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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호] 상도 5

by Casey,Riley 2023. 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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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상옥.
  그는 1855년 을묘년에 죽었다. 그가 태어난 것은 정조 3년이었으니 
1779년이었다. 그는 77세의 나이로 죽었으므로 비교적 장수를 누린 셈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임상옥의 죽음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바가 없으나 송이가 순교하여 죽은 
그해 여름이 지난 가을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한낮에 짧은 낮잠 속에서 황새를 타고 너울너울 천상으로 날아오르던 
송이의 모습을 본 이후부터 임상옥의 몸은 급속도로 쇠약해졌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 이후 그는 거동도 불편하여 좋아하던 채소를 가꾸는 밭일도 나갈 수 
없어 대부분 누워 지냈는데 마침내 선선한 가을이 되었을 무렵의 어느 날, 
임상옥은 하인들에게 대야에 물을 떠오라고 일렀다.
  하인들이 대야에 물을 떠오자 그는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혼자서 손을 
씻고 얼굴을 씻었다. 그리고 나서 거울을 가져오라고 말했다. 하인들이 
거울을 가져오자 임상옥은 물끄러미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이보시게, 가포."
  임상옥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쳐다보면서 혼잣말을 하였다. 이룰 
지켜보던 사람들은 모두 임상옥이 헛것을 본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임상옥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혼잣말을 했던 것이다.
  "그 동안 수고가 참 많으셨네."
  임상옥은 평생을 빌려 쓰다 이제는 껍질로 남기고 떠나야 할 자신의 
모습을 향해 혼잣말을 한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 임상옥은 박종일을 시켜 
붓과 벼루 그리고 종이를 가져 오라 말하였다.
  박종일이 종이를 가져오자 임상옥은 몸을 일으켜서 붓에 먹을 듬뿍 묻힌 
후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하여 문장을 써 내리기 시작하였다.

  사사생생생부사
  적금후사우하심
  기위한명오일신
  탈인괴뢰상창창

  임상옥이 남긴 생애 마지막 게송의 뜻은 다음과 같다.

  죽고 죽으며 나고 났다가 다시 죽나니,
  금을 쌓으며 죽음을 기다림 어찌 그리 미련한고,
  부질없는 이름 위해 얼마나 이 한 몸을 그르쳤던가,
  인간의 껍질을 벗고 맑은 하늘로 오른다.

  임종게.
  한평생 수도를 하였던 고승들이 죽음을 앞두고 노래하는 마지막 게송. 
그런 의미에서 임상옥이 쓴 이 최후의 사는 임상옥이 남긴 임종게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임상옥은 한평생 상인으로서 대성을 거둬 조선 제일의 거부가 되었으나 
'금을 쌓으며 죽음을 기다림' 그 자체가 어리석음을 깨달았으며, 또한 평생 
동안 노력하여 '부질없는 이름'을 얻는 것은 성공하였으나 그것으로 인하여 
오히려 자기 몸 하나를 그르쳤음을 깨달았던 수도자였던 것이다.
  그는 마침내 석숭 큰스님으로부터 점지 받았던 화두들을 타파함으로써 
상불을 이루었던 상업의 부처였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는 박종일에게 몇 마디를 남겼는데 그것은 임상옥의 
유언이었다.
  임상옥이 박종일에게 남긴 유언의 내용은 오늘날 정확히 남아 전하지 
않고 있다. 다만 자신의 유산과 관계된 재산을 자손들에게 물려주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임상옥은 '천하의 권세도 십 년이 가는 것은 없고, 열흘 이상 붉은 꽃도 
없다'는 진리를 꿰뚫어 보고 있던 철인이었다. 그 어떤 부자도 3대 이상 
계속되지 못함을 임상옥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3대 이상 부를 세습하는 가문은 전무후무한 
것이다. 그것은 임상옥이 말하였던 '재물은 평등하기가 물과 같다'라는 
철학과 일치되는 것이다. 그 어떤 재물, 그 어떤 재산, 그 어떤 부도 3대 
이상 세습되지 못함은 하늘의 도리인 것이다.
  부는 물이며, 이는 가질 수도 소유할 수도 없는 흐름인 것이다.
  그러므로 자손들에게 재산을 몰려줌은 자손들을 무능력하게 만드는 
일이며 자손들의 몸을 베는 칼인 것이다.
  그래서 임상옥은 평소 자손들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것을 재산은 화의 
문이요, 유산은 몸을 베는 칼'이라며 경계하였던 것이다.
  임상옥이 몇 명의 자손을 낳았는가는 알려진 바 없다. 의주 읍지에 실린 
임상옥의 행장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오고 있다.
  '...임상옥은 그의 두 아우와 아들 하나가 일찍 죽었다.'
  임상옥의 두 아우가 일찍 죽었다는 것은 <가포집>의 서문에도 나오는 
사실이고, 아들 하나가 일찍 죽었다면 임상옥은 아마도 여러 명의 자손을 
두었음이 분명할 것이다.
  어쨌든 임상옥의 그 막대한 유산은 일체 후손에게 물려지지 않았다. 그 
증거로서 그의 행장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임상옥의 후손들은 재산을 오래 간직토록 하기 위해 토지를 여럿으로 
쪼개어 궁장토로 편입시켰다.'
  궁장토라 함은 비빈이나 왕자의 궁원에 속한 논과 밭으로 이 기록을 
보아서도 알 수 있듯이 임상옥의 그 막대한 토지는 후손들의 소유가 
아니라 역이나 주둔군에 속하였던 역둔토처럼 국가의 소유로 귀속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는 임상옥의 후손들이 재산을 오래 간직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의 부를 철저히 사회에 환원시키고 일체의 유산을 물려주지 
않으려는 임상옥의 의지 때문이었던 것이다.
  이 거대한 임상옥의 토지는 일제 때에는 서북 지방의 유명한 
'불이농장'이란 이름으로 전해져왔다.
  아마도 임상옥과 같은 동향 출신인 문일명의 취재로 보이는 1923년 
무렵의 의주 지방의 한 답사기에는 다음과 같이 표현되고 있다.
  '불이농장의 일망무제한 곡식 풍경은 끝이 없었다.'
  불이농장이라면 평북 용천군의 벌판을 다 덮은 광대한 농토였다. 
1926년의 잡지에도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소작쟁의의 불길은 남선으로부터 일기 시작하여 이제는 서선지방에까지 
뻗쳐 왔다. 재작년 겨울부터 작년 봄이 지나도록 문제가 되었던 소작인의 
불이농장의 쟁의는 쌍방의 양보로 무사히 해결되었다....'
  이로써 임상옥이 남겼던 거대한 토지는 최소한 1926년까지는 
명목상으로나마 아직도 남아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의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일제시대 때 일본인의 
손으로 넘어간 것으로 추측할 뿐이니 과연 임상옥이 꿰뚫어 본 대로 그의 
그 불세출의 거재도 3대 이상 계속되지 못하고 흔적도 없이 깨끗하게 무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어쨌든 임상옥은 그날 밤 숨을 거두었다.
  아침 일찍 하인이 임상옥의 방 앞에서 문안인사를 올렸으나 방안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비록 몸은 쇠약하였으나 아침마다 하인들이 
문안인사를 올리면 큰소리로 화답을 하던 임상옥이었던 것이다.
  기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으므로 뭔가 불안해진 하인은 그 길로 뛰어가 
박종일을 불러왔다.
  박종일은 단숨에 달려와 임상옥의 침소로 들어가 보았다. 임상옥은 
자리에 누워 있었는데 너무나 평안하여 마치 갚은 잠에 빠져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래서 박종일은 몇 번을 흔들어 보다가 무심코 손을 
만져 보았다. 손에는 아직도 온기가 남아 있었지만 서서히 식어가고 
있었다.
  그 손에는 막 부쳐다 만 것처럼 쥘부채 하나가 들려 있었다. 박종일은 
그 부채가 무엇인가를 잘 알고 있었다.
  임상옥은 자신이 이장했던 아버지 임봉핵의 무덤 옆에 묻혔다. 일찍이 
임상옥은 백마산성의 서쪽 삼봉산 아래 동북쪽 첫 번째 산기슭으로 
아버지의 무덤을 이장했다. 임상옥은 이 산기슭을 자신의 선조들이 묻힐 
선산으로 지정하였고 또한 언젠가는 자신이 묻힐 곳이라고 가묘까지 
조성해 두었던 것이다.
  임상옥은 자신이 만들었던 '몇 개의 서까래를 엮어 조석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선고의 묘소 아래 지은 사당' 앞 공터에, 자신이 노래하였던 시의 
한 구절처럼 시를 옮는 빈손의 가객으로 죽어 묻힌 것이다.
  공수래 공수거.
  불교에서 사람의 일생을 허무하게 이르는 사람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떠난다'는 말과 같이 임상옥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자신의 
임종게처럼 인간의 껍질을 벗고 맑은 하늘로 올라간 것이다.
  이제 막 테이프 커팅이 끝났는지 여기저기서 하객들의 박수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리고 귀빈들은 자신이 자른 테이프를 기념관측에 
넘겨주었다.
  마침내 기념관의 문이 열렸다. 초청된 사람들은 천천히 기념관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잔디밭 한구석에 서서 팔짱을 낀 채 김기섭 회장의 
흉상을 쳐다보고 있었다.
  1부 순서가 끝나면 잔디밭에서 간단하게 칵테일 파티가 열릴 
예정이었으므로 주최측에선 부지런히 잔디밭에 테이블을 마련하고 음식을 
진열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진토닉 한 잔을 들고 천천히 마시면서 어느 
정도 기념관의 전시장이 한가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자동차에 미친 '바퀴벌레' 김기섭의 흔적을 통해 그를 단순히 
입지전적인 인물로만 추모할 것이다 사람들은 다만 김기섭을 통해 '금을 
쌓는 영광'과 '화려한 명예'만이 인간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가치로 되새김할 것이다.
여기에 모인 정치가들과 재계 인사 문화인들과 언론인들, 사회의 각 
지도층 인사들은 임상옥이 남긴 최후의 임종게에서 노래한 '금을 쌓으며 
죽음을 기다림이 어찌 그리 미련하고'의 의미와 '부질없는 이름을 위해 
얼마나 이 한 몸을 그르쳤던가'의 의미를 깨닫기나 할 수 있을 것인가.
  어리석은 괴뢰들.
  여러 가지 이상야릇한 탈을 씌운 괴상한 인형의 꼭두각시. 밀짚으로 
만든 허수아비들. 그러한 탈을 쓴 꼭두각시와 허수아비들이 벌이고 있는 
가면무도회. 
  이것이야말로 가장행렬을 하면서 웃고 즐기는 사육제인 것이다.
  나는 천천히 걸어서 기념관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일층 로비 정면에는 
자전거 바퀴 하나가 전시되어 있었다. 그것은 자동차공장 안에 있었던 
김기섭 회장의 숙소 '계영당'에서 가져온 유물이었다. 그 자전거 바퀴 
앞에는 간단한 설명문이 붙어 있었다.
  '김기섭 회장이 최초로 만들었던 자전거의 바퀴'
  그 설명문은 너무나 많은 사연들을 생략하고 있었다. 나는 그 바퀴에 
숨겨진 에피소드를 잘 알고 있었다. 굴렁쇠를 굴리던 소년시절부터 
바퀴라면 환장을 했던 꿈꾸는 소년 김기섭은 자전거의 생명인 림의 비밀을 
풀기 위해 목숨을 걸고 일본으로 밀항까지 한다. 오사카에 있는 
기계공작소에 공원으로 취직한 김기섭은 자전거의 생명이 타이어를 끼우는 
외륜(外輪)인 림에 달려 있음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보다 완벽한 원일수록 보다 완벽한 바퀴임을 알게 된 김기섭은 그곳에서 
보다 완벽한 바퀴를 만들다가 손가락 하나마저 잃어버렸던 것이다.
  오른손 새끼손가락.
  김기섭 회장의 오른손 새끼손가락의 마디 하나는 부러져 있었다.
  그는 내게 말했었다.
  "내 오른손의 새끼손가락과 자전거의 바퀴 하나를 바꿔버렸지. 그러나 
난 전혀 아깝지 않았소. 보다 완벽한 림을 만들기 위해서라면 난 
새끼손가락은 물론 오른손 하나와도 맞바꿀 마음이 있었으니까. 아니, 그 
이상이었지. 오른손은 물론 내 목숨과도 맞바꿀 마음도 있었으니까."
  자신의 말대로 목숨과도 맞바꿀 집념 하나로 만든 자전거 바퀴. 국내에 
돌아와 만든 저 바퀴 하나로 김기섭은 '자전거 제작'의 선두주자로 성공을 
거두게 되는 것이다.
  자전거로 큰 성공을 거둔 김기섭은 다시 세 개의 바퀴를 가진 삼륜차에 
빠져버린다. 때마침 농촌 진흥의 정부시책과 맞물려 폭발적인 삼륜차의 
수요는 김기섭을 재계의 거물로 성장시켰으며, 김기섭은 마침내 네 개의 
바퀴를 가진 승용차에 미쳐버리는 것이다.
  이처럼 한 개의 바퀴를 가진 굴렁쇠에서 네 개의 바퀴를 가진 승용차에 
이르기까지 온 평생을 바퀴에 바친 김기섭. 자신의 최후마저도 21세기를 
겨냥하여 만든 밀레니엄 신차 '이카로스'를 직접 시운전하다가 독일의 
고속도로에서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은 김기섭. 그는 자신의 표현대로 
인간이라기보다는 한 마리의 벌레, 바퀴에 미친 바퀴벌레였던 것이다.
  일층은 세 개의 전시실로 나뉘어져 있었다. 제1전시실에는 비참하게 
죽을 때 그의 몸 속에 들어 있었던 피 묻은 지갑, 손목시계와 같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결코 비싼 시계라고 할 수 없는 평범한 시계는 
그의 비장한 죽음을 말하여 주듯 표면을 감싼 유리 부분이 날카롭게 
균열되어 있었다. 그러나 시계의 바늘부분은 파손되지 않고 시간을 정확히 
가리키고 있었다.
  '5시 52분'
  시계는 정확하게 3시 52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마도 시계는 김기섭 
회장의 차가 독일의 고속도로 위에서 목숨을 잃은 바로 그 시간의 
충격으로 멎어버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김기섭은 1999년 12월 24일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근처에 있는 
비스바덴의 고속도로 위에서 정확히 오후 3시 52분에 운전 부주의로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언덕 아래로 굴러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스피드광. 독일의 고속도로 위를 시속 250킬로미터로 달려가던 스피드광 
김기섭. 실제로 나는 김기섭 회장이 직접 운전하는 페라리 F355 
베를리네타를 타고 시속 250킬로미터로 독일의 고속도로를 달려 본 적이 
있었다.
  그때 김기섭 회장은 내게 이렇게 말하였었다.
  "이 차가 명차라구요. 천만에요. 이 차는 한마디로 똥차요. 이 차는 
여자로 말하면 한마디로 똥갈보요."
  또한 김기섭 회장은 내게 이렇게 말을 했었다. 
  "진정으로 내가 만들고 싶은 것은 이런 차가 아니라 세월이 흘러도 
한결같은 차, 언제 봐도 새것 같고 세월이 흐르면 다정한 친구 같은 차, 
그것이 바로 명차인 것이오."
  그것이 벌써 10년 전의 일인 것이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직후 1989년 
가을의 일이었으니 김기섭은 10년 전인 그때 내게 이렇게 말하였던 
것이다.
  "이 고속도로 위에서 우리가 만든 명차가 다가오는 21세기에 파도처럼 
넘치는 모습을 나는 보고 싶소. 현대인에게 차는 말입니다. 칭기즈칸이 전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말의 힘이었소. 21세기에 있어 전 
세계를 장악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현대인의 말, 자동차뿐인 것이오."
  과연 그러한가 10년 전 김기섭이 내게 희망찬 포부를 말했던 그대로 
그가 만든 명차 '이카로스'는 독일의 고속도로 위를 파도처럼 넘치게 
달리고 있는 것일까. 김기섭이 예언했던 그대로 현대인의 말 자동차를 
정복하기 위해서 전 세계의 자동차 시장은 개편되고 개혁되고 있는 
것일까.
  다른 전시실에는 김기섭의 소장품들이 따로 진열되어 있었다. 김기섭의 
숙소에 걸려 있던, 김정희가 임상옥을 위해 써준 휘호도 진열되어 있었고 
임상옥의 저서인 <가포집>도 유리장 안에 안치되어 있었다. 가장 구석진 
자리에 '계영배'도 진열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계영배를 설명하는 문장은 
오직 이렇게 간략하게 적혀 있을 뿐이었다.
  '임상옥의 소장품. 이름은 계영배라 부른다.'
  깨어진 술잔. 골동품적 가치로는 만원도 되지 않는 싸구려 술잔. 
사람들은 모두 이 깨어진 술잔에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몰려든 보도진과 하객들이 대부분 이층 로비에 운집해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김정희 최후의 걸작 '상업지도'가 이층에 전시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천문학적인 가격으로 감히 금액을 책정할 수 없는 김정희의 '상업지도'라 
할지라도 그 가치에 있어서는 이 깨어진 술잔 '계영배'를 능가하지는 못할 
것이다.
  당대의 명인 우명옥이 만들었던 계영배. 자신의 어리석었던 욕망과 헛된 
미망을 뉘우치고 혼신의 힘을 다하여 빚었던 신기.
  전설 속으로만 존재하였던 계영배가 이처럼 실제로 존재하고 있음을 저 
사람들은 눈치라도 채고 있을 것인가 우리나라가 낳은 최고의 거상 
임상옥을 태어나게 한 이 작은 술잔.
  인간의 진정한 욕망은 만족이 아니라 자족임을 임상옥에게 일깨워준 이 
작은 술잔. 그러나 그 술잔 앞에는 아무도 서 있지 않았다.
  현대인들에게 진실로 필요한 것은 자기 욕망의 분수를 가늠할 수 있는 
'계영배'인 것이다. 계영배는 우리나라가 낳은 최고의 무역왕 임상옥을 
완성시킨 유좌지기인 것이다.
  인간의 욕망인 명예도, 재물도, 권세도 가득 채우려 한다면 
엎질러져버리니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보다 못하다'는 진리를 임상옥에게 
깨우쳐준 '한 방망이'였던 것이다.
  또한 '계영배'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오늘 개관되는 여수기념관의 
주인공 김기섭을 탄생시킨 태반이기도 한 것이다.
  이 '계영배'의 깊은 뜻을 깨달을 수가 있다면.
  여기 모인 많은 사람들, 권세를 누리는 저 정치가들과 관료들, 재물을 
누리는 저 많은 재계인사들, 명예를 누리는 유명인사들과 문화인들, 그들의 
가슴속에 저 깨어진 계영배의 잔 하나씩 깃들어질 수 있다면.
  "아니, 여기서 뭘 하고 계십니까."
  물끄러미 진열장 속에 들어 있는 계영배를 바라보며 상념에 빠져 있던 
나를 누군가 말을 걸어 일깨웠다. 그는 한기철이었다.
  "한참을 찾아 다녔습니다. 도대체 어디에 계셨습니까."
  "천천히 기념관을 돌아보고 있었습니다."
  내가 대답하자 한기철은 내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면서 웃으며 
말하였다.
  "이렇게 회장님을 기리는 여수기념관이 차질 없이 개관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정 선생님 덕분입니다. 정 선생님이야말로 정말 일등공신 
아닙니까."
  "천만에요."
  나는 머리를 저었다.
  "실장님 때문에 오히려 제가 많은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행운아는 
바로 접니다."
  "이층에 걸린 추사의 작품은 보셨습니까."
  한기철은 다소 자랑스런 모습으로 손을 들어 이층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도 한시 빨리 국보로 
지정해야 한다고 난립니다. 추사의 유작이 저희 기념관의 자랑거리가 된 
셈이지요. 이 모든 일도 정 선생님 덕분입니다. 지난 여름 함께 동경으로 
건너가 후지스카의 집을 방문하였을 때 정 선생님이 단호하게 결정을 
내려주지 않으셨더라면 어쩌면 흐지부지되어 추사의 유작이 저희 기념관에 
전시되지 못했을 테니까요."
  "글쎄요."
  나는 얼버무리면서 웃었다. 그러자 한기철은 다시 바쁜 일로 돌아서려다 
말고 나를 보면서 다짐하여 말하였다.
  "절대로 그냥 가셔서는 안됩니다. 방명록에는 이름을 쓰셨죠. 행사가 
끝난 후 잔디밭에서 기념파티가 있으니까 거기서 다시 만나 한 잔 
나누지요. 절대로 그냥 가시지는 마세요."
  한기철은 자신을 부르러 온 부하 직원과 총총히 사라졌다.
  나는 전시실을 나와 이층으로 가는 계단을 천천히 오르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은 대부분 이층 로비에 모여 있었다. 아마도 그곳에 한기철이 
자랑삼아 말하였던 추사의 유작 '상업지도'가 전시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추사가 임상옥을 위해 '상업지도'를 그려준 것은 계축년, 그러니까 
1853년 봄이다. 임상옥이 1855년에 죽었으니 그가 죽기 2년 전의 일이었다. 
이때 추사 김정희는 67세의 노인이었다.
  비록 김정희는 임상옥보다 7년이나 연하였으나 말년에 추사가 봉은사에 
머무르고 있었을 때는 깊은 병중이었다. 이는 아직도 봉은사에 남아 있는 
추사 최후의 절필인 '판전'이라는 글씨를 보면 알 수 있다.
  추사가 운명하기 며칠 전에 썼다는 이 현판에는 다음과 같은 낙관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칠십노과병중작'
  이 낙관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추사가 임상옥을 위해 '상업지도'의 그림을 
그릴 때에도 깊은 병환에 시달리고 있었음을 미뤄 짐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추사는 임상옥이 죽은 다음해인 철종 7년 1856년 10월 10일 숨을 거두게 
되는데 이때 추사의 나이는 70세였던 것이다.
  그렇게 보면 추사가 남긴 최후의 유작은 바로 임상옥을 위해 그려준 
'상업지도'임에 틀림이 없는 것이다.
  나는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아직도 보도진들이 운집하여 사진을 찍고 
있었는지 여기저기서 플래시가 터지고 있었고 TV 카메라도 작동하고 
있었다. 전문가를 앞세워 인터뷰를 하고 있는지 눈부신 조명이 이층 
로비를 환히 밝히고 있었다.
  뉴스에 굶주린 사람들. 새로운 것, 보다 새로운 것, 보다 기발하고 보다 
신기한 것, 보다 특이하고 보다 센세이셔널한 것에 굶주린 사람들. 새로운 
것은 이미 접한 순간 낡아져버린다. 그리하여 또 다른 새롭고 특이하고 
신기함을 추구하는 사람들.
  성의 굶주림과 갈증은 도착을 낳지만 새로움에 대한 호기심과 갈증은 
미친 광기를 낳는다.
  나는 사람들 사이를 뚫고 그 그림 앞으로 다가가 보았다. 세로 
25센티미터, 가로 65센티미터 정도로 '세한도'와 거의 같은 크기의 
'상업지도'는 마찬가지로 긴 두루마리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지난 무더웠던 여름, 후지스카의 집에서 삼십 분도 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보았던 그 작품은 기념관에 전시되어 안착했기 때문인지 한눈에도 
격조 높은 향기가 뿜어 나오고 있었다. 삼십 분의 시간이 허락되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작품을 감상한 시간은 십여 분도 채 못되었을 것이다.
  서두르고 쫓기면서 보던 '상업지도'의 그림이 그러나 저곳에 착좌하고 
있는 것이다.
  취재들이 끝났는지 많은 보도진들이 송고하기 위해서 다투어 빠져나가고 
있어 빈 공간이 생겼다. 나는 그 공간을 뚫고 그림 앞으로 나아갔다. 
  임상옥을 위해서 그려준 추사 최후의 유작 '상업지도'는 과연 걸작 중의 
걸작이었다.
  멀리 낮은 산자락이 솟아 있고 앞으로 펼쳐져 있는 전원에서 채소를 
가꾸고 있는 노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전원 한옆으로는 강물이 
흘러가고 있었는데, 피 한 방울 아끼듯이 먹을 아끼고 사물의 선을 극도로 
생략하는 삽필의 필법으로 쥐어짜듯 그림을 그렸으므로 어느 것이 
사람이고 어느 것이 자연인지 쉽게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단순해서 몇 
가닥의 선으로 이루어진 추상화처럼 보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 전체에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깊은 격조가 
넘쳐흐르고 있는 것이었다.
  '상업지도'
  나는 그림의 맨 오른편에 씌어진 화제를 바라보았다.
  '가포시상'
  그리고 정원에서 채소를 가꾸는 노인, 즉 임상옥을 주인공으로 하는 
그림 뒤에는 제발이 덧붙여져 있었다.
  지난번 동경에서 처음으로 보았을 때는 시간이 짧아 미처 음독조차 
해보지 못하였던, 김정희가 남긴 최후의 문장이었다.
  나는 그 발문을 읽기 시작하였다.

  '상업의 길'
  일찍이 태사공은 <사기>에서 '못이 깊으면 고기가 그곳에서 생겨나고 
산이 깊으면 짐승이 그곳으로 달려가며 사람이 부유하면 인의가 
부차적으로 따라온다'고 말하였다. 이는 옳은 말이다. 그러나 오직 
부유하기 때문에 인의가 따라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람의 부보다는 
마땅히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인도가 있어야만 인의가 따라오는 것이다. 
이를 일컬어 '상업의 길'이라고 부를 만하다.
  가포는 평생 부를 모아 마침내 조선 팔도에서는 그 누구도 당할 수 없는 
거부가 되었다. 그러나 가포는 일찍이 공자가 말하였던 대로 '상업이란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의를 추구하는 것'이라는 것에 충실하여 
평생 동안 인의를 중시하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마침내 
'재물은 평등하기 물과 같고 사람은 바르기가 저울과 같다'는 사실을 
깨달아 재물보다는 사람을 우선하였다.
  따라서 그는 평생 동안 재물을 모았지만 실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는 평생 황금을 벌었으나 이는 다만 채소를 가꾼 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 그를 '채소를 가꾸는 노인'이라고 부를 만하다. 고로 
그를 상불이라 부르니 이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즐겁고 기쁜 일이다.

  추사의 발문은 이렇게 끝을 맺고 있다.
  '노과노인 쓰다.'
  추사가 임상옥을 위해 쓴 발문의 내용을 천천히 훈독하여 읽어 내리는 
동안 내 가슴에는 물밀듯이 감동이 스며들고 있었다.
  지난 일년 동안 우연치 않게 뛰어들어 임상속의 생애를 추적해오고 있던 
내 일련의 작업이 추사의 발문으로 마침내 대단원의 종지부를 찍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었다.
  이처럼 짧은 문장으로 가포 임상옥의 생애를 이처럼 날카롭게 '촌철살인' 
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으로 내 모든 작업은 끝이 났다.
  나는 추사의 그림에서 두어 발자국 물러서며 중얼거려 말하였다.
  '이제 내겐 더 이상 임상옥도 없고 추사 김정희도 존재하지 않는다. 여수 
김기섭은 더더욱 존재하지 않는다.'
  추사가 임상옥을 위해 쓴 저 최후의 명문은 오늘을 싸는 우리에게 
던지는 사자후인 것이다. 그러나 과연 몇 명이나 알 수 있을 것인가. 
'상업이란 이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의를 추구하는 것이다'라는 공자의 
말을 빌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외치는 추사의 금언을 마음속에 새겨들을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 것인가.
  또한 평생 황금을 벌었으나 실은 채소를 가꾼 노인에 불과하였던 
임상옥을 빌려서 마땅히 '상업의 길'을 통해 '상업의 부처'에 이르는 
것이야말로 진실로 즐겁고 기쁜 일이라는 진리를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추사의 법어를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 
것인가.
  그러나.
  나는 추사의 그림에서 뒤돌아서면서 중얼거려 말하였다.
  그것을 걱정해서 무엇하겠는가 어차피, 이제 모든 것은 끝나버리지 
않았는가. 추사도 임상옥도 그리고 여수 김기섭도 이젠 나하고는 상관없는 
인물들인 것이다.
  나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나는 그냥 가지말고 꼭 남아서 한 잔 하자던 한기철의 말을 떠올렸다. 
그러나 한기철과의 약속도 이젠 모두 소용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냥 잔디밭을 가로질러 빠르게 기념관 
정문을 통해 걸어나왔다. 다행히 나를 막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끝>

  그런데 바로 그 무렵 뜻하지 않은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바로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처참한 천주교 박해 중의 하나였던 기해박해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기해박해는 1801년(순조편)에 일어났던 신유박해에 이어 38년 만에 다시 
일어났던 제2차 천주교 박해사건으로 그 규모는 박해 사상 가장 크고 
잔인하였다.
  기해박해는 1839년 사학토치법에 의해서 시작되었는데 표면상으로는 
무부무군의 멸륜지교인 천주학을 몰아내기 위함이었으나 실은 시파인 
안동김씨의 세력을 빼앗으려는 벽파의 풍양조씨가 일으킨 정권다툼이었던 
것이다.
  안동김씨는 천주교를 싫어하는 벽파와는 달리 관용적이어서 천주교에 
대해 관대하였지만 마침내 정권이 천주교에 대해서 적대시하고 있던 
우의정 이지연으로 넘어가게 되자 천주교인에 대한 박해가 다시 
시작되었던 것이다.
  조정에서는 '오가작통법'이란 악랄한 방법으로 천주교인들을 색출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오가작통법'이란 평민 다섯 집을 한 통으로 조직하여 
만약 그들 내에서 범죄행위가 발각되면 통 전체에게 형벌을 준다는 
인보조직이었던 것이다.
  특히 천주학에 대해서는 더욱 엄격하여 만약 임의로 그 통 내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숨겨준 것이 발각되면 함께 국문을 하고 심한 경우에는 
함께 목을 벤다는 엄명이 내려져 있었다.
  형조판서의 3월 2일자 보고에 의하면 포청에서 형조로 이송된 
천주교인은 43명인데 그 중 15명이 배교하여 석방되었고 또 5명이 
배교하였으나 남명혁, 박희순 등 9명은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사형 
당하였는데 이로부터 시작된 피의 박해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던 것이다.
  박해의 파도는 송이가 살고 있던 서강 일대로까지 확산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장성집이 불란서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은 천주교 신자임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감히 장성집을 고발하지 못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함께 살고 있는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인척지간이었고, 
또한 장성집이 베푼 인덕에 감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장성집은 스스로 유진길, 정하상, 조신철 등 조선교회 재건운동의 
중요 인물이며 선교사들의 측근 요인들이 체포되었고 많은 신자들이 
고문과 죽음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는 말을 듣고 뜨거운 
가슴을 억누를 수가 없어 스스로 순교할 의도로 자수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때 이미 장성집은 54세의 노년이었고 중병 상태여서 많은 
사람들이 자수를 만류하였다.
  마침내 1839년 4월 6일, 장성집은 주민의 밀고로 체포되었다.
  체포될 무렵 장성집은 거동도 못할 상태에서 포졸들이 가마에 태우려 
하였다. 그러나 장성집은 이를 거절하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야소님께오서는 십자가를 지고 죽음에 이르는 언덕까지 친히 걸어 
가셨소이다. 그런데 내가 어찌 가마를 탈 수가 있겠나이까."
  송이는 사람들 속에 끼어 장성집이 체포되어 이끌려 가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송이는 거동도 제대로 못하였던 장성집이 일어났다가는 쓰러지고, 
넘어졌다가는 다시 쓰러지면서 포청까지 걸어가는 모습을 숨죽여 지켜보고 
있었다.
  송이는 무서웠다.
  비록 그녀는 천주교 신자는 아니었지만 김효임으로부터 묵주를 
선물받아서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으며 또한 은밀하게 천주교 교리를 
공부하고 있기도 했다. 마음속으로는 언젠가는 천주교에 귀의할 것이라고 
굳게 다짐하고 있었지만 막상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처참한 광경을 보자 
두렵고 무서웠다.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 할지라도 묵주와 같은 성물은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체포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장성집은 포청에서도 형관들에게 맑은 정신으로 천주교 
교리에 대해서 설명한 후 혹형과 고문을 기쁘게 이겨내었다고 한다. 
  두 발목을 함께 묶은 다음 다리 사이에 뜨거운 막대기를 끼워서 
엇비슷이 비트는 주리를 트는 형벌에도, 가부좌를 틀게 하고 움직이지 
못하도록 묶은 다음 그 위에 무거운 돌을 올려놓는 압슬에도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야소님은 그 손과 발에 못이 박혀서 돌아가셨나이다. 그에 비하면 
이러한 형벌은 아무것도 아니나이다."
  마침내 장성집은 치도곤을 맞고 장사하였다. 그때가 1839년 5월 
26일이다.
  원래 천주교인들은 죽어도 대역죄인이라 하여서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였으나 장영덕은 은밀히 돈을 주어 장성집의 시신을 수습하였다.
  송이는 처참하게 죽은 장성집의 시신을 직접 자신의 눈으로 보았다. 
장성집의 시신은 갈갈이 찢겨 있었고 온몸은 붉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러나 이상한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다.
  죽은 그의 몸에서 피비린내가 나거나 시신에서 맡을 수 있는 썩은 
냄새가 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향기로운 향내가 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죽은 장성집의 몸에서 풍겨오는 이상한 향기. 도저히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신비로운 향기. 그뿐인가 온몸이 갈갈이 찢겨 
처참하게 죽었으면서도 그 얼굴에는 기쁨이 흘러 넘치고 있었다. 기쁨이 
흘러 넘치는 그대로 죽은 장성집의 사면.
  그 신비로운 모습을 본 순간 송이는 마음속으로 드디어 결심했다.
  나는 천주학을 믿을 것이다. 나도 천주학쟁이가 될 것이다. 죽음이 저와 
같이 기쁜 일이고, 죽음의 고통이 저와 같이 향기로운 일이라면 내가 
무엇을 더 망설이고 무엇을 더 무서워할 수 있겠는가 또한 장성집은 
죽음을 물리치고서까지 천주학을 지켜내지 않았던가 죽음보다 강한 무엇이 
천주학에 있음이 아닐 것인가.
  송이는 그 즉시 밤섬으로 출발하였다. 언니 김효임을 비롯하여 6명의 
가족들은 불안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들은 고향인 
밤섬을 떠나 경기도의 고향 땅 용머리라는 곳으로 이사를 갈 채비를 
차리고 있었다. 그녀들은 송이가 나타나자 뛸 듯이 기뻐하였다. 더구나 
송이가 천주교의 세례를 받고 싶다고 고백을 하자 언니 효임은 이렇게 
말했다.
  "송이 아씨, 하필이면 이때 믿으려 하십니까. 자칫하면 죽게 되는 것을 
모르십니까."
  그러나 송이는 마음의 흔들림이 없었다. 송이는 오히려 박해 속에서 
향기롭게 죽어간 장성집의 모습을 통해서 신앙에 대한 결의를 굳힐 수가 
있었던 것이다.
  송이가 자신이 직접 본 장성집의 모습을 낱낱이 고백하자 언니 효임은 
이렇게 말했다.
  "순교하여 죽는 것은 영광스런 일이나이다. 순교하여 피를 흘리는 것을 
혈세라 하나이다. 물로 세례를 받는 것보다 피로써 세례를 받는 
것이야말로 곧바로 하늘나라 천국에 드는 것이나이다. 장요셉 님은 이제 
혈세로써 하늘나라에 드셨나이다. 하늘나라에 들어서 야소님을 만나고 
천주님을 만나신 것이나이다. 이제 장요셉 님은 선민이 되셨나이다."
  혈세.
  자신의 피로써 자신의 죄를 씻는 피의 세례.
  송이는 김효임의 말을 통해 혈세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송이는 언니 김효임을 대모로 해서 세례를 받기로 하였다.
  송이에게 세례를 준 신부의 이름은 바로 장성집에게 세례를 베풀었던 
범세형 신부로서 그는 수원의 양감이라는 곳에 숨어 은둔하고 있었다.
  범세형 신부가 숨어 있던 양감은 수원 근처인 바닷가로 교우의 
집이었는데 비교적 안전한 곳이었다.
  그는 이곳으로 모방 신부와 샤스탱 신부를 불러 중국으로 몸을 피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이들은 한결같이 신자들과 더불어 함께 죽을 것을 
원하였으므로 하는 수 없이 몸조심을 당부하고 지방으로 돌려보냈던 
것이다.
  송이는 자신의 세례명으로 마리아 막달레나를 선택하였다.  
  마리아 막달레나.
  야소가 살려준 후부터 막달레나는 언제나 야소의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야소가 죽기 전날 밤에는 야소의 발에 향유를 바르고 이를 자신의 
머리털로 닦아드린 여인이었다. 그 발에 입을 맞춘 여인이기도 하였다.
  송이는 자신이 막달레나와 다름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막달레나가 
거리에서 몸을 팔던 창기였다면 자신도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추고 웃음을 
팔던 관기가 아니었던가.
  송이가 세례를 받겠다고 결심하자 김효임과 효주는 뛸 듯이 기뻐하면서 
당장 수원으로 송이를 데리고 달려간 것이다. 비록 전국이 천주교 박해의 
사학토치령으로 들끓고 있어 위험하였지만 한 사람의 영혼을 위하는 일이 
더 값어치가 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송이는 범세형 신부의 집전으로 마침내 세례를 받을 수 있었다. 송이가 
세례받는 것을 지켜본 사람은 김효임과 효주 자매 둘뿐이었다.
  해질녘의 바닷가였다.
  송이는 하늘에 있는 천주와 그의 아들인 성자와 그의 영인 성신의 
이름으로 성호를 긋고 바닷물에 몸을 담가 전생으로부터 이어온 자신의 
악업과 죄를 씻었다. 송이는 전능하신 천주님과 그의 아드님이신 야소를 
믿고 우리의 육체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할 것을 믿으며 죽지 아니하고 
영원히 살 수 있다는 신앙을 고백함으로써 마침내 천주교 신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범세형 신부는 송이의 머리 위에 바닷물을 붓고 그리고 손을 얹어 
안수기도를 해주었다.
  바로 그 순간.
  송이는 불덩어리와 같은 뜨거운 그 무엇이 자신의 몸 속으로 내리꽂히는 
것을 느꼈다. 마치 바닷가의 수명선 너머로 사라지는 저녁 해에서부터 
뜨거운 화염이 분출해서 몸을 뚫고 들어와 자신의 영혼에 깊은 화인을 
새기는 듯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후에 알게 된 것이었지만 송이가 느낀 그 뜨거운 불의 세례는 결국 불의 
성령을 받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날밤 송이는 하룻밤을 그곳에 머물면서 범세형 신부에게 
고백을 했다.
송이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저질렀던 모든 죄를 고백하였으며 자신이 
한때 한 남자의 아내로서 혼인을 맺었던 사실도 고백했다. 그 혼인을 통해 
가졌던, 사랑했던 남자에 대한 애증도 고백했으며 그 남자와 함께 
타올랐던 육체의 정념에 대해서도 고백했다.
  그리고 나서 송이는 울면서 말했다 
  자신도 이 지상에서의 헛된 사랑을 깨끗이 씻어버리고 동정녀로서 
한평생 야소님과 함께 오롯이 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범세형 신부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해 주었다. 비록 한때 결혼을 했다 하더라도 
얼마든지 동정녀로 되돌아가 평생 수정하면서 천주님만 모시고 살 수 
있다고 대답해 주었다.
  송이는 귀가 번쩍 뜨였다. 송이는 평생 처녀의 몸으로 동정을 지키면서 
살 것을 맹세하고 있는 김효임, 효주 자매에 대해 선망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도 효임과 효주처럼 처녀의 몸이라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남자의 
육체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는 그런 소녀의 몸이라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그런데 얼마든지 처녀의 몸으로 돌아갈 수 있다니. 동정녀의 
몸으로 되돌아가 평생 수정하면서 얼마든지 천주님만 모시고 살아갈 수 
있다니. 
  그러자 범세형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결혼한 당사자로부터 그 혼인이 무효임을 인정받을 수 있다면 그 
혼약은 없었던 일로 되돌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범세형 신부의 말은 사실이었다.
  실제로 이경이라는 여인은 어떤 내시에게 속아서 결혼하였으나 곧 
집으로 돌아왔고 후에 범세형 신부에게 청하여서 그 결혼이 무효임을 
인정받은 적이 있었는데 이경이라는 여인도 후에 순교하여 '성녀 이경이 
아가다'로 103인의 성인 반열에 들 수 있었던 것이다. 
  비록 결혼의 언약은 맺었지만 그 혼약이 거짓이거나 속임수라면 
당사자의 허락이 없더라도 그 결혼을 무효화할 수 있었고, 설 혹 그 
혼약이 정당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당사자들이 합의를 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 혼약을 파기하고 수정을 지킬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송이는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 임상옥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떨쳐버릴 수가 있게 되었다. 자신은 이제 임상옥의 아내가 아니라 
야소님을 섬기는 동정녀로서 새로 태어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박해는 더욱 심해져서 마침내 김효임, 효주 자매는 체포되었다. 
그녀들은 고향 밤섬을 떠나 용머리에 몸을 숨기고 있었으나 결국 천주교 
신자임이 발각되어 두 자매는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녀들은 포청에서 남동생 김 안토니오가 숨어 있는 피신처와 교회 
서적을 감춘 곳을 자백하라는 국문을 당했으며 이 때문에 혹독한 고문과 
형벌을 받았다. 기록에 의하면 효임, 효주 자매는 학춤이란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학춤이란 고문은 죄인의 옷을 모두 벗긴 뒤 양팔을 뒤로 젖혀 엇갈리게 
묶은 후 허공에 높이 매달아 사방에서 채찍이나 몽둥이로 때리는 잔학한 
형벌이었는데 이 자매들은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고 이를 견디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특히 언니 효임에 대한 형벌은 더욱 가혹해서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몸의 열세 곳을 지져대는 잔혹한 고문을 당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결국 포청에서의 혹형과 고문을 이겨낸 김효임은 효주와 함께 형조로 
이송되었으며, 형조 판서의 신문에 겸손하고 영리하게 대답하여 
형조판서를 감동시켰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 뒤 수개월 동안 두 자매는 옥에서 병과 싸우면서 순교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때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후일 조선교구 
제5대 교구장이 되었던 안돈이(마블뤼 안토니오) 주교는 이때의 
옥중생활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교우들은 감옥 속에 빽빽히 처넣어져 있었으므로 발을 뻗고 누울 수 
없을 정도이다. 그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이 지긋지긋한 
옥중의 괴로움에 비하면 고문은 문제가 안 된다. 상처에서 흐르는 피와 
고름 때문에 멍석은 푹푹 썩어가고 고약한 냄새를 풍기게 되니 이로 
말미암아 심한 병이 들기 시작하여 이삼 일 안에 죽는 신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러나 가장 무서운 형벌은 굶주림과 목마름이었다. 고문하는 
곳에서는 용감히 그 신앙을 고백했던 사람들도 그 기갈을 참지 못하여 
항복하는 자가 적지 않았다. 하루에 주먹만한 조밥덩이를 두 끼만 먹일 
뿐이므로 참다 못하여 썩어빠진 멍석자리를 뜯어 씹기도 하고 심할 때는 
옥안에 들끓고 있는 이를 먹기도 하였다.'
  김효임, 효주 자매는 5개월 동안이나 이 지옥 같은 감옥 속에서도 굳게 
신앙을 지켜 나갔으며 마침내 9월 3일 동생 효주가 먼저 서소문 밖 
형장에서 5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아 목이 베어져 순교하였다.
  감옥에서 이 소식을 전해들은 언니 효임은 슬퍼하지 아니하고 다만 
이렇게 말했을 뿐이라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효주가 먼저 하느님의 나라로 돌아갔구나. 효주가 먼저 영광의 순간을 
맞이하였구나."
  그로부터 20여 일 뒤인 9월 26일 언니 효임도 교우 8명과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한 동생의 뒤를 따랐다.
  언니 김효임 그리고 동생 김효주 자매는 1925년 7월 5일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에서 교황 성 비오 10세에 의해서 복자위에 올랐으며, 마침내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서 두 자매는 성인의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이다.
  한편 양감에 피신하고 있었던 범 신부는 배교자 김순성에 의해 그의 
거처가 알려지게 되자, 그에게 몸을 피하라고 권유하는 교우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다른 곳으로 몸을 피하면 나를 숨겨준 사람들에게 화가 미치게 될 
것입니다. 내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나를 숨겨준 사람들을 대신 죽일 수는 
없는 일인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1839년 7월 3일 스스로 포졸 앞에 나아가 자수하였다.
  자수하기 전 그는 모방 신부와 샤스탱 신부에게도 함께 자수할 것을 
권유하는 편지를 썼으며 그 내용은 대충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주님의 어린 양들이 우리를 대신하여서 매일같이 피를 흘리면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양떼를 돌보는 목자로서 우리들을 대신하여 피를 
흘리면서 죽어 가는 모습을 그냥 지켜볼 수만은 없어서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그러므로 그대들에게도 자수할 것을 권면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 
일어나가자.'"
  자수하기 직전 남은 두 신부에게 쓴 범 신부의 편지는 교우들에 의해서 
은밀하게 전하여졌다.
  이 무렵 모방 신부와 샤스탱 신부는 홍주에 머무르고 있었다.
  두 신부는 자수하기 직전에 쓴 범 신부의 편지를 읽는 순간 그 권유에 
순명할 것을 결심하였다. 성직자에게 있어 '청빈'과 '정결' 그리고 
'순명'이야말로 반드시 지켜야 할 덕목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두 신부는 9월 6일 홍주 근처에서 대기중이던 
포졸들에게 자수하여 서울로 압송되었다. 프랑스 외방선교회소속이었던 세 
신부는 9월 26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라는 극형으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이들의 시신은 처형된 지 20일이 지나도록 그대로 새남터에 방치되어 
있었다 두려워서 그 누구도 이 신부들의 시신을 수습하려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시신을 수습한 사람들은 새남터에서 가까운 서강에 사는 신자들로 
기해박해 때 체포되지 않고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이었다.
  기해박해는 천주학의 괴수인 세 신부를 처형한 뒤부터 가라앉기 
시작하였으므로 20일쯤 지나자 살아남은 신자들이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이 신자들 속에 송이도 끼여 있었다. 송이가 기적적으로 박해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비교적 늦게 세례를 받아 송이가 천주교 
신자임을 아무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설혹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같은 
성씨로 이루어진 집성촌에서 송이를 밀고할 사람은 없었다.
  어쨌든 송이를 비롯한 네 명의 교우들은 야밤을 틈타 한강변의 새남터에 
함부로 방치되어 있던 세 신부의 시신을 거둬들였다. 그들은 세 신부의 
시신을 가까운 노고산에 파묻었다.
  세 신부의 시신은 그로부터 4년 뒤인 1843년 시흥에 있는 삼성산으로 
옮겨져 묻혔고, 오랜 세월이 흘러 마침내 명동성당이 완공되자 1901년 
11월 2일 명동대성당의 지하실에 모시게 될 수 있었다.
  이들도 역시 김효임, 김효주 두 자매처럼 1925년 7월5일 당시의 교황 
비오 10세에 의해서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순교사 78명과 함께 
천주교 교회사상 처음으로 복자가 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고, 그후 1984년 
5월 6일 한국천주교 200주년을 위해 방한했던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서 
성인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3
  "이렇게 하여 소녀는 천주학쟁이가 되었나이다."
  자신이 어떻게 천주교를 믿게 되었는가를 모두 고백하고 나서 송이는 긴 
한숨을 쉬면서 말을 하였다.
  "이렇게 하여 소녀는 새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나이다."
  하룻밤의 고백이었다.
  아직 문 밖에서 새벽빛이 스며들지 않고 있었으나 송이의 고백은 밤을 
새우며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먼 곳에서 첫닭 우는 소리가 어둠을 뚫고 
들려오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에는 타오르기 시작하였던 촛불도 송이의 고백을 듣는 
동안 긴 시간이 흘러가 밑동을 태우고 있었다.
  "사옥이 가라앉았다고는 하지만."
  오랜 침묵을 지키던 임상옥이 마침내 입을 열어 말하였다.
  "아직 천주학에 대해서는 퇴치령을 내리고 있지 아니하냐. 그러니 
이렇게 함부로 나다녀도 위험하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
  임상옥의 말은 사실이었다.
  비록 기해박해가 마무리되어 이제 2년이 지난 신축년이라 하지만 여전히 
조정에서는 천주교 신자들을 색출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한눈에 보아도 뭔가 남달리 천주학쟁이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송이가 
이곳에까지 온다는 것은 마치 짚을 지고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나으리."
  임상옥의 말을 듣자 미소를 띤 얼굴로 송이가 받아 말하였다.
  "소녀는 더 이상 죽음이 두렵지 아니하나이다. 소녀는 수없이 죽어간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죽음이 죽음이 아니라 부활이며 죽음이 고통이 
아니라 기쁨임을 깨달았나이다. 따라서 이제 소녀는 죽음이 무섭지 
아니하나이다. 아니 이미 소녀는 이 세상에서는 죽은 목숨과 다름이 
없나이다."
  부활.
  죽었다가 다시 되살아남을 뜻하는 말.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일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일 것인가.
  이러한 임상옥의 속마음을 꿰뚫어 본 듯 송이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광암 이벽 님이 쓰신 <성교요지>에서는 야소님의 권능을 나타내는 
기적에 대해 이렇게 노래하고 있나이다."
  송이는 평소에 외워두었던 것처럼 또박또박 말을 이어 내려갔다.
  "야소의 귀한 말씀과 귀한 비유가 세상에 저문되고 기적이 잇달아 
일어났도다. 그는 착한 목자로, 온갖 상한 자를 돌보심으로 아침저녁 
세월을 보내셨도다. 악마를 쫓아내고 질벽을 고치시고, 더러움을 씻으시고 
화근을 멸하셨으며, 사망한 자를 무덤에서 일으키시고, 그의 옷섶만 만진 
부인도 정결해졌도다. 파도치는 물 위를 걸어 배를 오르시고, 바람을 
멈추게 하여 가라앉는 배를 구하시고, 무리들이 둘러서서 보는 가운데에서 
병든 자를 고치시고 눈먼 자를 보께 하시며, 크나큰 기쁨 가운데 죽은 
자를 부활케 하시도다."
  마치 노래하듯 외우고 나서 송이가 말을 이었다.
  "나으리, 이 소녀가 나으리를 찾아 뵈온 것은 나름대로 뜻이 
있어서이나이다."
  송이는 다소곳이 자세를 고쳐 앉으면서 천천히 말을 꺼내었다. 그 순간 
임상옥은 문득 송이의 양어미 산홍의 말이 기억되어 떠올랐다.
  산홍은 송이를 만나기 위해서 유기전에서 이 약전으로 찾아오기 직전 
다음과 같은 수수께끼의 말을 꺼내지 않았던가.
  "나으리, 송이 아씨는 이 산홍을 찾아오자마자 대인어른을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 만나야 한다고 말씀하셨나이다. 마지막으로 딱 한 번이면 
족하다고 말씀하셨나이다."
  이렇듯 천주교인이 되어 자신의 말대로 죽음에서 다시 되살아 난 새 
사람이 되어 찾아온 것에는 분명한 사유가 있을 것이다. 옛 정을 못 잊어 
다시 한번 만나고 싶다는 상사의 그리움 때문이 아닌, 분명한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산홍의 말처럼 '마지막으로 딱 한 번이면 족한 만남', 그 만남을 위해 
송이는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이곳까지 여행을 떠나온 것이다.
  "나으리, 하오니 나으리께오서는 이 소녀의 소청을 들어 허락하여 
주옵소서. 나으리께오서 이 소녀의 소청을 들어 허락하여 주옵신다면."
  송이는 잠깐 말을 끊고 물끄러미 임상옥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서늘하고 아득하였다.
  송이는 잠시 끊었던 말을 토해내었다.
  "...다시는 나으리를 찾아뵙지 아니할 것이나이다. 이것이 나으리를 뵙는 
마지막 상봉이 될 것이나이다."
  결연한 태도였다.
  천천히 날이 밝아오고 있는 듯 새벽을 알리는 닭소리가 여기저기서 
화답하며 들려오고 있었다.
  "무엇이냐. 무엇이 너의 소청이냐."
  임상옥은 입을 열어 말하였다.
  그러나 송이는 묵묵히 입을 다물고 물끄러미 임상옥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 사람이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이었던가 내 앞에 앉아 
있는 바로 이 사람이 그토록 보고 싶고 그리웠던 그 사람이었던가 하는 
회한의 감정이 솟구쳐 오르는 듯한 표정이었다.
  "너의 소청이 무엇이냐고 내가 묻지 않느냐."
  임상옥이 재촉하자 그제서야 송이가 입을 열어 대답하였다.
  "나으리께오서 물으시니 소녀가 답하리이다. 나으리, 이 소녀는 한때 
나으리의 아내였나이다. 비록 정실은 아니지만 어찌하였든  나으리와 
정분을 맺고 혼약을 맺었었나이다. 나으리께오서는 소녀의 낭군이 되었고, 
이 소녀는 나으리의 지어미가 되었었나이다. 그러므로 나으리는 이 소녀의 
주인이시옵고 이 소녀는 나으리의 종이었나이다. 그러나 이제 이 소녀는 
새로운 주인을 모시게 되었나이다. 소녀가 나으리께 하룻밤을 지새우며 
말씀드린 그대로 이 소녀는 천주학을 믿어 야소라는 분을 주인으로 새로 
모시게 되었나이다. 그러나 어찌하여 하늘 아래에서 한 여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있겠나이까. 옛말에 이르기를 '한 하늘 아래에서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시지 아니하였나이까. 한 신하가 두 주군을 섬길 수 없는 
것이 바로 충이라면, 한 아들이 두 아비는 섬길 수 없는 것이 바로 효이며, 
한 여인이 두 지아비를 섬길 수 없는 것이 바로 정조요, 절개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부부간에 맺은 혼약도 하늘이 맺어준 
부부지약이어서 이를 사람이 함부로 끊거나 베어버릴 수는 없는 
것이나이다. 그러나 이제 소녀는 두 주인 중 한 분의 주인만을 선택할 수 
밖에 없게 되었나이다."
  송이는 잠시 말을 끊었다.
  그녀는 묵주를 손으로 움켜쥐고 번 영원을 응시하는 아득한 눈빛이 되어 
천천히 말을 이어 내려갔다.
  "...소녀가 택한 주인은 이제 한 분뿐이시나이다. 그분의 이름은 오직 
야소님뿐이시나이다."
  송이는 천천히 말을 이어 내려갔다.
  "...소녀는 이제 야소님만을 모시고 평생을 수정하면서 살아가려 
하나이다. 비록 한때 나으리의 지어미였사오나 이제는 야소님만을 모시고 
평생 동정을 지키면서 살아가겠나이다. 일찍이 소녀에게 세례를 집전하여 
주셨던 범세형 신부님도 비록 소녀가 한 때 혼약을 맺어 유부녀가 되었다 
하더라도 얼마든지 동정녀의 몸으로 되돌아가 평생 수정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나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있다고 하였나이다."
  "그 조건이 무엇이냐."
  묵묵히 듣고 있던 임상옥이 물어 말하였다.
  그러자 송이는 다시 임상옥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보며 말하였다.
  "...바로 그 조건 때문에 이처럼 불원천리하고 나으리를 찾아 온 
것이나이다."
  "...그 조건이 무엇이냐고 내가 묻지 않더냐."
  "...결혼한 당사자로부터 그 혼인이 무효임을 인정받을 수 있다면 그 
혼약은 없었던 일로 되돌아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나이다."
  그제서야 임상옥은 송이가 이처럼 4년여의 세월이 흐른 후 느닷없이 
나타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송이가 나타난 이유는 맺었던 
혼약을 파기하여 달라는 이유 때문이었던 것이다.
  비록 그 혼약이 정당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당사자들이 합의를 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 혼약을 파기하고 동정녀로서의 수정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이 천주학의 교리인 모양이었다.
  "그러하면 네가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이이란 말이냐."
  이이.
  원래 조선시대의 사회에서는 이혼이 없었다. 부부는 천정배필이어서 
천합과 같아 하늘이 맺어준 것을 사람이 함부로 풀 수 없던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일부다처제가 보편화되어 있었고 축첩이 공인되어 있었으므로 
아내를 버리거나 내보내거나 내쫓거나 나가게 하는 일은 있어도 
법률적으로 이혼하는 일은 드문 일이었다.
  간혹 사대부층에서는 가족 중 가장이 큰 죄를 범하여 처벌될 경우 그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헤어지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때도 이를 
이혼이라고 부르지 아니하고 이이라고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듯 법률적으로 헤어지는 이이는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이었으므로 사람들은 이를 꺼리고 있었다.
  "아니나이다, 나으리."
  송이는 다소곳이 무릎을 꿇은 채 대답하였다.
  "감히 이 소녀는 나으리께 이이까지 바라지는 아니하나이다."
  "그럼 무엇이냐."
  "파의하여 주시옵소서."
  파의는 이혼과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것은 법률적인 구속력을 
갖지 않는 일종의 관행이었다. 
  이를 다른 말로 사정파의라 하였는데 이는 부부간에 서로 협의하여 
헤어지는 행위로 이혼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의절이었던 것이다.
  그러자 임상옥은 입을 열어 말했다.
  "파의건 이이건 간에 이미 모두 끝이 났던 일 아니냐. 나는 일찍이 너를 
만나서 그렇게 말하지 않았더냐. 너는 자유의 몸이 되었으니 이제 먼 
곳으로 떠나거라. 먼 곳으로 떠나서 새 생활을 하라고 말하지 않았더냐. 
그리고 나서 나는 이렇게 언약하지 않았더냐. 나는 이제 다시는 너를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이것을 마지막으로 다시는 너를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맹세하지 않았더냐. 사사로운 정으로 인연의 끈을 끊지 못한다면 
그때 너와 나는 둘 다 죽게 될 것이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더냐."
  "나으리께오서 하셨던 그 모든 말씀을 소녀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나이다."
  송이는 대답했다.
  "그리 맹세하고 나서 나는 다시는 너를 찾지 아니하였다. 그것은 너와 
나의 사사로운 인연을 끊어 버리기 위함이었다. 이로써 너와 나의 
부부로서의 인연은 이미 끊어진 것이 아니겠느냐. 이미 송이 너와 나는 
남이 되어 이이가 된 것이 아니겠느냐. 그런데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무효건, 파의건 모두 다 무슨 소용이 있을 수 있단 말이냐."
  임상옥이 말을 하자 송이가 고개를 끄덕여 말을 받았다.
  "나으리께오서 하신 말씀은 구구절절이 옳으신 말씀이시나이다. 하오나, 
나으리. 이제 소녀가 나으리를 찾아온 것은 하늘이 맺어준 부부로서의 
천합을 끊어버리는 징표를 주셨으면 하는 것이나이다."
  그 순간 송이는 천천히 저고리를 벗기 시작하였다.
  임상옥은 갑자기 송이가 저고리를 벗기 시작하자 당황하였다. 송이는 
고름을 풀어내리고 천천히 가슴을 풀어헤쳤다.
  저고리를 벗은 송이는 그 저고리를 임상옥의 앞에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나으리, 나으리께오서 의절의 징표를 이 소녀에게 내려주소서. 휴서 
하나를 이 소녀에게 내려주소서."
  그제서야 임상옥은 송이가 바리는 징표가 무엇인기를 알아낼 수 있었다. 
또한 송이가 어째서 갑자기 저고리를 벗어 자신의 앞에 내려놓았는가 그 
연유를 알 수 있었다.
  휴서.
  의절의 징표로 내려주는 상징적인 물건. 이를 다른 말로는 할급휴서라고 
부른다.
  부부간엔 헤어질 때는 그 이혼의 징표로 흔히 아내가 입던 저고리의 
깃을 잘라 상대방에게 주곤 하였던 것이다. 남편이 아내가 입던 저고리의 
깃을 자르는 것은 아내의 육체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하는 의식이었던 
것이다.
  "나으리."
  송이는 임상옥의 눈을 마주보며 입을 열어 말하였다.
  "소녀가 입던 저고리를 벗었나이다. 하오니 저고리의 깃을 잘라 
주시옵소서. 자른 그 헝겊을 소녀는 할급휴서로 알고 이혼의 징표로 
간직하겠나이다."
  송이는 저고리 옆에 가위를 내놓았다. 임상옥은 비로소 송이가 바라는 
소청이 무엇인가를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임상옥은 서슴지 않고 가위를 세워들었다. 그는 겉섶을 밀어 저고리를 
벌렸다. 낯익은 송이의 저고리였다. 일부러 부부의 인연을 맺을 때 입었던 
노랑 저고리를 그대로 입고 온 모양이었다.
  임상옥은 그 저고리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혼례를 치를 때 입었던 
송이의 갑사 저고리. 혼례를 치른 첫날밤 송이가 입었던 노랑저고리. 그 
저고리의 옷고름을 임상옥은 풀어 내렸었다. 그것으로 한 사람은 지아비가 
되었고 또 한 사람은 지어미가 되었었다.
  그뿐인가.
  그 낯익은 저고리에서는 낯익은 송이의 냄새가 풍겨오고 있었다.
  오랜만에 맡은 송이의 살 냄새. 육체의 향기. 낯익은 송이의 몸에서부터 
풍겨오는 강렬한 육향.
  임상옥은 그런 상념들을 일시에 떨쳐버리려는 듯이 날카롭게 가위를 
세워들었다. 
  저고리의 소매 끝부분인 끝동과 겨드랑이와 접촉이 되는 곁막음 부분과 
옷고름과 깃 부분은 노랑저고리의 빛깔과 달리 분홍 빛깔로 구분되어 
있었다.
  임상옥은 분홍 빛깔의 저고리 깃을 가위로 자르기 시작하였다. 날카로운 
가위의 날은 싹둑싹둑 소리와 함께 단숨에 깃의 한 부분을 베어 나가기 
시작하였다. 부부로서의 인연을 끊어버리는 절의의 칼날이었다. 그러나 
임상옥의 손끝은 머뭇거리거나 추호의 망설임도 없었다. 베혀라, 베혀버릴 
것은 베혀버려라. 끊어야 할 것은 끊어버려라.
  일찍이 부처는 말하였다.
  '이 세상에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실체도 없는 형상에 
집착하면 항상 근심과 고통이 생기는 법이다. 내가 있다면 내 것이 있을 
것이고 내 것이 있다면 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와 내 것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무거운 짐을 벗어버려라. 네 것이 아닌 
것은 모두 버려라. 그것을 버리면 영원한 평안을 누릴 것이다.'
  마찬가지로.
  임상옥은 저고리의 깃을 자르면서 생각하였다.
  '부처의 말처럼 이 세상에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는 것이다. 사랑도 
헛되고 헛되나니, 실체도 없는 형상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버려야 할 
것은 버려버리고 베혀야 할 것은 모두 베혀버려야 하는 것이다.'
  마침내 임상옥은 저고리의 깃을 한 조각 잘라내어 그것을 송이에게 
건네주면서 말하였다.
  "이것으로 정표가 되었느냐."
  다소곳이 앉아서 자신이 입던 저고리의 깃을 가위로 잘라내는 모습을 
담담하게 바라보고 있던 송이가 임상옥이 건네주는 천조각을 두 손으로 
받으면서 대답하여 말했다.
  "충분하나이다."
  송이는 묵묵히 벗었던 저고리를 다시 입기 시작했다 임상옥은 송이가 
옷을 입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송이는 저고리를 입고 깃을 여미었다. 
  그러나 잘라낸 깃으로 보기 흉할 정도로 옷은 불구가 되어 있었고, 
송이는 고름을 매어 옷을 여미었다. 그리고 나서 송이는 입을 열어 
말하였다. 
  "이제 소녀가 나으리를 찾아 뵈온 목적은 모두 이루게 되었나이다. 이제 
앞으로 다시는 나으리를 찾아뵙게 될 이유는 없게 되었나이다. 나으리, 
나으리께오서 이 소녀의 소청을 들어주셔서 감사하나이다."
  날은 이제 완전히 밝아 있었다. 캄캄하던 어둠은 물러가고 신 새벽의 
여명이 물처럼 스며들고 있었다.
  더 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조금 더 갓밝이의 빛이 밝아지면 
잠들었던 시장거리가 깨어나고 장사꾼들이 앞다투어 나올 설 시간이었다.
  어차피 남의 눈을 피해 헤어질 것이라면 조금이라도 어두울 때 헤어지는 
편이 나을 것이다. 
  "난 이제 가겠다."
  임상옥이 벗어놓았던 옷과 갓을 집어들자 송이가 먼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잠깐만 그 자리에 앉아 계시옵소서."
  임상옥이 다시 자리에 앉아 정좌하자 송이가 말했다.
  "나으리께 마지막으로 이 소녀가 삼배를 올리겠나이다. 나으리께오서는 
나를 낳지는 아니하였으나 나를 길러주셨으며 또한 나를 살려주신 
분이시나이다. 이 소녀가 이처럼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나으리의 은덕 때문이었나이다. 또한 이 소녀가 뒤늦게나마 천주님을 알아 
새로 태어날 수 있게 된 것도 모두 나으리의 은덕 때문이었나이다. 
나으리께서 나를 살려주시지 아니 하셨더라면 이 소녀는 아직도 비천한 
천기가 되어서 술을 팔고 노래와 춤을 추며 웃음을 파는 창기가 되어 있을 
것이나이다. 하오니 이 소녀에게 나으리의 은혜는 바다보다 갚고 하늘보다 
높으시나이다. 죽어도 백골난망이나이다."
  송이는 천천히 무릎을 굽혀 삼배를 올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삼배가 끝나자 임상옥은 의관을 정제했다. 송이는 무릎을 꿇은 
자세 그대로 그 자리에 엎드려 있었다. 임상옥이 의관을 갖춰 입고 신발을 
신고 방문을 닫을 때까지 송이는 그대로 방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임상옥은 아무런 말도 없이 총총히 약전을 나섰다.
  다행히 아직 어둑새벽이었으므로 시장거리에는 나다니는 사람도 없었고 
일부러 정체를 숨기기 위해 어두운 곳만을 골라 다닐 필요는 없었다.
  약전을 나선 후에야 임상옥은 왜 송이가 지난밤에 굳이 시장거리의 
약전에서 만나자고 약속장소를 정했는가 하는 그 이유를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송이는 지금 부인들의 맥경과 침구를 맡아서 의술에 종사하고 있는 
의녀인 것이다. 장안 제일의 명의인 장영덕의 내제자로서 의술에 종사하고 
있다면 자연 전국적으로 약전들과 서로 연관을 맺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은밀한 장소로서 시장거리의 약전을 돼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빠른 걸음으로 시장거리를 걸어가면서 임상옥은 생각하였다.
  이것으로 모든 것은 끝이 났다.
  송이의 양어미 산홍이가 말하였던 '마지막으로 딱 한 번이면 족한 만남', 
그 만남도 이것으로 끝이 나버린 것이다.
  하늘이 맺어준 부부로서의 천합을 끊어버리는 징표, 할급휴서.
  송이가 혼례식을 올리던 그날 밤 입었던 갑사 저고리의 깃을 잘라 그 
조각을 정표로 줌으로써 이제 송이와 나는 완전히 남남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 무렵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 임상옥의 시 한 구절이 그의 <가포집>에 
남아 전하고 있다.
  그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새벽 삼경의 촛불은 꽃샘추위에 놀라 떨고 있고
  해를 넘겨 그대를 만나니 할 말이 많이 있구나
  누각 주인은 전날의 태수이고
  시 옮는 가객은 늙은 선비로다
  즐겨 놀며 오늘의 만남을 기뻐하니
  이 지방에는 정다운 사연이 어찌 이리 많은가 
  길고 짧던 세상 일, 한 번 서주로 가버린 뒤
  영청교 다리 위엔 달빛만 유유히 흐르고 있네

