있는 층은 그냥
지나칠까? 그리고 다른 층에서 내릴까? 그건 안 된다. 오히
려 부자연스럽게 보일 것이다. 혹시 두 사람이 기억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SM 클럽에서 사람을 불렀을 때
도 문제가 된다.
무슨 문제가 발생했을 때, 아이스 픽이나 나이프가 발견될
가능성도 있다. 이런 일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제자리에 멈추어 서서 호주머니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뭔가를 잊어 버리고 나온 것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고는 노부부가 바로 옆에까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가, 몸을 확 틀면서 맛있게 드세요, 하고 말했다.
그가 반대쪽으로 몸을 트는 순간, 복도 가장 안쪽에 있는
2902호실 출입문이 활짝 열렸다. 그와 동시에 사나다 치아
키가 벌거벗은 몸으로 비틀비틀대면서 밖으로 나왔다. 그
바람에 하마터면 비닐 봉지를 떨어뜨릴 뻔했다. 깜짝 놀라
서 그는 사나다 치아키가 서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갑작스
러운 발짝 소리에 노부부도 깜짝 놀랐을 거라는 생각이 들
었다. 그건 정말로 악몽과도 같은 광경이었다.
[유년의 기억] 살인 노트
허벅지에 피가 배어 있는 붕대를 감은 채, 한 여자가 맨몸
으로 호텔 복도를 비틀거리면서 헤매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외국인 노부부는 그걸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
다. 그들은 막 엘리베이터 쪽으로 사라지려 하고 있었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몰라서, 사나다 치아키는 주위를 마
구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노부부가 기
둥 그늘 쪽으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마구 내달리
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다른 방에서 나올 경우 최악의 사태
가 벌어지게 된다.
허둥지둥 달려오는 가와시마 마사유키를 보고 사나다 치아
키가 가볍게 소리를 지르면서 반대쪽 방향으로 도망치려고
했다. 그와 동시에 휘청하면서 그녀가 복도 바닥에 나뒹굴
었다. 털썩 하고 무릎을 꿇은 뒤, 그녀는 곧바로 엉덩방아
를 찧고 말았다.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잔뜩 겁을 집어먹고
기어서 도망치려고 하는 사나다 치아키를 뒤쫓아 갔다.
그리고 등뒤에서 양쪽 옆구리에 팔을 낀 다음 일으켜 세우
려고 했다. 그렇게 끌어안은 뒤 질질 끌듯이 2902호실로 향
했다. 아무리 몸집이 작다고 하더라도 저항하는 여자를 몇
미터씩 끌고 가는 게 얼마나 중노동인지를 가와시마 마사유
키는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왼손에 비닐 봉지를 늘어뜨린 채 사나다 치아키를 껴안듯이
하면서 오른손으로 호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열쇠를 찾았
다. 사나다 치아키가 몸을 버둥거릴 때마다 비닐 봉지가 마
구 흔들렸다. 왼손에 감은 임시 붕대와 티슈가 어긋난 채로
상처를 감싸고 있었는지 상처에서 피가 흘러 나왔다. 가까
스로 열쇠를 쑤셔 넣은 뒤, 출입문을 활짝 열어제쳤다. 그
러고는 마치 쓰러지듯이 방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바로 그 순간, 어디선가 다른 객실문이 열렸다 곧바로 닫히
는 소리가 들려 왔다. 왼쪽 손에서 지독한 통증이 느껴졌
다. 금방이라도 심장이 파열할 것만 같았다. 누군가가 보았
을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나이프와 아이스 픽도 버리지 못
했다. 이런 상태에서는 SM 클럽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을 부
를 수도 없다.
사나다 치아키는 방 입구에 쓰러진 채 아파요, 하고 가볍게
신음소리를 토해 냈다. 아주 짧은 잠에서 깨어나자, 의식이
거의 회복된 듯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부터 허벅지에 난
상처가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아파 오기 시작했다. 허벅지
에는 붕대가 둘둘 말려 있었다. 누군가가 붕대를 감아준 것
같았다. 솜씨가 매우 서툴러 보였다.
자리에서 일어서자, 발등 위로 피가 뚝 하고 떨어졌다. 더
럭 겁이 났다. 병원엘 가봐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런데 병원
으로 데려다 줄 사람이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누군가
가 옆에 있었는데… 그때까지도 그녀의 몸에는 따뜻한 감촉
이 남아 있었다. 거울 앞으로 다가가서 자신의 모습을 살펴
보았다. 이빨은 검붉은 색을 띠고 있었고, 잇몸에는 뭔가가
달라붙어 있었다.
혀는 마치 고무 조각과도 같았다. 손가락으로 잇몸에 달라
붙어 있는 것을 떼어 냈다. 주름살처럼 보였다. 그제서야
그것이 다른 사람의 피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
의 손가락을 물어뜯던 장면이 생각났다. 웅웅거리는 목소리
도 귓가에 남아 있었다. 괜찮으니까, 화내지 말아요. 두려
워할 일이 전혀 없어요… 귓가에 대고 이렇게 속삭였던 그
남자의 피부다.
그래, 그 남자는 손가락을 물어뜯기면서도 고통을 참아 내
고 있었어… 방안을 빙 둘러보았다. 하지만 남자의 모습은
보이지가 않았다. 욕실도 살펴보았다. 남자의 모습은 그곳
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좀 도와 줘요, 아파 죽겠단 말
예요! 오른쪽 다리를 질질 끌면서 사나다 치아키가 소리쳤
다.
그리고 그 남자의 것으로 보이는 짙은 남색 양복을 집어 들
고 마구 흔들어댔다. 어디로 간 거야! 고래고래 소리치면서
가방을 내던져 버리고, 그녀는 그 남자를 찾기 위해서 밖으
로 나왔다. 복도에 나온 다음에야 자기 자신이 아무것도 입
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등뒤에서 출입문이 천천히
닫히고 있었다.
아아, 이젠 되돌아갈 수도 없어… 이렇게 생각했을 때 어떤
남자가 자기 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게 보였다. 찾고 있는
남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옷차림새가 달랐던 것이다. 깜
짝 놀라서 도망치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러고는 결
국 방안으로 끌려 들어오게 되었다. 방으로 돌아온 다음에
야 가와시마 마사유키의 왼손에 상처가 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 바로 이 남자야….
「이봐요.」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가와시마 마사유키가 사나다 치아키
한테 말했다.
「내 말 알아듣겠어요?」
가와시마 마사유키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사나다 치
아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기억
해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럼요, 알아듣고 말고요. 당신
은 저를 병원으로 데려다 줄 사람인데요…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자, 우선 옷부터 입고 봅시다.」
가능한 한 빨리 이곳에서 떠나야 한다. 누군가에게 발견될
가능성이 있다. 뿐만 아니라 나이프와 아이스 픽도 버리지
못했다. 병원으로 데려가는 게 좋을 성싶었다. 병원으로 데
리고 가서 치료를 받게 하면, 이 여자가 소속되어 있는 사
무실 사람들도 나를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다음에 사
정을 설명해 주면 된다. 6시간 분의 요금을 지불하면 사무
실 사람들도 불만을 얘기하지 않을 것이다. 가와시마 마사
유키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부탁이에요, 제발 옷 좀 입어요.」
서둘러서 짐을 정리하고 체크아웃 하자. 여자를 데리고 있
기 때문에 아마도 프런트 담당 직원이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이 호텔에서 나는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어. 그러니까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아. 택시를 타고 가까운 병원으로 가자. 이 여자를 그곳
까지 데려다 주기만 하면 돼. 그걸로 모든 문제가 끝나는
거야.
「병원에 가야 해요. 그런데 맨몸으로 갈 수는 없잖아요?」
가와시마 마사유키가 말했다. 그의 말을 듣고, 사나다 치아
키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래 역시 이 남자였어…
등뒤에서 나의 몸을 껴안고 다정하게 속삭여 주던 사람. 아
아, 마침내 그 사람을 만났어…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 알았어요. 입을게요.」
가와시마 마사유키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사나다 치아키가
대답했다.
「자,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사무실에 전화부터 하구요.」
그녀는 오른쪽 다리를 질질 끌면서,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전화기 쪽으로 걸어갔다.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통화 내용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사나다 치아키
의 옷을 가져와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미 나이프가
욕실 바닥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집어 들고 티슈로 감쌌다. 가볍게 피를 닦고
나서, 가위를 원래의 상태대로 되돌려 놓았다. 그러고는 그
것을 그녀의 핸드백 속에 툭 하고 떨어뜨리려고 했다. 그래
요, 기분도 좋지 않아요. 그래서 플레이도 일찍 끝내 버렸
어요. 오늘은 사무실에 들르고 싶지 않은데, 그래도 괜찮겠
죠?
전화를 걸고 있는 사나다 치아키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10
시가 조금 지났으니까, 요금은 4시간 분만 받을게요. 지금
은 기분이 아주 좋지 않아요. 하지만 병원엘 다녀오고 나면
괜찮아지겠죠, 뭐.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와시마 마
사유키는 샤워기의 꼭지를 틀었다. 욕조 가장자리 쪽 바닥
에는 피가 잔뜩 흩뿌려져 있었다. 그는 그것들을 닦아냈다.
그가 수건을 돌돌 말았다. 그리고 딱딱하게 굳어 버린 핏자
국들을 박박 문질러서 닦아낸 다음, 물을 끼얹었다. 기분이
좋지 않아서 병원엘 가겠다고? 아주 멋진 거짓말이라고 생
각하면서,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사나다 치아키의 속옷과 원피스를 집어들고 욕실에서
나왔다.
사나다 치아키가 벌거벗은 채 소파에 앉아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유두에는 은색의 링이 매달려 있었다.
「저, 팬티 좀 입혀 주시면 안 될까요? 상처 부위에 닿으
면, 아파서 제대로 입지 못할 것 같은데….」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사나다 치아키가 두 다리를 가지런히
모았다. 그녀가 두 다리를 앞쪽으로 쑥 내밀었다.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사나다 치아키의 앞쪽으로 걸어가서 무릎을 꿇
었다. 그리고 자주색 팬티를 양손으로 받쳐들었다. 먼저 양
쪽 발목 부분을 통과시켰다. 그런 다음에 장딴지를 거쳐서
무릎을 통과하게 했다. 거기까지 하고 나서 일단 손을 뗀
뒤, 사나다 치아키한테 일어서라고 했다.
가와시마 마사유키의 어깨에 손을 댄 채 사나다 치아키가
천천히 일어섰다. 성긴 음모들이 얼굴에 와 닿았다. 고무줄
을 잡아당겨서 최대한 늘어뜨렸다. 그리고 허벅지를 감싸고
있는 붕대에 닿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위쪽으로 팬티를 끌
어올렸다. 약간 투명해 보이는 자주색 팬티가 사나다 치아
키의 허리에 찰싹 달라붙었다. 아주 작은 팬티였다.
「팬티 스타킹은 신기지 않으셔도 돼요. 병원에 도착하면
어차피 벗어야 하니까요.」
사나다 치아키가 말했다. 그러죠, 하고 대답하면서 가와시
마 마사유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그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가방이 방 한쪽 구석에
내팽개쳐져 있었던 것이다.
노트가 바닥 위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저, 저걸 보았단 말
인가…? 모든 신경들이 공포감에 휩싸였다. 왼손의 상처 부
위를 중심으로 몸 구석구석까지 한기가 뻗쳐 나갔다. 뒤를
돌아보았다. 사나다 치아키가 슬립을 걸치고 있었다. 그걸
보고 그는 심한 구토 증세를 느꼈다. 이, 이 여자를… 하고
생각하는 순간, 구토 증세와 오한이 겹치면서 기묘한 흥분
감이 끓어올랐다.
어디선가 이 여자를 죽여야 한다. 만약 노트를 봤다면 다음
계획 따윈 세울 수도 없다. 난 알고 있어요. 그 사람이 누
군지… 아무한테나 이렇게 지껄여댈 게 틀림없다. 아이스
픽과 나이프를 버리지 않은 게 천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었다.
[유년의 기억] 병원의 두 사람
사나다 치아키에게 팔을 빌려 주고 있었기 때문에 정말로
천천히 걸을 수밖에 없었다. 호텔 밖으로 나온 순간부터 사
람들의 모습을 전혀 볼 수가 없었다. 차가운 공기가 그들을
감싸고 돌았다. 바람이 초고층 빌딩 사이를 빠져 나가는 소
리가 들려 왔다. 감각이 마비된 탓에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통증을 잠시 잊어 버리고 있었다.
몸을 잔뜩 웅크린 상태에서 사나다 치아키가 코트 깃을 세
웠다. 추, 추워요… 이렇게 말하면서 그녀가 가와시마 마사
유키의 팔을 더욱더 강하게 붙잡았다. 정말로 이상한 여자
야, 하고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생각했다. 병원엘 가는 게
그렇게도 좋단 말인가? 체크아웃을 하기 위해서 호텔 로비
로 향할 때였다.
가와시마 마사유키의 팔에 매달려 있다가, 엘리베이터 안에
들어서자마자 그녀 스스로 팔짱을 풀었다. 그러고는 프런트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혼자서 출구 앞까지 걸어갔다. 가와
시마 마사유키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인 것처럼 행동하
려는 것이었다. 그걸 보면서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몸 파는
여자들의 습성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후유,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것을 아무한테도 보여 주지 않아서 그나
마도 다행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사나다 치아키는 팔짱을 낀 채 함께 있고 싶
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곳에서 찰싹 달라붙으
면, 이 남자가 싫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많
은 곳에서는 모두가 나와 함께 있기를 싫어한다. 아버지에
관한 문제를 털어놓은 다음부터 그랬다. 함께 외출할 때 어
머니는 항상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걸었어.
나를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야… 사나다 치아
키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팔짱을 끼는 건 고사하고 함
께 걷는 것마저도 부끄러워해, 다른 사람들은… 나는 그런
여자야…
프런트에서 영수증을 받을 때,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위장용
안경을 아래쪽으로 약간 끌어내렸다. 그리고 혼자서 로비를
가로질러 가고 있는, 사나다 치아키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SM 도구가 들어 있는 커다란 가방과 핸드백을 양손에 든
채, 고개를 푹 떨구고 있었다. 가방의 무게 때문인지 어깨
마저도 축 처진 모습이었다. 그녀는 오른쪽 다리를 질질 끌
면서 걷고 있었다.
「가까운 곳에 있는 응급 병원으로 가주세요.」
가와시마 마사유키가 말했다. 그러자 요요기에 있는 종합
병원이 어떻겠느냐고, 운전 기사가 확인을 하듯이 물었다.
가와시마 마사유키도 사나다 치아키도 어느 병원이든 상관
이 없었다. 택시 안은 따뜻했다. 언제부터인지 사나다 치아
키가 몸을 조금씩 기대어 왔다. 상체를 뒤틀고, 가와시마
마사유키의 가슴 근처에 얼굴을 묻는다. 보호 시설에서 함
께 생활했던 여자 아이들 중에도 이런 애가 몇 명 있었지…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그때의 일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하지만 나를 좋아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그애들은 눈 깜짝
할 사이에 태도를 바꾸어 버렸다. 마치 처음부터 내가 존재
하고 있지 않았다는 듯이, 완전히 무시해 버렸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처럼 끈적끈적하게 달라붙는다고 해서 노
트를 읽지 않았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이런 여자들은 무슨 짓을 할지 알 수가 없다. 공포감 때문
에 벌벌 떨면서도 소리내어 웃는다. 웃으면서 눈물을 흘리
기도 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서, 폭력적인 태
도를 보이기도 한다. 단둘이 있으면서 노트를 읽었는지 그
렇지 않은지 확인해 봐야 한다.
「저, 실례가 될지 모르겠지만… 응급 병원은 왜 찾으세요?
어디가 아프세요?」
백밀러를 쳐다보면서 운전 기사가 물었다. 갑자기 사나다
치아키가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흘렸다. 공중 전화 카드가
튕겨나오는 듯한 목소리였다.
「아이가 밖으로 나오려나 봐요.」
미소를 머금은 채 사나다 치아키가 말했다. 가와시마 마사
유키는 거짓말도 참 잘한다고 생각했다. 택시에 오를 때 운
전 기사도 보았음이 틀림없다. 그녀의 허리는 두 손으로도
붙잡을 수 있을 만큼 가늘고 나약했다.
「틀림없어요.」
이렇게 이야기하고 나서 사나다 치아키가 가와시마 마사유
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눈동자에 물기가 어려서 흐릿해
보였다.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사나다
치아키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았을 뿐, 긍정도 부정도 않고
표정도 바꾸지 않았다.
「안경을 끼고 계시니까, 훨씬 더 멋져 보여요.」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잠자코 있었다. 빨리 병원에 도착해
라… 이렇게 생각하면서 그는 앞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
다.
「당신의 눈, 정말로 맑아 보여요.」
이 남자는 부자가 틀림없어. 사나다 치아키는 아까부터 이
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모든 점에서 차분한 태도를 유
지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생긴 것도 나무랄 데가 없었
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한테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다
른 사람들은 그렇지가 않았다. 자신이 진심으로 하는 말,
그리고 멋진 조크를 할 때마다 사람들은 과잉 반응을 보이
거나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이 남자만은 잠자코 있었다.
