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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김진명 - 한반도

by Casey,Riley 2023. 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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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2
김진명
바카라

경훈은 오세희의 전화를 기다렸다. 이제 김
재규를 전담했던 브루스를 만나면 많은 의
혹이 풀릴 것이다. 경훈이 미국에서 돌아온 
지 3일 만에  오세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
다.
 이제 갈 시간이 된 것 같소.  브루스가 이
틀 전 라스베이거스로 떠났소.  내일쯤이면 
둘 중 하나로 판가름이 나겠지.  저는 바로 
떠나겠습니다.  어디서  만나면  좋을까요?   
필립 최라는 사람은 어디에 있소? 
 주로 엠지엠 카지노에 있습니다. 
 그래요? 그거 마침 잘됐군. 브루스도 엠지
엠에서 하니까. 그럼  거기서 만납시다. 경
훈은 일이 제대로 되어간다고 생각했다. 이
제 남은 건 라스베이거스로 날아가는 일뿐
이다.
여행사 직원은 경훈이 돌아온 지 3일 만에 
다시 미국 여행을 떠나자 혀를 내둘렀다.
 이번에 가시면 한 달쯤은 있다 오세요. 
경훈은 웃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연결   편으로 갈아타고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한   경훈은 오세희가 
묵고 있는 호텔로 찾아갔다. 오세희는 이미 
프런트 데스크에 메시지를  남겨두고 있다
가 바로 내려왔다. 경훈은 오세희의  옆 방
에 짐을 푼 뒤 오세희의 방으로 건너갔다.
 예상외로 브루스는 상당히 따고 있소.  이
러다간 우리의 계획이  틀어질지도 모르겠
는걸. 오세희는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이제껏 잃었던 돈을  다 만회할 정도입니
까? 
 그렇소. 한 시간 전에 보았을 때에는 거의 
만회한 듯했소.  그럼 낭패로군요. 
 그 친구는 본전을  찾으면 그만둘 가능성
이 매우 높소.  그렇겠죠. 인생을 날렸다가 
다시 찾게 되었으니 즉각 그만두겠죠.   다
른 방법을 강구해야겠소. 
그러나 다른 방법이 들어먹힐 가능성은 거
의 없어 보였다. 브루스가 잃었던  돈을 만
회하고 나면 그때는 어떤 비밀을 알아내려 
해도 이쪽의 약점만 드러낼 뿐이다.
 일단 필립 최  씨에게는 연락을 해야겠습
니다. 한국에서 미리 전화를  넣어두었거든
요. 경훈은 필립 최의 휴대폰  번호를 눌렀
다. 
필립 최는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더니 
곧 오세희의 방으로 찾아왔다. 그는 경훈의 
소개로 오세희와 인사를 나눈 뒤,  방을 한 
번 둘러보고는 수화기를 들어 카지노 호스
트를 찾았다.
 이 방하고 이 옆 방에  계시는 분을 펜트
하우스로 모셔. 내가  있는 층으로 말이야. 
최고로 모셔야 할  분들이거든. 필립  최는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경훈에게 물었다.
 여행은 힘들지 않았소? 
언제 들어도 필립 최의 목소리는 잔잔했다. 
그러면서도 겸손했다.
 경훈은 이제 오십이 다 돼보이는 필립 최
로부터 이런 공대를 받는 것이 부담스러웠
다. 하지만 필립 최는 결코  경훈을 나이로 
압도하려는 태도는 보이지 않았다.
경훈은 그 점이 의아했다. 여기는 라스베이
거스, 필립 최의  홈 그라운드였다. 그리고 
지금 자신은 필립 최의  도움을 받으러 왔
고 그는 이 방면의 전문가였다.  그러나 그
는 거꾸로 무슨 힘든 부탁을 하러 온 사람
처럼 공손했다. 경훈은 그에게서 마치 수도
사 같은 인상을 받았다.
 아니오, 쾌적했습니다. 그나저나  괜히 번
거로움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천만에. 그
런데 어떻게 된 연유인지 자세히 들어보고 
싶소. 일단 장소를 옮깁시다. 필립 최는 경
훈과 오세희를 자신의 방으로 안내했다.
 가장 안전한 방이오. 도청 같은 것은 염려
하지 않아도 되오. 여러 면에  세심하게 신
경을 써주는 필립 최를  보며 경훈은 직업 
도박사란 결코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
했다. 자리에 앉아 차 한잔을  마시고 나자 
오세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것은 나라를 위한 일이오. 
이때 필립 최의 얼굴에 냉소가  번졌다. 오
세희가 얘기를 계속 하려  하자 필립 최가 
말허리를 잘랐다.
 하나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것이 있소.  이 
일이 어떤 종류의 일이든  나는 즐거운 마
음으로 해드리겠소. 그러나 나라를  위해서
는 절대 아니오. 미안하지만 나는  오 선생
님 같은 애국자가 못 되니까요. 내가 이 일
을 기꺼이 해드리는 것은  이 변호사의 부
탁이기 때문이오. 그러므로 조국이니  뭐니 
그런 단어는 가급적 쓰지 않았으면 좋겠소. 