  영청교 다리 위의 누각에 모여 달밤에 술을 마시며 노는 야회를 
노래하고 있지만 영청교 다리 위에 떠오른 달빛을 바라보며 '길고 짧던 
세상 일'의 부질없음을 노래한 임상옥의 시를 통해 송이와의 이별을 
아쉬워하는 그의 심정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제 3장  적중일기

1

  그로부터 12년이 흐른 계축년.
  15년간 재위하던 현종이 죽고 새로이 철종이 왕위에 오른 지 4년째 되던 
1853년 봄.
  그 지리했던 겨울이 물러가고 오랜만에 화창한 햇살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는 봄날이었다.
  임상옥은 대청마루에서 목침을 베고 잠깐 낮잠에 들었다가 깨어나 
있었다. 한가로운 봄날의 오후였다.
  아직 그늘진 곳에서는 지난 겨울에 내린 잔설이 쌓여 있을 정도였지만 
모처럼의 봄 햇살은 만물을 소생시키는 화기를 충만히 담고 있어 어느새 
뜨락의 헐벗었던 나무들에서는 푸른 잎새가 움트고 있었다.
  임상옥은 목침을 벤 채 대청마루 위 채마밭에서 지지배배 울고 있는 
제비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임상옥은 자신이 
낮잠에서 깨어난 것은 그 시끄러운 제비들의 울음소리 때문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 수 있었다.
  보름 전쯤일까
  지난해 내내 살다 떠나 텅 빈 제비집으로 또다시 어미새 한 마리가 날아 
들어온 것은.
  그로부터 어미새는 제비집에 들어앉아서 알을 품기 시작하였었다. 
한밤중에 임상옥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관솔불로 어미새의 눈을 비추어 
장시 정신을 잃게 하고 둥지 안을 살펴보았더니 둥지 안에는 대여섯 개의 
제비알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둥지 속에 손을 넣어 그 제비알을 만져 
보았는데 어미새의 체온으로 따뜻한 온기가 묻어 있었다.
  그 후부터 임상옥은 이제나저제나 하고 새끼제비들이 알에서 
깨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미새는 드물게 뻐찌뻐찌 하고 울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어김없이 
가까운 숲 속에서 태어날 새끼들의 아비새인 숫새 한 마리가 날아와 
산고의 고통을 인내하고 있는 어미새의 입에 먹이를 찔러 넣어주곤 
하였다.
  그런데 어제, 보름 이상 둥지를 지키고 앉아 있던 어미새 자리가 텅 
비어 있고 그 자리엔 이제 막 알을 까고 나온 새끼제비들이 노오란 
부리들을 합창이라도 하듯 벌리고서 재재 울고 있는 것이다.
  마침내 새끼들이 알에서 깨어난 것이다.
  임상옥은 춤이라도 출 듯이 기뻐하면서 그 새끼들의 부리를 하나씩 세어 
보았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네 마리, 다섯 마리, 여섯 마리.
  언젠가 그가 직접 손으로 세어 보았던 여섯 개의 알들이 모두 부화되어 
새끼제비로 탄생된 것이었다.
  보름 이상 알을 품고 있던 어미새는 어느새 힘차게 날갯짓을 하면서 
부지런히 먹이를 구해와 새끼들의 부리 속에 찔러 넣고 있었다. 어미새가 
먹이를 물고 날아올 때마다 아직 눈조차 뜨지 못한 새끼들은 그 엄마가 
찔러주는 먹이를 받아먹기 위해서 더욱 시끄럽게 재재재재 거리고 있었다.
  그 새끼들의 울음소리에 임상옥은 낮잠에서 깨어 일어난 것이었다 그는 
목침을 베고 누운 채 처마 끝에서 벌어지고 있는 생명의 신비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북풍한설 몰아치는 긴 겨울에는 영원히 봄이 찾아올 것 같지 않지만 
때가 되면 어김없이 봄은 찾아온다. 봄이 찾아오면 죽은 듯 보이던 
나무에도 생명의 새순이 돋아나고 어김없이 봄은 꽃피기 시작한다.
  지난 가을에는 저 머나먼 강남땅으로, 돌아온다는 기약도 없이 떠나버린 
제비도 영원히 돌아올 것 같지는 않았지만 때가 되면 어김없이 돌아와 
저처럼 알을 낳고 새끼를 키운다. 그러면 저 새끼는 또다시 어미가 되어서 
돌아와서 알을 낳고 새끼를 키우는 것이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여전히 목침을 베고 누워서 새끼제비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임상옥은 
생각하였다.
  한 번 간 인생은 또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제비는 또다시 돌아온다 
하더라도 그 제비가 어제의 제비가 아닌 것처럼, 겨울이 지나면 봄이 
또다시 찾아온다 하더라도 오늘의 봄이 지난해의 봄이 아닌 것처럼, 
젊음은 이제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
  임상옥의 나이는 올해로 일흔 하고도 다섯 살. 일찍이 선승 조주는 
120세의 나이로 죽기 며칠 전 다음과 같은 노래를 지어 자신의 모습을 
한탄하였다.

  닭이 울 무렵 새벽 한 시
  일어나 앉아 또다시 늙어 초라해진 내 몸을 한탄하노라
  군자도 없고 편삼도 없고
  가사의 모양만은 그런 대로 모습이 있구나
  잠방이는 허리가 없고 바라는 아가리가 없다
  머리에는 서너 말의 검푸른 비듬뿐
  전에는 수행하여 중생 제도를 바랬는데
  누가 알 것인가
  늙고 병들어 이토록 칠칠치 못한 꼬락서니가 될 줄은.

  조주는 120세의 자신을 '부즉류'에 비유하였다. 부즉류란 '칠칠치 못한 
늙은이'를 가리키는 중국의 속어로 임상옥은 비록 75세에 불과하였지만 
자신이야말로 '늙고 병들어 칠칠치 못한 늙은이'임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어찌할 것인가.
  임상옥은 지지배배 울고 있는 새끼제비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생각하였다.
  새 봄이 찾아와 또다시 제비가 날아온 것은 기쁘지만, 어김없이 제비가 
찾아와 봄소식을 전해온 것은 기쁘지만, 어찌할 것인가. 지난 가을에 
있었던 추억들은 어찌할 것인가 지난 가을에 맺었던 추억들은 어찌할 
것인가.
  임상옥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문득 시흥이 솟아오르고 시를 짓고 싶은 시심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머리맡에 두고 있는 벼루 위에 먹을 갈았다.
  먹을 갈면서 그는 머리 속에 떠오른 시상들을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이윽고 먹이 갈아지자 임상옥은 붓에 먹을 듬뿍 묻힌 후 종이 위에 
단숨에 써 내리기 시작하였다.

  새 봄의 처마엔 제비가 다투어 날아오지만
  강호에서 기러기와 맺었던 옛 약속 잊혀질까 두렵네.

  이른바 2행뿐인 단시였다. 이 무렵 임상옥은 완전히 시인이었다. 
머리맡에 붓과 벼루를 항상 마련해 두고 시상이 떠오를 때마다 시를 쓰곤 
했다.
  새 봄을 맞아 처마 밑으로 제비가 날아 들어오는 것은 기쁘지만 지난 
가을 강가에서 맺었던 기러기와의 옛 약속이 잊혀질까 두렵다는 임상옥의 
심정이야말로 늙고 병들어가는 자신의 몸을 한탄하면서,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은 아름답던 지난 추억마저 잊혀져 가는 망각임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적중일기> 
  이 무렵 임상속은 자신이 옮은 창화시만을 따로 추려내어 자영한 시집을 
발간하였는데 그 시집의 이름이 바로 <적중일기>였던 것이었다. 
'적중일기'라 함은 문자 그대로 쓸쓸한 적요의 나날을 기록한 내용으로 
그렇게 붙인 시집의 제목을 봐도 이 무렵 임상옥이 얼마나 외롭게 만년의 
인생을 보냈던가를 미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날 오후.
  <적중일기>에 실린 '삼교시붕'에 나오는 제1연의 '제비 노래'를 지은 
바로 그 봄날의 오후. 임상옥에게는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일찍이 석숭 스님이 예언하였던 임상옥의 마지막 운명, 그 마지막 
운명을 암시하는 뜻하지 않은 사건이 벌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봄볕이 따뜻하게 내리찍는 뜨락에는 병아리들이 모이를 먹고 있었다. 갓 
태어난 병아리들을 어미 닭이 이끌고 모이를 쪼아먹고 있었다.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임상옥은 노오란 병아리들이 제 어미인 암탉을 쫓아다니면서 물 한 모금 
마시고 허공 한 번 쳐다보기도 하고, 마당 위에 던져준 모이들을 쪼아먹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평화롭던 마당 위로 검은 그림자 하나가 드리워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검은 그림자는 쏜살같이 허공에서부터 날아와 
무엇인가를 홱 하고 채고는 재빠르게 사라졌다. 너무나 빠르고 갑작스런 
일이라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임상옥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분명하였다.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사라진 이후 
병아리를 돌보던 어미 닭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한순간에 
어미 닭의 모습이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어 어리둥절한 것은 임상옥만이 
아니었다. 어린 병아리들은 마찬가지였고, 순식간에 일어난 어미 닭의 
증발에 대해서 실감이 나지 않는 병아리들은 우왕좌왕하면서 어미 닭을 
찾고 있었다.
  임상옥은 대청마루에서 일어나 마당 한가운데로 달려나갔다. 그리고 
그는 맨발로 마당 한가운데 서서 허공을 바라보았다.
  푸른 하늘에는 유유히 솔개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제서야 임상옥은 
마당 위를 쏜살같이 내려왔다 사라진 그림자의 정체가 무엇인가를 확연히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솔개였던 것이다. 공중에 높이 떠 맴돌면서 지상 위에서 
움직이고 있는 들쥐나 개구리, 물고기는 물론 병아리, 닭을 채어가서 먹는 
육식조였다.
  임상옥은 바로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약육강식의 살륙 현장을 
생생하게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었다. 어미 닭을 잃고 우왕좌왕하는 병아리 떼를 
향해 또 다른 솔개 한 마리가 수직으로 강하하여 날카로운 발톱으로 
병아리 한 마리를 움켜쥔 후 또다시 날아 가버리는 것이었다.
  그 날 밤.
  임상옥은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마당에서 새끼들과 더불어 모이를 쪼아먹고 있는 닭은 잠시후면 닥쳐올 
위험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새끼들도 자신의 어미에게 닥쳐올 위험에 
대해서는 전혀 짐작조차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어찌 닭과 솔개의 경우뿐이겠는가.
  사람도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미구에 밀어닥칠 
죽음의 그림자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 채 마당을 돌아다니는 봄날 오후의 
닭처럼 한가롭고 행복할 뿐인 것이다.
  임상옥은 문득 <장자> 나오는 한 구절을 떠올렸다.
  장자는 여러 가지 재미있는 우화를 통해 '인간세편'의 취지에 입각한 
글들을 많이 썼는데 그 중에서도 산목편에 나오는 우화는 너무 유명하다.

  장주는 조릉의 밤나무 밑 울타리를 거닐고 있었다. 그때 예사롭게 
생기지 않은 한 마리의 새가 남쪽에서 날아오는 것을 보았다. 날개의 
너비는 7척이나 되고 눈의 크기는 직경이 한 치나 되어 보였는데 그 새는 
장주의 이마를 스치고 날아가더니 밤나무 숲에 앉았다.
  장주는 무의식중에 중얼거렸다.
  "이것은 어찌된 새인가 날개가 큰 데도 제대로 날 줄을 모르고 눈이 
크면서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로구나."
  장주는 바지자락을 걷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서 새를 잡는 화살을 
들고서 새를 엿보았다. 가만히 보니까 그 나무 시원한 그늘에서는 한 
마리의 매미가 자기 몸도 잊은 채 울고 있었다. 그리고 한 마리의 
사마귀가 잎사귀에 몸을 숨기고서 이를 잡으려하고 있는 중이었다. 
사마귀는 매미를 잡는 데만 열중하여 자신의 몸을 잊고 있었다. 그런데 
아까 본 이상하게 생긴 새는 사마귀를 노리고 있었는데 이처럼 눈앞의 
이익에 혹하여서 장주가 자기를 잡으려고 활을 들고 겨누고 있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장주는 몸서리를 치면서 중얼거렸다.
  "아, 생물들은 서로 해치고 이해는 서로 상대를 불러들이고 있구나."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장주는 활을 버리고 되돌아서 밤나무 숲길을 빠져 
나왔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밤을 훔쳐 가는 줄 알고 관리인이 쫓아오면서 
욕을 퍼부었다. 장주는 새를 잡는 데 정신이 팔려 남의 밤나무 밭에 
들어간 사실도 몰랐던 것이다. 
  장주는 돌아와 집으로 들어간 후 사흘이나 꼼짝도 아니하고 심기가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스승 장주의 모습을 본 제자 인저가 물었다.
  "선생님께서는 요즘 왜 그렇게 심기가 불편하십니까."
  제자의 질문에 장주가 대답하였다.
  "외부의 사물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나는 진정한 나 자신을 잃고 
있었다. 마치 흐린 물에 반해 맑은 물을 잊은 격이다. 나는 예전에 
선생님으로부터 '그 풍속 속에 들어가면 그 풍속을 따라야 한다'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거니와 처음부터 금지구역인 그런 밤나무 밭 속에는 들어가지 
말았어야 옳았다. 이번에 나는 조릉을 산보하다가 자신을 망각한 탓으로 
들어가지 않아야 할 밤나무 밭에 들어가 나 자신을 상실한 탓으로 
관리인으로부터 모욕을 받았다. 내가 마음이 편치 않은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임상옥은 하룻밤을 새우며 <장자>에 나오는 이 우화를 곰곰이 
심사숙고하였다.
이 우화에 나오는 것처럼 매미는 시원한 그늘에서 자신의 몸을 잊은 채 
울고 있었다. 그러나 매미는 사마귀가 잡아먹으려고 노리고 있다. 사마귀는 
매미를 잡으려는 데 정신이 팔려 있어서 자신을 새가 노리고 있음을 전혀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새는 또한 사마귀를 잡아먹으려는 데 
정신이 팔려 장주가 활을 들어 잡으려는 사실을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뿐인가 또한 새를 잡는 데 정신이 팔려 자신이 남의 
밤나무 밭에 들어와 있던 장주는 잠시후면 관리인에게 모욕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닭이 마당에서 모이를 쪼고 있느라 허공 위에서 솔개가 노리고 
있음을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그 병아리들 바라보고 있는 
나를 또한 죽음이 등뒤에 노리고 있는 것이다.
  아아.
  장자가 탄식한 것처럼 '나는 외부의 사물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진정한 
자기를 까마득히 잊고 있었구나.'
  임상옥은 벼락을 맞은 것과 같은 전율을 느꼈다.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망각에서부터 벽력과 같은 충격이 그의 몸을 뒤흔들었다. 마치 허공을 
떠돌던 솔개가 한순간에 땅으로 내리꽂히며 날카로운 발톱으로 병아리를 
움켜채듯 임상옥의 뇌리를 향해 고함소리 하나가 천둥소리가 되어 
내리꽂혔다.
  "네 이놈, 아직도 내 말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하였단 말이냐."
  천둥소리로 꾸짖는 대갈일성이었다. 그 소리에 임상옥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수십 년의 시공을 초월하여 내리꽂힌 석숭 큰스님의 할(喝) 
소리였던 것이다.
  "네 이놈."
  석숭 스님의 고함소리가 그의 뇌리로 박혀들었다.
  "아직도 이 뜻을 모르겠다는 말이더냐."
  퍼뜩 정신이 든 임상옥은 누운 자세에서 일어나 정좌를 하고 앉았다. 
갑자기 폭포물로 전신을 셋은 듯 정신이 맑아졌다. 임상옥은 까마득히 
오래 전에 들었던 석숭 큰스님의 목소리를 기억하여 떠올렷다.
  벌써 50년 가까운 세월이 훌쩍 흘러간 것이었다. 그때 임상옥의 나이 
스물 중반이 넘었을  때였으니 벌써 반세기의 세월이 흘러가 강산은 다섯 
번이나 바뀌었던 것이다.
  그 무렵 임상옥은 임상옥이 아닌 도원 스님이었다.
  아아. 생각난다.
  마지막으로 작별인사를 나누기 위해 찾아가 임상옥이 무릎을 꿇고 석숭 
큰스님에게 삼배를 올리자 큰스님은 느닷없이 입을 열어 말하였었다.
  "꽃을 한 송이 가져오너라."
자신이 잘못 들었나 생각하여 '무슨 말씀입니까'하고 묻자 석숭은 다만 
이렇게 말하였을 뿐이다.
  "꽃을 한 송이 가져오라고 내 말하지 않았느냐."
  밑도 끝도 없는 큰스님의 명령. 어쨌든 그 명령을 따르기 위해 방문을 
나섰는데 마침 암자에는 여름비가 자욱히 내리고 있었다. 아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절 앞 뜨락에는 온갖 꽃이 만발하고 있었다. 
보랏빛깔의 수국, 노란 원추리꽃, 붉은 작약꽃. 그러나 임상옥은 그 어느 
꽃 한 송이도 꺾지 못하였었다. 스님은 '꽃을 가져오라'고 명령하였지 '꽃을 
꺾어오라'고 명령하신 것은 아니었으므로 어느 꽃이라도 꺾어 꽃의 생명을 
빼앗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는 수 없이 임상옥은 어느 꽃도 꺾지 못하고 빈손으로 방안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꽃을 가져왔느냐."
  석숭이 물었을 때 임상옥은 문득 석숭 스님이 앉아 있는 바로 옆자리에 
한 무리의 붉은 꽃들이 화병 속에 꽂혀 있는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그 
꽃의 이름은 배롱나무라고 불리우는 목백일홍의 꽃. 이름 그대로 백일 
동안이나 꽃이 피어 백일 동안이나 질 줄 모른다는 자미화였다.
  "꽃을 가져왔느냐고 내 묻지 않았느냐."
  석숭이 큰소리로 다시 말하였을 때 임상옥은 '꽃을 가져왔습니다'라고 
선뜻 대답한 다음 꽃병 속에 꽂힌 백일홍의 나뭇가지를 뽑아들어 꽃 한 
송이를 스님 앞에 바쳐 올렸던 것이다. 석숭이 그 꽃을 본체만체 받으려 
하지 않자 하는 수 없이 임상옥은 그 꽃을 다시 꽃병 속에 꽂아 넣었는데 
그때서야 석숭은 주섬주섬 다기를 내놓으면서 말했었다.
  "차 한 잔 마시겠느냐."
  큰스님 석숭은 직접 준비된 찻잔 하나를 내밀고는 차를 따라 주며 
이렇게 말했었다.
  "차를 마시거라.'
  큰스님 석숭이 미리 준비해 두었던 찻잔. 그 찻잔이야말로 '계영배'가 
아니었던가.
  그때 암자 밖으로는 쑤아아- 숲을 뚫고 불어 가는 바람에 실린 빗소리가 
온 천지를 바닷속처럼 아득하게 가라앉히고 있었지.
  그 빗소리를 뚫고 석숭 큰스님은 이렇게 말하였다. 그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게 들려오고 있다.
  "...내가 하는 말을 명심토록 하여라. 너는 네 손으로 꽃을 꺾어 꽃의 
생명을 꺾지는 않았으니 분명히 자비심을 갖고 있다. 장사란 것도 이와 
마찬가지여서 돈을 벌기 위해서 남을 짓밟거나, 이를 추구하기 위해서 
남의 생명을 끊어버리는 무자비한 일을 해서는 아니된다. 너는 남을 
불쌍히 여기는 자비심을 갖고 있으니 반드시 장사로 큰 성공을 거둘 
것이다. 또한 너는 방안에 있는 꽃을 들어 내게로 가져왔다. 너는 꽃을 
가져오기 위해 먼 곳을 돌아 헤매이지 않고 가장 가까운 곳에서 꽃을 
발견하는 눈을 가졌다. 무릇 재화란 멀리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에 
있는 것이며 성공 또한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곁에 있는 것이다. 
너는 가장 가까운 곳에 복과 재화가 가득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정의 화합이 모든 일을 이룬다'는 옛말을 실천하고 있으니 이 
또한 복이 있을 징조가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너는 방안에서 꽃을 
구하였으니 평생 계집질이나 주색잡기와 같은 허망한 일로 세월을 
허송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한가.
  정좌하여 앉아서 까마득한 옛 기억을 더듬던 임상옥은 슬며시 미소를 
띄워 올렸다.
  그러하였는가 과연 내가 석숭 큰스님의 말씀처럼 평생 계집질이나 
주색잡기에 허송세월을 하지는 아니하였던가.
  송이.
  비록 옛 친구였던 이희저의 딸, 송이를 구하기 위해서였다지만 
혼약식까지 올렸던 그것은 어쨌든 축첩이 아니었던가.
  아아, 기억나고 생각난다.
  얼마나 송이를 상사하였던가. 송이와 가졌던 육체의 열락은 지옥불보다 
뜨겁지 아니하였던가. 그것이 계집질이 아니고 무엇이었던가. 그것이 
주색잡기가 아니고 무엇이었던가.
  "또한 너는 방안에서 구한 꽃을 다시 제자리에 갖다 놓아두었다. 너는 
모든 물건이나 사람이 제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분수를 알고 있으니 반드시 
복이 있을 것이다."
  석숭 큰스님의 목소리가 다시 기억되어 떠오르고 있었다.
  "이와 같이 천하만물은 반드시 있어야 할 제자리를 갖고 있는 것이다. 
장사도 이와 같다. 장사란 사람이 하는 것인데 모든 사람에게도 
대소귀천이 없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큰 사람도 작은 사람도 없고, 날 
때부터 귀한 사람도 천한 사람도 없는 것이다. 사람을 부릴 때 있어 
차별하지 말고 사람을 대할 때 크고 작음을 논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네가 선택한 꽃은 배롱나무의 꽃이었다. 배롱나무 꽃은 꽃 중에서 가장 
오래 피는 꽃이 아니더냐. 배롱꽃은 죽은 꽃잎에서 계속 새순이 나와 
가을이 될 때까지 한 번도 꽃이 지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너의 
재물은 계속 늘어만 가고 너의 상업은 계속 번창하여 나갈 것이다."
  그리고 나서 석숭 큰스님은 임상옥이 마시던 빈 잔 속에 다시 찻물을 
가득 부어 내렸었다. 그 향긋한 차의 향기가 아직도 풍겨 오는 것처럼 
느껴지고 있다. 
  정좌하고 앉아서 까마득한 옛 기억을 떠올리던 임상옥은 빙그레 미소를 
띄워 올렸다.
  차 한 잔 마시는 사이에 50년 세월이 흘러 가버린 것이다. 향긋한 차 한 
잔 마시는 사이에 모든 인생이 덧없이 흘러 가버린 것이다.
  임상옥은 석숭의 말을 다시 기억하여 떠올렸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그것은 배롱나무는 과실나무가 
아니어서 먹을 수가 없다는 점이다. 결국 너의 상운과 영화는 계속 
뻗어나가겠지만 그것은 당대에만 그칠 뿐, 그 열매는 자식 대에 이를 
때까지 맺지는 못할 것이다."
  당대에만 그칠 상운. 자식 대에는 이르지 못할 상운의 열매 석숭 
큰스님의 예언이 정확한 것이라면 이제 내 상운도 끝이나 가고 있는 
것이다.
  배롱나무가 과실나무가 아니어서 그 열매를 따먹을 수가 없듯이 내 자식 
대에 이르기까지 상업의 열매가 맺지 못할 것이니 석숭 큰스님의 말씀이 
옳다면 내 상업의 운은 이제 끝이 나고 있는 것이다.
  "...너는 반드시 살아감에 있어 세 번의 큰 위기를 맞이할 것이다. 그 큰 
위기가 있을 때마다 너는 이를 잘 극복해 나갈 것이지만 만약 그렇지 
못한다면 너는 하루아침에 멸문지화를 당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벌써.
  임상옥은 지그시 눈을 감고 지난 일을 회상해 보았다.
  조선 초기의 문신 이석형은 낙산 밑에 집을 짓고 살고 있었는데 그 집에 
연못이 있어 수위가 7할을 넘으면 물이 빠지게 하여 계영정, 즉 '넘침을 
경계하는 연못'이란 이름을 짓고 말년에는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선비로서 시문을 지으며 지냈는데, 마찬가지로 임상옥도 7할을 넘으면 
술이 없어져버리는 계영배, 즉 '가득 채움을 경계하는 술잔'을 통해 스스로 
상계에서 물러나 가객으로 시문을 지으며 은둔생활을 하고 있었다.
  눈을 감고 앉아서 하룻밤을 새우며 석숭 스님이 예견하였던 세 가지의 
비결을 떠올리는 동안 임상옥은 자신이 실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보냈다는 
감회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칠십 평생의 인생을 살아오는 동안, 세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으며 그 
고비를 만날 때마다 석숭 스님이 예언하였던 위기를 결국 '사', '정' 그리고 
'계영배'의 세 비결을 통해 타파하고 무사하게 넘어갈 수가 있었다.
  그러나 아직 끝이 난 것은 아니다.
  "이젠 그만 가거라. 그리고 산을 내려가면 그 즉시 이곳을 잊어버리고 
다시는 되돌아오지 말아라."
  석숭 큰스님은 계영배를 걸망 속에 집어넣고 일어서려는 임상옥에게 
이렇게 말을 하였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 하겠노라."
  이제 막 하산하려는 임상옥에게 하신 석숭 큰스님의 마지막 한마디. 그 
한마디의 말씀이 천둥이 되어 임상옥의 뇌리를 뒤흔들었다.
  "...마지막으로 말하거니와 네 생각과 네 뜻과 관계없이 네가 한 
푼이라도 손해를 보는 일이 있으면 그때가 네 상운이 다한 것을 알고 네가 
가진 모든 것 모두를 남에게 나눠주고 장사에서 손을 떼어라. 현명한 
사람은 지붕에서 한 방울의 낙숫물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는 순간 얼마 안 
가서 지붕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미리 짐작하여 알게 되느니라.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임상옥이 대답하자 석숭은 곧 입을 다물었었다. 그로 그만이었었다. 그는 
그 앉은 자리에서 즉시 돌아앉아서 본 척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석불이 
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석숭 큰스님의 마지막 말이었다.
  지금껏 임상옥은 석숭 큰스님이 예언하였던 세 가지의 위기에만 신경을 
쓰고 정신이 팔려 있었다. 어떻게 하면 그 위기를 물리칠 수 있을 것인가. 
석숭 큰스님이 내려주신 그 비의의 뜻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하고 그 
화두를 타파하는 데에만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석숭 스님의 예언은 아직 끝이 난 것이 아니었다.
  지난 한낮에 보았던 살벌한 풍경.
  한낮에 한가로이 병아리를 데리고 모이를 쪼던 어미 닭을 허공에서 
맴돌고 있던 솔개가 쏜살같이 내려와 날카로운 발톱으로 채어서 허공으로 
치솟던 모습을 바라보던 임상옥의 귓가에 들려오던 석숭 큰스님의 
대갈일성.
  "네 이놈, 아직도 이 뜻을 모르겠다는 말이냐."
  석숭 큰스님의 예언은 아직 완성되지 아니하였었다. 석숭 큰스님의 
예언은 지난 낮, 닭 한 마리를 솔개가 발톱으로 낚아 채어감으로써 마침내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닭은 분명히 임상옥의 소유였다. 그러나 그 닭은 임상옥의 생각과 
임상옥의 뜻과 관계없이 허공을 날아다니는 솔개에 의해서 희생을 
당하였으며 이로써 임상옥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손해를 보게 
되었던 것이다.
  비록 미미한 닭 한 마리의 손해였으나 분명하게 석숭 큰스님은 이렇게 
말을 하지 않았던가.
  "...네 생각과 네 뜻과 관계없이 네가 한 푼이라도 손해를 보는 일이 
있으면 그때가 네 상운이 다한 것을 알아라."
  그리고 나서 석숭 큰스님은 말하지 않았던가.
  "...현명한 사람은 지붕에서 한 방울의 낙숫물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는 
순간 얼마 안 가서 지붕이 새고 마침내는 지붕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미리 
짐작하여 알게 되느니라."
  아무리 잘 지은 집이라도 언젠가는 무너지게 되어 있는 것이다. 아무리 
튼튼한 집도 결국 한 방울의 낙숫물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하는 법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천하의 권력도 언젠가는 망하게 되어 있으며, 하늘 
아래 제일의 거부도 언젠가는 망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천하의 
구중궁궐도 한 방울의 낙수에서 무너짐이 비롯되듯이, 천하 재물의 
무너짐도 결국 미미한 손실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임상옥은 마침내 자신의 무릎을 소리가 나도록 철썩 때리고는 중얼거려 
말했다.
  '이제야 알겠다. 닭 한 마리야말로 지붕에서 떨어지는 한 방울의 
낙숫물인 것이다. 그러나 이 낙숫물은 점점 더 떨어지고 떨어져 드디어는 
지붕이 새고 지붕이 무너져 내릴 때가 다가올 것이다.'
  임상옥은 마침내 깨달았다.
  나는 이제 석숭 큰스님이 예언하였던 마지막 말씀, 내 상운과 명운이 
다하는 바로 그 경지에 이르게 될 것이다.