반응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짓말을 할 수도 없었다. 양
복은 싸구려였다. 지금 입고 있는 코트와 스웨트 셔츠, 구
두, 안경 등은 모두 싸구려 물건이었다. 이런 점으로 미루
어 볼 때 SM 클럽 여자와 즐기기 위해 변장을 하고 그 호텔
에 들어갔는지도 모른다. 그는 6시간이나 예약을 하고서도
나의 몸에 손도 대지 않았다. 게다가 4시간 분만 지불해도
되는데, 굳이 6시간 분의 요금을 지불했다. 빨리 벗고 빨리
보여줘. 자, 빨리 핥아. 빨리 집어 넣어… 지금까지는 죄다
이런 손님들뿐이었다. 그런데 이 남자는 그들과 질적으로
달랐다.
이 남자가 팬티를 입혀줄 때 허벅지에 난 상처가 몹시 아팠
다. 그런데도 아랫도리가 축축했다. 오늘 하루만 변장을 하
고 그 호텔에서 놀려고 한 것 같았다. 교토나 고베에서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사실은 다른 호텔의 스위트룸에 묵고
있는지도 몰랐다.
「솔직하게 말씀해 보세요. 지금 다른 호텔에 묵고 계시죠,
그렇죠?」
사나다 치아키가 물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봐, 내 생각이
맞지. 저 남자는 엄청난 부자임이 틀림없어… 사나다 치아
키는 이렇게 생각했다. 여, 역시… 노트를 본 게 틀림없어.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마음속으로 신음소리를 토해 내지 않
을 수가 없었다.
택시가 종합 병원의 응급실 입구 앞에 멈추어 섰다. 대부분
의 등은 이미 꺼진 상태였다. 운전 기사가 팔짱을 낀 채,
천천히 걸어가고 있는 가와시마 마사유키와 사나다 치아키
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다녀와요,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난 옛날부터
병원을 아주 싫어했어요. 그래서 건물 안으로는 들어가고
싶지가 않아요. 싫다거나 무섭다는 생각 따윈 하지 말아요.
마음 푹 놓고 다녀와요. 꼼짝 않고 이곳에 서 있을게요.」
탁한 숨을 토해 내면서 가와시마 마사유키가 말했다. 그들
이 서 있는 곳에는 작은 안내판이 내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 안내판에는 ‘응급 외래 환자 접수 창구’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의사와 간호사한테 얼굴을 보여줄 수는 없다
고 생각했다.
「알았어요. 그렇게 할게요.」
사나다 치아키가 말했다. 그랬었나… 자기는 늘 병원에서
눈을 떴다. 그럴 때 이 남자는 옆에 없었다. 그런데 오늘
보니까, 이런 이유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
다.
「하지만 당신도 손을 치료해야잖아요?」
사나다 치아키가 말했다. 그녀의 말을 듣고 가와시마 마사
유키는 아아, 난 괜찮아요, 하고 대답했다. 이건, 치료비예
요… 그가 호주머니에서 10,000엔권 석 장을 꺼내 사나다
치아키에게 건네 주려고 했다.
「필요없어요. 아까 돈을 더 주셨잖아요.」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사나다 치아키가 말했다. 응급실 쪽으
로 걸어가다 말고, 그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반드시 기다려 주셔야 해요, 알았죠?」
「염려 말아요. 꼼짝 않고 여기에 서 있을 테니까.」
「그리고 오늘밤 내내 저와 함께 보내는 거예요?」
「알았어요. 그렇게 할게요.」
사나다 치아키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걸 지켜보면서, 가
와시마 마사유키는 저 여자를 가능한 한 빨리 죽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둘이 함께 있는 장면을 누군가에
게 들킬 확률이 점점 더 높아질 것이다.
[유년의 기억] 갈등
의료 보험증은 가져오셨어요? 간호사가 물었다. 사나다 치
아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운전 면허증을 보여주
고, 서류에 주소와 이름을 적어 넣었다. 의사한테는 자전거
를 타다가 나뒹굴었다고 둘러댔다. 왼쪽 무릎에 가벼운 찰
과상을 입었는데, 그것은 호텔 복도에서 맨몸으로 나뒹굴
때 생긴 상처였다. 그걸 보고서도 의사는 달리 질문을 하지
않았다. 한 곳이 상처가 깊어서 꿰매야겠다는 말만을 덧붙
였다.
그는 와이셔츠를 찢어서 만든 붕대에 대해서도, 별다른 질
문을 하지 않았다. 전에 찌른 상처 자국도 보여 주었지만
거기에 대해서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상처 부위에 소
독을 하고 나서, 가제를 두툼하게 동여맸다. 그러고는 세
곳에다가 마취 주사를 놓았다.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끝내
고 싶어하는군, 하고 사나다 치아키는 생각했다. 10여 명의
사람들이 대기실에 앉아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눈을
절반쯤 감은 채, 한 남자가 입을 떡 벌리고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는 대머리였다. 오른쪽 엄지발가락과 복
사뼈가 크게 부어 오른 여자도 있었다. 화장을 진하게 한
중년 여자였는데, 두 명의 깡마른 젊은이가 그녀를 양쪽에
서 부축해 주고 있었다. 땀 냄새 나는 작업복 차림의 사내
네 명이 서로 얼굴을 맞댄 채,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
누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자줏빛 혈관이 선명하게 드러난
손으로 신문을 읽고 있는 노인, 갓난아기를 안고 있는 남
자, 다람쥐 인형을 손에 든 채 손수건으로 눈을 가만히 누
르고 있는 여자… 단 몇 분 만에 마취 주사가 효력을 나타
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바늘이 피부를 뚫고 들어갈 때는 약
간의 통증이 있었다. 코끝과 입술 주위에서 땀이 마구 솟구
쳤다. 의사의 손이 자줏빛을 띤 반투명 팬티에 몇 차례 닿
았다. 그때마다 사나다 치아키는 가와시마 마사유키를 생각
했다. 안경 너머에 있는 해맑은 눈을….
「섹스를 해도 괜찮을까요?」
진찰실 밖으로 나오려다 말고 사나다 치아키가 의사에게 물
었다. 의사는 진찰 기록부에다가 뭔가를 기록하고 있었다.
붕대는 풀지 마세요, 고개도 들지 않고 의사가 말했다.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버스 정류장 앞에 서 있었다. 비상 출
입구 쪽에서 곧장 길을 건너면 버스 정류장이 나왔다. 버스
정류장에는 차가운 바람을 막아 주는 칸막이가 설치되어 있
었다. 그는 가방을 두 개씩이나 들고 병원 응급실 부근에
서 있는 게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날씨가 이렇게 춥고,
시간도 11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 같은 생각이
더욱더 강하게 들었다. 그래서 도로를 건너 버스 정류장으
로 옮겨 왔던 것이다. 순찰하던 경찰관이 불심 검문이라도
한다면… 그래서 가방을 뒤지기라도 한다면… 사나다 치아
키가 맡기고 간 가방 속에는 SM 플레이 도구들이 들어 있
고, 또 다른 가방 속에는 아이스 픽과 나이프가 들어 있다.
하지만 버스 정류장에 서 있으면 아무런 일도 당하지 않을
것이다. 제아무리 커다란 짐보따리를 들고 있다고 해도 이
상할 게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곳에 서 있으면 응급 외
래 환자 접수 창구를 한눈에 살펴볼 수가 있다. 버스가 와
도 걱정할 게 없다. 행선지가 다르다는 동작을 취하기만 하
면 되는 것이다.
날씨가 너무나도 추웠다. T셔츠와 스웨트 셔츠, 청바지, 얇
고 값싼 코트 따위로는 막아낼 수 없는 추위였다. 손가락끝
이 얼어붙어 버릴 것만 같았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왼손에
도 가죽 장갑을 끼었다. 장갑이 자꾸만 손가락의 상처를 건
드렸다. 그 바람에 가까스로 멈춘 피가 다시금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 그는 해보고 싶은 게 한 가지 있었다.
추위와 고통을 자신한테서 분리해 내고 싶었다. 그 여자가
치료를 받는 동안에 생각해 두어야 할 게 여러 가지가 있었
다. 하지만 그 방법을 쓰지 않고서는 그런 것들을 생각해
내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런 종류의 기술들을 터득한 것도
지금처럼 겨울이었고, 추운 밤이었다. 나는 스스로 집을 나
갔다. 그리고 현관문을 강하게 닫았다. 그러고 보니까… 그
날 밤에도 왼쪽 손바닥이 몹시 아팠다. 어머니가 살충제로
쓰이는 암모니아 원액을 그의 손바닥에 끼얹었던 것이다.
그것은 물과 1대 10의 비율로 타서 써야 할 만큼 강력한 것
이었다. 조금 지나자 역겨운 냄새가 났다. 피부가 타는 냄
새였다. 손을 씻으려고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절대로 허락
해 주지 않았다. 다시는 돌아오지 마! 안쪽에서 어머니가
꽥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와 동시에 문 잠그는 소리가 들
려 왔다. 어머니는 문을 걸어 잠갔다. 젖빛 유리 너머로 어
머니의 실루엣이 보였다. 그런데 젖빛 유리 때문에 실루엣
이 부옇고 크게 보였다. 무서웠다. 추위와 통증으로 인해서
머리가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아마도 머리가 이상해지기를
바란 것 같았다. 슉, 하고 뭔가가 몸 속으로 들어왔다. 그
러고는 이내 슉, 하고 뭔가가 몸 속에서 빠져나갔다. 통증
과 추위, 그리고 공포심을 자신의 몸에서 분리시킬 수가 있
었던 것이다. 지금 여기에 서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니다. 이
추위와 고통은 나의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프지가
않다… 하지만 그는 이런 식의 언어를 써서, 스스로를 세뇌
시키지 않았다. 그때는 언어와 감정마저도 모두 사라져 버
리고 없었다. 아이스 픽으로 배를 찔렀던 열아홉 살 연상의
여자와 함께 살 때도 그 기술을 자주 사용했다. 그러기 위
해서 시선을 미묘하게 바꾼 것 같다. 분명히 그런 기억이
있다. 하지만 확실치는 않다. 3D(3차원의 형태, 입체감, 입
체 효과, 입체 사진`─`역주) 일러스트나 사진을 볼 때와
비슷했다.
하지만 지금은 가능할 것 같지 않았다. 언어로 생각해 내는
것도 무리일 성싶었다. 언어로 바꾸는 순간, 뭔가가 사라져
버린다. 언어를 더 많이 기억해 나가다 보면, 인간은 그에
비례해서 약해져 버리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버스 정류장에서 200미터쯤 떨어진 곳에 공중 전화 박스가
설치되어 있었다. 공중 전화 박스에 들어가 있을까? 그럼,
바람을 피할 수 있을 텐데. 그리고 요코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어…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이렇게 생각했다. 요코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고 생각한 순간, 엉터리 같은 장면이 머
릿속에 떠올랐다. 요코한테 전화를 건다. 그리고 지금까지
벌어진 모든 상황을 털어놓는다. 요코와 둘이서 수습책을
논의한다. 이런 모습을 상상해 버렸던 것이다.
「그 여자가 노트를 봐버렸어. 죽이는 수밖에 없겠지, 그렇
지? 그러고 싶지는 않지만, 어쩔 수가 없잖아?」
「그 여자, 지금 뭘 하고 있어요?」
「응급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어. 난 밖에서 기다리고 있
구.」
「의사나 간호사한테 말하지 않았을까요?」
「그러지 않았을 거야.」
「왜요?」
「얘기할 생각이었다면, 호텔에서 가이드맨한테 했겠지.」
「그것도 그렇군요. 하지만 노트를 봤다면, 재빨리 도망을
쳐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 여자는 어째서 도망치려고 하지
않는 거죠?」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아무튼 자신조차도 컨트롤하지
못하는 여자니까…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전혀 다른
경우도 있었어. 어떤 면에서는 동류 의식 같은 걸 느끼게
해, 그 여자는….」
「동류 의식이라구요?」
「어렸을 때 무슨 일을 당한 것 같아.」
「무슨 일이라뇨?」
「그건 나도 잘 몰라. 알고 싶지도 않구… 아무튼 잔뜩 겁
을 집어먹고 있어. 게다가 뭔가에 굶주리고 있는 모습이
야.」
「그래,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에요?」
병원 비상 출입구 쪽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다리
를 질질 끌면서 출입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다. 그리고 주위
를 빙 둘러본다. 어쨌든 간에 아카사카에 있는 호텔로 돌아
가서는 안 돼… 나지막이 중얼거리면서 가와시마 마사유키
는 사나다 치아키가 서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아아, 정말로 기다려 주었어, 이 사람은… 너무나도 감격해
서 사나다 치아키가 눈물을 글썽거렸다. 얼어붙을 것만 같
은 밤공기를 헤치고, 그 남자가 자기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
던 것이다. 그 남자는 양손에 커다란 가방을 든 채, 하얀
숨을 몰아쉬면서 달려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그녀는
만화 영화에 나오는 기관차 같다고 생각했다. 조금은 이상
해 보였다.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마치 고상한 아줌마처럼
그녀의 핸드백을 왼쪽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왼손에 상처
가 나서 들을 수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뜀박질을 하기가
어려울 텐데도, 그는 필사적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래서
약간은 이상해 보였다. 사나다 치아키는 1초라도 빨리 그의
어깨에 몸을 기대고 싶었다. 하지만 마취제 때문에 마음먹
은 대로 다리를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녀는 다리를 질질
끌면서,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우리 집으로 갔으면 좋겠는데, 그래 주겠어요?」
택시를 잡아 타고 나서 사나다 치아키가 말했다.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입술과 턱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너무나도 추
워서 입술과 턱 근육이 마비되어 버렸던 것이다. 택시에 오
른 뒤에도, 한마디의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고
개를 끄덕거리기만 했다. 어쨌거나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
다. 진짜 이름을 대고 투숙했기 때문에,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은 이용을 못한다. 지금 당장은 러브 호텔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다. 이걸 어떻게 이해시켜야 하나… 그는 줄곧 이
문제를 생각하고 있었다.
[유년의 기억] 싹트는 감정
왜 이 남자가 나를 병원까지 데려다 주었을까, 그리고 무엇
때문에 병원 건물 안으로는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을까…?
이런 문제에 대해서 사나다 치아키는 아무런 의구심도 품고
있지 않았다. 이 남자는 클럽으로 전화를 걸어서, 놀이 상
대로 자신을 선택한 손님이다. 그래서 호텔 방에서 만나게
된 것뿐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이런 사실들을 까맣게 잊어
버리고 있었다. 가와시마 마사유키가 겉으로 드러내 보인
노력과 희생만이 사나다 치아키의 가슴을 가득 메우고 있었
다. 그리고 그것이 자꾸만 증폭되어 갔다. 날씨가 그렇게
추운데도, 이 사람은 끝까지 기다려 주었어. 아아, 그의 팔
과 몸이 얼마나 차가웠던가… 그렇게 차가운 팔과 몸을 만
져 본 게 처음이었다. 처음에는 정말로 기다려 줄까, 하고
불안한 마음을 가졌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기
대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면서
응급실 출입구 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어디에
도 없었다. 그땐 정말로 기절을 할 뻔했다. 너무나도 슬펐
다. 그런데 그가 새하얀 숨을 토해 내면서 필사적으로 달려
오고 있는 게 아닌가. 마치 영화 속의 주인공과도 같았다.
오른쪽으로 15센티미터쯤 떨어진 곳에 가와시마 마사유키의
얼굴이 있다. 그때까지도 그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얼굴
이 약간 일그러진 모습이다. 난방을 해서 택시 안은 따뜻했
다. 근육은 이완되고 있었지만, 긴장감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것 같았다. 그 때문에 얼굴이 균형 감각을 상실해 버
리고 있는 듯했다. 계속해서 차가운 바람에 노출되어 있었
기 때문에 머리카락이 어지럽게 헝클어지고 푸석푸석하기까
지 했다. 그는 턱을 덜덜 떨고 있었다. 그 바람에 딱딱 하
고 이빨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콧물도 멈추지 않고 있는
듯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쉴새없이 눈을 깜박거리면서 눈
물까지 흘렸다. 사나다 치아키는 얼굴이 말이 아니군,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그가 사랑스러웠다. 남자의 얼굴을
보고, 사랑스럽다는 생각을 한 것도 처음이었다. 그녀는 갑
자기 때려 주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손바닥으로 뺨
을 툭툭 치는 게 아니라 주먹이나 꽃병, 또는 공구 따위로
눈 근처를 힘껏 때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굴에서 피
가 흐른다. 부탁이야, 그만해…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빈
다. 빙긋이 웃으면서 그 모습을 바라본다. 눈물을 뚝뚝 흘
리면서 빈다…? 그렇게 하면 이 남자가 더욱더 사랑스러울
것 같았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곁에 있어 줄 거라고
생각했다.