오세희는 약간 당황했지만  이내 단호하게 
대답했다.
 알겠소. 
이어 오세희는 필립 최에게 이제까지의 상
황을 있는 그대로 설명해 주었다.
 그럼 일단은 브루스가 가진 것을 도로 다 
잃도록 해야겠군요. 그의 입에서 정보가 나
올 때까지 말이오.   그렇소. 하지만  그게 
어떻게 가능하오? 바카라는 손님끼리의 싸
움이 아니고  카지노와의 게임이지   않소? 
그러나 필립 최는 그 물음에 대한 대답 대
신 애매한 미소를 띤  채 이야기를 계속했
다.
 그런 다음에는 다시 따도록 해야 하구요. 
 `…`…. 
오세희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경훈도 커
다란 충격을 받았다. 
그것까지는 미처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세희와 경훈은 단지  브루스가 
잃기만을 바랐을 뿐이다.  그러나 지금  이 
도박사는 브루스가  가진 것을  잃게 해서 
정보를 알아낸 다음에는 다시 그가 따도록 
해줘야 한다는 것이 아닌가. 경훈은 마음속
에 잠재해 있던 희미한  죄의식 같은 것이 
씻겨져 내려감을 느꼈다.
‘아, 세상에는  참으로  기인들이 많구나. 
나 같은 범인들로선 그들이 생각하는 각도
나 사는 방법을 이해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큰 인물이란  언제나 이처럼  심성이 착한 
모양이다. 내가 이제껏 우수한  인간이라고 
자부해 온 것은 얼마나 허술하고 이기적이
었던가. 나의 가치관이란  기껏 해봐야  나 
하나의 입신양명을 위한  처세술에 불과하
지 않았나.’필립 최는 잠시 생각하는 표정
을 짓더니 입을 열었다.
 지금 내려가서 그가  얼마를 가지고 있는
지 보아둡시다. 그리고 나중에 지금의 액수
까지만 다시 올려주면 되겠지요. 세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필립 최는 앞장서서 두 
사람을 도박장으로 안내했다. 동대문운동장
보다도 세 배쯤 커보이는 카지노였지만, 필
립 최는 누군가를 찾아 몇 마디 하더니 금
방 브루스를 찾아냈다.
 역시 바카라 테이블에 앉아 있군요. 그 정
도 돈을 잃었다면 당연히 바카라를 했겠죠.  
어떻게 금방 그를 찾았소? 이 넓은 카지노
에서. 
 모든 손님들의 정보는 빠짐없이 컴퓨터에 
기록되오. 엄청난 금액의 돈이  왔다갔다하
지만 티끌만한 부정이나 실수도 없는 곳이 
바로 카지노죠. 브루스와 일면식이 있는 오
세희는 두  사람과 떨어져  약간의 거리를 
두고 경훈에게 브루스가  누구인지를 턱짓
으로 알려줬다. 잠시  서서 판이  돌아가는 
것을 바라보던 필립 최는 브루스의 반대편
에 앉았다. 브루스는  한창 게임에  몰두해 
있었다.
필립 최는 사람을 불러 이것저것 물어보았
다. 경훈은 그가 브루스의 현재  상황을 확
인하는 것으로 짐작했다.
 1백만 달러 가져와요. 
필립 최의 입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튀어나
온 금액은 게임을 하고  있던 사람들을 놀
라게 했다. 1백만 달러라는 금액은  딜러가 
가지고 있는 칩의 합계에 해당하는 것이었
다. 카지노 측은  칩을 날라오기에  분주했
다. 게임은 잠시  중단되고 딜러들은  칩을 
세느라 정신이 없었다.
 미안합니다, 여러분. 
필립 최는  게임을 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깍듯이 인사를 했다.
 천만에요. 
사람들은 자기의 일은 아니었지만 이런 장
면을 보는 것  자체가 신나는  모양이었다. 
미국이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상상조
차 할 수 없을 정도의 위력을 가진다. 돈을 
가진 자가 곧 정의롭고 강한  자며, 멋있는 
자다.
이윽고 필립 최의 앞에  산더미 같은 칩이 
쌓이자 사람들은 우군을 얻은 듯한 표정으
로 다시 게임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이렇게 
많은 돈을  가진 사람이라면  필시 실력도 
상당하리라 믿었다. 강자와 같이 게임을 한
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특히 자신감을 잃은 
사람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자, 여러분 배팅하십시오. 
딜러의 입에 밴 채근에  따라 사람들은 각
자 칩을 옮겼다.  ‘뱅커’ 혹은  ‘플레이
어’의 두 자리 중 하나를 선택하는 이 게
임은 무척 단순해 보여  초심자도 쉽게 빠
져든다. 그러나 20~30년의 경력을 가진  도
박사들에게 가장  어려운 게임도  역시 이 
바카라다. 
어느 카지노든  바카라 룸을  따로 마련해 
놓는데, 물론 가장 좋은 위치에  자리한 그
곳은 제일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
 모두 배팅하셨습니까? 이제  마지막 콜입
니다. 