2

  다음날 아침.
  임상옥은 하인을 시켜 모든 창고의 문을 활짝 열게 한 후 이렇게 말을 
하였다.
  "창고에 있는 금덩어리와 은덩어리를 모두 마당에 꺼내 햇볕을 쬐도록 
하여라."
  하인 하나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채 물어 말했다.
  "햇볕을 쬐라시니 무슨 뜻이나이까."
  그러자 임상옥은 대답하였다.
  "햇볕을 쬐어야만 좀이 먹거나 녹이 슬지 않을 게 아니겠느냐."
  하인은 주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햇볕을 찍어야만 좀이 먹거나 
녹이 슬지 않을 게 아니냐는 말은 이치에 맞는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으리."
  하인이 조심스럽게 말하였다.
  "금덩어리와 은덩어리가 좀이 먹다니요."
  해마다 봄이나 가을이 되면 서고에서 책을 꺼내 햇볕에 말려 습기를 
없애고 좀이 먹지 않도록 하는 일은 있었지만 금덩어리와 은덩어리가 좀이 
먹을까봐 햇볕에 말리는 일은 없었던 일이다.
  "좀이 먹을까봐 그러는 것은 아니다."
  임상옥은 말하였다.
  "녹이 슬거나 벌레가 먹을까봐 그런다."
  어떻게 금덩어리와 은덩어리가 녹이 슬 수가 있을 것인가 그냥 
쇠붙이라면 녹이 슬겠지만 순금과 순은은 녹이 슬지 않는 물건이 아닐 
것인가.
  또한 벌레가 먹다니. 책이나 옷이라면 습기에 젖어 좀이나 곰팡이가 
먹을 수도 있겠지만 어떻게 금덩어리와 은덩어리를 벌레가 먹을 수가 있을 
것인가.
  "나으리."
  하인이 다시 물어 말하였다.
  "어떻게 금덩어리와 은덩어리에 녹이 슬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임상옥은 소리쳐 말하였다.
  "이놈아, 쇠붙이에 녹이 슬 때에는 털어 내고 벗겨내면 그만이지만 
금덩어리에 녹이 슬면 구할 방도가 없다. 네 놈이 이 도리를 어찌 
알겠느냐. 시키는 대로 즉시 하지 않겠느냐."
  임상옥이 호통을 치자 하인들은 그 즉시 마당에 멍석을 깔고 그 위에 
백지를 펴고 금덩어리와 은덩어리를 있는 대로 꺼내 햇볕에 말리기 
시작하였으니 그 엄청난 수량이 가히 장관이었다.
  마침 황금과 은괴는 햇볕을 받고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 임상옥은 박종일을 불러 모든 문부를 가져오도록 하였다.
  문부라 함은 장사할 때 사용하는 모든 문서와 장부로, 들고나는 수입과 
지출 등 회계에 대한 기록은 물론 외상에 관한 기록도 포함되어 있는 
부책이다.
  박종일이 문부를 가져오자 임상옥은 즉시 외상 장부에 적혀있는 
부채인들을 불러모으도록 명령을 하였다. 성읍에 살고 있는 상인치고 
임상옥에게 부채를 지고 있지 않은 상인은 거의 없을 정도였다. 이들은 
임상옥의 부름을 받고 단걸음에 달려오면서도 모두들 불안해하고 있었다. 
단시간 안에 빚을 갚고 그 빚에 따른 이자까지 계산해내라는 강제호출이 
아닌가 하고 이들은 불안해하고 있었는데, 막상 임상옥의 상가에 도착하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임상옥은 한 사람 한 사람씩 만나서 부채를 확인하고는 이를 강제로 
받아내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탕감해 주고 있지 않은가.
  또한 임상옥은 빚진 사람들이 보는 데서 그 장부에 적힌 이름을 일일이 
붓으로 지워 주었던 것이다 원래 상업에서 발생된 부채관계는 본인이 
죽으면 자식에까지 세습되는 무서운 계약이었다. 빚을 아비가 갚지 못하면 
반드시 그 빚을 아들이 갚아야 했다.
  임상옥도 죽은 아비 임봉핵이 남기고 간 빚을 갚기 위해서 얼마나 
노심초사하였던가.
  자신이 경험했던 쓰라린 기억이 이유가 되었을까. 일일이 외상을 탕감해 
주었을 뿐 아니라 장부에서까지 그 명단을 지워 주는 임상옥의 선행에 
상인들은 모두 놀래서 입이 먹 벌어졌던 것이다.
  그뿐인가.
  돌아가는 상인들에게 마당에서 햇볕을 찍고 있는 금괴나 은괴중 한 
덩어리씩을 들려서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아닌가.
  빚진 상인들은 일시에 부채를 탕감받고 횡재까지 하게 된 셈이었다.
  모든 상인들을 돌려보내고 나서 임상옥은 마당에 불을 피우고 문부책을 
태우기 시작하였다. 주인 임상옥의 행동을 낱낱이 지켜보던 박종일이 
못마땅하여 물어 말했다.
  "이름을 일일이 지웠으면 그만이지 어찌하여 문부까지 태워버리십니까."
  그러자 임상옥은 웃으며 말하였다.
  "못을 빼도 못구멍은 남는 법이오. 마찬가지로 아무리 이름을 
지워버렸다 해도 문부가 있으면 구멍, 즉 흔적은 남기 마련이오. 흔적을 
없애려면 마음에서 지워버려야 하오. 마음에서 지워버려야 한다면 
처음부터 없을 무로 돌아가야 할 것이 아니겠소. 태워버리는 것이야말로 
소신공양인 셈이어서 아예 있지도 않았던 한 처음으로 돌아가는 셈이오."
  그날 밤.
  두 사람은 주안상을 마련하여 마주앉았다. 박종일은 사전에 단 한마디의 
의논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뜻밖의 일을 벌인 임상옥에게 불만의 감정을 
갖고 있었으며 임상옥 또한 이를 잘 알고 있었다.
  별다른 대화 없이 몇 순배 술잔이 오고 가자 어색했던 감정이 어느 정도 
풀리고 말문이 열렸다. 박종일이 먼저 입을 열어 말했다.
  "나으리."
  박종일은 평생 임상옥의 반려자였다. 박종일이 없었더라면 임상옥의 
상업은 성공치 못하였을 것이다. 아니, 박종일이 아니었더라면 임상옥은 
어쩌면 속세로 되돌아 오지조차 못하고 아직도 불문에 몸담고 있었을지도 
모를 것이 아니겠는가.
  "심히 섭섭하나이다. 나으리께오서 저에게 한마디의 논의조차 없으시고 
이런 뜻밖의 일을 하시다니요."
  박종일의 섭섭한 마음은 당연한 것이다. 박종일은 임상옥의 반려자였을 
뿐 아니라 동업자였으며 믿을 수 있는 분신과 같은 존재였다. 특히 
상계에서 물러난 지난 20여 년 동안 임상옥이 술에 취해 시를 짓는 
가객으로만 소일하고 있을 때 임상옥의 상업을 도맡아 전념한 사람은 
박종일이 아니었던가.
  "미안하게 되었소."
  손을 내밀어 박종일의 손을 찾아 쥐면서 임상옥이 부드럽게 말을 
하였다.
  "자네에게 정말 미안하게 되었소 그려."
  "나으리."
  여전히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로 박종일이 물어 말하였다.
  "도대체 무슨 일로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셨나이까."
  그리고 나서 임상옥은 붓을 들어 종이 위에 다음과 같은 문장을 단숨에 
써내렸다.
박종일은 그가 쓴 문장을 쳐다보았다.
  '오사필의'
  박종일은 그 문장의 뜻을 잘 알고 있었다.
  일찍이 원나라에 의해서 남송이 멸망했을 때 대부분 항복하였으나 
끝까지 항전하다가 순절한 사람도 많았다. 문천상이 그 대표적인 인물로 
끝까지 원나라와 싸우던 항전파 중의 한 사람이었는데 마침내 그는 
원군에게 붙잡히게 되었다. 원나라의 세조 쿠빌라이는 문천상의 인격과 
재능을 아깝게 여겨 투항할 것을 계속 권하였는데 그는 끝내 응하지 않고 
유명한 '정기의 노래'를 옮으며 반항하였다.
  그가 읊었던 '정기의 노래'는 다음과 같다.

  천지에는 정기가 있으니
  이리저리 흘러서 모양을 이룬다. 
  아래로는 강과 산이 되고
  위로는 해와 달이 된다.
  사람에게는 호연지기가 되고
  널리 퍼져서는 대양에 넘친다.

  마침내 쿠빌라이가 처형의 명을 내리자 형 집행 직전에 문천상은 형리를 
돌아보며 이와 같이 말하였다.
  "나의 일은 끝났도다."
  그로부터 담담하게 죽음을 맞는 사람의 마지막 일성으로 '오사필의'는 
'나의 일은 끝났다'는 뜻으로 널리 사용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이까. 무슨 일이 있었사온데 '나의 일은 
끝났다'고 말씀하셨나이까."
  그러자 임상옥은 담담하게 대답하였다.
  "...이틀 전 한낮에 대청마루에 누워 낮잠을 즐기고 있었소이다. 그런데 
한낮 마당에서는 어미 닭이 병아리를 몰고서 모이를 쪼고 있었소. 참으로 
평화롭고 행복한 풍경이었소 그런데 갑자기 솔개 한 마리가 허공에서 
쏜살같이 날아와서 어미 닭을 날카로운 발톱으로 채어 어디론가 
사라져버리더군.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소. 너무나 급작스럽게 얼어난 
일이라서 정신을 차릴 겨를도 없는데 또 다른 솔개 한 마리가 이번에는 
병아리 한 마리를 채어 사라져 버리는 게 아니겠소. 그 순간 나는 
깨달았소."
  눈을 지그시 감으며 임상옥이 말하였다. 그러나 더 이상 임상옥은 말을 
계속하지는 않았다.
  "무엇을 깨달았다는 말씀이시나이까."
  박종일이 묻자 임상옥이 자신이 쓴 문장을 가리키면서 대답하였다.
  "나의 일은 끝났음을 알게 되었단 말이오."
  너무나 뜻밖의 고백이었다.
  겨우 닭 한 마리를 채어 가는 솔개의 모습에서 자신의 운명이 끝났음을 
예견하였다니 그리하여 문부에 적힌 모든 상인들을 불러 부채를 탕감해 
주었을 뿐 아니라 아예 문부를 불에 태우고, 그뿐인가 돌아가는 
상인들에게 금덩어리와 은덩어리를 나눠주기까지 하다니.
  "나으리."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박종일이 물어 말하였다.
  "도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도저히 저는 알 수가 없나이다. 겨우 닭 한 
마리를 솔개가 채어 가는 모습을 보고 '오사필의'를 생각하시다니요."
  "이보시게, 박공."
  임상옥이 정색을 한 얼굴로 입을 열어 말하였다.
  "일찍이 공자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소. '부귀가 가령 구할 수 있는 
것이라면 나는 채찍을 잡는 마부라도 하겠지만, 억지로 할 수 없는 것이니 
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르겠다'는 공자의 말씀처럼 부귀는 사람의 
욕망으로는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하늘의 뜻이 있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오 다행히 이 늙은이도 비록 채찍을 잡는 마부 노릇을 하지 
않았으나 하늘의 도우심으로 이만큼이나마 재물을 모으게 되었던 것이오. 
내가 이만큼이나마 부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부지런히 모으고 일한 
덕분도 있었지만 전국 제일의 거상이 되자면 천우신조로 하늘과 신령님의 
도움이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소. 이보시게 박공, 내가 곡식을 
심으면 지나가는 소라도 밭고랑에 거름이 될 똥을 한 무더기 누고 갔으면 
갔지 곡식을 밟는 일은 한번도 없었소. 하다 못해 호박을 심으면 한 
꼭지에 두 개씩 열었으면 열렸지 물러서 떨어지거나 썩는 법이 없었소. 
마찬가지로 사온 물건의 수량이 한두 개가 더 많았으면 많았지 결코 
모자란 적이 없을 만큼 이를테면 재수가 좋았던 것이오. 또한 짐승을 
먹여도 새끼가 죽는 법이 없었고, 닭을 쳐도 계란 열세 개를 품에 
안겼다면 나중에 병아리로 깨어나온 것은 한두 개가 늘어난 열네 마리거나 
열다섯 마리가 되도록 어미 닭이 알을 더 낳아 보탰으면 보태었지 결코 
줄어드는 법은 없었소. 심지어 닭이 거름 무더기에서 벌레를 쪼아먹을 
적에도 끌어 모으지, 끌어내려 흩은 적이 없었소. 그런데 그날 오후 평생 
처음으로 닭 한 마리를 솔개 한 마리가 채어 가는 모습을 내 눈으로 직접 
보게 되었던 것이오."
  일단 말을 마치고 나서 임상옥이 정면으로 박종일을 쳐다보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
  "이보시게 박공, 그 순간 나는 내 일이 끝났구나 하는 예감을 받았소. 
상인으로서의 상운도 드디어 끝이 났구나 하는 직감을 받은 것이오."
  "나으리."
  답답한 표정으로 박종일이 말을 잘랐다.
  "도대체 저는 나으리께오서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지 알 수 가 
없나이다. 상운이 끝나시다니요. 모든 것이 끝이 나시다니요. 나으리, 겨우 
닭 한 마리를 솔개가 채어간 것에 지나지 않나이다. 그런 일이야 
비일비재한 일이나이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일어날 수 있는 범사가 
아니겠습니까."
  "물론 평범한 범사요. 하지만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뒤틀리는 
천재지변도 처음에는 사소한 범사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오. 비록 지금은 
닭 한 마리를 솔개가 채어간 범사에 지나지 않으나 내일은 내가 살고 있는 
이 집을 화마가 단숨에 휩쓸고 가 순식간에 폐허로 만들어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오. 옛말에 화복무문이라 하였소. 지금까지 내가 가진 문으로 복이 
쏟아져 들어왔다면 닭 한 마리를 솔개가 채어간 것은 내가 가진 문으로 
화가 쏟아져 들어올 징조인 것이오."
  자신이 마시던 술잔을 비우고 그 빈 잔에 술을 따라 권하면서 임상옥은 
말을 이었다.
  "일찍이 내가 불문에 몸담고 있을 때 들은 이야기가 있소. 한 사람이 
길을 가는데 황야에서 호랑이를 만났소. 도망치다 도망치다 결국 절벽까지 
도망친 그 사람은 두 손으로 나무덩굴을 붙잡고 간신히 버티며 자신이 
절벽에서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호랑이의 입을 쳐다보고 있었소. 
그때 흰 쥐와 검은 쥐가 나타나고 덩굴을 갉더니만 마침내 툭, 하고 
덩굴이 끊어져버리게 되었소. 떨어지는 도중 그는 절벽에 피어난 산딸기 
열매를 목격하고는 그것을 따 입에 넣으며 '아아, 맛있다'고 감탄하였다는 
이야기요. 우리의 인생도 간신히 절벽에서 덩굴을 붙잡고 버티는 도망치는 
사람에 지나지 않소이다. 그 덩굴에서 낮의 흰 쥐와 밤의 검은 쥐는 
번갈아 가면서 시간의 날카로운 이빨로 생명줄을 갉아 내리고 있는데 그 
어리석은 사람은 마침내 호랑이 아가리에 잡혀먹을 죽음에 이르렀음에도 
산딸기를 따먹으면서 아아 맛있다고 감탄하고 있을 뿐인 것이오."
  임상옥은 술을 마시면서 말을 이었다.
  "일찍이 부처님은 <육방예경>이란 경전에서 재물을 없애는 여섯 가지 
일에 대해서 말씀하셨소. 나는 평생 동안 상인으로 살아오면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 여섯 가지의 경계를 항상 마음속으로 새기며 벗어나지 
않으려고 노력하였소."
  "그것이 무엇이나이까."
  박종일이 물어 말하였다. 그러자 임상옥은 대답하였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재산을 없애는 여섯 가지 일은 다음과 같소이다. 
첫째는 '술에 취하는 일'이요. 둘째는 '도박을 하는 일'이요. 셋째는 
'방탕하여 여색에 빠지는 일'이며, 넷째는 '풍류에 빠져 악행을 저지르는 
일'이며, 다섯 번째는 '나쁜 벗과 어울리는 일'이며, 여섯 번째는 '게으름에 
빠지는 일'이오."
  자신이 마신 술잔에 다시 술을 따라 박종일에게 건네주면서 임상옥은 
말했다.
  "이때 제자인 선생이 부처님께 물었소. '어째서 그 여섯 가지의 일들이 
재산을 없애는 허물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부처께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셨소."
  임상옥은 상인으로서 평생 동안 자신이 지켜왔던 계율을 비로소 
털어놓기 시작하였다.
  "'술을 마시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허물이 있다. 재산을 소비하게 되고 
몸에 병이 생기고 잘 다투고 나쁜 이름이 퍼지며 분노가 폭발하고 지혜가 
날로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술을 마시지 말아야 한다. 또한 도박에도 
다음과 같은 허물이 있다. 재산이 날로 줄어들고 도박에 이기더라도 
원한이 생기며, 지혜로운 사람이 타일러도 듣지 않으며 사람들이 그를 
멀리 하며 도둑질할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박을 해서는 안 
된다. 또한 방탕에도 다음과 같은 허물이 있다. 몸을 보존하지 못하고 
자손을 보호하지 못하고 항상 놀라고 두려워하게 되며 온갖 괴롭고 나쁜 
일이 몸을 얽어매고 허망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방탕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나쁜 벗과 어울리는 데도 다음과 같은 허물이 
있는 것이다. 남을 속일 꾀를 내고 으슥한 곳을 좋아하며 남의 여자를 
유혹하고 남의 물건을 훔치며 재물을 독차지하려 하고 남의 허물을 
드러내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쁜 벗과 어울리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재산을 없애는 여섯 가지 일 중에 가장 
마지막은 '게으름'이었소. 게으름에 대해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소이다. '게으름에는 다음과 같은 허물이 있다. 부자면 부자라고 
해서, 가난하면 가난하다고 해서 일을 하기를 싫어한다. 추울 때는 춥다고 
해서, 더울 때는 덥다고 해서 일을 하기 싫어한다. 시간이 이르면 이르다고 
해서, 시간이 늦으면 늦었다고 해서 일을 하기를 싫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디 게으르지 말아야 한다.'"
  임상옥은 빈 잔에 술을 따라 단숨에 이를 마시면서 말했다. 
  "평생을 상인으로 지내오는 동안 나는 이 말씀을 항상 마음 속에 새기며 
계율을 지켜왔소이다. 술을 마시되 지나치지 않으려 노력하였고, 도박에는 
손도 대지 않았고, 방탕은 되도록 물리치려 하였으며, 나쁜 벗은 멀리 하려 
하였으며 특히 게으름에 빠지지 않으려 노력해 왔소. 그리고 또 한 가지 
부처께서 말씀하신 다음과 같은 말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해 왔소. 즉'그 
대신 가까이 해야 할 벗이 있다. 그는 너에게 많은 이익을 주고 많은 벗을 
보살펴 준다. 잘못을 말리고 사랑하고 가없이 여기며 남을 이롭게 하고 
사업을 같이 하는 벗이다. 그러므로 그런 이는 친해야 한다.' 내게 있어 
그대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로 그 사람이었소. 내게 많은 이익을 주고 
내 잘못을 말리고 평생 동안 나와 함께 사업을 같이 해왔던 벗, 그 
사람이야말로 박공, 그대인 것이오."
  임상옥은 물끄러미 박종일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말하였다. 박종일은 
비록 임상옥보다 나이가 어렸지만 그도 이젠 나이가 들어 역시 고희를 
넘긴 노인이었다.
  "그러나 박공, 부처께서 말씀하신 그 여섯 가지의 경계도 천도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는 것이오. 술과 도박을 멀리 하고 나쁜 벗과 방탕을 멀리 
하고 아무리 부지런하게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하늘의 뜻'은 저버릴 수가 
없는 것이오. 내가 평생 모은 재물도 결국 호랑이에게 쫓기면서 절벽에서 
떨어지며 따먹은 산딸기 열매에 불과한 것이오. 이제 마침내 호랑이 
아가리에 잡아먹힐 때가 된 것이오. 내가 '나의 모든 일이 끝났다'고 
'오사필의'라고 말하였던 것은 바로 그런 뜻이었던 것이오."
  취기가 오른 임상옥은 껄껄 웃으면서 말하였다.
  "비록 닭 한 마리에 불과하였으나 솔개가 채어 가는 모습을 본 순간 
나는 내 상운뿐 아니라 명운까지 '오사필의'하였음을 깨달았던 것이오. 
이제는 부처님이라 할지라도 이를 막을 수는 없는 것이오."
  "좋습니다."
  박종일은 여전히 임상옥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으리의 말씀이 백 번 옳다 하여도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나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거나하게 취한 눈빛으로 임상옥이 박종일을 쳐다보며 물었다.
  "물으시니 대답하겠나이다. 어찌하여 문부에 적힌 상인들의 부채를 
일일이 아무런 조건 없이 탕감해 주셨습니까. 나으리는 그들이 어려울 때 
도와주셨나이다. 그러므로 나으리께오서 주신 빚은 이자를 받으려는 
대금이 아니었습니까. 빚진 상인들은 마땅히 그 빚을 갚아야 하나이다. 
아비가 못 갚으면 아들이라도 갚아야 하나이다. 그런데 나으리께오서는 
아무런 조건 없이 빚을 탕감해 주셨을 뿐 아니라 일일이 먹으로 그 명부를 
지워버리기 까지 하셨나이다. 그뿐이나이까 그들이 돌아간 뒤에는 아예 
문부를 불에 태워 없애기까지 하셨나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난 것은 
아니었나이다. 돌아가는 그들에게 금덩어리나 은덩어리를 하나씩 들려서 
돌아가게 했나이다. 빚진 상인들이 빚을 탕감받는 행운뿐 아니라, 
금덩어리까지 들고 가는 횡재까지 하게 되었나이다. 저는 도저히 이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이해할 수가 없나이다. 나으리, 나으리께서 그들에게 
빚을 지셨나이까. 빚진 자들은 저들이 아니나이까. 그런데 어째서 나으리는 
스스로 빚진 사람처럼 행동하셨나이까."
  구구절절이 박종일의 말은 옳은 것이었다. 경우에 바른 개성 출신의 
상인으로서 박종일의 말은 상인이 지켜야 할 법도에 충실한 지적이었다.
  빚을 탕감해 주는 일은 있을 수 있다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이유도 없이 
금괴까지 주는 것은 미치지 못함과 같은 과유불급의 지나친 행동이라는 
것이 박종일의 날카로운 지적이었던 것이다.
  그러자 임상옥은 말없이 붓을 들어 듬뿍 먹을 묻혔다.
  그리고 흰 종이 위에 단숨에 일필휘지로 문장을 적어 내리기 
시작하였다.
  단숨에 문장을 쓰고 난 임상옥은 물끄러미 박종일을 쳐다보면서 말을 
이었다.
  "지난 밤 나는 꼬박 하룻밤을 새운 끝에 마침내 한 가지의 사실을 
깨달았소. 나이 70에 이르러서야 상이 과연 무엇인기를 깨달았던 것이오."
  박종일은 임상옥이 쓴 문장을 바라보았다. 흰 종이 위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재상명여수 인중직사형'
  임상옥은 빈 잔에 자작하여 술을 따른 후 마시면서 말했다.
  "어릴 때부터 내 소원 중의 하니는 하늘 아래 제일 부자 천하 제일의 
상인이 되는 것이었소. 그 어릴 때부터의 꿈을 이뤄 이제 나는 조선 
팔도에서 제일 가는 거부가 되었소이다. 그러나 비록 거부가 되었지만 
마음속으로는 항상 아직 상의 기본조차 모르는 풋내기 장사꾼이라는 
생각을 지워버릴 수가 없었소. 그런데 그 날 밤, 닭 한 마리를 솔개가 
날카로운 발톱으로 채어 가는 모습을 본 순간 나는 상업의 도를 깨우칠 
수가 있었소."
  일찍이 임상옥이 환속을 결정하고 추월암을 물러나올 때 큰스님 석숭은 
불도가 아닌 상도를 통해서도 부처가 될 수 있음을 가르쳐 주었다. 암자에 
머무는 여러 대중에게 작별인사를 나누고 마지막으로 사승인 법천 앞에 
삼배를 올리자 법천은 임상옥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부디 성불하십시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불문을 버리고 속계로 환속하는 임상옥에게 부처를 이뤄 성불하라는 
사승의 말은 상업으로 부처를 이뤄 상불이 되라는 당부가 아니었던가.
  오도송.
  불교에서는 마침내 도를 이뤄서 깨달음을 얻은 순간 느낀 경지를 
게송으로 노래하는데 이를 오도송, 혹은 증도가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닭 한 마리가 솔개를 채어 가는 모습을 본 순간 자신의 
명운을 깨달은 임상옥은 바로 그 순간 대오각성하여 부처를 이룬 것이며, 
그 순간 자신이 깨달은 경지를 노래한 두 줄의 문장은 바로 임상옥의 
오도송이었던 것이다.
  임상옥의 오도송은 다옴과 같은 뜻을 지니고 있다.
  '재물은 평등하기가 물과 같고, 사람은 바르기가 저울과 같다.'
  박종일은 그 문장의 뜻을 이미 알고 있었으나 감히 입을 열어 말을 할 
수 없었다.
  임상옥의 얼굴에는 범접할 수 없는 기품이 흘러 넘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찍이 청허 휴정 스님은 21세 때 마을을 지나다 낮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크게 깨달아 다음과 같은 노래를 지었소이다. '털은 희어졌지만 
마음은 안 세는 것, 옛날 사람들이 이미 말하였네. 오늘 닭 우는 소리를 
들으니, 장부의 할 일이 끝났는가 싶네.' 청허 스님은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장부의 할 일이 끝났음을 깨달았으나 나는 닭 한 마리를 솔개가 채어 가는 
모습을 보고 오사필의를 깨달았소."
  임상옥은 껄껄 소리내어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노자는 이렇게 말하였소. '최상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은 선하여 만물을 
이롭게 하나 다투지 않으며 여러 사람이 싫어하는 곳에 처신한다. 고로 
도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나는 이제야 깨달았소. 재물이란 바로 물과 같은 
것이오. 흐르는 물은 다투지 않소이다. 물은 일시적으로 가둘 수는 있지만 
소유할 수는 없는 것이오. 물은 높은 데서 낮은 곳을 따라 흐를 뿐이오. 
물을 소유하려고 고여 두면 물은 생명력을 잃고 썩어버리는 것이오. 
그러므로 물은 그저 흐를 뿐 가질 수는 없는 것이오. 재물도 마찬가지요. 
재물은 원래 내 것과 네 것이 없소이다. 이는 물이 내 것과 네 것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내 것과 네 것이 아닌 재물을 내 
것으로 소유하려 하고 있소이다. 내 손안에 들어온 재물은 잠시 그곳에 
머물러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이오. 흐르는 물을 손바닥으로 움켜쥐면 잠시 
손바닥 위에 물이 고여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곧 그 물이 사라져버려 
빈손이 되어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요. 이는 사람도 마찬가지외다. 태어날 
때부터 귀한 사람 천한 사람, 가진 사람 없는 사람, 아름다운 사람 추한 
사람, 높은 사람 낮은 사람은 없는 법이오. 아무리 귀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는 잠깐의 현세에서 귀한 명예를 빌려 비단옷을 입은 것에 불과한 
것이오. 그 비단옷을 벗어버리면 그는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가 버리는 
것이외다. 그러므로 사람은 누구나 저울처럼 바른 것이오. 저울은 어떤 
사람이건 있는 그대로 무게를 재고 있소. 아무리 귀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더도 덜도 아닌 정확한 무게로 저울은 가리키고 있는 것이오."
  임상옥은 박종일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어찌하여 상인들의 빚을 탕감해 주었냐는 박공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바로 그것이오. 어차피 빚이란 것도 물에 불과한 것이오.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주었다고 해서 그것이 어찌 받을 빚이요, 갚을 빚이라 하겠소. 또한 
빚을 탕감하고 상인들에게 금덩어리를 들려 보낸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소. 금덩이라도 내가 소유하려 한다면 녹이 슬거나, 벌레가 먹고 
썩어버릴 것이오. 그들이 없었더라면 나 또한 상인으로서 성공을 거둘 
수가 없었을 것이오. 애초부터 내 것이 아닌 물건을 그들에게 돌려주는 
것에 불과한 일인데 그것을 감히 횡재라고 부를 수가 있겠소이까."
  그 순간 박종일은 임상옥의 심경에 품 변화가 있음을 알았다. 뭐라고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임상옥이 큰 깨달음을 얻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20년 전에도 그러하지 않았던가. 어느 날 갑자기 새로 지은 집을 
헐어버리고 작은 정자 하나를 지은 누옥에 스스로 물러나 시를 짓고 
은둔생활을 하지 않았던가.
  이번에는.
  박종일은 개성상인 특유의 날카로운 직관력으로 느낄 수가 있었다.
  그보다 더 심한 심경의 변화를 느끼고 있다. 주인 임상옥의 내부에 
천재지변과 같은 대격변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럴 때에는 그를 
내버려두는 것이 최상의 방책인 것이다. 
  내버려두자. 박종일은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그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자.

3

  그 다음날 아침.
  박종일은 먼 길을 떠났다.
  느닷없는 주인 임상옥의 명령 때문이었다.
  저 먼 한양 땅으로의 출장이었다. 그러나 전혀 상업과는 상관없는 
용무였다. 한양 조금 못 미쳐 과천에 있는 봉은사까지 다녀오라는 
당부였던 것이었다. 
  봉은사는 수도산에 있는 사찰로 연산군 4년에 정현왕후가 성종의 선릉을 
위해 능의 동편에 있던 견성사를 크게 중창하고 이름을 봉은사로 개칭한 
후부터 선종의 수사찰로 삼았던 명찰이다.
  그후 이 절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병화로 소실되었으나 정조 때에 
이르러 거의 모든 당우들이 중수되어 당시로서는 최고의 거찰이었다.
  특히 고승 보우가 주지가 된 후부터 불교를 중흥하는 중심 도량이 
되었는데 박종일이 임상옥의 명을 받고 이 절을 찾은 이유는 바로 이 절에 
추사 김정희가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김정희는 파란만장한 역정을 마치고 봉은사에 요사채 하나를 빌려 
기거하고 있었던 것이다.
  임상옥이 박종일에게 내린 명령은 봉은사에 머물고 있는 추사 김정희를 
만나 뵙고 문안인사를 올린 다음 갖고 간 문장 하나를 넌지시 건네주고 
오라는 단순한 용무였다. 임상옥이 김정희에게 보여주라는 문장은 그날 밤 
임상옥이 박종일에게 써보였던 단 두 줄의 문장이었다.
  '재상평여수 인중직사형'
  박종일로 보면 실로 수수께끼의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멀고먼 한양 
땅까지 찾아가서 오직 두 줄의 문장만을 보여주고 다시 돌아오라니.
  박종일은 의주를 떠난 지 보름만에 과천에 있는 봉은사에 도착하였다.
  박종일은 봉은사에 도착하자마자 김정희를 찾아가서 문안인사부터 
올렸다.
  "나으리."
  박종일은 댓돌 아래에서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리고 나서 김정희를 
바라보며 말하였다.
  "의주에 살고 있는 임상옥 대인께오서 문안인사를 올리라고 
여쭈셨나이다."
  "어허, 그러하신가."
  김정희는 크게 반가워하면서 말을 하였다.
  "대인어른께오서는 무고하신가. 대인어른께오서는 안녕하신가."
  임상옥이 마음속으로 김정희를 사숙하고 있었다면 김정희 역시 임상옥을 
공경하고 있었다.
  "대인어른께오서는 안녕하시나이다."
  박종일은 하인들을 시켜 가져온 귀한 산삼을 김정희에게 선물하였다. 
그것은 오래된 임상옥의 관례였다. 김정희를 만날 때마다 임상옥은 
최상급의 산삼을 헌상하였던 것이다.
  "번번이 이런 귀한 선물을."
  김정희는 임상옥으로부터 전해온 산삼을 받으면서 말하였다.
  "아무튼 고맙다고 말씀을 전해주시게나."
  "나으리께오서는 또 다른 물건을 보내셨나이다."
  박종일은 몸 속에 소중히 간직하였던 종이를 꺼내들었다.
  "나으리께오서는 대감어른께 이 물건도 반드시 보여 드리고 돌아오라고 
이르셨나이다."
  "이리 줘 보시게나."
  박종일은 두 손으로 그 종이를 김정희에게 바쳐올렸다. 김정희는 묵묵히 
그 종이를 펼쳐 보았다. 그리고 그 종이 위에 씌어진 문장을 읽어보았다.
  그 문장을 읽은 후 김정희는 말하였다.
  "이 문장을 쓰신 전후 사정을 말씀하여 보시게나."
  "나으리께오서는 한낮에 어미 닭이 병아리를 데리고 모이를 쪼고 있는 
모습을 보시다가 문득 솔개 한 마리가 발톱으로 그 닭을 채어 가는 것을 
보신 후 그 날 밤 이 문장을 지으셨다 하더이다."
  "그런 후 어떠하셨는가."
  "다음날 상인들을 불러 모든 부채를 탕감해 주셨으며 그 문부를 불에 
태우기까지 하셨나이다. 그뿐 아니라 돌아가는 상인들에게 금괴 하나씩을 
들려서 돌려보내시기까지 하셨나이다."
  "옳거니."
  느닷없이 김정희가 자신의 무릎을 치면서 다음과 같이 탄성을 질렀다고 
전해지고 있다.
  "채마밭에서 채소를 가꾸는 한갓 늙은이가 마침내 채마밭에서 금불상 
하나를 캐내었구나."
  박종일은 김정희의 탄성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김정희의 탄성은 
난해한 것이 아니다. 임상옥의 호는 '가포'였다.
  '가포'라 함은 '채마밭에서 채소를 가꾸는 사람'이란 뜻인 것이다. 
그러므로 채마밭에서 채소를 가꾸는 늙은이라면 바로 임상옥을 가리키는 
비유인 것이다. 그 임상옥이 채마밭에서 금불상 하나를 캐냈다는 표현은 
바로 부처상 하나를 캐냄으로써 도를 이루어 부처가 되었음을 암시하는 
일종의 선답이었던 것이다.
  법거량.
  불가에서는 깨달음의 경지를 남에게 내보임으로 해서 그 타인의 
경지까지 알아보는 방법이 있는데 이를 거량이라고 부른다.
  자신이 깨달은 경지를 열 자의 문장으로 압축시킨 임상옥이나, 그 
문장을 본 순간 임상옥의 경지를 단숨에 꿰뚫어 본 김정희나 이미 보통 
사람의 경지를 뛰어넘은 현인들인 것이다. 유일한 차이라면 임상옥은 상을 
통해 부처를 이뤘으며 김정희는 서를 통해 부처를 이뤘다는 것뿐이다.
  박종일은 봉은사에서 열흘 동안을 머물렀다. 임상옥으로부터 받은 
물건을 전하고 곧 돌아가려는 박종일을 한사코 김정희가 말렸기 때문이다.
  김정희는 박종일로부터 전해받은 임상옥의 게송을 당장 휘호하였다.
  임상옥의 문장을 휘호하면서도 김정희는 임상옥이 초탈하여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것을 재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부족하다고 김정희는 생각하고 있었다. 박종일로부터 
전해받은 '재상평여수 인중직사형'의 문장을 써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김정희는 생각하고 있었다.
  이 무렵.
  김정희는 날마다 달마상을 그리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그것은 김정희의 
오랜 벗이었던 백파가 일년 전에 죽었기 때문이다. 김정희는 생전에 두 
사람의 승려와 특히 절친하였는데 그 하나는 차로 유명한 초의, 또 한 
사람이 바로 백파였던 것이다.
  백파는 전라도 무장 사람으로 12세에 출가하여 일찍부터 강백으로 
유명하였으나 마흔 살이 넘어 '불법의 진실한 뜻이 문자에 있지 아니하고 
도를 깨닫는 데 있음을 잘 인식하고 자기 스스로 법에 어긋나는 말만을 
늘어놓았다'고 참회한 후 5년간 면벽수도하여 견성하였던 당대 제일의 
선사였다. 
  특히 백파는 선문의 요의를 정립시켜 백파문이라는 문파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또한 백파는 율과 화엄과 선의 정수를 고루 갖춘 거장이었는데 특히 
백파와 교유가 깊었던 김정희는 그를 '해동의 달마'라고 칭찬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정희가 백파를 해동의 달마라고 불렀던 데는 유래가 있다.
  김정희는 안도에서 건너와 중국 선종의 초조가 된 보리달마의 상을 즐겨 
그리고 있었는데 김정희가 달마상을 그릴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어찌하여 
백파상을 그렸는가."하고 묻는 것이었다. 이에 김정희가 "아니다, 나는 
백파를 만난 적도 없다. 내가 그런 것은 달마상이다"라고 말하였지만 
사람들은 믿으려 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김정희는 백파가 주석하던 영구산 구암사로 찾아가 백파를 
친견하게 된다. 백파를 본 순간 김정희는 어찌하여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가 그 연유를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바로 자신이 상상하여 그렸던 달마의 모습이 그림 속에서 뛰쳐나와 
실제의 모습으로 현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김정희는 백파를 '해동의 달마'라고 극찬하였으며 각별한 
교유를 맺기 시작하였다.
  그 무렵 김정희는 바로 백파가 오랫동안 기거하고 있던 전북 순창에 
있는 영구산 구암사로부터 백파의 화상을 그려 달라는 부탁을 받고 달마의 
화상을 닮은 '백파상'을 그린 후 서문을 덧불이고 있었던 것이다. '백파상을 
기리며 쓰고 아울러 서를 붙임'이라는 서문에서 김정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연전부터 달마의 화상을 만들고 있었는데 보는 사람마다 백파의 
모습이라고 하지 않는 이가 없으니 그 기연이 매우 기이하도다. 달마가 
죽어 외쪽 신발이 서쪽으로 돌아갔으나 보신은 동쪽에 나타난 것인가. 
예전에 산곡 노인은 이백시가 그린 도연명의 화상으로 자기의 모습과 서로 
닮고, 또 진회해가 그린 도연명 화상이 더욱 자기와 꼭 닮아 그대로 
도연명의 화상으로 자신의 초상을 삼았다고 한다. 이것은 달마와 백파가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닌 것과 같다. 영구산 속으로 보내어 백파의 
화상으로 만들어 그 문도들로 하여금 향을 사르고 그 화상의 곁에 글을 
불이니 '멀리서 보면 달마와 같고 가까이 보면 곧 백파로다. 차별이 있는 
것으로서 둘이 아닌 경지에 들어갔구나. 흐르는 물은 오늘만 있으나 맑은 
달은 전부터 있는 것일세.'"
  그런데 임상옥으로부터 전해온 산삼을 선물로 받고 임상옥의 문장을 
읽은 김정희는 임상옥 역시 '둘이 아닌 경지'에 들어갔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모이를 먹고 있는 닭을 채가는 솔개를 통해 너와 나의 경지가 없는 
불이문, 문자 그대로 모든 차별과 분별이 없는 경계를 깨닫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나누어주며 '재물을 물과 같고 사람은 저울처럼 올바름'을 
깨달은 임상옥 역시 차별상량이 없는 '둘이 없는 집'에 들어선 도인임을 
김정희는 깨달았던 것이었다.
  마치 김정희가 백파를 위해 노래하였던 '흐르는 물은 오늘만 있으나 
맑은 달은 전부터 있는 것일세'라는 구절처럼 임상옥 역시 마음속에 
밝아오는 명월, 즉 심월을 본 사람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김정희는 잘 알고 있었다.
  비록 드러내놓고 있지는 않았지만 임상옥이 자신을 위해 보이지 않는 
보시를 끊임없이 베풀어주고 있음을 김정희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10여 년 전에 그린 세한도의 발문에는 김정희 자신이 왜 이상적을 위해 
세한도를 그리게 되었는가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지난해는 <만학집>과 <대운산방문고>의 두 책을 부쳐왔고 올해는 
우경의 <황청경세문편>을 부쳐왔다. 이는 모두 세간의 흔한 책들이 
아니라 천만리 밖의 먼 곳에서 사들인 것으로 몇 년을 걸쳐 구한 것이지 
졸지에 얻어진 것이 아니다."
  김정희는 이 발문을 통해 자신이 표현한 대로 천만리 먼 곳의 
연경에까지 가서 귀한 책을 몇 해에 걸쳐 구해온 제자 이상적의 노고만을 
내심 치하하고 있었지만 김정희는 그 귀한 책을 구하는 데 드는 막대한 
경비가 바로 임상옥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왜냐하면 한낱 역관에 불과한 이상적이 총 120권에 달하는 
<황청경세문편>을 구하는 데 드는 모든 비용을 혼자서 조달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국가에 죄를 지어 유배생활을 하고 있는 중죄인을 위해 막대한 
경비를 지불하는 행위 역시 중죄임을 잘 알고 있었지만 임상옥은 
이상적에게 막대한 경비를 넌지시 쥐어줌으로써 김정희에게 덕을 베풀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모르고 있는 김정희가 아니었다.
  따라서 김정희는 제주도까지 찾아온 이상적을 위해 '세한도'를 그려 
주었듯 비록 직접 찾아오지는 않았더라도 대리인인 박종일을 통해 
임상옥을 위한 선물 하나를 먼저 들려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김정희가 주인으로부터 받은 선물과 물건을 전해주고 곧바로 돌아가려는 
박종일을 붙잡아 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 무렵 김정희도 이미 70세에 가까운 노인이었다. 더구나 두 차례에 
걸친 10여 년에 가까운 유배생활로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 있었던 
것이다.
  생전에 호를 추사, 완당, 시암, 천축고선생 등 백여 가지가 넘도록 
사용하고 있었지만 특히 봉은사에 머무르고 있던 말년에는 '노과'라는 호를 
애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 무렵 김정희는 자신을 문자 그대로 '늙은 
과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정희는 자신의 오랜 벗이자 마음속으로 공경하는 임상옥을 위해 
무엇을 그리고 무엇을 쓸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했다.
  매일 하루가 시작될 때마다 박종일은 김정희를 찾아가서 이렇게 
문안인사를 여쭈곤 했었다.
  "밤새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대감어른."
  요사체 안에서는 대답 대신 기침소리만 흘러나오곤 했었다. 그러면 
박종일은 이렇게 물어 보았다.
  "대감어른, 오늘이면 괜찮겠습니까. 오늘 돌아가도 되겠습니까."
  그러면 방안에서는 김정희의 다음과 같은 말이 흘러나오기가 일쑤였다.
  "하룻밤만 더 묵으시게나. 아마도 내일이면 돌아갈 수 있을 것일세."
  내일이면 돌아갈 수 있다던 김정희의 대답 소리가 벌써 하루 이틀 
되풀이되고 며칠새 닷새가 되고 엿새가 지나도 감감 무소식이었다.
  박종일은 몹시 궁금하였다.
  도대체 김정희는 주인 임상옥을 위해 무엇을 선물하기 위해 저렇게 
하루하루를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일까.
  마침내 열흘이 지났을 때에도 박종일은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김정희가 머물고 있는 요사채를 찾아가 문안인사를 올렸다.
  "밤새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대감어른."
  요사채에서는 아무런 기별도 없었다.
  "대감어른, 오늘은 어떻습니까. 오늘이면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 순간 벌컥 문이 열렸다. 지난 열흘 동안 박종일이 찾아가 문안인사를 
올려도 한 번도 열리지 않던 방문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방문이 활짝 
열린 것이었다.
  "물론이지."
  김정희가 질문에 대답했다.
  "오늘은 돌아갈 수가 있게 되었소."
  김정희는 손에 무엇인가를 들고 있었다. 그는 박종일에게 그림을 
내주면서 말하였다.
  "이것을 대인어른께 전해 주시오. 전해 주면서 이렇게 말을 전하시오. 
채마밭에서 채소를 심는 노인에게 천축에 사는 늙은 노인이 늙은 과일 
하나를 보내오니 맛있게 드셔 달라고 말씀을 전하시오."
  김정희가 박종일에게 한 말은 다만 그것뿐이었다. 그리고 나서 요사채의 
방문이 닫혔다. 박종일이 그럼 이제 떠나겠다고 작별인사를 올려도 방문 
저편에서는 기침소리조차 흘러나오지 않았다.
  박종일은 김정희가 준 물건을 쳐다보았다. 두터운 종이로 곁봉투를 씌운 
물건 하나였다. 겉봉투에는 다음과 같은 글자가 씌어 있었다.
  '친전'
  받은 이가 손수 펴보기를 바라는 뜻으로 다른 사람은 펴보지 말기를 
바란다는 뜻도 아울러 담고 있는 경계의 말이기도 하였다. 어차피 
주인에게 전할 물건이라면 볼 수도 없고 그 안의 내용을 확인해 볼 
박종일도 아니었지만 박종일은 새삼스럽게 호기심을 느끼고 있었다.
  도대체 봉투 안에 들어 있는 물건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 내용물이 
무엇이길래 하루 이틀도 아닌 꼬박 열흘 동안 봉은사에 붙잡아 둘 만큼 
중요하다는 말인가.
  보름이 걸려 다시 의주에 도착한 박종일이 임상옥을 찾아뵙자 임상옥은 
실제로 김정희가 말하였던 것처럼 채마밭에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채소를 
가꾸고 있었다.
의주를 떠날 때는 봄이었는데 한양을 다녀오는 동안 어느덧 계절이 바뀌어 
무더운 여름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래 무사히 다녀오셨는가."
  채소를 가꾸던 임상옥은 손을 씻고 박종일을 맞이하여 마주앉았다.
  "그래 추사 어른을 만나뵈었는가."
  "나으리께서 이르신 대로 봉은사로 찾아가서 대감어른을 만나뵙고 방금 
돌아왔나이다."
  그리고 나서 박종일은 그간 있었던 일들을 낱낱이 말하기 시작했다. 
추사를 만나서 산삼을 선물한 이야기, 산삼을 받고서 번번이 고맙다고 
치하하였던 추사의 말, 그리고 임상옥이 따로 전하라고 주었던 열 자가 
씌어진 문장을 전해준 이야기 등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르기 시작하였다.
  "그래 뭐라고 하시던가."
  박종일의 말을 전해들은 임상옥은 눈을 반짝이며 물어 말하였다.
  "문장을 읽으신 후 대감어른은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나이다. '이 
문장을 쓴 전후 사정을 말씀해 보시게나'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말씀드렸는가."
  "그래서 제가 직접 들은 대로 말씀드렸나이다. '나으리께서 한낮에 어미 
닭이 병아리를 데리고 모이를 쪼고 있는 모습을 보시다가 문득 솔개 한 
마리가 발톱으로 그 닭을 채어 가는 모습을 보신 후 그날 밤 그 문장을 
지으셨다 하더이다'라고 말씀드렸나이다. 그러자 추사 대감은 이렇게 또 
물으셨나이다. '그런 후 어떠하셨는가.'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씀드렸나이다. '다음날 상인들을 불러 모든 부채를 탕감해 주셨으며, 그 
문부를 불에 태우기까지 하셨나이다. 그뿐 아니라 상인들에게 금괴 
하나씩을 들려서 돌려보내기까지 하셨나이다.'"
  "그랬더니 뭐라고 하셨는가."
  임상옥은 여전히 눈을 깜박이면서 물어 말하였다.
  "갑자기 추사 대감께서 자신의 무릎을 내리치면서 '옳거니'하고 
감탄하셨나이다."
  "다만 그뿐이었는가."
  "아니옵니다. 그리고 나서 추사 대감께서는 뜻 모를 말씀 하나를 
중얼거리셨나이다."
  "뭐라고 중얼거리시던가."
  "추사 대감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나이다. '채마밭에서 채소를 가꾸는 
한갓 늙은이가 마침내 채마밭에서 금불상 하나를 캐내었구나'라고 
말이옵니다."
  박종일의 대답을 들은 임상옥이 갑자기 크게 웃기 시작했다.
  박종일이 깜짝 놀랄 만큼의 너털웃음이었다. 임상옥은 크게 웃으면서 
자신의 무릎을 내리치며 말했다.
  "아무렴, 그러면 그렇지. 그렇구 말구."
  박종일은 임상옥의 웃음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대체 채마밭을 가꾸는 늙은 노인이 채마밭에서 금불상 하나를 
캐내었다는 추사의 말이 뭐가 그토록 즐겁고 뭐가 그토록 우습다는 
것일까.
  "나으리."
  박종일이 정색을 한 얼굴로 임상옥에게 물었다.
  "뭐가 그토록 즐거우시나이까."
  그러자 임상옥은 대답했다.
  "이 사람아 나도 늙었지만 추사 역시 고희의 늙은 노인이네. 그 노인이 
아직 눈이 밝으니 이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한바탕 크게 웃고 나서 임상옥이 다시 물었다.
  "그리고 나서 무엇을 하였는가."
  "여러 날을 기다리게 하시고는 대감께오서 나으리에게 전해드리라고 
말씀하시면서 이 물건을 주셨나이다."
  "그것이 무엇인고."
  박종일은 일차로 김정희에게서 받은 물건을 두 손으로 바쳐 올렸다. 
임상옥은 박종일로부터 물건을 건네 받아 펼쳐보았다. 흰 종이에는 자신이 
박종일에게 전해 보낸 '재상평여수 인중직사형'의 문장이 낯익은 추사의 
글씨로 씌어있었다. 과연 천하의 명필이었다.
  오른편 위에는 '위 임상옥'이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고 자신의 글씨임을 
보증하는 김정희의 낙관이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그토록 마음속으로 
사숙하고 오랫동안 친교를 유지하고 있었으면서도 이처럼 김정희의 낙관이 
선명하게 찍혀 있는 글씨를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더구나 그 명필 
위에는 임상옥을 위하여 글을 쓴다는 글씨가 분명하게 씌어 있지 
아니한가.
  "과연 신필이다."
  임상옥은 그 글씨를 쳐다보면서 감탄하여 말하였다.
  "이것은 반드시 사람의 솜씨가 아니라 신명의 솜씨인 것이야."
  임상옥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면서 감탄하고 또 감탄하였다.
  "나으리, 그것으로 끝이 난 것은 아니셨나이다."
  박종일이 말을 이었다.
  "작별인사를 올리려 하였더니 추사 대감께오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나이다. '하룻밤만 더 묵고 가시게나. 아마도 내일 아침이면 
돌아가실 수 있을 것일세.'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봉은사에서 하루를 더 
머물 수밖에 없었나이다."
  박종일은 말을 이었다.
  "하오나 하룻밤만 묵으면 돌아갈 수 있으리라던 추사 대감의 말씀은 그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어긋나고 말았나이다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나고, 
닷새가 지나고 엿새가 지나도 감감 무소식이었습니다. 마침내 열흘이 
지났을 때야 추사 대감께오서는 문안인사를 드리러 간 제게 방문을 활짝 
열고 나와서 말씀하셨나이다. '오늘은 돌아갈 수가 있게 되었소'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나서 물건 하나를 제게 전해 주셨나이다."
  박종일은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었던 겉봉투로 감싼 물건을 임상옥에게 
두 손으로 바쳐올리면서 말했다.
  "이것을 나으리께 전하라고 추사 대감께오서 말씀하셨나이다."
  임상옥은 그 물건을 받아들었다.
  겉봉투에는 낯익은 김정희의 글씨로 '친전'이라고 씌어 있었다.
  조심스럽게 봉투를 뜯어내면서 임상옥이 박종일에게 물어 말하였다.
  "그리고는 다른 말씀은 없으시던가."
  그러자 박종일이 깜박 잊었었다는 듯 말을 하였다.
  "추사 대감께오서는 나으리께 이 물건을 전해 주시면서 이렇게 말을 
전하라고 일러주셨나이다."
  "뭐라고 말씀하시던가."
  "채마밭에서 채소를 심는 노인에게 천축에 사는 늙은 노인이 늙은 과일 
하나를 보내오니 맛있게 드셔 달라고 말씀하셨나이다."
  임상옥은 박종일의 전언을 들은 순간 김정희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채마밭에서 채소를 심는 노인'이란 바로 '가포', 즉 자신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천축에 사는 노인'이란 평소 불교에 심취해 있던 김정희 
자신을 가리키는 말로 실제로 김정희는 생전에 부처가 열반하였던 천축을 
따 자신의 호를 '천축고선생'이라고도 부르지 않았던가.
  또한 '늙은 과일'이란 문자 그대로 김정희가 말년에 봉은사에 머무르고 
있을 때 사용하였던 호 '노과'를 가리키는 비유로, 박종일에게 전하라던 
김정희의 말은 대충 이런 뜻인 것이다.
  '임상옥에게 김정희가 늙은 과일 하나를 보내니 이를 맛있게 드셔 
주십시오.'
  늙은 과일.
  봉투를 벗겨내면서 임상옥은 생각하였다.
  이 봉투 속에는 늙은 과일 하나가 들어 있는 것이다.
  '늙은 과일'이 보내는 '늙은 과일' 하나가 이 봉투 속에 들어 있음인 
것이다.
  임상옥은 봉투 속에 들어 있는 내용물을 꺼내어 펼쳐 보았다. 궁금한 
것은 박종일도 마찬가지여서 박종일 역시 숨을 죽이고 그 내용물을 
지켜보았다.
  임상옥은 그 내용물을 펼쳐 보았다. 그것은 두루마리 형태로 그려진 한 
폭의 그림이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어지는 화첩이라 자연 글씨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는데 우선 나온 글씨는 다음과 
같았다.
  '상업지도'
  그 글씨를 본 순간 다시 자신의 무릎을 내리치면서 임상옥이 크게 
웃었다.
  "아무렴 그러면 그렇지."
  상업의 길.
  평생을 상업으로 보내었던 장사꾼 임상옥에게 보낸 김정희의 마지막 
선물, 늙은 과일 한 꾸러미.
  임상옥은 조금 더 두루마리를 펼쳤다.
  그러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차례로 나타났다.
  '가포시상'
  시상이라는 말은 예술작품을 잘 음미하여 이해하고 즐기라는 감상의 
의미로 김정희가 박종일에게 전하였던 '늙은 과일 하나를 보내니 맛있게 
드셔 달라'던 의미와 일맥상통하고 있는 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마침내 김정희의 관지가 나오고 있었다.
  '노과'
  잠시 멎었던 임상옥의 손이 천천히 두루마리를 펼쳐 내렸다. 그의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러자 한 폭의 그림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풍경화였다.
  멀리 낮은 산자락이 솟아 있고 앞으로는 전원이 펼쳐져 있었다. 
전원에는 채소밭이 있었고 노인 하나가 채소를 가꾸고 있었다. 채소밭 
옆으로는 강물이 흘러가고 있었다. 
  화폭에 그려진 채소를 가꾸는 노인의 모습은 바로 임상옥 자신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노인의 모습 역시 지극히 생략되어 있어서 
얼핏 보면 산이나 강, 바위와 같은 풍경의 일부처럼 보이고 있는 것이다.
  피를 쥐어짜는 듯한 삽필의 필법도 사라져버리고 거친 몽당붓의 기교도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그가 평소에 발하였던 글자의 '피와 살'도 
완전히 사라지고 근육도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그래서 남은 것은 단순한 
선과 몇 개의 점뿐이었다.
  임상옥은 생각하였다.
  어쩌면 김정희는 붓을 들지 아니하고 손끝에 먹을 묻혀 손가락을 붓처럼 
사용하였을지도 모른다.
  지필.
  몽당붓조차 던져버리고 자신의 손가락에 먹을 묻혀서 마치 혈서를 쓰듯 
그려낸 김정희 일생일대의 최후의 유작 '상업지도'.
  김정희 특유의 기도, 향도 모두 사라져버리고 남은 것은 몇 점의 
유골뿐인 것이다.
  임상옥은 두루마리로 된 화폭을 모두 펼쳐 내렸다. 그러자 그림의 뒤를 
이어서 김정희가 임상옥을 위해 써준 제발의 문장이 한눈에 드러났다. 
그것은 화제인 '상업지도'에 대해서 부연하여 설명하고 있는 김정희의 
문장이었다.
  천천히 임상옥은 그 문장을 읽어 내리기 시작하였다. 한평생 상업에 
종사한 임상옥을 기리고, 상업에 있어 올바른 도를 깨쳐서 마침내 상도를 
이룬 임상옥에 대해 칭송하는 김정희의 마음이 그 문장 속에 녹아 흐르고 
있었다.
  임상옥은 천천히 그 문장을 음미하고 나서 감복하여 말하였다.
  "오직 하나일 뿐, 둘 이상은 있을 수 없음이로다."
  임상옥이 탄식하여 말하였던 내용은 일찍이 김정희가 '부작란도'에서 
화제로 썼던 '오직 하나일 뿐, 둘 이상은 있을 수 없다'의 문장에서 따온 
것이다.
  임상옥은 서화일치의 극치를 보여 주는 김정희의 작품을 감상한 후 발문 
끝에 씌어 있는 다음과 같은 글자를 보았다.
  '노과노인서'
  그 글자 위에는 김정희의 낙관이 선명하게 빛을 내고 찍혀 있었다.
  그 글자를 보자 임상옥은 '채마밭에서 채소를 심는 노인에게 천축에 
사는 늙은 노인이 늙은 과일 하나를 보내오니 맛있게 드셔 달라고 
말씀하셨나이다'라는 박종일의 전언을 떠올렸다.
  그 순간 임상옥은 자신의 무릎을 다시 내리치면서 말하였다.
  "과연 늙은 과일이 맛있게 익었구나."
  이 말을 들은 박종일이 의아하여서 물어 말하였다.
  "나으리, 늙은 과일이라니요. 어디에 과일이 있어 맛있게 익었다니요."
  그러자 임상옥은 웃으며 말하였다.
  "자네도 맛있는 과일을 먹고 싶은가. 따먹고 싶으면 마음대로 따 
잡수시게나."
  이에 박종일이 영문을 몰라 다시 말을 물었다.
  "나으리, 저는 무슨 말씀인지 도무지 모르겠나이다. 어디에 과일이 있어 
따먹고 싶으면 마음대로 따먹으라니요."
  그러자 임상옥이 웃으며 말하였다.
  "옛날 당나라에 법상이란 선사 한 분이 있었소. 이 사람은 마조라는 
사람이 널리 법을 펼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마조를 찾아가 이렇게 
물었었소. '무엇이 부처입니까.' 그러자 마조는 이렇게 대답하였소. '자네의 
마음이 바로 부처이다.' 마조의 이 말을 듣고 법상은 크게 깨달았소. 그는 
곧 구름이 걸려 있는 대매산에 올라 법호를 대매라고 고치고는 산 속으로 
들어가 30여 년 동안 두 번 다시 세상에 내려오지 않았소. 이때 염관 
화상이 있어 법문을 열었는데 그 회중의 한 사람이 스승의 주장자로 쓸 
나무를 찾으려고 산에 올랐다가 길을 잃었소. 문득 산중에서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은 풀잎을 엮어 옷을 만들고 머리는 뒤에서 하나로 모은 
남루한 차림으로 나무껍질로 지붕을 이은 오두막집에 살고 있었소이다."
  임상옥은 혼잣말로 말을 이었다.
  "길 잃은 중이 그 사람을 보고 여러 말을 나누었지만 그 사람의 말은 잘 
알아들을 수 없었던 거요. 그도 그럴 것이 그 사람은 벌써 산 속으로 
들어가 30여 년을 홀로 살았기 때문이었소이다. 그 사람에게 길 잃은 중이 
'여기서 몇 년을 사셨습니까'하고 묻자 그 사람이 대답하였소. '글쎄, 몇 
년이나 되었을까. 오직 사방의 산이 푸르렀다가 노래지고 다시 푸르렀다가 
노래지는 모습만을 보아왔을 뿐이오.'
그리고 나서 그 산사람이 이렇게 말하였소. '30년 전에 나도 한때 마조 
스님을 뵌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길 잃은 중이 물었소이다. 
'마조대사에게서 무엇을 배우셨습니까.' 순간 산사람이 이렇게 말하였소. 
'마음이 곧 부처, 그러니까 즉심즉불이란 말이오'
  길 잃은 중이 하산하는 길을 묻자 산사람은 이렇게 말하였소.  '물을 
따라 흘러가시오.' 산사람의 말대로 골짜기의 물을 따라 무사히 회중으로 
돌아온 중은 염관 화상에게 산중에서 있었던 일을 모두 고하였소.
  이에 염관이 말하였소. '내 기억으로는 강서에 있을 때 어떤 중 하나가 
마조 스님에게 불법을 물은 적이 있었다. 그때 마조 스님은 자네의 마음이 
바로 부처다라고 대답해 주셨는데 그후 30여 년 동안 그 중의 행방에 대해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네가 산에서 만난 산사람이 아마도 그 사람인 
것 같다.' 그리고는 몇 사람의 중을 불러놓고 산에 들어가 그 산사람을 
만나게되면 이러이러하게 말을 하라고 명하였소.
  염관의 명을 받은 중들이 산 속에 들어가 산사람, 즉 대매선사를 만나서 
다음과 같이 물었소 '무엇이 불법입니까.' 그러자 대매선사는 이렇게 
대답하였소. '마음이 곧 부처다.' 대매의 말을 들은 중들은 염관 화상이 
시킨 대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소. '마조 스님이 좀 달라지셨습니다. 
예전에는 마음이 곧 부처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요즘에는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이 말을 들은 대매는 이렇게 
말하였소. '그 미친놈의 늙은이가 돌아도 한참을 돌았군. 사람을 한없이 
헷갈리게 하는군. 그러나 그 늙은이가 그렇게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오로지 즉심즉불일 뿐이야.' 훗날 이 말을 전해들은 마조대사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소. '서산의 매실이 다 익었다. 따먹고 싶은 
사람들은 가서 마음대로 따먹어라.' 여기서 마조가 말하였던 서산의 
매실이란 바로 대매선사를 말하는 것이외다."
  다소 긴 인용을 마치고 나서 임상옥은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추사 대감도 실로 파란만장한 역정을 살아 왔소이다. 제주도의 섬에서 
10년, 북청의 한촌에서 2년의 유배생활을 보내고, 그리고 노경에 들어서는 
병고에 시달리며 환란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는 말을 들었소이다. 하지만 
추사 대감이야말로 눈과 비, 바람과 폭풍의 세한에도 늘 푸른 소나무처럼 
변치 아니하고 꿋꿋하게 버티어 와서 마침내 향기로운 과일의 열매를 맺게 
된 것이오. 그러니 과연 '늙은 과일' 이 맛있게 익은 것이 아니겠소이까."
  임상옥은 김정희의 '상업지도'를 손으로 가리키면서 말하였다.
  "이야말로 마조대사가 말하였던 '서산의 매실이 다 익었다. 따먹고 싶은 
사람들은 가서 마음대로 따먹어라'의 내용과 전혀 다르지 않음이 
아니겠는가."
  임상옥은 화폭의 맨 마지막에 적힌 '노과노인서'의 문자를 가리키며 
말하였다.
  "내가 박공에게 맛있는 과일을 먹고 싶은가.  따먹고 싶으면 얼마든지 
따 잡수시게나, 하고 말하였던 것은 바로 그 뜻이었소."
  그제서야 박종일은 주인의 속마음을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그리고 
주인이 말하는 '늙은 과일'이야말로 김정희가 열흘 동안 노심초사하여 
그렸던 작품 '상업지도'를 가리키는 비유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노과.
  김정희의 표현처럼 '늙은 과일'이 보내는 '늙은 과일' 한 꾸러미. 그 
마지막 열매가 바로 임상옥을 위해서 그려준 '상업지도'였던 것이다.
  김정희 최후의 유작이자 아직 공개되지 않았던 최고의 걸작, 
'상업지도'는 이렇게 해서 탄생되었던 것이다.
  어쨌든 모이를 쪼는 닭을 채가는 솔개의 모습에서 자신의 명운이 다함을 
깨닫고 무소유로 돌아가 '재물은 평등하기가 물과 같고 사람은 바르기가 
저울과 같다'라는 진리를 깨달은 임상옥이나, 그 게송을 본 순간 
'채마밭에서 금불상을 캐었음'을 깨닫고 생애 마지막으로 혼신의 힘을 다 
쏟아 '늙은 과일' 하나를 열매맺어 그 열매를 보낸 김정희나, 또한 그 
열매가 맛있게 익었음을 깨닫고 따서 맛있게 먹는 두 사람의 모습은 이미 
속인의 경계와 범인의 경계를 벗어난 초인의 경지임을 여실히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죽음을 앞둔 두 노인이 생애 마지막으로 서로의 우정을 확인하여 나눈 
최후의 선문답, 그것이 바로 늙은 과일, '상업지도'의 열매였던 것이다.


