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의 변호사 1
지은이: 존 그리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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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무장화를 신은 남자가 내 뒤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탔다. 처음에는 그를 보지 않았다. 하
지만 냄새는 맡았다. 담배와 싸구려 포도주 냄새, 거기에 오랫동안 비누칠이라고는 해 본 일
이 없는 노숙자의 냄새가 뒤섞여 몹시 고약했다.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는 우리 둘뿐이
었다. 마침내 내가 그쪽으로 눈길을 돌렸을 때, 먼저 눈에 띈 것은 장화였다. 검은색의 더러
운 장화는 너무 커 보였다. 닳고 해진 트렌치 코트는 무릎을 덮고 있었다. 코트 속의 더러운
옷들이 허리께를 겹겹이 둘러싸고 있어, 그는 땅땅해 보였다. 비만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
다. 그러나 잘 먹어 살이 찐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겨울이면 워싱턴의 노숙자들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전부 몸에 걸치는 것 같았다.
그는 흑인 중늙은이였다. 턱수염과 머리는 반쯤 셌는데, 몇 년 동안 깍지도 감지도 않은
것 같았다. 그는 두꺼운 색안경을 쓰고 똑바로 앞만 보며 나를 철저히 무시하고 있었다. 그
바람에 나는 머쓱해졌다. 왜 내가 저런 자를 훔쳐보는 거지?
그는 이곳 사람이 아니었다. 이것은 그의 건물이 아니었고, 그의 엘리베이터가 아니었다.
이곳은 그의 경제 형편으로 어슬렁거릴 수 있는 곡이 아니었다. 내가 다니는 회사의 변호사
들은 여덟 개의 층을 차지하고 시간당으로 요금을 청구하며 일을 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7
년을 보낸 나조차도 지금까지 그 엄청난 요금에는 영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그는 추위를 피해 들어온 거리의 부랑자에 불과했다. 워싱턴 시내에서는 늘 있는 일이었
다. 하지만 이런 쓰레기를 처리하라고 경비원을 두는 건데.
6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멎었다. 그때 처음으로 나는 그가 단추를 누르지 않았다는 사실, 즉
층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나를 쫓아오고 있었다. 나는 얼른 드레이크
& 스위니 법률 회사의 화려한 대리석 로비에 내려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그가 엘리베이터
안에 서서 여전히 나를 무시한 채 앞만 뚫어져라 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의 매우 쾌활한 안내원들 가운데 하나인 마담 드비어가 그녀 특유의 거드름 피우는
표정으로 나에게 인사를 했다.
내가 말했다.
"엘리베이터 주의해요."
"왜요?"
"부랑자예요. 경비원을 부르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군요."
"그 사람들은 정말."
그녀는 짐짓 프랑스 액센트를 흉내냈다.
"그리고 소독약도 좀 준비하고."
나는 외투에서 팔을 빼며 걸어갔다. 벌써 고무장화를 신은 남자는 잊고 있었다. 오후 내내
쉬지도 못하고 회의를 해야 했다. 중요한 사람들과 중요한 일을 협의해야 했다. 모퉁이를 돌
며 내 비서 폴리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을 때, 첫 총소리가 났다.
마담 드비어는 책상 뒤에서 일어서서, 소스라치게 놀란 얼굴로 부랑자가 들고 있는 끔찍
하게 긴 권총의 총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마담 드비어 곁에 처음 나타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는 나를 향해 정중하게 총을 겨누었고, 나 역시 그녀처럼 몸이 뻣뻣하게 굳고 말
았다.
"쏘지 말아요."
나는 말하며 두 손을 쳐들었다. 영화를 많이 보았기 때문에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되는
지 잘 알고 있었다.
"조용히 해."
그가 중얼거렸다. 대단히 차분한 태도였다.
내 뒤의 복도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누가 소리를 질렀다.
"총을 갖고 있어!"
이어 웅성거림이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소리가 희미해지면서 동료들은 뒷문으로 사라
졌다. 저러다 아예 창 밖으로 뛰어내리려 할지도 모르겠군.
내 바로 왼쪽에는 묵직한 나무문이 있었다. 그 너머는 커다란 회의실이었는데, 공교롭게도
그곳에는 소송부 소속 여덟 명의 변호사가 모여 있었다. 사람을 씹으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
이 일인지라, 두려움이라고는 모르는 고집 센 변호사들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억센 사
람이 래프터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어뢰 같은 싸움꾼이었다. 다름 아닌 그가 회의실 문을
벌컥 열어젖히더니 말했다.
"왜 이리 시끄러워?"
총신이 나에게서 그에게로 방향을 틀었다. 고무장화를 신은 남자는 바로 그가 원하던 것
을 손에 넣은 셈이었다.
"총 내려놔."
래프터가 문간에서 명령했다. 거의 그와 동시에 또 한번의 총성이 대기실에 울려퍼졌다.
총알은 래프터의 머리에서 한참 위에 있는 천장 어딘가를 뚫었지만, 그것으로 래프터 역시
죽을 수밖에 없는 한 인간임이 확인되었다. 고무장화를 신은 남자는 총을 다시 나에게 돌리
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순순히 래프터를 따라 회의실로 들어갔다. 내가 바깥에서 마지
막으로 본 것은 공포에 사로잡혀 책상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마담 드비어, 그녀의 목에
걸린 헤드폰 수화기, 쓰레기통 옆에 단정하게 놓인 그녀의 하이힐이었다.
고무장화를 신은 남자는 문을 쾅 닫더니 총을 공중에 휘저어, 여덟 명의 소송 변호사들이
그것을 충분히 감상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그 정도면 충분히 효과를 발휘한 것 같았다.
모두들 총의 소유자의 몸에서 풍기는 악취보다는 총이 발사되고 난 뒤에 풍기는 화약 냄새
에 더 민감한 것 같았으니까.
방 중앙에는 긴 탁자가 있고, 그 위에는 조금 전까지도 몹시 중요하게 여겨졌던 서류와
문서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벽에 일렬로 늘어선 창문들은 주차장을 굽어보고 있었다. 복도
로 통하는 문은 두 개였다.
"모두 벽에 붙어."
총이 좋은 지휘봉이라도 되는 것처럼, 모두들 얼른 벽으로 향했다. 이어 그는 총을 내 머
리 가까이에 들이대고 말했다.
"문 잠가."
나는 시키는 대로 했다.
벽을 향해 서둘러 움직이는 여덟 명의 소송 변호사들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 역시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얼른 문을 잠그고, 확인을 바라는 아이처럼 고무장화를 신은 남자를
보았다.
어쩐 일인지 우체국에서 일어났다. 그 끔찍한 총기 난사 사건이 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불만을 품은 우체국 직원이 점심 식사를 마치고 무기를 들고 들어와 동료 직원 15명을 쓸어
버린 사건 말이다. 이어 놀이터 대학살 사건도 떠올랐고, 패스트푸드점 살육 사건도 떠올랐
다.
그런 사건의 피해자는 무고한 아이들이나 품위 있는 시민들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안 그
래도 미운 털이 박힌 한 무더기의 변호사들 아니냐!
고무장화를 신은 남자는 뭐라고 중얼거리기도 하고 총으로 밀치기도 하면서 여덟 명의 소
송 변호사들을 벽에 세웠다. 이윽고 그들의 위치가 마음에 들었는지, 다시 나에게로 주의를
옮겼다. 이 자가 월 원하는 걸까? 질문이라도 하려는 걸까? 그렇다면 염병할, 어떤 답이라도
다 얻어낼 수 있겠지. 나는 색안경 때문에 그의 눈을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내 눈을
볼 수 있었다. 총구는 여덟 명의 소송 변호사들을 향하고 있었다.
고무장화를 신은 남자는 더러운 트렌치 코트를 벗더니, 마치 새 것이라도 되는 양 잘 개
어서 탁자 중앙에 놓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나를 괴롭혔던 냄새가 다시 코를 자극했다. 그러
나 이제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탁자 끝에 서서 다음 옷을 천천히 벗기 시작했다.
큼직한 회색 카디건이었다.
카디건이 큼직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 밑에는 붉은 막대들이 한 줄로 그의 허리에 묶
여 있었다. 경험 없는 내 눈에는 그것이 다이너마이트로 보였다. 막대의 위와 아래로부터는
색깔을 칠한 스파게티 같은 전선들이 뻗어나와 꿈틀거리고 있었으며, 은색 도관용 테이프가
막대들을 한데 묶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달아나고 싶었다. 사지를 허우적거리며 문으로 돌진하고 싶었다. 그리고 운에
맡기는 것이다. 자물쇠를 향해 손을 뻗을 때 한 발이 빗나가고, 문을 열고 복도로 몸을 던질
때 또 한 발이 빗나가기를 기대해 보는 것이다. 그러나 무릎이 흔들거리고 소리와 탄식 소
리가 새어나왔다. 우리를 포로로 잡은 남자는 그 소리에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조용히 해요."
그는 참을성 있는 교수와 같은 말투로 말했다. 나는 그의 침착한 태도에 기가 죽었다. 그
는 허리께의 스파게티 같은 전선 몇 가닥을 만지작거리더니, 이어 커다란 바지의 호주머니
에서 노란 나일론 끈 한 다발과 접는 칼 하나를 꺼냈다.
그는 자기 앞에 있는 겁에 질린 얼굴들을 향해 총을 한참 휘두르더니 말했다.
"난 누구도 해치고 싶지 않아."
듣기에는 좋은 말이었지만, 진담으로 받아들이기는 힘들었다. 세어 보니 빨간 막대는 12개
였다. 순식간에 고통 없이 가기에는 충분한 양이군. 그것 하나는 틀림없었다.
순간 총이 다시 나를 향했다.
"네가 저 사람들을 묶어."
래프터는 참을 만큼 참았다고 생각했는지, 아주 약간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이보시오, 당신이 원하는 게 대체 뭐요?"
세 번째 총알이 래프터의 머리 위로 날아가더니 누구에게도 해를 주지 않고 천장에 처박
혔다. 그러나 소리는 대포소리 같았다. 어떤 여자가 로비에서 비명을 질렀다. 마담 드비어일
까? 래프터는 허리를 굽혔다. 그가 다시 몸을 일으키려는데, 엄스테드의 두툼한 팔꿈치가 그
의 가슴 한가운데를 쿡 찔러 벽에 기댄 자세로 되돌려 놓았다.
"입 다물고 있어요."
엄스테드가 이를 악문 채 내뱉었다.
"당신이라고 하지 마."
장화를 신은 남자가 말했다. 즉시 당신이라는 말은 사라졌다.
"그럼 뭐라고 부르면 좋겠습니다?"
내가 물었다. 내가 인질들의 지도자가 되어 가는 느낌이었다.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예의
를 갖추어 그 말을 했다. 장화를 신은 남자도 나의 예의를 인정해 주는 것 같았다.
"그냥 형씨라고 해."
그러자 방 안의 모든 사람이 형씨가 아주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전화벨이 울렸다. 순간적으로 그가 전화기를 총으로 쏴 버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러나 그는 전화기를 향해 손짓을 했다. 나는 전화기를 그의 바로 앞에 갖다 놓았다. 그는 왼
손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오른손으로는 여전히 권총을 쥐고 있었다. 그리고 그 권총은 여전
히 래프터를 향하고 있었다.
만이리 우리 아홉 명에게 투표권이 있다면, 래프터가 첫 희생양이 되었을 것이다. 8대 1
로.
"여보세요."
형씨가 말했다. 그는 잠깐 듣더니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는 조심스럽게 뒷걸음질로 물러
나, 탁자 끝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끈을 들어."
그가 나에게 말했다.
그는 여덟 명 모두의 손목을 묶어 서로 연결시키라고 했다. 나는 끈을 자르고 매듭을 묶
었다. 동료들의 죽음을 재촉하는 입장이 된 몸이라, 그들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애를 썼
다. 나는 등에 권총을 느끼고 있었다. 형씨는 단단히 묶으라고 했다. 나는 피를 짜낼 것 같
은 시늉을 하면서도, 사실은 최대한 느슨하게 해 주려고 애를 썼다.
래프터가 나지막하게 뭐라고 중얼거렸다. 나는 그의 따귀를 갈겨 주고 싶었다. 엄스테드는
손목을 움직였기 때문에, 그를 다 묶었을 때는 끈이 밑으로 흘러내릴 것 같았다. 맬러머드는
땀을 흘리며 가쁘게 숨을 쉬고 있었다. 그는 방 안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으며, 또 유일한 파
트너(회사의 주식을 갖고 있는 변호사. 어소시에이트는 회사의 주식을 갖고 있지 않음: 편집
자)였다. 그리고 2년 전에 심장마비를 겪은 일이 있었다.
방 안에서 하나뿐인 친구 배리 누조의 얼굴은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서른둘로 나
이가 같았고, 같은 해에 입사했다. 그는 프린스턴 법대 출신이었고, 나는 예일 법대 출신이
었다. 아내들은 다 프로비던스 출신이었다. 그는 제대로 결혼 생활을 하고 있었다. 4년째인
데, 자식이 셋이었다. 내 결혼 생활은 긴 악화 과정의 마지막 단계에 들어서고 있었다.
우리의 눈이 마주쳤다. 우리 둘 다 그의 아이들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는 자식이 없어 다
행이다 싶었다.
앞으로 많이 듣게 될 사이렌 소리 가운데 첫 번째 사이렌 소리가 들려 왔다. 형씨는 다섯
개의 커다란 창문에 블라인드를 치라고 나에게 명령했다. 나는 천천히 꼼꼼하게 그 일을 하
면서, 아래 주차장을 훑어보았다. 누구라도 눈에 띄기만 하면 살아날 수 있을 것처럼. 주차
장에는 경찰차 한 대가 전조등을 켠 채 서 있었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경찰관들은 이미
건물 안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는 우리가, 아홉 명의 백인과 형씨가 있었다.
최근 집계한 결과에 따르면, 드레이크 & 스위니는 세계 전역의 지사에 8백 명의 변호사
를 거느리고 있었다. 그 가운데 반이 워싱턴에, 즉 형씨가 테러를 감행한 건물에 있었다. 형
씨는 나에게 '상사'에게 전화를 걸어, 그가 무장을 하고 있고, 12개의 다이너마이트를 몸에
차고 있다고 알리라고 말했다. 나는 내 부서인 반트러스트 담당부의 경영 담당 파트너 루돌
프에게 전화를 걸어, 형씨의 말을 전했다.
"자네 괜찮나, 마이크?"
루돌프가 나에게 물었다. 우리는 스피커폰의 음량을 최대로 키워 놓고 이야기를 하고 있
었다.
"잘 있죠, 어쨌든 시키는 대로 하세요."
"그자가 뭘 원한대?"
"아직 모르겠어요."
형씨가 총을 휘둘렀고 대화는 그것으로 끝났다.
나는 권총의 신호에 따라 회의 탁자 옆의 자리에 가서 섰다. 형씨로부터 몇 발자국 떨어
진 곳이었다. 그는 습관적으로 가슴 근처의 전선을 만지작거리곤 했는데, 우리 입장에서는
여긴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그는 아래를 흘끗 보더니, 빨간 전선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여기 이거 빨간 거 말이야, 내가 이걸 잡아당기면 그걸로 다 끝나는 거야."
그가 경고를 끝냈을 때, 색안경은 내 쪽을 향해 있었다. 나는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
았다.
"왜 그걸 잡아당깁니까?"
내가 물었다. 어찌 되었든 대화를 트고 싶어서 한 소리였다.
"나도 그러고 싶지는 않아 하지만 안 될 건 또 뭐야?"
나는 그의 어법에 약간 놀랐다. 말은 느렸다. 서둘지 않고 리듬을 꼼꼼히 살리고 있었다.
음절을 건너뛰는 법이 없었다. 지금은 노숙자이지만, 과거에는 훨씬 나은 지위에 있었던 사
람임에 틀림없었다.
"왜 우리를 죽이고 싶어하는 겁니까?"
내가 물었다.
"너하고 논쟁하고 싶지 않아."
어이쿠, 더 이상 질문 없습니다, 재판장님.
나는 변호사로서 시계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계속 손목시계를 보았다.
마치 이 자리에서 살아나면 일어난 일을 모두 꼼꼼히 기록해 두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1시
20분이었다. 형씨는 조양한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우리는 14분 동안 침묵의 시간을 견디어
야 했다. 신경이 걸레처럼 너덜너덜해지는 느낌이었다.
죽는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우리를 죽일 어떤 동기도, 어떤 이유도 없는 것 같았
다. 우리 가운데 누구도 전에 그를 만난 적이 없다는 것은 확실했다. 나는 아까 그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던 일을 기억했다. 그에게는 특별한 목적지가 없는 것 같았다. 따
라서 그는 인질을 찾고 있던 미치광이에 불과했다. 하지만 바로 그 사실 때문에, 불행하게도
우리를 죽이는 것이 그에게는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 될 수 있었다.
24시간 동안 톱뉴스 자리를 차지하면서 사람들의 고개를 설레설레 젓게 만드는 그런 의미
없는 학살이 될 것 같았다.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죽은 변호사와 관련된 농담이 시작되겠
지.
신문 머릿기사들이 눈에 보이고, 기자들이 보도를 하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그
러면서도 나는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로비에서는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밖에서는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복도 어딘가에서
경찰의 무전기가 삑삑거렸다.
"점심으로 뭘 먹었지?"
형씨가 나에게 물었다. 오랜 침묵을 깨는 소리였다. 너무 놀라 거짓말을 생각할 수도 없었
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구운 닭고기를 먹었는데요."
"혼자?"
"아뇨,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는 법대 친구로 필라델피아 출신이었다.
"값이 얼마던가? 둘이 먹는 데 말이야."
"30달러였습니다."
형씨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30달러라."
형씨는 되풀이하더니 말을 이었다.
"두 사람이 먹는 데 말이지."
그는 고개를 젓더니 여덟 명의 소송 변호사들을 보았다. 나는 형씨가 그들에게 여론 조사
를 할 경우에 그들이 거짓말을 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 사람들 가운데는 위가 꽤
나 고급이어서, 30달러 가지고는 애피타이저 값도 못 내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뭘 먹었는지 알아?"
형씨가 나에게 물었다.
"아뇨."
"난 수프를 먹었어. 합숙소에서 수프와 크래커를 먹었지. 공짜였는데, 그걸 먹을 수 있어
서 기분이 좋았지. 30달러면 내 친구들 백명이 밥을 먹을 수 있어. 그걸 아나?"
나는 갑자기 내 죄의 무게를 깨달았다는 듯이 엄숙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갑, 돈, 손목시계, 보석을 다 걷어."
그는 다시 총을 흔들었다.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아니."
나는 내 지갑, 손목시계, 현금을 탁자에 내려놓고, 내 동료 인질들의 호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너희들의 가장 가까운 친족에게 줄 거야."
형씨가 말했다. 우리 모두 숨을 내쉬었다.
그는 나에게 약탈물을 서류가방에 넣고, 가방을 잠그고, 다시 '상사'에게 전화를 하라고 했
다. 루돌프는 벨이 한 번 울리자 전화를 받았다. 스와트(SWAT, 특수 공격대:옮긴이) 대장
이 그의 사무실에 진을 치고 있는 광경에 눈에 보이는 듯했다.
"루돌프, 다시 나예요, 마이크. 스피커폰으로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래, 마이크, 괜찮나?"
"괜찮습니다. 보세요, 여기 이분이 나더러 대기실에서 가장 가까운 문을 열고, 복도에 검
은 서류가방을 내놓으래요, 그리고 나서 문을 닫고 잠그랍니다. 알겠습니다?"
"그래."
총은 내 뒤통수에 닿아 있었다. 나는 천천히 문을 열고 가방을 복도에 던졌다. 사람은 그
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세상에 대형 법률 회사의 변호사가 시간당 청구서를 쓰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을 막을 만
한 일은 거의 없다. 잠이 그 하나인데, 사실 우리 대부분은 잠을 적게 잔다. 먹는 것이야 청
구서를 쓰는 일을 붇돋아 줄 뿐이다. 특히 의뢰인이 식사비 계산서를 집어들 경우에는. 인질
범이 시간을 오래 끌게 되자, 나도 모르게 궁금해졌다. 건물에 있는 다른 4백 명의 변호사들
은 인질 위기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청구서 쓰는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을까? 주차장
에 피신해 있는 그들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대부분은 추위를 피해 차 안에 들어가 있
었는데, 휴대 전화로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것 역시 청구서가 날아가는 일이었
다. 이 회사는 잠시도 쉴 줄을 모르는군,
밑에 있는 악당들 가운데 일부는 이 인질극이 어떻게 끝나는가에 관심이 없을 게 틀림없
었다. 어떻게든 그저 빨리 끝나 주기만을 바랄 것이다.
형씨는 잠시 조는 것 같았다. 턱이 아래로 떨어지고, 숨이 깊어졌다. 래프터가 내 주의를
끌기 위해 소리를 냈다. 내가 그쪽을 보자 머리를 한쪽으로 휙 젖혔다. 나더러 움직여 보라
는 것 같았다. 문제는 형씨가 여전히 오른손에 권총을 쥐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설사 그
가 잠이 들었다. 해도, 그의 왼손은 여전히 무시무시한 붉은 전선을 단단히 쥐고 있었다.
그런데도 래프터는 내가 영웅이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가 회사에서 가장 비열하고 동
시에 가장 능력 있는 소송 변호사일지는 몰라도, 아직 파트너는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내
부서 소속도 아니었으니, 우리는 부대가 다른 셈이었다. 따라서 그는 나에게 명령을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작년에 얼마 벌었지?"
형씨가 나에게 물었다. 전혀 자던 사람 같지가 않았다. 목소리는 매우 맑았다.
나는 다시 깜짝 놀랐다.
"난, 어, 이런, 어디 보자..."
"거짓말은 하지 마."
"12만입니다."
형씨는 그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얼마나 기부했지?"
"기부했냐고요?"
"그래. 자선단체에."
"아! 어, 잘 기억이 안 나는데요. 청구서 같은 것들은 집사람이 관리하거든요."
여덟 명의 소송 변호사 모두가 동시에 몸의 무게중심을 바꾸는 것 같았다.
형씨는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이었다. 답변 거부를 용인하고 싶지 않은 것 같
았다.
"세금 양식 같은 건 누가 쓰는데?"
"국세청에 내는 것 말입니까?"
"그래, 그거."
"그건 2층에 있는 우리 세금 부서에서 처리합니다."
"여기 이 건물에서 한단 말이야?"
"네."
"그럼 가져와. 여기 있는 사람 모두의 세금 기록을 가져오란 말이야."
나는 변호사들의 얼굴을 보았다. 두어 사람은 '차라리 나를 죽이라고 그래.' 하고 말하고
싶은 표정이었다. 내가 너무 오래 망설였나보다.
"어서!"
형씨는 소리를 질렀다. 더불어 총까지 휘둘렀다.
나는 루돌프에게 전화를 했다. 그 역시 망설였고, 그래서 나도 그에게 소리를 질렀다.
"어서 팩스로 보내라니까요. 작년 것만이요."
우리는 15분 동안 구성에 있는 팩시밀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소득 신고서
가 빨리 오지 않는다고 형씨가 우리를 처형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면서.
2
인질들의 서기로 새로 기름부음을 받은 나는 형씨가 총으로 가리키는 곳에 앉아 팩스를
잡았다. 내 친구들은 거의 두시간 동안 서 있었다. 여전히 벽에 등을 기대고, 서로 꼭 붙어
서서, 거의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었다. 몸이 늘어지고 처지기 시작했으며, 표정도 가엾어 보
였다.
그러나 그들의 불편함은 앞으로 훨씬 더 늘어날 참이었다.
"너부터 해."
형씨는 나를 향해 말을 이었다.
"이름이 뭐지?"
"마이클 브록입니다."
나는 정중하게 대답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하고 인사하는 것처럼.
"작년에 얼마나 벌었어?"
"이미 말했듯이 12만입니다. 세전 액수죠."
"얼마나 냈지?"
물론 나는 거짓말을 할 수 있었다. 비록 세무 변호사는 아니었지만, 그의 질문을 받아넘기
는 것 정도는 자신 있었다. 나는 내 소득 신고서를 집어들고 천천히 페이지를 넘겼다. 클레
어는 2년차 외과 레지던트로서 3만 1천 달러를 벌었다. 따라서 우리 총수입은 상당해 보였
다. 그러나 우리는 5만 3천을 세금으로 냈다. 연방 소득세를 비롯해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세금들. 그리고 학비 융자금을 갚고, 클레어의 학비를 내고, 조지타운에 있는 아주 좋은 아
파트에 월 2천4백 달러씩 내고, 최신형 자동차 할부금을 내고, 안락한 라이프스타일을 유지
하는 데 당연히 지출되는 많은 돈들을 내고 나자, 투자 신탁 회사에는 불과 2만 2천 달러밖
에 저축을 못했다.
형씨는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나는 그의 인내심 때문에 기가 죽어 있었다.
지금 스와트 아이들이 환풍구로 들락거리고, 근처의 나무들로 올라가고, 이웃 건물들의 옥상
을 가로질러 달음박질치고, 우리 사무실의 도면을 보는 등, 형씨의 두개골에 총알을 박아 넣
는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텔레비전에서나 볼 수 있었던 온갖 일들을 하고 있을 터였
다. 그런데 형씨는 그런 일은 내 알 바 아니라는 식이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
들이고,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것이 우리와 다른 점이었다.
그는 계속 붉은 전선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것 때문에 우리 심장 박동은 일 분에 백
번을 넘어서고 있었다. 내가 입을 열었다.
"예일 대학에 천 달러를 냈습니다. 그리고 이 지역의 유나이티드 웨이(United Way, 개인
적 기부금으로 기금을 만들어 적십자사 등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일을 하는 민간 조직 :
옮긴이)에 2천을 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한테는 얼마나 주었어?"
예일에 간 돈이 궁핍한 학생들을 먹여 살리는 데 쓰였을 것 같지는 않았다.
"글쎄요, 유나이티드 웨이가 도시 전체에 돈을 나누어 주니까, 내가 낸 돈 가운데 일부도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데 쓰였을 게 틀림없습니다."
"배고픈 사람들한테는 얼마나 주었어?"
"나는 세금으로 5만 3천을 냈습니다. 그 가운데 많은 부분이 복지, 메디케이트(국민 의료
보장 제도 : 옮긴이), 의지할 곳 없는 아이들을 돕는 사업 같은 데로 갔을 겁니다."
"그럼 그 일을 자발적으로 한 건가? 남을 돕고자 하는 마음에서?"
"불평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나는 대부분의 내 동료와 마찬가지로 거짓말을 했다.
"배고파 본 적은 있나?"
그는 간결한 답변을 좋아했다. 따라서 재치나 냉소를 들이밀어봐야 별로 생산적이지 않을
것 같았다.
"아뇨. 없습니다."
"눈 위에서 자 본 적 있나?"
"없습니다."
"너는 그렇게 돈을 많이 벌면서도 욕심이 하도 많아, 길가에 앉아 있는 나한테 잔돈 몇 푼
건네 주지 않았어."
그는 나머지 사람들을 향해 총을 휘두르며 말을 이었다.
"다들 마찬가지야. 너희들 모두 내가 앉아서 구걸하라 때 내 바로 옆을 걸어다녔어. 너희
들은 내 식사비보다 더 많은 돈을 커피값에 쓰는 사람들이야, 왜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
들, 집 없는 사람들을 도와주지 못하는 거야? 돈이 그렇게 많은데도."
나는 나도 모르게 형씨와 더불어 그 욕심 많은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대부분 자기 발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래프터만이 탁자를 노려보며, 워싱턴에서 수많은 형씨들을 넘어다닐 때
우리 모두가 하던 생각을 되씹고 있는 것 같았다. 즉 내가 잔돈푼을 주면 이 사람은
(1) 술집으로 달려갈 것이다,
(2) 더 구걸을 할 것이다,
(3) 길가를 절대 떠나지 않을 것이다.
다시 정적. 헬리콥터 한 대가 근처에서 배회하고 있었다. 경찰이 주차장에서 무슨 계획을
짜고 있는지는 상상을 해 볼 수 있을 뿐이었다. 형씨의 명령에 따라 전화를 내려놓았기 때
문에 외부와의 연락은 두절된 상태였다. 형씨는 누구하고도 이야기를 하거나 협상을 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회의실에 있는 청중만으로도 충분한 것 같았다.
"이자들 가운데 누가 돈을 제일 많이 벌지?"
형씨가 나에게 물었다.
맬러머드가 방 안에서 유일한 파트너였다. 나는 서류를 뒤적이다가 그의 것을 찾아냈다.
그러나 맬러머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마 날 거요."
"이름이 뭐야?"
"네이트 맬러머드요."
나는 네이트의 소득 신고서를 넘겨보았다. 파트너의 성공사례를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는
드문 기회였지만, 별로 즐겁지 않았다.
"얼마야?"
형씨가 나에게 물었다.
오, 국세청 항목들이 주는 즐거움이여. 뭘 원하시는지요? 총수입? 조정된 총수입(정당한
공제액을 뺀 총수입 : 옮긴이)? 순수입? 임금과 봉급에서 발생한 수입? 아니면 사업과 투자
에서 발생한 수입?
맬러머드가 회사에서 받은 봉급은 월 5만 달러였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꿈꾸고 있는 연
례 보너스는 51만이었다. 작년은 장사가 잘 된 해였고, 우리 모두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백만 달러 이상의 소득을 올린 많은 파트너 가운데 한 사람일 뿐이었다.
나는 안전하게 처리하기로 결심했다. 신고서 뒤쪽에 가면 다른 많은 수입들이 숨어 있었
다.-임대 소득, 배당금, 소규모 사업 소득 등. 그러나 형씨가 직접 신고서를 본다 해도, 숫자
와 씨름을 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백십만입니다."
나는 20만은 빼고 말했다.
형씨는 잠시 그 숫자를 생각했다.
"너는 백만 달러를 벌었군."
형씨가 맬러머드에게 말했다. 맬러머드는 그것을 조금도 창피해 하지 않았다.
"그렇소."
"배고픈 사람들과 집 없는 사람들한테는 얼마나 주었나?"
나는 벌써 정답을 찾기 위해 그의 공제 항목을 살피고 있었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소. 하지만 아내와 나는 여러 자선 단체에 돈을 내고 있소. 내가 분
명히 아는 건 '그레이터 워싱턴 기금'에 기부금을 냈다는 거요. 아마 5천일 거요. 그곳에서는
궁핍한 사람들한테 돈을 나누어 주고 있다고 알고 있소. 우리는 많은 돈을 내고 있소. 그렇
게 할 수 있어 행복하게 생각하고 있소."
"행복하기도 하겠지."
형씨가 대꾸했다. 처음으로 비꼬는 말투가 나타나고 있었다.
형씨는 우리가 알고 보면 사실 매우 관대한 사람들이라느니 하는 설명을 할 기회를 줄 생
각이 없었다. 그냥 사실만 원할 뿐이었다. 그는 나에게 우리 아홉 명의 이름을 적고, 그 옆
에 작년의 수입과 자선단체에 기부한 돈의 액수를 적으라고 명령했다.
시간이 좀 걸렸다. 나는 서두를까 늑장을 부릴까 망설였다. 숫자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가 우리를 죽일까? 그렇다면 서두르면 안될 일이었다. 우리 부자들은 많은 돈을 벌면서도
기부금을 내는 것은 무척 아까워했다는 사실이 금방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 뻔했기 때문이
다. 게다가 시간을 오래 끌면 끌수록 밖에서 우리를 구출하기 위한 시나리오도 좀더 치밀해
질 것이 분명했다.
또 형씨는 매시간 인질을 처벌하겠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니, 나로서는 급할 것
이 없었다. 자기 친구를 감옥에서 꺼내 달라는 요구 조건을 내걸지도 않았다. 사실 아무것도
원하는 게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시간을 끌었다. 맬러머드가 일등이었다. 꼴찌는 콜번이었다. 그는 3년차 어소시에이
트로, 총수입이 8만 6천에 불과했다. 나는 내 친구 배리 누조가 나보다 1만 1천을 더 번 것
을 알고 놀랐다. 나중에 이야기를 좀 해야겠군.
"우수리를 떼면 3백만이 되는군요."
나는 형씨에게 보고했다. 그는 다시 잠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의 손은 여전히 붉은
전선을 쥐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가난한 사람들한테는 얼마나 주었지?"
"기부금 총액은 18만입니다."
"기부금 총액을 말하라는 게 아니야. 나 같은 사람들을 교향악단이나 유대교 회당하고 똑
같이 취급하지 마. 포도주나 유명인의 서명을 경배하고 보이 스카웃에게 몇 달러 쥐어 주는
백인들의 클럽과 비교하지 말란 말이야. 난 먹을 것 이야기를 하고 있어, 너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도시에 함께 살고 있는 굶주린 사람들이 먹을 것 말이야. 아기들이 먹을 것. 바로
여기, 이 도시에서 말이야. 바로 이 도시에서, 너희들이 수백만을 버는 이 도시에서, 밤에 아
기들이 굶고 있고, 배가 고파 울고 있어. 먹는 것에는 얼마나 냈어?"
그는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내 앞에 있는 서류를 보고 있었다.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
다.
형씨가 말을 이었다.
"이 도시 전역에 무료 급식소가 있어. 가난한 사람들과 집 없는 사람들이 그나마 뭘 좀
먹을 수 있는 곳이지. 당신네들은 그 무료 급식소에 얼마나 냈어? 내기는 냈나?"
"직접적으로는 안 냈습니다. 하지만 이 자선단체들 가운데 일부에서..."
"시끄러!"
그는 다시 염병할 권총을 휘두르고 있었다.
"노숙자 합숙소는? 바깥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면 우리가 들어가 자는 곳 말이야. 그 서류
에 그런 합숙소에 돈을 낸 기록은 몇 개나 되지?"
역시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없습니다."
나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가 벌떡 얼어나는 바람에 우리는 깜짝 놀랐다. 은색 도관용 테이프 밑으로 빨간 막대들
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의자를 뒤로 걷어찼다.
"병원은? 의사들, 한때는 돈을 많이 벌던 훌륭하고 품위 있는 의사들이 와서 시간을 내
진료를 해 주는 작은 병원들이 있었어. 그들은 무료로 봉사를 해. 전에는 정부가 세를 내 주
고, 약품 같은 것들을 사는 걸 도와 주었지. 하지만 지금은 뉴트(미국 공화당의 실력자인 뉴
트 깅그리치를 가리킴: 옮긴이)가 정부를 좌지우지하는 바람에 돈줄이 끊겨 버렸어. 너희들
그런 병원에는 얼마나 냈어?"
래프터는 내가 어떻게든 해야 한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서류에서 뭔가를 갑자기 발
견하여, '젠장! 여길 봐요! 우린 병원과 무료 급식소에 50만을 냈다고요'라고 외치기라도 해
야 한다는 것 같았다.
래프터라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니다. 나는 총을 맞고 싶지 않았다. 형씨
가 보기보다 훨씬 똑똑했다.
나는 서류를 뒤적였고, 형씨는 창으로 걸어가 소형 블라인드 주위로 밖을 살폈다.
"경찰이 쫙 깔렸군."
우리가 간신히 알아들을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그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구급차도."
이어 그는 창 밖의 광경에 대해서는 잊어 버리고, 탁자 가장자리를 따라 발을 질질 끌며
걷다가 인질들 근처에서 발을 멈추었다. 인질들은 그의 모든 동작을 지켜보고 있었다. 특히
폭약에 시선을 모으고 있었다. 형씨는 천천히 총을 들어올리더니, 곧바로 콜번의 코를 겨누
었다. 1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였다.
"병원에는 얼마나 냈지?"
"안 냈습니다."
콜번은 대답하면서 눈을 질끈 감았다. 곧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나도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나는 숨을 죽였다.
"무료 급식소에는?"
"안 냈습니다."
"노숙자 합숙소에는?"
"안 냈습니다."
형씨는 콜번에게 총을 쏘는 대신, 누조를 겨냥하고 세 가지 질문을 되풀이했다. 누조도 똑
같이 대답했다. 형씨는 줄을 따라 내려가며 총을 겨누고, 똑같은 질문을 하고, 똑같은 대답
을 듣는 일을 되풀이했다. 그는 래프터도 쏘지 않고 지나갔는데, 우리 모두 그 점을 아쉬워
했다.
"3백만 달러라."
그는 역겹다는 투로 내뱉고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병들고 배고픈 사람들에게는 한 푼도 안 줘? 이 불쌍한 사람들아."
우리는 우리가 불쌍하다고 느꼈다. 순간 나는 그가 우리를 죽이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았
다.
평범한 거리의 부랑자가 어디서 다이너마이트를 손에 넣을 수 있었을까? 그리고 누가 그
에게 전선을 연결시키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을까?
해질녘이 되자 그는 배가 고프다고 했다. 그래서 나더러 상사에게 전화하여 북서부의 L
스트리트와 17번가가 만나는 곳에 있는 감리교 선교단에 식사를 주문하라고 했다.
"거기가 수프에 야채를 많이 넣어주거든."
형씨가 말했다.
"그리고 다른 데하고는 다르게 빵도 그렇게 상하지 않았고."
"무료 급식소에서 배달도 하나?"
루돌프가 믿을 수 없다는 투로 물었다. 그 말이 스피커폰을 통해 방 안에 울려퍼졌다.
"시키는 대로 하세요, 루돌프!"
나는 버럭 소리를 지르고는 덧붙였다.
"열 사람이 충분히 먹을 양을 시켜 주세요."
형씨는 전화를 끊고, 다시 내려놓으라고 했다.
우리 친구들과 경찰 한 대대가 러시아워의 차량들을 뚫고 도시를 가로질러, 조용한 작은
선교단으로 들이닥치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그곳에서는 누더기를 입은 부랑자들이
수프 그릇에 머리를 묻고 있다가 대체 무슨 일인지 궁금해 두리번거리겠지. 그때 내 친구들
은 소리칠 거야. 10인분 배달 있어요, 빵 추가.
형씨는 다시 창문으로 갔다. 헬리콥터 소리가 다시 들렸다. 그는 밖을 살피다가 뒤로 물러
서더니, 턱수염을 잡아당기며 상황에 대해 생각했다. 어떤 식의 공격 계획을 짜고 있길래 헬
리콥터까지 띄운 것일까? 어쩌면 부상자들을 운반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르지.
엄스테드는 한 시간 전부터 안달을 하고 있었고, 그 바람에 그와 손목이 연결되어 있는
래프터와 맬러머드는 당황하고 있었다. 엄스테드는 더는 참을 수 없는 것 같았다.
"어, 저, 죄송하지만, 정말이지, 어, 화장실에 좀 가야겠는데요."
형씨는 계속 턱수염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화장실? 화장실이 뭐야?"
"오줌 마렵다고요."
엄스테드는 정말 초등학교 3학년생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더는 못 참겠어요."
형씨는 방안을 둘러보다가, 커피 탁자에 놓인 도자기 꽃병을 보았다. 그는 다시 총을 휘둘
러 나에게 엄스테드를 풀어 주라고 명령했다.
"저게 화장실이야."
형씨가 말했다.
엄스테드는 싱싱한 꽃들을 꽃병에서 뽑더니 우리에게 등을 돌리고 오랫동안 오줌을 누웠
다. 우리는 눈 둘 곳이 없어 바닥만 살피고 있었다. 엄스테드가 마침내 볼일을 마치자 형씨
는 엄스테드와 나에게 회의 탁자를 창가로 옮기라고 명령했다. 탁자는 6미터 길이에, 드레이
크 & 스위니의 가구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단단한 호두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 내가 한쪽
끝에서, 엄스테드가 다른 쪽 끝에서 낑낑대며 한 번에 몇 센티미터씩 옮겼다. 형씨가 그만
됐다고 했을 때, 탁자는 2미터 정도 이동해 있었다. 형씨는 나에게 맬러머드와 래프터를 한
데 묶게 했다. 엄스테드는 자류롭게 내버려 두었다. 왜 그렇게 했는지는 평생 이해할 수 없
는 일이 되고 말았다.
이어 형씨는 여전히 묶여 있는 일곱 명의 인질들을 탁자에 앉히고 벽에 등을 기대게 했
다. 아무도 감치 이유를 묻지 못했으나, 나는 그가 저격수들로부터 그를 보호해 줄 방패를
원한다고 짐작했다. 나중에 나는 경찰이 옆 건물에 저격수들을 배치해 놓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쩌면 형씨가 그들을 보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래프터를 포함한 일곱 명은 다섯 시간 동안 서 있었던 뒤라, 앉을 수 있게 되어 한결 기
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 엄스테드와 나는 의자에 앉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형씨는 탁자 끝에
있는 자리를 차지했다. 우리는 기다렸다.
거리에서의 생활은 인내를 가르쳐 주는 모양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가만히 앉아 있는 것
이 무척 만족스러운 듯했다. 눈은 여전히 색안경 뒤에 감추고 있었고, 머리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누가 퇴거 담당자야?"
형씨가 누구에게랄 것 없이 중얼거렸다. 그는 잠시 기다렸다가 다시 그 말을 되풀이했다.
우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 마주보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는 탁자 위의 한 지점으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콜번의 오른발에서 멀리 쩔
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너희들은 집 없는 사람들을 무시했을 뿐 아니라, 그런 사람들을 거리로 내모는 것을 거
들기도 했어."
물론 우리는 같은 악보를 보고 노래를 부르듯,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우리에게 언
어 폭력을 퍼붓는다 해도, 우리는 기꺼이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우리가 주문한 음식은 7기 몇 분 전에 도착했다. 강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형
씨는 나에게 전화를 걸게 하여, 문 밖에 사람이 보이거나 사람 소리가 들리면 인질 가운데
하나를 죽이겠다고 경찰에게 경고했다. 나는 그 점을 루돌프에게 세심하게 설명했다. 나는
어떤 구출 작전도 시도하지 말라고 강조했다.
"우린 지금 협상을 하고 있단 말입니다."
루돌프는 알았다고 했다. 엄스테드는 문으로 가 자물쇠를 풀었다. 이어 형씨를 보며 다음
지침을 기다렸다. 형씨는 엄스테드 뒤에 있었다. 그의 머리로부터 30센티미터도 안 떨어진
곳에서 총을 겨누고 있었다.
"아주 천천히 문을 열어."
형씨가 말했다.
문이 열렸을 때 나는 형씨 몇 발자국 뒤에 서 있었다. 음식은 작은 수레에 실려 있었다.
사무직원들이 우리가 생산해 내는 엄청난 양의 서류를 싣고 다니는 수레였다. 수프가 담긴
커다란 플라스틱 용기 네 개가 보였다. 빵이 가득 든 갈색 종이 봉투도 보였다. 마실 것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것은 결국 알아낼 수가 없었다.
엄스테드가 복도로 한 발을 내딛고 수레를 잡아 회의실 안으로 잡아당기려 했을 때 총성
이 울려퍼졌다. 경찰 저격수가 단독으로 마당 드비어의 책상 옆 장식장 뒤에 숨어 있다가,
시야를 확보한 모양이었다. 12미터 정도의 거리였다. 엄스테드가 수레를 잡으려고 허리를 굽
혔을 때 순간적으로 형씨의 머리가 드러났는데, 저격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 머리를
날려 버린 것이다.
형씨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뒤로 비틀거렸다. 동시에 내 얼굴은 피와 액체로 뒤덮였
다. 나는 내가 맞은 것으로 생각했다. 고통 때문에 비명을 지른 기억이 난다. 엄스테드는 복
도 어딘가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다른 일곱 명은 불에 덴 개들처럼 탁자에서 뛰어내려,
모두 소리를 지르며 문쪽으로 기어갔다. 반이 나머지 반을 질질 끌고 가고 있었다. 나는 무
릎을 꿇고, 눈을 움켜쥐고, 다이너마이트가 폭발하기를 기다렸다. 잠시 추 다른 문을 향해
뛰었다. 혼란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었다. 문의 자물쇠를 따고 문을 열어젖혔다. 마지막으로
형씨를 보았을 때, 그는 우리의 값비싼 동양 양탄자 위에서 마지막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의 두 손은 양옆으로 늘어져, 붉은 전선과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스와트 녀석들이 순식간에 복도를 메웠다. 무시무시한 헬멧을 쓰고 두툼한 조끼를 입고
있었다. 그런 녀석들 수십 명이 몸을 웅크리고 손을 뻗고 있었다. 그러나 내 눈에는 흐릿하
게 번져 보일 뿐이었다. 그들은 우리를 붙들어 대기실을 지나 엘리베이터로 데려갔다.
"다쳤습니까?"
그들이 나에게 물었다.
나도 알 수 없었다. 내 얼굴과 셔츠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그리고 끈끈한 액체도 있었는
데, 나중에 의사는 그것이 뇌 척수액이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3
1층, 즉 형씨의 다이너마이트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가족과 친구들이 기다리
고 있었다. 우리의 동료들 수십 명도 사무실과 복도들을 꽉 메우고 우리의 구출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를 보자 큰소리로 환호를 했다.
나는 피범벅이었기 때문에 지하실에 있는 작은 운동실로 이끌려 갔다. 운동실은 우리 회
사 소유였지만, 변호사들은 거의 무시하는 곳이었다. 우리는 운동을 하기에는 너무 바빴다.
아마 거기서 운동을 하다 걸리면 더 많은 일을 할당받게 되었을 것이다.
나는 곧 의사들에게 둘러싸였다. 그 가운데 아내는 없었다. 그들은 우선 그 피가 내 피가 아
니라는 이야기부터 해 주어 나를 안심시켰다. 이어 일상적인 검진을 했다. 혈압은 올라가 있
었고, 맥박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의사들은 알약을 하나 주었다.
하지만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샤워였다. 그들은 나를 탁자 위에 10분 정도 눕게 하고
는 혈압 변화를 지켜보았다.
"내가 쇼크 상태입니까?"
내가 물었다.
"아닌 것 같군요."
하지만 나는 쇼크를 느끼고 싶었다. 클레어는 어디 있단 말인가? 나는 여섯 시간 동안 총
구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목숨이 왔다갔다했다. 그런데도 그녀는 다른 가족들처럼 여기 와
서 기다려 주지도 못한단 말인가.
나는 뜨거운 물에 오랫동안 샤워를 했다. 샴푸를 잔뜩 발라 세 번 머리를 감았다. 그리고
물을 뚝뚝 떨구며 한참을 서 있었다. 시간이 얼어붙은 것 같았다. 그 어떤 것도 중요하게 느
껴지지 않았다. 나는 살아 있었다. 그것이 중요했다. 숨을 쉬고, 김을 뿜고 있었다.
나는 다른 사람의 깨끗한 운동복으로 갈아입었다. 나한테는 너무 컸다. 나는 다시 탁자로
돌아가 혈압을 쟀다. 비서인 폴 리가 들어와 나를 한참 안아 주었다. 나는 그런 포옹을 절실
하게 원하고 있었다.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클레어는 어디 있지?"
내가 물었다.
"병원에서 비상 대기 중이래요. 내가 병원으로 전화를 해 보았어요."
폴리는 우리 결혼 생활의 끝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괜찮으세요?"
"그런 것 같아."
나는 의사들에게 고맙다고 하고 운동실을 나왔다. 루돌프가 복도까지 나와 나를 어색하게
포옹했다. 그는 내가 마치 무슨 훌륭한 일이라도 한 것처럼 '축하한다'는 말을 썼다.
"내일은 일을 안 해도 좋네."
그가 말했다. 이 사람은 하루만 쉬면 내 문제가 모두 치유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내일 생각은 해 본 적도 없는데요."
내가 대꾸했다.
"자네한테는 휴식이 좀 필요해."
그는 마치 의사들도 미처 생각해 내지 못한 이야기를 하듯이 그 말을 덧붙였다.
배리 누조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료 인질들은 이미 자리를 뜨고 없었다.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손목에 난, 끈에 쓸린 자국뿐이었다.
대학살이 최소한의 피해로 끝이 나고, 좋은 편이 승리를 서두고 웃음을 짓자, 드레이크 &
스위니의 흥분은 금방 가라앉았다. 인질극이 벌어지는 동안 대부분의 변호사와 사무직원들
은 형씨와 폭탄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1층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폴리는 내 외투를
가져왔다. 나는 커다란 운동복 위에 외투를 입었다. 거기에 술 장식이 달린 구두를 신고 있
으니 이상해 보였으나, 상관하지 않았다.
"바깥에는 기자들이 있어요."
폴리가 말했다.
아, 그렇군, 얼론. 얼마나 대단한 기삿거리인가! 흔해빠진 총격사건이 아니라, 거리의 미치
광이가 변호사 한 무더기를 인질로 잡았던 사건이었으니.
하지만 그들은 제대로 된 기삿거리를 건질 수가 없었다., 안 그런가. 변호사들은 무사했고,
나쁜 편은 총을 맞았고, 그가 쓰러지는 바람에 폭탄도 불발로 끝나고 말았으니. 그러나 그들
은 아쉬워하겠지. 아, 이렇게 시시하게 끝나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총성, 그리고 폭탄. 하얀
섬광과 함께 유리창들이 박살나고, 팔다리들이 거기에 떨어지고. 그것을 채널 나인에 저녁
뉴스 톱뉴스로 생중계할 수도 있었을 텐데.
"내가 모셔다 드릴께요."
폴리가 말을 이었다.
"나를 따라 오세요."
누군가가 내게 할 일을 이야기해 준다는 것이 무척 고마웠다. 내 머리는 느리게 돌아가고
있었다. 생각하는 것 자체가 귀찮았다. 정지 화면이 하나씩 지나갈 뿐, 플롯도 없고, 배경도
없었다.
우리는 뒷문을 통해 1층을 빠져 나왔다. 밤공기는 차고 얼얼했다. 허리가 아프도록 그 달
콤함을 들이마셨다. 폴리는 그녀의 차를 가지러 달려갔고, 나는 건물 모퉁이에 숨어 앞에서
벌어지는 서커스를 지켜보았다. 경찰차, 구급차, 텔레비전 중계차, 심지어 소방차까지 와 있
었다. 이제 짐을 싸서 떠나고 있었다. 형씨를 시체 보관소로 실어가기 위해 기다리는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살아 있어! 나는 살아 있어! 나는 그 말을 되풀이하며, 처음으로 웃음을 지었다. 나
는 살아 있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짧지만 진지하게 감사 기도를 드렸다.
소리들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우리는 말없이 앉아 있었다. 폴리는 운전대를 잡고 천천히
차를 몰며, 내가 무슨 말인가 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순간 내 귀에 저격수 라이플의 귀
를 찢는 듯한 총성이 들린 것이다. 그리고 다른 인질들이 떼를 지어 탁자에서 내려와 문으
로 다가가는 소리.
내가 뭘 보았더라? 탁자 쪽을 흘끗 보았을 때, 일곱 명은 뚫어져라 문을 보고 있었다. 내
가 다시 형씨에게로 눈길을 돌렸을 때, 그는 총을 들어올려 엄스테드의 머리를 겨누고 있었
다. 그가 총을 맞았을 때, 나는 그의 바로 뒤에 있었다. 어떻게 총알이 그를 뚫고 나서 나까
지 뚫지 않았을까? 총알은 벽이나 문이나 사람도 뚫는다던데.
"그 사람은 우리를 죽일 생각이 없었어."
나는 간신히 들릴 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폴리는 내 목소리를 듣지 안심이 되는 것 같았다.
"그럼 뭘 하고 있었던 거죠?"
"모르겠어."
"원하는 게 뭐였어요?"
"말하지 않았어. 사실 그 사람은 놀라울 정도로 말이 없었어. 우리는 그냥 몇 시간 동안
서로 보고만 있었어."
"왜 그 사람이 경찰과 이야기를 하려고 하지 않은 거죠?"
"누가 알겠어? 그게 그 사람의 가장 큰 실수야. 그가 전화만 하게 해 주었다면, 내가 나서
서 그가 우리를 죽일 생각이 없다고 경찰을 설득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다고 그를 죽인 경찰을 탓하는 건 아니겠죠?"
"아니야. 잊지 말고 경찰에게 감사 편지를 쓰라고 말해 줘."
"내일은 출근하실 건가요?"
"아니면 달리 뭘 하겠어."
"그냥 내일은 쉬시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쉬려면 1년을 쉬어야지. 하루로는 아무 도움이 안 돼."
내 아파트는 조지타운의 P 스트리트에 있는 연립주택의 3층이었다. 폴리는 도로 가에 차
를 세웠다. 나는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 창문이 컴컴한 것을 보니, 클레어는
아직 집에 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내가 클레어를 만난 것은 워싱턴으로 이사오고 나서 한 주 뒤였다. 나는 막 예일 법대를
졸업하고 부유한 법률 회사의 좋은 자리에 취직을 한 몸이었다. 나와 동기인 다른 50명의
신입들과 마찬가지로 화려한 미래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클레어는 아메리칸 대학에서 정치
학과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한때 로드 아일랜드 주 주지사를 지냈으며,
그녀의 가문은 수백 년의 전통을 지닌 명문이었다.
드레이크 & 스위니는 대부분의 대형 법률 회사들처럼 첫해에 신병 훈련소와 같은 과정을
밟게 했다. 나는 하루 15시간, 일 주일에 엿새 일을 했고, 일요일이면 클레어와 주말 데이트
를 했다. 그리고 일요일 밤이면 다시 회사로 나왔다. 우리는 결혼을 하면 더 오랜 시간을 함
께 있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침대는 함께 쓸 수 있었으나, 우리가 하는
일이라고는 대부분 잠을 자는 것뿐이었다.
결혼식은 성대했고 신혼여행은 짧았다. 신혼의 광채가 흐릿해지면서, 나는 다시 회사일에
전념하여 일 주일에 90시간 일을 했다. 결혼 후 석 달 동안, 우리는 섹스 없이 18일을 보낸
적도 있었다. 클레어가 세어 보았다.
클레어는 첫 몇 달 동안은 재미있어 했으나, 내가 그녀에게 소홀한 것에 점차 짜증을 내
기 시작했다. 그녀를 탓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어소시에이트들은 드레이크 & 스위
니의 신성한 사무실에서 불평을 하지 않는 법이었다. 각 기 가운데 파트너가 되는 숫자는
10퍼센트도 안 되었다. 따라서 경쟁은 무시무시했다. 그러나 파트너가 되었을 때의 보상은
컸다. 1년에 적어도 백만 달러는 벌 수 있었다. 따라서 시간당 청구서를 많이 발행하는 것이
아내를 행복하게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었다. 따라서 이혼이 흔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 루돌프에게 내 짐을 덜어 달라는 말을 한다는 것은 꿈도 꾸지 않았다.
결혼 첫해가 끝날 무렵 클레어는 무척 불행한 모습이었으며, 우리는 말다툼을 하기 시작
했다.
그녀는 의대에 가기로 결심했다. 집에 앉아 텔레비전만 보고 있는 것도 싫증이 났는지, 의
대에 가면 적어도 나처럼 바쁠 수는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나도 좋은 생각이라고
찬성했다. 그것으로 내 죄책감을 많이 덜어 버릴 수 있었으니까.
입사 후 4년이 지나자, 회사에서는 서서히 파트너가 될 가능성에 대한 암시를 흘리기 시
작했다. 많은 어소시에이트들은 그 암시를 소중하게 간직하고, 동료들이 받은 것과 비교해
보았다. 너는 파트너로 가는 추월 차선에 진입해 있다. 그것이 내가 받은 암시였다. 따라서
더 열심히 일을 하라는 암시도 동시에 받았지만.
클레어는 집에 있는 시간을 나보다 더 줄이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우리 둘 다 극단적인
일 중독 상태에 빠져들게 되었다. 우리는 이제 싸우지 않았다. 그냥 조용히 멀어져 갈 뿐이
었다. 그녀는 그녀 나름의 친구와 관심사가 있었고, 나는 또 내 나름의 것이 있었다. 다행히
도 우리는 자식을 낳는 실수는 저지르지 않았다.
내가 일을 이렇게 만들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래도 우리는 한때 사랑을 했는데. 그
사랑을 그냥 놓아 버리다니.
나는 어두운 아파트로 들어서면서, 몇 년 만에 처음으로 클레어를 원했다. 죽음과 직면하
고 나면,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은 법이다. 누가 나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느끼고 싶
고, 누가 쓰다듬어 주기를 바라고, 누가 나를 아낀다는 말을 듣고 싶은 것이다.
얼음을 넣은 보드카를 만들어 서재의 소파에 앉았다. 나는 삐쳐서 씩씩대고 있었다. 혼자
였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내 생각은 문득 형씨와 보낸 여섯 시간의 일 쪽으로 흘러가곤 했
다.
보드카 두 잔을 마신 뒤 문간에서 클레어가 오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자물쇠를 따더니
"여보!" 하고 불렀다.
나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여전히 삐쳐서 씩씩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서재로 돌아오더니,
나를 보고 발을 멈추었다.
"당신 괜찮아?"
그녀가 진짜 근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아."
내가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그녀는 가방과 외투를 내려놓더니, 소파로 걸어와 나를 굽어보았다.
내가 물었다.
"어디 있었어?"
"병원에."
"그랬겠지."
나는 보드카를 길게 한 모금 들이키고는 덧붙였다.
"이봐, 난 심한 일을 겪었어."
"다 알고 있어. 마이클."
"알고 있다고?"
"물론 알고 있지."
"그런데 대체 어디 있었던 거야?"
"병원에."
"아홉 명이 어떤 미친놈한테 여섯 시간 동안 인질로 잡혀 있었어. 여덟 명의 가족은 걱정
이 되어서 찾아왔어. 어쨌든 우리는 운이 좋아 무사했지. 다들 가족과 함께 돌아가고, 나는
비서 차를 얻어타고 집에 왔어."
"갈 수가 없었어."
"울론 올 수가 없었겠지. 내가 참 생각이 모자란 놈이야."
그녀는 소파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우리는 서로 노려보았다.
"병원에서 못 가게 했어."
클레어는 아주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는 인질극에 대해 알고 있었고, 사상자가 생길 가능성에 대비하고 있었어. 그건 그런
상황에서는 정상적인 절차야. 경찰에서 병원에 알리면, 병원에 있는 의사들은 모두 비상 대
기하고 있는 거라고."
나는 다시 보드카를 한 모금 길게 마시며 날카로운 대꾸가 될 만한 말을 찾고 있었다.
클레어가 말을 이었다.
"나는 당신 회사로 도우러 갈 수가 없었어. 병원에서 비상 대기하고 있었으니까."
"전화는 했어?"
"하려고 했어. 하지만 계속 통화중이었어. 마침내 전화가 연결되었는데, 경찰이 받더니 끊
어 버렸어."
"상황이 끝난 지 두 시간이 지났어. 그 동안 어디 있었어?"
"수술실에. 남자애가 수술 중에 죽었어. 교통사고였어."
"안타까운 일이군."
나는 의사들이 얼마나 많은 죽음과 고통을 마주하는지 상상도 못했다. 나에게는 형씨가
내 눈으로 본 두 번째 주검이었다.
"나도 마찬가지 심정이야."
그녀는 그 말과 함께 부엌으로 가더니 포도주 잔을 들고 돌아왔다. 우리는 한동안 어두컴
컴한 곳에 앉아 있었다. 대화를 해 본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
클레어가 물었다.
"아니. 지금은 아니야."
정말로 하고 싶지 않았다. 아까 먹은 약에 알코올이 섞이자, 숨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나
는 형씨를 생각했다. 총을 휘두르고, 배에는 다이너마이트를 묶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얼마
나 침착하고 평화로워 보였는지, 그는 오랫동안 침묵이 계속되어도 전혀 구애받지 않았다.
지금 내가 원하는 것도 침묵이었다. 이야기는 내일 해야지.
4
화학 물질은 다음날 새벽 4시까지 효과가 있었다. 눈을 뜨자마자 형씨의 끈적끈적한 뇌
척수액 냄새가 콧구멍을 얼얼하게 파고들었다. 어둠 속에서 잠시 미칠 것만 같았다. 나는 코
와 눈을 문지르며 소파 주위에서 허우적거렸다. 마침내 누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클레
어는 내 옆의 의자에서 자고 있었다.
"괜찮아."
클레어가 작은 소리로 말하며 내 어깨를 어루만졌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악몽일 뿐이야."
"물 좀 갖다 줄래?"
클레어는 부엌으로 갔다.
우리는 한 시간 동안 이야기를 했다. 나는 기억나는 것은 죄다 이야기했다. 그녀는 내 곁
에 앉아 물잔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내 무릎을 쓰다듬으며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었다.
사실 우리는 몇 년간 이야기다운 이야기를 나눈 적이 거의 없었다.
그녀는 7시에 회진을 해야 했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와플과 베이컨으로 아침 식사를 준
비했다. 우리는 부엌 카운터에서 식사를 했다. 앞에는 작은 텔레비전이 있었다. 6시 뉴스는
인질극과 함께 시작되었다. 위기 상황 동안 건물을 찍은 장면들이 나왔다. 밖에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상황이 끝나자 나와 함께 인질로 잡혀 있던 동료 몇 명이 서둘러 건물을 떠나
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 귀를 시끄럽게 했던 헬리콥터들 가운데 적어도 하나는 방송국 소속
이었다. 그 헬리콥터의 카메라가 망원 렌즈로 창문을 잡은 장면들이 있었다. 형씨가 창문으
로 바깥을 내다보는 모습이 몇 초 동안 나왔다.
그의 이름은 드본 하디였다. 나이는 마흔다섯. 베트남 참전용사였으며, 약간의 전과가 있
었다. 이름 아침 뉴스의 진행자 뒤쪽 화면에 그가 강도로 체포되었을 때 찍은 얼굴 사진이
비쳐졌다. 형씨와 전혀 안 닮은 모습이었다. 턱수염도 없고, 색안경도 안 쓰고, 훨씬 더 젊어
보였다. 그는 마약 복용 경험이 있는 노숙자로 묘사되고 있었다.
"동기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아직 가족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우리 회사에서는 아무런 논평을 하지 않았다. 사건 보도는 용두사미로 끝나고 말았다.
다음은 날씨였다.
"오후 늦게 눈이 많이 올 것으로 예상됩니다."
2월 12일이었다. 이미 새로운 강설량 기록이 세워지고 있었다.
클레어가 나를 회사까지 태워다 주었다. 6시 40분이었음에도 주차장에는 내가 두고 간 렉
서스 외에도 수입차 몇 대가 주차해 있었다. 우리 주차장은 비는 법이 없었다. 늘 사무실에
서 자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클레어에게 오전 중에 전화를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
고 병원에서 점심을 먹도록 해 보자고 이야기했다. 그녀는 나에게 적어도 하루 이틀은 좀
쉬엄쉬엄 하라고 말했다.
나더러 어쩌라는 말인가? 소파에 누워 약이나 먹고 있으라는 말인가? 모두들 하루 정도
는 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마 그리고 나서는 다시 전속력으로 일을 해 주
기를 기대하는 것 같았다.
바짝 긴장하고 있는, 로비의 두 경비원에게 아침 인사를 했다. 네 개의 엘리베이터 가운데
세 개가 열리니 채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 가운데 선택을 할 수가 있었다. 나는 형씨
와 내가 함께 탔던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와 동시에 현실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수많은 질문이 동시에 떠올랐다. 왜 그는 우리 건물을 골랐을까? 왜 우리 회사를? 로비로
들어서기 전에는 어디에 있었을까? 평소에는 프런트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던 경비원들은 다
어디 가 있었을까? 왜 하필이면 나를 골랐을까? 이곳에는 하루 종일 수백 명의 변호사들이
들락거리는데. 왜 하필이면 6층이었을까?
그의 목적이 무엇이었을까? 부유한 변호사들을 모아 놓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지 않는다고
질책하기 위하여 폭탄을 몸에 두른 채 인질극을 벌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드본 하디의 목숨
이 아무리 하잘것없다 하더라도, 그런 식으로 목숨을 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보다 더 부유한 사람들을 고를 수도 있었을 텐데. 더 탐욕스러운 사람들을 골랐을 수도
있을 테고.
"누가 퇴거 담당자야?"
형씨의 질문에는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알아보면 오래 걸리지도 않을 일이
었다.
엘리베이터가 멈추었다. 나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오늘 아침에는 아무도 뒤따라오지
않았다. 마담 드비어는 이 시간에는 아직 어딘가에서 잠들어 있을 터였다. 6층은 조용했다.
나는 마담 드비어의 책상 앞에 발을 멈추고, 잠시 회의실로 통하는 두 개의 문을 응시했다.
가까운 곳에 있는 문을 천천히 열어 보았다. 총알이 형씨의 머리에 박힐 때 엄스테드가 서
있던 문이었다. 나는 깊은 숨을 쉬고 전등 스위치를 올렸다.
달라진 것은 없었다. 회의실 탁자와 의자들은 완벽하게 그대로였다. 형씨가 죽어 넘어졌던
동양산 고급 바닥 깔개는 더 예쁜 것으로 교체되어 있었다. 벽에는 새로 페인트가 칭해져
있었다. 래프터가 서 있던 자리 위의 천장에 났던 총알 수멍도 사라지고 없었다.
드레이크 & 스위니는 어제 있었던 사건을 없었던 일로 만들기 위해 밤새 힘을 좀 쓴 모
양이었다. 오전 중에 호기심이 강한 사람 몇 명이 틀림없이 이 방을 들여다보겠지만, 이 정
도면 입을 떡 벌릴 만한 것은 찾지 못할 것 같았다. 사람들이 1, 2분 정도 일을 못하고 시간
을 낭비하는 것으로 끝이 나고 말 것 같았다. 우리의 청결한 사무실에 거리의 쓰레기 흔적
이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냉엄한 위장 전술이었다. 슬프게도 나는 그런 행동 뒤에 숨은 원리를 이해하고 있었다. 나
도 부유한 백인의 한 사람이니까. 나는 여기에서 뭘 기대했을까? 기념관? 형씨의 동료 노숙
자들이 갖다 놓은 꽃다발?
나도 내가 뭘 기대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새 페인트 냄새는 어쨌든 역겨웠다.
매일 아침 내 책상의 똑같은 자리에는 『월 스트리트 저널』과 『워싱턴 포스트』가 놓여
있었다. 그것을 거기에 갖다 놓는 사람의 이름은 오래 전에 잊어 버렸다. 『워싱턴 포스트』
의 메트로 섹션의 1면, 접힌 부분 아래쪽에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은 드본 하디의
얼굴 사진이 박혀 있었다. 그리고 어제의 작은 인질극에 대한 큰 기사가 실려 있었다.
나는 그 기사를 빨리 읽었다. 내가 어떤 기자보다도 세부적인 내용을 더 잘 안다고 생각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몇 가지 새로 알게 된 사실들이 있었다. 빨간 막대들은 다이너마이
트가 아니었다. 형씨는 빗자루 손잡이를 두어 개 가져다가 톱으로 토막을 낸 다음, 그 주위
에 그 불길해 보이는 은색 테이프를 감은 것이다. 그리고 그걸 가지고 우리에게 그렇게 겁
을 준 것이다. 총은 44구경 자동으로, 훔친 것이었다.
『워싱턴 포스트』였기 때문에 기사는 피해자들보다 드본 하디를 더 많이 다루었다. 물론
드레이크 & 스위니에서는 누구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나로서는 만족스러운
일이었다.
'14번가 법률 상담소'의 책임자인 모디카이 그린의 말에 따르면 드본 하디는 국립 수목원
에서 오랫동안 청소부로 일을 했다. 그러다 예산 절감 때문에 일자리를 잃었다. 그는 강도죄
로 감옥에서 몇 달을 보낸 뒤, 거리를 떠돌게 되었다. 그는 알코올, 마약과 씨름을 하였으며,
좀도둑질로 붙들려 가곤 했다. 그린의 법률 상담소가 그를 몇 번 대리한 적이 있었다. 그러
나 그의 변호사도 드본 하디의 가족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파악을 못하고 있었다.
그린은 동기에 대해서도 별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드본 하디가 낡은 창고에서 최근에
퇴거당했다는 말은 했다.
퇴거란 법률가들이 시행하는 법적 조치였다. 워싱턴에 있는 수천 개의 법률 회사들 가운
데 형씨를 거리로 내몬 회사가 어디인지는 기사에 안 나와 있어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
다.
그린의 말에 따르면 14번가 법률 상담소는 자선단체의 자원을 받으며 오직 노숙자를 상대
로만 일을 하고 있었다.
"연방 지원금을 받을 때는 변호사가 일곱 명이었는데, 지금은 둘로 줄었습니다."
기사에서는 그렇게 그린의 말을 이용하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월 스트리트 저널』은 그 사건에 대해 언급도 하지 않았다. 만일 전국
에서 다섯 번째로 큰 부자 회사의 아홉 명의 법인 변호사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죽었거나
약간의 상처만 입었어도, 아마 그 기사는 『월 스트리트 저널』의 1면을 차지했을 것이다.
커 큰 기삿거리가 되지 않았던 게 다행이야. 나는 많은 할 일을 앞에 두고 멀쩡한 몸으로
책상이 앉아 서류를 읽고 있지 않은가. 자칫 잘못했다면 형씨와 함께 시체 보관소에 들어가
있을 수도 있는 몸이었는데.
폴리는 8시 몇 분전에 출근했다. 얼굴에 환한 웃음을 지으며 들어와 집에서 만든 쿠키가
담긴 접시를 내밀었다. 그녀는 내가 출근한 것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사실 인질로 잡혔던 아홉 명 모두가 출근을 했다. 예정보다 훨씬 빠른 속도였다. 사실 집
에서 마누라한테 응석이나 부리고 있었다가는 자신이 약하다는 것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꼴
이 되었을 것이다.
"아서가 전화를 했는데요."
폴리가 말했다. 우리 회사에는 아서가 적어도 열 명은 있었지만 그 가운데 오직 한 아서
만이 성 없이 사랑들 입에 오르내릴 수 있었다. 아서 제이콥스는 선임 파트너였으며, 최고
경영자였으며, 회사의 핵심 추진제였으며, 우리 모두가 매우 존경하고 찬미하는 인물이었다.
이 회사에 심장이나 영혼이 있다면 바로 아서였다. 나는 입사 후 7년 동안 그와 딱 세 번
이야기를 해보았다.
나는 아서에게 괜찮다고 말했다. 그는 내가 곤경에서도 용기와 품격을 보여 준 것을 칭찬
했다. 그 말을 듣자 내가 마치 영웅이라도 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인질극 상황에서의 내
행동을 아서가 어떻게 알았을까. 아마 먼저 맬러머드와 이야기를 했을 것이고, 그 다음에 순
서대로 사다리를 타고 내려왔을 것이다. 그러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퍼져나가고, 우스개
소리들도 퍼져나갔겠지. 엄스테드의 꽃병 사건에서는 박장대소가 터졌을 것이다.
아서는 10시에 회의실에서 어제의 인질들을 만나고 싶다고 하였다. 우리의 진술을 비디오
에 녹화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왜 녹화를 하는 거죠?"
내가 물었다.
"소송부 친구들이 그게 좋겠다고 했네."
나이 여든임에도 목소리는 면도날 같았다. 아서가 말을 이었다.
"그자의 가족이 아마 경찰에 소송을 제기할 걸세."
"물론 그러겠죠."
"그러면 우리도 피고가 될 수 있네. 요새는 사람들이 아무것이나 가지고 다 소송을 거니
까 말일세."
고마운 일이죠. 하마터면 나는 그렇게 말할 뻔했다. 소송이 없다면 우리 같은 사람들이 어
떻게 먹고살겠습니까?
나는 걱정해 주어서 고맙다고 말했다. 아서는 전화를 끊었다. 아마 다음 인질에게 전화를
하겠지.
9시 전부터 방문객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호의를 보이는 사람들과 수다꾼들이 끊이지
않고 찾아와 내 사무실 근처에서 얼쩡거렸다. 물론 심각한 표정으로 내 걱정을 해 주기도
했지만, 동시에 자세한 이야기도 몹시 궁금해하였다. 나는 할 일이 산더미 같았지만, 일에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찾아오다가 잠시 비는 시간에 나는 내 관심을 기다리고 있
는 서류들의 대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정신이 멍했다. 손이 그쪽으로 가지 않았
다.
전과 같지가 않았다. 일은 중요하지 않았다. 내 책상 위에 있는 것들은 생사를 좌우하는
문제들이 아니었다. 나는 죽음을 보았다. 나 스스로 죽음을 맛볼 뻔했다. 그냥 툭 털어 버리
고 아무 일도 없었던 거처럼 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다니, 내가 순진했지.
나는 드본 하디를 생각했다. 여러 색깔의 전선들이 사방으로 뻗어 있는 빨간 박대들을 생
각했다. 그는 그런 장난감을 만들고, 침투 계획을 짜느라 많은 시간을 보냈다. 또 총을 훔치
고, 우리 회사의 위치를 알아냈다. 그리고 결정적인 실수를 하는 바람에 목숨을 내 놓아야
했다. 그런데도 나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그에게 신경을 쓰는 사람이 한 사람도,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마침내 사무실을 나오고 말았다. 찾아오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이 자꾸 이야기를 걸어오고 있었다. 기자 두 명이 전화를 하기까지 했다. 나는
폴리에게 볼일이 있다고 말했다. 폴리는 아서와의 약속을 상기시켜 주었다. 나는 차고 가서
시동을 걸고 히터를 켰다. 차 안에 한참 앉아 상황 재연에 참여할지 말지 고민했다. 빠지면
아서는 기분이 나쁠 것이다. 아서와 만날 기회를 걷어차는 사람은 없으니까.
차를 몰고 밖으로 나갔다. 멍청한 짓을 할 수 있는 드문 기회였다. 나는 상처를 입은 사람
이었다. 떠나야 했다. 아서를 비롯한 회사 사람들도 나한테 이 정도의 여유는 주어야 했다.
조지타운 방향으로 차를 몰았지만, 특별히 염두에 둔 곳은 없었다. 먹구름이 하늘을 메우
고 있었다. 사람들은 보도에서 종종걸음을 쳤다. 제설 작업반이 준비를 하고 있었다. M 스
트리트에서 거지를 한 사람 지나치면서, 저 사람이 드본 하디를 알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눈보라가 치면 노숙자들은 어디로 갈까?
병원에 전화를 걸어 보았으나, 아내는 몇 시간 동안 급한 수술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만 전해 들었다. 그것으로 병원 식당에서의 우리의 로맨틱한 식사는 시작도 하기 전
에 끝아 나 버리고 말았다.
방향을 틀어 북동부로 향했다. 로건 서클을 지나, 우범지대로 진입하여, 마침내 14번가 법
률 상담소를 찾아냈다. 북서부의 14번가와 Q 스트리트가 만나는 곳이었다. 도로 가에 차를
세웠다. 이것으로 내 렉서스를 보는 것도 마지막이겠지.
상담소는 붉은 벽돌로 지은 3층짜리 빅토리아풍 저택의 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손댈 데가
많은 건물이었다. 꼭대기층의 창문들은 낡은 합판으로 가려져 있었다. 옆집은 지저분한 세탁
소였다. 마약을 파는 곳들도 멀지 않겠지.
입구에는 밝은 노란색 차양이 있었다. 문을 두드려야 할지 그냥 밀고 들어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문 손잡이를 돌려 다른 세계로 발을 들여
놓았다.
이곳도 말하자면 법률 사무소였다. 그러나 대리석과 마호가니로 꾸며진 드레이크 & 스위
니와는 매우 다른 곳이었다. 내 눈앞의 커다란 방에는 네 개의 금속 책상이 있었는데, 각각
의 책상에는 파일들이 30센티미터 높이로 빽빽이 쌓여 있어 숨이 막힐 정도였다. 책상들 주
위의 닳아빠진 양탄자 위에도 파일들이 위태롭게 쌓여 있었다. 쓰레기통은 가득 찼고, 구겨
버린 규격 용지들이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한쪽 벽에는 다양한 색깔의 파일 캐비닛들
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워드프로세서와 전화기들은 십 년은 된 것들이었다. 나무 책꽂이는
책의 무게를 못 견디고 가운데가 처져 있었다. 마틴 루터 킹의 크고 바랜 사진이 뒤쪽 벽에
비뚜름하게 걸려 있었다. 그 방으로부터 작은 사무실 몇 개가 가지를 뻗어나가고 있었다.
혼잡하고 지저분한 곳이었지만, 나는 그곳에 매혹되었다.
대가 세 보이는 남미계 여자가 잠시 나를 쳐다보다가 타자 치던 손을 멈추고 입을 열었
다.
"누굴 찾아왔나요?"
그것은 질문이라기보다는 도전에 가까웠다. 드레이크 & 스위니의 안내원이 그런 식으로
인사를 했다가는 그 자리에서 해고를 당했을 것이다.
책상 한켠에 압정으로 붙여 놓은 명패를 보니 그녀의 이름은 소피아 맨도사였다. 나는 곧
그녀가 단순한 안내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옆의 어떤 방에서 커다란 고함 소리가
터져나왔다. 나는 깜짝 놀랐으나, 소피아는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았다.
"모디카이 그린을 찾아왔는데요."
나는 정중하게 말했다. 그 순간 고함소리에 뒤이어 목소리의 주인공이 자기 사무실에서
앞방으로 쿵쿵 소리를 내며 걸어나왔다. 한 걸음 떼어놓을 때마다 바닥이 흔들렸다. 그는 방
건너편의 에이브러험이라는 사람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소피아는 그 사람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더니, 나에게서 눈길을 거두고 다시 하던 일로 돌
아갔다. 그린은 거구의 흑인이었다. 키가 적어도 190센티미터는 될 것 같았고, 몸통도 널찍
하여 근수도 상당히 나갈 것 같았다. 나이는 50대 초반이었으며, 잿빛 턱수염에 빨간 테의
동그란 안경을 쓰고 있었다. 그는 나를 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다시 에이브러
험을 향해 소리를 지르며 삐걱이는 바닥을 가로질렀다. 그는 어떤 사무실로 사라지더니, 잠
시 후에 다시 혼자 나타났다.
그는 다시 나를 보더니 말했다.
"무슨 일이오?"
나는 앞으로 다가서며 내 소개를 했다.
"만나서 반갑소."
그러나 말뿐이었다. 그가 덧붙였다.
"그런데 무슨 일이오?"
"드본 하디 때문입니다."
그는 나를 잠시 보더니, 소피아 쪽을 흘끗 보았다. 그녀는 자기 일에 몰두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사무실 쪽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를 따라 가로 세로가 각각 3미터 조금 넘는
정사각형의 방으로 들어갔다. 창문은 없었고, 바닥에는 공간이 남는 곳마다 마닐라 봉투와
낡은 법률류 서적들이 빽빽이 쌓여 있었다.
나는 그에게 금박 장식이 된 드레이크 & 스위니 명함을 내밀었다. 그는 얼굴을 잔뜩 찌
푸리고 명함을 살폈다. 이윽고 그는 명함을 되돌려 주며 말했다.
"빈민가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오신 거구려?"
"아닙니다."
나는 명함을 받으며 말했다.
"그럼 무슨 일이오?"
"이야기를 좀 하러 왔습니다. 하디 씨를 쏜 총알에 나도 맞을 뻔 했거든요."
"당신도 그 방에 있었소?"
"네."
그는 깊은 숨을 쉬더니 얼굴을 폈다. 그는 내 옆에 있는 유일한 의자를 가리켰다.
"앉으시오. 하지만 바지가 더러워질지도 모르겠소."
우리 둘 다 의자에 앉았다. 내 무릎이 그의 책상에 닿았다. 나는 두 손을 외투 호주머니
깊숙이 찔러 넣고 있었다. 그린 뒤에서 라디에이터가 덜그덕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우
리는 서로 마주보다, 이윽고 눈길을 돌렸다. 내가 찾아온 것이니, 내가 먼저 말을 해야 했다.
그러나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안 좋은 날이었겠구려."
그의 신경질적이니 목소리는 낮아져 있었다. 동정적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하디만큼 안 좋았을 수는 없죠. 신문에서 그린 씨 이름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여기 오게
된 겁니다."
"내가 어떻게 해 주어야 할지 모르겠구려."
"하디의 가족이 소송을 제기할까요? 그렇다면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안 좋을 수도 있
을 것 같습니다."
"가족은 없소. 그리고 큰 소송도 없을 거요. 내가 좀 시끄럽게 굴겠지. 아마 하디를 쏜 경
찰관은 백인일 거요. 따라서 시에서 돈 몇 푼을 짜낼 수도 있을 거요. 어쩌면 불법 방해라고
걸고 합의금을 받아낼 수도 있을 거요. 하지만 나도 뭐 재미있어서 그러는 건 아니오."
그는 손으로 자기 책상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내가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난 그 경찰관은 보지 못했습니다."
나는 처음으로 그 사실을 깨달았다.
"소송 이야기는 그만둡시다. 그것 때문에 여기 온 거요?"
"나도 왜 내가 여기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출근
을 했습니다. 하지만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차를 몰고 나왔는데, 여기에 오게
된 겁니다."
그는 천천히 머리를 흔들고 있었다. 마치 내 말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보였다.
"커피 좀 드시겠소?"
"됐습니다. 그린 씨는 드본 하디를 잘 아셨겠군요."
"그래요. 드본은 이곳에 자주 왔소."
"지금은 어디 있습니까?"
"아마 워싱턴 종합병원 시체 보관소에 있을 거요."
"가족이 없으면 그는 어떻게 됩니까?"
"시에서 매장해 주지. 책에 나오는 용어로는 극빈자 장례라고 하오. RFK 경기장 근처에
그런 사람들을 묻는 묘지가 있소. 한번 가보쇼. 가족이 찾아가지 않는 시신이 얼마나 많은지
알면 놀랄 거요."
"그럴 것 같군요."
"사실 당신한테는 노숙자의 삶 하나하나가 놀라운 일일 거요."
가볍게 한번 맞은 셈이었으나, 나는 싸움을 할 기분이 아니었다.
"혹시 하디가 에이즈에 걸렸는지 안 걸렸는지 아십니까?
그는 고개를 뒤로 젖히더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잠시 머리 속에서 내 말을 굴려 보는 것
같았다.
"그건 왜 묻소?"
"나는 하디의 뒤에 서 있었습니다. 그의 뒤통수가 터졌고, 나는 얼굴이 피범벅이 되었죠.
그래서요."
그렇게 말하자, 모디카이 그린은 나를 나쁜 편이 아니라 평범한 백인으로 보는 것 같았다.
"그 친구가 에이즈에 걸렸던 것 같지는 않은데."
"죽으면 확인해 보나요?"
"노숙자들이 죽었을 때 말이오?"
"네."
"대부분의 경우에는. 드본은 평범하게 죽지 않았지만."
"확인해 주실 수 있나요?"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약간 더 누그러진 모습이었다.
"그럼."
그는 머뭇머뭇 대답하더니, 호주머니에서 펜을 꺼냈다. 그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여기 온 거요? 에이즈가 걱정이 되어서?"
"그것도 한 가지 이유인 것 같습니다. 그린 씨 같으면 안 그러겠습니까?"
"당연히 그러겠지."
에이브러험이 들어왔다. 마흔 가량의, 작은 몸집에 흥분 잘하는 남자로, 나는 공익법(공공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집단 소송 및 기타의 법적 절차를 다루는 법률 분야 : 옮긴이) 전문
변호사요, 하고 이마에 써 붙이고 다니는 사람처럼 보였다. 유대인에, 짙은 턱수염에, 뿔테
안경에, 구겨진 블레이저 상의에, 주름진 카키 바지에, 더러운 운동화, 거기에 세상을 구하려
하는 사람 특유의 무게 잡는 모습까지.
그는 내가 있는 것을 무시했다. 그린도 사교적인 면에 밝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린이 에이
브러험에게 말했다.
"눈이 엄청나게 올 거라는 예보던데. 가능한 모든 합숙소를 개방하게 해야 하네."
"알고 있습니다."
에이브러험이 쏘아붙이더니 갑자기 나가 버렸다.
"바쁘시군요."
내가 말했다.
"그러니까 그게 다요? 혈액 검사?"
"네.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혹시 하디가 왜 그랬는지는 아십니까?"
그린은 빨간 안경을 벗더니 휴지로 안경을 닦고 눈을 문질렀다.
"이런 사람들 가운데 많은 수가 그렇듯이, 그도 정신이 멀쩡하지는 않소. 거리에서 오래
살면서, 술에 젖고, 마약에 취하고, 추운데서 자고, 경찰이나 깡패들의 발에 채이다 보면, 다
들 미치게 되지. 게다가 그에게는 화가 날 만한 일이 있었소."
"퇴거 말이로군요."
"그렇소. 몇 달 전 그는 뉴욕 애비뉴와 플로리다 애비뉴가 만나는 모퉁이의 버려진 창고
로 들어갔소. 누가 합판 같은 걸 가져다 뚝딱거려서 작은 아파트들을 여러 개 만들어 놓았
지. 노숙자들이 들어가 살기에는 나쁜 곳이 아니었소. 지붕도 있고, 화장실도 몇 개 있고, 물
도 나왔으니까. 한 달에 백 달러였소. 전에 포주를 하던 자가 그런 시설을 만들어 놓고 그것
이 자기 소유라고 주장했는데, 그자에게 세를 내야 했소."
"실제로 그자의 소유였습니까?"
"그런 것 같소."
그는 책상의 서류철 더미에서 얇은 서류철 하나를 뽑아들었다. 놀랍게도 그는 찾던 서류
를 단 한 번에 찾아내었다. 그는 잠시 내용을 살펴보았다.
"그러다 일이 꼬였소. 지난달에 리버오크스라고 하는 회사가 그 창고를 매입했거든. 커다
란 부동산 회사요."
"그런데 리버오크스가 모든 사람을 쫓아낸 건가요?"
"그렇소."
"그렇다면 우리 회사가 리버오크스를 대리했을 가능성이 많겠군요."
"그럴 가능성이 많지."
"그런데 뭐가 꼬인 겁니까?"
"간접적으로 들은 이야기지만, 퇴거 전에 통지가 없었다고 하더군. 사람들은 그 포주에게
세를 내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소. 그렇다면 그들은 단순한 불법 점거자가 아니지. 그들은 세
입자인 것이고, 따라서 정당한 정차를 통해 보호받을 권리가 있소."
"불법 점거자들은 통지를 못 받습니까?"
"못 받지. 늘 일어나는 일이오. 노숙자들은 흔히 버려진 건물로 들어가는데, 대부분은 별
일이 없소. 그래서 그들은 그게 자기 거리고 생각하게 되지. 하지만 소유자가 마음만 먹으면
통지 없이 그들을 쫓아낼 수 있소. 불법 점거자들한테는 아무런 권리가 없거든."
"드본 하디가 어떻게 우리 회사를 추적했을까요?"
"누가 알겠소? 어쨌든 그 친구는 바보가 아니오. 미치기는 했지만, 바보는 아니란 말이
오."
"그 포주를 아십니까?"
"알지. 전혀 믿을 수 없는 자요."
" 그 창고가 어디 있다고 하셨죠?"
"지금은 사라졌소. 지난주에 철거를 했지."
그린의 시간을 너무 많이 뺐었다. 그는 자기 시계를 흘끔거렸고, 나는 내 시계를 흘끔거렸
다. 우리는 전화번호를 교환했고, 다시 연락하기로 약속했다.
모디카이 그린은 따뜻하고 애정이 많은 사람으로, 수많은 이름없는 의뢰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거리에서 노력을 하고 있었다. 그가 법을 보는 관점에는 영혼이 깃들여 있었다. 나로서
는 따라갈 수 없는 부분이었다.
나는 나오면서 소피아를 무시해 버렸다. 그녀도 나를 무시할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에. 내
렉서스는 도로 가에 그대로 있었다. 다만 그새 내린 눈이 2, 3센티미터 덮여 있었을 뿐이었
다.
5
눈이 쏟아지는 도시를 떠돌아 다녔다. 시간 걱정 하지 않고 워싱턴 거리를 운전해 본 것
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나는 묵직하고 호화로운 차 안에 따뜻하게 앉아 있었다.
그냥 차량들을 따라 움직였다. 갈 곳도 없었다.
아서가 나한테 화가 나 있을 테니, 회사는 당분간 나한테는 제한 구역이나 다름없었다. 게
다가 회사에 있으면 시도 때도 없이 들이 닥치는 사람들 때문에 고생을 해야 할 터였다. 그
들은 마음에도 없이, '그래, 어때?' 하고 물으면서 이야기를 시작하려 할 것이다.
카폰이 울렸다. 폴리였다. 전전긍긍하는 목소리였다.
"어디에요?"
"누가 알고 싶어하는데?"
"많은 사람이요. 아서도 그 가운데 하나예요. 루돌프도 그렇고요. 다른 기자가 전화를 하
기도 했어요. 의뢰인 몇 사람이 조언을 받으러 오기도 했고요. 클레어도 병원에서 전화를 했
어요."
"클레어는 뭐래?"
"걱정하고 있어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지만."
"난 괜찮아, 폴리. 사람들한테는 병원에 있다고 말해 줘."
"진짜에요?"
"아니, 하지만 진짜로 그러고 싶은 마음이야. 아서는 뭐래?"
"직접 전화하지는 않았어요. 루돌프가 전화를 했어요. 다들 기다리고 있어요."
"기다리라고 해."
잠깐 정적이 흘렀다. 이윽고 폴 리가 아주 천천히 말했다.
"알겠어요. 언제 들르실 수 있어요?"
"모르겠어. '의사가 보내주면'이라고 대답해야 하나? 폴리도 퇴근하지 그래. 지금 눈보라가
오고 있는데 말이야. 내일 전화할게."
나는 전화를 끊었다.
낮에 아파트에 들어가는 것은 어색한 일이었다. 게다가 난로가에 앉아 눈이 내리는 것이
나 지켜보는 것도 못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술집으로 가면, 제정신으로는 술
집에서 나오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차를 몰았다. 나는 차량들과 함께 흘러갔다. 통근차들은 서둘러 메릴랜드나
버지니아의 교외로 퇴각하고 있었다. 나는 다시 도심으로 들어가는, 거의 텅 빈 거리를 수월
하게 달려갔다. 나는 RFK 경기장 근처에서 가족이 찾아가지 않는 주검들을 붇는 묘지를 찾
아냈다. 어젯밤에 식사를 주문했던 17번가의 감리교 선교단도 지나갔다. 나는 평생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는, 또 아마 앞으로도 다시 가볼 일이 없을 동네들을 통과해 갔다. 4시가 되자
도시는 텅 비었다. 하늘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폭설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미 땅을 한 뼘 가
까이 덮었는데도, 더 올 것이라는 예보였다.
물론 눈보라가 몰아친다 해서 드레이크 & 스위니가 문을 닫는 일은 없었다. 그 곳에는
한밤중과 일요일이 더 좋다고 하는 변호사들이 있었다. 전화벨이 울리지 않아 좋다는 것이
다. 따라서 폭설이 내리는 기간이야말로 쉴새없는 회의와 전화라는 고역으로부터의 즐거운
해방이라고 할 수 있을 터였다.
로비에서 경비원들에게 비서를 비롯한 사무직원들은 오후 3시에 퇴근했다는 이야기를 들
었다. 나는 다시 형씨의 엘리베이터를 탔다.
내 책상 한가운데 여남은 개의 전화 메시지 메모가 단정하게 놓여 있었다. 그러나 관심이
가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컴퓨터를 켜고 우리의 의뢰인 색인을 뒤지기 시작했다.
리버오크스는 델러웨어에 있는 회사로, 1977년에 설립되었으며, 메릴랜드 헤이거스타운에
본부를 두고 있었다. 개인 소유 기업이었기 때문에, 재정 관련 정보는 거의 알아낼 수가 없
었다. 우리측 변호사는 N. 브레이든 챈스였는데, 나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나는 우리의 방대한 데이터베이스로부터 그의 이름을 찾아보았다. 챈스는 우리의 부동산
부서의 파트너였다. 그렇다면 4층에서 근무하겠군, 나이는 마흔 넷, 기혼, 듀크 법대 졸, 학
부는 게티스버그 출신. 대단한 이력이었지만 이 회사에서는 특별할 것도 없었다.
8백 명의 변호사들이 매이리 협박을 하고 소송을 걸고 있는지라, 우리 회사에는 진행중인
파일만도 3만 6천 개가 넘었다. 예를 들어 뉴욕 지사에서 시카고의 우리 의뢰인에게 소송을
거는 일이 없도록, 새로운 사건은 접수될 때마다 즉시 우리의 데이터 시스템에 첨가되었다.
드레이크 & 스위니의 모든 변호사, 비서, 사무직원은 개인용 컴퓨터를 가지고 있었으며, 따
라서 모든 파일이 일반적 정보에 즉시 접근할 수 있었다. 팜비치(미국 플로리다주 동남해안
의 관광지 : 옮긴이)에 있는 우리 유언 검인 변호사가 부유한 의뢰인의 유산을 처리하고 있
다고 해보자. 그런 경우에도 나는 마음만 먹으면 키 몇 개만 눌러서 기본적인 사항을 알아
낼 수 있었다.
리버오크스에 대해서는 42개의 파일이 있었다. 그 대부분이 그 회사가 매입한 부동산 거
래 관련 파일들이었다. 챈스는 모든 파일에서 공식 대리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파
일들 가운데 네 개가 퇴거와 관련된 것이었는데, 세 개는 작년에 일어난 것이었다. 탐색의
첫 단계는 쉬웠다.
1월 31일, 리버오크스는 플로리다 애비뉴에 있는 토지를 매입했다. 매도자는 태그 주식회
사였다. 2월 4일, 우리 의뢰인은 그 토지에 있는 버려진 창고에서 다수의 불법 점거자들을
퇴거시켰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드본 하디 씨였으며, 그는 이 퇴거 조치를 감정적으로 받
아들여,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변호사들을 추적했다.
나는 파일 이름과 번호를 적어 놓은 다음 4층으로 내려갔다.
대형 법률 회사에 입사하는 변호사들 가운데 부동산 변호사가 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들어오는 사람은 없다. 명성을 높일 수 있는 훨씬 더 화려한 분야들이 많기 때문이다. 소송
이야말로 누구나 다 좋아하는 분야였으며, 적어도 회사 내에서는 소송 변호사들이 모든 변
호사들 가운데 가장 존경을 받았다. 가장 뛰어난 변호사들은 법인 분야 가운데 몇 군데에도
관심을 가졌다. 인수 합병 쪽은 여전히 경쟁이 치열하였으며, 증권 쪽은 예전부터 인기를 끌
던 곳이었다. 내 분야인 반트러스트 쪽도 꽤 존경을 받는 편이었다. 세법은 무척 까다로운
만큼, 그쪽 변호사들은 찬탄의 대상이었다. 정부 관련(로비) 쪽은 역겨운 곳이었지만 워낙
보수가 좋았기 때문에, 워싱턴의 모든 법률 회사들은 변호사들 한 무리를 할당해 놓고 정치
인들의 몰락을 거드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처음부터 부동산 일을 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어떻게 그 길로 가게 되는지
는 나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만 움직이며, 매일 저당 문서의 깨알 같은 글씨
를 읽고 있었다. 그들은 회사 전체에서 볼 때는 약간 열등한 변호사들 취급을 받았다.
드레이크 & 스위니에서는 모든 변호사들이 자신이 현재 진행중인 파일을 자기 사무실에
보관했다. 잠가 두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처리가 끝난 파일들만 다른 사람들이 열람할 수
있었다. 선임 파트너나 회사의 집행위원회 위원이 요구하지 않는 한, 어떤 변호사도 다른 변
호사에게 파일을 보여줄 의무가 없었다.
내가 보고 싶어하는 퇴거 파일도 진행 중인 파일로 분류되어 있었다. 형씨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특별 보호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비서 구역 옆의 책상에서 사무직원 한 사람이 청사진을 홅어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
왔다. 나는 그에게 브래튼 챈스의 사무실이 어디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복도 건너편의 열린
문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놀랍게도 챈스는 책상에 앉아, 아부 바쁜 변호사의 모습을 모여주고 있었다. 그는 내가 나
타난 것에 어리둥절해했는데, 당연히 그럴 만도 했다. 미리 연락을 하여 약속 시간을 잡는
것이 정상적인 의전 절차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의전 절차 따위에 신경 쓸 기분
이 아니었다.
그는 나에게 앉으라고 권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그냥 자리에 앉았다. 그것도 그의
기분을 풀어 주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어제 인질로 잡혔던 친구로군."
그는 내 이름을 듣고는 생각이 났는지 짜증스럽게 내뱉었다.
"네, 그렇습니다."
"끔찍했겠소."
"끝난 일인데요 뭐. 그런데 총을 들고 왔던 사람, 그러니까 고 하디 씨가 2월 4일에 어떤
창고에서 퇴거를 당했다고 하던데요. 그게 우리 퇴거 건이었나요?"
"그렇소."
챈스가 쏘아붙였다. 그의 방어적인 태도를 보니, 하루 종일 그 파일 때문에 어지간히 시달
린 모양이었다. 아서를 비롯한 고위층과 함께 그 파일을 철저히 검토해 보기도 했을 것이다.
