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여 땅이여>
김진명
한
의문의 사건 13
바이러스 추적 23
터미널 다운-고통의 3분 27초 31
저항과 타협 40
토우의 흔적 47
힘의 정체 55
잠적 61
컴퓨터 천재 71
기이한 환자 82
함흥차사의 비밀 92
역사의 수수께끼 104
토우의 저주 117
야마자키 연구소 129
맨해튼의 밤 137
함정 142
해킹 전쟁 152
접속 160
혼의 부활 169
파일 침입자 181
화두 187
신비 한 체험 197
수호 사자 212
파티마의 예언 221
한밤의 기도 247
바티칸에서 온 신부 251
비극적 예언 260
숫자의 비밀 268
천년의 법력 280
토우와 팔만대장경 292
도난 303
음모 313
의문의 사건
기미히토 교수는 동경대학교의 교정에 들어서면서야 비로소
학교를 떠나 미국의 실리콘밸리 연구소로 옮긴 것이 벌써 3년이
나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말이지 바쁜 삶이었다. 그리고 바쁜 만큼 성공적인 삶이기
도 했다. 기미히토는 감개무량함을 느끼며 아카몬의 기둥 옆에
잠시 멈춰섰다. 기미히토의 뇌리에 20여 년 전 동경대학교에 입
학하며 처음 이 기둥 옆에서 가족들과 사진을 찍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그후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모든 것이 변했다. 이제 청춘도 날
개를 접고 중견 교수가 되었지만 기미히토는 한 번도 자신이 나
이가 들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 이유가늘 학교에 있
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그에게 아카몬은 새로운 의미로 다가
왔다.
그러나 기미히토의 기분 좋은 상념은 그다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며칠 전 미국에서 받았던 전화 내용이 떠올랐기 때문
이다
기미히토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하세가와입니다.
아니, 하세가와 교수님이 웬일이십니까?"
연구는 잘되십니까?"
네, 덕분에 모든 일이 순조롭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로 여기까지 전화를 다 하셨습니까?"
기미히토는 일본은 지금 한밤중이란 사실을 상기하며 신경을
곤두세웠다. 더군다나 전화를 걸어온 상대방은 전산학부의 학부
장이었다. 몇 년 간이나 학교를 떠나 있는 자신에게, 그것도 미
국으로까지 전화를 걸어 왔다면 이것은 예사로운 인사 같은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사실은 사정이 좀 생겨서요. 약간 복잡한 일이라 전화로 얘기
를 나누기는 뭣하고 . 괜찮으면 학교로 한번 와주실 수 있을
지 해서 전화를 드렸습니다.
네? 학교로요? 동경으로 말입니까?"
더욱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미국에 있는 자신에게 갑자기 동경
의 학교로 와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추측조차 하기 힘든 중에도 기미히토는 혹시
자신이 아직도 보유하고 있는 교수직과 관련된 일이 아닐까 생
각했다 만약 그것 때문이라면 비행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동
경까지 갈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그는 언제나 한마디로 '예스'
라고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기미히토는 곧이어 이 전화가 자신의 교수직 유임과
관련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또렷하게 깨달았다. 교수직을 내놓
으라는 내용이라면 남에게 나쁜 소식을 전하는 것을 무엇보다
싫어하는 하세가와가 한밤중에 자신에게 전화를 할 리도 없으려
니와,그의 교수직은 학교에서 강권하다시피 하여 유지시켜 온
것이라는 사실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자신은 자타가 공인하는
동경대학교의 자랑이 아닌가.
기미히토는 전화기 옆에 놓여 있는, 그 전날 도착한 편지를 눈
으로 더듬었다 그것은 총장이 정기적으로 자신에게 보내오는
안부 편지 중 하나였다. 도대체 하세가와 교수가 연구에 몰두하
고 있는 자신에게 태평양을 건너서 학교로 와달라고 하는 이유
가 무엇일까.
전화로 설명을 드릴 수 없어서 죄송합니다.
기미히토는 어느새 여행 일정을 잡고 있었다. 하세 가와의 인
품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그로서는 이 시간에 이런 전화를 받았
다면 자신이 잠시 연구소를 떠나 일본으로 가야 하는 것은 필연
이라고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알겠습니다. 모레쯤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러면 모레 오전에 출발하는 일본항공기의 좌
석을 예약해 두죠. 요금은 학교에서 지불하겠습니다. 일등석입
니다.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는데
와주시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그럼 학교에서 뵙도록 하죠. 정
말 죄송합니다.
학교에 일이 있다면 당연히 가봐야지요.
그렇다. 자신도 동경대학교의 한 가족이었다. 이제 3년 만에
돌아오는 학교지만 아카몬을 들어서면서부터 학교의 모습 하나
하나가. 학생들의 표정과 옷차림이 너무나 친근하게 눈에 들어
오고 있었다. 자신이 팀장이 되어 진행하던 그 수많은 프로젝트
들, 함께 밤을 새운 팀원들을 이끌고 새벽에 시작한 해장술이 하
루 종일 이어지던 기억들에 기미히토는 다시 한 번 입가에 미소
를 머금었다.
그 당시 조교였던 기무라는 이제 어엿한 교수가 되어 자신의
뒤를 잇고 있다. 그리고 박사 과정에 있던 이케다는 히하치의 선
임 연구원이 되었고, 기쿠지는 통산성의 엘리트 관리로 살아가
고 있다고 한다.
사랑하는 동경대학교, 그리고 사랑하는 후배들과 제자들이라
는 생각에 기미히토는 흐뭇했다. 이제 기무라가 어느 정도 경력
을 쌓으면 자신이 책임자로 있는 실리콘밸리 연구소로 불러 다
양한 연구를 하도록 도와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하세가와 교수가 도대체 나를 왜 불렀을까?'
교정을 걸으면서 곰곰 생각하던 기미히토는 무언가 자신의 능
력을 필요로 하는 난제가 생겼을 것이라고 최후의 결론을 내렸
다. 그것밖에 다른 이유는 떠오르지 않았다.
기미히토는 학교에서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을 때 자신
에게 도움을 청했다는 사실을 기분 좋게 음미하며 하세가와 교
수의 방문 앞에 섰다.
어떤 종류이든 그것이 컴퓨터에 관한 것이라면 문제가 없었
다. 자신은 어떤 난제이든 해결할 것이고, 만약 자신이 해결하지
못한다면 인류에게 그런 문제는 아직은 시기상조인 것이다.
아, 기미히토 교수님. 어서 오십시오. 여행은 힘들지 않았습
니까? 갑자기 오시게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역시 그랬다. 기미히토의 출현에 활짝 펴지는 하세 가와의 얼
굴에는 확고한 기대감이 서려 있었고, 그 기대감은 얼굴 한쪽에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는 짙은 근심의 그림자와 뚜렷한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이 뚜렷한 대비는 하세 가와의 낙천적인 성품을
잘 아는 기미히토에게 강렬한 의문으로,그리고 동시에 약간의
불쾌감으로 다가왔다.
'내가 왔는데도 불구하고 이 노인에게는 아직 걱정할 것이 남
아 있다는 얘기인가.
그래서 약간의 인사말이 오고 간후 바로 자신의 팔을 잡아끄
는 하세가와 교수의 성급함은 오히려 마음을 편하게 했다. 쓸데
없는 군더더기 설명보다는 현장을 직접 보는 것이 낫기도 했지
만, 전산 분야에서는 몇 안 되는 구세대에 속하는 하세 가와의 근
심 어린 설명에 어떤 표정으로 동조하는 태도를 보여야 할지 난
감하던 참이었다.
잘 아시겠지만 이번 문제는 철저한 보안이 필요합니다. 문제
가 해결되든 안 되든 말입니다.
너무나 괴이한 일이라 사람들의 쓸데없는 호기심을 끌까 봐
걱정도 되고, 또 우리 학교의 명성도 있고 하니
하세가와는 말꼬리를 흐렸다. 그의 얘기는 기미히토에게 매우
이상하게 들렸다 컴퓨터로 다루고 있는 자료에 대해서는 말을
안해도 보안을유지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기미히토는 하
세가와가 어딘지 당황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전산 시스템의 문제가 아닙니까?"
물론 그렇습니다만~
하세가와의 대답은 뭔가 석연치 않았다. 컴퓨터에 관한 한 판
단은 분명할 수밖에 없다. 시스템 작동이 되거나 안 되거나의 둘
중 하나다. 모든 것은 기계적이고 기계적인 결론은 언제나 명백
하다. 뭔가가 안 되면 안 되는 이유가 있고, 그 이 유는 누구에게
나 납득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과학이 아닌 그 과학적 분
석에 따라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될 수 있도록 환 경을 바꾸어주
는 것, 그것이 바로 자신이 할 일이고 자신은 제 대로 갖추어진
전산실에 도착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기미히토는 세상에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은 하나도 없
다는 철통 같은 신념을 가진 사람이었다. 사람들이 신비 현상이
니 뭐니 떠들어대는 것들도 모두 관찰의 오류에서 나온다는 것
을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동양문화연구소:
현대식으로 새로 지은 건물이었다. 현관 안에 들어서자 한쪽
에 전시되어 있는,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토우 한쌍이 유독 눈
에 띄었다.
최근에 전산실 내부를 거의 개조하다시피 했습니다.
계단을 올라가 연구소 입구에 들어서면서 나지막하게 건네는
하세가와의 말에 기미히토는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
나 하세가와가 전산실을 개조했다고 말하는 의도는 선뜻 이해되
지 않았다
그래도 문제는 풀리지 않고 있어요.
기미히토는 무슨 소리인가 하는 표정으로 하세 가와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하세가와는 마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는 듯이 기미히토를 소장실이라 씌어진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동양문화연구소장은 기미히토도 아는, 역사 전공의 야스나리
교수가 맡고 있었다. 소장은 수년 전 연구소의 자료를 모두 전산
화할 때 기미히토의 도움을 받은 것을 기억하는지 자리에서 일
어나 고개를 숙였다.
아, 기미히토 교수님,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랜만입니다. 수고가 많으시지요.
소장은 의자를 권했다
자, 이제 기미히토 교수님이 오셨으니 문제가 풀릴 것으로 기
대합니다 만약에 기미히토 교수님조차도 원인을 알아내시 지 못
한다면 이 일은 그야말로 불가사의라 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하세가와가 그답지 않게 과장된 어투로 운을 뗐다.
우리 모두는 좋은 결과가 있을 걸로 믿어 마지않습니다.
기미히토가 듣기에 우리 모두란 동양문화연구소와 전산학부
의 모든 교수들을 말하는 것 같았다
소장님이 설명을 하시지요.
하세가와의 권유에 때마침 여직원이 가져온 차를 권하던 야스
나리 소장은 기대 섞인 표정으로 운을 뗐다
기미히토 교수님을 예까지 오시게 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
리 연구소의 전산실에 있는 컴퓨터 때문입니다.
기미히토는 차를 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컴퓨터가 문제
였다. 그렇다면 문제는 없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아마 컴퓨터 시스템에 관한 문제일 겁니
다. 그렇게 얘기해도 되겠습니까, 하세가와 교수님?~
하세가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게도 우리 전산실의 컴퓨터가 언제부터인가 말을 안
듣기 시작했습니다.
말을 안 듣는다는 것은 어떤 현상을 얘기하는 겁니까?"
납득 못할 에러가 종종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며칠 간 아니
몇 주일 간이나 작업해 둔 자료가 하루아침에 저절로 지워진다
든지, 드물긴 하지만 컴퓨터의 명령 체계가 갑자기 말을 안 들어
아예 작업을 하지 못한다든지 하는 겁니다. 애써 작업한 자료들
이 모두 사라지는 바람에 지난 석 달 간 우리 전산실은 엉망이었
습니다.
석 달이나요?~
기미히토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 이유를 밝혀내지 못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생길 수 있죠? 전산실에서 석 달이나 컴퓨
터를 쓰지 못하다니?"
기미히토는 자신도 모르게 하세가와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러나 하세가와는 지그시 눈을 감은 채 기미히토와 시선을 마
주치지 않았다. 아마 당분간 눈을 감고 있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
하는 모양이 었다.
우선 컴퓨터 회사의 서비스 팀을 불렀습니다. 문제가 생길 때
마다 불렀지요. 그러나 아무리 점검을 해도 컴퓨터 자체에는 문
제가 없다는 겁니다.
기미히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컴퓨터와 관련하여 생기는 문제
는 반드시 기계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닌 경우가 더 많은 법이다.
그리고 기계적인 문제라면 자신을 여기까지 부를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컴퓨터에 문제가 없는 상황에서 자꾸 같은 현상이 반복되기
에 전산실 내부를 개조하다시피 할 정도로 대대적으로 수리를
했습니다.
기미히토는 아까 하세가와가 전산실을 개조하다시피 했는데
도 문제가 풀리지 않았다고 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얘기군요.
바로 그렇습니다. 그래서 전산학부의 모든 교수들이 달려들
었지요.
충분히 짐작이 가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하세가와가 보안을
지켜달라고 하던 얘기나 학교의 명성이 달려 있다고 하던 얘기
도 이해가 되었다 요는 전산학부의 교수들이 모두 달려들었으
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는 얘기였다
고명하신 교수님들이 모두 애를 써주셨지만 기이하게도 이유
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미히토는 동료 교수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미나미, 오카모
토, 스즈키, 누구 한 사람 할 것 없이 쟁쟁한 실력파들이었다
'이상한 일이군, 이들이 달려 들었는데도 시스템 오류의 이유
조차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데
그러나 그럴수록 기미히토는 어떤 종류의 은근한 기대가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내일 아침에 시스템 진단을 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바이러스 추적
기미히토는 동양문화연구소를 나와 학부 시절부터의 동기인
오카모토 교수의 연구실을 찾았다
여어 , 드디어 나타나셨군 동경대학 전산학부의 구세주가 드
디어 오셨어 .
무슨 소리야, 구세주라는 건?~
전산학부의 명예를 회복시켜 줄 주인공이라는 뜻이지.
나라고 별수 있겠어, 일본 제일의 천재들이 못해내는 일을.
이거 왜 이러시나 약관20세에 컴퓨터 논리 구조를 저술한
사람이 우리 같은 소인배를 천재라고 부른단 말이야?"
실없는 소리 그만하고 나가세, 좀 이르지만 저녁이나 먹으면
서 얘기를 좀 나눠보세.
학교 앞의 로바타야키 식당 구석에 자리를 잡고 정종을 한 순
배 나누고 나자 오카모토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얘기를 꺼냈다.
알 수 없는 일이야. 잘못된 것은 아무것도 없어. 아니 우리 눈
에 보이질 않아.
그런데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을 안 한단 말이지?"
그래, 정확히 얘기하자면 오작동을 하는 거지.
무슨 간섭 현상은 아닐까?~
그래서 기계도 모두 바꾸고 설비 환경도 모두 점검했지 종내
는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건 모두 교체하거나 새로 설비를 해
버렸단 말이야. 동양문화연구소가 아니라 전산학부의 자존심이
걸린 일이 돼버렸거든.
프로그램 점검도 했을 테고?"
물론이지 특히 중형 스테이션에는 자체의 점검 프로그램이
있잖아. 어떤 때는 그것마저도 의심스러워 하나부터 백까지 철
저히 , 문자 그대로 철두철미하게 훑었단 말이야. 아마 수십 번은
족히 점검했을 거야.
기미히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은 기본에 속하는 일이
라 이들이 실수를 했을 리가 없었다. 미국을 떠나면서부터 만만
치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막상 오카모토의 얘기를 듣고 나
자 어려움이 피부에 느껴져 왔다. 기미히토는 낮은 신음을 내뱉
으며 정종을 한잔 들이켰다.
그렇다면 지금 생각해 볼 수 있는 유력한 가능성은 바이러스
감염이 아닐까? 기존의 점검 프로그램에는 나타나지 않는 괴이
한 놈 말이야.
그것이 가장 유력한 가능성이긴 한데 꼭 그렇게 볼 수
도 없는 것이 시설을 바꿀 때 컴퓨터와 기존에 쓰던 디스켓이나
프로그램까지도 모두 바꾸어버리는 등 감영 가능성을 완전 차단
했는데도 시스템 장애가 계속 발생 했거든.
해커가 수시로 침입하여 바이러스를 심어두었을 가능성도 체
크했겠지?~
물론이지. 아예 통신을 차단하고 점검했으니까.
역시 그들은 조금의 실수도 하지 않고 모든 것을 점검했다 쉽
게 결론이 나지는 않을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난감했다.
미국에서 여기까지 날아와 웃음거리가 되는 건 아닌지 몰
라.
이 사람, 무슨 소릴! 자네가 못하면 일본에서는 해결할 사람
이 아무도 없는 거야.
오카모토가 진심으로부터 해준 이 한마디는 기미히토의 가슴
에 강한 자신감을 회복시켜 주었다
'그래, 내가 못하면 인류에게는 아직 이른 문제야.
다음날 아침 기미히토는 편한 옷차림으로 전산실에 나타났다.
두 명의 조교와 컴퓨터를 판매한 후지쓰 선임 연구원의 지원을
받아 일을 시작했다.
우선 정압 트랜스의 전압을 재고 바닥의 수평도를 확인하며
공기 중에 떠다니는 먼지의 알갱이 수를 측정하는등 환경 점검
부터 했다 물론 이상이 있을 리 없었다
계속해서 컴퓨터의 프로그램 해석 체계 해부 및 실행 과정 점
검이 이어졌다. 후지쓰에서 만든 스테이션 타입의 중형 컴퓨터
와 단말기들의 논리 구조는 꽤 복잡하긴 했지만 기미히토에게는
전혀 일거리가 되지 못했다.
그렇게 3일을 보냈다. 그러나 3일이 지나도록 아무런 결과를
얻지 못하자 기미히토는 은근히 초조해졌다.
프로그램 수용 체계는 잘못된 것이 없군. 그렇다면 이제 나도
만인의 웃음거리가 되는 일밖에는 남은 것이 없겠어. 내일 마지
막으로 바이러스 감염을 조사해 보자구.
기미히토는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바이러스 감염에 큰 희망
을 걸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가장 가능성이 있고 다른 사람들
이 찾아내지 못했을 걸로 생각되는 것은 역시 바이러스 감염이
었다
아마 아직 일본 열도에는 상륙하지 않아 교수들에게 낯선 바
이러스가 있을 것이다. 통신망을 통해서 누군가가 심어놓은 악
성 바이러스, 혹은 어느 해커가 보낸 트로이의 목마가 컴퓨터 깊
숙한 곳에 숨어 있다가가끔자료를 잡아먹었을 것이다. 이제껏
조사한 결과 그것 말고는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없었다.
어쩌면 자신은 이미 결론은 내려놓고 이제껏 그 결론을 실행
하기 위한 준비 작업을 천천히 진행시켜 왔는지도 모를 일이었
다. 진짜 작업은 내일에야 비로소 시작한다는 생각을 하며 기미
히토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자신감의 표시였다. 컴퓨터 바이러스에 관한 한 자신은 일본
뿐 아니라 세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백신 전문가이고, 자
신이 만든 기미히토 백신은 아직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였다.
다음날 아침, 기미히토는 인원을 대폭 지원받아 침착하게 작
업 지시를 했다.
이제껏 사용되었던 모든 디스켓과 CD를 점검하여 바이러스
감염 여부를 확인하게. 외부로 유출된 것이 있다면 회수하여 단
한 장도 놓치지 말고 조사해야 하네. 그리고 스테이션에 접속했
던 모든 통신도 점검하게. 각 회선마다 일일이 본인에게 확인하
여 그 도용 여부도 철저히 체크해야 하네.
기미히토의 접근법은 광범위하면서도 치밀했다. 기미히토의
지시를 받는 작업자들의 얼굴에 그 어느 때보다도 희망 서린 기
색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기미히토는 작업자들에게 지시를 내려놓고 자신은 스테이션
의 감염 여부를 직접 조사하기 시작했다. 기미히토는 이제껏 누
구에게도 공개한 적이 없는 자신의 감염 체크 프로그램을 작동
시키면서 미국의 연구소에서 개발한프로그램을모교인 동경대
학교에서 맨 처음 쓰게 되었다는 사실에 아이러니와 더불어 보
람을 느꼈다. 어떤 종류의 바이러스도 찾아낼 수 있는 이 프로그
램은 미국의 유수한 메이커들이 모두 탐내던 것이다
아무리 컴퓨터를 바꾸었다 하더라도 전산실에서 필요한 프로
그램들을 깔기 위해서는 여러 종류의 기존 디스켓이나 CD를 썼
을 것이고, 그렇다면 역시 바이러스 감염의 위험이 높다 결론은
역시 동경대학교의 교수들에게는 전혀 생소한 최악성 바이러스
의 잠복일 수밖에 없다.
탐지 프로그램을 작동시키는 기미히토의 손길에는 자신감이
배어 있었다.
그러나 서너 시간에 걸친 탐지 작업이 끝나면서, 그리고 작업
자들로부터 각자 맡은 분야에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보고가 속
속 들어오면서 기미히토의 안색은 차츰 변하기 시작했다. 이윽
고 밤늦게 스테이션에 통신으로 접속했던 사람들을 만나러 나갔
던 작업 자들로부터도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보고를 듣는 순간
기미히토는 온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기미히토는 자신도 모르게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저녁 무렵부터 동양문화연구소로 건너오기 시작한 전산학부
교수들의 얼굴에도 침통한 기색이 감돌았다.
이럴 수는 없었다. 동경대학교의 전산학부에서 아무런 기계적
이상이 없는 컴퓨터의 오작동에 대해 이유를 모르겠다고 물러설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결과로 봐서는 더 이상 어찌할
방법이 없다.
하세가와를 비롯한 몇몇 교수들은 이제 남은 문제는 보안을
유지하는 일뿐이라고 생각했다. 이 사실이 공개될 경우 동경대
학교는 전국에서 몰려드는 아마추어 컴퓨터 전문가들로 북적댈
것이고, 그들은 당당하게 자신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요구할
것이다 그러면 동경대학교 전산학부의 명예는 땅에 떨어지고
만다. 그들이 해결하든 해결하지 못하든 간에 .
이제 다시는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침묵을 깨고 던진 기무라 교수의 한마디였지만 누구도 동의하
지 않았다. 원인을 규명하지 못한 채 다시는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한다는 것은 너무나 무책임하면서도 비과학쩍인
사고였다. 그러나 기무라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두는 잘 알고
있었다 상황은 종료될 수밖에 없었고, 기무라는 그 물꼬를 트는
발언을 했을 뿐인 것이다.
하지만 기미히토는 골똘히 생각에 잠긴 채 앉아 있었다. 몇 사
람이 일어나 같이 늦은 저녁이나 먹자고 권유했으나 기미히토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아예 눈을 감고 묵묵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기미히토 교수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방해
를 하지 않는 것이 나을 것 같소.
하세가와 교수를 필두로 하여 사람들이 하나 둘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모두 지금은 기미히토를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낫겠
다고 생각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기미히토는 텅 빈 전산
실에 혼자 남아 있게 되었다.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겨 있던 기미히토는 어느 순간 묵직한
것이 온몸을 내리누르는 듯한 중압감에 눈을 떴다. 희미한 물체
가 자신을 내리누르는 듯했다. 기미히토는 버둥거리면서 억지로
눈을 뜨고 올려다보았다. 이게 뭘까?
아! 동양문화연구소 입구에서 보았던 토우였다. 바로 그 토우
가 주름진 얼굴에 지그시 미소까지 띠고 기미히토를 내려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헌 !~
다음날 아침, 출근한 동양문화연구소의 직원들은 기미히토가
밤을 새우며 전산실에 남아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야스나
리 소장은 피로에 흽싸인 기미히토의 얼굴을 보는 순간 감동을
느꼈다 문제를 해결하든 못하든 간에 미국에서 온 지 며칠도 안
된 기미히토가 보여주고 있는 성실한 태도는 존경할 만했다.
아, 이거 너무 고생이 심하시군요. 이렇게 애쓰시는데 저희들
은 집에서 편안히 잠을 잤다니 도리가 아닙니다.
야스나리 소장은 인사를 하면서 기미히토의 얼굴을 가까이에
서 들여다보고는 흠칫 놀랐다. 다만 피곤할 뿐이라고 생각했던
기미히토가 어떤 알지 못할 기이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소장이 놀라는 것을 본 기미히토는 손으로 얼굴을 한 번 쓰윽
문지르고는 조금 웃어 보이며 말했다
소장님, 제게 좀더 여유를 주십시오.
터미널 다운-고통의 3분 27초
맨해튼에 있는 페닌슬라 파이낸스사의 회계부장 제스만은 아
침에 출근하여 직원들로부터 몇 가지 보고를 받고 그에 따른 간
단한 지시를 내리고는 자신의 컴퓨터를 켰다.
(편지가 일곱 통 와 있습니다. )
제스만은 편지의 제목을 살폈다. 광고나 별 의미 없는 동호회
의 일방적인 선전문이 많아 오는 편지마다 다 읽을 수 없는 노릇
이기 때문에 제스만은 제목만 보고 읽어야 할 편지인지 아닌지
를 분별했다.
치밀하고 판관한 성격의 회계부장은 단 한 번도 이 식별 작업
을 실수한 적이 없었다. 하긴 일방적으로 선전문을 보내는 측에
서는 어딘지 모르게 광고 냄새가 나는 제목을 달기 때문에 그런
것을 무슨 재주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긴 했다.
제스만은 제목을 훌으며 다섯 통의 편지를 넘겼다 여섯 번째
편지의 제목을 보는 제스만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이제 막 인
터넷을 배우기 시작한 시애틀에 사는 손자로부터 온 편지였다.
(할아버지 , 안녕하세요?)
편지를 읽는 제스만의 표정은 내내 행복해 보였다 그는 다음
달의 정기 휴가 때에는 손자나 보러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다음
편지로 눈길을 넘겼다
(터미 널 나운-고통의 3분 27초.)
틀림없는 광고였다. 이런 것은 보통 컴퓨터 주변 기기를 파는
업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문구였다. 제스만은 푄피를 넘겨버리고
회계 정리 프로그램을 불러 익숙한 솜씨로 회사의 상반기 예상
순익을 계산해 나갔다 연방준비위원회의 이자율 배려 때문에
상반기의 순익은 대폭 증가했다.
지구가 멸망하는 그날에야 금융 회사도 망한다는 것이 평소
제스만의 지론이었다. 사람들은 언제나 돈을 필요로 한다 이것
은 돈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고
개를 숙이며 돈을 가져가고는 언제나 충성스럽게 이자를 붙여
되가져온다. 땅 짙고 헤엄치기이다. 돈만 가지고 있으면 시간이
갈수록 이자가 붙는다. 자본주의란 멋진 제도이다
대충의 계산만으로도 순이익이 5천만 달러가 넘는다는 것을
확인한 제스만은 부사장의 비서에게 전화를 해서 손님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기분 좋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좋은 정보는 누
가묻기 전에 먼저 보고한다는 것이 제스만의 원칙이었다
경영자 앞에서 일부러 눈살을 찌푸리고 매우 걱정스러운 표정
으로 이번 분기의 순익은 얼마라고 보고할 때가 제스만에게는
가장 기쁜 순간이었다. 아무리 순익이 많아도 반드시 심각한 표
정으로 말해야 한다. 이것은 제스만이 30년 세월 회계 업무를 보
면서 경영자의 신임을 얻기 위해 터득한 기술이었다
수고했네, 제스만.
돈을 누가 벌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적어도 이때만큼은 자
신의 존재가 가장 부각되는 순간이라고 제스만은 믿었다. 부사
장실이 있는 20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기분 좋은 표정으로 걸어
가던 그는 한 여직원의 날카로운 고함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온라인이 이상해요.
곧이어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스만은 황
급한 걸음으로 직원들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야?"
숫자들이 엉망이에요. 입금액은 10분의 1로,출금액은 열 배
로 자동 확장되고 있어요.
뭐라고, 그게 도대체 무슨 얘기야?~
제스만은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혼란은 모니터상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었다
어? 아니, 안 돼 !
제스만은 급히 스테이션으로 뛰어갔다. 스테이션에서는 이미
기술자들이 자체 점검 프로그램이 자동적으로 작동하는 것을 멀
거니 바라보고만 있을 뿐 손쓸 엄두조차 못 내고 있었다.
왜 그런 거야,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대답을 해봐. 왜 이놈의 기계가 갑자기 미쳐버렸는지, 말을
해야 할 것 아냐.
그러나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제스만은 황급한 손길로 전화
기를 들었다.
부사장님 대줘, 급해 !
통화중입니다.
끊어버려 ! 그 전화 끊고 빨리 연결해.
연방준비위원회와 통화중인 데요.
교환원은 끄떡도 하지 않고 통화의 상대방을 알려주는 것으로
세상의 누구라도 이 전화를 끊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주지시켰
다. 그러나 다음 순간 교한원은 짐승의 울부짖음에 가까운 제스
만의 절규에 얼이 빠져버렸다.
빨리 전화 끊고 바꾸란 말이야, 이 정신나간 계집애야!
교환원의 놀란 신음에 뒤이어 부사장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제스만 부장, 도대체 무슨 일이오?~
온라인이 혼란에 빠졌습니다.
혼란이라니?"
입출금이 몇십 배씩 뒤바뀌고 있습니다.
뒤바뀐다는 것이 무슨 말이오? 진정하고 차분히 설명을 해보
시오. 당황해서는 제대로 일을 해결할 수 없소.
제스만은 무미건조한 부사장이 평소에 이렇게 말하는 것을 수
없이 들었지만 이토록 위급한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로 얘기하는
데에는 질리지 않을 수 없었다
원인 모를 전산 장애가 일어나 전국의 현금자동지급기에서
입금자들이 넣는 돈은 10분의 1로, 출금은 열 배로 나가고 있습
니다.
뭐라고, 도대체 그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요?"
믿을 수 없지만 현재 일어나고 있습니다.
언제부터 그런 혼란이 일어났소?"
약 3분 가량 됐습니다.
이유는? 무슨 이유인지 모른단 말이오?"
확인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일단 터미널을 끄시오.
알겠습니다.
제스만이 전화기를 내던지는 순간 직원 중 하나가 손가락으로
모니터를 가리켰다. 제스만의 가슴은 다시 한 번 덜컹 내려앉았
다. 맙소사! 이번엔 또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거지?그러나 다음
순간 제스만은 가슴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컴퓨터는 기적처럼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정확히 3분 27초 간 장애를 일으켰습니다. 손실금은 즉시 계
산하겠습니다.
즉각 계산해 봐. 가만, 지금 뭐라 그랬지? 뭐라고,3분 27초?~
제스만은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그는
자신의 자리로 뛰어가 컴퓨터를 켰다.
(터미널 다운-고통의 3분 27초.)
제스만 부장, 그러니까 아침에 출근해서 컴퓨터를 켜니까 그
런 제목의 편지가 와 있었다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여러 이사님들이 들을 수 있도록 한번 읽어보시오.
결산서에 우리 몫으로 3백만 달러를 계상하시오. 쓸데없는
짓을 하면 회사는 망할 거요. 다시 연락하겠소.
제스만은 자신이 지어낼 수 있는 가장 심각한 표정으로 편지
를 읽었다.
들으셨다시피 아주 간결한 문구입니다.
제스만 부장, 잠간 자
리를 비켜주겠소?"
회의를 주재하던 부사장은 회계부장이 나가는 것을 기다려 침
통한 표정으로 이사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무겁
게 입을 뗐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일단 FBI에 수사를 의뢰하는 것이 어떨까요?"
안 돼요. 너무 위험해요. FBI가 범인을 잡으면 좋겠지만 못
잡으면 회사는 끝장이오. 그런 위험에 회사를 노출시킬 수 없어
요.
맞습니다. 우리는 지난번 시티은행의 경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티은행은 처음에 상대방의 요구에 대해 코웃음
을 치고 FBI에 신고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어땠습니까?"
한 이사의 지적에 모두 입을 다물었다 입금 요구를 거절한 시
티은행의 온라인망은 붕괴되기 시작했고, 시티은행은 하루를 넘
기지 못하고 범죄자의 요구에 굴복하고 말았다. 그 과정에서
FBI가 해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시티은행은 그 사고로 매우
큰 손실을 입었다. 무엇보다도 큰 손실은 거액의 입 금주들이 시
티은행에 넣어둔 자신의 돈에 불안을 느꼈다는 사실이다.
그 틈을 노려 경쟁 은행들은 예금주들을 부추겼다
'시티은행의 전산망은 범죄자들에게 노출되어 있다. 자칫하면
돈을 분실한 책임조차 떠맡아야 할지 모른다. 가장 보안이 잘돼
있는 자신의 은행으로 오는 것이 최선이다.
이런 말을 듣고도 불안해하지 않을 예금주는 없었다. 많은 거
액 예금주들이 시티은행을 떠났다.
거의 모든 금융 기관들이 이런 종류의 협박을 당하면 해결할
방식이 있습니다.
이사들의 얘기가 갈래가 잡혔다고 생각했는지 사회를 보던 부
사장이 입을 열자 모든 사람의 눈이 부사장에게로 쏠렸다
어떤 방식 입니까?"
부사장은 약간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상대와 협상하여 금액을 科는 것입니다.
대다수의 이사들은 부사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지금 자신들이 처해 있는 상황을 너무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범인들도 그렇게 무도한 편은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아주 치
밀한 자들이죠. 무엇보다도 기업의 회계 원리를 잘 아는 자들입
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죠?~
그들은 결산서에 자신들의 몫을 넣어두라고 했습니다. 이것
은 바로 협상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얘기라고 생각합니다.
잘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이제 곧 결산입니다 그들은 일단 우리에게 3백만 달러를 제
시했지만 우리가 근본적으로 반발하는 상황까지 계산에 넣고 있
습니다. 즉 우리 회사의 상반기 실적이 좋지 않을 경우엔 아무리
협박을 해도 우리가 그들에게 돈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매우 치밀한 자들이 군요. 그러니 결산 결과에 따라 협상을 할
수 있다는 얘기군요.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우리 회사의 상반기 실적이군요. 우리
회사의 상반기 결산은 어떻습니까?"
부사장은 제스만이 가져온 서류를 읽었다.
5천 2백만 달러의 흑자입니다.
저런!
이사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아무 문제 될 것이 없군요, 그렇다면.
부사장의 얼굴에도 자신만만한 표정이 퍼졌다. 협상액이 얼마
가 되든, 혹은 전혀 협상이 안돼 전액을 다 주든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순이익이 5천 2백만 달러나 된다면.
그러면 어떻게 상대와 협상을 하죠?~
엄청난 금액의 순이익에 고무된 이사 한 사람이 성급하게 물
었다. 다른 이사들도 부사장의 얼굴에 눈길을 모았다. 모두 문제
는 없다는 표정이었다. 부사장도 자신만만한 얼굴로 이사들의
얼굴을 들었다 역시 돈은 좋은 것이다. 돈이 많이 벌리니 이런
협박도 두려을 것이 없었다. 비상 이사회에 모인 일동의 관심은
이제 다른 데로 가 있었다.
이사회에서 동의하기만 한다면 협상은 그리 어려울 것이 없
습니다. 범인들은 다시 연락을 해올 것입니다. 그때 순이익 중
상당 부분이 차입금 상환으로 나가야 한다고 사정하고 협상을
벌이면 분명히 통할 것입니다.
그것은 부사장이 알아서 하시오. 우리는 모두 동의하니까.
이사들의 의견은 이미 통일이 되었다는 듯이 자신 있는 목소
리가 한사람의 대 주주로부터 흘러나왔다. 이사회에 참석한 대
다수의 이사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은싸울수 없는싸움이
다. 피해가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천하의 시티은행도 무릎
을 꿇었는데야.
그러나 다음 순간 이사들은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안 돼요. 그럴 수는 없어요.
저항과 타협
반대가 있을 수 없는 상황에서 터져나온 바로 그 반대의 목소
리에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모두 목을 길게 뽑고 반대 의사를 표
명한 쪽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은 더욱 확산되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여자였다 이 자리에 참석한 유일한 여자 부
사장은 황급히 그녀를 소개했다 얼마 전에 사망한 대주주 스튜
어트의 딸이었다.
이런 항복은 있을 수 없어요. 여러분들은 무언가 잘못되었다
는 느낌이 들지 않으세요?"
여자의 표정은 이런 불의에 너무나 쉽게 타협하는 것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이사들은 단순하고 강경했다.
이미 계산을 끝낸 그들은 중간에 나선 이 여자에 대한 공격적인
적 개심으로 가득했다.
대단한 숙녀 분이군요. 상식을 과감하게 깨뜨리고 반대를 하
다니. 부친을 그대로 닮은 스튜어트 양의 용기에 우리는 감탄했
습니다. 그러나 스튜어트 양 우리 한번 잘 생각해 봅시다. 이것
은 전쟁이에요. 상대는 드러나지 않은 강자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노출되어 있고 실력조차 턱없이 부족해요. 이 전쟁에서의
실력이란 바로 컴퓨터 해킹입니다 상대는 이미 우리 전산망의
논리 구조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있어요. 물론 우리는 FBI에
신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티은행의 경우에서 보았
듯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해요. 지는 것이 너무나 명백한 전쟁
입니다. 이런 전쟁은 피해야만 합니다.
평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한 주주가 설득조로 현재의
상황을 짚었다.
그러나 이대로 타협하는 것은 비굴해요. 타협하면 그 범죄자
들이나 우리나 다를 게 없잖아요. 여러분은 그런 생각이 들지 않
으세요?"
스튜어트 양, 젊은 나이에는 그런 생각이 들 수 있겠지요. 그
러나 돈을 보호하려면 모든 것을 참아야 해요. 돈이란 벌 때나
지킬 때나 인내가 필요한 법이오. 돈은 인생의 또다른 진실이오
어쩌면 진리란 말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르지.
스튜어트는 무엇인가 말하려고 입술을 달싹거리다 그냥 입을
꽉 다물어버렸다. 이런 속물과 더불어 돈에 대해 얘기를 나눈다
는 것이 불쾌해서인지 아니면 모두가 뿜어내는 강렬한 분위기
에 눌려서 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자,그러면 회의의 결론을 내립시다 굳이 거수를 할 필요는
없겠지.
스튜어트를 설득하던 주주는 더 이상 지체할 필요가 없다는
듯 부사장에게 눈짓으로 재촉했다 그러자 부사장은 구석 자리
에 앉아 있는 사십대 초반의 한 사나이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아
시아계로 보이는 신사였다. 그는 부사장의 눈길에 조용히 고개
를 가로저었다.
스튜어트가 입을 다물어버린 이 시점에서 회의의 결론은 명백
해졌다. 이사들은 스튜어트 역시 내심으로는 타협을 바라고 있
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선 타협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부사장의 태도는 조심스러웠다.
거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합시다.
먼저 타협에 찬성하는 분들은 손을 들어주십시오.
거의 모든 사람의 손이 올라갔다
반대하는 분들은 손을 들어주십시오.
스튜어트의 오른팔에 눈길을 모으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놀
라움에 가득 찬 웅성거림이 일었다. 또 한 사람의 팔이 천천히
올라가고 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누구
이길래 이사회에 참석할 수 있었는지,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다
는 표정으로 부사장을 쳐다보았다. 그들의 눈초리에는 의아함과
불만이 가득했다.
웬 작자야?"
누군가가 귓속말로 옆 사람에게 속삭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있기도 전에 사나이의 유창한 영어가 사람
들을 침묵시켜 버렸다.
타협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목소리에는 자신감과 단호함이 실려 있었다. 마치 모든 것은
이미 결정되었다는 듯한 투였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다시 시
작되었다
저 친구 누구요?"
글쎄, 모르겠는데. 처음 보는 친구요.
그런데 건방지잖소. 감히 모두의 뜻을 반대하다니,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기나 하나.
가만, 어쩌면 저 사람이 바로 그 사람 아닐까?"
그 사람이 라니?"
쉿, 조용히 해요.
몇 마디 귓속말이 오간후에야 이사들은 새로이 회사의 지배
주주로 등장한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얼마 전 그들
은 한국의 거대 기업군인 대일그룹이 순식간에 몇 사람의 대주
주 지분을 인수한 후 추가로 공개 매수를 하여 새로이 지배 주주
가 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던 것이다.
대주주님의 부탁이 있어 회의가 끝나면 소개드리려고 했는
데, 지금 소개드리겠습니다. 이번에 새로 우리 회사 주식의 51퍼
센트를 인수한 대일그룹의 김정완 이사십니다.
저 사람이 !
이사들은 모두 경악했다.
김정완은 간단한 인사를 끝내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지금까지 우리는 회사에 발생한 문제가 무엇인지 부사장님으
로부터 들었습니다. 물론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간단하게 문제
를 해결하는 방식인지 저도 압니다. 그러나 여러분, 저는 이러한
문제 해결 방식이 우리 회사의 미래에 결정적인 장애가 될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록 경영권을 행사하고 있진 않지만 김정완은 이미 회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단독으로 51퍼센트
를 갖고 있는 막강한 지배 주주이기에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그
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우리 회사는 정의로운 금융을 표방하고 있습니다 정의란 약
간의 편의를 위해 불의와 타협하거나 고개를 숙이지 않습니다.
김정완은 사람들의 표정을 읽으면서 자신 있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게다가 우리는 전세계의 어린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커리지 앤드 호프(C&H) 프로그램의 주요 스폰서 입니다 어린이
들에게 용기를 갖고 부정한 일에 굴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면서 우리 자신이 범죄자들에게 무릎을 꿇을 수
는 없습니다.
김정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남부 억양의 탁한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저흰들 몰라서 그들과 타협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해결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아까와 같은 사고가 한시간만터진다면
현금카드 가진 놈들은 벌떼처럽 달려들어 열 배씩 돈을 인출해
갈 테고,거액 예금주들은 모두 돈을 빼갈 겁니다. 그러면 뭐가
남습니까? 파산 아닙니까, 파산 알량한 정의감의 대가로 우리
회사는 파산하고 맙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가진 것을 모두 잃
고 맙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그러고도 정의를 지키자는
말씀입니까?우리 회사는 FBI가 아닙니다. 아마 FBI라도 이런
때는 타협할 거요.
머뭇거리며 김정완의 얼굴을 살피던 이사들 중 한두 사람이
손바닥을 마주치더니 이윽고 여기저기서 박수가 터져나왔다. 사
람들은 이렇게 많은 이익을 올리는 회사에서 그런 모험을 한다
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눈에는 김정완
이란 동양인이 이상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대다수 중요 주주들은 더욱 세게 손바닥을 마주쳐댔다. 이 세
상 물정 모르는 동양인에게 자신들의 센스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어쩌자고 이런 자가 지배 주주가 되었단 말인가. 사
람들은 자신들의 박수 소리로 이 동양인을 압도할수 있으리라
믿었다. 도대체 방법이 없지 않은가.천하의 시티은행도무릎을
꿇었는데 감히 우리 회사가
그러나 짙은 눈썹에 다부진 눈매의 작은 동양인은 전혀 동요
하지 않았다.
저는 이 회사의 지배 주주로서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결코 범죄자들에게 무릎을 꿇지 않을 것입니다. 그 대가가 어떤
것이든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회사는 돈을 벌기 위해서만 존재
하는 집단이 아닙니다. 불의와 타협하여 얻은 더러운 돈을 세며
즐거워할 수는 없단 말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회사의 파산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겠소?"
넓은 아래턱을 가진 한 이사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
다. 젊은 동양인에 대한 그의 분노는 이미 인내의 한계를 넘어서
고 있었다
본인의 책임 한도 내에서는 응분의 책임을 지겠습니다.
어떻게 책임을 지겠다는 말이오? 그런 모호한 말로는 우리를
설득할 수 없소.
다른 이사들의 표정도 험악하게 변해 있었다. 스튜어트는 이
런 분위기를 견디기 어려운지 아예 눈길을 창 밖의 하늘로 던지
고 있었다.
김정완은 눈을 감았다. 잠시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는 듯하던
그는 이윽고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눈을 번쩍 뜨고 단호
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경 영권을 포기하지요.
사람들은 다시 한 번 경악했다. 도대체 이 사나이는 어떻게 되
어먹은 친구인가. 대일그룹은 어떤 회사기에 이런 친구를 보냈
으며, 이 친구는 어떻게 자기 마음대로 이런 엄청난 결정을 한단
말인가. 대일그룹의 오너라도 된다는 말인가.
그러나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이사들은 보복의 제물을
찾은 것이다. 일이 잘못되면 대일그룹은 엄청난 타격을 입을 것
이고 일은 백 중 구십구 잘못될 것이다. 그리고 이 무례한 인간
의 삶은 진창이 되어버릴 것이다.
좋소. 그러면 우리는 두고보겠소.
토우의 흔적
일주일이 다 돼가도록 기미히토는 임시로 배정받은 동경대학
교의 연구실을 떠나지 않았다. 원래가 프로젝트를 한번 맡으면
끝이 날 때까지는 쉬는 법이 없는 그의 성품을 잘 아는 동료 교
수들도 이번에는 예사롭지 않다고 느끼고 있었다.
더욱 이상한 것은 처음 이틀 동안만 전산실에 들어가 작업을
하더니 그후로는 아무도 부르지 않은 채로 혼자 자신의 임시 연
구실에 들어앉아 있는 것이었다. 하루에 한 번 정도 잠간 전산실
에 들어가 보는 것이 그가 하고 있는 일의 전부였다. 이런 종류
의 일은 많은 지원자들과 더불어 시스템을 검색하는 것이 필수
적인데 기미히토는 무엇을 하는지 모르지만 일주일 동안 혼자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었다.
기미히토의 방에 식사를 배달하러 들어간 식당 종업원들의 얘
기에 따르면, 그는 책상 앞에 앉아 양손으로 턱을 괴고는 한없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밖에 있는사람
들에게는 기미히토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단서를 전혀 찾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로 들렸다. 무언가 단서를 잡았다면 당연히
컴퓨터에 매달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일주일에서 하루가 더 지나고 나서야 기미히토는 자신의 연구
실에서 나와 동양문화연구소의 야스나리 소장을 찾아갔다. 소장
은 전산실에서 무슨 작업인가를 하고 있다가 그를 맞았다. 그동
안 면도는커녕 세수조차 하지 않았는지 기미히토의 얼굴은 꺼칠
했지만 눈빛만은 살아 있었다.
소장은 얼마 전 기미히토의 얼굴에서 발견했던, 마치 넋이 나
간 듯한 기이한 표정을 기억했다 그 표정은 아직도 그의 얼굴에
서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소장은 이러다가 기미히토가 어떻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흠칫 두려움을 느꼈다.
소장은 기미히토를 말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칫 잘못하면
일본 제일의 컴퓨터 천재를 잃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근성으로 유명한 이 사나이는 어쩌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이 문제에 몰두하고 있는지 몰랐다.
그의 얼굴을 살핀 소장은 확실히 이 문제는 기미히토에게 자
신의 존재 이유를 내건 한판 승부라는 것을 깨달았다. 시스템 컨
트롤에 관한 한 기미히토는 틀림없는 세계 제1인자였다 소장은
기미히토가 다시 한 번 전산실의 모든 환경 설비를 바꾸자고 제
안해 올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맨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어할 것이다. 남들이 한 것
에 대한 철저한 불신, 그것은 천재들의 공통된 특징이다 그러나
소장의 예상과는 달리 기미히토는 전혀 다른 질문을 해왔다.
소장님, 지금까지 연구소의 전산실에서 작업하던 자료들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네, 뭐든지 대답을 해드리지요.
석 달 전부터 작업해 오던 (묘제의 연구)라는 자료는 누가 작
업하는 것입니까?~
- 기다려보십시오.
소장은 전화기를 들어 전산실의 직원과 통화를 했다.
아, 그것은 야마자키 연구소와 이치로 교수님이 공동 작업을
하던 것입니다.
그 이치로 교수님이 돌아가신 분입니까?"
알고 계셨군요, 참 안된 일입니다 이치로 교수님은 심야 작
업을 마치고 퇴근하시다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돌아가셨습니
다 경찰 검안 결과는 과로로 인한 실족사로 나왔습니다.
전산실에서 작업을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아까 말씀하신 공동 작업은 무엇을 말합니까?~
야마자키 연구소에서 가지고 온 자료를 토대로 이치로 교수
님이 논문을 작성하는 형식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랬군요
기미히토는 무언가를 이해하겠다는 듯이 무의식적으로 고개
를 끄덕이고 있었지만 얼굴은 여전히 형언하기 어려운 복잡한
표정으로 얽혀 있었다.
소장은 이런 기미히토가 안타깝게 생각되었다 미국에서 잘
지내고 있는 기미히토를 불러온 것이 후회되어 소장은 조심스럽
게 말을 꺼냈다.
기미히토 교수님, 이제 여기 일은 잊으시고 다시 미국으로 돌
아가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소장의 말에 기미히토의 입가에는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하긴 이제 저도 그만둘 때가 된 것 같습니다.
그동안 연구소를 위해 애써주시던 모습은 정말 감동적이었습
니다. 이제 최후의 방법으로 컴퓨터의 기종을 한번 바꿔보려 합
니다.
아니, 소장님.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현재로선 방법이 없기에~
제 얘긴 그게 아니고, 시스템은 이미 정상이 되었다는 말씀입
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
소장은 말을 잇지 못했다. 한참 동안 기미히토의 얼굴을 살피
는 소장의 시선에는 강한 의혹과 더불어 불안의 그림자가스며
있었다. 소장은 기미히토가 이 일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착란 상
태에 빠진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그러나 소장의 시선과 마
주친 기미히토의 눈길에는 자신감이 담겨 있었다
다음 순간 소장은 급히 전화기를 들었다.
시스템 작동을 해보고 결과를 나에게 알려줘.
그날 저녁 전산학부의 모든 교수들은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셨
다 모두 악몽으로부터 헤어난 기분이었다 평소 술을 석 잔 이
상은 절대로 안 마시는 하세가와 교수마저도 얼마나 취했는지
혀 꼬부라진 소리를 해댔다.
기미히토 교수님 , 기미히토님이 우리를 살렸어요. 우리 학
교를 살렸어요 역시 기미히토님은 천재입니다. 이 하세가와
가 백 번 죽었다 다시 살아나도 도저히 못 따라가는 천재란 말입
니다. 자, 우리 모두 이 천재를 위해 건배합시다. 기미히
토 만세.
만세 .
만세 .
만만세.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기미히토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그 역
시 옆에서 권하는 많은 양의 술을 마셨지만 얼굴에는 형언하기
어려운 수많은 갈래의 표정이 담겨 있었다. 아니 마시면 마실수
록 오히려 그의 눈동자는 더욱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무엇인가
매우 강렬한 의문에 부딪힌 것이 분명해 보였다.
이윽고 술판이 파장에 이르자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
난 기미히토는 술 마신 사람답지 않게 신속한 동작으로 거리로
걸어나가 택시를 불렀다. 기미히토가 택시에 올라타려는 순간
뒤에서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탁 쳤다.
이봐, 구세주! 어딜 그렇게 바쁘게 가는 거야?"
오카모토였다.
아, 오카모토. 같이 가지 않으려나?"
어디 좋은 데가 있는 모양이지? 예쁜 아가씨라도 숨겨놓은
집이 있어?"
후후, 이 사람.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어서 타.
어딜 가는지 알아야 동행을 하든지 말든지 할 거 아냐?~
술 마시고 가는 데가 다 뻔하지 뭘 그래. 안 타면 나 혼자 가
서 재미 볼 거야.
그렇게는 안 되지. 이 오카모토를 빼돌려선 좋을 게 없다구.
그러나 택시에 올라탄 오카모토는 기미히토의 목적지를 알고
는 깜짝 놀랐다
동경대학교로 갑시다.
아니, 자네 이 시간에 학교에 가서 뭘 하려는 거야?"
좀 가볼 일이 있어.
어디 , 동양문화연구소에?~
그래 .
다 잠겨 있을 텐데?"
현관문만 열면 돼 .
기미히토의 이 말은 더더욱 이해할수 없었다. 오카모토의 생
각으로는 자정이 다된 이 시각에 잠긴 전산실 건물에 들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기미히토가 하는 대로
따라가 볼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전산실 건물 앞에서 내린 기미히토는 수위를 불러 문을 열게
하고는 1층 중앙 현관 안의 편평한 석대를 살필 뿐이었다. 오카
모토는 보통의 경우 대형 화분이나 장식음 조각품 따위를 올려
놓는 양편의 석대 위에 얼마 전까지 한 쌍의 토우가 있었던 것을
기억해 냈다
이봐, 천재 양반. 아무것도 없는 돌바닥에서 무엇을 찾겠다고
이 시각에 그리 열심이야?"
응, 아무것도 없군.
도대체 뭐가 없다는 거지? 돌바닥 위에는 아무것도 없는 게
당연하지 않나?"
글쎄, 혹시 무슨 흔적이라도 있을까 해서 왔던 거야.
무슨 흔적 말이야?"
자네,여기에 한쌍의 토우가 있던 것 생각나나?"
생각나고말고. 한 석 달 전에 갖다놓은 것인데 이제 보니 없
어졌군. 나는 없어진 것도 모르고 있었어. 지금 자네가 얘길 하
니 알겠구먼.
나는 그 토우들의 흔적이 있나 조사한 거네.
토우들의 흔적이라구? 그런 걸 왜 조사해야 하지? 이 늦은
시각에 .
기미히토는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갑자기 무언가 생각
난 듯 말했다.
참 하나 물어볼 게 있네.
뭔가?"
얼마 전 이 연구소의 전산실에서 사람이 죽은 일이 있지, 이
치로 교수라던 가?~
그래, 맞아. 밤늦게까지 남아 작업을 하고 나오다가 죽었다더
군.
그 사람 어떻게 죽었지?"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굴러 떨어져 죽었대. 경찰이 그렇게 판
정했지. 장시간 작업에 매우 피곤했던 모양이야.
현장에 다른 사람들은 없었나?"
작업을 하던 사람들이 서넛 있었대. 하지만 목격자는 아니
야 .
그랬겠지.
뭐가 그랬겠진가?"
그랬을 거라구.
음, 자네 좀 이상하군. 여기서 사람 죽은 것은 어떻게 알았
나? 누가 미국까지 편지를 보냈을 리도 없는데
뭐 별로 이상한 일은 아니네. 전산실의 업무 일지를 보고 알
았을 뿐이니까.
업무 일지라. 자네는 별걸 다 보는군.
비웃지 말게. 결국은 그 업무 일지가 오늘의 술판을 만들었으
니까.
그게 무슨 소린가?"
그 업무 일지를 보고 시스템 장애를 해결했다는 말이야.
점입가경이군 그래 그 업무 일지가 시스템 가이드북이라도
된단 말인가?"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 었네.
술이 확 깨는군. 우리 어디 조용한 데라도 가서 좀 앉자구. 자
네의 그 이상한 얘기에 나는 홀려버리고 말 것 같네.
자네가 홀리더라도 조금도 이상할 것 없네. 나는 이미 홀려
있으니까.
힘의 정체
두 사람은 말없이 걸어 학교 부근의 작은 카페에 마주앉았다
시원한 음료수를 한잔 마시고 난 오카모토가 이제는 조금도 농
담기가 없는 얼굴로 파고들었다.
얘기해 보게 자네가 바이러스를 찾아낸 게 아니라면 어떻게
그 시스템 장애를 해결했지? 업무 일지와는 또 어떤 관계가 있
는 건가?"
너무 수수께끼 같은 일이라 나도 무척 오래 생각했네.
처음에 나는 완전히 실패했네.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점검을
해봤지만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잖나. 물론 바이러스도 검출되
지 않았구 말이야.나는 절망상태에 빠졌었네.어떻게 해볼 방
도가 없었지.
오카모토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훤히 지켜본 사
실이었다.
기미히토는 마지막 바이러스 검색이 실패로 끝나자 실의에 빠
져 허탈한 표정으로 전산실에 멍하니 앉아 있었고, 일동은 그를
혼자 남겨둔 채 돌아와 버렸던 것이다
그날 밤새 고민하던 나는 한번 거꾸로 생각해 보기 시작했
지.
거꾸로라니?"
매우 간단한 방식이지. 일본 제일의 전문가들이 해결하지 못
했다면 혹시 문제는 없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야.
그러나 분명히 문제는 있었잖나.
그랬지. 그래서 그날 밤 나는 무척 힘이 들었네. 주관을 배제
해야 했거든. 나는 철저히 주관을 배제하고 형식을 좇았네 우선
나는 그 장애가 발생한 것이 약 석 달 전부터 라는 데 주목했지.
결국은 이 석 달 전이라는 형식적 관찰이 나에게 해결의 실마
리를 제공한 거야.
석 달 전이라는 얘기는, 음 그러니까 넉 달이나 다섯 달
전에는 이런 문제가 없었다는 얘기가 아닌가?~
그야 그렇지 .
나는 석 달 전부터 전산실에 생긴 모든 변화를 체크했네 모
든 변화 말일세 아주 사소하거나 외견상 아무런 관계가 없을 것
같은 사실도 놓치지 않고 말이야 철저히 주관을 배제했네.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체크를 하자니 자연스럽게 전산실의 업무 일지
까지 보게 되었어 .
학교란 참 변화가 없는 곳이야. 석 달 전부터 달라진 것은 크
게 세 가지밖에 없더군.
그게 뭔가?"
우선 하나는 그 (묘제의 연구)라는 자료가 전산실에 들어왔
다는 사실이 야.
또 하나는?~
여기에 토우가 놓였다는 것.
마지 막 하나는?"
한 달 전 이치로 교수가 죽었다는 거지.
그 세 가지 사실이 서로 연관이 있다는 얘긴가?~
처음에 나는 그 두 가지 사실이 서로 연관이 있다고
생각했어.
어떤 두 가지 사실 말인가?~
토우와 (묘제의 연구).~
그런데 이제는 달라졌나?"
그렇네.
어떻게?"
교수의 죽음까지도 관계가 있다는 생각이야.
어느 쪽으로 조합해야 하지?"
토우 쪽으로.
그렇다면 그 토우가 이치로 교수를 죽였다는 예긴가?~
바로 그렇네 .
이제 오카모토는 아무렇게나 함부로 말을 하지 못했다. 이 믿
을 수 없는 얘기를 기미히토보다도 오히려 더욱 심각한 표정으
로 듣고 있었다. 이 천재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사실에 주목
함으로써 결국은 아무도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를 깨끗이 처리해
버렸잖은가.
지금 나는 몹시 당황스럽네.
이해하네.
자네 말이 맞다면 어째서 (묘제의 연구)만 방해를 받았을까?
다른 작업들은 멀정하게 진행이 되었잖은가.
그게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점이야. 토우는 (묘제의 연구)에
대해서만 선택적 장애를 일으켰거든.
그런 일이 과연 가능할까?"
가능했어. 그러니까 해결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자네의 해결책이란 그저 그 토우를 치우는 것이었
단 말이지?"
바로 그렇네 .
아, 너무도 혼란스럽군.
그러니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말게, 의심받을 테니까.
오카모토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얘기를 남들에게 해봤자 기미히토의 말대로 정신이상자로 의심
받을 뿐인 것이다
그 토우가 지능이 있다는 얘긴가?"
그럴 리야 없지 .
그렇다면 어떻게 선택적 장애를 일으킨단 말인가?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 우선 토우의 내력을 알아봐야겠어. 또
(묘제의 연구)가 어떤 내용인지도.
그렇겠군.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일개 토우가 어째서 그렇게 신비한
힘을 발휘했는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이해하는 일이야.
나로서는 정말 이해할 수가 없네.
그렇겠지. 나도 이 결과를 받아들이기까지 며칠을 고민했으
니까.
기미히토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오카모토는 갑자기 무슨 생각
이라도 떠올랐는지 정색을 하고 물었다.
자네 혹시 미국에 돌아가지 않으려는 것 아닌가?"
바로 맞췄네. 지금 나는 매우 중대한 문제에 봉착했어. 미국
에 돌아가서 시스템 연구를 계속한다는 것이 이제는 아무런 의
미도 없는 일이 되어버렸단 말이야.
오카모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미히토의 성격상 있을 법한,
아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언제나 현상보다도 그 현
상의 뿌리를 파헤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기미히토가 토우
가 컴퓨터에 영향을 주었다는 기묘한 결론을 가슴에 어정정하게
묻은 채로 순순히 미국으로 돌아갈 리는 없었다
그럼 자네는 무엇을 할 작정인가?"
이 현상의 뿌리를 규명해야만 해. 말도 안 되는 이 현상이 어
째서 일어났는가를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만 해 그러고
나서야 지금까지 해오던 일을 계속할 수 있을 것 같아.
우리는 컴퓨터 천재를 잃는 셈인가?"
현재로선 뭐라 말할 수 없네 다만 지금 뭔가 느낌이 아주 특
별해 왠지 이제껏 내가 접해보지 못했던 이상한 세계와 만날 것
같은 기분이 야.
잠적
제천경찰서 정보과장 이 경감은 동향 감시 대상자 명단을 앞
에 두고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제천에서 태어나 순경에서부터 시작하여 이제 경정 진급을 눈
앞에 두고 있는 그로서는,이 도시에서 약간이라도 문제점이 있
는 사람에 대해서는 직업이나 경력은 물론 조상의 내력까지도
훤히 파악하고 있는 터였다.
그것은 이 도시를 잠시 스쳐간 사람이라도 마찬가지였다. 범
죄와 연관되는 희미한 고리라도 있다면 이 경감의 머릿속에 이
름이든 신체적 특징이든 최소한 한 가지는 각인되어 있게 마련
이었다
제천이라는 고장은 동서남북 어느 방향에서 들어오더라도 반
드시 높다란 고개를 하나는 넘어야 한다. 남쪽에서는 죽령, 동쪽
에서는 영월재, 북쪽에서는 치악재, 서쪽에서는 다릿재와 박달
재 두 고개를 한꺼번에 넘어야 비로소 분지에 자리잡은 이 유서
깊은 도시에 발을 디딜 수 있다. 범죄와 관련 있는 사람이 이 고
개를 넘어오는 것은 바로 이 경감의 머릿속으로 걸어 들어오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경감은 벌써 1분이 넘게 이마를 찡그리고 감
시 대상자 명단에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동향 감시 대상자)
성명 사도광탄
직업 : 무
의뢰 기관 국제형사기구
혐의 :르루케 하이재킹 사건 배후 조종자로 추정
이 경감은 찌푸린 얼굴을 펴지 않은 채로 인터폰을 눌렀다.
박 형사 오라 그래.
곧이어 노크와 함께 들어선 박 형사는 이 경감의 찌푸린 얼굴
과 책상 위의 명단을 보고는 이내 무슨 일인지 알아차렸다. 자신
에게 전담시킨 사도광탄의 동태와 관련하여 불렀을 것이란 생각
이 들자 땅딸막하고 힘 좋아 보이는 박 형사는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선수를 쳤다.
이상한 일입니다. 그 사람 전혀 이상한 동태를 보이지 않습니
다. 제가 찰거머리처럼 감시를 하고 있지만 수상한 기미라고는
여태껏 조금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만나는 사람도 없어?"
이지영이라고 세명대학교 교수가 한 사람 있긴 한데 가끔 낚
시에 동행하는 정도입니다. 그 밖엔 혼자서 죽어라 낚시만 다닐
뿐 누구를 만난다거나 하는 일이 전혀 없습니다.
서울도 올라가지 않아?"
제천에 뼈를 묻을 작정인지 아예 꼼짝도 하지 않고 있습니
다.
낚시 가서 특별히 누구를 만나거나 하지는 않나?"
여기 사람들하고 만나면 잡담이나 나눌까 깊이 있는 대화를
하지 않습니다.
골치 아픈 작자야, 골치 아픈 놈이라구
이 경감은 연신 고개를 흔들어대며 감시 대상자 명단 옆에 있
는 또 한 장의 서류에 시선을 던졌다.
(진단서)
환자명 : 사도광탄
병명 : 과대망상증
치료 기간 미정
이게 도대체 무슨 얘기야. 테러 분자란 얘기야, 아니면 미친
놈이란 얘기야?"
이 경감은 분노를 터뜨렸다. 아마도 자신의 오랜 형사 경력에
도 불구하고 정체가 잘 포착되지 않는 이상한 인물에 대한 긴장
이 이런 식으로 표출되는 모양이었다.
뭐하는 놈인진 모르지만 하여간 희한한 놈입니다.
박 형사가 거들었다. 이 경감은 흰자위가 번득거리는 눈을 치
켜뜨며 박 형사의 이마에 난 흉터를 훌었다.
이해할수 없는 일이야. 이런 놈이 항공기 납치 사건 관련자
로 국제형사기구의 감시 대상이라니.
꼼꼼하다 못해 다소간 신경질적인 이 경감에게 이 사람은 못
내 골칫덩어리였다. 국제형사기구라면 흔히 말하는 인터폴이 아
닌가. 서울 같은 대도시라면 모르겠으되 이 작은 도시 제천에 인
터폴의 감시 대상 인물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인물의 감시가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이라는 사실이 하루도 빠짐없이 이 경감의
신경질을 돋우고 있었다
도대체 그 항공기 납치의 내용이 뭐랍니까?~
박 형사가 작은 키를 책상 앞으로 기울이며 서류에 눈길을 모
았다. 그러나 박 형사도 이 경감의 서류에 국제 항공기 납치 사
건 관련자라는, 자신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밖에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없어 !
간단히 내뱉은 이 경감은 벌떡 일어서며 책상을 걷어찼다. 여
위고 키가 큰 그의 무릎이 발보다 먼저 책상 서랍에 부딪혔다.
인터폴인지 뭔지 새끼들, 감시 대상자면 어디서 무슨 짓을 한
놈인지는 알려줘야 할 거 아냐?"
그러게 말입니다.
박 형사는 재빨리 맞장구를 쳤다
이봐, 자네 오늘부터 아무것도 하지 말고 하루 종일 그놈만
감시해. 당직이니 뭐니 다 빼줄 테니까 당분간은 그놈만 쳐다보
고 살아.
가뜩이나 신경질적인 이 경감은 이제 코앞에 다가온 경정 진
급의 기회를 사도광탄이라는 인물 때문에 날려버릴까 봐 노심초
사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합수머리에는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 오대산 부근에서 시작
되는 주류와 금당계곡을 비롯하여 미탄 등에서 내려오는 지류가
도돈리를 거쳐 판운쯤에서는 본격적으로 강의 모습을 보이기 시
작하는 평창강과, 법흥계곡에서 내려오는 차고 맑은 물이 수주
면에서 깊어지는 주천강이 합쳐진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 합수머
리다.
여기서 합쳐진 평창강과 주천강은 일단 영월로 올라가 동강과
합쳐진 후 영춘을 거쳐 단양으로 가서는 잠시 충주호에서 머물
렀다가 여주를 거쳐 미포나루를 타고 팔당으로 흘러 들어가는
남한강의 상류를 이룬다.
아직은 남한의 수계 중 가장 깨끗하다는 이 강에서는 깨끗한
물에만 서식하는 팔뚝만한 쏘가리가 노냥 잡히고 빠가사리 꺽
지 등 소주맛 나게 하는 놈들이나 간장에 무를 넣고 흐물흐물하
게 조려내면 식욕 되찾는 데는 최고라는 참마자가 많이 잡혀 낚
시꾼의 발길을 이끈다.
이 강에는 비단 이런 맛있는 고기뿐만 아니라 멸종 위기에 있
니 어쩌니 해서 보호 어족으로 지정된 어름치나, 한때 멸종되었
다고까지 알려진 수달도 심심찮게 나타난다. 밤에 푸르스름한
야광을 내쏘며 낚시꾼의 어망을 노리는 수달은 전국에서도 이
지역에만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낚시꾼들뿐만
아니라 동물학자들까지 하릴없이 낚싯대를 펴놓고 소주잔을 기
울이며 어둠 속에서 빛나는 푸르스름한 눈동자를 기다리게 만드
는 곳이다.
물 속까지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주천강을 바람이 쓸고 지나
가자 물결은 살아 움직이는 새떼처럼 한껏 출렁거렸다. 얕은 물
살이 밀려드는 강변에는 부드러운 모래가 歌히는 대로 흩어지며
낚시꾼들의 댓은 발바닥을 자극했다.
몇 사람의 낚시꾼들이 간지러운 햇살을 가득 받으며 찌를 노
려보고 있었다 강변은 흘러가는 물결만큼이나 여유롭고 한가
했다.
선주에게서 전화가 왔었어.
산을 안고 여유롭게 흘러가는 강물에 낚싯대를 던져놓고 있던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이 한참 동안이나 강물 위에 떨어지는 나뭇
잎을 보고 있다가 마침내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나
나머지 한 사람은 전혀 감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은 채 무심한 동
작으로 드리워져 있던 낚싯대를 들어 미끼를 새로 달아서는 능
숙한 동작으로 던졌다.
얼마 전에 국내로 들어왔대.
자네를 꽤 찾은 모양이던데 나하고 같이 있다고 얘기했
어 .~
만나러 오겠다더군.
만나만 보는 것은 괜찮지 않은가?~
사도광탄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고는 톡톡 입질이
오는찌를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날쌔게 챘다. 낚싯줄에 잔뜩 힘
이 실리며 세 칸짜리 낚싯대가 팽팽하게 휘어졌다.
큰놈이야!
사도광탄이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낚싯대가 좌우로 심하게
요동질치더니 텀벙 소리와 함께 은빛 비늘의 고기가 높이 솟구
쳤다. 사도광탄은 낚싯대의 끝을 배에 누르고 두 손으로 낚싯대
를 꽉 잡은 채 천천히 일어섰다
고기는 계속 낚싯대를 좌우로 흔들어대며 물 속에 잠겼다 솟
구쳤다를 반복했으나 사도광탄의 능숙한 동작 앞에서는 헤어나
지 못하고 버둥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서두르지 않고 여유 있는
동작으로 낚싯대를 잡고 있는 사도광탄의 얼굴에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이윽고 힘이 빠져버린 고기를 사도광탄은 서서히 들
어올렸다.
이야, 이놈 엄청나게 큰데. 월척은 충분히 되겠어 .
옆에서 이지영이 감탄사를 연발했다.
근래에 잡은 고기 중 제일 큰놈이군.
우리 학교에 탁본 잘 뜨는 분이 있는데 내가 부탁해서 어탁이
라도 떠놔야겠어 .
그럴 필요 있나.
사도광탄은 비늘 사이에 박힌 낚싯바늘을 빼더니 두 손에 꽉
차는 고기를 들어서는 물 속으로 던져버렸다
이렇게 큰놈은 아쉽잖아, 한 자도 넘는데. 물론 자네가 고기
를 늘 놔주는 건 알고 있지만.
놔주면 언젠가 또 잡는 기쁨을 맛보게 해줄지도 모르지.
사도광탄은 떡밥을 새로 개기 위해 신문지로 싼 떡밥 가루를
통에 풀었다. 여유 있고 한가로운 동작으로 강물을 조금 떠서는
통에 담고 떡밥을 개기 시작하던 사도광탄의 눈길이 무심코 지
나치다가 신문에 선명하게 박힌 사진에 멈추었다.
그는 떡밥 가루가 다 쏟아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 신문을 앞으
로 확 잡아당겼다 이지영은 그의 갑작스런 동작에 의아한 눈초
리로 신문의 사진을 살폈다.
수백 개나 되는 석주가 일부 해체된 중앙청 지하에 빽빽히 박
혀 있는 사진이었다.
어 , 이게 뭔가?"
이지영의 눈길이 사진의 설명을 따라갔다 (중앙청 지하의 석
주)라는 제목의 짤막한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일제 시대 일본인들이 북악의 기를 막고 조선의 국운이 쇠하도록
경복궁의 대문이 있던 자리에 수많은 석주를 박은 사실이 중앙청 철
거로 인해 드러났다. 일제는 서울의 지기가 북악에서 흘러 경복궁 바
로 앞에서 솟아난다는 풍수 사상에 따라 조선에서 인물이 나오는 것
을 막고 민족 정신을 흩뜨리기 위해 여기에 석주를 박고는 중앙청을
지어 은폐했다 이제껏 정부나 사학계에서는 이런 사실을 모르다가
이번에 중앙청의 해체 공사에서 드러났다.
기사를 다 읽고 난 이지영은 사도광탄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깜짝 놀랐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한 그의 눈에서 이제
껏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강렬한 광채가 뿜어져나오는 것이었다.
한참이 지나자사도광탄은 생각이 정리되었는지 눈빛이 정상으
로 돌아왔다. 그리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말했다.
그 녀석, 일부러 잡혀준 것 같아. 마지막 선물로 말야.
마지막 선물이라니, 이제 낚시를 안 할 건가?"
음, 이제 낚시철이 끝나가잖나.
한겨울에는 얼음이라도 깨고 낚시를 할 듯하던 사도광탄이었
다. 그런 그가 낚시철이 끝 나간다고 하는 것은 이지 영에게 뭔가
심상찮은 느낌을 주었다 그러고 보니 사도광탄이 말한 마지막
선물이라는 단어도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이지영은 어쩌면 그
가 이제 이곳을 떠나려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도광탄은 아주 오랫동안이나 소식이 없어 외국으로 이민 갔
거나 죽었나 보다고 잊고 지내던 친구였다. 그런 그가 1년 전 갑
자기 자신을 찾아 내려왔다. 그때 지영은 무척 놀랐었다.
그동안 지영은 늘 사도광탄은 언제고 갑자기 떠날 사람이라고
생각해 오던 터였다. 다만 사도광탄이 왜 중앙청의 석주가 드러
난 기사를 보고 갑자기 떠날 결심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사실 사도광탄에게는 이해하지 못할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
만 중앙청의 석주와 그의 결심 사이의 상관 관계는 더욱 짐작조
차 할 수 없었다
다음날 제천경찰서에서는 경찰청 국제형사과로 긴급 보고를
올렸다.
사도광탄이 잠적했습니다. 목격자들에 의하면 서울행 열차를 탔
다고 합니다.
컴퓨터 천재
이봐요, 미스터 체인저 이 기계 언제 점검했어요?"
그건 왜 묻죠?,
기계가 이상해요.
어떻게 이상하단 말입니까?"
평균 확률이 현저히 떨어지잖아요. 80퍼센트도 안 된단 말이
에요. 며기 세 번째 릴은 무조건 같은 그림을 피해가고 있어요.
이 정도면 조작도 너무 심한 조작 아녜요?"
우리 카지노에는 기계 조작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래요? 그럼 지배인을 좀 불러다 줘요. 내가 무엇이 어떻게
조작되었는지 직접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
잠시 기다리세요.
얼마 후 정장을 깔끔하게 받쳐입은 신사가 눈이 휘둥그레져
탐스런 검정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슬롯머신 앞에 앉아 있는
한 젊은 여자 옆에 섰다. 환전 직원으로부터 기계 조작 운운하는
손님이 찾는다는 말만 들은 그는 당연히 우람한 체구의 말썽꾼
이 돈을 잃고 화풀이 겸 시빗거리를 찾아 씩씩대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보니 매끈한 피부에 윤기가 흐르는 머릿
결을 가진 젊은 여자가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연신 고개를 끄
덕이며 릴을 당기고 있는 여자를 잠시 지켜보던 지배인은 곁에
다가서서 나직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세요? 클라크입니다. 슬롯머신 매니저죠.
수아예요. 근데 이쪽 기계들이 좀 이상한 것 같은데요.
지배인은 다시 한 번 놀랐다. 뒷모습을 보고 미인일 거라고 생
각은 했지만 이렇듯 마주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
아지는 미인일 줄은 몰랐다 동양, 그중에서도 일본이나 한국계
라고 판단한 지배인은 여자의 나이를 스물, 혹은 그보다 한둘 정
도 더 되었겠다고 생각했다. 미모도 미모지만 새까만 눈동자에
넘쳐흐르는 총명함이 적대적 상황에서도 지배인으로 하여금 한
껏 친절하게 대하도록 했다.
하하, 어떻게 이상한 것 같습니까?"
동시 동작 감응 장치를 해둔 것 같아요. 세 번째 릴은 반드시
두 번째 릴을 피하게 되어 있단 말이에요. 내가 1백 달러를 가지
고 해본 결과에 의하면 이 기계는 연방 기준에 형편없이 떨어지
고 있어요.
그럴 리가 있습니까? 때때로 오랫동안 안 터지는 기계가 있
을 수 있죠. 이쪽으로 한번 앉아 보세요. 아마 행운을 기대할 수
있을지 모르지요.
수아가 자리를 옮기자 매니저는 뒤에서 한동안 지켜보다 자리
를 떴다. 1백 달러를 집어넣은 수아가 한창 기분을 올리며 3백
달러를 막 올라서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단하군! 내 추측이 맞다면 학생의 이름은 수아겠지?~
수아는 누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흠칫 놀라 뒤를 돌아다보
았다.
놀랐다면 미안한데, 나는 페닌슬라 파이낸스사의 김정완이라
고 해. 어젯밤 뉴욕에서 왔지.
놀러 오셨어요?"
아니, 수아를 만나려고 스탠퍼드를 거쳐 이리 오는 길이야.
친구들이 알려줬어. 수아가 매주 주말을 리노에서 보낸다고.
그제서야 수아는 긴장을 풀고 다시 릴을 당기기 시작했다
뭐, 쏠쏠한 학비 정도예요. 그런데 제 이름은 어떻게 알았
어요
자세한 것은 우리 앉아서 얘기하면 어떨까?"
무슨 얘긴지 모르겠지만 전 지금 바쁜데
그럼 잠시 기다리실래요? 지금 이 기계가 잘 터지고 있거든요.
그래 그러지 아니 수아가 게임을 끝낼 때까지 나도 옆에서
게임을 하지.
그러세요.
정완은 수아와 같이 3백 달러를 넣고 게임을 시작했으나 돈이
다 내려갈 때까지 한 번도 잭팟을 잡지 못했다. 그러나 옆의 수
아는 쉴새없이 잭팟을 잡아내어 결국 8백 달러를 채웠다.
미안해요. 저 땜에 잃으셨군요.
그래도 재미는 있었어. 근데 바로 옆의 기계인데도 어쩌면 그
렇게 차이가 나지?"
그거야 카지노 측에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요?"
하하하.
호호호.
두 사람이 자리를 옮긴 곳은VIP 라운지였다.
어머! 세상에, 이렇게 호화로운 방이 있다니! 융단의 감촉이
너무나 부드러워요. 구름 위를 걸으면 이런 느낌일까요? 대관절
어떤 사람들이 이런 라운지를 이용하죠?"
글쎄, 잘 모르겠는데. 아마 최고의 고객들이겠지.
그럼 아저씨는요?"
나는 고객은 아니야 하지만 호텔은 나 같은 사람이 오면 기
꺼이 이런 시설을 제공하고 싶어하지 그러면서 언젠가는 도박
을 시작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 하지만 나는 오늘 돌아가야 해.
일이 있거든.
이렇게 늦게요?"
그래 .
그런데도 일부러 절 찾아 여기까지 오셨어요? 스탠퍼드를 거
쳐서?"
그렇단다. 뭘 좀 마시겠니?"
네. 콜라. 아니 맥주 주세요.
정완은 룸바에서 맥주를 꺼내왔다 수아는 상하 층으로 이루어
진 호화로운 라운지가 신기한 듯 연신 고개를 돌려 이것저것 살
피다가 대형 유리창을 통해 바깥을 내다보았다. 리노의 밤풍경
이 그대로 한눈에 들어왔다.
수아, 사실은 부탁이 있어 찾아왔다.
수아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는지 말없이 맥주를 들이키며 정완
을 물끄러미 주시했다. 정완은 침착하고 잔잔한 목소리로 자신
의 회사가 처한 곤경을 설명했다. 정완의 얘기가 진행됨에 따라
수아의 표정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하나 궁금한 게 있어요. 아저씨는 왜 모두가 원하는
타협을 하지 않나요? 제가 볼 때에도 이 일은 타협하는 것 외에
는 별다른 방법이 없을 것 같은데요.
물론 나도 타협을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단다 그러나 이번
에 우리 대일그룹이 페닌슬라 파이낸스사를 인수한 것은 단순히
금융업에 종사하기 위해서가 아니란다 이것은 극비에 속하는
일이지만 너에게는 알려주어야 할 것 같구나. 우리는 내년부터
미국 시장에, 아니 세계 시장에 완벽한 보안성이 있는 칩을 내장
한 중형 스테이션을 판매할 예정이다. 지금 연구가 상당히 진척
돼 있어 이 금융 회사는 사실은 그 제품을 판매하기 위한금융
지원 회사인 셈이지. 즉 구매력이 약한 소비자에게 돈을 빌려주
면서 제품을 사게 하는 거야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해커의 위협
에 굴복해 돈을 지불하게 되면 내년부터 시작될 보안성 스테이
션 판매는 절망적이야. 해커에게 돈을 뜯긴 회사의 제품을 사서
해커에게 대비하자는 건 말이 안 되지 . 그런 면에서는 이번에 아
주 운이 나빴어. 하필이면 악성 해커에게 걸리다니
불특정 다수의 고객과 거래하는 온라인 망을 가지고 있으면
아무래도 해커의 노림 대상이 되기 싶죠. 하지만 이번 위기만 극
복하면 내년부터의 제품 판매는 대성공이겠네요.
바로그거야.그렇기 때문에 이번의 전쟁은 천국이냐지옥이
냐를 가르는 피나는 싸움이지. 모든 것은 이번에 그 해커들로부
터 우리 회사의 전산망을 보호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려 있는 거
야 수아가 이 일을 맡아주면 좋겠어.
제가요?"
수아는 깜짝 놀라 그제껏 입에 대고 있던 맥주잔을 황급히 내
려놓으면서 소리를 질렀다
그래, 수아가 말이야.
정완은 목소리에 힘을 주면서 지그시 수아의 눈 깊은 곳을 들
여다봤다
안돼요,저는 도저히 할수 없어요 이제 곧 학기말 시험이
있거든요.
시험?~
네 .
그 시험을 좀 연기할 수 없을까?"
안 돼요. 시험을 끝내고 나서 친구들과 캐나디언 록키로 캠핑
을 가기로 했거든요.
그 캠핑도 좀 연기할 수 있지 않을까?"
캠핑 후에는 아르바이트를 해야 해요 다음 학기 등록금과 생
활비를 방학 동안에 벌어야 하거든요.
이 일을 맡아주면 내가 졸업할 때까지 등록금과 생활비를 다 대
주고, 또 무엇이 되었든 수아가 원하는 것은 모두 들어 주기로 하
면 말이야. 물론 수아는 얼마가 되든 돈을 요구할 수도 있지.
정완의 이 제안은 실은 얼마가 되든 수아가 원하는 대로 돈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세상에 이런 제안을 거절할 사람은
없는 법이다. 더군다나 방학 동안 뼈빠지게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는 여건에 있는 유학생이라면
안 돼요. 아버지가 허락해 주시지 않을 거예요.
정완은 혀를 끌끌 찼다. 보통의 대학생이라면 신이 나서 달려
들 일을 이 여학생은 턱이 닿지 않는 이유를 들어 거절하고 있는
것이다. 그 나이에 아버지에게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우습게 생각되기도 했지만 미국의 젊은이들에게서는 절대로
들을 수 없는 이 대답에 한편으로는 마음이 푸근해 짐을 느꼈다
아버지와 매사를 의논한다면 이 여학생은 틀림없이 곧고 바르게
자라났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지 수아의 얼굴은 비할
데 없이 해맑아 보였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버지를 찾아뵙고 같이 의논해 보는 것은
어떨까?"
아버지는 한국에 계세요.
가는 것이 어렵다면 5자 동시 통화 방식으로 전화로 의논하
는 것은 어떨까?~
일단 제가 한번 깊이 생각해 보겠어요. 아버지께 의논도 드리
구요. 하지만 아버지는 그런 큰돈 받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실 거
예요.
아버지는 뭐하시는 분이지?"
시골에 계세요. 한가하게 낚시를 하시거나 등산을 다니시죠.
오랫동안 공무원 생활을 하시다가 여러 해 전에 그만두고 낙향
하셨어요.
어디 계시지?~
박달재라고 아세요?"
그럼, 충주에서 제천으로 넘어가는 고개잖아. (울고 넙는 박
달재)라는 노래로 유명하기도 하고.
네, 잘 아시네요. 그 근처에서 과수원을 하세요.
과수원?"
네 사과를 주로 하세요. 한때 양봉도 하셨는데 요즘은 그냥
과수원만 하세요.
잘되시니?"
그저 먹고 살 만하면 된다고 하세요. 제게도 공부는 원하는
만큼 하도록 도와주겠지만, 재산 같은 건 절대 물려줘서도 안 되
고 그럴 수도 없다고 하시죠 동네의 어려운 사람들도 돌보고 계
세요.
훌륭한 분 같은데 .
호호호.
아버지가 자랑스럽 겠군.
저는 아버지를 도저히 따라가지 못해요 아버지는 고집이 대
단하세요. 인간이란 자연과 같이 있는 시간이 많을수록 행복하
대요. 그런데 저는 자연을 접하며 호연지기를 길러야 한다는 아
버지의 가르침을 따르지 못하겠더라구요. 아버지처럼 물질적 유
혹에 강하지도 못하구요. 아버지의 피를 물려 받았는데도 어쩌면
이렇게 다른지 저도 모르겠어요. 제가 장학금을 못 받았으면 유
학은 생각도 못했을 거예요. 스탠퍼드나 예일 같은 유명 대학이
아니면 가지도 말라고 하셔서 고생 좀 했어요.
세대 차이 때문이 겠지 .
그런 생각도 해봤어요. 우리 세대는 자유롭고 편안한 것만 좋
아하지요. 지나치게 재미만 추구하기도 하구요.
지금처럼 좋은 세상에서는 당연하지. 아무도 돌보지 않는 사
이에 조국이 가라앉을 수 있다는 생각도 필요하긴 하지만.
아버지 같으면 당장 아저씨를 도와드릴 거예요. 물론 그 대가
는 바라지도 않으시구요. 아버지는 나라와 민족을 먼저 생각해
야 한다고 늘 말씀하시니까요. 근데 저는 그게 그렇게 쉽게 되지
않아요. 솔직히 왜 남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이해가 안 돼요.
그런 삶은 보통 사람으로선 이해하기 어려운 게 당연하지.
그런데 아버지는 저를 영원한 고민에 빠뜨리셨어요. 이해하
기 싫다고 해서 그렇게 쉽게 끝나버리지가 않는단 말이에요.
그건 무슨 말이지?"
아버지는 사람에게는 단순히 먹고 사는 일 이외에 조국이니
정신이니 하는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늘 말씀하시지요. 예를 들
어 전쟁이 나면 가족도 저버리고 싸우러 나가시겠다고 하셨어
요. 저는 그런 아버지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죠. 하지만 시
간이 지날수록 그런 아버지에게 무언가 미안한 감정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딱히 뭐라 그럴 수는 없지만 내가 너무 이기적인 삶
을 사는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이 들 때도 있단 말이에요 아버
지와 딸이라는 관계를 떠나서 한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말이죠.
그 문제는 내가 뭐라 말할 수 없을 것 같구나 얘기를 듣고 보
니 무턱대고 아버지와 같이 의논하자고 할 수도 없는 문제고. 어
쨌든 수아, 나는 너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해.
참으로 대답하기가 어렵군요. 더군다나 문제를 해결할 수 있
을지도 의문이구요.
하지만 수아, 나는 정말 시간이 없단다.
어쨌든 곧 연락드릴게요.
정완은 수아에게 명함을 주었다.
오늘밤에 여기서 잘 계획이라면 내가 펜트하우스를 얻어주
지. VIP로 등록된 이상 이 호텔 내에서는 무엇을 먹든지, 어떤
서비스를 받든지 모두 무료니까 하고 싶은 대로 뭐든지 해. 하루
더 있고 싶으면 프런트데스크에 전화해서 연장해도 되고.
아녜요, 그러지 않겠어요.
왜? 어차피 잘 거라면 그게 나을 텐데.
부담돼요.
알았어. 그럼 여기서 작별하지. 연락 기다리마.
좋은 연락 못 드릴지도 몰라요.
정완은 뉴욕으로 돌아가는 밤 비행기 안에서 묘한 느낌에 사
로잡혔다. 수아가 얘기하는 아버지라는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
다. 그녀의 아버지는 돈으로 수아의 마음을 충분히 움직일 수 있
을 거라고 너무 쉽게 판단한 자신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비록 수
아가 돈에 혹하는 눈빛을 보이긴 했지만 이내 아버지와 의논하
겠다고 대답한 것은 신선한 느낌을 주었다. 미국의 젊은이들에
게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의자를 뒤로 젖히고 몸을 파묻는 그의 머릿속에는 한국과학기
술원 최 박사의 목소리가 되살아나고 있었다
자네 혹시 연전의 CIA 해킹 사건 생각나나? CIA에서 감시하
는 한국인 명단을 몽땅 빼내버린 사건이었지. 열흘에 걸쳐 작업
을 했으면서도 감쪽같이 은폐하여 온 미국을 발칵 뒤집었던 사
건 말일세. 글쎄, 당시 대학 신입생에 불과하던 한 여학생이 저
지른 사건이라구 내가 아는 바로는 컴퓨터에 관한 한 그녀를 따
라갈 만한 사람이 없네. 지금 스탠퍼드에 다니지, 아마.
기이한 환자
조세형 교수는 병원 문을 열고 들어서며 어딘지 모르게 약간
위축되는 느낌이 들었다. 수납처라든지 약제실 안으로 통해 있
는 진료실과 원장실 등의 간단한 병원 구조는 일반 개인병원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지만 선입견 때문인지 정신병원이라는 곳
에서는 왠지 모를 음산한 기운이 느껴졌다
입원 환자인 듯 환자복을 입은 한 여인이 진료실 밖에 있는 의
자에 앉아 있었다 조 교수는 진찰중인 원장을 기다리기 위해 그
녀 곁에 앉았다. 그녀는 슬리퍼를 곁에 벗어놓은 채 맨발로 바닥
에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조 교수는 여인의 하얗고 보드라운 맨
발이 매우 예쁘다고 생각했다.
이런 여인이 무슨 이상이 있어서 이토록이나 음침한 병원에
입원하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어 조 교수는 슬그머니 고개
를 돌려 그녀의 얼굴에 시선을 맞췄다 예쁜 얼굴이었다. 이런
곳에서 만나는 젊은 여인에 대한 호기심은 조 교수로 하여금 어
떤 종류의 상상을 하게 했고, 그녀의 얼굴과 표정을 자세히 들여
다보게 했다.
아악!
날카로운 비명이 여인의 입에서 터져나왔다. 맨발로 바닥에
글씨를 쓰느라 정신이 없던 그녀는 고개를 들다가 조 교수와 눈
이 마주치자 잔뜩 겁을 먹은 듯 연신 비명을 질러댔다. 조 교수
는 극도로 당황했다. 함부로 말릴 수도, 자리를 비켜버릴 수도
없는 상황에서 조 교수는 간호사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녀가 비명을 지르다 못해 숨넘어갈 지경이 되도록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혹시 여인이 어떻게 되기라도 할까 봐 조바심이 난 조 교수가
당황한 목소리로 몇 번 간호사를 불러대자 그제야 수납실 문을
열고 고개를 빼꼼 내민 간호사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싸늘한
목소리로 그녀를 제지했다
조용히 해 !
별로 크지도 않은 목소리였지만 마치 거짓말처럼 여인은 조용
해졌다
위로 올라가!
이어진 간호사의 목소리에 여인은 온순하기 그지없는 태도로
2층으로 난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그제야 조 교수가 와 있는 것
을 의식한 간호사가 표정을 바꾸며 말했다.
놀라셨죠? 남자만 보면 저래요.
간호사의 안내를 받아 원장실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야 조
교수는 정신병원에서는 소독약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
았다. 환자들이 치료받아야 할 것은 육신이 아니었다.
어서 와 기다리고 있었어 .
오랜만이야.
이제 사십대 후반인 서영인 원장은 걸걸한 목소리로 조 교수
를 맞았다. 초등학교 시절 친구인데다가 대학까지 동창인 두 사
람은 각기 자기 분야에서 명성을 쌓고 있었으나 하는 일이 달라
서인지 자주 만나는 편은 아니었다.
조세형 교수는 큰 키에 비해 지나치게 마른 체격이었지만, 때
이르게 희끗희끗해진 머리로 인해 점잖고 원숙한 인상을 풍겼
다 조 교수는 손을 내밀어 서 원장과 악수를 나누었다.
서 원장은 화장기 없는 얼굴에 긴 머리를 아무렇게나 둥글게
말아올리고 있었지만, 서글서글한 눈매와 붉은 입술은 그녀가
타고난 미인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걸걸한 목소
리와 큼직큼직한 행동거지는 그녀가 여자라는 사실을 상대방이
전혀 느끼지 못하게 했다.
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박사학위까지 따온 서 원장은 귀국과
동시에 국내 유수의 종합병원에서 몇 년 간 신경정신과 과장을
맡다가 비교적 일찍 개원을 한 편이었다.
돈만 된다면 어떤 환자라도 받아들이는 보통의 병원과는 달리
서 원장은 환자를 골라 받았다. 가벼운 환자만 받는 것은 아님에
도 불구하고 서 원장이 맡은 환자들은 거의 완치되는 편이어서
병원은 이내 이름이 알려졌다.
간호사가 내온 차를 마시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동창들의
소식 등 가벼운 이야기가 오갔다. 그러기를 얼마 후 조 교수가
찻잔을 내려놓자 서 원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본론을 꺼냈다.
바쁜 조 교수를 여기까지 오게 한 것은 보여줄 사람이 있어서
야. 너무나 특이한 사람이지.
남자인가?"
그래 .
몇 살이지?"
사십대 초반이야.
그 정도 나이에 정신과 전문의로부터 특이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면 결코 가볍지 않은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사람이란 젊은
나이에는 특이하니 어쩌니 하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나이가
삼십대 중반에만 이르러도 이미 그런 비유는 더 이상 어울리지
않게 되는 법이다.
서 원장 환자인 모양이지?~
그래 .
어디가 아픈가? 정신질환에도 여러 종류가 있잖아?"
그러나 서 원장은 환자의 병명에 대해서는 쉽게 고개를 끄덕
이지 않았다.
설마 천하의 서 영인이가 환자의 병명도 모른다는 건 아니겠
지?~
보통의 환자가 이런 말을 하면 과대망상증 환자라고 볼 수 있
는데, 이 사람의 경우는 꼭 환자라고 얘기하기가 어려운 측면도
있고 해서 말이야.
하하 그렇다면 서 원장은 환자도 아닌 사람을 병원에 잡아놓
고 있다는 말인가?'
아주 특이하다는 측면에선 환자이긴 해. 달리 얘기하면 그
가 환자라고 생각되는 유일한 이유는 너무 특이한 인간이란 것
이지 .~
조 교수는 왜 서 원장이 그런 사람을 자기에게 보여주려고 하
는지 궁금증이 일었다.
그 사람과 내가 무슨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나?"
조 교수는 서 원장이 이런 저런 일로 바쁘기 짝이 없는 자신을
병원으로 불렀을 때 틀림없이 가볍지 않은 이유가 있을 것이라
고 생각했다. 서 원장이 의료계에서 명성을 얻었다면 그 역시 학
계에서 결코 그녀 못지않은 명성을 갖고 있는 바였다. 아직 독신
인 서 원장은 결코 남에게 의존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혹시 결혼
하게 되었나? 조 교수는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에 고개를 저으
며 학교 문을 나섰었다.
한번 만나봐.그리고 그의 얘기에 대한 평가는 조 교수가 직
접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내가 의학박사도 아닌데 서 원장의 환자에 대해 어떤 평가를
할 수 있겠어?"
조 교수 분야의 얘기 같아서 말이야.
내 분야라고?"
꼭 그렇다고 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그와 얘기를 나누면서
조 교수가 떠올랐어 .
조 교수는 왠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정신병의 치료 방법에
대해서 잘 아는 편은 아니었지만 서 원장이 환자의 얘기나 하려
고 자신을 오라고 했다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정신질환자란 원래 이상한 말들을 늘어놓는 사람이고, 의사란
환자의 그 이상한 얘기를 치유하고 정상으로 돌려주는 사람이
아닌가 환자가 어떤 얘기를 한다고 해서 그 얘기에 근거해 그
분야의 전문가를 불렀다는 데 대해, 그리고 그 대상이 자기가 되
었다는 데 대해 조 교수는 의아함과 더불어 불쾌감을 느꼈다.
서 원장은 조 교수의 기분을 알아차렸는지 부드러운 목소리로
환자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이 사람은 우리 병원에 온 이래 내가 아무리 진료를 하려 해
도 여간해서는 입을 열지 않았어. 그런데 며칠 전 갑자기 말문을
열고 네게 정중하게 부탁을 해왔어.
굿을 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더군.
굿을?~
음.
그래서?~
치료에 도움이 되는 굿이라면 할 수도 있다고 대답했지. 그
다음 나는 왜 이 사람이 그런 얘기를 하는지 알고 싶어졌어.그
와 더 얘기를 나눠보고 싶었던 거야.
무슨 소리야, 의사가 환자에게 굿을 해준다니?~
그 사람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굿 얘기를 하진 않았을 거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지. 그 얘기가 나오게 된 동기를 알고 싶어서
굿을 할 수도 있다고 대답한 거야.
물론 환자를 알기 위해 그런 대답을 했다는 것은 이해하네.
그러나 그런 소문이 퍼지면 사람들이 얼마나 서 원장을 비웃겠
나? 아마 의사협회 같은 데서도 서 원장을 질책할 것 같은데.
조 교수는 은근히 서 원장이 이 환자를 단순한 정신질환자 이
상으로 대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치료에 도움이 된다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는 게 내 생각이
야.
시대를 완전히 거꾸로 가는 치료법이군.
조 교수는 비아냥거리면서도 호기심이 생겼다. 의사의 입에서
나온 굿이란 단어와 의사로 하여금 이런 단어를 입에 담게 한 환
자, 그리고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사려 깊은 서 원장이 일부러
자신을 불러 이런 얘기를 하는 상황이 흥미롭지 않을 수 없었다.
서 원장은 조 교수의 반응에 개의치 않고 진지한 표정으로 계
속 얘기를 이어나갔다.
그런데 이 환자가 요구하는 것은 간단한 굿이 아니야. 문화계
와 학계에서 대거 참여하는 굿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고, 그 이유
는 우리 역사 언저리에 떠도는 한 사람의 혼령을 위로하고 편안
히 쉴 수 있도록 해야만 한다는 거야.
역사 언저리에 떠도는 혼령이라고? 그게 누구의 혼령인데?~
조 교수는 그제야 서 원장이 자신을 부른 이유를 알 수 있었
다. 자신의 전공 분야인 역사와 관련된 얘기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너무나 엉뚱한 얘기였다. 역사 언저
리에 떠도는 혼령은 무엇이고 요즘 세상에 굿이라니 또 무슨 엉
뚱한 말인가. 조 교수는 의식적으로 손목시계에 시선을 돌렸다.
서 원장의 장난 같은 얘기를 받아주기에는 시간이 아깝다는 제
스처였다.
그는 태조 이성계의 혼을 위로해야 한다고 하더군.
태조 이성계?"
그래, 태조 이성계의 원혼이 조선왕조 5백 년 내내 왕실을 저
주했다는 거야. 그뿐 아니라 청와대에 머무르는 지금의 대통령
들까지도 그 저주를 받고 있다는 거지.
하하하하.
조 교수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제 서 원
장의 얘기는 뭐라고 대꾸할 수도 없는 유치한 수준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서 원장은 진지하기 짝이 없는 표정이었다.
삼각산에 맴도는 그 원혼을 달래야만 청와대의 주인도 무사
하고 나라의 우환도 가라앉는다는 거야.
그래서 해원굿을 해야 한다는 건가?"
이 환자의 얘기야.
노골적으로 비웃는 조 교수의 표정에 서 원장은 머쓱해져 한
다.
나를 부른 것은 학계가 그 굿에 동참하도록 앞장서 라는 뜻인
가?"
그게 그가 바라는 바일 거야.
