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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호] 상도 4

by Casey,Riley 2023. 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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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도4
최인호
      
   차례
   제4부 계영배의 비밀
  제1장 누란지위
  제2장 계영배의 비밀
  제3장 석승 스님
  제4장 길 없는 길


   제1장 누란지위
  
  1
  을미년.
  34년이나 재위하던 순조가 물러나고, 헌종이 즉위한 지 그 원년이 되는 
1836년.
  마침내 우려했던 일이 일어난 것이다.
  임상옥은 하루아침에 벼슬에서 물러났을 뿐 아니라 관직에서 삭탈당하고 
감옥에 갇히는 비운을 맞게 되는 것이다.
  이때의 상황을 한말의 사학자이자 언론인이었던 문일평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임상옥은 일찍이 홍경래의 난 때 수성의 공과 또한 변무사 수원으로 
입연의 공이 있음으로 인해서 조정에서 오위장을 시키고 완영중군을 
주었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아니하였으며, 54세 때 특지로서 곽산군수가 
되매 혜정이 많았다 하고, 연거푸 귀성부사가 되었으나 정부의 논척으로 
인해 파귀한 이후로 드디어 사진(벼슬아치가 정해진 시간에 출근함을 
가리키는 말)에서 물러나 절의하였다---(중략)---이 무렵 임상옥의 
세로에는 풍파가 많아서 누란지위와도 같았다. 그것은 비변사들에 의해서 
임상옥의 가옥이 참람하다고 논척하여 임상옥은 일시적으로 착수하여 
생명의 위험이 있을 뻔하였던 것이다'
  참람.
  분수에 넘치어 함부로 하는 행동을 가리키는 말. 문일평은 임상옥이 
'알을 쌓아놓은 듯이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상태'의 누란지위에 빠진 것은 
임상옥의 가옥이 분수에 넘치어 참람하였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임상옥은 <가포집>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자서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축년에는 선고의 묘소 아래에 몇 개의 서까래를 엮어서 조석으로 
바라볼 수 있는 장소로 만들었다. 남들은 이것을 궁궐과 같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나 나는 그러한 이름을 감당할 수 없다. 집이 다 지어지매 집 
주위에 길게 담장을 두르니 굉장히 사치한 집이라고 하지만 동성이척의 
여러 친척들이 모두 거처하려면 마땅히 이 정도는 되어야 할 것이다. 

  문일평의 번역으로 된 임상옥의 자서전은 이처럼 많은 부분을 자신이 
아버지의 묘소를 삼봉산 아래에 이장하고 그 주위에 궁궐 같은 집을 지은 
사정에 대해 '여러 친척들이 모두 거처하려면 마땅히 이 정도는 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변명하고 있지만 실제로 임상옥이 지은 집은 99간의 대가였던 
것이다.
  옛말에 이르기를 '큰 집 짓고 망하지 않는 놈이 없다'고 하였다. 왕가도 
아닌 사가에서는 특히 아무리 권세가 높고 돈이 많아도 99간 이상은 지을 
수 없었다.
  대문 너비가 몇 자, 기둥 높이가 몇 자라는 엄격한 제한까지 있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사가에서는 삼문도 세우지 못하였고 두 다리 이층 기둥을 
못 세웠으며 부연(짧고 네모진 서까래)도 못 달았고 채색은 물론 단청도 
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또한 일상 생활의 용구에서도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금수저를 쓸 수 있는 신분과 은수저를 쓸 수 있는 사람이 정해져 
있었으며 머리에 쓰는 것도 뿔갓을 쓰는 사람과 대패랭이를 쓸 사람이 
따로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뿐인가.
  임상옥이 단지 가옥을 지었다 해서 일시적으로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일시는 생명의 위험까지 맞게 되는, 일찍이 석승 큰 스님이 예견했던 대로 
세 번째의 큰 위기를 맞게 되었던 것일까.
  그 보다도.
  임상옥이 암행어사인 비변사들의 눈총을 받고 감옥에 갇혔을 뿐 아니라 
멸문지화의 마지막 위기를 맞이하게 된 데에는 다른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송이 때문이었다.
  그렇다. 모든 마의 근원에는 반드시 여인이 존재하고 있었다. 욕망을 
상징하는 '큰 집'과 쾌락을 상징하는 여색이야말로 모든 화의 근원이며 
임상옥 역시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던 것이다.
  처음에 임상옥은 논척에 의해서 전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에도 자신의 
죄상을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임상옥은 한 달 이상 감옥에 갇혀 있었다. 감옥에 있는 모든 죄수들은 
가쇄라 하여 목에 씌우는 나무칼과 발목에 채우는 쇠사슬을 차고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오형 중의 하나인 곤장으로 볼기를 맞는 장형 이상의 
죄를 지은 죄인들이었다. 이러한 죄인들에게 자유를 구속하고, 고통을 주기 
위해 그러한 옥구들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감옥을 관장하는 형조에서는 매월 월령낭관이란 관리를 보내어 전옥에 
수감되어 있는 죄수를 정찰하였다. 
  임상옥도 예외는 아니었다.
  비록 발목에 채우는 쇠사슬에 묶이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목에는 
쇄항이라고 불리는 칼을 쓰고 있었다.
  원래 유생들이나 사죄를 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당상관 이상의 관리나 
공신들에게는 칼을 씌우지 않는 특권이 있었다. 임상옥도 마땅히 지방 
수령이었고 또한 홍경래의 난 때 수성의 공을 세운 공신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임상옥은 목에 나무칼을 쓰고 있는 중죄인이었던 것이다.
  감옥에 갇혀 있는 한 달 동안 임상옥은 자신이 다만 분에 넘친 대하를 
지은 지은 죄 이유하나만으로 목에 칼까지 쓰는 중죄인 취급을 받아야 
하는 것인지 그것이 못마땅하고 궁금했다. 
  그러나 무심코 감옥에서 심심풀이로 파자를 하다가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임상옥은 큰 집인 '옥' 자를 파자하면 '시지', 즉 '죽음에 
이른다'는 뜻임을 알게 된 것이다.
  이에 비하면 작은 집을 가리키는 '사' 자는 '인길' 즉 '사람이 길하다'는 
뜻임을 알게 되었으며, 또한 '사' 자는 '인설', 즉 '사람의 혀'를 가리킴이니 
작은 집이라도 지니고 있으면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구설수가 있게 
된다는 뜻을 깨닫게 된 것이다.
  전옥에 갇힌 지 한 달 만에 임상옥은 마침내 감옥에서 풀려났다.
  임상옥이 받은 형벌은 위리안치였다. 이 형벌은 고위 관원 등에 대한 
가벼운 유형이었는데 탱자나무 울타리로 가린 유배소에서 일정한 거리 
이상은 출입하지 못하는 유거형이었던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두문불출이라고 불렀다.
  비교적 가벼운 형벌이라고 부를 수 있어 처첩과 미혼 자녀들과 한 
집에서 동거할 수 있었으며 부모와 기혼 자녀들의 왕래 역시 허락되었던 
것이다.
  유배 기간 동안 형조에서는 보수인을 보내어 죄인의 행동을 일일이 
감시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임상옥이 받은 형벌은 죄상에 비해서는 가장 가벼운 
유형이었던 것이다.
  임상옥은 감옥에서 풀려나자마자 자신의 유배소에 국가에서 허락되는 
대로 아내 홍남순과 소실 송이를 데려다가 유형이 끝날 때까지 함께 살 
것을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고 나선 사람이 바로 박종일이었다.
  그는 임상옥이 전옥에 갇혀 있는 동안 사방팔방으로 임상옥의 구명을 
위해 뛰어다녔었다.
  워낙 눈치 빠르고 아는 사람이 많았던 박종일인지라 임상옥이 죄상에 
비해 가벼운 안치형을 받은 것은 전적으로 박종일의 구명운동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무렵 송이는 곽산에 아직 머무르고 있었는데 송이를 데려다 정식으로 
처와 첩이 함께 살게 하려 하자 박종일이 이를 제지하고 나서서 말하였다.
  "나으리"
  세월이 흘렀음일까 아니면 지위가 달라졌음일까.
  언제부터인가 박종일은 임상옥을 부를 때 형님이란 호칭 대신 
나으리라고 부르고 있었다.
  박종일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나으리께오서 목에 칼까지 받은 중죄인으로 전옥에 갇혀 계신 것이 
다만 큰 집을 지었다는 국법을 어긴 죄뿐인 줄만 알고 계시나이까"
  "그럼 무엇이냐"
  그렇지 않아도 임상옥은 그것이 궁금하였던 것이라 대뜸 물어 말하였다.
  "온 성내에 소문이 파다한 것을 어찌 나으리께서만 모르시나이까"
  "그 소문이 무엇이냐고 내가 묻지 않느냐"
  "나으리"
  박종일이 정색을 한 표정으로 임상옥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조정에서는 나으리의 새 집을 허물고 그곳 집터에 연못을 만드는 
파가저택의 형벌을 내리려 했나이다. 다행히 그 형벌은 면하였습니다만 
나으리께서는 전옥에 갇히신 것은 새 집 때문이 아니라, 실은 다른 
연유때문이나이다"
  파가저택.
  이는 새 집을 허물고 그곳 집터에 연못을 만드는 중벌로, 예로부터 
대역죄인에게나 행하는 형벌이었던 것이다. 그만큼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을 
허문다는 것은 그 사람의 종자를 끊어버리고 삼족을 멸하는 의미와 같은 
중벌이었던 것이다.
  "그 다른 연유가 무엇인지 내가 다시 묻지 않느냐"
  "나으리, 그 다른 연유는 바로 송이 아씨 때문이나이다"
  순간 임상옥은 소스라쳐 놀랐다. 자신익 감옥에 갇혀서 중죄인이나 쓰는 
쇄항을 목에 두르고 있었던 이유가 다름 아닌 송이 때문이었다니, 그 
소문이 온 성문 안에 자신만 모르고 파다하게 퍼져 있다니.
  "송이라고 말하였느냐"
  임상옥의 질문에 박종일은 묵묵부답이었다.
  "내가 재차 묻지 아니하였느냐. 어찌 대답을 못하느냐"
  그제서야 박종일이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나으리. 나으리가 옥에 갇히신 것은 바로 송이 아씨 
때문이나이다"
  자신이 옥에 갇힌 이유가 송이 때문이라는 박종일의 말은 임상옥에게 
있어 청천벽력이었던 것이다.
  "나으리"
  박종일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송이 아씨가 태어날 때부터 관기의 딸로 태어나지 않음은 삼척동자도 
아는 것이나이다. 송이 아씨가 처음에는 관노였다가 관기가 되었음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나이다. 그뿐인가요, 나으리. 송이 아씨의 
생부가 평서대란 때 주모자로 능지처참되었던 대역죄인이었나이다. 
나으리께오서는 대역죄인의 따님을 작은 아씨로 맞아들이셨나이다"
  "그것이 도대체 무슨 죄란 말이더냐"
  임상옥이 물어 말하였다.
  "나으리. 송이 아씨의 생부가 누군지 정녕 모르셨단 말입니까"
  "누구냐. 송이의 생부가 누구더란 말이냐"
  "나으리"
  박종일이 임상옥의 눈을 정면으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송이 아씨의 생부는 이희저로서 바로 나으리의 죽마고우였나이다"
  임상옥은 내심 까무라칠 정도로 놀랐지만 곧 평상심을 되찾았다.
  "이희저와 나으리가 절친한 친구 사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이 
평안도에 한 사람도 없을 것이나이다. 그뿐이니까. 바로 이희저의 천거에 
의해서 나으리는 평서대란의 괴수였던 홍경래를 일년 가까이 서기로 두고 
그를 부리지 않으셨나이까"
  "그것이 무슨 잘못이란 말이냐. 나는 오히려 평서대란 때 수성의 공을 
세워 주상으로부터 특지까지 받은 사실을 자네 또한 알고 있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나으리. 만약에 나으리께오서 홍경래의 난 때 은공을 
세우지 못하였다면 이번에 적몰가산 당하고 집을 허물고 그 집터에 연못을 
만드는 형벌을 받으셨을 것이나이다"
  잠시 박종일은 말을 끊었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하시면 나으리께오서는 어찌하여 대역죄인 이희저의 시신을 
수습해서 아무도 모르게 그의 고향에 묻어주셨나이까. 대역죄인의 시신을 
까마귀밥이 되지 않게 추스려서 장례를 치러주는 일도 중죄가 됨을 
모르셨나이까"
  귀신이 통곡할 노릇이었다.
  순간 임상옥은 모골이 송연하였다.
  물론 박종일의 말은 사실이었다.
  대역죄인으로 능지처참 당하여 죽은 시신을 추스려서 장례를 치러주는 
일은 국법을 거스르는 중죄였던 것이다.
  그러나 임상옥은 도저히 그 비밀이 어떻게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었는지 
그 연유를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그 비밀을 나는 사람은 자신과 그리고 그 당시의 평안감사였던 
정만석뿐이었다.
  물론, 이희저의 시신은 두 명의 하인을 시켜서 그의 고향인 가산으로 
운구되어 대령강의 신도에 옮겨져 매장되었는데 그렇다면 그 두 명의 
하인들의 입을 통하여 이 비밀이 밝혀진 것일까.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임상옥은 머리를 흔들었다.
  하인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고 있던 문외한들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박종일은 그 비밀의 전모를 제 손바닥 들여다보듯 상세히 알고 
있지 아니한가.
  "나으리"
  박종일이 임상옥의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보며 말하였다.
  "나으리께오서 대역죄인 이희저의 시신을 수습해서 매장을 하여 준 것을 
모두 비변사들이 알고 있었나이다. 이 모든 사실들을 비국에서는 낱낱이 
알고 있었나이다"
  "허지만"
  임상옥이 입을 열어 말하였다.
  "그것이 송이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냐. 네 말은 내가 하옥되었던 
것이 모두 송이 아씨 때문이라고 이르지 아니하였더냐"
  "나으리"
  기가 막히다는 듯이 박종일이 혀를 차며 말하였다.
  "송이 아씨가 바로 이희저의 친딸이 아니나이까. 조정에서는 송이 
아씨를 대역죄인의 딸이라 하여서 관노로 비적에 떨어뜨렸나이다. 
이를테면 조정에서는 송이 아씨를 역신의 가족이라 하여 노비로 삼은 
것이었나이다. 그런데 나으리께오서 송이 아씨를 소실로 삼으심으로 송이 
아씨를 면천시켜 천민에서 양민으로 속신시켜 주셨나이다. 나으리"
  박종일이 간곡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옛 조정에서는 인목대비의 친정 어머니를 제주감영의 노비로 
삼았사오니 아무도 이를 말리는 사람조차 없을 만큼 국법은 
엄중하였나이다. 하물며 대비마마의 친어머니를 노비로 삼았사온데 
대역죄인의 딸을 소실로 삼아 면천시켜 양민으로 만들어 준 것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었나이다"
  따지고 보면 박종일의 말은 구구절절이 옳은 말이었다.
  "이제서야 나으리"
  모든 말을 마치고 나서 박종일이 임상옥에게 다짐하며 물었다. 
  "나으리께오서 감옥에 갇히셨던 진짜의 이유가 이제 짐작이 되시나이까, 
나으리. 나으리께오서 갇히셨던 것은 큰 집을 지었기 때문보다는 이렇듯 
송이 아씨 때문이라는 사실이 이제 짐작이 가시나이까"
  박종일의 말을 통해 임상옥은 그제서야 자신이 전옥에 갇혔던 진짜 
이유를 알게 된 것이다.
  임상옥은 기가 막혀 묵묵부답이었다.
  이러한 임상옥의 속마음을 알아차린 듯 박종일이 임상옥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꺼냈다.
  "그러하니 나으리. 당분간 배소에서 근신하소서. 나으리의 
일거수일투족을 보수인들이 낱낱이 감시하고 이를 낭관에게 일일이 
보고하고 있는 이때 아무리 나으리께오서 처첩은 물론 미혼 자녀들까지 한 
집에 살 수 있는 안치형을 받았다 하더라도 당장에 송이 아씨를 데려다가 
유배지에서 함께 사시는 것은 섶을 지고 불 속에 뛰어드는 무모한 짓이 
아닐 수 없나이다"
  박종일의 충고는 지극히 옳은 말이었다.
  "그러하오니 나으리"
  박종일은 말을 맺었다.
  "당분간 참고 기다리소서. 신이 보기에는 나으리의 유거형은 곧 끝이 
나실 것이나이다. 이 유거형이 끝날 때까지만 기다리소서. 송이 아씨를 
보고 싶다 하시더라도 유배 기간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소서"
  

  2

  이무렵.
  국가는 어지럽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허다한 재난과 재해가 계속 몰아 
닥치고 있었다. 대기근, 전염병, 화재, 대홍수 등의 천재지변으로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순조의 말년인 1834년 1월 한양에서는 3영의 
장졸들이 치운 길가의 시체만 하더라도 1,005구, 해골이 816개였다고 하니 
그가 전국에서 입은 인명 피해만 해도 수만 명이 넘었을 것이다.
  더욱이 순조가 승하하고 8세의 왕세손 환에게 왕위를 물려주자 왕권은 
더욱 쇠미해지고 백성의 고난은 더욱 가중되던 난세 중의 난세였던 
것이었다.
  그러나 임상옥이 머물고 있는 의주는 그 극심한 천재지변에도 임상옥이 
내놓은 곡식과 의연금으로 굶어죽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으며, 때문에 
임상옥이 비록 죄인의 몸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민심은 모두 임상옥을 
하늘처럼 우러르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는 임상옥의 공덕비를 세우려 까지 하였으나 임상옥이 극구 
만류하여 이를 무산시킨 것을 보면 이때 임상옥이 처했던 상황을 미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임상옥은 모든 것이 즐겁지 않았다.
  앉으나 서나, 자나 깨나 임상옥은 오직 한 사람, 송이에 대한 그리움으로 
오매불망이었던 것이다.
  어느덧 봄이 지나고 여름이 접어들고 있었다. 꽃이 다투어 피고 만산은 
우거졌건만 임상옥의 마음은 적적할 뿐이었다.
  보는 것이 다 송이 모습 뿐이요, 들리는 소리마다 송이의 목소리였다. 문 
밖으로는 출입할 수 없는 두문불출의 유형이었으므로 임상옥은 마당에 
서서 울타리 곁에 핀 꽃을 쳐다보며 그 냄새를 맡아보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임상옥은 송이가 사무치도록 그리웠다. 송이의 몸에서 나던 향기가 
그리워서 임상옥은 몸을 떨었다.
  나으리.
  꽃향기를 맡을 때면 임상옥은 첫날밤 임상옥의 품에 안기어 속삭이던 
송이의 목소리가 떠오르곤 하였다.
  '살아서는 같이 늙고 죽어서는 한 구덩이에 함께 묻히겠나이다. 믿을 수 
없다 여기신다면 저 밝은 태양으로 맹세하겠나이다'
  하늘에서 타오르는 태양으로 사랑을 맹세하였던 송이의 목소리.
  살아서는 비록 헤어져 살지라도 죽어서는 한 구덩이에 함께 묻혀서 
해로동혈하겠다던 송이의 목소리. 그 송이가 그리워서 임상옥은 견딜 수가 
없었다.
  마침내 임상옥은 은근히 박종일을 불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보게. 감시인에게 뇌물을 주고 잠깐이라도 나갔다 오면 안되겠나. 
하루만이라도 나갔다 오면 안되겠나"
  "어딜 가시려고 하시나이까"
  냉정한 표정으로 박종일이 말했다.'
  "송이 아씨를 만나시기 위해 그러시나이까"
  "이보게. 처와 첩을 거느리고 함께 살아도 좋다고 국법도 정하고 있지 
아니한가. 그렇다면 단 하룻밤이라도 만나서 회포를 푸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아니되옵니다, 나으리"
  박종일은 한마디로 거절했다.
  "그렇게 하신다면 다된 밥에 재를 뿌리는 형국과 마찬가지이나이다. 
참으시오소서, 나으리. 이제 길어 봤자 여름 지나고, 가을이 찾아오면 
형기가 끝날 것이나이다"
  할 수 없이 물러서며 임상옥이 말을 바꾸었다.
  "한 가지 부탁이 있네"
  "그것이 무엇이나이까"
  "자네가 나 대신 곽산으로 가서 송이 아씨를 만나고 오시게나. 만나서 
살아갈 수 있는 재물을 충분히 건네어 주고 그간의 사정과 경위를 충분히 
설명해 주고 이곳의 안부를 전하여 주고 오시게나"
  박종일은 차마 임상옥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 즉시 박종일은 
송이가 살고 있는 곽산으로 출발했다.
  임상옥은 어린아이처럼 박종일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해거름이면 
마당에 나아가서 울타리 너머를 기웃거리며 행여 박종일이 돌아올까를 
살펴보곤 했었다.
  이틀 뒤.
  해질 무렵에 박종일은 곽산에서 돌아왔는데 그는 임상옥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물건 하나를 주었다.
  그것은 부채였다.
  그 부채를 보자 임상옥은 4년 전에 있었던 단오날을 떠올렸다. 그날 
곽산의 북쪽 삼장천에서 단오놀이를 하다가 임상옥이 고려 때의 명신 
김극기의 시를 읊고 그 시의 한 구절을 역하라고 문제를 내었던 적이 
있었다.
  아무도 그 시를 차마 번역치 못하고 있을 때 한갓 기생에 불과하던 
송이가 나서서 이를 번역하고 그 대가로 주었던 단오선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 단오부채는 임상옥과 송이 사이에 오고 간 최초의 정표였던 
것이다.
  "나으리"
  박종일은 다만 이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아씨가 나으리에게 이 부채로 더운 여름을 시원하게 보내시라고 
말씀하셨나이다"
  특별히 대나무 생산지인 전주에서 붉은 색의 주사로 물감 들인 
단오부채였다.
  임상옥은 말없이 그 부채를 펼쳐 보았다. 그 부채 위에는 송이의 
글씨임이 분명한 필체의 한시가 씌어 있었다.

  노란 구름 성 언저리에 까마귀가 깃들어 날아와(황운성변오욕서)
  까악까악 가지 위에서 우는구나(귀비아아지상제)

  베틀 위의 비단 짜는 진천 고을 아낙네는(기중직금천녀)
  푸른 비단 연기 같은 창 너머에서 쫑알거리네(벽사여연격창어)

  북 멈추고 멍하니 먼 곳의 임을 생각하고는(정사창연억원인)
  빈 방에 혼자 자려 하니 눈물이 비같이 흐른다(독숙공방루여우)

  이 노래는 당나라 시성인 이백이 지은 명시로 제목은 '까마귀가 우는 
밤'이다. '오야제'란 송나라의 시인 유의경이 지은 연가로서 이를 악부에서 
노래로 만들어 대유행을 시켰는데 이백이 제목을 빌려와 남녀간의 사랑을 
새로 노래한 연시였던 것이다.
  송이는 이백의 연시를 빌려와 이를 단오부채 위에 써 보냄으로써 먼 
곳이 있는 임상옥에게 자신의 사랑을 대신 고백하였던 것이다.
  이 시는 <진서> '열녀전'에 나오는 당대의 문장가요, 미인이었던 소혜의 
마음을 노래하고 있다.
  그녀의 남편은 진천에서 지방장관으로 있다가 죄를 범하고 유사로 
유배당하였다. 이때 소혜는 비단에 840자의 빙빙 돌아가며 읽은 시인 
화문시를 무늬 놓아 짜서 남편에게 보냈던 것이다.
  그 내용이 하도 애절해서 남편이 아내를 자신의 유형지로 불러 함께 
살았던 사연을 당나라의 시성 이백이 남녀간의 사랑 노래로 이 연시를 
새로 지었던 것이다.
  임상옥은 송이가 쓴 부채 위의 연가를 읽어내리자 가슴이 에이는 것 
같았다.
  특히 '빈방에 홀로 자려 하니 눈물이 비같이 흐른다'라는 마지막 
문장에서는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임상옥은 굳이 이백의 '오야제'를 써 보낸 송이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소혜가 비단에 화문시를 무늬 놓아 짜서 사랑하는 남편에게 보냄으로써 
그 애절한 내용을 보고 남편이 소혜를 유배지로 불러 함께 살았듯이 먼 
곳에 있는 임을 생각하면 눈물이 비처럼 흐르니 나도 소혜처럼 애절한 
사연을 부채 위에 새겨 보내나니 나를 그곳에 불러 함께 살게 해 달라는 
간절한 염원을 안고 있었던 것이었다.
  단오부채에 새겨진 송이가 써서 보낸 연시를 보자 임상옥은 더욱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생각하였다.
  모든 재산을 국가에서 압수하는 적몰가산을 당해 알거지가 된들 
어떠하겠는가.
  모든 집을 허물고 그 집터에 연못을 만드는 파기저택의 형벌을 받은들 
어떠하겠는가.
  모든 재산과 모든 명예를 다 잃고 모든 형벌을 받는다 하더라도 송이 
하나만을 내가 소유할 수 있다면 그것과 모두 맞바꾸어도 나는 아깝지 
않을 것이다. 송이와 함께 살 수 있다면 나는 이 세상을 버린다 해도 이를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일찍이 부처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람들이 재물과 색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마치 칼날에 묻은 꿀을 
탐하는 것과 같다. 한 번 입에 댈 것도 못되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핥다가 
혀를 상한다. 정과 사랑은 어떠한 재앙도 꺼리지 않는다. 모든 욕망 가운데 
성욕보다 더한 것은 없다. 성욕의 크기는 한계가 없는 것이다. 다행히 
그것이 하나뿐이었기 망정이지 둘만 되었어도 부처가 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애욕을 지닌 사람은 마치 횃불을 들고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같아서 반드시 손을 태울 화를 입게 될 것이다"
  그렇다.
  일찍이 큰스님 석숭이 예언했던 대로 임상옥에게 세 번째 위기, 즉 
마지막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큰스님 석숭이 내린 비결, '정' 자로 멸문지화의 두 번째 위기를 벗어난 
임상옥에게 마침내 마지막 위기인 세 번째의 위기가 닥쳐온 것이었다.
  그것은 명예와 지위(권력), 재물의 욕망까지 벗어났던 임상옥이 받은 
최후의 유혹이었다.
  임상옥 최후의 유혹.
  그것이 바로 송이였던 것이다.
  부처의 말대로 '다행히 그것이 하나뿐이었기 망정이지. 둘만 되었어도 
부처가 될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라고 경책받은 애욕.
  그 애욕이 일찍이 석숭 스님이 예견하였던 임상옥의 마지막 유혹이었던 
것이다.
  산을 내려오던 날, 석숭 스님은 말없이 마시던 찻잔을 임상옥에게 
건네주지 않았던가.
  "가져라. 이 잔은 너에게 주는 선물이다"
  어떻게 하면 그 마지막 위기를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임상옥이 
물었을 때 석숭 스님은 그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대신 마시던 찻잔을 
임상옥에게 선물로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석숭 스님은 다음과 같이 
수수께끼의 말을 남겼다.
  "이 잔을 잘 갖고 있도록 하여라. 이 잔이 너의 마지막 위기를 잘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잔이 너를 전에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전무후무한 거부로 만들어 줄 것이다"
  그것이 바로 계영배였던 것이다.
  잔의 안쪽에 수수께끼의 여덟 글자가 새겨 있는 평범한 잔.
  계영기원 여이동사.
  임상옥은 이 계영배를 항상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언젠가 마지막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비기로서보다 큰스님 석숭의 마지막 
은물이었으므로.
  그러나 임상옥이 맞은 마지막 위기인 송이. 그 애욕의 덫을 이 평범한 
찻잔에 불과한 계영배가 벗어나게 해줄 것이라고 꿈에라도 생각하고 
있었을까.
  드디어 큰스님 석숭이 내린 마지막 위기를 물리쳐줄 비기, 계영배의 
수수께끼가 밝혀질 바로 그때가 다가온 것이었다.
  
  3
  
  그 무렵.
  국경지방의 방위태세를 순시하는 비변사 겸 임상옥의 유배상태를 
점검하는 낭관으로 조상영이 임상옥을 찾아온 것이다.
  조상영은 당대의 세도가였던 조만영의 인척지간으로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힘이 막강하였던 사람이었다.
  그 동안 34년에 걸친 순조의 재위 기간에는 김조순을 비롯하여 임상옥의 
배후에서 도와주었던 박종경이 천하의 세력을 양분하고 있었다.
  그러나 순조가 승하하기 전 왕위를 왕세손인 환에게 물려준 후 천하의 
권세는 새로운 사람에게 넘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잠깐 그 당시의 세도정치의 판도에 대해서 간단하게 
알아보기로 하자.
  원래 순조의 왕세자는 영이었다. 왕세자 영의 세자빈은 풍양조씨였던 
조만영의 딸이었다.
  조만영은 자신의 딸이 세자빈으로 정해지자 득세하기 시작해서 
이조판서와 어용대장을 거쳐서 순조의 왕비였던 순원왕후의 아버지로 
천하의 세도가였던 김조순과 세력을 다투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왕세자 영이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22세의 일기로 승하하자 다시 
순조가 친정하게 되었는데 이 무렵 권신 사이의 알력이 고질화되어 서로 
징토하므로 순조는 한탄하였다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근래에 와서 조선에 들끓는 물의는 탄인과 살인에 관한 것 뿐이요, 
정신으로서 나를 보필하려는 신하는 하나도 없고 나에게 주토만을 아뢰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결국 안동 김씨와 풍양조씨 간의 세력 다툼은 풍양조씨를 
대표하는 조만영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 무렵 김조순은 죽고 없었으며, 8세에 왕위에 오른 환이 
왕대비 순원왕후에게 수렴청정을 청하였기 때문이다.
  득, 안동김씨였던 조주순의 딸인 순원왕후는 자기 집안의 지나친 
권력독점을 어는 정도 견제하려는 생각으로 오히려 풍양조씨 편에 섰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왕위에 오른 허종의 외조부인 풍원부원군 조만영이 더욱 
득세하게 되었으며 마침내는 그의 동생이었던 조인영이 이조판서에 오르는 
등 천하의 세도는 모두 풍양조씨 일족으로 넘어가게 된 것이다.
  바로 이 무렵, 그 조만영의 인척이었던 조상영이 비변사로 파견되어 
임상옥이 사는 배소로 찾아온 것이다.
  거만하기가 이를 데 없는 조상영은 죄인들의 동정을 살피는 낭관의 
역할까지 겸하고 있었으므로 임상옥으로서는 죽느냐, 사느냐의 
생사가판이었던 것이다.
  "나으리"
  조상영이 임상옥을 방문한다는 말을 듣고 박종일이 나서서 말하였다.
  "반드시 비변사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할 것이나이다. 이번에 비변사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성공할 수 있다면 나으리께서는 당장에라도 죄인의 
몸을 벗어날 수 있으실 것이오나, 만에 하나 이번에 비변사의 눈밖에 
나시게 된다면 당분간은 유배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나이다"
  박종일의 말은 사실이었다.
  천하의 세도가인 풍양조씨의 일원으로서 조상영이 임상옥을 잘 보고 
그를 좋게 평가하여 형조에 보고를 올린다면 임상옥은 그 즉시 죄인의 
몸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나, 만약 조상영이 그를 나쁘게 평가하여 보고를 
올린다면 임상옥은 더욱 오랫동안 유배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조상영이 임상옥의 유배소를 방문한 것은 병신년 그해 9월 초 
이튿날이었다.
  임상옥이 그 날짜를 영원히 잊지 못하고 기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석숭 큰스님이 마지막 위기를 물리칠 비기로 물려주었던 계영배에 씌어져 
있던 수수께끼의 문장처럼 죽음을 맞이할 바로 그 날짜였기 때문이다.
  비변사인 조상영을 맞기 위해서 임상옥이 사는 배소는 분주하였다. 술을 
좋아한다는 그를 위해 성대한 주안상이 마련되었으며 또한 여색을 
좋아한다는 그를 위해 기생들마저 불러들였다.
  해질 무렵.
  조상영이 임상옥의 배소에 들렀는데 과연 첫인상이 거만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한마디로 돼지를 연상시킬 만큼 비대한 조상영은 앉자마자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기 시작하였으며 그리고 닥치는 대로 술을 마시기 시작하였다.
  술은 임상옥의 집에서 담근 가양주가 나왔으나 조상영은 대작하여 술을 
서로 주고받는 수작을 무시하고 자신이 따라서 자신이 마셨다. 자신의 
술잔에 자신이 따라서 마시는 주법은 상대방을 완전히 무시하는 행위였던 
것이다.
  조상영의 그런 태도는 임상옥을 전혀 인정하지 않겠다는 오만불손한 
태도였던 것이다.
  술상에서는 서로 잔에 술을 따라 돌리는 행배를 하고 권주잔을 반드시 
비우고 되돌려주는 반배를 해야 하는데 조상영은 권주잔을 받고서도 이를 
돌려주지 않았다. 이는 임상옥과 더불어 술잔을 나눌 수 없다는 무언 중의 
협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임상옥은 절대로 겉으로 이를 내색하지 않고 공손하게 예의를 
지키고 있었다.
  한참 술기운이 거나하게 올랐을 때였다.
  갑자기 조상영이 방 한구석에 세워둔 찬탁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저기 찬탁 위에 놓인 물건이 무엇인가"
  방 한구석에는 찬탁이 놓여 있었다. 삼층으로 되어 있는 찬탁의 맨 
윗칸에는 풍란이 흰 꽃을 피우고 놓여 있었다.
  "난이나이다"
  "그것말고 그 아래에 있는 물건 말일세"
  가운데 층에는 잔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바로 석숭 큰스님이 선물로 준 
계영배였던 것이다. 임상옥은 유배될 때 이 계영배도 가지고 온 것이다. 
임상옥은 평소에 계영배를 항상 손에 닿을 수 있고 눈에 잘 띄는 찬탁 
위에 올려놓고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었다.
  "그 물건은 잔이나이다"
  임상옥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였다. 그러나 조상영은 물러서질 않았다.
  "무엇이라고, 잔이라고. 그렇다면 술잔이 어찌하여 술상 위에 놓여 있지 
아니하고 찬탁 위에 놓여 있단 말이냐"
  "나으리"
  임상옥은 웃으며 말하였다.
  "좋은 물건이 아니고 그저 평범한 잔에 불과하나이다"
  "마찬가지 아니냐. 그저 평범한 잔에 불과하다면 어찌하여 그 잔이 찬장 
속에 들어 있지 아니하고 사랑방에 놓여 있을 수 있단 말이냐. 이리 한번 
가져와 보시게나"
  조상영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거만하게 말하였다. 하는 수 없이 임상옥은 
자리에서 일어나 찬탁 위에 놓인 두 손으로 들어 올렸다.
  임상옥은 두 손으로 잔을 조상영에게 바쳤으나 조상영은 한 손으로 이를 
받았다.
  그는 물끄러미 술잔을 들여다보고 나서 이렇게 말하였다.
  "자, 여기다 잔을 따르리다, 임공"
  조상영은 잔에 술을 따라 이를 임상옥에게 행배하였다. 권주잔은 가급적 
빠르게 비우고 빨리 돌려주는 것이 주법이었으므로 임상옥은 단숨에 
술잔을 비우고 잔에 가득 술을 따라 이를 조상영에게 내어밀었다. 이미 
조상영 앞에는 술잔이 놓여 있었다. 주불쌍배라 하여 자기 앞에 술잔을 둘 
이상 두지 않는 것이 예절이었으나 조상영은 제멋대로였다.
  마침 기생들의 가무가 시작되었다.
  조상영은 소문으로만 듣던 치마무검 춤이 시작되자 넋을 잃고 황홀하게 
이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한바탕 놀이가 끝나자 조상영은 임상옥이 올린 술잔을 들어올렸다. 한 
잔 마시려다 말고 조상영은 몹시 불쾌한 표정으로 말하였다.
  "이보시오, 임공. 나에게 무슨 유감이라도 있소이까"
  조상영은 붉으락푸르락하였다. 이를 본 임상옥은 당황하여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시나이까"
  "내가 이미 죽은 사람입니까. 내가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죽은 
제삿상 위에 올려진 위패입니까"
  "무슨 말씀이시온지"
  "내가 죽은 사람이 아니면 어찌하여 빈 잔을 내게 반배하셨나이까"
  "빈 잔이라니요"
  "빈 잔이 아니면 무엇이오. 한번 보시오"
  조상영은 계영배를 임상옥에게 내밀었다. 임상옥은 계영배를 
들여다보았다. 과연 조상영의 말대로 술잔은 텅 비어 있었다. 이럴 수가 
있는가. 임상옥은 믿을 수가 없어서 주위를 살펴 보았다. 혹시 조상영이 
기생들의 가무를 바라보면서 앉은자리에서 덩실덩실 춤까지 추었으므로 그 
틈에 술상이 흔들려 잔 속에 들어있던 술이 모두 쏟아져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노파심으로 임상옥은 술상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술상은 깨끗하고 말짱하였다.
  그렇다면 옆자리에 앉은 기생들이 퇴주잔인 줄 알고 주인 몰래 마시지 
않았을까 하고 조상영 양옆에 앉은 기생들의 얼굴 표정을 살펴보았다.
  술 손님이 워낙 거나하게 취해버리면 눈치 빠른 기생들은 슬그머니 
술잔에 담긴 술을 쏟아버리거나 자신이 마시는 경우가 간혹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느 안전이라고 워낙 오만불손한 
조상영의 비위를 건드릴 만한 기생은 없을 것이 분명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임상옥은 생각하였다.
  조상영이 술잔에 담긴 술을 담숨에 들이키고 나서 일부러 시비를 걸고 
있는 것이 아닐까.
  "어쨌든 좋소"
  조상영은 계영배에 술을 가득 따르면서 말하였다.
  "귀신이 마셨든, 아니면 저승사자가 마셨든 마신 것은 마신 것이니 내가 
대신 벌주를 내리겠소"
  술자리에서 주도에 어긋난 행동을 하거나 주령을 어긴 사람에게 벌배라 
하여서 연거푸 석 잔을 마시게 하는 주법이 있었다.
  "신이 잘못하였으니 벌주를 받겠습니다"
  조상영은 잔에 술을 가득 따라 연거푸 석 잔을 내렸다. 임상옥은 받는 
즉시 잔을 비웠다. 석 잔을 모두 마시고 나서 임상옥은 잔에 술을 가득 
따르며 말하였다.
  "분명히 신이 술을 가득 따랐나이다. 이를 분명히 눈으로 직접 
보셨나이다"
  "여부가 있겠소, 임공"
  술잔을 받으며 조상영은 너털웃음을 웃었다. 또다시 기생들의 가무가 
시작되었는데 조상영은 기생들의 춤에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주색을 
좋아하는 조상영은 기생들의 자태에 혼이 빠진 것이다.
  한바탕 춤이 끝나자 다시 술잔이 돌아가기 시작하였는데 순간 조상영이 
소리 높여 말하였다.
  "도대체 이 무슨 해괴한 일이란 말인가"
  조상영은 벌떡 술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또다시 술잔이 깨끗하게 비어 있지 않은가"
  조상영은 차마 임상옥에게 핑계를 댈 수가 없었다. 분명히 잔에 가득 
술을 따르는 것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까지 하였으므로 깨끗하게 비어 있는 
술잔이 임상옥 탓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조상영은 잔을 들어 술잔의 안 부분을 세심하게 살펴보았다. 혹시 
어딘가 금이 가 그곳을 통해 술이 새어나간 것이 아닐까 하고 살펴보았다. 
그러나 술잔은 어느 한 곳도 파손되어 있지 않고 온전하였다.
  "이제보니 이 자리에 술에 걸신들린 마귀가 있음이 분명하렷다"
  조상영은 옆자리에 앉은 기생을 가리키며 물어 말하였다.
  "네 년이냐. 네 년이 나 모르게 이 잔에 담겨 있는 술을 마셔버렸단 
말이냐"
  "나으리"
  기생은 천부당만부당하다는 표정으로 펄쩍 뛰며 말하였다.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나으리의 술잔을 넘보겠나이까"
  "네 말이 사실이라면 이거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 아니겠느냐"
  순간 임상옥의 머리 속으로 무엇인가 번개처럼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이 잔은 큰스님 석숭이 마지막 선물로 준 신묘한 물건인 것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이 잔에는 신통력이 깃들여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큰스님이 주신 이 잔이야말로 단순한 술잔이 아니라 어쩌면 신기의 
잔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임상옥은 뭔가 짚히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술잔의 안쪽에 새겨진 여덟 개의 수수께끼 문자였다.
  가득 채워 마시지 말기를 바라며 너와 함께 죽기를 원한다는 여덟 글자 
중에서 네 글자는 난해하지만 앞의 네 글자는 쉽게 그 뜻을 헤아릴 수 
있지 아니한가.
  '계영기원', 즉 '가득 채워 마시지 말기 바란다'는 것이 그 글자의 뜻이고 
보면, 이 잔은 계영배, 즉 가득 채우는 것을 경계하는 잔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이 잔에 무엇인가 가득 채우면 뭔가 이상한 일이 생겨나는 
마법의 술잔이 아닐 것인가.
  임상옥은 생각했다.
  술잔에 넘치도록 술을 따르지 않고 7부 정도만 채운다면 술 잔 속의 
술은 사라지지 않을지도 모를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임상옥은 호기심이 발동했다.
  "신이 술잔을 다시 따라 올리겠나이다"
  임상옥은 잔을 받아들고 이번에는 술잔이 넘치도록 가득 술을 따르지 
않았다. 술잔의 7부 정도만을 채울 만큼 술을 따르고 나서 술잔을 
조상영에게 행배하였다. 조상영은 거들먹거리며 술잔을 받아놓고 나서 
다시 딴청을 부렸다.
  옆에 앉은 기생들과 한바탕 걸판진 농지거리를 마친 조상영이 술잔을 
들었는데 이번에는 임상옥이 예측하였던 대로 술이 없어지지 아니하고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닌가.
  조상영은 술을 단숨에 비우고 나서 임상옥에게 말하였다.
  "이보시오, 임공"
  술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던 임상옥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말, 말씀하십시오"
  "옛말에 이르기를 계집은 품어야 맛이고 잔은 채워야 맛이라 
하였소이다"
  "그 말이 맞습니다"
  잠자코 있던 박종일이 무릎을 치면서 말을 받았다.
  "나으리, 계집은 품어야 맛이고 잔은 채워야 맛이나이다. 말씀만 
하십시오, 나으리. 어느 기생이 마음에 드시오니까. 원하시는 기생이 
있으시면 말씀만 하십시오. 신이 책임지고 수청을 들이겠나니다"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네"
  조상영은 빈 잔을 치켜세워 들고나서 이렇게 말하였다.
  "어찌하여 잔을 가득 채우지 않으시고 약간만 채워 내게 행배하셨는가. 
말씀해 보시게나. 임공"
  가득 채우지 않고 잔을 건네어 준 임상옥을 힐책하고 있었다.
  조상영은 이렇게 다시 말하였다.
  "아무래도 날이 밝으면 닭을 빌려 타고 차계기환하여야 하겠네"
  조상영의 말에는 언중유골이 있었다.
  '차계기환'이란 말은 문자 그대로 '닭을 빌려 타고 돌아간다'는 뜻으로 
조선 성종 때의 문신 서거정이 엮은 <태평한화골계전>에 나오는 
설화이다. 시중에 떠도는 우스갯소리를 엮은 이 책에는 친구의 박대를 
우스갯말로 꼬집은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김 선생이란 사람이 어느 날 친구의 집을 방문하였다가 친구가 그를 
반겨 맞으며 술을 대접하는데 안주는 오직 채소뿐이었다. 친구가 먼저 
이렇게 사과하여 술을 권하였다.
  "형편이 어렵고 시장은 또 멀어서 대접할 것이라고는 오직 담백한 
채소뿐이네. 이거 대접이 형편없어 미안하네"
  김 선생도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넉넉지 못한 형편은 잘 알고 있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득 뜰을 보니 여러 마리의 닭이 모여 
여기저기 모이를 쪼아먹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다 말고 김 선생이 
헛기침을 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대장부가 어찌 천금을 아끼겠는가. 마당에 내가 타고 온 말을 잡아서 
술안주로 삼읍시다"
  느닷없는 이 말에 주인인 친구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말하였다.
  "말을 잡으면 무엇을 타고 돌아간단 말인가"
  그러자 김 선생은 짐짓 이렇게 말하였다.
  "그야 닭을 빌려 타고 가면 되지"
  그제서야 김 선생의 말 뜻을 알아챈 친구는 크게 웃고 곧 뜰에 있는 닭 
한 마리를 잡아서 대접하였던 것이다.
  '닭을 빌려 타고 돌아간다'는 '차계기환'은 이 설화집에 나오는 유명한 
이야기로 손님을 박대하는 것을 빗대어 빈정대는 말투였던 것이다.
  "이보게"
  조상영은 임상옥의 옆에 앉은 박종일을 쳐다보면서 말하였다.
  "마구간에 가면 내가 타고 온 말 한 마리가 매어 있을걸세. 사내 
대장부가 어찌 천금을 아끼겠는가. 마땅히 내가 타고 온 말의 모가지를 
베어 술안주로 삼는 것이 어떠하시겠는가"
  조상영은 '닭을 빌려 돌아간다'는 고사를 인용함으로써 천하의 거부 
임상옥을 정면으로 조롱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으리"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박종일이 머리를 조아리며 물어 말하였다.
  "나으리의 말을 잡아 안주를 삼아서야 되겠습니까. 마땅히 닭을 잡아 
안주를 대접해 드려야지요. 하오나 나으리. 어찌하면 마음이 
풀리시겠나이까"
  그러자 예의 시건방진 표정으로 조상영이 말을 받았다.
  "계집은 품어야 맛이고 술잔은 채워야 맛이라고 하였는데 어찌하여 
임공께서는 잔을 가득 채우지 아니하고 약간만 채워 내게 행배하셨는가. 
이야말로 멀리서 찾아온 친구를 박대한 꼴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으리"
  박종일이 재빠르게 계영배를 들어올리면서 말하였다.
  "신이 한 잔 따라 올리겠나이다"
  박종일은 잔에 술이 넘치도록 가득 따랐다. 그리고 두 손으로 공손히 
조상영에게 내어밀었다. 조상영은 마지못한 표정으로 술잔을 받았다.
  받은 술잔을 그는 술상 위에 내려놓은 후에 말을 이었다.
  "가득 채운 술잔을 받았으니 이제 닭을 빌려 타고 돌아갈 필요도 없고, 
마구간에 새워둔 말의 모가지를 베어 안주를 삼을 필요도 없겠군"
  "여부가 있겠습니까, 나으리"
  박종일이 맞장구를 치면서 말을 받았다.
  "나으리께오서 어찌 닭을 빌려 타고 돌아갈 수 있으시겠습니까"
  조상영과 박종일의 대화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임상옥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하나, 잔에 담겨 있는 술만이 
임상옥의 유일한 관심 대상이었다.
  임상옥은 이미 두 차례의 술잔이 가득 채운 행주를 통해 이 잔에 술을 
가득 채우면 무슨 조화인지 술이 없어지고 술잔이 깨끗하게 비어버린다는 
믿기지 않는 사실을 어렴풋이 터득하고 있었다.
  자신이 주법을 무시하고 조상영에게 술잔을 올릴 때 가득 채우지 
아니하고 7부 정조만 채워 행배한 것도 그 때문이 아니었던가.
  술잔의 7부 정도만 시험삼아 채워 보았더니 그제서야 술은 없어지지 
아니하고 온전하지 아니하였던가.
  그런데 어떻게 해서든 임상옥에게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꼬투리를 
잡으려는 조상영은 기다렸다는 듯이 가득 채우지 않은 술잔을 빌미로 
시비를 걸어오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이를 까마득히 모르고 있는 박종일은 또다시 계영배에 술을 가득 
따라 조상영에게 바쳐 올린 것이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게 될지도 모른다.
  임상옥은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임상옥의 시선은 또 한 번 온통 이 잔에 
쏠려 있었다.
  아니나다를까.
  걱정했던 일이 눈앞에 일어난 것이다.
  '사라졌다. 술이 사라졌다'
  임상옥은 눈을 지긋이 감았다.
  그때였다. 임상옥이 예상한 대로 조상영은 흥분된 목소리로 소리쳐 
말하였다.
  "도대체 이 무슨 귀신이 곡할 일이란 말인가"
  잔을 쥔 조상영의 손이 눈에 띌 정도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아니, 술이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아니한가"
  조상영은 술상 위에 술잔을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았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박종일이 당황한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신이 분명히 넘치도록 술을 따른 것을 나으리께오서도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두 차례의 행배로 술잔이 혹시 깨어져 술이 새어나간 것이 아닐까 
확인까지 해보았으며 옆자리의 기생이 퇴주잔인 줄 알고 몰래 마시지 
않았음을 이미 확인된 일이었다.
  그러므로 세 번째 똑같은 일이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정말 해괴망칙한 일이었던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내가 지금 귀신에라도 홀리고 있단 말이냐"
  조상영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올 것이 왔구나, 하고 임상옥은 순간 생각을 하였다. 행여 하는 마음으로 
우려했던 것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나으리"
  당황한 박종일이 일어서서 조상영을 만류하여 말하였다.
  "나, 나으리. 고정하시옵소서. 신이 다시 술잔에 술을 따라 
올리겠나이다"
  박종일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조상영을 간신히 자리에 앉히곤 소리쳐 
말하였다.
  "뭣들을 하고 있느냐. 어서 풍악을 울리지 않고"
  파장이 되어버린 술좌석의 흥을 돋구기 위해 풍악을 우리도록 명령한 
다음 박종일은 다시 잔에 술을 따르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순간 조상영은 
뭔가 집히는 것이 있다는 듯 술잔을 채우는 박종일의 일거수일투족을 
면밀히 쳐다보며 말하였다. 
  "오냐"
  조상영은 입맛을 다시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내가 반드시 네 놈의 정체를 밝히고 말리라"
  조상영은 언제 취했었느냐는 듯 말짱한 정신으로 술을 따르는 박종일의 
태도를 낱낱이 지켜보며 말하였다.
  "나으리"
  가득 술을 채우고 나서 박종일이 말하였다.
  "분명 술을 가득 채웠나이다"
  "더 따르거라"
  분명히 술잔을 가득 채웠음에도 조상영은 재촉하였다. 박종일은 이미 
기득 채운 술잔 위에 더 술을 부어내렸다. 술좌석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조상영의 앞에 놓여 있는 잔에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악사들은 더 이상 풍악을 울리지 않았으며 기생들도 더 이상 춤을 
추지도, 노래를 부르지도 아니하였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 임상옥만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실로 숨막히는 순간이었다.
  그때였다.
  바로 그들의 눈앞에서 상상할 수 없는 신기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아주 조금씩 사라지고 있어 얼핏 보면 분간이 가지 않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술의 양은 눈에 띌 정도로 줄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누군가 
술잔에 들어 있는 술을 조금씩 마시고 있는 형상이었다.
  제삿상 위에 놓인 제물을 신명들이 받아 마시듯 술잔 속에 들어 있는 
술을 신명들이 흠양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마침내 조금씩 사라지던 술잔 속의 
술이 마침내 완전히 비어버렸다,
  그들은 그들의 눈으로 똑똑히 술잔 속에 들어 있던 술이 어딘가 금이 
가서 새어 나간 것이 아니고 기생이 퇴주잔인 줄 알고 몰래 마셔버린 것이 
아니라 제 스스로 사라져버리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던 것이다.
  완전히 술잔이 비자 이를 확인이라도 하듯 조상영이 술잔을 들어 거꾸로 
뒤집어 보았다. 한 방울의 술도 남아 있지 않은 깨끗한 빈 잔이었다.
  언제 술이 가득 들어 있었냐는 듯 술잔은 젖어 있지도 않았다.
  "좋소이다"
  조상영이 주위를 돌아보며 말하였다.
  "우리는 모두 술잔 속에 들어 있는 술이 없어지는 것을 우리의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였소. 내가 다시 신기한 마술을 보여 드리겠소"
  조상영은 임상옥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임공이 술을 따르시오. 임공이 술을 따른다면 술잔 속의 술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외다. 술을 따르시오"
  그제서야 임상옥은 감았던 눈을 다시 떴다.
  조상영도 이미 어느 정도 술잔의 신묘함에 대해서 눈치를 채고 있었던 
것이다.
  "어서 술을 따르시오, 임공"
  조상영은 임상옥에게 재촉하여 말하였다.
  임상옥은 물러설 수 없음을 알았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고 있음을 그는 느끼고 있었다.
  임상옥은 술병을 들어 잔에 술을 따르기 시작하였다. 이미 이 잔의 
신통력을 알고 있는 임상옥이었기에 그는 술잔의 7부 정도만 술을 채웠다.
  임상옥이 가득 채우지 않자 이를 지켜보던 조상영이 입을 열어 
말하였다.
  "어찌하여 술잔을 가득 채우지 않소이까"
  "나으리"
  임상옥이 대답하였다.
  "나으리께서 직접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술잔을 가득 채우면 술이 
없어지는 것을"
  조상영이 다시 물었다.
  "이 정도만 채우면 술이 없어지지 않을 것인가"
  "그러할 것이나이다"
  "좋소, 한 번 지켜볼 수밖에"
  조상영은 7부 정도만 채운 잔을 지켜보기 시작하였다. 이는 조상영뿐 
아니였다. 연회에 참석하였던 모든 악사와 모든 기생들도 감히 이 잔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임상옥의 말을 정확하였다.
  잔에 있던 술은 없어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충분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술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모든 것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진 셈이었다. 석숭 큰스님이 준 이 
잔이 이름 그대로 '가득 채우는 것을 경계하는 술잔'으로, 가득 채우면 제 
스스로 그 술이 없어져버리고 적당히 채워야만 온전히 남아 있는 신기임을 
분명하게 밝혀진 것이었다.
  "가득 채워라"
  이를 지켜보던 조상영이 소리높여 말하였다.
  "술잔을 가득 채우시오"
  "나으리"
  박종일이 조심스레 말하였다.
  "가득 채우면 술이 없어지는 것을 나으리께어서도 분명히 보시지 
않으셨나이까"
  "가득 채우지 않은 술잔이라면 나도 받지 않을 것이며, 가득 채우지 
않은 술이라면 나는 마시지 않을 것이오"
  그것은 일종의 오기였다.
  "누가 이기나 해봅시다. 얘들아, 술잔에 술을 가득 따르거라"
  조상영은 옆자리에 앉은 기생에게 말하였다. 기생은 다시 잔에 술을 
따르기 시작하였다.
  더욱 이상한 일이 생긴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기생은 잔에 술을 따랐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었다. 술 한 병이 다 
비도록 술을 따랐으나 술잔은 채워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술이 가득 들어 있는 술 한 병은 눈대중으로 어림잡아도 열 잔을 채울 
수 있을 만큼 많은 술이 들어 있기 마련인 것이다. 그러나 술 한 병이 다 
비도록 술을 따랐으나 술잔이 채워지기는커녕 술잔 바닥에만 간신히 고여 
있을 뿐이었다.
  "나으리"
  술잔을 채우던 기생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물러서며 말하였다.
  "이상하게도 술잔이 채워지지 않나이다"
  기생의 말은 사실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술은 없어져버리는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긴 했었지만 어쨌든 술잔은 가득 채울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의 경우는 전혀 달랐다.
  도저히 술잔을 채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마치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형상이었다.
  무서움에 질린 기생이 손을 떨며 물러섰다.
  "무엇을 하고 있느냐"
  이를 보던 조상영이 소리쳐 말하였다.
  "술이 떨어진 것을 보지 못하였느냐. 술을 더 가져오지 못하겠느냐"
  기생들은 다투어 술병을 더 가져왔다.
  "따르거라"
  새 술병이 오자 조상영이 술을 따르던 기생에게 명령하여 말하였다.
  "나으리"
  겁에 질린 기생은 두 손을 싹싹 빌면서 말하였다.
  "저는 무서워 도저히 술을 따르지 못하겠나이다"
  "좋다"
  갑자기 조상영이 술상을 내리치면서 말하였다.
  "누구든 이 술잔을 가득 채우는 사람이 있으면 내가 백 냥을 
하사하겠다"
  조상영이 호기롭게 말하자 돈이 탐난 기생들이 앞을 다투어 나서서 술을 
따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각자 술병을 들고 나서서 술을 따르기 
시작하였으나 그 어떤 술병도 술잔을 가득 채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좋다"
  지켜보던 조상영이 마침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직접 나섰다.
  "누가 이기나, 한 번 내 손으로 직접 따라 보겠다"
  성미가 급하고 난폭한 조상영이었으므로 양손에 술병을 들고 동시에 
술잔을 따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모두 소용이 없는 짓이었다. 아무리 
술병을 기울여 술을 따라도 술잔을 채워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조상영의 두 손에 들린 술병에서도 술이 떨어졌다.
  그러자 조상영은 묵묵히 술잔을 노려볼 뿐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
  "나으리"
  옆에 앉았던 기생이 조심스레 물었다.
  "술을 더 가져오라고 이를깝쇼"
  조상영은 머리를 흔들며 대답하였다.
  "내버려두어라"
  조상영은 자존심이 상해 있었다. 부어도 부어도 채워지지 않는 술잔의 
신묘함보다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당했다는 적개심으로 조상영은 
분기가 탱천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소가 장소인 만치 조상영은 간신히 
이를 악물고 이를 참아내고 있었다.
  그때였다.
  묵묵히 술잔을 내려보던 조상영은 술잔에서 무엇을 발견했는지 술잔을 
들어 가만히 눈앞에 대어 보았다.
  그제서야 조상영은 술잔 안쪽에 새겨진 글자를 발견했던 모양이었다. 
글자가 워낙 미세하고 작았으므로 조상영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술잔에 
새겨진 글자를 하나하나 읽어내리기 시작하였다.
  "계영기원이라"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계영기원이라면 술잔을 가득 채우지 말기를 바란다는 뜻이 아닌가"
  조상영은 완잔히 술이 깨어 있었다.
  그는 다시 새겨진 글자를 천천히 계속해서 읽어 보았다.
  "여이동사라"
  그는 다시 중얼거렸다.
  "여의동사라 하면 너와 함께 죽기를 원한다는 뜻인데, 그렇다면 
전체적으로는 이런 뜻이 되겠군"
  조상영은 순간 고개를 들어 똑바로 임상옥을 쏘아보았다.
  "결국 가득 채워 술을 마신다면 너와 함께 죽겠다는 뜻이 아닌가. 
여보시오, 임공. 이제 보니 이 술잔은 저주가 내린 물건이오. 대답해 
보시오, 임공. 임공이 나를 오라고 초대해서 이 술잔으로 술을 행배하였던 
것은 나를 죽이기 위해서 일부러 귀신의 힘을 빌려 저주가 내린 이 술잔을 
사용했던 것이 아니신가"
  말도 안되는 억지였다.
  찬탁 위에 가만히 놓여 있던 계영배를 술잔으로 사용하자고 먼저 제의 
했던 것은 조상영 자신이 아니었던가.
  조상영으로서는 여러 사람들 앞에서 당한 무안을 어떻게 해서라도 
임상옥에게 책임을 전가시켜 화풀이를 해야만 직성이 풀릴 판이었다.
  "대답해 보시오, 임공. 이 귀신 붙은 잔은 도대체 어디서 난 것이오"
  "그 잔은 귀신이 붙은 물건이 아니나이다"
  하는 수없이 임상옥이 입을 열어 변명하였다.
  "무엇이라고. 이 잔이 귀신 붙은 잔이 아니라고"
  순간 조상영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는 술상에 놓인 잔을 한 
손으로 쥐어들었다.
  "사람을 불러놓고 저주가 내린 잔으로 행배를 하다니. 이 잔이야말로 
급살을 내릴 잔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아, 아닙니다, 나으리"
  박종일이 황급히 일어서서 조상영을 달래기 위해 바짝 다가섰다. 
조상영이 소리를 외치며 잔을 힘껏 허공으로 치켜들었다.
  "비키시오. 이런 요망한 잔을 내가 가만히 내버려둘 수는 없소이다"
  조상영은 허공으로 치켜올린 잔을 순간 내던졌다. 마침 초가을이었지만 
더운 날씨였으므로 문을 활짝 열어놓고 연회를 벌이고 있었다.
  조상영이 내던진 잔은 다행히 사람을 피해 그대로 열린 창문을 통과하여 
마당으로 날아갔다.
  너무나 갑작스레 일어난 일이었으므로 사람들은 말릴 겨를도 없었다. 
그들은 마당으로 날아간 잔이 무엇인가 부딪혀 쨍그랑하는 소리와 함께 
깨어지는 파열음을 들었다.
  "난 가겠소. 더 이상 술자리에 앉아 있을 필요는 없을 터이니까"
  실로 무례한 일이었다.
  조상영은 자신과 함께 온 관원들을 대동하고 바람처럼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모든 것이 한꺼번에 벌어진 것이다. 그것은 연회가 아니라 
한바탕의 소동이었다. 아무리 무례한 조상영이었지만 임상옥과 박종일은 
문 밖까지 그를 전송하고 돌아왔다.
  파장이 난 술좌석은 처참한 전쟁터와 같았다.
  임상옥은 썰물이 빠져나간 듯한 살풍경한 모습과는 상관없이, 허리를 
굽혀 마당을 헤메기 시작하였다.
  "나으리"
  보다 못해 박종일이 물어 말하였다.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그러자 임상옥이 대답하였다.
  "좀 전에 던진 잔을 찾고 있네"
  박종일은 잔이 날라간 방향을 쫓아서 더듬거리며 찾고 있는 임상옥의 
모습을 쳐다보면서 순간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은 과연 제정신이 있는 사람일까
  조상영이라면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세도정치가인 조만영의 
친척으로서, 그뿐인가, 죄인의 몸이 된 임상옥에게 있어서는 생사여탈권을 
갖고 있는 낭관이 아닐 것인가. 형조에서는 파견된 조상영을 통해 죄인 
임상옥의 동태를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조상영이 임상옥에 대해 올린 
보고에 의해서 임상옥은 당장에라도 유배에서 풀려나기도 하고 아니면 더 
많은 시간을 유형지에서 보내야 하는 것이다.
  그런 막강한 힘을 가진 조상영의 비위를 거스르고 분기탱천하게 해서 
보낸 뒤끝이라 마음이 불안하고 심란한 판인데 그런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두운 정원에서 조상영이 내던진 술잔의 행방을 더듬어 찾고 있다니.
  "나으리"
  하는 수없이 박종일도 잔을 찾아 헤메면서 입을 열어 말하였다.
  "그 잔은 도대체 어디서 난 것입니까"
  박종일은 임상옥이 그 잔을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평범한 잔을 왜 그렇게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을까 늘 궁금하던 차에 
오늘에야 비로소 그 궁금증이 풀린 셈이다.
  그러나 임상옥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잔이 날아가 
무엇인가 부딪쳐서 쨍그렁 하고 깨어지는 소리까지 들었으므로, 마당에 
있는 정원석과 부딪쳤을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임상옥으로서도 오늘에야 석숭 큰스님이 주신 이 잔의 신묘함을 비로소 
알 수 있었던 것이다.
  큰스님은 어째서 이 잔을 마지막 위기를 물리칠 수 있는 비기로 전해 
주셨을까.
  임상옥은 어두운 정원을 더듬어 잔을 찾으며 생각하였다.
  가득 채우면 술잔의 술은 한 방울도 남지 않게 되며 7부 정도만 채우면 
잔의 술은 온전히 남아 있다.
  그뿐인가. 마침내 욕심을 부려 억지로라도 잔을 가득 채우려면 밑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술독째 가져와도 채울 수 없는 잔. 그처럼 신묘한 
잔을 석숭 큰스님은 어째서 내게 전해 주셨을까. 
  순간, 임상옥은 머리를 끄덕였다.
  큰스님이 내게 잔을 주신 것은 바로 '가진 것을 가득 채우려함은 그만 
그치는 것만 못하다'는 교훈을 일깨워 주시기 위함인 것이다.
  인간의 욕망이란 이 잔처럼 가득 채우려 하면 모든 것을 남기지 못하고 
탕진하게 되나 7부 정도만 채우려 하면 만족할 수 있으며 스스로 자족하는 
마음이야말로 자연의 도리임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었다.
  임상옥은 소리내어 중얼거렸다.
  내가 백간에 가까운 거옥을 지은 것도, 뒤늦게 상사에 빠져 송이와 
사랑타령을 벌이는 것도 어쩌면 내 욕망을 가득 채우려 함이 아니었을까. 
그 가득 채움을 경계하기 위해 큰스님 석숭은 바로 이잔 계영배를 전해 
주신 것이 아닐까.
  모든 것을 이룬 지금이야말로 물러갈 바로 그때임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큰스님은 이 계영배를 비기로 전해 주신 것이 아닐까.
  그때였다.
  임상옥과 더불어 술잔을 찾던 박종일이 소리쳐 말하였다.
  "나으리, 잔을 찾았나이다"
  잔이 날아간 방향과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 박종일은 두 손으로 잔을 
받쳐들고 있었다. 임상옥은 박종일의 곁으로 달려가 보았다.
  박종일의 손에 들린 잔은 한눈에도 보기 흉할 정도로 파손되어 있었다. 
힘껏 내던진 조상영의 손에서 날라간 술잔이 무엇인가에 부딪쳐 쨍그렁 
하는 소리를 낼 때 이미 한 쪽이 부서져나간 모양이었다. 임상옥이 
부서져나간 파편을 찾아보았으나 박살이 나 가루만 남았을 뿐 그나마 
술잔의 형태만이라도 남아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나으리"
  그러나 박종일은 무엇인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는 듯 눈짓으로 잔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술잔에 무엇이가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임상옥은 잔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무엇인가 붉은 빛깔이 깨어진 
잔에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임상옥은 그 붉은 빛깔의 정체가 무엇인가 
살펴보았다.
  깨어진 부분에서 붉은 빛깔의 액체가 천천히 흘러 떨어지자 임상옥은 
박종일의 손에 상처가 나서 피가 묻어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아니었다. 붉은 피는 분명히 잔의 깨어진 부분에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으리"
  떨리는 목소리로 박종일이 말하였다.
  "피는 아닌갑쇼, 나으리. 잔이 피를 흘리고 있나이다"
  그것은 분명히 붉은 피였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인간이 아닌 잔이 깨어져 나간 상처 부분에서 붉은 피를 흘리고 있는 
것이다.
  임상옥은 박종일에게 이 비밀을 절대로 발설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한 
다음 잔에 묻은 피를 정결하게 닦아 들고 방으로 돌아왔다.
  피는 더 이상 흘러내리지 않고 있었다.
  임상옥은 탁자 위에 깨어진 잔, 계영배를 올려놓고, 마치 살아 있는 석숭 
큰스님에게 행하듯 세 번 큰절을 하였다. 그리고 나서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하였다.
  "스님, 오늘에야 큰스님이 내려주신 계영배의 비의를 알게 되었나이다. 
스님께서 내려주신 계영배의 화두를 반드시 깨우쳐 하늘의 도리를 제가 
이루겠나이다. 스님, 부디 명철보신 하옵소서"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석숭 스님이 열반에 들었음을 임상옥은 짐작이나 
하였을까.
  계영배에 새겨진 '너와 함께 죽겠다'란 문장이 계영배와 함께 운명을 
같이 하겠다는 석숭의 예언임을 짐작이나 하였을까.
  깨어진 부분에서 흘러나온 피가 실은 석숭의 피였음을 짐작이나 
하였을까.
  그날이 바로 병신년 9월 초이튿날이었던 것이다.