사나다 치아키는 자기의 마음을 가와시마 마사유키한테 전
하고 싶었다. 저, 말예요… 몸을 가볍게 흔들어 대면서 하
기 어려운 이야기들까지 모두 털어놓는다면 어떤 반응을 보
일까? 저 말예요… 당신은 이런 얘길 싫어하겠지만… 저는
아버지라는 인간을 아주 싫어해요. 주변 사람들은 매우 진
실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아버지는 회사원이었어
요. 제가 태어난 곳에서는 가장 큰 회사였는데, 그곳에서
경리를 담당하고 있었죠. 그 사람은 금붕어 기르는 취미밖
에 가지고 있지 않았어요. 초등학교 무렵부터였어요. 어머
니가 집에 없을 때나 잠든 뒤에, 나한테 몹쓸 짓을 하기 시
작했어요. 그 일을 당하고 나서 나는 죽어 버리고 싶은 마
음밖에 갖고 있지 않았어요. 그 인간도 나한테 죽으라는 얘
길 자주 했죠. 죽어 버리고 싶었다는 거, 정말이에요. 결국
죽지는 못했지만… 중학교 다닐 때였어요. 걸핏하면 저는
편도선이 붓곤 했죠. 그런데 그게 원인이 돼서, 심하게 앓
은 적이 있어요. 온몸에서 열이 펄펄 끓었어요. 결국엔 수
술을 해야 했죠. 우리 집은 나고야 부근에 있었어요. 하지
만 동네가 아주 작아서, 큰 병원이 없었지요. 그래서 수술
도 동네 의사가 할 수밖에 없었죠. 어머니는 그 의사한테
맡겨도 아무 탈이 없을까, 하고 걱정했어요. 그러자 아버지
가 갑자기 흥분을 하더군요. 치아키한테 무슨 일이 생긴다
면, 그놈을 죽여 버리고 말 거야! 그러고는 갑자기 흐느끼
기 시작했어요. 저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그
때는 제가 아버지 문제를 어머니한테 털어놓은 뒤여서, 아
버지의 성격이 크게 바뀌어 있었어요. 집안 분위기도 엉망
진창이었죠. 아무튼 아버지가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흐느꼈
던 것만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요. 어른이, 그것도 남자가
그렇게까지 심하게 우는 경우를 본 적이 없으니까요. 저는
전문 대학엘 들어갔어요. 그리고 그 무렵부터 성격을 바꾸
기 시작했죠. 그러면서 남자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어요. 지
금도 남자 친구가 세 명이나 있어요. 하지만 걔들은 질투를
하지 않아요. 세 명 모두 칠칠치가 못하기 때문이죠. 그 중
한 명은 대학생인데, 이름이 가즈키예요. 걘 고등학교 때
사고를 당해서 지금도 어깨와 무릎이 시원치가 않아요. 지
금 당장 죽어 버리고 싶다고 말하면서 깊은 잠 속으로 빠져
드는 남자의 얼굴… 그런 사람을 좋아해요, 저는… 그래서
6개월쯤 전에는 걔한테 할시온을 먹이기까지 했어요. 할시
온 세 알을 으깬 다음에, 오렌지 주스에 타 먹였어요. 그런
데 그 일이 있고 난 다음부터, 제가 만들어 주는 음료수나
음식 따윌 절대로 입에 대지 않았어요, 걘… 모두가 그런
사람들뿐이었어요. 요시아키도 그랬어요. 죽고 싶다고 하면
서 나이프로 다리를 찌르는 체하자, 난리를 피우더군요. 그
러고는 정말로 조금 찔러 보이자, 새파랗게 질려 가지고 도
망쳐 버렸어요. 그 남자는 지금 비디오 대여점에서 일하고
있어요. 나이는 스물여덟 살이구요. 아쓰시는 저랑 동갑내
기로, 얼마 전에 미용사가 됐어요. 그런데 걘 혼혈아예요.
혼혈아인 데다가 눈까지 나빠요. 근시이고, 부모도 없어요.
고아죠. 어려서 경험한 일들을 자주 털어놓았어요, 걘… 술
에 취하면 죽어 버리겠다고 하면서 서글피 울곤 했죠. 그리
고 이따금 저를 엄마라고 부르기도 했어요. 저한테 피어스
를 가르쳐 준 사람도 바로 아쓰시예요. 제 귀에는 다섯 개
의 링이 달려 있는데, 각각의 링은 18번부터 10번까지의 게
이지를 나타내고 있죠. 그리고 니플에다가는 피어스를 했어
요. 니플이란 유두를 가리키는 말이죠. 저는 달이나 해골을
도안한 문신도 좋아해요. 그것들도 몸에 새기고 싶었어요.
그래서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죠. 하지만 그때 이후로
전화를 하지 않아요, 걔가… 열여덟 살 때 성격을 바꾸고,
최근 3년 동안 스무 명 가량의 남자들을 사귀어 봤어요. 하
지만 모두가 그런 사람들뿐이었어요… 제가 얼마나 기뻐했
는지 아세요? 당신을 만나서요….
「배고프지 않으세요?」
사나다 치아키가 물었다. 전혀 표정을 바꾸지 않고, 가와시
마 마사유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줄곧 앞만 쳐다보
고 있었다. 앞과 뒤, 그리고 왼쪽과 오른쪽에는 초고층 빌
딩들이 죽 늘어서 있었다. 고층 빌딩에서 다양한 색깔의 빛
이 새어 나왔다. 그래, 저 빛이 나와 이 남자를 감싸안고
있어… 사나다 치아키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 남자한테 자
기의 마음을 전할 수도 있지만, 반드시 그럴 필요도 없었
다. 이 남자는 뭔가를 물은 적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자기
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고백하는 것도, 그걸 받
아들이는 것도 싫어한다. 이 세상에는 이런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지껄이기를 좋아하고, 듣기를 좋아한다.
모두가 리포터이고, 모두가 기자 회견을 하는 연예인이다.
친아버지한테 그런 일을 당했을 때, 기분이 어땠어요? 슬펐
어요? 예, 눈물이 펑펑 쏟아졌어요. 어째서 내가 이런 일을
당했는지, 슬퍼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마치 보디빌더들이
서로의 근육을 뽐내면서 보여 주려고 하듯이, 누구나가 자
기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려고 한다. 그리고 상처를 드러내
기만 하면 그것이 저절로 치료된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하고 사나다 치아키는 생각했다. 이 남자가 그 사람일까…?
끝까지 나를 기다려 준 남자가 맞는 걸까…? 그녀는 스스로
에게 의문을 표시했다. 아버지한테 거기를 핥기고 있는 자
기, 그리고 천장 한쪽 구석에서 그걸 내려다보고 있는 자
기, 죽으라고 명령하는 자기, 거기를 핥기면서 아버지한테
좋아요라고 내뱉고 있는 자기, 스위스 아미 나이프에서 가
위를 끄집어내고 있는 자기, 그들 모두가 모른다고 대답했
다. 도대체 어떤 남자를 기다리고 있는지, 사나다 치아키
자신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한테 흥미를 가져 달
라면서, 참아 달라면서, 희생해 달라면서 몸을 요구하던 남
자들을 모두 받아들이려고 했다. 그래, 그런 건 아무래
도 좋아… 안경이 뿌예졌음에도 그걸 닦으려 하지 않는 가
와시마 마사유키의 얼굴을 올려다보면서 사나다 치아키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 남자는 내 방에서 눈물을 흘리게 될
거야. 기뻐서 감사의 눈물을 펑펑 쏟아 낼 거야….
「조금만 참으세요. 거의 다 왔으니까요. 집에 가서 따뜻한
스튜와 수프를 만들어 드릴게요. 그걸 드시면 좀 나아지실
거예요.」
사나다 치아키가 말했다. 그, 그래요… 가와시마 마사유키
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한테도 얼굴을 보이지 않
고 이 여자의 방에 들어갈 수 있을까? 그래, 일단 쉬고 보
자. 그 다음에 계획을 세우면 되니까.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 슬리퍼를 신으세요. 여름용이긴 하지만, 이거 모로코
제예요. 싫으면 다른 걸로 드릴까요? 어라, 여기에 중국제
가 있네? 골동품 같아 보이긴 하지만, 대단히 아름다운 실
크 제품이에요. 전족을 한 여자들이 신던 거라서, 크기가
좀 작죠. 보통 사람들은 신기가 어려울 거예요. 맨발일 경
우에는 간신히 신을 수도 있겠지만요. 양말을 신었을 때는
역시 모로코제가 좋아요.」
방이 꽤나 커보였다. 마룻바닥에는 털이 복슬복슬하게 난
카펫이 깔려 있고, 벽에는 대형 히터가 설치되어 있었다.
히터에서 나지막이 기계음 소리가 들려 왔다. 그리고 창밖
베란다에는 접는 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 의자에 누워서 하
늘을 쳐다보면, 니시신주쿠 거리의 초고층 빌딩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집은 새로 지은 맨션으로, 신오쿠보의 번화가와 주
택가가 잇닿아 있는 곳에 위치했다. 그 건물 안에는 경비실
이 따로 없었다. ㄷ자 형의 건물 중앙에는 작은 뜰이 만들
어져 있었다. 뜨락에는 관엽 식물과 천사상(天使像)이 장식
되어 있었다.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쪽으로 올라
갔다. 엘리베이터의 한쪽 벽면은 유리로 장식되어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상승함에 따라서 천사상이 조금씩 멀어져 갔
다. 그들은 6층에서 내렸다. 그녀의 집 쪽으로 걸어가다가
그들은 강아지를 데리고 나온 노인과 마주쳤다. 하지만 사
나다 치아키는 한마디의 말도 건네지 않았다. 노인도 마찬
가지였다. 그는 오른쪽 다리를 질질 끌면서 걷고 있었는데,
두 사람한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얼굴을 보지 못했을 거
야…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간
접 조명 때문에 주위가 상당히 어두웠기 때문이다.
손잡이 아래쪽에 있는 구멍에 카드식 열쇠를 꽂아 넣었다.
[유년의 기억] 그녀의 집에서
출입문이 열렸다. 사나다 치아키가 전등을 켰다. 불빛이 따
뜻한 느낌을 주었다. 그녀가 선반 위에 올려 놓은 슬리퍼들
을 하나씩 하나씩 보여 주었다. 그리고 그것들 가운데 하나
를 꺼내서 신으라고 했다. 그녀가 꺼내 준 것은 노란색을
띤, 샌들처럼 생긴 슬리퍼였다.
「우선 에스프레소라도 만들어 드릴까요? 아니면 맥주나 진
토닉을…?」
가와시마 마사유키가 에스프레소를 마시겠노라고 대답했다.
사나다 치아키가 독일제 커피 메이커와 작은 커피잔을 꺼내
왔다. 커피 메이커는 은색의 스테인리스 제품으로, 소형 전
자 레인지만큼 컸다. 아마도 영업용인 것 같았다. 잘 닦아
서 그런지, 표면이 반짝반짝 빛났다. 사나다 치아키가 방을
가로질러서 주방 반대쪽으로 걸어갔다. 그녀가 벽장의 문을
활짝 열어제친 뒤, 가와시마 마사유키의 코트를 행거에 걸
었다. 그러고는 그대로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코트와 원
피스가 주르르 흘러 내렸다. 곧 이어서 슬립이 툭, 하고 방
바닥 위로 떨어졌다. 그녀의 몸에는 자줏빛 팬티만이 남아
있었다. 장소가 달라지니까, 여자의 인상까지도 다르게 보
이는군… 사나다 치아키의 모습을 보고, 가와시마 마사유키
는 이렇게 생각했다. 호텔 복도와 욕실, 방 등에서 부축해
주었을 때보다도 피부가 훨씬 더 하얘 보였다. 응…? 가와
시마 마사유키는 그녀의 몸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팬티 선
에서 배꼽 근처까지 보송보송하게 솜털이 돋아나 있었다.
정말로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나다 치아키는 먼저 잿빛 T셔츠를 입었다. 허벅지에 난
상처를 압박하지 않게끔 주의하면서, 회갈색의 벨벳 스커트
를 천천히 끌어올렸다. 어차피 조금 있다가 다시 벗어야 하
니까…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사나다 치아키가 중얼거
렸다.
「방이 참 좋군요.」
소파에 앉아 커피 메이커를 쳐다보면서 가와시마 마사유키
가 말했다. 은빛이 나는 기계에서 진한 커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전 다른 데에는 거의 돈을 쓰지 않아요.」
커피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 놓으면서 사나다 치아키가 말했
다. 그러고 나서 가와시마 마사유키의 옆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다른 여자들은 술을 마신다거나, 디스코장을 찾곤 하죠.
하지만 저는 그런 걸 좋아하지 않아요. 옷을 사는 취미도
없지만,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하나씩 하나씩 사 모으죠.
전 그런 게 좋아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L자형 소파가 오디오, 책장 등과 마
주보는 형태로 놓여 있다. 미스터리와 공포 소설 문고판,
제1권부터 갖추어져 있는 듯이 보이는 순정 만화 단행본들,
그리고 그릇 및 가구에 관한 책들… 그 속에 뒤섞여 있는
한 권의 책이 눈에 확 들어왔다. 책등에 『사체(死體) 사진
집』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비디오와 CD는 별로 많아
보이지 않았다. 언젠가 크게 히트쳤던 일본 만화 영화가 세
개 있었다. 그리고 클래식 CD가 몇 장 있을 따름이었다. 그
것도 오후의 클래식 명곡선이라는 제목이 붙은, 홈뮤직 풍
의 것들뿐이었다. 그밖에 영화 음악 음반 몇 장과 유명한
일본의 팝 싱어 베스트 음반 10여 장 정도가 갖추어져 있었
다. 텔레비전 화면도 별로 커보이지가 않았다. 그리고 미니
콤포넌트 오디오 장치도 아주 평범한 것이었다.
「조금 있다가 수프를 만들어 드릴게요. 그 동안 음악이라
도 들려 드릴까요?」
가와시마 마사유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나다 치아키가
‘오후의 클래식 명곡선 볼륨 Ⅲ’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CD 데크에 집어 넣었다.
쇼팽의 『야상곡』과 슈만의 『아름다운 어린이들의 세계』
그리고 슈베르트의 『즐겁고 흥겨운 한때』가 함께 실려 있
었다. 볼륨을 낮게 해서 소리가 아주 작았다. 은은한 음악
소리를 들으면서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에스프레소를 마셨
다. 사나다 치아키가 몸을 바짝 밀착시켰다. 은은한 피아노
소리를 들으면, 마치 비가 내리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어
요. 그렇게 생각지 않으세요…? 이렇게 말하려는 순간, 가
와시마 마사유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까는 너무나도 추
워서 말을 못했어요… 히터가 가동중이었기 때문에 몸이 금
세 따뜻해졌다. 조금 전에 본 사나다 치아키의 하얀 배를
머릿속에 떠올리자, 갑자기 마음이 뒤숭숭해지기 시작했다.
「병원에서 치료는 제대로 해주던가요?」
사나다 치아키가 벨벳 스커트를 걷어 올렸다. 그리고 새로
감은 붕대를 보여 주었다. 의사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
까?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그 부분이 신경에 쓰였다. 노트에
관한 문제를 의사한테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그것을 보증해
줄 만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의사의 신고를 받은 경찰이
이 집을 감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혹시 집 밖에서 대기하
고 있는 건 아닐까? 내가 아이스 픽을 꺼내는 순간, 한꺼번
에 들이닥치기 위해서… 이 맨션 앞까지 택시를 뒤쫓아 온
차는 없었다. 맨션 주위와 건물 입구, 그리고 6층 엘리베이
터 홀에서도 그런 낌새는 느낄 수 없었다. 노트에 살인 계
획이 적혀 있다는 이유만으로, 또한 아이스 픽과 나이프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체포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여
자가 허벅지 상처에 대해서 거짓말을 한다고 해도 문제될
게 없다. 즉 자해를 한 게 아니라 이 사람한테 찔렸다면서
거짓 증언을 한다 해도 체포당할 위험성은 없다. 상처 부위
를 조사하면 아이스 픽이나 나이프가 아니라 스위스 아미
나이프의 가위로 찔렀다는 사실이 금방 밝혀질 것이기 때문
이다. 상처의 깊이나 각도로 볼 때 다른 사람한테 찔렸는
지, 자신이 직접 찔렀는지도 금방 밝혀지게 된다. 그런 걸
생각하면서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문득 뭔가를 깨달았다. 자
기 자신의 몸 안쪽에서 미세한 진동이 일고 있었다. 그는
사나다 치아키의 허벅지에 감겨 있는 새로운 붕대를 바라보
았다. 그래, 너는 단지 이 여자를 아이스 픽으로 찌르고 싶
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자기의 가슴속에서 이런 소리가 들
려 오고 있었다. 며칠 전, 24시간 편의점 안에서 들었던 목
소리와 똑같았다. 그래, 틀림없어… 기저귀 진열장 옆에서
들려 왔던 목소리가… 이봐, 아직도 모르겠어? 지금 너는
두 가지 문제점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어. 그 여자가 노
트를 봐버린 것 같아서 불안해 하고 있지, 그렇지? 그리고
갓난아기를 찌를지도 모른다고 상상하는 게 싫겠지. 이런
거 아냐? 이봐, 좀더 솔직해질 수 없어? 뻔뻔스럽게도 너는
이 여자를 뒤쫓아 왔어. 그리고 서로 몸을 기댄 채, 그녀의
방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있어. 이 여자와 헤어지고 싶지
않기 때문일 거야. 헤어지는 게 싫기 때문일 거라구. 왜 그
러는지, 누구보다도 네가 잘 알 거야. 아까 이 여자가 옷을
갈아입을 때, 하얀 배를 슬쩍 쳐다보았지? 희미한 갈색 솜
털이 자라나 있는 배를 말야. 그 새하얀 배에 뾰족한 아이
스 픽을 푹 찔러 넣고 싶었겠지. 그러면 작은 구멍이 생겨
날 거 아냐? 그걸 확인하고 나서, 아이스 픽의 끝부분을 천
천히 돌리고 싶었겠지. 너는 지금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
어. 너한테는 이 문제가 가장 중요해. 아이스 픽을 푹 찔러
넣고 나서 다시 빼내면, 작은 구멍에서 찐득찐득한 피가 흘
러나오겠지. 콸콸 쏟아져 내리는 시커먼 피가 보고 싶은 거
지? 그 순간을 위해서 지금까지 살아 왔어, 너는… 너는 그
런 인간이야. 그런 인간이 될 수 있게 도와준 사람이 있지?