서 원장은 조 교수를 부른 것은 자신이 아니고 환자라는 사실
을 분명히 했다 그 사실이 조 교수를 더욱 화나게 했다. 이 친구
가 정신질환자들만 오래 상대하더니 자신도 환자가 된 게 아닌
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봐, 서 원장. 나는 그만 가봐야겠어. 그리고 무슨 이유인지
는 모르지만 환자의 얘기에 너무 빠져 있는 것 같아. 이러다간
서 원장조차 어떻게 될 것 같아 걱정되는군.
글쎄, 그럴지도 모르지. 어떨 때는 환자 입장이 되어 보고 싶
을 때도 있어. 이 환자 같은 사람은 그 머릿속에 한번 들어가 보
고 싶은 생각이 든단 말이야.
말을 마친 서 원장은 일어나려는 조 교수의 팔을
잡아 다시 앉히면서 버튼을 눌러 보조원을 불렀다
최군, 사도광탄 씨를 데려오게.
조 교수는 낭패감이 들었지만 기왕 시간을 내서 여기까지 온
이상 그를 만나지 않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매우 느리게 걸었다. 한쪽 팔은 자연스럽게 내려져 있었
지만 나머지 한쪽 팔은 손바닥을 약간 구부린 채 가슴 아래께에
올려놓고 걸어 들어오는 것이 어딘지 눈에 익은 듯했다.
기억을 더듬던 조 교수의 뇌리에 한 장의 그림이 떠올랐다. 누
구의 그림인지는 언뜻 생각나지 않았지만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이 수많은 학자들과 더불어 걸어나오는 그림이었다.
신경 계통의 환자란 으레 발작을 하거나 얼굴을 찌푸리고 어
딘지 모르게 안정되지 못한 느낌을 주는 것으로 알고 있는 조 교
수에게 이 사람은 너무나 다르게 보였다. 훤칠한 이마와 사회 생
활에 결코 찌들지 않은 것 같은 맑은 얼굴을 보며 조 교수는 아
주 특이한 사람이라고 하던 서 원장의 얘기를 떠올렸다. 이런 얼
굴을 가진 사람이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다니 믿기지 않았다.
자리에 앉은 환자는 서 원장이 조 교수를 서울대학교의 국사
학과 교수라고 소개하자 눈길은 돌리지도 않은 채 고개를 끄덕
이고는 이내 무표정한 얼굴로 눈을 감아버렸다. 조 교수는 평소
이런 경우를 당했다면 크게 화를 냈을 터이지만 왠지 차분해졌
다 정신질환을 앓는 환자라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도 사회에서 늘 대하는 그런 유형의 인간이 아니라는 판단에서
였다
그리고 일단 그의 얼굴을 대하자 서 원장이 결코 사소한 일로
가볍게 자신을 부를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다시금 떠올랐다
함흥차사의 비밀
환자의 얘기를 듣고 자신을 병원까지 부른 것이나 환자를 대
하는 눈길을 보니 서 원장은사도광탄이라는 이름의 이 환자에
게 빠져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이 들자 조 교수의 심중에는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정신질환계의 중진으로 자리잡을 만큼 정
확하고 유능한 서 원장을 이렇게 만들어버린 사도광탄이라는 인
물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하는 호기심이 생겼다. 비록 그들의
얘기는 유치해도 그럴수록 사람에 대한 흥미는 더해졌다.
조 교수는 사도광탄의 얼굴에 시선을 던지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듣기로는 태조 이성계의 혼령을 위한 굿을 해야 한다고 했다
는데 어째서 굿을 해야 한다는 거지요? 이미 제사를 지내고 있
는 터에 .
사도광탄은 천천히 눈을 떴다. 넓고 환한 이마 밑에서 빛나는
두 눈에는 광채가 서려 잔잔한 미소와 더불어 어질고 현명한 인
상을 풍겼다.
조 교수는 약간 부끄러워하는 듯한 그의 미소를 보며 결코 독
선과 아집을 부릴 사람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 게다가 그가
환자라는 생각도 전혀 들지 않았다.
제사는 살아 있는 인간들의 예례일 뿐입니다. 공자는 귀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법이라 했으니 제사를 통해서는 원혼을
달래줄 수 없어요.
그렇다 하더라도 어째서 태조를 달래기 위한 굿을 해야 한단
말인가요?"
태조는 한을 품고 죽었고, 그의 죽음은 왜곡되었지요.
태조의 죽음이 왜곡되었다구요?"
사도광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한 얘기로군.
천수를 누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
요.
어떻게 함부로 그렇게 얘기할 수 있단 말이오?"
조 교수는 사도광탄의 첫마디에서부터 기분이 상했다. 생소한
얘기도 그랬지만 교수인 자기 앞에서 강의하듯 하는 사도광탄의
말투가 여간 기분 나쁘지 않았다.
추궁하는 듯한조 교수의 말투를 대하자사도광탄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조 교수는 자신이 좀 심했나 싶어 서 원장을 쳐다
보며 다소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분명히 나와 있지 않은가요?"
조선 전기사는 조 교수의 전공 분야였다. 사도광탄은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어떤 근거로 그런 얘기를 하는 겁니까?"
바로 실록에 그렇게 나와 있기 때문이지요.
그게 무슨 얘기요?"
조 교수의 물음에 대답 없이 한동안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
던 사도광탄은 다른 물음을 던졌다.
교수님은 함흥차사라는 말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지
요?"
함흥차사?"
조 교수의 시선이 닿는 곳에서 사도광탄은 조용히 고개를 끄
덕이고 있었다. 의외의 질문이었다. 함흥차사라면 어린아이도
다 아는 얘기였다. 조선 건국 직후 태조 이성계가 이방원의 꼴이
보기 싫어 함흥으로 가버렸으며 자신을 찾아오는 이방원의 사신
들을 활을 쏴서 죽이곤 했다는 이야긴데, 거의 정사에 가까운 비
중을 가지고 있는 야담이었다.
사학과 교수인 자신이지만 따로 생각해 보거나 한 적은 없었
기에 사도광탄의 물음은 생소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함흥차사에
대해 따로 특별히 생각할 것이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함흥차사란 이태조가 함흥으로 찾아오는 사신들을 죽였다는
예긴데, 그것이 이태조 자신의 죽음과 무슨 관계가 있소?~
관계가 있어요. 함흥차사는 이태조의 억울한 죽음을 말해 주
는 열쇠거든요.
설명을 해보시오.
조 교수의 목소리는 여전히 냉랭했다
이태조가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는 생각이 들면 해원굿을 도
와주실 건가요?"
뜻밖에도 사도광탄은 여유 있는 미소를 띠며 조 교수를 은근
히 밀어붙였다. 조 교수는 어이가 없었다. 도대체 실록에 엄연히
나와 있는 역사적 사실을 반박하는 일에 자신이 어떻게 동조할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굿을 하자고 학계의 동료들을 설득하다
간 웃음거리가 될 것이 뻔했다 조 교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 문제는 들어보고 나서 생각합시다.
사도광탄은다시 웃었다. 조교수의 생각을 훤히 헤아리는 듯
했다.
먼저 왜 실록을 믿을 수 없는지 생각해 보기로 할까요.
사도광탄은 전문가를 앞에 두고 무슨 강의라도 하는 양 천연
스러웠다
실록을 믿을 수 없다니? 수천 수백 종의 우리 역사책 중에 조
선왕조실록만큼 정확한 것이 또 어디 있겠소?"
그러나 사도광탄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태조 이성계가 죽자 태종은 하륜에게 실록의 편찬과 감독을
맡겼지요?"
그랬소.
하륜이 어떤 인물인지는 잘 아시지요?"
무얼 말하는 거요?"
그는 태종의 심복 중 심복이었어요.
그래서요?"
그는 이방원과 같이 정도전을 죽이고 쿠데타를 주도한 인물
이지요. 그가 태조실록 편찬과 감독의 우두머리였다면 실록은
안봐도 뻔하지 않을까요?비유하자면 전두환이 집권중 장세동
에게 12 12쿠데타를 쓰게 한 꼴이 되겠지요.
으음
사도광탄의 이야기는 실록의 절대적 권위를 믿고 있는 조 교
수에게 날카로운 칼끝이 되어 찌르는 듯했다.
왕조 시대니까 가능했던 일이겠지요. 하긴 현대와 같은 민주
시대에도 광주학살 당시의 발포 책임자를 못 가리니 전제왕권
시대인 당시에는 오죽했을까요.
냉정하게 따지면 그럴 법한 얘기였다 사도광탄의 얘기는 태
종이 하륜으로 하여금 태조실록의 편찬을 감독하도록 했다면 실
록의 진실성은 이미 물 건너갔다는 것이었다.
하륜이 감독한 실록은 완성된 후에도 발표되지 못했지요. 춘
추관의 관리들이 모두 반발했으니 까요. 하긴 춘추관의 사관들은
이방원이 태조실록을 쓰도록 사초를 제출하라 했을 때도 반달하
여 조정에 나오지 않았지요. 이에 격노한 이방원이 분장을 치고
장남을 옥에 잡아가두며 벌금을 물린다고 했을 때에야 마지못해
나왔지요.
으음.
틀림없이 그랬다. 태조실록은 사실 형 식상으로는 부정할 수
없는 하자가 있었다
하륜은 태조실록이 나오자 사초를 거두어 폐기해 버립니다.
이러한 태조실록의 편찬 경위를 볼 때 이방원이 자신의 혈육들
을 죽이고 권력을 찬탈한 부분과 관련해서는 실록은 결코 믿을
수 없어요.
간결하지만 정확한 논리였다. 조선사에 태산처럼 버티고 선
조선왕조실록을 단 몇 마디로 흔들어버리는 이 사람의 정체에
대한 의문이 조 교수의 뇌리에 홍수처럼 밀려들었다. 하지만 조
교수는 그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아무런 경력도
내력도 없는 정신병 환자의 얘기에 고개를 끄덕여줄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말이 논리적으로 파고드는 것은 사실이
아닌가. 머리를 번개같이 돌린 조 교수는 한 사람의 진지한 인물
을 생각해 냈다
실록의 감수에는 변계량 같은 명신도 참여했소. 그는 곧은 인
물로 곡학아세(曲學阿世)할 사람이 아니오.
그랬지요. 하지만 곧은 인물인 그 변계량조차도 당시의 공포
분위기에서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어요. 다만 그는 세종조
에 이르러서야 태종의 비문을 쓰면서 이방원의 난과 관련해서는
실록이 잘못 씌어졌다는 양심의 고백을 하지요. 이것은 세종을
극도로 당황하게 만들었고 명군이라는 세종조차도 그 비문을 없
애고 말았어요.
음,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 실록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 이태조가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는 주장과 관계가 있는 것
은 아니지 않소?"
일단 거기에서 출발하자는 거지요. 그 당시의 정황을 그려내
는 데 믿지 못할 실록에 의지하지 말고 상식과 순리에 따라 판단
하자는 거 지요.
이방원이 쿠데타를 일으키는 데 있어 가장 두려운 상대는 누
구였을까요?"
텔레비전의 사극에서 흥미를 부풀리기 위해 과장한 대로 정
도전이 었을까요?"
조 교수는 잠시 생각한 후에 대답했다
당신은 이 태조라고 생각하는 거요?"
그렇지요. 어려서부터 용맹하기로 이름난 장군 중의 장군인
태조 이성계였지요. 게다가 그는 현장이 아닌가요? 쿠데타를 일
으킨다는 것은 바로 이성계에게 대항하는 일이고 이성계를 제압
해야만 쿠데타는 성공하는 것이 아닌가요?"
그래서요?"
이방원의 쿠데타 군은 바로 궁으로 들어가 이성계의 호위군
을 격파하고 이성계를 수중에 넣었습니다. 이성계는 대로하지만
군사들에게 붙들려서 어쩔 도리가 없었겠지요.도검 앞에 왕명
이 무슨 소용이 있었겠습니까?"
그 다음은?"
조 교수 목소리는 사도광탄의 실수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
처럼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감아들었다
이방원은 자신의 친부인 이태조를 궁궐 깊숙한 곳에 가두었
겠지요. 물론 다른 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도록 엄중한 통제를 했
을 테구...
그것은 당신의 단순한 짐작에 불과하오. 이방원이 그토록 이
태조를 핍박했다는 것은 실록뿐 아니라 어떤 기록에도 없소.
당연하지요. 그 부분의 기록은 있을 수가 없지요. 우선은 아
는 사람이 별로 없고 기록을 해도, 그 기록을 보관해도 모두 죽
을 따름이었으니까요.
조 교수의 뇌리에 하륜이 실록 편찬을 감독했다면 이방원의
만행을 그대로 기록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사도광탄의 처음 얘
기가 퍼뜩 스쳤다.
그런데 선생은 어떻게 그런 단언을 할 수 있지요?"
조 교수의 호칭이 당신에서 선생으로 변했다.
바로 그 함흥차사 때문이지요.
어떤 관계가 있다는 말이오?"
함흥차사란 무엇이지요? 이태조가 자신을 찾아오는 사신들
을 죽인다는 것인데 炎 궁극적인 뜻은 결국 함흥에 가면 죽는다
는 것 아닌가요?모든 신화나 야담의 비의는 이런 식이 아니던
가요? 그런데 과연 누가 죽일까요? 이태조가 죽일까요?"
명궁인 이태조가 활을 쏘아 죽인다는 것 아니오?"
그렇지 않아요. 아들한테 붙잡혀 함흥에 유폐당한 이태조가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활을 쏘아 죽인다구요? 사신이 되었
든 뭐가 되었든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과 친구와 부하들이 줄을
이어 몰려드는데 그들을 죽인단 말입니까? 상식이 아니지요. 사
람이 그리운 이태조가 손을 맞잡고 눈물을 흘리며 반가워해야
할 사람들을 죽일 리가 없단 말이에요.
그 정확한 뜻은 이방원이 보내는 사신만을 죽인다는 것 아니
오?
왕이 자신의 부친이자 태상왕인 이테조에게 보내는 사신이라
면 미관말직의 관리는 아니겠지요. 조정의 원로이거나 적어도
당상관입니다. 그런데 실록에 혹은 어느 역사 기록에 이태조에
게 사신으로 가서 죽었다는 관리들의 이름이 있나요? 단 한사
람도 없어요. 게다가 이 태조에게 보내는 사신 중에는 이성계의
친구이거나 부하이거나 따르던 사람도 많았겠지요. 그들을 모두
죽였을까요? 아니면 이야기를 나눠보고 사신의 목적으로 왔다
고 하면 가는 길에 활을 쏘았을까요? 얼토당토않은 이야기예요.
함흥차사란 말만 있고 실제로 가서 돌아오지 않은 사신은 없는
것입니다.
사도광탄의 논리는 치밀했다. 조 교수는 어느 기록에서도 이
태조에게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사람의 이름을 본 적
이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어째서 함흥차사란 얘기가 생겨난 거요?"
사람들이 함흥에 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이야
기라고 볼수밖에 없어요 즉 이태조를 찾아가려는 사람들에 대
한 경고란 말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흥에 가는 사람은?"
죽어요.
이태조가 아닌 이방원에게?~
바로 그렇지요. 그게 함흥차사에 숨어 있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방원이 태조를 음해하고 조선 5백 년 간, 아니 지
r에 이르기까지 우리들은 그 함흥차사란 말에 의해 속아왔다는
말이오?"
그렇지요. 이방원의 쿠데타 이후 태조는 죽는 순간까지 단 한
번도 마음대로 살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선생의 가설은 지나친 비약이 아니오?"
잘 생각해 보면 지극히 상식적이지요.
조 교수는 이제 흥미 있는 표정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사
도광탄의 주장은 혹세무민의 근거 없는 이야기가 아니라 상당히
치밀하고 논리적이었다.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니 역사를 전공하
는 사람으로서 한 번쯤은 생각해 봤어야 할 부분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확실히 태조실록에는 문제가 있었다 하륜이 이미 손을 댄데
다가 세종 H년에 그 쿠데타 부분을 다시 한 번 고쳤기 때문에 정
확한 사실을 담고 있다고 보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사도광탄의 일면 근거 있는 논리 전개에 조 교수는 반박하기
는커녕 희미하나마 동조하고 싶은 기분마저 들었다.
역사를 전공하지도 않은 이 사람이 5백 년 이상의 세월이 흐
르는 동안 아무도 의심하지 않아온 함흥차사란 야담을 꿰뚫고
이런 정도로 근거 있는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자,
조 교수는 문득 소름이 끼치며 섬뜩한 느낌마저 들었다.
도대체 이 사람은 누구일까?정신병자란 사람이 이토록 치밀
할 수 있을까?
외국의 예술가나문학가중에 정신병자가 많듯이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이 사람도 주위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천
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니까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하던 조선 초기에 이방원은
사람들이 자신의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것을 내놓고 막을 수는
없었다. 엄청난 불효 자식이 되고 민심이 이반하니까. 그러나 사
람들이 이태조를 마구 찾아가도록 해서도 안되었다. 그래서 이
태조가 찾아오는 사람들을 죽인다는 소문을 만들어 퍼뜨렸다.
그게 함흥차사의 비밀이란 얘긴가요?"
조 교수는 사도광탄의 이야기를 정리해 보았다.
지극히 상식적이지요. 그 무렵의 역사에는 또 하나의 수수께
끼가 있어요.
또 하나의 수수께끼?"
그렇지요. 이방원의 쿠데타는 바로 얼마 후 수양대군의 쿠데
타로 맥이 이어지고 이 두 난의 와중에 권력에 빌붙지 않은 의인
지사들이 씨가 마르게 되었어요. 그 나쁜 전통은 수백 년을 두고
이어졌지요. 바로 이것이 지금의 우리 사회에서 눈에 불을 켜고
보아도 지조 있는 인간을 찾아볼 수 없게 된 이유지요.
조선 초의 그 두 난이 조선조 인물들의 성격을 결정지었다는
얘기인가요?"
그렇지요. 그 사이에 한 의인이 있었지만 애석하게도 역사는
그분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말았어요.
또 하나의 수수께끼란 그분을 말하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그분은 누구요?"
양념대군이지요.
양녕대군? 어째서 그분이 수수께끼란 말이오?"
다음에 다시 만날 때 얘기하도록 하지요.
지금 듣고 싶은데 다음에 얘기하겠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이유
라도 있는 거요?"
교수님께서 다소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군요. 왜
냐하면 양념대군도 태종 이방원의 쿠데타와 관계가 있으니까
요.
또 하나의 함흥차사 같은 이야기가 있단 말이오?"
오늘 우리가 나눈 이야기를 뒷받침할 만한 사실이 있어요. 그
얘기는 다음에 하도록 하지요. 지금은 좀 피곤하군요.
말을 마치고는 덤덤히 일어나는 사도광탄에게 조 교수는 손을
내밀었다. 사도광탄은 손을 맞잡는 대신 고개를 숙이고는 들어
왔던 문으로 천천히 걸어나갔다. 머쓱해진 채 내밀었던 손을 거
두며 조 교수는 저 사람의 정체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들
었다
어떠냐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서 원장에게 조 교수는 말없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역사의 수수께끼
사도광탄을 만나고 온 후 조 교수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벌써
희끗희끗해지기 시작한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조 교수는 한 정
신질환자를 만나고 왔을 뿐인데 왜 이렇게 마음이 불편한지 자
문해 보았다.
사도광탄의 해석은 한낱 가상에 불과하다고 비하하면서도 진
실이 어떻든 간에 그의 해석이 원래의 야담보다 훨씬 설득력이
있다는 생각이 조 교수를 혼란에 빠뜨렸다.
어느 비 오는 날 오후, 조 교수는 한 세미나의 참석을 취소하
고 서 원장의 병원을 찾았다. 하루 종일 비가 추적거려서 그런지
병원에 가는 동안 기분이 많이 가라앉았다.
갑자기 웬일이야? 연락이나 하고 오지.
서 원장 환자의 얘기를 들어보려고.
어때? 의미가 있는 얘기던가?"
글쎄, 아직 잘 정리가 되지 않는군. 그런데 그 사람은 무슨 문
제가 있어서 입원하고 있나?"
그걸 참 알 수 없어. 본인이 통 말을 안 하니 종잡기가 어려
워 .
발작을 하거나 하진 않나?~
정반대야. 너무 조용해.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아무 이상 없어 모든 걸 억누르고 있
는 환자 유형 같기도 하고 일반 환자에게서 보이는 증세가
하나도 없어.
혹시 아무 이상이 없는 건 아닐까?"
때로는 그런 생각을 해보기도 해. 본인이 아무 얘기도 안 하
니 길이 있는 진단을 할 수가 없단 말이야.
내가 보기에 서 원장이 그 사람을 대하는 건 일반 환자 대하
는 것 같지는 않던데?"
그렇게 느껴졌어?"
아주 강하게 느꼈지.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야 다만 정신과 의사로서
수많은 환자를 대하다 보면 느껴지는 게 있는데, 그 사람에겐 보
통 사람과는 다른 뭔가가 있어. 범접하기 어려운 분위기 같은 것
이상 유무를 판단하지 못한다면 내보내는 것이 옳지 않을
까?~
그게 옳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에게는 갈 곳이 없을 거라는
느낌이 들어. 만날 사람도 없는 것 같고. 그나마 그와 대화를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 라는 생각이 든단 말이야.
버림받은 사람인가?~
그건 모르지. 버림을 받았거나 그 자신이 버렸을 가능성도 있
겠지. 이상한 것은 그가 스스로 내 병원을 찾아왔다는 거야.
스스로?"
그래, 자신이 중요한 일을 해야 하는데 당분간 병원에 좀 있
어 야겠다더군.
그래서?"
조 교수는 호기심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환자 중에 자신이 스스로 아프다거나 병원에 있어야 한다고
하는 사람을 나는 보지 못했어.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이미 환
자가 아니란 얘기야.
거 절했겠군.
아니 , 입원을 시켰지 .
왜?"
뭔가 다른 유형의 환자 같았어. 연구를 해보고 싶었지 그런
데 시간이 좀 흐르니까 그가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 .
어떤 도움이?"
너무나 외로워 보이더군. 도저히 그냥 내보낼 수 없다는 생각
이 들었어 .
또 무슨 말을 했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그런데도 그런 기분이 들더군. 마치
그가 내게 수많은 말을 하고 있는 듯했어 여전히 철통같이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말이야.
무슨 말을 하는 것 같았는데?"
마치 '내가 의지할 사람은 당신뿐이오' 하고 말하는 것 같았
어 .
입원하고 나서는 말을 하던가?"
3일이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입을 열었어. 간호사들 사이에
서는 그가 벙어리라고 소문이 나 있었다나 봐.
그 다음부터는 말문이 터졌나?~
그런 건 아니고 내가 꼭 필요로 하는 것만 협조를 하지. 여느
때는 마찬가지로 늘 입을 다물고 있고.
뭐하던 사람인가?"
자신의 과거에 대해선 통 얘기를 하지 않아.
치료를 하고 있진 않다는 얘기지?"
현재로선 그렇지 그냥 관찰하고 있을 뿐이야.
지난번에 나와 대화를 나눈 것도 서 원장에겐 치료를 위한 관
찰이었겠군.
그런 셈이지. 보통 때는 통 말이 없으니까.
입원비는 어떻게 하지?"
안 받고 있어.
조 교수는 잠시 무엇을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혹시 그가 무슨 생각이 있어서 일부러 여기에 온 건 아닐까?"
일부러?"
그래 .
도대체 정신병원에 일부러 들어와서 할 일이 뭐가 있는데?'
글쎄, 나도 당장은 잘 떠오르지 않는데 가령 누군가를 피하려
한다든지 , 혹은
혹은?~
음, 혹은 여기서 무엇인가를 기다린다든지
하하, 조 교수의 상상력도 대단하군.
서 원장은 조 교수의 얘기를 웃어 넘기면서도 마음이 썩 편안
하지는 않았다. 조 교수 같은 학자가 이런 얘기를 할 때는 뭔가
느낌이 있기 때문이겠지만 어쩌면 자신도 어렴풋이 그와 비슷한
느낌을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결혼은 안 했나 보지?~
조 교수도 꽤 관심이 가는 모양이지? 결혼은 아마 한 적이 없
을 것 같아.
조 교수는 서 원장의 말을 듣는 동안 사도광탄이 펼치는 비약
적 가설과는 관계없이 그처럼 환하고 밝은 얼굴이 정신병원의
몇 평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무겁게 다가왔다.
사도광탄은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한쪽 팔을 가슴께에 올린 채
로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조 교수를 발견하고는 역시 부끄러움
을 머금은 듯한 알 수 없는 미소를 입가에 떠올리며 가볍게 고개
를 끄덕였다.
몸은 좀 어떻소?~
사도광탄은 슬며시 눈을 감더니 고개를 다시 한 번 끄덕이기
만 했다.
지난번에 양념대군을 두 난 사이의 의인이라고 한 것은 무슨
이유요?'
사도광탄이 눈을 감는 것을 본 조 교수가 그 눈을 다시 뜨게
하려는 듯 바로 질문을 던졌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양념이 왕이 되었더라면 조선의 정기가
그리 흐려지지는 않았을 것을
사도광탄은 진정 아쉬운 듯 이맛살을 찌푸리며 탄식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양녕 대신 충녕이 왕이 된 것은 누구에게
물어도 조선의 복이라 대답할 거요 세종 이상 가는 명군이 한반
도 역사상 그 어느 때 있었다고
양녕도 왕이 되었다면 훌륭한 정치를 했을 겁니다. 하지만 한
사람의 명군보다 중요한 것은 한시대의 정신이지요 양념이 왕
이 되었으면 계유정난은 없었을 테고 무엇보다 조선 선비들의
기개가 꺾이지 않았겠지요. 권력의 눈치를 보며 보신하는 나쁜
전통도 안 생겼을 테구요.
그러나 양녕은 온전한 정신을 가졌다고 보기 어려운 행동을
일삼았소.
그랬지요. 파락호의 광행을 여 보란듯이 저지르곤 했지요. 세
자의 신분으로 말이에요.
그래서 세자의 자리에서 쫓겨났으니 애석 해하기 전에 자업자
득이지요. 스승이 오는 날 개 짖는 흉내를 내고, 술에 취해 무시
로 활을 쏘고, 밤에 궁궐 담을 넘어 민가의 유부녀를 겁탈했으니
도저히 그 자리를 유지할 수 없었던 것 아니오?~
양념이 왜 그런 미친 짓을 했는지 생각해 보셨나요?'
그러니까 선생은 양념대군이 실제 방탕한 인물이 아니라 일
부러 그런 짓을 했다는 거요?'
그렇지요. 그는 지극히 올바른 정신의 소유자로 당당하고 사
려 깊은 인물이었어요. 태종은 일찍부터 그를 세자로 정하곤 어
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왕의 자리를 물려주려 했지요. 양녕이 쓴
경회루의 현판을 보고는 그 필치에 감탄하여 잠을 못 이루고 기
뻐했어요. 양념은 이렇듯 군왕의 자질이 충분한 똑똑한 사람이
었어요. 게다가 그는 14년 간이나 세자로 있었는데 정신이 온전
치 못한 사람이라면 그렇게나 오랜 세월을 세자 자리에 머무를
수 있었을까요?~
그렇다면 양녕대군은 왜 일부러 그런 짓을 했단 말이오?'
그것이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예요. 해답을 찾지 못한 역사학
자들은 후에 세종이 되는 충녕이 자신보다 똑똑하기 때문에 충
녕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그런 광행을 일삼았다고 결론을
내리고는 학교의 도덕 교과서에 미담으로 소개했지요. 하지만
세상에 그런 결론보다 더 우스운 일이 있을까요?'
우스운 일이라니? 충녕이 총명하고 군왕의 자질을 갖추었다
면 충분히 그럴 수 있소.
하하, 태종이 처음 왕위를 양녕에게 물려주려 했을 때는 양념
의 나이 열세 살, 충녕의 나이 겨우 열 살이었습니다. 이제 겨우
열 살에 불과한 양념이 열 살바기 충녕에게 왕위를 물려줘야겠
다는 판단을 한 후 미치광이가 되는 각본을 짰다는 해석이 가당
키나 한가요?'
음 그 해석은 역시 무리가 있군. 동생이 똑똑하다 해도
본인으로서는 왕위를 넘겨주기 싫었겠지. 더군다나 미친 척해
가면서까지 그랬다는 건 해석에 무리가 있군.
그런 해석이 절대적으로 허구라는 건 이방원과 황희 정승의
관계에서도 알 수 있지요.
황희?'
태종은 황희를 믿고 아끼다 못해 하루라도 보지 않으면 잠을
못 잘 지경이었지요. 그런데 양념을 세자에서 꿰하려 할 때 황희
는 결사 반대했고, 태종은 이런 황희를 귀양보낸 후 자신이 죽을
때까지 4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렇게나 애지중지하던 황희를 단
한 번도 만나보려고 하지 않았어요. 결국 황희는 태종이 죽은 세
종 4년이 되어서야 귀양에서 풀려나지요 우리는 여기서 두 가
지 사실을 유추할 수 있지요.
조교수는사도광탄이 이 분야의 연구를 많이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전문가인 자신도 양녕의 폐세자와 관련해서는 태종
과 황희의 관계에 대해 특별히 주목한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도광탄은 마치 먼 옛날 일이라도 기억해 내는 듯한 표정으
로 이맛살을 찌푸려가며 한마디 한마디 조심스럽게 풀어냈다.
하나는 양념은 절대로 성품이 방탕하고 군왕의 자질이 없는
파락호가 아니었단사실이지요.충녕에 비해 인품이 현저히 뒤
떨어졌다면 강직하고 정확하기 짝이 없는 황희가 폐세자를 그렇
게나 필사적으로 반대했을 리가 없어요 오히려 황희가 극력 반
대했다는 데에서 우리는 양녕의 천품이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
지요.
사도광탄이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것 같아도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은 언제나 사실적이고 합리적이었다.
'혹시 이 사람이 정신병원에 있는 것에는 정말로 짐작 못할 어
떤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닐까?'
조 교수는 이런 생각을 했다가 머쓱한 기분이 들어 서 원장을
쳐다봤다. 환자에게 빠져 있다고 비아냥거렸던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조 교수는 다시 쫓기듯이 물었다.
또 하나는?'
태종이 그렇게나 아끼던 황희를 죽는 그 순간까지도 보려 하
지 않았던 것은 그의 증오와 경계가 보통이 아니었단 말이지요.
황희가 미움을 산 것은 오직 폐세자를 반대했다는 사실 하나 때
문인데 태종에게 그것은 너무나 민감하게 파고 들었어요. 그토록
이나 아끼던 황희에게 가한 도에 넘치는 증오를 미루어보면 폐
세자의 문제에는 어떤 비밀이 숨어 있어요.
또 무슨 비밀이 있단 말이오?'
조 교수는 사도광탄의 일방적인 설명에 무척 비위가 상했지만
반박할 기회를 갖기가 어려웠다.
명재상 황희는 총명했던 왕세자가 갑자기 미친 짓을 일삼는
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필사의 노
력으로 결국은 그 이유를 알아내 고야 말았겠지요. 그리하여 세
자의 광행을 이해하고 그를 옹호했지만 결국 폐세자론이 나오자
황희는 태종이 자식들에 게만큼은 절대로 숨기려 했던 비밀을 그
의 목전에서 거론하고 말았겠지요.
자식들에 게만큼은 결코 드러내고 싶지 않은 비밀이라면
권력 찬탈을 위해 자신의 친부인 태조 이성계를 무자비하게
유린한 사실을 지적했겠지요. 그로 말미암은 아버지에 대한 양
념의 분노, 그리고 그렇게 이어진 권좌에 앉을 수 없다는 양녕의
의로움에 대한 칭찬이었을 테지요.
태종의 약점과 양녕의 장점을 대비하는 발언이었다는 건가
요?~
그렇지요. 깊이 묻혀 있던 이성계에 대한 이방원의 만행을 세
자로 있던 양녕은 어느 순간 알아버렸을 거예요. 충절과 효행을
으뜸으로 하는 유학의 세계에서 아버지의 만행을 알아버린 양념
이 한없는 고민에 빠졌을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요. 고민과 방
황이 이어 졌겠지요 자신의 아버지, 자신이 이어받으려는 왕위,
심지어는 자신의 혈통조차 한없이 더럽게 여겨졌고,자신의 존
재는 끝없는 모순이라는 허무에 빠졌겠지요. 권력이 무엇이며
왕은 무엇인가 하는 방황 끝에 결국 그는 그런 왕위를 이어받을
수 없다는 결심을 굳혔겠지요. 그러고는 광행이 시작된 거지요.
결국 그 씨는 이방원의 쿠데타로부터 뿌려졌다는 말이오?'
그렇지요. 그것은 양념의 동생 효녕을 보면 더욱 분명히 드러
나지요.
효녕과는 어떻게 연관이 된다는 거요?'
양념이 광행으로 세자 자리를 버리자 바로 아래 동생인 효녕
은 아예 머리를 깎고 절로 들어가 버렸지요. 조선 초기의 강력한
억불숭유 정책을 스스로 거스르면서 말이에요. 입산행의 본질은
형의 광행과 같아요. 더러운 왕좌를 받기 싫다는 거지요.
그 자신이 서열을 어긴 선위로 인해 골육상쟁을 치렀던 태종
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장자 세습의 전통을 굳히려 했지요. 그러
나 세 사람의 왕자 중 두 명이 광행과 입 산행으로 왕위를 피하자
화가 머리 끝까지 났어요. 그런 상황에서 황희가 태종의 약점을
들추며 양녕을 옹호하자 죽을 때까지 그를 안 본 것이지요.
조 교수는 침묵했다. 몇 대를 잇는 기나긴 한 편의 드라마였
다. 이방원의 쿠데타에서부터 함흥차사의 비의를 거쳐 양념의
광행과 황희에 대한 증오까지를 관통하는 대추리를 과감하게 해
내는 사도광탄을 바라보며 그는 어떻게 정리를 해야 할지 몰랐
다. 그냥 웃어버리고 싶었지만 사도광탄이 조합해 내는 역사적
사실 하나하나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연계성을 가지고 다가왔
다. 역사는 이렇게 숨겨졌던가.
아무도 이태조가 어떻게 죽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함흥차
사에서 양녕의 광행까지를 생각해 보면 태조가 결코 천수를 누
렸다고는 볼 수 없어요. 죽는 그날까지 한과 설움을 쌓아가며 운
명을 저주했을 테지요 조선왕조실록에 태조가 천수를 누렸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그대로 믿겠다는 것은 실로 생각이 없는사람
의 태도입니다 태조에 관한한 실록은 조작으로 일관되어 있어
요 이방원의 쿠데타는 중요한고비마다 태조가 병석에 있었다
는 역사 기술도 조작이에요. 바로 그 실록에 이방원의 쿠데타로
부터 10년 간 태조는 건강하게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지 않던가
요. 쿠데타 후 모든 일은 방원의 뜻대로 이루어졌고, 누구도 버
려진 태조의 원혼을 달래지 않았지요. 조선은 말할 것도 없고 대
한제국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삼각산 아래에서 누구도 끝이
좋지 못했어요.
선생은 태조의 원혼이 조선과 지금의 우리 나라를 저주한다
고 말하는 거요?'
백 년이나 이어져 온 나라를 세운 사람은 그 뜻이 옳든 그르
든 간에 큰 인물이에요.세상의 기를 한몸에 받고 사직을 열었
다면 그 힘이 쉽사리 흩어지지 않아요. 삼각산에는 큰 원혼이 떠
돌고 있어요.
선생의 얘기는 그래서 굿을 해야 한다는 거요?'
사도광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 하필 굿이란 말이오? 꼭 달래야 한다면 다른 방법으로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태조의 원혼은 교회에서 예수에게 기도한다고 달래지지 않
아요. 알라의 사원에 가서 절을,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깊은
산속 절에 가서 목탁을 두드린다고 되는 것도 아니지요. 지난 5
천 년 간 이 땅에는 혼을 부르고 혼을 달래는 방법이 있어 왔어
요. 그것이 바로 굿이지요.
지금 세상에 굿을 지내 혼을 위로한다는 것은 시대를 거꾸로
사는 어리석은 짓이 아니오?'
결코 아니에요. 굿에는 힘이 있어요. 예수에게 하는 기도에
힘이 있다면 굿에도 힘이 있어요.
하지만 굿은 미신이오.
세상에 미신이란 말은 없어요, 없어져야 해요. 미신이란 무엇
인가요? 비과학적인 것이 미신인가요? 그렇다면 기독교도 불교
도 이슬람교도, 아니 세상의 모든 종교는 비과학적이고 따라서
미신이에요. 한반도에는 한반도의 역사와 문화가 있어 왔고 한
반도의 믿음이 있어 왔어요. 거기에는 굿이 있고 제사가 있고 칠
성님이 있고 용왕님이 있어요. 산신령도 있지요. 모두 이 나라
사람에게 통하는 신통력이 있고 영험이 있어요.
하하, 하하하하.
조 교수는 웃었다 웃을 수밖에 없었다. 굿을 강변하는 사도광
탄의 얘기를 듣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제껏 그가 얘기하
던 함흥차사니 양념대군이니 하는 이야기들의 부담도 훨씬 덜해
졌다.
그렇다 결국은 모두 허무맹랑한 이야기인 것이다. 딴에는 신
중한 표정으로 역사적 사실을 들어 치밀하게 추리를 해왔지만
역시 정신질환자의 허구에 불과한 것이다. 세상에 괏이 효력이
있고 칠성님이 있고 용왕님이 있다고? 하하하하, 하하하하.
조 교수는 얼마간 자신을 짓눌러왔던 무거운 분위기를 내던지
고 가벼운 마음으로 정신병원의 문을 나섰다. 그러면 그렇지.
토우의 저주
동경대학교의 행정직원은 컴퓨터의 천재로 알려진 기미히토
교수를 만나는 것만으로도 즐거워했다
제 아들 녀석에게 교수님을 만났다고 얘기하면 왜 사인을 안
받아왔느냐고 성화를 할 것 같아서요.
기미히토는 기꺼이 사인을 해주었다
그런데 어쩐 일로 교수님께서 직접 행정처를 찾아오셨습니
까?'
행정직원은 무슨 일이든지 다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다는 얼
굴로 물었다.
다름이 아니고 동양문화연구소 현관에 놓여 있던 토우에 대
해서 알아보러 왔습니다.
아, 그것 말입니까? 매우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예술품
이죠. 어딘지 모르게 신비하게 느껴져 저도 가끔 그 토우를 보러
연구소 쪽으로 가곤 합니다.
직원은 기미히토가 어떤 목적으로 왔는지 알지도 못하고 너
스레를 떨었다.
그 토우가 어떻게 해서 거기에 놓이게 되었습니까?'
그 토우는 일본에서 제작된 것이 아닙니다.
기미히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에서 온 것이지요.
아, 그렇습니까?'
그 토우는 외무성으로부터 기증받은 것입니다.
외무성으로부터요?'
그렇습니다. 이제껏 외무성 지하 창고에 묻혀 있다가 지난번
외무성 건물의 개수 공사 때 세상에 드러난 것입니다. 외무성에
서 우리 학교에 기증하겠다고 해서 우리는 고마운 마음으로 받
아들였을 뿐입 니다.
그것이 언제 어떤 이유로 일본으로 오게 됐는지는 모르십니
까?'
직원은 웃음띤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까지는 모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참, 그런데 교수님, 아까 연구소 건물에 갔을 때는 그 토우들
이 보이지 않는 것 같던데요?'
아, 소장님이 연락을 하실 겁니다.
예, 알겠습니다.
기미히토는 지난번 오카모토를 통해 소장에게 그 토우를 반
납하도록 부탁했다. 이유를 정확히 밝히지는 않았지만 시스템
문제를 해결한 기미히토의 특별 부탁이라고 하면 들어줄 것 같
았다.
행정처에서 나오는 그 길로 기미히토는 외무성을 찾아갔다.
행정직원에게 부탁하여 미리 외무성에 전화를 해두어서인지 외
무성 직원은 매사에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물품 반입 록에는 그 토우가 1937년에 일본으로 넘어온 것으
로 돼 있군요.
어떤 이유로 넘어 왔는지는 기록이 안 돼 있습니까?'
뭐 특별한 기록은 없습니다. 그 당시에는 쓸 만한 미술품들을
갖고 들어오는 것이 유행이었으니까요.
누가 가지고 왔는지는 알 수 있습니까?'
예, 그건 기록이 돼 있습니다.
직원은 토우를 가지고 온 사람의 인적 사항을 적어주었다.
'한성헌병대 감찰부장 일본 육군 중좌 스기하라.
이 사람의 주소를 알 수는 없습니까?'
여기엔 적혀 있지 않습니다 육군의 직원록을 찾아보시는 게
낫겠습니다.
아, 그러면 되겠군요. 고맙습니다.
기미히토는 바로 의회도서관으로 가서 육군의 직원록을 뒤졌
다. 1937년 당시 한성에서 근무하던 육군 간부의 인적 사항을 알
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스기하라, 시즈오카 현 :
시즈오카 현청과의 통화로 기미히토는 스기하라가 현재 82세
이며 오사카 근교의 덴리 시로 이사 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
었다.
주변의 집이 모두 남향인데 이상하게도 이 집만은 서향이군
요. 그러니 자연히 대지가 툭 삐져나와 퐁네의 균형미를 해치고
있습니다.
주변의 집보다 훨씬 큰, 일본의 한 전통 가옥 앞에서 가마모토
는 이상하다는 듯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미술을 전공했
으나 컴퓨터 조형을 할 때에 기미히토에게 잠시 배운 적이 있는
청년이었다.
기미히토는 마침 가마모토가 이 지방에 살고 있는 것을 기억
하고는 그에게 스기하라와의 연락을 부탁했던 것이다. 다만 그
에게는 이 집 주인이 고미술품 수집에 일가견이 있어 개인적인
일로 만나보려 한다는 정도로 얼버무렸다.
정말 특이한 집이네요 칠도 다른 집들과는 달리 검은색으로
했어요. 가만히 뜯어보면 이상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요.
그러다가 가마모토는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다 자신이 느끼
는 대로 이야기를 하면 기미히토가 어떻게 생각할지 조심스러운
모양이었다 왜냐하면 기미히토가 좀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눈
살을 잔뜩 찌푸리고 집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마모토는 약간 계면쩍은 표정으로 눈치를 살피다가 이윽고
기미히토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대문의 초인종을 눌렀다.
동경대학교의 기미히토 교수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선생님과
는 전화 연락이 되어 있습니다.
미리 연락이 되어 있어선지 안에서는 바로 문을 열어주었다.
응접실로 안내된 두 사람은 녹차를 한잔 마시고 댁에 걸린 장
식품을 구경했다. 호화롭지는 않았지만 이국적인 느낌을 풍기는
조형물과 도자기들이 은은한 자태를 내비치고 있었다.
우리 나라의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가마모토가 이상한 느낌을 풍기는 큰 진흙 인형 하나와 골동
품 몇 점을 살피다가 낮은 목소리로 기미히토에게 감상을 말해
왔다.
교수님 생각대로 대단한 수집가군요.
그런 것 같군.
기미히토가 건성으로 대답을 하는 중에 문이 열리면서 하얗게
머리가 센 노인이 젊은 여인의 부축을 받으면서 들어왔다. 노인
은 비록 등이 굽고 쇠약해 보였으나 눈빛만은 강렬해 젊었을 때
는 보통이 아니었을 거라는 인상을 풍겼다
가마모토는 급히 일어나 노인에게 먼저 고개를 깊이 숙이고는
기미히토를 소개했다.
동경대학교의 기미히토 교수님입니다. 선생님을 뵈러 오셨습
니다.
기미히토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처음 뵙습니다. 기미히토입니다.
스기하라요. 앉으시오.
실 례하겠습니 다.
이때 기미히토의 얼굴을 흘끗 쳐다본 가마모토는 사전에 얘기
라도 있었던 양 슬쩍 자리를 비켰다
저는 정원 구경을 좀 해도 되겠습니까?'
노인을 부축하고 왔던 젊은 여인이 노인의 고갯짓을 보고는
가마모토를 안내하여 응접실 밖으로 나갔다
무슨 일로 여기까지 나를 찾아오셨소?'
기미히토를 응시하는 노인의 눈길에는 나이답지 않게 힘이 들
어 있었다. 기미히토는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몰라잠시
망설이다가 단도직입적으로 얘기를 꺼내기로 했다. 노인을 보니
쓸데없이 얘기를 돌리거나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은 한 쌍의 토우 때문에 선생님을 찾아뵈었습니다.
토우라구요?'
그렇습니다.
토우라는 건 흙인형이 아니오?'
그렇습니다.
어떤 토우를 말씀하시는 거요?'
혹시 한국에서 한 쌍의 토우를 일본으로 가져온 사실을 기억
하십니까?'
노인은 아무런 대답 없이 기미히토를 날카로운 눈길로 쏘아보
았다. 무서운 눈길이었다. 주변의 모든 것을 얼어붙게 할 정도의
이토록 강한 안력이 어디서 쏟아져 나오는지는 알 수 없지만 도
저히 팔십 노인의 것으로는 여겨지지 않는 예리한 눈길이었다
기미히토는 바싹 긴장되었다.
자신은 단순히 이 노인에게 토우를 일본으로 가지고 오게 된
경위를 물으려고 했을 뿐인데, 노인의 이런 무시무시한 반응을
대하자 놀라을 뿐이었다. 영문을 몰라하는 기미히토의 눈동자를
한참 노려보던 스기하라는 눈길을 거두지 않은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은 누구요?'
기미히토입니다 동경대학교의 전산학부 교수입니다
정체가 무엇이냔 말이오?~
정체라니요? 그냥 교수일 뿐입니다.
솔직히 말하시오. 내 입에서 한마디라도 듣고 싶다면.
기미히토는 노인의 말투에서 그도 역시 자신으로부터 무엇인
가를 듣고 싶어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토우에 대한 노인의
관심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강렬하다는 것을 깨달은 기미히토는
연구소에서 있었던 컴퓨터와 토우에 관한 자초지종을 있는 그대
로 얘기했다.
기미히토의 얘기를 듣는 노인의 안색이 놀라울 정도로 창백해
졌다.
최근에 그랬다구요, 그 토우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노인은 얼어붙은 표정으로 한참이나 기미히토의 얼굴을 응시
하더니 겁에 질린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렇다면 토우가 교수를 죽였소.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어떻게 토우가 사람을 죽일 수 있다
는 말입니까? 선생님께서는 뭔가 짐작 가는 일이 있으십니까?'
노인은 매우 경직된 표정으로 힘들게 말문을 열었다.
기미히토 교수는 직접 그 현상을 목격했으니까 의문을 갖지
않겠지만, 사실 그 토우는 정말로 불길한 요물이오.
네?그럼 선생님께서도 그 토우의 신비한 힘을 경험하신 일
이 있습니까'?~
이를 말이오. 그 토우의 저주는 생각하기도 싫소. 나는 그 토
우를 일본으로 가지고 온 것을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르오.
토우를 직접 파헤치셨나요?'
노인은 옛날 일을 기억해 내려는 듯 한동안 눈을 감았다 .
그러나다음순간노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투탄카멘의 발굴에 대해 알고 있소?'
네? 투탄카멘이라구요?'
그렇소. 룩소르의 투탄카멘 말이오.
기미히토는 알고는 있었지만 노인의 얘기를 듣기 위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조선에서 그 토우를 파내기 얼마 전쯤의 일이었지. 영국의 하
워드 카터라는 발굴가가 테베의 골짜기에서 투탄카멘의 피라미
드를 찾아냈소.그 피라미드의 입구에서 카터는 상형 문자로 된
점토판을 발견했는데, 거기에는 '죽음은 그 날개로 파라오의 평
안을 교란시키는 자를 모두 찾아가리라' 라고 씌어 있었지 . 물론
카터는 그 경고를 무시했고, 세계적인 엄청난 발굴이 행해졌소
그 유명한 투탄카멘의 황금 미라가 나오고 휘황찬란한 보물들이
모두의 눈을 어지럽게 했소.
노인은 잠시 말을 멈추고 기미히토를 살폈다. 기미히토는 노
인의 얘기에 열중해 있엇다.
하지만 그 이후 죽음이 꼬리를 물었소 맨 먼저 그 발굴을 기
획하고 자금을 댔던 커너번이 카이로에서 이유 없이 죽었소. 이
상한 것은 그가 가장 아끼던 그의 애완용 폭스테리어도 그날 밤
같은 시간에 런던에서 마구 짖어대다가 즉사해 버렸다는 사실이
오. 다음으로는 커너번의 사망 직후 미라의 방에 들어갔던 미국
의 고고학자 아서 메이스가몸이 이상하다고 호소하더니 곧 혼
수 상태에 빠져 죽고 말았소. 그것도 같은 컨티넨털호텔에서. 그
며칠 후 커너번과 거래 관계가 있던 금융업자의 아들인 굴드가
커너번의 사망 소식을 듣고 카이로로 왔소. 카터는 그를 무덤으
로 안내했고 다음날 굴드도 죽었소. 그뿐이 아니오. 그 미라의
시체를 검사한 두 의사 데리 교수와 닥터 루카스도 죽었고, 미라
의 시체를 班선 촬영한 사진기사 더 글라스도 영국으로 돌아가자
마자 사망했소. 커너번의 부인은 벌레에 물려 죽고, 카터의 비서
역시 침대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소. 무덤의 발굴에 관여했다가
이런 식으로 죽은 사람들이 모두 스물두 명에 이르렀소. 세상은
온통 파라오의 저주라고 떠들어댔지.
이야기를 계속하는 노인의 얼굴에는 불안의 그림자가 짙게 배
어 있었다.
그런데 그 믿을 수 없는 얘기가 현실이 되어 나타난 것이오.
바로 여기 혼슈에서
네?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그 토우를 가지고 귀국한 우리 여섯 명 중 다섯이 이유 없이
죽었소. 모두 23일 간격으로. 아무도 사인을 밝혀내지 못했소.
심장마비를 일으키거나 아니면 2층에서 떨어져 죽거나, 하여간
모두 괴이하게 죽었소.
그러면 스기하라 선생님께서는 그중 유일하게 생존해 계신
분이군요.
그렇소. 그후 나는 동경을 벗어나 여기 덴리 시로 내려와 조
용히 살았소. 거의 집안에만 있으면서 참으로 조심하고 살았소.
선생님은 그 토우에 관련된 여섯 사람 중 유일한 생존자란 말
씀인데,그렇다면 동경에 있는 토우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이 생명을 유지하게 된 이유라고 생각하십니까?'
정확히는 알 수 없소. 하지만 나는 무라야마 슈에이의 도움으
로 간신히 살았다고 생각하오.
무라야마 슈에이라구요? 그는 어떤 분입니까?'
일본 제일의 풍수사요. 조선의 풍수, 무속, 귀신도 그가 집대
성했소. 당시 우리 헌병대와 총독부에서는 그의 권고에 따라 조
선 방방곡곡의 혈을 막았소. 물길을 막거나 비틀기도 하고 구릉
을 잘라내 기도 했지 그가 집필한 조선의 풍수라는 책은 지금
도 풍수의 고전으로 당당히 버티고 있소.
밖에서 보니 이 집의 구조가 매우 특이하던데요?~
역시 무라야마 선생의 권고를 받아들여 괴이한 힘이 들어오
기 어렵게 지었소. 덴리 시로 이사 온 것도 우리 종교의 힘을 빌
려 그 요사스런 토우를 물리치기 위해서였소.
무라야마 선생은 왜 그 토우를 근본적으로 없애버리지 않았
습니까?~
그는 토우에 대해서만은 매우 조심스러웠소. 함부로 다루려
하지 않았단 얘기요.토우 발굴에 관여했던 동료들이 죽어가자
나는 급히 그에게 연락을 했소. 일본으로 돌아온 그는 내 얘기를
듣고 한참 동안 뭔가를 생각하더니 누군가를 만나러 갔소. 그리
고 돌아와서는 토우를 없애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으니 마음대
로 처리하라고 했소.
그분이 누구를 만나러 갔을까요?'
알 수 없소. 무라야마는 일본 제일의 풍수사였지만 토우에 대
해서만은 그 사람과 의논하는 것 같았소. 얼핏 듣기에 호사이라
고 하던 것 같기도 하고 나는 그쪽 사람들을 잘 모르지만
동료들이 죽어갈 때 나를 살린 것이 그 사람이었는지도 모르지.
그런데 토우를 없애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
은 무슨 뜻입니까?'
나도 당시로서는 무슨 말인지 짐작할 수 없었소.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 토우는 어째서 외무성 창고 안에 있게 되었습니까?~
우리 중의 몇 사람이 죽자 가나가와라는 친구가 그 토우를 요
코하마의 바다에 버리려고 들고 갔지. 그러나 가던 중에 자동차
안에서 쓰러져버렸소. 사정을 모르는 운전사가 그 토우를 다시
동경으로 실어오게 되었고, 가나가와는 그날 밤 죽었소. 그래서
나는 그 토우를 한국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
소 하지만 결코 아는 사람에게 부탁할 수는 없었소. 어떤 변괴
를 당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오. 그래서 나는 그것을 외무성으
로 보내버렸소. 당시 외무성에서는 조선에 관리를 많이 파견하
고 있었기 때문이오. 그런데 어떤 이유에 선지 외무성에서는 그
것을 조선으로 보내지 않고 지하 창고에 넣어두었소. 나는 그후
로 그 토우에 대해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고 살아왔소. 토우가
저주를 한다면 내게 가장 먼저 하지 않겠소?'
토우가 다시 출현했다는 사실에 스기하라는 진정 겁을 먹고
있었다 투탄카멘의 경우와 빗대어 생각하는 것만 보아도 그의
공포가 어느 정도인지 충분히 짐작이 되었다.
이제 지나치게 놀라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 토우는
이미 동경대학교에서 약 3개월 간 만인에게 공개되었습니다.
그러나 노인은 기미히토의 위안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는
듯 잔뜩 겁에 질린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미히토가 1분
1초라도 빨리 나가주기를 바라는 듯했다.
기미히토는 노인에게 인사를 남기고 밖으로 나왔다. 정원에서
연못을 구경하고 있던 가마모토는 무료했던지 얼른 다가와 기미
히토를 뒤따라 나온 여인에게 인사를 하고는 곧장 대문으로 향
했다 그는 이제 기미히토와 저녁을 먹기만 하면 된다는 사실이
즐거운 모양이 었다.
동경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기미히토는 공공이 생각에 잠겼
다. 스기하라의 말로 미루어보면 무라야마 슈에이라는 사랑은
토우의 정체에 대해 누구보다 깊이 알고 있었다. 그를 만나보면
토우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현재까지 살
아 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는 도대체 무슨 이유로 토우를 없애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다고 얘기 했을까?
야마자키 연구소
기미히토의 설명을 들은 오카모토는 연신 고개를 좌우로 흔들
었다.
자네는 정말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군. 실제로 일어난 일이니
믿지 않을 도린 없지만 나는 정말로 믿기가 힘드네. 과학을 버릴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결론을 내리기까지는 아직도 조사해야 할 것이 많네. 결론은
그후에 내리자구.
기미히토 역시 조심스러을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컴퓨터가 유독 야마자키 연구소에서 가져온 (묘제의
연구)에 대해서만 선택적 장애를 일으켰는지 를 우선 규명해야
하네. 그러자면 야마자키 연구소에서 가지고 온 그 자료를 살펴
봐야겠어.
두 사람은 동양문화연구소의 전산실로 갔다 기미히토는 단말
기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렸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없어졌잖아.
뭐가?'
없어졌어 . 그 (묘제의 연구) 말이야.
어떻게 된 일이지?'
기미히토는 직원을 불렀다.
아, 그 자료는 야마자키 연구소에서 와서 가져갔습니다.
아니, 바로 며칠 전에도 있었는데 언제 가져갔단 말이오?'
어제 가져갔습니다.
복사해 둔 것도 없어요?'
아시다시피 남의 자료는 허가 없이 복사할 수 없습니다 형사
문제가 발생하거든요.
이상하군 이제껏 놔뒀던 것을 왜 하필 어제 가져갔을까?'
야마자키 연구소에서는 이치로 교수님이 돌아가신 줄 모르고
있었답니다. 이치로 교수님이 자료를 다 쓰고 나면 돌려주기로
하셨는데 연락이 없기에 그저 연구가오래 걸리나 보다고 생각
했다는군요.
납득이 가기도 하고 안 가기도 하는 일이었다. 기미히토는 뭔
가 집히는 게 있는지 급히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러나 이내 고개
를 가로저으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없군, 없어 아무것도 없어.
뭐가 없단 말이지?'
이치로 교수가 연구한 흔적. 그 자료를 가지고 뭐라도 했다면
흔적이 있을 텐데 아무것도 없어 이상한 일이야 이렇게 완벽하
게 모든 자료를 가져갈 수 있을까?~
염려 마,야마자키 연구소측에 접촉하면 돼.마침 거기에는
도시아키가 있네.
그래?'
기미히토의 표정이 밝아졌다. 도시아키라면 오카모토와 함께
학부 시절부터 가까운 동료였다
자네가 미국 가고 나서 얼마 안 있다가 도시아키가 그 연구소
의 수석 연구원으로 갔어.
잘됐군.
기미히토는 도시아키와 마음 편하게 대화를 나누기 위해 저녁
시간에 만나 술 한잔을 하기로 약속했다.
프린스호텔 로비라운지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 시간보다 약간
일찍 도착한 기미히토는 입구에서 잘 보이는 자리에 목을 뒤로
젖히고 앉았다.
벌써 옆에 대기하고 선 웨이터에게 에스프레소 한잔을주문하
고 양손을 깍지껴 머리 뒤에 대었다. 그리고 천장의 벽화를 천천
히 감상하였다.
기미히토는 미국을 떠나서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하나
하나 곱씹어보았다. 이것은 기미히토의 오래된 습관이었다. 한
창 일에 열중해 있을 때는 자신의 오류를 지나치기 쉽다 그러나
기미히토는 가끔 이런 국외자의 시각으로 자신의 일을 점검함으
로써 뜻밖의 소득을 얻곤 했다.
이번에 컴퓨터에 대한토우의 영향을 밝혀낸 것도 이 버릇 덕
분이었다. 어느 누가 토우가 원인이라는 것을 생각이나 했을까.
그의 뇌리에 토우가 죽인 것으로 추정되는 이치로 교수가 떠올
랐다.
'토우는 어째서 그 사람만 죽였을까?'
원래 놓였던 자리에서 치워버리기까지 한 자신에게는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 토우가 이치로 교수를 죽였다면 어떤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여어, 이 사람.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고 있나?~
도시아키였다 그의 모습은 몇 년 전 보았을 때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아, 도시아키. 조금도 변한 데가 없어 보이는군.
자네야말로. 그런데 오카모토에게 들으니 학교 전산실의 문
제를 깔끔히 해결했다고 하더군 역시 천재에게 그런 건 식은죽
먹기였겠지.
어르지 말게 정말 혼났네. 우연히 해결했을 뿐이야.
우연이란 천재에게만 일어나지 자, 자리를 옮길까?~
두 사람이 찾아간 곳은 일본 정식으로 유명한 긴자의 어느 조
용한 음식점이었다. 미리 예약해 두었으므로 두 사람은 한갓진
별채로 안내되었다. 술이 몇 순배 돌고 그간의 신변 잡사에 대한
얘기가 거의 꼬리를 접을 무련 기미히토는 은근하고 나직한 목
소리로 말했다
이봐, 도시아키 !
왜?'
우리 학교로 보낸 자네 연구소의 그 자료 말이야, (묘제의 연
구)던가? 그것 며칠 간만 보여줄 수 있겠나?'
그러나 다음 순간 기미히토는 깜짝 놀랐다
미안하네, 그건 보여줄 수 없네.
기미히토는 도시아키가 이렇게 단호하게 거절할 줄은 생각도
못했다 도시아키가 어떤 친군가. 학부 시절부터 오카모토와 같
이 셋이서 얼마나 어울려 다녔던가. 오죽 찰떡같이 어울려 다녔
으면 부인들끼리도 동창처럼 되어버린 사이가 아닌가. 미국에
있는 동안 연락을 못 취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쉽게 멀어질 정
도의 관계는 절대로 아니었다.
기미히토는 (묘제의 연구)라는 자료에 대해 더욱 불 같은 호
기심이 일었다
'도시아키가 이렇게까지 딱 잘라 거절하는 그 자료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 정도라면 누구에게 물어서 될 일이 아니었다. 스스로 알아
내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기미히토는 순간적으로 기지를
발휘했다.
괜찮네. 나는 이치로 교수가 작업하는 도중 간간이 써놓은 비
망록을 보고 그 자료와 관련하여 그가 상당한 고뇌를 했다는 것
을 알게 됐네. 물론 무슨 일인가도 대략 알고 있네. 다만 나는 자
네가 그런 일에 너무 깊이 관여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충
고를 해주려고 만나자고 했던 것일세 이제 우리 술이나 마시
지 .
말을 마친 기미히토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일부러 큰 동
작으로 술병을 들어 도시아키의 잔에 가득 부었다. 그러면서 슬
쩍 올려다본 도시아키의 얼굴에는 분명 효과가 나타나고 있었
다. 안색이 확 달라져 있었던 것이다.
이치로 교수가 양심의 고백을 남겼다고?'
그래, 메모로 보아서는 다소간 작업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있
던데.
도대체 어디에 그런 메모를 남겨놓았나?'
걱정 말게,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해. 내가 전산 장애를 해결
하느라 전산실의 컴퓨터란 컴퓨터는 모조리 헤집었잖아. 록이
걸려 있는 파일도 모두 샅샅이 뒤졌고. 이치로 교수는 스테이션
의 한 공간에 비밀 파일을 만들어놓고 그런 메모를 남겼더군.
바보 같으니 , 차라리 하겠다고 나서지를 말지 . 그렇게나 약한
인간이 그런 작업을 어떻게 하겠다고 ~
그건 이해를 해야 해. 중요한 비밀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잖
아 그걸 풀기 위해서는 그런 파일이 필요했을 거야 하지만 걱
정하지 마. 나밖에는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
기미히토의 능청스런 연기에 도시아키는 무슨 의미인지 고개
를 좌우로 흔들었다.
이치로 교수가 자살하겠다고 했나? 그 메모는 그러니까 유서
같은 것이었나?'
도시아키는 완벽하게 걸려들었다.
아니, 그런 얘기는 없었어. 그냥 자신이 하는 일에 깊은 회의
를 갖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을 뿐이야. 사인은 과로로 인
한 실족사였어 .
대답을 하면서 기미히토는 약간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아까 자네에게 자료를 보여주지 못하겠다고 한 것은 용서하
게. 자네도 이해하겠지?'
그럼, 그런 자료를 어떻게 함부로 보여주겠나. 대략 어떤 자
료인지만 예기해 줘 .
그런데 자네는 왜 그 자료에 대해 알고 싶어하지?'
이치로 교수의 죽음을 이해하고 싶어서 그래. 교수 친목회의
멤버였거든.
사실 그 자료는 야마자키 이사장이 직접 이치로 교수에게 주
었어. 이사장은 이치로 교수가 죽은 줄 모르고 연구원들과 오랫
동안 만주에 가 있었지. 엊그제 밤에 돌아와 이치로 교수에게 전
화를 했다가 그가 거의 한 달 전에 죽은 것을 알고는 대경실색하
여 어제 아침에 급히 자료를 회수했어.
그래서 그동안은 그게 스테이션에 그대로 남아 있었군.
기미히토는 장단을 맞추었다.
(묘제의 연구)는 식민 지배 당시 한반도에서 행해졌던 어느
발굴에 대한 기초 자료들이야. 나도 그 내용까지는 확실히 모르
지만, 이사장은 이치로 교수에게 그 자료를 기초로 해서 연구를
하도록 했지.
공동 연구의 내막은 그런 것이었군.
처음에 이치로 교수는 한사코 거부했어. 그러나 이사장의 함
정에 걸려들었지.
이사장의 함정이라구?'
그래 우연인 것처럼 여자를 붙여줬지 뭔가.
여자?'
감칠 듯이 녹아드는 여자지.
왜 그런 짓을 했지?'
이치로가 하지 않으려 했으니까.
학자가 원하지 않는 걸 그렇게 해서라도 하도록 했다구? 그
게 말이나 되는 얘긴가?'
그러니 이치로가 그렇게 고뇌했던 것이 아닌가?'
그렇군.
이치로는 석 달의 여유를 달라고 했어.
그 정도 걸리지 않나? 한 편의 논문을 쓰려면.
그런데 죽어버린 거지 .
도대체 그 자료는 뭐야?'
식민 시대의 발굴이라는 것밖에는 나도 모른다니까. 내 전공
도 아니잖아. 게다가 그 자료만은 이사장이 직접 관리해. 다른
사람은 손도 못 댄다는 말이야.
기미히토는 도시아키가 진심으로 자신을 대하는지의 여부를
가늠할 수 없었다. 그렇게나 중요한 자료를 한 달이나 허술하게
방치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한편 생각하면 이
사장 본인이 없었다니 그럴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
쨌든 도시아키는 자기가 알고 있는 선에서는 기미히토에게 모두
털어놓았음을 분명히 했다.
맨해튼의 밤
리우데자네이루로부터 아메리카합중국의 내륙을 가로질러 존
에프케네디공항에 도착한 747점보기에서 갈색 싱글 차림의 한
사나이가 내리더니 게이트 입구에서 기다리던 두 명의 사나이를
따라 링컨컨티넨털에 올랐다. 해안 도로를 따라 한참 달려온 자
동차는 맨해튼에 들어서자 이내 브로드웨이를 흐르는 차량의 물
결에 섞였다
비행기에서 내린 삼십대 후반의 사나이는 차 안이 더운 듯 손
등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씻었다
미스터 딕슨, 에어컨을 세게 올릴까요?'
사나이는 말없이 손을 내저었다. 아마 상대가 다른 어떤 말을
했어도 딕슨은 손을 내저었을 것이다. 창 밖으로 멍하니 눈길을
던지고 있넌 딕슨은 얼굴에 비웃음을 흘리며 조롱 섞인 목소리
로 비아냥거렸다.
내가 자살이라도 할까 봐 자네들을 보냈나?'
무슨 소릴요, 저희들은 언제든 나오지 않았습니까?~
'자식들, 언제든 나왔다구?'
딕슨은 한꺼번에 몰려드는 생각들을 정리하느라 이맛살을 찌
푸렸다.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은 아내 매기였다. 그래도 이 세상에서
자신을 가장 아끼고 위해주는 사람은 누가 뭐래도 아내였다. 다
음으로는 외아들 미키. 그러나 녀석은 한번 이런 따끔한 맛을 보
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녀석은 이 세상의 모든 게 거저 주
어지는 것으로 아는 한심한 놈이다. 한번 고생을 해봐야 세상이
얼마나 만만치 않은지 알 게 아닌가.
그러나 다음 순간 딕슨은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아니야, 안 돼. 녀석에게는 방법이 없어. 그냥 저 바닥으로 전
락해 버릴 수밖에 없는 놈이야. 내가 끝까지 돌봐주어 야만 해:
미스터 딕슨, 몸이 안 좋은 것 아닙니까?'
입 닥쳐 , 이 멍청아!
말을 내뱉어놓고 딕슨은 자신이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에게 그럴 필요는 없는 건데.
그러나 딕슨은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이들은 아서에게 월
급을 받고 있는 아서의 개들이 아닌가. 사람이 아닌 개에 불과한
자들이 건방지게 자신을 걱정해 주는 듯한 표정을 짓자 딕슨은
무척 불쾌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자신도 불과 얼마 전까지는 아서의 개들 중
한 마리였다는 생각과 더불어 이제 아서에게 버림받았다는 절망
감이 혹독하게 뇌리를 파고들었다.
자동차가 월스트리트의 한 검은색 마천루 앞에 멈추자 온통
금장으로 두른 도어맨이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오십대의 도어
맨은 딕슨을 보자 곧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반가운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딕슨 씨 , 무슨 일입니까? 얼굴이 안 좋아 보이십니다.
딕슨은 주머니에서 잡히는 대로 돈을 꺼내 상대의 코트 주머
니에 찔러주었다
고맙습니다.
도어맨은 여느 때와는 달리 심상치 않아 보이는 딕슨의 뒷모
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서는 얼굴 가득 웃음을 띠며 딕슨을 맞았다.
여어 , 딕슨! 어서 오게.
아무런 생각이 없는 인형처럼 입을 크게 벌리고 활짝 웃을 수
있는 것은 아서만의 특기였다 그러나 때때로 그의 웃음은 공포
감마저 들게 했다. 웃고 있는 아서의 얼굴 뒤에는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기 때문이다.
회장님, 저는 만회할 수 있습니다. 틀림없이 할 자신이 있습
니다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웃음으로 터질 듯한 아서의 얼굴과 곧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딕슨의 얼굴이 묘한 대비를 이루었다.
아니야, 자네는 훌륭했어. 누가 자네를 탓하겠나.
회장님, 제발~
좀 쉬는 게 좋을 거야. 괜찮아, 괜찮다구.
나스닥에 제가 잡아놓은 신주들이 이제 곧 뜰 겁니다.
그러나 딕슨의 말은 아서에 의해 器기고 말았다.
쉬게, 자네는 휴식이 필요해.
회장님,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그냥 조용히 나가게.
딕슨은 필사적이었다.
방법이 있습니다. 선물 거래에서 당한 참패를 일거에 만회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하하. 괜찮아, 괜찮다구 그냥 쉬라니까.
여전히 얼굴 가득 미소를 짓고 있던 아서가 눈짓을 하자 대기
하고 있던 두 사람의 건장한 사나이들이 걸어와 딕슨의 팔을 잡
았다.
딕슨은 안간힘을 쓰면서 저항하려 했으나 거한들에게 양팔이
붙잡히고 몸이 들려 꼼짝할 수 없었다
딕슨이 울음 섞인 목소리로 절규했다.
한국, 한국입니다. 회장님, 한국에서 해낼 수가 있습니다. 맹
세합니다.
그러나 아서는 회전 의자를 돌려 창 밖에 보이는 자유의 여신
상에 눈길을 보냈다 딕슨의 얘기에 귀를 기울여줄 기미라고는
이미 조금도 없었다.
회장님! 매기, 그리고 미키의 목숨까지도 걸겠습니다. 실패
하면 우리 가족은 모두 죽어도 좋단 말입니다. 틀림없이 기회가
있습니다 일거에 만회할 수 있단 말입니다. 믿어주십시오.
아서의 귀가 꿈틀했다 시선을 여전히 창 밖에 둔 아서의 짤막
한 목소리가 딕슨의 다리를 땅에 닿게 했다.
시간은 1분이야. 말해 봐. 어떻게 네놈이 선물 거래에서 패대
기쳐 버린 10억 달러를 한국놈들이 돌려줄 수 있는가를.
궁정
정완은 46번가의 사우나도크에 앉아 있었다. 맨해튼의 사우나
는 서울의 사우나와는 달리 김이 짙은 데 비해서 온도가 낮아 싱
거웠다 두르고 있던 타월을 뜨거운 물에 적셔 아예 바닥에 깔고
드러누운 정완의 머리에 복잡한 생각들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이제 열흘 후면 결산 보고를 해야 한다. 즉 해커들이 기다려준다
는 시한이 열흘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애초에 정완은 이 일이 크게 어려울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한국의 본사에는 이름을 날리는 쟁쟁한 컴퓨터 전문가들이 수없
이 포진해 있어 그들이 쉽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
했던 것이다
그러나 기대를 걸었던 본사의 기술 팀은 뜻밖에도 전혀 힘을
쓰지 못했다. 보안용 칩을 개발하는 것과 해킹을 추적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문제라는 그들의 안쓰러운 대답에 정완의 가슴
은 덜컥 내려앉았다
그제야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정완은 속내를 감춘
채 수많은 외부 전문가를 만났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로부터도
만족스런 대답을 얻을 수 없었다.
해킹이라는 것은 어떤 이론이 있어 체계적으로 배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해커 자신이 수많은 노력과 시험을 통하여 스스로
깨우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실력이란 절대적으로 개인적인 것이
라 할 수 있다
정완은 얼마 전 리노에서 만났던 수아의 얼굴을 떠올렸다. 과
학기술원 최 박사의 권고가 있어 한번 만나보기는 했지만사실
큰 기대를 가지고 찾아간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아버지와 상의
해 보아야 한다고 어린아이 같은 대답을 하던 여학생이 수많은
전문가를 만나고 난 지금에 와서 자꾸 생각나는 것이다.
회사의 비서로부터 전화가 와 있습니다.
정완은 흘끗 시계를 봤다 다음 약속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비서가 사우나에까지 전화를 걸어 방해할 리가 없
다는 생각에 정완은 의아해하며 전화기를 들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베키입니다.
그동안 정완은 임시 주총을 통해 회장직을 수락한 터였다
여비서의 오그라드는 목소리에 정완은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
꼈다.
무슨 일인가?'
회장님 컴퓨터의 극비 파일에 외부 침입자가 들어왔었습니
다.
내 컴퓨터에 외부 침입자라구?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
지?'
아직 정확한 경위는 파악이 안 되고 있습니다.
이상하군. 비밀 번호는 나만 알고 있는데 어떻게 파일에 접속
할 수 있었을까? 그런데 외부 침입자가 도대체 무슨 짓을 했단
말인가?'
역시 확인이 안 되고 있습니다. 회장님의 파일에는 어떤 직원
도 접근을 못하기 때문에
으음, 침입자말고는 말이지.
정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어떻게 알 수 있었나? 침입자가 내 극비 파일에 접속
했다는 것은?~
침입자가 제 컴퓨터의 이메일에 메시지를 남겨 두었습니다.
여비서는 마치 자신의 잘못인 양 수심이 가득한 목소리로 대
답했다.
메시지를 읽어봐.
(339276이란 이름이 붙은 파일의 끝을 보시오)라고 되어 있
습니다.
알았어 , 곧 가지 .
정완은 서둘러 샤워를 마치고 회사로 향했다. 자신이 많은 전
문가들과 접촉한 것을 알고 당장이 라도 돈을 내놓으라고 하는 요
구라면 큰일이라는 생각에 발걸음을 다급하게 옮겨놓고 있었다.
(아저씨, 회사의 컴퓨터를 한번 훌었는데요 별다른 혐의점을
찾지 못했어요.부분적인 정보만 빼내는 보통의 해킹과는 달리
협박자는 수십 차례에 걸쳐 접근해서는 키스테이션의 명 령 체계
를 모조리 읽어버렸어요. 어떤 조작도 가능하도록 했기 때문에
캐시박스에 돈이 차 있는 한은 얼마라도 뺄 수 있어요 키스테이
션은 한 방향으로만 명령을 내리는데다가 외부 입력 방지 시스
템이 가동되고 있는데 이 방지 시스템을 깨고 명령 체계도 쌍방
향으로 작동하도록 바뒀으니 상대는 완전 프로란 얘기죠. 현재
로서는 안개 속에 있는 셈이지만 한 가지 방법을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자세한 내용은 만나서 말씀드리죠. 내일 뉴욕으로 가겠
어요 자연사박물관 앞의 노상 카페에서 만나는 것이 어떨까요?
괜찮은 시간을 이메일로 넣어주세요.)
뜻밖에도 침입자는 수아였다.
정완은 자신도 딜펄게 주먹을 불쁜 쥐었다 짧은 메모였지만
여태까지 만난 전문가들의 탁상공론과는 달리 믿음을 주는 내용
이었다.
자연사박물관의 길 건너편 카페는 햇볕을 온몸에 받으며 한가
롭게 대화를 즐기기에 적당한 곳이다. 박물관이 있는 이곳은 맨
해튼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그리 바쁘지도 복잡하지도 않은 지
역이다
정완은 자연스럽게 에프레소 한잔을 들고 걸으며 테이블 사
이를 살피다가 낯익은 믹을 보았다. 순진하고 맑은 눈동자의
수아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정완은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여대생은 간데없고 싸구려 미장원에서 손질한 듯
한 곱슬곱슬한 금발에다 루즈를 짙게 칠한 입술, 그 옆에 장난스
럽게 찍은 점,그리고 할머니도 입지 않을 것 같은 50년대 식의
낡은 투피스에 2차대전 당시 전투기 조종사들이 목에 매던 국방
색 스카프가 정완을 순간적으로 착각하게 했다. 수아가 먼저 눈
으로 아는 체를 안 했으면 못 알아봤을 것이다
안녕하세요?'
그래,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우선 앉으세요.
하하, 반갑구나 그런데 갑자기 30년이나 빨리 늙어버린 것
은 무슨 까닭이지?'
변장을 했어요. 혹시 누가 지켜볼지 몰라서요.
그럴 리가 있을까?'
이런 일에는 늘 조심을 해야 해요.
그래, 그게 좋을지도 모르겠군.
정완이 이 방면의 전문가들을 만나고 있다는 소문이 이미 퍼
졌을 수도 있으므로 수아의 일견 장난스러워 보이는 변장은 충
분한 의미가 있을 법했다. 그러고 보니 자리도 주변에 다른 사람
들이 없어 마음껏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곳이었다.
정완은 수아가자신보다 더 신중하게 일에 임하고 있다는 느
낌이 들어 부끄러웠다.
아버지와 의논해 봤어?'
승낙하셨어 ?'
학비 얘기도 했고?~
뭐라 그러셨지?~
그런 걸 받는 게 아니라고 하셨어요.
훌륭한 아버님이시군. 하지만 나로서는 뭔가 보답을 하지 않
을 수는 없는데.
그런 생각은 하지 마세요.
수아는 진심으로 대가에는 관심이 없는 듯했다. 수아는 테이
블에 놓여 있는 밀크세이크를 맛있게 빨아먹었다 나이를 짐작
할 수 없게 변장을 한 수아가 세이크를 빨아먹는 모습에 정완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혼자서 하고 있는 협박이 아녜요. 전문적인 조직 같아요. 일
을 서로 분담하는 조직 말예요.
나도 그럴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중에 최소한 한 사람은 아주 뛰어난 해커예요. 자신감이 넘
쳐흐르고 있어요. 너희들이 아무리 해도 나를 막아낼 수는 없다
고 생각하는 거죠.
어떻게 알 수 있지?'
기한을 길게 주고 있잖아요.
그게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
그 정도 기간이라면 얼마든지 시스템을 바꾸거나 보안 처리
를 할 수 있거든요. 그래서 보통의 해커라면 즉각 돈을 내놓으라
고 요구할 거예요. 하지만 이 사람은 여유가 있어요. 바꿀 테면
바꿔보라는 거죠. 그 다음에는 더욱 큰 손해를 보아야 할 거라는
메시지가 들어 있는 거예요. 그리고 아저씨네 회사뿐 아니라 다
른 회사들에도 접촉했을 거예요. 아마 늘 성공했겠죠. 따라서 자
신감도 붙었을 거구요. 이 정도 해커라면 수사 기관에서는 붙잡
지 못해요. 어떤 회사든 타협할 수밖에 없는 거죠.
정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렇다. 자신은 지나친 모험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른다. 모든 회사들이 굴복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아
닌가. 정완은 화가 치 밀어올라 목소리를 높였다.
도대체 그 해킹이란 것을 이해할 수가 없군. 보안 장치를 해
두고 평생을 두드려봐도 알아낼 수 없는 비밀 번호를 달아두는
데도 침입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말이야.
너무 그렇게 화내지 마세요. 해킹이 가능하니까 아저씨네 회
사에서 보안 칩이 내장된 컴퓨터를 개발해 돈을 벌 수 있는 거잖
아요?'
수아의 허를 찌르는 말에 정완은 혀를 차며 웃을 수밖에 없었
다. 이미 이 기술 세계는 윤리니 도덕이니에 붙들려 있을 수 있
는 공간이 아니었다.
치열한 싸움, 그리고 승리밖에는 살아날 길이 없는 삭막한 세
계였다
문득 회의 석상에서 정의를 부르짖던 스튜어트가 생각났다.
지더라도 싸워야 한다던 스튜어트의 주장에 귀를 기울인 이사는
단 한 사람도 없지 않았던가 만약 중형 스테이션 판때라는 특수
한 사정에 처해 있지 않았다면 자신은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니 별로 자신이 서지 않았다.
lift
그들은 어떤 수법으로 키 스테이션을 조작했을까?'
제가 접촉해 본 바로는 아저씨네 컴퓨터의 패스워드를 조합
에 의해서 알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해요.
그게 무슨 말이지?'
비밀 번호를 알아내어 접속할 수는 없다는 얘기죠.
그럼 어떻게 접속했지?'
비밀 번호를 묻고 거기에 따라 접속을 시키거나 차단하는 프
로그램 자체를 붕괴시켜 버린 거죠.
그럼 접속도 불가능하게 되어버리지 않을까?'
그게 바로 상대의 실력이죠. 상대는 일단 프로그램을 붕괴시
키고는 그 프로그램의 틀에 따라 기능을 되살린 거예요. 보통 때
이런 역할을 수행하는 바이러스를 심어둔 거죠 전문 용어로는
'트로이의 목마' 라고 하는데 오랜 잠복 기간을 거쳐 3분 27초 간
작동되도록 한 것은 대단한 실력가라는 얘기예요.
그런 자에게 어떻게 맞설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함정을 파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어떤 방법으로?'
상대는 성공을 거듭하다 보니 기고만장해졌어요.자만에 빠
져 있는 거죠.
그래서?~
역 이용하는 거죠. 초일류의 해커에게는 광기와도 같은 자존
심이 있어요. 그 자존심을 건드리는 거예요.
어떻게?'
수아는 싱긋 웃었다.
해킹 대결을 하는 거예요.
대결이 라고?'
네 상대가 키스테이션에 접속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일
단 키 스테이션에 접속하면 저도 바로 키스테이션으로 들어가는
거죠. 혹은 제가 먼저 들어가 있을 수도 있구요.
들어가서는?~
같이 해킹을 하는 거예요. 상대는 언제 들어와 봐도 제가 무
언가를 들쑤시고 있는 것을 발견하면 경쟁심이 생기게 되겠죠.
그렇게 되면 저는 여러 가지로 상대를 유도할 수 있죠. 어떤 방
법을 쓸지는 그때 가서 판단할 거예요.
수아는 뭔가 생각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이 일은 상대를 추적할 수 있을 정도의 시간을 버는 것이 중
요하거든요. 이제까지 상대는 자신의 컴퓨터를 이용하여 키스테
이션에 접속했어요. 하지만 한 번에 접속할 수 있는 시간은 불과
몇 분이죠 너무 길면 꼬리가 잡히니까요.
그렇겠지 . 다른 고객보다 현저히 길게 접속한다면 추적을 면
치 못하겠지.
전국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접속 내용을 일일이 다 점검할 수
는 없는 노릇이니까 상대의 정체를 알아낼 수는 없지요 하지만
상대를 유도하여 통화 시간을 늘리게 하는 것은 하나의 방법이
될 거예요. 일단 같이 키스테이션에서 만나면 뭔가 방법이 나올
것 같아요.
정완은 될 수 있는 대로 자신과 수아를 제외한 다른 사람은 이
일을 모르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누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
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수아와 같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야 비로소 정완은 이 외로운
싸움에서 일방적으로 지지만은 않을 것 같은 확신이 생겼다
해킹 전쟁
놈은 수많은 전문가를 만났어. 하지만 오늘처럼 밝은 표정을
보인 적은 없었어. 이것은 무얼 말하는 거지?'
짙은 수염에 얼굴에는 칼자국이 나 있는 삼십대 초반의 사내
가 시퍼렇게 날이 선 잭나이프로 자몽 껍질을 벗기며 나이에 어
울리지 않게 잔뜩 쉰 목소리로 내뱉었다.
잭, 이 바보야. 네까짓 녀석이 컴퓨터의 무엇을 안다는 거야'
술이나 처먹고 돈이나 받으면 되는 놈이 무슨 쓸데없는 소리가
그렇게 많아?'
술에 찌든 목소리의 주인공은 잭의 잘난 체하는 소리에 기분
이 상한 듯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하지만 어딘가 기분이 안 좋았어. 이제까지 죽을상을 하고 다
니던 놈이 그렇게 확 바뀌었다면 주의를 해야 하지 않을까?~
자꾸 그런 개소리나 내뱉고 있을 거야?'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뜸 위스키 병이 날아들자 잭은 고개를
숙여 피했고 병은 뒤의 벽에 부딪혀 유리 조각들이 튀었다.
그렇게 화낼 건 없잖아, 월리 나는 조심하자고 하는 말인데'
그러자 옆에서 잠자코 술잔을 기울이고 있던 사십대 초반의
사나이가 월리라고 불린 자에게 손을 내저으며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봐 월리, 한번 생각해 볼 필요는 있겠어. 만약 저쪽에서 전
문가를 고용하여 대응해 온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샘, 시티은행 경우를 생각해 봐요. 처음에 나를, 이 월리를 얼
마나 비웃었어요. 하지만 한 달 후에 어떻게 됐죠?'
그렇긴 하지만 이제는 저쪽에서도 뭔가 대비책이 나올 때가
되지 않았을까?'
나에게 대항할 수는 없어요. 그런 둔재들의 머리로는 영원히
어 림없는 일이니까.
하긴, 이제껏 아무도 자네에게 대항하지는 못했지 .
걱정 말고 술이나 마셔요. 날짜 돼서 돈 들어오는 거나 챙기
면 되니까요.
그래, 그렇고말고
정완은 기한이 되기 전에 미리 상대의 요구에 응하지 않을 것
임을 선포하고는 FB떼 정식으로 수사를 의뢰했다. 이사들의 쏟
아지는 불만과 비아냥에도 불구하고 급작스레 정면 돌파를 선언
한 신임 회장 정완에게 월스트리트의 시선이 온통 쏠릴 수밖에
없었다
오랫동안 월스트리트를 지배해 온 많은 보수적 금융인들은 회
의적 시각을 감춘 채 이 젊은 외국인의 의욕적 도전에 찬사를 쏟
아냈다.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할 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자신
의 재산을 담보로 싸울 용기가 없었던 그들은 이 돈키호테를 가
상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누구도 돈키호테가 이 싸움에서 이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정완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지지 전화를 받았다. 어린이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일반 시민으로부터 원로 금융인에 이르기까
지 모두가 호의적인 관심을 갖고 정완을 응원했다. 스튜어트는
정완의 결정에 열광했다.
수아, 인사해. 여기는 미스 스튜어트. 우리 회사의 대주주야.
미스 스튜어트, 수아는 나를 도와주는 여학생이오.
반가워요.
스튜어트는 수아가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수아의 변장한 모습에는 최소한 30년 이상의 시간 차
이가 나는 복장과 화장이 뒤섞여 있었던 것이다.
호호, 재미있는 학생이군요. 어디 출신이에요?'
스탠퍼드. 고향은 한국이에요.
수아는 해커를 잡기 위해 대기중입니다.
다른 분들은요?'
수아 혼자예요.
정완의 말에 스튜어트는 안색이 변했다.
네? 아니, 뭐라구요? 이 학생 혼자 해커를 잡는다구요?
자신 있게 말하는 정완의 부연 설명이 이어지지 않자스튜어
트는 노골적으로 불안을 드러냈다 그녀는 정완 다음으로 많은
주식을 보유하고 있는 대주주였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정완이
일처리하는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위험한 요소가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사가 시작되자 잠시 멎었던 스튜어트의 근심에 가득 찬 목
소리가 나지막하게 정완에게 전해졌다.
물론 이 학생을 못 믿는 것은 아니지만 어쩐지 저는 이번 일
이 너무 쉽게 처리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군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동안 내가 만나본 어떤 전문가도 수아
처럼 자신 있게 상대를 분석하지 못했어요. 수아는 한국에서 가
장 인정받는 해커입니다.
미안하지만 아직 한국의 능력으로는 아무래도 좀 떨어지지
않나요?'
컴퓨터 역사에선 당연히 떨어지겠지만 능력만은 결코 떨어지
지 않습니다.
필요하다면 제가 전문가들을 좀 알아볼까요?'
스튜어트는 여전히 불안이 가시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긴 누
구라도수아의 이 어줍잖은 모습과 말투에 신뢰감을 느낄 수는
없을 것이다. 수아는 스튜어트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스탠
퍼드 학생 특유의 능청을 떨었다.
어머, 이 집 소스 하나 죽여주네요. 입에 착착 감기는 것이 둘
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르겠어요.
하하, 그래 그럼 우리 물릴 때까지 여기만 올까?'
1년 내내 먹어도 물릴 것 같지 않아요.
수아, 해커가 이리로 오게 되어 있나요?'
아까 대기중이라 하지 않았어요?'
스튜어트의 불안감은 수아에 대한 미움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그녀는 시티은행도 손을 들어버린 해커에게 대항하
기 위해 이런 애송이 여학생 한 명만을 데리고 온 정완에 대해
강한 불신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아 네 걱정 말고 많이 드세요. 이제 얼마후면 저는 해커와
밤을 새워가며 싸워야 해요.
싸운다구요? 어떻게 싸우죠?'
들어가서요, 치고 박고 해야죠.
스튜어트의 불만은 드디어 거세게 폭발했다.
나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요. 협박자들은 지금 분노하고 있
어요. 그들은 우리 회사가 타협을 거부하자 보복의 칼을 갈고 있
단 말이에요. 시티은행을 굴복시키고 우리 회사의 전산망을 3분
이상이나 마비시켰던 그 해커가 이제 우리 회사를 아예 쓰러뜨
리기 위해 앙심을 품고 달려들고 있다구요. 그런데 이렇게 무사
태평으로 있는 것이 우리의 대응책이란 말이에요? 나는 도저히
그냥 있을 수 없어요. 미국에서 가장 유능한 컴퓨터 전문가들을
부를 거예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전쟁을 수행하는 전사들이
지 연극 무대의 배우가 아니란 말이에요.
말을 마친 스튜어트는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버렸다
정완은 스튜어트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정신이 드는
양 미안한 표정으로 수아의 얼굴을 살폈다.
마음 쓰지마 미국 여자들은 무엇보다도 겉모습이 든든해야
안심이 되는 모양이니까.
충분히 이해가 가요. 저를 믿고 있는 아저씨가 오히려 이상한
지 모르죠.
사실 나도 수아를 무턱대고 믿는 건 아니야 하지만 수아는
내가 만나본 누구보다도 나에게 신뢰를 주었어. 너를 만나본 순
간 이런 종류의 작업은 사람이 많다고 되는 게 아니란 것을 나는
분명히 느꼈어. 그리고 수아가 최고의 재능을 가진 해커란 것도
알 수 있었어. 지금 수아가 하고 있는 변장이 그것을 확실히 증
명하고 있잖아? 남들은 웃을지 모르지만 너는 누구보다도 진지
하고 성실한 태도로 이 일에 임하고 있어 상대가 무시무시한 프
로라면 수아도 그 못지않은 프로라는 것을 나는 느낄 수 있어.
사실 나는 수아의 변장에 감명을 받았어.
호호호, 이 우스꽝스런 모습에 말이죠?'
그래, 하하하하.
정완이 해커와의 정면 대결을 선포하고 나서도 며칠이 지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정완의 회사에는 FBI의 수사관들과 스튜어트가 막대한 착수
금을 주고 데려온 아메리칸 소프트웨어사의 전문가들로 북적거
렸다. 이들이 해커를 찾아내면 성공 사례금을 지불하는 조건이
었다. 부사장을 제외한 모든 직원과 이사들은 정완보다는 스튜
어트를 훨씬 신임했다.
그들은 첫날 잠시 나타나 컴퓨터를 한번 살펴보고는 다시 나
타나지도 않는 과거에서 온 듯한 이상한 여자보다 서너 명씩 팀
을 짜서 회사에 상주하고 있는 전문 회사의 직원들이 한결 미더
웠다. 하지만 부사장만은 정완이 어떻게 행동해 왔는지 알고 있
었기 때문에 그가 이렇듯 여유 있게 기다리는 데에는 믿는 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스튜어트가 데리고 온 전문가들은 여러 가지 복잡한 접속 차
단 프로그램을 설치했다. 그들은 최첨단 기술인, 쉴새없이 변하
는 패스워드 방식을 채택했다. 이 방식은 비밀 번호가 자동적으
로 계속 바뀌기 때문에 외부인이 비밀 번호를 알아내서 접속한
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외에도 그들은 복잡한 몇 개의
보안 장치를 추가했다
어떤 해커도 들어올 수 없습니다.
아메리칸 소프트웨어사의 기술 부사장은 기자들 앞에서 장담
했다
그러면 이전의 보안 장치들은 해커가 어떻게 뚫었을까요?'
그건 우리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한 것이 아니기 때
문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모든 해커들에게 종말을 고하는 최후의 장
치라고 생각합니까?'
해킹은 끝이 없습니다. 앞으로의 세계는 해킹과 방어와의 영
원히 반복되는 싸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히 단언하
건대 우리의 이런 방어 시스템은 앞으로 5년 간은 무너지지 않
을 것입니다.
5년 간이나요?'
그렇습니다. 아니 그보다 12년쯤 더 견뎌낼지도 모릅니
다.
일이 이렇게 진행되자 스튜어트는 이사들을 모아놓고 자신 있
는 목소리를 토해냈다
그런 범죄자들에게 굴복하려 했다는 사실이 부끄럽지 않으세
요?'
접속
월리는 술을 끊고 있었다 그의 눈빛이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MIT의 해킹클럽에서도 단연코 천재로 군림하던 그는 현대의 재
능 있는 대부분의 젊은이가 그러하듯 학업과 해킹 중에서 해킹
을 택하고는 학교를 그만두었다.
최초의 해커들이 컴퓨터를 통한 정보에의 접근을 모토로 한
자유인이었다면,수많은 사회 기관으로부터 정보를 차단당하고
난 후의 해커들은 어쩔 수 없이 범칙의 유혹에 노출당하고 있다.
그러므로 해킹은 날이 갈수록 더욱 위험한 범죄로 인식될 것이
고, 컴퓨터 한 대에 모든 것을 걸고 있는 젊은이들은 이런 현실
을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그들은 컴퓨터 한 대로 전세계를 누비고 싶어했고, 가장 초보
의 해킹은 이러한 행위들에 부과되는 최소한의 비용조차 면제받
고 싶어하는 데에서 출발했다. 그들에게 해킹은 자유를 향한 거
대한 비상이었고, 거기에는 이상야릇한 흥분조차 묻어났다. 이
흥분이란 범죄에의 유혹이었다
월리는 무서운 눈빛으로 자신의 컴퓨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장사꾼들이 컴퓨터에 연결해 둔 방지 시스템 같은 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자신의 먹이에 달려들어 만만찮
은 솜씨로 살점을 베어먹고 있는 한 부랑자에 대한 억제할 수 없
는 분노가 엄습하고 있었다.
월리는 놈이 왜 이 먹이에 눈을 돌렸는지 안다 세상이 온통
떠들어대니 갈고 닦은 자신의 솜씨를 보이고 싶은 영웅 심리가
발동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정도의 실력을 갖춘 놈이라면 이 일
의 배후에 자신이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감
히 도전해 오다니 월리는 자신의 전설이 무시당하고 있다
는 사실에 고통받고 있었다
(패스워드를 입력하시오.)
장사꾼들이 깔아둔 프로그램이었다.
(레벨이 다릅니다. )
(접속이 불가능합니다. 다시 시도하겠습니까?)
유치한 장난들이었다. 물론 이런 장벽에 걸려 몇 달이고 시간
을 낭비하는 놈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놈들은 근본적으로 해킹
이란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해킹은 본질적으로 방어벽
을 깨는 것이고, 지키느냐 깨지느냐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머리
의 차이였다
월리는 다시 한 번 숨을 가다듬었다. 그놈만 없었다면 이미 돈
은수중에 들어와 있을 것이다 해커와의 전쟁이니 뭐니 하던 그
회사의 회장이란 놈은 벌써 쫓겨나고 말았을 것이 아닌가. 그러
나 흥분하면 안 돼
월리는 장사꾼들의 철조망을 간단하게 건너뛰었다.
(접속되 었습니다. )
평소 같으면 기고만장했을 월리도 오늘만은 긴장하고 있었다.
시간은 2분.오늘은 몇십 번 재접속하더라도 놈과의 대결을 마
무리하고 일을 완전히 끝내야만 한다. 놈은 아직 들어오지 않았
다. 월리는 지불 명령 프로그램을 불렀다
지난번의 경험으로 볼 때 이 프로그램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바꾸려면 25분 걸린다. 이 25분은 순수한 작업 시간이다. 패스워
드와 접속 방지 시스템을 건너뛰는 데 걸리는 시간이 매회 20초.
그렇다면 매회 순수한 작업 시간은 1분 40초. 정확하게 열다섯
번을 접속해야 한다. 그러나 작업중에 놈이 들어온다면 월
리의 머리는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작업중에 놈이 들어온다면 다시 나의 프로그램은 와해되고
만다. 이 며칠 간의 작업을 보면 오늘도 놈이 들어오지 않을 리
가 없지 않은가. 그러면 역시 오늘도 실패하고 만다. 그렇다고
놈과 타협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월리의 머리는 두 쪽으로 나뉘어 맹렬한 속도로 돌아가고 있
었다 이미 화면에 뜬 지불 명령 프로그램의 알고리즘을 파헤치
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작업중에 나타날 놈에 대한 생각으로
꽉차 있었다.
벌써 시간이 다됐는가. 월리는 화면에 뜬 시계를 보았다. 1분
50초. 오늘따라 시간이 빨리도 흐르고 있었다. 월리는 자신의 작
업을 저장하고는 접속을 끊었다. 다음 접속 때에는 저장 파일을
불러 그 다음부터 작업할 수 있도록 연결해 두는 월리의 솜씨는
가히 천재적 이었다.
통신만 접속되면 어떤 컴퓨터도 자신의 퍼스널컴퓨터로 조작
해 버리는 월리의 재능은 한마디로 신기였다. 하긴 애플컴퓨터
도 한 사람의 해커가 처음부터 끝까지 개발한 것이고 보면 컴퓨
터에 적당한 장치를 붙여 해커를 막겠다는 발상은 애초부터 무
리일 수밖에 없었다.
월리는 똑같은 작업을 반복했다.
(접속되 었습니 다. )
그리고 1분 EO초가 지나면 다시 신호음이 울렸다. 작업이 반
복되면서 월리는 묘한 희망을 갖게 되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놈
이 들어오지 않는 것이었다. 작업은 이미 12회를 반복하고 있었
지만 오늘은 놈이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녀석은 떠나버 렸나 '
월리가 며칠 간 아무런 소득을 올리지 못했던 것처럼 놈도 소
득을 올릴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타협을 할 수 없는 것은 놈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자존심 하나로 존재하는 해커에게 있어서
그 정도 실력이라면 결코 타협은 없는 법이다. 이제 끊었다가 세
번만 더 접속하면 게임은 끝난다는 생각에 월리는 가슴이 부풀
었다
'내가 왜 이렇게 약해지고 말았지 ,
월리는 가슴이 뛰는 걸 느끼면서 위스키 병에 손을 뻗쳤다. 작
업을 하면서 술을 마신 적은 없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예외였다
마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지금마시는술은 의미가 달랐다 이제까지의 술이 비
틀어져버린 자신의 인생에 대한 화풀이 술이었다면 지금은 긴장
감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술이었다. 월리는 이번만은 제발 놈이
안 나타나주기를 절실히 바라는 자신을 느끼고 있었다.
월리의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1분 50초의 시간을 알리
는 경보음과 동시에 화면에는 패스워드를 통하지 않은 접속을
알리는 신호가 떠올랐다 놈이 나타난 것이다.
순간 월리는 묘한 유혹에 휩싸였다 놈은 자신과는 작업 내용
이 다르다는 사실이 번개처럼 뇌리에 떠오른 것이다. 자신과는
달리 놈은 예금 조작에 집착한다는 사실을 며칠 간의 조우를 통
해 알고 있었다. 놈은 자동지급기를 통해 현금을 빼려 하고 있었
다. 실력에 비해서는 꿈이 작은 놈이었다.