   @[제2장 계영배의 비밀@]


   1
  
  1836년 병신년 그해 10월.
  마침내 임상옥은 안치형에서 벗어났다. 보수지가에서 유배해야 하는 
유거형에서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되었다. 
  일년도 채 못되어 유형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조상영이 형조에 
올린 보고서 때문이었다. 거만하기 짝이 없는 조상영이었으나, 어쨌든 
취중에 남의 집 가보를 집어던져 깨트린 실수를 저질렀으므로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임상옥에 대해 극히 우호적인 보고서를 올린 
것이다.
  어찌 보면 임상옥을 구해낸 것도 결국 계영배였던 것이다. 계영배가 
스스로 신통력을 부려 분기탱천한 조상영이 집어던져져 깨어짐으로써 
임상옥을 구해낸 셈이었다. 임상옥이 죄인의 몸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계영배의 살신성인 때문이었던 것이다.
  임상옥이 유형지에서 돌아와 자유의 몸이 된 후 첫 번째로 행한 것은 
행장을 차려 곧바로 길을 떠난 것이다.
  그는 잠시도 새 집에 거하지 않고 오직 하인 한 사람만을 데리고 길을 
떠났다.
  가족을 물론 박종일도 도대체 어디로 길을 떠나는가, 몹시 궁금해 
하였지만 임상옥은 일체 이에 대해 입을 열어 말하지 아니하였다.
  임상옥이 종자 하나만을 데리고 길을 떠났을 때 그의 몸 속에는 오직 
하나의 물건만이 소중히 간직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것이 바로 계영배였다.
  계영배는 이미 조상영의 손에 깨어졌으므로 더 이상 쓸모없는 물건이 
되어버렸지만 임상옥은 이를 소중하게 간직하고 여행을 떠났던 것이다.
  임상옥이 길을 떠나 찾아간 곳은 경기도 광주 지방이었다. 그곳은 
사옹원에서 설치한 관영 사기제조장이 있는 곳이다.
  사옹원이라면 임금의 식사와 대궐 안의 식사 공급에 관한 일을 맡아 
하는 관청으로 이들은 대궐에서 쓰는 모든 식기와 그릇들을 전국의 
자기소와 도기소에서 만들어 올리도록 임명해두고 있었는데, 특히 
관어용의 특상품들은 경기도 광주에 사옹원의 분원인 번조소를 설치하고, 
직접 국가에서 그릇을 만드는 일을 관장하고 총괄하였던 것이다.
  임상옥이 경기도 광주의 번조소를 찾아간 것은 그곳에서 계영배가 
만들어졌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계영배가 관요, 그 중에서도 특상품만을 만들어내는 광주요에서 
만들어진 자기라는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었던 것이다.
  임상옥은 계영배가 조상영에 의해서 깨어져 붉은 피를 흘리는 것을 본 
순간 이를 정결히 씻어 상 위에 올려두고 마치 살아 있는 큰스님 석숭에게 
행하듯 삼배를 올리고 나서 다음과 같이 맹세하였던 것이었다.
  "스님께서 내려주신 계영배이 화두를 반드시 깨우쳐 하늘의 도리를 제가 
이루겠나이다"
  큰스님 석숭과의 약속이었으므로 유형에서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되자마자 
그 누구에게도 행방을 알리지 않고 계영배가 만들어진 경기도 광주의 
번조소를 향해 길을 떠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광주의 번조소로 가서 계영배를 만든 사람이 누구이며, 어떤 사연에 
의해서 이 신묘한 잔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가. 또한 이 신묘한 술잔이 
어떤 경로에 의해서 석숭 스님에게까지 전해져 내려올 수 있었을까의 
수수께끼를 파헤칠 수 있다면 큰스님과의 약속대로 계영배의 화두를 
깨트릴 수 있을 것이 아니겠는가.
  그보다도.
  임상옥이 서둘러 길을 떠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보통 번조소에서는 해마다 임금이 쓰는 그릇인 어선을 비롯하여 왕궁 
소용의 일반 용기, 봉상사의 제기, 내의원의 제약용기, 왕가의 경사 때 
사용되는 특수 사기 등 만3천 개가 넘는 어기들을 상공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 전국의 명인들을 차출해서 해동기로부터 결빙기까지 작업을 계속하고 
있었다.
  임상옥이 자유의 몸이 된 것은 10월 초, 그러므로 시일을 차일피일 
미루다가는 어느덧 결빙기가 찾아와 분원은 해체되고 도공들도 뿔뿔이 
흩어질 때가 다가왔기 때문이다.
  결빙기가 오면 전국 각지에서 몰려들었던 도공들은 그 동안 
분원으로부터 받은 임금을 챙겨들고 자기들의 고향으로 흩어져 가기 
때문에 때를 놓치면 계영배의 비밀을 파헤칠 수 없었던 것이다.
  임상옥은 서둘러 경기도 광주에 도착하였다.
  경기도 광주에 설치되었던 관요는 대충 퇴촌면과 실촌면, 초월면, 
도척면, 경안면, 오포면 등 광주의 6개 면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이는 
10년을 주기로 번목을 위해서 수목이 무성한 곳을 찾아서 이동했기 
때문이다. 분원이 설치되어 가마를 굽기 위해서 수목을 채취한 곳은 숲이 
무성해질 때까지 비워두었다가 다음에 다시 그곳에 분원을 설치하여 
수목을 채취하는 것이 원칙이었던 것이다.
  임상옥이 광주에 찾아갔을 때는 경안천 근처 지금의 남종면 분원리에 
부분원이 살치되어 있었다.
  이 번조소에는 사옹원에서 파견된 봉사가 번조관으로 상주하고 있었다. 
봉사는 종8품에 해당하는 하급관리였으나 그는 사옹원에 소속된 도공들을 
관리하는 막강한 힘을 갖고 있었다.
  임상옥이 분원을 찾아가자 분원을 지키고 있던 번조관이 임상옥을 
맞이하였다. 그는 임상옥의 소문을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임상옥이 봉사에게 계영배를 보여주고 찾아온 목적을 말하였으나 봉사는 
난처한 얼굴로 말하였다.
  이미 전국에서 모여든 사기장들이 뿔뿔이 헤어져버렸다는 것이다. 아직 
결빙기가 다가오지는 않았지만 조정에서 필요한 어기들을 모두 제작하여 
상공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 필요가 없어 해산시켜버렸다는 것이다.
  임상옥은 실로 난감하였다.
  의주에서 경기도 광주까지 먼 길을 단숨에 달려왔으나 이미 관요지는 
파장되어버린 것이다.
  "하오나, 나으리"
  봉사는 허리를 조아리며 말하였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나이다"
  봉사는 귓속말로 말하였다.
  "퇴촌면에 가면 지씨라는 성을 가진 노인이 살고 있나이다. 이미 아흔 
살이 넘어 연로하여 오래 전부터 퇴촌에 움집을 짓고 살고 있는데 그 
영감을 찾아가면 아마도 모든 것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나이다"
  경기도 광주의 분원이라면 예로부터 사기그릇으로 유명한 곳. 그래서 
광주 본토의 사기라면 그 이름이 높았으며 품질도 뛰어났던 것이다. 
그것은 해마다 이 분원으로 몰려드는 도기공들의 솜씨가 뛰어났을 뿐 
아니라, 흙과 물 역시 다른 지방에 비해 탁월하였기 때문이다.
  "나으리"
  봉사가 덧붙여 말하였다.
  "지씨 성을 가진 그 노인은 육, 칠십 년 전부터 이 광주분원에서 가장 
유명한 도공 중의 한 사람으로 당할 사람이 없을 정도였나이다. 또한 이 
분원에 소속된 도공들이 모두 존경하는 사람으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이 일대에서는 살아 있는 역사라고 말을 할 수 있나이다. 한때는 
여기 광주 분원을 총감독했던 변수였지요. 나으리께오서 그 깨어진 
사기잔의 무엇을 알고 싶어서 이처럼 누추한 곳까지 찾아오셨는지 그 
연유는 알 수 없겠사오나 아마도 그 영감을 찾아가셔서 물으신다면 알고 
싶어하시는 모든 것을 얻어낼 수 있으실 것이나이다"
  임상옥은 봉사의 말을 좇기로 하였다. 그 이외엔 다른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봉사가 임상옥을 안내하였는데 그때가 이미 석양 무렵이었다. 노인이 
살고 있는 퇴촌으로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야 하였다.
  우산천에서 흘러 들어오는 물로 호수를 이룬 강 너머로 띠 모양의 
평야를 이루고 있는 벌판이 보였다.
  "나으리"
  사공이 배를 저어 강을 건너는 동안 봉사가 입을 열어 말하였다.
  "이곳이 퇴촌면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이 나라 개국공신인 조영무 
대감이 벼슬에서 물러나 이곳에서 거주하였기 때문이었나이다"
  조영무.
  조선 초의 개국공신이자 무신. 중국에서 귀화한 후예로서 이성계의 
사병이 되어 고려 말의 충신 정몽주를 격살한 사람 중의 하나인 것이다. 
  "조영무 대감의 묘가 아직도 퇴촌에 그대로 남아 있나이다"
  임상옥은 묵묵히 뱃전에 앉아서 주위의 경관을 쳐다보았다. 낮은 구릉을 
이루고 있는 언덕들 주위로 해협산, 앵자봉과 같은 산봉우리들이 병풍을 
이루고 있어 절경이었다. 잔잔한 강물만 바라보니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강물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또한 최항 대감의 묘소가 퇴촌에 남아 있고 서거정 대감이 쓴 신도비가 
함께 남아 있나이다"
  최항은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활약하였던 
학자였는데 서거정의 자부이기도 하였다. 서거정은 이 강물을 건너가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강가에서 빨래하는 저 새악시 얼굴이 꽃과 같은데,
  어릴 적부터 빨래하며 생활하였네.
  아침에 흰 발을 씻으니 눈빛 같고,
  저녁에 흰 팔을 씻으니 서릿발 같네.
  아침마다 저녁마다 씻고 또 씻으니,
  강물이 스스로 깨끗해짐에 마음으로 만족하리.
  휜 실을 내리니 빙사가 더 희고,
  밤마다 흰 달 아래 찬 물레를 돌리네.
  가는 비단을 짜 재단하여 문을 만드니
  교초(동해의 인어 비슷한 미인이 짜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비단)보다 
가늘고 월사보다 가볍네.
  강물이 맑고 또 잔잔함이여.
  날마다 눈을 내리어 쉴 때가 없어라.
  씻기를 끝내매 소담한 화장이 물 밑에 비치니,
  소아(월궁의 선녀)도 깨끗함을 사양하겠고
  강비(강의 선녀)도 부끄러워 하겠네.

  조선 초기 최대의 학자이자 시인이었던 서거정은 특히 이곳을 좋아하여 
자주 이 지방을 유랑하였으며 죽은 후에도 이곳에 묻혔는데 강가에서 
빨래하며 비단을 짜는 여인을 노래한 시는 다음과 같이 이어지고 있다.
 
  ...문득 미친 바람이 있어 천지가 어두우니
  티끌이 아득하여 갈 곳을 잃었네.
  허둥지둥 진흙물 가운데서 당황하니,
  옥질은 이미 잘못되어 옷도 검어졌구나.
  시누이 문에 나와 새악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데
  새악시는 빨래하기 왜 더딘고.
  새악시가 돌아오니 시누이는 손뼉치며 웃으며
  꼴불견하여 우리집 시가 아니라 하네.
  시누이 나이는 겨우 열세 살,
  이때에 철이 아직 덜 들었네.
  시누이야 시누이야, 새악시를 비웃지 마라.
  이 한을 뒷날 너 또한 알게 되리라.

  임상옥은 우쭐우쭐 춤추며 강을 건너가는 나룻배 위에 앉아서 묵묵히 
서거정의 옛 시를 떠올려 보았다.
  맑은 강가에서 비단실을 씻으며 빨래를 하고 있는 새악시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서거정은 그러나 마치 미친 바람처럼 몰아치는 세월에 그 아름답던 
새악시는 늙고 꼴불견이 될 것임을 암시한다. 그 모습을 보고 깔깔 웃는 
열세 살의 시누이. 지금 너는 비웃지만 여인으로서의 너의 일생도 바로 
그러하리라는 인생의 무상함을 우스꽝스러운 정경 묘사로 그려낸 서거정의 
천재적인 문재에 감탄하면서 임상옥은 강변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과연 강가에서는 여인들이 빨래를 하고 있었고, 서편 하늘에 물드는 
핏빛 낙조가 그대로 강물에 투영되어 강물이 핏물인지, 하늘이 핏빛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그러하면 강가의 여인들은 비단실에 낙조의 붉은 물을 들여 염색을 하고 
있는 것일까.
  옛부터 경기도 광주 땅은 좋은 쌀과 미인이 나는 곳으로 유명한 곳. 
서거정의 노래가 아니더라도 광주의 미인들은 서시보다 아름답고, 월궁의 
선녀인 소아보다 우아하고, 강의 선녀인 강비보다 예쁘다고 알려져 있다.
  나룻배 위에 앉아 있던 임상옥은 묵묵히 생각하였다. 계영배가 이곳 
광주 분원에서 만들어진 것이 분명하다면 이 계영배는 서거정이 
노래하였던 것처럼 그 아름다운 미인들과 무슨 상관이라도 있는 것일까.
  마침내 강을 건너 나룻배는 퇴촌 나루에 이르렀다.
  봉사를 앞세운 임상옥은 채마밭 사이로 난 오솔길을 따라 부지런히 
걸어가기 시작하였다.
  "나으리"
  앞서 걷던 봉사가 입을 열어 말하였다.
  "원래 이곳에는 도마리란 가마터가 있나이다. 고려시대 때엔 오히려 
이곳 일대에서 도자기 제조가 성행하였으나 근래에 들어서는 교통이 
불편하여 자연 미미하게 되었나이다. 하오나 지 노인은 줄곧 이곳에서 
가마터를 갖고 한겨울 동안 도자기를 굽고 있나이다. 성격이 괴팍하고 
까다로워서 어울리는 사람도 없고 한때 혼인을 하여서 자식도 있다는 말도 
있지만 본 사람도 없고, 지금은 혼자서 살고 있나이다. 가는 귀가 먹어서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사람들과 어울리지도 아니하고 혼자서만 살고 
있는데, 사람들은 아흔 살이 넘었다고 하지만 어떤 이들은 백 살이 
넘었다고도 말을 하고 있나이다"
  구릉을 넘어가자 붉은 색을 띤 노천요들이 그대로 드러나 보이고 
있었다. 그대로 노촌에 토기를 쌓아놓고, 그 주위에 나무를 쌓아 그릇을 
구워냈는데 자연 낮은 온도에서 구워낼 수밖에 없었으므로 산소공급이 
많아져서 토기 속의 철분이 산화되어 붉은 색을 띨 수밖에 없었다. 이런 
노천요들은 함부로 쓰는 막그릇을 만드는 곳이었고, 대부분 근처에 사는 
화전민들이 임시로 만든 노천가마였다.
  "하오나"
  이미 땅거미가 내린 어둑어둑한 오솔길을 앞서가며 봉사가 말을 이었다.
  "아직 근력은 청년 못지 않게 성성해서 만드는 그릇은 아직도 
최상품이나이다. 따라서 임금님께 올리는 어품은 모두 지 노인이 만들고 
또한 직접 관리감독하고 있나이다. 하오나, 성미가 까다로워서 한 번 싫은 
사람이면 대답은커녕 고개를 돌리고 쳐다보지도 아니하며, 자신이 만든 
그릇이라 할지라도 마음에 들지 아니하면 모두 깨뜨려버리고 비록 
나랏님께  바치는 특상품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아니하면 
절대로 내어놓지 않는 고집불통의 노인이나이다. 그리고 또한 알 수 없는 
것은..."
  봉사는 가던 길을 멈추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것으로 보아 그 노인의 
집이 가까워진 모양이었다.
  "절대로 자신이 만든 물건은 내다 팔지 않는다는 것이나이다. 대부분의 
사기장들은 자기의 임기가 끝나면 만든 그릇들을 지게에 지고 전국 
방방곡곡으로 흩어져 만든 그릇들을 팔아 그것으로 쌀도 사고, 불도 
때는데 지 노인은 지금껏 단 한 번도 가마터를 벗어나 본 적이 없으며 
또한 만든 그릇을 대처에 나가서 목돈을 마련한 적도 없나이다. 노인은 
다만 어용지기를 만든 품삯만으로 살아갈 뿐이나이다. 만약 노인이 돈을 
벌려 하였다면 아마도 벌써 천하의 거부가 되었을 것이나이다"
  마침내 울창한 숲이 나타났다. 그 동안 퇴촌에는 가마를 굽기 위해 
나무를 벌목하지 않아 자연 숲이 우거진 모양이었다. 
  그 숲 사이에 초라한 움집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이미 날은 어두워져 
사위를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캄캄하였는데 그 움집에서부터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지 노인이 출타중은 아닌 모양입니다"
  집에서 새어나오는 희미한 불빛을 보자 안심한 듯 봉사가 입을 열어 
말하였다. 움집에서부터 낯선 사람이 찾아오는 것을 경계하는 듯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노인장 계시오"
  봉사는 움집 앞에서 서서 소리쳐 말하였다. 지 노인이 가는 귀를 먹었기 
때문인 듯 필요 이상으로 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그러나 움집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봉사는 거리낌없이 방문을 열어 안을 확인하여 본 
후 말하였다.
  "없습니다, 나으리. 아마 지 노인이 가마터에 가 있을지도 모르겠나이다"
  봉사는 움집을 가로 돌아 집 뒤쪽으로 걸어갔다. 집 뒤쪽 굴뚝 가마는 
장작더미가 채곡채곡 쌓여 있었다. 아마도 가마에 사용하는 화목들인 
모양이었다.
  집 뒤로 돌아가자 후끈하는 화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언덕의 경사면을 
따라 길게 만들어진 등요의 가마가 보였다. 그 가마 속에서는 방금 불이 
타오르고 있었는지 가마벽 쪽에 나 있는 화창으로 넘실거리는 화염이 
보였다. 가마의 맨 위쪽에는 굴뚝이 나 있었는데 그 굴뚝에서부터 뜨거운 
열기가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노인장이 사기를 굽고 있는 모양입니다"
  혼잣말로 봉사는 중얼거렸다. 가마의 제일 아랫부분에는 아궁이가 
있었고 그 아궁이에서는 이글거리며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검은 그림자 
하나가 그 아궁이에 연신 장작더미를 날라 집어던져 넣고 있었다. 전부 
인근의 숲에서 채취한 소나무들이었다.
  "안녕하시오, 노인장"
  봉사는 아궁이에 장작을 집어던져 넣고 있는 검은 그림자를 향해 인사를 
하였다. 아궁이에서부터 타오르고 있는 붉은 불빛이 노인의 얼굴을 핥고 
있었다. 봉두난발한 머리칼과 가슴까지 내려오는 긴 수염을 기른 노인은 
산발한 머리카락 위에 댕기와 같은 붉은 천을 질끈 묶고 있었으며, 
화덕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로 얼굴이 붉게 익어 있었고 온몸에서는 
비오듯 땀이 흐르고 있었다.
  한마디로 노인장의 모습은 광인의 모습이었다.
  바지는 정강이까지 걷어올리고 있었고 허리는 굽어 있었으나 힘은 
장사인지 한 손으로 장작더미들을 날라다 연신 아궁이에 집어넣고는 
바람이 잘 통하도록 긴 부지깽이로 불구덩이를 이리저리 쑤시고 있었다.
  노인은 홀깃 인사를 한 봉사와 그 뒤를 따라온 임상옥과 종자를 
쳐다보았을 뿐 그저 그뿐이었다. 굳이 봉사의 설명이 아니더라도 괴팍한 
노인임이 분명하였다.
  "노인장"
  봉사는 들고 온 술병을 노인이 잘 볼 수 있도록 가마 곁에 내려놓으며 
소리쳐 말하였다.
  "좋은 술을 한 병 가져왔소. 출출한데 한 잔 드시고 일을 하시구려"
  봉사는 미리 임상옥에게 귀띔해주었다. 지 노인이 워낙 술을 좋아해서 
좋은 술을 가져가는 것만이 노인의 입을 열게 하는 유일한 방법임을. 
그래서 임상옥은 하인에게 술병을 한가득 지게에 지고 따라오도록 했던 
것이다.
  노인은 다시 흘깃 봉사가 가져온 술병을 보았으나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그러자 봉사가 가져온 커다란 술잔에 가득 술을 따라들고 
노인에게 올렸다.
  노인은 순간 그 술잔을 받아들었다. 그러나 마시지는 않았다. 노인은 
술잔을 들고 한참 봉사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홱- 하고 술잔을 던져버렸다. 
그리고 나서 불을 지피는 화장을 세워들고 말하였다.
  "가거라 네 이놈, 내 곁에 얼씬도 하지 말거라"
  봉사는 혼비백산하여 뒷걸음질쳐서 물러섰다. 우렁한 목소리였다. 실로 
노인의 목소리하고는 말할 수 없는 혼백이 깃든 목소리였다.
  이를 보던 임상옥이 머리 위에 쓴 갓을 벗고 그대로 아궁이 옆에 엎드려 
노인에게 큰 절을 올리기 시작하였다. 임상옥은 한 번, 두 번, 세 번을 
노인에게 절을 하였다.
  임상옥이 삼배를 올렸으나 노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노인은 
부지깽이로 장작을 이리저리 쑤시면서 아궁이의 불을 지피고 있을 
뿐이었다.
  임상옥은 조금 전 노인이 집어던진 술잔을 찾아들고 그 술잔에 술을 
따르기 시작하였다. 가득 따른 술잔을 임상옥이 두 손으로 바쳐 올렸다. 
노인은 이번에는 그 술을 버리지 아니하고 단숨에 술잔에 가득 들어 있는 
술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이로써 노인은 임상옥을 손님으로 
맞아들이겠다는 무언의 암시를 해보인 것이다.
  그 즉시 임상옥은 하인의 지게에 싣고 온 술병과 육포를 비롯한 안주를 
풀어놓도록 하였다. 임상옥은 지 노인이 장인으로서의 자존심이 대단한 
것을 꿰뚫어 보았던 것이다. 비록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천민의 도공이긴 
했지만, 예술가로서의 높은 긍지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명의의 자존심을 한갓 하급관리에 불과한 번조관이 짓밟은 
것이다. 지 노인이 봉사의 술잔을 받지 않고 던져버린 것은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 봉사의 무례함을 꾸짖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어둠이 내리자 상대적으로 달빛이 밝아졌다. 하늘에는 둥근 달이 공중에 
걸려 있는 구름 한 점 없는 투명한 달밤이었다. 임상옥이 삼배를 올린 
것처럼 술 석 잔을 연거푸 올리자 노인은 묵묵히 주면 주는 대로 마시고 
있었다. 마침내 술을 다 마시고 나서 지 노인의 입가와 수염에 묻은 술을 
손등으로 씻어내리며 말하였다.
  "이런 누추한 곳에 오실 손님이 아니신데 어인 일로 찾아오시었소"
  "노인장, 어른"
  임상옥이 예를 갖춰 대답하였다.
  "제가 노인장 어른을 찾아뵈온 것은 한 가지 물건 때문이나이다. 오래 
전 이곳 광주 분원에서 만들어진 잔 하나가 있었는데 이 잔을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싶으며, 또 그 잔을 만든 사람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는가를 
알고 싶어 찾아왔나이다. 다행히 노인장 어른께오서 수십년 동안이나 이 
분원에서 변수장으로 계시옵고, 오가는 장인들의 신상을 손바닥 알 듯 
자세히 알고 계신다는 말씀을 전해들었으므로 이처럼 염치를 불구하고 
찾아왔나이다"
  "그 물건이 무엇이고"
  노인은 임상옥을 쳐다보았다. 가는귀가 먹었다는 봉사의 말 때문에 
소리를 높이던 임상옥은 곧 그럴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되었다. 노인은 
사람의 말을 들어서 알기보다는 사람의 입을 보고 말을 정확하게 해독하고 
있었으므로.
  "잔이나이다"
  "잔이라고"
  임상옥이 대답하자 노이이 말을 받았다.
  "잔이라면 술잔인가 찻잔인가"
  "둘 다 쓰이지만 제가 보기에는 술잔이 듯 느껴지나이다"
  "그 물건이 어디 있는데"
  "제가 가져왔나이다"
  임상옥이 대답하였다. 임상옥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계영배를 몸 
속에서 꺼내들었다.
  노인은 임상옥의 행동을 낱낱이 지켜보고 있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노인의 눈은 노인의 눈이 아니었다. 노인의 눈빛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임상옥은 계영배를 꺼내들어 이를 노인에게 내밀었다.
  "이 잔이나이다"
  노인은 말없이 임상옥이 올린 잔을 받아들었다. 그는 계영배를 아궁이 
가까이 가져가 타오르는 불빛에 비춰 보았다.
  그때였다. 갑자기 계영배가 눈에 띌 정도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것은 
계영배가 흔들린 것이 아니라, 그 잔을 쥐고 있던 노인의 손이 와들와들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잔은, 이 잔은"
  지 노인은 온몸을 떨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는 마치 넋이 
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노인장, 어른"
  옆에서 지켜보던 임상옥이 긴장하며 노인을 불러보았다. 그러나 노인은 
여전히 몸을 떨고 있었다.
  "...무슨 일이나이까, 노인장 어른..."
  "이 잔이, 어째서 이렇게 깨어져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지 노인은 여전히 누구에게가 아닌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 잔이 깨어진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나이다. 원래는 깨어져 있었던 
잔이 아니었는데 얼마 전에 뜻하지 않은 변고로 잔이 깨어진 것이나이다"
  "마침내 올 것이... 왔군"
  지 노인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빈 술잔을 집어들었다. 임상옥이 술을 
따르자 지 노인은 몇 잔을 거푸 마셨다.
  "마침내 올 것이... 오고야 말았어"
  여전히 넋두리를 하듯 중얼거리는 노인에게 임상옥이 물어 말하였다.
  "노인장 어른께오서는 이 잔을 알고 계십니까"
  그러자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였다.
  "알다마다... "
  "그러하면 이 잔은 노인장께오서 만드셨습니까"
  지 노인은 깊은 상념에 잠긴 듯 아궁이에서 타오르는 불빛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노인은 깊은 생각에 잠겨 불 속에 장작더미를 집어넣는 것도, 
부지깽이를 쑤셔 불길을 일으키는 것도 잊어버린 사람처럼 보이고 있었다.
  "노인장 어른"
  임상옥은 소리를 높혔다.
  "그러하면 이 술잔은 어른께오서 만드셨습니까"
  그러자 노인은 임상옥을 쳐다보았다. 그는 떠듬떠듬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보시게. 이 잔은 사람이 만든 잔이 아니네. 이 잔은 신명님이 만드신 
신기일세"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의 말이었다.
  "하늘 아래, 이와 같은 신기를 만든 사람은 아마도 없을걸세"
  순간 임상옥은 생각하였다.
  이 노인은 계영배의 신통력을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가득 채우면 
어느새 한 방울의 술도 남아 있지 않고 7부 정도 채워야만 온전한 계영배.
  그뿐인가. 억지로 가득 채우려 하면 술독의 술은 물론 한강의 물을 전부 
쏟아 붓는다고 해도 채울 수 없는 술잔, 계영배의 신묘함을 노인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노인장 어른, 어른께오서는 이 분원에서 가장 뛰어난 명인이십니다. 
그런데도 어른께오서는 이 잔을 만들지 못하신단 말씀이시나이까"
  임상옥이 묻자 노인은 머리를 흔들며 대답하였다.
  "이보시게나, 이 잔에 비하면 나는 허드레 질그릇 항아리나 만들고 있는 
싸구려 사기장이라 할 수 있네"
  "하오나 노인장 어른께오서는 임금님의 어기를 만드는 분이 
아니시나이까"
  "물론 나는 나랏님의 어기를 만들고 있지. 그러나 이 물건은 나랏님의 
어기가 아니라, 천상의 신기일세. 이러한 신기는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신령님들이 만드는 것일세"
  "그러하면 노인장께오서는 이 신기를 만든 사람이 누군지 알고 
계십니까"
  임상옥이 조바심을 내며 묻자 잠시 노인은 말을 끊었다. 노인은 잠자코 
술을 마셨다.
  "알고 있지"
  긴 침묵 끝에 노인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 잔을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 나는 알고 있어"
   노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고 있었다. 감개가 무량한 목소리였다.
  "그 사람이 도대체 누구입니까"
  단도직입적으로 임상옥이 물었다. 그러자 지 노인은 임상옥의 질문에 
대답치 않고 잠자코 깨진 계영배에 자신의 술을 따랐다. 그러나 깨어진 
계영배는 이미 신통력을 잃고 있었을 뿐 아니라 반도 채울 수 없었다.
  "그럼, 보셨나. 보셨겠지"
  지 노인은 임상옥에게 말했다.
  "뭘 말씀이십니까"
  "이 잔의 신묘함을 보셨겠지. 보셨으니 이곳까지 찾아오셨겠지. 찾아와서 
나를 만나셨겠지. 나를 만나서 묻고 있겠지. 그렇지 않은가. 나는 이럴 줄 
알고 있었네. 언젠가는 이 잔이 이곳까지 제 발로 찾아오게 될 것을 알고 
있었어. 오늘이 바로 그날일세"
  지 노인은 물끄러미 임상옥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앞에 앉은 양반이 누구신지 모르겠사오만 이 잔의 행방을 찾아 
이곳까지 오셨다면 반드시 귀인임을 분명할 것이오. 귀인 중에도 하늘이 
내리신 천인임이 분명하오. 그러하시니 무엇이든 묻고 싶은 것이 있으면 
물으시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모두 말씀하여 드릴 것이오"
  깜박 잊었던 듯 노인은 장작을 아궁이에 집어넣었다. 그러자 잠시 
사그라들었던 불빛이 맹렬하게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노인장 어른"
  임상옥은 노인 옆에 바짝 다가앉으면서 말하였다.
  "제가 알고 싶은 것은 이 잔을 만든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나이다. 
그뿐 아니라 이 잔을 만든 사람이 어떻게 해서 어떤 사연으로 이 신기를 
만들게 되었는지 그 사연 또한 알고 싶나이다"
  그러자 임상옥의 말을 듣고 있던 노인이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띄워 
올리며 말하였다.
  "그것을 알아 무엇하겠소. 이미 다 흘러가버린 옛날의 이야기인데. 
게다가 이 신기마저 깨어져버렸는데"
  지 노인은 상상할 수 없었던 미소를 띄워 올리면서 중얼거려 말하였다.
  "모두 부질없는 일이야. 모두 소용없는 일이고말고"
  그리고 나서 노인은 천천히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하였다.

