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 1
9월 5일 오후 10시 49분
요코하마
산케이엔(삼계원, 요코하마 시 나카 구에 있는 유명한 일본식 정원
: 역자 주) 근처에 자리잡고 있는 택지 북쪽 끝에는 14층짜리 아파트
가 늘어서 있었다. 지은지 얼마 되지 않은 아파트인데도 거의 대부
분 입주가 끝난 상태였다 아파트 한 동마다 100여 세대나 모여 살고
있었지만 주민들은 옆집 사람 얼굴조차 알지 못했다. 각각의 집들에
사람이 살고 있음을 증명해 주는 것은 밤이 되면 켜지는 불빛밖에 없
었다
남쪽에는 기름 뜬 바다가 공장의 불빛을 번들번들 반사해 내고 있
었다. 공장 외벽에 무수히 달라붙어 있는 파이프가 근육에 엉겨붙은
혈관을 떠올리게 했다. 그 표면을 덮고 있는 수많은 일루미네이션이
마치 야광충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로테스크한 광경이었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했다. 공장은 검은 바다에 무언의 그
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거기서부터 불과 수백 미터 앞에 반듯하게 정리된 택지가 있었고,
거기서부터 불과 수백 미터 앞에 반듯하게 정리된 택지가 있었고,
그곳에 새로 지어진 2층집이 덩그러니 서 있었다. 남북으로 난 일방
통행 도로 옆으로 현관이 나 있고, 그 옆은 차 한 대분의 주차장이 있
었다 신흥 주택 단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집이라는 느낌이
지만, 뒤쪽과 양 옆쪽 어느 곳에서도 다른 집의 모습이라곤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교통편이 좋지 않아서인 듯,사려는 사람도 없어 '파
는 땅'이라는 첫말만이 이곳저곳 눈에 띌 뿐이었다. 완공과 동시에
팔려나간 아파트와 비교해 보면 더더욱 쓸쓸한 풍경이다
그 집 2층의 형광등불빛이 열려 있는 창문을 넘어 어두운노면으
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온집을통틀어 불이 밝혀져 있는곳은2층에
있는 도모코의 방뿐이었다. 사립 여고 3학년인 오이시 도모코는 그
방에 놓인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하얀 티셔츠와 짧은 반바지 차림
으로 바닥에 놓여 있는 선풍기 앞에 두다리를내놓고 몸만 비튼 무
리한 자세로 문제집에 눈길을 떨구고 있었다
티셔츠 자락을 파닥거려 선풍기 바람을 맨살에 닿게 하면서 누구
에게라고 할 것도 없이 덥다덤다 투정을 늘어놓고 있었다 여름 방학
동안 지나치게 논 덕분에 숙제가 산더미처럼 쌓였지만 도모코는 그
이유를 더위로 돌리고 있었다 하지만 올여름은 그리 덥지 않았다.
오히려 맑은 날이 적어 해수욕장 손님들도 예년보다 훨씬 적었다. 그
러던 것이 여름 방학이 끝나자마자 5일 연속으로 무더위가 계속되고
있었다. 이런 얄궂은 기후에 짜증이 난 도모코는 하늘을 원망했다.
· .이런 빌어먹을 더위에 어디 공부가 제대로 되겠어?
도모코는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던 손으로 라디오의 볼륨을 높였다
도모코는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던 손으로 라디오의 볼륨을 높였다
바로 옆 모기장에 붙어 있던 작은 나방이 선풍기 바람을 견디지 못하
고 어딘가로 날아가 버리는 게 눈에 띄었다. 벌레가 어둠 속으로 사
라진 다음, 모기장이 잠시 동안 부들부들 가늘게 떨렸다.
아까부터 진도는 조금도 나아가지 않고 있었다. 내일이 시험이지
만 밤을 새운다 해도 시험 범위까지는 끝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시계로 눈을 돌렸다. 이제 곧 11시다 프로 야구 뉴스라도 볼까 하
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내야 쪽 스탠드에 있는 부모님의 얼굴이
비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내일 시험이 마음에 걸린다. 도모코는 어
떻게든 대학에 가고 싶었다 들어 가기만 하면 된다. 대학이라는 이름
만 붙어 있으면 어디라도 좋다 그렇기는 해도올해 여름 방학은 불
만이다. 그다지 덥지 않은 날씨 덕분에 화려하게 놀지도 못했고,그
런가 하면 끈적거리는 습기가 기분 나빠 공부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 쳇,고등 학교 시절의 마지막여름 방학이었는데.좀더 팍뜨고
싶었단 말야. 여고생이라 불리는 여름 방학도 이걸로 끝.
짜증이 나자화풀이 대상이 차츰 변해 갔다.
‥‥정말이지 , 딸은 땀범벅이 되어 공부하고 있는데, 뻔뻔스럽게 둘
이서 야간 경기나 보러 가다니 . 딸의 기분도 생각해 줘야지 .
일 관계로 우연히 손에 넣게 된 요미우리 자이언츠 경기 티켓을 가
지고 양친은 도쿄등 구장에 갔다 시합이 끝나고 아무데도 들르지 않
는다면 집에 도착할 시간이다. 막 지은 방 네 개짜리 집에 지금 도모
코 혼자뿐인 것이다
최근 며칠 간은 전혀 비가 오지 않았는데 묘하게도 습기가 느껴졌
다 자신의 몸에서 스며나온 땀 이외에,분명 방 안에 작은물방울들
이 떠돌고 있다. 도모코는 무의식적으로 허벅지를 탁 내리쳤다. 손으
로 떼어 보았지만 찌부러진 모기의 모습은 없다. 무릎 위에 한 점으
로 집중된 가려움을 느꼈었는데‥‥ 기분 탓인 모양이다. 부웅∼ 날개
소리가 난다. 도모코는 두 손으로 머리 위를 휘저었다. 파리다. 파리
는 일단 시야에서 사라지는가 싶더니 선풍기 바람을 피하려는 듯 문
앞에서 다시 떠올랐다. 도대체 어디서 날아들어 왔을까? 문은 모두
잠겨 있다 도모코는 방충망을 확인해 보았다. 파리가 통과할 만한
틈새는 아무데도 없었다. 도모코는 갈증을 느낌과 동시에 소변이 보
고 싶어졌다
숨이 답답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디에서인지 모르게 압력이 가해
져와 가슴을 짓눌렀다. 아까부터 투덜투덜 불평을 늘어놓던 도모코
였지만 지금은 마치 딴사람처럼 입을 다물고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
면서도 까닭 없이 심장이 두근거렸다 집 바로 앞의 도로를 통과하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스윽 계단 밑의 벽을 쓰다듬으며 사라져 갔
다 자동차 엔진 소리가 작아지면서 멀어져 가자 이전보다 한층 더
어둠이 깊어진 것 같아 도모코는 일부러 큰 소리를 내며 뚜벅뚜벅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복도 전등의 스위치를 올렸다.
소변을 보고 난 후 도모코는 한동안 변기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심장의 두근거림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이런 일은 처음이다. 왜
이러는 거지? 커다랗게 몇 번 심호흡을 하고 난 다음 일어선 도모코
는 팬티와 짧은 반바지를 함께 끌어 올렸다.
‥‥엄마 아빠, 빨리 오세요.
갑자기 여자다운 말투로 바뀌었다.
아니 지금 내가 누구에게 부탁하고 있는 거지·)
부모에게 빨리 와 달라고 말한 것이 아니었다 대상이 불분명한 누
군가를 향한 것이었다.
‥‥부탁이에요. 저를 겁주지 말아 주세요.
어느 사이엔가 존대 말마저 쓰고 있었다.
싱크대에서 손을 씻었다. 그녀는 젖은 손으로 냉장고의 얼음을 집
어 유리컵 속에 넣고 콜라를 가득 부었다 그리고 단숨에 한 잔을 비
운 다음 컵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유리컵 속에서 얼음이 핑그르
르 돌다 멈춘다. 도모코는 흠칫 몸을 떨었다. 한기가 느껴졌던 것이
다. 목의 갈증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 또다시 1.5리터짜리 콜라병
을 냉장고에서 꺼내 유리컵에 붓는다. 손이 떨렸다. 등뒤에 무언가가
있다 절대 인간은 아니다. 고기 썩은 냄새, 공기 중에 녹아 에워싸고
들어오는 듯한‥‥고체일 리 없는 어떤 것.
"부탁이에요, 그만!"
소리내어 빌었다. 싱크대 위의 15와트짜리 형광등이 파락파락 헐
떡이고 있다
아직 새 집인데 형편없는 등이군.
도모코는 온 집안의 조명을 전부 켜 두지 않은 걸 후회했다. 그러
나 스위치가 있는 곳까지 걸어갈 수가 없었다. 아니, 돌아볼 수조차
없었다. 등뒤에 무엇이 있는지는 익히 알고 있었다. 네 평짜리 방, 할
아버지의 신위를 모신 불단(불단, 부모나 조부모의 신위를 모신 작은
불단, 일본에서는 불단을 모셔 놓은 집을 흔히 볼 수 있다 : 역자
주), 커튼은 열려 있을 것이고 유리창 너머로는 잡초가 난 택지와 아
파트 불빛이 바둑판 모양으로 작게 반짝이는 게 보일 것이다. 단지
그뿐일 것이다.
두 잔째의 콜라를 반쯤 비웠을 즈음 도모코는 도저히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기분 탓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농밀한 느낌이 전해
져 온다. 당장에라도 뭔가 뒤쪽에서 쭉 뻗어나와 목덜미를 건드릴 것
만 같다
· . 만약 그것이라면 어쩌지?
그 이상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있다간 그 일만이 머릿속
에 차올라, 공포가 점점 커지고, 마침내는 그 공포를 이겨 내지 못하
게 될 것 같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일주일 전의 그 사건.슈이치가
그런 말을 해서 이렇게 됐다.
모두들 물러날 수 없게 되어 버렸어‥‥
선명한 영상이긴 했지만 도시로 돌아왔을 즈음에는 차츰 신빙성이
사라져 갔던 것이다. 누군가의 장난이리라. 도모코는 기분 좋은 것들
을생각해 보려 애썼다. 좀더 다른‥‥하지만 그것이라면 그게 사
실이라면 어쩌지? 맞아, 그때 전화도 걸려왔었잖아.
아, 엄마 아빠는 뭐 하고 있는 거야?
"빨리 돌아와요!"
도모코는 목소리를 높였다. 소리를 높여 봐도 까닭 없이 불쾌한 그
림자는 전혀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가만히 뒤에서 엿보고 있
다. 기회가 오길 기다리고 있다.
만 17세인 도모코는 아직 공포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하
지만 상상 속에서 멋대로 부풀려진 공포라는 것이 있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 맞닥뜨리면 되는 거야. 그래, 틀림없어 . 뒤돌아봐도 거기에
는 아무 것도 없을 거야. 분명 , 아무 것도.
도모코는 뒤돌아보고 싶은 욕망에 빠져들었다. 당장에 아무 것도
없다는사실을 확인함으로써 한시라도 빨리 지금 같은 상황에서 빠
져나오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저 그것으로 끝날 수 있을까? 등에 소름이 끼쳤다. 어
깨 쪽에서 솟은 오한이 등줄기를 타고 밑으로 밑으로 흘러내려 , 식은
땀이 티셔츠를 흠뻑 적시고 있었다. 단지 생각 탓이라고만 하기에는
육체적 변화가 너무나 격렬했다.
· 누군가 말했어. 육체는 정신보다 정직하다고.
한편에서는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뒤돌아 봐,뭐가 있을 턱이 없
잖아, 남은 콜라를 마시고 빨리 공부하지 않으면 내일 시험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구.
유리컵 속에서 얼음이 파삭 등개졌다 그 소리에 퉁겨 오르듯 도모
코는 자기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9월 5일 오후 10시 54분
도쿄 시나가와 역 앞의 교차로
마침 신호가 노란색으로 바뀌었다 그대로 지나갈 수도 있었지만
기무라는 택시를 인도 쪽으로 붙여 세웠다. 록본기 교차로까지 가는
손님을 태울 수 있으면 좋으련만. 여기서 타는 손님은 대개 아카사카
나 록본기 방면이 많다. 이렇게 신호 대기로 서 있는 사이에 손님이
올라타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
택시와 인도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한 대의 오토바이가 횡랄보도
바로 앞에 멈춰 섰다. 오토바이를 몰고 있는 것은 청바지를 입은 젊
은 녀석이다 기무라는 촐랑거리며 다니는 오토바이가 성가시기 그
지 없었다. 특히 신호 대기중인데 태연하게 차 앞을 가로막고 서거
나, 문짝 바로 옆에 멈춰 서는 오토바이를 보면 화가 치민다. 마침 손
님이 없어 기분이 나빠진 탓도 있어서 기무라는 유쾌하지 않은 눈길
로 사내를 쳐다보았다. 머리 전체를 감싼 헬멧으로 표정을 감춘 사내
는 보도 블록에 한 발을 걸치고 다리를 벌린 채 불량한 태도로 몸을
흔들고 있었다.
늘씬한 다리의 젊은 여자가 인도를 걷고 있다. 사내는 그 여자의
뒷모습에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렇지만 사내는 여자의 모습을 끝까
지 쫓지 않았다. 약90도로머리를 돌렸을 즈음,사내는쇼윈도에 시
보행자용 신호가 깜박이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빨간색으로 바뀌었
다 횡단보도를 건너던 사람들이 걸음을 재촉하며 택시 앞으로지나
갔다. 손을 들어 부르는 사람은 없다. 기무라는 엔진을 공회전시키며
정면에 보이는 신호등이 파랗게 바뀌길 기다렸다.
그때, 오토바이의 사내가 흠칫 하고 몸을 심하게 떠는가 싶더니 두
손을 쳐든 채 기무라의 택시 쪽으로 쓰러졌다. '탕' 하는 소리와 함
께 문에 부딪힌 사내는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발을 헛디며 쓰러진 게 틀림없어 , 기무라는 비상 깜박이를 켠 다음
차에서 내렸다. 문짝이 상했으면 그것에 대한 수리비를 받아 낼 생각
이었다. 신호는 푸른색으로 바뀌어 뒤에 늘어서 있던 차들이 기무라
의 차를 앞질러 교차로로 들어서고 있었다. 사내는 도로에 벌렁 나자
빠진 채 발버등을 치며 두 손으로 헬멧을 벗으려 애쓰고 있었다. 기
무라는 그런 사내보다 우선 자신의 밥벌이 수단부터 살폈다. 예상했
던 대로 도어에 비스듬하게 흠집이 나 있었다.
"쳇 !"
기무라는 혀를 차며 사내에게 다가갔다. 사내는 헬멧의 끈이 턱밑
으로 단단히 조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머리와 함께 뽑아 버리기
가 없었다. 사내는 기무라의 손을 잡고 뭐라 호소해 왔다 매달리기
까지 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헬멧 눈 부분의 덮개를 열려고
조차 하지 않았다. 기무라는 멋대로 짐작했다.
"기다려 ! 지금 구급차를 부를 테니까."
도대체 한쪽 발을 헛디◎을 뿐인데 저렇게 돼 버리다니 , 납득이 가
지 않는 걸. 머리를 부딪힌 게 안 좋았나?
공중전화로 달려가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 . 말도 안 돼 그 자식 , 헬멧은 제대로 쓰고 있었어 . 다리나 팔이
부러진 것 같지도 않았고.번잡스러워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만
약 내 차에 부딪혀 다쳤다고 하면, 이거 좀 곤란하게 될지도 모르겠
는걸.
좋지 않은 예감이 기무라를 덮쳤다.
‥‥만약 다쳤다면 내 자동차보험으로 처리되는 건가? 그러면 사고
증명서에, 덤으로 경찰까지 .
전화를 마치고 다시 돌아와 보니 사내는 목 주변에 손을 올린 채
꼼짝도못하고 있었다. 지나가던 몇 사람이 멈춰 서서 걱정스럽다는
듯 기웃거리고 있었다 기무라는 사람들을 헤치고 들어가 구급차를
부른 것이 자기라는 것을 모두에게 과시해 보였다.
"이봐· . 이봤! 정신차려 , 곧 구급차가 올 거야."
기무라는 헬멧의 끈을 벗겼다. 그러자 그렇게까지 괴로워했던 것
이 거짓말인 것처럼 헬멧이 가볍게 벗겨졌다 놀랍게도 사내의 얼굴
은 크게 일그러져 있었다. 사내의 표정에 맞는 단어를 찾는다면 -
경악, 그것이었다. 두 눈을 잔뜩 부릅뜨고 있었고 빨간 혀는 목 안을
막고 있었다. 입가에서 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구급차를 기다릴 필
요도 없었다 헬멧을 벗기던 기무라는 그 사내의 맥박을 발견할 수
없었다 기무라는 오싹했다. 주변의 풍경에서부터 현재의 상황이 스
르륵 조용히 빠져나가고 있었다.
쓰러져 있던 오토바이 바퀴가 느리게 돌아가면서 엔진 부분에서
흘러나온 검은 기름이 노면을 거쳐 하수구 속으로 방울방을 떨어지
고 있었다. 바람 한 점 없었다 활짝 갠 밤하늘을 배경으로 머리 위의
신호등이 다시 빨간색으로 변했다. 기무라는 비틀비틀 일어나 도로
변의 가드레일을붙잡고는다시 한번 슬쩍 길바닥에 누워 있는사내
를 보았다 사내는 헬멧을 베개삼아 베고 직각에 가까운 모양으로 머
리를 곧추세운 자세다. 아무리 봐도 부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내가 저렇게 했나?저 남자 머리를 저렇게, 헬멧 위에?헬멧을
베개로 삼다니 , 왜 그랬지?
불과몇 초전의 일이었는데도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커다랗
게 열려 있는 두눈이 이쪽을 향하고 있다 오한이 스쳐갔다. 미적지
근한 공기가 쓰윽 어깨를 훌고 지나간 것 같다. 계속 되는 늦더위로
인해 열대야임에도 불구하고 기무라는 떨리는 몸을 주체할 수 없었
다
황궁을 둘러싸고 있는 녹색의 수면이 이른 아침의 가을빛을 반사
시키고 있었다. 무더운 9월토 이제 끝나가려 하고 있었다. 아사카와
가즈유키는 지하철로 내려가다 문득 생각이 달라졌다. 갑자기 9층에
서 내려다보았던 물빛을 좀더 가까운 곳에서 느껴 보고 싶어져 밖으
로 이어지는 계단을 올라갔다. 병 바닥에 침전물이 쌓이는 것처럼 출
판국의 더러운 공기가 지하에 쌓여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바깥
공기를 마시고 싶어진 것이다. 황거 (일본 천황의 궁 : 역자 주)의 녹
색을 눈 앞에 대하면 고속 5호선파 환상선이라는 두 개의 도시 고속
도로가 합류하는 이 부근의 배기 가스마저 그리 신경 쓰이지 않을 것
같았다 막 밝아 오기 시작하는 하늘이 아침의 냉기와 함께 신선하게
빛나고 있었다.
밤샘작업을 해서 몸은 상당히 피로해 있었지만 그다지 졸럼지는
않았다. 원고를 마쳤다는 흥분이 적당한 자극이 되어 뇌세포를 각성
시키고 있었다. 아사카와는 최근 2주간이나 쉬지 않았다. 오늘 내일
은 집에서 푹 쉬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편집장의 명령이기도하니 당
당하게 쉴 수 있었다.
구단시타 방향에서 빈 택시가 오는 것을 보고 본능적으로 손을 들
었다. 이틀 전에 회사와 집을 오가는 지하철 정기권이 끝났는데 아직
새로 사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에서 키타시나가와의 아파트까지 지
하철로는 5백 엔,택시로는2천 엔. 약 1천5백 엔이 더 들지만세 번
이나 갈아탈 것을 생각하면‥‥ 월급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사실
에 힘입어, '뭐 오늘 정도는 사치스럽게 가보~파' 하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이날, 그 장소에서 아사카와가 택시를 탈 기분이 된 것은 사소한
충동이 쌓인 끝에 일어난 변덕 때문이었다. 애초에는 택시를 타려고
밖으로 나온 것이 아니었다 불현듯 바깥 공기가 그리워진 참이었는
데, 빈 차'라는 붉은 표시등이 켜진 택시가 달려왔고,그순간표를
사 가지고 세 번이나 갈아타야 한다는 사실이 번거롭게 느껴졌던 것
이다. 만일 지하철로 집에 돌아갔다면 두 개의 사건은 결코 같은 선
으로 이어지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돌이켜보면 이야기의 발단에는
언제나 우연이 따라 붙게 마련이다.
한 대의 택시가 망설이듯 팔레스사이드 빌딩 앞에 멈춰 섰다 운전
사는 40대 전후로 보이는 작은 체구의 남자였는데, 그 역시 밤샘을
했는지 새빨간 눈을 하고 있었다. 차 안에는 얼굴 사진이 붙어 있었
고 사진 옆에는 기무라 미키오라는 운전사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키타시나가와까지· . ."
행선지를 들은 기무라는 엉덩이를 들썩거리고 싶은 기분이 되었
다. 키타시나가와는회사 차고가 있는 히가시고탄다의 바로 앞에 있
는 곳으로, 이제 슬슬 돌아가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기무라의 방향
과 일치했다. 택시 운전사라는 직업의 재미가 실감되는 순간은 자신
이 마음먹은 데 따라 일이 흘러가는 때다. 평소와는 달리 기무라는
말이 많아졌다.
"취재 나가시는 겁니까?"
피곤 때문에 충혈된 눈을 창 밖에 던지고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아사카와는 '예?' 하고 되물었다. 자신의 직업을 어떻게 알았을까?
"손김. 혹시 신문 기자 아니십니까?"
"주간지 파트입니다만, 잘도 알아맞추는군요."
20년 가까이 택시를 몰고 있는 기무라는 손님을 태운 곳이나 복장,
말투로부터 손님의 직업을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게 되었다. 일반적
으로 인기가 있는 직종에 몸담고 있고, 더구나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
기고 있는 손님의 경우 일에 관계된 화제를 꺼내면 쉽게 응해 온다.
"이른 아침부터 취재라니 , 힘드시겠군요."
"아니, 그 반대입니다 이제부터 돌아가 자려던 창입니다 "
"어 , 나하고 똑같네."
평상시의 아사과와에게는 일에 대한 긍지 같은 게 없었다 그러나
오늘 아침, 처음으로 자신의 기사가 활자화되었을 때 느꼈던 그 만족
감이 되돌아오는 것 같았다. 기획 시리즈를 마치면서 상당한 반항을
얻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하시는 일, 재밌습니까?"
"그저· . . "
아사카와는 애매하게 답했다. 재미있을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하지만 당장엔 그 이상 자세히 대답해 주는 것이 귀찮을
뿐이다. 그는 2년 전의 실패를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손했
던 기사의 제목도 아직까지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현대의 새로운 신들.'
두 번 다시 취재 활동을 할 수 없을 것 같다며 , 몸서리를 치면서 편
집장에게 호소하던 초라한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차는 도쿄 타워를 왼쪽으로 끼고 도는 커브
길을 상당한 속도로 돌아나갔다
"손님 , 운하 쪽 도로로 갈까요, 아니면 다이이치 교하마 쪽으로 갈
까요?"
키타시나가와라고 해도 어디냐에 따라 루트가 달라지게 된다.
"다이이치 쪽으로‥‥ 신반바 앞에서 내려 주세요 "
택시 운전사란 손님의 목적지를 확실히 정해 두면 얼마간 안심하
는 법이다. 기무라는 다이이치 교하마 간선 도로를 향해 핸들을 오른
쪽으로 꺾었다.
그 장소가 가까워졌다 기무라로서는 근 한 달이나 지났지만 잊을
수 없는 교차로다. 아사카와가 2년 전의 실패에 연연해하는 것과는
달리 기무라는 어느 정도 객관적인 입장에서 그 사고를 바라볼 수 있
었다. 그에게는 사고에 대한 책임도, 그에 따른 반성도 따르지 않았
기 때문이다. 완전히 상대방의 과실에 의한 사고였고, 자신이 주의했
다고 해도 피할수는 없었다. 그 당시의 공포는 이제 잊어버렸다 한
달‥‥ 길다고 할 수 있을까? 아사카와는 2년 전의 공포에 아직도 사
로잡혀 있는데.
그렇지만 아무래도 설명이 되지 않는다. 왜 이곳을 지날 때마다 그
때의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고 싶어지는 것일까?룸미러를 슬쩍
보았을 때 손님이 자고 있는 경우에는 그저 포기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면 예외 없이 모든 손님에게 그때의 일을 말하곤 한다. 기무라는
이 교차로에 들어설 때마다 언제나 얘기하고 싶은 충동에 횝싸였던
것이다.
"한 달 전이었던가‥‥‥
마치 이야기를 시작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는 듯이 신호가 기무
라의 눈앞에서 노란색에서 빨간색으로 바뀌었다.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있나 봅니다. "
이야기의 내용을 무심히 내비치며 기무라는 손님의 관심을 끌려
했다. 아사카와는 반쯤 잠들어 있던 머리를 번쩍 쳐들고 두리번두리
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기무라의 음성에 놀라 지금의 위치를 확인하
고자 했던 것이다.
"돌연사(돌연사)라는 게 요즘 늘어나고 있는 모양이죠?‥‥ 젊은이
들까지도_E."
"11 ?"
아사카와의 귀에 그 단어가 메아리쳤다. ·돌연사. 기무라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아니 , 한 달 전쯤이었죠. 저 곳에서 신호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는
데 갑자기 내 차 앞에 오토바이가 쓰러지는 겁니다. 달리다가 고꾸라
진 게 아니었어요.멈춰 서 있었는데 갑자기 '쾅' 하고.그래서 어떻
게 됐을 것 같습니까?아, 오토바이를 몰고 있던 건 열아홉 살짜리
재수생이었는데‥‥ 그게 글쎄, 죽어 버린 겁니다. 깜짝 놀랐습죠. 구
급차가 오고, 경찰차가 오고. 근데 제 차 아닙니까, 부딪힌 게. 대단
한 일이었죠."
아사카와는 입을 다문 채 듣고 있었지만 10년 경력 기자의 육감에
따라 즉석에서 운전사와 택시 회사의 이름을 메모했다 그것은본능
이라고도 할 수 있는 신속함이었다.
"죽은 게 좀 이상했죠. 아무튼 엄청난 기세로 헬멧을 벗으려고‥‥
벌렁 누워서 부들부들‥‥내가 구급차를 부르러 갔다가돌아와보니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니더군요."
"장소는 어디 였습니까?"
아사카와의 눈은 완전히 깨어 있었다.
"저기예요, 저기 ."
역전 횡단보도 건너편을 기무라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시나가와
역은 미나토 구 다카나와에 있었다. 아사카와는 그 사실을 머릿속에
박아 두었다. 만약 저곳에서 사건이 일어났다면 관할은 다카나와 경
찰서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재빨리 다카나와 경찰서 내부로 파고들
어갈 루트를 더듬었다. 유력 신문사의 강점은 바로 이런 데 있다. 신
문사는 모든 분야에 걸쳐 인맥을 가지고 있어서 경우에 따라서는그
정보 수집 능력 이 경찰을 넘어서는 경우도 있다.
"그러니까 사인은 돌연사였다는 겁니까?"
"그러니까 사인은 돌연사였다는 겁니까?"
돌연사라는 병명이 있는지 없는지 알 바아니다. 아사카와는 묻는
데 급급했다. 이 사고가 자신의 마음 어느 곳으로 말려 들어오고 있는
지 모르는 채‥‥
"웃기는 얘기죠.내 차는서 있었단 말입니다 제멋대로 넘어진 건
그쪽이었단 말예요. 그런데 사고증명서, 덤으로 큰 건 아니지만 제
보험에 때가 탔으니‥‥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죠."
"분명한 날짜와 시간을 기억하십니까?"
"아니, 아니. 뭔가 사건 냉새라도 맡으신 겁니까? 9월 4일인가 5
일,음· 그 즈음이었을 거야.시간은 저녁 11시 전후였다고 생각깁
니 다. "
말을 마치자마자 기무라의 뇌리에 어떤 시간의 광경이 되살아났
다. 미적지근한 공기· 쓰러진 오토바이에서 흘러나온 새까만 기름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기름은 하수구를 향해 기어가고 있었다. 표면
에 헤드라이트 불빛을 반사시키며 , 끈끈한 방울이 되어 하수구 속으
로 떨어져 사라져 갔었다 소리도 없이. 감각 기관들이 일시적으로
장해를 일으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헬멧을 베고 누워 있는 사
내의 죽은 얼굴, 그 놀란 표정 . 무엇에 그렇게 놀랐을까?
신호가 파란색으로 바뀌었다. 기무라는 액셀을 밟았다. 됫좌석에
서 볼펜 달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사카와가 메모를 하고 있었다. 기
무라는 토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어째서 이렇게 생생하게 떠오르는
걸까? 기무라는 시디신 타액을 삼키며 구토를 참았다
"그래, 사인이 뭐였습니까?"
아사카와가 물었다.
"심장마비 "
‥‥ 심장마비? 부검의가 정말 그런 진단을 내렸단 말인가? 요즘엔
심장마비 같은 단어를 쓰지 않을 텐데·
"정확한 날짜와 함께 이 점도 확인해 둘 필요가 있겠군."
아사카와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메모를 계속했다.
"다시 말해, 그 외의 외상은 전혀 없었다는 건가요?"
"그래요, 그렇다니까요. 전혀 , 놀란 것뿐이에요. 정말이지‥‥ 놀라
고 싶은 건 오히려 내 쪽인데."
"ㅂ1 ?"
"아, 그 죽은 사람 말이죠. 엄청 놀란 얼굴로 죽어 있었거든요 · "
아사카와의 마음속에 무언가 '팍' 하고 여물어 터지는 소리가 났
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두 사건을 거부하고자 하는 음성도 곧 뒤따
랐다
‥‥우연의 일치다, 단순히 .
신반바에 거의 도착했다.
"그 신호등, 왼쪽으로 돌아 세워 주세요."
차가 멈추고 문이 열린다. 아사카와는 두 장의 천 엔짜리와 함께
명함을 내밀었다.
륜신문사의 아사카와라고 합니다 괜찮으시다면 지금 얘기,좀더
자세히 들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네, 그러죠."
기무라는 기쁜 듯이 말했다. 왠지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인
것처럼 여겨졌다.
'나중에 전화드리겠습니다. "
"전화번호· . "
"아, 괜찮습니다 회사 이름을 적어 두었으니까요. 이 부근이더군
요"
아사카와는 차에서 내려 문을 닫으려다 잠시 주저했다. 이 사건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에 뭐라 말하기 어려운 공포를 느꼈던 것이다 이
상한 일에는 머리를 디밀지 않는 게 좋지 않을까?그때의 재판(재
판)이 되지 않을까? 그러나 이렇게까지 흥미를 돋워 놓은 이상, 절대
입을 다물고 넘겨 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은 너무
나 명백한 일이다. 아사카와는 다시 한번 기무라에게 물었다.
"그 남자, 분명히 헬멧을 벗으려고 고통스럽게 발버등쳤단 말이
죠?"
오구리 편집장은 아사카와의 보고를 들으면서 얼굴을 찡그렸다.
문득 2년 전 아사카와의 모습이 머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여우에게
흘린 것처럼 밤낮 컴퓨터 앞에 앉아,취재로 얻은 것 이상의 정보를
섞어 교주 가게야마 테라다카의 반생을 극명하게 써내려 가고 있었
다. 그때의 이상스러움. 정말이지 정신과 의사에게 진찰을 부탁하고
싶을 정도의 광기였다.
때마침 시기도 나빴다 2년 전, 초자연 현상에 대한 이상스런 붐이
출판계를 쉽쓸자 편집실에는 심령 사진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도대
체 세상이 어떻게 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온갖 출판사 앞으로 보
내져 온 수많은 유령 얘기나 심령 사진이라 칭하는 가짜들의 산더미 .
세상 돌아가는 것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다고 자부하던 오구리였지
만 그때의 현상만큼은 도저히 납득할 만한 답을 발견해 낼 수 묵었
다. 그야말로 상식을 넘어선 일로, 투고자의 수도 엄청났다 진짜 조
금도 과장하지 않고 말하건대,하루에 도착하는 우편물만으로도 편
집실이 가득 메워질 정도였다. 그것도 전부가 초자연적인 내용들이
었다. M신문사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일본의 모든 출판사라는 출판
사는 모두 그 폭풍에 휘말려 상식의 범위를 벗어난 현상에 괴로워해
야 했다.
시간 낭비를 각오하고 조사한 결과, 투고자는 한 사람이 몇 건을
보낸 것은 아니었지만 당연하게도 거의 익명이었다. 대략 계산해 봐
도 1천만이라는 사람들이 그 시기에, 어딘가의 출판사에 편지를 보낸
셈이 된다. 1천만! 그 숫자에 놀라 온 출판계가 몸을 떨었다 투고의
내용이야 그리 무서을 게 없었지만 그 숫자 만큼은 마음 깊은 곳까지
흔들고도 남을 만한 것이었다. 즉, 열 명이 모였을 때 그 중 한 명은
투고 경험이 있다는 게 되는데, 출판계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이나 그
가족, 친구들을 둘러보면 투고한 사람은 한 명도 찾아볼 수 없었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산더미처럼 쌓인 편지는 전부 어디에서 왔
단 말인가? 편집자들은 모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그 정답을
찾기도 전에 파도는 물러갔다. 약 반 년에 걸친 이상 현상 후, 그때가
마치 꿈이었던 양 편집실은 정상으로 돌아왔고 그런 종류의 편지는
한 통도 오지 않았다
신문사가 발행하는 주간지로서 그와 같은 현상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오구리는 명확한 태도로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내
린 결론은 철저한 무시였다. 혹 이러한 현상에 불을 붙이는 역할을
한 것은 오구리가 항상 시시하다고 평하던 잡지들이 아닐까? 사진이
나 경험담을 게재함에 따라 독자들의 투고열이 부채질되고,그 결과
로 기현상이 일어난 것이 아닐까?물론 이것만으로도 모든 것을 납
득할 만큼 충분히 설명해 주지 못한다는 걸 오구리도 잘 알고 있었
다. 그러나 오구리는 어떻게든 합리적인 이유를 붙여 사태에 대처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후, 오구리 편집장 이하 편집부원들은 도착한 우편물을 개봉하
지도 않고 소각장으로 보내 버렸다. 그리고 세상 돌아가는 것에 대해
이상 현상이 일어나기 전과 조금도 다름없는 태도를 취했다. 물론 초
자연 현상에 대한 내용은 무엇이든 간에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그 때
문인지 엄청난 투고 열기가 서서히 물러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한
데 이런 시기에 아사카와가 어리석게도 꺼져 가는 불에 기름을 부으
려 나서고 있는 것이다. 오구리는 멀뚱하게 아사카와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2년 전의 실패를 되풀이할 생각인가?
"당신 말이야."
오구리는 무슨 말을해야 할지 모를 때면 반드시 상대방을 '당신'
이라고 불렀다.
"편집장님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 잘 알고 있습니다. "
"아니, 그게, 재밌기는 재밌어. 그렇지만 여기에서 뭐가 튀어나올
지 모르잖아. 이봐, 튀어나을 게 또 지난 번 같은 녀석이라면 좀 곤란
하지 않겠나?"
'지난 번 같은 녀석' 오구리는 아직도 2년 전의 초자연 현상 붐이
인위적인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미워하고 있다.
무수한 곤란을 서었기 때문에 모든 초자연적인 것에 대해 편견을 가
지고 있다.
"이제 와 새삼신비성에 손을 대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우연
은 있을 수 없다. 이렇게 말하고 싶을 뿐입니다. "
"우연이 라‥‥‥
오구리는 비스듬히 턱을 받치고는 다시 한번 이야기의 내용을 정
리했다.
·아사카와의 처조카 오이시 도모코가 9월 5일 오후 11시를 전후
로 혼모쿠에 있는 자택에서 사망. 사인은 급성 심부전. 아직 여고 3학
년, 17세의 젊은 나이이다. 같은 날,같은 시각,시나가와 역 앞에서
19세의 재수생이 오토바이를 탄 채 신호 대기 중에 역시 심근경색으
로 사망.
"나로서는 단지 우연이 겹쳐졌을 뿐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는 걸.
택시 운전사에게 얘기를 듣자 처조카가 죽은 걸 떠올린 것에 불과한
if 아냐?"
"그렇다면 좋습니다. "
아사카와는 편집장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오토바이를 탔던 청년은 죽기 직전까지 헬멧을 벗으려고 발버등
치며 괴로워했습니다. "
"· . · 그래서?"
"도모코 역시 시체로 발견되었을 때 머리를 쥐어뜯은 듯 두 손에
자신의 머리칼 뭉치를 쥐고 있었습니다. "
아사카와는 도모코와 몇 번 만난 적이 있다. 여 고생답게 항상 머리
카락을 소중히 여겨, 아침마다 샴푸로 머리 감는 일을 빠뜨리지 않던
아이였다. 그런 여자아이가 자신의 소중한 머리카락을 뭉텅뭉텅 쥐
어뜯는 일이 있을수 있는가.그녀에게 그렇게 하도록 만든 어떤 것
의 정체는 무엇일까? 아사카와는 필사적으로 머리칼을 쥐어뜯는 도
모코의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의 모습을 상
상했다 그리고 그녀를 몰아세웠던 표현할 길 없는 공포를.
"모르겠군. 당신 말야, 지나친 선입관을 갖고 있는 거 아닐까? 어
떤 사건이라도 공통점을 찾고자 마음먹으면 무언가 찾아 낼 수 있게
마련인 거야. 두 사람 모두 심장 발작으로 죽었다며 그러면 고통스
러웠을 거야. 머리를 쥐어뜯거나 정신없이 헬멧을 벗으려 하거나 ·.
의외로 자연스런 행동이 아닐까?"
그럴 가능성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아사카와는 고개를 좌우로 흔
들었다. 그런 말 정도에 간단히 밀려날 수 없었다.
"편집장님, 가슴입니다. 고통을 느낀 곳은 가슴이에요.어떻게 머
리를 쥐어뜯을 필요가 있을 수 있습니까?"
"당신. 심장 발작 일으켜 본 경험 있어?"
"· . · 없습니 다. "
"그럼 의사에게 물어 본 적은 있나?"
"뭘 말입니까?"
"심장 발작을 일으킨 사람이 머리를 쥐어들는지, 아닌지를 말야."
아사카와는 입을 다들 수밖에 없었다. 그는 실제로 의사에게 물어
보았던 것이다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
"· .·그거야, 그럴 수 없다고는 할 수 없죠."
"· .·그거야, 그럴 수 없다고는 할 수 없죠."
애매한 대답이었다
"그 반대되는 경우는 있습니다만 다시 말해 뇌막하출혈이나뇌
출혈의 경우, 머리가 아파짐과 동시에 배 근처에 이상을 느끼니까 말
이죠‥‥‥
"요컨대 개인차란 말 아냐? 수학 문제가 풀리지 않아 머리를 쥐어
뜯는 녀석이 있는가 하면, 담배를 피우는 녀석도 있어 . 배에 손을 대
는 녀석도 있을지 몰라 "
오구리는 그렇게 말하면서 의자를 빙글빙글 돌렸다.
"어쨌든 지금 단계로서는 아직 뭐라 말할 수 없는 거 아닌가. 실어
줄 페이지도 없어. 알았나? 2년 전의 실패도 있으니까 이런 종류의
일에 멍청하게 손대지 말라구. 그렇게 단정하고 덤벼 들면 그렇게 써
지는 거 아니겠어 ."
그럴지도 모른다. 정말로 편집장 말대로 단지 우연이 겹쳐진 것일
뿐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글쎄요, 최종적으로 의사는 고개를 갸웃거릴 따름이었다. 심장 발
작에 의해 머리카락을 뭉텅 뽑아 내는 일이 있느냐는 물음에 의사는
얼굴을찡그리고 '으음' 하는소리만냈을뿐이다. 그얼굴은말하고
있었다. 적어도 그를 거쳐간 환자 중에는 그런 예가 없었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
지금으로서는 솔직하게 물러서는 수밖에 없다. 두 사고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보다 객관적인 인과 관계를 발견해 내지 않고는 편집장
을 설득하기 어렵다. 만일 아무것도 발견해 내지 못한다면 그때는 군
말없이 손을 떼자. 아사카와는 그렇게 마음먹었다.
극
수화기를 내려놓은 아사카와는 수화기 위에 손을 얹은 그대로 종
처럼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필요 이상으로 추켜세우며 상대방의 안
색을 살피던 자신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남아 맴돌자,참을수 없
는 기분이 되었다. 전화를 받은 상대방은 정말이지 거만한 태도로 비
서에게서 수화기를 건네 받았다 그러나 잡지사의 기획 의도를 설명
해 나가자 그에 따라 점차로 목소리의 톤이 부드러워졌다. 처음에는
광고나 의뢰하는 것인 줄 잘못 알았던 것이리라. 그러다가 재빨리 머
리를 회전시켜 자신의 성공 스토리가 기사화되었을 때의 이득을 계
산해 낸 것이다.
tOP인터뷰 라고 이름붙여진 이 기획은9월부터 연재된 것으로,
당대에 회사를 일으킨 사장에게 스포트를 맞춰 그간의 고생담이나
역정을 기사로 정리하는 것이었다 일단 취재 약속을 받아 내는 데
성공한만큼 조금은 만족스럽게 수화기를 내려놓아도 좋으련만, 아사
과와의 기분은 무겁기만 했다. 속물이라고 해야 할 사람에게서 듣는
것이란 매번 판에 박은듯비슷한고생담,자신이 얼마나 능력이 뛰
어난지, 얼마나 기회를 잘 잡았고, 남보다 앞서가는지‥‥ 이쪽에서
감사의 말을 건네고 일어서지 않으면 구구절절 한없이 길어지는 성
공담이었다. 지긋지긋했다 아사카와는 이런 기획을 궁리해 낸 자가
미웠다. 잡지를 유지하기 위해선 아무래도 광고가 필요하고, 광고를
위한 사전 포석으로 나중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사카와는 회사가 돈을 버는가, 손해를 보는가에 는 별 관심
이 없었다. 중요한 것은 재미있는 일인가 아닌가, 단지 그것뿐이었
다. 상상력을 수반하지 않는 일은 육체적으로는 편해도 정신적으로
는 피곤해지는 경우가 많다.
아사카와는 4층의 자료실로 향했다. 내일 인터뷰를 위한 기초 조사
도 해야 되지만 그 이상으로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흥미 있는
두 사고를 묶어 줄 객관적인 인과 관계. 번뜩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어디서부터 손을써야 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속물 사장의
목소리를 머릿속에서 털어 버리자 그 틈 사이로 문득 끼여드는 의문
이 있었던 것이다.
‥‥과연, 9월 5일 오후 11시 전후에 일어난 원인 불명의 돌연사는
그 두 건뿐일까?
그렇지 않다면, 다시 말해 그 외에도 같은 사건이 일어났다면 우연
일 확률은 제로에 한층 가까워진다. 아사카와는 9월 초순의 신문을
훌어보기로 했다. 직업상 신문은 꼼꼼히 읽는 편이다. 하지만 사회면
기사 같은 것은 대충 제목만 훌고 넘겨 버리는 때도 많았다. 따라서
무언가 빠뜨렸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그런 예감이 들었다. 마음에 걸
리는 것이 있다 한 달 전쯤,사회면 한귀퉁이에 기묘한 제목이 실렸
던 것 같다. 왼쪽 아래에 작은 스페이스로· . 기사가 실려 있던 장소
만큼은 기억하고 있었다. 제목을 보고 흥미를 갖고 읽으려던 참에
'이봐, 아사카와!' 하고 부르는 데스크의 목소리로 인해 바빠지는 통
에 그대로 인지 못하고 지나쳐 버렸던 것이다.
아사카와는 9월 6일 조간부터 조사하기 시작했다 분명히 단서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자 보물을 찾아나전 어린아이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두운 자료실에서 거의 한 달 전의 신문을 읽는
다는 것, 대단찮은 행위지만 속물의 인터뷰에서는 맛볼 수 없는 정신
적인 상패함마저 느껴진다. 아사과와는 밖으로 뛰어다니며 갖가지
사람들과 얽히는 일이 성격에 맞았다.
9월 7일 석간· 아사카와가 기억하고 있던 바로 그 기사가 있었다.
34명의 희생자를 낸 해상 사고 뉴스에 눌려, 그 기사의 스페이스는
기억했던 것보다 훨씬 작았다. 이러니 못 보고 지나친 것도 무리가
아냐. 아사의 와는 은테 안경을 꺼내 지면 가까이에 얼굴을 대고 한
자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찬찬히 본문을 읽어 나갔다.
렌터카에서 젊은 남녀 변사체 발견
7일 오전 6시 15분경, 요코스카 시 국도변 공터에 세워져 있던 승용차 앞
좌석에 수은 남녀가 숨져 리는 것을 지나가던 트럭 운전사가 발견, 요코스열
경찰서에 신고했다. 차량 번호를 통해 사망한 남녀는 도쿄 도 시부야 구의 재
수생(만 19세)가 요코하마 시 이소고 구의 사립 여자고등학교 학생(만 17세)
으로 판명. 승용차는 이틀 전 저녁, 시부야 구에 있는 렌터카 회사에서 재수
생이 빌린 것이었다.
발견 당시 차의 문은 잠겨 있었으며, 자동차 키는 핸들 밑에 꽃힌 채였다
사망 추정 시각은 5일 심야에서 이튿날 새벽. 차창이 닫힌 것으로 보아 잠이
든 상태에서의 산소 결핍으로 인한 사망으로 추정되지만 약물에 의한 것일
가능성도 있어 자세한 사인은 아직 파악되지 않고 있다. 타살 의혹은 현재로
선 없는 것으로 추정된다.
단순한 기사였지만 아사카와에게는 분명한 손맛이 전해져 오는 것
이었다. 사망한 여고생은 도모코와 마찬가지로 요코하마의 사립 여
고에 다녔고, 나이도 같은 17세 승용차를 빌린 남자도 시나가와 역
앞에서 사고사한 청년과 마찬가지로 재수생이며 나이도 역시 모두
19세. 사망 추정 시각도 거의 비슷하며 사인 역시 불명 .
네 명의 죽음에는 분명한 상호 접속점이 있다. 결정적인 공통점을
발견하는 데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유력 신문사에
속해 있는 만큼 정보 수집에 어려울 것은 없다 기사를 복사한 아사
카와는 일단 편집국으로 향했다. 엄청난 금광을 발견한 듯한 만족감
으로 걸음이 차츰 빨라졌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시간마저 초조하
게 느껴졌다.
요코스카시청 출입 기자실.요시노는자신의 책상에 앉아원고지
위에서 펜을 움직이고 있었다. 도쿄 본사에서 이곳까지 고속도로가
붐비지 않으면 한 시간 만에 올 수 있는 곳이다. 요시노의 뒤에 선 채
로 아사카와가 말을 걸었다.
"요시노 선배님 !"
요시노와 다시 만나는 건 거의 일 년 만이다
"여, 아사카와 아냐? 웬일이야? 이런 시골까지‥‥ 자, 앉지."
요시노는 빈 의자를 끌어당겨 아사카와에게 권했다. 얼굴은 수염
투성이로 품위 없는 인상을 주었지만, 요시노는 의외로 다른 사람들
의 이목에 신경을 쓰는 편이었다.
"바쁘십니까?"
"아, 뭐 ."
요시노는 아사카와가 사회부에 근무하고 있을 무렵의 3년 선배로,
현재 35세다.
"실은 요코스카 통신부에 문의해 보니, 선배가 이곳에 있다고 해
fl ‥‥‥
"뭔가, 나한테 무슨 볼 일이라도 있나?"
아사카와는 좀전에 복사한 기사를 내밀었다. 요시노는 이상할 정
도로 긴 시간을 들여 그것을 노려보았다. 자신이 쓴 기사이므로 그렇
게까지 열심히 읽지 않아도 잘 아는 내용일 텐데도,그는 입으로 가
져가려던, 평소에 즐기는 땅콩을 허공에 정지시킨 채 온 신경을 기사
에 쏟아붓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되새김질하고 있었다 마치 기사
내용을 전부 」1집어내 단숨에 위 속에서 소화시켜 버리려는 듯이.
"이게 어쨌다는 거지?"
요시노는 진지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별거 아닙니다. 좀더 자세히 듣고 싶어서."
요시노가 일어섰다.
"좋아, 근처에서 차라도 마시며 얘기하지."
"시간,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아. 내 쪽이 오히려 재밌을 것 같아."
요코스카시청 옆에는 조그만 다방이 있어 2백 엔이면 커피 한 잔
을 마실 수 있었다. 요시노는 자리에 앉자마자 카운터를 돌아보고
'커피 둘!' 하고 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아사카와를 향하더니 앞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알고 있나? 난 사회부 기자가 된 지 12년이나 돼. 그 12년 동안 여
러 가지 사건과 만났지 . 그렇지만 그렇게 괴이한 사건과 마주친 적은
처음이었어 "
요시노는 거기까지 말하고 물을 한 모금 마신 다음 말을 계속 이어
갔다.
"근데 아사카와, 우리 서로 교환 조건을 거는 게 어때? 본사 출판
국에서 일하는 자네가 어째서 이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한 거지?"
아직 본심을 보일 순 없다. 자신만의 특종으로 만들고 싶었다 요
시노 같은 민완 기자에게 알려지면 '앗' 하는 사이에 먹이를 빼앗기
고 말 것이다. 아사카와는 순간 거짓말을 했다
'별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제 처조카가 죽은 여고생과 친구인데 이
것저것 물어와서 . 여기 들른 김에· . "
서투른 거짓말이다. 요시노는 의심의 눈초리를 빛내는가 싶더니
이내 흥이 깨진 듯 천천히 몸을 뒤로 뺐다.
'정말인가?"
"네. 아무래도 여고생 아닙니까'~l 친구가 죽은 것만도 굉장한 일인
데,표한죽음이었으니까요.이렇다저렇다말들이 많아서· . 부탁드
립니다, 자세히 얘기 좀 해주십시오."
"그래, 뭐가 듣고 싶은 거야?"
"그 후에 사인이 밝혀졌습니까?"
요시노는 고개를 저 었다
"그게, 이른바 갑작스런 심장 정지라는데, 왜 그런 것이 일어났는
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몰라."
"타살 혐의는? 가령 목이 졸렸다든가‥‥‥
"있을 수 없어. 목에 내출혈의 흔적은 전혀 없었어 ."
"약물·. . "
'해부했지만 반응이 나타나지 않았어."
"그렇다면 사건은 아직 해결 · .."
"이봐 이봐, 해결이고 개똥이고 없어. 타살이 아니니까 사건도 뭐
도 아닌 거라구. 병사, 아니면 사고사, 그걸로 끝나는 거지 . 수사본부
도 당연히 없어."
거침없는 말투였다. 요시노는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사망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 이유는 뭐죠?"
"미성년자잖아‥‥ 더구나 의심 가는 부분이 있었거든."
요시노는 거기서 뭔가 떠올랐는지 슬쩍 웃음을 홀리더니 몸을 앞
으로 숙였다.
"남자 쪽은 말야, 청바지와 함께 팬티를 무릎까지 내리고 있었어.
여자 쪽도 말이지 , 팬티를 무릎 밑으로 내리고 있었고."
"그렇다면 그, 한창 중이었단 말인가요?"
"한창일 리 없어 지금부터 해 볼까하던 참이었어.재밌는건 '지
금부터다' 하고 덤벼들 바로 그때 !"
요시노는 '짝' 하고손뼉을쳤다.
"무슨 일인가가 일어난 거야."
참으로 상대방을 흥분시키는 말투였다.
"이봐, 아사카와. 솔직히 말해 줘 . 자네, 이 사건과 관계된 실마리
를 쥐고 있는 건가?"
"비밀은 지켜 주겠어 . 손아귀에 쥐고 있는 걸 채갈 마음은 없어 . 단
지 나는 개인적으로 흥미를 느끼고 있을 뿐이야."
아사카와는 침묵을 지켰다.
"야, 난 듣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하단 말야."
생각해 보았다. 역시 안 되겠다. 아직 말하지 않는 게 좋겠다. 그렇
지만 거짓말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
"미안합니다, 요시노 선배.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아직 아무것
도 말할 수 없습니다. 2-3일 안에 반드시 얘기해 드릴 수 있을 겁니
다. 약속합니다. "
요시노의 얼굴에 금세 실망의 빛이 떠올랐다.
"쳇,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야 · .."
아사카와가 간청하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다음 얘기를 재촉하는
시선.
"뭔가 일어났으리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단 말야. 남녀가 '지금
부터 하자' 하는 순간에 질식이라니. 우스갯 소리도 안 될 얘기야. 미
리 마신 독이 약효를 발휘한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지만 그런 반응도
나오지 않았고‥‥뭐, 반응이 나타나지 않는 약물도 있긴 하지만 재
수생과 여고생이 그리 간단히 손에 넣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어 ."
요시노는 차가 발견된 장소를 떠올려 보았다. 실제로 현장에 가 봤
기 때문에 왜 분명한 인상으로 남아 있다. 오쿠스야마라는 산으로 을
라가는 비포장 도로변에 작은 계곡이 있고, 그 사이에 울창하게 우거
진 숲속의 빈터가 있었다. 길을 거슬러 올라온 자동차의 미등이 살
짝 보일 듯한 모양으로 차가 멈춰 서 있었던 것이다 운전하던 재수
생이 무슨 속셈으로 차를 가져왔는지 상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
니었다 밤이 되면 그 길을 지나는 차는 한 대도 없을 것이고, 숲 옆
으로 뻗어나온 나뭇잊이 가림막이 되어 돈 없는 커플에게 값싼 밀실
이 되어 줄 만했다.
'더구나 남자는 핸들과 차창 사이로 머리를 들이밀어 넣으려 했던
것처럼 , 여자는 그 옆자리의 시트와 문짝 사이에 머리를 묻으려는 듯
한 자세로 죽어 있었단 말야. 나는 이 눈으로 두 사람의 시체를 차에
서 끌어내리는 것을봤어, 차의 문을 연 순간 차 안에서부터 강력한
요시노는 거기서 숨을 내쉬었다. '꿀꺽' 하고침 삼키는소리가났
"생각해 봐, 가령 숲에서 무서운 동물이 나타났다 하자. 두 사람은
요시노는 두 손을 쳐들며 이해가 안 된다는 포즈를 취했다
"도대체 어찌 된 일인지 이해가 가질 않는단 말야."
만일 요코스카 만에서 해난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 기사는
되고,장난감이 되어 주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그러나,조
사원을 포함해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 사이로 퍼져 나갔던 이상스
런 분위기. 각자 비슷한 생각을 떠올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그것이 모두들 목구멍에 걸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말을 하려
하지 않는 그런 분위기.
한 쌍의 남녀가 동시에 심장 발작으로 사망하는 일이 생길 리 없음
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의학적인 억지로 자기 자신을 납득시키려 했
지만, 실제로는 어느 누구도 그런 것을 믿고 있지 않았다. 단지 다른
사람들로부터 비과학적인 녀석이라고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기 위해
서 그런 사실을 입 밖에 내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상상할 수조차 없
었던 공포를 자신의 주변으로 끌어당기는 것 같아 그들의 피이한 죽
음을 인정하는 것 자체가 두려웠던 것이다. 납득은 되지 않더라도 파
학적인 설명에 의존하는 쪽이 훨씬 마음 편한 것이다.
아사카와와 요시노의 등줄기로 동시에 한기가 스쳐갔다 두사람
역시 같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잠시 동안의 침묵은 두사람의 가슴
에 차오르는 어떤 종류의 예감을 확인시켰다.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
니다. 무슨 일인지 벌어지는 것은 지금부터다. 아무리 과학적 지식을
갖추고 있다 해도, 인간은 근본적인 면에서 과학의 법칙만으로 설명
할 수 없는 어떤 존재를 믿고 있는 것이다.
"발견됐을 때 남녀의 손은 어디에 있었죠?"
아사카와가 당돌하게 물었다.
"머리· . 아니 , 머리라기보다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어 ."
"이런 식으로 머리카락을 쥐어들진 않았습니까?"
아사카와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겨 보였다
"뭐 ?"
"그러니까 자신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면서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던가."
"아니 ,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아."
"그래요? 재수생과 여고생의 주소와 이름을 알려 주실 수 있겠
죠7"
"알려 주지 . 하지만 자네, 약속 잊지 말라구 "
아사카와가 웃으며 끄덕여 보이자 요시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바람에 테이블이 흔들려 커피가 잔받침으로 흘러 넘쳤다. 요시노
는 커피잔에 한 번도 입을 대지 않았던 것이다.
아사카와는 일하는 틈틈이 사망한 네 명의 신변을 조사하려 했지
만 일에 쫓겨 좀처럼 생각같이 되어 주지 않았다. 이러저러하는사이
일주일이 지나고 달이 바뀌어 여름이 되돌아온 것 같았던 9월의 폭염
도 깊어 가는 가을색에 밀려 흘러가듯 과거의 기억이 되었다. 그러는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이후로 신문 사회면 구석구석까
지 눈을 돌리게 되었지만 비슷한 사건은 다시 눈에 띄지 않았다. 혹.
아사카와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어떤 무서운 일이 착착 진행되
어 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네 사람의 죽음
은 단순한 우연이고, 아무런 연관성이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
가 많아졌다 요시노 선배와도 그 이후로 만난 적이 없다. 그 역시 이
제 잊고 있는 것이리라. 그렇지 않다면 아사카와에게 연락을 해 왔을
것이다.
아사카와는 사건에 대한 열정이 식어 가는 것 같으면 언제나 네 장
의 카드를 주머니에서 꺼내, 우연일 리 없다고 새롭게 다짐하곤 했
다. 카드에는 이름과 주소 등 인적 사항이 기입되어 있었고, 그 밑 공
백에는 8월부터 9월에 걸친 네 사람의 행적 등 취재로 얻은 정보를
빠짐없이 메모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카드 1
오이시 도모코 1972년 10월 21일생.
사립 게세이 여고 3학년 만 17세.
주소 요코하마 시 나카 구 흔모쿠모토초 1-7.
9월 5일 오후 11시 전후, 양친 외출 중, 자택 1층 주방에서 사망. 사인은
급성 심부전.
카드 2
이와다 슈이치 1971 년 5월 26일생.
에이신 학원에서 재수중. 만 19세.
주소 : 도쿄 도 시나가와 구 니시나카엔 1-5-23
9월 5일 밤 10시 54분, 시나가와 역 앞 교차로에서 대러져 사망. 사인은
심근경색.
카드 3
쓰지 요코 1973년 1월 12일생.
사립 게세이 여고 3학년. 만 17세.
주소 : 요코하마 시 이소고 구 모리 5-19,
9월 5일 심야에서 이튿날 새벽 사이에 국도변에 정차된 차 안에서 사망.
사인은 급성 심부전.
카드 4
노미 다케히코 1970년 12월 4일생.
에이신 학원에서 살수중 만 19세.
주소 도쿄 도 시부야 구 우에하라 1-10-4.
9월 5일 심야에서 이튿날 새벽 사이, 국도번의 차 안에서 쓰지 요코와 함
께 사망. 사인은 급성 심부전
오이시 도모코와 쓰지 요코는 같은 학교에 다니는 친구 사이이고,
이와다 슈이치와 노미 다케히코도 같은 학원에 다니는 친구라는 사
실은 굳이 취재를 통해 확인할 필요도 없이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리
고 쓰지 요코와 노미 다케히코가 9월 5일 밤 요코스카로 드라이브 나
간 사실로 볼 때, 그 두 사람은 애인까지는 아니라 해토 함께 놀러 다
닐 만한 친구임에는 틀림없다. 친구들한테도 쓰지 요코가 도쿄의 재
수생과 사귀고 있는 것 같다는 소문을 들을 수 있었다 다만 언제, 어
떻게 사귀게 된 사이인지는 지금으로선 알 길이 없다
그렇다면 당연히 오이시 도모코와 이와다 슈이치도 애인 사이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나오게 되지만 아무리 조사해 봐도 그런 사실을
증명할 단서는 나타나지 않았다. 어쩌면 오이시 도모코와 이와다 슈
이치는 서로 얼굴조차 본 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 과연 그
네 사람을 연결하는 실은 한 가닥뿐일까? 정체 불명의 존재가 무작
위로 희생자를 끄집어냈다고 하기에는 네 사람의 관계가 지나치게
가깔다 예컨대 네 사랑이 다른 사랑들은 모르는 비밀을 가지고 있어
서 그 비밀 때문에 죽음을 당했다든가‥‥ 아사카와는 좀더 과학적으
로 생각해 보았다. 네 사람이 어느 시간에, 동시에 어떤 장소에서 심
장에 침범하는 바이러스에 감염됐다.
‥‥아니 , 아니 .
아사카와는 걸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급성 심부전을 일으키는 바이러스 같은 게 있을 리 있나.
'바이러스, 바이러스' 아사카와는 계단을 오르며 두 번 중얼거렸
다. 그리고 역시 과학적인 설명을 Al도해 보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고 고쳐 생각했다.
급격한 심장 발작을 일으키는 바이러스의 존재를 가정해 보자 초
자연적인 힘을 가정하는 것보다는 얼마간 현실적 이고, 다른 사람에
게 얘기했을 때 웃음거리가 될 걱정도 덜어진다. 현재까지 지구상에
서 발견되지 않은 것이지만, 극히 최근에 운석 내부에 박혀 우주로부
터 날아온 것일 수도 있다. 아니, 세균 병기로 개발된 것이 새어나왔
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틱.그렇다. 우선 이것을 바이러스의 일
종이라고 생각하자. 물론 그렇게 한다고 해서 모든 의문점에 대해 해
답을 낼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네 사람 모두 경악의 표정을 띤 채로 죽은 것은 왜일까? 쓰지 요코
와 노미 다케히코가 좁은 차 안에서 서로 상대방에게서 떨어지려고
애쓰며 죽은 것은 왜일까? 검시 결과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었던 것
은 왜일까? 만일 세균 병기가 흘러나온 것이라면 세 번째 의문에 대
해서는 쉽게 답할 수 있다 그쪽에서 함구령을 내린 것이다.
그 가정에서 더 나아가 보자 피해자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고 있
다 그렇다면 그 바이러스는 공기 감염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에
이즈처럼 혈액으로 감염되는 것인가?아니면 극히 감염되기 어려운
것일까? 그러면 가장 중요한 것은 사망한 네 사람이 그것을 도대체
어디에서 묻혀 온 것일까 하는 것이다. 8월부터 9월 사이 네 사람의
행동을 다시 한번 조사하여 공통된 장소와 시간을 찾아 내야 한다.
당사자의 입이 닫혀진 지금읏로서는 그렇게 간단히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네 사람만의 비밀로, 부모나 친구들 중 어느 누구도 모르게
숨겼다면 찾아 낼 방도가 없다. 그러나 분명 그 네 사람은 어떤 시간,
어떤 장소에서 어떤 열을 공유했음에 틀림없다.
아사카와는 컴퓨터 앞에 앉아 정체 불명의 바이러스를 일단 머릿
속에서 지웠다. 그리고 막 취째해 온 자료를 꺼내서는 카세트테이프
의 내용을 재빨리 정리해 나갔다. 기사를 오늘중으로 완성해야만 한
다. 내일 일요일에는 아내 시즈카와 함께 도모코의 집을 찾아가 보기
로 했다. 도모코가 죽은 장소를 실제로 확인해 보고, 만일 분위기가
아직 남아 있다면 그것을 피부로 느끼고 싶었다 외동딸을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언니를 위로하고 싶다는 생각에 아내는 방문에 동의
했지만, 물론 그녀는 남편의 진의를 모르고 있었다.
기사의 전체 구성을 어떻게 짤까 생각하며 아사카와는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아사카와의 아내 시즈카는 언니네 집에서 거의 한 달 만에 친정 부
모와 만났다. 외손녀 도모코가 죽은 이후 두 사람은 휴일마다 아시카
가에 있는 집에서부터 딸을 위로하러 올라오고 있었다. 그런 사실조
차 시즈카는 오늘에야 알았다 야윈 얼굴에 깊은 슬픔이 담긴 노부모
를 보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었다 두 사람에겐 세 명의 손주가 있었
다. 장녀인 요시미의 딸 도모코, 차녀인 노리코의 아들 겐이치 그리
고 아사카와부부의 딸인 하루코.세 명의 딸이 각각 한명씩이니 그
리 많다고는 할 수 없었다. 첫 손주였던 만큼 도모코를 만나면 항상
얼굴이 양글쪼글 되게 웃으면서 한껏 어리광을 받아 주었던 것이다.
딸을 잃은 부모의 슬픔과 손녀를 잃은 슬픔 중 어느 쪽이 더 큰 것인
지 판단내리기 어려울 정도로 장인 내외는 크게 낙담하고 있었다
‥‥손주라는 게 그렇게 귀여운 것일까?
올해로 서른에 접어든 시즈카로서는 자신의 딸이 죽었다면, 하는
시즈카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오후 3시가 지나자 아시카가의 장인 내외가 돌아갈 채비를 시작했
다. 시즈카는 이상했다. 항상 바쁘다, 바쁘다 하던 남편이 왜 처형의
집에 가보자는 말을 꺼냈을까? 원고 마감에 쫓겨 장례식에도 얼굴조
차 보이지 않았던 남편이다 그런데 슬슬 저녁 식사 준비를 할 시간
인데도 전혀 돌아가fl는 내색을 보이지 않는다. 조카인 도모코와는
몇 번 보았을 뿐으로 친근하게 이야기를 나눈 일도 없었을 터였다
고인이 그리워 자리를 뜨기 힘든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여보, 이제 슬슬· . ."