딜러는 필립 최를  흘끗 쳐다봤다.  배팅할 
기미가 안 보이자 바로 카드를 건넸다.
카드는 우선 플레이어에 배팅한 사람들 중 
최고액자에게 보내진다. 처음에는 두  장의 
카드, 그리고 경우에 따라 한 장을 더 받기
도 하고 그냥 이기거나 지기도  한다. 독일
에서 만들어진 이 게임은 상당히 복잡하다. 
뱅커와 플레이어  간의 숫자  관계에 따라 
각각 한 장의 카드가  더 주어지거나 않거
나 한다.
브루스는 이제껏 늘  최고액을 배팅함으로
써 항상 자신이 카드를  받아 쪼아보곤 했
다. 이번 판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신중한 손길로 자신의  카드를 귀퉁이부터 
천천히 밀어올렸다. 바카라(0)가 먼저 보이
고 다음으로 올라오는 카드에는 점이 찍혀 
있었다.
 포 사이드. 네 면에 모두 점이  찍혀 있었
다. 10 아니면 9였다.
카드를 들추는 브루스의 손이 가늘게 떨렸
다. 배팅액은 1만 5천 달러. 엄청난 배팅이
었다. 카지노 측과  특별히 배팅  상한액에 
대해 협의하지 않은 한 최고액의 배팅이었
다. 10이라면 상하에  하나씩의 점이  찍혀 
있을 것이다. 9라면 상하는 텅 빈 공간이고 
가운데에 하나의 점이  박혀 있을  것이다. 
가늘게 떨리던 브루스의 손길에 점차 자신
감이 배었다.
 내추럴. 
브루스의 자신 있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8이나 9를 내추럴이라고 한다. 이것은 상대
에게 카드가 한 장 더 갈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다. 뱅커에 배팅한 상대가 한  번에 두 
장의 카드로  이편을 이기지  못하면 그냥 
지고 마는 것이다. 상대는 브루스의 내추럴
을 보자 이내 포기한  손길로 카드를 날려
버리고 말았다. 그가 던진 두  카드의 합계
는 6이었다.
플레이어에 배팅해서 이기면  커미션이 없
다. 반면 뱅커에 배팅하면 5퍼센트의  커미
션을 카지노 측에 내야 한다.  따라서 룰은 
뱅커 쪽에 약간 유리하게 되어  있다. 커미
션도 떼지 않은 1만 5천 달러의 칩을 끌어
당기는 브루스를 보는 사람들의 얼굴에 경
외감이 서렸다. 기껏해야 2~3백 달러, 혹은 
5백 달러 배팅을 하는 사람들에게 그의 존
재가 어떻게  비칠 것인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브루스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망설임의 기
색이 비쳤다. 그는 원래 이번  판만 이기면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브루스를  바라보
는 사람들의 표정과  다시 한 번  이길 수 
있을 것만 같은 요행  심리가 그를 부추기
는 모양이었다.
 모두 배팅하셨습니까? 이제  마지막 콜입
니다. 
다시 반복되는 딜러의 음성에 브루스는 무
의식적으로 손을 칩에 갖다 댔다.  다시 플
레이어에 1만 5천 달러를  갖다 놓는 그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사람들은 다투어 그의 
뒤를 따라 플레이어에 배팅을 했다. 사람들
은 그를 이 판의 리더로 보고 있었다.
 뱅커에 3만. 
너무도 안정된 필립 최의 목소리가 사람들
의 귀에 들어와 박혔다.
 사람들은 필립 최의  얼굴에 시선을 모았
다. 안정된 목소리만큼이나 안정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어떤 사람은 얼른  배팅 금
액을 줄이고, 또 어떤 사람은  아예 배팅을 
바꿔놓았다.
브루스의 표정이 상기됐다. 불안에 떠는 모
습이 역력했다. 그러나 이 무서운 판에서도 
인간의 자존심은 고약하게 작용했다.  그는 
이제까지의 영웅적 위치에서  스스로 떨어
지려고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
였다. 브루스는 오기가 발동하는지  냉소를 
흘리며 필립 최를 쏘아보았다. 그러나 필립 
최는 게임 이외의 것에는  아무 신경도 쓰
이지 않는다는  듯 무심한  얼굴로 딜러가 
카드 나누는 동작만 쳐다보고 있었다.
카드는 먼저 브루스에게 배달되었다.  브루
스의 가늘게 떨리는 손길이  두 장의 카드 
위에서 잠시 멈추었다. 브루스는 남몰래 심
호흡을 했다. 한 장의 바카라가  먼저 보였
다. 다음은 제법 많은 점이 보였다. 브루스
의 표정이 밝아졌다. 7, 8, 아니면 9거나 10
일 것이다.
 세븐. 
약간의 불안이 깔린  목소리였으나 어쨌거
나 상당한 우위를 점한  데서 나오는 자신
감이 묻어 있었다.  7도 역시 다음  카드를 
받지 않는다. 상대는 8 혹은 9일 경우 무조
건 이기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는 다시 한 
장의 카드를 받는다. 그러나 7이 못  된 상
황에서 한 장의 카드를 더  받아 7을 이긴
다는 것은 확률이 무척  낮기 때문에 플레
이어의 7은 사실 매우 높은 수였다.