  그날 밤, 노인의 이야기는 하늘에 떠오른 달이 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노인은 마치 계영배가 다시 자기 곁에 찾아오기를 기다리면서 평생을 보낸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언젠가는 계영배가 자기를 찾아올 것이라고 굳게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계영배는 그의 아들과 같은 분신이었으며 또한 지 노인의 
종교이자 신앙이었다.
  지 노인의 묵언은 하룻밤의 긴 고백으로 깨어졌다. 노인이 고백하는 
동안 달은 뜨고 공중에서 빛이 났으며, 별은 무성하고 달은 지고 그 뒤를 
이어 동이 텄다.
 

  2

  지순영 노인이 우삼돌을 처음 만난 것은 70여 년 전 일이었다. 
  그 무렵 지순영은 도기공들의 장인 외장으로 불리고 있었는데, 그해 
여름 큰물이 들어 홍수가 났었다.
  지순영은 여전히 퇴촌의 강가에서 가마를 굽고 있었는데 그해 든 큰물은 
가마 바로 앞까지 물이 들어올 만큼 엄청났었다. 하루는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수군대고 있었는데 듣고 보니 송장 하나가 물에 떠밀려와 강가에 
누워 있다는 것이다. 지순영은 비를 맞으며 강가로 나가 보았는데 과연 
시체 하나가 강가에 쓰러져 있었다.
  홍수가 들면 상류에서부터 온갖 가재도구들은 물론 소, 닭, 돼지들이 
흘러 내려오는 것은 물론이고 간혹 이처럼 죽은 사람의 시신도 떠내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나이는 이제 겨우 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년이었다. 그런데 
죽은 줄 알았던 송장이 자세히 살펴보니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 벌거벗은 
가슴에 귀를 들이대자 아직 가늘가늘하지만 숨이 남아 있었고, 얼음처럼 
찬 몸에도 희미하게나마 온기가 남아 있었다. 그 길로 지순영은 그 아이를 
업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지순영에게는 옥추단이란 비상약이 있었다. 옥추단이라면 벌레나 
짐승, 식물의 독 등 일체의 독물에 대한 해독작용에 즉효를 보이는 
구급약으로 예로부터 궁중에서 비상약으로 쓰고 있는 명약이다. 
산상강기로 발병한 경우에도, 물에 빠져 질식한 경우거나 심지어는 귀신에 
홀려 놀란 경우에도 기를 살려주는 최후의 명약이었던 것이다. 지순영은 
소년의 입안에 옥추단을 간신히 넣어 먹인 후, 소년을 뜨거운 가마 곁에 
뉘어 놓았다.
  이제 살고 죽는 것은 본인의 운명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하루가 
지나자 소년은 피를 토하기 시작하였으며 열이 올라 몸이 불덩어리였다. 
  지순영은 죽을 끓여서 손수 떠 먹여주는 한편 혼수상태가 들어 헛소리를 
하는 소년의 열을 달래기 위해서 찬물에 적신 수건으로 온몸을 닦아주곤 
했다.
  사흘 만에 열이 내리고 소년은 정신이 돌아왔다.
  소년은 본시 강원도 산골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 부모를 다 잃고 
단신으로 이곳저곳을 걸식하며 유랑하며 다녔었다. 숯을 굽는 산막에서 
지내기도 하고 때로는 화전민 마을에서 마을 일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손재주가 있었던 소년은 통천에 있는 옹기 굽는 움막에서 옹기 
일을 배우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까지 이름이 없었던 소년은 비로소 이름을 갖게 되었는데, 
삼돌이라고 하였다. 성은 움막 주인의 성을 따서 우삼돌이라 하였던 
것이다.
  삼돌이가 있던 움막은 항아리, 독, 동이 등 일반가정에서 흔히 쓰는 
싸구려 질그릇을 굽는 곳이었다. 그해 여름, 삼돌이는 움막 주인인 자신의 
양부와 둘이서 그 동안 만든 질그릇들을 뗏목에 싣고 경기도안성을 향해 
강을 타고 내려오고 있었던 것이었다.
  안성에서 서는 장이라면 전국에서 생산되는 각종 그릇들이 모여드는 
집산지로 유명한 곳이다.   
  그런데 그만 강 위에서 비를 만난 것이었다. 엄청난 비였다. 뗏목을 타고 
내려오는 것을 무목이라 하였는데, 이렇게 큰비가 내릴 때에는, 그 즉시 
뗏목을 버리고 뭍에 올라야 하는데 미련한 움막 주인은 자신이 만든 
질그릇이 아까워서 좀처럼 뗏목을 버리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강물이 불어 이제는 어쩔 수 없이 물이 흘러가는 대로 운명에 맡길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결국 뗏목이 뒤집혀 움막 주인은 소년이 보는 앞에서 물에 빠져 
떠내려갔으며 소년 또한 떠내려가다가 광주 땅에서 뭍으로 떠밀려 살아난 
것이다.
  타고나기를 천애고아였으므로 소년은 오갈 데 없는 신세였다. 그래서 
지순영이 소년을 거둬들이기로 하였다. 다행인 것은 그나마 소년이 
움막에서 질그릇을 만드는 곳에서 일해 본 경험이 있어 흙을 반죽하는 일, 
그릇모형 만드는 일, 근처에서 나오는 양질의 박토를 날라오는 일 등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다는 것이다. 익숙해 있었을 뿐 아니라 눈썰미도 
갖추고 있었다.
  지순영은 소년을 자신의 일꾼으로 쓰기로 마음을 굳혔다. 오갈 데 없는 
신세였기에 소년은 생명의 은인이기도 한 지순영을 친부 이상으로 모시기 
시작하였는데 성품 역시 때가 묻지 아니하고 천진하였다.
  그릇을 만드는 데에는 무엇보다 흙을 반죽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흙을 주무르고, 때리고 하면 할수록 생명력을 갖기 마련인 것이다. 
그래야만 흙 속에 들어 있는 기포들이 미세한 분말에 의해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기포는 흙 속에 들어 있는 불순물과 더불어 결국은 그릇을 
방해하는 근본 요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도공들은 흙을 반죽하는 
기포작업보다는 도자기에 유약을 칠하고 양인각으로 문양을 그리는 화려한 
기수에만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소년은 묵묵히 5, 6년동안 흙을 반죽하고, 시목을 나르고, 밤을 
새워가며 일정한 화력으로 가마를 굽는 기초작업에만 매달리고 있었다.
  그것은 지순영의 의도적인 가르침이었다. 여기저기에서 지순영의 소문을 
듣고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 도공들이 제자를 되기를 간청하곤 했으나 
대부분 2, 3년을 채우지 못하고 떠나버리곤 했다.
  지순영은 도자기를 굽는 기술도 하나의 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것은 
기술이 아니라 도이며, 따라서 도공들은 기술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수양을 쌓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찾아오는 대부분의 제자들은 처음부터 기술을 배우고자 원하곤 
했었다. 그럴 때면 가차없이 제자들을 화장으로 때려 쫓아버리곤 했다.
  가마에 불을 지피는 화장은 지순영의 주장자였다. 제자들이 그의 말을 
듣지 않으면 사정없이 화곤으로 두들겨패곤 했었다. 그러면 제자들은 
도저히 못견디고 제 발로 나가버리곤 했다.
  그러나 소년만은 달랐다.
  소년은 지순영이 회장으로 때려도 일체 신음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특히 
지순영은 아침마다 가마를 만지기 전에 강가에 나아가 목욕재계할 것을 
명하였는데 단 하루도 소년은 이를 거르지 않았다.
  한겨울 강물이 꽝꽝 얼어붙으면 돌로 얼음장을 깨고 그 찬물로 
목욕재계하여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한 후 가마 곁으로 다가가곤 했다.
  그러는 사이 소년은 살이 붙고 키가 커서 청년이 되었고, 흙을 반죽하는 
것만 5년 이상을 가르친 지순영은 그제서야 자신이 가진 기술들을 
전수하기 시작하였는데, 소년은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을 알았고 제대로 
결과가 나오기까지 가마 곁을 떠나지 않았다.
  도자기 기술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유약을 칠하는 것이다. 흑유라고 
불리는 유약을 바르면 유약 속에 산화철물이 8퍼센트 정도 들어가 유약의 
발색이 흑갈색이 났으며, 철채자기는 백자 태토로 그릇을 만들고 그 표면 
전면에 철분을 바른 다음 그 위에 다시 백자유약을 발라 구어내야 하는 
것으로 이때 그릇 표면에 쇠녹색이 나면서 곁이 반짝이며 윤이 나는 
것이다.
  그러나 같은 유약이라도 첨가하는 성분이 많고 적음에 따라 전혀 다른 
그릇이 생산되는 것이 바로 사기 제조의 비법이었던 것이다.
  그릇에서 최고의 자기를 갑번이라 하였는데 이 갑번 기술을 가진 사람은 
오직 지순영뿐이었다.
  원래 조선백자는 함박눈이 내린 뒤 맑게 갠 새벽 햇살이 눈 위에 비친 
듯한 청정한 담청색이 깃들인 순백자를 최고로 치곤 했다.
  이는 페르시아 지방에서 생산되어 중국을 통해 수입되던 코발트 안료인 
회회청의 영향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순영이 있을 무렵에는 설백자가 
최고의 상품이었던 것이다.
  이때에는 아무런 문양이 없는 순수한 배가를 선호하고 있었는데, 순백의 
태토 위에 전보다 푸른 맛이 줄어들고 맑고 투명한 유약을 시유하는 
문양보다는 그 빛깔에 더욱 신경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어떻게 
하면 보다 더 아름다운 백색을 형상화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백자의 최고 
목표이었던 것이다.
  이 최고의 백자를 설백자라 하며 그 이름을 갑번자기라고 부르고 있다.
  이 갑번자기는 사옹원에 속해 있는 모든 도공 중에서도 오직 외장 
지순영만이 구울 수 있는 최고의 명품이었던 것이다.
  그 무렵 왕실에서만 사용되던 갑번자기를 사치스럽고 권세와 돈이 있는 
양반과 부호들이 찾아와 앞을 다투어 구하려 하였으나 지순영은 절대로 
이를 내다 팔지 않았다. 때문에 이를 은밀히 팔아 목돈을 마련하려는 
분원장인 봉사들과 지순영 간의 알력은 대단하였다.
  지순영은 천만금이 생긴다 하더라도 자신이 만든 그릇을 내다 팔지 
않았다. 그릇은 예술품이지 상품이 아니라는 것이 그의 고집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상인이 아니다. 우리는 예인이다"
  내다 팔 갑번자기가 있으면 지순영은 이를 깨어부쉈다.
  소년은 어느덧 분원에서 당할 사람이 없는 최고의 기술자가 되었다.
  소년은 일취월장하여 분원 최고의 장인이 되어 마침내 나라에서 
임금님이 드실 어상품을 만드는 사기직공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해 봄.
  지순영은 새로 옷 한 벌을 만들었다.
  그해가 소년이 홍수에 떠밀려와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지 8년째 되는 
해로 소년이 열여덟 되던 해였다. 이는 소년이 성인이 된 나이로 관례를 
치르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럴 때 남자는 보통 갓을 쓰고 여자는 쪽을 지르는 것이 상례라 지 
외장은 새옷 한 벌과 갓을 마련하여 가마 옆에서 예를 치렀다.
  비록 입을 열어 말을 하지 않았지만 이날의 예식은 소년이 성인이 되는 
관례이기도 할뿐더러 정식으로 소년을 양자로 맞아들이는 예식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지순영은 우삼돌이라는 이름을 가진 소년에게 새 이름을 
붙여주었는데 이를 명옥이라고 하였다.
  밝을 옥과 같은 사기직공이라는 뜻을 가진 새 이름으로 그 이후부터 
소년은 우명옥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마을 사람들은 우명옥을 지순영의 
아들이라고 부르곤 했었는데 그럴 때면 지 외장은 마음이 흐뭇하곤 
했었다.
  지 외장은 언젠가는 아들 명옥에게 갑번자기를 굽는 기술을 전수해 
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때가 아니었다.
  지 외장은 갑번자기는 손끝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예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 외장은 아들 우명옥이 언젠가는 
자신을 뛰어넘어 당대뿐만 아니라 도예 최고의 장인이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도예 최고의 장인.
  그것을 지 외장은 도불이라고 부르곤 했다.
  도예의 부처.
  그 부처가 되는 것이 지 외장의 소원이었다. 그 염원을 이루기 위해서 
그는 결혼도 하지 않았고 아이도 낳지 않았으며 단 하나의 도자기도 팔지 
않았으며 세속을 버리고 홀로 퇴촌에 묻혀 살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최고의 기술자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그것을 
뛰어넘는 도불에는 감히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부처를 이루는 것은 기술을 뛰어넘는 그 무엇인 있다는 것이다. 아는 
것이 많다고 해서 부처를 이룰 수는 없는 것이다. 비록 지 외장이 조선의 
모든 도공들이 꿈꾸던 최고의 백색을 형상화시켜 보일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무색이 아닌 것이다.
  모든 도공들의 최고의 꿈은 완벽한 백색의 자기를 만드는 일이었다. 
한때는 함박눈이 내린 뒤 맑게 갠 새벽 햇살이 눈 위에 비친 듯한 청정한 
담청색의 순백색, 그 순백색이 모든 도공의 꿈이었다.
  그러나 차츰 함박눈도, 새벽 햇살도, 청정한 담청색에 대한 추구도 
사라지고 오직 순수한 백색이 최고의 미라고 도공들은 생각하고 있었다.
  모든 도공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순수한 백색. 그 백색을 지 
외장은 만들어낼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백색을 만들어낼 수 있다 하더라도 
지 외장은 자신이 부처가 될 수 없다고 스스로 체념하고 있었다.
  '최고의 색은 최고가 아니다'
  지 외장은 그렇게 깨닫고 있었다.
  '최고의 색은 색이 없는 무색인 것이다
  나는 지금껏 색을 추구하여 왔다. 그러나 최고의 백색은 색이 없는 
무색인 것이다. 그리하여 불교에서는 모는 색신을 벗어나 정신만으로만 
사는 세계를 무색계라고 부르고 있지 아니한가.
  언젠가는 우명옥에게 갑번자기의 기술을 전수하여 줄 것이다. 우명옥은 
갑번자기의 기술을 익힌 후 마침내 그 백색의 세계를 뛰어넘어 무색의 
경지에 들어갈 것이다
  그리하여 우명옥은 색이 없는 그릇을 만드는 도예에서 최고의 부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명옥은 곧 분원에서 가장 뛰어난 사기장이 되었다. 분원에서 만드는 
어용지기의 모든 그릇을 우명옥이 직접 만들거나, 관리 감독하는 책임자가 
되었던 것이다.
  우명옥의 빠른 기술 습득과 빠른 승진은 곧 동료 사기장들에게 질투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들도 우명옥처럼 열심히 노력해서 기술의 향상을 
노리기보다는 우명옥의 뛰어난 재능에 시기를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사기장들은 합심해서 흉계를 꾸미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은 
우명옥에게 여자와 술을 가르쳐 주는 것이었다.
  오래 전부터 광주 지방에는 전국에서 모여든 색주가가 있었다. 이들은 
전국에서 사기장들이 모여 작업을 하는 해빙기에서 결빙기까지 성시를 
이루었다가 날이 쌀쌀해지면 사라지는 일종의 파시였다. 주로 사기장들의 
두둑한 주머니를 노리는 색주들이었던 것이다.
  사기장들은 나라로부터 임금을 받고 있었으므로 대부분 가을철이 되면 
주머니가 두둑하였다. 때문에 제법 반반한 여인들이 이곳에 몰려들어 술과 
웃음은 물론 몸을 팔고 있었던 것이다.
  사기장들은 알고 있었다.
  우명옥이 아직까지 술을 한 번도 입에 대어보지 못한 숙맥이며 여인의 
손목을 잡아보기는커녕 곁에도 가보지 못한 숫총각임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이렇게 순진한 숫총각일수록 술과 여자에 빠져들면 헤어나지 못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우명옥을 데리고 색주가로 찾아갔다. 그 색주가에는 가장 
뛰어난 미인으로 계향이 있었는데 모든 사기장들이 눈독을 들이고 있던 
여인이었다. 계향은 한 가지 원칙을 갖고 있었다. 술과 웃음을 팔고, 
사내들이 원하면 몸을 만지는 것은 허락하였지만 옷을 벗고 몸을 
허락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그녀의 고집이었던 것이다.
  그 고집을 꺽기 위해서 많은 사기장들이 여름 한철 내내 목돈을 
송두리째 바치기도 하고 어떤 사기장들은 강제로 납치하여 협박을 하여 
보았으나 막무가내였다.
  우명옥은 생전 처음 선배 사기장들을 따라 색주가로 가서 술을 한 잔 
마셔 보았다. 한 잔 마신 술이 정신을 그토록 황홀하게 만드는 것일까.
  우명옥은 상상할 수 없었다. 일찍 부모가 죽어 걸식으로 자란 고아 
우명옥의 핏속에도 술에 대한 숙연이 깃들어 있음일까. 우명옥은 술의 
맛이 낯설지가 않았다. 한 잔 마셔 보고 두 잔 마셔 보고, 잔이 계속될수록 
사기장들은 박수를 치며 잘한다고 환호하였다. 우명옥은 처음으로 마신 
술자리에서 술에는 호감을 보였지만 계향에게는 관심조차 없었다.
  오히려 우명옥에게 반한 것은 계향이었다.
  우명옥은 다른 사기장에게서는 볼 수 없는 흰 피부에 기품있는 모습을 
하고 있었고, 훤칠한 키에다 훤훤장부였던 것이다.
  첫눈에 반한 계향은 사기장들에게 우명옥을 데려오면 술을 공짜로 
주겠다고 간청하기 시작하였다.
  사기장들은 우명옥을 데리고 거의 날마다 계향을 찾아갔는데 우명옥은 
우명옥대로 마시면 취하는 술에 대한 매력으로 이를 마다하지 않았다.
  우명옥에게 반하여 상사병이 든 계향은 그가 찾아가면 옆자리에 앉아서 
갖은 아양을 떨곤 하였다. 차츰 술맛에 길들어가던 우명옥도 어느 날 술에 
취한 눈으로 계향을 보자 처음으로 여인의 아름다움에 대해 눈이 뜨이게 
되었다.
  우명옥은 지금까지 도자기의 미에 대해서만 눈을 뜨고 있었던 것이다. 
도자기가 그의 전부였으며 도자기가 그의 술이자 여인이었던 것이다. 특히 
조선백자의 특징은 여인의 특성을 모방하고 있었다. 자신의 선은 여인의 
곡선을 흉내내고 있으며 풍만한 자기의 선은 여인의 육체를 형상화한 
것이다. 우명옥은 술에 취해서 바라본 계향이야말로 살아 있는 자기임을 
처음으로 깨달았던 것이다.
  그 무렵.
  우명옥은 작업중이었으므로 따로 분원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타락을 지 외장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우명옥은 차츰 술과 계향에게 빠져들기 시작하였다. 너무나 순진무구한 
청년이기에 일단 물이 들기 시작하자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속도가 빨랐다.
더구나 계향이가 우명옥에게 한눈에 반해 그녀는 그 누구에게도 허락지 
아니하던 자신의 몸을 주었다. 여인의 몸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우명옥을 
계향이 이렇게 저렇게 가르쳐 주었는데 우명옥은 계향의 몸에서 처음으로 
육체의 눈이 떴다.
  그것은 쾌락이 아니라 극락이었다. 우명옥은 자신이 그토록 추구해 왔던 
도자기의 미가 실제로 살아 있는 여인의 몸 앞에서는 한갓 무용지물임을 
알았다. 도자기는 오직 부레 의해서 달구어지나, 육체는 정념에 의해 
달구어지는 것을 우명옥은 알았다. 도자기는 유약에 의해서 채색되지만, 
육체는 희로애락의 감정에 의해서 채식되는 것을 우명옥은 비로소 알았다. 
도자기는 양각에 의해서 무늬가 결정되지만 육체는 사랑과 미움, 연민과 
증오에 의해서 무늬가 결정된다는 것을 알았다. 육체의 쾌락은 법열이었다.
  우명옥은 육체를 통해 도자기가 어째서 그처럼 불에 의해서 
완성되는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우명옥과 계향은 육체의 궁합이 맞았다. 우명옥은 하룻밤에 세 번 
이상을 접합하였으며 그러할 때마다 계향은 태토가 되고, 운용문이 되고, 
초화문이 되었다. 때로는 청화백자가 되고 국화문병이 되었다.
  이윽고 결빙기가 시작되었을 무렵.
  지 외장은 아들 우명옥의 이러한 소문을 들었다.
  아들 우명옥이 술과 계집에 빠져 있다는 소문을 들은 순간 지 외장은 
마침내 올 것이 왔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그는 모른 체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짜피 우명옥이 도예의 명인이 되기 위해서는 언젠가는 술과 
여인이라는 쾌락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지 외장은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 외장 자신도 잚은 시절 술과 여자에 빠졌던 아픈 기억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지나치게 빠지지 않으면 술과 여자는 반드시 거쳐야 할 
통과의례라고 지 외장은 애써 위안하고 있었다. 술과 여자에게 빠져본 
후에라야 그런 쾌락이 헛되고 헛되다는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다.
  술과 여인의 쾌락이 결국 백색의 아름다움을 초월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비로소 마음의 명정을 찾게 될 것이다.
  과연 결빙기가 되어 분원이 해체되자 도공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색주가들도 파장이 되어 흩어졌다.
  우명옥도 퇴촌의 지 외장 가마터로 돌아왔으나 이미 예전의 우명옥이 
아니었다. 그의 눈빛에는 욕망에 대한 그리움과 고뇌의 그림자가 깃들어 
있었다. 지 외장은 아들 우명옥의 그러한 욕망에 대해 짐짓 모른 체하고 
방관하고 있었다.
  한겨울 내내 우명옥은 여전히 새벽에 일어나 얼음장을 깨고 목욕재계를 
하고 그릇을 구웠으나 그가 구워내는 도자기는 예전의 아름다운 그릇들이 
아니었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선을 가진 자기가 아니라, 뒤틀리고 
울퉁불퉁한 파행적인 자기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따금 자신이 마시는 술을 
우명옥이 조금씩 마시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으나 지 외장은 이를 모른 
체하고 있었다.
  계율을 깨뜨려 파계를 하고 계행을 깨뜨려 파행을 하는 과정을 통해 
사람은 거듭 새로 나고, 무릇 도자기들도 역시 거듭 새로 나는 것이다.
  어느덧 겨울이 가고 봄이 왔을 때, 다시 분원은 문을 열었다. 전국 
각지에서 도공들이 모여들고 강가를 따라 색주가들고 문을 열기 
시작하였다. 
  겨울 한철 동안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혀 안정을 하고 있던 우명옥에게 
또다시 새로운 유혹이 시작된 것이다. 우명옥은 계향을 찾아갔으나 계향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계향은 소금장수의 아내가 
되어 집에 들어앉아 있다는 것이다. 우명옥은 처음에는 계향을 
찾아다녔으나 마침내 계향이를 만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이를 상관하지 않았다.
  계향이 아니라면 어느 계집도 좋았다.
  춘심이든, 매월이든 우명옥은 가리지 않았다. 못생겼든 잘생겼든, 노래를 
잘 부르든 못 부르든 우명옥은 가리지 않았다. 치마만 두른 여인이면 
우명옥은 좋아하였다. 그리고 그녀들과 가리지 않고 함께 육체의 정을 
나누었다.
  우명옥은 쾌락을 느꼈지만 이미 그 쾌락은 극락이 아니었다. 여인을 
가리지 않고 육체의 정을 나누었으나 마음은 항상 미진하였다. 술도 
마찬가지였다. 술은 깊어 바다와 같지만 마셔도 마셔도 갈증은 여전하였다.
  우명옥을 유혹에 빠뜨리려 했던 선배 사기장들이 오히려 당황하였다. 
정도가 지나쳐 어기들을 만들 우명옥이 저 지경이 되니 하루하루 작업이 
신통치 아니하였다. 그들은 하는 수 없이 지 외장을 찾아와 
이실직고하였다.
  말을 전해들은 지 외장은 이렇게 그들을 꾸짖어 말하였다.
  "명옥이가 그렇게 된 것은 오히려 그대들이 바라던 바가 아니었던가"
  "외장 나으리"
  그들은 머리를 조아리며 변명하였다.
  "저희들은 그저 놀고 마는 정도에만 그칠 줄 알았지, 저토록 깊이 빠져 
버릴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나이다"
  "알겠네. 다들 가보시게나"
  그날 저녁, 지 외장은 머리를 산발하여 풀어내렸다. 그리고 새끼를 
꼬아서 거적 하나를 만들었다. 만든 거적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부지깽이로 쓰는 화장을 들고 지 외장은 색주가를 찾아갔다. 그는 소문을 
통해 우명옥이 머무르고 있다는 색주가를 알고 있었다.
  색주가는 술을 마시러 온 사기공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중 한 
방에서는 우명옥이 여인을 옆에 앉혀두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창을 
통해서 노래를 부르는 여인의 노랫소리도 함께 들려오고 있었다. 창문에 
비친 그림자가 아들 우명옥의 모습임을 확인한 지 외장은 색주가 마당에 
거적을 깔았다. 그리고 그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대뜸 통곡을 하고 
울기 시작하였다.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마치 초상이라도 난 집 같았다.
  난데없는 곡성에 이 방 저 방에서 문이 열리고 술 취한 취객들이 
내다보는 한편 색주가에서는 사람들이 쏜살같이 달려와 만류하여 
말하였다.
  "왜 이러십니까, 외장어른. 남의 집 장사를 망치시려는 겁니까"
  "내 아들 초상을 치르러 왔네"
  대성통곡을 하면서 지 외장이 머리를 풀고 땅을 치며 울며 말하였다.
  "내 아들이 이 술집에서 죽었다 하니 송장을 가져가려 찾아왔네"
  그리고 나서 지 외장은 울면서 말하였다.
  "이놈들아, 어서 내 아들의 송장을 내놓아라. 이놈들아, 어서 내 아들의 
송장을 내놓지 않겠느냐"
  우명옥은 난데없는 곡성에 마시던 술잔을 멈추었다.
  우명옥은 그 울음소리가 아버지 지 외장의 곡성임을 금방 알게 되었다. 
그는 도대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살펴보았다.
  그는 뚫린 방문 창호지 구멍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우명옥은 아버지 지 
외장이 술집 마당에 거적을 깔고 머리를 산발하여 풀어헤친 후 통곡하여 
우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혼비백산한 우명옥은 잠시 어찌할까를 망설였다. 이대로 맨발로 
뛰어나가 아버지 지 외장을 맞아들일까 하다가 우명옥은 그대로 뒷문을 
통해 달아나버렸다. 잠시 후 우명옥이 도망쳐버린 뒤 색주가의 주모들이 
달려나와 지 외장을 부축하여 일으켜 세우며 말하였다.
  "일어나십시오, 외장 나으리. 이제 가셔도 좋습니다"
  "가라니"
  지 외장은 모른 체 시치미를 떼면서 말하였다.
  "내 아들의 송장을 내어주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외장 어른"
  주모는 웃으면서 말하였다.
  "그 망할 송장이 죽은 송장이 아니라 산송장이 되어서 제 발로 
도망쳐버렸나이다"
  그제서야 지 외장은 새끼를 꼬아서 만든 거적을 말아들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난 것은 아니었다. 
  그날 밤에도 우명옥은 다른 색주가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아들 
명옥도 아버지 지 외장의 속뜻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버지가 자신의 
인생을 이래라 저래라 간섭할 나이가 지났다고 우명옥은 생각하고 있었다.
  그보다도 더 심각한 것은 우명옥이 술과 계집에 중독되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하루라도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술집 앞마당에 또다시 지 외장이 나타난 것이다. 여전히 거적 
하나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부지깽이로 쓰는 화장을 세워들고서, 그는 
술청 앞마당에 거적을 깔고 그 위에 머리를 산발한 채 통곡하여 울기 
시작하였다.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난데없는 곡성이었다. 그 술집이 난리가 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술집 여기저기에서 누군가 달려나와 지 외장을 만류하여 말하였다.
  "외장어른, 도대체 왜 이러십니까. 남의 집 장사를 망치려 하십니까"
  "너의 집 술장사만 생각하느냐, 이놈들아. 내 아들 줄초상은 생각지 
않고"
  지 외장은 대성통곡을 하면서 땅을 치며 말하였다.
  "내 아들이 이 술집에서 죽었다 하니, 송장을 치르러 왔네"
  그리고 나서 지 외장은 화장을 들어 맨땅을 내리치면서 소리쳐 
말하였다.
  "이 놈들아, 이놈들아. 내 아들을 내놓아라. 내 아들을 내놓아라"
  하는 수 없이 주모들이 방으로 뒤쳐들어가 우명옥을 찾아 말하였다.
  "저 소리가 들리지 않소"
  그러자 우명옥이 술잔에 가득 들어 있는 술을 단숨에 들이켜면서 
말하였다.
  "저 울음소리가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러십니까"
  "이 사람아"
  보다못한 주모가 우명옥의 등짝을 소리나게 내리치면서 한탄하였다.
  "저 울음소리야말로 자네 아버지 울음소리가 아닌가"
  그러자 우명옥은 옆에 앉은 계집의 젖가슴을 손으로 어루만지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나하고는 모르는 사람입니다. 울고 싶으면 울라고 하고, 통곡을 하고 
싶으면 통곡을 하라고 하십시오"
  그리고 나서 우명옥은 주모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술이 떨어졌으니 술이나 더 주십시오"
  그러나 주모는 진저리를 치면서 말하였다.
  "술이고 나발이고 어서 빨리 내 술집에서 나가 주시게나. 자네 때문에 
내 술집이 망하겠네"
  더 이상은 술을 팔지 않겠다는 데야 더 이상의 다른 수는 없었다. 
우명옥은 하는 수 없이 뒷문으로 빠져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난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 지 외장과 아들 우명옥의 이러한 줄다리기는 날이면 날마다 
계속되었던 것이다. 땅거미가 내려 저녁이 되면 우명옥은 술집으로 
찾아갔으며 우명옥이 찾아든 술집으로 영락없이 지 외장이 산발을 하고 
거적을 들고 나타나 거적 위에 무릎을 꿇고 대성통곡을 하면서 이렇게 
소리치는 것이었다.
  "내 아들을 내놓아라. 내 아들의 송장을 내놓아라"
  그러자 술집들은 하나씩 둘씩 이 골치 아픈 술손님 우명옥을 받아들이지 
않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우명옥도 만만치 않았다.
  색주가는 얼마든지 널려 있었으며, 술과 계집은 얼마든지 지천으로 깔려 
있었던 것이다.
  우명옥은 지 외장이 찾아와 울건, 통곡을 하간 개의치 않았다. 그는 
아버지가 대성통곡을 해도 술을 마셨으며, 아버지가 머리를 풀고 땅을 
내리치며 울어도 계집을 품에 안았다. 그러다가 정히 주모들이 달려와 
뭐라 하면 못 이기는 체하고 술집 뒷문으로 도망쳐버리는 것이 일쑤이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유난히 달이 밝은 밤이었는데 그날따라 우명옥은 일찌감치 술에 
대취하여 있었다. 계집을 양쪽이 앉히고 저녁 무렵부터 분탕질을 하고 
있었는데 아니나다를까 또다시 지 외장이 거적을 들고 와서 마당에 이를 
깔고 울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그러자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던지 우명옥 옆에 앉은 계집에게 
말하였다.
  "방문을 활짝 열어라"
  어쩔 수 없이 우명옥의 말대로 방문을 활짝 열자 우명옥은 계집들에게 
큰소리로 말하였다.
  "무엇들 하고 있느냐. 어서 노래를 부르지 않고"
  기생들은 가야금을 뜯으면서 병창을 하기 시작하였다.
 
  나구노자, 나구노자.
  맹호연이 나귀 타고
  이적선이 고래 타고
  청계도사 학을 타고
  무산선사 구름 타고
  초패왕은 우미인 타고
  당명황은 양귀비 타고
  중원천자 코끼리 타고
  어사서방 춘향이 타고
  우리 서방은 나를 타고,
  나는 탈 것 없어 남송정 곧은 솔로
  조그맣게 배 만들어
  한량 기생 많이 싣고
  술과 안주 많이 싣고
  진동진둥 당기진둥 달구경이나 가십시다.
  당둥 진둥당기둥이나 - 
  
  그러자 우명옥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실로 가관이었다.
  아비는 술집 앞마당에 거적을 깔고 통곡을 하고 있었고 아들은 아비가 
보는 그 앞에서 술상을 벌이고 술집 기생들이 부르는 가야금 병창에 흥이 
나서 덩실덩실 춤이나 추고 있었던 것이다.
  아비가 벌이는 통곡과 아들이 벌이는 한바탕의 노랫가락이 어우러진 
목불인견의 지옥도였다.
  그때였다.
  갑자기 거적 위에서 대성통곡을 하던 지 외장이 느닷없이 화장을 
세워들고 벌떡 일어나며 말하였다.
  "오냐, 살아 있는 네 놈의 송장을 내가 죽은 송장으로 만들어주마"
  지 외장은 그 길로 성큼성큼 마당을 가로질러 짚신을 신은 채 아들이 
놀고 있는 방안으로 들어섰다. 우명옥은 인두겁을 쓴 듯 아비가 그러는 
줄도 몰고 여전히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었다.
  "네 이노옴"
  온 집이 떠나갈 것 같은 대갈일성에 지 외장의 손에 들린 화장이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우명옥을 향해 부지깽이을 내리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인정사정이 없는 매질이었다. 얼굴이고 머리통이고 가릴 데 없는 무지비한 
몽둥이질이었다. 금세 핏물이 솟아오르고 머리가 터졌다. 노래를 부르던 
기생들이 "에구머니나" 하고 비명을 지르며 혼비백산하여 도망쳐버렸으나 
우명옥은 고스란히 앉은 자리에서 때리면 때리는 대로 맞고 있을 뿐 
도망치려 하지 않고 있었다. 비명소리는커녕 신음소리 하나도 내지 않았다.
  "죽어라 이노옴. 어짜피 살아 있는 송장이 될 바에는 죽어 있는 송장이 
나을 것이다, 죽어라 이노옴"
  우명옥의 몸통에서 분수처럼 피가 솟구치고 있었다. 술집 여기저기에서 
놀란 사람들이 뛰어나오고, 술집 주모까지 가세해서 지 외장을 뜯어말리고 
있었으나 지 외장의 몸은 신들린 무당과도 같았다.
  여러 사람이 합세하여 지 외장을 번쩍 안아들고 나아가 문 밖으로 
몰아내자 지 외장은 거적을 말아들고 사라져버렸고 술집 안에는 죽은 송장 
하나만 쓰러져 누워 있을 뿐이었다. 우명옥은 입으로 거품을 물고 있었고, 
완전히 의식을 잃고 있었다. 지 외장이 휘두른 부지깽이에 급소를 
강타당한 듯 사지를 경련하고 있었다.
  이른바 장독을 맞아 급살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우명옥의 생명이 위태위태하였다. 우명옥의 몸은 이미 온기를 잃고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술집 손님 하나가 부랴부랴 우명옥의 두 
눈꺼풀을 까본 후 다만 이렇게 말하였을 뿐이다.
  "급살을 맞았소. 회생하기가 어려울 것 같소이다"
  우명옥이 죽었다는 소문이 분원에서 금방 나돌았다. 우명옥의 아비 지 
외장에게 맞아 죽었다는 소문이 분원의 사기장들 사이에서 떠돌았다.
  아들이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서도 지 외장은 조금도 동요치 아니하였다. 
지 외장은 여전히 물레를 발로 돌리며 자기를 빚고, 등요에서 나무로 불을 
때어 사기를 반죽하였다. 이미 아들에 대한 생각은 모두 잊어버린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한밤중에 느닷없이 개가 짖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지 외장은 너무 
피곤하여 개 짖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그대로 혼곤히 잠들어 있었는데 
미친 듯이 개가 계속 짖어대자 잠에서 깨어났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낌새를 눈치채고 방문을 열어보자 불빛에 웬 사내 하나가 우뚝 서 있었다.
  달이 휘영청 밝은 달밤이었다.
  오랫동안 문 밖에 서 있었는지 사내의 몸에서는 흰 서리가 내려 있었다.
  죽었다던 아들 우명옥의 모습이었다.
  "네가 귀신이냐, 사람이냐"
  지 외장은 서 있는 그림자를 향해 소리쳐 말하였다.
  "귀신이라면 물러가고 사람이라면 무릎을 꿇어라"
  그러자 그림자는 지 외장을 향해 무릎을 꿇고 삼배를 올리기 
시작하였다. 이른바 외지에서 살아 돌아왔다는 아들 우명옥의 
문안인사였던 것이다.
  문안인사.
  저 사바세계의 애욕과 저잣거리의 음욕. 그 모든 욕망을 버리고 다시 
돌아왔다는 우명옥의 재출가 선언이었던 것이다.
  우명옥은 기사회생으로 간신히 생명을 건진 것이다. 백약이 무효였으나 
장독에는 분뇨가 좋다는 민간요법 그대로 묵힌 분뇨를 한 사발이나 먹은 
후 정신이 돌아왔으며 시간이 흐르자 부기도 내려 살아난 것이다.
  한번은 열 살 무렵 홍수에 떠밀려와 간신히 구사일생하였으며 이번에는 
지 외장이 휘두른 부지깽이에 난타당하여 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이다. 그러나까 우명옥은 두 번의 죽음에서 일어선 것이다.
  삼배를 올리고 그 자리에 꿇어앉은 우명옥을 향해 지 외장이 다시 
소리쳐 말하였다.
  "돌아왔으면 무엇을 꾸물대고 있느냐. 얼른 강가로 나가서 목욕재계하지 
못하겠느냐. 몸과 마음을 씻고 심신을 정결케 하지 못하겠느냐"
  다시 받아들여 달라는 아들의자 제자인 우명옥의 삼배를 아비이자 
스승인 지 외장이 받아들이고 또다시 그를 거둬들인 한 순간이었다.
  우명옥은 다시 지 외장의 가마에서 일을 하기 시작하였다. 마침 
결빙기가 되어 분원이 해체되었으므로 우명옥은 두문불출하고 도자기를 
빚고 구웠다.
  언제 술과 계집에 빠져 있었느냐는 듯이 그는 모든 것에 초탈하여 
있었다.
  평소에도 말이 없던 우명옥은 완전히 벙어리가 되어버려 하루 종일 
한마디도 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 잘 생기고 아름답던 얼굴은 초췌하고 
남루해졌다. 이마에는 젊음 같지 않은 주름살이 깊이 패었고, 볼도 함께 
패어 있었다. 수염도 깎지 않아 덥수룩하였으나 안광만은 빛나서 마치 
홀린 것처럼 보였다.
  지 외장은 아들 우명옥에게 자신이 가진 최고 기술을 전수해주기 
시작하였다.
  마침 그해 겨울은 눈이 많이 왔었다. 폭설이 내려 눈이 강산에 쌓였다.
  폭설로 눈이 쌓이자 지 외장은 우명옥을 데리고 눈밭으로 나아갔다. 
며칠을 두고 눈이 내렸으므로 발목을 덮을 정도로 눈이 쌓여 있었다.
  "봐라"
  그 눈을 가리키며 지 외장이 아들에게 말하였다.
  "이것이 눈이다. 이 눈의 흰 빛이야말로 사기장들이 추구하는 백색의 
극치이다. 이 눈을 바로 자기 속에 담을 수 있다면 그가 만드는 자기는 
이미 그릇이 아니라 자연의 경계를 뛰어넘은 신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일찍이 두보는 그의 시에서 '하얗게 눈이 쌓여 절벽이 없어지고 골짜기도 
무너졌구나'하고 노래하였다. 이렇게 새하얗게 쌓인 눈을 백애애라 하는데 
바로 백애애한 눈빛의 흰색이야말로 갑번자기의 궁극 목표인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는 우명옥을 보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한겨울 동안 이 눈을 보고 또 보아라. 그래야만 백색을 
깨닫게 될 것이다"
  삭풍이 불어와 막힌 데가 없는 강물을 얼어붙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명심하여라. 눈을 보되 형상을 짓지 말아라"
  지 외장은 항상 들고 다니던 화장으로 눈 위에 글자 하나를 써내렸다.
  그것은 구슬 옥 자였다.
  "우선 옥 자를 버리거라"
  그리고 나서 지 외장은 다시 글자 하나를 써내렸다. 그것은 달 월 
자였다.
  "또한 월 자도 버리거라"
  지 외장은 다시 글자 하나를 써내렸다. 그것은 오얏 리 자였다. 그는 
다시 말하였다.
  "이 자도 버리거라"
  그리고 나서 지 외장은 눈 위에 차례차례 글씨를 써내렸다.
  지 외장이 쓴 글자는 뒤를 이어 차례로 매 . 노 . 학 . 소 . 은 . 염 등의 
단어들이었다. 이 모든 글자를 쓰고 나서 지 외장은 이렇게 말하였다.
  "그러므로 눈을 보되 구슬을 버리고, 달을 버리고, 오얏나무도 버리고, 
매화도 버리고, 학도, 은도, 소금도 모두 버리거라. 이러한 것들은 네가 
눈을 바로 보는 데 방해하는 언구들이며 마들인 것이다"
  그것은 지 외장이 스스로 터득한 진리였다. 그는 한겨울 눈을 보기 
위해서 엄동설한에 눈밭에 들어가 쏟아져내리는 눈과 쌓인 눈을 직시하곤 
하였다. 그때 그는 눈을 보려 하였으나 실제로는 눈의 형상에만 매달려 
있음을 알았다. 그것을 눈을 떠올리게 하는 여러 가지의 영상들이었다. 
예를 들어 달빛, 매화꽃, 학의 흰 빛깔, 눈부신 이화꽃, 소금 등 눈을 
연상시키는 고정관념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지 외장은 눈의 흰 백색을 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형상들과 싸우고 있었던 것임을 깨달았다. 눈을 직시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고정관념들을 버려야 하는 것임을 지 외장은 깨달았던 것이다.
  "맨손으로 싸워라"
  지 외장은 우명옥에게 말하였다.
  "이를 백전이라 하는데 오직 너는 맨손으로만 싸워야 하는 것이다"
  백전.
  원래 이 말은 시인들이 제각기 그 재능을 겨루기 위해서 싸울 때 쓰는 
말로 가령 시를 지을 때 운을 시제로 할 경우에는 지 외장이 눈 위에 
써보였던 옥 . 월 . .이 . 매 . 노 . 학 . 소 . 은 . 염 등의 단어 사용을 
금하고 다른 단어들로만 재능을 겨루는 것을 이르며, 이를 다른 말로는 
금체시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니까 지 외장의 가르침은 스스로 터득한 것이 아니라 예로부터 
시인들이 재능을 겨룰 때 사용한 금기를 빌려온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지 외장이 사용했던 '맨손으로 싸워라'라는 백전이야 말로 
우명옥에게는 가장 절실한 표현이었다.
  그날부터 우명옥은 하루도 빼놓지 않고 눈밭으로 나갔다. 그해 겨울 
유난히 눈이 많이 내리고 날은 추워 눈이 내리는 대로 녹지 아니하고 
그대로 쌓였다. 그러나 우명옥은 눈밭에 들어가 돌로 빚은 석상처럼 
꿈쩍도 하지 않고 내리는 눈을 보고, 쌓인 눈을 보았다.
  어떨 때는 하루종일 눈밭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으므로 내리는 
눈을 맞아 그대로 눈사람이 되어버리기도 하였다. 어떨 때는 눈밭에 
뒹굴기도 하고, 어떨 때는 쌓인 눈을 두 손으로 궁글려 입으로 먹기도 
하였다.
  맵고 날카로운 겨울바람에 손과 발이 얼어 심한 동상에 걸려 지 외장이 
직접 토시가 달린 방한복을 만들어 주었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보다도 가장 염려되는 것은 우명옥의 눈이었다. 눈빛의 백색은 온 
빛깔 중에서 가장 강렬하고 눈부신 빛깔이다. 사물의 모든 빛을 되쏘는 
특징을 가진 눈의 백색은 그러므로 눈을 상하게 하는 독을 가지고 있었다. 
우명옥은 온종일 그 강렬한 눈 빛깔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해가 져서 
귀가할 무렵에는 앞이 보이지 않아 더듬거리며 돌아오곤 했다. 도공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바로 눈이었으므로 이러다가 우명옥이 눈이 먼 장님이 
되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되어 지 외장은 우명옥을 만류해 보기도 
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는 한마디로 눈에 미친 광인이었다.
  우명옥의 미친 광기는 그해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와 온 산천에 덮혔던 
문이 모두 녹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 동안 우명옥은 거의 장님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해동기가 되었으나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하여 분원에서 
해마다 봄이면 실시하는 사기 제조에는 참여치 못하였다.
  그 점은 오히려 갑번자기에 미친 우명옥에게는 백자에 몰두하는 데 잘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우명옥은 먹는 것과 자는 것을 모두 잊어버린 광인이었다. 그는 가마 
곁에서 자고 가마 곁에서 먹었다. 그는 한시도 가마 곁을 떠나지 않았다.
  봄이 깊어 날이 따뜻해지자 장님과 다름없던 우명옥의 눈은 조금씩 
나아져가고 있었지만 아직도 그는 지팡이를 사용해야 할 정도로 눈이 
어두웠다.
  지 외장은 우명옥의 하는 행동을 일체 상관치 아니하고 하는대로 
내버려두었다. 그러나 겉으로는 모른 체하고 있었지만 내심으로는 온 
신경을 집중시켜서 아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었다.
   우명옥의 일과는 똑같은 일의 반복이었다.
  태토를 반죽하고 물레를 돌려 그릇을 빚고, 그릇 위에 유약을 발라 칠을 
하고, 그 유약 위에 잿물을 입혀 착색을 한 후 이를 가마 속에 넣어 굽는 
일이었다.
  우명옥은 단 하루도 아침마다 강가에 나아가 목욕재계하는 것을 거르지 
않았으며 빚은 그릇을 가마 속에 넣어 구울 때는 언제나 상을 차려놓고 
신명들에게 제사를 지내곤 하였다.
  제사를 마치면 우명옥은 사흘 낮, 사흘 밤을 꼬박 가마 곁에 붙어앉아 
한시도 쉬는 일이 없이 시목을 아궁이 속에 집어넣곤 했다.
  이때가 되면 지 외장은 비록 그의 행동을 거들거나 도와주지는 않지만 
혼신의 힘을 다해 우명옥의 작업에 소원을 빌곤 했다.
  "천지신명이시여"
  지 외장의 소원은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내 아들 우명옥이 사람이 낼 수 있는 최고의 순백 자기를 만들어낼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내 아들 우명옥이 사람이 만들 수 있는 최고의 
갑번자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명인이 되도록 하여 주소서"
  마침내 모든 작업이 끝나면 가마를 충분히 식힌 후 안으로 들어가 구운 
그릇의 결과를 살피게 되는데 그러할 때면 지 외장은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아들 우명옥의 행동을 숨죽여 지켜보곤 했다.
  그러나 결과는 언제나 실패였다.
  애써 만든 자기를 하나씩 두들겨 깨어버리는 파열음만 들려올 뿐이었다.
  행여 미완성의 자기를 남겨두면 분원의 관원들이 이를 몰래 반출하여 
갑번자기라 하여 비싸게 팔아버리는 일이 왕왕 있었으므로 지 외장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자기가 생산되면 이를 철저하게 부숴버리고 
있었고, 아들 우명옥도 지 외장의 행동을 따라 철저히 자기를 깨어버리는 
습관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 외장은 아들 몰래 깨어진 자기의 파편을 일일이 주워 확인해 
보곤 했다.
  그럴 때면 지 외장은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완형이 아니라서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지만, 그 파편 위에는 
눈부신 흰 백색의 유약이 광택을 뿜고 있는 것이었다. 그 백색은 이미 
자기 자신이 만들 수 있는 백색의 경지를 초월해 있었다.
  지 외장이 순백을 추구하고 있었다면, 비록 파편 위에 표현되긴 
하였지만 우명옥이 내는 백색은 순백을 뛰어넘어 설백의 형상을 
표출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우명옥이 자신이 만든 백자를 
깨뜨려버리지 아니히고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더라도 그 백자는 이미 
도공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최고의 명품이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아들 우명옥이 깨뜨려버린 도편들을 확인할 때마다 지 외장은 
전율에 몸을떨었다.
  이미 아들은 나를 뛰어 넘어섰다. 우명옥이 만드는 백자는 이미 백색의 
경지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우명옥은 이에 만족치 아니하고 만드는 백자란 백자는 모두 
깨뜨려 파손해버렸다. 그렇다면 우명옥이 바라는 백자은 그 끝이 어디일 
것인가. 우명옥이 바라는 백자는 하늘에서 난분분 난분분 내리는 설편의 
빛깔, 백애애의 그 흰 눈빛을 담은 자연 그대로의 빛깔일 것인가.
  그 봄과 여름 그리고 무덥던 여름도 가고 어느덧 가을이 오고, 그 
가을도 저물어가던 만추의 어느 날 밤.
  그날 밤은 아들 우명옥이 백자를 빚어 유약을 칠한 후 가마 속에 넣어 
사흘 낮, 사흘 밤을 꼬박 불을 땐 후 일련의 작업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밤이었다.
  백자를 완성하는 마지막 밤이 되면 지 외장은 촉각을 곤두세워서 
우명옥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날 밤도 가마목에서는 마음에 안드는 백자를 깨뜨려 부숴버리는 
파열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것은 일정한 간격을 갖고 이어지고 있었다.
  타악, 타악.
  애써 만든 자기를 자기 손으로 깨뜨려버리는 파열음을 들을 때마다 지 
외장은 가슴이 서늘하였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이어지던 파열음 소리가 순간 멎어섰다. 그리고 
나서 무거운 정적이 이어졌다. 이제나저제나 하고 지 외장은 기다렸다.
  그러나 더 이상 부숴버리는 소리는 이어지지 않고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침묵이 흐르고 있을 뿐이었다. 지 외장은 온 신경을 다해 귀를 
기울였다.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지 외장은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투명한 달빛이 온누리에 흘러넘치고 있는 깊은 가을밤이었다. 지 외장은 
가마목으로 달려가 보았다. 분명히 지 외장이 다가오는 인기척을 
들었음에도 가마 쪽에서는 아무런 기색도 없었다. 몇날 며칠을 계속 불을 
때고 있었으므로 가마터에는 후끈한 열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가마의 아궁이 쪽에는 이미 나무로 만든 망치로 깨뜨려 버린 백자들의 
잔해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 한쪽에 우명옥이 두 손으로 무엇인가를 
움켜쥐고 우뚝 서 있었다. 그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지 외장은 아들 우명옥이 두 손으로 무엇을 움켜쥐고 있는가를 
쳐다보았다. 그것은 백자 항아리였다. 몸체는 둥근 선을 그리면서 입을 
벌린 주둥이보다 굽이 더 좁은 조선백자 항아리의 대표적인 유형이었다. 
얼핏 보면 항아리는 만들기 쉬운 자기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주둥이와 
굽에 이르기까지의 완만한 곡선으로 인해 가장 까다로운 자기의 일종인 
것이었다.
  "무엇을 하고 있느냐"
  지 외장이 소리를 내어 물었으나 우명옥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우명옥은 움켜쥐고 있던 백자 항아리를 지 외장에게 두 손으로 
내밀었다. 지 외장은 그 항아리를 받아들었다.
  온누리에는 대낮과 같은 월광이 흘러넘치고 있어서 모든 사물이 
분명하게 보였다. 지 외장은 높이 들어올린 항아리를 들여다 보았다.
  순간 지 외장은 자신이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하였던 설백의 빛깔을 
가진 옥동자가 자신의 손에 들려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침내 아들 우명옥은 백애애한 눈빛을 백자 위에 그대로 재현시키는 
신기를 터득한 것이다.
  