챈스가 말을 이었다.
"그게 어쨌다는 거요?"
"그 사람이 불법 점거자였습니까?"
"당연히 그렇고 말고. 그자들은 다들 불법 점거자였소. 우리 의뢰인은 지저분한 일을 정리
하려 했던 것뿐이오."
"그 사람이 불법 점거자였던 게 확실합니까?"
챈스가 입을 떡 벌렸다.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이윽고 그는 깊은 숨을 쉬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요?"
"내가 그 파일을 볼 수 있습니까?"
"아니. 그건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오."
"그렇게 될 수도 있습니다."
"당신을 감독하는 파트너가 누구요?"
그는 자를 징계할 사람의 이름을 받아 적겠다는 듯이 펜을 뽑아 들었다.
"루돌프 메이스입니다."
그는 그 이름을 크게 휘갈겨 썼다.
"나는 몹시 바빠. 이제 나가 주겠소?"
"왜 내가 그 파일을 볼 수 없다는 겁니까?"
"그건 내 것이고, 내가 안 된다면 그만이기 때문이오. 됐소?"
"그걸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당신한테는 충분해. 자, 나가시오."
그는 일어서서 문을 가리켰는데,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웃음을 지어
보이고 떠났다.
사무직원은 그 이야기를 다 듣고 있었다. 그의 책상을 지날 때, 우리는 짐짓 무슨 영문인
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교환했다.
"지저분한 놈."
사무직원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냥 입 모양만 그려 보였다고 할 수 있었다.
나는 다시 웃음을 지으며, 동감이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저분한 놈인데다가 멍
청하기까지 하지. 챈스가 유쾌한 얼굴로 아서나 위에 있는 다른 거물이 파일 유출을 막으라
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했다면, 나는 그렇게까지 수상쩍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파일에는 뭔가가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 파일을 손에 넣는 것은 힘든 일이 될 것 같았다.
클레어와 내가 가지고 있는 휴대 전화-호주머니에, 핸드백에, 차에-에다가 호출기까지 감
안하면, 우리의 의사소통은 매우 쉬운 일이 되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우리 결혼 생활에서는
쉬운 일이 없었다. 우리는 9시경에나 통화를 할 수 있었다. 그녀는 또 한 번의 힘든 하루를
보내고 녹초가 되어 있었다. 그녀가 하루 동안 하는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어떤 일보다도
힘든 일이어야만 했다. 이것은 우리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늘 하는 시합이었다. 내가 의사
니까, 또는 변호사니까, 내일이 네 일보다 중요하다고 우기는 시합.
나는 이런 시합에 짜증이 났다. 내가 죽음을 아슬아슬하게 모면한 사건의 여파 때문에 직
장에서 일찍 나와 거리를 배회했다고 말했으면, 클레어는 즐거워했을지도 모른다. 자기의 하
루가 나의 하루보다 훨씬 더 생산적이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을 테니까.
그녀의 목표는 이 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여성 신경외과의가 되는 것이었다. 남자 의대생
들도 모든 희망이 사라졌을 때 택하게 되는 뇌 전문 의사가 되겠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총
명한 학생이었고, 단호한 결의를 가지고 있었고, 거기에 엄청난 스태미너라는 축복까지 받고
태어났다. 그녀는 드레이크 & 스위니에서 제대로 단련을 받은 마라톤 맨이었던 나를 천천
히 짓밟았듯이, 다른 남자들도 짓밟고 올라설 터였다. 나는 이제 이런 경주에도 짜증을 느끼
고 있었다.
클레어는 미아타 스포츠카를 몰고 다녔는데, 그것은 사륜 구동이 아니었다. 날씨가 나빠서
그녀가 걱정이 되었다. 그녀는 한 시간 뒤에 일이 끝날 예정이었고, 내가 조지타운 병원까지
가려면 그 정도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내가 그녀를 데리러 갔다가, 오는 길에 레스토랑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애용하는 중국 음식이라도 사 들고 오자고 했다.
나는 책상의 서류와 집기를 정리하게 시작했다. 진행 중인 열 개의 파일에는 눈을 주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나는 책상에 딱 열 개의 파일만 올려놓았다. 루돌프에게서 배운
방법이었다. 그렇게 하면 매일 조금씩이라도 각 파일에 신경을 쓸 수 있었다. 그 열 개를 고
르는 데는 요금 청구가 중요한 변수였다. 내가 고르는 열 개에는 법률적 문제의 다급함과
관계없이 반드시 가장 부유한 의뢰인들의 파일이 포함되었다. 이것 역시 루돌프에게서 배운
요령이었다.
나는 1년에 2천 5백 시간 정도를 청구하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주당 50시간이었고, 1년에
50주였다. 내 평균 청구액은 시간당 3백 달러였다. 따라서 나는 내가 사랑하는 회사에 총 75
만 달러의 매출을 올려 주는 셈이었다. 그러면 회사는 나에게 그 가운데 12만을 주었고, 3만
을 나의 사회보장 관련 비용으로 사용하였으며, 경비로 20만을 지출하였다. 나머지는 파트너
들이 챙겼는데, 끔찍하게 복잡한 공식을 사용하여 배분을 하는 바람에 매년 주먹다짐이라도
일어날 것 같았다.
우리 회사 파트너가 1년에 백반을 못 버는 것은 드문 일이었으며, 어떤 사람들은 2백만
이상을 벌기도 했다. 그리고 한번 파트너는 영원한 파트너였다. 따라서 내가 초고속으로 승
진하여 서른 다섯에 파트너가 된다면, 30년간 화려하게 돈벌이를 하면서 엄청난 부를 쌓을
수 있었다.
바로 그 꿈 때문에 우리는 밤낮을 가지리 않고 책상에 붙어 앉아 있었다.
나는 그런 숫자들을 긁적이고 있었다. 내 습관이라 할 수 있었는데, 아마 우리 회사의 다
른 모든 변호사도 같은 습관을 가지고 있을 터였다. 그래 전화벨이 울렸다. 모디카이 그린이
었다.
"브록 씨."
그는 정중하게 말했다. 목소리는 또렷하게 들렸지만, 주변의 시끄러운 소리도 함께 들리고
있었다.
"네. 마이클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좋소. 이봐요, 몇 군데 전화를 해 보았는데, 걱정할 것이 없을 것 같소. 혈액 검사 결과는
음성이었소."
"고맙습니다."
"천만에."
"빨리 알고 싶어할 것 같아서 전화한 거요."
"고맙습니다."
뒤에서 나는 소리가 갑자기 더 시끄러워졌다. 내가 말을 이었다.
"거긴 어딥니까?"
"노숙자 합숙소요. 눈보라 때문에 사람들이 갑자기 몰려들어 제대로 먹일 수도 없구려. 그
래서 다들 나와서 일하고 있소. 이만 끊어야겠소."
책상은 오래 된 마호가니였다. 바닥 깔개는 페르시아산이었다. 의자는 진홍색 가죽으로 덮
여 있었다. 갖추어진 장비는 거의 예술의 경지에 이른 것들이었다. 나는 잘 꾸며진 내 사무
실을 돌아보며, 정말 오랜만에 궁금해하였다. 이렇게 꾸미는 데 얼마나 들었을까? 우리는 그
냥 돈이나 좇고 있는 게 아닐까? 왜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일을 할까? 더 비싼 바닥 깔개
를 깔기 위해? 더 좋은 골동품 책상을 들여놓기 위해?
나는 따뜻하고 아늑하고 아름다운 사무실에 앉아 모디카이 그린을 생각했다. 그는 지금
혼잡한 합숙소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었다. 춥고 배고픈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고
있었다. 따뜻한 웃음을 지으며 유쾌하게 말을 건네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우리 둘 다 법학으로 학위를 받았고, 우리 둘 다 사법 시험을 통과했고, 우리 둘 다 법률
용어에 유창했다. 우리는 어느 정도 친족 관계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나는 내 의뢰인들이
경쟁자들을 삼키고, 결산 보고서 맨 아랫자리에 0을 몇 개 더 보태는 일을 도와 주고 있었
다. 그리고 그 일로 나도 부자가 될 터였다. 반면 그는 그의 의뢰인들이 식사를 하고 따뜻한
침대를 찾을 수 있도록 돕고 있었다.
나는 내 규격 용지철에 적힌 숫자들을 보았다. 소득과 햇수. 부로 가는 길. 갑자기 내 모
습이 처량해 보였다. 이 노골적이고 뻔뻔스러운 탐욕.
나는 전화벨 소리에 깜짝 놀랐다.
"왜 사무실에 있는 거야?"
클레어가 물었다. 단어 하나 하나가 느릿느릿 흘러나왔다. 그 하나 하나가 얼음에 덮여 있
는 것 같았다.
나는 깜짝 놀라 손목시계를 보았다.
"어, 말이야. 서해안에 있는 의뢰인이 전화를 해서 그랬어. 이제 눈이 안 오네."
전에도 써먹었던 거짓말인 것 같았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기다리고 있어, 마이클. 걸어 갈까?"
"아냐. 금방 갈게."
나는 전에도 클레어를 기다리게 한 적이 있었다. 그것도 시합의 일부였다. 너무 바쁜 몸이
라 시간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했으니까.
나는 건물에서 다려나가 눈보라 속으로 들어갔다. 또 하룻밤을 망쳤지만, 별로 걱정은 되
지 않았다.
6
마침내 눈이 그쳤다. 클레어와 나는 부엌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나는 밝은
아침 햇살의 도움을 받아 신문을 읽고 있었다. 내셔널 공항에서는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모
양이었다.
"플로리다로 가자, 지금."
내가 말했다.
그녀는 기죽이는 눈길로 나를 보았다.
"플로리다?"
"그래, 바하마 제도로. 이른 오후면 거기 도착할 수 있어."
"안 돼."
"안 될 게 뭐야. 난 며칠 동안 출근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왜 안해?"
"난 망가졌으니까. 망가지면 회사를 며칠은 쉴 수 있어."
"당신이 망가졌다고?"
"알아, 알아. 사실은 장난이지. 하지만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쉴 여유도 좀 주고, 응석도
받아주고, 비위도 맞추어 주니까. 그걸 최대한 이용하자는 거야."
클레어의 얼굴이 다시 굳어졌다.
"난 못해."
그것으로 끝이었다. 나는 그저 즉흥적으로 기분을 내 본 것에 지나지 않았다. 나 역시 그
녀가 많은 의무에 매인 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걸 알면서 그런 제안을 한다는 건
잔인한 일이야. 나는 신문으로 다시 눈길을 돌리며 생각했다. 하지만 반성할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다른 상황이었어도 그녀는 나와 함께 떠나지 않았을 테니까.
그녀는 갑자기 서두르기 시작했다. 약속, 수업, 회진. 야심만만한 젊은 외과 레지던트의 생
활이 눈앞에 있었다. 그녀는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나갈 준비가 되었다. 나는 그녀
를 병원까지 태워다 주었다.
차는 눈이 가득 쌓인 거리를 천천히 나아가고 있었지만 우리는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
다.
"한 이틀 멤피스에 갔다 와야 할 것 같아."
레저브아 스트리트의 병원 입구에 도착했을 때 나는 당연하다는 투로 말했다.
"그래?"
클레어는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부모님 좀 뵙고 와야겠어. 뵌 지 거의 1년이나 됐잖아. 지금이 좋은 때인 것 같아. 난 눈
이 오면 몸도 찌뿌드드한데다가, 지금은 일할 기분도 아니거든. 난 지금 망가진 상태잖아."
"그럼, 전화해."
그녀는 문을 열며 그렇게 이야기하더니, 내려서 그냥 문을 닫았다. 입맞춤도 없었고, 작별
인사도 없었고, 걱정하는 표현도 없었다. 나는 그녀가 서둘러 보도를 내려가 건물 안으로 사
라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끝났군. 어머니한테 이 이야기를 하기는 정말 싫은데...
내 부모님은 60대 초반이었다. 두 분 다 건강했고, 강요된 퇴직 생활을 즐겁게 보내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아버지는 30년 동안 비행기 조종사 일을 했다. 어머니는 은행의 지점장
이었다. 두 분 다 열심히 일을 하고 열심히 저축하여, 우리에게 편안한 상층 중간 계급의 가
정을 제공해 주었다. 내 두 형제와 나는 우리가 갈 수 있는 가장 좋은 사립학교를 다녔다.
두 분은 건실한 분들이었다. 보수적이고, 애국적이고, 나쁜 습관도 없고, 서로에게 열렬히
헌신적이었다. 일요일에는 교회에 갔소, 독립기념일에는 행진에 참가했고, 일 주일에 한 번
씩 로터리 클럽에 갔고, 원할 때면 언제나 여행을 하였다.
두 분은 3년 전 형 워너가 이혼한 일을 두고 여전히 마음 아파하고 있었다. 워너는 애틀
랜타에서 변호사 일을 했는데, 대학 시절 애인과 결혼을 했다. 멤피스의, 우리도 잘 아는 집
안 출신이었다. 그러나 아이들 둘 낳은 뒤에, 그들의 결혼 생활은 무너져 버렸다. 형수가 아
이들 양육권을 가지고 포틀랜드로 갔다. 부모님은 일이 잘 풀릴 경우 1년에 한 번 손자들을
보러 갔다. 나는 부모님이 만났을 때 그 이야기는 절대 꺼내지 않았다.
멤피스 공항에서 차를 돌려 동쪽으로 제멋대로 뻗어 있는 교외로 차를 몰았다. 백인들이
사는 곳이었다. 흑인들은 도시를 가지고 있었고, 백인들은 교회를 가지고 있었다. 흑인들이
하나둘 분양지로 이사해 오면, 백인들은 다른 분양지로, 더 멀리 옮겨갔다. 멤피스는 이런
식의, 인종들의 경주 때문에 동쪽으로 천천히 넓어지고 있었다.
부모님은 골프 코스에서 살았다. 모든 창문을 통해 페어웨이를 굽어볼 수 있도록 설계된
새 유리 주택이었다. 나는 그 집이 싫었는데, 페이웨이가 늘 사람들로 붐볐기 때문이다. 그
러나 그런 말을 입밖에 내지는 않았다.
공항에서 미리 전화를 해 두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기대감에 차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
버지는 나인 홀 근처에 있는 것 같았다.
"피곤해 보이는구나."
어머니가 나를 안고 입맞춤을 한 다음에 말했다. 어머니의 일반적인 인사 방법이었다.
"고마워요, 어머니. 어머니는 아주 좋아 보이는데요."
사실이 그랬다. 매일 테니스를 치고 컨트리 클럽에서 일광욕과 함께 섭생을 하니, 그 나이
에도 늘씬한 몸매에 청동빛 피부를 유지할 수 있었다.
어머니가 얼음을 넣은 차를 내왔다. 우리는 파티오에서 그것을 마시며, 다른 퇴직자들이
골프 카트를 타고 페어웨이를 따라 달려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무슨 일이니?"
어머니는 1분이 지나기도 전에, 내가 첫 모금을 다 마시기도 전에 그렇게 물었다.
"아무 일도 없어요. 괜찮아요."
"클레어는 어디 있니? 너희들은 한 번도 전화를 안 하더구나. 클레어 목소리를 들은 지가
두 달도 넘은 것 같구나."
"클레어는 잘 있어요, 어머니. 우리 둘 다 건강하게 살면서 열심히 일하고 있어요."
"둘이 함께 보내는 시간은 많니?"
"아뇨."
"함께 보내는 시간이 있기는 있는 거니?"
"많지 않아요."
어머니는 얼굴을 찌푸리며 눈알을 굴렸다. 어머니로서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
다.
"너희들 무슨 문제 있니?"
어머니가 물었다. 드디어 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네."
"그럴 줄 알았다, 그럴 줄 알았어. 전화로 네 목소리를 듣고 뭔가 문제가 있다는 걸 알았
지. 설마 너희들도 이혼으로 가고 있는 건 아니겠지? 상담은 해보았니?"
"아뇨. 그냥 미적지근한 상태예요."
"그럼 왜 상담을 안 해봐? 클레어는 훌륭한 아이야, 마이클. 넌 결혼 생활에 네가 가진 모
든 걸 투자해야 돼."
"노력하고 있어요, 어머니. 하지만 어렵네요."
"바람 피웠어? 마약? 알콜? 도박? 그런 문제가 있는 거니?"
"아뇨. 그냥 두 사람이 각자의 길을 가고 있는 거예요. 전 일 주일에 80시간씩 일하고 있
어요. 클레어도 80시간을 일하고요."
"그럼 일을 좀 천천히 해. 돈이 전부가 아니잖니."
어머니의 목소리가 약간 갈라졌다. 눈에 물기가 어리고 있었다.
"미안해요, 어머니. 그래도 우린 애들은 없잖아요."
어머니는 입술을 깨물며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안으로는 죽어 가고 있
었다. 나는 어머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제 두 녀석은 가고 하나만
남았구나. 어머니는 내 이혼을 개인적 실패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형의 경우에 실망했던 것
과 똑같았다. 어머니는 자신에게서 탓할 부분을 찾아낼 터였다.
나는 연민을 받고 싶지 않았다. 좀 재미있는 화제로 바꾸기 위해 형씨의 이야기를 꺼냈다.
물론 어머니를 위해, 내가 처했던 위험은 상당히 줄여서 말했다. 그 이야기가 멤피스 신문에
실렸는지 어쨌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부모님은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괜찮니?"
어머니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
"물론이죠. 저는 총에 맞지 않았어요. 지금 여기 와 있잖아요."
"오, 다행이야. 그러니까, 감정적으로도 괜찮은 거니?"
"네, 어머니, 전 멀쩡해요. 망가진 데라곤 하나도 없어요. 회사에서 한 이틀 쉬라고 해서
고향에 온 거예요."
"딱한 것. 클레어 일만 해도 만만찮을 텐데, 또 그런 일이라니."
"전 괜찮아요. 어젯밤에는 눈이 많이 왔어요. 잠시 휴가를 떠나기 좋을 때라는 생각이 들
었죠."
"클레어는 혼자 있어도 안전할까?"
"워싱턴의 누구 못지않게 안전하죠. 클레어는 병원에서 살아요. 아마 워싱턴에서 가장 안
전한 곳일걸요."
"난 너희들 걱정을 많이 한단다. 나도 범죄 통계 같은 걸 보거든. 워싱턴은 매우 위험한
도시야."
"멤피스도 만만치 않죠."
우리는 골프공이 파티오 근처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는, 공 임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체격 좋은 부인이 골프 카트에서 내려, 잠시 공 위에 웅크리고 있더니, 형편없이 쳐냈다.
어머니는 차를 더 가지고 오겠다고 일어서며 눈물을 훔쳤다.
부모님 가운데 어느 분이 내가 찾아간 것을 더 언짢게 받아들였는지 모르겠다. 어머니는
내가 튼튼한 가정을 유지하며, 손자를 많이 낳아주기를 바랐다. 아버지는 아들들이 출세의
사다리를 빨리 올라가, 힘들게 얻은 성공의 열매를 마음껏 누리기를 바랐다.
오후 늦게 나는 아버지와 나인 홀을 돌았다. 아버지는 공을 쳤고, 나는 맥주를 마시며 카
트를 운전했다. 나는 아직 골프에 매력을 못 느끼고 있었다. 차가운 맥주를 두 캔 정도 마시
고 나자, 이야기를 할 준비가 되었다. 나는 점심을 먹으면서도 형씨 이야기를 다시 했기 때
문에, 아버지는 내가 그냥 이틀 정도 놀며 정신을 차리고, 다시 돌아가 열심히 전투할 것이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큰 회사가 좀 지겨워졌어요, 아버지."
세 번째 티에서 앞의 4인조가 자리를 비켜 주기를 기다릴 때 나는 그렇게 이야기했다. 나
는 초조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초조해한다는 사실에 무척 짜증이 났다. 이것은 내 인생
이지, 아버지의 인생이 아니지 않은가.
"그게 무슨 소리냐?"
"제가 하고 있는 일에 싫증이 난다는 거예요.."
"현실로 돌아온 것을 환영한다, 얘야. 공장에서 프레스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은 자기가 하
고 있는 일에 싫증이 안 날 것 같으냐? 넌 그래도 돈은 많이 벌잖아."
이렇게 해서 아버지의 골프는 엉망이 되고 말았다. 두 홀 뒤, 아버지는 공을 찾아 러프를
돌아다니다가 말했다.
"직장을 옮길 생각이냐?"
"생각 중이에요."
"어디로 갈 건데."
"아직 모르겠어요.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 해봤어요. 다른 자리를 찾아보지도 않았고요."
"찾아보지도 않았는데 다른 쪽이 더 낫다는 것을 어떻게 아니?"
아버지는 공을 집어들고 걸어갔다.
나는 포장된 좁은 길을 따라 카트를 몰고 갔고, 아버지는 공을 쫓아 페어웨이를 걸어갔다.
나는 머리가 하얗게 센 저 남자를 왜 이렇게 두려워할까? 아버지는 모든 아들에게 목표를
세우고, 열심히 일하고, 중요한 인물이 되기 위해 노력하라고 밀어붙였다. 많은 돈을 벌어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하는 데 모든 것을 걸도록 밀어붙였다. 그리고 물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 대주었다.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사회적 양심을 가지고 태어나지는 않았다. 우리는 교회에 가면
헌금을 냈는데, 그것은 성경이 그렇게 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부에 세
금을 냈는데, 그것은 법이 그렇게 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돈을 내는 것을
통하여 뭔가 좋은 일이 이루어졌을 것이고, 결국은 우리도 그 일에 참여한 셈이라고 할 수
도 있다. 정치는 그 게임에 참여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며, 게다가 정직한 사람들
은 그곳에서 돈을 벌 수 없다는 것이 아버지의 지론이었다. 우리는 생산적이 되어야 한다고
배웠으며, 우리가 더 큰 성공을 거둘수록, 그것은 어떤식으로든 사회에도 더 큰 도움이 되는
길이라고 배웠다. 목표를 세우고, 열심히 일하고, 공정하게 시합을 하고, 번영을 얻어라.
아버지는 5번 홀에서 더블 보기를 했다. 카트에 타면서 그것이 퍼터 탓이라고 했다.
"전 어쩌면 더 나은 곳을 찾는 게 아닌지도 몰라요."
내가 말했다.
"그냥 하고 싶은 이야기를 솔직히 해보거라."
아버지와 마주할 때는 늘 있는 일이지만, 쟁점에 용감하게 맞서지 못하는 내가 나약하다
는 느낌이 들었다.
"공익법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게 대체 뭐냐?"
"돈을 많이 벌지는 못하지만 사회의 공익을 위해 일을 하는 거죠."
"뭐야, 이제 넌 미주당원이라도 된 거냐? 워싱턴에 너무 오래 있었구나."
"워싱턴에도 공화당원이 많아요. 사실 공화당원이 의회를 장악하고 있잖아요."
우리는 말없이 다음 티로 갔다. 아버지는 훌륭한 골퍼였지만, 샷은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나 때문에 집중력이 흐트러진 것이다.
아버지는 다시 러프 사이로 터벅터벅 걸어가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주정뱅이 한 놈의 머리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 사회를 바꾸겠다는 생각이 들었
다는 거냐?"
"그 사람은 주정뱅이가 아니에요. 베트남전 참전 용사입니다."
아버지는 베트남전 초기에 B-52기를 몰았다. 때문에 아버지는 내 말을 듣고 잠깐 몸이 굳
었다. 그러나 잠시뿐이었다. 아버지는 조금도 양보할 태세가 아니었다.
"베트남전에 참전한 사람이 한두 명이냐?"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많았다. 공은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사실 아버지는 열
심히 찾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공을 하나 더 페어웨이에 던져 놓고는 형편없이 쳐냈다. 우리
는 다시 움직였다.
"나는 네가 좋은 직장을 때려치우는 것을 보고 싶지 않구나. 너는 지금까지 열심히 일해
왔어. 이제 몇 년만 있으면 파트너가 될 거야."
"그럴지도 모르죠."
"좀 쉬어라. 그럼 된다."
어쩌면 모두가 하나같이 똑같은 처방을 제시하는 것인지.
나는 저녁때 부모님을 보시고 좋은 레스토랑으로 갔다. 우리는 클레어, 내 직장, 두 분이
거의 보지 못하는 손자들 이야기를 피하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우리는 옛 친구와 옛 동네
이야기를 했다. 나는 두 분으로부터 그곳의 최근 소식을 들었지만, 전혀 관심이 없었다.
금요일 정오, 비행기 시간 네 시간 전에 그곳을 나왔다. 나는 다시 워싱턴의 혼란스러운
생활로 향하고 있었다.
7
금요일 밤에 내가 돌아갔을 때 아파트는 물론 비어 있었다. 그러나 약간의 변화도 있었다.
부엌의 카운터에 메모지가 놓여 있었던 것이다. 내가 고향에 가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클레
어도 자신의 고향 프로비던스에 이틀 동안 다녀오겠다고 했다. 이유는 밝혀져 있지 않았다.
집에 도착하면 전화를 달라는 메모만 적혀 있었다.
나는 그녀의 부모님 집으로 전화를 했다. 그들은 저녁 식사 중에 있었던 모양이다. 우리는
힘겹게 5분 동안 이야기를 나눈 뒤에, 우리 둘 다 괜찮고, 멤피스도 괜찮고, 프로비던스도
괜찮고, 가족들도 괜찮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녀는 일요일 오후쯤 돌아오겠다고 했
다.
나는 전화를 끊고, 커피를 만들었다. 침실 창 밖을 물끄러미 내다보며 커피를 마셨다. 차
량들이 여전히 눈이 덮인 P 스트리트를 기어가고 있었다. 눈이 좀 녹았다고는 하나 큰 차이
를 느낄 수 없었다.
클레어도 내가 내 부모님에게 이야기 했던 우울한 이야기를 그녀의 부모님에게 이야기했
을 것이다. 우리끼리는 이야기해 보기도 전에 각자의 부모님에게 그런 것을 솔직히 이야기
한다는 것이 슬프고 이상한 일이었지만, 어쩐 일인지 놀랍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나는 이런
것에도 짜증이 났다. 그래서 빠른 시일 내에, 이번 일요일에라도, 어딘가에, 부엌 식탁에라도
함께 앉아, 현실에 직면해야겠다고 결심을 했다. 그런 자리에서라면 둘 다 감정과 두려움을
숨김없이 드러내게 되겠지. 그러면 그때부터 우리는 각자 별도의 미래를 계획하기 시작할
것이 틀림없었다. 나도 클레어가 나와 거리를 두고 싶어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 욕망이
얼마나 강하냐에 대해서만 모르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할 말이 설득력 있게 들릴 때까지 큰 소리로 연습을 해 보다가, 밖으로 나
가 오랫동안 산책을 했다. 기온은 영하 10도에 살을 엘 듯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트렌치 코
트 속으로 냉기가 파고 들었다. 예쁘장한 집들과 아늑한 연립주택들이 보였다. 가족다운 가
족들이 식사를 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푸근한 온기를 즐기고 있었다. M 스트리트로 접어들
었다. 그곳에는 밀실 공포증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의 무리가 보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영
하의 금요일 밤에도 M 스트리트는 절대 따분하지가 않았다. 술집은 만원이었고, 레스토랑에
는 대기자들이 줄을 서 있었고, 커피숍에도 빈 자리가 별로 보이지 않았다.
나는 어떤 뮤직 클럽의 창가에 서서, 발목까지 눈에 잠긴 채 블루스 음악에 귀를 기울이
며, 젊은 남녀들이 술을 마시고, 춤을 추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평생 처음으로 내가 젊은 사
람이 아닌 다른 어떤 존재라는 느낌이 들었다. 내 나이 서른둘이었다. 그러나 지난 7년간 보
통 사람들이 20년 동안에 하는 일보다 더 많은 일을 해 왔다. 지쳤다. 늙지는 않았지만, 힘
겹게 중년을 향해 내려가고 있었다. 나도 이제 내가 대학을 갓 졸업한 기운찬 청년이 아니
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제 저 안의 예쁜 여자들도 나를 두 번 돌아보는 일은 절대
없겠지.
몸이 얼어붙고 있었다. 다시 눈이 오고 있었다. 나는 샌드위치를 사서 호주머니에 쑤셔넣
고, 터벅터벅 아파트로 돌아갔다. 거기서 강한 술을 만들고, 난로불을 작게 피워 놓고, 어둑
어둑한 곳에서 식사를 했다. 혼자서.
예전 같으면 주말에 클레어가 집에 없을 경우, 그것을 아무런 죄책감 없이 사무실에 틀어
박힐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난롯가에 앉아 그런 생각에 역겨
움을 느끼고 있었다. 드레이크 & 스위니는 내가 사라진 뒤에도 오랫동안 당당하게 서 있겠
지. 몹시 중요하게 떠받들어지는 의뢰인들과 그들이 제시하는 문제들은 다른 무리의 젊은
변호사들이 처리해 주겠지. 내가 떠나는 것은 회사 입장에서 볼 때는 차를 달리다 도로에서
아주 작게 튀어나온 돌출부를 만나는 것과 같은 일일 거야. 별다른 느낌 없이 그냥 지나가
고 말겠지. 내가 나오고 나면 바로 몇 분 뒤에 다른 사람이 내 사무실을 차지하겠지.
9시가 조금 지났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그 바람에 나는 길고 우울한 백일몽으로부터 갑
자기 깨어났다. 모디카이 그린이었다. 휴대 전화에 대고 큰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바쁘쇼?"
"어, 뭐 별로. 무슨 일인데요?"
"엄청나게 춥구려. 다시 눈도 오고. 그래서 일손이 딸리거든. 기간 좀 낼 수 있소?"
"뭘 하려고요?"
"일. 여기서는 지금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도움이 되거든. 합
숙소와 급식소는 만원인데, 자원봉사자가 부족하오."
"내가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는데요."
"빵에 땅콩 버터를 바를 줄 아시오?"
"뭐 그 정도는."
"그럼 자격이 있는 거요."
"좋아요. 어디로 갈까요?"
"우리 사무실에서 열 블록 정도 떨어진 곳이오. 13번가와 유클리드 애비뉴가 만나는 곳이
오. 오른쪽에 노란 교회가 있소. 에버니저 크리스천 펠로십이라는 교회요. 우리는 그곳 지하
에 있소."
나는 그의 말을 받아 적었다. 글씨가 점점 흔들리고 있었다. 모디카이가 나를 전투 지역으
로 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총을 준비해 가야 하는 것인지 묻고 싶었다. 모디카이도 총을
들고 다닐까. 하지만 그는 흑인이었고, 나는 아니었다. 내 차는 어쩌지? 누구나 탐내는 내
렉서스는?
"알아들었소?"
잠시 정적이 흐르자 모디카이는 물었다.
"네. 20분 뒤에 가겠습니다."
나는 간신히 대꾸했다. 벌써 가슴이 쿵쾅거리고 있었다.
나는 청바지와 스웨터로 갈아입고, 고급 하이킹 부츠를 신었다. 지갑에서 신용카드와 현금
대부분을 뺐다. 옷장 꼭대기에 양모로 안을 댄 낡은 데님 재킷이 있었다. 커피와 페인트 자
국이 있는 재킷으로 법대 시절의 유물이었다. 나는 거울 앞에서 그것을 입어 보면서, 내가
부자처럼 보이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젊은 배우가 그런 옷을 입
고 『배니티 페어』의 표지에 등장한다면, 그 즉시 유행이 될 것 같았다.
방탄 조끼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그러나 문을 잠그고 눈
속에 발을 내디디면서 묘한 흥분도 느끼고 있었다.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차를 타고 가며 총을 갈겨댄다든가 폭력배들이 떼로 덥친다든
가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날씨 때문에 잠시 거리가 텅 비면서 안전이 다시 찾아온 것
같았다. 나는 교회를 찾아내, 맞은편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교회는 작은 성당처럼 보였다.
적어도 백 년은 되어 보였다. 원래의 신도는 그곳을 떠나고 없었다.
모퉁이를 돌자 남자 몇이 어깨를 맞대고 웅크린 자세로 문간에서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분명히 알고 있는 사람처럼 그들 옆을 스치고 지나가, 노숙
자들의 세계로 들어갔다.
사실 이런 광경은 수도 없이 보았고 나는 내 할 일만 하면 된다는 듯이 앞으로 밀고 나가
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나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나는 지하실을 꽉 채우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의 엄청난 숫자에 놀라 입을 떡 벌리고 있었
다. 어떤 사람들은 바닥에 누워 잠을 자려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모여 앉아 낮은 목소
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긴 탁자에 앉아, 어떤 사람들은 접는 의자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콘크리트 블록으로 세운 벽은 앉아 있는 사람들의 등에 가려져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어린아이들은 울거나 놀고 있었고, 아이들 어머니는 아이들이 멀리
못 가게 하려고 애들 쓰고 있었다. 주정뱅이들은 뻣뻣하게 누워 내내 코를 골고 있었다. 자
원봉사자들은 담요를 나누어 주거나, 사람들 사이를 걸어다니면서 사과를 나누어 주고 있었
다.
주방은 한쪽 끝에 있었는데, 음식을 준비하고 나누어 주느라 북적거렸다. 뒤쪽에 모디카이
의 모습이 보였다. 종이컵에 과일 주스를 따르며 쉴새없이 지껄이고 있었다. 음식을 나누어
주는 탁자들에는 길게 줄을 지어 늘어선 사람들이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있었다.
안은 따뜻했다. 몸 냄새와 음식 냄새에 가스의 열기가 섞여 강하고 독특한 냄새가 났으나,
꼭 불쾌한 것만은 아니었다. 형씨처럼 옷을 잔뜩 껴입은 노숙자 한 사람이 지나가다 나와
부딪쳤다. 어서 움직여야 할 것 같았다.
나는 곧장 모디카이에게 갔다. 모디카이는 나를 보고 반가워하였다. 우리는 오랜 친구 사
이처럼 악수를 했고, 그는 나를 두 자원봉사자에게 소개를 했다. 그들의 이름은 잘 들리지
않았다.
모디카이가 말했다.
"완전히 엉망이오. 폭설에, 갑작스러운 추위에. 우리는 밤새 일을 하고 있소. 저기 저 빵을
가져 오시오."
그는 썰어 놓은 하얀 빵이 담긴 쟁반을 가리켰다. 나는 쟁반을 들고 모디카이를 따라 탁
자로 갔다.
"아주 복잡한 일이오. 여기 볼로냐 소시지와 겨자가 있고, 저기 마요네즈가 있소. 샌드위
치 가운데 반은 겨자를 넣고, 반은 마요네즈를 넣어야 하오. 볼로냐 소시지는 한 조감, 빵은
두 조각이오. 이따금씩 땅콩 버터를 바른 빵도 여남은 개 만들어 놓으시오. 알았소?"
"알았습니다."
"금방 알아듣는군."
모디카이는 내 어깨를 툭 치고 사라져 버렸다.
나는 얼른 열 개의 샌드위치를 만들어 내 능숙한 솜씨를 자랑하였다. 이어 나는 속도를
늦추고,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눈을 아래로 내리깔
고 있었지만, 연신 앞의 음식을 흘끔거렸다. 모두 종이 접시, 플라스틱 사발과 숟가락, 냅킨
을 들고 있었다. 그들이 줄을 지어 지나가면 사발에는 수프가 차고, 접시에는 샌드위치 반
개가 올라가고, 거기에 사과 하나와 작은 쿠키가 보태지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는 사과 주스 한 컵이 기다리고 있었다.
대부분 주스를 건네 주는 자원봉사자에게 작게 "고맙소" 하고 한 마디를 던지고, 조심스
럽게 접시와 사발을 들고 멀어져 갔다. 아이들조차도 음식을 다룰 때는 조용하고 신중했다.
접시에 든 음식으로부터 얼굴로 피어오르는 향기, 입 안에 들어간 음식이 주는 온기와 느
낌을 음미하기 위해 대부분 천천히 식사를 했다. 그러나 매우 서두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내 옆에는 버너가 네 개 달린 가스 스토브가 있었는데, 버너마다 커다란 수프 단지가 끓
고 있었다. 그 맞은 편에 있는 탁자에는 셀러리, 당근, 양파, 토마토, 닭 몸통 등이 있었다.
커다란 칼을 든 자원봉사자가 열심히 칼질을 해대고 있었다. 다른 두 자원봉사자가 스토브
를 담당하고 있었다. 몇 사람은 음식을 나누어 주는 탁자로 음식을 가져갔다. 샌드위치 담당
자는 나 하나였다.
"땅콩 버터 샌드위치가 더 필요한데."
모디카이가 주방으로 돌아가면서 말했다. 그는 탁자 밑에서 2갤런들이의 땅콩 버터 단지
를 꺼내더니 말을 이었다.
"그 일을 좀 해 줄 수 있겠소?"
"전문가의 솜씨를 보여 드리죠."
그는 내가 일을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잠시 줄이 짧아져 있었다. 그는 이야기를 하고 싶
어했다.
"난 그린 씨가 변호사인 줄 알았는데요."
나는 땅콩 버터를 바르며 말했다.
"나는 변호사이기 전에 인간이오. 둘 다 되는 것도 가능한 일이지. 아, 그렇게 많이 바르
면 안 되오. 능률적으로 일을 해야지."
"이 음식은 어디서 옵니까?"
"음식 은행에서. 모두 기부받은 것이오. 오늘 밤은 닭이 있어 다행이오. 별미라고 할 수
있지. 보통은 야채뿐이거든."
"이 빵은 별로 신선하지 않은데요."
"그렇소. 하지만 공짜요. 커다란 빵집에서 오는 거요. 유효 기간이 지난 것들이지. 원한다
면 그 샌드위치를 먹어도 좋소."
"고맙습니다. 방금 하나 먹었습니다. 그린 씨도 여기서 먹나요?"
"잘 안 먹지."
뚱뚱한 몸집으로 볼 때 모디카이는 채고 수프와 과일만 먹고 사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
는 탁자 끝에 앉아 사람들을 살폈다. 모디카이가 말을 이었다.
"합숙소에는 처음 와 보는 것이오?"
"네."
"마음 속에 처음 떠오르는 단어가 뭐요?"
"가망 없다."
"예측할 수 있는 단어로군. 하지만 극복하게 될 거요."
"여기에 몇 사람이나 삽니까?"
"한 사람도 살지 않아요. 여긴 임시 합숙소요. 주방은 매일 점심때와 저녁때 개방하지만,
원칙적으로 이곳은 합숙소가 아니오. 하지만 날씨가 나쁘면 문을 열어 주지. 착한 마음씨를
가진 교회요."
나는 그 말을 이해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럼 이 사람들은 어디 삽니까?"
"어떤 사람들은 불법 점거를 하고 있소. 버려진 건물 같은 데 사는 거요. 그들은 운이 좋
은 축이지. 어떤 사람들은 거리에서 살고 있소. 또 어떤 사람들은 공원에, 어떤 사람들은 버
스 차고에, 어떤 사람들은 다리 밑에. 날씨만 괜찮다면 그런 곳에서도 살 수 있소. 하지만
오늘밤 같으면 얼어죽기 십상이지."
"그럼 합숙소는 어디 있습니까?"
"여기저기 흩어져 있소. 한 스무 곳쯤 되오. 그 가운데 반은 개인들의 후원금을 모아 운영
하는 곳이고, 나머지 반은 시에서 운영하는 곳이오. 그런데 새 예산안 덕분에 시에서 운영하
는 곳들 가운데 두 곳은 곧 문을 닫을 판이오."
"침대는 몇 개나 있습니까?"
"대충 5천 개쯤."
"노숙자는 몇 명이나 되는데요?"
"어려운 질문이요. 숫자를 헤아리기 쉬운 집단이 아니거든. 한 만명쯤 될 거요."
"만 명이요?"
"그렇소. 그것도 그냥 거리에 나와 있는 사람들 수만 따진 거요. 한두 달 노숙자 생활에서
벗어나 가족이나 친구들과 살고 있는 사람들이 또 2만 명은 될 거요."
"그러니까 거리에 나와 있는 사람들 수가 적어도 5천은 된다는 거로군요?"
나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그대로 드러내며 말했다.
"적어도."
자원봉사자 한 사람이 다가와 샌드위치를 달라고 했다. 모디카이가 도와 주어, 우리는 곧
여남은 개를 만들 수 있었다. 이어 우리는 다시 쉬면서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문이 열리더니
젊은 여자가 아이들을 데리고 천천히 들어왔다. 아기 하나는 안고 있었고, 뒤로 세 아이가
따라오고 있었다. 한 아이는 반바지에 짝이 맞지 않는 양말을 신고 있었다. 신발은 보이지
않았다. 어깨에는 수간을 두르고 있었다. 나머지 두 아이는 그래도 신발은 신고 있었지만,
옷이 빈약한 것은 똑같았다. 아기는 잠들어 있는 것 같았다.
애엄마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일단 지하실로 들어오기는 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망
설이는 것 같았다. 탁자에는 자리가 없었지만, 그녀는 자기 가족을 이끌고 음식이 있는 곳으
로 향했다. 자원봉사자 두 사람이 웃음을 지으며 그들을 맞으러 다가갔다. 한 사람이 그들을
주방 근처 모퉁이에 데려다 놓고 음식을 날라다 주었다. 또 한 사람은 담요로 그들의 몸을
덮어 주었다.
모디카이와 나는 그런 상황이 전개되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관찰하는 모습은
보여주지 않으려 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눈길을 어디로 돌리는지 신경을 쓰는 사람도 없었
다.
"눈보라가 끝나면 저 여자는 어떻게 하지요?"
내가 물었다.
"누가 알겠소? 한번 직접 물어 보구려."
모디카이는 내 허를 찌른 셈이었다. 나는 이런 일에 직접 손을 담그고 싶은 마음은 없었
기 때문이다.
"위싱턴 변호사 협회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소?"
모디카이가 물었다.
"어느 정도는요. 왜요?"
"그냥 궁금했소. 변호사 협회에서는 노숙자들을 위한 무료 봉사도 많이 하거든."
그는 미끼를 던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미끼를 물 생각이 없었다.
"나는 사형 사건 일을 맡고 있지요."
나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어느 정도는 사실이기도 했다. 4년 전, 우리 회사 파트너 한 사
람이 텍사스의 한 사형수를 위한 브리프를 쓰고 있었는데, 그 일을 도와 준 적이 있었기 때
문이다. 회사에서는 모든 어소시에이트들에게 무료 변론 일을 권장했지만, 무료로 하는 일
때문에 청구서 쓰는 일이 지장을 받을 정도가 되라고까지 권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여자와 네 아이를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두 아이는 쿠키를
먼저 집어들고, 수프는 식도록 내버려 두었다. 애엄마는 마약에 취했거나 무슨 충격을 받은
듯했다.
"저 여자가 지금 가서 살 수 있는 데가 있을까요?"
내가 물었다.
"아마 없을 거요."
모디카이가 냉담하게 대꾸했다. 그는 여전히 탁자에 걸터앉아 큰 발을 대롱거리고 있었다.
모디카이가 말을 이었다.
"어제부로 임시 합숙소의 대기자 명단이 5백 명을 넘어섰소."
"임시 합숙소에만 말입니까?"
"그렇소.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면 시에서 바지를 베풀어 개방해 주는 혹한기용 합숙소가
하나 있소. 저 여자는 그곳으로 가는 것 외에는 다른 희망이 없는데, 오늘 밤에는 그곳도 만
원일 거요. 어쨌든 시에서는 날씨가 풀리면 그곳을 다시 폐쇄하는 친절을 베풀지."
수프 담당자가 집에 가야 했다. 내가 그 순간에 근처에 있는 자원봉사자들 가운데 가장
한가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일을 떠맡게 되었다. 모디카이 혼자 샌드위치를
만드는 일을 했고, 나는 한 시간 동안 셀러리, 당근, 양파에 칼질을 했다. 교회의 급식소 설
립자 가운데 한 사람인 돌리 양이 조심스러운 눈길로 내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가지 11년 동안 노숙자에게 음식을 먹이는 일을 맡아 왔다. 이곳은 그녀의 주방이었다.
나도 이 곳에서 일을 하게 되어 영광이라고 느끼는 사람이었으나, 결국 내가 썬 셀러리가
너무 크다고 핀잔을 듣고야 말았다. 나는 곧 크기를 조정했다. 그녀의 앞치마는 하얀색에 얼
룩 하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실에 커다란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이런 사람들을 보는 데 익숙해졌습니까?"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우리는 난로 앞에 서서, 뒤쪽 어딘가에서 벌어진 말다툼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다. 모디카이와 목사가 나서자 사태가 수습되었다.
"전혀 그렇지 못해요."
그녀는 수건에 손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도 가슴이 아파요. 하지만 '가난한 자에게 먹을 것을 주는 자는 행복하다'는 격언도
있잖아요. 그것 때문에 계속 이러고 있는거죠."
그녀는 나에게서 고개를 돌리더니 천천히 수프를 저었다.
"닭이 준비가 되었군요."
그녀가 내 쪽에 대고 말했다.
"무슨 뜻이죠?"
"닭을 스토브에서 내려서, 국물은 더 단지에 붓고, 닭은 식힌 다음에 뼈를 발라 내라는 뜻
이에요."
뼈를 바르는 데도 기술이 필요했다. 특히 돌리 양이 권장하는 요리법을 사용하려면. 일을
마치고 나자 내 손가락들은 뜨끈거렸으며, 곧 물집이 잡힐 것만 같았다.
8
모디카이는 나를 데리고 어두운 계단을 올라가 로비로 향했다.
"발 조심하시오."
그는 거의 속삭이는 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스윙도어를 몇 개 지나 예배당 안으로 들어갔
다. 침침했다. 사람들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누워 잠을 청하고 있었다. 신도 좌석 밑으로 들
어가 꿈틀대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머니들은 아이들이 돌아다니지 못하게 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복도에도 사람들이 웅크리고 앉아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간신히 그들 사이로 빠져
나가 제단까지 갈 수 있었다. 성가대석에도 사람들이 꽉 차 있었다.
"이렇게 해 주는 교회는 많지 않소."
모디카이가 속삭였다. 우리는 제단 탁자 옆에 서서 줄줄이 늘어선 신도 좌석들을 살펴보
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니 교회들이 문을 열어 주지 않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일요일에는 어떻게 합니까?"
나도 속삭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날씨에 따라 다르지. 여기 목사는 우리 편이라고 할 수 있소. 때로는 사람들을 내쫓을 수
없어 예배를 취소하기도 하오."
'우리 편'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확실치 않았으나, 나는 그 클럽의 회원이라는 느낌
이 들지 않았다. 천장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제야 우리 머리 위에 말발굽 모양의 발
코니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곳의 신도석에 줄줄이 자리를
잡고 있는 또 다른 사람들의 무리에 천천히 초점을 맞추었다.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는 중얼거리기 시작했으나, 말을 맺을 수가 없었다.
"세어 보지 않소. 그냥 먹여 주고 재워 줄 뿐이오."
바람이 세차게 불어와 건물 옆면을 때렸다. 창문들이 덜그덕거렸다. 예배당 안은 지하실보
다 추웠다. 우리는 뒤꿈치를 들고 사람들의 몸을 넘어, 오르간 옆의 문으로 나갔다.
11시가 다가오고 있었다. 지하실은 여전히 혼잡했다. 그러나 수프 앞에 줄을 선 사람들은
없었다.
"나를 따라오시오."
모디카이가 말했다.
그는 플라스틱 사발을 하나 들더니 자원봉사자 앞에 내밀었다.
"어디, 얼마나 요리를 잘 하는지 봅시다."
모디카이는 웃으면서 자원봉사자에게 말했다.
우리는 사람들 한가운데 있는 접는 탁자에 앉았다. 옆에 있는 부랑자들과 몸이 닿았다. 모
디카이는 늘 하는 일처럼 음식을 먹고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수프를 집적거리며 몇 숟갈 떠먹어 보았다. 돌리 양 덕분에 수프의 맛은 아주 좋았다. 하지
만 나는 멤피스 출신에 예일 법대를 거쳐 드레이크 & 스위니에 입사한 부유한 백인 남자인
마이클 브록이 워싱턴 북서부 한가운데 있는 어떤 교회의 지하실에 노숙자들과 함께 앉아
있다는 사실을 넘어설 수가 없었다. 나 말고 백인은 딱 한 사람뿐이었는데, 중년의 알코올
중독자인 그 사람은 이미 식사를 바치고 사라진 뒤였다.
내 렉서스는 이제 사라져 버렸을 것 같았다. 건물 밖으로 나가면 나는 5분도 견디지 못하
고 죽임을 당할 것 같았다. 나는 모디카이가 언제 어떻게 떠나든 그와 함께 움직이겠다고
맹세를 했다.
"이건 좋은 수프로군."
모디카이는 말하더니, 설명을 덧붙였다.
"수프를 이용할 수 있는 재료가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지거든. 조리법도 장소마다 다르고."
"지난번에 '마르타의 식탁'에서는 국수가 나왔소."
내 오른쪽에 있는 남자가 말했다. 그의 팔꿈치는 내 팔꿈치보다 내 수프 그릇에 더 가까
이 다가가 있었다.
"국수?"
모디카이는 짐짓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덧붙였다.
"수프에 말이오?"
"그렇소. 한 달에 한 번쯤은 국수가 나오지요. 물론 이제는 다 그걸 알아서, 자리를 얻기
가 힘들긴 하지만."
나는 그가 농담을 하는 건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눈은 진지하게 반짝거
리고 있었다. 노숙자가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수프 급식소에서 자리를 얻기가 힘들다고 탄
식한다는 것이 나에게는 유머로 여겨졌다. 좋은 식당에서 자리를 얻기 힘들다―조지 타운에
있는 내 친구들에게서 얼마나 많이 들었던 말인가.
모디카이가 웃음을 지으며 남자에게 물었다.
"이름이 뭐요?"
나는 모디카이가 늘 이름과 얼굴을 함께 외우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가 사랑하는
노숙자들은 단지 피해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사실 그것은 자연스러운 호기심이라고 할 수 있었다. 노숙자들은 어떻게 노숙자가 되는
가? 미국의 방대한 공적 지원 체제의 어느 곳에 빈틈이 생겼길래 다리 밑에 살아야 할 정도
로 가난한 미국인들이 생긴단 말인가?
"드라노요."
노숙자가 내 큼지막한 셀러리 토막을 집어 어적어적 씹으며 말했다.
"드라노?"
모디카이가 되물었다.
"드라노."
그가 되풀이했다.
"성은?"
"없소. 너무 가난해서."
"드라노라는 이름은 누가 지어 주었소?"
"우리 엄마가."
"당신 어머니가 드라노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을 때 당신은 몇 살쯤 되었소?"
"다섯 살쯤."
"왜 드라노가 되었소?"
"엄마한테는 아기가 하나 있었는데, 좀체 입을 다물지 않고 계속 울어만 대는 거였소. 모
두들 잠을 자지 못했소. 그래서 내가 아기에게 드라노를 먹였소."
그는 수프를 저으며 그 이야기를 해 주었다. 너무 연습이 잘 된 말이 너무 말끔하게 나와
서 나는 그 이야기를 조금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귀를 기울이고 있었
고, 드라노는 그런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아기는 어떻게 되었소?"
모디카이가 물었다. 순진한 사람 역을 맡고 있었다.
"죽었죠."
"그럼 그 아기가 당신 남동생이었겠군."
"아니. 여동생이었소."
"알겠소. 그러니까 당신은 당신 여동생을 죽였다는 이야기로군."
"그렇소. 대신 그 후로 우린 잠은 많이 잘 수 있었소."
모디카이는 비슷한 이야기를 많이 들어보았다는 듯, 나를 향해 눈을 찡긋 했다.
내가 물었다.
"어디 살고 있습니까, 드라노?"
"여기 워싱턴에 살고 있소."
"어디 묵고 있소?"
모디카이가 내 질문의 어휘를 수정하여 다시 물었다.
"여기저기 묵고 있소. 옆에 있어 달라고 돈을 주는 여자들이 많거든."
드라노 건너편에 있던 두 남자가 그의 이야기에 재미를 느낀 것 같았다. 한 남자는 소리
죽여 웃었고, 또 한 남자는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우편물은 어디서 수령하오?"
모디카이가 물었다.
"우체국에서."
드라노가 대답했다. 드라노는 모든 질문에 대해 금방 답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 같
았다. 그래서 우리는 드라노를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돌리 양은 스토브 불을 끈 뒤에 자원봉사자들에게 커피를 만들어 주었다. 노숙자들은 하
룻밤 잘 자리를 준비하고 있었다.
모디카이와 나는 어두운 주방의 탁자 가장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커다란 배식구 유리
창을 통하여, 되는 대로 자리를 메우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내가 물었다.
"언제까지 여기 있을 겁니까?"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봐야지. 지금 한 방에 2백 명 정도의 사람들이 있소. 흔히 있는일이지. 어쨌든 이런 경우
에 목사는 내가 여기 있는 걸 좋아할 거요."
"밤새도록 말입니까?"
"여러 번 해 본 일이오."
내 계획에 이 사람들과 함께 잔다는 것은 없었다. 그러나 모디카이가 나를 호위해 주지
않는 상태에서 건물을 나간다는 것도 없었다.
"가고 싶을 때 언제라도 가시오."
모디카이가 말했다. 간다는 것은 내 몇 가지 안 되는 선택 사항들 가운데도 최악의 것이
었다. 한밤중에, 그것도 금요일 밤에, 워싱턴 거리에 나가다니. 아름다운 차를 가진 백인 남
자가. 눈이 오든 오지 않든, 나는 밖에서 내가 마주치게 될 가능성이 높은 일들이 마음에 들
지 않았다.
"가족은 있습니까?"
내가 물었다.
"있지. 아내는 노동부에서 비서로 일하고 있소. 아들이 셋 있는데, 하나는 대학에 다니고
있소, 하나는 군대에 가 있소."
세 번째 아들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그의 목소리가 흐려졌다. 나는 더 이상 물어볼 생
각이 없었다.
"그리고 하나는 십 년 전에 길거리에서 잃었소. 폭력배들에게 당했지."
"안타까운 일이군요."
"당신은 어떻소?"
"결혼은 했지만, 아이는 없습니다."
몇 시간 만에 처음으로 클레어 생각이 났다.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면 클레어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우리 둘 다 자선 사업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일에 시간을 쓸 여유는 누
려 본 적이 없었다.
클레어는 아마 이렇게 궁시렁거릴 것이다.
"이 사람이 정말 망가지고 있군."
하지만 상관없었다.
"부인은 뭘 하시오?"
모디카이가 가벼운 대화를 하려는 마음에서 물었다.
"조지타운의 외과 레지던트입니다."
"이야, 당신네들은 곧 성공을 하겠군, 안 그렇소? 당신은 대형 법률 회사의 파트너가 될
거고, 부인은 외과의가 될 거고. 아메리칸 드림이 다시 한 번 실현되는 순간이로군."
"그렇겠죠."
목사가 갑자기 나타나더니, 모디카이를 주방 구석으로 끌고 가 조용히 소근거렸다. 나는
사발에서 쿠키 네 개를 집어들고 구석으로 갔다. 젊은 애엄마가 앉아서 베개를 머리에 받친
채 잠을 자고 있었다. 아기는 겨드랑이 끼고 있었다. 어린아이들은 담요 밑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맏이는 깨어 있었다.
나는 아이 옆에 쭈그리고 앉아 쿠키를 한 개 내밀었다. 아이는 반짝 빛내며 과자를 쥐었
다. 나는 아이가 쿠키를 먹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아이는 다 먹더니 하나를 더 달라
고 했다. 아이는 몸집이 작고 뼈만 앙상했다. 4살 정도밖에 안 되어 보였다.
어머니가 머리를 앞으로 떨구다가 소스라쳐 놀라며 눈을 떴다. 그녀는 지치고 처량한 눈
으로 나를 보다가, 내가 쿠키를 나누어 주는 착한 아저씨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희미하
게 웃음을 짓더니 베개를 고쳐 베었다.
"이름이 뭐니?"
나는 아이에게 속삭였다. 쿠키를 두 개 주자 아이는 내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온타리오."
아이는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다.
"몇 살이야?"
아이는 손가락 네 개를 들어올렸다가, 하나를 아래로 접더니, 다시 들어올렸다.
"네 살?"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쿠키를 하나 더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나는 얼른 한 개를 더
주었다. 줄 수 있는 것이라면 뭐라도 더 주었을 것이다.
"어디 묵고 있니?"
나는 작은 소리로 물었다.
"차에서요."
아이도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그 말을 소화하는 데에는 잠시 시간이 걸렸다. 이번에는 뭘 물어 보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이는 먹느라 바빠 내 이야기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나는 아이에게 세 가지 질
문을 했소, 아이는 세 번 정직하게 대답을 했다. 이들은 차에서 살고 있었다.
나는 모디카이에게 달려가서 차에서 사는 사람들을 발견했을 때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묻
고 싶었다. 그러나 계속 온타리오를 보며 웃음만 짓고 있었다. 아이도 나를 보고 웃음을 지
었다. 마침내 아이가 입을 열었다.
"사과 주스 또 있어요?"
"그럼."
나는 주방으로 가 컵 두 개에 사과 주스를 따랐다.
아이는 벌컥벌컥 컵 하나를 비웠다. 나는 두 번째 컵을 내밀었다.
"고맙습니다, 해야지."
"고맙습니다."
그러면서 아이는 쿠키를 더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나는 접는 의자를 하나 가져다가 온타리오 옆에 자리를 잡고, 벽에 등을 기댔다. 지하실은
가끔 조용해졌지만, 전체적으로 고요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침대 없이 사는 사람들은 차분하
게 잠을 잘 수 없기 때문이다. 이따금씩 모디카이가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달려가 급작스러
운 불행을 해결하곤 했다. 그의 커다란 몸집이 워낙 위협적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의 권위
에 도전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온타리오는 배가 든든해지자 다시 잠이 들었다. 작은 머리를 어머니 발 위에 뉘고 있었다.
나는 슬며시 주방으로 가, 커피를 한 잔 더 따르고, 구석의 의자로 돌아갔다.
순간 아기가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는 애처로운 목소리로 엄청나게 크게 울어젖혔다. 그
소리 때문에 방 전체의 공기에 파동이 일어나는 느낌이었다. 어머니는 갑자기 잠에서 깨는
바람에 어리둥절했고, 피곤했고, 화가 났다. 어머니는 아기에게 입을 다물라고 하고는, 안고
흔들어 주었다. 아기는 더 큰 소리로 울었다. 다른 숙박객들도 부시럭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 느낌이나 생각 없이 팔을 뻗어 아이를 안아들었다. 그러면서 어머니의 신뢰를
얻기 위해 그녀를 향해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그녀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저 짐을 던 것이
홀가분할 뿐인 것 같았다.
아기는 전혀 무겁지 않았다. 그러나 흠뻑 젖어 있었다. 아기의 머리를 내 어깨에 올려놓고
등을 토닥여 주기 시작하다가 그것을 깨달았다. 나는 주방으로 달려가, 모디카이, 또는 나를
구원해 줄 다른 자원봉사자를 찾았다. 그러나 돌리 양은 이미 한 시간 전에 집에 가고 없었
다.
다행스럽고 또 놀랍게도, 내가 난로 주위를 돌아 다니는 동안 아기는 잠잠해지기 시작했
다. 나는 토닥이고 어르며 수건 같은 것을 찾았다. 내 손도 흠뻑 젖었다.
내가 어디 있는 거지? 내가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내가 어두운 주방에서, 노숙자의
아기에게 콧노래를 불러 주며, 기저귀에 싼 것이 오줌뿐이기를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 친구
들은 뭐라고 할까?
아기에게서 역겨운 냄새는 나지 않았지만, 아이의 머리에 있던 이들이 내 머리로 옮겨져
오는 느낌이었다. 순간 내 최고의 친구 모디카이가 나타나 전등 스위치를 올렸다.
"어이쿠, 귀여워라."
그가 말했다.
"기저귀 였나요?"
나는 작지만 날카로운 소리로 물었다.
"큰 거야, 작은 거야?"
모디카이는 즐거운 목소리로 물으며, 옷장을 향해 걸어갔다.
"모르겠어요. 어서 서두르기나 하세요."
모디카이는 팸퍼스 하나를 꺼냈고, 나는 아기를 그에게 떠넘겼다. 내 데님 재킷의 왼쪽 어
깨 근처가 크게 젖어 있었다. 모디카이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능숙한 솜씨로, 아이를 도마
에 올려놓고, 적은 기저귀를 빼고―계집아이라는 것이 드러났다―뭔가로 닦아 주고, 새 기저
귀를 채우고, 다시 아이를 나한테 떠넘겼다.
"자, 다 됐소."
모디카이가 의기양양하게 말을 이었다.
"완전 신품이오."
"법대에서는 그런 걸 안 가르칠 텐데요."
나는 아기를 받으며 말했다.
아기를 안고 한 시간 정도 어슬렁거렸다. 마침내 아기가 잠이 들었다. 나는 아기를 재킷으
로 싸서, 어머니와 온타리오 사이에 살며시 내려놓았다.
토요일 새벽 3시가 되어 가고 있었다. 가야 했다. 새롭게 자극받은 양심이 하루에 받아낼
수 있는 용량은 그 정도였다. 모디카이가 거리까지 나를 배웅하더니, 와 주어서 고맙다고 하
고, 코트도 입히지 않고 나를 밤 속으로 떠나보냈다. 내 차는 새 눈으로 덮인 채 있던 자리
에 그대로 있었다.
모디카이는 교회 앞에 서서 차를 몰고 떠나는 내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9
화요일에 형씨와 마주친 이후로 나는 드레이크 & 스위니를 위하여 단 한 시간의 청구서
도 발송하지 않았다. 나는 5년 동안 한 달에 평균 2백 시간을 청구하였는데, 이것은 엿새 동
안 하루에 8시간을 청구하고도, 거기에 2시간 정도를 더 청구했다는 뜻이다. 하루도 낭비할
수 없었으며, 귀중한 몇 시간을 무료로 보내 버리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드문 일이기는 했
지만 혹시 다른 사람들에게 처질 때면, 토요일에 12시간을 일했소, 일요일에도 그런 식으로
일을 했다. 처지지 않았을 경우 토요일에는 7,8시간만 일했소, 일요일에는 몇 시간 정도로
끝을 냈다. 클레어가 의대에 간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토요일 늦은 아침에 물끄러미 침실 천장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아무런 일도 안
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몸이 마비될 듯했다. 그렇다고 사무실에 가고 싶지는 않았다. 생각하
고 싶지도 않았다. 폴리가 내 책상 위에 단정하게 줄을 맞추어 놓아 두었을 분홍색 전화메
시지들이 두려웠다. 고위층에서 내 상태를 궁금해하여 한번 만나자고 보냈을 메모들이 두려
웠다. 남 말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찾아와 나누려고 할 잡담이 두려웠다. 친구들과 진짜로
걱정하는 사람들과 전혀 걱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나에게 물을 수밖에 없는 '잘 지내나?' 하
는 인사가 두려웠다. 그러나 가장 두려운 것은 일이었다. 반트러스트 사건들은 오래 걸리고
힘이 들었다. 파일들이 너무 많아 상자가 여러 개 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소용이
란 말인가? 10억짜리 법인이 다른 10억짜리 법인과 싸운다는 것이. 수많은 변호사들이 달려
들어 쉴새없이 서류를 만들어 내는 것이.
나는 한 번도 그 일을 좋아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었다. 열심히 그 일을 연습하고, 똑똑하게 굴고, 누군가 나를 요
구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세금 쪽일 수도 있고, 노동 쪽일 수도 있고, 소송 쪽일 수도
있다. 그러나 누가 반트러스트 법 자체를 좋아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순전히 의지의 힘으로 침대에서 나와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
아침 식사는 M 스트리트의 한 빵집에서 산 크로아상과 진한 커피였다. 운전을 하며 모두
먹고 마셨다. 온타리오는 무엇으로 아침 식사를 할까? 그것을 궁금해하다가, 나는 자신을 그
만 고문하자고 혼자말을 했다. 나에게도 죄책감 없이 시사를 할 권리 정도는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제 나에게 음식은 중요성을 잃고 있었다.
라디오에서는 최고 기온이 영하 7도, 최저 기온이 영하 18도이며, 일 주일 동안 눈은 오지
않을 것이라고 예보했다.
건물 로비까지는 아무도 안 만나고 잘 갔다. 그러나 엘리베이터에 타는 순간 통신 부서의
브루스 뭔가 하는 친구가 올라타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떻습니까?"
"괜찮아요. 그쪽은?"
나는 약간 날카롭게 대꾸했다.
"좋습니다. 이봐요, 우리가 당신을 성원하고 있습니다. 잘 버티십시오."
나는 그의 후원이 큰 도움이나 되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게도 그는 2층에서 내
렸다. 그러나 나가기 전에 마치 탈의실에서 만난 운동선수들처럼 내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이 손 치워, 브루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망가진 물건이었다. 마담 드비어의 책상과 회의실을 지나가는 내 발걸음은 평소보다
느렸다. 대리석 복도를 지나 내 사무실로 들어가 가죽 회전의자에 주저앉았다. 피곤했다.
폴리가 전화 메시지를 남기는 대는 몇 가지 방법이 있었다. 내가 메시지를 보고 부지런히
전화를 하면, 내 노력이 가상하다고 인정을 하여 전화기 옆에 메모지 한두 장만을 남겨두었
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에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시로 책상 한 가운데
줄줄이 메모지를 늘어놔, 책상을 분홍색의 바다로 바꾸어 버렸다. 물론 그 전화메시지들은
완벽하게 시간 순서를 따르고 있었다.
전화 메시지는 모두 39개였다. 몇 개는 급한 것이었고, 몇 개는 간부들에게서 온 것이었
다. 폴리의 메시지로 보건대, 루돌프가 특히 짜증이 심한 것 같았다. 나는 메시지들을 하나
씩 주워모으며 천천히 읽고, 다 모은 것을 옆으로 치웠다. 우선 평화롭게, 아무런 압박감 없
이, 커피부터 다 마실 생각이었다. 그래서 책상에 앉은 채 두 손으로 컵을 잡고 멍한 표정으
로 앉아 있었다. 꼭 절벽 가장자리에서 망설이는 사람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고 있을 때
루돌프가 들어왔다.
첩자들이 그에게 전화를 한 것이 틀림없었다. 망을 보고 있던 사무직원이거나, 아니면 엘
리베이터에서 만난 브루스이겠지. 어쩌면 회사 전체가 비상 경계중었을지도 모른다. 아니야,
그러기에는 너무 바쁜 사람들이야.
"안녕, 마이크."
루돌프는 시원시원한 목소리로 인사를 하고는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심각한 일을
앞두고 있는 사람의 자세였다.
"안녕하세요, 루디."
이제까지 그를 면전에서 루디라는 애칭으로 부른 적이 없었다. 늘 루돌프였다. 그의 현부
인과 파트너들은 그를 루디라고 불렀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
"어디 갔었나?"
루돌프가 동정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내비치지 않으며 물었다.
"멤피스에요."
"멤피스?"
"네. 부모님을 만날 일이 있어서요. 그리고 가족 주치의인 정신과 의사도 거기 있거든요."
"정신과 의사?"
"네. 정신과 의사가 이틀 동안 나를 관찰했습니다."
"자네를 관찰해?"
"네. 페르시아 양탄자가 깔려 있고, 저녁으로 연어가 나오는 호화로운 방에서 말입니다.
하루에 천 달러나 하더군요."
"이틀 동안이나? 자네가 이틀 동안이나 입원을 했다고?"
"네."
거짓말을 해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거짓말을 해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이 부담스럽지도
않았다. 이 회사는 마음만 먹으면 가혹하게, 심지어 무자비하게까지 나올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나는 지금 루돌프의 닦달을 받을 기분이 아니었다. 그는 집행위원회로부터 명령을
받고 이곳에 왔을 것이며, 내 방을 나가서 몇 분 뒤에 보고서를 작성해 올릴 터였다. 내가
루돌프를 녹일 수 있으며, 보고서 내용도 부드러워질 것이고, 간부들도 긴장을 풀 터였다.
그러면 짧은 기간이기는 하지만 내 인생도 편해질 터였다.
"전화라도 했어야지."
루돌프가 여전히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으나, 곧 얼음에는 금이 간 것 같았다.
"어이쿠, 루돌프. 나는 갇혀 있었단 말입니다. 전화도 없었어요."
내 목소리에는 그를 녹일 만큼의 괴로움이 담겨 있었다.
루돌프는 한참 입을 다물고 있다가 말했다.
"괜찮나?"
"괜찮습니다."
"정말 괜찮은 건가?"
"정신과 의사가 괜찮다고 했습니다."
"100퍼센트?"
"110퍼센트요. 아무 문제 없습니다, 루돌프. 잠깐 휴식이 필요했던 것뿐입니다. 이제 괜찮
습니다. 전속력으로 밀고 나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루돌프가 원하는 모든 것이었다. 그는 웃음을 지으며 긴장을 풀더니 말했다.
"할 일이 많아."
"압니다. 어서 해야죠."
그는 달려가다시피 내 사무실을 나갔다. 그는 곧장 전화로 가서, 회사의 많은 직공들 가운
데 하나가 다시 말안장에 올라타 앞으로 달려갈 준비를 하고 있다고 보고할 터였다.
문을 잠그고 불을 껐다. 이어 한 시간 동안 애를 써서 서류와 낙서로 책상을 뒤덮었다. 아
무 일도 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한 시간은 때우고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은 도저히 못 참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전화 메시지들을 호주머니에
쑤셔넣고 나와 버렸다. 들키지 않고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나는 메사추세스 거리의 대형 할인점에 들러, 기쁜 마음으로 쇼핑을 즐겼다. 아이들을 위
해 사탕과 작은 장난감들을 샀고, 그들 모두를 위해 비누와 세면용품을 샀고, 다양한 크기의
아동용 양말과 스웨트 팬츠를 샀다. 팸퍼스 기저귀도 한 박스 샀다. 2백 달러를 쓰는 일이
그렇게 즐거워 보기는 처음이었다.
사실 나는 그들을 따뜻한 곳으로 돌아오게 할 수 있다면 얼마든 쓸 용의가 있었다. 한 달
동안 모텔비를 내야 한다 해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곧 내 의뢰인들이 될 것이며,
나는 그들이 제대로 된 거주지를 얻을 때까지 맹렬히 협작을 하고 소송을 해 나갈 생각이었
다. 나는 어서 누군가에게 소송을 걸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교회 건너편에 주차를 했다. 전날 잠에 주차를 할 때보다는 두려움이 훨씬 덜했지만, 그래
도 여전히 무서웠다. 나는 지혜롭게도 선물을 차 안에 두고 내렸다. 만일 그냥 들고 들어가
면, 나를 산타클로스로 오인하여 폭동이 일어날지도 모르니까. 내 계획은 그 가족과 함께 그
곳을 떠나, 그들에게 모텔을 잡아 주고, 목욕과 소독을 하게 하고, 배부를 때까지 먹여 주고,
혹시 병원에 갈 일은 없는지 확인하고, 필요하다면 신발이나 따뜻한 옷을 사 주고, 그리고
다시 음식을 사 주는 것이었다. 비용이 얼마가 들든,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상관없었다.
부유한 백인이 죄책감을 조금 덜어내기 위해 그런다고 생각해도 상관없었다.
돌리 양은 나를 보고 반가워하였다. 그녀는 인사를 하더니, 껍질을 벗겨야 하는 야채 한
무더기를 가리켰다. 그러나 나는 우선 온타리오와 그의 가족부터 찾아야 했다. 그러나 보이
지 않았다. 어제 있던 자리에는 없었다. 그래서 누워 있는 노숙자들을 넘어가기도 하고, 비
켜가기도 하면서 지하실을 돌아다녀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예배당 안에도 없었고, 2층에도
없었다.
나는 감자 껍질을 벗기며 돌리 양과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어젯밤의 그 가족을 기억했다.
그러나 그녀가 9시쯤 도착했을 때는 벌써 떠나고 없었다고 했다.
"어디로 갔을까요?"
"이봐요, 이 사람들은 계속 움직여요. 이 급식소에서 저 급식소로, 이 합숙소에서 저 합숙
소로 움직이죠. 브라이트우드에서 치즈를 준다는 소식을 들었을지도 모르고, 어디에 담요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지도 모르죠. 어쩌면 맥도널드에서 일자리를 얻어, 아이들을 여동생에
게 맡겨 두었을 수도 있어요. 모르는 일이죠. 어쨌든 한 군데 머물지는 않아요.."
온타리오의 어머니가 일자리를 얻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 문제를
가지고 주방에서 돌리 양과 입씨름을 할 생각은 없었다.
점심 식사를 타려는 줄이 형성될 즈음 모디카이가 도착했다. 내가 먼저 그를 보았다. 둘의
눈이 마주쳤을 때 그는 아주 환하게 웃음을 지었다.
샌드위치를 만드는 일은 새로운 자원봉사자가 했다. 모디카이와 나는 배식 탁자에서 일을
했다. 국자로 단지에서 수프를 떠 플라스틱 사발에 부어 주는 일었다. 그러나 여기에도 기술
이 필요했다. 국물을 너무 많이 넣으면 받는 사람이 노려보게 된다. 그렇다고 야채 건더기를
너무 많이 넣으면 나중에는 국물만 남게 된다. 모디카이는 이미 오래 전에 기술을 완벽하게
습득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기술을 어느 정도 익힐 때까지 몇 사람의 노려보는 눈
초리를 감수해야 했다. 모디카이는 음식을 받으러 온 모든 사람들에게 즐겁게 말을 건넸다.
안녕, 잘 있었소, 어떻게 지내시오, 다시 만나서 반갑구려 등등. 어떤 사람들을 마주 웃음을
짓기도 했고, 어떤 사람들은 고개도 들지 않았다.
정오가 다가오면서 문이 더 자주 열리고, 줄은 더 길어졌다. 갑자기 많은 자원봉사자들이
나타났다. 주방은 일에 바쁜 행복한 사람들이 덜그럭거리고 쿵쾅거리는 유쾌한 소리로 가득
찼다. 나는 계속 온타리오를 찾고 있었다. 산타클로스가 기다리고 있는데, 이 녀석은 그것도
모르다니.
우리는 줄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각자 한 사발씩 수프를 채웠다. 식탁에는
자리가 없었기 때문에, 주방의 싱크대에 등을 기대고 수프를 먹었다.
"어젯밤에 기저귀 갈아 준 일 기억납니까?"
먹다 말고 내가 물었다.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소?"
"오늘은 그 사람들이 안 보이는데요."
그는 입을 우물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가 오늘 아침에 떠날 때까지는 여기 있었는데."
"그게 몇 시였죠?"
"6시. 저쪽 구석에서 푹 잠이 들어 있었는데."
"어디로 갔을까요?"
"알 수 없지."
"꼬마는 자기들이 차에 묵고 있다고 말하던데."
"아이와 이야기를 해보았소?"
"네."
"그리고 이제 그 아이를 찾고 싶다 이거로군?"
"네."
"기대하지 마시오."
점심 식사 뒤에 해가 얼굴을 내밀자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하나씩 배식 탁자 옆을
지나며 사과나 오렌지를 집어들고 지하실을 떠났다.
"노숙자들은 늘 불안정하오."
모디카이가 사람들 모습을 지켜보며 말을 이었다.
"그들은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오. 그들에게도 관행과 일상이 있고, 좋아하는 장소가 있
고, 거리의 친구가 있고, 할 일이 있소. 지금도 다들 자기들이 잘 가는 공원이나 골목길로
가, 눈을 피할 곳을 찾고 있을 거요."
"지금 바깥은 영하 7도입니다. 밤에는 영하 18도까지 내려갈 거고요."
"돌아올 거요.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리면 이곳은 다시 사람들로 가득 찰 가요. 잠깐 나갑
시다."
우리는 몰리 양에게 잠시 나갔다 오겠다고 말했다. 모디카이의 낡은 포트 토러스가 내 렉
서스 옆에 서 있었다.
"저건 여기서는 오래 못 견딜 거요."
그는 내 차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 동네에서 시간을 많이 보낼 계획이라면, 싼 차로 바꾸는 게 좋을 거요."
나는 내 멋진 차와 헤어진다는 것은 꿈도 꿔 본 적이 없었다. 그의 말이 불쾌하게 들릴
정도였다.
우리는 토러스에 올라탔다. 토러스는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나는 곧 모디카이 그린의 운전
솜씨가 형편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안전띠를 매려고 했으나 성치가 않았다. 그는 그것이
부서졌다는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우리는 눈을 깨끗이 치워 놓은 워싱턴 북서부 거리를 달렸다. 창에 판자를 대놓은 연립주
택들을 지나갔다. 너무 거칠어서 구급차 운전사들도 들어가기를 꺼리는 주택 단지를 지나갔
다. 사슬 위에 철조망이 반짝이는 학교들을 지나갔다. 이어 늘 폭동이 일어나는 동네로 들어
갔다. 그는 훌륭한 여행 안내자였다. 구석구석이 그의 텃밭이나 다름없었다. 모퉁이마다 이
야기가 있었고, 거리마다 역사가 있었다. 다른 합숙소와 급식소들도 지나갔다. 모디카이는
급식소 책임자와 목사들을 많이 알고 있었다. 그에게는 좋은 교회와 나쁜 교회 두 가지밖에
없었다. 중간은 없었다. 그 기준은 노숙자들에게 문을 열어 놓으냐 잠가 놓느냐 하는 것이었
다. 모디카이는 하워드 법대를 가리켰다. 그가 엄청나게 자랑하는 곳이었다. 그는 야간에 5
년 동안 법대를 다녔다. 상근직에 부업까지 하나 해가면서 공부를 했다. 모디카이는 타버린
연립주택을 가리키며, 그곳이 마약업자들의 근거지였다고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그이 셋째
아들 케시어스가 그 연립주택 앞의 보도에서 죽었다고 덧붙였다.
그의 사무실 근처에 이르자, 모디카이는 잠깐 들렀다 가도 되겠냐고 물었다. 우편물을 확
인하고 싶다는 거였다. 물론 괜찮았다. 나야 그냥 따라나온 거니까.
침침하고 추웠다. 아무도 없었다. 그는 전등을 켜더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린 셋이오. 나, 소피아 멘도사, 에이브러험 레보. 소피아는 사회사업가이지만, 거리의
법에 대해서는 나와 에이브러험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이 알고 있소."
나는 그를 따라 지저분한 책상들 주위를 걸어다녔다. 그가 말을 이었다.
"전에는 이곳에 일곱 명의 변호사가 빽빽히 들어앉아 있었소. 상상이 되오? 연방에서 법
률 봉사 지원금이 나올 때의 이야기지. 지금은 공화당 때문에 한 푼도 못 받고 있소. 저쪽에
사무실이 세 개, 내 쪽에 사무실이 세 개가 있소."
그는 사방을 손가락질하며 덧붙였다.
"빈 공간이 많지."
인력 부족 때문에 비어 있는 것일 터였다. 그렇게 비어 있다 해도, 낡은 파일들이 담긴 바
구니나 먼지가 덮인 법률 서적들에 걸려 넘어지지 않고 걸어다닌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
었다.
"이 건물은 누구 소유입니까?"
"코언 신탁. 레너드 코언은 뉴욕의 대형 법률 회사의 창건자요. 86년에 죽었는데, 아마 죽
을 때 나이가 백 살은 되었을걸. 어쨌든 그는 엄청난 돈을 벌었는데, 말년에 가서 죽을 때
돈을 가져가지 않기로 결심을 했소. 그래서 여기저기에 뿌렸는데, 그가 만들어낸 것들 가운
데 하나가 노숙자들을 위해 무료 변호를 담당하는 법률 상담소들을 지원하는 신탁이었소.
그래서 이런 곳이 생기게 된 거지. 그 신탁에는 여기 워싱턴, 뉴욕, 뉴웍, 이렇게 세 개의 법
률 상담소가 있소. 나는 83년에 여기에 취직을 해서, 84년에 책임자가 되었소."
"그럼 지원금은 한 군데서만 나옵니까?"
"거의 다 한 곳에서 나오지. 작년에 코언 신탁은 우리에게 11만 달러를 주었소. 1년 전에
는 15만이었지. 따라서 돈이 줄면서 변호사 하나를 잃게 된 거요. 신탁은 제대로 운영을 못
해서, 지금은 원금을 까먹고 있는 중이요. 5년 뒤에도 우리가 여기에 있을 수 있을까 의심스
럽소. 아니, 3년이나 버틸 수 있을까 몰라."
"기금을 모을 수는 없나요?"
"아, 있고 말고. 작년에는 9천을 모았소. 하지만 시간이 많이 걸려. 법률 봉사를 하든지,
기금을 모으든지 둘 중의 하나만 가능하오. 소피아는 사람들과 잘 사귀지를 못하오. 에이브
러험은 뉴욕에 있을 때부터 사람들과 마찰을 많이 일으켰소. 그렇게 되면 가석과 같은 인품
을 가진 나만 남거든."
"경비는 얼마나 들어갑니까?"
이렇게 되면 상당히 캐묻고 들어가는 셈이었으나 별로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비영리 단
체들은 자신의 수입과 지출을 솔직히 밝히는 연례 보고서를 발표하는 것이 상례이니까.
"한 달에 2천이오. 비용과 약간의 비축분을 제하고, 우리 셋이 8만 9천 달러를 나누어 갖
게 되오. 똑같이. 소피아는 자신이 완전한 파트너라고 생각하고 있소. 사실은 소피아와 입씨
름하는 게 무서우니까 마음대로 생각하라고 놔 두는 거지만 말이오. 난 집에 거의 3만을 가
져가오. 내가 듣기로는 그 정도면 국선 변호사의 평균 수입은 된다고 하오. 자, 거리에서 일
하는 사람들 사정은 그 정도요."
우리는 마침내 그의 사무실에 이르렀다. 나는 그의 건너편에 앉았다.
"난방비 내는 걸 잊었나 보죠?"
나는 몸을 떨고 있었다.
"그런지도 모르지. 사실 우리는 주말에 일하는 경우가 별로 없거든. 그럼 돈이 절약되니
까. 어쨌거나 이곳은 완전한 난방이나 냉방이 불가능한 곳이오."
드레이크 & 스위니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생각은 해 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주말에 문
을 닫으면 돈이 절약된다니. 결혼 생활은 유지될지 모르지만.
"게다가 이곳을 너무 안락하게 해 놓으면 우리 의뢰인들이 이곳에서 나가지 않으려 한다
는 문제도 있소. 그래서 이곳은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덥지. 덕분에 이곳에서 죽치는 사
람들도 줄일 수 있고. 커피 좀 하겠소?"
"사양하겠습니다."
"물론 내가 한 말은 농담이오. 우리는 노숙자들이 이곳에 못 있게 하려고 무슨 수단을 강
구하지는 않소. 사실 우리는 날씨에 신경 쓰지 않소. 우리 의뢰인들은 춥고 배가 고프오. 그
런데 우리가 어떻게 그런 것에 신경을 쓰겠소? 당신 오늘 아침에 식사할 때 죄책감을 느꼈
소?"
"네."
그는 모든 것을 아는 지혜로운 노인 같은 웃음을 머금었다.
"그건 아주 흔한 일이오. 우리도 큰 회사에서 나온 젊은 변호사들과 여러 번 일을 해 보
았소. 무료 봉사하러 나온 신참들이지. 그런 친구들은 늘 처음에는 음식에 흥미를 잃게 된다
는 이야기를 하오."
그는 자신의 거대한 허리를 두드리며 덧붙였다.
"하지만 그런 건 다 극복이 된다오."
"무료 봉사하는 신참들을 무슨 일을 했습니까?"
나도 내가 미끼를 향해 다가가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모디카이도 내가 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그들을 합숙소로 보냈소. 그들은 의뢰인들을 만났고, 우리는 그 사건들을 감독했
소. 우리가 하는 일은 대부분 쉽소. 전화에 대고 움직이지 않으려는 관료에게 고참을 지르기
만 하면 되거든. 식량 배급표, 참전 용사 연금, 주택 지원금, 의료 보장, 아동 지원 등등에
대해서 말이오. 사실 우리가 하는 일 가운데 25퍼센트 정도가 사회보장 혜택과 관련된 것이
오."
나는 열중해서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모디카이도 내 마음을 읽고 있었다. 모디카이는 낚
싯줄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알겠지만, 마이클, 노숙자들에게는 그들을 대변할 목소리가 업소. 아무도 그들의 말을 듣
지 않고,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소. 그들도 누가 자기들을 도와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소. 그래서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보험 급부를 받으려고 전화를 하려 해도 일이 되지
를 않소. 늘 기다리고 있으라는 말만 들을 뿐이지. 그러나 기다려도 아무도 연락을 해 주지
않소. 사실 그들에게는 주소가 없거든. 관료들은 그런 데 무관심하지. 그럼으로써 관료들은
그들이 도와야 할 바로 그 사람들에게 엿을 먹이고 있는 거요. 이런 상황에서 노련한 사회
사업가라면 적어도 관료가 귀를 기울이게는 할 수 있소. 어쩌면 그의 말을 듣고 관료는 파
일을 들춰보기라도 하고, 전화라도 해 줄지 모르오. 그런데 변호사 정도가 전화에 대고 짖어
대면서 한바탕 법석을 떨면, 상황이 달라지게 되오. 관료들이 활발하게 움직이는 거요. 거류
가 처리되는 거요. 주소가 없는데? 걱정하지 마쇼. 나한테 수표를 보내면 내가 의뢰인에게
전달할 테니까. 이런 식으로 되는 거요."
모디카이의 목소리가 올라가고 있었다. 두 손을 공중에 휘젓고 있었다. 모디카이는 다른
무엇보다도 대단히 훌륭한 이야기꾼이었다. 배심 앞에서도 매우 훌륭한 솜씨를 발휘할 것
같았다.
모디카이가 말을 이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소. 한 달 전쯤, 내 의뢰인 하나가 보험 급여 신청서 양식을 가지러
사회 보장 사무소에 간 적이 있었소. 간단한 일이었을 거요. 그는 나이가 예순이었고, 늘 등
이 아파 고생하고 있었소. 바위나 공원 벤치에서 10년을 바다 보면 등에 문제가 생긴다오.
그는 사무소 바깥에서 두 시간 동안 줄을 서 있다가, 마침내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거기
서 다시 한 시간을 기다렸소. 그렇게 해서 결국 첫 번째 책상에 다가가게 되었지. 그는 자신
의 원하는 것을 설명하려 했소. 그러나 그날 하루 종일 기분이 나빴던 고집스러운 직원한테
심한 대접을 당하게 되었지. 그 여자는 심지어 내 의뢰인의 몸에서 냄새가 난다는 이야기까
지 했소. 물론 그는 모욕을 느꼈고, 서류 작업을 마치지도 않고 나와 버렸소. 그는 나에게
전화를 했소. 그래서 나도 전화를 했지. 결국 지난 수요일에 사회 보장 사무소에서 작은 행
사가 열렸소. 나는 의뢰인과 함께 그 자리에 참석했소. 물론 그 여직원도 나와 있었지. 뿐만
아니라 그 여직원의 감독, 그 감독의 감독, 워싱턴 사무소 책임자, 사회 보장부의 거물까지
도 나와 있었소. 여직원은 내 의뢰인 앞에 서서 한 장짜리 사과문을 읽었소. 정말 훌륭하고
감동적인 글이었소. 이어 그 여자는 나에게 내 의뢰인의 보험 급여 신청서를 내는 즉시 처
리해 주겠노라는 약속을 받을 수 있었소. 이것이 정의요, 마이클. 이것이 거리의 법의 핵심
이오. 존엄성."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모든 이야기에서 거리의 변호사는 좋은 편이었고, 노숙자는 결국 승
리자가 되었다. 나도 모디카이가 그가 이야기하는 성공담과 같은 숫자의 가슴 아픈 이야기
들을 감추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런 이야기들이 더 많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는 나에 대한 기초 작업은 제대로 하고 있는 셈이었다.
나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 그는 우편물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우리는 마침내
사무소를 떠나 합숙소로 돌아왔다.
어두워지기 한 시간 전이었다. 깡패들이 거리를 배회하기 전에 얼른 아늑한 지하실로 들
어가야겠군.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모디카이가 옆에 있었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자신감을
가지고 천천히 걷고 있었다. 그가 옆에 없었다면, 허리를 굽히고 눈 위에서 비틀거렸을 것이
다. 초조해서 발이 제대로 땅에 닿지도 않았을 것이다.
돌리 양은 무슨 수를 썼는지 통닭을 한 무더기 얻어다 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
가 닭을 삶았고, 나는 김이 피어오르는 몸통을 조각조각 나누었다.
한창 바쁠 때는 모디카이의 부인인 조앤도 우리를 도왔다. 그녀 역시 그녀의 남편만큼이
나 유쾌했고, 또 키도 거의 남편만했다. 두 아들 모두 키가 195센티미터라고 했다. 케시어스
는 2미터가 넘었고, 열일곱의 나이로 총에 맞아 죽기 전에는 여러 곳에서 스카웃 제의를 받
던 농구계의 스타였다고 했다.
나는 자정에 그곳을 나왔다. 온타리오 가족은 그때까지도 보이지 않았다.
10
일요일은 아침 늦게 걸려온 클레어의 전화와 함께 시작되었다. 그녀가 또 한 번의 어색한
대화를 시도한 이유는 언제 집에 돌아올 지 이야기해 주기 위해서였다. 나는 우리가 제일
좋아하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자고 했으나, 클레어는 그럴 기분이 아니라고 했다. 나는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았다. 우리는 그럴 단계를 이미 지나 있었다. 우리 아파트는 3층이었
기 때문에, 일요일자 『워싱턴 포스트』를 집으로 배달해 달라고 했지만 제대로 전달되지가
않았다. 여러 가지 방법을 서 보았지만, 반 정도의 경우는 신물을 볼 수 없었다.
나는 샤워를 하고 옷을 여러 겹 입었다. 일기예보에서는 최고 기온이 영하 4도가 될 것이
라고 했다. 집을 나갈 채비를 하는데, 텔리비전에서 아침의 톱뉴스를 내보내고 있었다. 나는
그 소리를 듣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말을 듣기는 들었으나, 바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부엌 카운터에 있는 텔리비전으로 다가갔다. 발이 무거웠다. 심장은 얼어붙었다. 충격 때문
에 입이 떡 벌어져 있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전날 오후 11시경 경찰은 북동부 최악의 우범지대라 할 만한 포트 토튼 공원 근처에서 작
은 차 한 대를 발견했다. 차는 도로에 주차해 있었는데, 체인을 감지 않은 바퀴는 진창에 박
혀 그대로 얼어붙어 있었다. 차 안에는 젊은 여자와 그녀의 네 자녀가 있었는데, 모두 질식
사한 상태였다. 경찰은 그 가족이 차 안에서 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했다. 그들은 히터를
들어 놓기 위해 시동을 켜 놓았는데, 배기 파이프가 거리에서 긁어 놓은 눈더미에 묻혀 끝
이 막히는 바람에 배기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어 몇 가지 자세한 이야기가 나왔으
나,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나는 보도를 달려갔다. 눈에 미끄러지기는 했으나 용케 넘어지지는 않았다. P 스트리트를
따라 위스콘신 애비뉴까지 갔으며, 거기서 14번가로 넘어가, 그곳에 있는 신문 가판대에 멈
추었다. 나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숨을 헐떡이며 신문을 움켜쥐었다. 1면 하단 한 귀퉁이에
그 기사가 실려 있었다. 막판에 집어 넣은 것이 분명했다. 거기에도 이름은 없었다.
후다닥 A 섹션을 펼쳐 보았다. 나머지는 젖은 보도로 떨어졌다. 기사는 14면에 이어지고
있었는데, 경찰의 상투적이니 논평과 더불어, 배기 파이프가 막히면 위험하다는, 당연히 나
옴직한 주의가 나와 있었다. 이어 가슴이 찢어질 듯한 자세한 이야기들이 나와 있었다. 어머
니는 22살이었다. 이름은 론타 버튼이었다. 아기는 테메코였다. 어린아이들은 알론소와 단테
로, 두 살짜리 쌍둥이들이었다. 맏이는 온타리오, 네 살이었다.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가 튀어나왔나 보다. 조깅을 하던 사람이 내가 위험한
사람이라도 되듯, 묘한 눈길로 나를 보았다. 나는 신문을 펼쳐든 채, 바닥에 떨어진 나머지
스무 섹션은 짓밟으며 걷기 시작했다.
"이보시오!"
뒤에서 험악한 목소리가 튀어나오더니, 그 목소리가 이어졌다.
"돈 안 내고 갈 거요?"
나는 계속 걸었다.
그는 내 뒤로 바짝 다가오더니 고함을 질렀다.
"이보쇼!"
나는 발을 멈추고 호주머니에서 5달러짜리 지폐를 꺼내 그의 발치에 집어던졌다. 상대의
얼굴은 보지도 않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P 스트리트에 이르렀다. 아파트 근처였다. 나는 어떤 훌륭한 연립주택 앞의 벽돌 옹벽에
몸을 기댔다. 보도의 눈은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천천히 기사를 다시 읽어보았다. 끝이 다
르기를 바라면서. 생각과 질문이 격류처럼 밀려왔다.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두
가지 질문은 계속 되풀이되고 있었다. 왜 그들은 합숙소로 돌아오지 않았을까? 아기가 내
데님 재킷에 싸인 채 죽었을까?
생각하는 것 자체가 부담이었다. 걷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충격이 사그러드는 것과 더
불어 죄책감이 강하게 밀려왔다. 왜 금요일 밤 처음으로 그들을 보았을 때 어떻게 해 주지
못했을까? 따뜻한 모텔로 데리고 가 먹을 것을 사 줄 수도 있었는데.
집에 들어가자 전화벨이 울리고 있었다. 모디카이였다. 나에게 그 기사를 보았으냐고 물었
다. 나는 그에게 젖은 기저귀가 기억나냐고 물었다. 바로 그 사람들입니다. 내가 말했다. 모
디카이는 아직 희생자들의 이름은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온타리오를 만났던 일을 자세
히 이야기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오, 마이클."
그는 훨씬 슬퍼진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그렇습니다."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나중에 만나기로 했
다. 나는 소파로 갔다. 그곳에서 한 시간들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어 차로 가, 그들을 위해 샀던 음식과 장난감과 옷이 든 봉투들을 치웠다.
모디카이는 정오에 내 사무실로 왔다. 그냥 궁금해서 온 것이었다. 그도 대형 법률 회사들
을 볼 만큼 보았다. 그가 궁금해한 것은 형씨가 쓰러진 현장이었다. 그곳을 한번 확인해 보
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그의 짧은 답사를 안내하며, 인질극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
다.
우리는 그의 차를 타고 떠났다. 일요일의 원활한 교통 상태가 고마웠다. 모디카이가 다른
차들의 움직임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론타 버튼의 어머니는 38살인데, 마약을 판매한 죄로 10년 형을 받고 복역 중이오."
모디카이가 말했다. 여기저기에 전화를 해 본 모양이었다. 그는 덧붙였다.
"오빠가 둘 있는데, 둘 다 감옥에 있소. 론타는 매춘과 마약 전과가 있소. 아이들의 아버
지 또는 아버지들이 누군지는 알 수가 없었소."
"어디서 들은 이야기입니까?"
"어느 공영 주택 단지에서 론타 버튼의 할머니를 찾아냈소. 할머니가 지난번에 론타를 보
았을 때는 아이가 셋뿐이었다고 했소. 론타는 자기 어머니와 함께 마약을 팔았소. 할머니 말
에 따르면 자기는 그 마약 사업 때문에 딸이나 손녀와 관계를 끊었다는 거요."
"그들은 누가 묻어 줍니까?"
"드본 하디를 묻어 분 사람과 같은 사람들이지."
"제대로 장례를 치르는 데는 얼마나 들까요?"
"가격이야 협상이 가능하지. 관심 있소?"
"내가 장례를 치러 주고 싶습니다."
우리는 펜실베니아 애비뉴를 지나며, 콩그레스 거리에 늘어선 거대한 사무용 건물들을 헤
치며 나아가고 있었다. 뒤로 의사당이 보였다. 시민들이 집도 없이 헤매는데도 매달 수십억
달러씩을 낭비하고 있는 바보들에게 속으로 욕을 한두 마디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의사당
을 코앞에 두고 있는 곳에서 어떻게 무고한 네 명의 아이가 살 곳이 없어 거리에서 죽어갈
수 있단 말인가?
그 아이들은 태어나지 말았어야지. 이 도시에서 나와 같은 집단에 속한 사람들은 그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시신들은 검시관실로 옮겨졌는데, 그 옆에 시체 보관소가 있었다. 워싱턴 종합병원에 있는
갈색의 평범한 2층짜리 건물이었다. 시신들은 찾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거기에 보관되었
다. 48시간내에 아무도 나타나지 않으면 썩지 않게 약품 처리를 한 다음 나무관에 집어 넣
어, 얼른 RFK 경기장 근처의 묘지에 묻어 버렸다.
모디카이는 장애자용 주차 공간에 차를 세우더니, 잠시 동작을 멈추었다.