시즈카가 남편의 무릎을 가볍게 두드리며 속삭였다.
"하루코 녀석,졸린 것 같아.여기서 잠깐 재우고 가는 게 좋지 않
을까?"
아사카와 부부는 딸을 데리고 왔다. 평소 같으면 지금쯤 낮잡을 잘
시간이다 아닌게 아니라 하루코의 눈 깔박임은 졸릴 때의 그것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여기서 낮잠을 재우면 앞으로 두 시간은
더 이 집에 머물지 않으면 안 된다. 갓 외동딸을 잃은 언니 부부와 앞
으로 두 시간,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면 좋을까.
"전철 안에서 재우면 되잖아요."
시즈카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얼마 전에 혼난 적이 있잖아. 지긋지긋해."
하루코는
서 EBㅁ』 tHIn-Olo
를 쓴다. 두손 두발을 모두 버등거리며 큰 소리로 아우
성쳐 엄마 아
빠를 곤란하게 만드는 것이다. 야단이라도 치면 불에
기름을 끼얹는
꼴이라서 , 어떻게든 제대로 재우는 방법 외에는 얌전
하게 만들 도리
가 없었다. 이쯤 되고 보면 아사카와는 주위의 시선을
느끼고는, 제
각 일 피해를 보고 있는 것은 부모라는 듯한 불쾌한 얼굴
로 입을 다물고
만다. 다른 승객들의 짜증스런 눈초리 때문에 아사카와
는 숨이 막힐
어 것처럼 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시즈카 역시 신경질
적으로 대의 근
육을 떨고 있는 남편의 얼굴은 되도록 보고 싶지가 않
았다.
a "당신이 그러시다면 ."
. "그래, 2층에서 잠간 재워 ."
하루코는 엄마의 무릎 위에서 거의 반쯤 눈을 감고
있었다.
최 "내가 재우고 오지 ,"
아사카와는 딸의 볼을 손등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자식을 돌보
륜 는 일이라곤 어지간히 없었던 아사카와였기에 그 말이
아무래도 기
묘하게 들렸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슬픔을 대하고 나니
마음이 바뀌
정 기라도 했단 말인가.
'떠떻게 된 거예요,오늘은· . 왠지 기분이 이상해
요."
"괜찮아. 이 모양이라면 금방 잠들 거야. 나한테
맡겨 ."
시즈카는 딸을 아사카와에게 건넸다.
으로
아사카와는 딸을 안고 계단을 올라갔다 2층에는 도모코가 쓰던 방을
포함하여 세 개의 방이 있었다. 남향의 한 방에 깔려 있던 이불에 살
짝 하루코를 눕혔다. 곁을 지켜 줄 필요도 없었다. 귀여운 숨소리를
내며 딸아이는 이미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아사카와는 살짝 방에서 나와 아래층의 모습을 살피면서 도모코의
방으로 들어갔다. 죽은 사람의 프라이버시에 손을 댄다고 생각하니
다소 뒤가 켕겼다. 이런 종류의 일에 대해서는 스스로 삼가고 있지
않았던가. 그러나 커다란 목적을 위해서는, 커다란 악을 평정하기 위
해서는 이런 일도 어쩔 수 없다. 그런 식으로 요리조리 이유를 붙여
금세 옳지 않은 행동을 정당화시키는 자신이 어처구니 없었다 그는
변명하고 있었다. 기사 때문이 아니다, 네 사랑에게 공통된 시간과
장소를 찾아 내려는 것뿐이다. 잠깐만 실례하자.
아사카와는 책상 서랍을 열었다. 평범한 여고생이 사용하는 문구
류가 잘 정돈되어 있었다. 사진이 세 장, 편지 , 작은 지갑, 수첩 , 바느
질 도구 죽은 다음 부모의 손길이 닿았던 것일까?아니,그렇게 보
이지는 않는다. 원래부터 깔끔한 걸 좋아했으리라, 일기장 같은 것이
나오면 가장 손쉬울 텐데 X월 X일, 언제 어디서 , 쓰지 요코, 노미 다
케히코, 이와다 슈이치 등과‥‥ 그런 기록만 나타나 준다면. 아사카
와는 책장에서 노트를 꺼내들고 몇장을 차례로 넘겼다. 서랍 안쪽에
서 너무나 여자아이다운 일기장이 나왔지만 앞부분에 서문 비슷한
것만 쓰여 있었는데 다가 날짜도 훨씬 오래 전의 것이었다.
책상 옆에 놓인 정리함에는 책 같은 것은 없는 대신 빨간 꽃무의의
화장대가 얹혀 있었다. 화장대의 서랍을 열었다 값싼 액세서리 몇
개. 산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잃어버린 듯 쌍으로 된 귀고리는 많지 않
았다. 휴대용 빗에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몇 올 걸려 있었다.
붙박이 옷장을 열자 훅 하고 여고생의 내음이 물씬 풍겨 온다. 컬
러풀한 무의의 원피스와 스커트가 가득걸려 있다. 도모코의 부모는
외동딸의 체취가 담긴 옷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 아직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사카와는 아래층의 동태에 귀를 기울
였다. 여기서 들키면 처형 내외가 어떻게 생각할지 알 수 없다 인기
척은 들리지 않았다. 아내와 처형 내외가 무언가 열심히 얘기를 나누
고 있는 것 같다. 아사카와는 윗저고리의 주머니를 하나씩 뒤졌다.
손수건, 영화표 반쪽,껌 종이,그리고 작은 핸드백 안에는 티슈, 전
철 정기권을 넣는 지갑. 안을 열어 보았다 통학용 정기권, 학생증,
그리고 한 장의 카드.카드에는 이름이 기입되어 있다. 야야산결귀.
이걸 뭐라 읽지?유키라고 읽나?여자인지 남자인지 이름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었다. 어째서 다른 사람의 카드가 이런 곳에? 그때 계단
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아사카와는 카드를 자기 호주머니에
넣고, 정기권 지갑을 원래 자리에 되돌려 놓은 다음 옷장 문을 닫았
다. 복도로 나오니 처형인 요시미가 막 2층으로 올라서고 있었다.
"하루코는 얌전히 잠들었어요?"
"예, 덕분에. 너무 폐를 끼치는 것 같습니다. "
"괜찮아요."
처형인 요시미가 머리를 가볍게 숙여 보이며 하루코가 자는 방으
로 들of갔다.
화장실에서 아사카와는 카드를 꺼냈다. 퍼시픽리조트 클럽 회원
증. 카드의 명칭이다. 그 밑에 야야산결귀라는 이름과 회원 번호, 유
효 기간이 적혀 있고 뒤집었더니 주의 사항 5개 조항과 회사 이름, 주
소, 퍼시픽리조트 클럽 주식회사, 도쿄 도 치요다 구 고지마치 3-5,
TEL (03)-261-4922 등의 글자가 적혀 있었다. 훔치거나 주운 것이 아
니라면 도모코는 아마 이 카드를 노노야마(야야산)라는 인물에게서
빌렸을 것이다. 무얼 하려고?물론 퍼시픽 리조트의 시설을 이용하
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렇다면 언제 어느 곳이었을까?
이 집에서 전화를 걸 수는 없는 일이다. 담배를 사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아사카와는 집 앞 공중전화로 뛰어갔다. 다이얼을 돌린다
"네, 퍼시픽리조트 클럽입니다. "
젊은 여자의 목소리다.
"저어 , 회원권으로 이용 가능한 시설을 알고 싶습니다만."
여자의 답변이 늦다. 간단히 대답할 수 없을 정도로 이용 시설이
많은 것인지도 모른다.
"아, 아니, 저 말이죠‥‥ 도쿄에서 하루면 갈 수 있는 곳으로‥‥‥
아사카와가 덧붙여 말했다. 네 사람이 모두2박, 3박이나 집을 비
웠다면 제법 눈에 띌 만한 일이다. 이제까지의 조사에서 그런 기미를
발견하지 못했으니 기껏 하루 거리였을 것이다. 1박 정도라면 친구집
에서 자고 오겠다든가 하는 말로 얼마든지 부모를 속일 수도 있다.
"미나미하코네에 퍼시픽랜드라는 종합 시설이 있습니다 "
여자의 목소리는 사무적이었다
"구체적으로, 그러니까 어떤 레저를 즐길 수 있죠?"
"글쎄요. 테니스, 골프, 체력 단련장‥‥ 그리고 수영장도 있습니
다. "
"숙박 시설은?"
"네, 호텔과 임대 별장인 로그캐빈이 있습니다. 원하신다면 안내
팜플렛을 보내 드릴까요?"
"네, 꼭 좀 부탁드립니다. "
아사카와는 손님인 척했다. 호의적인 가운데 정보를 듣기 위해서
였다
"저 , 호텔이나 임대 별장에 일반 사람들도 묵을 수 있나요7"
"네. 묵을 수 있습니다만 일반 요금이 적용됩니다 "
"그렇습니까?그럼 그쪽 전화번호를 알려 주시겠습니까. 한번 가
봐야겠군요."
"숙박 예약이시라면 이쪽에서 접수를 받습니다만 "
"음‥‥ 아니, 그쪽으로 드라이브하다가 갑자기 들르게 될지도 모르
니까‥‥ 전화번호를 알려 주세요."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기다리는 사이에 메모리와 볼펜을 꺼냈다.
"전화번호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
여자의 목소리가 되돌아오더니 11자리 숫자를 두 개 알려 준다. 지
역 번호가 왜나 길다. 아사카와는 재빨리 받아 적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데, 그 밖에 다른 시설은 어디 있습니까?"
"하마나코와 미에 현 하마지마초에 같은 종합 레저랜드가 있습니
다. "
너무 멀다! 고등학생이나 재수생으로서는 거기까지 갈 만한 비상
금이 없었으리라.
"과연 이름 그대로 태평양을 향해 있군요."
여자는 퍼시픽리조트 클럽 회원이 되면 얼마나 멋진 대우를 받을
수 있는지 의기양양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사카와는 적당히 들
어 준 다음 말을 잘랐다.
"알았습니다. 자세한 건 팜플렛을 보기로 하죠. 주소를 말해 줄 테
니 팜플렛을 보내 주세요."
아사카와는 주소를 말한 뒤 수화기를 놓았다. 여자의 설명을 듣는
동안 돈에 여유가 있다면 회원이 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정말 들
었다.
하루코가 잠든 지 한 시간 정도 지나고 장인 내외도 돌아가고 없었
다. 시즈콰는 문득문득 수심에 잠기기 일쑤인 언니를 대신해서 주방
에서 식기를 닦고 있었다. 아사카와도 주방에서 식기를 날라 주며 활
발히 일을 거들었다
"어쩐 일이에요, 당신? 이상하네요."
시즈카가 잠시 그릇 씻던 것을 멈추고 말했다.
"하루코를 재우고, 설거지를 돕고‥‥ 앞으로도 이래 주면 좋3K는
El?"
생각에 잠겨 있던 아사카와는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아내는자기
이름의 뜻 그대로 조용히 (시즈카는 한자로 '정(고요할 정)' 이라 씀 :
역자 주) 있어 주면 좋겠다. 여자의 입을 닫게 하려면 대꾸하지 말아
야 한다.
'당신, 그러고 보니 재우기 전에 기저귀 채웠어요?이불을 적시기
라도 하면 큰일이에요."
아사카와는 그 말에 개의치 않고 주방 벽을 빙 둘러보았다. 여기서
도모코가 죽은 것이다. 바닥에는 유리 파편이 흩어져 있었고 콜라가
엎질러져 있었다고 한다 아마 냉장고에서 콜라병을 꺼내 마시려는
순간, 그 바이러스에게 당했을 것이다 아사카와는 냉장고를 열고 도
모코가 한 것 그대로의 흉내를 냈다. 유리컵이라 여기고 마시는 시능
을 한다.
"뭐 하는 거예요? ‥‥여보."
시즈카가 멍하니 입을 벌리고 바라보았다. 아사카와는 그대로 계
속했다 마시는 시능을 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돌아보니 눈앞에 거실
과 주방을 갈라 놓은 유리문이 보인다. 그 위로
의 표정을 반사해 내지는 못하고 있었다. 만일 유리 저편이 캄캄한
어둠뿐이고 이쪽 편이 밝았다면, 도모코가 그날 밤 여기에 서 있었던
시간과 같은 때라면‥‥ 이 유리문은 거울과도 같이 주방의 모습을 비
춰 보여 주었을 것이다. 공포로 일그러진 도모코의 얼굴이 비쳤을 것
이라고 생각하니, 아사카와는 이 유리문이 그 날 일어난 모든 일의
기록자인 것처럼 여겨졌다. 빛과 어둠의 흥정에 따라 투명하게도 되
고, 거울처럼 되기도 하는 유리 흘린 듯이 유리창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있는 아사카와. 그런 아사카와의 등을 시즈카가 두드리려는 그
때, 2층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하루코가 잠에서 깬 것이다.
"아, 하루코가 깬 모양이에요."
시즈카가 젖은 손을 수건에 닦았다. 그러나 잠에서 깬 아이의 울음
이라기에는 너무 심한 울음소리다. 시즈카는 당황하여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시즈카와 교대하듯 들어선 것은 처형 요시미였다. 아사카와는 예
의 그 카드를 내밀었다.
"이게 피아노 밑에 떨어져 있더군요."
아사카와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말하고는 반응을 기다렸다.
요시미는 카드를 손에 들고 뒤집어 본다.
"이상하네 , 어째서 이런 게 ."
이 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한다.
"도모코가 친구에게 빌린 것 아닙니까?"
애 친구 중에 이런 이름이 있었던가?"
그렇게 말한 요시미는 자못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아사카와를 보았
다.
"어쩌지 , 이걸. 소중한 물건일 테죠? 그 애는 이미· . . "
요시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정말이지 사소한 것조차 슬픔을 북받
치게 하는 모양이다. 아사카와는 어떻게 물어야 할지 망설여졌다
"저어,도모코가 여름 방학에 친구와 함께 이 리조트클럽에 갔다
든가· ."
요시미는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딸을 그만큼 신뢰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모에게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친구들과 싸돌아다니는 아이
가 아니다, 무엇보다 수험생이기 때문에 그럴 리 없다. 아사카와로서
는 요시미의 기분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더 이상도모코에 관
한 일을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대입을 앞둔 여고생이 부모에게 남자
친구하고 임대 별장으로 놀러 갔다 오겠다고 알리고 갔을 리는 없다.
아마도 친구집에서 공부하겠다는 식의 거짓말을 했음이 뻔하다. 부
모는 아무 것도 모를 수 있다.
"제가 회원증 주인을 찾아 돌려 주겠습니다. "
는 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남편이 부르는 소리에 주
설 수 있기를 기원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아사카와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노노야마라는 인
물이 리조트 클럽 회원증을 도모코에게 빌려 주었다면 도모코의 죽
음을 알자마자 회원증을 되찾기 위해서 도모코 부모에게 연락을 취
했을 것이다. 그러나 도모코의 어머니 요시미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
다. 노노야마가 회원증에 관한 일을 잊었을 리는 만무하다. 부모의
것이라고 해도 고액의 회원비를 낸 이상 잃어버린 채로 그냥 파들
리가 없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아사과와는 이렇게 생각해 보
았다. 노노야마는 나머지 세 사람. 즉 이와타, 쓰지 , 노미 중 누군가
에게 카드를 빌려 주었다. 그런데 카드가 어떤 사정으로 인해 도모코
에게 넘어갔고, 그대로 끝이 나 버렸다. 로노야마는 빌려 준 상대에
게 연락을 취했다. 연락을 받은 부모는 자식의 유품을 뒤진다. 발견
될 리 없다. 카드는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세 명
의 가족에게 연락을 취해 보면 기노야마의 주소가 밝혀질지 모른다
오늘밤 바로 전화해야겠다. 만약 그렇게 해서 단서를 얻어 내지 못한
다면 이 카드가 네 사람에게 공통의 시간과 장소를 제공했을지도 모
른다는 가능성은 희박한 것이 된다.
그러나 아무래도 노노야마를 만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여의치
않을 경우 퍼시픽리조트의 회원 번호로 주소를 알아 내는 도리밖에
없었다. 아마 직접 회사에 문의하면 그리 간단히 가르쳐 주려 하지
않겠지만, 뱀의 길은 뱀이 안다고(같은 부류의 사람들끼리는 서로 사
정을잘안다는뜻의 일본속담 역자주),신문사의 인맥을활용하
면 어떻게든 될 것이다
누군가가 아사카와를 부르고 있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음성 ‥‥ 여
보‥‥여보.어린아이의 울음소리에 섞여 있는 아내의 목소리는 당
황하고 있었다.
"여보, 좀 올라와 줘요 "
아사카와는 퍼뜩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지금까지 자신이 무슨 생
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딸의 울음소리가 아무래도 이상
하다 계단을 오를수록 그런 생각이 강해졌다.
"왜 그래?"
아사카와는 아내를 꾸짖듯 말했다.
"얘, 이상한 것 같지 않아요? 왜 이러는 거지? 우는 게 평소와 달
라요. 여보, 아파서 그럴까요?"
아사카와는 하루코의 이마에 손을 대 보았다 열은 없었다. 하지만
조그만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이 몸 전체로 전해져 가끔 실룩
실룩 등까지 떨고 있었다 얼굴은 새빨갛고 두 눈은 모두 꼭 감고 있
었다.
"언제부터 이런 거야?"
"잠에서 깼을 때 아무도 곁에 없었으니까 모르죠."
하루코는 잠에서 깼을 때 길에 엄마가 없어서 운 적이 많다. 그러
나 엄마가 달려와서 꼭 껴안아 주면 바로 그친다. 아이는 울음을 통
해 뭔가를 호소하고 있다. 도대체 무엇을‥‥ 이 아이는 지금 뭔가 말
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어리광과는 다르다. 조그만 두 손을 얼굴 위
로 단단히 마주 잡고 있었다‥‥ 두려움. 그렇다, 이 아이는 두려운 나
머지 울부짖고 있는 거다. 하루코는 얼굴을 돌리더니 꼭쥐고 있던
주먹을 살짝 펴서 정면을 가리켜 보이는 시능을 했다. 아사카와는 그
방향을 보았다. 기등이 있었다 시선을 들었다. 천장 아래 30센티미
터쯤에 걸린 주먹만한 크기의 반야면(반약면, 일본의 전통극 '◎에
서 쓰이는 가면의 하나로 두 개의 뿔, 크게 찢어져 올라간 입을 가진
여자 귀신 탈 ' 역자 주), 이 아이가 귀신 탈에 겁을 먹은 건가?
"이봐, 저거 !"
아사카와가 턱으로 가리켰다. 두 사람은 동시에 귀신 탈을 본 다음
천천히 서로 마주보았다.
"얘가 탈을 무서워하고 있다는 거예요?"
아사카와가 일어섰다. 기등에 걸린 귀신 탈을 떼어 옷장 위에 엎어
놓았다. 이렇게 하면 하루코 눈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울음소리가
뚝 그쳤다.
"아니, 하루코. 귀신이 무서웠니?"
시즈카는 원인을 알아 내 안심이 되었는지 기쁜 듯 딸의 얼굴에 볼
을 비볐다. 아사카와는 어딘가 석연치 않았다. 그저 왠지 이 방에는
더 있고 싶지 않았다.
"자, 빨리 가자구."
아사카와가 아내를 재촉했다
해질 무렵, 처형 집에서 돌아오자마자 아사카와는 쓰
지,노미, 이
와다 순으로 전화를 걸었다. 리조트 클럽 회원증에 관해
다른 사람으
로부터 문의가 없었는지 묻기 위해서였다. 마지막으로 전
화를 받은
나 이와다의 어머니가 단숨에 떠들어 댔다.
"아들의 고등학교 선배라는 사람한테서 전화가 왔었는
데, 리조트
시설 회원증을 빌려 줬으니까 돌려받고 싶다고 해서요‥
‥ 한데 아들
방을 샅샅이 뒤져도 결국 아무것도 나오지 않아 곤란해
하고 있던 참
01에 요."
이렇게 해서 노노야마의 전화번호는 바로 파악되었고,
즉시 전화
를 걸 수 있었다.
노노야마는8월 마지막 일요일에 시부야에서 이와다를
만나 회원
증을 빌려 주었다고 했다. 그때 이와다는 꼬신 여 고생들
과 함께 놀러
가기로 했다고 말한 모양이다.
‥‥여름 방학도 끝인 걸. 마지막으로 실컷 놀지 않으
면 열심히 수험
공부에 집중할 수 없단 말야.
그 말을 듣고 노노야마는 웃었다.
‥‥바보 자식 , 재수생한테 여름 방학 같은 게 어딨
냐?
8월의 마지막 일요일은 26일 그 이후 어딘가에서 묵을
작정으로
놀러 갔다면 27일, 28일, 29일, 30일 중 어느 하루다.
9월이 되면 재
수생은 어쨌든 간에 고등학교는 신학기를 맞이하기 때문
이다.
낯선 장소에 오래 있어서 피로했던 탓인지 , 하루코는
곁에 붙어 자
고 있는 시즈카와 함께 바로 잠들어 버렸다. 침실 문에
귀를 대 보니
두 사람의 숨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밤 9시‥‥ 아사카와한테는 마음
이 편안해지는 시간이다. 아내와 아이가 잠든 후가 아니면 비좁은 아
파트에는 맘편히 자리잡고 일할 수 있는 공간이 없었다.
아사카와는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유리잔에 따랐다 각별한 맛
이 난다. 회원증 발견으로 일보 전진했음이 확실하다. 8월 27일, 28
일, 29일, 30일 중 어느 하루, 이와다 슈이치를 포함한 네 명의 그룹
이 퍼시픽리조트의 숙박 시설을 이용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그 시
설 중에서도 미나미하코네 퍼시픽랜드에 있는 빌라 로그캐빈이 가장
유력하다. 거리상으로 봐도 하코네 이외의 시설에 머물 수는 없었을
테고. 돈 없는 고교생 그룹이 우아하게 호텔에 투숙했으리라고토 생
각할 수 없다. 회원증을 이용해 싸게 빌릴 수 있는 별장에 숙박하는
것이 보통일 것이다 회원증을 이용하면 그곳은 5천 엔, 1인당 천 엔
정도면 이용할 수 있었다.
빌라 로그캐빈의 전화번호는 지금 손에 있다. 아사카와는 테이블
위에 메모를 놔 두었다 그곳 프런트에 전화를 걸어 노노야마라고 하
는 이름으로 네 명이 묵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면 손쉬운 일이
된다 하지만 전화로 프런트에서 대답해 줄 리가 없다 리조트 클럽
내의 대여 별장 관리인쯤 되면 손님의 프라이버시를 지키는 것은 당
연한의무로생각하게끔잘훈련되어 있을것이다 주요신문사기자
라는 신분을 증명하고 그 조사 목적을 명확하게 알려 준다고 해도 전
화로는 관리인이 가르쳐 줄 리 없다 일단 그지방의 지국에 연락을
취해 연고가 있는 변호사를 동원해 숙박부를 보여 달라고 부탁해 보
는 건 어떨까 하고 아사카와는 생각했다. 이런 경우, 관리인이 숙박
는 건 어떨까 하고 아사카와는 생각했다. 이런 경우, 관리인이 숙박
부를 보여 줄 의무가 생기는 것은 경찰과 변호사에 한한다. 아사카와
가 그런 신분을 가장해 업자 발각되기 십상이며 그렇게 되면 회사에
피해를 입히게 된다. 이런 경우엔 제대로 절차를 밟는 것이 안전하고
또 확실하다.
그렇지만 그 경우 아무래도 최소 3∼4일은 걸리게 된다 아사카와
에게는 그것이 안타까웠다. 당장 알고 싶었다 3일도 참을 수 없을 만
큼 사건 해명에 대한 정열이 강했다
도대체 여기서 나을 것은 무얼까? 만일 네 사람이 8월 말에 미나미
하코네 퍼시픽랜드, 빌라 로그캐빈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치고, 그것
이 원인이 되어 의문의 죽음을 불러들였다고 한다면 도대체 거기에
서 일어난 것은 무엇인가?바이러스, 바이러스. 그것을 바이러스라
고 부르고 있는 것은 신비적인 어떤 것에 압도당하지 않기 위한 허세
일 뿐이라는 것 정도는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초자연의 힘에 맞
서는 데 과학의 힘을 이용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이치에 맞는 일이다.
모르는 것을 모르는 말로 논해 봤자 아무 소용 없다. 모르는 것을 아
는 말로 바꿔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아사카와는 하루코의 울음소리를 떠올렸다. 왜. 오늘 오후 하루코
는 귀신 탈을 보고 그토록 두려워 했을까?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아
사카와는 아내에게 물었다.
"이봐. 당신. 하루코엑게 귀신 얘기 해 준 적 있어?"
"그림책 같은 걸로 귀신이 무섭다는 걸 가르쳐 줬냐구?"
"아뇨, 그런‥‥‥
대화는 거기서 끊겼다. 시즈의는 아무런 의문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아사카와는 마음에 걸린다. 그러한 두려움은 본능적인 부분
을 찌르지 않으면 나오지 않는 것이다 '이건 무서운 것이다' 라고 배
웠기 때문에 무서워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유인원이라고 불리던
시대에서부터 인간은 늘 뭔가를 두려워하며 살았다. 천등, 태풍, 야
수, 화산 분화, 그리고 어둠‥‥ 그렇기 때문에 처음으로 천등 소리와
번개를 만난 아이라도 그것을 본능적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이해가
간다. 무엇보다 천등은 현실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 그러나 귀신은 그런 존재가 아니다. 사전에서 귀신을 찾
아보면 '상상 속의 괴물 혹은 죽은 사람의 영혼'이라고 실려 있다.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귀신한테서 겁을 먹는다고 한다면
하루코는 마찬가지로 무서운 얼굴 모양을 하고 있는 고지라(일본 55
영화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고지라」에 나오는 괴수로 공룡과 비슷
한 모양을 하고 있다. 일본에 있어 괴수의 대명사라고 할 만하다 . 역
자 주)의 모형에서도 겁을 먹었어야 한다. 언젠가 백화점의 쇼윈도에
서 하루코는 그것을 본 적이 있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고지라 모형.
하지만 그 애는 두려워하기는커녕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이며 그것에
몰입해 들어갔던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설명한다?단 하나 분명한
것은 고지라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상상 속의 괴물일 뿐이라는 사실.
그렇지만 귀신은‥‥ 과연 귀신은 일본에만 있는 것일까? 아니 , 서양
에도 비슷한 게 있다. 악마‥‥ 첫잔에 비해 맥주맛이 떨어
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 밖에는 없을까? 하루코가 겁내하는 것. 그래, 있다.
어둠 아이
는 어둠을 상당히 두려워한다. 불이 켜져 있지 않은 방에는
결코 혼
자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둠은 빛의 상극으로서
역시 현실
. 속에서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다. 지금도 하루코는 어두운 방
에서 엄
마 품에 안겨 잠을 자고 있는 것이다
제2장
고원(고원)
끝깠지 망01라.
그렇지 않으면 망자에게 먹일 것이다.
이 영상을 망 자는 일주일 우 이 시간에 유을
운명에 농껄 있다. 수고 싶지 않다면, 각금부터 말하는 것을
실앵에 흑인라. 의데를 알 수 없는 장면의 연속.
그 가운데 단 내나 이메알 수 있는 것은 이것대 본 자는
정확이 일주일 무에 유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수운을 피알 방법이 각운된 부분은
열레데전의 CF에 의매 지워져
각표다는 것
10월 11일 목요일
빗발이 점차 빨라져 아사카와는 와이퍼 속도를 올렸다. 하코네의
날씨는 변덕스럽다. 오다와라 부근에서는 맑았던 것이 해발이 높아
짐에 따라 공기가 습해지다가 산마루 부근부터 심한 비바람에 붙잡
힌 적이 지금까지 몇 번이나 있었다. 한낮이라면 하코네를 뒤덮는 구
름 모양에서 어느 정도 산의 기후를 예측할 수가 있다. 하지만 밤에
는 헤드라이트가 비치는 전방의 어둠에만 정신을 빼앗겨 차를 멈추
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나서야 비로소 어느 사이엔가 밤하늘이 가려
져 있음을 깨닫곤 한다. 도쿄 역에서 하행 특급 열차에 올라탔을 때
까지도 거리는 아직 옅은 어둠 가운데 놓여 있었다. 그것이 아타미
역에서 렌터카를 빌릴 때에는 구름 사이로 달이 보였다 안 보였다 하
도쿄발 하행선을 타서 아타미 도착은 18시 7분 개찰구를 나와 렌터
카를 빌리는 수속을 마친 것이 18시 30분. 슈퍼에서 컵라면 두 개와
위스키 작은 병을 사 가지고 일방 통행로가 많은 시내를 그럭저럭 빠
져나온 것이 19시 ,
바로 눈앞에 휘황한 오렌지색 빛을 감고 있는 긴 터널이 보인다
이 터널을 빠져나가 네츠칸 도로로 접어들면 바로 미나미하코네 퍼
시픽랜드 입구의 안내판이 눈에 띌 것이다. 단나 단층(아타미와 칸나
이 사이를 가로지르는 단층대 : 역자 주)을 관통하는 터널(단나 터
널 총길이가7천8백41미터로 16년 간에 걸친 공사끝에 1934년 개
통된 터널 : 역자 주) 속으로 들어가자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변한
다. 동시에 피부색도 조수석 시트도, 차 안의 모든 것이 오렌지색 라
이트를 받아 차분한 안정감을 잃고 헝클어 진다. 맞은편에서 오는 차
는 한 대도 없었고, 마른 앞유리를 어루만지는 와이퍼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낼 뿐이다. 와이퍼를 껐다. 8시까지는 목적지에 도착할 것이
다. 도로는 텅 비어 있었지만 한껏 액셀을 밟을 기분이 나지 않는다.
아사카와는 무의식 중에 그 장소로 가는 것을 꺼리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 오후4시 20분, 아사카와는 출판국에서 '지-지-' 하고 소리
를 내는 팩스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타미의 통신부에서 회답이 오기
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팩스에는8월 27일부터 ,)0일에 걸친 빌라
로그캐빈 숙박부 사본이 실려 있을 것이다. 프린트가 된 사본을 보고
아사카와는 뛸 듯이 기뻐 031
다케히코. 네 사람은 29일 밤, 로그캐빈 B-4호에 숙박했다. 이와다 슈
이치가 노노야마의 이름을 빌린 것은 확실하다. 이것으로 네 사람의
공통 시간과 장소는 밝혀졌다 8월 29일 수요일, 퍼시픽랜드 빌라 로
그캐빈 B-I호임에 틀림없다. 의문의 죽음을 맞기 꼭 일주일 전의 일이다.
아사카와는 바로 그 자리에서 수화기를 들어 빌라 로그캐빈의 번
호를 돌렸다. 오늘밤 B-4호에 숙박을 예약하기 위함이다. 내일 오전
11시에 있을 편집회의에만 늦지 않으면 되니까 그곳에서 밤을지낼
시간은 충분하다
‥‥가 보자. 어쨌든, 현장에 가 보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게 무엇인지 그로서
는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
터널을 빠져나오자마자 바로 도로 요금을 내는 곳이 있어 아사카
와는 백 엔짜리 동전 세 개를 건네 주면서 물었다.
"미나미하코네 퍼시픽랜드가 요 앞인가요7"
당연한 것이었다. 지도를 통해 몇 번이고 확인해 두었다. 단지 오
랜만에 사람을 만나는 듯한 기분이 들어 왠지 말을 나누고 싶어졌던
것이다.
일까? 좀처럼 차를 출발시키려고 하지 않는 아사카와를 사내는 이상
하다는 얼굴로 보고 있다. 무리하게 웃는 얼굴을 만들어 보이고는 천
천히 차를 출발시켰다.
네 사람에게 공통된 시간과 장소를 알아 랬다고 하는 몇 시간 전의
기쁨이 거짓말처럼 사그라들어 있었다. 빌라 로그캐빈에서 하룻밤을
묵은 지 꼭 일주일 후에 죽은 네 사람의 얼굴이 눈꺼풀에 명멸되면
서 , 되돌아가려면 지금밖에 기회가 없다며 히죽히죽 웃고 있다. 하지
만 여기서 되돌아갈 수는 없다. 한편으로는 신문 기자로서의 본능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혼자라고 하는 상황이 어쩔 수 없이
공포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요시노에게 말을 했으면 아마
쾌히 달려 들었을 테지만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이라 곤란하다. 아사
카와는 지금까지의 경과를 문서로 정리해 이미 플로피 디스크 안에
넣어 두었다. 휘젓거나 방해하는 일 없이 이 사건을 함께 뒤쫓아 줄
사람‥‥ 짚이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다. 순수한 흥미만으로 나서
줄만한사람이 한명 있었다 게다가 그쪽 방면에 관한지식도풍부
하다. 대학의 시간 강사라서 시간적 여유도 있다. 안성맞춤이었다
다만 고약한 구석이 있는 특이한 성격이라 아사카와는 참아 낼 수 있
을지 어떨지 자신할 수 없었다.
산 경사면에 미나미하코네 퍼시픽랜드 안내판이 서 있었다. 네온
사인은 없고 백색 패널판에 검은 페인트로 쓰여 있을 뿐이어서 헤드
라이트에 비춰진 순간을 놓쳤다면 깜빡 못 보고 지나치고 " 것
을 따라 올라갔다. 리조트 클럽에 이르는 길치고는 몹시 좁아 이대로
더 갈 수 없게 되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불안했다. 커브가 심한데
다가 가로등도 없었기 때문에 기어를 낮추고 천천히 올라갔다. 맞은
편 차가 오면 피해 줄 공간도 없었다
어느새 비는 그쳐 있었다. 아사카와는 그 사실을 그제야 비로소 깨
달았다. 단나 단층을 경계로 동과 서의 날씨가 이렇게 다른 것이다.
그래도 길은 끊어지는 일 없이 그럭저럭 위로위로 이어져 가고 있
었다. 올라감에 따라길 양쪽 여기저기에 팔기 위해 지어 놓은 별장
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길은 갑자기 2차선이 되면서 돌변하여
노면 질도 좋아졌다. 멋진 가로등이 길 양쪽을 장식하고 있었다. 아
사카와는 이 변화에 놀랐다 퍼시픽랜드의 부지 내로 들어선 순간,
사치스런 장식이 곳곳에서 얼굴을 내밀었던 것이다. 좀전에 지나왔
던, 밭 가운데 난 작은 길은 도대체 무엇이었던 걸까?옥수수와 키
큰 풀줄기가 양쪽 편에서 길 쪽으로 힘없이 기대와 좁은 길을 보다
좁아 보이게 하면서 급커브 뒤에 나타날지도 모르는 어떤 것에 대한
불안을 더더욱 불러일으키던 그 길
널찍한 주차장 맞은편에 있는 5층 건물이 이곳의 안내 센터이자
레스토랑이었다. 아사카와는 아무 생각 없이 차를 로비 앞에 세우고
홀로들어갔다. 시계를 보니 정각8시.예정대로다 '퐁,퐁' 하는공
소리가 어디에선가 들려온다 센터 아래로 테니스 코트 네 개가 들어
서 있고, 노르스름한 라이트 아래에서 몇 커플의 남녀가 테니스에 열
을 올리고 있었다. 놀랍게도 테니스 코트는 네 곳 모두 차 있었다. 10
. 월 초순의 목요일 밤 8시 아사카와는 이런 곳까지 와서 게
임을 벌이
는 자들의 신경 구조를 이해할 수 없었다. 테니스 코트의
훨씬 아래
∼ 쪽으로는 미시마와 누마즈 지역의 o호이 멀찍이 바라다보
였다. 그
건너편의 콜타르(석탄을 건류할때 산이는 흑색의 끈끈한
액체 : 역
주 자 주)처럼 검은 것은 다쓰코노우라라고 불리는 바다다.
◎ 센터로 들어가자 정면은 레스토랑으로 되어 있었다. 유
리로 둘러
◎ 쳐져 안쪽의 모습이 잘 보였다. 아사카와는 여기서 다시
놀랐다. 레
릴 스토랑의 영업은 8시면 끝난다는데 아직 절반 정도의 좌석
이 차 있었
뜬 던 것이다. 가족 동반이나 여자애들 그룹. 도대체 어찌 된
것인가?
티 아사카와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 패거리들은 어디에서
온 걸까?
◎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수가 없다. 아무래도 여기에 있는
사람들 모두
가 자신이 방금 지나온 그 길을 지 나왔다고 생각되지 않
는 것이다.
t 흑 지금 지나온 것은 뒷길이고, 정말은 다른 쪽에 좀더 밝
고 넓은 길
이 있는 건 아닐까? 하지만 퍼시픽랜드가 있는 장소를 설
명해 준 여
자는 전화에서 말했다.
네츠칸 도로 중간쯤에서 왼쪽으로 꺾어 산길을 올
라오세요.
아사카와는 그 말 그대로 따라온 것이다. 다른 샛길은
없었던 것
같다.
응식 주문은 끝났다는 말을 듣고서도 아사카와는 레스
토랑 안으로
들어갔다. 널찍한 유리창 아래에는 잘 손질된 잔디가 완
만한 커브를
그리며 밤거리를 향해 기울어져 있었다. 실내 조명을 다
소 어둡게 유
지하고 있는 것은 보다 아름다운 야경을 손님들에게 보여
주기 위한
것 같다 아사카와는 근처를 막 지나치려는 웨이터를 붙잡고 빌라 로
그캐빈이 있는 장소를 물었다 웨이터는 아사카와가 방금 들어섰던
현관 홀을 가리켰다.
"저 길에서 오른쪽으로 곧장 2백 미터쯤 가면 관리실이 있습니다. "
"주차장은 있나요?"
"관리실 앞이 주차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
예상과는 달랐다. 이런 곳에 들르지 않고 곧장 나아갔다면 자연스
럽게 목적한 장소에 도착했을 것이다. 왜 근대적인 빌딩의 외관에
빠져서 어슬렁어슬렁 레스토랑 안까지 들어와 버린 걸까?아사과와
는 어느 정도 자신의 심리를 분석할 수가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마
음을 놓았던 것이다 아사카와는 「13일의 금요일」의 무대가 됨직한,
다시 말해 근대적 이라는 말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칙칙한 통나무집을
상상하고 있었지만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곳까지 근대
과학의 힘이 제대로 미치고 있다는 증거를 눈앞에 두고 보니 다소 마
음이 든든해지기까지 한다.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랫세계에
서 이곳까지 이르는 형편없는 길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니스
나 식사를 즐기는 사람들이 이 윗세계에 많이 있다는 것 어째서 그
런 것들이 마음에 걸리는 것인지 아사카와는 스스로도 이해할수 없
었다. 다만 어딘지 모르게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서는 살아 있다는 느
낌을 가질 수가 없었다.
테니스 코트도, 레스토랑도 붐비고 있으니 몇 동의 로그캐빈에서
는 저녁 식사 후의 즐겁고도 단란한 소리가 들려와야 할 것이다. 아
사카와는 그러리라 기대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주차장 끝에 서서 골
짜기 밑바닥까지 내려다봐도 드문드문한 수풀의 완만한 경사면에 세
워져 있을열 동의 로그캐빈 중여섯 개밖에는 확인이 안되었다 그
아래쪽은 가로등 불빛조차 닿지 않는데다가 실내에서 흘러나오는 한
줄기의 빛도 없었기 때문에 밤이 드리우는 나무 그늘의 깊은 어둠에
잠겨 있다. B-4호, 아사과와가 오늘밤 묵을 방은 그래도 그럭저럭 빛
과 어둠의 경계에 자리잡고 있어 현관문의 위쪽 정도가 아사카와의
눈에 들어왔다.
아사카와는 정면으로 돌아가 관리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텔레비전 소리가 들리지만 사무실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관리인은
왼편 안쪽의 방에 있어서 아사카와가들어온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카운터에 가려 안쪽의 모습을 알 길이 없었다. 텔레비전 프
로그램이 아니라 외국 비디오를 보고 있는 모양으로 영어 대사와 함
께 반짝반짝 흔들리는 화상 그림자가 정면의 진열장 유리에 반사되
고 있었다. 그 붙박이 진열장 가득히 케이스에 든 비디오테이프가 죽
놓여 있었다. 아사카와는 카운터에 손을 얹고 소리쳤다. 곧바로 60세
전후로 보이는 작은 몸집의 남자가 얼굴을 내밀었다. '아, 어서 오십
시오' 라며 고개를 숙였다. 변호사를 동반한 아타미 통신부 조사에 응
해 흔쾌히 숙박부를 보여 준 것이 이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아사카와는 붙임성 있게 웃어 보였다.
"예약해 놓은 아사귀와입니다. "
남자는 노트를 펼쳐 예약을 확인했다.
"B-4호였죠? 여기에 이름과 주소를 써 주세요."
아사카와는 본명을 기입했다. 노노야마 명의의 회원증은 어제 본
인 앞으로 우송했기 때문에 지금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혼자십 니 까f"
관리인은 얼굴을 들고 이상하다는 듯 아사카와를 보았다. 지금까
지 이런 곳에 혼자서 묵는 손님은 없었다. 일반 요금의 경우 혼자라
면 호텔에 묵는 쪽이 경제적이다. 관리인은 한 장의 숙박계를 내밀더
"괜찮으시다면 한 편 어떻습니까? 화제작도 좨 갖춰 놓았습니다
"아, 네 , 비디오 대여인가요?"
아사카와는 벽을 가득 메운 비디오 타이틀을 가볍게 훌어보았다
「레이더스」, 「스타워즈」, 「백 투 더 퓨처」, 「15일의 금요일」 · SF를
중심으로 한 외국 영화 화제작들이 진열되어 있고 신작도 좨 있었
다 아마 이 로그캐빈을 이용하는 것은 젊은 그룹뿐인 모양이다. 흥
미를 끄는 영화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아사카와가 여기에 온 것은 일
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하필 일이 생겨서요· . . "
아사카와는 바닥에 놔 두었던 노트북 가방을 들어 보였다. 관리인
은 그것을 보고서야 이런 곳에 혼자 묵으려는 이유를 납득할 수 있었
던 모양이다.
아사카와는 확인을 했다.
"예 , 마음대로 사-5-하
십시오."
사용한다고 해도 아사카
와에게 필요한 것은 컵라면의 물을 끓이기
위한 주전자뿐이다 종이와
키를 받아들고 사무실을 나오려고 하는
아사카와에게 관리인은
B-4호의 위치를 설명하고 난 뒤 묘하게 정중
li│ 한 어조로 '편히 쉬십시오'
라고 말했다
손잡이에 손을 대기 전
에 아사카와는 준비해 둔 고무장갑을 꺼내
양손에 끼웠다. 정체 불명
의 바이러스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주
문(만문)이자 일시적인 위
안이었다.
문을 열고 현관 옆의 스
위치를 켜자 열평 정도의 거실이 100와트
전구에 의해 밝혀졌다. 벽
지부터 바닥의 카펫, E인용 소파, 텔레비전,
주방 세트까지 실내의 모든
것이 새 것이었으며 기능적으로 배치되
어 있었다 아사카와는 신발
을 벗고 들어갔다. 거실 외에 발코니가
있고,그리고 2층과 1층에
각각 하나씩 세 평 남짓한 다다미 방이 있
었다 확실히 혼자 특기에는
너무 사치스러운 공간이었다. 아사카와
는 레이스 커튼과 함께 유
리문을 열어 공기를 바꾸었다. 기대와는 다
르게 실내는 아주 청결하게
치워져 있었다 아무단서도 없이 돌아가
게 될지도 모른다. 아사카
와의 머리에 문득 그런 불안한 생각이 스쳤
다.
거실 옆 다다미 방에 들
어가 벽장을 열었다 아무 것도 없다. 아사
카와는 셔츠와 바지를 벗고
편안한 셔츠와 트레이닝 복으로 갈아입은
후, 벗은 옷을 벽장에 걸었다. 2층으로 올라가 다다미 방의 전등을 켰
다. 스스로도 어린애 같다고 아사카와는 쓴웃음을 지었다. 정신을 차
리고 둘러 보니 온 방의 조명이란 조명은 전부 켜 두고 있었다
충분히 밝혀 놓은 다음, 이번에는 화장실 문을 살짝 열고 안을 확
인한 후 문을 조금 열어 두었다. 어릴 적의 담력 시험을 떠올렸다. 여
름밤, 화장실에 혼자서 가지 못해 문을 약간 열고 아버지에게 망을
봐 달라고 부탁했던 그 시절.
불투명 유리 건너편은 깔끔한 욕실이다. 습기도 없고 욕조 바닥이
나 주방도 보송보송 말라 있다. 요 며칠 동안 이 방에는 손님이 들지
않았음에 틀림없다 고무장갑을 벗으려 했지만 땀 때문에 달라붙어
좀처럼 잘 벗겨지지 않았다. 고원의 차가운 바람이 스며들면서 커튼
을 흔들고 있었다.
아사카와는 냉장고에서 꺼낸 얼음으로 유리잔을 채우고 사 가지고
온 위스키를 반 정도 따랐다. 그 다음 수돗물이라도 탈까 하고 잠시
망설이다 '언더록으로 마시고 싶었지' 하고 자신을 납득시키고는 수
도꼭지를 잠갔다. 아직은 이 방에 있는 것을 먹을 용기가 나지 않았
다. 하지만 미생물은 열과 얼음에 약하다는 선입관 때문에 냉장고의
얼음은 계속 꺼내 먹기로 했다.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고는 텔레비전의 스위치를 켰다. 신인 가수
의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도쿄에서도 이 시간대 같은 프로를 한다.
아사카와는 채널을 돌렸다. 굳이 보려는 생각은 없었지만 볼륨을 적
당히 조절해 둔 다음 가방 안에서 비디오 카메라를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이변이 생겼을 경우, 일어난 일을 하나하나 녹화할 생각이었
놓았다. 이변이 생겼을 경우, 일어난 일을 하나하나 녹화할 생각이었
다.
위스키를 한 모금 마셨다. 아주 조금이기는 하지만 대담해진 것처
럼 느껴졌다. 아사카와는 지금까지의 과정을 다시 한번 머릿속에서
되새겨 보았다. 만일 오늘밤 여기에서 아무런 단서도 얻지 못한다면
쓰려고 마음먹고 있는 기사는 암초에 걸리게 된다. 그렇지만 뒤집어
생각해 보면 그쪽이 좋을지도 모른다. 아무런 단서도 얻지 못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 그 바이러스를 피해 갔기 때문인 셈이니까. 처자식이
있는 몸인데 이곳에서 이상스럽게 죽고 싶지는 않다. 아사카와는 테
이블 위에 발을 내던졌다‥‥과연 나는 ◎ 기다리고 있는 걸까? 두렵
지 않은가?이봐, 두렵지 않냐구?죽음의 신이 덮칠지도 모른단 말
야.
불안정한 시선을 이곳저곳으로 보내고 있던 아사카와는 아무래도
벽의 어느 한 점으로 눈을 모을 수가 없었다 보고 있는 동안 어떤 이
미지가 형상을 띠고 나타날 것만 같았다.
바깥에서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창문을 닫고 커튼을 여미려고
창 밖의 어둠으로 흘깃 시선을 던졌다. 바로 앞에는 B-5호의 지붕이
있었는데 그로 인해 드리워진 그림자가 한층 짙은 어둠을 만들어 내
고 있었다. 테니스 코트에도, 레스토랑에도 사람이 많았다. 그런데
왠지 여기에는 아사카와 혼자뿐이다. 커튼을 닫고 시계를 보았다. 8
시 56분. 이 방에 들어온지 아직 30분도 지나지 않았다 적어도 한
시간은 지난 것처럼 느껴진다. 여기에 있는 것이 그대로 위험으로 연
결되는 것은 아니다. 되도록 그렇게 생각함으로써 기분을 안정시켰
다. 그도 그럴 것이 , 빌라 로그캐빈이 생긴 지 벌써 반 년,5-4호에 묵
은 손님 수도 상당한 인원에 이를 것이다 그렇지만 묵었던 사람 모
두가 변사한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의 조사에 의하면 죽은 것은 그
네 명뿐 시간을 들여 조사하면 더 나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현재로
선 그 외에 발견된 것이 없다. 요컨대, 여기에 묵었었다는 것이 아니
라 여기에서 무엇을 했는가가 문제인 것이다.
‥‥그들은 여기에서 도대체 윌 한 것일까?
아사카와는 미묘하게 질문 방식을 바꾸었다
· .아니 , 이 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화장실에도 욕실에도 옷장에도 냉장고에도 단서 같은 것은 없다.
설사 있다고 해도 관리인이 치워 버렸을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
런 곳에서 느긋하게 위스키 따월 마시고 있는 것보다는 관리인을 상
대하는 쪽이 빠르지 않을까?
한 잔째 잔을 비웠다 두 잔째는 양을 줄였다. 술에 취해 버릴 수는
없다 이번에는 수돗물을 탔다. 위험에 대한 감각이 다소 마비된 모
양이다. 업무중 짬을 내어 이런 곳까지 온 자신이 어리석게 생각된
아사카와는 안경을 벗고 세수를 하고는 거울에 자신의 얼굴을 비추
었다 병자의 얼굴이었다. 혹 이미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은 아닐까?
아사카와는 방금 만들었던 물 탄 위스키를 단숨에 비우고는 또 한 잔
을 부었다
주방에서 돌아왔을 때, 아사카와는 전화기 아래 선반에 가지런히
놓인 한 권의 노트를 발견했다.
'여행의 추억 .'
표지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그는 노트를 들쳤다.
4월 7일 토요일
논코는 오늘이라고 하는 날을결코 잊지 않을 거예요
어째서인지
는 비 · 밀. 유이치는 너무나 자상해, 우후후각
NONKO
민박식 호텔에 흔히 놓여 있는 여행 추억이나 감상을
메모하는 노
트였다. 다음 페이지에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이 서
툰 사씨로 그
려져 있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온 가족일 것이다 날짜는
4월 14일,
역시 토요일이다.
l
l
6
◎
규
◎
◎
1
i
f
아버지는 뚱보입니다.
어머니는 뚱보입니다
그래서 나도 뚱보입니다.
4월 14일
아사카와는 계속 페이지를 넘겼다. 뒤쪽에 있는 페
이지가 세차게
넘겨져 오는 힘이 느껴졌지만 아사카와는 순서대로 페
이지를 넘겨
나갔다. 순서를 어긴 결과, 뭔가를 못 보고 지나치는
일도 있을 수 있
는 것이다.
는 것이다.
아무 것도쓰지 않은 여행객도 많았을 터이므로 확실히 말할수는
없지만, 여름 방학에 들어가기까지는 대체로 토요일마다 손님이 들
어 있었다. 여름 방학이 되자 날짜 간격이 좁아지더니 ,8월 말로 다가
감에 따라 여름이 끝나는 것을 한탄하는 소리가 많아진다.
8월 20일 일요일
아, 여름 방학도 끝이군. 아무 것도 좋은 일이 없었어. 누군가 좀
도와 줘 . 불쌍한 내게 구원의 손길을. 이쪽은 4백co오토바이를 소유.
상당히 핸섬 . 쓸 만하다구. 4. Y.
쓰고 있는 동안에 펜팔 상대를 구하기 위한 자기 PR이 되어버린 모
양이다. 발상은 비슷비슷했다. 커플로 이곳을 이용했던 사람들은 그
감상을 남들 보란 듯이 , 그렇지 않았던 사람들은 상대를 찾는다는 생
각을 노트에 발산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읽는 것이 지루하지는 않았다. 시계 바늘은 겨우 9시를 지
나고 있었다.
8월 30일 목요일
꿀꺽 . 경고. 배짱 없는 놈은 이것을 보면 안 된다. 후회할 걸
헷헷헤 .
5. 1.
그저 그것뿐이다. 8월 30일이라고 하는 것은 네 사람이 묵은 다음
날 아침 . 5.1.라고 하는 이니셜은 이와다 슈이치라 생
각된다. 그가 쓴
페이지만은 여느 것과 다르다. 어떻게 된 것일까? 이것
을 보면 안 된
다? 이것이라는 건 도대체 무엇일라? 아사카와는 일단
노트를 덮고
옆을 보았다 작은 틈이 나 있다. 아사카와는 그곳으로
손가락을 넣
고페이지를펼쳤다‥‥‥꿀꺽 경고.배짱없는농은이것을보
면 안
된다. 후회할 걸. 헷헷헤. 5. 1.' 라는 문자가 눈으로
뛰어들어온다. 어
째서 이 페이지는 스스로 펼쳐지려는 힘을 가지고 있을
까? 아사카와
는 생각했다 아마 그 네 사람은 페이지를 펼쳐 그 위에
뭔가를 얹어
두었던 모양이다. 그 무게 때문에 이 페이지는 펼쳐지려
는 힘을 아직
까지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얹어 놓았
던 것은 이것
을 보면 안 된다의 '이것'과 등호(등호)로 연결되는 것
임에 틀림없
다.
아사카와는 두리번두리번 주위를 둘러보고는 전화
테이블을 구석
구석 뒤졌다 아무 것도 없다. 연필 한 자루도 나오지
않는다.
한 번 더 소파에 앉아 노트의 다음 장을 읽었다. 다
음 날짜는 9월 1
◎ 일 토요일.정말이지 흔한 일밖에 쓰여 있지 않았다. 그
날에 묵은 대
일 학생 그룹이 '이것'을 보았는지 어떤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그 다음
일 페이지 어디를 찾아봐도 '이것' 에 판한 얘기는 없었다.
◎ 아사카와는 노트를 덮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배짱
없는 놈은 이것
훈 을 보면 안 된다고 하는 이상, 그것의 내용은 무서운
것이 아니면 안
훈 된다
규 아사카와는 노트를 닥치는 대로 펼친 다음 가볍게
손으로 눌러 보
았다 게다가 닫히려는 종이의 힘에 대항할 만한 무게를 가진 것. 예
를 들면, 한 장이나 두 장의 심령 사진류라면 그 정도의 무게를 가질
수없다 주간지,혹은 단행본이라든가‥‥ 어쨌든 눈으로 볼수 있는
것일 게다.
관리인에게 물어 볼까? 8월 30일, 손님이 돌아간 다음 방 안에 묘
한 것이 놓여 있지 않았는지 어떤지를.기억하고 있을까?만일 인상
에 남을 정도로 기묘한 것이었다면 분명히 기억하고 있을 것임에 틀
림없다. 아사카와는 일어나려다 문득 눈앞의 VHS 비디오를 눈여겨보
게 되었다 텔레비전 스위치가 켜져 있는 상태여서 청소기를 껴안은
유명 여배우가 남편을 뒤쫓아가는 장면이 흐르고 있었다 가전 제품
의 CF 같다.
그래, VHS 비디오테이프 정토면 펼쳐진 노트 위를 눌러 놓기에
꼭 알맞지 않은가.
아사카와는 어정정하게 허리를 굽혀 담뱃불을 껐다. 아까 관리실
에서 언뜻 본 비디오 컬렉션이 머리에 획 떠올랐다. 오랜만에 무서운
공포 영화를 보고 나서 , 재미있으니 보라는 얘기를 하려 했던 것인지
도 모른다. 만일 그뿐이라면‥‥ 잠간, 만일 그렇다면 어째서 이와다
슈이치는 고유명사를 사용하지 않았을까? 예컨대 「13일의 금요일」이
재미있다는사실을어떤 사람에게 전하고 싶었다면 '이것' 따위의 대
명사를 쓰는 대신 고유명사를 쓰면 된다. 그러면 일부러 노트에 '이
것'을 얹어 둘 필요도 없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것'은 이것이라는
표현으로 가리키지 않으면 안 될 것으로 고유한 명칭이 없는 것일지
도 모른다.
‥‥어떨까? 조사할 가치가 있을까?
달리 아무런 단서도 없는 이상.밑져야 본전이다 어쨌든 이런 곳
에서 궁리를 해 업자 결말이 날 리 없다. 아사카와는 현관을 나서자
돌층계를 올라가 관리실의 문을 밀었다.
좀전과 마찬가지로 관리인의 모습은 카운터 안에 없었고 텔레비전
소리만 구석에서 들려왔다. 도시에서의 회사 생활을 마치고 여생을
자연 속에서 지내려고 리조트의 관리인으로 재취업한 것은 좋지만,
막상 일을 시작하고 보니 너무나 지루한 나머지 매일 비디오를 보며
지내는 일 외엔 다른 수가 없다‥‥ 아사카와는 이곳 관리인의 경우를
그런 식으로 해석했다. 아사콰와가 큰 소리로 부르기 전에 관리인이
납죽 엎드린 자세로 쑥 얼굴을 내밀었다. 아사카와는 왠지 모르게 변
명하듯이 말했다.
"역시 비디오라도 빌릴까 해서요 ·. "
관리인은 기쁜 듯 빙긋 웃는다.
"그럼 좋아하시는 걸 골라 보세요. 한 편에 ,1백 엔 받습니다. "
아사카와는 괴기 영화 타이틀을 살렸다. 「지옥의 집」, 「검은 공포」,
그리고 「엑소시스트」 , 「오멘」 , 모두 학생 시절에 본 것뿐이다. 그 밖
에는 · . 다른 미지의 공포 영화가 있어야 했다. 대충 처음부터 끝까지
살펴보았지만, 아사카와는 그럴싸한 것을 발견할 수 없었다. 다시 한
번 2백 편 정도의 제목을 순서에 따라 눈으로 훌었다 그러자 제일 맨
아래 선반의 구석에 알맹이뿐인 비디오테이프가 ◎굴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다른 것은 재킷 위에서부터 사진과 제목 글자에 둘러싸
여 있는데 그 테이프에는 아무런 라벨도 붙어 있지 않았다.
"그거 , 뭡니까?"
묻고 난 다음 아사카와는 자신이 '그것' 이라는 대명사를 사용해
가리키고 있음을 깨달았다. 고유명사가 없으니 달리 부를 방법이 없
는 것이다. 관리인은 곤란하다는 듯 얼굴을 찡그리고 "예?" 하는 얼
빠진 소리를 내더니 그 테이프를 손에 들었다.
"이건, 아무 것도 아니에요."
‥‥아니 , 이 사람은 테이프의 내용을 알고 있는 것일까?
"그거 보셨나요?"
아사카와는 물었다.
"글쎄요 ‥‥‥
관리인은 자꾸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었다. 어째서 이런 것이 여
기에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혹시 괜찮다면 그 테이프, 좀 빌릴 수 있을까요?"
관리인은 대답을 하는 대신에 탁 하고 무릎을 펐다
"아, 생각났습니다. 방에 굴러다니고 있었어요. 전, 틀림없이 여기
비디오라고 생각해 가지고 왔는데요."
"이것이 있던 데가 B-4호 아닙니까?"
아사카와는 확인하듯 천천히 물었다. 관리인은 웃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건 기억 못하죠. 어쨌든 2개원쯤 전 일이라서요."
아사카와는 다시 한번 물었다.
"이 비디오 봤나요?"
관리인은 역시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져 있
었다.
"아뇨."
"그거 , 좀 빌려 주십시오."
"텔레비전 프로라도 녹화하게요?"
"아, 예 , 뭐‥‥‥
관리인은 비디오를 힐끗 보았다.
"탭이 부러져 있어요. 봐요, 녹화 방지 탭이 부러져 있죠?"
술기운도 한몫 거들어 공연히 초조했다. 빌려 달라고 했으면 얼른
건네 주면 되는 거야, 이 자식아!' 하고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하지
만 아무리 취해도 아사카와는 다른 사람에게 강압적인 태도로 나갈
수 없었다.
"부탁합니다. 긍방 돌려 드릴 테니까요."
아사카와는 머리를 숙였다. 관리인은 이 손님이 왜 이런 젓에 흥미
를 나타내는지 이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가운데 재미있는 영상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어쩌면 지우는 것을깜빡한 비디오라든가‥‥
왜 처음 발견했을 때 보지 않았던가 하고 후회했다. 지급 당장 보고
싶은 유혹에 사로잡혔지만 손님에게 부탁을 받았는데 싫다고 할 수
는 없는 일이다. 관리인은 테이프를 내밀었다. 아사카와는 지갑을 꺼
내려고 했지만, 관리인이 손으로 막았다.
"아뇨아뇨, 요금은 괜찮습니다. 받을 수 있는 게 아니죠."
"고맙습니다. 바로 돌려 드리겠습니다 "
아사카와는 테이프를 든 손을 가볍게 올려 보였다.
"재미있는 거라면 바로 돌려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관리인의 호기심은 확실히 자극을 받고 있었다. 여기에 진열되어
있는 비디오는 예전에 전부 본 것들뿐이어서 흥미의 대상에서는 제
외되어 있다
‥‥ 그건 그렇고, 왜 저것을 못 보고 지나쳤을까? 지루함에서 벗어
날 좋은 거리가 되었을 텐데. 하지만 뭐 , 시시한 텔레비전 프로를 녹
화한 것일지도 몰라.
관리인은 그 비디오테이프가 바로 돌아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다.
비디오테이프는 맨 앞으로 되감겨 있었다. 어디에서나 구할 수 있
는극히 평범한 120분짜리 테이프로,관리인이 말한 대로 녹화 방지
용 탭이 부러져 있었다. 아사카와는 비디오 스위치를 켜고 테이프를
밀어넣었다. 텔레비전 화면 바로 앞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재생 버
튼을 눌렀다. 테이프가 회전하는 소리. 아사카와는 이 가운데 네 사
람의 죽음의 수수께끼를 풀 열쇠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를 가지고 있었다 아주 조그만 단서라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
로도 만족하겠다는 기분으로 재생 버튼을 누른 것이다. 위험은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비디오를 보는 것 때문에 초래되는 위험 따윈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잡음과 함께 화면이 일단 심하게 흔들렸지만 채널을 조작하자 바
로 진정되고 브라운관은 먹물을 망질러 놓은 것처럼 다시 흑색으로
칠해졌다. 이것이 이 비디오의 첫 번째 장면이었다 소리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고장이라도 났나 하고 아사카와는 얼굴을 가까이 댔
다. '경고!이것을봐서는안된다. 후회할걸' 이와다슈이치의 말이
되살아난다 후회 따윈 할 리가 없다. 아사카와는 익숙해져 있었다.
예전에는 사회부 기자였던 것이다 어떤 잔혹한 영상을 보게 될지라
도 후회하지 않을 만한 자신이 있었다.
새까만 화면에 바늘 끝만한 빛의 점이 나타났다 명멸하기 시작하
는가 싶더니 그것이 서서히 부풀어 좌우로 날아다니다가 이윽고 왼
쪽 구석에 고정되어 갔다. 그리고 가지를 뻗어 나가더니 양끝이 터진
빛의 다발 모양으로 지렁이처럼 기어 돌아다니면서 여섯 개의 글자
를 만들어 내려 하고 있다. 텔롭(텔레비전 화면에 글자나 사진을 투
사 ·삽입하는 기기 . 역자주)등으로 불러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새까만 반지 (반지, 주로 붓글씨를 연습하는 일본 종이 :역자 주)에 하
얀 붓으로 몹시 서툴게 써 놓은 글자 같다. 그래도 그럭저럭 다음과
같이 읽을 수 있었다
'끝까지 보아라.' 명령형이다. 일단 사라졌다가 다음 글자가 떠을
랐다 '망자에게 먹힐 것이다. 망자가 무엇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
지만 먹힌다는 말은 심상치 않다. 이 두 문구 사이에는, '그렇지 않으
면'이라는 접속사가 생략되어 있는 것 같다. 도중에 영상을 멈추게
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혼이 날 거다, 라고 협박하고 있는 것
이다.
망자에게 먹힐 것이다. 라는 글자가 그대로 확대되어 가면서 화면
에서 검은색을 쫓아 버렸다. 검정에서 유백색으로, 변화는 단조로웠
다 얼룩이 있는 유백색의 색채는 자연의 색이라고는 도저히 말하기
어려운 것으로 캔버스에 겹쳐 칠해진 갖가지 관념처럼 보였다. 꿈틀
거림, 고뇌, 출구 발견, 당장이라도 용솟음치려 하는 무의식 , 혹은 생
의 약동. 에너지를 지닌 사고(사고)가 짐승처럼 어둠을 포식해 갔다.
이상하다고 해서 정지 버튼을 누를 기분은 들지 않는다. 망자가 두려
워서가 아니다. 강렬한 에너지의 유출이 기분 좋아‥‥
모노크롬으로 생각되던 차면에 빨간색이 튀어올랐다. 그와 함께
땅울림이 어디서랄 것도 없이 들려온다. 혹 이 집 전체가 흔들리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착각할 정도로 방향성 없는 소리다. 작은 스피
커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다. 걸쭉하고 새
빨간 유체가 폭발했다가 흩어져 날고, 때로는 화면 전체를 점령해 데
리는 때도 있다. 검정에서 하양, 그리고 빨강으로 색이 격렬하게
변하기만 할 뿐, 아직까지 자연적인 광경은 나타난 것이 없다 추상
화된 관념과 색의 변화가 선명하고 강렬하게 뇌리에 새겨지면서 피
로마저 느끼게 했다. 그러자 보는 자의 심리를 읽어 냈는가 싶게 화
면에서 붉은 기가 씻은 듯 물러가고 완만한 산정을 가진, 언뜻 보아
도 화산이라고 알 수 있는 산 경치가 펼쳐졌다. 화산은 맑게 갠 하늘
을 배경으로 하얀 연기를 뭉게뭉게 피워 올리고 있었다. 카메라가 위
치한 곳은 산기슭 근처인 듯, 발밑은 울퉁불퉁한 흑갈색의 용암에 덮
여 있다.
