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3-원제 루프
제1장 밤의 끝에서
제2장 암 병동
제3장 땅 끝 여행
제4장 지 하 공간
제5장 강림
작가의 말
밤의 끝에서
새시로 된 문을 열자 방 안으로 바다 향기가 흘러들어 왔다. 바람은
거의 없었지만 습기를 머금은 밤공기가 컴컴한 도쿄 만(濕)에서부터
그대로 올라와, 목욕을 끝내고 나온 몸에 착 달라붙어 온다 하지만
가오루는 바다를 아주 가깝게 느끼게 해주는 이 무더운 기운이 그다
지 싫지 않다.
저녁 식사 후에는 발코니에 나가 별의 움직임이나 달의 변화를 관
찰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달의 표정은 미묘하게 변하고 있어
보고 있기만 해도 절로 신비스런 기분이 되었다 이런 신비스런 기분
에 영감을 받을 때도 많았다.
가오루가 밤하늘을 바라다보는 것은 매일의 일과였다. 새시 문을
활짝 열고 가오루는 어두운 발코니 바닥을 더듬어 슬리퍼를 신었다.
밤하늘로 높이 치솟은 초고층 맨션의 29층 발코니 가오루의 마음을
완벽하게 사로잡는 장소이자, 가장 편한 곳이기도 했다.
9월도 중순이 훨씬 지났지만 늦더위는 의외로 혹독하다. 6월부터
열대야가 계속되어 가을이 되어도 혹서가 사그라들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매일 밤 이렇게 발코니로 나와 보지만, 시원함을 얻기는커녕 더위
를 더욱 실감할 따름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여름이라는 계절이 점점
길어지기 시작한 것 같았다
하지만 발코니에서 별을 바 라다보면, 별들이 손에 닿을 정도로 아
주 가깝게 다가와 있어 더위 따윈 잊게 된다.
도쿄 만을 향하고 있는 다이바의 주택 구역 (다이바는 19세기 말에
세워진 포대로서 그 주변은 매립되어 택지로 활용되고 있다 주변의
시나가와 구와 함께 고급 주택지가 많은 지역이다 역자 주)에는 맨
션들이 죽 늘어서 있었다. 하지만 거주자는 그리 많지 않아 창문으로
새어나오는 빛의 양이 한정되어 있어 밤하늘의 별이 더욱 아름답게
비쳐지는 것이다.
가끔 '삭' 하고 바람이 흘러가는 때가 있다. 그러면 바다의 분위기
는 엷어지고 막 목욕을 마쳐 젖은 머리카락이 다소의 끈끈함을 남긴
채 마른다.
"가오루, 감기 걸릴라. 창문 닫아라."
주방 식탁 안쪽에서 엄마 목소리가 났다. 찬바람이 들어가니까 창
문이 활짝 열려 있음을 안 것이리라. 엄마가 있는 위치에서는 발코니
가 보이지 않으므로 가오루가 발코니에서 밤공기를 맞고 있다는 것
을 알지 못할 터이다.
그러나 가오루는 이런 더위 속에 설마 추워서 감기에 걸릴 일은 없
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엄마의 잔소리에 질려했다. 그렇지만 엄마의
걱정 많은 성격은 별로 새삼스러운 게 아니다. 발코니에 있는 것을
들키게 되면 실내로 끌려들어갈 게 뻔하다. 가오루는 바깥쪽에서 창
문을 닫아 엄 마가 모르도록 했다.
지상 100미터 높이까지 하늘로 밀어올려진 가늘고 긴 공간을 이제
가오루는 독차지하게 되었다. 그는 뒤돌아 유리창 너머로 실내를 보
았다. 엄마의 모습은 직접 보이지 않았다 부여 형광등이 비추는 유
백색 빛줄기가 소파가 있는 거실로 파고들어 와, 가오루는 그 하얀 빛
속에 엄마가 있는 기색을 읽어 낼 수 있었다. 싱크대 앞에 서서 , 설거
지를 하는 엄마의 움직임으로 인해 부엌에서 뻗어 나오는 빛이 조금
씩 흔들리고 있다.