"정말 들어가고 싶소?"
"들어가죠 뭐."
모디카이는 전에도 이곳에 와 본 적이 있기 때문에 미리 전화를 해두었다. 잘 맞지도 않
는 제복을 입은 경비원 하나가 감히 우리를 막으려 했다가 모디카이한테 야단을 맞았다. 어
찌나 소리가 크던지 나도 겁이 날 정도였다. 그렇지 않아도 속이 편치 않던 판인데.
경비원은 얼른 뒤로 물러나며 길을 내 주었다. 판유리를 단 몇 개의 문에 검은 글자로 시
신 안치소라고 적혀 있었다. 모디카이는 마치 주인이라도 되는 듯이 서슴없이 들어갔다.
"나는 버튼 가족의 변호인인 모디카이 그린이오."
모디카이는 책상에 앉은 젊은 남자에게 으르렁거렸다. 신분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무슨
도전장을 내미는 것 같았다.
젊은 남자는 서류판을 확인하더니, 서류를 몇 장 더 뒤적였다.
"대체 뭐 하고 있는 거요?"
모디카이가 다시 쏘아붙였다.
젊은 남자가 맞설 듯한 자세로 고개를 들다가, 상대의 몸집이 얼마나 큰지를 깨달았다.
"잠시만요."
젊은 남자는 컴퓨터를 향했다.
모디카이는 나를 보며 큰소리로 말했다.
"이곳에 시체가 천구라도 있는 건가?"
나는 모디카이가 관료와 공무원들에게는 조금의 인내심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동시에 사
회사업부의 여직원으로부터 사과를 받아냈던 이야기가 기억이 났다. 모디카이에게는 법률가
노릇이라는 것이 반은 협박을 하고 고참을 지르는 일이었다.
머리카락을 검은 색으로 대충 염색한 창백한 남자가 나오더니 끈적끈적한 손으로 악수를
하며 빌이라고 자기 소개를 했다. 파란색 의사용 가운에 두꺼운 고무창이 달린 신발을 신고
있었다. 검시관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어디서 구해 올까?
우리는 그를 따라 문을 하나 통과했다. 살균이 된 복도를 지나가는데, 온도가 갑자기 뚝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잠시 후 마침내 제일 큰 보관실에 이르렀다.
"오늘은 몇 구나 들어왔소?"
모디카이가 늘 시신의 숫자를 확인하기 위해 들르는 사람처럼 물었다.
빌은 문 손잡이를 돌리며 말했다.
"12구요."
"괜찮아?"
모디카이가 나에게 물었다.
"모르겠습니다."
빌은 금속 문을 밀었고, 우리는 안으로 들어섰다. 공기는 몹시 차가웠고, 방부제 냄새가
났다. 바닥에는 하얀 타일이 깔려 있었다. 조명은 푸르스름한 형광등이었다. 나는 고개를 숙
이고 모디카이를 따라 들어가며, 주위를 둘러보지 낳으려 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
이었다. 시신들은 머리에서 발목까지 하얀 시트로 덮여 있었다. 텔리비전에서 보는 것과 똑
같았다. 우리는 하얀 발들을 지나갔다. 발가락에 꼬리표가 달려 있었다. 이윽고 갈색의 발들
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리는 방향을 틀어 구석에서 멈추었다. 왼쪽에는 들것이 있었고, 오른 쪽에는 탁자가 있
었다.
"론타 버튼이라."
빌미 말하며, 극적인 동작으로 시트를 허리까지 젖혔다. 온타리오의 어머니였다. 평범한
하얀 가운을 입고 있었다. 죽음은 그녀의 얼굴에 아무런 자국을 남기지 않았다. 자고 있다고
해도 좋을 거서 같았다. 나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
"맞군."
모디카이가 말했다.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 같은 태도였다. 그는 확인을 위해 나를
보았다. 동시에 나는 숨을 멈추었다. 아이들은 모두 한 장의 시트에 덮여 있었다.
서로 딱 달라붙어, 줄을 지어 누워 있었다. 맞추어 입은 듯한 가운 위로 두 손을 포개고
있었다. 잠자는 아기 천사들. 거리의 어린 병사들이 마침내 평화를 찾았도다.
온타리오의 몸에 손을 대고 싶었다. 팔을 두드려 주며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가 원
하는 모든 것을 해 주고 싶었다.
좀더 자세히 보려고 한 발 앞으로 나갔다.
"만지지 마시오."
빌이 말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모디카이가 말했다.
"맞소."
빌이 시트를 덮었다. 나는 눈을 감고 짧게 기도를 했다. 자비와 용서를 비는 기도였다. 다
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지 말아라. 주님이 내게 말했다.
빌이 다른 방에 가서 철사로 된 커다란 바구니 두 개를 꺼냈다. 죽은 가족의 개인 소지품
이 들어 있는 바구니였다. 빌은 내용물을 탁자에 쏟았다. 우리는 그가 목록을 작성하는 것을
도와 주었다. 그들이 입었던 옷은 낡고 더러웠다. 내 데님 재킷이 그들이 소유한 물건들 가
운데 가장 좋은 것이었다. 그 외에 담요가 석 장, 핸드백, 싸구려 장난감 몇 개, 이유식, 수
건, 더욱 더러운 옷가지, 바닐라 웨하스 한 상자, 따지 않은 맥주 캔 하나, 담배, 콘돔 두 개,
20달러 가량의 지폐와 잔돈 등이 있었다.
"차는 시립 주차장에 있소."
빌이 말을 이었다.
"안에는 쓰레기가 가득하다고 하더군."
모디카이가 말을 받았다.
"차는 우리가 처리하겠소."
우리는 소지품 목록에 서명을 하고, 론타 버튼 가족의 개인 소지품을 들고 그곳을 나왔다.
"이걸 가지고 뭘 하죠?"
내가 물었다.
"할머니에게 가져갑시다. 재킷은 도로 가져가겠소?"
"아뇨."
장례식장의 주인은 모디카이가 알고 있는 목사였다. 모디카이는 목사의 교회가 노숙자
들에게 친절하지 않았기 때문에 목사를 달가워하지 않았으나, 이야기는 하며 지내는 사이였
다.
우리는 교회 앞에 차를 세웠다. 하워드 대학 근처의 조지아 애비뉴였다. 도시 가운데 비교
적 깨끗한 구역으로, 창문에 널을 댄 곳이 비교적 적었다.
"당신은 여기 있는 것이 좋겠소."
모디카이가 말을 이었다.
"우리끼리 있어야 훨씬 더 솔직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거든."
혼자 차 안에 낮아 있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차피 이제는 그에게 내 목숨을 맡겨 놓은 처
지였다.
"그러죠 뭐."
나는 좀더 편하게 자리를 잡으며 주위를 흘끔거렸다.
"괜찮을 거요."
그 말과 함께 모디카이가 떠나자 나는 차 문을 잠갔다. 잠시 후 나는 긴장을 풀고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모디카이는 사업적인 이유 때문에 목사와 단 둘이 있고 싶어하였다. 내가 있
으면 문제가 복잡해질 테니까. 목사가 나를 보고, 저 사람은 누구이고, 왜 이 가족에게 관심
을 가지는가? 하고 묻는 순간 장례 비용은 급등할 것이 틀림없었다.
보도는 혼잡했다. 나는 사람들이 종종걸음을 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바람이 사람들의 몸
속으로 세차게 파고들고 있었다. 두 아이와 어머니가 내 옆을 지나갔다. 모두 좋은 옷을 입
고 손을 꼭 쥐고 있었다. 어젯밤 온타리오와 그의 가족이 얼어붙은 차 안에서 웅크린 채 냄
새도 없는 일산화탄소를 들이마시다 결국 이 세상을 떠났을 때, 저들은 어디에 있었을까?
우리 모두는 어디에 있었을까?
세상이 뒤죽박죽 뒤엉키고 있었다. 어떤 것도 말이 되지 않았다. 나는 일 주일이 채 안 되
는 시간에 노숙자의 시신 여섯 구를 보았다. 나는 그 정도의 충격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
지 않았다. 나는 교육받은 백인 변호사로서, 부유하게 잘 먹고 살았으며, 엄청난 부와 그것
으로 살 수 있는 모든 좋은 것을 향해 빠른 속도로 나아가고 있었다. 물론 결혼이야 끝장이
났지만, 곧 다시 탄력을 얻을 수 있었다. 세상에는 좋은 여자들이 얼마든지 있었다. 따라서
사실 나에게 심각한 걱정은 없었던 셈이다.
나는 나를 궤도에서 탈선하게 만든 형씨를 저주했다. 나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만든 모디
카이를 저주했다. 내 가슴을 찢어 놓은 오타리오도.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그만큼 신경이 바짝 곤두서 있었다. 모디카이였
다. 도로 가의 눈 속에 서 있었다. 나는 창문을 조금 열었다.
"2천 달러에 해 주기로 했소. 다섯 명 모두."
"아무래도 좋습니다."
그러자 모디카이는 다시 사라졌다.
잠시 후에 그는 다시 돌아와 운전대를 잡고 차를 몰기 시작했다.
"장례식은 화요일, 여기 교회에서 하기로 했소. 나무 관이지만 좋은 건 아니오. 꽃은 그가
준비하기로 했소. 멋지게 꾸미겠다는 거요. 목사는 3천을 달라고 했지만, 언론에서 나올 것
이라고 설득을 했소. 목사도 텔리비전에 나오게 될 것이라고 말이오. 좋아하더군. 2천이면
나쁜 건 아니오."
"고맙습니다, 모디카이."
"당신 괜찮소?"
"아뇨."
내 사무실로 돌아가는 동안 둘 다 별말이 없었다.
클레어의 남동생 제임스는 호지킨 병(Hodgkin's disease) 진단을 받았다. 그래서 프로비던
스에서 가족 회의가 열렸던 것이다. 그것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나는 클레어가 주말
을 어떻게 보냈는지 이야기하는 것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의 가족은 그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으며, 서로 끌어안고 제임스와 그의 아내를 위로하며 눈물을 흘리고 기도했다. 그녀의
가족은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는 가족이었다. 그녀가 나도 오라고 전화를 하지 않은 것이 무
척 고마웠다. 치료는 곧 시작될 예정인데, 예후는 좋다고 했다.
그녀는 집에 돌아온 것에 행복해 했다. 속을 털어 놓을 사람이 있는 것에 해방감을 느끼
는 것 같았다. 우리는 서재의 난롯가에서 발에 누비이불을 덮고 포도주를 마셨다. 로맨틱한
분위기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나는 그 전에 너무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감상적
이 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가엾은 제임스를 위해 적당히 슬
퍼하고, 그녀의 말에 어울리는 대꾸를 하는 데도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다.
이것은 내가 예상하던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것이 내가 원하던 것이었는지, 자신이
없었다. 나는 우리가 결정적 행동은 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러다 작은 접전
을 벌이게 될지도 모르지. 어차피 곧 추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바라건대, 교양 있는
어른들답게 별거의 절차를 밝아 나가겠지. 그러나 온타리오 일이 있은 뒤라, 나는 감정과 관
련된 문제에는 어떤 것에도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진이 빠져 있었다. 클레어는
계속 내가 피곤해 보인다는 이야기를 했다. 하마터면 그녀에게 고맙다고 말할 뻔했다.
나는 그녀가 이야기를 끝낼 때까지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이어 대화는 천천히 나의 주말
쪽으로 흘러갔다. 나는 그녀에게 모든 이야기를 하였다. 합숙소에서 자원봉사자로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 일, 이어 온타리오와 그의 가족 이야기. 나는 클레어에게 신문에 난 기사를
보여 주었다.
클레어는 진실로 감정이 움직였다. 그러나 동시에 혼란도 느꼈다. 내가 일 주일 전과는 다
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나의 새로운 모습이 전의 모습보다는 마음에 든다고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자신이 없는 듯했다. 사실 나도 자신이 없었다.
11
젊은 일 중독자들인 클레어와 나에게는 자명종이 필요없었다. 특히 한 주일 전체와 도전
해야 하는 월요일 아침에는. 우리는 5시에 일어나, 5시 반에 시리얼을 먹고, 이어 각자의 길
을 향해 출발했다. 마치 누가 먼저 집을 나설 수 있나 경쟁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나는 포도주 덕분에 주말의 악몽에 시달리지 않고 잘 잘 수 있었다. 사무실로 차를 몰고
가면서 이제 나와 거리의 사람들 사이에 어느 정도 거리를 두기로 결심했다. 장례식 때도
잘 참아낼 수 있겠지. 하다보면 노숙자들을 위한 무료 봉사의 기회도 올 거야. 모디카이와의
우정은 계속 유지해야지. 어쩌면 그의 사무실에 자주 들르게 될지도 몰라. 돌리 양에게도 가
끔 들러, 굶주린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일을 도와야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기부금도
내고, 또 기금을 모으는 일도 거들어야지. 그래도 내가 다른 무료 변호인들보다는 자금원으
로서 더 큰 가치가 있을 거야.
어둠을 뚫고 사무실로 사를 몰고 가면서, 나의 우선 순위를 원위치로 재조정하려면 당분
간은 하루에 18시간씩 일을 해야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나의 경력에 사소한 탈선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일에 빠져들다 보면 다 제대로 정리가 될 터였다. 내가 타고 있는 특
급 열차에서 뛰어내리려는 놈은 바보일 뿐이다.
나는 형씨가 탔던 엘리베이터와는 다른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형씨는 이제 지난 일이었
다. 나는 내 마음에서 그를 차단해 보였다. 그가 죽은 회의실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서류 가
방과 코트를 내 사무실 의자에 던지고, 커피를 가지러 갔다. 아침 6시 이전에 복도를 성큼성
큼 걸어가고, 여기서 동료와 이야기를 하고, 저기서 사무직원과 이야기를 하고, 재킷을 벗고,
소매를 걷어붙이고... 돌아오니 이렇게 좋군.
나는 우선 월 스트리트 저널을 훑었다. 그것을 먼저 고른 데는 이 신문이 워싱턴에서 죽
어 가는 노숙자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점도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그 다음에 위싱턴
포스트를 보았다. 메트로 섹션 1면에 론타 버튼 가족에 대한 작은 기사가 실려 있었다. 그녀
의 할머니가 아파트 건물 바깥에서 울고 있는 사진도 실려 있었다. 나는 그 기사를 일고 옆
으로 밀쳐 놓았다. 내가 기자보다 더 많이 알고 있었다. 게다가 이미 다른 데 정신을 팔지
않기로 결심한 뒤였다.
위싱턴 포스트 아래 파일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규격 용지 크기의 평범한 마닐라 종이로
만든 것이었다. 우리 회사에서 수백만 장씩 소비하고 있는 파일이었다. 파일에는 아무런 표
시도 없었다. 그래서 오히려 수상쩍었다. 파일은 그렇게 신문지 아래서 모습을 드러낸 채 책
상 한가운데 놓여 있었다. 익명의 존재가 갖다 놓은 것이 분명했다. 나는 천천히 파일을 펼
쳤다.
안에는 종이 두 장밖에 없었다. 첫 번째 것은 전날의 위싱턴 포스트 기사를 복사한 것이
었다. 내가 열 번은 읽었고, 또 클레어에게 보여 주기도 했던 것이다. 그 밑에 드레이크 &
스위니의 공식 파일에서 빼낸 서류의 복사본이 있었다. 그 제목은 퇴거자―리버오크스/태그
주식회사였다.
왼쪽 칼럼에는 1부터 17까지 번호가 적혀 있었다. 4번이 드본 하디였다. 15번은 론타 버튼
과 서너 명의 아이들이었다.
나는 파일을 천천히 책상에 내려놓았다. 이어 의자에서 일어서서 문으로 걸어갔다. 문을
잠그고 거기에 기댔다. 완전한 정적 속에서 시간이 흘러갔다. 나는 책상 한가운데 놓인 파일
을 노려보았다. 그것이 진짜이고 정확한 것이라고 가정하라 수밖에 없었다. 누가 저런 것을
위조한단 말인가? 나는 파일을 다시 조심스럽게 집어들었다. 두 번째 종이 밑의 파일 바다
에 익명의 제보자가 연필로 적어 놓은 글이 있었다.
이 퇴거 조치는 법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잘못된 것이었다.
인쇄체로 적혀 있었다. 내가 필체 분석을 하더라도 쓴 사람을 밝혀내지 못하게 하려는 의
도였다. 연필 자국은 매우 희미했다. 연필심이 파일 바닥에 제대로 닿은 거서 같지도 않았
다.
한 시간 동안 문을 잠가 두고 있었다. 그 동안 창 밖으로 해가 뜨는 것을 보기도 하고, 책
상에 않아 파일을 노려보기도 했다. 복도를 지나 다니는 사람들 숫자가 늘어 갔다. 이윽고
폴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문을 열고, 모든 것이 잘 되어 가는 것처럼 인사를 했다. 이
어 필요한 일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아침 시간은 회의로 빡빡했다. 그 가운데 두 개가 루돌프와 함께 의뢰인들을 만나는 것이
었다. 나는 제대로 일을 해냈다. 물론 회의가 끝나고 나서는 무슨 말을 했는지 무슨 행동을
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루돌프는 자신이 키우는 스타가 원래의 모습을 완전히
되찭은 것을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나는 인질극과 그 여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는 무례하다 싶을 정
도로 무뚝뚝하게 굴었다. 나는 전과 똑같은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이전과 다름없이 힘차
게 돌진하는 존재였다. 따라서 내 안정성에 대한 걱정은 용납할 수 없었다. 아침 늦게 아버
지가 전화를 했다. 전에 아버지가 사무실로 전화를 한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멤피스에는 비가 온다고 했다. 그냥 따분하게 집에 앉아 있지. 그래, 나하고 네 엄마는 네
걱정을 했다. 클레어는 잘 있어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대화의 안전 지대를 찾다가 그
녀의 남동생 제임스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도 결혼식에서 제임스를 한 번 만난 적이 있었다.
나는 적당하게 클레어의 가족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고, 아버지는 그 말을 듣고 기분이 좋았
다.
아버지는 사무실에 있는 나와 이야기를 할 수 있어 기뻐하였다. 내가 그대로 회사에 남아
큰 돈을 벌고 있고, 또 더 큰돈을 벌려고 한다는 것이 아버지는 좋았던 것이다. 아버지는 계
속 연락을 하자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30분 뒤, 형 워너가 애틀랜타 도심의 고층 건물에 있는 사무실에서 전화를 했다. 형은 나
보다 여섯 살 위였는데, 엄청나게 큰 법률 회사의 파트너였으며,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소송
변호사였다. 나이차가 컸기 때문에 워너와 나는 어렸을 때부터 별로 가깝지가 않았다. 그러
나 함께 있는 것을 부담스러워한 적은 없었다. 워너는 3년 전에 이혼을 할 때는 매주 나에
게 전화를 하여 속을 털어놓곤 하였다.
워너도 나처럼 시계 바늘에 매달려 사는 처지였다. 따라서 이야기를 오래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워너가 말했다.
"아버지하고 이야기를 했다. 다 이야기를 해 주시더구나."
"그러셨겠지."
"네 기분이 어떨지 이해해. 다 겪는 일이잖니. 너는 열심히 일하고 있고, 큰 돈을 벌고 있
고, 한 번도 가던 길을 멈추고 힘든 사람들을 도와 준 적이 었었어. 그런데 그런 일이 터진
거야. 그러자 넌 다시 법대생으로 돌아갔어. 1학년으로 돌아간 거지. 이상으로 가득차서 인
류를 구원하는 변호사가 되고 싶어하던 때로 말이야. 기억나니?"
"그래. 오래 전에 그랬지."
"맞아. 법대 1학년에 들어갔을 때 설문 조사를 했는데 말이다, 우리 반 아이들 가운데 반
이 넘는 수가 공익법을 하고 싶어했어. 하지만 3년 후에 졸업을 하지 모두 돈을 벌러 갔지.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구나."
"법대라는 게 사람을 탐욕스럽게 만드나 보지 뭐."
"그런 것 같구나. 우리 회사에는 1년을 쉬면서 공익법 관련 일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어. 일종의 안식년 같은 제도지. 1년이 지나고 나면,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다시 돌
아오는 거야. 너희 회사에도 그런 게 있니?"
역시 워너다웠다. 나에게 문제가 있다고 하자, 그는 벌써 답을 제시하고 있었다. 멋지고
깔끔한 답. 열 두달이면 나는 새로운 사람이 된다는 거지. 최단 기간 우회하고, 내 미래는
그대로 보장받고.
"어소시에이트들은 해당 사항 없어. 파트너 한두 명이 행정부에 일하러 갔다가 1,2년 후에
돌아온다는 이야기는 들었어. 어쨌든 어소시에이트들한테는 적용되지 않는 이야기야."
"하지만 너는 상황이 다르잖아. 너는 상처를 입은 사람이야. 네가 그 회사 구성원이라는
이유로 염병할 죽임을 당할 뻔했단 말이야. 나 같으면 윗사람들을 을러서라도 휴가를 좀 얻
겠다. 한 1년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는 거야."
"가능할지도 모르겠군."
나는 형을 진정시키기 위해 그렇게 말했다. 그는 전형적인 A형 인간이었다. 엄청나게 밀
어붙이고, 늘 논쟁에서 한 걸음쯤 앞서 나가고. 특히 가족과 관계될 경우에는.
"가봐야 돼."
내가 말했다. 형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나중에 더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점심은 좋은 식당에서 루돌프와 의뢰인과 함께 했다. 이런 것을 업무 오찬이라고 불렀다.
알콜은 입에 댈 수 없다는 뜻이었고, 또 점심을 먹는 데 쓴 시간에 대한 비용을 의뢰인에게
청구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루돌프는 한 시간에 4백짜리였고, 나는 3백짜리였다. 우리는 두
시간 동안 일을 하며 점심을 먹었다. 따라서 의뢰인은 점심값으로 천사백 달러를 내야 했다.
우리 회사는 그 레스토랑과 외상 거래를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식대는 드레이크 & 스위니
로 청구될 터였다. 그러나 지하실 어딘가에서 숫자를 맞추고 있는 사람이 외뢰인에게 식대
까지 청구해 낼 방법을 찾아낼 것이 분명했다.
오후에는 쉴새없이 전화를 하고 회의를 했다. 나는 순전히 의지의 힘으로 전투적인 표정
을 유지하고, 일더미를 헤쳐나가고, 가는 곳마다 무섭게 청구서를 발행하였다. 그러나 반트
러스트 법이 이렇게 막막할 정도로 난해하고 따분하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5시가 다 되어서야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몇 분 생겼다. 나는 폴리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다시 문을 잠갔다. 수수께끼의 파일을 다시 펼치고, 규격 용지에 아무렇게나 메모를 하
기 시작했다. 낙서를 하기도 하고, 리버오크스와 드레이크 & 스위니를 놓고 사방에 화살표
를 그리기도 했다. 파일 때문에 만났던 부동산 담당 파트너 브레이든 챈스가 회사를 대표하
여 가장 많은 화살을 맞고 있었다.
내 1번 용의자는 챈스 밑에서 일하는 사무직원, 내가 챈스와 목청을 높이는 것을 알았고,
잠시 후에 내가 그의 방을 떠날 때 챈스를 '지저분한 놈'이라고 불렀던 젊은 남자였다. 그라
면 퇴거 사건의 자세한 내막을 알고 있을 터이며, 파일에도 접근할 수 있을 터였다.
그레이크 & 스위니의 기록에 남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나는 휴대 전화로 반트러스트 담
당 사무직원에게 전화를 하였다. 그의 사무실은 내 사무실에서 모퉁이만 돌아가면 되었다.
그는 나에게 다른 직원의 이름을 가르쳐 주었으며, 이어 나는 별어려움 없이 내가 찾는 사
람의 이름이 헥터 팔머라는 것을 알아냈다. 우리 회사에 근무한 지는 약 3년 되었는데, 계속
부동산 부서에서만 있었다. 나는 그를 추적하기로 결심했다. 물론 사무실 바깥에서 해야 할
일이었다.
모디카이가 전화를 해서 저녁 식사 약속이 있는지 물었다.
"내가 대접하리다."
모디카이가 말했다.
"수프 말입니까?"
모디카이는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아니지. 내가 좋은 곳을 알고 있소."
우리는 7시에 만나기로 했다. 클레어는 의사로 돌아가 있었다. 시간도, 식사도, 남편도 잊
고 있었다. 오후 중반에 전화를 하여, 내 상태를 확인하고 서둘러 몇 마디 하기는 했다. 몇
시에 집에 갈지는 모르겠어. 어쨌든 매우 늦을 거야. 저녁은 각자 알아서 해야지. 그렇다고
클레어 탓을 할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바로 나에게서 추월 사건을 달리는 자들의 생활 방
식을 배운 것이니까.
우리는 듀퐁 서클 근처의 한 레스토랑에서 만났다. 앞쪽의 바는 사람들로 빽빽했는데, 대
부분이 많은 보수를 받는 공무원들인 것 같았다. 그들은 도시를 벗어나기 전에 한잔 하고
있었다. 우리는 뒤쪽의 비좁은 좌석에서 한잔 했다.
"버튼 이야기는 큰 기삿거리요. 지금도 계속 커지고 있소."
모디카이가 생맥주를 마시며 말했다.
"미안합니다. 지난 12시간 동안 동굴에 틀어박혀 있었거든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언론에서 큰 관심을 가지고 있소. 아이 넷과 어머니가 죽었는데, 모두 차 안에서 살고 있
었다. 그들은 의회에서 1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었는데, 그때 의회에서는 더 많은 어
머니들을 길거리로 내보내는 복지 개혁 법안을 처리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매끈한 기사 아
니오?"
"따라서 장례식은 큰 행사가 되겠군요."
"당연하지. 오늘 노숙자 활동가 여남은 명과 이야기를 했소. 그들 모두 장례식에 오기로
했소. 뿐만 아니라 사람들도 데리고 오기로 했소. 장례식장은 노숙자들로 가득할 거요. 물론
언론에서도 많이 오고. 어머니 관 옆에 있는 네 개의 작은 관. 카메라들이 그것을 잡아 6시
뉴스에 내보낼 거요. 우리는 장례식 전에 집회를 열 거고, 후에는 행진을 할 거요."
"그들의 죽음으로부터 뭔가 좋은 일이 생길 수도 있겠군요."
"어쩌면."
대도시의 노련한 변호사로서 나는 모든 점심과 저녁 초대에는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디카이는 뭔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었다. 그의 눈이 내 눈을 집요하게 따라 다
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들이 왜 노숙자가 되었는지 알아보았습니까?"
내가 미끼를 던졌다.
"아니. 아마 보통의 경우와 비슷하겠지. 아직 그걸 확인할 시간이 없었소."
나는 약속 장소로 차를 몰고 오면서 수수께끼의 파일과 그 내용물 이야기는 하지 말자고
결론을 내렸다. 그것은 비밀로 해 두어야 할 사항이었다. 드레이크 & 스위니에서의 내 위치
때문에 알게 된 일이었다. 변호사로서 의뢰인의 활동에 대해 알게 된 것을 공개하는 것은
직업적인 책임을 방기해 버리는 엄청난 죄였다. 따라서 그것을 내 입으로 말한다는 것은 생
각만 해도 두려웠다. 게다가, 아직 확인도 안 된 내용이었다.
웨이터가 샐러드를 가져왔다. 우리는 먹기 시작했다.
"오늘 오후에 회사에서 회의가 있었소."
모디카이가 먹으면서 말을 이었다.
"나, 에이브러험, 소피아가 모이는 회의요. 거기서 도움이 좀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왔소."
나는 놀라지 않았다.
"무슨 도움이죠?"
"다른 변호사."
"돈이 없는 줄 알았는데요."
"약간의 비축분이 있소. 그리고 새로운 마케팅 전략을 채택했소."
14번가 법률 상담소가 마케팅 전략을 궁리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었다. 모디카이도
웃자고 한 이야기였다. 우리는 웃음을 지었다.
"새로운 변호사가 일 주일에 열 시간을 기금 모금에 쓸 수 있다면, 자기 월급은 생겨갈
수 있을 거라고."
다시 웃음.
모디카이가 말을 이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우리의 생존은 기금을 모으는 능력에 달려 있소. 코언 신탁은
망해 가고 있소. 이제까지 우리는 구걸을 하지 않는 사치를 누려 왔지만, 이제는 우리도 달
라져야 하오."
"기금 모금 말고 또 무슨 일을 해야 하는 겁니까?"
"거리의 법이오. 당신은 이미 충분한 자질이 있소. 또 우리 직장도 이미 보았소. 그곳은
쓰레기장 같은 곳이오. 소피아는 잔소리가 심한 여자요. 에이브러험은 지저분한 놈이오. 의
뢰인들의 몸에서는 악취가 나오. 보수는 형편없소."
"얼마나 되는데요?"
"연봉 3만을 줄 수 있소. 하지만 첫 6개월간은 그 반밖에 약속할 수 없소."
"왜죠?"
"신탁의 회계연도가 6월 30일에 끝이 나오, 그때 가야 7월 1일부터 시작되는 다음 회계연
도에 우리에게 얼마를 줄 수 있는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소. 지금 우리에게는 다음 여섯 달
동안 당신한테 보수를 줄 정도의 비축분이 있소. 그 다음부터는 우리 넷이 비용을 제한 나
머지를 나누어 가져야 하오."
"에이브러험과 소피아도 거기에 동의를 했나요?"
"그럼. 물론 내가 잠시 연설을 한 뒤에 그렇게 했지만, 우리는 당신이 기존 법조계에 좋은
연줄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소. 또 당신은 좋은 교육을 받았고, 잘생겼고, 총명하고,
어쨌든 그런 사람 아니 돈을 모으는 데는 타고난 재주를 지니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
소."
"내가 돈을 모으기 싫다면요?"
"그럼 우리 넷은 보수를 훨씬 더 하향 조정해야겠지. 어쩌면 1년에 2만을 가져가야 할지
도 모르오. 그 다음에는 1만 5천, 그러다 신탁의 기금이 말라 버리면, 우리도 우리 의뢰인들
처럼 거리로 나서게 되는 거지. 노숙 변호사들이 되는 거요."
"그러니까 나에게 14번가 법률 상담소의 미래가 걸려 있다는 뜻이로군요?"
"우리는 그렇게 판단했소. 우리는 당신을 완전한 파트너로 영입할 거요. 어디 드레이크 &
스위니가 그것보다 나은 조건을 제시할 수 있는지 봅시다."
"감동적이로군요."
동시에 나는 약간 두렵기도 했다. 모디카이의 일자리 제안을 예상하지 못했던 바는 아니
지만, 막상 듣고 보니 걸어 들어가기가 망설여지는 문이 열렸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검은 콩 수프가 나왔다. 우리는 맥주를 더 시켰다.
"에이브러험은 어떤 친구입니까?"
"브룩클린 출신의 유대인이오. 원래 모이니헌 상원의원의 비서로 일하기 위해 워싱턴에
왔는데, 그렇게 의회에서 몇 년을 보내다가 거리에 정착하게 된 거요. 아주 총명한 친구요.
그는 주로 큰 법률 회사에서 무료 봉사에 나선 변호사들과 소송 계획을 짜는 일을 하오. 지
금은 센서스 담당부가 노숙자 숫자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고 소송을 걸고 있소. 또 노숙
자 자녀들에게 교육을 시키지 않았다고 워싱턴 교육위원회에 소송을 걸고 있소. 인간 관계
면에서는 모자란 것이 많지만, 뒷방에서 소송을 위한 모략을 짜는 데는 대단한 솜씨를 발휘
하지."
"소피아는요?"
"능력 있는 사회사업가요. 야간 법대를 11년째 다니고 있소. 행동과 사고는 변호사와 똑같
소. 특히 공무원들 구박할 때는. 당신도 한번 소피아가, '나 소피아 멘도사 변호사인데 말이
에요' 하는 소리를 들어 봐야 하는데. 하루에도 열 번은 그 소리를 한다니까."
"소피아가 비서 일도 겸합니까?"
"아니. 우린 비서가 없소. 스스로 타자를 치고, 서류 정리를 하고, 커피를 만들어야 하오."
그는 몸을 약간 앞으로 기울이더니 목소리를 낮추어 말을 이었다.
"우리 셋은 오랫동안 함께 일을 해 왔소, 마이클. 그래서 이제 서로들 약간은 타성에 젖어
있소. 솔직히 말해, 새로운 생각을 가진 새로운 얼굴이 필요하오."
"보수는 확실히 유혹적이군요."
웃자고 해 본 이야기지만 별 재미가 없었다.
그래도 모디카이는 싱긋 웃었다.
"이건 돈을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오. 당신 영혼을 위해서 하는 일이오."
내 영혼은 거의 밤새도로고 깨어 있었다. 내가 퇴사를 할 배짱이 있을까? 그렇게 보수가
적은 일자리를 받아들이는 문제를 내가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 되면 수백
만 달러와 작별을 고하는 것인데.
내가 갈망하던 물건과 소유는 희미한 기억이 되고 마는 것인데.
타이밍은 나쁘지 않았다. 결혼이 끝나는 것과 더불어, 어떻게든 모든 면에서 근본적으로
변해야 할 때였다.
12
화요일에는 병가를 냈다.
"감기인 것 같아."
나는 폴리에게 그렇게 말했고, 폴리는 훈련받은 대로 구체적인 상태를 물었다. 열은 있나
요? 목은 아픈가요? 두통은요? 다 아파. 그 가운데 어떤 것 하나이든 전부 다이든 나는 상
관하지 않았다. 회사에 나가 일을 못할 정도라면 확실하게 아픈 것이 좋았다. 몰리는 양식을
작성하여 루돌프에게 보낼 터였다. 루돌프가 전화할 것이 뻔했기 때문에 이른 아침에 아파
트를 나와 조지타운 근처를 배회했다. 눈은 빨리 녹고 있었다. 오늘의 최고 기온은 영상 10
도 정도라고 예보되었다. 나는 워싱턴 하버를 따라 천천히 걸으며 한시간을 죽였다. 여러 노
점상에서 카푸치노를 맛보기도 하고, 포토맥 강에서 사람들이 추위에 떨며 노를 젓는 모습
을 지켜보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0시에 장례식장으로 떠났다.
교회 앞의 보도에는 바리케이트가 설치되어 있었다. 경찰관들이 여기저기 서 있었고, 그들
의 오토바이가 도로를 따라 세워져 있었다. 저 아래쪽으로 텔리비전 중계차들이 보였다.
차를 타고 지나가는데, 연사가 마이크에 대고 고함을 지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 머리 위로 카메라에 보여주기 위해 서둘러 만든 플래카드들
이 몇 개 보였다. 나는 세 블록 떨어진 이면 도로에 차를 세우고, 서둘러 교회로 향했다. 정
문을 피해 옆문으로 갔다. 그곳에서는 나이든 안내원이 지키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1층에
좌석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나에게 기자냐고 물었다.
안내원은 나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문을 하나 가리켰다. 나는 그에게 고맙다고 하고 그
문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흔들거리는 층계를 올라가니 밑의 아름다운 예배당을 굽어보는
2층석이 나왔다. 양탄자는 적포도주 빛깔이었다. 신도석은 짙은색 목재로 만들어져 있었다.
창문은 스테인드글라스였고, 깨끗했다. 아주 먹진 교회였다. 잠시지만, 왜 이 교회 목사가 노
숙자들에게 문을 열지 않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2층석에는 나 혼자였기 때문에, 마음대로 자리를 고를 수 있었다. 나는 뒷문 위쪽, 설교단
에 이르는 중앙 통로가 잘 보이는 곳으로 갔다. 성가대가 예배당 바깥의 앞계단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텅 빈 교회의 고요 속에 홀로 낮아, 흘러드는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음악이 멈추고 문이 열렸다. 사람들이 우루루 몰려들기 시작했다. 조객들이 예배당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자 2층석 바닥이 흔들거렸다. 성가대는 설교단 뒤에 자리를 잡았다. 목사가 교
통정리를 했다. 텔리비전 취재진은 한쪽 구석에, 몇 명 안 되는 가족은 앞자리에, 활동가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온 노숙자들은 중앙 부분에. 모디카이는 내가 모르는 두 사람과 느릿느
릿 걸어 들어왔다. 측면의 문이 열리면서 죄수들이 들어왔다. 론타의 어머니와 두 오빠였다.
파란 죄수복을 입고, 손목과 발목에는 수갑과 족쇄를 차고 있었으며, 서로 쇠사슬로 연결되
어 있었다. 옆에서는 네 명의 무장 경비원이 감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가운데 두 번째 줄에
앉았다. 론타의 할머니와 다른 친척들 뒤였다.
자리가 정돈되자 오르간이 낮고 슬픈 곳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때 내 자리 밑에서 소란
이 일어났고, 모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목사가 설교단으로 올라가 모두 일어서라고 말
했다.
하얀 장갑을 낀 안내인들이 나무 관들을 들여오고 있었다. 그들은 통로를 따라 들어가, 관
을 교회의 앞쪽에 일렬로 배치했다. 설교단 앞의 공간을 꽉 채운 관들 중앙에 론타의 관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아기의 관은 아주 작았다. 1미터도 안 될 것 같았다. 온타리오의 관, 알
론소의 관, 단테의 관은 중간 크기였다. 무시무시한 광경이었다. 흐느낌이 일기 시작했다. 성
가대가 콧노래를 하며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안내인들이 관들 주위에 꽃을 놓았다. 잠시, 그들이 혹시나 관을 열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
움에 몸이 떨렸다. 전에는 흑인의 장례식에 와 본 적이 없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전혀 짐
작할 수가 없었다. 뉴스에서 장례식 장면을 보여 줄 때, 이따금씩 관이 열려 있고 가족이 시
신에 입을 맞추는 광경이 나온 적이 있었다. 이곳에 카메라를 든 독수리떼들은 그런 광경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관은 열리지 않았다. 그래서 세상은 내가 아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온타리오 가
족이 매우 평화롭게 잠들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자리에 앉았고, 목사는 길게 기도를 했다. 이어 어떤 여자가 독창을 했고, 그 뒤에
잠시 정적이 이어졌다. 목사가 성경 구절을 읽고 잠시 설교를 했다. 이어 노숙자 활동가 한
사람이 나오더니, 이런 일이 일어나게 만든 사회와 그 지도층을 통렬하게 공격했다. 그녀는
의회, 특히 공화당을 비난했다. 이어 지도력이 없는 시와 사법부, 관료제를 비난했다. 그러나
그녀는 가장 통렬한 비난을 아껴두고 있었다. 그것은 상층 계급, 즉 돈과 권력을 가지고 있
으면서도 가난하고 병든 자들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 대한 비난이었다. 그녀의 분노에
찬 말들은 분명했으며, 매우 효과가 큰 것 같았다. 그러나 장례식장에 어울리는 연설인지는
의문이었다.
그녀가 연설을 끝내자 사람들은 박수를 쳤다. 이어 목사가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돈 많
은 백인들을 호되게 꾸짖었다.
다시 독창, 약간의 성경 봉독이 있고 나서, 성가대는 감동적인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울고 싶어질 정도였다. 사람들이 관 위에 손을 얹어 보기 위해 줄을 섰다. 그러나 흥분한 사
람들이 갑자기 몰려들어 흐느끼면서 관을 어루만지는 바람에 줄은 곧 흩어지고 말았다.
"관을 열어라."
누가 소리쳤다. 그러나 목사는 고개를 저어 안 된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사람들이 설교단
쪽으로 몰려오는 바람에 관 주위는 사람들로 빽빽했다. 모두들 고함을 지르고 흐느끼는 바
람에, 합창단은 소리를 더 크게 질러야 했다. 론타의 할머니가 제일 크게 소리를 지르고 있
었다. 사람들이 할머니를 쓰다듬으며 위로했다.
믿어지지가 않았다. 론타가 이 세상에서 보낸 마지막 몇 달 동안 이 사람들이 다 어디 어
있었단 말인가? 관 안에 누운 작은 몸들은 살아서는 이렇게 많은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었
을 것이다.
카메라들이 더 바짝 다가왔고, 울부짖는 조객의 수는 점점 늘어났다. 이것은 완전히 쇼라
는 느낌이 들었다.
마침내 목사가 나서서 질서를 회복했다. 그는 오르간 음악을 배경으로 다시 기도를 했다.
목사가 기도를 마치자, 해산을 위한 행사가 길게 이어지며,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관 옆에 줄
을 섰다.
예배는 한 시간 반 동안 계속되었다. 2천 달러의 값어치는 충분히 한 공연이었다. 나도 자
랑스러웠다.
사람들은 바깥에서 다시 집회를 열고, 의사당 쪽으로 행진을 하기 시작했다. 모디카이도
행렬 안에 들어가 있었다. 행렬이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는 것을 보며 갑자기 궁금해졌다. 모
디카이는 몇 번이나 이런 행진과 시위에 참가했을까? 그는 이렇게 대답하겠지. 아직도 한참
더 해야 돼.
루돌프 메이스는 서른의 나이에 드레이크 & 스위니의 파트너가 되었고, 이것은 아직도
깨지지 않은 기록이었다. 만일 그의 인생이 계획대로 진행된다면, 그는 파트너로 가장 오랫
동안 일하는 기록도 가지게 될 터였다. 그에게는 법이 곧 인생이었다. 이것은 그의 세 명의
전 부인들이 분명하게 증언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법 외에 그가 손을 댄 것은 모두 참담한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루돌프는 대형 법률 회사에서는 유능한 선수 노릇을 했다.
그는 오후 6시에 그의 사무실에서 산더미 같은 일감 뒤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폴
리를 비롯하여 다른 비서들은 퇴근하고 없었다. 대부분의 사무직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보통
5시 반이 넘으면 복도의 통행량이 현격히 줄기 마련이었다.
나는 문을 닫고 자리에 앉았다.
"아픈 줄 알았는데."
루돌프가 말했다.
"그만두겠습니다."
나는 최대한 용감하게 말했다. 그러나 벌써 위가 뒤틀리고 있었다.
루돌프는 앞에 있던 책들을 옆으로 치우고, 값비싼 펜에 뚜껑을 닫았다.
"계속해 보게."
"회사를 그만 두겠습니다. 공익법을 다루는 회사에서 일자리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어리석은 짓 말게, 마이클."
"어리석은 짓을 하는 게 아닙니다. 이미 마음을 정했습니다. 그리고 가능한 한 문제를 일
으키지 않고 이곳을 나가고 싶습니다."
"앞으로 3년이면 자넨 파트너가 될 수 있어."
"그것보다 더 나은 제안이 들어왔거든요."
그는 대꾸할 말을 찾을 수가 없어, 좌절감을 느끼며 눈알을 굴렸다.
"이보게, 마이크. 하나의 사건 때문에 이렇게 부서질 수가 있는 건가."
"부서진 게 아닙니다. 그저 다른 분야로 옮기는 것 뿐입니다."
"다른 여덟 명의 인질들은 이러지 않아."
"대단하군요. 어쨌든 그 사람들이 행복하다니 나도 기쁩니다. 사실 그들은 소송 부서 소속
입니다. 그쪽은 이상한 종자들 아닙니까."
"어디로 가려고?"
"로건 서클 근처에 있는 법률 상담소입니다. 노숙자 법을 전문으로 하죠."
"노숙자 법?"
"네."
"얼마나 준다나?"
"엄청나게 준답니다. 혹시 상담소에 돈을 기부하실 생각은 없습니까?"
"이거 제정신이 아니군."
"약간의 위기를 겪고 있을 뿐입니다, 루돌프. 난 이제 겨우 서른 둘입니다. 중년의 위기를
겪기에는 너무 젊죠. 어쨌든 빨리 위기를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 달간 쉬게. 가서 노숙자들과 함께 일을 한 다음, 그런 생각을 떨쳐 버리고 다시 돌아
와. 지금 떠나는 건 시기가 아주 안 좋아, 마이크. 우리가 얼마나 일이 밀려 있는지 잘 알지
않나."
"안 될 겁니다, 루돌프. 안전망이 있으면 재미가 없잖습니까."
"재미? 자넨 이 일을 재미로 하나?"
"그렇고 말고요. 시계를 보지 않고 일을 하는 게 얼마나 재미가 있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클레어는 어쩌고?"
루돌프는 그의 절망감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클레어를 잘 알지도 못했다. 게다
가 결혼 생활에 대해서는 충고할 자격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클레어는 괜찮습니다. 금요일에 퇴사하겠습니다."
루돌프는 패배감에 젖어 투덜거렸다. 눈을 질끈 감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믿을 수가 없군."
"미안합니다, 루돌프."
우리는 악수를 하면서, 내일 아침 일찍 식사를 함께 하면서 내가 마무리 못한 일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했다.
폴리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내 이야기를 듣게 하고 싶지 않아, 내 사무실로 가서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 그녀는 알링턴의 집에서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녀는 내 이야기 때문
에 한 주일을 망치고 말았다.
가는 길에 태국 식당에 들러 먹을 것을 샀다. 집에 가서는 포도주를 냉장고에 넣어 두고,
식탁을 차린 다음, 클레어에게 할말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클레어가 나의 기습 공격을 눈치챘는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오랜 세월에 걸쳐 우리는 싸
우는 대신 서로를 그냥 무시해 버리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의 전술은 야비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나는 기습 공격을 감행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충격적인 소식으로 철저하게
무장하고 있다가, 어떤 반응이 나올 때마다 재치있게 받아넘기는 것. 불공평한 방법이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동시에 무너지고 있는 결혼 생활에서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10시가 되어 가고 있었다. 클레어는 몇 시간 전에 저녁을 대충 때웠기 때문에, 우리는 곧
장 서재로 가서 포도주 잔을 기울였다. 나는 난로에 불을 지폈다. 우리는 각자 제일 좋아하
는 의자에 앉았다. 잠시 후에 내가 입을 열었다.
"이야기 좀 해."
"뭔데?"
클레어가 아무런 걱정 없이 물었다.
"회사를 나올 생각이야."
"그래?"
클레어는 포도주를 들이켰다. 그녀의 냉정함은 정말 칭찬할 만했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거
나 아니면 무관심한 것처럼 보이고 싶었거나, 둘 중의 하나였다.
"응. 그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어."
"왜?"
"이제 바꿀 때가 되었나 봐. 법인 일이 갑자기 짜증스럽고 하찮게 여겨져. 뭔가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고 싶어."
"그거 좋지."
그녀는 벌써 돈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 이야기가 나오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사실 그건 존경할 만한 일이야, 마이클."
"내가 전에 모디카이 그린이란 사람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지? 그의 상담소에서 일자리
를 제안했어. 그래서 월요일부터 출근하기로 했어."
"월요일?"
"응."
"그럼 벌써 결정을 한 거네."
"그래."
"나하고 상의도 없이? 내 이야기는 들어 보지도 않고? 그게 옳은 거야?"
"난 지금 회사로는 돌아갈 수 없어, 클레어. 루돌프한테도 오늘 말했어."
다시 포도주 한 모금. 그리고 클레어는 약간 이를 갈았다. 눈에서 분노가 번뜩이는 듯했으
나, 그녀는 그냥 넘어갔다. 그녀의 자제력은 정말 놀라웠다.
우리는 노란 불길 때문에 최면에 걸린 듯 불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클레어가 입을
열었다.
"그게 경제적으로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물어봐도 돼?"
"변화가 좀 있겠지."
"새 직장에서 보수는 얼마나 준대?"
"연봉 3만."
"연봉 3만이라."
클레어는 되풀이하더니,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마치 실제보다 더 낮은 액수처럼 들리
게 하려는 듯 다시 되풀이했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럼 나보다도 적네."
그녀의 연봉은 3만 2천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가파르게 상승할 예정이었다. 사실
큰돈을 만질 날도 멀지 않았다. 나는 토론의 목표를 관철하기 위해, 돈을 가지고 칭얼대는
것에는 절대 동정심을 보이지 않기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공익법 일은 돈 때문에 하는 게 아냐."
나는 너무 경건한 척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말을 이었다.
"내 기억으로는, 당신도 돈 때문에 의대에 간 건 아닌 것 같은데."
전국의 모든 의대생들과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돈에 끌린 것이 아니라고 맹세하면서 의학
공부를 시작했다. 인류를 돕고 싶다고 했다. 법대생과 마찬가지였다. 우리 모두 거짓말을 한
것이다.
클레어는 불을 보며 계산을 하고 있었다. 아마 집세 생각을 하고 있겠지. 우리가 사는 곳
은 매우 좋은 아파트였다. 사실 월 2천 4백이면 이곳보다 훨씬 더 좋은 곳에서 살 수도 있
었다. 가구도 그만그만 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사는 지역을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남
부끄럽지 않은 주소, 아름다운 연립주택, 화사한 동네. 하지만 우리가 실제로 집에서 보내는
시간은 많지 않았다. 그렇다고 손님을 부르는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사를 한다는 것은
하향 조정을 하는 셈이었지만, 충분히 견딜 수 있는 일이었다.
우리는 돈 문제에 대해서는 늘 모든 것을 공개하고 살아왔다. 아무것도 감추지 않았다. 클
레어는 우리가 상호 신탁에 5만 1천 달러쯤 가지고 있고, 당좌예금 구좌에 1만 2천을 가지
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가 결혼 생활 6년 동안에 그것밖에 못 모았나 생각하면
놀랍기도 했다. 큰 법률 회사에서 빠른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노라면, 돈은 무한정인 것처럼
보이는데.
"조정을 좀 해야 할 것 같군, 안 그래?"
클레어가 차가운 눈길로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조정'이라는 말에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
은 의미들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래야 할 것 같아."
"피곤해."
클레어는 잔을 비우더니 침실로 갔다.
처량하군. 서로 한번 제대로 싸워 볼 만한 증오도 못 가졌다니.
물론 나는 나 자신의 새로운 지위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나는 멋진 기삿거리가 될
터였다. 야망에 찬 젊은 변호사가 가난한 사람들의 옹호자로 변신하다. 우량 법률 회사에 등
을 돌리고 푼돈을 받고 일하다. 클레어는 내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암
만 그래도 성자를 비판하기는 힘들 것이다.
나는 난로에 장작을 하나 더 넣고, 술을 한 잔 더 만들었다. 그리고 결국 소파에서 잤다.
13
8층에는 파트너들의 전용 식당에 있었다. 어소시에이트가 그곳에서 식사를 하는 것은 명
예로 여겨졌다. 루돌프는 오전 7시에 그들의 특별 식탁에서 자기와 함께 아일랜드 오트밀
한 사발을 먹으면 내가 제정신을 차리게 될 것이라고 생각할 만큼 얼간이였다. 내가 어떻게
권력자들과의 아침 식사로 이루어진 미래에 등을 돌리겠냐는 거겠지.
루돌프는 흥미있는 소식을 가져왔다. 전날 밤 늦게 아서와 이야기를 했는데, 나에게 1년간
의 안식년 휴가를 주자는 이야기가 나왔다는 것이다. 상담소에서 주는 보수와 내 현재의 보
수 차이의 차액은 회사에서 채워 주겠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도 명분이 있는 일이었다. 그들
에게도 이것이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었
으니까. 나는 회사를 위하여 1년간 봉사를 하는 변호사로 임명되는 것이고, 회사에서는 자기
들도 좋은 일을 했다고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1년 뒤에 배터리를 재충전한 나는
이제 다른 관심사는 억누르고 회사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리하여 내 재능을 다시 한 번 드
레이크 & 스위니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다.
나는 그 아이디어에 감동했다. 쉽게 물리쳐 버릴 수 있는 제안이 아니었다. 루돌프에게 생
각을 해보겠다고 약속했다. 빠른 시간 안에. 그는 내가 파트너가 아니기 때문에 집행위원회
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단서를 달았다. 회사에서는 이전에 한 번도 어소시에이트를 위해
그런 휴가를 고려한 적이 없다는 이야기였다.
루돌프는 나를 잡으려고 필사적이었다. 그것은 우정과는 관계 없는 일이었다. 우리 반트러
스트 담당부에는 일이 산더미처럼 밀려 있었다. 나 정도의 경험을 자니 고참 어소시에이트
가 적어도 둘은 더 필요했다. 떠나기에는 타이밍이 매우 안 좋았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이
회사에는 8백 명의 변호사가 있다. 그 가운데서 루돌프가 원하는 변호사를 찾아 낼 수 있겠
지.
1년 전에 나는 75만 달러가 약간 안 되는 금액을 청구했다. 그 덕분에 나는 그들의 전용
식당에서 아침을 먹으며, 나를 잡아 두려는 그들의 긴급 계획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던 것
이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1년치 내 연봉을 노숙자나 내가 원하는 자선 단체에 던져 주
고, 1년 뒤에 다시 나를 데이고 온다는 것도 말이 되는 이야기였다.
안식년 이야기가 끝난 뒤, 우리는 가장 급한 일들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할 일의
목록을 작성하고 있을 때, 브레이든 챈스가 우리 식탁에서 멀지 않은 식탁에 와서 앉았다.
챈스는 처음에는 나를 보지 못했다. 식당에는 여남은 명의 파트너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대부분 혼자였으며, 또 대부분 조간 신문에 머리를 틀어박고 있었다. 나는 챈스를 무시하려
했다. 그러나 우연히 그쪽을 건너다보다가, 나를 노려보는 그의 눈길과 마주치게 되었다.
"안녕하십니까, 브레이든."
내가 큰 소리로 말하자, 챈스는 깜짝 놀랐다. 루돌프도 누구인가 보려고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챈스는 고개만 끄덕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갑자기 토스트를 열심히 먹기 시
작했다.
"저자를 아나?"
루돌프가 나지막히 물었다.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의 사무실에서 잠깐 만났을 때 챈스는 나를 감독할 책임이 있는 파트너의 이름을 요구
했고, 나는 루돌프의 이름을 댔다. 지금 보니 챈스는 루돌프에게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지저분한 놈이야."
루돌프가 간신히 들릴 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만장일치로군. 루돌프는 곧 챈스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서류를 넘기며, 일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내가 끝내지 못한 일이 아주 많았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게 챈스와 퇴거 파일 쪽으로 생각이 흘러가고 있었다. 챈스는 유약해 보였고, 피
부는 창백했고, 이목구비는 오밀조밀했다. 행동거지에는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그가 거
리에서 불법 점거자들로 가득한 버려진 창고를 살피는 모습은 상상할 수가 없었다. 일을 철
저히 하기 위해 자기 손에 때를 묻히는 모습은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보나마나 챈스는
책상에 앉아 서류 작업을 감독하며 수백 시간을 청구했을 것이고, 우리 회사의 헥터 팔머
같은 친구들이 지저분한 일들을 처리했을 것이다. 챈스는 리버오크스의 임원들과 점심이나
먹고 골프나 쳤겠지. 그것이 파트너로서 그의 역할이니까.
아마 챈스는 리버오크스/태그 창고에서 추방된 사람들의 이름도 모를 것이다. 그가 왜 그
런 데 신경을 쓴단 말인가? 그들은 이름도 없고, 얼굴도 없고, 집도 없는 불법 점거자들일
뿐이었다. 경찰이 그들을 조그만 거처에서 끌어내 거리에 내동댕이쳤을 때도 챈스는 그 현
장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헥터 팔머는 아마 그 광경을 목격했을 것이다.
챈스가 론타 버튼과 그녀의 가족의 이름을 모른다면, 퇴거와 그들의 죽음 사이의 관련도
모를 것이다. 아니, 어쩌면 지금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누가 말해 주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질문들에 대해서는 헥터 팔머가 대답을 해 주어야 했다. 그것도 빨리. 오늘은 수요
일. 나는 금요일에 퇴사할 예정이었다.
루돌프는 8시에 아침식사를 마쳤다. 그의 사무실에서 아주 중요한 사람들과 약속이 잡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내 사무실로 가서 워싱턴 포스트를 읽었다. 예배당에 놓인, 열리지 않
은 다섯 개의 관을 찍은 사진이 있었다. 가슴이 찢어지는 사진이었다. 장례 예배와 그 뒤의
행진에 대한 이야기도 자세하게 실려 있었다.
사설도 그 이야기였다. 매우 잘 쓴 글로서, 먹을 것과 잠잘 곳이 있는 모든 사람이 잠시
발을 멈추고 우리 도시의 론타 버튼들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촉구하고 있었다. 그들을 거리
에서 쓸어다가, 우리 눈에 띄지 않는 어떤 감추어진 곳에 처박아 둘 수는 없다. 그들은 자동
차 안에서 살고 있고, 창고를 불법 점거하고 있고, 임시로 세운 천막에서 추위에 떨고 있고,
공원 벤치에서 자고 있고, 혼잡하고 때로는 위험한 합숙소에서 잠자리 차례가 오기를 기다
리고 있다. 우리는 그들과 같은 도시에 살고 있다. 그들도 우리 사회의 한 부분이다. 우리가
그들을 돕지 않으면, 그들의 숫자는 늘어난다. 그리고 그들은 계속 우리 거리에서 죽어갈 것
이다.
나는 신문에서 그 사설을 오려내, 잘 접어서 지갑에 넣었다.
회사 사무직원들의 망을 통하여 헥터 팔머와 접촉할 수 있었다. 그에게 직접 접근하는 것
은 지혜롭지 못한 일이었다. 근처에 챈스가 숨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3층 제1도서관의 책꽂이들 사이에서 만났다. 보안 카메라로부터, 또 모든 사람들로
부터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그는 몹시 초조해 보였다.
"당신이 그 파일을 내 책상 위에 갖다 놓았습니까?"
나는 바로 치고 들어갔다. 게임을 할 시간이 없었다.
"무슨 파일 말입니까?'
그는 저격수가 우리를 겨누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리버오크스/태그 퇴거 파일 말이오. 그건 당신이 다루는 것 아닙니까?"
그는 내가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지, 또는 얼마나 적게 알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그건 맞습니다."
그가 대답했다.
"원래의 파일은 어디 있습니까?"
팔머는 책꽂이에서 책을 한 권 꺼내더니, 연구에 몰두하듯 책을 들여다보았다.
"모든 파일은 챈스가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의 사무실에?"
"네. 파일 캐비닛에 넣고 잠가 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소근거리고 있었다. 여기 오기 전에는 팔머를 만나는 일을 두고 초조해한 적이 없
었는데, 지금은 나도 모르게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이제는 누가 우리를 지켜본다면,
우리가 뭔가 수상쩍은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터였다.
"파일에는 뭐가 있습니까?"
내가 물었다.
"나쁜 게 있죠."
"말해 보세요."
"나도 처자식이 있는 몸입니다. 잘리고 싶지 않습니다."
"나를 믿으세요."
"당신은 퇴직하지 않습니까? 걱정할 게 없잖습니까?"
소문은 빨리 돌았다. 그러나 놀랄 일이 아니었다. 사실 나는 여러 번 궁금해했다. 누가 소
문을 더 많이 퍼뜨릴까? 변호사들일까 아니면 비서들일까? 아마 정답은 사무직원들일 것이
다.
"왜 그 파일을 내 책상에 갖다 놓은 겁니까?"
그는 다른 책으로 손을 뻗었다. 그의 오른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요."
그는 책을 몇 장 넘기더니 그 줄 끝으로 걸어갔다. 나도 그 뒤를 따라갔다. 우리 근처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팔머는 발을 멈추더니 다른 책을 꺼냈다. 그도 이야
기를 하고 싶어하는 것이 분명했다.
내가 말했다.
"그 파일이 필요합니다."
"나한테는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습니까?"
"훔치는 수밖에 없죠."
"좋습니다. 열쇠는 어디서 얻을 수 있습니까?"
그는 잠시 내 얼굴을 살폈다. 내가 얼마나 진지하게 나오는 것인지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팔머가 말을 이었다.
"나한테는 열쇠가 없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퇴거자 명단을 손에 넣었습니까?'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알면서 왜 이럽니까. 당신이 내 책상에 갖다 놓았잖습니까."
"이거 완전히 제정신이 아니군."
팔머는 그 말과 함께 멀어져 갔다. 중간에 멈추어 주기를 기다렸으나, 계속 걸어갔다. 책
꽂이들을 지나, 층층이 쌓아 올린 책들을 지나, 안내 데스크를 지나, 도서관을 나가 버렸다.
루돌프에게 말한 것과는 달리, 회사에 있는 마지막 사흘 동안 열심히 일을 할 생각은 없
었다. 책상 위에는 반트러스트 사건 관련 서류들을 어지럽게 흩어 놓고, 문을 닫고, 벽만 보
고 있었다. 무슨 일에도 웃음만 지었다. 나는 떠날 사람이었다. 숨을 쉴 때마다 압박감이 조
금씩 줄어드는 것 같았다. 이제 시계에 목을 걸어 놓고 노동을 할 필요가 없었다. 내 야심만
만한 동료들이 일 주일에 85시간을 일하니까 나도 80시간은 일해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상사들에게 아첨을 할 필요도 없었다. 파트너 자리를 놓치는 악몽 때문에 괴로워할
필요도 없었다.
모디카이에게 전화를 걸어, 공식적으로 일자리 제안을 받아들인다고 통보했다. 그는 웃음
을 터뜨리며, 내 월급을 줄 방법을 찾아보아야겠다고 농담을 했다. 월요일부터 일을 시작할
수 있다고 했으나, 모디카이는 잠깐 오리엔테이션을 해줄 테니 그 전에 들르라고 했다. 나는
14번가 법률 상담소의 내부를 머리 속에 그려보며, 그 텅 비고 지저분한 사무실들 가운데
어느 사무실이 나에게 할당될까 궁금해하였다. 마치 그것이 중요란 일이기라도 한 것처럼.
오후가 저물 무렵, 나는 내가 완전히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친구와 동료들로부터
심각한 작별 인사를 받으며 시간을 보냈다.
나는 잘 대처했다. 사실 나는 성자를 되는 길로 가고 있는 것 아닌가.
그러는 동안 아내는 이혼 변호사를 만나고 있었다. 무자비하게 남자를 쥐어짜는 것으로
유명한 여자 변호사였다.
나는 집에 6시에 들어갔다.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 클레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부엌
탁자에는 메모와 컴퓨터에서 뽑아낸 계산표가 가득했다. 계산기 한 대가 옆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클레어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제대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내가 기습 공격
에 걸린 셈이었다.
"이혼을 제안하고 싶어. 이유는 화해 불가능한 성격 차이야."
클레어는 유쾌하게 말을 이어갔다.
"물론 우리는 싸우지 않아 삿대질도 하지 않아. 하지만, 우리 입으로는 말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이미 인정하고 있어. 우리 결혼이 끝났다는 걸."
클레어는 말을 끊고, 내가 무슨 말을 하기를 기다렸다. 그렇다고 내 입장에서 놀란 척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이미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이의를 제기한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
가? 나도 그녀만큼 차가운 태도를 보여 주어야 했다.
"물론이지."
나는 가능한 한 냉정하게 대꾸했다. 마침내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는 데서 약
간의 안도감마저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나보다 이혼을 더 원한다는 것은 신경이
쓰이는 일이었다.
클레어는 우위를 유지해 나가기 위해, 이혼 변호사인 자클린 흄을 만난 이야기를 했다. 그
녀는 수류탄을 던지듯 그 이름을 던졌다. 이어 변호사 스스로 자화자찬식으로 늘어 놓은 이
야기를 옮기기 시작했다.
"왜 변호사를 고용한 거지?"
내가 말을 끊고 들어갔다.
"확실히 보호를 받고 싶었어."
"나한테 이용당할까봐?"
"당신은 변호사야. 따라서 나한테도 변호사가 있어야 해. 간단한 거야."
"그 여자를 고용하지 않았다면 돈을 많이 절약할 수 있었을 텐데."
나는 약간 시비조로 나갔다. 어차피 이건 이혼이 아닌가.
"하지만 나에게도 변호사가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훨씬 좋은걸."
클레어는 나에게 1번 문서를 건네 주었다. 우리 재산과 부채를 계산표로 작성해 놓은 것
이었다. 2번 문서는 그것을 나누는 방법에 대한 제안서였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녀는 다수
를 가지려 하고 있었다. 우리한테는 현금 1만 2천 달러가 있었는데, 그녀는 그 반으로 자기
자동차의 은행 담보를 갚겠다고 했다. 나는 그 나머지 가운데 2천 5백을 갖는 걸로 되어 있
었다. 내 렉서스의 담보 1만 6천을 갚는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그녀는 우
리가 투자 신탁 회사에 넣어 놓은 돈 5만 1천 달러 가운데 4만을 갖겠다고 했다. 이건 너무
하다 싶었다.
"공평하게 나누는 것 같지 않은데."
내가 말했다.
"똑같을 수가 없지."
그녀는 막 싸움소를 고용한 사람으로서 자신감을 가지고 말했다.
"왜?"
"중년의 위기를 겪는 사람은 내가 아니니까."
"그러니까 내 잘못이라는 거야?"
"지금 잘못의 비율을 따지자는 게 아니야. 재산을 나누자는 거야. 이유는 당신만 알겠지
만, 어쨌든 당신은 연봉 가운데 9만을 스스로 깎아냈어. 내가 왜 그 결과를 감수해야 돼? 내
변호사는 당신의 행동의 우리를 경제적인 파탄에 이르게 했다는 점을 판사에게 납득시킬 수
있다고 자신했어. 당신이 미치고 싶다면, 그건 좋아. 하지만 내가 당신과 함께 굶기를 바라
지는 마."
"그럴 가능성은 적은데."
"말다툼하고 싶지 않아."
"나도 내가 다 갖는 입장이라면 말다툼하고 싶지 않을 거야."
나는 어느 정도는 시끄럽게 굴어야겠다는 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우리는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집어던지지도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울지 않을 거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
다. 바람을 피운 것이나 약물에 중독된 것을 가지고 지저분하게 비난할 일도 없었다. 대체
무슨 이혼이 이 모양이란 말인가?
아주 황폐한 이혼. 클레어는 나를 무시하고, 계속 메모에 적힌 것들을 이야기해 나갔다.
변호사가 내린 지침에 따른 것임에 틀립없었다.
"아파트 계약은 6월 13일까지야. 나는 그때까지 여기 있을 거야. 그럼 집세는 만 달러가
돼."
"나는 언제 나가는 게 좋을까?"
"되는 대로 빨리."
"좋아."
나가 달라고 한다면, 있게 해 달라고 애걸할 생각은 없었다. 이것도 우위에 서려는 행동이
었다. 어떤 식으로 나가야 더 경멸하는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을까?
하마터면, '다른 남자를 들어오게 하려는 거야?' 하는 식의 멍청한 소리를 할 뻔했다. 나는
그녀의 침착성을 흔들고 싶었다. 순간이라도 얼음이 녹는 것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냉정을 유지했지.
"주말까지는 나갈게."
클레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얼굴을 찌푸리지도 않았다.
"왜 당신이 투자 신탁에 넣은 돈의 80퍼센트를 가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내가 물었다.
"80퍼센트를 갖겠다는 게 아냐. 만은 집세로 내고, 3천은 관리비로 쓰고, 2천은 우리가 함
께 쓴 신용카드들의 청구서를 처리하고, 또 우리 앞으로 세금이 6천 정도 나올 거야. 그게
전부 2만 1천이라고."
3번 문서는 서재에서 시작하여 빈 침실에서 끝이 나는, 개인 소유의 완전한 목록이었다.
우리 둘 다 감히 부엌의 식기를 놓고 말다툼을 벌이지는 못했다. 따라서 소유물 분리는 매
우 평화롭게 진행되었다.
"원하는 대로 다 가져."
나는 몇 번이나 그렇게 말했다. 특히 수건이나 침대보 같은 물건이 나올 때는 교묘한 방
법으로 몇 가지 물건을 교환하기도 했다. 몇가지 자산에 대한 나의 태도는 소유에 대한 어
떤 초연한 태도보다는 물리적으로 운반이 쉽지 않다는 점에 의해 좌우되었다.
나는 텔리비전과 접시 몇 개를 원했다. 갑자기 맞닥뜨린 독신 생활이었기 때문에, 새로운
장소를 어떻게 꾸밀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반면 클레어는 이미 몇 시간 동
안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 보고 나서 나와 마주 앉았다.
그러나 소유물 분배 문제에서는 공평했다. 우리는 3번 문서에 나온 항목을 분류하는 짜증
스러운 일을 끝내고, 공평하게 분배를 끝냈음을 선포했다. 이제 별거 합의서에 서명을 하고,
여섯 달을 기다렸다가, 함께 법정으로 가서 법적으로 우리의 혼인을 해지하면 끝이었다.
둘 다 게임 뒤의 환담은 원치 않았다. 나는 외투를 찾아 들고, 조지타운의 거리를 오랫동
안 산책했다. 어떻게 이렇게 인생이 극적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일까.
그 동안 결혼의 부식 과정은 분명하기는 했지만, 속도가 느렸다. 그러나 내 일에 변화가
생기면서, 그것이 결정타가 되었다. 상황이 너무 빠르게 변하고 있었고, 나로서는 그것을 멈
출 힘이 없었다.
14
안식년을 준다는 제안은 집행위원회에서 기각당했다. 그들이 자기들끼리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야 알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루돌프는 몹시 우울한 얼굴로 나쁜 선례를 남겨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강했다고 전해 주었다. 큰 회사에서는 한 어소시에이트에게 1년간의 휴가를
주는 것이, 불만을 품었던 다른 사람들이 사방에서 온갖 요구를 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는 걱정이 우세했다는 것이다.
이제 안전망은 없었다. 내가 문을 나가면 그것으로 문은 완전히 닫혀 버리는 것이었다.
"자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정말 잘 알고 있나?"
루돌프는 내 책상 앞에 서서 물었다. 그의 옆의 바닥에는 커다란 상자 두 개가 있었다. 폴
리가 벌써 내 짐을 싸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요."
나는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내 걱정은 마십시오."
"나도 노력은 했네."
"고맙습니다, 루돌프."
루돌프는 고개를 저으며 내 방을 나갔다.
어젯밤 클레어에게 기습 공격을 당한 뒤부터 안식년에 대해서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머
리 속에서 더 다급한 생각들이 버글거리고 있었다. 이제 이혼을 하고, 독신이 되고, 나 자신
이 노숙자가 될 판이었던 것이다.
새 일자리와 사무실과 앞으로의 일뿐만이 아니라, 갑자기 새 아파트까지 걱정하게 된 것
이다. 사무실 문을 닫고, 신문의 분류 광고의 부동산 난을 살펴보았다.
차를 팔면 한 달에 480달러의 할부금은 절약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고물차를 하나 사서 보
험을 잔뜩 들어 놓고, 내가 새로 살게 될 동네에서 밤중에 차가 없어지기를 기다리는 거야.
광고를 보니, 워싱턴에서 쓸만한 아파트에 살려고 하다가는. 내 새로운 봉급의 대부분이 집
세로 날아갈 것이 뻔했다.
일찌감치 점심을 먹으러 나가, 허름한 방을 알아보러 워싱턴 중심부를 돌아다녔다. 가장
싼 것이 월 천백짜리로 그나마 쓰레기장 같았는데, 그것도 거리의 변호사에게는 너무 큰 돈
이었다.
점심을 먹고 돌아오니 다른 파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 규격 용지 크기에 평범한 마닐
라 종이로 만든 파일이었고, 바깥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전과 똑같은 자리에 놓여
있었다. 펼쳐보니 왼쪽에 테이프로 열쇠 두 개가 붙어 있었다. 오른쪽에는 타자로 친 메모가
스테이플러로 찍혀 있었다. 이런 내용이었다.
위의 열쇠는 챈스의 방 열쇠입니다. 아래 열쇠는 창문 밑의 파일 서랍의 열쇠입니다.
복사를 하고 도로 갖다 놓으십시오. 조심하십시오. 챈스는 의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열
쇠는 버리십시오.
갑자기 폴리가 나타났다. 자주 그러듯이, 문도 두드리지 않고, 소리도 없이, 유령처럼 불쑥
나타난 것이다. 폴리는 토라져서 나를 무시하고 있었다. 우리는 4년 동안 함께 일했다. 그녀
는 내가 떠나는 바람에 몹시 마음이 상했다고 주장했다. 사실 우리는 그렇게 가깝지는 않았
다. 폴리는 며칠이면 다시 다른 일을 맡을 터였다. 그녀가 매우 착한 사람인 것은 사실이었
지만, 지금 내 걱정거리들 가운데는 맨 아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얼른 파일을 덮었다. 폴리가 봤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잠시 기다려 보았다. 폴리는 상
자에 짐을 담느라 바빴다. 그녀는 파일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파일에 대해
서 알지 못한다는 강력한 증거였다. 그러나 그녀는 내 사무실 주변 복도의 모든 것을 보고
있기 때문에, 헥터든 누구든 어떻게 그녀의 눈에 띄지 않고 내 사무실에 들어왔다 나갔는지
상상을 할 수가 없었다.
함께 인질이 되었던 친구 배리 누조가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하려고 들렀다. 그는 문
을 닫더니, 상자들을 피해서 다가왔다. 퇴직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게 클
레어 이야기를 하였다. 그의 부인과 클레어는 둘 다 프로비던스 출신이었다. 이상하게도 위
싱턴에서는 그런 사실이 의미를 가졌다. 우리 부부는 몇 년 간에 걸쳐 그들 부부와 몇 차례
만났다. 그러나 네 사람의 우정과 두쌍의 결혼이 같은 길을 가게 되지는 않았다.
배리는 처음에는 놀랐고, 이어 우울해했고, 이어 아주 잘 떨쳐 버렸다.
"자넨 힘든 한 달을 보내고 있군. 안됐네."
"한참 미끄럼을 타는 중이지."
우리는 옛날 이야기를 했다. 왔다가 사라진 사람들 이야기를 했다. 그러고 보니 그와 맥주
한 잔을 하며 형씨 일을 이야기한 적도 없었다. 이상한 일이다 싶었다. 친구가 함께 죽음을
맞이했다가 간신히 살아났는데, 너무 바빠 후유증을 이겨내는 것을 서로 도와 주지도 못하
다니.
우리는 결국 퇴직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짐을 싸는 상자들이 바닥 한가운데 있는데 그
이야기를 피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그 사건이 배리가 나를 만나러 온 이유라는
것을 깨달았다.
"실망시켜서 미안하네."
배리가 말했다.
"왜 이래, 배리?"
"아냐, 정말이야. 그 동안 자네한테 들러봤어야 하는 건데."
"왜?"
"자네가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했으니까 말이야."
배리는 말하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그의 유머를 즐기려고 애를 썼다.
"그래, 난 지금 좀 미친 것 같아. 하지만 곧 나아지겠지 뭐."
"아냐, 진지하게 말하는데, 자네가 힘들어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네. 지난주에 자네를 찾아
왔는데 안 보이더군. 자네 걱정을 했지만 알잖나, 늘 그렇다는 걸."
"알지."
"여기 와보지 못해 정말 마음이 안 좋군, 마이크. 미안해."
"왜 이래, 그만 좀 해."
"우리 모두 엄청나게 겁을 집어먹었지. 하지만 자넨 총에 맞을 뻔했어."
"우리 모두 죽을 수도 있었는데 뭐, 배리. 진짜 다이너마이트였다면, 총알이 조금만 빗나
갔어도 쾅 하는 거였지. 그 이야기는 다시 하기 마세."
"문으로 박박 기어가다 마지막으로 눈에 띈 것이 자네였네, 피범벅이 되어 비명을 지르고
있더군. 난 자네가 맞은 줄 알았어. 우리는 줄을 지어 밖으로 나왔다. 사람들이 우리를 붙들
어 주더군. 우리는 고함을 지르고 있었어. 곧 쾅 하는 소리가 들릴 거라고 생각했지. 난 생
각했어. 마이크가 아직 저 안에 있는데... 그 친구는 다쳤는데... 우리는 엘리베이터 옆에서
멈추었어. 누가 손목의 밧줄을 끊어 주더군. 뒤돌아보았더니 마침 경찰이 자네를 붙잡아 일
으키는 게 보였네. 지금도 그 피가 기억나. 염병할, 완전 피범벅이었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친구에게는 이게 필요해. 이렇게 하면 이 친구의 마음이
편해지겠지. 루돌프나 다른 사람들에게, 적어도 마이클의 마음을 돌리려고 설득을 해보기는
했다고 보고를 할 수 있겠지.
"내려가면서 나는 계속 물어보았네. '마이크가 맞은 거야? 마이크가 맞은 거야?' 아무도
대답을 못하더군. 한 시간은 지나서야 자네가 괜찮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아. 집에 가서
자네한테 전화를 하려 했지만, 아이들이 날 가만 내버려 둬야지. 그때 전화를 했어야 했는
데."
"됐어."
"미안하네, 마이크."
"제발 그 말 좀 그만하게. 끝난 일이야, 다 끝났다고. 며칠 밤이라도 새면서 이야기를 할
수도 있었겠지.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었을 거야."
"언제 떠나겠다는 결심을 굳혔나?"
그 질문에 대해서는 잠시 생각을 해보아야 했다. 솔직히 말한다면, 일요일에 빌이 시트를
젖쳐 온타리오가 마침내 안식을 얻은 것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그때 그 자리에서, 그 순간
그 시신 안치소에서, 나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주말에."
설명은 덧붙이지 않았다. 그에게는 필요 없는 것이었다.
배리는 고래를 저었다. 마치 바닥에 널려 있는 상자들이 일차적으로 자기 탓이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그를 도와주기로 마음먹었다.
"자네라도 나를 말릴 수는 없었네, 배리. 아무도 말릴 수 없었어."
그러자 배리는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동의한다는 뜻으로. 어떤 식으로든 이해를 한
모양이었다. 누가 총을 얼굴에 들이대면, 시계가 멈추고, 무엇이 먼저인지가 극명하게 드러
난다. 신, 가족, 친구.
돈은 제일 아래 순위로 밀린다. 째각째각 끔찍한 순간이 지나가면서 회사와 일은 사라져
버린다. 그러면서 이것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넨 어떤가?"
나는 배리에게 그렇게 묻고는 덧붙였다.
"어떻게 지내고 있나?"
짧은 몇 시간 동안이지만 회사와 일은 저 바닥에 가라앉아 있었다.
"목요일에 재판이 시작되었네. 형씨가 들이닥쳤을 때 준비하고 있던 게 바로 이번 재판이
었어. 판사한테 연기를 부탁할 수도 없었지. 의뢰인은 이 재판 날짜가 잡히기를 4년이나 기
다렸거든. 어쨌든 몸에는 말일세. 그래서 우리는 바로 고단 기어를 집어 넣고 재판을 시작했
네. 조금도 늦추지 않았지. 결국 재판이 우리를 구했다고 할 수 있어."
'물론 그랬겠지. 일이 치료지. 드레이크 & 스위니에서는 일이 심지어 구원이기도 하지.' 나
는 배리에게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두 주 전이면 나도 똑같은 이야기를 했을 터이
기 때문이다.
"잘됐군."
나는 대꾸했다. 아주 착하게. 그리고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자넨 괜찮다는 거지?"
"그럼."
그는 소송 변호사였다. 강인한 체질을 갖춘 사나이다운 변호사였다. 그에게는 또 자식이
세 명 있었다. 따라서 삼십대의 우회라는 사치는 그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갑자기 배리는 시간에 쫓기는 표정이 되었다. 우리는 악수를 하고 포옹을 했다. 그리고 앞
으로도 연락을 하자는 형식적인 약속을 했다.
문을 닫아 두고, 파일을 노려보며 어떻게 할지를 생각해 보았다. 오래지 않아 몇 가지 가
정을 할 수 있었다.
하나, 열쇠는 진짜다.
둘, 함정은 아니다. 나에게 적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은 없고, 또 어차피 나는 떠날 몸이 아
닌가.
셋, 그 파일은 정말로 그 사무실에, 창 밑의 서랍에 있다.
넷, 잡히지 않고 그것을 가져올 수 있다.
다섯, 짧은 시간에 그것을 복사할 수 있다.
여섯,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갖다 놓을 수 있다.
일곱, 가장 중요한 것으로, 파일에 진짜로 증거가 담겨 있다.
나는 규격 용지에 이런 점들을 적어 놓았다. 파일을 가져오는 것은 즉시 해고의 사유가
될 수 있었으나, 그것은 상관없었다. 불법적으로 획득한 열쇠를 가지고 챈스의 사무실에 들
어갔다가 들키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복사를 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었다. 회사에 있는 파일들 가운데 두께가 2,3센티미터가
안 되는 것은 거의 없었으므로, 모든 것을 다 복사하려면 수백 장은 복사를 해야 할 터였다.
그것은 곧 오랫동안 남의 시선에 노출된 채 복사기 앞에 서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것
은 너무 위험했다. 게다가 복사는 비서나 직원들이 하는 것이지, 변호사가 하는 것은 아니었
다. 또 기계는 하이테크 제품이라 복잡했다. 내가 단추를 누르자마자 어딘가 문제가 생길 것
이 틀림없었다. 암호도 있었다. 모든 복사 비용을 의뢰인에게 청구할 수 있도록 해 놓았기
때문이다. 복사기들은 트인 공간에 있었다. 이곳에서는 구석에 한 대만 놓인 복사기에서 복
사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회사 다른 곳에 있는 복사기를 찾아볼 수도 있었으나,
내가 다른 곳에서 복사를 한다는 것 자체가 의심을 받을 일이었다.
따라서 파일을 가지고 건물을 나가야 했는데, 그것은 범죄 행동에 준하는 일이었다. 하지
만 나는 파일을 훔치는 것이 아니라, 잠시 빌리는 것일 뿐이었다.
4시가 되었을 때, 나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부동산 부서로 걸어갔다. 마치 중요한 볼일이라
도 있는 것처럼 파일을 잔뜩 들고 있었다. 헥터는 책상에 없었다. 브레이든 챈스는 사무실에
있었다. 문을 조금 열어 두고 있었는데, 전화 통화를 하는 심술궂은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천천히 지나가자 비서가 웃음을 지었다. 천장에서 나를 살피는 보안 카메라는 보이지 않았
다. 어떤 층에는 그런 카메라가 있는데, 이곳에는 없는 모양이었다. 하긴 누가 부동산 부서
에서 보안이 깨질 것을 걱정하겠는가?
나는 5시에 퇴근을 했다. 가는 길에 식당에 들러 샌드위치를 사 가지고 새 일터로 향했다.
내 파트너들은 퇴근을 안하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피아는 악수를 할 때 웃음을 지어
주기까지 했다. 순간이기는 했지만.
"승선을 환영하오."
에이브러험은 마치 내가 침몰하는 배에 타기라도 한 것처럼 무서운 표정으로 인사를 했
다. 모디카이는 그의 사무실 옆에 있는 작은 사무실을 향해 두 팔을 흔들었다.
"이 바이면 어떻소? 5번 특실이오."
"아름답군요."
나는 새 사무실에 들어가 보았다. 내가 방금 나온 사무실의 반 크기였다. 내가 쓰던 책상
은 들어가지도 않을 규모였다. 사무실 안의 한쪽 벽에는 파일 캐비닛 네 개가 있었는데, 각
기 색깔이 달랐다. 천장에는 알전구가 달려 있었다. 전화기는 보이지 않았다.
"마음에 드는군요."
거짓말이 아니었다.
"전화는 내일 달겠소."
모디카이는 창문 위로 블라인드를 내리며 말을 이었다.
"이곳은 베인브리지라는 이름의 젊은 변호사가 사용하던 곳이오."
"그 사람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돈 문제가 걸렸지."
어두워지고 있었다. 소피아는 어서 퇴근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에이브러험은 자기 사무
실로 돌아갔다. 모디카이와 나는 그의 책상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내가 가져온 샌드위치와
그가 끓인 맛없는 커피였다.
복사기는 80년대에 생산된 큼지막한 것으로, 내가 다니던 법률 회사에서 좋아하는 암호
패널이나 다른 복잡한 장치들이 달려 있지 않았다. 이 복사기는 큰 방의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근처에는 낡은 파일들로 뒤덮인 책상이 네 개가 있었다.
"오늘 밤에는 몇 시에 퇴근합니까?"
나는 식사를 하면서 모디카이에게 물었다.
"모르겠소. 한 시간 정도 더 있다가 갈까 하는데. 왜?"
"그냥 궁금해서요. 난 드레이크 & 스위니에 두어 기산 갔다 올 생각입니다. 끝마쳐 달라
는 일이 좀 있어서요. 일을 마치고 나서 내 사무실에 있던 잡동사니를 오늘 밤에 여기에 갖
다 놓을까 합니다. 그래도 될까요?"
모디카이는 음식을 씹다가 서랍 안으로 손을 넣어, 열쇠 세 개가 달린 고리를 나에게 던
져 주었다.
"마음대로 왔다 갔다 하시오."
"안전하기는 할까요?"
"아니. 그러니 조심하시오. 바로 저 앞에, 가능하면 문 가까이에 주차를 하시오. 그리고 빨
리 들어오시오. 안에 들어오면 문을 잠그고."
모디카이는 내 눈에서 두려움을 보았는지 안 마디 덧붙였다.
"익숙해질 거요. 눈치 빠르게 굴기만 하시오."
6시 반에 나는 눈치 빠르게 빠른 걸음으로 내 차로 갔다. 보도는 텅 비어 있었다. 폭력배
도, 총성도 없었다. 내 렉서스에 긁힌 자국도 없었다. 차문을 열고 들어가 차를 몰고 나오는
데 마음이 뿌듯했다. 나도 잘 하면 거리에서 살아 남을 수 있을지 몰라.
드레이크 & 스위니까지 돌아가는 데는 11분 걸렸다. 챈스의 파일을 복사하는 데 30분이
걸린다면, 모든 것이 제대로 된다고 가정할 때, 그 파일은 그의 사무실에서 한 시간 동안 나
와 있는 셈이 될 것이다. 그럼 챈스도 전혀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나는 8시까지 기다렸다가
태연하게 부동산 부서로 내려갔다. 이번에도 열심히 일하는 사람처럼 소매를 걷어붙이고 있
었다.
복도에는 사람이 없었다. 챈스의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잠겨 있었
다. 이어 나는 다른 사무실을 모두 확인해 보았다. 처음에는 작게 두드렸다가 좀더 크게 두
드려 보고, 손잡이도 돌려보았다. 문 가운데 반이 잠겨 있었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보안 카
메라가 있는지도 확인해 보았다. 회의실도 들여다보고, 타자수들이 모여 앉은 곳도 살펴보았
다. 아무도 없었다.
챈스의 사무실 열쇠는 내 열쇠와 똑같이 생겼다. 색깔도 크기도 같았다. 열쇠는 완벽하게
맞았다. 나는 금세 어두운 사무실로 들어섰고, 동시에 불을 켤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해야
하는 상황과 부딪혔다. 차를 타고 지나가던 사람이 어느 사무실에 갑자기 불이 켜졌다는 것
을 알아챌 수는 없을 것이다. 누가 복도를 지나간다 해도 문 밑으로 새어나오는 불을 보지
는 못할 것이다. 게다가 사무실 안은 깜깜했다. 손전등도 가져오지 않았다. 나는 문을 잠그
고, 불을 켜고, 곧장 창문 밑의 파일 서랍으로 가, 두 번째 열쇠로 서랍을 열었다. 무릎을 꿇
고 조용히 서랍을 뺐다.
파일은 수십 개였다. 모두 리버오크스와 관련된 것이었다. 일련의 방법으로 단정하게 정돈
되어 있었다. 챈스와 그의 비서는 매우 조직적인 사람이었다. 그것은 이 회사가 소중하게 여
기는 자질이기도 했다. 두툼한 서류철에 리버오크스/태그 주식회사라는 색인이 붙어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꺼내 넘겨 보기 시작했다. 그것이 맞는 파일인지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봐!"
복도에서 커다란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사무실 몇 개 아래서 다른 남자의 목소리가 대답을 했다. 이어 그들은 챈스의 사무실 문
과 아주 가까운 곳에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농구 이야기였다. 불릿스 대 닉스의 시합이
었다.
나는 후들거리는 무릎을 끌고 간신히 문까지 걸어갔다. 불을 껐다.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브레이든의 고급 가죽 소파에 10분 동안 앉아 있었다. 내가 빈 손으로 사무
실을 나가는 모습이 눈에 띈다면, 아무것도 문제될 것이 없었다. 어차피 내일은 나의 마지막
날이었다. 물론 그렇게 되면 나는 파일을 손에 넣지 못하겠지만.
내가 파일을 들고 나가는 것을 누가 본다면 어떻게 될까? 파일을 가지고 나를 다그친다면
나는 죽은 목숨일 터였다.
미칠 듯한 심정이었지만 그래도 곰곰이 상황을 분석해 보았다. 모든 시나리오를 검토해
보았다. 인내심을 가지자. 나는 계속 스스로를 다그쳤다. 저 사람들은 곧 갈 거야. 농구 이야
기는 여자 이야기로 이어졌다. 둘 다 결혼하지 않은 것 같았다. 어쩌면 야간 근무를 하는 조
지타운 법대의 인턴 사원들인지도 모르지. 곧 그들의 목소리는 희미해졌다.
나는 어둠 속에서 서랍을 잠그고 파일을 집어들었다. 5분, 6분, 7분, 8분. 나는 조용히 문
을 열고, 천천히 머리를 내밀어 보았다. 이어 복도 아래위를 살폈다. 아무도 없었다. 나는 얼
른 뛰어나와, 헥터의 책상을 지나, 대기실로 향했다. 태연하게 보이려고 애를 쓰면서도 발걸
음을 재게 놀리고 있었다.
"이봐!"
누가 뒤에서 고함을 질렀다. 모퉁이를 돌면서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한 남자가 내 뒤를
쫓아오고 있었다. 가장 가까운 문은 조그만 도서관으로 통했다. 나는 그 안으로 숨어들었다.
다행히도 안은 어두웠다. 책들 사이를 움직이다가 반대편의 문을 찾아냈다. 문을 열었다. 짧
은 복도가 나오고, 그 끝에 있는 문 위에 출구 표시가 보였다. 나는 그 문을 향해 달려갔다.
올라가는 것보다는 내려가는 것이 빠를 것이라고 생각하고 아래로 방향을 잡았다. 내 사무
실은 두 층 위였지만, 혹시 그가 내 얼굴을 아는 사람이었다면, 그는 나를 찾으러 내 사무실
로 갈 터였다.
숨을 헐떡이며 1층으로 나왔다. 코트도 안 걸친 상태였다. 누구 눈에도 띄고 싶지 않았다.
특히 노숙자가 들어오는 일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세워 둔 경비원의 눈에는 띄고 싶지 않
았다. 나는 옆쪽 출구를 이용했다. 형씨가 사살된 날 밤 폴리와 내가 기자들을 피하기 위해
이용한 문이었다. 밖은 몹시 추웠고, 가벼운 비까지 내리고 있었다. 나는 차를 향해 달려갔
다.
서툰 초보 도둑답게 머리 속에서 복잡한 생각이 오갔다. 어리석은 짓이었다. 정말 어리석
었다. 애초에 들킨 것도 아니지 않은가. 아무도 내가 챈스의 사무실을 떠나는 것을 보지 못
했다. 아무도 내가 내 것이 아닌 서류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뛸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가 고함을 질렀을 때 그 자리에 멈추어서 그와 이야기를 나
누어야 했던 것이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행동하면 되는 것이었고, 그가 파일을 보자고
하면 야단을 쳐서 쫓아 내면 그만이었다. 그는 아마 챈스의 사무실 밖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하급 직원에 불과했을 테니까.
그런데 왜 그가 그렇게 고함을 질렀을까? 그가 나를 몰랐다면, 왜 복도의 다른쪽 끝에서
부터 나를 막으려 했을까? 나는 차를 몰고 메사추세츠 애비뉴를 달리고 있었다. 어서 복사
를 하고 어떻게 해서든 다시 파일을 갖다 놓을 생각이었다. 나도 밤을 새우는 데는 이골이
난 사람이었다. 새벽 3시까지 기다렸다가 챈스의 사무실로 몰래 숨어들어야 한다면, 얼마든
지 그럴 용의가 있었다.
잠시 긴장을 풀었다. 히터에서는 제일 강한 바람이 나오고 있었다.
마약상 체포 작전이 실패하여 경찰관 한 사람이 총을 맞았고, 한 마약상이 소유하나 재규
어가 18번가를 쏜살같이 달려 내려가는 중이었다는 것을 내가 알 도리가 없었다. 나는 뉴햄
프셔 애비뉴에서 녹색 신호를 받았기 때문에 직진했을 뿐이다. 그러나 경찰관을 쏜 아이들
이 교통 법규에 신경을 쓸 리가 없었다. 내 왼쪽으로 재규어가 희끄무레하게 보이는 것 같
더니, 얼굴 앞에서 에어백이 펼쳐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 운전석 문이 내 왼쪽 어깨를 찌르고 있었다. 깨진 창으로 검은 얼굴들
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사이렌 소리가 들리는가 했는데, 나는 다시 의식을 잃고 말았다.
구급대원 한 사람이 내 안전띠를 풀더니, 조수석 쪽에서 내 몸을 끌어냈다.
"피는 안 보이는데."
누군가가 말했다.
"걸을 수 있습니까?"
한 구급대원이 물었다. 어깨와 갈비뼈가 아팠다. 일어서려 했지만, 다리가 마음대로 움직
이지 않았다.
"난 괜찮아요."
나는 중얼거리며 들것 가장자리에 주저앉았다. 내 뒤에서는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고 있었
지만, 그쪽으로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구급대원들이 나를 들것에 묶었다. 나는 구급차로
들려가면서 재규어를 보았다. 재규어는 뒤집혀 있었고, 경찰관과 구급대원들이 차를 둘러싸
고 있었다.
"난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나는 계속 그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구급대원들은 내 혈압을 재고 있었다. 구급차가 움
직였다. 사이렌 소리가 희미해졌다.
그들은 나를 조지 워싱턴 대학 메디컬 센터의 응급실로 데려갔다. 엑스레이를 찍어 보니,
부러진 데는 없다는 게 확인되었다. 그러나 멍이 들었고, 통증이 심했다. 나는 진통제를 잔
뜩 맞고, 입원실로 들어갔다.
한밤중에 잠을 깨 보니, 클레어가 침대 옆의 의자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15
클레어는 새벽이 되기 전에 나갔다. 착하게도, 회진 때문에 나가는데 아침 늦게 다시 오겠
다는 쪽지를 탁자 위에 남겨 놓았다. 클레어가 의사들과 이야기를 해보았는데, 내가 죽지는
않을 모양인 거서 같았다.
우리는 완벽하게 정상적이고 행복했다. 서로에게 헌신하고 있는 귀여운 한 쌍의 부부였다.
도대체 왜 우리가 이혼 수속을 밟고 있는 거지?
간호사가 나를 깨우고 클레어의 쪽지를 갖다 준 것이 7시였다. 나는 쪽지를 되풀이해 읽
었다. 간호사는 계속 날씨에 대해서 궁시렁거리며―진눈깨비가 온다는 이야기였다―혈압을
쟀다. 나는 간호사에게 신문을 갖다 달라고 했다. 그녀는 30분 뒤에 시리얼과 함께 신문을
갖다 주었다. 그 기사는 메트로 섹션의 1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마약 단속반원은 총격전에서
총을 몇 방 맞았는데, 상태가 심각한 모양이었다. 그는 마약상 한 명을 사살했다. 또 한 마
약상이 재규어를 몰다가 자동차 사고를 냈는데, 그는 현장에서 죽었으며 경찰은 여전히 현
장을 조사중이었다. 내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그것은 잘된 일이었다.
내가 관련되지만 않았다면, 그 기사는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경찰과 마약 거래상들 사이의
총격전에 불과했을 것이며, 나는 읽지도 않고 지나갔을 것이다. 그 사건은 내가 거리로 나온
것을 환영하는 기념 행사 같았다. 나는 그런 일이 워싱턴의 어떤 전문 직업인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해 보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어두워진 뒤에 도시의 그 구
역으로 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화를 자초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왼쪽 어깻죽지는 부어 올라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왼쪽 어깨와 쇄골은 뻣뻣했고, 만
지기만 해도 아팠다. 갈비뼈 근처가 욱씬거렸기 때문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숨을 쉴 때마
다 아팠다. 나는 간신히 화장실까지 가서 용변을 보고, 거울에 얼굴을 비추어 보았다. 에어
백이라는 것은 작은 폭탄과 같았다. 그 충격 때문에 얼굴과 가슴에 감각이 없었다. 그러나
피해는 심하지 않았다. 코와 눈이 약간 부어 오르고, 윗입술 모양이 달라진 정도. 주말만 지
나고 나면 다 사라질 것들이었다.
간호사가 또 약을 들고 들어왔다. 나는 그녀에게 약 하나하나에 대해 물어본 다음, 전부
안 먹겠다고 했다. 통증과 뻣뻣함 때문에 먹는 약이었지만, 나는 머리를 맑은 상태로 유지하
고 싶었다. 7시 30분에 의사가 들르더니 잠깐 살펴보고 갔다. 부러지거나 찢어진 데가 없었
기 때문에 오래 있을 이유가 없었다. 의사는 혹시 모르니까 다시 엑스레이를 찍어 보자고
했다. 됐다고 하려 했으나, 이미 아내와 이야기를 끝낸 모양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절뚝절뚝 병실 안을 돌아다니면서 부상당한 부분이 어떤지 확인해 보았다.