다시 어둠에 둘러싸였다. 활짝 개어 푸르렀던 하늘은 순식간에 온
통 검게 칠해지고, 다음 몇 초 후 화면 중앙부에서 새빨간 액체가 용
솟음치더니 아래를 향해 흘러나간다. 두 번째의 폭발‥‥ 다시 치솟은
물보라는 붉게 타올라 그 때문에 희미하게 산의 윤곽을 판별할 수 있
다 앞부분의 영상이 추상적이었던 것에 비해 이번 것은 구체적이다.
분명히 화산 폭발이다. 자연계의 현상이며, 설명 가능한 장면이다.
분화구에서 흘러나온 용암은 산 표면을 타고 계곡 사이를 기으며 다
가오고 있다. 카메라는 어디에 위치하는 젓일까? 하늘에서 촬영한
것이라면 몰라도 이 상태로라면 용암에 먹혀 버릴 것이다. 땅울림이
커지고 화면 전체를 용암이 온통 메우기 직전, 장면이 싹 바뀌었다.
장면과 장면 사이에 연속성이 없는, 완전히 당돌한 변화였다.
백지에 검고 수은 글자가 떠올랐다. 윤곽이 희미해져 있기는 하지
만, 그럭저럭 '산' 이라는 글자로 읽을 수가 있다. 먹물이 뚝뚝 떨어
지는 붓을 난잡하게 휘두른 것처럼 , 크고 작은 검은 점들이 글자 주
위를 화려하게 꾸미고 있었다. 글자는 움직이지 않았으며 화면의 흐
트러짐도 없었다.
다시 갑작스런 변화. 두 개의 주사위가 등근 바닥의 납그릇 안을
굴러다니고 있다 배경은 백색, 납 그릇 안은 흑색, 그리고 주사위의
하나를 의미하는 점만이 적색 아까부터 이 세 가지 색이 많이 사용
되고 있다. 주사위는 소리 없이 천천히 글러가더니 이윽고 하나와 다
싯 개의 점을 위로 하고 멈추었다. 한 개의 빨간 점과 횐 바탕에 늘어
서 있는다섯 개의 검은점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다음 장면에 이르자 그제서야 사람이 등장한다. 얼굴이 온통 주름
투성이인 노파가 마루 위에 오도카니 앉아 무릊에 손을 얹고 왼쪽 어
깨를 약간내밀며 정면을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왼쪽 눈과 오른
쪽 눈의 7)
보일 정도다.
"·. ·그러고, 몸은 워쩌? 물노릇만 하고 있으면, 기신 씌워 . 알았냐?
먼대껀 조싱혀 . 니것은 맹년, 새끼가 붙허 . 기집이야. 할매가 말하는
거 들어 . 토백이도 괜찮잖혀 ."
노파는 무표정하게 그것만 말하고는 획 사라져 버렸다 의미 불명
의 말이 많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설교를 하고 있다는 것만은알수
있었다. 뭔가에 대해 주의하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이 노파는 도대체
누구에 대해, 누구를 향해 말을 걸고 있는 걸까?
갓 태어난 아기의 얼굴이 화면 가득 펼쳐졌다. 어디선지 모르게 갓
난애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역시 텔레비전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
리는 아니다 얼굴 밑, 바로 가까이 에서다. 실제로 곁에서 들려오는
소리 같다. 화면에 아기를 안고 있는 손이 보였다 왼손을 머리 아래
넣고 오른손을 등으로 돌려 소중하게 안고 있다. 예쁜 손이다. 화면
에 건을 잃고 빠져 있던 아사카와는 어느새 영상 속의 인물과 같은
손 모양을 하고 있었다.
울음소리가택 바로 밑에서 들려왔다. 아사과와는 놀라 자신의 손
을 거둬들였다. 감촉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미지근한 양수와 피. 그
리고 작은 살덩이의 무게. 아사카와는 무언가를 내던지듯 양손을 떨
쳐 버리고는 손바닥을 얼굴로 가까이 끌어당겼다. 냄새가 낭아 있었
다 망은 피 냄새. 모태에서 흘러나온 것일까?아니면‥‥축축한 촉
감도 느껴졌다. 그러나 실제로 손이 젖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사
카와는 영상으로 눈을 되돌렸다. 아직 아기의 얼굴이 비춰지고 있다
울고 있긴 해도 얼굴은 온화한 표정이 가득했고, 몸의 떨림은 가랑이
사이까지 전해져 달랑 붙어 있는 작은 그것까지 흔들고 있었다.
다음 장면은 백 개쯤 되어 보이는 사람들의 얼굴 어느 얼굴이나
증오와 적의를 담고 있다는 것 이외에, 달리 눈에 띄는 특징은 없다
평평한 화면을 메우고 있는 수많은 얼굴들이 서서히 화면 구석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하나하나의 얼굴 크기가 작아짐에 따라 얼굴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 마침내 대집단으로까지 부풀어 갔다. 머리만으로
이루어진 무리라는 게 이상하긴 했지만, 솟구쳐 오르는 음성이 대군
집의 그것을 연상시켰다 각각의 입들이 뭔가를 외치고 있는 가운데
숫자는 더욱 늘어 갔고, 또한 더욱 작아져 갔다. 뭐라 말하고 있는 걸
까? 잘 알아들을 수가 없다. 무리의 웅성거림 , 비난하는 것 같은 소
리 . 욕설 분명 환호나 갈채의 소리는 아니다. 겨우 한마디가 귀에 들
어온다.
거짓말쟁이 !' 라는 단어 . 그리고 또 하나. '사기꾼!'
얼굴수가천 개를넘은 듯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 숫자는 계
속 늘어만 갔다. 비례해서 소리도 커져 갔다. 만이라는 숫자를 넘긴
얼굴들은 검은 입자처럼 화면을 가득 메우게 되었다. 이윽고 꺼 놓은
브라운관 같은 색으로 변해 버렸지만 소리만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마침내 소리마저 사라지고 약간의 잔향만이 귓가에 남았다. 잠시 동
안 화면은 그 상태 그대로 정지해 버린 것처럼 보였다. 아사카와는
왠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자기 자신에 대한 요란한 비
난이다‥‥ 그런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화면이 바뀌자, 나무로 만들어진 받침 위에 한 대의 텔레비전이 놓
화면이 바뀌자, 나무로 만들어진 받침 위에 한 대의 텔레비전이 놓
여 있는 것이 보였다. 로터리식 채널을 가진, 상당히 구형인 19인치
로, 토끼귀 모양의 실내 안테나가 나무로 만들어진 텔레비전 케이스
위에 얹혀 있다. 극 중의 극, 아니 텔레비전 속의 텔레비전. 화면 안
에 놓여 있는 텔레비전에는 아직 아무것도 비춰지지 않고 있다. 전원
은들어와 있는 듯 채널 손잡이 옆의 램프가 빨갛게 궈져 있다. 화상
속의 텔레비전 화면이 지지직 흔들렸다가는 원래대로 돌아왔다. 다
시 한번 지지직 화면이 흐트러진다. 그 간격이 짧아지는 것 같더니
희미하긴 하지만 하나의 글자가 떠올랐다. 그럭저럭 동'이라고 보
였다. 액'이라는 글자는 때때로 흐트러지고 비뚤어지면서 '여'라는
글자로 변하기도 하면서 사라져 갔다 칠판에 분필로 쓴 글자를 젖은
걸레로 닦아 내는 것 같은 방식의 차면 전환이었다.
보고 있는 사이 , 아사카와는 묘한 답답함에 사로잡혀 갔다 심장의
고동 소리가 들려오고, 동맥을 흐르는 피의 압박감이 느껴진다. 그리
고 냄새, 감촉, 혀를 찌르는 새콤달콤한 맛. 문득 생각났다는 것처럼
불쑥 펼쳐지는 영상과 소리 이외의 어떤 실체가 어떤 작용을 통해 오
감을 자극해 오는 것인지 이상하기 그지 없었다.
돌연 남자 얼굴이 나타났다 지금까지의 영상과는 달리 이 남자에
게는 살아 있다는 생명의 고동이 확실히 담겨 있었다. 보고 있는 동
안혐오감이 느껴졌다. 왜 자신이 혐오감을 품게 된 것인지 알 수없
었다. 특별히 추남인 것도 아니다 이마가 좀 벗겨지긴 했지만 어느
쪽인가 하면 괜찮은 남자의 부류에 들어간다. 다만 눈에 위험한 색이
담겨 있었다 사냥감을 노리는 짐승의 눈.사내는 얼굴에서 땀을 흘
리고 있었다 '하아 하아' 하고 거칠게 호흡하며 눈을 위로 치켜뜬
채 리드미결하게 몸을 움직이고 있다. 사내의 뒤로는 드문드문 나무
들이 우거져 있었고, 그 나무들 사이를 통해 오후의 태양빛이 들어오
고 있다. 사내가 위를 향하고 있던 눈을 정면으로 돌리자, 화면을 보
고 있던 자와 시선이 마주치게 되었다. 아사카와와 사내는 잠시 서로
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답답함이 치 밀어올라 아무래도 눈을 돌리
고 짚다. 사내는 침을 흘리고 있었으며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목덜
미가 서서히 클로즈업 되더니 그대로 획 화면 왼쪽으로 사라져 버렸
다.
잠시 동안 화면은 나무들의 검은 그림자만 비추었다 뱃속에서부
터 치솟아 오른 비명이 밖으로 뿜어져 나왔다 소리와 동시에 어깨,
목덜미, 다음으로 사내의 얼굴이 화면으로 돌아왔다. 벗은 채였던 사
내의 오른쪽 어깨 끝 살이 몇 센티나 도려내졌다. 그 상처에서 흘러
나온 핏방울이 카메라 쪽으로 빨려들어간 것처럼 커지더니 렌즈에
닿아 발그레하니 화상을 물들여 갔다 마치 눈을 깜박이듯이 화면은
한 번, 두 번 어두워졌다가는 밝기를 되찾았다. 영상은 이미 붉은 기
를 띠고 있었다. 사내의 눈이 살기를 띠었다. 얼굴과 함께 어깨가 다
가오고, 떨어져 나간 살점 아래로 서가 하얗게 엿보였다.
가슴을 덮쳐오는 강렬한 압박감. 다시 나무들이 우거진 풍경 . 하늘
이 돌고 있다. 저녁 어둠을 향한 하늘의 색, 마른 풀잎이 바스락바스
락 소리를 냈다. 땅이 보이고 풀이 보이고 다시 하늘이 보였다. 어디
선지 모르게 갓난애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조금 전에 나왔던 사내
아이의 울음소리일까 ‥‥ 이윽고 화면 주위에 어둠의 띠가 둘러쳐지
고, 서서히 그 고리를 좁혀 갔다. 빛과 어둠은 상당히 확실한 경계선
을 가지고 있었다.
화면 중앙 어둠 한가운데에 두둥실 떠오른 둥근 달이 자리잡고 있
다. 달속에 사내의 얼굴이 있다 달에서 주먹 크기의 덩어리가떨어
져 나오더니 둔탁한 소리를 낸다. 또 하나,그리고 또 하나. 소리와
함께 영상이 꿈틀거리며 흔들리다가 흩어진다.
살을 찢는 소리, 뒤이은 칠흑 같은 암흑, 그렇지만 고동 소리는 남
아 있었다. 콸콸거리며 피가 돌고 있다. 그 장면은 오래 이어졌다. 영
원히 끝나지 않는 게 아닐까 싶은 어등 처음과 똑같이 글자가 떠올
랐다.
첫 번째 장면의 글자는 아무리 보아도 몹시 서툰 것이어서 막 글자
를 배운 어린애가 쓴 글자를 연상케 했지만 마지막 장면의 그것은
다소 나아진 모습이다. 서서히 , 희미하게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하얀
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 영상을 본 자는 일주일 후 이 시간에 죽을 운명에 놓여 있다.
죽고 싶지 않다면, 지금부터 말하는 것을 실행에 옮겨라. 즉‥‥‥
아사카와는 꿀꺽하고 침을 삼키고는 눈을 크게 부릅뜨고 텔레비
.
전을 응시했다. 그런데 거기에서 화면이 싹 바뀌었다. 정말이지 완벽
.
.
.
.
1
상
한 변화였다 누구나가 한 번은 보았음직한 텔레비전 광고가 끼여든
것이다. 여름함의 번화가 풍경 , 가장자리에 앉은 유카타(여름에 입는
무명 홑옷으로, 여자들이 입는 유카타에는 화려한 무의가 장식되어
있어 가까운 곳에 나들이 갈때도 입는다 ' 역자주)차림의 여배우,
밤하늘을 장식하는 불꽃 모기향 CF다. 약 30초 정도의 CF가 끝나고
다른 장면이 들어오려는 순간, 화면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방금 전의
어둠, 그리고 마지막 글자가 사라지고 난 후의 잔상. 그곳으로부터
'사아일' 하는 잡음이 들려왔다.
비디오테이프는 모두 끝났다. 아사카와는 눈을 부릅뜬 채 테이프
를 되감아 마지막 장면을 재생했다 같은 장면의 반복‥‥ 중요한 부분
에 끼여든 불필요한 CF. 아사카와는 비디오를 멈추고 텔레비전을 껐
다. 그렇지만 여전히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목이 바싹 말라 있었
다
" · . ·뭐지 · . 이게."
달리, 도대체 뭐라 말하면 좋을까?의미를 알 수 없는 장면의 연
속, 그 가운데 단 하나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이것을 본 자는 정확히
일주일 후에 죽는다는 내용. 그리고 그것을 피할 방법이 기록되어 있
는 부분이 텔레비전 CF에 의해 지워져 버렸다는 것
누가 지운 거지? 그 네 사람일까?
턱이 덜덜 떨렸다 만일 네 명의 젊은이가 같은 시각에 죽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면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하고 웃어넘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알고 있었다. 그 말대로 네 사람이 의문
의 죽음을 당했다는 것을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아사카와는 그 소리에 심장이 튀어나을 것
만 같았다. 수화기를 들어 귀로 가져간다. 무언가가 몽을 숨긴 채 어
둠 속에서 가만히 이쪽을 엿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 . ·여보세요."
아사카와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 단어만 겨우 꺼낼 수 있었다. 대답
이 없다. 어둡고 좁은 장소에서 무언가가 소용돌이치고 있다. 땅울링
소리 같은 우웅-하는 낮은 소리와 축축한 흙냄새가 난다 귓가로
전해져 오는 냉기에 목덜미 부근의 모든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가슴에 가해져 오는 압박은 더욱 강해지고, 땅 속 깊은 곳을
기어다니던 벌레가 발목과 등으로 꿈틀꿈틀 달라붙어 기어오르며 간
지럽히고 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상념과, 시간이 지나 성숙된 증오가 수화기
를 통해 바로 옆까지 올라오고 있었다. 아사카와는 광 하고 수화기를 '
내려놓았다. 입을 막으며 차장실로 달려갔다. 등줄기를 달리는 오한
과 갑작스런 구역질. 전화 저쪽의 그것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아사카와는 의도하는 바를 알 수 있었다.
" ·봤지?알았나,말하는대로하는거야‥‥그렇지 않으면·.. "
아사카와는 면기 위에 토해냈다 토할 것도 별로 없어서 조금 전
에 먹은 위스키가 시큼한 위액과 함께 입에서 흘러나왔다. 눈에 스며
들어 눈물이 번진다. 위액이 코로 올라와 고통스러웠다 그래도 지
금, 여기에서 전부 토해 내면 방금 본 영상도 함께 흘러나와 버릴 것
만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 어떻게 하란 말야?방법을 모른단 말이야,」 난
뭘 하면 되는 거지?"
화장실 바닥에 주저앉아 아사카와는 공포에 질세라 큰 소리를 질
러 댔다.
"봐 달란 말야, 놈들이 지워 버렸어. 중요한 부분을‥‥ 나, 난 알 수
없단 말야. 용서해 달라구."
어쨌든 변명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아사카와는 화장실에서 뛰쳐
나와 보기 흥한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볼 여유도 없이 온 방 안을 두
리번거리며 어느 곳에 있을지도 모르는 어떤 것에 굽실굽실 머리를
숙이며 애원했다.
어느 사이엔가 상대의 동정을 원하는 얼굴이 되어 있다는 것을 본
인은 알지 못했다. 아사카와는 일어나 싱크대에서 입을 헹구고 물을
마셨다. 바람이 스며들어왔다. 거실 창문을 보았다. 커튼이 흔들리고
있다.
· .아니 , 아까 닫았었는데.
분명 커튼을 닫기 전에 새시로 된 유리문을 단단히 잠갔던 터였다
틀림없다. 흔들림이 멈추지 않는다. 까닭 없이 그의 뇌리에 도시의
초고층 빌딩 야경이 떠올랐다 빌딩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바둑판 무
의의 창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켜졌다 꺼졌다 하며 어떤 글자를 만들
어 내려 하고 있다.
빌딩 자체가 직사각형 모양의 거대한 묘비이고, 빛에 의해 모양이
만들어지고 있는 글자는 묘비명처럼 보였다. 그 이미지가 사라진 후
에도 횐 레이스의 커튼은 등실등실 춤을 추고 있었다.
아사카와는 거의 반미치광이가 되어 벽장에서 가방을 꺼내 짐을
정리했다. 1초라도 여기에 더 이상 머물 수는 없다
·누가 뭐라든, 여기에 더 있다간 일주일은커녕 하룻밤 만에 내 목
숨이 끝나 버릴 거야.
그는 셔츠에다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현관에 내려섰다 바깥으로
나서기 전에 이성을 발동시켰다. 그저 단순히 공포심에 쫓겨 도망치
려는 것만으로는 안 돼. 스스로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 순간
적으로 솟구쳐 오르는 생존에의 본능.
아사카와는다시 한번 방으로 돌아가 비디오테이프의 '꺼냉' 버튼
을 눌렀다. 목욕 타월로 비디오테이프를 둘둘 감아 가방 안에 넣는
다. 단서는 이 테이프뿐이다. 두고 갈 수는 없다. 연속된 장면의 수수
께끼가 풀리면 혹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 발견될지도 모른다. 그러 ·
나 그렇다고 해도 기한은 단 일주일.
시계를 보았다. 11시 8분을 가리키고 있다. 테이프를 다 본 것은
확실히 10시 40분경이었다. 이제 시간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
다. 아사카동호근 방 열쇠를 테이블 위에 놓고 방 조명을 환하게 켜둔
채 밖으로 나와 관리실에도 들르지 않고 곧장 자기 차로 달려가 키를
꽃았다.
"혼자서는 무리야. 그 녀석의 도움을 빌리자."
혼잣말을 하면서 아사카와는 시동을 걸었지만, 백미러가 마음에
걸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액셀을 아무리 세게 밟아봤자 안타
까을 정도의 스피드밖에 나지 않는다. 꿈 속에서의 추적극 같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백미러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의 뒤를 쫓는 검은
그림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제5장
돌풍(돌풍)
아사괴와는
물 바유 위에서 로프에
[H롱대롱 매달린 간 낼려서지 운아고 있었다.
한쪽 발을 뻗어 목욕물의 온도를 알아보는 것것렴 복사때까지
물에 담가 망았다. 섬뜩한 감촉과 암께 발끝에서부터 등에 이르긴까지
소름이 게져 아사카와는 바로 발을 류다. 땅 업에서 많은 대이
뻗어나와 자신을 내보물 속으로 잡아당각서고 하는
듯안 느낌이 들었다. 앞에서도 옆에서도
벽이 압박해 온다. 이제
운망칠 길은 남다
10월 12일 금요일
"우선 그 테이프를 보여 줘 ."
다카야마 류지는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록본기 교차로에 자리
한 커피숍 2층 10월 12일 금요일. 오후 7시 20분. 아사카와가 비디오
를 보고 난 지 24시간이 지나려 하고 있다. 여 자애들의 유쾌한 목소
리에 둘러싸이면 공포의 감정도 다소나마 엷어지지 않을까 싶어 일
부러 번잡스러운 록본기를 만남의 장소로 골랐던 것이지만 조금도
위안이 되어 주지 않았다. 이야기해 나갈수록 어젯밤의 사건이 선명
하게 되살아나,공포심이 약해지기는커녕 커져 가기만했다 몸에 씌
인 무엇인가의 그림자가 몸 한구석에서 갑작스레 느껴지는 일조차
있었다.
류지는 와이셔츠의 제일 윗 단추까지 채우고 넥타이도 바싹 맨 채
풀려고 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목 주위의 살이 이중으로 부풀어올라
보고 있는 쪽을 답답하게 만든다. 이 각진 얼굴로 웃어 보이기라도
하면 보통 사람들로서는 징그러운 인상을 받고 말 것이다.
류지는 유리잔에서 얼음을 꺼내 입에 처넣었다
류지는 유리잔에서 얼음을 꺼내 입에 처넣었다
"· . ·못 들었냐? 내 얘기. 위험하다고 했잖아."
아사콰와는 목소리를 누르며 말했다.
"그럼 왜 나한테 얘길 꺼냈냐? 도와 줬으면 하는 거지?"
류지는 볼에 웃음을 띄운 채 입 안의 얼음을 와작와작 깨부순다.
"비디오를 안 보더라도 도을 방법쯤은 있어 ."
류지는 약간 머리를 숙이고 고개를 저었다 얼굴에는 아직 엷은 웃
음이 가시지 않았다. 아사과와는 갑작스런 분노가 덮쳐와 신경질적
으로 소리를 질렀다.
"너 , 안 믿는 거지 ! 내가 얘기한 거‥‥‥
폭탄이란 것을 알지 못하고 풀어헤친 소포처럼 아무 준비도 없이
비디오를 보고 만 아사카와로서는 달리 류지의 건들거리는 웃음을
설명할 말이 없었다. 그런 공포를 경험한 것은 처음이다. 게다가 끝
난 것이 아니다. 앞으로 6일 간. 공포가 싸목싸목 올가미를 조여 오고
있다. 저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죽음이다. 그런데도 이 녀석은
자진해서 그 비디오를 보고 싶다는 따위의 말을 하고 있다.
"소리지르지 마. 내가 안 무서워하는 게 불만이냐? 말이다, 아사카
와, 전에도 얘기한 적이 있지만 난 만일 볼 수만 있다면 세상의 종말
을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는 인간이야.이 세상치 구조,다시 말해 ,
시작과 종말의 수수께끼 , 극대와 극소의 수수께끼를 해명해 주는 녀
석이 있다면 목숨과 바꿔서라도 그 녀석의 지식을 괄어내겠어 . 넌 내
얘길 활자화했잖아, 기억하고 있을 텐데."
물론 아사카와는 기억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류지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있는 것이다.
처음 기획을 세운 것은 아사카와였다. 2년 전, 아직 그가 30세였을
때, 자신과 같은 나이의 일본 청년이 어떤 것을 생각하고, 어떤 꿈을
갖고 살고 있는가 하는 의문을 지닌 적이 있었다. 기획은 통과되었
다. 통산성의 관료,도의회 의원, 일류 종합상사 사원에서부터 극히
평범한 샐러리맨까지 다양한 세계에서 활약하고 있는 30세의 청년을
뽑아,독자가 알고 싶어할 만한 기본적인 데이터부터 개성에 이르기
까지 한정된 지면 속에서 50이라는 연령을 분석해 보려 했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뽑힌 십여 명 가운데에서 아사카와는 고등학교 동창생
인 다카야마 류지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직함은 K대학 문학부
철학과 시간 강사. 그것을 본 아사카와는 놀랐다. 류지는 의학부에
진학한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취재는 아사카와에게 떨어졌다. 다양한 직업 가운데 하나로서 그
가 리스트업된 셈이었는데 류지는 30세의 햇병아리 학자를 대표하기
에는 너무나도 강렬한 개성을 가지고 있었다. 고교 시절부터 손대기
어려웠던 성격이 더더욱 갈고 닦여진 것처럼 여겨졌다. 그는 일단 의
학부를 졸업하긴 했지만 철학과에 편입했고, 바로 그 해 박사 과정을
마친 참이었다. 만일 소교 자리가 비었더라면 틀림없이 그 자리를 차
지했을 테지만 운 나쁘게도 그 자리에는 이미 다른 선배가 앉아 있었
다 결국 그는시간 강사자리를 얻어 일주일에 두번 모교에서 논리
학 수업을 담당하게 되었다
현재, 철학이라고 하는 학문 분야는 과학과 지극히 가까운 위치에
놓여있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따위의 '싱거운관념을즐
기는 것=철학'이 아닌 것이다. 전공이 논리학이라도 되는 경우에는
순자가 빠진 수학을 연구하는 것과도 같다. 일찍이 고대 그리스에서
는 철학자는 동시에 수학자이기도 했다. 류지도 마찬가지로 문학부
강사이기는 했지만 머리의 회로는 과학자의 그것이었다 그런데 전
문 분야에서의 지식은 물론이거니와 그의 초심리학(초심리학)에의
조예는 보통의 깊이가 아니었다. 아사카와에게는 모순으로 받아들여
졌다. 초심리학, 즉 초능력이나 신비주의류는 과학의 논리에 반하는
것이 아닌가 류지는 대답했다‥‥그 반대다. 초심리학은 세계의 구
조를 해명하는 하나의 키워드이다. 한여름인데도 스트라이프가 들어
간 긴 소매의 셔츠를 입고, 오늘처럼 셔츠의 제일 윗 단추까지 잠그고
있던 류지는 말했던 것이다
"나는 인류의 멸망 순간을 맞이하고 싶다. "
숨막히게 더운 얼굴에 땀을 흘리면서 말했던 것이다. 그리고 세계
의 평화와 인류의 존속을 외치는 패거리는 불쾌하다고도.
취재중에 아사카와는 이런 질문을 했다.
‥‥ 장래의 꿈을 들려 달라.
류지는 태연히 대답했다.
‥‥ 언덕 위에서 인류가 멸망하는 광경을 구경하면서 대지에 구멍 '
을 파고 그 구멍 속에 몇 번이고 계속해서 사정하는 것
아사카와는 확인을 했다.
· 야, 정말 그런 걸 써 버려도 되겠냐?
류지는 역시 , 지금과 마찬가지의 망은 웃음을 띄우고 끄덕였을 뿐
이다.
"그러니까 나한텐 무서운 것 따윈 없어,"
류지는 그렇게 말한 다음 획 하고 아사카와 쪽으로 얼굴을 들이밀
었다.
"어젯밤, 또 한 사람 해치웠어 ."
‥‥ 또?
아사카와가 아는 한 세 번째의 희생자다. 첫 번째를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 두 사람 모두 가와사키 시 다마 구에 있는 집에서
공립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아사카와는 매일 아침 수업이 시
작되기 한 시간 전에 학교에 도착해 상쾌한 아침 시간대를 이용해 그
날 예습을 하는 습관이 있었다. 학교에서 일하는 사람을 빼면, 언제
나그가 학교에 처음 들어오는 사람이었다 그에 비해 류지는 1교시
수업을 제대로 나온 적이 없다고 할 만한 지각 상습범 .
그런데 여름 방학이 막 끝난 어느 날 아침, 아사카와가 평소대로
학교에 도착했을 때, 웬일인지 먼저 나와 있던 류지가 교실 책상 위
에 멍하니 걸터앉아 있었던 것이다 '이야, 웬일이냐?' 하고 아사카
와는소리쳤다 꺼,뭐.' 무뚝뚝하게 그렇게 대답했을뿐,류지는 안
중에도 없다는 모습으로 창문을 통해 교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
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노에도 붉은 기가 돌았으며 토해내는 숨
결에서 술냄새가 약간났다. 특별히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 이상의 대화는 계속되지 않았고, 아사카와는 평소와 같이 교과서
를 펼치고 예습에 들어갔다. 그런데 잠시 지나자 소리도 없이 아사카
와의 등뒤로 다가온 류지가 '야, 너한테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
데‥‥‥ 하고 그의 등을 두드렸던 것이다. 류지는 개성이 강했지만 공
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는 학생이라 학교에서 인정받는 존재였다
별다른 특색이 없었던 아사카와로서는 류지 같은 동급생한테 무언가
부탁받는다는 것이 륜지만은 않았다
"실은 말야, 우리 집에 전화 좀 걸어 줄래?"
류지는 허물없이 아사카와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는 말했다.
"좋아. 근데, 뭣 때문에?"
"그냥 걸기만 하면 돼. 전화해서 날 바꿔 달라고 해 "
아사카와는 얼굴을 찡그렸다.
'◎· .◎ 하지만, 런 여기 있잖아?"
"됐으니까, 그렇게 해 달라구."
들은 대로 번호를 돌렸다. 류지 어머니가 전화를 받자, '류지 좀 부
탁합니다' 라고 바로 눈 앞에 있는 사랑을 불러 냈다.
'처, 류지는 지금 학교에 갔는데 ."
어머니는 온화하게 대답했다
"아아, 그렇습니까."
아사귀와는 수화기를 내려 놓았다.
"이렇게 하면 되는 거냐?"
아사카와는 석연치 않았다 이런 짓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뭐 이상한 거 없었냐?"
류지가 물었다.
"어머니 목소리 , 긴장하고 있지 않았어?"
'단로, 아무것도‥‥‥
아사카와로서는 류지 어머니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던 것이지만,
특별히 긴장의 울림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 같지는 않았다.
"등 뒤에서 왁자지껄하는 사람 소리가 났다든가‥‥‥
"아니, 별로. 그런 건 없었어. 아주 평범한 아침 식탁 분위기야."
"그래? 그러면 됐어 . 고마워 ."
"이봐, 무슨 일이냐?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류지는 왠지 안심했다는 표정을 띄우며 아사카와의 어깨에 팔을
두르더니 확 하고 자기 쪽으로 얼굴을 끌어당기고는 입을 귓가에 가
져갔다.
"넌, 입도 무거을 것 같고 믿음이 간다. 그러니까 얘기해 주지 . 실
은 말야, 나, 오늘 아침 5시경 여자를 범하고 왔어 ."
아사카와는 놀란 나머지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새벽 5시경, 류
지는 아파트에 혼자 사는 여대생 방에 몰래 들어가 폭행한 다음, 경
찰에 고발하면 용서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그 길로 학교에 왔
다는 것이다. 그래서 혹 오늘 아침 경찰이 집에 와 있지는 않을까 하
고 마음에 걸려 아사카와에게 전화를 걸게 해서 집 안의 상황을 살피
게 했던 것이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아사카와와 류지는 자주 말을 나누게 되었다
물론 아사카와는 류지의 범죄를 다른 사람에게 퍼뜨리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듬해, 류지는 고교 대항 투포환 대회에서 3위
에 입상했고,또 그 이듬해에는 K대학 의학부에 입학했다. 아사카와
는 그 다음해에야 겨우 유명 대학 문학부에 합격했던 것이다.
아사카와는 자신이 진짜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실은
류지에게도 그 비디오를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이다. 내용을 입으로 말
하는 것만으로는 그의 지식과경험을유용하게 이용하기 어렵다 그
렇지만 한편에는 자기가 살아남기 위해 남까지 끌어들이는 것은 좋
지 않다는 윤리판이 자리잡고 있었다. 갈등이긴 하지만, 양팔 저울에
달아 보면 어느 쪽이 무거울지 뻔히 알고 있었다. 살아남을 가능성을
될 수 있는 한 크게 만들고 싶다.
그건 그렇고· 난 어째서 이런 녀석을 친구로 삼고 있는 것일까 하
는,늘품고 있던 의문이 문득 솟구쳐 오른다 신문사에 들어간지 10
년, 취재를 통해 알게 된 사람은 수도 없이 많다. 그렇지만 웬일인지
서로 불러내서 술을 마실 만한 사이로 발전한 것은 류지 이외에 없
다. 동창이기 때문에? 아니 , 동창생이라면 그 외에도 몇 사람이나 있
다 류지가 지닌 특이성에 끌리는 무언가가 마음 밑바닥에 존재하고
있음을 생각하니 아사카와는 문득 자기 자신조차 알 수 없게 되고 마
는 것이다.
'떠이 , 서두르자고. 낭은 시간은 앞으로 6일뿐이잖아?"
류지는 아사카와의 두 팔을 잡더니 꽉 하고 쥔다. 힘이 세다.
"빨리 나에게도 그 비디오를 보여 달라구. 때를 놓쳐 네가 가 버리
면 내가 외롭지 않겠냔 말야,"
류지는 아사카와의 팔을 리드미컬하게 비비면서 손도 안댄 채 접
시에 남아 있는 치즈 케이크를 포크 끝으로 찔러 입으로 옮겨 넣고
질겅질겅 씹기 시작했다. 류지에게는 무엇을 씹을 때에 입을 닫는 습
관이 없었다. 바로 눈앞에서 입 안의 케이크가 타액과 섞여 녹아 가
는 모습을 보고 있던 아사카와는 구역질이 나기 시작했다. 각진 얼
굴, 땅딸막한 체형 , 그런 사내가 치즈 케이크를 질겅거리면저 유리컵
의 얼음을 손으로 끄집어 내서는 와작와작 일부러 큰 소리를 내며 깨
물어 먹고 있다.
아사카와는 깨달았다 이 녀석말고는 의지가 될 만한 놈이 없다고
‥‥상대는 정체 불명의 악령이니 보통 사람으로는 당해 낼 수 있을
리 없다. 그 비디오를 보고도 태연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류지 정도
뿐일 것이다 독은 독으로 다스린다. 그 이외에는 없다. 만일 류지가
죽을 운명에 빠진다 한들 무슨 상관인가?인류의 멸망을 보고 싶다
고 지껄이는 놈은 오래 살 자격이 없는 거다
아사카와는 그렇게 생각하며 생판 남인 류지를 끌어들이려는 행위
를 정당화시키고 있었다.
두 사랑은 택시로 아사카와의 아파트로 향했다. 록본기에서 키타
시나가와까지는 길이 막히지 않으면 20분도 걸리지 않는다 룸미러
는 운전기사의 이마만 비추고 있었다. 입을꼭 다문 채 핸들에 한손
을 얹은 그는 손님에게 말을 걸려고 하지 않았다. 원인을 따져 보면
택시 운전기사의 수다가 발단이었다 만일 그 시간, 그곳에서 택시를
잡지 않았다면 이런 기괴한 사건에 휘말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
사카와는 보름 전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리 귀찮았어도
표를 사 가지고 몇 번이나 갈아타든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갔어
야 했다고 후회했다.
"너희 집에서 더빙할 수 있냐?"
류지가 물었다. 직업상, 아사카와는 두 대의 비디오를 갖고 있었
다. 한 대는 보급하기 시작했을 무렵에 구입한 것으로 성능은 좨 뒤
떨어진 것이지만 복사를 뜨는 정도라면 그다지 문제될 것이 없었다.
"할 수 있어."
-그래? 그럼 바로 복사 좀 해 줘 . 내 방에서 몇 번이고 찬찬히 보면 1
서 연구하고 싶어서 말야."
‥‥든든하다, 아사카와는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의 아사카와는 그
정도 말만으로도 간단히 용기를 얻을 정도였다.
집 근처에서 택시를 내려 걷기로 했다. 9시 lo분 전. 이 시간이면
아직 아내와 아이가 자지 않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아내인 시즈카는
늘 9시 조금 전에 딸을 목욕시킨 다음 바로 이불로 들어가 딸 옆에서
곁잠을 자는 동안에 자신까지 함께 잠들어 버리곤 한다. 그리고 일단
잠들어 버리면 일단 자력으로는 이불에서 나오지 못한다 시즈카는
될 수 있는 한 남편과의 대화 시간을 가지려 했기 때문에 이전에는
'깨워 주세◎라는 메모를 반드시 테이블 위에 남겨 두었다. 일하고
돌아온 아사카와는 그 말에 따라 일어날 의지가 있을 것이라 믿고 아
내를 흔들어 깨웠다. 그런데 도무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래도
무리하게 깨우려 들면 아내 시즈카는 머리 위의 파리를 쫓는 것처럼
양손을 휘두르며 불쾌하게 얼굴을 찡그리고 싫은 소리를 지른다. 반
은깨어 있지만,자려고 하는 힘 쪽이 훨씬 강한 모양이어서 아사카
와는 헛수고 끝에 물러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일이 반복되는사이
에 아사카와는 메모를 봐도 시즈카를 깨우지 않게 되었고 시즈카 역
시 메모를 놓아 두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바야흐로 밤 9시는 아무도
침범하지 못하는 시즈카와 하루코의 취침 타임이 된 것이다.
오늘 같은 경우, 오히려 그것이 도움이 되었다 시즈카는 류지를
싫어하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라서 아사카와는 그 이유를 들어 본 적
도 없었다‥‥부탁이니까 이제 그 사람 집으로 불러들이지 말아 줘
요.그렇게 말하던 때의, 노골적으로 혐오감을 드러내던 아내의 얼
굴을 아사카와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시즈카와 하루
코가 보는 앞에서 그 비디오를 틀 수는 없는 일이다.
방은 어둡고 쥐죽은 듯 고요했다. 현판까지 수증기와 비누 향기가
흘러나와 일었다. 두 사람은 젖은 머리에 타월을 대고 막 이불에 들
어간 모양 같다. 칭실 문에 귀를 대고 아내와 딸이 자고 있는 것을 확
인하고 난 아사카와는 거실로 류지를 안내했다.
"아이는 자냐?"
유감스러운듯류지가말했다. '쉿' 아사카와가손가락을 입에 갖
다 댔다 이런 일로 잠을 깰 시즈카가 아니긴 하지만 평소와 달리 이
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어슬렁어슬렁 일어나 나오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아사카와는 비디오 두 대의 출력 단자와 입력 단자를 연결한 뒤 예
의 테이프를 밀어넣었다. 재생 버튼을 누르기 전,류지의 얼굴을 보
며 정말로 재생해도 좋은가 하고 말없이 의지를 확인했다.
"뭐 하는 거야? 빨리 재생시켜 ."
텔레비전 화면을 응시하는 류지는 눈을 피하는 일 없이 재촉했다.
아사카와는 류지의 손에 리모컨을 쥐어 주고 일어나 창가로 갔다. 다
시 볼 기분이 나지 않았다. 사실 몇 번이라도 보면서 냉정히 분석하
지 않으면 안 될 것이지만,이제는 더 이상 이 사건을 추적하겠다는
기력조차 솟지 않는다. 여하간에 도망치고 싶다. 단지 그뿐이었다
지 어긴 적이 없었다. 결혼한 지 만 3년이 지났지만 부부 사이는 좋은
편이다. 귀여운 딸을 낳아 준 아내의 의견을 아사카와로서는 무시할
수 없었다.
발코니에서 방 안을 들여다보니 불투명한 유리를 통해 보이는 화
상이 흔들리고 있었다 빌라로그캐빈에서 혼자보는 것과,자고 있
긴 해도 세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곁에 두고 번화가의 아파트 6층에
서 보는 것과는 공포심의 정도가 전혀 달랐다. 그러나 류지라면 같은
상태에서 보았다고 해도 꼴사납게 당황하거나 눈물을 흘리는 따위의
일은 없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만은 실실 웃으며 욕지거리를 해 가
면서 상대를 위협하는 눈초리로 화상을 봐 주길 바랐다.
담배를 다 피우고 발코니에서 방으로 돌아오려던 바로 그때 , 복도
와 주방을 사이에 둔 문이 열리더니 잠옷 차림의 시즈카가 나타났다.
아사카와는 당황해서 테이블 위의 리모컨을 조작해서 화상을 일시
정지시켰다.
"자지 않았어?"
아사카와의 음성에는 비난의 기색이 스며 있었다.
"무슨 소리가 들려서 요."
시즈카는 말하면서 싸아-싸아- 하는 소리를 내며 흔들리고 있
는 화면과, 류지와, 아사카와를 차례로 돌아보았다. 미심쩍다는 표정
을 얼버무리면서‥‥
"자!"
일체의 질문을 거부하는 어조로 아사카와는 말했다.
"괜찮으시면 사모님도 같이 보시죠. 이거 재미있어요."
바닥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채로 류지가 얼굴을 돌렸다. 아사카
와는 류지에게 호통을 쳐 주고 싶었다. 그렇지만 말로 하는 대신 머
릿속 생각 모두를 주먹에 담아 테이블을 힘껏 내리쳤다 그 소리에
움찔한 시즈카는 허등대며 문 손잡이에 손을 대더니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얼굴을 조금 숙이며 '그럼 편히 쉬다 가세◎ 라고 류지에게 인
사했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문 저쪽으로 사라져 갔다. 한밤중에 남
자 둘이 비디오를 틀었다 껐다‥‥ 아내가 어떤 상상을 하고 있을지
아사카와는 짐작하고도 남았다. 가늘게 뜬 눈에 경멸의 빛이 떠올랐
던 것을 놓치지 않고 보았다. 류지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사내의
본능에 대한 경멸. 아사괴와는 아내에게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는 것
이 괴로웠다.
아사카와의 기대대로 류지는 마지막까지 보고도 태연했다. 그는
콧노래를 부르면서 테이프를 되감았다가 빨리 감기와 정지를 반복하
면서 다시 한번 포인트를 확인해 나갔다.
"이걸로 나까지 말려든 셈이군 네가 가진 시간이 6일, 내가 7일."
류지는 게임에 참가할 수 있어 기쁘다는 듯 말했다
"어떻게 생각해?"
아사카와는 류지의 의견을 물었다.
"애들 놀음 아닐까7"
"뭐 ?"
"애들 때, 자주 이런 짓 하지 않았냐? 무서운 그림 같은 걸 보여 준
다음, 이걸 본 사람은 불행해진다는 따위의 말로 친구를 겁주고는 하
잖아. 아니면 행운의 편지라든가."
아사카와도 그런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여름밤에 들었던 괴담에
도 비슷한 패턴의 내용이 있었다.
"그래서?"
"아니 , 아무것도. 다만 그렇게 느껴졌을 뿐이야."
"그 밖에 뭔가 눈치챈 게 있으면 말해 봐."
"글쎄, 영상 자체는 그다지 무서운 것 같지 않군 현실적인 것과 추
상적인 것이 섞여 있는 것처럼 보여 만일 네 명의 남녀가 이 말대로
죽어 버렸다는 사실만 없다면, '흥, 이런 거' 하고 코웃음쳐 버렸을
거야. 안 그래?"
아사카와는 끄덕였다 어쨌거나 그는 비디오의 말이 거짓이 아니
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먼저 네 명의 멍청이가 왜 죽었는가,그 이유를 생각해 보자.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겠지.비디오의 마지막에서 '이것을 본 자는
모두 죽을 운명이다' 라고 말한 그 직후의 주문(fR문) ‥‥ 이봐, 지금
부터 죽음의 운명에서 도망칠 방법을 주문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그
럼 , 네 사람은 그 주문 부분을 지워 버렸기 때문에 죽음을 당한 것일
까?아니면 단순히 주문을 실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음을 당한 것
일까? 아니, 그 이전에 주문을 지워 버린 것이 진짜 그 네 사람인지
아닌지를 확인해 볼 필요가 있어. 어쩌면 네 사람이 봤을 때부터 이
미 주문이 지워져 있었을 수도 있거든 "
"확인한다니 , 어떻게? 네 사랑에게 물어 볼 수도 없잖아."
아사카와는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유리잔에 따라 류지 앞에 놓
았다
"바로 그거야. 보ㄹ』 "
류지는 비디오의 마지막 장면을 재생해, 주문을 지워 버린 모기향
CF가 끝나는 순간을 잡아 일시 정지시킨 다응 구분 동작 버튼으로 천
천히 돌려 나갔다. 지나쳐 버렸다. 되감고 다시 정지 구분 동작‥‥
그러자 짧은 순간, 테이블을 둘러싸고 앉은 세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
다. 아슬아슬하게 CF에 이어져 프로그램 장면이 걸려 있었던 것이다.
그 프로는 전국 네트워크를 통해 밤 11시부터 방송되는 나이트 기로,
세 명 중 한사람은 누구나 알고 있는 백발의 대중 작가. 한 사랑은
젊고 아름다운 여자, 그리고 또 한 사람은 간사이 지방을 중심으로
활약하는 젊은 만담가였다 아사카와는 화면 가까이에 얼굴을 디밀
었다
"너 , 이 프로 알지?"
류지가 물었다.
'fiBS에서 방영 중인 나이트 쇼야."
"그렇지? 대중 작가는 MC, 여자는 보조 MC. 그리고 만담가는 이날
의 게스트인 거야. 그러니까 이 만담가를 게스트로 부른 날이 언제인
지만 알아 내면 네 사람이 주문을 지웠는지 어떤지 알 수 있어."
"· .·그렇군 "
나이트 쇼는 평일 밤 11시부터 방송된다. 만일 이 방송이 8월 29일
것이라면 지운 것은 그날 밤 빌라 로그캐빈에 묵은 그 네 사람이라는
것이 된다.
'fiBS는 네가 있는 신문사 계열이지? 간단히 알 수 있지 않겠어?"
"알았어 , 조사해 볼게."
"아, 부탁해. 우리들 목숨에 관계된 일이니까 말야. 어쨌든 어떤 일
이라도 좋아, 하나씩 하나씩 확실히 해 나가는 거야. 알았지 , 전우?"
류지는 아사카와의 어깨를 두드렸다 함께 죽을 운명에 있으니 전
우라는 표현을 사용했을 것이다
"너 , 무섭지 않냐?"
"무서워? 그 반대다 기한이 정해지다니 재미있잖아? 벌은 죽
음‥‥ 좋았어 . 목숨 걸기가 아니면 놀이가 재미 없어지지 ."
아까부터 류지는 정말로 즐거운 듯 떠들어 대고 있어서 , 애써 공포
를 감추려는 허세가 아닐까 하여 아사카와는 다소 걱정이 되기도 했
다. 하지만 그의 눈 속을 들여다보아도 한 점 두려움을 읽어 낼 수가
없었다.
"다음으로, 이 비디오를 누가 언제 어떤 목적으로 만든 것인지 조
사해 빌라 로그캐빈이 생긴 지 반 년이 되는 모양인데, 그 동안에 B-
4호에 묵었던 손님을 조사해서 비디오를 가지고 들어왔던 놈을 알아
내는 거야. 뭐 , 8월 하순으로 좁혀도 상관없겠지 가능성이 가장 높은
건 그 네 사람 바로 전에 묵었던 놈들이야."
"그것도 내가 알아봐야 하나?"
류지는 단숨에 맥주를 비우고 잠시 생각했다.
"당연하지. ·기한이 정해져 버린 거니까. 너하고 같은 족속으로
누군가 도움이 될 만한 놈은 없냐? 있으면 도움을 받자구 "
"이 사건에 흥미를 갖고 있는 기자가 한 명 있기는 있어 하지만 목
숨에 관계되는 거니까 그리 간단히는‥‥‥
아사카와는 요시노를 생각하고 있었다.
"상관없어. 마구 끌어들여. 이 비디오를 보여 주면 엉덩이에 불이
붙은 것처럼 뛰어 돌아다니지 않을 수 없을 거야.그런 것도 재밌잖
아"
"모두 너 같은 놈만 있는 건 아냐."
"그렇다면 불법 포르노 비디오라고 속여서 억지로 보여 줘 버리면
되잖아."
류지에게 상식적으로 이야기해 봤자 소용없는 일이다. 주문의 내
용이 』초지지 않은 한, 함부로 남에게 보여 줄 수는 없는 일이다. 아
사카와는 일이 막다른 골목에 빠져 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이 비디오
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조직적인 조사가 필요하지만
비디오의 성질상 쉽게 남의 손을 빌릴 수가 없다. 류지처럼 기꺼이
떤 반응을 보일까?그도 역시 처자식이 있는 이상,위험을무릅쓰면 f
서까지 호기심을 만족시괴려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비디오 '
를보지 않아도도와줄수 있는 일은 있다. 일단그에게만큼은지급 ·
까지의 경위를 얘기해 두어야 할지도 모른다
"알았어 . 만나 보지 ."
류지는 식탁에 걸터앉아 리모컨을 들었다.
"맞아맞아. 이건 추상적인 장면과 구체적인 장면, 크게 둘로 나눌
수 있겠어 ."
말을 이 어가면서 그는 화산 분화 장면에서 정지시켰다.
"봐, 이 화산 이건 아무리 봐도 현실에 실제로 있는 거야. 어째서
산이 나오는 건지 조사해야 돼. 게다가 이 분화, 산의 이름을 알면 분
화한 날도 알 수 있을 테니까 이 장면이 언제 어디에서 녹화된 것인
지 확실해지지 ."
류지는 다시 화상을 이동시켰다. 노파가 등장해서 영문 모를 말을
하는 장면이다.
‥‥어쩌 , 물노릇, 기신, 맹년, 기집 등 방언 같은 말이 박혀 있다.
"어딘가의 사투리일 거야. 우리 대학에 방언 전문가가 있으니까 그
치한테 물어 보자. 그렇게 하면 이 할머니의 출신지를 알 수 있을 거
야."
류지는 되감기를 눌렀다. 마지막 장면 가까이의 , 특색 있는 사내의
얼굴이 비춰졌다 이마에서 땀을 흘리며 '하아하아' 하고 거친 숨을
토해 내면서 리드미컬하게 몸을 움직이고 있는사내.그의 어깨살이
도려내지기 바로 직전 장면에서 류지는 화상을 스톱시켰다. 사내의
얼굴을 가장 크게 잡고 있는 장면이다. 이목구비에서 귀의 형태까지
상당히 분명하게 얼굴의 특징을 잡아 낼 수 있었다. 다소 벗겨진 머
리지만 나이는 30세 전후 정도일 것이다
"이 남자 본 기억 있어?"
류지가 물었다.
"있을 리가 없잖아."
"섬뜩한 면상을 하고 자빠졌군."
"네가 그렇게 생각할 정도니 이 사내도 대단한 거야. 경의를 표하
고 싶어지는걸."
"아아 그러도록 해. 이렇게 인상이 강한 얼굴은 그리 흔치 않아.
찾을 수 없을까? 넌 기자니까 조사에 관한 한 프로겠지?"
"말도 안 돼 범죄자라든가 연예인이라면 모르지만, 얼굴만으로 사
람을 찾아 낼 수는 없어. 일본 인구는 1억이 럼는단 말야."
"그러니까 범죄자 쪽으로 추적해 보면 어때?아니면 불법 포르노
비디오 쪽 배우라든가 "
아사카와는 대답을 하는 대신에 메모 용지를 끌어당겼다. 해야 할
일이 많아졌을 때 메모해 두지 않으면 잊어버리고 만다.
류지는 영상을 멍추었다. 그리고 제멋대로 또 한 병의 맥주를 냉장
고에서 꺼내더니 서로의 잔에 따랐다.
"건배하자!"
건배의 이유를 알 수 없는 아사과와는 잔을 들어올리려 하지 않는
다
'』 예감이 들어 ."
류지의 흙빛 뺨에 약간 붉은 기가 돈다.
"이 사건에는 보편적인 악의 이미지가 붙어 있어. 냉새가 란다구,
어딘지 모르게 그때의 충동이‥‥ 너한테 얘기했었지?내가 제일 처
어딘지 모르게 그때의 충동이‥‥ 너한테 얘기했었지?내가 제일 처
음 범한 여자에 대해."
"아아, 기억하고 있어 ."
'벌써 15년이나 전의 일이다 그때도 묘하게 가슴을 부추겨 오는
예감이 있었어 . 17세, 고교 2학년 때, 9월. 난 새벽 3시까지 수학 공
부를 하고 나서 한 시간 정도 독일어를 공부한 다음 머리를 쉬고 있
었어 늘 그렇게 하고 있었지.지친 뇌세포를 풀어 주기에는 어학이
딱 좋으니까 말야 4시가 되자 역시 평소처럼 맥주 두 병을 마시고 산
책을 나갔어. 나설 때부터 내 머리에는 평소와 다른 무언가가 싹트기
시작했지.심야의 주택가를 걸어 본 적 있냐?기분 좋지.개까지 잔
단 말야 난어느 아파트 앞까지 와 있었어.멋진 목조2층 건물이었
는데, 난 이곳 어디엔가 가끔 길에서 마주친 적이 있는 청초한 느낌
의 여대생이 살고 있다는 걸 기억해 냈지. 어느 방인지는 몰랐어. 난
여덟 개인 방 창문을 차례로 살펴 나갔지. 그때까진 별다른 속셈이
있어 둘러본 것이 아니었어.다만,왠지 말이야. 2층 남쪽끝에 눈길
이 멈추자 마음속에서 무언가 터져나오는 소리가 나더니 갑자기 마
음속에 싹트기 시작한 어둠이 서서히 커져 가는 걸 느낄 수 있었어
나는 다시 한번 차례대로 살펴보았지 . 역시 같은 곳에서 어둠이 소용
돌이치더군.분명히 확신할수 있었어 그 방에 열쇠가 잠겨 있지 않
다는 걸 말야. 단순히 잠그는 걸 잊어버린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
었지 . 난 마음속에서 생겨난 어둠에 이끌려 아파트 계단을 올라가 그
방 앞에 서게 됐어 . 문패에는 로마자로 쓰여 있었지 . YUKABU bMGTA.
난 오른손으로 문 손잡이를 세게 쥐었어. 잠시 그렇게 있다가 힘을
난 오른손으로 문 손잡이를 세게 쥐었어. 잠시 그렇게 있다가 힘을
담아 손잡이를 왼쪽으로 돌렸지.하지만 돌아가지 않았어 '이런 어
처구니 없는' 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찰칵 하고 소리가 나더니 문이
열리는 거야. 무슨 소린지 알겠냐? 잠그는 걸 잊은 게 아니라 그 순
간에 열쇠가 열려 버린 거지. 어떤 에너지가 작용해서 말야. 여자는
책상 옆에 요를 깔고 자고 있었어 . 틀림없이 침대에서 자고 있을 거
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렇지 않았어. 이불 옆으로 한쪽 발을 내밀고
류지는 거기에서 일단 말을 멈췄다. 그리고 그 다음 광경을 재빨리
뇌리에 재현시킨 듯, 가련함과 잔혹함이 뒤섞인 표정으로 먼 기억을
응시하는 것이었다. 아사카와는 이처럼 흐리터분한 류지의 얼굴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그로부터 이틀 후,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아파트 앞을지나
자니 2톤 트럭이 멈춰 서서 가구 등을 방에서 실어 내는 것이었어 . 이
사하려 했던 건 YUKARI였어. 아버지인 듯한 낭자 곁에서 YUKARI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멍하니 담에 기데서서 실어 내는 가구를 물끄러
미 보고 있었지.왜 갑자기 딸이 이사하는 건지 아버지는 진짜 이유
를 몰랐을 게 뻔해. 그렇게 해서 %BD%는 내 앞에서 모습을 감췄어 .
부모 집으로 돌아갔는지 , 아니면 주소를 바꾸고 이전과 같은 여대에
계속 다녔는지· . 어쨌든, 그 아파트에서는 단 1초라도 살 수 없었던
거야. 헤헤 , 불쌍하게도. 어지간히 무서웠던 모양이야."
아사카와는 듣고만 있어도 답답했다. 함께 맥주를 마시고 있다는
것조차 혐오스러워졌다
것조차 혐오스러워졌다
"너 , 그래서 꺼림칙하지는 않든?"
'벌써 익숙해져 버렸지. 매일 콘크리트를 주먹으로 쳐 봐,결국엔
통증 따윈 느끼지 않게 돼,"
· .그래서 지금도 같은 짓을 계속하고 있는 것인가? 아사카와는 두
번 다시 이 녀석을 집에 들여놓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맹세했다. 어
쨌든 아내와 딸 곁으로는 다가오지 못하게 하겠다고.
"걱정하지 마. 네 아이에겐 그런 짓 안 할 테니까."
마음속을 간파당한 것 같아 아사카와는 서둘러 얘기를 돌렸다.
"그런데 그, 예감이란 건 뭐야?"
"그러니까 악의 예감이지. 터무니없는 악의 에너지가 존재하지 않
는다면 이렇게 공들인 장난은 이루어질 수 없을 거야."
류지가 일어섰다 서 봤자 머리 높이는 의자에 앉아 있는 아사카와
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지만 160센티도 되지 않는 단신이면서도
전국 고교 대회의 투포환시합에서 입상한 적이 있는만큼 어깨 부근
에 부풀어올라 있는 근육이 멋지다.
"난 슬슬 돌아가겠어 . 숙제, 제대로 해 놔. 날이 밝으면 너한테 남
은 시간은 앞으로 5일."
류지는 한쪽 손을 펼쳐 보였다.
"알았어 ."
"어디선가 말이야, 악의 에너지가 소용돌이치고 있어 . 난 알아. 그
리운 향기가 나는 걸."
단정짓듯 그렇게 말하더니 류지는 복사된 테이프를 가슴에 껴안고
현관으로 나섰다.
"다음 작전 회의는 네 방에서 하자."
아사카와는 낮은 목소리로 분명히 말했다.
"알았어 , 알았어 ."
류지의 눈이 웃고 있었다.
류지가 돌아가자마자, 아사카와는 거실의 벽시계를 보았다. 결혼
축하 선물로 친구에게서 받은 것으로, 나비 모양을 한 붉은 추가 흔
들리고 있었다. 10시 21분‥‥ 포늘 하루 몇 번이나 시계를 본 것일
까? 아무래도 시간이 마음에 걸려 견딜 수가 없었다. 류지가 말한 대
로 날이 밝으면 앞으로 남겨진 기한은 5일. 과연 그때까지 지워진 부
분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을지 . 성공 가능성이라고는 거의 없는 수술
을 앞에 둔 앙 환자의 심경이다. 아사카와는 지금까지 암은 환자에게
알려져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런 정신 상태가 계속되는
것이라면 알리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에 따라 죽
음을 앞두고 생명을 완전 연소시키는 사람도 있겠지만, 아사카와에
게는 그런 재주가 없었다. 아직까지는 괜찮다. 하지만 마지막 하루 1
시간, 1분으로 시간을 잘게 상개다 보면 정상적인 의식을 지속시킬
수 있을지 어떨지 도무지 자신이 서지 않았다. 혐오하면서도 류지에
게 끌리는 이유를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류지는 도저히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강력한 정신적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아사카와가 주변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며 살금살금 살
아가고 있는 데 반해 류지는 몸 안에 신, 아니 악마를 기르며 자유분
방하게 살고 있다. 공포에 굴복하는 일은결코 없다 아사카와의 경
우 삶에 대한 욕망으로 공포심을 쫓아 버릴 수 있을 때는 죽은 다음
에 남겨질 아내와 딸에게 생각을 집중시켰을 때뿐이다. 아사카와는
갑작스레 걱정이 되어 침실 문을 가만히 열고 자고 있는 아내와 딸의
얼굴을 확인했다. 아무 일 없이 편안히 자는 얼굴.두려워 움츠리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아사카와는 전화로 요시노를 불러내 지금까지
의 경위를 이야기하고 협력을 부탁하기로 했다. 오늘 생긴 일은 오늘
안에 처리해 두지 않으면 틀림없이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
10월 13일 토요일
일주일 간 휴가를 낼까도 생각했지만 방에 틀어박혀 무의미하게
떨고 있는 것보다는 회사의 정보 시스템을 풀로 이용하는 편이 비디
오테이프의 내용을 해명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마음을 고쳐먹은
아사카와는 토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출근했다. 출근해 봤자 일이 손
에 잡히지 않을 것이라는 건 뻔한 사실이다. 편집장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얼마 동안 일에서 벗어나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되었다
편집장의 협조만 얻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편집장이 그것을 믿어 줄지 어떨지 하는 점이다 예의 우연론
을 들고 나와 콧방귀를 찔 게 뻔하다. 증거물인 비디오가 있다지만,
처음부터 부정하고 덤벼들면 모든 젓이 자신의 논리에 따라 배열되
고, 납득이 가도록 변형퇴고 말 것이다.
그러나‥‥ 재미있을 거라고 아사카와는 생각했다. 일단, 서류 가방 '
에 비디오를 넣어 가지고 오긴 했지만 만일 이것을 편집 장에게 보여
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싶었다 아니 , 그 이전에 그는 과연 이것을
보려고 할까?어젯밤 늦게 요시노에게 일의 경과를 이야기해 주자,
그는 믿었다. 그리고 그 말을 뒷받침하듯이 절대로 비디오는 보고 싶
지 않다며,보여 주지 말아 달라고 말했다. 그 대신 할수 있는 한의
일은 협력하겠다고 말했던 것이다.
요시노의 경우, 믿을 수밖에 없는 토양이 분명 존재했다. 국도변의
차 안에서 쓰지 요코,노미 다케히코의 변사체가 발견되었을 때, 재
빨리 달려온 요시노는 현장의 공기를 느낄 수 있었다. 알 수 없는 괴
물말고는 이런 짓을 할 수 없다고 알고 있으면서도 수사원들 중 누구
하나도 그것을 입 밖에 내지 않는 그 숨막히는 분위기.만일 요시노
가 그때의 공기를 느끼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순순히 믿었을지 어떨
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아사카와는 지금, 하나의 폭탄을 안고 있었다. 편집장의 눈
앞에 들이밀고 위협하면 대충 효과가 있을 것이다. 단순한 흥미 면에
서도 아사카와는 비디오를 써 보고 싶다는 유혹에 사로잡혀 있었다.
오구리 편집장의 얼굴에서 사뭇 남을 얕보는 듯한 평소의 웃음이
사라졌다 책상에 양 팔꿈치를 대고. 눈을 바쁘게 움직이더니 다시
한번 아사과와가 말한 것을 음미했다.
‥‥8월 29일 밤, 빌라 로그캐빈에서 틀림없이 어떤 비디오를 보았
다고 생각되는 네 명의 남녀가 비디오의 말대로 정확히 일주일 후에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그 이후, 비디포는 관리인의 눈에 띄어 관리
인실에 놓여졌고, 아사카와에게 발견되기 전까지는 얌전히 잠자고
있었다. 그런데 아사카와에게 발견되었고, 결국 그걸 보고 만 것이
다. 이 녀석이 5일 후에 죽는다? 그런 일을 믿을 수 있을까? 그러나
네 사람의 죽음은 틀림없는 사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한다?논리적
인 흐름은?
오구리 편집장을 내려다보는 아사과와의 얼굴에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우월감이 감돌고 있었다. 경험상, 오구리가 지금 어떤 것을
생각하고 있을지 대충 짐작이 갔다. 아사카와는 오구리의 사고가 막
다른 골목에 빠졌으리라 생각되는 때를 가늠해서 서류 가방에서 비
디오테이프를 꺼냈다. 점잔빼는, 로열 스트레이트 플래시를 펴 보이
는 듯한 손놀림은 정말이지 연극 같았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이걸 보시겠습니까?"
아사과와는 창가에 놓인 소파 옆의 텔레비전을 눈짓으로 가리키면
서 도발과 여유의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괄꺽 침을 삼키는 소리가
오구리의 목구멍 안쪽에서부터 들려온다. 포구리는 창가 쪽으로 눈
길조차 주지 않고 책상 위에 놓인 새까만 비디오테이프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정직하게 자신의 마음에 묻고 있었다.
" '보려고 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볼 수 있다. 너는 그렇게 할 수
있다. 평소처럼 시시하다며 웃어 넘기곤 저쪽 비디오에 이걸 밀어넣
으면 되지 않나? 하라구. 자, 해 봐.
오구리의 이성은 자신의 육체에 명령을 내렸다‥‥이런 바보 같은
일이 있을 리 없으니 얼른 봐 버리라고.본다는 건 요컨대 아사카와
의 말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 된다. 괜찮겠나? 잘 생각해 봐, 보는 것
을 거부하면 이 자식의 하찮은 이야기를 믿어 주는 것이 된다. 그러
을 거부하면 이 자식의 하찮은 이야기를 믿어 주는 것이 된다. 그러
니까 당장 봐 넌 현대 과학의 신봉자잖아? 유령을 무서워하는 애송
이가 아냐.
실제로 오구리는 그 이야기를 99퍼센트까지 믿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속에 아주 조금, 혹시나 하는 생각이 있었다. 혹시 사실이라
면‥‥세상에는 아직 현대 과학이 미치지 않는 영역이 있을지도 모른
다. 그런 위험성이 있는 한 아무리 이성이 작용해 장자육체는 당연
히 거부할 것이다 지금도 오구리는 의자에 앉은 채 움직이려고 하지
않고 있다. 아니, 움직일 수 없었던 것이다 머리에서의 이해에 그칠
뿐,몸이 말을듣지 않는다 위험의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이상,
육체는 정직하게 방어 본능을 작동시키고 있는 것이다. 오구리는 얼
굴을 들고 바싹 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어떻게 해 줬으면 좋겠다는 건가?"
‥‥이겼다.
아사카와는 확신했다.
"지금 맡은 일에서 빼 주세요. 이 비디오에 관해 철저하게 규명하
고 싶습니다 부탁합니다. 아시겠죠? 제 목숨이 걸린 일입니다 "
오구리는 두 눈을 굳게 감고 있었다.
"기사로 쓸 셈인가?"
"이래봬도 기자니까요·. 일단 사실은 적어 두겠습니다. 저와 다
괴야마 류지의 죽음에 따라 모든 것을 어둠에 매장시키는 일은 없어
야겠죠. 물론 실을 건지 아닌지의 결단은 편집장님께 맡기겠습니다
만."