너의 어머니 말야. 그래, 너의 어머니가 일정한 역할을 해
주었어….
어디선가 손톱 타는 냄새와 털 타는 냄새가 났다. 그와 동
시에 관자놀이 안쪽에서 열이 나기 시작했다. 코와 눈, 그
리고 귀신경이 교차하는 곳에서 불꽃이 일었다. 입술이 가
느다랗게 떨리기 시작했다. 어느 틈엔지, 목덜미에서는 땀
이 배어 나고 있었다. 자신의 성대가 저절로 뭐라고 외치려
하고 있었다. 공포감 때문에? 아니면 흥분하고 있어서? 그
걸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리고 눈
도 꼭 감았다. 그때까지도 그는 장갑을 끼고 있었다. 그는
먼저 왼손에 끼고 있던 장갑을 벗었다. 가죽 장갑 안쪽에는
천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피부에 찰싹 달라붙는 바
람에, 찢어진 부분에서 다시금 피가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왼손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통증이 느
껴지면 자기 자신을 컨트롤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머나, 내 정신 좀 봐. 깜박 잊고 있었네! 손 내미세요,
약 바르게….」
사나다 치아키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고개를 푹 떨군 채,
가와시마 마사유키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때까지도 그는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유년의 기억] 이상한 그리움
「약 바르는 게 싫으신가 봐요? 하지만 바르셔야 돼요. 제
가 의사 선생님한테 얘기해서 약을 타 왔거든요. 자, 손 좀
내밀어 보세요.」
가와시마 마사유키가 다시 한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사나
다 치아키의 목소리가 아득히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와 동
시에 그는 이상한 그리움 같은 것을 느꼈다. 그 무렵부터
그랬다. 의식이 혼란스러워지면서 자기 자신을 컨트롤하지
못하게 되면, 반드시 들려 오곤 하던 목소리… 관자놀이 안
쪽에서 열이 난다. 그런데 그 열이 뭔가에 콱 막혀서 밖으
로 새나가질 못한다. 눈과 귀와 코의 신경이 교차하는 곳에
서 불꽃이 튄다. 뭔가가 파열하기 시작한다.
바로 그 순간, 어디선지 목소리가 들려 오기 시작한다. 하
지만 그건 내부에서 들려 오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건 분명
밖에서 들려 오고 있었다. 현실성을 띠고 있는 목소리다.
야단치는 것도, 달래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서도 항상 현실
성을 띤 채 전달되어 왔다. 여기 있었구나, 마사유키.
자, 가자. 밥 먹을 시간이 됐으니까. 오늘은 너희들이 좋아
하는 햄버거가 나왔단다. 식사 땐 어떻게 해야지? 손을 씻
어야겠지? 자, 손 씻으러 가자. 물이 차갑긴 하지만 깨끗이
씻어야 해. 기분 좋지 않니, 햄버거를 먹게 돼서? 자, 저길
보려무나. 모두들 좋아하잖니? 밖에서 들려 오고 있는 목소
리가 교차하는 신경의 불꽃들을 하나씩 하나씩 꺼뜨리기 시
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관자놀이 안쪽에서 일고 있는 열까
지도 식혀 준다. 귀를 막지 마라. 그리고 눈을 떠라… 외부
의 목소리가 말한다. 주위를 둘러보렴. 그래그래, 주위에서
들려 오고 있는 소리를 들으려무나. 봐라, 달라진 게 있니?
달라진 건 하나도 없단다. 너를 위협할 만한 게 전혀 없으
니까 안심해라….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고 나서
꽉 움켜쥐고 있던 왼손의 긴장을 풀었다. 눈을 떴다. 그때
나 지금이나 전혀 달라지지 않은 게 한 가지 있었다. 그건
자신의 내부, 자신을 포장하고 있는 피부 안쪽에서 들려 오
고 있는 목소리였다.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기분이 불
쾌해지고 마음 또한 불안해진다. 그때마다 그는 귀를 틀어
막는다. 하지만 아무런 효과도 없다. 귀와 눈과 코신경이
교차하는 곳에서 불꽃이 튀는 것도 똑같고, 그때마다 떠오
르는 영상도 똑같다. 보고 싶지 않아서 눈을 감는다. 하지
만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안쪽에서 들려 오는 목소
리와 영상을 중화(中和)시킬 수는 없을까…?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바깥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와 영상
이 바로 그것이었다.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죽음보다 훨씬
더 두려운 게 있었다. 사고나 질병으로 인해서, 시각과 청
각을 잃는 것이다. 외부의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되거나 볼
수 없게 된다면…? 그렇게 되면 단 하나의 공포감만이 한없
이 부풀어오르게 되어, 눈 깜짝할 사이에 미쳐 버리고 말
것이다. 그래, 약이라든가 먹을 것에 대해서 더 많은 이야
기를 해다오… 이렇게 생각하면서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사
나다 치아키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아 참, 배고프시죠? 수프 만들어 드릴게요. 제가 만든 수
프, 맛있어요. 수프를 만드는 게 저의 취미거든요.」
이렇게 지껄여 대면서 사나다 치아키는 가만히 생각해 보았
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내가 뭘 하고 있었더라
…? 그래,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단지 새로 감은 붕대를
보여 주었을 뿐이야. 그렇지, 이 남자가 갑자기 침묵하기
시작했어. 그리고 이내 얼굴이 창백해졌어. 이런 일이 있기
전에, 내가 한 행동이라곤 그뿐이었어. 이 방에는 히터가
설치되어 있고, 히터에는 센서가 부착되어 있기 때문에 섭
씨 22도를 정확히 지켜 주고 있지. 그러니까 추울 리가 없
어. 그런데도 이 남자는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피가 스밀
정도로 입술을 꼭 깨물고 있었어. 봐, 입술에 이빨 자국이
나 있잖아? 그리고 그 자리에 피가 배어 있어. 그런데도 이
남자는 그 같은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어.
「오늘밤에는 크림 콘 수프를 만들어 볼까 해요. 이렇게 추
운 날 밤에는 뭐니뭐니 해도 크노르예요. 몸 속까지 꽁꽁
얼어 버릴 것 같은 날에는 콘소메(맑은 수프의 일종`─`역
주)보다 포타쥬(색깔이 진하고 걸쭉한 수프`─`역주)를 먹
는 게 좋아요. 희멀건 것보다는 걸쭉한 게 더 낫잖아요? 저
는요, 카레 분말을 조금 넣어서 먹곤 해요. 물론 우유도 넣
죠. 보통 우유도 넣고, 가당 연유도 넣어요. 고소한 옥수수
맛에다가 고소한 우유까지 더하면 정말로 기가 막혀요. 영
양도 만점이구요.」
계속해서 사나다 치아키가 지껄여 댔다. 가와시마 마사유키
는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사나다 치아
키는 정말로 기뻤다. 가와시마 마사유키가 자기의 말을 진
지하게 들어 주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와시마 마
사유키는 사나다 치아키의 입언저리와 허벅지를 번갈아 가
면서 살펴보고 있었다. 허벅지에 감겨 있는 붕대를 보고,
뭔가를 생각해 낸 게 틀림없어… 사나다 치아키는 이렇게
생각했다. 아까 내가 욕실에서 했던 행동들을 떠올리고 있
는 거야…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욕실에서
했던 행동들이 단편적으로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사나다 치
아키는 그와 같은 단편들을 확실하게 기억해 내려고 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연결시키기 위해서, 안간힘을 다했다. 가
와시마 마사유키를 위해서, 기억을 되살리고 싶었던 것이
다. 가위로 마구 찔러서 허벅지가 피투성이였다. 그 영상만
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분명히 그
걸 보았다. 그 이미지를 살려 내야 한다. 가와시마 마사유
키가 피로 얼룩진 자신의 허벅지를 바라보고 있다… 그녀는
모든 신경을 집중시켰다. 그리고 그와 같은 장면을 이미지
화하는 데 성공했다. 푸딩이나 젤리가 얼어붙으면서 천천히
응고되어 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단지 색깔을 가진 빛의
반점들이 찰싹 달라붙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것들은 딱
딱하게 굳거나 물렁물렁하게 풀어지는 과정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가와시마 마사유키의 얼굴이 가장 먼저 영상의 형
태를 띠고 부각되기 시작했다. 그는 욕실문 옆에 서 있었
다. 모든 노력을 다하니까, 결국엔 생각이 났어. 이런 일은
처음이야… 사나다 치아키는 이렇게 생각했다. 허벅지를 찌
르거나 손목을 자를 때는 아무런 통증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 대신 그런 일들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생각해 내려고
한 적도 없었다. 문이 열린다. 문이 열린다. 욕실문이 열리
고, 이 남자가 나타난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이 남자가 서
있다. 이 남자는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얼굴은
…? 얼굴, 이 남자의 얼굴은…? 겁을 내고 있다. 그래 생각
났어. 내가 깔깔거리면서 웃어 버릴 정도로, 이 남자의 얼
굴은 놀라움과 공포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어. 그래, 그 당
시 이 남자는 안색이 창백해질 정도로 잔뜩 겁을 집어먹고
있었어.
「수프 접시도 두 개나 있어요. 새로 샀어요. 거기에다가
담아 먹을 거예요. 수프는 금세 만들 수 있으니까, 조금만
참으세요. 정말로 금세 만들 수 있어요. 물을 끓인 뒤, 크
노르 수프를 넣으면 다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저 젓기만
하면 된다구요. 수프 접시 말예요, 저도 아직 써보지 못했
어요. 그거 싸구려가 아니에요. 웨지우드 제품이라구요.」
이 남자는 잔뜩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당연
한 일이다. 허벅지를 마구 찔러서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으
니까. 사나다 치아키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이 남자는 분
명히 잔뜩 겁을 집어먹고 있었어. 그런데 어째서 그 같은
사실을 까맣게 잊어 버리고 있었을까…? 이 남자가 도망치
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시아키는 줄행랑을 쳐버렸다. 전문
대학 시절에 사귀었던 유다카도 구급차를 부르러 간다고 하
면서 결국엔 도망쳐 버렸다. 히사오는 완력으로 그녀의 행
동을 제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도 그녀한테 손을 잘리자,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언제나 혼자 병원에서 눈을 뜨게 되었다. 그때부터 그녀는
병원까지 데려다 주곤 하는 환상의 남자를 꿈꾸게 되었다.
하지만 진실을 알고 있다. 그건 환상일 뿐, 그런 남자는 어
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하얀 옷을 입고 하얀
헬멧을 뒤집어쓴 남자들이 하얀 차에 뛰어오른다. 그리고
그 남자들이 그녀를 붙잡아서, 팔뚝에 주사를 놓는다. 진실
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 남자를 환상 속의 남
자로 생각했다. 손을 깨물리고서도 이 남자는 도망치지 않
았다. 뿐만 아니라 이 남자는 온화한 목소리로 속삭여 주기
까지 했다.
이런 일은 처음이다. 거기까지 생각하다 말고, 사나다 치아
키는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뭔가 중요한 걸 잊어 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또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 남자를 환
상 속의 남자로 생각했던 이유가 달리 또 있을 것이다. 사
나다 치아키는 욕실 안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머릿속에 하나
씩 하나씩 떠올렸다. 마침내 그것들이 영상으로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잔뜩 겁을 집어먹은 가와시마 마사유키의 얼굴,
그가 보여 주려고 했던 몇 가지의 행동들, 가와시마 마사유
키의 손과 팔… 그래, 또 하나 잊어 먹은 게 있어. 물건이
었다. 욕실 안에 있던 것들… 목욕 타월과 비누, 샴푸, 핸
드백, 욕실 바닥의 피, 쓰레기통, 티슈 상자, 비데와 변기,
화장지, 그리고… 그래, 생각났다. 전화야, 전화!
「카레 분말을 넣는다니까, 이상한 생각이 드시나 보죠? 하
지만 염려 마세요. 우유와 카레는 아주 잘 어울리는 식품이
니까. 카레에다가 콘을 첨가하면 그만이죠. 루(밀가루를 기
름이나 버터로 볶은 것`─`역주)를 집어 넣으면 안 돼요.
카레 가루를 조금만 첨가해도 우유와 콘이 훨씬 더 고소해
지죠. 잘 모르셨을 거예요, 이런 사실들을….」
이 남자는 욕실에서 전화를 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전화를
하고 있는 이 남자의 영상이 아니다. 전화의 내용이다. 거
기에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손바닥에서 소름이 돋았다. 이
남자는 전화를 하면서, 나의 진짜 이름을 입에 올렸어. 지
금, 치아키 씨와 함께 있어요… 그래, 분명히 그렇게 얘기
했어. 나의 본명을 거론하다니… 항상 먼 발치에서 나를 지
켜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부탁으로 나의 뒷조사
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전부터 나를 알고 있던 게
틀림없다.
[유년의 기억] 서로 다른 욕구
나를 좋아하고 있으면서도, 부끄러운 나머지 말을 꺼내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온갖 궁리 끝에 손님으로 가장해서 나
를 불러들이려고 했던 게 아닐까? 그래, 그럴지도 몰라. 그
러다가 그만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되었던 거야. 그래서 그는
깜짝 놀란 와중에서도 도망치지 않고 나를 도와 주었던 거
라구. 그래, 틀림없어. 그러니까 욕실에 들어가기 전에 자
위 행위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는데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 내가 그런 짓을 하는 게 달갑지 않았던 거야. 발가
벗은 상태에서 묶어도 돼요? 이렇게 묻긴 했지만, 실제로는
묶을 생각도 하고 있지 않았어. 단순히 SM을 좋아하는 손님
에 불과했다면, 병원까지 데려다 주지도 않았을 거야. 그런
사람이 이렇게 추운 날씨를 무릅쓰고 기다려 주었겠어…?
「저는 알고 있어요.」
미소를 머금으면서 사나다 치아키가 말했다. 조금 전에 비
해서 목소리가 조금 다른 것 같았다.
「뭐, 뭘요?」
목소리가 달라진 것을 깨닫고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가슴이
철렁했다. 게다가 ‘저는 알고 있어요’라는 말까지 했다.
「사실대로 얘기해 볼까요? 당신은 SM 플레이를 하기 위해
서, 저를 불렀던 게 아니에요.」
삽시간에 가와시마 마사유키의 얼굴이 벌개졌다. 그는 자신
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표정을 보고, 사나다 치아키는 수줍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
각했다. 자신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알아 버렸으니, 깜짝 놀
랄 수밖에… 그래서 대답을 못하고 있는 거야.
반면에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바짝 긴장을 했다. 느닷없이
이게 무슨 소리지? 무슨 꿍꿍이속으로 이런 얘길 꺼냈을까?
카레 맛이 깃든 크림 수프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장광설을
늘어놓다 말고, 갑자기 모든 사실을 알고 있다고 내뱉는 의
도가 뭐지? 노트를 읽고 나서, 나의 반응이 어떤지를 살펴
보려는 건가? 하지만… 저 여자는 지금 즐거워하고 있어.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나의 반응을 보고 즐거워할 수
있는 걸까? 혹시 의사한테 모든 걸 털어놓았던 게 아닐까?
이 여자의 이야기를 듣고, 의사가 경찰서에 신고를 했을지
도 몰라. 지금 이 순간에도 경찰이 이 집을 감시하고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야.
「아까 병원에서 말예요….」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가와시마 마사유키가 화제를 바꾸
었다. 수줍어서 화제를 바꾸려는 거야… 사나다 치아키는
이렇게 생각했다. 정말로 수줍음을 많이 타는 사람인가 봐.
말수가 적은 것만 봐도 알 수 있어, 그건… 고백하는 것은
물론이고, 상대방한테서 그런 얘길 듣는 것마저도 싫어하나
봐. 그러니까 손님으로 가장하고 나한테 접근해 왔겠지.