필립 최가 뱅커의 카드를 받았다.  그의 손
길은 무심하게 두 장의 카드를 밀어넘겼다. 
6이었다. 7과 6은 상극이다.  6은 7에 대해
서 무조건 지는 것이 룰이다. 한 장의 카드
를 더 받을 기회가 없는 것이다.
 식스. 
필립 최의 목소리가 터져나오는 순간 브루
스는 자신도 모르게 테이블을 쳤다.
 예스. 
참으로 깊은 감회가 밴 목소리였다.
 플레이어 윈. 세븐 오버 식스. 
딜러의 목소리가 채 귀에서 사라지기도 전
에 브루스는 1만 5천  달러를 같은 플레이
어에 놓았다. 기세가  올랐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이 브루스를 따라 배팅했다.  브루스
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길이 다시금 경외감
으로 물들었다. 이제  필립 최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길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역시 
이 테이블에서는 브루스가  리더라는 의식
이 그들의 눈빛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필립 최를 바라보는 브루스의 눈은 우월감
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이제 다시 한 번  너를 꺾어주고 말겠다는 
결의가 그의 살벌한 눈길에서 느껴졌다.
 플레이어에 1만. 
필립 최의 다소 기가  꺾인 듯한 목소리가 
테이블 위에 떨어지자 브루스는 적의 어린 
눈길을 거두었다.
 내추럴 플리즈, 캡튼. 
필립 최는 부드러운 눈길을 브루스에게 보
내며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당신이 최
고라는 표시였다.
 노 프라블럼(문제 없소). 
브루스는 의기양양한 목소리를  점잖게 내
뱉으며 자신에게 배달된  카드를 차분하게 
밀어올렸다. 첫 카드는 3이었다. 다음 카드
를 뽑는  브루스의 손길에  강한 자신감이 
배어 있었다. 투  사이드. 4 아니면  5였다. 
카드를 밀어올리며 가운뎃점을  찾는 브루
스의 눈동자에 잔뜩 쌓인 칩이 반사됐다.
 예스. 
브루스는 카드를 던졌다.
 내추럴. 
합계 8이었다. 사람들의 표정이 기쁨과  더
불어 약간의 후회를 머금었다. 왜  좀더 배
팅하지 못했나 하는 아쉬움이었다.  딜러는 
무심한 손길로 뱅커의 카드를 뒤집었다. 뱅
커에 배팅한  사람이 없을  때에는 딜러가 
대신 뒤집는다.
 하우에버(그러나)`…`…. 
딜러의 이상한 발음이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는가 싶더니 이윽고  떨어져내린 카드를 
보고 사람들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
왔다.
 싯(빌어먹을)! 
딜러는 모든 사람들의 배팅을  거둬들였다. 
딜러의 무심한 목소리가 사람들의 귀에 잔
인하게 들어와 박혔다.
 뱅커 윈. 나인 오버 에잇. 
브루스의 눈에 핏발이 서는가 싶더니 다시 
손길이 플레이어로 거침없이 나갔다.  역시 
1만 5천 달러였다. 필립 최의  배팅이 즉각 
뒤를 이었다.
 아임 서포팅 유(당신을  지지하는 배팅이
오). 
브루스가 짐짓 여유를 가장한 미소를 지었
다. 필립 최의 배팅은  5천 달러였다. 다시 
브루스에게 카드가  배달되었다.  이번에는 
브루스의 손길이 유난히 심하게 떨렸다. 브
루스에게는 본전 근처의  배팅이었던 것이
다. 이기면 몇 천 달러를 따는 것이고 지면 
약 2만 달러를 잃는 것이다. 브루스는 세븐
을 뒤집어냈다.
 뱅커 윈. 에잇 오버 세븐. 
딜러의 무심한 손길이 사람들의 칩을 거두
어갔다. 브루스는 잠시  손을 멈추었다. 플
레이어가 네 번 연달아  나오고 뱅커가 두 
번 연달아 나왔다. 이제 어디에  배팅을 할 
것인가. 브루스는 뱅커가 두 번  다 내추럴
로 이긴 것을 중요하게 보고  있었다. 이즈
음에서는 뱅커가 센 것이다.
브루스의 손이 칩을 옮겼다. 칩은 뱅커라고 
쓰인 바닥을 묵직하게 가리며 버티고 섰다. 
필립 최의 배팅이 뒤따랐다. 높게  쌓인 브
루스의 칩에 비해 필립  최의 칩은 형편없
이 낮았다.
딜러가 건네준 카드를 뒤집는 브루스의 손
길에는 신중함이 상실되어 있었다. 두 장의 
바카라가 나왔다. 자신 없는 손길은  또 한 
장의 바카라를 뽑아냈다.
 플레이어 윈. 파이브 오버 나씽. 