   3

  "이 항아리가 바로 그 항아리나이다"
  지 노인은 시자를 시켜 가져오게 한 항아리를 임상옥에게 보여주며 
말하였다. 해질 무렵이 지나 초저녁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밤이 깊도록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야기를 시작할 무렵에는 달이 서편 산마루에서 
솟아오르고 있었으나 이미 밤이 깊어 하늘 한복판에 걸려 있었다. 그 긴 
이야기에도 노인은 조금도 지친 기색이 없었다. 
  처음에는 귀를 기울여 듣고 있던 봉사도 차츰 까딱까딱 졸기 시작하다가 
따뜻한 가마터 옆부분에 허리를 기대고 잠이 들어 있었고, 술독을 지게에 
가지고 온 종자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깨어 있는 사람이라고는 지 
노인과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임상옥뿐이었다.
  두 사람은 잔을 돌려가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한가득 들어 있는 술 한 
독의 반이 빌 정도로 두 사람은 한껏 마신 뒤끝이었다. 그러나 노인은 
취기가 오르지 않은 전혀 말짱한 모습이었다.
  "보시겠소이까. 우명옥이 만들었던 바로 그날 밤의 백자 항아리를 
보시겠소"
  노인은 백자 항아리를 가리키며 말하였다. 임상옥은 그 항아리를 쳐다 
보았다. 과연, 과연 천하의 명품이었다.
  "그날 밤도 오늘 밤처럼 달빛이 유난히 밝고 깊은 가을밤이었소"
  노인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푸른 달빛 아래여서인지 백자 항아리의 
흰빛은 오히려 눈이 부실 정도로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월광조차도 
머무를 수 없이 그대로 흘러내릴 정도로 윤택이 흐르고 있는 백자 
항아리의 빛깔은 이제 마악 백설이 내린 듯하였다.
  빛깔뿐이 아니었다.
  주둥이에서 좁은 굽까지 흘러내라고 있는 몸체의 곡선은 어느 한군데도 
겹쳐지는 일 없이 원만한 유선을 이루고 있었는데 중앙은 대칭으로 
완벽하게 조화를 보이고 있었다. 얼핏 보면 단순하게 보이는 형태였으나 
아름다운 여인의 육체를 연상케하는 풍만한 곡선을 내부로부터 밖으로 
터질 듯이 팽창되어 부풀어오르고 있었다.
  임상옥은 백자 항아리를 두 손으로 받쳐들고 이리저리 돌려서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한 점의 티나, 심지어 유약의 균열도 보이지 않는 
완벽한 백자였다. 아무런 시문도, 문양도, 음각도 없는 천연 그대로의 백자 
항아리였던 것이다.
  "어떻소이까, 대인어른"
  노인은 황홀한 표정으로 백자 항아리를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는 
임상옥을 쳐다보며 말하였다. 임상옥은 탄식하며 대답하였다.
  "이처럼 아름다운 백자는 본 적이 없나이다"
  중국과 무역을 하고 있는 임상옥으로서는 도자기에 대해 심미안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조예가 깊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도자기는 대청무역에 중요한 물품이었다. 따라서 임상옥은 나름대로 
도자기에 식견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와 같은 명품은 일찍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본 적뿐 아니라 들은 적도 없었다.
  "그렇소이다, 대인어른"
  지 노인은 다시 술잔에 들어 있는 술을 단숨에 들이켜고 나서 머리를 
끄덕이며 말하였다.
  "하늘 아래에 이러한 백자 항아리를 만들 줄 아는 명인은 오직 우명옥 
한 사람밖에 없나이다"
  지 외장은 자신이 마신 술잔을 임상옥에게 내어주며 말을 덧붙였다. 
임상옥은 이미 취기가 올랐으나 노인의 권주를 마다할 수 없었다. 
임상옥의 주량은 지 외장에 비하면 불급이었다.
  "그러므로 이 백자 항아리는 우명옥이 만든 것이 아니라, 바로 하늘이 
만들어 내린 물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오. 하오나"
  노인은 잠시 말을 끊었다. 그는 잠자코 임상옥을 쳐다보았다. 봉두난발한 
머리칼과 가슴까지 내려오는 긴 수염을 기른 노이의 얼굴은 화덕에서 
뿜어나오는 열기와 술기운으로 붉게 익어 있었고, 예사롭지 않은 형형한 
눈빛은 임상옥을 뀌뚫어 보고 있었다.
  "이 천하의 명기도 그가 만든 다른 그릇에 비하면 한갓 싸구려 
질그릇이라고 말할 수 있소이다"
  "이 이상의 명품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임상옥이 묻자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였다.
  "물론이오, 물론 있고 말고"
  "도대체 어디에 그런 신기가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임상옥이 묻자 노인은 손을 들어 자신의 앞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바로 이곳에 있소이다"
  "이곳이라면"
  "바로 이 자리에 있소이다"
  노인은 화덕이 옆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임상옥이 갖고 온 깨어진 
계영배가 놓여 있었다. 그 계영배는 이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백자 
항아리의 바로 곁에 놓여 있어 그 크기가 왜소함뿐 아니라 그 빛깔과 
형태의 치졸함으로 한결 더 초라하게 보이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계영배는 깨어져 버림으로써 완형의 백자 항아리에 비하면 병신이 
되어버린 불구의 모습이었던 것이었다.
  "천하의 백자 항아리라 할지라도 이 잔에 비하면 값싼 오지독이라고 
말을 할 수 있을 것이오"
  "어째서입니까"
  임상옥이 묻자 지 노인은 다시 술 한 잔을 단숨에 들이켜고 나서 잠시 
끊었던 말을 다시 이어내리기 시작하였다.
  

   4. 

  천하의 명품 백자 항아리를 만든 며칠 뒤 그날도 우명옥은 또다시 
물레를 돌려 자기를 빚고 이를 가마에 넣어 굽고 있었다.
  새벽녘이었다.
  가마의 아궁이에 장작을 부지런히 집어넣고 있던 우명옥은 깜박 잠이 
들었다. 그러나 그의 잠은 수상한 인기척에 곧 깨어졌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누군가 가마의 굴뚝 쪽에 서 있었다. 처음에 우명옥은 자신이 
깜박 잠이 들어 헛것을 본 것이었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다. 
간혹 일에 몰두하면 헛것을 보는 경우가 왕왕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기우는 새벽 달빛 속에 분명히 사람의 그림자가 서 있었던 것이었다.
  "누구냐"
  우명옥은 소리쳐 말하였다.
  "귀신이라면 썩 물러가고, 사람이라면 이리 나오너라"
  우명옥은 부지깽이로 쓰는 화장을 치켜들며 말하였다. 그러자 그 
그림자는 갑자기 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하였다.
  "누구냐"
  사람임이 분명하였으므로 우명옥은 그 그림자 곁으로 다가가 보았다. 
남루한 옷차림의 그 그림자는 우명옥이 다가오자 두어 발자국 물러섰으나 
곧 그 자리에 무너져 내렸다. 우명옥은 그 무너진 사람의 모습을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보았다.
  한 여인이 그곳에 쓰러져 있었다. 그 순간 우명옥은 그 여인이 누구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여인은 바로 그의 순결했던 동정을 앗아갔던 계향이, 바로 그녀였던 
것이었다.
  이 세상에서 태어나 처음으로 알았던 여인의 몸, 여인의 육체에 의한 
쾌락을 최초로 알게 해준 첫사랑, 바로 그녀였던 것이다.
  우명옥의 동정을 빼앗았던 계향은 그러나 한 번 떠나간 후 돌아오지 
않았다. 우명옥의 가슴에 상처만 남긴 채 소금장수의 아내가 되었다는 
소문만 떠돌 뿐 죽었는지 살았는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우명옥에게 술과 여자를 가르쳐 준 그 장본인 계향. 계향을 떠나보낸 후 
우명옥은 얼마나 방황하였던가. 날이 저물면 이 술집에서 저 술집으로, 
수많은 화류항을 떠돌았어도 그 어떤 계집도 첫 정을 주었던 계향의 
육체는 아니었다. 첫 마음을 주었던 계향의 마음은 아니었다.
  그 계향이가 바로 그곳에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그 아름답던 얼굴은 간 곳이 없었다. 그 예뻤던 모습도 간 곳이 없고 
계향의 모습은 남루한 걸인의 행색이었다. 순간 우명옥은 계향이가 자신을 
만나러 이곳까지 남의 눈을 피해 도망쳐 왔음을 알았다.
  "네가 웬일이냐"
  우명옥은 계향의 몸을 부축하여 일으키며 물어 말하였다. 계향은 
우명옥보다 서너 살 연상이었다. 일찍이 부모를 여윈 우명옥에게 계향은 
어머니이자 피붙이 같은 여인이기도 하였다.
  계향의 등뒤에 무엇이 업혀 있는 것을 우명옥은 보았다. 찬바람을 
쏘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 포대기를 덮어 씌우고 있었지만 그 안에는 
분명히 작은 어린아이 하나가 들어 있었다. 그 어린아이가 갑자기 잠에서 
깨어나서 칭얼거리며 울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황급히 계향이가 등뒤의 
어린아이를 돌려 품안에 안아놓고 젖을 물리기 시작하였다. 칭얼거리던 
아이는 어미의 젖을 빨기 시작하자 이내 울음을 그쳤다.
  아이는 이제 한 살이 갓 넘은 갓난아이로 보였다.
  "어떻게 된 것이냐. 도대체 네가 웬일이냐"
  "서방님"
  이슬에 젖어 반짝이는 눈빛으로 계향이가 말을 하였다. 
  "당장 죽어도 좋으니 얼굴을 마지막으로, 한 번이라도 먼발치에서라도 
좋으니 뵈옵고 돌아가리라 생각하고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우명옥이 물어 말하였다.
  "도대체 행색이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이냐. 어디 죽을 병이라도 걸렸단 
말이냐"
  계향이가 젖을 물려 다시 곤히 잠든 아이의 얼굴을 포대기를 접어 
드러내었다.
  "이 잠든 아이의 얼굴을 한 번 보시오소서"
  우명옥은 계향의 말대로 잠든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강렬한 인연의 끈이 그 어린아이에게서 뿜어나와 
자신과 얽혀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사내아이나이다. 이제 겨우 한 살밖에 되지 않은 갓난아이이나이다. 
하오나 아직까지 이 아이는 이름을 가질 수 없었나이다. 왜냐하면 아직도 
이 아이는 태어나서 한 번도 자신을 낳아준 아비를 만나지 못하였기 
때문이나이다"
  우명옥은 계향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를 잘 알 수 없었다.
  우명옥은 잠든 아이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서방님, 이 아이는 바로 서방님의 아들이나이다"
  이 무슨 기구한 운명이란 말인가. 우명옥은 자신을 닮은 아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생각하였다.
  계향은 한숨을 쉬면서 그간 있었던 일들을 털어놓기 시작하였다.
  파시가 된 후 계향은 그 길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고향에서 그녀는 
소금장사를 하는 보부상을 알게 되었다. 마음속으로는 우명옥을 사랑하고 
있었으나 한갓 화류계의 기생으로서 자신의 정체를 모르는 고향사람과 
혼례를 치르면 평생 촌부로 평범한 일생을 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는 선뜻 그의 청혼을 받아들인 것이다. 우명옥을 위하는 
길이라는 생각도 들었던 것이다. 광주 분원 제일의 사기장 우명옥에게 
있어 자신은 한갓 홍등가에서 웃음을 팔고 있던 갈보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때 이미 계향의 몸에는 우명옥의 씨앗이 자라나고 있었다. 
그녀는 고향에서 살림을 차렸는데 신혼부터 행복하지가 않았다. 평생 
떠돌이 봇짐장수로 보냈던 남편은 본시부터 방랑벽이 있었고, 노름벽에 
주사까지 심하였다. 걸핏하면 계향을 두들겨 패었는데 계향은 이를 악물고 
이를 참아내었다. 그런데 아이가 태어난 것이다. 이미 이 아이가 우명옥의 
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계향은 이를 남편에게 철저히 비밀로 붙였는데 이 
아이가 사단이 되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남편은 일찍이 창병에 걸려서 아이를 낳을 수가 없었으며 
아이를 낳아도 배냇병신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멀쩡하고 
건강한 아이가 태어나자 처음에는 자신의 아이인 줄 알고 좋아하던 남편은 
차츰차츰 계향을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철이 되면 소금을 지고 전국을 
돌아다니는 남편은 자연 풍문에 빨랐는데 어느새 아내 계향이가 한때 광주 
근처의 색주가에서 기생 노릇을 하고 있었다는 풍문까지 전해 듣게 되자 
계향을 의심하는 의처증은 극도에 달하게 되었다.
  남편은 계향을 보기만 하면 폭력을 휘둘렀다. 그러면서 아이의 진짜 
아버지가 도대체 누구냐고 캐묻기 시작하였다. 계향은 자신의 뭇매를 맞는 
것은 얼마든지 참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 갓 태어난 아이를 집어던져 
죽이려 하는 남편의 광기에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계향은 자신이 맞아 죽더라도 아들을 살릴 수 있다면 그 어떤 형벌도 
달게 받으리라고 결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결심도 마침내 한계에 
이르게 되었다.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온 남편은 계향에게 노름돈을 달라고 요구하였다. 
시집갈 때 갖고 갔던 온갖 패물과 노리개를 팔아 남편의 노름돈을 
보태주던 계향은 마침내 모든 것을 팔았으므로 더 이상 돈을 마련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남편은 행패를 부리기 시작하였다. 남편은 계향의 머리를 
부여잡고, 마당으로 끌고 나와 계향을 개 패듯 두들겨 때리고 있었다. 
계향은 때리면 때리는 대로 죽은 듯이 맞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때였다.
  방안에서 잠들어 있던 아이가 울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남편은 성큼성큼 신을 신은 채로 방안으로 들어가 우는 아이를 
번쩍 안아들고 밖으로 걸어나왔다. 계향은 겁에 질려 남편의 행동을 
쳐다보았다.
  남편은 우는 아이를 번쩍 들어 그대로 땅 위에 메다꽂으려는 듯이 
보였다. 계향은 필사적으로 남편에게 매달렸다. 남편은 소금 남편대로 
광기에 휩싸여 갔고, 계향은 계향대로 필사적이었다. 남편 아이가 더욱 
울기 시작하자 아이를 우물 속에 집어던져 넣으려고 하였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이었다.
  내버려두었다가는 그대로 아이가 우물 속으로 던져져 죽을 판이었다. 그 
순간 계향은 우물가에 놓여 있던 바윗돌을 집어들었다. 그녀는 그 
바윗돌을 들어 남편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남편은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머리가 깨어져 붉은 피가 흘러나왔고 남편은 소리를  
지르며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계향은 그러한 남편이 무서웠다. 남편은 다시 일어나 자신과 아이를 
한꺼번에 우물 속에 집어넣어 죽여버릴 것만 같았다. 자신을 집어던져 
죽이는 것은 얼마든지 무섭지 않았으나 아이를 죽이는 것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래서 계향은 소리를 지르는 남편의 입을 막기 위해 계속 
바윗돌로 그의 머리를 내리쳤다. 남편의 입에서 비명소리가 그칠 때까지. 
남편의 몸이 더 이상 꿈틀거리지 않을 때까지.
  마침내 남편의 욕지거리가 사라지고 평온을 되찾게 되자 계향은 땅 위에 
던져진 채 울고 잇는 아이를 발견하였다. 그녀는 아이를 안아들고 젖을 
물렸다. 배가 고픈 아이는 엄마의 젖을 빨자 곧 잠잠해졌고, 그 순간에야 
계향은 자신이 무슨 일을 했던가 하는 제정신이 들었다.
  온 마당은 붉은 피의 바다였다. 자신의 온몸도 붉은 피를 뒤집어 쓰고 
있었다. 미친 듯이 날뛰던 남편은 우물가의 한곁에 쓰러져 누워 있었다.
  계향은 조심스레 남편 곁으로 다가가 보았다. 계향은 남편이 완전히 
숨이 끊어져 죽어버렸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계향은 한순간에 남편을 죽인 살인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계향은 치마를 
뒤집어쓰고 그대로 우물 속에 뛰어들어 자결을 할까 생각하였다. 그러나 
자신마저 죽으면 이 아이는 하루아침에 천애의 고아가 된다는 생각이 
떠오르자 그녀는 죽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대로 있다가는 남편을 죽인 
살인행위가 온 동네에 번져 나갈 것이고, 자신은 포졸들에게 체포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계향은 그대로 옷만 입은 채 아이를 업고 고향을 
도망쳤던 것이다.
  자신이 도망친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관원들에게 붙잡힐 것이다. 
지아비를 죽인 살인자로 수배돼 방방곡곡 그 어디에 가서 숨어 있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붙잡혀 능지처참을 당하게 될 것이다.
   계향은 서두르고 있었다. 서둘러 자신도 모르게 경기도 광주의 분원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체포되기 전에 이 아이를 생부인 
우명옥에게 전해주어야 한다. 자신은 남편을 죽인 살인자라 해도 이 
아이마저 살인자의 아들이라는 오명을 씌우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붙잡히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이 아이를 우명옥에게 전해주고 자신은 
어디론가 다른 곳으로 멀리 떠나가야 할 것이다.
  "...그래서"
  빠른 시간 안에 모든 사실을 고백한 계향은 한숨을 쉬면서 말을 맺었다.
  "그래서 이렇게 단걸음에 광주 땅까지 달려왔나이다. 그래서 서방님을 
찾아왔나이다"
  계향의 얼굴에서는 눈물마저 말라 있었다.
  그녀의 말대로 몇날 며칠을 먹지도 자지도 않고 오직 우명옥에게 아이를 
맡겨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달려온 것이 분명하였다.
  "아이를 맡아 주오소서. 서방님, 이 아이는 바로 서방님의 아이이나이다"
  계향의 젖을 먹고 잠든 아이를 두 손으로 안아들고는 우명옥에게 
전해주었다. 우명옥은 엉겹결에 아이를 안아들었다.
  "아이를 진짜 낳은 아버지인 서방님께 전해 드렸으니 아이를 거두어 
주시오소서"
  "어떻게 할 것인가"
  우명옥은 불과 한두 해 사이에 노파가 되어버린 첫사랑의 여인 계향을 
쳐다보며 물어 말하였다.
  이제 계향은 어떻게 할 것인가"
  "제 걱정은 하지 마시오소서, 서방님"
  희미하게 계향은 웃으며 말하였다.
  "아이를 서방님께 전해 드렸고, 이렇게나마 서방님을 만나서 얼굴이라도 
뵙게 되었으니 이제 저는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나이다"
  우명옥은 자신의 품안에 안긴 아들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 보았다.
  그 순간 우명옥은 천애고아인 자신의 처지가 떠올랐다. 태어나서부터 
부모를 잃은 자신의 운명이 그대로 대물림하여 되풀이되고 있는 것일까.
  이 아이를 내가 거둬 키운다 하더라도 어차피 어미가 없는 아이가 아닐 
것인가. 지아비를 죽인 살인자 어미를 어떻게 아이에게 가르쳐 줄 수 있을 
것인가.
  어느새 어둠이 물러가고 어둑새벽이 되어 먼동이 트고 있었다. 새벽 
여명이 스며들기 시작하여 계향은 초조해진 듯 자리에서 일어나 
작별인사를 하였다.
  "안녕히 계시오소서"
  "가면 어디를 간단 말이냐"
  황급히 우명옥이 말을 받았다.
  "갈 곳은 얼마든지 있나이다. 천지사방이 다 갈 곳이나이다"
  "갈 곳이 있다 하여도"
  우명옥이 말을 잘랐다.
  "숨을 곳은 없지 않느냐"
  "숨을 곳도 얼마든지 있나이다. 천지사방이 다 숨을 곳이니 염려 
놓으시오소서"

  날이 밝았을 때 지 외장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새벽마다 아들 
우명옥이 강가에 나아가 목욕재계하고 맑은 강물을 한동이 길어다가 부엌 
독에 퍼붓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던 것이다. 이상하다 생각하여 독 안을 
들여다보았으나 과연 독 안에 물은 말라 있었다. 이런 일이 한 번도 
없었으므로 지 외장은 무슨 변고가 일어났음이 틀림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서둘러 아들이 있는 가마터까지 나아가 보았다.
  가마터는 텅 비어 있었다.
  가마의 아궁이에는 연신 타오르고 있어야 할 불도 잦아들고 있었고, 
가마의 굴뚝에서는 연기가 새어나오고 있지 아니하였다. 지금이 한창 
불기운을 쏟아주어야 할 막바지였으므로 가마가 이처럼 텅 비어 있다는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이처럼 중요한 시간에 자기공이 가마를 
비워두고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그래서 지 외장은 소리를 지르며 
아들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아들 우명옥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지 외장은 아들 우명옥이 또다시 색주가로 나아가 술을 마시고 계집질을 
하는가 염려가 되어 수소문을 하여 보았으나 그 어디에도 아들의 그림자는 
보이지 아니하였다. 우명옥의 모습은 광주 땅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열흘 정도 지났을 무렵.
  어느 날 포교가 포졸 두 사람을 데리고 지 외장의 가마막을 찾아왔다. 
그는 한양과 한양 근교에 있는 구역을 순찰하고 범법자들을 체포하는 
포도청에 소속된 군관이었는데 통부라는 표찰을 휴대하고 있었다.
  "아들에게 누가 찾아온 적이 없었소"
  지 외장은 아는 바가 없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포교는 이렇게 말하였다.
  "강화도에서 지아비를 죽인 여인 하나가 어린아이를 업고 이곳까지 
내려왔다는 소문이 있는데, 그 여인은 이곳에서 기생을 하던 계향이란 
계집이었고 그 계집은 우명옥을 찾아서 이곳까지 도망쳐 왔다는 소문이 
있소이다. 사람을 죽인 살인자를 숨겨주는 죄 역시 중죄에 해당되는 
일이니 아들이 기별을 전해오면 일단 포도청에 신고부터 하여 주도록 
전해주시오"
  포교들이 한바탕 으름장을 놓고 사라지자 지 외장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하였다. 기생 계향의 소문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던 것이고, 그 
계향이가 아들 우명옥의 첫사랑이라는 사실도 지 외장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 계향이가 남편을 죽인 살인자가 되어 도망치다 마침내 
우명옥을 찾아온 것이다. 아들 우명옥도 차마 찾아온 계향을 매정하게 
끊지 못하고 인정에 끌려 그대로 함께 야반도주하여 버린 것이다.
  그제서야 지 외장은 아들 우명옥이 어째서 갑자기 행방불명되었는가 
하는 이유를 알게 된 것이다.
  한편 우명옥은 계향과 더불어 광주 땅을 떠나 정처없이 유랑 생활을 
하기 시작하였다. 계향이는 지아비를 죽인 살인자였으므로 이를 
강상범이라 하였다.
  강상범은 유교 도덕의 기본이 되는 삼강오륜, 즉 임금과 신하,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 지켜야 할 도리를 어긴 범죄인으로 인간이면 
마땅히 지켜야 할 인륜을 짓밟은 패륜아로 취급하여 붙잡히는 순간 마땅히 
사형의 형벌을 받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남의 눈을 피해 걸식을 하면서 강원도의 산골로 숨어들었다. 
그들이 숨어든 곳은 통천이었다. 통천은 강원도에서 가장 깊은 오지였는데 
두 사람이 정착한 곳은 화전민이 살고 있는 추지령이라는 깊은 산 
속이었다.
  우명옥이 통천을 찾아간 것은 그곳이 자신의 고향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천애고아로서 통천의 이곳저곳을 걸식하고 다녀 누구보다도 이곳의 
지리에 밝았으며 숯을 굽는 산막에서 지내기도 하고 화전민을 도와 화전을 
하기도 해 그곳이 우선 머리에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곳이 우명옥의 고향이라고는 하지만 열 살밖에 안된 어린 나이 
때 떠난 고향이었으므로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명옥은 
산 속에 움막 하나를 손수 지었고 물 흐르는 개울가에 작은 가마터를 하나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옹기를 굽기 시작하였다.
  천하의 명인, 백자중에서도 가장 최고의 명품인 갑번자기를 빚던 
우명옥이 하루아침에 질그릇 항아리와 독, 동이 등 일반 가정에서 흔히 
쓰는 싸구려 질그릇을 굽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우명옥은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우삼돌이란 이름으로 돌아왔다.
  그는 노천 가마에서 옹기를 구웠다. 옹기는 질그릇과 오지그릇을 일컫는 
말로, 이런 싸구려 그릇들은 진흙으로 빚어서 잿물을 입히지 않고 구운 
가장 싸구려 그릇이다. 따라서 겉면이 거칠고 윤이 없었으며 고열에서 
굽지 아니하고 대충 구웠기 때문에 쉽게 깨지는 단점이 있었다.
  그러나 우명옥, 아니 우삼돌은 옹기를 구울 때가 가장 행복하였다. 
천하의 백자 항아리,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최고의 예술품, 설백의 백자 
항아리를 빚을 때보다 우삼돌은 너무나 행복하였다. 백자를 구울 때 
사용하는 질좋은 백토와는 달리 진흙은 어디서나 발견할 수 있고 구할 수 
있는 흔하디흔한 이토였다.
  도한 우삼돌은 자신이 굽는 싸구려 질그릇이 나랏님이 사용한 
어용지기가 아니라 가난한 서민들이 사용하는 일상품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고운 빛깔을 만들기 위해서 따로 유약을 칠할 필요도 없었고 장식적인 
문양을 새기지 않아도 무방하였다. 우명옥이 만든 백자들은 임금이나 
고관들을 위한 사치품이었으나, 우삼돌이 만드는 질그릇은 오직 음식을 
담고 물을 저장하는 기능적인 역할에만 충실하면 그만인 생활용품이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우삼돌이 만드는 질그릇은 사랑하는 아내 계향과 사랑하는 
아들 우덕기가 먹을 양식을 구해주는 중요한 생계수단이었다.
  우삼돌은 자신의 아들에게 덕기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태어나서부터 
천애고아였던 우삼돌은 덕기가 자신의 아들이며, 자신이 가족을 가졌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는 아내를 가졌다는 사실이 행복하였고, 무엇보다 아들이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그는 부지런히 질그릇을 만들었고 만든 질그릇을 
지게에 지고 자신이 직접 산골지방을 돌아다니면서 그릇을 팔았다.
  비록 값싼 질그릇이었지만 천하의 명인이 만든 물건이었으므로 아무래도 
달라 보였던지 날개돋친 듯 팔리기 시작하였다. 그는 한 푼이고 두 푼이고 
주는 대로 돈을 받았으며, 당장 돈 없는 농가에는 무상으로 나눠 주었다가 
가을이 되면 곡식으로 받아서 긴 겨울을 풍족하게 지낼 수 있었다.
  우삼돌은 행복하였다.
  질그릇을 팔아 푼돈이 생기면 그는 장터에 들러서 아내와 자식에게 줄 
음식을 장만해서 밤늦게 움막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계향의 아름다움은 옛날로 돌아온 듯하였다. 그러나 남의 눈에 띌 것이 
두려워서 계향은 항상 수건을 머리에 둘러 시골 아낙네처럼 하고 다녔다.
  아들은 무럭무럭 자랐으며 우삼돌이 돌아오면 "아버지" 하고 소리치면서 
마중 나오기도 하였다. 아들이 걸음마를 하여 걷고, 마침내 뛰고 달리며 
자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따를 때마다 우삼돌은 너무나 기뻐서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우삼돌은 한편 마음이 불안하였다. 자신이 이처럼 행복해도 
좋은가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비록 아내 계향과는 입을 열어 말을 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아내는 사람을 죽인 강상죄인이 아닐 것인가. 하늘로부터 
천형을 받아야 마땅할 두 사람이 이처럼 행복한 것은 하늘의 도리에 
어긋난 일이 아닐 것인가.
  우삼돌의 불안한 예감은 적중하였다.
  아들 우덕기가 네 살이 되었을 무렵, 전염병이 돌았다. 호열자였다. 어린 
아들이 갑자기 열이 몹시 나면서 구토와 설사가 시작되었다. 먹으면 먹는 
대로 토하고 몸이 불덩어리처럼 뜨거웠다. 아들이 이른바 쥐통이라 
불리우는 콜레라에 걸려버린 것이었다. 사람들은 하나씩 죽어가고, 일단 이 
병에 걸린 사람은 집에서 격리되어 쫓겨나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계향은 
소문을 내지 않고 아들을 몸에 안고 함께 앓았다. 계향은 자신이 병에 
걸려 아들의 병을 대신 앓고, 자신이 죽는 대신 아들이 살아나기를 
기원하였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어린 아들은 한시가 다르게 몸이 늘어지고, 
경기마저 하였다. 아들이 눈을 감으면 계향은 흔들어 깨웠다. 그럴 때마다 
아들은 희미하게 눈을 뜨곤 하였다. 
  "아가야, 내가 보이느냐. 이 에미가 보이느냐"
  계향이가 소리쳐 물으면 아들은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하곤 했었다.
  "보여요, 엄마"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계향이가 아들을 흔들어 깨워도 아이는 눈을 
뜨지 않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아이는 영영 눈을 뜨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계향은 절대로 아들을 품에서 내려놓으려 하지 않았다. 우삼돌이 
아이의 시체를 치우려 해도 계향은 막무가내로 아이를 포기하지 않았다.
  계향은 말하였다. 아이가 잠들어 있는 것뿐이라고, 잠든 것뿐이니 이제 
잠에서 깨어나면 곧 눈을 뜰 것이라고.
  우삼돌은 양지 바른 곳에 아들의 시신을 묻었다. 이제 겨우 네 살 난 
어린 아들이었다. 이 세상에 태어나 자신의 몸으로 낳은 유일한 
피붙이였다. 자신을 아버지라고 불렀었던 유일한 혈육이었다.
  그는 웃음을 잃었다. 그는 여전히 질그릇을 만들고, 만든 그릇들을 
지게에 지고 산간마을을 돌아다니며 푼돈을 벌었으나 그는 더 이상 
행복하지 않았다. 
 그는 장터에서 돌아올 때마다 끊었던 술에 취하기가 일쑤였다. 그것은 
계향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웃음을 잃었다면 계향은 넋을 잃은 유령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말을 나누지도 않았고 눈이 마주치는 일도 없었다.
  어느 날 우삼돌이 만든 옹기를 지게에 지고 사나흘이나 마을을 
돌아다니며 팔고는 집에 돌아왔을 때였다. 그는 무심코 집으로 들어서려다 
말고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었다. 그는 빈 지게를 맨 채 문 밖에 서서 
방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것은 아내 계향의 비명소리였다. 
그러나 그 비명은 다급한 소리가 아니라 뭔가 들떠 있는 흥분된 
신음소리였다.
  우삼돌은 그 신음소리를 들은 순간 방에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작대기를 치켜들었다. 
당장이라고 문을 박차고 뛰어들어가 지겟 막대기로 요절을 내고 싶었으나 
그는 갑자기 손을 내렸다. 그리고 소리없이 집을 벗어나 작은 야산에 있는 
아들의 무덤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아들의 작은 봉분 앞에 앉아서 소리 죽여 한참을 울었다. 그는 
자신이 한바탕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한참을 울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계향은 방안에 혼자 누워 있었다. 그녀는 곱게 
분단장을 하고 있어서 마치 옛날 광주분원의 색주가에 있을 때의 기생처럼 
보였다.
  그러나 세월이 그녀에게서 아름다움을 빼앗아 갔으므로 오히려 그와 
같은 울긋불긋한 분단장이 계향의 모습을 더욱 추하게 만들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계향은 방탕한 생활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우삼돌은 아내 계향이가 분탕질을 하기 시작하면서 온 마을에 
소문이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를 들은 체도 하지 아니하고 
질그릇만 만들고 있을 뿐이었다.
  질그릇을 만드는 가마터에는 아들 우덕기가 갖고 놀던 장난감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우삼돌은 자신이 직접 진흙으로 새, 토끼, 다람쥐 등 각종 
동물의 모형을 빚은 후 이를 구워서 아들에게 장난감으로 주곤 했었다. 
덕기는 아버지가 만든 장난감을 가장 좋아했었다.
  덕기는 자신이 말만 하면 아버지는 진흙으로 무엇이든 만들어줄 줄 아는 
마법의 손을 가졌음을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 하늘을 나는 새를 만들어줘"
  덕기는 하늘을 나는 새를 가리키며 말하면 우삼돌은 당장 진흙으로 새를 
만들어 이를 구워 아들의 손에 쥐어주곤 했었다. 천하의 명인 우삼돌이 
만든 새였으므로 그것은 마치 생명이 깃들어 있는 새처럼 보여 이제라도 
당장 하늘을 날아오를 것처럼 보이고 있었다.
  덕기는 보이는 것마다, 갖고 싶은 것마다 아버지에게 만들어 달라고 
부탁을 하곤 했었다. 물 속의 물고기를 보면 물고기를 만들어 달라고 
하였고 산 속에 사는 진기한 동물을 보면 이를 만들어 달라고 하였다.
  아버지 우삼돌의 손은 전능하였다. 심지어 세상에 없는 물건도 덕기가 
원하면 우삼돌은 이를 만들어내곤 했었다. 가령 덕기가 도깨비를 만들어 
달라고 하면 아빠 우삼돌은 도깨비를 만들어 아들에게 헌상하였다. 
처음에는 각종 동물에 관심이 많던 아들이 점차 이에 흥미를 잃어가더니 
나중에는 우삼돌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아버지, 엄마를 만들어줘"
  사랑하는 아들이 원하는 물건이었기에 이를 마다할 아버지가 아니었다. 
우삼돌은 계향의 모습을 빚어 토우를 만들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어느새 
인형놀이에 관심이 많은 나이로 성장한 것을 알았다. 그래서 우삼돌은 
엄마뿐 아니라 자신의 모습을 닮은 아비 인형도 만들어 주었고, 아들 
덕기를 꼭 닮은 토우인도 만들어 주었다. 진흙으로 만든 한가족이었다. 
뿐만아니라, 인형들이 살 집과 나무, 산과 강을 만들어 주었다.
  아들 덕기는 무엇보다 아버지가 만들어준 인형들을 좋아하였다. 죽기 
전까지도 이 인형들을 떼어놓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아들 덕기가 죽고, 아내 계향이가 유령처럼 넋이 나가 닥치는 
대로 분탕질을 하기 시작하자 우삼돌은 더 이상 질그릇을 빚는 데 
흥미조차 느끼지 못하고 멍청하게 가마터에 앉아서 아들이 갖고 놀던 진흙 
장난감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아내 계향이가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만든 그릇을 지게에 지고 산골마을을 돌아다니며 팔다가 사흘 만에 
돌아오니 집은 텅 비어 있었다. 계향은 집 어디에도 없었다. 우삼돌은 아내 
없는 집에서 몇날 며칠을 자면서 아내를 기다렸다. 그러나 아내는 
돌아오지 않았다. 마침내 열흘이 지났을 때 그는 아내를 찾아서 통천 
읍내로 나갔다. 성 밑을 따라서 주막집이 대여섯 채 형성되어 있었는데 
우삼돌은 그 주막집을 기웃거리다가 어느 집에서 낯익은 목소리 하나가 
흘러나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구노자, 나구노자.
  맹호연이 나귀 타고
  이적선이 고래 타고
  청계도사 학을 타고
  무산선사 구름 타고
  초패왕은 우미인 타고
  당명황은 양귀비 타고
  중원천자 코끼리 타고
  어사서방 춘향이 타고
  우리 서방은 나를 타고
  나구노자 나구노자...

  우삼돌은 그 노랫소리가 누구의 목소리인가를 금방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아내 계향의 목소리였다. 그와 함께 반쯤 열린 방안에서 함께 
노래하며 껄걸 웃는 남정네의 목소리를 우삼돌은 들었다. 그는 열린 
방안에서 아내 계향이가 일어나서 덩실덩실 춤을 추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계향은 이미 술에 취해서 제대로 몸을 가눌 수 없었으며, 
기생으로서도 퇴물이 되어버린 퇴기 중의 퇴기였으므로 술상에서도 
괄세받는 퇴물이 되어버린 모습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우삼돌은 지겟막대기를 세워들고 주막집 마당을 가로질러 방안으로 
뛰쳐들어가 계향의 머리채를 끌어당겨서 집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는 세워들었던 지겟막대기를 힘없이 떨어뜨렸다.
  "내버려두어라"
  우삼돌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어차피 죽은 목숨이 아니더냐"
  우삼돌은 터덜터덜 주막집을 나와서 혼자 걸어 움막집으로 돌아왔다. 달 
밝은 밤중이었다. 그는 대낮처럼 밝은 마당에 앉아서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였다. 그는 자신이 이곳에서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생각하였다.
  순간 우삼돌의 눈에 무엇인가 띄었다. 그 물건은 달빛에 반사하여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무심히 그 물건을 집어들었다. 그는 그 
물건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토우였다.
  그러나 만들다가 아직 완성하지 아니하였던 미완성의 토우였다. 그 
토우는 반은 계집아이의 형상을 하고 있었고, 하반신의 반은 아직 형체를 
갖추지 못한 채 진흙으로 남아 있었다. 그때 우삼돌은 죽은 아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아버지, 내 동생을 만들어줘. 아버지도 있고 엄마도 있고 나도 있는데 
동생이 없잖아"
  아들 덕기는 형제가 없었으므로 항상 동생을 낳아달라고 조르고 있었다. 
특히 계집아이 누이동생을 갖는 것이 소원이었던 것이다.
  그 미완성의 계집아이 토우는 아들 덕기가 병중에 우삼돌에게 소원했던 
물건이었다.
  "아버지, 동생을 만들어줘. 누이동생을 만들어줘"
  아들 녀석은 그 진흙 인형이 채 만들어지기 전에 그만 숨을 거둬버린 
것이다.
  순간 우삼돌은 자신의 인생살이가 한갓 진흙 인형으로 노는 한바탕의 
소꿉놀이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한 사람이 한 여인을 만나서 사랑을 하고, 
아이를 낳고 가족을 이루고, 태어나서 늙어가며 병들어 죽어가는 일상사가 
한바탕의 꿈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우삼돌의 귓가로 아버지 지 외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 외장은 
우삼돌에게 옛 중국의 고사를 들려주며 인생이란 한바탕의 봄꿈이란 말을 
자주자주 하였기 때문이었다.
  우삼돌은 아버지 지 외장이 말해 주었던 고사의 내용을 떠올렸다.
  옛날 중국 당나라 때 노생이란 젊은이가 어느 주막에서 여옹이란 도사를 
만났다. 인생이 희망과 기쁨으로만 가득 차 있던 노생에게 도사 여옹은 
자신의 베게를 베고 낮잠을 잘 것을 권유한다. 노생은 도사의 베게를 베고 
잠이 들었다. 그는 꿈속에서 온갖 부귀와 영화를 누리며 80세까지 살았다. 
그러나 꿈에서 깨어보니 주막집 주인이 짓고 있던 좁쌀밥이 아직도 익지도 
않았다는 내용으로 우리들의 인생이란 좁쌀밥 한 그릇을 익히는 것에 
불과한 한바탕의 꿈이라는 사실을 비유한 고사였던 것이다.
  아버지 지 외장의 말을 떠올리자 우삼돌의 가슴은 찢어지는 듯하였다.
  지 외장의 말은 틀림이 없다. 계향이와 아들 덕기, 이렇게 셋이서 
행복하게 살았던 지난 5년의 세월도 한갓 꿈에 지나지 않는다. 아들이 
자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따르던 일도 한갓 진흙으로 만든 인형들의 
소꿉놀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아이를 만들고 아이를 낳는 일도 이처럼 
진흙으로 한 계집아이의 형상을 빚어내는 장난에 불과한 것이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계집아이는 이처럼 반은 사람의 형상을 갖추었고 
반은 아직도 만들어지지 않은 진흙의 형상을 간직하고 있는 흙에 불과한 
것이다.
  어차피 사람이란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간다. 불교에서는 우리의 
몸을 다만 지수화풍일 뿐이라고 말하지 않던가. 우리의 몸은 흙과 물 
그리고 불과 바람이 어우러져 만들어진 흙덩어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을 깨닫자 우삼돌은 죽은 아들이 원하던 미완성의 토우를 다시 
만들기 시작하였다. 아들이 원하던 대로 예쁜 계집아이 모습의 토우는 
금방 만들어졌다.
  우삼돌은 아들이 갖고 놀던 아버지와 엄마, 그리고 아들의 모습을 닮은 
토우 옆에 방금 만든 계집아이의 인형을 세워놓았다.
  그것은 진흙으로 만든 인형들의 한가족이었다.
  "이것이 너의 아내 계향이다"
  우삼돌은 진흙의 아내를 바라보며 중얼거려 말하였다.
  "슬퍼할 필요도 없고 애처로워할 이유도 없다"
  우삼돌은 술손님 앞에서 울긋불긋한 몸단장을 하고 춤을 추고 있던 
계향의 모습을 떠올렸다.
  '춤을 추고 있는 계향은 진흙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노래를 부르는 
계향도 진흙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우삼돌은 진흙의 아들 덕기를 바라보며 중얼거려 말하였다. '이것이 너의 
아들이다. 아들은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갔으니 이 세상에 태어난 
것도, 죽은 것도 아니다. 본시부터 없는 형상을 너는 아들이라 부르며 
좋아하였었다. 아들이란 빈 허공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모든 슬픔과 괴로움이 눈 녹듯이 사라지고 마음이 
평온하게 되었다. 우삼돌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딸의 인형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것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너의 딸이다. 이처럼 오는 것도, 가는 것도 
없는 것이다'
  우삼돌은 순간 깨달았다. 그는 진흙으로 빚은 계향과 아들 덕기, 아직 
태어나지 않은 딸의 형상을 통해 뼈에 사무치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아내 계향처럼 인생이란 있고 없는 것이 아니며, 아들 덕기처럼 
나고 죽는 것도 아니며, 딸처럼 오고 가는 것도 아니라는 분명한 
자각이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형상을 닮아 있는 아버지라는 토우를 바라보며 
생각하였다.
  '본시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으며,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으며, 오는 
것도 아니며 가는 것도 아닌 것을 네가 괴로워하는 것은 진흙덩어리에 
불과한 네가 소유하려 하기 때문이다. 가질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는 
욕망이 진흙덩어리에 불과한 너의 실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고통과 
괴로움은 너의 욕망 때문이며 너의 애욕 때문인 것이다. 보아라, 너야말로 
저와 같이 진흙에 불과하지 않느냐. 진흙덩어리에 불과한 네가 도대체 
무엇을 그토록 고통스러워하고 있음이냐. 그 고통은 바로 너의 욕망 
때문이 아닐 것이냐'
  우삼돌은 하룻밤의 긴 사유 끝에 큰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아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도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강물 속에 진흙으로 
만든 아내와 아들, 태어나지 않은 딸, 그리고 자신의 토우를 수장하였다.
  그는 아무런 미련도 없었다.
  이것으로 모든 장례식은 끝이 났다고 생각하였다. 아내 계향뿐 아니라 
자신의 장례식도 이미 끝이 났으니 이미 자신은 산 목숨도 죽은 목숨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본시부터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사는 것도 아니며 죽은 
것도 아니며,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이 고통으로 오는 것은 오직 욕망 때문에 비롯된다는 깨달음을 얻은 
우삼돌은 자신의 토우를 물 속에 집어던져 스스로 장례식을 치르자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그는 자신이 만든 움막을 돌아보았다. 아궁이에 남아 있는 불씨를 마른 
짚에 댕겨다가 불을 일궈 그는 움막을 태우기 시작하였다. 마침 모든 것이 
마른 늦가을이라 불길은 금방 처마로 옮겨 붙고 새벽녘에 불어오는 
찬바람은 곧 집안 전체를 화염에 휩싸이게 하였다. 삽시간에 움막은 
스러져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그는 곧바로 발을 돌려 먼 길을 떠났다.