눈으로는 아침 뉴스를 지켜보았다. 혹시나 내가 아는 사람이 병실로 들어와 노란 페이즐리
가운을 입은 내 모습을 보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었다.
위싱턴에서 사고를 당한 차를 찾는 것은 짜증나는 일이었다. 특히 사고 직후에 찾으려 할
때는. 우선 내 유일한 정보원이라 할 수 있는 전화번호부에서부터 시작을 했다. 교통과 관련
된 관공서 가운데 반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나머지 반은 별관심을 보여 주지 않았다. 이른
시간이었고, 날짜도 나빴다. 게다가 금요일이었다. 누구인들 새로운 일에 말려들고 싶겠는
가?
사고를 당한 대부분의 차들은 북동부 라스코 로드에 있는 시립 차량 보관소로 옮겨졌다.
나는 그 사실을 중부 경찰서의 어떤 비서관에게서 알아냈다. 그녀는 동물 통제가 주업무였
다. 나는 아무 데나 경찰과 관련된 전화번호를 돌리고 있었던 것이다. 때로는 다른 차량 보
관소로 가는 경우도 있죠. 또 댁의 경우에는 차가 아직 레커차에 매달려 있을 가능성도 높
고요. 레커 차량들은 개인 소유거든요. 그것 때문에 늘 문제가 생겨요. 그녀는 전에 교통 쪽
에서 일을 했는데, 그곳이 무척 마음에 안 든다고 했다.
모디카이 생각이 났다. 거리와 관련된 모든 정보에 대한 새로운 정보원. 나는 9시까지 기
다렸다가 그에게 전화를 했다. 나는 모디카이에게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고, 병원에 있기
는 하지만 다친 데는 없다고 안심을 시켰다. 이어 사고가 난 차를 어떻게 찾을 수 있냐고
물어보았다. 역시 그에게는 방법이 있었다.
나는 폴리에게 전화를 걸어 똑같은 이야기를 하였다.
"출근 안 하나요?"
폴리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지금 병원이야, 폴리. 내 말 듣고 있어?"
폴리는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럼으로써 내가 걱정하던 것을 확인해 주었다. 아마 회의실쯤
에 케이크와 펀치가 담긴 사발을 갖다 놓고, 50면 정도의 사람이 모여 축배를 들며, 내가 얼
마나 훌륭한 사람이었는지에 대해 돌아가며 짧게 연설을 할 계획이었겠지. 나 역시 그런 송
별 파티에 두어 번 참석해 본 일이 있었다. 끔찍한 일이었다. 나는 내 송별식은 피하기로 마
음먹고 있었다.
"언제 퇴원하세요?"
폴리가 물었다.
"모르겠어. 아마 내일쯤?"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나는 의사가 허락하든 하지 않든, 정오 이전에 나갈 생각이었다.
폴리는 더 머뭇거렸다. 케이크, 펀치, 바쁜 사람들의 중요한 연설, 또 어쩌면 선물도 한두
개. 일개 비서인 폴리가 그런 계획을 다 어떻게 연기하고 취소한단 말인가?
"안됐어요."
폴리가 말했다.
"나도 같은 심정이야. 누가 나를 찾던가?"
"아뇨. 아직은."
"좋아 그럼 루돌프한테 사고 이야기를 해줘. 내가 나중에 전화한다고 하고. 이만 끊어야
돼. 또 검사를 하라고 난리거든."
이렇게 해서 드레이크 & 스위니에서의 한때 유망했던 나의 미래는 종적을 감추고 말았
다. 나는 내 송별 파티도 무산시켰다. 서른둘의 나이에 법인의 노예라는 족쇄에서, 돈이라는
족쇄에서 해방된 것이다. 이제 내 양심만 따라가면 그만이었다. 움직일 때마다 갈비뼈들 사
이로 칼이 쑤시고 들어오는 느낌만 없다면 이 이상 기분이 좋을 수가 없을 텐데.
11시 넘어 클레어가 왔다. 그녀는 복도에서 내 담당 의사와 이야기를 했다. 소리는 들렸지
만, 그들은 그들만의 언어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둘은 내 병실로 들어와 퇴원해도 좋다고 선
언했다. 나는 클레어가 집에서 가져온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클레어는 나를 집까지 태
워다 주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우리는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화해의 가능성은 없었
다. 단순한 자동차 충돌 사고 때문에 바뀔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클레어는 아내가 아니라
친구이자 의사로서 내 옆에 있는 것일 뿐이었다.
클레어는 토마토 수프를 만들어 놓고, 나를 소파에 앉혔다. 이어 약을 부엌 카운터에 늘어
놓고, 어떻게 먹으라고 가르쳐 주고는 병원으로 돌아갔다.
나는 10분 동안 가만히 수프를 먹고, 크래커 몇 개를 먹었다. 그리고 다시 전화를 붙들었
다. 모디카이는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나는 분류 광고를 보고, 부동산업자들한테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이어 자동차 서비스에
전화를 하여 세단 한 대를 보내 달라고 하였다. 그리고 멍든 몸을 풀기 위해 뜨거운 물에
오랫동안 샤워를 했다.
운전사 이름은 리언이었다. 나는 앞자리에 앉았다. 도로의 팬 곳을 지나며 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얼굴을 찌푸리고 신음을 토하기 싫어서였다.
좋은 아파트를 구할 여유는 없었지만, 그래도 안전한 곳은 찾아야 했다. 리언에게 몇 가지
생각이 있었다. 그는 차를 신문 가판대에 세웠다. 나는 그곳에서 워싱턴 부동산 업자들이 내
는 무료 광고지 두 개를 집어들었다.
리언의 의견에 따르면, 듀퐁 서클 북쪽에 있는 애덤스-모건이 살기가 괜찮았다. 그러나
지금은 괜찮지만, 여섯 달 뒷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고 주의를 주었다. 그곳은 잘 알려진
동네였다. 나로 여러 번 지나친 곳이었지만, 한 번도 차를 세우고 둘러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길가에는 20세기초에 지어진 연립주택들이 줄을 지어 있었다. 그 모든 집에 지
금도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곳이 워싱턴에서는 활기찬 동네라는 뜻이었다. 리언의
말에 따르면 지금도 그 동네의 술집과 클럽들은 장사가 잘 되었으며, 새로 생긴 가장 좋은
레스토랑도 그곳에 있다고 했다. 그러나 모퉁이만 돌면 동네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지기 때
문에 당연히 주의를 해야 했다. 상원의원 같은 중요한 인물들이 의사당에서 강도를 당하는
판이니, 누구도 안전하다고 할 수 없었다.
애덤스-모건을 향해 차를 달리다가, 갑자기 차보다 더 크게 팬 곳을 만났다. 그곳을 피하
지 못하고 그대로 통과하고 말았는데, 그 바람에 10초 정도는 공중에 떠 있다가 큰 충격과
함께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왼쪽 몸통 전체가 불 같은 통증
에 휩싸였다.
리언은 겁에 질렸다. 나는 리언에게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사실대로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그는 속도를 상당히 늦추더니, 아예 부동산 소개업자 노릇을 해주기까지 했
다. 그곳은 낡을 대로 낡은 아파트로, 양탄자에서는 고양이 오줌 냄새가 틀림없는 불쾌한 냄
새가 나고 있었다. 리언은 집 주인에게 이런 상태로 집을 보여 주다니 창피한 줄 알라고, 거
의 노골적으로 이야기를 했다.
두 번째로 간 곳은 5층에 있는 다락방이었다. 나는 하마터면 거기까지 못 올라갈 뻔했다.
엘리베이터도 없었다. 게다가 난방도 시원치 않았다. 리언은 관리인에게 정중하게 고맙다고
하고 밖으로 나왔다.
다음 다락방은 4층이었지만, 깨끗하고 괜찮은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이 연립주택은 와이오
밍 애비뉴에 있었는데, 코네티컷 애비뉴에서 조금 떨어진, 상당히 으슥한 동네였다. 집세는
한 달에 550이었다. 나는 그곳을 보기도 전에 이미 그 집으로 하자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몸
이 급속하게 허물어지고 있었다. 자꾸 부엌 카운터에 두고 온 진통제 생각이 났다. 아무 거
라도 그냥 정해 버리고 싶었다.
지붕에 경사진 꼭대기층에는 아주 작은 방 세 개가 있었으며, 배관이 제대로 작동하는 것
같은 목욕탕이 있었고, 깨끗한 바닥이 있었고, 그런 대로 거리도 내다보였다.
"이걸로 하겠소."
리언이 집 주인에게 말했다. 나는 문틀에 기대 있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지
하실에 있는 작은 사무실에서 얼른 계약서를 읽고, 서명을 하고, 보증금과 첫 달 치 집세에
해당하는 수표를 써 주었다.
클레어에게 주말까지는 나오겠다고 했으니, 그대로 할 생각이었다.
리언도 조지타운의 화려한 집에서 애덤스-모건의 방 세 개짜리 작은 아파트로 이사오는
이유가 궁금했겠지만, 물어보지는 않았다. 그는 자기 직업에 대단히 충실한 사람이었다. 나
를 아파트까지 데려다 주고, 내가 진통제를 삼키고 잠깐 눈을 붙이는 동안에는 차 안에서
기다려 주었다.
화학 물질로 인해 뿌애진 내 의식 어딘가에서 전화벨이 울리고 있었다. 나는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아가 전화기를 찾고, 간신히 '여보세요' 하는 말을 할 수 있었다.
루돌프였다.
"병원에 있는 줄 알았는데."
목소리를 들었고, 또 누구 목소리인 줄도 알았으나, 안개는 아직 가시지 않았다.
"있었죠."
나는 잘 굴러가지 않는 혀로 말을 이었다.
"지금은 아닙니다만, 왜 그럽니까?"
"오늘 오후에 자네를 보고 싶었지."
아, 그래요? 물론, 펀치와 케이크를 놓고 쇼를 하고 싶어서였겠지요?
"나도 차 사고를 당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루돌프. 용서해 주십시오."
"자네한테 인사를 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았네."
"편지라도 쓰라고 하십시오. 팩스로 보내면 될 테니까."
"자네 지금 기분이 좋지 않군, 그렇지?"
"그래요, 루돌프. 방금 차에 치인 기분입니다."
"약을 먹었나?"
"무슨 상관입니까?"
"미안하네. 이보게, 브레이든 챈스가 한 시간 전에 나한테 왔다 갔네. 자네를 몹시 보고
싶어하더군. 이상한 일이야. 안 그런가?"
안개가 걷히면서 머리가 훨씬 맑아졌다.
"무슨 일로 나를 보잡니까?"
"말을 안 하려 하더군. 하지만 자네를 찾던데."
"난 그만두었다고 말해 주십시오."
"말했지. 귀찮게 해서 미안하네. 시간 있으면 들르게. 여기에는 자네 친구들이 많으니까."
"고맙습니다. 루돌프."
약을 호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리언은 차에서 자고 있었다. 빠른 속도로 달리는 차 안에서
모디카이에게 전화를 했다. 모디카이는 사고 보고서를 찾아 냈다. 레커 서비스를 한 곳은
'헌들리 견인'이라고 나와 있었다. 그러나 그 곳에 전화를 해봐도 자동 응답기만 돌아가고
있었다. 길이 미끄러워 사고가 많으니, 견인차를 가진 사람들은 바쁠 터였다. 마침내 3시쯤
정비공이 전화를 받았으나,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리언은 7번가 근처 로드 아일랜드 애비뉴에서 헌들리 견인 회사를 찾아냈다. 옛날에는 모
든 서비스를 제공하는 주유소였지만, 지금은 정비소, 견인 서비스, 중고차 매매, 이삿짐 트레
일러 대여를 하는 곳이었다. 검은 막대들이 모든 창문을 보호해 주고 있었다. 리언은 앞문까
지 차를 바짝 갖다 댔다.
"엄호해 주시오."
나는 그렇게 농담을 던지고는 차에서 내려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서자 문이
반동으로 인해 다시 안으로 밀고 들어오며 왼쪽 팔을 쳤다. 나는 통증 때문에 허리를 접었
다. 기름이 잔뜩 묻은 작업복을 입은 정비공이 모퉁이를 돌아나오며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온 이유를 설명했다. 정비공은 서류판에서 찾아내 서류들을 찾았다. 뒤쪽에서 남자들
이 이야기를 하고 욕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주사위를 던지며 위스키를 마시는 것이 틀림없
었다. 아마 마약도 팔겠지.
"경찰이 가지고 있군."
정비공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이유가 짐작이 갑니까?"
"아뇨. 무슨 범죄 같은 게 있었습니까?"
"그래요. 하지만 내 차가 범죄와 관련된 것은 아닌데."
정비공은 멍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도 바쁜 사람이었다.
"어디 있을지 짐작 가는 데라도 있소?"
나는 가능한 한 유쾌한 목소리로 물었다.
"압수한 차일 경우에는 대개 하워드 북쪽의 조지아에 있는 차량 보관소에 갖다 놓지요."
"시에 차량 보관소가 몇 개나 있습니까?"
정비공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걸어가 버렸다.
"하나가 아니란 건 확실합니다."
정비공은 그 말을 던지고 사라져 버렸다.
이번에는 아주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얼른 리언의 차로 달려갔다.
우리가 그 차량 보관소를 찾았을 때는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한 블록의 반 정도를 체인
과 철조망이 둘러싸고 있었다. 안에는 사고를 당한 차 수백 대가 위험하게 처박혀 있었다.
두 대가 세로로 쌓여 있는 경우도 있었다.
리언은 나와 함께 보도에 서서 사슬 사이로 안을 살폈다.
"저기 있군."
내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렉서스는 창고 옆에 우리를 마주보는 자세로 주차되어 있었다.
사고를 당하면서 앞의 왼쪽이 부서졌다. 펜더는 사라지고 없었다. 드러난 엔진은 뭉개져 있
었다.
"운이 아주 좋았군요."
리언이 말했다.
그 옆에는 재규어가 있었는데, 지붕이 납작했다. 창문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창고에는 무슨 사무실 같은 것이 있었으나, 문은 닫혀 있고 컴컴했다. 정문에는 쇠사슬이
걸려 있고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철조망은 비를 맞아 반짝거렸다. 멀지 않은 모퉁이에서
는 억세 보이는 남자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그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갑시다."
내가 말했다.
리언은 나를 국립 공항으로 데려다 주었다. 차를 빌리려고 했을 때 내 머리에 떠오른 곳
은 그곳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식탁이 차려져 있었다. 사들고 온 중국 음식이 스토브에 들어가 있었다. 클레어는 내가 오
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걱정을 하고 있었지만,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보험 회사에서 하라는 대로 차를 빌리러 갔었다고 이야기했다. 그녀는 훌륭한 의사답게 나
를 살피더니, 약을 먹으라고 했다.
"난 당신이 쉬고 있을 줄 알았어."
"그러려고 했지. 하지만 소용없더군. 어쨌든 배가 고파."
남펴과 아내로서의 마지막 식사인 셈이었다. 시작할 때와 똑같이 끝이 나고 있었다. 다른
곳에서 준비한 것으로. 빠르게.
"헥터 팔머라는 사람 알아?"
저녁 식사를 반쯤 했을 때 클레어가 물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알아."
"한 시간 전에 전화를 했어. 당신하고 꼭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하던데. 누구야?"
"회사에 있는 사무직원이야. 오늘 아침에 그 친구와 사건 하나를 검토하기로 했거든. 그
친구 입장이 곤란하겠군."
"그런가 봐. 오늘 밤 M 스트리트에 있는 술집 네이선에서 9시에 보재."
"왜 하필이면 술집이야?"
나는 생각에 잠기며 물었다.
"이유는 이야기하지 않았어. 수상쩍게 들리던데."
식욕이 사라졌다. 하지만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계속 먹었다. 꼭 그럴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클레어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으니까.
M 스트리트까지 걸어갔다. 이슬비는 진눈깨비로 변하고 있었다. 통증은 여전히 심했다.
금요일 밤이라 주차는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이 기회에 근육도 좀 움직이고, 머리도 맑게 하
자는 생각도 있었다.
팔머와 만나는 것은 성가신 일이 될 수도 있었다. 걸어가면서 준비를 좀 해야 했다. 내가
한 행동을 덮어 버릴 거짓말들을 생각해 냈고, 또 그 거짓말들을 덮어 버릴 더 큰 거짓말들
을 생각해 냈다. 도둑질까지 한 마당에 거짓말이 무슨 대수랴. 헥터는 회사를 대신해서 나를
만나는 것일 수도 있었다. 따라서 도청 장치를 감추고 나올 가능성도 있었다. 잘 듣고, 말은
줄여야지.
네이선에는 사람이 반밖에 차지 않았다. 10분이나 일찍 도착했는데, 헥터는 벌써 나와, 작
은 부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헥터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
니, 나에게 손을 쑥 내밀었다.
"마이클 브룩 씨로군요. 나는 부동산 부서에서 일하는 헥터 팔머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
다."
급습을 당한 셈이었다. 몹시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내민 손을 잡고 악수를 하며 현기
증을 느꼈다. 내 입에서도 만나서 반갑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 같았다.
헥터는 부스를 가리켰다.
"여깁니다. 앉으시지요."
헥터는 아주 따뜻한 표정으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몸을 굽히고, 부스 안
으로 몸을 비벼 넣었다.
"얼굴은 왜 그렇습니까?"
헥터가 물었다.
"에어백과 입맞춤을 했습니다."
"아, 나도 사고 소식을 들었습니다."
헥터가 얼른 대꾸했다. 대꾸가 너무 빨랐다. 헥터는 말을 이었다.
"괜찮습니까? 뼈는 멀쩡하다고요?"
"괜찮습니다."
나는 천천히 대답하며, 그의 생각을 읽으려고 애를 썼다.
"상대는 죽었다고 들었습니다."
내가 말하는 것을 제대로 기다리지도 않고 대꾸가 나왔다. 이 대화는 그가 끌고 갈 생각
인 모양이었다. 나는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다.
"그래요. 마약상이라고 하던데."
"워싱턴이라는 데가 워낙..."
웨이터가 나타났다. 헥터가 물었다.
"뭘 드시겠습니까?"
"블랙 커피로 하죠."
순간, 그는 무엇을 마실까 생각하는 척하면서 발로 내 다리를 슬쩍 차기 시작했다.
"무슨 맥주가 있소?"
헥터가 웨이터에게 물었다. 웨이터들이 싫어하는 질문이었다. 웨이터는 똑바로 앞을 보며
상표 이름들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그가 발로 건드렸기 때문에 나는 헥터를 보고 있었다. 헥터는 두 손을 탁자 위에 올려놓
고 있었다. 헥터는 웨이터를 방패로 삼아, 오른손 검지손가락을 아주 조금 꼬부려 자기 가슴
을 가리켰다.
"몰슨으로 하겠소."
헥터가 불쑥 말했고, 웨이터는 떠났다.
헥터는 도청 장치를 감추고 나왔고, 또 우리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어디 있
건, 웨이터의 몸을 뚫고 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본능적으로 술집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살피
고 싶었다. 그러나 유혹에 저항할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널빤지처럼 뻣뻣한 목때문이기도
했다.
이제 헥터가 왜 처음 만난 사이처럼 떠들썩하게 인사를 했는지 설명이 되는 셈이었다. 헥
터는 하루 종일 들볶였는데, 모든 것을 부인했다는 뜻이었다.
"나는 부동산 부서에서 일하는 사무직원입니다. 우리 파트너인 브레이든 챈스를 만난 일
이 있으시죠?"
"네."
내 말은 녹음이 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한 적게 말해야 했다.
"그 분이 내 직속 상관이라 할 수 있죠. 지난주 언젠가 브록 씨가 내 상관을 만나러 왔을
때 우리는 잠깐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죠."
"팔머 씨가 그렇다고 한다면야 뭐. 난 그런 기억이 없지만."
헥터의 얼굴에 아주 희미한 웃음이 스쳐갔다. 눈가의 긴장이 약간 풀리는 것 같았다. 감시
카메라로는 포착하지 못할 터였다. 나는 탁자 밑에서 발로 그의 다리를 살짝 걷어찼다. 내가
제대로 박자를 맞추어 주는 것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어, 내가 뵙자고 한 이유는 브레이든의 사무실에서 파일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내가 범인으로 지목되고 있는 건가요?"
"어, 아닙니다. 하지만 용의자 가운데 한 사람이기는 하죠. 그게 브룩 씨가 지난주에 브레
이든의 사무실에 갑자기 오셨을 때 찾으시던 거라서요."
"그럼 내가 범인으로 지목되고 있는 거로군."
나는 열을 냈다.
"아직은요. 진정하십시오. 회사에서는 이 사건을 철저하게 조사하는 중입니다. 우리는 그
저 가능성이 있는 모든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있을 뿐입니다. 그때 브룩 씨가 오셔
서 브레이든에게 파일 이야기를 하셨기 때문에, 회사에서는 나더러 브룩 씨와 이야기를 해
보라고 한 겁니다. 그것뿐입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요. 나도 그것뿐입니다."
"파일에 대해서는 모르십니까?"
"물론 모르지. 내가 왜 파트너 사무실에서 파일을 가져간단 말입니까?"
"거짓말 탐지기를 갖다 대도 똑같이 말씀하시겠습니까?"
"물론이지."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분개한 목소리로 들리기도 했을 것이다. 나한테 거짓말 탐지기를
들이대는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
"좋습니다. 회사에서는 우리 모두에게 거짓말 탐지기를 갖다 대겠다고 합니다. 그 파일에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사람은 모두요."
맥주와 커피가 나왔다. 덕분에 우리는 잠깐 쉬면서 상황을 평가하고 자시 전열을 가다듬
을 수 있었다. 헥터는 방금 자신이 큰 곤경에 빠졌다고 이야기한 셈이었다. 거짓말 탐지기를
갖다 대면 그는 박살이 날 터였다. 마이클 브록이 회사를 그만두기 전에 만났나? 사라진 파
일 이야기를 했나? 파일 내용을 복사해 주었나? 그가 사라진 파일을 가져가는 데 협조했
나? 네, 아니오로 대답해. 간단하게 대답해야 하는 힘든 질문들이었다. 그가 거짓말을 해서
탐지기를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은 없었다.
"지문 조사도 하고 있지요."
헥터는 낮은 목소리로 그 말을 했다. 감추어진 마이크를 피하려 한 것이 아니라, 내가 받
을 충격을 완화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지문을 남긴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도둑질을 하기 전에나 후
에나.
"잘 하는 일이군요."
내가 대꾸했다.
"사실 오후 내내 지문을 떴습니다. 문에서, 전등에서, 그리고 파일 캐비닛에서. 많은 지문
이 나왔죠."
"범인을 잡기를 바랍니다."
"사실 굉장한 우연의 일치입니다. 브레이든의 사무실에는 진행중인 일들과 관련된 파일들
이 백 개는 되지요. 그런데 없어진 단 하나의 파일이 하필이면 브록 씨가 보고 싶어하던 그
파일이라니."
"무슨 저의로 한 말입니까?"
"그냥 말 그대로입니다. 굉장한 우연의 일치라고요."
헥터는 지금 듣는 사람들을 위해서 말을 하고 있었다.
나도 연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 말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군."
나는 거의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나를 고발하려거든, 경찰한테 가서, 영장을 받아 와서, 나를 잡아가시오. 그렇지 않으면,
웃기지도 않은 생각일랑 혼자서 하고 있든가."
"이미 경찰이 개입했습니다."
헥터는 아주 차갑게 내뱉었다. 덕분에 내가 꾸며낸 감점은 그 자리에서 녹아 버렸다. 헥터
가 말을 이었다.
"이건 절도거든요."
"당연히 절도지. 그럼 가서 도둑이나 잡고, 나하고 시간 낭비는 그만하시오."
헥터는 술을 한참 들이켰다.
"누가 브룩 씨에게 브레이든의 사무실 열쇠를 주었습니까?"
"물론 아니지."
"브룩 씨의 책상에서 텅 빈 파일이 발견되었는데, 거기에는 두 개의 열쇠에 대한 메모가
적혀 있었습니다. 하나는 문 열쇠고, 또 하나는 파일 캐비닛 열쇠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난 모르는 일이오."
나는 가능한 한 오만하게 말하면서, 머리 속으로는 빈 파일을 마지막에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해 내려고 애를 썼다. 너무 많은 물증을 남겼다. 나는 변호사답게 생각하라고 훈련받았
지, 범죄자답게 생각하라고 훈련받지는 않았던 것이다.
헥터는 다시 술을 한참 들이켰고, 나는 다시 커피를 홀짝였다.
헥터는 말을 충분히 했다. 메시지는 충분히 전달되었다. 회사의 메시지도, 헥터 자신의 메
시지도. 회사는 내용물 그대로 파일을 돌려받고 싶어했다. 헥터는 자기 모가지가 날아갈 수
도 있음을 알리고 싶어했다.
그를 구하는 것은 나에게 달린 일이었다. 파일을 돌려주면서 자백을 하고 더 이상 거론하
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회사에서도 나를 용서해 줄지 모른다. 아무런 손해가 없었으니까. 돌
려주는 조건으로 헥터의 일자리 보장을 내걸 수도 있을 것이다.
"할 이야기가 더 있소?"
어서 자리를 뜨고 싶었다.
"아뇨, 언제 거짓말 탐지기 조사를 받겠습니까?"
"전화를 하겠소."
나는 코트를 집어들고 그곳을 나왔다.
16
나도 곧 그 이유를 이해하게 되었지만, 모디카이는 워싱턴의 경찰관들을 몹시 싫어하였다.
그들 대부분이 흑인들이었음에도. 그들은 노숙자들에게 거칠다는 것이 모디카이의 생각이었
다. 모디카이에게는 그것이 선과 악을 가르는 변함없는 기준이었다.
그런 그도 경찰관 몇 명과는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필러 경사였는데,
모디카이는 그를 '거리 출신'이라고 묘사했다. 필러는 법률 상담소 근처의 공동체 센터에서
문제아들을 교육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또 필러와 모디카이는 같은 교회에 다녔다. 필러에
게는 그 나름의 연줄이 있어, 그 연줄들을 움직임으로써 내 차를 빼낼 수 있었다.
필러는 토요일 아침 9시가 넘자마자 상담소로 들어섰다. 모디카이와 나는 커피를 마시며
추위를 이기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필러는 토요일에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는 잠자리에 더
누워 있고 싶었는데, 하는 표정이었다.
모디카이가 운전을 하고 대화를 주도했다. 나는 뒷자리에 앉았다. 우리는 미끄러운 거리들
을 지나 북동부로 들어가고 있었다. 일기예보에서는 눈이 온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차가운
비가 내리고 있었다. 차는 별로 없었다. 몹시 추운 2월 아침이었다. 대단한 정성을 지닌 사
람들만 감히 보도로 나설 용기를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조지아 애비뉴에서 조금 떨어진 시립 차량 보관소의 벙어리 자물쇠를 잠가 놓은
정문 근처 도로 가에 차를 세웠다. 필러가 말했다.
"여기서 기다리시오."
저 너머로 내 렉서스의 잔해가 보였다.
필러는 정문으로 걸어가 장대에 달린 단추를 눌렀다. 그러자 창고 사무실의 문이 열렸다.
제복을 집은 작고 여윈 경찰관이 우산을 쓰고 나왔다. 두 사람은 몇 마디 이야기를 했다.
필러는 차로 돌아와 문을 쾅 닫더니, 어깨를 흔들어 빗물을 털어 냈다. 필러가 말했다.
"이제 가보시오."
나는 빗속으로 내려서서 우산을 들어올렸다. 얼른 정문으로 걸어갔다. 윙클이라는 이름의
경찰관에게서는 유머나 호의라고는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는 수십 개의 열쇠를 꺼내더니, 용
케 그 가운데서 묵직한 벙어리 자물쇠들에 맞는 열쇠 세 개를 찾아냈다. 이윽고 윙클이 문
을 열며 말했다.
"이쪽으로 오시오."
나는 그를 따라 자갈이 깔린 차량 보관소를 걸어갔다. 갈색의 흙탕물이 고여 있는 웅덩이
를 피해 가려고 최대한 애를 썼다. 그러나 움직일 때마다 몸 전체가 아팠기 때문에, 건너뛰
고 옆으로 몸을 트는 행동은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윙클은 곧장 내 차로 다가갔다.
나는 바로 앞자리로 갔다. 파일은 없었다. 잠시 공황 상태에 빠졌지만, 나는 곧 운전석 뒤
의 바닥에서 멀쩡한 파일을 찾아낼 수 있었다. 나는 파일을 집어들고, 어서 돌아가려 했다.
차가 입은 피해를 살펴볼 기분은 아니었다. 나는 말짱하게 살아남았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었다. 다음 주에 보험 회사와 씨름을 좀 하면 그만이었다.
"그거요?"
윙클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나는 얼른 뛰어가고 싶었다.
"따라오시오."
우리는 창고로 들어갔다. 한쪽 구석에서 부탄 난로가 씩씩거리며 우리를 향해 뜨거운 공
기를 내뿜고 있었다. 윙클은 벽에 걸린 10개의 서류판들 가운데 하나를 집어들더니, 내가 쥐
고 있는 파일을 노려보았다.
"갈색 마닐라 파일."
윙클은 쓰면서 말을 이었다.
"5센티미터 두께."
나는 파일이 마치 황금이라도 되는 듯 꽉 움켜쥐고 서 있었다. 윙클이 말을 이었다.
"거기 무슨 이름이 있소?"
나는 저항을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그러나 꾀를 내서 대답만 잘 하면, 완전히 흔적
을 없앨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게 왜 필요한 겁니까?"
내가 물었다.
"그걸 탁자에 내려놓으시오."
파일은 탁자로 내려갔다.
"리버오크스, 슬래시, 태그, 주식회사."
윙클은 계속 쓰면서 말을 이었다.
"파일번호, TBC, 96-3381."
내 꼬리는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이게 당신 거요?"
윙클은 파일을 가리키며, 적잖이 수상쩍다는 투로 물었다.
"그렇습니다."
"좋소. 이제 가보시오."
고맙다고 인사를 했으나,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얼른 내달려 차량 보관소를 빠
져나가고 싶었지만, 걷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내가 나가자, 윙클은 문을 잠갔다.
내가 차 안에 들어가자 모디카이와 필러는 둘 다 고개를 돌려 파일을 보았다. 둘 다 그것
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나는 앞서 모디카이에게 그것이 매우 중요한 파일이라고
만 말해 두었다. 손상을 집기 전에 찾아야 한다고 했다.
그까짓 평범한 마닐라 파일 하나 때문에 이런 수고를 했단 말이야? 그들의 표정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상당소로 돌아가는 동안 차 안에서 파일을 넘겨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는 않았
다.
필러에게 고맙다고 하고, 모디카이에게 인사를 한 뒤, 나는 조심스럽게 차를 몰아 내 새로
운 다락방으로 갔다.
돈의 출처는 연방 정부였다. 워싱턴에서는 놀랄 일도 아니었다. 체신부에서는 2천만 달러
짜리 요금별납 우편물 시설을 워싱턴 시안에 지을 계획이었으며, 리버오크스는 그 건물을
짓고, 임대하고, 운영하고 싶어하는 적극적인 몇 개의 부동산 회사들 가운데 하나였다. 리버
오크스는 몇 군데 땅을 후보지로 고려하고 있었다. 모두 워싱턴 시내의 쇠락해 가는 우범
지대에 자리잡고 있었다. 지난 12월에는 리버오크스를 포함한 세 개의 회사가 최종 후보로
발표되었다. 그 전에 이미 리버오크스는 앞으로 필요하게 될지도 모르는 부동산들을 싼 값
에 사들이고 있었다.
태그는 정상적으로 등록된 법인이었으며, 그 유일한 주주는 틸먼 갠트리였다. 파일의 내용
을 보니 그는 전직 포주이자, 조무래기 사기꾼이었으며, 중죄로 두 번의 유죄 판결을 받은
경력이 있었다. 위싱턴에 흔한 그런 부류의 인물들 가운데 하나였다. 갠트리는 범죄 행각 뒤
에 중고차와 부동산이라는 사업 분야를 발견하였다. 그는 버려진 건물들을 매입한 뒤, 때로
는 순식간에 추리를 하여 다시 팔기도 했고, 때로는 세를 받고 입대를 하기도 했다. 파일의
개요에는 태그의 14개 소유물 목록이 나와 있었다. 어쨌든 미합중국 체신부가 더 많은 공간
을 필요로 하게 되었을 때, 갠트리의 길은 리버오크스의 길과 만나게 되었다.
1월 6일, 체신부는 등기 우편을 통해 리버오크스에게 그 회사가 새로운 오금별납 우편물
시설의 건설자/소유자/임대자로 선정되었다고 통보했다. 이어 연간 임대료 150만 달러에 20
년 기간 보장을 조건으로 한 계약서를 제시하였다. 편지에는 또 정부답지 않게 서두르는 태
도로, 리버오크스와 체신부 사이의 최종 계약이 3월 1일까지는 체결되어야 하며, 그렇지 않
을 경우 거래는 취소된다고 적혀 있었다. 연방 정부는 7년 동안 궁리를 하고 계획만 세우다
가, 갑자기 순식간에 건물을 지어 달라고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리버오크스, 변호사, 부동산 업자들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1월에 리버오크스는 퇴거 사건
이 발생한 창고 근처 플로리다 애비뉴에 있는 네 개의 부동산을 매입했다. 파일에는 그 지
역 지도가 두 장 포함되어 있었는데, 빗금으로 매입 부지와 협상중인 부지를 표시해 놓고
있었다.
3월 1일이면 지금부터 불과 이레 뒤였다. 챈스가 이 파일이 사라진 것을 그렇게 빨리 알
아차린 것도 놀랄 일이 아니었다. 그는 매일 이 파일을 꺼내 놓고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플로리다 애비뉴에 있는 창고는 지난 7월에 태그가 매입을 했는데, 파일에 그 액수는 나
와 있지 않았다. 리버오크스는 1월 31일에 20만 달러를 주고 그 물건을 샀다. 드본 하디와
버튼 가족을 거리로 내몰기 나흘 전이었다.
나는 앞으로 나의 거실이 될 텅 빈 목재 바닥에서 파일의 서류 한 장 한 장을 조심스럽게
꺼내 살펴보고 그 내용을 규격 용지에 자세히 적어 놓았다. 다시 그 순서 그대로 꽂아 놓으
려는 것이었다. 모든 부동산 관계 서류에는 당연히 있음직한 서류들이 있었다. 지난 몇 년간
의 세금 기록, 소유주의 변화, 이전의 증서들, 부동산의 매매 계약서, 부동산 업자와 교환한
서신, 결산 서류, 현금 거래였기 때문에 은행은 개입되지 않았다.
파일의 왼쪽 내지에는 날짜별 기록이 있었다. 각 항목의 날짜와 간단한 설명을 기록하기
위해 미리 인쇄하여 사용하는 드레이크 & 스위니의 양식이었다. 파일의 이 일지를 보면 담
당 비서의 업무 조직 능력을 판단할 수 있었다. 모든 서류, 지도, 사진, 차트 등, 파일에 들
어가는 것이면 어떤 것이든 일지에 기록이 되어야 했다. 이것은 드레이크 & 스위니의 신병
훈련소에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이야기였다. 우리 대부분은 엄격한 방법을 익혔다. 세
상에 일지에 자세하게 기록되지 않은 것을 찾느라 두꺼운 파일을 뒤적이는 것보다 짜증나는
일은 없다고 배웠다. 30초안에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없는 파일은 쓸모없는 파일이라는 것이
었다.
챈스의 파일은 조직적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그의 비서는 세부적인 데까지 꼼꼼하게 신경
을 쓰는 여자였다. 그러나 일지에는 손을 댄 흔적이 있었다.
1월 21일, 헥터 팔머는 혼자 창고로 갔다. 이런 식의 매물 조사는 일상적인 일이었다. 그
는 창고 문으로 들어가다 두 명의 불량배에게 강도를 당했다. 그들은 어떤 몽둥이 같은 것
으로 그의 머리를 때리고, 칼을 들이대면서 지갑과 현금을 빼앗아 갔다. 팔머는 1월 23일에
출근을 못했으며, 폭행 사건을 기록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파일에 넣으라고 넘겨 주었다. 보
고서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이 났다.
「1월 27일 월요일, 경비원을 데리고 다시 방문하여 조사할 예정.」이 보고서는 파일의 일
지에 제대로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두 번째 방문 결과에 대한 보고서는 없었다. 그럼에도 일지의 1월 17일 항목
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HP(헥터 팔머의 약자 :옮긴이) 보고서 ― 현장 방문 및 조사.」
헥터는 27일에 경비원과 함께 창고로 가서 현장 조사를 했다. 그때 틀림없이 심각한 불법
점거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의 다른
서류 작업들로 판단해 보건대, 그 보고서도 틀림없이 파일에 편입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보고서는 파일에서 사라졌다. 무슨 범죄 같은 것이 있을 리 없었다. 나는 그때
까지 일지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파일에서 서류들을 꺼냈다. 그러나 하나도 빠뜨린 것은
없었다. 따라서 내가 잃어 버린 것은 아니었다. 어떤 항목이 일지에 기재되었다면, 그것은
파일 안에 있어야 했다.
최종 계약 체결일은 1월 31일, 금요일이었다. 다음 화요일, 헥터는 불법 점거자들을 몰아
내기 위해 다시 창고로 갔다. 사설 경비 회사에서 나온 경비원 한 사람, 해당 지구 경찰관
한 사람, 퇴거 전문 회사에서 나온 난폭한 사람들 넷이 헥터를 도와 주었다. 두 쪽에 이르는
그의 보고서에 따르면 그 일을 처리하는 데는 세 시간이 걸렸다. 헥터는 자기 감정을 감추
려 했지만, 그는 퇴거를 시킬 만한 배짱이 없었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었다.
다음 구절을 읽는 순간 나는 내 심장이 멈추는 느낌을 받았다.
'그 여자에게는 네 자녀가 있었는데, 하나는 유아였다. 그녀는 배관 시설이 안 된 방 두
개짜리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그들은 바닥에 매트리스 두 개를 깔아 놓고 생활하고 있었다.
그녀는 아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경찰관과 싸웠다. 그들은 결국 퇴거당했다.'
그러니까 온타리오는 어머니가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는 뜻이었다.
파일에는 퇴거당한 사람들의 명단이 있었다. 모두 17명이었다. 아이들은 나와 있지 않았
다. 월요일 아침에 워싱턴 포스트에 난 기사의 복사본과 함께 내 책상에 올라왔던 것이 바
로 그 명단이었다.
파일 뒤편에는 17명에 대한 퇴거 통지서가 있었는데, 그것은 파일에 철해지지도 않았고
일지에 기록이 되지도 않았다. 즉 그것은 실제로는 사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불법 점거자들
에게는 통보받을 권리를 포함해서, 아무런 권리도 없었다. 그 통지서는 뒤에 생각이 나서 준
비해 둔 것이었다. 꼬리를 감추기 위해서. 아마 그것은 형씨 사건이 일어난 뒤에 챈스 자신
이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넣어 둔 것이 터였다.
손을 댄 흔적은 분명했고, 또 그것은 멍청한 짓이었다. 하지만 챈스는 파트너였다. 파트너
가 어떤 일로 파일을 제출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사실 이 파일도 제출한 것이 아니었다. 훔쳐 온 것이었다. 절도죄가 발생한 것이고, 지금
드레이크 & 스위니에서는 그 범죄에 대한 증거를 수집하고 있었다. 도둑놈은 멍청이었다.
7년 전에 입사를 앞두고 사립 탐정이 내 지문을 채취했다. 변호사라면 누구나 하는 일이
었다. 이제 그 지문을 챈스의 파일 캐비닛에서 채취한 지문과 비교해 보기만 하면 끝이었다.
몇 분도 안 걸릴 일이었다. 이미 비교해 보았을 것이 틀림없었다. 내 체포 영장이 떨어질까?
그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일을 시작한 지 세 시간 만에 바닥 대부분이 서류로 뒤엎었다. 나는 신중하게 서류들을
파일에 다시 꽂은 뒤, 차를 몰고 상담소로 가 그곳에서 복사를 했다.
"쇼핑하고 올게."
쪽지에 그렇게 적혀 있었다. 우리한테는 좋은 짐가방들이 있었다. 그것은 재산을 나눌 때
는 언급되지 않았던 항목이었다. 클레어는 앞으로 나보다 여행을 더 자주 하게 될 터였다.
그래서 나는 싸구려 가방들을 택했다. 더플백과 운동용 가방이었다. 짐을 챙겨 가는 장면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기본적인 것들만 꺼내 침대에 쌓았다. 양말, 속옷, 티셔츠, 화장
품, 구두. 그러나 그 즈음 사용하던 것들뿐이었다. 다른 것들은 클레어가 버리겠지. 나는 서
둘러 서랍을 깨끗이 비우고, 약품을 넣는 장 가운데 내가 사용하는 부분도 깨끗이 비웠다.
몸과 마음이 다 상처를 받고 아픈 상태에서 나는 가방들을 두 층 아래 세낸 차가 있는 곳으
로 날랐다. 그리고 다시 양복과 옷들을 한짐 가지러 돌아갔다. 낡은 침낭이 눈에 띄었다. 적
어도 5년 동안은 쓰지 않던 것이었다. 누비이불과 베개와 함께 그것도 가지고 내려갔다. 자
명종, 라디오, 휴대용 CD 플레이어와 CD 몇 장, 부엌 카운터의 13인치 텔리비전, 커피 단지
한 개, 헤어 드라이어, 파란 수건들 한 세트는 내 것이었다.
차가 가득 차차, 나는 떠난다는 쪽지를 적어 두었다. 그것을 그녀가 남긴 쪽지 옆에 붙여
두었지만, 그녀의 쪽지는 보지 않으려 했다. 착잡한 감정들이 당장이라도 의식 안으로 밀고
들어올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준비가 되지 않았다. 전에는 이렇게 집을 나가 본 적이 없
었다. 따라서 어떻게 하는 것이 잘하는 것이지 알 수가 없었다.
문을 잠그고 계단을 내려왔다. 이틀 정도 있다가 나머지 짐을 가지러 올 생각이었지만, 마
치 마지막으로 그 계단을 내려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클레어는 내 쪽지를 읽어보고, 내가 무엇을 가져갔나 보기 위해 서랍과 옷장을 열어 보겠
지. 내가 진짜로 집을 나갔다는 것을 알면 서재 앉아 잠깐 울지도 몰라. 한참 울지도 모르
지. 하지만 오래가지는 않을 거야. 클레어는 쉽게 다음 단계로 넘어갈 테니까.
차를 몰고 나오는데, 해방감 같은 것은 없었다. 다시 독신이 된다는 것은 재미없는 일이었
다. 결국 클레어와 나 둘 다 패배한 것이다.
17
사무소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일요일의 상담소는 토요일보다 더 추웠다. 나는 두꺼
운 스웨터, 코듀로이 바지, 보온 양말 차림이었다. 책상에 앉아 서류를 읽으며, 김이 피어오
르는 커피 두 잔을 마셨다. 건물에는 난방장치가 있었지만, 그것을 만지작거리고 싶은 생각
은 없었다.
내 의자, 내 명령대로 흔들거리고 뒤로 기울고 돌아가는 가죽 회전의자가 그리웠다. 새로
운 의자는 결혼식 같은 때 빌리는 접는 의자보다 약간 나은 정도였다. 그 의자는 성했을 때
도 불편하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 하물며 지금은 내 몸이 몸인지라 고문 도구와 다를 바 없
었다.
책상도 낡은 것이었다. 폐교된 학교에서 가져온 것 같았다. 상자처럼 네모나게 생긴 책상
의 양쪽으로 서랍이 세 개씩 달려 있었는데, 그 서랍들은 열리기는 열렸으나 여는 데 상당
한 힘이 필요했다. 건너편의 의뢰인용 의자들은 진짜로 접는 의자였다. 하나는 검은 색이었
고, 또 하나는 처음 보는, 녹색 비슷한 색깔이었다.
벽은 석고였는데, 수십 년 전에 색을 칠하여 지금은 옅은 레몬빛으로 바래져 있었다. 유일
한 장식품은 1988년 7월에 열렸던, 정의를 위한 행진을 알리는 플래카드를 액자에 넣어 둔
것이었다.
바닥은 낡은 떡갈나무였는데, 널빤지들은 가장자리가 둥글게 닳아 있었다. 지난 세월 동안
사람들이 열심히 사용해 왔다는 증거였다. 최근에 청소를 했는지, 구석에 빗자루와 함께 쓰
레받이가 놓여 있었다. 그것은 또다시 청소를 하고 싶으면 네가 알아서 하라는 은근한 신호
이기도 했다.
오, 강한 자의 몰락이여! 만일 내가 일요일에 나와서 의뢰인이 될 수도 있는 사람들이 나
에게 강도짓을 할까봐 문을 잠가 놓고, 볼품없는 작은 책상에 앉아 떨면서 석고의 금이 간
곳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형 워너가 보았다면, 아주 풍부하고 다채로운 말로 모
욕을 주었을 것이고, 나는 그것을 꼭 종이에 적어 놓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부모님의 반응은 예측할 수 없었다. 하지만 곧 전화를 해야 했고, 주소가 두 가지나 바뀐
것으로 인해 이중으로 충격을 받을 거라는 것 정도는 예상해야 했다.
갑자기 누가 큰 소리로 문을 두드리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거리의 불량배들이 내 뒤를 쫓아오고 있었던 것인가?
문으로 다가가는데 다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앞문의 쇠막대와 두꺼운 유리 사이
로 사람 형체가 보였다. 배리 누조였다. 몸을 떨고 있었으며, 어서 안전한 곳으로 들어오고
싶어 안달이었다. 나는 자물쇠들을 풀고 그를 들어오게 했다.
"완전 쓰레기장이로군.!"
배리가 유쾌한 표정으로 한 마디 던지며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나는 다시 문을 잠그고 있
었다.
"묘한 분위기지?"
나는 움츠러들며, 도대체 이것이 무슨 일인가 궁리하고 있었다.
"정말 쓰레기장이야!"
배리는 내 새로운 사무소를 보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는 소피아의 책상 주위를 돌며 천
천히 장간을 벗었다. 파일들이 산사태처럼 쏟아질 것이 두려워 감히 함부로 손을 못 대고
있었다.
"집에 돈을 많이 가져가라 수 있도록 경비를 최대한 줄이고 있지."
그것은 드레이크 & 스위니의 오래 된 농담이었다. 그러나 그곳의 파트너들은 경비에 대
해 계속 잔소리를 하면서도, 자기 사무실을 다시 꾸미는 데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돈 때문에 여기 왔다는 건가?"
배리가 여전히 즐거워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물론이지."
"제정신이 아니군."
"내 소명을 발견했다네."
"그래, 자네를 부르는 목소리도 들었겠지."
"그래서 여기 온 건가? 내가 미쳤다는 이야기를 하러?"
"클레어와 통화를 했네."
"그래, 클레어가 뭐라던가?"
"자네가 집을 나갔다고 하더군."
"사실이야. 우린 이혼 절차를 밟는 중이네."
"얼굴은 왜 그 모양이야?"
"에어백 때문이지."
"아, 그래. 깜빡했네. 펜더가 우그러지는 정도의 가벼운 자동차 사고라고 들었네."
"그랬지. 펜더들이 우그러지긴 우그러졌더군."
배리는 습관적으로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쳐 놓았다가, 얼른 다시 입었다.
"경비를 줄인다고 난방비도 안 내나?"
"가끔 한두 달 빼먹기도 하지."
배리가 조금 더 돌아다니며 옆쪽의 작은 사무실들을 살폈다.
"이곳은 누가 돈을 대지?"
배리가 물었다.
"어떤 신탁에서."
"쇠퇴하는 신탁에서?"
"그래, 급속하게 쇠퇴하는 신탁에서."
"어떻게 이곳을 알아냈나?"
"형씨가 여기서 얼쩡거렸거든. 이곳이 형씨의 변호사들이 일하는 곳이었네."
"형씨라."
배리는 잠시 발을 멈추고 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그가 우리를 죽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나?"
"아니. 아무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아서 벌인 일일 뿐이야. 그는 그저 평범한 노숙
자에 지나지 않지. 그는 누가 자기 이야기를 들어 주기를 바랐던 것뿐일세."
"그에게 덤벼들 생각을 한 적이 있나?"
"아니. 하지만 그의 총을 낚아채서 래프터를 쏠 생각은 했지."
"그랬으면 좋았을 걸."
"또 그런 일이 생기면 그렇게 할게."
"커피 있나?"
"그럼. 앉아 있게."
배리가 나를 따라 주방으로 오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그곳은 무척 지저분했기 때문이다.
나는 얼른 컵을 하나 찾아내 씻은 다음 거기에 커피를 채웠다. 나는 배리를 내 사무실로 초
대하였다.
"좋군."
배리가 내 사무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곳이 바로 무수한 홈런을 쳐 내는 곳이지."
내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우리는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두 의자 모두 삐걱거리
는 소리를 냈으며, 곧 무너질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이곳이 자네가 법대에서 꿈꾸던 곳인가?"
배리가 물었다.
"법대 기억은 나지 않는군. 그때 이후로 너무 많은 시간을 청구해서 말일세."
배리는 마침내 내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그의 얼굴에서 으스대는 표정이나 웃음기는 사
라졌다. 농담은 끝났다. 나쁜 생각지기는 했지만, 나는 배리도 도청 장치를 가지고 온 것이
아닌지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헥터에게도 셔츠 밑의 도청 장치를 감추게 하고
전쟁터에 내보냈다. 배리에게도 같은 짓을 할 수 있을 터였다. 배리가 자원을 하지는 않았겠
지만, 그들은 압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결국 나는 그들의 적이었다.
"그래서, 형씨를 찾아 이곳에 온 건가?"
배리가 물었다.
"그런 것 같네."
"그래서 뭘 찾았나?"
"지금 무슨 바보 놀이를 하자는 건가, 배리? 회사에 무슨 일이 있는 거야? 무슨 소탕 작
전이라도 벌이고 있는 건가? 자넨 나를 잡으러 온 건가?"
배리는 신중하게 내 말을 재 보면서, 얼른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이 커피는 끔찍하군."
곧 다시 뱉을 것 같은 인상이었다.
"그래도 뜨겁기는 하잖아."
"클레어 일은 안됐네."
"고맙네. 하지만 그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군."
"파일이 하나 사졌네, 마이클. 모두들 자네를 지목하고 있어."
"자네가 여기 온 건 누가 알고 있나?"
"아내가 알고 있지."
"회사에서 보내내 건가?"
"절대 아니야."
나는 그의 말을 믿었다. 그는 7년간 내 친구였고, 가끔은 가까울 때도 있었다. 그러나 많
은 경우 우정을 나누기에는 서로가 너무 바쁜 처지였다.
"왜 나를 지목하는 거지?"
"그 파일이 형씨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지. 자네는 브레이든 챈스에게 가서 그 파일을
보여 달라고 했어. 자네는 파일이 사라지던 날 밤에 그의 사무실 근처에서 목격되기도 했네.
자네가 갖지 말아야 할 열쇠들을 누군가 자네에게 주었다는 증거도 있네."
"그게 다인가?"
"그리고 지문이 있지."
"지문?"
나는 놀란 표정을 지으려 하며 되물었다.
"사방에. 문에, 전등에, 파일 캐비닛에. 자네의 것과 완벽하게 일치하더군. 자네는 거기 있
었네, 마이클. 자네가 파일을 가져갔어. 그 파일을 가지고 무엇을 하려는 건가?"
"자네는 그 파일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
"형씨는 우리 부동산 의뢰인들 가운데 한 사람에 의해 퇴거당했네. 그자는 불법 점거자였
어. 그래서 그 자는 정신이 돌아서 우리에게 잔뜩 겁을 주었지. 자네는 총에 맞을 뻔했고.
그래서 자넨 망가진 거야."
"그게 다인가?"
"그게 내가 들은 이야기 다야."
"누구한테 들었는데?"
"누구랄 게 있나. 지난 금요일에 회람이 돌았네. 회사전체에. 변호사, 비서, 사무직원을 모
함하여 모두에게. 파일이 사라졌고, 자네가 용의자이고, 회사의 누구도 자네와 접촉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었네. 사실 나도 여기 오면 안 되는 거라네."
"말하지 않을게."
"고맙군."
브레이든 챈스는 퇴거 사건과 론타 버튼 사이의 관련을 알아냈다 하더라도, 누구에게도
그것을 인정할 사람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의 동료 파트너들에게도. 배리는 솔직히 말하고
있었다. 그는 그 파일에서 내가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드본 하디뿐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
다.
"그럼 왜 여기 온 건가?"
"난 자네 친구야. 지금은 모든 게 미친 듯이 돌아가고 있어. 맙소사, 지난 금요일에는 회
사에 경찰관들이 왔어. 이게 믿을 수 있는 일인가? 지난 주에는 스와트 팀이 왔고, 우리는
인질이었어. 그러더니 자넨 절벽에서 뛰어내렸어. 그리고 클레어와 그런 일이 벌어졌고. 쉴
틈을 좀 주게. 두어 주 어디 갔다 오세. 아내들을 데리고 말이야.:
"어디로?"
"모르겠어. 어딘들 어때. 어디 섬에나 갔다 오지 뭐."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나?"
"우선 긴장을 좀 풀 수는 있겠지. 테니스도 좀 치고, 잠도 좀 자고. 재충전을 하는 거야."
"회사에서 비용을 대고?"
"내가 비용을 대고."
"클레어 문제는 잊어 버려. 이미 끝났어, 배리. 오래 끌기는 했지만 결국 끝이 났어."
"좋아. 그런 우리 둘이 가지 뭐."
"하지만 자네는 나하고 접촉을 해서는 안 될 텐데."
"나한테 생각이 있어. 내가 아서한테 가서 이야기를 하는거야. 우리가 문제를 풀 수 있다
고. 자네는 파일을 가져오고, 그 안에 든 내용을 잊는 거야. 그러면 회사도 용서를 하고 잊
는 거야. 그리고 우리 둘이 아무이에 가서 두 주 동안 테니스를 치는 거야. 그리고 다시 돌
아와서, 자네는 원래 자네가 속한 곳인 편한 사무실로 돌아가는 거야."
"회사에서 자네를 보냈군, 그렇지?"
"아니. 맹세하네."
"소용 없을 거야, 배리."
"어디 그럴 듯한 이유를 좀 대보게. 어서."
"변호사라는 건 시간에 대한 청구서를 보내고 돈을 버는 것 이상의 일을 하는 거야. 자네
는 왜 법인의 창녀가 되고 싶어하나? 난 그 짓에 싫증이 났어, 배리. 난 좀 달라지고 싶네."
"꼭 법대 1학년생처럼 말을 하는군."
"바로 그거야. 우리가 법에 입문하게 된 것은 법이 높은 수준의 소명이라고 생각했기 때
문이야. 우리는 법률가이기 때문에 불의나 사회적인 변과 싸울 수 있고, 온갖 멋진 일을 할
수 있단 말일세. 우리도 한때는 이상주의자들이었어. 왜 다시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건가?"
"저당들 때문이지."
"지금 자네를 나 있는 데로 끌어들이려는 건 아닐세. 자네한테는 자식이 셋이야. 다행히도
클레어와 나한테는 자식이 없네. 따라서 나한테는 조금 미칠 여유가 있는 셈이지."
있는지도 몰랐던 구석의 라디에이터가 덜그럭거리며 쉭쉭 심을 내뿜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것을 지켜보며, 거기서 약간의 열기라도 얻을 수 있기를 바랐다. 1분이 지났다. 이어 2분.
"그들이 자네를 잡을 거야, 마이클."
배리는 여전히 라디에이터 쪽을 보며 말했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그들? 우리라고 해야겠지."
"그래. 회사가. 파일을 훔치는 건 안 돼. 의뢰인을 생각해 보게. 의뢰인에게도 비밀을 보장
받을 권리가 있네. 파일이 회사 밖으로 나가면, 회사에서는 그것을 찾으러 쫓아갈 수밖에 없
네."
"범죄 혐의를 걸고?"
"아마도. 그들은 엄청나게 화가 나 있어, 마이클. 그들을 탓할 수도 없지. 그들은 또 변호
사 협회에 징계 문제를 제기하는 것도 거론하고 있네. 변호사 활동 금지 명령이 떨어질지도
몰라. 래프터가 벌써 그 작업을 하고 있네."
"왜 형씨가 그때 약간 아래를 겨냥하지 않았을까?"
"그들은 완강해."
"회사가 나보다 잃을 게 더 많지."
배리는 나를 살폈다. 그는 그 파일에 뭐가 들어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거기에 형씨 이야기만 들어 있는 게 아닌가?"
배리가 물었다.
"그것 말고도 많은 것이 들어 있지. 회사는 엄청나게 취약해. 그들이 나를 잡으러 오면,
나도 그들을 잡으러 갈 수 있어."
"훔친 파일을 이용할 수는 없네. 이 나라 어떤 법정도 그것을 증거로 채택하지 않을 거야.
자넨 소송을 몰라."
"지금 배우는 중이네. 그들에게 물러나라고 하게. 잊지 말게. 나한테 파일이 있고, 파일에
는 많은 것이 담겨 있어."
"그들은 불법 점거자 무리였을 뿐이야, 마이클."
"그것보다 훨씬 복잡해. 누군가 브레이든 챈스와 마주 앉아 진실을 알아낼 필요가 있어.
래프터에게 경망한 짓을 하지 전에 우선 숙제부터 제대로 하라고 하게. 정말이네, 배리, 이
건 신문 1면에 실릴만한 일이야. 자네들은 집에서 나오는 것도 겁내게 될걸."
"그러니까 휴전을 제안하는 건가? 자네는 파일을 갖고 있고, 우리는 자네를 내버려 두고."
"어쨌든 당분간은. 다음 주나 그 다음 주 일은 나도 모르니까."
"아서와 이야기를 해보는 게 어때? 내가 중재를 할게. 우리 셋이 한 방에 들어가, 문을 걸
어잠그고, 일을 해결하는 거야. 그건 어때?"
"너무 늦었어. 사람들이 죽었어."
"형씨는 자살했어."
"또 있어."
그것으로 이제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한 셈이었다. 배리는 내 친구였지만, 그는 우리가 나눈
대화의 대부분을 그의 상사들에게 이야기할 터였다.
"설명을 해주겠나?"
배리가 물었다.
"못해. 비밀이야."
"꼭 가짜처럼 들리는 군. 파일을 훔치는 변호사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이니 말이야."
난방기가 꿀럭거리며 픽픽댔다. 말을 하는 것보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더 편했다.
둘 다 나중에 후회할 말을 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배리는 상담소의 다른 직원들에 대해 물었다. 나는 잠깐 상담소 구경을 시켜 주었다.
"믿어지지 않는군."
배리는 여러 번 그렇게 중얼거렸다.
"우리가 계속 연락하며 지낼 수 있을까?"
배리가 문간에서 물었다.
"그럼."
18
오리엔테이션은 약 30분간 계속되었다. 그 시간은 곧 상담소에서 북동부 펫워스의 '사마리
아인의 집'에 가는 데 걸린 시간이었다. 모디카이가 운전을 하고 이야기도 했다. 나는 서류
가방을 움켜쥐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이 방면의 초보자인 나는 곧 이리한테 잡아먹힐 사람
처럼 초조해하고 있었다. 나는 청바지에 하얀 셔츠와 타이 차림이었다. 그 위에 낡은 군청색
블레이저를 걸치고 있었다. 또 낡은 나이키 테니스화와 하얀 양말을 신고 있었다. 면도도 그
만두었다. 나는 이제 거리의 변호사였으니, 내 마음대로 옷을 입을 수 있었다.
물론 모디카이는 내가 새 사무실에 들어가 일할 준비가 되었다고 통보하는 순간부터 내
스타일의 변화를 눈치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눈길은 나이키 운동화에서 머뭇
거리고 있었다. 그에게는 이미 익숙한 모습이었다. 큰 법률 회사에 다니면서 가난한 사람들
과 몇 시간을 보내겠다고 높은 탑에서 내려오신 양반들의 꼴이라는 것이 늘 그랬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들은 구레나룻을 기르고 데님 천으로 된 옷을 입어야 한다고 느끼는 것 같
았다.
"당신 의뢰인들은 삼분의 일이 여러 가지로 혼합된 상태일 거요."
모디카이는 한 손으로 형편없이 운전을 하고, 다른 한 손으로는 커피를 들고 있었다. 우리
차 주위를 빽빽하게 채우고 있는 다른 사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모디카이가 말을 이었다.
"삼분의 일쯤은 고용되어 있고, 삼분의 일은 자녀를 포함한 가족이 있고, 삼분의 일은 정
신 장애이고, 삼분의 일은 참전 용사이고, 이런 식으로. 또 저소득자용 주택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 가운데 삼분의 일은 그것을 받고 있고. 어쨌든 지난 15년 동안 250만채의 저비용 주
택들이 없어졌고, 연방의 주택 프로그램은 70퍼센트가 줄었소. 사람들이 거리에서 살고 있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오. 지방 정부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희생을 대가로 예산의 균형을 맞추
어 왔으니까."
모디카이는 통계들을 술술 읊어대기 시작했다. 그것이 그의 삶이자 직업이었기 때문이다.
꼼꼼하게 메모를 하도록 훈련을 받아온 변호사로서, 나는 얼른 서류 가방을 열고 그것을 받
아 적고 싶은 강박관념과 싸워야 했다. 그러나 그냥 듣고만 있었다.
"이 사람들은 최저 임금 수준의 직업을 가지고 있소. 따라서 개인 주택을 가진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소. 이 사람들은 그런 것은 꿈도 꾸지 않소. 그들이 벌어들이는 소득은 주택
비용과 같은 속도로 상승하지 않았소. 따라서 이들은 점점 더 처지게 되었소. 동시에 지원
프로그램들은 점점 더 축소되어 왔소. 잘 들으시오. 장애인 노숙자들 가운데 오직 14퍼센트
만이 장애 보험금을 받고 있소. 14퍼센트만이! 앞으로 이런 사례들을 자주 보게 될 거요."
차가 빨간불을 만나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멈추었다. 그의 차는 교차로까지 밀고 들
어가 있었다. 사방에서 경적이 울렸다. 나는 다시 자동차 사고를 만나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몸을 잔뜩 움츠렸다. 모디카이는 자기 차가 러시아워의 차량들의 통행을 방해하고 있다는
생각은 조금도 못하는 것 같았다. 그는 멍하니 앞만 보고 있었다. 다른 세계에 들어가 있었
던 것이다.
"노숙자들의 문제 가운데 가장 무시무시한 것은 우리가 거리에서 보지 못하는 것이오. 가
난한 사람들 가운데 반 가량이 자기가 가진 주택을 유지하느라 소득의 70퍼센트를 쓰고 있
소. '주택 및 도시 개발부'에서는 삼분의 일이 적당하다고 말하고 있소. 이 도시에는 쫓겨나
지 않고 간신히 자기 집에 달라붙어 있는 사람들이 수만 명에 이르고 있소. 임금이 한 번만
밀리면, 예상치 못하게 입원이라도 하게 되면, 예상하지 못했던 긴급 사태라도 발생하면, 그
들은 그 길로 집을 잃고 마는 거요."
"그럼 어디로 갑니까?"
"바로 합숙소로 가는 길은 드물지. 처음에는 가족이나 친구들에게로 가오. 하지만 엄청난
압박감을 느끼게 되지. 그들의 가족이나 친구들 역시 보조금이 나오는 주택에 살고 있고, 그
들의 임대 계약서에는 한 주택에 살 수 있는 사람들의 숫자를 제한하고 있거든. 따라서 이
런 경우에는 임대 계약을 어길 수밖에 없는데, 그럼 퇴거를 당할 수도 있소. 그래서 그들은
돌아다니게 되오. 때로는 아이들 언니에게 맡기기도 하고, 친구에게 맡기기도 하지. 상황은
점점 악화되오. 노숙자들 가운데 많은 수가 합숙소를 두려워 하고 있기 때문에. 합숙소 만큼
은 피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을 하오."
모디카이는 오랫동안 말을 멈추고 커피를 마셨다.
"왜죠?"
내가 물었다.
"합숙소들이 다 좋은 곳들은 아니기 때문이오. 폭행, 강도, 심지어 강간 같은 일들이 벌어
지기도 하거든."
그곳이 바로 내가 내 법률가로서의 여생을 보내야 하는 곳이었다.
"어이쿠, 권총을 깜빡 잊고 안 가져 왔군요."
"당신은 괜찮을 거요. 이 도시에는 무료 자원봉사자들이 수백 명 있는데, 그들 가운데 누
가 다쳤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소."
"그거 듣기 좋은 이야기로군요."
차는 다시 움직였다. 아까보다는 안정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사람들 가운데 반쯤이 어떤 식으로든 알콜이나 마약 중독 문제를 안고 있소. 드본 하
디처럼 말이오. 그건 아주 흔한 일이오."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습니까?"
"안됐지만 별로 없소. 몇 가지 프로그램이 남아 있기는 차지만, 요새는 침대 하나 찬기가
힘드니까. 하디를 참전 용사 회복 병동에 보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는 제 발로 걸어나오고
말았소. 중독자들은 자기가 그만둘 마음이 생겨야만 치료를 받는 법이오."
"가장 흔하게 중독되는 것이 뭐죠?"
"알콜이요. 그게 가장 싸거든. 크랙 마약에 중독된 사람들도 많은데, 그것도 싸기 때문이
오. 그들에게서는 모든 중독 유형들을 보게 되지만, 고급 마약은 너무 값이 비싸지."
"내가 맡을 처음 다섯 사건들은 어떤 것들일까요?"
"당신 불안하군, 안 그렇소?"
"불안합니다. 아무것도 모르니까."
"마음놓으시오. 일은 복잡하지 않소. 다만 인내심이 필요할 뿐이오. 우선 사회보장 혜택을
못 받는 사람들 만나게 될 거요. 아마 식량 배급표를 못 받는 사람이겠지. 아니면 이혼 사건
이거나. 또 집주인에게 불만을 가진 사람일 수도 있고. 고용 분쟁일 수도 있소. 물론 형사
사건도 틀림없이 있을 거요."
"어떤 종류의 형사 사건입니까?"
"가벼운 것들이지. 도시화된 미국에서는 노숙자들이 범죄자화하는 경향이 있소. 대도시들
은 거리에서 사는 사람들을 박해하기 위해 온갖 종류의 법들을 통과시켰소. 구걸할 수도 없
고, 벤치에서 잘 수도 없고, 다리 밑에서 야영을 할 수도 없고, 공원에 개인 물품을 보관할
수도 없고, 보도에 앉을 수도 없고, 공공 장소에서 음식을 먹을 수도 없소. 물론 이런 규제
들 가운데 많은 것은 법정에서 무효화되었소. 에이브러험은 연방 판사들에게 이런 악법들이
헌법 수정 일조의 권리들을 침해한다고 납득시키는 아름다운 성과를 거두었소. 그래서 도시
들은 배회, 부랑, 공공 장소에서의 만취 등과 같은 일반적인 법만 시행하고 있소. 이런 법들
은 노숙자들을 겨냥한 거요. 좋은 옷을 입은 사람이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술에 취해 골목
길에 오줌을 눈다 해도, 그건 별것이 아니오. 하지만 노숙자가 똑같은 골목길에 오줌을 누
면, 그는 공공 장소에서 소변을 본 죄로 체포되오. 싹쓸이도 흔한 일이고."
"싹쓸이요?"
"그렇소. 도시의 한 지역을 목표로 삼아, 그곳의 모든 노숙자들을 쓸어 담에 다른 곳에 갖
다 버리는 거요. 애틀랜타에서 올림픽 전에 그런 일이 벌어졌소. 세계가 지켜보고 있는데 가
난한 사람들이 구걸을 하고 공원 벤치에서 자게 놔둘 수는 없다는 거지. 그래서 그들은 특
수 경찰 부대를 투입하여 문제를 해결했소. 그리고 나서 애틀랜타에서는 모든 것이 얼마나
예뻐 보이느냐고 허풍을 친 거 아니오."
"그들을 어디다 데려다 놓았습니까?"
"합숙소에 데려다 놓지는 않았을 거요. 그곳에는 합숙소가 없으니까. 그냥 데리고 다니다
가, 거름을 버리듯 도시의 다른 지역에 내버렸을 거요."
모디카이는 얼른 커피를 마시면서 히터를 조절했다. 그러느라고 5초 정도 운전대에서 손
을 완전히 놓았다. 모디카이가 말을 이었다.
"잊지 마시오, 마이클, 누구든 어딘가에서는 살아가야 하는 거요. 이 사람들에게는 대안이
없소. 배가 고프면 먹을 것을 구걸해야 하는 거요. 피곤하면 어디든 눈에 띄는 곳에서 잠을
자야 하는 거요. 집이 없어도 어딘가에서는 살아야 하는 거요."
"노숙자들이 체포당합니까?"
"매일 일어나는 일이오. 그건 어리석은 정책이오. 비록 거리에서 살기는 하지만, 합숙소를
들락거리며, 어딘가에서 최저 임금을 받고 일을 하며, 한 단계 올라가 자족적인 생활을 유지
하게 위해 최선을 다 하는 사람들을 데려가다니. 그렇게 상다가 어느 날 다리 밑에서 잔다
는 이유로 체포당하는 거요. 그 사람도 다리 밑에서 자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누구든 어딘
가에서는 잠을 자야 하는 것 아니겠소. 시의회에서 똑똑하게도 노숙자가 되는 것을 범죄로
만들어 놓는 바람에 그런 사람들이 죄를 짓고 마는 거요. 체포된 사람은 감옥에서 빠져나오
는 데만 30달러를 내야 하고, 벌금으로 또 30달러를 내야 하오. 그런 빈털털이더러 60달러를
내라니. 어떻게든 그런 돈을 마련하고 나면 그는 또 한 눈금 아래로 떨어지는 거요. 그 사람
은 체포당하고, 모욕을 당하고, 벌금을 내고, 벌을 받았소. 그리고 이제 자신의 생활 방식의
잘못을 깨닫고 집을 찾으라는 거지. 염병할 거리를 떠나라는 거요. 이것이 우리 대부분의 도
시에서 벌어지는 일이오."
"그럼 차라리 감옥에 있는 게 나을까요?"
"다신 최근에 감옥에 가본 일 있소?"
"아뇨."
"가지 마시오. 경찰관들은 노숙자들을 다루는 훈련을 받지 못했소. 특히 정신병자들과 중
독자들은 다룰 줄을 모르오. 게다가 감옥은 만원이오. 우선 형사 소송 제도 자체가 악몽과
같은 것이오. 거기에 노숙자들을 기소하는 것은 그 제도를 더욱 꼬이게 만들 뿐이오. 그게
참 어리석은 짓이오. 어떤 사람에게 하루 동안 합숙소와 먹을 것과 운송 수단과 조언을 제
공하는 것보다 그를 하루 동안 감옥에 잡아 두는 것이 돈이 25퍼센트나 더 들어가오. 게다
가 전자가 장기적으로 볼 때도 더 도움이 되는 일이오. 또 전자가 더 설득력 있는 방법이오.
25퍼센트라. 여기에는 체포와 기소에 들어가는 비용은 포함시키지 않은 것이오. 그렇지 않아
도 대부분의 시들은 파산 상태요. 워싱턴은 특히 그렇소. 잊지 마시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합숙소를 폐쇄한다는 것을. 그러면서도 그들은 노숙자를 범죄자로 만드느라 돈을 낭비하고
있는 거요."
"소송을 제기할 때가 무르익은 것 같군요."
모디카이는 굳이 맞장구를 필요로 하지 않았지만, 내가 한 마디 거들었다.
"우리는 미친 듯이 소송을 걸고 있소. 전국의 변호사들이 이 법들을 공격하고 있소. 그러
니까 염병할 시들은 또 노숙자들을 위한 합숙소를 건설하는 것보다 그 공격을 막아내기 위
한 법적인 방어에 더 많은 지출을 하고 있소. 당신 정말이지 이 나라를 사랑해야 하오. 세계
에서 가장 부자 도시인 뉴욕은 그 주민들에게 살 곳도 제대로 제공하지 못해서, 그곳 주민
들은 거리에서 잠을 자고 5번가에서 구걸을 하오. 그러자 민감한 뉴요커들은 속이 상해서,
거리를 청소하겠다고 공약한 루디 뭐시긴가 하는 자를 시장으로 뽑았소. 그러자 그는 그의
최고급 시의회를 통하여 노숙을 불법으로 만들어 버렸소. 그런 거요. 구걸도 못한다. 보도에
앉지도 못한다. 노숙자가 될 수 없다. 그러면서 그들은 미친 듯이 예산을 삭감하고, 합숙소
들을 폐쇄하고, 지원을 줄이고, 동시에 이런 식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일소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변호하기 위해 뉴욕 변호사들에게 엄청난 돈을 주고 있소."
"워싱턴은 얼마나 나쁜 상황입니까?"
"뉴욕만큼 나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별로 나은 편도 아니오."
우리는 두 주 전 같으면 내가 환한 대낮에 장갑차를 타고도 지나가지 않았을 지역을 통과
하고 있었다. 가게 현관들은 검은 쇠막대들로 보호되어 있었다. 키 큰 아파트 건물들은 생명
없는 구조물처럼 보였는데, 난간에는 빨래가 걸려 있었다. 모두 잿빛 벽돌로 지은 것들이었
다. 모든 건물이 연방 정부의 돈으로 서둘러 지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건축학적인 무미건조
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모디카이가 말을 이었다.
"워싱턴은 흑인들의 도시오. 복지 수당을 받는 계급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소. 이곳은
또 변화를 원하는 사람들, 많은 활동가들과 급진주의자들이 몰려드는 곳이오. 이곳 사람들은
당신 같은 사람을 좋아하오."
"나는 활동가나 급진주의자라고 할 수 없는데요."
"지금은 월요일 아침이오. 당신이 지난 7년 동안 매주 월요일 아침에 어디에 있었는지를
생각해 보시오."
"내 책상에 앉아 있었죠."
"아주 좋은 책상이었겠지."
"그렇습니다."
"당신의 우아하게 꾸며진 사무실에서."
"네."
모디카이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럼 당신은 이제 급진주의자요."
그것으로 오리엔테이션은 끝났다.
건물 앞의 오른쪽에는 두꺼운 옷을 입은 남자들이 거리 모퉁이에 휴대용 부탄 버너를 갖
다 놓고 모여 앉아 있었다. 우리는 그들을 끼고 돌아, 도로 가에 차를 세웠다. 그 건물은 오
래 전에는 백화점이었다. 지금은 간판에 '사마리아인의 집'이라고 손글씨로 적혀 있었다.
"사설 합숙소요."
모디카이가 말을 이었다.
"침대 90개에 좋은 음식을 제공하오. 알링턴의 교회 연합이 자금을 대고 있소. 우리는 6년
동안 이곳을 찾아왔소."
문간에 음식 은행에서 온 승합차가 주차해 있었다. 자원봉사자들이 야채와 과일 상자들을
부리고 있었다. 모디카이는 문간에서 일을 하는 나이든 신사와 이야기를 했고, 우리는 곧 안
으로 들어갔다.
"얼른 안내를 하겠소."
모디카이가 말했다. 나는 그의 옆에 바짝 붙어 1층을 돌아다녔다. 그곳은 짧은 복도들로
이루어진 미로와 같았는데, 복도 옆에는 페인트를 칠하지 않은 시트록(종이 사이에 석고를
넣은 석고 보드:옮긴이)으로 만든 작고 네모난 방들이 줄지어 있었다. 각각의 방에는 문이
있었고, 자물쇠가 달려 있었다. 문 하나는 열려 있었다. 모디카이는 안을 보며 말했다.
"안녕하시오."
간이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있던, 충혈된 눈에 몸집이 자그마한 남자가 우리를 보았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좋은 방이로군요."
모디카이가 나를 향해 말을 이었다.
"이곳에는 프라이버시가 있고, 좋은 침대가 있고, 물건을 갖다 놓을 공간이 있고, 전기가
있소."
모디카이가 문 옆의 스위치를 올리자 조그만 전등 안에 있는 전구의 불이 나갔다. 방은
잠시 더 어두웠으나, 모디카이는 금방 다시 스위치를 올렸다. 충혈된 눈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방에 천장은 없었다. 옛 백화점의 낡은 패널들은 10미터 위에 달려 있었다.
"목욕탕은 어떻습니까?"
내가 물었다.
"저 뒤에 있소. 개별 욕실을 제공하는 합숙소는 거의 없소. 안녕히 계시오."
마지막 말은 방 안에 있는 남자에게 한 말이었다. 그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저기서 라디오들을 켜 놓아, 어디서는 음악이 들리고, 어디서는 뉴스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월요일 아침이었다. 그들도 해야 할 일이 있었고, 가야 할 곳
이 있었다.
"이곳에 방을 얻는 것이 힘듭니까?"
묻기는 했으나 답은 분명했다.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지. 대기자 명단이 엄청나게 길거든. 게다가 합숙소에서 선별적으
로 입주를 시키고 있소."
"이곳 사람들은 얼마나 있다 나갑니까?"
"경우에 따라 달라요. 평균 석 달이라고 할 수 있을 거요. 이곳은 좋은 축에 드는 합숙소
요. 따라서 이곳은 안전하오. 합숙소에서는 입주자가 안정된 상태에 들어가면, 그들을 자비
를 부담하는 주택으로 옮기려고 노력하오."
모디카이는 나를 검은 전투화를 신은 젊은 여자에게 소개했다. 이곳을 운영하는 여자였다.
"우리 새 변호사요."
그것이 나에 대한 소개였다. 그녀는 합숙소에 온 것을 환영한다고 말했다. 모디카이와 여
자는 사라진 의뢰인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나는 혼자 복도를 따라가다 가족들이 사는 구역
에 이르렀다. 아기 울음 소리가 들려, 문이 열린 곳으로 가 보았다. 이 구역의 방은 아까보
다 약간 더 컸고, 내부는 다시 아주 작은 방들로 나뉘어 있었다. 스물다섯은 넘지 않았을 것
으로 보이는 건장한 몸집의 여자가 의자에 앉아, 웃통은 벗어젖히고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있었다. 열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내가 입을 벌리고 바라보고 있었음에도 전혀 기가 죽지
않았다. 침대에서는 어린아이 둘이 재주를 넘고 있었다. 라디오에서는 랩이 흘러나왔다.
여자는 오른손으로 빈 젖가슴을 들어올려 나에게 내밀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 복도를 달
려내려와 모디카이를 찾았다.
의뢰인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사무실은 식당의 한쪽 구석, 주방 근처였다. 책
상은 주방장에게서 빌린 접는 탁자였다. 모디카이는 구석에 있는 파일 캐비닛의 자물쇠를
열었다. 이어 우리는 일을 시작했다. 벽을 따라 일렬로 놓은 의자에 여섯 명이 앉아 있었다.
"누가 1번이오?"
모디카이가 말하자, 어떤 여자가 의자를 들고 앞으로 나왔다. 여자는 변호사들 맞은편에
앉았다. 두 변호사 모두 펜과 규격 용지를 들고 대기하고 있었다. 한 변호사는 산전수전을
겪은 '거리의 법'에 관한 한 베테랑이었으며, 또 한 변호사는 물정 모르는 순진한 인간이었
다.
여자의 이름은 웨일린이었으며, 나이는 스물일곱, 자녀는 둘, 남편은 없었다.
"반은 합숙소 출신일 거요."
모디카이는 메모를 하면서 나에게 말을 이었다.
"나머지 반은 거리 출신이고."
"우리는 아무나 받습니까?"
"집이 없는 사람들은 아무나."
웨일린의 문제는 복잡하지 않았다. 그녀는 패스트푸드 레스토랑에서 일하다가 어떤 이유
로 그만두었는데―모디카이는 그 이유는 본 건과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다.―마지막 두 번의
급료를 받지 못한 것이다. 그녀에게 연락처가 없었기 때문에, 고용주가 수표를 엉뚱한 곳으
로 보내고 만 것이다. 수표는 사라졌고, 고용주는 더 이상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다음 주에 어디 있을 거요?"
모디카이가 웨일린에게 물었다.
웨일린도 알지 못했다. 여기일 수도 있었고, 저기일 수도 있었다. 그녀는 일자리를 찾고
있었다. 일자리를 찾으면, 다른 일들이 생길 수 있었고, 그러면 이런저런 사람과 함께 살게
될 수도 있었다. 아니면 혼자 살 곳을 구할 수도 있었다.
"돈을 받아 주겠소. 수표는 내 사무실로 보내라고 하겠소."
모디카이는 웨일린에게 명함을 내밀며 말을 이었다.
"일 주일 뒤에 이 번호로 전화하시오."
웨일린은 명함을 받아들고, 고맙다고 하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이 멕시코 음식점에 전화를 하고, 웨일린의 변호사라고 하시오. 처음에는 잘해 주다가,
협조하지 않으면 호통을 치시오. 필요하면 직접 가서 수표를 받아오시오."
나는 무슨 복잡한 일이라도 되듯이 그 지침을 받아 적었다. 웨일린이 받을 돈은 210달러
였다. 내가 드레이크 & 스위니에서 마지막으로 작업을 하던 사건은 반트러스트 분쟁이었는
데, 걸린 돈이 9백만 달러였다.
두 번째 의뢰인은 법적인 문제를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못했다. 그냥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할 뿐이었다. 술에 취했거나 정신병이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둘 다인지도 몰랐
다. 모디카이는 그를 주방으로 데려가 커피를 따라 주었다.
"이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줄만 생기면 무조건 서고 본다오."
세 번째는 합숙소 입주자로, 그곳에 머문 지 두 달이 되었다. 따라서 주소 문제는 복잡할
것이 없었다. 그녀는 58살로, 깨끗하고 단정했으며, 참전 용사의 부인이었다. 모디카이가 그
녀와 이야기하는 동안 들추어 본 두툼한 서류철에 따르면, 그녀는 참전 용사 수당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 그러나 그 수표는 메릴랜드에 있는 어떤 은행 계좌로 송금되었고, 그녀는 그
계좌에 접근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설명이 그러했고, 또 그녀의 서류도 그것을 입증해 주었
다. 모디카이가 말했다.
"참전 용사 협회는 좋은 기관입니다. 수표를 그곳으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능률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동안 줄은 늘어났다. 모디카이에게는 익숙한 광경이었
다. 고정된 주소가 없어 식량 배급표가 중단되는 경우, 집주인이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겠다
고 하는 경우, 자녀 양육 지원금을 받지 못하는 경우, 부정 수표 단속법에 걸려 체포 영장이
나온 경우, 사회 보장의 장애자 수당을 청구하는 경우, 두 시간 동안 10명의 의뢰인을 만난
후, 나는 탁자 한쪽 끝으로 가 직접 면담을 하기 시작했다. 무료 변호사로서 상근한 첫날 나
는 벌써 독자적인 활동을 하게 되었다. 스스로 메모를 하고, 내 동료 변호사 모디카이만큼
중요한 활동을 하게 된 것이다.
마비스는 내가 처음 단독으로 만난 의뢰인이었다. 그는 이혼을 원했다. 나도 마찬가지였
다. 나는 그의 슬픈 이야기를 들은 후, 집으로 달려가 클레어의 발에 입을 맞추고 싶은 느낌
을 받았다. 마비스의 부인은 창녀였는데, 전에는 품위 있는 사람이었으나 크랙 마약에 중독
되고 말았다. 그녀는 크랙 때문에 마약 밀매자에게 갔고, 이어 포주에게 갔고, 이어 거리에
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그녀는 그들이 소유한 것을 모두 내다 팔았고, 마
비스를 빚더미에 앉혀 놓기까지 했다. 마비스는 파산 신청을 했다. 그러자 부인은 두 아이를
데리고 포주의 집으로 들어갔다.
마비스는 이혼이라는 과정에 대해 몇 가지 일반적인 질문을 했다. 나도 기본적인 것밖에
몰랐지만, 최선을 다해 즉석 설명을 해주었다. 마비스의 이야기를 메모하다가, 클레어가 바
로 그 순간 그녀의 변호사의 좋은 사무실에 앉아 우리의 혼인을 해지하는 계획을 마무리짓
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얼마나 걸릴까요?"
마비스가 묻는 바람에 나는 백일몽에서 깨어났다.
"여섯 달입니다. 부인이 논쟁할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무슨 뜻이죠?"
"부인이 이혼에 합의할까요?"
"우린 그 이야기는 해보지 않았습니다."
여자는 1년 전에 집을 나갔다. 내가 보기에는 그 정도면 유기에 해당할 것 같았다. 간통까
지 있으니, 이 사건은 쉽게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비스는 합숙소에 일 주일째 있었다. 그는 깨끗했고, 술에 취하지 않았으며, 일자리를 찾
고 있었다. 나는 그와 30분을 보내는 것이 즐거웠으며, 이혼을 성사시켜 주겠다고 맹세했다.
아침은 빨리 지나갔다. 초조함도 사라졌다. 나는 진짜 문제를 가진 진짜 인간들을 돕고자
손을 뻗고 있었다. 법적인 대리를 위하여 달리 가볼 데가 없는 어려운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나뿐만이 아니라 법과 규제와 법정과 관료제라는 방대한 세계에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나
는 웃음을 짓게 되었으며, 그것이 그들에게 편안함을 주게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돈을 내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했다. 돈은 중요한 게 아닙니다.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진실로 돈은 중
요하지 않았다.
12시에 우리는 사람들의 점심 식사를 위해 탁자를 내주었다. 식당이 붐비고 있었다. 수프
도 준비되었다.
마침 흑인 동네에 있었으므로, 우리는 플로리다 애비뉴 그릴로 흑인 음식을 먹으러 갔다.
그 혼잡한 레스토랑에서 백인은 나 하나였다. 그러나 내가 백인이라는 사실도 점차 의식하
지 않게 되었다. 아직은 아무도 나를 죽이려 하지 않았다. 아무도 내가 백인이라는 것을 상
관하지 않는 것 같았다.
소피아는 다행히도 망가지지 않은 전화기를 한 대 찾아냈다. 문에서 가장 가까운 책상의
파일 더미 밑에 깔려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고맙다고 하고, 프라이버시가 보장되는 내 사무
실로 물러났다. 여덟 명이 조용히 앉아 조언을 듣기 위해 변호사가 아닌 소피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디카이는 오후에는 우리가 오전에 사마리아인의 집에서 가져온 사건들을 처리하
는 게 어떻겠느냐고 했다. 총 19건이었다. 그는 또 내가 일을 부지런히 해서 빨리 끝마치고,
소피아도 도와 주었으면 하는 눈치였다.
거리에 나서면 일하는 속도가 느려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오산이었다. 나는 갑자
기 다른 사람들의 문제에 푹 빠져 버리게 되었다. 다행히도 나 자신에게 몰두하는 일 중독
자라는 전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우선 드레이크 & 스위니에 전화부터 했다. 부동산 부서의 헥터 팔머를 바꾸
어 달라고 했다. 잠시 기다려 달라는 이야기가 나온 뒤에 연결이 되지 않았다. 5분 뒤에 전
화를 끊고, 다시 전화를 했다. 마침내 비서가 받았으나, 다시 기다리라는 말을 했다. 그러더
니 갑자기 브레이든 챈스의 깔깔한 음성이 내 귀를 덮쳤다.
"무슨 일이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헥터 팔머를 부탁합니다."
나는 의식적으로 목소리를 높이고 단의 끝을 자르며 발음했다.
"누구요?"
"릭 해밀턴입니다. 학교 때 친군데요."
"그 사람은 이제 여기서 일하지 않소."
챈스는 전화를 끊었다. 나는 전화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폴리에게 전화를 해서 확인을
해 달라고 할까? 헥터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아봐 달라고 할까? 폴리라면 금방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루돌프한테? 아니면 배리 누조한테? 아니면 내가 제일 좋아하던 사
무직원한테? 순간 나는 그들이 이제 내 친구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떠났다. 한
계선을 넘어간 인물이었다. 적이었다. 나는 골치거리였고, 그들 머리 위의 권력자들은 나와
이야기하는 것을 금지했다.
전화번호부에는 헥터 팔머가 세 명이었다. 그들에게 전화를 걸어 보기로 했다. 그러나 다
른 사람이 전화를 쓰고 있었다. 상담소에는 전화선이 두 개였는데, 일하는 사람은 넷이었던
것이다.
19
상담소에서 첫날을 마쳤을 때, 서둘러 퇴근을 하고 싶은 마음은 아니었다. 집이라고 해보
았자 텅 빈 다락방이었으며, 사마리아인의 집의 비좁은 방 세 개를 합친 것만한 크기일 뿐
이었다. 침실에는 침대도 없었고, 거실에는 케이블이 연결되지 않은 텔리비전 한 대뿐이었
고, 부엌에는 카드 탁자 하나에 냉장고도 없었다. 집에 가구를 들여 놓고 꾸밀 계획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멀고 모호한 계획일 뿐이었다.
소피아는 정간 5시에 퇴근했다. 그녀의 정상적인 퇴근 시간이었다. 그녀가 사는 동네는 거
칠었기 때문에, 소피아는 어두워지면 문을 잠가 놓고 집 안에 틀어박혀 있고 싶어했다. 모디
카이는 하루 일을 놓고 30분 동안 나와 이야기를 한 뒤에 6시쯤 떠났다. 너무 늦게까지 있
지 마시오. 가능하면 짝을 지어 퇴근하고, 모디카이가 주의를 주었다. 모디카이가 확인해 보
니, 에이브러험 리보는 9시까지 일을 할 계획이었다. 모디카이는 우리 둘이 함께 퇴근하라고
했다. 사무실 가까이 주차를 해라, 빨리 걸어라. 모든 것을 주의 깊게 살펴라.
"자, 하루가 어땠소?"
모디카이는 나가는 길에 문간에 멈추어 서서 물었다.
"흥미진진했습니다. 사람들과 만나니 기운이 나는군요."
"하지만 가끔은 상심도 할 거요."
"이미 상심한 상태입니다."
"좋소. 만일 어떤 일이 생겨도 상심하지 않는 지점에 이르면, 그때가 그만둘 때요."
"이제 막 시작한 사람한테 무슨."
"알아. 그리고 당신이 있으니 좋소. 그 동안 여기에도 워스프(WASP, 앵글로색슨계 백인
신교도, 미국 사회의 주류:옮긴이)가 한 사람쯤 필요했거든."
"그렇다면 내가 그 대표가 되어서 영광입니다."
모디카이는 나갔고, 나는 문을 다시 닫았다. 나도 이곳에 사무실 문을 열어 놓고 일을 하
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피아는 아예 트인 공간에서 일을 했다.
사실 나 역시 오후 내내 그녀가 전화에 대고 상담소 전체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큰소리로
관료들을 혼내는 것을 보며 즐거워하기도 했다. 모디카이 역시 전화기를 들면 짐승이 되었
다. 그는 귀에 거슬리는 저음으로 으르렁거리면서 온갖 요구와 지저분한 협박을 했다. 에이
브러험은 훨씬 조용한 편이었지만, 그의 문도 늘 열려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 이곳 형편을 잘 헤아리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문을 닫아 두는 쪽을
택했다. 다른 사람들도 그 정도 인내심은 가져 줄 터였다.
나는 전화번호부에 있는 세 사람의 헥터 팔머에게 전화를 했다. 첫 번째 사람은 내가 원
하는 헥터가 아니었다. 두 번째 번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세 번째 번호가 진짜 헥터 팔머
의 음성 메일이었다. 목소리는 퉁명스러웠다. 우리는 집에 없습니다. 메시지를 남겨 주십시
오. 나중에 전화를 드리겠습니다.
그의 목소리였다.
드레이크 & 스위니는 무한한 자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헥터 팔머를 감추어 둘 방법
과 장소도 많을 터였다. 8백 명의 변호사, 170명의 사무직원, 워싱턴, 뉴욕, 시카고, 로스앤젤
레스, 포틀랜드, 팜비치, 런던, 홍콩의 사무소. 똑똑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헥터를 해고하지
는 않았을 것이다. 헥터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따라서 그의 보수를 두 배로 올
려 주고, 승진을 시키고, 다른 도시에 있는 지사로 보내면서 널찍한 아파트도 얻어 주었을
것이다.
나는 전화번호부에서 그의 주소를 옮겨 적었다. 음성 메일이 여전히 돌아가고 있는 것을
보면, 아직 이사를 한 것 같지는 않았다. 새로 배우고 있는 거리의 상식으로도 충분히 그를
추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볍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두드릴 때와 마찬가지로 갑자기 문이 열렸다. 문의 나
사와 손잡이는 낡고 헐거워, 닫히기는 했지만 꽉 물리지는 않았다. 에이브러험이었다.
"시간 좀 있어요?"
에이브러험은 의자에 앉았다.
의례적인 방문이었다. 인사를 하자고 들른 것이다. 그는 조용하고 초연해 보이는 사람으
로, 매우 총명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지난 7년간 온갖 종류의 변호사들이 4백 명씩이나 득실
대는 건물에서 일한 경험이 없었다면, 아마 기가 죽었을 것이다. 나는 그 7년 동안 에이브러
험 같은 사람을 여남은 몇 만났고 또 알고 지냈다. 사교적 기술에는 별관심 없는, 초연하고
진지한 사람들이었다.
"이곳에 온 것을 환영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더니 곧장 공익법을 정열적으로 옹호하기 시작했다. 그는 브루클린의 중간 계급 신이
었다. 콜럼비아 법대를 나왔으며, 월 스트리트의 어떤 법률 회사에서 끔찍한 3년을 보냈고,
애틀랜타의 사형 반대 그룹에서 4년을 보냈고, 의사당에서 좌절에 찬 2년을 보냈다. 그러다
어떤 변호사 잡지에서 14번가 법률 상담소에서 변호사를 구한다는 광고를 보게 되었다.
"법이란 높은 수준의 소명입니다. 돈을 버는 것 이상의 일이죠."
이어 에이브러험은 다시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커다란 법률 회사와 그곳에서 수임료로
수백만을 긁어 모으는 변호사들에 대한 긴 탄핵 연설이었다. 그의 브루클린 친구 하나는 동
해안에서 서해안을 넘나들며 유방 이식 회사들만 고소하면서 1년에 천만을 번다고 했다.
"1년에 천만이라니! 그 돈이면 워싱턴의 모든 노숙자들에게 잘 곳과 먹을 것을 줄 수 있
는데!"
어쨌든 에이브러험은 내가 광명을 찾은 것에 기뻐하였으며, 형씨와 있었던 일을 안타깝게
여겼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죠?"
내가 물었다. 그와 이야기하는 것은 즐거웠다. 그는 불 같은 성격이면서 머리가 좋았다.
게다가 그 방대한 어휘 구사력에는 기가 죽을 정도였다.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정책. 나는 다른 변호사들과 협조하여 소송을 만들어 가고 있어
요. 또 소송을 직접 지휘하기도 하죠. 보통은 집단 소송이지만. 우리는 상무부에 소송을 걸
었습니다. 90년도의 센서스에서 노숙자들이 제대로 조사되지 않았기 때문이죠. 또 워싱턴 교
육위원회에 소송을 걸었습니다. 노숙자 자녀들의 입학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또 집단 소송
도 하나 제기해 놓았습니다. 워싱턴에서 적당한 절차 없이 부당하게 수천 채의 주택에 대한
지원을 끝내 버렸기 때문이죠. 그리고 노숙자들을 범죄자로 만들려고 하는 수많은 법 조항
들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노숙자들이 부당한 일을 당하면 어떤 것이라도 소송의 대상이 됩
니다."
"그거 복잡한 소송이겠군요."
"그렇죠. 하지만 다행히도 이곳 워싱턴에서는 기꺼이 자신의 시간을 기부하고자 하는 유
능한 변호사들이 아주 많아요. 나는 감독이죠. 계획을 짜고, 팀을 모아, 시합을 하는 거죠."
"의뢰인은 직접 만나지 않나요?"
"가끔은. 하지만 나는 저기 내 작은 방에 혼자 있을 때 일을 가장 잘할 수 있어요. 그래서
당신 이곳에 온 것을 내가 기뻐하는 거죠. 엄청난 일의 교통 정리를 하는 데 도움이 필요하
니까."
에이브러험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대화가 끝난 것이다. 우리는 정각 9시에 퇴
근을 하기로 했다. 에이브러험은 자기 방으로 갔다. 그가 연설을 하던 도중, 나는 그의 손가
락에 결혼 반지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법이 그의 인생이었다. 법은 질투심 강한 애인이라는 오래된 격언이 에이브러험이나 나
같은 사람들에 의해 새로운 수준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셈이었다.
우리가 가진 것은 법밖에 없었다.