「의사 선생님이 뭐라고 하던가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벼, 별다른 게 아니라…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느냐고 묻
지 않아요?」
「물었어요.」
「그,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어요?」
「자전거를 타다가 나뒹굴었다고 했죠.」
「자전거?」
「최근엔 다양한 기능을 갖춘 부속품들이 함께 딸려 나와
요. 마실 것을 담을 수 있는 그릇과 변속기 레버 등도 함께
갖추어져 있죠. 하지만 저는 자전거 타는 것 자체를 좋아하
지는 않아요. 언젠가 스포츠 잡지를 본 적이 있는데, 거기
에 그렇게 쓰여 있더군요. 자전거를 타다가 쓰러지면, 허벅
지에 상처를 입기가 쉽다구요.」
「…….」
「의사도 믿지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그 사람들, 귀찮아서
대충대충 넘어가요.」
「귀찮아서?」
「대기하는 환자들이 많기 때문에 귀찮을 거 아녜요? 게다
가 다른 상처 자국도 있구… 자전거를 타다가 다쳤다는 얘
길, 그 사람들이 믿겠어요? 하지만 그 사람들, 그런 문제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아요.」
「다른 상처라뇨?」
가와시마 마사유키가 반문을 했다. 차고 있던 시계를 풀고,
사나다 치아키가 손목을 보여 주었다. 그녀의 손목에는 네
개의 상처 자국이 나 있었다.
「다리에도 여러 개 있어요. 붕대 때문에 보이지 않지만요.
」
이제 보니까 이 여자, 상습범 아냐…? 왜 진작 아차리지
못했을까? 손목의 상처 자국은 주름살과 겹쳐 있었고, 허벅
지는 피투성이었기 때문에 그 당시에는 보이지가 않았던 것
이다. 상습범이야, 이 여자는… 강한 자살 욕구를 갖고 있
는 여자가 틀림없어.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갑자기 맥박이
빨라졌다. 내 손에 죽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닐까? 내가 나
이프를 꺼내서, 푹 찔러 주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닐까?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사나다 치아키의 손목을 가만
히 살펴보았다.
사나다 치아키가 가와시마 마사유키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
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자, 이리로 오세요. 그녀가
눈으로 신호를 보내 왔다. 그리고 그의 손을 붙잡은 채 방
한쪽 구석에 놓여 있는 더블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가
가와시마 마사유키를 침대 가장자리 쪽에 앉혔다. 그리고
자신도 그 옆자리에 앉았다. 그때까지도 두 사람은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손
목의 상처 자국을 들여다보면서 사나다 치아키가 입가에 미
소를 머금었다. 입술의 끝부분이 약간 비뚤어져 있다. 또
한번 충격을 받았겠지… 이렇게 생각하면서 그녀는 가와시
마 마사유키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쓸어 넘겼다. 수줍음을
너무 많이 타는 사람이라서, 내가 리드하는 수밖에 없어,
수프를 만들기 전에 확실하게 가르쳐 줘야지, 몸을 만져도
좋고 키스를 해도 좋아. 그래, 섹스를 해도 좋다고 말해야
지… 거기에 생각이 미치는 순간, 몸 안쪽에서 성욕이 꿈틀
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걸 정확하게 느끼고 있었다.
「저는 다 알고 있어요. 저한테 하고 싶은 게 있으시죠?」
사나다 치아키가 말했다. 순간,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심한
현기증을 느꼈다.
「두려워할 거 없어요.」
역시… 하고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생각했다. 이 여자가 노
트를 본 게 틀림없어. 노트를 보고, 임자를 만났다고 생각
한 거야. 그래서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었던 거구. 자기 집으
로 유인해 와서 기회를 엿보고 있는 중이야, 지금 이 여자
는…
자살 욕구를 갖고 있는 놈들은 모두 마찬가지야. 자신의 행
적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하지. 그래, 이 방 어딘가에 비
디오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을지도 몰라. 연락을 받은 친구
들이 망원 렌즈로 관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구. 베란다로
통하는 유리창에는 커튼이 드리워져 있지 않았다.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커튼을 치지 않은 게 신경 쓰이시나 봐요?」
가와시마 마사유키가 커튼을 바라보고 있자, 사나다 치아키
가 이렇게 물었다.
「커튼을 쳤으면 하시죠? 그 마음, 이해해요. 하지만 저는
창밖에 펼쳐져 있는 빌딩숲을 좋아하기 때문에 커튼을 치지
않아요. 저기 좀 보세요. 하늘에 닿을 듯이 높다란 빌딩 꼭
대기에서 빨간색의 불빛이 깜박거리고 있어요. 비행기 등이
충돌하지 않게끔 주의를 주고 있는 거죠. 아무튼 저걸 보
면, 빌딩이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져요.」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쉴새없이 지껄이고 있는 사나다 치아
키와 초대형 빌딩숲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갑자기 위장 부
위가 메슥메슥했다. 사나다 치아키는 얼굴 가득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촉촉한 눈동자가 침대 사이드에 있는 등불
을 반사시키면서 반짝반짝 빛났다. 숨이 넘어가는 순간까지
도 이 여자는 이런 표정을 짓고 있을 거야… 가와시마 마사
유키는 갑자기 불쾌한 생각이 들었다. 빨리 찔러, 하고 나
한테 명령을 내릴 거야, 이 여자는… 어디 그뿐인가. 목과
배에 구멍이 나고 손목에 자상이 생겨서 피투성이가 된다고
해도, 기쁜 표정으로 미소를 머금을 거야. 결국 나는 이 여
자의 도구로 전락해 버리고 마는 거지.
이 남자가 도대체… 사나다 치아키는 초조감을 느끼기 시작
했다. 긴장을 완화시키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데, 이 남자
는 오히려 긴장감을 더해 가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지? 여자를 경험해 본 적이 없어서 그러는지
도 모른다. 손을 그곳으로 가져가 볼까? 그러면 눈에 핏발
을 세우고 기뻐할지도 모르잖아? 아니야, 좀더 인내심을 갖
고 천천히 가르쳐 주는 게 좋아. 그렇지, 성욕에 관한 얘기
를 꺼내도록 하자. 지금까지 경험했던 남자들은 모두가 좋
아했으니까….
「성욕이 사라지면 곧바로 불안감에 휩싸이고 말죠. 그런
성격을 갖고 있어요, 저는….」
이불을 살짝 걷어 내면서 사나다 치아키가 말했다. 그녀가
가와시마 마사유키의 손을 붙잡아서, 침대 시트를 만지게
했다.
[유년의 기억] 저를 만지세요
「자, 만져 보세요. 금세 아실 거예요. 이게 실크라는 걸
말예요. 두주일 전에 샀어요. 꼼꼼히 만져 보세요. 질감부
터 다를 테니까요. 일반 백화점에서 팔고 있는 한국산 실크
나 대만산 실크는 이렇지가 않아요. 싸구려 실크들은 겉만
번지르르하죠. 어때요, 느낌이 다르지 않으세요? 물기를 머
금은 것처럼 매끄럽죠? 하지만 젖어서 그러는 게 아니에요.
상상해 보세요. 여기에 제가 누워 있고, 당신이 위에서 내
려다보고 있는 장면을 말예요. 이 시트가 축축하게 적셔지
는 걸 상상해 보시라구요. 이 시트, 오늘 처음 사용하는 거
예요.」
사나다 치아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와시마 마사유키가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갑자기 자신이 누군가의 조종을
받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언어의 의미를 깨닫기 시작
한 무렵, 그러니까 네 살이나 다섯 살 때였을 것이다. 실컷
두들겨 패고 나서 어머니가 무서운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두들겨 팼는데도 울지 않을 때면 어머니는 꼭 그 말을 꺼냈
다. 넌 정말 이상한 놈이야. 어른이 되면 반드시 머리가 이
상해질 거야… 언젠가 나는 동급생한테 그 이야기를 털어놓
았다. 그래서 병원에 함께 가보기도 했다. 그 남자는 창문
이 없는 좁은 방에서 하루 종일 벽에 귀를 들이대고 있었
다.
벽의 소리를 듣고 있었던 것이다. 벽의 소리를 들으면서 웃
기도 하고 울기도 했다. 다른 사람이 무슨 소리를 하면, 그
남자는 정반대로 행동을 했다. 조용히 하라고 하면 떠들었
고, 먹으라고 하면 이빨을 딱딱 부딪치면서 절대로 입을 열
지 않았다. 잘 봐둬, 너하고 똑같은 사람이니까… 너도 언
젠가는 창이 없는 좁은 방에 들어가서 벽의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그 남자는 하루 종일 벽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
러기 위해서는 벽 앞에 앉아서 목을 비틀어야 한다. 벽에다
귀를 대고 하루를 보내야 하는 것이다. 그 결과 목이 원래
의 상태로 되돌아오질 않았다. 얼굴은 항상 옆을 보고 있
고, 귀만이 앞쪽을 향하고 있었다.
세월이 흘러서 나도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 조사를 해보기로 했다. 책에는 이렇게 쓰
여 있었다. 정신 분열증 환자라고… 누군가가 나한테 무슨
소리를 하고 있다, 누군가가 나한테 무슨 일을 시키고 있
다, 자신은 누군가의 조종을 받고 있다… 정신 분열증을 앓
기 시작할 때 이런 증상이 나타난다고 쓰여 있었다. 계획적
으로 살인을 하는 게 아닙니다. 갑자기 이상해지는 거죠.
갑자기 이 여자가 자기 자신의 다리를 찌릅니다. 그 순간,
이 여자를 죽이고 싶다는 유혹에 빠지죠. 침대 위에서 맨몸
으로 나뒹굴다가 내가 나이프로 여자를 찌릅니다. 그럼 여
자는 웃으면서 죽어 갑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나는 틀림
없이 정신 병원으로 보내진다. 아마도 이 여자는 내 손에
죽는 걸 상상하면서 흥분에 사로잡혀 있을 것이다. 가와시
마 마사유키는 이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나를 조종하고 있
는 놈이 있다고 해도 이 여자는 아니다. 이 여자는 자살 욕
구를 가지고 있는 데다가 색광이기도 하다. 이 여자는 단지
하녀와 같은 존재일 뿐이다. 나를 발정시키려는 놈이 보낸
심부름꾼인 것이다. 나는 이 여자를 벌벌 떨게 해야 한다.
비명을 지르면서 애원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울부짖게 한
다음에 찔러 죽여야 한다. 지금 이 여자는 눈동자를 촉촉하
게 적신 채 웃고 있다. 얼굴이 마치 광대의 가면과도 같다.
눈이 촉촉하게 젖어 있는 건 욕정 때문이다. 저걸 봐, 기뻐
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마구 지껄여 대고 있잖아?
「이걸 좀 만져 보세요. 실크 제품이에요. 시트를 만지고
나서 제 피부를 어루만지세요. 아셨죠?」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사나다 치아키가 가와시마 마사유키의
손을 가만히 붙잡았다. 그런 후 가와시마 마사유키로 하여
금 시트의 표면을 어루만지게 했다. 사나다 치아키가 붕대
를 감지 않은 자신의 허벅지 쪽으로 가와시마 마사유키의
손을 가져갔다.
「이렇게 한 사람이 지금까지 단 한명도 없었어요.」
사나다 치아키가 말했다. 정말이에요, 이건… 요시아키도
그랬고, 유다카도 그랬어요. 아쓰시와 히사오, 가즈키도 이
시트를 만진 적이 없어요. 그래요, 이 시트의 촉감을 즐긴
다음에 나의 몸을 만지는 거예요. 아주 특별한 사람만이 할
수 있어요, 이런 건… 이 시트 위에서 사정을 하세요. 그래
도 돼요, 당신은… 제 마음이 제대로 전달되고 있는지 모르
겠군요. 여기까지 생각하다 말고, 사나다 치아키의 얼굴에
서 갑자기 미소가 사라졌다. 사정…? 이 남자는 어떤 표정
을 지으면서 그걸 내보낼까? 다른 남자들하고는 어떻게 다
를까? 물어… 하고 그놈은 말했다. 이런 때 그놈이 생각날
게 뭐람? 그놈은 물게 했다. 아이라도 갖게 되면 큰일나니
까…
그놈은 물게 했다. 무는 순간, 그것이 나왔다. 이 남자는
그놈과 달라. 그렇다면 어떻게 다를까? 그래, 이 남자는 욕
실에서 나를 도와 주었어. 뿐만 아니라 엄청나게 추운 곳에
서 기다려 주기까지 했어. 그러니까 이 남자가 시키는 것이
라면 뭐든지 해야 돼. 뭐든지…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 남자가 나의 거기를 핥고 또 핥는다. 그런 다음에 내가
문다. 문다. 그것이 나온다. 이 남자는 나한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손가락을 깨물린 상태에서도 나의 귓
가에 대고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여 주었다. 어디 그뿐인가.
금방이라도 얼어붙을 것처럼 추운 곳에서 나를 기다려 주기
까지 했다. 그래서 좋아하게 된 게 아닐까, 이 남자를…?
이 남자가 아무 짓도 하지 않아서… 아무 짓도 하지 않아서
… 그리고 어떤 짓도 하려 들지 않기 때문에… 그놈과 이
남자는 질적으로 다르다. 그놈의 목소리가 되살아난다. 물
어, 물란 말야, 치아키. 물어, 물라구…
사나다 치아키의 손이 멈추었다. 가와시마 마사유키의 손을
자신의 허벅지 위로 끌어내린 상태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
다. 뭐라고 내뱉으려던 언어를 꿀꺽 삼켜 버린 듯이, 그녀
는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자신의 허벅지 위에 놓여 있는
가와시마 마사유키의 손을 뚫어져라고 쳐다볼 뿐이었다. 이
윽고 그녀가 가와시마 마사유키한테서 손을 뗐다. 그리고
마치 냄새를 맡듯이, 자신의 손을 입언저리 쪽으로 가져가
는 것이었다. 눈을 감았다.
손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 같군, 하고 가와시마 마사유키
는 생각했다. 그때까지도 그의 손은 사나다 치아키의 허벅
지 위에 놓여 있었다. 그가 자신의 손을 슬며시 끌어내렸
다.
바로 그 순간, 사나다 치아키가 눈을 떴다. 자신의 허벅지
를 힐끗 쳐다보고 나서, 그녀가 가와시마 마사유키의 얼굴
을 잔뜩 노려보았다. 또다시 그 증세가 시작되려는 것 같았
다.
그녀는 자각하고 있었다. 자신의 허벅지 위에 가와시마 마
사유키의 손이 놓여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한 순간, 온몸
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결국 이 남자도 똑같아… 소리
를 내지 않고 그녀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뭐가 똑같고, 누
구와 똑같다는 것인지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럴 만한
힘이 그녀한테는 없었다. 그게 없으면 살아갈 수가 없다.
그리고 그것이 발생하지 않으면 모든 힘이 사라져서 끝내는
죽고 만다. 그것은 눈으로도 확인할 수 있을 만큼 구체성을
띠고 있었다. 분노… 마침내 그것이 손끝과 발끝에서 심장
과 뇌로 치솟아 올랐다. 왜 이런 게 필요하지…? 금방이라
도 눈물이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다. 그녀는 가만히 손수건
을 집어 들어서, 눈물을 찍어 내곤 했다. 그런가 하면 지금
처럼 갑작스럽게 단절을 시킨 적도 있었다. 이렇게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면 반드시 심한 발작 증세가 뒤따랐다. 그리
고 그 같은 증세가 한풀 꺾인 다음에는 당장 죽고 싶을 정
도로 기분이 나빠졌다. 정말로 싫은데 그 같은 증상이 반드
시 발생한다. 하지만 그녀한테는 그걸 멈추게 할 만한 힘이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그녀한테 꼭 필요한 요소이기 때문
일 것이다. 어째서 이런 게 필요하지…? 눈앞에 있는 다른
사람이나 물건, 또는 자신을 몽땅 태워 버리고 싶었다. 그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진 분노였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어느 날, 젊은 체육 선생님과 함
께 체육관에 남은 적이 있었다. 두 사람 외에는 아무도 없
었다. 그녀는 그 선생님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스커트를
들춘 뒤, 팬티 속에다가 그의 손을 집어 넣으려고 했다. 남
자라면 누구나가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체육
선생님을 기쁘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체육 선생님은 그
녀의 손을 단호하게 뿌리쳤다. 그녀는 분노에 휩싸였다. 그
와 동시에 불에 덴 사람처럼 마구 울어대기 시작했다. 순
간, 체육 선생님은 크게 당황을 한 것 같았다. 미, 미안하
다… 단지 친하게 지내려고 그랬을 텐데… 이렇게 이야기하
면서 그가 악수를 청하려고 손을 내밀었다. 그때 그녀는 피
가 날 정도로 그의 손을 콱 깨물어 버렸다. 어째서 나한테
는 이런 게 필요하지? 이 남자는… 하고 생각하면서, 가와
시마 마사유키의 얼굴을 다시 한번 노려보았다. 나를 화나
게 했어. 뭘 하든지 간에, 무슨 말을 하든지 간에 나는 화
가 난다. 이 남자가 키스를 하려고 해도, 나한테서 떠나 가
려고 해도, 나의 거기를 핥으려고 해도, 나를 때리려고 해
도, 넙죽 엎드려서 나한테 사죄를 하려고 해도 나는 격렬하
게 화를 내기 시작할 것이다. 지금까지 다른 남자들한테 그
랬던 것처럼… 그러는 게 이젠 정말 싫어… 사나다 치아키
는 이렇게 생각했다.
사나다 치아키는 다시 한번 눈을 감았다. 그리고 팔짱을 낀
채, 가와시마 마사유키와 함께 걷던 장면을 생각해 냈다.
택시에 오른 뒤 휘황 찬란한 불빛에 휩싸여 있던 장면도 생
각해 냈다. 불빛은 초고층 빌딩숲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
다.