오구리는 크게 두 번 끄덕인다
"그래, 좋아. 톱 인터뷰는 텁치한테 맡기기로 할까?"
아사카와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비디오테이프를 서류 가방
에 도로 집어넣으려다가 약간의 장난기가 발동해 다시 한번 오구리
앞에 테이프를 내밀었다.
"이거 , 믿으시는 거죠?"
오구리는 '으◎ 하는 긴 신음 전리를 내고는 고개를 옆으로내저
을 뿐이었다. 믿는다고도, 믿지 않는다고도 딱 잘라 얘기할 수 없다,
어쨌든 일말의 불안이 있다‥‥ 뭐 , 그런 뜻일 젓이다
"저도 편집장님과 같은 기분입니다. "
아사카와는 그런 말을 남기고 물러갔다. 오구리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만일 그가 10월 18일이 지나서도 살아 있다면, 그때는 이
눈으로 비디오를 봐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때가 오면 역
시 몸이 거부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하는 불안은 언제까지나사라
질 것 같지 않았다.
자료실에서 아사카와는 세 권의 두꺼운 책을 책상에 쌓아올렸다.
띨본의 화각, 유각껼기, 떼계의 환화신, 비디오에 수록된 화산
의 분화 장면은 일본에서 찍은 것 같다고 점찍은 아사카와는 우선
『일본의 화산』이라는 책 표지를 넘겼다. 권두의 컬러 사진. 연기와
수증기를 하얗게 뿜어올리는 산들은 흑갈색의 용암에 뒤덮인 채 당
당하게 밤하늘을 향해 새빨간 용암을 뿜어 내고 있다. 어둠 속에 녹
아드는 그 화구의 검은 윤곽이 우주의 기원을 만들어 낸 빅뱅을 연상
케 했다. 아사카와는 머리에 새겨져 있는 영상과 사진을 비교하면서
차례로페이지를넘겼다. 아소산,아사마야마,사쿠라지마· . 그런데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이내 발견해 낼 수 있었다. 후지 화산대에 속
하는 미하라야마(삼원산,이즈제도의 오시마라는섬에 있는복식성
층 활화산 ' 역자 주)는 일본 활화산 중에서도 상당히 유명한 부류에
속해 있었다.
" · . 미 하라야마?"
아사카와가 중얼거렸다. 공중 촬영 사진이 두 장, 약간 높은 언덕
위에서 찍은 사진이 한 장. 아사카와는 영상을 떠올려 여러 방향에서
의 모습을 이미지화해 사진들과 비교했다 확실히 비슷하다. 산기슭
에서의 시점에서 볼 때 , 산꼭대기는 완만한 경사를 가지고 있는 것처
럼 보인다 그러나 공중사진을 보면 산꼭대기에는 원형의 외륜산이
있고, 칼데라 가운데에 중앙 화구가 보인다. 산기슭의 조금 높은 언
덕에서 찍은 것은 비디오의 영상과 특히 닮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산 표면의 색도, 기복 상태도 거의 같아 보였다 머릿속의 잔상에만
의지할 것이 아니라 제대로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아사카와는 다른
두세 개의 후보와 함께 미하라야마 사진을 복사했다.
오후 내내 아사카와는 전화만 걸고 있었다. 요 반 년 동안, 빌라 로
그캐빈을 이용한 그룹에 대한 전화 취재다. 직접 만나 안색을 살펴
가며 얘기를 들으면 좋겠지만,그럴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다. 전화
가며 얘기를 들으면 좋겠지만,그럴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다. 전화
목소리만으로 거짓말을 간파해 내기는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아사
카와는 상대의 사소한 동요도 놓치지 않으려고 특별히 귀를 기울였
다. 확인해야 할 상대는 16개 그룹. 올해 4월에 빌라 로그캐빈이 완성
되었을 무렵에는 각 동에 비디오가 갖춰져 있지 않았다. 지방에 있던
숙박시설이 헐리고,그곳에 설치되어 있던 대량의 WR이 사용될 장
소로 새로 지어진 로그캐빈이 선택된 것은 7월 중순의 일이다. 여름
방학에 맞추려 했던 듯 비디오와 테이프 수집이 완비된 것은 7월 하
순. 따라서 팡고 팡플렛류에는 비디오 대여 서비스가 있다는 것이 실
려 있지 않았다. 와보고서야비로소이런 것이 있었던가하고비 꼬
는 날 시간 때우기로 이용하는 정도여서 사전에 테이프를 가져와 프
로그램을 녹화하려 했던 그룹은 거의 없었다. 물론 전화 목소리를 믿
는다면 말이다.
도대체 누가 그 테이프를 그곳에 가지고 들어간 것일까?그리고
그것을 녹화한 자는 누구일까? 아사카와는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생
각으로, 때에 따라서는 몇 번이고 떠보았지만 누구 하나 조금이라도
숨기는 것 같은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16개 그룹 중 비디오의 존재
조차 깨닫지 못했던 것이 골프를 목적으로 온 3개 그룹. 있는 것은 알
았지만 이용하지 않은 것이 7개 그룹.비 때문에 원래의 목적이었던
테니스를 못 치게 되자 하는 수 없이 비디오를 빌린 것이 5개 그룹.
빌려갔던 영화는 흘러간 명화가 많았다. 아마도 과거에 본 적이 있는
것을 재차 본 것이리라 그리고 낭은 하나의 그룹,요코하마에 사는
가네 코라는 4인 가족만은 가져온 비디오테이프를 사용해 TV 프로그
램을 녹화하려 했다.
아사카와는 일단 수화기를 내려놓고 완성된 16개의 데이터를 다시
한번 죽 훌어보았다. 문제가 있을 만한 것은 한 군데‥‥ 가네코 부부
와 초등학생인 두 어린아이
그들은 올해 여름 방학 두 번에 걸쳐 빌라 로그캐빈을 이용했다
처음이 8월 10일 금요일 밤, 그리고 두 번째가 8월 25일과 26일. 토요
일, 일요일 연 이틀 숙박한 것이다. 두 번째의 이용은 예의 네 사람이
묵기 3일 전에 해당된다. 다음 월요일, 화요일에는 손님이 없었기 때
문에 가네코 일가 바로 뒤에 네 사람이 들어간 셈이다. 게다가 일요
일 밤 8시 , 초등학교 6학년인 남자아이가 집에서 가져온 비디오테이
프에 TV 프로그램을 녹화했다고 한다
그 아이는 일요일 밤8시,민방에서 방송하고 있는 코미디 프로를
매번 빠뜨리는 일 없이 보고 있었다. 그러나 프로그램의 선택권은 당
연하게도 부모에게 있었다. 부모는 이 시간대, NHK의 대하 드라마에
채널을 맞추는 것이다 로그캐빈에는 텔레비전이 한 대밖에 없었지
만, 비디오가 놓여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아이는 녹화해 두었다
가 나중에 보려고 녹화 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한참 녹화하던 도중에
때마침 비가 그친 것을 알리러 온 친구가 테니스를 치자고 불러 내자
그대로 여동생과 함께 코트로 달려가 버렸던 것이다 보고자 했던 프
로그램을 다 본 부모는 녹화 중이라는 것도 잊고 텔레비전을 껐고,
10시 가까이까지 코트를 뛰어다닌 형제도 녹초가 되어 돌아오자마자
곯아떨어 졌기 때문에 비디오에 대한 일 따윈 완전히 잊어버리고 말
았던 것이다
다음날. '이제 곧 우리 집이다' 라고 깨달을 즈음에서야비디오테
이프를 비디오 안에 넣어 둔 채라는 걸 깨닫게 된 아이는, 차를 운전
하고 있던 아버지에게 '돌아가야 해요' 라고 큰 소리로 애걸했다고 한
다. 어지간히 옥신각신하긴 했지만 마침내 제법한 아이는 울면서 집
으로 돌아갔다 ‥‥
아사카와는 비디오테이프를 꺼내 책상 위에 세웠다 인덱스 라벨
을 붙이는 부분에 '후지텍스VHS 7120 Super AV' 라는 문자가 은색으
로 빛나고 있었다. 아사괴와는 다시 가네코 씨 집의 번호를 눌렀다.
" · .여러 번 죄송합니다. 조금 전에 전화드린 M신문사의 아사카와
입니다만."
조금 사이를 두고 '예' 라는 대답이 들렸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어
머니의 목소리다.
"아드님이 비디오테이프를 두고 왔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테이프
가 어느 회사 건지 기억하심니까?"
"글쎄요."
웃음을 머금은 목소리 . 그 배경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온다
"아, 지긍 마칭 애가 돌아왔으니까 물어 볼게요."
아사카와는기다렸다 '어느회사 것인지 알리가없을거야' 라고
생각하면서 .
"역시 , 모르겠답니다. 집에서 쓰는 건 세 개씩 묶어 얼마 하는
것 뿐이 라서요."
무리도 아니다. 비디오를 사용할 때 그것이 어느 메이커 것인지 일
일이 신경 쓰고 있을 리 없다. 그때, 아사카와의 머리가 갑자기 번뜩
였다·. 기다려, 이 테이프의 케이스는 어디에 있는 걸까?테이프는
어느 것이나 케이스에 넣어서 팔고 있다 케이스를 버리는 일은 별로
없다 적어도 아사카와는 음악용 과제트테이프건, 비디오테이프건
간에 케이스를 버린 적이 없었다.
"댁에선 비디오테이프를 케이스에 넣어서 보관하고 계십니까?"
"11, 물론."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그쪽에 빈 케이스가 하나 남아 있는지 어떤
지 알아봐 주실 수 있을까요?"
"#1?"
얼빠진 목소리였다. 질문의 의미는 이해할 수 있어도 그 안쪽에 담
긴 동기를 알 수 없어 행동을 무디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부탁합니다 ·실은, 사람의 목숨이 달려 있는 일이라서요."
특히 가정 주부의 경우,사람 목숨 운운하면 금방 약해진다. 수고
를 덜고, 행동을 재촉하고 싶은 경우, 이 말은 충분한 효과를 발휘한
다. 더욱이 아사카와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잠시, 기다려 주세요."
생각대로 목소리 울림이 변했다. 수화기가 놓인 후, 다소의 시간이
흘렀다. 만일 케이스도 함께 빌라 로그캐빈에 놔 두고 왔다면 그 관
리인이 버린 것이 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가네코 씨 집에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빈 케이스 말이죠?"
"11."
"두 개가 있는데요."
"메이커 이름과 테이프 종류가 써 있을 텐데요‥‥‥
"음, 하나는 파나비전 7120. 또 하나는 후지텍스 VHS 7120 Super
ff · .
아사카와의 손에 들려 있는 비디오테이프와 완전히 똑같은 명칭이
다 후지텍스의 비디오테이프는 무수히 팔리고 있을 것이니, 이것만
으로 확증을 얻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한 길음 다가선 것만
은 확실하다. 이 악마의 테이프의 근원은 초등학교 6학년 남자아이가
가지고 온 것이다. 어떨까?그렇게 생각해도 거의 틀링없는 게 아닐
까?
아사카와는 정중히 예의를 표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8월 26일, 네 사랑이 숙박하기 3일 전 일요일 밤 8시부터 B-4호의
비디오는 녹화 상태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잊은
채 가네코 일가는 돌아가고 만다 다음에 온 것은 그 네 명. 그날도
역시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디오라도 볼까 하고 조작하자 안에 테이
프가 든 상태, 아무 생각 없이 그것을 보게 된다 영문을 알 수 없는
기분나쁜내용 게다가 마지막에 있는 협박문구 네 사람은 악천후
를 욕하다가 질 나쁜 장난을 생각해 냈다. 죽음의 운명에서 도망치는
방법을지운 뒤,다음에 숙박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서 겁을 주자.물
론내용은 믿고 있지 않았다 만일 믿고 있었다면 너무나 무서워 장
난 따위는 칠 수 없었을 것이다.
과연 네 사람은 죽음의 순간, 이 테이프의 내용을 떠올렸을까? 그
렇지 않으면 그럴 여유도 없이 죽음의 신에게 끌려 사라져 간 것일
까?남의 일이 아니다. 아사카와는 부르르 몸서리를 쳤다 앞으로 5
일 간,죽음의 운명에서 도망칠 방법을 찾아내지 않으면 그들과 마
찬가지로‥‥ 그때가 오면 녀석들이 어떤 기분으로 죽어 갔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남자아이가 녹화했다고 하면 그 영상은 어디에서 온 것일
까? 맨 처음 아사카와는 비디오 카메라로 녹화된 것을 갖고 들어왔
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설마 프로그램을 녹화하려고 테이프를 넣
었는데, 말도 안 되는 영상이 전파를 타고 침입해 들어 왔다고는 상상
조차 해 본 일이 없었다.
‥‥해적 방송!
아사카와는 작년 선거 때, NHK방송 종료 후에 상대 입후보를 비방
하는 영상이 흘러나왔던 사건을 기억해 냈다.
그렇다, 해적 방송 말고는 달리 생각할 수가 없다.
8월 26일 밤 8시부터, 미나미하코네 일대의 전파를 타고 그 영상이
흘러나와 버렸고,때마침 이 테이프가 그것을 건져올린 것일 가능성
이 있다. 만일 그렇다면 뭔가 기록이 남아 있을 젓이다. 아사카와는
그 지방의 방송 지국과 통신부에 문의해 당장이라도 사실을 확인해
야겠다고 생각했다
오후 10시, 아사카와는 평온한 두 숨소리의 마중을 받으며 귀가했
다. 현판에 들어서자마자 침실 문을 살짝 열고 아내와 딸의 잠자는
얼굴을 확인한다. 아무리 피곤한 몸으로 돌아와도 아사카와는 이것
을 빠뜨린 적이 없다
거실에는 메모 용지가 놓여 있었다. '다카야마 씨한테 전화가 왔었
습니다. 오늘 하루 아사카와는회사에서 몇 번이나류지 방에 전화
를 걸었지만, 통화하지 못했다.
아사카와는 다이얼을 돌린 다음 벨을 열 번이나 울렸다 아무도 받
지 않는다 히가시나과노의 아파트에서 류지는혼자살고 있었다 아
직 돌아와 있지 않은 것이다.
가볍게 샤워를 하고 나서 맥주 한 병을 비우고,다시 한번 전화를
건다. 역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맥주 대신 위스키를 언더록으로
해서 한 잔 더 마셨다. 취기로 잠드는 방법 이외엔 숙면의 수단이 없
었다. 장신에다 날씬한 체구였던 아사카와는 지금까지 병다운 병을
앓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런 방법으로 죽음의 선고를 받으리라고는 ‥‥ 아직 마응
어딘가에는 이 사건을 꿈이라고 받아들이려는 구석이 있었다. 이대
로 비디오의 의미와 주문의 내용이 밝혀지지 않은 채 18일 오후 10시
라고 하는 마감 시간을 맞이하지만 결국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평소와 전혀 다름없는 일상이 계속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오구리
편집장은 남을 깔보는 얼굴로 미신에 대한 어리석음을 설교하고, 류
지는 실실 웃으면서 '세계의 구조는 좀처럼 알 수 없단 말야' 라고
중얼거린다. 그리고 아내와 딸은 지금까지 해 온 대로 자는 얼굴로
아빠를 맞이할 것이다. 추락하는 비행기 안에서조차 승객들은 모두
자신만은 살아남을 것이라는 희망을 마지막까지 버리지 않는 법이
다.
석 잔째 위스키 언더록을 다 비우고, 아사카와는 세 번째 다이얼을
돌렸다. 이번에 받지 않으면 오늘은 포기할 생각이었다. 벨을 일곱
번 울렸을 때, 수화기 들리는 소리가 났다
"뭐 하고 자빠졌어 ! 지금까지‥‥‥
아사카와는 상대를 확인하지도 않고 호통부터 쳤다. 상대가 류지
면 모르는 사이에 말투가 더러워진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존재였다
어떤 친구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결코 태도를 무너뜨리
지 않는 아사카와지만 류지에게만은 아무렇지도 않게 큰 소리로 욕
설을 퍼부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류지를 친구라고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대답은 의외로 류지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여보세요 저‥‥‥
느닷없는 호통에 겁먹은 여자 목소리.
"아, 죄송합니다. 잘못 걸었습니다. "
아사카와는 수화기를 내려놓으려 했다.
"저, 다쾨야마 선생님 댁에 거셨죠?"
"아, 예. 그렇습니다만·. . "
"선생님은 아직 안 돌아오셨는데 요· . . "
아사카와는 이 젊고 매력적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마음이
쓰였다. 다카야마 선생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가족이 아니라는 것
은 짐작이 간다. 애인· .◎ 설ㅁ◎ 류지를 좋아하는 여자 따윈 있을 리
가 없다. 아사카와는 선입견에 따라 그렇게 결론 내리고 있었다.
"그렇습니까? 전 아사괴와라고 하는 사람입니다만."
"선생님이 돌아오시면 전화드리라고 전해 두겠습니다‥‥아사카
와 씨라고 하셨죠?"
수화기를 내려놓았지만 아직 여자의 목소리가 남아 있었다. 부드
러운 울림이 듣기 좋았다.
카펫이 깔린 침실에서 침대가 없어진 것은 하루코가 태어났을 때
였다. 아기를 침대에 재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4조 반짜리 방에
아기 침대를 놓을 공간도 없었다. 할 수 없이 지금까지 쓰던 더블 침
대를 버리고 그 대신에 이불을 깔았다 폈다 하기로 한 것이다. 아사
카와는 깔아 놓은 두 채의 이불 중 빈 공간으로 기어들어갔다. 세 사
람이 같이 잘 경우에 있어 세 사람이 자는 장소는 정해져 있었다. 시
즈카와 하루코의 잠버릇은 너무나 나빠 잠이 들고 한 시간쯤 지나면
처음 위치와는 많이 달라진다 때문에 나중에 들어오는 아사카와는
늘 빈 공간을 찾아 내야만 했다.
만일 아사카와가 없어진다면 그만큼의 공간을 메우는 데 어느 정
도의 시간이 걸릴까?시즈카가 재혼 상대를 찾는 데 걸리는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배우자를 잃음에 따라 생긴
틈을 영원히 메우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3년, 3년이라고 하는 것
이 타당한 선이 아닐까? 아사카와는 친정에 돌아가 부모에게 딸을
맡기고 일하러 나서는시즈카의 얼굴이 그 나름대로 생기 있게 빛나
는 모습을 억지로 그려 보았다. 아내가 강하게 견며 주길 바랐다. 자
신이 죽은 후. 생지옥에 빠진 아내와 아이를 상상하는 건 견딜 수 없
는 일이다.
5년 전 치바 지국에서 본사 출판국으로 막 옮겨왔을 무렵. 아사카
와는 같은 M신문사 계열의 여행사 여직원이었던 시즈카와 알게 되었
다 그녀가 있는 곳은 3층이었고 아사카와는 7층, 가끔 엘리베이터에
서 얼굴을 마주치는 정도였는데, 때마침 취재를 위해 티켓을 받으러
갔을 때 담당자가 없어 시즈카가 대신하게 되었다.
그때 그녀는 25세, 여행이 너무나 좋다는 시즈카는 취재로 여기저
기 돌아다니는 아사카와에게 선망의 눈길을 주었는데, 아사카와는
그 눈빛에서 첫사랑이었던 여성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서로의 얼굴과 이름을 안 다음 엘리베이터 안에서 만나면 인사를 나
누게 되었고, 두 사람 사이는 급속도로 깊어져 갔다.
2년 후, 두 사람은 가족의 반대도 없이 순조롭게 결혼했다. 본가의
도움으로 계약금을 해결하고 키타시나가와에 방 두 개에 주방이 딸
린 아파트를 구입한 것은 결혼하기 반 년 전의 일이었다. 땅값이 폭
등할 것을 예상해 결혼 전에 서둘러 새 집을 구입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될 수 있는 한 빨리 응자긍을 갚아 버리려 했을 뿐이다
만일 그 시기를 놓쳤더라면 아사카와 부부는 영영 도심지에 집을
마련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파트가 1년 뒤에 약 ,)배나 올랐기 때문
이다. 매달 갚아 나가는 융자금은 집을 빌렸을 경우의 반도 안 되었
다. 좁다좁다, 늘 불평을 하고 있긴 해도 이 재산 덕분에 두 사람 모
두 여유롭게 살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남겨 줄 수 있는 것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아사카와는 생각했다. 생명보험금으로 남은 융자
금을 갚으면 이곳은 그대로 아내와 딸의 것이 된다.
‥‥사망시에 받는 생명보험 액수는 분명히 2천만 엔이었던 것 같은
데, 제대로 확인해 둘 필요가 있겠군.
아사카와는 몽롱한 머리로 금액을 여기저기 배분하다가 유언해 둘
것이 있으면 일찌감치 메모해 두어야겠다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
건 그렇고, 그의 죽음은 어떻게 불릴까?병사?사고사? 아니면 타
살'1
· .아무튼 생명보험의 내용을 다시 한번 확인해 두어야겠어.
최근 3일 동안 잠에 빠질 때에는 늘 비관적인 기분이 되었다. 아사
카와는 자신이 사라지고 없을 세계에까지 영향력을 미쳐 보겠다고
이것저것 고민하다가, 유서 비슷한 것을 남기려는 궁리도 해보았다.
10월 14일 일요일
다음 일요일, 아사카와는 일어나자마자 류지의 전화번호를 돌렸
다. 쉰 목소리로 '·.예' 하고 대답하는류지.정말이지 이 전화때문
에 잠이 깼다고 하는 목소리다. 아사카와는 어젯밤부터의 초조감이
다시 일어, 끝내 전화에 대고 고함을 지르고 말았다
"어젯밤, 어디 간 거야!"
"아 아, 뭐야 아사의와냐?"
"전화를 걸어 줬어야지 !"
"이야, 너무 많이 마셔 버려서 말야. 요즘 여대생들은 술도 센데다
가 그쪽도 세거든. 질렸다, 질렸어."
문득 요3일 간의 일이 꿈처럼 느껴지면서 맥이 빠진다. 심각하게
살고 있는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어쨌든 지금 갈게 . 기다려 ."
아사카와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전철을 타고 히가시나카노 역에서 내려 우에오치아이를 향해 10분
정도 걸었다. 아사카와는 걸으면서 밤에는 술을 마시고 돌아다녔다
지만 류지라면 분명히 뭔가 잡아 냈을 거라고 위안 삼으며 그에 대해
작은 기대감을 품었다. 어쩌면 수수께끼가 풀린 게 아닐까? 그래서
그 녀석이 태연하게 밤늦게까지 마시고 떠들어 댔을지도 모른다. 류
지의 아파트가 다가옴에 따라 낙천적인 기분이 된 아사카와는 약간
걸음을 빨리했다. 불안과 기대, 비관과 낙관. 감정은 딸랑딸랑 흔들
렸고. 그 때문에 아사카와의 정신은 더욱 피곤했다.
그야말로 지금 막 일어난 듯, 제멋대로 자란 수염에 잠옷 차림으로
류지는 현관 문을 열었다 아사카와는 신을 벗는 것조차 초조해서
'뭐 좀 알아 냈냐?' 하고 물었다.
"아니 , 별로‥‥ 뭐, 들어와."
대답하면서 류지는 북북 머리를 긁었다. 멍하니 눈의 초점이 맞지
않아 아직 뇌세포가 깨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커피라도 마시고 잠 좀 깨."
기대에 어긋난 아사카와는 불쾌한 듯 덜그럭덜그럭 소리를 내며
주전자를 불에 얹어 놓았다 시간에 대한 강박 관념이 돌연 솟구쳐
모른다.
벽 한면에 책이 쌓여 있는 세 평짜리 방에 두 사람은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자, 조사한 걸 말해봐."
무릎을 떨며 류지가 말한다. 시간의 낭비는 허락되지 않는다. 아사
카와는 어제 알아 낸 사실을 잘 정리해서 시간의 경과에 따라 나열해
갔다. 우선, 그 비디오테이프는 8월 26일 밤 8시부터 빌라 로그캐빈
의 비디오로 녹화된 젓 같다는 사실
류지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역시 비디오 카메라로 녹
화된 것을 가지고 들어왔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거 재밌군. 그건 그렇다치고, 네가 말하는 것처럼 그게 해적 방
송이라고 한다면 그 외에도 그 영상을 본 사람이 있다는 게 되는
El‥‥‥
"일단 아타미하고 미시마 지역의 통신부에 문의해서 그 사실은 물
어 영어 . 하지만 현재로선 8월 26일 밤, 로그캐빈이 있는 미나미하코
네 지역에 괴전파가 날아들었다는 정보는 들어오지 않은 모양이야."
"그렇군, 그렇군· . . "
류지는 팔짱을 끼고 잠시 생각했다.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겠군. 하나는 영상을 본 자가 모두 죽었기
때문에‥‥ 잠깐만, 텔레비전으로 흘러나왔을 시점에서는 주문이 지워
져 있지 않았을 테니까· . 뭐, 좋아. 어쨌든 그 지역 신문사도 이 사건
을 캐치해 내지 못하고 있단 말이지· . . "
"그 가능성도 이미 확인했어 . 그 네 사람 이외의 희생자 유무 말이
잖아? 그것도 없어. 제로야, 제로. 전파가 날아왔다고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보았을 텐데 희생자는 한 사람도 나오지 않았고 이
상한 소문조차 없어 ."
"야, 에이즈가 문명 사회에 처음 등장했을 때의 일 기억하냐? 처음
에 미국 의사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몰랐어.그저 본 적도
없는 증상으로 죽어 가는 놈을 보고 묘한 병이 생기고 있는 것 같다
는 정도의 예감을 품었을 뿐이지. 에이즈라고 하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한 건 발생한 지 2년 정도 지난 다음이었어‥‥알았냐, 그런 일
도 있단 말야."
단나 단층을 경계로 보았을 때, 그 서쪽 산간부에서는 네츠칸 도로
아래쪽으로 드문드문 민가가 산재할 뿐이었다. 거기에서 남쪽을 우
러러보면 현실감이 희박한 고원, 미나미하코네 퍼시픽랜드가 있었
다. 그 땅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일이 진행되고 있는 것일까?
실제로는 원인 불명의 돌연사가 많이 발생하고 있는데 공공연하게
알려지지 않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에이즈뿐만이 아니다 일본에
서 최초로 발견된 '가와사키병'은 근 10년이나 되는 세월이 지나서
야 새로운 병으로서 지위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괴전파가 날아
우연히 비디오에 수록된 지 1개원 반 남짓. 아직 증후군으로 인지될
정도까지 발전되지 않았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만일 아사카와가
조카딸을 포함한 네 명의 죽음에서 공통된 요소를 발견하지 못했다
면, 이 '질병' 은 아직도 지하에서 잠자고 있었으리라. 만일 그렇다면
보다 무서운 일이 되고 말 것이다. '질병'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한다
는 것은 수백, 수천이라고 하는 희생자가 나온 후에야 가능한 일이
다.
"그 부근에 사는 주민들의 집을 일일이 조사할 만한 시간은 없어.
그건 그렇고. 류지 또 다른 가능성은?"
"또 하나. 영상을 본 사람이 그 네 사람과 우리들 이외에는 존재하
지 않는다는 것.말이야,이걸 우연히 녹화했다는 초등학생 녀석 지
방에 가면 주파수가 바뀐다는 걸 알고 있었을까? 도쿄라면 4번 채널
에서 나오던 게 지방에 가면 완전히 다른 채널에서 방송되기도 한단
말야. 멍청한 놈이라면 그런 것도 모르고 도쿄의 채널에 맞춰 두고
녹화했을지도 몰라."
"· . · 그래서 ?"
"생각해 봐. 예를 들면 우리처럼 도쿄에 사는 사람들이 아무것도
방송되지 않는 2번 채널을 돌리겠어?"
과연 그랬다. 아이는 그 지방의 사람이라면 결코 맞추지 않았을 채
널에 놓고 녹화 버튼을 눌러 버렸을지도 모른다 부모가 다른 프로그
램을 보고 있었으므로 녹화되고 있는 방송의 화면은 확인하지 않았
던 것이다. 더욱이 그 주변은 산간 지역이라서 집도 드문만큼 텔레비
전을 보는 사람의 절대수도 단연 적을 수밖에.
"어쨌든 문제는 그 전파의 발신지가 어디인가 하는 점이야."
류지는 간단히 잘라 말했다. 전파의 발신지 조직적이며 동시에 과
학적인 수사를 하지 않으면 결코 해결될 것 같지 않은 문제다.
"자, 잠깐 기다려 반드시 너의 전제가 옳다고는 할 수 없어. 그 애
가 잘못해서 괴전파를 녹화해 버렸다는 건 단순한 추측에 지나지 않
아, "
"알고 있어 하지만 말야, 백 퍼센트의 확증을 얻은 다음 일을 진척
시킨다면 결말을 낼 수 있을 것 같아?이 정도 선에서라도 가 보는
수밖에 없어 "
전파 아사카와의 과학적인 지식은 빈약한 것이었다 도대체 전파
라는 건 무엇인가. 우선 그것부터 조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전파의
발신지를 찾아 내는 수밖에 없다. 다시 한번, 그 지역에 가지 않을 수
없다. 오늘을 빼면 죽음의 마감일 까지 앞으로 4일.
다음 문제는 주문 부분을 지운 것은 누구일까 하는 점 . 비디오테이
프가 현지에서 녹화된 것이라고 가정하면, 이것을 지운 것은 그 네
사람말고는 없다. 아사카와는 텔레비전 방송국에 문의해 한창 잘 나
가고 있는 만담가 산유테가 생방송 나이트 쇼에 게스트로 출연했던
날을 알아보았다. 틀림없었다. 되돌아온 말은 8월 29일이라고 하는
대답. 네 사람이 주문을 지웠다고 봐도 백 퍼센트 틀림없었다.
아사카와는 서류 가방에서 몇 장의 복사지를 꺼냈다 이즈 제도,
미하라야마의 사진이다.
"어때 ?"
류지에게 보이면서 의견을 요구한다.
"미하라야마라‥‥ 이봐, 이것도 백 퍼센트 확실하다고 봐도 되겠
어 ."
"어떻게 알아?"
"어제 오후에 할멈이 지껄이고 있던 사투리에 대해 우리 대학에서
민속학을 하고 있는 꼰대에게 물어 영어. 그랬더니 요즘은 많이 쓰이
지 않지만, 아무래도 오시마(대도)의 방언 같다더군 오시마중에서
도 남쪽 끝에 위치하는 사시키지 지역의 방언이 전여 있대. 우유부단
한 자식이라 확실히 잘라 말한 건 아니지만, 이 사진까지 더해 생각
해 보면 방언은 오시마, 산은 미하라야마라고 봐도 틀림없겠어 . 그런
데 미하라야마의 분화에 관해서는 좀 알아봤어?"
"아, 물론. 2차 세계대전 후· 그러니까 분화 시기는 2차 대전 후
로 좁혀도 상관없을 것 같은데· .. "
" · .그렇겠군 "
"그렇지? 미하라야마는 전후에 네 번 분화했어 . 첫 번째는 19금년
부터 51년에 걸쳐서. 두 번째는 57년. 세 번째는 74년. 그리고 네 번
째는 기억도 새로운 1986년 가을. 덧붙이자면 57년 분화 때에는 새
로운 분화구가 생겼고 1명이 사망, 53명이 중경상을 입었어 ."
"비디오 카메라의 보급을 생각하면 86년 것이 제일 수상하지만, 아
직 뭐라고 말하기는 어렵겠지 ."
류지는 그제야 생각난 듯이 가방을 뒤져 한 장의 종이 조각을 꺼냈
다
"그래그래, 그 방언을 표준어로 고치면 이렇게 되는 모양이야. 그
치가 꼼꼼하게 표준말로 번역해 줬어."
"그 후 몸은 어떤가? 물놀이만 하고 있으면 귀신이 찻아온단 말야.
알았냐? 타관 사람을 조심해. 넌 내년에 아이를 낳을 거다. 여자애니
까 할미가 말하는 걸 잘들어 둬 이 지방 사람이라도 상관없지 않겠
냐?"
아사카와는 천천히 두 번을 읽어 본 다음 얼굴을 들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태가 알겠냐! 그걸 네가 지금부터 알아봐야 하지 않겠어?"
"앞으로 4일이 라구!"
어디부터 손을 대면 좋을지 모르겠다. 게다가 조사할 것은 너무도
많다. 신경이 날카로워진 아사카와는 비난조로 말했다
"너 말야 난 너보다 하루 여유가 있어, 넌 선두에 서서 힘써야
될 처지란 말야."
아사의와의 마음속에 문득 의구심이 솟구쳤다. 류지는 그 하루의
여유를 악용할 수가 있다 예컨대 주문의 내용이 두 가지 중 어느 하
나인 것 같다면, 류지는 아사카와에게 한쪽만을 가르쳐 준 다음, 그
의 생사 여부를 봄으로써 옳고 그름을 검증할 수 있다. 단 하루의 차
이가 커다란 무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류지 , 내가 죽든 살든 넌 아무래도 좋겠지 . 실실 웃으면서, 그렇게
태연하게 ‥‥‥
볼썽사나운 히스테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아사카와는 아우성쳤다.
"무슨 기집애 같은 말을 하고 자빠졌어? 징징거리는 소리 하고 있
을 여유가 있으면 좀더 머리를 굴려 ."
아사과와는 아직도 원망스러운 듯한 눈을 하고 있다.
"야 어떻게 말하면 성이 차겠냐? 넌 내 친구야. 죽어 버리면 곤란
해. 나도 노력할 테니까 너도 힘내 . 서로 열심히 해 보자‥‥ 이봐, 이
제 불만 없지7"
류지는 도중에 어린애 같은 어조로 바꾸어 그렇게 말하더니 천박
하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 가운데 현관 문이 열렸다. 아사카와는 깜짝 놀라 부엌
너머의 현관을 돌아보았다. 젊은 여성이 몸을 구부리고 횐색 하이힐
을 벗으려는 참이었다. 짧은 머리칼이 두 귀 위를 살짝 덮고, 귀고리
가 하얗게 빛나고 있다. 여자가 구두를 벗고 얼굴을 들었을 때 아사
카와와 눈이 마주쳤다.
1소4
"어머 . 죄송해요. 틀림없이 선생님 혼자‥‥‥
여자는 그렇게 말하고 손을 입가에 댔다. 품위 있는 몸짓에,횐색
으로 통일된 청결한 옷맵시 . 모두 이 방의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스커트에서 뻗어 나온 다리는 가늘고 유연했으며 , 갸름한 얼
굴의 지적인 생김새가 텔레비전 CF에 자주 나오는 여성 작가를 닳았
다
"어서 들어와."
류지의 목소리 질이 변해 있었다. 울림엔 위엄이 담겨 있었고, 비
천함은 그림자를 숨기고 있었다.
"소개하지 . K대학 문학부의 다카노 마이 양. 철학과의 재원으로 내
수업을 열심히 듣고 있지. 내 강의를 이해하고 있는 건 이 애 정도라
고나할까 ·. 이쪽은M신문사의 아사카와가즈유키 내· 친구."
다카노 마이는 조금 놀란 듯 아사카와를 보았다 그녀가 도대체 무
엇에 놀란 것인지 그때의 아사카와는 알 수 없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
마이는 섬뜩할 정도로 매력적인 미소를 띄우며 가볍게 고개를 숙
였다. 그것은 보는 자를 정말이지 상쾌한 기분으로 만들어 주었다
아사카와는 이처럼 아름다운 여성을 만난 적이 없었다. 고운 피부,
빛나는 눈, 균형 잡힌 몸매‥‥ 게다가 내면에서 배어 나오는 지성 , 기
풍,상냥함,어느 하나 나무랄 곳이 없었다 아사카와는 뱀의 눈초리
를 앞에 둔 개구리처럼 꼼짝할 수 없었고,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이봐, 뭐라고 말 좀 하지 ."
류지에게 옆구리를 찔려서야 겨우 '안녕하세◎ 라고 어색하게 대
답했지만, 눈은 아직 얼이 빠져 있는 상태였다.
"선생님 , 어젯밤 어디 가셨었어요?"
마이는 스타킹으로 감싸인 발끝을 우아하게 구부리며 류지 쪽으로
두세 걸음 다가갔다.
"실은 다괴바야시 군하고 야기 군이 권해서‥‥‥
둘이 나란히 서니 마이가류지보다 10센티 정도더 키가 컸다 하
지만 체중은 류지의 반 정도일 것이다.
"안 돌아오실 거면 확실하게 그렇다고 말해 주셔야‥‥ 저, 기다리
다 지쳐 버렸어요,"
아사카와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어젯밤 전화 목소리를 기억해 냈
던 것이다. 어젯밤,이 방에서 아사의와가 걸었던 전화를 받은 것은
틀림없이 이 여자다.
류지는 어머니에게 야단맞은 소년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뭐 , 좋아요. 이번에는 용서해 드릴게요. 자, 이거 ."
마이는 종이 봉투를 내밀었다.
"속옷, 빨아 놓았어요. 방도 치우려고 했지만 책 위치가 바뀌면 선
생님이 화내실까 봐‥‥‥
아사카와는 주고받는 말로 두 사랑의 관계를 짐작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봐도 사제 관계를 넘은 애인 사이로밖에는 비춰지지
않는다. 게다가 어젯밤 늦게까지 이 여자는 류지의 집에서 그의 귀가
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정도의 관계란 말인가?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커플을 보면 화가 치미는 경우가 있지만, 이 경우는 그 도를 넘
는다. 류지 주변의 모든 것이 미쳐 있는 것이다. 게다가 마이를 응시
할 때의 류지의 자애 어린 시선과 말투,그리고 얼굴 표정까지 변화
시켜 버리는 멋진 카멜레온적 태도. 아사카와는 순간, 류지의 범죄
행위를 모두 폭로해서 다카노 마이의 눈을 뜨게 해 주고 싶을 정도의
분노를 느꼈다.
"선생님, 슬슬 점심 때에요. 뭐 만들까요?아사카와 씨도 드시고
가실 거죠? 주문하실 거 있으세요?"
아사카와는 뭐라 대답하기 곤란해서 류지를 보았다.
"사양 말라구. 마이 양의 요리 솜씨가 상당하거든."
"만들어 주시는 대로 먹겠습니다. "
아사카와는 그렇게 말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마이는 곧 요리 재료를 사기 위해 근처 슈퍼로 나갔다. 그렇지만
그녀가 없어진 다음에도 아사과와는 꿈을 꾸는 기분으로 문 쪽만 응
시하고 있었다
"야, 왜 비둘기가 장난감 총에 맞은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냐?"
류지는 자못 이상하다는 듯 히죽히죽 웃고 있다.
" 아니 , 아무것도."
"야, 이봐, 그렇게 멍하니 있을 때가 아니라구."
류지는 아사카와의 뺨을 찰싹찰싹 가볍게 때린다
"그녀가 없을 때 얘기해야 할 게 있어 ."
"마이 양에겐 그 비디오 안 보여 줬지?"
'당연하지."
"좋아. 그럼 얼른 끝내자. 난 밥 먹는 대로 돌아가겠어 ."
"그래, 무엇보다 넌 안테나를 찾아 내지 않으면 안 돼."
"안테나?"
"전파 발신 기지 말야,"
느긋하게 있을 수는 없었다. 돌아가는 길에 도서관에 들러서 일단
전파에 관해 조사할 필요가 있다. 오늘 이대로 미나미하코네에 가서
닥치는 대로 찾아다니는 것보다는 사전에 어느 정도 조사해서 가능
성 높은 몇 군데를 골라 내는 방법이 손쉬울 것이다. 전파의 성격과
해적 방송 사건의 수사 방법을 알아 내면 몇 가지 가능성도 찾아 낼
수 있을 것이다.
해야 할 일은 산더미 같다. 하지만 지금의 아사카와는 왠지 기세가
꺾여 있었고, 마음은 딴 곳에 가 있는 모습이었다. 그녀의 얼굴과 몸
매가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왜 마이는 류지 같은 자와
사귀는 것일까? 분노를 동반한 커다란 의문이 생겨났다.
"어이 , 듣고 있는 거야!"
아사카와는 류지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다.
"비디오 속에 사내 아기 장면이 있었지?"
"아아."
아사카와는 마이의 자태를 일단 지운 다음, 미끈미끈한 양수에 싸
인 신생아의 영상을 떠올려 보려고 했다. 그러나 잘 되지 않았다. 그
는 물에 젖은 알몸의 마이를 상상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 장면을 봤을 때, 난 내 손에 닿는 묘한 감촉을 느낄 수 있었어.
"그 장면을 봤을 때, 난 내 손에 닿는 묘한 감촉을 느낄 수 있었어.
마치 내가 그 사내 아기를 안고 있는 듯한·. . "
·감촉? ‥‥안고 있는 감촉? 상상 속의 품안은 마이와 사내 아기가
어지러을 정도로 자리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아사카와는 가까스로
잡아 캘 수 있었다. 실제로 아기를 팔로 안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어 두 손을 흠칫 하고 거둬들였던 그 감각! 그리고 류지도 완전히 같
은 감각을 느꼈다는 사실의 중요성 .
"나도 그랬다 미끈한 감촉을 확실히 느꼈어."
"너도? 그렇다면 이건 어떻게 된 거지?"
류지가 기어서 텔레비전으로 다가가더니 비디오를 돌려 그 장면을
재생시켰다. 시간으로는 약 2분 간, 사내 아기는 온화한 울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기의 목과 엉덩이 아래로 보들보들한 손 두 개가 엿
보였다.
"어이 , 이게 뭐지?"
류지는 영상을 일시 정지시키고는 구분 동작으로 보았다. 아주 짧
은 순간이기는 하지만 화면이 검어졌다. 순간적인 것이라서 연속해
서 볼 때는 좀처럼 알아채기 힘들 정도다. 하지만 몇 번이고 반복해
서 구분 동작으로 보니 영상이 새까맣게 메워지는순간을포착할수
있었다.
"아, 잠깐!"
류지는 소리쳤다. 등을 구부린 채 움츠리고 앉아 진지한 표정으로
물끄러미 화면을 보는가 싶더니, 퍼뜩 화면에서 얼굴을 떼어 내며 두
눈을 바쁘게 움직인다. 류지는 격렬한 사고(사고)에 빠져 있는 것이
다. 사고의 모습이 눈의 움직임으로 나타나고 있다. 아사카와로서는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통 알 수가 없다 결국 2분 동안의 장면
가운데 검게 변하는 순간은 33번이나 나왔다.
"그래서,뭐야?그저 이것만으로 뭔가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기라
도 한단 말이야? 단순한 촬영 미스 아냐? 비디오 카메라의 고장이라
든가 ."
아사카와의 말을 무시하며 류지는 다른 장면에서도 그것을 찾아
내려 했다. 바깥 계단을 올라오는 발 소리가 들린다. 류지는 서둘러
정지 버튼을 눌렀다.
이윽고현관문이 열리고 '오래 기다리셨유?' 하는목소리와함께
마이가 나타났다 그리고 방은 다시 향기에 감싸여 갔다.
일요일 오후, 공립 도서관 앞 잔디에는 아이를 동반한 가족들이 많
았다. 사내아이와 캐치볼을 하고 있는 아버지가 있는가 하면, 아이들
노는 데 끼지 못하고 잔디에 아무렇게나 드러누워 자고 있는 아빠도
있었다. 10월 중순 일요일은 온화하고 좋은 날씨 덕분에 어디나 한가
로움에 넘쳐 있었다
그런 광경을 대하고 있던 아사카와는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4층 자연과학실에서 전파에 관한 기본 원리를
대충 익힌 그는 어디랄 것도 없이 그저 멍하니 바깥 경치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소늘 하루는 별안간 생각이 두절되고 마는 때가 많았
다. 갖가지 생각이 맥락도 없이 자꾸만 솟아올라 집중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초조하기 때문이리라 아사카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빨리
아내와 딸의 얼굴이 보고 싶다. 지금, 그런 생각이 강하게 덮쳐왔다.
남아 있는 시간이 별로 없다. 저렇게 잔디 위에서 아이와 놀 수 있는
것도‥‥
5시가 조금 못 되어, 아사카와는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인 시즈카
는 저녁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야채를 썰고 있는 뒷모습에서 불
쾌감을 읽어 낼수 있었다. 이유는 알고 있다 모처럼의 휴일인데 '류
지한테 갔다오겠다'는 말만 남기고 아침 일찍부터 밖으로 나가버렸
기 때문이다 휴일마저 아내를 대신해 딸을 돌봐 주지 않았으니 스
트레스가쌓었을 것이다 게다가 하필 류지한테라니 행선지가 좋
지 않다. 적당한 거짓말로 얼버무릴 수도 있었지만, 유사시에 연락을
취할 수 없게 될 가능성이 있어 곧이 곧대로 말해 버렸다.
"저기요, 부동산에서 전화가 왔었어요."
시즈카는 부엌칼 쥔 손을 계속 놀리며 말했다
"왜 ?"
"이 아파트, 팔 생각 없냐구요."
아사카와는 딸 하루코를 무릎에 앉히고 그림책을 읽어 주었다. 당
장에 의미는 몰라도, 많은 말을 머리에 축적시켜 두면 세 살 무렵이
되어 둑이 터지듯 말이 넘쳐나오는 것이다.
"칼을 잘 쳐 준대?"
땅값이 폭등한 이후부터 집을 내놓으라는 부동산 중개업자가 많았
다.
'1천만‥‥‥
전보다 값이 내려가 있었다. 하지만 융자금을 갚아도 아내와 아이
의 손에 상당한 액수가 남게 된다.
"당신은 뭐라고 했어?"
시즈카는 타월로 손을 닦으면서 그제야 돌아본다.
"남편이 없어서 모르겠다구요."
늘 그랬다. 남편이 없으니까‥‥남편에게 상의해야 ·.지금까지 시
즈괴는 무슨 일이든 혼자 멋대로 결정한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앞으
로는‥‥
'떠보, 어떡하죠?슬슬 생각해 보지 않을래요? 교외라면 정원이
딸린 단독 주택을 살 수 있겠죠? 부동산업자도 그랬어요."
일가족의 소박한 꿈, 그것은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를 팔고 교외에
큰 집을 짓는 것. 밑천도 아무것도 없다면 단순한 꿈으로 끝나고 말
일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도심부의 아파트라는 강력한 재산이 있
었다. 꿈은 언제나 현실 가능한 것이었으며 , 그 꿍을 입에 담는 것만
으로도 두근두근 할 정도의 즐거움이 더해졌다. 손을 망으면 바로 닿
는 곳에 그것이 있는 것이다
"게다가 슬슬 둘째도 ·.."
시즈카가 머릿속에서 어떤 광경을 그리고 있는지 아사카와는 손바
닥 보듯 알 수 있었다. 교외의 널찍한 집 , 두 명이나 세 명의 아이들
에게 각각 하나씩의 공부방,몇 명의 손님이 와도 곤란하지 않을 만
큼의 거실. 하루코가 무릎 위에서 날뛰었다. 아빠의 눈이 그림책에서
떠나, 자기 이외의 것으로 관심을 돌리고 있음을 눈치채고 항의하는
것이다. 아사카와는 그림책으로 눈을 돌렸다.
옛날옛날 갈대 우거진 늪지가 바다에 이어져 있었다.
그렇게 소리내어 읽었지만 아사카와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아
내의 꿍을 실현시켜 주고 싶다. 절실한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앞으로
4일. 원인 불명의 죽음을 아내의 정신이 견며 낼 수 있을까? 꿈이 맥
없이 무너져 사라지려는 것을 아내는 아직 모르고 있는 것이다.
오후 9시. 아내와 딸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잠자리에 들었다. 아사
카와는 류지가 마지막에 한 말이 마음에 걸렸다.
‥‥ 왜, 그 녀석은 아기가 나오는 장면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봤던
걸까7게다가노파의 말·.· '니것은 맹년 새끼가붙허,다시 말해 넌
내년 아이를 낳을 거야' 라는 말. 노파의 말에 등장하는 아이와, 사내
아기의 장면과는 뭔가 관계가 있는 것일까? 그리고 화면 전체가 까
맣게 되는 순간. 그 순간이 어떤 간격을 두면서 30번 넘게 계속 나타
나고 있었던 것 같다.
아사카와는 다시 한번 비디오를 봄으로써 그것을 확인하려 했다.
제멋대로인 것처럼 보이는 류치마저 필사적으로 원가를 찾아 내려
하고 있었다. 류지는 논리적인 사고력은 물론이거니와 직감력도 뛰
어났다. 반면 아사카와가 자신 있어하는 것은 면밀한 조사에 의해 진
실을 끌어 내는 작업이었다.
아사카와는 캐비닛을 열어 예의 비디오테이프를 꺼내 들었다. 그
아사카와는 캐비닛을 열어 예의 비디오테이프를 꺼내 들었다. 그
리고 비디오에 밀어넣으려 하는 순간 문득 어떤 사실을 깨닫고는 손
을 멈추었다.
‥‥잠잔, 뭔가 이상해.
어디가 어떻게 이상한 것인지 아사카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제
6감이 움직였던 것이다. 비디오테이프를 손에 들었을 때의 이상스런
기분이 지나친 생각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 서서히 더해 갔
다. 아주 사소한 변화였다.
·어디지? 변한 곳은 어디야?
심장이 두근거린다.
·나쁜 일이다 사태를 좋게 만드는쪽이 아냐 생각해 봐.잘생각
해 보는 거야 내가 마지막에 이것을 보고 난 다음, 난 분명 테이프를
되감아 두었어. 그런데 지금 감긴 테이프의 두께는 왼쪽이 2, 오른쪽
은 1.정확히 녹화된 영상이 끝난 부분에서 멍춘 채 되감겨 있지 않
다 누군가가본 것이다 내가없을 때· ,
아사과와는 침실로 달려갔다. 시즈콰와 하루코가 서로 접쳐진 모
습으로 잠들어 있다. 시즈과를 바로 돌려 놓은 아사카와는 그 어깨를
흔들었다.
"이봐. 일어나. 이봐, 시즈카!"
아사카와는 하루코까지 깨우는 일이 없도록 목소리를 낮추었다.
시즈카는 불쾌한 듯 얼굴을 찡그리며 몸을 좌우로 비튼다.
"이봐, 일어나라니까!"
아사카와의 목소리는 평상시와 달랐다.
"· . ·뭐예요? ‥‥왜 그래요?"
"얘기할 게 있어 . 이 리 와 봐."
아사카와는 시즈카를 일으켜 그대로 주방으로 잡아끌었다. 그리고
비디오테이프를 아내 앞에 내밀었다.
"당신, 이거 기어?!"
너무나 무서운 태도에 시즈카는 잠시 동안 테이프와 남편의 얼굴
을 교대로 보는 수밖에 없었다.
"· 안 되는 거였어요?"
그렇게 말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 이 사람, ◎ 그렇게 화를 내고 있는 거지? 일요일인데도 당신은
어딘가 가 버리고, 지루해서 엊그제 당신이 류지 씨와 살금살금 보고
있던 비디오를 잡아 빼서‥‥ 그치만, 하나도 재미없는 엉터리 . M신문
사 계열의 영상 사업부에서 만든 것이겠지 .
시즈괴는 무언으로 이렇게 항의하고 있었다. 그렇게 화낼 이유는
없다고‥‥
아사카와는 결혼해서 처음으로 아내를 때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
혔다.
" · .이 , 멍청이가!"
그러나 주먹을 굳게 쥐었을 뿐 그럭저럭 충동을 견며 냈다. 냉정하
게 생각하자.내가 잘못한 게 아닌가? 이런 것을 아내의 눈이 닿을
수 있는 곳에 방치해 둔 나의 행동이 문제겠지 , 남편 앞으로 온 봉투
조차 결코 뜯지 않았던 아내를 믿고 진열장에 놓아 두었던 것이다.
왜 숨기지 않았을까?이런 위험한걸.게다가류지와둘이저 이것을
보고 있는 걸 시즈카가 보았던 것이다. 비디오테이프에 호기심을 품
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숭기지 않은 내가 잘못이었다.
"미안해요."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시즈카가 사과했다.
"언제 봤어?"
아사카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오늘 오전에 ."
"정말이야?"
업던 때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을 시즈괴로서는 알 리 없
었다. 시즈카는 꾸벅 끄덕여 보였다.
'몇 시쯤?"
"왜 그런 걸 물어요?"
"대 답이 나 해 !"
다시 한번 아사카와는 주먹을 꽉 움켜쥐다 말았다.
"10시 반경인가? 「가면 라이더」가 막 끝났을 때였으니까 ·."
가면 라이더? 왜 그런 걸 보고 있었지? 우리 집에서 「가면 라이더」
에 흥미를 가지고 있는 건 딸인 하루코뿐이다. 아사카와는 쓰러질 것
같았지만 필사적으로 버터 냈다.
"중요한 일이니까 잘 들어 . 당신이 이 비디오를 봤을 때, 하루코는
어디에 있었어?"
시즈카는 울 것 같은 얼굴로 변해 있었다.
"내 무릎 위에 있었어요."
"하루코도 당신하고 같이 ·.이 비디오를봤단말야."
"그저 번쩍이는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을 뿐, 그 애에게는 아무 의
ㅁ1 "
"시끄러워 ,1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꿈이 어이없이 사라져? 그 정토가 아니다. 가족 그 자체가 무너지
려 하고 있다. 정말이지 아무 의미도 없는 죽음에 의해.
시즈카는 남편의 분노, 공포, 절망을 보고서야 그제야 이것이 예삿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떠보‥‥ 설마‥‥ 거짓말이죠?"
시즈카는 질 나쁜 장난이라고 해석했던 비디오의 말을 떠올렸다.
그런 것이 있을 리 없다. 그렇지만 이 사람의 이 당황하는 모습, 이게
뭐지?
"여보, 그건 거짓말이죠?· . . "
아사카와는 고개를 옆으로 저었을 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갑
자기 애처로움이 북받쳐 오른다. 자신과 같은 운명에 빠진 자가 여기
에 또 생기다니 .
10월 15일 월요일
요 며칠,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아사카와는 지금까지의 일 모두가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근처의 렌터카 사무실에 전
화를걸어 어제 예약한 시간대로 차를 가지러 갈 것임을 알렸다. 어
제 예약이 분명히 잡혀 있었다. 역시 현실은 끊기는 일 없이 계속되
고 있었던 것이다.
현지의 전파 발신 장소를 찾아 내려면 역시 발을 확보할 필요가 있
었다. 시판 중인 무전기로 텔레비전 전파를 방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
이니 만큼, 전문가에 의해 개조된 무전기가 사용되었으리라 생각했
다. 화상이 끊기지 않았다는 것만 봐도 발신 장치는 극히 가까운 거
리에서 강력한 전파를 날렸을 게 틀림없다. 좀더 정보가 많았다면 전
파가 흘렀을 구역을 특정지을 수 있었을 테고 그것을 토대로 발신지
를 추적해 낼 수도 있었겠지만, 아사카와가 갖고 있는 것은 빌라 로
그캐빈 B-4호의 텔레비전이 전파를 수신했다는 사실뿐이었다 그곳
을 중심점으로 근처의 지형을 확인하면서 이 잡듯 뒤져서 찾아내는
방법 말고는 다른 수를 찾아 낼 수 없었다.
얼마만큼 시간을 요할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아 아사카와는 일단 3
일분의 갈아입을 옷을 가방에 쑤셔 넣었다. 3일분‥‥ 그 이상은 그에
게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얼굴을 마주 대할 때도 시즈카는 비디오 얘기는 비치지도 않았다.
어젯밤. 그럴싸한 거짓말이 떠오르지 않아 아사카와는 '일주일 후의
죽음' 에 대해 별다른 설명 없이 시즈카를 재웠다. 시즈카 역시 그것
을 확인하는 것이 두려워서 애매한 상태를 바랐음에 틀림없다. 평소
처럼 질문 공세를 괴는 일없이 묘하게 입을 다문 채 나름대로 받아들
이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떤 해석에 도달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불
안감마저 씻어 낼 수는 없었던지 아침 드라마를 보다가 몇 번이나 깜
짝깔짝 놀라며 바깥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일절, 이 일에 대해 나서지 마. 나 자신,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 어쨌든 나한테 맡겨 "
시즈카의 불안을 덜어 주기 위해 아사카와는 그렇게 말하는 것 외
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아내 앞에서 결코 나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막 집을 나서려는 바로 그때, 전화가 울렸다. 류지에게서이다.
"재미있는 걸 발견했다. 네 의견을 꼭 듣고 싶어."
류지의 목소리에는 약간 흥분된 기색이 배어 있었다.
"전화로 얘기하면 안돼? 실은 지금 렌터카를 가질러 가려던 참이
야."
"렌터카?"
'건파의 발신 장소를 찾아 내라고 한 건 너잖아?"
"그렇지 응, 그쪽은 내버려 두고 여하간에 곧장 와. 어쩌면 안테나
따윈 찾을 필요가 없어질지도 몰라. 우리가 세운 전제 그 자체가 무
너져 버릴지도‥‥‥
미나미하코네 퍼시픽랜드에 갈 필요가 생길 경우, 그의 방에서 그
대로 직행할 수 있도록 아사카와는 렌터카를 빌린 뒤에 류지의 집으
로 가기로 했다.
인도에 차 바퀴를 걸쳐 주차시킨 다음 아사카와는 류지의 방 문을
거칠게 두드렸다.
"들어와! 안 잠겼어."
아사카와는 난폭하게 문을 밀어젖히고는 일부러 발소리를 크게 내
며 부엌을 가로질러갔다.
'띨 발견한 거야?"
아사카와는 단단히 벼르며 물었다
"왜 그렇게 씩씩대는 거야?"
류지는 책상다리를 한 채 눈을 뒤룩거렸다.
"◎ 발견했는지 얼른 가르쳐 줘 !"
"진정해."
'친정할 수 있겠냐'~? 자, 빨리 말해 !"
류지는 잠시 인을 다물었다. 그리고 천천히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아사카와는 세 평짜리 방에 털썩 주저앉아 무릎 관절을 양손으로
세게 쥐었다
"아내하고·, 아내하고 딸이 그걸 봐 버렸어 ."
"이런이런, 엄청난 일이 돼 버렸군."
류지는 물끄러미 아사카와의 도습을 바라보며,그가흥분 상태에
서 벗어나기를 기다렸다. 그러는 사이에 재채기를 한 번 하고는 큼
하고 소리를 내며 코를 푼다.
"그래서 너, 마누라하고 애를 살리고 싶은 거지?"
아사카와는 어린애처럼 끄덕였다.
"그렇다면 더욱 냉정해져야지. 난 결론을 먼저 말하지 않아.증거
를 나열할 뿐이야. 네가 그 증거에서 뭘 떠올릴지, 내가 알고 싶은 건
바로 그거야. 알았냐? 그러니까 흥분해선 곤란해."
"알았어."
아사카와는 솔직하게 인정했다
"일단 제수라도 하고 와라."
아사카와는 류지 앞에서는 울 수가 있었다 아내 앞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일 수 없었던 만큼 류지를 감정의 배출구로 삼을 수밖에 없
었던 것이다.
타월로 얼굴을 닦으면서 돌아오자 류지가 한 장의 레포트지를 내
민다. 거기에는 간단한 표가 그려져 있었다.
1) 도입부
8.)초 (0) 추상
2)붉은색의 유출 49초 (0) 추상
3)미하라야마(삼원산) 55초 (11) 현실
4)미하라야마의분화 32초 (6) 현실
5) 산 글자
56초 (0) 추상
6) 주사위
103초 (0) 추상
7) 노파
111초 (0) 추상
8) 아기
125초 (55) 현실
9)무수한일굴 117초 (0) 추상
10)대은 텔레비전 141초 (35) 현실
11)남자얼굴 186초 (44) 현실
12) 마지막
132초 (0) 추상
보기만 해도 대략 짐작이 갔다. 비디오 영상을 장면마다 나눈 것이다.
"어젯밤,문득 생각이 나서 이런 걸 만들어 업는데·. 알겠어,어떤
건지?영상은 전부 12장면으로 되어 있어 자각 번호와제목을붙여
기지.제목 뒤의 숫자는 그 장면이 비춰진 시간.그 다음 괄호 안의
숫자는 화면이 새까맣게 뒤덮였던 순간의 횟수."
아사카와는 의아스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제 네가 돌아가고 나서 아기가 나포는 장면 이외의 것도 조사해
업어. 새까맣게 되는 순간이 있는지 어떤지. 그랬더니 봐라, 이렇
게·. 3), 4), 8), 10), 11)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었어."
"그 다음에 있는 추상이라든가 현실이라는 건?"
"그 다음에 있는 추상이라든가 현실이라는 건?"
"12장면은 크게 두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추상적인, 그렇지, 마음
속의 풍경이라고 해야 할 장면하고, 실제로 눈을 통해 볼 수 있는 현
실 속에 존재하는 장면. 그런 구분이야."
류지는 거기서 잠깐 사이를 두었다.
"이걸 보고 나서 뭐 깨달은 거 없냐?"
"글쎄. 네가 말하는 검은 막은 현실 장면 가운데만 나타나 일군."
"그래, 그렇지? 우선 그 점을 ㅁ1릿속에 잘 넣어둬."
"야, 류지 . 이런 감질나는 짓은 그만두고 빨리 설명해 줘. 요컨대,
이게 뭘 의미하는 거야?"
"음, 기다려 . 결론을 먼저 안겨 주면 직감이 둔해지는 경우가 있다
난 직감에 의해 이미 어떤 결론에 도달했어. 일단 결론을 내리고 나
면 모든 사실과 현상을 왜곡해서라도 자신이 얻은 결론을 정당화시
키려고 하는 법이거든.멈죄 수사에 있어서도 그렇겠지, 이놈이 수상
하다고 단정짓고 나면 모든 증거가 그놈을 가리키고 있는 것 같이 보
인단 말야. 알았냐?지금 잘못된 길로 다가갈 수는 없어. 너에게서
내가얻은 결론을 검증받지 않으면 안돼.즉 여기에 늘어놓은사실
을 통해 나와 같은 직감을 얻을 수가 있을지 어떨지‥‥‥
"알았어 . 계속해 ."
"좋아, 검은 막이 현실의 풍경 속에서만 나타난다고 하는 사실과
함께 다시 한번 처음으로 이 영상을 봤을 때의 감각을떠올려 봐.아
기 장면에 관해선 어제 말한 대로야. 그 외에는?예를 들어,무수한
얼굴이 나오는 장면은 어땠지?"
류지는 리모컨을 조작해 그 장면을 비추었다.
"잘 봐, 이 얼굴."
벽에 끼워진 수십 개의 얼굴이 서서히 후퇴하더니 수백, 수천 개로
부풀어 간다 얼굴 하나하나를 잘보면 사람의 얼굴 같기는 한데 뭔
가 다르다.
"어떤 느낌이지?"
류지가 물었다.
'긷가,내 자신이 비난받고 있는 듯한·. 거짓말쟁이,사기꾼이라
"그치?실은 나도 같은,아니 네 느낌에 거의 가까운 감각이 전해
아사카와는 신경을 집중시켰다. 이 사실들이 이끌어 내려는 것. 류
지는 기다리고 있다. 명확한 대답을
"어때 ?"
다시 한번 류지가 물었다. 아사카와는 머리를 저었다
"안 되겠어 ,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아."
"좀더 느긋하게 시간을 들여 궁리하다 보면 틀림없이 나와 같은 걸
생각해 냈을지도 몰라. 알았냐? 나도 너도 이 영상은 텔레비전 카메
라 요컨대 기계 렌즈에 의해 촬영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
"아니야?"
"순간적으로 화면을 뒤덮는 이 검은 막은 뭐지?"
류지는 구분 동작으로 온통 검게 칠해진 화상을 찾았다. 연속해서
류지는 구분 동작으로 온통 검게 칠해진 화상을 찾았다. 연속해서
세 번째 콤마부터 네 번째 콤마까지 검은 화상이 끼여들어 있었다.
구분 동작의 한 콤마는 30분의 1초니까 시간으로 계산하면 약0.1초
정도다.
'련실 풍경엔 나타나고 상상의 풍경엔 나타나지 않는 건 왜지? 이
화면을 잘 봐. 완전히 새까만 건 아니야."
아사카와는 화면에 얼굴을 가까이 댔다 확실히 엷고 희미하게, 횐
아지랑이 같은 것을 띄우고 있었다.
'과릿한 그림자‥‥ 이건 말야, 잔상이다. 그리고 보고 있는 동안에
자신이 당사자가 된 듯한 느낌이 드는 이 생생한 현장감은 뭘까7"
류지는 아사카와의 눈앞에서 크게 한 번 눈을 깔빡여 보였다‥‥ 검
은 막. 검은 막 ‥‥아니?
"흑, 이게 눈 깔빡거림?"
아사카와는 중얼거렸다.
"그래 맞아. 그렇게 생각하면 앞뒤가 통해 사람은 직점 눈으로 보
는 것 이외에 마음속 어떤 장면을 떠올릴 수 있어.그 경우, 망막을
통한 게 아니기 때문에 깜빡거림은 나타나지 않지 하지만 현실에서
눈으로 보는 풍경은 망막에 비치는 빛의 강약에 의해 상이 형성되는
거야, 그런 경우, 망막의 건조함을 방지하기 위해 우린 무의식 중에
눈을 깜박이지 . 검은 막은 눈을 감았을 때의 순간이야."