워싱턴 경찰은 거의 새벽 1시까지 기다렸다가, 특공대처럼 들이닥쳤다. 그들은 초인종을
누르고, 거의 동시에 주먹으로 문을 두드려 대기 시작했다. 클레어가 잠을 깨고, 침대에서
나와 잠옷 위에 옷을 걸쳤을 때, 그들은 문을 걷어차며 당장이라도 부수고 들어올 태세였다.
"경찰이오!"
클레어가 겁에 질려 묻자 그들은 그렇게 대답했다. 클레어는 천천히 문을 열고, 겁에 질려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네 명―두 명은 정복 차림이었고, 두 명은 양복을 입고 있었다―이
마치 사람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기라도 한 것처럼 뛰어들었다.
"뒤로 물러서!"
한 사람이 소리쳤다. 클레어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뒤로 물러서라니까!"
그가 다시 고함을 질렀다.
그들은 문을 쾅 닫았다. 그들 가운데 우두머리인, 싸구려 양복 차림의 개스코 경위가 한
걸음 앞으로 나오더니 빠른 동작으로 호주머니에서 접힌 서류를 꺼내 들었다.
"당신이 클레어 브록이오?"
웃기지도 않게 콜럼보 흉내를 내고 있는 것 같았다.
클레어는 멍하니 입을 벌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난 개스코 경위요. 마이클 브록은 어디 있소?"
"이제 여기 살지 않아요."
클레어는 간신히 그 말을 중얼거렸다. 다른 세 명은 근처에서 웅크린 채, 뭐가 나타나기만
하면 당장이라도 달려들 태세였다.
개스코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체포 영장은 없었고, 수색 영장만
있었다.
"여기 이 아파트에 대한 수색 영장이 있소. 키스너 판사가 오후 5시 반에 서명한 거요."
개스코는 서류를 펼쳐 클레어에게 보여 주었다. 누구라도 한 순간에 그 작은 활자를 읽고
뜻을 이해할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옆으로 비켜 주시오."
클레어는 뒤로 더 물러났다.
"뭘 찾는 거죠?"
클레어가 물었다.
"영장에 다 나와 있소."
개스코는 영장을 부엌 카운터에 던졌다. 네 명의 경찰관들은 부채꼴로 흩어져 아파트 곳
곳으로 들어갔다.
휴대 전화는 내 머리맡에 있었다. 나는 바닥에 침낭을 펴고 베개를 베고 자고 있었다. 사
흘째 이런 식으로 바닥에서 자고 있었다. 내 새로운 의뢰인들의 고통에 동참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먹는 것도 줄였고, 잠도 더 줄였다. 공원 벤치나 보도의 맛을 조금이라도 보려
는 것이었다. 여전히 몸의 왼쪽은 무릎까지 자주색이었다. 몹시 쓰라리고 아팠다. 그래서 오
른쪽으로 누워 잘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정도면 적은 대가라고 할 수 있었다. 나에게는 지붕, 난방, 잠긴 문, 일자리, 내
일 먹을 것에 대한 보장, 미래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휴대 전화를 더듬어 찾아서 말했다.
"여보세요."
"마이클!"
클레어가 작은 목소리로 날카롭게 불렀다.
"경찰이 아파트를 수색하고 있어."
"뭐?"
"지금 와 있단 말이야. 네 명이야. 수색 영장도 들고 있어."
"뭘 찾으러 왔대?"
"무슨 파일을 찾고 있어."
"10분 뒤에 갈게."
"서둘러."
나는 마친 사람처럼 아파트로 뛰쳐들어갔다. 공교롭게도 내가 처음 만난 경찰관이 개스코
였다.
"난 마이클 브록이오. 당신은 대체 누구요?"
"개스코 경위요."
개스코가 조롱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신분증 좀 봅시다."
나는 클레어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손에 커피를 들고 냉장고에 기대 있었다. 나는 그녀를
향해 말을 이었다.
"종이 한 장만 가져와."
개스코는 코트 호주머니에서 배지를 꺼내 높이 쳐들었다.
"래리 개스코. 오늘 아침 9시에 당신부터 고소를 하겠소. 자, 당신과 함께 있는 사람들은
누구요?"
"세 사람이 또 있어."
클레어가 나한테 종이를 건네주며 말을 이었다.
"침실에 들어가 있는 것 같아."
나는 아파트 뒤쪽으로 갔다. 개스코가 내 뒤를 따랐고, 클레어도 그 뒤 어디쯤엔가에서 따
라오고 있는 것 같았다. 손님 침실에서 사복을 입은 형사 한 명이 엎드려 침대 밑을 살피고
있었다.
"신분증 좀 봅시다."
내가 고함을 질렀다. 형사는 버둥거리며 일어서더니, 당장 싸움이라도 할 태세였다. 나는
한 걸음 더 다가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신분증 내놔, 임마."
"넌 누구야?"
형사는 뒤로 물러서면서 개스코를 보았다.
"마이클 브록이다. 넌 누구야?"
형사는 배지를 꺼냈다.
"대럴 클라크."
나는 큰소리로 외치면서 이름을 적었다. 내가 다시 소리쳤다.
"피고 2번."
"나한테 어떻게 소송을 걸어?"
"내 말 잘 들어. 8시간 뒤, 연방 법원에서 불법 수색으로 너희들한테 백만 달러짜리 소송
을 걸 거야. 난 거기서 승소 판결을 받아낼 거야. 그리고 나서 너희가 파산 신청을 할 때까
지 사냥개처럼 너희를 쫓아다닐 거야."
다른 두 경찰관이 내 예전의 침실에서 나타났다. 나는 경찰에 둘러싸였다.
"클레어."
내가 말을 이었다.
"가서 비디오 카메라 좀 가져와. 이걸 녹화해 두어야겠어."
클레어는 거실로 사라졌다.
"여기 판사가 서명한 영장이 있소."
개스코가 약간 방어적으로 나왔다. 나머지 세 명은 나를 둘러싼 원을 좁히기 위해 바짝
다가섰다.
"이 수색은 불법이오."
나는 악에 받쳐 내뱉고는 말을 이었다.
"영장에 서명한 사람들도 고소할 거요. 당신들 하나하나도 고소할 거고. 당신들은 휴가를
받게 될 거요. 아마 무급이겠지. 그리고 민사 소송에 걸려들게 될 거요."
"우리한테는 면책특권이 있소."
개스코가 동료들을 흘끔거리며 말했다.
"웃기는 소리."
클레어가 카메라를 들고 들어왔다.
"내가 여기 살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했어?"
내가 클레어에게 물었다.
"했어."
클레어는 대답하면서 카메라를 눈으로 들어올렸다.
"그런데도 수색을 계속했다 이거지? 그 순간부터 이건 불법이 된 거야. 당신들은 거기서
멈추었어야 해. 물론 그러면 재미가 없었겠지? 다른 사람들의 개인 소지품을 뒤져보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 일인데 말이야. 당신들한테는 기회가 있었는데도 그걸 날려 버렸어. 이제
그 대가를 치러야 해."
"이거 미쳤군."
개스코가 말했다. 그들은 두려움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으나, 내가 변호사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아파트에 들어왔을 때 내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따라서 내가 한 이
야기가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들었을 것이다. 사실 나 스스로는 잘 몰랐다. 그러나 그 순간에
는 그 말이 멋있게 들렸다.
말하지만 나는 아주 얇은 법의 얼음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고 있는 셈이었다.
나는 개스코의 말을 무시했다.
"이름 좀 말해 주시오."
나는 두 정복 경찰관에게 말했다. 두 사람은 배지를 보여 주었다. 랠프 릴리와 로버트 브
로어였다.
"고맙소."
나는 정말 뺀질뺀질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당신들은 피고 3번과 4번이 될 거요. 자, 이제 떠나 주시오."
"파일은 어디 있소?"
개스코가 물었다.
"나는 여기 살지 않기 때문에 파일은 여기 없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당신들은 고소를
당하는 거요, 개스코 경위."
"고소야 늘 당하는 거니까, 대수롭지 않은 일이요."
"멋지군. 당신 변호사가 누구요?"
그 핵심적인 순간에 개스코는 누구의 이름도 대지 못했다. 나는 서재로 걸어갔고, 그들도
머뭇머뭇 따라왔다.
내가 말했다.
"가시오. 파일은 여기 없소."
클레어는 계속 비디오를 찍고 있었는데, 이것 때문에 경찰은 최대한 입을 조심하고 있었
다. 그들은 느릿느릿 문 쪽으로 갔다. 블로어가 변호사에 대해 뭐라고 중얼거렸다.
그들이 간 다음에 영장을 읽어 보았다. 클레어는 부엌 탁자에서 커피를 마시며 나를 지켜
보고 있었다. 수색으로 인한 충격은 강도가 약해지고 있었다. 클레어는 다시 차분해졌다. 얼
음장 같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녀는 겁을 먹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약한 모습
은 조금도 보여 주려 하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든 나를 필요로 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
하는 것 같았다.
"파일에 뭐가 있어?"
클레어가 물었다. 그러나 진짜로 알고 싶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클레어가 원하는 것은 이
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이었다.
"이야기가 길어."
다시 말해서, 묻지 말라는 뜻이었다. 클레어는 그 말을 이해했다.
"정말로 경찰관들을 고소할 거야?"
"아니. 고소할 근거가 없어. 그냥 쫓아버리고 싶었을 뿐이야."
"어쨌든 효과가 있었군. 다시 올까?"
"아니."
"다행이군."
수색 영장을 접어 호주머니에 집에 넣었다. 영장에는 오직 한 가지 항목밖에 없었다―리
버오크스/태그 파일. 지금 그 파일은 내 새 아파트 벽 속에 사본 한 부와 함께 잘 감추어져
있었다.
"그 사람들한테 내가 어디 사는지 이야기했어?"
내가 물었다.
"난 당신이 어디 사는지 몰라."
이어 잠시 정적이 흘렀다. 내가 어디 사느냐고 물어보는 것이 어울리는 타이밍이었다. 그
러나 클레어는 불어보지 않았다.
"이런 일이 생겨서 정말 미안해, 클레어."
"괜찮아. 다시 생기지 않는다는 약속만 해줘."
"약속할게."
나는 포옹도, 입맞춤도 없이, 어떤 접촉도 없이 아파트를 나왔다. 그냥 잘 있으라는 인사
만 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클레어가 원하는 바였다.(2권에 계속)
거리의 변호사 제2권
지은이: 존 그리샴
20
화요일은 워싱턴에서 단연 가장 큰 합숙소인 '창조적 비폭력을 위한 공동체'에서 무료 변
호 일을 하는 날이었다. 이번에도 모디카이가 운전을 했다. 모디카이의 계획은 첫 일 주일
동안은 나와 동행을 하고, 그 다음부터는 내가 알아서 하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내가 배리 누조에게 했던 협박과 경고는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드레이크와 스위니는 강
하게 나올 생각인 것 같았다. 사실 놀랄 일도 아니었다. 전에 살던 아파트를 심야에 습격한
것은 앞으로 다가올 일에 대한 무례한 경고였다. 이제 모디카이에게 내가 한 행동에 대해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마자 입을 열었다.
"아내와 나는 헤어졌습니다. 내가 집을 나왔고요."
불쌍하게도 모디카이는 아침 8시에 그런 우울한 소식을 듣게 될 줄은 몰랐던 것 같다.
"안됐소."
모디타이는 나를 보다가 무단횡단을 하던 사람을 칠 뻔했다.
"괜찮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는 경찰이 내가 살던 아파트를 습격하여 나를 찾았습니
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회사를 그만둘 때 가지고 나온 파일을 찾았습니다."
"무슨 파일인데?"
"드본 하디와 론타 버튼 파일입니다."
"계속해 보시오."
"이제 다 아는 일이지만, 드본 하디는 드레이크 & 스위니가 그를 그의 집에서 내쫓았기
때문에 인질극을 벌이다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와 함께 퇴거를 당한 사람이 16명입니다. 또
아이들도 있지요. 론타와 그녀의 가족도 거기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는 내 말을 되씹더니 이윽고 대꾸를 했다.
"좁은 세상이군."
"그 버려진 창고는 리버오크스에서 체신부 시설로 사용할 계획인 부지에 있었습니다. 2천
만 달러짜리 프로젝트였죠."
"나도 그 건물을 알고 있소. 불법 점거자들이 늘 사용하던 곳이지."
"그러나 그들은 불법 점거자들이 아닙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추측이오, 아니면 뭔가를 알고 있는 거요?"
"지금은 추측입니다. 그 파일에는 나중에 누가 손을 댄 흔적이 있습니다. 어떤 서류들은
사라지고 다른 서류들이 덧붙여졌죠. 헥터 팔머라는 이름의 사무직원이 지저분한 일을 처리
했습니다. 현장을 방문하고 실제로 퇴거시키는 등의 일을 했죠. 그 사람이 나에게 진상을 이
야기해 주었습니다. 헥터는 익명으로 나에게 쪽지를 보내 퇴거 조치가 불법이었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헥터는 내가 파일을 가져올 수 있도록 열쇠도 주었습니다. 그런데 헥터는 어제
부로 이 곳 워싱턴 사무실에서 일을 하지 않습니다."
"어디로 간 거요?"
"나도 알고 싶습니다."
"그 사람이 열쇠를 준 거요?"
"직접 건네 주지는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라는 쪽지와 함께 내 책상에 두고 갔죠."
"그래서 그 열쇠를 사용했소?"
"네."
"파일을 훔쳤군?"
"훔칠 계획은 아니었습니다. 복사를 하러 상담소로 오는 길에 어떤 멍청이가 빨간불을 무
시하고 달려오는 바람에 병원으로 실려가게 된 겁니다."
"우리가 당신 차에서 찾아온 것이 그 파일이로군."
"그렇습니다. 그걸 복사해 놓고 드레이크 & 스위니에 갖다 놓을 생각이었습니다. 그랬다
면 아무도 몰랐을 겁니다."
"그게 지혜로운 행동이었는지 모르겠군."
모디카이는 나를 멍청이라고 부르고 싶었을 터이나, 우리는 아직 그 정도로 허물없는 사
이는 아니었다.
"파일에서 사라진 게 뭐요?"
나는 리버오크스가 우편물 사실을 빨리 지어야만 했던 사정을 요약해서 이야기해 주었
다.
"그 부지를 확보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심했습니다. 팔머는 처음에 창고를 갔을 때 강도를
당했습니다. 그 일이 보고서로 파일에 남아 있죠. 팔머는 경호원을 데리고 다시 갔습니다.
그러나 그 보고서는 사라졌습니다. 원래 제대로 파일에 들어가 있었던 것인데, 누가 없앤 것
입니다. 아마 브레이든 챈스 짓이겠죠."
"그 보고서에는 무슨 내용이 있는데?"
"나도 모릅니다. 하지만 내 짐작으로는, 헥터는 창고를 조사했을 뿐, 불법 점거자들이 임
시로 아파트를 만들어 놓고 살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들과 이야기를 한 뒤에, 그들이 사
실은 틸먼 갠트리에게 집세를 내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겁니다. 그들은 불법 점거자들이 아
니라 세입자들이었죠. 임대차법에 의한 모든 보호를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었던 겁니다.
그러나 이미 철거 계획이 잡혀 있었고, 건물에 대한 계약을 마무리지어야 했습니다. 겐트리
는 그 거래를 위해서라면 살인이라도 했을 겁니다. 그래서 그 보고서는 무시되고, 사람들은
퇴거당했던 것입니다."
"17명이 있다고 했지?"
"네. 아이들도 있었고요."
"그 사람들 이름을 아시오?"
"네. 누가 나에게 명단을 주었습니다. 아마 팔머였겠죠. 내 책상 위에 놓고 갔습니다. 그
사람들을 찾을 수 있다면 목격자들을 확보하는 셈입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그들은 갠트리에게 겁을 집어먹고 있을 가능성이 높군. 그는 힘깨나 쓰
는 자요. 자신을 영화의 대부 같은 존재로 생각하고 있지. 그가 입을 다물라고 하면 입을 다
물어야 하오. 아니면 강에서 시체로 발견되니까."
"설마 그자를 무서워하는 건 아니겠죠, 모디카이? 어서 그자를 찾아내 다그쳐 봅시다. 결
국 모두 이야기를 하고야 말 겁니다."
"거리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사람처럼 말하는군그래. 이거 내가 멍청이를 고용했나봐."
"그자는 우리를 보면 도망갈 겁니다."
이번에는 유머가 먹혀들지 않았다. 팬은 최대 속도로 돌아가고 있었지만, 히터에서는 열기
가 나오지 않았다. 차 안은 몹시 추웠다.
"갠트리가 그 건물 건으로 얼마를 얻게 되오?"
모디카이가 물었다.
"20만입니다. 그자는 그 건물을 여섯달 전에 샀습니다. 얼마를 주고 샀는지는 파일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누구한테서 산 거요?"
"시에서요. 버려진 건물이었죠."
"아마 5천원을 주었을 거요. 기껏해야 1만을 주었을 테고."
"장사를 잘하는군요."
"잘하지. 갠트리는 그 장사를 통해 한 계단 올라간 거요. 그자는 조무래기였소. 연립주택
이나 세차장이나 식료품점 같은 소규모 물건들을 거래하던 자인데."
"왜 그자가 창고를 사서 그것을 싸구려 아파트로 임대했을까요?"
"현금 때문이겠지. 그자가 5천을 주고 그것을 사서, 다시 천을 들여 벽 몇 개를 세우고,
화장실 두어 개를 지었다 치자고. 이제 전등만 달아 놓으면 장사는 되는 거요. 소문이 퍼지
고, 임대자들이 나타나지. 임대자들에게는 월 백 달러, 그것도 현금으로만 받는 거요. 어차피
그의 손님들은 서류에는 관심이 없소. 그자는 그곳을 지저분하게 유지해서, 시에서 오면 그
들이 불법 점거자들이라고 말하면 그만이오. 그들을 쫒아 버리겠다고 약속을 하지만, 그럴
계획은 없지. 이 근처에서는 늘 일어나는 일이오. 규제를 받지 않는 주택 임대업이지."
왜 시에서 개입하여 법을 집행하지 않느냐고 물을 뻔했으나, 다행히도 입을 다물 수 있었
다. 그 답은 헤아리거나 피하기에는 너무 많은, 도로의 파인 곳에 있었다. 삼분의 일은 몰고
다니기에 위험할 정도인 경찰차들에 있었다. 지붕이 주저앉는 학교 건물에 있었다. 조그만
병실에 환자들을 쑤셔넣는 병원에 있었다. 잠잘 곳을 찾지 못하는 5백 명의 집 없는 어머니
와 아이들에 있었다. 시는 그냥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거리의 사람들을 착취하는 불법 임대업자는 우선 순위에서 밀릴 수밖에 없
었다.
"헥터 팔머는 어떻게 찾을 거요?"
모디카이가 물었다.
"회사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기 때문에 그를 해고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회사에는 지사가
일곱 개 더 있는데, 아마 그 가운데 어디에 숨겨 놓았을 겁니다. 내가 찾아내겠습니다."
우리는 도심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모디카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층층이 쌓여 있는 저 트레일러들 보이지? 저게 마운트 버논 광장이오."
광장은 도시의 한 블록의 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담장이 높아 밖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았
다. 트레일러들은 형태와 길이가 다 달랐다. 어떤 것들은 매우 낡았는데, 어쨌든 모두 고물
이었다.
"저것이 이 도시에서 가장 나쁜 합숙소요. 저것들은 낡은 우편 트레일러들인데, 정부가 워
싱턴에 준 거요. 워싱턴 시는 똑똑하게도 거기에 노숙자들을 집어 넣을 생각을 했소. 노숙자
들은 캔에 든 정어리들처럼 저 안에 빽빽하게 들어가 있소."
2번가와 D스트리트가 만나는 곳에서 모디카이는 긴 3층짜리 건물을 가리켰다. 1천3백명이
살고 있는 건물이었다.
창조적 비폭력을 위한 공동체는 70년대 초 정부를 괴롭히기 위해 워싱턴에 모인 어떤 시
위자 그룹이 세운 것이다. 그들은 북서부의 한 집에서 함께 살았다. 그들은 의사당 주변에서
시위를 하다가, 집없이 살아가는 베트남전 참전 용사들을 만나, 그들을 집으로 데려오기 시
작했다. 그들은 의사당 주변에서 시위를 하다가, 집없이 살아가는 베트남전 참전 용사들을
만나, 그들을 집으로 데려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도시 이곳저곳이 더 큰 숙소로 옮겨갔다.
그 숫자는 점점 늘어났다. 전쟁이 끝난 뒤 그들은 워싱턴의 노숙자들의 곤경에 관심을 돌렷
다. 80년대 초에는 미치 스나이더라는 활동가가 나타나 거리의 사람들을 정열적으로 또 시
끄럽게 대변하게 되었다.
창조적 비폭력을 위한 공동체는 버려진 전문학교를 하나 발견했다. 연방 정부의 돈으로
세워지고, 여전히 정부에서 소유하고 있는 곳이었다. 그들은 6백 명의 불법 점거자들과 함께
그곳을 침입했다. 그곳은 그들의 본부이자 집이 되었다. 정부에서는 그들을 쫓아내려고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였으나 다 소용이 없었다. 1984년 스나이더는 노숙자들의 비참한 생활에
관심을 끌기 위해 51일간 단식 투쟁을 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두 번째 임기를 위한 선거를
한 달 앞두고, 대담하게도 그곳을 노숙자들을 위한 모범적인 합숙소로 바꾸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스나이더는 단식을 끝냈다. 모두 행복해했다. 선거 후 레이건은 약속을 어겼다. 이
어 온갖 종류의 지저분한 소송들이 뒤따랐다.
1989년, 시는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남동부에 합숙소를 지었다. 그리고 창조적 비폭력을
위한 공동체의 노숙자들을 이주시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시는 노숙자들이 무척 고집이
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떠나고 싶어하지 않았다. 스나이더는 창문을 널빤지로 막
고, 포위공격에 대비하겠다고 선언했다. 소문들이 난무했다. 그 안에 8백명의 노숙자들이 있
다, 무기를 잔뜩 쌓아 놓았다, 전쟁이 벌어질 것이다.
시는 시한을 강제하지 않고 평화로운 해결책을 찾으려 했다. 창조적 비폭력을 위한 공동
체는 1,300개의 침대를 보유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미치 스나이더는 1990년에 자살을 했
다. 시에서는 어떤 거리에 그의 이름을 붙여 주었다.
우리는 8시 반이 다 되어 도착했다. 입주자들이 나갈 시간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가지고 있었고, 대부분은 어쨌든 밖으로 나가고 싶어하였다. 정문에서는 백여 명의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며, 밤에 따뜻하게 쉰 뒤의 추운 아침 이야기를 행복하게 하고 있었다.
1층의 문 안에서 모디카이는 유리 칸막이 안에 있는 감독과 이야기를 했다. 모디카이는
서명을 했고, 우리는 로비를 가로질러, 서둘러 건물을 나서는 사람들의 떼를 뚫고 지나갔다.
내가 백인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않으려 했으나,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상당히 옷을 잘 입
은 편이었으며, 재킷에 타이까지 매고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줄곧 유복하게 살아온 사람이
었다. 그러나 이제 검은 바다로 떠내려온 것이다. 이 젊은이들은 거리의 거친 남자들로, 대
부분이 범죄 전과를 가지고 있었으며, 대부분이 호주머니에 3달러 이상을 가지고 있지 못했
다. 누구라도 내 목을 부러뜨리고 내 지갑을 가져갈 것 같았다. 나는 눈이 마주치는 것을 피
하면서, 바닥만 노려보며 걸었다. 우리는 상담실 옆에서 기다렸다.
"무기와 마약을 소지했다가는 평생 이곳에 다시는 못 들어오게 되지."
모디카이가 말했다. 우리는 계단을 따라 흘러내려오는 사람들의 물결을 지켜보고 있었다.
약간 마음이 편해지는 느낌이었다.
"이곳에서 초초함을 느껴 본 적이 없나요?"
내가 물었다.
"익숙해지게 돼."
모디카이로서야 그렇게 말하는 것이 쉽지. 그야 여기 있는 사람들과 통하는 사람이니까.
문 옆의 서류판에는 법률 상담소를 위한 지원자들이 이름을 적는 종이가 붙어 있었다. 모
디카이는 서류판을 집어들었다. 우리는 의뢰인들의 이름을 살폈다. 지금까지 13명이었다.
"평균보다 조금 못하네."
모디카이가 말했다. 열쇠가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모디카이는 설명을 해주었다.
"저기 있는게 우체국이오. 이 일에서 짜증이 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우리 의뢰인들과 연
락을 유지하는 거요. 주소가 일정치 않으니까 문제가 되지. 그래서 좋은 합숙소에서는 우편
물을 보내고 받을 수 있게 해주고 있소."
모디카이는 문 근처의 다른 방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곳을 옷을 두는 방이오. 이곳에서는 매주 새로운 사람들을 3,40명 받아들이고 있소. 새
로 온 사람이 맨 먼저 하는 일이 신체 검사요. 현재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폐결핵이오. 두
번째 단계는 저기에 가서 세 가지 옷을 고르는 것이오. 속옷, 양말, 모두 다 있소. 한달에 한
번씩 다시 와서 한 벌을 다 가져살 수 있소. 따라서 연말이 되면 훌륭한 옷장이 생기는 셈
이지. 이 옷들은 괜찮은 것들이오. 사실 이곳에서는 옷을 너무 많이 기부 받아 다 처리하지
도 못할 정도이지."
"기간은 1년입니까?"
"그렇소. 이곳에서는 1년이 지나면 내쫓소. 처음에는 심하게 느껴질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렇지 않소. 이곳의 목표는 자급자족이오. 어떤 사람이 이곳에 들어오면 자기에게 시간이
12달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오. 그 안에 몸을 단정히 하고, 술기운을 없애고, 기술을 배우
고, 일자리를 찾아야 하는 거지. 대부분은 1년이 안 되어 나가게 되오. 극히 일부이긴 하지
만, 영원히 이곳에 있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지."
어니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가 큼직막한 열쇠고리를 들고 왔다. 그는 상담실의 문을 열어
주더닌 사람졌다. 우리는 상담소를 설치하고, 조언을 해줄 준비를 갖추었다. 모디카이는 서
류관을 들고 문으로 가서, 맨 위에 있는 이름을 불렀다.
"루서 윌리엄스."
루서는 문으로 간신히 들어올 수 있을 정도로 몸집이 컸다. 우리 건너편에 앉을 때는 의
자가 튀어나갈 뻔했다. 녹색 작업복에 하얀 양말, 그리고 오렌지색 고무 샤워 샌달 차림이었
다. 그는 펜타곤의 보일러실에서 야간 작업을 했다. 그런데 그의 여자친구가 집을 나가면서
모든 것을 가져가 버렸다. 이어 빚이 늘어갔다. 아파트에서도 나와야 했다. 그는 합숙소에
있는 것을 창피해하고 있었다.
"숨쉴 여유가 필요해요."
루서가 말했다. 나는 그가 안됐다고 생각했다.
루서에게는 청구서들이 잔뜩 밀려 있었다. 신용카드 회사에서 그를 쫓아다니고 있었다. 지
금은 창조적 비폭력을 위한 공동체에 숨어 있는 셈이었다.
"파산 신청을 합시다."
모디카이가 나에게 말했다. 나는 파산 신청을 어떻게 하는지 몰랐다. 그래서 얼굴을 찌푸
리고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루서는 기뻐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20분 동안 양식에 기록을
했고, 루서는 기쁜 표정으로 방을 나갔다.
다음 의뢰인은 토미였다. 그는 우아한 동작으로 방 안으로 들어와 손을 내밀었다. 손톱에
는 밝은 빨간색 매니큐어가 칠해져 있었다. 나는 악수를 했다. 모디카이는 하지 않았다. 토
미는 마약 중독자 갱생 시설에 다니고 있었다. 크렉과 헤로인 때문이었다. 어쨌든 밀린 세금
을 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문제였다. 그는 3년 동안 세금 신고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
기 국세청에서 자신의 실수를 발견한 것이다. 그는 또 자녀 양육비도 2천 달러 밀려 있었다.
나는 그가 어떤 종류가 되었든 아버지라는 것을 알고 안심했다. 갱생 시설에서는 강도 높은
프로그램을 시행하기 때문에-일 주일에 이레였다-상근직을 구할 수가 없었다.
"자녀 부양비에 대해서는 파산 신청을 할 수 없소. 세금도 마찬가지요."
모디카이가 말했다.
"나는 갱생 프로그램 때문에 일을 할 수가 없어요. 또 거기에 안 다니면 나는 다시 마약
을 하게 될 겁니다. 일도 못하고 파산 신청도 못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무것도 못하지. 갱생 프로그램을 끝내고 일자리를 얻을 때까지는 걱정을 미루어 두시
오. 그리고 나서 여기 마이클 브록에게 전화를 하시오."
토미는 웃음을 지으며 나에게 눈을 찡긋했다. 이어 둥둥 떠 다니는 듯한 걸음으로 방에서
나갔다.
"저자가 당신이 마음에 드는 것 같은데."
모디카이가 말했다.
어니가 다시 지원자 명단을 가져왔는데, 거기에는 11명의 이름이 있었다. 문 밖에는 줄이
만들어졌다. 우리는 분리 전략을 쓰기로 했다. 나는 방의 맞은편으로 갔다. 모디카이는 있던
자리에 그대로 남았다. 우리는 한 번에 두 명씩 면담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처음 만난 사람은 마약 혐의가 걸린 젊은 남자였다. 나는 상담소로 돌아가 모디카이
에게 다시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받아 적었다.
다음 순서에서 나는 충격을 받았다. 백인이었기 때문이다. 마흔 가량이었는데, 문신도 없
었고, 얼굴에 상처 자국도 없었고, 이가 빠지지도 않았고, 귀걸이도 없었고, 눈도 충혈되지
않았고, 코 끝이 빨갛지도 않았다. 턱수염은 일 주일 정도 자랐고, 머리는 한 달 전쯤에 빡
빡 밀었다. 악수를 할 때 그의 손이 부드럽고 촉촉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이름은
폴 펠햄이었으며, 합숙소에 3달 동안 있었다. 그는 과거에 의사였다.
마약, 이혼, 파산, 면허 취소 등이 이제는 모두 다리 밑으로 흘러간 물이었다. 최근의 일이
지만 빠르게 희미해지고 있었다. 그는 그저 이야기를 할 사람을 원하고 있었다. 하얀 얼굴을
가진 사람이면 더 좋고, 이따금씩 펠햄은 탁자 아래쪽 모디카이를 두려운 눈길로 흘끔거렸
다.
펠햄은 펜실베니아주 스크랜턴에서 잘 나가는 부인과 의사였다. 큰 집에, 메르세데스, 예
쁜 부인, 두 자녀, 그러나 처음에는 발륨(valium)을 남용했다. 이어 더 강한 약에 중독이 되
었다. 이어 그는 코카인의 즐거움을 이따금씩 맛보기 시작했고, 더불어 그의 병원의 여러 ㅓ
간호사들의 살도 맛보기 시작했다. 또한 그는 부동산업에도 손을 대어 택지 개발을 하면서
많은 은행 융자를 받았다. 그러다 평범한 분만 도중에 아기를 떨어뜨리는 일이 생겼다. 아기
는 죽고 말았다. 아기의 아버지는 존경받는 장관이었는데, 그 사고를 목격했다. 그 바람에
소송의 수모를 겪게 되었다. 그 결과 약에 더 의존하게 되었고, 간호사들에게도 더 탐닉하게
되었다. 모든 것이 무너졌다. 그는 환자에게서 헤르페스(herpes)가 옮았고, 그것을 부인에게
감염시켰다. 그러자 부인은 모든 것을 가지고 플로리다로 이사해 버렸다.
나는 그의 이야기에 빠져 버렸다. 나는 노숙자 변호사로서 짧은 시간을 보내면서, 그때까
지 만나게 된 모든 의뢰인들에게서 그들이 결국 거리에 나앉게 된 슬픈 이야기들을 자세히
듣고 싶어하였다. 나는 그런 일이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을 원했던 것이다. 나
의 계급에 속한 사람들은 그런 불행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보장을.
내가 펠햄의 이야기에 빨려들었던 것은, 의뢰인을 보면서 처음으로, 그래, 어쩌면 이게 내
모습일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운명이란 마음만 먹으면 교묘한 방법으로
누구라도 자빠뜨릴 수 있는 것이다. 펠햄은 그 이야기를 몹시 하고 싶어하였다.
펠햄은 그것이 그리 먼 과거의 일이 아니라는 암시도 했다. 한참을 듣고 나서, 막 왜 변호
사가 필요한 것이냐고 물으려고 했을 때, 그가 말했다.
"파산 과정에서 숨겨 놓은 게 좀 있습니다."
모디카이는 계속 의뢰인들을 갈아치우고 있는 동안 백인 둘이 앉아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
누는 꼴이 이상하게 보일 것 같아, 나는 다시 메모를 하기 시작했다.
"어떤거죠?"
"내 파산 변호사는 부정직했죠."
이어 그는 은행이 너무 일찍 저당을 처분해 버리는 바람에 자신이 파멸을 당했다는 이야
기를 길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나지막했다. 펠햄은 모디카이가 이쪽
을 흘끔거릴 때마다 말을 멈추곤 했다.
"그리고 또 있습니다."
펠햄이 말했다.
"뭡니까?"
"이건 비밀입니다, 알았습니까? 그러니까, 난 이제까지 많은 변호사들을 이용했는데, 늘
돈을 주었다는 겁니다. 비밀을 보장받기 위해서였죠. 내가 변호사들에게 얼마나 많은 돈을
썼는지 아무도 모를 겁니다."
"우리의 이야기는 비밀이 철저하게 보장됩니다."
나는 진지하게 말했다. 비록 무료로 일을 하기는 했지만, 수입료를 주고 안 주고는 변호사
와 의뢰인 사이의 특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이었다.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됩니다."
"한 마디도 안하겠습니다."
순간 워싱턴의 노숙자 합숙소에서 다른 천삼백 명의 사람들과 함께 산다는 것은 숨기에는
아주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펠햄은 내 대답에 만족한 것 같았다. 그는 더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한창 잘 나갈 때 나는 아내가 다른 남자를 만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 환
자가 이야기를 해주었죠. 여자가 벌거벗고 진찰을 받을 때는 무슨 이야기든 다 해주거든요.
나는 망연자실했습니다. 그래서 사립탑정을 고용했죠. 아니나 다를까, 그 이야기는 사실이었
습니다. 그 남자는, 글쎄요, 어느 날 사라져 버렸다고 해둡시다."
펠햄은 말을 끊고 내 대꾸를 기다렸다.
"사라져 버렸다고요?"
"네. 그 이후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죽은 건가요?"
정신이 멍했다. 펠햄은 약간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있는지는 압니까?"
다시 고개를 끄덕.
"그게 언제 일입니까?"
"4년 전."
이야기를 받아 적는 내 손은 떨리고 있었다.
펠햄은 몸을 앞으로 숙이더니 속삭였다.
"그는 FBI요원이었습니다. 마누라의 대학 시절 남자 친구였죠. 펜실베니아 주립대 말입니
다."
"참 나."
그가 진실을 말하는 것이라고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들이 나를 쫓고 있어요."
"누가요?"
"FBI가. 지금까지 4년 동안 쫓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모르겠어요. 그들과 거래를 할 수도 있겠죠. 난 누가 내 뒤를 밟는 것에 지쳤습니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잠시 분석해 보았다. 모디카이는 한 의뢰인과 이야기를 끝내고 다른
의뢰인을 부르고 있었다. 펠햄은 모디카이의 모든 동작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내가 말했다.
"정보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 요원 이름을 압니까?"
"네. 그자가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도 압니다."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도 알고요?"
"그럼요."
펠햄은 메모나 서류 같은 것은 들고 있지 않았다.
"내 사무실로 오는 게 어떻겠습니까? 정보를 가지고요. 거기서 이야기하죠."
"생각 좀 해봅시다."
펠햄은 손목시계를 보았다. 그는 자신이 교회에서 파트 타임 청소부로 일을 하는데, 빨리
가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악수를 했고, 펠햄은 떠났다.
나는 곧 거리의 변호사가 되면서 갖추어야 할 능력 가운데 하나가 남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내 의뢰인들 가운데 많은 수가 그저 누구하고든 이야기를 하고
싶어했다. 모두들 이런저런 식으로 걷어차이고 두들겨맞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무료로 법
적 조언을 해주겠다고 하니, 변호사에게 속을 털어놓고 싶지 않겠는가. 모디카이는 능숙하게
의뢰인의 이야기를 헤집어서 그 가운데서 자신이 손대야 할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 파악해
냈다. 반면 나는 여전히 사람들이 그렇게 가난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압도당하고 있었다.
나는 또 가장 좋은 사건이라는 것은 후속 처리가 필요 없이, 헌장에서 바로 처리할 수 있
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내가 가진 공책 한 권에는 식량 배급표, 주택 지원, 의료보험, 사회
보장 카드, 심지어 운전 면허를 신청하기 위한 양식들이 가득 차 있었다. 의심이 들면, 일단
양식에 기록부터 하는 것이 수였다.
정오가 되기 전에 26명의 의뢰인들이 지나갔다. 우리는 탈진 상태였다.
"좀 걷다 옵시다."
건물 밖으로 나갔을 때 모디카이가 말했다. 하늘은 맑았다. 창문도 없는 답답한 방에 세
시간 동안 갇혀 있다 나오니, 차가운 바람이 상쾌하게 느껴졌다. 길 건너에는 미합중국 세
금 법정이 있었다. 멋진 현대식 건물이었다. 사실 창조적 비폭력을 위한 공동체는 비교적 최
근에 지어진 멋진 현대식 구조물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우리는 2번가와 D 스트리트가 만나
는 곳에서 멈추어, 합숙소를 보았다.
모디카이가 말했다.
"저곳의 임대 계약은 4년 후면 만기요. 벌써 부동산업계의 독수리떼들이 모여들고 있소.
두 불록 떨어진 곳에는 새 컨벤션 센터가 들어설 예정이오."
"지저분한 싸움이 벌어지겠군요."
"전쟁이 벌어지겠지."
우리는 길을 건너 의사당 쪽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갔다.
"아까 그 백인 말이오. 무슨 이야기를 합디까?"
모디카이가 물었다.
펠햄은 유일한 백인이었다.
"놀랍더군요."
어디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말을 이었다.
"전에 펜실베니아에서 의사로 일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누가 쫓아다닌답니까?"
"네?"
"지금은 누가 쫓아다니냐고?"
"FBI라는데요."
"멋지군. 지난번에는 CIA였는데."
나는 발을 멈추었다. 모디카이는 계속 걷고 있었다.
"본 적이 있는 사람입니까?"
"그래요. 합숙소들을 순회하는 사람이지. 피터 뭐라고 하는 것 같던데."
"폴 펠햄이랍니다."
"그것도 바뀌었군."
모디카이는 나를 돌아보며 덧붙였다.
"멋진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 자리에 서서 모디카이가 트렌치 코트에 두 손을 찔러 넣고 걸어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의 어깨가 흔들리고 있었다. 걷잡을 수 없이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
기 때문이다.
21
용기를 내어 모디카이에게 오후에 다른 볼일이 있다고 말하자, 그는 매우 퉁명스럽게 당
신 지위는 다른 사람들의 지위와 같다, 아무도 당신이 시간을 어떻게 쓰는지 감독하지 않는
다, 다른 볼일을 보고 싶으면 마음대로 봐라, 하고 말했다. 나는 서둘러 사무실을 나왔다. 소
피아만 내가 일찍 퇴근하는 것을 눈치챈 것 같았다.
나는 손해 보험 지불액 산정 담당자를 한 시간 동안 만났다. 내렉서스는 완전히 부서졌다.
보험회사는 21,840달러를 제시하며, 재규어의 보험회사를 족칠 수 있도록 양도 증서를 달라
고 했다. 내가 렉서스 때문에 은행에 빚진 것이 1만 6천달러였기 때문에, 내 손에는 5천 달
러짜리 수표와 잔돈이 남게 되었다. 그만하면 적당한 자동차, 즉 무료 변호사라는 내 새로운
지위에도 어울리고, 자동차 도둑을 유혹하지도 않을 자동차를 사기에는 충분한 돈이었다.
또 한 시간은 병원 대기실에서 낭비했다. 나는 의뢰인이 많아 휴대 전화를 들고 다닐 정
도로 바쁜신 몸이었기 때문에, 잡지들 사이에 앉아 시계가 째깍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조바심을 냈다.
간호사는 팬티만 남기고 다 벗으라고 했다. 이어 차가운 탁자에 올라가 20분 동안 앉아
잇게 만들었다. 멍은 짙은 갈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의사는 여기저기 쿡쿡 찔러 더 아프게
만들더니, 두 주만 있으면 좋아질 것이라고 했다.
정각 4시에 클레어의 변호사 사무실에 도착했다. 남자처럼 옷을 입고, 웃음도 지을 줄 모
르는 안내원이 나를 맞이했다. 구석구석에 여자의 심술이 묻어나고 있는 느낌이었다. 들려오
는 소리들조차 남성에 적대적인 것 같았다. 전화를 받는 여자의 퉁명스럽고 쉰 목소리, 스피
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여자 컨트리 송 가수의 목소리, 복도 저편에서 이따끔씩 들려오는 날
카로운 목소리. 색깔은 옅은 파스텔톤이었다. 라벤더와 핑크와 베이지였다. 탁자 위의 잡지
들도 분명한 특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여성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는 잡지들만 있을 뿐, 화려
함을 자랑하거나 뒷소문을 까발리는 잡지들은 전혀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다. 손님들은 그
잡지들을 보고 감탄할 뿐, 실제로 읽지는 않았다.
재클린 흄은 처음에는 정도에서 벗어난 의사들을 빈털털이로 만들면서 많은 돈을 벌었고,
이어 여자를 희롱하는 상원의원 두 명을 파멸로 몰아넣음으로써 사나운 여자로서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녀의 이름은 수입은 많지만 결혼 생활은 불행한, 워싱턴의 모든 남자들에게
두려움을 불러 일으켰다. 나도 어서 서류에 서명을 하고 그곳을 떠나고 싶었다.
그러나 30분을 기다려야 했으며, 더 이상 못 참겠다 싶어 막 지저분한 장면을 연출하려는
찰나 한 어소시에이트가 나오더니 복도 아래쪽에 있는 사무실로 데려갔다. 그녀는 별거 합
의서를 건네 주었다. 처음으로 나는 이혼이라는 현실과 마주하게 되었다. 합의서 제목은 클
레어 애디슨 브룩 대 마이클 넬슨 브록이었다.
법은 여섯 달 별거한 뒤에야 이혼이 가능하다고 규정해 좋고 있었다. 나는 합의서를 주의
깊게 읽고 서명을 한 뒤 그곳을 나왔다. 이제 추수감사절 무렵이면 다시 공식적으로 독신이
될 예정이었다.
그 날 오후에 내가 네 번째로 들른 곳은 드레이크 & 스위니의 주차장이었다. 폴리는 정
각 5시에 내 소지춤이 가득 든 상자 두 개를 가지고 나왔다. 그녀는 정중하고 능률적인 태
도를 보여 주었지만, 입을 꼭 다물고 있었고, 사무실로 돌아가려고 서둘렀다. 그녀의 몸에도
도청 장치가 붙어 있을지 몰랐다.
나는 두세 블록을 걸어가다가 혼잡한 모퉁이에서 발을 멈추었다. 건물에 기대어 배리 누
조의 번호를 눌렀다.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회의중이었다. 나는 이름을 대고 급한 일이라고
했다. 그러자 30초가 안 되어 배리가 전화를 받았다.
"이야기 좀 할 수 있어?"
내가 물었다. 나는 전화 내용이 녹음되리라고 가정하고 있었다.
"그럼."
"회사 옆이야. K 스트리트와 코네티컷 애비뉴가 만나는 곳. 커피나 마시자고."
"한 시간 뒤에 갈게."
"아냐. 당장 나와. 아니면 없던 일로 하고."
그들이 음모를 짤 시간을 주고 싶지 않았다. 도청 장치를 붙일 시간도 주고 싶지 않았다.
"알았어, 어디 보자, 그래, 좋아. 갈 수 있어."
"빙글러 커피숍에 있을게."
"어딘지 알아."
"기다리고 있을게. 혼자 와야 돼."
"영화를 너무 많이 봤군, 마이크."
10분 뒤 우리는 혼잡한 커피숍의 창가에 앉아 뜨거운 커피를 손에 들고, 코네티컷 애비뉴
를 걸어 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왜 수색 영장을 받아낸 건가?"
내가 물었다.
"그건 우리 파일이야. 자네가 지금 그것을 가지고 있고, 우리는 그것을 돌려받고 싶어. 간
단한 거야."
"그건 찾지 못할 거야, 알아써? 그러니까 염병할 수색을 집어치워."
"자네 지금 어디 살고 있나?"
나는 툴툴거리다가, 최대한 뺀질거리는 태도로 웃음을 터뜨렸다.
"수색 영장 다음에는 체포 영장이 따르기 마련이지. 이번 경우에도 그렇게 될 건가?"
"나는 말할 자유가 없네."
"고마워, 친구."
"이보게, 마이클, 자네가 틀렸다는 전제에서 시작해 보세. 자네는 자네의 것이 아닌 물건
을 가져갔어. 그건 도둑질이야. 아주 단순한 거야. 그리고 그러는 과정에서 자네는 회사의
적이 되었네. 나는 자네 친구지만, 지금도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잇네. 자네의 행동이 회사에
피해를 주는 상황에서, 내가 자네를 도와 줄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는 거야. 이런 지저분
한 상황을 초래한 건 내가 아니라 자네야."
"브레이든 챈스가 이야기를 다 하지 않았군. 그자는 버러지야. 그 오만하고 바보 같은 놈
은 배임 행위를 저질렀다고. 지금 그놈은 자기 몸보신을 하려 하고 있어. 그놈은 이 문제가
파일 도난이라는 간단한 문제이며, 따라서 나를 체포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떠벌리고 있
어. 하지만 그 파일 때문에 회사는 수모를 당할 수도 있어."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손 떼라는 거야. 어리석은 짓 하지 말고."
"자네를 체포한다든가 하는 짓을 하지 말고?"
"그래, 우선 그런 짓부터 하지 말라는 거야. 난 하루 종일 혹시나 누가 내 뒤를 쫓아오지
않나 살피며 살고 있는데, 그건 정말 재미없는 일이야."
"그러니까 도둑질을 하지 말았어야지."
"훔칠 생각이 아니었네, 알았어? 난 파일을 빌린 거야. 복사를 하고 다시 갖다 놓을 계획
이었다고. 그런데 그렇게 할 수가 없었지."
"그러니까 그 파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마침내 인정한 셈이군."
"그래. 하지만 그것도 부정할 수 있어."
"게임을 하려고 하는군, 마이클. 하지만 이건 게임이 아니야. 그러다 다칠 수도 있어."
"그쪽에서 손을 떼면 안 다치지. 우선을 그렇게 하자고. 일 주일 동안만 휴전을 해. 수색
영장도 없고, 체포 영장도 없는 걸로."
"좋아. 그럼 자네는 뭘 주겠다는 건가?"
"그 파일로 회사에 창피를 주는 일을 하지 않을게."
배리는 고개를 저으며 뜨거운 커피를 마셨다.
"나는 거래를 할 입장이 아니네. 난 미천한 어소시에이트에 불과해."
"아서가 지휘를 하고 있는 건가?"
"물론이지."
"그럼 아서한테 전하게. 나는 자네하고만 이야기를 할 거라고 말이야."
"자네는 너무 많은 것을 가정하고 있군, 마이클. 자네는 회사가 자네와 이야기를 하고 싶
어할 거라고 가정하고 있어.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지 않네. 회사 사람들은 자네가
파일을 훔쳐갔다는 사실 때문에, 그리고 그것을 돌려주기를 거부한다는 사실 때문에 몹시
흥분해 있어. 그들을 탓할 일이 아니야."
"그들에게 똑똑히 말하게, 배리. 이 파일은 신문 1면 기사감이야. 회사 이름이 신문에 굵
은 활자로 박히고, 시끄러운 기자들이 그 밑에 많은 기사들을 써제낄 거야. 만일 내가 체포
된다면, 난 곧바로 <워싱턴 포스트>에 사실을 알릴 걸세."
"제정신이 아니군."
"그럴지도 모르지. 챈스 밑에는 헥터 팔머라는 이름의 사무직원이 있었네. 그 친구 이야기
는 들었나?"
"아니."
"자네는 논의 그룹에서 빠져 있구먼."
"내가 그 안에 들어가 있다고 주장한 적 없네."
"팔머는 그 파일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어. 그래서 어제부로 지난주까지 일하
던 곳에서 일하지 못하게 되었네. 그가 어디로 갔는지는 나도 모르지만, 알아보면 재밌을 걸
세. 아서한테 물어보게."
"파일이나 돌려주게, 마이클. 자네가 그걸 가지고 뭘 할 계획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법
정에서 사용할 수는 없을 걸세."
나는 커피를 마시고, 등받이 없는 의자에서 내려왔다.
"일 주일간 휴전이야."
나는 걸어가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아서한테 자네도 논의 그룹에 끼워 달라고 하게."
"아서는 자네 명령을 듣지 않아."
배리가 쏘아붙였다.
나는 얼른 커피숍을 나와, 보도의 사람들 사이로 스며들었다. 듀퐁 서클을 향해 뛰다시피
걸었다. 배리와 염탐하러 나온 사람들이 있는 곳을 어서 떠나고 싶었다.
전화번호부에 따르며 팔머의 주소는 베세즈더 근처의 아파트였다. 서둘 필요도 없었고 생
각할 시간도 필요했기 때문에, 우선 순환 도로를 타고 시내를 한바퀴 돌았다. 밀리는 차량들
속에 끼어 천천히 차를 몰았다.
일 주일 내에 체포될 가능성은 50 대 50이었다. 회사로서는 나를 잡으려 할 수밖에 없었
다. 브레이든 챈스가 아서를 비롯한 집행위원회에게 진실을 숨기고 있다면, 회사에서야 강하
게 나올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리고 치안판사가 나에 대한 체포 영장을 발부할 만큼의 정
황 증거는 충분했다.
형씨 사건은 회사를 흔들어 놓았다. 챈스는 고위층에 불려가 한참 닥달을 당했다. 그런 상
황에서 그가 스스로 의도적 부정 행위를 인정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는 거짓말을 했다. 파일을 조작하면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그
렇게 했을 것이다. 피해자들이라고 해봐야 결국 거리에서 살고 있는 불법 점거자들에 불과
하지 않은가.
그런데 그가 어떻게 헥터를 그렇게 빨리 처리할 수 있었을까? 돈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챈스는 파트너였다. 내가 챈스라면, 나는 헥터에게 돈을 제시했을 것이다. 한 손으로는 돈을
내밀고, 다른 손으로는 즉시 잘라 버리겠다는 협박을 내밀었을 것이다. 그리고 예를 들어 덴
버 지사에 있는 파트너 친구에게 전화를 하여, 부탁을 하나 들어 달라고, 사무직원을 하나
전근시켜야겠는데 좀 받아 달라고 말했을 것이다.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헥터는 사라져 버렸다. 나나 질문을 하고 싶어하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숨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아마 보수는 더 올라갔을 것이다.
그렇다면 거짓말 탐지기 검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회사가 그저 헥터와 나를 협박하기 위
해 그런 말을 했던 것뿐일까? 아니면 헥터가 검사를 받고 통과를 한 것일까? 그랬을 것 같
지는 않았다.
챈스는 헥터가 진실을 감추고 있기를 바랐다. 헥터는 챈스가 일자리를 보호해 주기를 바
랐다. 그렇다면 실제로 거짓말 탐지기 검사가 심각하게 고려되었을 때, 챈스가 막고 나섰을
것이다.
아파트 단지는 길게 짜임새 없이 뻗어 나가고 있었다. 새 건물들이 추가되면서, 단지는 도
시에서 북쪽으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 주위의 거리에는 패스트푸드점, 주유소, 비디오 대여
점 등, 갈 길 급한 통근자들의 시간을 절약해 주는 것들이 빽빽히 들어서 있었다.
나는 테니스 코트 옆에 주차를 하고, 가지각색의 건물들 사이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천
천히 걸었다. 이 일이 끝나면 특별히 갈 데가 없었다. 워싱턴 경찰이 영장과 수갑을 가지고
어디에서 숨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시 감옥에 대한 무시무시한 이야기
들을 머리에서 지워 버리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 한 가지 이야기는 소 가죽에 찍는 낙인처럼 내 기억에 박혀 지워지지
않았다. 몇 년 전, 드레이크 & 스위니의 젊은 어소시에이트 하나가 금요일에 일을 마치고
조지타운의 한 술집에서 몇 시간 동안 술을 마신 일이 있었다. 그는 버지니아까지 가려고
하다가, 음주 운전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는 경찰서에서 음주 측정을 거부하였으며, 그 즉시
주정뱅이 유치장에 갇혔다. 감방은 만원이었다. 감방 안에서 그는 유일하게 양복을 입은 사
람이었다. 동시에 유일하게 좋은 손목시계를 차고, 좋은 구두를 신고, 얼굴이 흰사람이었다.
그는 실수로 옆사람 발을 밟았는데, 그와 동시에 피범벅이 되도록 두드려 맞았다. 그는 석
달 동안 병원에 입원하여 얼굴 성형 수술을 받았으며, 이어 고향 윌밍턴으로 가 가족의 보
살핌을 받았다. 뇌 손상은 경미했으나, 대형 법률 회사의 혹독한 생활을 견디기에는 큰 부상
이라고 할 수 있었다.
첫 번째 관리 사무실은 문이 닫혀 있었다. 나는 다른 관리 사무실을 찾아 터덜터덜 보도
를 걸어갔다. 전화번호부에 아파트 호수는 적혀 있지 않았다. 이곳은 안전한 단지였다. 조그
만 테라스에는 자전거와 플라스틱 장난감들이 있었다. 유리창을 통해 가족들이 식사를 하고
텔레비젼을 보는 모습이 보였다. 창에는 보호용 쇠막대들이 없었다. 주차장을 빼곡히 메우고
있는 차들은 통근자들이 흔히 애용하는 다양한 중형차들이었는데, 대부분 깨끗했고 휠캡 네
개가 다 제대로 끼워져 있었다.
경비원이 나를 세웠다. 그는 내가 위협이 될 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뒤에, 본
관 관리 사무실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적어도 5백 미터는 떨어져 있었다.
"이곳에 아파트 건물이 몇 개쯤 됩니까?"
내가 물었다.
"많지요."
하긴, 그가 왜 숙자 같은 것에 관심을 가지겠는가.
야간 관리인은 학생으로, 샌드위치를 먹고 있었다. 앞에는 물리학 교과서가 펼쳐져 있었
다. 그러나 책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작은 텔레비젼으로 불릿스와 닉스의 시합을 보고 있었다.
내가 헥터 팔머에 대해 묻자, 그는 키보드를 두드렸다. 번호는 G-134였다.
"하지만 이사를 했는데요."
학생은 입에 샌드위치를 하나 가득 물고 말했다.
"그래요, 알고 있소. 나는 헥터와 같은 회사에 다니고 있소. 그 친구는 금요일까지 일을
했지. 나도 아파트를 하나 구하고 있는데, 그가 살던 곳을 볼 수 있을지 모르겠소."
학생은 내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고개를 저었다.
"토요일에만 가능합니다. 이곳에는 9백 동이 있습니다. 그리고 대기자들도 있고요."
"나는 토요일 전에 결정을 해야 하는데."
"안됐군요."
그는 샌드위치를 한 입 더 물더니 다시 텔레비젼으로 눈길을 돌렸다.
나는 지갑을 꺼내 들었다.
"침실은 몇 개요?"
학생은 컴퓨터 모니터를 보았다.
"두 개요."
헥터에게는 지식이 넷이었다. 그의 새 아파트는 훨씬 널찍하겠군.
"한 달에 얼마요?"
"750."
나는 백 달러짜리 지폐를 한 장 꺼내 들었다. 학생은 즉시 그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내가
말을 이었다.
"이렇게 합시다. 나한테 열쇠를 주시오. 내가 혼자 가서 그곳을 보고 10분 안에 돌아오리
다. 아무도 모를 거요."
"대기자 명단이 있다니까요."
그는 다시 그렇게 말했으나, 샌드위치는 종이 접시에 내려놓았다.
"그게 그 컴퓨터 안에 있소?"
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네."
그는 입을 닦았다.
"그럼 순서를 바꾸기도 쉽겠군."
그는 잠긴 서랍에서 열쇠를 꺼내 들고, 돈을 쥐었다.
"10분입니다."
아파트는 관리 사무실 근처에 있었다. 3층짜리 건물의 1층이었다. 열쇠는 맞았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문을 통해 새 페인트 냄새가 새어나왔다. 새 페인트칠이 다 끝나지
도 않았다. 거실에는 사다리, 페인트받이 천, 하얀 물통이 있었다.
지문 채취 전문가들이 찾아온다 해도 팔머 가족의 흔적은 찾아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서
랍, 캐비닛, 옷장은 전부 텅 비어 있었다. 양탄자 같은 것들도 다 뜯겨 나갔다. 심지어 욕조
와 세면대의 때도 깨끗이 닦여 있었다. 먼지도, 거미줄도, 부엌 싱크 밑의 흙도 없었다. 깨끗
하게 소독이 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방마다 약간 어두운 흰색의 새 페인트가 칠해져 있었다.
거실만 작업이 반 정도가 덜 끝났다.
나는 사무실로 돌아와 카운터에 열쇠를 던졌다.
"어떻던가요?"
관리인이 물었다.
"너무 작군요. 어쨌든 고맙소."
"돈을 돌려드릴까요?"
"학교에 다니고 있소?"
"네."
"그럼 가지쇼."
"고맙습니다."
나는 문간에서 발을 멈추고 물었다.
"팔머가 이사간 집의 주소를 남겼소?"
"같이 일한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요."
"맞소."
나는 얼른 문을 닫았다.
22
수요일 아침에 출근을 하자, 조그만 여인이 사무실 문에 기대 앉아 있었다. 시계는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사무실 문은 잠겨 있었다. 기온은 영하였다. 처음에는 나는 그녀가 바람을
피해 밤새도록 사무실 문간에 죽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내가 다가오는 것을 보
더니,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나는 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했다. 손으로는 열쇠를 찾고 있었다.
"변호사이신가요?"
그녀가 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나 같은 사람을 위한 변호사요?"
나는 그녀가 노숙자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의뢰인들에게 묻는 것은 그것 하나뿐이었다.
"그럼요.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나는 문을 열며 말했다. 안이 바깥보다 더 추웠다. 나는 자동 온도 조절 장치를 만졌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볼 때 그것은 어떤 설비하고도 연결되어 있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커피를 만들었다. 주방에 오래 된 도넛도 몇 개 있었다. 그녀에게 권하자, 그녀는 얼른 하나
를 집어 들었다.
"이름이 뭐죠?"
내가 물었다. 우리는 앞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소피아의 책상 옆이었다. 나는 커피가 끓기
를 기다리며, 난방 장치가 작동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었다.
"루비예요."
"나는 마이클입니다. 어디 살죠, 루비?"
"여기저기요."
그녀는 회색 스웨트 수트, 두꺼운 갈색 양말, 상표 없는 더러운 하얀 운동화 차림이었다.
나이는 서른에서 마흔 사이, 몸은 빼빼 말랐고, 눈은 약간 사팔뜨기였다.
"자, 자."
나는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어디 사는지 알아야 합니다. 합숙소에 사세요?"
"어떤 합숙소에 살았지만, 나와야 했어요. 강간을 당할 뻔했거든요. 난 차가 있어요."
출근하다가 근처에서 차를 본 기억은 없었다.
"차가 있다고요?"
"네."
"운전을 하나요?"
"운전은 안해요. 뒤에서 잠만 자요."
나는 규격 용지를 꺼내 놓지 않고 질문을 하고 있었다. 내가 훈련받은 것과는 다른 행동
이었다. 나는 커다란 종이컵 두 개에 커피를 따랐다. 우리는 내 사무실로 들어갔다. 다행히
도 그곳에서는 난방기가 살아나 꿀럭거리고 있었다. 문을 닫았다. 모디카이가 곧 도착할 터
였는데, 그는 조용히 들어오는 기술을 배우지 못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루비는 갈색의 접는 의자 가장자리에 엉덩이를 걸쳤다. 의뢰인용 의자였다. 그녀는 몸을
웅크리고, 상체 전체를 동원하여 커피컵을 감싸고 있었다. 마치 그것이 세상에 마지막 남은
따뜻한 것이라도 되는 듯이.
"뭘 도와 드리면 될까요?"
내가 드디어 규격 용지로 무장을 하고 물었다.
"내 아들 테런스 일이에요. 그애는 열여섯이죠. 그런데 데려가 버렸어요."
"누가 데려갔단 말입니까?"
"시에서요. 아이를 양자로 주는 사람들이요."
"지금 어디 있습니까?"
"그 사람들이 데려갔단 말이에요."
그녀의 대답은 짧았다. 신경질적으로 내뱉는 것 같았다. 내가 질문을 할 때마다 벌떡벌떡
일어서려는 것 같았다.
"자, 마음 편하게 가지고, 테런스 이야기를 해주시겠어요?
루비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나와 눈을 맞출 생각은 하지 않고, 두 손으로 컵을 쥔 채, 이
야기를 해나갔다. 몇 년 전, 사실 얼마나 오래 전 일인지는 불분명했지만, 어쨌든 테런스가
10살쯤 되었을 때, 그들은 작은 아파트에서 단 둘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녀는 마약을 판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리고 넉 달 동안 감옥에 갔다. 테런스는 루비의 언니네 집에 가서 살
게 되었다. 그녀는 석방되어서 테런스를 데려왔으며, 그때부터 거리에서 악몽과 같은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들은 차에서 잠을 잤고, 텅 빈 건물들에 무단 칩입하여 잠을 잤고, 따뜻한
날이면 다리 밑에서 잠을 잤고, 추워지면 합숙소로 들어갔다. 그래도 아들은 학교에 보냈다.
그녀는 보도에서 구걸을 했다. 또 몸도 팔았다. 크랙도 조금 팔았다. 테런스를 먹이고, 입히
고, 학교에 보내는 일을 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중독자였다. 크랙을 끊을 수가 없었다. 임신을 하게 되었는데, 아기를 낳자
마자 시에서 바로 데려가 버렸다. 크랙 때문에 생긴 아기였다.
루비는 그 아기에게는 아무런 애정이 없는 듯했다. 오지 테런스에게만 애정을 가지고 있
는 것 같았다. 시에서는 테런스에 대해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모자는 노숙자들의 그림자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그녀는 절망감에 빠진 상태에서, 한때 그녀가 하녀로 일했던 가족
에게로 갔다. 롤런드 집안이었다. 아이들은 장성하여 독립하고 부부만 살고 있었다. 그들은
하워드 대학 근처에 따뜻하고 작은 집을 가지고 있었다. 루비는 테런스를 데리고 살면 한
달에 50달러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뒤쪽 포치 위에 작은 침실이 하나 있었다. 루비가 청소를
하느라고 여러번 들어가 본 곳이었다. 테런스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롤런드 부부는 처음
에는 망설였으나, 결국 동의했다. 그들은 좋은 사람들이었다. 적어도 그때는, 루비는 매일 밤
한 시간씩 테런스를 만날 수 있었다. 아들은 성적이 좋아졌다. 겉모습은 깨끗하고 안전해 보
였다. 루비는 자신이 한 일에 만족했다.
그녀는 아들의 생활을 중심으로 자기 생활을 재조정했다. 롤런드의 집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무료 급식소를 찾아갔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합숙소를 자주 옮겼고, 뒷골목과 공원
과 버려진 차도 자주 옮겨 다녔다. 매달 돈을 열심히 긁어 모았으며, 매일 밤 아들을 찾아가
는 일은 한 번도 빼먹지 않았다.
다시 체포될 때까지는, 첫 번째는 매춘 혐의로 체포당했다. 두 번째는 패러것 공원 벤치에
서 잤다는 혐의였다. 또 있을지 모르나 기억은 못했다.
한번은 길거리에 의식을 잃고 누워 있다가 발견되어 워싱턴 종합병원 응급실로 실려간 적
도 있었다. 그녀는 중독자들을 위한 갱생 시설에 들어갔으나, 테런스가 보고 싶어 사흘 만에
나와 버렸다.
어느 날 밤 루비가 테런스의 방에서 그와 함께 있는데, 테런스가 그녀의 배를 물끄러미
보면서 또 임신을 했냐고 물었다. 그녀는 그런 것 같다고 대답했다. 아버지가 누구예요? 테
런스가 다그쳤다. 그녀도 몰랐다. 테런스는 욕을 퍼붓고 고함을 질렀다. 너무 시끄럽게 난리
를 피우는 바람에, 롤런드 부부가 나서서 그녀에게 나가 달라고 했다.
루비가 임신을 한 기간에는 테런스가 잘 상대해 주려 하지 않았다. 가슴 아픈 일이었다.
차에서 지고, 푼돈을 구걸하고, 아들을 볼 시간만 기다리다가, 기껏 아들한테 가서는 철저히
무시를 당한 채 한시간 동안 구석에 앉아 아들이 숙제하는 모습이나 지켜봐야 하다니.
루비가 이야기를 하다가 그 지점에서부터 울기 시작했다. 나는 몇 가지 메모를 했다. 앞
사무실에서 모디카이가 쿵쿵거리며 돌아 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소피아와 싸움을 하려는 모
양이었다.
루비는 불과 1년 전에 세 번째로 아이를 낳았는데, 역시 크랙 때문에 생긴 아이였다. 이번
에도 시에서 바로 데려가 버렸다. 그녀는 아기를 낳고 병원에 있었던 나흘 동안 테런스를
보지 못했다. 퇴원을 한 뒤에는 그녀가 알고 있는 유일한 생활 방식으로 돌아갔다.
테런스는 우수한 학생이었다. 수학과 스페인어에 탁월했을 뿐 아니라, 트롬본을 잘 불었
고, 학교 연극반에서는 배우로 활동했다. 해군 사관학교에 갈 꿈을 꾸고 있었다. 롤런드 씨
도 군 복무를 한 경험이 있었다.
루비는 어느 날 밤 형편 없는 몰골로 아들을 만나러 갔다가, 부엌에서 롤런드 부인을 만
나 싸움이 벌어졌다. 심한 말이 오갔다. 최후 통첩들이 튀어나왔다. 테런스도 그 싸움의 한
가운데 있었다. 삼 대 일이었다. 루비는 아들을 데리고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테런스는 가지
않겠다고 했다.
다음날 밤에는 시에서 나온 사회사업가가 서류를 들고 루비를 기다리고 있었다. 누가 벌
써 법정에 갔다 온 것이다. 테런스는 양부의 보호를 받기로 결정되었다. 롤런드 부부가 그의
새 부모가 될 예정이었다. 테런스는 이미 그들과 3년째 살고 있었다. 루비가 60일간 갱생 시
설에 들어가 깨끗해지기 전에는 아들을 방문하는 것도 금지 되었다.
그때 이후로 3주일이 흘렀다.
루비가 말했다.
"난 아들을 보고 싶어요. 보고 싶어 미치겠어요."
"갱생 시설에는 들어갔습니까?"
루비가 얼른 고개를 젓고는 눈을 감았다.
"왜요?"
내가 물었다.
"들어갈 수가 없어요."
나는 거리의 크랙 중독자가 어떻게 회복 시설에 들어가는지 몰랐다. 그러나 이제 알아야
할 때가 왔다. 나는 따뜻한 집에서 잘 먹고, 잘 입고, 안전하고, 깨끗하고, 중독과 아무런 관
계가 없고, 롤런드 부부의 엄격한 감독하에서 숙제를 열심히 하고 있는 테런스의 모습을 그
려 보았다. 롤런드 부부도 거의 루비만큼이나 테런스를 사랑하게 되었다. 나는 테런스가 가
족 식탁에서 롤런드 부부와 함께 아침을 먹다가, 롤런드 씨가 아침 신문도 젖혀 두고 스페
인어 어휘들을 유창하게 읊어대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테런스는 지옥에서 살고 있는
내 가련한 의뢰인과는 달리 안정되고 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런데 루비는 지금 그들의 재결합을 도와 달라고 부탁하고 있었다.
"이 일은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아셨죠?"
나는 무슨 일이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도 전혀 모르면서 그렇게 말했다. 5백 가구가 비
상 합숙소에 조그만 자리가 나기를 기다리는 도시에 마약 중독자가 차지할 수 있는 침대는
많을 수가 없었다.
"마약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면 테런스는 못 봅니다."
나는 도덕적인 척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말했다.
그녀는 눈에 눈물을 글썽였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중독에 대해 얼마나 아는 것이 없는지 깨달았다. 마약은 어디서 구할까? 값은
얼마나 할까? 하루에 몇 번 맞고, 몇 번이나 취해 있을까? 마약 중독에서 헤어나오는 데 얼
마나 걸릴까? 그리고 완치하는 데는? 10년 동안 가지고 있었던 습관을 떨쳐 버릴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시는 크랙 때문에 태어난 아기들을 다 어떻게 할까?
루비에게는 아무런 서류도, 주소도, 신분증도 없었다. 가슴이 에일 듯한 이야기밖에 없었
다. 그녀는 내 사무실의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 기분 좋은 것 같았다. 이 여자한테 어떤 식
으로 가달라고 하면 될까? 커피잔은 빈 것 같았다.
소피아의 날카로운 목소리 때문에 나는 현실로 돌아왔다. 그녀 주위에서도 날카로운 소리
들이 들렸다. 나는 문으로 달려갔다. 처음에 든 생각은 또 형씨 같은 미치광이가 총을 들고
들어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총은 총인데 다른 총이었다. 개스코 경사가 많은 지원병을 거느리고 다시 온 것이
다. 정복을 입은 세 명은 소피아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소피아가 무자비하게 독설을 퍼부어
댔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청바지에 스웨트셔츠 차림의 두 살람은 육박전이 벌어지기만
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사무실에서 걸어나가는 순간, 모디카이도 그의 사무실에서 걸어나
왔다.
"안녕하시오, 마이키."
개스코가 나에게 말했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
모디카이가 으르렁거렸다. 벽이 흔들렸다. 정복을 입은 경찰관 한 사람은 총지갑으로 손을
뻗고 있었다.
개스코는 모디카이가 곧장 다가갔다.
"수색이오."
개스코는 영장을 꺼내 모디카이에게 던지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 그린 씨요?"
"그렇소."
모디카이가 대답하며 영장을 낚아챘다.
"뭘 찾는 거요?"
내가 개스코에게 고함을 질렀다.
"똑같은 것."
개스코도 마주 고함을 지르더니 말을 이었다.
"그것만 내놓으면, 우리도 순순히 돌아갈 거요."
"그건 여기 없소."
"무슨 파일이야?"
모디카이가 수색 영장을 보며 물었다.
"퇴거 파일입니다."
내가 대답했다.
"당신이 보낸 고소장을 못 보았는 걸."
개스코가 나에게 말했다. 나는 정복을 입은 경찰관들 가운데 둘이 릴리와 블로어라는 것
을 알아보았다. 개스코가 말을 이었다.
"뻥은 되게 치더니만."
"염병할, 어서 여기서 나가!"
소피아는 블로어가 그녀 책상으로 다가오자 소리를 질렀다.
개스코가 책임자답게 나섰다. 그는 예의 그 조롱하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이보시오. 우리는 두 가지 방식으로 이 일을 할 수 있소. 첫째는 당신이 그 의자에 앉아
입을 다물고 있는 거요. 둘째는 우리가 당신한테 수갑을 채우고, 당신은 두 시간 동안 차 뒤
에 앉아 있는 거요."
한 경찰관이 옆에 붙은 사무실마다 머리를 들이밀어 보고 있었다. 나는 루비가 내 뒤로
천천히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가만."
모디카이가 소피아를 향해 말을 이었다.
"가만히 있어."
개스코가 나에게 물었다.
"위에는 뭐가 있소?"
모디카이가 대신 대답했다.
"창고요."
"당신 창고요?"
"그렇소."
내가 나섰다.
"거기에는 없소. 당신들 지금 시간 낭비하고 있는 거요."
"그럼 낭비해야지 뭐, 안 그래?"
어떤 의뢰인이 창문을 열고 들어오는 바람에, 안에 있던 모두가 놀랐다. 문을 연 사람의
눈이 재빨리 안을 살피더니, 정복을 입은 세 사람에게 가서 멈추었다. 그는 얼른 안전한 거
리로 물러났다.
나는 루비에게도 나가라고 했다. 이어 모디카이와 함께 그의 사무실로 가서 문을 닫았다.
"파일은 어디 있소?"
모디카이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에는 없습니다. 맹세합니다. 이건 그저 나를 괴롭히려는 것일 뿐입니다."
"영장은 유효해 보이던데. 절도가 있었으니, 파일이 그것을 훔친 변호사와 함께 있다고 가
정하는 것은 합리적인 것 아니겠소."
나는 변호사답게 똑똑한 소리를 하려 했다. 경찰이 수색을 중단하고 달아나게 할 수 있는,
뭔가 법적으로 통렬하고 멋진 말을, 그러나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그저 경찰이 상담소를 뒤
지고 다니게 만든 것이 미안해서 쩔쩔맬 뿐이었다.
"그 파일 사본은 가지고 있소?"
모디카이가 물었다.
"네."
"원본을 돌려주겠다는 생각은 해보았소?"
"아뇨. 그건 죄를 인정하는 일이 될 겁니다. 그들은 내가 파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사실
로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설사 돌려준다 해도, 그들은 내가 복사를 했을 거라고 추
측할 겁니다."
모디카이가 턱수염을 문지르며 내 말에 동의했다. 우리가 모디카이의 사무실에서 나가는
순간, 릴리가 소피아의 책상 옆에 있는 사용하지 않는 책상 근처에서 발을 헛디뎠다. 파일들
이 산사태처럼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소피아는 릴리에게 고함을 질렀다. 개스코는 소피아
에게 고함을 질렀다. 긴장이 빠른 속도로 고조되면서, 상황은 말의 수준을 벗어나 물리적 충
돌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우리 의뢰인들이 수색을 보지 못하도록 앞문을 닫았다.
"이렇게 합시다."
모디카이가 말했다. 경찰관들이 모디카이를 노려보았으나, 그들 역시 어떤 지침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법률 사무소를 수색하는 일은 조무래기 불량배들로 가득 찬 술집을 급습
하는 일과는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그 파일은 여기 없소, 알았소? 우선 그 전제에서 출발합시다. 당신들은 여기 있는 파일들
을 원하는 대로 다 볼 수는 있지만, 그것을 열어 볼 수는 없소. 그렇게 하면 의뢰인의 비밀
을 침해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오. 동의하오?"
경찰관들은 개스코를 보았다. 개스코는 그 정도는 받아들일 수 있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
했다.
우리는 내 사무실에서부터 시작했다. 모두 여섯 명의 경찰관과 나, 그리고 모디카이가 비
좁은 사무실에 들어가, 서로 접촉하는 것을 피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나는 책상 서랍
을 하나하나 열었다. 어느 하나 빼놓을 것이 없이 모두 세차게 잡아당겨야만 열렸다. 잠시
후 개스코가 혼자말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좋은 사무실이군."
나는 캐비닛에서 파일을 하나씩 꺼내 개스코의 코 밑에 흔들었다가 다시 집어넣었다. 나
는 월요일부터 근무했기 때문에 수색할 양이 많지 않았다.
모디카이는 내 사무실을 빠져나가 소피아의 책상으로 갔다. 그 곳에서 전화를 했다. 개스
코가 내 사무실의 수색이 끝났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하고 밖으로 나갔을 때, 모디카이가 전
화에 대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네, 판사님, 고맙습니다. 그 사람은 지금 내 옆에 있습니다."
모디카이는 전화기를 개스코에게 건네며 이를 활짝 드러내고 웃고 있었다.
"키스너 판사요. 그 수색 영장에 서명한 분이오. 당신하고 이야기를 하고 싶으시다오."
개스코는 문둥이가 잡았던 것을 잡듯이 전화기를 받아들었다.
"개스코입니다."
그는 수화기를 귀에서 10센티미터 정도 떼고 말했다.
모디카이는 다른 경찰관들을 향했다.
"여러분, 여러분은 이 방을 수색해도 좋습니다. 하지만 거기까지입니다. 양쪽의 개인 사무
실로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판사의 명령입니다."
개스코가 '네 판사님'하고 중얼거리고는 전화를 끊었다.
우리는 한 시간 정도 그들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책상에서 책상으로 옮겨다녔다.
책상은 소피아의 것을 합하여 모두 네 개였다. 잠시 후 그들은 수색이 성과가 없을 것임을
깨달았고, 그래서 최대한 느리게 움직여 시간을 끌기 시작했다. 책상마다 오래 전에 종결된
파일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마지막으로 들추어 본 지 몇 년이 된 책과 법률 간행물들도 있
었다. 어떤 서류나 책에는 먼지들이 덮여 있었다. 가끔은 거미줄도 치워야 했다.
파일마자 사건 이름이 타자나 손으로 적혀 있었다. 두 경찰관은 개스코를 비롯한 다른 경
찰관들이 부르는 파일 이름을 받아 적었다. 지루한 일이었고, 전혀 가망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소피아의 책상을 마지막까지 남겨 두었다. 그녀는 직접 일을 처리해 주었다. 각 파
일의 이름을 불러 주고, 존스, 스미스, 윌리엄스처럼 간단한 이름도 철자를 불러 주었다. 그
녀는 잠깐 살펴 볼 수 있을 정도만 서랍을 열어 보였다. 그녀에게는 개인용 서랍도 있었는
데, 아무도 그 안은 보려 하지 않았다. 그 안에는 특별한 무기가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작별 인사 없이 떠났다. 나는 그런 침입을 당한 데 대해 소피아와 모디카이에게
사과하고 비난을 피해 내 사무실로 물러났다.
23
퇴거자의 명단에서 5번은 켈빈 램이었는데, 모디카이는 어디선가 들어 본 이름 같다고 했
다. 모디카이는 워싱턴의 노숙자 숫자가 만명은 될 것이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14번가
법률 상담소에 적어도 그 정도 숫자의 파일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따라서 모디카이는 어떤
이름이든 들어 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모디카이는 무료 급식소와 합숙소와 서비스 제공자들로 이루어진 폐쇄 회로를 순회하며
일을 했다. 서비스 제공자들이란 설교자와 경찰과 다른 거리의 변호사들이었다. 어두워진 뒤
에 우리는 시내의 비싼 사무용 건물들과 호화로운 호텔들 사이에 끼여 있는 교회로 차를 몰
고 갔다. 지하 2층의 큰 방에서는 '빵 다섯 개'라는 이름의 무료 급식 프로그램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방에는 접는 의자들이 줄을 지어 놓여 있었고, 배고픈 사람들이 둘러앉아 식사를
하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수프 정도를 주는 곳이 아니었다. 접시에는 옥수수, 감자, 칠면
조 아니면 닭으로 보이는 고기 한 조각, 과일 샐러드, 빵 등이 가득 차 있었다. 나도 저녁을
먹지 않았기 때문에 그 냄새에 배고픔을 느꼈다.
"몇 년 만에 와보는군."
모디카이는 문간에 서서 식당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이곳에서는 하루에 3백 명이 식사를 하오. 멋지지 않소?"
"음식은 어디서 옵니까?"
'워싱턴 중앙 급식소'라는 곳에서, 창조적 비폭력을 위한 공동체의 지하실에 있는 단체요.
그들은 이 지역 레스토랑들로부터 남는 음식을 모으는 시스템을 개발했소. 대단한 시스템이
지. 먹고 남은 것을 모으는 게 아니오. 조리를 하지 않았는데, 그냥 놔두면 곧 상할 것들을
모으는 것이오. 그들은 냉장 트럭 편대를 갖추고 있어, 도시 전역을 돌아다니며 음식을 모
으고, 그걸 가지고 급식소로 와서 냉동 음식을 만드는 일을 하오. 그렇게 해서 하루에 2천
명 이상을 먹이는 거요."
"맛있어 보이는데요."
"실제로 아주 맛이 있소."
라이저라는 이름의 젊은 여자가 우리를 보았다. 빵 다섯 개 급식소의 새로운 담당자였다.
모디카이는 그녀의 전임자를 알고 있었다. 라이저와 모디카이는 전임자에 대해 잠깐 이야기
를 나누었다. 그 동안 나는 사람들이 식사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전에 미쳐 보지 못했던 것을 발견했다. 노숙자들 사이에도 등급이 있다는 점이었다.
그들끼리도 사회 경제적인 수준에서 분명한 차이가 났던 것이다. 한 식탁에서는 여섯 남자
가 둘러앉아 식사를 하며, 텔레비젼에서 보았던 농구 시합에 대해 즐겁게 이야기를 하고 있
었다. 그들은 비교적 옷도 잘 입었다. 한 사람은 장갑을 끼고 식사를 했는데, 그것만 뺀다면
이들은 도시의 어느 노동 계급 술집에 앉아 있는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들 뒤에서
는 몸집이 큰 사람이 짙은 색 선글래스를 쓰고 혼자 앉아 손가락으로 닭을 잡아뜯고 있었
다. 그는 형씨가 죽을 때 신고 있었던 것과 비슷한 고무 장화를 신고 있었다. 낡은 코트는
더러웠다. 주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인생은 옆에서 웃음을 터뜨리고 있는 남자들
의 인생보다 훨씬 더 힘들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앞서 말한 남자들은 뜨거운 물과
비누를 이용할 수 잇는 사람들인 반면, 혼자 잇는 남자는 그런 데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
이었다. 앞서 말한 남자들은 합숙소에서 잠을 자는 반면, 혼자 있는 남자는 공원에서 비둘기
들과 함께 잤다. 그러나 두 부류는 모두 노숙자에 속했다.
라이저는 켈빈 램을 몰랐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한테 물어보겠다고 했다. 우리는 그녀가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고,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한쪽 구석에 있는 물통을 가리키고, 나이
든 여자와 법석을 떠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두 남자 사이에 앉았다. 두 남자 모두 자
기들 이야기에 빠져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녀는 다른 식탁으로 갔고, 이어 또 다른
식탁으로 갔다.
정말 놀랍게도, 변호사가 한 사람 나타났다. 대형 법률 회사의 젊은 어소시에이트였다. '노
숙자를 위한 워싱턴 법률 상담소'와 함께 일하는 자원봉사자였다. 그는 지난해 기금 모금회
에서 모디카이를 만나 그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법률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나누었
다. 이윽고 그는 뒷방으로 사라져, 그곳에서 세 시간으로 예정된 법률 상담을 시작했다.
"워싱턴 법률 상담소에는 150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있소."
모디카이가 말했다.
"그걸로 충분합니까?"
내가 물었다.
"충분하다는 건 없지. 우리도 자원봉사자 프로그램을 재개해야 할 것 같소. 당신이 책임지
고 운영할 수도 있겠지. 에이브러험도 좋다고 하더군."
모디카이와 에이브러험, 소피아, 그들이 내가 운영할 프로그램에 대해 의논을 했다는 것이
기분 좋았다.
"그렇게 하면 우리 기반이 확대될 거고, 우리가 법조계에 얼굴을 내미는 일도 늘어날 거
고, 그것이 돈을 모으는 데도 도움이 될 거요."
"그럼요."
나는 별확신 없이 대꾸했다.
라이저가 돌아왔다.
"켈빈 램은 저 뒤쪽에 있어요."
그녀가 뒤쪽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뒤에서 두 번째 탁자예요. 레드스킨스 팀의 모자를 쓰고 있는 사람이죠."
"이야기는 해봤소?"
모디카이가 물었다.
"네. 중독 같은 건 없는 사람이예요. 정신이 아주 말짱하던데요. 창조적 비폭력을 위한 공
동체에 묵고 있고, 쓰레기 트럭에서 파트타입으로 일을 하고 있대요."
"조그만 방 하나 쓸 수 있겠소?"
"그럼요."
"램한테 노숙자 변호사가 이야기를 하고 싶어한다고 전해 주시오."
램은 인사를 하지도 않았고, 악수를 하자고 하지도 않았다. 모디카이는 탁자에 앉았다. 나
는 모퉁이에 서 있었다. 램은 하나 남은 의자에 앉더니, 소름끼치는 눈길로 나를 보았다.
"무슨 문제가 있어서 그러는 게 아니오."
모디카이는 최대한 편안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몇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을 뿐이오."
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합숙소 거주자 차림이었다. 청바지, 스웨트 셔츠, 운동
화, 모직 재킷, 이것은 다리 밑에서 자는 사람의 악취가 나는, 겹겹이 껴입은 옷가지와는 다
른 것이었다.
"론타 버튼이라는 여자를 알고 있소?"
모디카이가 물었다. 그가 우리 둘을 대신해서 이야기를 할 예정이었다.
램은 고개를 저어 모른다는 뜻을 전했다.
"드본 하디는?"
다시 모른다고 했다.
"지난달에 당신은 버려진 창고에 살고 있었지요?"
"그렇소."
"뉴욕 애비뉴와 플로리다 애비뉴가 만나는 모퉁이에 이는 것이었지요?"
"그렇소."
"집세를 내고 있었지요?"
"그렇소."
"한 달에 백 달러였지요?"
"그렇소."
"털면 갠트리한테?"
순간 램의 몸이 얼어붙었다. 눈을 감고 그 질문을 생각하고 있었다.
"누구요?"
램은 되물었다.
"창고는 누구 소유였소?"
"나는 조니라는 작자한테 세를 내고 있었소."
"거기서 얼마나 살았소?"
"넉 달쯤."
"왜 나왔소?"
"쫓겨났소."
"누가 쫓아냈소?"
"모르겠소. 어느 날 경찰관들과 어떤 작자들이 나타났소. 그들이 우리를 잡아 보도에 내동
댕이쳤소. 이틀 뒤, 불도저가 창고를 밀어 버리더군요."
"경찰관들한테 세를 내고 살고 있는 거라고 이야기를 했소?"
"많은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했소. 어린애들이 딸린 어떤 여자는 경찰하고 싸우려고도 했
지만 아무 소용없었소. 나, 난 경찰관들하고는 안 싸워. 하여간 협약했소."
"그 사람들이 퇴거 조치 전에 서류를 보여 주었소?"
"아니."
"나가라는 통지는 있었소?"
"아니. 아무것도 없었소. 그냥 나타난 거요."
"문서로 된 건 아무것도 없었소?"
"아무것도. 경찰관들은 우리가 불법 점거자들이라고 하더군. 즉시 나가야 한다고 했소."
"그래서 지난 가을 10월쯤 나온 거로군."
"그 정도 되는 것 같소."
"처음에 그곳은 어떻게 찾아갔소?"
"모르겠소. 누가 창고안의 작은 아파트를 임대한다고 했소. 세가 싸다고 했지. 그래서 확
인하러 갔소. 가니까 판자니 벽이니 하는걸 세우고 있더군. 지붕도 있었고, 멀지 않은 곳에
화장실도 있었고, 수도도 있었소. 그 정도면 바가지를 쓰는 건 아니었소."
"그래서 들어갔군."
"그랬소."
"임대 계약서에 서명을 했소?"
"아니. 그 작자가 아파트는 불법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문서로 남기면 안 된다고 했소. 혹
시 누가 물어보면 불법 점거를 하고 있다고 말하라고 하더군."
"그리고 현금을 요구했고?"
"현금만."
"매달 세를 냈소?"
"그러려고 노력했지. 그 작자는 15일에 집세를 받으러 왔소."
"퇴거당할 때는 집세가 밀려 있었소."
"약간."
"얼마나?"
"한 달쯤."
"그것 때문에 퇴거를 당한 거요?"
"모르겠소. 이유는 이야기하지 않았으니까. 그냥 모두 한꺼번에 쫓아냈으니까."
"창고에 있던 사람들과 알고 지냈소?"
"두어 사람과는. 하지만 대개는 잘 모르고 지냈지. 아파트마다 좋은 문이 달려 있어서 모
두들 문을 잠가 놓고 살았으니까."
"아까 말했던 그 애들 어머니, 경찰과 싸우던 여자 말이오, 그 여자는 알았소?"
"아니. 아마 한두 번쯤 봤을 거요. 그 여자는 건너편에 살았지."
"건너편?"
"그렇소. 창고의 중앙에는 배관이 없어서, 양쪽 끝에 아파트를 지었거든."
"당신 아파트에서는 그 여자 아파트가 보였소?"
"아니. 그곳은 굉장히 큰 창고였소."
"당신 아파트는 얼마나 컸소?"
"방이 둘이었소. 얼마나 컸는지는 모르겠소."
"전기는?"
"있었지. 전선을 몇 개 집어넣어 주었소. 그래서 라디오 같은 걸 꽂을 수 있었지. 전등도
있었고. 수도도 있었고. 하지만 화장실은 공동 화장실을 써야 했소."
"난방은?"
"별로 안 들어왔소. 추웠소. 하지만 거리에서 자는 것만큼 춥지는 않았소."
"그러니까 그 아파트에서 행복하게 살았다는 거로군."
"괜찮았지. 한 달에 백 달러면 나쁘지 않았다는 거요."
"다른 사람을 두어 명 안다고 했지요. 그 사람들 이름이 뭐요?"
"허먼 해리스와 샤인 뭐시기요."
"그 사람들은 지금 어디 있소?"
"못 봤소."
"당신은 어디 묵고 있소?"
"창조적 비폭력을 위한 공동체에 있소."
모디카이는 호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램에게 주었다.
"그곳에 얼마나 있을 거요?"
모디카이가 물었다.
"모르겠소."
"나하고 연락할 수 있겠소?"
"왜?"
"당신한테 변호사가 필요할지 모르니까, 합숙소를 옮기거나, 살곳을 마련하면 연락 주시
오."
램은 아무 말 없이 명함을 받았다. 우리는 라이저에게 고맙다고 하고 사무실로 돌아갔다.
모든 소송이 그렇듯이 피고들을 상대로 행동을 하는 데는 많은 방법이 있었다. 피고는 셋
이었다. 리버오크스, 드레이크 & 스위니, 태그. 더 생길 것 같지는 않았다.
첫 번째 방법은 매복이었다. 또 하나의 방법은 서브를 하고 발리를 하는 것이었다.
매복을 하는 것은, 우리 주장의 틀을 갖추고, 법원으로 달려가, 소송을 걸고, 언론에 흘리
고,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을 우리 스스로 증명해 보이는 것이다. 여기서 얻는 것은 기
습 효과였다. 그리고 피고들을 당황하게 하는 것이었고, 어른을 환기시키는 것이었다. 이 방
법에 약점이 있다면, 저 아래 어딘가에 안전망이 있다는 강하기는 하지만 확인은 안 된 믿
음을 가지고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일과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서브를 하고 발리를 하는 방법은 우선 피고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에서 시작된다. 편지
에서 앞서 말한 것과 같은 주장을 하지만, 소송을 건다기보다는 그 문제를 이야기해 보자고
피고들을 초대하는 것에 가깝다. 이렇게 편지가 오다가 보면 대체로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예측할 수 있다. 그러다 상대의 책임을 입증할 수 있으면, 조용히 합의를 볼 수도 있다. 소
송은 아예 피할 수도 있는 것이다.
모디카이와 나는 두 가지 이유에서 매복이 마음에 들었다. 회사는 나에게서 손을 떼라는
요구에 아무런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두 번의 수색은 꼭대기층의 아서, 그리고 래프터를 비
롯한 소송 부서의 고집쟁이들이 나를 잡겠다고 결심을 했다는 분명한 증거였다. 내가 체포
되면 그것은 멋진 신문 기사가 될 터이기 때문에, 그들은 나에게 모욕을 주고 압력을 가하
기 위해 틀림없이 언론에 그 이야기를 흘릴 터였다. 우리는 우리 나름으로 반격을 준비해야
했다.
두 번째 이유는 이 사건의 핵심과 관련되는 문제였다. 즉 우리가 소송을 제기하여 선서
진술을 강요하기 전에는 헥터와 다른 증인들의 증언을 받아낼 방법이 없다는 점이었다. 소
송을 제기하자마자 뒤따르는 증거 개시 기간에는 피고들에게 온갖 종류의 질문을 할 기회를
얻을 수 있으며, 피고들도 선서를 하고 답변을 해야 했다. 우리는 또 원하는 누구에게나 선
서 진술을 시킬 수 있었다. 헥터 팔머를 찾아낼 수만 있다면, 그에게 선서를 시키고 마음껏
볶아 댈 수 있었다. 퇴거를 당한 다른 사람들을 찾아낼 수 있다면, 그들에게 진상을 말하도
록 강제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은 다 밝혀야 했다. 이것을 하는 데는 법정에서 인정하는 증거 개
시를 이용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이론적으로 보자면 우리 사건은 아주 간단했다. 창고의 불법 점거자들은 틸먼 갠트리 또
는 그를 대신하여 일하는 누군가에게 기록에 남지 않도록 현금으로 집세를 냈다. 갠트리는
리버오크스에 그 부동산을 팔 기회를 얻었는데, 빨리 해치워야 하는 일이었다. 갠트리는 리
버오크스와 그 변호사들에게 불법 점거자들에 대해 거짓말을 했다. 드레이크 & 스위니는
부지런하게도 헥터 팔머를 보내 거래 체결 전에 현장을 조사하게 했다. 헥터는 처음에 조사
하러 갔을 때는 강도를 당했으며, 두 번째는 경호원을 데려갔다. 그때 거주자들이 사실은 불
법 점거자들이 아니라 세입자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보고서를 통해 이것을 브레이든 챈스
에게 보고했으나, 챈스는 그것을 무시하고 계약 체결을 진행시키는 불운한 결정을 내렸다.
세입자들은 불법 점거자들 취급을 당하여 적절한 절차 없이 즉시 퇴거당했다.
공식적으로 퇴거 절차를 밟으려면 적어도 30일이 더 필요했다. 관련자 누구도 그 시간을
낭비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30일이면 혹한기는 지나갔을 것이다. 눈보라나 영하의 밤
의 위험은 줄어들고, 따라서 차 안에서 히터를 켜놓고 잘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런 기록도 없고, 집세 영수증도 없고, 추적할 흔적도 남기지 않는 거리
의 사람들에 불과했다.
이론적으로는 복잡한 사건이 아니었다. 그러나 장애물은 엄청났다. 노숙자들의 증언을 확
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갠트리가 나서서 휘젓고 다닐 경우에는. 그는 거리의
지배자였으며, 그곳은 내가 별로 나가 싸우고 싶어하지 않는 영역이었다. 모디카이도 나름대
로 호의와 소곤거림에 기초한 방대한 네트윅을 형성하고 있었으나, 그의 화력은 갠트리의
화력에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우리는 태그 주식회사를 피고로 지목하는 것을 피하는 방법
을 여러모로 강구해 보았다. 갠트리가 끼어들면 소송은 훨씬 터 지저분해지고 더 위험해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를 빼고 소송을 걸 수 있었으며, 그를 끌어들이는 문제는
다른 두 피고인 리버오크스와 드레이크 & 스위니에 맡겨 둘 수 있었다.
그러나 갠트리는 우리의 책임 이론에서 중요한 원인 제공자였다. 따라서 그를 피고에서
제외한다는 것은 사건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문제를 낳을 수 있었다.
헥터 팔머는 찾아내야 했다. 그리고 일단 찾아낸 다음에는, 어떻게 해서든 감추어진 보고
서를 내놓든가, 아니면 그 내용을 이야기해 달라고 설득해야 했다. 그를 찾는 것은 쉬운 일
이었다. 그러나 그의 입을 여는 것은 불가능할 수도 있었다. 헥터는 일자리를 지켜야 하기
때문에 입을 열려고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는 자신에게 부인과 네 자녀가 있음을
강조했다.
소송에는 또 다른 문제들도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순수하게 절차적인 것이었다. 우리
는 변호사들이었기 때문에 론타 버튼이나 그녀의 네 자녀를 대신하여 소송을 제기할 권한이
없었다. 우리는 그녀의 가족에 고용되어야만 했다. 그런데 그녀의 어머니와 두 오빠는 감오
게 있었고, 아이들의 아머지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래서 모디카이는 가족 법원에 론
타의 유산 문제를 처리할 수탁자를 임명해 달라고 청원을 하자는 의견을 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적어도 처음 단계에서는 그녀의 가족을 우회해 갈 수 있었다. 결국에 가서 손해 배
상을 받아내게 되면 가족 문제가 엄청나게 골치 아픈 일이 될 수가 있었다. 론타의 네 명의
자녀에게는 둘 이상의 아버지가 있을 것이라고 가정해도 무리가 없을 터였다. 따라서 돈을
주려면 그들 각각을 찾아내 통지를 해야 했다.
"그건 나중에 걱정하자고."
모디카이가 말을 이었다.
"우선 이기고 봐야 해."