브루스는 떨리는 손길로 다시  한 번 칩을 
옮겼다. 이번엔  플레이어  쪽이었다. 필립 
최는 더욱 적은 칩을  브루스를 따라 플레
이어에 옮겼다. 브루스가 매판 1만  5천 달
러를 거는 데 비해 필립 최는 대략 5백 달
러를 배팅했다.
브루스의 얼굴은 긴장감으로 잔뜩 굳어 있
었다. 건네진 카드를  뒤집는 손길이  더욱 
심하게 떨렸다.
 뱅커 윈. 에잇 오버 파이브. 
카지노의 음모
그 판 이후로  브루스는 근 두  시간 동안 
계속 풀 배팅했다. 이제 사람들은  모두 브
루스와 반대로 배팅하고 있었다. 카드는 희
한하게도 브루스의 반대편으로만 떨어졌던 
것이다. 자포자기한 브루스의 눈이 점차 초
점을 잃었다. 브루스는 무슨 까닭인지 사람
들과 반대로만 가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기는 쪽과 반대로만 가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필립 최는 브루스와 엇
갈려 이기는 쪽으로만 배팅하고 있었고, 사
람들은 희희낙락거리며 필립 최를 따라 칩
을 옮겼다.
누가 바카라를 쉬운 게임이라고  말했던가. 
두 시간 후 브루스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일어났다. 마지막으로 배팅한 2백 달러마저 
잃고 나자 더  이상 앉아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기다 말고 필립 최의 뒤에 멈춰섰다.
필립 최 앞에 수북하게 쌓인 칩을 넋을 잃
고 바라보는 브루스의 얼굴은 끝없는 회한
과 절망으로 물들어 있었다. 필립  최는 가
끔씩 그에게 시선을 던지며 고개를 흔들었
다. 왜 그런 식으로 게임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제스처였다.
브루스는 방으로 올라가고  싶었지만 이제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자 단  한 걸음도 
떼어놓을 수 없었다. 그는 가끔  자신을 돌
아보며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듯 고갯짓하
는 필립 최와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억지
로 웃음을 지었다.  그것만이 절망에  빠진 
브루스가 바깥 세계와 교신할  수 있는 유
일한 신호였다.
이윽고 필립 최는 50만  달러나 불어난 칩
을 밀어내며 일어섰다.
 좀 쉬어야겠어. 이 칩을 보관해 줘. 
딜러들은 황송한 표정을 지으며 서둘러 필
립 최의 칩을 세었다. 
황송한 표정, 그것은 이긴 자에  대해 카지
노 딜러들이 보이는 본능적인 모습이다. 브
루스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그런 대접을 받던  주인공이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러나 지금은 어쩔 수  없는 패배자일 뿐
이다. 패배자란 늘 비참하지만  카지노에서
의 패배자만큼 처량한 존재도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패배자의 내면적  갈등을 상상하
면서 동정심과 복수심이  교차하는 눈길로 
쳐다본다. 복수란 불과 얼마 전까지  온 판
을 호령하며  빅 배팅을  해대던 화려함에 
대한 비난인 것이다.  ‘우린들 왜  그렇게 
화려하게 쳐대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마치 겁쟁이처럼 조심하면서  쩨쩨한 배팅
으로 일관한 것은 바로  당신처럼 되지 않
기 위해서였다’라는   시선을 패배자에게 
사정없이 쏘아대는 것이다.
브루스는 비록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안됐
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그 속에 담
겨 있는 다른 의미를 너무도 잘 알았다. 그
러나 필립 최는 달랐다. 브루스는  필립 최
가 자신의 오기 섞인  배팅에 대해서 여러 
번 지지를 해준 것과  아울러 자신을 바라
보는 눈길에서도 어딘지 따스함을  느꼈다. 
그 느낌은 카지노에서는 처음 대해보는 낯
선 것이었다.
브루스는 카지노 호스트를 통해 필립 최가 
진정한 도박사라는 것을 알아냈다.  그리고 
기분에 따라서는 턱없는 짓을 하는 괴짜라
는 사실도. 브루스는 무엇보다도 그가 한국
인이라는 사실을 다행으로 여겼다.  한국인
에게는 자신도 할 얘기가 있었던 것이다.
브루스는 필립 최가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
이자 은밀히 뒤쫓았다. 
그리고 필립 최가 엘리베이터를 타기 직전 
간신히 말을 붙여볼 기회를 잡았다.
 게임을 참 잘하시더군요. 
필립 최는 브루스를 보자 무척 반가워하다
가 이내 안쓰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까는 왜 그렇게 했소? 그렇게 흥분해서
는 이길 수가 없잖아요.
  고통스럽습니다. 저도 왜 그랬는지  모르
겠어요. 
 참`…`…. 
필립 최가 안타까운 한숨을 남기고 엘리베
이터를 타려 하자 브루스는 다급하게 그를 
붙잡았다.
 저어`…`…. 
 …`…? 
 잠시 얘기 좀 할 수 있겠습니까? 
 무슨 얘기요? 
필립 최의 목소리가 갑자기 건조해졌다. 브
루스는 바뀌어버린 필립 최의 반응에 그만 
용기를 잃고 말았다.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뭔데요? 