놈이 마음에 드는 예금주를 찾아 자동 이체를 통해 자신의 계
좌로 예금을 옮기고 나서 지불 명령 프로그램을 부르기까지는
약 7분 정도의 여유가 있다. 만약 자신이 지금 계속 작업하여 6분
안에 끝낸다면 놈과 조우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월리의 가슴
은 뛰고 있었다.
2분의 시간을 알리는 경보음이 화면에 떠있는 시계와 더불어
월리를 재촉했다 월리는 마우스를 굴려 시계 그림 위에 갖다 댔
다. 망설임이 밴 손길이 서너 번 방황했다. 기회는 지금이다. 약
간의 위험은 있다. 아주 약간의 위험.하지만 지금의 기회를 놓
치면 언제 다시 작업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월리는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수많은 해커들을 생각했다. 자
신을 전설로 아는 수많은 추종자들. 그들에게 자신을 보여주어
야만 한다는 생각이었다 월리는 자신이 하이에나 같은 놈에게
다 잡은 먹이를 뺏겼다는 소문이 나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째깍 째깍:
1초 1초 넘어가는 시계 소리가 월리의 가슴을 파고들며 마치
단검으로 심장을 후벼내는 것처럼 고통스럽게 들려왔다.
몇 번이나 망설이던 월리의 손은 시계 클릭이 넘어가는 그 순
간 마우스의 버튼을 떠나고 있었다. 전설은 깨져서는 안 돼. 클
릭의 저편에서 떠오르는 아주 작은 위험을 묻어 버리기나 하려는
듯이 월리의 양손은 쉴새없이 키보드 위에서 춤췄다
이제 몇 분만 있으면 지불 명령 프로그램에는 자신이 개발한
트로이의 목마가 잠복된다. 자신이 정하는 날짜와 시간에 키스
테이션은 미쳐버리고 만다. 그리고 페닌슬라 파이낸스는 자신에
게 무릎을 꿀고 말 것이다. 전설은 계속되어야만 한다.
아저씨 , 게임은 끝났어요.
무슨 말이지?'
상대는 결국 자신과의 싸움에서 무너지고 말았어요.
포기 했단 말이야?'
지금부터 키 스테이션에 5분 이상 통화하는 상대가 바로 범인
이에요. 그 정도면 충분한 시간이죠?'
정완은 즉각 워키토키를 들었다.
니콜슨 씨, 지금 키스테이션과 통화하는 수백 명 중 한 사람
이 범인이오. 범인은 5분 이상 통화할 것이오. 충분하겠소?'
니콜슨은 FHI의 수사관이었다. 그는 전화국에 나가 있다가 정
완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바로 교환실로 뛰어들어갔다.
페닌슬라 파이낸스와 연결된 전화를 모두 잡아내! 새로 들어
오는 전화는 모두 막고 통화 시간 체크해. 지금 23초 지났어 !~
미리 대기하고 있던 교환원들과 FBI 요원들의 눈이 모두 전자
교환기의 램프에서 멎었다 교환원이 걸려오는 전화를 막아버리
자 새로 들어오는 램프는 없어졌다. 하나 둘씩 꺼져가는 램프를
보는 교환원과 FBi 요원들의 초조한 눈길에는 팽펭한 긴장감이
배어 있었다.
1분이 지나면서 fBi요원들의 눈은2백 개 이하의 램프에 서
서히 모아지고 있었다. 1분 30초가 지나자 150개 이하로 떨어지
고 1분 50초가 지나면서부터는 현저히 떨어져 불과 20여 개의
램프만 남았다. 2분이 지나자 불과 다섯 개로 줄어든 램프는 그
로부터 10여 초가 지나자 단 하나의 램프로 완전히 모아졌다.
램프는 정확히 5분 53초 만에 꺼졌다.
매사추세츠 주 보스턴 입니다.
헬리콥터 대기시켜! 보스턴 수사 책임자 불러 주소와 전화
번호 일러줘. 내가 도착할 때까지는 포위만 하고 있으라 그래.
니콜슨은 전화국 옥상으로 날아온 헬리콥터에 올랐다. 헬기가
해안선을 따라 보스턴까지 올라가는 동안 니콜슨은 흥분을 가라
앉힐 수가없었다 불가능한일이 이루어지고 있는것이다 심장
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머리 전체에 울리는 느낌이었다. 세상에 ,
이런 놈들을 잡다니.
니콜슨은 헬기가 보스턴에 도착할 때까지 무려 서른세 군데와
통화를 했다. 보스턴의 현장 책임자는 전화기를 통해 니콜슨의
심장 뛰는 소리까지 듣고 있다고 했다.
월리 역시 키보드에서 손을 떼면서 터질 듯한 심장을 양손으
로 억눌렀다 드디어 해낸 것이다. 놈이, 배짱이라고는 새앙쥐보
다 못한 그놈이 막 들어오려고 하는 찰나에 자신은 작업을 모두
끝낸 것이다. 월리는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눈에서 찝찔한 액체
가 흐르는 것을 느꼈다. 드디어 해낸 것이다.
월리는 위스키 병을 들었다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털썩 던지
며 고개를 젖히고는 병을 입에 댔다. 목구멍을 쿡 쏘며 내려가는
호박색 스카치가 긴장에 절어 녹초가 된 월리의 신경을 부드럽
게 가라앉혔다. 월리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스카치 향기를 깊
이 들이 마시며 오만한 목소리로 외쳤다.
샘, 이 불멸의 월리를 위해 한잔!~
그러나 월리의 귀에 들려온 목소리는 전혀 낯선 것이었다.
미안하네, 월리. 나는 샘이 아니라 니콜슨이네.
당신은 누구요?~
FBI 수사관이야.
수사관이라구? 아니야.
월리는 꿈꾸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수사관이 날 막을 수는 없어. 도대체 누구야? 무슨 장난이
야?'
니콜슨이 신분증을 보여주고 수갑을 채우자 비로소 월리는 정
신이 드는 모양이었다. 얼마나 긴장을 했던지 그의 등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말해 주시오. 도대체 누구요? 누가 나를 패배시킬 수 있었단
말이오?'
니콜슨은 그 주인공이 한 여학생이라고 말해 주고 싶은 충동이
이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월리의 상실감은 너무도 처절했다.
샘과 월리에 이어 두 시간 후에 잭도 집에서 체포되었다 며칠
이 지나도록 월리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자신이 함정에 빠져 체
포된 것을 깨달은 월리는 다시 한 번 창담하게 무너져내렸다. 그
는 보통의 범죄자와는 달랐다. 그에게 있어 해킹에서의 패배는
인생의 침몰이었다.
월리는 체포된 후 수사에 극도로 비협조적이었기 때문에 FBI
는 수아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가 페닌슬라 파이낸스사에 깔
아둔 바이러스를 소멸시키는 일 외에도 또다른 범죄를 저질렀는
지에 대한 시급한 조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월리는 수많은 금융 회사의 정보를 컴퓨터에 내장해 두고 있
었다. 전화 번호 외에도 패스워드를 알아내고 보안 장치를 파괴
하기 위한 여러 정보, 아이디어 등을 빽벡하게 쌓아두고 있었다
이미 침입한 금융 회사의 비밀 파일에 수록된 내용도 곳곳에 저
장되어 있어 수사관들은 혀를 내둘렀다.
혼의 부활
기미히토는 생각을 가다듬었다. 토우의 괴상한 힘에 대해서는
자신말고도 두 사람이 더 알고 있었다. 한사람은 물론 토우를
일본으로 가지고 온 스기하라였고, 또 한 사람은 무라야마 슈에
이라는 풍수의 대가였다.
스기하라에 의하면, 무라야마는 토우를 없애는 것만으로는 별
로 의미가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무라야마보다 토우를 더 잘 알
고 있는 사람은 없다. 더군다나 스기하라의 요청에 의하여 토우
의 괴력을 막을 수 있도록 집을 설계해 주었다면 무라야마는 토
우의 특성까지도 잘 알고 있다는 얘기다
'무라야마는 어떤 사람인가:
기미히토의 머릿속에서 무라야마에 대한 호기심이 불같이 솟
았다. 그는 즉시 서점으로 달려가 그가 썼다는 조선의 풍수라
는 책을 샀다.
(무라야마 슈에 이 )
조선총독부 촉탁. 1931년 총독부의 명에 따라 조선의 풍수를 집대
성. 1972년 일본국서간행회에서 복각판 출간
방대한 저술에 비해서는 저자에 대한 소개가 아주 간단했다
저자의 머리말에서도 특별한 사상을 엿볼 수는 없었다. 다만 한
반도는 오래 전부터 외침에 시 달려왔으므로 생활의 안전을 보
장받기 위하여 인력으로 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힘을 믿고 거기
에 의존하려 했다는 분석과, 이런 경향이 귀신과 천지의 생기를
중시하게 되어 풍수가 성행했다는 정도로 머리말을 끝내고 있
었다.
총독부의 촉탁을 받아 저작에 착수했다는 것이나 책의 내용이
풍수를 잘 알아야만 쓸 수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는 단순한 학
자라기보다는 풍수와 법술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으로 여겨졌다.
헌병 장교였던 스기하라는 무라야마가 헌병대 및 총독부와 밀접
한 관계를 갖고 있는 일본 제일의 풍수사라고 했다.
풍수사인 그가 무슨 이유로 헌병대 및 총독부와 밀접한 관계
를 가졌을까 기미히토는 스기하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스기하라 선생님 , 일전에 찾아뵈었던 기미히토입니다.
또 무슨 일이오?'
무라야마 선생님의 연락처를 알 수 있을까 해서요.
무라야마? 그는 이미 죽었소. 그런데 왜 그러는 거요?'
역시 돌아가셨군요.토우에 대해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
요.
토우 이야기는 더 이상 하지 마시오.
목소리로 보아서 스기하라는 아직도 토우의 공포에서 헤어나
지 못한 듯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무라야마 선생님이 남기고 간 것이 없을
까요?'
남기고 간 것이라니?'
토우에 대한 무슨 기록이라든지 그런 것 말입니다.
그거야 네가 어떻게 알겠소?'
혹시 자손의 연락처라도?'
모르오.
스기하라는 매정한 목소리로 전화를 끊었다. 기미히토는 그가
아직도토우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다시 전화를 걸어 설득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한참 머리
를 짜내던 기미히토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래 책이 있지 않은가:
기미히토는 조선의 풍수를 펴낸 출판사로 연락을 했다. 인
세는 아들에게 보낸다고 했다 출판사에서 알려준 번호로 전화
를 걸자 무라야마의 아들은 풍수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
다고 하면서 뜻밖에 반가운 소식을 전해주었다
아버님의 제자가 있는데 연락처를 알려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뜻밖의 소득이었다 하지만 하토야마라는 이름의 그 제자는
몇 번이나 거처를 옮겨, 기미히토는 거의 일주일 간이나 추적해
야 했다. 결국은 그가 삿포로 부근에 있는 어느 산중턱에 홀로
기거한다는 사실을 알아내고는 곧 신칸센에 몸을 실었다
차창 밖으로 쏜살같이 지나치는 시골 풍경을 보며 기미히토는
자신이 왜 토우에 대해 이처럼 열중하는가를 생각했다. 결론은
인간으로서의 근본적인 호기심이자 자신이 신봉해 온 과학의 검
증이었다. 만약 세상에 비과학적인 현상이 틀림없이 존재한다면
자신은 인식의 틀을 다시 짜야만 할 것이다
종착역인 삿포로에서 내려 다시 버스로 갈아타고 북쪽을 향해
얼마를 더 간후에야 하토야마가 거처한다는 산이 시야에 들어
왔다 걸어 올라갈 수밖에 없는 산길을 한참 돌아 인적이 거의
없는 꼭대기에 이르렀을 때에야 일본에서는 보기 드문 초가집
한 채가 나타났다
집 앞에는 작은 탑이 하나 서 있고 그 반대편으로는 괴이한 형
상을 한 바위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초가집의 지붕에는 형형
색색의 깃발이 꽃혀 있고 지붕을 지탱하는 기둥에는 '부적 짓는
집' 이라고 씌어 있었다. 이런 꼭대기에서 사람들을 상대로 장사
를 한다는 사실에 기미히토는 적이 놀랐다.
실례합니다.
기미히토가 인기척을 내자 문틈으로 바로 대답이 새어나왔다
들어오시오.
기미히토는 초가집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예순은 되
어 보이는 노인이 환한 표정으로 그를 맞았다. 기미히토는 이 사
람이 자신을 부적 지으러 온 손님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알았다.
몇십 개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그의 방에는수많은부적과귀
신을 부르고 물리칠 때 쓰는 피리와 북 등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
었다.
기미히토가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찾아온 까닭을 설명하자 하
토야마는 잠시 기억을 더듬다가 생각이 난 듯 밝은 목소리로 대
답했다.
그렇지 그 토우에 대해 선생님이 언젠가 얘기하신 적이 있었
소. 선생님은 토우뿐만 아니라 조선의 괴이한 힘에 대해 연구를
많이 하셨소. 선생님은 예로부터 조선은 법술에 밝은 사람들이
많고 귀신을 모실 줄 알며 영계와 닿아 있는 나라라고 하셨소.
특히 자연과 사람들이 잘 어우러져 많은사람들이 자연의 기를
존중하여 그로부터 힘을 얻는다 하셨소.
조선을 잘 아는 분이셨군요?'
땅속까지 훌은 분이었소. 총독부에서는 중요한 이유로 선생
님에게 조선의 풍수를 집대성하도록 하였소.
무슨 이유였습니까?'
조선을 합방한 후 총독부의 요청에 의해 우리 나라의 많은 법
술사들이 조선으로 건너갔소. 조선인들이 마음으로부터 우리 일
본을 따르게 하기 위해서는 총칼의 지배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던 거요. 요는 문화적 지배가 중요했던 거지 그래서 머리
도 깎게 하고 우리 글도 배우게 하고 풍습도 우리 식을 따르게
했소. 그런데 조선인들의 의식을 파고 들어가 보니 이 사람들의
운명과 인생관을 좌우하는 것은 그런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신앙이더란 말이오.
조선인들이 신앙에 그렇게 깊이 닿아 있었습니까?~
그랬소. 지도층이든 양반이든 평민이든 남자든 여자든 모두
가 빌고 굿하고 제사지내는 데 그리 열심일 수가 없었소.
무슨 신앙을 그리 깊이 믿던가요?'
조선의 신앙은 불교와 유교가 가미되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는 조상신과 자연신을 뿌리에 깔고 있었소. 그 조상신과 자연신
이라는 것은 얼마나 종류가 많소. 그러니 수도 없이 많은 귀신과
풍수가 흥했던 게지.
그렇다면 조선인들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무라야마 선생님
은 조선의 풍수를 연구하신 거군요?'
, 그렇게 얘기할 수도 있지만 정확히 얘기하자면 조선
의 강한 기를 꺾어놓아야겠다고 우리는 생각했소.
기를 꺾어요?~
그렇소. 자세히는 모르지만 당시 내노라 하는 우리 법술사들
이 조선에만 가면 한결같이 힘이 빠지고 법술이 통하지 않는다
며 그냥 두어서는 안 된다고 입을 모으더란 말이오.
그래서요?'
지기를 뚫어야 한다는 거지. 조선의 지기와 풍수의 영험을 막
아야 우리 일본신이 조선에 자리를 잡는다고 생각했던 거요.
있을 법한 얘기였다. 일본이란 나라는 귀신의 천국이 아닌가.
현실적으로 무력을 통해 조선을 지배하고 있는 마당에 일본의
귀신이 조선에서 힘을 쓰지 못하고 놀린다면 조선 사람의 마음
을 지배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런 현
상은 곧 조선인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것이 뻔했다.
총독부에서도 여러 번에 걸쳐 비밀 회의를 했소. 조선을 영구
지배하려면 그들의 문화의 고리를 완전히 끊어야 한다고 생각했
소. 그런데 조선의 문화는 곧 신앙이었으므로 그들을 신과 이어
주는 역할을 하는 무당, 도사, 법술사, 승려 등을 탄압하고 배척
하기로 결정을 한 것이오. 대신 신사 참배를 시키면 그들이 마음
으로부터 일본을 따르게 될 것이 아니겠소. 이런 정책 아래에서
무라야마 선생님이 맡은 일은 조선의 지기를 끊어버리는 것이었
소. 인물이 날 만한 자리는 모두 묻어버리고,조선 민족의 정기
가 솟구치는 봉우리마다엔 쇠말뚝을 박고, 지사가 배출되는 마
을은 물줄기를 바꾸고 지맥을 끊어버렸소.
그런 일들이 과연 효과가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으면 뭣하러 수많은 돈을 들여 그런 일들을 했겠
소?그후로는 우리 일본의 법술사들이 조선에서 마음대로 법술
을 부리고 귀신을 불렀소.
기미히토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다 하지만 자신 역시
토우의 신비한 힘을 직접 겪고 있는 터라 예전처럼 과학적 시각
으로 마냥 부정만 할 수도 없었다
토우와 무라야마 선생님은 어떤 관계가 있었습니까?~
그러나 하토야마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선생님은 다른 법술사들처럼 조선을 함부로 무시하지 않으셨
소. 아니 어떤 면에서는 대단히 두려워 하셨소.
무엇 때문에요?'
조선에는 일본과 다른 그 무엇이 있었소. 아무리 맥을 끊고
혈을 막아도 없어지지 않는, 무언가 신비한 힘이 끊임없이 선생
님을 괴롭혔던 거요.
그것은 귀신의 힘이었나요?'
아니오. 그것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닌, 너무 크고 너무 어려
운 힘이었소. 선생님은 그 힘만이 조선에서 스스로를 지켜낸 유
일한 힘이라고 얘기하셨소. 결국 선생님도 그것 때문에 돌아가
셨지만
무라야마 선생님이 그것 때문에 돌아가셨다구요?~
그렇소. 끝까지 그 힘에서 벗어나지 못하셨소.
무슨 힘이었죠, 그것은?'
나도 알 수는 없소. 다만 돌아가시기 전 선생님은 이런 말씀
을 하신 적이 있소. '아마 역사상 가장 많은 침략을 당한 나라가
있다면 그것은 조선일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큰 나라 중국이나
우리 일본이 틈나는 대로 조선을 침략했지만 결코 무너뜨리진
못했다.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조선 사람들이 싸움을 잘하기 때
문이 아니다. 그들은 늘 패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조선에는 알지
못할 힘이 있다. 그 힘은 뿌리가 있는 것이다 나는 잘못 생각하
여 그 뿌리를 건드리고 말았다 '
그러니까 무라야마 선생님은 그 힘의 뿌리를 건드려 결국은
저주를 받아 세상을 떠났다는 겁니까?'
선생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셨던 것 같소.
토우와 관계가 있진 않을까요?'
참, 그 토우 말이지? 맞았소, 바로 그 토우와 관련되어 있소
선생님은 그 토우가 괴력을 발해 사람을 죽이는 것은 그 큰 힘을
건드렸기 때문이라고 하셨소.
무라야마 선생님은 토우의 저주를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스기하라 씨도 살리셨으니
그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선생님은 토우의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소.
이때 기미히토의 뇌리에 스기하라가 말한 호사이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혹시 호사이란 이름을 들어보셨습니까?~
하토야마는 기미히토의 눈을 들여다보며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상하군요. 스기하라 씨는 자신을 토우로부터 구한 사람은
어쩌면 무라야마 선생님이 아닌 호사이라는 분일 거라고 했는데'
내 말은 모른다는 것이 아니고 말할 수가 없다는 뜻이오.
왜 말할 수가 없습니까?'
나는 아직 수도가 끝나지 않았소.수도가 끝날 때까지는 그
이름을 입에 담지 않는 법이오.
왜요?'
거듭되는 기미히토의 질문에도 하토야마는 입을 닫아버렸다.
할 수 없이 기미히토는 질문을 바꾸었다.
왜 무라야마 선생님은 그 토우를 없애버리지 않았을까요? 물
에 던져버 린다든지
그 이유는 잘 모르겠소. 사람들이 죽어가자 조선에서 급히 돌
아오신 선생님은 조치를 취해 스기하라를 살리긴 했지만 굳이
토우를 없애려 하진 않으셨소. 아마 토우는 큰 힘의 저주를 실현
하는 단순한 도구라고 생각하셨을지 모르지요.
토우를 없애 봐야 워낙 큰 그 힘의 저주를 막을 수는 없다는
뜻이군요.
하토야마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제껏 잠잠하던 그 토우가 지금에 와서 다시 괴력을
발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그것은 나도 알 수 없소.
무라야마의 행적에 대해서는 많은 도움이 되었지만하토야마
도 모든 의문을 해소해 주지는 못했다. 그러나 기비히토는 하토
야마의 얘기를 바탕으로 자신의 추리를 세워나갈 수 있었다.
1. 무라야마는 조선의 기를 꺾는 작업에 앞장섰다.
2. 그러다가 조선의 큰 힘의 뿌리를 건드렸다.
3. 그 힘은 조선에서 스스로를 지켜낸 유일한 힘이다
4. 토우는 그 작업에 참가한 사람들에 대한 그 큰 힘의 저주를
실행하는 수단이었다.
하토야마에게 작별을 고하고 돌아오면서 기미히토는 앞으로
할 일을 생각했다.
우선 무라야마와 스기하라, 그리고 그의 동료들이 조선에서 어
떤 일을 했는가를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는 어째서 그
토우가 지금에 와서 다시 괴력을 발하는가를 추적해야 한다 기
미히토의 뇌리에는 이런 비밀들을 밝혀내려면 우선 스기하라를
만나고 다음으로는 한국으로 가야 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기미히토는 스기하라를 만나기 전에 우선 그가 조선에서 수행
한 업무의 내용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악인이 아니
라도 식민지에서 헌병으로서 행했던 일들을 이제 와서 있었던
그대로 말하기는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더군
다나 토우의 저주를 받을 정도였다면 떳떳치 못한 일이었을 가
능성이 큰 것이다
기미히토는 당시 한성헌병대에서 스기하라와 같이 근무했던
사람들을 찾아 스기하라의 조선에서의 행적을 탐문했다. 모두
나이 든 사람들이었지만 스기하라는 조선 주둔 헌병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높은 계급이었기에 탐문 작업이 그다지 힘들
지는 않았다.
그 사람은 주로 조선의 문화 통치와 관련하여 총독부를 지원
하는 역할을 맡았소.
헌병대에서 문화와 관련하여 총독부를 지원할 일이 뭐가 있
었습니까?'
조선인들은 대개가 무식해서 문화 정책이 뭔지도 모르고 밀
어붙이는 대로 따라오곤 했지만 그중에는 고집이 무척 센 사람
들이 있었소.글줄깨나안다는사람들은무척 다루기 힘들었지
꼬장꼬장한 선비들이나 뼈대 있다는 가문들은 결코 순순히 총독
부의 정책을 따르지 않았다는 말이오. 경찰의 힘만으로는 안 되
는 일이 가끔 있었지. 그래서 헌병대가 필요했소.
스기하라 중좌의 업무 가운데 한국인에게 특별히 원한을 살
일은 없었습니까?'
어찌 없었겠소?'
그러나 구체적인 것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다만 스기
하라가자신이 맡은 작업에 신들린 듯이 열중했다는 것은 여러
사람의 증언으로 확인됐다.
그 사람은 누구보다 앞서 조선인의 정신에 영향을 미치는 전
통과 풍습을 소멸시키는 일을 은밀히 했소. 집안이 대대적으로
신사를 지키며 살아와서 그런지 그는 일본신을 조선의 어떤 종
교보다 우위에 올려놓으려 했소. 그 와중에 문제가 생기곤 했던
것은 사실이오. 하지만 막강한 헌병대의 힘 앞에 현실적으로 누
가 그에게 대들 수 있었겠소?'
파일 침입자
이건 무얼 의미하는 걸까?'
수아는 월리를 잡아내자마자 숨돌릴 겨를도 없이 급히 스탠퍼
드로 돌아가 아슬아슬하게 일주일에 걸친 시험을 쳤다. 그러고
는 다시 뉴욕의 FBI 사무실로 초빙되어 월리의 컴퓨터를 조사하
는 작업을 했다.
작업을 거의 끝냈을 무렵 수아의 작업을 지켜보고 섰던 한 수
사관이 프린터로 뽑아낸 자료를 내밀었다. 이미 수아의 실력을
인정한 그들은 될 수 있는 한 그녀를 활용하려 들었다 수사관이
내민 것은 월리의 범행 준비가 상당한 정도로 진행된 라이언펀
드라는 회사의 파일이었다 그들은 이 파일을 월리의 또다른 범
행을 입증하는 자료로 쓰려 했다.
글쎄요, 해킹에 직접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이
회사의 사업 계획이나 경리 문서 같은 것이겠죠.
파일을 넘기면서 수아는 무신경하게 대답했다. 하나라도 더
알아내어 기소 유지에 이용하려는 수사관과 수아 사이에는 시각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월리의 암호가 아닐까?'
자료의 맨 끝에 수십 개의 숫자가 아무런 규칙 없이 배열되어
있는 것을 보면서 수사관은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월리의 것은 아니에요. 이 앞의 자료들이 모두 지워져 나온
것을 보면 저쪽에서 보안 장치를 해둔 것이네요. 이 숫자들은 월
리가 황급히 그 보안 장치를 깨자 나온 것이구요. 하여간 그쪽
회사의 입장에서는 매우 중요한 서류였겠는데요. 극비 사인이
들어가 있는 거나 패스워드 없이 유출될 경우 자동으로 지워지
도록 한 것을 보면요.
그럼 월리 범행의 입증 자료로 쓰지는 못하나?'
일단 이런 극비 사인이 되어 있는자료가월리의 컴퓨터에 있
었다는 것만으로도 범행 입증은 충분하겠죠.
참, 그렇군. 그런데 이 남아 있는 숫자들은 도대체 무얼 뜻하
는 걸까?~
그 내용이야 알 필요가 있겠어요? 우린 그냥 범죄 행위만 입
증하면 되는 거지.
옆에서 신문 계획서를 작성하던 신참 수사관이 그리 까다롭게
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듯 한마디 거들었다
혹시 분식 결산이라든가 회사의 비자금에 관련된 내용이 아
닌가 해서 말이야 탈세의 유력한 증빙 자료가 되거든.
역시 나이 든 수사관은 달랐다 금융 회사의 극비 파일을 보면
뭐라도 건질 수 있을지 모른다는 노련한 수사관의 감이었다.
마치 암호처 럼 되어 있잖아.
수아는 재빨리 서류를 훌었다.
750hf -825,OOOM -1,155,OOOM -1,0501vf
600M -1,110,OOOM -1,554,OOOM -1412M
750M -142,500M -)99,500M -l8IM
37,500M -322,500M -451,500M -4IOM
2,250M -315,OOOM -441,OOOM -4OOM
다섯 개의 숫자군이 나열되어 있었다.
세상에 이런 걸 보고 내용을 알아낼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요?~
하하, 그렇겠지? 이런 걸 보고 무언가 밝혀내려 한다면 남들
의 비웃음만사겠지?하지만 수아, 이것 하나는 알아주면 고맙
겠어. 내가 볼 때 이 숫자에선 뭔가 범죄의 냄새가 나.그 좋은
머리로 생각을 좀 해줘. 한 건 잡게 해주면 두둑한 포상금이 있
을 거야.
욕심 그만 부리시고 저를 스탠퍼드로나 보내줘요.
그럼 스탠퍼드로 연락할게. 하지만 지금은 회장님이 밖에서
기다리셔 .
정완은 스튜어트와 함께 라운지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수아를
반갑게 맞아 밖으로 나왔다. 가발을 벗고 화장을 지운 수아를 보
고 스튜어트는 상당히 놀란 눈치였다.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의 수
아 옆에서 금발에다 푸른 눈을 가진 스튜어트는 큼직한 인형처
럼 보였다.
대기하고 있던 리무진에 타자마자 정완이 궁금증을 못 견디겠
다는 듯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설명을 해줘 .
호호호, 어리둥절하시죠?'
그래,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고 있어.
아무도 수아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동안 뭘
했던 거야?'
말씀드렸잖아요 들어가 싸웠어요.
어디에 들어가 싸웠단 말이지?'
페닌슬라 파이낸스사의 키 스테이션 안에서요.
아니, 그렇다면 협박자가 스테이션에 침입했었다는 얘긴가?'
모르셨어요? 이미 50번 이상이나 침입 했었는데요.
수아의 말에 모두 깜짝 놀랐다. 그중에서도 스튜어트의 놀라
움은 다른 사람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그럼 그토록이나 자신만만해하던 아메리칸 소프트웨어사의
보안 장치들은 무용지물이었단 말이에요?'
상대는 그런 보안 장치들을 하루에도 몇 개나 만들었다 없앴
다 할 정도의 실력이 있는 사람이에요.
맙소사!
저는 폰뱅킹을 통해 남의 구좌에서 돈을 빼내는 좀도둑으로
위장했어요.상대는 지불 프로그램 전체를 조작해서 회사에 타
격을 입히고 큰돈을 한번에 받아내려 했죠. 결국 우리는 지불 프
로그램에서 마주치게 되어 있었어요.
그래서?'
상대가 조작하면 내가 방해하고 내가 조작하면 상대가 방해
하는 싸움이 며칠 간 계속했죠. 상대는 자만심에 빠져 있었고 영
웅 의식을 갖고 있었어요. 나를 의식적으로 무시했죠. 하지만 어
떤 작업도 해낼 수 없었어요. 그것이 상대를 미치게 만들었어요.
자존심에 상처를 입기 시작했죠. 그런 것으로 미루어보면 상대
는 뿌리 없는 해커가 아니라 MIT 의 전통을 잇는 정통파해커인
지도 몰라요. 그러다 상대는 기회를 잡았어요 혼자 20여 분을
작업할 수 있었죠. 내가 들어가지 않았으니까요. 이제 6분 정도
만 더 작업을 하면 되는데 그때 내가 들어가니까 상대는 다급한
상황에서도 유혹을 느낀 거죠. 내가 지불 프로그램을 불러 다시
원상태로 회복시켜 버리기 전에 자신의 위장 바이러스를 심어놓
고 나가버리려 했던 거예요. 위장 바이러스는 잠복 기간이 있어
보통 때는 발견하지 못하거든요. 저는 늘 침입한 지 78분이
되어서야 지불 프로그램에 들어가곤 했으니까 상대는 제 함정에
걸려들었던 거 예요.
처음에 함정을 파겠다고 했던 것이 그런 의미였나?'
네 .
그렇다면 그 모든 것을 처음부터 구상했단 말이지?~
호호, 그렇다니까요.
수아. 용서해 줘요.
스튜어트는 얼굴이 발개졌다
r미스 스튜어트가 지난번 그 식당에서 저녁을 사준다면요.
그럼요.
그리고 도중에 안 나가버린다면요.
하하하하.
정완의 호쾌한 웃음소리에 스튜어트의 발개진 얼굴이 더욱 붉
게 물들었다
화두
기미히토는 무라야마가 건드렸다고 고백한 그 큰 힘이란 개인
의 원한 같은 것과는 다른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 힘은
스기하라의 행적을 탐문하는 것만으로는 손에 잡히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조선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더 빠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고 말았다. 무라야마 같은 법
술사들이 보는 역사는 학자들이 보는 것과는 다를 것이라는 생
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무라야마의 표현대로 조선에서 스스로를 지켜온 유일한
힘이라는 화두를 풀어낼 역사학자들이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기미히토는 결국 스기하라를 만나 뭔가를 더 얻어낼 수밖에 없
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스기하라를 찾아 덴리 시로 갔다
다시 만난 스기하라는 예전보다는 훨씬 안정된 모습이었다.
기미히토 교수가 왔다 간 후 많은 생각을 해봤는데 내가 그
토우 때문에 너무 긴장했던 것 같소. 당시 동료들이 잇따라 죽음
을 당하는 바람에 굉장히 당황했던 게 사실이오. 하지만 동경대
학교에서 만인에게 공개되어도 아무런 일이 없는 것을 보면 토
우는 이제 힘을 잃었나 보오. 돌아보면 숨어산 지난 세월이 아쉽
기만 하오.
무라야마 선생님과는 조선에서부터 가까운 사이였던 모양이
지요
그랬소. 우리는 조선에서 같이 일했소.
법술사인 그분이 헌병과 같이 일했다는 것이 잘 이해가 안 되
는데 그럴 일이 있었습니까?'
음 어떤 일들은 우리가 같이 해야만 했소.
어떤 일들입니까?'
기미히토의 잇따른 물음에 스기하라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법술사와 헌병이 같이 해야 할 일이란 것이 무엇인지 바로 떠오
르지는 않았지만 기미히토는 뭔가 쉽게 얘기하기 어려운 일이었
을 것으로 짐작하고는 질문을 돌렸다.
일전에 토우를 파내서 일본으로 가져왔다고 하셨는데, 그것
을 발굴할 때 무라야마 선생님도 같이 계셨습니까?'
그랬소.같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그 사람이 시키는 대로 모
든 일을 했지.
그 토우를 발굴하게 된 동기는 무엇이었습니까?'
나는 그 토우를 파낸 동기에 대해서는 잘 모르오. 다만 무라
야마가 그 당시 하던 일은 주로 풍수 이론에 근거하여 조선의 맥
을 다루는 일이었소. 그래서 그 토우도 풍수적 동기에 의해 파헤
쳐진 것이 아닌가 짐작할 뿐이오.
무라야마 선생님은 조선의 풍수에 대해 정통하셨던 모양이군
요?'
이르다 말이오. 지난 몇년이던가, 한국인들이 고속도로를 만
들면서 허겁지겁 무라야마의 조선의 풍수라는 책을 구해서는
신주 모시듯 하며 현장으로 들고 다녔소. 한반도에서는 고려든
조선이든 풍수에 근거해서 도읍을 정했소.그렇게 정한 도읍도
풍수적으로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다시 치료를 했소.
그토록 오랫동안 풍수를 중요시하던 조선인들에게는 어째서
제대로 된 책 한 권이 없었을까요?무라야마 선생님의 책을 대
통으로 여길 정도니 말입니다.
거의가 중국 책들이었지. 물론 조선인들이 지은 것도 있지만
무라야마의 책이 학문적 시각에서 가장 체계적으로 되어 있소.
특히 그 책은 고려와 조선의 갖가지 풍수적 경험을 기록하고 있
어 살아 있는 풍수책이라 할 만하오.
그랬군요 그러나 그 책은 총독부의 촉탁을 받아 통치 목적으
로 씌어진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 하더라도 잘되었소. 당시 우리는 조선의 방방곡곡에
사람들을 파견하여 지방마다의 풍수 이야기를 집대성했소. 특히
그 전설의 풍수책 도선비기를 한번 찾아보려고 했지.
전설의 풍수책이라구요?'
그렇소. 신라 말의 승려인데 한국 최고의 풍수로 꼽히는 도선
이 지은 것으로 요즘에 이르는 일까지도 예언을 했다는 책이오.
그러나 그런 예언이 들어맞을 리가 있겠습니까? 신라 말이라
면 지금으로부터 1천 년도 더 된 옛날인데.
기미히토 교수, 예언에 있어서 5백 년 뒤와 1천 년 뒤의 차이
가 뭐라고 생각하오?'
글쎄요, 그러고 보니 큰 차이가 있을 것 같지 않군요.
그렇다면 그 도선이란 인물이 5백 년 뒤의 일을 예언하고 그
것이 정확히 들어맞았다면 1천 년 뒤의 예언도 맞다고 보는 것
이 당연하지 않겠소?'
그 도선이란 승려가 5백 년 뒤의 일을 예언했다는 말씀입니
까?
그렇소. 정확하게 예언했소.
무엇을 예언했습니까?'
이미 신라 말에 그는 그 다음 다음 왕조인 조선의 도읍지가 한
성이 되리라는 것과 왕조의 주인은 이씨가 되리라는 것을 예언
했소. 즉 '계왕자이 이도어한양(繼T者李 而刻於漢陽)' 이라고 했
단 말이오. '왕업을 이을자는 이씨로서 도읍은 한양에 정할 것
이다' 라는 뜻이니, 이 정도면 우연이라 할 수만은 없지 않겠소?'
그렇겠지요. 그러나 그 예언이 과연 사실인지는 과학적으로
검증돼야 하지 않을까요?'
글쎄, 과학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 검증일지는 모르
지만 이미 고려 시대에 도선비기를 가진 자는 심하게 처벌을
받았소. 게다가 고려 왕실에서는 매년 한성에 자두나무를 잔뜩
심었다가 다 자라면 사람을 시켜 모두 베어버리게 하곤 했소. 이
것을 풍수 용어로는 염승이라 하는데 바로 이씨의 기가 융성하
는 것을 막으려는 풍수적 치료법이오. '이(李)' 라는 한자의 뜻이
바로 자두나무니 까.
그러한 것이 정사에 기록되어 있다는 말씀입니까?'
조선에 있어 정사가 뭔지는 잘모르겠지만서거정이라는조
선 초의 대학자가지은 필원잡기와 이중환의 택리지에 기록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충분히 믿을 만하다고 보오.
스기하라는 뜻밖에도 조선에 대해 매우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그렇다면 조선의 예언이란 대단한 것이군요.
기미히토는 내심 매우 놀라고 있었다. 5백 년 전에 이씨가 왕
이 되어 한양에 천도하리라는 것을 어떻게 알아맞힐 수 있단 말
인가. 이런 예언들에 대한 기미히토의 종래 견해는 매우 회의적
이었다. 예언이란 맞으면 그만, 안 맞아도 역시 그만인 속임수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이렇듯 정확하게 들
어맞은 예언을 대하자 놀라움이 더했다.
이런 기미히토의 모습을 보자 스기하라는 더욱 당당한 표정으
로 자신 있는 목소리를 밀어냈다.
이씨의 한양 천도와 관련해서는 또 하나의 예언이 있소.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양으로 천도하는 데에는 두 사람의 법술사가 팽팽하게 대
립했소. 한 사람은 정도전, 또 한 사람은 무학이라는 승려였소.
두 사람은 한양이 도읍지로 그지없이 좋다는 데는 의견이 같았
지만 궁궐 터를 앉히는 데에는 의견의 차이를 보였소.
궁궐 터를 앉힌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대궐의 방향을 정하는 것이오. 무학은 인왕산을 진산으로 하
고 북악과 남산을 좌우용호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정도전
은 그럴 경우 동면하게 되는데 고래로 군주는 모두 남면하여 정
사를 보았다고 주장했소. 결국 정도전의 말대로 북악을 전산으
로 하는 임좌병향으로 결정되었는데, 이때 무학이 탄식하며 말
하기를 앞으로 2백 년 후에 나의 말이 헛되지 않음을 알게 될 것
이라고 하였소.
무학도 예언을 했군요.
그러나 사실 그것은 무학의 예언이 아니었소 무학은 단지 신
라의 명승 의상대사의 비기를 인용했을 뿐이오.
그것은 또 어떤 내용입니까?'
신라의 고승 의상대사는 그의 산수비기(山水秘記)A에서, 도
읍을 택할 자가 승려의 말을 믿고 들으면 국운의 연장을 바랄 수
있으나 만약 정(鄭)씨가 나와 시비를 품으면 세(焉世)가 되지
못해 찬탈의 화가 생기고 2백 년 내외에 국운이 탕진할 위험이
있다고 했던 것이오.
그래서 결국 세가 되지 못해 찬탈의 화가 생겼습니까?~
그렇소. 조선은 출발하자마자 이방원의 난이 있었고 세조의
왕위 찬탈이 있었소. 또한 2백 년이 되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 일어나지 않았소?~
기미히토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 도선비기는 찾았습니까?~
아니, 찾지 못했소.
스기하라는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당시의 기억을 반추하는
듯했다. 한참이 지난 다음 이윽고 눈을 뜬 스기하라는 다시 본래
의 화제를 끄집어냈다.
풍수적 결함을 막기 위해 치료하는 데에는 아까 말했던 염승
말고도 비보라는 것이 있소.
그것은 무엇입니까?'
기미히토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기가 허한 곳을 보강하는 것이지 즉 인위적으로 풍수의 명당
을 만들어내는 것이오. 조선에는 염승과 비보가 많았소.
비보는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비보의 방법은 수없이 많소. 보통 탑을 만들거나 새로 산을
쌓거나 돌을 놓거나 나무를 심기도 하오.
그럼 그 토우도 염승이나 비보의 일종입니까?'
확실치는 않지만 아마도 그런 종류의 목적을 가진 것 같소
조선의 도읍인 한성은 많은 풍수적 결함을 갖고 있소. 그들은 이
것을 막기 위해 여러 가지 염승을 마련했소, 예를 들면 경복궁
앞의 해태는 본시 물짐승이라 건너편 관악산의 화기를 막으려는
목적으로 놓이게 되었소. 관악산은 강렬한 화기를 가진 산이기
때문이오. 이 관악산을 막기 위해 조선인들은 남대문 옆에 남지
(南池)라는 이름의 연못을 파놓기도 했소. 또한 남대문의 이름을
일부러 숭례문이라 짓고 다른 문들과는 달리 문액도 세로로 내
걸었소. 그 까닭은 숭(崇) 자나 례(禮) 자는 모두 불(火)과 관련
이 있는 글자이기 때문인데 그 불이 활활 타오르는 형상을 만들
기 위해 문액을 세로로 내걸었던 것이오. 불로써 불을 제압한다
는 풍수적 치료법이지. 또 동대문은 원래 흥인문이었지만 임진
왜란이 끝난 후 지(之) 자를 덧붙여 흥인지문이라고 했소.
기미히토는 감탄하며 물었다
그건 또 왜지요?.
다른 문들이 세 글자인 데 반해 이렇게 네 글자의 이름을 붙
인 까닭은 임란후 동방이 낮고 허술해서 함락되었다고 생각하
여 이 허점을 보강하기 위해서라고 하오. 풍수상 지(之) 자는 산
맥의 모양을 나타낸 문자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실제로 산을
쌓는 노력 대신 산맥을 나타내는 문자 지(之)를 사용했던 거요.
조선은 참으로 풍수의 나라라고 할 만하군요.
기미히토는 스기하라의 얘기를 들으며 자신의 인생은 어떤 것
이었는가를 생각했다. 과학이라는 잣대만으로 살아온 삶이었다.
과학으로 검증이 안 된 것은 무조건 의심하고 무시해 온 자신의
인생은 혹시 세상의 반만을 알고 지내온 절름발이 삶은 아니었
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흐트러졌다.
동양에 살면서도 동양의 모든 문화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서양
의 과학을 맹목적으로 추종해 온 자신이 부끄러웠다. 당장 눈앞
에 있는 스기하라와도 자신은 너무나 다른 세계를 살아온 것이
다. 그리고 자신은 이제껏 그들이 보고 생각해 온 모든 것을 부
인하는 과학으로 학문과 인생을 쌓아온 것이다.
기미히토는 쫓기듯 물었다.
그 토우는 무엇의 염승을 위한 물건이었기에 무라야마 선생
님은 조선인들이 일부러 묻어둔 것을 굳이 파냈을까요?'
스기하라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나도 확실한 것은 알지 못했소. 다만 무라야마의 눈빛이 여느
때와는 달리 너무도 비장해 보여 그것이 그때까지 해왔던 일과
는 비교도 안 되게 중요한 작업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
었을 뿐이오.
당시 헌병 중좌인 스기하라 선생님께도 얘기하지 않았을 정
도라면 결코 보통의 일은 아니었겠군요?'
그렇소. 아마 총독 각하와 무라야마를 비롯한 몇 사람만이 알
고 있었던 극비의 작업이었을 것이오.
당시 작업을 하면서 매우 궁금하셨을 텐데 짐작조차 한 일이
없었나요?'
다시금 스기하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어본 적은 있었지만 무라야마는 고개를 가로저었을 뿐이
오. 하지만 그패 무라야마가 작업 중간에 혼자말로 뭐라고 한 게
있긴 한데
스기하라가 양미간을 좁히며 무언가 그때 기억을 떠올린 듯했
지만 별것 아니라는 듯 말을 맺지 않자 기미히토가 재촉하듯 물
었다.
그게 무엇이었습니까?'
이것만 깨면 조선은 완전히 무너져.
기미히토는 스기하라를 만나고 나서도 여전히 토우에 대한 의
문이 시원스럽게 풀리지 않았다 기미히토는 스기하라의 이야기
를 차근차근 정리해 보았다.
무라야마는 조선에서 총독을 비롯한 몇 사람만이 아는 극비의
작업을 수행했다 그는 먼저 토우를 파헤치지만 그 궁극적 목표
는 토우의 염승을 풀고 조선에서 제일가는 그 무엇인가를 해치
려는 것이었다. 무라야마가 '이것만 깨면 조선은 무너져'라고
얘기한 그것은 하토야마의 얘기에 따르면 조선에서 스스로를 지
켜온 유일한 힘이었다.
'조선에서 스스로를 지켜온 유일한 힘:
그것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신비한 체험
기미히토 교수님 , 여행은 어떠셨습니까?'
너무 짧은 거리라 여행이랄 것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일단 짐을 꾸리면 피곤한 법이죠.
아닙니다. 정말 여기 오고 싶어 병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그러셨다면 원없이 많이 보고 가십시오.
모든 걸 알게 될 때까지는 절대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그러려면 한국 사람이 되셔야 할 텐데요.
못 될 것도 없죠.
하하하.
둘은 웃었다. 그러면서도 기미히토는 한 아이를 떠올렸다 어
린 시절 초등학교를 같이 다니던 한국인 아이였다. 징용 온 노무
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 아이는 무척이나 일 본인으로 행세하고
싶어했다. 자신이 일본인 조종사의 아들이라고 거짓말하던 그
아이는 어느 날 자신의 신분이 탄로나자 수업 도중에 교실을 나
가버렸다. 다음날 학교에 와서 울부짖는 그 아이의 어머니를 보
고 기미히토는 그 아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린 것을 알았다.
유년 시절 내내 기미히토는 괴로운 기억에 시달렸다. 그 아이를
놀리는 데 앞장섰던 것이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지금 제게는 어느 나라 사람이냐 하는 것보다 무엇이 옳으냐
하는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한평생 과학을 신봉하며 살아왔는
데 과학의 법칙 바만에 엄연히 존재하는 세계가 있다면 나는 인
생을 헛산 게 되고 맙니다. 무당이니 풍수니 하는 것의 정체를
파헤치는 일이 지금의 제게는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김포공항에서 서울 시내로 들어가는 자동차를 탄 기미히토는
이제껏 해왔던 그 어떤 여행보다도 이번의 한국 여행이 중요하
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기미히토의 얼굴이 반대편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광선을 받아 한결 다부지게 보였다.
하토야마와 스기하라를 만나본 기미히토는 토우의 정체를 파
헤치려면 일본에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
는 곧 동경대학교의 조선사연구실을 찾아가 한국의 교수들을 소
개받았고 곧장 한국으로 출발했던 것이다.
이제 그에게는 토우와 그 배후의 조선의 힘을 밝혀내는 일이
인생의 숙제가 되어 있었다.
김일성의 죽음을 예언해서 유명해진 무당이 있지요?~
한국에 오기 전 나름대로 공부를 한 기미히토는 예정했던 관
광이 끝나면서부터 의욕적으로 달려들었다. 그가 가장 관심을
가진 것은 무당이었다
네, 있었지요.
그 구체적 과정은 어땠습니까?'
거기에는 그 예언을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재미있는 일
화가 있습니다.
그 일화는 검증받은 것입니까?'
대학에서 국문학을 강의하면서 무속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는
변익중 교수의 눈길이 기미히토의 얼굴에 멎었다. 일화를 듣기
도 전에 객관적 검증의 여부를 물어오는 기미히토의 태세가 심
상치 않았다. 동경대학 조선사연구실의 교수로부터 얘기를 전해
듣기는 했지만 기미히토 교수는 한국의 정신 세계에 상상 이상
으로 집착하고 있었고, 특히 그것을 과학적으로 분석해 내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무속적 일화란 것은 대개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인식되게 마
련입니다. 대개의 경우 있지도 않은 신통력을 선전하기 위해서
당사자가 지어내죠. 그러나 우연히도 이 경우는 기자가 개입돼
있습니다 아마 믿어도 될 것 같군요.
기미히토의 얼굴에 반가운 기색이 번졌다 사실 기미히토 교
수가 집착하고 있는 것은 일화의 내용이 아니었다. 그는 그 형
식, 즉 비과학적인 것의 진실성 여부에 집착하고 있었다. 이것은
그가 전공인 컴퓨터를 제쳐두고 토우에 집착하는 것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기미히토 교수는 이 세계에 대한 자기 인식의 틀을 검증하고
싶었다. 이번의 여행도 사실은 너무도 철저히 과학 일변도로 살
아온 자신의 인생에 대한 중간 정검 같은 것이었다
들어보고 싶습니다.
그 무당이 김일성의 죽음을 예언한 것은 김일성이 죽기 이틀
전입니다. 당시 김일성은 김영삼 대통령과 정상 회담을 갖기로
되어 있었고,그는 묘향산의 집무실에서 한창 정상 회담 준비를
하던 때라 누구도 그렇게 갑자기 급사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랬지요. 그는 갑자기 사망했지요.
그 무당은 무속 연구를 하는 한 교포 여인의 방문을 받고 대
화를 하던 중 갑자기 영감을 얻어 김일성이 이틀후인 음력 5월
30일에 사망한다고 단언을 했던 겁니다.
김일성은 정말 음력 5월 30일에 사망했습니까?~
그랬습니다 정확하게 그날 사망했습니다.
음 교수님은 이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믿느냐는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아마도 이 일화는 김일성이 죽고 나서야공개되
었겠지요?'
몇몇 사람 사이에 얘기가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모두에게 알
려진 것은 김일성 사후겠지요.
왜 그 무당은 갑작스럽게 김일성의 죽음에 대해 얘기를 했을
까요? 또 들었다는 사람 역시 무속을 연구하는 사람이라 하셨
죠? 그렇다면 객관성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지 않을까요? 아까 얘
기하셨던 기자는 어디에서 등장합니까?'
기미히토는 철저히 파고들었다
그 무당이 불쑥 김일성의 죽음을 얘기했던 것은 아닙니다. 사
실 그 예언은 몇 달 전인 1994년 4월에 시작됩니다. 그 무당의
집에 한 젊은이가 찾아왔습니다 젊은이는 신분을 밝히지 않고
한 사람의 사주를 들이 밀었습니다.
변 교수는 기미히토에게는 철저히 논리적으로 얘기를 해야 한
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미 단순한 흥미의 수준이 아니라 기어코
진실을 가리고야 말겠다는 오기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젊은이는 그 사주를 이웃집 아저씨의 것이라고 했고, 그 무당
은 아무런 의심 없이 사주를 보고 점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그 무당이 풀이했던 점괘가 어딘가에 있을 겁니다. 잠간만요.
변 교수는 책상 서랍에서 스크랩북 하나를 꺼내왔다.
병색이 짙고 실권에서 물러난 형국입니다 올해 음력 2월 아주
엄청나게 안 좋았겠는데요. 뼈 마디마디에 병이 침투해 보약을 먹더
라도 회복할 수가 없습니다. 심장이 나쁘고 혈압이 높고 당뇨기가 있
습니다. 이 노인께선 빠르면 올해 음력 56월, 늦으면 동지섣달에
하직할 것 같습니다. 설사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목숨을 구하더라도
밖으로 나다니기 힘들 것입니다. 내년부터 이분의 권력은 다른 사람
에게로 갈 것입니다
사주 자체만으로는 어떻습니까? 어떤 운명을 타고난 사주입니
까?
생사 여탈권이 있는 사주입니다. 임금님 사주이지요
여자 관계는 어땠을 것 같습니까?
-복잡했을 것입니다. 하나 둘이 아닙니다. 한 번 상처해서 두 번
장가는 갔겠는데 세 번. 네 번 장가가지는 못합니다
자식은 어떻습니까?
-제 점에서 나오는 자식은 아들만입니다. 딸은 나오지 않습니다
죽은 아들을 포함해서 네 명이었습니다. 죽은 아들은 하나 같습니다
실상은 마음이 여리고 착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눈 하나 깜짝 않고
사람을 죽일 수 있습니다
부모는 어떤 분이었습니까?
-부모는 대단한 분은 아니었겠습니다. 아버님은 일찍 돌아가셨
는데요. 이분은 부모 덕을 입은 게 없습니다. 개천에서 용 난 격으로
혼자 일어난 운세입니다. 부모에게서 교육을 받는 식으로 평범하게
자랄 수 없었기 때문에 굴욕감 등을 느껴 원래 착했던 심성이 변한
것 같습니다
그 젊은이는 기자였고, 사주는 김일성의 것이었던 모양이군
요?'
기미히토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기자는 다시 말없이 한사람의 사주를 내놓았습
니다.
변 교수는 다음 장을 펼쳐 보였다.
아까 그분과 부자 관계인가요? 아버지가 없으면 큰일을 할 수
도 있는데 아버지의 압력으로 꿈을 펴지 못하겠습니다. 재물은 있으
나 덤으로 딸려가는 사람 자기 뜻대로는 한 번도 해보지 못하고 기
를 펴지 못한 사람입니다. 아버지에게 순종. 복종은 하겠지만 많이
부딪힐 것입니다 천심은 좋은데 아버지가 너무 큰 분이라 지
금 이분은 사형 선고가 내렸다고 할 정도로 상당히 좋지 않습니다.
이분의 사주는 아버지만 못합니다
그 사주는 누구의 것이었습니까?'
김정일, 김일성의 아들이죠.
음
사주와 예언이 얽혀 있는 얘기였다 그러나 기미히토에게는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과학의 시각으로 보면 사주도 예언도 믿
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고 둘 중의 어느 하나만 진실이라 하더
라도 과학만을 신봉해 온 자신의 지식 체계는 무너질 수밖에 없
는 일이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그 무당은 사주를 바탕으로 점을 쳤습니
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이 같은 사주를 보고 점을 친다면 결과가
어떻게 나올까요?'
좋은 질문입니다. 그 기자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다른 점술가
에게 그 사주를 가지고 가서 물었습니다. 역시 기자의 신분과 사
주의 주인이 김일성이라는 사실은 숨겼죠.
올해 돌아가시겠는데요. 올 음력 7월이나 9월을 넘기시더라도
내년 7웜이나 9월에는 돌아가십니다 사고로 돌아가시는 것은 아니
고 노환의 형태로 돌아가실 것입니다.
-이분의 자식은 몇이나 되겠습니까?
-점괘대로 하면 죽은 자녀를 포함해서 7남매입니다. 틀렸다면
숨겨놓은 자식이 있겠지요. 아들과 딸이 각각 한 명씩 죽은 것 같습
니다.
부모 운은 어떻습니까?
-이분의 부모는 이 양반만 못합니다. 이분은 그냥 농가에서 태어
났겠는데요. 개천에서 용 난 모습입니다. 이분을 낳은 부모가 있고
기른 부모가 따로 있겠습니다
결혼 생활, 여자 관계는 어떠했겠습니까?
요 새끼(동자신의 목소리이다) , 여자라면 모두 관계하는 놈이구
나. 계집질을 많이 했겠는데. 관계를 가진 여자, 즉 부인은 일곱인데
이미 셋이 죽었습니다. 머지않아 네 번째 부인이 죽는데 그분의 넋이
남편을 데리고 갑니다. 넷째 부인의 죽은 넋이 남편을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사주대로라면 이분의 운명은 91세까지이나 죽은 부인이
데려가, 사고는 아니지만 명대로 못 사는 것이기 때문에 비명이라고
도 할 수 있습니다.
-사주 자체로는 어떤 일을 할 사람입니까?
-아주 큰일을 할 사람입니다. 나랏님이 되었더라도 높은 나랏님
이 되 있겠는데요. 재물이 있고 여자가 많고 장수하고 권력을 잡을
수 있으니 아주 큰 나랏님이 될 사주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품었던
뜻을 다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하직하겠습니다. 이분이 한 일은 큰
것이지만 자기가 품은 뜻을 다 이루지는 못합니다
성격은 어떻습니까?
다양합니다. 이분의 통솔력은 인자함과 결단력에서 나왔습니
다. 원래는 인자한데 안 되겠다 싶으면 결단력을 발휘하는 분입니다.
또 수하에 부하가 잘 들어와서 삼합(三合)을 갖추었습니다. 인자함
과 결단력, 좋은 부하의 삼합이 갖춰진 형국입니다. 그러나 하늘이
기울었습니다. 백퍼센트 정도의 확률로 금년에 돌아가시겠습니다.
이 사람이 김일성인데 전쟁을 일으키겠습니까?
못 일으킵니다.
이 기자는 다시 김정일의 사주를 넣었습니다.
빛이 나는 일이 있겠습니다. 감옥소에 있는 사람이면 출감을 하
겠고 지위에 있는 분이면 승진하겠습니다. 날개 다는 형국입니다. 그
러나 아버지만 못한 사주입니다
- 월간조선 1994년 4월 이정훈 기자
각각 다른 두 사람의 무당이 본 점괘는 놀랍도록 일치했다. 기
미히토는 머리털이 쭈뼛해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우
연의 일치라고 생각했다. 무당들 아니라 누가 봐도 건강하고 장
수한다고 말하기에는 김일성의 나이가 너무 많지 않았는가.
기미히토는 이런 정도의 미신이나 우연에 물러서서는 안 된다
고 생각했다. 자신이 태어나 지금까지 신봉해 왔던 과학이 여기
서 무너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들은 사주나 팔자에 관한 책을 보고 예언을 하는 것입니
까?'
책을 보는 경우도 있지만 본인의 영감에 의해 예언을 하는 경
우가 많습니다.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그렇게 특출한 능력을 갖게 되는 것입
니까? 타고나는 것입니까?'
타고나는 것은 아닙니다. 대대로 무당의 가계를 잇는 세습무
가 있긴 하지만 거의 없어지고 지금의 무당들은 대부분 강신무
입니다.
강신무란 것은 무엇입니까?'
문자 그대로죠. 신이 내려 무당이 되는 것입니다.
신이 내린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강신 체험을 하는 사람들은 먼저 무병을 않습니다. 이 병은
매우 독특해서 까닭 없이 시름시름 앓기 시작합니다. 대개 밥을
먹지 못하고 몸이 말라 허약해지며 마음은 들떠 안정하지 못하
고 꿈이 많아집니다. 결국 미쳐 산이나 들, 거리를 헤매고 다니
면서 중얼거리죠. 대개 상당 기간 이런 상태로 지내게 됩니다.
병원에서 고칠 수 없나요?'
병원에 가면 오히려 증세가 악화되는 것이 특징입니다. 의사
들은 병명을 대찌 못하고, 심하게 앓는 경우에도 치료를 포기하
고 집으로 돌려보낼 따름입니다. 결국 환자는 치료를 포기한 상
태에서 주변의 권유를 받아들여 무당에게 가봅니다. 무당은 첫
눈에 진짜 정신질환자와 신이 들린 무병환자를 구분합니다 진
짜 정신질환자에게는 잡귀를 쫓는 굿을 하지만 이 무병환자에게
는 내림굿을 해서 무당이 되게 합니다 제자로 받아들이기도 하
지요.
그 다음부터 특출한 능력을 갖게 된다는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무당이 가진 특출한 능력은 어떤 것들입니까?'
기미히토가 호기심 가득한 눈을 빛냈다.
원하신다면 한번 보러 갈까요?'
기미히토의 마음을 읽은 변 교수가 흔쾌히 제안했다.
네. 정말 한번 보고 싶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찔 변 교수는 기미히토를 데리고 나섰다. 서울
근교의 한 산이었다. 기슭을 지나 조금 똘랐을 즈음, 어디선가
북소리가 들려왔다. 위로 오를수록 북소리는 더욱 크게 들렸다.
마침내 가파른 산길을 돌아들자 아침인데도 촛불을 두 대 밝혀
둔 바위가 보였다.
북소리 사이사이로는 간간이 여자의 흐느낌이 들렸다 그 속
에 역시 여자의 것이면서도 굵고 탁한 목소리가 때로는 높게, 때
로는 낮게 섞여 나오고 있었다. 굵은 목소리의 주인공이 무당이
었다.
무당은 두 가지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한 번은 흐느끼고 있는
여자에게, 또 한 번은 누구에겐지 모르겠지만 무언가를 열심히
묻고 있었다.
지금 저 무당은 혼을 불러놓고 대화를 중계하고 있습니다.
혼과 대화를 한다구요?'
기미히토는 변 교수의 얘기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세
상에 혼이 어디 있단 말인가 설사 있다 한들 살아 있는 인간이
어떻게 대화를 한단 말인가. 강신무가 앓는다는 무병은 그렇다
치더라도 혼을 불러 대화를 한다는 사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이 아닌가.
그러나 변 교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설명을 계속했다.
지금 목소리가 바뀐 것은 다른 혼을 불러냈기 때문입니다.
무당은 이제 남자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그 남자
의 목소리를 듣자 젊은 여인의 흐느낌이 더욱 서러운 통곡으로
변했다.
아마 죽은 부친의 혼을 불러낸 것 같군요.
그런데, 이상하군요. 저 여자무당이 이젠 남자 목소리를 내
고 있지 않습니까?'
단순한 남자 목소리가 아닙니다. 죽은 아버지의 목소리를 내
는 거지요.
뭐라구요? 죽은 아버지의 목소리를 네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평소에 전혀 알지 못하던 사람의 동작이
나 습관이 그대로 배어나오기 도 합니다.
기미히토는 어떻게 추스를 수 없는 커다란 혼란이 덮쳐오는
것을 느꼈다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부정하고 싶지
만 눈앞에서 번연히 일어나고 있는 사실이 아닌가
일본에도 수많은 귀신이 있고 그들을 모시는 신사가 있지만
이렇듯 신비한 체험을 한 적은 없었기에 기미히토는 귀신이란
그냥 장난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목전에서 벌어
지고 있는 광경을 어떻게 장난이라 할 수 있을 것인가.
젊은 여인은 더욱 큰소리로 통곡을 하더니 종내는 목을 놓아
버렸다.
오십대로 보이는 무당은 통곡하는 여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야
릇한 목소리로 굿거리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넋을 모시러 나가세
넋을 모시러 나가세
피기 젓대 사민 육각 징 장 참겨들고
영정 낵기 가자스라
혼정 낵기 가자스라
子망제 앞을 실고 신망제 뒤를 따라
망세님의 넋을 모시러 가자스라
이윽고 무당은 여인을 부축해 일으키더니 잠시 나지막한 목소
리로 무언가를 설명하면서 말했다.
화덕벼락장군님, 이제 술 한잔자시고 돼지머리 한점 드시고
화를 풀어주셔요. 앞으로는 조상님 잘 모시고 부모 잘 모시고 산
다고 맹세했으니 제발 화를 푸시고 이 불쌍한 젊은 여인 잘 좀
보아주셔요.
연방 춤을 추며 빌던 무당은 갑자기 신이 들렸는지 삼지창을
들어 돼지머리를 푹 찔렀다. 시퍼렇게 갈아둔 삼지창은 관통하
다시피 돼지머리를 푹 뚫고 들어가 박혔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
이 떡시루를 세우고 그 위에 널판지를 깔자 무당은 삼지창을 세
우더니 그 위로 펄쩍 뛰어 올라갔다
용케도 쓰러지지 않고 그 위에서 한참 춤을 추던 무당은 그 밑
으로 남자 두 사람이 커다란 작두를 놓고 어깨로 받치자 다시 작
두날 위에 서서 연신 무언가를 중얼거리면서 춤을 추었다. 날카
로운 작두 위에서 맨발로 펄쩍펄쩍 뛰면서 춤을 추는데도 피 한
방울 나지 않는 것이 기미히토는 너무나 신기했다.
저 것은 연습으로 가능한 건가요?~
글쎄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아마 신이 통해서 저런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군요.
신이 통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건가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저런 일을 하는 무당은 나름대로 자
신감이 있어서 저 시퍼런 날 위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자신이 모
시는 신이 이런 것쯤이야 해주겠지 , 보호해 주겠지 하는 자신감
말입니다. 일단 그들이 그렇게 마음을 먹으면 다치기는커녕 다
른 사람까지 그렇게 전염을 시키지요.
다른 사람을 전염시킨다구요?~
나는 그런 모습을 수없이 봤습니다. 평범한 동네 여자 중에도
무당 옆에서 구경을 하다가 신이 터지면 같이 올라가 춤을 추어
대는 경우가 있는데, 자신이 한 번도 추어 보지 못한 춤을 저 시
퍼런 작두 위에서 어쩌면 그렇게도 정신없이 추어 내는지 두 눈
으로 보면서도 도저히 믿어지지 않더군요.
무당이 아닌 보통의 여자가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런 것은 알고 보면 별게 아니죠.
변 교수의 말에 기미히토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무슨 소립니까, 별게 아니라뇨?'
신이 내리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라는 거죠.
기미히토의 표정이 자못 심각해졌다.
그런데 무당들이 모시는 신은 어떤 신입니까? 전지전능하고
천지를 창조한 유일신입니까?'
아닙니다. 처음 내림굿을 할 때 모시게 되는 신이지요. 칠성
님, 서산대사, 사명대사, 천신대감, 부처님, 옥황님, 일월성신,
화덕벼락장군, 대신할머니 , 산신령 등 다양합니다.
수호 사자
기미히토는 변 교수의 설명을 들으면서 역시 한국에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토우라는 존재를 알게 되면서 보이지
않는 세계의 신비가 차츰 가슴속에 자리잡았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사주가 두 무당에게서 거의 똑같이 나오늪
것은 일면 과학적 검증이라 할 만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같은 조
건을 부여했을 때 같은 반응이 나오는 것이 과학이라면, 김일성
이라는 동일인의 사주를 넣었을 때 비슷한 절제가 나오는 것은
일견 과학적 체계와 궤를 크게 달리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기미히토는 이런 사람들을 통하면 토우의 정체를 받아내는 일
이 어려을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변 교수에게 자신이
겪었던 토우에 대해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총독부에서 했던 일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토우가 무
언가의 염승이었을 거라고 스기하라 씨는 추측하시더군요.
그러나 기미히토의 설명을 다 들은 변 교수는 아무 대답 없이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비로소 눈
을 뜬 변 교수는 약간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그것만 깨면 조선은 무너진다고 말했답니까?'
그렇습니다.
또 그것이 조선에서 스스로를 지켜온 유일한 힘이라고요?'
네. 무라야마의 제자 하토야마로부터 들은 얘기입니다.
아,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군요. 그들이 모든 자료를 없
애버렸으니 이제 와서는 짐작조차 할 수가 없군요.
그들이 라면?'
총독과 무라야마를 비롯한 식민 통치자들 말입니다.
아까 그 무당들에게 물어보면 모를까요?'
변 교수는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크기가 다른 일입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사주를 보고 점을 치는 정도의 일이 아니란 뜻입니다. 수천
년 동안 나라를 이어온 정기에 해당하는 부분일 겁니다.
무라야마가 그 작업을 해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을까요?~
짐작할 수 없군요. 어쨌거나 그날 수호 토우를 파냈다면 일단
1차 작업은 성공한 것 아닙니까?'
수호 토우라구요'~
그렇습니다 그 토우는 염승이 아니라 수호 사자입니다.
무엇을 지키는 사자였을까요?'
그것을 확실히 알 수는 없습니다만, 예로부터 진귀한 보물은
기가 허한 방위에 수호 사자를 두어 지키게 했습니다. 수호 사자
의 종류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토우를 땅에 묻었을 정도
면 보통의 보물이 아닌 건 확실한 것 같군요. 단순한 물건이 아
니란 얘기지요.
그렇다면 어떤 종류의 보물이었을까요?~
신력이 있는 범상치 않은 보물일 겁니다. 그 토우에는 물론
신력에 의한 주문이 들어가 있었겠죠.그래서 괴력을 발휘했을
겁니다.
토우가 파헤쳐졌다면 그 보물은 파괴된 것으로 보아야 할까
요?'
글쎄요, 그것은 모르겠습니다.
무라야마는 그 보물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을까요?'
거기에는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무라야마가토우를 파헤치
는 등의 행위를 한 것으로 보면 그는 그 큰 힘을 깨려고 했을 겁
니다. 그러나 그는 토우를 파헤쳤을 뿐 그 힘의 실체를 파괴하지
는 못했죠.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지요?'
힘의 실체가 없어졌으면 토우도 괴력을 잃었겠지요.
아, 그렇군요.
기미히토 교수의 얘기에 따르면 무라야마는 죽어가면서도 그
힘의 실체를 밝히지 못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큰 힘이 무엇인지 정말 궁금해지는군요.
변 교수로부터 이야기를 전해들은 조세형 교수는 며칠 동안
망설이고 있었다.
토우와 관련된 지난날의 비밀에 대해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그는 몇 사람의 동료와 더불어 찾아볼 수 있는 기록은 모두 샅샅
이 뒤졌다. 그러나 그토록 극비리에 행해졌던 일이 기록에 남아
있을 리 없었다 따라서 그는 온갖 지력을 짜내어 무라야마가 했
던 말의 의미를 알아내려 했으나 추측조차 할 수 없었다.
변 교수는 변 교수대로 법술사들을 통해 토우의 내력을 알아
보았으나 역시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시간이 꽤 흘러 초조해진 조 교수의 뇌리에 한 사람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사도광탄
함흥차사를 뒤집어 생각했던 사람 그리하여 삼각산을 헤매는
이태조의 혼을 달래야 한다던 그 사람이라면 무엇인가 짐작해
낼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조 교수의 뇌리를 스쳤다.
그러나 자신은 사도광탄의 주장을 실소에 부치고 와버리지 않
았던가.그때 그는굿이 영험이 있고 칠성님이 영험이 있고산신
령이 영험이 있다고 했다 자신은 무엇이 우스워 그 얘기에 그렇
게 웃어버렸을까. 사실 시간이 지나면서 조 교수는 자신의 경솔
한 처신을 은근히 후회하고 있었다.
이제 그를 다시 찾아가 봐야 하지 않을까.
잘 있었나 서 원장?'
아니, 조 교수 아냐 웬일이야, 부르지도 않았는데 여길 다 찾
아오고.
서 원장은 조 교수가 여러 사람을 데리고 예고도 없이 찾아오
자 반가워하면서도 약간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지난번에 조
교수는사도광탄의 면전에서 실소를 터뜨리고 가버리지 않았던
가.
손님들을 소개하겠네. 이분은 기미히토 교수, 동경대학교의
전산학부 교수시지. 그리고 이분은 무속 연구가 변익중 박사시
고' .
인사가 끝난 후 조 교수는 찾아온 목적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또 웃어버리고 나가진 않겠지 . 지난번처럼 말이야.
역시 서 원장은 사도광탄을 배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손님들
이 있어 그런지 지나치게 추궁하진 않았다
이를 말인가.
그는 여전히 천천히 걸었다. 찾아온 사람들 앞에 자신의 모습
을 보이는 것이 부끄러운 양 걸어오면서 수줍게 웃었다. 악수 대
신 진중하게 머리를 숙여 인사하는 모습이 이제 세 번째 그를 보
는 조 교수에게 친근하게 와닿았다.
건강은 어떻습니까 사도광탄 씨?~
여 전합니다.
인사가 끝나자 조 교수가 기미히토를 대신해서 토우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결국 유일한 단서는 '조선에서 스스로를 지켜온 유일한 힙'
이라는 것과 '그것만 깨면 조선은 무너져'라는 말인데 도저히
짐작이 가지 않는군요.
조 교수가 이야기의 핵심을 강조하면서 말을 끝냈지만 사도광
탄은 눈을 감은 채로 아무 말도 없었다.
기미히토에게는 이런 광경들이 모두 우습게 생각되었다. 중요
한 문제라고 하면서 정신병원에 찾아와 이상한 환자에게 내용을
설명하는 것이나 이 환자로부터 대답을 기대하는 것이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에게는 차라리 무당에게 가서 점을 치는 것이 훨
씬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환자가 아무 반응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조 교수는 끈질기게
기다렸다. 기미히토가 보기에는 답답하기 짝이 없었지만 변 교
수도 아무 말 없이 기다리고 있는지라 자신이 뭐라고 할 계제는
아니었다.
그들이 무슨 일인가를 도모하고 있다는 조짐이군요.
지금까지 굳게 입을 다물고 있던 사도광탄이 말문을 열었다
그들이라니요?'
조 교수가 반가움을 감추며 물었다.
일본인들 말입니다.
그들이 어떤 일을 하고 있습니까?'
이번에는 기미히토가 물었다. 사도광탄이 눈을 뜨며 기미히토
를 바라보았다.
그 토우는 주문과 기가 들어가 있는 영물입니다. 아무런 이유
도 없이 움직이지는 않지요. 토우가 다시 괴력을 발휘하는 걸로
보아서 무언지는 모르지만 음모가 있을 것 같군요.
기미히토는 사도광탄의 눈길을 피하지는 않았지만 침묵을 지
켰다. 그에게는 사도광탄이라는 사람이 비정상적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다소 이상한 얘기라도 교수들이 하는 것은 그래도 받
아들일 수 있었지만 정신병원의 환자인 이 사람의 얘기에까지
어떤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 우스웠던 것이다
그런데 그 토우는 무엇을 지키던 수호 사자였을까요?'
이번에는 변 교수가 물었다 그는 친구인 조 교수로부터 그에
대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지라 어느만큼은 진지한 믿음을 가
지고 있었다.
알 수 없군요.
그 신물은 파괴되었을까요?~
변 교수가 다시 근심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나 사도광탄
은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기미히토에게 물었다
토우는 어느 방위를 보고 있었죠?~
네에? 무슨 말씀이신지?'
파헤쳐질 당시 토우가 어떤 방향을 보고 있었느냐는 말입니
다
그것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없습니다.
스기하라 씨는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한번 물어주시지
요.
서 원장이 얼른 전화기를 건네주었다. 그녀는 늘 사도광탄과
관련된 일이라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
고, 지금 그들의 대화 내용으로 봐서 보통 일이 아닌 것 같아 기
미히토로 하여금 바로 전화를 걸게 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스기하라는 언제나처럼 집에 있었다. 기미히토는 스기하라가
그런 것까지 기억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전혀
기대하지 않고 다이얼을 돌렸다 그러나 뜻밖에도 스기하라는
토우가 향했던 방향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서쪽이라 합니다.
기미히토가 전화기를 놓으며 이상하다는 듯이 사도광탄을 쳐
다보자 그는 기미히토의 속마음을 읽고 있기라도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무라야마는 토우가 향하고 있는 방향에 신경을 많이 썼을 겁
니다. 수호 사자는 앉히는 방향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신물을 등지고 앞을 보고 있는 것입니까?~
그렇지요. 그러면서 신물의 정면을 지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신물은 서향을 하고 있었다는 얘깁니다.
기미히토는 사도광탄에 대한 인식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느
꼈다. 조 교수나 변 교수가 모두 일본에서 소개받은 훌륭한 학자
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흘려버렸던 것을 사도광탄이 집어내는
것을 보고는 마냥 무시하려던 생각이 바뀌었던 것이다 기미히
토는 내처 물었다
방향이 왜 중요합니까?'
수호 토우를 묻었으면 풍수를 고련해서 신물을 간직했겠지
요. 현무 주작이 결정되고 좌청룡 우백호가 있을 터이니 그 신
물이 무엇인가를 알아내는데 큰 도움이 되지요.
사도광탄의 말은 기미히토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짐작 가는 데가 있습니까?~
조 교수가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그 단서를 가지고 깊이 생각하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신물이 서향이었다는 것이 유일한 단서가 될지도 모르겠어요.
게다가 무라야마의 말대로 우리 역사에서 스스로를 지켜온 것이
라면 기를 모으면 생각해 낼 수도 있을 것 같군요. 문제는 얼마
나 생각에 몰입할 수 있느냐지요.
다음날 사도광탄은 사라져버 렸다.
파티마의 예언
그가 사라졌습니다 어젯밤 한 시경으로 추정됩니다. 모두가 잠들
었을 때 홀연히 없어 저버렸습니다.
사도광탄이 없어져 한바탕 법석을 떨고 난 오후 서 원장은 두
사람의 방문을 받았다. 형사였다.
사도광탄 씨를 만나러 왔습니다.
서 원장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없어지자마자 사
람들이 찾아오다니
무슨 일이죠?~
우리는 정보과 형사인데, 그 사람의 동정을 보고하게 되어 있
습니다.
글쎄 무슨 이유로 그 사람의 동정을 보고하게 되어 있느냔
말이에요?'
그것은 말할 수 없습니다.
말할 수 없다구요? 그렇다면 나도 말할 수 없어요.
그러시면 안 됩니다. 아실 만한 분이 도와주셔야지 이렇게 비
협조적으로 나오시면 됩니까?'
서 원장은 의아했다 과거 군사 독재 시절에나 있을 수 있었
던 일이 목전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화가 치밀어 나가라고 소리
지르려던 서 원장은 순간 주춤했다 혹시 사도광탄이 무슨 일을
저질렀다면 그의 엉뚱함으로 보아 그랬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
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아닙니다. 통상적인 동향 조사입니다.
그렇다면 이제까지는 왜 한 번도 오지 않았죠?'
그건
그제야 서 원장은 깨달았다. 경찰은 간호사를 매수해 두고 있
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사도광탄이 없어지자마자 경찰이 알고
찾아온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일로 경찰은 그를 감시하고
있단 말인가.
쓸데없는 건 묻지 마시고 그를 만나게 해주십시오.
잘 알잖아요, 그 사람이 없어진 것을.
어디로 갔습니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어요?'
생각해 보십시오. 평소에 대화를 많이 나누지 않았습니까?'
대화 나눈 적 없어요. 알지도 못하고, 알아도 얘기할 수 없어
요.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 사람을 감시하는지를 알기 전에는.
두 사람의 형사 중 나이가 많아 보이는 사람이 눈을 껌벅하자
젊은 사람이 작은 목소리로 짧게 내뱉었다.
그 사람은 인터폴에서 감시하고 있어요.
뭐라구요, 인터폴?'
서 원장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인터폴이라면 국제경찰 아
닌가. 사도광탄이 도대체 무슨 일로 국제경찰의 감시를 받고 있
단 말인가.
그가 무슨 국제 범죄라도 저질렀나요?'
그거야 모르죠. 우리는 그냥 감시 요청만을 받고 있으니.
수배되지 않은 것을 보면 범죄 행위가 드러난 것은 없는 모양
입니다. 범죄의 가능성이 농후하거나 혐의를 받고 있겠죠.
나이가 든 사람이 한마디 거들었다
어디로 갔는지는 나도 몰라요. 아무 말도 없이 가버렸으니.
이 말을 하면서 서 원장은 한 줄기 섭섭한 감정이 가슴 밑바닥
에서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아무 말도 없이 가버리다니, 가겠다
고 말을 했다면 안 보내지 않았을 텐데.
사실이 그랬다. 비록 자신의 환자로 남들과 같이 엄중한 감시
밑에 있기는 했지만 그가 가겠다고 나설 때에 붙잡아둘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우선 자신이 치료를 한 바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증발이 안타까운 것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
도광탄에게 차츰 빠져들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이성에 대한단순한 이끌림이 결코 아니었다 같은 인
간 존재로서의 이끌림 이었다. 그에게는 내면으로부터 울려오는
힘이 있었다. 그것은 공허한 이론이나 휴머니즘 같은 원리가 아
니었다. 서 원장은 요즘 사람들에게서는 볼 수도 겪을 수도 없는
사도광탄의 괴이함을 좋아했고, 그 괴이함 속에 있는 삶과 우주
에 대한 통찰을 존중했다.
비록 의사와 환자 사이지만 서 원장은 사도광탄에게서 삶의
깊이에 대해 배우는 것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까짓 병원비 같은
것은 문제도 아닌데 아무런 말도 없이 떠났다는 사실이 야속하
게 생각됐다.
알겠습니다. 만약 연락이 오거나 하면 여기로 전화 부탁드립
니다.
파리 경시청의 국제형사과 드파이유 경부는 한국의 경찰청으
로부터 날아온 한 장의 팩스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인물 번호 19HOKOROO09 감시 이탈.
팩스는 짧은 내용이었다. 미국 FBI의 협력관으로 오래 근무하
다가 새로 부임한 그는 인물 번호를 보자 호기심이 솟았다. '감
시 이탈'이야 이제 곧 다시 '행적 포착'全으로 바뀌어 날아오겠지
만 어떤 인물이기에 20년 가까이 감시 해제가 안 되고 있는지 궁
금해진 것이다. 더군다나 인터폴 수배 인물로는 극히 드문 한국
인이 아닌가.
(사도광탄)
1955년 11월 14일생.
르루케 하이재킹 사건의 주범 다우니와의 연관 추정
(중략)
이자는 결국 다우니의 정신을 지배하여 사건을 배후 조종했다는
심증이 있음.
물증 없음
지속적 감시 요망
* 바티칸 특별 요청.
드파이유 경부는 마지막의 바티칸 특별 요청이라는 별도 표시
에 주목했다. 그는 다시 한 편에 붙어 있는 르루케 하이재킹 사
건의 번호를 찾았다. 사건은 매우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고, 하
이재킹 사건의 기록이 늘 그렇듯이 여러 각도에서 재구성되어
있었다.
그는 시계를 봤다. 20분 후면 점심 시간인 것을 확인하고는 전
화기를 들어 사건 당시의 팜당 수사관이었던 데스탱 경부의 번
호를 돌렸다.
내가 먼저 사야 하는 걸 이거 미안하게 됐네.
아니야 자넨 이혼한 부인에게 돈을 부쳐야 되잖아.
제기랄, 내가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나?'
인생이 그렇지 뭐. 근데 자네 그 르루케 하이재킹 사건을 수
사했더구먼.
그랬지.
그 당시의 얘기를 들려주게, 낱낱이 말이야.
참, 자네 다시 국제형사과로 발령 받았지?~
팔자인 모양이야.
데스탱은 포도주 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당시의 상황을 입체적
으로 구성하여 설명 했다
캔터 베리 상공이군.
더블린 공항을 이륙한 비행기가 잉글랜드를 가로질러 막 영불
해협에 들어서기 직전에 누군가가 낮은 목소리로 되뇌었다 스
튜어디스는 도버 해협 건너편의 칼레를 바라보며 좀 이상하다
싶었을 때 미리 조치를 취했더라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에 자신을 질타하고 있었다.
사나이는 처음부터 말이 없었다. 이 사나이처럼 타서부터 지
금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음료수 접대
나 식사 메뉴를 물었을 때도 그저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스
튜어디스는 사나이의 기분을 풀어보려고 일부러 사나이와 시선
을 마주치고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나이는 가슴에 걸려 있는
굵고 낡은 은십자가를 만지더니 천천히 성호를 그었다
'독실한 가톨릭 이군:
스튜어디스는 괜히 신경을 곤두세웠다고 생각하면서 통로를
지나쳤다.
그로부터 10분 후 비행기의 후미에 앉아 있던 그녀는 이 사나
이가 비행기의 앞쪽으로 걸어나가는 것을 보고 다시금 신경이
쓰였다. 화장실을 그냥 지나쳐가는 사나이의 걸음걸이가 어딘지
모르게 이상하기도 했지만 손에 들고 있는 결코 작지 않은 검은
봉지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스튜어디스는 급히 전화기를
들었다
기장님 지금 앞으로 걸어나가는 사람이 어딘지 마음에 걸려
요 혹시 조종실문을안닫았다면
그러나 스튜어디스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비행기
의 맨 앞에까지 걸어나간 사나이가 몸을 돌리고 뱉어낸 한마디
에 그녀는 온몸의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신사 숙녀 여러분, 이 비행기는 지금 이 순간부터 납치되었습
니다.
말의 내용과는 너무나 딴판인 조용하고 점잖은 목소리였다.
이 점잖은 목소리가 승객들로 하여금 기묘한 혼동을 일으키게
했다. 마치 일요일에 신자들을 모아놓고 설교하는 신부나 목사
의 것으로나 알맞을 이 목소리 때문에 승객들은 도저히 자신들
이 처해 있는 상황을 깨달을 수 없었다.
목소리뿐만이 아니었다. 온화해 보이는 얼굴 역시 평생 남과
한번 다투어 보지도 않았을 것처럼 보였다. 몇 사람의 승객은 무
슨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생긴 양 앞뒤를 두리번거리며 흥미
있는 표정으로 사나이의 다음 동작을 살폈다.
사나이의 동료들이 아무도 나타나지 않아 안심도 되었지만
사나이가 들고 있는 봉투도 세탁물 봉투같이 부드럽고 푹신해
보이는 것이어서 그 안에 위험한 총기 같은 것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나이는 영화에서 보았던
것처럼 모두의 고개를 숙이게 하거나 손을 들고 눈을 감게 하지
도 않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승객들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나이
의 입에서 무시무시한 소리가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이 봉투 안에는 매우 민감한 폭발물이 있습니다. 만약 승무원
이나 승객 여러분 중 누구라도 저를 제지하거나 무기를 꺼내는
분이 있으면 우리 모두는 공중에서 몰살하고 맙니다 심지어는
제가 넘어지기만 해도 폭발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
러분께 진심으로 협조를 부탁하는 것입니다.
그제야 승객들은 자신들이 어떤 지경에 처했는지 생생하게 깨
달을 수 있었다
하이재킹 .
비행기는 납치된 것이다. 매우 점잖아 보이는 그 점잖음으로
인해 더욱 기묘한 느낌을 주는 한 사나이에 의해.
납치범의 신원은 밝혀졌나요?'
내무장관은 눈살을 찌푸리며 수화기를 좀더 가까이 귀에 갖다
댔다. 아일랜드에서 이륙한 비행기라면 필시 IRA의 행위일 것이
다. 그렇다면 자신은 또다시 그 목소리조차 듣기 싫은 영국 친구
들과 지루하고도 복잡한 대책 회의를 끝없이 반복해야만 한다.
장관은 벌써 몇 개비째 연달아 피우던 담배를 비벼 껐다.
이름과 신분은 알아냈습니다.
뭔데요?'
다우니라는 이름의 아일랜드 출신 수도사입니다.
뭐요, 수도사라구요?'
그렇습니다.
어느 종파의 수도사랍니까?'
가톨릭.
허허, 저런! 세상이 이제 드디어 말세로 가는구먼 그래 가톨
릭의 수도사가 비행기를 납치했단 말이오?'
내무장관은 혀를 끌끌 찼다. 이것은 그야말로 미증유의 사건
이었다. 수도사라면 바로 신부가 아닌가 아니 성당의 봉직 신부
보다도 오히려 더욱 진지하고 치열하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과
더불어 사는 인간이 아닌가. 그런 수도사가 비행기를 납치했다
는 사실을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요구 조건이 뭐요?'
그 요구 조건이라는 것이 이상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뭔데요, 우리더러 성당 건립 자금이라도 내놓으라는 건가?'
그게 아니고
뭐요?'
납치범은 교황청에 무언가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교황청에?'
그렇습니다.
흐음, 가톨릭의 수도사라면 교황청에 무언가를 요구할 수 있
겠지 . 그런데 하필이면 왜 우리 나라에 비행기를 착륙시키고 그
런답니까?'
납치범의 요구 조건이 프랑스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장관은 적이 안심이 되는 모양인지 여유를 찾은 음성으
로 약간의 농담이 밴 투정을 부렸다. 그러나 맞은편의 경시청장
은 여전히 긴장된 목소리였다.
하지만 일단 르루케 비행장에 내린 이상 모든 책임은 우리에
게 있습니다. 특히 우리 경찰에게 말입니다.
그야 그렇지만 어쨌든 정치적으로는 크게 곤란할 문제가 없
단 말이오. 그런데 그 납치범이 교황청에 요구하고 있는 조건은
무엇이오? 도대체 무슨 원한이 있기에 수도사가 비행기를 납치
하고 조건을 내건단 말이오?'
그 수도사가 교황청에 요구하고 있는 것은 어떤 비밀을 공표
하라는 것입니다.
뭐라구, 비밀을 공표해?'
장관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이제껏 비행기 납치범의 요
구란 것은 언제나 돈이 아니면 과격파 테러단의 석방 같은 것이
었다. 그런데 이번에 생긴 사건은 납치범의 정체도 이해할 수 없
었지만 그 요구 조건은 더 더욱이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교
황청에 비밀을 공표하라는 것은 비행기 납치범의 요구 조건으로
서는 얼토당토않은 것이었다.
그거야말로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로군. 그래, 도대체 무
슨 비밀을 공표하라는 거지?'
이제 장관은 자신의 업무를 떠나서 개인적으로도 지대한 관심
이 생겼다
파티마의 제3의 예언이 란 것입니다.
뭐라구, 파티마의 제3의 예언?'
그렇습니다.
시종 투정 섞인 목소리로 물어나가던 장관의 목소리가 여기서
딱끊겼다 아니 끊긴 것은 목소리만이 아니었다 장관은 자신도
모르게 탁자에 뻗었던 두 다리를 내려놓고 있었다. 이것은 세상
에서 늘상 일어나는 그런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장관은
더욱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도대체 무엇이오? 파티마의 제3의 예언이란 것은?'
그것은 마리아의 예언입니다.
마리아? 성모 마리아 말이오?'
그렇습니다.
마리아가 예언을 했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언제?'
아주 최근의 일이라 합니다 20세기에 일어난 일입니다.
20세기에? 아니 그게 정말이오?~
그렇습니다 정확하게는 1917년 5월 13일 포르투갈의 파티마
에 성모 마리아가 나타난 것입니다 마리아는 세 명의 어린 목동
앞에 나타나서 인류의 미래와 관련한 예언을 했답니다.
이봐요, 총감 세상에는 뭐가 나타났다, 누가 어떤 예언을 했
다. 마리아를 보았다. 예수를 보았다 하는 등의 얘기가 너무도
많지 않소? 그런 것을 어떻게 일일이 믿는단 말이오?'
물론입니다. 그래서 그런 보고가 있을 때마다 로마의 교황청
에서는 일일이 조사를 한답니다. 거의가 허위로 밝혀지지만 이
파티마의 성모 출현은 교황청으로부터 공식적인 인정을 받았습
니 다.
공식적인 인정을 받았다는 것은?'
마리아의 출현과 예언이 검증되었고 교황청은 파티마를 성지
로 정했습니다. 그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매년 수많은 교인
들이 파티마를 찾고 있습니다. 심지어 교황은 아그자의 총격을
받고 기적처럼 살아나자마자 완치도 되지 않은 몸을 이끌고 바
로 파티마를 찾아 성모에게 감사했습니다.
그래요? 출현은 인정을 받았다니까 그렇다 치고 도대체 어떤
예언이 검증되었다는 거지요?'
소르본느 법학부 출신인 내무장관은 시간을 다투는 이 긴박한
상황에서도 꼬치꼬치 물어갔다. 그는 자신이 납득되지 않는 일
에 대해서는 어떤 중요한 결정도 내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미카엘 천사가 먼저 나타나 5월 13일 세 명의 어린 목동 앞에
마리아가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을 했답니다. 과연 그날이 되자
마리아가 나타났는데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 어린 목동들 앞에
한 줄기 강렬한 광채가 나타나는 것이 보였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마리아가 나타났다고 인정할 수 없는
것이 아니오?'
그렇습니다. 마리아는 그후에도 매달 같은 날 여섯 번에 걸쳐
나타났고, 마지막 발현 때에는 소문을 듣고 몰려든 약 7만 명이
희한한 기적을 목격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세 아이 중 둘은 마리
아의 예언대로 곧 인플루엔자에 걸려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마리아는 두 아이가 죽을 것이라고 예언했고, 그 예
언이 맞았다는 얘기요?'
법학을 전공한 내무장관은 이런 종류의 문제를 가지고 설득하
기에는 가장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수화기에서 흘러나오는
총감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담겨 있었다. 장관은 총감이 가톨
릭 신자라는 것을 떠올렸다.
그런 것은 사소한 것이지만 파티마의 예언은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제 1 예언은 제1차 세계대전이 예언 당시로부터
1년 반 안에 끝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그 전
쟁이 언제 끝날지 몰라 절규하고 있었는데 마리아는 이제 1년
반 후면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예언을 하셨던 것입니다. 어린 목
동들 중 하나가 '그러면 이제 세계전쟁은 끝입니까'라고 묻자
'아니다. 이 전쟁이 끝나고 20년이 지나면 또 한차례의 세계대
전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확히는 20년 1개월
후에 2차대전이 일어났습니다. 마리아는 전쟁의 자세한 양상과
원자폭탄도 예언하셨습니다. 어린 목동들 중 하나에게 환상으로
거대한 버섯 모양의 구름을 보여주었으니까요. 이것을 제2의 예
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제3의 예언은?'
장관은 자신도 모르게 내처 물었다.
그게 바로 지금 이 순간 이 수도사가 로마 교황청에 공표를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행기를 납치해 가면서까지요.
이상한 일이군 교황청에서는 왜 그 제3의 예언을 이제껏 공
표하지 않는 거요?'
그것은 성모마리아의 계시였습니다 마리아는 이 예언을 세
어린 목동들 중 하나인 루치아에게 일러주며 제3의 예언은 아무
에게도 얘기하지 말고 오로지 로마의 교황에게만 알려주라고 했
던 것입니다.
그래서요?'
장관은 이제 강한 호기심을 보이고 있었다.
루치아는 이 예언을 글로 작성하여 교황에게 보냈습니다. 그
리고 두 아이가 죽자 칼멜의 기도원에 들어가서 지금까지 은둔
생활을 하면서 오직 기도로만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제3의 예언을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겠
군요.
얼마 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단 두 사람밖에는 모릅
니다.
두 사람이 라면?'
바로 루치 아 수녀와 교황입니다.
교황청의 간부들도 모르고 있다는 얘긴가요?'
그렇습니다. 오직 교황만이 그 예언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
은 성모 마리아의 계시입니다 교황 이외의 그 누구에게도 그 예
언을 공개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장관은 그제야 이 우스꽝스러운 하이재킹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이 납치범의 요구 조건이 이제껏 있어 온 그
어느 조건보다도 까다롭고 실현되기 어려운 것임을 깨달았다
같은 시각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모인 추기경들의
표정은 엄숙하다 못해 삼엄한 분위기까지 감돌고 있었다. 시스
티나 대성당 옆의 교황궁으로 급히 모이라는 연락을 받은 추기
경들은 국무장관인 비오 추기경으로부터 설명을 듣기 전까지는
자신들이 왜 그토록 급히 와야 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국무장관의 설명을 듣고 난 그들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위기감이 나타나 있었다. 아무도 말문을 열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교황청이 그토록 감추고자 했던 비밀이 이제 세상에 노
출될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하이재킹이라면 세계 언론으로부터 제1급의 주시를 받게 마
련이다. 아마 지금쯤 바티칸 광장에는 세계의 언론 기관으로부
터 구름같이 몰려온 기자들이 이 회의의 결론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당황한 추기경들은 이 회의의 결론을 어떻게 내려야 할지에
대하여 미리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느라 바삐 머리를 돌리고 있
었다. 가까운 사람들은 더러 귓속말로 의견을 나누었다.
수도사가 이런 짓을 하다니 고통스럽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이제껏 수천 번이나 예언의 공개를 거부해
왔지만 이번에는 어쩐지 쉬울 것 같지 않군요.
차제에 아예 예언을 공개하도록 진언하는 것은 어떨까요?'
그것은 안 될 말입니다.
혹시 장관께서는 예언에 접촉해 본 적이 있으신지요?'
없습니다. 아직도 루치아 수녀와 교황 성 하께서만 알고 계십
니다.
대략 어떤 내용일지 짐작은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짐작만 하고 있을 뿐이지요. 바오로 6세 성하와 요한 바오로
1세 성하의 경우를 미루어보면 말입니다.
바오로 6세는 교황이 되어 파티마의 예언을 꺼내 보다가 너무
나 놀란 나머지 의자에서 굴러떨어져 실신했다 그리고 무엇보
다도 심약했던 요한 바오로 1세는 즉위한 지 한 달 만에 심장마
비로 숨졌다.
그의 죽음을 놓고 이런 저런 말이 많았지만 파티마의 예언을
보고 그 중압감에 숨졌다는 견해가 유력했던 것이다 심지어 그
는 파티마의 예언을 본 날 밤 홀로 미친 듯 기도를 하다가 죽었
다는 얘기도 있었다
예언의 구체적인 내용은 교황과 루치아 수녀만이 알고 있지만
바티칸 깊은 곳에서 일하는 몇 사람의 핵심적 추기경들은 그 예
언의 내용을 어느 정도는 미루어 짐작하고 있었다. 그들은 예언
의 내용이 매우 무시무시하다는 것과 가톨릭에 결코 호의적이지
않다는 느낌을 갖고 있었다
교황 성하께서 드십니다.
이윽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나타나자 추기경들은 모두 일
어나 그를 맞았다.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오직 기도로만 살아온 사람, 그리하여
성령의 축복을 받아 비이탈리아인으로서는 5백 년 만에 처음으
로 교황이 된 이 사람은 즉위하는 그날부터 참으로 정열적으로
일해 왔다 그는 이제까지의 구태의연하고 권위적인 교황청의
분위기를 일신하고 신도들과 살갗을 맞대며 진심으로부터 우러
나오는 기도를 요구했다.
원칙 그 자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철저히 고전적인 가치를 고
집해 온 그는 요한 23세 시절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회의
전례에 대한 혁신적인 헌장을 발표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
다 그 헌장의 요체는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장은 효계 제도보다
중요하다는 것으로 가톨릭 의식의 새 장을 여는 것이었다.
교황이 자리에 앉자 추기경들사이에 토론이 시작되었다.
최악의 사태는 우리가 그 예언을 공표하지 못하겠다는 결론
을 내리고 그 사실에 대해 납치범이 폭탄을 터뜨림으로써 결말
을 내는 경우입니다. 전세계의 언론은 이구동성으로 교황청을
비난할 것입니다 피범벅이 되어 나구는 시체들을 보여주며
그사람들의 목숨에 대해 조금도 개의치 않았던 우리를사정없
이 매도할 것입니다.
공의회에 모여든 추기경들의 대부분은 교황청의 지위에 대해
염려했다.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세계적으로 가톨릭
의 신도 수는 급감하고 있었으므로 교황청은 전세계의 언론이
주목하고 있는 이번 사건의 경우 자연히 사회 정치적 측면에서
문제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곧 좀더 근본적인 문제를 의식하고 있
는 추기경들과 교황의 측근들에 의해 묻혀버리고 말았다
예언은 절대 공개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성모님의 계시
입니다.
추기경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교황청의 입장을 구태여 따질
필요도 없이 예언이 공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성모 마리아
의 계시였다. 전인류가 멸망하더라도 성모 마리아의 예언이라면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 그들만의 종교에 극도로 충실한 추기경들
의 원칙이었다.
성경은 이미 하느님에게 자식을 제물로 내놓는 아브라함의 이
야기를 실음으로써 이런 경우의 지침을 내려놓고 있었다. 그리
고 무엇보다도 그들은 역대 교황과 입장을 같이하고 있다는 사
실에 자신감을 얻고 있었다.
지체할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들은 이내 의견
을 정리한 후 두 눈을 감고 무엇인가를 골몰히 생각하고 있는 교
황에게로 눈길을 모았다. 주변이 조용해지고 나서도 한참이 지
나서야 교황은 눈을 떴다.
카를 보이티와, 즉 요한 바오로 2세는 평화롭고도 부드러운
표정의 얼굴을 들어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깊이 들여다보았
다. 이것은 그가 1978년 교황에 선출되고 나서 모든 회의의 결론
을 내리기 전에 항상 해오던 버릇이었다.
그러나 이날의 눈동자만은 어딘지 모르게 생기를 잃고 있었
다. 추기경들은 교황의 얼굴에서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망설임
을 읽어낼 수 있었다. 원칙이라면 이 사나이 카를 보이티와는 돌
과 같은 사람이었지만 오늘은 눈에 띄게 흔들리고 있었고, 이 점
은 교황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오늘의 결론은 결코 추기경들의 몫이 아니었다. 데체 교황청
안에서 교황을 제외한 어느 누가 파티마의 예언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단 말인가. 그런 의미에서 이번의 하이재킹은 바티칸이
아닌 교황에 대한 도전이요 시험이었다.