  며칠 뒤 새벽.
  지 외장은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쏴아- 하고 빈 독에 물을 붓는 물소리 
때문이었다. 아들 우명옥이 사라져버린 지 벌써 5년 째. 그러나 지 외장은 
단 하루도 우명옥을 기다리지 않은 날이 없었다. 지 외장은 문이 덜컥이는 
바람소리에도 행여 아들이 돌아온 것이 아닐까 귀를 세우고 있었다. 문 
밖을 굴러 다니는 낙엽소리에도 행여 아들의 발자국 소리가 아닐까 
소스라쳐 놀라깨곤 했었다.
  온다. 틀림없이 돌아온다.
  지 외장은 확신을 갖고 있었다. 
  아들 우명옥은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
  그런데 무엇인가 쏴아- 하고 빈 독에 물을 붓는 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그것은 아들의 버릇이었다. 매일 새벽 동트기 전 강가에 나아가 
목욕재계하고 물 한동이를 길어다가 빈 독에 물을 가득 채우는 것이 아들 
우명옥의 일과였던 것이다.
  지 외장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잠결에 들은 
바람소리를 물소리로 착각한 것뿐이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그런데 착각이 아니었다.
  쏴아- 하고 빈 독에 쏟아 붓는 물소리가 분명하게 들려오고 있지 
아니한가. 지 외장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앉으며 소리쳐 말하였다.
  "명옥이냐 -"
  그러자 문 밖에서 아들 우명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아버님. 접니다"
  순간 지 외장은 부엌으로 난 문을 열어보지도 않고 말하였다.
  "독에 물을 가득 채웠느냐"
  "가득 채웠나이다"
  그것으로 그뿐이었다. 오랜만에 돌아온 아들 우명옥과 그 5년을 한날 
한시도 잊지 않고 기다렸던 아버지 지 외장과의 만남은 그 두어 마디면 
그만이었다.
  우명옥은 전보다 더 말이 없어져서 벙어리와 다름이 없었다. 그는 이미 
이십대의 나이를 벗어나 중년에 접어들고 있었으며 아름답던 모습과 
눈부시던 청춘은 완전히 소멸되어 허물어져 보였다.
  그 다음날부터 그는 가마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가마에서 자고, 
가마에서 먹고, 가마에서 모든 생활을 하였다. 지 외장은 아들 작업에 
관심을 보이거나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아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면밀하게 엿보고 있었다. 지 외장은 아들 우명옥이 도공이 만들어낼 수 
있는 설백의 갑번자기를 이미 완성하였으므로 이제부터는 인간이 낼 수 
있는 백색이 아니라 오직 신명만이 창조할 수 있는 무색의 갑번자기를 
빚어낼 수 있으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지 외장은 우명옥이 만들었다가 마음에 들지 아니하면 깨어버린 자기의 
파편들을 몰래 주워 살폈으나 그 파편들은 이상한 형태와 빛깔을 갖고 
있었다.
  아름답고 유려한 곡선은 보이지 아니하고 거칠고, 둔화된 그릇의 
형태들만 나오고 있을 뿐이었다. 그뿐인가, 무엇보다 중요한 태토는 정선된 
백토들이 아니라 함부로 질그릇을 빚을 때 사용하는 거친 진흙과 같은 
황토들이었다. 함박눈이 내린 뒤 맑게 갠 새벽 햇살이 눈 위에 비친 것 
같은 청정한 순백색을 추구해야 할 빛깔도 제멋대로여서 지 외장은 아들 
우명옥이 도대체 무엇을 만들려고 추구하고 있는 것일까를 종잡을 수가 
없었다.
  아들은 지금 진흙으로 질그릇을 만들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지금 
진흙으로 빚어 볕에 말리거나 낮은 온도로 구운 다음 잿물을 입히는 
오지그릇을 만들고 있단 말인가.
  오자기.
  도공들은 오지그릇을 까마귀 오 자를 사용하여 오자기라고 부르곤 
하였다. 오지그릇은 질그릇보다 한 수 위였지만 어쨌든 도깨그릇이나 
약탕관, 뚝배기와 같은 겉면이 거칠고 검붉은 하품 그릇이었으므로 
도공들은 스스로 자신의 뒤떨어진 미적 감각을 빗대어 자신들을 도공이 
아닌 오공이라고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천하의 명인, 하늘 아래 둘도 없는 명장 우명옥이 도대체 지금 무엇을 
만들려 함일까. 도자기가 아닌 오자기, 즉 까마귀그릇을 만들고 있음일까.
  그러나 아버지 지 외장은 아들의 마음을 읽지 못하였다. 아들 우명옥에 
있어 이제 순백색의 갑번자기는 더 이상 추구해야 할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이 빚어낼 수 있는 최고의 아름다움과 인간이 표현해낼 수 있는 
최고의 백색을 지닌 갑번자기, 그것이 더 이상 우명옥의 목표가 아니었던 
것이다.
  우명옥이 이제 추구하고 있던 것은 그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용이었다. 최고의 아름다움을 지닌 갑번자기라 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형상이며, 최고의 순백색을 지닌 갑번자기라 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형태를 가진 형식에 그치지 않았다. 그런 그릇들은 다만 
그릇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가령 천하의 갑번자기라 할지라도 그 속에 물을 담으면 뚝배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또한 그 속에 약을 담으면 약탕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값싼 질그릇이라 할지라도 그 속에 보화를 넣으면 이는 진기가 
되는 것이며, 값싼 오지그릇이라 할지라도 그 속에 향약을 담으면 향기가 
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하의 명기는 그 그릇의 모양새나 빛깔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명기가 담는 내용에 따라 좌우되고 잇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천하의 명작이나 예술 또한 그 아름다움과 표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시와 그림이 그 아름다움을 통해 무엇을 담고 있는가 하는 
내용에 따라 좌지우지되고 있는 것이다.
  우명옥은 고통을 통해 인생이란 것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며, 나고 
죽는 것도 아니며, 오고 가는 것도 아닌 것을 깨달았다. 본시 그러한 
인생이 고통스러운 것은 그것을 소유하려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임을 
우명옥은 각성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우명옥은 이제 아름다운 형태나 
빛깔을 가진 그릇이 아니라 인간이 지닌 헛된 욕망의 유한성을 경계하는 
그릇, 즉 '늘 곁에 두고 보는 그릇'을 만드는 것이 최종목표였다.
  늘 곁에 두고 보는 그릇, 이를 유좌지기라고 부른다. 유좌지기란 마음을 
적당히 가지라는 뜻을 새기기 위해 늘 곁에 두고 교훈을 삼는 그릇을 
말하는데 이 그릇에 대해서 말한 사람이 공자였다.
  일찍이 공자는 주나라 환공의 사당에 간 일이 있었다.
  환공의 사당 안에는 의식에 사용하는 의례용 기구인 의기가 있었다. 
그것은 자유로이 기울어질 수 있도록 그릇을 매달아놓은 기구였다. 공자가 
사당을 지키는 이에게 물었다.
  "이것은 무엇을 하는 그릇입니까"
  그러자 사당지기가 대답하였다.
  "늘 곁에 두고 보는 그릇, 즉 유좌지기입니다"
  그 말에 공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말하였다.
  "나도 들은 적도 있거니와 유좌지기는 속이 비면 기울어지고 적당하게 
물이 차면 바로 서 있고, 가득 차면 엎질러진다고 하지요"
  천하의 성군이었던 환공은 평소에 속이 비면 이리저리 기울고 가득 
채우면 엎질러지고 적당하게 물을 채워야만 중심을 잡고 잘 서 있는 
유좌지기를 보면서 자신이 어떻게 마음을 잡고 욕망을 간수해야 하는가의 
교훈을 얻곤 했었다. 무엇보다 어느 쪽으로 치우치는 일 없는 중용의 도를 
강조한 공자에게 있어 환공의 유좌지기야말로 자신의 사상을 대변하는 
그릇이었던 것이다.
  그 전설적인 그릇에 대해서 우명옥에게 이야기해준 사람이 바로 아버지 
지 외장이었다. 우명옥이 어렸을 때부터 그 이야기를 해주었던 것이다.
  "저 먼 중국의 사당에 가면 도깨비와 같은 그릇이 있다. 그 그릇을 가득 
채우면 엎질러지고 텅 비면 이리저리 기울고 오직 적당하게 채워야만 
중심을 잡고 똑바로 서 있는 그릇인데 그 이름을 유좌지기라 부른다"
  유좌지기.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 지 외장을 통해 전해들은 전설 속의 그릇. 이제 
우명옥이 만들어내고 싶은 그릇이야말로 바로 이 유좌지기였던 것이다.
  인간의 욕망. 그 끝간 데를 모르는 욕망의 한계를 깨우쳐줄 수 있는 
그릇, 단지 그 안에 무엇을 담아 먹고 마시는 그릇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을 꾸짖고 경책하는, 곁에 두고 보는 그릇, 그 유좌지기를 만들고 싶은 
것이 우명옥의 최종목표였던 것이다.
  계영배.
  우명옥은 자신이 만든 그릇의 이름을 미리 결정해 두고 있었다. 그 
그릇의 이름은 '가득 채움을 경계하는 잔'이라는 의미를 가진 계영배였다.
  그는 모든 것을 맛보았다.
  술과 여자 그리고 쾌락과 명예, 소유와 집착, 애욕과 허무 그 모든 
것들을 단시일 내에 모두 맛보았던 것이다.
  그는 이러한 모든 고통의 근원이 바로 모든 것을 가득 채우려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았다. 그러므로 가장 큰 욕망은 무욕이며 가장 
큰 만족은 바로 자족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우명옥은 바로 이 모든 것을 가득 채우려는 욕망을 경계하는 계영배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말하였다.
  '적당히 채워라. 어떤 그릇에 물을 채우려 할 때 지나치게 채우고자 하면 
곧 넘치고 말 것이다. 또한 칼은 쓸 수 있을 만큼 날카로우면 되는 것이지 
예리하게 갈고자 하면 날은 지나치게 서서 쉽게 부러지고 만다. 
금은보화를 지나치게 가진 자는 남의 시기를 사게 되며, 또한 부귀해져서 
지나치게 교만해지면 상황이 어지러워져서 결국 이 모든 것을 탕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적당히 성공한 후에는 그곳에 영원히 
머물러 있으려고 노력해서는 아니되며 적당히 때를 보아서 물러감이 바로 
하늘의 도리인 것이다. 하늘은 만물을 낳되 소유하지 않으며, 또한 
무리하지도 않고 공을 이루어도 관여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천도, 
즉 자연의 도리인 것이다'
  우명옥은 노자가 말하였던 '모든 불행은 스스로 만족함을 모르는 데서 
비롯된다'는 천도를 깨우쳤으며, 또한 그 깨우침을 노자가 말하였던 '어떤 
그릇에 물을 채우려 할 때 지나치게 채우려 하면 곧 넘치게 되고 만다'의 
문장에서 '가득 채움을 경계하는 잔', 즉 계영배의 이름을 결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명옥은 그 계영배를 만들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해 가마에 
매달렸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도자기에 관한 모든 상식과 지식, 그리고 
모든 기술을 버렸다. 그는 완전한 무의 상태에서 다시 시작하였다.
  이러한 우명옥의 마음을 짐작할 수 없었던 아버지 지 외장은 아들의 
작업 또한 전혀 이해가 없었다.
  그 길었던 겨울이 지나고, 또 봄이 가고 여름이 되었을 무렵.
  한밤중에 지 외장은 문득 눈을 떴다. 잠귀가 밝은 지 외장은 잠결에 
문득 인기척을 들은 듯도 싶어 눈을 뜬 것이다. 그는 귀를 기울였다. 
  문 밖에서 분명 무슨 소리가 나고 있었다.
  "누구냐"
  벌떡 몸을 일으키며 소리쳐 묻자 문 밖에서 우명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명옥이나이다"
  "네가 웬일이냐"
  우명옥은 좀처럼 곤히 잠든 지 외장의 잠을 깨우는 일이 없었으므로 지 
외장은 의아해서 물어 말하였다. 그러자 우명옥이 대답하였다.
  "아버지, 방금 그릇 하나를 만들었나이다. 한번 봐주셨으면 좋겠나이다"
  지 외장은 주섬주섬 몸을 일으켰다. 그는 문 밖으로 나왔다. 아직 깊은 
한밤중이었다. 다행이 달은 휘영청 밝아 온누리는 강물과 달빛으로 
흘러넘치고 있었다.
  문 밖에는 우명옥이 서 있었다. 그는 앞장서 걷기 시작하였으며 지 
외장은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이제까지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아들 우명옥이 제 스스로 찾아와, 그것도 혼곤히 잠든 아버지를 깨워 
자신이 만든 그릇을 봐달라고 자청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천하의 갑번자기,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최고의 설백자기를 빚어냈을 
때도 우명옥은 아버지에게 찾아오지 않았다. 그때 지 외장은 뭔가 낌새를 
채고 가마 쪽으로 다가가 스스로 발견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아들 우명옥이 제 발로 찾아와 잠든 아버지 지 외장을 깨운 
것이다. 그렇다면 우명옥은 도대체 어떤 그릇을 만들어냈음일까. 방금 가마 
속에서 번조한 자기들을 꺼냈으므로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지 외장은 
본능적으로 가마의 아궁이 주위의 화덕을 살펴보았다.
  가마의 바닥은 고동색의 가는 모래가 깔려 있었고 경사진 가마 바닥의 
수평을 유지하기 위해서 감발을 엎어 괴어놓았는데, 새로 만든 그릇은 
일단 꺼내놓은 즉시 화덕 위에 올려놓고 감상하는 것이 보통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는 자그마한 잔 하나가 놓여 있을 뿐, 그 어디에도 눈에 
띌 만한 모습이 보이지 않고 있었다. 설백의 백자 항아리는 그 빛깔로 
인해 한밤중이라도 마치 흰 눈이 내린 것처럼 눈이 부실 만큼 빛나는 것이 
당연했기 때문이다.
  "무엇을"
  지 외장이 한참만에 물어 말하였다.
  "무엇을 봐달라는 말이냐"
  아버지가 묻자 우명옥은 화덕 위에 놓인 그릇 하나를 두 손으로 
들어올려 지 외장에게 바쳤다. 지 외장은 그 그릇을 들여다보았다. 지극히 
평범한 그릇이었다. 크기는 왜소하고 모양도 단순한 잔이었다.
  도공들은 자신의 솜씨를 뽐낼 때만 항아리하든가 목이 긴 물병 같은 
우아한 곡선미를 살릴 수 있는 백자들을 선호하고 있었다. 이러한 잔들은 
실용적인 그릇일 뿐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반기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잔이 아니더냐"
  지 외장은 의아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그렇습니다, 아버님. 그것은 잔이나이다"
  "이 잔의 무엇을 보아 달라는 말이냐"
  "아버지께 모처럼 술 한 잔을 올리고 싶어서 그리 말하였나이다"
  우명옥은 무릎을 꿇은 자세에서 그렇게 말하였다.
  과연 가마 옆에는 술병 하나가 놓여져 있었다. 지난 백여 일 동안 몇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아 벙어리와 다름없었던 아들 우명옥이 입을 열어 
말문이 트였을 뿐 아니라 술까지 올리겠다고 하니 어쨌든 반가운 마음에 
지 외장은 아들이 만든 잔을 치켜들었다.
  그 잔에 우명옥은 한 가득 술을 따랐다. 잔이 넘치도록 술을 따르자 지 
외장은 이렇게 말하였다. 
  "이 아비한테 술을 따르기 위해 잔 하나를 만들었단 말이냐"
  지 외장은 마음이 흐뭇해서 잔을 들어 입가에 대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한 가득 잔이 넘치도록 따랐던 술이 하나도 없이 깨끗하게 텅 비어버린 
것이었다. 지 외장은 자신이 귀신에 홀렸는가 하고 생각하였다.
  "방금 따른 술이 모두 어디 가버렸느냐"
  지 외장은 자신도 모르게 엎질러졌는지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그 
어디에도 흔적은 보이지 아니하였다.
  "다시 따르겠나이다"
  이번에는 우명옥이 잔의 한 7부 가량을 채울 정도로 술을 따랐다. 잔을 
한 잔 받아 마시고 나서 이번에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잔을 내밀며 
말하였다.
  "너도 한 잔 마시거라"
  지 외장은 술잔을 가득 채워 아들에게 내밀었다. 아들은 두 손으로 지 
외장이 주는 잔을 받아 들었다. 그러나 마시려는 순간 술잔의 술은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순간 지 외장은 뭔가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내가 술잔을 가득 채우고 말겠느니라"
  그리고 나서 지 외장은 술잔 속에 한가득 술을 따라서 주의깊게 이를 
지켜보았다. 술은 순식간에 사라져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았다.
  어디로 새버린 것이 아닐까 잔을 뒤집어 보았지만 새어나간 흔적도, 
균열된 부분도 없었다.
  지 외장은 이번에는 술잔의 7부 정도만을 채워 보았다. 그러자 술은 
조금도 사라지는 일이 없이 온전히 남아 있었다.
  지 외장은 아들 우명옥이 가득 채우면 모든 술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버리고, 적당히 채워야만 술이 온전하게 남아 있는 신기를 
만들었음을 알 수 있었다.
  "내 반드시"
  지 외장은 중얼거려 말하였다.
  "내 반드시 이 잔을 한 가득 채우고 말 것이다. 해내고야 말것이니라"
  이번에는 술병을 거꾸로 세워들고 잔에 술을 쏟아부었다.
  그러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술병의 술이 다 없어지도록 술잔이 
채워지지 않고 있었다. 그야말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던 것이다.
  한 병의 술은 모두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잔은 조금도 채워지지 
않고 있었다.
  그제서야 지 외장은 아들 우명옥이 마침내 대기를 만들어 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문자 그대로, 큰 그릇. 그러나 도공들에게 있어 대기라 함은 신령에게 
제사지낼 때 쓰는 신기를 말한다. 아무리 천하의 명품을 만들 수 있는 
명장이라 하더라도 생과 사의 경계를 뛰어넘지 못하고는 신기를 만들어 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아들 우명옥이 이와 같은 신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설백의 갑번자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한계를 뛰어넘어 
신기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뜻하는 것이다.
  백색의 갑번자기를 뛰어넘어 무색의 갑번자기를 빚어낼 수 있을 만큼 
속계를 초탈하여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뜻하는 것이다.
  순간 지 외장은 우명옥이 이미 자신의 아들이 아님을 깨달았다.
  "아버지"
  우명옥은 입을 열어 말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께오서 늘상 말씀해 오시던 먼 중국의 사당에 
있던 도깨비와 같은 그릇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 제 소원이었나이다. 
아버지께오서는 그 그릇을 가득 채우면 엎질러지고 텅 비면 이리저리 
기울고 오직 적당히 채워야만 중심을 똑바로 잡고 서 있는 그릇인데 그 
이름을 유좌지기라 하였나이다. 저도 그와 같이 늘 곁에 두고 보는 
그릇이라는 유좌지기를 만들고 싶었나이다. 
  "그리하여 이와 같은 신묘한 그릇을 만들었단 말이냐"
  "그렇사옵니다, 아버지"
  "그러하면 이 그릇의 이름은 무엇이냐"
  "계영배라 하였나이다"
  "계영배라 하면 '가득 채움을 경계하라'는 뜻이 아니겠느냐. 너는 가득 
채우려 하면 없어지고 오직 적당하게 채워야만 온전한 이 계영배를 
만들었음이냐. 억지로 가득 채우려 하면 한강 물을 다 쏟아붓는다 
하더라도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계영배를 만들었음이냐"
  "그렇사옵니다, 아버지"
  지 외장은 순간 아들 우명옥이 더 이상 이곳에 머물지 못할 것임을 
직감하였다.
  아들 우명옥은 천하의 갑번자기를 만들어보고 싶어하는 도공의 욕망조차 
초월하여 있는 것이다.
  그날 밤, 우명옥은 가마 옆에 앉아 월광 속에서 무언가 열심히 술잔 
안에 글을 새기고 있었다.
  
  지 외장의 불길한 예감은 적중하였다. 그 다음 날 아침, 우명옥은 
어디론가 또다시 사라져버린 것이다.
  사라지기 전 우명옥은 잠들어 있는 지 외장의 움막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삼배를 올렸다. 이로써 그는 자신을 키워준 아버지에게, 또한 자신을 
가르쳐 준 스승에게 신구의의 삼업에 경의를 표한 다음 어디론가 떠나 
사라졌다.
  자신이 만든 신묘한 물건 계영배의 술잔 하나만을 갖고서 그는 홀연히 
사라져버린 것이다.

   5

  지 노인은 긴 회상을 끝내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노인의 긴 고백으로 이미 하룻밤은 흘러가버리고 먼동이 트고 있었다. 
함께 온 봉사는 여전히 따뜻한 가마 곁에 머리를 기대어 깊은 잠에 빠져 
있었고 멀리 떨어진 곳에 하인도 쭈그리고 앉은 채 잠들어 있었다. 깨어 
있는 사람이라고는 지 노인과 임상옥뿐이었다.
  하룻밤이 다 지나도록 달무리를 안주 삼아 술을 마셨으므로 술독의 술은 
다 비어 있었다. 임상옥은 취기가 올랐으나 지 노인은 여전히 말짱하였다.
  지 노인은 얘기를 하는 틈틈이 화목들을 아궁이 속에 집어던져 넣고는 
이를 부지깽이로 바람이 잘 통하도록 이리저리 쑤시고 있었다.
  "아들 녀석이 사라져버린 이삼 년 후쯤인가, 한겨울에 얼어죽은 시체 
하나가 가마터 근처에서 발견되었소. 남루한 여인의 시체였는데 마을 
사람들은 한때 광주 분원 근처 색주가에 있던 기생 계향이의 시체라고 
말하였소. 마을 사람들이 시체를 거둬다가 양지바른 곳에 묻어 주었소"
  먼동과 함께 어둠이 물러가고 있었다. 먼곳에서 새벽을 알리는 첫 닭의 
울음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지난 수십년 동안"
  짧은 침묵 끝에 다시 노인이 입을 열어 말을 이었다.
    "나는 아들 우명옥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소. 이제 
광주분원에도 갑번자기를 만들 사람은 나 하나밖에 남지 않았소. 내가 
죽어버리면 이 명맥은 끊어져버리고 대가 끊길 것이 분명하오"
  "아드님이 돌아올 것이라고 믿으십니까"
  임상옥은 넌지시 물어보았다.
  그러자 봉두난발한 머리칼과 가슴까지 내려오는 긴 수염을 기른 노인은 
형형한 눈빛으로 임상옥을 쏘아보며 대답하였다. 
  "돌아오고 말고, 반드시 돌아오리라고 믿고 있었소. 그런데 이제 아들 
대신 깨어진 계영배가 이렇게 돌아와 있소이다"
  지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나는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소. 언젠가는 이 잔이 이곳까지 제 발로 
찾아오게 될 것을 짐작하고 있었소. 오늘이 바로 그 날인 것이오"
  지 노인은 다시 부지깽이로 장작더미를 이리저리 쑤셔대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러면 이제 내가 대인어른께 묻겠는데, 대인어른은 이 술잔을 도대체 
누구에게 얻었소"
  임상옥은 노인의 질문에 대답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곧 말문을 닫았다.
  나는 노인의 아들 우명옥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우명옥을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내가 이 계영배를 얻은 것은 큰스님으로부터였다. 석숭 
스님은 항상 차를 마실 때면 이 잔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명옥이 
만든 신묘한 이 잔 계영배가 어떻게 해서 석숭 큰스님에게 흘러갔는지 그 
연유는 모르지만 석숭 스님은 임상옥이 하산하여 속세로 돌아올 때 자신이 
즐겨 마시던 찻잔을 주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이 잔을 갖고 가도록 
하여라. 이 잔이 너의 마지막 위기를 잘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잔이 너를 전에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전무후무한 거부로 
만들어줄 것이다"
  임상옥은 머리를 흔들며 생각하였다.
  지 노인의 질문에 대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굳이 큰스님 석숭의 
일들을 털어 고백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석숭 스님의 밀을 
고백한다면 지 노인의 머리는 한층 더 복잡해질 것이므로.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임상옥은 얼버무려 대답하였다.
  "이 잔이 어찌어찌해서 내게로 흘러들어오게 되었는지 그 연유조차 잘 
모르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해서 계영배를 얻게 되었는가하는 
노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아니하고 얼버무려 버린 것은 임상옥 나름대로의 
확신 때문이었다. 임상옥은 노인의 얘기를 통해서 계영배의 비밀을 모두 
밝혀내었으며 우명옥의 손에서 계영배가 어떻게 해서 석숭 큰스님에게로 
전해져갈 수 있었는지 그 비밀까지 밝혀낼 수 있었던 것이다.
  오직 아들 우명옥이 돌아오기만을 한결같이 기다리며 산 노인에게 그 
비밀을 굳이 밝혀 새삼스럽게 절망을 안겨줄 필요는 없지 아니한가.
  이미 깨어져버린 계영배처럼 아들이 돌아오리라는 희망 역시 산산이 
깨어져버렸다는 사실을 어떻게 가르쳐 줄 수 있을 것인가.
  임상옥은 그러므로 지 노인의 질문에 굳게 입을 다물어버렸던 것이다.
  이로써 임상옥은 몸을 일으키며 생각하였다.
  계영배에 얽힌 비밀을 좇아 이곳까지 찾아온 소기의 목적을 이루게 된 
것이다. 계영배에 관한 비밀은 지 노인의 입을 통해 모두 밝혀내게 된 
것이다. 계영배에 관한 모든 비밀을 알게 된 이상 더는 이곳에 지체하여 
머물 필요가 없다고 임상옥은 생각하였다.
  그는 하인과 그를 이곳까지 안내하여 온 봉사를 깨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작별인사를 나눴다. 임상옥이 인사를 나누고 길을 떠나려 하자 
지 노인은 그에게 우명옥이 만들었던 최고의 명품 백자 항아리를 가리키며 
말하였다.
  "대인어른, 이 백자 항아리를 갖고 가시오"
  아들 우명옥이 남긴 단 하나의 명품, 하늘 아래 그 누구도 만들 수 없는 
최고의 명품 백자 항아리. 아들이 남기고 간 단 하나의 유품이 갑번자기를 
어째서 지 노인은 처음 만난 임상옥에게 선뜻 내어주려고 하는 것일까.
  "아, 아닙니다"
  임상옥은 완강하게 손을 내저으며 말하였다.
  "그 백자는 아드님이 남기고 간 천하의 명품이나이다. 당연히 갖고 계실 
분은 어른밖에 없으시나이다. 한갓 장사치에 불과한 저에게는 과분한 
물건이나이다"
  그러자 지 노인은 웃으며 말하였다.
  "옛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때 초나라에서 있었던 일이나이다. 변화씨라는 
사람이 산 속에서 옥돌을 발견하여 곧 여왕에게 바쳤습니다. 여왕은 
보석을 받아들고 보석 세공인에게 감정시켜 보니 그저 평범한 돌멩이라고 
하였습니다. 화가 난 여왕은 변화씨를 발뒤꿈치를 자르는 형벌인 월형에 
처했습니다. 여왕이 죽자 이번에는 그 옥돌을 무왕에게 바쳤는데 이번에도 
같은 대답이 나오자 변화씨의 나머지 한 발의 뒤꿈치도 자르는 형벌에 
처했던 것입니다. 무왕의 뒤를 이어 문왕이 즉위하자 변화씨는 그 옥돌을 
들고 뒤뚱거리며 걸어서 궁궐 앞에 앉아 사흘밤 사흘낮을 꼬박 
울었습니다. 문왕이 그 사연을 묻자 변화씨는 울면서 그간 있었던 일들을 
고했습니다. 문왕은 이상하게 여겨 그 옥돌을 받아서는 세공인에게 맡겨 
다듬어오라고 시켰습니다. 그 결과 투박한 돌 속에서 천하에 보지 못한 
명옥이 오롯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문왕은 크게 기뻐하며 곧 변화씨에게 
많은 상을 내리고 그의 이름을 따서 그 옥을 '화씨의 구슬', 즉 
화씨지벽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천하의 완벽한 명옥도 
그를 알아주는 사람이 아니면 한갓 돌멩이에 불과한 것이나이다."
  노인은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이 세상 모든 만물은 그 나름대로의 임자가 따로 있고 주인이 따로 
있는 법이나이다. 이 설백의 갑번자기를 소중히 간직하고 보관할 사람은 
오직 임 대인 한 사람뿐이나이다"
  임상옥은 하는 수없이 우명옥이 남긴 최고의 명품 백자 항아리를 
받아들고 퇴촌을 떠났다. 훗날 임상옥이 사람을 시켜 거금을 지 노인에게 
보냈었으나 지 노인은 일언지하에 이를 거절하였다는 말이 전해 내려오고 
있을 뿐이다.
  임상옥은 일행과 더불어 언덕을 내려 강가로 왔다. 간밤에 매어둔 
나룻배는 강가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세 사람은 나룻배 위에 탔으며 
하인은 노를 젓기 시작하였다.
  이미 날은 밝아 먼동은 텄지만 강물 위에는 안개가 자욱하게 드리워져 
있었고 맞은편 하늘에는 지다 만 달이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하인은 노를 저을 때마다 배는 강물 위를 미끄러져 나가고 있었고, 강물 
위에는 모든 풍경이 거꾸로 비추이고 있었다. 아직 지지 않은 창백한 달 
그림자도 강물 위에서 거꾸로 빛나고 있었다.
  이제 우명옥은 절대로 이곳으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임상옥은 강물 속에 거꾸로 비친 산봉우리와 자욱하게 드리운 강물 위의 
안개를 바라보면서 생각하였다.
  지 노인은 죽을 때까지 아들을 만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옳은 일이었을까. 아들 우명옥이 만들었던 신기 계영배를 어떤 경로로 
해서 임상옥이 입수하게 되었는가 그 연유를 지 노인에게 말하지 않았던 
일이 과연 옳은 일이었을까. 어떻게 해서 우명옥의 계영배가 석숭 
큰스님의 수중으로 들어가게 되었는지의 비밀을 지 노인에게 밝히지 
않았던 일이 과연 옳은 일이었을까.
  아니다.
  임상옥은 머리를 흔들면서 중얼거려 말하였다.
  그것을 지 노인에게 말하지 않았던 것은 과연 옳은 일이었다. 왜냐하면 
지 노인에게 있어 유일한 희망은 아들 우명옥이 살아서 돌아오는 
것이었으므로 우명옥이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지 
노인에게 말해줄 수 있을 것인가.
  강물 위에는 건너편 망월봉의 산그림자마저 거꾸로 비추이고 있었다. 
간밤에 이 산 위에서 달이 뜨고, 그리고 지 노인은 밤새도록 지난 일들을 
이야기하였던 것이다.
  일찍이 서거정은 망월봉을 바라보면서 이런 시를 지었었다.

  긴 바람에 배부른 돛으로 한수에
  급히 달려 산중으로 돌아오니 술이 처음 익었구나.
  마른 창자에 술이 들어가니 또한 쉽게 취하는도다.
  두 귀가 취중에 쨍 울리며 흥이 스스로 족하니
  술두루미를 옮겨 망월봉에 날려 올라가
  슬쩍 눈을 동쪽 봉우리로 옮겨
  새 달이 떠오르기를 기다려 본다.
  새 달이 넘실넘실 구름 끝에 나오니
  빙륜이 둥그런데 금물결무늬 일렁거리네.
  잠깐 새에 하늘 중앙에 달려 있으니
  구주와 사해가 모두 밝은 빛이네.
  잔을 들어 달에게 물어도 달은 응하지 아니하는데
  돌아보니 토끼가 나의 청광맞음을 비웃고 있구나.

  아직 지지 않은 달은 강물 위에 떠 있고 그 달 속에서 토끼가 웃고 
있었다. 청광. 마음이 깨끗하여 청아한 맛이 있으면서도 하는 짓이 상식에 
벗어난 광인. 미친 것도 아니면서도 일부러 미친 척하는 광풍. 그렇다. 
우리의 인생이란 한바탕의 일진광풍이 아닐 것인가. 우명옥의 짧지만 
파란만장한 일생을 따지고 보면 한바탕의 광대놀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지 노인도 마찬가지다. 천하의 백색자기를 꿈꾸는 지 노인의 열정도 
미치광이와 멍청이의 광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순간.
  임상옥은 전광석화와 같은 영감을 느꼈다.
  어째서 석숭 큰스님이 자신에게 마지막 위기를 물리칠 비기로 계영배를 
물려 주었는가 하는 그 수수께끼를 풀어내었던 것이었다. 너무나 분명해서 
한 줌의 미혹조차 없었다. 그뿐인가. 마지막으로 남겼던 석숭 큰스님의 
화두도 그는 마침내 타파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잔이 너를 전에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전무후무한 거부로 만들어 
줄 것이다"
  임상옥은 품속에서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계영배를 꺼내어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는 확연히 알 수 있었다. 큰스님 석숭의 그 말이 과연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가를 그는 그제서야 대오철저하였던 것이다.
  
  그렇다.
  큰스님 석숭은 임상옥에게 닥쳐온 첫 번째 위기를 '죽을 사'의 활구로 
물리쳐 주었으며, 두 번째의 위기를 '솔 정' 자의 비의로 물리쳐 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세 번째의 위기를 "계영배'의 비기로 물리쳐 주신 
것이다. 석숭 큰스님의 그런 계시는 이제 더 이상의 위기는 없다는 의미를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석숭 큰스님은 임상옥의 세 번째 위기를 타파해 주었을 뿐 
아니라 무슨 방법으로 임상옥의 위기를 그 세 번째 위기에서 멈추게 
하였던 것일까.
  아직 계영배의 모든 비밀이 밝혀진 것이 아니다. 임상옥은 뱃전에 앉아 
강물을 바라보면서 생각하였다.
  계영배의 남은 비밀을 밝혀내기 위해서는 아직 한군데 더 들러야 할 
곳이 남아 있는 것이다.


   @[제3장 석숭 스님@]


  금강산은 해발 524미터로 높은 산은 아니다. 산새가 날카롭고 험준하여 
경치가 빼어나 금강산이라고 불리고 있다. 다만 강원도의 금강산과 
구분하기 위해서 의주금강이란 애칭으로 불리고 있는데, 이 산은 계곡도 
깊어 산에서 흘러내린 물은 송장이라고 부르는 대규모의 저수지를 이루고 
있을 정도이며, 이 부근 일대는 예로부터 쌀을 생산하는 곡창지대를 
이루고 있다.
  산중에는 금강사, 천왕사를 비롯하여 5백 년 이상이 된 고찰 추월암이 
있는데, 산정에 오르면 멀리 만주벌의 산줄기가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고 있었다.
  금강산을 다른 이름으로 석숭산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이 산이 험준한 
바위로 이루어진 악산이기 때문이다.
  평생을 이 산에서 주석하셨던 석숭 큰스님은 자신의 법호를 그렇게 지은 
것도 자신이 머무르고 있는 산의 이름을 따서 선가의 법통을 그대로 
따랐기 때문이다. 석숭은 평생을 금강사의 말사인 암자 추월암에 머무르고 
있으면서 산문 밖을 떠나본 적이 없었다.
  멀리 경기도 광주의 분원을 찾아가 계영배의 비밀을 추적하였던 
임상옥이 의주로 돌아와 제일 먼저 했던 일은 곧바로 금강산에 오르는 
일이었다.
  금강산의 추월암.
  추월암을 떠나 하산하는 임상옥에게  큰스님 석숭은 말하였었다.
  "이제 그만 가거라. 그리고 산을 내려가면 그 즉시 이곳을 잊어버리고 
다시는 되돌아오지 말아라"
  그것이 석숭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 말을 끝으로 석숭은 벽을 향해 
돌아앉아 임상옥이 물러가며 마지막으로 삼배를 올려 예를 갖추었지만 본 
척도 들은 척도 하지 아니하였던 것이다.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자신이 금강산을 올라 추월암을 찾아가 석숭 스님을 친견한다 
하더라도 반가워하기는커녕 그 즉시 주장자로 한 방 두들겨 맞고는 
쫓겨나리라는 것을.
  "다시는 되돌아오지 말아라"
  그것은 바로 석숭의 엄명이었던 것이다.
  바로 이 엄명 때문에 임상옥은 의주읍내에서 금강산을 언제나 마주보고 
있으면서도 그 산을 오르지 못하고 있었다.
  임상옥은 광주의 분원에서 돌아오자마자 곧바로 금강산을 오르면서 
생각하였다.
  이번에는 어쩌는 수가 없다.
  석숭 스님으로부터 백 방망이 두들겨 맞는 일이 있더라도 그를 만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니다. 옛 당나라의 선승 남천이 고양이의 목을 
단칼에 베어버렸듯, 찾아가 친견하여 설혹 석숭이 자신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단칼에 베어버린다 하더라도 그를 만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임상옥은 석숭이 내려준 세 개의 화두를 모두 타파하였고, 
이를 모두 깨달았으니 석숭을 만나 깨달음을 인정받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예로부터 제자들은 스승이 내려준 공안을 깨뜨려 타파하면 눈밝은 스승을 
찾아가 증명을 받는 것이 법도였기 때문이다.
  그보다도.
  임상옥에게는 아직 밝혀야 할 비밀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계영배의 
비밀'이었다.
  그는 신묘한 그릇 계영배의 비밀을 밝혀내기 위해 경기도 광주의 
분원까지 찾아가 지 노인을 만나 계영배에 얽힌 비밀을 추적할 수 있었다. 
지 노인을 통해 그 계영배를 번조한 우명옥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상세하게 
들을 수 있었으며, 또한 우명옥이 인간의 욕망을 경계하기 위해서 
계영배를 만들었음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계영배에 관한 모든 비밀이 밝혀진 것은 아니다. 
임상옥은 임상옥대로 마음속으로 어떤 한 가지의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 확신을 확고히 하는 것은 석숭 스님을 만나는 순간 품속에서 
계영배를 꺼내 그대로 악- 소리와 함께 석숭의 얼굴 정면을 향해 집어던져 
버리는 방법 하나뿐이었던 것이다. 임상옥은 석숭의 얼굴을 향해 그 
계영배를 내던지기 위해 30년 만에 금강산을 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11월의 만추였지만 북녘의 깊은 산이었으므로 이미 한겨울이었다. 
그래서 산의 계곡에는 어느덧 잔설이 덮여 있었다.
  30여 년 만에 산에 오르고 있으면서도 전혀 산길이 달라진 것이 없었다.
  산은 옛 산 그대로였고 물 역시 옛 물 그대로였다. 숲도 옛 숲 
그대로였고 바위도 옛 바위 그대로였다.
  임상옥은 열다섯의 나이 때 이 산 속에서 동자승 아닌 동자승 노릇을 
하면서 법천 스님으로부터 글공부를 했었다. 그것이 일년. 또한 임상옥은 
의주의 상계로부터 파문을 당한 뒤 먹고 살 길이 막막해지자 다시 
입산하여 행자승 생활을 하였었다. 그것이 일년 하고도 수개월, 모두 
합하여서 금강산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은 3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언제나 
어디서나 임상옥의 가슴속에 고향처럼 살아 있었던 것은 바로 
금강산이었던 것이다.
  30여 년 만에 금강산을 오르고 있었지만 모든 풍경은 옛날 그대로였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였지만, 그리하여 10년이 세 번이나 
흘러갔지만 산은 옛 산 그대로였다. 산은 옛 산 그대로였으면서도 바뀐 
것은 임상옥 자신뿐이었다.
  그는 저잣거리로 내려와 상인이 되었으며 마침내 조선 최고 최대의 
거부가 될 수 있었다.
  임상옥은 산길을 오르며 30여 년간 속세에 있었던 지난 과거를 회상하여 
보았다. 중요한 고비 때마다 석숭 큰스님의 활구들이 자신의 위기를 
물리쳐 주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느낄 수 있었다.
  환속하기로 마음을 결정하고, 석숭을 만나러 갔을 때 임상옥이 삼배를 
올리자 석숭은 소리쳐 말하였다.
  "네 놈이 나를 죽어 있는 목불로 본 모양이구나. 당장 썩 나가거라, 이 
날강도 같은 놈아"
  석숭은 펄펄 뛰었으나 임상옥은 무릎을 꿇고 앉아서 이렇게 말하였었다.
  "이만 물러가나이다, 큰스님. 그 동안 신세 많이 지었나이다. 부디 
만수무강하시옵소서"
  그리고 나서 사승이었던 법천 앞에 삼배를 올리자 법천은 임상옥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하였었다.
  "부다 성불하십시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모든 번뇌에서 해탈하여 부처를 이루는 일. 불도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상도를 통하여 상불을 이룰 수 있음을 깨우쳐 주신 은사 스님인 법천과 
큰스님 석숭.
  두 사람을 만나기 위해 30년 만에 금강산의 옛 길을 오르고 있는 
임상옥의 가슴은 청년처럼 설레고 있었다. 
  임상옥은 금강사부터 둘러보기로 하였다. 금강사는 천왕사와 더불어 
금강산에 있는 사찰이었고, 추월암은 금강사에 딸린 암자였으므로 석술 
스님을 만나보기 전에 우선 은사 스님이었던 법천 스님부터 만나보는 것이 
예의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금강사도 옛 모습 그대로였다. 예나 지금이나 가난한 절 살림 
그대로였으므로 퇴락한 요사채의 모습도 그대로였으며 대웅전의 퇴색된 
단청도 그대로였다.
  마침 겨울에 쓸 땔감을 하기 위해서 깊은 산로 들어가 나무를 하고 오는 
스님이 눈에 띄었다. 한눈에 보아도 어린 행자승이었다. 나무를 한 짐 지고 
오는 행자승의 모습을 보자 문득 큰스님 석숭으로부터 얻어맞던 옛 기억이 
떠올랐다.
  "이놈아, 네 놈이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는 칼을 보여 
달라고 해서 보여 주었는데 뭐가 그리 어리둥절하냐. 네 놈이 얻어맞아 
거꾸로 처박힌 것은 사람을 죽이는 칼이요, 네 놈을 부축하여 일으킨 것은 
사람을 살리는 칼이다. 그 칼을 똑똑이 보았으면 잘 가거라"
  임상옥은 장미령을 활인도를 사용함으로써 사창가에서 구해낼 수 
있었으며, 그 대신 자신은 의주의 상계로부터 파문을 당하고 봇짐장수로 
전락하였다가 먹고 살 길이 막막해지자 입산수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결국, 석숭 스님의 화두 '사람을 살리는 칼'은 열매를 맺어 
장미령이 고관대부의 정실이 됨으로써 임상옥은 화려하게 상계에서 
재기하였을 뿐 아니라, 연경의 인삼 상계까지 손쉽게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30여 년간.
  임상옥은 줄곧 상업으로써 성공하고 마침내 조선 제일의 무역왕이 될 수 
있었으나 그는 자신의 이익 추구를 위해 다른 사람을 해치거나 상하게 
하는 살인검은 결코 사용하지 않았었다. 이 모든 것이 석숭 큰스님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이다.
  절에서 쓰는 땔감을 구해 뒷산에서 내려오다가 잠시 지게를 부리고 
바위에 앉아 쉬고 있는 행자승의 모습을 본 순간 임상옥은 문득 석숭 
스님과 있었던 옛 일을 떠올렸던 것이다.
  그렇게 보면 삭숭 스님은 '죽을 사' 자와 '솔 정' 자와 '계영배'의 세 
비결로 자신의 위기를 모두 물리쳐 주었고, 처음부터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는 칼'의 비의로써 상업의 도를 가르쳐 준 것이다.
  임상옥은 비로소 깨달았다.
  임상옥의 상업에는 그 처음부터 석숭 스님이 있었으며 그 시작에서부터 
중심에 이르기까지, 그 중심에서부터 마무리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석숭 
스님이 좌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임상옥의 상업에는 그 어디에나 석숭 
스님의 불이 영향을 끼치고 있었음을 임상옥은 깨달을 수 있었다.
  "스님"
  임상옥은 땔감을 구해오다 잠시 등짐을 내리고 바위 위에 앉아 쉬고 
있는 행자승 앞으로 다가가면 합장하여 말하였다.
  그러자 깜짝 놀란 행자승이 바위 위에서 내려와 맞받아 합장을 하였다.
  "법천 스님이라고 금강사에 계시온지요"
  임상옥은 자신의 은사 스님인 법천이 30년이 지난 지금에도 금강산 
산중에서 머무르고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러자 행자승이 말하였다.
  "법천 스님이라면 법 법 자에 하늘 천 자의 법명이십니까"
  "그렇습니다만"
  "법천 스님은 금강사에 계시나이다. 금강사에서 주지스님으로 
계시나이다"
  자신의 사승이었던 법천이 금강사 주지스님으로 있다는 행자승의 말에 
임상옥은 우선 마음이 놓였다.
  임상옥이 한때 절밥을 먹은 사문이었다고는 하지만 산문에 머물렀던 
기간도 모두 합쳐 3년이 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30년만에 찾아가는 
임상옥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임상옥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오직 은사 스님이었던 법천 스님과 그리고 큰스님 
석숭, 두 사람뿐이 아닐 것인가.
  그런데 그 은사 스님이 금강사의 주지로 주석하고 있다는 행자승의 말은 
한마디로 낭보가 아닐 수 없었다.
  임상옥은 총총이 금강사로 발길을 옮겼다.
  이미 산중은 동안거에 접어들고 있었다. 원래 동안거는 스님들이 음력 
10월 16일부터 석 달 동안 한 곳에 모여 일체의 외출을 금하고 
수행하였으므로 이미 안거가 시작되어 금강사는 빈 산처럼 적요하였다. 
소임을 맡은 몇몇 스님만 오가고 있을 뿐 깊은 한겨울이라 찾아오는 
사람들의 발길도 완전히 끊겨버린 무주공산이었다.
  사람들의 발길이 완전히 끊겨버린 공산이라 하더라도 산은 그대로 옛 
산이었고 절은 그대로 옛 절이었다.
  임상옥은 종무소로 찾아갔다.
  비록 동안거 중이라 하지만 소임를 맡고 있을 스님들은 그곳에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안거중에는 보통 차를 끓이는 전다, 목욕물을 
끓이는 욕두, 밥공양을 준비하는 반두, 안거 스님들을 총괄하는 감무 등의 
소임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흔히 외부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은 감무의 
소임을 맡은 스님의 몫이었던 것이다. 마침 감무 스님이 그곳에 앉아 
있었다. 임상옥이 합장하여 배례하고는 자신이 찾아온 목적을 말하였다.
  "법천 스님을 뵈오러 찾아왔습니다"
  "법천 스님시이라면 주지스님이시온데 지금 안거중이라서"
  원래 안거중에는 일체의 면회는 금지되어 있는 것이 상례였다.
  "하오나 긴급한 일이라 부탁드리나이다"
  임상옥은 자신의 이름을 말하고는 한때 자신이 이 절의 승려였으며 
법천은 은사 스님이었음을 말하였다. 그러자 그는 담담하게 말하였다.
  "이곳에서 기다리고 계십시오, 말씀드리고 오겠나이다"
  스님이 사라진 후 임상옥은 물끄러미 법당 앞마당을 바라보았다. 때마침 
희끗희끗 싸락눈이 흩날리기 시작하였다. 저 뜨락이 자신이 아침마다 
대빗자루로 쓸던 그 마당인가 하고 임상옥은 생각하였다. 저 마당에서 
비질을 하다가 감히 석숭 스님의 몸을 향해 대빗자루로 한 방 후려쳤던 
일이 엊그제 일처럼 떠오르고 있었다. 그 일이 엊그제 같은데 벌서 30년의 
세월이 흐른 것이다.
  싸락눈은 조금씩 알이 굵어지면서 절 앞마당의 탑들 위에도 내려 쌓이기 
시작하였고 퇴색한 법당 앞 석등 위에도 내려 쌓이기 시작하였다. 바람이 
한 점 없는데도 싸락눈은 이리저리 춤을 추면서 흩날리고 있었다.
  이윽고 사라졌던 스님이 나타나 말하였다.
  "주지스님이 만나 뵙겠다고 하시나이다. 따라 오시지요"
  임상옥은 앞장 선 스님을 따라 싸락눈이 내리는 마당을 가로질렀다. 
보존불을 모신 대웅전 뒤쪽으로 울창한 숲이 우겨져 있었다. 반쯤 열린 문 
안쪽으로 낯익은 석가모니불의 모습이 보였고 주불 앞에 피워진 향냄새가 
향긋하게 풍겨오고 있었다. 그 우거진 숲 사이에는 작은 암자 하나가 
있었다.
  어느덧 싸락눈은 함박눈으로 변하였으므로 온 풍경은 은세계가 되었다.
  산도, 숲도, 나무도, 암자도 온통 새하얀 은백색의 천지였다.
  댓돌 위에는 짚신 한 켤레가 놓여 있었는데 내리는 문발을 참다랗게 
맞고 있었다. 왕골로 만든 짚신이었다.
  그 짚신을 보자 임상옥은 문득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은사 스님이셨던 법천 스님은 평소에 짚신을 삼는데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법천 스님은 부지런해서 항상 손에서 일감을 놓는 일이 없었는데 
좀 한가한 시간이다 싶으면 짚신을 삼아서 여러 대중들에게 나눠 주곤 
했었다. 법천의 눈대중은 틀림이 없어 한눈으로 보아도 짚신의 치수를 
정확히 맞추곤 해서 그가 만들어 주는 미투리는 사람의 발에 꼭 맞았다.
  어릴 때부터 임상옥은 법천으로부터 글공부는 물론 짚신 삼는 법을 
배우곤 했었다. 짚으로 새끼를 한 발쯤 꼬아 넉 줄로 날을 하고, 짚으로 
엮어 발바닥 크기로 하여 바닥을 삼고, 양쪽 가장자리에 짚을 꼬아 총을 
만들고, 뒤는 날을 하나로 모으고 다시 두 줄로 두르면 짚신 하나가 
완성되곤 했었다. 훗날 임상옥은 먼 길을 갈 때면 자신이 신을 짚신을 
미리 여러 벌 준비해 두고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법천 스님은 짚신뿐 아니라 생삼과 짚을 엮어 만든 삼신, 늪이나 
연못가에 나는 부들이란 잎을 엮어 만든 향포신, 관초라고 불리우는 
왕골로 만든 왕골신 등 온갖 짚신들을 다 만들어낼 줄 알고 있었다.
  댓돌 위에 놓인 짚신은 왕골 짚신이었다.
  논밭이나 습지에 사는 왕골의 줄기와 껍질로 만든 왕골 신을 본 순간 
임상옥은 문득 스승에 대한 반가움으로 가슴이 설레었다.
  "스님, 법천 스님"
  임상옥은 문을 맞으며 소리를 질러 말하였다.
  "임상옥이 문안인사 올리겠나이다"
  "들어오시게나"
  덜컹 암자의 문이 열렸다. 문 안에 법천 스님이 서 있었다. 비록 30년의 
세월이 흘렀다고는 하지만 예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임상옥은 삼배를 올려 
제자로서의 예를 다하였다.
  "오고 가는 인편에 임 대인께오서 상업으로 성불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마는"
  임상옥이 삼배를 올리자 그의 손을 맞잡아 자리에 앉히고는 법천이 입을 
열어 말하였다.
  임상옥은 그제서야 산을 떠나 속계로 나아갈 때 법천 스님이 자신에게 
하였던 덕담이 떠올랐다.
  "성불이라니요, 스님. 이제 겨우 초견성에 불과하나이다. 어린아이가 첫 
걸음마를 떼어놓은 것에 불과할 따름이나이다"
  임상옥은 물끄러미 법천 스님을 쳐다 보았다. 30여 년 만에 보는 법천 
스님은 한마디로 고불의 모습이었다.
  "임 대인이 퇴속을 한 것이 언제였더라"
  법천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려 말하였다. 
  "강산이 세 번 변하였나이다. 벌써 30년의 세월이 흘러가 버렸나이다"
  임상옥이 대답하자 화롯불 속에 넣어두었던 뜨거운 주전자의 물을 
찻잔에 따르던 법천이 멈칫거리며 말하였다.
  "벌써 그렇게 되었나. 나는 엊그제처럼 생각이 드는데"
  법천은 찻잔에 차를 따라 임상옥에게 내밀었다. 임상옥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향긋한 차의 맛과 향기가 예전 그대로였다. 두 사람은 잠시 말을 
잊은 채 열린 문 밖에서부터 흘러 들어오는 흰 눈발을 바라보았다. 온 
풍경을 뒤바꿔버린 설편들은 그러나 어느 한 곳으로 치우치거나 모자람이 
없이 한결같이 모든 사물들을 공평하게 뒤덮어 삽시간에 은세계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자 문득 임상옥은 어린 시절 석숭 스님으로부터 배운 
화두 하나가 떠올랐다.
  옛날 방거사가 약산 스님을 만나 뵙고 떠나려하자 약산이 선객더러 
배웅케 하였다. 사립문을 나서자 갑자기 폭설이 쏟아졌는데 이 눈발을 
보며 방거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던 것이다.
  "송이송이 내리는 눈발마다 다른 곳에 떨어지지 않는구나"
  우연히 떨어지는 눈발 한 조각도 모두 마땅히 앉을 곳에 앉는구나, 라는 
방거사의 탄식에 선객은 문득 물어 말하였다.
  "그러면 눈발들은 어느 곳에 떨어집니까"
  그러자 방거사는 그 선객의 뺨을 후려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당신은 눈은 있지만 보지 못하는 장님이요, 말은 하지만 벙어리와 같은 
사람이오"
  얼핏 보면 제멋대로 앉는 듯 보이는 눈송이 하나도 모두 앉을 곳에 
앉아서 결국 조화로운 은세계를 펼쳐 보인다는 화두를 옛날 석숭 스님은 
임상옥에게 가르쳐 주며 이렇게 말하였던 것이다.
  "이 세상 만물 중에서 앉지 않아야 할 곳을 찾아 앉는 사물은 오직 
사람뿐인 것이다"
  임상옥은 향긋한 차를 마시며 어린 시절 석숭 큰스님으로부터 들었던 옛 
이야기를 가만히 떠올려 보았다.
  "사람만이 항상 높은 곳을 찾아 앉으려 하고, 좋은 곳을 찾아 앉으려 
하고, 한 번 앉으면 그곳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은 눈송이 
하나보다도 못한 존재인 것이다"
  임상옥이 차를 마시면서 법천 스님을 쳐다보며 웃으며 말하였다.
  "30년의 세월이 흘렀다지만 여전히 눈발들은 예나 지금이나 다른 곳에 
앉지는 않습니다, 스님"
  임상옥의 말뜻을 법천은 금방 알아차렸다. 두 사람은 차를 마시면서 
함께 서로 마주보며 크게 웃었다.
  "무슨 일로 대인어른께오서 찾아오셨나이까"
  긴 침묵 끝에 문득 법천이 입을 열어 말하였다.
  "공사다망 중이라서 이처럼 깊은 산중에 쉽게 찾아오실 수 없으실 
터인데"
  임상옥은 몸 속에 간직하고 있던 계영배를 꺼내 놓으며 말을 하였다.
  "제가 금강사를 찾아온 것은 바로 이 물건 때문이나이다"
  그러자 법천은 임상옥이 꺼내 놓은 계영배를 집어 올려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이 물건이라면"
  혼잣말로 법천은 중얼거렸다.
  "노사님께서 쓰시던 찻잔이 아닐 것인가"
  "그렇습니다, 스님"
  "허지만 오래 전에 쓰시던 찻잔이었고, 언제부터인가는 보이지 않던 
물건이었는데"
  어릴 때부터 석숭 큰스님을 시봉하던 법천이었으므로 석숭이 쓰던 
물건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눈이 밝았다.
  "그렇습니다, 스님"
  임상옥이 대답하였다.
  "제가 퇴속하여 산을 내려갈 때 노사님께서 제게 주셨던 
찻잔이었나이다"
  "허어, 그러하신가"
  임상옥니 마신 빈 찻잔에 다시 뜨거운 찻물을 따르며 법천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이 깨어진 찻잔 때문에 이 깊은 산중으로 대인어른께오서 
이처럼 찾아오셨다니. 도대체 무슨 일이신가"
  "이 찻잔을 노장님께 돌려드리기 위해서 찾아왔나이다"
  "노장님이시라면"
  찻물을 따르던 법천이 순간 멈칫거리면서 임상옥에게 되물었다.
  "누구를 말함이나이까"
  "석숭 큰스님이시나이다. 이 찻잔의 원 주인은 석숭 큰스님이시니, 
돌려드려야 마땅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나이다. 또한 돌려드리기 전에 
할 말이 몇 마디 남아 있기도 하여서 이처럼 찾아오게 되었나이다"
  임상옥이 말을 하자 법천은 한참을 침묵하였다. 그는 침묵 끝에 찻물을 
따르고 자신의 찻잔에도 따른 후 묵묵히 한 잔을 모두 마실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긴 침묵 끝에 법천이 입을 열어 말하였다.
  "대인어른께오서는 이제 이 찻잔을 영원히 노장님께 돌려드릴 수 없게 
되었나이다. 또한 노장님께 물어봐야 할 말이 몇 마디 남아 있다 하여도 
영원히 여쭤볼 수는 없게 되었나이다"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가 가지 않아 임상옥은 법천을 쳐다보며 물었다.
  "이미 알고 찾아오신 줄만 알았는데, 대인어른께오서는 아무것도 
모르셨나이까"
  "무엇을"
  임상옥이 어리둥절하여 물어 말하였다.
  "무엇을 모르고, 무엇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시오니까"
  "대인어른"
  법천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대인어른께오서는 한 발 늦으셨나이다. 석숭 노장님을 찾아 뵙고 그 몇 
마디 여쭙고 나서 그 찻잔을 돌려드리려 하였다면 두 달 전에 찾아왔어야 
했을 것이나이다. 적어도 두 달 전에만 찾아오셨더라도 노장님을 뵈올 수 
있었을 것이나이다"
  "그렇다면"
  임상옥은 뭔가 짐작되는 것이 있었다. 임상옥은 다급한 목소리로 물어 
말하였다.
  "그렇다면 노장님께오서는"
  "그렇소이다"
  법천은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하였다.
  "노장님은 두 달 전에 입적하셨나이다. 대인어른께오서는 한 발 
늦으셨나이다"
  임상옥은 맥없이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뜨렸다. 온몸에서 힘이 한꺼번에 
빠져나갔다.
  임상옥은 묵묵히 열린 방문 바깥으로 쏟아지는 눈발을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졌다, 하고 임상옥은 생각하였다. 한 번도 이겨보지 못하였던 석숭 
큰스님. 그 큰스님의 얼굴을 향해 30년 만에 계영배를 집어 던져 통쾌하게 
보은하려던 꿈마저 깨어졌다, 하고 임상옥은 생각하였다.
  "어디 아프시거나, 병환도 없으셨는데 갑자기 입멸하셨나이다"
  순간, 임상옥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두 달 전이라면, 은사 스님의 말씀처럼 석숭 큰스님이 두 달 전에 
입적하셨다면, 대충 일치되고 있음이 아닐 것인가. 계영배가 깨어진 날짜와 
석숭 큰스님이 입적한 날짜가 일치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계영배가 깨어졌다, 두 달 전쯤에. 깨어졌을 뿐 아니라, 깨어진 술잔 
부분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리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비변사 조상영은 귀신 붙은 술잔이라 하여 계영배를 마당으로 힘껏 
내던져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연회가 파하자 임상옥은 박종일과 
더불어 어두운 정원에서 조상영이 던진 계영배를 찾아내었던 것이다. 이미 
계영배는 깨어져 보기 흉할 정도로 파손되어 있었는데 그 깨어진 부분에서 
붉은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임상옥은 모골이 송연함을 느꼈다.
  "석숭 노장님께오서는 정확히 언제 열반에 드셨나이까"
  그러자 법천이 천천히 대답하였다.
  "지난 9월 초였나이다"
  "잠깐"
  황급히 말을 막으며 임상옥은 가만히 손가락을 짚어 날짜를 계산하여 
보았다. 낭관 조상영이 자신의 집을 방문하였던 것이 정확히 언제였던가 
하고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러자 정확히 날짜가 기억되어 떠올랐다.
  "그러하면 석숭 노장님께오서 열반에 드신 날이 9월 초이튿날이 
아니나이까"
  "그렇소이다"
  법천은 담담하게 대답하였다.
  "석숭 노장님께오서 열반에 드신 날이 9월 초이튿날이 분명하나이다"
  "시각은 어떠하였나이까"
  임상옥은 다시 손가락을 짚어 시를 계산하여 보았다. 연회가 파하고 
계영배를 집어던져 깨트려버린 조상영이 돌아간 시간은 저녁 술시. 오후 
7시부터 9시에 해당하는 시간이었던 것이었다.
  "...제가 말씀드려보겠나이다. 노장님께오서 열반에 드신 시각이 정확히 
병신년 9월 초이튿날의 술시가 아니셨나이까"
  임상옥이 묻자 법천이 빙그레 웃으며 말하였다.
  "노장님께오서 입적한 사실도 모르고 찾아오신 대안어른께오서 어떻게 
노장님의 입적 날짜를 정확히 맞출 수 있으시나이까. 입적하신 시각까지 
정확히 맞춰내시니 실로 신출이시나이다. 그렇소이다, 대안어른. 
노장님께오서는 병신년 9월 초이튿날 술시에 열반에 드셨나이다"
  법천은 다시 찻물을 임상옥의 찻잔에 따르며 혼잣말처럼 말하였다.
  "그날 저녁 갑자기 노장님께오서는 북을 치라고 하셨나이다. 스님 
하나가 둥둥둥 법고를 울리기 시작하자 때아닌 북소리에 소승이 놀라서 
추월암에 뛰어올라 갔나이다. 노장님은 추월암에서 누워 계시다가 소승이 
찾아뵈옵자 '나 좀 일으켜 달라'고 말씀하셨나이다"
  법천은 담담하게 말을 이어내렸다.
  "그래 소승이 노장님을 부축하여 일으키자 노장님은 평소에 공부하던 
자세로 좌선히여 앉으셨나이다. 그러더니 느닷없이 이렇게 말씀하셨나이다.
  '나 오늘 갈란다' 
  어디 한군데도 아프시거나 병이 드신 일이 없는 건강한 몸이셨기에 
소승은 놀라서 이렇게 물었나이다.
  '언제쯤 가시겠습니까'
  그러자 노장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나이다.
  '잠시 후면 갈 것이다'
  그리고 노장님은 지긋이 눈을 감고 손에 들었던 염주알을 굴리기 
시작하셨나이다. 가끔 '무라, 무라' 하는 소리를 하시면서. 평생을 무자 
화두와 싸우셨던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소승은 조금 다급한 마음이 
들었나이다. 노장님께서 입적하시겠다는 말씀을 하셨으므로 임종게라도 
받아둬야 했기 때문이었나이다. 그래서 소승은 이렇게 말했나이다.
  '스님. 마지막으로 한 말씀 하시겠습니까'
  그러자 노장님은 감았던 눈을 뜨고 이렇게 말씀하셨나이다.
  '도시몽중인데 나보고 잠꼬대를 하고 떠나라는 말인가. 죽어 떠나야 하는 
일이야말로 꿈을 깨는 일인데, 나보고 군더더기 소리를 하란 말인가. 
평생을 헛소리만 해왔던 나에게'
  그래도 소승이 벼루와 붓을 가져다가 받쳐 올리며 말하였나이다.
  '노장님께서 가신다 하여도 저희들은 아직 꿈 속에 머물고 있지 
아니합니까'
  그러자 노장님은 붓을 들어 이렇게 써내리셨나이다.