      제4장  종장

1

  1855년 을묘년. 철종 6년 여름.
  공주감영에서 황새바위로 죄수 한 명이 이송되었다. 목에 큰 항쇄칼을 
쓴 죄수였다. 당시 공주감영으로는 각 지방에서 잡혀온 천주교 신자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충남의 홍주, 예산, 해미, 덕산, 신창, 
홍산, 연산 청양, 공주, 이인, 탄천과 충북의 청주, 진천, 연풍, 옥천, 
전라도의 전주, 광주, 경기도의 죽산, 포천, 그리고 한양에서 잡혀온 
천주교인들이 공주감영에 집결되고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공주감영에서의 심문과 고문은 잔인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프랑스 신부 
샤를르 달레(Charles Dallet)는 특히 이 공주감영에서의 참상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을 정도다.
  '공주옥에서 순교한 이들의 이름과 숫자는 다 알 수 없을 만큼 많이 
있었다.'
  죄수들은 참수와 교수, 돌로 맞아 죽음, 옥사, 아사, 매질에 의해서 죽는 
태사 등으로 죽어갔는데, 처단한 죄수들의 머리는 나무 위에 오랫동안 
매달아 놓아 사람들에게 천주학을 경계하게 하였으며 일부러 그들의 
시체를 강도와 절도범 등 흉악범의 시체와 섞어놓아 어느 것이 순교자의 
것인지 구별하기조차 어렵게 만들었다.
  지금도 남아 있는 황새바위 앞을 흐르는 제민천은 홍수로 범람할 때에는 
순교자들의 피로 빨갛게 물들어 금강으로 흘러 들어가 '피의 강'이라고 
불리기도 할 정도였다. 
  따라서 황새바위라는 명칭의 유래는 이곳 가까이에 황새들이 많이 
서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지만, 혹은 목에 큰 항쇄칼을 쓴 
죄수들이 이 언덕바위 앞으로 끌려나와 수없이 죽어갔기 때문에 
항쇄바위로 불리다가 훗날 황새바위로 바뀌어졌다는 설도 있는 것이다.
  이 황새바위로 공주감영에서 이송된 죄수 하나가 방금 도착한 것이다. 
이미 공개처형의 공고가 나붙은 지 오래 되었으므로 황새바위 앞산 위에는 
흰 옷을 입은 공주 읍민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병풍처럼 둘러 서 있었다.
  이윽고 시간이 되자 목에 칼을 쓴 죄수가 끌려나왔는데 이미 그 모습은 
살아 있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죽어 있는 송장의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3개월 동안 공주감영에서 갖은 고문을 당하고 기아로 
인해 골수까지 병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죄수는 온갖 고문을 다 당하였다.
  치도곤으로 수십 대를 맞았으며 두 발목을 한데 묶은 다음 다리 사이에 
두 개의 막대기를 끼워 엇비슷이 비트는 주리의 형벌로 다리가 부러져 
있었다. 벌거벗긴 뒤 양 팔을 뒤로 젖혀 엇갈리게 묶어서 허공에 높이 
매달아 사방에서 채찍이나 몽둥이로 때리는 잔학한 학춤도 당했으며, 
마지막으로는 죄인을 앉혀 가부좌를 틀게 한 후 움직이지 못하게 묶어놓은 
다음 무릎 위에 널판지를 대고 그 위에 무거운 돌을 올려놓는 압슬형을 
받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죄수는 끝내 배교하지 않았다.
  곤장 삼십 대를 맞아 만신창이가 되어 피가 흘러내렸지만 죄수는 이렇게 
말을 하였을 뿐이다.
  "이제야 오직 야소와 성모 마리아의 괴로움이 어떠하였는지 조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고문하는 형리들이 오히려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마침내 압슬형으로 다리가 으스러지고, 고문으로 붉은 피가 흘러내리는 
고통이 있었지만 죄수는 이렇게 말하였을 뿐이다.
  "나는... 붉은 옷을 입는 것이 소원입니다.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은 
위주치명하여 붉은 옷을 입기 위함이니 국법대로 죽여 주십시오."
  붉은 옷.
  이는 순교하여 붉은 피를 흘리며 치명하겠음을 나타내는 원의였던 
것이다.
  마침내 죄수는 감사의 명에 의해 공개처형 장소인 황새바위에 도착한 
것이다. 이미 죄수는 걷지조차 못하여 형리들에 의해서 질질 끌려오고 
있었는데 형장에 도착하여 항쇄칼을 벗기니 놀랍게도 긴 머리카락이 
드러났다.
  "여자다."
  맞은편 산 위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은 칼을 벗기자 드러난 긴 머리칼을 
보면서 수군거렸다.
  과연 죄수는 여자였다. 형리가 죄수 앞에 나서서 죄수의 죄목을 
큰소리로 낭독하기 시작하였고, 마지막으로 죄수에게 어떤 방법으로 죽고 
싶으냐고 물어보았다.
보통 천주학쟁이들을 죽일 때에는 망나니들의 칼에 의해서 목을 베는 
참수, 밧줄로 목을 매어 죽이는 교수 그리고 돌을 던져 죽이는 세 가지의 
방법을 쓰고 있었는데 대부분의 죄인들은 참수형을 원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 방법은 단칼에 목을 베어내는 형벌이었으므로 그만큼 고통이 
덜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족들은 미리 망나니들에게 
은밀히 돈을 주어 죄수들이 고통을 느낄 겨를도 없이 단칼에 죽여 달라고 
흥정하기도 했던 것이다.
  원래 공주감영은 교수형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달레 신부는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이곳의 처참한 광경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옥의 벽에는 위에서부터 한 자 높이 되는 곳에 구멍이 뚫려있다. 
매듭으로 된 밧줄 고리를 죄수 목에 씌우고 밧줄 끝을 벽의 구멍으로 
내려보낸다. 그리고 옥 안에서 신호를 하면 밖에서 사형 집행인이 밧줄을 
힘껏 잡아당긴다. 희생자가 죽으면 시체를 밖으로 끌어내어 장례도 치르지 
않고 밭에 내버려둔다.'
  그러나 이 죄수는 달랐다. 
  여죄수는 분명한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하였다.
  "...저는 돌에 맞아 죽고 싶나이다."
  돌에 맞아 죽는 형벌은 석투살이라고 불린다. 그러자 형리는 놀라서 
자신이 잘못 들었나 하고 생각하여 다시 물어 말했다.
  "돌에 맞아 죽고 싶다고 말하였느냐."
  "그렇습니다, 나으리."
  한 손에는 묵주를 들고 먼 하늘을 쳐다보면서 여인은 담담하게 말했다.
  "주님을 위해 처음으로 죽은 사덕망도 돌에 맞아 죽었나이다."
  사덕망. 이는 천주교에서 처음으로 순교한 스테파노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성서는 사덕망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사람들은 스테파노에게 한꺼번에 달려들어 성밖으로 끌어내고는 돌로 
치기 시작하였다.'
  여인은 돌에 맞아 죽은 최초의 순교자 사덕망처럼 자신도 돌에 맞아 
죽고 싶다는 원의를 분명하게 드러내 보였던 것이다.
  죄수가 마지막으로 바라는 소원은 큰 이의가 없으면 그대로 따라주었다.
  끌려온 죄수의 이름은 이송이. 세례명은 마리아 막달레나였으며 이때 
죄수의 나이는 43세였다.
  그러면 사형수 이송이는 어떻게 해서 이곳 황새바위로까지 끌려와 공개 
처형을 당하게 되었는가.

  송이가 마침내 천주학쟁이로 관원에게 체포된 것은 3개월 전 봄이었다.
  그러나 이례적인 것은 송이가 체포되었을 때만 해도 큰 박해는 없었던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라는 점이었다. 천주교에 대한 큰 박해는 1801년의 
신유박해, 1839년의 기해박해, 1846년의 병오박해 등 세 차례나 있었지만 
송이가 체포되었을 때는 소강 상태에 머무르고 있었을 무렵이었다.
  이후 1866년에 이르러서 또 한 차례의 대박해인 병인박해가 있게 되지만 
송이가 체포되었던 철종 6년 을묘년만 하더라도 소규모의 박해도 없던 
비교적 태평성대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송이가 천주학쟁이로 관가에 체포된 것은 대세 때문이었다.
  송이는 여전히 서강에서 의녀로 종사하고 있었으나 독실한 송이의 
신앙은 천주교도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이 무렵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천주교 신자가 전국적으로 1만3천 
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신자들에게 있어 송이는 비록 여자의 
몸이었지만 정신적인 지주였던 것이다.
  한국 최초의 신부 김대건이 순교하여 죽은 것이 병오박해의 
1846년이었으므로 이후 조선에는 단 한 사람의 사제도 살아 있지 않을 
때였다.
  이후 철종 7년인 1856년 베르스 주교 등 세 신부가 한양에 들어올 
때까지의 정확히 10년 동안 조선 그 어디에서도 사제를 찾아볼 수 없는 
공백기간이었던 것이다.
  그 10년 동안에도 신자는 새로 태어나고 다시 생겨나고 그리고 
죽어갔다. 그러나 문제는 새로 생기는 신자에게 영세를 베풀 수 있는 
사제가 한 사람도 없었다는 점이다. 그보다도 더욱 절박한 것은 임종을 
앞두고 죽어 가는 예비 신자들이었다.
  아직 세례를 받지 못한 신자들이라 할지라도 중병에 걸려 임종을 
앞두었을 때는 대부분 세례를 받고 싶어하였으나 이 무렵 국내에는 세례를 
집전할 사제가 한 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송이는 소문난 의녀여서 신자들의 임종을 지켜보는 기회가 많이 
있었는데, 그럴 때면 대부분 죽음을 앞두고서야 회심을 하여 세례를 받고 
싶어하는 환자들의 안타까운 모습을 수없이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 
사람의 영혼이라도 구할 수 있었으면 하고 송이는 간절하게 소망하였지만 
사제가 없는 이상 예비신자들은 고아처럼 병들고 고아처럼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송이는 대세를 베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사적세례, 혹은 약식세례라고 부른다. 또는 
비상세례라고도 불리는데 어쨌든 대세란 세례를 베풀 수 있는 사제를 
대신하여 예식을 생략하고 영세를 베푸는 행위였던 것이다.
  대세는 정식으로 세례의 집행이 불가능할 경우, 즉 전쟁이나 박해로 
인해 세례성사의 집행이 불가능하거나, 집행자인 사제가 없거나, 사제를 
불러오는 동안에 세례 받을 사람이 죽을 위험이 있을 경우에는 집행할 수 
있다고 교회법으로도 보장되어 있는 조건세례였던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송이는 대세를 베풀기 시작하였다.
  조금 전까지도 죽음을 앞두고 극심한 고통과 불안으로 떨고있던 
환자들이 대세를 베풀면 기적처럼 마음의 평화를 얻고 담담한 마음으로 
죽음을 받아들였다. 놀란 것은 환자들보다도 환자를 지켜보는 
가족들이었다.
  가족들은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던 환자가 송이로부터 대세를 받고 
단숨에 마음의 평화를 얻는 모습에 두려움과 경이를 느꼈다. 그리하여 
환자의 죽음을 지켜보던 많은 가족들도 장례를 치른 후 천주교에 귀의하곤 
했다.
  송이 자신도 대세의 위력을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세례를 받고 죽은 
환자와 받지 못하고 죽은 환자의 얼굴은 극과 극이었다.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은 사람의 사면은 대부분 고통과 공포로 
일그러지고 흉칙하였으나 세례를 받고 죽은 사람들의 사면은 잠을 자듯 
온유하고 부드러웠던 것이다.
  송이의 소문은 전국의 신자들 사이로 퍼져나갔고 많은 환자들은 송이의 
손에서 치료받고 송이의 손에서 죽고 싶어서 강으로 운집하고 있었다.
  이 무렵 송이를 의녀로 발탁하였던 명의 장영덕은 노환으로 가끔 
환자들을 볼  뿐이었고, 의원은 주로 그의 아들인 장경환에 의해 대를 
물려 영업 중이었으나 아버지와는 달리 아틀 장경환은 자신보다 의술이 
뛰어나고 환자들로부터 신망이 높은 송이에 대해서 질투심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송이가 서강에서 20년 가까이 살면서도 천주교인 색출에 적발되지 
않았던 것은 전적으로 장영덕의 후광과 보살핌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들 장경환은 아버지 장영덕과는 달랐다.
  장경환도 아버지를 닮아 의술에는 당대 제일이었으나 인품은 아버지를 
닮지 못하고 있었다.
  장경환은 송이가 귀신의 사술을 빌려 요사스런 방법으로 환자들을 
현혹시키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장경환이 믿고 있던 귀신의 사술, 요사스런 술법이야말로 바로 서양귀신 
야소의 힘을 빌린 천주학이었다.
  마침 그 무렵.
  한양에서부터 환자 하나가 실려왔는데 그녀는 궁녀였다. 빼어난 미모에 
총명한 여지들은 어린 나이에 궁녀로 발탁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특히 
궁녀들 중에는 천주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 이유는 
1839변 기해박해 때 죽은 궁녀 박희순에 대한 소문 때문이었다.
  박희순은 언니 '박큰아기'와 더불어 함께 순교한 궁녀였지만 그보다도 그 
뛰어난 미모와 재주로 궁녀들 사이에서는 전설적인 인물이었던 것이다. 
  특히 박희순은 15세경 순조로부터 유혹을 받았는데 그녀는 어린 
나이에도 감히 순조의 유혹을 물리쳤던 것이다.
  비록 궁중에서 심부름을 하는 나인이었지만 특별히 대왕의 성은을 
입으면 하루아침에 왕비가 될 수 있으므로 궁녀들은 누구나 대왕의 눈에 
드는 천행을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하늘이 주신 그 부귀영화의 기회를 물리치고 결국에는 서소문 
밖에서 천주교 신자로서 참수형을 받고 죽은 박희순에 대한 소문 때문에 
궁녀들 사이에서는 마음속으로 천주학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호의적인 
예비 신자들이 많이 있었다.
  일단 한번 궁녀로서 궁중에 매이면 병에 걸려 죽기 전이 아니면 궁궐 
밖으로 나올 수는 없는 법, 송이에게 실려온 궁녀도 경각을 다투는 
위급환자였다.
  송이는 그 궁녀를 본 순간 어떤 방법으로도 살릴 수 없음을 직감하였다. 
그럴 때면 송이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환자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세요. 제가 아는 그 어떤 방법도 환자에게 
도움이 될 수 없나이다."
  이 말을 들은 환자가 주위를 물리친 후 숨을 헐떡이며 이렇게 말을 
하였다.
  "의녀님, ...저는 궁녀로서 평생을 보내 이제 시집을 못 깐 처녀로서 이 
세상을 하직하려 합니다. ...저는 일찍이 어렸을 때 박희순과 전경협이라는 
두 궁녀를 통해 천주학에 대해서 들본 적이 있나이다. ...저는 또한 박희순, 
전경협 두 궁녀가 어떻게 해서 죽었는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의녀님에게 찾아온 것은 제 병이 낫기보다는 다른 소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 병은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제 몸은 이제 골수에까지 
병이 들어 낫지 못할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간신히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말을 한 후 그 궁녀는 바짝 마른 손을 
내밀었다. 송이가 그 손을 마주 쥐었다. 그녀의 손은 불덩어리처럼 
뜨거웠다.
  불덩어리처럼 뜨거운 궁녀의 손에 무엇인가 들려 있었다. 송이는 그 
물건을 확인하여 보았다. 그것은 묵주였다. 송이는 묵주를 본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묵주는 천주교 신자들이 소중하게 갖고 다니는 성물, 비신자라 해도 이 
성물을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체포될 수 있는 물건이었다.
  "의녀님, ...제가 이 물건을 받은 것은... 전경협으로부터였나이다. 
전경협이 신앙생활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칭병을 하고 궁을 나설 때... 
저에게 이 성물을 주면서 이렇게 말하였나이다. ...나는 오로지 나랏님보다 
더 높은 천주님을 모시기 위해 궁궐을 떠난다, 당신도 언젠가는 천주님을 
모시게 되기를 바란다...."
  전경협.
  그녀 역시 1839년 기해박해 때 궁녀 박희순과 함께 순교하여 죽은 성녀 
중의 한 사람이다.
  궁녀의 신분으로 국법으로 금하는 천주교를 믿었다는 이유로 포청과 
형조에서 남보다 더 혹형과 고문을 당하면서 배교를 강요당했지만 '만 번 
죽더라도 주님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한 후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던 성녀였다."
  "의녀님...."
  궁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말을 이었다.
  "저도 언젠가는 나랏님보다 높은 천주님을 모시고 싶었나이다. ...그러나 
세상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이날 이때에 이르게 되었삽고 마침내 저 
세상에 가게 되었나이다. ...저 세상으로 가기 전에 의녀님을 찾아온 것은 
제 병이 낫기보다는 다른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나이다...."
  "그것이 무엇이나이까."
  송이가 궁녀의 손을 잡으며 부드럽게 물었다.
  "...그것은."
  궁녀는 띄엄띄엄 말을 이었다.
  "...죽기 전에 천주학에 입교하기 위함이나이다. 의녀님, 저에게 세례를 
주십시오."
  그제서야 송이는 궁녀의 소원이 무엇인가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궁녀는 죽기 전에 전설적인 인물이었던 박희순, 전경협 두 궁녀로부터 
보고 들었던 천주교에 입교를 하고, 나랏님을 모시는 궁녀에서 천주님을 
모시는 교인으로 거듭 태어나기를 소원하고 있는 것이다.
  송이는 잘 알고 있었다. 이와 같은 이교인들 앞에서 세례를 베푼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죽어가는 한 사람의 영혼이라도 구하는 길은 오직 대세, 단 하나의 
방법뿐이었던 것이다.
  송이는 결단을 내렸다.
  이방인들 앞에서 대세를 베푸는 것이 위험한 일임을 알면서도 다른 
대안이 없다고 송이는 결심하였다. 그녀는 곧 대세를 베풀 준비를 하기 
시작하였다.
  우물물을 떠와 그 생수로써 환자의 몸을 씻었다. 그리고 나서 송이는 
환자의 두 손에 묵주를 들린 후 이렇게 물어 말하였다.
  "전지전능하신 천주 성부를 믿습니까."
  이미 침례를 한 궁녀의 두 눈은 물로 씻은 듯 맑고 평온하였다. 궁녀는 
두 손을 모은 채 대답하였다.
  "믿습니다."
  "그 외아들 야소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야소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음을 믿습니까."
  "...믿습니다."
  "다시 살아나셔서 그리로부터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심판하러 오실 
것을 믿습니까. 그리고 영원히 삶을 믿습니까."
  "...믿습니다."
  송이는 손가락에 생수를 찍어 궁녀의 이마에 십자표를 그린 후 이렇게 
말을 하였다.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궁녀 이순임에게 세례를 줍니다."
  대세가 끝난 후 궁녀 이순임은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였다.
  "...고맙습니다.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이나이다."
  궁녀는 가족들에 의해 곧 접으로 옮겨지고 그날 밤 송이는 관원에 
체포되었다. 장경환에 의해 이미 밀고되어 송이의 일거수일투족이 
관원들에게 낱낱이 감시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아들 장경환의 태도를 수상하게 여기고 있었던 장영덕이 
송이에게 몸을 피해 도망칠 것을 권유하였으나 송이는 다만 웃으며 이렇게 
말하였을 뿐이다.
  "나으리, 제가 이 의원을 떠나 어느 곳에서 살아갈 수 있겠나이까."
  그날 밤.
  한 떼의 포졸들이 송이의 집으로 들이닥쳤다. 포졸들은 송이의 집을 
수색하여 교회 서적들과 성경, 묵주와 십자가상 같은 성물들을 찾아냈다. 
그러한 물건들이 나온 이상 송이가 천주교 신자라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증거물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즉시 송이는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송이는 일단 포청으로 압송 당하여 곤장 삼십 대를 맞으며 배교를 
강요당하였다. 장영덕도 노구를 끌고 송이를 찾아와 배교를 권유하였지만 
이미 자신의 운명을 감지한 송이는 다만 이렇게 말했다.
  "나으리, 나으리께오서 오갈 데 없는 저를 거둬들여 의녀로까지 
키워주신 것은 백골난망이나이다. 하오나 저는 이제 더 다른 소원은 
없나이다. 만약 남은 소원 하나가 있다면 오로지 위주치명하여 붉은 옷을 
입는 것이나이다."
  붉은 옷.
  붉은 피를 흘리며 순교하겠다는 송이의 결연한 의지를 본 순간 장영덕은 
이렇게 중얼거린 후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정히 그러하다면 네 뜻대로 하여라."
  그 즉시 송이는 악명 높은 공주감영으로 이송되었다. 공주 감옥에서의 
혹형과 고문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극심한 것이었다.
  주리를 틀고 압슬형으로 다리가 으스러져도 송이는 신음을 할 뿐 
비명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고문을 하는 형리들도 그들이 본 죄수 중에서 
가장 지독한 죄수라고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온몸을 지져대었지만 송이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마침내 감영에서는 송이에게 마지막 방법을 사용하기로 하였다. 그것은 
고문 중에서도 가장 잔인한 고문이었던 것이다. 일종의 성고문으로 송이의 
온몸을 벌거벗겨서 각종 흉악범들이 들끓고 있는 남자 죄수들의 방에 
집어넣는 방법이었다.
  온갖 흉악범들이 갇혀 있는 남자들의 전옥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그 지옥 속에 벌거벗긴 송이가 던져진 것이었다. 피에 굶주리고 배고픈 
맹수 앞에 피비린내 나는 고깃덩어리를 던져 넣은 꼴이었다. 여인에 
굶주리고, 정욕에 불타고 있는 죄수들은 난데없이 던져진 벌거벗은 송이의 
육체를 본 순간 광기에 젖어 미친 듯이 송이에게 달려들었다.
  암사자를 차지하기 위한 숫사자들의 혈투처럼 여인을 차지하기 위해서 
죄수들은 격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전옥들은 감방 밖에서 이를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비록 마흔이 넘은 나이였지만 송이는 여전히 처녀처럼 꼽고 아름다웠다.
  결국 힘이 가장 센 죄수의 승리로 돌아가 송이는 그 죄수의 제물이 
되었다. 격투에서 이건 죄수는 으르렁거리면서 송이의 앞으로 달려갔지만 
순간 그 죄수는 멈칫거렸다. 무엇인가 신비로운 힘이 송이를 감싸고 
있었던 것이다. 송이의 벌거벗은 몸은 마치 찬란한 황금처럼 눈부신 
광채로 빛나고 있었다. 너무나 그 빛이 강렬하였으므로 감히 죄수는 그 
빛을 향해 손을 뻗을 수가 없었다. 죄수 하나가 여인의 몸을 만지기 
위해서 손을 뻗었으나 곧 뜨거운 불에 데인 것처럼 비명을 지르면서 
물러섰다. 그 누구도 이 여인의 몸을 범할 수가 없었다.
  기록은 이 장면을 이렇게 간단하게 전하고 있을 뿐이다.
  '남자 죄수들의 방에서는 갑자기 신비로운 힘이 생겨나 흉악한 
죄수들이라도 감히 여인을 범할 수가 없었다.'
  알 수 없는 기적의 힘이 송이의 몸을 감싸고 보호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이 모습을 본 순간 형리들은 이 죄수가 배교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깨달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공주감사의 명에 의해 송이는 황새바위에서 공개 
처형으로 사형이 집행되기로 판결이 내려진 것이었다.
  천주학 죄인으로 체포된 지 3개월만의 일이었다.
  "...저는 돌에 맞아 죽고 싶나이다."
  형리 하나가 송이의 얼굴에 용수를 씌웠다. 원래 용수는 죄수를 밖으로 
데리고 다닐 때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머리에 씌우던 물건인데 
형리들은 처참하게 죽어가는 송이를 위해 마지막 배려로 얼굴에 용수를 
씌워 주었던 것이다. 형리가 얼굴에 용수를 씌우려 하자 송이는 이렇게 
말하였다.
  "잠깐만요, 나으리."
  형리를 잠깐 만류하면서 송이는 천천히 얼굴을 들어 후 하늘과 붉은 
태양 한여름으로 타오르는 푸른 녹음과 황새바위 밑을 흐르는 맑은 강물을 
바라보았다. 송이는 그 모든 풍경을 눈동자 속에 담아 두려는 듯 하나하나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서 송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형리가 송이의 얼굴에 검은 용수를 씌우자 송이는 입을 열어 소리를 
내어 기도했다.
  "천주님, 제 영혼을 받아 주십시오."
  송이의 마지막 기도문은 천주교에서 전해오는 최초의 순교자 
사덕망(스테파노)이 돌에 맞아 죽을 때 부르짖었던 마지막 기도문과 
일치하고 있었다.
  그 처참한 모습에 구경을 나왔던 사람들 중에 일부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잔혹한 광경을 
은근히 즐기고 있었다. 더구나 죽어 가는 죄수가 여인일 바에야 
구경꾼들의 가학적인 성향은 한층 고조되고 있었다.
  "죽여라."
  구경꾼 중의 한 사람이 소리 질렀다. 그러자 타오르는 불 속에 기름을 
부은 듯 여기저기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죽여라, 죽여."
  "돌로 쳐죽여라."
  그 구경꾼 속에 한 여인이 눈물을 흘리고 서 있었다. 그 여인은 억장이 
무너지는 듯 몸을 떨며 흐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송이를 키운 양어미 
산홍이었다. 이때 그녀의 나이 쉰여덟이었다.

2

  오후가 되자 날씨는 더욱 무더워졌다. 오전 내내 채소를 가꾸던 
임상옥은 허리가 뺏뺏해지는 것을 느꼈다. 물을 길어다가 밭고랑마다 물을 
주느라고 무리를 했기 때문일까 임상옥은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다.
  "나으리, 좀 쉬시지요. 나머지는 쇤네가 하겠나이다."
  나이든 노복이 보다 못해 한마디 거들고 나섰다.
  "그럴까."
  기다렸다는 듯 임상옥은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그는 허리를 두드리며 
햇볕을 가리던 삿갓을 벗고 대청마루 위로 올라섰다. 그렇지 않아도 
날씨가 무더워지는 한낮에는 쉬리라 생각하고 있었던 참이었다. 
  임상옥은 목침을 베고 누웠다. 바람 한 점 불어오지 않는 땡볕 속이었다.
  임상옥은 누워서 무심코 머리맡에 두었던 부채를 집어들었다. 부채를 
들어 소리가 나도록 부치다 말고 문득 임상옥은 그 부채를 들여다보았다.
  단오선이었다.
  언제였더라.
  임상옥은 부채를 들여다보면서 지난 일을 회상하여 보았다.
  곽산에 군수로 제수되었던 것이 임신년이었으니 벌써 20여 년전의 
일이었던 것이다. 그때 임상옥의 나이는 54세로서 인생의 절정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 무렵 곽산의 북쪽 삼장천에서 단오놀이를 하다가 임상옥이 고려 때의 
명신 김극기의 시를 옮고 그 시의 한 구절을 역하라고 문제를 내놨을 때 
이를 맞춘 사람이 한갓 기생에 불과했던 송이였던 것이다. 그 송이에게 
상으로 내렸던 단오선. 특별히 대나무 생산지인 전주에서 붉은 색의 
주사로 물감들인 고급 부채 단오선. 
그러자 목침을 베고 누운 임상옥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비록 20여 년 전의 일이었지만 마치 어제의 일처럼 모든 풍경, 모든 
모습들이 선명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임상옥은 빙그레 미소를 띄워 올리면서 그 단오선을 펼쳐 보았다. 그 
부채 위에는 능숙한 필체로 한시가 적혀 있었다. 낯익은 필체였다.
  임상옥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게도 보고 싶고 그리워했던 
송이에게 박종일을 대신 보내었을 때 박종일은 돌아와서 송이가 건네준 
부채를 내밀며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나으리, 송이 아씨가 나으리께 이 부채로 더운 여름을 시원하게 
보내라고 말씀하셨나이다."
  단오선.
  임상옥과 송이 사이에 오고 간 최초의 정표.
  또한 송이가 임상옥에게 더운 여름을 시원하게 지내라고 보내준 물건. 
그 부채 위에는 이백이 지은 다음과 같은 연시가 적혀 있었다.

  노란 구름 성 언저리에 까마귀가 깃들어 날아와 
  까악까악 가지 위에서 울고 있구나. 
  베틀 위의 비단 짜는 진천 고을의 아낙네는 
  푸른 비단 연기 같은 창 너머에서 종알거리네.
  북 멈추고 멍하니 먼 곳의 임을 생각하고는
  빈 방에 홀로 자며 비 같은 눈물을 흘리네.

  그러니까 송이는 이백의 시를 빌려서 자신의 애타는 마음을 고백하고 
있었던 것이다.
  송이가 박종일을 통해 '나으리께오서 이 부채로 더운 여름을 시원하게 
보내시라'는 말을 전해온 것은 부채를 부칠 때마다 일어나는 바람 속에 
묻어 있는 애틋한 사랑의 감정을 느끼시고 잊지 마시라는 간절한 염원이 
아닐 것인가.
  임상옥은 미소를 띄워 올리면서 단오선의 부채를 소리가 나도록 부쳤다. 
그러자 바람 한 점 없는 무더위 속에서 부채에서는 맑은 바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비록 오래된 부채였으나 바람 속에는 아직도 애틋한 사랑의 연풍이 
깃들어 있었다.
  '이 부채로 더운 여름을 시원하게 보내시라'고 송이가 보낸 부채. 벌써 
까마득히 20여 년의 세월이 흘러갔지만 여전히 청풍이 흘러나오고 있고, 
잊혀지지 않는 연풍이 깃들어 있는 부채.
  나이가 들수록 한시도 송이를 잊은 적이 없었던 임상옥이었다.
  비록 서로를 위하는 상생의 길을 걸어 단칼에 송이와 부부의 인연을 
끊고, 정을 베었으나 여전히 송이는 임상옥에게 있어 마름풀이었다. 
임상옥은 여전히 송이에 있어 물새였던 것이다.
  아아, 기억난다.
  임상옥은 목침을 베고 누워 단오선으로 부채질을 하면서 지난 일을 
회상하여 보았다. 뜨거웠던 송이의 육체. 밤새도록 식을 줄 모르던 
무산지몽의 정사.
  "네가 누구냐."
  정사를 할 때면 임상옥은 신음하면서 송이의 얼굴을 감싸쥐며 물었었다. 
그러면 송이는 대답하였다.
  "소녀는 송이나이다."
  "송이가 누구더냐."
  "송이는 송이나이다."
  송이가 대답하면 임상옥은 이렇게 말하곤 했었다.
  "아니다, 송이는 마름풀이다."
  "소녀가 마름풀이라면 나으리는 무엇이나이까."
  "나는 물새로다."
  "나으리가 물새라면 물새는 어찌 우나이까."
  "물새는 팍팍 울지. 꽉꽉 울며 마름풀을 찾아다니고 있지."
  송이의 얼굴과 가슴을, 마름풀처럼 이리저리 뒤척일 때마다 송이의 몸은 
뜨거워져서 살이 데일 것 같았었다.
  아아, 모든 것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그 꺼질 줄 모르던 정념의 불꽃, 그 
열정은 다 어디로 사라졌는가. 이제 육체는 참다랗게 식어 꺼진 재처럼 
늙어 스러져버렸다.
  어디로 사라져버렸는가.
  부채는 여전히 예전의 부채 그대로이고, 청풍 역시 예전 그대로 맑은 
바람 그대로이고, 바람에 깃들어 있는 연풍 역시 옛날의 설레는 바람 
그대로인데 그 부채를 보낸 사람은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머리맡 나무 위에서는 매미가 귀청이 찢어지도록 울음을 울고 있었다. 
그 울음소리를 들으며 임상옥은 또다시 지난 일들을 회상하여 보았다.
  언제였던가 송이를 마지막으로 만났었던 것이.
  그해가 신축년이었으니 지금으로부터 14년 전의 일인 것이다.
  그해 봄, 유기장수 한 사람이 산홍이가 보낸 비녀를 사라고 찾아 온 날 
밤. 시장거리에 있는 한약전에서 남의 눈을 피해 마지막으로 송이를 
만났었지. 그때 송이는 자신이 이제 새 주인 야소를 모시게 되었다고 
고백함으로써 스스로 천주학쟁이임을 밝히지 않았던가. 그리고 부부로서의 
천합을 끊어버리는 징표로서 혼례식 때 입었던 갑사 저고리의 깃을 잘라 
할급휴서하여 달라고 청원하지 않았던가.
  그것이 송이를 본 마지막이었다.
  저고리 깃을 가위로 잘라주자 송이는 이렇게 말하였었지.
  "이제 소녀가 나으리를 찾아온 소기의 목적은 모두 이루게 되었나이다. 
이제 앞으로 다시는 나으리를 찾아뵙게 될 이유는 없게 되었나이다. 
나으리, 나으리께오서 이 소녀의 소청을 들어주셔서 감사하나이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날 밤이 송이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지금 송이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녀의 말대로 천주학을 믿어 
야소라는 이름의 새 주인을 모시게 되었다면 송이의 평소 성격으로 보아 
누구보다 깊은 신앙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송이는 어쩌면 이미 
체포되어 순교하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소녀가 택한 주인은 이제 한 분뿐이시나이다. 그분의 이름은 오직 
야소님뿐이시나이다."
  어차피 덤으로 사는 인생. 마당에서 모이를 쪼는 닭을 채 가는 솔개의 
모습에서 자신의 상운과 명운이 다했음을 꿰뚫은 임상옥은 나머지 인생을 
덤으로 여기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일체의 소유와 일체의 욕망에서 
벗어난 임상옥이라 할지라도 아름다운 추억마저 끊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송이.
  아직 살아 있다면 그녀는 마흔셋의 나이가 되어 있을 것이다.
  아아.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 것인가. 아아, 보고 싶다, 하고 임상옥은 
생각하였다. 만나고 싶다, 하고 임상옥은 생각하였다. 만나서 보고 싶다고 
임상옥은 생각하였다. 한 번만이라도 만나서 보고 싶다, 하고 임상옥은 
생각하였다.
  그러다 문득 부채질을 하던 임상옥의 손이 맺었다. 그는 깊은 낮잠에 
빠져들었다.