그동안 교황은 파티마의 예언에 대한 공표를 수많은 사람들로
부터 강요당해 왔다 거기에는 공산주의자나 무정부주의자들뿐
만 아니라 가톨릭의 성직자들, 심지어는 바티칸 추기경들의 보
이지 않는 압력도 있었다. 바티칸 성청의 핵심 간부들은 교황만
이 그 비밀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일종의 소외감을 느끼
고 있었다.
의례적인 미소가 지나간 교황의 얼굴에는 이윽고 고뇌에 찬
표정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비록 정치적 교황이라는 얘기를
듣고 있긴 했지만 표정을 관리하는 정치 기술이 이 폴란드인 교
황에게는 없었다.
기실 교황은 크게 고심하고 있었다. 이것은 교황에게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원칙에 관한 문제에서는 양보할 줄 모르는 교황
이지만 오늘은 너무나 다른 문제였다.
이제 한 시간 후면 비행기가 폭파되고 승객들은 소중한 목숨
을 잃고 만다 그렇게 되면 결국 바티칸은 풀 한 포기라도 귀중
히 여기라는 하느님의 계시를 어기고 대답 한마디로 살릴 수 있
었던 수많은 승객의 목숨을 잃은 원망을 홀로 들어야 한다. 그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결정은 가뜩이나 줄고 있는 신도들의
수를 격감시킬 것이다.
맨 처음 발언한 추기경은 바로 그 점을 지적했던 것이다. 그까
짓 예언이 무엇이기에 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을 버려야 하느냐
고 묻는 그 추기경의 항변은 정당하고 인간적인 것이었다. 바티
칸은 명분을 잃어서는 안 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추기경들은 교황의 곤혹스러운 입장을 잘 이해했다. 그들은
아무리 원칙의 신봉자라 하더라도 바티칸의 정치적 입장을 고려
하지 않을 수 없는 교황의 입장을 알았고, 그런 시각에서 교황의
고뇌를 이해했다.
그러나 정작교황의 고민은 추기경들이 이해할 수 있는 범주
에서 벗어나 있었다. 교황은 최고 결정권자이고 세계의 위대한
지도자 중 한 사람이다. 성모 마리아의 예언이 아니라 하더라도
납치범의 협박에 굴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론은 이미
내려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 점은사건 해결에 있어 인도적 측면에 비중을 두는 추기경
들이 간과하고 있는 지도자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지금 교황의 격심한 고뇌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협박에
대한 답변 때문이 아니었다. 이 자리에 나오기 전 교황은 부속
기도실에서 두 시간 동안이나 기도를 올렸지만 이상하게도 마음
이 안정되지 않았다.
하필이면 왜 파티마의 예언인가 기이하게도 증오와 더불어
비행기를 납치하면서까지 예언을 알고 싶어하는 그 수도사에 대
한 동정과 연민이 교황의 가슴을 무섭게 후벼대고 있었다. 한 번
도 얼굴을 본 적이 없는 수도사였지 만 이 사람은 이상하게도 그
언젠가 만났던 엘살바도르 대주교의 기억을 되살려내고 있었다
로메로.
그는 교황을 만나기 위해 로마에 와서 보름 이상이나 기다렸
다 하지만 라틴아메리카에서 불길처럼 타오르던 해방신학이 못
마땅했던 교황은 마지못해 그를 만나기는 했지만 이미 대화의
문은 철통처럼 잠겨 있었다.
자신의 애원이 거절당하자 엘살바도르 대주교의 두 눈에 어리
던 그 고독하고 절망적이던 눈빛이 기도를 드리는 내내 교황의
가슴속에서 살아나고 있었다.
그로부터 3주일 후 로메로는 미사를 드리던 도중 가슴에 총을
맞고 운명했다
교황은 몇 날 밤을 고통과 회한으로 몸서리치며 기도에 매달
렸던가 그날 로메로를 지지하는, 아니 그의 수고를 위로하는 단
한마디의 말만 건넸더라도 기꺼이 민중 속으로 뛰어든 그 대주
교는 독재자의 테러에 그토록 무참하게 희생당하지는 않았을 것
이다.
그가 교황으로부터 푸대접을 받고 돌아왔다는 사실이 알려지
자 독재 정부는 그를 제거해도 된다는 자신감을 얻었고, 그는 미
사 도중 한 킬러의 총을 맞고 즉사하고 말았다. 교황은 고뇌했
다 자신이 로메로를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런데 로메로를 향한 연민의 정이 왜 비행기를 납치한 다우
니라는 이름의 수도사에게서 되살아나는지 교황은 이해할 수 없
었다 아마 이 사람도 곧 죽으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인지 몰랐
다. 예언은 공표될 수 없다는 자신의 한마디에 의해.
바티칸의 중요한 인물이 모두 회의장에 모여 있는 두 시간 동
안 정작 가장 중요한 한 추기경이 빠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사람은 별로 없었다 모두가 회의의 엄숙한 분위기에 사로잡혀
있는 시간에 그는 바티칸의 깊숙한 곳에서 외부로 향하는 전화
기에 나직한 목소리를 밀어내고 있었다.
교황청에서는 절대로 예언을 공개할 수 없소. 하지만 비행기
가 납치되고 승객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 상황에서 그렇게
발표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니오? 상황이 급해지면 예언은 공개될
수 있다고 보도가 나갈 것이오. 귄터, 당신이라면 이 상황에서
유일한 해결책이 무엇인지 알 것이오.
itaL
프랑스의 특수부대 장 다르므가 비행기에 침투한 것은 납치범
의 요구 시한이 불과 30분 남아 있을 때였다.
창설 이후 단 한 번도 테러 진압에 실패한 적이 없는 이 부대
에게도 이번의 작전은 뜻밖에도 쉽지 않았다 그것은 납치범의
정체가너무도 낯설어 약점을 찾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
해진 바로는 그가 매우 민감한 폭발물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그 무엇보다도 승객의 안전을 제일로
생각하는 경시청의 협상 전문가 크레망은 특수부대의 작전을 극
구 반대했다. 일단 예언을 공개하겠다고 수도사를 안심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설사 그까짓 예
언쯤 공개하면 도대체 뭐가 어떻단 말인가. 그 예언이 공개된다
고 세상이 뭐가 달라지겠는가
크레망은 이런 상황에서는 자신의 역할이 누구보다도 중요하
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 유능한 협상 전문가는 갑자기 상황이 긴박하게 돌
아간다는 것을 느꼈다. 피납기의 착륙 초기 상황을 장악했던 자
신이 어느 순간 갑자기 잊혀져버리고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위
험 천만한 상황에서 장 다르므가 갑자기 투입된 것이다
장 다르므는 소음 장치가 장착된 특수 용접기로 일등석 전용
의 문을 따냈다 등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몰랐
던 다우니는 다섯 명의 요원이 바싹 다가갔을 때에도 메인캐빈
의 한쪽에 승객들을 몰아놓고는 그들의 불편에 대해 사과하고
있었다.
그림자같이 다가간 폭발 전문가가 흔들림을 방지하기 위해 다
우니의 손목을 빡 붙잡자 또 한 사람의 요원이 번개같이 그의 손
에 들린 검은 봉지를 나꿔챘다. 그것으로 상황은 끝이었다
아무런 무기도 흉기도 없는 이 나약한 수도사의 양팔을 억센
요원들이 좌우에서 끼는 것으로 상황은 끝이었다. 실제 요원들
은 그의 양팔을 꽉 붙들었다. 위험은 끝난 것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승객들뿐만 아니라 요원들도 놀라고 말았
다. 몇 발의 총성이 들리면서 수도사의 허리가 푹 꺾여졌던 것이
다. 특공 팀장이었다
요원들은 그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작전 수칙을 위반
한 것을 알았다. 저항력을 완전히 상실한 범인을 살해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다우니의 죽음과 함께 파티마의 제3의 예언도 급속히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져갔다. 이것이 그가 전혀 무력한 상황
에서도 죽어야만 했던 이유였던 것이다.
사건이 종결된 후 교황청에서는 일단의 사람들을 아일랜드로
보냈다 아일랜드 경찰보다도 더욱 깊숙이 수도원을 조사한 교
황청의 사람들은 다우니가 비행기를 납치한 것은 한 사람과의
오랜 교리 논쟁을 통해서 였다는 결론을 내렸다.
몇몇 핵심적인 추기경들이 염려했던 것과는 달리 다우니의 배
후에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다
우니가 가톨릭에 대해 적대적이지 않다는 사실도 교황청을 안심
시켰다
그러나 그것으로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다우니
와 오랫동안 교리 논쟁을 벌여온 사람이었다. 현재로서는 그가
다우니와 어떤 내용의 교리 논쟁을 벌였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충실한 가톨릭의 수도사이자 기독교 신비주의자였던
다우니가 그 사람과의 교감을 통해 신비주의에 대한 더욱 강렬
한 믿음을 갖게 되었던 것은 틀림없는 듯했다. 다우니는 얼마 동
안 한국에서 봉직한 적이 있었고, 그때에 그 사람을 사귀게 되었
던 듯했다.
주변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최근까지도 무수한 서신 왕래를
통하여 그 한국인과 교리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교황청의 우려는 다우니에게 깊은 영향을 미친 그 인물에게
집중되었다.
그는 도대체 어떤 인물일까 그는 급작스레 교황청에서 주목
하고 감시하는 세계 각지의 제 1급 중요 인물들 중 하나로 떠올
랐다. 그가 바로 사도광탄이었다.
데스탱은 술잔을 놓으며 프파이유에게 말했다
다우니는 완전히 제압당한 상태에서 특공 팀장의 총격을 밭
고 즉사했어. 특공 팀장의 이런 행동은 살인으로 求단될 수도 있
었지만 워낙 중요한 사안이었던지라 단 한 명의 승객도 다치지
않고 구조했다 하여 오히려 표창을 받았지.
무슨 말인지 알겠네. 그가 살아 재판이 진행되었다면 세상은
온통 파티마의 예언 이야기로 떠들썩 했겠지 .
당시 바티칸의 입장이 매우 곤란했어. 윗선에서 거래가 있었어
그런데 다우니는 어떻게 해서 사도광탄이라는 한국인과 교리
논쟁을 벌이게 되었나?'
확실한 것은 몰라. 교황청에서 기록을 다 가져가 버렸으니까.
하지만 탐문 수사 등에 의해 어느만큼은 알게 되었지. 다우니는
아일랜드 주교회의 추천을 받아 한국의 어느 신학교에서 유학
생활을 했어. 거기서 그는 한 청년을 만났는데 그 청년은 지극히
동양적인 방식인 자기 속으로의 몰입 이라나 참선이 라나 좌우간
그런 방법을 통해 깊은 정신 세계에 도달했다는 거지 어쨌든 그
청년은 다우니로서는 도저히 생각하지도 못했고 이해할 수도 없
는 말을 하곤 했대 둘은 자연스럽게 신앙의 문제를 얘기하기 시
작했고 다우니는 차츰 가톨릭만이 세상의 진리가 아니라는 청년
의 사상에 빠져들었던 모양이야. 청년은 가톨릭이 독선에서 벗
어나 이제껏 전세계의 타종교와 각 민족의 고유 문화에 대해 저
지른 죄악을 회개하고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했지. 그러면서 그
는 파티마의 제3의 예언이란 성모마리아가 직접 가톨릭의 죄상
을 질타하고 참회를 촉구하는 내용이지만 교황청이 은폐하고 있
다고 주장한 거야.
그 예언은 마리아가 교황에게만 공개하라고 했다며.
그 청년은 그것도 가톨릭의 속임수라고 했어 세상의 예언이
란 모두 공개되었지 은폐된 것이 없었다는 거지. 들으면 사람들
에게 전하는 것이 예언의 본질이라고 하면서, 가톨릭이 거듭나
기 위해서는 교황이 그 예언을 공개해야만 한다고 했지. 그의 말
과 인생에 영향을 받은 다우니는 그것이 종교인의 참된 자세라
생각하고는 아일랜드로 돌아와서 고민 끝에 결국은 범행을 결심
한 것으로 추정돼.
그러니까 엄밀히 얘기하면 경찰의 수사를 통해서는 사도광탄
이 범행을 공모한 것으로 밝혀지지는 않았다는 거지?'
그렇지 그가 위험 인물이라는 것은 교황청의 결론이네.
한밤의 기도
골짜기를 건너가는 바람이 쏴 소리를 내며 내를 스쳤다. 어둠
속에 솟아 있는 바위들이 황홀한 달빛을 받아 빛을 발하고 산등
성이에서는 간간이 산짐승의 날랜 걸음이 돌부스러기를 흘렸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산새의 울음소리가 태초의 순수를 아직도 간
직한 채 하늘 아래 우뚝 선 태백을 고요히 적시고 있었다.
달빛에 은은히 젖어 차고 맑은 물이 흘러넘치는 계곡에서 사
도광탄은 도시 그것도 음침한 정신병원에서 보내느라 지쳐버린
육신을 깨끗이 씻고는 정신을 모았다. 깊은 밤이라 심산을 흐르
는 정기를 타고 마음이 저절로 따라 흘렀다.
백두산에서 바다를 따라 아래로 내리뻗은 정기는 금강, 설악
을 거쳐 태백산에 머물렀다가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소백을 타
고 일단 속리에 머무른 후 덕유와 가야를 거쳐 지리산으로 들어
갔다. 사도광탄은 기를 모아 백두의 정기를 따라 몸 속으로 돌리
며 숨을 고른 후 두 눈을 감고 손을 가슴에 모았다.
국조 단군이시여, 하늘의 뜻과 땅의 지지를 받아 동북아시아
의 좋은 터에 자리를 잡은 이래 우리 겨레는 자애와 인정으로 5천
년을 살아왔나이다. 이웃을 내 몸처럼 아끼고 온누리에 사랑을
베풀며 선인을 존중하고 후인을 위해 덕을 쌓아왔지만 역사는
늘 창궐하는 외적으로 어지러웠나이다. 오직 평화로 지내길 바
랐던 겨레의 염원은 피지배의 굴욕으로 얼룩졌고, 이제 민족은
갈라지고 흩어져 그 아픔이 하늘을 찌르고 있나이다. 전통을 존
중하고 인륜을 밝히며 살아왔던 우리가 이제는 타국의 거친 문
화에 미풍양속을 묻어버리고 뿌리를 잃고 살고 있나이다 그러
나 국조시여, 지난 5천 년 간 나라를 위하고 겨레를 위하여 순결
한 마음과 몸을 바친 수많은 선열이 지켜보시고 이 땅에 우리를
있게 한 천지신명이 굽어 보살피시는바, 저는 이 미천한 몸을 바
쳐 겨레의 정신을 되찾고 문화를 다시 세워 국조의 창업을 이으
려 하나이다. 이제 이국의 마흥이 침입하여 겨레의 성보를 훼하
였으니 마땅히 다시 찾아 조상님 앞에 올리고 눈물을 흘리려 하
나이다. 국조 단군이시여, 이 미천한 몸으로 하여금 앞날을 볼
수 있는 혜안을 가지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역사의 치욕을 망에
묻고 자랑스러운 이 땅의 주인으로 국조의 뜻을 수대에 이어가
게 하옵소서.
기도를 마친 사도광탄은 물에서 나와 몸을 닦은 후 바위에 가
부좌를 틀고 앉았다. 눈을 들어 멀리 북극성에 모으고 손을 모아
서는 가볍게 맞잡은 채 두 다리 위에 자연스럽게 내렸다 사도광
탄은 정신이 맑고 깨끗해지자 기를 모아 깊은 명상의 세계로 들
어섰다.
'조선에서 스스로를 지켜온 유일한 힘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이것만 깨면 조선은 무너진다는 그 신물은 무엇이란 말인가.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계속된 명상은 3일 밤낮 동안이나 이
어졌다.
태백역에서 출발하여 서울의 청량리까지 가는 기차는 지난 수
십 년 간 숨가쁘게 변천해 온 이 땅에서 변하지 않은 풍물 중 하
나일 것이다. 그 선로 그 역에, 열차 이름까지도 통일호 그대로인
데 유일한 변화는 증기 기관차가 디젤로 바뀌었다는 것뿐이다.
사도광탄은 태백에서 청량리까지 기차를 타고 오면서 자연의
여유로움을 한껏 맛보았다.
그 어느 때던가, 한창 진리를 구하던 무렵 극도로 정신이 순수
해지자 자연과 교감을 나누는 단계가 펼쳐졌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나는 듯했다
그때에 멈추었으면 시인으로, 사색가로 인생을 즐겁게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사도광탄은 씁쓰레한 미소를 지었다. 손에 잡힐
듯이 다가왔다 이내 사라지곤 하는 차창 밖의 풍물들이 포근하
게 가슴에 와 안기는 것을 느끼면서 사도광탄은 오랜만의 여유
로움에 몸을 맡겼다
청량리역에서 내린 사도광탄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그의
귀환은 즉각 보고되 었다.
그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습니다. 오늘 오후 세 시에 혼자 돌아왔
습니다.
서 원장은 사도광탄이 다시 돌아온 것이 몹시 기뻤다. 서 원장
은 사도광탄이 말없이 나간 이후 계속 허전함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딱히 집어서 무어라 말하기는 어려워도 서 원장에게는 사도광
탄에 대한 애정이랄까 보호 본능 같은 것이 작용하고 있었다. 서
원장이 문득문득 느끼는 것이지만 사도광탄에게는 삶을 초월하
여 바라보는 안목이 있었고, 그것은 보통 사람에게서는 도저히
느껴지지 않는 것이었다. 특히 그가 떠나고 나서 찾아온 형사들
은 서 원장에게 놀라움을 주었고, 그들의 출현은 의사로서의 보
호 본능을 더욱 자극했다.
뿐만 아니라 서 원장은 이제 사도광탄이 살아온 내력에 대해
서도 더욱 궁금증을 갖게 되었다. 사도광탄은 자신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려 들지 않았지만 그의 내력은 엉뚱한 방향에서 드
러나고 있었다.
바티칸에서 온 신부
베르나데타님, 잠간 얘기 좀 나누실까요.
주일 미사를 마치고 나오던 서 원장은 주임 신부의 부름에 약
간 의외라는 느낌이 들었다. 오랫동안 성당을 다니고 있긴 했지
만 그리 열성적이지도 않은데다가 성직자들과는 별로 대화를 나
누지 않던 그녀였기에 주임 신부가 일부러 자신을 기다렸다가
부른 것을 알고는 쉬이 그 이유를 짐작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사무실에서 차를 한잔 대접한 신부는 미소를 지으며
편한 분위기를 유도했다.
베르나데타님의 병원에 있는사도광탄이라는 환자를 만나볼
수 있을까요?'
서 원장은 적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런 상관도 없어
보이는 주임 신부가 사도광탄이 자신의 병원에 있는 것을 아는
것이나 또 그를 만나려고 하는 것이나 모두 너무나 엉뚱한 일이
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그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하는 손님들이 있습니다.
손님이라구요? 어떤 분들입니까?'
바티칸에서 오신 신부님들입니다.
서 원장은 다시 한 번 놀랐다. 그녀는 사도광탄이 가톨릭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바
티칸에서 신부들이 그를 찾아왔단 말인가, 혹시 지난번의 외출
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던 서 원장은 고개를 끄
덕였다
사도광탄은 두 사람의 외국인 신부를 보고는 무언가 기억해
내려 애쓰는 듯했다. 인사가 끝나자 외국인 신부의 말을 주임 신
부가 통역했다.
저는 바티칸의 교리 청에서 일하는 신부입니다. 교황청에서는
귀하가 오래 전 아일랜드의 한 수사와 교환한 편지들을 오랜 기
간에 걸쳐 신중하게 검토했습니다. 그 결과 한국의 종교에 대한
가톨릭의 공격적 태도를 지적한 귀하에게 몇 가지 설명을 해드
려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 결론에 따라 교리청 장관께
서 저를 보내셨습니다.
내가 위험성이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군요.
서 원장은사도광탄의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라 당황
했다. 사도광탄에게 자신이 모르는 위험이 내재되어 있다는 말
인가
사실을 말하자면 다우니 신부는 귀하와 서신 교환을 계속하
면서 신비주의의 깊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그는 동양의 정신 문화를 배척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에
서 뜻깊은 유학 생활을 했다고 얘기하곤 했지요. 우리는 서로 영
향을 주고받았고 그는 훌륭한 신부였어요.
우리는 귀하에게 타문화에 대한 교황청의 입장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사도광탄은 진지한 표정으로 신부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파티마의 제3의 예언을 공개하는 거요. 그
러면 모든 것이 설명되는 것이란 말이오.
그러나 그것을 공개하지 않는 것이 교황청의 원칙 입니다.
교황은 이미 그 자신의 태도로 파티마의 예언을 공개하고 있
지 않은가요?'
무슨 얘긴지 이해할 수 없군요.
교황은 이미 타종교와의 화해 및 공존을 천명했지요. 그는 유
대인들의 종교인 유대교를 인정하고 불교를 인정했어요. 柔리스
종교와 이슬람교 역시 인정했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
이 지요?'
이제까지의 오류에 대한 반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은가
요?~
무슨 오류를 말하는 겁니까?'
기독교를 제외한 세상의 모든 종교 및 각 민족의 독특한 신앙
에 대한 이제까지의 부정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는 것이 아닌가
요?'
교황께서는 궁극적으로 세계의 평화를 염원하시는 겁니다.
결국 그것은 이제까지 기독교만이 유일한 진리임을 내세워온
입장을 바꾸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 입장
의 변화, 즉 이제까지의 잘못된 진리관을 진지하게 공개해야 하
는 것이 아닌가요?'
교황 성 하께서는 각 종교의 지도자들을 만나 그들과 포옹함
으로써 역사적 화해를 이루셨습니다.
그것만으로는 올바른 반성이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없어요
아직도 전세계의 수많은 교회는 배타적이지요. 즉 기타의 민속
신앙을 우상 숭배로 터부시하고 있단 말이오.
그러나 다른 신앙을 위해 바티칸이 어떤 적극적인 입장을 취
할 수는 없습니다.
아니지요 교황이 다른 종교와의 공존을 선언했다는 것은 그
자신 다른 신앙과 같은 위치에 서겠다는 겸허한 자기 반성이 아
닌가요?그렇다면 이제까지 기독교의 독선적 진리한 때문에 희
생된 신앙과 문화에 대한 사과가 필요하지요 특히 서양 여러 나
라의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에 편승하고 과학적 물질 문명의 힘
에 의존하여 타민족의 토속 신앙과 문화를 거세했던 역사에 대
한 원상 회복 노력이 있어야만 하지 않을까요?~
도대체 바티칸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얘기 입니까?'
가장 좋은 방법은 파티마의 제3의 예언을 공개하는 것이오.
그것이 어떤 내용인 줄 알고 그것의 공표를 그렇게 주장한단
말입니까?'
파티마의 제 3의 예언은 지금의 가톨릭이 인간의 탐욕과 진리
를 부정하는 이기심에 의해 그 본래의 순수한 모습으로부터 크
게 이탈되어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그 예언은
마리아의 경고이고 교황은 그 경고를 잘 이해하고 있어요. 파티
마의 마리아를 철저히 믿는 요한 바오로 2세는 그 경고에 의해
타종교와의 공존을 천명한 것으로 볼 수 있어요.
보지도 않은 예언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알 수 있단 말입니까?
그 예언은 교황 성하만 보도록 계시가 내려져 있는데요.
나는 그 예언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고 있소.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입니까?'
그 계시에는 음모가 숨겨져 있을 거요.
파티마의 예언에 음모가 숨겨져 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무엇이 음모란 말입니까?'
교황에게만 공개하라는 계시란 것이 바로 음모요.
그것은 성모 마리아의 말씀이었습니다.
결단코 아닐 거요 그것은 오히려 마리아의 예언을 묻어버리
는 음모적 행위로 볼 수 있소.
왜 그렇게 확신합니까?'
마리아가 보낸 가톨릭에 대한 경고는 세속의 성직자들에게는
교세의 약화를 의미하는 신호탄이지요. 어떤 성직자도 그 예언
을 달가워할 리는 없을 거요. 예언의 본질은 현재의 이익을 고려
하는 정책과는 관계가 없지요. 도대체 왜 그 예언이 공개되어서
는 안 된다는 거지요? 마리아의 예언이며 지고의 순수함에서 나
온 뼈를 希는 반성인데 말이오. 교황은 그 예언을 반드시 공개해
야만 하오. 그래야만 지난 2천 년 간의 과오에 대한 반성이 되기
때문이오.
귀하는 가톨릭에 무슨 원한이라도 있는 것처럼 보이는군요.
나는 내 민족의 문화를 얘기하는 거요. 기독교는 그 공격적
교리로써 우리 문화의 뿌리를 싹둑 잘라냈지요. 기독교가 아닌
모든 종교, 민속, 관습을 철저하게 부정하고 해체했어요. 기독교
만이 옳다는 확신은 지금도 이 나라의 분열에 앞장서고 있어요.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기독교의 잘못인가요? 고유 종교나 문
화를 보호하는 것은 귀민족의 역량 아닌가요?'
그래서 나는 그 예언의 공개를 촉구하는 거요. 이 땅의 미개
한 사람들이 자신의 문화를 버려가면서 그토록 신봉하는 기독교
가 유일한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바로 마리아를 통해 확인하
도록 해주어야겠다는 말이오.
미개한 종교나 문화는 기독교보다는 오히려 과학에 의해 부
정당하는 법입니다.
두 축이지요 이 땅에 기독교는 서양의 물질 과학문명과 함
께 들어왔어요. 우리의 토속 신앙은 그 과학에 의해 미신으로 취
급받고 전통 문화는 기독교에 의해 우상 숭배로 내몰려야 했지
요. 이 땅의 모든 문화는 서양 과학의 잣대에 의해 철저히 재구
성되었고 거의 대부분 몹쓸 것으로 폐기 처분되었지요. 비과학
적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그러나 그 과학, 이 땅의 모든 문화
를 비과학이라고 매도하고 폐기해 버린 그 서양 과학은 자신들
의 종교인 기독교에 대해서는 그런 잣대를 세우지 않았어요. 그
이유는 무엇이지요? 기독교가 과학적이기 때문인가요? 하느님
이 진흙으로 아담을 빛고 아담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었다는 것
이 과학인가요? 예수가 부활했다는 것이 과학인가요? 과학으로
보면 우리의 신앙은 미신이고 서양의 신앙은 미신이 아니란 말인
가요? 그러니 과학은 얘기할 필요가 없어요. 나는 교황청에서 그
간 타민족의 문화를 짓밟은 데 대한 사과를 하고 파티마의 예언
을 공개할 것만을 바라지 다른 어떤 설명도 듣고 싶지 않소.
주임 신부와 두 사람의 바티칸 신부는 사도광탄에게 무엇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이 돌아간 후 서 원장은 2층에 있는 사도광탄의 방으로
올라갔다. 이 심상치 않은 사람들의 출현에 대해 사도광탄으로
부터 설명을 들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아까 듣자니 세상에서 단두사람,교황과루치아수녀만 안
다는 파티마의 제3의 예언을 안다고 얘기하던데 실제로 알고 있
나요?'
보지 못했으니 알 수 없지요.
그러나 그들에게는 안다고 얘기하지 않았나요?'
그랬지요. 그것은 누구라도 알 수 있는 것이거든요, 생각만
좀 깊이 해보면.
어떤 식으로 생각해야 하지요?~
우선 마리아가 그 예언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고 교황에게
만 알리라고 했다지 않은가요? 그것이 바로 열쇠지요.
어째서요?'
그것이 마리아의 계시든 아니든 그 예언의 내용이 가톨릭에
대단히 불리한 것임에 틀림없어요. 좋은 내용이라면 그 예언은
이미 오래 전에 공개되었을 테니까요.
그러면 누가 그 예언을 교황에게만 알리라고 했을까요?'
그것은 어쩌면 처음 그 내용을 접한 루치아 수녀일지도 모르
지요. 너무도 참담한 예언에 아무에게도 알려선 안 되겠다고 생
각했을 수도 있어요. 아니면 당시의 성직자들이었겠지요. 어쨌
거나 그 내용은 지난 세월 기독교가 세계의 여타 신앙과 문화에
대하여 저지른 과오를 경고하는 내용임에 틀림없을 겁니다.
어떻게 알지요?~
요한 바오로 2세를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요. 그는 아그자라
는 암살자에 의해 총을 맞았어요. 겨우 1밀리미터 차이로 총알
이 심장을 관통하지 못했는데, 그는 수술이 끝나고 회복도 채 안
된 상태에서 멀리 포르투갈에 있는 파티마를 찾아 마리아에게
기도를 했어요 교황은 왜 하필 파티마의 마리아가 자신을 지켰
다고 생각했을까요? 이것은 그가 평소에 파티마의 마리아를 향
해 열심히 기도를 해왔다는 증거지요.
그렇죠, 평소에 늘 기도를 드리던 성령이 자신을 지켰다고 생
각하게 마련이지요.
교황은 늘 파티마의 예언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이 증명된
거지요. 이것은 그가 발표하는 바티칸의 수칙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 교황은 전례 없이 비장하게 가톨릭의 과오에 대한 인식
과 반성을 촉구하고 있거든요.
가톨릭이 어떤 과오를 저질렀다는 거지요?~
바로 아까 말한 타신앙과 문화의 파괴지요. 가톨릭의 이름으
로 자행된 반인권적 범죄도 포함되겠지요.
교황청은 왜 그 예언에 그렇게 민감할까요? 그냥 발표해 버
리고 무시하는 게 그렇게 숨기고 있는 것보단 나을 것 같은데.
교황청은 이미 파티마에 나타난 마리아를 이적으로 승인했어
요. 승인을 했을 뿐만 아니라 성지로 선포했지요 그렇게 해놓고
예언만 무시한다면 이치에 맞지가 않겠지요.
바티칸으로서는 참으로 곤란한 예언이군요.
나는 그 예언이 바티칸에 주는 상징적 의미는 훨씬 무서울 수
도 있다고 생각해요.
무슨 의미 인가요?'
또다른 예언들이 있기 때문이지요.
비극적 예언
서 원장은 자신도 모르게 사도광탄과의 대화에 빠져들고 있었
다. 그녀는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음 질문을 하고 있는 자
신을 발견했다 이것은 그녀가 다른 환자들을 대할 때와늪 완전
히 다른 상황이었다
마리아의 또다른 예언입니까?'
아니오. 예언 그 자체로 유명한 사람들이지요. 세기의 예언자
라고 부를 수 있을까.
누구의 예언이죠?'
성 맬러가이, 혹은 성 말라카이라고 불리는 예언자지요. 그는
기독교 신비주의자로 에이레 북부의 대주교였어요.
언제 사람입니까?'
11세기 말부터 12세기 전반을 산사람인데 그의 예언이 공개
된 것은 죽은 지 450년이 지난 15n년 무렵이에요.
가톨릭에 관한 예언을 했나요?'
그래요. 그는 자신의 예언을 시를 통해서 남겼는데 12세기 초
반의 교황 세레스틴 2세부터 마지막 교황까지 110여 명의 인물
에 대하여 재임 기간,출신지,특징, 어떤 경우는 실제의 이름까
지 열거했지요.보는 사람들이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로 대부분
정확했어요. 예를 들면 클레멘트 13세를 '움브리아의 장미꽃' 이
라고 했는데 그것은 그가 움브리아 출신이었기 때문입니다. 클
레멘트 14세를 '달리는 곱' 이라 한 것은 그 교황의 가문의 문장
이 바로 달리는 곰이었기 때문이지요.
교황의 예언자라고 할 만하군요 그가 현대의 교황들에 대해
서 했던 예언은 어떤 것이었나요?~
그는 베네딕트 15세를 '신앙 인구 감소하다'라고 표현했어
요. 그런데 실제로 1차대전을 겪어야 했던 그 교황의 재임중에
유럽 사람들이 하도 많이 죽어서 신자들이 많이 감소했어요. 또
바오로 6세를 '꽃 중의 꽃' 이라고 했는데, 그 교황이 프랑스 출
신임을 암시한 것이죠. 꽃 중의 꽃은 백합으로, 바로 프랑스의
국화예요. 또한 그는 1979년에 즉위한 루치아노 알비노, 즉 요한
바오로 1세를 '반달에 관하여' 라고 예언했어요. 즉위한 지 雅일
만에 죽은 그 교황이 임종할 때 반달이 하늘에 걸려 있었지요.
지금의 교황인 요한 바오로 2세에 대하여는 낄식으로부터' 라고
예언했는데, 그것은 그가 이제까지의 그 어떤 교황의 명성도 뒤
덮어버릴 만한 업적을 쌓는다는 뜻으로 해석되고 있어요.
그런 예언들이 왜 바티칸에 무서운 상징이 될 수 있다는 거죠?
앞으로의 예언이 무섭기 때문이지요.
어떤 예언인가요?'
그는 지금의 교황 이후 오직 두 사람의 교황만이 나온다고 했
어요.
네에, 그게 무슨 말이죠? 그럼 가톨릭이
서 원장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래요.다음의 교황은 '올리브의 영광'이라고 되어 있고,마
지막교황은 '로마의 베드라고 되어 있어요. 이 로마의 베드
로 시대에 가톨릭 교회는 종말을 고한다는 예언이지요.
성 로마 교회의 마지막 박해 때 로마의 베드로가 지배하게 되리라
그는 많은 고난 가운데서 그의 양떼를 먹일 것이며 그후 일곱 언덕의
도시는 파괴될 것이며 끔찍한 재판관이 그 도시를 심판하리라
끔찍한 예언이군요.
그 예언은 바티칸의 고문서 보관소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교황청에서는 상당히 신경을 쓰고 있어요 무엇보다도 이제까지
의 교황들에 대한 말라카이의 예언이 너무나 정확하게 맞았기
때문에 바티칸은 불안해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런 예언을 과연 믿을 수 있을까요? 가톨릭에 종말
이 온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일까요?'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이지요.가톨릭이라고 해서 영원
할 수는 없지요. 다만 우리가 사는 시대에 그 종말이 온다는 예
언이 당혹스러운 거죠.
그런 예언에 대한 바티칸의 입장은 어떻죠?'
바티칸은 다만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이에요.
교황청의 입장이 어려울 수밖에 없겠군요.다른사람도 아닌
마리아의 예언도 공표하지 못하고 있는 걸 보면 말예요.
사람들을 더욱 전율케 하는 것은 말라카이가 했던 예언과 조
금도 다름이 없는 예언을 한사람이 말라카이가죽은 지 4백 년
후에 나왔다는 사실이에요.
그 사람은 혹시 말라카이의 예언시를 보지 않았을까요?'
그랬을 가능성은 조금도 없어요. 말라카이의 예언시는 그 사
람이 죽은 후에야 발견되기도 했지만, 그는 말라카이보다 훨씬
자세하게 교황들의 운명을 예언했고 세계의 모든 일들에 대해
다양한 예언을 했기 때문이지요.
그가 누구죠?'
노스트라다무스 사상 최고의 예언자지요.
노스트라다무스가 교황에 대해 예언한 것이 있다구요?'
서 원장도 나폴레옹과 히틀러의 등장을 예언한 세기의 예언자
노스트라다무스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가톨릭과 교회의 운명에 대한그의 예언은 말라
카이의 예언과 완전히 일치하고 있어요.
어떤 예언을 했는데요?'
그도 역시 현재의 교황 이후에는 단 두 명의 교황이 존재할
것이라 했습니다. 말라카이와 마찬가지로 베드로라는 이름을 가
진 사람이 마지막 교황이 될 것이며, 이 교황에 이르러 바티칸은
약탈당하고 로마 교회는 무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지요.
페스트도 전쟁도 살해할 수 없었던 자 한 언덕의 꼭대기에서 죽으
리라. 하늘에 얻어맞아 사제는 죽으리라. 그때 보리라, 選황의 기반
을 잠식한 교황청 사람들의 파멸을
어쩌면 그 두 사람의 예언이 이토록 똑같을 수 있을까요?'
무서운 능력을 지닌 예언자들이지요. 나는 파티마의 제3의
예언도 그들의 예언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럼 실제로 사도광탄 씨가 다우니라는 수도사를 사주했나
요? 비행기를 하이재킹하고 교황청에 파티마의 예언을 공개하
라고 협박하도록 말이죠.
그것은 그의 선택이었지요.
사도광탄의 얼굴에 다우니를 추도하는 듯한 표정이 잠시 떠올
랐다.
나는 사람들이 올바른 시각으로 종교를 보기 바랐을 뿐입니
다. 그리하여 교회만 다니면 천국에 가고 안 다니면 지옥에 간다
는 무자비한 논리에 빠져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이 뚜렷하게 구
분되는 현상을 막고 싶었지요. 결국 그것은 민족의 분열을 초래
하니까요.
그러나 기독교를 믿을 자유는 누구에게나 있는 게 아닌가요'
그것이 민족 분열을 초래할 수 있으니 믿지 말라고 할 수는 없잖
아요?~
물론이지요. 다만 기독교가 아니면 모두 마귀라는 식의 주장은 곤란하지요. 나는 그
런 주장이 틀렸다는것을 마리아를 통해
보여주고 싶은 거예요. 파티마의 제 3의 예언은 기독교의 독선과
성직자들의 오류를 질타하는 내용일 수밖에 없어요. 아니면 공
개하지 못할 이유도 없고, 교황이 이제까지 마귀라고 몰아붙였
던 타종교와의 공존을 천명할 이유도 없지요. 그 예언은 교황에
게 심한 압박감을 주는 겁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무당을 믿고 굿을 할 수는 없는 것 아니에
요?'
믿고 안 믿고의 문제 이전에 그것들이 우리의 문화였다는 사
실이 중요하지요. 오랜 세월을 우리와 가까이 있어 온 것이에요
거기에는 우리의 살아온 모습이 있지요.
그러나아무래도그것은가까이하기가좀
신은 무엇이고 종교는 무엇입니까? 애정을 갖고 보면 예수가
하는 역할을 우리의 산신령도 충분히 해내고 있어요. 서세동점
의 시대에 가장 피해를 본 것은 바로 우리의 종교 문화이고 우리
의 정신 문화지요. 세상의 모든 신비한 힘은 사실 인간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고 신화란 그 민족의 인간들을 기록한 것인데, 우리
는 지금 다른 민족의 신화만을 믿고 우리의 신화는 모두 기억에
서 없애버리고 말았어요.
다른 민족의 신화라는 것은 무엇이죠?~
구약이란 무엇이지요? 유대 민족의 신화가 아닌가요?'
서 원장은 혼란스러웠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화는요?'
단군신화 훌륭한 신화지요. 홍익인간의 이념이 있잖아요?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는 최고의 휴머니즘을 우리 민족의 이념으
로 천명한 것이지요.
그런 논리라면 우리의 신앙은요?'
이 땅의 자연신,조상신과 외래의 불교,유교가 혼합되어 만
들어진 우리 민족의 정신 생활의 유산인 무속이 있지요. 과학적
인 시각에서 보면 종교는 그것이 어떤 종교이든 다 미신이에요
어떤 종교가 어떤 종교보다 낫다, 혹은 못하다고 얘기할 수는 없
다는 말이지요. 종교적인 시각에서 보면 내 종교만이 올바른 것
이에요. 그렇다면 왜 천지신명을 못 믿고 산신령을 못 믿는단 말
입니까? 우리의 조상들이 잘 믿고 잘 살아왔던 내 것, 내 종교인
데요.
그러나 무지하고 허황된 무당을 믿을 수는 없는 것 아니에
요? 무당들이 얼마나 한심한지는 사도광탄 씨도 알 텐데요.
지금 우리 나라에는 20만 명이 넘는 무당이 있어요. 모두가
신이 내린 것은 아니지요. 그 가운데는 생활을 위한 직업 무당이
많지요. 그들에게 신통력을 기대할 수는 없을지 몰라요. 그러나
종교를 통해 신통력을 바란다면 그들이 승려나 목사보다는 신통
력이 있다고 나는 생각해요. 신이 내려서 무당이 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종교는 어느 믿음이 신통력이 더 센가
를 다투는 것은 아니에요.
그렇겠지요. 하지만 목사는 신통력이 없더라도 생활의 교훈을 주는 설교를 하지만
신통력이 없는무당의 행위는 모두 허위
가 아닌가요?'
아니지요.그들도 나름대로 충실하게 인간의 병을 치료하고
있어요.
어떻게요?'
무당은 인간의 마음속에 잠재되어 있는 막연한 불안감을 어
루만지지요. 무당이 신이 내려 점을 치는 것은 인간의 합리적 판
단이 어려을 때 행해져요 인간이란 무척 합리적인 존재인 듯하
지만 막상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오히려 비 합리적으로 행동하
거든요. 근본적으로 인간은 신앙을 요구하는 존재이고, 무당은
신통력과는 무관하게 이에 부합하는 사람들이지요.
서 원장은 사도광탄과의 대화에서 무언가 잡힐 듯 잡힐 듯하
다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다시 멀어지는 어떤 것을 느꼈다
유아세례를 받고 이미 오랜 세월 성당에 다닌 그녀로서는 사
도괌탄의 말을 그대로 다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서 원장은 가
톨릭이 우리 문화를 배려하는 관대한 종교이며,가톨릭 교리가
동양 사상과 일맥 상통하는 점이 많다고 막연히 생각해 오던 터
였다.
그러나 사도광탄의 얘기를 듣다 보니, 종교의 선택은 그 종교
의 질적인 차이보다는 문화권의 힘의 차이에 의해 결정된다는 어
렴풋한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굿과 무당을 무조건 미신이라고
생각하고 멀리했던 것이 혹시 문화적 힘의 차이 때문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어 서 원장은 서둘러 대화를 마치고 일어섰다.
숫자의 비밀
조용한 대학 도시 스탠퍼드는 오로지 공부만을 위해 전세계에
서 몰려든 학생들로 북적거리는 곳이다 좁은 도시이지만 답답
하다는 느낌이 별로 들지 않는 것은 아름다운 해변과 캘리포니
아특유의 부드러운 잔디가 깔린 좋은 코스의 골프장이 있기 때
문이다.
스탠퍼드 대학에는 한국에서 유학온 학생들이 꽤 많은 편이
어서 유학생회는 그런대로 북적거렸다
수아의 컴퓨터 실력은 학교 전체에 정평이 나 있어서 유학생
들은 문제가 생기면 늘 그녀에게 찾아오곤 했다. 비교적 여유가
있는 유학생이 얻은 그리 작지 않은 아파트가 수아에게 컴퓨터
를 배우고자 하는 유학생들의 아지트였다. 그들은 한번 이 아지
트에 모이면 하룻밤을 새우는 것은 보통이고 햄버거, 피자, 콜라
따위로 끼니를 때우며 며칠씩 지내곤 했다.
이렇게 된 데는 수아가 워낙 남녀 가리지 않고 허물없이 모두
와 잘 어울려 지내는 이유도 있지만, 수아에게 환심을 사고 싶어
하는 남학생들이 좀처럼 그녀의 곁을 떠나려 하지 않기 때문이
기도 했다
수아, 오늘은 무엇을 가르쳐줄 거야? 체이스 맨해튼뱅크에 잔고 없이 계좌 트는 방
법이나 브라운 대학 여학생들의 비밀 대화
방에 들어가는 방법은 어떨까?'
안 돼, 오늘은 할 일이 있어.
하지만 뭐라도 배우고 싶어 죽겠다. 해킹에 한창 맛들이게 해
놓고 바쁘다고 하면 어떡해? 서울에 있는 미정이 ID 도용하는
방법이라도 가르쳐줘.
호호, 넌 머리가 나빠서 안 돼. 열흘은 꼬박 가르쳐야 겨우 미
정이 비밀 번호를 알까말까 할 정도야.
하하하.
자리에 모인 유학생들은 모두 웃었다.
그러면 오늘은 우리도 배울 게 없는 거야?'
오늘은 안 돼. 논문 계획서를 만들어야 돼. 그 대신 수수께끼
를 하나 내줄 테니 맞춰봐.
그래, 뭔데'
얼마 전 뉴욕에서 월리를 잡을 때 그의 컴퓨터에서 나왔는데
읜지 모르게 약간 범죄 냄새가 난단 말이야. 탈세 자료와 함께
극비 파일에 들어 있어 FBI의 수사관들이 탈세 쪽으로 추궁했는
데 그 회사는 단호히 부정했어. 아무런 연결 고리 없이 오직 숫
자의 상관 관계밖에는 단서가 없는데 어때, 한번 해볼래?'
맞추면 뭐가 있어?'
FBI에서 포상금이 나온대.
얼마나?~
글쎄, 모르기는 해도 한 학기 등록금은 해결될걸.
와아!
탈세범들은 보통 숫자를 크게 줄여 장부에 기록한다. 하지만
모든 숫자들 사이에는 상관 관계가 있게 마련이어서 FBI의 탈세
심리 수사관들 중에는 수학과 출신이나 심지어는 기호학이나 암
호 해독의 전문가들도 있다.
그들은 월리의 컴퓨터에 있던 숫자군이 한 금융 회사의 극비
파일 중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의심했지만 어떤 혐의도 찾아낼
수 없었다. 그들은 수감중인 월리를 추궁하고 수아에게도 의견
을 물어왔지만 그녀 역시 숫자 사이의 상관 관계를 찾아낼 수 없
어 포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 그럼 문제를 주겠어. 시간은 무한대, 단 외부에 알리는 것
은 안 돼. 한 가지 충고하자면 하루 만에 상관 관계를 못 찾으면
잊어버리는 게 좋을 거야. 다음 학기 등록금 공짜로 벌려다가 이
번 학기 학점 날려보내는 수가 있으니까.
수마는 자신의 컴퓨터에 입력되어 있는 그 숫자군을 종이에
적었다.
U 750M -825,OOOM -1,155,OOOM -1,050M
U dOOM -1,110,OOOM -1,554,OOOM -1.412M
F 750M -142,500M -199,500M 181M
37,500M -322,500M 451,500M -4IOM
2,250M -311,OOOM -441,OOOM -4OOM
정말 척 봐서는 탈세 자료 같아 보이네. 매출액 조작 같은 것
말이야. 왼쪽의 문자는 거래처고.
하지만 매출액 조작이라면 숫자들이 거꾸로 씌어 있어야 되
잖아. 축소돼야 하니까.
이런 바보, 그러니까 암호지. 전문가들은 일부러 거꾸로 하는
거 아냐.
그렇게 쉬운 게 아닐 거야, FBI의 전문가들이 못 찾았으면.
이건 수수께끼가 아니야. 누구도 이런 것을 가지고 상관 관계
를 알아낼 수는 없어 . 즉 정보가 너무 부족하다는 거지.
모두들 한마디씩 하는 것을 듣고 있던 수아가 레이저프린터에
서 출력을 끝내고는 일어서며 말했다.
잘들 해봐, 나는 갈 테니. 등록금 벌려다가 학점이나 날리지
말고.
수아는 며칠 동안 논문 계획을 짜느라 집에 파묻혀 지냈다 국
내에서와 달리 외국에서 공부를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비용이
큰 문제여서 논문을 한번에 써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쫓길 수
밖에 없다.
벌써 몇 번째 울리는 호출기 소리에 수아는 짜증이 나서 일어
났다. 스위치를 아예 꺼버리려던 수아는 호출기에 찍힌 메시지
를 보고는 약간 놀랐다.
테드.
그는 학교에서 자주 마주치는 남학생 가운데 하나였지만 수아
와 친하게 지내는 사이는 아니었다 그는 강의실이건 식당이건,
콘서트홀이건 미팅 장소건 금방 자고 일어난 사람처럼 부스스한
머리에 구김이 잔뜩 간 옷을 입고 다녀 여학생들 사이에 얘깃거
리가 되곤 했다. 하지만 자기 할 일을 야무지고 똑떨어지게 해내
서 교수들 사이에서는 평판이 좋은 학생이었다.
지난번에 그는 처음으로 아지트에 나왔었는데 그날따라 수아
가 일찍 집에 와버려 별로 친해질 기회가 없었다.
수아는 상대의 전화 번호를 돌렸다.
풀었어요.
풀었다니까요.
무얼 말이에요?~
그제야 수아는 생각이 났다.
네? 풀었다구요, 그 수수께끼를 풀었다는 거예요?~
뭔가 잘못 이해한 거 아니에요?~
와서 보면 될 거 아닙니까.
상대의 불쾌감이 전화기를 타고 흘러왔다
지금 어디 있어요?~
학교에요.
그럼 지금 학생회관 휴게실로 갈게요.
수아는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우선 친하지도 않은 말
없는 남학생이 그 수수께끼를 풀려고 마음먹었다는 것이 이상
했고,다음으로는 그가 수수께끼를 풀었다는 사실이 믿기 힘들
었다
수아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FBi 전문가들도 손을
들고 자신도 일찌감치 기권해 버린 수수께끼를 그가 풀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그의 착각일 수밖
에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만약 착각이 아니라면, 그것은 그 학
생이 자기에게 관심이 있다는 얘기에 다름아니었다.
수아는 귀국하게 된 한 선배한테서 거저 얻다시피 한 낡은 자
동차에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백미러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았다. 무신경하게 입은 듯한 자신의 옷차림이 왠
지 마음에 걸렸다.
뭔가를 의욕적으로 해본다는 게 더 중요하죠. 전문가들도 못
풀었으니 틀려도 괜찮아요. 다만 그런 문제에 너무 매달리다 보
면 쓸데없는 시간 낭비가 될 수 있어요. 그러니 지나치게 마음쓰
지 말아요.
보나 안 보나 당연히 틀렸을 것으로 생각하고 한껏 상냥한 목
소리로 위로의 분위기를 돋우려던 수아는 다음 순간 테드의 사
무적인 목소리에 맥이 풀려버렸다
별로 어렵지 않게 풀리던데요.
테드는 여유 있는 표정으로 싱긋이 웃었다.
네? 믿어지지 않아요.
설명할까요?'
아니, 잠깐만요. 먼저 전화를 하구요.
어디에 전화를 해요?'
FBI에요.
왜요?~
풀었다고 해야죠.
그래요.
이제 수아는 완전히 놀라고 말았다. FBi에 먼저 전화를 하겠
다고 하면 놀랄 줄 알았는데 테드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자
신이 있다는 얘기였다. 수아는 신중해졌다.
설명해 보세요.
왼쪽 문자는 각 나라의 영어 이니셜이에요. 처음의 u는 미
국 그 밑의 U는 영국, 는 프랑스, j는 일본, H는 홍콩이에요.
그런가요?~
수아는 반신반의하면서 속으로 맞춰보았다. 유나이티드 스테
이츠,유나이티드 킹덤,프랑스, 저팬, 홍콩 다 맞았다. 테드는
수아가 속으로 맞춰보는 것을 아는지 웃으며 기다렸다.
숫자는 무슨 의미죠?'
왼쪽의 첫 번째 숫자는 각각 그 나라의 화폐로 표시한 금액이
에요. 달러, 파운드, 프랑, 엔, 홍콩달러죠.
그 다음은요?~
그것은 이 금액을 어느 나라의 화폐 단위로 환산한 거예요.
어느 나라죠?'
어느 나라일 것 같아요?'
글쎄요.
그대의 조국인데요.
내 조국이요? 어머, 한국 말이에요?'
네, 바로 우리 나라의 원화로 환산한 금액이에요.
그렇다면 세 번째 숫자는요?'
원화에 40퍼센트씩을 곱한 액수죠.
마지 막은요?'
그것을 다시 달러로 환산한 거예요.
모든 화폐 단위를 달러로 환산한 거란 말이죠?'
그래요.
수아는 잠시 테드가 말한 것을 점검했다. 과연 틀림없었다.
이게, 이게 말이 되나요? 이런 것을 어떻게 맞출 수 있단 말
이죠? 혹시 귀신이 아닌가요?'
의외로 간단했어요.
간단했다구요? 믿어지지 않는군요. 나도 이 수수께끼를 풀어
보려고 모든 방법을 썼지만 그런 건 생각도 못했어요.
세상엔 우연의 일치라는 게 있잖아요.
무슨 뜻이죠?~
나는 그 다섯 개의 숫자열 앞에 있는 문자와 숫자와의 관계에
주목했어요. J 옆에 있는 숫자는 다른 숫자에 비해 월등히 커요.
다른 숫자가 백 단위 혹은 천 단위인 데 비해 J 옆에 있는 숫자만
그렇게 큰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했지요. 거의 백 배가 넘는 큰
숫자라 나는 그 라는 문자의 이니셜에 집중했죠.뭐가 떠올랐
는지 알겠어요?'
저 팬?'
그래요. 마침 서울에서 누나가 다니러 왔어요. 신문을 가지고
왔길래 거기에 있는 환율 조회표와 맞추었죠. 딱 맞더군요.
테드는 수아에게 문제를 풀게 된 경위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지트에서 돌아온 테드는 며칠 동안 수아가 제시한 괴상한
숫자들을 앞에 놓고 끙끙댔다. 그는 수아에게 해답을 들이밀고
싶은 일념으로 숫자 풀이에 의욕적으로 매달렸다. 그러나 해답
은커녕 조그만 단서조차 찾을 수 없었다
도대체 하나의 문자와 그에 따른 네 개씩의 숫자들만으로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 않았지만
오기로 대했다. 천재라고 소문난 수아가 풀지 못한 문제의
해답을그녀 앞에 자신 있게 내밀고 싶었다. 그녀로부터 칭찬을
듣고 싶었다.
그것이 다른 남학생들처럼 그녀 주변을 맴도는 것보다 남자답
고 품위 있게 그녀의 마음을 끌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
각되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그것은 훌륭한 결정이었다.
테드는숫자풀이에 매달렸다 그는숫자 풀이의 단서는 절대
적으로 각 숫자열 사이의 상관 관계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상관 관계는 그렇게 쉽사리 드러나지 않았다.
겨우 밝혀낸 것이라고는 각 숫자열의 세 번째 숫자는 두 번째
숫자의 1.4배가 된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두 개의 1)자 중에서
처음의 U자가 붙은 숫자만이 나중의 숫자도 처음 숫자의 1.4배
가 된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것으로 미루어볼 때 숫자군에는 반드시 어떤 규칙성이
있음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이 외에 수학적으로 드러나는 통일
적 관계는 더 이상 찾아낼 수 없었다
'어째서 만 이렇게 큰 숫자일까?'
하룻밤을 꼬박 샌 다음 테드가 주목한 것은 라는 문자였다.
다른 문자가 붙어 있는 숫자보다 가 붙은 숫자는 월등히 크다
는 사실에 주목한 그는 의 의미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아, 혹시?'
그때였다.
'딩동 딩동 딩동 "
한창 생각에 빠져 있던 테드의 귀에 기다리다 지쳤는지 초인
종이 계속 울어댔다. 그러나 그는 초인종이 몇 번이나 울리도록
문을 열 생각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베란다에 쌓아
둔 폐지 꾸러미를 헤집으며 뒤졌다.
'딩동 딩동 딩동 "
누구요?'
테드는 있는 대로 짜증을 부리며 문을 열었다. 뜻밖에도 한국
에서 온 누나가 서 있었다.
어, 누나. 웬일이야? 그런데 혹시 한국 신문 있어?'
잘 있었니? 안에 있으면서 왜 그렇게 문을 안 열어?'
신문 있냐니까?'
그래 있어 .
테드는 누나의 가방 옆에 비쭉 나와 있는 한국 신문을 가로채
서는 황급히 넘겼다
그래, 이거야!
신문의 한 면과 숫자를 맞춰보던 테드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
를 질렀다. 곧바로 수아를 호출한 테드는 이것저것 묻는 누나에
게 건성으로 대답하며 전화를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수아의 전화
를 받자마자 누나가 부르는 소리를 뒤로하고 학생회관으로 달려
왔던 것이다
아, 역시 역사는 우연히 이루어지네요.
그런데 이까짓 게 뭐 중요하다고 그래요?'
결코 쉽게 볼 일이 아녜요. 암호란 건 늘 비밀을 간직하고 있
잖아요. 상대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도 모르죠.
그런 일에 신경을 쓰는 건 시간 낭비예요. 할 사람들이 따로
있잖아요. FHI에 알려주기만 하면 일은 끝나잖아요.
하긴 그렇네요. 바로 FBI에 알려주죠. 성과가 있으면 연락이
오겠죠.
성과가 있으면요?'
아무래도 뭔가 범죄의 냄새가 나는 자료 같아요.
내가 헛수고를 한 건 아니겠지요? 분명히 풀기만 하면 등록
금이 나온다고 했지요?'
테드는 수아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는 데 대해 다소 화가
났다. 그는 숫자 풀이에 며칠 밤낮을 바치고 문제를 푼 것이 너
무 기뻐 유레카를 외치며 허겁지겁 달려왔는데, 수아가 너무 성
의 없이 대답해 자존심이 상했다
아참, 그랬던가요? 네, 아마 그게 그러니까
확실히 해요.
사실 누군가 이걸 풀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했거든요. 솔
직히 무슨 의미가 있을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았구요.
그럼 빈말이었어요?~
아녜요, 제 얘기는 시간이 약간 걸릴지도 모른다는 그런 뜻이
에요.
그럼 연락 줘요.
간단한 인사와 함께 다소 냉랭한 표정으로 일어서는 테드의
뒷모습을 보면서 수아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천년의 법력
기미히토 교수님, 이번 주말에는 한국의 유서 깊은 절을 한번
찾아가 보는 게 어떨까요?'
고마운 말씀입니다. 그렇잖아도 꼭 한번 가보고 싶었습니
다.
기미히토는 조 교수의 배려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사도광탄 씨도 같이 갈 겁니다.
아, 그분이 돌아오셨군요.
기미히토는 사도광탄이 돌아왔다는 말을 듣자 반가운 마음이
솟는 것을 느꼈다
처음 봤을 땐 어딘지 이상하게 느껴졌던 사도광탄이 지금은
묘한 호기심을 자극하면서 다가왔다. 토우의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도 이제는 사도광탄에게 기대하고 있는 형편이었기에 그의
귀환은 다행스럽기조차 했다.
서 원장이 운전하는 자동차는 서울을 떠난 지 네 시간 정도 지
나 해인사의 일주문에 도착했다.
서 원장은 모처럼 휴가를 내어 흥분되는지 가야산으로 오는
내내 유쾌한 목소리로, 시골 풍경을 감상하며 생각에 잠겨 있던
모두를 즐겁게 했다. 단풍이 곱게 물들기 시작한 산천은 산수화
처럼 펼쳐져 있었고, 추수가 끝나 누렇게 변한 논밭은 그림 엽서
처럼 아늑하고 아름다운 색채를 연출해 내고 있었다.
미리 연락을 해두어서인지 절에서는 학승을 내보내어 안내를
해주었다 학승은조교수의 이름을 알고 있었던 모양인지 해인
사의 사적 가치를 설명하는 데 열심이었다
가야산 해인사는 불교 삼보 중 법보로 유명합니다. 해인사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양산 통도사와 국내 최대의 사찰인
순천 송광사와 함께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3대 사찰 중 하나입
니다.
법보는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불교에는 삼보란 것이 있는데 법보, 불보, 승보를 뜻합니다.
법보는 부처님의 계율을 수행하고 율법을 해석하는 데 있어 가
장 권위를 가진 절을 말합니다 우리 불교의 법통은 해인이 잇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불보는 부처님의 가사나
사리를 모신 절을 말하는 것으로 양산 통도사에는 인도로부터
전해진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있습니다. 승보는 문자 그대로 스
님을 말하는 것으로 송광사에 뛰어난 스님이 많고 그 수에 있어
서도 제일이라 승보라 하는 것입니다.
기미히토는 학승의 설명을 귀담아듣고 있다가 말했다.
우리 일본의 절과는 사뭇 다르군요.
어떻게 다릅니까?'
일본의 절들은 사실 깊은 수양이나 참선을 위한 도장은 아닙
니다. 승려들은 대중과 쉽게 어울려 지내고 거의 관광 수입 등에
의존해서 살아가지요. 때로는 귀신을 쫓기 위한 기도를 하러 오
는사람들도 있습니다만 그런 일은 거의 신사에서 신관들이 맡
아서 합니다.
기미히토가 학승의 설명에 귀 기울이며 관심을 나타내고 있는
것과는 반대로 조 교수는 아까부터 얼굴을 찌푸리고 무슨 생각
엔가 깊이 잠겨 있었다 일행이 학승을따라 대웅전으로 올라가
는 동안에도 조 교수는 뒤에 처져 여전히 생각에 잠긴 채 느릿느
릿 발걸음을 옮겨놓았다
사도광탄 역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눈을 반쯤 감은 채로 손
을 턱에 대고 한 손으로는 허공에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학승은 괴이한 일행이라고 생각하는지 힐끔힐끔 두 사람을 쳐
다보며 설명을 계속했다.
해인사는 또한 우리 나라 선교의 법통을 잇는 절입니다. 여러
해 전에 돌아가신 성철 큰스님을 필두로 해인선원에서는 우리
나라의 고명한 선승들이 대행의 업을 쌓아왔습니다.
변 교수가 학승의 설명을 한창 일본어로 옮기고 있을 때였다.
그런가
조 교수가 갑자기 무슨 중요한 사실이라도 밝혀냈는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탄식했다. 일행은 모두 조 교수를 주목했다.
그러나 조 교수는 아무런 말도 잇지 않았다.
사도광탄 씨가 해인사로 오자고 한 것은 틀림없이 이유가 있
을 것 같은데 이제는 얘기를 해줘도 되지 않을까요?'
조 교수의 이런 모습을 본 서 원장이 사도광탄을 채근했다 그
러나 사도광탄은 잠시 고개를 끄덕였을 뿐 천천히 걸음을 옮기
며 학승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해인사에는 수많은 보물이 있습니다만 그중에서도 팔만대장
경이 으뜸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학승의 발걸음은 경판고를 향하고 있었다.
이 경판고도 역시 국보죠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경판을 보
관하고 있습니다만 아직│ 단 한 장의 경판도 썩거나 곰팡이가
피지 않았습니다 통풍에│대한 그 세심한 배려를 생각하면 놀라
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기미히토는 연신 고개를끄덕 거렸다.
해인사에는 큰불이 일곱 차례나 나 거의 모든 건물들이 한두
번씩은 불에 탔습니다. 지금의 건물들은 모두 조선 후기에 지어
진 것들입니다. 그러나 │ 경판고만은 단 한 차례도 불길에 손상
된 적이 없습니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일행은 학승의 설명에 놀라움을 표했다 그러나 사도광탄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는 이미 그 모든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 묵묵히 학승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고만 있었다.
지리산 공비 토벌 때 팔만대장경은 다시 한 번 큰 위기를 겪
었습니다. 당시 공비들은 아군에 쫓겨 모두 해인사로 피신했습
니다. 작전을 지휘하던 미군 고문관은 해인사를 폭격하면 공비
를 섬멸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는 한국 공군의 출격을 명령했습
니다.
출격 했나요?'
서 원장이 조급하게 물었다.
물론입니다. 당시 작전권은 미군이 갖고 있었으니 군령은 추
상 같았습니다.
그래서요?'
네 대의 공군기가 출격하여 미리 떠있던 미군 정찰기의 지시
대로 해인사를 폭격하기 위해 급강하했습니다.
저런 !
그러나 쏜살같이 아래로 내리꽃히던 전투기들 중 맨 앞의 지
휘기가 급히 폭격 중지를 외치며 솟아올랐습니다. 편대장이었던
김영환 중령이었습니다.
그래서요?'
그는 득시글거리는 공비를 코앞에 두고도 편대를 이끌고 그
냥 기지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서 원장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런 인물도 있었군요. 그러고 나서도 그는 무사했나요?'
화가 머리끝까지 난 미군 고문관이 공군 참모총장과 김영찬
중령을 호출했습니다 당장에 군법회의에 회부한다며 펄펄 뛰는
고문관 앞에서 김 중령은 당당하게 항변했습니다. 군법에 의해
사형을 당한다 하더라도 팔만대장경이 있는 해인사를 폭격할 수
는 없다고 한 거죠.
저런 !
팔만대장경은 이렇게 지켜졌습니다.
가슴이 아리 네요.
서 원장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학승은 지난 이야기 한 토막을
무심하게 들려주고 있었지만 그녀는 묘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
다. 서 원장이 낮은 목소리로 조 교수에게 물었다.
조 교수 이상한 생각이 들지 않아?'
뭐가?'
그때 그 장소에 그런 군인이 있었다는 게 단지 우연으로만 생
각되지 않는단 말야. 뭔가 큰 힘이 그것을 보호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런 느낌이 들어.
변 교수의 통역으로 이야기의 내용을 파악한 기미히토가 갑자
기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다
혹시 .
그러나 기미히토는 하고 싶은 말을 다 마무리할 수 없었다. 사
도광탄이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대며 조용하라는 시늉을 했기 때
문이다 기미히토는 어쩐지 그런 사도광탄에게서 거부할 수 없
는 힘을 느꼈다.
게다가 일본, 중국 할 것 없이 모두 팔만대장경을 그토록 탐
냈지만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때도 티끌 하나 다치지 않았습
니 다.
학승의 설명은 여기서 끊겼다 나이 든 한 승려가 나타났기 때
문이다. 학승은 매우 공손한 자세로 인사를 했다
아미타불, 큰스님을 뵈옵니다.
아미타불, 손님들을 뫼시고 있었구나.
인자한 표정의 승려는 일행에게도 합장을 하며 인사를 했다.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의 조세형 교수님과 일행들이심니다.
그래, 그래.
큰스님은 조 교수를 비롯해 일행 한 사람 한 사람과 눈을 마주
치며 인사를 나누다가 기미히토를 보고는 눈길을 멈추었다 이
내 그가 일본인 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아미타불, 시주는 바다 건너서 오신 분이로군요.
기미히토는 큰스님이 첫눈에 자신을 알아보자 깜짝 놀랐다
한국인과 일본인을 얼굴 하나로 구분하시는 것을 보니 과연
큰스닝이십니다.
일행은 스스럼없이 웃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사도광탄의 얼
굴에 눈길이 머문 큰스님은 움찔하며 놀라는 표정이 역력했다.
아, 너무나 어려운 상이시군요.
사도광탄은 말없이 웃었다.
성철 큰스님께서 평소에 당신을 만나려면 반드시 3천 배를
하도록 하셨지만 몇 분의 기인이 오셨을 때에는 뛰어나가 손을
맞잡으셨습니다. 선생님은 성철 큰스님이 계셨으면 맨발로 나와
서 손을 잡을 상이십니다.
서 원장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물었다.
이분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인데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십니
까? 무엇이 비댐하단 말씀입니까?'
천하 중생을 위해서 몸을 바치신 분입니다. 부처로 나아가는
큰 깨달음을 얻으셨다가 몸을 잃으셨군요. 하지만 몸이 무엇이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성철 큰스님께서 보셨으면 참으로 얼싸안
고 춤을 추셨을 겁니다.
서 원장은 알듯 모를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에 사도광탄이 나섰다.
큰스님께서 팔만대장경을 구경시켜 주셨으면 합니다.
기꺼이 그래야지요.
큰스님은 일행을 안내하여 장경각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
다. 기분 좋은 냄새가 코에 스미며 천년에 가까운 세월을 이어온
역사가 일행 앞에 그 엄숙한 모습을 드러냈다.
수천 장의 경판은 반듯하고 정연한 모습으로 판대 위에서 오
직 침묵으로 기나긴 세월을 여며오고 있었다. 먼지 하나 쌓이지
않은 판고 안에 수천 장의 경판이 마치 생명처럼 기를 머금고 살
아 있는 것이 그대로 느껴져 오자 일행은 옷깃을 여몄다
이상한 기분이 드는군요. 마치 저 경판들이 살아 있는 것 같
은 기분이 듭니다.
그런 기분을 느낀 것은 기미히토뿐만이 아니었다. 큰스님은
합장을 하며 나직한 목소리로 염불을 외웠다
성철 큰스님께서 살아 계실 때 경관고로 내려오길 좋아하셨
지요. 천년의 법력을 느낀다고 가끔 말씀하시곤 했는데 소승은
공부가 짧아 아직 그 깊은 힘을 느끼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무언가가 느껴지는데요.
아미타불, 그렇다면 정말 경지가 높은 분들이 오신 게로군요.
일행은 모두 웃었다.
팔만대장경에는 참으로 신비한 힘이 있다고 성철 큰스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수많은 환난이 있었지만 언제나 미리 경판을
지키도록 준비된 사람들이 나타나곤 했습니다.
아까 저희도 그런 기분을 느꼈습니다. 마치 천지신명이 보호
하는 것과도 같은.
그럴 것입니다. 팔만대장경이 겪은 가장 큰 환난이라면 아마
도 몽고의 침략과 임진왜란일 것입니다. 잘 알다시피 몽고의 침략 정책은 피지배자
의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이었지요. 칭기즈
칸은 자신에게 대항한 지역의 모든 생명체들을 깊은 가마솥에
넣고 끓였지요. 그리고 그들이 이룩한 모든 문화와 유적들을
태우거나 부됐습니다. 고려도 예외가 아니었어요. 끝까지 침략
에 저항하던 고려에 대해 몽고군의 원수 살리타이는 직접 대군
을 이끌고 침략했지요.그는 이전에 침략했던 휘하의 장군들에
게 초조대장경을 불사천도록 직접 지시했던 인물로, 대장경을
중심으로 다시 뭉치려는 고려인들의 항전 의지를 싹부터 잘라버
리려고 했습니다. 그가, 제대로 저항 한번 하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져 도망하던 고려 사람들을 산 채로 붙잡아 여자들은 발가
벗겨 희롱하고 겁탈한 후 인두로 젖과 음부를 지지며 그 고통스
러워하는 모습을 즐기고, 남자들은 장난삼아 찔러 죽이고 베어죽
이며 때로는 팔다리를 하나씩 떼내어 불에 구워 먹으면서 지금의
용인 근처를 지날 때였어요 산골짜기에서 한 대의 화살이 날아
들어 살리타이의 목을 꿰뚫어 즉사시켜 버렸습니다.
누가 쏜 화살이었습니까?'
서 원장이 울분을 참지 못하고 있다가 성급하게 물었다. 그러
나 큰스님은 잔잔한 목소리로 하던 얘기를 계속했다.
전세계를 지배했던 몽고군은 전쟁 도중 장군이 죽는 경우도
드물었고 대장군이 죽는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였습니다. 더욱
이 원수가 전장에서 목숨을 잃은 경우는 전무후무하다 할 것입
니다. 그 한 방의 화살을 쏜사람은 김윤후라는 이름의, 병사가
아닌 서생이었지요. 몽고군의 침략을 피해 용인으로 가 있던 그
는 평소 잡아보지도 않았던 활을 들어 적의 무리를 향해 무심하
게 당겼던 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화살은 하고많은 군사를
모두 지나쳐서 맨 뒤에 있던 살리타이의 목을 그대로 꿰뚫었던
거지요. 원수를 잃은 몽고군은 모두 퇴각했고 대장경의 제조는
계속되었습니다. 나는 언젠가 대장경에 불어넣었던 우리 민족의
호축 의지가 그분의 화살 한 방을 통해 발현되었다고 생각한 적
이 있었어요.
조 교수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학생들에
게 김윤후라는사람은 그 정체가 분명하지 않아 하늘에서 떨어
졌는지 땅에서 솟아났는지 모를 인물이라고 강의한 적이 있었
다. 그런데 큰스님은 지금 그가 대장경을 보호하기 위해 나타난
사람이라고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임진왜란 때는 더욱 묘합니다. 왜는 일찍이 팔만대장경 판본
을 하나 얻어가는 것을 최고의 숙원으로 알았고 대마도에서 사
신이 올 때마다 그 판본의 하사를 애타게 빌었습니다. 그러니 임
진왜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 팔만대장경을 얼마나 노렸을
까는 두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임진년 4월 13일에 부산포, 14일
에는 부산진성을 함락하고 바로 동래성을 무너뜨린 후 양산, 울
산, 창원, 창녕을 거쳐 침공 보름 만인 27일에는 해인사의 지근
에 있는 성주에 진주했으니 히데요시가 문화재 약탈의 특수 임
무를 부여한 시마스 부대는 팔만대장경에 혈안이 되어 부대의
선봉에서 합천 진출만을 고대하고 있었어요. 동래부사 송상현
이 무너진 후로는 이렇다 할 저항 한번 받지 않고 성주까지 진
출한 왜군들은 해인사 약탈을 식은죽 먹기로 생각하고 팔만대
장경의 운반 방법까지 의논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수십 년 전에
두사람의 기인이 대장경을 보호하기 위해 마련한 계책이 발동
되었지요.
그들이 누구입니까?'
한 분은 조식 선생이지요. 호가 남명인 이 신비에 싸인 선비
는 중앙에서 벼슬을 하는 두 사람의 출중한 제자에게 낙향하여
해인사 부근에서 후진을 양성하고 있으면 때가 올 것이라고 했
습니다 스승의 심지가 깊음을 잘 아는 두 제자 중 한 사람은 거
창에, 또 한 사람은 합천의 초야에 묻혀 지내다가 임진왜란이 일
어나자 의병을 조직했으니, 바로 거창의 송암 김면 장군과 합천
의 내암 정인홍 장군이 그들이었어요.
아,그 유명한 의병장들이 조식 선생의 제자였고,조식 선생
은 앞일을 내다보고 미리 제자들에게 준비를 시켰군요.
변 교수는 신기한 느낌이 들었는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
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또 한 분은 휴정 서산대사인데 그분은 애제자 소암대사에게
난이 일어나면 무엇보다도 팔만대장경을 지키라 분부하고 세상
을 떠났어요.
하, 어째서 두 분이 다 하필이면 팔만대장경을 지키게 하였을
까요?'
알 수 없는 일이지요.
서 원장의 질문에 큰스님은 잔잔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과연 난이 일어나자 소암대사는 즉각 승병을 모아 해인사 입
구의 큰 고개를 지키는 데 진력을 다했으니, 왜병들은 이 고개를
넘으려 수없이 시도를 했지만 결국은 해인사 문 앞에도 오지 못
했어요. 그래서 이 고개 이름을 지금도 왜구치 (辯適峰)라고 하지
요.
호, 그런 연유로 해인사가 지켜졌던 것이군요.
서 원장이 기쁨에 들뜬 목소리로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발
했다.
뿐만이 아닙니다. 임란 최고의 의병장 홍의장군 곽재우가 의
령에서 일어나 가아산을 중심으로 활동한 것도 팔만대장경과 무
관하지 않아요. 곽재우, 김면, 정인홍 소암대사를 따라 그 허술
한 무기로 봉기한 의병들이 무려 3만이 넘는 왜군과 싸워 이겨
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모두 성주, 영산 등지에 묶어 올라가지
도 내려가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그럼으로써 초반에 파죽으로
깨지던 전세를 만회하고 이순신, 원균 등의 수군이 명나라를 치
기 위한 길을 빌려친다고 기세 등등하던 왜군들로 하여금 강화
를 맺고 돌아가게 했으니 이것이 모두 팔만대장경의 신묘한 힘
을 느낄 수 있는 증거입니다.
르그 .
조 교수가 나지막한 신음을 토해냈다.
토우와 팔만대장경
그런데 팔만대장경이란 무엇입니까? 저는 사실 말은 많이 들
었어도 팔만대장경이란 게 무엇인지 확실히 알고 있지는 못하거
든요.
기미히토가 진정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큰스님은 일본인인
기미히토가 팔만대장경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하자 진지한 얼굴
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팔만이란 부처님이 중생의 번뇌가 팔만사천 가지에 이른다
고 설파하시고 그에 대치하는 팔만 사천의 설법을 논하셨기에
그 모두를 담았다는 뜻이지요. 대장경은 세 개의 광주리라는 뜻
입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말씀을 달은 경 ,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
르는 자들이 지켜야 할 도리를 담은 율, 부처님의 가르침을 연구
해 놓은 논을 말하는 것으로 불교 경전 모두를 총괄하는 것이기
에 일체경이라고도 합니다.
아하, 그렇습니까. 저는 경판의 숫자가 8만 개라서 팔만대장
경이라고 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원래는 팔만사천대장경
이라 해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여기에는 속장경도 있어요.
속장경은 무엇입니까?'
대장경이 부처님의 설법을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진 것이라
면 속장경은 한국, 중국, 일본, 거란 등의 학승들이 저술한 것을
말하지요. 인도에서 성립된 대장경에 비해 속장경은 각국의 지
역적 특성과 문화적 다양성을 나타내고 있으므로 불교 문화의
성숙과 변용의 측면에서 대장경 못지않은 중요성을 가지고 있
습니다.
기미히토는 큰스님을 따라 걸으면서 무엇보다도 대장경의 엄
청난 양에 감탄했다.
팔만 사천 가지 설법을 모두 대장경에 담아서 인지 경판의 수
만 해도 대단하군요.
그렇습니다. 이 대장경은 고려 시대에 몽고의 침략을 당하자
온 조정과 백성이 16년 간이나 전력을 다해 완성한 것입니다 하
루에 한 권씩 읽는다 해도 거의 20년이 걸릴 정도의 방대한 양이
지 요.
기미히토의 입이 벌어졌다.
그 양보다 더 놀라운 것은 경판 하나하나가 만들어진 과정입
니 다.
저도 언젠가 그 경판들이 제조 후 7백여 년이 지난 오늘에 이
르기까지 썩거나 좀먹거나 뒤틀리지 않고 온전히 보존되어 오고
있다는 얘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도대체 어떤 과정을 거쳐 만
들었기에 이토록이나 내구성이 강할까요?'
기미히토의 물음에 큰스님은 흐뭇한 미소를 짓고는 설명을 계
속했다
우선 경판 자체가 부패하거나 벌레 먹는 것을 방지하고 나무
재질을 더욱 견고하게 하기 위해 원목을 바닷물에 3년 동안 담
가두었다가 꺼내어 판자로 짠 다음, 다시 그것을 소금물에 삶아
내서는 그늘에서 말린 뒤 깨끗하게 대패질하여 판을 만들었습
니다.
재료를 마련하는 데에만 34년이 걸렸군요.
기미히토가 탄성을 자아냈다.
완성된 밑판은 판각하는 곳으로 옮겨지고, 판각수들은 여기
에다 편찬 교정이 끝난 경의 내용을 경판 수치에 알맞게 구양순
필체로 정성껏 써놓은 사경 원들의 판하본을 붙여 한 자 한 자 돋
을새김으로 새겨넣었어요.
신기한 일이군요. 그 많은 사람들이 제각기 작업한 것이 어쩌
면 그리도 한 가지 필체로 나올 수 있단 말입니까 마치 한 사람
이 작업한 것처럼요.
부처님의 신력이 작용했을 테지요.
그렇다 하더라도 미스터리군요.
그런 다음 판이 뒤틀리지 않도록 양끝에 가곡으로 마구리를
붙여 옻칠을 하고 마무리 손질을 가한 후, 마지막으로 네 귀를
동판으로 장식하여 한 장의 경판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경판의 크기나 두께는 어느 정도입니까?'
큰스님은 기미히토의 깊은 관심이 배어 있는 거듭된 질문에
허허 웃었다
그냥 사과 궤짝만한 크기에 두꺼운 어른 손등 정도 되는 두께
라고 기억하면 되겠지요.
우리 일본에서는 대장경을 만들지 못했습니까?'
기미히토가 부러운 듯 물었다
과거에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그
들은 더욱 팔만대장경의 수입을 갈구했던 것입니다 일본인들은
수없이 공물을 바치면서 대장경본을 요구해 왔지요. 세종대에는
일본의 국사가 들어와 대장경 판을 하사하지 않으면 목숨을 끊겠
다고 하면서 집단으로 6일 간이나 단식한 일도 있었어요.
그랬군요.
기미히토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 일에 크게 관심이
없는 자신이 볼 때에도 팔만대장경은 보통 탐이 나는 물건이 아
니었다.
충분히 이해가 되셨는지요?'
물론입니다. 감사합니다.
큰스님은 작별하면서도 연신 눈길을 사도광탄의 얼굴에 모으
고 있었다 그는 무슨 말인가를 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사도광탄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큰스님과 작별하고 서울로 올라오는 차 안에서 조 교수는 복
잡한 표정을 지은 채 미간을 찌푸리고 무엇인가를 한참이나 생
각하고 있었다
이봐, 조 교수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는 거야. 그렇다 하더
라도 얼굴은 좀 펴. 기껏 절 구경 잘하고 기분 좋게 오면서 그렇
게 찌푸려 대면 오며가며 운전하느라 고생한 이 서영인이 기분이
좋을 리가 있겠어?'
서 원장은 모처럼의 여행이 즐거웠는지 우스갯소리를 했다
그러나 조 교수는 여전히 잔뜩 찌푸린 채 얼굴을 펴지 않고 연
신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결국 그것이 었나?'
아까부터 자꾸 뭐가 그거 였다는 거야?'
사도 선생이 해인사로 내려오자고 한 것이 그것 때문이었냔
말이야.
혼자서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야 얘기를 좀 해. 얘기를 해야
알 것 아냐.
답답한지 서 원장의 목소리가 약간 올라갔다. 그러나 조 교수
는 여전히 대답을 않은 채 이번에는 아예 눈까지 감아버렸다 그
러나 이네 눈을 급히 뜨고는 바로 옆에 있는 서 원장을 소리쳐
불렀다.
이봐, 서 원장!~
왜?'
아까 우리가 절에서 나올 때 햇빛이 우리를 정면으로 비치지
않았나?~
서 원장은 무슨 소린가 싶었지만 일단 기억을 더듬어보니 조
교수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오후 늦은 무렵이었지만 햇살이 정
면에서 비추고 있었다.
그래, 나올 때 눈이 부셨지.
지금 몇 시지?'
다섯 시 . 그런데 왜 그래?'
다섯 시에 해가 정면에서 비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거
야?~
글쎄, 나는 통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
방향 말이야.
방향? 석양 무렵에 해가 정면에서 비치면 서향이잖아.
그래, 바로 서향이야.
서향이 뭐 어때서? 어 서향? 그 토우가 앉혀졌던 방향이
잖아.
그래. 드물게도, 아주 드물게도 해인사는 서향이군.
조 교수가 지적한 대로 해인사가 절로서는 드물게도 서향이라
는 사실이 서 원장에게 토우와의 관계를 떠올리게 했다. 이것은
변 교수나 기미히토도 마찬가지였다. 사도광탄은 자신의 입으로
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승려들의 입을 빌려 결국 조선에서
스스로를 지켜온 힘은 팔만대장경이라는 것을 얘기하려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 교수가 이제는 또렷한 목소리로 되뇌었다.
사도 선생이 해인사로 내려가자고 한 이유는 결국 무라야마
가 건드리려 했던 것은 팔만대장경이라는 사실을 말하려고 한
것이었나? 조선에서 스스로를 지켜온 유일한 힘이란 팔만대장
경을 말함인가?'
그래, 바로 그거야. 토우가 지키려고 했던 것은 바로 팔만대
장경이었어.
서 원장은 급히 차를 세웠다 일행은 모두 사도광탄의 굳게 다
문 입술을 쳐다봤다. 조 교수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알 수 있었소? 그 토우가 팔만대장경의 수호 사자라
는 사실을?~
사도광탄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순간적으로 깨어난 듯
잠시 사람들의 표정을 훌어보고는 이내 무슨 의미인지 깨달은
모양이었다
나는 무라야마가 남긴, 조선에서 스스로를 지켜온 유일한 힘
이라는 말에 주목했지요. 그리고 토우가 앉혀진 서향이라는 방
향도 도움이 되었어요. 그후는 별로 어렵지가 않더군요.
대단한 추리군요.
변 교수는 감탄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 교수는 실상 그렇게 힘
든 추리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상당히 합리적이라
는 생각이 들었다.
사도광탄. 그의 괴이한 주장은 처음에는 엉뚱해 보이지만 언
제나 합리적인 사고를 배후에 깔고 있었다. 조 교수가 생각하는
한 그는 대단히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보통
사람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 합리적인 사고의 단편들을 창조적
으로 이어낸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토우가 팔만대장경의 수호 사자였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 거지?'
차를 출발시키던 서 원장이 갑자기 충격적인 생각이라도 떠오
른 듯 외쳤다.
그 토우가 파헤쳐졌다는 사실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거냔
말이야?'
글쎄
조 교수는 언뜻 대답을 할 수가 없어 말을 얼버무렸다
설마 팔만대장경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겠지?~
팔만대장경에?
그래, 팔만대장경이 훼손되거나 하지는 않았겠지?'
그럼, 아무 이상이 없잖아?~
그런데 이상하잖아 그들이 수호 사자인 토우를 파헤쳤다면
대장경에 손을 대지 않았을 리가 없잖아?'
그건 정말 이상하군요.
서 원장의 생각에 변 교수도 동감을 표시했다 일동은사도광
탄의 얼굴에 시선을 모았다. 이제 무슨 궁금한 점이 있으면 사도
광탄을 쳐다보는 것이 모두의 습관처럼 되어 있었다.
이치상으로는 손을 안 댔을 리 없지요. 수호 사자를 파헤치고
나서 팔만대장경을 그냥 두었을 리는 없겠지요 다만
다만 뭐 예요?'
서 원장이 조급하게 말을 재촉했다
다만 대장경의 법력을 당할 수 없었겠지요.
무라야마는 대장경을 해하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결국 대장경
의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죽었다는 얘긴가요?~
그렇지요.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어요.
뭐예요?'
애초부터 그는 대장경을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어
요.
무슨 뜻이죠?'
토우를 파헤칠 정도의 실력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뜻이
에요.
그렇다면 무라야마의 배후에 누군가가 있었다는 얘긴가요?'
그래요.
그게 누구일까요?~
알 수 없어요. 다만 무라야마보다 훨씬 위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생각할 수 있겠죠.
기미히토는 사도광탄의 말을 들으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언젠가 스기하라가 했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는 무라야
마가 자신을 살리기 위해 누군가와 의논을 했다며 자신이 살아
있는 것은 그 사람의 덕분일지 모른다고 했었다. 기미히토는 놀
란 눈길로 사도광탄의 옆얼굴을 쳐다보다가 얼굴 한편에 어딘지
음울한 기색이 감도는 것을 느꼈다
사도 선생님의 얼굴이 어두워 보이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
까?~
아까 경판고에서 뭔가 개운치 못한 기분을 느꼈어요. 나는 그
이유를 생각해 보고 있던 중이었는데 비록 그들이 팔만대
장경을 어떻게 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어쩌면 상상 이상으로
흠이 많이 생겼을지도 모르지요.
어떤 흥이 있단 말입니까?~
세상에 신비력이 있지만 무시로 달려드는 철실적 힘에 항상
견딜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보면 신비력과 현실적 힘은 언제나 보
완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식민 지배 당시는 우리 민족의 현실적
힘이 너무나 없었기 때문에 일본인들의 음모를 완전히 이겨낼수
없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임진왜란 때도 건재했던 팔만대장경이 결국 식민
지배 때는 그들의 마수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말인가요?~
그렇지요. 그들이 무슨 짓이라도 했을 겁니다. 당시 토우가
스기하라의 동료들을 해한 사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습니
까?'
어째서 토우가 그것을 증명한다는 거지요?'
조 교수는 사도광탄의 추측이 마음에 안 드는지 따지듯 물었
다.
토우는 경판을 지키는 수호 사자가 아닌가요. 경판이 완전하
다면 그 당시 토우가 일본에서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확실하진 않지만 대장경판 중 일부가 일본으로 유출
되었을 가능성이 있지요.
그러면 이제껏 가만 있던 토우가 지금에 와서 다시 움직이는
이유도 경판과 관련된 것일까요?'
그렇진 않을 겁니다.
같은 토우인데 차이가 있을까요?~
지금의 토우는 야마자키 연구소에서 동경대로 보낸 어떤 작
업에 대해서만 선택적 장애를 일으켰다고 하셨지요?'
그 작업이 팔만대장경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대장경에는 우리 민족의 안전을 지키려는 수많은 염원이 들
어 있어요.몽고의 침입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하던 고려가
그들을 물리치기 위해 벌였던 일은 오직 팔만대장경의 제조뿐이
었지요. 조정이 중심이 되어 곤을 조각하고 온 나라의 법술사가
모두 주문을 넣었어요. 천지신명의 기와 부처의 법력이 대장경
에 들어 있단 말입니다 이 세상에 과학으로 규명되지 않는어떤
힘이 있다면,그 힘은 틀림없이 대장경에 들어 있을 겁니다. 그
힘이 대장경을 보호해 왔고우리 민족을 보호해 왔습니다 그러
니 우리가 그 숱한 위기를 넘기고 세계사에 머리를 내밀고 있는
게 아닐까요. 그리고 이제 그 신통력이 바다 건너 일본에서 한민
족과 관련된 너무도 중요한 일이 생기자 토우를 움직이는 게 아
닐까요. 아마 대장경 못지않게 중요한 성물이 토우를 자극한 것
인지도 모르지요.
대장경 못지않게 중요한 성물이라구요? 그게 도대체 뭔가
요?'
가서 알아보기 전에는 대답할 수 없군요.
그 토우의 힘은 영원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아요. 토우의 신통력이 떨어지기 전에
흠이 있을 것 같다는 얘기는 결국 경판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
입니까?'
아마 그런 것 같습니다. 경판의 기가 고르게 전달되어 오지
않았어요.
빛나는 우리의 문화 유산이라고 자랑스럽게 세계문화재로 등
록한 대장경에도 일본인들의 침탈의 마수가 뻗쳤다니 !
여태껏 대장경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서 원장조차 애통한지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조 교수는 비교적 냉정한 편이었다. 그로서는 사도광
탄이 경판고에서 느낀 이상한 기분만으로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그것은 학자의 태도가
아니었다.
나는 팔만대장경에 무슨 문제가 있다는 얘기를 들어본 바가
없소.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이 정말 완전치 않은지, 일본인들이
정말 손을 댔다면 어느 정도로 훼손되었는지는 전문가에게 의뢰
를 해야만 알수 있는 일이 아니겠소?판단은 대장경의 전문가
를 수배하여 알아본 이후로 미루는 것이 온당할 거요.
사도광탄은 조 교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중요한 문제이니만큼 내가 신중하게 알아보겠소.
조 교수는 학자다운 조심스러운 태도로 말했다.
기미히토는 자신이 감격했던 팔만대장경을 일본인들이 훼손
했다는 말을 듣고 가슴이 아파왔다 직접 토우의 신비를 체험한
그는 이제 팔만대장경의 신력에 대해 누구보다 강하게 믿고 있
었다 일행은 기미히토의 낯빛이 점점 붉게 물들어 가는 것을 보
았다.
전후 세대인 기미히토는 언제나 자신의 조국 일본이 미개한
조선을 개화와 문명으로 이끌었다고 배웠고,그런 점에서 일본
의 조선 합방은 정당하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지금 세계의 문화 유산이라는 팔만대장경을 자신의 선
조들이 유린했다는 사실을 듣게 되자 낯을 들 수 없었다. 기미히
토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수호 토우를 묻어 지키려던 그 신물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우리는 무척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무도 알 수 없
었습니다 조선총독부에서 귀중한 자료를 모두 불태워버렸기 때
문입니다. 이 기미히토가 일본인을 대신하여 사과하는 것을 받
아주십시오.
그러자 변 교수가 기미히토의 팔을 잡으며 숙연해지려는 분위
기를 부드럽게 막았다.
기미히토 교수님처럼 문화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우리 나라
에 와주신 분이 있다는 것을 저는 잊지 못할 것입니다.
아까 사도광탄 선생께서 토우가 다시 움직인 것을 보고 일본
인들이 한국과 관련된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하셨는데, 옳다고
생각됩니다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성장한 저는 이런 역사
관계에 대해 백지와 같은 상태였는데,팔만대장경을 노려온 것
만 봐도 일본의 오류가 무엇이었는지 짐작이 됩니다. 저는 지금
토우가 움직이는 이유 역시 한국과 관련된 일이라고 확신합니
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에서 온 토우가 괴력을 발휘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일리 있는 말이었다. 조 교수를 비롯한 일동은 고개를 끄덕이
며 기미히토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사도광탄 역시 묵묵
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일본으로 돌아가서 이 음모를 밝혀내는 데 최선을 다하
겠습니다 그 음모가 한국과 관련된 어떤 것일 거라는 생각이 저
를 못 견디게 하는군요.
사도광탄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기미히
토에게 물었다.
언제 일본으로 갈 예정이지요?~
팔만대장경의 분실 여부에 대한 결론을 보고 가야 할 것 같습
니 다.
그때 같이 가시죠.
기미히토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러면 좋겠군요. 사도 선생께서도 그 토우를 보는 것이 좋겠
습니다.
음, 토우보다도
조 교수는 서울로 돌아온 다음날부터 관련 학계에서 팔만대장
경과 관련된 문헌을 집중적으로 조사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팔
만대장경에 대해 서지학적으로 정통한 학자가 없다는 것을 알고
는 깜짝 놀랐다. 학자와 문헌에 따라 모두 제각각의 주장을 늘어
놓고 있었다.
이 럴 수가
영인본이 있긴 하나 경의 종과 책의 수에 대해서는 하나도통
일된 견해가 없이 중구난방이었다. 의지할 문헌도 없는 가운데
그나마 정신문화연구원에서 펴낸 민족대백과사전에 팔만대장
경에 대해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었다.
조 교수는 무엇보다도 경판의 총수량에 주목했다. 경전의 종
수나 권 수에는 차이가 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해석상
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판의 수는 늘리거나 줄일 수 없
는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있었는지 의 여부는 경판의 수를 확인
하면 정확히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경판의 수까지도 일치하지 않아 결국 조 교수는 분
노를 터뜨리고 말았다. 조 교수는 상기된 표정으로 팔만대장경
에 정통하다는 문화재 위원을 찾아갔다
팔만대장경의 경판 수는 196n년에 경북대학교의 서수생 교수
가 조사한 것이 가장 정확하지 않겠소 서 교수는 당시 문공부의
의뢰로 현지에서 정밀하게 팔만대장경을 조사했으니 말이오.
문화재 위원은 조 교수가 무슨 말을 꺼내는지 경계하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서 교수의 조사에 의하면 팔만대장경은 총 1,541종에 6,aU
권, Ul,240매의 경놘이 있었소. 그런데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펴낸 민족대백과사전에는 팔만대장경의 수량을 1,501종,
f,7關권에 경판은 01,25f)매로 되어 있어요 일치하지가 않아요.
조 교수는 흥분한 상태였다 그는 겨레의 성물이라고 할 수 있
는 팔만대장경의 현황이 불확실하다는 것이 견딜 수 없었다
이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오.
문화재 위원은 계속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종 수나 권 수의 불일치는 해석상의 차이로 볼 수 있소. 하지
만 경판의 수는 틀릴 수가 없는 것 아니오?'
그렇지요.
그런데 분명히 차이가 나지 않소. 경판의 수가 무려 열여壽
장이나.
거기에 대한 조 교수님의 견해는 어떻습니까?'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소. 종잇장도 아니고 사과 궤짝보다
큰 나무판을 잘못 헤아릴 수도 없는 일인데 어째서 그렇게나 차
이가 난단 말이오?'
전적의 종 수나 권 수는 분류하는 사람마다 다른 견해를 가질
수 있으므로 그 차이를 일일이 시비하는 것은 대장경의 훼손이
나 도난과 무관하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경판의 수는 처음 만든
것이 지금에 이르기까지 똑같을 수밖에 없는 것이죠.서수생 교
수가 센 경판의 수가 틀릴 리는 없습니다. 서 교수는 사람들을
동원하여 경판을 세고 세고 또 세었으니까요. 정확하게 01,240
매가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민족대백과사:戮의 %1,25a매는 어떻게 해서 나온
숫자죠?~
381,25H매는 그전에 세었던 기록이죠. 유감스럽게도 팔만
대장경에는총 경판수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나 대장경
은 제조 후 항상 왕궁의 보호를 받아왔기 때문에 분실이란 생각
할수조차 없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일제 시대 데라우치 총독
이 일본 천용사에 헌정하려고 인경할 때 조사한 경판 수는
Hl,258매였죠. 정신문화연구원에서 펴낸 민족대백과사전의
81,258매라는 경판의 매수가 데라우치 총독 시대에 조사한 것을
그대로 옮긴 것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일제 시대에 조사한 것
과 해방 후에 조사한 것과는 열여덟 매의 차이가 납니다.
그렇다면 그 열여덟 매는 도난당했을까요?'
그수량은 알도리가 없습니다 다만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
습니다.
무엇이죠?'
팔만대장경판의 일부가 없어졌다는 사실만은 틀림이 없습니
다.
뭐라구요?~
조 교수는 자신도 모르게 고함을 지르고 말았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것이 없어질 수 있단 말이오?그토록이
나 귀중한 겨레의 성물이?'
일제 시대이긴 한데 어떤 경위로 없어 졌는지는 알 수 없습니
다. 일부가 도난당한 것은 확실한데~
그럼 도난당했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 수 있지요?'
문서가 있습니다.
문서라구요?'
그렇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지금 사무실에는 없습니다 그러
나 다음에 오시면 보여드리죠.
내일 당장 오죠.
문화재 위원의 사무실을 나서며 조 교수는 아찔한 심정이었
다 팔만대장경 판이 도난당한 사실을 국사학과 교수인 자신조차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은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면서
도 한편으로는 사도광탄의 육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
체 기 (氣)가 무엇이기에 그는 경판고 안에서 이미 팔만대장경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느꼈을까
다음날 조 교수는 먼저 병원에 들러 사도광탄과 같이 문화재
위원의 사무실로 갔다. 문화재 위원은 책상 서랍에서 한 장의 서
류를 꺼냈다 서류는 원본을 복사한 것이었다
1937년에 해인사 주지 장제월이 미나미 총독에게 경판의 도
난 사실을 문서로 보고한 것입니다.
문화재 위원은 조 교수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조 교수는 서
류를 빼앗듯이 받아서는 급한 눈길로 훌어 내려갔다 번득이는
눈동자가 서류를 훌어 내려가는 동안 조 교수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국보 및 사찰 재산 도난 보고의 건)
본년 8월 28일 당사가 안장하고 있는 고려대장경 판목 전부를 만
주국 정부의 의뢰로 탑탁(판목을 종이에 찍어 인쇄함)함에 있어 허가
를 상신했던바, 본년 9월 11일부로 본부(총독부)의 인가가 내렸기로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교수 다카하시 박사의 지휘 밑에 인경 공사
를 실시할 제. 당사 소유 국보 고려대장경 판목 및 당사 소유 재산 귀
중품이 도난되었음을 발견하였음 도난당한 날짜는 미상임.
도난당한 경판명 대반야바라밀다경 1장
대장엄경론 1장
대장경목록 1장
석교분기 원통초 1장
이구열, 한국문화재 수난사 (돌베개)
아, 겨레의 성물이 이렇게 유린당하고 말았다니 !
조 교수는 쓰고 있던 안경을 벗으며 탄식했다. 그는 미련이 담
긴 목소리로 물었다
이것이 총독부의 공문임에 틀림 없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잃어버렸다는 네 매의 경판이 그후 어떻게 되었는
지는 알 수 없습니까?~
찾았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이 네 매의 경판은 그 열여덟 매 안에 포함되어 있을까요?'
아마 그럴 겁니다.
조 교수는 맥이 풀린 발걸음으로 문화재 위원의 사무실을 나
올 수밖에 없었다. 사도광탄을 옆자리에 태운 그는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왜 열여덟 매에 대한도난보고가아니고 네 매에 대한도난
보고만이 되어 있을까요?'
그 점을 생각해 보았는데 무라야마는 토우를 파헤치고 대장
경을 보호하는 신력을 일시 흩뜨린 후 몇 매의 중요한 경판만을
빼내어 가지고 갔을지 모르죠. 법술사인 그에게 있어서 궁극의
목표는 조선의 신력을 무너뜨리는 것이지 대장경 전부를 일본으
로 인출해 가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지요. 또한 그 자신 대장경
전부를 손댄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
고 있었을 테니까요.
그렇다면 대장경에 손댄 사람이 무라야마 말고도 또 있다는
얘깁니까?'