 어디 좀 앉아서 얘기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식사를 하려던 참이오. 
 그럼 식사를 같이할 수 없겠습니까? 
브루스는 필사적이었다. 어려운 말을  간신
히 뱉어내는 브루스의 표정은 안쓰럽다 못
해 처참할 정도였다.
 식사를? 
필립 최는 망설이는 듯하다가 대답했다.
 음, 그럽시다. 
필립 최는 앞장서서  중국 식당으로  갔다. 
브루스는 자리를  잡고 앉아서  필립 최가 
요리를 서너 가지 시킬  때까지 계속 자신
이 어떻게 잃었는지, 얼마를 잃었는지에 대
해 반복적으로 설명했다. 이런 브루스의 얘
기를 필립 최는 지루한 표정 한번 짓지 않
고 들어주었다. 요리가 나오고 술이 얼근해
지자 브루스는  드디어 마음에  품고 있던 
얘기를 꺼냈다.
 언젠가 저는 2천 달러를  가지고 20만 달
러를 딴 적이 있었습니다.  오호, 그래요? 
 아주 침착하게 했죠. 저는 그것을  잃으면 
끝이라는 생각에 최저  배팅으로 일관했습
니다. 시간과의 싸움이었죠.   시간과의 싸
움? 대단하군요. 바로 그게 게임에서  이기
는 원칙이지. 어떻게  그런 원리를  깨달았
소? 브루스는 용기를 냈다.
 저는 꼭 따야만 할 때는 달라집니다. 절대
로 아까와 같이 한번에  치거나 하지는 않
죠.  그래야만 하오. 
 사실은 내일이면 집에서  돈을 부쳐올 텐
데, 오늘 이렇게  허탈한 상태에서는  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데
`…`….
  말씀해 보시오. 
 2천 달러만 좀 빌려주시면 내일 갚아드리
겠습니다. 브루스는 한번에 1만 5천 달러를 
배팅하던 때와는 너무도 달라져 있었다. 단
돈 2천 달러를 구걸하는 그의 모습을 한참 
바라보던 필립 최는 표정을 냉랭하게 바꾸
었다.
 잘 아시겠지만 도박판에서는 절대로 돈을 
빌려주거나 받는 법이 아니오. 운을 바꾸기 
때문이지. 푹 쉬면서 기다렸다가 내일 돈이 
오면 게임을 시작하시죠. 브루스는 애가 닳
았다. 필립 최라는 인물은 손에  잡힐 만한 
거리에 있는 듯하면서 아니었다. 그러나 여
기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는 무릎이라도 
꿇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으면서 매달렸다.
 미안합니다. 너무 잘 알지만 워낙  사정이 
다급해서`…`…. 이제   브루스의 입에서는 
집에서 돈을  부쳐온다는 등의  얘기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잘생긴 모습에 어울리
지 않게 비굴한 기색이 얼굴에 가득 찼다.
 잘 아시겠지만 나는 프로요. 
 네, 잘  알고 있습니다.  카지노 호스트가 
선생님이 어떤 분인지 알려주더군요.  필립 
최는 잠시 브루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브
루스는 그의  시선을 받자  최대한 가련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평범한 사람들을 싫어하오. 뭔가  특
별한 인간을 좋아하지. 
알겠소? 브루스는 무슨 말인지  몰라 필립 
최의 입에 시선을 모았다.
 남들은 나를 괴짜라 부르지. 아무리  불쌍
해도 평범한 인간을  돕지는 않소.  그들은 
결국 거품처럼 사라져버리고  말기 때문이
오. 
나는 뭔가 좀 특별한 사람,  특별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 그런 사람이라면 가끔 도와주
기도 하오. 브루스의 얼굴에 희미한 희망의 
그림자가 스쳐갔다.
 사실 저도 그렇게  평범하게 살아온 사람
은 아닙니다. 그러나 필립 최는  믿지 못하
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요? 
 네. 
브루스의 얼굴에 초조한 기색이 떠올랐다.
 어떻게 특별합니까? 
 혹시 한국 분이 아니십니까? 
 그렇소만`…`…. 
 아, 잘되었군요. 사실 저도 한때 한국에서 
근무했거든요.  무슨 근무를?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을  꼽자면 아마 
도박일 것이다. 도박에서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은 필연적으로 자살을 생각하게  된다.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이 무엇을 못하랴. 브
루스는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 
그러나 브루스는 마지막 순간 망설였다. 본
능적인 보안 의식이 그를 붙들어맨 것이다.
 뭐, 굳이 얘기할 필요는 없소. 
필립 최는 흥미 없다는  듯이 술잔을 입에 
갖다 대면서 눈길로는 계산서를 훑었다. 브
루스는 당황해하면서 술을  입에 털어넣고
는 다급하게 말을 꺼냈다.
 특수한 일이었습니다. 혹시 주한 미군  철
수에 대해 아십니까?  미군 철수요? 
 사실 제가 주한 미군 철수를 막은 사람입
니다. 당시 미군이 철수했다면  한반도에서
는 엄청난 일이 일어났을 겁니다. 브루스는 
초조하게 필립 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표정에 변화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자신
의 목숨이 좌우될 판이었다.