또다시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덮쳐왔다. 맨 처음에 이것을 보았을
때도, 아사카와는 화장실로 뛰어들어 갔지만, 그때보다 지금의 로한
이 더 심했다. 자신의 몸에 뭔가 들어가 버렸다!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 없다. 기계가 녹화한 것이 아니라 어느 인간의 눈, 귀 , 코, 혀 , 거
기에다 피부 감각, 요컨대 인간의 오감(오감) 모두가 이 영상을 녹화
해 낸 것이다. 이 오한, 참을 수 없을 정도의 떨림. 그것은 알 수 없는
그림자가 자신의 감각 기관 속으로 쑤욱 들어와 ‥‥ 아사카와는 몸 속
에 들어온 내가아닌 다른 것과 같은 시점으로 이 영상을 보고 있었
던 것이다.
닦아도 닦아도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야, 알았냐? 개인차는 있지만 눈 깜빡임의 평균 횟수는 남자가 분
당20회이고 여자가 분당 15회야 그러니까 이 영상을 녹화한 건 여
자일지도 몰라."
아사카와에게는 그 말이 들리지 않았다.
"헤헤헤, 왜 그래? 너 , 죽은 사람 같은 얼굴을 하고 있잖아."
류지가 웃었다.
"자. 좀더 낙관적으로 생각해. 우린 해결에 한 걸응 다가선 거라구.
이 영상이 어떤 인물의 강각 기관에 의해 기록된 것이라면 주문의 내
용은 그 인물의 의지와 관계된 것일 테지 . 결국, 그 인물은 우리가 윈
가 해 주기를 바랐던 거야 "
아사카와의 사고는 일시적으로 기능이 마비되어 있었다. 류지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퍼지고는 있지만, 의미가 머리까지 닿지 못하
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이걸로 해야 할 일이 확실해진 거다. 이 인물이 누구인지
찾아 낼 것.그리고 그 인물이 생전‥‥뭐, 아마도 이놈은 이미 살아
있지 않을 거야‥‥생전에 뭘 바라고 있었던가 하는 것,그게 우리가
살아남기 위한 주문인 거야."
류지는 어떠냐 하고 아사카와에게 윙크를 해 보였다.
아사과와가 운전하는 차는 요코하마와 요코스카를 연결하는 도로
를 따라 남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류지는 조수석 의자의 등판을 제끼
고 달리 스트레스받는 일이 없다는 얼굴로 자고 있었다. 이제 곧 오
후 2시라지만 아사카와는 전혀 공복감을 느끼지 않았다
아사카와는 깨우려고 뻗었던 손을 도로 거둬들였다. 목적지까지는
아직 멀었다. 그저 막연히 가마쿠라로 가라고 들었을 뿐 확실한 목적
지는 듣지 못했다. 행선지도 정해 주지 않고, 게다가 가는 목적도 몰
랐기 때문에 운전자의 신경은 곤두서 있었다. 자세한 것은 차 안에서
얘기하겠다던 류지는 허겁지겁 가방에 짐을 채워 넣더니 차에 올라
탄 순간, '난 어젯밤에 한숨도 자질 못했어. 가마쿠라에 도착할 때까
지 깨우지 말아 줘' 라는 말만 남기고 곧장 잠들어 버렸던 것이다.
아사히나 인터체인지에서 방향을 바꿔 가나자와 가도를 따라5킬
로미터 정도 달리자 가마쿠라 역에 다다랐다. 류지는 두 시간의 수면
을 취한 셈이었다.
"어이 , 다 왔어 ."
아사카와가 어깨를 흔들자, 류지는 고양이처럼 몸을 뻗으며 손등
으로 눈을 비비더니 푸들푸들 얼굴을 옆으로 흔들었다
"모처럼 좋은 꿈을 꾸고 있었는데, 아∼함."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몸을 일으킨 류지는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창 밖을 획 둘러
보았다.
"이 길을 똑바로 가서 이치노토리이에서 왼쪽으로 돈 다음 스톱."
류지는 그 말만 하고는 '헤헤헤, 계속 꿈을 꿔 봐야지'하고는 다시
자려고 했다
"야, 5분도 안 걸려. 잘 시간 있으면 나한테 제대로 설명이나 해
줘 ."
"가면 알아."
류지는 다시 잠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왼쪽으로 돈 다음 차를 세웠다. 바로 앞에 '미우라 데쓰조 기념관'
이라고 작게 쓰인 2층짜리 낡은 민가가 있었다.
"저기 주차장으로 들어가."
어느샌가 류지는 실눈을 뜨고 있었다. 만족스러워 보이는 그 얼굴
은 향기로운 냉새라도 맡고 있는 것처럼 콧구멍을 넓히고 있었다.
"헤헤헤, 덕분에 그럭저럭 계속 꿈을 꿀 수가 있었어 ."
"어떤 꿈이었는데?"
아사카와는 핸들을 되받아치면서 물었다.
"알잖아, 하늘을 나는 꿈이야. 난 하늘을 나는 꿍을 제일 좋아한단
말야."
류지는 사뭇 기쁜 듯 콧소리를 내며 혀로 양 입술을 쩍쩍거리며 할
았다.
미우라 데쓰조 기념관이라는 건물엔 인기척이 없었다. 1층 10평 정
도의 공간에 사진과 서적류가 액자에 넣어져 있기도 하고, 유리 진열
장에 넣어져 장식이 되어 있고, 중앙 벽에 미우라 데쓰조라는 인물의
약력이 걸려 있었다. 아사카와는 그것을 읽고 나서야 겨우 이 인물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실례합니다, 누구 안 계십니까?"
류지는 안쪽을 향해 소리쳤다 대답이 없었다.
미우라 데쓰조는 Y대학 교수를 퇴직한 다음, 2년 전에 15세로 사망
했다. 전공은 이론 물리학. 특히 물성 이론과 통계 역학에 환했다. 하
지만 작기는 해도 기념관이라는 것이 세워진 이유는 전공인 물리학
으로 쌓은 업적 때문이 아니었다. 초현상(초현상)에 대한 과학적 해
명. 약력에 따르면 그의 이론은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다고 하지만,
주목했던 것은 물론 일부분의 사람들 뿐이었을 것이다 아사카와가
이제까지 그의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다는 게 그 증거였다. 그런데
그가 발견한 이론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아사카와는 그 대답을 벽과
진열장에서 찾았다‥‥ 염 (염)은 에너지를 갖고, 그 에너지는‥‥ 거기
까지 막 읽었을 때, 계단을 급히 뛰어내려오는 소리가 안쪽에서부터
울려퍼지더니 미닫이문이 열리고 사십이 넘은 콧수염의 남자가 얼굴
을 내밀었다. 명함을 손에 들고 그 남자에게 다가가는 류지의 모습을
보며 아사카와도 가슴에 있는 주머니에서 명함집을 꺼냈다.
"처음 뵙겠습니다. K대학의 다카야마입니다. "
아사카와와 얘기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어조로, 빈틈없이 행동하
는 것이 참으로 우스꽝스러웠다. 아사카와도 명함을 내밀었다. 대학
강사와 주간지 기자,그 두 개의 직함을 비교해 보더니 낭자는 조금
싫은 표정을 지었다 그가 얼굴을 찡그린 것은 아사카와의 명함 때문
이었다.
"혹 괜찮으시다면, 잠시 상담에 응해 주시겠습니까?"
"아, 뭔가요?"
남자는 경계의 눈빛을 보냈다.
"실은 미우라 선생님을 생전에 딱 한 번 만나뵌 적이 있습니다. "
그 말에 낭자는 왠지 안심했다는 듯 불편한 표정을 누그러뜨리고
접히는 의자 세 개를 가지고 와서 늘어놓았다.
"그러셨습니까? 자, 앉으시죠."
"3년 정도 전· 맞아요,정확히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전해였군요.
전 모교에서 과학방법론 강의를 맡지 않겠느냐는 타진을 받았었는
데, 기회에 선생님의 말씀도 들어 보려고 ·."
"이 집에서 만나셨습니까?"
"예, 다카쓰카 교수님의 소개로‥‥‥
다카쓰카 교수라는 이름을 듣자 남자는 그제야 웃는 얼굴을 띄웠
다. 공통 항목이 확실해진 것이다.
‥‥이 두 사람은 같은 방면의 사람들로 서로 공격할 생각은 아닌 것
같다.
"대단히 실례했습니다. 전 미우라 데쓰아키라고 합니다. 죄송합니
다, 마침 명함이 떨어져서· ."
"그렇다면 선생님의‥‥‥
"예, 불초 외아들입니다. "
"그러십니까? 이야, 미우라 선생님께 이렇게 멋진 아드님이 계셨
다니‥‥‥
아사카와는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자기보다 열 살은
연상일 사람에게 멋진 아드님이란 표현이 뭐냐?
미우라 데쓰아키는 간단히 기념관 소개를 했다. 제자들이 힘을 합
해 아버지가 남긴 집을 기념관으로 만들어 일반에 개방하고, 수집된
자료 정리를 맡아 주었다는 것 그리고 자신으로 말할 것 같으면 아
버지가 희망했던 연구자의 길을 걷지 않고, 기념관 부지 내에 펜션
(민박식의 작은 호텔 : 역자 주)을지어 경영하고 있다는 등의 사실
을 자조적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역시, 아버지의 명성과 남겨 준 토지를 이응하고 있는 것이기 때
문에 불초 자식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겠죠."
데쓰아키는 그렇게 말하고 부끄러운 듯 웃었다. 그의 펜션은 종종
고등학교 합숙 같은 데 이용되었다. 이용자의 대부분은 물리, 생물
동아리 등과 같은 과학계 동아리였는데 그 가운데에는 초심리연구회
라는 이름도 있었다. 고교생 합숙에는 늘 명목이 필요하다 요컨대
미우라 데쓰조 기념관은 고교생 단체를 끌어들이기 위한 번드르한
미끼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
류지는 앉음새를 고치며 얘기의 핵심으로 들어가려 했다.
"아, 대단히 죄송합니다. 그만 쓸데없는 말을 술술‥‥ 그런데 무슨
용건으로?"
보이는 바에 따르면 데쓰아키에게는 과학자로서의 재능은 없는 것
같았다.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에 따라 수시로 태도를 바꾸는 장사
꾼이 어울려 , 하고 류지는 옆얼굴에 경멸의 빛을 띄우는 것이었다.
"실은, 저희는 어떤 인물을 찾고 있습니다. "
"누굽니까?"
"아니 , 그 이름을 알기 위해 이곳에 온 겁니다 "
"아, 어떤 건지‥‥ 아무래도 잘 ."
데쓰아키는 곤란한 듯 얼굴을 찡그리고, 찬찬히 얘기해 달라고 넌
지시 재촉했다.
"그 인물이 현재 살아 있는지,그렇지 않으면 죽어 버렸는지 아직
뭐라고 말하기 어련습니다만, 확실히 보통 사람에게는 없는 힘을 숨
기고 있습니다. "
거기서 류지는 잠시 사이를 두고 데쓰아키를 응시했다. 데쓰아키
는 보통사람에게는 없는 힘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바로 눈
치챌 수 있었던 모양이다.
"미우라선생님은 이 분야에 있어선 아마 일본 제일의 수집가이실
겁니다. 이전에 선생님한테 독자적으로 구축한 네트워크를 이용해
일본 안에 사는 초능력 자들의 목록을 수집해 그 자료를 보존하고 있
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
데쓰아키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설마, 그 자료 중에서 어떤 한
사람을 찾아 달라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
"아, 물론 파일은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가짜도 많고, 어쨌
거나 분량이 분량인지라 "
데쓰아키는 다시 한번 그 파일을 조사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오싹
했다. 십여 명의 제자들이 수개월이나 걸려 겨우 정리했을 정도다.
게다가 다소 의심쩍은 자료들까지도 고인의 유지에 따라 보존했기
때문에 방대한 양으로 부풀어올라 버린 것이다.
"아니, 수고를 끼칠 만한 일은 하지 않겠습니다 허락해 주신다면
저희 둘이서 찾아보겠습니다. "
"이곳 2층 창고에 있습니다만, 일단 한번 보시겠습니까?"
데쓰아키는 일어섰다 분량을 모르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한 번이라도 그것들이 들어차 있는 선반을 보면 조사할
기분 같은 건 사라질 게 뻔하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데쓰아키는 두
사람을 2층으로 안내했다.
계단을 올라가자 높은 천장의 그 방 정면 벽엔 7단 선반이 2열로
나란히 놓여 있었다. 파일 하나에 보존되어 있는자료는40건,그런
것이 대충 보기만 해도 수천‥‥ 류지는 그렇다치고, 아사카와의 얼굴
에서는 핏기가 가셨다.
· 이런 데 시간을 들이고 있다간 이 어두운 창고에서 죽음을 맞이
하게 될 거다.
이어, '달리 방법이 없단 말인가!'하는소리 없는외침.
"봐도 괜찮겠습니까?"
"봐도 괜찮겠습니까?"
류지는 태연스럽게 말했다.
"그럼요, 그럼요, 좋으실 대로·.. "
데쓰아키는 반쯤 질려 하면서도 도대체 무엇을 찾아 낼 속셈일까
하는 호기심도 있어 장시 두 사람의 모습을 관찰하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진저리가나는 모양으로, '전 일이 있어서'라는말을남기고그
자리를 떠났다.
두 사람만 남게 되자, 아사카와는 류지에게 물었다.
"야,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해 봐."
파일이 진열된 선반을 올려다보고 있기 때문에 아사카와의 목소리
는 다소 굵었다. 기념관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그가 입을 연 것이
다. 파일은 연대순으로 진열되어 있었는데 1956년부터 시작해서
1988년으로 끝나 있었다. 1988년‥‥ 미우라 박사가 죽은 해였다. 죽음
으로써 .)2년 간에 이르렀던 수집이 막을 내린 것이다.
"시간이 없어.찾으면서 말할게.난 1956년부터 찾아볼 테니까,넌
60년부터 시작해 줘 ."
아사카와는 시험잠아 한 권을 뽑아 페이지를 넝겼다. 어느 페이지
에나 최소한 한 장의 사진과 간단한 해설, 거기에다 주소와 이름이
쓰인 종이가 붙어 있었다.
"찾아보다니 , 뭘 찾으면 되는 거야?"
"주소하고 이름을 잘 봐. 이 가운데서 오시마지역의 여자를 골라
"여자?"
아사카와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할머니가 누굴 보고 맹년, 새끼가 붙허라고 말했을 것 같냐?"
분명 남자가 아이를 낳을 수는 없다.
두 사람은 어찌 되었든 간에 찾기 시작했다 단순한 작업을 반복하
면서 류지는 아사카와에게 계속 질문을 당하며 , 이런 파일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인지 그 이유를 설명했다.
초자연 현상에 흥미를 갖게 뢴 미우라 박사는, 1950년대에 들어 초
능력을 사용한 실험을 시도해 보았지만 좀처럼 안정된 결과가 나오
지 않았다. 때문에 과학적인 이론을 끌어 내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
했다. 투시 능력에 있어서도 바로 좀전까지 생긴 일이, 대중 앞에서
는 일어나지 않는 등 한결같지 않았다. 이런 능력을 발휘하는 데에는
상당한 집중력이 필요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미우라 박사가
요구하고 있는 것은 언제, 어떤 경우에 있어서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제대로 된 참관인 앞에서 실패 따위를 한다면 미우
라 자신이 사기꾼으로 몰릴 게 뻔하다. 그래서 미우라 박사는 아직
세상 속에 묻혀 있는 초능력자가 있을 거라고 확신하고, 그를 바탕으
로 초능력자 발견에 힘쓰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어떤 방법으로 그들을 찾으면 좋을까? 한 사람 한 사람 만
나서 투시 능력, 예지 능력, 염동 능력 등을 조사할 수는 없는 일이
다. 그래서 그가 생각해 낸 것은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지는 인물에게
엄중히 봉인된 필름을 우송하고, 거기에 지정한 도안을 염사(念寫,
정신적인 힘만으로 화상을 그려 내는 일 역자 주)해서 밀봉된 상태
그대로 되받는 방법이었다 이것이라면 상대가 먼 지역에 있는 경우
도 능력을 시험할 수가 있다 게다가 염사 능력이라고 하는 것은 상
당히 기본적인 힘이어서, 이 능력을 가진 자는 동시에 예언 혹은 투
시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1956년, 미우라 박사는 출판사와 신문사에 있는 제자들의 힘을 빌
려 전국적으로 초능력 자를 모집하기 시작했다. 제자들은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우연히 능력이 있을 만한 사람의 소문을 듣게 되면 그것을
미우라 박사에게 보고했다. 그렇지만 되돌아온 봉서를 조사했을 때,
확실한 능력이 있다고 여겨지는 것은 전체의 약 1할에 지나지 않았
다. 대부분의 필름은 봉한 것을 솜씨 좋게 잘라내고는 살짝 바꿔치
기한 것이었다. 속임수가 분명하다고 판단되는 것은 그 자리에서 찢
어 버리고, 왠지 미심쩍은 것은 될 수 있는 한 보관해 두기로 한 것인
데, 그 결과로 지금 보는 바와 같이 수습도 할 수 없을 만큼 수집품이
쌓이고 말았다 그 후,매스미디어의 발달과제자수의 증가로 이 네
트워크는 더욱 자리를 잡아 갔고, 데이터의 수는 해를 거듭할 수록
점점 더 늘어나서 박사가 죽은 해까지 계속되었던 것이다.
"그렇군‥‥‥
아사카와가 중얼거렸다.
"이 수집품의 의미는 알겠는데, 이 가운데 우리들이 쫓고 있는 인
간의 이름이 있다는 전 어떻게 알지「,7"
"확실히 이 중에 있다고는 말하지 않았어.다만 가능성이 극히 높
다는 것뿐이지. 됐냐? 그만한 짓을 했던 녀석이야, 너도 알지? 염사
가 가능한 놈은 뭐 실제로 몇 사람 있겠지. 하지만 말야. 아무런 장치
도 쓰지 않고 브라운관에 영상을 보내 줄 수 있는 초능력 자는 그리
흔하지 않아. 초특급의 힘이야. 그만한 능력자라면 보통 생활을 하고
있어도 눈에 띄는 법이거든 미우라 씨의 네트워크가 그런 걸 두 눈
멀정히 뜨고 놓쳤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어 "
‥‥가능성은 있다. 아사카와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파일을 넘기
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간다.
"그런데 난 왜 1960년 파일부터 찾으라는 거야?"
아사카와는 문득 생각난 것처럼 고개를 들었다.
"비디오테이프 속에 텔레비전이 한 대 비춰졌었지7그건 아주 구
형이야. 50년대부터 60년대 초로, 텔레비전 초창기 시절."
"그렇니까, 뭘‥‥‥
"시끄러워 , 가능성의 문제라고 말했잖아."
아까부터 왜 안달하고 있는 거지 , 하고 아사카와는 스스로를 다잡
았다. 하지만 무리도 아니다 시간은 제한되어 있는데 이 방대한 파
일이라니. 침착한 것이 오히려 부자연스러울 정도다.
그때, 아사카와는 파일 속에 있는 오시마라는 글자를 보았다.
"어, 있다!"
귀신 목이라도 따온 듯한 외침이었다. 류지가 놀라서 돌아보더니
들여다본다.
·. 오시마 모토마치.쓰치다아키코, 37제,60년 2월 14일 소인.검
은 바탕에 횐 번개 같은 젓이 달린 흑백 사진 한 장. 그 해설에는
'+' 이라고 글자를 염사해 달라고 써 보냈는데, 이와 같은 염사를 얻
었다. 살짝 바꿔치기한 흔적은 없음.
"어때 !"
아사카와는 흥분으로 몸을 떨며 류지의 반응을 기다렸다
"· 가능성이 없는 것도아니군 일단주소하고 이릉을적어 둬,"
그 말만 하고 류지는 자기가 맡은 파일로 돌아갔다. 아사카와는 이
렇게 빨리 '그것 같은 것' 을 발견할 수 있었던 사실에 기분이 좋아졌
지만, 류지의 담당한 반응이 불만스럽기도 했다.
두 시간이 지났다. 그 이후, 오시마 출신의 여성은 한 사람도 발견
할 수가 없었다. 실험 응답자의 주소는 도쿄 혹은 칸토 지역 근처가
많았다. 데쓰아키가 차를 가지고 나타나 야유라고 생각해도 좋을 만
한 두세 마디 말을 남기고 물러갔다 두 사람 모두 파일을 넘기는 손
의 속도가 서서히 떨어져 갔다. 두 시간이나 들였지만 일 년분의 자
료조차 자세히 살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사괴와는 그럭저럭 脚년도 자료를 모두 조사하고 61년도 자료로
옮기려다 힐끗 류지 쪽을 보았다. 류지는 책상다리를 하고 펼친 파일
에 얼굴을 묻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잠들어 버린 건가, 이 자식‥‥ 하
고 손을 막 뻗으려는데 류지가 눌려 찌부러지는 것 같은 신음 소리를
냈다.
"배고파 죽겠다. 도시락하고 우롱차 좀 사다 줘 . 그거하고 '푸치펜
션 · 소레이유' 에 오늘밤 예약 부탁해."
"뭐, 뭐야, 그건."
"아까 그 아저씨가 경영하고 있는 펜션이야."
"그건 아는데 너 같은 녀석하고‥‥‥
"싫냐?"
"첫째, 느긋하게 펜션 같은 데 묵고 있을 여유가 없어."
"설사 여자를 발견했다고 해토 이래 가지고선 오시마에 갈 방법이
없어 . 오늘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다구. 확실히 수면을 취해 체력을
다져 두는 쪽이 좋지 않겠어?"
류지와 함께 펜션에 묵는다는 사실에 말할 수 없는 혐오감을 느꼈
다. 하지만 할 수 없다고 단념한 아사카와는 도시락을 사러 달려가면
서 미우라 데쓰아키에게 오늘밤 묵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그리고 나
서 다시 돌아와 류지와 둘이서 우롱차를 마시면서 도시락을 먹었다
오후 7시‥‥ 잠깐 동안의 휴식이었다.
랄이 나른하고, 어깨에 알이 배기는 것 같았다 눈이 따끔따끔해서
아사카와는 안경을 벗었다. 그 대신 파일을 얼굴 바로 앞으로 가져와
혀로 한듯이 찾아갔다 신경을 집중시키고 있지 않으면 깜빡지나쳐
버리고 말 것 같았다. 덕분에 쓸데없는 피로만 더욱 쌓여 갔다.
오후 9시 쥐죽은 듯 조용한 창고에 류지의 느닷없는 목소리가 을
려퍼졌다.
"드디어 발견했어 . 이런 데 있다니 "
아사카와는 그 파일에 빨려들듯 류지 옆에 주저앉아 안경을 고쳐
썼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오시마의 사시키지 야마무라 사다코(山材fi子),10살 봉서의
소인은 1958년 8월 29일. "자신의 이름을 염사해 달라는 뜻을 보냈는
데 이것을 얻었음. 진짜라고 봐도 틀림없음." 그리고 검은 바탕에 하
얗게 '14J' 이라는 글자가 떠오른 사진이 한 장.
아사과와는 그 淡' 이라는 글자를 본 기억이 났다.
"야, 이거다. "
목소리가떨렸다. 비디오속 이것과 똑같은 ◎'이라는글자장면
이 미하라야마 분화 장면 바로 뒤를 잇고 있었다 게다가 열 번째 장
면에 비친 낡은 텔레비전에는 凌'이라는 글자가떠 있었다. 그리고
이 여자의 이름은 山村貞子.
"어떻게 생각해?"
류지는 물었다.
"틀림없어 . 이 거야 "
그제야 아사카와의 마음에 희망이 솟구쳤다. 어쩌면 마감시간에
맞출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문득 가슴을 스쳤다.
10월 16일 화요일
오전 10시 15분, 아사카와와 류지는 아타미 항에서 막 출발한 쾌속
정에 올라타 있었다. 오시마와 본토를 연결하는 카페리는 없었기 때
문에 차는 아타미 고락쿠엔 옆 주차장에 맡겨 놓는 수밖에 없었다.
아사카와는 차 열쇠를 아직도 왼손에 쥔 채였다
오시마 도착은 한 시간 후 예정이었다. 하늘은 잔뜩 찌푸려 있고
바람도 상당히 셌다. 대부분의 승객은 갑판에 나오는 일 없이 지정석
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서둘러 표를 사느라 충분히 확인할 새가
없었지만, 아무래도 태풍이 다가오고 있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파도
가 거칠어지고 요동도 심했다.
아사카와는 뜨거운 캔커피를 마시면서 지금까지의 경과를 다시 한
번 머릿속으로 되새겨 보았다 용케 여기까지 왔다고 칭찬해야 할지 ,
그렇지 않으면 보다 빨리 ◎村貞子'라는 이름을 찾아내 오시마로
향해야 했다고 게으름을 책망해야 할지 . 아사카와는 어느 쪽으로도
결정내릴 수가 없었다. 모두 순간적으로 비디오를 뒤덮는 검은 막이
'눈 깜빡임' 이라는 것을 깨달았는가, 깨닫지 못했는가에 달려 있었던
것이다. 영상을 기록한 것이 비디오 카메라가 아니라 인간의 감각 기
관이며, 게다가그 인간이 빌라로그괘빈 B-4호에 있던 녹화 상태의
비디오를 향해 강한 '염사' 를 보낸 것이라고 한다면 분명 그 인물이
가진 초능력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강한 것일 게다. 류지는 그런
보통사람과는다른 '눈에 띄는' 특징에 주목했고,마침내 이름을찾
아 내는 데 성공했다. 아니, 아직 확실하게 '山村』j子'가 범인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다. 단순한 용의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 용의를 좀
더 확실히 하기 위해 지금 두 사람은 오시마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거친 파도 탓에 배가 크게 흔들렸다. 아사 자와는 기분 나쁜 예감에
사로잡혔다. 과연 두 사람 모두가 오시마로 나선 일이 옳았을까? 태
풍에 갇혀 둘다 오시마에서 나갈 수 없게 된다면 아내와 딸은 누가
구할 것인가? 마감은 이제 바로 코앞까지 임박해 있다. 내일 모레 오
후 10시 4분
캔 커피로 양손을 덥히면서 아사카와는 더욱 작게 몸을 움츠렸다.
"난 아직도 못 믿겠어 . 도대체 인간에게 그런 일이 기-:3·한 건지 , 어
떤지 ."
"믿고, 안 믿는 문제가 아니겠지."
오시마의 지도에 시선을 떨군 채 류지가 대답했다.
"어쨌든 넌, 이 현실에 직면해 있는 거야. 알았냐?우리에게 보이
는 건 연속해서 변화하는 현상의 일부뿐이야."
류지는 지도를 무릎 위에 놓았다.
"빅뱅은 알고 있겠지?우주는 2백억 년 전에 엄청난 폭발을 일으
켜 탄생됐다고 믿어지고 있어.탄생하고 나서 현재까지의 우주 모습
을난수식으로나타낼 수가있지 미분방정식이야· 알았냐?이 우
주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현상은 미분 방정식으로 표현하는 게 가
능해 이걸 사용하면 1억 년 전, 백억 년 전, 혹은 폭발 후 1초, 아니
0.1초 후 우주의 모습도 확실히 알 수 있어.하지만 말야,자꾸만 시
간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0인 순간, 요컨대 폭발하는 바로 그 순간의
일을 표현하려 하면 이게 아무리 해도 알 수가 없는 거야. 그리고 또
한 가지, 우리들의 우주가 마지막에는 어떻게 돼 버리는 건지‥‥ 우주
는 열려 있는 것인지 혹은 닫혀 있는 것인지? 있잖냐,시작과 끝을
알지 못한 채 그저 우린 경과만을 알 뿐이야. 이런 건 인간의 인생과
비슷하지 않냐?"
류지는 그렇게 말하고 아사카와의 팔을 찔렀다.
"그렇기도 하군. 앨범을 보면 자신의 세 살 때 모습, 막 태어난 아
기였을 때의 모습 같은 건 어느 정도 알 수 있긴 하지 ."
"그 말대로야 태어나기 전, 그리고 죽은 후 이것만 인간은 알지
못하고 있는 거다. "
"죽은 후라· . 죽으면 그것으로 끝나고 아무것도 없다, 그뿐인 것
아닐까?"
"너 , 죽어 본 적 있냐?"
"아니 ."
아사카와는 자못 심각한 척하며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그럼 모르는 거 아니겠어?사후 세계가 어떻게 되어 있는 건지 말
야"
"영혼이 존재한단 말이냐?"
"그러니까, 나로서는 모르겠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거야. 하지만
말이다, 생명의 탄생을 생각해 보면 혼이라는 것의 존재를 가정하는
쪽이 쉬울 것 같지 않니?현대의 분자생물학자가 말하고 있는 장난
에는도저히 현실성이 없단 말야. 알았냐?그사람들은뭐라고 말하
고 있는 줄 알아? 그릇 안에 20여 종의 아미노산을 수백 개 넣고 전
기 에너지를 가하면서 뒤적뒤적 해 주면· 자, 이와 같이 생명의 근
본인 단백질이 생깁니다 이런 식으로 말하고 있단 말야 그런 바보
같은 말을 믿을 수 있겠어? 그런 건 신의 창조물입니다. 라는 얘기가
차라리 단박에 감이 오지. 야 난 말야. 탄생의 순간에는 완전히 다른
타입의 에너지 , 아니 어떤 종류의 의지가 작용했다고 생각해."
류지는 아사카와 쪽으로 아주 조금 얼굴을 들이밀었는가 싶더니 ,
화제를 싹 바됐다.
"야,너 아까 미우라 기념관에서 열심히 선생의 저작을훌고 있던
데 , 뭐 재미 있는 거라도 발견했냐?"
그러고 보니 읽다 만 게 있었음이 떠올랐다‥‥ 박사의 이론‥‥염
(念)은 에너지를 갖고, 그 에너지는‥‥
"염은에너지라던가 그런 게 써 있었던 것 같은데· ."
"그 다음은?"
"아니 , 읽을 새가 없었어 ."
"헤헤, 유감이군. 거기서부터가 재밌는데. 그 선생, 보통 사람들이
들으면 놀란 만한 일을 태연하게, 그럴싸하게 늘어놓으니까 이쪽이
오히려 이상해져 버린단 말야. 요컨대 그 아저씨가 말하려던 것은
'관념은 에너지를 가진 생명체다' 라는 거야."
'判?다시 말해서 머릿속에 담긴 생각이 생명체로 변화한다는 거
야?"
"그런 게 되겠지 ."
"그건 극단적인 걸."
"극단임에는 틀림없지만 그와 비슷한 사고 방식은 기원전부터 논
해지고 있어. 생기론(生起論)의 변형이라고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도
없거든 "
류지는 거기까지 말하더니 값자기 대화에 흥미를 잃고, 오시마의
지도로 시선을 되돌렸다
류지가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 모르는 바 아니다. 지긍 우리가 직
면하고 있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默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
인 이상, 원인과 결과는 모른다 할지라도 현상적인 사실만이라도 포
착해서 대처해 가는 수밖에 없다.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주문의
수수께끼를 풀어 생명의 위기에서 벗어나는 일이지 초능력의 수수께
끼를 밝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말한다면 분명 맞는 얘기다. 하지
만 아사카와는 아무래도 석연치 않았다. 아사카와는 류지에게 좀더
명쾌한 대답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먼바다로 나감에 따라 요동도 점차 심해져, 아사카와는 배멀미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의식하면 할수록 가슴 언저리가 굼실궁실해 온
다. 꾸벅꾸벅 졸고 있던 류지가 갑자기 얼굴을 들어 밖을 내다보았
다. 바다는 짙은 회색으로 물결치고 있었고, 전방에 어렴풋이 섬의
모습이 떠올라 있었다.
"야, 아사카와. 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데."
"뭐가?"
"로그캐빈에 묵었던 네 녀석들은 왜 주문을 실행하지 않은 걸까?"
· .뭐야, 겨우 그런 건가?
'뻔하잖아? 비디오의 내용을 믿지 않았으니까 "
"물론 나토 그렇게 생각했어 . 그래서 주문을 지우는 따위의 장난을
한 거다. 라고 말이야. 근데 갑자기 생각났어. 고등학교 때 육상부 합
숙중에 사이토가 헐레벌떡 방으로 뛰어들어왔었어. 한밤중에. 기억
하지? 사이토‥‥ 그 좀 멍청한 녀석 말야. 부원은 전부 열두 명이었는
데 모두 같은 방에서 자고 있었지. 그 자식, 방으로 뛰어들어오자마
자 턱을 바들바들 떨면서 '유령을 畿어 !' 라며 큰 소리로 아우성을 쳐
댔어. 화장실 문을 열려고 하는데 세면대 옆 쓰레기통 그림자 근처에
서 작은 여자아이의 우는 얼굴을 봤다고 말야 그자리에 있던 나 이
외의 열 명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 것 같냐7"
"반은 믿고 반은 웃었다, 그런 거 아냐?"
류지 는 고개를 흔든다.
"피기 영화라든가 텔레비전 속의 세계라면 그랬겠지 . 처음에는 모
두 믿지 않았는데,그들 가운데 한 사람씩 한사람씩 괴물의 습격을
받아 ·. 그런 패턴이니까. 하지만 말야, 현실은 달라. 누구 하나 예외
없이 그의 얘기를 믿었단 말야. 열 명 모두 말이야. 열 명이 특별히
겁쟁이였기 때문이 아냐 어떤 그룹을 대상으로 실험해도 똑같은 결
과가 나을 게 뻔해. 근원적인 공포심 , 그건 인간의 본능 가운데 이미
짜 넣어져 있는 거야."
"그 네 사람이 비디오를 믿지 않은 게 이상하다, 그렇게 말하고 싶
은 거냐?"
류지의 얘기를 듣는 사이에 아사카와는 불현듯 귀신 탈을 보고 을
던 딸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때의 당혹감,그 아이는 어째서
귀신 탈이 무섭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응‥‥ 아니 , 그 영상은 스토리도 없었으니까, 보는 것만으로는 그
다지 무서운 건 아니었어.그러니까 믿지 않았을 수도 있지.그렇지
만 왠지 마음에 걸리지 않았을까? 어때? 너라면, 주문을 실행하면 죽
음의 운명에서 도망칠 수 있다고 한다면, 설사 믿어지지는 않는다 해
도 실행해 볼까 하는 기분이 들지 않겠니? 적어도 한 사람 정도는 빠
져나간 놈이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거야.그 자리에선 강한 척
했다가도 도쿄에 돌아온 다음 몰래 실행에 옮기는 건 가능하거든 "
불길한 예감이 더 강해졌다 실은 아사카와 자신, 같은 생각을 했
던 적이 있었다‥‥만일 주문이 실현 불가능한 것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
"실현 불가능했기에,믿지 않음으로써 자기 자신을 납득시키려 했
다고 봐야 하는 건가· ."
아사괴와가 그때 떠올린 것은 이런 경우였다. 누군가에게 살해당
한 여자가 이승에 메시지를 남겨,남의 손을 빌려 자신의 원한을 풀
려고 한다‥‥
"난 네가 뭘 생각하고 있는지 알아. 어떻게 할래? 만일 그렇다면 "
만일 어떤 한 사람의 인간을 죽여라. 라는 식의 명령이 담겨 있었
다면,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생판 모르는 사람을 죽일 수 있
을까 없을까‥‥ 아사카와는 자문했다. 무엇보다도 문제인 것은 만일
그런 사태에 직면했을 경우, 둘 중 누가 주문을 실행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아사카와는 머리를 세게 흔들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생각
은그만두자,지금은 그저 '山材貞子'라고 하는 인물의 소원이 누구
나 실현 가능한 것이기를 비는 수밖에 없다.
"이봐, 류지 . 부탁이 있다. "
아사카와는 목소리에 힘을 넣었다.
"뭐 ?"
"만일 내가 늦어서 , 결국· ,"
아사카와는 죽음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고 싶지 않았다.
"그 다음날, 네가 주문의 정체를 』招 냈을 경우, 내 아내와 딸한테
류지는 그 다응 말을 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물론이지.맡겨둬.내가 책임지고 네 마누라하고 딸아이를 구해
주지 ."
아사카와는 명함을 꺼내더니 그 뒤에 전화번호를 적어 넣었다.
"이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 아내와 딸아이를 아시카가에 있는처가
"이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 아내와 딸아이를 아시카가에 있는처가
집에 보낼 생각이야. 자, 이게 처가집의 전화번호. 잊어버리기 전에
받아둬 ."
류지는 명함을 보지도 않고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선내 방송이 배가 막 오시마에 도착했음을 알렸다. 아사카와는 배
에서 내리자마자 집에 전화를 걸어 잠시 친정에 돌아가 있으라고 아
내를 설득할 작정이었다. 언제 자신이 도쿄로 돌아갈 수 있을지 알
수가 없다. 어쩌면 이대로 오시마에서 데드라인을 맞이하고 말지도
모른다. 좁은 아파트 안에서 날로 더해 가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아내와 아이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다.
트랙을 내려오면서 류지가 물었다
"야, 아사카와. 마누라하고 아이라는 게 그렇게 귀여운 거냐7"
너무나도 류지답지 않은 질문이었기 때문에 아사카와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때가 되면 알 거야, 너도."
하지만 아사카와는 류지가 제대로 된 가정을 꾸밀 수 있을 거라고
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타미 쪽보다 이곳 오시마 쪽 바람이 조긍 더 셌다. 하늘을 올려
다보니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구릉의 움직임이 빨랐고, 잔교(機
橋, 배를 부두에 댈 수 있도록 물가에 만들어 놓은 구조물 . 역자 주)
의 콘크리트에 부서지는 파도가 발밑을 흔들고 있었다. 심한 비는 아
니었지만 바람에 실려온 빗방울이 정면으로 아사카와의 얼굴에 들이
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우산도 쓰지 않은 채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새우등으로 바다 위의 잔교를 빠른 발걸음으로 건넜다.
렌터카라고 쓰인 플래카드와 민박이나 여관집을 알리는 깃발 따위
를 든섬 사람이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아사카와는 목을 빼 만
나기로 한 사랑을 찾았다. 아타미 항에서 쾌속정을 타기 전에 아사카
와는 본사에 문의해, 오시마 통신부 전화번호를 알아 내어 하야츠라
고 하는 통신원에게 조사 협조를 의뢰했던 것이다. 오시마에 지사를
두고 있는 신문사는 없었고, 그 대신 그 지방의 사랑을 통신원으로
고용하고 있었다. 통신원은 섬에서 일어난 사건에 늘 눈을 번뽁이떠
무언가 이상한 사건이나 에피소드를 발견했을 경우에는 본사에 연락
할 의무가 있었고, 회사 사람이 섬에서 취재를 하게 될 경우에는 당
연히 협조해야 한다. M신문사를 퇴직한 후 오시마에 자리잡은 하야
연히 협조해야 한다. M신문사를 퇴직한 후 오시마에 자리잡은 하야
츠의 경우, 오시마 이남에 있는 7개 섬 전체를 정보 수집 영역으로 삼
고 사건이 일어나면 본사 기자를 기다릴 것도 없이 스스로 기사를 써
서 보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야츠가 섬에 독자적인 네트워크를 갖
고 있고,그의 협조를 얻을 수 있다면 아사카와의 조사 역시 빠르게
진행될 수 있을 것이다
하야츠는 아사카와의 요청에 흔쾌히 응하고 부두까지 마중 나을
것을 전화로 약속해 주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아사카
와는 두사람이 간다는 것,그리고 자신의 신체적 특징 등을하야츠
에게 간단히 알려 두었다.
"실례합니다만 아사카와 씨 아니십니까?‥‥‥
등 뒤에서 말을 걸었다.
"예, 그렇습니다만 · .."
"오시마 통신부의 하야츠입니다. "
하야츠는 우산을 내밀면서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로 웃으며 맞이
했다.
"불쑥 찾아피서 죄송합니다. 신세 좀 지겠습니다 "
아사카와는 걸으면서 류지를 소개하고, 서둘러 하야츠의 차에 올
라탔다 바람 소리가 요란해 차 안이 아니면 제대로 얘기를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경차치고는 차 안이 넓었다. 아사카와가 조수석 , 류
지가 됫좌석에 앉았다
"곧바로 야마무라 다카시 댁으로 가시겠습니까?"
하야츠는 양손을 핸들에 얹고 물었다. 육십이 넘었는데도 머리숱
이 많아 그만큼 횐머리도 많았다.
"야마무라 사다코(山材」I~)의 친정을 벌써 알아 낸 겁니까?"
전화로 야마무라 사다코라고 하는 인물에 대해 조사하고 싶다는
뜻을 미리 이야기해 두었다.
"조그만 마을이라서요.사시키지 에서 야마무라라고 하면 한 집밖
에 없으니까 이내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야마무라 씨네는 평소에는
어부지만 여름 동안은 민박도 하고 있는데, 어떻습니까? 괜찮으시다
면 오늘밤은 거기서 묵으시는 게‥‥ 저희 집토 괜찮습니다만, 너무 좁
고 지저분해서요‥‥ 오히려 폐가 되는 것이 아닌가 싶어‥‥‥
하야츠는그렇게 말하고는 웃었다 거짓 없는 말이었다 그는아내
와 둘이서 살고 있었는데 실제로 손님 두 사람을 묵게 할 공간이 떫
었다. 아사카와는 뒤로 돌아 류지를 보았다
"난 아무래도 상관없어 ."
하야츠는 섬 남쪽 끝 사시키지를 항해 경차를 달렸다. 달렸다고는
해도 성을 일주하는 오시마 순환 도로는 폭도 좁고 러브도 많아 좀체
스피드를 낼 수 없었다. 마주치는 차도 압도적으로 경차가 많았다
오른쪽의 시계가 열리며 바다가 보이자, 바람 소리가 변했다 하늘빛
을 받아 어둡게 가라앉은 바다는 커다랗게 꿈틀대면서 물마루를 하
얗게 번쩍이고 있었다. 그것이라도 없으면 하늘과 바다를 가르는 선,
혹은 바다와 육지를 가르는 선마저 나누기 어려웠을 것이다. 물끄러
미 바라보고 있는 사이에 어두운 기분이 될 것 같았다. 라디오에서는
태풍에 관한 정보가 흘러나오고 주위는 한층 더 어두워졌다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들어가니 바로 동백나무들이 터널처럼 이
어져 있었다. 차는 그 안으로 접어들었다. 오랜 세월 비바람을 맞아
흙을 빼앗긴 탓인지 , 동백나무 줄기 밑은 꼬불꼬불 구부러진 벌거숭
이 뿌리가 몇 가닥이나 얼굴을 내민 채 서로 휘감겨 있었다. 비에 젖
은 그 표면은 정취가 있었지만 아사카와는 문득 거대한 괴물의 내장
속을 달려나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에 빠져 버렸다
'사시키지는 요 바로 앞입니다. "
하야츠가 말했다.
"하지만 야마무라 사다코라는 여성은 이미 여기에 없을 것 같군요.
뭐, 자세한 건 야마무라 다카시 씨한테 물어 보십시오. 야마무라 씨
는 분명히 야마무라사다코의 어머니 되는 사람파사촌이 된다고들
었습니다. "
"야마무라 사다코란 여자, 지금 몇 살입니까?"
아사카와가 물었다. 류지는 아까부터 됫좌석에 웅크리고 있을 뿐,
한마디도 말을 하려 들지 않는다.
"글쎄요, 직접 만난 적은 없습니다만·. 만약 살아 있다면 지금쯤
42-43제 정도 아닐까요7"
‥‥만일 살아 있다면, 왜 그런 표현을 쓰는 걸까 하고 아사카와는
이상하게 여겼다. 어쩌면 현재 소식이 끊어진 상태가 아닐까? 애써
오시마까지 왔건만 정보도 잡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그런
두려움이 획 하니 머리를 스치는 것이었다.
그럭저럭 하는사이,차는 '야마무라장'이라는 간판이 달린 2층집
앞에 멈춰 섰다. 바로 앞에 바다를 바라다볼 수 있는 완만한 경사면
이 있어, 날씨가 맑으면 멋진 풍경을 즐길 수 일을 만한 곳임이 틀림
없다. 앞바다에는 삼각형의 섬 그림자가 희미하게 떠있었다. 도시마
였다.
"날씨가 좋으면요, 저쪽에 신시마, 시키네시마, 게다가 고즈시마까
지 바라볼 수 있죠."
하야츠는 멀리 남쪽 앞바다 쪽을 가리키면서 자랑스러운 듯 말했
다.
"조사한다는 게, 대체 그 여자의 윌 조사하면 되는 거야?"
·. 1965년에 입단?농담이 아니군.지금부터 25년이나 빗날 일 아
냐?
요시노는 속으로 욕을 하고 있었다.
‥‥ 1년 전 범인의 자취를 쫓는 것도 엄청나게 성가신 일인데 25년
전이라니 .
"아무거나 좋습니다 알아 낼 수 있는 것 전부. 우린 그 여자가 어
떤 인생을 보냈고, 지금 현재 무엇을 하고 있고, 무엇을 바라고 있는
지, 그런 걸 알고 싶습니다. "
요시노는 한숨을 쉬는 수밖에 없었다. 수화기를 귀와 어깨로 누르
면서 책상 끝의 메모지를 앞으로 끌어당겼다.
"· 그래서 , 그 여자의 당시 나이는?"
"18세, 오시마의 고등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도쿄로 상경 , 곧바로
극단 '비상' 에 입단했습니다. "
"오시마?"
요시노는 움직이던 펜을 멈추고 얼굴을 찡그렸다.
"자네, 지긍 어디서 전화하는 건가?"
'떠긴 오시마, 사시괴지입니다. "
"· 언제 돌아올 예정이지?"
"되도록 빨리요."
"알고 있나? 태룽이 접근하고 있다는 거‥‥‥
현지에 있으면서 모를 리 없는 일이지만 요시노로서는 이 절박한
상황이 마치 일부러 만들어 낸 일 같아 재미있게 여겨지기까지 한다
'마◎은 내일 모레 밤.그렇지만 본인은 오시마에 갇혀 버린 채 영
영 나오지 못하고 말지도 모른다.
"배나 비행기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아사카와는 아직 자제히 파악하고 있지 못했다.
"아니 ,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이 상황이라면 일단 틀림없이‥‥‥
"결항‥‥‥
"· . ·그렇지 않겠나?"
야마무라 사다코의 조사에 바빴던 아사카와는 태풍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미처 포착하지 못했던 것이다. 포시마에 도착했을 때부터 왠
지 기분 나쁜 예감이 들었지만, '결끙 이라는 단어를 직접 입에 담고
보니 위기감이 바싹바싹 다가온다. 아사카와는 수화기를 손에 든 채,
입을 다물어 버렸다.
"이봐 이봐, 걱정 마. 아직 확실히 결정된 건 아냐."
요시노는 애써 밝게 말하고는 화제를 피해 갔다.
"그럼 그 여자‥‥ 야마무라 사다코의 18세까지 약력은 이미 자네 쪽
에서 조사가 끝난 거군."
"대략적인 건· . . "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아사카와는 전화 부스 안에서 바람과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외에 다른 단서는 없는 건가?설마, 극단 '비상'뿐인
건 아니겠지?"
"그게, 그렇습니다. 야마무라 사다코는 1947년에 이즈오시마의 사
시키지에서 태어나,어머니인 시즈코·. 아, 이 이름도 메모부탁합니
다. 야마무라 시즈코, 47년 당시 22세. 시즈코는 막 태어난 사다코를
할머니한테 맡기고 도쿄로 도망쳐· . ."
"왜 아기를 섬에 남겨 둔 채· . . "
"남자 때문이죠. 이 이름도 메모해 주세요. 이구마 헤이하치로, 당
시 T대학 정신과 조교수, 야마무라 시즈코의 애인‥‥‥
"그렇다면 야마무라 사다코는 시즈코와 이구마 헤이하치로 사이에
서 태어난 아이란 말인가?"
"확증은 잡지 못했습니다만, 일단 그렇게 봐도 틀림없겠죠."
"두 사람, 결혼은 안 했나?"
"예, 이구마 헤이하치로는 아내가 있었으니까요."
그렇군, 불륜이라는 건가 .
요시노는 연펄 끝을 혀로 한았다.
"알겠네, 계속하게."
"1950년이 되자마자 시즈코는 3년 만에 고향을 찾아가 딸인 사다
코와 재회하고, 잠시 동안 여기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해가 끝나갈
코와 재회하고, 잠시 동안 여기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해가 끝나갈
무렵 , 또다시 도망쳤는데 그때는 사다코도 함께였죠. 그 후 5년 정도,
시즈코와 사다코 모녀가 어디서 뭘 하고 있었는지 불분명합니다. 그
런데 50년대 중반, 이 섬에 살고 있던 야마무라 시즈코의 사촌은 시
즈코가 유명해졌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합니다 "
"사건이라도 일어난 건가?"
"모르겠습니다. 그저 그 사촌은 바람결에 시즈코의 소문을 들었다
고 할 뿐이라‥‥ 그런데 우리 신문사 명함을 내 밀자마자 신문사 양반
이라면 댁들이 훤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말하는 겁니다. 말투로 봐서
는 아무래도 시즈코와 사다코 모녀는 1950년부터 55년까지 5년 동안
매스컴을떠들썩하게 할 만한 뭔가를 했던 모양입니다 어쨌든 간에
여긴 섬이라서 본토의 정보가 들어오기 어려워서‥‥‥
"그러니 뭔가? 나한테 알아보라고 하는 거군."
"눈치가 빠르시군요."
"바보 녀석 그 정도는 금방이지."
"아직 남았습니다. 56년. 시즈코는 사다코를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
옵니다만, 완전히 딴사람처럼 초라해져서 사촌이 뭘 물어도 대답하
려고도 하지 않고, 우울증 환자처럼 뜻모를 말만 중얼중얼거리더니
결국에는 미하라야마의 화산에 몸을 던져 자살하고 만 겁니다. 31세
때였습니다. "
"시즈코가 왜 자살했는지 그것도 내가 조사해야 하는 건가?"
"부탁드립니다. "
아사카와는 수화기를 쥔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만일 이대로 섬
에 갇혀 버린다면, 의지가 되는 것은 요시노밖에 없다 이런 곳에 둘
이나 어슬렁어슬렁 들어오는 게 아니었다고 아사카와는 후회했다.
사시키지 같은 작은 촌락이라면 류지 혼자서 충분히 알아 낼 수 있었
을 것이다. 자신은 도쿄에 남아 류지로부터 연락을 기다리며 요시노
와 둘이 취재하러 돌아다니는 쪽이 훨씬 효율적이었음에 틀림없다.
"할 만큼은 해 보지 . 하지만 말야, 손이 좀 부족할 것 같은데?"
"오구리 편집장에게 전화해서 몇 명 돌려 달라고 부탁해 보겠습니
다. "
"아, 그렇게 해 주게."
말은 했지만 아사카와로서는 자신이 없었다. 늘 편집부원이 부족
하다고 투덜대고 있는 편집장이 이런 일에 귀중한 인원을 나눠 주리
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근데 어머니가 자살한 다음. 사다코는 그대로 사시키지 에 남겨져,
어머니의 사촌이 돌보게 됐어요. 그 사촌 집이라는 게 현재 민박을
하고 있어서‥‥‥
아사카와는 류지와 함께 지금 바로 그 민박에 묵고 있다는 것을 말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필요 이상의 일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4학년인 사다코는 다음해 바로 미하라야마의 분화를 예
언해서 학교에서 유명해졌습니다 아시겠습니까? 1957년, 미하라야
마는 사다코가 예언한 그 날짜, 그 시간에 분화했거든요."
"그거 대단한데. 그런 여자가 있다면 지진예측연합회 같은 단체는
필요없겠군."
예언이 적중했다는 소문이 섬 전체에 퍼지자 그것이 미우라 박사
의 네트워크에 걸리게 되었다는 것 역시 여기서는 두말할 필요가 없
을 것이다. 다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 일이 있은 이후, 사다코는 자주 섬 사람들한테 예언을 해 달라
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거기에 답하거나 하지 않
았죠. 자신에게는 전혀 그런 능력이 없다고만· . . "
"겸손 때문인가?"
"아니, 알 수 없죠. 그리고 고교를 졸업하자 사다코는 기다렸다는
듯이 상경했고, 신세지고 있던 친척에겐 그저 한 장의 엽서만 보냈을
뿐입니다. 거기에 극단 비상의 입단 시험에 합격했다고 쓰여 있었답
니다. 그 이후 오늘까지 사다코한테 온 소식은 일절 없었고, 그녀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이 섬에 한 사람도 없습니
다"
"요컨대 그 후의 행적을 쫓을 단서가 되는 건 극단 비상 이외에는
없다는 거로군 "
"유감이지 만 ‥‥‥
"좋았어, 다시 한번 확인하지. 내가 지금부터 조사할 건, 야마무라
시즈코가 매스컴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유하고, 화산에 뛰어든 이유,
그리고 딸인 사다코가 열여덟 살에 극단에 들어가서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즉, 어머니에 관한 것하고 그 딸에 관한 것, 이 두 가
"그렇습니다 "
"어느 쪽을 먼저 할까?"
"fl ?"
"어머니 쪽부턴지, 딸 쪽부턴지. 어느 쪽을 먼저 조사하면 좋겠느
냐고 묻는 거야. 자네, 시간이 없지?"
직접 문제가 되는 것은 물론 사다코의 지나온 삶이다.
"딸 쪽부터 부탁합니다 "
"알았어. 그럼 내일 당장 극단 비상 사무실에라도 얼굴을 내밀까?"
아사카와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아직 오후 6시를 조금 지난 정도
다 극달 연습장이라면 충분히 열려 있을 시간이다.
"요시노 선배, 내일이라고 하지 말고, 오늘 부탁합니다. "
요시노는 크게 한숨을 쉬고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이봐, 아사카와 좀 봐 줘, 나 역시 일이 있다구. 오늘밤 안에 써
내 야 하는 원고가 산더미처럼 있단 말야. 사실은 내일 역시· . . "
요시노는 거기에서 말을 멈췄다. 이 이상을 말하는 것은 지나친 생
색을 내는 꼴이 된다. 그는 늘 남자다운 이미지를 연출하는 데 세심
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다.
"모쪼록 부탁드립니다. 아시겠어요',7저의 마감 시간은 내일 모렙
니다"
본인이 신문사 마감에 쫓기고 아사카와로서는 도저히 그 이상 강
하게 말할 수가 없었다 다만 잠자코 요시노의 대답을 기다리는 수
"·.·마감이라고는 해도. 할 수 없군. 알았어 . 될 수 있는 한 오늘밤
안에 어떻게든 해 보지 음, 약속은 할 수 없지만 "
"죄송합니다, 신세 좀 지겠습니다. "
아사카와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선 수화기를 놓으려고 했다.
"어이 , 잠깐 기다려 . 난 아직 중요한 걸 안 물었어 "
"뭡니까?"
"자네가 봐 버렸다는 비디오의 영상하고 그 야마무라 사다코하고
는 대체 어떤 관계가 있는 건가?"
아사카와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
'말해도 분명히 안 믿을 겁니다. "
"괜찮으니까 말해 봐."
"비디오 카메라가 그 영상을 녹화한 게 아닙니다. "
아사카와는 충분한 사이를 둠으로써 그 의미가 요시노의 머리에
침투되기를 기다렸다
"그건 야마무라 사다코라고 하는 여성의 눈을 통해 기록된 영상하
고 그녀의 마음에 떠오른 영상이 아무런 맥락도 없이 단편적으로 나
열된 겁니다 "
"뭐 7"
요시노는 순간 말을 잃었다.
"그래요, 못 믿겠죠?"
"염사‥‥ 같은 건가?"
"염사라고 하는 표현은 맞지 않죠. 염에 의해 브라운관에 영상을
띄우는 거니까 '염상' 이라고 해야될까요?"
'염상(念像)'이 날조(推造)라는 단어와 겯쳐 떠올라(일본어로 읽
을 때 두 단어의 발음이 비슷하다 . 역자 주) 요시노는사뭇 우습다
는 듯 웃었다. 아사카와로서는 그리 화낼 만한 일도 아니어서 웃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요시노의 기분을 상상하며 , 상대편의 기분 따윈
아랑곳하지 않는 웃음소리를 묵묵히 듣고 있었다.
로후 9시 40분. 지하철 마루노우치 노선을 타고 요츠야 산초메에서
내려 지상으로 나가는 계단을 오르는 도중, 요시노는 강풍에 모자가
날아갈 듯싶어 두 손으로 머리를 누르면서 부근을 둘러보았다. 표적
으로 삼고 있던 소방서는 찾을 것도 없이 바로 모퉁이에 있었고, 1분
도 못 걸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극단 비상'이라는 입간판 옆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고,
그 안쪽에서부터 젊은 남녀가 소리치는 대사와 노랫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공연이 임박해 있어 마지막 전철이 끊어질 때까지 연습을
계속할 작정으로 있는 것이다. 문예부 기자가 아니더라도 그 정도는
알 수 있다. 늘 범죄 사건을 쫓아다니는 요시노로서는 중견 극단의
연습장을 찾는 일이 어딘지 모르게 어색함이 느껴졌다.
지하로 통하는 계단은 쇠로 만들어져 있었다. 발을 내려 놓을 때마
다 계단에서 '콩콩' 하고 딱딱한 소리가 난다 만일 이 극단의 창립
멤버인 사람이 야마무라 사다코에 대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면
이곳에서 실은 툭 하고 끊어져 버리고, 희대의 초능력자의 생애는 어
둠 속에 매몰되고 만다. 극단 비상이 창립된 것은 1957년,야마무라
둠 속에 매몰되고 만다. 극단 비상이 창립된 것은 1957년,야마무라
사다코가 입단한 것이 1965년. 창립 멤버로 현재까지 남아 있는 사람
은 극단 대표로서 작가 겸 연출가인 우치무라를 포함해 네 명에 불과
하다
요시노는 연습장 입구에 있던 스무 살 안팎의 견습생에게 명함을
건네고는 우치무라를 불러 달라고 부탁했다.
"선생님, M신문사에서 오셨습니다 "
견습생은 연극 배우답게 잘 울려 퍼지는 목소리로 벽 쪽에 앉아 배
우들의 연기를 지켜보고 있던 연출가 우치무라를 불렀다. 우치무라
는 놀란 것처럼 돌아보더니 상대가 신문 관계자라는 것을 알고는 표
정을 풀고 싱글댕글하며 요시노에게 다가왔다. 어느 극단이나 신문
사 관계자를 정중히 대접한다. 신문의 문예란에 잠깐 실어 주는 것만
으로 티켓의 매상이 크게 늘어나기 때문이다. 일주일 후로 다가온 공
연 연습 풍경이라도 취재하러 왔을 것이다‥‥ M신문사에는 지금까지
그다지 크게 부각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우치 무라는 이 참에 잠시 붙
임성을 떨어 보였다.
그렇지만 요시노가 온 진짜 이유를 안 순간 우치 무라는 갑자기 흥
미를 잃고는, 난 지금 바쁜데, 라는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힐끔힐쁨 연습장을 둘러보다가 의자에 앉아 있는 오십이 넘은 몽집
작은 낭자 배우에게 눈길을 멍추더니 신◎ 하고 새된 목소리로 불
렀다. 오십이 넘은 사내를 향해 '짱(어린아이끼리, 혹은 어른이 아이
를부를때 붙이는 호칭 : 역자주)'이라고 부르는 것·. 아니,그보다
도 우치무라의 여성스런 목소리와 휘청휘청 언밸런스하게 뻗은 가늘
고 긴 팔다리가 근육질의 요시노에게는 메스껍게 느껴졌다. 자신과
는 완전히 이질적인 존재가 여기에 있다는 그리 유쾌하지 않은 느낌.
'신짱, 2막까지 차례 없지?그럼 이 사람한테 야마무라사다코에
대해 얘기해 주지 않겠어? 기억하지? 그 메스꺼운 여자."
요시노는 신시야라고 불린 남자 배우의 목소리를 텔레비전에서 방
영하는 서양 영화의 더빙에서 들은 적이 있었다. 아리마 신은 무대에
서의 활약보다도 성우로서의 활약이 두드러진 사람이었다. 그 역시
현존하는 창립 멤버 중 하나였다.
"야마무라 사다코?"
아리마는 반 정도 벗겨지기 시작한 이마에 손을 대고 25년 전의 기
억을 하나씩 더듬었다
"아, 그 야마무라 사다코,"
아리마는 약간 얼빠진 소리를 질렀다. '戈 라고 하는 말이 붙는 것
을 보니 상당히 인상 깊은 여성이었음에 틀림없다
"생각났어? 그럼 , 난 연습하고 있을 테니까 2층 내 방으로 안내해
드려 ."
우치무라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나서 , 배우들이 모인 곳으
로 다가가 방금 전까지 앉아 있던 자리에 되앉는 사이에 절대 군주인
연출가의 얼굴을 되찾고 있었다.
사장실이라고 쓰인 문을 열더니, 아리마는 가죽 소파 세트를 가리
키면서 요시노에게 앉을것을권했다 사장실이 있는이상사장도존
재하고,사장이 있는 이상 이 극단은 회사 조직으로 되어 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아마도 아까의 연출가가 사장을 겸하고 있을 것이
다.
"날씨도 궂은데 수고 많으십니다. "
아리마는 연습 때문에 흘린 땀으로 얼굴을 붉게 빛내며 , 눈 안쪽에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띄우고 있었다. 조금 전의 연출가는 상대의
마음속을 살피면서 대화를 진행시켜 가는 타입으로 보였지만, 아리
마는 숨김없이 묻는 것을 정직하게 대답해 나갈 타입으로 보인다. 상
대의 사람됨에 따라 편안한 취재가 될지 , 괴로운 취재가 될지 정해지
는 법이다.
"죄송합니다. 바쁘실 텐데·.. "
요시노는 앉으면서 수첩을 꺼내고 오른손에 펜을 쥐는 평소의 포
즈를 취했다
"야마무라 사다코의 이름을 이제 와서 들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
습니다 제법 왜 옛날 일이라서요."
아리마는 자신의 청춘 시절을 기억해 내고 있었다. 그때까지 몸담
고 있던 상업 극단을 뛰쳐나와 동료와 함께 새로운 극단을 창립했을
무렵의 젊은 에너지가 그리웠다.
"방금 전 아리마씨가그녀의 이름을 기억해 냈을 때 '戈 야마무
라사다코라고말쏭하셨는데요, '戈 라고하는건 어떤 뜻입니까?"
"그 아이가 들어온 건, 음 언제종이었더라. 극단이 탄생한 지 몇
년 됐지? 극단이 한창 뻗어나갈 무렵이라서 해마다 입단 희망자는
늘었습니다만‥‥ 어쨌든 야마무라 사다코는 별난 아이였어요."
'별나다면, 어떤 점이."
"글쎄요."
아리마는 턱에 손을 대고 생각에 장겼다 그러고 보니 , 왜 자신은
그 아이에 대해서 별난 여자라고 하는 인상을 갖고 있는 것일까?
"특별히 눈에 띄는 특징이라도?"
"아뇨, 외모는 흔히 보는 보통 여자애였어요. 키가 좀 컸는데, 얌전
하고‥‥ 그리고 늘 고립돼 있었어요."
"고립 ?"
"예. 보통은 견습생끼리 사이가 좋죠. 한데 그 아인 결코 자기가 먼
저 그 틈에 낄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
어느 집단에나 그런 타입의 사람이 있는 법이다. 그것으로 야마무
라 사다코의 인상이 이상했었다라고 생각하긴 어렵다
"그녀의 이미지를 한마디로 말하면?"
"한마디? 글쎄요, 어쩐지 기분 나쁨‥‥ 이라고나 할까?"
아리마는 망설이지 않고 '어쩐지 기분 나쁨' 이라는 표현을 사용했
다. 그러고 보니 우치 무라도 '그 메스꺼운 여자' 라고 표현했었다. 18
세의 젊디젊은 소녀가 기분 나쁘다고 평가받는다는 사실에 요시노는
동정을 금할 수 없었다. 그는 어느새 징그러운 외모의 여자아이를 상
상하고 있었다.
"그 어쩐지 기분 나쁜 건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생각해 보니 이상한 일이다. 25년 전, 그저 일 년 정도 있었을 뿐인
견습생의 인상이 왜 이토록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일까? 아리마는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뭔가 있었을 것이다. 야마무라 사다코의
이름을 기억에 남게 한 어떤 에피소드가.
"맞아, 생각났어. 이 방입니다. "
아리마는 사장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 사건을 기억해 낸 순간,
사무실로사용되고 있던 무렵의 이 방 가구배치까지 선명하게 되살
아났다.
"그래요, 창립 당시부터 극단 연습장은 여기에 있었습니다만, 당시
는 훨씬 좁았고 지금 저희가 있는 이 방은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었습
니다. 저기에 락커가 놓여 있었고, 여기에 유리로 만들어진 칸막이·
그리고 맞아요, 정확히 지금 텔레비전이 있는 것과 같은 장소에 역시
텔레비전이 놓여 있었습니다. "
아리마는 손으로 그 장소를 가리켜 가며 설명해 나갔다.
"텔레비전?"
요시로는 눈을 가늘게 뜨며 펜을 고쳐 쥐었다.
"예, 구형 흑백 텔레비전이었죠."
"그래서요?"
요시노는 다음 얘기를 재촉했다.
"연습이 끝나 대부분의 단원이 돌아간 뒤의 일이었는데. 전 제 대
사에서 아무래도 납득이 안 가는 부분이 있어 다시 한번 읽어 보려고
이 방에 들어왔죠. 저기로요‥‥‥
아리마는 입구의 문을 가리켰다.