  "죽여라, 죽여."
  "돌로 쳐죽여라."
  군중들은 일제히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맹목적인 분노로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형리들은 검은 용수를 씌운 송이를 황새바위 위에 
세워놓았다.
  이곳은 황새들이 많이 서식하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비극과는 상관없이 
황새떼는 나무 위를 날아다니고 있었다. 예로부터 소나무 위에 앉아 있는 
황새를 관학이라 하여 그림이나 자수 속에 나오는 길조로 취급하고 
있었으나, 이들의 평화로운 모습과는 달리 잔인한 풍경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황새떼는 황새바위 끝을 흐르는 제민천 위를 유유히 날아다니고 있기도 
하였다.
  마침내 죄수가 끌려나오자 형리들은 죄수의 소원대로 돌로 쳐죽이는 
석투살을 준비하고 있었다. 송이는 마지막으로 성경에 나오는 사덕망이 
외쳤던 마지막 기도문 "천주님, 제 영혼을 받아 주십시오"를 마친 후 두 
손을 합장하였다.
  잠시 망설였던 형리 중의 한 사람이 죄수를 향해 돌을 던졌다. 그 돌은 
정면으로 죄수의 가슴에 내리꽂혔다. 그 충격으로 죄수는 쓰러졌다.
  그러나 쓰러졌던 죄수는 몸을 일으켜 꿇어앉았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 
큰소리로 외쳤다.
  "천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지우지 말아주십시오."
  이 또한 사덕망의 마지막 말과 일치하고 있었다. 기도가 끝나기 전에 
여기저기서 돌이 날아들었다. 송이의 몸은 걸레조각처럼 찢겨지고 붉은 
피가 솟아오르고 뼈가 부러지고 머리가 깨어져 골수가 흘러내렸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송이의 몸은 짓이겨진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형리 중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람이 다가가 송이의 죽음을 확인하였다. 
마침내 송이가 완전히 죽었음을 확인한 형리는 손을 들어 상황이 끝났음을 
알렸다.
  생각보다 일찍 시시하게 끝이 났음에 실망한 군중들은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하였다.
  송이의 시체는 흉악범들의 시체와 뒤섞여 황새바위 위에 방치되었다.
  바로 그때였다.
  사람들이 사라지자 수많은 황새떼가 날아와서 붉은 피가 솟아 나오는 
죄수의 시체 위에 앉기 시작하였다.
  온몸이 희고 날개 부분의 깃털만 검은 황새들은 떼지어 날아와 마치 
무엇인가를 합심해서 받쳐들고 하늘나라로 운반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이 
모습을 송이의 양어미 산홍은 울면서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3

  무슨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훨훨거리는 소리 같기도 하고 무엇인가 가볍게 부딪치는 소리같기도 
하였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고 임상옥은 소리 난 쪽을 보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시야는 안개가 낀 듯 자욱하게 가려져 있었다.
  그 안개 속에서 끊임없이 펄럭이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궁금해진 임상옥은 안개 속을 뚫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가 
보았다.
  그러자 무슨 형태가 보였다. 그 형태는 흰 날개를 퍼덕이면서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까부터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는 
날개소리였던 것이다. 무슨 날개인가 하고 임상옥은 자세히 쳐다보았다.
  무엇인가 날아오고 있었다. 그 날아오는 물체는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온몸이 희고 날개의 깃털이 검은 새였다. 새가 가까이 날아오자 
그제서야 다리는 붉고 부리는 검은 황새의 모습임을 알 수 있었다.
  그제서야 임상옥은 아까부터 들려오던 무엇인가 가볍게 부딪치는 소리가 
황새가 부리를 부딪쳐 가락가락 하고 내는 소리임을 알 수 있었다.
  임상옥은 잘 알고 있었다. 황새는 명관이 없어서 다른 새처럼 울어대지 
못하는 무성조임을.
  웬 황새인가, 하고 임상옥은 순간 생각하였다.
  송단의 새라고 불리우는 황새가 도대체 어디로 날아가고 있는 것일까.
  갑자기 시야를 가렸던 안개 같은 것이 걷히더니 모든 것이 순식간에 
밝아지고 온 하늘을 덮는 듯한 황새떼들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게 무슨 일인가 저처럼 많은 황새떼들이 도대체 어디로 날아가고 있는 
것일까.
  임상옥은 감탄하면서 하늘을 덮은 황새떼들을 우러러 지켜보고 있었다. 
그 순간 임상옥은 황새들이 서로 합심하여 무엇인가를 떠받들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고 임상옥은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것은 해와 같이 빛나고 있었다. 너무나 빛이 나고 있어서 눈이 부실 
정도였다. 황새떼들은 해처럼 빛나는 무엇인가를 떠받들고 하늘로 
솟구치고 있었던 것이다.
  점점 더 황새떼들이 가까워오자 임상옥은 마침내 그 해와 같이 빛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사람이었다. 황새떼들이 합심해서 떠받들고 운반하는 사람은 
여인이었다. 그러나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을 뿐 이 지상에 살고 있는 
그 어떤 여인의 모습과는 달랐다. 그 여인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있었으며 옷은 빛과 같이 눈부셨다. 임상옥은 그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 여인의 모습은 바로 송이였던 것이다.
  송이다.
  임상옥은 가슴이 뛰었다.
  황새떼들이 힘을 모아 하늘나라로 날라 가고 있는 저 여인은 바로 
송이인 것이다.
  "송이야."
  임상옥은 큰소리로 외쳐 불렸다. 그러나 임상옥의 목소리는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다.
  "송이야, 어데로 가고 있느냐. 송이야."
  임상옥은 목청이 터져라고 외쳤다. 그러나 여전히 소리가 되어 
터져나오지 않고 있을 뿐.
  그때였다.
  송이의 눈과 임상옥의 눈이 마주쳤다. 송이는 빙그레 웃고만 있을 
뿐이었다.
  너무나 가까워 손만 뻗으면 잡을 수도 있어 보였지만 송이는 이미 
피안의 기슭 저편에 있어 이승의 세계를 뛰어넘어 있었다.
  바라밀다.
  번뇌가 가득한 차안의 이 세상에서 생사를 초월하여 열반의 피안으로 
가는 바라밀다. 송이는 이미 잡을래야 잡을 수 없고, 만질래야 만질 수 
없고, 소리를 내어 불러보았자 들리지 않는 저 바라밀다에 머물고 있었다.
  송이는 분명히 송이였으나, 그가 알고 있는 송이가 아니었다.
  송이는 무엇보다 아름답고 거룩하고 신비로운 한 사람이었다. 남성과 
여성의 성을 초월한 하나의 인간이었다. 불행하게 태어나 파란만장의 생을 
보내고 임상옥을 만나 애끓는 사랑을 하고 그러한 모든 일들은 그녀가 
벗어버린 허물일 뿐 그녀의 본질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이미 송이라고 불려지는 어떤 여인과는 전혀 상관없는 별개의 
선녀였고 천사였다.
  바로 그 순간.
  임상옥은 잠을 깨었다.
  손에 들고 부치고 있던 단오선의 부채가 무심코 떨어지는 낌새에 
소스라쳐 놀라 꿈에서 깨어난 것이었다. 잠깐 목침을 베고 누웠다가 
낮잠에 빠져들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짧은 낮잠 속에 꾼 꿈은 너무나 
선명해서 생시인 것만 같았다. 아직도 송이의 이름을 목이 터져라고 
외쳤건만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던 안타까움이 가슴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임상옥은 누웠던 자리 그대로 목침을 베고 묵묵히 누워 있었다.
  임상옥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송이는 바로 이 순간 알 수 없는 
어딘가에서 죽은 것이다. 천주학으로 처형을 당한 것이다. 그녀의 넋이 
이승을 떠나기 전에 잠깐 꿈을 빌려서 나타나 임상옥에게 이승에서의 
마지막 작별인사를 나누고 떠난 것이다.
  임상옥의 얼굴 위로 메마른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그날 밤.
  황새바위 처형장에는 낯선 사람들이 남의 눈을 피하여 숨어들었다. 등이 
굽은 노파와 건장한 체격을 가전 남자였다. 노파는 이미 형리들에게 
웃돈을 건네어 주었으나 그래도 조심을 해야 했으므로 성문이 닫힌 
한밤중에야 숨어든 것이었다. 다행히 달이 떠서 대낮처럼 밝았으므로 
시야는 투명하였다.
  원래 황새바위에서 처형된 죄수들은 흉악범들과 사학 죄인들이 
대부분이어서 이들은 굶주린 들짐승이나 까마귀들의 밥이 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보통이었다.
지난 낮, 돌에 맞아 죽은 송이의 시체를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비록 쉽게 찾을 수 없도록 흉악범들의 시체와 뒤섞어 놓았으나 
한눈에 보아도 다른 시체와는 구별되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시체들은 벌써 썩어서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지만 송이의 
시체에서만은 이상하게도 향기로운 냄새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밤이 되자 굶주린 짐승들이 몰려들어 시체의 살을 물어뜯고 있어 건장한 
체격의 사내는 이를 물리치기 위해 들고 있던 지게작대기를 이리저리 
휘둘러보았으나 송이의 시체만은 온전하였고 감히 들짐승도 넘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건장한 체격의 사내는 송이의 시신을 가마니로 둘둘 말아 지게에 졌다. 
따로 관을 준비할 겨를도 없었고 장례를 치를 준비 역시 겨를이 없었다. 
생매장이라도 하는 것 자체가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었다.
  옹기장수와 산홍은 송이의 시신을 싣고 재빠르게 공산성에 올랐다. 
공산성은 옛부터 웅진성이라 하여 백제의 왕궁 터가 있던 곳. 그러나 비 
무렵만 해도 함부로 방치되어 울창한 잡목들만이 무성한 황성이었다. 
소나무들이 울창한 낮은 빈터에 옹기장수는 지게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땅을 파기 시작하였다.
  이 모든 행위들이 불법이었으므로 모든 일들은 재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사람 키가 될 만큼 땅을 판 후 그들은 시신을 말았던 가마니째 땅 속에 
그대로 밀어 넣었다. 사람의 형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시신이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산산조각으로 찢어진 시신이었지만 두 
손만은 온전해서 마치 기도하는 자세 그대로 합장되어 있었고 그 손에는 
여전히 십자가상이 달린 묵주가 들려 있다는 사실이었다.
  훗날 가매장한 시체를 다시 파내어 정식으로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알아볼 수 있게 묘석 대신 돌맹이들을 무덤 주위에 표시해놓고 나서 두 
사람은 서둘러 그곳을 떠났다.
  그러나 두 사람은 또다시 그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옹기장수 손선우도 그로부터 10년 뒤인 1866년의 병인박해 때 
순교하였으며 산홍의 행방도 그 이후로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5장  상업지도

  2000년 11월 3일.
  마침내 김기섭 회장의 호를 딴 '여수기념관'이 개관되었다. 대학로에 
위치한 공터에 지은 조촐한 규모의 기념관이었다.
  살아 생전 자신이 말하였듯 바퀴에 미쳤던 '바퀴벌레'라는 별명답게 
기념관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바퀴 형상의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잔디가 깔린 마당에는 김기섭 회장의 모습을 한 조각상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직 정식으로 제막식을 하지 않아 그 조각상은 흰 천으로 
가리워져 있었다. 흰 천으로 가리워져 있었지만 키가 낮은 것으로 보아 
전신상이 아니고 인체의 가슴 부위까지만 조각한 흉상인 모양이었다. 실물 
크기의 전신상이 아니라 흉상이라는 점이 우선 마음에 들었다.
  생전에 김기섭 회장은 유난히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만약 살아 있었다면 자신의 호를 딴 기념관을 짓는다는 
사실조차 겸연쩍어 쑥스러워하였을 것이다. 하물며 자신의 기념관이므로 
어쩔 수 없이 조각상을 세운다 하더라도 실물 크기의 전신상을 세운다는 
것은 극구 반대하였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흉상이라는 점은 다행스런 일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개관 시간이 다가오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김기섭 회장이 
재계에 큰 영향을 미쳤던 큰 인물이었으므로 경제계 인사뿐 아니라 정계, 
학계를 망라해서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전직 대통령의 
얼굴도 보였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문화계 인사들의 모습도 보이고 
있었다. 
  나는 구석진 자리에 서서 팔짱을 끼고 잔디밭 너머로 완공된 기념관을 
바라보았다. 아담한 크기의 이층 건물이었다. 화려하지 않은 기념관의 
규모와 사치스럽지 않은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생각보다 많은 기자들이 모여들고 있었고 여기저기서 사진기자의 
플래시가 터지고 있었다. 그것은 기평그룹의 총수였던 김기섭 회장의 
기념관 개관식을 취재하기보다는 또 다른 뉴스 때문에 그토록 많은 
취재진들이 운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추사 김정희의 작품 때문이었다.
  추사 김정회가 그린 최후의 유작이 기념관 재단 측에 넘겨졌기 
때문이었다.
  물론 나는 열흘 전쯤 한기철의 제보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김정희의 
국보급 '세한도'를 능가하는 최고의 걸작품인 '상업지도'는 그러나 생각보다 
적은 금액으로 재단 측에서 인수할 수 있었다. 그것은 추사에 미쳐 있던 
후지스카 지카시의 이들 후지스카 세이지의 결단 때문이었던 것이다.
  후지스카 세이지는 아버지가 남긴 '추사의 유작들을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박물관에 기증하는 것은 몰라도 사사로이 팔거나 넘기는 일은 
절대로 없게 하라'는 유언을 파기하고 추사 최후의 걸작 '상업지도'를 
여수기념재단 측에 넘겼던 것이다. 작품을 넘기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기철은 내게 전해 주었다.
  "비록 박물관은 아니지만 기념관이니 사사로운 매매는 아닙니다. 고인은 
박물관이라면 무상으로 기증하는 것은 무관하다는 유언을 남기셨으나, 
기념관이니 명목상의 대금은 받을 것입니다."
  후지스카의 말처럼 추사 김정희 최후의 걸작품 '상업지도'의 값은 
명목상의 대금이었다. 아마도 후지스카가 흥정하려 하였다면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이를 구하라는 김기섭 회장의 집념과 맞물려 천문학적인 가격을 
형성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처럼 많은 취재진들이 모인 것은 바로 추사의 마지막 걸작품인 
'상업지도' 때문이었던 것이다. 이미 '세한도'를 능가하는 걸작품이라는 
작품적 평가가 전문가들 사이에서 떠돌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뉴스적 
가치를 매스컴에서 놓칠 리가 만무하였기 때문이다.
  마침내 개관 시간인 열한 시가 가까워오자 너른 잔디밭은 발 디딜 틈이 
없을 만큼 사람들로 가득 갔다. 정각이 되자 국무총리가 도착하였으며 
유족을 위시한 몇 명의 인사가 제막식을 거행하는 것으로 개관식은 
시작되었다.
  한쪽에 자리잡은 실내악단의 연주와 함께 줄을 잡아당기자 천천히 흰 
휘장이 벗겨져 내렸다.
  그러자 청동으로 빚은 김기섭 회장의 흉상이 드러났다. 극사실주의에 
입각한 조각품이었다. 그래서 조각상은 마치 김기섭 회장이 살아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사실적이었다.
  여기저기서 박수소리가 터져나왔다.
  잠시 후 이 기념관을 건립하는 데 총지휘를 맡았던 한기철이 올라가 
경과 보고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경과 보고를 하는 동안 나는 팔짱을 
낀 채 지난 일을 잠시 떠올려 보았다.
  언제였던가. 아아, 생각난다. 김기섭 회장이 직접 시운전을 하고 독일의 
고속도로를 달리다 불의의 사고로 죽은 신차 '이카로스' 바로 21세기를 
겨냥하여 만든 밀레니엄 야심작 '이카로스'의 신차발표회장에서 나는 
기획조정실장이었던 한기철을 만났던 것이다.
  물론 10년 전이었던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무렵 김기섭 
회장과 처음으로 상면할 때 그 만남을 주선했던 사람이 한기철이었으므로 
구면이었지만 김 회장이 죽은 후에는 그것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그때가 
1월, Y호텔의 컨벤션홀이었다.
  신차발표회가 끝난 후 한기철은 나를 따로 Y호텔의 음식점으로 
안내하였다. 그곳에서 한기철은 내게 김기섭 회장의 시신 속에 들어 있던 
지갑을 꺼내 보였었지. 가죽으로 만든 그 지갑은 죽을 때의 비극으로 
피범벅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 흔한 만원짜리의 지폐 하나 없이 텅 비어 있던 피 묻은 김기섭 
회장의 지갑. 그 지갑 속에는 작은 지퍼로 교묘하게 위장된 비밀공간이 
있었다.
  그 비밀공간에서 나온 한 장의 종이. 그 종이 위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씌어 있었지.
  '재상평여수 인중직사형'
  평생 좌우명으로 삼아 항상 지갑 속에 넣고 다닐 만큼 소중히 하였던 
금언. 따라서 그 문장에서 빌려와 자신의 호까지 '여수'로 삼았던 김기섭.
  그때 한기철은 내게 그렇게 말하였다.
  "그 문장이 어디서 왔는지 출처를 밝혀 주십시오. 도와주십시오. 
저희들을 위해서 도와주지 마시고, 돌아가신 회장님을 위해서라고 
생각하시고 도와주십시오."
  그것이 시작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우리나라가 낳은 최대의 
무역왕이었던 임상옥과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나는 김기섭을 통해 임상옥이라는 인물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4대째에 걸쳐서 사신을 따라다니던 가난한 상인의 후예로 태어났던 비천한 
신분의 임상옥. 그러나 그는 '죽을 사' 자와 '솥 정' 자의 비의를 통해 
우리나라가 낳은 최고의 거상으로 성공한다. 그러나 그보다도 가득 채우면 
텅 비어버리고 오직 7할쯤 채워야만 온전한 '계영배'를 통해 마침내 
'상업의 도'를 깨달아 '상업의 부처'을 이루었던 임상옥.
  아아, 저 사람들은 알고 있는 것일까.
  마치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릴 것처럼 권력에 취해 있는 저 어리석은 
정치가들. 마치 선택받았다는 착각 속에 탐닉하고 있는 귀족의 기업인들. 
사교계에 모여든 저 유명인사들. 저 카메라의 플래시 속에, TV의 카메라 
앞에 너무나 당당한 천민상업주의의 어릿광대들. 박수를 치는 저 사람들. 
그들은 알고 있을 것인가.
  임상옥이 깨달았던 계영배의 진리를 그들은 과연 알고나 있을 것인가.
  아니다.
  이곳은 김기섭의 여수기념관이 아니다. 이곳은 임상옥의 '가포기념관'인 
것이다.
김기섭은 평생 임상옥을 사숙하고 마음속으로 존중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곳에는 임상옥이 남긴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가 남긴 문집인 <가포집>과 '계영배'도 전시되어 있다. 취재진들이 
그처럼 취재열을 올리고 있는 '상업지도'도 결국 추사 김정희가 가포 
임상옥을 위해 그려준 최후의 유작인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이곳은 
김기섭 회장을 기리는 여수기념관이채만 결국 상업의 도를 이루었던 
임상옥의 정신을 이어받은 기념관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저들은 과연 알 것인가
  기념관 내부에 전시된 깨어진 잔, 골동품 가치로는 만원도 되지 않는 
계영배에 숨겨져 있는 치열한 삶의 진리를 저 사람들은 눈치라도 첼 수 
있을 것인가
  한기철의 경과보고 이후로 몇 사람의 하객이 인사말을 하고 고인을 
추모하고 그리고 박수를 쳤다. 죽은 김기섭 회장이야말로 우리나라 경제를 
이끈 거목이었으며, 비록 죽었으나 그가 남긴 유지는 아직도 계승 
발전되고 있다는 식의 치사가 이어진 후 마침내 테이프 커팅 순서가 
되었다.
  몇 사람의 귀빈들이 흰 장갑을 끼고 기념관 앞에 드리워진 색종이 
테이프 앞에 늘어섰다. 그들은 한결같이 의전용 가위를 들고 있었다.
  나는 팔짱을 낀 채 생각하였다.
  저들이 테이프를 끊으면 정식으로 내 역할은 끝이 나게 되는 것이다. 
나의 역할. 지난 1월, 한기철로부터 은밀하게 제의 받았던 나의 임무. 
김기섭 회장이 사숙하였던 역사적 인물 임상옥에 대한 추적은 완전히 끝이 
나게 되는 것이다.
  지난 10개월 동안 나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일관되게 임상옥이라는 
인물 추적에 열중하여 왔다. 이제 그 추적이 저 테이프 커팅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상도 5
    지은이: 최인호
    출판사: 여백미디어
    봉사자: 최용희

      제1장 세한도
  비행기가 일본 나리타 공항에 내린 것은 오후 일곱 시 무렵이었다. 예정 
시간보다 십여 분 일찍 도착한 것이었다.
  비행기가 무사히 착륙하고 저희 비행기를 탑승해 주셔서 고맙다는 
안내방송이 나오고, 비행기가 완전히 멎을 때까지 그대로 좌석벨트를 맨 
채 좌석에서 기다려 달라는 스튜어디스의 말이 나오자 그제서야 한기철은 
눈올 뜨고 하품을 하면서 말하였다.
  "아아, 벌써 동경에 닿은 모양이지요."
  그는 김포공항을 출발하여 나리타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의 두 시간 동안 
내내 잠에 떨어져 있었다. 비행기가 출발하자마자 스튜어디스에게 독한 
위스키를 두어 잔 얻어 함께 마신 뒤로 한기철은 줄곧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회사의 격무로 인해 항상 만성피로가 누적되어 있다가 느닷없는 
해외출장으로 한꺼번에 피로함이 몰린 탓일까. 아예 작정한 듯 
스튜어디스로부터 눈을 가리는 검은 안대를 얻어 쓰고는 웃으며 말하였다.
  "잠깐 눈 좀 붙이겠습니다."
  잠깐 눈을 불이겠다는 그의 말은 단지 인사말에 지나지 않았다. 비행 
중에 제공되는 기내식도 먹지 않고 그는 가늘게 코까지 골면서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잠깐만이라도 눈을 불일 수가 없었다. 원래 성격이 예민한 
터라서 공공장소에서는 아무리 피곤해도 잠을 잘 수 없는 습성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느닷없는 이번 여행에 대한 궁금증 때문이었다.
  내게 있어서 이번 여행은 전혀 예정된 것이 아닌 돌발적인 것이었다. 
한기철로부터 연락을 받은 것이 오늘 아침이었고, 그는 대뜸 내게 이렇게 
말했다.
  "정 선생님, 혹시 여권은 갖고 계시겠지요."
  요즈음 세상에 여권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는 생각이 들어 내가 
피식 웃으면서 '있다'고 대답하자 그는 다시 물어 말하였다.
  "혹시 일본 비자는 갖고 계십니까."
  글을 쓰고 사는 것을 직업으로 갖고 있는 내가 특별한 목적 없이 일본 
비자를 갖고 있을 리가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없는데요."
  그러자 한기철은 다시 물었다.
  "미국 비자는 갖고 계시겠지요."
  일본에 비하면 미국은 훨씬 인심이 후한 편이어서 한 번 비자를 발급 
받으면 보통 여권 기간의 만료 시기까지는 연장해 주어 미국 비자는 살아 
있었던 것이다.
  "미국 비자는 남아 있습니다."
  내가 대답하자 한기철은 잘됐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러면 됐습니다. 일본은 비자 없이도 72시간은 통과 체류할 수 
있으니까요. 72시간이면 충분합니다. 정 선생님, 저와 함께 일본에 잠깐 
동안만 다녀오시지 않겠습니까."
  "일본이라면 어디를 말하는데요."
  "동경입니다. 오늘이 마침 금요일이니까 저녁 비행기로 출발하면 일곱 
시쯤 동경에 닿을 것이고, 주말에 모든 일을 끝마치고 늦어도 일요일이면 
서울로 돌아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오늘 저녁에 출발하지는 말인가요."
  나는 당황했다. 오늘 중으로 써주어야 할 급한 원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습니다. 오후 다섯 시쯤 동경으로 출발하는 비행기가 있습니다. 한 
시간 전에 공항에서 모든 수속을 하면 되니까 오후 네 시쯤 제2청사 
C은행 앞에서 만나면 될 것 같습니다. 나오실 때 여권만 잊지 말고 갖고 
나오시지요. 비행기표는 저희들이 따로 마련해 놓았습니다. 참, 정 
선생님의 영어 철자가 어떻게 되시는지요."
  한기철은 오랫동안 큰 그룹 안에서 무역으로 단련된 세일즈맨답게 
신속하고 빈틈이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요."
  나는 따로 머리 속으로 시간 계산을 하면서 말하였다. 오후 네 시까지 
김포공항으로 나가야 한다면 오후 세 시에는 집에서 출발해만 한다. 그냥 
3일의 짧은 여행이라면 작은 백 하나면 충분하므로 짐을 싸고 떠날 준비를 
하는데 삼십 분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오후 두 시까지는 원고를 
쓰는 일에 몰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전화로 말씀드릴 수는 없고 만나 뵙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단 
오후 네 시에 김포공항 제2청사에서 뵙겠습니다. 출국수속을 하는 2층에 
C은행이 있으니까 그 은행 앞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일방적으로 전화가 끊긴 후 나는 서둘렀다. 두 시까지 원고를 끝내고 
송고까지 마치려면 시간이 빠듯했으므로 성급히 책상 앞에 앉아서 펜을 
들었다.
  7월 초순인데도 날씨는 복더위처럼 무더웠다. 더위와 씨름하면서 나는 
점심도 거른 채 30매에 달하는 청탁 원고를 무사히 끝 낼 수 있었다.
  시간이 촉박했으므로 갈아입는 옷만 대충 챙겨 작은 가방을 들고 점심도 
거른 채 택시를 타고 김포공항에 달려 왔지만 출국수속을 하는 C은행 
옆에 도착한 것은 약속시간보다 십 분 늦은 네 시 십 분 무렵이었다.
  그러나 미리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던 한기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약속 장소인 C은행 앞은 여행객들로 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외국으로 
단체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의 집합 장소였는지 각종 깃발을 든 여행사 
직원들이 함께 떠날 여행객들의 이름을 부르고 주의 사항을 알려주느라고 
야단법석이었다.
  나는 초조하게 한기철을 기다렸다.
  한기철이 나타난 것은 네 시 삼십 분 정도였다. 그는 갑작스런 출장 
여행이라 따로 챙길 짐도 없는 맨몸이었다.
  "죄송합니다. 회사 업무가 바빠서요."
  이것저것 따질 겨를이 없었다. 우리 둘은 빠르게 수속하고 빠르게 출국 
검색대를 빠져나왔다. 동경으로 출발하는 비행기가 머무르고 있고, 
기항장은 이미 모든 승객들이 탑승을 완료한 후였다. 우리 둘은 
아슬아슬하게 비행기에 올랐고, 그러자마자 비행기의 출입구가 닫혔던 
것이다.
  비행기에 올라서도 우리 둘이 나눈 대화는 두세 마디가 고작이었다.
  한기철을 마지막 본 것이 지난 봄이었으니 다시 만난 것은 삼, 사 
개월만의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말대로 바쁜 회사 업무에 시달리고 
있었는지 초췌하고 지쳐 있었다.
  "비행기가 동경에 도착하면 동경 지사에서 직원이 마중을 나와 있을 
겁니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얼음을 넣은 위스키를 시켜 나누어 마시면서 나는 한기철에게 물었다. 
한기철은 술을 마시면서 대답했다.
  "정확한 이유는 저 역시 잘 모릅니다. 동경에 가서 동경 지사장을 
만나봐야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굳이 저까지 출장 여행을 떠나야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아, 아닙니다."
  황급하게 손을 저으면서 한기철이 대답하였다.
  "정 선생님을 모시고 가는 것은 제 뜻이 아닙니다. 오늘 아침 동경 
지사장으로부터 긴급 연락이 왔습니다. 가능하다면 빨리 정 선생님을 
모시고 동경으로 출장을 와달라는 전언입니다. 그러니까 정 선생님을 
모시고 가는 것은 동경 지사장으로부터의 정식요청 때문이지 저의 
개인적인 용무 때문은 아닙니다."
  그리고 나서 한기철은 수수께끼처럼 말을 덧붙였다.
  "저도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아마 돌아가신 회장님과 관련된 매우 
긴급한 업무 때문이 아닐까요. 왜냐하면 동경 지사로부터 전송되어 온 
팩스에 'K-2에 관한 문건'이라고 명기되어 있었으니까요. K-2라면 
돌아가신 김기섭 회장님의 암호명 아닙니까."
  K-2.
  그것은 김기섭 회장을 가리키는 암호명임을 나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동경 지사에서는 K-2에 관련된 업무로 굳이 나를 
동경까지 와달라는 긴급 전문을 보내온 것이었을까.
  그러나 더 이상 질문을 던질 수가 없었다.
  위스키 두어 잔으로 취기가 오른 한기철은 스튜어디스로부터 수면 
안대를 얻은 다음 그대로 갚은 잠에 빠져들어 더 이상 대화를 나눌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기철이 잠들어 있는 동안 나는 한기철과의 지난 일을 잠시 떠올려 
회상하고 있었다.
  우연히 기평그룹의 총수 김기철 회장이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고속도로 
위에서 새로 제작된 신차(新車) 이카로스를 직접 운전하다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다는 긴급 뉴스를 본 것은 지난해 말, 크리스마스 
전야였다. 언젠가 1989년경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무렵 우연히 취재 여행 
차 베를린에 들렀던 나는 그 곳에서 자신의 표현대로 '바퀴에 미친 
바퀴벌레' 김기섭 회장과의 첫 대면을 하였으며, 그로부터 K-2 김기섭 
회장과 우정을 쌓게 되었던 것이다.
  김기섭 회장과의 첫 대면을 주선한 사람은 당시 프랑크푸르트의 
지사장으로 있었던 한기철. 마침내 새로운 뉴 밀레니엄의 새 천년이 
시작되는 2000년 1월. 이카로스의 신차발표회에서 나는 한기철을 다시 
만나게 되었으며 그 날 밤 나는 한기철로부터 뜻밖의 제의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죽은 김 회장의 지갑에서 나온 한 장의 쪽지. 그 쪽지 위에 
씌어진 수수께끼의 문장 '재상평여수 인중직사형'의 출처를 알려달라는 
제의였던 것이다.
  한기철의 부탁을 받은 나는 한학에 밝은 서예가 석전으로부터 그 문장을 
쓴 사람이 다름 아닌 조선 후기의 무역왕 임상옥임을 밝혀내기에 
이르렀다.
  김기섭 회장이 평소에 임상옥을 사숙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그 자신의 
호를 그가 남긴 문장에서 따와 '여수'라고 하였음을 확인했던 나는 
다가오는 11월 3일 김 회장의 생일을 기념하여 '여수기념관'을 개관하려고 
준비중인 한기철에게 임상옥이 남긴 저서인 <가포집>을 구해 줄 수 
있겠느냐고 부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부탁은 전혀 뜻밖의 수확을 얻게 되었다. 기평그룹의 
자동차공장인 '매화리 공장' 한구석에 마련된 김기섭 회장의 숙소에서 나는 
뜻밖에도 전설 속에서만 나오던 잔 '계영배'를 발견하게 됐던 것이다.
  비밀리에 북한의 주석 김일성을 방문하여, 직접 임상옥의 고향인 의주에 
살고 있는 후손들로부터 <가포집>과 전설 속의 '계영배'를 구해 온 
김기섭의 행적을 통해 나는 임상옥이 저서인 <가포집> 서문에 나오는 
수수께끼의 문장 '나를 낳아준 사람은 부모이지만 나를 이루게 해준 것은 
그 하나의 잔이었다'의 의미를 밝혀낼 수 있었던 것이다. 
  11월 3일. 
  다가오는 김기섭 회장의 생일을 기념해서 개관하려는 '여수기념관'에 
진열될 중요한 유물, 계영배를 보관하고 있는 동안 나는 골동품상이자 
최고의 감정가인 박재정을 통해 그 계영배가 경기도 광주군 일대의 
사옹원이라는 관원에서 2백여 년 전에 제작된 진품임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골동품적 가치로는 만원도 채 되지 않는 하찮은 물건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계영배를 통해 임상옥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추적할 수 있었던 
나는 이번에는 뜻밖에도 한기철과 함께 해외출장 여행에 동행하게 된 
것이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비행기가 동경까지 도착하는 동안 나는 궁금증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무슨 이유로 동경 지사에서는 나를 긴급으로 함께 와 달라는 
전언을 보내 온 것일까. 
  천천히 활주로를 선회하여 기항장으로 다가가는 비행기의 창문을 통해 
본 나리타 공항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서울의 일곱시라면 잔광이 남아 
있는 석양 무렵이었으나, 동경은 위치상 우리나라보다 해가 일찍 뜨고 
그만큼 일찍 지는 탓인지 이미 어둠이 내려 있었다.
  비행기를 내리자 일본 특유의 후덥지근한 공기가 눅눅한 습기를 띠고 
몸에 달라붙어 금세 땀이 솟아올랐다.
  한기철은 웃옷을 벗고 연신 흘러내리는 땀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말하였다.
  "이건 완전히 한증막에 들어온 기분인데요. 그렇지 않습니까, 정 
선생님."
  우리는 입국수속을 하였다.
  여권을 내어주자 출입국 관리는 내 여권을 자세히 살펴본 후 나를 
쳐다보면서 간단하게 영어로 물었다.
  "입국 비자가 없는데 일본서는 며칠 있을 예정입니까."
  "72시간입니다. 3일 안에 출국할 겁니다."
  나는 미리 준비해 놓았던 출국 날짜가 예약돼 있는 비행기표를 
내밀었다.
  관리는 내가 내민 비행기 티켓을 꼼꼼히 살펴본 후 출국시간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나서도 그는 여분의 페이지를 넘기며 미국 비자까지 
확인한 후 비로소 별다른 말 없이 72시간 머무를 수 있는 통과비자의 푸른 
도장을 찍어 주었다.
  한기철이나 나나 간편한 휴대용 백을 들고 있었을 뿐 따로 짐을 부치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그대로 세관 심사대를 통과하여 통관 구역을 
빠져나왔다.
  사람들을 기다리는 통로 앞에서 누군가 한기철을 부르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몹시 더운 날씨임에도 그는 정장 차림에 넥타이까지 매고 
있었다.
  "인사드리지요."
  먼저 악수를 나눈 후 한기철은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저희 회사의 동경 지사장입니다."
  "안녕하세요, 정 선생님. 정 선생님의 소설은 모조리 읽었습니다. 애독자 
중 한 사람입니다."
  그는 지갑 속에서 명함을 한 장 꺼내어 내게 내밀었다. 나는 악수를 한 
후 그가 준 명함을 쳐다보았다.
  "박동우."
  "차를 가져왔습니다. 주차장까지 함께 가시겠습니까."
  박동우는 앞장서서 걸으며 말하였다.
  우리는 공항 구내를 빠져 나왔다.
  그나마 에어콘으로 통제되고 있던 무더위가 실내를 빠져 나오자 
무차별로 덤벼들고 있었다. 끈적끈적한 무더위가 한순간 덤벼들었기 
때문에 숨이 막힐 정도였다.
  차를 세워둔 곳까지는 2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거리였지만 한기철과 
나는 완전히 물에 빠진 사람처럼 땀에 짖어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날씨에 
익숙해져 있는 듯 박동우는 단정히 빗은 머리카락 한 올도 흐트러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한 방울의 땀조차 흘리지 않고 있었다.
  그는 차에 앉자마자 최강으로 에어콘을 가동시켰다. 한바탕 냉기를 
샤워처럼 폭발시키고 난 후 박동우는 천천히 차를 몰고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잘 아시겠지만."
  주차장을 빠져나오면서 박동우는 말하였다.
  "공항에서 동경 시내까지는 한 시간 반정도 걸립니다. 러시아워일 때는 
두 시간이 넘게 걸린 적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서울에서 동경까지의 비행 
시간이나 나리타 공항에서 동경 시내까지의 운전 시간이나 같은 시간이 
걸리는 셈이지요."
  박동우의 말대로 동경으로 들어오는 고속도로는 차들로 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차는 제대로 속력을 올리지 못하고 가다 서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나는 나를 동경으로 초청한 박동우의 속마음에 대해서 궁금했지만 
박동우는 묵묵히 운전대만 잡고 있었을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한기철도 마찬가지였다. 한기철은 차창 밖을 스쳐 지나가고 있는 
고속도로 주변의 밤 풍경을 살펴보고 있었다.
  차가 동경 시내로 접어들 무렵에야 박동우가 먼저 입을 열어 말하였다.
  "어떻습니까, 한 실장님. K-2의 기념관은 잘 진행되고 있습니까."
  "건물은 개관 예정일까지 완공되겠지만 그 안에 진열될 유물의 내용이 
문제예요."
  한기철은 다소 걱정되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내용이 빈약한 것 같아 걱정입니다."
  그러자 박동우가 머리를 끄덕이면서 말을 받았다.
  "어쩌면 이번에 잘하면 K-2에 관한 뜻밖의 자료를 얻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정 선생님을 함께 모시자고 전문을 보낸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차는 동경의 시내로 접어들고 있었다. 동경 특유의 현란한 네온사인이 
야밤을 불야성으로 밝히고 있었다.
  "호텔은 긴자 쪽에 잡아놓았습니다. 우선 시장하시겠지만 방에 들어가 
간단히 씻고 난 후 식사를 하시도록 하시지요."
  긴자는 동경에서는 가장 전통 있는 오래된 번화가 그러나 오랫동안의 
불황 때문인지 오랜만에 보는 긴자 거리는 어쩐지 활기를 잃고 침체의 
늪에 빠진 느낌이었다. 거리를 밝힌 네온사인의 광고탑들도 광휘가 퇴색된 
느낌이었고, 거리를 오가는 행인들의 모습에도 생기가 없어 보였다. 
연중무휴로 일본의 전통극인 가부키를 공연하는 극장 근처에 있는 호텔에 
차가 멈춘 것은 저녁 아홉 시 무렵이었다.
  "먼저 안으로 올라가셔서 간단히 씻으시고 나오시지요. 호텔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우리는 동경 지사에서 미리 예약해 준 방으로 올라가 우선 땀에 흠뻑 
젖은 옷을 벗고 샤워를 했다. 욕실 안은 전형적인 일본 호텔방답게 
공중전화부스처럼 작고 비좁았다. 어떻게 일본인들은 이처럼 작아서 마치 
가상현실 같은 좁은 공간에서 자고 먹고 목욕을 하고 생활하고 있는 
것일까. 마치 아크로바트하는 곡예사들처럼.
  나는 묘기를 보이는 곡예사처럼 아슬아슬하게 샤워를 하고 머리를 감고 
양치질을 했다.
  몸에 묻은 물기를 수건으로 닦은 후 나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비로 내려오자 이미 두 사람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긴자 근처에 간단하게 술과 안주 겸 식사를 할 수 있는 제법 이름이 
알려진 식당이 하나 있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박동우가 우리에게 의향을 물었으나 우리는 가타부타 대답을 할 처지가 
못되어 머리를 끄덕였을 뿐이다.
  "가까우니까 차는 주차장에 놓아두고 걸어서 가시지요."
  박동우는 앞장서 호텔을 빠져나갔다.
  끈적끈적이는 땀을 씻어 내리고 새 옷을 갈아입은 뒤끝이라 그런지 
초여름의 무더위는 한결 가신 느낌이었고 밤바람마저 상쾌하였다.
  인근 어딘가에 바다가 가까운 것일까. 불어오는 바람 속에 찬 염분의 
소금 냄새가 섞여 있는 느낌이었다.
  박동우는 미로와 같은 긴자의 골목길을 이리저리 빠져나갔다. 긴자는 
오래된 번화가로서의 명성을 뉴타운들에게 모두 빼앗겼는지 오가는 
사람들은 젊은이들이 아니라 정장을 한 회사원이나 오피스걸들이 
대부분이었다. 간혹 일본의 전통복인 기모노를 입은 여인들의 모습도 
보였다.
  가까운 거리라고 했으나 박동우가 안내한 식당은 걷기에는 좀 먼 
거리였다. 좁은 골목에 있는 지하실이었다. 계단을 밟고 내려가자 톡 터진 
홀이 나타났고, 홀 안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제법 알려진 식당답게 
인근에서 모여든 회사원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미리 예약을 해두었는지 박동우가 나타나자 구석진 자리로 안내했는데 
아마도 박동우의 단골집인 모양이었다.
  "이 집 음식이 제법 유명합니다. 술값도 비교적 싼 편이고 분위기도 
좋아서 저희들과 같은 비즈니스맨들이 많이 찾고 있습니다. 안주도 
전통적인 일본 음식들이 나오는데 독특한 맛이 있습니다. 제가 한번 시켜 
보겠습니다."
  "그럽시다."
  한기철이 쾌활하게 대답하여 말하였다.
  "그보다도 우선 찬 맥주 한 잔부터."
  박동우는 생맥주를 석 잔 시켰다. 일본에서는 병맥주보다는 
나마비루라고 불리는 생맥주가 더 감칠맛이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500cc 잔에 가득 담겨온 맥주부터 마시기 시작하였다.
  혼잡한 음식점 안은 담배연기와 떠들썩한 사람들의 목소리, 부딪치는 
술잔들의 덜그덕 소리, 귀에 거슬릴 정도로 큰 샹송 풍의 노랫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술을 좋아하는 한기철이 생맥주로 만족할 리 만무하였다. 우선 생맥주로 
입가심을 한 그는 위스키를 시켰다. 위스키에다 찬물을 타서 마시는 
일본식으로 술을 마시기로 했다.
  비행기에서 나눠주는 기내식마저 거르고 계속 잠을 갔던 한기철로서는 
배가 고픈 모양이었다.
  그러나 빈 속에 물 탄 위스키의 맛이 더욱 자극적이었으므로 한기철은 
속도를 내고 있었다.
  박동우가 시킨 일본 특유의 안주 겸 식사의 음식들이 연이어 나오고, 
취기가 오르기 시작하자 박동우가 입을 열어 말하였다.
  "두 분께 이렇게 긴급으로 동경에 출장오시라고 전문을 보냈던 것은 
바로 돌아가신 K-2에 관한 용건 때문입니다."
  박동우는 천천히 말을 이어 내려갔다.
  "지난 여름 바로 이맘때쯤이니까 아마도 일년 전쯤이 되겠네요. K-2께서 
해외여행 중에 동경에 들렀습니다."
  일년 전쯤 이맘때라면 김기섭 회장이 죽기 5개월 전의 이야기인 것이다.
  "K-2께서는 동경 지사장인 저를 은밀히 부르시더니 갑자기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 메모용집니다."
  박동우는 들고 있던 작은 봉투 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었다. 그 
종이는 흔한 사무용지였다.
  우리들은 박동우가 내민 종이쪽지 위에 씌어진 글자를 보았다. 이미 
김기섭 회장의 지갑에서 나온 문장을 통해 K-2의 필체에 익숙해져 있는 
나로서는 종이 위에 씌어진 글자가 K-2의 필적임에 틀림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종이 위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전 경성제대 교수 '후지스카''
  우리들이 메모지를 충분히 본 것을 확인한 박동우는 말을 이었다.
  "K-2께서는 느닷없이 이 메모용지 하나를 주시고는 이 사람의 유족들이 
어디에 살고 있는가를 한 달 내로 찾아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K-2의 
지상명령이라 우리는 발칵 뒤집혔는데 솔직히 뜬구름을 잡는 듯한 무모한 
짓이었습니다. 전 경성제대의 교수라면 벌써 60년이나 지난 오래 전의 
일이었으니 생존해 있을 가능성은 전혀 없었고, 설사 유족들이 살아 있다 
해도 이름도 모르고 오직 후지스카란  성만 가지고 노학자의 흔적을 
찾아낸다는 것은 그야말로 김씨라는 성 하나만을 가지고 서울을 뒤지는 
어리석은 짓이었습니다. 그러나 정보 수집을 최우선으로 하는 
종합상사로서 K-2의 엄명을 거스를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동경에 살고 있는 수많은 학자들을 통해 정보를 수집했으며 그 결과 
마침내 후지스카의 유족들이 동경 시내에 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박동우는 우리들에게 술을 권할 뿐 자신은 좀처럼 술을 마시려 하지 
않았다. 차를 타고 돌아가야 했으므로 음주를 삼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변명이었다. 그래서 우리도 그에게는 술을 권하지 않고 있었다.
  박동우는 잠시 끊었던 말을 이었다.
  "우리는 즉시 그 사실을 K-2에게 알렸습니다. 후지스카 교수의 소재지를 
알아냈으니 다음 명령을 기다리겠습니다라고 말입니다."
  "도대체 후지스카란 사람이 무엇하는 사람이었습니까."
  잠자코 찬물을 탄 위스키를 마시던 한기철이 질문을 던졌다.
  "그건 우리도 전혀 알고 있지 못했던 부분이었습니다."
  박동우는 대답하였다.
  "전 경성제대 교수인 후지스카 교수가 도대체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우리로서도 전혀 신상에 관한 정보를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저희들 
지사망이 알아낸 것이라곤 후지스카 교수는 이미 오래 전에 작고하였고, 
그의 아들이 미망인을 모시고 살고 있는데 아들도 이미 환갑을 넘긴 
노인이라는 것뿐이었습니다. 어쨌든 저희들이 후지스카 교수의 소재지를 
알아내었다는 전문을 띄워보내자 그로부터 며칠 뒤 본사로부터 훈령이 
내려왔는데 즉시 입국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저는 명령을 받고 곧 
귀국하였습니다. 입국한 즉시 K-2를 만나 뵈었더니 K-2는 내게 은밀히 
말씀을 내리셨습니다. 후지스카 교수는 우리나라에 있을 때 완당 연구가로 
유명한 학자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완당이라면 잘 아시다시피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서예가이자 학자였던 추사 김정희 선생의 호가 
아니겠습니까. 어쨌든 후지스카는 서울대 전신인 경성제대에 재직하고 
있을 무렵 광범위하게 추사의 대표적인 작품들을 수집하고 있었던 것으로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추사의 대표작인 수십 점의 국보급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었으며 1940년 나이가 들어 경성제대 교수직을 퇴임하게 되자 
그 유물들을 갖고 동경으로 돌아가 은둔생활을 하였던 노학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가 갖고 있던 국보급의 추사 김정희 
선생의 유작들은 제2차 세계대전 때 공습으로 모두 불이 나서 전소되어 
버렸다는 것이었습니다."
  후지스카.
  박동우의 입에서 흘러나온 추사 김정희의 연구가 후지스카. 그제서야 
술에 취한 내 머리 속으로 뭔가 기억되어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소문에 의하면 후지스카 교수가 소장했던 수십 점의 김정희 유물은 
한순간에 잿더미로 변해버렸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안 
것이지만, 공습에 의해 자신의 집이 직격탄을 맞아 불에 타기 시작하자 
후지스카 교수는 불타는 집으로 뛰어들어 목숨을 걸고 대부분의 유작들을 
구해내어 온전히 보관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때 폭격으로 후지스카 
교수는 얼굴에 화상을 입었으며 골절상까지 입어 말년에는 발을 저는 
장애인이 되었다는 소문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은 K-2의 입을 
통해 직접 들은 이야기로 어쨌든 우리가 천신만고 끝에 그 소재지를 
알아낸 후지스카란 인물의 정체가 바로 완당 연구가로 밝혀진 셈이지요."
  박동우의 말을 듣는 동안 내 머리 속으로는 보다 구체화된 역사적 
사실의 내용이 선명하게 떠오르고 있었고 불타오르는 집을 향해 오직 추사 
김정희의 유물을 구하기 위해서 뛰어드는 한 인물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추사에 미쳤던 전설적인 인물 후지스카. 그가 
불타는 집에서 목숨을 걸고 건져온 유물이야말로 바로 김정희 생애 최대의 
걸작품인 '세한도'였던 것이다.
  추사 김정희가 말년에 제주도에서 유배당하고 있을 무렵, 이때 찾아온 
제자 이상적의 인품을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하여 그려준 김정희 최고의 
걸작 세한도. 이 최고의 명작품은 추사에 미쳤던 후지스카의 살신성인에 
의해 간신히 생명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이다.
  박동우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서 K-2는 저에게 다시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후지스카가 
소장하고 있는 추사 김정희의 유물 중에 혹시 가포 임상옥에게 헌사된 
유물이 있는가를 확인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K-2는 만약 
추사 김정희 선생께서 가포 임상옥의 이름으로 헌사한 유작이 있다면 그 
값의 고하 여부를 막론하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작품을 구입하여 
소장하여 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밤이 깊어가자 사람들은 하나씩 둘씩 빠져나가고 술집 안은 차분히 
가라앉고 있었다.
  찬물을 위스키에 섞어 마시는 일본식 주법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한기철은 얼음도 넣지 않고 스트레이트로 위스키를 마시고 있었고, 나는 
속도를 줄이고 있었다. 박동우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K-2의 명령을 받고 동경으로 돌아온 저는 즉시 후지스카 교수의 
후손들에게 연락을 취해 보았습니다. 그때 전 놀라운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습니다. 후지스카 교수의 후손들은 그들이 소장하고 있는 추사 김정희 
선생의 유품에 관한 한 일체의 코벤트는 물론 사사로이 열람하는 일도 
허용할 수 없다고 완강히 거절했습니다. 우리들은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에 후지스카 유족들이 그런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그것을 
조사해 보았습니다. 알아본 결과 후지스카가 소장하고 있던 최고의 걸작품 
중에 '세한도'가 있었는데 이 걸작품을 서예가 손재형씨가 일본으로 건너가 
후지스카의 양심에 호소하고 또한 거액을 들여 사들여 우리나라로 가져온 
뒤 뒤늦게 이를 후회하였던 후지스카가 임종을 앞두고 한 유언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소유한 추사의 유적들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박물관에 기증하면 몰라도 사사로이 팔거나 넘기는 일은 절대로 
없게 하라는 유언을 남겼고 이후부터 후손들은 철저히 이를 지켜나가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도 쉽게는 물러설 수가 없었습니다. 
K-2의 명령을 받은 이상 후지스카 가문의 소장품 중 추사가 임상옥에게 
헌사한 유작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자료확인 정도라도 해야할 의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힘 겨루기 싸움을 하고 있던 중 지난 겨울 
K-2께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게 되었다는 비보를 전해듣게 
되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생각했습니다. K-2께서 돌아가신 이상 이 
프로젝트는 포기해야 하는 것일까. 곰곰이 생각한 끝에 저는 아니다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비록 이 프로젝트가 공적인 일이 아니라 K-2의 
사사로운 명령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유효할 뿐 아니라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성사시킬 책임까지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 가지 루트를 통해서 후지스카 교수의 외아드님이신 
후지스카 세이지씨를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세이지씨는 오랫동안 은행에 
근무하다 정년퇴직을 한 전형적인 은행원으로 아는 상사를 통해 여러 
경로로 우리의 성의를 표시하자 지난 봄이었던가요, 드디어 우리에게 
메시지가 왔습니다. '귀하의 요청을 받고 완당 선생의 유작을 정리하던 중 
완당 선생이 가포에게 헌사하신 '가포시상' 이란 제호가 들어 있는 유품한 
점이 발견되었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후지스카의 유족이 새로이 발견한 김정희의 유작 중 가포 임상옥에게 
헌사함을 나타내 보인 결정적인 증거인 제호 '가포시상'.
  일찍이 자신의 제자 이상적을 위해 그려준 '세한도'에도 이상적의 호인 
'우선'을 빌어와 '우선시상'이란 관지를 사용한 것을 보면 '가포시상'이라 
함은 문자 그대로 가포 임상옥을 위해 그려준 사실을 명백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박동우는 천천히 말을 이어내려 갔다.
  "후지스카 세이지 씨로부터 그런 메시지를 받자 우리는 '만약 추사 
김정희 선생이 가포 임상옥의 이름으로 헌사한 유작이 있다면 그 값의 
고하 여부를 막론하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작품을 구입하여 소장하여 
놓을 것' 이라는 K-2의 엄명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 
세이지 씨에게 그 그림을 한 번이라도 열람해 볼 수 없겠느냐는 전문을 
보냈는데 유족 측의 반응은 한마디로 난색이었습니다. 선친인 후지스카의 
유언이 사사로이 추사의 작품을 공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어서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또다시 아는 루트를 총동원하여 
설득에 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글쎄요, 저희들의 정성에 마침내 마음이 
움직였는지 자신의 집으로 방문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게 된 것입니다. 단, 
허락의 조건으로 절대로 사진 촬영을 할 수 없다, 또한 이를 취재하기 
위해서 신문기자나 방송 관계자들의 동행도 허락되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추사 김정희 선생의 작품을 감정하는 전문가들의 배석도 허락되지 않는다, 
열람시간은 삼십 분에 국한한다는 까다로운 조건이 있었습니다. 이 조건을 
수락하기 전에는 열람할 수 없다는 것이 유족들의 부탁이었기에 사전에 
모두 이를 수락한다는 각서를 쓰고 나서야 마침내 후지스카의 집을 방문할 
수 있는 허락을 받게 된 겁니다."
  운전 때문에 술을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고 있던 박동우가 그간에 
있었던 경과 보고를 대충 마무리졌는지 물 탄 위스키를 한 잔 마시면서 
말을 맺었다.
  "후지스카 씨의 집을 방문키로 허락된 날짜가 바로 내일 토요일 오후 세 
시였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세 시에서 세 시 삼십 분까지만 추사가 
가포 임상옥에게 헌사한 그림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겁니다."
  박동우는 한 잔을 단숨에 비우며 말하였다.
  "저희들이 정 선생님을 이렇게 모신 것은 비록 선생님이 서예가거나 
추사 김정희의 전문가는 아니시지만 이런 분야에 조예가 깊으시고, 또한 
생전에 김 회장님과는 각별한 우정을 맺고 계셨고, 곧 개관될 
'여수기념관'의 자문 역할을 맡고 계신 적임자이시므로 이렇게 모시게 된 
것입니다. 더구나 선생님은 신문기자도 아니고 다만 글을 쓰시는 소설가가 
아니십니까."
  한기철은 이미 자신은 관심 밖이라는 듯 빠른 속도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대충 말을 끝낸 박동우는 집이 멀어 먼저 일어서기로 하고 한기철과 
나는 술집에 계속 남았다. 술값은 미리 박동우가 계산하고 갔으므로 
우리는 남은 술을 깨끗이 비웠다. 한기철은 이미 대취하여 있었다. 그러나 
나는 긴장이 됐는지 좀처럼 취기가 오르지 않고 있었다. 술이 떨어지자 
한기철은 더 마시자고 억지를 부렸지만 그를 달래어 간신히 거리로 
나섰다. 한기철은 비틀거리고 있었고 방향감각을 잃고 있었다. 나는 그를 
부축하고 호텔까지 걸어갔다.
  "딱 한 잔만 더 하십시다, 정 선생."
  이미 한기철과 서너 차례 술을 마신 경험을 통해 그의 '딱 한 
잔만'이라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나는 그를 부축하여 엘리베이터에 탔고 그의 방문을 열어주고 방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내 방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시간은 이미 열 시가 넘어 있었지만 맹숭맹숭한 느낌이었다. 복도에 
있었던 자판기가 문득 떠올랐으므로 동전 몇 개를 들고 자판기에서 맥주 
몇 통을 뽑아들었다. 
  혼자서 TV를 켜고 침대에 누워서 맥주를 캔 째로 벌컥벌컥 들이켜면서 
나는 생각하였다. 
  내일 오후 세 시면 추사 김정희가 임상옥을 위해 그려준 유작을 직접 내 
눈으로 감상하게 된다. 후지스카의 유물. 세계 최고의 완당 연구가이자 
완당의 수집가였던 전설적인 인물 후지스카. 그 후지스카가 소장하고 있는 
미공개의 걸작을 내 눈으로 감상하게 될 것이다.
  그보다도 나는 벌컥벌컥 맥주를 들이켜면서 생각하였다.
  나는 죽은 K-2, 그러니까 김기섭 회장의 날카로운 통찰력에 대해 
찬탄을 금할 수 없었다.
  김 회장은 어떻게 추사 김정희가 가포 임상옥을 위해 그려준 그림을 
후지스카가 소장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데까지 추리력을 발동할 수 
있었던 것일까.
  결과적으로 김 회장의 추리력은 보기 좋게 적중되지 않았는가. 물론 
김기섭은 임상옥의 생애를 추적하는 동안 임상옥과 김정희가 생전에 갚은 
교분을 맺은 사실을 밝혀냈을 것이다. 비록 임상옥이 김정회보다 7년 
연상이었지만 두 사람은 깊은 우정을 맺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임상옥은 
마음속으로 김정희를 사숙하고 있었다. 그 결과 김정희를 통해 석숭 
스님이 내려준 수수께끼의 문자였던 '사'자와 '정' 자의 비의를 밝혀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정희는 임상옥에게 있어 친구이자 스승이었던 것이다. 
또한 생전에 임상옥은 알게 모르게 김정희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은인이고 그러한 은인을 위해 김정희가 그림 한 점을 선물하였으리라는 
상상은 당연한 추리였던 것이었다.
  후지스카.
  당대 최고의 완당 수집가인 전설적인 인물 후지스카가 추사 김정희가 
임상옥에게 그려준 유작을 소장하고 있으리라는 김 회장의 계산은 
그러므로 합당한 추론이었던 것이다.
  후지스카가 완당에 있어 최고의 수집가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1940년까지 경성제대 교수로 있었던 후지스카는 완당에 미쳐있던 완당 
연구가였다. 그는 닥치는 대로 완당의 작품을 수집하고 있었다.
  그가 완당 연구가로서 독보적인 위치로 손꼽히는 것은 바로 추사의 
대표작인 '세한도'를 소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한도는 헌종 l0년인 1844년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에서 귀양살이하고 
있을 무렵, 자신의 제자인 역관 이상적을 위해 그려준 일품이었다.
  이때 김정희의 나이는 59세였는데, 그의 제자 이상적은 두 번이나 
제주도로 건너가 문안을 하였고 역관의 직함으로 수시로 연경을 드나들 
때마다 구했던 귀한 자료들을 김정희에게 전해줄 수 있었다.
  특히 자학에 밝은 계복의 <만학집> 8권과 우경이 편찬한 120권 짜리 
방대한 <황청경세문편>의 자료들은 절해고도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는 
김정희에게는 지극히 고마운 선물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김정희는 제자 이상적을 위해 푸른 청송 세 그루가 서 있는 
외딴집의 겨울풍경을 그렸는데 이를 제하여 '세한도'라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김정희 최고의 걸작 '세한도'가 탄생된 것이다.
  '세한도'의 내용은 사제간의 의리를 잊지 않고 두 번씩이나 연경으로부터 
귀한 책들을 구해다 준 이상적의 인품을 날씨가 추워진 뒤에 제일 늦게 
낙엽지는 소나무와 잣나무의 지조에 비유하여 그에게 답례로 그려준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발문이 작가 자신의 글씨로 적혀 그림 끝에 붙어 
있는데 이 그림에 대해서 사학자 이병도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본시 '세한도'는 <논어>의 종지에 따른 소식의 '삼청도'가 비롯이다. 
추운 겨울에도 변함이 없는 송죽의 상청과 매란의 오한을 받들은 의취다. 
곧 군자는 역경에서도 그 절조를 지킴에 비긴 표백인 것이다. 완당의 
'세한도'는 완당의 작품 '부작난도'에서 화제로 썼던 '오직 하나일 뿐 둘 
이상은 있을 수 없다'의 회심작이다. 천지가 백설로 덮인 납작한 토담집 
안팎에 네 그루의 소나무가 그려진 단출한 꾸임새이나, 고고한 구도와 
노건한 선화와 고졸한 격조가 넘치는 자화상이다. 그림 속에 시가 있고 
도가 스며 정이 넘실거린다. 이는 높깊은 학문과 남다른 견문과 타고 난 
대수가 아니고는 다다르지 못할 절경이다. 물론 소나무는 의표의 상징이요, 
토담집은 적거의 실상이요, 혈창은 고고의 숨통이다. 명문의 완당이라 
'세한도'를 구성하면서 체념을 되새겨 기구한 현실을 자위했을 것은 산산이 
부질없다. 안의 노송은 자기의 표상이니 아름드리 밑그루의 대담한 용사는 
치뻗다가 갈라진 안산한 일지와 좋은 대비가 된다. 그 꿈틀거리는 용사, 
창창한 침엽, 자못 의연한 기상으로 해서 사뭇 안간힘이 시퍼렇다. 모진 
풍설에 시달리면서도 끝내 조절하는 완당의 자존이 도사렸다. 한편 밖에 
나란한 소나무는 그 앉힘부터가 오롯하다. 물론 권세와 이해를 초월한 
문객의 나툼이다. 싫으면 뱉고 달면 삼키는 세파와는 진작에 담을 싼 
꿋꿋한 자세인 것이다. 이 중의 하나가 이상적임에 분명하다....
  이병도의 극찬이 아니더라도 완당의 농축된 내면에서 표출된 필선과 
먹빛의 담백하면서도 고답한 분위기는 문인화가 지향하는 사의의 세계와 
서화일치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는 절품인 것이다.
  '세한도'를 더욱 빛내고 있는 것은 공자의 훈화와 사마천의 기사를 
인용하여 쓴 도합 294자의 발문이다.
  놀랍게도 294자의 발문에는 '지'자가 27자가 나오고 있는데 같게 쓴 
글자가 하나도 없을 정도로 '문자향 서권기'의 표본인 것이다.
  '세한도'를 더욱 빛내고 있는 발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난해(헌종 9년. 1843년)에는 <만학집>과 <대운산방문고>의 두 책을 
부쳐왔고, 올해는 우경의 <황청경세문편>을 부쳐왔다. 이는 모두 세간의 
흔한 책들이 아니라 천만리 밖의 먼 곳에서 사들인 것으로 몇 년을 거쳐 
구한 것이지 졸지에 얻어진 것이 아니다. 또한 세상의 밀물 같은 풍조는 
오직 권세와 이득에 귀속시키기 마련인데, 바다 밖에 귀양온 초라하고 
쓸쓸한 자에게 귀속시키기를 세상의 권세와 이득에 쏠리는 것과 같이 
하다니, 이는 저 태사공(사마천)이 '권세와 이득으로 야합한자는 권세와 
이득이 없어지면 교분이 성글어진다'고 했는데, 자네 역시 세상의 밀물과 
같은 풍조 속의 한 사람으로서 초연히 스스로 특출하여 밀물 같은 풍조와 
권세와 이득이 밖에 있으니 나를 권세와 이득으로써 보지 않는다는 
말이신가. 일찍이 공자는 '날씨가 추운 연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잎의 
시들음이 늦음을 안다'고 말하였다. 사실 소나무와 잣나무는 사철을 통해서 
잎이 시들지 않아 날씨가 추운 이전에도 한 소나무와 잣나무요, 날씨가 
추운 이후에도 같은 소나무와 잣나무인 것이다. 그렇다면 전의 자네야 
지칭할 수 없지만 후의 자네는 성인으로부터 지칭을 받을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선인의 특별한 지칭은 한갓 잎의 시들음이 늦어지는 곧은 
절조와 굳은 무침이 있어서다. 아아. 서한의 인심이 순박하고 후한 시대에 
급암(직간으로 이름높은 선비)과 정당시(천하의 명사와 사귀되 귀천을 
가리지 않았던 인물)와 같은 어진 이도 빈객이 시세와 더불어 성하고 
쇠했지만 하구의 적공이 문에다 방을 붙여 인심을 풍자한 처사는 박절함이 
너무했다. 서글픈 일이다. 완당노인은 쓴다.