 나는 한국에 대해 잘 모르오. 부모가 한국
인일 뿐이지 나는  미국 시민이오.  어려서 
여기로 왔으니까. 필립 최가 시큰둥한 표정
을 짓자 브루스는 다시 다급해졌다.
 당시 한국의 정보부장  김재규와 제가 미
군 철수를 막아냈습니다.
 우리가 아니었으면  한국은  북한의 무력 
앞에 그대로 주저앉았을  테고, 지금  같은 
발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한단 말이오?   아무리 
돈이 필요하다 해도 그런  억지는 쓰지 마
시오. 그리고  김재규 부장이라구요?  그가 
죽고 없다고 해서 함부로 얘기하지는 마시
오.  정말입니다. 저는 김 부장과  보통 사
이가 아니었습니다. 필립 최는 귀찮다는 듯
한 표정으로 술잔을 들어올렸다.
 그렇다 치고 당신이 어떻게 주한 미군 철
수를 막았단 말이오?  당시 카터 대통령은 
주한 미군 철수를 공약으로 내걸었죠. 과연 
카터는 대통령이 되자 주한 미군을 차례로 
철수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했지만 당시의  한국 대통
령을 미워한 카터는 오히려 철수에 가속도
를 붙였어요. 필립 최는 손을 내저었다.
 잠깐, 나는 그런 일에  흥미가 없소. 하지
만 흥미를 느낄 만한 내 친구가 있지. 그는 
소설가요. 만약 당신이  그런 얘기를  하고 
싶다면, 그 친구를  부르겠소. 어쩌면 그가 
당신 이야기를 소설의 소재로 삼을지도 모
르지. 만약 그가 흥미 있어  하면 당신에게 
2만 달러를 주겠소.  네? 얼마라구요? 
 2만 달러. 
 오, 하느님!  아마 그  친구분은 틀림없이 
흥미로워하실 겁니다. 
분명합니다. 브루스의 목소리가  떨렸다. 2
만 달러라는 금액은 이  절망에 빠진 사나
이를 완전히 흔들어놓았다.
 그럼 내일 만납시다. 
 아니, 그 친구분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그랜드캐니언에 관광  갔소. 하지만  전제 
조건이 있소. 내 친구가 흥미  있어 한다는 
전제하에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이오.   제
발 그 친구분에게 제가  꼭 이야기할 기회
를 주십시오.  노력은 해보겠지만 그  친구
가 흥미 있어  할지는 모르겠소.  브루스는 
초조했다. 하지만 내일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필립 최는 노련하게 상대의 
심리를 조종했다.
두 개의 태양
다음날 식당에  나타난 브루스의  두 눈은 
움푹 들어가 있었다. 2만 달러라면 그가 회
생을 꿈꾸어 볼 수 있는 돈이었다. 그가 간
밤을 어떻게 보냈을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
었다. 초조한 브루스에게 경훈의 여려 보이
는 얼굴은 위안이 되었다.
 여기는 내 친구 미스터 리요. 상당한 재산
가지만 취미로 시나 소설을 쓰고  있소. 경
훈과 악수를 나누는 브루스의 손이 떨렸다.
 주한 미군 철수가 어떻고 했다면서요? 
경훈의 시큰둥한 태도는  브루스에게 절망
을 안겨주었다.
 아니,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얘
기가 있습니다.  저는 별로 흥미가  없습니
다. 그저 취미로 쓰는 글인데  무슨 흥미가 
있겠습니까? 브루스는 다급해진 나머지 눈
물마저 글썽이며 사정했다 제발`…`…. 
경훈은 난감한 눈길로 필립 최를 바라보았
다. 필립 최는 알  바 아니라는 듯  양손을 
들었다 놓았다. 경훈은  뭐 이런  재미없는 
사람을 만나라고 했느냐는 듯 필립 최에게 
질책의 눈길을 던졌다.
 한번 들어나 보지 그래요. 
필립 최가 넌지시 권유하자  경훈은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고는 무관심한 표정
으로 말을 꺼냈다.
 그럼 어디 들어나 보죠. 한국에서 무슨 일
을 했습니까?  육군 중위로서 주한 미군의 
정보 및 공작을  담당했죠. 그리고  한국의 
중앙정보부장에게   영어를  가르쳤습니다.    
음, 그래요, 그러면 정보부장과 인간적으로 
가까웠겠군요.  네, 그래요. 
 정보부장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정이 많고 의리가 강했습니다. 
브루스는 경훈이 질문을  던지자마자 바로
바로 대답했다.
 그런데 선생의 그  정보 및  공작 임무와 
정보부장은 어떤 연관이 있었습니까?   우
리는 일단 한국의 최고  권력자 곁에 우리 
사람을 심어두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선택한 인물이  김재규 정보부장이
었죠.  최고 권력자라면  대통령을 말하는 
겁니까?  네. 