  칠십여년유몽해
  금조탈각반초원
  천고여정백대사
  부운기멸월휴영
  인생의 70여 년을 꿈의 바다에서 노닐다가
  이제 껍질을 벗고 근본으로 돌아가노라.
  천고의 나그네 마음 백대의 일들이여.
  구름이 일었다 사라졌다 달이 찼다 기울었다.

  임종게를 마악 쓰시고 나자 노장님은 잠잠히 앉으셔서 염주알을 
굴리셨나이다. 이렇게 잠잠히 앉아 계시는 것을 보고 소승이 물었나이다.
  '스님, 화두가 아직 살아 있나이까, 아직도 성성하시나이까'
  그러나 노장님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셨나이다. 그 순간 노장님은 
갑자기 입으로 피를 토하시더니 그대로 손을 들어 금강인을 말으시며 앉은 
채로 좌탈입망하셨나이다. 며칠 후 다비식을 올리고 기골하셨는데 
놀랍게도 골분 사이에서 영롱한 사리들이 삼십여 과가 나왔나이다"
  법천은 혼잣말로 석숭 스님이 입적할 때의 상황을 요약해서 말하였다. 
비록 요약해서 간단히 말하였지만 임상옥에게는 실제 상황처럼 눈앞에 
선명하였다.
  석숭 큰스님은 계영배가 깨어져 피를 흘리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 
자신도 피를 흘리며 앉은 채로 숨을 거둔 것이다.
  임상옥은 묵묵히 차를 마시며 생각하였다.
  석숭은 계영배가 언제 깨어질 것인가를 알고 있었으며 그 깨어지는 
순간이 바로 자신이 숨을 거두는 임종의 순간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석숭은 임상옥의 운명을 꿰뚫어 보고 있었으며, 그리하여 계영배를 통해 
임상옥이 최대의 위기를 벗어날 것임을 알고 있었으며, 그 계영배가 
임상옥에 의해서 깨어지고, 그 깨어지는 순간 자신의 운명 역시 사라질 
것임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계영배를 통해 자신의 운명 또한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임상옥의 머리 속으로 계영배에 새겨진 여덟 자의 문장이 떠올랐다.
  '계영기원 여이동사'
  이 여덟 자의 문장 중 술잔이 깨어질 때 두 글자, 즉 '너와 함께'라는 
글자는 떨어져나가버렸다.
  그렇다면, 술잔에 새겨진 '너와 함께 죽겠다'는 뜻은 문자 그대로 '술잔이 
깨어져 운명을 고하는 바로 그 순간에 나도 함께 더불어 숨을 거두겠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술잔이 깨어져 피를 흘리는 바로 그 순간에, 
함께 피를 흘리며 좌탈입망한 석숭 스님은 잔에 새겨진 참위가 그대로 
적중되어 맞아 떨어짐을 뜻하고 있는 것이다.
  "스님"
  임상옥은 문득 얼굴을 들어 법천을 쳐다보며 물어 말하였다.
  "한 가지 여쭙고 싶은 말씀이 있나이다"
  "무엇이나이까"
  "석숭 큰스님의 속명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실 수 없으시나이까. 또한 
석숭 스님께오서 속인이셨을 때 무엇을 하시던 분이셨던가를 가르쳐 주실 
수 없으시나이까"
   임상옥은 자신의 질문이 우문임을 잘 알고 있었다. 어리석은 질문임을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임상옥은 다른 방법은 구할 수 없었다. 임상옥의 
질문을 받은 법천은 대답 대신 뜨거운 찻물을 빈 잔에 천천히 따르고 나서 
한참을 침묵 끝에 답하였다.
  "대인어른, 중에게 있어 과거는 전생임을 모르시나이까. 중에게 있어 
속명이나 과거는 낡은 껍질에 불과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지 
않으시나이까"
  사승 법천의 말은 사실이었다.
  출가한 사문에 있어 속세의 일들은 모두 태어나기 전 전생의 일에 
불과한 것이다.
  임상옥은 비우면 다시 채워 주고, 비우면 다시 채워 주는 차를 마시면서 
생각하였다. 
  비록 법천 스님은 석숭 큰님의 속명이나 속인으로서의 직업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고 해도 임상옥은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석숭 스님은 바로 우명옥 그 사람인 것이다. 지 노인의 양아들. 당대 
최고의 설백색 갑번자기를 빚어낼 수 있는 최고의 명장 우명옥. 
파란만장한 일생, 온갖 명예와 쾌락, 술과 여자의 욕망, 그리고 예술가로서 
성취할  있는 최고의 극미. 이 모든 것을 성취하였던 최고의 도공 우명옥.
  그가 욕망의 한계를 나타내 보인 계영배를 빚고 난 후 아버지 지 노인을 
떠나 사라진 것은 바로 이 변경의 마을 의주인 것이다. 그는 계영배와 
더불어 자신의 속명 우명옥을 버리고 석숭의 새 이름을 얻었으며, 그는 
당대 최고의 도공을 버리고 사문의 직업을 택하였던 것이다.
  지 노인이 그토록 기다려도 기다려도 아들 우명옥이 돌아오지 않았던 
것은 우명옥이 전생의 업을 버리고 새 인간으로 거듭 태어났기 때문이다.
  임상옥이 광주에서 돌아오자마자 30여 년 만에 금강산을 찾아온 것도 
석숭 큰스님을 만나 그 전생의 일을 따져 묻고 그에게 깨어진 계영배를 
되돌려 주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한 발 늦은 것이었다.
  전생의 일을 따져 묻기 전에 석숭 큰스님, 아니 우명옥은 자신이 빚은 
계영배에 스스로 새겨놓은 예언 그대로 계영배와 더불어 숨을 거둬버린 
것이다.
  "대인어른"
  법천은 빙그레 웃으며 말하였다.
  "원 주인이신 노장 큰스님께 이 찻잔을 돌려드리기 위해 돌아오셨다면 
다시 찻잔을 갖고 하산하여 돌아가십시오. 소승이 생각하기에는 
노장님께오서 대인어른께 이 찻잔을 의발로 전해 주신 것으로 
느껴지나이다"
  의발. 스승이 제자에게 자신의 가사와 바리떼를 물려주는 일. 이는 
단순히 자신의 의발을 전해주는 일뿐 아니라 자신의 선지를 전해 주어 
법제자로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행위인 것이다.
  "양지하시옵소서, 대인어른. 입적하신 석숭 노장님께오선 대인어른께 그 
찻잔을 통해 의발을 전해 주시어 수법제자로 삼으셨으니 그 오지를 받들어 
섬겨서 부디 명철보신하시어 견성성불하시옵소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그날 저녁.
  임상옥은 석숭 스님이 입적하기 직전 남기고 간 임종게를 직접 볼 수 
있었다. 보통의 임종게들은 노장들이 입으로 구슬하고 이를 시자들이 받아 
적은 것이 대부분이었으나, 석숭의 임종게는 본인이 직접 쓴 게송이었다.
  그러나 어디에든 죽음을 앞둔 흔적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힘이 넘쳐 
필력이 왕성하게 느껴졌으며 치열한 선기가 엿보이고 있는 선필이었다.
  그 선필을 본 순간 임상옥은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계영배에 새겨진 문장과 임종게에 씌어진 문장의 필치가 정확히 
일치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누가 뭐래도 같은 한 사람이 쓴 필적임이 
분명하였던 것이다.
  특히 '천고의 나그네 마음 백대의 일들이여, 구름이 일었다 사라졌다, 
달이 찼다 기울었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천고여정백대사 
부운기멸월휴영'의 문장에서 나타나 있는 '영' 자와 계영배에 새겨진 
문장에서 '계영기원'의 '영' 자는 정확히 일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당대의 최고의 명장 우명옥이 석숭 큰스님에 틀림없다는 사실이 
정확하게 밝혀진 것이다.
  임상옥은 금강사의 요사채에서 하룻밤을 머물렀다. 낮 동안 내린 폭설로 
길이 끊겨 산을 내려갈 수 없어 법천이 만류하였기 때문이었다.
  임상옥 역시 30여 년 만에 들른 금강사에서 하룻밤 유숙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다.
  밤이 깊을 때까지 임상옥은 좀체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자신이 
예견하였던 대로 우명옥이 바로 석숭 큰스님이었다는 사실이 감회가 
깊었을 뿐 아니라, 신기 '계영배'로 자신을 위기에서 구원해준 석숭 
큰스님의 은덕과 그 은덕을 갚을 겨를도 없이 계영배와 더불어 운명을 
같이한 스님에 대해서 감개가 무량하였기 때문이다.
  임상옥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밤이 깊어지자 
눈발이 그치고 날이 맑아졌으나 한낮 동안 내린 눈으로 온 강산은 
눈천지였다. 마치 갑번자기가 온 세상을 뒤덮고 있는 듯하였다.
  언제 하늘이 흐리고 눈이 내렸느냐는 듯 밝은 밤하늘엔 둥근 달이 
휘영청 떠올라 있었다. 그 흰 눈빛 위로 월색마저 흘러넘치고 있어 백야가 
찾아온 듯하였다.
  임상옥은 천천히 발길을 옮겨 대웅전으로 다가갔다. 반쯤 열린 대웅전 
안은 촛불이 켜져 있었다. 석가모니불 앞에는 향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임상옥은 짚신을 벗고 그 불당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본전불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서 산을 내려가 사바세계에서 있었던 지난 30년간의 
세월을 되새겨 보았다.
  그러자 그 30년간의 세월이 한바탕의 꿈과 같은 생각이 들었으며 석숭 
큰스님의 임종게처럼 '꿈의 바다'에서 노닐었던 곳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모든 것이 낡은 껍질에 불과하고 흥망성쇠의 백대의 일들이 한갓 
뜬구름이 일어났다 사라지며, 달이 차고 기울어지는 환상에 지나지 않음을 
그는 깨달았다.
  그는 본존불을 향해 절을 올리기 시작하였다. 일천배를 올리리라고 그는 
결심하였다.
  30여 년 전 이 절에서 행자 노릇을 하고 있을 때 임상옥은 매일같이 
백팔배를 올리곤 했었다. 인간에게는 깨닫기만 하면 곧 없어지는 번뇌인 
여든여덟 가지의 견혹과 깨달아도 쉽사리 없어지지 않는 열 가지의 번뇌인 
수혹이 있는 것이다. 여기에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능인 탐심과 화를 내는 
진심과 어리석음의 치심 등 번뇌의 열 가지를 모두 합쳐서 백팔 가지의 
번뇌가 있는 것이다.
  돈이나 권력, 명예나 연인에 대한 쾌락과 같은 탐욕이 바람직하지 못한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쉽사리 끊지 못하듯, 이러한 유혹을 끊어내는 
방법으로 흔히 백팔 참배를 권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거울의 때를 닦고 칼을 숫돌에 갈 듯이 하나하나 자신의 번뇌를 
생각하며 백팔배를 올리면 수도소단혹이라하여 이러한 번뇌가 조금씩 
사라진다는 일종의 수행방법이었다.
  임상옥은 옛 일을 생각하면서 배를 올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마음과는 달리 몸은 예전 같지 않아서 백여 배에서부터 벌써 
몸이 곤하기 시작하였다. 온몸에서 땀이 비오듯 솟구쳐 올랐다. 오백여 
배에 이르렀을 때 임상옥은 기진하여 쓰러졌던 몸을 추스려 일으킬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이대로 물러서서는 
안된다라고 그는 마음을 다잡았다.
  오체투지.
  불교에서는 부처님께 드리는 예배를 오체투지라고 부른다. 인도에서부터 
시작한 이 예배법은 두 무릎, 두 팔꿈치, 이마 등 인간의 오체를 모두 땅에 
붙여 절하는 최경례법이었던 것이다. 오륜투지리고도 불리우는 이 예배는 
그러므로 전신을 사용하는 예불이었으므로 몹시 힘든 수도방법 중의 
하나였다.
  임상옥은 전력의 힘을 다해서 오체를 투지하였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다가왔다. 온몸의 마디마디가 다 쑤시고 관절이 부러지는 것 같았다. 
온몸은 이미 땀이 흘러 비 오듯하였으며 무릎은 벌써 다 까졌다.
  그는 한 배 한 배 절을 올릴 때마다 스스로 입을 열어 소리를 질렀다.
  "육백구십일 배, 육백구십이 배, 육백구십삼 배..."
  어느 순간 고통이 사라지고 무아지경과 같은 혼미가 찾아왔다. 몸이 
가벼워진 것 같기도 하였다. 그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그러나 
쓰러지면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쓰러져서는 안된다고 
그는 이를 악물고 마음을 다잡곤 하였다.
  "구백구십여섯, 구백구십일곱, 구백구십여덟..."
  마침내 일천배를 마치게 되었을 때 그는 쓰러져 한동안 일어서지 
못하였다. 
  그는 두 무릎과 두 팔꿈치, 그리고 온 얼굴을 바짝 붙인 채 그대로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비오듯 흘러내리는 땀과 함께 뜨거운 것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것은 
땀이 아닌 눈물이라는 것을 임상옥은 뒤늦게 깨달았다. 그는 자신이 왜 
울고 있는 것일까, 그 이유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마음이 슬프거나 
애닯지도 않은데 어째서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일까. 그는 엎드려 쓰러져 
울면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새벽 예불을 알리는 범종소리가 느닷없이 정적을 깨뜨리면서 
울려퍼지기 시작하였다. 잠든 삼라만상을 깨우는 종소리였다. 임상옥은 
일천배를 마치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엎드린 채로 그 종소리를 귀기울여 
듣고 있었다.
  종소리. 종소리만 들어도 모든 중생의 번뇌가 없어지고, 지혜가 
자라나며, 지옥에서 벗어나고, 삼계에 윤회하는 일도 없이 성불할 수 
있다는 범종소리.
  그 종소리를 듣는 순간.
  임상옥은 갑자기 쓰러졌던 자세에서 벌떡 일어섰다. 한 줌의 미혹도 
없이 모든 것이 천지광명과 같이 밝았다. 그는 덩실덩실 춤이라도 출 것 
같은 환희를 느꼈다. 느닷없이 너털웃음이 터져 흘러서 그는 한참을 
혼자서 껄껄 크게 웃었다.
  그는 실성한 사람처럼 보였다.
  당나라의 선승 임제는 말하였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스승을 만나면 스승을 죽여라"
  바로 그 순간 임상옥은 임제의 말처럼 석숭을 만났으며 마침내 석숭을 
죽여버릴 수가 있었던 것이었다. 임상옥은 마침내 석숭을 듣고 뛰어넘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날 새벽, 종소리를 들으며 큰 깨달음을 얻었던 임상옥은 그 때의 
느낌을 노래한 한 편의 시가 그의 문집 <가포집>에 남아 있다. '추월암의 
새벽 종소리'라는 제목의 그 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들마을에서는 시각을 부르는 악악한 닭소리요
  산 깊은 절에는 새벽을 알리는 융융한 종소리로다
  하늘 바람이 인간의 꿈을 깨우려 하여
  천층만장의 봉우리에서 끌어내렸다
  야촌악악호경조
  산사융융보효종
  천풍욕파인간몽
  인하천층만장봉

  석가모니 부처를 향해 일천배의 예불을 올림으로써 스승 석숭의 은혜에 
참 보은하려 했던 임상옥은 참배를 마친 후 새벽 종소리에 큰 깨달음을 
얻었다. 그 깨달음을 통해 임상옥은 마침내 스승 석숭 큰스님을 죽일 수 
있었던 것이다.
  임상옥은 석숭이 내려준 계영배의 화두를 타파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마지막으로 석숭이 내려준 언구마저 타파할 수 있었다.
  "이 잔이 너의 마지막 위기를 잘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이 
잔이 너를 전에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전무후무한 거부로 만들어 줄 
것이다"
  수수께끼와 같은 석숭의 유언.
  전무후무한 거부로 만들어 줄 것이라는 계영배의 공안을 임상옥은 
소리가 큰 융융한 새벽 종소리 속에서 쳐부실 수 있었던 것이다.
  임상옥은 이 게송을 통해서 인간의 어리석은 꿈을 깨우는 하늘의 바람을 
느꼈으며, 천층만층으로 말없이 에워싼 인간의 업장이 무너지는 깨달음을 
느꼈음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를 불도의 진리를 
깨달은 끝에 노래하는 일종의 오도송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임상옥은 그 새벽 종소리를 들으면서 '현자는 모든 것에서 배우는 
사람이며, 강자는 자기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며, 부자는 자기 스스로 
만족하는 사람' 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석숭 스님이 '전에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전무후무한 거부'가 
되리라고 예견하였던 것은 임상옥이 앞으로 그러한 거부가 되리라고 
예언한 것이 아니라, 욕망의 유한함을 깨닫고, 그 욕망의 절제를 통해 
스스로 만족하는 자족이야말로 하늘 아래 최고의 거부로 나아가는 
상도임을 예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임상옥은 자시의 상업과 자신의 부가 모두 자신의 소유물임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임상옥은 항상 만족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아홉를 가지면 하나를 더 가져 열을 채워서 소유하려 하였으며, 
마침내 열을 채워도 마음을 충족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열을 채워도 마음 
하나가 항상 부족하였다. 어차피 인간은 그 열을 채우려 하는 마음이 열을 
더 가질 수 있다 하여도 스스로 만족할 수 없는 '천층만장'의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존재인 것이었다.
  임상옥은 한순간 자신의 상업과 자신의 부가 자신의 소유가 아님을 
깨달았던 것이었다.
  임상옥은 새벽 종소리를 들으며 자기가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심사숙고하였다. 
  그는 깊은 상념 끝에 자기가 앞으로 해야 할 행동으로 세 가지의 길을 
떠올렸다.
  그것은 피하거나 돌아서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라, 반드시 가야만 하는 
길없는 길임을 임상옥은 잘 알고 있었다. 그 세 가지의 길 없는 길을 
끝까지 갈 수 있을 때라야만 비로소 자신이 '전에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전무후무한 거부', 즉 상업의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임을 그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마음을 굳게 다잡고 마지막으로 향에 불을 붙여 향로 속에 꽂아 
사르며 두 손으로 합장하였다. 그리고 소리를 내어 중얼거리며 말하였다.
  "부처님, 저는 이제 세 가지의 길을 떠나려 하나이다. 이 세 가지의 남은 
길이 가기에는 어렵고, 험난한 길이온 줄 제가 잘 알고 있사오니 반드시 
남아 있는 이 애착의 욕망을 버림으로써 길 없는 길을 끝까지 갈 수 
있도록 부처님께오서는 저를 도와주시옵소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그날 오후.
  임상옥은 금강산을 떠났다.
  떠나기 전 임상옥은 법천 스님과 더불어 추월암에 올라 석숭 스님의 
사리를 친견하였다. 사리는 사리함 속에 들어 있었다. 다비식을 올린 뒤에 
수습한 쇄신사리렸다.
  법천의 말처럼 삼십여 과가 넘는 둥근 구슬 형태의 연골이었다. 어떤 
것은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었으며, 어떤 것은 진주처럼 이 지상의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형형색색의 영롱한 빛깔로 광채를 뿜고 있었다.
  임상옥은 묵묵히 석숭 스님이 남기고 간 사리를 바라보았다.
  다 어디로 갔는가.
  하늘 아래 그 누구도 감히 빚지 못하였던 설백색의 갑번자기를 만들 수 
있었던 우명옥의 재능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하늘 아래 신기인, 욕망의 
유한함을 나타내 보이는 계영배를 만들고 그와 동시에 세속을 버렸던 
석숭, 살아 있는 부처였던 그의 혼백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인생이란 본시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며,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아니며, 오는 것도 가는 것도 아님을 깨달았던 우명옥, 아니 석숭은 이처럼 
영롱한 사리 몇 과를 남기고 사라져버린 것인가.
  스승이 남긴 사리를 묵묵히 바라보는 임상옥의 마음은 착잡하였다.
  눈 덮인 산길을 내려오면서 임상옥은 지난 새벽 종소리를 들었을 때 큰 
깨달음 끝에 결심하였던 '세 가지의 길'을 새삼스럽게 떠올려 보았다.
  이제 남아 있는 것은 그것뿐이다. 세 가지 길을 행동하여 실행에 옮기는 
것뿐이다.



    @[제4장 길 없는 길@]


   1

  금강산에서 돌아온 그날 밤 임상옥은 술상을 차리고 박종일을 
불러들였다. 실로 경축할 만한 술자리였다. 비록 오랜 기간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전옥에 한 달 이상 갇혀서 쇄항을 쓰는 죄수 노릇에다가 마침내 
안치형을 받아 일정한 장소를 벗어날 수 없는 두문불출의 유배상황에서 
풀려나 마침내 자신의 본가로 돌아온 후 처음으로 맞는 술자리였기 
때문이었다.
  공교롭게도 임상옥의 죄명은 비변사들의 논척으로 '임상옥이 새로 지은 
가옥이 참람하다'는 것이었다.
  바로 임상옥이 자신의 문집 <가포집>의 서문에서 '정축년에는 선조의 
묘소 아래에 몇 개의 서까래를 엮어 조석으로 바라볼 수 있는 장소를 
만들었다. 남들은 이것을 궁궐과 같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나 나는 그러한 
이름을 감당할 수 없다. 집이 다 지어지매 집 주위에 길게 담장을 두르니 
사람들은 굉장히 화려하고 너무 사치한 대하라고 말하나 동성이척의 여러 
사람들이 모두 거처하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변명하고 
있지만, 어쨌든 임상옥이 지은 새 집이야말로 임상옥을 착수당하게 만든 
재앙의 원인이었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임상옥은 자신이 지은 그 새 집에서 단 하룻밤도 잠을 자지 
못하였던 것이다.
  새 집을 완성하기 직전에 체포되어 옥에 갇혔으며, 또한 전옥에서 
풀려난 뒤에도 조정에서 지정한 유택에서 일정 기간 유배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미처 새 집에 입주할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임상옥은 금강산을 내려와 비로소 자신이 지은 새 집을 둘러보았다. 
조상 대대로의 묘소들을 중심으로 지은 새 집은 과연 사람들의 눈총을 
받을 만큼 화려하고 웅대하였다. 임상옥은 오랜 숙원이었던 자신의 꿈이 
마침내 이루어져 거대한 현실로 나타난 것을 보았다.
  4대째에 걸친 의주의 전통적인 상인의 집. 중국의 사신을 좇아다니며 
보따리 행상으로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할 수 있었던 조상들. 찢어지게 
가난하여 어쩔 수 없이 강물에 빠져 죽은 아비 임봉핵. 그뿐인가. 그의 두 
동생도 비참하게 죽지 아니하였는가.
  임상옥은 조상들을 비롯하여 아버지, 그리고 비참하게 죽은 두 동생의 
묘소들을 일일이 둘러보았다. 이 묘소들이 자리잡은 백마산성의 삼봉산 
아래 신동의 산기슭, 그 산기슭에 조상들과 가족들의 원혼을 달래줄 
웅대한 가옥을 지을 것을 얼마만큼 소원하였던가. 마침내 그 소원이 
이루어져 이처럼 궁궐과 같은 대우가 우뚝 서게 된 것이다.
  조상의 원혼을 달래줄 사당의 대문 위에는 짚으로 만든 제웅이 내걸려 
있었다. 새로 이사간 집에서 일어나는 액을 막기 위해서 만든 사람의 
형상을 내거는 풍습에서 비롯된 초우인이었다.
  그날 밤, 임상옥은 박종일 한 사람만을 불러 단둘의 조촐한 술자리를 
마련하였다.
  "어떠하시나이까, 나으리"
  모든 형기를 마치고 자유로운 몸이 되어서 새 집으로 들어와 첫날 밤을 
맞는 주인 임상옥을 치하하면서 박종일이 말하였다.
  "새 집으로 들어와 첫날밤을 맞으시는 기분이 어떠하시나이까"
  이사한 첫날 밤에는 팥죽을 끓여서 집안 곳곳이 뿌리기도 하고 
가족들끼리 나눠 먹곤 하였는데 이는 귀신이 붉은 색을 무서워하므로 붉은 
팥의 주력을 이용하여 새 집에 붙어 있는, 모르는 악귀를 몰아내고자 
함이었다.
  임상옥은 팥죽을 먹으면서 대답하였다.
  "선대로부터의 소원이 이루어졌는데 어찌 감개가 무량하지 않겠나"
  팥죽을 다 먹기까지 그러나 임상옥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술잔을 기울여 권커니 잣커니 술을 마시기 시작하자 흥이 오른 박종일이 
먼저 입을 열어 말하였다.
  "조선 팔도 안에서 이처럼 좋은 집에서 살고 있는 사람은 아마도 
대인어른 한 사람밖에 없을 것이나이다. 나랏님이 살고 계신 궁궐이라 
하더라도 이처럼 화려하지는 못할 것이나이다"
  흥이 오른 박종일은 신명이 나서 말하였지만 이상하게도 임상옥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술을 마시고 있을 뿐이었다.
  임상옥은 금강사에서 새벽 종소리를 들었을 때 대오각성하였던 세 
가지의 길 없는 길만을 떠올렸다.
  그 중 첫 번째의 길을 곧바로 실행하여 옮길 때가 바로 지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 동안 술을 마시며 침묵을 지키던 임상옥이 문득 입을 열어 
말하였다.
  "내가 새 집을 지은 것은 '집 위에 또 다른 집'을 짓는 것에 지나지 
않았고 또한 '지붕 아래 또 다른 지붕'을 지은 것에 지나지 않네"
  임상옥은 마신 잔에 술을 따라 박종일에게 권하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말인데, 내 자네한테 부탁이 있네"
  "무슨 말씀이시나이까"
  "내가 이처럼 큰 집을 지은 것은 선조의 묘소 아래에 집을 지어 
조석으로 조상들을 모시며 살고 싶었던 원의 때문이며, 또한 모든 
친척들이 함께 모여 거처하기 위함이었네. 허지만 이는 국법을 어긴 
중죄여서 벌을 받아 마땅한 일이었소. 그러므로 이제 이 집을 짓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 나의 바램이오"
  "무슨 말씀이시나이까"
  오랫동안 동업자로 눈빛만 보아도 임상옥의 속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박종일이었지만 임상옥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가를 헤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내 말은"
  임상옥은 얼굴을 들고 똑바로 박종일을 바라보았다. 그는 분명한 어조로 
말을 받았다.
  "이 집을 허물어버리고 싶단 말일세"
  순간 박종일은 자신이 행여 말을 잘못 들었는가 하고 귀를 의심하여 
임상옥을 쳐다보았다.
  "무슨 말씀이시나이까"
  "이 집을 허물어버리고 싶단 말일세"
  임상옥은 대답은 단호하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추호의 말설임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새로 지은 집 전부를 허물어버리시겠다는 말씀이시나이까"
  "전부는 아니더라도 반 정도는 허물고 싶네. 특히 집 주위에 두른 
담장은 모두 없애고 싶고, 두 다리 이층 기둥은 반드시 베어버리고 싶네. 
또 호화롭게 채색한 기둥은 물론 단청도 벗겨 버리고 싶네"
  "나으리"
  기가 막히다는 듯 박종일이 임상옥의 말을 잘랐다.
  "나으리께오서는 제정신이시나이까. 오늘이 바로 새 집으로 입주하신 
첫날밤이 아니시나이까. 새 집으로 이사하여 들어오는 첫날밤에 이게 
도대체 무슨 해괴한 말씀이시나이까. 새 집에서의 첫날밤에 애써 지은 
집들을 모두 헐어버리시라니요, 나으리. 그러하면 지금 나으리께오서 앉아 
계신 이 집도 허물어버리란 말씀이시나이까"
  그러자 망설임 없이 임상옥이 대답하였다. 
  "이 집 역시 부숴버리게. 하나도 남김없이 허물어버리세"
  하나도 남김없이 허물어버리라는 임상옥의 말에 충격을 받은 박종일이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나으리, 나으리께오서는 모든 형기를 마치시고 자유를 얻으셨나이다. 
모든 죄를 다 갚으셨나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스스로 새 집을 허물고 
파가저택을 하려 하시나이까"
  박종일은 은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으리께오서는 이제 새 집에서 사셔도 누가 무어라 할 사람이 
없나이다. 나으리는 이 새 집에 사실 만큼 충분한 자격을 갖고 계시나이다. 
나으리는 조선 팔도에서 최고의 거상이시고, 부자이시나이다"
  묵묵히 술을 마시던 임상옥이 씁쓸한 웃음을 웃으며 말하였다.
  "이보게, 박공"
  "말씀하십시오, 대인어른"
  "자네는 내가 한때 산중에 들어가 승려 노릇을 하였던 것을 잘 알고 
계시겠지"
  "물론이나이다, 대인어른. 소인이 아니었더라면 아마도 대인어른께오서는 
지금까지도 산중에 머물면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나 염불하고 
계셨을 것이나이다"
  다소 짖궂은 말투로 박종일이 농지거리를 했다. 어쩌면 가벼운 
농지거리로 주인의 경직된 마음을 풀어 보려는 속셈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박종일의 농에 임상옥은 맞장구를 치면서 껄걸 소리를 내어 웃으며 
말하였다.
  "물론 그러하였겠지. 자네를 만나지 못하였더라면 아마도 나는 아직도 
산중에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하고 염불이나 외우고 있었겠지"
  껄걸 소리를 내어 웃고 나서 임상옥은 다시 술을 단숨에 들이키며 
말하였다.
  "산중에서 중노릇을 하고 있을 때 들은 이야기 중 하나가 있소이다. 
부처님이 가르친 경전 중에 백유경이란 경전이 있소. 중생을 교화시키기 
위해 지극히 쉬운 비유로써 불교를 쉽게 이해시킬수 있게 만든 이야기들을 
모아놓은 경전인데 그 중에 이러한 이야기가 있소이다"
  임상옥이 천천히 낮은 소리로 말을 계속 이어 내려갔다.
  "옛날에 미련하여 아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어리석은 사람이 한 
사람 살고 있었소. 이 어리석은 사람은 그러나 돈이 많아 아주 큰 
부자였소이다. 어느 날 그 어리석은 부자는 이웃 부잣집에 갔다가 
삼층으로 지은 누각을 구경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웅장하고 화려할 뿐만 
아니라 사방이 탁 트이게 높이 지은 다락집으로 시원하면서도 모든 것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것이었소. 그러자 그 어리석은 부자는 이렇게 
생각했소. '내 재산도 저 사람 재산만 못지 않다. 저 사람이 부자라면 나도 
부자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어찌하여 나는 아직도 그런 삼층 누각을 짓지 
못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런 생각 끝에 그 어리석은 부자는 유명한 목수를 
불러서 말하였소. '저 삼층 누각처럼 거대하고 웅장한 누각을 지을 수 
있겠소' 그러자 목수는 대답하였소. '저 누각은 바로 내가 지은 것입니다' 
그 화려한 삼층 누각을 지은 사람이 바로 자신이 부른 목수라는 사실이 
신이 난 부자는 이렇게 말하였소 '잘됐소, 그러면 나에게도 저와 같은 
누각을 지어 주시오' 부자의 명을 받은 목수는 곧 땅을 고르고 벽돌을 
쌓아 누각을 짓기 시작하였소. 낮은 땅바닥에서부터 벽돌을 쌓아 짓는 
것을 지켜보던 그 어리석은 부자는 의심이 나서 목수에게 물어보았소. 
'어떤 집을 지으려는 것이오' 그러자 목수는 대답했소. '삼층 누각을 짓고 
있는 중입니다' 이 말을 들은 어리석은 부자는 이렇게 말하였소. '나는 
아래 두 층은 필요없으니 맨 위층의 삼층 누각만 지어 주시오'  이말을 
들은 목수가 이렇게 말하였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아래층을 짓지 
않고 어떻게 이층을 지을 수가 있으며, 이층을 짓지 않고 어떻게 삼층을 
지을 수가 있겠습니까'"
  임상옥은 말을 이었다.
  "그래도 어리석은 부자는 고집을 굽히지 않았소. '나는 삼층만 필요하니 
맨 위층만 지어 주시오' 그러자 목수는 이렇게 말하였소이다. '나는 그런 
집을 짓지 못합니다' 그리고 목수는 떠나버리고 말았소. 이보시게나, 박공"
  임상옥은 미소를 띠면서 다시 술잔을 비웠다. 그리고 나서 빈 잔을 
박종일에게 내어주면서 말하였다.
  "나야말로 아래층을 짓지 않고 또 이층을 짓지 않고 삼층만 지으려는 
어리석은 부자였던 것이오. 비록 내가 돈을 모은 약간의 부자이긴 
하였으나 주제넘은 욕망으로 삼층의 누각을 지으려는 헛되고 어리석은 
부자였던 것이오"
  그리고 나서 임상옥은 문득 붓을 들어 듬뿍 먹을 묻힌 후 종이 위에 
일필휘지로 다음과 같이 써내려갔다.
  박종일은 임상옥이 쓴 문장을 읽어 보았다.
  
  금칭언행허구자
  왈공중누각용차사

  문장을 쓴 임상옥은 이렇게 말하였다.
  "이 문장을 쓴 사람은 청대의 학자 적호란 사람인데 그 뜻은 다음과 
같네. '지금 언행이 허구에 찬 사람을 일컬어 공중누각이라고 말한 것은 이 
일을 인용한 것이다' 그렇소이다, 박공"
  임상옥은 낮은 목소리로 그러나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래층도 없이, 이층도 없이 허공에 떠 있는 누각은 공중누각으로 바로 
신기루인 것이오. 나는 바로 그 신기루를 좇는 어리석은 부자였으며 또한 
적호가 말하였던 '언행이 허구에 찬 사람'인 것이외다. 그러므로 내가 이제 
무슨 공중누각이 필요하겠소이까. 이 새 집과 이 큰 집과 이 호화로운 
대우가 무슨 의미가 있겠소이까. 진실로 큰 집은 밖에 있는 공중누각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집이 아니겠소이까. 내 안에 아직도 땅도 고르지 
못하였고 아직 아래층의 벽돌도 제대로 쌓지 못하였는데 어떻게 삼층 
누각을 지을 수 있겠소이까"
  일단 말을 마치고 나서 임상옥은 물끄러미 박종일을 쳐다보았다. 짧은 
침묵이 흐른 뒤 임상옥이 부드럽게 말하였다.
  "이제야 아시겠는가, 박공. 내가 왜 이 새 집을 허물어뜨리려 하는지 그 
이유를 아시겠는가. 그렇소이다. 내게 있어 이 집은 새 집이 아니라 바로 
공중에 떠 있는 누각인 것이외다. 하늘에 떠있는 신기루인 것이외다"
  임상옥이 말을 이었다.
  "옛날 북송의 학자이자 정치가로 삼괄이란 사람이 있었소. 호는 
몽계옹이라 하였는데 그 사람은 사천감이 되어 천체를 관측하고 역법을 
만들었던 박물학자이기도 하였소이다. 특히 천문, 지리, 수학, 본초에 
박식하였던 그는 나중에 지방장관이 되어 수차례에 걸쳐 변경 지역을 
순시하였는데 이때 그는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되었소. 즉 변경 지방인 
등주를 순시할 때였는데 바다 위 수평선에 아름답고 화려한 누각의 
성시들이 줄을 이어 서 있는 것을 보았던 것이오. 그래서 배를 타고 
나아가 보니 그 수평선 위에 세워져 있는 화려한 누각이 한갓 신기루가 
아니겠소. 삼괄은 나중에 자신이 쓴 몽계필담이란 박물지 속에서 이때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써내렸소이다"
  일단 말을 끊은 임상옥은 다시 먹을 듬뿍 묻혀 붓을 세워 들었다. 그는 
백지 위에 문장을 써내려갔다.
  