우리는 앞사무실에 있었다. 소피아의 책상 옆에 있는 책상에는 고물 컴퓨터가 놓여 있었
다. 내가 타자를 치고 있었고, 모디카이는 어슬렁거리면서 구술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자정까지 전략을 짰다. 소장의 초안을 잡고, 여러 번 고쳤다. 쟁점들에 대해 토론
을 했다. 절차를 의논했다. 리버오크스와 내 옛 회사를 법정으로 끌어들여 시끄럽게 재판을
벌일 꿈을 꾸었다. 모디카이는 이 사건을 하나의 분기점, 즉 노숙자들에 대한 대중의 동점심
의 쇠퇴 흐름을 역전시킬 수 있는 중요한 기회로 보았다. 반면 나는 그저 잘못된 일을 바로
잡을 방법으로 보았을 뿐이다.
24
다시 루비와 커피를 마셨다. 내가 7시 45분에 출근했을 때, 루비는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
다가 나를 보고 반가워하였다. 어떤 사람이 버려진 차의 뒷좌석에서 여덟 시간 동안 뒤척인
뒤에 이렇게 명랑한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을까?
"도넛 있어요?"
루비가 물었다. 나는 전등 스위치를 올리고 있었다.
벌써 습관이 되었군.
"찾아 보죠. 앉으세요. 코피를 좀 만들 테니까."
나는 부엌에서 덜그덕 거리며 커피 기계를 닦고, 먹을 것을 찾아 보았다. 어제 이미 오래
된 것이었던 도넛은 훨씬 더 단단해져 있어지만, 다른 것은 없었다. 내일은 새 도넛을 사와
야겠다고 머리 속에 적어 두었다. 혹시 내일도 루비가 올지 모르니까. 어쩐지 그렇게 될 것
만 같았다.
루비는 도넛을 하나 집어 들고 딱딱한 가장자리를 조금씩 뜯어 먹었다. 예의바른 태도를
보여 주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아침은 어디서 먹습니까?"
내가 물었다.
"보통 안먹어요."
"점심하고 저녁은요?"
"점심은 10번가에 있는 '나오미 센터'에서 먹어요. 저녁에는 15번가에 있는 '갈보리 선교
단'에 가서 먹죠"
"낮에는 뭘 합니까?"
그녀는 다시 커피가 든 종이컵을 끌어안고 있었다. 그 온기를 최대한 이용하려는 것이었
다.
"보통은 나오미 센터에 있어요."
"거기에는 여자들이 몇 명이나 있죠?"
"모르겠어요. 많아요. 어쨌든 잘해 줘요. 하지만 낮 동안뿐이죠."
"여자 노숙자들만을 위한 곳입니까?"
"네, 그래요. 4시에는 문을 닫아요. 대부분의 여자들은 합숙소에 살고, 어떤 여자들은 거리
에서 살죠. 난 차가 있어요."
"그 사람들도 루비가 크랙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그런 것 같아요. 내가 알콜 중독자와 마약 중독자를 위한 모임에 나가기를 바래요. 하지
만 나만 그런 게 아니에요. 마약을 하는 여자들은 많아요."
"어젯밤에도 했나요?"
내가 한 말이 내 귓속에서 메아리쳤다. 내가 그런 질문을 하고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
았다.
루비는 고개를 떨구었다. 눈도 감았다.
"솔직히 말해 보세요."
"할 수밖에 없었어요. 매일 밤 해야 돼요."
그녀를 야단칠 생각은 없었다. 전날 루비의 이야기를 듣고도 그녀가 치료를 받을 수 있도
록 도와 주지 못했으니까. 그것이 갑자기 나에게 중요한 일이 되었다.
루비는 도넛을 하나 더 달라고 했다. 나는 마지막 남은 도넛을 포일에 싸주었고, 커피에는
뚜껑을 닫아 주었다. 루비는 나오미 센터에 볼일이 있는데 늦었다고 하면서 상담소를 나갔
다.
워싱턴 시청 앞에서 벌어진 정의를 위한 집회는 행진으로 이어졌다. 모디카이는 노숙자들
의 세계에서는 유명인사였기 때문에, 나를 군중 속에 남겨 두고 단상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
었다.
적갈색과 금색이 섞인 가운을 입은 어떤 교회성가대가 재단을 차지하고 힘찬 찬송가를 부
르기 시작했다. 수백 명의 경찰관들이 거리 아래위에서 느슨하게 대오를 형성하고 어슬렁거
리고 있었다. 경찰의 바리케이드가 차량들의 출입을 막고 있었다.
창조적 비폭력을 위한 공동체에서는 천여 명의 보병 부대를 동원하기로 약속했다. 그들은
떼를 지어 몰려왔다. 노숙자이고 또 노숙자임을 자랑스워야하는 길고, 인상적이고, 무질서한
대열이었다. 그들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기 전에 소리부터 들렸다. 열심히 연습한 행진 구
호가 몇 블록 떨어진 곳부터 들렸다. 그들이 모퉁이를 돌자, 텔레비젼 카메라들이 그들을 맞
이하기 위하여 달려나갔다.
노숙자들은 무사히 시청의 계단에 집결하여, 플래카드를 휘들렀다. 대부분은 그들이 직접
쓰고 제작한 것이었다. 살인을 중단하라. 합숙소를 보존하라, 나도 집을 가질 권리가 있다.
일자리! 일자리!일자리! 그들은 플래카드를 미리 높이 쳐들었다. 플래카드들은 찬송가의 박
자와 시끄러운 구호의 운율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
교회 버스들이 바리케이드 앞에 멈추더니, 사람들 수백 명을 쏟아냈다. 그들 가운데 많은
수는 거리에 사는 사람들로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옷을 잘 차려 입은 교인들이었으며, 대부
분이 여자들이었다. 나로서는 모디카이 외에 단 한 사람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소피아와 에
이브러험도 군중 속 어디가에 있었지만 보이지는 않았다. 선전지에는 지난 10년간 이렇게
큰 집회아 행진은 없었다고 적혀 있었다. 이 집회의 이름은 '론타를 위한 대회'였다.
확대된 론타 버튼의 사진이 커다란 플래카드로 대량 제작되었다. 사진 주위에는 검은 테
가 둘러져 있었다. 사진 밑에는 '누가 론타를 죽였는가?" 하는 무시무시한 말이 적혀 있었
다. 군중에는 나누어 준 이 플래카드는 곧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플래카드가 되었다. 자기
나름의 시위용 깃발을 가져온 창조적 비폭력을 위한 공동체 사람들조차고 이 플래카드를 집
어 들었다. 론타의 얼굴이 사람들 머리 위를 누비며 끄덕거리고 있었다.
멀리서 사이렌이 울부짖더니,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운구차가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바리
케이드를 통과하여 시청 건물 바로 앞에서 멈추었다. 군중 한가운데였다. 운구차의 뒷문이
열렸고, 검게 칠한 모조 관이 운구하는 사람들에 의해 밖으로 실려나왔다. 운구를 하는 사람
들도 노숙자들이었는데, 그들은 관을 어깨에 매고 행진을 시작할 준비를 갖추었다. 색깔은
같지만 크기는 훨씬 작은 관 네 개는 또 다른 사람들이 운구했다.
바다가 갈라졌다. 관을 멘 행렬은 천천히 계단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합창단이 흑인
특유의 장송곡을 부르기 시작했다. 내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죽음의 행진이었다. 그 작은
관들 가운데 하나는 온타리오를 상징하고 있었다.
이어 사람들이 앞으로 몰려나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손을 위로 뻗어 관을 만졌다. 그러
자 관은 두둥실 떠서, 약간씩 좌우로 흔들리며, 끝에서 끝까지 갔다.
놀라운 드라마였다. 카메라들이 단상 가까이 몰려나가, 이 엄숙한 움직임을 남김없이 기록
했다. 앞으로 48시간 동안 텔레비젼에서 그 모습을 지겹도록 볼 수 있을 터였다.
관들은 계단 한가운데 합판으로 만들어 놓은 선반 위에 나란히 놓였다. 론타의 관이 중간
이었다. 모디카이가 서 있는 단상에서 몇 발자국 아래였다. 오랜 시간 동안 카메라들이 그
모습을 찍어댔다. 이윽고 연설이 시작되었다.
의장은 활동가였는데, 그는 우선 행진을 조직하도록 도와 준 모든 단체에 고맙다는 인사
부터 했다. 그 단체들 명단은 대단했다. 적어도 그 양에서는, 그가 단체들 이름을 읽어나가
는 것을 들으면서, 나는 합숙소, 선교단, 급식소, 연합체, 진료소, 법률상담소, 교회, 무슨무
슨 센터, 봉사활동 단체, 직업 훈련 프로그램, 중독 치료 프로그램, 심지어 선출직 관리들의
이름에까지 그 수가 엄청나다는 것에 기분 좋게 놀랐다. 그 모두가 이 행사에 관여하고 있
었다.
지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왜 노숙자 문제가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
다음 여섯 명의 연설자가 그 질문에 대답을 해주었다. 우선 적절한 기금 부족, 그 다음에
예산 감소, 연방 정부의 무관심, 시의 태만, 돈 있는 사람들의 동정심 부족, 지나치게 보수화
되어 버린 사법부. 이유는 끝도 없었다.
연설하는 사람들마다 같은 주제를 되풀이했다. 모디카이만이 예외였다. 그는 다섯 번째 연
사로 나섰는데, 버튼 가족이 세상에서 보낸 마지막 몇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함으로써, 군중
이 입을 다물게 했다. 모디카이가 아기의 기저기(아마 아기로서는 마지막 기저귀였겠지만)를
갈아 주었던 이야기를 하자, 군중 사이에서는 모든 소리가 사라져 버렸다. 기침 소리도 수근
거리는 소리도 없었다. 나는 마치 누가 안고 잇는 아기를 보듯 관들을 보았다.
"이윽고 이 가족은 합숙소를 떠났습니다."
모디카이는 저음의 잘 울리는 목소리로 느릿느릿 말을 이어나갔다.
"그들은 다시 거리로, 눈보라 속으로 돌아갔는데, 론타와 어린아이들은 그곳에서 불과 몇
시간밖에 더 살지 못했습니다."
모디카이는 그 시점의 사실들을 이야기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큰 재량권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도 사건의 진상을 몰랐기 때문이다. 나는 알았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군중은 이야기의
세밀한 부분의 진위 여부를 떠나, 이야기 자체에 빨려들어가 있었다.
모디카이가 그 가족의 마지막 몇 분, 온기를 유지하고자 서로 부둥켜안고 있었던 장면을
이야기할 때, 내 주위에서 여자들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내 생각은 이기적으로 변했다. 만일 이 남자, 내 친구이자 동료 변호사가, 30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높다란 단상에서 자신의 이야기로 수천 명의 군중을 사로잡을 수 있다면, 팔을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운 배심석에 앉은 열두 명의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어마어마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까?
순간 나는 버튼 소송은 절대 그렇게까지 진행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제정신을
가진 피고 변호팀이라면 모디카이 그린이 이 도시의 흑인들로 이루어진 배삼에서 설교를 할
기회를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가정이 옳다면, 그리고 우리가 그 가정들을 입증할 수
있다면, 재판을 절대 열리지 않을 것이다.
연설이 한 시간 반 정도 계속되자, 군중은 몸을 들썩이며 어서 걷고 싶어하였다. 성가대가
다시 노래를 시작했다. 요구하는 사람들은 관을 메고, 시청을 떠나 행렬을 인도하기 시작했
다. 관 뒤에는 모디카이를 포함한 지도부가 있었다. 우리도 그 뒤를 따랐다. 누가 나한테 론
타의 플래카드를 건네 주었다. 나도 누구 못지않게 그 플래카드를 높이 쳐들었다.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은 행진을 하거나 항의를 하지 않는다. 그들의 세상은 안전하고 깨
끗하고, 그들을 행복하게 유지해 주기 위해 고안된 법들의 지배를 받는다. 나는 전에 한 번
도 거리로 나선 적이 없었다. 왜 구태여 거리로 나서겠는가? 처음 한두 블록을 걷는 동안
나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네 명의 사생아를 둔 스물두 살의 흑인 어머니의 얼굴이 담긴 플
래카드를 들고 이런 식으로 거리를 걸어가다니.
그러나 이제 나는 몇 주 전과는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이제는 원한다 해도 돌아갈 수가
없었다. 내 과거는 돈과 소유의 지위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것은 이제 나를 곤혹스럽게 만드
는 골칫거리들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편안하게 행진을 즐겼다. 노숙자들과 함께 구호를 외쳤고, 다른 사람들과 똑
같이 플래카드를 높이 치켜들었다 내렸다 하였으며, 심지어 나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찬송가
들을 부르려고 노력도 해보았다. 나는 시민으로서의 첫 항의를 즐기고 있었다. 앞으로도 이
럴 기회가 여러 번 있겠지만.
의사당으로 다가가자 바리케이드들이 우리를 보호하고 있었다. 행진 계획은 치밀하게 짜
여 있었다. 그리고 그 규모 때문에 가는 길내내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관들은 의사당 계
단에 놓였다. 우리는 관을 둘러싸고 모여, 시민권 운동가와 두 의원으로부터 다시 일련의 격
렬한 연설을 들었다.
연설이 주는 느낌은 이제 퇴색했다. 들을 만큼 들었다. 내 노숙자 형제들은 할 일이 없었
다. 그러나 나는 월요일에 새 직장에서 일을 시작한 뒤, 벌써 31개의 파일을 거느리게 되었
다. 그것은 31명의 사람들이 내가 식량 배급표를 갖다 주고, 집을 찾아 주고, 이혼 소송을
제기해 주고, 범죄 혐의를 변호해 주고, 분쟁이 생긴 임금을 받아 주고, 퇴거를 막아 주고,
중독 치료를 도와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마술이라도 부려서 정
의를 찾아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반트러스트 변호사 일을 할 때는 의뢰인들을
마주할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거리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나는 보도의 행상한테서 싸구려 시가를 하나 산 뒤, 짧은 산책을 하러 갔다.
25
팔머가 살던 집의 옆집 문을 두드렸다. 여자의 목소리가 대답했다.
"누구세요?"
그러나 자물쇠를 풀고 문을 열어 주려 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 집 앞에 가기전에 오랫동
안 열심히 계획을 짰다. 심지어 베세즈더로 차를 몰고 가면서 연습을 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나의 행동이 설득력을 가질지 자신할 수가 없었다.
"보브 스티븐스라고 합니다."
나는 굽실거리는 말투로 말을 이었다.
"헥터 팔머를 찾는데요."
"누구요?"
여자가 되물었다.
"헥터 팔머요. 옆집에 살았던 분 말입니다."
"무슨 일인데요?"
"그분한테 빚을 진 게 좀 있어서요. 그래서 그분을 찾으려는 겁니다."
내가 돈을 받으려 왔다거나, 아니면 어떤 다른 불쾌한 일로 왔다고 하면, 이웃들은 당연히
방어적으로 나올 터였다. 그래서 나는 내 계략이 그만하면 재치있는 것이라고 자부심을 가
지고 있었다.
"이사갔어요."
여자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나도 이사갔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혹시 어디로 갔는지 아십니까?"
"아뇨."
"이 지역을 떠났나요?"
"모르겠어요."
"이사가는 것은 보셨습니까?"
물론 그 대답은 '네'여야 했다. 그것까지 피해 갈 수는 없었다. 그러나 여자는 대답하는 대
신, 자기 아파트로 쑥 들어갔다. 아마 경비원을 부르는 모양이었다. 나는 질문을 되풀이하고,
이어 다시 초인종을 눌렀다. 그러나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그래서 사는 헥터의 집의 반대쪽 옆집으로 갔다. 초인종이 두 번 울리자, 문이 사슬의 한
계까지 열렸다. 내 나이 또래의 남자가 입가에 마요네즈를 묻힌 채 물었다.
"누구요?"
나는 아까와 똑같이 보브 스티븐스로서 이야기를 했다. 남자는 주의 깊게 이야기를 들었
다. 뒤의 거실에서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텔레비젼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고 있었다. 8
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어둡고 추웠다. 나는 그의 늦은 저녁 식사를 방해한 셈이었다.
그러나 그는 언짢은 표정을 짓지는 않았다.
"난 그 사람과 친하지 않았소."
"그분 부인은요?"
"몰랐소. 나는 출장을 많이 나가는 편이오. 대부분은 집에 없소."
"사모님은 그 사람들을 아셨을까요?"
"아니."
대답이 너무 빨리 나왔다.
"혹시 선생님이나 사모님이 팔머 씨 가족이 이사하는 것을 보셨습니까?"
"우리는 지난 주말에 이곳에 없었소?"
"팔머 씨 가족이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고요?"
"모르오."
나는 고맙다고 하고 돌아서다가, 살이 피둥피둥 찐 경비원과 마주쳤다. 제복을 입은 경비
원은 오른손에 든 곤봉으로 왼손 손바닥을 툭툭 치고 있었다. 영화에 나오는 거리의 경찰관
의 모습이었다.
"뭐 하는 거요?"
경비원이 으릉렁거렸다.
"누굴 찾고 있소. 그것 좀 치우시지."
"우리 단지 내에 잡상인을 들여놓지 않아."
"귀가 먹었소? 물건을 파는 게 아니라, 누구를 찾고 있다니까."
나는 그를 지나쳐 주차장으로 향했다.
"주민이 신고를 했소."
경비원이 내 등뒤에 대고 소리치고는 덧붙였다.
"어서 떠나쇼."
"지금 가잖아!"
저녁 식사는 팔머의 집에서 멀지 않은 술집에서 타코와 맥주로 때웠다. 집 근처보다 교외
에서 먹는 것이 더 안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레스토랑은 전혀 개성이 없었다.
새로 형성되는 부자 동네의 술집 구실을 하면서 부유해지고 있는 전국 체인점이었다. 손님
들은 주로 젊은 공무원들이었다. 아직 집에 갈 일이 남은 사람들이었다. 모두들 생맥주를 마
시거나 텔리비전에 중계되는 운동 경기를 보고 고함을 지르면서, 정책이나 정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외로움에도 적응을 해야 했다. 나는 아내와 친구들을 떠났다. 하긴, 드레이크 & 스위니라
는 착취 공장에서 보낸 7년은 우정을 키워가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 점에서는 결혼
생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나이를 서른둘이나 먹은 지금, 나는 독신 생활을 제대로 해나
갈 준비가 되지 않았다. 텔리비전의 시합을 보면서, 그리고 주위의 여자들을 보면서, 나는
사귈 만한 사람을 찾기 위해서 술집이나 나이트클럽을 찾아다녀야 하는 것인지 자문해 보았
다. 그러나 다른 장소와 다른 방법도 있을 것 같았다.
어쨌든 홀로 남겨진 처량한 신세였다.
도심으로 천천히 차를 몰고 갔다. 아파트로 서둘러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임대 계
약서에는 내 이름이 나와 있었다. 어디 컴퓨터에도 들어가 있을 터였다. 따라서 경찰은 별어
려움 없이 내 다락방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경찰에서 체포를 계획하고 있다면, 밤에 들
이닥칠 것이 틀림없었다. 한밤중에 문을 두드려 나에게 겁을 주는 것을 즐기겠지. 약간 거칠
게 굴면서 몸 수색을 하고 수갑을 채울 것이고, 문 밖으로 밀쳐낼 것이고, 내 두 팔을 꽉 잡
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갈 것이고, 순찰차의 뒷자석에 밀어 넣고 시유치장으로 달려가겠
지. 아마 유치장에는 한밤중에 체포된 젊은 백인 전문 직업인으로는 내가 유일할 것이다. 경
찰은 그저 나를 다른 잡범들과 함께 유치장에 집어넣고, 어디 한번 알아서 버텨 봐라, 하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구경을 하고 있겠지.
나는 어디를 가나 두 가지는 몸에 지니고 다녔다. 하나는 휴대 전화였다. 그것만 있으면
체포되는 즉시 모디카이에게 전화를 할 수 있었다. 또 하나는 지폐 뭉치였다. 20달러짜리들
이었다. 이것을 보석금으로 사용하여, 혹시 유치장에 가기 전에 빠져나올 수 있을지도 모르
니까.
아파트 건물에서 두 블록 떨어진 곳에서 차를 세웠다. 혹시나 수상쩍은 인간들이 있지나
않은가 해서 근처의 빈 차들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이어 다락방까지 무사히 올라갈 수 있었
다. 아무도 나에게 손대지 않았고, 물론 체포당하지도 않았다.
거실에는 이제 잔디밭용 의자 두 개와 플라스틱 상자가 있었다. 상자는 커피 탁자 노릇을
했고, 의자에 앉았을 때 발을 걸쳐 놓는 곳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텔리비전은 그 상자와 어
울리는 다른 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나는 이렇게 가구가 빈약한 것이 좋았으며, 다른 사람을
집 안으로 불러들일 생각은 없었다. 아무에게도 내가 사는 모습을 보여 주지 않을 작정이었
다.
없는 동안 어머니가 전화를 했다. 나는 어머니가 남긴 녹음에 귀를 기울였다. 어머니와 아
버지는 내가 걱정이 되어서, 한번 찾아오고 싶다고 했다. 워너 형과 의논을 했는데, 형도 한
번 올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들이 내 새로운 인생을 분석하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했다.
아마 내가 정신을 차리게끔 이야기를 좀 해주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11시의 톱뉴스는 론타를 위한 집회였다. 시청 건물 계단에 놓인 다섯 개의 검은 관을 클
로즈업으로 찍은 장면도 나왔다. 군중에게 연설하는 모디카이의 모습도 나왔다. 군중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많았던 모양이다. 뉴스에서는 5천 명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시장은 아무런
논평을 하지 않았다.
텔리비전을 끄고 클레어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나흘간이나 이야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 쪽에서 좀 공손한 모습을 보여 주며 갈등을 완화시키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이다. 법적으로 우리는 아직 부부였다. 일 주일 정도 후에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것도 괜찮
을 것 같았다.
세 번 전화벨이 울린 다음, 귀에 선 목소리가 머뭇머뭇 '여보세요.' 하며 전화를 받았다.
남자 목소리였다.
순간적으로 정신이 멍해, 아무런 이야기도 할 수가 없었다. 목요일 밤 11시 반이었다. 클
레어는 남자를 불러들인 것이다. 내가 나온지 일 주일도 안 되었는데. 전화를 끊어 버리려다
가,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클레어 좀 부탁합니다."
"누구시죠?"
남자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마이클이라고, 클레어 남편입니다."
"클레어는 샤워중인데요."
남자의 목소리에서는 만족감이 묻어나고 있었다.
"전화했다고 전해 주십시오."
얼른 전화를 끊어 버렸다.
자정이 될 때까지 세 방을 돌아다니며 서성거렸다. 마침내 좀 걷기 위해 다시 옷을 입고
추운 바깥으로 나갔다. 결혼 생활이 망가지면, 그간의 과정에 대해 온갖 시나리오를 떠올리
게 된다. 그냥 서로 멀어지게 된 것일까, 아니면 그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일이 있었을까?
내가 어떤 신호를 놓쳤던가? 그냥 어쩌다 하룻밤 들르게 된 남자일까, 아니면 오랫동안 만
나던 사이일까? 처자식을 두고서도 열이 뻗치는 의사일까, 아니면 나에게 부족했던 부분을
채워 주는, 젊고 정력이 넘치는 의대생일까?
나는 줄곧 아무려나 상관없다고 되뇌이고 있었다. 우리는 부정한 행동 때문에 이혼하려는
것이 아니다. 클레어가 아무 남자하고나 자고 다닌다 한들, 걱정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결혼은 끝났다. 분명한 것이다. 이유야 어쨌든 간에. 내가 걱정하건 말건 클레어는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다. 나는 이미 클레어를 끝냈고, 없앴고, 잊어 버렸다. 내가 마음대로 여자
들을 쫓아다닐 수 있다면, 클레어도 마찬가지다.
그래, 맞다.
새벽 2시, 내가 있던 곳은 듀퐁 서클이었다. 동성애자들이 야유하는 소리를 무시했다. 겹
겹이 옷을 껴입고 그 위에 누비이불을 두른 채 벤치에서 자고 있는 남자들을 지나갔다. 위
험한 곳이었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몇 시간 뒤, '크리피스 크림'에 들러 여러 가지를 섞어 도넛 한 상자를 사고, 더불어 커피
큰 컵 두 개와 신문도 샀다.
루비는 추위에 떨면서도 충실하게 문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눈은 평소보다 더 충혈되어
있었다. 웃음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우리가 늘 이야기하던 장소는 앞 사무실의 책상이었다. 나는 책상 위를 정리하고, 커피와
도넛을 내밀었다. 루비는 초콜릿은 좋아하지 않았지만, 과일을 넣은 것은 무척 좋아했다.
"신문은 읽나요?"
내가 신문을 펼치며 물었다.
"아뇨."
"글은 잘 읽습니까?"
"별로요."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그 기사를 읽어 주었다. 1면에서부터 시작을 했다. 거기에 군중 위
를 둥둥 떠가는 것처럼 보이는 다섯 개의 관을 찍은 커다란 사진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사
는 아래쪽 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한 자도 빼놓지 않고 읽어 주었고, 루비도 열심히 들
었다. 그녀도 버튼 가족이 죽은 이야기는 듣고 있었다. 루비는 세부적인 내용에 큰 관심을
보였다.
"나도 그렇게 죽을 수 있을까요?"
루비가 물었다.
"아뇨. 루비의 차에 엔진이 있고 히터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죠."
"내 차에도 히터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거리에서 동사할 수는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얼어 죽는다는 뜻이죠."
루비는 냅킨으로 입을 닦고 커피를 마셨다. 온타리오의 가족이 죽던 날 밤에는 기온이 영
하 12도였다. 루비는 어떻게 그 날 밤에 살아 남았을까?
"날씨가 몹시 추워지면 어디로 갑니까?"
내가 물었다.
"아무 데도 안 가요."
"그냥 차에 있나요?"
"네."
"그러다 얼어 죽으면 어떻게 하죠?"
"담요가 많아요. 그냥 그 속에 파묻혀 있어요."
"합숙소에는 안 가나요?"
"절대."
"테런스를 만나는 데 도움이 된다면 합숙소에 가겠습니까?"
루비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더니, 묘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다시 말씀해 보세요."
"테런스를 만나고 싶죠, 그렇죠?"
"그래요."
"그럼 루비는 깨끗해져야 합니다, 그렇죠?"
"그래요."
"깨끗해지려면, 한동안 갱생 센터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고 싶죠?"
"어쩌면요, 어쩌면이요."
작은 작전이었으나,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테런스를 다시 만나는 것을 도와 드릴 수 있습니다. 둘이 함께 살게 될 수도 있습
니다. 그러나 그 전에 먼저 깨끗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깨끗한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죠?"
그녀의 눈은 내 눈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루비는 커피를 껴안았다. 김이 얼굴을 향해 피
어올랐다.
"오늘 나오미 센터에 갈 건가요?"
"네."
"그곳 책임자와 이야기를 했어요. 오늘 두 번의 모임이 있대요. 알콜 중독자와 마약 중독
자가 모이는 거죠. 루비가 그 두 모임에 참석을 했으면 좋겠어요. 책임자가 나한테 전화를
해서 루비가 참석 했는지 안 했는지 알려 줄 겁니다."
루비는 야단맞은 어린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 순간에는 더 밀어붙일 생각이
없었다. 루비는 도넛을 우물거리고, 커피를 마시고, 내가 기사를 읽어 주는 대로 정신이 팔
린 표정으로 귀를 기울였다. 루비는 해외 소식과 스포츠에는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았지만,
도시 뉴스에는 큰 관심을 보였다. 오래 전에는 투표를 한 번 한적도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워싱턴의 정치는 쉽게 이해하는 것 같았다. 범죄 기사도 잘 이해했다.
신문에서는 긴 사설로 시와 의회가 노숙자들을 위한 재정 지원을 하지 않는 것을 꼬집고
있었다. 사설은 이러다가는 론타와 같은 사람들이 도 생길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합중국 의
사당 코앞의 거리에서 다른 아이들이 또 죽어갈 것이다. 나는 적당히 말을 바꾸어 이 사설
의 내용을 루비에게 전해 주었고, 루비는 구절마다 동의를 했다.
차가운 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차로 루비를 다음에 가는 곳까지 데려다 주었다.
'나오미 여성 센터'는 북서부 10번가에 자리잡은 4층짜리 연립주택이었다. 비슷한 집들이 모
여 있는 동네였다. 여성 센터는 7시에 문을 열고 4시에 문을 닫았다. 매일 낮 동안 음식, 새
워, 옷가지, 행사를 제공했고, 그곳을 찾는 모든 노숙자 여인들에게 자문을 해주었다. 루비는
그곳의 단골이라고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안으로 들어서자 친구들의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나는 미건이라는 젊은 여자 책임자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루비를 중독에서
벗어나게 할 음모를 짰다. 그곳에 있는 여자들 반이 정신병을 앓고 있었고, 반이 중독에 걸
려 있었고, 삼분의 일이 에이즈 양성 반응자였다. 미건이 아는 바로는, 루비에게는 아무런
전염병이 없었다.
내가 센터를 나올 때, 여자들은 큰 방에 모여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책상에 앉아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데, 소피아가 문을 두드리더니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
에 안으로 들어왔다.
"모디카이가 그러는데, 누구를 찾는다면서요."
소피아는 규격 용지를 들고 메모를 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헥터를 기억해 냈다.
"아, 네. 찾고 있어요."
"내가 도와줄게요. 그 사람에 대해 아는 걸 다 말해 보세요."
소피아는 앉아서 내가 주절거리는 대로, 그의 이름, 주소, 일터, 신체적 특징, 부인과 네
자녀가 있다는 사실 등을 기록했다.
"나이는요?"
"아마 서른일 겁니다."
"대략적인 수입은요?"
"3만 5천."
"자녀가 넷이라면, 그 가운데 적어도 한 명은 학교에 다니겠네요. 그 정도 수입에 베데즈
더에 살고 있었다면, 아마 사립학교에 다녔을 거에요. 그리고 이 사람은 남미계니까, 아마
천주교도일 거예요. 또 다른 건?"
다른 것은 한 가지도 생각나지 않았다. 소피아는 자기 책상으로 돌아가더니, 고리가 세 개
달린 공책을 펼치고 뒤적이기 시작했다. 나는 문을 그대로 열어 두고 그녀가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귀를 기울였다. 첫 전화는 체신부 쪽이었다. 말이 곧 스페인어로 바뀌었기 때문에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계속 전화가 이어졌다. 그녀는 영어로 인사를 하고 아는 사람을 바꾸
어 달라고 하더니, 곧 모국어로 바꾸어 말했다. 이윽고 카톨릭 감독 관구로 전화를 했는데,
그것이 또 일련의 전화로 이어졌다. 나는 이내 흥미를 잃었다.
한 시간 뒤, 소피아는 나에게 오더니 말했다.
"그들은 시카고로 이사갔어요. 주소가 필요해요?"
"대체 어떻게……?"
나는 말꼬리를 흐리며, 놀란 눈으로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묻지 말아요. 그 사람들이 다니는 교회에 내 친구의 친구가 있어요. 주말에 서둘러 이사
를 했대요. 새 주소가 필요해요?"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요?"
"쉽지는 않을 거예요. 하지만 동네는 대충 가르쳐 줄 수 있어요."
앞 사무실에는 그녀의 조언을 기다리는 의뢰인이 적어도 여섯 명은 되었다.
"지금은 됐습니다. 필요하면 나중에 다시 말할게요. 고맙습니다."
"천만에요."
천만에라니. 나는 사실 어두워진 뒤에 다시 추위에 떨며, 경비원의 눈을 피해 가며, 경비
원이 총으로 나를 쏘지 않기를 바라며, 몇 시간 동안 헥터의 이웃집 문들을 두드리고 다닐
계획이었다. 그런데 소피아는 전화를 한 시간 하더니, 사라진 사람을 찾아 낸 것이다.
드레이크 & 스위니의 시카고 지사에는 백 명이 넘는 변호사들이 있었다. 나는 반트러스
트 사건 때문에 그곳에 두 번 가본 적이 있었다. 사무소는 호반의 마천루에 자리잡고 있었
다. 건물의 로비는 몇 층 높이였으며, 분수와 상점들이 있고, 에스컬레이터들이 지그재그로
위로 올라갔다. 그곳은 숨어서 헥터 팔머를 기다리기에는 이상적인 장소였다.
26
노숙자들은 거리에, 보도에, 도로 가장자리와 도랑에, 콘크리트에, 쓰레기에, 하수구 뚜껑
과 소화전과 쓰레기통과 버스 정류장과 상점 입구에 가까이 있다. 그들은 매일 익숙한 영토
를 천천히 움직이다가 발은 멈추고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 그들에게는 시간이 별 의미가 없
기 때문이다. 그래서 발을 멈추고 길에서 멎어 버린 차를 구경하기도 하고, 길모퉁이의 새로
나온 마약상을 구경하기도 하고, 그들의 구역에 나타난 낯선 얼굴을 구경하기도 한다. 그들
은 모자로 얼굴을 감추거나 잡화점 차일 뒤에 모습을 감추고, 보초처럼 모든 움직임을 관찰
한다. 그들은 거리의 소리를 듣고, 버스의 디젤 배기 가스와 싸구려 식당의 튀김 기름 냄새
를 맡는다. 똑같은 택시가 한 시간에 두 번 지나가면, 그들은 그것을 눈치챈다. 멀리서 총소
리가 나면, 그것이 어디서 난 소린지 안다. 버지니아나 메릴랜드 번호판이 붙은 좋은 자동차
가 도로 가에 주차해 있으면, 떠날 때까지 지켜보고 있는다.
아무런 특징이 없는 차에 정복을 입지 않은 경찰관이 앉아서 기다리고 있으면, 그들은 그
것을 구경한다.
"저 밖에 경찰이 있는데요."
우리 의뢰인들 가운데 하나가 소피아에게 말했다. 소피아는 앞문으로 가, 남동부 쪽 Q 스
트리트를 살폈다. 그곳에 경찰관의 차로 보이는 차가 한대 있었다. 그녀는 30분을 기다렸다
가 다시 확인했다. 그리고 모디카이에게로 갔다.
나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식량 배급표 사무소와 다른 한편으로는 검사실과
씨름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금요일 오후였다. 시의 관료들은 평일에도 수준 이하였지만,
이런 날은 능률이 더 떨어졌다. 모디카이와 소피아가 함께 와서 소식을 전해 주었다.
"경찰이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데."
모디카이가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책상 밑으로 들어가 숨고 싶었다. 그러나 물론 그렇게 하지는 않
았다. 나는 침착해 보이려고 애를 썼다.
"어디에요?"
나는 마치 그것이 중요하기나 한 것처럼 물었다.
"저 모퉁이에. 30분 이상 이 건물을 감시하고 있소."
"어쩌면 모디카이를 잡으러 온 것인지도 모르죠."
하하. 그러나 두 사람 다 굳은 표정이었다.
"전화를 해봤어요."
소피아가 말을 이었다.
"체포 영장이 나왔대요. 중절도죄라는데요."
중죄! 감옥! 잘생긴 백인 청년이 감옥에 던져지다니. 나는 몸의 무게중심을 다른 쪽으로
옮기며, 두려움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놀랄 일은 아니로군요."
마치 늘 있는 일인 것처럼. 내가 말을 이었다.
"어차피 겪어야 하는 일인데요 뭐."
모디카이가 말했다.
"검사실에 있는 사람한테 전화를 해보겠소. 자수하는 식으로 처리하면 더 나을 것 같으니
까."
"그게 더 낫겠죠."
마치 별상관 없다는 듯이. 내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오후 내내 검사실과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습니다. 아무도 상대해 주려고 하지 않
던데요."
"그것에는 법률가가 2백 명이나 있소."
그러나 모디카이는 본래 그쪽 사람들과는 사귀지 않았다. 경찰과 검사는 거의 천적이었다.
재빨리 계획을 짰다. 소피아는 보석금 보증인에게 전화를 하기로 했다. 보증인은 유치장에
서 우리를 만나면 된다. 모디카이는 친한 판사를 찾아 보기로 했다. 그러나 뻔한 사실 한 가
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지금이 토요일 오후라는 사실. 내가 시 유치장에서
주말을 살아서 넘길 수 있을까.
두 사람은 전화를 하기 위해 떠났고, 나는 겁에 질려 책상에 앉아 있었다. 움직일 수도,
생각할 수도 없었다. 앞문이 삐걱이는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정각 오후 4시, 개스코 형사가 부하 두 사람을 끌고 들어왔다.
개스코를 처음 만났을때, 그가 클래어의 아파트를 수색하고 있었을 때, 내가 고함을 지르
고 욕을 하고 그와 그의 동료들에게 온갖 지저분한 소송을 걸겠다고 협박을 했을 때, 그가
하는 말마다 신랄하게 반박을 했을 때, 내가 사납게 돌진하는 변호사이고 그는 일개 경찰관
에 불과했을 때, 그가 하는 말마다 신랄하게 반박을 했을 때, 내가 사납게 돌진하는 변호사
이고 그는 일개 경찰관에 불과했을 때, 내 머리 속에는 언젠가 그가 나를 체포하는 즐거움
을 누리게 될 거라는 생각은 떠오르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제 개스코가 나이든 운동선수처
럼 거들먹거리며 들어와, 조롱하는 웃음을 나에게 던지고 있었다. 손에는 전보다 더 많은 서
류를 들고 있었다. 그는 그 접힌 서류를 내 가슴에 내던질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브록 씨를 좀 만나야겠소."
개스코가 소피아에게 말했다. 거의 동시에 내가 앞 사무실로 나서서 웃음을 지었다.
"안녕하시오, 개스코. 여전히 그 파일을 찾고 있소?"
"아니. 오늘은 아니오."
모디카이가 그의 사무실에서 나타났다. 소피아는 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가 서로를
보고 있었다.
"영장 있소?"
모디카이가 물었다.
"있소. 여기 브록 시에 대한 거요."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갑시다."
나는 개스코 쪽으로 움직였다. 뒤에 있던 경찰 하나가 허리춤에서 수갑을 휙 꺼내 들었다.
나는 적어도 씩씩한 모습은 보여 주겠다고 결심하고 있었다.
모디카이가 말했다.
"내가 그 사람 변호사요. 어디 그것 좀 봅시다."
모디카이는 개스코에게서 체포 영장을 받아 살폈다. 뒤로 돌려진 내 손목에는 수갑이 채
워지고 있었다. 차가운 강철이 손목을 꼬집었다. 수갑은 너무 꽉 끼었다. 나는 태연한 모습
을 보여 주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내가 경찰까지 내 의뢰인을 따라가겠소."
모디카이가 말했다.
"어이쿠, 고맙소. 하지만 그런 수고는 끼치고 싶지 않소이다."
개스코가 말을 받았다.
"어디로 가는 거요?"
"중서부로."
모디카이가 나를 향해 말했다.
"내가 곧 그리 따라가겠소."
소피아는 수화기를 집어 들고 있었다. 그것이 모디카이가 나를 따라온다는 사실보다 훨씬
더 큰 위안이 되었다.
의뢰인 세 병이 그 광경을 빠짐없이 보고 있었다. 소피아와 이야기를 나누러 들어온, 순진
한 거리의 신사들이었다. 그들은 의뢰인들이 늘 앉는 곳에 앉아 있었다. 내가 그들 옆을 지
나가자 그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형사 하나가 내 팔꿈치를 움켜쥐더니 앞문으로 떠밀었다. 거리에 발을 내딛는 순간 나는
얼른 고개를 숙이고 차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아무런 표시가 없는 하얀 자동차 한 대가
모퉁이에 서 있었다. 노숙자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차가 그 자리에 멈추고, 경찰관들
이 쏜살같이 우리 사무소로 들어오고, 이어 나에게 수갑을 채워 데리고 나오는 광경을 다
보았다.
"변호사가 체포당했어."
그들은 곧 서로 소근거릴 것이고, 소식은 빠르게 거리에 전파될 터였다.
개스코는 나와 함께 뒷자석에 앉았다. 나는 낮게 몸을 내리깔았다.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
충격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이 무슨 시간 낭비야."
개스코는 카우보이 장화를 신은 발을 무릅에 올려놓으며 긴장을 풀었다. 개스코가 말을
이었다.
"이 도시에는 미제(未濟) 살인 사건이 140건이고, 모퉁이마다 마약 중독자들이 있고, 중학
교에서 마약상들이 마약을 파는데, 당신같은 사람한테 시간을 낭비해야 하다니."
"지금 날 심문하려는 거요, 개스코?"
내가 물었다.
"아니오."
"좋소."
개스코는 묵비권이 있다느니 뭐니 하는 미란다 경고는 읽어 주지 않았다. 사실 심문을 시
작하기 전에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운전대를 잡은 형사는 14번가를 따라 남쪽으로 날듯이 차를 몰고 있었다. 전조등은 켜지
도 않고 싸이렌을 울리지도 않았다. 그러면서도 교통 신호나 보행자들은 존중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럼 보내 주시오."
내가 말했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렇게 하겠소. 하지만 당신 정말 어떤 사람들을 화나
게 했더군. 검사가 그러는데, 당신을 잡으라는 압력이 심하다는 거요."
"누가 압력을 넣는다는 거요?"
내가 물었다. 그러나 나는 답을 알고 있었다. 드레이크&스위니는 경찰을 가지고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곧바로 검찰 수뇌부와 법적인 대화를 나눌 터였다.
"피해자들."
개스코가 심하게 비꼬는 투로 대답했다. 나도 그의 평가에 동의했다. 부유한 변호사들의
무리를 범죄의 피해자라고 부르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유명한 사람들 가운데도 체포를 당한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그들을 기억해 보려 했다. 마
틴 루터 은 몇 차례 감옥에 갔다. 보에스키와 밀큰을 비롯하여,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유명
한 도둑들도 있었다. 음주운전을 하거나 창녀와 수작을 하거나 코카인을 소지한 혐의로 체
포된 배우나 운동 선수들은 또 어떻고. 그들도 보통 범죄자들처럼 경찰차 뒷좌석에 끌려갔
다. 멤피스 출신의 판사 가운데는 무기 징역을 사는 사람도 있었다. 대학 때 알던 친구 하나
는 사회 복귀 시설에 들어가 있었다. 전에 알던 의뢰인 하나는 탈세 혐의로 연방 감옥에 들
어가 있었다. 모두 체포되어, 시내로 끌려가, 경찰 기록에 이름이 올라가고, 지문 채취를 당
하고, 턱 밑에 작은 번호판을 들고 사진을 찍었다. 그러고도 모두 살아남았다.
아마 모디카이 그린도 수갑의 차가운 감촉을 느껴 보았을걸.
마침내 초조한 기다림이 끝났다는 데서 오는 안도감도 있었다. 달아나고, 숨고, 누가 쫓아
오나 뒤돌아보는 일은 끝이 난 것이다. 더군다나 한밤중에 급습을 당한 것도 아니었다. 그랬
다면 아침까지 감옥에 있어야 할 터였다. 지금은 시간을 조절해 볼 여지가 있었다. 운이 좋
으면 주말의 범죄자들이 몰려오기 전에 일처리가 끝나고 보석으로 풀려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두려운 면도 있었다. 평생 느껴 보지 못한 두려움이었다. 시 유치장에서는 많은 일
들이 잘못될 수 있었다. 서류가 사라질 수도 있었다. 여러 가지 일 때문에 석방이 지체될 수
도 있었다. 보석은 토요일이나 일요일까지, 심지어 월요일까지 연기될 수도 있었다. 비좁은
감옥에 지저분한 사람들과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내야 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내가 체포되었다는 소문이 퍼져나가겠지. 내 친구들은 고개를 저으며, 저 녀석이 또 무슨
짓을 해서 인생을 더 망칠까 궁금해하겠지. 부모님들은 처참한 심정이겠지. 클레어는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었다. 특히 지금은 멋진 남자가 곁에 있어 줄 테니까.
나는 눈을 감고 마음을 편하게 가지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수갑을 차고 내 두 손을 깔고
앉아서는 도저히 마음이 편해질 수가 없었다.
입감 절차는 몽롱한 상태에서 집행되었다. 개스코가 마치 길 잃은 강아지처럼 나을 이곳
에서 저곳으로 끌고 다니는 것이 마치 초 현실적인 움직임처럼 느껴졌다. 바닥만 보자. 나는
호주머니에 있는 것들을 다 내놓고, 양식에 서명을 해야 했다. 그 다음에 더러운 복도를 걸
어가, 구두를 벗고, 키 재는 테이프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 다음에 옆모습 사진을 찍
었다. 그 다음에 지문 채취, 그곳은 붐볐기 때문에, 개스코는 나를 정신병자처럼 복도의 의
자에 수갑으로 묶어 놓고, 커피를 가지러 나갔다. 체포된 사람들이 발을 질질 끌며 돌아다녔
는데, 모두 입감 절차를 밟고 있었다. 사방에 경찰관들이었다. 백인의 얼굴도 하나 보였다.
경찰관이 아니라 나와 같은 피고였다. 젊은 남자였는데 좋은 군청색 양복을 입고 있었다. 술
에 취한 것이 분명해 보였고, 왼쪽 빰에는 멍이 있었다. 금요일 5시도 안 되었는데 어떻게
저렇게 술에 떡이 될 수 있을까? 그는 큰 소리로 협박을 하고 있었다. 험한 말이지만 혀가
꼬부라져 알아 듣기는 힘들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사람이 그를 무시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
는 사라졌다. 시간이 흘렀고 공황 상태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밖은 어두웠다. 주말이 시작되
고, 유치장은 바빠질 터였다. 개스코가 돌아와 지문을 채취하는 곳으로 데려갔다. 그는 내
담당자가 능숙하게 내 손가락에 잉크를 묻혀 지문을 찍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전화는 필요없었다. 개스코의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내 변호사는 근처 가까운 곳에 있
었다. 유치장을 향해 갈수록 문은 묵직해졌다. 나는 가고 싶지 않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거리는 우리 뒤로 멀어져 갔다.
"내가 보석을 신청할 수 있소?"
마침내 내가 물었다. 앞에 쇠창살이 보였다. 창문에 창살이 있고, 총을 가진 교도관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당신 변호사가 아마 그 일을 하고 있을 거요."
개스코는 나를 코피 경사에게 인계했다. 코피는 나를 벽에 밀어 붙이고, 발로 차 다리를
벌리게 만들었다. 이어 푼돈이 있나 뒤지듯이 몸수색을 했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자 코피는
금속탐지기를 가리키며 뭐라고 중얼거렸다. 나는 탐지기를 무사히 통과했다. 부저소리와 함
께 문이 미끄러지듯 열리면서, 복도가 나타났다. 양쪽으로 쇠창살이 달린 방들은 쭉 늘어서
있었다. 뒤로 문이 닫혔다. 쉽게 석방되게 해달라는 내 기도는 무위로 끝나고 만 것이다.
갇혀 있는 사람들이 좁은 복도를 향해 쇠창살 사이로 손과 팔을 내밀었다. 그들은 지나가
는 우리 모습을 지켜보았다. 나는 다시 눈길을 발로 돌렸다. 코피는 감방을 하나하나 들여다
보았다. 꼭 사람들 수를 세는 것 같았다. 우리는 오른쪽 세 번째 방에서 멈추었다.
내 감방 동료들은 흑인들이었고, 모두 나보다 훨씬 어렸다. 처음에는 네 명인 줄 알았는
데, 위쪽 침상에 다섯 번째 흑인이 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양손으로 이층 침대가 있었는데,
감방 안에는 여섯 명씩 들어가 있었다. 감옥은 조그만 정사각형으로, 삼면의 벽에는 쇠창살
뿐이었다. 그래서 좌우의 복도 건너편의 죄수들을 볼 수 있었다. 뒤쪽 벽은 시멘트 블록으로
막혀 있었고, 한쪽 구석에는 조그만 화장실이 놓여 있었다.
내가 들어가자 코피는 문을 쾅 닫았다. 위쪽 침상에 있던 남자가 일어나 앉아 두 다리를
옆으로 내려놓았다. 두 발이 아래쪽 침상에 앉은 남자의 얼굴 근처에서 대롱거렸다. 다섯 명
모두 문간에 서 있는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차분하고 두려움 없는 표정을 지으려고 애를
썼다. 바닥에 앉을 자리를 찾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그래야 내 감방 동료를 건
드릴 위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그들은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금속탐지기를 설치해 놓은 것이 천만 다행
이었다. 그들에게는 총도 칼도 없었다. 나한테는 옷 외에는 아무런 재산이 없었다. 손목시계,
지갑, 휴대 전화, 현금 등은 들어올 때 다 맡겨 두었다.
감방의 앞쪽이 뒤쪽보다 안전할 것 같았다. 나는 사람들 눈길을 무시하고 바닥에 자리를
잡았다. 등은 문에 기댔다. 복도 아래쪽 어딘가에서 누가 교도관을 소리쳐 부르고 있었다.
두 감방 떨어진 곳에서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쇠창살과 침상들 사이로 군청색 양복을 입
은 술취한 백인 남자가 몸집이 커다란 두 흑인에게 구석에 몰린 채 머리를 얻어맞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구경꾼들은 때리는 사람들을 응원하고 있었다. 그 바람에 감장 전체
애 폭력적인 분위기가 감돌았다. 백인이라는 것이 전혀 이익이 되지 않는 순간이었다.
날카로운 호각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코피가 손에 곤봉을 들고 들어왔다. 싸움은 갑자
기 끝이 났고, 술취한 사람은 바닥에 엎드려 꼼짝도 하지 않았다. 코피는 감방으로 가더니,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았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본 사람도 없었다.
"조용히 하고 있어!"
코피는 그 말과 함께 다시 나갔다.
몇 분이 지났다. 술취한 사람은 신음을 토했다. 멀리서 누군가가 토하고 있었다. 내 감방
동료 한 사람이 일어서더니, 내가 앉아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그의 맨발이 내 다리를 스쳤
다. 나는 위를 흘끗 보았다가, 눈길을 돌렸다. 그는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이
제 끝장이라는 것을 알았다.
"좋은 재킷이군."
그가 말했다.
"고맙소."
나는 비꼬는 투로, 그러나 자극적으로 들리지 않게 하려고 애를 쓰며 웅얼거렸다. 재킷은
군청색 블레이저로, 매일 청바지에 카키 셔츠와 함께 입고 다니는 낡은 것이었다. 급진주의
자 마이클의 옷차림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목숨을 걸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좋은 재킷이군."
그가 다시 말했다. 더불어 이번에는 발로 나를 슬쩍 밀쳤다. 위쪽 침상에 있던 남자가 뛰
어내리더니, 더 자세히 보려고 다가왔다.
"고맙소."
나도 다시 말했다.
그는 18이나 19살쯤 되어 보였다. 여위고 키가 컸다. 몸에 지방질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
었다. 거리에서 인생을 보내는 조직폭력단원인 것 같았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멋진 모습
을 보여 주려고 안달하며 건방지게 허세를 부리고 있었다.
아마 그가 이제까지 걷어찬 인간들 가운데 내가 가장 만만한 존재였을 것이다.
"나한테는 그런 좋은 재킷이 없는데."
그는 말하면서 이번에는 더 강하게 밀쳤다. 시비를 걸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열등한 거리의 똘마니와 똑같은 인간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지. 나는 생각했다. 그는 달아
날 곳이 없기 때문에 옷을 훔칠 수도 없었다.
"이걸 빌리고 싶소?"
내가 위는 보지 않고 물었다.
"아니."
나는 무릎이 턱에 닿을 때까지 발을 끌어당겼다. 방어적인 자세였다. 그가 걷어차거나 치
더라도 저항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저항을 하는 순간 다른 네 명이 합세할 것이 뻔했다. 이
어 그들은 백인을 타작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겠지.
"이 친구가 당신 재킷이 좋다고 하잖아."
위쪽 침상 에 있던 남자가 말했다.
"그래서 고맙다고 했소."
"이 친구가 자기한테는 그런 좋은 재킷이 없다고 하잖아."
"그래서 나더러 어쩌란 말이오?"
"선물을 하면 좋을 것 같은데."
세 번째 남자가 다가옴으로써 나를 둘러싼 반원이 거의 완성되었다. 첫 번째 남자가 내
발을 걷어찼고, 그와 동시에 모두 조금씩 다가왔다. 그들은 언제라도 달려들 태세였다. 누가
먼저 나서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게 선물이야?"
첫 번째 남자가 그것을 받으며 물었다.
"마음대로 생각하시오."
나는 여전히 아래를 보면서 눈길이 마주치는 것을 피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발을 보지
못했다. 갑자기 발이 날아와 내 왼쪽 관자놀이를 치는 바람에, 내 머리는 뒤로 젖혀지면서
쇠창살에 부딪히고 말았다.
"젠장!"
나는 큰 소리로 내뱉으며 뒤통수를 만지작거렸다.
"그 염병할 것 가져도 좋소."
나는 다시 다가올 공격에 대비해 몸을 긴장시키며 말했다.
"선물인가?"
"그렇소."
"고마워."
"천만에."
나는 얼굴을 문질렀다. 머리 전체에 감각이 없었다.
그들은 뒤로 물러섰다. 나는 공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시간 감각은 없었지만 몇 분이 지난 것 같았었다. 두 감방 아래쪽의 술취한 백인이 기운
을 차리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또 다른 목소리가 교도관을 불렀다. 내 재킷을 가져간 똘마
니는 그것을 입지 않았다. 감방이 삼켜 버린 것이다.
얼굴이 욱씬거렸다. 그러나 피는 나지 않았다. 더 이상의 부상을 당하지 않는다면, 운이
좋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 같았다. 복도 아래쪽에서 어떤 사람이 잠 좀 자자고 고함을 질렀
다. 순간 밤이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걱정이 되었다. 감방 안에는 여섯 명이 있었는데, 안
네는 좁은 이층 침대가 양쪽으로 하나씩 있었다. 담요나 베게도 없이 바닥에서 자야하는 건
가?
바닥은 차가워지고 있었다. 나는 바닥에 앉아 감방 동료들을 흘끔거리며, 그들이 무슨 범
죄를 저질렀을까 추측해 보았다. 나야 파일을 하나 빌렸을 뿐이고, 물론 그것을 돌려 줄 용
의가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이렇게 마약상, 자동차도둑, 강간범, 또 아마 실인범일지도 모르
는 범죄자들 사이에서 제일 낮은 지위를 차지하고 앉아있었다.
배는 고프지 않았다. 하지만 먹을 것 생각이 났다. 칫솔은 없었다. 화장실에는 가고 싶지
않았지만, 나중에 가고 싶으면 어떻게 하지? 마실 물은 어디 있지? 기본적인 것이 가장 중
요했다.
"좋은 신발이로군."
갑자기 목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나는 깜짝 놀랐다. 고개를 들어보니, 다른 남자가 나를 굽
어보고 있었다. 그는 더러운 흰 양말을 신었을뿐, 구두는 신지 않았다. 그의 발은 내 발보다
10센티미터는 커 보였다.
"고맙소."
내가 말했다. 문제가 되고 있는 내 신발은 낡은 나이키 운동화였다. 농구화도 아니었고,
특별히 감방 동료의 눈길을 끌 만한 것이 못 되었다. 이전 직장에서 신고 다녔던 술 장식이
달린 구두를 신고 다닐걸. 거리에 나온 후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싸이즈가 얼마야?"
그가 물었다.
"10."
재킷을 가져갔던 똘마니가 다가왔다. 나는 충분히 알아들었다.
"내 거하고 똑같은데."
첫 번째 남자가 말했다.
"이걸 가지고 싶소?"
나는 즉시 끈을 풀기 시작했다. 내가 말을 이었다.
"자, 내 신발을 선물로 주고 싶소."
나는 얼른 발길질을 하여 신발을 벗어 버렸다. 그가 신발을 가져 갔다.
청바지하고 속옷도 줄까? 나는 그렇게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오후 7시경 모디카이가 마침내 나타났다. 코피가 감방으로 나를 데리러 왔다. 앞으로 걸어
가는데 코피가 물었다.
"신발은 어디 있소?"
"감방에. 저 친구들이 가져갔소."
"내가 가져오리다."
"고맙소. 거기 가면 군청색 블레이져도 있을 거요."
그는 내 얼굴 왼쪽을 보았다. 눈꼬리가 부어 오르고 있었다.
"괜찮소?"
"아주 좋소. 이제 자유니까."
보석금은 만 달러였다. 모디카이는 보석 보증인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천
달러를 현금으로 주고, 서류에 서명을 했다. 코피가 내 운동화에 블레이져를 가져왔다. 감옥
생활은 끝이 났다. 바깥에서는 소피아가 그녀의 차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데리
고 얼른 떠났다.
27
순수하게 육체적인 면에서만 보자면, 나는 높은 탑에서 거리로 내려온 대가를 치르고 있
었다. 자동차 사고로 인한 멍은 거의 사라졌지만, 근육과 관절의 통증은 몇 주 동안 더 계속
될 터였다. 몸무게는 빠지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내가 한때
당연시했던 레스토랑에 갈 여유가 없어졌다는 것. 둘째는 먹는 것에 대한 관심을 잃었다는
것. 그리고 바닥에 침낭을 깔고 잤기 때문에 등이 아팠다.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 그렇게 자
는 것도 참을만해지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시행해 보기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암만 시간
이 지나도 익숙해질 것 같지 않았다.
그러다 이제 거리의 똘마니가 맨발로 내 두개골을 부술 뻔한 일까지 벌어졌다. 늦게까지
얼음 찜질을 했지만, 밤중에 잠이 깰 때마다 두개골이 확대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살아 있는 것, 몇 시간 동안 지옥에 내려갔다가 그런대로 멀쩡한 몸으로 구출받은
것이 다행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미지의 것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졌다. 적어도 현재로서는
이제 잠복한 경찰관은 없었다.
중절도죄는 웃어넘길 일이 아니었다. 실제로 내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최고 형량은 징
역 10년이었다. 그러나 그 걱정은 나중에 할 생각이었다.
나는 토요일에 동이 트기 전에 아파트를 나와, 얼른 가장 가까운 신문 판매대로 달려갔다.
내가 새로 애용하게 된 동네 커피숍은 난폭한 파키스탄인들이 칼로라마 거리에 운영하는 것
으로, 아주 작은 심야 빵가게에 딸린 것이었다. 애덤스-모건 지역에서 안전한 지역과 믿을
수 없는 지역을 가르는 좁은 블럭에 자리잡고 있는 곳이었다. 나는 가만가만 카운터로 다가
가 우유를 큰 잔으로 주문했다. 이어 신문을 펼치고 , 내가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이유가 되었
던 작은 기사를 찾아냈다.
드레이크 & 스위니의 내 친구들은 계획을 잘 짜놓았다. 메트로면의 2면에 내 얼굴이 실
려 있었다. 회사에서 사원모집을 위해 만든 브로셔에 실으려고 작년에 찍은 것이었다. 이 사
진의 네거티브를 가지고 있는 곳은 드레이크 & 스위니뿐이었다.
기사는 네 문단으로 이루어진 짧은 것이었는데, 회사가 기자에게 제공한 정보를 중심으로
요령있게 쓰여져 있었다. 나는 그곳의 반트러스트 부서에서 7년 일했고, 예일 법대를 나왔
고, 전과가 없는 사람이었다. 회사는 전국에서 다섯 번째로 큰 곳이었다. 8백 명의 변호사와
8개 지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인용은 없었는데, 그것은 인용이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그 기
사의 유일한 목적은 나에게 모욕을 주는 것이었으며, 실제로 그 목적을 훌륭하게 달성하고
있었다. 내 얼굴 옆에 달린 기사 제목은 <워싱턴의 변호사 중절도죄로 체포되다>였다. 훔친
물건에 대해서는 그냥 '도난 물품'이라고만 나와 있었다. 최근에 회사를 나오면서 물품을 훔
쳤다는 것이다.
어리석은 손찌검 같았다. 변호사 한 무리가 서류에 불가한 것을 놓고 모호한 말들을 늘어
놓다니. 나 자신과 나를 아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누가 관심이나 가지겠는가? 창피함은 곧
사라질 터였다. 세상에는 현실적인 이야기들이 아주 많으니까.
드레이크 & 스위니에서는 친한 기자를 하나 찾아내 사진과 배경 설명을 건네 주었을 것
이고, 그 기자는 네 문단짜리 기사를 써놓고 내 체포를 확인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렸을 것
이다. 아서와 래프터의 팀이 나의 체포와 그 후의 일에 대해 계획을 짜는 모습이 눈에 선했
다. 그렇게 사용한 시간은 틀림없이 리버오크스에 청구했을 것이다. 단지 그들이 이 지저분
한 일에 가장 가까이 있는 의뢰인들이 라는 이유로.
얼마나 대단한 홍보 효과냐! 토요일판에 네 문단이나 실렸으니.
이 파키스탄인들은 과일을 넣은 도넛을 만들지 않았다. 그래서 대신 오트밀 쿠키를 사서,
사무실로 차를 몰았다.
루비는 문간에서 자고 있었다. 이곳에 몇 시간이나 있었을까? 나는 그쪽으로 다가가면서
궁금해했다. 루비는 낡은 누비이불 두세장을 덮고 있었다. 소지품을 넣은 커다란 캔버스천
쇼핑백을 베개로 삼고 있었다. 내가 헛기침을 하고 소리를 내자 그녀는 벌떡 일어섰다.
"왜 여기서 자고 있죠?"
내가 물었다.
그녀는 먹을 것이 든 종이 봉투를 보며 말했다.
"어디에서든 잠을 자야 할 것 아니에요."
"차에서 자는 줄 알았는데."
"맞아요. 대부분은 그래요."
노숙자한테 왜 여기서 또는 저기서 자느냐고 물어보았자 생산적인 결과가 나올 수 없었
다. 루비는 배가 고팠다. 나는 열쇠로 문을 열고, 커피를 만들러 갔다. 루비는 우리의 관행에
따라, 이제 그녀의 책상이 되어 버린 곳으로 곧장 가서 기다렸다.
우리는 아침 뉴스를 훑으면서 쿠키와 커피를 먹고 마셨다. 나는 번갈아 기사를 읽었다. 하나
는 내가 읽고 싶은 것으로, 하나는 루비가 관심을 가지는 것으로. 나에 대한 기사는 그냥 넘
어갔다.
루비는 전날 오후 나오미 센터에서 열린 알콜 중독-마약 중독 모임에서 중간에 나와 버
렸다. 아침 모임은 무사히 마쳤는데, 두 번째 모임에서 뛰쳐나와 버린 것이다. 책임자인 미
건이 개스코가 나타나기 한 시간 전쯤 전화를 해주었다.
"오늘 아침에는 기분이 어때요?"
나는 신문을 다 읽고 나서 물었다.
"좋아요. 변호사님은요?"
"좋아요. 난 깨끗해요. 루비는요?"
루비는 고개를 약간 떨구었다. 눈이 약간 옆을 향하더니, 아주 약간 사이를 두고 대답했
다.
"네, 깨끗해요."
"아니, 째끗하지 않아요. 나한테 거짓말하지 말아요, 루비. 나는 루비의 친구이고 변호사에
요. 그리고 난 루비가 테런스를 볼 수 있도록 도와 줄 겁니다. 하지만 나에게 거짓말을 하면
도와 줄 수가 없어요. 자, 내 눈을 똑바로 보고, 깨끗하면 깨끗하다고 말해 보세요."
그녀는 몸을 더 움츠리고, 눈길을 바닥에 떨구며 말했다.
"깨끗하지 않아요."
"고마워요. 왜 어제 오후에 알콜 중독-마약 모임에서 나가 버렸죠?"
"안 그랬어요."
"책임자가 그랬다고 하던데요."
"난 끝난 줄 알았는데."
나는 이길 수 없는 논쟁에 말려들고 싶지 않았다.
"오늘 나오미 센터에 갈 건가요?"
"네."
"좋아요. 내가 데려가죠. 하지만 두 모임에 다 참석을 하겠다고 약속해 주어야 합니다."
"약속할께요."
"가장 먼저 자리에 앉았다가, 가장 나중에 나오는 사람이 되어야 해요, 알겠죠?"
"알았어요."
"책임자가 지켜보고 있을 겁니다."
루비는 고개를 끄덕이고 쿠키를 하나 더 먹었다. 네 개째였다. 우리는 테런스, 갱생 프로
그램, 중독으로부터 깨끗해지는 것 등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나는 새삼 중독에서 빠져나오
는 것이 가망없는 일이라고 느꼈다. 그녀는 겨우 24시간 동안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도
감당을 못하고 있었다.
마약은 크랙인 것 같았다. 금방 중독이 되고, 값은 무척 쌌다.
나오미 센터로 가는 도중에 루비가 갑자기 말했다.
"변호사님은 체포당했었죠?"
하마터면 빨간불을 그냥 지나칠 뻔했다. 루비는 해가 뜰 때 사무실 문간에 자고 있었다.
글자는 간신히 읽을 줄 아는 정도였다. 그런데 어떻게 신문을 보았을까?
"그래요, 맞습니다."
"그럴 줄 알았어요."
"어떻게 알았죠?"
"거리에 있다 보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게 되요."
아, 그랬구나. 신문은 무슨 신문. 노숙자들은 그들 나름으로 뉴스를 전달하는 수단을 가지
고 있었다. 저기 모디카이의 사무소에서 일하는 젊은 변호사가 체포되었다더라. 경찰이 우리
같은 사람들을 끌고 가듯이 끌고 갔다더라.
"오해가 있었습니다.."
내가 말했다. 마치 루비가 물어보기라도 한 것처럼.
이미 안에서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나오미 센터의 계단을 올라가면서 우리는 그 소리
를 들을 수 있었다. 미건은 앞문을 열어 주더니, 나에게 커피나 한 잔 하고 가라고 했다. 1
층의 큰 방은 한때 멋진 응접실이었던 곳인데, 그곳에서 나오미 센터의 여자들은 노래를 하
고 서로의 고민을 이야기하고 들어 주었다. 우리는 잠시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나는 유
일한 남성으로서, 마치 침입자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미건은 주방에서 커피를 따라 주고는, 잠깐 센터 구경을 시켜 주었다. 우리는 작은 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여자들이 기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층의 주방 옆에
는 화장실과 샤워실이 있었다. 뒤쪽에는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종종 나가 혼자 앉아
있는 작은 정원이 있었다. 2층에는 사무실과 자원봉사자 센터가 있었다. 그 옆에 네모난 방
에는 의자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는데, 그곳이 알콜 중독-마약 중독 모임이 열리는 곳이
었다.
좁은 계단을 올라갈 때 아래층에서 즐거운 합창이 울려퍼졌다. 미건의 사무실은 3층이었
다. 그녀는 안으로 들어가자고 하더니, 내가 앉자마자 『워싱턴 포스트』를 내 무릅에 던졌
다.
"힘든 밤이엇겠군요?"
미건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다시 내 사진을 보았다.
"뭐 별로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이건 뭐죠?"
미건이 내 관자놀이 대신 자기 관자놀이를 가리키며 물었다.
"내 감방 동료가 신발을 달라더군요. 그가 신발을 가져가면서 생긴 겁니다."
미건은 내 닳아빠진 나이키 운동화를 보았다.
"그거 말인가요?"
"네. 아주 좋지 않습니까?"
"유치장에는 얼마나 있었죠?"
"두어 시간이요. 그 결과 인생을 정리하게 되었죠. 갱생 시설을 거쳤다고나 할까요. 이제
난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미건은 다시 웃음을 지었다. 완벽한 미소였다. 우리의 눈이 마주쳤고, 잠깐 그대로 있었다.
이야! 그녀의 손가락에는 결혼 반지가 없었다. 미건은 키가 크고, 약간 심하게 마른 편이었
다. 머리카락은 짙은 붉은색이었는데, 마치 대학 예비학교 학생처럼 귀 위로 짧고 말끔하게
잘랐다. 눈은 밝은 갈색이었다. 순간 미건이 매우 매력적이라는 느낌이 왔다. 더 일찍 알아
채지 못한 것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내가 덫에 걸린 것일까? 시설을 구경하는 것 외에 다른 이유 때문에 계단을 올라오게 된
것일까? 어제는 왜 저 웃음과 눈을 제대로 보지 못했을까?
우리는 서로 이야기를 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메릴랜드의 성공회 목사였으며, 레드스킨즈
팀의 팬으로서 워싱턴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미건은 십대 때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일하
기로 결심했다. 그보다 더 숭고한 소명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2주 전까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미
건은 형씨 이야기, 그리고 그 사건으로 내가 정화된 이야기에 매혹되었다.
미건은 점심을 먹으러 다시 오라고 초대했다. 루비를 확인하러.
"해가 나면 정원에서 식사를 할 수도 있어요."
무료 변호사라고 해서 다른 사람들과 다를 건 없었다. 그들도 예상치 않은 이상한 곳에서,
예를 들어 여성 노숙자들을 위한 합숙소 같은 데서 로맨스를 발견하곤 하는 것이다.
워싱턴의 가장 험한 동네에 차를 몰고 다니고, 합숙소에서 몇 시간을 보내고, 노숙자들과
아무렇게나 섞이면서 일 주일을 보내고 나자, 이제 밖에 나갈 때마다 모디카이 뒤에 숨지
않아도 되었다. 물론 모디카이는 좋은 방패였지만, 거리에서 살아 남으려면 내 발로 호수에
뛰어들어 헤엄을 치는 법을 배워야 했다.
나에게는 노숙자들이 왔다 갔다 하는, 30개에 이르는 합숙소와 급식소와 센터들의 명단이
있었다. 그리고 드본 하디와 론다 버튼을 비롯하여 퇴거당한 17명의 이름이 적힌 명단도 있
었다.
토요일 아침, 내가 나오미 센터 다음에 들른 곳은 갤로더 대학 근처의 마운트 길레드 교
회였다. 내가 가진 지도에 따르면 그곳은 뉴욕 애비뉴와 플로리다 애비뉴가 만나는 곳, 전에
창고가 서 있었던 곳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급식소였다. 책임자는 글로리어라는 이름
의 젊은 여자로, 내가 9시에 갔을 때는 혼자 주방에서 셀러리를 썰면서 자원봉사자들이 도
착하지 않는다고 초조해하고 있었다. 내가 완벽한 자격을 갖춘 변호사라고 스스로 소개를
하고 글로리어 또한 그것을 믿게 되자, 그녀는 도마를 가리키며 양파를 네모나게 잘라 달라
고 했다. 성실한 무료 변호사가 어찌 그런 일을 거절한단 말인가?
전에 눈보라가 쳤을 때 돌리의 급식소에도 이런 일을 해보았죠. 내가 설명했다. 글로리어
는 정중하기는 했지만, 시간에 못 댈까봐 안절부절이었다. 나는 양파를 썰고 눈물을 닦으면
서 내가 일하고 있는 사건을 설명하고, 드본 하디, 론다 버튼과 함께 퇴거를 당한 사람들의
이름을 읊어대기 시작했다.
"우리는 사건 담당자들이 아니에요. 그냥 노숙자들한테 먹을 것을 주는 일이나 할 뿐이죠.
나도 사람들 이름은 잘 몰라요."
자원봉사자가 감자 자루를 들고 들어왔다. 나는 떠날 채비를 했다. 글로리어는 고맙다고
하면서, 명단의 사본을 하나 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도 나름대로 알아보겠노라고 했다.
나는 계획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갈 곳은 많고 시간은 거의 없었다. '캐피틀 진료소'에
서는 의사와 이야기를 했다. 그곳은 노숙자들이 예약 없이 출입할 수 있는 시설로, 개인이
돈을 대 운영하는 곳이었다. 진료소는 모든 환자의 기록을 보관하고 있었다. 토요일이었기
때문에, 월요일에 비서가 나오면 내 명단의 이름들을 컴퓨터 파일에서 확인해 주겠다고 했
다. 일치하는 이름이 나오면 전화를 해줄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로드아일랜드 에비뉴 근처에 있는 '구원자 선교단'에서는 카톨릭 신부와 차를 마셨다. 그
는 이름들을 열심히 살펴보았으나. 아는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워낙 사람들이 많아서 말이오."
아침에는 겁먹을 만한 일이 딱 한번 있었는데, 그 일은 '자유연합'에서 일어났다. '자유연
합'은 오랫동안 까맣게 잊혀지고 있다가 최근에 공동체 센터로 바뀐 어떤 결사체가 지은 커
다란 집회소였다. 11시가 되자 현관에는 점심을 먹기 위한 줄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먹으러 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줄을 무시하고 바로 문으로 갔다. 음식을 타기 위해 줄을 서
있던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내가 새치기를 한다고 생각하고 나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그들
은 그렇지 않아도 배가 고파 화가 났는데 내가 좋은 구실을 제공한 셈이었다. 게다가 내가
백인이라는 사실이 불에 기름을 부운 격이 되었다. 하지만 어떻게 나를 노숙자로 오인할 수
가 있단 말인가? 자원봉사자가 문을 지키고 있었는데, 그 역시 내가 못된 놈이라고 생각했
다. 그는 무례하게 나를 밀쳐냈다. 감방에서 있었던 일 이후로 내 신체에 가해진 또 한 번의
폭력이었다.
"나는 여기 먹으로 온 게 아니오!"
나는 화가 나서 큰 소리로 말을 이었다.
"난 노숙자들을 위한 변호사란 말이오!"
그 말에 사람들은 진정되었다. 동시에 백인이면서도 그들의 형제가 될 수 있었다. 책임자
는 킵 목사였다. 빨간 베레 모자에 검은 칼라 차림이었는데, 몸집은 작지만 격렬한 기질을
가진 사람이었다. 우리는 처음 보는 사이였다. 그는
(1)내가 변호사이고,
(2)버튼 가족이 내 의뢰인이고,
(3)내가 그들의 소송을 책임지고 있고,
(4) 얼마 후에는 손해 배상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자, 돈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
다. 나는 그와 30분을 낭비하고 나서, 모디카이를 다시 보내겠다고 맹세하고 나서야 그곳을
나올 수 있었다.
미건에게 전화를 하여 점심 먹으러 갈 수 없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지금 도시 반대편에
있는데, 아직 만나야 할 사람이 많다고 핑계를 댔다. 그러나 미건이 나와 사귈 의향을 비친
것인지 아닌지 아직 알 수가 없다는 것이 진짜 이유였다. 동시에 나에게 전혀 필요 없는 존
재이기도 했다. 나는 여자를 사귀어 본 지가 거의 10년이나 되었다. 이제는 사귀는 규칙도
다 잊었다.
그러나 미건은 좋은 소식을 전해 주었다. 루비는 알콜 중독ㅡ마약중독의 아침 모임을 견
디었을 뿐 아니라, 24시간 동안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겠다고 맹세까지 했다는 것이다. 미건
이 방 뒤쪽에서 지켜보았는데, 감동적인 장면이었다고 전해 주었다.
미건이 말했다.
"루비가 오늘 밤에는 거리에서 벗어나 있을 필요가 있어요. 루비는 12년 동한 단 하루도
깨끗했던 날이 없었거든요."
물론 그 문제는 내가 도와 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미건은 몇 가지 궁
리를 하고 있었다.
오후도 아침과 마찬가지로 성과가 없었다. 하나 있다고 한다면, 워싱턴의 모든 합숙소의
위치를 알았다는 것이다. 나는 사람들을 만났고, 인연을 맺었고, 앞으로 다시 만날지도 모르
는 사람들과 명함을 교환했다.
여전히 켈빈 램이 우리가 찾아낼 수 있었던 유일한 퇴거자였다. 드본 하디와 론타 버튼은
죽었다. 나머지 14명은 모두 길거리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골수 노숙자들은 가끔 먹을 것이나 신발이나 담요를 얻으러 합숙소를 찾기는 하지만, 흔
적을 남기지는 않는다. 그들은 도움을 원치않는다. 그들에게는 사람과 접촉하고 싶은 욕망이
없다. 그러나 14명의 퇴거자들이 골수 노숙자들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그들은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세를 내며 지붕 아래 들어가 살았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인내심을 가지시오. 모디카이는 나에게 말하곤 했다. 거리의 변호사들은 모름지기 인내심
을 가져야 하오,
루비는 나오미 센터 문간으로 나를 마중나왔다. 그녀는 반짝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나를
힘차게 끌어안았다. 루비는 두 모임을 모두 마쳤다. 미건은 이미 다음 12시간의 계획을 잡아
놓았다. 루비는 거리에 머무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루비도 동의했다.
루비는 나와 내 차로 도시를 떠나 버지니아로 들어갔다. 교외의 쇼핑센터에서 칫솔과 치
약, 비누, 샴푸를 샀다. 할로윈 행사를 해도 좋을 만큼의 사탕도 샀다. 우리는 도시로부터 더
멀어졌다. 게인스빌이라는 마을에 갔더니 반짝거리는 새 모텔에, 42달러만 내면 하룻밤을 재
워준다고 광고가 붙어 있었다. 신용카드로 계산을 했다. 어떻게든 회사에 비용 청구를 할 수
있겠지.
나는 일요일 아침에 내가 다시 올 때까지 문을 잠그고 방을 떠나지 말라고 엄하게 명령을
내려 놓고 그곳을 떠났다.
28
3월 초하루이자 토요일 밤이었다. 나는 젊고, 독신이었고, 얼마전처럼 부자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직은 완전히 파산한 상태도 아니었다. 옷장에는 좋은 옷들이 가득했다-비록 입
고 다니지는 않았지만. 이곳은 백만 명이 사는 도시였다. 그리고 정치 권력의 중심을 향해
모여든 수많은 젊고 매력적인 여자들이 늘 좋은 시간을 보낼 준비를 갖추고 있다고 소문이
난 도시였다.
나는 다락방에서 혼자 맥주와 피자로 속을 채우며 대학 농구를 보고 있었다. 불행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괜히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가, '이보쇼, 당신 체포되었다는 그
사람 아니오? 오늘 아침 신문에서 보았소.' 하는 잔인한 인사말을 듣기 쉽상이었기 때문이
다.
나는 루비에게 전화를 걸어 잘 있나 확인해 보았다. 전화벨이 여덟 번 울리고 나서야 전
화를 받는 바람에 나는 하마터면 공포에 몸이 마비될 뻔했다. 그러나 그녀는 아주 기분이
좋다고 했다. 사탕을 잔뜩 먹었고, 줄곧 텔레비젼만 보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방은 떠난 적
이 없다고 했다.
루비는 35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버지니아 시골의 주간(州間) 고속도로 바로 옆
에 있는 조그만 도시였다. 그녀나 나나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이었다. 마약을 찾을 방법이
없는 곳이었다. 잘했다고 내 등을 두드려 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듀크와 캐롤라이나 시합의 하프타임 동안에 피자 옆의 플라스틱 상자 위에 있던 휴대 전
화가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바람에 나는 깜짝 놀랐다. 아주 다정한 여자 목소리였다.
"안녕, 전과자."
클레어였다. 전혀 모가 나지 않은 목소리였다.
"안녕."
나는 텔레비젼 소리를 죽였다.
"괜찮아?"
"잘 있지. 당신은 어때?"
"잘 있어. 오늘 아침에 신문에서 당신 웃는 얼굴을 봤지. 걱정이 되어서 전화했어."
클레어는 일요일에만 신문을 읽었다. 따라서 그녀가 나와 관련된 작은 기사를 보았다는
것은 누가 신문을 보여 주었다는 뜻이었다. 어쩌면 지난번에 전화를 받았던 그 뜨거운 피를
가진 의사인지도 모르지. 하지만 오늘은 토요일 밤인데? 그녀도 나처럼 혼자란 말인가?
"좋은 경험이었지 뭐."
그리고 나서 클레어에게 그 동안 있었던 일을 다 이야기해 주었다. 개스코에서 시작해서
석방이 되는 순간까지. 클레어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이야기가 진행되어 가면서 나는 클
레어가 진짜 혼자 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따분한지도 모르지. 어쩌면 외로운지도 모르지.
만의 하나이지만, 혹시 진짜로 내 걱정을 했을지도 모르지.
"얼마나 심각한 혐의였어?"
클레어가 물었다.
"중절도면 최고가 10년이야."
나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클레어가 걱정을 해줄 거라는 사실이 기분 좋았다. 내각 말
을 이었다.
"하지만 걱정은 안해."
"또 그 파일 때문이지, 그렇지?"
"응. 그리고 절도도 아니야."
물론 절도였다. 하지만 나는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
"변호사 면허를 잃을 수도 있는 거야?"
"응. 중죄 유죄 평결을 받으면 자동적으로 잃게 되지."
"끔찍해, 마이크.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할 거야?"
"솔직히 그런 생각은 해보지 않았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거야."
나는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변호사 면허를 잃는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어쩌면 생각할 필요가 있는 문제일지도 모르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우리는 정중하게 서로의 가족의 안부를 물었다. 나는 용케도 호지킨병에 걸린 그녀의 오
빠 제임스도 기억해 냈다. 그는 치료를 받고 있고, 가족은 낙관적으로 전망하고 있다고 했
다.
나는 전화를 걸어 주어 고맙다고 했다. 우리는 연락을 하기로 약속했다. 휴대 전화를 다시
피자 옆에 내려놓고 소리를 죽인 시합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보고 싶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루비는 깨끗이 샤워를 한 뒤에, 어제 미건이 준 새 옷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몸에서 빛이
나는 것 같았다. 그녀의 모텔 방은 1층이었고, 문은 주차장을 마주보고 있었다. 루비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루비는 햇빛 속으로 뛰어들며 나를 꼭 끌어안았다.
"난 깨끗해요!"
그녀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난 24시간 동안 깨끗했어요!"
우리는 다시 끌어안았다.
두 방 아래에서 육십대의 부부가 방을 나서며 우리를 노려보았다.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
든 알 게 뭐냐.
우리는 도시로 돌아가 나오미 센터로 갔다. 그곳에서는 미건과 실무진이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루비가 발표를 하자 작은 기념식이 벌어졌다. 미건은 늘 첫24시간에 가장 큰 환호를
보낸다고 미리 나에게 귀뜸해 주었다.
일요일이었다. 그 동네 목사가 한 사람 와서 성경 공부를 진행했다. 큰 방에서는 여자들이
모여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를 했다. 미건과 나는 정원에서 커피를 마시며, 다음 24시간의 계
획을 짰다. 루비는 기도와 예배 외에도 알콜 중독-마약 중독 모임에 두 번 참석할 예정이었
다. 그러나 우리는 낙관주의를 경계해야 했다. 미건은 중독자들 가운데서 살아가는 사람이었
다. 그녀는 루비가 거리로 돌아가는 즉시 다시 중독 상태로 빠져들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
다. 미건은 매일 목격하는 일이었다.
내 지금 사정상 모텔 전략을 구사할 수있는 날짜는 며칠밖에 안되었지만, 어쨌든 그 돈은
기꺼이 지불할 용의가 있었다. 나는 그날 오후 4시에 시카고로 떠날 예정이었다. 헥터를 찾
는 작업을 시작할 생각이었다. 얼마가 걸릴지 알 수 없었다. 루비는 그 모텔이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아니, 그곳을 몹시 좋아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한 번에 하루씩만 계획을 세우기로 했다. 미건이 루비를 차에 태워 교외의 모텔로
데려가고, 그 비용은 내가 대기로 했다. 루비는 그곳에서 일요일 밤을 보내고, 미건이 월요
일 아침에 루비를 찾아오고, 그때부터 그 다음 일을 걱정하기로 했다.
미건은 또 루비에게 거리를 떠나야 한다고 설득하는 일을 시작했다. 루비는 우선 치료 센
터에 가야 하고, 이어 여자들을 위한 합숙소에 가서 여섯 달 동안 꽉 짜여진 생활을 하면서
직업 훈련도 하고 사회 복귀 훈련도 받아야 했다.
미건은 말했다.
"24시간이면 대단한 일을 한 거죠. 하지만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많아요."
나는 최대한 빨리 그곳에서 나왔다. 미건은 점심 때 다시 와서 함께 식사를 하자고 했다.
내 사무실에서 둘이 점심을 먹으면서 중요한 일들을 이야기할 수 있잖아요. 그녀의 눈이 춤
을 추며, 어디 수락을 해보라고 도전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초대를 받아들였다.
드레이크 & 스위니의 변호사들은 늘 일등석에 앉아 날아다녔다. 그들은 마치 자기들이
그럴 자격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별 네 개짜리 호텔에 묵었으며, 호화로운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으나, 다만 리무진은 너무 사치스럽다고 생각하여 이용하지 않았다.
대신 링컨 컨티넨털을 빌려 탔다. 모든 출장 경비는 의뢰인들에게 청구하는 것이었다. 의뢰
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법적 인재들을 이용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멋 좀 부리
는 걸 가지고 불평할 수 없었다.
시카고로 가는 비행기의 내 좌석은 이코노미 클래스에 있었다. 그나마 마지막 순간에 예
약을 했기 때문에 끔찍하게도 중간 자리였다. 창쪽 자리에는 묵직한 몸집의 사내가 앉아 있
었는데, 무릎이 농구공만 했다. 통로 쪽에는 18살쯤 되어 보이는 냄새나는 젊은이가 앉아있
었다. 새까만 머리는 모호크족처럼 잘랐는데, 거기에 검은 가죽과 끝이 뾰족한 크롬을 잔뜩
모아다 장식을 해놓았다. 나는 둘 사이에 비집고 앉아 두 시간 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나도
한때 터고 다녔던 일등칸에 앉아 거드름 피우는 놈들에 대해서는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애
를 썼다.
이런 식의 여행은 내 보석 합의 사항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것이었다. 나는 판사의 허락
없이는 워싱턴을 떠날 수 없는 몸이었다. 그러나 모디카이와 나는 그것이 사소한 위반이며,
내가 다시 워싱턴으로 돌아오는 한 별문제가 안 될 것이라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나는 오헤어 공항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도심의 비싸지 않은 호텔로 향했다.
소피아는 팔머 가족의 새 주소를 알아내지 못했다. 만일 내가 드레이크 & 스위니 지사에
서 헥터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우리 운은 다한 셈이라고 할 수 있었다.
드레이크&스위니의 시카고 지사에는 160명의 변호사가 있었으며, 이것은 워싱턴과 뉴욕
다음 가는 규모였다. 부동산 부서는 유난히 커서 18명의 변호사를 두고 있었는데, 이것은 워
싱턴 지사보다 큰 규모였다. 나는 그래서 헥터를 시카고로 보낸 것이라고 짐작했다. 시카고
에는 그를 갖다 놓을 만한 자리가 있었던 것이다. 입사 초기에 드레이크&스위니가 시카고
의 잘 나가는 부동산 회사를 사들였던 일이 내 기억에도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월요일 아침7시가 조금 지나 연합생명 건물에 도착했다. 잿빛의 우울한 날이었다. 미시건
호수를 가로질러온 바람이 내 몸을 채찍질해 댔다. 시카고는 세 번째였다. 전에 두 번 왔을
때도 이번과 마찬가지로 추웠다. 나는 마실 커피와 얼굴을 감출 신문을 샀다. 그리고 1층의
거대한 아트리움의 한쪽 구석, 시야가 좋은 탁자에 자리를 잡았다. 에스컬레이터들은 2층과
3층으로 엇갈리며 올라가고 있었고, 위층에서는 여남은 대의 엘리베이터가 대기하고 있었다.
7시 반이 되자 사람들이 바쁜 표정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8시가 되어 커피 세 잔째를
마셨을 때, 나는 바짝 긴장을 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헥터가 나타날 수 있었기 대문이다.
에스컬레이터들은 수백 명의 임원, 변호사, 비서들로 빽빽했다. 모두 묵직한 코트를 입고 있
었는데, 놀랍게도 다들 비슷해 보였다.
8시 20분에 헥터는 건물 앞쪽으로부터 아트리움으로 들어왔다. 다른 통근자들 무리와 함
께 서둘러 안으로 들어왔다. 헥터는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으며, 곧장
에스컬레이터로 갔다. 나는 가능한 한 태연한 모습을 보이려고 애를 쓰며, 다른 에스컬레이
터로 걸어가,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나는 곁눈질로 헥터가 모퉁이를 돌아 엘리베이터를 기
다리는 모습을 살폈다.
분명히 헥터였다. 나는 이 좋은 운을 더 이상 시험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어쨌든 내 추측
이 옳았다. 그는 한밤중에 워싱턴에서 시카고 지사로 전근을 온 것이다. 이곳에 있으면 감시
할 수도 있었고, 더 많은 보수로 회유할 수도 있었고, 필요하다면 협박을 할 수도 있었기 때
문이다.
나는 이제 헥터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앞으로 여덟 내지 열 시간 도안
이곳을 떠나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나는 아트리움 2층의 호수가 잘 보이는 곳에
서 미건에게 전화를 했다. 루비는 어젯밤도 잘 견디었어요. 이제 48시간이 되었고, 계속 신
기록을 수립중이에요. 이어 나는 모디카이에게 전화를 하여 헥터를 찾은 사실을 알렸다.
지난해의 드레이크&스위니 편람에 따르면, 시카고 지사의 부동산 부서에는 세 명의 파트
너가 있었다. 아트리움의 건물 안내를 보니 세 명 모두 51층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나는 그
들 가운데 무작위로 아무나 골랐다. 딕 하일리가 걸렸다.
나는 9시 가까이에 일제히 몰려드는 사람들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51층으로 올라갔
다. 낯익은 환경이었다. 대리석, 황동, 호두나무, 감추어진 조명, 고급 양탄자.
태연한 표정으로 안내원을 향해 다가가며, 화장실을 찾아 주위를 흘끔거렸다. 보이지 않았
다.
안내원은 머리에 헤드셋을 쓰고 전화를 받고 있었다. 나는 얼굴을 지푸리고 최대한 고통
스러운 표정을 지으려고 애를 썼다.
"안녕하세요."
안내원은 전화를 받는 와중에도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나는 이를 악물고 가쁘게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딕 하일리와 약속이 있는데, 아무래도 곧 토할 것 같소. 뭘 잘못 먹은 모양이오. 화장실
에 좀 갔으면 하는데."
나는 배를 움켜쥐며 무릅을 굽혔다. 내가 꼭 그녀의 책상 위에 토할 것 같은 실감나는 연
기를 했나 보다.
그녀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안내원은 벌떡 일어나더니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
다.
"저 아래쪽이에요. 모퉁이를 돌아, 오른쪽으로 가세요."
나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토할 것처럼 허리를 잔득 굽히고 있었다.
"고맙소."
나는 간신히 그렇게 말했다.
"뭘 좀 갖다 드릴까요?"
안내원이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너무 힘들어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듯. 모퉁이를 돌아 고개를 숙이
고 남자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빈 칸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기다렸다.
전화벨이 울리는 빈도로 보아, 그녀는 너무 바빠 나한테 신경 쓸 여유가 없을 것 같았다.
큰 법률 회사 변호사처럼 옷을 입고 왔으니, 수상쩍어 보이지도 않았을 것이다.10분 뒤, 나
는 남자 화장실에서 나가 안내원이 있는 곳과 반대 방향으로 복도를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
다. 처음 눈에 띄는 빈 책상에서 스테이플로 묶여있는 종이 묶음을 들고, 걸어가면서 메모를
하는 척했다. 무슨 중요한 일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러나 나는 사방으로 눈길을 돌리고 있었
다. 문과 책상에 붙거나 놓인 명패들을 살피고 있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변호사들은 셔츠
차림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젋은 변호사들은 문을 조금 열어 놓고 전화를 하고 있었다. 타자
수들은 부르는 대로 받아 치고 있었다.
무척이나 익숙한 광경이로군!
헥터는 전용 사무실을 가지고 있었다. 작은 방이었는데, 명패는 붙어 있지 않았다. 나는
반쯤 열린 문을 통해 그의 모습을 발견했다. 동시에 얼른 안으로 뛰어들어가며 문을 쾅 닫
았다.
헥터는 의자에서 뒤로 등을 휙 젖히며 두 손을 들어올렸다. 마치 총을 마주한 것처럼.
"이게 뭐야!"
"안녕, 헥터."
그러나 총도 없었고, 폭력도 없었다. 나쁜 기억만 있을 뿐이었다. 헥터는 두 손을 위로 내
리며 웃음가지 지었다.
"이게 뭐야?"
헥터가 되풀이했다.
"그래, 시카고는 어떻습니까?"
나는 책상 가장자리에 엉덩이를 걸치며 물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습니까?"
헥터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나도 똑같은 걸 묻고 싶은데요."
"나야 일을 하러 온 거지만."
헥터는 머리를 긁적였다. 도로에서 150미터 상공에, 창문도 없고 표시도 없는 방에 틀어박
혀, 자기보다 중요한 사람들에게 겹겹이 둘러싸여 있는데도, 헥터는 자기가 피해 달아난 바
로 그 사람에게 있는 곳을 들킨 것이다.
헥터가 물었다.
"나를 어떻게 찾았습니까?"
"아주 쉬웠죠, 헥터. 나는 이제 거리의 변호사입니다. 아는 것도 많고 똑똑하죠. 어디 다시
달아나 봐요. 또 찾아낼 테니까."
"나는 이제 달아나지 않습니다."
헥터는 말하며 눈길을 돌렸다. 그 말을 반드시 나에게 유리하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아
니었다.
내가 말했다.
"내일 소송을 제기할 겁니다. 피고들은 리버오크스, 태드, 드레이크 & 스위니가 될 거구
요. 당신은 숨을 곳이 없습니다."
"원고는 누구입니까?"
"론타 버튼과 그 여자의 가족. 나중에 찾아내면 다른 퇴거자들도 추가할 겁니다."
헥터는 눈을 감고 콧마루를 꼬집었다. 내가 말을 이었다.
"론타를 기억하죠, 헥터? 당신이 그 사람들을 쫓아낼 때 경찰관들과 싸우던, 애들이 딸린
젊은 여자 말입니다. 당신은 그걸 다 봤습니다. 그리고 진상을 알았기 때문에 죄책감을 느꼈
던 거죠. 단신은 그녀가 갠트리에게 세를 내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겁니다. 당신은
그걸 다 보고서에 적었습니다. 1월 27일자 보고서지요. 그리고 그 메모를 일지에 기록하고
철을 해놓았읍니다. 일지에 기록까지 한 것은, 브레이든 챈스가 언젠가 그것을 없애 버릴 거
라고 예상했기 때문입니다. 챈스는 실제로 그렇게 했죠. 그래서 내가 여기 온 겁이다, 헥터.
그 보고서 사본이 필요합니다. 나머지 파일은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공개될 겁니다. 지금
필요한 건 그 보고서입니다."
"왜 내가 사본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사본을 만들어 놓기 않기에는 너무 똑똑한 사람이거든. 당신은 챈스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원본을 없애리라는 걸 알았습니다. 하지만 챈스가 한 일은 곧 폭로될 겁니다. 그자와
함께 가겠단 생각일랑 하지 마시오."
"그럼 나는 어디로 갑니까?"
"아무 데도 안 가지. 당신은 아무 데도 갈 데가 없어요."
헥터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퇴거의 진상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시점에 가서는
어떤 식으로든 증언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증언은 드레이크 & 스위니를 침몰시킬 것
이며, 그것으로 그도 끝장날 터였다. 그것이 모디카이와 내가 이야기한, 일의 진행 방향이었
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제안할 것이 약간은 있었다.
"나에게 그 보고서를 준다면,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는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정
말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당신을 증인으로 부르지도 않겠습니다."
헥터는 고개를 젖고 있었다.
"알겠지만, 나는 거짓 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럴 수 있죠. 하지만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거짓말을 못할걸요. 당신 보
고서가 파일의 일지에 기록되어 있었는데 사라졌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당신도 보고서를 썼다는 것은 부인하지 못할 거고요. 그리고 우리에게는 당신이 퇴거시킨
사람들의 증언이 있습니다. 그들은 워싱턴의 순수하게 흑인들로만 이루어진 배심 앞에서 훌
륭한 증인이 되어 줄 겁니다 그리고 1월 27일에 당신과 함께 있었던 경호원과도 이야기를
했습니다."
펀치 하나하나가 그의 턱에 작렬하고 있었다. 헥터는 로프에 기대 있었다. 사실 우리는 그
경호원을 찾아내지 못했다. 파일에 이름이 나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짓말할 생각은 마시오. 그래봐야 상황은 더 악화되기만 할 뿐입니다."
헥터는 너무 정직해서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사실 그는 나에게 퇴거자들 명단
과 함께, 파일을 훔칠 수 있는 열쇠를 넘겨준 장본인 아닌가 핵터는 영혼과 양심을 지닌 사
람이었다. 과거로부터 도망쳐 시카고에서 숨어 지내면서도 행복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물었다
"챈스가 회사에 진상을 이야기했읍니까?"
"모르겠습니다 아마 안 그랬을 걸요. 그렇게 하려면 배짱이 필요한데, 챈스는 겁쟁이라
서....이렇게 가면 나는 해고 될 겁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회사를 향해 멋진 소송을 걸게 될 겁니다. 그건 내가
처리해 드리죠. 당신 문제로 그들에게 다시 소송을 걸고, 당신한테는 수임료를 한 푼도 안
받겠습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둘 다 몹시 놀랐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우리는
과거로 돌아가 있었던 것이다
"네."
헥터가 말하자 비서가 들어왔다.