"거기에 서서 방 안을 들여다보니 유리를 통해 텔레비전 화면이 반
짝반짝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텔레비전을 보고 있구나 하
고 생각했습니다 결코 잘못 본 것이 아니었습니다. 브라운관의 영상
을 직접 본 건 아닙니다만,불투명한 유리 너머로 분명히 흑백의 빛
이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던 겁니다.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방
안은 약간 어두웠는데, 전 유리 칸막이를 돌아가 텔레비전 앞에 있는
게 누굴까 하고 들여다보았습니다. 야마무라 사다코였습니다. 그런
데 유리 칸막이를 돌아 들어와 그녀 옆에 섰을 때에는 이미 화면에
아무 것도 비치지 않고 있었던 겁니다 전 물론 그녀가 재빨리 스위
치를 끈 것이라고만 생각했죠. 그때까지는, 아무 의심도 품지 않았던
겁니다 하지만‥‥‥
아리마는 거기에서 말을 머뭇거렸다.
"예, 계속하세요."
"전 야마무라사다코에게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전철이 끊어진다
는 등의 말을 건네면서 책상 위의 스탠드 스위치를 켰는데, 이게 켜
지질 않는 겁니다. 잘보니까콘센트가빠져 있었던 거예요.전 웅크
리고 앉아 콘센트에 플러그를 꽃으려 했습니다. 그 순간, 비로소 눈
치를 챘던 겁니다. 텔레비전 플러그도 콘센트에 꽃혀 있지 않다는 사
실을요."
텔레비전에서 뻗어나온코드 끝이 바닥에 ◎굴고 있는걸 본순간
등줄기를 오싹하게 만드는 오한이 스쳐 지나가던 것을 아리마는 또
렷하게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전원이 들어와 있지 않았는데 토 분명히 텔레비전은 켜져 있었
다?"
요시노는 확인했다.
"그렇습니다. 오싹했죠. 무심코 얼굴을 들어 야마무라 사다코를 봤
습니다. 전기도 들어와 있지 않은 텔레비전을 앞에 두고 이 아이는
윌 하고 있었던 걸까 하구요. 그녀는 저와 시선을 마주치는 일 없이
그저 물끄러미 텔레비전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입가에 희미한
웃음을 띄우고 있었습니다. "
어지간히 인상이 깊었는지 , 아리마는 에피소드의 세세한 부분까지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일을 다른 분한테 얘기한 적이 있습니까?"
"예, 물론이죠. 우짱· . 아까 만나신 연출가 우치무라라든가. 시게
모리 씨 같은 사람한테 "
"시게모리 씨요?"
"이 극단의 사실상 창립자입니다. 우치 무라는 2대 극단 대표죠."
"아, 네, 그래 시게모리 씨는 당신 얘기를 듣고 어떤 반응을?"
"마작을 하고 있었는데요, 시게모리 씨는 상당히 흥미를 보였죠.
원래 여자를 아주 좋아하는 편이라‥‥ 아무래도 전부터 노리고 있었
던 모양입니다. 언젠가 야마무라 사다코를 자기 것으로 만든다구요.
그래서 그날 밤, 술기운도 한몫 거들어 시게모리 씨가 지금부터 야마
무라 사다코의 아파트를 덮치겠다는 등 엉뚱한 말을 해대서‥‥ 저희
는 정말 질려 버렸죠· . 술주정에 진지하게 대꾸해 주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결국 그 사람 혼자 남겨 놓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돌아갔습
니다. 하지만 시게모리 씨가 그날 밤 정말로 야마무라 사다코의 아파
트에 갔었는지 어떤지 결국 아무도 모르는 채 그날은 그렇게 지나갔
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건 말이죠, 다음날 시게모리 씨가 연습장에
얼굴을 내밀기는 내밀었는데, 완전히 사람이 변한 것처럼 입을 꾹 다
문 채 말도 하지 않고 창백한 얼굴로 멍하니 의자에 앉아서 움직이려
고도 하지 않다가 잠든 것처럼 죽어 버린 겁니다. "
요시노는 흠칫 놀라며 얼굴을 들었다.
"그럼 , 사인은?"
"심장마비, 요샛말로 하면 급성 심부전이란 것이었습니다. 공연이
임박해서 상당히 무리했기 때문에 피로가 쌓였던 것 같습니다. "
"야마무라사다코와 시게모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결국
아무도 모르는 일이군요."
요시노가 확인을 하자 아리마는 크게 끄덕였다. 과연 이 정도의 원
인이 있었다면 야마무라사다코의 인상이 강렬하게 남는 것도 무리
가 아니다.
'戈 후 그녀는?"
"그만뒀죠.우리 극단에 있었던 건 1년인가2년 간이었던 것 같습
니 다. "
"여길 관둔 다음에는 어떻게 됐나요?"
"글쎄,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
"보통은 어떻게들 합니까? 극단을 관둔 뒤 ‥‥‥
"할 마음이 있는 놈은 다른 극단에 다시 들어가죠."
"야마무라 사다코의 경우는 어떨까요?"
"상당히 머리도 좋았고 연기력도 나쁘지는 않았죠. 하지만 성격적
으로 결함이 있어서요.저, 이 세계는 요컨대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가 중요하죠. 사다코 같은 성격이라면 좀 힘들죠."
"결국 연극계에서 발을 뺐을 가능성도 있다?"
"뭐 ,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습니다만·. ."
"그녀가 그 후에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없습니까?"
"글쎄요, 견습 동기생이라면 혹시· . ."
"알 수 있겠습니까? 동기생의 이름과 주소."
"잠깐 기다리십시오."
아리마는 일어나서 붙박이 선반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죽 늘어서
있는 파일 중에서 한 권을 빼냈다. 그것은 입단 시험 때 제출하는 이
력서를 보관한 것이었다.
"여덟 명이군요.그녀를 포함해서 1965년에 입단한 견습생은 전부
여덟 명입니다. "
아리마는 며덟 장의 이력서를 한손에 들고 펄럭거려 보였다
"볼 수 있습니까?"
"예 , 그러세요."
이력서에는 사진 두 장이 붙어 있었다. 가슴 위쪽의 얼굴 사진과
전신이 찍힌 것. 요시노는 조급한 마음을 억누르며 야마무라 사다코
의 이력서를 빼랬다. 그런데 사진을 향하던 그의 눈이 갑자기 커졌
다.
"아까, 야마무라 사다코는 어쩐지 기분 나쁜 여자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요시노는 혼란스러웠다. 아리마의 얘기를 들으면서 상상했던 야마
무라사다코의 얼굴과 현실적으로 보고 있는 사진의 얼굴이 너무나
도 동떨어졌기 때문이다.
"기분 나쁘다? 말도 안 돼. 난 지금껏 이렇게 예쁜 얼굴을 본 적이
없어 ."
요시노는 문득, 왜 자신이 예쁜 여자라고 표현하지 않고 예쁜 얼굴
이라고 말해 버린 걸까 하는 의문을 품었다 확실히 완벽하게 다듬어
진 얼굴이기는 하지만 여자로서의 원만한 느낌 같은 게 결여되어 있
었다 그렇지만 전신 사진으로 눈을 돌리자 허리와 발목이 잘록한 것
이 눈에 띄게 여자다웠다. 이토록 아름다운데 도 불구하고 25년이라
는 세월의 흐름에 침식당하고 남은 인상이 '어쩐지 기분 나쁨' 혹은
'메스꺼운 여자'라니. 상식적이라면 헛지고 아름다운 여자였다'라
고 말하는 게 보통일 것이다 요시노는 여타의 명확한 특징을 밀어낼
정도로 강하게 얼굴에 담겨 있는 '어쩐지 기분 나쁨'의 정체에 강한
흥미를 느꼈다
10월 17일 수요일
요시노는 오모테산도와 아오야마도리 네거리에 서서 다시 한번 수
첩을 꺼냈다
미나미 아오야마 산 各1, 스기야마소(努7f莊). 그것이 25년 전 야
마무라 사다코의 주소였다. 번지와 아파트 이름이 주는 언밸런스(아
오야마는도쿄의 대표적 고급주택가이다 반면에 液'자는 날고오
래 된 싸구려 연립 주택에 흔히 붙는다 ' 역자 주)에 요시노는 절망
감을 맛보고 있었다. 큰길을 돌아 미술관 바로 옆 블럭이 6-1번지였
지만 요시노가 걱정한 대로 스기야마소라는 싼 아파트가 있어야 할
장소에는 붉은 벽돌로 된 호화로운 아파트가 우뚝 솟아 있었다
‥‥애당초 무리한 얘기다. 25년 전의 여자의 발자취 따위를 알아 낼
수 있을 리가 없지 .
나머지 남은 단서는 야마무라 사다코와 동기생으로 입단한 네 명
의 견습생 사다코와 동기생으로 들어온 일곱 명 중에서 그럭저럭 연
락처를 알아 낼 수 있었던 것은 네 명뿐이었다. 그들이 사다코의 소
식에 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면 실마리는 완전히 끊어지고 만
다. 요시노는 그렇게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불안하기 짝이 없었
다.
시계를 보니 오전 11시를 넘고 있었다. 요시노는 근처 문방구로 뛰
어들어가 지금까지 알아 낸 것만이라도 아사카와에게 알려 줘야겠다
고 생각하고 오시마의 통신원을 향해 팩스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때, 아사카와와 류지는 마침 통신원인 하야츠의 자택에 있었다.
"야, 아사카와! 진정해."
바쁘게 움직이며 돌아다니는 아사카와의 등에 대고 류지가 호통을
쳤다.
"안달이 나서 견딜 수가 없는 모양이군."
‥‥최대 풍속, 중심 부근의 기압‥‥밀리바, 북북동 바람‥‥폭풍우
권 내 ‥‥강한 파도.
아사카와의 감정을 건드려 보겠다는 것처럼 라디오에서는 태풍
정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오마에사키의 남해상 약 150킬로 지점에 위치한 태풍 21호는 풍속
40미터를 유지하현서 북북동 방향으로 매시 20킬로로 진행하고 있었
다. 이 대로라면 오늘 저녁에는 오시마 미나미오키아이에 도착할 터
였다 항공편이나 배편이 평상시 체제로 돌아오려면 내일,목요일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하야츠의 추측이었다.
"목요일이 라니 !"
아사카와의 머릿속은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내 생명의 데드라인은 내일밤 10시야. 태풍 새끼, 얼른 지나가
버리든가 열대 저기압이 되든가, 어쨌든 빨리 꺼져버리란 말야!
"이 섬의 배와 비행기는 대체 언제쯤부터 움직이는 겁니까!"
아사카와는 분노를 어디에 쏟아부어야 좋을지 알 길이 없었다.
‥‥이런 데 오는 게 아니었어 , 후회해도 후회해도 끝이 없다. 그런
데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후회하면 되는 걸까?그런 비디오 따
윈 보지 않았어야 했어. 그런 데서 택시를 잡는 게 아니었어 에이,
빌어먹을!
"야, 진정하라는 말 모르겠냐? 하야츠 씨한테 불평해 봤자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
묘하게도 부드럽게 류지는 아사카와의 팔을 잡았다
'생각하기 나름이야. 주문의 실행은 이 섬에서가 아니면 할 수 없
을지도 몰라 그렇잖냐?그럴 가능성도 있어 그 네 녀석들이 왜 주
문을실행하지 않았을까 오시마까지 올돈이 없었다면‥‥그래, 있
을수 있겠지.이 폭풍을 은혜의 바람이라고 생각해 봐.그러면 기분
도 나아질 거야."
"그건 주문을 발견한 뒤의 일이야!"
아사카와는 류지의 손을 뿌리쳤다. 나잇살이나 먹은 사내 둘이 , 싸
움하듯이 떠들어 대는 것을보고 하야츠와그의 아내인 후미코는 얼
굴을 마주보았지만, 아사카와에게는 두 사람이 웃고 있는 것처럼 보
였다.
"뭐 가 우습죠?"
두 사람에게 바싹 다가서려던 아사카와의 손을 류지는 조금 전보
다도 더 세게 당겼다.
"그만둬 어쨌든 발버등쳐 業자 소용없어 ."
아사카와의 초조함에 맞닥뜨리게 된 사람 좋은 하야츠는 태풍에
의한 결항에 책임을 느끼기 시작했다. 아니 , 그보다는 폭풍의 영향으
로 괴로워하는 사람을 바로 눈앞에서 두고 보니 깊은 동정을 느끼고
말았다고나 해야 할까?그는 아사카와의 일이 잘 진행되기를 바랬
다. 이제 곧 도쿄에서 팩스가 도착할 테지만, 기다린다고 하는 행위
자체가 쓸데없는 초조감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 , 그는
기분을 어떻게든 바꿔 보려고 했다.
"조사하는 일은 잘 되어 갑니까?"
하야츠는 아사카와의 기분을 진정시키려고 부드럽게 물었다.
"예, 뭐 ."
"바로 요기에 야마무라 시즈코의 소꿉친구가 살고 있는데요. 혹시
괜찮으시면 불러내서 얘기라도 들으면 어떻겠습니까? 겐지 씨도 이
폭풍으로 고기도 못 잡으러 나가서 심심 해하고 있을 테니까 틀림없
이 기뻐할 겁니다. "
취재거리를 주면 잠시나마 초조함도 잊혀지지 않을까. 하야츠는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댈써 칠십에 가까운 할아버지라, 만족스런 얘기를 들을 수 있을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그저 기다리는 것보다는 훨씬 낫겠죠."
"아‥‥‥
"어어이 , 겐지 씨한테 전화해서 바로 이쪽으로 오라고 해."
하야츠는 아사카와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뒤를 돌아보더니 부져
에 있는 아내에게 말했다.
하야츠가 말한 대로 겐지는 즐거운 듯 이야기했다. 야마무라 시즈
코에 대해서 지껄이는 게 즐거워서 견딜 수 없다는 투였다 겐지는
시즈코보다 세 살 연상으로, 현재 68세. 시즈코는 소꿉친구이기도 하
고,첫사랑이기도 했다 남에게 이야기함으로써 기억은 보다 분명해
지는 것일까, 아니면 듣는 상대가 있다는 것에 자극을 받아 기억을
쉽게 끌어 낼 수 있었던 것일까?겐지에게 있어 시즈코에 대한 얘기
는 자신의 청춘 시절을 추억하는 것과 똑같았다. 두서 없이,때때로
눈물을 보이면서 이야기하는 시즈코와의 에피소드로부터 아사카와
와 류지는 그녀의 일면을 알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다지 신용할 만
한 것이 못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추억은 늘 미화되는 것인데다
어쨌든 이미 40년 이상이나 지난 옛날 얘기였다 다른 여자와 뒤죽박
죽이 되어 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아니 , 그런 것은 있을 수 없을지
도 모른다 첫사랑의 여자라는 건 남자에게 있어선 특별한 것이다.
다른 여자와 혼동하는 일은 없을지도 모른다.
겐지는 언변이 좋다고는 할 수 없었고, 게다가 빙 둘러서 하는 표
현이 많았기 때문에 아사카와는 정말이지 지겨워졌다. 그런데 그때
였다.
"시즈코가 변해 버린 건 그 탓이었지 . 수도승의 석상을 바닷속에서
주워 올린 게 · 보름날 밤이었어."
그런 이야기를 시작한 것에 의해 마사카와와 류지의 흥미가 갑작
스레 끌어 당겨졌다. 그의 이야기에 의하면, 야마무라 사다코의 어머
니인 시즈코에게 이상한 힘이 깃들게 된 것파, 보름달이 뜬 바다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그 일이 일어났던 날 밤,겐지는
바로 그녀 곁에서 배를 젓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것은 1946년,여름 ·
도 끝나 가려고 하던 어느 날 밤의 일로 시즈코가 21살, 겐지는 24살
이었다.
늦더위가심해 밤이 되어도 전혀 서늘해지지 않았다고,겐지는親
년 전의 일을 마치 어젯밤 일처럼 말했다
그런 더운 밤, 겐지는 길가에 앉아 펄럭괼럭 부채질을 하면서 파도
가 잠들어 평온해진 바다가 조용한 달빛과 함께 밤하늘을 비추는 것
을 보고 있었다. 고요함을 깨부수듯 시즈코가 집 앞의 언덕길을 달려
와 눈앞에 서더니 사정도 말하지 않고 소매를 잡아당겼다
"겐짱, 낚으러 갈 거니까 배 좀 띄워 줘 !"
이유를 물었지만 '이런 달밤은 다시 오지 않아' 라고 말할 뿐. 겐지
는 멍하니 오시마에서 제일 예쁜 처녀를 바라볼 수밖에
"얼빠진 얼굴 하지 말고, 자 빨리‥‥‥
시즈코는 겐지의 목덜미를 잡아올려 억지로 세웠다. 늘 시즈코가
말하는 대로 끌려다니던 겐지가 되물었다.
"낚다니 , 대체 뭘?"
시즈코는 앞바다를 응시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수도승님의 석상이야 "
"수도승님의 석상이야 "
"수도승님의 ‥‥?"
그날 점심 때쯤, 미군 병사가 수도승님의 석상을 바다에 처넣어 버
렸다고 시즈코는 눈썹을 엄하게 치켜올리고 분한 듯이 말했다.
동쪽 해안의 중간쯤에 있는 모래밭에는 '수도승 굴 이라고 불리는
작은 동굴이 있었고, 거기에는 699년 그곳으로 귀향 온 엔노 오즈누
라는 수도승을 본뜬 석상이 안치되어 있었다. 오즈누는 나면서부터
박식해서 수행 끝에 주술과 선술을 체득하여 귀신을 자유자재로 조
종할 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오즈누가 나타낸 예지 능력은 세상
을 다스리는 문무의 권력자들을 두렵게 만들어, 사회를 혼란케 하는
죄명으로 이곳 오시마에 귀향 오게 되고 말았다. 지금으로부터 1300
년 가까이 되는 옛날 얘기다.
엔노 오즈누는 바닷가 동굴에 틀어박혀 더욱 수행을 쌓고, 섬사람
들에게 농업과 어업을 가르쳐 그 인덕을 존경 받았는데, 그 후 용서를
받고 본토로 돌아가 슈겐도(修驗道, 일본 전통 무속과 밀교 · 도교를
결합한 종교로서 영험을 얻기 위해 산중 수행과 기도·주술 의식을
주로 행한다 : 역자 주)를 창시하게 된다. 그가 오시마에 있었던 기
간은 3년 정도로 되어 있는데 그 동안에 철로 만든 나막신을 신고 후
지산까지 날아갔다는 전설도 있다 성 사람들이 그를 사모하는 마음
은 아주 두터워서, 수도승 굴은 섬 안 제일의 성지가 되었고 수도제
라고 불리는 제사를 매년 6월 15일에 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2차 대전이 끝난 후, 일본에 남게 된 미 점령군은 일본 종교
에 대한 정책의 일환으로 수도승 굴에 모셔져 있던 엔노 오즈누의 석
상을 바닷속에 버렸던 것이다 그 순간을 시즈코가 놓치지 않았던 모
양이다. 오즈누에 대한 신앙이 두터웠던 시즈코는 미미즈하나라는
바위 뒤에 숨어서 미 해군 순시정이 던져 넣은 석상의 위치를 확실히
머릿속에 새겨 넣었던 것이다
건져올리는 것이 수도승님의 석상이라고 들은 겐지는 귀를 의심했
다. 어부로서의 솜씨는 확실하지만 석상을 건져올린 경험은 지금까
지 한 번도 없다. 그렇지만 남몰래 정을 품고 있는 시즈코의 부탁을
딱 잘라 거절할 수도 없는 일이라 이번에야말로 그녀에게 선심을 쓰
고 공치사를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밤바다에 배를 띄웠다. 무엇보다
도 이런 아름다운 달밤에 단둘이서 바다에 나갈 수 있는 것만도 너무
나 멋진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굴 앞의 모래밭과 미미즈하나 두 곳에 불을 피워 표시를 해 두고
바다로 바다로 저어나갔다. 두 사랍 모두 이 부근 바다는 잘 알고 있
었다. 바다 밑바닥이 어떻게 되어 있고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그리
고 이곳에서 헤엄치고 있는 물고기떼.그러나 지금은 밤, 달이 아무
리 밝다고는 해도 바다에 잠수하면 빛이 전혀 닿지 않는다 겐지에게
는 시즈코가 어떻게 해서 석상을 발견할 속셈인지 알 길이 없었다.
노를 저으면서 겐지는 그것을 물어 보았지만,시즈코는 대답하지 않
고 바닷가에서 불타고 있는 모닥불을 보면서 자신이 있는 위치만 확
인할 따름이었다. 물가에서 타오르는 두 불꽃의 거리를 눈짐작으로
어림잡아 바다 위의 위치를 알아 랠 수 있었는지도
ㅁ1
터쯤 노를 저어 닿을 때, 시즈코가 '세워 줘 !' 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고물로 다가가 바닷물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어두운 바닷
속을 들여다보더니 '뒤돌아' 하고 겐지에게 명령했다. 겐지는 지금부
터 시즈코가뭘 하려는지 알아채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일어난시즈
코는 기모노를 벗었다. 살갗에서 미끄러지는 옷 소리에 상상력이 더
욱 북돋아 올라 겐지는 답답했다. 바다에 뛰어드는 소리가 등 뒤에서
일어나고 물보라가 어깨 끝을 건드리자 살짝 돌아보았다 시즈코는
수건으로 길고 겁은 머리채를 묶고, 가는 그물 끝을 입에 물고 바다
에서 얼굴을 내민 채 떠있었다. 그리고는 상체를 물 위에 내밀며 크
게 두 번 숨을 들이마신 다음 바다 밑으로 잠수해 들어갔다.
몇 번인가 물 위로 얼굴을 내밀고 헐떡였던 것 같다 ‥‥ 마지막으로
얼굴을 들었을 때 그녀의 입에는 그물 끝이 없었다. 수도승님에게 단
단히 묶어 놓은 걸까?
"자, 끌어올려 ."
시즈코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뱃머리로 몸을 옮긴 친지는 그물을 당겼다. 시즈코는 어느새 배 위
로 올라와 기모노를 걸치고 겐지 옆에 나란히 서서 그가 석상을 끌어
올리는 걸 도왔다. 끌어올린 석상을 배 중앙에 놓고 두 사람은 해변
으로 돌아왔는데, 그러는 동안 겐지와 시즈코는 아무 말도 나누지 않
았다. 왠지 모를, 모든 질문을 가로막는 분위기가 감돌았던 것이다
캄캄한 바닷속에서 어떻게 석상이 있는 장소를 알아 냈는지, 겐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로부터 ,1일 후에 친지가 시즈코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수도승의 석상이 바다 밑바닥에서 자신을 부르고 있었
다고 한다. 귀신을 거느린 석상의 녹색 눈이 어두운 바다 밑에서 번
쩍 빛났다‥‥ 시즈코는 그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그 후, 시즈코는 몸이 아프다고 호소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가벼운
두통조차 앓아 본 적이 없는데 갑자기 옥죄이는 통증과 함께,본 적
도 없는 풍경이 뇌리에 전개되는 일이 많아졌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본 풍경은 가까운 장래에 반드시 현실의 것이 되었다. 친지가 자세하
게 들은 바에 따르면 미래의 풍경이 획 하니 뇌리에 끼여들 때는 으
레 감글 종류의 향기가 코를 자극한다고 한다. 오다와라로 시집 간
겐지 누나가 죽는 장면을 그 직전에 예지한 젓도 시즈코였다. 그렇다
고 해도 미래에 일어날 사건을 의식적으로 예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아무 예고도 없이 , 어떤 풍경이 '번쩍' 하는 반짝임으로
뇌리에 번뜩일 뿐, 그 장면의 필연성은 찾아 낼 수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시즈코는 남에게 부탁을 받고 그 사람의 장래를 알아맞히는
일을 하지 않았다
다음해 시즈코는 겐치가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상경해서 , 이구마
헤이하치로와 알게 되어 그의 아이를 임신한다. 그리고 그해 말, 야
마무라 시즈코는 고향으로 돌아와 여자아이를 낳게 된다. 그 아이가
사다코였다
겐지의 얘기는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었다. 말투에서,그로부터 10
년 후에 야마무라 시즈코가 미하라야마의 분화구에 뛰어든 것은 애
인인 이구마 헤이하치로 탓이라고 단정짓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연
적(戀敵)으로서 당연한 생각이겠지만, 원한 섞인 이야기는 듣기 괴
로워진다. 단 하나 수확이 있었다면 야마무라 사다코의 어머니인 시
즈코에게도 예지 능력이 있었고,그 힘을 준 것은 엔노 오즈누 석상
일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때마침 그때, 팩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프린트된 것은 확대된 야
마무라 사다코의 얼굴 사진으로 요시노가 극단 비상에서 입수한 것
이었다.
아사카와는 묘하게 감동적인 기분이 되었다 비로소 야마무라 사
다코라는 여성의 용모를 접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순간적이기
는 해도 자신은 이 여자와 감각을 함께 하고, 같은 시점에서 풍경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어두운 침대 안에서 상대의 얼굴도 보지 않고 서
로 몸을 요구하고, 동시에 오르가슴을 맞이했던 사랑스런 여자의 얼
굴에 약한 햇살이 비쳐들어 겨우 그 용모가 분명해진다‥‥ 보기 싫다
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팩스로 받
아 본 사진은 다소 윤곽이 희미했지만 야마무라사다코의 아름답고
반듯한 얼굴 생김새와 그 매력을 유감없이 전해 주고 있었다.
"괜찮은 여자잖아?"
류지가 말했다 아사카와는 문득 다카노 마이를 떠올렸다. 순수하
게 얼굴만을 비교하면, 야마무라 사다코 쪽이 다카노 마이보다도 훨
씬 아름답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다과노 마이에게는 향기가 날 정
도로 여자의 빛깔과 향기가 있었다. 그렇지만 야마무라 사다코를 표
현할 때는 '어쩐지 기분 나쁨'이라니.사진만 보았을 때는 그 '어쩐
지 기분 나쁨'은 전해 오지 않는다. 야마무라 사다코가 가진, 보통 사
람에게는 없는 힘이 주위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음에 틀림없다
두 장째의 팩스에는 야마무라 사다코의 어머니 , 시즈코에 관한 정
보가정리되어 있었다. 그것은좀전에 막들었던 겐지의 이야기에 이
어지는 것이었다.
1947년 고향인 사시키지를 뒤로하고 상경한 야마무라 시즈코는 갑
작스런 두통에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갔고, 그곳 의사의 소개로 T대학
정신과 조교수인 이구마 해이하치로와 알게 된다. 이구마 헤이하치
로는 최면 현상의 과학적 해명에 몰두하고 있었는데, 시즈코에게 놀
랄 만한 투시 능력이 있음을 발견하고 굉장한 관심을 보인다. 그것은
그의 연구 테마 그자체를 바꿔 버릴 정도의 사건이었다 이후 이구
마 해이하치로는 시즈코를 피 시험자로 삼아, 초능력에 관한 연구에
몰두한다. 그러나 두 사람은 단순히 연구자와 피 시험자라고 하는 관
계를 넘어, 아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구마는 시즈코에게 애정을
품게 된다 그해 말, 이구마의 아이를 밴 시즈코는 세간의 눈을 피해
도망치듯이 고향인 오시마의 사시키지 로 돌아와 거기에서 야마무라
사다코를 낳는다. 시즈코는 딸을 사시괴지에 남겨 두고 바로 상경하
지만, 3년 후 사다코를 데리고 돌아오기 위해 다시 사시키지를 찾는
다. 그 이후 미하라야마의 분화구에 몸을 던져 자살하기까지 시즈코
는 딸을 곁에 두고 한시도 떼어 놓지 알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1950년대에 들어오자 이구마 헤이하치로와 야마무라 시즈
그런데 1950년대에 들어오자 이구마 헤이하치로와 야마무라 시즈
코 콤비는 주간지와 신문 지상을 떠들썩하게 장식하게 된다. 초능력
의 과학적 근거가 갑자기 클로즈업 되었기 때문이다. 세간에서는 T대
학 조교수라고 하는 이구마 헤이하치로의 지위에 현혹되었는지, 처
음에는 모두 시즈코의 초능력을 믿는 편에 섰다. 매스컴도 어느 쪽인
가 하면,그럭저럭 호의적으로 쓰고 있었다 그렇지만 가짜일 게 뻔
하다는 비판 역시 뿌리필어서,보다귄위 있는 학자 그룹이 '수상쩍
다' 고 한마디 코멘트를 붙이자, 대세는 시즈코와 이구마 헤이하치로
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시즈코가 발휘한 초능력이라고 하는 것은 주로 염사, 투시, 예지의
이른바 ESP였고, 실제로 손을 대지 않고 사물을 움직이게 하는 염동
력을 발휘한 적은 없었다. 어느 잡지에 의하면 그녀는 엄중히 봉인된
필름을 이마에 대기만 하는 것으로 지정된 무의를 염사할 수가 있었
고, 마찬가지로 엄중히 봉인된 봉투의 내용물을 백발백중으로 알아
맞힐 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잡지는 시즈코가 사기꾼에 불
과하며 다소간의 연습을 한 마술사라면 아주 쉽게 똑같은 것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리하여 세간의 관심은 점차 시즈코와 이구마 헤
이하치로에 대해 냉담해져 갔다.
그런 때,시즈코는 불행에 쉽쓸리게 된다. 1954년,시즈코는 둘째
아기를 낳았는데 생후 4개월 만에 병사하고 만다. 아기는 사내아이였
다. 이때 일곱 살이었던 사다코는 막 태어난 자기 동생에게 특별한
애정을 쏟았던 것 같다.
다음 해인 55년, 이구마 헤이하치로는 대중들 앞에서 시즈코의 능
력을 보이려고 각 매스컴에 연락했다. 시즈코는 처음엔 이것을 싫어
했다. 대중에 둘러싸인 채로는 자신의 생각대로 의식을 집중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실패할 염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양보하
지 않았다. 매스컴으로부터 사기꾼으로 불리는 데 대해 러 이상 참을
수 없고 명백한 증거를 내미는 것 외에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방법
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당일, 백 명 가까운 보도진과 학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시즈코는 마
지못해 실험대에 올랐다. 아들이 죽은 후 정신적으로 쇠약해진 탓도
있어 도저히 최상의 컨디션이라고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실험은 극히
간단한 방법으로 행하려 했다. 납 용기에 든 주사위 두 개의 눈을 알
아맞히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평소의 능력을 발휘하면 전혀 문제가
없을 터였다. 그러나 시즈코는 그녀를 둘러싼 백 명 모두가 자신의
실패를 바라고 있다는 걸 '알고' 만다 시즈코는 몸을 떨며 바닥에
몸을 구부리고 "이런 건, 이제 싫어 !"라고 비통한 소리를 외쳤다 시
즈코의 해명은 이러했다 인간은 누구나적지 않은 '염'의 힘을갖고
있다 난 그저 그 힘이 낭보다 더 센 것일 뿐, 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
이 실패를 마음 속으로 빌고 있는 와중에서 내 힘 같은 건 방해받아
작용하지 않게 되어 버린다. 그 뒤를 이어받은 것은 이구마 헤이하치
로였다.
"아니 , 백 명이 아니다 바야흐로 일본 국민 모두가 나의 연구 성과
를 짓밟으려 하고 있다. 매스컴에 선동되어 여론이 한쪽 방향으로 흐
르기 시작했고, 매스컴은 다수의 국민들이 바라는 것 이외에는 말하
지 않게 되었다. 부끄러운 줄 알라!"
결국 투시 능력의 공개 실험은 이구마 헤이하치로의 매스컴 비판
으로 막을 내렸다.
이구마 헤이하치로의 노성을, 적으로 여기고 있는 매스컴에게 실
험의 실패 원인을 덮어 씌우려는 트집으로 받아들인 매스컴 관계자들
은다음날지면에 일제히 써 댔다. 역시 가짜‥‥괴짜의 껌질이 벗
겨지다‥‥사기꾼 T대 조교수‥‥ 5년에 걸친 논의에 종지부‥‥현대
과학의 승리. 시즈코와 이구마 헤이하치로를 옹호하는 기사는 하나
도 없었다.
그해 말, 이구마 헤이하치로는 아내와 이혼하고 T대를 사직했다
이 무렵부터 시즈코의 피해 망상이 심해진다 그 후, 이구마 헤이하
치로는 스스로도 초능력을 갖추려고 산에 틀어박혀 폭포수를 뒤집어
쓰는 등의 기이한 행동을 하더니 무리한 나머지 폐결핵에 걸려 하코
네의 요양소에 입원하고 만다. 시즈코의 정신 상태는 더욱더 나빠졌
다. 여덟 살인 사다코는 매스컴의 눈과 여론의 조소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시즈코를 설득해서 고향 사시키지로 돌아오지만, 잠시 눈을 멘
사이에 어머니는 미하라야마의 화산에 뛰어들고 만다. 이리하여 세
사람의 생활은 어처구니없이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아사카와와 류지는 동시에 두 장의 프린트를 읽었다
"원한이군."
류지는 중얼거렸다.
"원한?"
"그래. 어머니가 미하라야마에 뛰어들었을 때, 딸인 사다코는 어떤
마음을 품었겠나?"
"매스컴에 대한 원한이라는 건가?"
"매스컴뿐만이 아니지 . 처음에는 추켜 세우더니. 추세가 변하자 조
소를 퍼붓고 가족을 파멸로 몰아넣은 일반 대중에 대한 원한 야마무
라 사다코는 세 살부터 열 살까지 아버지와 어머니 곁에 착 달라붙어
있었을 테지 . 그렇다면 그런 세간의 풍조를 피부로 느꼈을 거야."
"그렇다지만 일부러 무차별적인 공격을 하지 않아도· . ."
아사카와가 변명을 하다 말았던 것은 물론 자신이 매스컴의 일원
이라는 사실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그는 마음속에서 변명 , 아니 간청
하고 있었다. 나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매스컴의 체질에 대해서는 비
판적이라고.
"뭘 중얼거리고 있어?"
"어 '~l "
어느 샌가 소리를 내 염불처럼 외우고 있다는 것을 아사카와는 깨
닫지 못하고 있었다
"자, 이걸로 그 비디오의 영상이 어느 정도 해명된 거지? 미하라야
마는 어머니의 투신 장소이자, 사다코가 분화를 예지해 냈던 화산이
니 만큼 거기에는 상당히 강한 염이 작용했을 거야 다음 장면,희미
하게 떠오른 ◎' 이란 글자. 그건 아마도 야마무라 사다코가 어린 시
절, 처음으로 성공시킨 염사가 아닐까?"
"어린 시절?"
왜 어린 시절의 염사가 아니면 안 되는 것인지 아사카와로서는 납
득이 가지 않았다
"응 네 살인가 다섯 살 무렵이야.그리고 다음 주사위 장면.사다
코는 어머니의 공개 실험장에서 주사위의 눈을 알아맞혀 야 하는 어
머니를 걱정스러운 듯이 지켜보고 있었던 거지 ."
"아니 잠깐, 야마무라 사다코한테는 납으로 된 그릇 안을 굴러다니
는 주사위의 눈이 확실히 보였단 말야."
아사카와도, 류지도 그 장면을 '자신의 눈'으로 봤던 것이다. 틀림
없는 사실이다.
"그게 뭐?"
"어머니인 시즈코는 투시할 수 없었잖아 "
"어머니는 하지 못하고, 딸이 할 수 있었다는 게 그렇게 이상한 거
냐? 무슨 상관이지? 사다코는 그 당시 아직 일곱 살이었지만 어머니
를 훨씬 능가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던 거야. 백 명이나 되는 사람
들의 무의식적인 염의 힘 따위에는 구애받지 않을 정도로 말이지. 생
각해 봐,브라운관에 영상을 보낸 거야. 필름에 빛을 보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구조로 텔레비전은 영상을 비춰 내. 525개의 주사선을
주사하는 방법으로 말야. 사다코는 그게 가능했어 . 어머니보다 훨씬
월등한 힘이야."
아사과와는 아무래도 석연치가 않다.
"그 정도의 능력이 있었다면 미우라 박사에게 보낸 염사 필름에는
더 고도의 무의가찍혀 있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너도 둔한 녀석이구나. 알겠냐?어머니인 시즈코는 초능력이 남
에게 알려진 까닭에 불행한 생애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어. 딸에게
자신과 같은 전철을 밟게 하고 싶지 않았을 거야. 능력을 숨기고, 극
히 평범하게 살 것. 어머니는 딸에게 그렇게 말했음에 틀림없어 사
다코는 힘을 억누르고 극히 일반적인 염사에 머물도록 조정했던 거
야."
야마무라 사다코는 단원이 돌아간 뒤에도 혼자 연습장에 남아, 당
시로선 매우 귀한 물건이었던 텔레비전을 향해 자신의 힘을 시험하
고 있었던 것이다 결코 』닌의 능력이 남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주의
하면서 .
"다음 장면에 등장하는 노파는 누구야?"
아사카와가 물었다
"누군지는 모르지 . 아마, 그 할머니 사다코의 꿈 같은 데서 나타나
귀엣말로 예언 같은 걸 들려 주었던 게 아닐까'~? 옛날 사투리로 말야.
너도 눈치 챘겠지만 이 섬의 언어는 거의 표준어와 같아. 그 할머니는
상당히 나이를 먹었어. 가마쿠라(12세기부터 14세기에 걸친 시대 :
역자 주)에 살고 있었던가, 아니 어쩌면 엔노 오즈누인가와 연관이
있을지 도 모르지 ."
‥‥니것은 맹년, 새끼가 붙허 너는 내년 아이를 낳는다.
"그 예언 정말일까?"
"아,그거?다음에 바로 사내 아기 장면이 이어지지?난, 처음에
야마무라 사다코가 사내 아기를 낳은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팩
스를 보니까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애."
"생후 4개월 만에 죽은 동생 · .. "
"그래, 그쪽일 것 같아 "
"그럼 예언 쪽은 어떻게 되는 거지? 노파는 아무리 봐도 야마무라
사다코를 향해 '니것' 이라고 부르고 있었어. 사다코가 아이를 낳은
건가?"
"모르지 . 할머니의 말을 믿는다면 아마도 낳은 것이 아닐까?"
"누구 아일?"
"그런 걸 내가 어떻게 아냐? 야, 너 내가 뭐든지 알 거라고 생각하
지 마. 난 그저 추측을 말하고 있을 뿐이니까."
만일 야마무라 사다코의 아이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누구의 아이
이며 , 지긍 무엇을 하고 있을까?
류지는 갑자기 일어서려다가 테이블 안쪽에 무릎을 세게 부딪혔
다.
"몹시 배가 고프다 했더니 벌써 점심 때가 지났잖아?야, 아사카
와, 밥 먹으러 가자."
류지는 그렇게 말하더니 무릎 관절을 손으로 문지르면서 혼자 성
큼성큼 현관을 향했다. 아사카와로선 식욕은 없었지만 마음에 걸리
는 것이 있어서 식사에 동조하기로 했다. 류지에게서 알아보라고 부
탁받긴 했지만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몰라 그대로 놔 두고 있었
던 게 생각났던 것이다.
그것은 비디오테이프의 마지막에 나타나는 사내가 누구인가 하는
의문. 아버지인 이구마 헤이하치로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한다면
야마무라 사다코가 그를 보는 시선에 너무 적의가 강하다. 그 사내의
얼굴을 브라운관에서 봤을 때, 아사카와는 몸 안쪽에 둔하고 무거운
통증을 느끼면서 , 동시에 강한 혐오감을 품었다. 상당히 반듯한 얼굴
의 사내로, 특별히 눈초리가 나쁜 것도 아닌데 어째서 혐오감을 품게
되고 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리 봐도 야마무라 사다코의 눈은
육친을 응시하는 것이 아니었다. 요시노가 조사한 리 포트에는 사다
코가 부친과 대립하고 있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었다. 오히려 그
녀는 부친을 사랑한 딸이었다는 인상을 준다. 그 사내의 신원을 』招
내는 것은 우선 불가능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30년 가까운 세월은 사
내의 얼굴을 상당히 바꿔 버렸을 것이다. 그래도 만일의 경우를 생각
해 요시노에게 이구마 헤이하치로의 얼굴 사진을 찾아 달라고 부탁
해야 할지 , 그리고 류지는 이 점에 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등
등을 의논하기 위한 목적도 있어서 아사카와는 류지의 뒤를 쫓아 밖
으로 나갔던 것이다.
휴- 휴- 하고 바람소리가 난다. 우산을 써 봤자 소용없는 일이
라 아사카와와 류지는 모토마치 항구 바로 앞 경양식집에 등을 구부
린 채 뛰어들어갔다.
"맥주라도 마실까?"
류지는 아사카와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이미 여 종업원을 향해
'맥주 두 잔!' 하고 소리치고 있었다.
"류지 아까 얘기의 계속인데,네 생각으로는 그 비디오의 영상이
요컨대 뭐라고 생각하냐?"
"몰라."
불고기 정식을 먹는 데 바쁜 류지는 짤쌀맞게 대답해 버리고는 얼
굴을 들려 고조차 하지 않았다. 아사카와는 안주인 소시지를 포크로
찌르고, 맥주를 입으로 가져갔다. 창 너머로 잔교가 보인다. 기선 매
표소는 물론 어디나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 섬에 갇힌 여행객들은 분
명히 여관이나 민박집 창문으로 이 어두운 하늘과 바다를 걱정스럽
게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류지가 얼굴을 들었다
"너 말야, 인간이 죽는 순간 어떤 걸 머리에 떠올리는지 들은 적 있
fl ?"
아사카와는 창 밖을 향하고 있던 시선을 정면으로 되돌렸다
"응, 마음에 남아 있던 인상적인 장면이 플래시백처럼 전개되
어.·. "
아사카와는 어떤 작가의 체험담을 책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그 작
가에게는 산길에서 차를 몰다 핸들 조작을 잘못해 계곡 아래로 차와
함께 굴꼴떨어진 경험이 있었다 차가 도로에서 튀어나와 공중에 뜬
순간 작가는 '아.난 이제 이것으로 죽는구나' 하고 깨달았다. 그리
고 그것을 깨달았을 때 그때까지 격었던 일 중에서 며러 가지 장면이
탁탁 소리를 내면서 눈으로 보고 있는 것처럼 세세한 부분까지 명료
하게 머릿속을 스쳐 갔다고 한다. 결국 작가는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
졌지만 그때의 경험이 상당히 선명하게 의식에 남아 있었던 모양이
다.
"설마 그런 종류의 것이란 말야?"
아사카와가물었다 류지는 여종업원에게 손을들어 맥주 한잔을
더 주문했다.
"난 말야, 그저 그런 걸 연상했을 뿐이야, 비디오에 열거된 장면은
이거나 저거나 모두 야마무라 사다코의 염력이나 생각이 강하게 작
용했을 순간을 포착하고 있는 거니까 말야. 인생에서의 인상적인 장
면들이었다고 말하지 못할 이유가 없잖아?"
"그렇군 이봐, 그렇다면 결국."
"맞아. 그럴 가능성이 높아 "
‥‥야마무라사다코는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죽는 순간에 그녀의 머릿속에 어지럽게 떠올랐던 여러 가
지 장면이 이런 형태로 현세에 남아 버렸다?
"그녀는 왜 죽은 걸까? 그것하고 또 하나, 비디오의 마지막에 비친
사내와 사다코의 관계는?"
"그거고 저거고 나한테 질문하지 말라구.나 역시 모르는 것 투성
이니까."
아사카와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야. 조금쯤은 자기 머리로 생각해 봐. 너무 남한테 기대려는 것 아
냐「1 만일 나한테 무슨 일이 있어서 너 혼자 주문의 수수께끼를 풀어
야 할 지경이 되면 어떻게 할래?"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아사카와가 죽고 류지 혼자서 주문을 푸
는 일은 있을지 몰라도 그 반대의 경우는 있을 수 없다. 아사카와는
그 점 만에서만은 확신을 갖고 있었다
통신부로 돌아오.자 하야츠가 말했다
"요시노라는 분한테서 전화가 왔었습니다 밖이니까 10분 지나서
한 떤 더 건답니다. "
아사카와는 전화 앞에 버티고 앉아 좋은 소식이기를 기도했다. 벨
이 울렸다. 요시노로부터다.
"아까부터 몇 번이나 전화했는데 "
요시노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비난이 섞여 있었다
"죄송합니다. 식사하러 나갔습니다. "
"근데 팩스는 받았나?"
요시노의 어조가 약간 변했다. 비난의 울림이 사라지고 그 대신 상
냥함이 들어 있다. 아사카와는 기분 나쁜 예감이 들었다.
"예, 덕분에 아주 참고가 됐습니다. "
아사카와는 거기서 수화기를 쥔 손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바畿
다.
"그래, 어떻습니까?알아 냈습니까'~7야마무라 사다코의 그 뒤 행
적을?"
아사카와는 단단히 마음을 먹고 물었다. 그러나 요시노의 대답은
바로 이어지지 않았다.
"실패다. 실은 끊겼다. "
듣는 순간,아사카와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울어 버릴 것처럼 일그
러져 갔다. 류지는 기대에 부풀었던 인간의 얼굴이 순식간에 절망으
로 변해 가는 것을자못 재밌다는 듯 관찰하면서 바닥위에 털썩 앉
아 뜰을 향해 양발을 내던졌다.
"끊겼다니 , 무슨 말입니까!"
아사카와의 목소리가 흥분되어 있다
"야마무라 사다코와 동기로 극단에 들어온 견습생 중에서 현재 소
식을 알 수 있는 사람은 네 명. 그 네 명에게 전화로 물어 봤지만 모
두들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 그들이,그들이라고 해야 모두 이미 오
십 전후의 아저씨지만,네 사람 모두 입을 모아 말하는 건 야마무라
사다코는 극단 대표인 시게토리가 죽은 직후부터 안 보였다는 것 뿐.
그 이외에 야마무라 사다코에 관한 정보는 얻을 수가 없었어."
"설마 이걸로 끝이라는 얘긴 아니겠죠?"
"그렇게 말하지 말게 . 달리 방법이· . "
"난 내일밤 10시에 죽을 운명에 있단 말입니다. 나 뿐만이 아니라,
아내와 딸은 일요일 오전 11시 "
"음, 날 잊었군. 기분 나쁜데."
류지가 뒤에서 훼방을 놓았지만 아사카와는 상대하지 않고 계속했
다.
"아직 다른 방법이 있겠죠?견습생 이외에 야마무라사다코의 소
식을 아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시죠?가족의 목숨이 걸려
있단 말입니다. "
"꼭 그렇다고 할 수는 없겠지 ."
"예? 무슨 뜻?"
"마감 시간이 되어도 자네가 살아 있을 수 있다는 거지 ."
"믿지 않는군요."
아사카와는 눈앞이 새까매지는 것 같았다.
"백 퍼센트 믿으라는 건 무리야."
"아시겠습니까, 요시노 선배?"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어떻게 하면 이 사람을 설득시킬 수 있을
까?
"나 역시 말이죠, 반도 안 믿는다구요. 말도 안 돼, 뭐가 주문이야.
하지만 아시겠어요? 가령 6분의 1의 확률로 이것이 진실이라고 한다
면, 당신은 여섯 발 중 한 발의 비율로 탄환이 날아가는 권총을 관자
놀이에 대고 방아치를 당길 수 있겠습니까? 못할 겁니다. 총구를 아
래로 내리고, 뵉 수 있으면 권총째 바닷속에라도 던져 버리려고 할
게 뻔하지 않습니까?"
아사카와는 단숨에 떠들어 댔다. 뒤쪽에서 류지가 '우린 바보야,
바◎ 라며 떠들어 대고 있었다.
"시끄러 ! 조용히 해."
아사카와는 수화기를 손바닥으로 막고는 뒤를 돌아보며 류지에게
호통을 쳤다
요시노가 목소리의 톤을 떨어뜨렸다.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요시노 선배, 부탁합니다. 의지가 되는
건. ."
말을 이어가려던 아사카와의 팔을 류지가 잡아당겼다. 아사카와는
분노를 실어 그대로 기세 좋게 돌아보았다. 그러자 눈에 들어온 것은
예상외로 진지한 류지의 얼굴이었다.
"우린 바보다. 나도 너도 냉정함을 잃고 있어 "
류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아사카와는 그렇게 말하고 수화기를 내렸다.
"왜 그러는 거야?"
"왜 이런 간단한 걸 깨닫지 못했을까?야마무라사다코의 발자취
를 연대순으로 쫓을 필요가 없다구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도 상관없
잖아, 왜 B-4호가 아니면 안 되는 거야7왜 빌라 로그캐빈이 아니면
안 되는 거지? 왜 미나미하코네 퍼시픽랜드가 아니면 안 되는 거
야?"
아사카와는 아! 하는 표정과 함께 어떤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그
리고 다소 기분을 가라앉힌 다음 수화기를 다시 들었다.
"요시노 선배 ."
요시노는 끊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요시노 선배, 극단의 선은 일단 놔 두십시오. 그것보다 급히 조사
해 주실 일이 생겼습니다 미나미하코네 퍼시픽랜드에 대해선 이미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음, 들었지 . 리조트 클럽이지?"
"예, 내 기억으로는 확실히 10년 정도 전에 골프장이 생기고 그걸
보조하는 형태로 현재의 시설이 갖춰졌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아
시겠습니까? 조사했으면 하는 건 미나미 하코네 퍼시픽랜드가 생기
기 이전에 거기 뭐가 있었나 하는 것입니다. "
요시노가 놀리는 펜 소리가 들려온다.
"뭐가 있었냐구? 그저 고원이 아닐까?"
"그럴지도 모르죠. 그치만 그렇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
류지가 다시 아사카와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그거하고 배치도다. 알겠냐? 퍼시픽랜드가 생기기 전, 그 땅에 다
른 건물이 서 있었다면 그 건물의 배치도도 입수하도록 전화 상대한
테 말해 질 ."
아사카와는 그대로 요시노에게 전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반드
시 단서를 잡아 달라고 강하게 다짐해 두면서. 그렇다 누구한테나
염원의 힘은 있는 것이다.
10월 18일 목요일
바람은 약간 강했지만, 활짝 갠 하늘에는 흰구름이 낮게 흐르고 있
었다. 태풍 21호는 어제 저녁 보소 반도를 스치듯이 북동 해상으로
사라졌고 그 뒤를 덮친 것은 눈이 아플 정도로 푸르른 바다색이었다.
상쾌한 가을의 맑은 날씨와는 정반대로 아사카와는 마치 사형 집행
을 눈앞에 둔 사형수의 심경으로 배 갑판에 서서 물마루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을 위로향하니 이즈고원의 능선이 느긋하게 하늘 한복
판으로 달리고 있었다
드디어 '마감'의 날을 맞이하고 만 것이다. 지금은 오전 10시, 앞
으로 12시간만 지나면 그때가 틀림없이 다가온다. 빌라 로그캐빈에
서 비디오를 봐 버린 지 일주일이 지나려 하고 있었다. 길었다‥‥라
는 것이 실감이다. 보통 사람이 일생 걸려도 경험하지 못할 정도의
공포를 단 일주일 만에 모두 체험하고 만 것이므로 길다고 느끼는 것
도 당연하리라.
수요일 하루 종일 오시마에 틀어 박혔던 것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아사카와로서는 알 수 없었다. 전 화상으로는 그만 흥분한 나머지 조
사가 늦어진 것을 따지고 말았지만,지금 와서 냉정히 생각해 보니
요시노는 정말 잘해 주었다는 감사의 마음이 커진다. 만일 아사카와
스스로 조사하러 돌아다녔다면, 초조함에 사로잡혀 포인트에서 벗어
난 방향으로 빠져들었을지토 모른다.
‥‥결국 다행이었던 것이다. 태풍은 이쪽 편이 되어 준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죽는 순간에 그렇게 하
면 좋았을걸, 이렇게 했어야 할 것을, 하고 후회하지 않기 위해 아사
카와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지막 남겨진 단서는 눈앞에 있는 세 장의 프린트. 어제 반나절에
걸쳐 요시노가 알아내서 팩스로 보내온 것이다. 미나미하코네 퍼시
픽랜드가 생기기 전, 역시 그 땅에는 요즘엔 보기 드문 시설이 들어
서 있었다 드물다고 해도, 당시의 입장에서 보면 극히 흔한 건물이
었다. 이전에 거기에 있었던 것은 결핵 요양소였다.
결핵. 지금은 이 병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별로 없지만, 2차 대전 전
의 소설을 읽으면 반드시 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이 이름을 보게 된
다. 토마스 만에게 『마의 산』을 쓸 계기를 준 것도 결핵균이라면, 가
지이 모토지로(携井基次郎, 1901∼1932.폐결핵으로 요절한 소설가
역자 주)로 하여금 맑디 맑은 퇴폐를 을조리게 한 것도 결핵균이었
다. 그러나 19뀨년에 발견된 스트렙토마이신, 1950년에 발견된 히드
f)RIJ÷I ;f%f_t~fl 5·f~:1: 377f "f~?")7).%7H 9%bBl 1
~)ㄹ)3 f")D faC1. ㄷ)"la )lIft(1912∼1926 · fx) ~=)trIAl 4 1
와시대(1926∼1989 역자주)에 걸쳐 이 병으로 죽은사람은매년
20만 명에 달했지만, 그 숫자는 2차 대전 후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렇
지만 결핵균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현재도 이 균에 감염되어 죽는
사람이 매년 5천 명 정도 되는 것이다. 그런데 결핵이 맹위를 떨치던
시대, 이 병을 치료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깨끗하고 맑은 공기와 한
가롭고 조용한 환경 이었다
따라서 결핵 요양소를 모두 고원 등지에 세웠던 것인데, 과학 요법
의 진보에 따라 환자 수가 감소하자 요양소의 기능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되었다. 즉,내과,소아과, 외과 등을 병행해서 만들지 않으면 경
영 면에서 채산이 맞지 않게 되고 말았던 것이다. 1960년대 중반,미
나미하코네에 있던 결핵 요양소에도 이러한 변혁기가 찾아왔다. 하
지만 상황은 더없이 곤란했다. 너무나도 교통편이 나쁜 곳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결핵의 경우 일단 입원하면 좀처럼 퇴원을못하기
때문에 교통편은 문제되지 않는다. 그러나 종합병원으로의 변모를
죄하는 데 있어 그것은 치명적이었다. 이리하여 미나미하코네 요양
소는 1972년에 폐쇄되었던 것이다.
그곳을 눈여겨본 것이 전부터 골프장이나 리조트 시설의 건설지
를 물색하고 있던 퍼시픽리조트 클럽이었다. 1975년, 퍼시픽리조트
는 미나미하코네 요양소가 서 있던 자리를 포함한 고원 지대를 매
입. 곧바로 골프장 건설에 착수했고, 이어 분양을 위한 별장, 호텔,
수영장, 체육 클럽, 테니스 코트와 리조트 시설을 차례로 갖추어 나
갔던 것이다. 그리고 빌라 로그캐빈이 완성된 것이 지금으로부터 반
년 전인 1990년 4월이었다
년 전인 1990년 4월이었다
"어떤 곳이지?"
갑판에 있을 류지가 어느새 아사과와 옆자리에 와 있다.
"응?"
"미나미하코네 퍼시픽랜드 말이야."
‥‥그래, 류지는 아직 그곳에 간 적이 없다.
"야경이 아름다운 곳이야."
생명감이 희박한 분위기, 오렌지색 불빛 아래서 퐁퐁거리며 울려
퍼지던 테니스볼 소리가 아사카와의 귀에 되살아났다.
‥‥그 분위기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요양소가 있던 시절, 그곳에
서 몇 명의 사람이 죽었을까?
아사카와는 그런 것을 생각하면서 눈밑으로 아름답게 펼쳐지는 누
마즈와 미시마의 야경을 떠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사카와는 맨 첫째 장 프린트를 밑으로 돌리고 둘째 장과 셋째 장
을 무릎 위에 펼쳤다. 둘째 장 프린트에는 요양소 건물의 간단한 배
치도, 그리고 셋째 장 프린트에는 요양소의 현재 모습인 미나미하코
네 퍼시픽랜드 인포메이션 센터와 레스토랑이 있는,)층짜리 멋진 건
물이 복사되어 있다. 아사카와가 방문했을 때 갑자기 차를 세우고 성
큼성큼 들어가서는 종업원에게 빌라 로그캐빈이 있는 곳을 물었던
그 건물이다.
아사카와는 두 장의 프린트를 번갈아 응시했다. 30년 가까운 세월
의 흐름이 도안으로 만들어져 있다 산을따라구부러지는길을기준
으로 보지 않으면 어디와 어디가 일치하는 것인지 전혀 알 수가 없
다. 아사카와는 실제의 풍경을 뇌리에 떠올리면서 빌라 로그캐빈이
서 있는 장소에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하고 둘째 장에 그려진 지
도를 더듬었다. 명확히 위치를 지정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렇긴 하
지만 아무리 그 두 장의 프린트를 서로 겹쳐 봐도 빌라 로그캐빈이
있는 장소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골짜기 쪽
의 경사면을 뒤덮는 울창한 나무숲이 있을 뿐이다.
아사카와는 다시 한번 첫 번째 프린트로 되돌아갔다 미나미하코
네 요양소에서 미나미하코네 퍼시픽랜드로의 변천, 그 이외에 또 다
른 중요한 정보가 기록되어 있다. 나가오 죠타로, 57세. 아타미 시에
서 내과 · 소아과 의원을 경영하는 개업의 이다 나가오는 1962년부터
67년까지 5년 동안 미나미하코네 요양소의 의사로 근무했다. 인턴을
막 마친 아직 햇병아리 시절의 일이다. 당시 미나미하코네 요양소의
의사로 근무하고 현재도 생존해 있는 사람은,나가사괴의 딸네 집에
은거하는 다나카 히로미와 나가오 죠타로 두 사람뿐이다. 원장을 비
롯한 그 외의 의사는 모두 이 세상사람이 아니었다 따라서 미나미
하코네 요양소에 관한 정보를 얻어 내려면 나가오 의사 이외에는 달
리 없었다. 다나카 히로미는 이제 곧 80세라는 고령인데다가, 나가사
키라는 장소를 생각해 볼 때 도저히 취재하러 갈 시간이 없는 것이
다.
누구라도 좋으니까 산 증인을 발견해 달라고 아사카와는 필사적으
로 요시노에게 신신당부했고, 요시노는 화가 치미는 것을 참으면서
겨우겨우 나가오 의사의 이름을 알아 냈던 것이다. 그가 써 보내온
것은 이름과 주소 뿐만은 아니었다. 나가오 의사에 관한 재미있는 경
력도 첨가되어 있었던 것이다. 왜 요시노가 이 일에 흥미를 가진 것
일까? 아마 조사하는 동안에 우연히 주워듣고 별생각 없이 기록했을
뿐일 게다.
나가오는 1962년부터 67년까지 5년 간. 요양소에서 하루도 쉬지
않고 의사로서의 사명을 다했던 것이 아니다. 2주일이라는 짧은 기간
이기는 해토, 진료하는 측에서 진료받는 측으로 바뀌어 격리 병동에
수용된 적이 있었다. 1966년 여름, 산간부의 격리 시설을 방문했을
때 부주의하게도 환자로부터 천연두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만 것이
다. 다행히 몇 년 전에 예방접종을 받아 두었기 때문에 위험한지경
에는 이르지 않은 채 2차 발열도 없이 극히 가벼운 증상으로 끝났다
그러나 감염을 방지하기 위해 격리 치료를 받지 않을수 없었다. 재
미있는 것은 그로 인해 나가오의 이름이 의학적인 자료에 남게 된 것
이다. 다시 말해 일본에서의 마지막 천연두 환자. 기네스북에 여러
가지 기록이 실리는 요즘 이런 기록에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요시노로서는 재미있다고 느껴졌음에 틀림없다. 천연두,
아사카와나 류지 제대에게 이 병명은 이미 AH(死語)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류지 , 너 천연두에 걸린 적 있냐?"
아사카와가 물었다
"너 바보 아냐? 그럴 리가 없잖아. 사멸했다구, 그런 거."
"사멸?"
"그래 인류의 지혜에 의해 근절되었어. 이미 이 세상에 천연두는
존재하지 않아."
류지가 말하는 대로 세계보건기구(WHO)의 백신에 의한 철저한 소
탕 작전으로 천연두 바이러스는 1975년, 거의 지구상에서 모습을 감
추어 버렸다. 이 세상의 마지막천연두환자,이 이름도 물론 기록에
남아 있다. 1977년 10월 16일에 발진한 아프리카 소말리아의 청년이
다
"바이러스가 사멸하다? ‥‥글쎄,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아사카와는 바이러스에 관한 지식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죽여도
죽여도 그 모습을 바꾸며 끈질기게 살아람는다는 인상이 아무래도
지워지지 않는다
"바이러스는 말야, 생명과 비생명의 경계선을 헤매고 있는 거야
기원을 따져 올라가면 인간 세포 내의 유전자라는 설도 있을 정도야.
어디서 어떻게 생겨난 건지는 몰라. 다만 생명의 탄생과 그 진화에
크게 관련되어 있는 건 분명해."
류지는 머리 뒤로 깍지 끼고 있던 손을 뻗어 크게 기지개를 켰다.
그 눈이 생생하게 빛나고 있다.
"아사카와, 재미있지 않냐? 세포 속의 유전자가 튀어나와 다른 생
물이 되다니.상반되는 것들 모두가 그 근원에 있어서는 동일했을지
도 몰라. 빛과 어둠 역시 빅뱅이 일어나기 전에는 사이좋게 모순 없
이 동거하고 있었어.신과 악마도 그랬지, 요컨대 추락한 신이 악마
라고 불리게 됐을 뿐 근본은 같은 거야. 남과 여 역시 그래, 윈래 모
습은 지렁이나 달팽이처럼 여성 성기와 남성 성기를 동시에 갖추고
있었던 거라구. 그거야말로 완벽한 힘과 미의 상징이라고 생각되지
않냐?"
류지는 그렇게 말하고는 웃었다.
"헤헤헤, 섹스하는 수고를 더는 거니까 편한 거지 ."
뭐가 우스울까 하고 아사카와는 그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여성 성기와 남성 성기를 함께 갖춘 생물이 완전한 것일 리 없
다.
"그 밖에도 사멸한 바이러스라는 게 있나?"
"글쎄, 그렇게 흥미가 있다면 도쿄에 돌아가서 철저히 알아보면 되
존◎◎?"
"돌아갈 수 있다면 말야."
"헤헤, 걱정 마. 돌아갈 수 있어."
그매, 아사카와와 류지를 태운 고속정이 마침 오시마와 이토를 잇
는 선 중간에 있었다. 비행기를 이용하면 더 빨리 도쿄에 돌아갈수
가 있겠지만 두 사람은 아타미에 사는 나가오 죠타로를 방문하기 위
해 일부러 배편을 이용했던 것이다.
예정대로 10시 50분 도착. 아사카와는 배에서 내리자마자 렌터카
를 세워 둔 주차장으로 달려갔다
"어이 , 그렇게 안달하지 말라니까."
류지가 뒤에서 느긋하게 쫓아온다. 나가오의 병원은 기노미야 역
바로 근처에 있었다. 류지가 차에 올라타는 것을 초조한 기분으로 끝
까지 지켜보고 난 아사카와는 비탈과 일방 통행이 많은 아타미 시가
지를 향해 차를 달렸다.
"이봐, 이 사건 뒤에서 손을 대고 있는 건 악마일지도 몰라."
올라타자마자 류지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아사카와로서는 도로
표지를 보는 데 바빠 대답할 여유가 없었다. 류지가 계속했다.
"악마는 말야, 늘 다른 모습으로 이 세상에 나타난다 구. 14세기 후
반에 유럽 전역을 습격한 페스트에 대해 알고 있냐? 전 인구의 약 반
수 가까이가 죽었어 믿을 수 있겠어?절반. 일본의 인구가6천만으
로 줄어드는 것과 마찬가지야. 물론 당시의 예술가는 페스트를 악마
에 비교했어 지금 역시 그렇겠지. 에이즈를 현대의 악마따위로 부
르지 않냐? 하지만 말야, 악마는 결코 인간을 사멸로 몰아넣는 일은
없어. 어째서냐 인간이 없으면 놈들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지.
바이러스도 말야, 숙주인 세포가 죽어 버리면 살 수 없는 거야. 그런
데 인간은 천연두 바이러스를 사멸로 몰아넣었지. 정말일까? 그런
것이 가능할까?"
일찍이 전세계에서 맹위를 떨치며 높은 사망률을 자랑하던 천연두
에 대한 공포는 현대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게 되었다. 심한 병
고 때문에 이 병을 둘러싼 신앙과 미신은 일본에도 수없이 존재한다
그 옛날 이 병을 발생시키는 것은 호소가미 (德擔神)라는 역신이라고
믿어졌다. 신이라기보다는 악마라고 부르는 쪽이 좋겠지만, 과연 인
간은 신을 사멸의 가장자리로 쫓아보낼 수 있을까? 류지의 의문에는
그런 물음이 포함되어 있었다.