  등주사면임해
  춘하시요견공제
  성시누대지상
  토인위지해시

  임상옥이 쓴 문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박종일이 물어 말하였다.
  "이 문장의 뜻은 무엇이나이까"
  그러자 빈 잔에 술을 따라 다시 단숨에 들이켜고 나서 임상옥이 
말하였다.
  "이 문자의 뜻은, '등주는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데 늦은 봄에서 
여름에 걸쳐 멀리 수평선 위로 누각들이 줄을 이은 도시가 보인다. 이 
지방 사람들은 이를 가르켜 해시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바닷가에는 
수증기가 많이 있어 전혀 엉뚱한 곳에 물상이 생겨 있지도 않은 바다 위 
수평선에 화려한 누각으로 둘러싸인 성시가 보인다는 뜻이네. 이를 그 
지방 사람들은 '바다의 도시'라고 부른다는 것인데, 이를 말하자면 있지도 
않은 공중누각이라는 뜻과 같다네. 이보시게나, 박공"
  임상옥은 넌지시 박종일을 쳐다보며 말하였다.
  "내가 이처럼 참람한 큰 집을 지은 것은 집이 아니라 그 어리석은 
부자처럼 공중누각을 지으려 하는 것이며, 또한 내가 지은 이 집은 사람이 
사는 집이 아니라 바다 수평선 위에 떠오르고 있는 누각성시, 즉 있지도 
않은 '바다의 도시'를 지으려 하였던 것이오. 이를 가르켜 해시라 하였으며 
해시야말로 바다 위에 떠있는 신기루와 같은 것 아니겠소이까"
  긴 말을 잇고 나서 임상옥은 다음과 같이 말을 맺었다.
  "그러므로 내가 지은 이 큰 집은 공중에 지으려 하는 어리석은 부자의 
공중누각이며, 바다 위에 떠있는 신기루이며, 모래 위에 세워진 사상누각인 
것이오. 그러하오니 이제야 아시겠소이까, 박공. 내가 왜 이 새 집을 
허물려 하는지 그이유를"
  그제서야 박종일은 임상옥의 속뜻을 정확히 알 수 있었다. 그는 또한 
임상옥의 뜻이 확고하여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묵묵히 술잔만 기울이며 생각하였다.
  임상옥의 뜻이 확고한 이상 그 어떤 방법으로도 그 뜻을 바꿀 수 없음은 
명약관화한 사실인 것이다.
  박종일은 문득 고개를 들어 임상옥을 바라보며 물어 말하였다.
  "정히 그러하시겠다면 언제부터 파가를 하시겠나이까"
  "지금부터"
  조금도 거리낌도 없이 임상옥은 단박 대답하였다.
  "바로 당장 여기서부터"
  "하오나"
  박종일은 말을 잘랐다.
  "지금은 엄동설한이나이다. 밖은 북풍한설이 몰아치고 있는 
한겨울이나이다. 그러하오니 한겨울은 새 집에서 보내셨다가 봄이 되어 
집을 파가하여도 늦지 않으실 것이나이다, 나으리. 그러하오니 한 철만 
늦추셨다가 새 봄이 들었을 때 이를 시행함이 옳을까 하나이다"
  박종일의 말을 들은 임상옥은 마시던 술잔을 갑자기 탁자 위에 내려 
놓으며 말하였다.
  "옛 중국의 건봉선사에게 제자 한 사람이 다음과 같이 물었소이다. 
'사방이 다 불토로 뚫리고 큰길 하나가 곧바로 열반의 문으로 뚫였는데 그 
길을 가려면 어디서부터 출발하여야 합니까' 이 질문에 건봉선사는 다음과 
같이 답하였네. '눈앞이 곧 길이다' 그리고 나서 건봉은 이렇게 말하였소. 
'곧바로 여기에서 출발하라' 이보시게나, 박공. 공중에 뜬 누각을 
허물어뜨리는데 때를 살펴 무슨 소용이 있으며 바다 위에 뜬 신기루를 
무너뜨리는데 때를 살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하오니 옛 스님이 
말씀하였듯,  '곧바로 여기에서부터 출발하는 것'만이 옳지 않겠는가. 
그러니 박공, 당장 내일 아침부터 시작하시오"
  그 다음날부터 파가가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임상옥이 새 집으로 입주한 
바로 그 다음날부터 새 집을 허무는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이는 몹시 충격적인 일이었다. 집을 허무는 일은 인륜을 벗어난 큰 죄를 
지은 죄인이나 대역죄인의 집을 헐어 없애고 그 집터에 물을 대어 못을 
만드는 형벌이었으므로 온 성내의 사람들이 수군수군하였다.
  그러나 모든 일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임상옥의 지시대로 거대한 집을 둘러쌌던 담장도 철거되었으며 두 다리 
이층의 기둥도 베어졌다. 지나치게 웅장하였던 집도 부숴졌으며 채색한 
기둥은 물론 단청의 칠도 벗겨졌다. 온존하였던 것은 선고의 묘소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당뿐이었다. 이때 임상옥의 부인인 홍남순이 놀라서 
남편에게 쫓아와서 물어 말하였다.
  "도대체 무슨 일을 하시려는 겁니까. 애써 지은 집을 살지도 아니하고 
부숴버리시다니요"
  평생을 통해 임상옥의 말에 순종하고 따랐던 정처 홍남순의 질문에 
임상옥은 빙그레 웃으며 다만 이렇게 대답하였다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내가 집을 부숴버리려는 것은 보다 큰 집을 지으려 함이네"
  이에 홍남순은 다시 물었다.
  "도대체 언제 어디에 그 큰 집을 다시 지으려 하심입니까"
  그러자 임상옥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고 한다.
  "이제는 그 큰 집을 밖이 아니라 안에서 지으려 함이네"
  그 말의 뜻을 알지 못한 홍남순이 다시 물었다.
  "그 안이 어디이시나이까"
  임상옥은 아내의 질문에 대답하지 아니하고 다만 자신의 가슴을 
가르켰다고만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데, 임상옥의 그 수수께끼와 같은 
대답이 실제로 큰 집을 지을 곳은 밖이 아니라 가슴 속의 마음임을 나타내 
보이는 선문답이었는지 그 깊은 뜻을 헤아릴 길은 없으나 어쨌든 경계하고 
삼가할 일이다.
  이렇듯 스스로 자신이 지은 새 집을 파가하고 부숴뜨린 임상옥이야말로 
상도를 통해 부처를 이룬 상불임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2.
 
  헌종 3년. 1837년 정유년 춘삼월.
  임상옥은 의주를 떠나 곽산으로 출발하였다. 의주에서 곽산까지의 
거리는 2백 리. 꼬박 이틀이 걸리는 여정이었다.
  곽산은 임상옥이 연전까지만 하더라도 2년 동안 군수 노릇을 하던 
성읍으로 특히 수재 때 의연금을 내어 많은 이재민들을 구해주었던 바로 
그곳이었다. 때문에 곽산의 성민들은 2년의 임기를 마치고 귀성부사로 
영전되어 가는 임상옥을 위해 공독비를 세웠던 유서가 깊은 고을이기도 
했다.
  그러나 귀성부사로 제수까지 되었던 그의 벼슬이 비변사의 논척으로 
하루아침에 취소되었을 뿐 아니라 일년 동안 관직을 삭탈당하고 전옥에 
갇혔으며 보수지가에 유배되어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그 원인을 
제공해 준 고을 역시 바로 곽산이었던 것이다.
  비변사의 논척으로 임상옥이 '새로 지은 집은 참람하다'는 것이 그 
표면상의 이유였지만 임상옥이 귀성부사에서 파귀되고 착수가 되었던 것은 
바로 송이 때문이었다.
  송이의 생부 이희저가 홍경래의 난 때 대역죄를 지은 괴수였고 그 
이희저와 죽마고우였던 임상옥의 정체가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이희저의 시신을 수습하여 아무도 모르게 그의 고향인 대령강 속의 신도에 
파묻어 주었던 비밀까지 밝혀졌으며 이희저의 친딸 송이를 소실로 삼아 
노비 송이를 천민에서 양민으로 속신시켜 줌은 대역죄인 이희저와의 우정 
때문이라는 비변사의 논척은 실로 촌철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음을 여실히 
보여 주었던 날카로운 지적이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일년 반.
  임상옥은 꿈에도 잊지 못하였던 송이를 만나기 위해 곽산을 찾아가고 
있었다.
  송이는 아직도 마련해 놓은 치가에서 임상옥만을 기다리며 살고 있었다. 
그 집은 임상옥과 송이가 정식으로 혼례를 치른 신방이기도 하였다.
  그 집에서 임상옥은 54세의 나이로, 송이는 20세의 나이로 정식으로 
혼례를 치렀으며 이로써 송이는 임상옥의 소실, 즉 여부인이 되었던 
것이다.
  함께 늙어갈 수는 없을지라도 함께 죽어 한 구덩이에 묻힐 수 있다는 
송이의 말은 임상옥의 뇌리에 항상 남아 있었다.
  임상옥은 송이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송이가 고우였던 
이희저의 친딸이어서 그녀를 속신시켜 주기 위해서는 오직 첩실로 삼는 한 
방법 때문에 가까이 하였으나 차츰 송이에게 빠져들고 있었다.
  송이는 아름답고 문재가 있는 데다가 영특하고 매력적이었다. 또한 
30년이 넘는 나이 차이가 있었음에도 두 사람의 운우지정은 궁합이 
맞았다.
  임상옥이 구름이라면 송이는 비였고, 임상옥이 산이라면 송이는 아침의 
구름이었다. 임상옥이 물새라면 송이는 마름풀이었고 임상옥이 거문고라면 
송이는 비파였다.
  단 하루도, 임상옥은 송이를 잊은 적이 없었다. 아니었다. 한날 뿐 
아니라 한시도 임상옥의 머리에서 송이에 대한 그리움이 떠나본 적이 
없었다.
  당장에라도 송이를 보고 싶은 마음에 견딜 수가 없었던 임상옥. 모든 
재산을 국가에서 압수하는 적몰가산을 당해 알거지가 된들 어떠하겠는가. 
모든 집을 허물고 그 집터에 연못을 만드는 파가저택을 당해 멸문이 된들 
어떠하겠는가. 모든 재산과 모든 명예를 잃고 모든 형벌을 받는다 
하더라도 송이 하나만을 소유할 수 있다면, 그것과 모두 맞바꾸어도 이를 
마다하지 않겠다던 임상옥.
  그동안 송이는 어떻게 변하였을까.
  송이는 자신이 써 보낸 단오부채 위의 문장처럼 매일 밤 빈 방에서 홀로 
자면서 먼 곳의 임을 생각하며 비와 같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임상옥도 마찬가지였다.
  매일 밤 송이를 생각해서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을 못 이루고 
전전반측하고 있었다. 몽매에도 잊지 못할 송이였다. 송이가 보내온 부채를 
부칠 때마다 일어나는 바람 속에 송이의 향훈이 녹아 흐르는 듯하였다. 
견딜 수 없는 그리움이었다.
  먼산에는 아지랑이가 아른아른 피어오르고 있었고, 지난해에 산에 불을 
질렀던 소흔 위에는 푸른 풀들이 새파랗게 돋아 오르고 있었다. 산성 
너머의 산골짜기를 따라 봄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고, 그 숲에서부터 
뻐꾸기의 울음소리가 뻐꾹- 하고 들려왔다.
  산자락에는 진달래와 철쭉들이 천지사방으로 피어나 있어 붉은 피를 
토하고 있는 듯하였다. 
  춘봄의 향과 함께 옛 감흥에 젖으며 임상옥은 생각하였다.
  '그러나, 내가 이제 송이를 만나러 가는 것은 상사의 정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일년 반 만에 송이를 만나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이다. 
만나서 회포의 정을 푸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따로 있는 것이다'
  
  지난 초겨울.
  임상옥은 금강사의 대웅전에서 부처님을 향해 일천배를 올린 후 때마침 
들려 오는 새벽 종소리를 들은 순간 비로소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수수께끼와 같은 석숭 스님의 유언, '전에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전무후무한 거부가 되리라'던 화두를 마침내 타파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오철저하였던 임상옥은 깊은 상념 끝에 앞으로 자신이 취해야 할 세 
가지의 길을 떠올렸던 것이다.
  그것은 피하거나, 벗어나거나, 돌아서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라, 반드시 
가야 할 '길 없는 길'임을 임상옥은 깨달았던 것이다.
  그 길 없는 길을 깨달은 순간 임상옥은 마음을 굳게 다잡고 향에 불을 
붙여 향로 속에 꽂아 피우면서 이렇게 기원하였던 것이다.
  "부처님, 저는 이제 세 가지의 길을 떠나려 하나이다. 이 세 가지의 남은 
길이 가기에는 어렵고, 험난한 길이온 줄 제가 알고 있사오니 반드시 남아 
있는 이 애착과 집착의 욕망을 버림으로써 길 없는 길을 끝까지 갈 수 
있도록 부처님께오서는 저를 도와주시옵소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반드시 가야 할 세 가지의 남은 길 중 첫 번째가 바로 임상옥이 이미 
실행하였던, 새로 지은 집을 입주한 그 다음날부터 부숴 파가해버린 
것이다.
  지난 겨울동안 새 집을 부숴버리는 작업은 계속 진행되었으며 마침내 
봄이 오자 그 작업은 일단락될 수 있었다.
  2년에 걸쳐 지었던 임상옥의 거대한 집은 삽시간에 무너져 반 이하로 
규모가 줄어버렸다. 이젠 그 누구도 임상옥의 집을 대하라고 수군대는 
사람들이 없을 정도였다.
  새 집을 부숴버림으로써 가야 할 세 가지의 길 중에 그 첫 번째의 길을 
실행하였던 임상옥은 마침내 그 두 번째의 길을 가기 위해서 이렇게 
곽산을 향해 송이를 만나러 가고 있었던 것이다.
  말이 이끄는 대로 말 위에 올라앉아 있으면서도 임상옥은 줄곧 깊은 
상념에 빠져 있었다.
  내가 과연 그 두 번째의 길 없는 길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을 것인가. 
아아, 아무리 궁궐 같은 호화로운 집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무너뜨리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몽매에도 잊을 수 없는 송이. 그 
사랑하는 송이를 내가 과연 잊을 수 있을 것인가.
  임상옥은 삿갓을 눌러 썼다. 원래 양반들은 삿갓을 쓰는 경우가 
드물었으나 임상옥은 부들로 만든 늘삿갓을 써 얼굴을 가리웠다. 간혹 
선비들이나 부녀자들도 내외용 쓰개로 삿갓을 쓰는 일도 왕왕 있었기 
때문이다.
  그보다도 임상옥은 삿갓을 써서 자신의 모습을 가릴 필요가 있었다. 
곽산은 2년간 지방 수령으로 있었던 고을이었고 민생을 살피기 위해서 
다니지 않은 곳이 없었으므로 웬만한 성민들은 모두 낯이 익어 삿갓으로 
얼굴을 가리지 않으면 금방 정체가 드러날 판이었기 때문이다.
  성문을 들어서자 곧 읍내가 드러났다. 읍내에 들어서자 임상옥은 종자 
하나를 먼저 송이의 집으로 보내어 자신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미리 
전하도록 하였다.
  읍내에 들어선 임상옥은 자신이 탄 말이 송이의 집에 가까이 갈수록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이윽고 자신이 머무르던 관아를 지나 송이가 살고 있는 집에 가까이 
이르자 멀리 대문 가에 짚에 불이 붙어 활활 타오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미 먼 길을 오느라 날이 어둑어둑 저물어가고 있었는데, 대문 앞에는 
누군가 서서 다가오는 임상옥을 향해 연신 허리를 굽히며 절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송이의 양어미 산홍이었다.
  말에서 내린 임상옥이 대문가에 놓인 짚불을 뛰어넘어 집안으로 
들어서자 산홍이 춤을 추면서 말하였다.
  "나으리, 이게 웬일이시나이까. 이것이 꿈이나이까 아니면 생시이나이까. 
오신다는 기별도 없이 이게 도대체 웬일이시나이까"
  "그렇게 되었네"
  임상옥이 그렇게 대답하자 산홍은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말을 이었다.
  "어찌된 일이시나이까. 까막까치들이 하늘에서 머리를 이어 오작교를 
만들어 주셨나이까. 은하수를 건너서 나으리께오서 이처럼 찾아오시다니요. 
하늘도 기뻐서 칠석우를 뿌린 것입니다요"
  임상옥은 집안을 두리번거려 보았으나 송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한편 송이는 지난 일년 반 동안 매일같이 방안에 베틀을 들여놓고 
명주를 짜고 있었다. 그녀로서는 임을 그리는 마음을 달랠 수 있는 
방법이란 베틀을 돌려 직접 옷감을 짜는 일뿐이었다.
  누에고치를 끓는 물에 넣어 실켜기를 하여 제사한 실을 구해다 송이는 
임상옥이 입을 두루마기와 마고자 등 포를 만들고 있었다. 비록 사랑하는 
임을 만나뵈올 수 없다 하더라도 그리움에 눈물을 흘리기보다는 길쌈에 
열중하여 그리움을 잠깐이라도 잊고, 게다가 사랑하는 임을 위한 옷을 
만들고 있노라면 어느 정도 시름을 달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매일매일 베틀을 돌려 옷감을 짤 때면 송이는 자신이 직녀와 같다는 
느낌을 받곤 했었다. 무료할 때면 송이는 베틀가를 부르곤 했었다.
  "월궁에라 노던 선녀, 지상에라 내려오니, 할 일이 전혀 없어 좌우를 
둘러보니 옥난간이 비었구나..."
  그럴 때면 자신은 천제의 손녀로 하늘로부터 추방되어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사랑하는 임 견우와 몇 년에 한 번씩밖에 만날 수 없는, 월궁에서 
쫓겨난 선녀와 같다는 느낌을 받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따라 이상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용두머리를 돌리기 위해서 
밟아 흔들던 베틀신이 갑자기 멈춰섰던 것이다.
  그 순간 가늘고 얇은 대오리를 참빗날같이 세운 바디가 어그러지면서 
짜고 있던 명주의 실이 끊어져버린 것이다.
  그 순간 송이는 생각하였다.
  어째서 없던 일이 생겨난 것일까. 왜 갑자기 참빗살 같은 바디가 
어그러지면서 명주가 끊어져버린 것일까. 지난 일년 반동안 베틀로 옷감을 
짜면서 이처럼 피륙이 끊어져 버린 적은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이것은 무슨 불길한 징조인가.
  명주는 보름새라 하여 촘촘하게 짜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갑자기 
실타래가 엉기면서 명주의 실이 끊어져 버렸을 뿐 아니라 튕겨져 나온 
날카로운 바디의 침이 북을 들고있던 송이의 손가락을 내리 찔렀다.
  송이는 순간 비명을 지르며 베틀을 멈췄다. 손가락에서는 금세 붉은 
피가 솟구치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송이는 붉은 피가 솟아나오는 손가락을 바라보면서 생각하였다. 바디에 
찔려 피가 흘러나오는 일은 가끔 있는 일이었지만 바디가 어그러지고 
한꺼번에 실이 끊어져버린 것은 이제껏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이 무슨 일인가. 이 무슨 불길한 흉조인가'
  퍼뜩 정신이 든 송이가 무명실로 더 이상 피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손가락을 묶고 있을 때 갑자기 방문 밖에서 벽제 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의주에 사시는 임 대인께오서 납시었소. 임 대인께오서 행차하시었소"
  별배의 고함소리를 들은 순간 송이는 자신이 잘못 들었는가 귀를 
의심하였다.
  의주에 사는 임 대인이라면 꿈에도 그리는 서방님이 아니신가. 그분께서 
납시었다면 기별을 보내오신 것이 아니라 몸소 행차하셨다는 뜻이 아닌가.
  거의 동시에 양어미 산홍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맨발로 마당으로 
뛰어나간 산홍은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소리쳐 말하였다.
  "송이 아씨, 별배의 고함 소리를 들으셨나이까. 서방님께오서 
행차하신다는 말을 들으셨나이까"
  그 말을 들은 순간 송이는 그 자리에 무너져 앉았다. 다리에 맥이 풀려 
더 이상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아아, 사랑하는 서방님이 오신 것이다.
  그런데, 어인 일인고. 명주실이 끊어지고, 바디의 침에 찔려 붉은 피를 
흘린 바로 그 순간에 꿈에 그리던 사랑하는 서방님이 찾아오신 것이다.
  
  그날 밤.
  송이의 집에서는 새로 신방이 꾸며졌다. 이미 술과 안주로 거나하게 
취한 임상옥이 자리에 눕고, 얼마 후 밤이 이슥하였을 때 송이가 들어왔다. 
신방에서는 신부의 족두리와 저고리의 끈을 반드시 신랑이 먼저 풀어주는 
것이었으므로 임상옥은 송이의 저고리 끈을 잡아당겨 플어주었다. 
임상옥의 손길이 송이의 앞섶을 풀어헤치자 송이의 몸은 불덩어리처럼 
뜨거워졌다. 그것은 정념의 불꽃이었다.
  "네가 누구냐"
  임상옥은 신음하면서 송이의 얼굴을 감싸쥐면서 물어 말하였다. 그러나 
송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일년 반 사이에 송이의 육체는 놀라울 
정도로 농염하게 무르익어 있었다. 단순히 상사의 마음만으로 불타오르는 
소녀에서 이제는 육체의 열락마저 기다리는 성숙한 여인의 몸과 마음으로 
농익어 있었다.
  "네가 누구냐고 묻지 않더냐"
  송이의 몸은 불덩어리였고 그녀의 입에서는 불꽃과 같은 입김이 터져 
흐르고 있었다. 낯익은 육향 냄새였다.
  "소녀는 , 소녀는 송이이나이다"
  그러면 임상옥은 짖궂게 송이의 가슴을 어루만지면서 물어 말하였다. 
송이의 가슴은 그리움과 기다림으로 물결치고 있었고, 젖꼭지는 곤두서 
있었다.
  "송이가 누구더냐"
  임상옥이 송이의 젖가슴을 입술로 가볍게 깨물면서 다시 물어 말하였다. 
두 사람이 나누는 말들은 오래 전 잠자리에서 합환을 나눌 때 쓰던 
말들이었다.
  "송이는 송이이나이다"
  "아니다, 송이는 마름풀이다"
  "송이가 마름풀이라면 서방님은 무엇이나이까"
  "나는 물새로다"
  "서방님이 물새라면 물새는 어찌 우나이까"
  "물새는 꽉꽉- 하며 울지. 꽉꽉- 하고 울면서 마름풀을 찾아 다니고 
있지"
  임상옥은 그때와 마찬가지로 물새소리를 흉내내면서 송이의 몸을 
마름풀처럼 뒤적이고 있었다.
  임상옥의 입은 물새의 부리가 되었으며 물새의 부리는 들쭉날쭉한 
마름풀을 이리저리 헤치고 있었다. 물새의 부리가 마름풀을 이리저리 캐기 
시작하자 모래톱으로 옥수가 가득 차오르기 시작하였다.
  그 옥수는 꿀과 같은 달콤한 감로수였다.
  "그러하면 서방님, 이제는 마름풀을 찾으셨나요"
  "찾았지, 암, 찾았고 말고"
  "마름풀이 어디에 있나이까"
  "이곳에 있지 않느냐"
  임상옥은 송이의 옥문 속으로 자신의 몸을 밀어 넣으면서 신음하여 
말하였다.
  "송이 네가 바로 마름풀이 아니더냐"
  몸을 섞으면서 두 사람이 나누는 말은 일종의 타령이었다. 사랑타령이자 
방아타령이었다.
  "아니나이다"
  임상옥의 몸이 디딜방아처럼 발을 구르자 송이의 몸은 물레방아가 되어 
흘러내렸다.
  "소녀는 마름풀이 아니나이다"
  "그러면 무엇이냐"
  "소녀는 구미호이나이다. 서방님, 제 엉덩이에 꼬리가 아홉 개가 달려 
있는 구미호이나이다" 
  "어디 한 번 만져보자"
  임상옥의 손이 송이의 엉덩이를 어루만졌다.
  송이의 몸은 자지러지고 있었다. 그녀의 몸은 바들바들 경련하고 있었다.
  "송이야"
  헐떡이면서 임상옥이 질문하였다.
  "송이 네가 어디 있느냐"
  "서방님"
  송이가 대답하였다.
  "바로 서방님 품 속에 있지 않나이까"
  "그런데 어찌하여 네가 보이지 않는단 말이냐. 이제 보니 네가 정녕 
사람이 아니로구나"
  "사람이 아니라면요"
  "백년 먹은 여우가 아니겠느냐"
  "백년 먹은 여우라면 어찌하여 제 몸에 꼬리가 없겠나이까"
  "그러니까 백호가 아니겠느냐. 백년 먹은 흰여우야 한 번 둔갑할 때마다 
꼬리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다 하니, 그러니 네가 정녕 흰여우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냐. 그러니 네가 무엇 하러 사람이 되어 내 곁으로 
찾아왔단 말이냐" 
  "사람으로 태어나길 원해서나이다. 여우의 몸에서 벗어나 사람의 몸을 
받다 환생하기를 원해서나이다"
  "네가 여우에서 사람의 몸으로 환생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
  "그것은"
  송이가 임상옥의 몸을 손톱으로 할퀴면서 신음하였다.
  "서방님의 간을 빼어먹는 일이나이다. 소녀가 서방님의 간을 빼어먹을 
수 있다면 소녀는 사람의 몸을 받을 수 있을 것이나이다"
  "그러하면"
  임상옥이 이를 악물며 말하였다.
  "네 뜻이 정녕 그러하다면 간을 빼어먹으려무나"
  "정녕이시나이까"
  "정녕 그러하다고 내 이르지 않았느냐. 먹어라, 내 간을 빼어먹어라"
  그러자 순간 송이가 임상옥의 가슴을 핥고 그리고 깨물었다. 임상옥은 
신음하였다.
  "소녀는 서방님의 간뿐 아니라 심장도 빼어먹고 나으리의 혼백도 
빼어먹나이다"
  송이의 말은 사실이었다.
  송이는 임상옥의 오장육부뿐 아니라 혼백마저도 빼어먹었다. 두 사람은 
함께 죽어 함께 백골이 되었다. 백골이 되어도 두 사람의 정념은 끝이 
없었다.
  순식간에 새벽닭이 우는 달구리가 되었으나 두 사람의 달구질은 끝이 
나질 않았다.
  이틀 낮, 이틀 밤을 임상옥과 송이는 문밖 출입도 하지 않았다. 임상옥과 
송이는 방문을 나서지도 않았다. 두 사람은 함께 먹고, 마시고, 아이들처럼 
벌거벗고 분탕질을 하면서 장난하고 함께 자고 함께 몸을 섞었다. 
광란이자 광분이었다.
  그러나 서로에 대한 갈증은 쉽사리 채워지지 않았다. 탐닉하면 할수록 
그들의 육체는 만족을 모르는 아쉬움 속에서 타오르고 또 타올랐다. 그 
불이 타오를 때는 열락에 있었지만 불이 꺼지면 참다랗게 재만 남곤 
했었다. 열락의 불이 꺼지면 공허가 있었고 쾌락의 불이 꺼지면 허무가 
있었다. 그 덧없는 허무가 싫어서 임상옥은 쉴 새 없이 물새가 되어 
송이의 마름풀을 이리저리 헤집고 다녔다. 
  마침내 이틀째의 밤이 깊어갈 무렵, 임상옥이 송이에게 오늘은 일찍 
잠을 자자고 말하였다. 무슨 일이냐고 송이가 묻자 임상옥이 대답하였다.
  "내일 아침 일찍 먼 길을 떠나야 할 곳이 있어서 그러하니라"
  임상옥의 말은 송이로서는 금시초문이었다. 아침 일찍 먼 길을 
떠나신다니. 일년 반만에 찾아오신지 이제 겨우 이틀 밤이 지나고 
사흘째가 되어갈 뿐인데도 날이 새면 아침 일찍 먼 길을 떠나신다니. 
도대체 나으리는 어디로 떠나신다는 말이신가.
  송이는 순간 가슴이 철렁하고 눈앞이 캄캄하였다.
  혹시 나으리께서 의주로 돌아가신다는 뜻이 아닐 것인가.
  그렇지 않아도 송이는 뭔가 마음 한구석이 불안불안하였다. 일년 반 
동안 서방님을 위해 베틀을 돌려 명주실을 짜고 있었는데, 어인 일인가. 
서방님이 찾아오신 바로 그 순간에 명주실이 끊겨지고 동시에 날카로운 
바디의 침에 손가락을 찔려 붉은 피를 흘리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껏 한 번도 없는 절현의 한순간, 꿈에도 그리던 서방님이 찾아오신 
것이다. 명주의 실타래가 얽히면서 실이 한꺼번에 끊겨져버리는 일은 
전에는 없던 일. 이는 불길한 징조가 아닐 것인가.
  그러한 불안감이 서방님과 함께 있는 이틀 낮, 이틀 밤 동안에도 마음 
한 구석에서 항상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서 임상옥이 피가 흘러나오지 않도록 무명실로 칭칭 묶은 송이의 
손가락을 보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을 때도 송이는 그 연유를 대답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으리"
  송이는 조심스럽게 임상옥의 얼굴을 살피면서 물어 말하였다.
  "...내일 아침 일찍 길을 떠나신다니요"
  "물론이다. 먼 길을 떠날 것이다"
  "하오면"
  떨리는 목소리로 송이가 물었다.
  "어디로 가시나이까"
  "가산가지 가야 하느니라"
  가산. 가산은 곽산에서 거리로는 별로 떨어져 있지 않다. 하지만 가산은 
곽산보다 더 깊은 첩첩산중이고 가는 길이 험로하여 쉽사리 가고 올 수 
있는 길이 못되었다.
  임상옥의 입에서 의주로 돌아가지 않고 가산으로 간다는 말이 
흘러나오자 송이는 일단 안심이 되어 마음이 놓였다.
  "가산까지는 대체 무슨 일로 가시나이까"
  송이의 무심한 질문에 임상옥은 순간 가슴이 탁 막혔다. 송이는 자신의 
고향이 가산임을 이처럼 꿈에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임상옥은 순간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가산은 네가 태어난 고향이니라. 네가 태어난 고향이기 때문에 그곳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임상옥은 조금의 내색도 하지 않고 다만 이렇게 대답하였을 
뿐이다.
  "내일이 한식이 아니더냐. 그러니 가산을 찾아가서 성묘를 한곳 해야 할 
곳이 있기 때문이니라"
  한식은 동지로부터 105일째 되는 날. 이날은 절사라 하여서 여러 가지 
주과를 마련하여 성묘하고, 묘가 헐었으면 봉분을 개수하고 주위에 사초도 
하는 날이다.
  "가산에도 제향해야 할 묘소가 있으시나이까"
  막연히 임상옥의 4대조에 걸친 선조들의 묘소가 모두 의주에 있음을 
알고 있던 송이는 임상옥을 친히 찾아가 성묘할 만큼 가까운 친척의 
묘소가 가산에 있을까 의아하게 생각하여 물어 말하였다. 조상의 묘소가 
아닐 때에는 묘가 멀면 대리인을 시켜 제향을 올려도 무방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서방님은 친히 그 먼 가산까지 찾아가서 제사를 
올리겠다는 것일까.
  그뿐이 아니었다.
  임상옥은 송이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던 것이었다.
  "나 혼자서 길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송이도 함께 길을 떠나야 할 
것이니라"
  임상옥의 말은 송이로서는 뜻밖이었다. 가산가지의 먼 길을 서방님 
혼자서 떠나지 아니하고 자신도 동행하여 떠나야 한다니.
  "나으리"
  송이는 정색을 하고 물어 말하였다.
  "소첩은 무슨 말씀이시온지 그 뜻을 정히 모르겠나이다. 소첩도 
나으리와 함께 길을 떠나야 한다니요"
  "가산에는 나뿐 아니라 송이도 찾아 뵙고 제향을 올려야 할 선묘가 
있다"
  진지한 표정으로 임상옥이 대답하였다.
  "그러하면"
  영민한 송이가 말을 덧붙였다.
  "길을 떠날 때 소첩은 상복을 입어야 옳으리까"
  "상복을 입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임상옥이 대답하였다.
  "하지만 상복을 입지 않는다고 해도 가슴에는 최를 달도록 하여라"
  최.
  원래 최란 작은 베조각을 가슴에 다는 것을 가리킨다. 주로 심장이 있는 
왼쪽 가슴에 달았는데 이것은 죽은 사람을 그리워하는 '눈물받이'의 
역할까지 하여 심장의 슬픔을 가리키는 상징적인 뜻을 가지고 있었다.
  임상옥의 말을 들은 송이의 가슴은 또 한 번 철렁하였다. 보통 돌아가신 
사람들을 추모할 때는 가슴에 최를 달거나, 슬픔을 등에 지었다 하여 
부판의 삼베조각을 등쪽의 옷깃에 달거나, 적이라 하여 양쪽 어깨에 
삼베조각을 매다는 풍습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슴에 다는 최는 가장 
가까운 부모들이 돌아가셨을 때 애처의 뜻을 표현하기 위한 상장이었던 
것이다. 
  송이는 순간 생각하였다.
  상복을 입지 아니한다 하더라도 가슴에는 최를 달라는 서방님의 말은 
가산에서 성묘할 고인이 부모와 같은 육친임을 나타내 보이고 있음이 아닐 
것인가.
  뭔가 있다, 하고 송이는 생각하였다. 뭔가, 가산에는 송이 자신과 연관된 
숨겨진 그 무엇인가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 날 새벽.
  동이 트기 전에 임상옥과 송이는 곽산을 떠나 가산으로 출발하였다. 
임상옥은 말을 타고 떠났으나 송이는 교부들이 맨 가마를 타고 떠났다.
  간밤에 이른대로 송이는 흰 상복을 입지 아니하였으나 삼베로 만든 최를 
양쪽 가슴에 매달았으며 백댕기라 하여서 삼베로 만든 헝겊으로 머리를 
묶고 있었다.
  예로부터 '2월 한식에는 꽃이 피어도 3월 한식에는 꽃이 피지 않는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었다. 2월에 한식이 드는 해는 철이 이르고, 3월에 드는 
해는 철이 늦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산을 찾아가는 길 양옆에는 유난히 철이 이른 탓인지 
흐드러지게 봄꽃이 피고 있었다.
  그러나 가산을 찾아가는 길 양 옆에는, 청천강과 대령강의 두 강줄기가 
합쳐지는 그 어귀에 자리잡고 있는 작은 한촌이었다. 길은 멀지 않았지만 
주위에 첩첩한 산이 많아 가고 오기가 수월치 않았다.
  해가 있는 동안에 성묘를 마치고, 해거름까지는 곽산으로 돌아와야 
했으므로 임상옥은 인부들을 재촉하여 서둘러 길을 가도록 명령하였다.
  임상옥은 20연 년 만에 가산으로 이희저의 무덤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임상옥은 종자가 이끄는 대로 말을 타고 가면서 줄곧 마음이 
착잡하였다.
  남의 눈을 피해 매장을 하였으니 묘비는 물론 봉분조차도 제대로 세우지 
못하였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 하였는데 20여년의 세월이 흘러 강산이 
두 번 이상 변하였으므로 20여 년 전에 묻었던 이희저의 묘자리를 쉽사리 
찾아낼 수 있으리오. 비록 강물이 잘 보이는 둔덕 높은 곳에 묘자리를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해마다 강물은 범람하여 떼자리를 입히지도 못하였던 
묘소에는 잡초가 우거져서 어디가 어디인지 분간할 수 없을 만큼 풀이 
자랐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임상옥은 생각하였다.
  비록 황폐하여 이희저의 묘소를 찾을 수 없다고 할지라도 그곳 어딘가에 
이희저의 혼백이 남아 있으리라. 백골이 진토되었다 하더라도 넋은 
살아남아 있으리니 평생 처음으로 찾아오는 딸 송이의 모습은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날 오후, 임상옥의 일행은 대령강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적개정에서 
나룻배를 타고 섬 한가운데에 있는 신도로 들어갔다. 적개정은 세조가 
명나라에 사신으로 들어갈 때 지나가다 지어준 정자의 이름이었다.
  20여 년 만에 찾아온 섬은 임상옥이 생각했던 대로 어디가 어디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섬을 돌아다니며 그나마 햇살이 잘 드는 
양지바른 둔덕 가장 높은 자리, 흘러가는 강물이 잘 보이는 언덕 위에 
이희저의 묘자리를 만들었으므로 그 위치를 찾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 자리 위에는 잡초가 우거지고 갈대가 무성하였다. 하인들을 시켜 그 
잡초들을 일일이 베어내도록 하였다. 키를 넘는 잡초들을 베어내는 동안 
임상옥과 송이는 언덕 위에 서서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겨울 얼어붙었던 강물이 무르익은 봄날의 따뜻함에 녹아 와랑와랑 
소리를 내면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옛날 고구려의 주몽이 이 강을 건널 
때 물고기들이 다리를 만들어 주어 건너게 해주었다 하여 개사강이라고도 
부리는 상류에서부터 눈 녹은 물아 함께 흘러내리고 있었으므로 물살이 
빨라 화살처럼 보일 정도였다.
  "나으리"
  오랜만에 임상옥을 따라 나왔으므로 송이의 마음은 한껏 부풀어 있었다.
  "저는 쑥을 캐겠나이다"
  송이는 양지바른 곳을 따라 돋아난 다북쑥을 손으로 캐기 시작하였다. 
그녀의 모습은 나물을 캐러 산으로 들로 나선 봄처녀처럼 보였다.
  그러한 송이의 부푼 모습과는 달리 임상옥의 마음은 계속 착잡하고 
무거웠다. 이제 조금 있으면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비밀을 
송이에게 털어놓아야 한다. 내가 이곳에 찾아온 것은 오직 그것을 하기 
위함이다.
  하인들은 잡초들을 베어내고 칡넝쿨과 가시나무 등을 잘라내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봉분이 보이지 않는 평평한 평지였으므로 하인들은 
임상옥이 그 자리에다 제향을 차리라고 말하자 어리둥절해 하였다.
  임상옥은 하인들에게 모두 멀리 떨어져 있으라고 주위를 물리쳤다. 
이쪽에서 기별을 보내기 전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명령을 
내리고는 송이와 단둘이서 그곳에 남았다.
  "나으리"
  마침내 단둘이서만 남게 되자 주위를 둘러보던 송이가 임상옥에게 물어 
말하였다.
  "이곳까지 성묘를 하러 오셨나이까"
  "물론이다"
  임상옥이 대답하였다.
  "이 곳에 성묘하러 온 것이다"
  "하오나"
  주위를 둘러보면서 송이는 다시 물었다.
  "무덤이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아무 곳에도 봉분이 보이지 아니하고 
비석조차 보이지 않지 않습니까"
  "무덤이 바로 이곳이다"
  손을 들어 임상옥이 바로 앞 평지를 가라키면서 말하였다. 그 평지 
앞에서 임상옥은 갓을 벗고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는 두 손으로 술잔에 
술을 따른 후 그 평평한 평지 주위를 세 바퀴 돌아 배향을 하고 술잔에 
담긴 술을 흙 위에 골고루 뿌려내었다.
  그러자 갑자기 임상옥의 가슴이 무너져내렸다. 기가 막힌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땅을 짚은 채 엎드려서 울기 
시작하였다. 20여 년 전에 대역죄인으로 죽어 이토록 봉분조차 세우지 
못하고 죽은 친구의 억울함보다도 그 이후에 있었던 운명의 기구함 
때문이었다.
  "나으리"
  임상옥의 통곡이 거세어지자 지켜보던 송이가 부축하여 일으키며 
말하였다.
  "너무 상심치 마시옵소서, 나으리. 행여 몸이 상하실까 염려되나이다"
  그러나 임상옥의 상심은 좀처럼 그쳐지지가 않았다. 그의 눈에서는 계속 
눈물이 흘러내렸다.
  "도대체 누구의 시신이 이곳에 묻혀 있나이까"
  잔에 술을 따라 두 손으로 받쳐 올리면서 송이가 물었다.
  술이나 한 잔 마시면 어느 정도 마음이 진정되리라 생각하였던 
모양이었다. 그러자 술잔을 받아 단숨에 들이켜고 나서 임상옥이 말하였다.
  "이곳에 묻혀 있는 사람은 일가친척이 아니라 내 절친한 
죽마고우였느니라"
  "하오나"
  송이가 다시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무 곳에서도 비석조차 보이지 않나이다"
  "그것은"
  임상옥은 길게 한숨을 쉬며 대답하였다.
  "그럴 만한 까닭이 있기 때문이다"
  "그 까닭이 무엇이나이까"
  "그것은 이곳에 묻힌 사람이 나라에 큰 죄를 지은 대역죄인이기 
때문이다"
  잔을 채운 술을 다시 들이마시면서 임상옥이 말을 이었다.
  20여 년 전에 이 곳 일대에 큰 역모가 일어났느니라. 한때는 평서지방 
모두를 장악할 만큼 큰 세력을 떨쳤으나 이내 관군에 의해서 패하여 
몰살되었느니라"
  "소문은 소첩도 익히 전해들어 잘 알고 있나이다, 나으리"
  걱정스러운 얼굴로 송이가 말을 덧붙였다.
  "그것은 어제의 일이오니까"
  "20여 년의 세월이 흘렀느니라"
  "하오면 그때 나으리께오선 남의 눈을 피해 그 대역죄인의 시신을 
이곳에 묻어 주셨나이까"
  "그렇다"
  임상옥이 대답하였다.
  "어찌하여 그 대역죄인의 시신을 이 외진 섬까지 가져와 이곳에 
파묻으셨나이까"
  "그것은 그 대역죄인의 고향이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니라. 그 죄인은 
이곳에서 태어났으며 이곳에서 광산을 경영하여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큰 거부가 되었느니라"
  "그 죄인의 이름이 무엇이오니까"
  "그 죄인의 이름은 이자, 희자, 저자, 이희저라고 한다. 이곳에 묻혀 있는 
사람의 이름이 바로 이희저인 것이다"
  임상옥은 손을 들어 무덤자리를 가리키면서 분명하게 대답하였다.
  그때였다.
  조심스럽게 임상옥의 말을 듣던 송이가 날카롭게 질문을 던졌다.
  "나으리, 한마디 여쭤보겠나이다. 나으리께오서는 간밤에 상복을 입는 
대신 소녀에게 가슴에 최를 달라고 이르셨나이다. 가슴에 최를 다는 것은 
육친간에나 할 수 있는 상장이나이다. 하오면 이 무덤에 묻힌 사람과 이 
소녀와는 어떤 연관이 있나이까"
  단도직입적인 질문이었다.
  임상옥은 순간 말문이 콱 막혔다. 어디서부터 답변의 실마리를 
풀어나가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그러나 어차피 때는 왔다고 
임상옥은 생각하였다. 송이를 데리고 이곳에 온 것은 그녀의 출생에 얽힌 
비밀과 그녀의 신분에 관한 모든 수수께끼를 명명백백하게 밝혀주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송이야"
  임상옥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말씀하십시오, 나으리"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듣거라. 내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오더라도 
놀라거나 무서워해서는 아니될 것이다. 알겠느냐"
  임상옥은 송이를 바라보았다. 송이는 봄 햇살을 반짝이며 흘러가는 
강물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뿐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모든 것을 각오한 표정이었다. 그 표정에는 죽은 이희저의 결연한 표정 
같은 것이 깃들어 있었다. 
  "송이 너는 관기였던 산홍의 친딸이 아니니라. 산홍은 다섯 살 때 너를 
양딸로 삼아서 키웠으니 산홍은 너를 낳은 생모가 아니라 너를 키운 
양어미이니라. 그 사실을 알고 있었느냐"
  임상옥의 질문에 송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빈 잔에 
술을 따라 자작하여 들이켜면서 말하였다. 
  "이제와서 그런 얘기를 하시는 까닭이 무엇이오니까. 어미 산홍이 나를 
낳은 어미가 아니라 나를 키운 양어미인 줄 모르는 사람이 곽산 지방에서 
누가 있겠나이까"
  "너를 낳은 생모가 누구인 줄 알고 있느냐" 
  "모르옵니다, 나으리. 하오나 관기의 딸이면 어떻고 관노의 딸이면 
어떠하나이까. 어차피 둘 다 종년의 계집이 아니겠나이까"
  송이의 말은 자조적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관노의 자식임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이다. 송이 너는 관노의 자식이다. 너를 낳은 생모의 이름은 손자, 
복자, 실자, 손복실이라 하였다. 그러니까 송이 너를 낳은 생모의 이름은 
손복실인 것이다"
  임상옥의 입에서 자신의 생모 이름이 흘러나오자 송이는 움찔하였다.
  그러나 얼굴에는 그 어떤 표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나으리"
  긴 침묵 끝에 마침내 송이가 입을 열어 말을 뱉었다.
  "소녀를 낳은 생모가 이제 와서 밝혀진들 무엇이 어떻게 하겠나이까. 
어차피 기생의 딸이면 어떠하고, 노비의 딸이면 어떠하리까. 둘 다 비천한 
종년의 팔자가 아니겠나이까"
  "아니다"
  임상옥은 말을 끊었다.
  "너를 낳은 생모는 관노이긴 하였지만 나면서부터 노비는 아니었느니라. 
너의 어미는 공노비였느니라. 너의 어미는 태어날 때부터 노비가 아니라 
어느 날 조정에 의해서 하루아침에 노비가 되어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니라"
  이미 충격을 받음직하건만 전혀 내색조차 하지 않는 얼굴로 송이는 
임상옥을 힘주어 바라보며 물어 말하였다.
  "소녀의 생모는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나이까. 전쟁에서 포로가 
되었나이까, 아니면 무슨 죽을 죄를 지어서 하루아침에 공노비로 
전락하였나이까"
  "너의 어미는 아무런 죄도 짓지 아니하였느니라. 너의 어미는 하늘을 
우러러 한점의 죄도 짓지 않았느니라. 너의 어미는 섬섬옥수를 가졌었던 
반가의 아낙이었느니라"
  "하오면"
  다시 빈 잔에 술을 따라 송이는 자작하여 들이켜면서 물어 말하였다.
  "어찌하여 소녀를 낳은 어미는 아무런 죄를 짓지 아니하였는데도 
하루아침에 공노비로 될 수밖에 없었나이까"
  "그것은 바로 지아비 때문이었다. 송이 너를 낳은 어미가 하루아침에 
공노비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송이 너를 낳은 아비 때문이다.
  "나으리"
  비로소 얼굴을 들어 임상옥의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보며 송이가 물었다.
  "소녀의 아비는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나이까"
  준엄한 질문이었다. 임상옥은 더 이상 말을 돌려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였다. 이제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곧바로 핵심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너를 낳은 아비야말로 지금 네 바로 앞에 묻혀 있다"
  임상옥은 못박아 대답하였다.
  "이제야 알겠느냐. 내가 어찌하여 송이 너에게 상복 대신 가슴에 최를 
달게 하고 이곳까지 데리고 온 것인가, 그 이유를 알겠느냐. 그렇느니라. 
너를 낳은 아비의 이름은 바로 이희저. 한때는 평서지방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천하장사에 굴지의 부호였느니라. 어릴 때부터 가슴에 
웅지를 품고 있던 호걸이기도 하였느니라. 그러나 그릇된 꿈을 펼치기 
위해서 너를 낳은 아비는 역모를 꾀하여 군사를 일으켜 대란을 
일켰느니라. 마침내 관군에 패하여 끝까지 싸우다가 참살되었는데 이로 
인해 남은 가복들이 뿔뿔이 공노비가 되어 몸종으로 팔려나갔느니라. 바로 
그때 이희저의 아내, 네 어미는 뱃속에 유복자 하나를 배고 있었는데 그 
뱃속의 아이가 지금 이곳에 앉아 있는 송이 자네이니라"
  일단 임상옥은 말을 끊었다. 깊은 침묵이 왔다. 송이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격정을 억누르기 위해서 이를 악물고 있는 듯 그녀의 표정은 굳어 있고 
온몸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무서운 인내로 마음의 
충격을 억제하고 있었다. 그녀의 흰 관자놀이에서 태양혈의 핏줄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한껏 부풀어올라 격동치고 있었다.
  "처음에 나는 이 모든 비밀을 끝까지 그 누구에게도 밝히지 아니하리라 
결심하고 있었다. 하늘 아래 이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 
나뿐이었으므로 나만 입을 다물고 있다면 이 비밀은 영원히 미궁 속에 
빠질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느니라. 하지만 나는 깨달은 바가 있었느니라.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은 하나도 숨김이 없이 그대로 밝혀야 한다고 
나는 결심했었느니라"
  차려놓은 제삿상 위의 술잔을 채우고 나서 임상옥은 송이에게 말하였다. 
  "자, 어떡하겠느냐. 일어서서 돌아가신 망인에게 술을 따르고 배례를 
올려 넋을 달래야 하지 않겠느냐. 그래야 죽은 원혼이라도 달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때였다.
  넋을 잃고 망연히 앉아 있던 송이가 결심한 듯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술잔에 술을 따라 그 술을 무덤가를 세 번 돌면서 조금씩 
흩뿌렸다. 그리고 나서 무덤을 향해 배례를 올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녀의 몸은 무덤가에 무너졌다. 송이의 몸이 무덤가를 덮었다. 
그녀의 온몸이 물결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아버지"
  무덤을 향해 절규하는 그녀의 울음소리가 간간히 새어나오고 있었고 
목놓아 우는 통곡소리도 깊은 침묵 속에 섞여서 간간이 터져오르고 
있었다.
  "아버지-"
  임상옥은 한쪽에 서서 묵묵히 송이가 우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내버려둬야 한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울고 싶은 대로 실컷 울어야 한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그래야만 한이 풀릴 것이다. 가슴에 맺힌 모든 한이 풀릴 
때까지 울 수 있으면 실컷 울도록 내버려둬야 할 것이다.
  "아버지-"
  헐벗은 맨땅을 손가락으로 움켜쥐고는 송이는 피를 토하듯 숨죽여 
외치고 있었다.
  그 외마다 소리가 어제도 그제도, 20여 년 전에도 변함없이 흘러가고 
있는 강물 위를 흘러가고 있었다.
  "아버지- 아버지-"
  이로써 임상옥은 목놓아 우는 송이의 외마디 소리를 들으면서 
생각하였다.
  모든 비밀은 밝혀진 것이다. 송이의 출생에 관한 모든 비밀과 송이의 
신분에 관한 수수께끼는 백일하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이로써 마음의 
준비가 모두 끝이 난 것이다. 이젠 홀가분하게 마음의 정리를 끝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날 오후 늦게 성묘를 끝내고 임상옥은 곽산을 향애 걸음을 
재촉하였다.
  돌아오는 말 위에서 임상옥은 생각하였다.
  이로써 이희저에 대한 모든 마음의 빚은 갚은 것이다. 모든 비밀을 
송이에게 밝힘으로써 송이와 헤어질 마음의 준비를 끝낸 것이다.
  읍참마속.
  촉한의 제갈량이 군령을 어긴 마속을 눈물을 흘리면서 목을 베었다는 
고사처럼 사랑하는 송이를 진심으로 위하는 길은 송이의 목을 단칼에 
내려치는 것임을 임상옥은 깨달을 수 있었다.
  송이를 진심으로 위하는 것은 단칼에 인연의 끈을 끊어버림으로써 
그녀를 자유롭게 하여 주는 것이다. 사사로운 정념으로 그녀를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송이의 목숨을 단칼에 내리킴으로써 그녀를 죽여버리는 일인 
것이다. 이제야말로 송이를 죽여버릴 바로 그때가 다가온 것이다.
  해거름에 서둘러 돌아오는 길이었으므로 뉘엿뉘엿 해는 지고 있었다. 온 
산을 붉게 물들인 진달래와 철쭉꽃 사이로 소쩍소쩍- 피를 토하면서 
소쩍새가 울고 있었다.
  그 소쩍새의 애조띤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임상옥은 묵묵히 옛 신라시대 
때의 고사를 떠올렸다.
  신라 진평왕 때 유명한 기생 하나가 살고 있었는데 그녀의 이름은 천관, 
혹은 천관녀라고 하였다. 그녀는 소년 시절 화랑이었던 김유신과 서로 
좋아하고 있었다. 우연히 천관의 집에 유숙한 뒤로 하루도 그녀를 보지 
못하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김유신은 사랑에 빠져 있었다.
  이 일을 알게 된 김유신의 어머니 만명부인은 김유신을 불러 앉히고 
울면서 다음과 같이 훈계하였다.
  "네가 성장하여 공명을 세워 임금과 어버이를 영화롭게 하기를 밤낮으로 
바랬었는데 이제 너는 천한 년과 술집에서 놀아나고 있단 말이냐"
  이때 김유신은 어머니 앞에서 다시는 그 집에 가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고 전해오고 있다. 실제로 어머니와의 약속은 지켜져서 
김유신은 그 이후 천관녀의 집을 지나지 않았으나 어느 날 술에 취해 말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깜박 마상에서 잠이 들었는데 말은 이전에 다니던 
옛길을 따라 기녀 천관녀의 집으로 찾아간 것이었다. 천관녀는 원망하던 
김유신이 찾아오자 맨발로 달려나와 그를 반갑게 맞이하였다.
  말 위에서 잠을 깬 김유신은 놀라 술이 깨었으며 그 순간 김유신은 칼을 
빼어 말의 목을 베어버리고 안장을 버린 채 그대로 집으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이를 본 천관녀는 원사라는 사랑노래를 지어 불렀는데 이 노래는 널리 
불렸다고 알려져 있으나 지금은 전해 내려오지 않고 있는 것이다.
  훗날 천관녀는 김유신을 그리다가 병에 걸려 죽었으며 김유신은 그 
영혼을 달래기 위해서 천관녀의 집자리에 절을 지었는데 그 절 이름을 
천관사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또한 자기가 탔던 말의 목을 베어 죽인 자리를 참마항이라 불렀는데, 
뒷날 김유신이 삼국통일의 큰 업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말의 목을 
베어버린 참마항에서 움튼 것이라는 이야기를 임상옥은 소년시절 행자 
노릇을 할 무렵 승려들로부터 전해들었던 것이다.
  참마항.
  말의 목을 베어 죽인 바로 그곳. 말의 목을 단칼에 베어버림으로써 
애욕을 끊어버린 김유신처럼 이제 나도 미몽에서 깨어난 말의 목을 단칼에 
베어버려야 하는 것이다.
  애욕. 이성에 집착하는 성적인 욕망.
  송이를 향한 육체적 욕망. 마셔도 마셔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 
  일찍이 부처는 애욕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왕이 거동하면 신하도 따라가듯 애욕이 가는 곳에는 항상 미혹이 
따른다. 습한 땅에 잡초가 무성하듯 애욕의 습지에는 번뇌의 잡초가 
무성한다. 또한 애욕은 나찰의 딸과 같아 아이를 낳는 대로 잡아먹고 
마침내는 자기의 남편까지도 잡아먹는다. 중생들이 선업의 아이를 낳으면 
낳는 대로 잡아먹고 중생까지도 잡아먹는다. 애욕은 또한 꽃밭에 숨은 
독사와 같다. 사람들이 꽃을 탐해 꽃을 꺽다가 독사에게 물려 죽는다. 
중생들은 오욕의 꽃을 탐하다가 애욕을 뿜는 독사의 독을 받고 마침내 
악도에 떨어진다"
  그리고 나서 부처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차라리 남근을 독사의 아가리에 넣을지언정 여자에 몸에는 대지 말라. 
이와 같은 인연도 악도에 떨어져 헤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애욕은 착한 
법을 태워버리는 불꽃과 같아서 모든 공덕을 없애버린다. 애욕을 얽어묶은 
밧줄과 같고 시퍼런 칼날을 밟는 것과 같다. 애욕은 험한 가시덤불을 
뛰어드는 것과 같고 성난 독사를 건드린 것과 같으며 더러운 시궁창과 
같은 것이다"
  어느덧 주위는 서서히 땅거미가 내려 어두워져가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어둠이 내리기 전에 곽산읍내에 도착한 것이다. 
  말 위에 오래 앉아 종자가 이끄는 대로 우쭐우쭐 타고 가면서 임상옥은 
묵묵히 귓가를 때리는 부처의 사자후를 마음에 새겨들었다.
  이제야말로 말의 목을 단칼에 베어버리고 애욕의 굵은 밧줄을 끊어버릴 
때인 것이다.
  애욕의 습지에 돋아난 번뇌의 잡초를 뿌리채 뽑아 버릴 때인 것이다. 
바로 이것이 금강사에서 새벽 종소리를 들었을 때 깨달았던 길 없는 길의 
두 번째 행인 것이다. 송이를 향한 애욕의 번뇌를 단칼에 끊어버리는 일인 
것이다.
  