[유년의 기억] 할시온
그녀는 싸늘한 팔의 감촉을 되새김했다. 그때 가와시마 마
사유키의 팔은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
치자, 조금은 힘이 솟았다. 그래, 그런 느낌이었어… 눈을
감은 채 그녀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다시 한번 거리를
걷고 싶다, 이 남자와 팔짱을 끼고….
「수프를 만들어 드릴게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사나다 치아키가 말했다. 그리고
다리를 질질 끌면서 주방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가와시
마 마사유키의 시선을 느꼈다. 그의 시선이 자신의 등에 집
중되고 있었다. 실망했을 거야, 내가 아무것도 해주지 않아
서… 이제 그만 돌아가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할까 봐서, 두
려움에 떨고 있을 거야. 사나다 치아키는 수프 속에다가 할
시온을 집어 넣기로 마음먹었다.
「죄송해요. 카레 분말을 너무 많이 넣었나 봐요. 매워서
어떡하죠?」
미안해 하는 표정으로 사나다 치아키가 말했다. 아니에요,
아주 맛있어요… 냅킨으로 입을 닦으면서 가와시마 마사유
키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까 가방을 사러 하네다 공항에 갔
다가 그곳에서 샌드위치를 먹은 것 말고는 하루 종일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 그는 묽은 노란색 수프를 단번에 마셔
버렸다. 그런 다음에 롤 빵을 두 개나 더 먹었다. 몸 안에
서 따뜻한 기운이 올라왔다. 갑자기 긴장감이 풀리기 시작
했다.
사나다 치아키가 텅 빈 수프 접시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설거지를 하기 위해서, 그것들을 들고
주방 쪽으로 걸어갔다. 뜨거운 물을 틀고 접시를 씻었다.
그런 다음에 야자나무 그림이 새겨져 있는 향신료 병을 꺼
내서 내용물을 확인했다. 병에는 물빛을 띤 가루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분말로 만든 할시온이었다. 이것은 시부야 역
부근을 전전하는 판매업자한테서 구했다. 그 사람이 이런
식으로 감추어 두면 된다고 가르쳐 주었다. 귀이개로 세 번
쯤 떠 담으면 한 정 분량이 되었다. 그리고 작은 스푼으로
절반쯤 떠 담으면 세 정 분량이 되었다. 가와시마 마사유키
한테는 대략 두 정 정도의 분량을 수프에 타서 먹였다. 카
레 분말을 듬뿍 집어 넣은 것도 다 그 때문이었다. 그렇게
하면 할시온의 맛을 느끼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할시온은 꽤나 쓰기 때문에 걱정을 했던 게 사실이다. 하지
만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전혀 의심을 하지 않았다. 어지간
히도 배가 고픈 모양이었다. 그는 한마디의 말도 않고 눈
깜짝할 사이에 마셔 버렸다. 그의 코끝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버터를 바른 롤 빵도 두 개씩이나 먹었다. 옛
날 가즈키라는 남자한테는 세 정 분량의 할시온을 먹였다.
하지만 그건 가즈키가 할시온 상용자여서, 그 정도의 분량
을 먹이지 않으면 약효가 없을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할시온 상용자로 보이지가 않았다. 이
런 사람이 두 정을 먹을 경우, 30분 만에 효력이 나타난다.
그리고 1시간 뒤에는 마취총을 맞은 코끼리처럼 풀썩 쓰러
져서 잠이 들어 버린다. 솔직히 말해서 한 정이면 충분했
다. 하지만 정량을 복용한 상태에서는 욕정이 생길 수도 있
다. 눈이 흐리멍덩해진 상태에서, 마구 덤벼들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만은 피해야 한다. 또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기
억들이 떠오를 게 뻔하다고 생각했다. 일단 잠이 들어 버리
면 그땐 내 것이 된다. 설령 손가락을 자른다고 해도 이 남
자는 눈을 뜰 수가 없다.
사나다 치아키는 접시를 닦고 있었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
라보면서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심한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
다. 갑자기 태도를 바꾼 이유가 뭘까? 수프를 먹이고 난 다
음에, 다시금 유혹을 하려는 걸까? 그렇지 않다면 죽임을
당하는 게 갑자기 두려워져서…? 수프를 만들기 위해서 주
방으로 향하기 전까지, 저 여자는 몇 번씩이나 나를 노려보
았다. 왜 그랬을까? 이것저것 생각하는 게 귀찮아졌다. 아
카사카에 있는 호텔로 돌아가서, 침대 위에 벌렁 드러눕고
만 싶었다. 그리고 성감 마사지를 해준 삼십대 후반의 여자
를 부르고 싶었다. 그러면 모든 게 끝날 것처럼 생각되었
다.
벌써 새벽 1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계획에 따르면 후반 작
업을 모두 끝마치고, 호텔로 돌아와 있을 시간이었다. 계획
대로 되었다면 기분이 어떨까? 갑자기 노트를 펼쳐 보고 싶
었다. 노트는 가방안에서도 가장 밑바닥에 놓여 있었다. 가
와시마 마사유키는 싱크대 앞에 서 있는 사나다 치아키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녀는 냄비와 접시를 열심히 닦고 있었
다. 세제를 사용하지 않고 뜨거운 물만으로 음식 찌꺼기와
기름기를 닦아내고 있는 것 같았다. 이따금씩 그녀는 등불
아래서 그릇을 들여다보곤 했다. 그리고 음식 찌꺼기 따위
가 눈에 띄면 처음부터 다시 씻기 시작했다. 손잡이가 달린
냄비도 똑같은 방식으로 씻었다.
방안을 빙 둘러보았지만, 휴지 조각 하나 떨어져 있지 않았
다. 읽다 만 잡지와 신문, 먹다 만 과자 봉지와 초콜릿 상
자, 둥근 티슈 페이퍼와 과일 껍질 따위도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벽장 옆에 놓여 있는 화장대도 깨끗했다. 마치 게
임을 시작하기 직전의 체스판처럼, 화장품들이 가지런하게
늘어 세워져 있었다. 크기와 높이에 맞추어서 여러 가지 모
양의 병들을 정확하게 구분해 놓았던 것이다. 테이블을 사
이에 두고, L자형 소파와 오디오가 똑같은 거리에서 마주보
고 있다. 테이블이 놓여 있는 곳까지 거리를 잴 경우, 틀림
없이 1센티미터도 차이가 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오디오
도, 책장에도 관계없는 것들은 절대로 놓아 두질 않았다.
예를 들어서 편지와 엽서, 약 상자와 약병, 지갑, 메모지와
명함, 클립과 동전 따위도 줄줄이 늘어 세워져 있는 책 위
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 놓질 않았다. 싱크대 옆에는 플라
스틱 용기가 놓여 있는데, 그녀는 그 속에다가 자질구레한
도구들을 가지런히 담아 두고 있었다. 식탁도 손이나 얼굴
이 비칠 정도로 깨끗하게 닦여 있었다.
가구 전시장에 온 것 같군, 하고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생각
했다. 활기가 전혀 없었다. 오직 침대의 일부만이 예외적이
라고 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이 앉았던 자리에 희미한 흔적
이 남아 있었다. 이불이 살짝 걷히고 시트에 주름이 잡혀
있었던 것이다. 광택이 나면서도 부드러운 곡선의 줄무늬
음영이 들어가 있는 이불이었다.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사나
다 치아키와 바싹 달라붙어 있을 때의 느낌을 머릿속에 떠
올렸다. 숨가쁘고 불안정한 느낌이었다. 실크를 이용한 줄
무늬 음영은 미지 세계의 완만한 구릉처럼 보였다. 어찌 보
면 매끄러운 여자의 등과 가슴에 남아 있는 폭력의 흔적 같
기도 했다.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이만큼 방을 깨끗하게 유
지하기도 힘들 텐데, 하고 생각했다. 먼지 하나 발견할 수
없을 정도로 깨끗한 방이었다. 몇 시간째 청소를 계속하고
있는 사나다 치아키… 이런 모습을 상상하고 있을 때, 방이
한 번 크게 흔들렸다. 그는 무심결에 식탁의 가장자리를 붙
잡았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런 변화도 느낄 수가 없
었다. 사나다 치아키는 그때까지도 주방에 있었다. 행주로
그릇을 닦고 있는 것 같았다. 지진이라도 일어났나…? 불안
한 마음으로 눈을 비볐다. 머리를 가볍게 흔들어 보기도 했
다. 그러고 나서 한동안 상황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느낄 수가 없었다. 피곤해서 그런가 보다고 생각했
다.
조금 지나자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래서 다시금 노
트 문제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침대에 누워서 노트를 검토
해 보고 싶었다. 여러 가지 일을 경험해서 그런가? 무슨 내
용이 쓰여 있는지, 제대로 기억이 나질 않았다. 상당 부분
을 까먹어 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작은 글씨로 7쪽 가량
을 기록해 둔 것 같았다. 그런데 첫 대목이 무슨 내용이었
는지도 제대로 떠오르지가 않았다. 어떤 직종에 속해 있는
여자를 고를까… 이런 내용이 쓰여 있었던 것 같다. 호텔은
어느 곳으로 정하지? 이런 글귀가 쓰여 있었던 것만은 분명
하다. 생각나는 대로 써내려갔기 때문에 완벽하게 정리를
해낼 수가 없었다. 모든 글씨들이 거칠게 보였다. 이 여자
가 먼저 잠들어 준다면, 여기에서 노트를 검토해 볼 수가
있는데…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이렇게 생각했다.
모든 정리를 끝마친 듯, 사나다 치아키가 뒤돌아 서 있었
다. 팔짱을 낀 채 가와시마 마사유키가 앉아 있는 쪽을 바
라본다. 그러고는 이내 시계를 쳐다본다. 그래서 가와시마
마사유키도 손목시계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수프를 먹고,
주방안으로 들어간 게 정확히 25분 전의 일이었다. 묵묵히
싱크대 앞에 서 있는 사나다 치아키의 모습을 보면서 가와
시마 마사유키는 생각했다. 저 여자는 노트의 어느 부분을
읽고, 나의 계획을 이해했을까…? 방을 비운 시간이 기껏해
야 2,`3분밖에 안 되었을 텐데… 그렇게 짧은 시간 동안에
마구 휘갈겨 쓴 글씨를 얼마나 많이 읽을 수 있을까? 무턱
대고 노트를 펼쳤다면, 거기에 쓰여 있는 내용들을 전혀 이
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저 여자는 정상적인 정신 상
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저 여자는 모
든 걸 이해하고 있다. 노트를 읽지 않고서는 그걸 알 수가
없는데… 내가 다른 호텔에 묵고 있다는 것, 그리고 SM 플
레이를 하기 위해서 자기를 부른 게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
다. 그 다음은…? 그 다음은 어땠지?
[유년의 기억] 환상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또다시 방이 흔들렸다. 식탁의 한쪽
모서리를 붙잡았다. 사나다 치아키가 팔짱을 낀 채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는 것 같았다. 흔
들림이 여러 차례 계속되었다. 방의 중력이 몇 배나 증가돼
서, 뭔가를 붙잡고 있지 않으면 방바닥 위로 나뒹굴고 말
것만 같았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지?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두려움을 느꼈다. 시커멓고 거대한 뭔가가 자신을 삼켜 버
리고 있는 것 같았다. 무겁고 커다란 셔터가 눈앞에서 닫히
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갇히고 만
다…
언제 나타났는지, 닫혀 가고 있는 셔터 맞은편 쪽에서 어머
니가 웃고 있었다. 사나다 치아키인 것 같기도 했다. 또는
열아홉 살 연상의 그 여자 같기도 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
지! 어때, 내 말이 맞지? 이처럼 창문도 없는, 좁은 곳에
갇히고 말 거라고 했지! 누군가가 그의 귀에 대고 호통을
쳤다. 그만둬! 하고 소리치면서 벌떡 일어서려고 했다. 하
지만 마치 마법에 걸린 것처럼 몸이 움직여 주질 않았다.
몸이 돌처럼 무거웠다.
하루 종일 벽에 귀를 대고 앉아 있는 남자가 되어 버렸어,
나는… 그렇게 된 자신이 말했다. 항상 귀를 앞쪽으로 내밀
고 있어서, 고개가 꺾이고 만 남자였다. 어른이 되면, 너도
그렇게 되고 말 거야. 미쳐 버리고 말 거라구! 어머니의 목
소리였다. 귓가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웅웅거렸다. 그와
동시에 셔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닫혀 버릴
것만 같았다. 누군가가 웃고 있었다. 아니, 한 사람이 아니
라 모든 사람들이 그랬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웃고 있었다. 마치 세상이 떠나갈 것처럼 환호성까지 지르
고 있었다. 사람들로 뒤덮인 스타디움… 그 지하에 창문도
없는 좁은 방이 만들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 갇혀
있었다. 저길 봐, 철제 셔터가 닫히고 있어… 이렇게 생각
하면서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묘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무의
식이 눈에 보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무의식이 파문을 일으
켰다. 그런 다음 발밑에서 천천히 솟아 올라왔다. 그와 같
은 광경이 실제로 보이는 듯했다. 그건 새까맣고 무거운 액
체의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여기저
기에 폐품들이 둥둥 떠 있는, 구토물의 늪이었다. 늪은 온
갖 공포감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뭔지 모를 폐품들이 갈
가리 찢어져 있기도 했고, 녹이 슨 채 뒤틀려 있기도 했다.
타서 녹거나 눌려서 찌부러뜨려져 있기도 했다. 그런가 하
면 깨져서 산화되거나 썩어서 발효된 것들도 있었다. 그 속
에는 미생물들이 득실득실했다. 미생물들의 소굴인 셈이었
다. 그것들이 둥둥 떠 다니고 있었다. 공포감은 무시무시해
보이는 벌레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이미 턱밑까지 늪에 파묻혀 버린 상태
였다. 벌레들이 그의 얼굴 위로 기어오르고 있었다. 그의
머리카락에 다리와 촉수를 휘감았다. 벌레들의 다리에는 가
느다란 가시가 달려 있었다. 벌레들이 발을 마구 움직여서,
가와시마 마사유키의 머리카락을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그
리고 뾰족한 촉수로 그의 머리를 사정없이 찔러댔다. 벌레
들을 떼어내기 위해서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머리카락을 마
구 쥐어뜯었다. 그와 동시에 그의 손이 테이블 모서리에서
떨어져 나갔다. 쿵, 하고 그가 마룻바닥 위로 나동그라졌
다. 늪에 온몸이 잠겨 버린 순간이었다. 요, 요코… 그는
아내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불렀다.
처음에는 사나다 치아키도 그가 뭐라고 하는지 몰랐다. 효
과가 뛰어나군, 틀림없어. 저 남자는 할시온을 처음 먹어
봤어…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무너져 내리는 몸을 지탱
하기 위해서,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녀는 엷은 미소를 머금은 채, 그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
다.
마침내 그가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면서,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표정이 매우 고통스러워 보였다. 그때만은 약간의
동정심이 일었다. 그래, 나도 그랬어. 맨 처음 할시온을 먹
었을 때는 기분이 몹시 불쾌했었지… 그때 그녀는 불안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졸음이 갑작스럽게, 그것도 한꺼
번에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아쓰시였나? 아니면 가즈키…?
그건 잘 모르겠지만, 그들 가운데 누군가가 옆에서 손을 붙
잡아 주었어. 그래서 쉽게 잠자리에 들 수가 있었지. 이렇
게 생각하다 말고, 그녀는 깜짝 놀랐다. 처음에는 치아키,
하고 부르는 줄 알았다. 하지만 자세히 들어 보니까, 다른
여자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게 아닌가. 요코라는 이름이 귀
에 들어왔다. 순간,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흥, 하고 그녀가 코웃음을 쳤다. 격한 감정을 억누르기 위
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소용이 없었다. 몸이 부들부
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분노가 온몸을 휘감아 버
렸다.
그녀의 손은 이미 싱크대 서랍 속에 들어가 있었다. 그런데
힘을 너무 많이 준 탓인지, 서랍 속에 넣어 둔 것들이 우당
탕탕 소리를 내면서 마룻바닥 위로 쏟아져 버렸다. 뒤이어
서랍마저도 마룻바닥 위로 떨어졌다. 순식간에 주방이 난장
판으로 변해 버렸다. 회전식 핸들이 달린 대형 깡통따개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단단히
움켜쥐었다. 가와시마 마사유키가 나동그라진 의자를 붙잡
고 일어서려고 했다. 그녀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
고 가와시마 마사유키가 있는 곳으로 다가선 다음에야 그녀
는 알게 되었다. 왜 자기 자신한테는 제어하기 어려울 정도
로 격렬한 분노가 필요한 것인지를… 그와 같은 분노는 바
로 모욕감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다. 모욕감은 적의를 상
징한다. 그리고 그것은 주변의 적의에 맞설 수 있게끔 용기
를 가져다 준다. 그래서 격렬한 분노가 필요한 것이다. 격
렬한 분노만이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힘을 가져다준다.