그렇지요. 대장경의 신력이 얼마간 흩뜨러지자 그 작업에 하
수인으로 참가했던 자들이 뜻도 모르고 몇 매씩 빼갔을 수도 있
겠지요. 어쩌면 무라야마 자신은 단 한 매의 경판도 일본으로 가
지고 가지 않았을 수도 있어요 대장경의 무서운 힘을 너무도 잘
알았기에 그것을 피하려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요.그래서 뜻
도 모르는 하수인들의 손으로 대장경의 신력을 흩뜨려버렸을 수
도 있는 거지요.
그러면 지금 우리는 대장경의 완전한 경판 수도 모르고 있단
말인가요?'
조 교수의 한탄에 이어 잠시 생각하던 사도광탄의 말이 이어
졌다.
지금으로서는 어떤 수량도 대장경의 총 경판 수로 단정해 버
려서는 안 됩니다. 81,240매도 81,258매도 옳지 않을 수 있으니
까요. 아무 주장이나 받아들여 팔만대장경의 경판 수로 확정을
지어버리면 돌이킬 수 없는 역사의 오류를 범하고 말 우려가 있
어 요.
맞는 말이오. 일제 시대에 세었던 것이 틀렸다고 해석해 버리
고 요즘 센 것을 기준으로 하여 우리의 팔만대장경은01,240매
이다. 그러니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단정했을 때에는 정말 큰 문
제를 일으키게 되는 것이군요.
사과 궤짝 넓이만한 것을 세는데 일제 시대라 해서 잘못 세었
다고 생각할 수도 없고 도난이 보고된 다음에 센 것을 정확하다
고 주장해서도 안 되겠지요.
그렇군요, 우리에게는 대장경이 세계의 문화 유산이니 뭐니
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군요.
음모
수아는 며칠 동안이나 다이얼을 돌린 후에야 해외 출장에서
갓 돌아온 니콜슨 수사관과 통화를 할 수 있었다.
그 숫자의 비밀을 풀었어요. 아마 탈세는 아니고 투자 계획인
모양이에요. 그런데 상금은 얼마죠?'
투자 계획이라구? 제기랄, 한 건 할 걸로 기대했는데.
상금은요?'
범죄와 아무런 관련이 없을 때에는 국고에서 상금이 나갈 수
없어.하지만 염려 마, 수아가 뉴욕에 오면 내가 치즈버거 정도
는 사줄 테니.
그렇게 해서 될 일이 아녜요.
왜?'
친구에게 상금이 나온다고 하고 현상을 걸었거든요.
저런! 그럼 우선 수아 돈으로 햄버거를 사줘야겠군.
그것이 탈세 자료가 아니라고 하자 니콜슨 수사관은 흥미를
잃은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도 어떻게 좀 해보세요. 그때 상금이 나올 거라고 해서
제가 현상을 걸었잖아요.
그래, 노력해 보지 .
니콜슨은 건성으로 대답했다.
숫자 풀이는 팩스로 보낼까요?'
팩스? 안 보내도 돼. 내가 그냥 구두로 보고할 테니까 그 숫
자들은 쓰레기통에 넣어버려 .
친구한테 약속을 했단 말이에요. 상금을 줘야 해요. 상금 준
다는 얘기를 믿고 친구에게 맡겼으니 까요.그러면 상금이 나오
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 아니에요.
그래. 알았어요, 알았어 팩스로 보내줘. 그리고 참, 수사는
종결할 테니까 수아도 휴대용 컴퓨터에 있는 그 숫자들을 지워
버려야 해.
월스트리트의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라이언펀드의 W층에
서 엘리베이터가 멎었다 기다리고 있던 회장의 여비서가 애교
넘치는 웃음을 흘리며 엘리베이터에서 나온 두 신사를 안으로
안내했다
니콜슨 수사관이시죠. 반갑습니다. 회장입니다.
환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비서가 가져온 차를 마시고 나자 니콜슨은 표정을 바꾸고는
목소리를 약간 높였다
탈세에 대한 추가 수사를 모두 마쳤습니다. 우리는 그 결과를
국세청에 통보하는 것으로 수사를 종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즉
형사 처벌은 없다는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너무나 사려 깊은 처분입니다. 우리 회사는 절대
적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물론 추적 수사를 하면 그 외에도 이것저것 있겠지만 고의가
없는 것으로 인정하겠습니다.
너무나 고맙습니다.
이봐, 그 서류들을 모두 넘겨드려.
니콜슨의 부하 직원은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넘겨주었다.
압수 번호를 확인하십시오.
1 .
연방법에 따라 우리는 압수했던 서류의 등본, 감정, 혹은 이
에 관련한 서류의 진본. 등사본 등을 한 장도 가지지 않았음을
확인해 드립니다.
몇 개의 번호를 확인하고 압수당했던 서류를 앞으로 끌어당기
던 회장의 눈길이 맨 위에 놓인 한 장의 팩스 용지에 멎었다. 그
의 눈초리는 수아가 작성한 숫자의 의미 풀이를 순간적으로 무
섭게 훌었다.
아, 이것은 외부에 의뢰했던 감정의 회신입니다 탈세가 아니
라는 의견이지요.
외부에 의뢰했다구요? 그것은 위법이 아닙니까?
비록 한 장의 팩스였지 만 회장은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아닙니다 적법 절차에 따랐습니다 이 사람은 감정 요원으로
정식 위촉을 받았습니다. 그의 휴대용 컴퓨터에 있는 내용도 지
웠습니다.
니콜슨은 정식 절차를 밟았던 것이 다행이라 생각했다. 수사
에 조력하는 모든 인물은 사무실에서 위촉장에 서명을 하게 되
어 있었다.
아, 그렇습니까.
회장은 금세 태도를 누그러뜨렸다.
그 사람에게는 불행하게도 수고비를 못 주게 되었습니다 내
가 햄버거 값이라도 줄 테니 계속 생각해 보라고 한 것이 그 친
구로 하여금 이런 팩스를 보내게 했으니까요. 이게 투자 계획이
아니라 탈세 자료였다면 그 친구 몇 년 먹을 햄버거 값은 벌었을
텐데 .
니콜슨의 농담에 세 사람은 다 같이 웃었다
우리가 지불하고 싶습니다. 무혐의를 입증해 주었으니까요.
고맙지만 불법 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모르는걸 요.
물론 제가 개인적으로 가볍게 요청하긴 했지만 감정인에게
피감정자가 사후 사례를 하는 것은 감정법 위반입니다.
회장의 눈초리가 다시 팩스를훌었다. 가장자리 맨 위에 송신
자의 팩스 번호가 있는 것을 확인한 그의 표정에 벌펏 미소가 스
쳤다 그는 더 이상 니콜슨을 조르지 않았다
뭐라구, 아지트에 도둑이 들었어?~
수아는 전화를 받고 깜짝 놀랐다.
그래, 온통 다 뒤집어놓았어.
없어진 건 뭐지?~
글쎄, 없어진 건 없는 것 같아, 다만 컴퓨터의 모든 파일이 지
워져 있을 뿐이야.
이상한 도둑이 네 .
경찰에 신고를 해야겠어 .
당연히 해야지 .
전화를 끊으려던 수아는 뭔가가 생각났는지 다시 수화기를 고
쳐잡았다.
참, 전에 내가 팩스 보내달라고 줬던 종이 있지?~
응, 뉴욕으로 보낸 거?'
그래,그거 없애버려.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의 하나라도 경
찰이 그걸 캐물으면 귀찮아져 .
알았어.
전화를 내려놓은 지 5분쯤 지나서 수아는 다시 전화기를 들어
야 했다.
수아야, 그게 없어졌어.
그거라니?'
네가 보내라던 팩스 원본 말이야.
잘 찾아봤어?'
그럼 . 보내고 나서 팩스 선반 위에 그냥 두었는데 지금 보니
없어 .
알았어. 별것 아니니까 혹시 경찰이 온 다음에 그것이 나오
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구겨서 버려 경찰이 그런 걸 물어볼 리도
없지만.
알았어.
스탠퍼드에는 워낙 학생들이 많다 보니 가끔 도난사건이 발
생했다. 유학생들은 아지트에 도둑이 들었다는 얘기에 놀라긴
하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다. 누군가 장난으로 방을 뒤
지고 파일을 지워버렸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논문 준비를 위해 휴대용 컴퓨터를 켜던 수아는 눈에 들어오
는 숫자를 보고 고개를 흔들었다. 테드에게 했던 약속이 큰 부담
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니콜슨 수사관은 비겁했다 한 학기 등
록금은커녕 1달러짜리 지폐 한 장 받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수마는 그 숫자들을 지워버렸다. 테드에게는 사과를 하고 근사
한 저녁이라도 사는 도리밖에는 없었다
수아는 초조해졌다 여간내기가 아니던데. 수아는 서랍 속에
있는 돈을 모두 꺼네 세어보았다. 빠듯한 금액이었다. 난감했지
만 하루 잘 먹고 2주 동안은 토스트로 때우면 되겠지 생각하며
테드에게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최고급 음식점에서 만나자고 약
속했다.
운이 좋았어요. 아마 엔화가 끼여 있지 않았으면 못 풀었을
거예요.
테드는 수아의 주머니 사정을 모를 리 없었지만 사양 않고 비
싼 메뉴를 골라서는 무심한 동작으로 칼질을 하면서 겸손을 떨
었다. 수아에게는 그런 테드가 개선장군의 무용담보다 더 뽐내
는 것으로 여겨졌다 눈치챌까 봐 너무 싼 것을 시키지도 못한
수아는 메뉴에 표시된 정가 외에도 팁이니 세금이니 하는 것들
이 얼마나 붙을까 신경을 쓰면서도 테드의 이야기에 장단을 맞
추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가 단서가 되었다 하더라도 그 막막하던 숫자들의 수
수께끼를 풀었다는 것은 대단한 두뇌를 가졌단 얘기예요.
그러나 테드는 수아의 칭찬에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수
아는 테드를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이려 계속 숫자에 대한 질문
을 던졌다
그런데 그 회사는 왜 우리 나라 환율에 각국의 화폐를 맞추어
두었을까요?'
글쎄, 무역을 하는 회사겠죠.
아니, 금융 회사라고 했는데.
그럼 국제 투자를 전문으로 하나 보죠.
그렇겠네요.
대화는 수아가 이끄는 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수아는 계속 그
숫자가 범죄와는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주지시키기 위해 화제를
바꾸지 않았다.
그 회사는 한국에 투자를 많이 하나보죠? 액수가 엄청나게
크던데요.
글쎄요.
테드는 여전히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수아는 이러다가는 대책
없이 끌려갈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그나저나 상금을 못 받아서 어떡하죠?'
테드는 표정을 홱 바꾸었다.
상금을 못 받다니요?'
수아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테드의 입에서 무슨 소리가 나
올지 몰라 조마조마해 하는 수아의 귀에 뜻밖에도 부드러운 목소
리가 들렸다.
할 수 없죠, 그 친구들이 그렇게 나온다면.
수아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그런데 조건이 있어요, 상금 대신에요.
수아는 갑자기 사레가 들려, 마시던 물을 입 밖으로 흘렸다
조건이라구요? 상금 대신?~
나와 한 달 동안 데이트할 것.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수아는 야릇한 기분에 사로잡혔
다 계속 상금 얘기를 할까 봐 난감해 하는 순간에 돌연 무뚝뚝한
태도를 바꿔 부드럽게 다가온 테드. 그러나 마음을 놓는 순간 그
가 제안한 한 달 동안의 데이트. 도대체 테드라는 남자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몰랐다. 태도가 좀 특이하기는 하지만 기분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수아는 자신을 이렇게 곤란한 상황에 빠뜨린 그 난해한 숫자
들을 떠올렸다. 우리 나라 환율에 각국의 화폐를 맞추어두었다
는 사실. 테드의 해답을 더듬던 수아는 문득 하나의 의문점을 발견했다
'40퍼센트씩이 곱해져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수아는 니콜슨 수사관이 그 회사가 라이언펀드라는 이름의 금
융 회사라고 하던 것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모두가 한국 돈으로
계산되고 같은 비율이 곱해져 있는 것은 한국에 투자를 해서 그
정도의 수익을 얻는다는 뜻으로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돈은 왜
달러가 아닌 각국의 통화로 분산되어 있을까? 그 회사가 세계
각지에 지사를 두고 그 지사들에서 각각 한국에 투자를 한다는
의미일까?
수아의 머리는 숫자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쉴새없이 돌아가
고 있었다. 그런데 깊이 생각할수록 어딘지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 니콜슨 수사관에게 그것이 투자 계획이라고 말해 버린
것은 성급하지 않았나 하는 후회조차 들었다.
그러나 금융 회사의 생리를 모르는 수아로서는 숫자만 가지고
그 속에 숨은 뜻을 파악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비 전문가의 입
장에서 차분히 생각만 한다고 알아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참, 그 생각을 왜 못했을까?'
수아는 정완에 게 전화를 걸었다
아저씨 , 수아예요.
그래 수아. 어떻게 지내니? 하하, 리노에서 돈이 떨어져 전
화한 건 아니지?~
아저씨두, 참.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전화했어요.
뭐지? 우리 천재 아가씨도 모르는 게 있나?~
탈세 혐의가 있는 어떤 자료를 Fbi로부터 받았는데요,금융
회사 것이었어요 탈세가 아닌 사업 계획 같은 것이어서 수사는
종결했다는데 뭔가 궁금한 게 있거든요 좀 도와주세요.
그래, 마침 보고 싶던 참이니 오너라.
뉴욕으로요?'
그래 .
차비 가 없는데요.
차비가 문제겠니? 유나이티드에어라인의 티켓 카운터로 가.
내가 지불해 둘 테니 .
그래도 될지 모르겠네 요.
수아는 우리 회사를 구해준 은인인데 이쯤이야.
쑥스럽네요. 그럼 바로 출발할게 요.
(2권에 계속)
하늘이여 땅이여
김진명 장편소설
제2권
차례
검은 돈 9
비밀 결사 17
신사의 주문 28
저주의 바람 35
혼란의 소용돌이 43
이카로스와 프로메테우스 47
거대한 락전 60
외로운 투쟁 街
보이지 않는 힘 74
디 데이 84
해후 99
미지의 세계 112
침투 120
납치 140
운명의 시간 153
금융 전쟁 159
피의 화요일 173
묘제의 연구 180
단서 189
예기치 않은 출현 194
유언 203
겅은 목갑 209
진실의 이면 218
잃어버린 시간 230
은폐된 비밀 237
신화의 나라 245
세 가지 물음 257
눈동자 267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287
나는 시간 속 어디에 있는가
291
검은 돈
정완은 라과디아 공항에 차를 가지고 직접 나와 있었다
어머 , 이렇게 큰 차는 처음 타봐요.
내겐 차 안에 타고 있는 수아가 더 크게 느껴지는걸.
호호, 근데 이번엔 아저씨가 제게 머리를 빌려 주셔야 해요.
그래. 하지만 먼저 호텔에 가서 샤워라도 좀 하고 편히 쉬면
서 예기하자꾸나.
스탠퍼드에서 샌프란시스코, 다시 뉴욕까지의 여행은 결코 짧
은 것이 아니었다. 정환은 호화로운 호텔은 오히려 수아에 게 부
담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센트럴파크 부근
의 조용하고 자그마한 호텔로 수아를 안내하고는 그녀가 샤워를
마친 때까지 로비에서 기다렸다.
기분이 한결 좋아졌는데요.
그래 식사는 뭘로 할까?~
오랜만에 우리 나라 음식 좀 먹고 싶어요.
참, 그렇겠군 그럼 우래옥으로 갈까??
좋으실 대로요.
한국 식당에 자리를 잡고 앉기가 바쁘게 수아는 그 숫자표를
꺼내놓고 정완에게 설명 했다.
각각의 숫자에 40퍼센트씩을 곱한 것은 잘 생각해 보면 그 의
미를 알 수 있어요. 투자 수익률이죠. 우리 나라에 투자를 하는
것이 좋은지 나쁜지는 모르겠지만 문제는 그 액수가 너무 크다
는 사실이에요. 한 회사가 이렇게 엄청난 자금을 어디에 투자하
는 거죠?또 그렇게 투자해서 무슨 수로40퍼센트의 이익을 얻
겠어요? 그래서 아저씨한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한 거예요.
정완은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라이언펀드라면 자금 동원력이 엄청나지. 25억 달러라도 과
감하게 투자할 수 있단다 그러나 악랄한 돈 사냥꾼인 그들로서
도 한 곳에 집중 투자한다는 것은 엄청난 도박이지. 회사의 운명
을 걸어야만 생각할 수 있는 일인데 나로서도 이해가 잘
안 가는구나.
그런데 그 돈을 어디에 투자하죠?플랜트 건설일까요, 아니
면 합작 사업??
이 회사는 그런 일에 투자하지는 않는다. 헤지펀드라는 말 들
어본 적 있니??
없어요. 그게 뭐죠?
오로지 금융 사업만 하는 회사들이지.자본주의의 최첨단을
걷는 회사들이다 돈이 오가는 사업이라면 뭐든지 하지.
그렇다면 그 숫자들은 우리 나라에 대한 금융 사업 계획이겠
군요. 금융 투자라면 뭘까요??
글쎄
정완은 잠시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이때 수아의 머리에 퍼뜩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아지트에 들
었던 도둑 파일을 모두 지워버리고 팩스 원본을 가져갔던 그 이
상한 도둑이 떠올랐던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단순한 학생의 장
난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과 더불어 수아의 귓전에 테드의 목소
리가 살아나고 있었다.
'왼쪽 문자는 각 나라의 영어 이니셜이에요:
어쩌면 그들의 투자는 비정상적인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비 정상적 인 투자라고??
네 사람들의 눈을 피해야만 할 사정이 있다는 예감이 들어
요.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여러 나라 화폐로 투자 계획을 짜둘
이유가 없지 않을까요??
각국 화폐들이 원화로 바뀌었다가 다시 달러로 환산된 것을
보면 결국 자본이 흘러나오는 원천을 은폐하겠다는 건데, 세계
여러 나라의 투자자들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위장하려는 속셈이
군 미국에서는 얼마든지 해외로 돈을 보낼 수 있으니까 이들은
해외에 분산되어 있는 투자 회사를 통해 자신의 정체를 숨기겠다
는 얘기지 .
왜 그럴까요??
우리 정부의 감시를 피하려는 거겠지. 그렇다면 이것은 투자
라기보다는 투기일 가능성이 크겠는데.
무슨 투기죠?~
환투기 아니면 주식인데 외환은 IMI'의 감시하에 있으
니 노골적인 환투기를 통해 40퍼센트라는 큰 차익을 내기는 어
렵고, 내 생각으로는 아마도 주식 투자일 것 같구나.
주식이요? 그렇게 많은 돈으로 주식을 사요??
그래. 이제 얼마 후면 우리 나라 증권 시장이 완전히 개방된
다. 그러면 외국인들이 아무런 제한 없이 우리 나라의 주식을 마
음껏 살 수 있지. 이 도표는 아마도 그 투자 계획일 가능성이 커.
외국인들이 주식을 마음껏 살 수 있다는 것은 우리 나라에 득이
되나요, 아니면 해가 되나요??
한마디로 득이 된다거나 해가 된다고 간단히 얘기할 수는 없어
국제 금융의 흐름을 따라야 경 쟁에서 뒤처지지 않을 수 있다
는 측면에서는 바람직하지. 또한 외국의 자본을 이용할 수 있다
는 점에서도 유리하고. 그러나 위험 요소도 있어 . 규모가 큰 외
국 자본은 우리 나라와 같이 작은 금융 시장을 마음대로 흔들어
자본 파동을 초래할 수도 있으니까.
자본 파동을 초래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죠??
우리 나라의 증권 시장이 개방되면 외국인들이 엄청난 자금
을 동원하여 주식을 대량 매입할 수 있지 .
그래서는요??
가뜩이나 완전 개방을 앞두고 올라가던 주가가 결국에는
천정부지로 치솟겠지 그들이 막대한 자본을 동원하여 주식을
사대면 너도나도 주식 시장으로 몰릴 테고, 주가는 날이 갈수록
상승하게 되겠지. 한창 주가가 올라가는 길목에서 그들이 한꺼
번에 팔아버리면 그 피해는 국내의 투자자들이 몽땅 떠맡게 되
고 그들은 유유히 빠져나갈 가능성이 있어.
정말 그럴 수 있겠네요. 그런데 이렇게 위험한 주식 투기를
막을 수 있는 장치가 없나요??
없어 . 다만 정부는 시장 상황을 지켜보다가 특정 자본이 특정
주식에 몰리는 것만 경고할 뿐이야. 그러나 그들이 우리 정부의
감시에 노출될 리가 없지 .
어떻게 해야 하죠??
정부 차원에서의 대책은 없는 게 확실해.
민간 차원에서 는요??
내가 아는 한은 특별한 방법이 없어 .
그게 도대체 말이 되나요. 상대의 투자 규모는 25억 달러예
요. 아저씨 말대로라면 국내의 투자자들은 모두 망하고 말 텐데
요.
그런 위험성 때문에 정부에서는 주식의 전면 개방을 꺼려왔
지만 끝내는 외국의 금융 개방 압력에 손을 들고 만 거야.
덕을 보늣 뻔한 금융 붕괴를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받아들여
야 하나요'~
현재로서는 두 눈 멀정히 뜨고 당할 수밖에 없어. 지난번의
외환 사태처럼 .
그들의 음모를 알려 모두가 주식을 사지 않도록 하면요?~
그들이 누군지 어떻게 아냔 말이야. 게다가 정부가 그런 식
으로 개입하면 그 부작용은 무척 오래갈 거야. 자칫 잘못될 경우
우리의 증권 시장은 국제적으로 외면당하게 될 테구. 아마 어떤
효력보다는 악영향만 미치게 될 거야.
안타깝군요.
증권 시장을 완전히 개방하는 데 필수적으로 따르는 위험이
야. 어느 정도의 희생은 어쩔 수 없는데, 이렇게 악의적으로 덤
벼드는 펀드가 있다면 자칫 한 방에 금융 붕괴가 올 수도 있어.
미국에서 금융 회사를 경영하는 정완은 안목이 날카로웠다
그러한 그가 방법이 없다고 얘기하는 것이 처음에는 이해가 되
지 않았으나 국제 금융 시장에 대한 설명을 듣고 보니 수아 역시
비관적인 분위기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의 증권 시장 전
면 개방은 헤지 펀드들에 게는 진정 최고의 호재였다.
이대로 당할 수는 없어 우리가 앉아서 또다시 너희 자본주의
의 하이에나들한테 당할 수만은 없단 말이야. 고통은 지난번의
외환 사태로 충분해. 그래, 내 힘으로 해내 겠어. 아직 한 달의 시
간이 있잖아'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수아는 그들의 음모
를 그냥 둘 수는 없다고 굳게 다짐했다 그러나 당장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부딪쳐볼 뿐이었다. 그리고 우선적으로 해
야 할 것은 까다로운 교수들로부터 시간을 얻어내는 일이었다
비밀 결사
안젤로 주교는 자신이 성직자의 길을 택한 이후 가장 어려운
시기에 봉착했다고 생각했다 가톨릭 교리와 교황의 언행 사이
의 불일치를 찾아내서 교황에게 진언하는 임무를 맡고 있는 그
에게 최근 몇 년 간은 매우 힘들었다
교리청 장관을 필두로 하는 보수적 성향의 추기경들은 교황의
언행에 대해 사사건건 안젤로 주교에게 책임을 물어왔다. 물론
그는될 수 있으면 기계적으로 일에 임하려 했으나 그게 마음대
로 되지 않았다
요한 바오로 2세의 취임 이후 교황과 추기경단 사이에는 언제
나 보이지 않는 대립이 있어 왔는데 최근에는 그 대립이 격화될
대로 격화되어 일반 신부들도 그 둘 사이의 이상한 분위기를 느
낄 수 있을 정도였다.
교황은 어떤 일에 대해서도 예전의 교황들처럼 아는 듯 모르
는 듯 넘어가려 하지 않았다. 교황청의 자금으로 법적 금융 거
래를 해오던 이탈리아 추기경들의 부정이 누군가에 의해 언론으
로 흘러 들어갔고 급기야는 사법적 수사가 시작됐다 또한 2차
대전 당시 교황청으로 흘러 들어왔던 나치와 파시스트의 자금
에 대해서도 교황은 조사를 명령했다.
무엇보다도 근본적인 문제는 교황이 새로운 가톨릭상을 만들어내려 한다는 사실이었
다. 교황이 추구하는 이 새로운 가톨릭
상은 적당한 변화나 개혁이 아니었다. 2차대전 당시 엄청난 살
륙에 대해 침묵했던 교황청의 과오를 인정한다는 정도가 아니었
다 교황은 가톨릭이 지난 5천 년 간이나 유지해 온 유일신의 개
념을 모호하게 만들 수 있는 언행을 계속했다.
교황은 사상 최초로 타종교들에게도 가톨릭과 동등한 지위를
부여하기 시작했고, 그 지도자들과 다정히 어깨를 맞대었다. 또
한 수백 년을 이어온 과학과의 대립에서 창조를 부정하지만 않
는다면 과학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천명했다. 사실 과학을 받아
들이면 결국 창조는 부정당할 수밖에 없기에 교리청 장관을 필
두로 한 추기경단은 가톨릭의 운명에 대해 심각한 위기 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안젤로 주교는 기도를 시작했다.
짧은 기도가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 벨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두 사람의 신부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오, 스테파노 신부 여행은 힘들지 않았나요?~
네, 속히 갔다 왔습니다.
한국의 추기경은 잘 계시던가요??
네, 건강하시더군요.
그래. 갔던 일은 어떻게 되었나요??
주교는 잔뜩 기대가 실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마귀입니다. 도저히 하느님의 은총을 기대할 수 없는 사
람입니다.
스테파노 신부의 단호한 답변을 듣는 안젤로 주교의 얼굴에
먹구름이 끼었다.
만나서 우리의 입장에 대한 이해를 구했나요??
네, 하지만 그는 파티마의 예언을 공표하는 것만이 최선의 방
법이라 했습니다.
그 사람은 왜 그렇게 그 예언의 공표를 고집하던가요??
자신들의 문화와 고유 신앙이 파괴된 책임의 일단이 기독교
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매우 괴상한 논리군요.
미친 사람입니다. 실제로 한국에 가서 알아본 결과 그는 정신
병원에서 중증의 과대망상증 환자라는 진단을 받았고, 지금도
정신병원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정확한 문장을 구사해서 편지를 보냈단
말인가요??
아시다시피 정신병이란 게 겉으로 보아서는
음,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한국에는 어떤 신앙이 있던
가요??
조상신과 자연신 숭배의 오랜 전통이 있는데 거의 전멸되었
다는 겁니다. 사실 제가 안 바로도 좀 너무하기 는 하더군요. :)
그렇게 되기까지는 여러 원인이 있었겠지만 일본의 식민 지
배를 받은 것이 주요 원인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그 나라에서 기독교는 어떤 상황에 놓여 있던가요?~
기독교는 모두 기복 신앙으로 둔갑해 있었습니다. 목회자들
은 아무리 성실하고 선량하게 살아도 예수를 믿지 않으면, 아니
교회에 나오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식으로 설교하
고 있었습니다. 특히 개신교의 각 교파들이 그런 논리로 신도를
끌어들이고 있었습니다 이웃 국가인 중국이나 일본과는 아주
다르더군요.
일본과 어떻게 다르다는 얘기죠?~
기독교가 전해진 것은 일본이 백 년이나 먼저 입니다만 일본
의 기독교 인구는 전인구의 0.5퍼센트도 안 됩니다. 그나마 여호
와를 유일신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 10분의 1도 안 된다고
자신들의 고유 문화를 잘 지켜냈다고 생각하는 반면, 한국의 목
회자들은 일본인들은 아무도 천국에 못 간다. 그토록 예수를 안
믿는데 어떻게 천국에 가겠는가라고 하더군요.
안젤로 주교는 당혹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 었다
반발이 이해가 안 가는 상황은 아니지만 그의 기독교관은 너
무나 부정적입니다.
어떤데요??
중세에 기독교는 인간성을 탄압하고 신권 세계를 만드는 데
에 열정을 바쳐왔고, 근세에 와서는 제국주의와 손을 잡고 타민
족을 짓누르고 그 문화를 초토화시켜 왔다는 겁니다.
보통 문제가 아니군요.
안젤로 주교는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까짓 인간을 뭘 그렇게 대수롭게 생각하십니까? 제가 볼
때에는 정신병원에 있는 환자에 불과하던데요.
그러나 안젤로 주교는 고개를 가로저 었다
수고했어요. 푹 쉬도록 해요.
그럼
스테파노 신부를 내보내고 난 안젤로 주교는 간단한 기도를
마친 뒤 성호를 그었다. 그러고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교리청
장관의 방으로 갔다.
교리청 장관은 외무장관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가 안젤로 주
교를 맞았다 그 방에는 낯익은 얼굴이 몇 사람 더 자리하고 있
었다.
그는 한국의 기독교 신자들에게 교회의 모순을 보여주고 싶
어합니다 그것이 파티마의 예언을 통해서 가능하다고생각하고
있습니다.
안젤로 주교로부터 스테파노 신부가 한국에서 사도광탄을 만
났던 얘기를 듣고 나자 교리청 장관은 깊은 분노가 서린 목소리
를 뱉어냈다.
파티마의 예언을 공표하는 것밖에는 아무 얘기도 듣지 않겠
군요??
그는 자신의 동포들을 설득하는 대신 파티마의 예언의 공표
를 택한 듯합니다.
음, 세계 인구는 늘어도 가톨릭의 신도 수는 급격히 줄고 있
는 판인데 그자가 다시 한 번 이상한 짓을 하면서 예언의 공개를
요구하면 보통 일이 아니지 않소.
그러게 말입니다.
외무장관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맞장구를 쳤다 그는 신도 수
의 격감이란 문제에 몹시 화가 나 있는 듯했다.
과거 레이건 대통령 때는 미국과의 관계가 얼마나 좋았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미국 중앙정보국의 정보가 필요할 때면 아무
때나 보여주곤 했지요. 그러나 지금의 클린턴과는 너무 문제가
많아요. 그 건방진 친구는 며칠 전 성하와의 통화에서 고함까지
지르더군요. 성하께서도 화가 머리 끝까지 나셨어요.
외무장관, 문제는 우리에게도 있어요. 성하처럼 심하게 낙태
를 반대하면 어떤 젊은이가 가톨릭에 남아 있으려 하겠어요?~
외무장관은 고개를 끄덕 였다
그나저나 그 예언이 걱정이오. 그자가 극단적으로 일을 저지
르고 언론이 가세해 흥미 위주로 가톨릭을 매도하면. 파격적 개
혁을 갈구하는 성하가 전격적으로 예언을 공개해 버릴 수도 있
는 일 아니오??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최근에 성하는 예언과 관련하여 흔들
리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자는 우리 가톨릭에 공전의 위기를 초래할 수 있는 위험인
물이오. 하지만 모든 문제의 근본은 바로 성하에게 있어요. 잘못
하면 기도가 바뀔 판이니
기도가 바뀐다구요??
'세상의 주인이신 단 한 분의 하느님'으로 시작하는 기도가
이제 '세상의 여러 주인 중 하나이신 하느님'으로 될 판이란 말
이오.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성하가 보이시는 행동이나 그자의 태도는 별로 차이가
없소. 그리스도가 아닌 그들의 신을 인정한다는 것 아닌가. 조상
신을 믿는다면 그들에게도 하느님이 있겠지.
환웅인지 단군인지 하는 존재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기도는 '하느님 아버지'가아니라 '단군 아
버지' 가 되지 않겠소?~
그렇습니다.
안 돼요. 이래선 안 돼 .
무엇보다도 그자가 매우 위험합니다. 파티마의 예언에 대한
성하의 생각이 차츰 공표 쪽으로 방향을 트는 경향이 있는데,
그 자가 무슨 일이라도 일으키면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될 것
입니다.
그 예언은 절대로 공표되어서는 안 돼요.
장관의 어조는 단호했다
장관님은 그 예언의 내용을 아십니까??
모르오. 하지만 하나는 분명히 알고 있소. 그 예언은 공표되
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오.
스테파노 신부에 의하면 그 사도광탄이라는 자는 교황 성하
의 급격한 변화는 바로 그 파티마의 예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
기 때문이라고 했다더군요.
장관의 눈썹이 꿈틀했다
누군가가 그런 얘기를 했다구요??
그렇습니다.
그럼 그자는 예언의 내용을 알고 있다는 얘긴가요??
어느 정도 추측하고 있답니다.
도저히 그냥 있을 수 없는 일이오. 그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
도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소.
장관의 표정이 무섭게 굳어지는 것을 보며 안젤로 주교는 혹
시 장관도 그 예언의 내용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티칸 내부의 깊숙한 곳에서는 몇몇 추기경이 그 예언의 내
용을 알고 있으며 , 언젠가 그 예언이 공표될 수도 있다는 신념을
밝힌 교황과 충돌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하지만 안젤로 주
교는 그 예언은 자신이 뭐라고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기에 더 이상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사실 성하께서 너무 급격히 달라지시고 있는 것을 보면 의아
한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번에는 과학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창조론만 부정하지 않는다면' 이란 전제를 달았소.
그런 전제는 도피용이 아닌가요??
그렇소, 사실은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이지 정말 문제야. 교회
가 과학을 받아들이고 나면 무엇이 남는다는 건가.
이대로 가면 교회는 붕괴하고 말아. 도대체 성하는 왜 스스로
교회를 깨려 한단 말인가.
사람들이 나가자 교리청 장관은 기도실로 들어가서 오랫동안
혼자 기도를 했다. 수심에 찼던 그의 얼굴이 기도를 마치고 나오
자편안한분위기로 안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그의 얼굴
에는 거칠고 격정적인 기도를 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는 전화기를 들어 숨을 미처 고르지 못한 채 단호한 목소리
로 외쳤다.
귄터 백작을 바꿔주시오!
기디온 교수는 프랑크푸르트공항의 출국 카운터 옆에 있는 카
페에서 조용히 맥주잔을 기울였다. 카페에는 비행기의 출발을
기다리는 승객들이 다소 들뜬 분위기로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기디온은 가방에서 지도를 꺼냈다
한국
손가락으로 지도상에 금을 그어보니 시베리아 상공을 날아 만
주를 거쳐서 들어가게 되어 있는 작은 나라였다 이 나라에서는
아무도 총을 쓰지 않는다고.
기디온은 잠시 눈을 감고 회상에 잠겼다.
처음 임무를 수행한 나라가 콩고였던가. 그 검은 나라에서는
내란중에 한 달 동안 무려 스물일곱 명의 신부와 수녀들이 암살
을 당했다. 서방 세계를 적으로 몰아야 집권을 할 수 있다고 판
단한 반군 지도자의 그릇된 전술 때문이었다.
그곳에는 기디온이 가야 할 정당하고도 확실한 이유가 있었
다. 기디온은 기꺼이 갔고, 성직자들은 암살의 공포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 물론 반군 지도자의 가톨릭에 대한 그릇된 편견도
말끔히 없어졌다. 잠자는 사이 침실에서 깨끗이 없어져버린 목
과 함께.
다음은 어디였던가. 엘살바도르, 아니면 니카라과. 어디였는
지 확실치는 않지만 해방신학에 미쳐 날뛰던 신부가 기다리고
있었다. 오랫동안 신부와 토론을 벌였던 기억이 났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 당시 그가 전개했던 논리는 옳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신부는 가톨릭의 신성성을 너무 무시하지 않았던
가. 독재자와 맞서 싸우지 않는 사제는 이미 정통성을 상실했다
는 주장은 그런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예수가 체제에 불
만을 가진 혁명가였다는 주장은 너무 심했다
그 신부는 독재와 싸워 이기고 나면 가톨릭을 정치에 이용할
사람으로 생각되었다. 비행기 출발30분 전까지도 그의 숨가쁜
주장은 그치지 않았었다. 하지만 기디온이 비행기를 타고 난 후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주장에 귀기울여줄 사람을 찾지 못했을 것
이다. 그의 주장도 구멍난 그의 머리통에서 다 새어버렸을 테니
까.
기디온은 이틀 전 귄터 백작으로부터 받은 전화를 떠올렸다
기디온 교수, 한국에 한 정신병자가 있소.실제 병원에 있는
환자요. 지난 80년 발생했던 다우니의 하이재킹을 承사했을 거
라는 혐의가 있소.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문제는 지금 그자가 파
티마의 제3의 예언을 공표하라고 교황청에 요구하고 있다는사
실이오. 아직은 잠재적이지만 언제 어떤 돌발 행동으로 이어질
지 모르오. 우리의 추기경은 그의 이런 요구가 성하를 자극하여
예언의 공표로 이어질까 봐 지극히 염려하고 있소. 물론 이제까
지와 마찬가지로 현지에서의 결론은 교수에게 맡기는 바요 바
로 떠나주었으면 하오.
기디온은 비행기의 출발을 알리는 마지막 안내 방송이 나오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훤칠한키에 또렷한 이목구비,그리고 하얀
살결은 누가 봐도 학자 타입의 인물임을 말해 주었다.
기디온은 스튜어디스의 안내를 받아 퍼스트클래스의 좌석에
앉았다. 루프트한자의 여객기가 이륙하여 끝없는 구름 속을 비
행하는 동안 그는 눈은 감았지만 정신병원에 있다는 미지의 인
물에 대한 생각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중세의 십자군전쟁에 참전한 유서 깊은 전통을 가진 집안에서
태어난 기디온은 가톨릭을 보호해야 한다는 신성한 사명감 아래
에서 자라났다. 그러던 어느 날 기디온은 극비리에 한 사람의 방
문을 받았다. 그는 기디온에게 로마의 카타콤베 시절부터 지금
까지 밀전되어 오고 있는 한 조직에 가입할 것을 권유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이 세상의 유일한 진리인 그리스도의
말씀은 보전되어야 하고, 그 가장 순수하고 성스런 사명을 비밀
리에 수행하는 인간으로 자신이 선택되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기디온은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울려오는 감격에 휩싸였다
귄터는 감격에 젖어 있는 기디온에게 장미로 장식된 작은 십자
가를 내밀었다.
장미십자회.
무릎을 꿇고 십자가를 받는 기디온의 두 뺨에는 눈물이 흘러
내렸다
가톨릭 명문들의 묵시적 동의에 의한 최고의 비밀 결사인 이
조직은 누구도 조직원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평상시에는 귄
터라는 이름의 전권을 가진 대리인이 무슨 일을 해야 할 것인가
를 결정하되 판단은 조직원에게 맡겼다
다만 이 조직은 108년 만에 한 번씩 전 조직원들의 의사를 물
어 새로이 해석해야 할 교리와 조직이 나아가야 할 방향 등을 결
정했다. 그러나 전 조직원이라고 해야 얼마 되지도 않는데다가
모든 것이 비밀리에 행해졌기 때문에 이 조직은 오랜 세월이 흐
르는 동안에도 결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일이 없었다.
상황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판단을 위해, 그리고 두 번 다시
중세의 암흑 시대와 같은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 비밀 결사는
그 시대 최고의 명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자제들에게만 가입
이 허용되었다 물론 유럽 대륙의 가문들에게만 해당되는 얘기
였다. 가입자는 어떤 분야에서든 최소한 몇 개의 수석을 차지한
기록이 있어야 했다 특히 철학과 종교에서의 두각은 필수조건
이었다.
그들은 결코 요란스럽게 성당에 나가지는 않았다 가입 제의
를 받아보지 못한 사람은 누가 조직원인지 전혀 알지 못했으며 ,
조직원 서로간에도 만날 기회는 극히 드물었다.
특이한 것은 희생되어야 할 사람을 직접 만나 어떤 형태로든
사상을 검증한 후 그를 제거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확신이 서면
오로지 자신의 판단에 의해 일을 결행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중세의 종교 재판장과 같은 역할을 수
행한다고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대체로 자신의 손에 직
접 피를 묻히는 것을 싫어했다. 일단 판단과 결심이 서면 그 다
음은 아무런 문제가 있을 수 없었다 세상에는 돈을 위해서라면
어떤 불가능한 일도 해내는 인간들이 많아 다음 문제를 모두 처
리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디온은 예외였다. 십자군전쟁에서 최고의 무훈을
떨친 그의 조상에게서 전해진 핏속에는 정의와 어긋나는 것에
대해서는 자신의 손으로 처리하는 가문의 전통이 용솟음치고
있었다.
신사의 주문
쇼토쿠 신사의 새벽은 조용히 밝아왔다 일찍 잠을 깬 신관은
부근의 산사에서 은은히 들려오는 새벽종 소리를 들으며 이슬에
젖은 풀잎을 밟고 걸었다. 일찍 둥지를 나선 새들이 지저귀는 소
리가 종소리를 타고 새벽 안개 속으로 떨어져내리고, 이제 가을
을 알리는 낙엽이 한 잎 눈앞에서 춤을 추고는 어깨를 넘어 자취
를 감췄다.
신관은 이런 신성한 새벽이면 제를 올리기가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총총히 걸어 대문을 열었다 이제 10여 세에 불과한사
동이 나머지 한쪽의 대문을 열며 아직 눈꼬리에 남은 잠을 소매
로 비벼댔다.
차 한잔 마실 시간이 지나자 희뿌연 안개가 낮게 깔린 길을 따
라 승용차의 질주음이 들려왔다.
신관은 경건한 자세로 손을 맞잡고 대문 앞으로 나서서 기다
렸다. 잠이 완전히 달아난 사동의 얼굴에 이제는 긴장된 표정이
자리잡았다.
선생님, 정말 다카가와 선생님이 오십니까??
신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저도 그분이 제 올리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까??
안 된다.
왜요? 저도 뽁 보고 싶은데요.
아니다. 너는 아직 어리다.
야마도 선생님은 저더러 이제는 다 컸다고 하셨는데요.
하지만 네게는 아직 다카가와 선생님의 신력을 견딜 수 있
는 힘이 없어. 몰래 숨어서 보다가 실수라도 하면 큰일난다.
절대 실수 안 할 거예요.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쉿 !
신관의 입을 막는 시늉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눈에 들어온 검정
색 자동차는 허리를 깊이 숙인 신관과 사동의 앞을 지나 신사 안
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신풍이 불어 오는군.
검정색 유카타를 입고 역시 같은 검정색 하오리를 걸친 채 자
동차에서 내린 오십대 중반의 사나이가 지나가는 바람을 느껴보
려는 듯 손바닥을 펴고 팔을 허공에 뻗었다 평온하고 부드러운
표정임에도 불구하고 눈에서 혁혁한 안광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
이미 수양의 경지가 상당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는 바람을 잡아보는 듯 손을 몇 번 쥐었다 펴더니 서서 기다
리고 있던 몇 사람의 신관들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다카가와 선생님의 신력이 저희 신사에 깃들이기를 바랍니
다.
수석 신관이 여럿을 대표하여 공손히 답례를 했다.
인사를 나누시지 요.
다카가와는 역시 하오리 차림으로 내린 또 한 사람의 사나이
에 게 신관들을 소개했다.
야마자키 이사장이십니다.
신관들은 역시 깊이 고개를 숙였다
이사장이라 불린 사나이는 굵고 짙은 눈썹에 부리부리한 눈매
를 갖고 있었다 가슴이 떡 벌어지고 머리에는 하얀 띠를 두른
것이 에도 시대의 무사를 연상케 하는 풍모였다.
두 사람은 신당 앞에서 잠시 고개를 숙이고는 신발을 벗고 신
당 안으로 들어갔다.
향을 사르시지요.
야마자키는 위패 앞에 무릎을 꿇고 신관의 도움을 받아 향에
불을 붙인 다음 느릿하나마 힘있는 동작으로 향로에 꽂았다
절을 올리시지요.
사나이는 역시 힘있고 느릿한 동작으로 위패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당당하여 거칠 것이 없었다.
아마테라스 오미카미 신이시여, 이제 야마자키가 신성한 날
의 새벽을 택해 가슴에 맺힌 한을 통곡으로 고하고자 찾아왔나
이다. 국조께서 신력으로 이 나라를 여신 이래 신민을 보호하사
천하의 환난을 이겨낸 지 2천여 년. 지난 몽고족의 침략 때에도
바다를 건너오는 그들의 군세에 나라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서자
오미카미 신께서는 바람을 보내 외적을 물귀신으로 만들고 열도
를 지키셨나이다. 그러나 이제 나라가 외적의 발굽 아래 짓밟
히고 신민의 도시들이 악랄한 폭탄을 맞아, 죽은 자는 혼을 잃고
산 자는 평생을 병마에 시달리며 울부짖고 있나이다. 절치부심
으로 살아온 지난 50여 년 세월을 신민은 고개를 숙이며 굴욕을
참고 나라의 운명을 보전해 왔나이다. 하지만 오늘에 이르러 국
치는 극에 달하고 지난날 우리의 식민지였던 한반도의 축생들까
지도 다케시마를 그네들의 영토라 우기며 덤비니 신민은 살았으
되 죽은 것과 다름이 없나이다. 하여 일본혼을 되살리고자 하는
신민들이 숱한 고초를 겪어가며 지난날의 굴욕을 씻고자 몸과
마음을 다하였으나 밖으로는 외적의 눈길이, 안으로는 무지몽매
한 자들의 비난이 잇따랐습니다 그러나 작금에 이르러 신민이
드디어는 우리 일본혼 중흥의 중요성을 깨달아 미국과 러시아,
중국을 상대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함을 다같이 인식하였나이
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는 민족의 저력을 모으고 심기일전하여
새로운 눈으로 역사를 보고 어지럽혀진 신국의 역사를 되찾고자
하옵니다. 하지만 신국의 지기가 흐름을 멈추고 천기는 바야흐
로 이동을 시작하였나이다. 신이시여, 신민은 사력을 파하여 천
지의 기를 붙들고자 선인의 예언을 좇아 성업을 수행하고자 하
나이다. 하오니 신안으로 그 흥물이 있는 곳을 짚어 주소서. 부디
신력으로 도우사 신민의 정성이 하늘에 미치도록 하오소서.
사나이가 절을 마치고 일어나자 다카가와가 위패 앞에 섰다
그는 주머니에서 이상한 그림과 글씨가 씌어진 부적을 꺼내서는
위패를 덮었다. 부적은 누렇게 바래어 이미 오랜 옛날에 만들어
진 것임을 짐작하게 했다.
다카가와는 향을 다시 피우고 정종을 잔에 채워서는 위패 앞
에 놓았다. 신관의 도움 없이 걸~l를 진행하는 그의 손길은 주춤
거리는 법이 없이 유연하고 익숙했다
이윽고 제단을 다 차린 다카가와는 끈으로 묶었던 머리를 풀
어헤쳤다. 맨발에 검정색 유카타 차림으로 제단 앞에 선 그는 잠
시 고개를 숙인 후 눈을 감더니 무슨 뜻인지 모를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작은 소리로 반복되던 주문이 그의 얼굴이 달아오름
에 따라 점점 빠르고 격해지는 가운데 간간이 신음 소리가 뒤섞
였다. 소름이 끼칠 듯한 신음과 함께 차츰 붉게 달아오르던 그의
얼굴이 삽시간에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하더니 이마에서부터 음
산한 귀 기가 감돌았다.
조금 전까지도 벌겋게 달아올랐던 다카가와의 얼굴이 삽시간
에 창백해지자 멀찍이 숨어서 이 광경을 바라보던 사동의 팔에
소름이 돋았다. 사동은 말로만 듣던 다카가와 선생의 통혼 의식
을 보는 것이 소원이라 신관의 눈을 피해 통로 한 곁에 숨어 이
범상하지 않은 의식을 훔쳐보고 있었던 것이다
다카가와의 주문은 그 뜻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때로는 여
유 있게 불공을 드리는 스님의 독경 같기도 하다가 때로는 미친
여자가 숨쉴 틈도 없이 뱉어내는 저주 같기도 했다. 간혹 외마디
비명을 지를 때에는 비틀거리며 쓰러질 듯도 하다가 어느새 다
시 본래의 평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사동은 살금살금 기어 다카가와의 제단을 향해 다가갔다. 다
카가와의 주문을 또렷하게 듣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윽고 다카가와의 주문을 확실하게 들을 수 있는 거리에 다다
른 사동은 고개를 들다가 그만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
빠지고 말았다.
아악!
무서운 얼굴이었다. 가히 귀신의 얼굴이라 할 만했다. 이루 표
현할 수 없는 음산하고 기괴한 기색이 얼굴에서 넘쳐나고, 온몸
은 지기에 젖어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했다 이상하게도
그의 몸짓에는 힘이 없어 보였다. 마치 몸은 없고 바람만이 유카
타를 펄럭이고 있는 듯했다.
한참을 같은 동작을 반복하며 주문을 외던 다카가와가 다시
원래의 평온한 안색을 되찾고 모든 동작을 멈췄다. 사동은 살며
시 무릎걸음으로 자리를 벗어났다.
팔굽과 무릎을 이용하여 소리가 나지 않게 뜰로 빠져나오던
사동은 뭔가가 팔굽에 걸리는 것을 느꼈다. 낡은 천 종류였다.
손을 뻗어 집어본 사동은 흠칫 놀랐다. 부적이었다. 다카가와가
제단을 꾸밀 때 위패를 덮었던 바로 그 부적이 날아와 자신의 팔
굽에 걸린 것이다.
사동은 가슴이 뛰었다. 바람 한 점 없었는데 어째서 부적이 여
기까지 날아왔는지 의아했지만 그런 것을 따지고 있을 틈이 없
었다. 어쩌면 자신이 부적을 훔쳤다는 누명을 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하지만사동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랐다. 그냥 버리고 가야 할지 아니면 가지고 가야 할지 결심을
하지 못했다.
이때였다. 사동은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눈길을 의
식했다 왠지 모르게 고개를 들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사
동은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힘에 끌리는 것을 느꼈다.
고개를 들어 그 눈길과 마주치는 순간 사동은 가슴이 답답해
지면서 아찔하는 현기증을 느꼈다. 자신도 모르게 부적을 들고
일어서던 사동은 그대로 자리에 고꾸라졌다
저주의 바람
이상한 일이야, 정말 이상한 일이야.
다카가와 선생, 무슨 잘못된 일이라도 있습니까??
아까 그 사동 때문에 기분이 언짢으신가요??
아니,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럼 무슨 일로 그러십니까??
이상한 일이군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생겼어요.
다카가와는 신사를 떠나올 때부터 형언하기 어려운 표정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생각하며 혼자말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는 옆
자리의 야마자키가 아무리 물어도 전혀 대답이 없다가 갑자기
어떤 생각이 떠오른 듯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혹시 작업을 추진하던 중에 무슨 불길한 일이라도 생기지 않
았습니까??
없었습니다.
아무 문제 없이 잘 진행되었단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야마자키는 언뜻 대답을 해놓고는 석연치 않아 머릿속으로 이
제까지의 작업 진행을 더듬어보았다. 비록 사소한 일이었지만
그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별것 아니긴 하지만 썩 유쾌하지 않은 일이 있긴 했습니다.
어떤 일이지요?~
누군가가 우리 연구원에게 접근하여 작업을 추적하려 했던
적이 있었지요. 하지만 자료를 일체 회수했습니다. 그런데 그것
이 다카가와 선생과 무슨 관계가 있을 리는 없을 것 같은데요.
아니, 아닙니다 그 일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시오. 누가 연구
원에 게 접근했습니까??
동경대학교의 한 교수입니다. 컴퓨터를 전공하는 사람이라더
군요.
동경대학교의 교수라 그 사람이 어떻게 그런 일을 했을
까요?~
동경대학교의 이치로 교수에게 연구를 의뢰했는데 교수는 죽
고 그자가 자료를 추적해 왔더군요.
다카가와의 눈썹이 꿈틀하더니 삽시간에 그의 눈에서 무서운
빛이 努아졌다
그랬군요. 그런 일이 있었군요.
다카가와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야마자키는 이런
다카가와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동경대학교 교수
가 도시아키에게 접근하여 작업을 추적하려 한 것이나 이치로의
죽음이 오늘 신사에서의 기도와 무슨 상관이라도 있는 것처럼
얘기하는 다카가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이치로 교수는 (묘제의 연구)를 가지고 작업을 하
다 죽었단 말이지요??
그렇습니다._,
어떻게 죽었습니까??
사고로 죽었습니다.
다카가와의 목소리에 점점 힘이 실리는 것을 느끼며 야마자키
는 이상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어떤 사고입니까??
계단에서 떨어져 죽었습니다.
그가 떨어지는 장면을 목격한 사람은 없습니까??
없습니다.
경 찰에서는 사인을 뭐 라고 하던가요?
과로로 인한 실족사로 겁안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 동경대학교의 교수 이름은 무엇입니까?~
기미히토. 최고의 컴퓨터 실력자로 인정받고 있는 사람이람
니다.
다카가와의 굳어 있던 얼굴이 풀렸다. 그는 뭔가를 짐작했는
지 고개를 끄덕 이면서 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주머니에서 아까
의 그 부적을 꺼내 자세히 살폈다
사망한 교수의 시체는 화장했습니까?~
그건 모르겠군요. 확인할 수는 있습니다. 확인해 볼까요??
그러는 것이 좋겠군요.
야마자키는 비서에게 전화를 했다.
매장했다는군요.
그 시체를 한번 보고 싶습니다.
부패되기 시작했을 텐데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시체는 말을 하는 법입니다.
야마자키는 매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다카가와가 혼
을 부르고 유령과 통하는, 보통의 인간이 아니긴 하지만 죽은 교
수의 시체를 파보자고 말할 줄은 몰랐다.
경찰에서 철저히 검시를 했습니다만 피부에 긁힌 자국 외에
는 별다른 상처도 없었고 누군가 위해를 가한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마치 잠을 자듯 평온하게 죽었지요.
야마자키는 다카가와가 괜한 일을 한다는 생각이 들어 시체에
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랬겠지요.
다카가와는 별말이 없었다.
봉분을 뜯어내고 1미터 이상 파들어가자 음침한 색깔의 가로
지기 버팀목이 한 끝을 드러냈다.
문화적 의미가 있는 발굴이라면 인부들도 신이 날 터이지만
죽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을 그 죽음의 이유를 캐내기 위해
파내는 일이 즐거을 리 없었다.
버팀목과 상판을 들어내자 시꺼먼 목관의 기분 나쁜 색깔이
야마자키의 눈에 들어왔다.
인부들이 관을 들어올리려 하는 순간 다카가와의 목소리가 그
들의 동작을 막았다.
그만!
네, 뭐라구요??
관을 들어낼 필요는 없어요. 관 두껑만 열어요.
인부들이 관을 열자 아직 완전히 부패하지 않은 시체가 관바
닥에 누워 있었다. 모두코를찌르는 악취에 얼굴을찌푸렸지만
다카가와는 예리한 눈초리로 한동안 시체를 살피더니 준비한 향
을 피우게 하고는 잠시 눈을 감고 주문을 외웠다
야마자키는 이것이 말로만 듣던 다카가와의 초혼 의식이라는
것을 알았다. 한동안 주문을 외워 혼을 위로하던 다카가와가 약
간 높은 목소리로 주문을 외우자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바람이
한 점도 없어 곧게 피어오르던 향의 연기가 마치 누가 입김이라
도 부는 듯 굽어졌던 것이다 연기는 서쪽으로 구부러졌다.
이제 됐어요. 덮어요.
어리둥절해하는 인부들을 뒤로하고 다카가와는 자동차를 향
해 걸음을 옮겼다 놀란 것은 인부들만이 아니었다. 야마자키는
서둘러 다카가와를 뒤쫓았다. 자동차에 올라탄 야마자키의 표정
은 의문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다카가와 선생, 시체를 보자더니 왜 이제는 볼 필요가 없다고
서둘러 돌아서 나오는 겁니까? 나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겠
습니다.
알 수 있는 것은 다 알았습니다.
아까 그 연기가 구부러진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두 가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나는 물론 그 교수의 원한
에 찬 혼령이요, 또 하나는 그 교수를 죽인 요물의 기였습니다
그 요물은 아마 보통의 힘이 아닌 것 같습니다. 아직까지도 강하
게 느껴지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그 교수를 죽인 요물의 기라구요? 그렇다면 그 교수가 타살
당했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믿을 수 없군요. 경찰 발표로는 타살의 흔적은 조금도 없었다
는데요.
흔적을 남기는 힘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그는 저주의 힘에 의해 죽은 것입니다.
네? 도대체 누가 어떤 이유로 ?
구천을 헤매는 망혼은 서쪽을 가리켰어요.
서쪽을 가리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요??
서쪽에서 온 힘이 그를 죽였다는 의미지요.
서쪽에는 뭐가 있지요? 바다 ??
바다 저편에는요?~
조선! 그렇다면 이치로 교수는 조선에서 온 힘에 의해 죽었
단 말입니까?~
아마도 그럴 겁니다.
조선에서 누가 이치로 교수를 저주했단 말입니까?~
그만을 저주한 것은 아닐 겁니다.
그렇다면 또 누구를??
잘못하면 야마자키 이사장까지도 서쪽에서 온 힘의 저주를
받을지도 모릅니다.
야마자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무리 기골찬사람이라해도
자신이 정체를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저주를 받고 있다는데 태평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럴 리가,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까??
가능한 일입니다. 연구원을 접촉했던 교수가 있었다고 했지
요? 이름이 기미히토라고 했던가요??
네, 그렇습니다.
그 사람이 뭔가를 알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러나 섣불리 그 사람을 만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연구원
을 접촉한 것으로 보아 그 사람은 작업을 추적하려고 혈안이 되
어 있을 텐데, 그를 만난다면 오히려 비밀이 탄로날 우려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다카가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그다지 심
각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방법이 ??
그의 무의식과 대화를 하면 됩니다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대
답하면서도 그는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으니까요. 야마자키 이
사장은 기미히토 교수를 가볍게 마취시켜 잠시 저에게로 데려오
시기만 하면 됩니다.
정말 그가 기억을 하지 못할까요??
설마 이 다카가와를 못 믿는 것은 아니겠지요?~
무슨 말씀을요.
두사람이 탄 검정색 승용차는 황궁을 오른쪽에 끼고 니주바
시를 지나 동경 시내 한복판으로 미끄러져 갔다.
혼란의 소용돌이
증권 시장의 완전 개방을 불과 10여 일 남겨둔 한국의 증권가
는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IMF와의 협상에 따라 한국 정부
는 적대적 인수 합병을 포함하는 완전 개방을 선언했다. 주식의
완전 개방은 이미 외국인에게 채권을 개방하면서부터 예견돼 오
던 것이었다.
연리 2퍼센트 정도에 불과한 일본에 비해 이자율이 10퍼센트
가 넘는 한국이 외국인에게 채권을 개방하는 것이나 거대 자본
을 동원하는 외국인이 국내의 우량 기업을 아무때나 인수 합병
할 수 있는 조건을 포함한 완전 개방이나 본질적으로는 같은 것
이다. 둘 다 상당한 위험을 내포하는 것이지만 외환에 다급한 한
국 정부로서는 이것저것 가릴 여유가 없었다.
대화증권 명동 지점에 근무하는 김 차장은 연일 찾아오는 신
규 고객들을 맞느라 정신이 없었다. 주식이 무엇인지도 모르다
가 신문에 거듭 실리는 투자 전문가들의 조언에 따라 증권 회사
를 처음 찾는다는 신규 고객들은 이미 큰돈을 벌어놓은 듯한 표
정들이었다.
사실 잘될 때의 주식이란 매력적인 것이다. 은행에 1년을 넣
어둬야 받을 수 있는 이자를 주식은 단 하루 만에 뽑아주지 않는
가 종목 하나만 잘 잡으면 한 달 안에 원금의 서너 배까지도 불
려주는 게 주식이다. 바로 이 맛에 한번 주식에 손을 댄 사람은
좀처럼 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마력이 끝내는 고객들을 비탄에 빠뜨린다. 고객들
은 어떻게 하면 벌기만 하고 손해는 안 볼 수 있느냐는, 황당한
질문을 스스럼없이 해댔다 .
김 차장은 투자자들의 이런 심리적 함정을 잘 이해했다. 그래
서 평소 그는 제 발로 찾아온 고객이라 하더라도 주식보다는 채
권을 권하는 편이었다. 그가 보기에 주식이란 참으로 위험한 것
이다. 일확천금을 노렸다가 밑천까지 다 날리고 후회하는 사람
들을 보아온 게 한둘이 아니었다
그것은 비단 투자자들만이 아니었다. 증권 회사 지점장치고
자기 집 가진 사람 없고,직원치고 처갓집 재산 축내지 않은 사
람 없다는 속설을 떠올리며 김 차장은 그들의 무모한 욕심에 혀
를 내두르곤 했다
그러나 김 차장이 생각하기에도 이번만큼은 너무나 좋은 기회
였다 김 차장은 지금까지 결코 무리수를 던지지 않았다. 그는
늘 안전 위주로 신중한 접근법을 견지해 왔고, 그래서 입사 동기
들이 모두 이런 저런 이유로 직장을 떠날 때에도 끝까지 남아 있
을 수 있었다.
하지만 김 차장도 이번에는 눈에 띄게 달라졌다. 그는 최근 은
행에 집을 저당잡히고 장인의 노후적금을 해약하는 등 은밀하게
자금을 모으고 있었다
그는 극심한 외환 위기와 함께 IMF의 구제 금융까지 받는 동
안 한국의 주식은 실제 가치의 다섯 배 정도나 저 평가되어 있다
고 생각했다. 게다가 외국인들에 의한 기업의 적대적 인수 합병
도 가능한 상태이므로 한국과는 비교도 안 되게 낮은 금리로 자
금을 동원할 수 있는 외국인들이 크게 밑지고 나갈 바에는 견실
한 한국의 제조업체를 인수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제까지처럼 정부가 주식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라는 판
단이 섰다. 그리고 외환 위기 당시 정부가 채권을 함부로 풀어버
린 것도 지금에 와서는 외국인 투자자에게 호재로 작용했다. 싼
이자의 외국 자금이 주식의 완전 개방과 맞물려 속속 한국으로
들어올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실제 상황보다도 김 차장을 강하게 끌어당긴
것은 세계 유수의 증권 평론가들이 모두 현저히 저평가된 한국
의 제조업을 제일의 투자 대상으로 선정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오늘도 세계적 증권 전문가인 월리엄 랜돌프가 한국 주식을 추
천하는 기사가 경제신문에 실렸다.
그러나 이 무렵 미국의 수아는 기진맥진해 있었다. 라이언펀
드의 전산망을 아무리 훌어도 이전의 그 숫자들은 찾아볼 수조
차 없었다. 하긴 이미 한번 유출된 것을 안그들이 일급 정보를
그대로 둘 리가 없었다.
혹시 자신이 너무 과민 반응을 보였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
이 끊임없이 뇌리를 파고들었다. 수아는 자포자기 상태에서 정
완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확실한 증거를 찾았니??
아저씨, 제가 너무 예민하게 생각했나 봐요.
갑자기 왜 그래? 풀이 죽어 있는 것 같은데.
아무것도 찾을 수 없어요. 제가 허황된 추리를 했나 봐요.
아니야. 수아의 추리는 너무도 훌륭했어. 오히려 나는 지금
무시무시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어.
그렇다면 제 추리가 정말 가능성이 있다는 말씀이에요?~
물론 틀림없이 지금 라이언펀드의 음모가 진행중이야.
어째서 그렇게 단정하시죠??
음,우리 금융인들만의 육감이라는 게 있어.물론 상당한 추
정 근거도 있지 .
어떤 것들이지 요??
만나서 얘기해 주지 .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나자꾸나
그것 때문에 일부러 오신다구요?~
그래, 보통 일이 아니니까.
이카로스와 프로메테우스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난 두 사람은 부두의 한 레스토랑에서 점
심을 같이 먹고는 작은 요트를 빌렸다.
아니 아저씨, 간단한 얘기를 하는데 요트는 왜 빌려요??
전번에 네가 변장했던 거 생각나니??
아저씨두 참.
요트는 샌프란시스코 만의 시원한 바람을 돛 가득히 받고 물
살을 가르며 앞으로 나갔다. 앨커트래즈 섬을 지나자 정완은 낚
싯대를 물에 드리우고는 수아를 불러 옆에 앉혔다.
조지라는 이름을 들어봤니??
네.
미국에 사는 사람치고 그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수백억 달러의 펀드를 굴리는 그는 세계 금융의 지
배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를 어떤 사람으로 알고 있니??
글쎄요, 자본주의의 깡패라고나 할까요. 아니면 자본주의 최
고의 전사?어쨌거나 그는 자신이 번 돈으로 갖가지 자선 사업
을 한다고 들었어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프로젝트 마련이라
든지, 능력은 있으되 기회가 없는 사람들을 위한 각종 사업을 펼
치고 있다고 언론에서 앞다투어 보도하더군요.
그래, 그렇게 알고 있구나. 그가 운영하는 펀드는 자본주의
시장 안에서 자연스럽게 탄생한 것이지 하지만 그가 동남아시
아에서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아니??
수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싱가포르를 비롯하여 태국, 말레이시아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국가들이 모두 엄청난 고통을 겪었어 . 그게 모두 조지
때문이지 .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조지는 돈이 되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가리지 않고 한단다. 이
것은 비단 조지뿐만이 아니라 모든 자본주의 기업들의 공통된
성향이지. 그래야만 살아남으니 말이야. 하여튼 조지는 싱가포
르의 외환시장에 개입했단다. 먼저 태국의 바트화를 계속사모
았지 .
왜 하필 태국 돈을 매입했을까요?~
태국이 무역 수지 적자가 계속되고 수출이 둔화되는 동안 외환
관리에 허점이 있다고 생각한 거지. 게다가 태국은 오랫동안 고
정 환율을 바꾸지 않았어. 즉 경제 능력에 비해 바트화가 과대
평가되어 온 거지 .
그래서요??
조지의 외환 딜러들은 바트화를 대량 사들인 후 어느 날 아침
일시에 매각하겠다고 내놓았지.
왜 그랬을까요? 그 많은 물량을 한번에 내놓으면 바트의 화
폐 가치가 왕창 떨어질 텐데요.
그것이 바로 그가 바라는 것이었지
그러면 어떻게 되는데요??
단기 핫머니에 의해 바트화가 엄청나게 떨어지면 태국 정부
는 필사적으로 화폐 가치를 올리려 하겠지. 왜냐하면 외채에 대
한 이자 및 수입 재료와 상품의 결제액 부담이 커지니까 물가와
임금이 폭등하고 경제는 혼란을 겪게 되며 외국 자본은 빠져나
가려 하기 때문이지 .
결과가 그렇게 되었나요??
아니, 그 반대가 되었어.
어떻게요??
마침 태국의 중앙은행이 3백억 달러가 넘는 외환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지가 내놓는 대로 바트화를 몽땅 사들여버렸
어. 태국 정부는 혼신의 힘을 다해 바트화의 하락을 막았단다.
그 결과 조지는 5억 달러의 손실을 보았고 결국 바트화의 가치
는 지켜졌어 .
잘되었군요.
그런데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어.
조지가 다시 시도했나요??
그래. 몇 달 후 그는 싱가포르 외환 시장에
그러고는 직접 진두 지휘하여 지난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대량의 바트화 매매를 시작했어.그동안 엄청난 양의 바트화를
사모은 후 다시금 일시에 전량을 다 내놓았던 거야 바트화가 떨
어지기 시작했지만 이미 기진맥진한 태국의 중앙은행은 도저히
견뎌낼 수가 없었지 . 보유하고 있던 달러를 모두 소진해 버린 태
국은 동남아국가연합에 구조를 요청했어. 싱가포르를 비롯한 말
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이 가세해서 바트화를 집중적
으로사들였지 그들이 보인 단결력은 전혀 예상밖의 것이었고,
며칠 간 싱가포르 외환 시장은 뜨겁게 달아오르다 못해 폭발할
것만 같았지. 내놓는 대로 사들이고 내놓는 대로 사들이곤 하는
전쟁이 며칠 간 숨쉴 틈도 없이 계속됐단다. 동남아의 화교 경제
권이 일치 단결한 방어력에 조지는 숨을 휘몰아 쉬며 괴로워했
지. 조지는 다시 참패할 것처럼 보였어. 마지막으로 조지가 쏟아
낸 수십억 달러어치의 바트화를 사들인 동남아국가연합의 금융
인들과 경제 관료들은 샴페인을 터뜨렸어. 영국의 영란은행을
무릎 꿇리고 영국인들이 그렇게도 꺼리던 파운드의 절하를 이끌
어낸 조지를 물리쳤다는 기쁨에 그들은 드높이 축배를 올렸던
거야. 하지만 그들은 이내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는 것을
깨달았지.
무슨 일이 일어났나요??
조지는 미국의 여타 헤지 펀드들을 정열적으로 끌어 들였어.
치밀하게 계산한 대차대조표를 월스트리트의 펀드매니저들에게
제시한 거야 아마 거기에는 손해에 대해 원금을 조지가 책임진
다는 이면 계약이 있었을 거야. 어쨌든 그들이 조지의 권고에 따
라 막대한 자본을 싱가포르 환시장에 들이대자 이제껏 바트화를
방어하는 데 일치 단결했던 각국의 금융 당국은 불안해지기 시
작했지. 그들은 자칫 잘못하다가는 태국뿐만 아니라 자국 통화
까지도 비참한 지경에 빠질 수 있다는 위기감에 잔뜩 몸을 움츠
렸어. 월스트리트의 대형 펀드들이 조지의 지휘에 따라 바트화
를 대량 매입했다가 일시에 투매하기 시작한 지 불과 며칠 만에
바트화의 가치는 하루에 10퍼센트 이상씩 뚝뚝 떨어져버리고 만
거야. 그러자 이제껏 공동 방어 전선을 펴던 동남아 국가들도 겁
을 집어먹고는 사두었던 바트화를 투매하기 시작했지. 바트화는
일시에 대 폭락하고 조지는 금융 파생 상품 거래에 의해 40억 달
러 이상을 챙겼어 .
결국 태국은 굴복하고 말았군요.
태국뿐만 아니 라 동남아 국가 모두 굴복하고 만 거지 .
조지 한 개인에 게요??
그래 .
조지가 챙긴 돈은 모두 동남아 국가의 국민들이 부담해야 하
구요.
물론. 실제로는 그가 챙긴 돈의 몇 배 이상을 동남아 국가의
국민들이 부담해야 하지. 경제 혼란으로 말도 못할 피해를 입었
으니까.
현대에도 아직 제국주의적 자본주의가 판을 치는군요.
더욱 한심한 것은 이 사태를 바라보는 미국인들의 시각이야
동남아의 대변인이라 일컬어지는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수상
이 조지의 비도덕성을 비난하고 나서자 미국 언론들은 한결같이
미국에서 조지가 한 선행을 예로 들면서 그는 성자와도 같은 사
람이라고 보호하고 나섰어. 결국 미국이 동남아 국가들을 별로
중요하지 않은 나라들로 보고 있다는 것을 노출시킨 셈이지.
투기 자본과 힘겹게 싸우는 금융 후진국을 보는 세계 선진국
의 시각이 어쩌면 그렇게 차가울 수 있죠??
그것이 바로 국제 금융의 현실이야.
일전에 겪었던 우리 나라의 외환 붕괴는 어째서 유발되었던
거예요??
아직 정확히 분석되지는 않았어. 복잡해. 이유야 어떻든 한국
경제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는 한 편의 드라마였지.
한국은 견실한 제조업의 기반이 있어 외환은 안전하다고들
전망했는데 왜 갑자기 그런 현상이 빛어졌어요??
직접적으로는 이자 차익을 노리고 단기 외채로 국내 기업에
장기 융자를 해준 금융 회사들에게 문제가 있어 대출이 중단되
면 괴멸할 수밖에 없는 재벌의 구조와 부실 융자로 좁아터진 금
융권, 그리고 고질적인 정경 유착, 기아사태 해결에 대한 정부
의 판단 미스 등도 중요한 원인이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금융 회
사들을 갑자기 조인 외국 금융 기관들의 행태도 생각해 볼 측면
이 있어.
복잡하다는 것은 갑자기 조인 이유가 복잡하다는 뜻인가요?~
역시 수아는 비상한 머리를 가졌구나. 그래, 바로 외국 금융
기관들이 한국 금융 회사들에 대한 추가 대출을 멈추고 대출금
상환을 거세게 독촉한 이유가 결코 간단하지 않단다.
뭐죠? 그 이유는??
어떤 면에서는 금융 개방 협상도 한 이유가 될 거야. 미국이
우리 시장의 개방을 강요하며 슈퍼 301조로 위협하자 정부는
WTO에 제소하겠다고 버렸지. 한국이 미국을 제소한다는 것은
지난 반세기의 한미 관계를 미루어볼 때 생각도 못할 일이지 .
그래서요?~
미국은 더욱 거세게 조여왔어. 각종 조치를 취하겠다는 압력
을 가해온 거야. 이에 대해 정부는 네브래스카산 수입 쇠고기의
세균 감염을 크게 터뜨렸어. 정면 승부를 할 의지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 거지 .
자꾸 몰아붙이면 그대로 밀리지만은 않겠다는 얘기군요.
그래. 그 무렵 미국의 신용 평가 기관들이 한국의 신용 등급
을 무서운 속도로 떨어뜨리기 시작했어. 거기에 어떤 힘이 작용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신용 등급 하락으로 금융 회사들의 추가
대출이 끊기자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안 헤지 펀드들의 환투기가
몰렸어. 정부의 경제 팀은 환투기에 견뎌내기 위해 외환보유고
의 실상을 은폐했대. 약한 것을 알면 더 무섭게 몰려드는 헤지펀
드를 막으려는 슬픈 전략이었지.
그러다 더 큰 화를 불러 들였군요.
그래, 결국 개방 협상이라는 소총 싸움을 하다 대포에 맞은
정부가 국가 경제의 괴멸 직전에 그들에게 손을 벌리다 보니 협
상은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그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내줄 수밖
에 없었던 거야.
그래서 지난번 대통령 후보들사이에 재협상 논쟁이 붙었던
거군요.
국민을 위하여 당연히 해야 할 재협상이 선거전에 이용된 것
은 가슴 아픈 일이었지. IMF의 처방은 우리 나라의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거야. 우리 경제의 견인차인 기업을 무차별적으로 죽
이도록 처방한 것을 누가 동의할 수 있겠니. IMF 내에서도 우리
경제를 무너뜨릴 위험성이 많은 지나친 긴축 처방에 대해 재협
상을 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야. 우리가 그런 가혹한 처방
을 받아야 할 만큼 잘못하지는 않았어. 그러나 우리의 처지가 워
낙 다급한 만큼 국제 자본과 진지하고 충실하게 협의하는 지혜
가 필요하단다.
아까 무시무시한 기분을 느낀다고 하셨는데 환투기가 다시
시작될 수 있다는 얘긴가요?~
IMF의 구제 금융을 받고 있는 한국에 특별한 상황이 발생하
지 않는 한 직접 환투기를 한다는 것은 헤지펀드들에게는 어려
울 거야. 하지만 라이언펀드가 마음에 걸려.
라이언펀드는 어떤 회사인가요??
그들은 환투기보다는 주식을 전문으로 하는데, 지난번 남미
주식의 대폭락 사태 때 엄청난 손해를 業어. 월스트리트 최고의
증권 매니저로 찬사를 받던 딕슨이 아서 회장에게 남미 주식의
대량 매집을 권고했던 거야. 남들이 팔고 나갈 때를 오히려 기회
라고 생각한 그들은 남들이 던져대는 걸 걸신들린 듯 받아먹었
지. 판단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었어 . 문제는 자본이었지. 남
미가 완전히 무너져버릴 것으로 생각한 국제 투자자들이 극도의
불안감에 사로잡혀 투자금 회수를 강행하자 그들은 결국 힘에
부쳐 손을 들고 말았어. 엄청난 손해를 본 거지.
그 라이언펀드가 한국에서 만회할 기회를 노리고 있나요??
그래, 내가 조사한 바로는 당연히 해고되어야 했을 딕슨이 여
전히 아서와 함께 뭔가를 노리고 엄청난 자금을 결집시키고 있
어 .
뭔가 획기적인 방법이 없을까요?사전에 완전히 봉쇄할 수
있는 방법이??
무언가를 생각하며 고개를 가로젓기만 하던 정완은 조용히 수
아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여기 있으니 세상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 잘 알게 되더구나. 이
제는 더 이상과거와 같이 열심히 일만 한다고 먹고 살수 있는
제조업의 시대가 아니야 세계는 자본과 정보를 장악하는 기업
이나 정부가 생산과 제조를 지배하는 금융 자본주의로 접어들었
어 슬프게도 우리의 조국은 이런 면에서는 백지 상태야 규제와
부정에 의해 결국은 부실로 전락한 우리 금융계는 국민이 피땀
흘려 거둔 과실들을 모두 금융 선진국에 내주고 있어. 자본력이
미약한 우리 나라는 당분간 국제 자본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상
태고. 그러나 지금 이 순간부터 우리는 더욱 치열해질 미래의 금
융 전쟁을 대비해야 해. 그 주역은 더 이상 안이한 생각에 젖어
있는 관리들도 아니고 정보나 컴퓨터와 담쌓고 지내는 나이 지
긋한 어른들도 아니야. 여기 월스트리트의 펀드매니저들은 스물
여섯 살이 넘으면 정년이라고 할 정도로 젊은이들의 신선한 머
리가 세상을 좌우한다. 우리 나라의 미래도 이제는 수아. 바로
너희 젊은이들에게 달려 있어, 수아, 한국으로 가거라. 가서 그
들이 어떻게 우리 나라를 공격하는지 지켜봐. 비록 오늘은 당하
지만 내일은 이겨낼 수 있는 경험과 지혜를 가지고 돌아와.
수아는 스탠퍼드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생각에 잠겼다
강가에서 마음을 비우고 평온하게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을 아버
지,이웃들과 과수원에서 열심히 사과를 따고 있을 어머니의 얼
굴이 떠올랐다. 이와 함께 여태까지 별로 생각해 보지 않았던 조
국에 대한 상념이 이어졌다.
변변한 자원 하나 없는 한반도에서 노심초사하며 외환을 지켜
내려는 동포들과,무지막지한 자본을 굴리며 탐욕에 찬 눈초리
로 한국을 넘겨다보는 조지를 비롯한 미국 투자자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비통한 표정으로 토해내던 정완의 절규가 떠
올랐다
세계는 정보 시대로 접어들었고, 그 주인공은 너희 젊은이들
이야. 너희들의 전쟁이 란 말이다:
수아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컴퓨터 앞에 앉아 인터넷을
통하여 한국의 증권 매매 제도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증권에 관
련된 모든 투자자들과 기관의 홈페이지에 들어가는 것은 물론
한국 증시의 흐름과 투자 전망에 대해서도 샅샅이 조사했다
며칠이 지나자 수아의 머릿속에는 어렴풋하게나마 어떤 방법
을 써야 할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이제껏 자신은 남들이 만들어둔 전산망에 침투하기만 하면 원
하는 것을 다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특기 중 특
기였다. 그러나 이제 그들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전혀 다른 것
이었다
며칠 간이나 밤을 새워가며 핏발 선 눈으로 전전긍긍하던 수
아의 머리에 번개같이 한사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 그 생각을 왜 못했을까? 그분이 도와만 준다면
그렇다. 그 사람이 도와만 준다면 자신은 어쩌면 그들을 막아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수아는 주먹을 꽉 쥐었다. 기대
에 들뜬 수아의 두 손이 키보드의 자판을 두드렸다
수아가 접속한 상대방은 실리콘밸리 연구소였다. 자신이 이제
껏 그토록 자주 해킹을 시도했지만 단 한 번도 시원하게 마음껏
헤집고 다닐 수 없었던 연구소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실패하는 횟수가 거듭될수
록 오기가 끌어올랐다. 더군다나 그 연구소는 미국 국방성이라
든지 중앙정보국의 극비 기관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어떤 때는
아예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스탠퍼드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해킹의 일인자로서의 자존심
이 형편없이 구겨져버린 수아는 죽자사자 그 연구소에 달려들었
고. 시간이 가면서 연구소의 보안 시스템을 하나하나 깨뜨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제는 저쪽에서 오기가 발동했는지 수아가 해킹에 성
공할 적마다 하나씩 단계를 높여가는 것이었다. 이상하게도 연
구소에서는 수아의 정체를 역추적해 오지 않았다. 오히려 수아
의 해킹을 환영하는 듯했다
이제 팎임없이 찌르고 막는 수아와 연구소의 관계는 게임의
파트너와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서로를 필요로 하는 동반자가
된 것이다.
수아는 그 연구소와의 게임을 통해 자신의 해킹 실력이 급속
히 늘었다는 것을 알았고 그 점은 연구소도 마찬가지였다. 연구
소는 수아와의 게임을 통하여 해킹 방지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시중에 내놓았다.
수아는 연구소가 내놓는 장벽을 하나씩 깨뜨릴 때마다 '천재
양반, 고맙소' 라고 쓰인 시그널을 받았고, 그때마다 연구소에도
자기 못지않은 천재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연구소의 천재는 자신의 ID를 프로메테우스라 했고, 수아는
그 프로메테우스에 대하여 깊은 흥미를 느껴오던 참이었다.
수아는 연구소의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메이 데이, 메이 데이 프로메테우스, 메이 데이. 이카로스로
부터 .)
상대가 자신을 프로메테우스라 한 것은 그의 실력에 비추어보
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었다. 자신의 컴퓨터 실력을 많은 사
람을 위해 쓰겠다는 의미였다
수아는 태양을 향해 끝없이 날아오르다가 날개가 녹아버리고
말았다는 이카로스를 자신의 ID로 정한 것을 생각하고는 입가
에 웃음을 머금었다. 끝없이 해킹을 하겠다는 의미였다. 프로메
테우스는 이 ID의 의미를 알면 뭐라고 할까.
그러나 이상하게도 프로메테우스로부터는 대답이 없었다. 비
록 만난 적은 없지만 이제까지의 관계로 보아 자신이 긴급 구조
요청을 하면 나타나지 않을 프로메테우스가 아니었다. 며칠 간
이나 긴급히 불러도 프로메테우스가 나타나지 않자 수아는 조바
심이 났다
한국 정부도 막을 수 없는 핫머니를 자신이 막아낼 수 있다면
그 유일한 방법은 컴퓨터를 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도저히 자
신의 실력으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유일
한 존재는 바로 프로메테우스였다.
그러나 믿었던 프로메테우스가 며칠 간의 긴급 구조 요청에도
불구하고 나타나지 않고 있다. 수아는 연구소의 이메일에 메모
를 남겼다.
(프로메테우스, 정말 급한 일이 있어요. 제발 연락을 부탁해
요. 이카로스로부터.)
거대한 작전
월스트리트의 마천루들 중에서도 라이언펀드의 번쩍거리는
사옥은 맨해튼을 찾는 관광객들의 감탄을 자아내는 명물이다.
41번 부두에서 출발하여 맨해튼을 한바퀴 돌고 자유의 여신상까
지 갔다오는 관광유람선에서 보면 맨해튼에는마치 이 건물밖
에 없는 듯했다. 그만큼 라이언펀드의 검은 유리벽은 현란한 빛
을 발하며 보는 이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딕슨은 72층의 자기 방에서 맨해튼의 이스트사이드에 눈길을
던지고 있었다.
이스트사이드.
태어나서 자란 곳이지만 좀처럼 정이 들지 않아 딕슨은 일부
러 피해다녔다. 지저분하고 천박하며 값싼 인간들이 시끌거리
는 그 거리를 지나칠 때면 딕슨은 눈길을 돌리거나 아예 눈을 감
아버렸다 어린 시절엔 자신도 저 거리에서 굴었다는 기억을
딕슨은 지워버리고 싶었다.
월스트리트.
고개를 돌리자 눈길 가득히 들어오는 마천루가 딕슨의 기분을
누그러뜨렸다. 오락가락하는 대서양의 갈매기들이 딕슨의 마음
에 평화를 되찾아주었다. 딕슨은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
갔다. 멀리 자유의 여신상이 자신에 찬 손길로 횃불을 들고 그에
게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 보였다
딕슨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극동, 이제 극
동이다. 극동이 있는 한자신은 살아날 수 있다 다시 지옥으로
되돌아가선 안 된다.
거대한 랍전
뭐야?~
회장님이 보시 잡니다.
알았어.
아서는 언제나처럼 환히 웃고 있었다. 딕슨은 아서와 지내온
지가 꽤 되었지만 그의 웃지 않는 얼굴을 대한 적이 별로 없었다
는 사실을 떠올리며 소파에 앉았다.
아서의 웃음은 이 세상에 대한 자신감과 동시에 비웃음을 보
여주는 것이었다. 그는 그 특유의 배짱과 엉뚱함으로 월스트리
트에 처음 등장한 이래 거의 실패 없이 전상으로 달려왔다. 그의
유일한 실패는 바로 지난번의 남미 투자 건이었다
딕슨은 그때마저도 아서가 활짝 웃으며 자신을 맞았던 것을 떠
올리며 몸을 움츠렸다. 이번마저 실패하면 그는 그 지저분한 이
스트사이드로도 돌아가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실패할 리가 없는 완벽한 작전이라며 자신을 위로했다.
딕슨, 돈은 이미 다 마련해 두었네.
수고하셨습니다.
그까짓 게 뭐 힘든 일이겠나? 자네가 할 일에 모든 것
이 달려 있는데.
내일 한국으로 가겠습니다.
그래 주겠나??
당연히 제가 할 일입니다.
돈은 언제 보내야 하지??
개방 직전에 보내주시는 것이 좋습니다. 보안 유지를 해야 하
기 때문입니다. 거액의 자금이 들어와 있는 것을 미리 알게 되면
한국의 투자자들이 즉각 대량 매점을 시작할 테니까요.
그런 것은 자네가 알아서 하게. 어쩐지 이번 일은 아주 쉽게
끝날 것 같은 느낌이야.
회장님께서 믿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자네가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해서 그렇지. (:파이낸셜 타임스]\=클라크도 한국의 무
슨 경제신문엔가에 기고를 했어 , 그 정도
면 사전 공작은 충분한 거지?~
클라크까지 모두 여섯 명이나 되는 세계 최고의 증권 전문가
들이 기고를 했습니다. 한국의 주식 투자자들은 지금 들떠 있습
니다.
틀림없이 지난번 남미에서의 어이없는 손해를 만회할 수 있
겠지??
자신 있습니다.
딕슨은 아내와 아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럼, 그래야지. 자네도 이제 이 회사를 직접 경영할 경력이
쌓였지?~
맡겨주신다면 소신껏 한번
그래, 이번 극동 작전이 성공리에 끝나면 자네가 이 펀드를
한번 이끌어 보게. 사실 지난번 남미 실패 전까지 자낸 월스트리
트의 신화가 아니었나?~
감사합니다 회장님.
아서의 사무실을 나오며 딕슨은 다시 한 번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고는 전자수첩을 꺼내 날짜를 꼽아보았다 작전을 시작하기
까지는 꼭 열흘이 남았다.
정완은 주도 면밀했다 라이언펀드에서 이번 일을 실행한다면
당연히 교활한 딕슨이 진두지휘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항공사를
통해 그의 출국 일정을 알아냈다. 그러고는 일부러 수아를 뉴욕
으로 오게 한 뒤 그의 바로 옆좌석을 예약했다. 일등석이었다
정완은 수아가 일단 딕슨을 봐두는 것이 어떤 형태로든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수아는 바쁜 가운데서도 테드와의 약속이 마음에 걸렸다. 테
드에게 말만 앞세우는 신뢰 못할 사람으로 자신의 이미지가 남
을 것이라는 생각에 견딜 수가 없었다 수아는 사정 얘기 정도는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테드에게 전화를 했다.
학교에 있는지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응답 메시지가
흘러나왔다 수아는 직접 통화하지 못하는 게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하며, 아무 생각 없이 너무나 긴급한 용무로 급하게 한국으
로 떠난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한편 수아는 프로메테우스로부터 연락을 받지 못한 채로 한국
으로 떠나야 한다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
지 않은 상태로 한국에 가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생기지
않았다.
공항에 나간 수아는 딕슨 옆자리에서 그를 관찰해야 한다는
생각에 여행에 대한 기대감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수아는 긴
장된 마음으로 비행기에 탑승했다.
수아는 자신의 자리를 찾아갔다. 딕슨은 이미 자리에 앉아 있
었다. 세련돼 보이는 감청색 재킷 차림의 딕슨은 옆좌석에 누가
앉는지 신경이 쓰이는 듯 수아를 흘끗 쳐다보았다. 수아가 가볍
게 인사를 하자 딕슨도 미소를 지으며 웃어 보였다
한국에 자주 가시나요??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식사가 끝나자 수아는 딕슨에게 말을
붙였다.
이번이 세 번째요.
의외로 딕슨은 사근사근했다.
자주 가시네요. 여행이신가요? 아니면 사업차 가시나요??
여행 겸 사업차 가는 길이지요. 나는 한국을 잘 알아요. 고구
려, 신라, 백제, 가야, 이런 나라들이 있었지요.
수아는 입이 딱 벌어졌다. 투기를 하러 가는 딕슨이 그런 정도
까지 한국을 깊이 아는 데에는 놀라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수아
는 시침을 떼고 물었다.
한국과 관련된 직업을 가지신 모양이죠??
아니오.
딕슨은 벙글거렸다. 그는 수아가 놀라는 것이 재미있는 모양
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한국 역사를 그렇게 잘 아세요??
딕슨은 좌석 옆의 선반에 넣어둔 가방에서 작은 게임기를 꺼
냈다.
게임을 하면서 배우지요.
딕슨이 게임기를 켜고 게임팩을 집어넣자 액정 화면에는 한국
지도가 나왔다. 수아는 기분이 좋아졌다. 이런 게임은 한국을 알
리는 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인들은 애 어른 할 것 없이 어딜 가나 게임기를 들고 다니
며 즐기는 것을 수아도 알고 있었다. 수아는 어떤 게임인지 궁금
해 고개를 기울여 화면을 보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수아는 깜짝
놀랐다.
우선 동해가 일본해로, 독도가 다케시마로 영문 표기되어 있
는 것도 눈에 거슬렸지만 그런 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1세기경
일본이 한반도를 3백여 년 간 지배할 당시라는 배경 설명이 나
오고 신라와 가야를 포함한 한반도의 남부 대부분이 일본의 영
토로 표시된 지도로 화면이 바뀌는 데에 수아는 아연 실색할 수
밖에 없었다. 게임은 일본의 장군들이 한반도를 유린하고 저항
하는 군사와 백성들을 무참하게 살해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
었다.
한국 역사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돼요.
딕슨은 유익하고 재미있는 게임이 아니냐는 듯한 제스처를 해
보였다.
어디 좀 봐도 될까요??
수아는 빼앗듯이 게임기를 받아 끝까지 프로그램을 넘겨보자
가슴이 콱 막히는 것 같았다. 일본이 3백여 년 간 한반도를 지배
했다는 억지 주장인 임나일본부설이 게임 전체의 주제였다. 게
임의 주인공은 모두 일본의 무사들이었고, 한반도의 백성들은
비적이나 야만인으로 나오는 처참한 내용이었다.
수아는 게잉팩을 뽑아 제조원을 확인했다. 마이크로소프트사
였다. 수아는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빌 게이츠의 마이크로소프트사 제품입니까??
물론이죠.
딕슨은 미국의 자랑이라는 듯한 표정으로 힘주어 말했다. 수
아는 기가 막혔다
일본인들은 손을 안 뻗치는 데가 없군. 온 세계가 일본 만화
일색인데, 컴퓨터 게임까지 모두 일본인들이 좌지우지하니 정말
큰일나겠어요.
한국은 한때 일본의 식민지였지요? 한국인들은 여전히 그 사
실에 감정이 남아 있나 보군요??
이건 아주 몹쓸 프로그램이에요. 한국의 역사를 알리기는커
녕 제국주의 일본의 멈출 줄 모르는 침략 야욕을 담은 저질 프로
그램이란 말이에요.
무슨 소리요? 이것은 마이크로소프트사에서 만든 것이란 말
이오.
그 회사는 남의 나라 역사 재단도 해주는 회산가요? 남의 나
라 역사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아무렇게나 돈벌이만 하면
되나요??
뭐가 잘못되었는진 모르지만 억울하면 돈 주고 사면 될 것 아
니오. 마이크로소프트사를 말이오.
딕슨은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그의 표정은 한국 같은 나라
가 감히 마이크로소프트사를 어떻게 건드리냐는 것 같았다 수
아는 지지 않고 딕슨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당신에겐 돈이 인생의 전부인지 모르지만 세상에는 아무리
많은 돈으로도 어쩌지 못하는 것이 있어요. 그것은 바로 삶의 진
실과 인생의 소중한 기록들,그리고 태초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인간들의 문화와 각 민족의 고유한 역사예요. 이런 것들을 돈으
로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참으로 불쌍한 사
람이네요 이런 게임 팩에까지 조작된 역사를 집어넣는 일본도
문제지만 인류 문화의 소중함도 모르고 눈앞의 이익에만 빠져
있는 당신도 전혀 나을 게 없는 사람이란 말예요.
수아는 비행기가 태평양을 날아 서울 상공에 도착할 때까지도
기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딕슨도 계속 말이 없었다. 두 사람은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어색하게 침묵을 지켰다.
외로운 투쟁
김포공항에는 정완의 지시로 수아가 한국에 있는 동안 일을
도와줄 미스터 최가 대기하고 있었다.
수아는 딕슨을 마중 나온 그랜저의 번호를 확인하여 수첩에
적어두었다 이 번호를 추적하면 딕슨이 거래하는 증권 회사를
알아낼 쑤 있을 것이다. 막상 한국행을 결심하고 나니 일이 하나
씩 풀려가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수아는 정완이 얘기한 대로 호텔에 짐을 풀고는 바로 미스터
최에게 딕슨을 마중 나온 자동차의 번호 조회를 부탁했다. 자동
차는 홍콩계 증권 회사인 스탠더드증권의 한국 지사 소유였다.
수아는 미스터 최에게 휴대용 컴퓨터를 접속할 수 있는 별도
의 전화선을 호텔로부터 얻어두도록 부탁했다.
수아는 미국에서 같이 공부하던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미
국에서 증권을 전공한 후 지금은 모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선
배였다.
웬일이야, 이렇게 갑작스럽게 나타나다니??
형 보고 싶어서 왔어요.
그동안 농담도 늘었네. 그래 공부는 잘돼가??
늘 그렇죠, 뭐 .
하긴 컴퓨터에 관한 한 수아가 오히려 교수들에게 학점을 줘
야 할 정도 아냐? 스탠퍼드 최고의 전사니까.
장난 그만하고 지금 빨리 좀 만나야겠어요.
당연히 만나야지. 한국에서 근사하게 한잔 사야지. 존경하는
이 선배가 말이야.
시종 장난기 어린 태도로 전화를 받던 선배였지만 막상 수아
를 만나 상황 설명을 듣자 무거운 낯빛이 되었다
음, 보통 일이 아닌데. 네 말대로 그들이 증권 당국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세계 각지로부터 들어온 자금으로 위장한다면 정부
로서는 그들을 규제할 방법이 없어.
자금 루트를 조사할 수는 없을까요??
안 돼, 정부로서는 함부로 난설 수 없어. 강제로 조사할 수도
없거니와 조사한다고 밝혀지지도 않아. 자칫 잘못하다가 모든
외국 투자자들이 자본을 빼서 나가면 그야말로 큰일이니까.
그렇다고 그들이 부정한 방법으로 증권 시장을 교란시키는데
정부가 팔짱만 끼고 있어야 한다는 말예요?~
물론 규제를 할 수는 있지. 그러나 사전 방지가 안 돼. 사태가
모두 끝난 뒤에야 허둥지둥할 뿐이야.
루머를 퍼뜨려서 다른 투자자들이 주식을 사지 않도록 하는
건 어때요??
그건 자살 행위야 국제 투자자들로부터 외면당하기 시작하
면 한국 증권 시장은 끝없는 침체로 빠져들게 돼. 외환 위기를
포함하는 더 큰 금융 붕괴의 위험이 있어.
역시 그도 정완과 같은 의견이었다.
일단 증권 당국에 가서 네가 가진 정보를 모두 공개해. 아마
그들도 지켜보기는 하겠지만 손을 쓸 도리는 없을 거야. 이런 식
의 핫머니는 후진 금융 시장에는 아주 위험한 독소야. 그러나 규
제는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하지. 문제는 그들이 선진국의 이런 악
랄한 투기 자본에 대처해 본 경험이 별로 없다는 거야.
기대했던 선배는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 수아는 이제 아무
도 자신을 도와주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다.
헤어지기 직전에 선배는 뜻밖의 소식을 전했다. 스탠퍼드에서
테드를 비롯한 몇 명의 유학생이 인류학과에서 진행하는 '샤머
니즘의 연구' 라는 프로젝트 가운데 동북아시아 쪽을 맡아 며칠
전 취재하러 서울에 왔다는 것이었다.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자신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비난은 듣지 않아도 되
니 말이다. 수아는 문득 관심 없이 들었던 테드에 대한 얘기가
떠올랐다.
그가 한국에서 제법 알려진 집안의 아들이라는 그다지 신빙성
없는 소문이 돈 적이 있었는데,사실 그는 전혀 그런 집안의 아
들같이 행동하지 않았다.
수아는 언젠가 유학생회의 소식지에서 놀기만 하는 도피성 유
학생들을 비판하는 테드의 글을 보고 공감한 적도 있었고, 그가
쓴 (경제 제도와 정의)라는 글을 읽으며 대단하다고 생각한 적
도 있었다. 그는 자본주의란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제도이며, 거
기에는 인간의 논리가 아닌 자본의 논리만이 존재하고, 인간에
게는 자본을 이용하느냐 아니면 자본의 지배를 받느냐 이 두 가
지 선택밖에 없다는 주장을 펼쳤었다.
수아는 이런 어려운 상황일수록 더욱 자본주의의 모순과 맞서
싸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오히려 점점 더 자본의 힘에 이끌려가고 있다. 심지어는문화나
예술조차도 자본과 결탁하지 못하면 위축될 수밖에 없는 사회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인간이 어떤 약점 때문에 자본주의를 따를
수밖에 없는지는 몰라도,하나의 분명한 비극은 자본주의의 지
배를 막아야 할 똑똑한 인간들이 가장 앞서 자본주의의 충실한
수호자가 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수아는 며칠 동안 증권 회사의 객 장에서부터 증권거래소에 이
르기까지 한국 증권 거래의 현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업무 시간
이 끝나면 호텔 방에 틀어박혀서 꼼짝도 하지 않고 라이언펀드
의 핫머니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열심히 연구했다 하지만 자신
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별다른 것이 없었다. 결론은 미국에서 이
미 연구했던 대로 컴퓨터를 조작하는 것뿐이었다.
딕슨의 매매가 이루어지는 스탠더드증권의 컴퓨터에 자신의
휴대용 컴퓨터를 접속하여 거래 내용을 조작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것만이라면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을수도 있다 그
러면서도 한국증권전산의 전체 주식 거래량 및 거래 금액과 액
수를 맞추고 거기에 일치하게 스텐더드증권에서 빠져나가거나
들어온 금액도 증권결제 원과 맞추어야 한다
수아가 스탠더드증권의 컴퓨터에 침입하여 조작하는 것은 어
려운 일이 아니지만 이것을 한국증권전산의 컴퓨터와 일치하게
할 수는 없다. 혹 스탠더드증권에서 매매 주문을 내면 그 내용이
즉각 자신의 컴퓨터에 입력되어 다른 종목의 다른 수량으로 매
매 주문이 나가도록 해야 하며 전체 매매 금액은 원래의 진짜
주문과 1원짜리 하나도 틀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게다가 자신의 컴퓨터는 스탠더드증권의 모니터에 원주문이
체결된 것과 같은 결과를 띄워주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스탠더
드증권에서 뽑아보는 당일 총결산도 원주문의 결과대로 모니터
에 띄워주어야 하는 것이다. 전화선을 충분히 확보해야 가능한
일이다.