"펙 씨가 기다리는데요."
비서가 말하며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곧 가겠소."
헥터가 말하자, 비서는 천천히 뒷걸음을 쳐 나가며 문을 그대로 열어 두었다.
"가야 합니다."
헥터가 말했다.
"보고서 사본이 없으면 난 안 갈 겁니다."
"정오에 건물 앞의 분수 옆에서 만납시다."
"그때 봅시다."
나는 사무소 입구를 나서면서 안내원에게 눈을 찡긋했다.
"훨씬 나아졌소. 고맙소."
"천만에요."
우리는 분수에서 서쪽으로 그랜드 애비뉴를 따라가다 사람이 북적거리는 유대인 식당으로
들어갔다. 샌드위치를 주문하려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헥터가 나에게 봉투 한 장 을 건네
주었다.
"나는 자식이 넷입니다. 나를 보호해 주십시오"
내가 봉투를 받아 들고 무슨 말을 하려는데, 헥터는 뒤로 물러나더니 사람들 속으로 사라
져 버렸다. 그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문을 나갔다. 외투의 깃을 세우고 있었다. 나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거의 뛰다시피 걷고 있었다..
식욕이 사라졌다. 호텔까지 네 블럭을 걸어가 체크아웃을 하고, 가방을 택시에 집어 던져
넣었다. 뒷좌석에 푹 주저앉았다. 문은 잠겨 있었다. 택시 기사는 졸고 있었다. 세상 누구도
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순간이었다. 나는 봉투를 열어 보았다.
보고서는 전형적인 드래이크 & 스위니 양식에 기록되어 있었다. 헥터의 개인용 컴퓨터로
작성된 것으로, 하단 왼쪽에 의뢰인 번호, 파일번호, 날짜 등이 작은 활자로 적혀 있었다. 날
짜는 1월 27일이었다. 리버오크스ㅡ태그 퇴거 조치 및 플로리다 창고 부지 건에 관하여 헥
터 팔머가 브레이든 챈스에게 보낸 것이었다. 같은 날 오전 9시 15분 헥터는 무장 경호원인
록 크릭 경비 회사의 제프 메클과 함께 현장에 도착하여, 12시 30분에 그곳을 떠났다. 창고
는 3층이었다. 헥터는 1층에서 먼저 불법 점거자들을 보았으며, 이어 2층으로 올라 갔는데,
그곳에는 사람이 산 흔적이 없었다. 3층에는 쓰레기, 낡은 옷가지, 모닥불 잔재가 있었는데,
몇 달 전에 사용된 물건들로 보였다.
1층의 서쪽에 임시로 지은 11동의 아파트가 있었다. 모두 합판과 시트록으로 급조한 것으
로, 같은 사람이 거의 같은 시기에, 외부인력을 동원하여 지은 것이 분명해 보였다. 외관으
로 보건대, 각 아파트는 대체로 같은 규모였다. 헥터는 어떤 아파트에도 들어갈 수가 없었
다. 문들은 모두 똑같았다. 가볍고 속이 빈 합성 재료로 만든 것이었는데, 플라스틱 같기도
했다. 문마다 똑같은 손잡이와 빗장이 달려 있었다.
목욕탕은 사람들이 빈번하게 들락거려 더러웠다. 최근에 수리를 한 흔적이 없었다.
헥터는 자신을 허먼이라고만 소개한 사람을 만났는데, 허먼은 이야기를 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헥터가 아파트에 집세를 얼마나 내느냐고 묻자, 허먼은 안 낸다고, 자신은 불법 점
거자라고 대답했다. 허먼은 제복을 입은 무장 경호원의 모습에 겁을 집어먹었기 때문에 그
것을 정상적인 분위기에서 이루어진 대화로 인정할 수는 없었다.
건물 동쪽에서 다시 비슷한 설계와 구조를 가진 아파트 열 동이 발견되었다. 아이가 우는
소리 때문에 헥터는 한 아파트로 다가가게 되었다. 헥터는 경호원에게 안 보이는 데로 물러
나 있으라고 말했다. 문을 두드리자 젊은 애엄마가 문을 열었다. 아기를 안고 있었다. 세 아
이가 여자의 다리에 매달려 있었다. 헥터는 자신이 법률회사에서 나왔는데, 건물이 매각되었
고, 여자는 며칠 안에 떠나야 할 것이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여자는 처음에는 자신이 불법
점거자라고 했다가, 곧 공격으로 돌아섰다. 이것은 내 아파트다. 나는 조니라는 사람에게 세
를 내고 있다. 조니는 매달 보름경에 와서 백달러를 받아 간다. 문서로 된 것은 없다. 누가
건물을 소유하고 있는지는 모른다. 조니만 만날 뿐이다. 나는 이 아파트에서 석 달을 살았
다. 갈 곳이 없기 때문에 나갈 수 없다. 나는 잡화점에서 일 주일에 20시간 일한다.
헥터는 여자에게 짐을 싸 떠날 준비를 하라고 말했다. 이 건물은 열흘 후면 철거된다. 여
자는 광적으로 변했다. 헥터는 여자를 더 자극하려 했다. 당신이 집세를 낸다는 증거가 있느
냐? 여자는 침대 밑에서 핸드백을 꺼내더니 헥터에게 종이 조각을 건네 주었다. 잡화점 금
전등록기에서 찍혀 나온 영수증이었다. 뒤에는 누가 낙서처럼 이렇게 휘갈겨 놓았다. '1월
15일, 론타 버튼으로부터 집세 백 달러 영수.'
보고서는 두 쪽 길이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종이가 또 하나 붙어 있었다. 거의 알아볼 수
없는 영수증 사본이었다. 헥터가 론타에게서 영수증을 받아, 복사를 하고, 원본은 보고서에
첨부한 것이다. 글자는 서둘러 쓴 것이었고, 철자는 틀린 데가 많았고 , 복사는 흐렸지만, 어
쨌든 놀라운 증거물이었다. 내가 기쁨에 겨워 소리라도 질렀나 보다. 택시 기사가 움찔하며
거울로 나를 살폈다.
보고서는 헥터가 보고, 말하고, 들은 것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였다. 결론도 없었고, 회사
고위층에게 제시하는 권고 사항도 없었다. 어디 이자들에게 밧줄을 충분히 주고, 이들이 스
스로 목을 매다는지 아닌지 한번 보자. 헥터는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헥터는 일개 사무직
원에 지나지 않았다. 조언을 하거나, 의견을 제시하거나, 거래를 막을 수 있는 입장이 아니
었다.
오헤어 공항에서 팩스로 메모를 모디카이에게 보냈다. 혹시 비행기 사고가 난다거나, 강도
를 당해 모든 짐을 빼앗긴다 해도, 그 사본이 14번가 법률 상담소의 서류철 깊은 곳에 간직
될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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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다 버튼의 아버지는 우리도 모르고 또 아마 세상도 모르는 사람일 터이기 때문에, 그리
고 그녀의 어머니와 형제들은 모두 쇠창살 두쪽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가족을 우회하여
수탁자를 의뢰인으로 이용하기로 전술적 결론을 내렸다. 월요일 아침, 내가 시카고에 있을
때, 모디카이는 워싱턴 가정 법원의 판사 앞에 나가 임시 수탁자가 론다 버튼의 자산과 그
녀의 자녀들 각각의 자산의 관리인으로 봉사하게 해달라고 신청하였다. 이것은 비공개로 처
리될 수 있는 일상적인 일이었다. 게다가 판사는 모디카이가 아는 사람이었다. 이 청원은 몇
분 뒤에 승인되었으며, 그 결과 우리는 새 의뢰인을 얻게 되었다. 그녀의 이름은 월머 펠런
으로, 모디카이가 잘 아는 사회 사업가였다. 소송에서 그녀가 차지하는 역할은 미미할 것이
며, 우리가 배상금을 받게 되는 경우에 그녀도 약간의 보수를 받게 될 터였다.
코언 신탁은 경영의 측면에서는 부실하였지만, 그럼에도 비영리 법률 상담소의 모든 측면
을 관장할 수 있는 규칙과 세칙을 가지고 있었다. 레너드 코엔은 법률가었다. 그것도 세부
사항에 강하게 집착하던 법률가였던 것이 분명했다. 상담소가 판결 결과에 따라 수임료를
받는 상해나 부당한 사망 사건을 다루는 경우, 코언 신탁은 웬만하면 그만두라고 얼굴을 찌
뿌리기는 하였지만, 그것을 원칙적으로 허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수임료 최고
한도는 배상액의 20퍼센트로 제한되어 있었다. 이것은 통상적인 삼분의 일에 비하면 적은
것이었다. 일부 법정 변호사들은 40퍼센트를 관례로 하기도 하는데.
상담소는 그 20퍼센트의 수임료 가운데 반을 가질 수 있었다. 나머지 10퍼센트는 신탁으로
갔다. 14년 동안 모디카이가 이런 식으로 수임료를 받고 처리한 사건은 딱 두 건이었다. 첫
사건에서는 나쁜 배심을 만나는 바람에 졌다. 두 번째 사건은 여자 노숙자가 시영 버스에
친 사건이었다. 모디카이는 10만 달러에 합의를 보았으며, 거기에서 상담료로 총 만 달러를
가져올 수 있었다. 그것으로 새 전화기도 사고 워드프로세서도 살 수 있었다.
판사는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우리의 20퍼센트 계약서를 승인해 주었다. 이제 소송을 걸
준비가 끝난 셈이었다.
농구 시합이 시작된 시간은 7시 35분이었다. 조지타운 대 시라큐스의 시합이었다. 모디카
이가 용케도 표 두 장을 구해 왔다. 내가 탄 비행기는 예정대로 6시 20분에 내셔널 공항에
도착했다. 30분뒤 나는 랜도버의 미합중국 에어 어리너의 동쪽 입구에서 모디카이를 만났다.
관중은 거의 2천 명에 가까웠다. 모디카이는 나에게 표를 주면서, 코트 호주머니에서 아직
개봉하지 않은 두툼한 봉투도 꺼내 주었다. 상담소의 내 이름 앞으로 날아온 등기 우편이었
다. 워싱턴 변호사 협회에서 날아온 것이었다.
"오늘 온 거요."
모디카이는 거기에 무엇이 들었는지 정확하게 짐작하고 있었다. 모디카이가 말을 이었다.
"우리 자리에서 만납시다."
모디카이는 학생들 무리 사이로 사라졌다.
나는 봉투를 뜯고, 바깥에서 읽을 만한 빛이 있는 곳을 찾아갔다. 드레이크&스위니의 내
친구들은 그들이 가진 모든 패를 내놓고 있었다.
그것은 항소법원에 나의 비윤리적인 행동을 공식적으로 고발한 편지였다. 그들의 주장은
세 쪽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내용은 거의 한 문단으로 요약할 수 있었다.
내가 파일을 훔쳤다. 변호사와 의뢰인간의 비밀을 공개했다. 나는 나쁜 놈이기 때문에,
(1) 영원히 법조계에서 쫓겨나거나,
(2) 오랜 기간 자격 정지를 당하고, 그와 동시에
(3) 공개적으로 견책당해야 한다.
파일을 아직 되찾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이것은 긴급한 사안이며, 따라서 신속히 조사
하고 처리해야 한다.
이 밖에도 통지서, 양식을 비롯한 다른 서류들이 있었지만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충격이
었다. 나는 벽에 기대어 문제를 생각해 보았다. 그래, 나는 변호사 자격 정지 문제가 거론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드레이크&스위니가 그 파일을 찾기 위해 가능한 수단을 모두
동원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비현실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나를 체포
하는 즐거움을 맛보았기 때문에 한동안은 누그러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분명히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피를 보고 싶어했다. 대형 법률 회사의 전형적인 방
식이었다. 장하게 공격하여 포로를 만들지 않는 전략이었다. 나도 잘 아는 방법이었다. 그러
나 그들이 모르는 것은 나 역시 다음날 9시에 버튼 가족의 부당한 죽음을 근거로 그들에게
천만 달러짜리 소송을 제기하는 즐거움을 맛보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내 평가에 따르면 이제 그들이 달리 나에게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이제 영장도 남지
않았고, 등기 우편도 남지 않았다. 모든 문제가 책상에 다 올려졌고, 모든 전선이 눈에 드러
났다. 어떤 면에서는 등기 우편물을 내 손에 쥐고 있다는 것이 적이 안심이 되는 점이 있기
도 했다.
그러나 동시에 두렵기도 했다. 10년 전 법대에 들어간 이후로, 다른 분야에서 일을 한다는
생각을 진지하게 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변호사 면허가 없으면 어떻게 살아간다?
하긴 소피아는 변호사 면허도 없는데 나와 똑같이 활동하고 있지 않는가.
모디카이는 우리 자리로 들어가는 통로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등기 우편물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모디카이는 마치 조의를 전하는 듯한 말을 했다.
시합은 긴장과 흥분이 고조되어 갔지만, 우리는 농구시합을 보러 온 것만은 아니었다. 헥
터 팔머를 경호했던 제프 매클은 록 크릭 경비회사에서 파트 타임으로 일하는 총잡이였다.
그는 또 이 경기장에서 경비를 서는 일도 했다. 소피아는 낮 동안 그를 추적했다.
우리는 경기장 건물 주변으로 어슬렁거리며, 공짜로 시합도 보고 여대생들 구경도 하는
백여명의 제복 가운데 제프 매클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그가 늙었는지 젊었는지, 백인인지 흑인인지,. 뚱뚱한지 말랐는지 전혀 모르고 있
었다. 그러나 경비원들은 왼쪽 사슴 호주머니 위에 조그만 명찰을 달고 다녔다. 우리는 하프
타임이 다가올 때까지 통로와 입구를 돌아다녔다. 우리는 하프타임이 다가올떄까지 통로와
입구를 돌아다녔다. 그러다 마침내 모드카이가 D출입구에서 귀여운 매표원에게 수작을 걸고
있는 네프 매클을 발견했다. 그곳은 내가 그 전에 두 번이나 살핀 곳이었다.
매클은 백인으로, 몸집이 컸으며, 평범한 얼굴이었다. 나이는 내 또래였다. 목과 이두박근
은 엄청났으며, 두툼한 가슴은 앞으로 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모디카이와 나는 잠깐 회의를
한 끝에, 내가 접근한 것이 좋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나는 명함 한장 손에 들고 태연한 표정으로 다가가 내 소개를 했다.
"매클씨, 나는 변호사 마이클 브록이요."
그는 사람들이 변호사로부터 인사를 받을 때 보통 보여 주는 언짢은 표정을 보여 주며 명
함을 받아들었다. 하긴 나는 그가 매표원과 수작을 부리는 것을 방해한 셈이었다.
"몇가지 물어봐도 되겠소?"
나는 마치 강력반 형사라도 된 것처럼 목에 힘을 주고 말을 이었다.
"물어 보쇼. 하지만 대답하는 것은 내 자유요."
그는 매표원에게 눈을 찡긋했다.
"워싱턴의 대형 법율 회사인 드레이크 & 스위니에서 경비일을 해준 일이 있소?"
나는 민감한 데를 건드렸다. 곧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것으로 대화는 끝난 것이
나 다름없었다.
"없는 것 같소."
그는 눈길을 돌렸다.
"확실하오?"
"그런 일 없소. 그게 내 대답이오."
"2월 4일에 그 회사가 불법 점거자들이 가득한 창고에서 퇴거를 집행한 일을 도와 준 일
이 없다 이거요?"
매클은 고개를 저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이를 악물고 있었다. 드래이크 & 스위니에서 온
사람이 이미 매클을 만난 것 같았다. 아니, 드래이크 &스위니에서 매클의 고용주를 협박했
을 가능성이 더 높았다.
어쨌든 매클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매표원은 손톱을 다듬는 데 정신이 팔려 있
었다. 나는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다.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조만간 내 질문에 답을 하게 될 거요."
매클의 턱 근육이 움찔했으나, 대꾸는 하지 않았다. 나도 더 밀어붙일 생각은 없었다. 그
는 거친 사람이었다. 성질이 나면 거리의 변호사쯤은 주먹질로 박살을 내버릴 수 있는 사람
이었다. 나는 지난 두 주 동안 상처는 입을 만큼 입었다.
후반전을 10분 정도 지켜보다가 등에 경련이 일어나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동차 사조의
후유증이었다.
모텔은 이번에도 새 것으로, 베데즈더의 북쪽가장자리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번에도 하
룻밤에 40달러였다. 사흘밤이 지나자 이제 루비에게 더 이상 감금 치료를 해줄 여유가 없었
다. 미건은 이제 루비가 모텔을 떠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만일 루비가 계속 말짱한 상태
를 유지하려면, 거리에서 진짜 시험을 받아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화요일 아침 7시 반, 나는 이층 루비의 방문을 두드렸다. 미건이 가르쳐 준 바에 따르면
220호실이었다. 대답이 없었다. 다시 문 을 두드려보고, 손잡이도 돌려 보았다. 문은 잠겨 있
었다. 나는 로비로 달려가, 안내원에게 그 방에 전화를 넣어 달라고 했다. 역시 대답이 없었
다. 모텔을 마간 사람은 없었다. 색다른 일이 벌어진 적도 없었다.
나는 부매니저를 불러, 긴급 사태가 벌어졌다고 이야기했다. 그녀는 경비원을 불렀고, 우
리 셋은 방으로 갔다. 나는 가는 길에 우리가 루비에게 어떤 일을 하고 있으며, 왜 그 방을
루비 이름으로 빌리지 않았는가를 설명했다. 부매니져는 자기네 좋은 모텔을 크랙 중독자
치료실로 사용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이었다.
방은 비어 있었다. 침대는 말끔하게 정리 되어 있었다. 밤새 사용한 흔적이 없었다. 건드
린 물건도 없었고, 놓고 간 물건도 없었다.
나는 그들에게 고맙다고 하고 그곳을 나왔다. 모텔은 우리 사무소에서 적어도 15킬로미터
는 떨어져 있었다. 나는 미건에게 전화로 상황을 알리고, 엄청난 숫자의 다른 통근자들과 씨
름을 하며 도시로 들어왔다. 8시 15분, 꽉 막힌 차량들 틈에 끼어 사무실로 전화를 했다. 소
피아에게 루비를 보았느냐고 물었다. 못 보았다는 대답이었다.
소장은 짧았고 적절했다. 론타 버튼과 그녀의 자녀들의 자산의 수탁자인 윌머 펠런이 불
법 퇴거의 음모를 꾸민 죄로 리버오크스, 드레이크 & 스위니, 태그 주식회사를 고소한다는
것이었다. 논리는 간단했다. 인과관계도 분명했다. 우리 의뢰인들은 아파트에서 쫓겨나지 않
았다면 차에서 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차에서 살지 않았다면 죽지도 않았을 것이다. 피
고의 책임은 입증하는 논리 는 쌈박했다. 단순했기 때문에 더 매력적으로 보였다. 전국의 어
던 배심이라도 그 논리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피고들의 태만과 의도적 행동들이 원고들의 죽음의 원인이 되었는데, 그 죽음은 충분히
예측 가능한 것이었다. 거리에서 사는 사람들, 특히 어린 자녀들을 거느린 미혼모들에게는
나쁜일들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들을 불법으로 집에서 내쫓았다면, 그들이 피해를 입었을
경우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우리는 잠깐, 형씨의 죽음에 대해서도 별도의 소송을 고려할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 역시
불법으로 퇴거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예측 가능하다고 할 수 없었다. 민사상
의 불법 행위를 당한 자가 인질극을 벌이고 그 과정에서 사살 당하기까지 논리적 인과관계
를 설정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배심에게 별 매력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형
씨에게는 영원한 안식을 주기로 했다
드레이크 & 스위니는 즉시 파일을 넘겨 달라고 요청할 것이 분명했다. 판사는 나에게
그렇게 명령할 가능성이 높았는데, 파일을 넘겨 준다는 것은 죄를 인정하는 것이 될 터였다.
그렇게 되면 내 변호사 면허도 날아가 판이었다. 나아가서 도난당한 파일에 속한 모든 것이
증거 능력을 상실할 가능성이 있었다. .
. 모디카이와 나는 화요일에 마지막으로 초고를 검토했다. 그는 다시 나에게, 정말로 이 소
송을 밀고 나아가고 싶으냐고 물었다. 그는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소송을 완전히 포기
할 생각도 있었다. 우리는 그 문제에 대해 몇 번 이야기를 했다. 심지어 버튼 소송을 취하하
고,드레이크 & 스위니와 협상을 하여 내 이름에서 오점을 지운 다음, 일 년 정도 분위기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슬며시 도시 반대편에 있는 모디카이의 친구판사에게 소송을 제기
하는 전략을 검토해 보기까지 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나쁜 전략이었기 ,곧 폐기
해 버리고 말았다.
모디카이는 소송 신청서에 서명을 했고, 우리는 법원으로 향했다. 모디카이가 운전을 했
고, 나는 다시 소장을 읽어 보았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페이지가 늘어낫다.
협상이 핵심이었다. 드레이크 & 스위니처럼 엄청난 자부심과 자존심을 가진 법률 회사,
신용과 봉사와 신뢰를 먹고 사는 회사에게는 이런 식의 폭로가 수모가 될 터였다. 나는 그
들의 심리와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위대한 변호사들을 숭
배했다. 그들은 어떤 식으로든 나쁜 사람으로 여겨지는 것에 공포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많은 돈을 번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있었기 때문에, 그에 상응하여 운이 덜 좋은 사람들
에게 동정심을 보여주고 싶은 욕구도 있었던 것이다..
드레이크 & 스위니는 잘못된 행동을 했다. 물론 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잘못된 행동을
했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아마 브레이든 챈스는 자기 방에 처박혀 숨을 죽인 채 어서 시간
이 흘러 가 주기를 열심히 기도하고 있을 터였다.
하자만 나도 잘못된 행동을 했다. 어쩌면 우리는 중간 지점에서 만나 협상을 해야 할 지
도 몰랐다. 그렇지 않으면 모디카이 그린은 가까운 시일 안에 친근한 배심에게 버튼 사건에
대한 주장을 제시하고 큰 돈을 요구하는 즐거움을 누리게 될 터였다.
버튼 사건은 절대 재판까지 갈 수 없었다. 나는 여전히 드레이크 & 스위니의 변호사처
럼 생각하고 있었다. 워싱턴의 배심과 직면한다는 생각만으로 드레이크 & 스위니의 변호사
들은 겁에 질릴 터였다. 그들은 처음에는 당황하다가, 곧 손해를 최소화하는 방법을 찾으려
고 기를 쓸 터였다.
에이브러험의 대학 친구인 팀 클로슨이 <워싱턴 포스트>에서 기자로 일을 하고 있었다.
그가 서기 사무실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우리는 그에게 소장 사본을 주었다. 그는 모디
카이가 원본을 제출하는 동안 그것을 읽고 있다가 우리에게 질문을 했다. 우리는 기꺼이 대
답을 했다. 물론 보도는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버튼의 비극은 워싱턴에서 사회적이고 정치적으로 뜨거운 감자가 되어 있었다. 어지러울
정도로 빠르게 비난이 오가고 있었다. 시의 모든 부서의 책임자들이 다른 쪽에 책임을 전가
했다. 시의회는 시장을 비난했고, 시장은 시의회를 비난하는 동시에 국회를 비난했다. 국회
의 일부 우익은 오랫동안 검토한 끝에 시장, 시의회, 시 전체를 싸잡아 비난했다.
그런 상황에서 모든 것이 한 무리의 부유한 백인 변호사들의 책임이라는 주장이 제기된다
는 것은 놀라운 기삿거리였다. 오랜 기자 생활을 거치면서 냉담해지고, 신랄해지고, 지쳐 버
린 클로슨 조차도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언론이 드레이크 & 스위니를 공격할 기회를 기다리며 잠복한다는 것에 나는 조금도 부
담을 느끼지 않았다. 지난주에 회사는 내가 체포되었다는 사실을 기자에게 흘림으로써 먼저
싸움 규칙을 세워 놓았기 때문이다. 래프터를 비롯한 소송 변호사들의 무리가 ,그래! 언론에
이 자식의 체포에 대해 알려 주는 것이 좋겠어, 하고 즐겁게 합의하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것만이 아니라 범죄자의 멋진 사진까지 제공하자고. 그럼 이 자식은 당황하고, 창피해하
고, 후회할 것이고, 결국은 파일을 토해내고 우리가 하라는 대로 하겠지.
나는 그들의 심리를 알았고, 그들이 게임을 하는 방법을 알았다.
따라서 기자를 도와 주는 데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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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 비폭력을 위한 공동체에 나가 혼자 자원봉사를 해야 했는데, 두 시간 지각을 했다.
의뢰인들은 로비의 더러운 바닥에 앉아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있었다. 일부는 졸고 있었고,
일부는 신문을 읽고 있었다. 열쇠를 가진 어니는 내가 늦은 것 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은 눈
치였다. 그에게도 그 나름의 일정이 있을 테니까. 어니는 자원봉사실 문을 열어 주고, 13명
의 의뢰인 후보의 명단이 적힌 서류판을 건네 주었다. 나는 첫 번째 사람을 불러들였다.
내가 일 주일 동안에 얼마나 많이 발전했는지 스스로 봐도 놀라웠다. 조금 전에 건물에
들어올 때도 총에 맞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로비에서는 내가 백인
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어니가 오기를 기다렸다. 의뢰인들의 이야기에는 참을성 있게,
그러나 효율적으로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아니까. 나
는 심지어 그들 가운데 하나인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턱수염은 일 주일 이상 내버려 두
었다. 머리는 귀를 약간 덮으면서, 덥수룩하다는 느낌을 주기 시작했다. 카키 셔츠에는 주름
이 잡혔다. 군청색 블레이져는 쭈글쭈글해졌다. 여기에 뿔테 안경만 걸치면, 완벽한 공익법
변호사의 외모를 갖추는 셈이었다.
그렇다고 의뢰인들이 그런 데 관심을 갖는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누가 자기 이
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기를 바라고 있을 뿐이었고, 그렇게 귀를 기울여 주는 것이 내 일이
었다. 명단은 17명으로 늘었다. 나는 네 시간 동안 자문을 했다. 드레이크&스위니와 곧 한
판 붙어야 한다는 것도 잊고 있었다. 클레어에 대해서도 잊고 있었다. 슬프게도 후자가 훨씬
쉬웠다. 심지어 헥터 팔머에 대해서도, 시카고에 갔던 일에 대해서도 잊고 있었다.
그러나 루비 사이먼만은 잊을 수가 없었다. 새로운 의뢰인이 올 때마다 어떤 식으로든 그
녀와 연결시켜 보곤 했다. 그렇다고 내가 그녀의 안전을 걱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루비는 나
보다 훨씬 더 오래 거리에서 버텨온 사람이었다. 하지만 왜 루비는 텔레비젼과 샤워가 있는
깨끗한 모텔방을 떠나, 버려진 차를 찾으려고 도시를 헤맸을까?
루비는 중독자였다. 그것이 간단하고 피할 수 없는 답이었다. 크랙이 자석이었다. 그것이
그녀를 다시 거리로 끌어당긴 것이다.
그녀를 교외의 모텔에 사흘밤 가두어 두는 일도 못한다면, 내가 어떤 식으로 그녀가 깨끗
해지는 것을 도울 수 있단 말인가?
이제 그 결정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늦은 오후의 워너 형의 전화 때문에 박살이 나고 말았다. 갑자기 일 때문에 워싱턴에 오
게 됐어. 아까 전화를 하려 했지만 네 새 전화번호를 알 수가 있어야지. 어디서 저녁을 먹을
까? 돈은 내가 낼게. 형은 내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그렇게 덧붙였다. 새로 생긴 '대니 오'라
는 데가 괜찮다고 하는 것 같던데. 내 친구가 지난주에 거기서 먹어 봤다더라. 음식이 아주
좋대! 나는 오랫동안 값비싼 식사는 생각도 해보지 못하고 살았다.
'대니 오'라면 나도 좋지 뭐. 그곳은 유행을 따르는 전형적인 곳으로, 시끄럽고 비쌌다.
나는 대화가 끝난 뒤에도 한참 전화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워너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워
너의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는 일 때문에 워싱턴에 온 것이 아니었다ㅡ그
런 일이 1년에 한 번 정도 있기는 하지만. 나는 이번 경우는 부모님이 보낸 것이라고 확신
하고 있었다. 그분들은 멤피스에서 애통해하고 계셨다. 또 한 명의 자식이 이혼한 것에 상심
하셨을 것이고, 내가 출세의 사다리에서 갑자기 굴러떨어진 것을 마음아파하셨을 것이다. 누
군가를 보내 나를 확인해 보아야 했다. 그런 일은 늘 워너가 맡았다.
우리는 대니 오의 혼잡한 바에서 만났다. 악수나 포옹을 하기 전에 워너는 뒤로 한발 물
러나 나의 새로운 모습을 살폈다.. 턱수염, 머리카락, 카키 바지 등등 모든 것을.
"진짜 급진파로군."
유머와 비꼼이 반반 섞인 말투였다.
"만나서 반가워."
나는 그의 극적인 행동을 무시하려 했다.
"여윈 것 같구나."
"형은 아닌 것 같은데."
워너는 그 날 하루 동안에 슬며시 몇 킬로그램이 더 늘기라도 했다는 듯이 배를 두드리며
말했다.
"뺄 거야."
워너는 서른여덟이었는데, 그만하면 괜찮아 보였다. 어째든 그는 자신의 외모에 대해 여전
히 대단한 허영심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몸무게가 늘었다는 말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당장
한 달 내에 몇 킬로그램을 빼고야 말 사람이었다.
워너는 3년째 독신으로 지내고 있었다. 그에게는 여자가 대단히 중요했다. 이혼 과정에서
간통에 대한 주장이 나왔는데, 양쪽 모두 그런 주장을 했다는 것이 특이한 점이었다.
"형은 멋있어 보이는데."
실제로 그랬다. 맞춤 양복에 셔츠. 값비싼 타이. 내 옷장에도 그런 것들이 가득했다.
"너도 그런 데 뭐. 요새는 그렇게 입고 있냐?"
"대부분은 그래. 때로는 타이 풀기도하고."
우리는 하이네켄을 주문하여 수많은 사람들 편에서 그것을 홀짝였다.
"클래어는 어때?
단도직입적이었다.
"잘 있는 것 같아. 우리는 합의하에 이혼을 신청했어. 내가 집을 나왔고."
"행복하대?"
"나를 내보내서 마음이 편안한가 봐. 어쨌든 클레어는 한 달 전보다는 지금이 더 행복하
다고 할 수 있어."
"다른 남자가 생긴 거냐?"
"그런 것 같지는 않아."
조심해야 했다. 우리 대화 가운데 전부는 아니라 하더라도 대부분은 부모님 귀에 들어갈
터였기 때문이다. 특히 추문이 될 만한 이혼 사유는. 부모님은 클레어를 비난하고 싶어할 것
이다. 클레어가 바람을 피우고 다니다 들키기라도 했다면, 아들의 이혼도 논리적으로 타당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을 테니까.
"너는?"
워너가 물었다.
"아니. 난 아랫도리를 잘 챙겼어."
"그런데 왜 이혼이야?"
"이유야 많지. 하지만 그 이야기를 다시 하고 싶지는 않아."
이것은 워너가 원하던 대답이 아니었다. 워너는 지저분하게 헤어지고, 아이의 양육권을 놓
고 싸우기까지 했다. 그리고 워너는 나에게 지겨울 정도로 자세하게 이야기를 해주곤 했다.
워너는 지금 나도 그렇게 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서 이혼을 하기로 결정을 했다는 거야 뭐야?"
"형도 다 겪어 봤잖아.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아."
지배인이 우리를 레스토랑 안쪽으로 데려갔다. 지나가다 웨인 엄스테드가 내가 모르는 두
사람과 함께 앉아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엄스테드도 나와 함께 인질이 되었던 친구였다.
형씨가 문 밖으로 음식을 가지러 보냈던 사람이고, 저격수의 총알이 아슬아슬하게 비켜간
사람이기도 했다. 엄스테드는 나를 보지 못했다. 오전11시, 내가 창조적 비폭력을 위한 공동
체에 있는 동안, 소장이 드레이크 & 스위니의 집행위원장 의장인 아서 제이컵스에게 전달
되었을 것이다. 엄스테드는 파트너가 아니었다. 다라서 소송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을까?
엄스테드도 당연히 알고 있을 터였다. 오후 내내 열린 다급한 회의를 통해 그 소식은 폭
탄처럼 투하되었을 것이다. 드레이크 & 스위니도 변호를 준비해야 했다. 행군 명령을 내리
고, 무기를 준비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외비일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소송은 무시되고 있을
것이다.
다행히도 우리 자리는 엄스테드가 있는 곳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레스토랑에 혹시
다른 적군은 없는지 보려고 주위를 흘끔거렸다. 워너는 마티니 두 잔 주문했으나, 나는 얼른
내 것은 취소했다. 그냥 물만 달라고 했다.
워너에게는 모든 것이 최고조에 이르러 있었다. 일하는 것, 노는 것, 먹는 것, 마시는 것,
여자, 심지어 책과 옛날 영화까지. 페루의 어떤 섬에서 심한 눈보라를 만나 얼어죽을 뻔하기
도 했고,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스쿠버 다이빙을 하다가 독이 있는 물뱀에 물리기도 했다. 이
혼 후의 적응 과정은 놀라울 정도로 수월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워너가 전세
계를 무대로 여행을 하고, 행글라이딩을 하고, 산을 오르고, 상어와 씨름하고, 여자를 쫓아다
니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애틀랜타의 대형 법률 회사의 파트너로서 많은 돈을 벌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많은 부분을 소비하고 있었다. 나와의 식사도 주제는 돈이었다.
"물?"
워너는 역겹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왜 이래. 한 잔 해."
"아냐."
나는 고집을 부렸다. 워너는 마티니에서 포도주로 옮겨갈 터였다. 느즈막이 레스토랑을 떠
나겠지만, 새벽 4시면 일어나 노트북을 두드릴 것이다. 약간의 숙취를 털어 버리며 여느 하
루와 다름없는 하루를 맞이할 것이다.
"패기 없는 녀석 같으니라고."
워너가 중얼거렸다. 나는 메뉴를 살폈다. 워너는 치마만 둘렀으면 놓치지 않고 살펴보고
있었다.
워너가 주문한 술이 도착했을 때, 우리는 식사를 주문했다.
"일 이야기 좀 해봐."
워너는 관심 있다는 인상을 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왜?"
"아주 재미있을 것 같아서."
"왜 그렇게 생각하지?"
"넌 큰돈에 등을 돌렸어, 따라서 거기에는 염병할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게 틀림없잖아."
"이유가 있지. 그리고 나에게는 그 이유가 그럴듯해."
워너는 나를 만날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다. 목적과 목표와 추구하는 바가 있었다. 그리고
나를 통해 추구하기 위해 자신이 해야 할 말의 윤곽을 잡아 놓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목표가 무엇인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지난주에는 체포를 당했어."
그의 방향을 틀어 버리기 위해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은 충격이라는 면에서는 성공을 거두
었다.
"뭐라고?"
나는 그 이야기를 해주었다. 아주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이제 내가 대화의 주도권을 잡
았기 때문이다. 워너는 내가 도둑질을 한 것에 비판적이었지만, 나는 그것을 변호하려 하지
않았다. 파일 자체는 또 하나의 복잡한 문제로, 우리 둘 다 그 방향으로는 깊이 들어가고 싶
어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드레이크 & 스위니로 돌아가는 다리는 불타 버렸단 말이야?"
워너가 식사를 하면서 물었다.
"영원히."
"공익법 변호사 일을 얼마나 할 생각인데?"
"이제 막 시작했어. 그리고 끝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왜?"
"언제까지 무료로 일을 할 수 있겠어?"
"먹고 살 수만 있는 한."
"그러니까 먹고 사는 게 기준이란 말이야?"
"지금은 그래. 형의 기준은 뭔데?"
"돈 내가 얼마나 버느냐. 내가 얼마나 쓰느냐. 얼마나 어디에 묻어두면, 그것이 커가는 것
을 지켜보고 있다가, 어느 날 아무 걱정할 필요 없이 그 돈만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느냐."
전에도 들어본 이야기였다. 이렇게 부끄러움 없이 탐욕을 드러낸다는 것도 감탄할 만한
일이었다. 사실 그 말은 우리가 어렸을 때 배운 것을 약간 투박하게 바꾸어 놓은 것에 지나
지 않았다. 열심히 일해서 많이 벌어라. 그러면 어떤 식으로든 사회 전체에 도움이 된다.
그는 내가 시비조로 나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바라는 싸움이 아니었
다. 그것은 승자가 없는 싸움이었다. 오직 추한 무승부만 있을 뿐이었다.
"형은 얼마나 갖고 있는데?"
워너는 탐욕스러운 사람답게 자신의 부를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마흔이 되면 투자신탁 회사에 묻어 놓은 돈이 백만이 될 꺼야. 마흔다섯이 되면 3백만이
되고. 그럼 난 회사를 그만둘 꺼야."
나도 그 숫자를 외우고 있었다. 대형 법률 회사들은 어디나 똑같으니까.
"너는 어떠냐?"
워너는 놓아 기른 병아리 요리를 썰면서 물었다.
"어디 보자. 난 지금 서른둘인데, 나한태는 대충 5천이 있어. 서른다섯이 되었을 때, 만일
내가 열심히 일을 하고 저축을 했다면, 그게 한 만이 될 거야. 쉰이 되면 투자신탁 회사에
한 2만쯤 모아 놓을 수 있겠네."
"그런 인생에 기대할 게 뭐 있겠냐. 18년 동안 가난 속에서 사는 인생에."
"형은 가난이 뭔지도 모르잖아."
"어쩌면 알지도 모르지 우리 같은 사람한테 가난이란 싼 아파트, 찌그러지고 털털거리는
중고차, 나쁜 옷, 여행을 하거나 놀거나 세상을 구경할 돈이 없다는 것, 저축하거나 투자할
돈이 없다는 것, 안전망이 없다는 것,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지."
"완벽하군. 형은 방금 내 이야기를 확인해 주었어. 형은 가난에 대해서 염병할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말이야. 형은 올해에는 얼마나 벌 것 같아?"
"90만."
"나는 3만을 벌 거야. 누가 형한테 강제로 3만만 받고 일을 하라고 한다면 형은 어떻게
할 것 같아?"
"자살을 하지."
"정말 그럴 꺼야. 정말로 형은 3만을 받고 일하느니 차라리 총을 뽑아들고 머리를 쏘고
말 거야.
"틀렸어. 난 약을 먹고 줄을 꺼야."
"겁쟁이."
"어쨌든 난 그렇게 싸게 받고는 일 못해."
"아니지. 그렇게 싸게 받고 일을 할 수는 있지만, 그렇게 싸게 살수는 없는 거지."
"그게 그거야."
"그것이 형하고 나하고 다른 점이야."
"염병할, 우리가 다르다는 말은 옳아. 하지만 어떻게 하다 우리가 달라진 거지, 마이클?
한 달 전만 해도 너는 나와 같았잖아. 하지만 지금 너를 보라고.. 그 멍청해 보이는 구레나
룻 에 바랜 옷이며, 민중에게 봉사하고 인류를 구원한다는 그 헛소리하며. 대체 어디서 잘
못된 거야?"
나는 깊은 숨을 쉬며 그의 질문에 담긴 유머를 즐겼다. 워너도 긴장을 풀었다. 우리는 사
람들 앞에서 싸우기에는 너무 교양있는 인간들이었다.
"너는 멍청이야."
워너는 몸을 낮게 기울이며 말을 이었다.
"너는 파트너로 향하는 빠른 길을 가고 있단 말이야. 너는 총명하고, 재능 있고, 독신이고,
애도 없어. 서른다섯이면 연봉 백만을 벌 수 있어. 너도 그 정도 산수는 할 수 있잖아."
"이미 끝난 일이야, 워너. 나는 돈에 대한 사랑은 잃었어. 돈이란 악마의 저주야."
"정말 새로운 이야기로군. 하나 물어보자. 예를 들어,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어디
보자, 그래, 예순이 되어 있으면 어떻게 할래? 세상은 어차피 구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을 구하는 일에도 지쳤으면? 너한테는 오줌을 눌 그릇 하나 없고, 한푼도 없고, 회사도
없고, 파트너도 없고, 뇌 전문의로 큰돈을 버는 부인도 없고, 너를 알아 줄 아무도 없다면?
그럼 넌 어떻게 할래?"
"나도 그 점에 대해 생각해 봤지. 그리고 나서 더럽게 부자인 형이 있으니 걱정 없다는
결론을 내렸어. 따라서는 그럴 때는 형한테 전화를 걸면 되겠지 뭐."
"내가 죽었으면?"
"유언장에 넣어 줘. 회개한 동생에게 준다고 생각하고."
우리는 갑자기 음식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대화는 시들해졌다. 워너는 너무 자만심이
강하여, 자기가 퉁명스럽게 맞서면 내가 정신을 차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잘못
디딘 걸음의 결과에 대해 몇 가지 날카로운 통찰을 보여 주기만 하면 내가 무료 변론 일을
버리고 진짜 일자리를 얻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내가 이야기를 하죠.' 부모님들한테
도 그렇게 자신있게 말했을 것이다.
워너에게는 아직 잽 몇 방이 남아 있었다. 그는 14번가 법률상담소의 보험 혜택이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다. 형편없지 뭐. 내가 대답했다. 퇴직금은? 내가 아는 바로는 없는데. 워너는
내가 딱 2년 동안만 영혼을 구하는 일을 하고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오라는 의견을 냈다.
나는 고맙다고 했다. 더불어 비슷한 생각을 가진 여자, 그러나 돈은 있는 여자를 찾아서 결
혼하는 게 좋을 거라는 멋진 충고도 덧붙였다.
우리는 레스토랑 보도에서 작별 인사를 했다. 나는 나도 내 앞가림은 한다고, 괜찮을
거라고 안심시키고, 부모님이 걱정하지 않도록 잘 말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분들 걱정시키지 마, 워너. 여기는 모든 게 괜찮더라고 전해 줘."
"배 고프면 전화해라."
워너는 유머라 생각하고 그렇게 말했다.
나는 손을 흔들어 주고 헤어졌다.
필론 그릴은 조지 워싱턴 대학 근처의 포기 보텀에 있는 24시간 커피숍이었다. 그곳은 불
면증 환자와 뉴스 중독자들이 모이는 곳으로 유명했다. 매일 밤 12시 직전이면 『워싱턴 포
스트』 초판이 도착했다. 그러면 이곳은 점심시간을 맞이한 좋은 식당처럼 붐볐다. 나는 신
문 한 장 사 들고 바에 앉았다. 바의 풍경은 묘했다. 모든 사람이 신문에 머리를 쳐박고 있
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필론은 몹시 조용했다. 내가 도착하기 몇 분 전에 『워싱턴 포스
트』가 도착했기 때문이다. 서른 명 정도의 사람들이 마치 전쟁 소식이라도 난 것처럼 신문
을 열심히 읽고 있었다.
그 기사는 『워싱턴 포스트』에는 아주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기사는 1면의 굵은 머릿기
사로 시작하여, 10면에서 계속 되고 있었다. 정의를 위한 집회의 플래카드에서 뽑은 론타의
사진, 십 년은 젊어 보이는 모디카이의 사진, 그리고 드레이크 & 스위니의 귀족들에게 수모
감을 안겨 줄 것이 틀림없는 세 장의 사진이 있었다. 가운데 아서 제이컵스가 있었다. 왼쪽
에는 틸먼 갠트리가 교도소에 들어가면서 찍은 얼굴 사진이 있었다. 오른쪽에는 드본 하디
가 교도소에 들어가면서 찍은 얼굴 사진이 있었다. 드본 하디는 그 자신이 퇴거를 당했고
또 뉴스거리가 될만한 방식으로 죽음을 자초했기 때문에 기사와 관련을 맺고 있었다.
아서 제이컵스는 『워싱턴 포스트』의 10명에서 두 명의 중범 전과자, 가슴에 작은 번호
판이 달려있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범죄자들과 나란히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드레이크 & 스위니의 변호사들이 문을 잠그고, 전화선을 뽑아 놓고, 회의를 취소하고, 사
무실과 회의실에서 머리를 맞대고 있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 했다. 그들은 대응 방침을
세우고, 수많은 다양한 전략을 고안하고, 홍보 담당자를 불러들일 터였다. 이 시간이 그들
에게는 가장 어두운 암흑의 시간이 될 터였다.
법조계에서는 일찍부터 팩스 전쟁이 시작될 터였다. 삼인조의 사진 사본이 동해안의 지사
에서 서해안의 지사로 날아갈 터이고,법인 관련 법을 다루는 세계의 모든 대형 법률 회사들
이 웃음을 터트릴 터였다.
갠트리는 무척 험악해 보였다. 그런 자에게 싸움을 걸었다고 생각하니 겁이 날 정도였다.
내 사진도 나와 있었다. 내 체포를 보도했던 토요일자 신문에 실렸던 바로 그 사진이었다.
나는 회사와 론타 버튼 사이의 연결 고리로 묘사되고 있었다. 물론 기자야 내가 실제로 그
녀를 만났다는 사실을 알 도리가 없었겠지만.
기사는 길고 철저했다. 퇴거 조치와 그 모든 관련자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거기에
는 하디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퇴거 이레 후 드레이크 & 스위니의 사무소에 나타나 인
질극을 벌였고, 그 인질들 하나가 나였다. 기사는 나에게서 모디카이로 옮겨갔다. 이어 버튼
가족의 죽음으로 이어졌다. 나는 조심을 하여, 기자에게 문제가 되고 있는 파일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았지만,기사는 내 체포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자는 약속을 지켰다. 우리는 한 번도 실명으로 나오지 않고, 단지 소식통으로만
언급되고 있었다. 내가 썼어도 이보다 잘 쓸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피고측으로부터 나온 이야기는 한 마디도 없었다. 기자는 그들과 접촉하려는 노력을 거의
또는 전혀 기울이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31
워너가 새벽 5시에 전화를 했다.
"일어났니?"
그는 그가 묵고 있는 호텔 특실에서 이미 일어나 앉아 있었다. 아마 벽을 보고 앉아 우리
가 제기한 소송에 대해 수도 없이 생각을 해보고 질문을 던졌을 것이다. 그는 이미 신문을
보았던 것이다.
나는 침낭의 온기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워너가 사건을 이렇게 저렇게 처리하
라고 충고하는 것에 귀를 기울였다. 워너는 소송 변호사였다. 그것도 매우 유능한 변호사였
다. 버튼 사건이 배심에게 지니는 호소력에 그는 군침을 흘렸다. 너희가 요구한 배상액은 충
분치 않아. 천만으로 되겠니? 배심만 잘 걸리면 배상액은 천정부지야. 내가 이 사건을 맡을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구나. 모디카이는 어떤 사람이냐? 법정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변호사
냐?
수임료는? 물론 40퍼센트에 계약을 했겠지. 결국 너한테도 아직 희망이 있는 거로구나.
"10퍼센트야.'
나는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방에서 말했다.
"뭐! 10퍼센트라고! 정신 나갔니?"
"우린 비영리 회사야."
내가 설명하려 했으나 워너는 듣지 않았다. 그는 내가 더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고 욕을
하고 있었다.
그 파일이 문제야. 워너는 마치 너희들은 왜 미처 그 생각을 못 했느냐는 듯이 말했다.
"파일 없이 너희 주장을 입증할 수 있니?"
"응."
워너는 신문에 제이컵스 노인이 양쪽에 범죄자들을 거느리고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애틀란타로 가는 비행기는 두 시간 후에 출발이었다. 그는 9시면
자기 책상에 가서 앉아 있을 터였다. 어서 그 사진을 자기 회사에 돌리고 싶어 안절부절인
것 같았다. 아마 전화를 끊는 즉시 서해안으로 팩스를 보낼 거였다.
워너는 이야기를 하다 말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워너의 전화를 받기 전에 세 시간을 잤다. 더 자보려고 몇 번 뒤척였으나, 잠은 더
오지 않았다. 편안히 쉬기에는 그 동안 내 인생에 변화가 너무 많았다. 샤워를 하고 아파트
를 나와, 파키스탄인 가게에서 해가 뜰 때까지 커피를 마시고, 나올 때 루비에게 줄 쿠키를
샀다.
14번가와 Q 스트리트가 만나는 모퉁이, 즉 우리 사무실 옆에 낯선 차 두 대가 주차해 있
었다. 나는 7시 반에 내 차를 타고 그 차들 옆을 천천히 지나갔다. 본능적으로 멈추지 않고
계속 갔다. 루비는 현관 계단에 없었다.
틸먼 갠트리는 폭력이 소송에서 자신을 변호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면, 망설임 없
이 그것을 사용할 것이다. 모디카이도 나에게 주의를 준 바 있었다. 물론 이런 일에는 주의
를 준다고 해서 큰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지만. 나는 모디카이의 집으로 전화를 하여 내가
본 것을 이야기하였다. 모디카이는 8시 반에 출근할 예정이었다. 우리는 그 때 만나기로 했
다. 소피아에게는 모디카이가 말하기로 했다. 에이브러험은 출장 중이었다.
지난 두 주 동안 내 1차적 관심은 소송이었다. 다른 중요한 일들도 있었다. 클레어, 이사,
새 일을 배우는 것. 그러나 리버오크스와 내 전 회사를 소송을 거는 일이 내 마음을 떠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큰 소송 사건을 치를 경우, 소송을 제기하기 전에는 과적인 분위기였
다가, 일단 폭탄이 떨어지고 가라앉고 나면 한 번 깊은 숨을 쉬게 되고, 이어 유쾌하고 차분
한 분위기가 찾아오게 마련이다.
겐트리는 우리가 그와 다른 두 피고에게 소송을 건 다음날 우리를 죽이지는 않았다. 사무
소는 매우 정상적인 분위기였다. 전화도 평소보다 더 자주 오지 않았다. 드나드는 사람들도
여전했다. 소송의 첫 단계가 일단 마무리되자, 다른 사건들에도 도 쉽게 집중할 수 있었다.
드레이크 & 스위니의 대리석이 깔린 복도에서 벌어지고 있을 공황 상태를 상상하는 것만
으로도 즐거웠다. 지금은 웃음도, 커피 기계 옆에서의 수다도, 복도에서의 농담이나 스포츠
이야기도 없을 것이다. 차라리 장례식장이 더 시끌벅적할 것이다.
나를 가장 잘 아는 반트러스트 담당부가 특히 썰렁할 것이다. 폴리는 초연하게 거리를 둔
자세로 변함없이 능률적으로 일을 처리하고 있을 것이다. 루돌프는 고위층과 머리를 맞대는
일 외에는 사무실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결국 드레이크 & 스위니의 4백 명의 변호사들을 싸잡아 비난하게 되면서 유일하게 안타
깝다고 할 수 있는 것은 그들 대부분이 사실 부정 행위와 무관할 뿐만 아니라, 그런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다는 점이었다. 부동산 부서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관심을 가
지지 않았다. 브레이든 챈스를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나도 그 회사를 7년을 다녔지만,
그 일이 있기 전에는 한 번도 그를 만난적이 없었다. 그를 만나게 된 것도 내가 먼저 찾아
갔기 때문이다. 죄 없는 사람들에게는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탁월한 전통을 이어받아
앞으로 밀고 나갈 내 동기들에게. 평소에 존경하던 고용주가 어떤 식으로든 부당한 죽음에
책임이 있다는 소식에 깜짝 놀랐을 후배들에게.
그러나 브레이든 챈스와 아서 제이컵스와 도널드 래프터에게는 전혀 동정심을 느끼지 않
았다. 그들은 내 급소를 찌르겠다는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어디 땀 좀 흘려 봐라.
미건은 80명의 여성 노숙자들로 가득 찬 센터의 질서를 잡는 힘든 일에서 잠시 벗어나,
나와 함께 차를 타고 북서부를 달리고 있었다. 그녀는 루비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전혀 몰
랐으며, 사실 루비를 찾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몇 분 동안
둘이 함께 있을 수 있는 구실은 되었다.
"이건 특별한 일이 아니에요."
미건은 나를 안심시키려 하고 있었다. 미건이 말을 이었다.
"대체로 노숙자들의 행동은 예측할 수 없어요. 특히 중독자들은요."
"전에도 이런 경우를 봤습니까?"
"겪을 건 다 겪었어요. 늘 침착해야 돼요. 어떤 의뢰인이 나쁜 습관을 버리고, 일자리를
찾고, 아파트를 얻으면, 조그만 소리로 감사 기도를 드리면 돼요. 하지만 흥분하지는 말아야
해요. 또 다른 루비가 나타나는 바람에 상심하게 되니까요. 이곳은 산보다는 골짜기가 많은
곳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우울증에 안 걸립니까?"
"의뢰인들에게서 힘을 얻게 되요. 그들은 놀라운 사람들이에요. 대부분은 축복도 받지 못
하고 태어나 살면서 아무런 기회도 얻지 못했어요. 그런데도 생존하고 있어요. 늘 어디에 발
이 걸려 넘어지지만, 또 늘 일어서서 계속 가려 하지요."
상담소에서 세 블럭 떨어진 곳에서, 뒤편에 부서진 차를 잔뜩 모아 놓은 자동차 정비소를
지나치게 되었다. 앞에서는 목에 사슬이 걸린 커다란 개가 이를 드러내고 지키고 있었다. 애
초에 녹슨 차들을 하나하나 살펴볼 계획도 아니었지만, 그런 개를 보자 마음을 정하기가 훨
씬 편했다. 우리는 루비가 14번가의 상담소와 L 스트리트와 10번가가 만나는 곳에 있는 나
오미 센터 사이에 살고 있다고 짐작하고 있었다. 대체로 로건 서클에서 마운트 버논 광장에
이르는 지역이었다.
미건이 말했다.
"하지만 모르는 일이죠. 이 사람들은 워낙 이동이 심해서 나도 늘 놀라곤 해요. 이 사람들
은 시간이 아주 많아요. 그래서 몇 킬로미터씩 걸어다니는 사람들도 있어요."
우리는 거리의 사람들을 관찰했다. 우리는 공원을 걸으면서 혹시 아는 사라들을 만날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노숙자들을 살피고, 그들의 컵에 동전을 넣어 주었다. 그러나 운이 없
었다.
나오미 센터에서 미건과 헤어졌다. 오후 늦게 전화를 하겠다고 약속했다. 루비는 우리가
계속 연락을 할 훌륭한 구실이 되어 주었다.
버크홀더는 인디애나 출신의 공화당 오선 하원의원이었다. 그는 버지니아에 아파트를 가
지고 있었으나, 이른 저녁에 의사당 주위를 조깅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의 비서진은 그가 의
회의 체육관에서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는다는 사실을 언론에 광고했다. 그 체육관은 의
회가 의사당 건물 지하에 설치했으나, 실제로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시설이었다.
의원이라고는 하지만 버크홀더는 433명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따라서 워싱턴에서 십
년을 보냈지만 거의 무명이었다. 그는 야심이 그리 크지 않았고, 매우 청렴했고, 건강을 지
키는 데 광적이었다. 이제 나이 마흔하나였다. 그는 농업위원회에서 일했으며, 하원 세입 소
위원회의 의장 자리를 맡고 있었다.
버크홀더는 수요일 초저녁 유니언 역 근처에서 혼자 조깅을 하다 총을 맞았다. 그는 운동
복 차림이었다. 지갑도, 현금도, 귀중품을 넣을 호주머니도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동기도 없
을 것 같았다. 버크홀더는 거리의 사람과 마주쳤다. 충돌하거나 가볍게 부딪혔을 수도 있고,
심한 말이 오갔을 수도 있다. 어쨌든 총 두 발이 발사되었다. 한 발은 빗나갔고, 또 한발은
왼쪽 어깻죽지에 박혔는데, 어깨까지 파고 들어가 목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서 멈추었다.
총격 사건은 어두워지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벌어졌다. 늦게 퇴근한 통근자들로 가득 찬
큰길 옆의 보도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목격자는 네명이었는데, 모두 공격을 한 사람이 노숙
자처럼 보이는 흑인 남자였는데, 별다른 특징은 없었다고 이야기했다. 범인은 어둠을 틈타
사라졌다. 통근자 가운데 한 사람이 차를 세우고 버크홀더를 도우러 달려갔을 때는 총을 든
남자는 사라진지 이미 오래였다.
버크홀더는 신속히 조지 워싱턴 병원으로 옮겨졌으며, 두 시간에 걸친 수술 끝에 총알은
제거되었다. 그와 더불어 안정 상태에 접어들었다는 발표가 나왔다.
워싱턴에서 의원이 총격을 당한 것은 오랜만의 일이었다.. 몇 명이 강도를 당한 적은 있었
으나, 신체적 상해를 당한 적은 없었다. 강도를 당한 피해자들은 보통 그것을 기회로 연단을
차지하여 범죄와 가치관 부족과 전반적인 도덕적 타락을 비난했다. 물론 그 모든 책임은 반
대당이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내가 11시에 그 뉴스를 보았을 때 버크홀더는 부상때문에 비난 연설을 할 수 없는 상태였
다. 나는 권투를 보면서 책을 읽다가 의자에서 졸고 있었다. 별다른 뉴스가 없는 날이었다.
버크홀더가 총에 맞기 전에는. 뉴스 진행자는 숨가쁘게 그 사건을 전하고, 배경에 버크홀더
의 멋진 사진을 놓고 기본적인 사항들을 이야기하였다. 이어 "병원 현장 나오세요!" 하고 외
치자, 여기자가 응급실 밖에서 추위에 떨며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버크홀더가 네 시간 전
에 통과한 문앞이었다. 그래도 뒤에는 구급차가 있었고, 환한 불빛들이 있었다. 그녀는 시청
자들에게 피나 시신을 보여 줄 수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한 선정적인 장면을 연출해야 했
던 것이다.
수술은 잘 되었읍니다. 그녀는 보도했다. 버크홀더는 안정된 상태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습
니다. 의사들은 성명을 발표했는데, 거기에는 사실상 아무런 내용도 들어 있지 않았다. 조금
전에 동료 의원 세 명이 급히 병원으로 달려왔다. 어떻게 했는지 그녀는 그들을 카메라 앞
에 붙들어 세울 수 있었다. 의원 셋은 서로 바짝 붙어 있었는데, 버크홀더의 생명이 위독한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세 명 모두 한결같이 엄숙하고 긴장된 표정이었다. 그들은 조명을 향
해 눈을 가늘게 뜨고,짐짓 그것이 그들의 사생활을 침해해서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지어 보
이려고 애를 썼다.
셋 가운데 내가 이름을 들어 본 의원은 없었다. 그들은 친구 걱정을 많이 했다. 의사들이
말한 것과 달리 버크홀더의 상태가 매우 심각하기라도 한 것처럼. 이어 그들은 시키지도 않
았는데, 워싱턴의 타락한 분위기에 대해 주절주절 이야기를 늘어 놓았다.
이어 총격 현장으로부터 또 한 번의 생중계가 있었다. 다른 얼빠진 기자가 버크홀더가 쓰
러진 '바로 그 현장'에 서 있었다. 이번에는 그래도 보여 줄 것이 있었다. 붉은 핏자국이 있
었던 것이다. 여기자는 아주 극적인 표정으로 그곳을 가리켰다. 그녀는 쭈그리고 앉아있었는
데, 저러다 보도에 손을 대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경찰관 하나가 카메라 프
레임 안으로 들어 오더니, 사건에 대해 모호하게 설명했다.
생방송 보도였다. 그런데 배경에 경찰차들의 빨갛고 파란 불빛들이 번쩍이고 있었다. 기자
는 몰랐지만,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눈치챘다.
싹쓸이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거리의 사람들은 차와 밴에 밀어 넣고 어디론가 데려가
는 중이었다. 경찰은 밤새도록 의사당 근처를 싹쓸이했다. 벤치에서 자는 사람, 공원에 앉아
있는 사람, 보도에서 구걸하는 사람, 집이 없는 것이 분명해 보이는 사람은 모두 체포했다.
배회, 쓰레기 무단 투기, 공공장소에서의 만취, 구걸등의 혐의를 걸었다.
모두가 체포되어 감옥에 간 것은 아니었다. 경찰 승합차 두 대는 북동부의 로드아일랜드
애비뉴까지 가서, 24시간 급식소를 갖춘 공동체 쎈터 옆의 주차장에 사람들을 쏟아 놓았다.
11명을 실은 또 한대의 경찰 승합차는 우리 사무실에서 다섯 블록 떨어진 T 스트리트의 '갈
보리 선교단' 앞에 멈추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감옥에 갈 것인지 아니면 그곳에 내릴 것인
지 선택하라고 했다. 물론 승합차는 순식간에 텅 비었다.
32
나는 침대를 들여 놓겠다고 맹세를 했다. 바닥에서 버둥거리며 어떤 점을 나 혼자에게만
증명해 보이겠다고 애를 쓰는 바람에 심한 수면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래서 새벽이 오
기 오래 전의 어둠 속에서 침낭에 앉아 앞으로는 좀 푹신한 것 위에서 자야겠다고 다짐하곤
했다. 그러면서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은 보도에 자면서 도대체 어떻게 버
티어 나갈까, 궁금해했다.
필론 그릴은 덥고 답답했다. 식탁에서 별로 높이 떨어지지 않은 곳에 담배 연기가 자욱하
게 구름을 이루고 있었다. 문을 열자마자 전세게에서 들여온 커피콩 향기가 쏟아져 나왔다.
평소처럼 그곳은 오전 4시반이 되자 뉴스에 중독된 사람들로 가득 찼다.
버크홀더가 단연 화제의 중심이었다. 그의 얼굴이 『워싱턴 포스트』의 1면에 자리잡고
있으며, 더불어 그의 신상, 총격 사건, 경찰 수사에 대한 몇 개의 기사가 실려 있었다. 싹쓸
이에 대해서는 아무 이야기도 없었다. 나중에 모디카이가 자세히 이야기 해주겠지.
메트로면에 놀랍고 도 기분 좋은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팀 클로슨 기자는 사명감이 투철
한 사람인 것이 분명했고, 또 우리의 소송에 고무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긴 기사를 통해 리버오크스에서부터 시작하여 세 피고를 자세히 살펴보고 있었다.
리버오크스는 2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투자자들의 그룹이 소유한 개인 회사인데, 그
투자자들 가운데 하나가 2억 달러의 재산을 가졌다는 소문이 있는 동해안의 부동산업계의
거물 클레이튼 벤더였다. 기사에는 벤더의 사진과 함께, 메릴렌드 주 헤이거스타운에 있는
리버오크스 본사의 사진도 실려 있었다. 이 회사는 지난 20년 간 워싱턴 근교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쇼핑 센터들을 지었다. 이 회사의 자산 가치는 3억5천만 달러로 평가되고 있었다.
그러나 은행 부채도 많았는데, 그 액수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어 북동부의 요금 별납 우편물 시설 계획의 역사가 매우 자세하게 나왔다. 그리고 그
다음이 드레이크 & 스위니였다.
당연한 일이지만, 회사내의 정보원은 없었다. 전화를 해달라고 했지만 아무런 응답도 없었
다. 그래서 클로슨은 기본적인 사실만 이야기했다. 규모, 역사, 몇 명의 유명한 변호사. 그리
고 두 개의 도표를 실었는데, 둘 다 『미합중국 법률』지에서 인용한 것이었다. 하나는 규모
를 기준으로 한 전국 10대 법률 회사의 명단이었고, 또 하나는 작년에 파트너들이 받은 평
균 보수를 기준으로 한 순위였다. 드레이크 & 스위니는 8백 명의 변호사들을 거느리고 있
었기 때문에 규모로 따졌을 때 5위였고, 파트너들의 수입은 평균 91만 5백달러로 3위였다.
내가 정말 이렇게 큰 돈을 버리고 퇴사한 것일까?
어울리지 않는 삼인조 가운데 마지막은 틸먼 갠트리였다. 그의 다채로운 인생은 조사 기
자들이 손쉽게 다룰 수 있는 대상이었다. 경찰관들이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전에 함
께 감방 생활을 했던 사람은 그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았다. 북동부의 어떤 목사는 갠트리가
가난한 아이들을 위하여 농구 골대를 세워 주었다고 말했다. 매춘부 일을 했던 여자는 그에
게서 맞았던 일을 회상했다. 갠트리는 태그와 갠트리 그룹이라는 두 회사를 움직이고 있었
으며, 그 회사들을 통하여 중고차 판매소 세 곳, 작은 쇼핑 센터 두 개, 두 사람이 총에 맞
아 죽은 아파트 건물 한 동, 임대용 복식 아파트 여섯 동, 강간 사건이 벌어진 일이 있는 술
집 한 곳, 비디오 대여점 한 곳, 시로부터 거의 공짜로 매입한 나대지 여러 곳을 소유하고
있었다.
세 피고 가운데 갠트리만 입을 열었다. 그는 작년 7월에 플로리다 애비뉴의 창고를 1만 1
천 달러에 매입하고, 금년 1월 31일에 20만 달러를 받고 리버오크스에 매도한 사실을 인정
했다. 운이 좋았죠. 갠트리는 그렇게 말했다. 건물은 쓸모없었지만, 그 밑의 땅은 1만 1천 달
러가 훨씬 넘는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갠트리가 그 창고를 매입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창고에는 늘 불법 점거자들이 생기기 마련이오. 갠트리는 그렇게 말했다. 사실 어쩔 수 없
이 그들을 쫓아 버리게 되었소. 집세를 물린 적이 없는데, 어디서 그런 소문이 생겼는지 모
르겠소. 그에게는 변호사들이 많았기 때문에, 정력적인 변호 활동을 전개할 작정이었다.
기사에 내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드본 하디와 인질극에 대한 이야기도 없었다. 론다 버
튼과 소장의 주장에 대해서도 거의 다루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이틀 연속으로 드레이크 & 스위니라는 오래되고 존경받는 법률 회사는 전직
포주와 음모를 꾸몄다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사실 기사에서는 변호사들을 틸먼 갠트리보다
더 악한 범죄자들로 그려 놓고 있었다.
기사에서는 내일자 신문에서는 론다 버튼의 슬픈 인생을 조명해 보겠다고 약속했다.
아서 제이컵스가 언제까지 자신이 사랑하는 회사가 진흙탕에 질질 끌려다니도록 놓아 둘
것인가? 사실 드레이크 & 스위니는 손쉬운 목표물이었다. 『워싱턴 포스트』는 고집스러운
데가 있었다. 기사가 계속 새끼를 치고 있었다.
9시 20분, 나는 나의 변호사 모디카이 그린과 함께 시내의 칼물트리에 빌딩에 도착했다. 6
번가와 인디애나 애비뉴가 만나는 모퉁이에 있는 건물이었다. 모디카이는 우리의 목적지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워싱턴의 민사 및 형사 사건의 집결지인 물트리에 빌딩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었다. 현관 바깥에는 사람들이 줄지어 서있었다. 변호사, 소송 관계자와 범죄자
들이 금속 탐지기를 통과하면서 줄은 천천히 줄어들고 있었다. 안은 시장바닥과 다름없었다.
로비에는 불안한 표정의 사람들이 빽빽히 들어차 있었으며, 네 층의 복도마다 법정들이 줄
지어 있었다.
노먼 키스너 판사는 1층의 114호실의 법정을 관장했다. 문 옆의 일정표를 보니 내 이름은
'1차 출두자' 속에 들어가 있었다. 내 이름과 함께 11명의 범죄자들 이름이 적혀져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판사석은 비어 있었고, 변호사들만 떼를 지어 몰려다니고 있었다. 모디카이
는 뒤쪽으로 사라졌다. 나는 두 번째 줄에 자리를 잡았다. 나는 잡지를 읽으며, 따분해 죽겠
다는 모습을 보여 주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안녕하시오, 마이클."
통로에서 누가 말을 걸었다. 도날드 래프터였다. 두 손으로 서류 가방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얼굴은 보았지만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 소송 부서 변호사들이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대꾸했다.
"안녕하십니까."
그들은 서둘러 건너편으로 가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피해자를 대리하고 있었다. 그러한
자격으로 내 사건이 진행되는 매단계마다 참석할 권리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 1차 출두에 불과한데! 나는 판사가 내 혐의를 읽는 동안 판사 앞에 서 있어
야 했다. 나는 무죄를 주장하고, 기존의 보석금에 근거하여 석방되어 법정을 나가게 될 터였
다. 그런데 래프리가 뭐하러 이곳에 왔을까?
천천히 답이 떠올랐다. 나는 잡지를 응시하며 아주 태연한 태도를 보여 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러다 마침내 그가 이곳에 온 것은 단지 나에게 경고를 하기 위해서임을 깨
달았다. 우리는 이 절도 사건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우리는 네가 가는 곳마다 쫓아다닐
것이다. 래프터는 드레이크 & 스위니의 모든 소송 변호사들 가운데 가장 똑똑하고 비열한
인간이었다. 법정에서 그를 보면 두려움에 몸이 부들부들 떨려야 마땅했다.
9시 반에 모디카이는 판사석 뒤편에서 나오더니 나를 향해 손짓을 했다. 판사가 판사실에
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디카이는 나를 판사에게 소개했고, 우리 셋은 작은 탁자 주위에
편하게 앉았다.
키스너 판사는 못 돼도 일흔은 되어 보였다. 흰 머리는 덥수룩했고 흰 수염은 들쭉날쭉했
다. 그러나 이야기를 할 때의 갈색 눈은 상대방 얼굴에 구멍이라도 뚫을 것 같았다. 그와나
변호사는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였다.
판사가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방금 모디카이에게 이건 매우 특별한 사건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었소."
나는 동의하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물론 특별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나는 아서 제이컵스와 30년 동안 이야기를 나누어 온 사이요. 사실 그곳 변호사들을 많
이 알고 있소. 훌륭한 변호사들이지."
사실이 그랬다. 드레이크 & 스위니는 최고를 고용하여 훈련을 잘 시켰다. 그러나 나를 담
당한 판사가 피해자들을 그렇게 칭찬하자 마음이 불안해졌다.
"변호사 사무실에서 처리 증인파일을 훔친다는 것은 돈이라는 관점에서 평가하기는 어려
울지도 모르오. 그건 그냥 종이일 뿐이고, 그 변호사 외에는 누구에게도 가치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오. 어쨌든 그걸 거리에 내다 팔 때는 아무런 가치가 없을 것이오. 나는 당신이 파일
을 훔친 걸 비난하는 게 아니오. 이해하겠소?"
"네. 이해합니다."
이해하는지 못하는지 나 자신도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나는 판사가 말을 계속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당신이 그 파일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리고 당신이 그 파일을 그 회사에서
가져갔다고 가정해 봅시다. 만일 당신이 내 감독하에 지금 그것을 돌려 준다면, 나는 거기에
백 달러도 안 되는 가치를 부여하고 싶소. 물론 그것을 훔친 것은 못된 짓이지만,, 그것은
약간의 서류 작업을 통해 덮어 둘 수도 있는 일이오. 물론 당신은 그 파일에서 얻은 정보를
이용하지 않는다는 데 동의해야 하고."
"만일 내가 그것을 돌려주지 않는다면요? 물론 이것 역시 가정입니다만."
"그렇다면 그 파일은 가치가 훨씬 높아지게 되오. 중절도라는 혐의가 붙게 되고, 우리는
그 혐의에 따라 재판을 해야 하오. 검사가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고, 배심이 당신이 유죄라고
생각하면, 나는 형을 선고해야 하오."
그의 이마의 주름, 그의 흔들리지 않는 눈길, 그의 목소리는 그가 선고하는 형량이 피하고
싶어할 만한 것이라는 데 의심의 여지를 남기지 않았다.
키스너가 말을 이었다.
"게다가 배심이 중죄 혐의를 인정하면, 당신은 변호사 면허를 잃게 될 거요/"
"네, 판사님."
나는 야단맞은 학생처럼 고분고분 대답했다.
모디카이는 뒤로 물러앉아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하나도 빼놓지 않고 머리 속에 담아
두고 있었다. 키스너가 말을 이었다.
"내가 맡은 다른 대부분의 사건들과는 달리, 이 경우에는 시간이 중요하오. 그 파일의 내
용에 근거하여 민사 소송이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오. 그것을 증거로 받아들이느냐 마느
냐 하는 것은 다른 법정의 다른 판사가 결정할 일이오. 그러나 나는 민사 소송이 너무 많이
진행되기 전에 형사적인 문제를 매듭짓고 싶소. 역시 당신이 파일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
고 하는 말이오."
모디카이가 물었다.
"얼마나 빨리 하실 겁니까?"
"두 주면 당신들이 결정을 내리는 데 충분하다고 생각하오."
우리는 두 주면 괜찮다고 합의했다. 모디카이와 나는 법정으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아무
일 없이 한 시간이 흘렀다.
『워싱턴 포스트』의 팀 클로슨은 변호사들이 몰려올 때 함께 들어왔다. 그는 우리가 법
정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다가오지는 않았다. 모디카이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결국 그를 구석으로 데려갔다. 모디카이는 법정에 드레이크 & 스위니에서 나온 변호사가
둘 있는데, 아마 그들이 신문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귀띔해 주었다.
클로슨은 곧장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래프터가 시간을 죽이고 있던 뒤쪽 벤치에서 목소리
들이 들렸다. 우리는 법정 밖으로 나왔는데, 밖에서 그들이 말다툼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키스너 앞에 출두한 시간은 예상대로 길지 않았다. 나는 무죄를 주장했고, 이어 어떤 양식
에 서명을 하고 서둘러 나왔다. 래프터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가기 전에 키스너와 무슨 이야기를 했습니까?"
나는 차에 타자마자 물었다.
"당신한테 한 이야기와 같은 이야기를 들었소."
"고집장이더군요."
"그는 좋은 판사요. 하지만 오랫동안 변호사 생활을 했소. 형사 사건 담당이었지. 최고였
소. 그는 다른 변호사의 파일을 훔치는 변호사에게는 동정심이 없소."
"나에게 유죄 평결이 떨어지면 몇 년을 받게 되죠?"
"말해 주지 않았소. 하지만 살 만큼 살아야 할 거요."
우리는 빨간불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히도 내가 운전을 하고 있었다.
"좋습니다, 변호사님. 이제 어떻게 할까요?"
"우리한테는 두 주의 여유가 있소. 천천히 생각해 봅시다. 아직 결정을 내릴 때가 아니
오."
33
조간 『워싱턴 포스트』에는 두 개의 기사가 실렸는데, 모두 눈에 띄는 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고, 사진이 딸려 있었다.
첫 번째 기사는 전날 약속되었던 것이었다. 론다 버튼의 비극적 삶에 대한 긴 기사였다.
기자는 두 이모, 전에 그녀를 고용했던 사람, 사회사업가, 그녀를 가르쳤던 교사, 감옥에 있
는 그녀의 어머니와 두 남자 형제 등을 접촉했지만, 주된 취재원은 그녀의 할머니였다. 『워
싱턴 포스트』는 그 전형적인 호전성과 무제한의 예산 덕분에 우리 소송에 필요한 사실들을
집대성해 놓는 뛰어난 작업을 해 놓았다.
론타의 어머니는 열여섯 살 때 론타를 낳았는데, 론타는 셋 가운데 둘째였다. 모두 사생아
였고, 모두 아버지가 달랐다. 물론 론타의 어머니는 아버지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론타는 북동부의 거친 동네에서 성장하였으며, 불안정한 어머니와 함께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고, 정기적으로 할머니와 이모들과 함께 살기도 하였다. 어머니는 감옥에 들락거
렸으며, 론타는 6학년을 마친뒤에 학교를 그만두었다. 예측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때부터
론타의 인생은 비참해지기 시작했다. 마약, 남자, 조직 폭력배, 작은 범죄, 거리에서의 위험
한 생활. 그녀는 최저 임금을 받는 곳에서 이런 저런 일을 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전혀 신뢰
할 수 없는 일꾼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시의 기록에도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열네 살 때는 상점에서 좀도둑질을 하다가 소
년 법정으로 보내졌다. 석 달 뒤에는 공공 장소에서 술에 취한 혐의로 다시 소년 법정으로
갔다. 일곱 달 뒤에 같은 혐의로 체포되었다. 열여섯 살 때는 매춘 혐의로 체포되어, 성인으
로 취급되어 유죄 평결을 받았으나 감옥에는 가지 않았다. 또 전당포에서 휴대용 CD 플레
이어를 훔쳐 중절도로 체포된 일이 있었는데, 이때도 유죄 평결을 받았으나 감옥에는 가지
않았다. 열여덟살 때는 워싱턴 종합병원에서 온타리오를 낳았는데, 출생 증명서에 아버지 이
름은 적혀 있지 않았다. 온타리오를 낳고 나서 두 달 뒤에 매춘 혐의로 체포되었는데, 이번
에도 유죄 평결을 받았으나 감옥에는 가지 않았다. 스무 살에는 역시 워싱턴 종합병원에서
알론소와 단테 두 쌍둥이를 낳았는데, 이번에도 역시 아버지 이름은 기록되지 않았다. 젖은
기저귀를 차고 있던 테메코는 론타가 스물한 살에 낳은 아기였다.
사망자의 이런 슬픈 약력 가운데도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보였다. 론타는 테메코를 낳은
뒤 우연히 '마리아의 집'을 알게 되어 그곳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곳은 나오미 센터처럼 낮
동안 여자들이 모이는 곳이었는데, 그곳에서 론타는 사회사업가인 넬 카서를 만났다. 기사에
서는 카서 여사의 말이 길게 인용되고 있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론타는 죽기 전 몇 달 동안 거리에서 벗어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
다. 센터에서 열리는 알콜 중독-마약 중독 모임에 참석했으며, 엄청난 용기를 가지고 중독
과 싸웠다. 물론 쉽지는 않았다. 그녀의 글 읽는 능력은 금방 향상되었다. 그래서 자신의 작
은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안정된 일자리를 얻기를 바라게 되었다.
결국 카서 여사는 커다란 식료품점에서 농산물의 포장을 푸는 일자리를 찾아 주었다. 시
간당 4달러 75센트를 받고 일 주일에 스무시간 일할 수 있는 자리였다. 론타는 한 번도 결
근하지 않았다.
지난 가을 어느 날 론타는 넬 카서에게, 비밀로 해야 하기는 하지만, 살 곳을 찾았다고 소
곤거렸다. 넬은 자신의 직업상의 관심 때문에 그녀의 집을 살펴보려 했지만, 론타가 거부했
다. 합법적인 게 아니에요. 론타가 설명했다. 방 두 개자리의 작은 불법 점거자 아파트인데,
그래도 지붕하고 잠글 수 있는 문은 있고, 근처에 목욕탕도 있어요. 한 달에 현찰으로 백 달
러씩 내요.
나는 마리아의 집에 넬 카서의 이름을 적으면서, 그녀가 증인석에 서서 배심에게 버튼의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떠올리며 웃음을 지었다.
론타는 자녀들을 빼앗기게 될까봐 겁을 먹게 되었다. 그런 일이 너무 자주 일어났기 때문
이다. 마리아의 집의 여성 노숙자들 대부분이 자녀를 빼앗겼으며, 론타는 그런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자기 가족을 지키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론타는 더 열심히 공
부하여, 심지어 컴퓨터의 기본적인 것도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한 번은 나흘이나 마약 없이
지내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퇴거를 당하게 되었다. 그녀의 얼마 안 되는 소지품은 자식들과 함께 길거리에
내던져졌다. 카서 여사는 다음날 그녀를 보았는데, 완전히 엉망이었다. 아이들은 굶주리고
더러웠다. 론타는 마약에 취해있었다. 마리아의 짐은 술에 취해 있거나 마약의 영향하에 있
는 사람은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는 방침을 가지고 있었다. 책임자는 론타에게 나가 달라고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카서 여사는 론타를 다시 보지 못했다. 신문에서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기 전에는 소식도 듣지 못했다.
나는 기사를 읽으면서 브레이든 챈스를 생각했다. 그도 이른 아침에 버지니아 교외에 있
는 따듯하고 좋은 집에서 이 기사를 읽어보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나
는 그가 일어나 있으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게 압박감이 심한 사람이 어떻게 제대로
잠을 잘 수 있겠는가?
나는 그가 고통을 겪기를 바랐다. 그가 다른 사람들의 권리와 존엄성을 그렇게 냉담하게
무시해 버림으로써 어떤 비극이 생겼는가를 깨닫기를 바랐다. 브레이든, 당신은 좋은 사무실
에 앉아 황금과 같은 시간을 아껴가며 일을 하고, 부유한 의뢰인들을 위해 서류를 넘기고,
지저분한 일을 시키러 보낸 사무직원의 보고서를 읽고, 결국 퇴거를 집행하라는 차갑고 계
산된 결정을 내렸다. 그것은 내리지 말았어야 할 결정이었다. 그들은 그저 불법 점거자들에
불과하다고 생각했겠지, 브레이든? 짐승처럼 살아가는 비천한 흑인 노숙자들이라고 생각했
겠지? 문서로 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겠지? 따라서 아무런 권리도 없다고 생각했
겠지? 내쫓아 버려. 그 사람들을 가지고 시간을 질질 끌다가는 프로젝트에 문제가 생길지도
몰라. 그렇게 말했겠지.
나는 그의 집으로 전화를 걸고 싶었다. 아침 커피를 마시다 깜짝 놀라게 하고 싶었다. '이
제 기분이 어떠신가, 브레이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두 번째 기사는 놀랍고도 유쾌한 것이었다. 적어도 법률적 관점에서는 그랬다. 그러나 그
것은 또한 골칫거리이기도 했다.
클로슨이 론타의 오래 전 남자 친구를 찾아 낸 것이다. 키토 스카이어스라는 이름의 열아
홉 살짜리 거리의 불량배였다. 법을 지키는 시민이라면 그의 사진을 보고 겁을 집어먹을 수
밖에 없을 것 같았다. 키토는 할말이 많았다. 그는 자신이 론타의 마지막 세 자녀의 아버지
라고 주장했다. 즉 쌍둥이와 갓난아기의 아버지라는 것이었다. 그는 지난 3년간 론타와 이따
금씩 함께 살다 말다 했는데, 살지 않았던 때가 살던 때보다 더 많았다.
키토는 전형적인 도심 슬럼가의 불량배였다. 고등학교 중퇴의 경력에 전과 기록을 가진
실업자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의 신뢰성은 언제나 문제가 될 수 있었다.
키토는 론타와 그녀의 자녀들과 함께 창고에 살았다. 가능할 때마다 집세를 내는 것도 도
와 주었다. 그러다 크리스마스가 지난 후에 싸움을 하고 그곳을 나왔다. 그는 지금은 남편이
감옥에 있는 여자와 살고 있었다.
그는 퇴거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퇴거 사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창고의 상태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는 자세한 것까지 이야기했다. 나는 그가 한 말을
보고, 그가 그곳에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가 묘사한 것은 헥터의 보
고서에 나온 것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키토는 틸먼 갠트리가 그 창고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조니라는 자가
매달 보름에 집세를 걷어 갔죠. 백 달러였습니다.
모디카이와 나는 그를 곧 찾아 낼 수 있었다. 우리의 증인 명단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키토 스파이어스는 우리의 스타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
키토는 그의 자녀와 그들 어머니의 죽음 때문에 몹시 슬퍼하고 있었다. 하지만 장례식에
는 참석하지 않은 것이 확실했다. 나는 장례식을 아주 주의 깊게 지켜보았는데, 키토의 모습
은 내 기억에 없었다.
우리의 소송은 기대 이상으로 언론의 조명을 받고 있었다. 우리는 피해보상금으로 천만
달러를 요구했다. 신문에 매일 나오고, 거리에서 매일 이야기가 되는 액수를 대충 써놓은 것
이었다. 그런데 론타는 수많은 남자들과 섹스를 했다. 그 가운데 키토가 첫 아버지 후보로
나타난 것이다. 걸린 돈이 많았기 때문에 곧 다른 아버지들도 나타나 죽은 자식들에 대한
사랑을 주장할 가능성이 높았다. 거리는 아버지 후보자들로 가득했다.
그것이 이 기사가 골칫거리가 되는 이유였다.
그러나 우리는 결국 키토와 이야기할 기회를 얻을 수가 없었다.
드레이크 & 스위니에 전화를 걸어 브레이든 챈스를 바꾸어 달라고 했다. 비서가 전화를
받길래 같은 이야기를 반복했다.
"실례지만 누구시죠?"
비서가 물었다.
나는 이름을 꾸며 대고 상담을 하고 싶어서 전화를 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리버오크스의
클레이튼 벤더에게 소개를 받았다고 이야기했다.
"챈스 씨는 전화를 받을 수 없는데요."
"그럼 언제 통화를 할 수 있소?"
나는 무뚝뚝하게 물었다.
"챈스 씨는 휴가중입니다."
"알겠소. 그럼 언제 돌아오는 거요?"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전화를 끊었다. 휴가는 한 달이 될 터이고, 그 다음에는 안식년이 될 터이고, 그 다
음에는 장기 휴가가 될 터이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가서 마침내 챈스를 해고했다는 사실
을 인정하겠지.
나는 챈스가 잘렸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고, 전화는 그것을 확인해 주었다.
지난 7년 동안 드래이크 & 스위니는 나의 인생이었기 때문에 나는 어렵지 않게 그 회사
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었다. 그들은 너무 자존심이 강하고 오만하여, 불명예스러운 일을 도
저히 참지 못했다.
아마 소송이 제기되자마자 그들은 브레이든 챈스에게서 진실을 알아냈을 것이다. 챈스가
자진해서 털어놓았는지, 아니면 회사에서 다그쳤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챈스는 그들
에게 처음부터 거짓말을 했으며, 그 바람에 이제 회사 전체가 소송을 당하게 된 것이다. 챈
스는 그들에게 헥터가 제출했던 원래의 보고서와 더불어 론타가 준 집세 영수증도 보여 주
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이미 그 문서들을 파기했고, 그 내용이 무엇인지 말로
설명했을 가능성이 더 높았다. 드레이크 & 스위니-구체적으로 아서 제이컵스와 집행위원회
-는 마침내 진실을 알게 되었다. 퇴거 조치는 없었어야 했다. 챈스는 리버오크스를 대리하
여, 세입자들에게 30일 전에 통보를 하고, 구두 임대 계약을 문서를 통해 해지했어야 했다.
그러나 30일을 연기하게 되면 리버오크스의 요금별납 우편물 시설 건설 프로젝트가 위태
로워질 수 있었다.
그러나 30일을 연기했다면 론타를 비롯한 다른 세입자들은 혹한기를 아파트에서 넘길 수
있었을 것이다.
챈스는 그의 파트너로서의 지분을 회사에 파는 관대한 조치를 통하여 회사를 나갔을 것이
다. 아마 회사에서는 헥터를 불러들여 설명을 들었을 것이다. 이제 챈스가 없었기 때문에 헥
터는 있었던 그대로 말하고, 또 아무런 해를 입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헥터는 나와의 관
련은 이야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집행위원회는 문을 걸어잠그고 현실을 직시하는 일에 돌입했을 것이다. 회사는 엄청나게
취약한 상태였다. 래프터와 그의 소송팀이 변호 계획을 짰을 것이다. 그들은 버튼 사건은 도
난당한 드레이크 & 스위니 파일에 들어 있는 내용에 기초한 것이라는 주장을 강하게 제기
할 생각이었을 것이다. 즉 훔친 자료를 법정에서 이용할 수 없다면, 소송도 기각되어야 한다
는 논리였다. 이것은 법적인 관점에서는 완벽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변론을 펼치기 전에 신문이 개입해 버렸다. 파일에서 감추려 하던 그 문제
에 대해 증언을 할 수 있는 증인들이 속속 나타나고 있었다. 우리는 챈스가 감춘 것에 관계
없이 우리 주장을 입증할 수 있었다.
드레이크 & 스위니는 혼란에 빠져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자기 의견을 입 밖에 내어 떠
들기 좋아하는 호전적인 변호사가 4백 명이나 있으니, 회사는 폭동 전야와 같은 분위기일
것이다. 내가 그 회사에 있다가 다른 부서에서 생긴 비슷한 추문을 알게 되었다면, 나 역시
빨리 문제를 해결하고 언론에서 구설수에 오르는 일을 피하라고 아우성을 쳤을 것이다. 문
을 꼭 닫아 잠그고 폭풍우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식의 해결책은 존재하지 않았다. 『워싱
턴 포스트 의 폭로는 앞으로 재판 과정에서 벌어질 작은 예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재판
은 일 년 뒤였다.
다른 쪽에도 취약점이 있었다. 파일에는 리버오크스가 불법 점거자듣에 대해 얼마나 알조
있었는지 나와 있지 않았다. 시실 챈스와 그의 의뢰인 사이에는 거의 교신이 없었다. 그러나
챈스는 가능란 빨리 거래를 종결지으라는 지침을 받았을 것이다. 리버오크스는 압력을 가했
고, 챈스는 불도저처럼 밀어붙인 것이다.
만일 리버오크스에서 퇴거가 불법이라는 것을 몰랐다고 한다면, 그들은 드레이크 & 스위
니가 법적 배임 행위를 했다고 주장하게 될 것이다. 리버오크스는 어떤 일을 해달라고 법률
회사를 고용했는데, 그 회사는 일을 서툴게 처리했고, 이런 실수는 의뢰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라는 논리였다. 리버오크스는 3억 5천만의 자산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만하면 드레이크
& 스위니에 잘못을 시정해 달라고 압력을 가할 만한 권력이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이 사건과 관계가 없는 다른 주요 의뢰인도 나름대로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도대체어떻
게 된 일이오?' 모든 파트너가 그들이 청구하는 돈을 지불하는 사람들로부터 그런 질문을
받게 될 터였다. 법인 관련 법률 세계는 무자비한 곳이기 때문에, 다른 회사들에서 온 콘도
르들이 드레이크 7 스위니의 머리 위를 선회하기 시작할 것이다.
드레이크 & 스위니는 자신의 이미지를 팔아서 먹고 사는 회사였다. 모든 법률 회사들이
다 그랬다. 어떤 회사도 드레이크 &스위니가 당하는 것과 같은 공격을 당하고서는 살아남
을 수 없었다.
버크홀더 의원은 멋진 선전 솜씨를 보여 주었다. 그는 수술 다음 날 신중하게 꾸민 무대
에서 기자들을 만났다. 그는 휠체어를 타고 병원 로비에서 임시로 만든 연단으로 나왔다. 그
는 예쁜 아내의 도움을 받고 일어서서 한 발 앞으로 나서더니 성명을 발표했다. 우연의 일
치인지 그는 인디애나 주민들을 상징하는 선홍색 스웨터셔츠를 입고 있었다. 목에는 반창고
가 붙어 있었고, 왼팔은 삼각건에 걸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건강하게 살아 있으며, 며칠이면 다시 의사당으로 돌아가 의무를 이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인디애나의 주민들에게 안부를 전했다.
그는 자기 인생에서 가장 멋진 순간을 맞이하여, 거리의 범죄와 대도시의 퇴락에 대해 연
설을 하였다. 그의 고향의 인구는 불과 8천 명이었다. 우리 나라의 수도가 이런 안타까운 상
태에 처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나는 아슬아슬하게 죽음을 벗어났기 때문에, 그 날
이후로 우리의 거리를 다시 안전하게 만드는 데 많은 힘을 쏟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에게
는 새로운 목적이 생긴 것입니다.
그는 총기를 규제하고 감옥을 더 만들어야 한다는 등등의 이야기를 계속 주절거렸다.
버크홀더가 총에 맞음으로써 워싱턴 경찰은 거리를 청소해야 한다는, 일시적이기는 하지
만 엄청난 압력을 받게 되었다. 상원의원과 하원의원들은 하루 종일 시도 때도 없이 워싱턴
도심의 위험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그 결과 어두워진 뒤부터 다시 싹쓸이가 시작되었다. 의
사당 근처의 모든 주정뱅이, 알콜 중독자, 거지, 노숙자들은 먼 곳으로 밀려났다. 일부는 체
포되기도 했다, 일부는 경찰차에 실려갔다.
오후 11시 40분, 경찰이 북동부 로드아일랜드 애비뉴 근처의4번가에 있는 주류 판매소에
들이닥쳤다. 가게 주인은 총소리를 들었으며, 보도를 걷던 동네 사람은 어떤 사람이 쓰러지
는 것을 보았다고 신고했다.
경찰은 주류 판매소 옆의 빈터, 잡석과 부서진 벽돌 더미 뒤에서 젊은 흑인 남자의 시체
를 발견했다. 금방 죽은 시체였다. 머리에 총알 두 발을 맞았다.
나중에 그 남자는 키토 스파이어스로 밝혀졌다.
34
월요일 아침에 다시 나타난 루비는 쿠키와 뉴스에 대한 강한 욕구를 드러냈다. 내가 평소
보다 약간 늦게 8시쯤 출근했을 때, 문간에서 기다리고 있던 루비는 웃음을 지으며 따뜻하
게 인사를 했다. 갠트리가 설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나는 어둠을 피해 사람들의 왕래가 많
을 때 사무실에 출근하고 있었다.
루비는 똑같아 보였다.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면 마약 잔치의 흔적이 남아 있을 것 같았지
만, 사실 특이한 것은 없었다. 우리는 함께 사무실로 들어가 루비의 책상에 자리를 잡았다.
상담소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이 나로서는 약간 안심이 되는 일이었다.
"어떻게 지냈습니까?"
"잘 지냈어요."
루비가 쿠키 봉투로 손을 집어넣으며 대답했다. 쿠키 봉투는 세 개가 있었다. 모두 지난주
에 그녀를 위해 산 것이었다. 모디카이가 좀 집어먹기는 했지만.
"지금은 어디에 묵고 있습니까?"
"내 차에요."
달리 어이겠는가? 루비가 말을 이었다.
"겨울이 다 가서 기분이 좋아요."
"나도 그렇습니다. 나오미 센터에는 갔었나요?"
"아뇨. 하지만 오늘 갈 거에요. 그 동안 몸이 별로 안 좋았어요."
"내가 태워다 드리죠."
"고마워요."
대화는 약간 어색했다. 그녀는 내가 모텔 건에 대해 물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물론
나도 그러고 싶었으나, 그러지 않는 쪽이 낫다고 판단했다.
커피가 준비되자, 나는 두 잔을 따라 책상 위에 놓았다. 루비는 쿠키 세 개째를 먹고 있었
다. 쉴 틈 없이 쥐처럼 가장자리를 갉아먹고 있었다.
이렇게 애처로운 사람을 어떻게 가혹하게 대할 수 있단 말인가? 신문이나 읽자.
"신문이나 읽을까요?"
내가 물었다.
"좋아요."
1면에는 시장의 사진이 있었다. 루비는 늘 시의 정치와 관련된 기사를 좋아하였고, 또 시
장은 뭔가 특색 있는 일을 하는 재주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 기사를 먼저 골랐다. 토요일
의 인터뷰 내용이었다. 시장과 시의회는 일시적인 불안한 동맹을 형성하여 법무부에 론타
버튼과 그녀의 가족의 죽음에 대해 조사해 달라고 요청했다. 시민권 침해는 없었는가? 시장
자신은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을 강력하게 암시했으나, 법무부를 불러들이다니!
우리의 소송이 중심 무대를 차지하면서 론타의 비극에 책임을 져야하는 새로운 범죄자 집
단이 떠오르고 있었다. 시청을 향한 손가락질은 상당히 줄어들고 있었다. 의회에 대한 비난
과 의회로부터의 비난도 중단되었다. 초기에 뜨거운 비난의 대상이 되었던 사람들이 이제
정력적으로 또 기쁜 마음으로 대형 법률 회사와 그 부유한 의뢰인들에게로 비난의 화살을
돌리고 있었다.
루비는 관련 기사에 매혹되었다. 나는 소송과 소송이 제기된 이후의 경과에 대해 간략하
게 요약해 주었다.
드레이크 & 스위니는 다시 신문에 두들겨맞고 있었다. 그곳의 변호사들은 '이 일이 도대
체 언제 끝날까?' 하고 자문하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물론 빨리 끝날 일은 아니었다.
1면의 하단 구석에는 체신부가 워싱턴 북동부의 요금별납 우편물 시설 관련 프로젝트를
중단한다는 결정을 내렸다는 내용의 짧은 기사가 실려 있었다. 부지와 창고 매입을 둘러싼
논란, 리버오크스와 갠트리가 관련된 소송 등이 모두 그 결정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리버오크스는 2천만 달러짜리 프로젝트를 놓쳤다. 따라서 쓸모 없는 도심의 부동산을 현
금으로 거의 백만 달러를 주고 매입한 셈이 되었다. 이제 그들은 호전적인 부동산 개발업자
답게 대응을 할 터였다. 변호사들을 족칠 것이 틀림없었다.
긴장감이 더 고조되고 있었다.