요, 요코, 도와 줘… 요, 요코… 눈꺼풀이 거의 닫힌 상태
에서 가와시마 마사유키가 신음소리를 토해 냈다. 그때였
다. 그의 눈을 향해서 사나다 치아키가 깡통따개를 힘껏 휘
둘렀다. 내 이름은 요코가 아니란 말야! 퍽, 하고 스테인리
스가 눈꼬리를 때렸다. 뼈에 부딪친 듯, 둔탁한 소리가 났
다. 얼어붙은 땅 속에 삽을 찔러 넣을 때 나는 소리 같았
다.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
고는 곧바로 달아나려고 했다. 사나다 치아키가 그런 그를
뒤쫓아가서 어깨와 입, 귀 따위를 마구 때렸다. 그녀의 눈
에서는 눈물이 펑펑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최초의 일격을 당한 순간,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통증과 함
께 무의식의 늪에서 기어나올 수가 있었다. 강한 충격과 그
직후에 발생한 심한 통증으로 인해서, 마비되어 있던 감각
들이 일시에 회복되었다. 닫히기 직전의 철제 셔터가 갑자
기 양쪽으로 갈라지면서 눈부신 빛을 통과시키고 있는 듯했
다. 하지만 강한 빛이 매우 위험하다는 사실을 그는 직감적
으로 깨닫고 있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두 팔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얼굴과 머리를 감쌌다. 길고 얕은 잠에서 지금 막
깨어난 기분이었다. 분명히 히터가 가동중이었는데, 유리창
이 모두 깨져서 차가운 바람이 밀려들고 있는 것처럼 느껴
졌다. 바로 그때였다. 그 목소리가 확실하게 들려 왔다. 빌
지 마! 아무리 아파도 빌어서는 안 돼, 절대로! 빌면 오히
려 공격이 심해진단 말야! 24시간 편의점 안에 들어갔을
때, 일회용 기저귀를 진열해 놓은 곳에서 들려 왔던 목소리
가 틀림없었다. 사나다 치아키의 허벅지에 감겨 있는 새 붕
대를 쳐다볼 때도 그 목소리가 들려 왔다. 정말로 오랜만에
들어 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 생각났어. 어려서부터
줄곧 나를 지켜 준 목소리야, 이건… 빌지 마, 이제 곧 공
격이 멈출 테니까. 공격이 멈추었는지를 확인하려면 상대의
얼굴을 쳐다봐. 상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라구.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만 있다면 너는 절대로 지지 않아.
사나다 치아키는 눈에서 눈물이 펑펑 쏟아지고 있음을 깨달
았다. 그 순간, 갑자기 어깨와 팔에서 피로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숨소리가 거칠어지면서 호흡을 하는 게 고통스러워
지기 시작했다. 볼과 턱을 거쳐서, 융단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카펫의 기다란 털끝에 눈물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그걸 보자마자, 눈 깜짝할 사이에 힘이 빠져
버렸다. 분노를 모두 써버렸어…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온
몸에서 힘이 빠져 나갔다. 깡통따개가 카펫 위로 떨어졌다.
그녀는 문득 깨달았다. 손가락 사이로, 가와시마 마사유키
가 울고 있는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손가락
은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런 눈길은 처음이었다. 이
남자가 화를 버럭 내면서, 이 방에서 나가 버리면 어떡하
지? 싹싹 빌면서 사죄를 할까? 이렇게 생각했지만, 그녀한
테는 이미 그럴 만한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는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었다. 턱과 어깨가 몇 차례 들썩거렸다. 봐, 하고 그 목
소리가 가와시마 마사유키한테 말했다. 저 여자는 지금 울
고 있어. 겁을 내고 있는 거야. 자, 보라구. 울고 있잖아?
저 여자의 손에는 깡통따개도 들려 있지 않아. 그러니까 얼
굴과 머리를 그렇게 가리고 있지 않아도 돼. 손을 내리라
구.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두 손을 천천히 내렸다. 스웨트
셔츠의 소매에 피가 묻어 있었다. 게다가 왼쪽 눈은 전혀
보이지가 않았다. 눈꼬리 위에 난 상처에서 피가 흘러 내리
고 있었기 때문이다. 왼손의 손등도 찢어져서 피가 배어 있
었다. 하지만 통증은 거의 느낄 수가 없었다. 정말로 이상
한 일이었다.
[유년의 기억] 목소리
이 통증은 나의 것이 아냐… 이런 암시를 걸었던 것도
아닌데, 어째서 통증이 사라져 버리고 없는 걸까? 그
래, 바로 그거야. 나의 몸 속에서 발생하는 목소리의
힘 때문이야… 나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던 그 목소
리… 그 목소리는 나에게 정말로 많은 것을 가르쳐 주
었어. 그런데 요코를 만나고 나서부터 그 목소리가 침
묵을 지키기 시작했어. 어렸을 때부터 줄곧 나를 도와
주었던 목소리… 그래서 나는 그 목소리만을 믿게 되
었지.
가와시마 마사유키의 모습을 보고, 사나다 치아키는
왠지 모르게 흉칙하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그가 머리
와 얼굴에서 두 손을 내리기 시작했다. 언젠가 디즈니
만화에서 보았던 나무늘보를 연상케 했다. 나무 위에
서 땅바닥으로 추락한 나무늘보가 틀림없었다. 나무늘
보는 항상 나무에 매달려서 생활하기 때문에 지상에서
는 자신의 체중을 지탱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땅 위에
내려와 있다는 것 자체가 위험일 수밖에 없었다.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나무늘보는 나무 위로 되돌아가려
고 한다. 그런데 느릿느릿한 나무늘보의 움직임을 들
여다보고 있노라면 징그러운 생각이 든다. 그것은 땅
위에 찰싹 달라붙어서 유령처럼 흐물흐물댄다. 손발을
마구 움직여대면서 아주 조금씩 나아간다. 가와시마
마사유키의 동작은 나무늘보의 동작과 똑같았다. 몹시
비굴하고 퇴화한 느낌을 주는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사나다 치아키는 웃을 수가 없었다. 가와시마 마사유
키의 왼쪽 얼굴이 피로 범벅이 되어 있어서 그런 것만
은 아니었다. 마치 그는 반반씩 갈라져 있는 연지색의
가면을 뒤집어쓴 사람처럼 보였다.
그가 사나다 치아키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물론 오른쪽 눈으로만 보는 것이었다. 그런 눈은 처음
이었다. 그런 눈의 소유자를 처음 보았기 때문에 사나
다 치아키는 웃을 수가 없었다. 방심한 상태에서도 그
의 눈은 슬픔과 증오로 뒤범벅되어 있었다. 그러면서
도 구원을 거부하고 있었다.
가와시마 마사유키가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했다. 그리
고 알아듣기 어려운 목소리로 사나다 치아키에게 뭐라
고 말을 했다.
「너, 그거 봤지? 욕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아이스 픽
말야. 틀림없이 있었을 텐데? 그거 봤어, 못 봤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눈빛이 아주
무서웠다. 사나다 치아키는 일단 고개를 가로 저었다.
「지금 당장 필요하단 말야. 분명히 욕실 바닥에 떨어
뜨렸다구, 아이스 픽을….」
사나다 치아키는 몇 번이고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상
한데…? 가와시마 마사유키가 중얼거렸다. 단백질 타
는 냄새가 났다. 그 냄새가 콧속뿐만이 아니라 온몸에
서 소용돌이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신경이 교차하는
곳에서 마침내 스파크가 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
이 연달아 터지면서 여기저기에서 불꽃이 일었다. 관
자놀이 안쪽에서도 열기가 일고 있었는데, 그것은 이
미 포화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럼에도 가와시마 마사
유키는 그 같은 사실들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
다. 단백질 타는 냄새와 불꽃의 열기가 한데 뒤엉켜
있었기 때문이다. 그 목소리도 더 이상은 들려 오지
않았다.
정말로 오랜만에 도움을 받았어. 하지만 지금부터는
나 혼자서도 할 수 있어…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이렇
게 생각했다.
그는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어렸을 때의 자기 자신이었던 것이다. 그래, 그건 다
른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라, 나 자신의 목소리야. 내
가 만들어 낸 거라구. 어린아이의 목소리는 어설픈 느
낌을 준다. 그래서 성인 남자의 목소리를 사용하기로
했다. 뉴스 기사를 읽고 있는 남자나 일기 예보를 전
달하고 있는 남자의 목소리다. 지금 나는 스스로 지껄
이고 스스로 행동한다. 눈앞에 있는 여자는 겁을 내고
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나를 무서워하고 있는 것이
다. 이런 기분을 맛본 게 이번이 두 번째다. 하지만
지금이 더 강렬하다. 첫번째는 어머니를 때렸을 때다.
오랜만에 만난 어머니가 아주 작게 보였다. 마치 몸이
오그라든 사람 같았다. 물에 담그면 크게 부풀어오르
고, 말리면 금세 오그라들고 마는 괴수 인형… 마치
그것처럼 바짝 말라서 오그라든 모습이었다. 나는 그
런 어머니를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어. 그런데… 엄
마를 용서해 줄 수 있겠니? 겁먹은 표정으로 어머니가
물었다. 겁먹은 모습을 보자, 갑자기 참을 수가 없었
다. 그래서 사정없이 두들겨 패주었다.
겁먹은 표정으로 구원을 요청한 게 잘못이었다. 그리
고 애초에 구원을 요청하는 게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런 건 세상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눈앞에 있는 이 여자도 기가 죽어서 나에게 구원을 요
청하고 있다. 이 여자한테 가르쳐 주어야 한다. 아무
리 울어도 누구 한 사람 도와 주지 않는다는 것을…
이 여자는 아이스 픽을 모른다고 했다. 아이스 픽이
욕실 바닥에 나뒹굴고 있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럼, 그
때 경찰이 찾아와서 증거물로 가져갔단 말인가? 그렇
다면… 어딘가에서 경찰이 이 방을 살피고 있다는 얘
긴데…? 그래, 걱정할 거 없어. 보이지 않는 곳을 선
택하면 그만이니까. 그래도 아이스 픽은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이 여자한테 올바로 가르쳐 줄 수가 있다. 서
둘러야 한다. 몸이 자꾸만 무거워지고 있었다. 반면에
상처가 난 곳의 통증은 이미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죽음만이 이 여자한테 중요한 것을 가르쳐 줄 수 있
어. 이 여자, 도망치려고 할까? 그럴지도 몰라. 그래,
절대로 도망치지 못한다는 것부터 가르쳐 줘야겠어.
그건 아주 간단하니까.
「이리 와.」
가와시마 마사유키가 말했다. 다시 한번 고개를 가로
젓고 나서, 사나다 치아키가 반 발짝 뒤로 물러섰다.
쓰러질 듯한 자세로, 가와시마 마사유키가 천천히 다
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오른쪽 팔목을 꽉 붙잡았다.
엄청난 힘이었다. 비명을 지르려고 했지만, 목구멍이
칼칼해서 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피유, 하고 쉰 소리만이 나올 뿐이었다. 가와시마 마
사유키가 거친 숨을 토해 냈다. 카레 냄새가 났다. 피
범벅이 된 그의 얼굴에서는 땀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그는 땀을 닦아 내면서 사나다 치아키를 주방 쪽으로
끌고 갔다. 조리대 위에는 커피 메이커가 놓여 있었
다. 그가 거친 동작으로 검정색 코드를 뽑아 냈다. 그
리고 그걸로 사나다 치아키의 두 손을 묶기 시작했다.
사나다 치아키는 도망치려고 했다. 하지만 몸이 움직
여 주질 않았다. 그가 두 손을 꽉 붙잡고 있었기 때문
이다. 발버둥을 쳐보았지만,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마구 발버둥을 치자, 허벅지에
난 상처가 다시금 아파 오기 시작했다. 엇갈린 손목
위로 가와시마 마사유키가 검정색 코드를 힘껏 감았
다. 여러 차례 감은 다음에, 그 사이로 코드를 빼내서
단단하게 묶었다. 코드로 조인 손목 부분이 하얗게 핏
기를 잃어 가고 있었다.
「아프지 않다고 생각해. 그럼, 통증이 사라질 테니
까.」
행주를 단단히 움켜쥔 뒤, 그것을 사나다 치아키의 입
속에 쑤셔 넣으면서 가와시마 마사유키가 말했다. 혀
가 마구 뒤엉키기 시작했다.
「요령을 알아야 해. 아주 조금이라도, 아플지도 모른
다거나 통증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실패로 끝
나고 말지. 자, 나를 똑똑히 봐.」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가와시마 마사유키가 사나다 치
아키의 손목을 강하게 끌어당겼다. 바로 눈앞에 가와
시마 마사유키의 얼굴이 있었다. 그때까지도 눈초리의
상처는 아물지 않은 채, 계속해서 피가 흐르고 있었
다. 할시온을 먹고 마비가 돼서 아무런 감각도 느끼지
못하는가 봐… 사나다 치아키는 이렇게 생각했다. 쉴
새없이 피가 흐르고 있는데도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왼
쪽 눈을 감으려고 하지 않았다. 피범벅이 된 상태에서
도 안구가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
무것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뭔가를 보기 위해서 안구
가 마구 움직이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마치 SF 영
화에 나오는, 부서진 인조 인간처럼 보였다. 손목이
아팠다. 그리고 입에는 행주가 물려 있어서, 숨쉬기가
곤란했다. 사나다 치아키는 가와시마 마사유키의 눈에
서 눈을 떼지 않았다.
우선은 이 여자한테 도망칠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
줘야 해. 가와시마 마사유키가 혼자말처럼 중얼거렸
다. 자꾸만 혀가 뒤엉켰다. 그때마다 입 속에 손가락
을 집어 넣고, 손톱으로 잇몸을 자극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면서도 두 번씩이나 혀를 깨물었다.
「난 거짓말 따윈 하지 않아. 자, 내 얼굴을 봐. 하지
만 초점은 내 얼굴보다도 멀리 맞춰야 해. 입체 그림
책과 같은 거지. 그게 바로 요령이야. 우리 어머니는
나한테 암모니아 원액을 뿌린 적도 있어. 문신을 새긴
다고 하면서 날카롭게 깎은 4H나 5H 연필로 손발을 마
구 찌른 적도 있구. 우유병으로 머리를 때린 적도 있
지. 그뿐인 줄 알아? 귀와 손가락을 실로 꽉 묶기도
했어. 하지만 난 아무렇지도 않았어.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담배나 바늘을 들이댄다고 해도 눈썹 하나 까
딱 않지. 이젠 알겠지, 요령이 뭔지?」
[유년의 기억] 위태로운 순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사나다 치아키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단지 암모니아 원액이라는 말과 문신,
우유병, 바늘이라는 낱말만이 귀에 들어올 따름이었
다. 그가 다시 알겠어? 하고 물었다. 뱅글뱅글 돌고
있는 그의 안구를 본 순간,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고
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고개를 끄덕거림에 따라서 입
에 물려 있던 하얀 행주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지금부터 너의 아킬레스… 아킬레스건을 자를 테니
까, 조금 전에 내가 얘기했던 대로 해.」
무슨 소린지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사나다 치아키는
순간적으로 멍한 상태에 빠져서 무턱대고 고개를 끄덕
거렸다. 가와시마 마사유키가 마룻바닥에 쭈그리고 앉
아서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조리용 가위와 포크, 수
저, 젓가락 따위를 차례차례 줍기 시작했다. 그걸 보
는 순간, 아킬레스건을 자르겠다던 문장이 퍼뜩 되살
아났다. 그와 동시에 그녀가 우물우물대면서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남은 힘을 몽땅 쏟아부으면서 도망치
려고 했다. 코드를 붙잡고 있던 가와시마 마사유키의
손이 좌우로 움직였다. 바로 그 순간, 커피 메이커가
우당탕탕 하고 마룻바닥 위로 나동그라졌다. 그 충격
으로 사나다 치아키는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내 나
이프가 어디로 갔지…?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가와시마
마사유키가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그의 시선이 소
파 옆에 있는 가방 쪽에 머물렀다.
「기다려, 나이프…를 가져올 테니까.」
느릿느릿한 말투로 가와시마 마사유키가 말했다. 그러
고는 비틀비틀대면서 소파가 놓여 있는 곳으로 발걸음
을 옮겼다. 암갈색 액체로 뒤범벅이 되어 있는 커피
메이커에서 코드를 뽑으려고, 사나다 치아키가 몸부림
을 쳤다. 코드에 손목이 단단히 묶여 있었기 때문에,
도망을 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
각했다. 코드에 묶여 있는 손목이 보라색으로 바뀌면
서 잔뜩 부어 올랐다. 가방 속에서 뭔가를 꺼내 가지
고 다시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가와시마 마사유키
의 모습이 스테인리스 커피 메이커에 비쳤다. 사나다
치아키가 힘을 주고 잡아당기면 잡아당길수록, 코드가
손목을 점점 더 강하게 죄어 왔다. 그녀는 고통을 참
으면서, 끊임없이 커피 메이커를 잡아당겼다. 어떻게
해서든지 현관문 앞까지 가야 해… 숨소리가 거칠어지
기 시작했다. 행주에 입이 틀어막혀 있어서, 콜록콜록
하고 기침이 나왔다. 가슴이 답답했다. 몇 차례 시도
를 해보았다. 하지만 행주가 입 안 가득히 들어 있어
서 쉽게 뱉어지지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지 현관문
앞까지 가야 해. 그런 다음에 발로 문을 마구 차서,
누군가를 부르는 수밖에 없어. 호텔 욕실에서 나한테
손가락을 깨물리면서도 이 남자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여 주었지… 틀림없어, 그때와 똑같은 표정으로
나의 아킬레스건을 자를 거야, 이 남자는… 얼어붙는
듯한 추위 속에서도 나를 기다려 주었던 남자… 그래,
그 당시와 완전히 똑같은 표정으로 나를 죽일 거야.