문제는 자동 변환 프로흐램이었다. 매매 주문의 결과는 수 초
혹은 수십 초 이내에 스탠더드증권의 모니터에 떠야 하는데 그
것을 수동으로 받아 컴퓨터에서 계산을 하고 다시 매매 주문을
보낸다면 시간이 너무 경과할 것이 뻔하다 증권 담당자가 키보
드를 치자마자 원주문에 상응한 종목들을 검색하여진체 액수까
지 맞추고 매매 주문을 내는 자동 변환 프로그램을 설치하는 일
이 컴퓨터 조작의 핵인 것이다.
수아에게는 이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이런
정도의 변환 프로그램을 짧은 시간 안에 만들 수 있는 실력자는
세계에서도 손꼽을 정도이다.
수아는 며칠째 프로그램을 만드느라 밤을 새다시피 했지만 도
저히 완벽하게 들어맞는 것을 만들어낼 수는 없었다. 아무리 컴
퓨터 천재라 하더라도 분야가 다른 일이었다.
실패할 때마다 수아는 이메일을 확인했지만 여전히 프로메테
우스로부터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보이지 않는 힘
요코하마에서 벌어진 일본 해상 자위대의 신함대 구축 축하 행
사에서는 사상 최초로 일반인들을 추첨을 통해 그날 탑승시키기
로 결정했다. 추첨에는 무려 6만 명이 응모했고, 낙첨된 수많은
젊은이들은 육지에서 함대의 위용을 지켜보면서 열렬히 손을 흔
들며 기성을 질러댔다.
행사에 참석한 수상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엄숙하고 긴
장된 분위기 속에 거행된 함대의 분열 및 도열 시범도 감동적이
었지만 수많은 국민들이 정부의 자위대 정책에 보내는 열렬한
지지가 그대로 가슴에 느껴졌기 때문이다. 최고로 기분이 좋아
진 수상은 리셉션에서 야마자키 이사장을 불렀다.
이사장, 참 좋은 아이디어였소. 추첨을 통해 국민들을 함대에
승선시킨다는 것은 우리 정치인들은 생각지도 못한 재기가 번뜩
이는 아이디어였소.
고맙습니다 국민들은 늘 자극을 바라고 있습니다. 내각은 국
민들에게 끊임없이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수상은 소리 없이 웃었다. 그가 군인이었다면 아마도 방위청
장관은 되었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반인들을 추첨을 통해 함대에 승선시키자는 것도 그 자극
의 하나였소?~
그렇습니다. 정치란 국민의 마음을 읽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
엇보다도 국민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국
민들은 분노하고 있습니다 태평양전쟁에서 패함으로써 우리 일
본은 사할린을 빼앗겼습니다. 또 센가쿠 열도를 빼앗기고 다케
시마마저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국민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누
구보다도 수상 각하께서 잘 아실 것입니다.
알고 있소. 우리는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리고 있소. 이번에
미국과 군사 동맹을 맺고 작전 범위를 한반도까지 넓힌 것을 이
사장도 알지 않소??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국민들의 마음입니다. 국민들로 하
여금 우리 일본의 역사와 일본혼에 대해 끊임없이 자각하도록
일깨워야 합니다. 당장 국민들은 우리가 고대로부터 3백여 년
간 한반도를 지배했다는 사실도 차츰 잊어가고 있습니다 요즘
나오는 역사 교과서 중에는 그런 사실을 단지 하나의 설로만 소
개하는 것도 간간이 눈에 띄는 실정입니다. 큰 문제입니다.
그러나 검인정 교과서란 저자가 재량껏 쓰는 것이니 정부가
간섭할 수 없지 않소??
야마자키의 얼굴이 불만스럽게 일그러졌다
역사 교과서만큼은 국정으로 놔둬야 했는데 쓸개 빠진 문부
성 놈들은 어느 나라 국민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야마자키는 수상의 앞인데도 불구하고 말을 마구 했다.
그러나 이 야마자키가 있고, 일본혼을 지키는 신민들이 있는
한 신국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이번에 임나일본부 게임을 만드
는 데 우리 연구소에서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아십니까??
수상은 다시 웃었다. 이런 사람이 있는 한 정말 일본은 무너지
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과 같은 정치인과는 달리
이 사람 야마자키는 태생적으로 애국자였다. 아니 정확히 얘기
하자면 일본혼의 신봉자였다. 그에게는 오직 일본의 영광만이
있을 뿐이었다
수상은 그가 막대한 후원금을 주며 역사학자들에게 일본의 영
광을 빛낼 역사의 발굴 및 연구를 시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지 않는 관료들의 뒤를 조
사하여 온갖 스캔들을 들추어낸다는 것도 익히 알고 있는 터였
다. 수상은 그의 입을 쳐다보았다.
게임을 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치밀하게 연구했지요. 심리학
자만 해도 다섯 사람이나 참여했습니다. 게임을 하는 사이에 사
람들은 자연히 한반도는 과거 우리 일본의 땅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아니 다만 아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 속에 녹아 들
어가는 겁니다. 사람들은 그 게임을 하는 사이에 3백 년 간이나
한반도를 지배했던 일본이 20세기에 들어와 한반도를 다시 36년
간 지배한 것은 전혀 잘못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더
군다나 다케시마 문제에 있어서도 암암리에 우리의 주장에 동조
하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런 의식화 작업들이 무엇보다 중요
하다고 생각합니다.
요는 미국인들의 의식을 우리 일본에 우호적인 쪽으로 바꿔
놓는 것이 중요하오.
옳은 말씀입니다 그래서 임나일본부 게임을 미국의 마이크
로소프트사에서 전세계에 내놓도록 한 것입니다. 마이크로소프
트사는 전세계에 소프트웨어를 공급합니다. 일단 시장에 내놓기
전에 그 회사의 두뇌들에게 우리 일본의 역사를 깊이 심어준 것
은 앞으로 여러 형태로 작용할 것입니다.
이사장이 그렇게나 진지하게 일본의 역사를 알리고자 애쓰는
데 대해 수상으로서 경의를 표하오.
그런데 아주 심각한 일이 있습니다.
야마자키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무슨 일이오??
사할린과 센가쿠 열도는 되찾아도 다케시마는 못 찾을 것 같
은 불길한 예감이 듭니다.
수상의 눈썹이 꿈틀했다.
무슨 소리요? 오히려 다케시마가 가장 쉽지 않소? 내각의 멤
버 중에는 한국이 다케시마에 건설한 접안 시설을 폭격해야 한
다는 강경과도 있소. 국제사법재판소에 20여 년 간 제소하고 있
는 등 명분은 우리가 다 갖고 있으니까. 사실 지금 당장 해도 한
국으로서는 대응할 방법이 없소.
세상의 큰일은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결정됩니다. 이것을 무
시하고 일을 도모하면 반드시 실패합니다.
보이지 않는 힘이라니??
호사이 선생께서는 지금껏 일본의 기가 승한 것은 만주와 한
반도의 기를 꽉 묶어왔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호사이가 누구요??
수상은 무심코 물었으나 야마자키의 눈초리를 대하자 찔끔했
다 그의 눈초리는 수상이란 사람이 호사이도 모르는가 하고 질
타하는 것 같았다.
우리 일본을 가장 일본답게 만든 분입니다. 모든 법술사들과
신관들의 위에 계셨던 분입니다. 세상에는 정치인들이 이끌어가
는 보이는 힘도 있지만 신묘한 힘을 가진 분들이 이끌어가는 보
이지 않는 힘도 있지요.
그분이 만주와 한반도의 기를 묶어왔다는 얘기요??
그렇습니다 그분은 합방 초기에 조선의 기를 면밀히 살펴보
시고는 큰 인물이 나올 혈을 모두 막으셨습니다. 그분은 20세기
에는 일본이 때를 만났지만 21세기에는 천기가 조선으로 넘어간
다고 하셨습니다.
오호, 그래요??
수상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러나 천기가 넘어가도 지기를 만나지 못하면 별일이 없을
것이라고 하시면서, 천기가 넘어가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지기
는 인간이 잘하면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이 잘하면??
그렇습니다 바로 우리 일본인들이 잘하면이란 뜻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잘할 수 있지요??
야마자키는 심각한 얼굴로 잠시 눈을 감았다. 가벼운 분위기
에서 말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다 수상 역시 가볍게 대화할 내
용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는지 야마자키가 눈을 뜨자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이따 동경으로 돌아갈 때 차-를 같이 탑시다 미리 내 차에 타
고 있는 게 좋겠소.
동경으로 돌아가는 리무진 안에서 수상은 운전석과 뒷좌석 사
이의 유리를 올리게 했다.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었지만 야마자
키의 목소리는 나직했다
호사이 선생께서는 조선에는 세 가지 힘이 있는데 그 세 가지
를 모두 제압하면 조선이 무너지고, 그 세 가지가 모두 드러나면
조선은 천기와 지기가 만나 국운이 구름 위에 있게 된다고 하셨
습니다.
수상의 표정은 이제 한층 더 진지해 보였다.
무엇이오, 그 세 가지 힘이란??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은 한반도 사상 최초로 임금부터 백성까
지, 심지어는 심산유곡에 숨어 있던 선인이나 도사들까지 일편
단심으로 한반도의 보전을 빌었던 영물입니다. 지배층의 일방적
인 강요에 의해 이루어졌던 세상의 어떠한 기원보다도 그 뜻이
순수하고, 한반도의 모든 기와 주문이 담겨 있어 그 힘은 세상의
어떤 다른 것과도 비할 바가 아닙니다. 결국 그들은 몽고의 침입
을 견뎌냈지요. 중국도 지배당했는데 말입니다.
나도 그 대장경이 보통의 보물이 아니란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런 정도인지는 몰랐소.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소.
무엇입니까??
그런 정도의 영물이라면 지난 임진년의 조선 정벌 때 왜 가지
고 오지 못했소? 다른 것은 모두 가져 왔으면서 유독 그것만 남
겨둔 것은 무슨 이유였소??
대장경을 가지고 오기 위해 히데요시는 온 힘을 다 쏟았습니
다. 출정 전에 이미 장군들에게 엄명을 내렸을 뿐만 아니라 진군
중에도 몇 번이나 독촉했습니다. 그러나 괴이하게도 조선의 출
중한 의병장은 모두 가야산을 중심으로 일어났고, 우리 군사는
도저히 해인사에 접근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지난 식민 시대에도 가능했을 것 같은데.
감히 누구도 마음먹지 못했습니다. 대장경의 영력이 소인들
의 발심 자체를 제압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시도를 안 했다는 얘기요?~
수없는 시도를 했지만 대장경이 스스로를 지켜 그 힘을 누를
수가 없었지요. 경판 여남은 장을 빼내는 정도로 만족해야 했습
니다.
호사이 선생은 관여하지 않으셨소?~
호사이 선생께서는 오히려 팔만대장경을 건드려서는 안 된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법술사들에게 호사이 선생의 한마디란 천근
보다 무거운 것입니다.
그리고 또다른 힘 이 란??
북악의 지맥입니다.
북악의 지맥??
네.서울의 진산인 북악에서 펼쳐나는 지기가 조선인들의 생
기를 좌우한다고 했습니다. 즉 인물이 나고 나라의 기운이 뻗치
는 것이 모두 북악의 지맥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북악의 기는
지금의 청와대 밑을 지나 경복궁 바로 앞에서 뻗쳐오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호사이 선생이 말씀하신 것이오??
그렇습니다.
호사이 선생은 북악의 지맥에 대해서는 어떤 태도를 보이셨
소??
선생께서는 손수 북악의 지맥을 막으셨습니다 선생은 총독
부를 지을 당시 서울로 초빙되어 지세를 일견하시고는 북악의
정기가 뻗쳐오르는 경복궁 대문 앞에 361개의 철추를 박아 지맥
을 끊어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대로 했소??
철추는 녹이 슬어 건물에 옮겨질 우려가 있다 하여 대신 콘크
리트 기둥을 빽벡히 박아 지맥을 막고는 흙을 덮었습니다. 그리
고 그 위에 총독부를 지어 은폐했습니다. 게다가 총독부를 날일
자의 형상으로 짓도록 했습니다. 바로 우리 일본의 상징입니다.
수상은 흥미가 가득 담긴 얼굴로 야마자키의 설명을 들었다.
호사이라는 인물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신비하게 다가왔다.
두 가지 힘이 대장경과 북악의 지기라면 세 가지 힘 중에 한
가지가 남았군. 그것은 무엇이오?~
야마자키의 얼굴에 곤혹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잠시 생각하
던 그는 이윽고 무엇인가를 결심한 듯 짧은 목소리로 내뱉듯 말
했다
수상 각하, 죄송합니다만 그것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어째서요??
수상은 불쾌한 기분을 애써 누르며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는 그분의 제자와 약속을 했습니다.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기로요.
나는 비밀을 지킬 것이오.
호사이 선생의 제자 역시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는 모든 것에
통한 사람입니다. 제가 말을 하면 그 사람은 즉각 알게 됩니다
그러면 약속을 어기는 것이지요.
오호, 야마자키 이사장이 약속을 그렇게나 잘 지키는 사람인
줄은 몰랐소.
죄송합니다.
수상이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려도 야마자키는 끄떡도 하지 않
았다. 수상은 그가 절대로 입을 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그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런데 이사장은 아까 중국과 러시아를 상대해서는 섬을 되
찾아도 다케시마는 못 찾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고 했는
데 그것은 왜 그렇소??
호사이 선생은 조선의 북악 밑에 박아둔 석주가 드러나면 전
국의 요처에 묻어둔 부적이 힘을 잃고 명산의 기가 다시 살아난
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그것이 드러났다는 얘기요??
몇 년만 더 넘겼으면 신국의 국운이 다시금 그 땅에 뻗쳤을
터인데 안타깝게도 불과 얼마 전 총독부가 해체되자 건물로 은
폐되었던 그것이 그만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세 가지 힘 중에서 이미 두 가지가 세상에 환히 드
러났으니 한반도의 천기가 지기를 만날 가능성은 매우 크다고
보아야 하겠군.
그것이
야마자키는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다시 입을 굳게 다물었다
수상은 야마자키가 일본인들이 잘하면 한반도의 천기와 지기
가 만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했던 얘기를 떠올렸다.
디데이
철저한 보안을 유지하고 있던 딕슨은 드디어 디데이를 정했
다. 별로 규모가 크지 않은 한국의 증시는 딕슨의 자금 유입만으
로도 달아오를 것이 뻔했기 때문에 딕슨은 디데이 전까지는 모
든 자금을 동경과 홍콩에 집결시켜 두었다. 투자자들은 증시 전
면 개방을 앞두고 유입되는 외화의 액수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딕슨은 이미 한국의 펀드매니저들과 종목 선택에 대해서는 충
분히 의논을 해두었다. 거액의 자금으로 매매를 용이하게 하려
면 아무래도 대형 우량주를 살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한국에는
대형 우량주가 수십 개나 포진해 있었다.
딕슨은 모든 여건이 충족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기대
이상이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증시 개방에 대한 한국 투자
자들의 기대치가 너무 커서 자신이 매입하기 전에 주가가 너무
올라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수익률의 감소를
뜻한다.
딕슨은 아서와 자신이 마련해 두었던 두 가지 대비책 중의 하
나를 쓸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하고는 아서 회장에게 바로 팩스
를 보냈다.
(회장님, 미스터 굿맨을 만나주십시오. 우리는 소방수가 필요
합니다. )
대서양을 면하고 있는 항구 도시 세일럼의 앞바다는 바람이
없어 날씨가 맑으면 바다에 떠있는 요트들이 마치 그림을 그려
놓은 것처 럼 움직임이 없었다.
뉴욕의 재벌들은 가끔 이 오래된 대서양의 도시 세일럼에 와
서 잔잔한 바다를 가르는 요트에서 하루를 보내곤 했다. 메인 랍
스터니 뭐니 해도 바닷가재라면 역시 이곳 세일럼이 세계 최고
이기 때문에 재벌들은 뉴욕에서 거리가 다소 먼 흠이 있어도 반
드시 이곳을 찾곤 한다
어서 오게나, 조지.
막 요트에 오른 오십대 후반의 사나이를 향해 팔을 활짝 벌린
채로 다가오는 아서의 표정이 더없이 밝아 보였다.
아서 , 오랜만이야.
조지라고 불린 사나이는 키가 작은 아서의 뒷머리를 손으로
다듬으며 안았다
이제껏 본 것 중에 제일 큰놈을 잡았지 뭔가. 그래서 부리나
게 자네에게 연락을 했지 혼자 먹기에는 너무도 아깝더란 말
이야.
고맙네. 얼마나 큰놈인지 나도 좀 보고 싶네.
여부가 있나. 자네에게 보여주려고 지금껏 기다리고 있었지
뭔가.
아서가 손짓을 하자 마도로스 모자를 쓴 사나이가 낚시용의 큰
플라스틱 박스를 가지고 왔다. 머리부터 꼬리까지의 길이가 1미
터도 넘음직한 바닷가재가 불안한 듯 더듬이를 빙빙 돌리며 몸
부림치고 있었다.
야, 대단한데!
게다가 기막힌 버터가 있어. 켄터키 어느 농가에서 만든 것인
데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버터는 난 먹다먹다 처음이야.
자네 이야기에 난 벌써 군침이 도는군.
한바탕 수다를 떤 두 사람은 조금 후 선실에 마주앉았다 온더
락스의 위스키 잔을 손에 쥔 조지가 웃음띈 얼굴로 물었다
아서, 내게 할말이 있는 것 같군.
그래, 자네 도움을 좀 빌리고 싶어 만나자고 했네.
하하, 자네가 저렇게 맛있는 가재 요리를 해주는데 안 들어줄
도리가 있나. 그래 뭔가?~
사우스코리아라고 있지??
사우스코리아? 그래, 그런데 왜??
그 나라에 대해 좀 알고 있나?~
그럼, 아다마다.
그래?거래는 얼마나 있었나?우리 조사로는 한 5억 달러쯤
되는 것 같던데.
그래, 그 정도야. 아직도 그 정도 놔두고 있지 .
뭘 했나??
외환도 하고 주식도 좀 했어.
재미는 봤나??
외환은 좀 보고 주식은 별로 못 봤어 그 나라는 특이하게도
정부가 주식을 쥐고 흔들어 . 좀 오를 만하면 찬물을 끼얹지. 그
나라 관리들은 주식을 불로소득이라고 생각하나 봐. 게다가 증
권 중개인들은 투자자들에게는 주식 투자의 호기라고 부추기고
는 자기들이 가진 것은 내다 팔지. 개인 투자자들은 백 퍼센트
손해보는 나라야.
후후, 자네도 손해 좀 본 모양이지??
화가 나서 한번 뒤집어버리려고 한 적도 있지. 그전에 손해
를 엄청 보는 바람에 참을 수밖에 없었지만. 동남아에선 벌었어
도 한국에선 번 게 없네. 아니 벌기는커녕 오히려 외환 위기를
당한 한국인들이 도와달라는 바람에 곤란했어. 명성도 유지해
야 했으니 말이야.
이 사람 돈 장사에 명성이 무슨소용인가.그럼 명성 때문에
내 부탁도 안 들어주겠단 말인가??
그럴 리가 있나?그런 걸 생각하면 돈 벌 데라곤 세상에 한
군데도 없게. 한때 기분이었어 .
아서는 만족한 듯 위스키를 한 모금 마셨다
나는 지금 한국에 모든 걸 걸었어 .
무슨 소리야??
딕슨이 한국을 많이 연구했네 의외로 시장 규모가좀 있어.
이번에 외국인에게 완전 개방을 하는데 한탕 세게 때릴 수 있겠
더라구.
음, 나도 감이 나쁘진 않아. 그런데 얼마를 집어 넣었나??
25억 달러.
목표는
40퍼 센트.
10억 달러군.
그래 .
얼마 동안에?~
2주일
2주일이라구? 어떻게 하지?~
조지는 흥미 있는 표정으로 아서를 쳐다봤다
자금을 다섯 개 나라의 돈으로 나누었어. 물론 서로 다른 각
각의 회사에서 투자하는 것으로 해두었지 하루에 한 회사씩 주
식을 사는 거야. 다섯 개 회사가 하루씩 나누어 사면 엄청난 자
금이 유입되기 때문에 주식은 매일 오르게 되어 있지 . 그 사이에
먼저 샀던 회사는 며칠에 한 번씩 모조리 팔았다가 다시 종목을
바꿔 사는 거야 물론 대형 우량주만 다루는 거지. 그래야 나중
에 자금을 빼기 위해 한꺼번에 대량 매도를 해도 의심을 받지 않
기 때문이야. 우리의 매매 패턴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거지. 관망
하던 자들도 둘째 주부터는 쫓아오게 되어 있어. 둘째 주는 폭발
장이 될 거야. 우리는 계속 한국 우량 기업들의 주가가 몇 배나
저평가되어 있다면서 매매를 계속하는 거야. 그렇게 둘째 주 중
반쯤 가면 목표는 초과 달성할 수 있어. 우리는 보유한 주식을
모두 매각하고는 신규 매입을 중단하는 거지. 이때가 중요한데
매각 직전에 내가 미리 교섭해 둔 타이거의 자금이 또 들어와
투자자들은 우리가 가진 주식을 모두 매각하더라도 새로운 자금
이 들어와 대기하고 있기 때문에 걱정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지
그러나 그 자금은 투자와는 상관없어 . 우리의 안전 철수를 보장
하는 역할만 할 뿐이지. 우리가 자금을 다 빼내 나가면 그 자금
도 며칠 안에 나가버리는 거야. 물론 나는 그들의 자금 동원에
대해서는충분한대가를지불하는거지 어떤가 내 계획이??
완벽하구먼.
자네의 칭찬을 들으니 반갑네.
그런데 어째서 내 도움이 필요하다는 거지??
내가 본격적인 매매를 시작하기 전에 주식이 잔뜩 올라버리
는 게 싫어. 그것을 자네가 좀 도와달라는 거야.
내가? 어떻게??
한국인들은 지난번에 호되게 당한 이후로 늘 외환에 불안을
느끼고 있어 내가 시작하기 전까지 자네가 원화를 좀 공격해 달
라는 거야. 그들은 자원이 없기 때문에 국제 수지에 지나치게 민
감해. 외환만 흔들면 그 나라는 벌벌 떨어. 원화를 좀 흔들어줘.
그러다 내가 손해보면??
손해볼 리가 없어. 자낸 이름이 있으니까 적은 돈으로도 겁을
줄 수 있잖아. 내가 요구하는 건 단지 일주일, 길어도 열흘 정도
야 부탁하네.
흐흐흐, 이제 보니 자네 정치인감이구먼. 아주 치밀한 계획이
야 물론협조하지 나도지난번 동남아투자때 자네 도움을받
았지 않은가.
고맙네, 정말 고마워. 이 지구상에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자네와 내가 협조하면 안 될 일이 뭐가 있겠나. 자 그럼 바닷가
재 맛이나 볼까.
와인은 내가 가져 왔네 .
두 사람은 정답게 어깨를 걸고 식당으로 들어갔다.
핫머니가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그들은 증시를 자극하
여 활기를 불어 넣기도 하지요. 게다가 그들이 항상 이익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손해를 보는 경우도 많아요. 지금 우리 나라에
조지의 자금도 약 5억 달러 정도 들어와 있지만 그 돈은 긍정적
으로 작용했습니다. 그 사람은 오히려 손해를 봤지요.
재경원이나 증권감독원에서는 우선 수아를 믿으려 들지 않
았다.
이것은 그 정도가 아니란 말예요. 전쟁이에요, 전쟁. 금융 전
쟁이 란 말이에요.
학생, 경제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에요. 증시의 전면 개방이
란 투자자를 가려 허락하고 말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오.
우리 나라의 선량한 투자자들이 모두 피해를 입는데도 팔짱
만 끼고 있을 거란 말이에요??
수아가 분노한 얼굴로 고함을 지르자 담당자는 귀찮다는 표정
으로 마지못해 한마디 툭 던졌다.
일단 감시는 할 테니까 자료는 주고 가요.
그러고는 전화 번호 하나 묻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버
렸다
수아는 그냥 미국으로 돌아가 버리고 싶은 기분을 몇 번이나
억눌렀다 증권 시장, 나아가서는 한국 경제를 파탄에 빠뜨릴 수
있는 어마어마한 위기를 눈앞에 두고도 피해버린다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았다. 분통이 터졌지만 수아는 꾸욱 눌러 참고는 호
텔로 돌아왔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이메일을 확인했지만 프로메테우스로
訃터는 여전히 소식이 없었다.
조지는 한국의 외환 시장을 무섭게 흔들어댔다. 하루가 멀게
떨어지는 원화 가치는 한국인들의 마음에 먹구름을 피워올렸다.
이미 외환에 크게 덴 적이 있는 한국인들의 불안은 날로 확산되
었다. 모든 경제 뉴스는 다시 외환 위기라며 떠들어댔다.
딕슨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과연 조지였다. 이제 그는 바닥
에 떨어진 열매들을 주워담기 만 하면 되는 것이다
디데이의 아침, 롯데호텔의 수트에서 기분 좋게 눈을 뜬 딕슨
은 룸서비스로 아침을 시켜 먹고는 14층의 사우나로 내려갔다
어느새 습관이 배었는지 땀을 흘리고 났을 때의 상쾌함이 전신
을 감싸고 들었다.
목욕을 마친 딕슨은 바로 호텔 옆에 있는 스탠더드증권으로
걸음을 옮겼다.
부사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입구에 미리 나와 대기하고 있던 간부 사원이 허리를 깊이 숙
여 인사를 했다
스탠더드증권으로서는 서울에 지사를 연 이래 딕슨이 사상 최
대의 손님이었다. 보안 유지를 중시하는 딕슨이 한국의 증권 회
사로 갈 리는 없었지만,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거액을 갖고 나타
난 이 사나이를 적당히 대접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지사장이 있었지만 본사의 부사장이 순전히 딕슨 한사람 때
문에 홍콩에서 한국으로 부리나케 날아왔다. 주식 중개 수수료
는 이미 논의가 되었기 때문에 부사장은 오로지 딕슨의 접대와
혹시 있을지 모르는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지원역으로
와 있는 것이다.
부사장은 딕슨이 들어오자 자리에서 일어나 깍듯이 고개를 숙
였다.
오늘부터 매입을 시작하겠소. 삼성전자, 포항제철, 삼성생명 ,
한전, 대우중공업 등의 대형주를 며칠 동안 나오는 대로 계속 사
들이시오. 단 최대한 기술적으로 매입하시오. 무슨 말인지는 알
거요.
알겠습니다.
대기업일수록 해외 차입금이 많아 외환 위기가 다시 거론되자
거의 모든 대형주가 바닥 시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터라 스탠더
드증권의 부사장을 비롯한 직원들은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뭐라
의견을 개진할 상황도 아니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상대는 자
신들보다 몇 수 위의 펀드매니저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상상도
할 수 없는 거액을 동원하고 있는 터였다.
과연 그랬다. 워낙 거대한 액수의 자금 앞에는 종목 선택이니
뭐니 하는 이론은 아무런 타당성이 없었다 바닥까지 내려가 있
던 증시인데다가 움직임이 무거운 대형주들인지라 매기가 형성
되자 하한가 부근에서도 매물이 쏟아져 나왔다.
다음날 증권 회사에 나온 딕슨은 어제 샀던 주식의 일부를 극
히 낮은 가격에 내놓았다 이것을 보자 혹시나 하고 대기하고 있
던 매물들이 다시 쏟아져 나왔다. 고도의 테크닉이었다. 오후장
에 들어서서야 딕슨은 본격적인 매입을 시작했고 역시 하한가
부근에서 엄청난 양을 사들일 수 있었다
며칠이 지나는 동안 딕슨은 한국의 증권가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방법을 동원하여 엄청난 매물을 거둬들였다
조지의 환투기에 넋이 빠져 있던 국내의 금융 당국이나 불안
한 주식 시장을 관망하기만 하던 투자자들은 외국 자금의 엄청
난 매수세가 본격적인 것으로 판단되자 그제야 기력을 회복하는
모습이었다.
딕슨이 주식을 긁어모으기 시작한 지 나흘째 되는 날부터는
대형주를 중심으로 주가가 서서히 오르기 시작하더니 그 다음날
에는 순식간에 폭등세를 보였다 며칠 전에 하한가 가깝게 딕슨
에게 주식을 팔아넘겼던 기관 투자자들이 사흘 간 상한가를 기
록한 상황에서 팔았던 주식을 되사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그 주의 토요일 장세는 사상 유례없는 거래량과 전종목 상한
가를 보이며 마감되었다.
그동안 저평가되었던 한국 기업들의 주가가 이제야 제자리를 찾
은 것 같습니다 세계 5개국에서 들어온 거액의 자금은 지난 일주일
간 엄청난 양의 주식을 사들였습니다 주초 침체를 면치 못하던 주식
시장은 주말에는 폭등세를 보였습니다 게다가 외국의 다른 거액 투
자자들도 속속 한국으로 자금을 이동시키고 있어 이런 폭등세는 장
기간 이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딕슨은 토요일 오후 제주도로 떠나며 다시 한 번 회심의 미소
를 지었다. 정말로 뜨거운 한 주가 또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다시 증권감독원을 찾아간 수아는 이번에는 원장실로 뛰어들
어갔다. 그러나 수아를 제지하고 자초지종을 들은 비서는 담당
부서장을 만나게 해줄 뿐이었다.
여기 이 자료를 보세요. 지금 5개국에서 들어온 돈은 모두 라
이언펀드의 자금이에요. 감시를 피하기 위해 은폐한 데 불과하
단 말이에요 지금 바로 이들을 조사해야 한다구요.
그런데 그들이 모두 한날 한시에 자금을 빼내가 버린다는 증
거는 없지 않소??
여기 이 숫자군을 보세요. 모두 40퍼센트의 이득을 보는 걸로
계획되어 있잖아요?~
이런 표는 만들어볼 수 있는 거요. 여기엔 그들이 일시에 자금
을 빼내간다는 어떤 암시도 들어 있지 않잖아요.
그렇다면 그들이 왜 자금을 위장 분산하여 들어왔겠어요??
그걸 어떻게 믿으란 말이오. 이런 종이 쪽지 한 장 때문에 국
제적 마찰이 벌어질 수 있는 일을 정부더러 하라는 건 아니겠지
요.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거기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
겠지요. 본국의 세금 문제도 있을 수 있겠고
이곳에서 이익을 얻는데 본국에 무슨 세금을 낸단 말예요??
하여간 그들은 투자할 자유가 있소. 수익을 본국으로 가지고
갈 수도 있고. 그것이 보장되지 않으면 외국 자본이 들어올 리가
없지 않소??
그러나 이건 계략이란 말예요. 우리 나라 주식 시장을 붕괴
상태에 빠뜨린 채 돈만 챙겨 가는데 그냥 있는다는 게 말이나 돼
요?~
그렇다면 학생은 오랜만에 찾아온 우리 주식 시장의 대활황
을 정부가 나서서 깨는 게 옳단 말이오??
그의 얼굴에는 마치 구세주와 같은 외국인 투자자를 의심하는
수아에 대한 불만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조지의 환투기로 불
안한 상황에서 사상 초유의 대규모 주식 투자 자금이 들어온 것
은 그의 생각에는 하늘의 도움이었다.
얼마 전부터 국내 금융 시장에는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달러
가 들어오는 것보다 고마운 일은 없었다. 그런데 그토록 고마운
주식 투자 자금에 대해 조사를 해야 한다는 철없는 여학생의 주
장은 엉뚱함으로밖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함부로 그런 주장을 하고 다니다가는 허위 사실 유포로 인한
증시 교란으로 검찰에 고발당할 수 있소.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낀 수아는 다시 한 번 분
노와 답답함을 느끼며 돌아나올 수밖에 없었다. 난생 처음으로
느끼는 어쩔 수 없는 무력감이 온몸을 휘감아왔다. 뜨겁게 달아
오르는 주식 시장을 보면서 자신만이 이 위태로운 현실에 애태
우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모든 게 부질없는 짓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뭐가 어떻게 변한
단 말인가. 라이언펀드가 한국에 와서 돈을 벌어 간다고 해서, 그
결과로 주식 시장이 붕괴 상태에 직면한다고 해서 뭐가 어떻게
된단 말인가. 자본주의는 이제 시장 지배를 떠나 금융 지배로 들
어가고 있지 않은가 어차피 한국은 미국의 자본력에 지배당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증시 붕괴라는 것이 도
대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 일인가.
수아는 갑자기 심한 회의와 무력감에 휩싸였다. 의욕이 없어
지고 실없는 웃음만 나왔다. 수아는 호텔로 돌아가 침대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텔레비전을 몇 시간이나 보다가 저녁은 룸서비
스로 시켜 먹고 다시 텔레비전을 보다가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없자 일본의 N鍊K와 홍콩의 스타TV를 봤다.
수아는 텔레비전을 보면서도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도 몰
랐다. 자꾸만 떠오르는 정완의 기대 어린 눈길을 지워버리려고
몇 번이나 채널을 돌렸다.
그러기를 반복하다가 수아는 자기도 모르게 선배한테서 받아
안쪽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테드의 전화 번호를 꺼내 다이얼을
돌렸다. 스탠퍼드에서의 생활이 그리웠던 것이다
테드는 웬일이냐며 깜짝 놀랐다. 그는 동북아시아의 샤머니즘
에 대한 조사를 하기 위해 왔는데 한국에서의 일을 마쳤으며 며
칠 후 일본으로 떠난다고 했다. 수아는 별얘기 없이 테드의 일이
잘되기를 바란다고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목소리에는 자신도
느껴질 정도의 패배감이 짙게 배어 있었다.
새벽이 가까워오면서 중압감은 더욱 가슴을 눌러왔다. 급기야
수아는 미니바에 있는 술을 꺼내 마셨다. 외롭고 허전한 기분에
계속 잔을 채우던 수아는 동이 훤히 터을 무렵 완전히 취하고 말
았다
비틀거리며 일어난 수아는 전화기를 들어 자신도 모르게 다이
얼을 돌렸다 미국이었다. 정완이 나오자 수아의 목소리는 울먹
임으로 변했다.
아저씨, 수아예요. 이제는 모르겠어요. 입이 닳도록 외쳐대도
모르겠다는 놈의 나라는 이제 나도 모르겠어요.
상대가 뭐라고 하는지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전화에 대고
울분을 다 토하고 나서 푹신한 침대에 몸을 묻으니 한없는 자유
와 편안함이 기분 좋게 온몸에 스며들었다. 금융 붕괴니 뭐니 하
는 것을 잊어버리니 얼마나 편한지 몰랐다.
해후
얼마를 잤는지 몰랐다 눈을 뜨고 시계를 보니 이미 오후 세
시가 넘어 있었다 수아는 말할 수 없이 공허한 기분에 휩싸였
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무력감이 그녀의
텅 빈 가슴을 더욱 쓰라리게 했다
한낮의 호텔 방에 혼자 누워 있다는 사실, 아니 그 사실보다도
일어나도 아무런 할 일이 없다는 생각이 수아를 더욱 비참하게
했다 수아는 전화기를 들어 항공사의 다이얼을 돌렸다. 다섯 시
간 후인 저녁 여덟 시에 미국으로 떠나는 비행기가 있었다. 수아
는 좌석 예약을 하려다 말고 급히 수화기를 놔버렸다
그러나 이내 다시 전화기를 들어 비행기표를 예약했다. 비행
기표를 예약하는 동안 수아의 뇌리에는 불가항력의 거대한 현실
앞에서 허덕이는 자신과 그 현실을 배후에서 흔들어대는 딕슨의
모습이 투영되었다. 수아는 회의에 젖어 짐을 정리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한국에까지 날아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
다. 정작 여기에 있는 관리들과 증권 전문가들은 눈 하나 깜빡하
지 않는데 미친 사람 취급을 받으면서 음모니 계략이니 떠들고
다녔던 자신의 존재가 우스꽝스럽게 생각됐다.
자신이 없어도, 자신이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한국에 문제가
있을 것은 없었다. 어차피 한국이란 그렇게 그렇게 흘러가는 나
라인 것이다. 증시가 초토화되든 금융이 붕괴되든 자신과는 관
련이 없는 것이다.
세면 도구까지 빠짐없이 챙겨넣은 수아는 마지막으로 전화기
를 들었다.
아버지 , 저예요.
응, 수아구나. 어떻게 지내니??
수아는 차마 한국에 와 있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이번 일은
급하기도 했지만, 아버지와 의논 한마디 없이 한국으로 날아왔
던지라 지금 와서 한국에 와 있다는 얘기를 할 수가 없었다. 수
아는 마음이 무거웠다.
잘 지내고 있어요.
그러나 아버지는 수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알아챘는지
즉시 목소리가 바뀌었다.
어째 목소리에 힘이 없어 보이는구나.
별일 없어요.
수아는 왈칵 서러움이 복받치는 것을 애써 눌렀다.
오늘 목욕을 갔는데 말이다, 목욕탕에 때밀이 청년이 하나 새
로 왔더구나.
그런데 그 친구가 욕조 주위를 오리걸음으로 죽어라 하고 뱅
뱅 도는 거야.
사람들이 그 앞에서는 차마 웃을 수가 없으니까 사우나실에
들어가서 배를 잡고 막 웃더라. 나도 웃었어. 얼마나 웃었는지
나중에는 눈들이 다 나오려고 하더구나. 그런데 갑자기 머리를
쾅 하고 때려오는 게 있었다.
그래, 별일 있어 전화한 건 아니지??
네. 아버지 목소리 듣고 싶어 전화했어요.
알았다, 그만 끊자.
네 , 들어 가세요.
전화를 끊고 나자 수아는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아버지는
여전하셨다.
목욕탕에서 오리걸음을 걷는 때밀이 청년을 보셨다고? 가방
을 들고 나오려던 수아의 뇌리에 그 청년의 모습이 말할 수 없이
엄숙하게 다가왔다.
좁고 열악한 공간에서 운동을 한다며 오리걸음을 걷는 청년.
좁은 목욕탕에서 하루 종일 지네다 보면 걸을 기회가 없어 다리
가 점점 약해질 것이다. 사람들이 웃든 말든 한 발짝 한 발짝 떼
어놓으며 자신의 삶을 가꾸는 청년
아버지는 그 청년의 살아가는 모습에 감동했고, 그 감동을 사
랑하는 딸에게 전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수아의 가
슴은 오히려 그 청년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 차올랐다. 그 청년에
게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인가
금융 붕괴는 그런 청년들이 비 오듯 땀을 흘리며 한푼 두푼 모
아 설계하는 미래를 완전히 앗아가 버릴 것이다. 자신이 외국에
가서 공부를 할 수 있는 것도 결국은 그런 청년들이 사회에서 애
써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자 수아는 맥없이 침대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괴로웠다. 그리고 부끄러웠다. 이대로 물
러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수아는 기계적으로 컴퓨터를 꺼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어쨌든 컴퓨터뿐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수아는 통신에
접속을 했다. 증권 투자 동호인의 게시판을 찾아 담담한 기분으
로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을 요약해 넣었다. 하지만 모처럼 활황
을 맞아 후끈거리는 열기가 느껴지는 게시판에서 자신의 정보가
심각하게 받아들여질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자신의 이메일
번호는 남겨두었다
미국으로 떠나기까지 약간 남아 있는 시간 중에라도 누군가로
부터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서성거리던 수아는 결국
공허한 심정으로 가방을 들고 호텔 방을 나섰다. 역시 자신이 한
국으로 온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는 자괴감으로 발
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일찌감치 공항에 도착한 수아는 출국 심사를 거쳐 게이트 옆
의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일등석 전용의 귀빈 대기실이 있었지
만 그런 데 올라가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대기실의 텔레비
전에서는 마침 증권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오늘도 주가 폭
등과 더불어 시중의 자금이 속속 증권 시장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다는 보도였다.
카메라는 객장을 가득 메운 투자자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
다 모두들 기쁨에 들떠 웃는 표정이었지만 수아의 뇌리에서 그
들의 모습은 이내 수심에 잠겨 허탈해하는 표정으로 변해갔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뻔히 알면서도 그냥 돌아가야 한다는 패배
감이 다시 한 번 수아의 마음을 강하게 짓눌러왔다.
수아는 도저히 그냥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무력한 자
신을 자학하며 텔레비전 앞을 떠났다 소파에 앉아서 시계를보
니 탑승 수속까지는 이제 20분이 남아 있었다
수아는 휴대용 컴퓨터를 켰다 떠나기 전에 증권 투자동호인
의 게시판에 남겼던 자신의 메시지를 보고 누군가 이메일로 연
락을 해왔다면 자세한 정보를 주고 떠나야 할 것이다. 그것만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편지가 한 통 와 있습니다. )
겨우 한 사람이란 말인가. 수아는 쓴웃음을 머금으며 편지의
내용을 띄웠다. 뜻밖에도 편지는 영문으로 와 있었다.
(여러 번 편지를 보냈더군요. 연락을 못해서 미안합니다 지금
미국에 없습니다 급한 일이 있으면 아래의 전화로 연락 바랍니
다. 82-2-334-4163. 프로메테우스로부터 .)
프로메테우스! 어, 우리 나라에 와 있잖아!
수아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나왔다. 이럴 수가
있을까. 도대체 이럴 수가 있는 건가. 그토록 찾았던 프로메테우
스가 비행기 출발 시간이 다되어 연락이 되다니. 그것도 지금 한
국에 와 있다는 것이 아닌가 전화 번호는 분명히 한국,그것도
서울이었다.
수아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듯한 전율을 느꼈다. 그가 한국에
와 있다니 이것은 기적이 아닐 수 없었다. 수아는 흥분하여 전
화 부스로 뛰어갔다. 몇 번 신호가 울려도 받지 않자 전화는 프
런트데스크로 이어졌다 아홉 시 이후에 들어온다는 메시지가
남겨져 있었다.
수아는 가슴이 방망이질치는 것을느낄 수 있었다 탑승수속
이 시작된다는 장내 방송이 나오고 있었지만수아의 귀에는 들
어오지 않았다.
아홉 시가 조금 지나서 전화를 걸자 프로메테우스는 바로 전
화를 받았다.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수아는 가슴이 떨리는 것
을 느꼈다. 컴퓨터를 통해서 해킹과 방어를 수없이 반복했지만
두 사람의 사적인 대화는 지금이 처음이었다.
프로메테우스. 저는 이카로스입니다.
수아의 목소리를 들은 상대방이 전혀 예상을 하지 못한듯놀
라는 모습이 전화선을 타고 그대로 전해져 왔다.
아니 이런, 이카로스가 여자라니. 믿기지 않는군요. 아무튼
반갑습니다. 여러 번 연락을 주셨더군요 제가 그간 컴퓨터 작업
을 하지 않아서 연결이 되지 않았어요.
그랬군요. 그런데 한국에는 무슨 일로 오셨어요??
개인적으로 알아볼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그러시군요. 사실은 저도 지금 서울에 있어요.
네? 그러면 이카로스는 한국인입니까??
네.
그러셨군요.
내일 좀 뵐 수 있을까요??
무슨 일입니까? 아침 시간이면 가능한데요.
부탁드려요. 제가 내일 아침 열 시에 묵고 계신 호텔 커피숍
으로 가겠어요.
그럼 , 내일 뵙지요.
전화를 끊은 수아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소리로 미
루어보건대 그는 서양인이 아닌 것 같았다. 한국인일 것 같은 생
각도 들었지만 그는 자신이 한국인이라고 밝혔을 때에도 계속
영어로 통화를 했다. 그렇다면 그는 한국어를 전혀 못하는 재미
교포란 말인가.
호텔로 다시 돌아온 수아는 깜짝 놀랐다 프런트데스크 앞의
소파에 테드가 앉아 있었다. 테드는 어젯밤 수아의 우울한 목소
리가 마음에 걸려 바쁜 가운데 시간을 내서 한번 들러본 것이라
고 말했다.
수아는 솔직히 반가웠다. 내일 아침이면 프로메테우스를 만나
게 될 것이고, 그러면 문제가 해결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놓였던 탓인지 테드와 술 한잔 하고 싶었다.
테드와 수아는 호텔 지하에 있는 나이트 클럽으로 갔다. 어두
컴컴한 가운데 붉은색과 푸른색 조명이 휘황찬란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한창 인기 있는 그룹이 나와 음악을 연주하고 노래를 불
렀다.
노래가 끝난 후 음악이 시작되자 수아는 무대 위로 제일 먼저
뛰어 올라갔다 그러고는 음악에 도취되어 눈을 감은 채 신나게
춤을 추었다. 잠시 후 눈을 떠보니 테드가 바로 앞에서 춤을 추
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놀라움이 배어 있었다 주변에서 함께
춤을 추던 사람들이 수아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들어올리며 멋있
다는 표시를 해주었다.
수아는 음악이 좋았다 어릴 때 아버지는 머리가 좋아진다며
클래식을 틀어주곤 했다. 수아는 음악에 두드러진 재능을 보였
다. 한번 들은 곡은 어렵건 쉽건 나름대로 소화해서 즉흥적으로
피아노를 치곤 했다.
고등학교 시절, 진로를 결정할 때 아버지는 수아의 음악 감각
을 칭찬하며 음대에 갈 것을 권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훌륭한
연주를 하는 딸의 모습을 오랫동안 혼자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수아는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반항했다. 남을 위해 하는
음악은 결코 하지 않겠다고 대들었다.
아버지는 그런 딸을 지그시 바라보며 그러면 뭘 하고 싶으냐
고 물었다. 수아는 자신은 한국의 빌 게이츠가 되고 싶다고 했
다. 컴퓨터 실력도 물론이지만 빌 게이츠처럼 많은 돈을 벌어서
제왕처럼 군림하며 살고 싶다고 당당하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날 이후 피아노에서 손을 떼고 컴퓨터에 몰두했다
왠지 절대 이길 수 없을 듯한 아버지에게 저항할 수 있는 유일
한 길 같아 며칠씩 밤을 새우면서 컴퓨터 자판을 두들겼다. 피아
노나 컴퓨터나 두들기는 쾌감은 비슷했다.
이상하게도 아버지는 수아가 하는 대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날 이후 수아는 클래식 대신 미국과 한국의 대중 가요에 심취
했다. 시험 전날에도 시끄러운 댄스 음악을 들으며 공부했다. 마
치 무엇엔가 도전하듯이 대중 가요와 춤과 컴퓨터 게임에 빠져
있는 딸을 바라보며 아버지는 미국 유학을 권했다.
음악이 있고 술이 있는 분위기에 마음이 녹은 수아는 테드에
게 자신의 옛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리고 현재의 상황도 얘기
했다. 그동안 외롭게 싸워왔던 수아는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의
논 상대가 생겨 아주 기분이 좋다고 덧붙였다.
테드는 놀랐다. 하지만 곧 자신이 할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
을 깨달았는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무엇을 어떻게 도우면 되
겠느냐고 몇 번이나 물어오는 테드에게 수아는 웃으면서 단지
얘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고맙다고 했다.
다음날 아침 호텔 커피숍에서 수아는 자그마한 몸집의 점잖고
온화한 표정을 지닌 프로메테우스를 만났다.
기미히토입니다.
프로메테우스는 일본인이었다.
수아예요.
기미히토는 놀라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는 어제의 통화에서
이카로스가 여자라는 사실에 깜짝 놀랐는데 이렇게 미인일 것이
라고는 짐작조차 못했다며 고개를 내둘렀다. 그의 머리에 미국
에서 이카로스와 치열하게 겨루던 기억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이카로스와 처음 만난 것은 일본에서 미국의 연구소로 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연구소의 직원들은 언제부턴가 이카로스
라는 이름에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보안 유지가 생명인 연구소에서는 모든 연구원들이 파일에 다
양한 보안 장치를 해놓았는데, 이카로스 앞에서는 모두 무용지
물일 뿐이었다. 국방성 등에 공급되는 연구소의 보안 장치들은
세계 제일의 성능을 자랑하는 것들이었지만, 이카로스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것을 뚫고 들어왔던 것이다.
연구원들은 기미히토가 오자 환성을 질렀다. 모두 이제야 비
로소 이카로스에게 연구소의 권위를 세울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
던 것이다 그러나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고의 컴퓨터 전문가
프로메테우스도 이카로스에게는 번번이 나가떨어질 뿐이었다
기미히토는 한때 이카로스가 러시아 정부의 촉탁을 받은,수
십 년의 경험을 가진 적어도 오십대 이상의 컴퓨터 전문가이리
라고 생각했던 것을 떠올리며 웃었다. 이십대 초반에 불과한 이
가냘픈 모습의 아름다운 여학생이 이카로스였다니.
우리는 묘한 인연이군요. 미국에서는 컴퓨터로 늘 만나더니
이제 여기 한국에 같이 와 있으니 말입니다.
인상이 무척 좋으시네요. 일본인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
어 요.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인, 그것도 여성일 줄은 전
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나저나 잘 만났습니다 늘 한번 만나
보고 싶었어요. 어떤 면에서는 도움도 많이 받았잖아요.
제가 뭘 도와드린 게 있다구요.
하하.우리 연구소에서는 그 귀신 같은 해킹 기술 덕을 얼마
나 썼는지 모릅니다. 잘 알겠지만.
어쨌든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나를 찾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인사가 끝나자 기미히토가 진지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자동 변환 프로그램의 제작에 관해서 몇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무슨 일이기에 내 도움이 필요하죠??
프로메테우스 이외에는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되었
어요. 진정으로 도움을 부탁드립니다.
기꺼이 도와드려야지요.
기대했던 대로 기미히토는 협조적이었다. 하지만 수아는 모든
사정을 있는 그대로 기미히토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용역을 맡아서요. 다른 건 다 되는데 이것은 도저히 할 수가
없었어요.
수아는 휴대용 컴퓨터를 켜고 자신이 이제껏 고심한 부분을
기미히토에게 설명했다
방법만 가르쳐주시면 제가 혼자서 해보겠어요.
그러나 수아의 설명을 듣고 난 기미히토는 고개를 저었다.
배워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최고의 전문가라도 꼬박
이틀 간은 작업을 해야만 하는 일이니.
네? 저는 그렇게까지 복잡할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기미히토를 바라보는 수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워낙 재능이 뛰어나다 보니 쉽게 생각했을 수도 있겠지만 이
경우의 자동 변환은 한꺼번에 고려해야 할 인자가 너무 많습니
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군요. 나는 오늘 오후에
일본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일본으로 돌아가신다구요??
그래요. 혼자라면 도와주겠지만 일행이 있어요. 여기서 만나
공항으로 같이 가기로 되어 있어요.
아 그렇다면
기미히토는 수아의 얼굴에 어리는 다급해 하는 표정을 보고 놀
랐다 동시에 왠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일로 저렇게
까지 당황하다니. 프로그램 개발은 늘 충분한 시간을 갖고 하는
일이라 이렇게 서두르거나 당황할 일이 전혀 아닌데도 불구하고
수아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그녀가 해킹 전쟁의 적수인 자신을 급히 찾은 것만으로도 자
존심을 크게 굽힌 것이고, 그런 만큼 사정이 급박하다는 사실이
더욱 절실하게 느껴 졌다.
음
기미히토에게 있어 수아는 마음이 끌리는 사람이었다. 두 사
람이 인사를 나눈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기실 두 사람은 오래
전부터의 친구나 다름없었다. 미국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밍과 해
킹에 관한 한 각각 제일이라고 생각하는 두 사람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컴퓨터를 통해 싸워왔는지 모른다.
두 사람은 끝없는 해킹과 그 방지책을 놓고 두뇌 싸움을 벌였
다 물론 그 싸움은 다른 사람이 끼여들 틈이 조금도 없는 천재
들의 전잼이었고, 천재 특유의 자존심이 싸움의 원동력이었다.
그 끝없는 싸움을 하는 동안 두 사람은 어느새 서로를 인정하
게 되었고, 두 사람 사이에는 둘만이 느낄 수 있는 우정이 싹텄
다. 그래서 수아는 자신 있게 기미히토를 찾았고, 기미히토 역시
수아를 진심으로 돕고 싶었다.
기미히토는 이 천재가 자존심을 굽히고 자신의 도움을 애절하
게 청해오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움직였다.
동행하기로 한 사람에게 연락을 해서 출국을 이틀 간 연기해
보도록 하죠.
네? 그렇게 해주시겠어요??
수아는 기미히토가 이렇게까지 말하자 가슴이 뭉클해졌다.
기미히토는 사도광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서 원장은 사
도광탄이 어디 들를 곳이 있다면서 일찍 병원을 나갔다고 했다.
열두 시에 여기서 만나기로 했으니 일단 내 방으로 올라가서
이 프로그램의 논리 구조를 같이 생각해 보기로 하죠.
기미히토는 기대 이상으로 적극적이었다.
두 시간 후 기미히토는 커피숍으로 사도광탄을 만나러 내려갔
다. 기미히토의 얘기를 들은 사도광탄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느니 이 호텔에서 이틀 간 머무르시는
건 어떻습니까??
기미히토는 사도광탄이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는 것이 미안했
다. 오랫동안 병원에서 생활해 왔다면 호텔에서 한 이틀 지내는
것은 사도광탄에게 기분 전환이 될 것 같았다. 물론 비용은 자신
이 댈 생각이었다
사도광탄은 말이 없었으나 기미히토는 몇 번 그와 만난 경험
으로 이런 반응을 보일 경우 그가 반대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기미히토는 프런트로 가서 수아와 사도광탄의 방을 각각 잡았
다 자신의 방과 같은 층이었다.
미지의 세계
기미히토는 이내 수아가 자신에게 무엇인가 감추고 있다는 것
을 알아차렸다. 말과는 달리 수아가 만들고자 하는 것은 용역을
받은 단순한 프로그램의 제작이 아니었다 기미히토는 수아가
이 프로그램을 해킹을 통해 어떤 컴퓨터에 입력하여 마음대로
조작하려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기미히토가 부탁받은 것은 수아가 해킹을 하고 나서도 그 컴
퓨터와 연결된 외부의 전산망에는 해킹되지 않은 처음의 입력
결과가 나타나도록 하는 지극히 복잡한 프로그램이었다. 수아는
프로그램이 누군가에 의해 철저히 조작되고 있다는 것을 모르도
록 하려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완벽한 자동 변환 프로그램을 짜
서 입력해야만 했다.
어느 정도 작업이 진행되자 기미히토는 수아가 하고자 하는
일이 범죄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눈치채기 시작했다 수아는
작업의 내막을 시원하게 얘기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의도를 알아
차리는 데에는 말이 필요치 않았다. 작업은 그 자체로 모든 것을
말해 주고 있었고, 기미히토는 수아가 위험하게도 한국의 증권
시장에 손을 대려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기미히토는 이런 일로 수아를 도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또
한 수아를 이대로 두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설사 이번 작업
에서는 손을 뗀다 해도 수아는 앞으로도 그 빼어난 해킹 실력으
로 계속 범죄의 뒷골목에 머무르다 쓰레기 같은 인생을 마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기미히토는 수아의 재능이 아까웠다. 그러나 외국인인 자신이
수아에게 뭐라고 조언을 한다고 해서 알아줄 리는 만무했다. 수
아를 설득할 한국인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기미히토는
이런 일에 적합한 사람을 알고 있지 못했다. 한참 생각하던 기미
히토는 드디어 한 사람을 떠올렸다
사도광탄.
이 사람이라면 혹시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기미히토의 뇌리를
스쳤다. 어딘가 신비한 힘이 있는 사도광탄이라면 수아를 만류
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몰랐다.
기미히토로부터 사정 얘기를 들은 사도광탄은 역시 묵묵부답
으로 고개를 끄덕 였다.
기미히토는 사도광탄과의 저녁 식사에 수아를 불렀다.
사도 선생님, 여기는 스탠퍼드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는 한국
인 유학생 수아 양입니다. 컴퓨터, 특히 해킹에 관한 한 일인자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아는 말없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사도광탄은 수아의
얼굴에 고요한 시선을 모았다.
수아 양, 여기 사도광탄 선생님은 요즘 세상의 풀리지 않는
의문에 대한 해답을 한 몸에 지닌 분이에요. 나는 요즘 사도광탄
선생님을 통해 새로운 세상에 눈을 떠가고 있어요.
수아의 눈길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사도광탄의 눈길과 마주
쳤다. 조급해하던 수아는 범상치 않은 사도광탄의 눈길에 움찔
했다. 보통 사람의 가벼운 얼굴이나 눈길이 아니었다.
그러나 기미히토의 소개말은 수아에게 이 인물에 대해 거부감
을 갖게 했다 다른사람을 그다지 존경해 본 적이 없는 수아에
게 기미히토의 과찬은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세상에는 컴퓨터의 작동에 영향을 미치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있더군요. 결국 나도 거기에 이끌려 한국까지 오게 되었지요.
기미히토는 미국에서 일본을 거쳐 한국에 오게 된 내력을 수
아에게 설명했다. 그러나 수아는 믿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컴퓨터에 영향을 미치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있다구요? 저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네요.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걸요.
선생님 어때요? 정말 그런 게 있어요??
수아는 대들듯이 사도광탄에게 물었다. 지금 수아의 머리에는
자동 변환 프로그램에 관한 생각뿐이었다. 다급한 상황에서 사
도광탄이라는 이상한 인물의 등장이 반갑지 않은 참이라 자연히
공격적인 언사가 나온 것이다 사도광탄은 수아의 얼굴에서 눈
길을 거두어들이지 않은 채 물었다.
수아, 예쁜 이름이구나. 그런데 수아는 과학이 무엇이라고 생
각하지??
이 세상의 질서에 대한 합리적이고 규칙적인 설명이라고 생
각해요.
수아는 스스로도 일목요연하게 대답했다 싶어 목을 곧추세
웠다
그렇다면 지금 과학은 그 자체의 역사로 볼 때 어느 단계에
와 있을까??
네? 질문을 이해하기가 힘들어요.
가령 말이지 , 인류가 앞으로 수억 년을 더 산다고 하면 과학
은 계속 발전할까, 아니면 어느 단계에 이르러서는 발전을 멈추
고 말까??
수아는 잠시 생각하고는 대답했다.
계속 발전할 것 같은데요.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렇다면 지금의 과학은 매우 초
보적이고 원시적인 것이 아닐까??
그렇겠네요.
훗날 인류는 지금의 과학을 뒤돌아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
까??
많이 웃겠죠.
그래, 내 생각에도 그럴 것 같아.
사도광탄은 여기서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의 과학이 세상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는 것
이 당연하다는 말씀인가요??
그렇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의 과학은 커다란 범죄
를 저질러왔어 .
무슨 뜻인가요??
과학이란 인간의 지적 척도를 얘기하는 것에 불과해. 어차피
한계가 있는 것이지. 그런 과학이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듯이 군림했고, 그 결과 당장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
는 현상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부정하고 말았어.
선생님의 말씀을 따르자면 과학이 오히려 큰 오류를 범했다
는 것이네요.
그래. 과학의 오류로 말미암아 세계 각지의 신비 문화와 정신
문화는 커다란 비극을 맞이했어. 제국주의적 팽창의 시대로부터
자본주의라는 물질 일변도의 세상에 이르기까지, 그 단편적인
지식의 범주 안에 들지 못했던 세상의 커다란 문화와 자 민족의
고유한 지식은 모두 대학살을 당했던 것이지.
수아는 반박할 말을 찾으려 애썼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내가 재미있는 예를 들어볼까? 피라미드의 힘이라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있나??
피라미드 안에 있는 보물이나 미라를 훔치면 보복을 당한다
는 이야기 말인가요??
아니 , 그게 아니고 피라미드의 형상 안에서는 신비한 힘이 생
겨난다는 현상 말이야.
아, 피라미드 모양 안에서는 면도기의 날이 상하지 않는다는
그런 원리요? 어디선가 얘기를 듣긴 했어요.
그래, 파라오의 면도기라고, 체코에서는 특허가 나기도 했지.
그게 정말 실제로 일어났던 일인가요??
그럼 그렇지 않다면 까다롭기로 유명한 체코 정부에서 특허
를 내주지 않았겠지 그 특허가 나기까지늘 10년이나 걸렸지만
말이야.
그건 이상하네요. 정말 효력이 있다면 피라미드의 형상을 만
들어 그 효능을 보여주면 될 테고, 그렇다면 그렇게 시간이 걸릴
이유는 없을 것 같은데요.
하지만 체코 특허국에서는 단순한 효력만이 아닌 그 원리를
밝히라고 요구했던 거지 특별하지 않은 재료, 즉 유리나 나무
같은 것으로 피라미드 형상을 만들면 그 안에서는 신기하게도
면도날이 녹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무뎌진 면도날도 다시 예리
해지는 실험이 행해졌고 공인도 받았지만 누구도 그 원리를 설
명할 수는 없었지.
과학으로 설명할 수는 없어도 현상은 엄연히 존재한다는 말
씀을 하시려는 거예요?~
아니, 그 이상이지 아까 얘기대로 참고 기다리면 과학이 그
것을 설명할 수 있는 날이 온다는 것을 얘기하려는 거야. 특히
우리 나라 문화에 그런 것이 많아. 모두 미신으로 부정당해 묻혀
버렸지만 그 근저에는 언젠가는 과학으로도 규명될 원리가 분명
히 존재한다는 거야.
그 피라미드의 힘에도 어떤 특별한 원리가 있었나요?~
그럼. 원래 피라미드의 힘을 발견하게 된 것은, 한 관광객이
피라미드를 보러 갔다가 피라미드 내부의 습도가 매우 높은 데
도 왕의 묘실 안에 죽어 있는 고양이가 부패되지 않고 미라로 변
해 있는 것을 보고는 호기심을 가진 데서 비롯되었어.
그렇다면 고대 이집트인들이 왕의 묘실을 피라미드형으로 만
든 것은 어떤 과학적인 원리에 의거해 그렇게 했다는 말씀인가
요??
피라미드는 고대 이집트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야. 멕시코의
마야 문명에도 피라미드가 남아 있어. 중요한 것은 이 미신과도
같은 현상이 과학적으로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이지.
어떤 원리에 의해 그렇게 되는 건가요?~
파라오의 면도기를 만든 체코의 드르발은 이 괴상한 현상의 ,
원리를 규명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 끝에, 부도체로 피라미
드의 형상을 만들면 땅에서 올라오는 지자기와 태양에서 쏟아지
는 전자파가 피라미드 형상 약 3분의 1 되는 지점에서 공명한다
는 것을 알게 되었어. 이 지점에서는 에너지가 매우 활성화되어
습기를 몰아내고 건조한 상태가 되었지. 피라미드의 모양은 반드시 이집트의 것을
따를 필요는 없고 마야의 것이거나 약간
달라도 마찬가지 효과가 나타난다는 것을 알았지. 하지만 피라미드의 네 면은 반드
시 정확하게 동서남북을 향해야하고,칼날을
재생시킬 경우는 남북 방향으로 놓을 때 가장 효과가 큰 것으로
밝혀졌어 .
마치 장난과도 같은 원리네요.
그렇다면 피라미드에 있는 왕의 방이 바닥으로부터 3분의 1
정도 되는 지점에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 겠지??
그렇겠는데요.
세상에는 과학으로 설명이 안 된다고 해서 부정해 버릴 수 없
는 일이 너무도 많아. 무당의 신통력이라든지 부적의 힘이라든
지, 보통의 인간이 알 수 없는 일들이 있고 그것들이 종합적으로
우리 문화를 형성해 온 거야.
동경대학교의 컴퓨터에 이상을 일으킨 힘도 과학적으로 설명
할 수는 없지만 부정해 버릴 수 없는 거네요.
수아는 얼굴에 미소를 떠올리며 사도광탄에게 굴복했다. 총명
한 수아는 이미 사도광탄이 보통 사람이 아닌 것을 알아차렸다
기미히토는 기회를 보아 말을 꺼냈다.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
기 위해 이카로스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이카로스, 지금 작업하고 있는 자동 변환 프로그램은 어디에
서 용역을 받은 거죠??
수아는 멈칫했다. 결국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는 생각이 들었
다. 상대방이 묻지 않으면 모르겠으되 일단 물은 이상 모든 것을
사실대로 밝히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작업의 내용이 모든 것을
말하고 있는데 자신이 거짓말을 한다고 해서 통과될 일이 아니
었다. 어쩌면 자신은 기미히토가 이런 질문을 해오기를 기다리
고 있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기미히토 교수님, 죄송해요. 사실은 말씀드릴 수 없는 사정이
있었어요.
침투
기미히토와 사도광탄은 수아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었다
라이언펀드의 투기 자금이 한국의 주식 시장을 붕괴시키고
빠져나가는 것을 막아야 해요. 그것을 저는 컴퓨터 조작을 통해
막으려고 하는 거예요.
어떻게 조작을 한단 말이죠??
딕슨은 저가에 사서 고가에 팔아요. 물론 엄청난 자금을 동원
하기 때문에 주가는 뛸 수밖에 없죠. 뒤늦게 뛰어든 일반 투자자
들은 딕슨이 주식을 팔아버리고 철수하면 큰 손해를 볼 수밖에
없어요. 선량한 외국인 투자자들이 자금을 빼면 외환 위기까지
겹치죠. 어쨌거나 딕슨이 한국의 투자자들을 희생양으로 삼으면
서 엄청난 단기 차익을 가지고 나가는 것을 막아야 하는데 정부
에서 할수 있는 일이 아녜요.다행히 모든 거래는 컴퓨터를 통
해 이루어지고 있어요. 저는 딕슨이 판 주식 대금으로 그들이 모
르게 자동 매입이 이루어지도록 컴퓨터로 조작하려는 거예요.
수아의 이야기가 끝나자 기미히토는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
다. 어린 여학생이 한 나라의 증권 전산망에 손을 대려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 방법이 너무나 대담했기 때문이다
또 한 번 놀란 것은 수아의 그 가상한 의도였다 동기야 어쨌
든 발각되면 바로 형사 입건될 일을 자신의 한 몸은 개의치 않고
미국에서 여기까지 날아와 혼자서 프로그램 제작에 노심초사해
왔다는 사실이 었다.
기미히토는 이제껏 미국이나 일본에서 수많은 해커들을 봐왔
지만 그들은 한결같이 심한 장난꾼이거나 시시한 좀도둑에 불과
했다. 하지만 이카로스는 달랐다. 물론 솜씨도 단연 탁월했지만
어떤 경우에도 해킹으로 피해를 입히는 경우는 없었다. 이카로
스의 해킹은 컴퓨터의 비밀을 샅샅이 캐내기 위한 무한한 열정
이었고, 새로운 창조를 위한 밑거름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카로스는 기미히토나 실리콘밸리 연구소에 커
다란 도움이 되었다. 연구소사람들은 새로운 프로그램을 제작
하고는 이카로스가 침투하기를 기다렸다 그의 해킹을 통해 시
제품에 대한 검증을 받으려 했기 때문이다.
그런 수아가 증권 전산망에 손을 대려 하자 기미히토는 크게
실망했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수아의 사정을 듣고는 감격했다.
펠젠스타인이나 워즈니악이 거대한 컴퓨터 기업의 횡포로부터
대중의 자유를 얻기 위해 싸운 해커들의 영웅이라면, 이카로스
는 조국의 위기를 컴퓨터 기술 하나로 구해보려는 또다른 해커
의 영웅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속이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어요.
수아는 윗입술을 깨물며 긴장하고 있었다. 기미히토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를 일이었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이것은 범죄
였다. 외국인인 기미히토가 자신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일에
기꺼이 협력해 주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왜 이카로스가굳이 프로그램 변형이라는 번거로운 방
법을 쓰려고 하나 궁금했어요. 그 빼어난 해킹 실력으로 ID를
도용한다든지 록을 푸는 것이 훨씬 쉬울 텐데 말입니다.
부탁이에요. 도와주세요. 그들의 계획이 성공한다면 가뜩이
나 어려운 우리 나라의 증시는 무너져 버릴 거예요. 선량한 외국
인 투자자들이 모두 빠져나가 버리면 또다시 외환 체제가 붕괴
되고 경제는 무너지고 말 거예요.
기미히토는 다시 한 번 감동을 느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범죄 행위에 섣불리 동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기미히토는 자
신의 신분을 생각했다. 동경대학교의 교수가 타국의 전산망을
조작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기미히토는 힘
들게 말했다.
미안해요, 내가 그 일을 직접 도울 수는 없어요.
이때 기미히토의 귓전에 뜻밖에도 사도광탄의 나지막한 목소
리가 들려왔다.
내가 돕지요.
기미히토는 너무나 놀랐다
그러나 사도광탄의 결의에 찬 말에도 불구하고 기미히토는 이
런 일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의문스러웠다 그렇지만
자신이 뭐라고 얘기할 입장은 아니었다.
세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는 기미
히토의 마음은 무겁기 짝이 없었다. 수아의 그 가상한 노력에 도
움을 주지 못하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그러나 어쨌거나 명
백한 범죄 행위에 가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답답한 심정으로 담배를 피워문 기미히토는 창 밖을 내다봤
다. 멀리 북악이 보였다.
기미히토는 범죄란 무엇이며 애국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혼돈스러웠다. 단순히 실정법을 어긴다는 이유로 수아의 애국적
행위를 범죄로 치부해 버린 자신이 과연 옳은가 하는 회의가 밀
려왔다.
기미히토는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안 돼, 고뇌 끝에 다다른
기미히토의 결론은 역시 수아를 도울 수 없다는 것이었다.
딩 동 -.
문을 열어보니 사도광탄이었다. 안으로 들어와 자리에 앉은
사도광탄은 담담한 어조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날 밤하늘에는 보름달이 떠 있더군요. 마지막이라는 생각
이 들어 나는 아는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달에 비추어보았
지요. 이윽고 나는 대열에서 빠져나와 단상을 향해 한걸음 한걸
음 나아갔어 요. 동료 사병들이나 장교들은 너무나 뜻밖인 나의
행동에 모두 놀랄 뿐 제지할 생각은 하지 못했지요. 나는 단상으
로 올라갔어요. 그러고는 목이 미어지게 외쳤지요. 당시 병영 내
에서의 데모란 바로 죽음과 같은 의미였어요. 그러나 우리 국민
모두가 죽음이 두려워 벌벌 떨며 끌려갈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우선 네가 희생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수아를 보니 그 옛날의 내
모습이 떠오르더군요.
사도광탄은 말을 마치고 기미히토의 눈을 깊숙이 들여다보았
다. 기미히토는 가슴이 옥죄어오는 것을 느꼈다. 사도광탄은 수
아를 도와주기를 간청하고 있는 것이다
기미히토 교수님이 일본에서 여기까지 오신 것은 바로 참된
삶을 위해서가 아닌가요.우리의 시야를 가리는 허위에서 벗어
나 진리를 구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요. 수아 역시 마찬가지이지
요. 법망을 피해 교묘하게 저질러지는 범죄 행위를 수아는 법을
어기면서 막아야 하는 입장에 서 있어요. 그 옛날 내가 병영에서
군사독재 반대 데모를 하고 법에 의해 처벌받았던 것과 다름없
지요. 교수님이나 수아나 나나 참된 것을 위하여 껍질을 과감하
게 벗어던진다는 점에서는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겁니다.
사도광탄의 얘기를 들으며 기미히토는 숙연해졌다. 사병의 신
분으로 병영에서 데모를 했다는 사도광탄의 이야기도 놀라웠고,
금융 붕괴를 막으려 미국에서 날아와 범죄자가 될 위험을 무릅
쓰고 애쓰는 수아도 감탄스러웠다. 그들은 개인의 이해 관계를
넘어선 보다 큰 뜻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하는 사람들로 생각되
었다.
그리고 자신도
기미히토의 뇌리에 이윽고 수아의 행위는 범죄가 아니라는 확
신이 섰다. 그것은 애국이었다. 그녀의 행위가 범죄가 아니라면
그것을 돕는 자신의 행위도 범죄가 될 이유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기미히토는 결의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틀 후 자동 변환 프로그램은 완성되었다 기미히토는 밤을
새워 작업을 했다 심혈을 기울여 만든 프로그램에 문제가 있을
리는 없었지만 수아와 함께 실험을 해가며 완벽한 논리 구조를
조합해 냈다.
자, 이제 목표물에 이 프로그램을 설치하는 것은 이카로스의
몫입니다.
기미히토의 농담에는 여유가 있었다. 그는 수아의 해킹 실력
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수아는 얼굴을 찌푸리며 무엇
인가 풀리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곤란한 문제가 생겼어요.
그게 뭐죠??
시간이 문제예요.
시 간이 라니 ??
이제 스탠더드증권의 컴퓨터에 접속하여 기존의 프로그램을
깨고 우리 것으로 바꾸는 작업을 해야 해요. 이 작업은 장이 마
감되고 자체 일일 결산 및 증권거래소와 증권결제 원과의 거래
확인을 마친 후 홍콩에 있는 본사와의 결산을 본 다음에야 할 수
있어요. 제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본사와의 결산 후 정확히 30분
이 지나면 터미널이 다운되는데 그후에는 접속을 할 수 없어요.
본사의 메인터미널에는 접속을 해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고, 한
국 지점은 아예 전화선을 끊어버리기 때문이죠.
30분이면 가능하지 않은가요??
그렇게 생각했지만, 지금 이 자동 변환 프로그램을 보니 설치
를 위한 검색을 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만만찮을 것 같아요. 저
의 휴대용 컴퓨터로는 역부족이에요.
음 그렇군요.
중형 스테이션이 필요해요.
기미히토는 수아가 고심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번 일은
단순한 해킹이 아니었다.
그것뿐이라면 일단 다른 기관의 스테이션에 정보를 보내고
그 시간대에 증권 회사로 전송하는 방법을 쓰면 되겠지만, 프로
그램을 설치한 후 증권 회사에서 쳐대는 엄청난 양의 매도 매수
주문을 다 소화하려면 저의 휴대용 컴퓨터 하나로는 어림도 없
어요. 중형 스테이션이 있고 컴퓨터마다 내부 개별 통신 설비가
극도로 잘되어 있어야 하거든요.
산 넘어 산이었다
그 얘기는 결국 전산실을 통째로 며칠 빌려야 한다는 얘기 아
닌가요??
거의 불가능한 일이군요.
세상에 전산실을 외부인들에게 통째로 빌려줄 기업이나 기관
이 있을 리 만무하다. 전산실이 없으면 1분 1초도 일을 할수 없
는 것이 요즘 세상이다. 더군다나 교섭을 할 시간도 없다 당장
내일 작업을 해야만 한다 누구보다도 이틀 밤을 새워 프로그램
을 만든 기미히토가 가장 실의에 빠졌다.
아,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수아는 급한 손길로 전화기를 들어 미국에 있는 정완의 번호
를 돌렸다
회장님께서는 해외 출장중이십니다.
연락이 안 되나요??
회장님께서 연락을 주시기 전까지는 안됩니다. 그런데 누구
시죠?~
한국의 이수아라고 하는데요.
이수아 씨라구요? 회장님이 메모를 남기셨어요. 이 번호로
빨리 전화를 걸어달라고 하셨어요.
비서가 불러주는 번호는 뜻밖에도 한국의 것이었다. 그렇다면
정완의 해외 출장지가 한국이라는 얘기가 아닌가.수아는 즉각
번호를 눌렀다
비서를 거쳐 건네진 전화기에서 정완의 걱정스런 목소리가 들
려왔다.
수아야, 어떻게 된 일이냐?~
네? 아저씨야말로 웬일이세요??
몸은 괜찮니? 별일 없어? 수아가 걱정돼서 바로 날아왔어.
그날은 웬 술을 그렇게나 많이 마셨니??
술을요? 그랬었죠, 제가 술을 마셨었죠. 그런데 어떻게 아셨
어요??
울먹이면서 나에게 전화했던 거 생각 안 나니?수아가 끊고
나서 바로 전화를 했는데 자는지 안 받더구나 푹 자게 하려고
나중에 전화를 했더니 그때는 체크아웃하고 나갔고, 항공사에서
는 예약은 했는데 타지는 않았다고 하고, 다음날부터 미스터 최
가 수백 번이나 삐삐를 쳤다는데 연락은 되지 않는다고 하고. 걱
정이 돼 마음졸이다가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즉각 날아왔지.
죄송해요, 아저씨 중요한 일을 하느라 그동안 삐삐를 꺼왔어
요.
그래 그건 어떻든 간에 지금 어디 있어?바로 봐야겠다 내
가 너를 괜히 보낸 거나 아닌지 모르겠어. 그렇게 부담 가질 필
요는 없었는데. 나는 단지 미래를 위해 경험을 해두라는 뜻이었
는데 .
아녜요, 아저씨.마침 미국의 아저씨 회사로 전화를 했던 참
이에요. 여기 호텔인데, 이리로 급히 와주세요. 아저씨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해요.
내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왜??
설명드릴 시간이 없어요. 어서 와주세요.
알았다.
호텔에 도착한 정완은 수아가 멀정한 것을 보고는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뭐가 그리 급하다고 했지?~
정완은 수아와 같이 있는 사십대 가량 돼 보이는 두 사람에게
의문의 눈길을 던졌다.
수아는 먼저 사도광탄과 기미히토를 소개했다. 그러고 나서는
이제껏 일어났던 일들을 설명했다. 설명을 듣고 난 정완은 기미
히토에게 깊이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기미히토 교수님, 너무도 큰일을 해주셨군요.
그러나 전산실이 없어서 모든 게 물거품이 될 형편입니다.
수아야, 대학교의 전산실 정도면 가능하겠니??
수아는 깜짝 놀랐다.
그럼요. 학교의 전산실이라면 직접적인 업무에 묶여 있지 않
을 수 있지요.
기미히토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나 학교라고 해도 쉽게 빌리기는 힘들 텐데요
내가 연락을 한번 해보지요.
정완은 전화기를 들었다. 그리고 일이 상당히 급한 상황이며
내일부터 작업을 시작하면 좋겠다는 내용을 전했다. 저쪽에서
의외로 순순히 승낙을 했는지 정완은 금방 전화를 끊었다. 수아
와 기미히토는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일이 너무도 쉽게 이루
어지고 있었다
이런 일이 어떻게 전화 한 통으로 이루어질 수 있죠??
기미히토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물었.다.
마침 우리 재단에서 세운 대학교가 있습니다.
그제야 수아는 정완이 어떤 인물인지를 기미히토에게 설명했
다. 수아의 설명을 듣는 기미히토의 표정에 놀라움과 부러움이
스쳐갔다.
사도광탄, 정완, 수아라는 각기 신분도 생각도 다른 세 사람이
범죄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자기 판단에 근거해 나라의
경제 위기를 구하려 달려드는 것을 보고 한국인들의 무서운 단
결력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이들을 보자 기미히토에게는 극도
의 경제 위기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틀림없이 다시 일어날 것이
라는 확신이 생겨났다.
네 사람은 오랜만에 편한 마음으로 정완이 사는 저녁 자리에
마주앉았다. 모두의 관심은 수아에게 쏠리는 분위기였다.
특히 사도광탄은 수아의 컴퓨터 조작에 협력은 하면서도,수
아가 해킹에 빠져 인생을 그르칠 수 있다는 위험도 경계하는 표
정이었다. 그는 수아의 표정에 여유가 생기자 그녀의 가치관을
테스트하는 듯한 물음을 던졌다.
해킹의 윤리에 대해 수아는 어떻게 생각하지?
제가 그것을 말할 자격이 있을까요? 취미로 하고 있지만요.
그러면서 수아는 잠시 머뭇거리다 야무진 목소리로 자신의 생
각을 전개했다.
해킹의 기본 정신은 자유에 있어요. 세상의 모든 정보를 함께
나누자는 거죠. 인간의 역사는 좀더 많은 사람이 좀더 많은 자유
를 누리자는 쪽으로 진행되어 왔어요. 아마 이것을 발전이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나 자본주의가 심화됨에 따라 인간은 자
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본에 예속되었어요. 일방적인 정보의 장
악은 이 예속을 심화시켰죠. 해킹은 정보의 세계만큼은 가진 자
못 가진 자를 떠나 모든 사람이 같이 자유롭게 나누자는 기본 정
신에서 출발했어요.돈이 아닌 인간의 노력과 능력만큼 정보를
갖는 평등이 해킹에는 있어요.
의외구나 그런 정도로 철학적 기반을 갖고 있다니.
해킹을 통해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죠. 지금의 세계는 이 점
을 두려워하지만 무수한 해킹 범죄를 겪으면서 인류는 올바른
대처 방법을 마련할 거예요. 해킹을 무조건 금기시하면 오히려
사회는 뒤떨어질걸요. 해킹 범죄는 해커가 잡아낼 수 있으니까
요. 게다가 컴퓨터의 인간 지배를 막는 것도 역시 해커의 몫이
죠. 그런 점에서 해커란 매우 인간적인 존재들이에요.
수아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리고 해커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그냥 넘겨버리지 않
아요. 단서는 언제나 사소한 것에서 찾아지거든요.
그렇다면 이번 일도 추적당하지 않게 배려를 했다는 건가??
기미히토는 말은 안 해도사도광탄이 자신의 안위에 대해 신
경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럼요. 함부로 공개는 할 수 없어도 도저히 추적하지 못하는
방법이 있어요. 초일류의 해커들에게는요.
내게 얘기하면 안 되는 모양이지??
네, 안 돼요.
수아가 너무도 분명하게 대답을 했기 때문에 세 사람은 모두
웃었다
해커의 세계에서는 지극히 사소한 것이 언제나 가장 큰 문제
가 되거든요. 재미있는 일화를 하나 얘기해 드릴게요.
사도광탄은 해킹에 대한 수아의 철학이 마음에 들었는지 안심
하는 표정이었다
1989년 3월에 FBI는 다섯 명의 서독 청년들이 미국의 국방성
을 비롯하여 항공우주국, 핵 연구센터, 유럽 핵 연구센터, 일본의
방위기술연구소 등에 침입하여 엄청난 기술과 정보를 빼내서는
소련의 KGB에 팔아넘긴 것을 알아냈어요. 그들의 해킹은 4년
동안이나 계속되어 오고 있었어요.
정완이 흥미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4년 동안이나 해킹이 계속됐는데도 정보 당국에서는 몰랐단
말이야?~
워낙 솜씨가 좋은 해커들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어떻게 잡았지??
참으로 의외의 곳에서 의외의 사람이 잡아냈어요. 하버드대
학교의 스미소니언 천체물리연구소에서 근무하던 클리포트 스
틀이라는 천문학자가 그들을 탐지하게 되었어요. 그는 컴퓨터의
시간당 사용 요금을 정산하다가 75센트의 오차가 나는 것을 발
견하고는 의문을 품게 되었죠.
불과 75센트에??
네 비록 적은 액수였지만 기계적으로 생각하면 오차가 있다
는 사실은 틀림없었죠. 액수는 차치 하구요.
그래서??
사도광탄도 컴퓨터의 세계에 차츰 끌리는지 자못 흥미 있는
얼굴로 물었다
스톨 박사는 생각 끝에 이것은 누군가 바깥의 침입자가 전산
망에 무단 접속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는 전화 기록을 모두
살폈어요.그러나 그들은 교묘한 방법을 섞어 접속했기 때문에
도저히 끝까지 추적하지 못했죠.
교묘한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지??
사도광탄이 웃으며 물었다. 수아가 어떤 방법을 쓰려는지 알
고 싶어하는 태도였다
예를 들면 서독에서 캐나다의 어느 연구소로 전화를 해서는
접속을 했어요. 그러고는 다시 파리로 연결하고 또 미국 국방성
과 연관이 있는 일본의 어느 기업 컴퓨터와 연결을 한 후 마지막
에 국방성의 컴퓨터와 접속을 했죠, 때로는 정식 업무와 관련하
여 접속중인 회선에 끼여들기도 하고, 하여간 여러 가지 방법으
로 추적하지 못하게 했죠. 가장 중요한 것은 전세계를 빙빙 돌아
온 그들의 접속 시간이 매우 짧다는 거였어요. 베테랑인 그들은
바로바로 정보를 빼가곤 했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추적을 했지?~
추적에 성공한 것이 아니라 유인에 성공했어요.
그 천문학자가??
네 스톨 박사는 그들이 군사 관련 핵심 정보를 노린다는 것
을 알고는 몇 군데 중요한 연구소의 컴퓨터에 iDle네트라는 종합
방위 시스템에 관한 정보를 심어두었죠. 아주 획기적이고 중요
한 극비 군사 시스템인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면서 말이에요.
그들이 거기에 걸려들었나?~
네. 워낙 큰돈에 정신이 팔려 있던 그들은 무려 두 씨간 동안
이나 그 가짜 컴퓨터 네트워크 속에 들어가 헤매고 있었죠. 그
자신도 탁월한 해커인 스톨 박사가 그들이 도저히 그만두지 못
하도록 심리적 압박을 가했기 때문이죠. 예를 들면 (이 시스템은
무단 접속되었기 때문에 폐쇄됩니다)하는 식으로 그들이 이번
에 정보를 얻지 못하면 다음의 접속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만들었죠. 마치 머드게임처럼요. 그들이 한없이 헤매는 동안 박
사는 최초의 전화 발신지를 찾아낼 수 있었던 거죠. 바로 서독의
하노버였어요. FBI는 서독 경찰과 같이 그들을 붙잡을 수 있었
지요.
사도광탄과 정완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참, 기미히토 교수님 부탁 하나 더 드려도 돼요??
뭐죠??
기미히토는 프로그램 제작이 다 끝났는데 무슨 부탁이 또 있
을까 하는 얼굴로 물었다.
스탠퍼드의 친구가 이번에 일본과 만주에 가게 됐어요. 인류
학을 전공하는데 동북아시아의 샤머니즘에 대해 논문을 쓰게 되
었대요. 일본으로 가실 때 좀 데려가 주셨으면 하구요. 일본에는
아는 사람이 없대요.
기미히토는사도광탄의 얼굴을 쳐다봤다. 두 사람은 같이 고
개를 끄덕였다.
다음날 사도광탄과 기미히토, 그리고 테드는 홀가분한 표정으
로 호텔을 나섰다. 테드는 곱슬머리를 빗지도 않은 채 헝클어뜨
리고 청바지 차림에 등에는 배낭을 하나 달랑 메고 있었다
정완과 수아가 공항까지 그들과 동행했다. 공항에는 변 박사
와 조 교수까지도 나와 있었다
기미히토 교수님은 언제 미국으로 돌아가세요??
수아는 예전처럼 미국에서 기미히토와 해킹 전쟁을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일단 일본에서 비과학적 현상에 대한 나의 의문을 풀어야 돌
아갈 것 같아요.
일본에서 확인할 것은 무엇인데요??
글쎄요, 지금에 와서는 한국의 신비한 힘이라고 얘기해야 할
까요.
저도 함께 가서 그 힘이 뭔지 직접 확인하고 싶어요.
당연한 얘기였다. 지적 호기심이 가득한 수아가 그런 신비한
토우에 관심을 갖지 않을 리 없었다.
수아 양, 일을 마치는 대로 일본으로 한번 놀러 와요. 마침 친
구도 일본에 있을 테니.
수아는 자기도 모르게 테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테드의 얼
굴이 환해져 있었다 수아는 얼른 대답했다.
네, 고맙습니다. 그런데 사실 토우도 보고 싶지만, 있지도 않
은 임나일본부니 뭐니 하면서 게임으로까지 역사를 왜곡해대는
일본이라는 나라를 꼭 직접 가서 보고 싶어요.
그게 무슨 말이지요??
수아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은 기미히토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
졌다
마이크로소프트사에서 왜 그런 소프트웨어를 만들었는지 이
유를 모르겠어요. 미국인들이 임나일본부라는 것을 알 리도 없
고, 틀림없이 일본인이 만들었을 텐데
어떻게 알지요??
마이크로소프트라는 제조 회사명 밑에 프로그래머의 이름이
씌어 있었으니까요,도치아키 미치오라든가도시아키 미치오라
든가, 뭐 하여튼 그런 이름이었어요.
도시아키? 지금 도시아키 미치오라고 했어요?~
아마 그랬던 것 같아요, 정확한 이름은 잘 모르겠지만 교수님
께서 아시는 분인가요??
기미히토는 대답 없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틀림없는 도시아키
였다. 같이 컴퓨터를 전공했지만 자신이나 오카모토와는 달리
도시아키는 게임에 몰두했고, 지금은 야마자키 연구소에 수석
연구원으로 가 있었다. 게임을 통해 역사를 알리는 일을 한다고
했으니 그가 틀림없겠지.
기미히토는 조 교수에게 물었다.
임나일본부설, 즉 일본이 과거 2세기에서 4세기까지 약 3백
년 간 한반도를 지배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까? 우리 일본인
들은 그렇게 알고 있는데요.
조 교수는 개탄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좌우로 크게 흔들었다.
두 사람과 인사를 나누러 나온 자리에서도 이런 얘기를 해야 한
다는 게 갑갑하다는 의미였다.
지난 제국주의 시대에 일본의 육군 참모본부는 광개토대왕비
의 안 보이는 세 글자를 억지 해석해서 거짓 주장을 꾸몄지요.
한반도를 침략하기 위하여 국민을 증원할 구실을 거기서 찾은
겁니다. 한반도는 과거 우리 땅이었으니 이제 가서 찾자는 논리
를 만들었지요. 일본 국민은 거기에 속아 전쟁으로 내몰렸지만
정작 문제는 지금까지도 어린 학생들을 계속 그렇게 가르친다는
데 있어요.
기미히토는 할말을 잊었다 한국에 와서 보니 자신이 일본에
서 배웠던 것은 상당 부분 허위라는 것을 알게 됐다. 해인사의
그 웅장한 팔만대장경도 훔치지 못해 안달하다가 경판 몇 장이
라도 빼내고 가판으로 채워넣은 것을 직접 목격하는 등 부끄럽
기 짝이 없던 터였다.
그의 이런 부끄러움은 친구 도시아키에 대한 분노로 이어졌
다 그리고 이치로 교수가 하던 일에 대한 의구심과 더불어 베일
에 싸인 연구소의 정체에 대한 의심이 진하게 솟아났다 기미히
토는 어쩌면 연구소의 흑막을 벗기는 데 수아의 해킹 실력이 필
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 원장이 조심해서 다녀오시라는 말을 꼭 전해달라고 하더
군요.
조 교수가 사도광탄에게 작변 인사를 했다.
일행은 탑승구를 향해 올라갔다.
선생님, 몸 건강히 다녀오세요.
수아는 불과 며칠 간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사도광탄의 폭 넓
고 깊이 있는 인품에 감동했는지 진심이 깃든 목소리로사도광
탄에게 인사를 하며 손을 흔들었다.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눈앞에서 움직이는 것을 보며 사도광
탄은 수줍은 듯 웃었다. 기미히토는 그가 유독 수아에게 잘 대해
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그가 일본으로 갔다고?~
그렇습니다.
경찰청에서 새로 사도광탄을 맡은 최 계장은 공항에서 돌아온
직원의 보고를 받자 아연 긴장했다. 사도광탄이 비행기를 탔다
는 사실은 결코 가볍게 넘길 사안이 아니었다
무슨 일로 갔지??
동경대학교의 교수와 재미 유학생을 동반했습니다. 무슨 일
로 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항공사에는 연락했나??
네, 인터폴에도 연락하고 기내 보안관에게도 특별히 당부해
두었습니다.
짐 검사도 했고?.
짐은 없었습니다.
짐이 없다고? 외국에 가면서 가방 하나도 안 가지고 갔단 말
이야
그렇습니다.
최 계장은 도저히 그 괴상한 인물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
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데 이제까지 그의 행적은 어땠나??
최근의 행적 말입니까??
아니, 처음부터 지금까지 말이야.
최 계장은 컴퓨터에서 사도광탄의 파일을 찾으면서 부하 직원
에게 물었다.
우리 경찰 기록에 처음 들어온 것은 군에서 제대하면서부터
입니다.
왜? 군에서 범죄를 저질렀나??
아뇨, 범죄라기보다는 의병 제대를 했습니다.
의병 제대라고? 무슨 병인데??
정신병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정신병잔데 왜 감시 대상에 올랐지??
그게 사정이 좀 복잡합니다. 그가 군에 있을 당시 문제의 그
하이재킹이 일어나 인터폴과 교황청에서 감시 요청이 왔습니다.
그런데 그 무렵 그는 영내에서 대통령을 처단하라는 요구를 했
고, 일련의 과정을 거친 후 정신병 판정을 받고 의병 제대했던
것입니다.
참 희한한 인간이군 그러니까 하이재킹과 정신병으로 감시
대상이 되었단 말이잖아.
두 가지가 다 이유란 말입니다.
그후에는??
수년 간이나 움막 같은 거처에서 안 나오기도 하고 전국 각지
를 헤매기도 했습니다. 어떤 때에는 성당에 다니고, 어떤 때에는
굿에 미치고, 또 어떤 때에는 절에서 몇 년 살기도 하는 등 도대
체 종잡을 수 없는 행동거지를 보여 왔습니다.
한심하군 우리가 이런 정신병자나 감시해야 하다니.
납치
기미히토는 세 사람이 거처할 수 있는 아파트를 빌렸다. 동경
시내에서 아파트를 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동경대학
교에서는 외국인 교수를 위한 다양한 주거 환경을 구비하고 있
었기 때문에 도움을 청하자 꽤 넓은 평수의 아파트가 어렵잖게
준비되었다. 아파트의 평수는 동경 대에서의 기미히토의 중요도
를 말해 주었다.
유학을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 문화를 배우고 연구하러
오는 학생이나 교수를 받아들이는 것도 대단히 중요한 일인데
한국은 외국인들의 주거에 대한 배려가 너무 없어요. 스탠퍼드
에서 한국에 갔다온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불만을 갖고 있었
어요.
아파트가 마음에 드나요??
네, 아주 좋은데요.
베란다 바로 앞으로 스미다 강이 유유히 흐르는 아파트는 동
경 시내인데도 불구하고 조용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에 둘러싸여
있었다.
먼저 토우를 보러 가죠.
기미히토는 짐 정리를 끝내자 동경대학교로 사도광탄과 테드
를 안내했다.
선생님은 속옷 가방 하나도 없으시군요.
테드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사도광탄 역시 빙긋이 웃으며 말했
다.
옷은 그렇게 자주 갈아입지 않아도 돼. 오래 입으면 그 옷도
살아 있게 되어 친구가 되고 보호막도 되지.
시험 칠 때 새 옷으로 안 갈아입는 것과 같은 이치예요??
글쎄
하하, 친군가 생겨서 좋을지는 모르겠지만 냄새가 나면 어떻
게 해요??
사도광탄과 테드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데도 구애받지 않고
오래 전부터 아는 사이인 양 가깝게 어울렸다. .기미히토는 말이
없던 사도광탄이 젊은 사람들과는 쉽게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동양문화연구소장님이 얼마나 신신당부를 하시는지 한쪽 구
석에 처박아두었습니다.
행정직원은 기미히토가 찾아와 토우를 보고 싶다고 하자 이해
하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같은 학교의 두 교수가 한 사람은 되도
록 깊이 감추어달라고 하고 한사람은 기껏 감추어두었던 것을
꺼내달라고 하니 그럴 만도 했다. 직원이 한 쌍의 토우를 꺼내와
서 탁자 위에 놓았다.
누런 진흙으로 만들어 유약 처리를 하지 않은 투박한 모습의
토우는 겉을 말끔히 닦아냈는데도 오랜 세월 땅속에서 보낸 연
륜을 은은히 풍기고 있었다.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선인의 얼굴을 하고 있는 노인상은 단
호하고 엄숙한 표정 속에서도 자애롭고 여유 있는 분위기를 풍
기고 있었다. 눈은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의 것인 양 꿈을 담고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으며, 인간에 대한 애정과 미래에 대한 희망
을 주는 밝은 웃음을 입가에 머금고 있었다 투박한 가운데 섬세
하며 치밀하게 만들어져 깊은 인상을 주는 얼굴이었다.
할머니상은 인자한 모습으로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아
무 생각 없이 편안하게 안길 수 있는 분위기를 가진 이 온순한
표정의 할머니상은 노인상과 잘 어우러져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평온한 기분을 갖게 했다.
이렇게 친근해 보이는 토우가 신비한 힘을 발휘했다고는 도
저히 믿어지지 않아요.
테드는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 사도광탄에게로 눈길을 돌
렸다 그러나사도광탄은 테드의 의문에는 대답할 생각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고 있었다 기미히
토는 사도광탄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행정직원과 한 곁에서 학교
에 대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사도광탄은 한동안 토우를 들여다보면서 마치 대화라도 나누
는 듯이 무언가를 중얼거리기도 하고 때로는 손을 모으고 눈을
감은 채 주문을 외기도 했다 이윽고 그는 토우를 향해 합장을
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선생님, 저 토우가 아직도 괴력을 소유하고 있을까요??
글쎄
저 토우가 팔만대장경의 수호 사자였다면 잃어버린 대장경이
나올 때까지 괴력을 발하지 않을까요??
없어진 팔만대장경은 그리 쉽사리 나오지 못할 게야. 어쩌면
영원히 볼 수 없을지도 모르지. 내 생각에 토우는 이제 더 이상
괴력을 발하지 않을 것 같구나.
왜요??
할 일을 다했다는 느낌이 들더구나. 그 한 쌍의 토우 앞에 섰
을 때 '우리는 할 일을 다했소' 라고 말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선생님만의 육감이군요. 저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
어 요.
사도광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토우가 할 일을 다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죠? 컴퓨
터를 방해하고 이치로 교수를 죽인 것이 다일까요? 그것이 없어
진 팔만대장경 판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토우가 힘을 발한 이유가 꼭 대장경 판을 찾기 위해서라고 단
정할 수는 없어 .
그럼 왜 그런 괴력을 발했을까요??
지금부터 그것을 알아내야 해 토우가 왜 그런 힘을 발했는지
이유를 알아내어 해결해야 해. 나는 그 일을 하기 위하여 일본으
로 건너온 거야.
선생님은 할 일이 많으신데 제가 괜한 호기심으로 철없이 따
라오지나 않았는지 모르겠어요.
테드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 않아. 이번 여행은 아마 테드에게 큰 깨달음을 줄
게 야.
어떤 깨달음이죠?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테드가 말끝을 흐리는 것을 보며 사도광탄은 빙그레 웃었다.
일본을 떠날 때쯤이면 자네 가슴에 맺혀오는 무엇인가가 있
을 거야. 우리 문화에 대한 절실한 그리움이라고나 할까??
제가 그렇게 절실하게 무언가를 느낄 수 있을까요? 우리 나
라에 대해서는 깡그리 잊어버리고 미국에서 맥도날드 햄버거나
NBA 농구 같은 것에 젖어 살고 있는데두요?~
문화는 보이지 않게 스며들어 있는 거야. 조상의 얼과 숨결은
우리도 모르게 우리 나라의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에까지 스
며들어 있지 . 이런 것들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없어지지 않아.
특히 우리 나라 사람들은 자연의 기를 소중히 하며 오랜 세월 지
키고 살아왔지 자네의 유전 인자 깊숙이 에는 자네를 어쩔 수 없
는 한민족으로 만드는 기가 스며들어 있어.
기는 과학적 근거가 있는 것인가요??
사도광탄은 입가에 묘한 웃음을 흘렸다.
너희들은 언제나 과학을 앞세우는구나.
사도광탄의 말에 기미히토는 왠지 모르게 뜨끔했다. 과학적으
로 설명할 수 없으면 그 무엇도 믿으려 하지 않던 얼마 전과는
너무도 달라진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한동안 동경대학교
교정을 말없이 걷던 사도광탄은 전혀 뜻밖의 말을 했다.
킬리안 사진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니??
들어본 적은 있지만 잘은 몰라요.
음. 그것은 보통의 사진과는 달리 렌즈를 사용하지 않아. 고
전압의 전극에 가까이 다가가면 몸에서 빛이 나는 원리를 이용
하여, 필름을 뒤에 대고 피사체에 고주파의 고전압을 가하는 것
이지. 그러면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피사체에서 나온 빛이 필름
에 그대로 감광되는데, 서양 과학에서는 이때 필름에 찍히는 빛
을 생체 에너지라 부른다 그것도 최근에야 모든 과학자들이 동
의한 것이지만. 하여튼 이 생체 에너지는 사람의 경우 건강 상태
에 따라 현저한 차이를 나타내지 특히 예방 의학에 있어서 자신
에게 어떤 병이 있는지 모르는 사람의 경우도 이 킬리안 사진을
찍어 보면 생체 에너지의 선명도와 색깔에 따라 병의 유무를 판
단할 수 있어. 그래서 그들은 대발견을 했다고 떠들썩하지만 사
실 이것은 기의 존재를 이제야 포착했다는 것에 불과하지.