  일찍이 적공은 하규지방의 정위가 되었을 때 빈객이 줄을 서다가 
정위에서 물러나자 대문에 참새가 깃을 칠 정도로 한산하였다. 그러다가 
다시 정위가 되어 빈객이 구름같이 모여들자 적공은 대문에다 '참된 
사람은 역경에 처했을 때에 알 수 있다'는 내용의 방문을 써 붙였다.

  한 번 죽고 한 번 살게 됨에 사귄 우정을 알고 한 번 가난하고 한 번 
부자됨에 사귐의 실태를 알며, 한 번 귀하고 한 번 천하게 됨에 사람의 
정이 나타나도다. 이 어찌 슬픈 일이 아니랴.

  방문객이 끊어져 한산한 상태를 가리키는 '문 앞에는 참새 떼가 놀고 새 
잡는 그물이 쳐졌다'는 '문전작라'라는 고사성어는 바로 여기에서 생긴 말. 
추사 김정희는 그러한 방문을 써 붙인 적공을 차라리 비웃으며 자신의 
담담한 심정을 명문 속에 나타내 보였던 것이다.
  스승으로부터 '세한도'를 건네어 받은 이상적은 이듬해 다시 이정응을 
동지사로 하는 연행을 따라 연경에 건너갈 때 '세한도'를 행낭 깊숙이 
지니고 있었다.
  그해 정월, 추사의 사우였던 오찬의 연회에 초대받은 이상적은 연회에 
참가한 l6명의 문신들에게 완당의 근황을 설명하는 한편 행낭에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세한도'를 꺼내어 이들에게 자랑하여 보였다. 명소 추사와 
깊은 교우를 맺고 있던 이들은 이상적이 꺼내 보인 '세한도'를 보자 깊은 
감동에 사로잡혔다.
  이때 모인 사람들은 오찬을 비롯하여 장악진, 조진작, 조동견 등 
16명이었는데 이 자리에서 이상적은 좌객의 제찬을 청하자 여러 사람들이 
문과 시를 제하였던 것이다. 당대 최고의 문사들 16가의 제찬이 
합장됨으로써 '세한도'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으며 마침내 귀국한 이상적은 
다시 제주도를 찾아 완당에게 이를 보여주면서 자랑하였던 것이다.
  그 뒤 1848년 12월, 추사 김정희가 오랜 유배생활을 끝내고 방환하게 
되었으며, 이로부터 '세한도첩'의 성가는 더욱 높아져서 이상적 집안의 
가보로 전해 내려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상적 집안의 가보였던 '세한도'가 그 후 어떤 운명을 지니게 
되었는가는 몹시 흥미롭고 수수께끼와 같은 스토리를 갖고 있다.
  이상적의 집안에서 가보로 전해오던 '세한도'가 우여곡절 끝에 
후지스카의 소장품이 되어 현해탄을 넘어 일본으로 건너간 데는 
드라마틱한사 연이 있다.
  임금으로부터 총애를 받아 역관의 신분이었지만 영구히 '지중추부사'직을 
받았던 이상적은 12번이나 중국을 내왕하면서 당대의 저명한 중국 
문인들과 교유를 맺어 중국에서 시문집을 발간까지 하였던 문인이자 
시인이다.
  역관으로서 언어에 대한 탁월한 기교를 구사하여 섬세하고 화려하며 
때로는 청아하다는 명을 얻은 그는 '거중기몽'이란 작품으로 사대부들 
사이에 명성을 얻었으며 임금 헌종은 그의 시를 특히 좋아하여 그의 
문집을 <은송당집>이라고까지 불렀다.
  그는 1865년 죽었는데 그가 죽자 '세한도'는 그의 제자인 김석준을 새 
주인으로 맞아 옮겨간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로는 '세한도'에 합장된 
16명의 청유들의 제찬 속에 김석준의 추찬이 삽입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김석준은 역시 역관이었고 이상적으로부터 시를 배웠던 당대의 유명한 
시인이자 세도가였다.
  그 당시 문학계는 역관 출신의 시인들인 이상적을 비롯해 이언진, 
정지윤 등이 석권하고 있었는데 김석준의 작품세계 역시 역관으로서의 
체험을 그대로 반영하여 중국의 문인들에게 국내 시인들의 작품을 
소개하는 한편 일본 및 유구에 이르기까지 활동범위를 넓혀 특히 일본의 
당시 풍물을 22수로 노래한 '화국죽지사'는 걸작으로 손꼽히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이상적의 가보인 '세한도'는 그가 죽자 그의 직계 제자이자 
일찍이 추사 김정희도 높이 평가한 바가 있는 세도가였던 김석준에게 
건너간 듯 보이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 확실한 것은 아니다.
  또 다른 소문에 의하면 이상적의 가보 '세한도'는 민규식의 소장품으로 
넘어갔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 역시 추측일 뿐 확실한 것은 아니다.
  어쨌든 이상적 이후에 '세한도' 의 가장 확실한 소장가는 후지스카였다. 
후지스카의 본 이름은 후지스카 지카시로 그는 청년시절부터 추사 
김정희에 미쳐 있던 한학자였다.
  동경제대를 졸업한 그는 1936년 모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게 되는데 
논문의 제목이 '이조에 있어서 청조문화의 이입과 김완당'일 정도로 
김정희에게 심취해 있던 학자였다.
  그는 경성제대 교수를 지냈는데 이 무렵 그는 김정희의 대표작인 
'세한도'를 소장하게 되는 것이다.
  청조의 경학에 밝았던 한학자인 후지스카는 평생을 완당 연구가로서만 
지낼 정도로 김정희에게 미쳐 있었다.
  그의 논문은 그의 아들에 의해서 1970년 <청조문화 동전의 연구>란 
책으로 간행되었는데 후지스카는 경성제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동안 
김정희의 작품들을 닥치는 대로 수집하여 마침내 수십 점을 소장하게 된 
것이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추사 김정희의 대표작인 '세한도'였던 것이다.
  어쨌든 일본으로 건너간 '세한도' 가 어떻게 해서 다시 우리의 곁으로 
돌아오게 되었는가의 사연 역시 미스터리에 속한다.
  '세한도'가 도대체 언제 우리나라고 돌아오게 되었는가 그 연대조차 
불분명하지만 어림짐작으로 보아 해방된 이후인 1946년부터 1947년 사이에 
있었던 일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후지스카가 1948년에 죽었기 때문이며 그 뒤 '세한도'에는 
오세창과 이시영의 추찬이 청서된 것을 보면 해방된 이후부터 
1948년까지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후지스카가 소장하고 있던 '세한도'가 신생 대한민국으로 되돌아오게 된 
데에는 서예가였던 손재형의 공로가 가장 컸다.
  호를 소전으로 하였던 손재형은 어릴 때부터 한학과 서법을 익혔으며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서예'란 말을 창안하였던 당대 제일의 서예가였던 
사람이다. 1940년, 후지스카가 경성제대 교수를 퇴임할 때 '세한도'의 
그림과 완당의 제발만을 복사해서 '김완당수화세한도'의 복제판을 내었을 
때 이를 본 손재형은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는 충격을 느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 이후부터 그는 다른 것은 몰라도 추사 김정희의 대표작 
'세한도'만큼은 우리나라의 국보로 지정되어 국내에 보관되어야 한다는 
집념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마침내 해방이 되어 신생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손재형은 일본으로 
건너가 후지스카를 만나 단독으로 설득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손재형은 전후에 궁핍해진 후지스카에게 거금을 주고 '세한도'를 산 후에 
이를 가져왔다는 소문도 있지만 이는 쉽게 믿어 질 수 있는 추측은 아닐 
것이다. 불타는 집 속으로 뛰어들어 '세한도'를 구해낼 만큼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후지스카의 열정으로 보아 손재형이 건넨 거금이 천문학적인 
금액이었다 할지라도 이미 쉽사리 마음이 움직여질 후지스카가 아닌 
것이다.
  또 다른 소문도 있다.
  애국심에 호소한 손재형의 말에 감명을 받은 후지스카가 한 푼의 돈도 
받지 않고 그냥 넘겨주었다는 것이다. 후지스카의 아들 역시 아버지가 
조선의 국보급인 '세한도' 가 일본의 한 개인소장품으로 있어서야 
되겠느냐며 선뜻 내주었다고 증언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후지스카는 자신의 생명처럼 애지중지하던 '세한도'를 떠나보낸 
후 곧 목숨을 잃었다.
  이때 입은 마음의 상처는 술집에서 박동우의 입을 빌어 들었던, 
후지스카가 후손들에게 남긴 유언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임종을 앞둔 후지스카는 자신이 소유한 추사의 유작들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박물관에 기증하면 몰라도 사사로이 팔아 넘기는 일은 절대로 
없게 하라는 유언을 남겼고 그 이후부터 후손들은 철저히 이를 지켜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침대에 누운 채 혼자서 벌컥벌컥 캔맥주를 마시면서 생각하였다.
  후지스카의 손을 거쳐 우리나라로 되돌아온 추사 김정희 '세한도'는 
1974년 12월 국보 180호로 지정된 후 이근태라는 사람을 거쳐 문화재 
수집가인 손세기 등의 소장으로 알려져 있다.
  어쨌든.
  자판기에서 꺼낸 세 통의 캔맥주는 이미 모두 바닥이 나 있었다.
  '세한도'를 비롯하여 김정희의 유작을 수십 점 소장하고 있던 전설적인 
인물, 후지스카 지카시.
  그의 소장품 중에서 지금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추사 김정희가 
조선 최대의 무역왕 임상옥에게 헌사한 귀중한 작품을 내일 오후 세 시면 
내 눈으로 직접 열람할 수 있게 된다.
  TV 화면에서는 남녀끼리 무슨 내기를 하여 지는 사람은 하나씩 옷을 
벗는 심야 프로그램을 하고 있었다. 일본말에 능숙하지는 않아 대충 
어림짐작으로 보면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쪽에서는 일부러 여자들에게 
불리하도록 만들어 옷을 벗도록 유도하고 있는 듯 보였다. 젊은 여인들이 
일본인 특유의 애교를 부리면서 웃옷을 벗어 젖가슴을 드러내고 치마를 
내려 팬티를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리모컨을 작동시켜 다른 채널로 돌려보았다.
  그곳에서는 온천장 순례라는 여행 프로그램이었는지 역시 젊은 여인들이 
스스럼없이 옷을 벗고 뜨거운 욕조에 몸을 담그는 장면이 적나라하게 
방영되고 있었다.
  남녀의 성을 상품화하는데 전혀 거부감이 없는 섹스의 천국 일본. 
그러나 그런 일본 전통의 풍습은 이제 우리나라로 전파되어 오히려 
일본보다도 더 은밀하고 광범위하게 번져나가고 있는 성문화.
  나는 스위치를 눌러 TV를 끄고는 이불 속으로 몸을 들이밀면서 
생각하였다.
  마침내 내일 오후 세 시면 날카로운 김기섭 회장의 추리력으로 재발견된 
추사 김정희의 새로운 유작을 직접 열람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어떤 
작품일까.
  추사 김정희는 자신의 벗이었던 가포 임상옥을 위해 어떤 그림을 
그려주고 어떤 발문을 써주었던 것일까. 지금까지 한 번도 역사의 수면 
위에 떠오르지 않았던 그 작품은 얼마만큼의 예술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2

  다음날 오후.
  우리는 호텔로 찾아온 박동우와 늦은 점심을 먹고 오후 두 시쯤 
후지스카의 집으로 출발하였다. 그날은 마침 토요일이었고 모든 직장들이 
휴무를 하고 있는 주말의 오후였으므로 거리는 사람들로 흘러 넘치고 
있었다.
  우리들이 찾아가고 있는 곳은 아오야마였다.
  오후가 되자 날씨는 다시 살인적으로 더워지기 시작하였다. 남의 집을 
방문할 때는 선물을 하는 것이 일본의 예법이었으므로 우리는 무슨 선물을 
할까 잠시 망설였다.
  일본에서는 될 수 있는 한 2천 엔이 넘지 않는 선물을 하는 것이 주는 
사람도 그렇고 받는 사람도 부담 없어 한다고 박동우는 말하였다. 그래서 
지하철의 상점에서 파는 화과자를 살까 하다가 대신 꽃을 사기로 하였다.
  2천 엔이 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꽃을 산 후 다시 우리는 아오야마로 
출발하였다.
  아오야마로 가는 지하철의 노선은 긴자선이었다. 차를 타지 않고 
지하철로 가기로 하였는데 박동우는 그렇게 하는 것이 편리하다는 
설명이었다.
  청산일정목. 그곳이 우리가 내려야 할 역의 이름이었다.
  탄환처럼 달려가는 열차가 터널을 지날 때마다 차체는 불규칙적으로 
몸부림치며 흔들리고 있었다. 내려야 할 정거장이 가까워지면 차체에 
매달린 스피커에서는 조는 듯한 목소리로 다음 정거장의 이름을 
되풀이해서 낭독해 주고 있었다. 내려야 할 정거장이 가까워졌으므로 
우리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열차가 멎기를 기다려 지하철을 내렸다.
  약속시간은 아직 삼십 분 정도 남아 있었다.
  박동우는 선물로 산 꽃다발을 들고 앞장서 걷기 시작하였다. 냉방장치가 
잘된 지하철에서 나오자마자 살인적인 무더위가 덤벼들었기 때문에 더위에 
약한 한기철은 연신 흘러내리는 땀을 손수건으로 닦아내고 있었다.
  다소 한적한 교외의 거리였다.
  한때는 구릉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이름에도 산이라는 명칭이 붙어 
있는 것일까
  한적한 도로를 따라서 잠시 한가한 시간을 틈낸 택시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다. 어떤 운전기사는 차 속에서 잠이 들어 있었고 어떤 운전기사는 
도시락을 먹고 있었다.
  가파른 언덕길을 따라 올라가기 전 우리는 갑자기 낯선 풍경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언덕 위에는 묘비들이 빽빽하게 밀집되어 있었다. 끝간데를 모르는 
'묘비의 바다'였다.
  "웬 공동묘지입니까."
  한기철이 놀란 표정으로 박동우에게 물었다.
  "이곳 아오야마에는 옛 황실이나 국가의 유공자 귀족 가문들의 무덤들이 
함께 모여 있습니다. 저 보이는 비석 하나하나는 대부분 잘 알려진 
사람들의 이름들입니다."
  우리는 잠시 넋을 잃고 갖가지의 묘비들로 구릉을 메우고 있는 묘비의 
바다를 쳐다보았다. 죽은 자를 추모하기 위해서 갖은 멋을 부렸으므로 
더욱 음산하고 기괴하게 보였다.
  우리는 서둘러 언덕길을 내려가 묘지를 벗어났다. 박동우는 어느새 
약도가 그려진 종이를 들고 주택가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따금 오토바이를 탄 젊은이들이 소음장치를 제거해서 일부러 뚜뚜따따 
폭발음을 내며 달려가고 있을 뿐 거리는 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주택가는 대낮의 정적 속에 잠겨 있었다. 마침내 찾던 집을 발견했다는 듯 
앞서 걷던 박동우가 어느 집 앞에 서서 우리를 돌아보았다.
  막연히 후지스카의 집은 낡고 전통적인 구옥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우리들의 상상과는 달리 비교적 새로 지은 듯한 일본 특유의 
신흥주택이었다. 차 한 대가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주차장과 좁은 마당에는 
잘 정리된 소나무가 두 그루 웃자라고 있었다. 대문에 걸린 문패를 
확인하고는 박동우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면서 말하였다.
  "이 집이 맞습니다. 이 집이 후지스카 댁입니다."
  나는 대문 옆에 달린 문패를 쳐다보았다.
  '후지스카 세이지’
  약속시간보다 십여 분 가량 빨리 도착한 셈이었다.
  오랜 일본생활에 익숙해져 있는 박동우는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후 
초인종을 눌렀다.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곧 바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자 박동우는 능숙한 일본말로 자신의 신분을 말하였다. 동시에 덜컹 
문이 열렸다.
  잠시 후 전통적인 일본의 화복을 입은 여인 하나가 종종걸음으로 
현관문을 열고 나와서 우리를 맞이하였다. 찾아온 손님을 맞이할 때 
아낙네가 나와서 맞을 뿐 주인은 현관에서 손님을 맞는 것이 전통적인 
일본의 예법이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허리가 땅에 닿을 듯한 일본식 절이었다. 박동우가 들고 온 꽃다발을 
부인에게 내어 밀자 다시 여인은 허리가 땅에 닿을 듯한 절을 하면서 
말하였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마당에는 작은 일본식 정원이 꾸며져 있었다. 한가운데에 놓인 수석을 
중심으로 빗질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는 모래밭과 작은 연못이 만들어져 
있었다. 연못 속에는 잉어들이 헤엄을 치고 있었다.
  누군가 현관의 마루 위에 서 있었다. 역시 전통적인 화복을 입은 
사람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화복을 입은 사내는 얼굴에 미소를 띠면서 말하였다.
  "안녕하십니까."
  박동우는 현관을 들어서자마자 지갑 속에서 자신의 명함을 빼어들고 
인사를 나누었다. 나는 그가 내어준 명함을 보자 그가 바로 문패 위에 
씌어 있는 후지스카의 후손인 '후지스카 세이지'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는 거실로 안내되었다. 일본인의 주택치고는 제법 큰 규모의 
집이었지만 거실은 소파 두 개가 놓여 있기에도 비좁은 공간이었다.
  정면을 향한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멋 부려 가꾼 일본식 정원이 환히 
보이고 있었다.
  "더우시면 부채를 드릴까요."
  창문은 활짝 열려 있었지만 바람 한 점 없는 성하였다. 냉방장치가 안된 
실내였으므로 우리는 쥘부채를 하나씩 건네 받아 펼쳐 들었다.
   후지스카의 부인이 얼음을 넣은 냉차를 한 그릇씩 가지고 왔다. 나는 
거실의 사방을 살펴보았다.
  이미 오래 전, 50년 전에 죽었다고는 하지만 후지스카의 가문은 완당의 
수집가로서 명망을 떨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실 어딘가에는 완당의 
작품 하나쯤은 걸려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과연 내 예상은 적중되었다.
  거실 안쪽에 액자 하나가 걸려 있었다. 그 액자에는 한눈에 추사의 
솜씨임을 확연히 알아볼 수 있는 난초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생전에 추사는 '난을 치는 그림'에 대해서 엄격하였다. 추사는 글을 쓰는 
솜씨가 제법 있고 그림을 그리는 솜씨가 제법이었다 하여 난을 치고 
문인화를 함부로 그리는 경박한 세태에 대해서 엄중히 질책하고 있었다.
  추사는 '열 사람의 눈이 보고 열 사람의 손이 가리키니 이 얼마나 
엄격함인가'라는 공자의 말을 인용함으로써 난을 함부로 그림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는 난을 그림에 있어 그 마음가짐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이로써 한 줄기의 잎, 한 장의 꽃잎이라도 스스로 속이면 얻을 수 없고, 
또 그것으로써 남을 속일 수도 없으니 이로써 난초를 치는 데 손을 대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하 최고의 천재였던 추사도 생전에 난 그림을 몇 점 남기지 
않았던 것이다. 
  과연 거실 한 켠에 내어 걸린 추사의 난 그림은 한눈에 보아도 '한 
줄기의 잎, 한 장의 꽃잎이라도 스스로를 속이면 얻을 수 없는' 엄격함과 
꿋꿋한 선비정신과 인격의 향기로 가득 차 있었다 .
  함부로 뻗어 올라간 난초 잎은 그러나 거침이 없고 활달하였으며 그 잎 
사이로 피어난 난초의 꽃은 그윽한 향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 난초의 위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씌어져 있었다.

  춘농노중
  지난초생
  산심일장
  인정향투 

  나는 속으로 그 문장의 뜻을 새겨보았다. 
  '봄 깊어 이슬 많고 땅 풀려 풀 돋는다. 산 깊고 해는 긴데 자취 
고요하여 향기만 살고 있다.'
  깊은 산 속에 홀로 피어나서 저 혼자 깊은 정적 속에서 짙은 향기를 
뿜고 있는 난을 노래한 추사 김정희의 글씨는 평소 그가 주장하였던 
천지만물의 '기'와 '향'을 담고 있었으므로 난초보다 더 난초다웠으며, 
꽃잎보다 더 꽃잎다웠다.
  부인이 가져온 냉차를 마시는 동안 우리는 별로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얼음을 넣은 냉차의 찬 기운이 더위를 식히자 마침내 입을 열어 
후지스카가 말하였다.
  "찾아오신 용건은 잘 알고 있으니 잠깐만 기다리시면 곧 그림을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평생을 은행원으로 근무하다 정년을 넘어 은퇴한 사람답게 후지스카는 
예의바르고 빈틈이 없었다.
  "그럼."
  후지스카는 일어서서 우리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사라졌다. 우리들은 
주인이 없는 빈 거실에 침묵을 지키며 앉아 있었다. 거실에는 여주인이 
솜씨를 부린 듯한 꽃꽂이 작품 하나가 놓여 있었다. 될 수 있는 대로 집안 
내부를 장식할 때는 인공적인 나무를 쓰지 않고 자연산 나무를 사용하는 
것이 일본의 전통적인 풍습이었으므로 이러저리 휘어지고 구부러진 
소나무의 모습 그대로 기둥을 떠받들고 있었다.
  추사 김정희의 유품들은 이 집 어딘가에 소중하게 소장되어 있을 
것이다. 어쩌면 추사의 유품들을 보관하는 창고가 따로 마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후지스카는 그 창고에서 추사 김정희가 임상옥에게 헌사한 유작 
하나만을 골라 들고 올 것이다.
  기다리는 동안 나는 김정희의 난초 그림을 두 번, 세 번 다시 보고 또 
보았다. '백 번 듣느니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다'는 옛 속담처럼 말로만 
듣던 추사의 활안은 그가 그린 난초화 한 폭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던 
것이다. ,
  그때였다.
  후지스카가 손에 무엇인가를 들고 나타났다. 종이를 가로로 둥글게 만 
두루마리였다. 이른바 주지로 된 화첩이었는데 그것을 본 순간 '세한도'도 
두루마리로 된 화첩임이 기억났다. 후지스카는 어느새 손에 흰 장갑을 
끼고 있었다. 소중한 추사의 작품에 조금이라도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그의 철두철미한 자세를 엿볼 수 있을 정도였다.
  "오랫동안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후지스카는 소파 앞 탁자 위에 그 두루마리를 내려놓았다. 나는 
긴장으로 숨이 가빠오는 것을 느꼈다.
  마침내 추사가 임상옥에게 헌사한, 한 번도 공개되지 않았던 작품을 내 
눈으로 직접 보게 되는 것이다.
  흰 장갑을 낀 후지스카의 손이 두루마리를 감싸고 있는 것을 풀었다.
  그리고 나서 후지스카는 천천히 두루마리를 펼쳐 내리기 시작하였다. 
오른쪽에서부터 왼쪽으로 이어지는 화첩이었으므로 자연글씨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혀질 수밖에 없었는데 우선 나온 글씨는 다음과 같았다.
  '상업지도'
  두루마리를 펼치자 나온 넉 자의 단어는 나를 흥분하게 하였다.
  그 문장의 뜻은 바로 '상업의 길' 이 아닐 것인가. 당대 최고의 거상 
임상옥을 위한 그림이었으므로 그런 화제를 붙인 것이었을까.
  후지스카는 조금 더 두루마리를 펼쳤다.
  그러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차례로 나타났다.
  '가포시상'
  그리고 나서 다음과 같은 김정희의 호가 나오고 있었다.
  '노과'
  노과는 추사 김정희의 백여 가지가 넘는 호 중의 하나로 주로 말년에 
기거하였던 과천 봉은사 시절에 사용하였던 호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세한도'가 제주도에서 유배하였던 그의 나이 59세 때의 작품이었다면 
김정희가 임상옥을 위해 그려준 '상업지도'는 그가 숨을 거두기 직전인 
철종 5년인 1854년 이후, 그의 나이 70세 때의 작품이 아닐 것인가.
  김정희는 제주도에서 9년간 유배생활을 하였다가 풀려난 이후에도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는 파란만장한 말년의 일생을 보냈다. 그러다가 
마침내 70세의 나이 때 과천에 있는 봉은사에 머물면서 말년을 보냈었다.
  젊어서부터 집안에 화암사란 원찰을 세우고 불전을 섭렵하였던 그는 
말년에 수년간은 봉은사에서 기거하면서 당대의 선지식의 대접을 받았던 
것이다.
  이 무렵 김정희의 나이는 70세의 고희를 넘긴 나이로 이 기간에 남긴 
작품들은 거의 전해지지 않고 있다. 오늘날 남아 전하는 유작은 본존불을 
모신 대웅전에 쓴 '대웅전' 이라는 편액과 죽기 3일 전에 쓴 '판전' 이라는 
편액의 글씨뿐이다.
  바로 이 무렵 김정희는 '노과', '천축고선생'과 같은 호를 사용하고 
있었다. '늙은 과일'을 뜻하는 이 익살스런 호는 그러므로 임상옥을 위해 
그려준 이 '상업지도'의 그림이 김정희의 유작들 중 가장 말년에 그려진 
작품임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노과' 라는 호 위에는 자신의 작품임을 인증하는 김정희의 낙관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후지스카가 다시 천천히 두루마리를 풀어 내렸는데 그러자 서서히 한 
폭의 그림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풍경화였다.
  김정희는 생전에 풍경화는 별로 그린 적이 없었다. 비록 입을 열어 
자신이 직접 말을 한 적은 없지만 청고고아의 뜻으로 서화를 그려야 
한다는 평소의 철학으로 보아 풍경화처럼 자연의 풍광을 제재로 한 그림은 
그의 취향에 맞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펼쳐져 나온 그림은 뜻밖에도 풍경화였다.
  멀리 낮은 산자락이 솟아 있고 밑으로는 강물이 흘러가고 있었다. 
앞에는 전원이 펼쳐져 있고 그 전원 한가운데에는 등 굽은 노인 하나가 
밭일을 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지극히 생략되어 있어서 얼핏보면 풍경화가 아니라 몇 가닥의 
선으로 이루어진 추상화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제주도 유배시절에 그린 '세한도'에도 이미 이런 흔적이 보인다.
  생전의 김정희는 이렇게 말하였다.
  "대체로 서도를 전공하는 데에는 12종류의 필법이 있다. 곧 은필, 지필, 
질필, 역필, 순필, 삽필, 전필, 과필.... 이처럼 붓을 쓰는데 살리고 죽이고 
하는 법은 그윽하게 숨기는 데 있는 것이고 빠르고 느린데 있는 것이다."
  자신이 말하였던 12종류의 필법 중에서 말년에 그가 추구하였던 필법은 
삽필이었다. 삽필은 사물의 선을 생략하고 단순화하여 먹을 사용할 때에는 
피 한 방울 아끼듯이 최소한으로 그림을 그림으로써 여백의 미를 
최대한으로 살리는 필법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필법을 사용할 때에는 
자연 부드러운 붓이 사용되지 않고 독필이라고 불리우는 몽당붓이 
사용되기 마련이다. '세한도'에 보이는 네 그루의 나무들과 작은 집의 
모습이 거칠고 투박하게 보이는 것은 바로 모든 털이 다 빠져나간 
몽당붓을 사용하여 억지로 먹을 묻혀 그린 듯한 거친 붓질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거친 붓질 때문에 오히려 모진 풍설 속에서도 끝내 
조절하는 작가의 꿋꿋한 선비정신이 날카롭게 표출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상업지도'에 나오고 있는 강물, 산 전원, 그 전원에서 밭일을 
하고 있는 노인의 모습들은 '세한도'의 그림을 더욱 심화시켜 몽당붓도 
아닌 그냥 나무토막으로 한 방울의 먹도 아껴서 쥐어짜듯 겨우 그려낸 
그림이었다.
  김정희는 생전에 이렇게 말하였다.
  "글자는 먹을 바탕으로 하니 먹은 글자의 피와 살이 되며, 힘을 쓰는 
것은 붓끝에 있으니 붓끝은 글자의 힘줄이 된다."
  탁월한 그의 이론은 '상업지도'에 있어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그의 
말처럼 '피와 살'을 이루는 먹은 삽필에 의해서 간신히 겨우 비칠 뿐이어서 
산도, 강도, 사람도 다만 선으로 나타날 뿐이었다.
  또한 그의 말처럼 근육의 힘줄을 이루는 붓끝 역시 거친 몽당붓의 
독필을 사용함으로써 다만 점으로만 나타나고 있었다.
  김정희 특유의 기도, 향도, 기교도 모두 사라져버리고 남은 것은 
최소한의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 뼈뿐이었다.
  아아.
  무심코 그림을 쳐다보던 나는 가슴이 서늘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곳에서 나는 추사 김정희의 무심을 본 것이다. 젊은 날의 정열도, 끓는 
피와 육체의 정념도, 꼿꼿한 선비정신도, 예술 혼과 기개도 모두 
사라져버린 칠십 노인의 달관한 유골을 본 것이다.
  후지스카는 계속 두루마리를 펼쳐 내려가 모든 그림을 탁자 위에 한눈에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그림 뒤를 이어서 김정희가 임상옥에게 써준 제발의 문장이 적혀 
있었다. 허락된 30분의 짧은 시간 안에 전문가의 식견을 가지지 못한 내가 
그 발문의 내용을 읽어 내리는 것은 무리였었다. 그러나 얼핏 눈에 띄는 
것은 ≪사기≫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한 구절이었다.
  "못이 깊으면 고기가 그곳에서 생겨나고, 산이 깊으면 짐승이 그곳으로 
달려가며, 사람이 부유하면 인의가 부차적으로 따라온다."
  이 말은 ≪사기≫ 중에서도 제129권인 '화식열전'에 나오는 말로 
김정희는 이 말에서부터 '상업지도'를 설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얼핏보아 100자가 넘어 보이는 발문 맨 끝에 다음과 같은 글자가 적혀 
있었다.
  '노과노인서'
  그 문장 위에 추사의 낙관이 찍혀 있었는데 방금 낙관을 한 듯 붉은 
인주의 빛깔이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날씨는 여전히 무더워 모두들 땀을 흘리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부채질을 
하지 않았다. 실내는 깊은 침묵에 빠져 있었다.
  탁자 위에 놓인 추사 김정희가 그린 그림이 뿜어내는 광채가 분위기를 
압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추사의 대표작인 '세한도'를 직접 본 것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상업지도'가 더 깊고 높은 예술적 가치와 격조를 갖고 있는 듯한 느낌을 
모두 받고 있었던 것이다.
  이 그림이야말로 추사가 남긴 작품 중 궁극의 것이었다.
  우리는 곧 후지스카의 집을 떠났다.
  약속시간이었던 삼십 분을 정확히 넘기자 "그럼 이만" 하는 소리와 함께 
후지스카가 탁자 위에 펼쳐 놓았던 그림을 둘둘 말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그림을 본 이상 더 할 말이 남아 있지 않았으므로 잠시 
의례적인 인사의 말들을 나누던 우리는 곧 일어서기로 하였다.
  후지스카와 그의 부인은 우리를 대문까지 전송하여 주었다. 손님이 안 
보이는 곳에 이를 때까지 시선이 마주치면 계속 인사를 나누는 것이 
일본의 독특한 예절이었으므로 우리는 경쟁이나 하듯 계속 허리를 굽혀 
인사를 나누었다.
  마침내 골목길을 돌아서자 그들의 모습은 사라졌고 우리들은 절인사에서 
해방되었다. 주택가를 벗어나 아오야마 묘지가 있는 언덕길을 오르기까지 
우리들은 각자 생각에 잠겨서 깊은 침묵에 빠져 있었다.
  나는 시인 왕유를 떠올렸다.
  당나라 최고의 시인이자 화가였던 왕유와 추사 김정희는 여러 면에서 
흡사한 부분이 많다.
  아홉 살 때부터 시를 썼으며 서와 음곡에도 재주가 뛰어났던 그는 한때 
반란군의 포로가 되는 등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낸 점에서도 김정희와 
비슷한 면이 있는데, 특히 송나라의 소동파는 그를 일러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고 평하였다.
  특히 왕유는 경건한 불교도로 시 속에 불교사상을 압축시킨 선시를 많이 
썼는데, 말년에 봉은사에 머물며 당대의 선지식 대접을 받았던 김정희와 
불교적인 면에서는 더욱 닮아 있는 것이다.
  왕유 역시 말년에는 '망천'에 머물면서 몽당붓을 사용하여 먹을 
핏방울처럼 아끼는 삽필 수법으로 망천도를 그렸다고 알려져 있는데 
오늘날까지 확실한 유작은 전해지지 않아서 대부분 전설 속의 그림으로만 
알려지고 있는 것이다.
  말년에 탁세를 물러나서 망천에서 유유자적하면서 자연을 즐겼던 왕유는 
망천에서 다음과 같은 선시를 지었다.