 어떻게 정보부장을 당신네 사람으로 만들 
수 있었지요?  우리는 김 부장에게 최고의 
정보를 제공하곤 했습니다. 이것은  이중의 
효과가 있었지요. 먼저 그는 우리의 예상대
로 대통령에게서 두터운  신임을 받았습니
다. 그가 정보부장으로서는 건강도 좋지 않
고 정치 공작에도 서툴렀지만 대통령의 신
임을 계속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우리에게
서 나가는 고급 정보 때문이었지요. 이것을 
너무도 잘 아는 그는  우리와 밀접한 관계
를 갖는  것만이 자신이  정보부장 자리를 
유지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하나
의 효과란?  우리도 필요한 정보를 그에게
서 공급받았습니다.  즉  상부상조한 거죠. 
경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간단하지
만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그런데 선생이 주한  미군 철수를 막았다
는 것은 무슨  얘깁니까?  언젠가  미국을 
방문한 김재규  정보부장에게 CIA의  터너 
국장이 한 가지 소원만  말하라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김 부장은 정색을 하고
는 주한 미군 철수를  중단해 달라고 하더
군요. 나는 그것이  중요한 이야기다  싶어 
최선을 다해서 터너 국장께  전달했습니다. 
단순히 통역만 한 게  아니라 전력을 다해 
한반도의 상황까지 전달했던 겁니다.  나의 
눈앞에는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날 경우 그 
위대한 한강의 기적이 포화로 뒤덮이는 광
경이 선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미군 철수를 막는 것이 내가 
한국민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
각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근무하게 된 
것 자체가 신의 섭리라고 생각하고는 혼신
의 힘을 다해 터너  국장께 설명했던 겁니
다. 사실 그것은  통역이 아니었습니다. 차
라리 절규에 가까웠습니다. 브루스의  텁수
룩하게 웃자란 수염이 가늘게 떨렸다. 그때
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지금 브루스의 입에
서 터져나오는 소리야말로 절규였다.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필립 최의 얼
굴에 가느다란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런데 왜 터너  국장은 김재규 정보부장
에게 소원을 말하라고 했습니까?   하나는 
거대한 시험이라고나 할까요, 우리는  김재
규라는 인물을 테스트했던 것입니다.  그의 
그릇 크기를 시험했던 거죠. 
그에게 과연  나라의 큰  고민을 정면으로 
돌파하려는 의지가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또 하나는 김재규가 그런 저돌적인 인물일 
경우 확고하게 우리  편으로 만들어두자는 
뜻이 있었습니다.  김 부장은 왜  하필이면 
주한 미군 철수를 중단해 달라고 부탁했을
까요?  그것은 그  당시 대다수  한국민의 
바람이었습니다. 또 김 부장으로서는  자신
의 자리를 영구히 보전하는, 그리고 우리로
서는 우리 사람을 최고  권력자 옆에 언제
까지나 근접시켜 놓는 최선의  방법이었죠. 
사실 그때 한국의 대통령은 몹시 불안해하
고 있었습니다. 
미군 철수는 바로 박  대통령의 실권을 의
미하는 것이었으니까요. 
미군 철수를  막지 못하면  보수 중산층의 
이탈은 물론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든 시민 
봉기가 일어나든 그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것이 뻔했습니다. 박 대통령
은 매일  고민을 하고  회의를 했습니다만 
카터 대통령의 주한 미군  철수 의지는 요
지부동이었습니다. 그러니  정보부장으로서 
김재규의 고민도 당연히 미군 철수를 막는 
일이었죠. 그러나 누가 미국 대통령의 결정
을 저지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터너 국장은 김재규 부장의 말을 듣고 즉
각 대답했습니다. 어려운 일이지만 김 부장
의 특별한 부탁이니만큼  들어주겠다고 말
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죠? 
 터너 국장은 신속히  남북한 군사력 비교
라는 자료를 만들었습니다. 북한의  군사력
이 남한보다 세 배는  강력하고 북한은 그 
어느 때보다 호전적이라, 미군 철수는 바로 
남한의 붕괴를  의미한다는  내용이었지요. 
그리고 그   자료를 은밀히   《워싱턴포스
트》에만 넘겨주었습니다. 이슈화시키는 방
법이었죠. 거대한 신문 하나에만 특종을 만
들어주면서 붐을 조성하는 겁니다.  잘되었
나요?  물론입니다. 삽시간에 워싱턴이 들
끓기 시작했죠. 언론과 공화당 의원들이 한
국이 공산권으로 넘어가는 데 대해 책임을 
지겠느냐고 카터 대통령을 몰아붙였습니다. 
한국이 넘어가면 일본도 넘어가고,  미국은 
아시아를 몽땅 소련과 중국에 넘겨주게 되
며, 그 다음은 유럽에 이어  미국까지 모두 
공산주의의 제물이 되고 마는데, 도대체 카
터 대통령은 뭐하는 사람이냐는 여론이 도
처에서 물 끓듯  했지요. 심지어는  민주당 
의원들조차도 카터 대통령을 공격했습니다. 
결국 카터 대통령은 철수를 중단시킬 수밖
에 없었지요. CIA가 마음먹고 나서서 하면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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