그 생체 에너지가 바로 기라는 말씀이군요.
그렇지.
기는 생물에게만 있는 건가요??
테드는 토우의 신비가 바로 이 기와 관련된 것이라고 생각하
고는 사도광탄에게 우회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렇지 않아. 기는 모든 물체, 심지어는 그림이나 도형에서도
나오지. 부적이 힘을 발휘하는 것은 이 기가 있기 때문이야.
그림이나 도형에도 기가 있다구요??
뿐만 아니라 글씨에도 기가 담겨 있어.
글씨 에도요??
그래, 대가는 붓끝에 기를 담아글씨에 옮겨놓지, 예를 들면
안평대군이 필생의 기를 담아 안견의 그림 앞에 쓴 '몽유도원
도' 라는 글씨는 현묘하다 못해 귀기까지 느껴지니까.
풍수도 기와 관련이 있나요?~
음, 매우 총명하구나 풍수의 요체가 바로 기라고 할 수 있지.
동기감응(同氣感應)이라는 거야. 같은 핏줄, 같은 환경에서 나온
생기끼리는 서로 반응한다는 원리가 풍수의 효력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있을 거야. 사람들이 명당을 찾아 헤매는 것은 땅에 묻힌
조상의 뼈가그 명당에서 나오는 기를 타고 왕성해져 후손에게
유익하게 작용하기를 바라기 때문이지.
토우가 선택적으로 살인을 했다는 것은 기의 관점에서 보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그것은 이치로 교수가 하려던 작업이 한민족에게 몹시 부정
적이었다는 사실을 추측하게 해준단다.
그렇다면 이치로 교수를 함정에 빠뜨려 가면서까지 작업을 추
진하려 했던 야마자키 이사장은 틀림없이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 거 겠군요.
미인계를 써서 이치로를 함정에 빠뜨렸다는 도시아키의 얘기
를 기억해 낸 기미히토가 끼여들었다. 사도광탄은 고개를 끄덕
였다.
세 사람은 동경대학교의 교정을 걸어 학교 뒤편의 호숫가로
갔다.
여기 잠깐 앉아 계시죠. 저는 연구실에 가서 가져올 게 있습
니다.
네 .
테드는 얼른 대답을 했지만 사도광탄은 이상하게도 묵묵히 입
을 다물고 있었다. 그 태도가 마치 그를 보내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아 테드는 사도광탄의 얼굴에 흘끗 눈길을 던지다 깜짝 놀
랐다 갑자기 그의 안색이 나빠졌던 것이다.
선생님 , 몸이 안 좋으세요??
사도광탄은 말없이 눈을 감아버렸다.
한참 동안 기다려도 기미히토가 나타나지 않자 테드는 얼마 떨
어져 있지 않은 연구실로 그를 찾으러 갔으나 혼자 되돌아왔다.
연구실 문이 잠겨 있는데요.
사도광탄의 안색은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아마 안 올 거야.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오늘 밤늦게나 돌아올 거야.
무슨 말씀이 있으셨나요?~
아니, 다만 교수의 얼굴이 반갑지 않은 사람과 만날 것 같
았어 .
나쁜 일이에요??
세상의 일이란 인간이 쉬이 짐작할수 없는 법이야 좋을 것
같은 일도 나빠지고 나쁠 것 같은 일도 좋아지는 법이지.
사도광탄은 뜻 모를 말만 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서 기다리는 것이 좋겠구나.
테드는 사도광탄의 말이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오랫동
안 기미히토가 돌아오지 않자 더 이상 거기에서 기다릴 수도 없
어 아파트로 되돌아갔다.
기미히토는 사도광탄의 말대로 밤늦게야 돌아왔다
걱정했습니다. 두 분이 혹시 길이라도 잃은 건 아닌가 해서
요.
놀랍게도 기미히토는 엉뚱한 얘기를 하고 있었다.
아니, 교수님. 우리가 학교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렸는지
아세요?~
무슨 소리예요? 연구실에 갔다 오니까 없던데.
테드의 눈길이 사도광탄의 얼굴에 꽂혔다.
아니 사도광탄 선생님.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런 것 같군요.
음, 그러고 보니 약간 이상한 것 같기도 하군요. 정신을 차려
보니 연구실 앞의 제 차에 앉아 있기에 약간 정신이 몽롱해져 차
안에 들어가서 쉬었나 보다고 생각했는데)
사도광탄은 이렇게 엉뚱한 소리를 하는 기미히토의 얼굴을 한
참 들여다보더니 뜻밖의 질문을 했다
기미히토 교수님은 최면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최면이요?
제 생각으로는 아마 그 사이에 어떤 자에게 최면을 당했던 것
같군요.
뭐라구요, 제가 최면을 당했다구요??
기 미 히토는 깜짝 놀랐다.
기억이 나지 않겠지요.
전혀. 하지만 제가 정말 최면을 당했을까요??
틀림없을 겁니다.
최면 상태에서 제가 아는 것을 말했을까요??
그랬을 겁니다.
이상하군. 내가 무슨 말을 했을까??
의식이 깨어나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도대체 누가 나를 납치하여 최면을 걸었을까요? 대관
절 내가 무엇을 했다고.
누군가가 교수님 모르게 교수님의 무의식 속에 있는 정보를
얻기 위해 법술을 부린 것이지요. 그것은 (묘제의 연구)때문입
니다. 교수님이 야마자키 연구소의 연구원인 도시아키와 만나
정보를 캐내려고 했던 것을 주목했겠지요. 그러니 그들은 도시
아키와 관련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연구소의 사람들일까요??
아무튼 최소한 야마자키 이사장과는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겠
지요.
야마자키는 기미히토의 무의식을 불러내어 아는 것을 모두 대
답하게 한 다카가와의 능력에 대해 내심 크게 감탄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를 일러 신풍을 만들어내는 법사라고 하던 것이 결
코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가 아니었다면 이치로 교수의 죽음이나, 기미히토라는 동경
대학교 교수가 도시아키와 접촉하여 연구소에서 비밀리에 진행
중이었던 작업을 추적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가볍게 넘겼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기미히토 교수가 다카가와의 최면에 걸려 무의식 상태
에서 말한 비밀 작업의 추적 동기에 대해서는 참으로 이해가 가
지 않았다. 컴퓨터의 이상을 일으키는 흙인형이 있었고, 그 흙인
형은 (묘제의 연구)에 대해서만 선택적 장애를 일으켰다고 했
다 게다가 이치로 교수가 실족사한 것도 그 흙인형의 신비한 힘
이 작용했기 때문이라는 진술은 너무도 황당했다
그러나 다카가와의 표정이 진지하게 변해가던 것을 떠올린 야
마자키는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은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지만
틀림없이 무언가가 있는 것이다. 야마자키는 전화기를 들었다.
비밀 작업의 보안을 위해서는 좀더 확실하게 진상을 파악해야겠
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저녁에 만났다
다카가와 선생, 참으로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야마자키가 정종을 한잔 들이키고는 마치 선생님에게 질문을
하는 어린아이 같은 표정으로 물어오는 것을 다카가와는 물끄러
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 기미히토라는 교수가 혹시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닐까요?~
다카가와는 말없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나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다카가와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세상에 토우가 컴퓨터에 이상을 일으키고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어쨌거나 그 사람은 그렇게도 비밀에 부친 우리 작업의 냄새
를 맡고 추적해 오지 않았던가요??
그래서 더욱 이해가 안 간단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는
내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얘기가 아닙니
까??
다카가와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게 뭐란 말입니까??
법 력이지요.
그렇다면 나의 작업은 앞으로도 계속 추적을 당하고 방해를
받는다는 얘기입니까? 기미히토 교수를 침묵하도록 만들어도
아무 소용이 없단 말입니까??
토우에 담았던 법력은 한시적인 것입니다. 영원한 힘은 아니
란 말이지요. 곧 사라질 것입니다.
언제 그 법력이 사라진단 말입니까??
다카가와는 술잔을 입에서 떼고 서쪽을 향해 턱을 조금 들고
는 마치 무엇을 느껴 보려는 듯 눈을 감고 천천히 숨을 골랐다.
한참 동안 같은 동작을 반복하던 다카가와는 석연찮은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 었다.
이상한 일이군. 그토록 강하던 법력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말았다니
네? 그 힘이 사라졌어요?~
그렇습니다.
다카가와의 단정적인 대답을 듣자 야마자키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 였다.
야마자키는 이미 무덤에서 이치로 교수를 죽인 힘을 느끼던
다카가와를 보았었다. 그때 다카가와가 그 힘은 조선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치로뿐만 아니라
자신까지도 그 토우의 목표라는 얘기에 못내 불안했었다. 그런
데 이제 그 기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하니 안심이 되었다
어쨌거나 그 토우의 기가 감쪽같이 사라졌다니 더없는 다행
이군요.
다카가와는토우의 기가 없어졌다는 얘기에 야마자키의 표정
이 되살아나는 것을 보고도 무슨 이유인지 이마를 찌푸린 채 탐
탁치 않은 눈길을 창 너머로 던지고 있었다.
운명의 시간
딕슨은 휴대용 컴퓨터를 켜고 철수 작전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는 주식을 모두 6등분했다. 하루에 6분의 1씩 파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는 생각에서였다 처음 이틀 간은 상승세 속에서 팔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 이틀은 보합세에서 판다. 문제는 마지
막 이틀이다.
한국의 투자자들이 갑자기 무서운 기세로 팔아치우는 외국 자
본에 대하여 두 눈을 크게 뜨고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리란 건 자
명한 일이다. 자칫 잘못하면 매수 주문이 뚝 끊긴 상태에서 하한
가로 며칠을 보내게 될지 모른다. 아니 최악의 경우에는 이제껏
번 것을 어느 정도 게워내야 할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물론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대비를 해두어야 한다
딕슨은 시계를 본다 뉴욕은 오전 열한 시. 지금이라면 아서가
사무실에 있을 것이다. 딕슨은 다이얼을 돌렸다.
회장님 , 딕슨입니다.
오오, 딕슨. 건강은 괜찮지??
물론입니다. 회장님도 좋으시죠??
좋다마다. 일은 여전히 순조롭지?
그럼요. 이제 서서히 철수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암, 그래야지 절대 욕심을 내면 안 돼.
염려 마십시오. 그런데 타이거의 자금은 예정대로 움직이겠
죠??
여부가 있나. 그런데 자네가 한국으로 가고 난 다음에 이 친
구들이 계약 내용을 약간 바꾸자고 해서 응해뒀네.
어떤 내용입니까?~
돈을 한국으로 보내지 않고 여기서 주식에 투자했을 경우의
기대 수익률을 더 올려달라는 거였어.
나쁜놈들, 막상 우리가 한국 시장에 손을 대고 나니까 그렇게
나오는군요. 약점을 잡았다 이거죠.
개의치 말게. 큰일 하는 사람이 그런 데 신경 쓰면 안 돼. 하
지만 자네가 꼭 알아야 할 중요한 내용도 있네.
그게 뭡니까??
한국인들로 하여금 타이거의 자금이 우리 투자에 대한 증거
금처럼 생각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거야. 우리가 벌어서 빠져
나왔을 때 자기네 자금이 대신 묶일까 봐 그러는 거지.
겁쟁이들, 꽤 몸조심을 하는군요.
한국 증권법에 특별한 조항이라도 있을까 봐 그러겠지.
세상에 그런 법이 있을 리 있나요?~
하여간 계약서를 반드시 한번 읽어봐 자네 컴퓨터에 이메일
로 보낼 테니.
알겠습니다.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래, 수고해.
딕슨이 주식을 한창 팔아치울 때 외국에서 30억 달러라는 거
금이 들어온다 그러면 투자자들은 안심을 할 것이고 딕슨은 마
지막 한 주까지 무사히 처분하고 한국을 뜬다. 그러고 나면 그
자금 역시 잠시 은행에 머물러 있다가 철수한다.
계획은 완벽했다.
'노 프러브럼 '
딕슨은 컴퓨터를 끄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오후 주식 시장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딕슨이 엄청난
자금을 갖고 들어와 주식을 사대니 냄비만한 한국 주식 시장이
들끓을 것은 당연했다.
한국에는 주식에 한이 서린 투자자들이 많았다. 한국인들은
늘 다람쥐처럼 조심하기보다는 멧돼지처럼 앞만 보고 돌진하곤
했고, 이런 경향은 장이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투
자자들을 수렁에 빠뜨렸다. 장세란 늘 바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이제껏 품은 한을 일시에 다 풀어버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아니 비단 한 번의 기회일
뿐 아니라 이제 한국의 주식 시장도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다는
확신을 가졌다
많은 종목들이 하루 종일 팔자 없는 상한가였다가 장 끝 무렵
에 딕슨이 6분의 1에 해당하는 주식을 내놓자 한동안 출렁거렸
다. 그러나 워낙 매수세가 강해 주식 시장은 여전히 초강세인 채
로 장을 마감했다.
오후 네 시 반. 이 시간이면 증권사는 모든 작업을 마친다. 이
제 30분후인 다섯 시 정각에 숙직 직원이 터미널을 꺼버릴 것이
다. 수아는 대학교의 전산실에 앉아 중형 스테이션을 통해 스탠
더드증권의 컴퓨터에 접속했다.
미리 알아둔, 홍콩에 있는 본사의 In를 집어넣자 모니터에 각
투자자들의 주식 거래 현황이 나타났다. 다국적 자금으로 위장
한 딕슨의 투자 수익률은 이미 40퍼센트를 넘고 있었다. 실로 엄
청난 금액이었다 이 돈이 불과 며칠 사이에 한국을 빠져나간다
고 생각하니 아찔했다.
수아는 떨리는 손길로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이제껏
수없이 해킹을 해왔지만 오늘처럼 긴장되기는 처음이었다. 시간
은 불과 30분. 그동안 상대방 컴퓨터의 논리 구조를 모두 파악하
고 자동 변환 프로그램을 설치해야 한다. 1분이라도 늦는다면
모든 것은 도로아미타불이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수아의 손가락
은 정확하게 키보드를 짚어나갔다
음
수아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자동 변환 프로그램을 설
치하기 위해서는 먼저 모두 146군데를 손봐야만 했다 30분이라
는 시간 안에 다할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최선을 다
할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보이지 않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키보드를 두드려 대면서도 수
아는 쉴새없이 다음 작업에 대한 연구에 몰입해 있었다. 초조하
고 불안했지만 수아의 손가락은 조그만 실수조차 없이 키보드를
계속 두드렸다. 수아의 이마에는 구슬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26분이 지날 무렵 정지 작업은 끝났다. 이제는 자동 변환 프로
그램을 전송하기만 하면 된다. 수아는 정신없이 자동 변환 프로
그램을 걸고는 입력키를 눌렀다 남은 시간은4분. 이제는 운명
을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은 컴퓨터의 속도가 좌우
할 것이다
컴퓨터는 프로그램을 보내기 시작했다. 이제 몇 초 후면 모니
터에 전송 속도가 나타날 것이다.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는 수아
의 얼굴에는 비장함마저 서려 있었다. 모니터에 3퍼센트라는 숫
자가 뜨는 순간 손목시계는 10초 경과를 나타내고 있었다 초조
한 손길로 계산기를 두드리던 수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안 돼 !
수아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계산기에는72퍼센트라는
숫자가 찍혀 있었다. 10초에 3퍼센트라면 1분에 18퍼센트, 4분
이면 72퍼센트밖에는 보내지 못한다. 1분 33초가 모자라는 것이
다. 수아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끝장이야, 안 돼 .
수아의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처절한 절망의 목소리였다.
자신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구할 수 있는 최고 성능의 컴
퓨터에 실수 한 번 하지 않고 키보드를 눌렀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시간의 한계는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다들 퇴근하고 숙직 자들밖에 없을 거 아냐? 그렇다면 그들을
묶어둘 수 있지 않을까??
정완의 다급한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순간 수아의 머
리에 뭔가가 번쩍했다
아, 그렇지.
수아는 휴대용 컴퓨터를 켜고는 무언가를 종이에 옮겨적었다.
스탠더드증권의 전화 번호예요. 대표 전화지만 회선이 많이
있겠지요. 전화를 걸어야 해요. 컴퓨터가 전송을 끝낼 때까지 말
이에요, 다른 일을 못하게 전화로 묶어두어야 해요.
정완은 급히 직원들을 불러 모든 회선에 전화를 넣도록 했다.
수화기를 통해 받지 못하고 있는 전화벨 소리를 듣고 정완이 신
호를 하자 수아의 얼굴에는 다시 생기가 살아났고 자동 변환 프
로그램은 무사히 전송됐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어?~
모르겠어요. 순간적인 생각이었어요.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도 수아의 흥분은 가라앉지 않았다.
수아의 정성에 하늘도 감복한 모양이야.
긍융 전쟁
딕슨은 결코 조급하게 서두르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는 한
국 시장을 보고는 언제나 오후 장에서 움직이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장을 움직이는 힘이 있는 그로서는 약삭빠르게 남보다
먼저 치고 빠질 필요가 없었다.
그는 장 끝 무렵 증권사에 나갔다. 6분의 1은 어제 상한가로
팔았고, 오늘은 나머지 다섯 덩어리 중 하나를 팔아야 했다. 딕
슨은 지점장실에서 모니터를 찬찬히 들여다봤다. 종목 선택을
하는 데 있어 딕슨은 누구의 조언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월스트
리트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과시하는 그에게 한국 주식 시장의
중개인들이란 우스운 존재들이었다.
그는 한국에 도착한 첫날, 홍콩에서 온 부사장과 지점장에게
못을 박았다.
내가 주식을 사고 파는 데 있어 옆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마
시오. 나는 오로지 내 판단에 따라 할 것이오. 만약 옆에서 조언
을 한다거나, 풍문이나 소문을 가져온다면 나는 그 즉시 모든 자
금을 빼내 다른 증권사로 갈 것이오.
딕슨은 여섯 종목을 골라 6분의 1에 해당하는 금액을 맞췄다
시황이 나빠질 경우 발이 무거워질 수 있는 종목을 우선적으로
골라낸 것이다. 딕슨은 메모지에 종목을 적어서는 지점장을 불
렀다.
기술적으로 파시오.
이것을 다 말입니까??
그렇소.
알겠습니다.
딕슨의 전망은 정확했다. 아침부터 그 많은 물량을 내놓는 것
보다 물량 부족의 초강세장에서 오후 장 끝 무렵에 내놓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었다. 물량에 목이 말라 있던 투자자들은 딕슨의
주식이 나오는 대로 받았다. 워낙 엄청난 물량이었지만 강세 시
장에서는 물량 확보:가 최고라는 단순화된 전략에 젖어 있던 투
자자들은 무서운 기세로 덤벼들었던 것이다.
딕슨은 상한가에 모두 팔았다. 둘째 날도 성공이었다
아저씨가 계시니 문제 될 것이 없겠지요.
정완의 존재는 수아를 크게 안심시켰다. 컴퓨터 조작은 자신
이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주식 시장에서의 작전은 아무래도 전
문가가 있어야 될 일이었다.
놀랍구나 어떻게 이토록 완벽하게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니??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정완은 풀리지 않는 일이 있는지 미간
을 찌푸렸다.
생각 외로 일이 쉽지 않아.
그가 주식을 판 돈으로 가장 인기 없는 종목의 주식들을 대량
매입하면 되잖아요??
대단한 계획이긴 하지만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
정완은 골똘히 무슨 생각엔가 빠져 있었다
어떤 문제가 있는데요??
주가를 일시에 폭락시켜야 해.
어째서죠?~
그가 인기 없는 종목의 주식을 잔뜩 사고 있을 때 주가가 대
폭락하여 며칠 간 매수세가 전혀 없어야 완벽해.
아, 그렇군요.
어떻게 주식을 폭락시키는가가 문제야.
그게 가능할까요? 인기가 없는 종목의 주식들도 대량으로 매
입되고 있는 장세에서 어떻게 주가의 폭락을 이끌어내죠??
지금 당장은 뾰족한 방법이 없어.
딕슨의 속셈을 소문내면 어떨까요??
본래 풍문과 소문이 난무하는 곳이 증권 시장이야. 단순히 소
문을 내는 것만으로는 이런 초강세장에서는 효과를 볼 수 없어.
더군다나 딕슨은 교활하게도 주식을 매입할 당시 몇 번이나 샀
던 주식을 한꺼번에 내놓았던 적이 있어. 주식을 싸게 사려는 목
적과 더불어 소문을 무력화시키는 예방 조치였지.
그러니까 소문을 뒷받침하는 가시적인 움직임이 있어야 한다
는 말인가요?,
바로 그거야. 누군가가 소문을 따라 가진 주식을 던지다시피
내놓아야 비로소 진정한 소문으로서의 효과를 발생시키지.
그런 사람을 찾는다는 건 불가능할 것 같아요.
뒤늦게 생각해 내긴 했지만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해결책이
없는 터라 정완은 일단 자동 변환 프로그램을 통해 인기가 없는
부실 회사의 주식을 잔뜩 사들였다
기미히토가 만든 프로그램의 정확도는 역시 대단했다. 수십
개 종목을 사들였는데도 단 1원의 오차도 없었다 수아는 기미
히토의 실력에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인간이란 존재는 정말 무섭네요.
나도 수아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 이런 엄청난
조작이 가능하다니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는군.
사실이 그랬다 정완은수아를 보면서 '세상은 컴퓨터를 아는
자가 지배한다' 라는 말이 과연 빈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뼈저리
게 느끼고 있었다. 나이 어린 여학생에 불과한 수아가 혼자서 공
포의 핫머니와 대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컴퓨터가 있기에 가능
한 것이다
감쪽같이 됐어요.
수아는 아무런 변화도 나타나지 않고 있는 스탠더드증권의 모
니터를 보면서 싱긋이 웃었다.
딕슨이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되면 혼비백산하겠군.
정완도 웃었지만 그에게는 심각한 고민 거리가 하나 남아 있
었다
그런데 어떻게 주가를 떨어뜨리느냐가 문제야.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애써 성공한 작업이지만 주가가 떨
어지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기본적으로 투기 자본을 막을 수 있는 건전 세력이 있어야 하
는데 우리 시장은 너무 약해
고민하던 정완이 답답한지 한숨을 내쉬었다 재계에서 잔뼈가
굵은 그는 이런 경우 아무리 친한 사이라 하더라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한창 치솟는 주가를
떨어뜨릴 목적으로 엄청난 돈을 쏟아부을 사람은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아저씨 회사에는 돈이 없어요??
순진한 수아는 정완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직선적으로
물었다
우리는 제조업을 하니까 자금이 모두 생산에 들어가 있단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전문적인 투자자야. 그것도 엄청난 양의 주식
을 거래하는 개인 투자자지.
잠시 말을 끊었던 정완은 다시 낙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불가능해. 그럴 사람이 있지도 않겠지만 있어도 찾을
수가 없어.
사도 선생님께 의논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그분이 이런 일에 무슨 도움이 되겠어??
일본으로 가시면서 어려운 일이 생기면 연락하라고 하셨어
요. 이상하게도 사도 선생님에게는 꼭 방법이 있을 것만 같은 예
감이 들어요.
사실이 그랬다 수아는 사도광탄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수아는 안부도 물을 겸 동경으로 전화를 걸었다.
묵묵히 수아의 이야기를 듣던 사도광탄의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흘러왔다
일전에 신문에서 본 사람이 있는데, 재벌 그룹의 자금줄인 한
금융 회사를 삼키려 했던 배포가 큰 인물이었어.
수아가 조급하게 물었다.
재벌 그룹의 오너예요?~
아니야. 재벌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지. 하지만 돈을 능가하는
배짱과 머리가 있는 사람이었어. 자금을 지원하는 후배가 있었
는데 같이 술을 마시다가 재벌의 횡포에 당한 억울한 사정을 듣
고 의리 하나로 같이 거사를 도모했다고 하더군. 그 사람의 인격
을 알 수 있게 하는 부분이었어.
요즘 보기 드문 사람이네요.
그래. 그에게 수아와 같은 애국심만 있으면 문제는 풀리지 않
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어떻게요?~
만나서 자초지종을 설명해 봐 증권에는 이력이 난 사람일 테
니까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자료만 넘겨주면 혹 도움을 얻
을 수 있을지 모르지.
자기 돈 한푼 안 쓰는 관리들도 꼼짝하지 않으려는데 엄청난
자금을 동원하는 일에 응하려 들까요??
세상에는 묘한 사람도 있는 법이야. 김정완 씨와 같이 가서
있는 그대로 설명을 하려무나.
박 회장은 벌써 두 시간 이상이나 혼자 책상 앞에 앉아 무언가
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키가 작고 머리는 벗겨졌으나 턱이
歌은그의 얼굴은 극도로 신중한 순간에도 약간의 장난기가드
러나 보였다.
이윽고 그는 고개를 가로 흔들어대며 인터폰에 대고 어린아이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최 이사 불러줘 .
잠시 후 코가 오똑하고 눈이 동그란 게 피노키오같이 생긴 삼
십대 후반의 한 사나이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부르셨습니까??
자네 이상하다는 생각이 안 들어??
뭐가요??
뭐긴 뭐야? 주식 말이지 .
글쎄요, 특별히 이상하게 생각되는 건 없습니다만
흐름이 우습잖아. 원화 급락으로 금융 위기니 뭐니 하던 게
불과 일주일 전인데 지금은 폭등세란 말이야.
그건 외국인 투자자들이 엄청난 자금을 시장에 투입했기 때
문이 아닙니까??
글쎄, 그게 이상하단 말이야.
최 이사는 박 회장의 직관이 또 꿈틀대고 있다는 생각이 들
었다.
우리 어머니는 이럴 때면 늘 몸을 움츠리셨어.
그러셨지요.
최 이사의 기억에 모두가 백 할머니라 부르던 박 회장의 어머
니 모습이 떠올랐다.
백 할머니는 모두가 흥분하여 폭등이니 뭐니 떠들어대고 전문
가들이 연일 신문에 지금이야말로 주식에 투자할 때라고 써대면
오히려 보유하고 있는 주식을 몽땅 팔아버렸다. 반대로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주식 폭락이라는 기사가 실리고 사람들이 아우성
치며 투매 현상이 일어나면 그때부터는 나오는 대로 매물을 사
모았다.
결과는 언제나 할머니의 승리였다. 기관이든 개인이든 도저히
할머니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백 할머니의 백전백승 비법은 무
욕과 정도였다. 욕심을 버리고 정도를 걸으면 길이 훤히 보인다
는 것이다.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라고 어려서부터 백 할머니 밑
에서 배운 박 회장의 주식 운용도 보통 사람과는 차원을 달리하
는 바가 있었다.
조지의 외환 공격이 극에 달하여 주식 시장이 꽁꽁 얼어붙은
그 정점에서 박 회장은 운용 가능한 모든 자금을 동원하여 주식
을 샀다. 남들은 모두 무모하다고 비웃었지만 그 시기에 과감하
게 주식을 사들인 투자자는 박 회장과 몇몇 외국인들뿐이었다.
그 매수 작전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상하게 폭등하고 있어. 그럴 이유가 없는데도 엄청난 자금
이 증시로 몰리고 있단 말이야.
현재 우리 나라의 경제 여건으로 보면 비정상이긴 합니다.
아니 그것도 그렇지만 조지가 한창 재미를 보는데 엄청난 주
식 투자 자금이 몰려왔고, 조지는 겨우 본전만 건지고 도망가 버
렸잖아.
그랬습니다.
이상하잖아. 최악의 상황에서 그런 대규모 자금이 들어왔다
는 게??
증권 전면 개방의 효과가 커서 그런 게 아닐까요??
그렇다면 조지가 한국으로 대규모 자금이 몰릴 것을 예상하
면서도 한국 돈을 공략했다는 것이 이상하잖아. 손실이 눈에 뻔
히 보이는데 말이야.
듣고 보니 그렇군요.
뭔지 확실치는 않지만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가 진행되고 있
는 것 같아. 어쨌든 감이 이상해. 우리 건 모두 쏴버려.
모두 말입니까??
그래, 하루에 3분의 1씩 내질러. 오늘은 오후 장에, 내일과 모
레는 장 시작할 때 상한가 동시 호가로 내놔.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 폭등세는 상당히 오래갈 것 같
은데요. 정보에 의하면 엄청난 규모의 새로운 영국 자금이 들어
왔다는데요.
아니야 어쩌면 하한가로도 안 팔리는 사태가 발생할지 몰라.
어머니가 계셨어도 이럴 때는 팔라고 하실 거야. 팔아버려.
알겠습니다.
최 이사는 회장실을 나서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들
은 틀림없이 괴상한 모자였다.
다음날 오전 박 회장은 인적 구성이 특이한 두 사람의 방문을
받았다.
김정완이라고 합니다.
눈썹이 짙고 신념이 강해 보이는 사십대 사나이 곁에는 이십
대 초반의 이지적으로 보이는 여성이 앉았다. 박 회장은 아름다
운 검은 눈동자를 가진 야무진 표정의 여성을 주시했다.
차를 한잔 마실 때까지도 아무런 말이 없이 앉아 있던 김정완
은 진지한 목소리로 수아를 소개했다.
라이언펀드라는 국제 투기 자금이 한국의 증권 시장을 노리
는 것을 알아내고는 혼자서 라도 그들을 막아보고자 서울로 온
스탠퍼드의 유학생입니다.
박 회장은 안경 너머로 앳된 모습의 수아를 응시했다. 수아는
이제까지의 일을 있는 그대로 설명했다.
그게 정말이오?~
박 회장은 처음엔 믿을 수 없다는 듯 몇 차례나 반문하다가 수
아가 휴대용 컴퓨터를 꺼내 딕슨의 주식 거래 패턴을 보여주자
놀라움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상상으로나 가능한 일이 지금 일어나고 있단 말이군.
이제 주식 시장은 대폭락 사태를 눈앞에 두고 있어요. 선량한
외국인 투자자와 국내 투자자들이 엄청난 손해를 보게 돼요. 가
계는 멍들 대로 멍들고 외국인 투자자들은 자금을 대거 빼내가
고 말 거예요. 무시무시한 금융 위기가 닥치고 있어요.
수아의 애원하는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박 회장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
그에게는 아직도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실감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딕슨을 무너뜨려야 해요. 그가 엄청난 물량을 쥐고 있을 때
주식값을 대폭 떨어뜨려야 해요. 우리 나라의 금융 붕괴를 막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어요.
음, 딕슨이 물량을 쥐고 있을 때 주식값이 떨어져야 다른 투
자자들이 손해를 보지 않는다는 말이군.
내게 찾아와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은, 주식값을 떨어뜨리는 역
할을 맡아달라는 것이오??
네. 증권계의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에요.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 그렇다면 그 시기는 언제라야
하오??
내일은 해야만 해요. 내일이면 딕슨은 보유 주식의 반을 처분
하게 되거든요. 그들 몰래 비인기 종목을 매수하고 있지만 언제
발각될지 몰라요. 길어야 하루 이틀 막을 수 있을 뿐이에요. 그
가 모든 걸 알아차리기 전에 주식값을 폭락시켜야 해요.
시간이 너무 촉박하군 내게도 생각해 볼 시간이 있어야 하지
않겠소. 확인도 해야겠고
박 회장은 무거운 표정을 지었다
딕슨은 내일 다시 엄청난 물량을 매도할 거예요. 그러면 또
저희가 시원찮은 종목을 사들일 거구요. 제 말이 맞으면 확인이
된 것으로 생각하셔도 될 거예요. 물론 그 다음은 회장님의 마음
에 달려 있지만요.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거나 젊은 사람이, 그것도 여성이 기특하오.
박 회장은 헤어지 면서 수아의 손을 꼭 쥐었다
박 회장은 인터폰을 눌러 최 이사를 불렀다
어제 오늘은 상한가로 다 나갔나??
네. 다 나갔습니다 하지만 너무 아까웠습니다.
흐흐, 그랬겠지. 그런데 지금 엄청난 정보가 들어왔어.
엄청난 정보라뇨
오늘 시시한 종목들이 전부 상한가로 끝난 것 알고 있지??
네.
알고 보니 거기에는 까닭이 있었더군.
무슨 까닭이 있었습니까?~
앞으로도 며칠 간은 계속 그 종목들이 상한가일 거야.
확실한 정보입니까??
틀림없어, 있는 돈 다 털어 사놓으면 무조건이야.
어떻게 할까요? 지시를 내려주십시오.
아, 이 사람아. 다 끝난 거지, 뭘 물어 사기만 하면 상한간데
몽땅 다 사야지 .
알겠습니다. 증권사에 들어가 있는 돈말고도 지금 놀고 있는
현금, 신용금고에 들어와 있는 돈, 파이낸스의 보유 어음도 몽땅
매각하여 주식을 사겠습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최 이사는 곧 우울한 표정을 짓는 박 회장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아니 , 회장님 . 왜 그러십니까?~
억울해.
뭐가요??
그런 엄청난 정보를 얻고도 떼돈을 벌기는커녕 가진 돈을 다
날려야 할 판이니 말이야.
사시면 무조건 벌 텐데 무슨 말씀입니까??
이봐, 최 이사.
네, 말씀하십시오.
자네 내 선친에 대해서 아나??
아 다마다요. 회장님께서 늘 자랑스러워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래, 그분은 지사였어. 내게도 언제나 나라를 생각하는 인물
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지. 그런데 그분의 장남인 내가 이런
상황에 편승하여 돈을 벌겠다고 덤벼서야 되겠는가 말이야.
그야 물론 안 되죠. 회장님은 그런 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제
가 회장님을 존경하는 것도 그 인간적 풍모 때문인데요.
그래 하지만 나도 인간이니 정말 눈물이 나는구먼. 엄청나게
벌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외면하고 오히려 손해를 봐야만 하는
상황이 발생했으니 말이야.
자초지종을 듣고 난 최 이사 역시 깜짝 놀랐다. 물론 박 회장
의 아픈 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한삼구한테 연락해. 그놈은 원체 발이 넓으니까 내일 아침 시
장 전체에 소문을 좌악 퍼뜨리라고 해. 그리고 오늘 내 돈을 있
는 대로 다 털어 넣어서 종목에 상관없이 주식이란 주식은 다 사
모아. 그리고 내일 아침 첫 장에 하한가로 전량 패대기쳐버려,
전량 하한가로. 그 쌍놈의 주식 시장을 작살내 버려.
그러면서도 박 회장은 못내 마음이 아픈 모양이었다. 불과 며
칠이면 1년치 이상을 손쉽게 벌 수 있는데 거꾸로 손해를 보아
야 하니 가슴이 아프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도 이렇게 하셨을 거야. 암, 이렇게 하셨고말고.
박 회장은 전화기를 들어 미국에 있는 딸의 번호를 눌렀다. 마
음이 울적할 때면 언제나 딸과 대화하는 것이 그의 습관이었다
피의 화요일
다음날 아침 주식 시장은 벌집을 쑤셔놓은 듯했다. 탄탄대로
를 걷고 있다고 생각했던 주식 시장은 삽시간에 피바다로 변했
다. 개장하자마자 이상한 소문이 나돌더니 급기야 증권가의 큰
손 박 회장이 보유한 주식을 하한가에 모두 던져버렸다는, 공식
확인된 소식이 증권가에 널리 퍼졌다.
외국의 투기 자본이 한꺼번에 팔아치우고 나간대.
그렇지 않아. 그들의 매매 패턴이야. 벌써 몇 번이나 다 팔았
다가 다시 사곤 했잖아.
이번엔 달라 박 회장이 가진 주식을 몽땅 던졌어. 매기가 없
어 거의 하한가로 빠졌다니까.
뭐, 박 회장이 내왔다구??
시장 분위기는 급속도로 식었다.
투자자들은 앞을 다투어 주식을 내왔고 거의 전종목에 매수
없는 하한가가 속출했다.
피의 화요일이었다.
딕슨은 기분 좋게 눈을 떴다. 간밤에 마신 술기운이 아직 완전
히 가시지는 않았지만 생애 최고의 일이 어려움 없이 이루어지
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가벼웠다 휘파람을 불어대며 샤워를
마친 딕슨은 1층으로 내려가서 아침 식사를 했다.
인생이 바뀌고 있었다. 며칠만 있으면 라이언펀드의 사장이
된다는 생각이 딕슨을 한없이 관대한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는
종업원을 불러 1백 달러짜리 지폐를 내밀었다. 여자 종업원은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고 돈을 받았다.
식사를 마친 딕슨은 증권 회사를 향해 걸었다. 호텔과 증권 회
사는 식사 후 산책을 경하여 걸으면 적당한 거리에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딕슨 씨.
지점장은 여느 때처럼 고개를 깊이 숙여 딕슨을 맞았다.
지점장, 오늘 얼굴이 왜 그렇소?~
딕슨은 지점장의 얼굴이 여느 때와 달리 안 좋아 보이는 것을
보고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이제 미국으로 돌아가면 자신이 챙
겨야 할 부하 직원들이 수백 명은 될 것이라는 생각이 스치자 딕
슨은 더욱 관심 있는 표정을 지었다
시장이 매우 안 좋습니다.
뜻밖의 보고였다.
북한에 쿠데타라도 났답니까?
그런 일이 아니라면 아침부터 시장이 그렇게 안 좋을 리가 없
었다 딕슨이 생각하는 한 한국의 주식 시장은 순풍에 돛 단 격
이었다. 돌발 변수란 북한의 변괴 정도였다 상장 기업 몇 개가
동시에 부도가 나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자신이 투입한 엄청난
자금의 힘으로 충분히 묻어버릴 수가 있었다. 딕슨의 목소리에
는 여유가 있었다.
그게 아니고 주식 시장에 괴상한 소문이 떠돌고 있습니다.
주식 시장엔 늘 소문이 많은 법이오. 그래, 무슨 소문입니
까??
딕슨 씨와 관련된 소문입니다.
뭐요? 나와 관련된 소문이라구??
그렇습니다.
대체 그 소문이란 게 뭐요??
라이언펀드에서 엄청난 자금을 세계 각국의 투자 자금인 듯
위장하여 한국 시장에서 단기간에 주가를 띄우고는 일시에 철수
해 버린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으음
딕슨은 뒷머리를 망치로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도대체 어떤 놈이 그런 소문을 퍼뜨린다는 겁니까??
그건 알 수는 없습니다만 우리 회사에 엄청나게 많은 전화가
걸려오고 있습니다.
어째서 여기로 전화가 걸려온단 말이오??
딕슨은 자신도 모르게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 자금들이 결국은 라이언펀드의 위장된 자금이냐고 물어오
고 있습니다.
으으..
누가 퍼뜨린 소문인진 모르지만 이런 정도로까지 얘기가 흘러
나온다면 결코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소문은 결국 소문에 불과한 법이오. 전적으로 부정하시오.
그러나 일이 곤란하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왜요??
한국 시장에서 개인 투자자로는 최고의 큰손이 라는 박 회장
이 보유하고 있던 주식을 하한가에 몽땅 내놓아버렸습니다. 몽
땅 말입니다.
뭐라구요??
딕슨은 급히 모니터를 들여다봤다.
시장 상황은 어제와는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전종목 상한가이던 것이 오늘은 모두 하한가 가까이 내려
가 있었다. 당황과 초조가 밴 손길로 딕슨은 급히 키보드를 두드
렸다.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종목들도 별로 차이가 없었다
내놔요, 전부 내놔.
그러면 폭락세를 부추길 뿐입니다 팔릴 리도 없구요.
맞는 말이었다. 이런 폭락세에 물량을 던져봐야 팔릴 리가 없
을 것이다. 딕슨은 급히 머리를 돌렸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할
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초점이 없는 눈길로 지점장을 쳐다
보는 딕슨은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 계획이 워낙 치밀했던 만큼
차질에 대한 충격도 컸다.
그러나 비극은 이제 겨우 시작이었다.
아니 ,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딕슨의 거래 계좌를 훌어보던 지점장이 비명을 질렀다.
무슨 일이오??
딕슨의 눈길이 신경질적으로 지점장의 얼굴을 향했다.
며칠 동안 팔기만 한 줄 알았는데,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
이죠??
무슨 일이냐니까요??
딕슨은 짜증스런 목소리로 지점장을 다그치면서 본능적으로
모니터를 들여다봤다
억 !
이상한 수치들이 딕슨의 눈길에 잡혔다. 현금 계정에 있어야 할
숫자들이 보이지 않는 대신 엉뚱한 주식들이 잔뜩 잡혀 있었다.
이게 뭐요??
지점장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딕슨 씨 주식을 다 판 줄 알았는데 이것들이 도대체 뭡니까?
엄청난 주식을 다시 사들이지 않았습니까??
무슨 말이오, 누가 무엇을 샀다는 거요?~
여기를 보세요.주식 매도 금액이 다시 매입 금액으로 전부
잡혀 있지 않습니까? 여기 물건들도 확실히 잡혀 있잖아요??
누가,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했어??
딕슨의 목소리와 얼굴은 이미 산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딕슨 씨말고는 아무도 매매에 관여한 사람이 없으니, 그야 당
연히 딕슨 씨가 했겠죠.
뭐야? 내가 그랬다고??
다른 사람은 아무도 손을 댈 수 없었으니까요.
무슨 개소리야. 그건.
우리 회사의 그 누구도 주식의 매매에 관여해선 안 된다고 딕
슨 씨가 맨 처음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뭐라고? 이 죽일 놈들아, 너희들이 손대지 않았으면 누가 손
을 댔단 말이야 너희들은 모두 형무소로 갈 줄 알아.
함부로 말씀하지 마세요. 도대체 누가 손을 댔단 말씀입니
까??
뭐라고? 죽어 , 죽어 이 개새끼야.
딕슨은 성난 투우처럼 미쳐 날뛰었다. 지점장실의 물건들을
있는 대로 집어던지며 길길이 날뛰는 딕슨을 증권 회사의 직원
들은 아무도 말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주식 시장은 며칠 동안 사자 없는 하한가 행진을 거듭한 끝에
야 비로소 반전세로 돌아섰다 라이언펀드 회장 아서가 미국에
서 날아와 보유한 주식을 모두 정상적인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넘겼다. 그들 사이의 장외 거래에 대한 자세한 내막은 시장에 알
려지지 않았지만, 한국의 경제를 희망적으로 보는 외국인 투자
자들은 아서에게 처음 딕슨이 한국에 가지고 들어왔던 원금을
보장해 주었다
아서는 한국의 증권 당국을 찾아가 정중히 사과했고, 조지는
더 이상 한국과 같이 건실한 나라에 대한 환투기를 하지 않겠다
고 발표했다. 그러나 비행기가 김포공항을 이륙하는 순간 아서
의 자존심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졌다. 언젠가 기회만 온다면
한국인들에게 자신이 누구인가를 보여주겠다는 다짐을 수없이
하면서, 아서는 웃는 얼굴로 독한 위스키를 들이켰다.
수아, 결국 해내고 말았군.
아저씨가 안 도와주셨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거예요.
겸손하기는.
정완과 수아는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간의 긴장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두사람은 저녁
후에 두세 군데의 칵테일바를 돌아다녔다 술이 그다지 세지 않
은 수아도 오늘만은 그녀답지 않게 마셔댔다
네일 같이 미국으로 돌아갈까??
잠시 생각하던 수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본으로 가고 싶어요. 사도광탄 아저씨 기미히토 교수님,
그리고 테드와 만나고 싶어요. 가서 멋지게 성공했다고 말하고
감사드리고 싶어요. 그분들은 정말 대단해요.
나도 놀랐어. 무엇보다도 그 사도광탄이라는 분에게는 일류
학교를 거쳐 사회에서도 일류로만 지내왔다고 자부한 내가 사실
은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로 지내왔는지 깨닫게 되었어. 수아도
그 분에게 배울 것이 참 많을 거야. 그럼 일본에 들렀다 오렴. 하
지만 오늘 밤은 내게 취하는 법을 배워야 해.
호호호.
두 사람의 대작은 밤이 깊도록 이어졌다.
묘제의 연구
수아가 딕슨의 투기를 막아내고 일본으로 오자 누구보다도 놀
란 건 기미히토였다
아니, 정말 그 엄청난 투기꾼을 막았단 말인가요??
그 작전대로 해서요?~
네. 교수님의 프로그램 덕분이었어요.
맙소사, 나는 빈틈이 많을 줄 알았는데.
사도광탄도 흡족한 얼굴이었다.
기미히토는 야마자키 연구소와의 싸움에서 수아가 큰 도움을
줄 것이라는 사실을 감지하고 있었다. 이제는 예전처럼 도시아
키를 만나 그에게서 비밀을 캐내려고 애쓸 필요가 없었다.
해킹
수아의 해킹이 있는 한 기미히토는 앉아서 야마자키 연구소의
모든 정보를 샅샅이 살펴볼수 있었다 수아는 야마자키 연구소
의 비밀 파일에 접속한 후 키보드를 기미히토에게 넘겼다.
이상하군, (묘제의 연구)라는 파일명의 자료는 연구소 파일
에 없는데??
몇 시간이나 인구소의 네트스테이션을 뒤지던 기미히토는 실
망한 얼굴로 수아를 돌아봤다.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 파일의 이름을 지워버리거나 바꾸는
경우가 있어요. 그렇다면 다른 방법으로 해보죠.
역시 해킹에 익숙한수아는 경험이 많았다. 잠시 생각하던 수
아는 방법이 떠오른 듯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방법으로 검색해 볼 수 있을지도 몰라요. 중요 연구원들
의 작업 내용을 일일이 검색해 보는 거예요. 동경대학교에 왔던
파일의 내용을 일부라도 기억하시겠죠??
물론 기억해요. 왜 그 생각을 진작 못했을까??
연구소는 연구원들의 각각의 ID에 보안 장치를 해두었지만
수아는 묘한 방법으로 그들의 ID 를 전부 알아냈다.
기미히토는 세상에 해커가 존재하는 한 인간이 컴퓨터에게 지
배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수아의 가늘고 긴 손
가락이 날래게 움직이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작업은 생각처럼 어렵지 않았다 이렇게 모든 연구원의 파일
을 자신의 손금 보듯 알아내 버리는 데에는 어떤 비밀도, 보안
장치도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기미히토는 아무리 해도 자신이 동경대학교에서 보았
던 내용을 찾아낼 수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자료가 없는데야 수아인들 방법이 있을 수 없었다. 그제야 기
미히토는 도시아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묘제의 연구)는 야마자키 이사장이 직접 관리해:
그러나 야마자키라는 이름이 붙은 파일도 그의 것이라고 짐
작되는 파일도 없었다. 야마자키는 컴퓨터를 쓰지 않거나 그의
개인용 컴퓨터는 외부와 통신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결론이 얻
어졌다.
도시아키처럼 가까운 친구를 통해서도 그 자료를 볼 수 없고,
컴퓨터 해킹도 안 되니 방법이 없군요.
기미히토는 손을 드는 수밖에 없었다. 기미히토는 습관처럼
난감한 표정으로 사도광탄을 돌아봤다. 사도광탄은 잠시 생각하
더니 기미히토에게 물었다.
이치로 교수와는 생전에 친분이 있었나요??
아뇨, 모르는 사이입니다.
이치로 교수의 전공은 무엇이었지요??
그것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필요하다면 학교에 전화를 해보
겠습니다.
기미히토는 즉시 학교에 전화를 걸어 이치로와 같은 학부의
동료 교수를 찾았다 이치로는 한때 동경대학교 동양문화연구소
전임 교수를 맡았던,조선의 역사와 문화에 정통한 학자였다는
것이 저쪽의 대답이었다.
역시 수수께끼의 실마리는 그 (묘제의 연구)에 있다는 얘긴
데 이런 가정이 가능하겠군요.
어떤 가정이죠??
기미히토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이치로가 조선에 정통한 학자였다면 동양문화연구소에서 그
가 작업하던 것은 조선과 관련된 어떤 내용이었을 겁니다.
그럴 가능성이 높겠군요.
그런데 그 내용은 한반도에 크게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무엇이었겠지요. 왜냐하면 토우가 그를 살해 했으니까요.
그렇군요. (묘제의 연구)가 과연 어떤 자료인지 더욱 궁금해
지는데요. 도대체 무슨 내용이기에 토우가 기를 발하여 작업의
진행을 막고 사람까지 살해했는지??
야마자키 이사장이 직접 관리한다면 현실적으로 그 내용이
무엇인지 알 길은 없지만 생각을 모아보면 어느 정도 유추는 가
능할 것 같군요.야마자키 이사장이 이치로 교수를 함정에 빠뜨
려가면서까지 (묘제의 연구)를 근거로 무슨 작업인가를 하게 했
다는 것은 이치로 교수가 그 방면에 높은 권위를 갖고 있다는 얘
기가 되지요.
그렇군요. 어떤 작업을 굳이 그에게 맡겼다면 그의 권위를 생
각했기 때문일 테고, 따라서 그가 주로 어떤 연구를 했으며 어떤
논문들을 썼는지 알아보면 (묘제의 연구)가 대략 무슨 내용인지
유추할 수 있다는 얘기군요.
그렇지요.
기미히토의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
제가 이치로 교수의 연구 활동을 알아보겠습니다.
그렇다면 될 수 있는 대로자세히 알아봐 주십시오.그의 연
구 활동뿐만 아니라 친분 관계, 학회 활동, 사회 활동 등등까지
도 말입니다. 참,그리고 중앙청 철거 반대 모임에 가입한사람
들의 명단도 좀 구해주세요.
기미히토는 사도광탄이 왜 뜬금없이 중앙청 철거 반대 모임에
가입한 사람들의 명단을 부탁하는지 궁금했지만 그것에 대해서
는 묻지 않았다 그만큼 사도광탄을 신뢰하고 있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 길로 나선 기미히토는 동경대학교의 여러 동료 교수들을 만
났다. 그들을 통해 이치로에 대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이치로 교수는 한반도의 고대 국가 성 립에 대한 논문을 주로
썼습니다. 삼국 시대 이전의 고조선에 대한 논문이 대부분입니
다.
역시 그렇군요.
사도광탄은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기미히토
는 그가 고개를 끄덕이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뭔가 짐작 가는 게 있는 모양이지요??
그러나 사도광탄은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았다.
이치로 교수는 매우 비사교적인 사람이었더군요. 학회 활동
조차 변로 하지 않는 괴이한 성격이었다고 합니다. 많은 역사학
자들이 동참한 중앙청 철거를 반대하는 모임에 가입하라는 권유
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중앙청 철거를 반대하는 모임이란 뭐죠?
컴퓨터 앞에 앉아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던 수아가 두사람
의 대화에 끼여들었다. 수아는 미국에 오래 있어 국내 사정을 잘
몰랐다
중앙청은 문화사적 의미가큰 건물이기 때문에 철거하는 것
이 옳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한일 양국에서 많이 나왔지.
사도광탄이 친절하게 설명했다.
아니, 우리 나라에도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래. 하지만 그 판단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었단다.
일본인들이 경궁 앞에 여봐란듯이 지은 그 건물이 우리의
민족 정기를 파괴하기 위해 지어졌다면서도 그냥 두어요??
많은 사람들이 그 건물을 철거해야 한다고 주장했지. 하지만
철거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의
생각이 꼭 잘못된 것이었다고 할 수는 없었어 일본인들이 한반
도의 정기를 막기 위해 석주를 박아놓고 그 위에 중앙청을 지어
은폐했다는 것을 철거 전에는 전혀 몰랐으니까.
어떤 상황이었더라도 저는 철거하는 것이 옳타고 생각해요.
그래, 그 나이에는 그런 기백이 있어야 하지. 무엇보다도 정
신이 중요하니까.
아, 그런데 여기에 이상한 것이 있군요.
노트에 정리한 것을 하나씩 검토해 가던 기미히토가 마지막
장에서 특이한 사실을 발견한 듯했다
이치로 교수는 최근에 지리학회에 가입했군요.
지리학회??
특별한 모임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사도광탄은 민감하게 반
응했다.
네 정기적인 학회 활동 말고는 이 사람이 가입한 유일한 모임
입니다.
언제 들어갔나요??
석 달쯤 전이군요.
사도광탄은 고개를 끄덕 였다.
지리학회란 어떤 모임이죠??
이제 두 사람의 대화에 본격적으로 끼여든 수아가 물었다.
지리학을 연구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학술 발표도 하고 공
동 관심사에 대해 의견도 수렴하는 학회지요.
역사를 연구하는 교수가 지리학회에 들어갈 이유가 있을까
요??
글쎄요.
기미히토와 수아는 사도광탄의 얼굴에 눈길을 모았다
그런 학회는 전문적인 학자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전공이 다
른 이치로 교수로서는 일부러 가입할 필요가 전혀 없지요. 다만
지리학회의 회원이 되어야만 얻을 수 있는 특전 같은 것을 생각
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군요.
그게 특별히 특전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학회지에 논문을
낸다든지 하는 종류의 것들이라면 이치로 교수와는 관계가 없을
것 같고
기미히토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수아가 거들었다.
자료를 마음껏 이용할 수 있다는 것도 특전이랄 수 있지 않을
까요??
음, 일리가 있을 것 같은데
사도광탄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치로는 교수잖아요. 대학 도서관을 마음껏 이용할
수 있었을 텐데 굳이 지리학회의 자료를 볼 필요가 있었을까요?
전문가도 아닌 그가.
기미히토가 의문을 제기했다.
아주 전문적인 자료가 필요했을지도 모르지요.
전문적인 자료라구요??
지리학회에만 있고, 회원이 아닌 사람에게는 공개되지 않는
그런 자료 말입니다.
예를 들자면??
지극히 오래된 고서적이나 하나밖에 없는 희귀한 자료라면
회원이 아닌 사람에게는 공개하지 않겠지요.
그럴 수 있겠군요. 한번 알아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기미히토가 이치로와 같은 동경대학교의 교수라는 사실은 여
러 가지로 편리했다 그는 별로 어렵지 않게 이치로가 지리학회
에서 대출했던 자료들을 확인해 왔다
사도 선생님의 추리가 딱 맞아떨어 졌습니다. 이치로 교수가
지리학회에서 대출한 자료들은 모두 너무나 귀해서 외부 대출은
안 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는 마이크로필름으로 찍어 복사를
하는 등의 방법으로 그 자료들을 보았더군요.
어떤 자료들이지요?~
만주의 오래된 지도들이었습니다.
만주의 고지도라
역사학 교수니까 고지도를 볼 필요가 있었겠지요.
수아가 끼여들었다-.
그랬겠지 . 하지만 석 달 전에 지리학회에 가입해서 만주의 희
귀한 고지도를 집중적으로 보았다면 통상의 연구를 위한 것은
아니었을 것 같은데 (묘제의 연구)는 만주에서 일어난 어
떤 사실과 관련된 기록일 가능성이 크겠군.
단서
죄송하지만, 선생님의 추리가 이번에는 맞지 않는 것 같은데
요.
수아가 자신 있는 얼굴로 말했다
어째서??
만주라면 중국이잖아요. 중국과 관련된 일에 팔만대장경의
기를 받은 토우가 괴력을 발해서 컴퓨터를 혼란에 빠뜨리고 이
치로 교수를 죽였을 리가 있나요??
음, 수아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지. 하지만
너무나 안타깝구나.
네? 뭐가요??
우리 민족의 터전이었던 만주가 이제는 기억 속에서 깨끗이
사라지고 말았으니 말이야. 비록 현실적인 지배 상태에 있지는
않더라도 만주에서 일구어졌던 우리의 역사를 망각해서는 안
돼 우리 문화의 많은 부분이 아직도 만주에 있어.
죄송해요.
수아의 잘못이 아니야. 역사에는 언제나 음모가 있지 현실적
인 필요에 의해 역사를 왜곡하고 역사의 음모를 꾸미는 어두운
세력은 어느 나라에나 있는 법이지. 만주와 우리를 떼어놓으려
했던 일본의 음모에 의해 우리 한민족은 반도에 갇힌 사람들이
되어버렸어 .
역사의 음모를 꾸미는 어두운 세력이라구요??
수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아가 비행기에서 보았다던 임나일본부 게임도 한 예가 되
겠지. 국민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한반도는 과거 수백 년 간
일본이 지배했다. 그러니 이제 가서 찾아야 한다는 주장을 편 일
본군부는 역사학자들을 동원하여 광개토왕비의 해석을 왜곡했
지 그런 음모를 다시 게임에 담아내는 그들의 행위는 음모의 극
치라 할 수 있어.
그제야 수아는 사도광탄의 말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특
히 게임에 담은 임 나일 본부야말로 참으로 교묘한 음모였다. 사
람들은 재미있는 것을 가장 잘 기억한다. 세계 제일의 소프트웨
어 회사인 마이크로소프트사에서 임나일본부 게임을 발매하도
록 한 것은 일본의 치밀한 음모가 아닐 수 없었다
아까 수아가 물었던 중앙청 철거 반대 모임도 그렇다고 할 수
있지, 그 모임에는 한일 양국에서 문화를 사랑하는 수많은 선량
한 사람들이 참가했어. 그들의 목적은 순수하게 문화 예술적 가
치, 혹은 역사적 의미를 보존하기 위한 것이었지. 하지만 그들은
전혀 다른 목적을 가진 사람들의 추악한 음모가 개입되어 있다
는 것을 알지 못했단다.
추악한 음모가 있었다구요??
수백 개의 석주를 박아 북악의 혈을 막고 지맥을 뚫은 후 그
것을 은폐하기 위해 지은 중앙청을 계속 존속시켜 한반도의 지
기가 솟아나는 것을 막아야만 한다는 음모지 .
서글픈 일이군요, 그렇다면 만주와 관련된 음모는 어떤 것일
까요??
기미히토 교수가 침통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는 자신의 조국
일본이 저지른 과오를 적당히 피하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음
모들이 기묘한 방법으로 문화와 역사의 마디마디에 녹아 있다는
데 더욱 큰 분노와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야마자키 이사장이 굳이 이치로 교수를 함정에 빠뜨려 논문
을 쓰게 했다는 사실에서 그 내용을 유추할 수 있어요.
어떻게요??
기미히토는 사도광탄의 추리력에 다시 한 번 놀랐다.
(묘제의 연구)란 분묘 제도의 연구입니다. 즉무덤의 양식을
조사하여 역사적 사실이나 문화를 발견해 내는 것이지요. 따라
서 그 자료는 발굴 기록을 담고 있을 것이고, 이치로는 역사학자
이므로 발굴 자료를 무엇보다도 귀하게 여겼을 거예요. 보통의
경우라면 그 희귀한 (묘제의 연구)를 좋아할 수밖에 없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마자키가 그를 함정에 빠뜨리면서까지 연
구를 하게 했다면 그 연구는 이치로의 마음에 내키지 않는 것이
었다는 얘기가 되죠. 따라서 그 내용은 이치로가 하기 싫어하는,
즉 이치로의 이제까지의 주장과는 반대가 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어요.
이치로의 주장은 어떤 것인가요?~
고조선이란 작은 나라가 있었는데 중국에서 온 기자에게 정
복당하여 기자조선이 되었고, 기자조선은 다시 중국에서 온 위
만에게 정복당하여 위만조선이 되었으며, 위만조선은 한나라에
게 멸망당했다는 거지요. 이 두 조선이 중국 정권이었으며 한의
지배 후에는 한반도 중북부를 포함하는 지역에 한사군이 설치되
었고, 기원후 313년에 고구려에 의해 멸망당할 때까지 한반도를
지배했으므로, 한민족은 이미 고대에 2천 년 가까이 중국의 지
배를 받았다는 것이 그의 논리이지요.
그럼 그 반대란?~
만주 지역에서 묻혀버린 한국 고대사의 비밀이 (묘제의 연구)
에는 있을 것 같군요.
사도광탄의 설명을 듣고 난 기미히토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잠
시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럼 이치로 교수의 집에 한번 가보는 게 도움이 될지 모르겠
군요.
그럴 수 있나요??
평소 이치로 교수와 친하게 지내던 교수들이 그의 부인을 위
로하기 위해 내일 집을 방문하기로 했답니다. 같이 가자고 하는
걸 어쩔지 몰라서 약속을 안 했는데 동행해야겠군요.
다음날 기미히토는 동료 교수들과 같이 이치로의 집을 방문했
다. 마침 같은 전산학부의 오카모토가 이치로의 부인과 잘 아는
사이라 자연스럽게 서재에 들어갈 수 있었다
주인은 죽었지만 서재는 아직 치우지 않고 있었다. 부인은 서
재에라도 남편의 모습을 담아두려는 모양이었다.
오카모토는 기미히토가 서재에서 이치로의 기록들을 편하게
볼 수 있도록 동료 교수들과 술자리를 벌였다
기미히토는 신속하게 이치로의 서신이나 비망록 등을 뒤졌다.
남의 기록을 뒤진다는 것이 마음 편한 일은 아니었지만 이치로
교수가 토우에 의해 살해당한 이유를 추적하려는 기미히토의 욕
망은 낡은 종이 냄새가 나는 이치로의 기록들을 부지런히 훌어
가게 했다.
그러나 서신이나 비망록에서는 (묘제의 연구)와 연관시킬 수
있는 메모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래도 기미히토는 실망하지 않
고 그의 논문과 연구 실적을 한 장씩 넘겨나갔다. 혹시라도 작업
도중에 술회나 감상을 써놓았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역
시 아무것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책상 위에 흐트러져 있는 종이
를 살펴보던 기미히토의 눈썹이 꿈틀했다.
이게 뭐지??
짧은 메모였다.
한평생의 연구 결과를 지키는 것이 중요한가, 아니면 학문의 진실
에 귀를 기울여야 옳은가 아. 그런 발굴이 있었을 줄이야.
기미히토는 얼른 종이를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밖으로 나왔다.
술자리는 파장 무렵이었다
예기치 않은 출현
이제 무슨 내용인지 짐작이 가는군요.
기미히토가 가지고 온 메모를 살핀 사도광탄의 표정이 가벼워
보였다
그 짧은 내용의 메모에서 무언가를 알아냈다는 말입니까??
짧지만 완벽합니다.
무슨 내용이지요??
이치로는 자신이 이제껏 발표해 온 연구 성과를 모두 부정당
할 수 있는 대단한 자료를 보게 되었지요.
그것이 바로 (묘제의 연구)라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는 만주에서 행해진 어떤 발굴을 (묘제의 연
구)를통하여 알게 되었어요.그 발굴은 이제껏 해온 그의 연구
결과가 모두 허위라는 것을 한눈에 보여주는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기미히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 발굴이 뭘까요??
테드였다. 그는 농가 방문 여행을 끝내고 어제 돌아왔다
그것은 이치로 교수가 그간 무엇을 주장했는지를 보면 알 수
있겠지. 그의 주장을 반대로 생각하면 되니까.
그 교수는 고조선의 실체를 부정하고 한국의 고대 국가 성립
이 신라, 고구려, 백제로부터 시작한다는 주장을 해왔던 사람이
라면서요??
그렇지, 그러니까 그 자료는 이미 고대 국가로서 존재해 왔던
고조선의 실체를 드러내는 유력한 증거라고 보면 되겠지.
고조선의 실체가 발굴을 통해 나타났단 말이에요??
그렇지 .
누구의 능을 발굴한 것일까요??
글쎄, 좀더 조사해 본 다음에 얘기하는 것이 낫겠다. 지금으
로서는 확실치 않은 것이 있거든.
무엇을 조사한다는 거죠??
야마자키 연구소에서 (묘제의 연구)를 통해 얻으려는 게 무
엇인지를 알아내야겠어 .
그걸 어떻게 알아내죠?~
한 가지 방법이 있어 .
사도광탄은 기미히토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일본에서 이치로 교수와 전공이 같으면서 그 못지않은 명성
을 가진 역사학자를 좀 알아봐 주시지요.
한국의 고대사를 전공한 학자 말이군요.
네 .
기미히토는 사도광탄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치로 교수가 죽었으니 야마자키에 게는 그를 대신할 학자가
필요하겠군요.
네 그리고 또 한 사람이 있어요. 아주 중요한 사람이지요,
중요한 사람? 그게 누군가요??
일전에 기미히토 교수께 최면을 걸었던 사람이지요.
네??
기미 히토는 깜짝 놀랐다.
그를 알고 있습니까??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니 , 어떻게요??
야마자키 같은 사람은 최면을 걸어 뭔가를 알아내겠다는 생
각을 할수 없어요. 법술사만이 할수 있는 생각이지요.틀림없
이 야마자키와 함께 무언가를 도모하는 법술사가 있을 겁니다.
사도광탄은 얼마 전 기미히토가 가지고 왔던 서류를 내밀었
다. 중앙청 철거 반대 모임에 가입했던 사람들의 명단이었다.
여기에서 어떻게 찾지요??
명단을 본 기미히토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물었다.
그들 중에는 문화 예술적, 혹은 역사적 가치와는 무관하게 중
앙청 철거를 반대한 사람들이 있어요. 학자나 문화 예술인들과
는 그 동기가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들이지요.
그런데 어떻게 순수한 동기를 가진 사람들과 그들을 구분해
내죠??
직업을 살펴보면 신관 또는 수도인이라고 쓴 사람들이 있어
요. 바로 한반도의 지맥을 막은 사람들의 제자거나 집안이지요.
선생님은 정말 뛰어나시군요. 천재라고 불리는 수아 씨도 선
생님 앞에서는 상대가 안 되겠는데요.
테드가 수아의 얼굴을 곁눈질하며 끼여들었다.
수아의 畿로통해지는 모습을 보며 테드는 크게 웃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을 만난다 하더라도 순순히 비밀을 얘기해
주지는 않을 텐데요.
수아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알 수 없지. 한번은 만나봐야 겠지.
사도광탄은 기미히토에게 자꾸 부탁하는 것이 미안한 듯 겸연
쩍은 웃음을 띠며 말했다.
그들을 만나려는 이유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음모들을 중
단시키려는 뜻입니다.
기미히토는 명단을 가슴속에 찔러넣으면서 웃는 얼굴로 푸념
섞인 농담을 던졌다.
이러다간 사설 탐정 사무소라도 하나 차려야겠군요.
며칠 간 바삐 다니던 기미히토는 점심 무렵에 홀가분한 표정
으로 들어왔다.
같이 나가서 식사할까요??
수아가 배가 고팠던지 반색을 하며 일어났다
테드는 먹을 복도 없군요. 이럴 때는 꼭 여행 가고 없으니.
기미히토와 사도광탄은 같이 웃었다
기미히토는 일본에 와본 적이 없는 두 사람에게 시내 구경을
시켜 줄 셈으로 자동차를 타고 긴자로 나갔다.
긴자의 거리를 걷는 동안 수아는 한국과 너무도 비슷한 일본
의 거리 풍경에 내내 놀라워했다. 몇 명의 남학생들이 지나가다
수아와 눈길이 마주치자 손을 흔들었다. 수아도 손을 흔들어주
자 왁자지껄하게 웃고 떠들며 지나갔다
일본은 이상하게도 우리 나라와 아주 비슷하군요.
사도광탄이 말을 받았다
우리 나라의 근대화는 일본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자연
히 비슷할 수밖에 없지.
놀라을 정도예요.
그래서 일본을 잘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단다 우리 나라의
문명 발전에 대한 예측과 반성이 되기 때문이지 .
조용한 정식 집에서 식사를 마치고 나자 기미히토는 그간 조사
한 것들을 풀어놓았다.
이치로 교수와 같은 전공으로 그만큼 명성과 실력이 있는 사
람은 없었습니다. 다만 역사학계의 태두라 불리는 원로 한 분이
이치로와 같은 한국 고대사를 전공했더군요.
그 사람의 이름이 뭡니까??
도야마입니다. 퇴직한 후 지금은 조용히 지내고 있습니다.
기미히토는 곧이어 가슴에서 중앙청 철거 반대 모임의 명단
을 꺼내놓았다.
이들 중에 몇 사람은 신사의 신관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려서
부터 신사에 들어가 오로지 신사만을 지키며 살아온 사람들로
특별히 눈에 띄는 점은 없었습니다. 다만 이 다카가와라는 사람
은 매우 특별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기미히토의 표정은 진지했다
어떤 점에서요??
다카가와는 신관은 아니지만 신사에서 많은 신관들을 상대로
강연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강연에는 신관이나 법술사들뿐만
아니라 역사학자들까지도 참석하고 있답니다.
무슨 강연을 하나요??
그의 강연의 범위는 매우 넓은 모양입니다. 법술에서부터 풍
수, 역사까지 다양하다고 합니다.
같이 한번 참석해 보는 것이 어떨까요??
좋은 생각입니다.
다카가와는 새벽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는 유카타를 입었다.
하오리를 걸치고 뜰에 발걸음을 내디디려는데 허리띠가 풀어져
내렸다. 무심코 허리띠를 집어들어 다시 매고 메이지 신사로 향
하던 그는 이상하게도 기분이 안정되지 않는 것을 느꼈다.
허리띠가 풀어진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불현듯 그의 뇌리
에 기미히토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고는 그가 얘기했던 한국
에서 온 사람과, 이치로 교수의 무덤을 파헤쳤을 때 느껴지던 서
쪽으로부터 온 힘이 불길하게 다가왔다.
신사에 도착하여 강연을 시작하고 나서도 다카가와는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없었다. 무슨 일인가 생길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다카가와는 자신도 모르게 자꾸 출입구로 눈이 갔다.
헉 !~
뒤쪽 출입구로 들어오는 사람의 얼굴을 본 순간 다카가와는
놀라고 말았다. 얼마 전 자신이 최면을 걸었던 기미히토였던 것
이다. 그리고 그의 뒤로는 그림자처럼 조용히 들어서는 사십대
의 사나이가 있었다.
다카가와는 신사의 좁은 방이 가득 차는 것을 느꼈다.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하던 이야기가 엇갈려 나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다카가와는 호흡을 고르면서 마음을 안정시켰다.
기미히토는 자신이 최면에 빠졌던 사실을 알 리 없다고 다카
가와는 자위하면서도 그가 어떻게 여기에 왔을까 하는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정작 문제는 기미히토보다도 같이 들어온 사십대의 사나이였
다 그로부터는 범인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이상한 기운이 뿜어
져 나오고 있었다. 다카가와는 기를 모았다. 한 괴이한 인물의
예기치 않은 출현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흔들릴 수는 없는 일이
었다.
스승님은 부적을 굳이 그림으로 그려야 할 필요는 없다고 하
셨습니다 많은 법술사들이 네가 붉은 헝겊으로 부적을 만드는
것에 대해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스승님
은 부적이 우주의 기를 끌어들이는 원리만 알면 부적을 만드는
형식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스승닝은 건축
물에도 기가 있어 건물을 잘 지으면 대단한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강연을 끝내자 신관들이 질문을 시작했다.
건물을 짓기 전 그 토대에 부적을 넣는 것과 비교해 보면 어
떤 것이 효과적입니까??
그것은 물론 건물 자체로 부적의 형상을 만드는 것이 훨씬 낫
습니다.
건물 밑에 부적을 넣은 것의 효과를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합
니까??
그것이 어떤 부적인지를 알아서 그 부적을 제압하는 강한 부
적을 지어서 가지고 가야 합니다.
중국인들이 마카오에 리스보아 카지노를 지을 때 건물 밑에
묻어둔 부적이 당시 돈으로 천만 달러어치였는데 어떤 방법을
써봐도 그 부적의 힘을 없애지 못하겠더군요 방법이 없을까요?
신사에 찾아오는 손님들 중 여러 분이 제게 하소연을 해오고 있
습니다.
마카오는 지세가 약합니다. 습한 해풍에 삭아 오래 지탱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다만 중국인들이 만들어 넣은 엄청난 부적
의 힘이 손님들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이제 지세가 쇠할 때가 됐
으니 부적도 따라 쇠할 것입니다. 손님들에게 도박부를 만들어
주실 때 역 삼각형으로 시작하세요. 밑에서 올라오는 기를 누르
는 부적입니다.
육순이 훨씬 넘은 기괴한 모습의 한 수도자가 음침하고 낮은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저는 세상의 온갖 고행을 다하고 이제는 차력, 최면, 행공, 부
유 등 깨우치지 못한 것이 없는데 호사이 선생님의 세 가지 문제
에 접근해 볼 기회도 안 주시는 이유가 뭡니까??
수도자의 이 질문에 기미히토의 귀가 꿈틀했다.
호사이.
낯익은 이름이었다 어디서 들었는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기미
히토의 귓전에 하토야마의 목소리가 살아나고 있었다.
'나는 수도중이오. 수도가 끝날 때까지는 그분의 이름을 입에
담지 않는 법이오:
호사이 스승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전 세 가지 문제를 내셨습
니다. 참으로 깨우친 수도자는 우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하시면서 그 세 가지 문제는 비록 간단하지만 영과 신과 혼과 백
의 영역을 자유로 드나들 수 있는 사람만이 풀어낼 것이라 하셨
습니다. 수련이 부족한 본인도 아직 그 문제에 접할 자격이 없습
니다.
호사이라는 이름의 무게 때문인지 수도자는 두 손을 모아 합
장한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언
사도광탄은 강연이 끝나자 벽에 걸려 있는 그림을 쳐다보며
강연장 안에 머물렀다. 기미히토는 그런 사도광탄을 남겨두고
나갔다.
사람들이 나갈 동안 꼼짝 않고 있던 다카가와는 이윽고 사도
광탄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뒷모습을 보이고 있는 사도광탄의
풍모에는 무게가 잡혀 있었다. 실내엔 둘만 남아 있었다.
다카가와는 한눈에 이 사람이 바로 기미히토가 최면 상태에서
얘기했던, 한국에서 온 사나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언젠가는
만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소.
사도광탄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가까이서 대하는 다카가와의
얼굴에는 헤아릴 수 없는 고행과 수련을 거친 수도자식 강인함
과 자신감이 배어 있었다. 사도광탄은 다카가와의 법술이 인간
의 경지를 넘어서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 통기술로 기를 마
음대로 다루고 최면과 점술, 부적과 관상에도 핀게 통해 있을 뿐
아니라 경전에도 조예가 있음이 한눈에 느껴졌다
다카가와의 느낌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도광탄에게는 법술을
얻기 위해 고된 수련을 거듭한 수도자의 거칠고 굳센 모습이 없
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뭐라 말할 수 없는 고결함과 신비함이 부
드러운 인상 속에 묻혀 있었다. 무언가 다른 길을 통해 경지를
이루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분명히
자신과는 다른 길이었으리라고 다카가와는 생각했다. 일순간 큰
깨달음을 얻은 풍모가 그의 몸 전채에 은근히 배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 한편에는 주화입마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음을 다카가와는 또한 놓치지 않았다. 언젠가 스승은 이렇게
말했었다.
'깨달음을 얻는 데 있어 선지식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수행은
결코 혼자 해서는 아니 된다. 언제나 주화입마를 경계해야만 하
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큰 깨달음은 결코 어느 스승도 전해주
지 못하는 법이다 아아, 큰 깨달음이란 진정 하늘만이 내리는
것인가:
스승은 이미 신의 경지에 올라 있었지만 언제나 큰 깨달음에
목말라했다. 사도광탄이 어느 정도 깨달음을 이루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묘하게도 그의 얼굴에는 큰 깨달음과 주화입마가
공존하고 있음을 다카가와는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한 가지 알고 싶은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사도광탄의 목소리는 작지만 힘이 있었다.
무엇이오?~
호사이 선생의 묘는 어디에 있지요?~
순간 다카가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왜 그러시오?
그분이 어떻게 입 적했는지 알고 싶소.
신의 경지에 다다랐던 스승이 임종 직전에 남긴 유언이 불현
듯 다카가와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했다.
'누군가 찾아와 나의 입적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물으면 그에
게 나의 세 가지 문제를 내도록 하라, 그리하여 그가 문제를 다
맞춘다면 너는 세상에 펼친 기를 거두고 10년 간 폐관하라. 그가
한두 가지 문제를 맞추는 것으로 그친다면 그 자리에서 목숨을
거두어라:
다카가와는 스승의 유언을 이해할 수 없었다. 또 이제껏 스승
의 입적을 물어온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오늘 마침내 이 낯선
사람이 스승의 입적을 물어온 것이다.
그 문제는 이 자리에서 논할 것이 못 되는군요. 스승께서는
유언을 남기셨소. 3일 후 내 집에서 차나 한잔 하는 것이 어떻겠
소?
그렇게 하지요.
다카가와의 배웅을 받으며 나오는 사도광탄을 보고 기미히토
는 반갑게 다가갔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자신에게 최면을 걸었
던 다카가와가 사도광탄을 어떻게 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고
있던 참이었다. 한편으로는 사도광탄이 당할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아까 순간적으로 뻗쳐나오던 다카가와의 기에 워
낙 놀랐던 터였다.
무슨 대화를 하셨습니까? 그자는 보통 사람이 아니더군요.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보면 한눈에 우리가 (묘제의 연구)를
추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 버리겠더군요.
그의 스승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어 요.다음에 다시 한 번 만
나기로 했지요.
혹시 사도 선생을 해하기라도 할까 봐 걱정했습니다.
기우입니다. 그는 수양이 높은 인물이에요.
기미히토는 쓴웃음을 지었다. 한때는 첨단 분야를 연구하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자신이 정신 세계를 다루는 사람들
속에 들어오니 한갓 어린아이와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이다.
그가 자신의 스승이 호사이라고 하는 것을 들으셨습니까?
네. 그 이름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기미히토는 스기하라가 흘리던 얘기를 떠올렸다.
'무라야마는 일본 제일의 풍수사였지만 토우에 대해서만은 그
사람과 의논하는 것 같았소. 얼핏 듣기에 호사이라고 하던 것 같
기도 하고
그 사람 호사이를 만나게 될 걸로 생각했지요.
기미히토는 뭔가 짚이는 게 있었다.
이미 일본으로 오기 전에 말이죠?
사도광탄은 고개를 끄덕 였다.
그러나 그는 이미 이 세상에 없지 않습니까?
다카가와가 대신할 거예요. 호사이는 죽은 후에도 어떤 일이
생길지 알고 있었던 듯하더군요.
놀랍군요.
무라야마가 토우를 파헤칠 때 그 위치를 일러준 사람도 아마
호사이일 겁니다. 토우의 힘에 치해 죽을 정도의 위인인 무라야
마로서는 숨겨진 토우를 찾아내지도 못했을 테니까요.
기미히토는 사도광탄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스기하라도 그
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던가.
과거 관동군 사령부를 클 대(大) 자로, 서울의 중앙청을 날
일(일) 자로, 부산 시청을 뿌리 본(本) 자로 짓도록 한 사람이 있
어요. 대일본(大日本)이지요. 나는 예전에, 정신이 우주와 통하
는 단계에 이르렀을 때 만주에서부터 남해안까지 내려오는 이
꽉찬 기가 한반도를 무겁게 짓누르는 것을 느꼈지요. 도대체 어
느 정도의 인물이기에 이렇듯 대담하게 기를 뻗쳤나 하고 궁금
했던 적이 있어요. 아까 다카가와가 강연중에 자신의 스승은 건
축물에 기를 넣어 부적을 대신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인물
이 바로 호사이였던 것이지요.
호사이는 정말 대단한 인물이군요.
물론이지요. 다카가와 역시 호사이가 택한 인물이니 대단할
거예요. 일전에 기미히토 교수가 최면을 당하고 왔을 때 느껴지
던 기가 보통이 아니었죠. 아까는 더욱 강한 기를 뻗치더군요.
일본의 운이 앞으로도 상당할 것 같아요. 저런 인물이 있으니 말
이에요.
그러나 법술사의 한계가 있지 않을까요?
저런 사람들이 일본의 정치인과 군인들을 지배하거든요 한
반도의 혈을 막고, 법술에 따라 건축물을 짓게 하며, 일본의 역
사학계나 교육계로 하여금 천황을 신으로 가르치게 하는 신화주
의가 바로 저런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것이에요.
기미히토는 불현듯 사도광탄과 다카가와라는 범상하지 않은
두 인물이 언젠가 크게 부딪칠 것 같은 예감에 몸을 떨었다.
검은 목갑
야마자키는 아침 일찍 다카가와의 연락을 받았다. 그를 만나
러 가기 위해 즉시 집을 나선 야마자키는 초조함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이치로 교수에게 맡긴 일이 전혀 진전이 안 된 데서 오
는 시간적 압박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그 일이 토우의 방해
로 인해 중단되었다는 사실이 불안감을 더했다.
게다가 다카가와는 중앙청의 석주가 드러났다는 사실을 지나
치게 불길하게 여기고 있는 터였다. 다카가와는 스승 호사이가
중앙청의 석주가 드러나면 곧이어 조선의 국운이 상승하며 숨겨
졌던 비밀들이 드러날 것이라고 말했다고도 했다.
이것을 받으시지요.
야마자키와 마주앉은 다카가와는 부적 하나를 내밀었다.
붉은 헝겊에 검 은색으로 그려진 복잡한 무의의 부적이었다
웬일로 부적을?
일전에 기미히토 교수를 신문했을 때 이치로 교수를 살해하
고 컴퓨터에 선택적 장애를 일으켰던 것은 토우의 신비한 힘이
었다고 한 것이 생각나십니까?
네, 분명히 그렇게 말했었지요.
이치로 교수의 무덤을 파헤쳤을 때 그 힘이 조선으로부터 왔
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지 않았습니까?
그랬었지요.
그 토우는 조선에서 헌병으로 복무했던 스기하라 씨가 조선
에서 가지고 온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까?~
당시 조선의 지맥을 다 막아 기를 끊었습니다만, 조선의 다른
큰 힘인 팔만대장경의 기를 끊기 위해 총독과 무라야마가 대장
경을 수호하는 토우를 파헤쳤습니다.
그 토우가 어디 있는 줄 알고 파헤칠 수 있었습니까?~
무라야마는 스승님을 한반도로 초빙하여 토우의 밭기를 탐색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스승님은 토우가 묻힌 자리를 찾아내
어 일러주시긴 했지만 대장경의 신비력이 워낙 크니 손을 대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무라야마 선생은 그 토우를 제거 했군요.
그랬지요. 하지만 스승님의 경고에 겁을 먹은 무라야마는 함
부로 대장경을 건드리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해인사가 있는 합
천군 가야면의 무식한 순사부장에게 해인사의 경관 몇 장을 빼
내도록 지시하고 다시는 해인사에 내려가지 않았지요.
그 순사부장은 경판을 빼냈나요?~
물론입니다.
그 경판들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알 수 없습니다 아마 무라야마는 그 이후에도 여러
번에 걸쳐 대장경의 힘을 흩뜨리기 위해 내용을 모르는 사람들
을 시켜 경판에 손을 댔을 겁니다.
모두 무사했나요?
그렇지 못했을 겁니다. 토우를 일본으로 가지고 온 사람들이
스기하라만 남고 모두 죽자 무라야마는 스승님을 찾아와 살 수
있는 방법을 물었습니다.
그래서요?
스승닝은 진판을 빼낸 자리에 가판을 만들어 넣어두라 하셨
습니다. 무라야마는 급한 나머지 가판을 정교하게 만들지 못하
고 아무렇게나 만들어 넣었습니다. 심지어는 대나무로 만들어
넣은 것도 있어요. 지금 조선의 해인사 경판고에 있는 경판 중에
는 그때 만들어 넣었던 경판들도 배 섞여 있을 겁니다.
스기하라를 제외한 모두가 죽었다는 말을 듣자 야마자키는 다
시 불안해지는 모양이었다.
그 토우는 확실히 요사스런 기가 다 빠졌나요?
그렇긴 하지만 혹시 다른 일이 생길지 몰라 부적을 지니고 다
니라는 것입니다.
다른 일이라면?
기미히토 교수와 같이 한국에서 왔다는 사람이 있었지요?
어쩌면 그 사람이 왔기 때문에 토우는 다시 단순한 흙인형으
로 돌아간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니란 뜻인가요?
다카가와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야마자키는 다카가와
의 표정이 이렇듯 심각한 적이 없었기에 놀랐다.
어제 아침 메이지 신사의 강연회에 그들이 찾아왔더군요.
그들이라면?
기미히토 교수와 그 한국인 말입니다. 그를 보니 이상하게도
불길한 기분이 들더군요.
불길하다면?~
다카가와는 구체적인 설명을 하지 않았다
기분이 썩 개운치가 않아요. 그래서 서둘러 부적을 지은 겁니
다.
다카가와의 얘기를 듣는 야마자키의 얼굴에 불안한 기색이 크
게 번졌다.
그렇다면 혹시 그가 토우 대신 괴력을 발할 수도 있다는 것
아닙니까?
그럴 가능성이 있지요.
야마자키는 토우가 이치로뿐만이 아니고 자신까지 저주하고
있다는 말을 언젠가 다카가와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다. 불안은
갑자기 거센 분노로 이어졌다. 야마자키는 일개 조선인 때문에
이토록 불안에 떨어야 한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었다. 그는 다카
가와가 내린 부적을 방바닥에 팽개쳤다.
안 되겠소. 역사학계의 태두고 뭐고 간에 강제로라도 그 (묘
제의 연구)를 풀게 해 조선의 뿌리를 파헤쳐버려야겠소. 필요하
다면 그 이상하다는 놈도 내가 직접 제거해 버리겠소. 그리고 다
카가와 선생, 이제껏 선생을 존경해 왔지만 지금 이 꼴은 우습지
않소. 토운지 뭔지 하는 흙인형 하나 못 당해 이치로 교수가 죽
고, 한국에서 왔다는 이상한 놈 하나 못 해치워 부적이나 지어주
다니 이 야마자키는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소.
다카가와의 목소리가 보통 때와는 달리 유난히 높아지고 있었
다 평소의 자기 목소리가 아니란 기분이 들어 다카가와는 급히
야마자키의 눈동자에 시선을 모았다. 야마자키의 눈은 초점을
잃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얼굴에는 평소 느끼지 못하던 이
상한기운이 퍼져 있었다 연구원의 무덤을 파헤쳤을 때 느껴지
던 기운이었다.
헉 !~
다카가와는 황급히 부적을 주워 야마자키의 얼굴에 씌우려 했
다. 그러나 야마자키는 다카가와의 손을 뿌리치며 자리를 박차
고 일어섰다.
내가 해! 이 야마자키가 하고 말겠어 나는 무사의 자손이야.
이제껏 법술 따위에 현혹되어 불안해하다니, 내가 바보였어. 단
칼에 베어 버리고 만다 이 야마자키의 앞을 가로막는 자는, 이
무사의 자손을 가로막는 자는 위대한 일본혼을 무시하는 자는
단칼에 죽여버 리 겠어 !
야마자키는 다카가와를 돌아보지도 않고 문을 박차고 나가버
렸다. 다카가와는 자신도 알지 못할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연구소에 출근한 야마자키는 자신의 사무실에 들어가서는 문
을 잠갔다. 이제까지는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토우의 저주를 알
고 나서는 (묘제의 연구)를 생각만 해도 긴장이 되었다. 창을 통
해 바깥을 내다보니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커
튼을 내리고 육중한 금고 앞에 섰다.
번호를 돌리는 손길이 분노와 흥분으로 가늘게 떨렸다. 야마
자키는 잠시 멈췄다가 남은 번호를 마저 돌렸다. 긍고 안에는 검
은 옻칠을 한 목갑이 놓여 있었다. 야마자키는 호흡을 고르고 마
음을 가라앉힌 다음 목갑이 뚜껑을 열었다
색이 바랠대로 바랜 자료집 한 권과 디스켓이 야마자키의 눈
에 들어왔다.
조심스럽게 자료집을 들어 첫 페이지를 넘기자 서문이 눈에
들어왔다 페이지를 넘김에 따라 낡은 종잇장들이 눈을 어지럽
혔다 책을목갑에 다시 넣으려던 야마자키의 손길이 멈칫했다.
갈등이 일어나고 있었다.
'도야마가 문제는 풀지 않고 이 책과 디스켓을 파괴한다면?'
죽일 것이다. 그러나 죽인다고 해서 이 책과 디스켓이 돌아오
지는 않을 것이다. (묘제의 연구)는 도야마의 목숨만을 담보로
하여 안심하기에는 너무도 중요한 물건이었다. 도야마는 조건을
내걸었다. 한 권의 책과 한 장의 디스켓만이 이 세상에 존재하도
록 하라는 것이 그가 내건 조건이었다. 나이만큼 교활한 늙은이
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야마는 이 (묘제의 연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한평생
고조선을 부정하는 연구로 일관해 온 사람이었다. 풍문에 의하
면 그는 그 묘의 발굴에도 참가 했다지 않은가. 물론 그라고 해서
당시의 어용 역사 연구라는 주류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겠지만
그런 것은 이제 와서는 변명이 될 수 없었다.
도야마가 (묘제의 연구)에 들어 있는 수수께끼를 풀겠다고 승
낙한 것도 자신이 평생을 바쳐 연구해 온 것을 헛된 것으로 만들
고 싶지 않아서 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 증거들을 없앨 가능
성도 있었다. 비록 그 대가가 죽음이라 하더라도.
복사는 반드시 해야 했다. 그러나 야마자키가 복사를 겁내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토우, 토우가 무서운 것이다. 다카가와는
토우가 힘을 잃었다고 했지만 그것을 어떻게 믿겠는가. 설사 토
우가 힘을 잃었다 하더라도 이상한 자가 한국으로부터 왔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게 그거였다.
야마자키는 (묘제의 연구)를 자신에게서 떠나보내야만 한다
는 생각과 도야마의 속셈 사이에서 한참 고민을 했다.
'그놈을 죽여버리면 되지 않는가:
그렇다. 안 보이는 저주를 쏟아내는 토우가 문제지 사람이라
면 두려워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한국에서 왔다는 자를 먼저 죽
이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야마자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야마자키는 일단 디스켓의 내용을 자신의 컴퓨터에 내장시켰
다. 그리고는 책과 디스켓을 목갑에 넣고 나서려다 다시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다카가와가 일부러 자신을 불러 부적을 주
던 생각이 났다 어쩌면 쥐도 새도 모르게 이치로처럼 될 수 있
다는 생각이 야마자키로 하여금 다시 하드디스크의 내용을 지워
야 한다는 결심을 하게 했다
목숨은 모든 것에 우선한다. 이치로에게 무슨 잘못이 있었는
가. 그가 죽은 이유는 다름아닌 (묘제의 연구)를 디스켓에 담아
두었다는 것뿐이 아닌가. 야마자키는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래야 한다:
막 키보드를 누르려던 야마자키는 아차 하며 손으로 이마를
쳤다.
'왜 그 생각을 진작 못했을까:
남의 컴퓨터에 넣어두면 되는 것이다. 야마자키는 음흉한 미
소를 머금었다 (묘제의 연구)따위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사
람, 아니 자신의 컴퓨터에 뭐가 들어왔는지도 모르는 사람, 컴퓨
터를 그저 장식으로 사둔 사람, 책상 위에 보란 듯이 놔두지만 1
년 내내 한 번도 켜보지 않는 사람, 그러나 통신용 ll)는 가지고
있는 그런 사람이 누구일까를 생각했다. 이윽고 그는 한 사람을
떠올렸다
사촌이었다. 그런 사람에게까지 저주가 퍼부어지지는 않을 것
이다 야마자키는 사촌에게 전화를 걸었다. 물론 대답은 오케이
였다.
간단한 컴퓨터 작업은 하지만 아직 통신은 할 줄 모르는 야마
자키는 연구원 한 사람을 불렀다
하드디스크에 있는 내용을 이리로 전송해 주게.
알겠습니다.
전송이 끝나면 본체에 있는 것은 지워버리게.
알겠습니다.
연구원은 야마자키의 지시에 따라 전송을 완료하고는 본체에
있는 (묘제의 연구)를 지워버렸다. 야마자키는 그 과정을 놓치
지 않고 지켜보다가 연구원이 나가자 목갑을 들고 일어섰다
진실의 이면
무슨 소리지 ?
컴퓨터에서 나는 소리에 기미히토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며칠
째 컴퓨터만 만지고 있던 수아가 잠시 밖에 나간 사이에 컴퓨터
에서 계속소리가나고 있었다. 기미히토는 컴퓨터 앞으로 다가
가 모니터를 들여다봤다. 그러나 화면에는 아무것도 뜨지 않은
채 경보음만 울렸다.
따르르릉-.
전화벨이 울려 기미히토는 일단 전화를 받으러 갔다.
수아예요. 혹시 별일 없나요?
컴퓨터에서 계속 경보음이 울리는데요?
이런 하필이면 바로 올라가긴 하겠지만3분쯤 걸릴 거
예요. 해킹하실 수 있죠?
글쎄, 자신 없는데요.
알겠어요. 곧 갈게요.
전화를 끊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수아가 뛰어들어왔다. 가쁜
숨을 토해내며 컴퓨터 앞에 앉은 그녀는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렸다.
빨리 해야 하는데~
수아는 쉴새없이 키보드를 두드리다가 갑자기 멈추고는 발을
굴렀다.
이런 바보 같은 계집애, 하필 이 순간에 자리를 비우면 어떡
해 .
무슨 일인데 그렇게 흥분해요?~
그게 들어왔었단 말이에요.
수아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거라니?
(묘제의 연구) 말이에요. 이쪽으로 넘어오기 직전에 저쪽에
서 컴퓨터를 꺼버렸어요.
(묘제의 연구)가 넘어올 뻔했다구요?
기미히토는 깜짝 놀랐다. 수아는 이제 절망한 듯 얼굴을 두
손에 묻고 있었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났는지 퍼뜩 고개를 들
었다.
맞아요. 어쩌면 흔적은 남아 있을지 몰라요. 넘어오는 순간
꺼졌으니까.
수아는 재빠르게 키보드를 두들겼다. 과연 화면에는 대학노트
한 장 분량의 글이 떠올랐다.
선생님 !
수아가 정신없이 고함을 질렀기 때문에 테드가 뛰어나오고 사
도광탄 역시 다소 놀란 표정으로 컴퓨터 앞으로 왔다.
(묘제의 연구)예요.
무슨 소리냐, 컴퓨터로는 찾을 수 없다고 하지 않았니?
그래요. 그래도 혹시 몰라서 연구소의 컴퓨터에 (묘제의 연
구)가 뜨기만 하면 즉시 삐삐가 울리도록 해두었거든요. 그런데
하필 그 중요한 순간에 제가 자리를 비우고 말았어요.
수아의 얼굴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래도 몇 줄은 살릴 수 있었어요 그런데 이게 무슨 말이
죠?'
화면에 떠오른 것은 서문에 해당되는 글이었다
나는 평양 근교의 강동군에 있는 큰 무덤의 내력에 대해 예로부터
많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 것에 주목했다. 또한 이 무덤은 몇몇
믿을 만한 조선의 역사서 에도 분명히 기록되어 있어, 발굴을 해서 그
내력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조선총독부에 발굴을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한바. 총독부
에서는 발굴의 조건을 심히 까다롭게 제한했을 뿐만 아니라 발굴의
발표 여부를 조선총독부에서 임의로 결정하고 발굴자는 그 지침에
따를 것을 요청했다.
또한 발굴자는 그 이름을 밝히지 못하고. 자료를 작성하지 못하며
누구에게도 발굴 사실을 누설해서는 안 된다고 못을 박았다 총독부
의 이러한 태도는 학문적 진실을 왜곡할 우려가 있어 나는 심히 못마
땅했으나, 일단 고분의 실체에 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총
독부의 계약서에 서명 날인을 하고 발굴을 시작했다.
발굴은 야간에 조선인들이 나타나지 않는 틈을 타서 극비리에 진
행되었으며, 거기에서 출토된 유물들과 석실에서 떼어낸 벽화는 모
두 총독부의 파견관이 엄격하게 관장하여 비밀리에 반출했으므로 나
는 그 유물을 자세히 조사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후에도 조선총독부는 그 발굴에 대한 발표를 일절 하지 않았으
므로 나는 정당한 발굴사의 대접을 받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나는
침묵을 강요받았다.
그러던 중 나는 다시 만주에서 하나의 무덤을 발견했다 천운이었
다. 너무나 오랜 세월이 지나 봉분도 없어지고 표석은 물론 그것이
무덤이라는 흔적을 보여주는 것도 전혀 없었다. 전문가의 눈에도 그
저 뜨일 듯 말 듯한 희미한 흔적을 더듬은 나는 이제는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자 파들어갔다.
황량한 벌판에서 혼자 하는 작업인데다 사람들의 눈에 뜨이지 않
아야 했으므로 너무나 힘들었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나 묘실을 발굴
한 나는 기뻐 미칠 지경이었다. 강동군에서 보았던 그 선인화가 분명
히 벽에 조각되어 있는 게 아닌가 그러나 그 선인화는 아무것도 아
니었다. 그 다음 내가 발견했던 것에 비하면
거기에는 신물이 있었다. 신물에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조선의 천운이 다하여 여기에 신물을 묻노니 영원히 박달겨레를
지키리라:
나는 갑자기 온몸이 떨려왔다. 단 한 조각의 부장품에도 손을 댈
수 없었다. 신비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등뒤에서 누가 나를 무서운
눈초리로 노려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돌아보면 아무도 없었지만
공포에 질린 나는 허겁지겁 능을 나오고 말았다.
그러고는 신들린 사람처럼 내가 팠던 능의 입구를 흙으로 막았다.
왜 그랬는지 나도 모른다. 다만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렸을 뿐이
다 이후나는 말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 여기저기를 떠돌며 술 한잔
이라도 마실 수 있으면 행복해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죽음
을 예감하고 있다.
나는 지금 하는 일이 잘하는 건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죽음
에 이르러 학자로서 내가 보았던 것을 기록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여
(묘제의 연구)라는 제목으로 남겨 역사적 진실을 지키고자 한다. 다
만 저급한 인간들이 하늘의 뜻을 어기는 것을 막기 위하여 능의 위치
를 고조선의 역사와 만주의 옛 지명을 섞어 암호로 남긴다.
-마에다
눈으로 따라 읽던 사도광탄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수아는
자신도 모르게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수아의 손을 어느새 테드가 잡고 있었다. 기미히토 역시 긴장되
는지 침을 삼켰다.
(묘제의 연구)는 이런 것이었군요.
모두들 한동안 말을 잃었다. 무거운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연
것은 테드였다.
마에다라는사람이 강동군과 만주에서 같은 종류의 능을 발
굴했다는데 누구의 능일까요?
그래요. 강동군의 발굴에서 보았던 선인화를 북만주에서 다
시 보았다고 했어요. 마에다라는 사람은 거기에 큰 의미를 두는
것 같아요.
수아가 덧붙이며 사도광탄을 바라보았다.
선생님, 선인화가 뭐죠?
문자 그대로 선인을 그린 그림이지.
선인이요?
그래 .
선인화가 그 능의 주인을 말해 주나요?
그렇지 .
선생님은 그 능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계시죠. 지난번에도
얘기하려다 마셨잖아요. 이제 (묘제의 연구)를 보셨으니 얘기해
주세요.
사도광탄의 얼굴은 자못 엄숙했다. 그는 시선을 들어 창 밖의
강을 내다보다 혼자말처럼 입 속에서 한 단어를 되뇌었다
단군릉.
사도광탄의 대답에 모두 놀랐다. 특히 테드는자신도모르게
큰소리로 다시 물었다.
네? 단군릉이라구요?그렇다면 단군이 실제로 존재했던 인
물이란 말이에요?
그래 .
사도광탄은 침통함과 분노가 뒤섞인 얼굴로 눈을 감았다.
테드는 당황했다. 사도광탄에게서 이런 모습을 보는 것은 처
음이기 때문이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나자 눈을 뜬 사도
광탄은 마음의 평정을 되찾았는지 차분한 목소리로 테드에게 물
었다
북한에서 최근에 단군릉을 발굴했다는 뉴스를 들은 적이 있
나?
네, 자세한 내용까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요. 김일성이 단군릉
발굴 현장에 가서 학자들을 독려하고 대대적으로 주변 환경을
조성했다는 정도는 기억이 나는데요.