우리는 해외 뉴스를 훑어보았다. 루비는 페루의 지진 소식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우리
는 그 기사를 읽었다. 메트로 면으로 넘어 갔을 때, 눈에 뛴 첫 기사 때문에 나는 심장이 멎
을 뻔했다. 키토 스파이어스의 전에 실렸던 것과 똑같은 사진ㅡ물론 크기는 두 배로 커졌고
훨씬 더 위협적으로 보이기는 했지만ㅡ 아래 키토 스파이어스 사망이라는 기사 제목이 적혀
있었다. 그 기사는 스파이어스와 버튼의 관련에 대한 금요일 기사 내용울 되풀이했을 뿐, 그
의 죽음의 자세한 내용은 전해 주지 못했다. 목격자도 없고, 실마리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는 이야기뿐이었다. 따라서 워싱턴에서 흔히 일어나는 살인 사건처럼 보일 뿐이었다.
"괜찮아요?"
루비가 묻는 바람에 나는 정신을 차렸다.
"어, 네."
나는 다시 호흡을 가다듬으려고 애를 썼다.
"왜 안 읽는 거죠?"
너무 놀라서 소리를 내어 읽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혹시 틸먼 갠트리의 이름이 언급되
었나 보려고 얼른 눈으로 기사를 훑어보았다. 없었다.
왜 없을까? 나에게는 뻔한 일로 보이는데. 스파이어스는 조명을 받는 순간을 만끽하는 가
운데 너무 많은 이야기를 했고, 그 바람에 원고들(우리!)에게 너무 귀중한 존재가 되어 버렸
으며, 결국 갠트리의 쉬운 목표물이 되고 만 것이다.
나는 그 기사를 천천히 읽어 주었다. 동시에 주위에서 나는 모든 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현관문을 유심히 살폈다. 어서 모디카이가 와주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갠트리가 의사 표시를 한 것이다. 거리 출신의 다른 증인들도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으라
는 경고였다. 그러나 갠트리가 증인을 죽이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면? 만일 갠트리가 변호사
들도 가만히 놔주지 않는다면 나는 어찌할 것인가?
공포의 한가운데서 나는 갑자기 그 기사가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면도 있다는 것을 깨달
았다. 우리는 잠재적으로 중요한 증인을 잃었다. 그러나 재판 과정에서 키토의 신뢰성은 문
제가 되었을 것이다. 그날 아침의 세 번째 기사에서 드레이크 & 스위니는 이 열아홉살짜리
의 살인과 관련하여 다시 언급되었다. 그 회사의 자랑스러운 이름이 살해당한 동네 깡패와
같은 기사에서 언급되었으니, 그들은 이제 고고한 자리에서 시궁창으로 떨어져 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한 달 전으로 돌아가 보았다. 형씨가 드레이크 & 스위니에 들이닥치기 이전으로. 내
가 동이 트기 전에 책상에 앉아 그 신문을 읽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다른 기사들도 읽어
보고, 소장의 핵심적인 주장들이 실제로 사실이라는 것을 알았을 경우를 상상해 보았다. 나
라면 어떻게 했을까?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내 감독 파트너인 루돌프 메이스에게 난리를 쳤을 것이다. 루돌프
역시 집행위원회에서 난리를 쳤을 것이다. 나는 내 또래들, 즉 회사의 다른 고참 어소시에이
트들과 만났을 것이다. 우리는 더 큰 피해를 입기 전에 어서 이 문제를 정리할 것을 요구했
을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재판은 피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우리는 온갖 요구를 했을 것이다.
나는 현재 고참 어소시에이트 대부분과 모든 파트너들이 내가 했을 일과 똑같은 일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복도가 그렇게 시끄러우니 일도 제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시간당
비용 청구도 거의 못할 것이다. 회사는 혼란에 빠져 있는 셈이었다.
"계속 읽어 주세요."
루비가 말하는 바람에 나는 다시 백일몽에서 깨어났다.
우리는 메트로 면을 훑어나갔다. 혹시 네 번째 기사가 있는지 알고 싶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런 행운은 없었다. 그러나 버크홀더의 피격 사건에 대응하여 경찰이 거리를 청소하고 있
다는 기사는 있었다. 노숙자들의 옹호자는 이 작전을 신랄하게 비판했으며, 소송을 하겠다고
위협하고 있었다. 루비는 그 기사가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노숙자들에 대해 그렇게 많은
기사가 나오는 것이 멋진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루비를 나오미 센터까지 데려다 주었다. 루비는 오랜 친구처럼 환영을 받았다. 여자
들은 그녀를 끌어안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넘겼다. 그녀의 몸을 부둥켜안고 우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주방에서 미건과 잠시 시시덕거렸으나, 내 마음은 로맨스에 가 있지 않았다.
사무실로 돌아갔을 때 그곳은 소피아의 손님들로 만원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
다. 9시가 되었을 때 벽 쪼게는 다섯 명의 의뢰인이 앉아 있었다. 소피아는 전화에 대고 스
페인어로 누군가를 협박하고 있었다. 나는 모디카이가 아침 신문을 보았는지 확인해 보기
위해 그의 방에 들어가 보았다. 모디카이는 웃음을 지으며 신문을 읽고 있었다. 우리는 한
시간 뒤에 만나 소송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약속했다.
나는 조용히 내 사무실 문을 닫고, 파일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두 주 동안 91개의 파일이
생겼는데, 그 가운데 38개는 종결을 지었다. 일이 많이 늦어지고 있었다. 계획을 따라잡으려
면 아침 내내 전화통을 붙잡고 열심히 일을 해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
소피아가 문을 두드렸다. 문에는 자물쇠가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문을 두드리는 동시에
열고 들어왔다. 인사도 없었다. 실례한다는 말도 없었다.
"창고에서 퇴거당한 사람들의 명단이 어디 있죠?"
소피아가 물었다. 그녀는 양쪽 귀에 연필을 하나씩 꽂고, 코끝에 돋보기를 걸고 있었다.
늘 할 일이 많은 여자였다.
명단은 늘 내 근처에 있었다. 내가 명단을 건네 주자, 소피아는 얼른 훑어보더니 말했다.
"그럴 줄 알았어."
"뭐가?"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8번, 마키스 디스. 어쩐지 귀에 익다 했지."
"귀에 익다고요?"
"그래요, 이 사람이 지금 내 책상 앞에 앉아 있어요. 어젯밤에 백악관 건너편의 라파예트
공원에서 붙들려가, 로건 서클에 버려졌죠. 싹쓸이에 걸린 거에요. 당신 오늘 운이 좋군요."
나는 그녀를 따라 앞 사무실로 갔다. 한가운데 있는 그녀의 책상 옆에 디스가 앉아 있었
다. 드본 하디와 매우 비슷해 보였다. 사십대 후반, 흰 머리와 턱수염, 짙은 색안경, 3월초의
대부분의 노숙자들과 마찬가지로 겹겹히 끼어 입은 옷. 나는 멀리서 그의 모습을 살핀 뒤,
소식을 전하러 모디카이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디스에게 다가갔다. 모디카이가 심문을 맡았다.
"실례하오."
모디카이는 아주 정중하게 말을 이었다.
"여기서 일하는 변호사 모디카이 그린이라고 하오. 몇 가지 물어봐도 되겠소?"
우리 둘 다 서서 디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디스는 고개를 들더니 대답했다.
"그러시든가."
"우리는 플로리다 애비뉴와 뉴욕 애비뉴가 만나는 모퉁이에 있던 창고에서 살던 사람들과
관련된 사건을 조사하고 있소."
모디카이가 천천히 말했다.
"내가 거기 살았소."
나는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거기 살았다고요?"
"그래요. 쫓겨났지만."
"그래요, 그래서 우리가 조사를 하는 거요. 우리는 거기서 쫓겨난 사람 몇 명을 대리하고
있소. 우리는 그 퇴거 조치가 부당하다고 생각하고 있소."
"말은 제대로 하시는군."
"거기 얼마나 살았지요?"
"석 달쯤."
"집세는 냈소?"
"내고 말고."
"누구한테?"
"조니라는 자한테."
"얼마나?"
"매달 백달러씩. 현금으로."
"왜 현금으로 낸 거요?"
"그쪽에서 기록이 남는 걸 바라지 않았거든."
"그 창고가 누구 소유였는지 알고 있소?"
"아뇨."
디스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나는 기쁨을 감추기가 힘들었다. 그 건물이 갠트리 소유라
는 것을 모르니 겁을 내지도 않을 수밖에.
모디카이는 의자를 끌어당겨, 진지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당신을 의뢰인으로 삼고 싶소."
"뭐 하러?"
"그 퇴거 조치 건으로 어떤 사람들에게 소송을 걸고 있소. 당신들을 거기서 쫓아낸 것은
부당한 행위였다는 것이 우리의 입장이오. 우리는 당신을 대리해서 소송을 걸고 싶소."
"하지만 그 아파트는 불법이었소. 그래서 현금으로 세를 낸 거요."
"상관없소. 우리가 돈을 받아 줄 수 있을 거요."
"얼마나?"
"아직은 모르겠소. 우리 의뢰인이 된다 해서 당신이 잃을 게 뭐요?"
"아무것도 없는 것 같군."
나는 모디카이의 어깨를 두드렸다. 우리는 실례한다고 하고, 모디카이의 사무실로 들어갔
다.
"뭐요?"
모디카이가 물었다.
"키토 스파이어스에게 일어난 일을 보면, 그의 증언을 녹음해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
다. 지금이요."
모디카이는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나쁜 생각은 아니오. 선서 진술서를 받읍시다. 디스가 거기에 서명을 하고, 소피아가 그
것을 공증하는 거요. 혹시 디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우리는 그것을 증거로 채택해 달라고
싸울 수 있소."
"녹음기는 있습니까?"
모디카이가 사방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래, 어딘가에."
그가 녹음기를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면, 그것을 찾는 데는 한 달 이상이 걸릴지도 몰랐다.
"비디오 카메라는 있습니까?"
"여기에는 없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가서 내 걸 가져오겠습니다. 소피아와 함께 디스가 어디 못 가도록 해주세요."
"그는 아무 데도 안 갈 거요."
"좋습니다. 45분 뒤에 돌아오죠."
나는 사무실을 달려나가, 서쪽 조지타운 쪽으로 빠르게 차를 몰았다. 휴대 전화로 세 번째
전화를 했을 때 수업 중간에 쉬고 있던 클레어와 통화가 되었다.
"무슨 일이야?"
클레어가 물었다.
"비디오 카메라 좀 빌려야겠어. 급해."
"그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
클레어는 아주 천천히 말하면서 상황을 분석하고 있었다. 클레어가 말을 이었다.
"왜?"
"선거 진술 때문이야. 좀 써도 될까?"
"괜찮겠지."
"거실에 그대로 있다는 거지?"
"응."
"현관 자물쇠는 바꿨어?"
"아니."
어떤 이유에선지 그 대답에 나는 기분이 좋았다. 나도 아직 열쇠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원하는 대로 들락거릴 수 있었다.
"경보 장치 암호는?"
"안 바꿨어. 그대로야."
"고마워 나중에 전화할게."
우리는 가구는 없고 파일 캐비닛만 가득한 빈 사무실로 마키스 디스를 데려갔다. 디스는
의자에 앉았다. 뒤는 텅 빈 흰 벽이었다. 내가 비디오 기사였고, 소피아가 공증인이었고, 모
디카이가 심문자였다. 디스의 답변은 완벽했다.
우리는 30분 만에 일을 끝냈다. 가능한 모든 질문을 하고 답을 들었다. 디스는 다른 퇴거
자 두 명이 어디 묵는지 안다면서, 그들을 찾아 주겠다고 약속했다.
찾아 내는 퇴거자마다 따로 소송을 제기한다는 것이 우리의 계획이었다. 한 번에 한 사람
씩 소송을 제기하면서 『워싱턴 포스트』의 우리 친구들에게도 충분한 정보를 제공할 생각
이었다. 우리는 켈빈램이 창조적 비폭력을 위한 공동체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찾아 낼 수 있는 퇴거자는 그와 디스만이 아니었다. 물론 그들의 사건이 큰 돈이 되
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의 소송을 제기함으로서 이미 포위 상태에 있는 피고들에게
더 큰 부담을 줄 수 있었다.
경찰이 다시 거리를 싹쓸이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 정도였다.
디스가 떠날 때 모디카이는 다른 데 가서 소송에 대해서 말을 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
다. 나는 소피아 근처의 책상에 앉아 우리의 새로운 의뢰인인 마키스 디스를 대리하여 세
쪽짜리 소장을 작성했다. 피고는 똑같이 세 명이었으며, 역시 부당한 퇴거 건에 대한 것이었
다. 이어 캘빈 램의 소장도 작성했다. 이어 이 소장들을 컴퓨터에 저장하였다. 원고를 더 발
견하면, 이제 같은 소장에 이름만 바꾸어 넣으면 될 터였다.
정오 몇 분 전에 전화벨이 울렸다. 소피아가 다른 전화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전화
를 받고 평소처럼 말했다.
"법률 상담소입니다."
위엄 있는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드레이크 & 스위니의 변호사 아서 제이컵스요. 모디카이 그린씨와 통화를 하고 싶소."
"그러시죠."
나는 그 말밖에 못하고, 얼른 대기 단추를 눌렀다. 나는 전화기를 응시하며 천천히 자리에
서 일어서서 모디카이의 사무실로 갔다.
"무슨 일이오?"
모디카이는 미합중국 법전에 코를 박고 있었다.
"아서 제이컵스가 전화를 했는데요."
"그 사람이 누구요?"
"드레이크 & 스위니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응시하였다. 모디카이가 웃음을 지었다.
"기다리던 전화로군."
모디카이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디카이는 전화기로 손을 뻗었고, 나는 자리에 앉았다.
짧은 대화였다. 주로 아서가 말을 했다. 만나서 소송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다, 빠르
면 빠를수록 좋다. 그런 이야기인 것 같았다.
전화를 끊은 뒤 모디카이가 대화 내용을 전해 주었다.
"내일 만나서 소송 합의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군,"
"어디서요?"
"그 회사에서. 아침 10시에. 당신 없이."
나도 초대받을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걱정을 하는 것 같던가요?"
내가 물었다.
"당연히 걱정 하고말고. 아직 재판까지 20일이나 남았는데 벌써 합의 때문에 전화를 하지
않았소. 엄청나게 걱정하고 있는 거지."
35
나는 다음날 오전에 구원자 선교단으로 가서, 마치 오랜 세월 노숙자들의 법적 문제들을 처리
해 온 사람처럼 능숙한 솜씨로 의뢰인들에게 자문을 해주었다. 그러다 결국 유혹을 못 이기고 11
시 15분에 소피아에게 전화를 하여 모디카이로부터 연락이 왔냐고 물었다. 소피아는 안 왔다고
했다. 우리는 드레이크 & 스위니와의 회의가 길어질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혹
시 모디카이가 모든 게 잘되어 간다고 보고를 하기 위하여 전화를 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행운은 없었다.
전날 밤에도 역시 잠을 많이 자지 못했다. 물론 이것은 신체적인 병이나 불편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뜨거운 물에 오랫동안 목욕을 하고 포도주를 한 병 비웠음에도, 합의에 대한 불안은 사
라지지 않았다.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의뢰인들과 상담을 하면서도 식량 배급표, 주택 지원금, 비행을 저지르는 아버지 등의 문제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내 인생의 다른 전선에서 아슬아슬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점
심 식사가 준비되었을 때 나는 그곳을 나왔다. 그들에게는 일용할 양식이 나의 존재보다 훨씬 중
요했기 때문이다. 나는 베이글 두 개와 물 한 병을 사 들고 한 시간 동안 순환도로를 타고 돌아
다녔다.
상담소로 돌아왔을 때 모디카이의 차는 건물 옆에 주차해 있었다. 모디카이는 그의 사무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모디카이는 8층에 있는 아서 제이컵스의 개인 회의실에서 그를 만났다. 그곳은 내가 가본적도
없는 성역이었다. 모디카이는 안내원과 직원들로부터 내빈 대접을 받았다. 안내원이 얼른 그의 코
트를 받아 주었고, 알맞게 커피를 타 주었고, 신선한 머핀을 제공하였다.
모디카이는 탁자 한쪽에 앉아, 도널드 래프터, 배임행위 보험과 관련된 보험사 쪽 대표, 리버오
크스 변호사를 만났다. 틸먼 갠트리에게도 변호사가 있었으나, 그쪽은 초대받지 못했다. 설사 합
의가 이루어진다 해도, 갠트리가 한 푼이라도 낼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리버오크스의 변호사가 참석한 것이 이상하다면 이상한 일이었으나, 이것도 말이 되지 않는 것
은 아니었다. 리버오크스의 이해관계가 드레이크 & 스위니의 이해관계와 충돌하고 있었기 때문이
다. 모디카이는 분명한 반감을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탁자 반대편에서는 주로 아서가 이야기를 했다. 모디카이는 그 사람이 여든 살이라는 것을 믿
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는 사실들을 암기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금방 기억해 냈다. 오랜 시
간 일을 할 능력을 갖춘 맹 예리한 정신이 쟁점들을 치밀하게 분석하고 있었다.
우선 그들은 회의에서 말하고 본 것은 엄격히 비밀로 하자는 데 합의하였다. 설사 그 자리에서
책임을 인정한다 해도 다음날이면 부정해 버릴 수도 있었다. 합의 제안이 있다 해도 문서에 서명
되기 전에는 법적 구속력이 없었다.
아서는 피고들, 특히 드레이크 & 스위니와 리버오크스가 기습 소송을 당했다는 말부터 했다.
"우리는 놀랐고 현기증을 느꼈소. 우리는 수모에 익숙지 않고, 지금 언론에서 가하고 있는 매질
에도 익숙지 않소."
아서는 그가 사랑하는 회사가 받고 있는 고통에 대해 매우 솔직하게 말했다. 모디카이는 그냥
듣기만 했다. 사실 회의 내내 그는 거의 듣는 일만 했다.
아서는 이 사건에는 여러 가지 쟁점들이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우선 브레이든 챈스 이야기
부터 하면서, 그를 회사에서 쫓아냈다는 사실을 밝혔다. 사표를 낸 게 아니라 해고해 버렸소. 아
서는 챈스의 부당 행위에 대해 솔직하게 말했다.
"챈스가 리버오크사의 모든 일을 담당하고 있었소. 그는 태그와의 거래의 모든 측면을 알고 있
었고, 모든 세부사항을 감독했소. 그는 퇴거 조치를 진행시키자고 했는데, 그것은 배임행위를 자
행한 것일 수도 있소."
"지금 '것일 수도 있다'고 했습니까?"
모디카이가 물었다.
"글쎄, 뭐 좋소, '것일 수도 있다'의 수준을 넘어선다고 할 수 있겠지. 챈스는 퇴거를 진행시킴으
로서 필요한 수준의 전문적인 책임을 감당하지 못했소. 그리고 파일을 위조했소. 그리고 자신의
행동을 감추려 했소. 그는 거짓말을 했소. 간단한 거요."
아서는 매우 불편해하며 그런 사실들을 인정하고는 말을 이었다.
"만일 챈스가 인질극 뒤에 사실대로 말했다면, 우리 회사는 소송과 그로 인한 언론의 포화를
막을 수 있었을 거요. 챈스는 우리를 몹시 수치스럽게 했고, 그 결과 회사에서 쫓겨났소."
"그가 어떻게 파일을 위조했습니까?"
모디카이가 물었다.
탁자 맞은편에 앉은 사람들은 모디카이가 파일을 보았는지 알고 싶어했다. 그 염병할 것이 어
디에 있는가? 그러나 모디카이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1월 27일자 헥터 팔머의 보고서를 보았습니까?"
모디카이가 물었고, 순간 그들의 표정은 굳었다.
"못 보았소."
아서가 대답을 했다.
그러니까 챈스는 그 보고서를 론타의 영수증과 함께 문서 분쇄기에 넣어 버린 것이다. 모디카
이는 아주 극적인 동작으로 그 순간을 철저히 즐기면서 가방에서 보고서와 영수증 사본 몇 장을
꺼냈다. 그는 위엄 있는 동작으로 그 사본들을 건너편으로 밀었으며, 변호사들은 굳은 동작으로
사본들을 낚아챘다. 그들은 공포에 젖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보고서를 읽는 동안 긴 정적이 흘렀다. 그들은 내용을 검토하고, 다시 읽고, 마침내 빠져나갈
구멍과 문맥에서 떼어내 자신들에게 편리하게 왜곡할 말들이 없는지 필사적으로 분석하기 시작했
다. 그러나 아무것도 찾아 내지 못했다. 헥터의 말은 아주 분명했다. 그의 이야기는 대부분이 묘
사였다.
"이게 어디서 났는지 물어봐도 되겠소?"
아서가 정중하게 물었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지금은."
그들은 이미 그 보고서 때문에 어지간히 속을 태운 것이 분명했다. 챈스는 회사를 나가면서 그
내용을 설명했고, 원본을 없애 버렸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런데 이 사본이 어디서 나왔단 말인가?
그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사본을 들고 내용을 살폈다.
그러나 그들은 노련한 소송 변호사들이었기 때문에 훌륭하게 대처했다. 그들은 내가 파일을 가
져가던 날 밤 챈스의 사무실에서 나를 본 증인을 확보하고 있었다. 지문도 있었다. 내가 챈스에게
리버오크스한테 그 파일을 보여 달라고 한 일도 있다. 동시도 있다.
모디카이가 말했다.
"하지만 결정적인 증인이 없지 않습니까. 그것들은 모두 정황적인 것들입니다."
아서가 물었다.
'파일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소?"
"모릅니다."
"우리는 마이클 브록을 감옥으로 보내는 데는 관심이 없소."
"그런데 왜 형사 고발을 한 겁니까?"
"자, 모든 이야기가 다 나왔소, 그린 씨. 소송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형사 고발 문제도 처리
할 수 있소."
"그거 좋은 소식이군요. 어떻게 소송을 해결하자는 말입니까?"
래프터가 열 쪽 짜리 자료를 넘겨 주었다. 칼라로 된 그래프와 차트가 가득했다. 그 모든 것이
불법으로 인한 사망과 관련된 소송에서 어린아이와 젊고 교육받지 못한 어머니는 큰 가치를 지니
지 못한다는 주장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었다.
드레이크 & 스위니의 부하 직원들은 대형 법률 회사 특유의 철저함으로 불법 행위 보상에 대
한 최근의 경향을 알아보기 위해 전국의 자료를 수집하느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일 년간의 경향. 오 년간의 경향. 십 년간의 경향. 지역별 경향. 주별 경향. 도시별 경향.
미취학 아동의 죽음에 배심들이 얼마나 주었는가? 별로 많이 주지 않았다. 전국 평균은 4만 5천
이었지만, 남부와 중서부는 그것보다 훨씬 낮았고, 캘리포니아와 대도시는 그것보다 훨씬 낮았고,
캘리포니아와 대도시는 그것보다 약간 높았다.
미취학 아동들은 일을 하지 않고, 돈을 벌지 않는다. 따라서 법정은 일반적으로 그들이 미래에
존을 벌 능력에 대해 예측하는 것을 어용하지 않는다.
래프터의 자료에서 론타가 잃은 소득에 대한 추정치는 매우 관대했다. 실제로는 간헐적으로 취
업 상태를 유지했음에도, 매우 많이 쳐준 셈이었다. 그녀는 스물두 살이었다. 자료에서는 그녀가
빠른 시일 내에 최저 임금 상근직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가정했다. 그만하면 관대한 가정이었
다. 그러나 래프터는 그 정도는 얼마든지 인정해 줄 수 있었다. 또 그녀가 평생 일을 하면서 마약
중독이나 알콜 중독에 빠지지 않고, 임신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가정하였다. 이 역시 자비로운 가
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일을 하다 어딘가에서 훈련을 받아, 최저 임금의 두 배를 주는 일자리로
옮길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 일자리를 예순다섯 살까지 유지할 수 있었다. 인플레이션을 감안하
여 그녀의 미래의 수입을 계산하고, 그것을 현재의 달러 가치로 환산했을 때, 래프터는 론타가 죽
음으로써 벌지 못하게 된 돈이 총 57만 달러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또 사망자들이 부상이나 화상을 입지 않았고, 고통도 느끼지 않았다. 그들은 자다가 죽었다.
드레이크 & 스위니는 이 사건의 합의를 보기 위해, 어떤 불법 행위도 인정하지 않았으며, 아이
한 명 당 5만 달러를 주고, 거기에 론타가 잃은 소득을 합하여, 총 77만 달러를 주겠다고 했다.
모디카이가 말했다.
"그건 턱없이 모자라는군요. 난 죽은 아이 하나만 가지고도 배심에게서 그 정도는 얻어낼 수
있소."
반대편에 앉은 자들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이어 모디카이는 래프터의 예쁘장한 자료에 있는 모든 내용을 무시하는 발언을 시작했다. 나는
댈러스나 시애틀에서 배심들이 어떻게 하는지에 관심이 없고, 그게 이 사건과 무슨 관계가 있는
지도 모르겠다. 나는 오마하의 법적 절차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하지만 나는 워싱턴의 배심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는 알고 있고, 나에게는 그것만이 중요한 것이오. 만일 당신들이 이런 식
으로 싸게 처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이제 가보아야겠다.
래프터가 쥐구멍을 찾는 동안 아서가 다시 나섰다.
"이것은 협상 가능한 것이오. 물론 협상이 가능하오."
그 자료에는 징벌적 배상금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는데, 모디카이는 그 점도 지적했다.
"부자 회사의 부자 변호사가 의도적으로 불법 퇴거 조치를 허용했소. 그 직접적인 결과로 내
의뢰인들은 거리로 내몰렸고, 그들은 그곳에서 추위를 피하려다 죽었소. 솔직히, 여러분, 이것은
징벌적 배상금을 때리기에 딱 좋은 사건이오. 특히 이곳 워싱턴에서는."
'이곳 워싱턴'이라는 말은 단 한 가지 의미였다. 흑인 배심.
"협상을 할 수 있소."
아서가 되풀이하고는 말을 이었다.
"당신은 얼마를 염두에 두고 있소?"
우리는 처음에 얼마를 제시할 것인가를 놓고 미리 회의를 했다. 우리는 소장에는 천만 달러를
적었지만, 그것은 아무렇게나 적어 놓은 것이었다. 적는 것이야 4억을 적을 수도 있었고, 5억을
적을 수도 있었고, 10억을 적을 수도 있었다.
"각각에 대해 백만입니다."
그 말이 마치 무게를 지닌 물건처럼 마호가니 탁자 위에 쿵 떨어졌다. 건너편에 앉은 사람들은
그 말을 분명히 들었지만, 처음에는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그럼 5백만?"
래프터는 간신히 들릴 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5백만이오"
모디카이가 큰 소리로 말을 이었다.
"피해자 한 사람마다 백만씩."
건너편에 앉은 사람들은 갑자기 규격 용지철에 관심을 가지더니, 네 명 모두 뭐라고 적기 시작
했다.
잠시 후 아서가 다시 싸움에 뛰어 들기 시작했다. 그는 우리의 책임 이론이 절대적인 것은 아
니라는 이야기부터 했다. 그들의 죽음에는 자연의 힘, 즉 눈보라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는 것이
었다. 이어 말로 논쟁을 끝맺었다.
"배심원들은 2월에는 눈이 온다는 사실, 2월에는 춥다는 사실, 2월에는 눈보라가 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겁니다."
회의 내내 모디카이가 배심이라는 말을 꺼낼 때마다 건너편에서는 몇 초간의 침묵이 뒤따랐다.
"그들은 재판을 겁내고 있더군."
모디카이가 나에게 말했다.
우리 이론은 당신들의 공격을 견딜 수 있을 만큼 튼튼하다. 모디카이는 그들에게 이야기했다.
의도적 행위에 의해서건 엄청난 태만에 의해서건, 어쨌든 퇴거 조치가 이루어졌다. 우리 의뢰인들
은 살 곳이 없어 거리로 내몰리게 되었다. 그것도 2월에. 나는 전국 어느 배심에게나 이 간단한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 이것은 특히 워싱턴의 선량한 시민들에게는 큰 호소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아서는 책임 문제를 가지고 논쟁을 벌이는 것이 싫증이 나서 그들의 가장 큰 무기로 이야기로
옮겼다. 곧 내 이야기였다. 특히 내가 챈스의 사무실에서 파일을 가져간 것, 그것도 그것을 보여
줄 수 없다는 말을 들은 뒤에 그렇게 한 것. 그들은 그것에 대해서는 협상이 불가능하다는 입장
이었다. 민사 소송에서 합의에 이르면 형사 고발은 취하하겠지만, 그래도 나는 윤리에 따른 소장
에 따라 징계 처분은 받아야 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들이 뭘 원하던가요?"
내가 물었다.
"2년간의 자격 정지."
모디카이가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아무런 대꾸를 할 수 없었다. 2년이라. 협상은 불가능하고.
"나는 그들에게 당신들 미친 것 아니냐고 했소."
그러나 내 마음에 들 만큼 강하게 이야기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모디카이가 말을 이었다.
그들은 돈 문제를 가지고 좀더 토론했으나 간격이 좁혀지지 않았다. 사실 그들은 가까운 시일
안에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한 것 외에는 어떤 것에도 합의를 보지 못했다.
모다카이가 마지막에 한 일은 마키스 소장을 전해 준 것이었다. 아직 소송을 제기하지는 않은
소장이었다. 거기에는 똑같은 세 명의 피고 이름이 적혀 있었고, 불법 퇴거에 대하여 5만이라는
소소한 액수를 요구하고 있었다. 앞으로 또 있을 꺼요. 모디카이가 장담했다. 사실 우리는 일 주
일에 두 명씩 모든 퇴거자의 이름으로 소송을 걸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 사본을 신문에 제공할 계획이오?"
래프터가 물었다.
"안 될 게 뭐겠소. 일단 소송을 제기하면 그것은 공적 기록이 되는 건데."
"아니, 뭐 우리는 지금까지 언론에 너무 많이 오르내렸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뿐이오."
"그 시합을 시작한 건 당신들 아니오."
"뭐라고?"
"당신들이 마이클의 체포 이야기를 흘렸잖소."
"우리가 한 게 아니오."
"그럼 『워싱턴 포스트』에서 어떻게 그의 사진을 얻었단 말이오?"
아서는 래프터에게 입 다물고 있으라고 야단을 쳤다.
나는 혼자 사무실에서 문을 닫아 놓고 벽을 바라보며 한 시간 동안 합의와 관련된 토론을 분석
해 보았다. 드레이크 & 스위니는 두 가지를 피하기 위해 많은 돈을 지불하려 하고 있었다. 첫째
는 더 이상의 수모를 피하자는 거였고, 둘째는 심각한 경제적 피해를 줄 수도 있는 재판이라는
소동을 피하자는 것이었다. 만일 내가 파일을 넘겨주면 그들은 형사 고발을 취하할 것이다. 그렇
게 되면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셈이었다. 다만 드레이크 & 스위니에서 어느 정도의 복수
를 원한다는 것만 빼면.
나는 단순한 배신자가 아니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내가 이런 지저분한 소용돌이의 근원이었
다. 내가 중간에 끼면서 그들이 높은 탑 속에 잘 감추어 두었던 지저분한 비밀이 드러나 소송으
로 인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그들이 공개적으로 수모를 당한 것만으로도 나를 미워할 만한 이유
가 되었다. 게다가 이제 그들에게서 그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돈을 뜯어내 갈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들의 복수심은 더욱더 불타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이 모든 일을 내보자 정보를 가지고 해냈다. 적어도 그들의 집단적 시각에서는 그
렇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헥터가 개입한 부분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 같았다. 내가 파
일을 훔치고, 필요한 모든 것을 파악하고, 소송을 제기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내가 가롯 유다였다. 그리고 슬픈 일이지만, 나는 그들을 이해했다.
36
소피아와 에이브러험이 퇴근하고 나서 한참 후까지도 나는 어둑어둑한 내 사무실에 앉아 있었
다. 모디카이가 들어오더니 내가 벼룩 시장에서 6달러를 주고 산 튼튼한 접는 의자 두 개 가운데
한 곳에 앉았다. 두 의자는 짝이 맞았다. 전 소유자는 의자를 밤색으로 칠해 놓았다. 못생기긴 했
지만, 이제 의뢰인이나 손님들이 이야기를 하다 말고 밑으로 주저앉는 일을 걱정하지는 않아도
되었다.
나는 모디카이가 오후 내내 전화를 붙들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사
무실에 다가가지 않았다.
"전화가 많이 오더군. 우리 생각보다 상황이 빠르게 진전되고 있소."
나는 귀를 기울일 뿐, 할말은 없었다.
"아서와도 이야기를 자주 했고, 드오리오 판사와 이야기를 많이 했소. 드오리오를 아시오?"
"아뇨."
"강인한 사나이요. 하지만 훌륭하고, 공정하고, 적당히 자유주의적인 사람이지. 오래 전에 대형
법률회사에서 일을 시작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판사 쪽으로 방향을 틀었소. 큰돈을
벌 기회를 거부한 것이지. 드오리오는 시내의 다른 어떤 법정 판사보다도 많은 사건을 소화하고
있소. 그는 변호사들을 휘어잡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오. 매우 고압적인 사람이오. 모든 문제를 합
의로 해결하기를 바라고, 합의가 되지 않으면 가능한 한 빨리 재판을 열기를 바라지. 그는 재판
일정을 말끔하게 소화해 내는 데 강박감을 가지고 있소."
"이름은 들어 본 것 같은데요."
"들어 보았기를 바라오. 당신도 이 도시에서 7년 동안 변호사 일을 했으니까."
"반트러스트 법이었죠. 대형 법률 회사에서 말입니다. 저 높은 곳에서요."
"어쨌든 결론은 이렇게 났소. 우리는 내일 1시에 드오리오의 법정에서 만나기로 했소. 모두 참
석할 거요. 피고 셋, 그들의 변호사, 나, 당신, 우리 수탁인, 소송에 어떤 식이든 이해관계가 있는
모든 사람."
"나도요?"
"그렇소. 판사가 당신도 참석하기를 바라고 있소. 배심석에 앉아 구경을 할 수도 있지 않느냐는
거였소. 어쨌든 당신이 나오기를 바랐소. 그리고 사라진 파일도 원하고 있소."
"기꺼이."
"어떤 사람들 말에 따르면, 드오리오는 언론을 싫어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소. 는 그의 법정에서
기자들을 쫓아 낸다고 하오. 텔레비전 카메라는 그의 문에서 30미터 안으로 들어 올 수 없소. 그
는 이 사건이 야기한 악명에 이미 화가 나 있소. 따라서 앞으로는 말이 새는 것을 막을 결심인가
보오."
"소장은 공적 기록입니다."
"그렇지. 하지만 판사는 마음만 먹으면 파일을 봉인할 수 있소. 그렇게 하지는 않겠지만, 그는
악을 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판사는 합의를 원한다 이겁니까?"
"물론 그렇고 말고. 그는 판사요, 안 그렇소? 모든 판사는 모든 사건이 합의되기를 바라오. 그
래야 골프를 칠 수 있는 시간을 더 낼 수 있으니까."
"우리 사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한답니까?"
"입을 꼭 다물고 있소. 하지만 피고 셋이 모두 참석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소. 부하를 대신 내
보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우리는 현장에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들을 보게 될 거요."
"갠트리도요?"
"갠트리도 올 거요. 그의 변호사와 이야기를 했소."
"그자도 출입구에 금속 탐지기가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겠죠?"
"아마 그렇겠지. 전에도 법정에 나가 보았을 테니까. 아서와 나는 판사에게 합의 제안에 대해
이야기했소. 판사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별느낌이 없는 것 같았소. 큰 평결들을 많이 봤을
테니까. 판사는 자기 배심원들을 잘 알고 있소."
"나에 대해서는 어떨까요?"
모디카이는 진실하면서도 위로가 되는 말을 찾느라 한참 입을 다물고 있었다.
"강경 노선을 택할 꺼요."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하는 것이 공정한 것입니까, 모디카이? 내 목에 밧줄이 걸려 있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보지를 못하겠군요."
"이건 공정성의 문제가 아니오. 당신은 그릇된 일을 바로잡기 위해 파일을 가져왔소. 그걸 훔칠
뜻은 아니었소. 그저 한 시간 정도 빌릴 생각이었소. 그것은 명예로운 행동이기는 하지만, 그럼에
도 절도는 절도요."
"드오리오가 그것을 절도라고 부르던가요?"
"그랬소. 한 번."
그러니까 판사는 내가 도둑이라고 생각하는구나. 만장일치가 되어가고 있었다. 모디카이의의견
울 물어 볼 배짱은 없었다. 모디카이는 아마 진실을 말해 줄 텐데, 나는 그것을 듣고 싶지 않았
다.
모디카이가 그 큰 몸집의 무게 중심을 옮겼다. 의자는 삐그덕거리는 소리를 냈으나, 조금도 움
직이지는 않았다. 나는 그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이걸 좀 알아 두었으면 좋겠소."
모디카이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당신이 말만 하면, 우리는 이 사건으로부터 눈 깜짝할 새에 달아날 수가 있소. 우리는 합의를
필요로 하지 않소. 사실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소. 피해자들은 이미 죽었소. 그들의 상속인들은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거나 감옥에 있소. 이건 당신 사건이오. 당신이 결정하시오."
"그렇게 간단치가 않아요., 모디카이."
"왜?"
"나는 형사 고발이 무서워요."
"당연하지. 하지만 형사 고발은 없던 일로 할 거요. 당장이라도 아서한테 전화를 해서, 우리도
모든 것을 없던 일로 할테니, 당신들도 그렇게 하라고 이야기 할 수 있소. 둘 다 이 일에서 손을
씻고 잊어 버릴 수 있소. 아서도 아주 기뻐할 거요. 쉬운 일이요."
"언론에서 우리를 산 채로 잡아먹으려 할 텐데요."
"그래서? 우리는 끄덕없소. 우리 의뢰인들이 『워싱턴 포스트』가 우리에 대해 뭐라고 하는지
관심이나 가질 것 같소?"
모디카이는 악마의 대변인 노릇을 하고 있었다. 자신은 믿지 않다는 일을 주장하고 있었다. 모
디카이는 나를 보호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동시에 드레이크 & 스위니를 잡고 싶어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를 자기 자신으로부터 보호할 수 없는 법이다.
"좋습니다, 손을 씻는다고 합시다. 그럼 우리가 뭘 얻은 겁니까? 그들은 살인을 하고도 아무 벌
도 받지 않고 살아가는 겁니다. 그들은 그 사람들을 거리로 내몰았습니다. 그들은 부당한 퇴거 조
치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지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우리 의뢰인들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을 고리에서 풀어 주자고요?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겁니까?"
"그것이 당신의 변호사 면허를 보호하는 유일한 길이요."
"약간의 압박감이 있는 게 일하기엔 제일 좋지요, 모디카이."
나는 약간 잔인하게 말했다.
하지만 모디카이의 말이 옳았다. 이것은 내가 저지른 일이었다. 따라서 내가 중요한 결정을 내
려야 한다는 것은 맞는 말이었다. 내가 파일을 가져왔다. 그것은 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잘못된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모디카이 그린은 내가 갑자기 발을 빼면 망연자실할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스스로 일어서도
록 돕는 것이 그의 인생의 전부였다. 그가 만나는 사람들은 희망도 없고 집도 없는 사람들, 받는
것은 거의 없고 그저 아주 기본적인 것만 요구하는 사람들이었다. 다음 한 끼 식사, 눈비에 젖지
않은 잠자리, 귀중한 임금을 주는 일자리, 자신이 낼 수 있는 집세만 내고도 살 수 있는 작은 아
파트. 이제까지 그의 의뢰인들이 안고 있는 문제의 원인이 큰 회사들과 지금처럼 직접적으로 연
결된 적은 없었다.
모디카이에게는 돈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기 때문에, 또 큰 보상금을 받는다 해도 그의 생활에
는 거의 또는 영향이 없었기 때문에, 또 의뢰인들은 그의 말대로 죽었거나 알려지지 않았거나 감
옥에 있었기 때문에, 그는 한 번도 재판 전의 합의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내가 관련되
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 모디카이는 재판을 원했다. 떠들썩하게 큰 재판을 벌여 조명과 카
메라와 활자가 아니라, 그가 만나는 노숙자들의 점점 견디기 힘들어지는 상황을 다루어 주기를
바랐다. 재판이 늘 개인적인 불법행위만 다루는 것은 아니다. 재판이 가끔 연단으로 사용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있기 때문에 문제가 복잡해졌다. 내 희고 연약한 얼굴을 쇠창살 너머에서 보게 되
는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내 변호사 면허증, 나아가서는 생계가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나는 배에서 뛰어내리지 않아요, 모디카이." 내가 말했다
"나도 안 그러리라고 생각했소."
"이런 시나리오라면 어떻겠어요? 그들을 설득하여 우리가 만족할 만한 돈을 받아 내는 겁니다.
형사 고발은 취하하게 하고요. 그럼 남는 것은 내 면허밖에 없습니다. 내가 그걸 잠시 포기하면
어떨까요? 그럼 나는 어떻게 될까요?"
"첫째, 당신은 징계에 따른 자격 정지라는 불명예를 안게 될 거요."
"그거 기분 나쁘게 들리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세상이 끝나는 건 아니잖습니까?"
나는 강하게 말을 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사실 나에게 일어날 창피스러운 일들 때문에 두려
워하고 있었다. 워너, 내 부모님, 내 친구들, 법대 친구들, 클레어, 드레이크 & 스위니의 그 모든
훌륭한 사람들. 그들이 그 소식을 들었을 때의 표정들이 눈앞을 스쳐 갔다.
"둘째, 당신은 자격 정지 기간에는 변호 활동을 할 수 없소."
"내가 상담소의 일자리를 잃게 되는 겁니까?"
"물론 아니오."
"그럼 뭘 하게 되지요?"
"글쎄, 당신은 이 사무실을 그대로 쓰게 될 거요. 창조적 비폭력을 위한 공동체, 사마리아인의
집, 구원자 선교단 등 당신이 이미 다니던 곳에서 계속 자원 봉사 일을 하게 될 거요. 당신은 이
상담소의 완전한 파트너 자리도 유지하게 될 거요."
"그러니까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겁니까?"
"별로 변한 건 없지. 소피아를 보시오. 소피아는 나머지 우리 셋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수의
의뢰인들을 상대하고 있소. 이 도시 사람 들 가운데 반이 소피아가 변호사라고 생각하고 있소. 법
정 출두가 필요하면 그것은 내가 처리하오. 당신도 똑같을 거요."
거리의 법을 지배하는 규칙은 그것을 집행하는 사람들이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다 걸리면 어떻게 하죠?"
"아무도 상관하지 않소. 사회 사업과 법률 봉사사이의 구분선이 그렇게 뚜렷한 것은 아니오."
"2년은 긴 시간인데."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지. 그리고 2년 자격 정지에 꼭 동의 할 필요는 없소."
"그것은 협상 불가능한 것인 줄 알았는데요."
"내일이면 모든 것이 협상 가능하게 되오. 하지만 당신은 조사를 해 둘 필요가 있소. 비슷한 사
건들이 있으면 찾아 보시오. 비슷한 고발에 대해 다른 지역에서는 어떻게 처리했는지 알아 보시
오."
"이런 일이 전에도 있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럴 수도 있소. 세상에 변호사들이 엄청나게 많지 않소. 그리고 변호사들이라는 게 원래 일을
망치는 법을 찾는 데는 기발한 사람들 아니오."
모디카이는 회의에 가야 했다. 나는 모디카이에게 고맙다고 했다. 우리는 문을 함께 잠그고 나
왔다.
나는 의사당 근처의 조지타운 법대로 차를 몰았다. 그곳 도서관은 자정까지 문을 열었다. 혼자
숨어서 불안정한 변호사의 인생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 보기에는 아주 그럴듯한 장소였다.
37
드오리오의 법정은 칼 물트리에 빌딩의 이층에 자리잡고 있는데, 그곳에서는 키스너 판사의 법
정도 멀지 않았다. 그곳은 내 중절도 사건이 귀찮은 과정의 다음 단계를 기다리고 있는 곳이었다.
복도는 형사 변호사들과 하급의 밥벌이꾼들로 바빴다. 케이블 텔리비전과 버스 정류장 벤치에 광
고를 하는 변호사들이었다. 그들은 의뢰인들과 머리를 맞대고 있었는데, 그 의뢰인들 거의 모두가
무슨 죄를 지은 사람들 같았다. 내 이름이 그런 악당들과 같은 소송 명부에 올라가 있다는 것을
믿고 싶지가 않았다.
우리가 들어가는 타이밍이 중요했다. 모디카이에게는 멍청한 짓으로 보일지 몰라도, 나에게는
그것이 중요했다. 그렇다고 감히 일부러 늑장을 부린다거나 하는 식으로 장난을 칠 수는 없었다.
드오리오는 시간을 지키는 데 광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10분이나 일찍 도착하여 도널드
래프터와 아서 무리의 노려보는 눈길과 소근거림과 시합 전의 따분한 잡담의 대상이 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또 판사가 없는 한, 틸먼 갠트리와 한 방에 있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나는 남들의 이야기는 다 들으면서도, 누가 나를 귀찮게 구는 것은 피할 수 있도록 배심석에
앉아 있고 싶었다. 우리는 1시 2분 전에 들어갔다.
드오리오의 서기가 의제 사본을 나누어 주고 있었다. 그녀는 우리에게 좌석을 안내했다. 나는
배심석에 혼자 속 편하게 앉을 수 있었다. 모디카이는 배심석 옆의 원고 탁자에 앉았다. 수탁인인
윌머 펠렌은 벌써 와 있었다. 앞으로 논의될 내용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벌써
지루해하는 표정이었다.
피고석은 전략적 배치란 무엇인가를 보여 주는 듯했다. 드레이크 & 스위니는 한쪽 끝에 몰려
있었고, 틸먼 갠트리와 그의 두 변호사는 다른 쪽 끝에 있었다. 중앙에서는 리버오크스 의 임원들
로 보이는 두 사람과 세명의 변호사가 완충 장치 노릇을 하고 있었다. 피고 측은 모두 열 세 명
이었다.
나는 전직 포주인 갠트리가 손에 반지를 잔뜩 끼고, 귀에 귀걸이를 달고, 밝고 화려한 옷을 입
고 올 줄 알았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그는 군청색의 멋진 양복을 입었는데, 그의 변호사들보
다 옷맵시가 훌륭했다. 그는 서류를 읽으며 모든 사람들을 무시하고 있었다
아서와 래프터와 네이선 맬러머드의 모습이 보였다. 배리 누조도 있었다. 어떤 꼴을 보아도 놀
라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배리를 보리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드레이크 &
스위니는 동료 인질들 가운데 세명을 내보냄으로써 미묘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셈이었다. 형씨
에게 붙들렸던 다른 변호사들은 무너지지 않고 살아남자 않았느냐. 그런데 너는 뭐냐? 왜 너는
계집애처럼 약해 빠진 거냐?
그들 가운데 다섯 번째는 보험회사에서 파견한 변호사인 L. 제임스 서버라고 나와 있었다. 드
레이크 & 스위니는 배임 행위에 대한 보험을 많이 들어 놓았지만, 이런 경우에도 보험금이 나올
까 의심스러웠다. 어소시에이트나 파트너가 도둑질을 했다든가, 아니면 의도적으로 행동기준을 어
긴다던가 하는 식의 고의성이 있는 행동은 보험금 지급 대상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변호사의
태만한 행동은 보험금 지급 대상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의도적인 불법 행위는 아니었다. 브레이
든 챈스는 그저 법규나 조례나 기존의 변호 방법의 한 부분을 간과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불법
점거자들이 사실상 세입자임을 잘 알면서도, 퇴거 조치를 단행하라는 의도적인 결정을 내렸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드레이크 & 스위니와 보험회사 사이에 지저분한 싸움이 벌어질 터였다. 마
음껏 싸워 보라지.
정각 1시, 드오리오 판사가 판사석 뒤에서 나오더니 자리에 앉았다.
"안녕하시오."
판사는 자리에 앉으면서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가운을 입고 있었는데, 그것이 내 눈에는 이상
하게 보였다. 이것은 형식적인 법정절차가 아니라, 합의를 위한 비공식적인 회의였다.
판사는 마이크를 조종하더니 말했다.
"버딕 씨, 문 좀 잠가 주시오."
버딕 씨는 안에서 문을 경비하는 제복의 차림의 정리였다. 방청석은 완전히 텅 비어 있었다. 매
우 사적인 회의였다.
법정 속기사가 모든 말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서기한테서 모든 관련자와 변호사들이 출석했다는 말을 들었소."
그러면서 드오리오는 마치 강간범을 보듯이 나를 흘끗 보았다. 드오리오가 말을 이었다.
"이 회의 목적은 이 사건의 합의를 보려는 것이오. 어제 주요 변호사들과 수차례 대화를 가진
뒤, 이런 시간에 이런 식의 회의를 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소. 나는 이
제까지 소송이 제기된 다음에 이렇게 빨리 합의를 위한 회의를 열어 본 적이 없소. 그러나 모든
관련자가 동의를 했기 대문에, 미리 대화를 가지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구려. 자, 첫 번
째 문제는 비밀 엄수에 관한 것이오. 오늘 우리가 하는 이야기는 어떤 상황에서도 언론에 공개할
수 없소. 알아들었소?"
드오리오는 모디카이를, 그 다음에 나를 보았다. 피고석에 앉은 사람들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틀었다. 나는 일어서서 먼저 언론에 흘리는 일을 시작한 것은 당신들 아니냐고 따지고 싶
었다. 물론 우리가 결정타를 날리긴 했지만, 먼저 주먹을 날린 것은 당신들이다.
서기가 우리 모두에게 두 문단으로 된 비공개 합의서를 나누어 주었다. 우리 각자의 이름을 적
어 넣을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나는 서명을 하고 합의서를 서기에게 돌려 주었다.
그러나 압박감을 느끼는 변호사는 두 문단으로 된 글을 놓고도 빠른 결정을 내릴 수 없는 법이
다.
"뭐 문제가 있소?"
드오리오가 드레이크 & 스위니 패거리에게 물었다. 그들은 빠져나갈 구멍을 찾고 있었다. 무조
건 그렇게 하라고 훈련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서명을 마쳤고, 서기는 합의서를 거두어 들였다.
판사가 말했다.
"우리는 나누어 준 의제에 따라 회의를 진행해 나갈 것이오. 그린씨, 당신이 소송을 제기했으
니, 먼저 이야기를 해보시오. 5분을 주겠소. "
모디카이는 메모 없이 일어서서 호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 아주 편안한 자세를 취했다. 그
는 2분 동안에 우리 주장을 분명히 밝히고 자리에 앉았다. 드오리오는 짧게 끝내 주어서 고맙다
고 했다.
이어 아서가 피고측을 대변했다. 그는 사건과 관련된 기본적 사실들을 인정했으나, 책임성의 문
제는 쟁점으로 삼았다. 그는 도시 전역에 휘몰아쳐 모든 사람의 생활을 어렵게 만든 '변덕스러운'
눈보라에 많은 책임을 떠넘겼다.
동시에 론타 버튼의 행동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론타 버튼이 갈 곳은 많았습니다. 긴급 대피소들이 문을 열어 놓고 있었습니다. 론타 버튼은
그 전날 밤에는 다른 많은 사람들과 함께 교회 지하에서 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왜 그곳을 떠
난 겁니까?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아무도 떠나라고 강제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적어도 지금까지
는 그런 사람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론타 버튼의 할머니는 북동부에 아파트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론타 버튼도 어느 정도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론타 버튼은 자신의 가족을 보
호하기 위해 좀더 노력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죽은 론타 버튼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이 아서가 잡을 수 있는 유일한 지푸라기라고 할 수 있었
다. 그러나 이제 일 년 정도 후면 내가 앉아 있는 배심석은 나와는 다르게 생긴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그때는 아서는 물론이고 제정신을 가진 변호사라면 누구도 론타 버튼이 자기 자
식들의 죽음에 얼마간 팩임을 져야 한다는 말을 입 밖에 내지 못할 것이다
"론타 버튼이 애초에 왜 거리에 나가게 된 거요?"
드오리오가 날카롭게 물었다. 나는 웃음을 지을 뻔했다.
아서는 기가 죽지 않았다.
"재판장님, 이 모임의 목적과 관련하여 우리는 퇴거가 부당한 것이었음을 인정할 용의가 있습
니다."
"고맙소."
"천만에요.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론타 버튼도 어느 정도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입니
다."
"얼마나?"
"적어도 50퍼센트."
"그건 너무 센데."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재판장님. 우리가 론타 버튼을 거리로 내보냈다 하더라도,
론타 버튼은 그 비극이 일어나기 전에 일 주일 이상의 시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린 씨?"
재판장이 모디카이를 불렀다.
모디카이는 일어서면서, 아서가 초보적인 이론을 가지고 논쟁하는 법대 1학년생이라도 되는 것
처럼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 사람들은 원한다고 해서 즉시 어디 들어가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제이컵스 씨. 그
래서 이 사람들을 노숙자라고 부르는 것이죠. 제이컵스 씨는 그들을 거리로 내보냈다는 것을 인
정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거리에서 죽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배심과 이야기를 해보고 싶
군요."
아서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래프터, 맬러머드, 배리는 열심히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들은 모
디카이 그린을 그와 똑같은 피부색을 가진 배심이 앉아 있는 법정에 풀어 놓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드오리오가 끼어들었다.
"책임성의 문제는 분명하오, 제이컵스 씨. 굳이 원한다면 배심에게 론타 버튼의 태만을 주장해
보시오. 나로서는 권하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말이오."
모디카이와 아서는 자리에 앉았다.
우리가 재판에서 피고의 책임 문제를 입증한다면, 배심은 그 다음에 배상의 문제를 생각할 터
였다. 따라서 그것이 의제의 다음 항목에 적혀 있었다. 래프터는 배심이 보상액을 결정하는 최근
의 경향에 대한 자료를 제출하겠다고 신청했다. 앞서 모디카이와 회의를 했을 때 보여주었던 것
과 같은 자료였다. 그는 최근 우리의 불법 행위 관련법에 따른 재판에서 죽은 아이들이 얼마나
가치를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어 론타의 취업 경력과 그녀가 죽음으로써 상실한
소득 손실 추정치로 넘어가면서, 이야기는 따분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전날 그들이 제시했던 것과
똑같은 77만 달러라는 액수에 이르렀으며, 그것을 기록에 남겨 달라고 했다.
"그것이 당신들의 최종 제안은 아니겠지요, 래프터 씨?"
드오리오가 물었다. 그의 말투는 도전적이었다. 그것이 그들의 최종적 제안이 아니기를 바란다
는 것이 분명했다.
"최종 제안은 아닙니다., 재판장님."
래프터가 대답했다.
"그린 씨."
모디카이가 다시 일어났다.
"우리는 피고측의 제안을 거부합니다, 재판장님. 그런 경향 같은 것은 나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내가 관심을 가지는 유일한 것은 내가 과연 배심에게 어떤 액수를 설득시킬 수 있겠느
냐 하는 것입니다. 래프터 씨의 의견을 존중하면서도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 액수가 피고측이
제시하는 액수보다 엄청나게 클 것이라는 점입니다."
법정의 누구도 그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모디카이는 죽은 아이의 가치가 5만 달러에 불과하다는 그들의 견해를 반박했다. 그는 그러한
낮은 추정치는 노숙자이자 흑인 아이에 대한 편견의 결과라고 강하게 암시했다. 피고석 가운데
갠트리만이 태연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모디카이가 말을 이었다.
"래프터 씨, 세인트 앨번 예비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있지요? 그 아들의 목숨을 내놓고 5만 달
러를 받을 수 있습니까?"
래프터가 깜짝 놀라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모디카이가 말을 이었다.
"나는 이 법정의 배심에게 이 어린아이들의 가치가 각각 적어도 백만 달러는 된다고 설득할 수
있습니다. 버지니아나 메릴랜드의 예비학교에 다니는 아이들과 똑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말
입니다."
그것은 상대의 허리를 치는 비열한 공격이라고 할 수 있었다. 피고측의 자녀들이 어느 학교에
다니는지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래프터의 보고서에는 피해자의 고통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그 이유에 대한 이야기
는 없었지만, 보나마나 뻔했다. 그들이 평화스럽게 죽었다는 것이다. 냄새 없는 가스를 들이마시
다 저세상으로 떠나 버렸다는 것이다. 화상도 입지 않았고, 부러진 데도 없었고, 피도 흘리지 않
았다.
그러나 래프터는 그 점을 생략한 것 때문에 톡톡히 대가를 치러야 했다. 모디카이는 론타와 그
녀의 자녀들이 지상에서 보낸 마지막 몇 시간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먹을 것과 따뜻
한 곳을 찾아 헤매던 일, 눈과 혹한에 시달린 일, 얼어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흩어지지 않고
함께 있으려는 필사적인 노력, 눈보라 때문에 고물 자동차 안에 처박힌 채 꼼짝도 못할 것이라는
공포, 엔진을 켜 놓고 기름이 떨어지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되어 계기판을 응시하는 모습.
매혹적인 연기였다. 능란한 이야기꾼이 꾸민 즉흥 무대였다. 나는 단독 배심원의 입장에서 그에
게 백지 수표라도 건네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내 앞에서 그들의 고통에 대해서는 입도 뻥끗 하지 마쇼."
모디카이는 드레이크 & 스위니를 향하여 으르렁거리고는 덧붙였다.
"고통이라는 발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모디카이는 마치 론타를 오랫동안 알았던 사람처럼 이야기를 했다. 아무런 기회도 누릴 수 없
는 아이로 태어나 , 예측 가능한 모든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녀가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였고, 가난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는 것. 그녀는
자신의 과거와 자신의 중독 상태를 직시하였으며, 피고들이 그녀를 거리로 내몰았을 때 중독에서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는 것.
모디카이의 목소리는 조수처럼 밀려들었다 밀려 나갔다. 분노로 올라가기도 했다가, 수치와 죄
책감으로 낮아지기도 했다. 음절 하나 생략하지 않았지만, 쓸데없는 말은 한 마디도 덧붙이지 않
았다. 그는 나중에 배심이 듣게 될 말을 최대한 공개하고 있었다.
아서는 돈을 관장하는 있는 사람으로서, 그의 말을 들으면서 자기 주머니에 점점 큰 구멍이 뚫
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모디카이가 마지막까지 아껴 둔 것이 있었다. 그는 드디어 징계적 손해 배상금의 목적에 대해
강연을 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불법 행위를 한 자들을 처벌하기 위한 것이며, 그들을 본보기로 삼
음으로써 더 이상 죄를 짖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는 피고 측, 즉 그들보다 운이 없는 사람들
을 존중하지 않는 부자들이 저지른 악을 망치로 두드려댔다. 모디카이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 사람들은 불법 점거자 무리에 지나지 않아. 그들을 내보내 버려! 당신들은 그렇게 소리쳤을
것이다. 당신들은 탐욕 때문에 법을 무시했다. 적법한 퇴거 조치라면 적어도 30일의 유예 기간을
준다. 그러나 그 30일이면 눈보라는 끝이 났을 것이다. 거리 생활도 좀더 안전해졌을 것이다.
이것은 징계적 손해 배상금을 물릴 수 있는 완벽한 사건이었으며, 모디카이는 배심도 그에 동
의하리라는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나도 동의했다. 아서와 래프터를 비롯하여 피고석에 앉
은 변호사들은 모디카이 그린을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500만이면 합의를 하겠습니다."
모디카이는 맨 마지막에 그렇게 말하고는 덧붙였다.
"거기서 한푼도 깎을 수 없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정적이 흘렀다. 드오리오는 메모를 하더니, 다시 의제로 돌아갔다. 그 다음은
파일의 문제였다.
"그걸 가지고 있소?"
판사는 나에게 물었다.
"네, 재판장님."
"그것 좀 주겠소?"
"네."
모디카이는 낡은 서류가방을 열고 파일을 꺼냈다. 모디카이는 그것을 서기에게 주었고, 서기는
그것을 재판장에게 넘겨 주었다. 드오리오는 10분 동안 꼼꼼히 파일을 넘겨보았고, 우리는 물끄러
미 그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래프터가 나를 몇 번 노려보는 것 같았지만, 무슨 상관이랴. 그를 비롯한 피고측은 그 파일을
손에 넣고 싶어 안달이었다.
판사는 파일을 다 보고 나서 말했다.
"파일은 돌아 왔소, 제이컵스씨. 저 아래 다른 법정에서는 형사 사건이 진행 중이오. 그래서 키
스너 판사와 이 문제를 이야기해 보았소. 제이컵스 씨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재판장님, 다른 모든 문제에 합의를 볼 수 있다면, 형사 고발을 밀고나가지는 않겠습니다."
드오리오가 말했다.
"당신도 그 점에 동의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브록 씨?"
동의할 수 있고 말고.
"네, 재판장님"
"그럼 다음으로 넘어갑시다. 다음 안건은 드레이크 & 스위니가 마이클 브록에 대해 제기한, 윤
리 문제에 대한 고발 건이오. 제이컵스 씨,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소?"
"물론입니다, 재판장님."
아서는 벌떡 일어나더니, 내 윤리적 약점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부당하게 가혹히 나오
거나, 쓸데없이 장광설을 늘어놓지는 않았다. 그런 약점을 공격할 수 있다는 것을 가지고 기뻐하
는 것 같지도 않았다. 아서는 변호사들의 변호사였으며, 윤리를 가르치는 동시에 윤리를 실천하고
있는 노인이었다. 아서와 그의 회사는 내가 저지른 일을 절대용서하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나는
결국 그들과 함께 일했던 사람이었다. 브레이든 챈스의 행동이 회사 전체의 불명예인 것과 마찬
가지로, 내가 어떤 윤리 기준을 유지하지 못한 것도 회사 전체의 불명예였다.
아서는 내가 파일을 가져간 것에 대한 처벌을 절대 피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것은 의뢰인인
리버오크스에 대한 의무를 방기한 일로, 절대 있을 수 없는 일 이었기 때문이다. 마이클 부록이
범죄자라는 것은 아니다. 중절도 혐의에 대한 형사 고발을 없던 일로 해주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마이클 부록은 변호사다. 그것도 아주 훌륭한 변호사다. 따라서 그는 책임을 져야
만 한다.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윤리 문제에 대한 고발은 철회하지 않겠다.
그의 주장은 타당했고, 제시 방식도 적절했다. 나도 그의 말을 납득했다. 리버오크스 사람들이
특히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 같았다.
드오리오가 말했다.
"브록씨, 할말 있소?"
무슨 말을 준비해 온 것은 아니었지만, 일어서서 내가 느끼는 바를 말하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나는 아서를 정면으로 보며 말했다.
"제이컵스 씨, 나는 늘 제이컵스 씨를 존경해 왔으며,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변
호하기 위해 할말은 없습니다. 파일을 가져온 것은 잘못한 일이며,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수도 없이 해 보았습니다. 나는 감추어진 정보를 찾고 있었으나, 그것이 핑계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제이컵스 씨에게, 그의 회사 사람들에게, 그리고 그 의뢰인인 리
버오크스에 사과합니다."
나는 자리에 앉은 다음, 그들 쪽은 돌아보지 않았다. 모디카이는 나중에 나의 겸손함 때문에 분
위기가 상당히 누그러졌다고 말했다.
이어 드오리오는 매우 현명한 조치를 취했다. 그는 다음 의제로 넘어간 것이다. 그것은 아직 시
작되지 않은 소송이었다. 우리는 마키스 디스와 켈빈 램을 대리하여 소송을 제기할 계획이었으며,
앞으로 우리가 찾아낼 수 있는 다른 모든 퇴거자들을 대리해서 소송울 제기할 생각이었다. 드본
하디와 론타는 죽었으니, 원고 후보는 15명인 셈이었다. 모디카이는 그 점을 약속했고, 또 판사에
게도 알렸다.
재판장은 말했다.
"제이컵스 씨, 만일 책임성을 인정한다면, 피해 보상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하오. 이 15건을 합
의하는 데는 얼마나 제시하겠소?"
아서는 래프터, 맬러머드와 귀엣말을 나누더니 말했다.
"재판장님, 우리는 그들이 지금까지 한 달 정도 집 없이 지냈다고 추측합니다. 우리가 그들 각
각에게 5천씩 준다면 그들은 살 만한 곳, 아마 전보다 훨씬 좋은 곳을 새로 찾을 수 있을 것입니
다."
드오리오가 말을 받았다.
"그건 적은 액수인데. 그린 씨."
"너무 적지요."
모디카이는 동의하고는 말을 이었다.
"이번에도 배심들이 어떻게 나올지에 기초하여 추정을 해볼 수 있습니다. 똑같은 피고, 똑같은
배심 후보들입니다. 그렇다면 각각의 사건마다 5만은 쉽게 얻어 낼 수 있습니다."
판사가 물었다.
"얼마면 받아들일 수 있겠소?"
"2만 5천입니다.
그러자 드오리오가 아서에게 말했다.
"그 정도는 주어야 할 것 같소. 그 정도 액수면 합당하다고 할 수 있소"
"15명 각각에게 2만 5천씩이요 ?"
아서가 되물었다. 법정의 두 방향으로부터 공격을 당하자 그의 침착한 태도도 무너지고 있었다.
"그렇소."
드레이크 & 스위니에서 온 네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열심히 토론을 벌였다. 변호사들 각각이
할말이 있는 듯했다. 다른 두 피고에 대해서는 미리 맞추어 둔 이야기가 업는 것이 분명했다. 갠
트리는 철저하게 무관심한 표정이었다. 그의 돈이 걸려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리버오크스는
이 사건을 합의로 끝내지 못하면, 자기네도 드레이크 & 스위니를 상대로 하여 소송을 걸겠다고
협박했을 것이다.
"2만 5천을 내기로 하겠습니다."
아서가 조용한 목소리로 발표했다. 이로써 드레이크 & 스위니의 금고에서는 37만 5천 달러가
날아가게 생겼다.
어쨌든 드오리오는 합의의 물꼬를 터주었다. 그래서 드오리오가 지혜롭다고 할 것이다. 그는 작
은 부분에 대해서는 합의를 강요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일단 돈이 흘러나오기
시작하면, 끝을 내기 전에는 멈추지 않을 터였다.
작년의 경우, 내가 의뢰인에게 청구한 금액 가운데 내 보수와 보험 급여를 제하고, 거기에 또
삼분의 일을 경비로 제하고 났을 때, 약 40만 달러가 파트너들이 나누어 갖는 황금 단지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비슷한 일을 하는 8백 명 가운데 한 사람일 뿐이었다.
"여러분, 이제 두 가지 쟁점만 남았소. 첫째는 돈이오. 이 소송에서 합의를 보는 데 얼마가 필
요한가? 둘째는 브록 씨의 징계 문제요. 이 두 가지는 서로 맞물려 있는 것 같소. 여기서 나는 두
당사자와 개별적으로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소. 우선 원고부터 시작합시다. 그린 씨, 브록 씨,
내 방으로 와주겠소?"
서기가 우리를 판사석 뒤의 복도로 데려가더니, 이어 떡갈나무 패널로 장식이 된 훌륭한 사무
실로 안내했다. 재판장은 가운을 벗고 비서에게 차를 가져오라고 했다. 우리에게도 마시겠냐고 했
으나, 우리는 사양했다. 비서가 문을 닫고 나가자, 드오리오와 우리만 남았다.
드오리오가 말했다.
"진전이 이루어지고 있소. 그런데, 브록 씨, 윤리에 대한 고발은 중대한 문제요.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알고 있소?"
"대충 알고 있습니다."
드오리오는 손가락 관절을 꺾더니 방 안을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여기 워싱턴에서 어떤 변호사가 비슷한 짓을 한 적이 있소. 한 7,8년 된 일이지, 아마. 증거 개
지 자료를 한 무더기 가지고 퇴사를 했는데, 그게 묘하게도 다른 회사에 가 있더란 거지. 덕분에
그자는 그 회사에서 좋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고. 그런데 그 작자 이름이 갑자기 생각이 안 나
는군."
"마코백입니다. 브래드 마코백."
내가 말했다.
"그래. 그자는 어떻게 되었더라?"
"2년 자격 정지를 당했습니다."
"드레이크 & 스위니도 당신에게서 그걸 원하오."
모디카이가 나섰다.
"절대 안 됩니다, 판사님. 2년 자격 정지에는 절대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럼 얼마면 동의하겠소?"
"최고 6개월입니다. 이것은 협상할 수 없습니다. 보십시오, 판사님, 저자들은 지금 완전히 겁을
집어먹고 있습니다. 판사님도 알지 않습니까. 저쪽은 겁을 먹고 있고, 우리는 두려울 게 없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어떤 것에든 합의를 해준단 말입니까? 차라리 배심을 불러 재판을 열겠습니
다."
"그런 일은 없을 거요."
판사는 내 앞으로 걸어오더니, 내 눈을 들여다보며 말을 이었다.
"6개월 자격 정지면 동의할 수 있겠소?"
"네. 하지만 저쪽에서 돈을 주겠다고 약속해야 합니다."
판사는 모디카이에게 물었다.
"얼마나?"
"5백만입니다. 배심한테 이야기를 하면 그것보다 더 얻어낼 수 있습니다."
드오리오는 창가로 가더니 생각에 잠겨 턱을 긁적거렸다.
"나도 배심이 그 정도는 줄 거라고 생각하오."
그는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모디카이가 말을 받았다.
"나는 2천만은 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돈은 누가 갖는 거요?"
판사가 물었다.
"그게 문제입니다. 돈의 분배는 악몽 같은 일이 되겠지요."
모디카이가 인정했다.
"변호사 수임료는 얼마가 가는 거요?"
"20퍼센트입니다. 그 가운데 반은 뉴욕에 있는 신탁으로 가지요."
판사는 갑자기 몸을 휙 돌리더니, 다시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두 손은 머리 뒤에 깍지를 끼고
있었다.
"6개월이면 가벼운 거요."
드오리오가 말했다.
"그게 우리가 동의할 수 있는 최고치입니다."
모디카이가 쏘아붙였다.
"알겠소. 피고측과 이야기해 보리다."
우리와 드오리오의 회의는 15분이 안 걸렸다. 그러나 피고측은 한 시간이 걸렸다. 돈을 내야 하
는 쪽은 그쪽이니까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우리는 북적거리는 로비의 벤치에 앉아 콜라를 마셨다. 의뢰인과 정의를 좇아 뛰어다니는 수많
은 변호사를 보며 둘 다 아무 말이 없었다.
복도를 걸었다. 이런저런 죄목으로 이제 곧 판사 앞에 서야 하는, 겁에 질린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모디카이는 아는 변호사 두어 명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대형 법률 회사 변호사들은 상급 법원에서 시간을 보내지 않으니까.
서기가 우리를 찾으러 왔다. 우리는 다시 법정으로 돌아갔다. 선수들이 모두 제자리에 앉아 있
었다. 긴장된 분위기였다. 드오리오는 흥분해 있었다. 아서 일행은 지친 표정이었다. 우리는 자리
에 앉아, 판사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그린 씨, 방금 피고측 변호사들과 이야기를 했소. 그들이 제시할 수 있는 최대한은 이렇소. 배
상액 3백만, 브록 씨의 자격 정지 1년."
모디카이는 바로 튀어일어났다.
"그럼 지금 시간 낭비를 하고 있는 거로군요."
모디카이는 서류가방을 집어들었다. 나도 얼른 일어나 그 뒤를 따랐다. 모디카이가 말을 이었
다.
"실례합니다, 재판장님. 다른 볼일이 있어서요."
우리는 통로를 향해 걸어갔다.
"잘 가시오."
판사가 좌절감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서둘러 법정을 나왔다.
38
차문을 여는데 내 호주머니에 들어 있는 휴대 전화의 벨이 시끄럽게 울어댔다. 드오리오 판사
였다.
"네, 판사님, 5분 후면 도착할 수 있습니다."
내 말을 듣자 모디카이는 웃음을 터뜨렸다.
도착하는 데는 10분이 걸렸다. 1층의 화장실에도 들르고, 천천히 걷고, 엘리베이터가 아니라 계
단을 이용하였다. 드오리오가 피고측을 야단칠 수 있는 시간을 가능한 한 많이 주자는 의도였다.
법정에 들어갔을 때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리버오크스의 세 변호사 가운데 하나인 잭 볼링
이 재킷을 벗고 소매를 걷어붙인 채, 드레이크 & 스위니의 변호사들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는 모
습이었다. 설마 그들의 따귀를 때리지야 않았겠지만, 그는 얼마든지 그럴 용의가 있고 또 그럴 능
력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가만있다가는 모디카이가 꿈꾸고 있는 엄청난 평결이 세 피고측 모두에게 떨어질 판이었다. 리
버오크스는 합의를 위한 회의 과정에서 겁을 집어먹은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리버오크스는 드레
이크 & 스위니를 협박했을 것이고, 어쩌면 배상액의 일부를 대겠다고 결심을 했을 수도 있었다.
우리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배심석을 피해 모디카이 옆에 앉았다. 월머 펠런은 떠나고 없었다.
판사가 말했다.
"이제 비슷해지고 있소."
"우리는 앞서의 제안을 철회할까 하는 생각을 하는 중입니다."
모디카이가 좀더 무시무시하게 으르렁거렸다. 우리끼리 그런 이야기를 해본 적은 없었다. 판사
와 다른 변호사들도 그 생각은 미처 해보지 못했다. 그들은 고개를 휙 젖히더니 서로 얼굴을 마
주보았다.
드오리오가 말했다.
"진전하시오."
"진지하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판사님. 이 법정에 앉아 있으면 앉아 있을수록, 이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배심에게 밝힐 필요가 있다는 확신이 강해집니다. 브록 씨에 대한 형사 고발 건을 마음대
로 하라고 하십시오. 그건 대수롭지 않은 일입니다. 그들은 파일을 돌려 받았습니다. 브록 씨는
전과가 없습니다. 검찰이 마약상들과 살인자들 때문에 과중한 부담에 허덕인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입니다. 따라서 브록 씨를 기소한다는 것은 세상이 웃을 일입니다. 그는 감옥에 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변호사 자격에 대한 고발 건은, 그대로 진행하라고 하십시오. 나도 브레이든 챈
스를 고발할 것이고, 이 지저분한 일에 관계한 다른 변호사들 몇 명을 더 고발할지도 모릅니다.
어릴 때처럼 침 뱉기 시합을 해보자 이겁니다."
모디카이가 아서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당신도 신문사로 달려가 보고, 우리도 신문사로 달려가 봅시다."
14번가 법률 상담소는 그들에 대해서 신문에 어떻게 나든 전혀 개의치 않았다. 갠트리는 어떤
지 모르지만 어쨌든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리버오크스는 나쁜 평판에도 불구하고 돈은 계속
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드레이크 & 스위니는 시장에 내다 팔 것이 그들의 평판밖에 없었다.
모디카이는 느닷없이 공격적인 발언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완전히 경악한 표정이었다.
드오리오가 물었다.
"끝났소?"
"그런 것 같습니다."
"좋소. 제시액은 4백만으로 올라갔소."
"4백을 낼 수 있으면 5백도 낼 수 있습니다."
모디카이는 다시 뒤쪽의 드레이크 & 스위니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 피고들은 작년에 의뢰인들에게 거의 7백만을 청구했습니다."
그는 그 숫자가 방 안에 메아리치기를 기다렸다가 말을 이었다.
"작년 한 해 동안에만 7백만이란 말입니다."
이어 리버오크스를 가리켰다.
"그리고 이 피고는 3억 5천만 달러의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재판을 열어 주십시오."
모디카이가 입을 다문 것으로 보이자, 드오리오가 다시 물었다.
"끝났소?"
"아닙니다, 재판장님."
모디카이는 즉시 놀라울 정도로 차분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하죠. 2백만은 즉시 주셔야 합니다. 백만은 우리 수임료이고, 백만은 피해자의 상속인
들에게 주는 것입니다. 즉 일 년에 30만에다가 합당한 이자를 보태서 말입니다. 이 피고들은 일
년에 30만 정도는 줄 여유가 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임대료를 올려받거나 시간당 수임료를 올
려받거나 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피고들은 방법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합의금을 장기 분납한다는 말은 말이 되는 이야기였다. 상속인들이 불안정한 상태라는 점, 그리
고 상속인들이 누구인지 아직 다 밝혀지지도 않았다는 점 때문에 법정에서 돈이 분배되는 것을
주의깊게 지켜봐 줄 필요가 있었다.
모디카이의 마지막 맹공격은 정말 뛰어난 것이었다. 드레이크 & 스위니 일당은 눈에 띄게 안도
하는 모습이었다. 모디카이는 그들에게 빠져나갈 구멍을 준 것이다.
리버오크스의 변호사 잭 볼리는 그들과 머리를 맞댔다. 갠트리의 변호사들은 지켜보며 귀를 기
울였지만, 그들의 의뢰인만큼이나 지루한 표정이었다.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아서는 발표를 하고 나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브록 씨에 관한 우리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일년 자격 정지입니다. 아니면 합의
도 없습니다."
갑자기 아서가 다시 싫어졌다. 나는 그들의 마지막 볼모인 셈이었다. 그들은 조금이나마 남아
있는 체면을 살리기 위하여 짜낼 수 있는 모든 피를 짜내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가엾은 아서는 힘을 가진 입장에서 협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필사적이었
으며, 또 사람들 눈에도 그렇게 보였다.
"그게 무슨 차이가 있소?!"
모디카이는 고함을 버럭 지르고는 말을 이었다.
"브록 씨는 자신의 면허를 반납하는 수모를 감수하겠다고 동의했잖소. 그런데 그 기간을 6개월
더 늘이는 것이 당신에게 뭘 준다는거요? 이건 말도 안 돼!"
리버오크스의 두 임원은 이제 참을 만큼 참았다. 원래가 법정을 두려워한 데다가, 모디카이로부
터 세 시간 동안 닦달을 당하고 난 뒤라, 그 두려움은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그들은 두 주간의
재판이 벌어지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들은 좌절감에 빠져 고개를 저으며, 서로 열심히 소
근거렸다.
심지어 틸먼 갠트리가 아서가 별것 아닌 걸 가지고 트집을 잡는 태도에 짜증을 냈다. 이제 간
신히 합의에 이르렀는데, 염병할 어서 좀 끝내 버리자!
방금 모디카이는 '그게 무슨 차이가 있소?' 하고 고함을 질렀다. 그 말이 옳았다. 사실 차이가
없었다. 특히 나 같은 거리의 변호사한테는. 나야 잠시 자격 정지를 당한다 해도 일이나 보수나
지위에 아무런 변화가 오지 않는 사람이었다.
나는 일어서서 매우 정중하게 말했다.
"재판장님, 차이가 나는 부분을 나누어 갖도록 하죠. 우리는 6개월을 제시했고, 저쪽에서는 12
개월을 제시했습니다. 나는 9개월에 동의할 수 있겠습니다."
나는 그 말을 하면서 배리 누조를 보았다. 그는 나에게 슬쩍 웃음을 지어 보였다.
만일 아서가 그 시점에서 입을 열었더라면 그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목졸림이라도 당했을 것이
다. 모두가 안도했다. 드오리오도.
"그럼 합의가 된 거요."
드오리오는 피고측의 확인을 기다리지도 않고 그렇게 말해 버렸다.
놀라울 정도로 능률적인 서기가 판사석 앞에서 워드 프로세서를 토닥이더니, 몇 분이 안 되어
한 쪽짜리 합의 각서를 만들어 냈다. 우리는 얼른 서명을 하고 법정을 떠났다.
사무소로 돌아와서도 샴페인을 터뜨리지는 않았다. 소피아는 늘 하던 일을 하고 있었다. 에이브
러험은 뉴욕에서 열리는 노숙자 회의에 참석하러 가고 없었다.
미국에서 50만 달러의 수임료를 받고도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는 법률 사무소가 있다면, 그것
은 14번가 법룰 상담소였다. 모디카이는 새 컴퓨터와 전화, 그리고 가능하다면 새 난방 장치를 원
하는 것 같았다. 돈의 많은 부분은 은행에 묻혀 이자만 토해 내며, 힘든 시절에 대비해 잠을 자고
있을 터였다. 그것은 우리의 얼마 안 되는 보수를 몇년간 보장해 줄 수 있는 좋은 안전 장치였다.
모디카이가 나머지 50만을 코언 신탁에 보내야 한다는 현실에 분노를 느꼈는지 어땠는지 몰라
도, 어쨌든 그것을 잘 감추고 있었다. 모디카이는 자기가 어쩔 수 없는 일을 가지고 걱정하는 사
람이 아니었다. 이길 수 있는 싸움들만으로도 두 손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버튼 합의 건을 정리하려면 적어도 아홉 달 동안 힘든 노동을 해야 할 터였다. 나는 앞으로 그
일에 많은 시간을 쏟아야 했다. 상속인을 결정하고, 찾아 내고, 그들이 횡재를 했다는 것을 통보
하고, 좋아서 어쩔 줄 모를 때 상대를 해주어야 했다. 일이 복잡해질 것 같았다. 예를 들어, DNA
검사를 통해 친자 확인을 해야 했다. 그러려면 키토 스파이어스의 시신과 테메코, 알론소, 단테의
시신을 다시 꺼내야 했다. 그가 실제로 그들의 아버지라면, 그는 먼저 죽은 자식들로부터 상속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 역시 죽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그의 상속인을 찾아 그가 받을 돈을 주어야
한다.
론타의 어머니와 형제들도 엄청난 골칫거리였다. 그들은 지금도 거리에 아는 사람들이 있으니,
머잖아 합의 소식을 듣게 될 터였다. 그리고 몇 년 후 가석방이 되어 나오면, 자기 몫을 찾으려고
무섭게 달려들 것이 틀림없었다.
모디카이가 특별히 관심을 가지는 두 개의 프로젝트가 있었다. 첫째는 전에 상담소에서 조직을
했다가 연방 지원금이 사라지면서 어영부영 끝나 버렸던 변호사 무료 봉사 프로그램이었다. 그
프로그램이 절정기에 이르렀을 때는 백 명의 변호사들이 노숙자들을 돕기 위해 일주일에 몇 시간
씩 자원 봉사를 했다. 모디카이는 나에게 그 프로그램을 부활시키는 문제를 생각해 보라고 했다.
나도 그 구상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고, 기
존 법조계에 발을 넓힐 수 있었고, 기금을 모금할 기초도 확대할 수 있었다.
방금 말한 기금 모금이 두 번째 프로젝트였다. 소피아와 에이브러험은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돈을 요구할 능력이 없었다. 모디카이는 입만 놀리면 사람들이 셔츠라도 벗어 주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었으나, 구걸을 싫어했다. 그러나 나는 전문 직업인들과 섞이고 어울리며, 그들이 매년 돈
을 내도록 설득할 수 있는 젊고 똑똑한 워스프 출신의 스타였다.
"계획만 좋으면 1년에 20만은 모금할 수 있소."
모디카이가 말했다.
"그걸로 뭘 하게요?"
"비서를 두 명 고용하고, 사무직원을 둘 고용하고, 변호사도 하나쯤 고용하게."
우리는 소피아가 퇴근한 뒤 앞 사무실에 앉아 어둠이 짙어지는 바깥을 살피고 있었다. 모디카
이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모디카이는 비좁은 상담실에서 일곱 명의 변호사들이 몸을 부딪혀 가
며 일하게 될 수 있는 시절이 다시 오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매일이 혼돈이겠지만, 그럼에도 거리
의 이 작은 법률 회사도 하나의 세력이 될 수 있었다. 수천 명의 노숙자들을 도울 수 있었다. 정
치가와 관료들도 상담소의 이야기라면 귀를 기울이게 될 것이다. 상담소의 목소리는 어디 가나
들리는 큰 목소리가 될 수 있었다.
모디카이가 말했다.
"우리는 5년 동안 몰락해 왔소. 그리고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은 고통을 겪고 있소. 지금이 흐름
을 바꿀 수 있는 황금과 같은 기회요."
그 도전은 나에게 맡겨진 일이었다. 나는 새로 수혈된 피였으며, 상담소에 새로 활력을 불어 넣
어 다음 수준으로 이끌고 갈 수 있는 새로운 인재였다. 나는 수십 명의 새로운 자원 봉사자들로
상담소를 밝고 환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기금 모금 시스템을 가동하여 우리도 남들과 같은 조건
에서 변호사 노릇 좀 해볼 수 있는 조건을 만들 생각이었다. 상담소를 확장하여, 그곳을 재능 있
는 변호사들로 꽉 채울 생각이었다.
노숙자들이 우리를 찾아오는 한, 그들의 권리를 끝까지 보호해줄 생각이었다. 우리의 목소리를
통하여 그들의 목소리가 세상에 울려퍼지게 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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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아침 일찍 내 책상에 앉아 변호사 겸 사회사업가로 즐겁게 내 본분을 다하고 있을 때
드레이크 & 스위니의 대표자인 아서 제이컵스가 갑자기 사무실 문간에 나타났다. 나는 유쾌하면
서도 조심스럽게 그를 맞이하였다. 그는 밤색 의자에 앉았다. 커피는 마시지 않겠다고 했다. 그저
잠시 이야기나 하다 가고 싶다고 했다.
아서는 괴로워하고 있었다. 나는 최면에 걸린 듯 노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지난 몇 주는 56년에 달하는 그의 변호사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 합의에 이르렀다는
사실도 위로가 되지 못했다. 회사는 길에서 튀어나오는 곳을 만나 약간 덜컹거리다가 다시 제 갈
길을 가고 있었지만, 아서는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그의 파트너 하나가 끔찍한 불법 행위를
저질렀으며, 그 결과 무고한 사람들이 죽었다. 드레이크 & 스위니는 합의금을 얼마 내든 간에 론
타와 그녀의 네 자녀의 죽음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아서는 자신이 그것을 극복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나는 너무 놀라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냥 듣고만 있었다. 모디카이도 함께 그의 이야기
를 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서는 괴로워하고 있었다. 오래지 않아 나는 그에게 안쓰러움을 느끼게 되었다. 그의 나이 여
든이었고 2년 정도 뒤면 은퇴를 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제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돈을 사냥하는데도 싫증이 났다.
"나는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소."
그러나 나는 아서가 내 장례식에도 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서는 우리의 법률 상담소에 매력을 느꼈다. 나는 그에게 내가 이곳을 우연히 발견하게 된 계
기를 이야기해 주었다. 이게 생긴지 얼마나 되었소? 아서가 물었다. 여기서 몇 사람이나 일하고
있소? 자금원은 어디요? 어떻게 운영하고 있소?
그는 나에게 문을 열어주었고 나는 그 안으로 들어갔다. 어차피 나는 아홉 달 동안 변호사 노
릇을 할 수 가 없었기 때문에, 상담소는 나에게 시내에 있는 대형 법률 회사의 변호사들을 이용
하여 새로운 무료 자원봉사 프로그램을 실시하는 일을 맡으라는 결정을 내려놓고 있었다. 공교롭
게도 아서의 회사가 가장 큰 법률 회사였기 때문에, 나는 그렇지 않아도 거기서부터 시작할까 하
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원봉사자들은 내 감독하에서 일 주일에 몇 시간만 일하면 될 터였다.
그러면 우리는 수천 명의 노숙자들을 지원 할 수 있었다.
자세히는 몰랐지만, 아서도 그런 프로그램들에 대해 알고 있었다. 나는 20년 동안 무료 봉사는
한 적이 없소. 아서는 슬픈 표정으로 고백했다. 보통 젊은 어소시에이터들에게 해당되는 일이지.
드레이크 & 스위니에서 그런 일이 얼마나 잘 진행되는지는 내가 잘 알고 있었다.
어쨌든 아서는 그 구상이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이야기를 할수록 프로그램 규모는 점점 커졌
다. 잠시 후 아서는 그의 워싱턴 사무소의 변호사 4백 명 전원에게 일 주일에 몇 시간씩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을 의무화하자는 문제를 공개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것이 썩 괜찮아 보인
다는 것이었다.
"변호사 4백 명을 다룰 수 있소?"
아서가 물었다.
"물론입니다."
나는 그런 일을 어떻게 시작하는지도 모르면서 말했다. 그러나 나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나는 덧붙였다.
"물론 도움이 좀 필요하겠지만 말입니다."
"어떤 도움 말이오?"
"드레이크&스위니 내부에 상근으로 무료 봉사를 조정하는 일을 맡는 사람이 있으면 어떻겠습
니까? 그런 사람이 있다면 노숙자법의 모든 문제에 대해 나와 긴밀히 협조할 수 있을 겁니다. 솔
직히, 4백 명의 자원봉사자가 있을 경우에는, 그 회사 쪽에도 누군가가 있어야 합니다."
아서는 그 문제를 곰곰이 생각했다. 모든 것이 새로운 것이었고, 모든 것이 좋게 들렸다. 나는
더 밀어붙였다.
"내가 적당한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꼭 변호사일 필요는 없는 것 아닙니까. 좋은 사무직원이면
됩니다."
"누군가?"
"헥터 팔머라는 이름을 들어 보셨습니까?"
"들어 본 것 같군."
"지금은 시카고 지사에 가 있습니다만, 원래 워싱턴 출신입니다. 브레이든 챈스 밑에서 일을 하
다가 물을 먹었죠."
아서는 눈을 가늘게 뜨고 기억을 해내려고 애를 썼다. 아서가 얼마나 알고 있는지 몰랐으나, 그
가 거짓말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영혼을 세척하는 작업을 철저히 즐기고 있었으니까.
"물을 먹어?"
아서가 되물었다.
"네, 물을 먹었죠. 그는 3주 전만 해도 베데즈더에 살고 있었는데, 갑자기 한밤중에 이사를 했
습니다. 느닷없이 시카고로 전근을 가게 된 거죠. 그는 퇴거 사건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었습
니다. 아마 챈스가 그를 감추고 싶어했던 것 같습니다."
나는 조심하고 있었다. 헥터와의 비밀 협약을 어길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아서가 평소처럼 행간을 읽어냈기 빼문이다.
"그가 워싱턴 출신이라고?"
"네, 그리고 그의 부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가 넷이죠. 틀림없이 돌아오고 싶어할 겁니다."
"그 친구가 노숙자들을 돕는데 관심이 가지고 있나?"
"직접 물어보시지 그러십니까."
"그렇게 하겠네. 아주 좋은 생각이야."
만일 아서가 헥터 팔머를 워싱턴으로 불러 새롭게 관심을 가지게 된 노숙자 법과 관련된 사항
들을 관장할 마음이 있다면, 그 일은 일 주일 내로 처리될 수 있었다.
우리 눈앞에서 프로그램은 형태를 잡아갔다. 드레이크 & 스위니의 모든 변호사는 일 주일에 한
사건 씩 처리할 의무가 있다. 젊은 어소시에이트들은 내 감독하에 자원봉사를 하기로 했고, 일단
일이 드레이크 & 스위니로 사건들이 도착하면 헥터가 변호사들에게 할당하기로 했다. 어떤 사건
들은 15분이면 끝나기도 하고, 어떤 사건은 한 달에 몇 시간씩 걸리기도 하죠. 나는 아서에게 설
명했다. 문제 없네. 아서는 대답했다.
드레이크 & 스위니의 4백 명의 변호사들이 갑자기 거리의 사람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눈
에 불을 켜고 달려들 거라는 생각이 들자, 정치가와 관료들과 하급 공무원들이 안됐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아서는 거의 두 시간을 머물다 갔다. 그는 내 시간을 많이 빼앗았다는 것을 깨닫고 사과했다.
어쨌든 그는 아주 좋은 기분으로 떠났다. 그는 아주 좋은 기분으로 떠났다. 그는 새로운 목적을
가지고 곧장 사무실로 갔다. 그는 이제 사명감에 불타는 사람이었다. 나는 차까지 배웅을 하고,
모디카이에게 이야기를 하러 뛰어갔다.
미건의 숙부는 메릴랜드의 폔윅섬 근처 델러웨어 해안에 집을 한 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그
집이 예스러운 낡은 집이라고 했다. 이층에 바다에 닿을 듯한 넓은 포치가 있고, 침실은 세 개였
다. 주말에 잠시 다녀오기에 아주 좋은 곳이라고 했다. 3월 중순이었다. 여전히 추었다. 하지만 난
로가에 앉아 책을 읽을 수는 있잖아요.
미건은 침실이 세 개라는 사실을 약간 강조했다. 복잡한 문제 없이, 각자가 충분한 사생활의 공
간을 가질 여유가 있다는 듯이었다. 그녀는 내가 첫 결혼으로부터 비틀거리며 물러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두 주일간 조심스럽게 연애를 시도한 끝에 우리 둘 다 느리지만 진
전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침 실 세 개를 언급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우리는 금요일 오후에 워싱턴을 떠났다. 내가 운전을 했다. 미건은 지도를 보았다. 그리고 루비
는 뒷좌석에서 오트밀 쿠키를 야금거리고 있었다. 도시를 벗어나, 거리를 벗어나, 해변에서, 깨끗
하게 맨정신으로 며칠을 보낸다는 생각에 몹시 흥분해 있었다.
루비는 목요일 밤을 깨끗하게 보냈다. 우리와 함께 델러웨어에 사흘밤을 있는다면 다 합쳐서
나흘이 될 터였다. 월요일 오후에 우리는 루비를 이스터우드에 입원시킬 계획이었다. 이스터우드
는 이스트 캐피틀에서 조금 떨어진 자그마한 여성용 갱생 센터였다. 모디카이가 그곳에 있는 누
군가에게 강한 압력을 가한 덕분에, 루비는 적어도 90일 동안 따뜻한 침대가 있는 작은 방을 가
질 수 있게 되었다.
도시를 떠나기 전 루비는 나오미 센터에서 샤워를 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미건은 그녀의
옷가지와 가방을 샅샅이 뒤져, 마약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보통의 경우라면 그런 수색을 사
생활 침해라고 할 수 있었으나, 마약 중독자에게는 다른 규칙이 적용되었다. 우리는 어스름녁에
그 집에 도착하였다. 미건은 일 년에 한두 번 그곳을 이용했다. 열쇠는 현관의 바닥깔개 밑에 있
었다.
나에게는 아래층 침실이 할당되었다. 루비는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다른 침실 두 개는 위
층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건은 밤 동안에 루비 근처에 있고 싶어하였다.
토요일에는 비가 왔다. 바다 바람이 실린 차가운 소나기였다. 나는 혼자 앞쪽 포치로 나가, 두
툼한 담요를 덮고 그네의 흔들림에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꿈의 세계로 빠져들어 저 아래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현관 문이 닫히며 스크린 도어
가 문 뒤에서 쾅 소리를 냈다. 미건이 그네로 걸어왔다. 담요를 들어올리더니 내 옆으로 쑤시고
들어왔다. 나는 그녀를 꼭 안았다. 안 그러면 밑으로 떨어질 판이었기 때문이다.
미건은 아담하니 안기가 편했다.
"우리 의뢰인은 어디 있죠?"
내가 물었다.
"텔리비전을 보고 있었다."
질풍 때문에 우리 얼굴로 안개가 밀려왔다. 우리는 더 꼭 겨안았다. 그네에 달린 사슬이 더 큰
소리로 삐걱이다가, 우리가 움직이지 않자 그 소리도 희미해졌다. 우리는 구름이 물 위에서 소용
돌이치며 솟구치는 것을 지켜보았다. 시간은 중요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해요?"
미건인 작은 소리로 물었다.
온갖 생각을 하기도 했고, 아무 생각을 안 하기도 했다. 도시로부터 벗어나니 처음으로 그곳을
돌아보고, 그곳을 이해해 보려고 노력할 수 있었다. 32일 전만 해도 나는 다른 사람과 결혼하여,
다른 아파트에 살면서, 다른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지금 안고 있는 여자와는 전혀 모르는 사이
였다. 어떻게 한 달 만에 인생이 이리 극적으로 바뀔 수가 있는가?
감히 미래는 생각해 볼 수가 없었다. 과거가 여전히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작가후기
나는 이 책을 쓰기 전까지는 노숙자들에 대해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물론 그들과 일을 하
는 사람들도 일지 못했다.
그러다가 워싱턴에서 '노숙자들을 위한 워싱턴 법률 상담소'를 알게 외었으며, 그곳 책임자인
패트리셔 퍼커를 만나게 되었다. 그녀와 그녀의 동료들-메리 & 루비, 스콧 맥닐리, 멜로디 웹 오
설리번-은 나에게 노숙자들의 세계를 소개해 주었다. 그들이 시간을 내주고 도와 준 데 큰 감사
를 드린다.
'노숙자와 빈곤에 대한 전국 법률 센터'의 머리어 포스카리니스, '레이철 여성 센터'의 윌리 데
이 모리스, '여성의 새로운 노력'의 메리 포핏, '베이커 & 호스테틀러'의 브루스 카지노와 브루스
샌퍼드에게도 감사를 드린다.
이번에도 글다운 글이 될 수 있도록 웰 덴튼이 원고를 읽고 고칠 곳을 제안해 주었다. 조내선
해밀턴은 조사를 맡아 주었다. 감사드린다.
그리고 진짜 모디카이 그린들에게, 참호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그들에게 조용한 헌사를 보낸
다.
존 그리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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