  물이 끝나는 곳까지 따라가서,
  앉아서 구름이 피어오르는 것을 보리라

  마찬가지로 김정희는 말년에 봉은사에 머물러 앉아서 구름이 피어오르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언덕 위에 오르자 한눈에 펼쳐진 묘비들의 바다가 다시 보였다.
  무덤을 둘러싼 숲과 나무는 우거질 대로 우거져서 음산한 그늘을 이루고 
있었다. 죽은 자를 추모하기 위해서 갖은 멋을 부려 묘비를 깎아 만들었다 
한들 묘비는 묘비인 것. 마치 죽은 자의 얼굴 위에 흰 분칠을 하고 붉고 
푸른 화장을 한 것과 같은 인위적인 아름다움이 차라리 공동묘지의 
분위기를 한결 기괴하게 만들고 있었다.
  어째서.
  나는 언덕길을 내려가면서 흘러내리는 땀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생각하였다.
  이 작품이 후지스카의 소장품이 될 수 있었던 것일까. 이상적의 
집안에서 가보로 전해 내려오던 '세한도' 가 후지스카의 손으로 넘어간 
것도 미스터리라면 임상옥의 집안에서도 틀림없이 가보로 전해 내려왔을 
'상업지도'의 그림이 후지스카의 손으로 넘어간 것도 또 하나의 미스터리인 
것이다.
  "어디 가서 땀을 식힐 겸 찬 빙수라도 먹는 것이 어떨까요."
  앞서 걷던 박동우가 지하철역에 이르자 발길을 멈추며 우리들의 의향을 
물었다. 지하철역을 중심으로 작은 상가가 형성되어 있었다. 우리는 
울긋불긋한 '빙'자가 그려진 깃발이 펄럭이고 있는 제과점으로 들어갔다. 
제과점 안은 냉방장치가 작동되고 있었다. 팔을 넣은 빙수가 오자 
우리들은 서둘러 먹기 시작하였다.
  "어떻습니까."
  어느 정도 더위가 가시기를 기다려서 박동우가 나를 쳐다보면서 물었다.
  "그림을 보신 소감이 어떠한지요."
  "글쎄요."
  나는 대답했다.
  "전문가가 아니어서 정확한 것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제가 보기에는 
엄청난 값어치가 있는 추사의 유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만."
  "아, 그렇습니까."
  박동우가 나의 말에 수긍이 간다는 듯 머리를 끄덕이면서 말을 받았다.
  "그보다도 돌아가신 K-2께서는."
  박동우는 못내 그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후지스카 가문에서 추사가 임상옥에게 헌사한 유작을 소장하고 
있을 것이라는 정확한 추정을 하셨던 것일까요. 저를 불러 만약 후지스카 
가문에 그런 작품이 있는 것이 확인된다면 값의 고하를 막론하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작품을 소장하여 놓으라고 말씀하셨던 회장님이 
아니십니까. 돌아가신 회장님께서는 무슨 신들린 족집게 무당처럼 어떻게 
정확하게 그런 사실을 예측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러게 말이오."
  침묵을 지키던 한기철이 얼음을 와작와작 소리가 날 정도로 깨먹으며 
맞장구를 쳤다.
  "더구나 그 그림의 화제가 '상업지도'라니, 이를테면 '상업의 길'이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 그림의 제목을 본 순간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회장님이 후지스카의 가문을 뒤져서 김정희 선생이 임상옥에게 헌사한 
유작을 찾으려 했던 것은 그 그림이 목적이라기보다도 당대 최고의 
무역왕이었던 임상옥에게 써준 '상업의 정도'를 얻기 위함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 말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팔빙수를 먹던 박동우가 문득 고개를 돌고 한기철을 쳐다보면서 물었다.
  "뭘 말이오."
  "실장님께서는 후지스카가 그 '상업지도'의 그림을 선선히 내놓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로서는 비록 돌아가셨지만 K-2의 명령은 아직 
유효하게 살아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돌아가셨기 때문에 
K-2의 명령은 저희에게 유언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그림을 보고 있는 동안 어째서 K-2께서 그 그림에 
그토록 집착하고 있었던가 그 이유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값의 고하 
여부를 막론하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작품을 구입해 소장하여 놓으라는 
K-2의 목소리가 귓가에 쟁쟁하게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박동우는 한눈에 두 사람을 동시에 바라보며 물었다.
  "후지스카가 그 그림을 우리에게 선선히 내놓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십니까."
  "네버."
  얼음을 와작 깨물면서 한기철이 머리를 흔들면서 대답하였다.
  "절대로, 절대로 내놓지 않을 것이오."
  한기철은 단숨에 결론을 내렸다.
  "바로 박 지사장이 우리에게 말하지 않았소 소장하고 있던 '세한도'를 
서예가 손재형 선생께 건네주고 난 뒤 이를 후회하였던 후지스카가 임종을 
앞두고 유언을 하였다고 말이오. 그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자신이 
소유한 추사의 유작들은 박물관에 기증하면 몰라도 사사로이 팔거나 
남에게 넘기는 일은 절대로 없게 하라는 유언을 남겼고 이후부터 후손들은 
이를 철저하게 지켜 나가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어찌 
'상업지도'를 우리에게 내놓겠습니까. 더구나 방금 전의 행동을 모두 보지 
않았습니까."
  한기철은 와작와작 소리를 내면서 얼음을 깨물며 말을 이었다.
  "정확히 약속시간 삼십 분 동안만 그림을 열람시키지 않았습니까. 
그뿐입니까. 그 동안에도 내내 우리를 감시하고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이 마치 사진을 찍으러 온 신문기자가 아닌가 아니면 추사의 
전문가가 아닌가 내내 경계하는 눈치였던 것을 박 지사장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한기철의 말은 사실이었다.
  깍듯이 예의를 갖추고 있었으면서도 만나고 있는 동안 내내 후지스카는 
경계심을 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박동우는 선선히 수긍하였다. 그리고 나서 말을 이었다.
  "실장님의 말씀이 맞으실 겁니다. 하지만 일찍이 해방된 이후에 
찾아왔던 손재형 선생은 후지스카 지카시를 찾아가 눈물로 호소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듣기에는 정확히 백 일간을 꼬박 찾아가 문안인사를 
하고 감정에 호소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후지스카 지카시가 손재형 
선생에게 전후 궁핍해진 사정 때문에 거액의 돈을 받고 '세한도'를 
넘겼다는 항간의 소문은 사실이 아닐 겁니다. 물론 그냥 공짜로 넘겼을 
리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알려진 것처럼 천문학적인 돈을 받고 흥정을 한 
뒤 그 대가로 '세한도'를 넘겨준 것도 사실이 아닌 것입니다. 만약 
돌아가신 K-2의 명령이 아직도 유효한 것이라면 저는 서예가 손재형 
선생처럼 백 일이 아니라 천 일이라도 찾아가 문안인사를 올리고 무슨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서라도 '상업지도'를 수집하여 오는 가을 개관되는 
회장님을 기념하는 '여수기념관'에 진열시켜 놓을 것입니다. 그 대신 
사전에 정 선생님께 여쭙겠습니다."
  박동우는 나를 쳐다보았다. 그는 정색을 한 얼굴로 내게 질문하였다.
  "선생님께서는 방금 보신 '상업지도'의 그림이 그럴 만큼의 값어치가 
있다고 보십니까. '세한도'를 수집하기 위해 백 일 동안 찾아갔던 손재형 
선생처럼 '상업지도'의 그림도 충분히 그 이상의 값어치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는 내게 결정을 요구하고 있었다.
  나는 난감하였다. 박동우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나를 동경까지 
출장을 오라고 부른 것이다.
  돌아가신 김기섭 회장에게 있어 임상옥은 얼마나 소중한 인물인가. 
김기섭 회장은 과연 평생을 통해 임상옥을 사숙하였던 것일까. 임상옥은 
김정희와 어떤 인연을 맺고 있었던 것일까. 그런 사실을 내게 묻고 최후의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 나를 필요로 한 것이다.
  나는 대답 대신 담배를 피워 물었다. 나는 담배 한 대를 모두 피울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심사숙고하였다. 그리고 나서 입을 열어 
대답하였다.
  "전 전문가가 아니어서 정확히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따라서 방금 
우리가 보고 온 '상업지도'의 그림이 엄청난 예술적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는 객관적으로 판단을 해드릴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돌아가신 김기섭 회장님에게 있어서 이 그림은 
반드시 수집해야 할 물건 중의 하나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는 이미 
생전에 임상옥에 관한 유품은 무엇이든 수집하여 놓았을 정도였습니다. 
임상옥의 저서는 물론 전설 속에 나오는 깨어진 잔 '계영배'도 수집해 
놓았습니다. 물론 그 잔은 골동품적 가치로 보면 만원도 되지 않는 고물에 
불과하지만 김기섭 회장님에게는 천금을 준다 해도 물리지 않을 
진품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 수 있다면 김기섭 회장님의 밀명대로 
그 그림을 수집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됩니다. 오는 가을 개관되는 
'여수기념관'에 반드시 그 그림이 함께 전시된다면 돌아가신 김기섭 
회장님의 유훈을 받들어 모시는 뜻깊은 일이 될 것임을 확신합니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맺었다.
  나는 내가 올바른 결정을 내렸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하찮은 고물이었을지 몰라도 김기섭 회장에게 있어서 
깨어진 '계영배'는 천금 이상의 값어치를 가진 보물이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추사 김정희가 임상옥을 그려준 '상업지도'의 그림은 
김기섭에게 있어서 생명과도 맞바꿀 만큼 귀중한 진보인 것이다.
  "아, 그렇습니까."
  박동우가 선선히 수긍하였다.
  박동우는 한기철을 보며 물었다.
  "여수기념관의 개관 날짜가 언제로 잡혀 있습니까."
  "11월 3일이오. 바로 회장님의 생일이니까요."
  "좋습니다."
  박동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혼잣말로 말하였다.
  "그럼 이 프로젝트의 데드라인이 바로 11월 3일인 셈이군요. 좋습니다. 
한번 승부를 걸어 보겠습니다. 그 날까지 후지스카의 손에서 '상업지도'의 
그림을 건네 받아 반드시 기념관의 벽 위에 전시될 수 있도록 혼신의 힘을 
다할 것입니다. 그럼 이만 나가실까요."
  우리는 제과점을 빠져나와 지하철로 내려가는 계단을 밟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누구도 박동우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후지스카가 그림을 우리에게 선선히 내어 놓을까요라는 질문에 선뜻 
'네버'란 절대 부정의 단어를 사용하였던 한기철의 대답처럼 기념관의 개관 
일자까지 '상업지도'를 후지스카의 가문으로부터 인수하여 전시해 놓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박동우의 말은 어차피 불가능할 것이라고 
마음속으로 판단하고 있었으므로.
  우리는 묵묵히 지하도 계단을 걸어갔고 묵묵히 지하철이 도착하기를 
기다려 묵묵히 지하철을 탔다.
  그러나 그 무더웠던 한여름, 짧게 머물었던 동경에서 느낀 그 대수롭지 
않았던 부정적인 예상은 그 해 가을 보기 좋게 빗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절대 불가능할 것이라고 판단되었던 추사 김정희의 그 그림이 마침내 
여수기념관의 정면 홀에 전시될 수 있었던 것이다. 세한도의 예술적 
가치를 능가하는 추사 김정희의 최후의 유작 '상업지도'의 발굴은 실로 
센세이셔널한 화제를 집중시킬 수 있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마치 피를 쥐어 짜내 그린 듯한 혈서와 
같은 추사의 마지막 작품은 매스컴의 화려한 조명을 받기에 충분한 
명작이었으며 그보다도 조선 최대의 무역왕이었던 임상옥을 위해 써준 
'상업지도'의 발문 내용이야말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던지는 궁극의 
화살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봉은사에 머물러 있으면서 말년을 보냈던 김정희를 찾아가 
'상업지도'의 그림을 받을 때까지 임상옥은 어떻게 남은 여생을 살았던 
것일까.
  애써 지은 집을 부숴버리고, 사랑하는 여인 송이를 멀리 떠나 보낸 후, 
스스로 물러나 '채소를 심는 사람'으로 자연에 심취하고 시를 짓는 일에만 
몰두하였던 임상옥은 어떻게 남은 생애를 마쳤던 것일까.

      제2장 혈세

1

  신축년 헌종7년인 1841년 봄.
  각종 유기와 철기들이 가득한 지게를 진 유기장수 한 사람이 임상옥의 
상가를 찾아들었다. 그는 대문을 지키는 하인들 앞에 지게를 내려놓고 
각종 놋그릇을 흥정하기 시작했다.
  "이 사람아."
  나이든 하인이 한심한 얼굴로 유기장수를 쳐다보며 말하였다.
  "이 집이 어느 집안이라고 놋그릇을 흥정하려 한단 말이신가. 이 집이 
바로 임부자댁 아니신가. 없는 물건이 없는 임부자댁에서 뭣 땜에 
놋그릇이 필요하단 말이신가. 딴 데 가서 알아보시게나."
  하인의 말을 듣자 유기장수는 차라리 안심이 된 얼굴로 물어 말하였다.
  "그러하면 이 집이 임부자댁이 맞습니까. 천하의 기보, 명보, 명기 등 
없는 것이 없는 '부엉이 창고'가 있는 임부자댁이 맞습니까."
  "이제야 제대로 알아보았군."
  나이든 하인이 의기양양하게 말을 하자 유기장수는 주섬주섬 풀어놓았던 
그릇들을 챙기면서 혼잣말을 했다.
  "공자 앞에서 문자 쓴 꼴이로군. 하오나."
  유기장수는 나이든 하인에게 다가서며 말하였다.
  "천하의 임부자 '부엉이 창고'라고 하여도 없는 물건은 있는 법, '부엉이 
창고'에 없는 물건 하나 사지 않으실라우."
  유기장수가 넌지시 말을 건네자 하인은 호통을 치며 말하였다.
  "옛끼, 자네는 소문도 못 들었는가. 의주목사의 옥로가 없어져 
야단법석이 났을 때 이방이 달려와 임대인에게 살려 달라고 빌자 '부엉이 
창고'에서 수백 개의 옥로를 꺼내어 없어진 옥로와 똑같은 물건을 골라 
주었다는 소문도 듣지 못하였는가."
  "좋소이다, 노인장. 내가 지금 하늘 아래 둘도 없는 물건 하나를 꺼내 
보일 터이니 이 물건을 임대인한테 보이면 당장이라도 살 것이오. 내기를 
걸어도 좋소이다. 만약 임 대인이 이 물건을 사겠다 하시면 그 이문의 
반을 노인장에게 드리겠고, 사지 않겠다 하면 그대로 돌아가겠소이다."
  밑져봐야 본전이라고 하인은 생각하였다.
  유기장수의 말대로 그 물건을 임 대인어른에게 보여서 만약 사겠다 하면 
그 이문의 반을 공짜로 먹는 셈이고, 만약 보여 주고 사지 않겠다 하면 
그냥 돌려주면 그만인 땅 짚고 헤엄치기의 흥정이었기 때문이다.
  "그 물건이 무엇인데."
  하인이 흥미를 보이면서 다가왔다.
  "이 물건은 하늘 아래 둘도 없는 보물 중의 보물이오. 만약 
노인장께오서 임대인에게 보여드리면 당장에 이 물건을 사실 것이오. 안 
그러면 내가 손에 장을 지지겠소이다."
  "그 물건이 무엇이냐고 내가 묻지 않더냐. 물건을 봐야 싸움이고 
흥정이고 할 것이 아니겠느냐. 옛말에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라는 
말이 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느냐."
  "좋소이다."
  유기장수는 품속에서 무엇인기를 꺼내었다. 그것은 순간 햇빛을 받아 
반짝 하고 빛이 났다. 그러나 유기장수는 그 물건을 손아귀 속에 쥐고 
있을 뿐 쉽사리 꺼내 놓으려 하지 않았다.
  "무엇이냐, 그 물건이."
  "노인장."
  유기장수는 정색을 한 얼굴로 하인의 얼굴을 쳐다보며 말하였다.
  "물건을 보여드리기 전에 분명히 약속하시오. 이 물건을 반드시 
임대인에게 보여드리고 웬 유기장수 하나가 이 물건을 팔러왔다고 말을 
전할 것을 약속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보여드리지 못하겠소. 내가 분명히 
말씀드릴 것은 임대인께오서는 이 물건을 반드시 사실 것이 틀림이 없다는 
것이오."
  "...약속하겠다."
  그 물건을 보고 싶은 호기심에 노인은 땅에 침을 뱉으며 말하였다.
  "천지신명에 맹세하겠소이까."
  "맹세하구 말구. 암, 맹세하구 말구. 내가 만약에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성을 갈겠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난 네 아들이다."
  "좋소이다."
  유기장수는 손에 들었던 물건을 하인에게 내밀었다. 하인은 재빠르게 그 
물건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자세히 그 물건을 바라보았다.
  그 물건은 햇빛을 받고 반짝이고 있었다. 하인은 그 물건이 예사 물건이 
아님을 빠르게 알아차렸다.
  하인은 순간 당황하였다. 그의 손에 들린 물건은 다름 아닌 비녀였기 
때문이다.
  "아니."
  하인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건 비녀가 아니더냐."
  "그렇소이다. 그 물건은 비녀올시다."
  "그러하면 아녀자들이나 쓰는 비녀를 대인 어른께 사시라고 보여 주라는 
말이더냐."
  "하오나 이 비녀는 예사 비녀가 아니올시다."
  유기장수의 말은 사실이었다. 한눈에 보아도 그 비녀는 예사 비녀가 
아니었다. 보통 아녀자들이 사용하는 비녀는 나무나 뿔, 뼈와 같은 단순한 
재료로 만든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그 비녀는 은과 산호로 만든 
고급이었다. 또한 부귀와 장수, 다산을 기원하는 아름다운 잠두도 갖고 
있었다. 이렇게 화려한 수식이 있는 비녀는 반드시 양반의 부녀자들만 
사용할 수 있는 고급 노리개였던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비녀가 아무리 고급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아녀자들의 노리개일 뿐, 임대인에게 보여드릴 만한 물건은 되지 못하였던 
것이다.
  "옛끼 놈."
  하인은 화가 나서 버럭 고함을 질렀다.
  "아녀자들이 쓰는 비녀를 대인 어른께 흥정하려 하다니. 네 놈이 진정 
나를 놀리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노인장."
  유기장수는 침착하게 말하였다.
  "반드시 대인어른께오서는 이 비녀를 사실 것이나이다. 천만금, 
만만금이라 하여도 이 비녀를 본 순간 사실 것이나이다."
  유기장수의 얼굴은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하인도 하인대로 마음에 
걸리는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자신의 성을 갈 뿐 
아니라 유기장수의 아들이라고까지 말하지 않았던가.
  "좋다."
  하인은 화를 내며 말하였다.
  "일단 약속을 한 이상 이 물건을 대인 어른께 보여드리고 오겠다. 
만약에 대인어른께오서 화라도 내시거들랑 네 놈은 당장에 저 빗자루로 
불방망이를 맞을 것이다."
  하인은 마당을 쓸던 빗자루를 가리키며 말하였다.
  "네 놈은 꼼짝말고 이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거라."
  하인은 한 손에 비녀를 들고 나는 듯이 집안으로 들어갔다.
  임상옥은 몇 년 전부터 집안 한구석에 작은 연못을 파고 암자 하나를 
지어서 그곳에서 따로 별거하고 있었다. 집안의 장사는 모두 박종일이 
맡아 하고 있을 뿐 임상옥은 장사에서 물러나 후 원 별채에서 채소나 
가꾸면서 소일하고 있었다.
  하인은 후원 별채로 뛰어갔다.
  마침 임상옥은 정원 한 켠에 마련해 놓은 채마밭을 파헤치고 있었다.
  "나으리."
  단숨에 뛰어왔으므로 숨을 헐떡이며 하인이 말하였다.
  "...무슨 일이냐."
  나이든 하인이 헐레벌떡 뛰어왔으므로 임상옥은 하던 일을 멈추고 물어 
말하였다.
  "...나으리."
  "...무슨 일이냐고 내가 묻지 않더냐."
  "나으리. 웬, 웬 유기장수 하나가 찾아왔는뎁쇼. 찾아와서는 나으리께 
무슨 물, 물건 하나를 팔러왔다고 말하였는뎁쇼. 천, 천만금 만만금이라 
하여도 대인어른께오서는 반드시 사실 것이라고 말하였는뎁쇼."
  "도대체 무슨 소리냐. 난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구나. 유기장수가 
찾아와 나에게 놋그릇을 팔려 하였다는 말이더냐."
  "아, 아닙니다요, 나으리."
  하인은 가쁜 숨을 가누면서 말을 더듬었다.
  "그게 아닙니다요, 나으리. 유기장수가 꺼내 보인 것은 놋그릇이 
아니옵고 다른 물건이옵는데, 유기장수의 말인즉은 나으리께 오서는 
반드시 이 물건을 사실 게 틀림이 없다고 하였나이다."
  "그 물건이 무엇이냐."
  임상옥은 무슨 물건인가를 등뒤에 감추고 있는 하인에게 물어 말하였다. 
그러자 하인은 마음에 걸리는 구석이 있었으므로 더듬거리며 말하였다.
  "하오나 나으리, 유기장수가 가져온 물, 물건은 아녀자들이나 사용하는 
물건이옵고, 나으리께오서는 사용하시지 못할 물건이나이다."
  "그 물건이 무엇이냐고 내가 묻지 않더냐."
  임상옥이 채근하자 그제서야 하인은 손에 들었던 비녀를 임상옥에게 두 
손으로 내밀었다. 임상옥은 그 비녀를 받아들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아니, 이건 비녀가 아니더냐."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임상옥은 비녀를 살피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어느 순간, 임상옥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임상옥의 손에 들린 
비녀가 눈에 휠 정도로 가볍게 흔들리고 있음을 하인은 눈치채었다.
  실로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이봐라. 그 유기장수는 어디 있느냐."
  임상옥이 묻자 하인은 대답하였다.
  "대, 대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나이다."
  "가서 그 유기장수를 이곳으로 데리고 오너라."
  임상옥이 명령하였다.
  "하오면 나으리."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하인이 물어 말하였다.
  "그 비, 비녀를 사, 사시겠다는 말씀이시나이까."
  "그 비녀를 사겠다고 전하고 그 유기장수를 데리고 이리로 오너라."
  "...분부대로 하겠나이다, 나으리."
  하인은 허리를 굽혀 절을 하고 다시 대문까지 달려가기 시작하였다. 
도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임대인에게 보여드리면 천만금이건 
만만금이건 반드시 비녀를 살 것이라는 그 유기장수의 말도 알 수 없는 
것이었고, 또한 그 비녀를 보자 처음에는 역정이라도 낼 듯한 
얼굴이었으나 갑자기 어느 순간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당장에 유기장수를 
데려오라는 임대인의 명령 또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유기장수는 시킨 대로 대문 앞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찌되었습니까, 노인장."
  "자네를 데리고 오랍신다."
   "그러하면."
  과연 그럼 그렇지, 히는 표정으로 유기장수는 몸을 일으키며 말하였다.
  "그 비녀를 사시겠단 말씀이시나이까."
  "여부가 있겠느냐. 유기 지게는 이곳에 맡겨두고 몸만 함께 
들어가자꾸나."
  하인은 유기장수를 데리고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이렇게 된 이상 
하인에게 있어 유기장수는 천덕꾸러기가 아니라 보물단지였던 것이었다.
  상가를 가로질러 후원의 별채로 가는 동안 하인은 마음이 급해져서 새삼 
다짐하였다.
  "...약, 약속한 것을 설마 잊지는 않았겠지. 내가 약속을 지켰으니 자, 
자네 또한 나하고 맺은 약속, 이를테면 그 비녀가 팔리면 이문의 반을 
내게 넘겨주겠다는 약속은 잊지 않았겠지."
  "...여부가 있겠습니까. 한 입으로 어찌 두말을 하겠나이까."
  임상옥은 담배를 피우면서 유기장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으리."
  허리를 굽혀 절을 하면서 하인이 말하였다.
  "유기장를 함께 대령하였나이다."
  그러자 임상옥이 유기장수를 쳐다보며 물어 말하였다.
  "네가 내게 비녀를 팔러 왔던 그 유기장수에 틀림이 없느냐."
  "틀림이 없나이다."
  유기장수는 분명하게 대답하였다.
  "내가 그 비녀를 사겠다. 그러하면 값은 얼마면 되겠느냐."
  그러자 유기장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하였다.
  "...나으리, 옛말에 이르기를 공양미는 삼백 석이라 하였나이다. 하오니 
삼백 석 값은 내셔야 할 것이 아니겠나이까."
  순간 옆에서 듣고 있던 하인은 놀라서 입이 벌어졌다. 비녀 하나에 
공양미 삼백 석의 값이라니. 그보다도 '값은 얼마면 되겠느냐'는 질문에 
느닷없이 '공양미 삼백 석'의 값이라니. 이 또한 무슨 수수께끼의 말대꾸인 
것인가
  "...공양미 삼백 석이라고 하였는가. 그 비녀의 값이."
  "그렇사옵니다, 나으리."
  "사겠네. 그 값을 치르고 내가 그 비녀를 사겠네."
  임상옥은 단숨에 대답하였다.
  더욱 놀란 것은 옆에서 지켜보던 하인이었다. 값을 흥정하는데 심청이가 
인당수에 빠져죽는 대가였던 공양미 삼백 석의 값이 오가는 일도 
해괴하거니와 그보다도 그 비녀 한 벌을 비싼 거금을 주고 당장 사겠다는 
임대인의 결정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하겠는가 당장 여기에서 어음을 끊어줄까."
  "나으리."
  유기장수가 입을 열어 말을 받았다.
  "저희 같은 봇짐장수들에게는 어음은 유통시키기도 어려우니 차라리 
현금을 주셨으면 하나이다."
  "이 사람아 천오백 냥의 현금이 어찌 당장에 있을 수 있겠는가."
  "하오면, 나으리."
  유기장수는 침착하게 대답하였다.
  "지금 당장에 주지 않으셔도 되나이다. 해질녘이 지나 어둠이 내리면 
읍내 시장거리에 도기를 파는 와기전에서 나으리를 기다리고 있겠나이다. 
그 전방으로 찾아오시면 되나이다. 그 곳에서 값을 지불해 주시면 
되겠나이다."
  "가겠네."
  임상옥은 선선히 대답하였다.
  "시장거리의 와기전으로 자네를 찾으러 가겠네."
  땅거미가 내린 후 저녁에 시장거리에 있는 와기전에서 따로 만나 
비녀값을 치르기로 약속한 뒤 임상옥은 유기장수를 떠나보내었다.
  그의 손에는 비녀가 들려 있었다.
  조선 제일의 거부인 임상옥이 값을 치르지 않고 비녀만을 떼어먹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유기장수가 그대로 돌아간 때문이다.
  유기장수가 돌아가자 임상옥은 마루 위에 올라앉아 물끄러미 손에 들린 
비녀를 바라보았다.
  틀림없는 그 비녀였다.
  매죽잠.
  은과 산호로 만들어진 고급 비녀. 부귀와 장수와 다산을 기원하는 
매화와 대나무의 꽃잎이 새겨진 잠두를 갖고 있는 고급 노리개.
  그 비녀는 매죽잠에 틀림없었다. 임상옥은 그 매죽잠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곽산군수로 제수되어 부임한 지 얼마 안되었을 때 임상옥은 눈에서 
비늘이 떨어질 정도의 미인이었던 송이를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송이의 얼굴이 웬지 낯이 설지 않고 수십 차례 만난 것처럼 친숙하게 
느껴졌던 임상옥은 그 연유를 밝히기 위해서 송이의 양어미였던 산홍을 
만나기 위해서 주막집으로 찾아가지 않았던가. 바로 그 주막집에서 주모로 
있던 산홍에게서 그 매죽잠을 처음 보았다.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송이의 생모로부터 선물 받은 물건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머리를 풀어 보여준 물건이 바로 매죽잠이었던 것이다.
  이 매죽잠이 송이의 양모 산홍의 비녀가 분명하다면 산홍은 유기장수를 
통해 남의 눈을 피해 은밀히 자신을 부르고 있음인 것이다.
  일찍이 임상옥은 송이와 혼례식을 올리기 전에 따로 산홍을 불러서 
매죽잠을 사겠다고 이른 후 그 값을 얼마만큼 쳐주었으면 좋겠느냐고 
물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산홍은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듯 말을 했었다.
  "나으리, 옛말에 이르기를 공양미는 삼백 석이라 하였나이다. 심청이도 
공양미 삼백 석에 몸이 팔려가지 않았나이까. 내 딸 송이도 나으리에 몸이 
팔렸사오니 공양미 삼백 석의 값은 내셔야 하지 않겠나이까."
  그때 임상옥은 그 비녀에 얽힌 비밀을 일체 송이에게 말하여 주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그 비녀를 사주었던 것이다.
  그 비녀가 바로 이 매죽잠이었던 것이다.
  유기장수에게 임상옥이 '값은 얼마면 되겠느냐'하고 물었을 때 
유기장수가 조금도 망설이지 아니하고 '나으리, 옛말에 이르기를 공양미는 
삼백 석이라고 하였나이다. 하오니 삼백 석 값을 내셔야 할 것이 
아니겠나이까'라고 대답하였던 것은 바로 산홍이가 미리 유기장수에게 
임대인을 만났을 때 비녀값을 물으면 이리저리 대답하라고 귀띔해 주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유기장수에게 미리 귀띔한 '공양미 삼백 석'의 
비녀값은 그러므로 당사자 둘이서만 알 수 있도록 꾸민 일종의 암호였다.
  한 번 보는 것만으로는 혹시 임상옥의 기억에 떠오르지 않을지 몰라 
산홍은 '공양미 삼백 석'이라고 암호를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임상옥은 비녀를 보면서 생각하였다.
  송이의 양어미 산홍이 남의 눈을 펴해서 나를 만나기 위해 비상수단을 
강구한 것이다. 유기장수를 통해 은밀히 만나자는 전령을 보내온 것이다.
  그러므로 유기장수가 지정하였던 시장거리의 와기전에서는 바로 
산홍이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임상옥은 가슴이 뛰었다.
  과연 산홍이가 자신을 만나기 위해서 은밀하게 전갈을 보내온 것인가 
아니다. 그럴 리가 없는 것이다. 산홍이가 무엇 때문에 남의 눈을 피해 
자신을 만나려 할 것인가. 산홍이가 매죽잠의 비녀를 통해 자신을 은밀히 
만나자고 연락을 보내온 것은 바로 송이가 남의 눈을 피해 자신을 만나기 
위해서 그런 방법을 취한 것이다.
  산홍을 움직인 사람은 바로 송이인 것이다.
  송이가 임상옥에게 만나자는 연락을 보내온 것이다.
  임상옥은 가슴이 뛰고 얼굴이 붉어졌다.
  송이.
  송이를 한시라도 잊은 적이 있었던가 모질게 정을 끊고 떠나 온 그 해 
가을, 임상옥은 은밀히 사람을 보내어 송이의 집을 염탐하고 돌아오라고 
명령을 내렸었다. 돌아온 사람이 이미 오래 전에 송이는 그 집을 떠나 
어디론가 사라졌고 행방조차 알 수 없다고 한 말에 얼마나 슬퍼하고 
가슴이 무너져 내렸던가 이별을 아쉬워하고 이별을 후회하였던, 그의 
상사는 송이가 어디론가 사라져 행방을 알 수 없다는 말에 하늘이 
무너지는 듯하였다.
  이제 다시는 이승에서 만날 수는 없으리라 체념하고 있었는데 바로 그 
송이가 아, 아 바로 그 송이가 만나자는 전갈을 보내온 것이다.
  실로 몇 년 만인가.
  임상옥은 비녀를 바라보면서 송이와 헤어진 햇수를 헤아려 보았다.
  송이와 헤어진 것이 정유년 봄이었으니 어느덧 4년의 세월이 흐른 
것이다. 헤어질 때 송이의 나이가 스물다섯이었으니 이제는 서른이 
다되었을 것이다. 그 동안 송이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송이와 헤어진 후 임상옥은 송이의 말처럼 병환으로 몸져 누웠었다. 
하루하루가 허망하여 상심에 젖어 지냈었다. 송이가 그리워서 밤마다 잠을 
못 이루고 뒤척이며 밤을 새웠다. 보고 싶어 보고 싶어, 그리워서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살아온 지난 세월이었다.
  어느새 임상옥의 나이는 환갑, 진갑을 넘긴 예순셋의 노인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보고 싶고 그리워하였던 송이로부터 실로 수년만에 만나자는 
기별이 온 것이다.
  어떻게 되었을까. 지난 4년 간 송이는 어떻게 변하였을까.
  어둑어둑 땅거미가 내리고 어두워질 때까지 임상옥은 도무지 마음을 
안정시킬 수가 없었다. 마침내 어둠이 내리자 임상옥은 삿갓을 쓰고 
거리로 나섰다.