아사카와는 류지의 얘기를 듣고 있지 않았다. 마음 한구석에서 '왜
이 자식은 지금 이런 얘기를 하는 걸까' 하는 의문을 느끼면서도 그
는 그저 단순히 길을 잘못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 될 수 있는 한 빨
리 나가오의 병원에 도착해야 한다는 것에만 온 신경을 집중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기노미야 역 앞 골목길로 막 들어서자 작은 단층집이 보였고, 현관
기노미야 역 앞 골목길로 막 들어서자 작은 단층집이 보였고, 현관
입구에 '나가오 의원, 내과 소아과'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아사
카와와 류지는 문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만일 나가오 로부터 아무
정보도 얻어 내지 못한다면 그때야말로 마감 시간 아웃 달리 새로운
선을 찾아낼 시간이 이제는 없었다. 그렇지만 도대체 무엇을 알아 낼
수 있을 것인가? 거의 30년 전의 야마무라 사다코와 관계가 있을 만
한 사건을 공교롭게도 나가오가 기억하고 있을 리 없지 않은가. 그러
기는커녕 미나미하코네 요양소와 야마무라 사다코가 관계 있다는 확
증조차 없다. 미나미하코네 요양소의 동료였던 몇 명의 의사는 다나
카히로미를제외하고는 모두 천수를 다했다 당시의 간호사 이름도
철저히 밝혀 낼 수 없는 건 아니겠지만 지금부터 해야 한다면 이미
늦은 일이다.
아사카와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11시 반, 마감까지 앞으로 10시간
남짓. 여기까지 온 아사카와는 문을 미는 손을 머뭇거리고 있었다.
"뭐 해? 빨리 들어가 "
류지는 아사카와의 등을 밀었다 그토록 서둘러 차를 달렸던 아사
카와가 왜 여기에서 주저하는 것인지 류지 역시 모르는 바 아니었다.
두려운 것이다. 마지막 희망이 끊기고, 살아날 수 있는 희망을 잃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류지는 자기가 앞으로 나서서 문을 열었다.
좁은대기실 벽 쪽에 세 사람이 앉을수 있는 긴 의자가 놓여 있었
다 마침 진찰을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류지는 몸을구부리
고 접수창을 통해 뚱뚱한 중년 간호사에게 말을 걸었다.
"죄송합니다. 잠시 , 선생님을 만나 뵙고 싶은데요."
간호사는 눈앞의 주간지에서 얼굴도 들지 않고 느긋하게 물었다.
"진찰입 니 까?"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선생님께 여쭙고 싶은 게 있어서요."
간호사는 주간지를 덮더니 얼굴을 들고 안경을 썼다.
"무슨 용건이신가요?"
"그러니까‥‥ 좀· 얘기를 듣고 싶어서요."
류지의 등뒤에서 아사카와가 초조하게 얼굴을 내밀었다.
"선생님은 계십니까?"
간호사는 안경테를 두 손으로 받치고 두 남자의 얼굴을 번갈아 쳐
다보았다.
"무슨 용건이신지 말씀해 주세요."
고압적인 말투였다. 류지와 아사카와는 일단 몸을 일으켰다.
"이런 간호사가 접수를 받고 있으니 손님이 올 리 없겠군 · .."
류지 는 들으라는 듯 말했다.
"뭐라구요!"
‥‥여기서 화를 내게 하면 곤란해 ! 아사카와가 그렇게 생각하고 머
리를 숙였을 때,안쪽 진찰실 문이 열리더니 횐 가운을 입은 나가오
가 모습을 나타냈다.
"무슨 일이오?"
나가오의 머리는 완전히 벗겨져 있었지만, 57세라는 나이보다는
다소 젊게 보였다 그는 수상쩍다는 듯 얼굴을 찡그리며 현관 입구에
선 두 사내를 응시했다.
나가오의 목소리가 들려옹과 동시에 돌아본 아사카와와 류지는 그
곳에 서 있는 나가오의 얼굴을본순간,또다시 동시에 '아!' 하고소
리를 질렀다.
· 나가오가 야마무라사다코에 관한 정보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
다. 이건 그 정도가 아니다. 당연히 알고 있어야만 했다.
머리에 전류가 흐르면서 아사카와의 뇌리에 새겨져 있는 비디오의
마지막 장면이 재빨리 되살아났다. '하아, 하◎ 하고 거친 호흡을
토해 내는 사내의 얼굴, 땀투성이 얼굴이 바로 눈앞으로 다가왔고,
눈은 暴게 충혈되어 있었다. 맨살인 어깻죽지, 거기에 딱 벌어진 상
처 ,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는 '눈'으로 쏟아져 내려 망막을 흐리게 했
다. 가슴을 짓누르는 강렬한 압박감, 살의를 띤 사내의 얼굴. 그 얼굴
이 지금 현실에서 보고 있는 나가오의 얼굴인 것이다. 나이는 먹었지
만 결코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아사카와와 류지는 얼굴을 마주보았다. 류지는 나가오를 가리키며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이러니까 게임은 재밌어 . 아아‥‥ 세상에 세상에, 이런 데
서 만나 뵙게 되다니 · "
나가오는 낯선 두 사내가 자신을 봤을 때의 반응에 노골적인 혐오
감을 드러내며 '뭐요?당신들은!' 하고 크게 소리를 질렀지만,류지
는 아랑곳하지 않고 성큼성큼 나가오에게 다가가 거침없이 떡살을
잡았다. 나가오는 류지보다도 10센티 정도가 더 컸다. 류지는 엄청난
완력으로 나가오의 귀를 자신의 입가로 끌어당기더니 완력과는 정반
대로 부드럽고 천천히 , 마치 주위를 노려보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30년쯤 전에 미나미하코네 요양소에서 야마무라사다코한
테 무슨 짓을 했지?"
'◎ 이 머리에 도달하기까지는 몇 초가 걸렸다. 나가오는 눈을 여
기저기로 바쁘게 굴리면서 과거의 장면을 기억해 냈다. 그리고 결코
지금까지 단 한번도 잊어 본 적이 없는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나자마
자 허리 아래쪽의 힘이 쑥 빠지기 시작했다. 류지는 의식을 잃기 시
작한 나가오의 몸을 부추켜 벽에 기대 세웠다 나가오는 과거의 기억
이 되살아난 것 때문에 쇼크를 받은 것은 아니다. 삼십이 될까 말까
한 이 사내가 어떻게 그 일을 알고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번쩍 든
순간, 말할 수 없는 공포가 전신을 관통했던 것이다.
"선생님 !"
간호사인 후지무라가 걱정스러운 듯 소리를 질렀다.
못하도록 현관 커튼을 닫았다.
"선생님 !"
후지무라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허등거리며 나가오의 지시를
바랄 뿐이었다. 나가오는 겨우겨우 정신을 차린 다음,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을 생각했다.
이 대책 없는 수다쟁이 여자에게 그 일이 알려지면 큰일이라는 생
각이 들자 평정을 가장하고 말했다
"후지무라, 점심 시간으로 알고 식사라도 하고 와요."
"· . ·선생님 ."
"괜찮으니까 갔다 와요. 내 일은 아무 걱정 말고."
낯선 사내 둘이 들어와서 선생님의 귓가에 뭔가 속삭였는가 싶었
는데 갑자기 선생님이 현피증을 일으켜 쓰러질 뻔하고‥‥ 무슨 일인
지 도무지 알 길이 없는 후지무라는 그때까지도 잠시 서 있었지만,
'빨리 가!' 라는 나가오의 호령에 퉁기듯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자, 그럼 얘기를 들을까요?"
류지가 진찰실로 들어가자 나가오는 암을 선고받은 환자처럼 그
뒤를 따랐다.
"먼저 주의를 주겠는데 거짓말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저와 이 사
내는 이 '눈'으로 보고 모든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류지는 우선 아사카와를 가리킨 다음 그 손가락을 자신의 눈으로
가져갔다
"그런, 바보 같은."
‥‥목격했다고?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그 숲에는 아무도 없었어 .
무엇보다도 이 두 사내의 나이는 당시 ‥‥
"믿지 못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겠지 . 그러나 우리 두 사람 모두 당
신의 얼굴을 잘 알고 있단 말야."
갑자기 류지의 말투가 변했다.
"뭣하면 가르쳐 줄까? 당신의 신체적 특징 ‥‥ 그 오른쪽 어깨에는
아직 상처 자국이 남아 있지 않냔 말야? 엉?"
나가오의 두 눈이 크게 떠지더니 턱 언저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류
지는 충분히 사이를 둔 다음 말했다.
"당신의 어깨 상처가 왜 거기에 있는지 말해 줄까?"
류지는 불쑥 머리를 들이밀더니 나가오의 어깨 끝으로 입을 옮긴
다.
"야마무라 사다코한테 물어뜯겼지? 이렇게 ."
류지는 입을 벌려 횐 가운 위를 무는 시능을 해 보였다 나가오의
턱 떨림은 더욱 심해져서 필사적으로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이와 이
가 제대로 맞물리지 않아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알았겠지?알겠냐'「우린 당신한테서 들은 얘기를 절대 누구한테
도 떠들지 않아 약속하지 . 단, 알고 싶은 건 야마무라 사다코의 신상
에 일어난 일 모두야."
도저히 사고력이 작용할 상태는 아니었지만, 나가오는 아무래도
얘기의 앞뒤가 맞지 않는 것같이 여겨졌다. 그 사건을 봤다면 이제
와서 내 입을 통해 알아 낼 필요가 없는 게 아닌가? 아니 잠깐, 그 팡
경을 들켰다는 전제 자체가 이상해. 그때 태어났을지 어땠을지도 의
심스러운 놈들한테 들킬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럼 , 뭐지? 이놈들은 대
체 뭘 業다는 거야?아무리 생각해도 모순은 부풀어 갈 뿐이어서 나
가오의 머리는 터져나갈 듯이 아팠다.
"fllfl1611fll‥‥‥
류지는 웃으면서 아사카와를 보았다. 그 눈이 말하고 있었다.
‥‥헤헤, 이만큼 겁을 주었으면 뭐든 솔직히 말할 거야.
그런 상태로 나가오는 말하기 시작했다. 왜, 세부적인 데까지 기억
하고 있는지 자신도 이상했다. 그리고 말하는 데 따라 몽 속의 감각
기관까지 그때의 흥분을 기억해 냈다. 그 광경, 열기,감촉, 피부의
윤기 , 매미 소리 , 땀과 풀 냄새, 거기에 낡은 우물까치‥‥
대체 무엇이 원인이었던 걸까. 아마 열과 두통에 시달려 , 정상적인
판단력을 잃고 말았던 것 같다. 그런 증상이야말로 잠복기를 경과한
천연두 초기 증상이었던 것인데, 설마 자신이 그런 병에 걸리리라고
는 생각지도 못했다 다행히 요양소에서는 한사람의 감염자도 나오
지 않아 별일 없었지만, 만일 결핵 환자들이 천연두의 공격을 정면으
로 받았더라면, 하고 생각하면 지금도 몸이 오싹해지는 느낌이다.
더운 날이었다 새로 입원한 환자의 흥부 단층 사진에서 1엔짜리
동전 정도의 공동을 발견하고, 음, 일 년은 각오하시는 게 좋겠네요,
등등의 말을 하면서 그 환자가 회사에 제출해야 할 진단서를 다 써
놓고는 답답함을 견디기 어려워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고원의 바깥
공기를 마셔도 머리의 통증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그래도 겨우겨
우 병동 옆 돌계단을 내려와 뜰 앞의 응달에 숨으려고 하는데, 한 젊
은 여성이 나무 줄기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비곳 환자가 아니었다 내가 이곳에 오기 훨씬 전부터 입원
해 있는 이구마 헤이하치로라고 하는 전T대학 조교수의 딸로, 이름
을 야마무라사다코라고 했다. 부모 자식 간인데도 성이 달라서 그
이름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최근 1개월 사이에 야마무라 사다코는
빈번하게 미나미하코네 요양소에 병문안을 하러 왔었지만 아버지 곁
에는 그리 오래 있지도 않았고, 의사에게 아버지의 증상을 묻지도 않
아 혹시나 아름다운 고원의 풍경을 즐기러 오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
각까지 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옆에 앉아 빙그레 웃어 보이고는
아버지는 어떠신가 하고 말을 걸었지만 그녀는 아버지의 증상에 관
해서는 별로 알고 싶지도 않다는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
녀는 아버지의 목숨이 이미 다해 가고 있음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말투를 통해 그것을 알 수 있었다. 어느 의사의 예상보다도 정확하게
그녀는 아버지가 죽는 날을 예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야마무라사다코 옆에 앉아그녀의 인생과 가족에 관
한 일 등을 듣고 있는 사이에 그토록 심했던 두통이 어느새 물러가
버렸음을 래달았다. 그 대신에 고개를 든 것은 열을 동반한, 묘하게
들뜬 느낌 . 어디서랄 것도 없이 활력이 去고, 몸 안에 돌고 있는 피의
온도가 높아져 가는 듯한 감각. 난 야마무라 사다코의 얼굴을 넌지시
관찰했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여자로서 이만큼 반듯한 얼굴이 이 세
상에 있을까 싶은 이상스러움 아름다움의 기준이 어디에 있는 것인
지는 알 수 없지만, 나보다도 스물이나 연상인 다나카 의사도 같은
말을 했었다. 야마무라 사다코 이상 가는 미인을 본 적이 없다고. 열
때문에 숨막히는 호흡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그녀의 어깨에 살짝 손
을 얹고 말했다
"나무 그늘이 시원한 곳에서 좀더 얘기해요."
야마무라 사다코는 아무 의심도 없이 꾸벅 끄덕이고는 일어서려고
했다. 그리고 일어서려고 등을 구부렸을 때. 난 그녀의 횐 블라우스
안쪽에 반듯한 모양으로 작게 흔들리는 유방을 보고 만 것이다. 그
빛이 너무나도 하얘서 보는 순간내 머리 전체가유백색으로 물들어
버려 정상적인 사고 능력을 빼앗기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그런 나의 설레임에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않고, 긴 스커
트에 붙은 먼지를 탁탁 손으로 털고 있었는데, 그 동작이 너무나도
천진난만해서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쏟아져 내려오는 듯한 매미 소리 가운데, 우리는 나무들이 우거진
숲 속을 무작정 걸었다. 명확히 목적지를 정했던 게 아니었는데 내
발은 어느새 어떤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땀이 등줄기를 흘러 떨어져
난 셔츠를 벗고 속옷 하나만 걸치게 되었다. 짐승들이 낸 길을 따라
나아가자 그 끝에 계곡 경사면에 낡은 민가가 있었다. 사람이 살지
않은 지 십년은 훨씬 지났을 것이다. 판자 벽은 어디나 썩어 있어 , 지
금 당장 지붕이 무너져 내려도 이상하지 않게 여길 정도였다. 그 민
가 저편에는 우물이 있었는데,그녀는 그것을 본 순간 '아아, 목 말
라' 하고 달려가 안을 들여다보기 위해 몸을 구부렸다. 외관상으로도
그 우물은 이미 오래 전부터 쓰이지 않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나 역
시 우물로 달려갔다. 우물 안을보기 위함이 아니다. 보고 싶었던 것
은 몸을 구부린 야마무라사다코의 그 가슴께 난 우물 가장자리에
양손을 짚고 그것을 바로 눈 앞에서 보았다. 어두운 흙 가운데에서는
습한 냉기가 올라와서 내 얼굴을 어루만졌지만, 내리쬐는 햇볕과 솟
아나는 충동을 막아 낼 수는 없었다. 충동이 어디에서 솟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천연두의 열에게 제어 기능을 빼앗겼다‥‥ 그런 기분이
든다 맹세코 말하지만, 지금까지 그런 관능적인 유혹에 사로잡힌 적
이 없었던 것이다.
난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녀의 포동포동하게 부풀어 있는 곳을
만졌다. 그녀는 놀라 얼굴을 들었다. 내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퉁겨
날아갔다. 그 후의 기억은 너무나 애매해서, 기억해 낼 수 있는 것은
단편적인 몇 장면밖에 없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야마무라 사다
코를 땅바닥에 대고 확 누르고 있었다. 블라우스를 가슴 위까지 걷어
올리고, 그리고‥‥ 격심한 저항을 만나 오른쪽 어깨를 세게 물릴 때까
지 내 기억은 날아가 버린 것이다 강렬한 통증 때문에 제정신으로
돌아온 나는 내 어깨 끝에서 흘러나온 피가 그녀의 얼굴 위에 떨어지
는 것을 보고 있었다. 퍼는 그녀의 눈에 들어갔고, 그녀는 싫다고 도
리질을 하듯 얼굴을 흔들고 있었다 그 리드미컬한 움직임에 맞춰 나
는 몸을 섞었다. 도대체 지금의 나는 어쩐 얼굴을 하고 있는 걸까?
야마무라 사다코는 어떤 눈으로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걸까? 그
녀의 눈에는 짐승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런 걸 생
각하면서 나는 끝을 냈다.
·행위가 끝나자 사다코는 강렬한 시선을 내게 고정시킨 채, 위를
보는 자세 그대로 두 무릎을 세우고 팔꿈치를 교묘하게 이용해 서서
히 뒤로 물러났다. 나는다시 한번 그녀의 몸을 보았다 잘못보았다
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구깃구깃해진 회색 스커트를 허리께로 휘감
은 채, 드러난 가슴 언저리를 감추려 고도 하지 않고 뒤로 물러나려는
그녀의 사타구니 사이로 훠 햇빛이 비치자 작고 거무스름한 덩어리
만일 내가 의사가 아니었다면 틀림없이 놀란 나머지 주저앉았을지
야마무라 사다코는 여전히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가족 이외의 사
는 데 있어서는 아무래도 한번은 거쳐야 하는 시련이 아닌가?나는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려 하고 있었다. 그런 나의 뇌리에 갑자기 단
어가 튀어 들어왔다.
· . 죽여 주겠어!
강한 의지에 뒷받침된 울림에 나는 그녀가 보내는 텔레파시가 거
짓이 아님을 순간적으로 직감했다 '의심'을품을사이도없이 내 육
체는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먼저 죽이지 않으면, 이쪽이
죽임을 당하고 만다. 육체의 방어 본능은 내게 명령을 내렸다. 나는
다시 그녀 위에 덮쳐 두 손을 가는 목에 대고 체중을 실었다 놀랍게
도 저항은 적었다. 마치 죽는 것을 바라고 있었던 것처럼 , 기분 좋은
듯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는 주르르 몸에서 힘을 빼기 시작했다.
숨이 끊어졌는지 어떤지 확인도 하지 않고, 나는 그녀의 몸을 안아
올려 우물로 다가갔다. 그때까지도 행동이 의지를 앞서고 있었던 것
같다. 결국 우물 안으로 떨어뜨릴 마음에서 몸을 안아올린 것이 아니
라, 안아올린 그 곳에 마침 등글게 벌어진 검은 입구가 문득 눈에 들
어왔다고, 그렇게 말하는 쪽이 타당하다. 뭔가 일이 자신에게 잘 맞
게 배치되고 있구나 하는 감각. 아니 , 그렇다기 보다도 몸이 자신 이
외의 의사에 따라 움직여지고 있구나 하는 감각. 이제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막연하게 알고 있었으며,귓속에서는 이 현실을
꿈이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위에서 들여다봤자 우물 바닥 쪽은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피
어오르는 흙냄새에서 바닥에 얕게 물이 고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
다. 나는 손을 떼었다 야마무라 사다코의 몸은 우물 벽면을 타고 미
말을 마친 나가오 앞에 아사카와는 한 장의 프린트를 내밀었다. 미
"그 우물은 이 그림 어디에 위치하는 거지?"
아사카와는 단단히 벼르고 물었다. 나가오는 그 그림의 의미를 이
"틀림없어 , 빌라 로그캐빈이 있는 장소다. "
아사카와는 일어나 말했다.
"자, 가자!"
그러나 류지는 침착했다.
"음. 그렇게 서두르지 말라구. 우린 아직 이 아저씨한테 묻고 싶은
게 있어. 어이, 당신, 그 뭔가 하는 증후군‥‥‥
"고환성 여성화증후군."
"그런 여자는 아이를 낳을 수 있나?"
나가오는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아니 , 안 됩니다. "
"그거하고, 또 하나 확인하고 싶군. 야마무라 사다코를 범했을 때,
당신은 벌써 천연두에 걸렸었지?"
나가오는 끄덕 였다.
"그렇다면 일본에서 마지막으로 천연두에 감염된 건 야ㅁ)무라 사
다코라는 게 되잖아?"
죽기 직전, 야마무라사다코의 몸에 천연두 바이러스가 침입했음
은 틀림없다. 하지만 그녀는 그 후 바로 죽었다. 숙주인 육체가 없어
지면 바이러스도 살 수 없다. 감염되었다고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
나가오는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자꾸 눈을 내리뜨며 류지의
시선을 피할 뿐 확실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야, 뭐 해 ! 빨리 가자."
아사카와는 현관 입구에 서서 류지를 재촉했다.
"콱, 좋은 추억이나 더듬고 있으라구 "
류지는 검지손가락으로 팅 하고 나가오의 콧잔등을 퉁기고는 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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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적으로 설명이 가능할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소설이나 시시
한W드라마의 상투적인 수법처럼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 같이 느껴
졌다. 더욱이 전개 방식에 템포가 있다. 야마무라사다코가 숨어 있
는 장소를 찾고 있었던 것도 아닌데, 갈팡질팡하는 사이에 그녀의 신
상에 일어났던 사건과 암매장 장소가 명확해진 것이다 그래서 류지
에게 '큰 철물점 앞에서 차를 좀 세워 줘'라는 말을 들었을 때 아사
카와는 '아, 이 녀석도 나랑 같은 생각을 하고 있구나' 하고 안심했
던 것이다. 그것이 얼마만큼 힘든 작업이 될는지 , 아사카와로서는 미
처 상상할 수 없었다. 만일 완전히 묻혀 버리지 않았다면 빌라 로그
캐빈 주변에서 낡은 우물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우물이 있는 장소를 알아 내면, 그 안에서 야마무라 사다코의
유골을 꺼내는 것도 손쉬운 일이다 모두 간단한 것처럼 생각되었고,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오후 1시의 따가운 햇살이 온천가비탈길에 반사되어 눈부시다. 평
일의 느긋한 거리 분위기와 이 눈부심이 아사카와의 상상력을 흐리
게 만들고 있었다. 고작 4∼5미터 깊이라고 해도 좁은 우물 바닥은 빛
이 넘치는 지상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
사카와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니시자키 철물점이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오자 아사카와는 브레이
크를 밟았다. 가게 앞에 진열된 접사다리와 잔디 玲는 기계 등을 볼
때 필요한 것 모두가 이 가게에 갖춰져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사는 건 너한테 맡긴다 "
그렇게 말을 남기고 아사카와는 근처의 전화 부스로 달려갔다. 문
앞에서 멈춰 서서 카드 자판기에서 전화 카드 한 장을 뽑아 낸다.
"야, 한가하게 전화나 걸고 있을 때가 아닐 텐데."
류지의 불평은 아사카와의 귀에 닿지 않았다. 류지는 투덜투덜대
면서 가게로 들어가 로프, 양동이, 삽, 도르래, 손전등 등에 차례로
손을 뻗었다.
이것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그런 초
조함이 아사카와를 재촉하고 있었다. 시간 여유가 없다는 것쯤은 충
분히 알고 있다 데드라인까지 남아 있는 시간은9시간을 밑돌고 있
다. 아사카와는 전화 카드를 밀어넣고, 처가의 번호를 눌렀다. 수화
기를 든 것은 장인이었다.
"아, 아사카와입니다. 시즈카하고 하루코를 바꿔 주시겠습니까?"
인사마저 빼고, 느닷없이 아내와 딸을 바꿔 달라고 하는 것은 상당
한 실례였지 만, 장인의 기분을 헤아리고 있을 여유가 없다 장인은
뭔가 말하려다가 이쪽의 절박한 상황을 이해했는지 바로 딸과 외손
녀를 불러 주었다. 장모가 받지 않아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장
모에게 수화기가 건너가면 장황한 인사를 주절주절 끝없이 계속할
모에게 수화기가 건너가면 장황한 인사를 주절주절 끝없이 계속할
테고, 중단을 요청할 기회조차 쉽게 찾아 낼 수 없게 되어 버릴 것이
다.
"예 , 여보세요."
"시즈카, 당신이야?"
아내의 목소리가 그리웠다.
"여보. 지금 어디 있어요?"
"아타미야. 그쪽은 어때?"
'별일 없어요. 하루코가 할아버지 할머니를 아주 잘 따라서요."
"거기 있어?"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 말이 되지 않는 파열음. 아빠를 찾아 필사
적으로 엄 마 무릎으로 올라오는 소리 .
"하루코, 아빠야 "
시즈카는 하루코의 귀에 수화기를 꼭 눌렀다.
"압빠, 압빠‥‥‥
그렇게 들렸다. 본인은 아빠라고 말하는 것이겠지만. 제대로 된 단
어가 만들어져 나오지 않았다 숨결과, 입술에서 새어나오는 공기 소
리, 그리고 입술과 歌이 수화기에 닿는 소리가 귓가에 크게 울려퍼졌
다. 그 때문인지 오히려 딸의 존재를 가까이 느낄 수 있었다. 이런 것
으로부터 도망쳐 지금 당장이라도 하루코를 꼭 껴안고 싶은 충동이
가슴을 찌른다.
"하루코, 기다려 아빠가 이제 곧 빵빵 타고 마중 갈 테니까."
"예? 그래요? 언제 와 줄 거예요?"
어느새 아내로 바뀌어 있었다
"일요일? 그래. 일요일에 렌터카를 빌려서 마중 갈 테니까 모두 같
이 닛코로 돌아 드라이브라도 하며 돌아가자."
"와, 정말‥‥ 하루코야, 잘됐구나. 아빠가 이번 일요일에 드라이브
에 데려가 준대 "
귀 안쪽이 뜨거워진다. 과연 이런 약속을 해 버려도 되는 것일까?
의사는 환자를 필요 이상으로 기쁘게 만들 일을 결코 말하지 않는다
나중의 쇼크를 작게 하기 위해서라도 기대를 품게 하지 않는 쪽이 좋
은 것이다
"사건 쪽은 이제 정리된 모양이네요?"
"이제 곧."
"약속해요, 모두 끝나면 처음부터 순서대로 얘기해 주겠다고· "
아내와의 약속. 일절 이 건에 관해서 질문하지 마 그 대신 띨단락
되면 전부 얘기해 줄게 아내는 충실히 약속을 지키고 있었다
"어이 , 언제까지 얘기나 하고 자빠져 있을 거냐?"
뒤에서 류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트렁크를 열고 구입한
도구를 집어넣으려는 참이다.
"또 전화할게. 오늘밤엔 또 못 걸지도 몰라"
아사카와는 후크에 손을 얹었다. 누르면 전화는 끊어지고 만다. 무
엇 때문에 전화를 건 것인지 알 수가없었다 그저 목소리를 듣기 위
함이었는지 , 아니면 더 중요한 것을 전하기 위 함이었는지. 그렇지만
가령 장장 한 시간을 대화했다고 해도, 전화를 끊을 때가 되면 말하
고 싶은 것의 절반도 전하지 못했다는 안타까움이 강하게 남을 것임
에 틀림없다. 결국 마찬가지인 것이다. 아사카와는 후크에 손가락을
얹었다가 힘을 뺐다. 어쨌든 오늘밤 10시에는 모든 결말이 난다. 오
늘밤, 10시에는·
이렇게 한낮에 오고 보니, 이전에 왔던 밤의 수상쩍은 분위기는 햇
살에 감추어진 듯 미나미하코네 퍼시픽랜드엔 극히 평범한 고원의
분위기가 감돌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테니스 공 소리도 들
떠 있었다 '포옹 포옹' 하고 길게 여운을 끄는 것이 아니라 '퐁퐁'
하고 마른 소리를 내며 공이 네트를 넘어 가고 있었다. 바로 눈 앞으
로는 후지산이 희미하게 하얀 모습을 보이고, 지상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온실 지붕이 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평일 오후, 빌라 로그캐빈에는 손님의 모습 같은 건 없었다. 이 대
여 별장이 그럭저럭 만실 상태가 되는 것은 토요일, 일요일과 공휴일
정도일 것이다. 5-4호는 오늘도 비어 있었다. 류지에게 수속을 맡긴
다음 아사카와는 짐을 들여놓고 가벼운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찬찬히 방 안을 돌아본다. 일주일 전의 밤, 아사카와는 허등지등
이 도깨비집에서 도망쳐 나갔던 것이다. 토하려는 것을 억지로 참고
화장실로 달려들어갔을 때, 하마터면 오줌을 지릴 뻔했던 일까지‥‥
그리고 화장실에 쭈그리고 앉자마자 눈에 띄었던 낙서 내용까지 아
사과와는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아사카와는 화장실 문을 열었
다. 같은 장소에 같은 낙서가 있었다.
2시가 조금 지났을 무렵이었다. 두 사람은 발코니로 나가 주변 풀
"단단히 배를 채워 둬 ."
류지가 말했다. 그는 2인분의 도시락을 사놓고 있었다. 아사카와는
"이봐, 확실히 해 둬야 하지 않겠냐?우린 지금부터 윌 하려는 거
'별하지 . 야마무라 사다코를 찾아 내는 거야."
"찾아내서 어떻게 해?"
"사시키지 로 옮겨 안장시켜 줘야지 ."
"결국 주문이라는 건‥‥ 야마무라 사다코가 바라고 있는 게 그것이
류지는 입 안에 가득 찬 밥을 질정질정 시간을 들여 씹으면서 초점
납득하지 못하고 있음을 그 표정에서 읽어 랠 수가 있었다. 아사카와
납득하지 못하고 있음을 그 표정에서 읽어 랠 수가 있었다. 아사카와
는 무서워졌다. 마지막 기회인 만큼 확고한 근거가 있었으면 좋겠다.
두 번 다시 되풀이할 시간은 없는 것이다.
"우리한테 지금 할 수 있는 건 이것말고는 없어."
류지는 그렇게 말하고는 비워진 도시락 상자를 내던졌다
"이런 가능성은 어때? 자신을 죽인 인간에 대한 원한을 풀어 주기
를 바란다 ‥‥‥
"나가오 죠타로 말이냐‥‥ 놈을 죽이면 야마무라 사다코의 마음이
진정될 거라고 말하는 거냐?"
아사카와는 류지의 눈 속에 있는 본심을 살폈다. 유골을 파내 안장
해도 역시 아사카와의 목숨을 구하지 못했을 경우, 류지는 나가오 의
사를 죽일 셈은 아닐까? 아사카와를 시금석으로 삼고 자신만 살아남
으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야, 시시한 것 생각하지 마."
류지는 웃었다.
"우선 말야, 만일 진짜로 야마무라 사다코의 원한을 샀다고 한다면
나가오 따윈 벌써 죽었어 "
확실히 그녀는 그만큼의 힘을 갖고 있었다.
"그럼 왜, 야마무라 사다코는 호락호락 나가오 한테 죽임을 당했을
까?"
'밀라고 말할 순 없지.다만 그녀 주위에선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
과 좌절이 엎치락뒤치락하고 있었던 거야. 극단에서 갑자기 없어져
'철세를 비관하는 사람은 죽인 인간에 대해 원한을 품지 않는다‥‥
"아니 , 그렇다기보다 야마무라 사다코 자신이 나가오라는 아저씨
"아니 , 그렇다기보다 야마무라 사다코 자신이 나가오라는 아저씨
미하라야마의 분화구에 뛰어든 어머니, 폐결핵으로 목숨이 얼마
"좋아, 그럼 가령 자살이라 치고, 사다코는 왜 죽기 전에 강간당하
거다' 라는 따위의 바보 같은 말은 하지 말라구."
아사의와는 다짐을 해 두었다 그 덕분에 류지는 대답이 궁해지고
말았다. 바로 그렇게 말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바보 같은 걸까?"
"뭐 ?"
"처녀로 죽고 싶지 않다는 기분이 , 그렇게 바보 같은 거냐구?"
류지는 아주 진지한 얼굴로 따지고 들었다.
"나라면, 만일 나였다면, 역시 그렇게 생각해. 동정인 채로 죽는 건
싫다구 말야."
평소의 류지답지 않다고 아사과와는 느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말하는 것도 표정도 류지답지 않았다.
"너, 진심으로 그런 말 하는 거냐? 남자와 여자는 달라 특히 야마
무라 사다코의 경우는 말이야."
"헤헤헤, 농담이다 결국 야마무라 사다코는 강간 따윈 당하고 싶
지 않았던 거야.그런 건 뻔해.누가자진해서 당하고 싶다고 생각하
겠어? 실제로 그녀는 배가 보일 정도로 나가오의 어깨를 물고 늘어
졌잖아. 당한 직후, 죽고 싶다는 생각이 퍼뜩 머리를 스쳤고, 짜기도
모르게 나가오 죠타로를 조종하고 말았다‥‥ 뭐 , 그런 거지 ."
"하지만 어떨까? 그래도 나가오에 대한 원한은 남지 않겠어?"
아사카와는 좀 납득이 안 된다.
"야, 잊어버리는 것으로 풀지 않았겠어?원한이라고 하는 점에선
말야. 야마무라 사다코의 분노의 화살은 특정 개인에 대한 것이 아니
라, 일반 대중을 향해 있었다고 보는 게 옳아. 그에 비하면 나가오를
증오하는 기분 따윈 아무것도 아닌 거지 ."
대중에 대한 원한. 만일 그런 것이 그 비디오에 들어와 있었다고
하면 과연 주문의 내용은‥‥ 어떻게 되는 거지? 무차별 공격 , 무차별
공격 . 류지의 탁한 목소리가 아사카와의 사고를 가로막았다
"관둬. 어수선하게 그런 걸 생각하고 있을 여유가 있으면 한시라도
빨리 야마무라 사다코를 찾아내자 모든 수수께끼에 답할 수 있는 건
사다코 뿐이 야."
류지는 우롱차를 다 마시고 일어나서는 빈 캔을 골짜기 밑바닥을
향해 내던졌다.
완만한 경사면에 선 두 사람은 대충 짐작 가는 풀숲에 시선을 두었
30년쯤 전, 여기에는 낡은 민가가 서 있었고 그 뜰 앞에는 우물이
바꿔 풍경의 변화를 살폈다 그렇지만 어디서 보든 전망에는그다지
변화가 없었다. 다만 집을 짓는다고 한다면 B-4호 옆 A-4호 근처가 제
변화가 없었다. 다만 집을 짓는다고 한다면 B-4호 옆 A-4호 근처가 제
일 짓기 쉬을 것 같았다. 옆에서 보니 그곳만 평탄하게 되어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사카와는 A-4호와 B-4호 사이에 납죽 엎드려 풀을 베
어 내고는 대지의 감촉을 손으로 확인했다.
그는 우물물을길어 본 적이 없었다. 아사카와는 자신이 우물이라
고 하는 것을 직접 대한 경험이 없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특히
이런 산간의 경우 우물은 어떤 구조로 되어 있을까?과연 정말로물
이 솟아나오는 걸까?그러고 보니 계곡을 따라 동쪽으로 수백 미터
정도 걸으면 높은 수목에 둘러싸인 늪지가 있었다. 아무래도 생각이
잘 정리되지 않는다 이런 때, 무엇을 염두에 두고 작업을 진행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머리로 피가 몰리는 것이 느껴졌다.
시계를 보니 3시에 가까웠다. 앞으로 7시간이면 데드라인 이런 짓
을 하고 있다가 늦어 버리는 건 아닐까'~) 궁리할수록 쓸데없는 생각
만 어지럽다. 우물의 이미지가 잘 잡히지 않는다. 添은 우물 흔적으
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1틀림없이 돌이 등글게 쌓여 있을 것이다. 무
너져 땅 속에 묻혀 버렸다면‥‥아아, 안 돼. 그렇게 돼 있으면 늦어
버린다 발굴하는 일 따위가 가능할리 없다
또다시 시계를 보고 만다. 3시 정각, 아까 발코니에서 우롱차를
500cc가까이나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목이 칼칼하다 쑥 튀어나
온 땅을 찾아라. 쌓아올려진 돌의 흔적을 찾아라, 마음속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아사카와는 드러난 땅에 삽을 찔러넣었다 시간이, 필요했다.
예전에 작은 굴을 파 보았던 적이 한 번 있다. 분명 초등학교 4학년
"어이 , 뭐 하는 거야?"
류지의 목소리에 아사카와는 깜짝 놀라서 얼굴을 들었다.
"너 , 아까부터 뭐 하는 거야? 이런 데 엎드려 가지고‥‥ 좀더 조사
아사카와는 입을 떡 벌리고 류지를 올려다보았다. 등에 햇살을 받
"함정이라도 팔 생각이냐'1"
크게 한숨을 쉬면서 류지가 말했다. 아사카와는 얼굴을 찡그리고
"시계만 보냐, 이 바보야!"
류지는 아사카와의 손을 후려쳤다. 류지는 잠시 아사카와를 노려
보고 있다가 한숨을 쉬며 웅크리고 앉아 온화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 좀 쉬고 있어라."
"그럴 시간 없어 ."
"마음을 진정시키라는 얘기야. 초조해 하면 제대로 일이 안 돼."
류지는 웅크린 아사카와의 가슴 언저리를 탁 하고 가볍게 밀었다.
균형을 잃은 아사카와는 벌렁 뒤집혀 발바닥을 공중으로 향한 채 굴
렀다.
"자 그렇게 ◎굴고 있어, 애처럼 ."
아사카와는 일어나려고 발버등쳤다.
"움직이지 마! 자라구! 쓸데없이 체력 소모하지 마!"
류지는 아사카와가 발버등치는 것을 그만둘 때까지 가슴을 발로
짓밟았다. 아사카와는 눈을 감고 저항을 포기했다. 류지의 발 무게가
몸에서 떨어져 멀어져 간다 살짝 눈을 뜨자 류지가 짧은 다리를 힘
차게 움직여 B-4호 발코니 그늘로 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발걸음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머지않아 우물이 있는 장소가 발견될 것이라는
예감이 솟구쳐 오자, 초조한 마음도 雲어져 갔다.
류지가가 버린 다음에도 아사카와는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손발
을 뻗고 큰 대 (犬)자가 되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태양이 눈부시다.
자신의 정신이 류지와 비교해 너무나도 연약하다는 사실이 싫어져
버린다 호흡을 가다듬고 냉정히 생각해 보려 했다. 앞으로 7시간, 시
시각각으로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자신을 계속 지켜 낼 자신이 없다.
지금부터는 모두 류지의 명령에 복종하자.그것이 제일이다 자신을
지워 없애고 강인한 정신력을 가진 인간의 부하로 물러앉는 것이다.
자신을 없애 버려라! 그렇게 하면 공포에서 만큼은 벗어날 수가 있다
흙에 파묻혀 자연과 일체가 되는 것이다! 그 소원이 통했는지 아사카
와는 급격한 수마(睡魔)에 사로잡혀 의식을 잃어 갔다. 그리고 잠으
로 떨어진 순간 딸 하루코를 높이높이 들어올리는 환상과 함께 방금
전 문득 되살아났던 초등학교 시절의 에피소드가 다시 한번 떠올랐
다.
아사카와가 자란 동네 변두리에는 시에서 관리하는 운동장이 있었
고, 그 옆의 벼랑을 타고 내려가면 가재가 사는 늪이 있었다. 초등학
교 시절, 아사카와는 친구들과 함께 자주 그 늪에 가재를 잡으러 가
곤 했다. 어느 날, 벼랑에 드러나 있는 붉은색의 흙이 봄햇살을 받으
며 도발하는 듯이 늪 옆에 우뚝 솟아 있었다. 물 속에 낚싯대를 드리
우는 일에 싫증이 난 아사카와는 볕이 드는 벼랑 경사면에 아무 생각
도 부슬부슬하고 발 밑으로 흘러내려갔다. 그러는 사이에 친구들도
한 시간 정도 파자 초등학생 하나가 쏙 들어갈 정도의 동굴이 탄생
몸을 구부리고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크기로 커졌다. 아사카와는 무
릎을 껴안고 친구들과 함께 킥킥거렸다 붉은 흙으로 만들어진 동굴
에 웅크리고 있으니 , 얼마 전 사회 시간에 배운 원시인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잠시 지나자, 동굴 입구를 아줌마 얼굴이 막는 것이었다.
저물기 시작한 석양을 등에 받아 얼굴이 어두웠기 때문에 표정은 잘
읽어 낼 수가 없었지만,근처에 사는 50세 전후의 주부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이런 데 동굴 같은 걸 파다니 생매장되면 기분 나쁘잖아?"
아줌마는 동굴 안을 들여다보면서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아사카
와와 다른 두 아이들은 얼굴을 마주보았다. 초등학생이기는 해토 주
의를 주는 방법이 이상하다는 걸 알아챘던 것이다. '위험하니까 관둬
라' 가 아니라, '이런 데서 생매장당해 죽어 버리면 근처에 사는 나로
선 기분 나쁘다. 그러니까 관둬라' 라니, 완전히 자기 입장만 생각해
서 주의를 주고 있는 것이다.
"ElaTaIDlff "
아사카와는 친구들에게 웃어 보였다. 아줌마의 검은 얼굴은 그림
자처럼 여전히 출구를 막고 있었다.
그 아줌마의 얼굴에 값자기 류지의 얼굴이 겯쳐졌다.
"네 신경도 어지간히 두꺼워졌구나. 이런 데서 잠을 자다니 대단
해 . 임마, 뭘 히죽거리고 있는 거야?"
류지가 깨웠다. 해는 서쪽 지평 딴 11.'1
까지 다가오고 있었다. 류지의 몸과 얼굴이 서쪽에서 비쳐들어오는
약한 빛을 가로막아 아까보다도 더 검게 물들어 있었다.
"좀 와 봐."
아사카와의 몸을 잡아 일으킨 류지는 잠자코 B-4호 발코니 아래로
기어들어갔다. 아사카와도 그 뒤를 따랐다 발코니 아래의 벽, 다시
말해 B-4호를 떠받치고 있는 기등과 기등 사이가 벗겨져 있었다. 류
지는 그 틈에 손을 끼워 넣고 힘껏 잡아당겼다. 판자는 와작 소리를
내고는 비스듬히 뜯겨 나갔다.
실내장식은 모던하지만,집 밑부분의 둘레를 감싸고 있는 벽은사
람 손으로 간단히 뜯겨 나갈 정도로 어설프게 지어져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은 철저한 날림 공사인 것이다 류지는 그곳으로 손전
등을 넣어 안쪽을 비추어 보았다. 그리고 와서 보라는 듯 얼굴을 흔
손전등이 비춘 것은 중앙에서 약간서쪽에 위치한검은돌출 부분
아사카와는 그 위에 무엇이 자리잡고 있는지 바로 생각이 미쳤다
보고 있었던 것이다.
류지는 판자를 차례로 벗겨 내고 사람이 드나들 수 있을 만한 구멍
을 만들었다 두 사람은 벽에 난 구멍으로 들어가 우물 가장자리까지
기어갔다. 로그캐빈은 경사면에 세워져 있었기 때문에, 나아갈수록
집 바닥이 내려와 압박을 가해 왔다. 어두운 집 바닥 아래라고 해도
공기는 충분할 테지만 아사카와는 답답함을 느꼈다 바닥 아래의 壽
은 바깥 것과 비교해 볼 때 선뜩하게 느껴질 정도로 차가웠다.
지금부터 무엇을 해야 할지 아사카와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아직
공포심은 솟구치지 않는다. 집 바닥을 이루고 있는 판자가 바로 머리
위로 다가오기 만 해도 답답한데, 어쩌면 더 깊은 어둠에 지배당하고
있을 우물 바닥에 내려가지 않으면 안 될지도 모른다. 아니, 그럴지
도 모른다 정도가 아니다. 야마무라 사다코를 끌어 내기 위해서는 거
의 분명히 우물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야, 손 종 빌려 줘 ."
류지가 말했다. 류지는 콘크리트 뚜껑의 벌어진 틈으로 내다보이
는 철골에 손을 대고 뚜껑을 내리막 경사 방향으로 잡아당겨 떨어뜨
려 보려고 했지만, 천장이 낮은 통에 생각처럼 힘이 들어가지 않았
다. 벤치 프레스(위를 보고 누워서 양팔로 역기 형태의 바벨을 들어
올리는 운동 역자 주) 120킬로그램을 들어올리는 류지일지라도, 발
디디는 곳이 좋지 않으면 힘이 반감되고 마는 것이다
크리트와 돌이 닿으면서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냈다. 아사카와와 류
지는 번갈아 소리를 내며 리드미컬하게 서로의 힘을 일치시켰다.
뚜껑이 움직였다. 우물 구멍이 얼굴을 내민 것은 몇 년 만의 일일
것이다. 우물을 막은 것은 빌라 로그캐빈이 세워졌을 때 아니면 미나
미하코네 퍼시픽랜드가 세워졌을 때, 혹은 결핵 요양소 때였을까. 콘
크리트와 돌의 밀착 상태나 떨어질 때의 한탄과도 같은 삐걱거리는
소리로 우물이 입을 다물고 있던 기간을 추측해 볼 도리밖에 없었다.
반 년이나2년 정도의 세월은 아닌 것 같다 최대한 길게 잡으면 25
년. 어쨌든 지금에서야 겨우 우물은 입을 열기 시작한 것이다 류지
는 생겨난 틈새로 짧은 삽을 대고 빙글빙글 돌려 끼워 넣었다.
"됐냐? 내가 신호하면 삽자루에 체중을 실어 ."
아사카와는 몸의 방향을 바꾸었다.
"됐어『「 하나, 둘, 셋 !"
아사카와가 지레의 원리를 응용해 뚜껑을 밀어올리자 동시에 류지
가 뚜껑 옆구리를 두 손으로 세게 밀었다. 뚜껑이 비통한 외침을 을
리며 털썩 하고 지면으로 떨어졌다.
우물의 등그런 가장자리는 약간 축축했다. 아사카와와 류지는 각
자 손에 손전등을 들고 그 축축한 가장자리에 손을 얹고 몸을 일으켰
다. 우물 바닥에 빛을 던지기에 앞서 두사람은 우물과 건물 바닥사
이의
정도의
갈 것처럼 그 공간의 밀도는 농밀한 것이었다
분명 그녀는 여기에 있다. 희대의 초능력자이자 고환성여성화증후
군의 여인‥‥ 아니 여인라고 하는 말은 적합치 않다. 생물학적인 남녀
의 구별은 생식선의 구조에 의해 이루어진다 아무리 아름다운 여성
의 육체를 가지고 있어도 생식선의 구조가 고환이라면 그것은 남성
이라는 얘기가 된다.
도대체 야마무라 사다코를 남자라고 불러야 할까, 여자라고 불러
야 할까, 아사카와는 알 수 없었다. 사다코라고 하는 이름을 보면 부
모들은 그녀가 여자로서 자라기를 바랐음에 틀림없다. 오늘 오전, 아
타미를 향하는 배 안에서 류지는 이렇게 말했다‥‥남성 성기와 여성
성기를 함께 갖춘 인간, 그것은 완벽한 힘과 미의 상징이야.
그러고 보니 일찍이 미술 전집 안의 고대 로마조각을 崙을 때 아
사카와는순간적으로 자신의 눈을 의심했던 적이 있다. 성숙한 여자
의 아름다운 나신이 돌 위에 길게 누워 있는데, 그 사타구니에서는
멋진 남성의 성기가 들여다보였던 것이다· .
"뭔가 보이냐?"
류지가 물었다. 손전등으로 비추자 바닥에 물이 고여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곳까지의 거리는 4∼5미터 정도. 다만 물의 깊이는 알 수가
없다.
"바닥에 물이 고여 있어 ."
류지는 꿈틀꿈틀 움직이며 로프 끝을 기등에 단단히 붙들어 맸다.
"야, 손전등을 아래로 향해서 우물 가장자리에 달아매 줘 , 절대 떨
어지지 않게 해 ."
· 류지는 이 구멍 안으로 내려갈 생각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순
간,아사카와의 발이 떨렸다. 만일 이 안으로 내려가게 된다면· . 좁
은 수직 구멍을 눈앞에 두고서야 겨우 아사카와의 상상력이 움직였
다.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저 검은 물에 몸을 담근
채 뭘 하지? 유골을 주위내야겠지‥‥
그런 일은 도저히 해낼 재간이 없다. 기분이 이상해진다. 그러므로
류지가 나서서 구멍 바닥으로 내려가는 것을 보며 아사카와는 감사
하는 마음과 함께 자신이 나설 차례가 돌아오지 않도록 신에게 비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둠에 익숙해진 탓인지 이전보다도 확실히 이끼에 뒤덮인 우물
내벽이 보다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오렌지색 불빛에 비친 돌벽에
눈과 코와 입이 떠오르고, 눈을 피하지 않고 보고 있자니 돌 모양이
단말마를 외치며 죽은 자의 일그러진 얼굴로 변해 간다.
출구를 향해 손을 梁은 무수한 악령들이 바다의 해초처럼 출렁거
리고 있었다. 한번 그렇게 보이기 시작하니 그 이미지가 좀처럼 흐트
러지지 않는다. 요기 (娛氣)가 감도는 직경 1미터 남짓의 원통형 공간
에 자갈이 떨어지자퐁당 하고 소리를 내며 악령들의 목구멍 안쪽으
로 삼켜져 갔다
류지는 우물과 집 바닥의 판자사이로 비집고 들어가로프를 양손
에 휘감고 서서히 아래로 내려갔다.
류지가우물 바닥에 내려섰다 무릎 아래가물속에 잠겨 있다. 그
렇게 깊지는 않았던 것이다.
"야, 아사카와! 양동이를 가지고 와. 가는 로프도.'
양동이는 아직 발코니에 놓여 있는 채였다. 아사카와는 집 바닥 밑
에서 밖으로 기어나왔다. 바깥은 어두웠다. 그래도 집 바닥 밑보다는
훨씬 밝게 느껴졌다. 그리고 뭐라고 말할 수 없는 해방감! 풍부하고
맑은 공기 !
로그캐빈을 둘러보자 도로 옆의 A-1호에서만 조명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아사카와는 시계를 보지 않기로 했다. 4-1호에서 새어나오는
가족 간의 단란한 소리가 그곳을 다른 세계로 만들어 내고 있었다.
시계를 보지 않아도 어렴풋하게 저녁 식사 시간임을 짐작할 수 있었
다.
아사카와는 우물 가장자리로 돌아와서는 로프 끝에 양동이와 삽을
묶어 아래로 내려보냈다. 류지는 삽으로 우물 바닥의 흙을 퍼서 양동
이에 담았다. 가끔씩 쭈그리고 앉아 손끝으로 흙탕물 속을 더듬거려
보기도 했지만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는 모양이다.
"양동이를 끌어 올려 !"
류지가 고함을 쳤다. 아사카와는 우물 가장자리에 배를 댄 자세로
양동이를 끌어올려 안의 흙탕물과 돌을 밖에다 비운 다음, 비워진 양
동이를 다시 아래로 내려보냈다. 입구를 막기 전에 상당히 많은 토사
가 흘러들어간 모양으로 아무리 파도 야마무라 사다코의 아름다운
"야, 아사카와!"
류지는 작업을 중단하고 올려다보았다. 아사카와의 대답이 없다.
"아사과와! 너 ,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난 아무렇지도 않아.
아사카와는 그렇게 대답하고 싶었다.
"너, 아까부터 한마디도 안 하잖아. 응원이라도 해 주는 게 어때?
"응원이 싫으면 노래라도 불러 미소라 히바리(일본의 대표적인
"of. 아사카와! 거기 있는 거냐? 갑자기 콰당 하고 쓰러진 건 아니
" 괘, 괜찮아 "
가까스로 쉰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콱, 시중들기 힘든 녀석이군."
류지는 내뱉듯이 말하고는 삽 끝을 물 속에 꽃았다.
몇 번이나 이런 짓을 반복한 걸까?수위는 서서히 낮아졌지만 그
럴싸한 것은 도무지 나타나지 않는다. 양동이가 위로 올라가는 속도
가눈에 띄게 느려져 갔다. 그리고 드디어 1센티도올라가지 않게 되
고, 우물 가운데 정도까지 끌어 올려졌던 양동이가 아사카와의 손에
서 미끄러져 떨어져 버렸다 직격은 피했지만,흙탕물을 뒤집어쓴 류
지는 분노와 함께 아사카와가 지닌 힘의 한계를 실감했다.
"바보 자식 ! 날 죽일 셈이야!"
류지 가 로프를 타고 올라왔다.
"교대다. "
‥‥교대 !
아사카와는 놀라 몸을 일으키고, 그 바람에 머리를 집 바닥 판자에
세게 부딪히고 말았다.
"잠간만, 류지 괜찮아, 아직 나도 힘이 남아 있어."
아사카와는 짧게 끊어 말했다 류지는 우물 위로 얼굴을 내밀었다.
"힘 따윈 아무데도 남아 있지 않잖아. 자 교대야."
"자, 잠깐, 기다려 줘 , 좀 쉬면 괜찮아."
"네가 괜찮아지는 걸 기다리고 있다간 날 샌다구."
류지는 아사카와의 얼굴에 손전등을 비췄다. 아사카와의 눈초리가
조금 변해 있었다. 죽음의 공포가 냉정한 사고력을 빼앗아가 버린 것
이다.
언뜻 보기에도 정상적인 판단력이 결여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삽으로 흙탕물을 퍼 올리는 작업과 무거운 양동이를 4-5미터씩이나
끌어올리는 작업 중 어느 쪽이 힘을 쓰는 작업인지는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만한 일이다.
"자, 빨리 아래로 내려가!"
류지는 아사카와의 몸을 우물 가장자리로 밀어넣었다.
"잠깐, 기다려. 있지 , 곤란해· . . "
"뭐가?"
"나, 폐소공포증(閉所恐情症)이야."
"바보 같은 소리 좀 작작해라,"
아사카와는 몸을 웅크린 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우물 바닥에서
"무리야, 난 못해."
류지는 아사카와의 멱살을 잡고 얼굴을 끌어당기더니 손바닥으로
"어때?잠이 좀 깼냐?난못 한다니?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죽
아내와 딸의 운명을 생각하고 보니 두려움에 몸을 움츠리고 있을
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몸이 말하는 것을 듣지 않는다
"있지 , 정말로 이런 게 의미가 있는 걸까?"
이제 와서 이런 질문을 해 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
도 아사카와는 힘없이 물었다. 류지는 멱살을 잡고 있던 손에서 힘을
뺐다
"미우라 박사의 이론을 좀더 자세히 가르쳐 줄까?원한이 현세에
강렬하게 남아 있으려면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갇힌 공간, 물, 그
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이 세 가지야.다시 말해 물이 있는
갇힌 공간에서 서서히 시간이 걸려 죽음에 이르렀을 경우, 죽은 자의
원한이 그 자리에 빙의 (漂依, 귀신 붙음 : 역자 주)되는 경우가 많다
는 얘기야. 자, 이 우물을 봐. 막히고 좁은 공간이야. 그리고 물. 비디
오 속에서 할머니가 뭐라고 말했는지 생각해 봐."
'''그 후 몸은 어떤가. 물놀이만 하고 있으면 귀신이 찾아온단 말
야.
물놀이, 물놀이, 그렇다 야마무라 사다코는 저 시커먼 흙탕물에
잠겨서 아직까at도 물놀이를 계속하고 있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끝없이 계속되는 지하수와의 유희.
"야마무라 사다코는 말야, 우물에 떨어졌을 때는 아직 살아 있었
of. 그리고 죽음이 찾아오는 걸 기다리면서 우물 안에 원한을 채워
갔던 거다. 그녀의 경우, 세 가지 조건 모두가 갖춰져 있는 거야‥
"· . ·그래서?"
"그래서 · 미우라 박사가 말하기를, 저주를 푸는 방법은 간단하다.
요컨대 해방시켜 주면 된다. 유골을 좁은 우물 바닥에서 11집어 을
려, 고향땅에 안장시켜 주면 된다 넓고 밝은 세계로 끌어내 주는 거
at ."
아까 양동이를 가지러 바깥으로 기 어나왔을 때, 아사카와는 뭐라
고 말할 수 없는 해방감을 맛보았다. 야마무라 사다코에게 같은 것을
해 주면 된다는 뜻인가? 그녀는 그런 것을 바라고 있는 것일까?
"그게 주문의 내용이라는 거야?"
"그럴지도 모르고,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지 ."
"애매하군 "
류지는 다시 한번 아사카와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야, 잘 생각해 봐 우리의 장래에는 말야,확실한 것 따윈 아무것
도 없어 늘 애매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 거다. 그래도 넌 살아가겠
지 애매하다고 하는 이유만으로 생명 활동을 정지시킬 수는 없어.
가능성의 문제다. 주문‥‥ 야마무라 사다코가 바라는 것은 달리 있을
지도 몰라. 하지만 그녀의 유골을 여기서 주워 내는 것으로 비디오에
끼여든 저주 그 자체가 없어질 가능성 역시 높아."
아사카와는 얼굴을 찡그린 채 소리 없이 외쳤다.
‥‥갇힌 공간과 물과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이라구? 이 세 가지
조건이 갖춰진 경우 가장 강한 원한이 남는다구?미우란가 하는 사
기꾼 학자의 그런 헛소리가 진실이라는 근거가 대체 어디에 있지?
"자, 알았으면, 넌 아래로 내려가."
‥‥몰라, 난 그런 거 모른다구!
"꾸물대고 있을 때가 아니다. 네 마감 시간은 이제 곧이야."
류지의 목소리가 점차 상냥해져 갔다.
"싸우지 않고 인생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구."
·바보 자식 ! 네 인생관 따윈 듣고 싶지도 않아.
아사카와는 그래도 우물 가장자리에서 몸을 내밀었다
"그래, 겨우 그럴 기분이 됐냐?"
아사카와는 로프에 달라붙어 우물 안쪽에 매달렸다. 류지의 얼굴
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괜찮아, 이 안에는 아무것도 없어 . 네게 있어 최대의 적은 그 빈약
한 상상력 이 야."
올려다보니 손전등 빛을 정면으로 받아 눈이 부시다. 등을 벽에 딱
붙이고, 로프를 쥔 손에서 천천히 힘을 뺐다. 발끝이 돌 표면에서 미
끄러져 단숨에 1미터 정도 떨어졌다. 마찰로 손이 뜨거워진다.
아사카와는 물 바로 위에서 대롱대롱 매달린 채 내려서지 못하고
있었다. 한쪽 발을 뻗어 목욕물의 온도를 알아보는 식으로 복사뼈까
지 물에 담가보았다. 섬뜩한 감촉과 함께 발끝에서부터 등에 이르기
까지 소름이 끼쳐 아사카와는 바로 발을 빼 버렸다.
그러나로프에 매달려 있을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조금씩조금
씩 몸의 무게 때문에 내려가다가 버티지 못하고 두 발이 떨어졌다.
그 바람에 물 바닥의 부드러운 흙이 발을 감싸며 단숨에 가라앉는다
아사카와는 눈앞의 로프에 매달렸다. 땅속에서 많은 손이 뻗어나와
자신을 흙탕물 속으로 잡아당기려고 한다는 패닉 상태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앞에서도,뒤에서도, 옆에서도,벽이 압박해 온다 도망칠
길은 없어 , 라고 입을 삐죽거리며 웃으면서 ,
·.류지 !
외치려 했지만 아사카와는 소리를 낼 수 없었다. 몹시 답답했다.
목구멍 안쪽에서 쉰 소리만 새어나을 뿐, 물 속으로 잠겨드는 어린애
처럼 얼굴을 들었다 넓적다리 안쪽이 뜨뜻미지근하게 젖어 가는감
촉이 느껴졌다.
"아사카와! 숨을 쉬어 ."
심한 압박감 탓에 아사카와는 무의식 중에 호흡을 멈추고 있었다.
"내가 여기 있으니까 안심해,"
울림을 동반한 류지의 목소리가 머리에 닿자 아사카와는 겨우 한
번 숨을 들이쉴 수가 있었다.
아직도 심장의 고동이 진정되지 않는다. 작업이 가능한 상태가 아
니었다. 필사적으로 뭔가 다른 것을 생각해 보려 했다. 좀더 즐거운
일.만일 이 우물이 별이 가득한 하늘 아래에 있었다면 이 정도로 답
답하진 않았을 것이다. 5-4호로 완전히 덮여 있는 것이었다. 그런 상
태가 도주로 마저 차단하고 있었다. 콘크리트 뚜껑을 제거해도 그 바
로 위에는 거미집이 쳐진 바닥 판자가 있다.
야마무라 사다코는 이런 곳에 25년 간이나 계속 살며‥‥ 그렇다 그
녀는 여기에 있다 내가지금 서 있는 발 아래 여긴 무덤이다. 죽은
자의 무덤인 거다. 달리 생각할 수 없다. 생각조차 갇혀 자유로운 날
갯짓이 허락되지 않는다
불행하게도 야마무라 사다코는 여기에서 인생의 막을 내렸고, 죽
음의 순간에 번뜩였던 여러 장면이 '염'의 힘에 의해 이 근처에 강하
게 남아 버린 것이다. 그것은 아마 좁은 동굴 안에서 충분한 시간에
걸쳐 성숙되어 , 밀물 썰물처럼 호흡하며 어떤 주기에 따라 강약을 반
복하다. 때마침 이 바로 위에 위치하고 있던 텔레비전의 주파수와 일
치되어 쓰윽 하고 이 세상에 나타나고 말았다.
야마무라 사다코는 호흡하고 있다. '하아, 하아' 하고 숨을 쉬는
소리가 어디에서랄 것도 없이 온몸을 에워싼다. 야마무라 사다코, 야
마무라사다코,그 이름이 뇌리에 이어지고,무서우리 만치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이 사진에서 떠올라 요염하게 고개를 흔든다.
야마무라사다코는 여기에 있다. 아사카와는 정신없이 바닥의 흙
을 더듬어 그녀를 찾았다. 아름다운 얼굴과 육체를 떠올리고, 그 이
미지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내가 지린 소변에 뒤범벅이 된 아름
다운 여자의 유골 아사카와는삽을움직여 흙탕물을퍼 올렸다. 시
간은 신경 쓰이지 않는다.
여기에 내려오기 전에 손목시계는 풀어 버렸다. 극도의 피로와 긴
장이 초조감을 마비시켜 제한 시간을 잊어버리게 했다 술기운과 비
슷하다. 시간 감각을 상실했다. 흙탕물로 가득해진 양동이가 왕복한
횟수, 귀 기울이면 들려오는 심장의 고동 소리‥‥그런 것으로밖에는
시간을 잴 수가 없다.
마침내 아사카와는 등그스름한 모양의 커다란 돌을 두 손으로 움
켜잡았다 감촉이 좋은. 매끈매끈한 표면에는 구멍 두 개가 뚫려 있
었다 아사카와는 물 속에서 그것을 집어올린 것이다. 움푹 패인 곳
에 쌓인 흙을 물로 씻어 내고 귀가 붙어 있었을 부분을 두 손 사이에
끼우고 해골과 마주했다. 이미지 속에서 살이 조금씩 붙어 간다
깊게 패인 안구에는 맑고 큰 눈동자가 되살아나고, 한가운데 의 두
구멍 위로 살이 부풀어올라 반듯하고 품위 있는 코를 만들어 낸다.
구멍 위로 살이 부풀어올라 반듯하고 품위 있는 코를 만들어 낸다.
긴 머리는 물에 젖어 귓속에서도, 목덜미에서도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야마무라 사다코는 근심이 담긴 눈동자를 두번 세번 깜박거
려 속눈썹 위에 묻은 물방울을 떨어내려고 했다.
아사카와의 두 손에 끼여 있는 야마무라사다코의 얼굴은 거북스
럽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움에 드리워진 그
늘은 없었다. 그녀는 아사카와에게 웃어 보이면서 순간 초점을 맞추
려는 것처럼 쓱 눈을 가늘게 떴다.
보고 싶었어 .
아사카와는 그렇게 말한 순간, 그 자리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득
히 머리 위에서부터 류지의 목소리가 닿아 온다.
·.아사카와! 네 데드라인은 10시 4분 아니었냐?기뻐해,지금 떨
써 10시 10분이다.
‥‥야, 아사카와! 듣고 있는 거냐? 살아 있지? 저주가 풀렸단 말야.
우린 살아난 거야. 야, 아사카와! 그런 데서 죽으면 야마무라 사다코
의 전철을 밟는 거야. 죽어도 나한테만은 저주를 걸지 마. 어차피 죽
을 거면 얌전히 극락왕생해라. 야, 아사카와! 알아들었으면 대답해 ,
류지의 목소리가 들려와도 살았다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아사카
와는 마치 다른 공간을 떠돌면서 꿈꾸고 있는 듯한 기분으로 야마무
라 사다코의 해골을 가슴에 품은 채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제4장
파문(波文)
한없이 및지는
의문, 監대폐 우리는 주문의
수수레끼를 푼 게 아니었나? 가슴이 몹시 두근刻梨다.
어떤 손이 갔슴속에까지 뻗어와 심장을 단단이 잡아 쥔 듯만 刻분이었다.
등골이 쿡쿡 아파 온다. 목덜데에 자갔운 감족이 당자 壽지는 놀라 의자에서 일어나
瑞
望지만 業렬안 壽증堅柔 쓰려져 대렸다. 刻울에 測진 류지의 모습은
뺨은 말라 뻣뻣아게 굳어 갈라져 있교 대리하락이 듬성듬성
빠진 대릿峯 사이로는 갈색 딱지들이 덕지덕지
않아 있었다. 류지는 견딜 수 없어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10월 19일 금요일
관리실에서 전화가 걸려오는 바람에 아사카와는 잠에서 깨어났다.
"오전 11시가 체크아웃 시간입니다만, 하루 더 묵으실 겁니까?"