그렇다면 자네는 아까 왜 단군이 실재했던 인물이냐고 물었
지?
저는 그 모든 것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북한에서 단군릉을 발굴한 것이 그들의 거짓이라고 이해했다
는 건가
네 신문에서 그렇게 읽었어요. 북한이 정권의 정통성을 선전
하기 위해 단군릉이라는 있지도 않은 무덤을 조작해 낸 것이라
고 우리 나라의 학자들이 해설을 달았던데요.
음, 그 경우는 우리 나라라고 칭하는 것은 옳지 않아. 남한이
라고 하는 게 맞지. 항상우리 나라의 반쪽인 북한이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야 통일도 앞당겨지는 거야.
사도광탄은 평소 같지 않게 엄격했다.
죄송해요, 선생님 .
자네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나. 게다가 남한 학자들의 그런 의
심이 전혀 터무니없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지. 하지만 북한의 발
굴을 무조건 백안시하는 것은 옳지 못해. 북한에서 이루어졌다
는 이유 하나만으로 말이지.
그래요. 남한의 학자들이 북한에 가서 발굴 현장을 보고 맞다
틀리다 얘기했다면 신빙성이 있겠지만 가보지도 않고 무조건 조
작했다고 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런데 선생
님, 진상은 어떤 건가요?
수아가 나섰다.
남한의 학자들이 북한의 단군릉 발굴을 조작이라고 얘기하는
가장 유력한 단서는 단군의 유골이 안치된 관에서 나온 못 때문
이야.
못이요?
그래 관 뚜껑을 박은, 녹이 슬 대로 슬어 삭아버린 철못이 고
구려 시대의 것이라는 거지 .
-그 못이 고구려 시대의 것이라고는 누가 판정한 거죠?
북한의 학자들이 지 .
그럼 말이 안 되는군요.
뭐가 말이냐?
남한 학자들의 주장이 말이에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없는 단군릉을 조작하는 마당이라면 굳이 단군의 관에서 고
구려의 철못이 나왔다고 주장할 바보가 어디에 있겠어요?~
바로 그렇다.
사도광탄은 조금 전의 엄격하던 얼굴과 달리 흐뭇한 미소까지
띠고 테드를 칭찬했다.
내가 보기에 북한이 발표한 단군릉의 발굴 보고서는 매우 솔
직하게 씌어졌어. 그들은 유골의 연대를 확인하는 데 사용한 방
법까지도 자세하게 공개했지. 외부의 검증을 진지하게 받아들이
겠다는 의사 표시일 뿐 아니라 사실 관계에 대해서도 자신이 있
다는 얘기야.
과학적 연데 측정에 의하면, 그 유골은 언제 사람이라는 거
에요?
지금으로부터 약 3천 5백 년 전의 사람이라는 거지.
그럼 단군의 시대와 맞나요?
약간의 오차를 감안하면 들어맞아.
그럼 고구려 시대의 철못이 나온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
하고 있죠?~
이렇게 생각해 보자 요즘은 고고학이니 발굴 과학이니 하는
것들이 발달되어 뭔가가 발굴이 되면 그걸 박물관 등에 전시하
여 보전하지만 고구려 시대에는 유골을 꺼내 발굴한다든지 하는
과학이 없었어. 과학의 시대가 아닌 신앙의 시대였기 때문에 유
골에 깃들인 정령을 해치려 하지 않았지. 따라서 고구려 사람들
이 고분을 발굴했다 하더라도 그대로 관 뚜껑을 다시 닫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런 일이었을 거야, 고구려의 철못은 이런 관점에
서 이해해야 하겠지 .
그러니까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무덤을 고구려인들이 발굴했
다가 철못을 박아 다시 뚜껑을 덮었단 얘기군요.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자기공명측정에 의해 수천 년이나 된
것으로 밝혀진 유골을 고구려인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보다 더
신빙성이 있지 않을까?
그렇군요 그렇게 보면 남한의 학자들이 무조건 북한의 단군
릉 발굴을 부정하는 것은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아주 크겠군요.
그럴 위험도 크지만 무엇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미 단군을
마음속으로부터 지워버린 듯한 태도야. 역사학자들이 무서운 집
념으로 단군을 찾아내지 않으면 누가 한다고 실증이니 학문의
방법론이니 하면서 책상에나 앉아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 .
이번엔 수아가 물었다.
마에다와 북한의 학자들이 평양에서 단군릉을 발굴했는데 어
째서 마에다는 만주에서 단군릉을 또 발굴했다는 거예요?
단군은 한 사람이 아니다.
단군은 임금이라는 뜻의 보통 명사야. 즉 보통 알고 있는 단
군왕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야 .
그렇다면 단군은 몇 사람이나 되죠?
규원사화 등에는 단군이 모두47명이라면서 1대 단군왕검
부터 47대의 고열가에 이르기까지 그 이름을 전하고 있지.
이 서문을 보아서는 (묘제의 연구)는 단군릉을 발굴한 사람
이 총독부에서 유물도 내놓지 않고 발표도 하지 않은 사실에 불
만을 품고 진실을 알리기 위해 만든 자료집 같아요. 그런데 이치
로 교수가 도대체 무슨 연구를 했길레 토우는 그의 작업을 저주
했을까요?
사실을 그대로 밝힐 목적이라면 (묘제의 연구)를 그렇게 숨
겨두고 극비리에 작업을 추진할 필요가 없었겠지. 그냥 (묘제의
연구)를 세상에 드러내면 되는 일이니까.
이야기를 듣고 있던 수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도광탄은 잠
시 생각한 후에 침통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여기에는 음모가 있어. 연구란 건 말뿐이고, 야마자키의 의도
는 이치로 교수를 시켜 능의 위치를 확인하고 그 신물을 파괴하
려는 거야.
네? 신물을 파괴한다구요?
사도광탄은 고개를 끄덕 였다.
왜 신물을 파괴하죠?
북악의 지기를 막고 팔만대장경을 훼손하려는 것과 같은 이
유에서 겠지 .
그래서 토우가 작업을 방해하고 이치로 교수를 해쳤다는 얘
기군요.
그렇지.
수아와 테드는 다시 한 번 사도광탄의 논리적인 추리에 놀란
얼굴로 서로를 쳐다봤다.
그럼 이제 다 끝난 건가요? 이치로 교수도 죽었으니 까.
그게 그렇지 않다. 야마자키는 새로운 시도를 할 거야. 아니
이미 시작하고 있겠지. 이치로를 대신할 사람을 찾아서.
이치로를 대신할 사람이라구요? 그게 누구죠?~
도야마.
아, 어제 얘기하던 원로 역사학자요?
그래, 그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이치로와 마찬가지로
고조선을 부정하는 데 한평생을 바쳤고, 이 (묘제의 연구)가 드
러나면 일생의 학문적 업적이 모두 사라져버리는 사람이지. 따
라서 야마자키에게 약점이 잡혀 있는 사람이야.
모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말을 잃었다. 이제 이 음모를
분쇄하는 일만 남은 것이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갈 것인
가. 사도광탄은 천천히 창가로 걸어갔다.
잃어버린 시간
일본 사학계의 태두로서 이제는 교단을 떠나 전원 생활을 즐
기는 도야마 박사는 아침에 받은 한 통의 전화에 하루 종일 신경
이 쓰였다. 정원의 화초를 다듬을 때나 새로 심은 나무에 물을
줄 때에도 상대방의 목소리는 잊혀지지 않았다. 상념을 털어버
리려 집 뒤의 숲길로 산책을 나갔을 때는 더욱 또렷하게 귓전을
울려와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유창한 일본어는 아니었지만 한마디 한마디를 똑똑하게 발음
하는 상대에 대한 궁금증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해갔다.
도야마 선생인가요?
상대방은 첫마디부터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학계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그를 이렇게 불경스러운 어조로 부르다니.
그렇소만?
낙랑의 비밀을 알고 있겠지요?
뭐라구요?
낙랑의 비밀 말이오.
그게 무슨 말이오, 도대체?
만나서 얘기하지요.
당신은 누구요?
사도광탄이오.
괴상한 이름을 댄 상대는 오후에 찾아오겠다는 것이었다. 도
야마는 당연히 그의 방문을 거절하려 했으나 어쩐 일인지 목소
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무엇이 자신을 그리도 당황하게 했
는지 모를 일이었다.
산책에서 돌아와 서재의 책상 앞에 앉은 도야마는 심란한 손
길로 책상 서랍에 열쇠를 꽂았다. 30여 년이나 한 번도 열어보지
않은 서랍이었다. 열쇠를 꽂아 돌리는 도야마의 손길에 가느다
란 떨림이 일었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다잡은 도야마는 힘있게 서랍을 당겼다
서랍 속에는 오랜 세월을 묵은 편지 봉투가 뽀얗게 먼지를 뒤집
어쓰고 있었다. 도야마는 편지 봉투를 꺼내서 책상 위에 올려놓
았다.
'마에다로부터'라는 겉봉의 글씨가 상념을 불러일으켰다. 긴
긴 세월이 지나는 동안 한 번도 꺼내본 적이 없는 편지였다. 붓
으로 쓴 먹글씨는 봉투도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다. 도야마는 눈
을 감았다.
단군릉을 발굴한 마에다가 편지를 보내온 것은 도야마가 역사
학회의 발굴 분과 위원으로 있을 때였다. 도야마의 은사 무라카
미는 마에다의 동료로 단군릉의 비밀 발굴에 참여했다.도야마
는 어린 나이였지만 은사를 따라 그 작업에 동참할 수 있었다.
마에다는 재야 사학자였지만 조선의 역사에 상당한 식견을 가
지고 있었다. 그는 조선의 역사서를 깊이 있게 연구하여 평양 부
근의 강동군에 단군릉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당시 무라카미는 총독부와 함께 극비리에 단군릉 발굴
을 부정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단군릉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면
그 당시 일본의 정부와 역사학계가 전력을 다해서 조작해 낸 한
반도의 고대 국가 기원에 대한 역사가 뒤집어지기 때문이었다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몇 년이 지나 무라카미가 뜻하지 않은
사고로 급사한 직후 보내온 편지에 마에다는 알코을 중독자가
되었다고 했다. 패전 전에 이유 없는 박해를 받았기 때문에 술
로 한풀이를 하다가 이제는 알코올에서 헤어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고 했다. 그는 북만주에서 새로이 발견한 단군릉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가 있으며, 약간의 돈과 기꺼이 바꿀 수 있다고
했다.
반신반의하며 도야마가 돈을들고 가서 그를
찾아갔을 때
그것은 이미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간 후였다. 마에다는 큰돈을 받
은 모양으로 누구에게 넘겼는지 결코 말하려 하지 않았다. 돈이
떨어지면 연락을 해오지 않고는 못 배기리라 생각하고 돌아와
기다렸지만 이상하게도 그로부터는 다시 연락이 없었다. 세월이
가면서 마에다의 존재는 잊혀졌고,도야마는 평양의 단군릉 발
굴 경험 덕분에 고조선 연구의 권위자로 칭송받게 되었다.
그런데 바로 그 마에다가 쓴 (묘제의 연구)가 어제 야마자키
로부터 전해져 왔던 것이다. 자신의 치명적인 약점에 대한 은근
한 암시와 함께.
손님 이 오셨습니다.
상념에서 깨어난 도야마는 황급히 편지를 다시 책상 서랍에
집어넣었다.
이리 모셔라.
사나이는 온화한 얼굴에 조용한 몸짓으로 들어왔다. 사나이
의 풍모는 도야마가 이제껏 가졌던 불쾌함을 어느 정도 가시게
했다.
실례합니다.
감정이 실리지 않은 인사말이었다.
앉으십시오.
도야마는 하는 수 없이 정중하게 방문객을 맞았다.
한국 고대사의 비밀에 대해 의논하기 위하여 찾아왔습니다.
무슨 비밀입니까?
도야마는 경계를 풀지 않은 표정으로 사도광탄의 말을 받았
다
선생도 참여했던 일본 정부의 단군 말살 정책에 대해 묻고 싶
습니다.
무슨 소릴 하고 있소? 단군 말살 정책이라니?
한마디로 부인하는 도야마를 바라보며 사도광탄은 타이르듯
되물었다.
그렇다면 선생께서는 조선의 단군릉 발굴 사실을 모르셨단
말인가요?
도야마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일제 시대에 이루어졌던 강동군 강동읍의 단군릉 발굴 말입
니다.
그 능을 단군릉으로 단정할 수는 없소.
도야마의 강경한 부정에 사도광탄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고
개를 저었다.
단군릉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구요? 그렇다면 그 당시 발굴된
유적을 왜 한 점도 발표하지 않았지요?
그것은, 그것은 총독부의 방침이었기 때문이오.
도야마의 목소리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떨렸다.
총독부의 방침이었다구요? 그랬겠지요. 그 능에서 한국의 유
구한 역사를 증명할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으니 총독부에서는 당
연히 발표를 못하게 했겠지요. 그런데 발굴이란 무엇이지요? 총
독부에서 그런 방침을 정하면 학자들은 발표를 하지 않는 건가
요? 그러고도 양심 있는 학자라고 할 수 있을까요?
당시에는 발굴에 대한 모든 사항을 총독부에서 관장했기 때
문에
세상의 모든 학자들이 행하는 발굴은 반드시 발굴보고서를
쓰도록 되어 있어요.그러나 일본인들이 행한 강동군의 단군릉
발굴은 단 한 장의 보고서도 없어요.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거
지요?~
할말을 잃은 도야마의 얼굴은 이제 드러나게 붉어져 있었다
발굴 보고서 없는 발굴은 도굴이 아니오. 학자들이 역사를 땅
에 묻어버리기 위해 참가한 발굴은 범죄란 말이오. 일본의 학자
들은 이런 일을 수없이 저질렀지만 특히 단군릉의 발굴 보고서
를 작성하지 않고 수많은 유물을 없애버린 것은 인류에 대한 무
서운 범죄요.
우리는 총독부의 지 침을 따랐을 뿐이오.
총독부는 당시 출토된 유물을 일본으로 보냈겠지요. 단군의
유물이 노출되는 것을 막는 일은 총독부 최대의 사업이었을 테
니까 .
당시 누구도 그 유물들이 단군조선 시대의 것이라고 확정할
수 없었소.
하고 싶지 않았겠지요. 하지만 당신들이 파괴한 그 수많은 유
물 중에는 그것이 틀림없는 단군의 무덤임을 알려주는 확고한
증거가 있소.
그것이 무엇이오?
무덤의 네 벽에 그려졌던 벽화요.
벽화?
그렇소. 선인과 장수를 그린 단군왕릉의 벽화요. 그 벽화는
어디로 갔소?
벽화를 잘라 옮겼는지 어쨌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소. 유물의
관리는 모두 총독부에서 했으니까. 어째서 그 벽화가 단군릉임
을 확실히 입증하는 증거라는 거요?
선인화니까요. 물론 고구려 시대의 무덤에도 선인을 그린 예
가 없는 것은 아니오. 하지만 선인 혹은 신선을 독립된 주제로
그린 것은 없고, 다른 주제에 선인이나 신선은 오직 부차적으로
만그려져 있소.그러니 선인이 독립적 주제로 그려져 있었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단군의 무덤이란 얘기가 되는 것이오.
일리는 있지만 확실치 않은 얘기요. 지금 당신의 주장은 마치
북한이 얼마 전 발굴한 고구려의 무덤을 단군릉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소.
북한의 발굴이라고 해서 우습게 보지 마시오. 북한 역시 그
무덤을 발굴한 동기는 일본인 학자들이 발굴한 것과 같소. 잘 아
시겠지만 강동군 강동읍의 그 무덤은 이미 수많은 역사서에 의
해 단군의 무덤으로 기록되어 오고 있던 것 아니오.
사도광탄의 강변에 도야마는 대꾸를 잃었다. 그는 단군릉을
발굴하고도 발굴 보고서를 쓰지 않았던 것에 대해 오랜 세월 자
책을 느껴왔던 것이다. 막무가내로 찾아와 자신을 질타하는 상
대에 대해 심기가 무척 불편했지만 뭐라고 항변할 수 없었다. 사
실 당시 제국주의의 분위기에선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학자의
입장에서는 사후에라도 진실을 밝혀야 했다. 자신 또한 그 일로
고민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던 세월이었다.
도야마는 더 이상 긍정도 부정도 않은 채 말을 돌렸다
그런데 아까 낙랑의 비밀이라고 했던 것은 도대체 무엇을 말
하는 겁니까?
은폐된 비밀
일본 학자들이 아무리 한민족의 고대 국가를 부정해도 고조
선의 실체는 지워지지 않았어요.수많은 중국의 사서에 조선이
라는 나라가 등장하기 때문이었지요 그러자 일본은 고조선을
작고 초라한 나라로 조작하려 했어요. 그래서 연구해 낸 것이 한
사군의 위치를 조작하는 일 아니었습니까?
우리가 한사군의 위치를 조작했다구요? 그런 어처구니없는
주장은 처음 들어보는군요. 한사군의 위치는 출토된 유물을 중
심으로 엄밀히 고증된 것이오. 당신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르겠
지만 그렇게 함부로 얘기하지 마시오.
도야마는 거칠게 항변했다. 그러나 사도광탄은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일본은 기를 쓰고 낙랑군이 지금의 평양을 중심으로 한반도
안에 있다고 주장해 왔어요. 그래야만 한반도가 기자조선, 위만
조선에 이어 한나라의 지배를 받아왔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지
요. 불행하게도 지금의 한국 교과서애도 그렇게 실려 있지만.
게다가 일본의 교과서에는 그 무렵 한반도의 남부는 일본이 지
배했다고 씌어 있으니 일본은 한민족을 최대한 초라하게 만들
었지요.
그렇다면 당신은 낙랑군이 평양 부근에 있었던 게 아니란 얘
기를 하고 있는 거요?
그렇소.
터무니없는 소리. 나의 스승을 비롯한 학자들이 평양의 고분
을 발굴했을 때 수많은 부장품들이 나온 것은 도대체 어떻게 설
명할 거요? 한나라의 것과 동일한 양식의 유물들과 한나라의 연
호가 새겨진 유물, 그 무엇보다도 낙랑이라 새겨진 기와 조각들.
그것조차 모두 허위였다는 얘기요?
틀림없이 그런 유물들이 나왔지요. 하지만 거기에는 함정이
있소.
무슨 함정이 있다는 말이오?
평양의 고분에서 나온 부장품들은 서한이 아닌 동한의 양식
이었소. 위만조선을 무너뜨리고 한사군을 설치한 것은 서한이
오. 그러면 한사군에서는 당연히 서한의 문물이 나와야 하지 않
겠소? 그러나 평양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은 서한이 아닌 동한의
것이었소. 여기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평양 고
분군을 발굴한 일본 학자들은 한나라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니 평
양은 낙랑군의 일부였다는 이론을 세워버렸던 거요. 물론 선생
의 스승 같은 사람들이 앞장선 일이지요. 광개토대왕비의 안 보
이는 세 글자로 임나일본부를 조작해 내는 솜씨니 그쯤은 일도
아니었겠지 .
듣고 있던 도야마가 고함을 질렀다.
낙랑이라는 글자가 엄연히 기와에 새겨져 있었는데도 평양이
낙랑군의 일부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단 말이오?
도야마의 표정은 확고했다 그러나 사도광탄은 나지 막하나 힘
있는 목소리로 도야마의 고성을 막았다
도야마 선생, 조용히 하시오. 발굴 기록도 숨기는 범죄자가
무슨 자격으로 고함을 친단 말이오? 당신도 역사학자라면 낙랑
의 비밀이 무엇인지 겸허하게 들으시오. 그 다음은 당신의 양심
에 맡기겠소.
도야마는 분노가 치밀었지만 신경을 집중하여 듣지 않을 수 없
었다. 자신의 은사 무라카미는 낙랑 유물을 근거로 한사군의 한
반도 지배설을 끌어낸 사람들 중 하나였고, 자신도 낙랑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를 결정적인 증거로 생각하고 있는 터였다.
선생은 낙랑공주와 호동왕자를 알겠지요?
도야마는 분을 참으려는 듯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 이야기에 낙랑의 비밀이 숨어 있소.
하지만 그 이야기는 야담이 아니오?~
야담?그런 정도도 모르는 사람들이 남의 역사를 그리도 비
틀었단 말이오? 잘 들으시오. 낙랑공주와 호동왕자는 당신들도
정통성을 인정하는 삼국사기의 대 무신왕조에 나와 있는 엄연
한 역사의 기록이오.
그럼 낙랑공주가 실재했던 사람이란 얘기요?~
그렇소.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 대무신왕의 아
들인 호동왕자는 옥저로 사냥을 나갔다가 낙랑 왕 치리를 만나
낙랑으로 가서 그의 딸과 혼인을 했소. 당시 낙랑에는 적이 쳐들
어오면 저절로 울리는 자명고가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가 낙랑을
정복하기는 매우 어려웠소. 그 비의는 망을 보는 훌륭한 시스템
이 있었다는 얘기요. 호동왕자는 낙랑공주를 시켜 몰래 북을 없
애도록 하여 결국 고구려가 낙랑을 정복할 수 있었소. 역시 낙
랑공주가 그 시스템을 와해하도록 사주했단 얘기이고. 이 사실
을 안 최리는 딸을 죽인 후 항복했고, 호동왕자도 대무신왕의
원비의 모함과 낙랑공주에 대한 사랑으로 번민하다가 결국 자
살했소.
재미있는 얘기이긴 한데 그것과 낙랑의 비밀이 무슨 상관이
있다는 얘기요?~
이 재미있는 이야기 속에 역사의 음모를 밝힐 수 있는 열쇠가
들어 있소.
도야마는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신경을 집중했다.
우선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어째서 최리가낙랑의 태수가아
닌 낙랑 왕이라 불리고 있는지에 주목해야 하오. 낙랑군을 다스
리는 자는 태수라야 하는데 낙랑 태수가 아닌 낙랑 왕이라고 기
록된 데서 최리는 낙랑군이 아닌 낙랑이라는 한 나라의 왕이라
고 생각해 볼 수 있소.
도야마는 아무런 반응이 없이 듣고만 있었다
다음으로 사냥을 가서 만난 호동왕자를 바로 자신의 나라로
데려가서 공주와 혼인을 시켰다면 최리는 중국인이 아니라고 볼
수 있소. 중국인이었다면 쉽게 말이 통할 리도 없었을 테고, 그
렇게 쉽사리 결혼을 시켰을 리도 없었을 거요.
일리 있는 얘기라는 생각이 도야마의 뇌리 한구석에서 똬리를
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낙랑군은 기원후313년이 되어서야 고구려의 미
천왕에게 멸망하는데, 기원후 32년에 최리가 딸을 죽이고 고구
려의 대무신왕에게 항복했다는 것은 이 낙랑국이 한사군의 낙랑
군과는 전혀 다른 나라, 즉 고구려에 면해 있는 한 소국이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유력한 증거요. 옥저와 가까운 낙랑이라는 이름
의 한 작은 나라, 이 나라가 평양부근에 있었을 것이라는추측
은 매우 자연스럽소.
그렇다면 평양에서 발굴된 유물들도 낙랑군의 것이 아니라
바로 낙랑공주의 나라인 낙랑국의 것이라는 말이요?~
바로 그렇소. 낙랑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가 평양에서 발
견되었을 때 일본인 발굴자들은 그 낙랑이 한사군의 낭랑군을
의미하는지 최리의 낙랑국을 의미하는지를 깊이 연구했어야 했
소 그러나 일본 학자들은 이것저것 살피지 않고 바로 낙랑군과
연결해 한민족의 역사를 기원전 108년부터 중국의 지배를 받아
온 비참한 역사로 규정지어 버렸던 거요.
도야마는 항변하고 싶었다 그러나 어떻게 항변해야 할지 갈
피가 잡히지 않았다. 상대의 얘기는 합리적인 가설이었다. 도야
마는 이 사람의 정체에 대한 궁금증이 강하게 일었다.
생각해 보시오. 기원후 32년이면 한나라가 강성하던 시기인
데 낙랑 태수가 고구려에 항복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 아니
오.
도야마의 양심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렇긴 하오.고구려는 그 당시 한사군의 견제를 피해 겨우
일어나고 있었는데 낙랑군이 고구려에 항복한다는 것은 어불성
설이오.
그렇다면 이 낙랑공주와 호동왕자의 얘기 속에 숨어 있는 낙
랑의 비밀을 이해하겠소?~
최소한 낙랑공주의 나라가 한사군 중의 낙랑군이 아니었을
거라는 확신은 들지만
사도광탄의 차가운 눈빛이 무섭게 파고들었다.
선생이 학자라면 지금 이 자리에서만이라도 양심대로 대답을
해보시오. 이제까지는 고조선을 없애려고 그렇게 기를 써왔겠지
만
도야마를 노려보는 사도광탄의 눈빛에는 얼음장같이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도야마는 쏘아보는 사도광탄의 눈길을 대하자
마음속으로부터 심한 자괴감이 일었다.
단군릉을 발굴하고도 보고서를 쓰지 않은 것은 일생의 과오였
다. 왜, 무엇 때문에 그 당시는 조선의 역사를 깎아내리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었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 학문의 세계에서 고요함과 삶의 의미를 누리고
있는 터에 예고 없이 찾아온 이 사람은 도야마의 양심을 무섭게
흔들어대고 있었다. 일본 역사학계의 태두라는 칭송을 듣는 자
신보다는 차라리 마에다가 훨씬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
다. 자신은 제국주의 정부를 위해 앞장을 서다 보니 이제는 거짓
과 허위로 뭉쳐진 비참한 인간이 되어버렸지만, 마에다는 비록
알코올 중독이 되었어도 떳떳하게 진실을 밝히고 간 사람이라는
생각에 숨이 막혀왔다.
단군릉의 은폐. 잊어버리고 싶었던 그 일이 오늘 이 사나이를
대하자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올가미가 되어 자신을 칭칭 감
아왔다 게다가 지금 사도광탄의 불이 튈 것 같은 눈길은 무서운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그의 눈은 사람의 것이 아닌 듯했다
도야마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당시 우리는 최리의 낱랑국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소. 평양
에서 낙랑이라는 글자가 나오자 당연히 한사군의 낙랑군이 평양
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했소.
사도광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어섰다 도야마는 사도광탄
에게 무슨 말이라도 할 것처럼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목이 메는
듯 힘들게 목소리를 밀어냈다.
단군릉을 발굴하고도 발굴 보고서를 내놓지 않은 것은 두고
두고 일본 학계의 부끄러움으로 남을 거요. 지금이라도 당시의
유물을 찾고, 발굴 보고서도 내놓는 것이 진정한 학자의 길이지
만. 아,나는 이미
도야마는 감정이 격해졌는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더니 갑자기 가슴을 움켜쥐었다.
지난식민 시대에 조선의 역사를 우리가 군국주의자들
의 강요에 의해 조작했던 것은 두고두고 씻을 수 없는 부끄러움
이오. 일본 학자들을 대신해 내가 이 도야마가 진심으로 사
죄하고 싶소.우리는 조선의 역사에 대해 일종의 열등감을
아, 그것을 보상받기 위해 우리는 조선의 역사를 파괴해야 한다
는 강박 관념을 가졌던 것이오. 용서하시오. 내가 내
가 이 도야마가
사도광탄은 도야마의 얼굴에 참회와 더불어 고통스런 표정이
자리잡는 것을 보자 불타는 듯하던 눈길을 거두어들이고는 현관
을 나섰다
신화의 나라
어디를 다녀오셨어요, 선생님?~
사도광탄이 도야마를 만난 얘기를 하자 수아는 의외로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수아는 평소 주변의 일본이나 중국의 역사와
는 달리 한국의 역사만 왜 그토록 짧은가 하는 의문을 떨칠 수
없었다. 늘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라 하면서도 막상 국사 교과서
에는 기원을 전후하여 생긴 신라, 고구려, 백제만을 고대 국가의
기원이라고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단군과 고조선은 과연
어디로 갔단 말인가.
선생님 , 단군릉은 어떤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어요?~
동국여지승람에 강동에는 두 개의 큰 무덤이 있는데
그중의 하나는 민간에서 단군묘라고 전해오는 것으로 둘레가
410자라고 기록되어 있고,숙종실록에는 강동의 단군묘와 평양
의 동명왕묘를 해마다 수리할 것을 건의한 이인엽의 상주를 허
락했다는 기록이 있지. 영조실록에는 영조가 평양감사에게 단군
묘를 잘보수 관리할 것을 명령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고 또 정
조실록에는 정조가 평양감사에게 단군의 묘지기를 정하고 강동
의 지방관으로 하여금 매년 봄과 가을에 묘를 둘러보는 것을 제
도화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기록이 있어.
일본인들의 단군릉 발굴에서는 총독부의 마음에 들지 않는
유물이 나왔겠네요.
그렇지. 발굴 보고서를 쓰지 않은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
아니었겠어?
우리 교과서에서는 단군을 역사가 아닌 신화로 소개하고 있
잖아요, 도대체 그 이유는 뭐예요?
우리 역사학계에서는 그간 일본인 학자들이 조사하고 연구한
실적을 토대로 우리 역사를 구성해 왔단다. 일본인 학자들은 그
당시 신국 사관에 사로잡혀 우리 역사를 깎아내리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지.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근대 학문이라는 틀 속에서
이루어졌고, 학자들은 그 학문적 방법론을 중요시하다 보니 일
본인들의 주장을 그대로 따르고 말았어.
정말 한심하군요. 우리 나라 역사를 짓밟아온 일본의 함정 안
에서 우리의 교과서가 편찬되고 학생들에게 가르쳐 지고 있다니
말이에요.
게다가 전에도 얘기했듯이, 일본 학자들은 그들의 신화는 사
실로 인정하면서 유독 한반도에서만은 철저한 고증을 부르짖었
지. 그러니 우리 학자들은 고증이 되지 않은 것은 모두 배제하는
것이 옳은 줄 알고 만주나 시베리아에 갈 수도 없는 상황에서,
또 일본인들에 의해 철저하게 사료를 파괴당한 상황에서도 고증
만을 부르짖는 어리석음을 저질렀지. 그러니 한민족의 고대사가
실종될 수밖에
저도 한 교수가 텔레비전에 나와 단군은 고려 시대에 몽고의
침략을 받자 민족 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나타났다고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있어요.
사도광탄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정말 큰일이구나. 그것은 미우라라는 일본인 학자가 조선사
편수회에서 처음 주장한 내용이고, 그후로 단군과 고조선을 부
인하는 데 전매 특허로 쓰인 허구인데 말이야.
일본인이 처음 주장했다고 해서 허구로 몰아붙일 수는 없잖
아요?
그들의 의도가 문제지. 일본이 한반도에서 가장 역점을 둔 정
책이 바로 단군과 고조선의 부정이었어.
단군은 불교적 믿음의 산물, 혹은 조작이라고 한 역사 선생님
도 계셨던 것 같은데요?~
단군을 전하는 기록 중 대표적인 것이 일연의 삼국유사와
이승휴의 제왕운기야 두사람의 경향은 매우다르지.한사람
은 승려이고 한 사람은 유교 학자이니까. 그러나 이 두 책에는
같은 내용의 단군 이야기가 실려 있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누가 어떤 목적을 위해 조작한 것이 아니라는 훌륭한 반
증이 아니 겠니?
수아는 내심 뿌듯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사도광탄이라는
아주 특이한 사람으로부터 듣는 역사는 학자들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낙랑공주와 호동왕자로부터 고대사의 비밀을 거미줄 뽑
아내듯 하는 솜씨에는 존경심이 생기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저는 이해할 수가 없어요. 비록 물리적으로 어떻게 하지는 못
한다 하더라도 도야마 교수가 그렇게 참회했다면 진실은 밝혀진
셈인데, 선생님은 왜 이렇게 언짢은 표정이시죠?
문제는 저런 학자가 아니야. 모두의 정신을 지배하는 자는 따
로 있어 .
그자가 누구죠?
사도광탄의 표정이 굳어졌다
야마자키는 도야마가 심장마비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서둘러 그의 집으로 갔다.
억세게도 재수가 없다고 생각하던 야마자키는 도야마의 몰골
을 보는 순간 머리털이 곤두서는 듯한 두려움을 느꼈다 부인의
말에 따르면 어제 한 한국인이 왔었다는 것이었다. 그가 급작스
런 심장마비로 쓰러진 것은 그 한국인의 영향 때문일 수도 있다
는 예감이 들었다
야마자키는 황급히 (묘제의 연구)부터 챙겼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하던 야마자키는 자존심을 누르고 다카가와를 찾
아갔다.
그놈이 나타났소.
다카가와는 대답 없이 야마자키를 쏘아보기만 했다
한국에서 왔다는 놈이 도야마에게 찾아갔었소.
도야마가 쓰러졌소. 그놈이 왔다 간 다음 쓰러졌단 말이오.
허둥대지 마시오. 그런다고 될 일이 아니오.
내가 허둥대지 않게 생겼소?토우보다도 더 무서운 놈이 나
타났는데, 어떻게 할 거요?
뭘 말이오?
뭐라니? 어떻게 그놈을 죽일 거냔 말이오.
그는 그렇게 쉽게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아니오.
그럼 그냥 둔단 말이오?
매사는 운명에 따라 흘러가는 법이오. 스승님의 유언도 있고
하니 기다려 봅시다.
유언이라구? 그렇다면 이 조선놈이 나타날 것을 호사이 선생
은 알고 있었단 말이오?~
그렇소.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야마자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신네 법술사들은 믿을 수가 없어.
순간 다카가와는 눈을 치켜떴다. 그러나 야마자키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 표정으로 내뱉었다.
60년 전 그 토우가 나타났을 때도 호사이 선생만 무사했지.
지금도 당신만 살 테지. 방법은 그놈을 없애는 것밖에 없어 어
차피 조선의 뿌리를 잘라버리려는 판에 하찮은 놈 하나 더 없애
는 것이 뭐 그리 어려워. 나의 선친은 식민 지배 당시 이 칼 한
자루로 조선인들의 목을 백 개도 더 떨구었는데.
야마자키는 들고 있던 칼집에서 칼을 쭉 빼들었다 불빛을 받
아 차갑게 빛나는 칼날을 눈길로 훌으며 야마자키는 중얼거렸다.
죽일 놈들! 다케시마가 자기네 것이라구 무지렁이 같은 놈
들이 감히 대일본에 대적을 해.
보란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기합과 함께 허공에 대고 칼을 휘
두르는 야마자키의 얼굴에는 강한살기가 뻗쳤다.그는 이미 제
정신이 아니었다 그간 맺힌 게 있었던지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
는 말들은 횡설수설했다.
어업협정이란 또 뭐야. 나포하는 대로 모조리 형을 살려야지
냄비 같은 놈들 선장에게 가혹 행위를 했니 어쩌니 하고 들끓다
가도 사흘만 지나면 싹 잊어버리는 놈들 반일이니 뭐니 하다가
도 급하면 돈 빌려달라고 손부터 내미는 놈들. 감히 총독부를 철
거할 때부터 죽여버리고 싶었어 .
다카가와는 야마자키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다 고개를 가로저
었다
기다려 보시오. 내일이면 그자의 운명이 결정될 테니까.
운명이 결정되다니?
죽거나 살거나 둘 중 하나요.
호사이 선생의 유언이 바로 그것이오?
그렇소.
그제야 야마자키는 다소 흥분이 가라앉았는지 칼을 거두고 다
카가와 앞에 앉았다.
사도광탄은 다카가와와 약속한 날 신사로 그를 찾아갔다.
귀인이 오셨는데 차를 한잔 대접해 드려야 할 것 같군요.
그럼 신세를
두 사람은 신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다카가와의 집으로
갔다 다카가와는 사도광탄을 찻방으로 안내한 후 다다미에 무
릎을 꿇고는 두 손을 모으고 눈을감은 채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제 얼마 후면 이승을 이별할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썩
좋지 않았다
그러나 운명을 어떻게 할 것인가.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
는 일이었다. 스승이 이미 오래 전에 준비해 둔 절차였다. 오히
려 그는 과분한 대접을 받는 건지도 몰랐다.
이제껏 스승이 내준 세 가지 문제에 접근할 수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의 얼굴을 보면 연민이 생기지 않는 것은 아니
었지만 이것은 자신이 자비를 베푼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신과도 같은 스승의 일일 뿐이었다.
이윽고 눈을 뜬 다카가와는 정성스런 손길로 청동 화로를 꺼
냈다. 화로의 양면에는 날아갈 듯한 선녀의 옷깃이 바람에 펄럭
이며 하늘에까지 닿아 있는 조각이 새겨져 있었다
다카가와는 간단한 주문을 읊조리며 숯불을 피웠다. 파란 불
꽃이 가늘게 일 때까지 연기 한 가닥 피우지 않는 그의 솜씨는
일품이었다. 파르스름한 불꽃 위에 먼지 한 점 묻지 않은 백자
주전자를 올려놓는 동안 다카가와는 잔기침조차 하지 않았다
정성스럽게 귀를 기울여 물이 끓는 소리를 듣고 있던 다카가
와는 한 손으로 소매 깃을 잡고 주전자를 들었다. 공손하게 무릎
을꿇고사도광탄의 찻잔에 차를 따르는 그의 자태는 이미 인간
의 모습이 아니었다.
좋은 차로군요.
바로 한국 지리산의 차밭에서 가지고 온 것입니다.
아, 그런가요? 지리산의 새벽 이슬 맞은 차는 한국에서도 으
뜸이지요. 이 차는 그중에서도 최고라는 운상이로군요. 이 차를
여기서 맛볼 줄은 몰랐습니다 이 차에 얽힌 원효와 의상데사의
얘기를 하나 해드릴까요?
재미있을 것 같군요.
의상대사가 깨달음을 얻자 선녀가 나타나 매일 지리산의 구
름 위에서 자라는 찻잎을 따 한잔씩 대접했습니다. 어느 날 의상
대사는 선녀에게 내일은 손님에게 차를 대접하고 싶으니 두 잔
을 가지고 오도록 부탁했지요. 그리고는 선녀가 오는 시간에 원
효대사를 청했습니다 의상은 하늘도 자기를 알아준다는 것을
원효에게 자랑하고 싶었던 겁니다 그러나 원효대사가 오고 나
서 아무리 기다려도 선녀는 나타나지 않았어요. 기다리던 원효
가 떠나자마자 선녀가 차를 가지고 나타났지요. 화가 난 의상대
사에게 선녀가 하는 말이 이미 한 시간 전부터 차를 가지고 왔
지만 원효의 주변에 5백이나 되는 나한이 둘러싸 그를 보호하므
로 방이 꽉차서 들어올 수 없었다고 하더랍니다. 운상이라는 차
에 담긴 선담이지요.
선승들은 차를 한잔 마시는 것만으로 도를 깨치기도 하지요
연전에 성 철선사가 돌아가셨을 때에는 저도 차를 한잔 끓여내어
가시는 길에 내놓기도 했습니다.
차를 끓여내기 전에 대장경 경판이라도 찾아주셨으면 선사께
서 즐겁게 받아들이셨을 텐데요.
사도광탄과 다카가와가 나누는 대화는 선문답 같았다.
역사학자들과 더불어 강론을 하는 것은 뜻밖이더군요.
우리 일본의 경우 신도와 역사는 분리하기가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특히 고대의 전승이나 신화에 대한 결정적인 자료는 신궁에
보관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역사학자들은 많은 부분을 신
관에게 의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신관들의 맹목적인 신앙이 역사를 왜곡하기도 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지요.
그런 사례가 있던가요?
이소노카미의 신궁에 있는 칠지도는 일본이 백제의 종주국이
었던 것처럼 보이기 위해 신관이 글자를 깎아 보이지 않게 하려
했지요.
백제 왕이 일본 태자에게 하사한 칠지도는 일본 우월주의자들
을 괴롭혔다 그들은 칠지도를 중국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조작
하기 위해 표면의 연호를 깎아버렸던 것이다
그 일은 유감입니다.
다카가와는 부정하지 않고 시원하게 유감을 표시했고, 사도광
탄도 더 이상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차의 향기는 말할 수 없이 은은했다. 사도광탄은 다카가와에
게 진심으로 인사를 챙겼다
참으로 오늘 한잔 차에 정신이 맑아지는군요.
무슨 말씀을요.
기미히토 교수에게 단순한 최면이 아닌 초혼의 법술을 쓴 흔
적을 도고 많이 놀랐습니다.
아하, 그랬군요. 그것을 아셨군요. 하지만 스승님의 진전에
비하면 저는 새의 깃털과도 같은 재주죠.
그분은 어째서 조선의 기를 그렇게 얽어놓으려 하셨던가요?
만년에 저에게 말씀하시길 동방의 지기는 일본과 한국이 나
누어 가진다 하셨습니다. 한국이 승하면 일본이 기울고 일본이
승하면 한국이 기운다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해결책은 따로 있지 않을까요. 명산대천에서 수
도인들이 기도를 하고, 신을 모시는 사람들이 화합의 굿을 하며,
지맥을 다루는 사람들이 한국과 일본 사이에 흐르는 기가 대척
하지 않도록 비보와 염승을 만드는 것 등등 말입니다.
스승님은 당시 일본이 천기를 얻고 인물이 동하는 데 반해 지
기가 따라주지 못하는 현실을 크게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지기만
승했으면 미국과의 대전에서도 질 리가 없었지요. 전쟁을 예견
하시고는 조선의 혈을 막아 기를 최대한 받으려 하셨지요.
기는 결국 정의를 따르게 되어 있지요. 기가 승한 것을 정의
라 하니까요. 만주와 한반도의 지기를 막아 일본이 승하려 했다
면 불의를 행하려 한 것이고, 사필귀정이라 결국은 무너질 수밖
에 없는 것이지요.
다카가와는 대꾸하지 않았다. 어차피 죽을 사람인데 깊이 다
툴 필요가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호사이 선생이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 하나 인간의 정의를 가
볍게 보았으니, 나는 선생의 생각과 능력이 지금에 와서 그대로
재현될 것을 염려하고 있어요.
무슨 말씀인가요?
지금도 일본인들은 괴상한 우월주의에 사로잡혀 있지 않나
요?
괴상한 우월주의라 그것은 어디에서 오는 것이죠?
일본의 신화주의에서 오는 것이지요.
신화주의?
아까선생이 얘기했듯이 일본의 역사는 신도와 분리할수 없
을 정도로 신도의 영향을 받고 있어요. 신도는 결국 신화 시대의
인물들을 모시는 것 아닌가요.
일본의 역사가 일본 신들의 뜻에 따라 전개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오.
문제는 일력 신이 타민족의 신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데
있는 거지요.
일본 신은 하늘의 자손이오.
모든 민족의 신화에서 시조는 항상 하늘의 아들이지요. 문제
는 그 신화로써 역사를 대치하려는 데 있는 것이오. 따라서 일본
인들은 타민족에 대하여 언제나 우월감을 갖게 되어 있소.
사도 선생은 스승님과 내가 그 우월주의를 심어주고 있다고
생각하오?
그렇소.
사도광탄은 단호했다.
이제껏 부드러운 표정으로 일관했던 다카가와의 몸에서 살기
가 꿈틀했다. 다카가와의 살기가 온몸으로 뻗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눈으로부터 광포한 기운이 뻗쳐나왔다. 이제 그는 사
도광탄을 어떻게 죽여야 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했다. 하지만 그
전에 절차는 거쳐야 할 것이다.
스승께서는 중앙청의 석주가 세 김 (개 느러나면 조선의 지맥이
풀릴 것이라 하셨소. 그리고 찾아오는 사람이 있을 것이니, 그가
유체를 보고자 한다면 세 가지 문제를 내보라 하셨소.
세 가지 문제라고요?
그렇소. 이제껏 나는 어떤 수도인도 그 문제를 푸는 것을 보
지 못했소.
하물며 나는 법술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문제를 풀겠소?
그 점은 염려 마시오. 임진란 후에 사명대사가 건너 오셨을 때
에는 신관들에 의하여 법술을 시험받으셨지요. 그때 사명대사는
훌륭한 법술로 모두를 놀라게 하시고 수많은 포로와 보물을 도
로 찾아가셨소. 온돌이 녹도록 불을 땐 방에서 수염에 얼음이 붙
은 채로 나온 사명대사는 최고의 경지에 이른 분이었소.하지만
지금 세상에 법술이 무슨 의미가 있겠소? 스승은 말로 대답할
수 있는 문제를 내고 계시면서 오히려 법술보다도 어려운 것이
라 하셨소.
그렇다면 한번 들어 보기로 합시다.
다카가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내 이 사람은 죽음에 동의
한 것이다.
세 가지 물음
다카가와는 앞장을 서서 사도광탄을 신전을 모신 방안으로 안
내했다. 다다미가 깔린 실내에는 옅은 향내가 풍겨나오고 있었
다. 앞서 들어간 다카가와는 방 한쪽 편에 가려져 있는 장막을
걷어올렸다. 거기에는 커다란 초상화가 놓여 있었다. 신비함과
비범함이 엿보이는 노인이 살아 있는 듯 생생한 모습으로 눈을
치뜨고 있는 초상화였다. 다카가와는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스승님이십 니 다.
초상화 밑의 위패에는 호사이라는 이름이 씌어 있었다. 이 사
람이 바로 제국주의 시대 일본의 정치인과 군인, 그리고 학자들
에 게 일본의 신국주의에 대한 믿음을 주입했던 신관이자 법술사
로서 그 신묘한 힘을 가늠하기 힘들다는 신비인 호사이였다.
예를 마친 다카가와는 제단의 서랍을 열고 낡은 봉투 하나를
꺼냈다. 검은색이었다 봉투에서 하얀 종이를 끄집어내는 다카
가와의 표정은 상기되어 있었다.
긴장하고 있기는 사도광탄도 마찬가지였다. 시공을 꿰뚫고 윤
회를 굽어보던 과거 어느 때에는 세상의 일에 대해서 모두 깨쳤
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화입마를 겪음으로써 폐인이나 다름없
는 상태가 된 적도 있었다. 사도광탄은 흐릿한 생각 한가운데서
도 정신을 집중했다
삼국지에는 왜 그렇게 많은 깃발이 등장하는가?
다카가와의 건조한 음성이 조용한 방안에 울렸다. 스승이 돌
아가신 후 긴 세월을 생각해 오던 문제였다. 그러나 그는 스승이
남긴 해답지를 볼 정도도 못 되었다. 이미 여러 번 느끼는 것이
지만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아니 그 전에 무엇을 묻는 문제인지
조차 알 수 없었다. 깃발이라는 것이 소속 부대를 알려주고 병사
들에게 용기를 북돋워주는 것 외에 도대체 무슨 역할을 한단 말
인가.
세상의 기는 삼각형에서 비롯되니 네 개의 삼각형이 동서남
북을 각각 가리킨다면 우주의 힘이 모여 없는 힘은 있게 하고 있
는 힘은 더욱 강하게 한다. 따라서 깃발의 의미는 기를 모음이
다 이를 위해서는 깃발의 모양을 삼각으로 만들고 동서남북을
정확히 택하여 세워야 한다 또한 깃발은 부적으로 전쟁터의 뭇
귀신으로부터 병사를 보호하니 귀신의 수만큼이나 많은 깃발이
필요한 까닭이며, 깃발은 병사의 혼을 잡아매는 최면이니 병사
들로 하여금 고향을 잊게 하고 부모를 잊게 하며 눈앞에 죽음이
있더라도 서슴없이 뛰어들게 한다. 따라서 깃발은 많을수록 좋
다. 그러나 깃발의 근본은 삼각형인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혹
시 사각으로 할 경우에는 반드시 삼각으로 시작하는 부적의 형
태를 넣어야 한다. 사각 바탕에 단순히 용을 그린다든지 별을 그
리는 것만으로는 깃발을 만들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다카가와는 자신의 귀를 믿을 수가 없었다. 사도광탄은 마치
평소에 생각해 두기라도 한듯이 이 이상한문제를거침없이 풀
어냈다. 세상에 누가 깃발에 대해 이렇게 생각해 두었을 것인가.
그러나 스승과 사도광탄은 신기하게도 깃발이라는 것에 기묘한
일치를 보고 있었다.
다카가와는 해답지를 꺼냈다. 그리고 분명한 스승의 필치로
씌어진 삼각과 부적이란 두 단어를 보며 탄식했다. 술법에는 한
경지를 이루었다고 말했지만 삼각에 그런 큰 힘이 있는지는
미처 몰랐던 것이다. 부적도 수없이 그렸지만 전쟁의 부적이 삼
각형으로 시작하는지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사도광탄의 말을
듣고 나서야 전쟁의 부적에 삼각이 많이 들어 있다는 사실이 떠
올랐다.
다카가와는 사도광탄에 대한 외경심이 크게 일어나는 것을 느
끼며 다음 문제지를 펴들었다.
진시황이 찾은 신선과 불로초의 땅은 어디인가?
논자는 선인은 멀리 동쪽에 있다 하였고 삼국사기에는 고
조선의 단군을 선인이라 기록하고 있으니 신선 사상은 원래 고
조선에서 생겨났다 할 것이다. 사기에는 진시황이 산등성에서
서불을 중국의 동쪽 바다로 보내어 봉래. 방장, 영주의 삼신산을
찾아가 불사약을 찾아오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중국의 동쪽
바다에 있는 고조선이 신선의 땅이었다고 할 것이다. 팔지지
에는 불사약을 찾는 서불이 선인을 만나기 위하여 들어간 땅은
단주라고 되어 있으니 이는 단군의 땅이란 얘기이다. 경상남도
남해군 금산에는 중국의 고문자로 새긴 마애석각이 있으니 그
내용은 '서불이 일어나 일출 때 예를올렸다(徐市起,禮日出)'는
내용이며, 제주도 서귀포에 있는 정방폭포에도 '서불이 이곳을
지나갔다(徐市過此)'는 마애석각이 있으니 신선과 불로초의 땅
은 한반도와 만주를 포함하는 고조선이라 할 것이다.
다카가와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납득이 가지 않는 문제였다.
그러나 스승의 답지에는 분명히 신선과 불로초의 땅은 조선이라
되어 있었다. 조선의 지기를 막고 심맥을 막으려 그리도 애썼던
스승이 왜 조선이 신선의 땅이라는 사실을 일부러 문제로 삼았
을까 하는 의문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다카가와는 의문을 누르고 다음의 문제를 꺼냈다.
어째서 백팔번뇌인가?
백팔번뇌. 불교에서는 이 세상의 온갖 번뇌를 일컬어 백팔번
뇌라고 한다 그런데 부처는 왜 하필이면 번뇌를 108개라 하였
을까. 거기에는 무슨 신묘한 뜻이 있는 것인가. 다카가와는 사도
광탄의 대답이 기다려졌다.
유대인의 카발라에는 72명의 천사가 나오고,자바의 보로부
드그 사원에는 72개의 불탑이 있으며, 중국 소림사의 무예는 72
가지이다. 72는 지구의 지축이 흔들리면서 태양이 황도대의 별
자리 1도를 이동하는 데 걸리는 연수이다 72와 36의 결합인 이
수 Im)은 태양이 열두 개 별자리의 중심에 위치하는 데 걸리는
햇수인 2,1脚년의 반인 1,ouo의 10분의 1로우주에 만재하는 모
든 물상이 꽉차 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앙코르와트 사원
의 석상은 모두 108개가 있으며, 아그니카야나에는 1만8백 개
의 벽돌이 있고, 장미십자회도 108년의 주기에 따라 행동을 결
정한다. 리그베다 역시 1만8백 개의 연으로 이루어져 있다. 백
팔번뇌는 내양과 우주의 돌고 도는 현상을 나타내는 비의인 동
시에 지축 이동으로 다가오는 대재해의 무서움을 경고하는 수비
학적 전승이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조용한 방에 울려퍼지는사도광탄의
목소리를 들으며 다카가와는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듯한 두려움
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이제야비로소사도광탄의 깊이를 알수 있었다 또한그
토록이나 조선의 지맥을 막으려 애썼던 스승이 왜 팔만대장경을
절데 건드리지 못하게 했는지,중앙청의 석주가 드러나면 인물
이 나기 시작한다고 말했는지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스승은 그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다카가와는 새삼 사도광탄의 비범함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
다. 사도광탄은 자신과 같이 술법의 연마를 통하여 경지에 올라
선 것이 아니라 단번에 큰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라는 사실 또한.
다 맛추셨소.
다카가와는 옷깃을 가다듬더니 갑자기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
렸다. 사도광탄은 다카가와에게서 은연중 풍겨나오던 살기가 완
전히 사라진 것을 깨달았다 다카가와는 진심으로부터 우러나오
는 삼배를 올렸다. 사도광탄은 다카가와를 붙잡아 일으켰다.
호사이 선생은 사물이 흘러가는 흐름을 꿰뚫은 분이었소.
아마 사도 선생님이 오실 것을 알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다카가와는 말투조차 완전히 바뀌었다
조선의 지맥과 심맥을 막으면서도 대장경을 함부로 건드리지
않았던 것을 보면 호사이 선생은 하늘을 읽고 땅을 볼 줄 알았던
분이라 아니할 수 없소.
스승님께서는 조선의 신비력을 높이 보셨습니다. 특히 팔만
대장경은 동양의 정신을 대표하는 보물이라고 하셨지요. 조선에
어떤 위기가 오더라도 팔만대장경이 있는 한 다 극복할 수 있다
고 하셨습니다. 또한 북악의 기가 드러나면 기인이 찾아올 것도
예상하셨고, 그 기인이 세 가지 문제를 풀면 스승을 대하듯 하라
하셨습니다. 기인이 나오면 그간 조선에 인물이 나오지 못하고
사람들이 화합하여 지내지 못하던 것이 모두 해소되리라 하셨으
니,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또한 저더러는 10년 간 폐관하라 하
셨으니, 이제 저는 관문을 닫고 10년 간 좌선할 예정입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것은 스승님의 유언입니다. 이제 저는 세상에 펼쳤던 기를
다 거둘 것입니다. 폐관하기 전 (묘제의 연구)를 찾아드리고 동
경대학교에 있는 토우도 거두어 팔만대장경이 있는 원래의 자리
에 묻겠습니다.
원래의 자리를 알고 있나요?
그렇습니다. 스승님께서 무라야마에게 일러주셨습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군요. 그런데 단군의 신물을 파괴하
려는 자는 어떻게 할 건가요?~
다카가와는 야마자키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다만
사도광탄의 얼굴에 시선을 모으며 쓸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그 문제를 풀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저는그문제의 의미조차도알수없었지만 이제
참된 힘이 무엇인지 알 것 같습니다.
사도광탄은 다카가와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돌아섰다. 패
배를 받아들일 줄 아는 수도인에 대한 예의였다. 다카가와는 대
문 앞까지 나와 사도광탄을 배웅했다.
다카가와는 하늘이 참으로 인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도광
탄의 얼굴에 보이는 주화입마의 흔적이 연민의 정을 금치 못하
게 하는 것이었다. 선지식을 가진 선지자가 조금만 인도했어도
스승 호사이, 아니 그 이상으로 깨우칠 자질이었다.
다카가와는 사도광탄이 숲길로 들어서는 것을 보면서 몸을 돌
리다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다카가와는 다시 사도광탄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그러나 그 순간 사도광탄은 이미 숲속으로 들어가 보이
지 않았다.
퍼뜩뇌리를스치는 예감이 있었다. 그의 얼굴에 보였던 비명
횡사의 뚜렷한 기운. 그를 처음 보았을 때 다카가와는 언뜻 그에
게서 사망수를 읽었다. 그러나 그리 놀라지는 않았다 자신은 스
승이 내려준 문제를 낼 것이고 그는 못 풀 테니까 당연히 자기
손에 죽을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문제를 다 풀어
냈다.
그런데도 그의 얼굴에 드리워져 있던 죽음의 기색은 없어지지
않고 오히려 더 짙어져 보였다 다카가와는 자신이 작을 崙다고
생각했다. 자신보다 높은 경지에 이른 사람이기에 그럴 수도 있
겠거니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야마자키:
이 이름이 떠오르자 다카가와는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사도
광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카가와는 터질 듯한 심장을 가
까스로 억누르고 뛰기 시작했다. 얼마 가지 않아 사도광탄의 모
습이 보이자 다카가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다카가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사도광탄이
지나간 숲으로 번개같이 내달리는 자가 있었다 야마자키였다
그의 손에는 에도 시대의 자객들이 즐겨 사용하던 짧은 칼이 들
려 있었다.
안 돼 !
다카가와의 입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이 터져나왔다
사도 선생 !
사도광탄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야마자키는 이미 사도광
탄의 코앞에 다다라 있었다. 피할 시간은 물론 놀랄 시간조차 없었다
이얏!
외마디 기합과 함께 시퍼렇게 날이 선 야마자키의 칼이 허공
을 가르는 순간이었다.
안 돼 ! 멈춰 !~
그러나 다카가와의 목소리는 쉿 하는 칼바람에 묻혀버렸다
야마자키의 칼이 허공을 가르며 사도광탄의 목을 향해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날아든 것으로 보이는 순간 다카가와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다카가와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땅바닥에 나동그라진 사람은 사도광탄이 아니라 다름아
닌 야마자키였던 것이다.
육중한 체구의 야마자키는 마치 통나무처럼 맥없이 쓰러졌다.
다카가와가 다가갔을 때 야마자키는 이미 죽어 있었다.
며칠 전부터 얼굴에 급살수가 있더니만~
다카가와는 야마자키의 눈을 감겼다
선생께서 내 목숨을 구해 주셨군요.
사도광탄은 고개를 숙였다 다카가와는 놀랐다.
아니, 제가 아닙니다. 까닭을 모르겠군요.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고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직도 피가 계속 흘러나오고 있는 야마자키의 머리를 살펴본
다카가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주위
를 둘러보았다.
총에 맞았는데요.
경찰이 와서 주변을 샅샅이 뒤졌지만 아무런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 시각 이미 현장을 떠나와 차 안에서 자신의 행동과 앞으로
의 계획을 곱씹어보는 한 사나이가 있었다.
'안 돼. 누구도 그를 죽여서는 안 돼. 내가 심문해서 내 판단에
따라 결정하기 전에는 그는 죽어서는 안 돼:
바로 기디온이었다.
눈동자
다카가와의 적극적인 증언으로사도광탄에 대한 경찰의 조사
는 곧 마무리되었다. 다카가와는 야마자키의 사무실에서 (묘제
의 연구)를 찾아사도광탄에게 전해주었다. 한참 동안이나 (묘
제의 연구)를 검토하던 사도광탄은 수아와 테드를 불렀다.
받아라.
어, 이것은 (묘제의 연구)아니에요? 아니, 이 중요한 것을
왜 저희에게 주세요?
수아와 테드는 놀라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지난 백 년 간 우리 나라는 자기를 올바로 볼 줄 모르고 남에
게 끌려다니는 어리석음을 범했다. 그 결과 오늘날 너희 젊은이
들의 머리와 가슴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이런 상
태에서 국력이니 뭐니 하는 것은 온당치가 않아. 하지만 천기는
거스를 수 없는 법. 이제 북악의 기가 드러났으니 팔만대장경을
온전히 정비하고 단군의 성물을 찾으면 21세기에는 잃었던 우리
나라의 기가 온 세계에 뻗치게 된다.
잃었던 우리의 거대한 힘들을 하나하나 찾아내는 것인가요?
그렇다.
그렇다면 이 (묘제의 연구)를 학자들에게 주어 우리 역사를
밝히게 해야 하지 않나요?~
사도광탄은 고개를 가로저 었다
아니 , 이것은 너희들의 일이야. 중요한 것은 너희들의 의식이
다. 우리 역사의 뿌리를 캐는 노력은 몇몇 전문가만의 일이 아니
라 바로 너희 자신의 문제라는 것을 깨닫는 게 더 중요해.
사도광탄의 목소리는 숙연했다.
수아는 (묘제의 연구)를 넘겨받았다.
그 책에는 만주에 있는 단군릉의 위치가 역사의 암호로 적혀
있다 고조선의 실제 위치와 수도.그리고 능의 위치가 우선
고대의 지명을 명확히 하는 데서 출발하고 있어 .
수아는 (묘제의 연구)를 넘겼다. 서문에 이은 마에다의 글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단군릉을 발견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능을 처음 발굴
할 때의 그 신비한 느낌. 선인화에서 뿜어져나오던 엄숙함.신물
에 욕심이 생길 때마다 등을 떠미는 듯하던 그 알 수 없는 힘
나는 이번만큼은 결코 도굴범들에 의해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는
엄숙한 사명감을 느꼈다. 그리하여 능의 위치를 고대의 지명을 이용
하여 표시함으로써 찾아낼 수 없도록 하였다.
수많은 인물들의 일치된 견해가 나왔을 때에야 비로소 능의 위치
가 드러나도록 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도굴범을 막는 데 효과가 있을
뿐 아니라 단군의 기록을 말살하여 조선의 역사를 조작하려는 총독
부의 음모를 막는 데에도 효과가 있을 것이다.
하니 후인들은 수많은 사서를 비교 검토하여 올바른 지명을 찾아
야만 능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과연 마에다의 말대로 다음 장부터는 다섯 가지의 물음이 던
져져 있었다.
1 만리장성의 동쪽 끝은 어디인가?
2. 요동은 어디에 있었나?
3. 폐수는 어느 강이었나?
4. 한번한은 어디였나?
5. 장당경은 어디였나?
이 다섯 가지의 물음 뒤에 다시 다섯 가지의 물음이 이어져 있
었다. 마에다는 스무고개식 방법으로 단군릉의 위치를 밝히고
있었다.
이제야 알겠군요. 야마자키가 왜 고조선 연구의 권위자를 그
렇게 찾았는지.
그래. 하나하나의 물음이 학자들에 따라 이견이 무성해서 쉽
게 대답할 수 없는 것들이지.
그런데 이렇게 어려운 것을 전문 학자도 아닌 우리가 어떻게
밝히죠?~
우리 나라의 모든 젊은이들이 힘을 합치면 비밀은 풀릴 것이
다 젊은이들의 의견을 전부 수렴해. 그 과정에서 젊은이들은 단
군을 찾아야 한다는 의식을 갖게 될 것이다. 물론 올바른 지명도
얻게 될 테고.
좋은 생각이 있어요. 이 (묘제의 연구)를 인터넷에 띄워 우리
나라의 모든 젊은이들이 볼 수 있게 하겠어요. 테드 빼고는 우리
나라의 젊은이들이 모두 참가할 거예요.
하하하하.
사도광탄은 이렇게 웃어보는 것이 참으로 오랜만이라는 생각
이 들었다. 사도광탄은 수아와 테드의 어깨에 양팔을 올려놓았다.
기쁘구나. 너희에게는 우리가 젊은 시절 겪었던 독재도 없고
가난도 없어. 우리 세대가 온몸으로 이겨냈던 그 힘들었던 세월
이 너희를 이렇게 꽃피웠구나.그 유머와 여유 나는 너희를 보
면서 우리 민족의 미래에 희망을 갖는다.
염려 마세요. 방학이 되면 돌아와 해인사에 갈 작정이에요.
최고의 문화 유산인 팔만대장경의 경판수조차 아무도 확실히 모
른다니 어처구니가 없어요. 일본인들이 훔쳐간 후 대나무로 깎
아 넣은 것도 있다면서요. 그 얘기를 듣고는 NBA 농구니 내셔
널 리그니 하는 것만 찾으며 살아왔던 제 자신이 부끄러웠어요.
인터넷을 통해 자원 봉사자를 구해 그들과 같이 그 무겁다는 경
판을 한 장 한 장 나를 거예요. 팔만대장경을 깨끗하게 보존하고
싶어요.
수아가 사도광탄을 위로하듯 부드러우나 야무진 목소리로 말
했다.
기미히토는 이제 작별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아쉬웠다. 그동안
함께 지내며 갖게 된 이들에 대한 애정은 생각보다 컸다. 비록
국적은 달랐지만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들은 친
형제 이상으로 정이 가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을 만남으로써 과
학에 대한 인식의 전환뿐만 아니라 이웃 나라 한국의 문화에 대
해서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그것은 무엇보다 큰 것이었다.
자신은 그간 이웃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너무 모르고 지내왔
던 것이다. 이들을 만났다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기미히토 교수님을 만난 것은 제 인생의 큰 행운이었어요.
수아의 맑은 목소리가 아쉬움에 머뭇거리는 기미히토의 귀에
전해져 왔다.
미국에서 다시 만나요.
할 적마다 이길걸요, 해킹 말예요.
만만치 않을걸요!
어려우면 프로메테우스의 도움을 받지요.
하하하하.
사도 선생님께는 참으로 많은 걸 배웠습니다.
별말씀을.
과학이 만능이 아니라는 것도 깨달았고,무엇보다도 동양사
는 다시 씌어져야 한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그간 정신의 역사가 부당하게 무시되었지요.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테드도 기미히토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기미히토는 세 사람을 나리다공항까지 배웅했다. 돌아오는 길
에 기미히토는 컴퓨터와 동양적 신비주의의 결합을 필생의 연구
주제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과학과 기술이 현대 세계를 이
끌어가는 중요한 수단이긴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 세계
가모든 현상의 배후에서 인간의 본질을 형성한다는 생각이 들
었다.
동양의 정신 문화는 서구의 물질 문화가 이르지 못하는 깊은
깨달음의 경지를 이루어왔고, 이 깨달음이 물질에 마비된 인간
의 정신을 일깨워 자유로운 인간으로 존재하게 하는 가장 훌륭
한 수단이라는 것을 기미히토는 사도광탄을 통하여 릴이 느꼈던
것이다,
김포공항에는 기미히토의 연락을 받고 서 원장이 마중 나와 있
었다. 서 원장은 사도광탄을 진심으로 반겼다. 그녀가 주차장에
자동차를 가지러 간 사이 수아는 사도광탄에게 작별을 고했다.
저는 이제 아버지를 뵈러 가야겠어요. 선생님은 제 가슴에 우
리 민족의 긍지를 심어주셨어요. 보고 싶을 거예요.
수아는 공항에서 바로 시외버스 터미널로 가겠다고 했다. 테
드는 섭섭했지만 이제 곧 중국으로 가야 하는 자신의 일정상 수
아와는 미국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다
선생님 , 미국에서 편지 드릴게요.
그래, 잘 가라.
수아가 두 눈을 붉히며 작별을 아쉬워했다.
네, 선생님. 그럼 이제 인터넷을 통해 만나요.
그래, 네가 자랑스럽구나.
저야말로 아저씨가 자랑스러워요.
수아는 사도광탄을 선생님이라고도 불렀다가 아저씨라고도
불렀다. 존경과 친근함을 다 같이 느낀다는 의미일 것이다
수아와 테드를 보내고 난 사도광탄 앞에 서 원장의 자동차가
와서 멎었다.
제천으로 가서 머무르고 싶군요.
서 원장은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언젠가는 떠날
사람이었다.
제천에는 연고가 있나요?~
아뇨, 그래도 정 붙이고 살았지요. 이지영이도 있고
사도광탄은 무슨 말을 덧붙이려는 듯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말
았다
무엇보다도 자연이 있어요.
서 원장은 그런 사도광탄에게 연민을 느꼈다. 자신만의 생각
인지는 몰라도 외로움이 느껴졌던 것이다.
오늘은 우리 집에서 지내는 게 어때요? 병원으로 가지 말고.
서 원장은 그녀답지 않게 약간 어색해하며 물었다
아뇨, 그냥 병원으로 가겠습니다.
서 원장은 자동차를 병원으로 몰았다.
다음날 아침 사도광탄은 병원을 나섰다.
연락도 없이 가면 누가 맞아주지요?
오랫동안 누가 나를 맞아준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서 원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천에도 사도 선생을 알아주는 사람들이 있나요?
자연이 있지요. 지금은 시퍼렇게 흐르는 강물 위로 솟구칠 물
고기가 있구요. 그 밖에 뭘 더 바라겠습니까?
서울에 오면 꼭 들르셔야 해요.
사도광탄은 말없이 서 원장의 눈을 들여다봤다
사도광탄은 청량리로 가서 기차를 탔다. 평일 아침이라 제천
으로 내려가는 중앙선 열차는 텅텅 비어 있었다. 창가에 앉아 바
깥 풍경을 내다보던 사도광탄은 앞자리에 두 사람이 와서 의자
를 자신과 마주보게 돌리는 것을 보고는 상대방들의 얼굴을 쳐
다봤다.
양복을 깨끗하게 차려입은 두 사람의 신사가 사도광탄에게 밝
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한 사람은 깨끗한 피부의 잘생긴 외국인
이었다. 그는 쾌활한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독일인이었다.
구린 모르겐.
사도괌탄도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도광탄 씨 , 맞죠?
한국인이 물어왔다. 쾌활해 보이는 외국인과는 달리 신중하고
근엄해 보였다. 사도광탄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용히 만나고 싶어 기다리던 중이었습니다.
누가요?
이분은 유럽에서 오셨습니다. 기디온 교수입니다.
그제야 사도광탄은 외국인을 자세히 쳐다봤다. 그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성직자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이분은 독일의 종교학 교수입니다. 로마의 교황청으로부터
교리 해석에 대한 위임을 받고 있습니다.
평범한 교수 같지는 않군요.
상대방은 복잡한 인상을 풍기는 사람이었다. 이 말에 기디온
은 싱긋 웃었다.
저는 이분으로부터 통역을 의뢰받았습니다.
이분은 교황청의 요청에 의해 나를 만나러 온 건가요?
사도광탄의 질문에 기디온은 장시 생각하는 눈치더니 대답했
고 사내가 통역 했다
그는 몇 가지 신과 인간의 문제에 대하여 자유롭게 대화를 나
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통역이 말을 전하는 동안 사도광탄은 사나이가 풍기는 이상한
기운이 어디서 오는 것인가를 생각했다
기디온은 보기 좋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사도광탄은 고개를 끄덕 였다
신성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인간이 바로 신이오.
너무나직선적인 사도광탄의 대답에 기디온의 미소가순간적
으로 사라졌다.
그것은 너무 교만한 생각 아닙니까?
인간이란 참으로 깊고도 깊어요. 그 안에는 신도 있고 우주도
있어요.
그렇다면 모든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다는 얘긴가요?~
신이란 헤아릴 수 없이 깊은 인간을 말하는 것이니, 깊어지면
누구나 다 신이 될 수 있지요 그러나 모든 사람이 깊어지지는
못해요.
어떻게 해야 신이 될 수 있지요?
눈을 감고 앉아서 끝없는 사색으로 들어가면 평소에 알지 못
하던 새로운 세계가 펼쳐져요. 물질과 욕심에 가려 느끼지 못하
던 세상의 또다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우선 신선한 정신
을 얻게 되고, 추하고 이기적인 생각이 모두 흩어져 없어지는 대
신 존재에 대한 공허한 마음이 생겨나지요.나뿐만아니라모든
살아 있는 것들, 심지어는 무생물에게조차 마음이 전해져서 그
들과 내가 하나이며 서로 그 존재의 뜻을 존중하게 돼요. 이 단
계에서는 꽃잎과도 대화를 나누고 하늘을 나는 새들이나 흐르는
시냇물과도 교감을 나누게 됩니다. 이 단계는 보통 사람이라 하
더라도 며칠 간의 정좌로 얻을 수 있는 단계이지요.
그런 것이 보통 사람에게도 가능하다구요?
물론이오. 사실 이 단계는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오. 사고가
논리적 인과 구조로 짜인 서양인들에 비해 정신의 비약을 저항
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동양인들이 훨씬 쉽게 이르는 단계지
요. 물론 베토벤이나 워즈리스, 에머슨, 소로 같은 서양인들은
그 예술적 재능으로 이 단계를 늘 유지하긴 했지만.
그 단계가 되면 어떤 변화가 일어나죠?
탐욕스럽게 많이 먹는 것이 싫어지고 피가 배어 있는 음식을
안 먹게 됩니다 신선하고 깨끗하지 않은 것은 피하게 되고, 재
미있는 유머라 하더라도 역겨움이 먼저 느껴 지지요. 친한 친구
라 하더라도 피하게 되고 말을 아끼게 되며 힘있는 사람을 피하
고 아이들을 아끼게 됩니다. 인간의 죄악을 생각하며 혼자 흐느
끼거나 희열에 들떠 자연을 배회하기도 하지요.
기디온은 사도광탄의 거침없는 설명에 적이 놀랐다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결코 알 수 없는 내용이었다.
보통사람의 경우 이 단계는 계속 유지가 되지 않아요.쉽게
다시 원상으로 돌아와요.
왜 그렇죠?
이 단계에 올라서는 것은 정신이 하는 부분인데, 정신은 언제
나 육체의 포로가 되어 있어요. 육체는 자기 존재를 지속시키려
는 강한 경향을 갖고 있는데 이것을 본능이라 할 수 있을 겁니
다. 본능은 모든 것을 지배하기 때문에 설사 자연과의 교감 단계
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정신이 본능을 뛰어넘어 지속된다는 것은
보통사람의 경우 너무나 어려워요.본능은 우주의 질서요 힘이
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다시 평상의 단계로 떨어지고 말아요.
어떤 사람들이 그 단계를 지속할 수 있나요?
아까 얘기했던 예술가들의 경우는 정신이 워낙 뛰어나고, 타
고난 재능이 마치 수도자의 수도와 같은 역할을 하여 기실 그들
은 오랫동안 수도를 해온 사람과 같아요. 그리하여 보통 때라도
그들의 정신은 예술이라는 신성하고 창조적인 작업에 몰입되어
있기 때문에 항상 탈속을 할 수 있는 거지요.
수도자들과는 어떻게 다르지요?
수도에 정진하는 사람들은 수없이 떨어졌다가 다시 오르곤
하면서 그 단계를 지속할 수 있는 힘을 쌓아요. 그러나 보통 사
람이 오직 생각의 힘에 의해서만 급속히 이 단계에 이르렀을 때
에는 그 다음이 어려워요.
무엇이 어렵다는 말인가요?
육체의 부담이 어렵다는 뜻이지요. 정신이 아무리 높은 단계
에 이르더라도 육체를 이탈할 수는 없어요. 그래서 누구라도 이
단계에 올라설 수는 있지만 쉽게 원점으로 돌아가지요. 도스토
예프스키의 악령이라는 소설에서 키릴로프는 초인적인 정신
력으로 인신(人神)의 경지에까지 올라갑니다. 그러나 그는 그 단
계에서 자신의 저급한 육체가 최고에 다다른 정신을 끌어내린다
는 것을 알고는 자살을 택하지요. 도스토예프스키도 깊은 사색
을 통하여 거의 신의 경지에까지 올라갔겠지요.그러나 깨어나
현실에 봉착하면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인간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한계를 처절히 느끼고는 자신의 체험을 소설로 나타낸 것입니
다 그가 선택한 인신(人神)이라는 단어만으로도 그의 체험을 알
수 있어요.
그렇다면 그 다음 단계도 있습니까?
물론이지요.
흥미롭군요. 자연과의 교감보다 위에 이르면 어떻게 되지
요?
자연 현상 뒤에 숨어 있는 거대한 존재를 느끼게 됩니다. 너
무나 무서운 단계지요.
자연과의 교감을 거치나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요. 선지식에 의해 인도되는 수
도자의 경우라면 보통 자연과의 교감을 거치지요.그러나 이 단
계가 없이 불쑥 그 거대한 존재에게로 나아가는 경우도 있어요.
기디온은 사도광탄의 얘기에 빨려들고 있는 자신을 느꼈다.
처음 들어보는 얘기였지만 그 속에서는 깊은 체험에서 우러나는
절실함이 울려나오고 있었다
기디온은 늘 최후의 심판을 내리기에 앞서 반가톨릭적인 수많
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모두 지나치게 세속적이
거나 자의 적이었다. 인간의 주관적 정신 세계를 이렇게 확실하
고 정연하게 풀어내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듣지 못했다.
그 거대한 존재란 무엇을 말하는 거죠?
정신이지요. 우리의 의식 세계 밖에 존재하는 거대한 정신 체
계입니다.
이 부분을 기디온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은 인간의 의식을 떠나 외부의 공간에 존재하는 실체인
가요?
아니오. 인간의 의식과 그 거대한 정신 체계는 맞물려 있어
요.
그렇다면 그 거대한 존재가 객관적 절대자는 아닌가요?
절대자이지요. 하지만 절대자는 나를 떠나 외부에 따로 존재
하는 것이 아니오. 가령 세계를 창조하고 인간을 창조한 그런 절
대자가 아니란 말이지요.
신이 아니란 말인가요?
신이지요. 다만 나와 연결되어 있는 신, 나도 될 수 있는 신이
란 말입니다.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다구요?~
그렇소. 신의 본 모습은 인간이오. 신이 자신의 모습을 본떠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고 인간이 자신의 신비 체험으로 신을 만
들어낸 것이지요. 인간은 종교에서 말하듯 그렇게 하등한 존재
가 아니오. 그 자신 절대자도 될 수 있고 신도 될 수 있는 불가사
의한 존재이지요. 다만 육체를 떠나지 못하고 본능의 세계에 붙
들려 있을 뿐이지요.
잠시 생각에 잠겼던 기디온이 다시 물었다.
그런데 아까 거대한 존재 앞으로 불숙 나아간다고 했는데 그
거대한 존재는 객관적 실체가 아닙니까?
아니오. 본인의 의식 체계 안에 있는 세계이기도 하고, 객관
적 실체이기도 하지요.
이해하기가 어렵군요.
사람들은 시인이 시를 쓸 때 보통 상상력을 동원하여 시를 쓴
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떤 시에는 시인의 체험이 들어가 있
지요.니체의 시 중에 (눈동자)에는 이런 구절이 있어요. '나는
느낀다. 나의 등뒤에서 거대한 눈동자가 나를 보고 있다늪 것
을 사람들은 이 시를 그냥 아무렇지 않게 읽어갈 것입니다. 시
인이 상상력을 동원하여 쓴 시라고 생각하며 말이오. 그러나 이
시는 니체가 직접 겪은 내용을 담은 것이오. 니체는 어느 날 밤
무슨 생각엔가 잠겨 있다가 바로 등뒤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무
섭게 노려보고 있는 것을 느꼈어요. 극도의 공포에 사로잡혀 뒤
를 돌아보면 아무도 없지만 바로 등뒤에서 자기를 보고 있었던
그 눈동자를 잊지 못했던 것이지요.
니체가 그런 것을 경험했다고 어떻게 확신하지요?~
기디온이 묻자 사도광탄은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듯 망설입
없이 대답했다.
내가 경험했으니까.
으음~
기디온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나왔다. 결사에 가입하고 처음으
로 회의가 찼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누군가의 체험에서 우러나
온 설명을 이해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 사람이 절실하게 설명하는 것을 자신은 이해
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자신이 모든 것을 심판하겠
다고 나선 것은 오류가 아닌가 하는 심한 자괴감이 느껴졌다. 잘
못하면 중세의 종교 재판의 오류를 자신이 범할 수도 있다는 두
려움마저 생겨났다.
그러나 여기서 멈출 수는 없는 일이었다. 기디온은 물러서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이 그런 것을 경험하지요?~
모든 사람에게 가능하지만 지속이 되는 것은 아까 얘기했듯
이 단계를 거친 수도자이지요.
보통 사람이 이 단계에 올라서면 어떻게 됩니까?~
선지 식이 없이 이 단계로 나가면 보통 혼이 빠지지요. 미쳐버
리는 것입니다.
단계를 거친 수도 자는요?
이 거대한 존재, 즉 절대자 앞으로 나아갔던 수도자는 극도의
외경심과 더불어 지극히 겸손해지지요. 기억으로만 간직하고 절
대자를 모시는 것이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하지요.
기디온은 사도광탄이 얘기하는 것이 바로 깊은 성직자의 단계
라고 생각했다
그 다음 단계도 있습니까?~
있어요. 어떤 인간은 이 절대자와 자기가 다르지 않다고 느껴
요. 자신이 절대자가 되어 보겠다고 생각하지요. 이것은 욕심 때
문이 아니고 깨달음이 이끌어가는 자연스러운 과정입니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이 깨달음은 아래에서 위로 자연스럽게 진
행되어 나가기 때문이지요.사실 이 단계에서는 멈추는 것이 더
낫겠지만
사도광탄은 도중에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기디온은 사도광탄
의 얼굴에 희미하게 나타나는 안타까운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어째서 멈추는 게 낫다는 얘기지요?~
도저히 그 단계에 이를 수가 없어요.
아무도 헤어나을 수 없나요?
그 길고 긴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도 이 단계를 넘어서는 인간
은 손으로 헤아릴 정도이지요.
그 단계를 넘어서면 어떻게 되는지 정말 궁금하군요. 절대자
의 세계가 말입니다.
기디온의 물음은 이미 가톨릭의 계율을 어기는 것이었다. 종
교의 세계에는 단 한 사람의 절대자만 있는 것이 아니던가.
아까 얘기했던 육체가 더 이상 방해가 되지 않아요.
그 단계에 오른 사람들은 누구인가요?
석가모니를 예로 들 수 있겠군요 그는 깨닫기 직전 수없는
나찰들의 유혹을 받았어요. 그러나 강한 정신력으로 결국은 이
겨내고야 말았지요. 예수도 광야에서 40일 간을 방황하며 마귀
와 싸워 미치기 직전까지 갔었지요. 그러나 그 역시 강인한 정신
력으로 이겨냈어요. 석가모니와 예수는 사람들 가운데로 뛰어들
었기에 알려졌지만 이 단계에 다다른 대부분의 절대자들은 세상
에 알려지지 않은 채 사라져버렸지요.
아니, 그렇게 크게 깨달은 사람들이 알려지지도 않은 채 없어
진단 말입니까?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들은 크게 보지요.탐욕과 술
수가 난무하는 인간 세계라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자연의 범주
속에서 늘 일어나는 일로 보일 뿐이지요. 따라서 크게 깨우쳐줄
그 무엇도 없다고 생각하지요.
깨닫고 나면 초능력이 생기지 않습니까? 병자도 고치고 죽었
다가 다시 태어나기도 하고
그런 능력을 발휘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요. 하
지만 진정으로 깨달은 사람들은 그런 사소한 것들의 위에 있어
요.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석가모니는 깨우침을 얻은 후 각지를 돌며 설법을 했어요. 그
의 설법을 들은 사람들에게는 수많은 이적이 일어났지요. 하지
만 석가모니 자신은 어떤 기적도 행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그리스도는 수많은 이적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행하
지 않았습니까?
그 단계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어요.
단정적으로 얘기하는 사도광탄의 자연스런 표정을 보고 기디
온은 다시 한 번 자신의 신념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해석한 가톨릭이란 무엇이었던가. 그 세계에 들어가 믿고 복종
하고 그 대가로 영생을 누린다 했던가.
기디온의 가슴속에는 앞에 앉은 이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일
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만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깨달은 분이
아니 란 뜻이오?
그렇소.
과거에는 이런 답변을 순간 상대방은 이미 살아 있는 사
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너무나 확고한 사도광탄
읜 체험적 설명은 이제까지 들어왔던 단편적 지식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자신이 못 미치는 단계에 있는 이 사람이 가톨릭에 도전
한다는 이유로 살해해야 한다니
기디온은 이제 은퇴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암살자가
상대의 사정에 귀기울이기 시작하면 때가 왔다는 신호다. 제거
해야할상대의 이야기로부터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된다면 더 이
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사도 선생은 전혀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해 주는군요.
기디온의 진심 어린 말에 사도광탄은 미소를 띠며 화답했다.
얼굴에 원귀가 가득하니 사고를 조심하고 그들을 달래며 여
생을 보내는 것이 좋겠소.
그들이라니요?
기디온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글쎄, 본인이 모르면 누가 알겠소?
그럼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단 말입니까?
작게 깨달은 자는 작게 보고 크게 깨달은 자는 크게 보지요.
관상을 보고 점을 치는 것은 작게 깨달은 자도 할 수 있는 일입
니다. 내가 교황청에 파티마의 제3의 예언을 공개하라고 한 것
은 더 큰 오류를 막자는 뜻이지 가톨릭에 흠을 내려는 것이 아
니오.
기디온은 깜짝 놀랐다 사도광탄에게서는 이해할 수 없는 불
가사의한 힘이 느껴졌다
기디온은 자신이 신봉해 온 가톨릭도 세상의 많은 종교 가운
데 하나라는 사실을 수긍하기 시작했다. 그리스도 역시 크게 깨
달았던 세상 사람 중 하나일 뿐이라는 사도광탄의 얘기도 함께.
교황이 말하는 종교의 평등이란 이런 것이었던가 이런 평화
를 타종교와 같이 누릴 수 있었단 말인가.
기디온은 사도광탄의 말 속에서 교황의 얘기와 동일한 메시
지를 느꼈다 내가 믿는 예수만큼이나 남이 믿는 석가도 존중해
야 하지 않을까 내가 가진 종교만큼이나 남이 가진 종교도 인
정해야 하지 않을까. 교황은 바로 그것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다음 순간 기디온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럴 수
는 없었다. 더 이상 망설여서는 안 된다. 결코 흔들려서는 안 된
다. 그는 자신을 다잡았다. 지극히 위험한 이 인물, 가톨릭을 흔
들어놓을지 도 모를 이 인물을 반드시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해
야 한다. 그건 피할 수 없는 이 사나이의 운명이라고 기디온은
생각했다
기차가 다음 역에 닿자 기디온은 손을 내밀었다. 사도광탄은 그
와 악수를 나누었다. 출입구를 향해가는 그의 걸음이 불안했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사도광탄의 눈길도 흔들리고 있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합수머리의 강물은 푸른색으로 변해 있었다. 오랜만에 낚싯
대를 드리운 사도광탄은 한들거리는 찌를 바라보며 모처럼 평
화를 맛보았다. 이지영은 찌개를 끓이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자네, 제천에 내려온 지 열흘이나 되도록 연락조차 않다니 섭
섭하네.
기거할 데부터 마련하느라 그랬네.
그래, 과수원 움막이 내 집보다 편하단 말이지.
때로는.
제기랄, 집사람이 끓일 땐 쉬워 보이더니 이것도 품이 많이
드는데.
재미인지 불평인지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는 이지영을 보자 옛
날의 어느 한때가 떠올랐다.
지영과 선주 그리고 몇몇 친구들과 함께 한탄강으로 야유회
를 간 적이 있었다. 그때에도 모두 즐겁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떠
들었다. 선주가 끓인 찌개를 지영이 덜어내다 뜨거워 쏟아버렸
던 일, 맨발로 놀다 유리 조각에 찔린 선주를 등에 업고 오던 기
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남의 등에 업히면 결혼해야 한대.
이 한마디에 힘든 줄도 모르고 버스 안까지 선주를 업고 갔던
기억이 떠올라 사도광탄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에게도
그런 그림 같은 시절이 있었던가.
찌개가 맛있게 끓었다.
한잔해.
이지영은 소주병을 기울여 술을 따랐다. 말없는 가운데 몇 번
잔이 오고 갔다.
선주 말이야
무척 불행했던가 봐.
유학 가서 결혼한 미국인 교수가 좋지 못했던 모양이야 지금
은 이혼하고 혼자 지낸다더군.
그만하게.
사도광탄은 술잔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지영은 기어코 한마디
를 더 했다
몇 번이나 자살을 기도했던 모양이야. 기댈 데도, 위로받을
사람도 없는 그 낯선 나라에서 가톨릭에 의지해서 살았나
봐. 자살 기도를 했을 때도 신부와 수녀에 의해 목숨을 건졌다더
군.
성모 마리 아가 고맙군.
이해할 수 없네. 그토록 기독교를 매도하던 자네가 마리아에
게 고맙다니.
나는 기독교의 그 오만하고 독선적인 해석과 타종교와 문화
에 대한무조건적 부정과 공격성을 탓할 뿐이야.특히 기독교에
기생하여 권력과 부를 누리며 민족 문화를 마구 짓밟는 자들을
경고하는 거지. 올바른 기독교에 대해서는 나도 무척 존경하고
있네. 그래서 나는 교황청에 그 올바른 기독교의 모습을 드러내
라는 의미에서 마리아의 예언을 공개하라고 촉구하는 거네.
이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두 사람은 낚싯대를 거두었다 술병도 비
어 있었다 이지영은 과수원 앞에서 사도광탄을 내려주었다.
식사는 집에 와서 하게.
생각나면 가지 .
자동차가 떠나자 사도광탄은 낚시 가방을 어깨에 둘러메었다
사과나무 사이로 난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걸음이 흥겨웠
다. 하늘에는 어느새 보름달이 휘영청 떠있었다
'보름달이 뜨는 밤에는 사람들이 미 친다고:
문득 수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아이가 보고 싶었다. 그녀에
게는 저 보름달조차 과학적으로 설명을 해주어야 받아들이겠지.
'미국의 과학자들이 보름달이 뜨는 밤에 범죄가 발생하는 빈
도를 조사했더니 평일보다 훨씬 많다는 통계를 얻었다더라 '
까다로운 녀석 , 그러나 귀여운 녀석 .
사도광탄은 소리내어 웃었다 결혼을 해서 아이가 있다면 녀
석처럼 밝은 성격일까. 사도광탄은 인서라는 이름을 떠올려보았
다. 갑자기 아이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만약 아이를
갖게 된다면 꼭 지어주고 싶었던 이름이 있었다. 인서(仁恕)였
다 동양 유교 정신의 핵인 인(仁)과 서양 기독교 정신의 핵인
서(恕)의 두 자를 합한 이름. 그럼 사도인서가 되는가? 그는 허
허롭게 웃었다 그 아이에게 어질게 용서하며 사는 법을 가르쳐
주고 싶었는데
얼굴을 스치는 바람을 타고 향긋한 내음이 코에 스며들었다
보름달은 등뒤에 떠 있었다. 서늘한 달빛 속에 생겨난 자신의 그
림자를 밟았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손을 잡고 서낭당 고개를 넘
어가던 생각이 났다. 아버지는 돌을 하나 주우라 했다.
소원을 빌면서 던지거라.
이제는 가고 없는 시절이다. 상실한 것은 시간만이 아니다. 풍
습도 없어졌다. 서낭당도, 던지던 돌도 이제는 모두 없어져버렸
다. 서낭당이 마귀라고. 제사 빼고 굿 빼고 산신령 빼고, 마귀란
것들 다 빼고 나면 한국 문화는 뭐가 남는가
사도광탄은 돌멩이 하나를 주웠다. 서낭당 대신 사과나무 위
로 돌멩이를 던졌다. 달빛을 받고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돌
멩이를 보는 사도광탄의 시선에 외로움이 짙게 배어 있었다.
나는 시간 속 어디에 있는가
사도광탄은 보름달에 비치는 그림자가 하나 더 늘어난 것을
보았다. 긴 그림자였다
사도광탄은 직감적으로 그가 누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사도
괌탄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림자 역시 멈추었다
사도광탄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짐작대로 창백한 얼굴빛을
한 기디온이 서 있었다.
사도광탄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차가운 달빛이 얼굴
에 쏟아져내렸다. 사도광탄은 눈에 힘을 모아 별을 찾으려 했다
어린 시절 하늘을 보면 언제나 찾아지던 그 별들이 오늘 밤은 좀
처럼 보이지 않았다.
엄마, 사람은 죽으면 뭐가 돼?
죽으면 별이 되지 .
별?~
그래, 저 어두운 하늘에 빛나는 별이 되는 거야.
가난한 어린 시절이었다. 농사는 늘 시원치 않았고 뭐든지 뜻
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러나 자연이 있었다.
삶이 견딜 수 없는 무게로 짓누를 때 사도광탄은 늘 강으로
나갔다 거기엔 바람이 있었고 물결이 있었다. 낚싯대를 던지고
한없이 출렁이는 물결을 보면서 사도광탄은 세상을 생각하곤
했다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도광탄을 기디온
은 두려움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기디온은 망설였다. 한 번도 자
신이 행하는 이 일에 회의를 가져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
엔 달랐다 이건 아니었다. 이 사람은 감히 자신이 심판할 상대
가 아니었다. 그러나
장례식은 초라했다. 상여는 합수머리 강변을 따라 주천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이지영과 서 원장, 조 교수, 그리고 변 교수만
이 상여 뒤를 따랐다.
사도광탄을 떠나보낸 뒤 쓸쓸한 심정으로 돌아온 이지영은 사
도광탄의 거처였던 움막을 찾았다. 편지 한 통이 남아 있었다.
수아에 게
언젠가 너는 내가 누구인지 물었었지
어디서 와서 무엇을 하고 살았는지 오늘은 그 얘기를 좀 하려 한다.
나는 시골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가난하게 보냈다 대학에 들어
가기 전까지는 그냥 평범한 시골 아이에 불과했지 가난했던 아버님
은 그래도 외아들인 내가 대학에 들어가기를 간절히 바라셨다
대학에 들어가니 모든 것이 새로웠다. 여유 있고 길이 있어 보이는
학우들 사이에서 나의 모습은 아마 초라하고 왜소해 보였겠지. 허약
한 촌뜨기. 그러나 나는 자신이 있었어. 내 인생을 내 손으로 개척한
다는 생각에 들떠 있었다.
내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은 독재에 반대하는 학생 운동이 대단했
단다 학교는 공부보다는 투쟁의 장소였지. 그러나 나는 데모에 나서
지 않았다. 나는 무슨 행동을 하기 전에 먼저 완전하게 세상을 보는
통일된 시각을 갓고 싶었다. .
학우들이 끌려가는 것을 볼 때마다 고통스러웠고 지금 하고 있는
이 공부가 과연 옳은가 하는 회의도 들었지만 나는 묵묵히 책을 읽
었다
사회과학, 철학,인문학,문학,물리학 수학 생화학 천문학,심지
어는 관상학과 방중술까지도 당시의 내게는 모두가 우선적으로 싸워
야 할 대상이었다. 물론 종교도 예외가 아니었다. 힌두교, 녈교. 조로
아스터교, 기독교, 이슬람교, 그리스정진, 유교, 도교 하나하나의 종
교에 나는 사제보다도 더 심취했단다.
그러기를3년. 나는 드디어 책을 던져버렸다 마침내 세상이 보이
기 시작했고, 어느 교수에게서도 더 이상 깊이를 느낄 수 없었다. 수
입한 사상에 반드시 수반되어야 할 사색이 없이 일차원에 머무르는
그들이 답답하게 보이기만 했다
나는 그후로 사색을 시작했단다. 이 세상에 운위되고 있는 모든 개
념과 원리를 나는 철저하게 의심하고 덤벼들었다. 가령 모두가 나쁘
다고 생각하는 것은 과연 나쁜가. 강도. 절도 따위는 말할 것도 없고
살인조차도 내 사색의 범위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어떤 살인은 극악이지만 어떤 살인은 찬양받지. 나는 결국 이 세살
에 그 자체로서 나쁜 것은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단다. 인간은 자신이
존재하는 공간에 의해 한계 지워질 수밖에 없는 운명의 소유자라는
결론은 나를 슬프게 했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면 도대체 어떤 것을
의미 있다 하고 어떤 것을 무의미하다 할 것인가
나는 파계승처럼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무시하고. 허무주의에 빠져
되는 대로 살다가 군에 입대했다 거기에서 광주사태를 맞은 나는 전
부대원이 집결했을 때 홀로 단상에 올라가 군부 독재를 규탄했지 . 그
것은 사회에 대한 애정 때문이기보다는 허무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
라는 존재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잔혹한 고문을 받았다 그러나 생에
대한 애착이 없었던 당시의 나로서는 그런 혹독한 고문조차 조롱했
다 나는 내 육체를 끝없이 학대함으로써 이 세상에 보복하고 싶었으
니까.
나는 죽기를 바랐지만 그들은 나를 죽이지 못했다. 결국 나는 정신
병 자로 석 방되 었지
아. 참으로 인간은 이상한 존재이다. 그때 나는 하나의 가능성을
보았다. 인간의 길 위에 있는 또 하나의 길 고문과 패락이 전혀 다를
게 없는 경지 어쩌면 그 경지에 다다를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전광
석화처럼 뇌리를 스쳤다.
그후 나는 산으로 들어갔단다. 혼자 산속에서 끝없는 정신의 경지
를 구했다 불행하게도 나는 정신적 스승을 만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인간이란 진정 위대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허무 위에는
성실한 인간의 조화로운 평화가 있었고. 그 위에는 자연과 통하는 길
이 있었다
어느 늦은 봄날. 개나리 꽃잎이 떨어지면서 내게 '내년에 또 올게
요. 세상은 아름다웠어요' 하는 소리를 나는 분명히 들었다. 나는 혼
신의 기를 모아 최고의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명상에 들어갔다. 시 간
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지만 나는 온갖 단계를 겪으며 결국은 마지
막 경 지에 올라섰다
그러나 불행히도 나는 최고의 깨달음 직전에는 반드시 머리에 마
(畿)가 침입한다는사실까지는 알지 못했단다. 깨달음의 막바지에서
모든 기를 쏟아부었기 때문에 몸과 마음이 허할 대로 허해져 있을
때. 마는 도저히 견뎌낼 수 없는 형 태로 침입하는 법인 것을
이미 모든 정신력이 진리의 피안에 가 있던 나였기에 정신의 어느
한 편을 타고 들어오는 마를 방어할 수 없었다. 필경에 최고의 경지
에 도달했다는 기억만을 가진 채 나는 미 쳐버리고 말았지 .
당시 나는 최고의 희열과 최고의 공포 속을 헤치고 지나가다 어느
순간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때가 늦었다. 일단 그
단계에 올라서면 뒤돌아설 수가 없다. 그래서 절반의 절대자란 없고
오직 광인이 있을 따름이란다.
마는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 잠재되어 있는 기운
이란다. 흔히 십마(漣)라고 하는데 평소에 이것은 본능에 가려 있
기도 하고. 수많은 종류의 관념들이 머리에 존재하고 있는 탓에 별로
느껴지지 않지. 그러나 어떤 생각에 깊이 몰두하여 기가 몹시 허해졌
을 때 인간의 육체적 힘으로부터 벗어나 정신에 침입하는 것이 곧 마
란다
아무튼 이후 나를 보호한 것은 우리 나라의 역사와 문화였다. 인간
은 기가 뭉쳐진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이 태어난 땅과 일체이다 그
가파른 구도의 길에서 절대자로 나아가기 직전 실패한 나를 이 땅은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었다
나는 마침내 어머니인 이 땅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제야 이 땅과
이 땅의 사람에 대한 애정이 생기더구나 애정을 갖고 바라본 이 땅
의 역사와 문화는 참으로 가슴 아팠단다.
어느 정도 몸을 회복한후 한반도를 살피니 기는 꽉 막혀 있고 민
족 문화는 피폐해져 있었다. 다행히 21세기에는 천기가 되돌아오는
형세라 나는 그 단초를 기다렸다.
중앙청 석주가 드러나고 일본에 있는 토우가 힘을 발하면서 겨레
의 운명에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으나, 하늘은 우리에게 숙제를 내주
었다 지금 우리 겨레에게는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단다.
수아.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잃어버린 역사를 찻는 일이다. 인간
은 결코 혼자의 힘만으로는 완전해지지 않아. 개인의 행복이란 것도
결국은 역사와 문화 속에서 찾아진다는 것을 잘 알겠지 . 그래서 나는
단군을 찾아나선 것이다.
이제 그 일이 너에 게로, 아니 이 땅의 모든 젊은이에 게로 넘어갔구
나. 비운의 세기를 당하여 잃어버렸던 겨레의 시조 단군을 되 찻는 날
천기는 우리에게로 돌아올 것이다.
수아야, 놀라지 마라
네가 이 글을 읽고 있을 때쯤이면 나는 이 세상사람이 아닐 것이
다. 나는 마지막으로 이 민족, 이 땅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깊은 사색 끝에 나는 이 길을 택하기로 했다
피해갈 수도 있는 길이지만 나는 그러지 않을 작정이다
그러니 슬퍼하지 마라
내 죽음은 이 겨레의 앞날에 음넉이 될 것이다
잘 있거라 비록 몸은 헤어지 지만 정신은 언제나 함께할 것이다
이제 나는 이 땅을 살다 간 모든 혼백들과 함께 영개에서 너희 젊
은이들을 지켜보고 있을 작정이 란다
안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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