2

  의주는 예로부터 상업이 성하였던 성읍이었으므로 시장거리는 무척 
번창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임상옥은 시장거리에서 점원 생활을 하여 
읍내의 시장거리는 제 손바닥 들여다보듯 환히 알고 있었다.
  시장거리는 어둠이 내려 철시한 점포들도 많았으나 그래도 오가는 
사람들로 혼잡하였다. 어린 소년시절 때부터 몸담았던 시장거리는 언제나 
그러하듯이 활기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인근 중국과 무역 거래를 하면서 중국의 물건들을 주로 취급하는 
만상점에서부터 비단을 짜는 조하방, 염색을 해주는 염방, 표백을 맡아하는 
표전, 나물과 채소를 파는 소전, 철기와 유기들을 만드는 대장간인 철유전, 
가구의 칠을 맡아주고 있는 칠전, 가죽을 도맡아하고 있는 피전, 목기를 
직접 만들어 파는 마전, 짚신을 엮어 만들어 파는 마리전, 약초를 팔고 
간단한 진맥을 짚어주는 의원까지 겸하는 약전, 옷을 만들어 파는 마전, 
고리와 대나무 제품을 만들어 파는 양전, 책상을 만들어 파는 궤전, 
찢어지거나 해진 옷을 수선해 주는 침방, 간단히 국밥 같은 음식과 술까지 
곁들여 팔고 있는 육전 등 시장거리는 없는 것이 없는 상점들로 가득 차 
있었고 각지에서 모여든 상인들로 화류항을 이루고 있었다.
  "여보시오."
  육전 앞에서 지나가는 행인들을 향해 유객을 하고 있던 술청 어멈이 
삿갓을 쓰고 가는 임상옥을 향해 소리쳐 말하였다. 
  "어딜 그리 바삐 가시요 삿갓 쓴 양반 나으리 출출한데 목이나 축이고 
가시오."
  임상옥은 곁눈도 주지 않고 계속 시장거리를 걸어 내려갔다. 유기장수와 
만나기로 한 와기전이 어디에 있는가를 주의깊게 살피면서.
  와기전이라면 진흙을 구워서 만든 토기들을 파는 상점이었다. 유약을 
쓰지 않는 맨그릇이었으므로 일반 서민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일상용품이 있는 곳이었다.
시장거리 후미진 곳에 와기전이 있었다. 해가 져서 이미 파장이 
되었으므로 전방의 문은 닫혀 있었다.
  다시 한번 와기전임을 확인한 임상옥은 소리 높여 말하였다.
  "이리 오너라."
  그러나 전방 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임상옥은 
가게의 문을 와랑와랑 소리가 나도록 두들겨 보았다. 그러자 안에서 
누군가 나오는 기색이 있었다.
  "뉘시오니이까."
  조심스레 바깥을 살피는 얼굴 하나가 어둠 속에 떠오르고 있었다. 잔뜩 
수염을 기른 중늙은이였다. 아마도 토기를 굽는 토기장이인 모양이었다.
  "물건 값을 치르러 왔네."
  임상옥은 소리를 낮춰 말하였다. 그러자 토기장은 머리를 흔들며 
말하였다.
  "토기를 사러 오셨다면 날이 밝은 내일에 찾아오시옵소서. 전방 문은 
닫았나이다."
  "난 토기를 사러 온 것이 아닐세."
  황급히 임상옥이 말하였다.
  "그럼 어떻게 오셨나이까."
  "나는 비녀값을 치르러 왔네."
이미 임상옥은 유기장수를 통해 비녀를 사라는 산홍의 전갈을 받았을 
때부터 뭔가 이 만남에는 남의 눈을 피해야 하는 절박한 사연이 숨어 
있음을 간파하고 있었다. 임상옥이 그 누구도 대동하지 않고 단신으로 
이렇게 찾아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비녀값을 치르러 오셨다니요."
  토기장은 능청스럽게 말하였다.
  "우리 집은 비녀를 파는 상점이 아니라 토기를 파는 와기전인뎁쇼."
  "이보시게."
  다시 문을 닫으려는 노인을 향해 임상옥은 품속에서 비녀를 꺼내 
보이면서 다급하게 말을 하였다.
  "바로 이 비녀값을 치르러 찾아왔다는 말일세."
  그러자 노인은 손을 내밀어 보이면서 말하였다.
  "그 비녀를 제게 한 번 보여 주시겠습니까."
  임상옥이 건네어 주자 노인은 주의깊게 그 비녀를 살펴본 후 비로소 
허리를 굽혀 정중히 예를 갖추며 말하였다.
  "어서 오십시오, 대인 나으리. 대인어른을 진즉부터 기다리고 
있었나이다."
  임상옥은 상점 안으로 들어갔다. 
  상점 안 어디에도 불빛은 보이지 않았다. 상점 바깥으로 난 중문을 열자 
그제서야 불빛이 보이고 그 불빛 속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대인어른."
  임상옥은 순간 그 목소리가 낮에 찾아왔던 유기장수의 목소리임을 알 수 
있었다. 
  "까다롭게 굴어서 송구스러웠나이다, 대인어른."
  유기장수의 모습은 지난 낮과는 전혀 달라 보였다. 비굴하리만치 
굽신거리던 태도는 간 곳 없이 사라져버리고 당당하고 의젓하였다.
  "비녀값을 가져 오셨습니까."
  유기장수는 물어 말하였다.
  "물론 가져왔네. 이곳에서 받을 터인가."
  임상옥이 묻자 유기장수는 머리를 흔들며 대답하였다.
  "아, 아닙니다, 나으리. 비녀는 제 것이 아니나이다. 그러하오니 비녀 
값은 원 주인에게 치르도록 하십시오."
  "그러하면 비녀의 원 주인은 어디에 계신가."
  "방안에서 기다리고 계시나이다."
  상점 안쪽에는 간단하게 살림을 할 수 있는 방 하나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 방에서부터 밝은 불빛이 내비치고 있었다. 약속이나 한 듯 유기장수와 
노인은 어둠 속으로 물러가고 임상옥은 그 방문 앞에 서 있었다 스스로 
문을 열기에는 쑥스러웠으므로 임상옥은 헛헛, 두어 번 헛기침을 하였다. 
그러자 안에서부터 방문이 열렸다.
  "어서 오십시오, 나으리."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대인어른."
  과연 생각했던 그대로였다. 방안에는 비녀의 주인이었던 산홍이가 얼굴 
가득히 웃음을 띠고 서 있었다.
  "이게 도대체 얼마만의 일이나이까, 나으리. 그간 별고가 없으셨나이까."
  임상옥이 신을 벗고 방안으로 들어서자 산홍이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두 손을 이마 위에 올리면서 말하였다.
  "절부터 받으시지요 대인어른."
  "이보시게나."
  큰절을 올리려는 산홍을 황급히 만류하면서 임상옥이 말하였다.
  "절은 무슨 절. 앉으시게, 앉으시게나."
  "아니나이다."
  막무가내로 산홍이가 손을 뿌리치면서 말을 하였다. 
  "오랜만에 뵈었으니 나으리께 이 산홍이가 큰절을 올려야지요."
  산홍은 큰절을 올리기 시작하였다. 그래도 한때 산홍은 임상옥의 
장모이기도 하였으므로 임상옥은 함께 맞절을 하여 예를 갖추었다. 
  "그간 가내에 별고 없으셨나이까. 옥체 만강하셨나이까."
  "덕분에 잘 지내었네. 산홍은 어떤하신가."
  임상옥의 질문에 산홍은 소리내어 웃으며 말하였다.
  "이미 늙어 할망구가 다된 늙은 년에게 무슨 사는 재미가 있겠나이까, 
나으리."
  산홍의 말은 사실이었다. 4년의 세월을 비켜갈 수가 없었던지 산홍의 
얼굴은 자신의 자조적인 말처럼 늙어 할망구가 다된 얼굴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 모습에는 한때 관기로 뭇 남성들을 녹이던 교태가 흘러 넘치고 
있었다. 
  "늙은 것은 산홍뿐이 아닐세. 나도 늙어 할아범이 다되었네."
  임상옥이 말을 받자 천만의 말씀이라는 듯 산홍이가 손을 저으며 
말하였다. 
  "천만의 말씀이시나이다. 나으리의 신색은 예전보다 훨씬 더 
좋으시나이다. 2백 년 묵은 산삼을 쪄서 드셨나이까, 아니면 젊어지는 
생물을 한 바가지 마시셨나이까."
  산홍의 걸판진 입담은 여전하였다. 뿐만 아니라 땋아서 한 바퀴 틀어 
올린 트레머리에 '팔닢 탱기'라고 불리는 빨간색의 헝겊을 매단 전형적인 
주모 행색 역시 예전 그대로였다.
  "그래, 산홍은 요즘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임상옥이 묻자 산홍은 키득키득 웃으며 말하였다.
  "평생 배운 도둑질이라야 술 마시고 노래하고 남정네들 가슴 짝을 
쥐어박는 것이었는데 이년이 늙어서도 다른 무슨 짓을 하겠나이까. 여전히 
길거리에서 주막집을 차려놓고 주모 노릇을 하고 있나이다."
  "여전히 곽산에서 말이더냐."
  "곽산이냐고 물으셨나이까."
  임상옥의 입에서 곽산이란 이름이 흘러나오자 산홍은 기가 막히다는 듯 
받아 말하였다.
  "곽산이라면 이 산홍이가 지긋지긋하게 생각하고 있는 곳이옵는데 
아직도 그곳에 머무르고 있겠나이까, 나으리. 이 산홍이도 곽산을 떠난 
것이 어언 4년이 되었나이다. 곽산을 떠나서 철산의 한 거리에서 주막집을 
하고 있나이다. 나으리께오서는 이 산홍이가 어찌하여 곽산을 
지긋지긋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리하여 떠난 것이 어찌하여 4년이 벌써 
넘어가고 있는지 그 연유를 아시고 계실 것이나이다."
  아직 봄이었는데도 울화라도 치미는 듯 산홍은 펄럭펄럭 소리가 나도록 
손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다 늙은 퇴기년이 늘그막에 딸년 덕을 보려고 곽산군수 사위를 본 것이 
어제만 같은데 어느 날 갑자기 군수 사위는 영이별을 하였삽고, 상사병에 
걸린 딸년은 어느 날 갑자기 지 어미에게 오고간다 한마디의 말도 없이 
행방을 감추어 생이별을 하였으니, 버림받은 이 늙은 년이 어찌 그 
지긋지긋한 곽산에 머무르고 있겠나이까."
  은근히 산홍은 임상옥을 빈정대고 꾸짖고 있었다.
  "미안하게 되었네, 장모."
  임상옥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하였다. 그러자 산홍은 짐짓 펄쩍 놀라는 
표정으로 물어 말하였다.
  "나으리, 나으리께오서 이 산홍을 뭐라고 부르셨나이까."
  "장모라고 불렀네."
  임상옥은 장난스레 말을 이었다.
  "예전에 산홍에게 값을 치르고 비녀를 삼으로써 산홍을 장모로 모시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나 또한 자네의 사위가 되지 않았던가."
  그러자 산홍은 펄쩍펄쩍 부치던 부채질을 문득 멈추고 정색을 한 얼굴로 
임상옥을 쳐다보았다. 
  "도대체 무슨 말씀이시나이까. 나으리가 이 산홍의 사위가 되셨다니요. 
또한 이 산홍이가 나으리의 장모라니요. 이를 말이 있으시나이까, 나으리. 
이 산홍에게는 딸이 없는데 무슨 사위타령에 장모타령이시나이까."
  "이보시게, 산홍."
  임상옥은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송이는 요즈음 어떻게 지내고 있는가."
  임상옥의 입에서 송이의 이름이 흘러나오자 놀란 듯 멈칫거리며 
산홍이가 말을 받았다.
  "나으리, 송이가 도대체 누구이시나이까."
  "이보시게, 산홍. 송이는 산홍의 딸이지 않은가"
  "나으리, 이 산홍은 돌계집이라서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석녀이나이다. 
그러니 이 돌계집에게 무슨 딸이 있었단 말씀이시나이까."
  "송이는 산홍의 친딸이 아니라 데려다 키운 양딸이었네."
  "나으리."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산홍이 억지를 부렸다.
  "송이가 내 양딸이옵고 나 또한 송이의 양어미였다 하더라도 이제는 다 
소용없는 일이나이다. 어느 하루아침에 의절을 하고 이 에미의 가슴에 
쾅쾅 대못을 박고 떠난 딸이오니 이미 송이는 내게 있어 죽은 딸년이옵고 
나 또한 송이에게 있어 죽은 에미이나이다. 그러하오니 이제 와서 
새삼스레 무슨 어이딸이시나이까."
  어이딸.
  이는 어미와 딸을 뜻하는 모녀의 순 우리말이었다.
  "그런데 나으리."
  산홍이가 갑자기 능청을 부리며 말하였다.
  "죽은 혼령이 귀신이 되어 나타났나이다."
  임상옥은 짐짓 모른 체하고 산홍의 능청에 말려 들어간 행세를 하였다.
  "귀신이 나타나다니."
  "나으리."
  산홍이가 말을 이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면 이는 귀신이 아니겠나이까. 죽은 혼령이 
귀신이 되어서 나타난 것이 아니겠나이까."
  "이보시게, 산홍."
  임상옥이 항복을 하였다.
  "난 도무지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네. 4년 만에 나타나 비녀값을 
치르라는 말의 뜻도 모르겠고 죽은 혼령이 귀신이 되어서 다시 살아났다는 
산홍의 말도 무슨 뜻인지 도무지 모르겠네.
  "정히 모르시겠나이까."
  다짐을 하면서 산홍이가 물어 말하였다.
  "정히 모르겠네."
  "나으리, 이 늙은 할망구를 놀리시면 안되시나이다. 나으리는 이미 이 
시장거리의 와기전을 혼자의 몸으로 몸소 비녀값을 치르러 찾아오실 
때부터 다 알고 계시나이다. 그렇습니다, 나으리."
  지금까지의 농지거리와는 달리 정색을 한 얼굴로 산홍은 말을 이었다.
  "죽은 귀신이 다시 살아나 찾아왔나이다. 송이아씨가 다시 제 발로 
찾아오셨나이다."
  순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임상옥의 가슴이 쾅, 하고 무너져 내렸다. 
심장이 멎는 느낌이었다.
  "그렇습니다, 나으리. 이 늙은 퇴기년이 이렇게 몇 년 만에 나으리를 
찾아온 것은 이 산홍이가 나으리를 만날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바로 
송이 아씨 때문이었나이다. 이 산홍이가 유기장수를 시켜 비녀를 사달라고 
꾀를 쓴 것은 나으리께오서는 그 비녀를 보시면 금방 숨은 뜻을 알아낼 수 
있으시리라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나이다. 과연 나으리는 이 산홍의 뜻을 
당장 알아차리시고 이렇게 몸소 시장거리를 찾아와 주셨나이다."
  "...송이는."
  임상옥은 천천히 말을 꺼내었다.
  "송이는 어디에 있는가."
  "나으리."
  산홍은 목이 메어 말하였다.
  "송이 아씨는 이 산홍을 찾아오자마자 대인어른을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 만나야 한다고 말씀하였나이다. 마지막으로 딱 한 번이면 족하다고 
말씀하였나이다."
  "송이가 어디에 있느냐고 내 묻지 않느냐."
  임상옥이 연거푸 채근하여 묻자 충분히 임상옥의 마음이 달아올랐음을 
확인한 산홍은 입을 떼며 말하였다.
  "송이 아씨는 지금 다른 곳에서 나으리를 기다리고 계시나이다."
  "다른 곳이라니."
  "이제 곧 나으리를 송이 아씨가 계신 곳으로 안내하여 드리겠나이다."
  산홍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임상옥이 이를 만류하여 말하였다.
  "잠깐, 비녀값은 치러야 할 것이 아니겠느냐."
  "나으리, 이 늙은 년에게 또다시 비녀값을 치르시다니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게 충분하온데 이 늙은 년에게 무슨 돈이 따로 필요하겠나이까. 
나으리께오서 이 늙은 퇴기 년을 모른다고 마다하지 않으시고 이처럼 몸소 
찾아와 주신 것만 해도 비녀 값은 이미 충분히 치르셨나이다."
  산홍은 일어서서 벽걸이에 걸어두었던 옥색 옥양목 치마를 꺼내들었다. 
그녀는 옥양목 치마를 쓰개치마처럼 머리 위에 뒤집어쓰고 얼굴을 치마 
하나로 감싸며 손으로는 앞을 여며서 잡은 후 임상옥을 쳐다보며 
말하였다.
  "나가시지요. 송이 아씨를 만나러 나가시지요."
  보통 쓰개치마는 나들이를 할 때 부녀자들이 사용하는 내외용 
쓰개였으나 산홍의 모습에는 자신의 신분이 노출될 것을 두려워하여서 
정체를 감추려는 기색이 역력하였다.
  두 사람은 방을 나왔다. 그러자 어디선가 유기장수가 나타나 앞장을 
섰다. 세 사람은 와기전을 나왔다.
  그새 길은 어둠이 내려 시전거리는 완전히 철시하고 있었다. 상설 
점포들은 이미 문을 닫았고 드문드문 보이던 난전 상인들의 모습도 
사라져버려서 시전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오가는 사람들의 발길도 
끊어져버려 나다니는 사람은 세 사람뿐이었다. 밤이 깊어지자 바람은 더욱 
세어져서 방심하다가는 쓰러질 것만 같았다.
  임상옥은 뭔가 마음속으로 이상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혼자 시장거리의 와기전으로 남의 눈을 피해 삿갓을 쓰고 찾아올 
때부터, 아니 산홍이가 비녀를 사달라고 유기장수를 통해 만나자는 기별을 
보내왔을 때부터 뭔가 이 만남에는 은밀한 사연이 숨어 있다고 
짐작하였다.
  처음에는 그 은밀한 기별이 임상옥의 입장을 고려해서 당사자들끼리만 
통하는 암호를 보낸 것이라고만 생각하였는데 차츰차츰 임상옥은 그것만이 
아닌 무엇인가가 이 만남 속에 깃들어 있음을 짐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무엇인가 틀림없이 있다.
  바람이 불어오는 시전거리를 유기장수의 뒤를 따라가면서 임상옥은 
생각했다.
  저 유기장수도 돌아다니면서 봇짐장수를 하는 장사치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비록 행색이 남루하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어딘가 기품이 
있어 보이지 않는가.
  그보다도 이와 같이 철저한 암행은 무엇인가. 산홍이도 완전히 
쓰개치마로 자신의 몸을 가려 정체를 숨겼고, 유기장수 또한 주위를 
살피며 걷는 품이 마치 잠행을 떠나는 사람처럼 보인다. 송이를 만나는데 
이처럼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만 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나으리."
  성큼성큼 앞장서 걸어가는 유기장수와는 달리 종종걸음으로 임상옥과 
나란히 걸어가던 산홍이가 낮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송이 아씨를 만나시더라도...."
  산홍은 속삭이듯 임상옥에게 귀띔하였다.
  "놀라셔서는 아니 되옵니다."
  "놀라다니."
  임상옥이 되묻자 산홍은 빠르게 말하였다.
  "이 산홍이도 송이 아씨를 처음 보았을 때 너무나 놀라서 죽은 혼령이 
귀신이 되어 나타난 줄 알았나이다. 놀라지 마시옵소서. 송이 아씨는 
나으리께서 아옵시는 그 송이 아씨가 아니나이다."
  "그러하면."
  임상옥이 묻자 산홍이가 대답하였다.
  "나으리께오서 아시는 송이 아씨는 이제 죽었나이다. 죽어서 백골이 
분토되었나이다. 나으리, 나으리께오서는 지금까지의 송이 아씨와는 전혀 
다른 새 송이 아씨를 만나게 되실 것이나이다. 그러하오니 심히 놀라지 
마시옵소서."
  그때였다.
  어디선가 나무토막을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저벅이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들려온 순간 유기장수는 순식간에 임상옥의 몸을 
감싸들고 전방 앞으로 밀어붙였다. 어느샌가 유기장수의 손이 임상옥의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산홍이도 바짝 곁에 붙어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타박타박, 나무토막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둘이 함께 조를 이룬 
사람들이 그들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그들은 야간 순찰을 도는 
야경꾼들이었다.
  이렇게까지 숨어야 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시전거리에서는 
한밤에 자신들의 전방을 순시하는 야경꾼을 고용하고 있었다. 한밤을 틈타 
노리는 도둑들의 범죄나 화재를 미리 방비하기 위한 순찰꾼들이었다 
이들은 '확딱이'라고 불리는 나무토막을 두드리며 일정 시간에 시장거리를 
돌아다니면서 경계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임무는 주로 순찰이었지, 이처럼 
숨어야 할 만큼 공포의 대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야경꾼이 완전히 그들의 곁을 사라져 발자국 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유기장수는 임상옥의 몸을 풀지 아니하고 결박하고 있었다.
  이윽고 발자국 소리가 완전히 사라지자 그들은 다시 걷기 시작하였다.
  밤은 깊어 짙은 어둠이 드리웠지만 달은 밝아 시야는 투명하였다. 
마침내 그들이 도착한 곳은 약전 앞이었다.
  "나으리."
  약전 앞에 이르자 산홍이가 임상옥에게 입을 열어 말하였다.
  "산홍이는 이곳에서 그만 물러가겠나이다."
  "물러가다니."
  "이 전방 안에서 송이 아씨가 나으리를 기다리고 계시나이다."
  유기장수는 말없이 전방의 덧문을 열었다.
  "들어가시오소서, 나으리."
  산홍이가 임상옥의 손을 가만히 잡으며 말하였다.
  "이 산홍에게 있어 나으리는 평생 은인이시나이다. 이 늙은 년이 죽어서 
눈에 흙이 들어간다 하더라도 나으리께 입은 은혜는 백골난망이나이다. 
부디 만수무강하시옵고 옥체 보존하소서."
  뭐라고 따로 인사말을 덧붙일 새도 없이 그들은 사라졌다. 임상옥은 
전방 앞에 홀로 서 있었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잊어버린 
사람 같았다. 산홍의 말처럼 자신이 귀신에 흘린 것 같았다.
  그 순간 산홍의 목소리 하나가 살아나서 귓가에 쟁쟁하게 들려왔다.
  "...송이 아씨는 이 산홍을 찾아오자마자 대인어른을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 만나야 한다고 말씀하셨나이다. 마지막으로 딱 한 번이면 족하다고 
말씀하셨나이다."
  마지막으로 딱 한 번이면 족한 만남. 그 만남을 위해 송이는 저 전방 
안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임상옥은 전방의 문을 열었다. 안에서 빗장을 잠그지 않았는지 문은 
그대로 열렸다.
  전방 안으로 들어가자 한약 냄새가 진동하였다. 약초를 팔기도 하고, 
의원들이 찾아오는 사람들의 진맥을 짚어 간단한 처방을 해주는 
약전이었으므로 사람들을 맞을 수 있도록 작은 방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그 
방에서부터 희미하게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임상옥은 덧문의 빗장을 
내리 걸었다.
  그는 설레는 마음으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는 방문 앞으로 다가갔다. 
떨리는 손으로 방문을 밀었다.
  열린 방안에 누군가 다소곳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분명히 인기척을 
들었을 터이고 열린 방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바람으로 촛불이 깜북거렸을 
터인데도 여인은 비껴 앉은 자세 그대로 장옷을 입은 채 앉아 있을 
뿐이었다. 
  송이였다.
  4년의 세월이 흘렀다고는 하지만 임상옥은 비껴 앉은 여인의 모습을 본 
순간 한눈에 그 여인이 송이임을 알 수 있었다.
  임상옥은 신을 벗고 방에 들어가 앉았다. 그리고 방문을 닫았다. 
찾아오는 환자들의 진맥을 보기 위해서 마련된 작은 방은 벽 전면이 
약초들을 넣어두는 약장으로 가득 차 있었고 천장에는 말리기 위해서 매단 
약초들이 주렁주렁 내걸려 있었다. 스며들어오는 바람결에 깜북거리던 
촛불도 잦아들고 두 사람은 깊은 침묵 속에 앉아 있었다.
  "오랜만이나이다, 나으리."
  긴 침묵 끝에 송이가 얼굴을 가리웠던 장옷을 벗으며 임상옥에게 먼저 
입을 열어 말하였다. 두 사람의 시선이 처음으로 마주쳤다.
  임상옥은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앞에 앉아 있는 여인은 꿈에도 그리던 
송이임에 분명하였고 목소리, 마주치는 눈빛 또한 송이임에 틀림이 
없었지만 뭔가 다른 분위기가 송이의 몸을 감싸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그녀는 변해 있었다.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신비한 분위기가 그녀의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그러자 문득 임상옥은 송이를 만나기 위해서 시전거리를 걸어올 때 
산홍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으리, 나으리께오서는 지금까지의 송이 아씨와는 전혀 다른 새 송이 
아씨를 만나게 되실 것이나이다. 그러하오니 심히 놀라지 마시옵소서."
  산홍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이 산홍이도 송이 아씨를 처음 보았을 때 너무나 놀라서 죽은 혼령이 
귀신이 되어 나타난 줄 알았나이다. 하오니 놀라지 마시옵소서."
  산홍의 말처럼 송이는 완전히 변해 있었다 송이는 분명할 송이였지만 
산홍의 말처럼 그가 알던 송이는 정녕 아니었다.
  송이의 모습과 행동에는 이 세상 것으로는 생각되어지지 않는 신령스런 
기운과 신성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얼굴 또한 달라져 있었다.
  정열적이고 아름답던 송이의 얼굴은, 내적으로 충일한 기쁨으로 인해 
얼굴 전체에서 빛이 나고 있을 만큼 눈부실 정도로 맑고 투명하였다.
  그녀의 얼굴 전체에서 광명의 빛이 흘러나와 그녀의 얼굴 뒤에는 후광이 
뿜어지고 있어 보였다. 아니다. 그것은 후광이 아니라 분명한 광배였다. 
부처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명의 빛. 그 신비한 원광이 송이의 몸 
전체에 드리워져 있었다.
  "문안인사 올리겠나이다, 나으리."
  송이는 큰절을 올리기 위해서 몸을 일으켰다.
  임상옥은 정좌를 하고 송이가 올리는 큰절을 받았다. 인연이 끊겨서 
남남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도 송이는 임상옥의 소실이었던 
것이었다.
  큰절을 올리기 위해서 두 손을 이마 위에 얹은 송이의 손에 무엇인가 
낯선 물건이 들려 있는 것을 임상옥은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 물건은 
한눈에 염불을 할 때 한 알씩 넘기면서 송주를 하는 염주처럼 보였다.
  "나으리, 그 동안 옥체만강하셨나이까."
  절을 올리고 나서 무릎을 꿇고 앉은 자세로 송이가 문안인사를 하였다.
  "이 늙은이가 어찌 만강할 수 있겠느냐. 하루하루를 무사히 보존하고 
목숨을 부지하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평안하고 안녕할 뿐이니라."
  "나으리."
  물끄러미 임상옥의 얼굴을 바라보며 송이가 말을 막았다.
  "나으리의 신색은 예나 지금이나 전혀 변한 곳이 없으시나이다."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구나. 그래, 송이 너는 어떠하냐."
  "나으리."
  순간 송이는 두 손을 합장하여 모으면서 말하였다.
  "이 소녀는 행복하나이다. 하루하루가 천국이나이다."
  송이의 말을 들은 순간 임상옥의 뇌리에는 무엇인가 스치는 것이 
있었다. 하루하루가 천국이라는 말에 임상옥은 번득이는 영감을 얻었다.
  그렇다, 천국이란 천상에 있다는 이상적인 세계를 가리키는 말로 
불교에서는 이를 극락이라고 부르고 있다. '고난이 없는 낙원'을 이르는 
말로 다른 말로는 천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이 낯선 말은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천주학쟁이들이나 쓰는 종교 용어가 아닌가.
  천주학쟁이.
  조정에서는 하늘에 있는 제천의 왕인 상제를 믿는다는 사교를 
천주악이라고 불러 경멸하고 있었다. 그 천주학의 교리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사람은 귀한 사람도 없고 천한 사람도 없이 평등하며 
하늘나라에는 나랏님보다 높고 부모님보다도 먼저이신 천주님이 계신데, 
이 세상에서 착한 일을 하면 상을 받아 천국에 가고 살아 있을 때 악한 
일을 하면 벌을 받아 지옥에 간다는 것이다.
  천국.
  '하루하루가 천국'이란 송이의 대답은 무심결에 그녀가 천주학쟁이임을 
드러내 보인 것이 아닐 것인가.
  "송이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이 무엇이냐."
  임상옥이 송이의 손에 들려 있는 낯선 물건을 가리키며 물어 말하였다.
  "무엇을 말씀이시나이까. 소녀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나이다."
  송이는 오른손을 펼쳐 보였다.
  "오른손 말고 왼손에 말이다."
  송이는 망설이다 왼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과연 그녀의 손바닥에는 
무엇인가 들어 있었다. 그것은 작은 나무구슬들을 줄에 꿴 물건이었다.
  염주처럼 보였지만 염주는 아니었고 그 끝에는 엇갈린 십자 형태의 작은 
나무토막이 매달려 있었다.
  "그것이 무엇이냐, 염주냐."
  임상옥이 묻자 송이는 대답하였다.
  "아니나이다."
  "그럼 이것이 뭐라고 부르는 물건이냐."
  "그것은 묵주라고 부르는 물건이나이다."
  "묵주라니."
   "'장미로 만든 꽃다발'이란 뜻이나이다."
  "끝에 매달린 그 나무토막은 무엇이냐."
  임상옥은 십자 형태의 나무 조각을 가리키며 물어 말하였다.
  "그것은 십자가라고 부르나이다. 나무로 만든 형틀이라는 뜻이나이다."
  임상옥은 그 이상한 나무로 만든 형태 위에 아주 작게 조각된 물건 
하나가 매달려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주의깊게 살펴보았다. 그 물건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철물을 부어 만든 작은 사람의 형상은 그 
십자 형태의 나무조각에 두 팔을 벌린 채 매달려 있었다.
  "이것은 무엇이냐."
  "사람이나이다."
  "사람이 왜 이렇게 이상한 형상으로 십자 형태의 나무조각에 매달려 
있느냐."
  "그 사람의 이름은 야소라 하나이다."
  송이의 입에서 흘러나온 낯선 이름.
  "야소가 도대체 누구인가."
  그러자 송이는 대답하였다.
  "야소님은 천주님의 아드님이시나이다."
  비로소 송이는 자신이 천주학쟁이임을 밝힌 셈이다.
  순간 임상옥은 이 만남 어딘가에 수수께끼와 같은 은밀한 무엇이 숨어 
있는 듯한 느낌이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가를 깨달을 수 있었다.
  4년 만의 만남에 어째서 그토록 복잡한 절치를 거쳐야 했던가를 
임상옥은 비로소 느낄 수 있었다. 왜 유기장수는 그토록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 했던가 소문에 듣기에 천주학쟁이들은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토기들을 팔고 다닌다는데 그렇다면 그 유기장수 또한 천주학쟁이임이 
분명한 것이다. 또한 시장거리의 야경꾼을 왜 그토록 경계할 수밖에 
없었던지 그 이유를 임상옥은 그제서야 깨달을 수가 있었다.
  조정에서는 눈에 불을 켜고 천주학쟁이들을 색출해내고 있었다. 
천주학쟁이들은 그들에게 조상을 위한 제사마저 거부하는 '무부무군'의 
사교의 집단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2년 전인 기해년, 전국적으로 사학토치령에 의해서 
천주학쟁이들을 색출하는 한편 가혹한 형벌로 천주학을 근절하기 위한 
대학살이 자행되었던 것이다.
  기해사옥.
  기해년에 일어났던 천주학에 대한 박해를 기해사옥이라 하였는데, 
교인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추적되었고 비록 투옥은 모면한 사람일지라도 
가산과 전답을 버리고 도망쳐야만 했다. 박해는 강원도,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등지에 골고루 미쳤으나 가장 박해가 심했던 곳은 경기도와 서울 
지역이었다.
  당시의 기록인 '기해일기'에 의하면 참수되어 순교한 자가 54명이고 
그밖에 옥에서 교수되어 죽고 장하에 죽고 병들어 죽은 자들 또한 60여 
명이 넘는 전국적인 대박해였던 것이다.
  임상옥도 천주학쟁이들에 대한 소문을 익히 전해들어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송이가 자신의 입으로 '하늘에 있는 천주'를 믿는 
천주학쟁이임을 스스로 고백하고 있지 아니한가.
  "천주는 도대체 누구인가."
  임상옥은 송이에게 물어 말하였다.
  그러자 송이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대답하였다.
  "천주는 이 세상 만물을 만드신 전지전능하신 분이옵고 무시무종한 
분이시나이다."
  "무시무종이라니, 그러면 시작도 없고 마침도 없다는 뜻인가."
  "그렇사옵니다, 나으리."
  "어찌하여 시작도 없고 마침도 없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하면 그 
천주라는 분이 우리들 사람도 만들었단 말인가."
  "그렇사옵나이다, 나으리. 우리들 인간도 천주님께오서 흙을 빚어 
만드셨나이다."
  "그러하면 야소는 천주의 아들이란 말이더냐."
  임상옥은 십자 형태의 나무토막 위에 묶여 있는 조각상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그렇사옵나이다, 나으리. 야소님은 천주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천주의 아들이 어째서 이처럼 십자가의 형틀 위에서 죽어 있단 
말이냐."
  "그것은, 그것은."
  송이가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찌르며 말하였다.
  "야소님께서 이 송이가 지은 죄를 대신해서 벌을 받아 십자가의 형틀 
위에서 못박혀 돌아가신 것이나이다."
  "죄라니, 네가 무슨 죄를 지었단 말이냐."
  임상옥이 묻자 송이가 미소를 띠며 대답하여 말하였다.
  "나으리, 이 세상 모든 사람들 중에 하늘을 우러러 감히 죄를 짓지 않은 
이가 있겠나이까. 이 소녀 또한 죄 중에 태어났으며 죄인 중의 
죄인이나이다."
  "도대체."
  임상옥이 단도직입으로 물었다.
  "어떻게 하늘 위에 천주가 있을 수 있단 말이냐. 너는 천주를 보았느냐."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면 천주를 어떻게 믿느냐. 보지도 못한 천주가 어떻게 존재하고 
있다고 믿을 수 있겠느냐."
  "나으리."
  임상옥의 질문에 송이가 입을 열어 대답하였다.
  "하오면 나으리께오서는 나랏님을 믿으십니까. 이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바로 임금이 아니시더냐."
  "하오면 임금님은 어디에 살고 계시나이까."
  "그야 이를 말이 있겠느냐. 임금님이야 왕궁 속에 살고 계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오면 나으리, 나으리께오서는 임금님을 만나 뵈신 적이 
있으시나이까."
  송이의 질문에 임상옥은 말문이 막혔다. 임상옥은 송이가 어째서 그런 
질문을 하고 있는가 진의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나랏님을 뵈온 적은 없으시지 않나이까. 하오면 
나으리께오서도 직접 눈으로 뵙지 못하셨는데도 어찌하여 궁궐 속에 
나랏님이 살아 계신 것을 분명히 믿고 계시나이까 마찬가지이나이다. 이 
소녀도 나으리와 마찬가지이나이다. 나으리께오서 직접 뵙지는 못하셨으나 
나랏님이 계신 것을 믿고 계신 것처럼 이 소녀 또한 직접 하늘에 계신 
천주님을 만나 뵙지는 못하였으나 하늘 위에는 우리를 만들고 우리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천주님이 분명히 계시 온 것을 굳게 믿고 있나이다."
  송이의 얼굴에는 기쁨이 흘러 넘치고 있었다. 임상옥이 알고 있던 
송이의 모습은 이미 죽어 사라지고 전혀 새로운 송이가 그곳에 앉아 
있었다. 
  "그러하면."
  임상옥이 낮은 목소리로 물어 말하였다
  "너는 천주학쟁이가 되었느냐."
  암상옥의 질문에 송이는 잠시 침묵하였다.
  그녀는 말없이 임상옥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은 짧게 
마주쳤다.
  "그렇사옵나이다. 나으리."
  송이는 분명한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이 소녀는 천주학쟁이가 되었나이다. 나으리께오서 알고 계신 송이는 
이미 죽어 사라졌나이다. 나으리, 소녀는 이제 새 사람이 되었나이다. 
소녀는 또한 새 이름을 갖게 되었나이다."
  "새 이름을 갖게 되었다구."
  "그렇습니다, 나으리."
  "새 이름이 무엇이냐."
  임상옥이 묻자 송이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하였다.
  "막달레나이나이다."
  "막달레나라구. 그것은 서양 사람의 이름이 아니더냐."
  "그렇사옵나이다, 나으리. 막달레나는 몸을 팔던 천한 창기였나이다. 
길거리에서 남정네들에게 몸을 팔다가 붙들려서 돌에 맞아 죽을 뻔하였던 
것을 천주님의 아드님이신 야소님께오서 살려주셨나이다. 나으리, 이 소녀 
또한 웃음을 팔던 비천한 창기가 아니었나이까. 그런 소녀를 천주님의 
아드님이신 야소님께오서 살려주셨나이다."
  막달레나. 
  송이의 새 이름 막달레나.
  송이의 말처럼 거리에서 몸을 팔던 천한 창기, 거리에서 몸을 팔다가 
현장에서 붙들려 와서 돌에 맞아죽을 뻔하였던 것을 야소가 살려준 여인. 
송이 스스로 표현하였듯 자신도 비천한 창기와 다름없었으므로 
천주학쟁이가 되어 가진 새 이름 마리아 막달레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모르겠구나."
  긴 한숨을 쉬면서 임상옥이 탄식하여 말하였다.
  "네가 지금 서양귀신에게 홀려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러자 송이가 얼굴에 미소를 띄워 올린 후 이렇게 말하였다.
  "언젠가는 나으리께오서도 이 소녀의 말을 믿게 되실 것이나이다."
  그러고 나서 송이는 몸 속에서 가지고 다니던 휴대용 붓을 꺼내들었다. 
그녀는 주위를 살펴서 한약을 처방하는 종이 한 장을 가져왔다. 그녀는 그 
종이 위에 다음과 같이 써내렸다.

  미생민래 전유상제
  유일진신 무성능비
  육일역작 선벽천지
  만물다언 기회차이
  수변화토 장위영의
  명처사대 천백개여

  임상옥은 송이가 쓴 문장을 하나하나 원어 내려갔다.

  아직 세상에 사람이 생기기 전에 이미 상제가 계셨으니
  오직 한 분만의 참 신으로 능히 비할 성인이 없으시도다.
  천주님 6일 동안 우주를 지으실 때 하늘과 땅을 먼저 열으시니
  그 가운데 온갖 만물 많기도 하고 기이하고 또한 신기롭게 하셨도다.
  마침내 흙을 가지고 빚으셔서 장차 영혼이 있는 인간이 되게 하시고
  살아갈 땅과 터를 주시고 천백 가지 모든 것을 베풀어 주셨도다.

  원래 이 내용은 천주교를 처음으로 받아들였던 광암 이벽이 지은 
<성교요지>의 첫 장에 나오고 있는 본문에서 인용한 것이다.
  송이가 쓴 문장을 원어 내려가던 임상옥은 몹시 흥미를 느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사람이 생기기 전에 이미 상제가 있었다'는 구절과 또한 사람을 
'마침내 흙을 빚어 만들고 장차 영혼이 있는 인간'이 되게 하였다는 
구절이었다.
  일찍이 절에 들어가 사문이 되었었던 전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임상옥의 생각은 항상 불교적 신앙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임상옥은 송이가 쓴 문장을 읽어 내린 순간 문득 자신이 알고 
있는 불교의 내용과 송이의 천주학이 근본에 있어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지, 수, 화, 풍의 흙과 물, 불과 바람의 네 가지 
요소가 합쳐서 생겼다고 말을 하고 있다.
  사람이 죽으면 흙에서 온 것은 흙으로 돌아가고 물에서 온 것은 물로 
돌아가고 불에서 온 것은 불로 돌아가고 바람에서 온 것은 바람으로 
돌아간다고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 '흙을 빚어 만든 
존재이고 그 흙에 영혼을 부어 인간이 되게 하였다'란 말은 불교의 그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또한 '이 세상에 사람이 생기기 전에 이미 상제가 
있었다'는 문장도 불교의 그것과 흡사한 것이다.
  일찍이 임상옥의 은사스님이셨던 법천은 '무엇이 불법이나이까' 하는 
임상옥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었다.
  "불법이란 별것이 아니다. 불법이란 '천지미분전'을 참구하고 
'부모미생전'을 참구하는 일이다."
  사승 법천의 대답은 임상옥의 일생에 큰 영향을 주었다. 불법이란 
다름아니라 '하늘과 땅이 갈라지기 전'의 세계를 생각하고 '부모가 
태어나기 전'의 세상을 참구하는 일이라는 법천의 말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 찰나의 세상 일에 연연하지 말고 영원히 변치 않는 진아를 
참구하라는 뜻이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사람이 생기기 전에 이미 
상제가 있었다'는 송이가 써 내린 문장은 결국 '하늘과 땅이 갈라지기 
전'과 '부모가 태어나기 전'의 한 처음에서부터 '나'가 있었다는 불법의 
그것과 상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뿐인가.
  어떻게 천주를 보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천주가 있음을 믿느냐는 
임상옥의 질문에 송이는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의 존재를 들어 임금을 직접 
배알한 사람은 적으나 만백성 모두 임금이 실재하심을 믿고 있는 것과 
같이 하늘에 계신 천주님을 직접 배알한 사람은 없으나 이 세상 
우주만물을 창조한 천주님은 분명히 엄존하고 계시다고 대답했던 것이다.
  이 역시 불교의 경전에서 나오고 있는 내용과 다름이 없었던 것이었다.
  일찍이 기원전 2세기 후반 그리스의 왕 메난드로스는 인도에 침입하여 
북인도 일대에 세력을 떨쳐 그리스문화의 영향을 주었던 인물이다.
  이때 미린다(메난드로스) 왕은 승려 나가세나와 불교에 대해서 문답을 
나누는데 이 문답이 <왕문경>이라 하여 초기 경전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이 경전에서 미린다 왕은 다음과 같이 묻는다.
  "스님, 스님은 부처님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스님의 스승은 부처님을 본 적이 있습니까."
  "스승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실재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대왕께서는 히말라야 산중에 있는 은하강을 본 적 이 
있습니까."
  "본 일이 없습니다."
  "대왕의 아버지께오서도 은하강을 보신 일이 있습니까."
  "본 일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대왕님, 은하강은 없는 것입니까."
  "스님, 아닙니다. 그 강은 있습니다. 나도 아버지도 은하강을 본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은하강은 실재로 있는 것입니다."
  "대왕님, 마찬가지로 나도, 스승도 부처님을 뵌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실재로 계셨습니다."
  히말라야의 은하강을 통해 부처의 실재를 증명하였던 나가세나 스님처럼 
송이는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의 비유를 통해 천주의 실재를 증명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임상옥은 강한 흥미를 느끼며 송이를 마주보았다.
  밤이 깊어갈수록 바람은 거세어져 전방은 금방이라도 어디론가 휩쓸려갈 
것처럼 덜컹거렸고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바람에 촛불은 금방이라도 
꺼질 듯이 깜북거려 두 사람의 그림자는 벽 위에 너울너울 춤추고 있었다.
  희미한 불빛을 받은 송이의 모습은 조금도 흩어진 기색이 없었고 
신비롭게 떠오르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네가 천주학쟁이가 되었단 말이냐."
  임상옥이 묻자 송이는 미소를 띄워올렸다.
  "정히 아시고 싶으시나이까."
  "물론이지."
  "정히 그러하시다면."
  긴 한숨과 더불어 송이는 입을 열었다.
  "이 소녀가 말씀드리겠나이다."
  송이는 묵주를 손바닥으로 움켜쥔 채 잠시 허공을 응시한 후 천천히 
말을 이어 내려갔다.
  "나으리께오서는 다시는 이 소녀의 곁으로 돌아오지 않으시겠다는 
작별의 말을 남기고 떠나신 이후부터 이 소녀는 도저히 곽산에서 살 수가 
없었나이다. 그 해 여름과 가을을 눈물로 지새운 후 마침내 그 해 겨울 
소녀는 큰 결심을 하였나이다. 나으리께오서 이 소녀에게 하셨던 말씀, 
이제 자유의 몸이 되었으니 먼 곳으로 떠나라는 말씀대로 곽산을 떠나기로 
결심하였던 것입니다. 다행히도 나으리께오서 이 소녀에게 멀리 떠나 새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큰돈도 보태 주셨으므로 소녀는 큰 결심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곽산에 그대로 머물고 있어서는 나으리에 대한 
그리움으로 사사로운 인연의 끈을 베어버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나이다. 
처음에는 유경으로 나아갈까 생각하였나이다. 하오나 곧 생각을 고쳐서 
유경보다는 대처인 한양으로 올라가리라 결심하였나이다. 유경이 비록 
평서 지방에서는 제일 큰 대처이긴 하오나 곽산이 가까워 나으리를 향한 
그리움의 물결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송이는 감정이 섞이지 않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내려갔다. 
임상옥은 묵묵히 벽에 몸을 기대고 앉아서 송이의 말을 귀담아듣기 
시작하였다. 
  송이는 자신의 생각대로 무턱대고 한양으로 올라왔다. 그녀가 정착한 
곳은 한강변에 있는 서강이었다 사대문 안에 들어가 살기에는 신분이 
적합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관기의 신분에서 면천하여 양민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사대문 안에는 양반들과 상인들이 살고 있었으므로 
일개 양민인 송이로서는 감히 꿈조차 꿀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서강은 전형적인 중인들이 모여 살고 있는 중인촌이었다. 주로 의관이나 
역관, 향리 따위의 세습적인 기술직이나 사무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이었는데 송이는 이곳에서 집을 사서 혼자서 생활하기 시작하였다. 
  송이는 머리를 없어 결혼한 여자 행세를 하였으며 소복을 하여 초년 
과부 행세를 하였다. 그렇게 해야만 주위 사람들로부터 이상한 눈길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비록 임상옥이 큰돈을 보태 주었다고 하지만 대처로 나와서 집을 사고 
자리를 잡느라 거의 다 바닥이 났고 어쨌든 살아가는 호구지책은 마련해야 
했으므로 송이는 삯바느질을 시작하였는데 솜씨가 촘촘하고 뛰어나다고 
해서 제법 손님이 그칠 새가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해서 송이는 어렵지 않게 생면강산인 서대문 밖 서강에서 
자리잡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송이가 살고 있는 바로 옆집은 대대로 의관의 집이었는데 
장안에서 소문난 명의였다. 나이가 들어 의관에서는 물러나 향리인 
서강에서 의술을 펼치고 있었는데 워낙 의술이 뛰어나다고 해서 문안 
사대부집에서 찾아오기도 하고 가마를 보내서 초청을 하기도 했다.
  이 한약방에는 장성집이란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바로 명의 장영덕의 
조카뻘이었다. 그는 한약방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소문난 팔난봉이기도 하였다. 그는 일찍 두 번이나 결혼하였으나 두 번 다 
아내를 사별한 불우한 사람이었다. 그는 옆집으로 이사온 송이의 미모에 
반해 마음속으로 송이를 원하고 있었다.
  마침 그때 장영덕은 의녀의 필요함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아무리 
장영덕이 소문난 명의라고 하지만 남녀간에 내외하는 풍습이 엄격했으므로 
부인들은 자신들의 병을 장영덕에게 진단 받기를 꺼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조정에서는 따로 의녀를 뽑아 주로 부인들의 맥경과 침구의 법을 
가르쳐 진료하도록 하였는데 남녀의 자유로운 접촉을 기피하던 때였으므로 
중서계급에 속한 여자들은 이 업에 종사하기를 원치 않아 주로 비녀 
가운데서 동녀를 뽑아 침구술과 맥경보는 법을 가르쳐 지방으로 
내려보내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는 이 의녀들이 기녀가 되어서 의술뿐 아니라 춤과 노래를 
가르쳐 연회에 참석하는 기생이 되었다. 특히 연회에서 의녀는 흑단 
가리마란 족두리를 쓰고, 일반 기생들은 흑포를 두르게 함으로써 의녀를 
약방기생이라 불러 관기 중에서도 제일품으로 치곤 해서 의술은 
유명무실할 뿐 실제로 의술에 종사하는 의녀들은 전무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명의 장영덕은 사사로이 자신이 갖고 있는 의술을 전수시킬 
의녀를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장영덕에게 송이를 의녀의 후보감으로 천거한 사람이 바로 
장성집이었다.
  송이는 의술을 배우지 않겠느냐는 장성집의 권유에 선뜻 마음이 
움직였다. 비록 의녀들이 기녀화되어 비천한 직업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의술의 소중함을 익히 알고 있던 송이였으므로, 
더욱이 의술을 가르쳐 주는 스승이 명의인 장영덕이었으므로 송이는 이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해서 송이는 장영덕의 내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영민하고 명석한 송이는 하나를 가르쳐 주면 열을 알았다. 의술을 
가르쳐 주는 스승이 놀랄 정도였다.
  맥경을 보는 법, 침구법, 약제법, 점혈법 등 놀라운 속도로 의술을 배워 
나갔다. 송이는 삯바느질을 그만두고 의원에서 일을 하게 되었는데 
찾아오는 부인들의 진맥은 모두 송이의 일이었다. 얼마 안되어 송이는 그 
의원에서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무렵 송이에게 운명적인 일이 생기게 되었다. 송이가 살고 
있는 서강에서 가까운 곳에 밤섬이 있었다. 이 밤섬은 한강 한가운데에 떠 
있는 섬으로 한여름 장마가 틀 때에는 물에 잠겨 사람들이 뭍으로 피난을 
가야 하는 사주였다. 이 밤섬에서 대대로 농사를 짓고 있는 한 가족이 
있었는데 살림이 제법 넉넉하였다. 가족들은 아버지가 병이 들자 배를 
타고 의원으로 찾아왔다. 그러나 이미 환자는 골수에까지 병이 들어 
차도를 보지 못하고 곧 숨을 거두었다.
  이때 아버지를 모시고 온 여인의 이름은 김효임이라 하였다. 그녀는 
김효주라 불리는 여동생과 함께 찾아왔으며 비록 아버지가 차도를 보이지 
못하고 죽었지만 이로 인해 송이와 친하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언니 김효임과 송이는 동갑내기였다. 김효임은 그 후부터 밤섬에서 
나는 각종 농산물을 송이에게 보내주곤 했다. 이따금 송이도 밤섬으로 두 
자매를 만나기 위해 건너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찾아간 송이에게 식사를 대접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음식을 전혀 입에 
대지 않는 것을 보고 송이가 의아해서 물어본 적이 있었다.
  "함께 먹지 그래요."
  그러나 언니 효임뿐 아니라 동생 효주도 전혀 음식을 입에 대지 않는 
것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이들의 가족은 모두 6남매였는데 이들 모두는 부친을 
여읜 후 전 가족이 천주교에 입교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또한 매주 두 
차례씩 대재를 지켜 단식을 철저히 행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천주교에서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고난받고 죽은 예수의 죽음을 
생각하여 죄와 욕정의 사슬을 끊고 자신을 완전하게 봉헌하기 위해 정해진 
날, 완전히 음식을 끊는 단식재를 거행하는데 이를 모르고 있는 
송이로서는 이들의 단식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뿐인가.
  이미 효임, 효주 두 자매는 중국인 신부 유방제로부터 세례를 받은 
천주교인이었으며 그로 인해 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수정을 결심하여 
동정을 지키기로 맹세하고 있었던 것이다.
  송이가 봐도 김효임, 김효주 두 자매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처녀였다. 
집안은 부유한 편이라 여기저기서 혼담이 들어온다는 것을 송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들 자매는 이미 혼기를 놓친 노처녀들이었으며, 그것이 
스스로 결심하여 수정하기 위함이라는 말에 송이는 심히 놀랐던 것이다.
  "어째서 수정을 지켜 동정녀가 되려는 것인가요."
  비록 정실은 아니었지만 사랑하는 남자 임상옥을 만나 이미 한 번 
혼약을 맺었던 송이는 두 자매의 수정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언니 김효임은 송이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도 약혼한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도 사랑하는 낭군님이 
계시나이다."
  언니 효임의 말은 송이의 궁금증을 한층 더 강하게 만들었다. 약혼하여 
사랑하는 낭군이 있다니 그러나 어디에도 그녀들이 말하는 낭군은 보이지 
않지 아니한가. 더구나 두 자매는 더욱 이해할 수 없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지 아니한가.
  "우리 자매는 한날 한시에 같은 낭군님과 혼례식을 올렸나이다."
  한날 한시에 언니 동생 두 자매가 같은 낭군과 혼례식을 올리다니. 이 
또한 무슨 해괴한 언약이란 말인가.
  "도대체 무슨 말씀인지 통 모르겠나이다. 하오면 그 낭군님은 도대체 
어디에 살고 계시나이까."
  송이가 묻자 잠시 머뭇거리던 언니 효임이가 마침내 결심하였다는 듯 
손에 들고 있던 묵주를 꺼내 보이며 말하였다.
  "우리 자매가 혼례식을 올린 사람은 다름 아닌 이 분이시나이다."
  효임은 마치 염주처럼 생긴 나무구슬을 꿰어 만든 물건을 가리켰다. 
송이는 그녀가 가리킨 물건을 바라보았다. 그 나무구슬 끝에는 십자 
형태로 만든 물건이 매달려 있었고 그 십자 형태 위에는 철제 금속으로 
조각된 사람의 형상이 붙박혀 있었다.
  "이 사람이라구요."
  "그렇습니다. 우리 자매가 혼례식을 올린 낭군님은 바로 이 
분이시나이다. 이분은 우리 자매의 서방님이시나이다."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구시나이까."
  송이가 묻자 이번에는 동생 효주가 웃으며 말하였다.
  "이분은 야소이시나이다. 바로 하늘에 계신 천주님의 아드님이시나이다."
  동생 효주의 말을 들은 순간 송이는 두 자매가 말로만 듣던 
천주학쟁이임을 알 수 있었다.
  하늘에 계신 천주님과 그의 아들인 야소 두 자매의 말을 들은 순간 
송이는 가슴이 철렁하였다.
  어쨌든 조정에서는 야소를 서양귀신이라 하고, 천주를 믿는 
천주학쟁이들을 천주악이라 하여서 천인공노할 대죄인으로 취급하고 있지 
아니한가.
  "이 사람은 죽은 서양귀신이 아니나이까. 어찌하여 죽은 귀신과 
혼례식을 올리시나이까."
  송이가 묻자 이번에는 언니 효임이가 웃으며 대답하여 말하였다.
  "이분은 죽은 사람이 아니라 천년이고 만년이고 영원히 살아계시나이다. 
세상이 있기 전부터 계시고, 세상이 없어진 후에도 계시는 무시무종하신 
분이시나이다."
  그날 밤, 송이는 언니 효임으로부터 그 묵주를 선물로 받아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송이는 그들 자매가 이미 중국 신부 유방제로부터 세례를 받아 
언니 김효임은 꼴룸바, 동생 김효주는 아네스라는 새 이름을 얻은 사실도 
알게 되었다. 또한 송이는 직접 자신의 눈으로 이들 자매들과 가족들이 
평생 동정을 지키기로 맹세한 후 병약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성심껏 
돌봐주는 모습을 수 차례 보아왔던 것이다. 두 자매는 자신의 가족이 
아니면서도 병든 환자들을 데리고 의원까지 나와서 자신의 돈으로 
치료까지 해주는 덕행을 베풀고 있었던 것이다.
  송이는 그녀들이 혼례식을 올렸다는 야소는 믿을 수가 없었지만 두 
자매가 보여주는 덕행에 대해서만큼은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엇이 두 
자매를 저토록 천사처럼 마음씨가 곱고 어진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 
것인가.
  아직도 송이는 마음속으로 서방님 임상옥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었다. 세월이 갈수록 임상옥을 향한 그리움은 날로 더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님을 향한 그리움과 육체의 열락을 염원하는 정념과 육욕으로 
송이는 밤마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가혹한 형벌이었다. 사랑하는 임을 두고도 보지 못하는 생이별의 아픔도 
혹독하였지만 그보다 더 혹독하였던 것은 육체적 욕망이었다.
  누구보다 육체의 쾌락에 끓어오르던 송이가 아니었던가. 이제 겨우 
스물여섯의 젊은 나이. 열락을 자제하기엔 젊디젊은 육체가 아닐 것인가.
  견딜 수 없는 욕정이 끓어오를 때면 송이는 바늘로 자신의 허벅지를 
찔러 피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누구보다 아름다운 효임, 효주 두 자매는 수정하여 동정녀가 
되기를 맹세하고 야소라는 서양귀신과 혼례식을 올린 것이다. 스스로 
생처녀가 되었을 뿐 아니라, 얼굴에는 평화가 흘러 넘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가능한 일인가.
  송이가 언니 효임으로부터 묵주를 선물로 받고 돌아와 이러한 의심과 
회의에 번민하고 있을 무렵, 또 다른 운명적인 사건이 송이가 일하고 있는 
의원에서 일어난 것이다.
  바로 송이를 의녀로 천거한 장성집이 어느 날 갑자기 돌변한 
사건이었다. 
  후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장성집은 원래 천주학쟁이였었다. 서른 살 경 
천주학을 알기 시작하여, 세례를 받지는 못하였지만 열심히 예비신자로 
살았었다. 그런데 두 번 결혼했으나 두 번 다 아내가 병으로 죽어버리자 
반사가 다 허망하다는 허무주의에 사로잡혀 재산 모으기에 몰두하였고, 
육체적 쾌락에 사로잡히게 되었던 것이다.
  그가 의녀로 천거하였던 것도 송이의 미모에 반해 송이를 유혹해 보려는 
욕망 때문이었다.
  바로 그 무렵, 장성집은 다시 신앙생활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보속하는 일에 전념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참회의 
방법이 가혹하였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그는 몇날 며칠을 굶었다. 한겨울이 되었는데도 
방에 불을 들이지 못하도록 하였다. 굶주림과 추위와 싸우면서도 그는 한 
발자국도 방에서 나오지 않았으며 그의 방에서는 연일 대성통곡하는 
울부짖음 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이를 보다 못한 그의 부모가 다음과 
같이 물었다고 기록에 전해지고 있다.
  "도대체 네가 무슨 죄를 지었느냐. 네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처럼 
대성통곡을 하고 있느냐."
  이에 장성집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고 전한다.
  "저는 삼가 하늘에 죄를 지었나이다."
  "예전에 자유롭게 드나들면서 생활한 것이 도대체 무슨 죄란 말이냐."
  부모들의 이러한 걱정에 지금은 우리나라가 낳은 103위 순교 성인 중의 
한 사람인 성 장성집 요셉은 이렇게 대답하였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제가 지은 죄는 의식을 넉넉히 하려는 욕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다시 
그런 죄를 짓는 것보다는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는 것이 더 낫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무술년, 1838년 4월 장성집은 세례를 받게 된 것이다. 
장성집에게 세례를 준 사람은 범세형이라는 불란서 신부였다. 원 이름은 
라우렌시오 앵베르 신부로 중국에서 활동 중 제2대 조선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던 외방선교회 소속 신부였다.
  같은 외방선교회 소속이자 불란서 신부인 소(브뤼기에르)신부가 제1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음에도 막상 조선 땅에는 입국조차 못하였던 것에 
비하면 범 신부는 1837년 12월 18일 처음으로 조선 입국에 성공하였던 첫 
주교였던 것이다.
  그는 이미 입국하여 있던 모방, 샤스탱 두 신부와 함께 전교에 힘쓴 
결과 불과 일년 사이에 9천 명에 가까운 천주교 신자들에게 세례를 베풀 
수 있게 된 것이다.
장성집이 범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은 것이 바로 이 무렵이었다. 서강에 
살고 있던 세 명의 교우들도 함께 세례를 받았는데 이 은밀한 세례식을 
우연히도 송이는 참석하여 지켜보게 되었다. 
  당시 천주교 신자들은 아직 본격적인 탄압을 받지 않고 있었지만 어쨌든 
조정으로부터 엄격한 감시를 받는 불온분자였다. 이미 범 주교의 입국 
사실은 입국한 지 불과 서너 달도 되지 않았음에도 당국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주교를 비롯하여 다른 신부를 추적하는 포졸들의 수색작업이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할 무렵이었던 것이다.
  송이가 아직 천주교 신자가 아닌데도 이렇게 은밀한 세례식에 참석할 수 
있었던 것은 김효임, 효주 두 자매의 각별한 배려 때문이었다.
  세례식은 서강의 한강변에서 거행되었다. 장성집을 비롯하여 세 명의 
신자들은 한결같이 흰옷을 입고 강가에 서 있었다.
  해질녘이었다.
  뉘엿뉘엿 기울어가는 봄 햇살이 서편 하늘을 핏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 핏빛 노을이 강물 위에 번져 강물 역시 핏빛이었다. 이른바 본격적인 
천주학쟁이가 된다는 세례식은 의외로 단순하고 간단하였다.
  신자들은 알 수 없는 이상한 몸짓을 하였으며 외국 신부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외국 신부는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신자들의 머리 외에 
손을 얹었다.
  먼 후일에 알게 되었지만 그것이 바로 안수기도였던 것이다.
  안수기도.
  성직자가 신자들의 머리 위에 손을 않고 축복이나 성령의 힘이 내릴 
것을 기도하는 일. 그 이상한 몸짓으로 이어진 세례식은 곧 이어 서투른 
한국말을 하는 신부의 질문과 신자들의 답변으로 이어졌다. 그들은 
큰소리로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워낙 주위가 조용하였으므로 송이는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똑똑히 들을 수가 있었다.
  신부는 그들에게 "당신은 전능하신 천주님을 믿습니까"라고 물었으며 
그들은 한결같이 "믿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또다시 신부가 그들에게 "당신은 천주님의 외아들 야소님을 
믿습니까"하고 물었으며 그들은 역시 "믿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또다시 신부가 그들에게 "당신은 성신을 믿습니까"하고 물었으며 그들은 
역시 "믿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나서 신부는 그들에게 다시 
질문을 하였는데 그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마귀를 끊어버립니까."
  그 질문에 신자들은 다시 이렇게 대답하였다.
  "끊어버립니다."
  그러자 신부는 신자들을 흘러가는 강물로 씻어주기 시작하였는데 
남자들은 완전히 강물 속에 담가서 침례하였으며 여자들은 강물을 떠서 그 
물을 이마 위에 부어 내렸다. 그 물이 천주교인의 죄들을 씻어 내린다고 
김효임은 송이에게 설명하여 주었다. 그때의 강물은 강물이 아니라 
성수로서 그 사람이 지은 죄를 깨끗이 씻어 주고 새 사람, 새 인간으로 
거듭나게 해준다고 김효임은 송이에게 설명하여 주었다. 
  그것으로 모든 세례식은 끝이었다.
  한 사람씩 외국인 신부는 끌어안고 입을 맞춰 주었는데 송이는 순간 
놀라운 모습을 보았다.
  저녁 노을이 핏빛으로 번져나가 어둑어둑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였음에도 
이제 막 세례를 받은 신자들의 얼굴에서는 광채가 뿜어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저녁 노을빛도 장엄하였고, 사람들의 얼굴에는 초자연의 광휘가 흘러 
넘치고 있었다.
  장성집의 얼굴과 모습은 완전히 변해 있었다. 송이가 아는 장성집은 
이미 죽어 있었고 새 사람, 새 인간의 장성집이 강변에서 있었다. 강변의 
갈대 숲에서부터 물새 떼들이 일제히 날갯짓을 하면서 일어나서 춤을 추며 
날아갔다.
  순간 송이는 마음속에서부터 어떤 간절한 소망 하나가 용솟음쳐서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아.
  송이는 순간 생각하였다.
  아아, 나도 저 성스러운 물 속에 뛰어들고 싶다. 저 물 속에 뛰어들어 
전신을 물 속에 담그고 싶다. 그리하여 저 성스러운 물로 내 몸에 묻은 
모든 죄와 더러운 욕심의 때를 씻어버리고 싶다.
  저 물 속에 뛰어들 수만 있다면 임을 향한 그리움도, 임을 향한 육체의 
욕망도 모두 끊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저 물 속에 뛰어들 수 있다면 
전생으로부터의 업도 끊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대역죄인으로 죽은 아비, 
이희저. 아비의 대역죄로 인해 비참하게 죽고 관노로 팔려간 형제들의 
악업들도 말짱하게 소멸되어 버릴 것이고 나도 저들처럼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 태어나게 될지도 모른다.
  이러한 송이의 속마음을 눈치했는지 언니 김효임이 송이의 손을 찾아 꼭 
쥐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언젠가 송이 아씨도 천주학을 믿으세요. 믿으셔서 저처럼 영세를 
받으세요."
  송이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자 김효임이 웃으며 말을 맺었다.
  "송이 아씨도 언젠가는 믿게 되실 거예요."
  그날 이후부터 송이가 다니는 한의원에서는 믿을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났다. 하루아침에 장성집이 변해버린 것이다. 한순간의 뉘우침으로 
스스로 차디찬 방에서 식음을 전폐하고 고행하던 장성집이 영세를 받고 
나자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그는 자신이 갖고 있던 모든 재산을 가난한 이웃에 나눠주었다. 집에서 
모시고 있던 조상님의 신주들을 모조리 불살라버린 것이다. 그의 부모들이 
아들이 망령이 들었다고 간곡히 이를 만류하였으나 장성집은 
막무가내였다.
  자신이 가진 모는 재물을 가난한 이웃에게 나눠주었지만 장성집의 
얼굴에는 기쁨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그는 무엇인가에 홀려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완전히 변해버린 장성집의 모습이야말로 송이에게는 불가사의한 
것이었다. 어떻게 한순간 인간이 저처럼 탈바꿈할 수 있을 것인가. 저렇게 
변한 장성집의 모습이야말로 그가 가지고 있던 원래의 진면목이 
아니었을까. 인간이면 누구나 갖고 있는 본래의 참모습이 그가 지은 죄와 
업으로 인해 가려져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송이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마음이 천주학으로 이끌려가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언니 김효임이 '언젠가는 송이 아씨도 믿게 되실 거예요'하고 말하였던 
것은 송이의 마음속에서 싹트고 있는 신앙의 씨앗을 꿰뚫어 본 때문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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