이런 남자는 지금까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어. 아버
지는 물론이고, 다른 어떤 남자들과도 달라. 한다면
하는 남자야. 할시온은 정신을 혼란스럽게 할 수는 있
어도 인격까지 바꾸어 놓지는 못해. 이런 남자는 정말
로 처음이야.
사나다 치아키는 손목과 허벅지의 고통을 참아 내면서
커피 메이커를 1센티미터씩 잡아당겼다. 문득 뒤를 돌
아보았다. 가와시마 마사유키가 비틀비틀대면서 걸어
오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접착 테이프로 둘둘 말린
꾸러미가 들려 있었다.
현관문까지는 아직도 2미터 정도가 더 남아 있었다.
이젠 틀렸어… 사나다 치아키는 체념을 하고 말았다.
그 순간, 온몸에서 힘이 빠져 나가며 카펫 위로 쓰러
지고 말았다. 가와시마 마사유키의 손이 그녀의 왼쪽
발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강하게 잡아당겼다. 뿌지직
하는 무슨 소리가 들려 왔다. 그가 옆으로 나동그라져
있는 커피 메이커 위에 걸터앉았던 것이다. 고개를 쳐
들고, 사나다 치아키는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가와시
마 마사유키가 그녀의 왼쪽 다리를 무릎 사이에 단단
히 끼고 있었다. 피범벅이 된 왼쪽 눈을 소매로 닦고
나서, 종이에 둘둘 말려 있는 테이프를 벗겨 낸다…
사나다 치아키는 가쁜숨을 몰아쉬었다. 더 이상은 고
개를 들고 있을 수도 없었다. 입을 틀어막고 있던 행
주도 흠뻑 젖은 상태였다. 입술 끝에서 침이 흘러 나
왔다.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테이프를 벗기고 있는 소
리가 들려 왔다. 그녀는 조금 전에 가와시마 마사유키
가 말한 것들을 생각해 내려고 했다. 아프지 않다고
생각하면 돼. 요령을 가르쳐 줄 테니까, 잘 들으라구.
먼저 뭔가를 봐. 그리고 눈의 초점을 그보다 좀더 안
쪽으로 맞추는 거야. 여기에서 자기 암시를 해야 돼.
절대로 아프지 않다고 믿어 버리는 거지. 단 한번이라
도 아프다는 생각을 하면 실패로 끝나고 마니까, 정신
바짝 차려야 해… 분명히 그는 그렇게 말했다. 그가
말한 대로, 사나다 치아키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하
지만 천장은 흰색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래서 그 안쪽
에다가 초점을 맞출 수가 없었다.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는 동안, 전혀 다른 생각들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
다. 그래, 일단 시도라도 해보자… 사나다 치아키는
아프지 않다면서, 자기 암시에 들어갔다.
여자들의 발 모양은 원래 이런가? 발 안쪽이 이상하게
생겼잖아? 이렇게 생각하면서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마
분지 바깥쪽에 둘둘 말려 있는 테이프를 천천히 벗겨
냈다. 미적지근한 바람이 온몸을 휘감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따금 의식이 멀어지기도 했다. 이제 다됐
어. 그가 중얼거렸다. 이제 곧 그 소리를 들을 수 있
어. 아킬레스건이 잘려 나가는 소리를 말야. 그건 그
렇다 치고 이 여자는 도대체 누구지…? 카펫 위에 드
러누운 채 꼼짝달싹 않고 있는 사나다 치아키를 바라
보면서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스커트가 허벅지 위쪽
으로 둘둘 말려서, 자줏빛의 팬티가 드러나 있었다.
그녀의 하얀 배가 가만히 들썩거리고 있었다. 희미하
게 솜털이 난 하얗고 작은 배…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테이프를 모두 벗겨 냈다. 칼날
을 감추기 위해서 둘둘 말았던 포장용 마분지 조각이
떨어져 나갔다. 날카롭고 뾰족한 칼날이 번쩍거리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다시금 그는 사나다 치아키의 하얀
배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계속해서 그녀의 배는
가만히 들썩거리고 있었다.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문득 깨달았다. 왼손에 단단히
움켜쥐고 있는 게 나이프가 아니라 아이스 픽이었던
것이다. 그 같은 사실을 깨달은 순간, 아기용 침대 속
에 드러누워 있던 갓난아기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기
도 모르게 그는 나지막이 신음소리를 토해 냈다. 그
소리를 듣고 사나다 치아키가 고개를 쳐들었다. 그의
손에 아이스 픽이 들려 있는 걸 보고는 눈이 휘둥그래
졌다. 그녀는 소리를 지르려고 했다. 하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고 목덜미의 핏줄만이 크게 부풀어올랐다.
그녀는 고개를 마구 흔들어댔다. 입에 물려 있는 하얀
헝겊이 힘없이 흔들거렸다. 침이 턱을 타고 목덜미 쪽
으로 흘러 내렸다.
가와시마 마사유키가 아이스 픽과 사나다 치아키의 배
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또다시 배를 찔러야 하나…?
그가 양쪽 무릎으로 단단히 죄고 있던 사나다 치아키
의 발목을 풀어 주었다. 그리고 커피 메이커에서 엉덩
이를 뗐다. 무릎을 꿇고, 그가 카펫 위를 기었다. 그
러다가 갑자기 사나다 치아키의 몸 위에서 동작을 멈
추었다. 마치 그녀의 몸 위로 올라타려는 것처럼 보였
다. 위아래로 움직이고 있는 사나다 치아키의 하얀 배
를 내려다보면서, 가와시마 마사유키가 배꼽 바로 아
래쪽으로 아이스 픽을 가져갔다. 사나다 치아키가 호
흡을 멈추었다. 그에 따라서 위아래로 들썩이던 배도
동작을 멈추었다. 솜털 위에다가 그림을 그리듯이 가
와시마 마사유키가 아이스 픽의 끝부분을 가만히 댔
다. 그런 후 아이스 픽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을 불어넣
었다.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의식이 희미해지면서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묘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그림자와 같은
것이 자신의 몸 속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암모니아 원
액 냄새… 돌아오지 마! 너 같은 놈은 필요없으니까!
하고 소리치는 새된 목소리… 나사식 잠금 장치가 잠
기는 소리… 젖빛 유리 너머로 윤곽만이 남은 실루
엣… 어, 어머니가 내 몸 속으로 들어왔어. 어머니와
자신이 서로의 몸을 껴안은 채 뒤섞여 있는 듯한, 그
리고 어머니한테 몸을 빼앗겨 버린 듯한 감각… 그건
정말로 구역질나는 일체감이었다. 난 당신이 싫어! 이
렇게 소리치려는 순간,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의식을
잃고 말았다.
[유년의 기억] 피어싱(PIERCING)
사나다 치아키는 마룻바닥 위에 떨어져 있던 조리용
가위로 코드를 잘라 냈다. 그러고 나서 입에 물려 있
던 행주를 끄집어냈다. 그녀는 넋 나간 표정으로, 가
와시마 마사유키의 얼굴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처음부터 그녀는 경찰을 부르겠다는 생각 따윈 갖고
있지 않았다. 경찰을 부를 경우, 자신도 아주 오랫동
안 유치장에 들어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가
방을 열었다. 테이프로 둘둘 만 커다란 나이프와 노트
가 나왔다. 그녀는 너무나도 지쳐 있었다. 목과 가슴,
손목, 허벅지 등이 한꺼번에 아파 왔다. 그 와중에서
도 그녀는 노트를 읽기로 했다. 노트를 모두 읽고 난
다음에도 그것이 실제 범죄 계획인지, 그렇지 않으면
변태 성욕자의 상상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단 한가지
사실만은 분명했다. 현관 옆 카펫 위에 쓰러져서 잠을
자고 있는 남자는 자신을 사모한 나머지 구출해 주려
고 달려온 왕자님이 아니었다. 정말로 나를 죽일 생각
이었어. 살인을 꿈꾸면서 스토리 플레이를 하려는 변
태야, 이 남자는… 그래서 돈을 내고 내 몸을 샀던 거
야.
침대 위로 올라간 뒤, 그녀는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좀처럼 잠이 오질 않았다. 가와시마 마사유키
가 눈을 뜰까 봐 두려워서 그런 건 아니었다. 더구나
할시온의 약효는 몇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사라지기
때문에 지금 당장 걱정할 일도 아니었다. 그래, 아이
스 픽이 배에 닿는 순간, 나는 공포감을 전혀 느끼지
않았어…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이려고 했던 걸까? 아
니면 더 이상 저항할 수가 없어서? 혹시 이 남자의 칼
에 찔리고 싶어서 그랬던 건 아닐까…? 가와시마 마사
유키가 커피 메이커에 걸터앉아서 테이프를 벗기고 있
는 동안, 사나다 치아키는 줄곧 천장을 올려다보면서
통증이 없어, 아프지 않아…라는 말을 되뇌고 있었다.
그때였다. 기묘한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갑작스럽게 부
풀어 올랐다. 손을 깨물리면서도 줄곧 귓가에 대고 속
삭여 주었던 남자, 얼어붙을 듯한 추위 속에서도 끝까
지 기다려 주었던 남자, 나의 손목을 꽁꽁 묶었던 남
자, 아이스 픽을 배에 들이댔던 남자… 이들이 모두
동일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그제서야 깨달았던 것이
다.
다른 남자들한테서는 그런 걸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말할 것도 없고 가즈키와 아쓰시, 히사오,
요시아키, 유다카 등은 절대로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
다. 그들은 한결같았다. 0.1초 만에 이상적인 남성에
서 최저 최악의 남자들로 변해 버렸던 것이다. 사나다
치아키는 한 남자한테서 싫은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
그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다고 생각한다. 그런
환멸에 대한 두려움을 섹스가 중화시켜 주곤 했다. 그
래서 성욕이 없어지는 걸 불안해 했던 것이다. 이제
그만 잠을 자야 한다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하지만 그게 마음먹은 대로 되어 주질 않았다. 가와시
마 마사유키와 팔짱을 낀 채, 거리를 걷고 있는 장면
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리고 택시를 타고 초고층 빌
딩의 창등에 둘러싸여 있는 장면도 떠올랐다. 가슴 가
득히 밀려드는 환희… 그런 감정을 느껴본 게 정말로
처음이었다. 이것만은 진실이라고 사나다 치아키는 생
각했다.
전화벨 소리를 듣고, 사나다 치아키는 아침 일찍 눈을
떴다. 클럽의 사장이 걸어 온 전화였다. 오늘은 꼭 사
무실로 나와 달라고 했다.
침대에서 일어나, 그녀는 가와시마 마사유키를 보러
갔다. 벌써 열 시간이 지났는데도, 가와시마 마사유키
는 계속해서 잠을 자고 있었다. 그는 벽면에 기댄 채
잠들어 있었다. 심장이 아래쪽을 향하고 있다. 눈초리
위쪽에 난 상처는 이미 아물어서, 피가 검게 말라붙어
있었다. 분필로 몸 바깥쪽에 선을 그리면 그야말로 사
체와 다름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룻바닥 위에
는 조리용 가위와 포크, 숟가락, 전선 조각 따위가 어
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그녀는 우선적으로 그것들을
치웠다. 그리고 피범벅이 되어 있는 핸들식 깡통따개
와 입에 물려 있던 행주를 개수대 속에 처박아 두었
다.
그것들은 나중에 씻기로 했다. 커피 메이커는 더 이상
쓸 일이 없을 것 같았다. 전기 청소기를 사용하고 싶
었다. 하지만 가와시마 마사유키를 깨울 것 같아서 그
만두기로 했다. 피와 커피 자국으로 얼룩져서, 카펫도
엉망진창이었다.
이것들은 모두 드라이 크리닝하기로 했다. 커피 메이
커 옆에 가와시마 마사유키의 지갑이 떨어져 있었다.
지갑을 열어 보았다. 한 장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막
태어난 아기와 안경 낀 여자, 그리고 가와시마 마사유
키가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이 여자가 요코…? 안경
낀 여자가 미소를 머금고 서 있었다. 반면에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무표정했다. 게다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하룻밤만 함께 보낸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사진
을 들여다보면서 사나다 치아키는 이렇게 생각했다.
팔짱을 끼고 두세 번 정도 함께 걸었다면, 아마도 이
사진을 갈기갈기 찢어서 불태워 버렸을 것이다. 팔짱
을 끼고 열 번쯤 산보라도 했다면, 틀림없이 이 여자
를 죽여 버렸을 것이다.
살며시 냉장고 문을 열고 맥주병을 꺼냈다. 세비앙 정
제와 알카셀투어를 입 속에 털어넣고 단번에 삼켜 버
렸다. 현관 옆 카펫 위에는 아이스 픽이 나뒹굴고 있
었다. 그녀는 그걸 집어들었다. 의식을 잃기 전에, 가
와시마 마사유키가 놓쳐 버린 물건이었다. 그녀는 그
것을 지갑과 노트, 나이프 등과 함께 가방 속에 넣어
두었다.
웨지우드 수프 그릇에 소독용 알콜을 2센티미터쯤 따
랐다. 그리고 그 속에다가 14번 게이지 니들과 링을
집어 넣었다.
왼쪽 젖가슴의 유두를 약용 비누로 잘 닦은 다음, 양
손에 의료용 고무 장갑을 끼었다. 사나다 치아키는 가
와시마 마사유키가 깨어났을 때를 생각했다. 그 순간
을 위해서, 새로운 피어스를 끼우기로 마음 먹었던 것
이다.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눈을 뜨자마자 나가 버릴 것이
다. 그리고 안경 낀 여자한테로 달려갈 것이다. 깡통
따개로 마구 두들겨 패거나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위협
을 해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이 남자
는 한번 돌아가겠다고 마음먹으면 반드시 그렇게 하고
만다.
그래, 스스로 이와 같은 고통을 선택해서 몸에 익혀야
해. 그 결과 아름다운 것이 육체에 남으면 인간은 강
해지니까… 지금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강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가와시마 마사유키가 가버린 다음에 찾
아올 적막감을 견뎌낼 수가 없으니까… 사나다 치아키
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녀는 양치질할 때 쓰는 물약을 엷게 만들어서 탈지
면에 발랐다. 그러고는 그걸로 유두 주위를 소독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 앞으로 걸어갔다.
정확히 수평이 되게끔 주의하면서 유두 양쪽에 조그맣
게 표시를 했다. 그런 다음에 다시 소파가 놓여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수프 그릇에서 니들을 꺼냈
다. 그리고 그것의 끝부분을 얼핏 들여다보았다. 그것
은 주사 바늘과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바늘이
파묻히는 게 아니라, 날카로운 칼날이 피부와 세포를
가른다… 그녀는 수프 그릇 가장자리에다가 테라마이
신 연고를 4센티미터쯤 짜냈다. 니들의 끝부분에 연고
를 바르면서 그녀는 문득 깨달았다. 어느 틈엔지 가와
시마 마사유키가 상체를 일으켜 세우고, 자기의 모습
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왼쪽 얼굴이 불타고 있는 듯한 고통을 느끼면서 가와
시마 마사유키는 눈을 떴다. 하지만 그는 한동안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었다. 그는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
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의식이 조금씩 회복되기 시
작했다. 그는 잠들기 전에 벌어졌던 일들을 조금씩 생
각해 냈다. 그리고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유두에 모든 신경을 집중시킨 채, 사나다 치아키가 거
울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웃옷을 모두 벗어
버린 상태였다. 양쪽 손에는 고무 장갑을 끼고 있었
다. 그녀가 천천히 소파에 주저앉았다. 그녀의 오른손
에는 끝부분이 날카로운 쇠막대기가 들려 있었다. 그
리고 왼손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 끝으로는 유두를
붙잡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다양한 기억들이 선명하게 떠올
랐다. 이, 이 여자를 찌르지 않았어, 나는… 소파 바
로 옆에는 가방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코
트가 놓여 있고 코트 위에는 아이스 픽과 나이프, 지
갑이 놓여 있었다. 이곳에서 나가자마자 아이스 픽과
나이프를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노트는 버리지 않을
거야. 노트에 기록할 땐 정말로 흥분했어. 그 노트에
는 뭔가가 꽉 막혀 있었어. 그래서 저 여자가 그걸 읽
었는지 그렇지 않은지, 지나칠 정도로 신경썼던 거
야….
사나다 치아키와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한동안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지난 다음에 사나
다 치아키가 왼쪽 엄지손가락과 오른손을 이용해서,
자신의 유두에 니들을 꽂기 시작했다. 마침내 니들의
끝부분이 유두를 뚫고 반대쪽 방향으로 나왔다. 그녀
가 손가락을 떼어냈다. 은색 바늘이 그녀의 유두를 좌
우에서 꿰뚫고 있었다.
「뭘 하는 거지?」
낮은 목소리로 가와시마 마사유키가 물었다.
「피어싱….」
자신의 유두를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사나다 치아키가
대답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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