재촉 전화였다. 아사카와는 수화기를 든 채 머리맡의 손목시계에
壽다란 선이 잠들기 전과 후로 끊어져 있었다.
'떠보세요 ‥‥‥
관리인은 상대편이 전화 옆에 있는지 어떤지 걱정이 되었다 까닭
없이 아사카와의 가슴에 기쁨이 솟구쳤다. 류지는자면서 몸을 뒤척
이다가 가늘게 눈을 떴다. 입에서 침이 흘러나와 있었다. 기억은 몽
롱해서 더듬어 랠 수 있는 것은 어두운 풍경뿐이었다. 의사 나가오를
방문해 빌라 로그캐빈으로 향했던 것까지는 그럭저럭 생각해 낼 수
가 있었지만, 그 이후부터가 아무래도 애매했다. 어두운 이미지만이
차례로 넘쳐나와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강렬한 인상을 가진 꿈을 꾸
긴 했는데 잠에서 깨는 순간 꿈의 내용을 잊어버리고 만, 그런 기분
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상쾌했다.
"· . ·여보세요, 들립니까?"
"아 예."
아사카와는 겨우 대답을 하고 수화기를 고쳐 쥐었다.
"체크아웃은 11시 입니다. "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해서 나가겠습니다. "
관리인의 사무적인 말투에 맞춰 아사카와도 사무적으로 대답하고
있었다. 주방에서 졸졸 가늘게 흐르는 수돗물 소리가 들려온다. 어젯
밤 잠들기 전에 수도꼭지를 제대로 잠그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사카
와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방금 전 뜨다 말았던 류지의 눈이 다시 감겨 있었다. 아사카와는
류지의 몸을 흔들었다.
"야, 류치 . 일어나."
몇 시간을 자 버렸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평소 아사카와는 기
껏해야 대여섯 시간밖에 자지 않았는데, 눈을 떴을 때의 기분을 통해
그보다 훨씬 긴 시간을 잤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아무 걱정 없
이 푹 잔 것은 상당히 오랜만의 일이었다
"야, 류지 ! 슬슬 여기서 나가지 않으면, 숙박비가 더 들어간다구."
아사카와는 좀더 세게 몸을 흔들었지만, 류지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대로 눈을 들어 보니 , 식탁에 놓인 비닐 봉지가 눈에 들어왔다. 유
백색 비닐 봉지 안에 뭐가들어 있는지 아사카와는 갑작스레 떠올랐
다 아주 사소한 계기로 꿈의 내용이 스르르 생각나는 것과도 같다.
‥‥야마무라 사다코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지 .
집 바닥 밑의 차가운 흙 속에서 끌어올려져 비닐 봉지 안에 질척하
게 오그라져 있는 야마무라사다코.졸졸졸흐르는물소리 어젯밤,
흙탕물투성이의 야마무라 사다코를 흐르는 물로 깨끗이 닦은 것은
류지였다. 그 물이 아직도 잠기지 않은 채 흐르고 있다 그때 이미 예
정 시각을 넘기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아사카와는 살아 있는 것이
다. 몹시 기뻤다. 눈앞까지 임박했던 죽음을 떨쳐 낸 지금, 보다 응축
된 생명은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야마무라 사다코의 두개골이
대리석 장식물처럼 아름답다.
"야, 류지 ! 일어나 "
문득 기분 나쁜 예감이 들었다. 마음 어딘가에 아직 걸리는 것이
있었다. 아사카와는 류지의 가슴에 귀를 댔다. 두꺼운 奇리닝 위로
확실한 심장 고동을 들어 그 역시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런데 가슴에 귀가 닿기 직전,아사카와의 목은 壽은 두 개
의 팔 안으로 감겨들어 갔다 아사카와는 순간적인 공포 상태에 빠져
정신없이 날뛰었다.
"헤헤헤, 바보! 내가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냐?"
류지는 아사카와의 목에서 손을 떼고 어린애 같은 소리를 지르더
니 웃었다 이런 사건이 일어났던 직후인만큼 농담이 통하지 않는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할 게 없는 것이다. 지금 당장 야마무라사
다코가 되살아나 저 테이블 옆에 서고, 류지가 머리털을 쥐어뜯으며
죽어 간다 해도 아사카와는 본 그대로를 솔직히 믿을 것이다 아사카
와는 화가 나는 걸 참았다. 류지에게 큰 빛을 졌기 때문이다
"시시 한 농담 그만둬 ."
"복수야. 너도 어젯밤에 어지간히 놀라게 만들었으니까."
류지는 ◎굴면서 킥킥 웃었다
"내가 뭘 어떻게 했길래?"
"우물 밑바닥에서 갑자기 쾅하고 쓰러져서 말야.난 죽어 버린 게
아닌가싶어· .걱정했단 말이다. 그대로 죽어버린 줄로말야."
아사과와는 눈을 깜빡였다.
"헤 , 기억 안 나냐? 정말이지 시중들기 힘든 놈이야."
그러고 보니 아사귀와는 스스로 우물 밑에서 기어나온 기억이 없
었다
어젯밤, 거의 탈진한 상태 그대로 로프로 끌어 올려졌음을 아사카
와는 겨우 깨달았다. 류지의 힘으로도 脚킬로그램의 몸을 4-5미터나
끌어올리는 작업은 수월치 않았다. 그렇게 매달려 있던 아사과와의
모습은 바다 밑바닥에서 끌어올려진 엔노 오즈누의 석상과 어딘가
닳아 있었다. 석상을 끌어올린 시즈코에게는 이상한 힘이 깃들었지
만, 아사카와를 끌어올린 류지에게는 근육통만 남았을 뿐이다.
"류지 ."
아사카와는 묘하게 정색을 하고 말했다.
'刻 야?"
"여 러 가지로 폐 많이 끼쳤다. "
"관둬 , 니글거리는 말 하지 마."
"네 도움이 없었다면, 난 지금쯤‥‥ 감사하고 있어 ."
"그만두라니까. 구역질날 것 같다. 네 놈한테 감사받아 敎자 한
푼
도 안 생긴단 말야."
"점심이라도 먹으러 갈까? 내가 사지 "
"뭐 , 네가 사는 건 당연하지 ."
류지는 '으샤' 하고 일어나다가 약간 비틀거렸다 몸 속의 근육이
나른해져 그 대단한 류지마저 자신의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
았던 것이다.
미나미하코네 퍼시픽랜드의 휴게실에서 처가의 아내에게 전화를
건 아사카와는 약속대로 일요일 아침 렌터카로 마중 갈 것을 전했다.
시즈괴는 그럼 이제 사건은 정리됐군요, 하고 물어왔지만 그에 대해
파문
아사카와는 '· . ·아마◎ 라고밖에 는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이 이대로
살아 있다고 하는 그 사실만 가지고 해결된 것이리라 추측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수화기를 놓았을 때,석연치 않은 기분이 보다 강해
졌다. 아무래도 걸리는 데가 있었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이 깨끗하게 해결되었다고 믿고 싶다. 어쩌면 류
지도 같은 의문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아사카와는 테이
블로 돌아오자 바로 류지에게 물었다
"이봐, 정말 이걸로 끝인 거지?"
류지는 아사카와가 전화를 걸고 있는 사이 점심을 깨끗이 먹어 치
웠다.
"아인 좋아하든?"
류지는 질문에 바로 대답하치 않았다.
"있지 , 넌 어때? 아주 시원한 기분은 아니지?"
"걱정되냐?"
"넌?"
"글쎄 ."
"뭐냐? 마음에 걸리는 게?"
"할머니 말야. 니것은 맹년, 새끼가 붙허. 넌 내년에 아이를 낳을
거다 그 할머니 예언 말이야."
역시 류지도 자신과 같은 것에 의문을 품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아사카와는 어느새 의심을 부정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니것이 라는 건, 그 경우에 한해 어머니인 시즈코를 가리키는 거 라
고 보면‥‥?"
류지는 딱 잘라 말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 비디오의 영상은 야마무라사다코의 눈
과 마음에 중심을 두고 있고, 할머니는 거기를 향해 말을 걸고 있어 .
니것이라는 건 야마무라 사다코 이외로는 생각할 슨 없어."
"할머니의 예언이 거짓말일 가능성도 있지 ."
"야마무라 사다코의 예지 능력은 백발백중일 텐데‥‥‥
"야마무라 사다코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 야."
"그러니까 이상한 거야. 생물학적으로 말하면 야마무라 사다코는
여자가 아니라 남자니까 아이를 낳을 수가 없지 . 게다가 죽기 직전까
지 처녀였잖아‥‥게다가."
"게다가?"
"처음 체험한상대가나가포· · 일본의 마지막천연두환자라고하
는 묘한 부합."
신과 악마, 체세포와 바이러스. 남파 여 , 그리고 빛과 어둠조차도
아득한 옛날에는 모순 없이 동일한 것으로서 존재하고 있었다고 한
다. 아사카와는 불안에 사로잡혔다. 유전자 구조와 지구 탄생 이전의
우주 모습에까지 이야기가 미치면 도저히 인간 개인의 힘으로는 해
결할 수 없게 되고 만다. 이제는 어떻게든 자기 자신을 납득시키는
수밖에 없다 다소 마음이 개운치 않은 것은 무리해서라도 지워 버리
고 어쨌든 끝난 것이라고 타이르는 수밖에 없다.
"난 이렇게 살아 있어. 지워진 주문의 수수께끼는 풀린 거야, 이미
끝난 거라구, 이 사건은‥‥‥
끝난 거라구, 이 사건은‥‥‥
그리고 아사카와는 갑자기 생각났다. 엔노 오즈누의 석상도 바다
밑바닥에서 끌어올려지는 것을 염원했던 게 아니었던가 하고. 그 염
원이 어머니인 시즈코에게 작용해 행동하도록 했고,그로써 그녀에
게 새로운 힘이 주어졌던 것이다. 그 일과 비슷한 것 같다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야마무라 사다코의 유골을 우물 밑바닥에서 주워 올린
것과. 엔노 오즈누의 석상을 바다 밑바닥에서 낚아올린 것‥‥ 하지만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 것은. 야마무라 사다코에게 주어진 능력은
얄궂게도 그녀를 불행하게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건 결
과만 보았을 때의 이야기고, 이번 경우는 저주로부터의 해방이 '주어
진 힘' 일 가능성도 충분하다. 아사카와는 무리라고 해도 그렇게 받아
들이고 싶었다.
류지는 아사카와의 얼굴과 어깨 끝으로 힐끗힐끗 시선을 던져 눈
앞의 사람이 확실히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 두번 정도 21덕
였다.
"뭐 , 그 점에 관해서는 문제될 게 없겠지 "
류지는 깊은 한숨을 토해 내면서 의자에 몸을 깊게 파묻어 갔다
"하지 만 ‥‥‥
"응?"
몸을 일으키면서 류지는 자기 자신에게 물었다
"야마무라 사다코는 대체 뭘 낳은 거지?"
아사카와와 류지는 아타미 역에서 헤어졌다. 아사카와는 야마무라
사다코의 유골을 사시키지 에 있는 친척 앞으로 보내 그들의 손으로
안장하도록 할 생각이었다. 30년 가까이나 소식이 없었던 사촌 조카
딸의 유골을 새삼 받아 봤자 그들로서는 귀찮을 따름일 것이다 그러
나 물건이 물건인 이상 방치할 수도 없다 신원 불명이라면 연고자가
없는 사망자로서 매장해 주는 방법도 있지만, 야마무라사다코라고
알고 있는 이상에는 사시키지 에서 인수하도록 하는 것이 옳다. 법적
인 시효는 벌써 지났고 이제 와서 살인 문제를 들고 나와 봤자 번잡
해질 뿐이니 만큼 사시키지 에 가서는 자살 같다고 얘기해 둘 작정이
었다. 아사카와는 유골을 건네 주고는 바로 도쿄로 돌아오고 싶었지
만,공교롭게도 배편이 없어서 오시마에서 1박을하지 않을수 없을
것 같았다. 렌터카를 아타미 항에 놓아 두고 가는 이상, 비행기를 이
용하면 오히려 번잡스러워진다.
'瑞를 보내는 정도는 너 혼자서도 할 수 있지?"
아타미 역 앞에서 차에서 내릴 때,류지가 깔보듯이 말했다. 야마
무라 사다코의 유골은 이때 비닐 봉지가 아니라 검은 보자기에 싸여
뒷좌석에 놓여 있었는데,확실히 이런 작은 포장을사시키지의 야마
무라에게 보내는 정도는 아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요는 그들이
받도록 만드는 일이다. 거부당해서 갖고 갈 만한 곳이 없어지면 귀찮
은 일이 된다. 친척에 의해 안장되지 않으면 주문의 실행도 완전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만, 어떨까? 느닷없이 25
년 전의 인골을 들이밀면서 이건 당신들의 연고자인 야마무라 사다
코입니다. 라고 얘기한들 듣는 쪽은 무엇을 근거로 그 말을 믿을 수
있을까‥‥ 아사카와는 조금씩 불안해졌다
"그럼 , 안녕 도쿄에서 다시 만나자 "
류지는 손을 흔들고는 아타미 역 개찰구를 빠져나갔다
"일이 없다면 같이 가 주는 것도 좋겠지만."
류지는 조급히 마무리 짓지 않으면 안 되는 논문을 산더미처럼 껴
안고 있는 상태였다.
"고마워 . 다음 기회에 은혜 갚겠어 ."
"관둬 , 나도 좨 즐거웠다. "
플랫폼 계단 뒤로 사라질 때까지 아사카와는 류지의 모습을 바라
보았다. 그리고 그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기 직전. 류지가 계단을
헛디며 구를뻔했다 가까스로 균형을 되찾기는 했지만 기우를 하고
흔들린 순간,늠름한 몸의 윤곽이 아사카와의 눈에 이중으로희미하
글의 향기와 함께‥‥
그날 오후, 아사카와는 야마무라 사다코의 유골을 무사히 야마무
라 다카시에게 건넬 수 있었다. 고기잡이에서 돌아온 야마무라 다카
시는 아사카와가 가지고 온 검은 보자기 꾸러미를 보자마자 그 내용
물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사카와가 두 손으로 내밀
며 '사다코 씨 유골입니다' 라고 말하자 그 꾸러미를 그립다는 듯 눈
을가늘게 뜨고 잠시 바라보더니 이윽고성큼성즘다가와깊숙이 머
리를 숙여 인사하며 받아 들었다
"먼 곳까지 일부러 오시느라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
아사카와는 맥이 빠졌다. 이렇게나 간단히 받아들이리라고는 생각
지도 못했다 야마무라 다괴시는 아사괴와의 의문을 간파하고 확신
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사다코가 틀림없습니다. "
세 살 때까지와 아흡 살부터 열여덟 살까지의 기간, 야마무라사
다코는 야마무라장에서 지냈다. 올해 만 61세인 야마무라 다카시에
게 있어서 사다코는 도대체 어떤 존재였을까? 유골을 받아들 때의
표정에서 추측해 보건대 상당한 애정을 쏟았던 것 같다. 그는 유골이
야마무라 사다코의 것이라고 확인도 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럴 필요
도 없이 그는 검은 보자기 꾸러미의 내용물이 야마무라사다코라고
직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처음으로 꾸러미를 보았을 때 눈의 반짝거
림이 그것을 말하고 있었다 역시 뭔지 모를 '힘'이 작용했음에 틀림
없다.
용무를 마치자 아사카와는 한시라도 빨리 야마무라 사다코 곁에서
도망치고 싶어 '비행기 시간에 늦어질까 봐서◎ 라고 거짓말을 하고
는 황급히 물러났다. 가족의 마음이 변해서 증거가 없는 한 유골은
받을 수 없다는 등의 말을 꺼낸다면 본전도 챙기지 못하고 말 일이
다. 무엇보다 야마무라 사다코에 대해 꼬치꼬치 물어오면 어떻게 대
답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남에게 말해 주기에는 긴 시
간을 필요로 한다. 더욱이 지금은 혈연 관계에 있는 자에게 말해 줄
심경이 아니었다.
아사카와는 지난 번에 신세진 것도 인사할 겸 통신부의 하야츠 씨
집에 들렀다가 오시마 온천 호텔로 향했다 느긋하게 온천물에 몸을
담가 피로를 푼 다음 지금까지의 경과를 문장으로 옮기기 위함이었
다.
아사카와가 오시마 온천 호텔에서 잠자리에 들 무렵, 류지는 히가
시나카노의 아파트 책상에 엎드려 졸고 있었다 쓰다 만 논문에 입술
을 대고 있어 덕분에 다크블루빛 잉크가 침으로 번져 있다. 어지간히
피로했는지 손에는 애용하는 몽블랑 만년필을 꼭 쥔 채였다. 그는 논
문 작성에 아직도 컴퓨터를 쓰지 않고 있었다.
꿈틀 하고 어깨가 흔들리더니 책상에 붙어 있던 얼굴이 부자연스
런 모양으로 비뚤어졌다. 류지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등줄기를 쭉
펴더니 잠에서 갓 깼다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두 눈을 크게 부릅뜨
고 있었다. 원래 쌍꺼풀 없이 치켜 올라간 눈이기는 하지만 그 눈을
한껏 크게 81파 평소의 인상과는 다른 귀여움이 엿보인다.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다. 꿈을 꾼 것이다 세상에 무서을 것이 없다던 류지가
진정으로 떨고 있었다 꿈의 내용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
만 꿈틀하는 몸의 떨림만이 꿈의 공포를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을 뿐
이다. 답답함을 느끼며 시계를 보았다. 오후 9시 40분. 이 시간이 무
엇을 의미하는지 쉬이 생각나지 않았다. 방 안의 형광등과 바로 앞의
스탠드가 켜져 있어 조명은 충분했지만, 그래도 조명이 부족하다고
느껴졌다. 본능적인 어둠에 대한 공포‥‥ 꿈은 비유할 수조차 없는
암흑에 지배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류지는 의자를 돌려 WR을 보았다. 그 테이프는 아직 거기에 들어
있는 채였다 논리적인 사고가작응할여지도 없이 이미지만이 먼저
스쳐 달려갔다.
"위험해, 그게 온 건가‥‥‥
류지는 책상 가장자리에 두 손을 대고 등뒤의 분위기를 살폈다. 아
파트는 큰길에서 들어간 조용한 곳에 있었기 때문에 거리의 잡음은
여러 가지가 섞여들어 구별하기 어려운 형태로 들려왔다. 급발진하
는 차의 엔진이나 타이어의 우는 소리만이 가끔 두드러질 뿐, 거리의
소리는 희미한 덩어리가 되어 배후의 공간에서 좌로 또 우로 떠다니
고 있었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니 소리의 원천이 무엇인지 알 만
한것도 있다 그 중에는 벌레 소리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혼연일체
가 된 각종 소리의 무리가 등실등실하고 사람의 영혼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현실감이 멀어져 간다‥‥ 류치는 그런 인상을 받았다. 그
리고 현실에서 멀어지는 만큼 류지의 몸 주위에 틈이 생기고, 그곳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영기가 감돈다. 쌀쌀한 밤기운과 피부에 휘감겨
붙는 습기가 음영(陰影)이 되어 가까이 다가온다 심장 고동이 째깍
째깍 울고 있는 시계 초침을 추월해 한층 더 빨라졌다. 알 수 없는 기
운이 가슴을 조여 오고 있다. 류지는 다시 한번 시계를 보았다. 9시
뀨분. 볼 때마다 몇 번이고 침을 삼켰다.
‥‥일주일 전, 내가 아사카와의 집에서 비디오를 본 것이 몇 시였
지? 9시경 그 녀석의 딸아이가 잠을 잔다고 했으니까‥‥ 그 후 재생
지? 9시경 그 녀석의 딸아이가 잠을 잔다고 했으니까‥‥ 그 후 재생
버튼을 눌렀다 치고‥‥ 다 본 건 ·.
류지는 자신이 비디포를 전부 보았던 시간을 확실히 파악하지 못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슬슬 그 시각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지금 자신에게 육박해 오는 이것이 가짜가 아니라는 것쯤은
류지로선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상상에 의해 공포심을 키우는 것과
는 다른 것이다. 상상 임신 같은 것일 리 없다. 분명 그것이 출렁출렁
다가오고 있다. 다만, 알 수 없는 것은‥‥
·. 왜 나한테만 오는 거지? 라는 의문.
나한테만 오고 왜 아사카와한테는 오지 않았지? 야, 불공평하잖
아.
한없이 넘치는 의문.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우린 주문의 수수께끼를 푼 게 아니었
던가? 그렇다면 왜? 왜? 왜?
가슴이 몹시 두근거렸다 뭔가의 손이 가슴 속에까지 뻗어와심장
을 단단히 잡아 쥔 듯한 기분이다. 등골이 쿡쿡 쑤셔 온다 목덜미에
차가운 감촉이 닿자 류지는 놀라 의자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허리에
서 등에 걸친 격렬한 통증으로 인해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 .이제부터 뭘 해야 하는지 생각해 !
그럭저럭 유지하고 있던 의식이 육체에 명령을 내렸다
'서 ! 일어서서 생각해 !'
류지는 다다미 위를 기어 가까스로VfR에 다다랐다. 꺼냄 버튼을
눌러 안에 들어 있던 테이프를 꺼냈다. 왜, 이런 행동을 취하는 걸
까‥‥ 그렇지만 당장에 달리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문제의 장본인인
이 테이프를 조심스럽게 조사하는 것 외에 이곳에서 달리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류지는 끄집어 낸 테이프의 앞뒤를 살펴본 다음 다시
비디오에 밀어넣으려다 손을 멈추었다. 테이프 등에 붙은 라벨에 타
이틀이 써 있었기 때문이다
'라이자미넬리 ·프랭크시내트라 새미 데이비스 Jr,1989.'
아사카와의 글씨였다 텔레비전에서 방영된 음악 프로를 녹화했던
것인 모양이다. 아사카와는 그것을 지우고 이 비디오를 복사했던 것
이다. 류지의 등줄기로 전류가 흘렀다. 새하알게 되어 버린 머릿속에
서 한가지 생각이 급속히 형태를 만들어 갔다 · .설마,하는 생각으
로 그 번뜩임을 일단 뇌리에서 지워 버렸지만, 테이프를 뒤집었을 때
순간적으로 흘렀던 전류는 확신으로 변해 있었다. 류지는 재빠른 머
리 회전으로 단숨에 몇 가지 것을 이해했다. 주문의 수수께끼, 노파
의 예언, 그리고 비디오테이프의 영상에 담긴 또 다른 힘·. 왜 빌라
로그캐빈에 묵은 네 명의 녀석들은 빠져나와 주문을 행하지 않았던
것인가‥‥왜 아사카와의 목숨은 살아남았는데 난지금 죽음의 위기
에 직면해 있는 것인가 · . 그리고 야마무라 사다코는 무엇을 낳은 것
인가‥‥ 힌트는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었다. 야마무라 사다코가 가진
힘과 어떤 또 다른 힘의 융합까지는 도저히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
그녀는 아이를 낳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낳을 수 있는 몸이 아니
다‥‥이 일이 앞으로 어떤 결과를 초래할까 하고.류지는 통증을 억
누르며 웃었다. 얄궂은 웃음이었다.
· 농담이 아니야, 인류의 최후를 지켜보고 싶은 내가 왜 이런 곳에
서 · 먼저 선두를 끊다니 ‥‥
류지는 전화가 있는 곳까지 기어가서 아사카와의 집 번호를 돌리
려다가 그가 지금 오시마에 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그 녀석 , 깔짝 놀라겠군, 내가 죽어 버리면.
가슴에 가해진 강한 압박이 늑골을 삐걱거리게 만들었다.
류지는 그대로 다카노 마이의 번호를 돌렸다. 삶에의 격렬한 집착
과 마지막으로 목소리만이라도 듣고 싶다고 하는 바람, 그 어느 쪽이
다카노 마이를 불러 내야겠다는 충동을 낳은 것인지는 류지 자신도
구별할 수 없었다. 단지 다른 한편의 목소리가 들린다.
‥‥포기해 , 그녀를 말려들게 하는 건 좋지 않아.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아직 늦지 않았을지도 몰라, 라고 하는 희
망의 목소리 .
책상 위의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9시 48분. 류지는 수화기를 귀에
대고 다카노 마이가 전화 받기를 기다렸다. 머리가 근질근질하고 까
닭 없이 가렵다. 머리에 손을 대고 북북긁자머리카락몇 올이 빠져
나가는 감촉이 잡힌다 두 번째 벨 소리가 울렸을 때, 류지는 얼굴을
들었다 정면의 양복장에 붙어 있는기다란거울에 자신의 얼굴이 비
춰졌다. 류지는 어깨와 머리 사이에 수화기를 끼우고 있다는 것조차
잊고 깜짝 놀라 얼굴을 거울에 가까이 댔다. 그 바람에 수화기가 떨
어져 버렸지만, 류지는 개의치 않고 거을 속의 자신을 응시했다 거
울에는 다른 인간이 비춰져 있었다 노랗게 된 뺨은 비쩍 말라 項및
하게 굳어 갈라져 있고, 잇따라 빠져나가는 머리칼 틈새로는 갈색 딱
지들이 덕지덕지 앉아 있다‥‥ 환각이다,환각일 게 뻔하다. 류지는
자신에게 타일렀다. 그렇지만 감정을 억제할 길이 없었다 바닥에 ◎
굴던 수화기에서 적보세◎라는여자의 목소리가 났다 류지는견딜
수 없어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다카노 마이의 목소리에 자신의 비명
소리가 겹쳐, 류지는 결국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놓치고 말았다
거울에 비친 것은 다름 아닌 백 년 후의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 대단
한 류지조차 몰랐던 것이다.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 버린 자신과
만나는 것이 이토록 무서운 일일 줄은‥‥
벨 소리가 네 번 울리는 것을 들은 다카노 마이는 수화기를 들고
'여보세요· .'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에 답했던 것은 '우워어어어
어!' 하는 비명이었다. 한 가닥의 전화선으로 급하게 전율이 달려나
갔다. 류지의 아파트에서 다카노 마이의 방으로 공포가 있는 그대로
의 모습으로 전해졌던 것이다 다카노 마이는 놀라 귀에서 수화기를
떼었다. 신음 소리는 계속되고 있었다. 맨 처음 비명에는 놀라움, 뒤
를 이어 계속되는 신음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분이 담겨 있다. 지금
까지 몇 번 정도 장난 전화를 받은 적이 있지만, 그것파는 다르다 싶
어 바로 수화기를 고쳐 쥐었다. 신음 소리가 뚝 그쳤다. 다음에 덮친
것은 조용한 정적‥‥
오후 9시 49분‥‥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여자의 목소리를 듣고 싶
다는 바람은 무참히 깨지고 오히려 그녀에게 단말마의 비명만을 퍼
붓다가 류지는 절명했다. 의식이 허무에 싸여 갔다‥‥ 바로 옆에 놓
인 수화기에서는 다시금 다카노 마이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
다. 침대에 등을 댄 채 바닥에 주저앉아 양발을 크게 벌리고, 왼손은
침대보 위에 내던지고 오른손은 계속해서 '여보세◎ 하고속삭이는
수화기를 향해 뻗은 채, 머리는 뒤로 꺾여 있었고 부릅뜬 두 눈은 천
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허무가 비집고 들어오기 직전, 류지는 자신
이 살아남지 못하리라는 것을 깨닫고 아사카와라는 녀석에게 비디오
테이프의 수수께끼를 가르쳐 주고 싶다고 강하게 염원하는 것을 잊
지 않았다.
다카노 마이는 몇 번이나 '여보세◎ 하고 전화저쪽을 향해 말을
걸었다. 대답이 없다. 그녀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신음 소리가 어
딘지 낯익다 기분 나쁜 예감이 가슴을 스치자 다시 한번 수화기를
들어 봤지만 전화 회선은 연결된 상태 그대로였다. 몇 번이고 훅을
눌러 보았지만 조금 전과 같은 정적만이 변함없이 이어질 뿐이다 이
때 다카노 마이는 전화를 걸어온 것이 류지이고, 그의 신상에 어처구
니없는 일이 일어난 것 같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었다.
10월 20일 토요일
오래간만에 온 집이긴 했지만 아내와 아이가 없으니 왠지 쓸쓸했
다. 며칠 만일까 하고 아사카와는 손가락을 꼽아 헤아렸다. 가마쿠라
에서 1박, 폭풍우에 갇혀 오시마에서 2박, 그 다음날 미나미하코네
퍼시픽랜드의 빌라로그캐빈에서 1박, 이어 다시 오시마에서 1박.겨
우 5박을 했을 뿐이다. 훨씬 오랜 기간 동안 나가 있었던 것 같은 기
분이 들었다. 취재 여행 4박 5일 같은 것은 흔했지만 돌아와 생각해
보면 늘 짧았다고 느껴졌는데
아사카와는 서재 책상에 앉아 컴퓨터의 전원을 올렸다 아직 몸 여
기저기에 근육통이 남아 있어 앉거나서기만해도 허리 근처에 통증
이 지나갔다. 잠못 이루는 밤이 계속되었던 요 일주일 간의 피로는
간밤의 10시간에 이르는 수면으로 해소될 수 있는것이 아니었다 그
렇지만 느긋하게 쉬고 있을 수만도 없다. 쌓인 일을 정리해 두지 않
으면 내일 일요일 닛코로 드라이브 가겠다는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된
다.
아사카와는 곧바로 컴퓨터 앞에 앉았다. 리포트 전반부분은 이미
디스켓에 저장해 놓았다. 그것에다가 월요일 이후, 야마무라 사다코
의 이름이 밝혀지고 난 다음 부분을 첨가해서 될 수 있는 한 빨리 원
고를 완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저녁 식사 즈음에는 5매 분량의 원고
를 마칠 수 있었다 그럭저럭 괜찮은 페이스였다. 아사카와의 경우,
심야가되면 페이스는 더욱더 빨라진다 이 정도의 컨디션이라면 상
당히 가벼운 기분으로 아내와 아이를 마중 나갈 수 있을 것 같다. 그
리고 월요일부터는 지금까지와 아무런 차이가 없는 일상 생활이 재
개될 것이다 편집장이 이 원고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나타낼지 는 전
혀 예상할 수 없지만,다쓰지 못하면 보여 줄 수도 없는 일이다. 지
면에 실리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아사카와는 지난 일주일 간
의 얘기 중 후반 부분을 다시 한번 정리하고 종합해 갔다. 원고가 완
성될 때, 비로소 그의 사건은 완료되는 것이다.
종종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이 멈춰지곤 했다. 책상 옆에는 야마무
라 사다코의 복사된 사진이 놓여 있었다. 실로 무서을 정도의 완벽한
미인이 힐끔힐끔 엿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자 아사카와는 집중
할 수가 없었다. 너무나 아름다운 이 눈을 통해 아사카와는 야마무라
사다코와 똑같은 것을 보고 말았던 것이다. 그녀의 일부가 몸 안에
들어와 버렸다고 하는 생각을 아직도 지을 수가 없다. 아사카와는 사
진을 눈이 미치지 않는 곳에 두었다. 야마무라사다코에게 주시당하
고 있는 것 같아 일이 잘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근처 음식점에서 저녁밥을 먹고 난 아사카와는, 지금 류지는 무엇
을 하고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사실 생각했다기보다는 그저 어렴풋
하게 그의 얼굴을 떠올렸을 뿐이다. 그런데 방으로 돌아와 일을 계속
하려 하자, 머릿속에 떠오른 류지의 얼굴이 서서히 확실해져 가는 것
이었다.
‥‥그 자식 , 지금쯤 뭐 하고 있을까?
머리에 떠오른 류지의 얼굴 윤곽이 가끔 이중으로 어긋나 보이기
도 한다. 이상하게도 가슴이 두근거려 오자 아사카와는 전화에 손을
뻗었다. 일곱 번쯤 벨 소리가 울리고 나서 수화기가 들려 아사카와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흘러나온 것은 여자 목소리였다.
"· . ·예, 여보세요."
모기 소리처럼 가냘픈 목소리.아사카와는 그 목소리를 들었던 기
억이 난다.
"여보세요, 아사카와입니다만 "
"fl , "
작은 대답.
"저 , 다카노 마이 씨 , 죠? 요전에는 아주 잘 먹었습니다 "
"fl ."
작은 대답.
"저 , 류지 그쪽에 있습니까?"
왜 빨리 류지를 바꿔 주지 않는 걸까 하고 아사카와는 의아해했다.
"저,류· ."
"선생님 , 돌아가셨어요."
도대체 얼마 동안이나 말문이 막혀 있었던 걸까? 얼빠진 듯이 '예'
라는 대답만 하고는 멍한 눈으로 천장의 한 점을 응시하다가 쥐고 있
던 수화기가 미끄러져 떨어질 뻔해서야 겨우 아사카와는 '언제?'라
는 물음을 던졌다.
"어젯밤 10시경 · .. "
류지가 아사카와의 아파트에서 그 비디오를 다 본 것이 지난 주 금
요일 9시 49분이었으니까, 바로 예고한 대로의 시각이다
"그래서 , 사인은?"
들을 필요도 없는 일이다.
"급성 심부전‥‥ 확실한 사인은 아직 모른대요."
아사카와는 간신히 서 있는 상태였다. 사건은 끝난 것이 아니다,
제2라운드에 돌입한 것이다.
"마이 씨 , 계속 그쪽에 계실 겁니까?"
"예 , 선생님의 유고를 정리할 게 있어서요."
"제가 지금 바로 갈 테니까 돌아가지 말고 기다려 주십시오."
아사카와는 수화기를 놓음과 동시에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내
와 딸의 마감 시간은 내일 오전 11시.시간과의 전쟁이 다시 시작되
려 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혼자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류지
는 이제 없는 것이다. 이런 데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다. 빨리 행동을
개시하지 않으면· .빨리빨리 ·
큰길로 나와 길의 혼잡 상태를 살폈다 전철보다 자동차 쪽이 빠를
것 같았다 아사카와는 횡단보도를 건너 노상에 주차시켜 두었던 렌
것 같았다 아사카와는 횡단보도를 건너 노상에 주차시켜 두었던 렌
터카에 올라탔다. 아내와 딸을 마중 가려고 반납을 내일로 연장시켜
둔 것이 다행스러웠다.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아사카와는 핸들을 쥐면서 생각을 정리해 보려 했다. 여러 가지 장
면이 플래시 백처럼 되살아날 뿐, 하나로 정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
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머릿속은 수습할 수 없는 지경이 될 뿐. 일과
일을 연결하고 있는 실이 뒤엉켜 터져나갈 것만 같았다. 진정해! 진
정하고 생각해 ! 아사카와는 자신에게 타일렀다. 그리고 가까스로 포
인트를 어디에 두고 좁혀 가야 할지가 명확해져 왔다.
‥‥우선 우리들은 주문, 즉 죽음의 운명으로부터 도망칠 방법을 발
견한 것이 아니라는 것. 즉, 야마무라사다코는 자신의 유골이 발견
되어 안장되고 싶다고 바랐던 것이 아니다. 그녀의 바람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뭘까‥‥그건 대체‥‥더 알 수 없는 것은 주문의 수수
께끼를 풀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난 이렇게 살아 있을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점. 어찌 된 일인가?설명해 줘. 왜 나만 살아 있을 수
있는 거지?
내일 일요일 오전 11시에는 아사카와의 아내와 딸이 죽음의 시간
을 맞이한다. 이미 밤9시다. 그때까지 무슨 수를 쓰지 않으면 그는
아내와 아이를 잃게 된다.
류지는 이 사건을 뜻밖의 죽음을 당한 야마무라 사다코의 저주라
는 관점에서 받아들였지만, 이제는 아무래도 그 점이 석연치 않게 되
었다 뭔가 남의 괴로움을 비웃는 듯한, 정체를 알 수 없는 악의가 존
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단정하게 무릎을 器고 앉은 다카노 마이는 류지의 미발표 논문을
무릎에 얹어 놓고 있었다. 한장 한장 넘기며 대충 훌어보고 있긴 했
지만, 안 그래도 난해한 내용들이 어서 좀처럼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
다 방은 휑했다. 류지의 유체는 오늘 아침 일찍 가와사키의 부모님
께 인도되어 이미 그곳에 없었다.
"어젯밤 일을 상세히 들려 주십시오."
친구의 죽음· 더욱이 전우라고도 할 수 있는 류지의 죽음은 슬펐
지만,지금은 감상에 젖어 있을 여유가 없다. 아사카와는 마이 옆에
앉아 고개를 숙였다
"밤 9시 반을 지났었나, 선생님한테서 전화가 걸려와서 · .."
마이는 어젯밤 일을 자세히 얘기했다. 수화기에서 흘러나온 비명 ,
그 후의 정적 , 서둘러 류지의 아파트로 달려왔지만 류지는 이미 침대
에 기대어 두 발을벌린 채· .마이는 류지의 사체가 있었던 장소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당시 그의 모습을 말해 나가는 동안에 눈물이 글
썽해졌다.
"제가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어서 ‥‥‥
아사카와는 마이에게 울 여유를 주지 않았다
"그때, 방 상황 중에 뭔가 별다른 점은?"
"아는‥‥그저,수화기가제대로 놓이지 않아서 귀에 거슬리는 소
리를 내고 있었어요."
류지는 죽음의 순간, 마이에게 전화를 걸려 했다‥‥ 무엇 때문에?
아사카와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정말 류지는 당신에게 아무 말도 남기지 않은 거죠?예를 들면,
비디오테이프에 대해서 라든지 ‥‥‥
"비디오?"
마이는 선생님의 죽음과 비디오 간에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느냐
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죽음 직전에 류지가 주문의 진짜 의미를 밝
혀 냈을까?그 녀석이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졌음을 알고 그녀에게
전화했음에 틀림없는데 · 그저 단순히 죽기 전에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던 걸까?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류지
는 주문의 수수께끼를 밝히고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 다카노 마이의
힘을 빌리려고 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결국 주문을
실행하려면 제3자의 힘이 필요한 것이다
마이는 돌아가려는 아사카와를 현관까지 배웅했다.
"마이 씨는 오늘밤 여기서?"
"예 , 원고 정리가 있어서요."
"그렇습니까? 바쁘신 데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
아사카와는 가려고 했다.
"저 , 잠깐‥‥‥
"11."
"아사카와 씨 , 저와 선생님 관계를 오해하고 계신 건 아닌가요?"
"예? 오해라구요?"
"그러니까, 저‥‥ 남자와 여자의 관계라고· . "
"· .·아니, 별로, 그런."
다카노 마이는 이 남자와 이 여자는 눈이 맞았구나 하는 시선을 던
지고 있는 남자를 분간해 낼 수 있었다. 마이를 보는 아사카와의 시
선에는 그런 뜻이 강하게 담겨 있어서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제가 처음 아사카와 씨를 만났을 때 선생님은 친구인 아사카와라
고 소개하셨죠? 전 좀 놀랐어요. 그도 그럴 것이 선생님이 친구라는
호칭을 쓴 건 당신이 처음인 걸요. 그래서 선생님에게 있어 당신은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마이는 거기에서 말을 멈추고 머뭇거렸다.
"·. 그러니까,선생님의 친구인 아사카와 씨만큼은 선생님과의 관
계를좀더 잘 이해해 주셨으면 해서.선생님‥‥제가 아는 한 여자를
모르는 채· . "
마이는 거기까지 말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동정 (童ti )인 채 죽었다는 건가?
대꾸할 말이 없어서 아사카와는 잠자코 있었다. 마이의 기억에 남
아 있는 류지는 마치 다른 사람처럼 여겨졌다. 어딘가 이야기가 어긋
나 버린 듯한‥‥
"· . ·예, 하지만‥‥‥
하지만 고교 2학년 때의 사건을 당신은 모르죠? 라고 아사카와는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죽은 자의 범죄 행위를 이제 와서 폭로하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죽은 자의 범죄 행위를 이제 와서 폭로하고
싶지도 않았고,마이의 가슴속에 잠자고 있는 류지의 이미지를 무너
뜨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보다. 그의 가슴에는 어떤 의문이 떠올랐던 것이다. 아사카와는
여성의 직감이라는 것을 믿고 있었다. 그리고 류지와 상당히 친밀하
게 사귀고 있던 마이가 류지를 동정이라고 한다면, 그 설이 보다 신
빙성을 갖는 건 아닐까 하고. 결국 고등학교 2학년 때 근처에 살던 여
대생에게 폭행을 저질렀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꾸민 이야기에 지나
지 않을지도‥‥
"선생님은 제 앞에선 어린애처럼 행동하셨어요.뭐든 얘기해 주시
고, 비밀이고 뭐고 없었어요. 어떤 청춘 시절을 보냈고, 어떤 고민을
갖고 계셨는지 전 거의 알고 있는 셈이에요."
"그랬습니까?"
달리 아사카와로서는 대꾸할 말이 없었다.
"선생님 제 앞에선 열 살의 순진한 철부지, 거기에 제3자가 가해
지면 신사, 그리고 아마 아사카와 씨 앞에선 악당을 연기하고 계시지
않았나요? 그렇죠?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
다카노 마이는 하얀 핸드백에 손을 뻗어 안에 든 손수건을 꺼내 눈
에 댔다.
"그렇게 따로따로 연기하지 않으면 선생님은 이 사회에서 살아갈
수가없었던 거예요 · 그래요,아시겠어요',l그런 걸·.."
놀람이 앞섰다. 그렇지만 아사카와로서도 짚이는 데가 있었다. 고
교 시절, 공부와 스포츠에 특별한 재능을 발휘했음에도 불구하고 한
명의 친구도 없었던 고독한 인격 .
"정말 순수하신 분· . 촐랑거리는 남학생들 따위와는 비교도 안 돼
요."
마이의 손에 쥐어진 손수건은 눈에 흘러넘치는 눈물을 빨아들이며
젖어 갔다.
좁은 현관 입구에 선 아사카와에게는 생각할 것이 너무나 많아 마
이에게 어떤 말을 남겨야 할지 얼른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가 알
고 있는 류지와 마이가 알고 있는 류지의 상이 너무나 동떨진 나머
지 , 초점이 어긋나 희미해진 것처럼 명확한 인물상을 파악할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류지에게는 어둠의 부분이 숨겨져 있었다. 아무리
발버등쳐 業자 그의 인격을 통째로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고교
2학년 때, 류지는 정말로 근처에 사는 여대생에게 폭행을 저지른 것
일까‥‥ 아사카와로서는 끝내 알 수 없었다. 또한 류지가 말하는 것
처럼 현재까지도 그런 행동을 반복하고 있는지 아닌지. 아내와 딸이
죽어야 하는 시간을 내일로 앞두고 있는 지금으로서는 쓸데없는 것
에 머리를 시달리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단 한마디 , 아사카와가 덧붙였다.
"류지는 내게 있어서도 최고의 친구였습니다. "
그 말이 기뱄는지 마이는 귀여운 얼굴에 웃는 얼굴인지 우는 얼굴
인지 모를 표정을 떠올리며 눈으로 가볍게 인사를 했다. 아사카와는
문을 닫고 아파트 계단을 빠른 걸음으로 내려갔다. 길가로 나와 류지
의 아파트에서 멀어져 감에 따라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면서까지 위
험한 게임에 몸을 던졌던 친구의 모습이 바싹바싹 다가와 아사카와
는 남의 눈도 아랑곳하지 않고 눈물을 흘렸다.
10월 21일 일요일
오전 0시가 지나 드디어 일요일이 왔다. 아사카와는 눈앞의 리포트
용지에 핵심 포인트를 메모해 가면서 생각을 정리해 보려 하고 있었
다.
‥‥류지는 죽음 직전이 되어서야 주문의 수수께끼를 풀고 다카노
마이에게 전화를 걸어 불러 내려고 했던 것 같다 즉, 주문을 실행하
는 데 있어서 다카노 마이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때
중요해지는 것은, 왜 난 살아 있는 것인가 하는 점 . 이에 대한 회답은
하나밖에 없다. 난 지난 일주일 사이에 나도 모르는 동안 주문을 실
행했던 것이다! 달리 어떤 설명도 있을 수 없다.
요컨대 주문은 제삼자의 손을 빌리면 누구라도 손쉽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에 다시 의문점 . 그러면 빌라 로그캐빈에 묵은
그 네 사람은 주문을 실행하지 않았던 것일까?
간단히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다른 세 사람 앞에서는 강한 것처럼
보이느라 그랬다 치더라도, 나중에 살짝 실행해 버리면 되지 않았을
까? 잘 생각해
내가 지난 일주일 간 무엇을 했지? 확실히 류지는 하지 않은 일이
면서 내가 한 일은 무엇인가?
그렇게 궁리하던 아사카와가 소리쳤다.
"그런 걸 어떻게 알아! 일주일 간, 난 했지만 류지는 하지 않은
것 ‥‥ 그런 건 산더미처럼 많다. 말도 안 퇘."
아사카와는 야마무라 사다코의 사진을 주먹으로 쳤다
"이년아, 얼마나 날 괴롭히면 성이 차겠냐?"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야마무라 사다코의 얼굴을 내리쳤다. 하지만
야마무라 사다코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어디까지나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사카와는 주방으로 가서 유리잔에 넘치도록 위스키를 따랐다.
머리 한 곳에 충혈되어 있는 피를 원래대로 돌려놓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쭉 하고 단숨에 들이키려다 손을 멈추었다. 주문 방법을
알아 내어 밤세워 아시카가의 처가까지 차를 운전하게 될지도 모른
다. 술은 상가하는 편이 좋다
원가에 의지하려고 하는 자신에게 차가 치밀었다. 빌라 로그캐빈
에서 야마무라 사다코의 배를 파냈을 때, 아사카와는 공포에 질려 하
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 그래도 그럭저럭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
던 것은 류지가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希50
"류지 ! 류지 ! 부탁이다, 살려 줘 ."
‥‥아내와 딸을 빼앗긴 생활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런 건 견딜 수
없다!
"류지 , 힘을 빌려 줘 왜 나는 살아 있을 수 있는 거지? 내가 처음
에 야마무라 사다코의 유골을 발견했기 때문인가? 만일 그렇다면,
아내와 딸은 살 수가 없잖아. 그럴 리가 없지? 그렇지? 류지 !"
아사카와의 마음은 헝클어져 있었다. 우는 소리를 할때가 아님을
알면서도 냉정을 잃고 잠시 류지를 향해 아우성치고 나자 또 그럭저
럭 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는 또 다른 포인트를 메모지에 기입
해 나갔다
노파의 예언 ‥‥ 야마무라 사다코는 정말로 아이를 낳은 것인가? 죽
기 직전에 성교한 나가오 죠타로는 일본의 마지막 천연두환자인데,
그것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어떤 의문의 라스트에도 물음표가
붙을 뿐이다. 한 가지도 확실한 것은 없다. 과연 이런 식으로 주문의
방법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인가? 실패는 허용되지 않는다.
다시 몇 시간이 지났다. 슬슬 날이 밝을 무렵이다. 바닥에 ◎굴고
있던 아사카와의 귓가에 남자의 입김이 와 닿았다. 짹짹거리는 작은
새의 울음소리가 난다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가 없다.
아사카와는 어느 사이엔가 바닥에 쓰러져 잠들었던 것이다. 으음
하고 아침 햇살에 눈이 부신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부드러운 빛 속에
서 사람의 그림자가 성급히 물러선다. 무섭지 않았다
아사카와는 퍼뜩 정신이 들어 그림자가 있는 방향을 응시했다.
"· .류지 , 거기 있는 거냐?"
그림자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리고 마치 뇌주름에 직접 새겨지
듯이 책 제목이 떠올랐다.
『인류와 전염병』
눈을 감은 아사카와의 눈꺼풀 속에 하얗고 선명하게 제목이 떠오
르더니 여운을 끌며 사라져 갔다. 그 책은 아사카와의 서재에 있는
것이다. 이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할 무렵 그는 네 명의 인간을 같은
시간에 죽음에 이르게 한것의 정체를 어떤 종류의 바이러스가아닐
까 하고 의심했고,그런 흥미에 의해 구입했던 것이다. 아직 읽지는
않았지만 그는 그 책이 책꽃이 어딘가에 꽃혀 있는지 잘 기억하고 있
었다.
동쪽 창문으로 아침 볕이 들어왔다 일어나려니 머리가 욱신욱신
아팠다.
· .꿈이었던 걸까?
아사카와는 서재 문을 열었다. 그리고 무언가가 암시해 준 책 , 『인
류와 전염병』을 손에 들었다. 물론 아사카와는 암시를 준 것이 누구
인지 상상할 수 있었다. 류지다. 류지는 주문의 비밀을 가르쳐 주기
위해 아주 짧은 순간 되돌아왔던 것이다.
3백 페이지 정도 두께의 이 책 어디에 주문의 해답이 실려 있는 것
일까? 아사카와에게 다시 직감이 번뜩였다. 191페이지 1 조금 전만큼
강렬하지는 않지만 그 숫자 역시 뇌리에 삽입되어 오는 것 같았다
그곳을 펼쳤다. 순간 아사카와의 눈 속으로 하나의 단어가 단계적으
로 팍팍팍 확대되어 뛰어들어왔다.
烈 烈 증식 증식
바이러스의 본능, 그것은 자기 자신을 늘리는 것.
'바이러스는 생명의 기구(機構)를 가로채서 자기 자신을 늘린다'
"오오오오오오!"
아사카와는 얼빠진 소리를 내질렀다. 주문의 의미에 겨우 이르른
것이다.
‥‥내가 지난 일주일 동안에 한 것 그리고 류지가 하지 않은 것, 명
확하지 않은가?난 그 비디오를 빌라 로그캐빈에서 가지고 와 복사
해서 류지에게 보여 주었다. 주문의 내용,간단하지 않은가?누구라
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복사해서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는 것 ‥‥
아직 보지 않은 사람에게 보임으로새 증식을 도와 우면 되는
것이다.
그 네 사람은 그런 장난을 저지른 다음 어리석게도 비디오테이프
를 빌라 로그캐빈에 두고 와 버렸다 그러니까 일부러 가지러 돌아오
면서까지 주문을 실행하려고 한 놈은 없었던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해석은 내릴 수 없다. 아사카와는 수화기를
들고 처갓집 번호를 돌렸다 전화를 받은 것은 시즈카였다.
"알겠어? 지금부터 말하는 걸 잘 들어. 장인, 장모님께 꼭 보여 드
리고 싶은 게 있어. 그것도 지금 바로 말이야. 그러니까 내가 그쪽에
도착할 때까지 두 분을 아무데도 나가지 않게 해 줘. 알았지?아주
중요한 일이 야."
‥‥아아, 나는 악마에게 혼을 팔려고 하는 게 아닐까? 아내와 딸을
살리기 위해 장인과 장모를 일시적인 위험에 빠뜨리려 하고 있다. 하
지만 딸과 손녀를 구하는 일이라면 두 사람은 기꺼이 협력할 것임에
틀림없다 그들도 역시 복사해서 다른 누군가에게 보이면 그것으로
위험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끝은‥‥ 그 끝은?
"무슨 얘기예요? 잘 모르겠어요."
"됐으니까, 시킨 대로 하란 말야. 지금 바로 그쪽으로 떠날게. 아,
그렇지 . 거기 WR 있어?"
"있어요."
"VlIS 방식인가?"
"VHS예 요."
"알았어 , 바로 떠나지 . 절대로, 알았어? 절대로 아무데도 가지마."
"잠간만요. 저기,아버지하고 어머니한테 보여 주고 싶다는 게 그
비디오 아녜요?"
아사카와는 대답이 궁해 잠자코 있었다.
"그래요?"
"· . ·그래 ."
"위험은 없어요?"
‥‥위험은 없어요? 라니 , 너와 네 딸은 앞으로 다섯 시간 후면 죽을
운명에 있어.작작좀 해둬, 이 바보야.질문 나부랭이나 하고 있다
니 . 일의 경과를 순서대로 들려 줄 시간이 없단 말야. 아사카와는 고
함을 치고 싶은 기분을 그럭저럭 억눌렀다
"어쨌든, 내가 말하는 대로 해 !"
7시 조금 전이다. 지금부터 고속도로를 달린다고 했을 때 정체가
없다면 9시 반경까지는 아시카가의 친정에 도착할 것이다. 아내 몫과
딸 몫으로 두개를 복사할 시간을 계산하면, 11시 마감 시간이 아슬아
슬한 상황이다. 아사카와는 수화기를 놓고는 오디오 진열장을 열어
VfR의 플러그를 뽑았다 복사히려면 아무래도 두 대의 비디오가 필
요하므로 아시카가의 처가까지 옮기지 않을 수 없다.
아사카와는 방을 나서려다 다시 한번 야마무라 사다코의 사진을
보았다
당신, 터무니 없는 걸 낳았군 그래.
수도 고속도로로 들어가 동북자동차전용도로를 타는 코스를 택하
기로 했다. 문제는 수도 고속도로의 정체를 어떻게 피하느냐이다. 톨
게이트에서 요금을 지불하며 정체 상황을 확인하려던 아사카와는 비
로소 오늘이 일요일임을 깨달았다 그 때문인지 평소에는 염주처럼
늘어서 있을 해저 터널 앞에도 자동차 대수가 현저히 적어 정체를 찾
아볼 수가 없다. 이런 상태로 가면 예정대로 9시에는 처가에 도착한
다음 충분한 여유를 갖고 두 개의 복사에 임할 수가 있다. 아사카와
는 속도를 늦추었다. 과속으로 사고에 휘말리는 쪽이 훨씬 두려웠다.
강변을 따라 달리면서 아래를 보니 막깨어난 일요일 아침 거리의
표정이 여기저기 보였다. 사람들이 평일과는 다른 움직임으로 걷고
있다. 평화스런 일요일 아침 ‥‥
아사카와는 끝내 생각에 빠지고 말았다. 이것이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가‥‥ 아내의 몫과 딸의 몫, 두 방향으로 나뉘어 방출된 바이러
스는 대체 어떻게 퍼져 나갈 것일까?이미 한 번 본 적이 있는 사람
에게 복사본을 만들어 건네 주고, 어느 특정 그룹 내에서 주고받기를
반복하면 바이러스의 만연을 방지할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그래서
는 증식을 바라는 바이러스의 의지에 어긋나는 것이 된다. 그 기능이
어떤 구조로 비디오테이프에 담겨 있는가는 현재로선 알 수 없다. 알
기 위해서는 실험이 필요하다. 목숨을 걸고서 진실을 해명해 보려는
인간이 나타나는 것은 상당히 심각한 상태에 이르도록 만연된 다음
의 일이 될 것이다. 복사본을 만들어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것만으로
위험을 피할 수 있다고 한다면, 어려운 방법이 아니므로 사람들은 반
드시 실행에 옮기게 된다 그리하여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아직
못 본 사람에게' 라는 조건이 반드시 따라붙는다. 또 한 가지 , 아마 일
주일 간이라는 집행유예 기간은 전파되는 동안에 단축될 것이다. 본
사람은 일주일을 기다리지 않고 복사해서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대체 이 고리는 어디까지 퍼져 나갈 것인가? 인간이 본능적으로 지
닌 공포심을 움직여 전염병화한 비디오테이프가 눈 깔짝할 사이에
온 사회에 퍼질 게 뻔하다. 게다가 공포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터무니
없는 헛소문을 만들어 내지 않으리라고 볼 수도 없다. 예컨대 '본 사
람은 둘 이상의 복사본을 만들어 두 사람 이상의 인간에 보여야 한
다' 는 따위의 조건이 첨가된다면 한 줄기의 흐름과는 비교가 되지 않
을 정도의 기하급수적 속도로 파급되어 반년 동안에 일본 전국민이
매개체가 되어 감염이 해외에까지 미칠 것이다. 그러는 과정에서 몇
명의 희생자가 나온다. 그러면 사람들은 비디오테이프의 예고가 거
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더욱더 필사적으로 복사를 반복한다 어떤
공황 상태를 만들어 내고 어떤 사태로 결말이 날지 예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희생자가 몇 명이나 나올지도 · 2년 전,공전의 심령
현상 붐이 덮쳤을 때, 도착한 투서는 천만 통에 달했다 어딘가 미쳐
있다. 그 미침에 편승해 신종 바이러스는 맹위를 떨칠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대중에 대한 원한, 인류의
지혜에 의해 멸절의 가장자리까지 내몰린 천연두 바이러스의 원한
그것이 야마무라 사다코라고 하는 특이한 인간의 몸 속에서 융합되
어 생각지도 못한 형태로 다시 세상에 나타난 것이다.
아사카와든 그 가족이든 비디오를 보고 만 사람은 모두 이 바이러
스에 잠재적으로 감염된 것이다. 매개체이다. 게다가 바이러스는 생
명의 핵이라고 할 수 있는 유전자에 직접 파고들어 간다. 이것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아직은 알 도리가 없다 앞으로의 역사에, 아니 인류
의 진화에 어떻게 관련될 것인지 ‥‥
· 난 가족을 지키기 위해 인류를 멸망시킬지도 모르는 전염병을
세계에 풀어놓으려 하고 있다.
아사카와는 이제부터 하려는 일의 의미가 두려웠다. 아주 희미한
속삭임도 있었다.
‥‥아내와 딸을 방파제로 삼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가? 숙
주를 잃으면 바이러스는 죽는다. 인류를 구할 수 있는 거다.
그렇지만 그 목소리는 너무나도 작은 것이었다.
차는 동북자동차전용도로로 접어들었다. 혼잡은 默었다. 이대로
가면 충분히 시간 내에 도착할 수 있다. 아사카와는 어깨에 힘을 넣
고 핸들에 달라붙은 모습으로 차를 운전하고 있었다.
"후회 따윈 하지 않아. 내 가족이 방파제가 되어야만 할 이유 따윈
어디에도 없어. 위기가 다가온 이상, 어떤 희생을 치러서라도 지켜
내야 되는 것이 있어 ."
결의를 새로 다지기 위해 아사카와는 엔진음에 지지 않는 목소리
로 그렇게 말했다. 과연 류지라면 이런 경우 어떻게 했을까? 그 점에
관해 그는 자신이 있었다. 류지의 영이 아사카와에게 비디오테이프
의 수수께끼를 가르쳐 준 것이다 즉, 아내와 딸을 구하라고 시사한
것이 된다. 그것이 마음 든든하다. 류지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지금,이 순간자신의 기분에 충실해라1 우리 앞에는 애매한 미
래밖에 없는 거다. 나중 일은 어떻게든 될 것이다. 인류의 지혜 같은
게 맞아떨어지면 해결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인류에게 하
법이다. 해치워도 해치워도 꼬리를 물고 나타나게 마련인 것이다
아사카와는 아시카가를 향해 일정하게 속도를 유지했다. 백미러
속으로 지금 막 뒤로한 도쿄의 하늘이 비춰지고 있다. 그 상공에 검
은 구름이 기분 나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묵시록적인 악의 유출을
암시하는, 뱀과 같은 움직임이었다.
● 작품 해설 1
뇌세포의 壽주림을충족시궈 주는소설
공포 소설의 대가인 스티븐 킹은 경애하는 작가이기는 하지만 그
의 소설을 읽고 공포에 질린 적은 없었다. 헐리우드에서 잇따라 제작
되는 공포 영화는 실제로는 쇼커, 스프래터 , 스릴러이며 , 공포의 감
정이 아니라 보는 사람에게 경악이나 혐오, 서스펜스를 제공할 뿐이
다. 거기에는 공포의 그림자조차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스즈키 코지의 『링』을 읽을 때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진정 재능
으로 넘치는 작가는 계산을 해서 그렇게 쓰는 것인가, 아니면 우연히
그렇게 되는 것인가? 그건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발바닥에 구멍이 뚫
린 것처럼 작품을 통하여 그 바닥을 알 수 없는 공포속으로사람들
을 몰고 간다 그렇게 나는 생각을 바꾸어야 했다. 그토록 『링』은 무
서운 이야기였다
『링』을 다 읽었을 때는 장마비가 쏟아지던 날 밤 10시쯤이었다. 나
는 지급도 당시의 상황을 잘 기억하고 있다. 나는 읽기를 마치고 방에
홀로 있는 게 견딜 수 없어서 택시를 잡아타고 신주쿠까지 달려가 동
료들이 우글거리는 술집으로 들어갔다. 혼자서 있는 것이 이상하게
두렵고, 혼자서 화장실 가는 것을 두려워했던 유년 시절처럼 , 타인의
따뜻한 체취를 갈망했다. 그런, 이성이 아닌 본능을 직접적으로 건드
리는 공포가 『링』에는 있었다. 부끄럽지만 이런 느낌은 처음이다.
그만큼의 공포를 『링』은 어떻게 해서 내게 부여했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작가 스즈키 코지가 세상에 소개한 새로운 피물 때문이다. 그
괴물은, 활자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곧바로 나의 이성을 먹
어 치우고,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공포의 싹을 트게 했다.
이야기는 네 명의 청소년이 의문의 돌연사를 당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네 명 모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한날 한시에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사망한 소녀의 이모부인 주인공이 원인을 추적하면서 일
주일 후의 죽음을 예고하는 공포의 (정말이지 공포의 ! ) 비디오테이프
를보고 만다 그 테이프의 말미에는 죽음을 피할수 있는 방법이 나
온다. 그런데 이미 죽은 네 명은 테이프를 본 다음 그 부분을 지워 버
렸다.
과연 주인공은 일주일이라는 한정된 시간에 죽음을 피하는 방법을
찾아 낼 수 있을까? 그리고
이렇게 쓰고 보니 이 소설이 지극히 정통적인 구성으로 짜여져 있
음을 알수 있다. 오해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감히 말한다면,스
릴러 서스펜스 형식을 띤 소설의 경우, 이런 종류의 작품은 수없이
많으며 그것은 그다지 놀랄 만한 것이 아니다. 『링』을서스펜스로서
읽는다면,비디오에 담겨 있던 죽음을 피하는 '주술'이란 도대체 무
엇인가라는 미스터리와 일주일이라는 한정된 시간 내에 주인공이
과연 그 미스터리를 해결할 것인가가 그 초점이 된다
그러나 여기까지 읽고 '뭐야? 그렇다면 단순한 서스펜스물이 아닌
가?' 하고 이 작품과 스즈키 코지를 우습게 봐선 안 된다. 절대로 안
된다. 그렇게 평가하면 벌받는다.
『링』이 단순한 서스펜스라면 확실히 '뭐야?'라고 말할 수 있을지
도 모른다. 그러나 이 소설은 참신한 아이디어로 반짝이는 경천동지
할 공포 소설이다. 서스펜스가 클라이맥스로 치닫기 일보 직전, 스즈
키 코지의 재능이 별처럼 반짝이며,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괴물(괴물
이라고해서 '피라니아사람'이나 공포의 '뱀사람' 같은 것이 아니니
안심하라)이 숨어서 기다리고 있다.
『링』은 이성을 마비시키는 공포와 훌릉한 서스펜스를 동시에 충족
시킨다. 서스펜스가 없다 할지라도 스즈키 코지가 내놓은 괴물에의
공포는 19세기 말 브람 스토커가 내놓은 『드라클라』와 같은 충격을
갖고 있다 중세에서 근대까지 사람들로 하여금 공포에 질리게 한 것
이 어둠 속에서 꿈틀거리는 마물(魔物)이었다면, 지금부터 미래를
향해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은,스즈키 고지가 이 작품을 통해 제시
한 비전 새로운 괴물' 이라 할 것이다
스즈키 코지는제2회 일본 판타지 소설 대상 우수상을수상한 『낙
원』으로 1990년 말에 데뷔했다. 나는 출판된 직후 『낙원』을 읽어 業
는데, 신인으로 여겨지지 않는 필력과 풍부한 상상력에 크게 탄복한
바 있었다. 그 중에서도 책의 타이틀이 됐던 제2장 '락원'은 한마디
로 말할 수 없을 만큼 탁월했다 남해(南海)의 모험담을 읽어 가다
내 자신의 가슴이 크게 움직였던 기억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낙원』이 나온 지 6개월 후에 출판된 것이 『링』이다. 그러나 실
제로 『링』은 1990년 '요코미조세이지' 상에 응모된 작품이므로 『링』
을더 먼저 썼는지도 모른다. 당시 나는 짧은 소견으로 '허어! 판타
지 소설 상까지 받은 사람이 복싱 소설도 쓰나? ' 하는 생각을 하며 책
을 펴들었다. 그런데 정말이지 데뷔하여 두 번째 작품을 발표하는 정
도의 신인이 이런 걸작을 쓸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낙원』에서
『링』까지 출판 시점의 차이는 불과6개월이지만,세 번째 작품은 그
로부터 거의 1년 반이 지난 1993년도에 출간되었다. 『햇빛 찬란한 바
다』가 그것인데, 이 작품 역시 로맨틱하고 정열적인 소설로서 , '헌팅
턴씨 병' 이라는 희귀한 병을 소재로 하여 작가의 재능이 곳곳에서 다
이내믹하게 발휘되고 있다.
지금까지 출판된 소설을 읽노라면, 작가가 재능이 넘치는 스토리
텔러이자 상상을 초월한 아이디어맨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작가는
앞으로도 계속 자신의 껍질을 벗기면서 우리들에게 그 정체를 드러
낼 것이다. 우리들 탐욕스런 독자들은 뇌세포의 굶주림을 충족시켜
줄 새로운 재능을 다시 한번 움켜쥐었다. 『링』은 가장 뛰어난 엔터테
인먼트이며, 등골이 오싹할 정도의 공포 소설이다. 부디 한번 읽어
보시길 간절히 원하는 바이다.
반도 토시히토(板東齡人) /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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