  그로부터 며칠 뒤.
  임상옥은 곽산을 떠났다.
  떠나기 전날 밤. 두 사람은 마지막으로 술상을 차려놓고 마주 앉았다. 
비록 입을 열어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송이는 오늘 밤이 두 사람이 함께 
지내는 그 마지막 밤임을 잘 알고 있었다.
  송이는 임상옥의 입을 통해 자신의 출생에 얽힌 비밀을 알게되고, 20여 
년 전에 죽은 아비 이희저와 임상옥이 생전에 절친한 친구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임상옥이 자신의 곁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내 곁을 떠나려 하신다. 나으리께오서 내 곁을 떠나려 하신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귀호곡처럼. 사랑하는 나으리께오서 내 곁을 떠나시려 한다.
  
  가시리 가시리잇고 나를 버리고 가시리잇고.
  날더러 어찌 살라 하시고 나를 버리고 가시리잇고.
  붙잡아 두고 싶지옵마는 행여 아니 올세라.
  설은 님 보내옵노니 가시는 듯 돌아오소서.

  예로부터 전해오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안타까워하면서 부르는 
고려가요처럼 송이의 마음은 무너지는 듯했다.
  사랑하는 나으리께오서 나를 버리고 떠나가시려 한다. 날더러 어찌 살라 
하시고 나를 버리고 떠나가시려 한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 것인가.
  행여 서방님이 돌아오시면 드리라고 짜고 있던 명주옷은 이제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베틀을 돌려 옷감을 서둘러 완성하면서도 송이의 마음은 애절하고 
곡진하였다.
  아아,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 것인가. 사랑하는 님께오서 나를 두고 
떠나려 하신다. 붙잡아도 소용없고 매달리면 행여 더욱 돌아오지 
않으시리니. 차라리 모른 체할 것인가. 그리하여 모른 체 보내면 떠나시는 
것처럼 돌아오실 것인가.
  "...처음에 내가 곽산에 수령으로 부임하였을 때 기생 점고 중에 너를 본 
순간 심히 놀랬었었느니라"
  송이가 따라주는 술을 마시면서 임상옥은 천천히 지난 일들을 회상하여 
말하였다.
  "그것은 처음으로 본 너의 얼굴이 낯설지가 않고, 수십 차례 만난 
사람처럼 친숙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네가 치마무검을 춘 날 밤, 
내가 은밀히 너를 따로 불러 일찍이 나를 본 적이 있었더냐고 물어 
보았다.
  "기억하고 있나이다, 나으리"
  임상옥의 회상에 맞장구를 치면서 송이가 말하였다.
  "나으리께오서는 저에게 낳은 어미와 아비가 누구인지 하고 
물으셨나이다"
  "그리하여 나는 아전만을 은밀히 데리고 너를 낳은 양어미 산홍을 
만나기 위해 주막집으로 암행하여 보기도 하였느니라. 그러나 
산홍으로부터도 아무런 비밀을 알아내지 못하였으므로 관아로 돌아가 
노비안을 가져오도록 하였느니라. 노비안을 통해 송이 네 호적을 찾아본 
순간 나는 심히 놀랬었다. 왜냐하면 송이의 아비가 이희저로 노비안에 
분명히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에야 나는 어찌하여 송이 네가 
처음 본 순간부터 낯설지가 아니하고 수십 번 만나본 듯한 숙세의 인연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던 그 비밀을 알게 되었느니라. 그날 밤, 나는 하룻 
밤을 꼬박 새우며 고민하고 또 고민하였다. 그날 밤, 내가 밤을 새우며 
고민하였던 것이 무엇인지 알겠느냐"
  활짝 열어젖힌 방문 밖에는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활짝 피어난 매화꽃 
위로 이슬같은 봄비가 자욱히 적시고 있었다.
  한참을 생각해 보고 나서 송이가 대답하였다. 
  "...제가 어찌 그것을 알겠나이까"
  "그날 밤"
  임상옥은 술잔을 기울이며 말을 이어내려 갔다.
  "나는 한 가지의 결심을 하였는데 그것은 송이 너를 수청들이는 
일이었다. 신임 사또가 송이 너에게 빠졌다는 소문이 온 마을에 퍼져 
나가도록 계속해서 너를 수청들이는 일이 바로 그날 밤을 꼬박 새우는 
끝에 내린 결심이었다. 과연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두세 번 수청을 
들이고 나자 온 성안에 소문이 자자하게 퍼져나갔음을 내가 곧 알게 
되었느니라. 이 모든 것이 내가 미리 정한 계략이었으며 모든 일이 
계략대로 척척 맞아떨어졌느니라. 내가 어찌하여 송이 너를 수청 들이려 
하였는지 그 이유를 아직도 모르겠단 말이냐"
  임상옥이 묻자 송이는 자신도 술잔에 술을 따라 마시며 한숨처럼 
대답하였다.
  "나으리의 깊은 뜻을 소첩이 어찌 알겠나이까"
  "...그 모든 것은 너를 소실로 삼기 위함이었다. 너를 소실로 들여 
첩지가를 삼기 위함이었다. 너를 첩으로 얻어 딴 살림을 차려야 한다는 
것이 그날 밤을 꼬박 새워가며 세운 계략이었다"
  "어째서나이까"
  송이가 술을 마시며 물어 말하였다. 그녀의 얼굴은 이미 홍조가 되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어째서 소녀를 수청 들이고 일부러 소실이 되도록 하여 마침내 딴 
살림을 차려 치가를 하셨나이까"
  "그것은"
  단숨에 술을 들이켜고 나서 임상옥이 대답하여 말을 이었다.
  "오직 송이 너를 구하기 위함이었다. 그날 밤, 나는 밤을 꼬박 새우며 
노비안을 들여다보면서 깊이 고민하고 또 고민하였다.옛 고우 이희저의 딸 
송이를 관기에서 빼어내 면천하여 양민으로 속신시켜 주는 방법이 어떤 
것이 있을까 생각하였으나, 그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었던 것이다. 
사노비라면 돈으로 얼마든지 속신시켜 줄 수 있으나 그 아비가 
대역죄인으로 온 가족이 공노비로 노비안에 입적되었다면 방법은 오직 
하나, 관노가 호적에서 벗어 나는 길은 양민의 소실이 되는 방법이 유일한 
것이었느니라. 그리하여 내가 세운 모든 계략은 남의 의심을 사지 않고 
송이를 내 소실로 삼는 것뿐이었느니라"
  "그리하여"
  한숨을 쉬면서 송이가 말을 받았다.
  "...모든 것이 나으리의 뜻대로 되었나이까"
  "보다시피"
  짐짓 껄걸 소리내어 웃으며 임상옥이 말하였다.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었느니라. 그날 밤, 결심하였던 대로 나는 너를 
세 번이나 수청 들였으며 그 소문은 온 성읍으로 번져나가 신임 사또가 
송이에게 혼이 나갔다는 소문이 자자하게 되었으며 자연스럽게 송이를 
소실로 맞아들일 수 있었고, 그리하여 마침내 너는 기적에서 벗어나 
속량하여 양민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느니라"
  "하오면"
  송이가 물어 말하였다.
  "이 모든 것이 나으리의 계략이었나이까. 모든 것이 나으리의 뜻대로 
되었나이까"
  "헛허허"
  너털 웃으며 임상옥이 자신의 무릎을 내리치며 말하였다.
  "일러 무엇하겠느냐. 보다시피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지 아니하였느냐"
  "하오면 단지 그것뿐이었나이까"
  송이는 붉은 얼굴로 정면으로 임상옥의 얼굴을 쳐다보며 물어 말하였다.
  "나으리께오서 저를 품안에 안아주심은 옛 친구의 딸을 속량시켜 
노비에서 구해내고 싶은 우정, 그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나이까"
  송이의 질문은 매서웠다. 임상옥은 그 예봉을 피하면서 대답하였다.
  "그러하면 우정 이외에 또 다른 감정이라도 있을 것이냐"
  "나으리"
  송이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소첩은 나으리를 상사하고 있나이다. 꿈에도 잊지 못하고 몽매에도 
잊지 못하였나이다. 그럼에도 그 모든 것이 우정 때문이셨나이까"
  "우정 이외에 무슨 사사로운 감정이 있을 것이냐"
  분명하게 임상옥이 대답하였다.
  "하오나 나으리, 소첩은 나으리와 몸을 섞었나이다. 소첩이 마름풀이라면 
나으리는 물새였나이다. 나으리가 거문고이셨다면 소녀는 비파이었나이다. 
나으리가 견우라면 소첩은 직녀이옵고, 나으리가 무산이셨다면 소첩은 
아침의 구름이었나이다. 이 모든 것이 단지 친구와의 우정 하나 
때문이셨나이까"
  계속 송이는 정곡을 파고드는 질문의 화살을 쏘아대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 화살을 피하면서 임상옥은 껄걸 웃으며 대답하였다.
  "그러하면 그 우정말고 무슨 사사로운 감정이 있을 것이냐, 헛허허. 
아버지와 딸 사이에 상피라도 붙는단 말이냐. 내 말을 잘 듣거라. 송이 
너의 아비가 이희저라면 나 또한 너의 아비와 다름이 없는 것이다. 아비와 
딸 사이의 근친에 어찌 상간이 있을 수 있겠느냐"
  "하오나"
  송이는 물러서질 않았다. 그녀의 두 눈은 임상옥의 얼굴에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있었다.
  "나으리는 소첩과 혼례식도 올리셨나이다. 나으리는 소첩의 서방님이 
되셨나이다. 나으리가 말씀하셨나이다. 바로 이 방에서 신방을 보내는 
첫날밤에 나으리는 소첩에게 아내라고 말씀하여 주셨나이다. 그때 소첩은 
해로동혈이라 하였습니다. 그러자 나으리는 '같이 늙어갈 수는 없지 
않느냐'고 말씀하시옵고 소첩은 이렇게 대답하였나이다. '함께 나으리와 
늙어갈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함께 한 구덩이에 묻힐 수는 있을 것이 
나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러하면 그러한 맹세도 거짓이었나이까. 그러면 
상사의 맹세도 전부 옛 친구와의 우정 때문에 꾸민 거짓이셨나이까"
  묵묵히 듣고 있던 임상옥이 비로소 입을 열어 말하였다.
  "송이야"
  임상옥이 부르자 송이가 말하였다.
  "말씀하십시오, 나으리"
  '내 말을 잘 듣거라. 내 말을 명심하여 듣겠느냐"
  "...여부가 있겠습니까"
  "송이 너를 면천하여 양민으로 속량시켜 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말로 송이 너와 살림을 차려 소실을 삼는 것뿐이라고 내가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더냐. 너의 아비 이희저는 죄인 중에도 대역죄인으로 
네가 살 수 잇는 방법은 오로지 그것뿐이었느니라. 이번에 내가 
조정으로부터 착수가 되어 일년 가량 유배형을 받은 그 연유를 네가 알 수 
있겠느냐. 하늘 아래 비밀이란 없는 법이라고, 대역죄인의 딸을 소실로 
삼았다는 것이 비변사로부터 논척되었기 때문이었느니라"
  일단 말을 그치고 나서 임상옥은 빈 잔을 송이에게 내밀었다. 송이는 두 
손으로 술병을 기울여 잔을 가득 채웠다. 임상옥은 묵묵히 술잔을 비울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긴 침묵 끝에 임상옥은 입을 열어 
말하였다.
  "내 말을 잘 듣거라. 내 말은 절대로 명심토록 하여라. 이제 모든 것이 
뜻대로 되었다. 송이는 면천되어 양민이 되었다. 이제 그 누구도 너를 
노비의 자식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너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러나 먼 곳으로 떠나거라. 네가 멀리 떠나서 새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충분한 돈을 보태줄 것이다. 또한 나도 이제 다시는 너를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이 밤이 지나면 나는 날이 밝기 전에 너를 떠날 것이다. 이것이 
마지막으로 다시는 너를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만약 사사로운 정으로 
인연의 끈을 끊지 못한다면 그때 너와 나는 둘 다 죽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번 기회에 그 인연의 끈을 단칼에 베어버린다면 나도 살고 너 또한 살 
수 있는 쌍생의 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가까운 시일 내에 먼 
곳으로 떠나거라. 다행히 너는 아직 나이가 젊으니 얼마든지 새 출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네 핏속에는 용맹하고 출중한 아비의 피가 흐르고 있지 
아니하냐. 또한 이제 네가 아비의 성인 이가를 물려받아 새 이름을 얻지 
아니하였더냐. 이송이. 그것이 너의 새 이름이 아니더냐"
  그윽한 눈빛으로 임상옥이 송이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송이의 두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드디어 나온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떠나시겠다는 가시리의 
말이 터져나온 것이다.
  그러나 그 눈물은 방울되어 흐르지는 아니하였다. 독한 마음으로 송이는 
애써 눈물을 자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첩에게도 술을 한 잔 따라 주시옵소서"
  송이가 말을 하자 임상옥은 자신이 마시던 술잔에 잔이 넘치도록 술을 
따라주었다. 그 잔을 받아 술을 들이켜고 나서 붉은 얼굴로 송이가 
말하였다.
  "나으리, 나으리의 깊은 뜻을 이제야 모두 알겠나이다. 나으리께오서 
어찌하여 소첩을 아비의 무덤까지 데리고 가셨는지 그 깊은 뜻도 이제야 
알겠나이다. 또한 나으리께오서 날이 밝으면 떠나시옵고, 떠나시면 아주 
오지 않겠노라고 하신 말씀의 뜻도 잘 알겠나이다. 또한 나으리께오서 
소첩에게 먼 곳으로 떠나 양민으로 새 출발을 하라고 이르신 말씀의 깊은 
뜻 또한 잘 알겠나이다. 하오나, 나으리. 소첩이 이제 마지막으로 한 마디 
묻겠나이다"
  송이는 잠시 말을 끊었다. 그녀는 술잔에 남은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나서 빈 잔에 두 손으로 술을 따라 다시 임상옥에게 바쳐 올렸다.
  술잔을 바쳐 올리면서 송이가 말하였다.
  "나으리께 마지막으로 묻겠사오니 솔직하게 답변하여 주시겠나이까"
  "여부가 있겠느냐"
  술잔을 받으면서 임상옥이 대답하였다. 그러나 송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술잔을 받은 임상옥이 한 잔을 다 마실 때까지 송이는 입조차 
열지 아니하였다. 참다 못한 임상옥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네가 방금 나에게 묻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러하면 묻겠나이다"
  잠시 비 내리는 정원 쪽으로 얼굴을 돌렸던 송이가 똑바로 임상옥을 
쳐다보면서 물어 말하였다.
  "나으리, 나으리께오선 정말 자신이 있으시나이까. 소첩을 떠나서 소첩을 
잊을 자신이 있으시나이까. 소첩을 보지 않아도 견딜 수 있으시나이까. 
소첩을 떠나보낸 후 그것으로 심신에 변환이 들어 눕지 않을 자신이 
있으시나이까. 정말로, 정말로 날이 밝으면 이별의 길을 떠나 영원토록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자신이 있으시나이까. 소첩을 보지 않아도 
하루하루를 사는 생활에 기쁨이 있을 수 있겠나이까. 허망하고 허망하여 
상심에 젖지 않을 자신이 있으시나이까. 소첩이 없더라도 활기에 찰 
자신이 있으시나이까. 소첩의 몸이 그리워서 밤마다 뒤척이지 않을 자신이 
있으시나이까. 날마다 차가워지는 나으리의 몸을 덥혀줄 소첩의 생각에 
시름에 겨워 한숨을 쉬지 않을 자신이 있으시나이까. 진실로 진실로 
나으리께 묻사오니 이 송이가 없어도 살아갈 자신이 있으시나이까. 저승도 
막지 못한 이승에서의 숙세의 인연을 단칼에 베어버릴 자신이 
있으시나이까"
  송이의 말은 구구절절이 구곡간장의 깊은 마음속을 털어놓는 듯하였다. 
한바탕 말을 쏟아내고 나서 송이는 잠시 말을 끊고 긴 한숨을 쉬었다.
  "나으리"
  애절한 눈빛으로 송이가 임상옥의 눈을 마주보며 말하였다.
  "나으리께오서 하라시면 소첩은 능히 할 수 있나이다. 먼 길을 떠나라면 
소첩은 이르시는 대로 능히 할 수 있나이다. 먼 곳으로 떠나 새 출발을 
하라시면 소첩은 능히 그렇게 할 수 있나이다. 하오나, 나으리"
  송이는 술잔을 단숨에 비우고서 말을 이었다.
  "나으리께오서는 제가 없으면 살지 못하실 것이나이다. 나으리께오서는 
제가 없으면 인생이 허망하여서 살지 못하실 것이나이다. 나으리께오서 
소첩을 찾으실 때 소첩이 없으면 애통하여 몸져 누우실 것을 저는 알고 
있나이다. 소첩이 나으리의 곁을 못내 떠나지 못함은 바로 나으리 
때문이나이다. 소첩은 나으리가 죽으면 함께 죽겠나이다. 소첩은 나으리가 
땅에 묻히면 함께 묻힐 자신이 있나이다. 그 이상 이승에서 더 무엇을 
바랄 수 있겠나이까. 잠시 머물다 사라질 이승에서 나으리의 곁에 소첩이 
있고, 소첩 곁에 또한 나으리가 있어 서로 상사하고 상사하니, 더 이상 
무엇을 바랄 수 있겠나이까. 그러하니 나으리, 소첩이 마지막으로 
묻겠사오니 정말로 자신이 있으시나이까. 이 소첩이 먼곳으로 사라져 
다시는 만날 수 없다 하더라도 소첩을 잊을 자신이 있으시나이까"
  송이는 정면으로 임상옥의 두 눈을 쳐다보며 물었다. 단도직입적인 
질문이었다.
  비켜가거나 돌아가는 일 없이 평소의 그녀답게 요점을 향해 곧바로 찔러 
들어가는 질문이었다. 질문을 받은 임상옥이 웃음 띤 얼굴로 말하였다.
  "술을 한 잔 따라주지 아니하겠느냐"
  그러자 송이는 두 손으로 술을 따라주었다. 임상옥은 묵묵히 잔을 
들이켜고 다시 빈 잔을 내려놓으며 말하였다.
  "다시 한 잔 따라주지 아니하겠느냐"
  송이가 따라주자 다시 그 잔을 들이켜고 나서 임상옥은 빈 잔을 술상 
위에 내려놓으며 말하였다.
  "다시 한 잔 더 따라주지 아니하겠느냐"
  술 석 잔의 삼배였다. 예로부터 술 석 잔의 삼배를 마신다 함은 자신의 
결연한 의지를 드러내 놓겠다는, 술자리에 있어서의 주도였던 것이다.
  송이 역시 그 주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말없이 두 손으로 
다시 빈 잔을 채웠다. 이미 마신 술이 상당하여 취했을 법도 하건만 
임상옥은 조금도 취한 기색이 없이 묵묵히 송이가 따라주는 삼배를 
들이켜고 나서 빈 술잔을 소리가 나도록 술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나서 송이를 마주보며 입을 열어 말하였다.
  "네가 물으니 내가 분명 대답할 것이다. 묻지 아니하면 대답하지 않아도 
좋은 것을 송이 네가 물으니, 그러면 내가 대답하겠다. 이제 모든 것은 
끝이 났다. 모든 것이 내 소원대로 이루어졌다"
  문득 말을 그치며 임상옥은 벼루를 가져오게 한 후 붓에 먹을 듬뿍 
묻혀서 종이 위에 단숨에 한시를 써내려갔다.
  임상옥이 종이 위에 쓴 시는 다음과 같았다.

  하마음군주
  문군하소지
  군언부득의
  귀와남산수
  단거막부문
  백운무진시

  단숨에 흰 종이 위에 한시를 써내리고 나서 임상옥이 송이에게 물어 
말하였다.
  "이 시가 누구의 시인지 알고 있느냐"
  "알고 있나이다. 당의 시인 왕유의 시이나이다"
  "그렇다"
  임상옥은 붓을 던지며 말하였다.
  "이 시는 왕유의 '송별'이라는 시이니라"
  임상옥은 손가락으로 일일이 짚어 내리면서 자신이 쓴 왕유의 시를 읊어 
내려갔다.
  "말에서 내려 그대에게 술을 권하면서, 그대에게 묻노니 '어느 곳으로 갈 
것인가', 그대 말하기를 '뜻을 얻지 못하면 남산 언저리에 돌아가 눕겠네', 
'그저 가게 다시 묻지 않겠네. 흰구름이 끝날 때가 없을 테니까' "

  왕유의 시를 읊고 나서 임상옥이 송이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송이가 내게 술을 권하며 어느 곳으로 갈 것인가 하고 물으니 내가 
왕유의 시를 빌어 대답하노라. 송이야, 나는 이제 너의 질문에 대답하노라"
  임상옥이 마치 타령을 하듯 노래조로 말을 하였다.
  "나는 이제 뜻을 얻지 못하였으니 남산 언저리에 돌아가 누울 것이다. 
그러니 송이야, 다시는 내게 어디로 갈 것인가 묻지를 말아라. 어차피 
흰구름이 그칠 때는 없을 터니까"
  왕유의 시를 빌려 한바탕의 타령을 끝내고 나서 임상옥이 말을 맺었다.
  "송이야, 너는 이제 내 마음에서 떠났음이니라. 한 번 흘러간 물은 
거꾸로 흘러갈 수 없고 한 번 흘러간 마음은 돌이킬 수가 없는 것이니라"
  그리고 그만이었다.
  그것이 송이의 마지막 질문에 대한 임상옥의 최종답변이었던 것이다. 
임상옥의 마지막 답변을 들은 송이가 몸을 일으키며 말하였다.
  "나으리, 잘 알겠사옵니다"
  그리고 나서 송이는 천천히 임상옥에게 삼배를 올리기 시작하였다.
  그녀의 두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으나 흘러내리지는 
아니하였다. 그것은 작별의 인사였다. 불교에서 말하는 최대의 경의를 
표하는 삼배를 올림으로써 이제는 사랑의 인연과 애욕의 인연을 끊고, 그 
동안 베풀어 준 은덕에 감사한다는 마음을 담는 송별의식이었던 것이다.
  다음 날 아침.
  날이 밝기 전에 임상옥은 곽산을 떠났다. 행여 마을 주민들이 알아볼까 
삿갓을 쓰고 가져온 돈과 보화들은 산홍에게 물려준 후 곽산을 떠났다. 그 
보화들은 간밤에 말하였던 대로 송이가 먼 길을 떠나 낯선 곳에서 
충분하게 새 출발을 할 수 있을 정도의 큰돈이었던 것이다.
  간밤에 있었던 두 사람의 작별을 전혀 모르고 있던 산홍으로서는 뜻밖의 
횡재에 입이 벌어질 만큼 함박웃음을 띠며 좋아하였다.
  "잘 있게나, 장모"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길을 떠나면서 임상옥은 산홍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산홍은 대문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문 안에서 전송하여 말하였다.
  "나으리, 항상 대문을 열어놓고 기다리고 있겠나이다. 안녕히 
가시옵소서, 안녕히 가시옵소서"
  송이는 방안에서 떠나는 임상옥의 목소리와 발자국 소리와 양어미 
산홍의 호들갑스런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송이는 숨죽여 듣고 있었다. 
자칫 통곡으로 터져 흐르려는 눈물을 막기 위해서 송이는 입안에 가득 
숨을 베어물고 있었다.
  가신다.
  임께서 떠나가신다.
  떠나가시면 이제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신다.
  아아, 날더러 어찌 살라시고 나를 버리고 떠나가신다.
  마침내 임상옥이 문 밖으로 나아가 발자국 소리가 멀어져 가자 송이는 
노리개로 차고 있던 칼집 속에서 날카로운 은장도를 빼어들었다.
  은장도.
  송이가 정절을 지키기 위해서 항상 옷고름에 차고 다니던 패도. 그러나 
이제 정절이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송이는 칼집에서 날카로운 칼을 
빼어들고 허공으로 치켜들었다. 유사시에는 상대를 공격하거나, 
마지막으로는 자결하기 위해서 갖고 다니던 칼이 아니었던가.
  허공으로 치켜들었던 은장도를 송이는 순간 내리찍었다.
  송이의 손에서 은장도는 춤추었다. 베틀 위에 거의 완성되어 가던 
명주옷의 실을 은장도는 단숨에 베어내었다.
  임이 오시면 만들어 주리라 일년여 동안 직접 짜던 명주옷이었다. 
그러나 이제 떠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임을 위해 옷감을 짜서 
무엇하며, 옷을 지어 무엇할 것인가.
 임은 떠났다. 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송이는 베틀에 걸려 있는 명주옷을 은장도로 갈갈이 찢어내리면서 
무너졌다. 마침내 참았던 울음이 통곡이 되어 터져 흘렀다.
  날더러는 어찌 살라 하시고 나를 버리고 떠나시고 말았다.
  절현.
  옛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때 거문고의 명수 백아가 자기가 타는 거문고의 
가락을 알아주던 유일한 벗 종자기가 죽은 후에는 거문고의 줄을 끊고 
다시는 타지 않았던 것처럼 송이는 사랑하는 님의 옷을 찢어 절연함으로써 
마침내 맺었던 의를 끊고 절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무렵.
 임상옥은 곽산 성문을 벗어나고 있었다.
  성문을 지나 산마루에 이르자 임상옥은 삿갓을 벗고 말을 세웠다. 그는 
말에서 내려 철쭉꽃이 온 산을 피처럼 물들이고 있는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산 아래로 자신이 떠나온 곽산 읍내의 풍경이 아련하게 펼쳐 
보이고 있었다.
  이로써.
  임상옥은 소리를 내어 중얼거렸다.
  곽산에 올 때부터 생각해 두었던 소기의 목적을 다하고 돌아가게 
되었다. 새벽종이 울리는 금강사에서 깨달았던 세 가지의 길 없는 길 
중에서 그 두 번째의 길을 행하고 돌아가는 것이다.
  혼신의 힘을 다해 표정을 숨기고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임상옥의 가슴도 
이별의 슬픔으로 갈갈이 찢어지고 있었다.
  과연 내가 살 수 있을까.
  간밤에 마지막으로 물었던 송이의 질문처럼 내가 과연 송이를 떠나서 살 
수 있을까. 송이를 보지 않아도 살 수 있을까. 정말로 이별의 길을 떠나 
영원토록 다시는 이 곽산으로 돌아오지 않을 자신이 있을 것인가. 저승도 
막지 못한 이승에서의 숙세인연을 단칼에 베어버릴 자신이 있는 것일까.
  아니다.
  바위 위에 걸터앉아 물끄러미 읍내를 바라보던 임상옥인 소리를 내며 
머리를 흔들었다.
  고통이 따르더라도 오직 이 하나의 길뿐이다. 이 길만이 송이와 내가 
함께 사는 공생의 길인 것이다.
  일찍이 부처는 경전에서 말하였다.
  애욕이 생사의 근원임을 밝힌 부처는 '어찌하면 윤회의 근원을 끊을 수 
있습니까' 하고 묻는 미를보살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모든 중생들에게는 시작 없는 옛적부터 갖가지 애정과 탐심과 음욕이 
있기 때문에 생사가 윤회하는 것이다. 중생들은 음욕으로 인해 각자의 
성품과 생명을 타고나는 것이니 윤회의 근원이 애욕임을 명심하여라. 
음욕을 애정으로 일으켜 생사가 계속되는 것이다. 음욕은 사랑에서 오고, 
생명은 음욕 때문에 생기는데 중생은 또다시 생명을 사랑하여 드디어 
음욕을 의지하니 음욕을 사랑함은 원인이 되고 생명을 사랑함은 결과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부처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사람이 애욕에 얽매이면 마음의 흐리고 어지러워 도를 볼 수 없다. 
깨끗이 가라앉은 물을 휘저어 놓으면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그림자를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너희들은 반드시 애욕을 버려야 한다. 애욕의 때가 씻기면 
도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도를 보는 사람은 마치 횃불을 가지고 어두운 
방안을 들어갔을 때 어두움이 사라지고 환히 밝아지는 것과 같다. 도를 
배워 진리를 보면 무명이 없어지고 지혜만 남을 것이다.
  내게 있어 송이를 떠남은.
  임상옥은 피를 토하듯 천지사방으로 피어난 진달래와 철쭉꽃을 바라보며 
생각하였다.
  부처의 말처럼 애욕을 끊는 일이다. 그리하여 애욕을 끊음으로서 마음의 
흙탕물은 깨끗이 가라앉고 죽고 사는 생사의 윤회에서 벗어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아니다. 내가 애욕을 끊음은 오로지 나를 위한 길만은 아닌 
것이다. 송이에게 있어 나야말로 애욕의 대상이다. 송이에게 있어 나야말로 
애정과 음욕의 마군이며 온갖 번뇌와 집착을 일으키는 마귀인 것이다. 
진실로 송이를 위하는 길은 내가 스스로 그녀의 곁을 떠남으로써 송이를 
애욕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여 주는 길인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성도의 길인 것이다.
  지금은 야속하고 원망스럽겠지만 언젠가는 송이도 나의 속뜻을 헤아려 
오히려 감사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부처는 <법구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가지지 말라. 미운 사람도 가지지 말라. 사랑하는 
사람은 못 만나 괴롭고, 미운 사람은 만나서 괴롭다. 그러므로 사랑을 
일부러 만들지 말라. 사랑은 미움의 근본이 된다. 사랑도, 미움도 없는 
사람은 모든 구속과 걱정이 없다"
  임상옥은 마음속에 남아 있는 한 가닥의 미련마저 읍내가 바라보이는 
산마루에서 훌훌 털어버리고 다시 말 위에 올라 길을 재촉하였다. 그의 
귓가로 젊었을 무렵 사찰에서 들었던 부처의 사자후가 천둥소리가 되어 
들려왔다.
  "가까이 사귄 사람끼리는 사랑과 그리움이 생긴다. 사랑과 그리움에는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다. 연정에서 근심이 생기는 것임을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애욕은 그 빛이 곱고 감미로우며 즐겁게 한다. 또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들의 마음을 산산이 흐뜨려 놓는다. 관능적인 
애욕에는 이와 같은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나는 이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갈 것이다. 그것은 송이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갈 때 송이도 그물에 걸리지 
아니하는 바람처럼 혼자서 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함께 사는 
공생의 길인 것이다.
  임상옥은 스스로의 약속을 지켰다. 그는 다시는 송이를 만나기 위해 
곽산으로 찾아온 적이 없었다.
  그것은 송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임상옥이 떠난 몇 달 후 집을 
정리하고 먼 곳으로 떠났다. 아무도 그녀가 어디로 떠났는지 알지 
못하였다. 심지어 송이의 양어미 산홍조차도 송이가 어디로 떠났는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3

  곽산에서 돌아온 임상옥은 즉시 금강사에서 새벽 종소리를 들었을 때 
깨달았던 길 없는 길 중에서 그 세 번 째의 길을 실행에 옮길 것을 
결심하였다. 
  이미 스스로 지은 집을 파가하는 것으로 그 첫 번 째의 길을 실천하였던 
임상옥은 사랑하는 송이와의 인연을 끊고 이별함으로써 두 번 째의 길 
없는 길을 행하였다.
  이제 남은 것은 세 번째의 길이었다.
  임상옥은 조촐한 주안상을 차린 후 박종일을 불러들여 단둘이 마주 
앉았다. 주거니 받거니 몇 순배의 술잔이 오간 뒤 임상옥이 먼저 입을 
열어 말하였다.
  "이제 다시는 곽산으로 내려가지 않을 것이오"
  박종일은 주인 임상옥의 말을 쉽게 이해하지 못하였다. 곽산에는 주인이 
사랑하는 애첩 송이 아씨가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주인은 다시는 곽산으로 내려가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는 
것일까.
  "또한 앞으로는 될 수 있는 대로 문밖출입을 자제하여 두문불출할 
것이오"
  이해가 가지 않는 얼굴로 박종일이 물어 말하였다.
  "이 세상과 절연하시겠다는 말씀이시나이까"
  그러자 임상옥은 단숨에 대답하였다.
  "그렇소이다. 속세를 벗어나겠소이다"
  "세속을 벗어나서 무엇을 하실 생각이시나이까"
  "못을 파서 연못을 만들고, 꽃을 심고, 그 속에서 책을 읽고, 시를 
지으며 자적할 것이오. 그리하여 무엇보다 휴식을 취할 것이네. 새소리를 
듣고, 하늘 위에 흘러가는 구름도 바라볼 것이오. 일찍이 당나라의 시인 
왕유는 이런 시를 남겼소. 행도수궁처 좌간운기시. '물이 끝나는 곳까지 
따라가 앉아서 구름이 피어오르는 것을 보리라' 라는 뜻이오. 이제는 나도 
모든 세속을 버리고 물이 끝나는 수궁처를 따라가고 싶소. 그곳을 찾아 
앉아서 구름이 피어나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소이다"
  "하오면"
  박종일이 말을 받았다.
  "나으리의 상업은 어떠하시겠나이까. 나으리의 상업은 날로 번창일로에 
있나이다. 나으리야말로 조선 팔도 제일의 거상이 아니시나이까"
  임상옥은 박종일의 말처럼 조선 팔도 제일의 거상이었을 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거부였다.
  "마찬가지요"
  임상옥은 단숨에 대답하였다.
  "앞으로는 상계에도 나가지 않을 것이오"
  "그러면 무엇을 하시겠다는 것이나이까"
  "나는 가객이 될 것이오"
  임상옥이 대답하였다. 가객이라 함은 시조를 잘 짓거나 창을 잘하는 
사람으로 일정한 주거지역이 없이 떠돌아다니면서 술을 얻어먹는 가인을 
말함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박공"
  넌지시 박종일을 불러 술잔에 술을 따라주면서 임상옥이 말하였다.
  "앞으로 상업은 모두 박공이 나를 대신하여 운영하여 주시오. 상업의 
전권을 모두 박공에게 양도하겠으니 앞으로는 박공이 주인이 되고 나는 
물러가 종이 될 것이오"
  그러자 박종일은 천부당 만부당한 소리라는 듯 펄쩍 뛰면서 말하였다.
  "이를 법이나 하실 말씀이시나이까. 어찌 소인이 대인어른의 경영 
수완을 당해낼 재간이 있겠나이까. 나으리께서는 하늘이 내린 거상이옵고 
소인은 일개 잡상에 지나지 않나이다"
  그때였다.
  임상옥이 무엇인가를 꺼내서 술상 위에 얹어 놓았다. 째그랑 소리가 
나는 그 물건을 박종일이 바라보았다. 그것은 상평통보였다. 상편통보는 
조선에서 통용되는 유일한 화폐로 이를 법화라고 하였다.
  "이것이 무엇이오, 박공"
  술상 위에 상평통보를 소리가 나도록 올려놓은 후 임상옥이 물어 
말하였다.
  "화폐가 아니나이까"
  박종일이 대답하였다.
  "구리로 만들었으므로 동전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또 엽전이라고 
부르기도 하나이다. 사람들은 일러 돈이라고 부르기도 하나이다"
  상계에서는 통화 기능을 대신해 온 쌀, 포 등 물물화폐와 칭량은화의 
화폐기능이 한계를 드러내자 법화인 상평통보를 거래의 주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박종일이 대답하자 임상옥이 입을 열어 말하였다.
  "아니오, 박공. 이것은 화폐가 아니고, 동전도 아니고, 엽전도 아니고, 
돈도 아니오"
  "그러면 무엇이나이까"
  박종일이 물었다.
  "이것이 화폐도 아니고, 동전도 아니고, 돈도 아니라면 그럼 이것은 
무엇이나이까"
  박종일의 질문에 임상옥이 대답하였다.
  "이것은 아도물이오"
  임상옥은 짤막한 대답을 하고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박종일은 임상옥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도물. 원래 중국에서는 이것을 가리킬 때, '아도' 란 속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아도물' 이라면 '이 물건'을 가리키는 중국의 속어였던 
것이다. 임상옥의 대답은 그러니까 '이것은 물건이다' 라는 식의 
답변이었다.
  "무슨 뜻인지"
  박종일이 짧은 침묵 끝에 말을 이었다.
  "소인은 전혀 모르겠나이다. 어찌하여 나으리께오서는 이 화폐를 '이 
물건' 이라고 부르시나이까"
  그러자 임상옥은 술을 마시면서 천천히 대답하였다.
  "일찍이 중국에 왕연이란 사람이 있었소. 그는 죽림칠현의 한 사람인 
왕융의 종제로서 명문 출신이었소, 때는 위진시대로 진나라가 몰락하고 
있을 때였는데 그는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도 정무를 보는 일은 뒷전으로 
미룬 채 오로지 세속을 떠나 청담으로만 세월을 보냈었는데 그래도 정무는 
순조로웠다고 전해지고 있소이다. 그는 후에 석추를 앞세워 흉노가 진의 
도읍 낙양으로 쳐들어왔을 때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잡혀서는 다음과 
같이 변명하였소. '내가 출세욕이 있어 이 자리에 이른 것이 아니라 다만 
사령에 따라 이리 되어버린 것' 이라고 말이오. 그러자 이 말을 들은 
석추는 왕연을 비웃으며 목을 베어 죽였는데 그에 대한 일화가 오늘까지 
남아 있소. 그는 세속에 관한 것을 혐오하였는데 특히 금전이나 화폐에 
관한 말을 입에 담기조차 꺼려하였소. 어느 날 남편이 잠들어 있을 때 
그의 아내가 남편을 시험하려고 그가 자고 있는 침대 앞에 돈을 
깔아놓도록 하녀에게 명하였소. 잠을 깬 왕연은 무심코 침대에서 일어나려 
하다가 발 밑에 깔려 있는 돈을 보고는 소스라쳐 이렇게 소리질렀소이다. 
'거각아도물' 이말의 뜻은 '이 아도물을 치워버려라' 라는 것인데, 그러니까 
왕연이 했던 말은 돈이란 말조차 입에 담기 싫어했던 사람이었으므로 
'돈을 치워라' 하지 않고 '이 물건'을 치워라 하고 말한 것이오.
  임상옥은 술상 위에 놓인 상평통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하였다.
  "나는 평생 동안 이 물건을 주우며 살아왔소. 이것이 나를 행복하게 
해줄 것이라고 믿고 이 물건을 모으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왔소. 그런데 
이제 와서 돌아보니 이것은 다만 하나의 물건, 즉 아도물임을 깨달았던 
것이오. 나는 이것이 나의 것이라 생각해왔으나 이 물건은 본디 그 누구도 
소유할 수 없는 물건임을 나는 깨달았소. 마치 흐르는 물이나 푸른 
하늘이나 대기처럼 이 물건은 가질 수도, 소유할 수도 없는 하나의 
물건임을 나는 깨달았소. 이것은 잠시 내가 맡고 있는 것일 뿐, 언젠가는 
내 곁을 떠나 다른 사람에게 돌아갈 물건이오. 따라서 이 아도물을 내가 
영원토록 소유하려 하는 것이야말로 집착임을 나는 깨달았던 것이오. 옛 
중국의 전한의 무제 때 큰 세력을 떨쳐 중앙정권에 큰 위협이 되었던 
회남왕 유안은 <회남자>란 책을 남겼는데 이 책 속에 이런 말이 나오고 
있소"
  임상옥은 잠시 붓을 들어 먹을 묻힌 후 종이 위에 다음과 같이 
써내렸다.
  
  축록자불견산
  확금자불견인

  단숨에 문장을 써내리고 나서 임상옥은 박종일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사슴을 쫓는 사람은 산을 보지도 못하고, 금을 움켜쥐려는 자는 사람을 
보지 못한다"
  임상옥은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그는 껄걸 웃으며 말하였다.
  "이 말이야말로 나를 두고 하는 말이오. 나는 평생 동안 사슴을 
쫓아다녔으므로 산을 보지도 못하였고, 나는 평생 동안 이 아도물을 
쫓아다녔으므로 제대로 사람을 본 적이 없소이다. 내가 사람을 본 것은 이 
사람이 내게 이로운 사람인가 해로운 사람인가, 이익을 남겨줄 사람인가 
손해를 끼칠 사람인가만 따져보았을 뿐 그 사람의 진면목은 보지 못하였던 
것이오. 이 모든 것이 이 아도물에서 비롯된 것이오. 이제 나는 사슴을 
버림으로써 산을 볼 것이며, 금을 버림으로써 사람을 제대로 보고 싶소. 
또한 이 아도물을 버림으로써 하늘과 땅의 모든 천지만물을 똑똑히 보고 
싶소이다.
  술병을 들어 박종일의 술잔에 가득 술을 따르며 임상옥이 말하였다.
  "이제야 아시겠소. 내가 어찌하여 아도물과 세속을 버리고 가객으로 
돌아가려 하는지 그 이유를 이제야 아시겠소"
  임상옥의 질문에 박종일이 대답하였다.
  "대충 알아듣겠나이다, 나으리. 나으리를 대신하여 상업에 종사하여 
경영해 달라는 뜻을 짐작할 수 있겠나이다. 하오나 한 가지 묻고 싶은 
말이 있사옵니다"
  "그것이 무엇이오"
  정색을 하고 임상옥이 말하자 박종일이 물어 말하였다.
  "도대체 무엇이 나으리를 이처럼 변하게 하였나이까. 나으리께오서 
세속을 버리시겠다고 말씀하셨다면 무슨 계기가 있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도대체 무엇이나이까"
  그러자 임상옥은 빙그레 웃으며 말하였다.
  "물론 있소이다. 장님이었던 내 눈을 휘번쩍 뜨게 한 장본인이 
있소이다"
  "그것이 무엇이나이까"
  "그것이 바로 저것이야"
  임상옥이 손을 들어 찬탁을 가리켰다.
  박종일은 임상옥의 손끝이 가리킨 찬탁 위에 놓인 물건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깨진 술잔 하나였다. 그 언젠가 조상영이 집어던져 깨뜨렸던 
평범한 술잔이었던 것이다.
  "저 깨어진 잔이 나으리의 두 눈을 뜨게 하였단 말씀이시나이까"
  "그렇소이다"
  임상옥은 분명하게 대답하였다.
  "하지만"
  박종일은 어이가 없었다. 그는 주인의 마음과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저 잔이야말로 하찮은 물건이 아니나이까"
  "물론 그러하겠지. 하지만 나를 낳아준 사람은 부모이지만 나를 이루게 
해준 것은 바로 저 잔인 것이오"
  그날 밤. 박종일은 임상옥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임상옥이 상업에서 손을 
떼고 물러앉은 대신 박종일이 전면으로 나서 경영을 맡기로 합의를 본 
것이다.
  임상옥은 그 즉시 작은 연못 하나를 조성하고 그 주위를 따라 숲을 
가꾸고 꽃을 심었다. 작은 집 하나를 마련하고 자신의 호를 '가포' 라 
지었다. 가포의 뜻은 '채마밭에 채소를 심는 사람' 이란 뜻이었다.
  그는 자신의 호처럼 그 이후에는 채소를 심는 사람처럼 은둔 생활에만 
파묻혀서 다시는 상계에 나서지 아니하였다. 그는 그때부터 자연에 
심취하고 시를 짓는 일에만 몰두하였으므로 자신의 소망대로 가객이 
되었던 것이다.
  스스로 상계에서 물러나 가객이 됨으로써 금강사에서 새벽 종소리를 
들었을 때 깨달았던 길 없는 길의 세 번째 길을 완성한 자신이 자서한 
<가포집> 서문에서 자신의 인생을 근본적으로 바꾼 '계영배' 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나를 낳아준 사람은 부모이지만 나를 이루게 해준 것은 그 하나의 
잔이었다'
  그렇다. 그 술잔, 계영배는 임상옥을 거상에서 거인으로 변화시킨 
것이다. 
  이때의 심경을 임상옥은 <가포집> 서문에서 담담한 필치로 간단하게 
표현하고 있다.
  '...새 집을 짓고 입주하여 들어오매, 숲과 연못, 꽃과 돌 사이에 새들이 
날아와 다투어 집을 지으며 지저귄다. 가히 책을 읽고 시를 지으면서 
만년에 휴식을 취할 장소가 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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