눈을 다시 어둠 속으로 되돌린 가오루는 언제나 자신을 의문에 쉽
싸이게 하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가오루에게는 자신의 존재를 포함
해 세계의 구조를 어떻게든 해명해 보고 싶은 꿈이 있었다. 그것은
어떤 분야에 있어서 첨단의 수수께끼를 푸는 것뿐만이 아니다. 그의
소망은 자연계의 모든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통일적인 이론을 발견
하는 것이다. 정보공학계의 연구자인 아버지와 거의 공통된 꿈이어
서 그들 부자는 함께 있으면 자연과학에 관해서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기 보다는 가오루가 갖가지 질문을 던지고,
아버지가 그에 대답한다는 편이 맞을 것이다. 아버지 히데유키는 인
공 생명 개발 프로젝트 연구원을 역임한 뒤, 교수가 되어 대학으로
연구의 장소를 옮겼다. 히데유키는 올해 10살이 된 어린 가오루의 질
문을 결코 얼버무려 버리거나 무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상식에 얽매
이지 않는 아들의 대담한 발상으로부터 연구의 힌트를 얻는 일조차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는 늘 진지했다.
가끔 휴식을 취하는 일요일 오후에 아버지와 아들이 열띤 논의를
펼치는 것을 엄마 마치코는 만족스런 듯이 바라보곤 했다. 자신도 모
르게 이야기에 열중해 곧잘 주변 상황을 잊어버리고 마는 아버지에
비해 아들은 화제에 끼여들지 못하고 혼자 남겨져 있는 엄마에 대한
배려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논점이 되고 있는 사항을 쉽게 풀어서 엄
마에게 설명해 주고 될 수 있는 한 논의에 참여할 수 있도록 이끌어
가는 것이었다. 그런 배려는 히데유키로서는 도저히 홍내낼 수 없는
재능이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배려가 기쁜 것인지 , 아니면 10살밖에 안 됐는데
도 벌써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자연과학에 대해 토론하는 아들을 자
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인지 , 아들을 보는 엄마의 눈에는 늘 만족과 사
랑스런 표정이 나타나 있었다.
멀리 아래로 보이는 레인보 브리지(도쿄 만에 놓여진 현수교,'93
년 개통된 이래 야경이 좋아 데이트 코스로 유명하다 ' 역자 주) 위로
자동차의 헤드라이트들이 줄기차게 흘러가고 있었다. 빛줄기 가운데
아버지가 운전하는 오토바이도 있으면 좋겠다고 가오루는 기대했다.
가오루는 늘 아버지의 귀가를 고대하고 있었다.
히데유키가 인공 생명 프로젝트의 연구원에서 대학 교수로 발탁된
것을 기회로, 도쿄 교외에서 다이바의 맨션으로 옮겨 온 것이 벌써
10년 전의 일이다. 바닷가의 초고층 맨션이라는 주거 환경은 가족의
기호에 맞는 것이었다. 높은 위치에서 보이는 경치에 가오루는 싫증
나는 일이 없었다. 밤이 되면 별들을 자기 앞으로 끌어당겨서 아직
다 파악하지 못한 세계로 마음껏 상상력을 펼쳤다
대지로부터 아득히 떠있는 높은 곳의 거주 공간은 가오루에게 조
류(,』켠R)와 같은 안목을 갖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조류가 파충류
의 진화된 형태라고 한다면 주거 공간이 하늘을 향해 뻗기 시작한 것
은 인간의 진화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되었을까?가오루는 문득 그
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가오루는 최근 한 달 정도 전혀 흙
을 밟지 않았다
키와 거의 같은 높이의 발코니에 양 손을 대고 발돋움을 하려던 순
간 가오루는 어떤 기척을 느꼈다. 지금 처음 느끼는 기척이 아니다.
언제부터일까, 철이 든 무렵부터 종종 느꼈던 것이다. 다만, 이상하게
도 가족과 함께 있을 때는 이 같은 기척이 덮쳐오는 적이 없었다.
이제는 익숙해져서 등뒤에서 무언가가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어도 가오루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뒤돌아봤자 거기에 무엇이 있는
지 이미 알고 있다. 아무런 변화도 없는 거실, 안쪽의 주방과 그 옆
싱크대. 싱크대에서 는 변함없이 엄마 마치코가 설거지를 계속하고
있을 것이다.
가오루는 고개를 옆으로 흔들어 무언가가 보고 있다는 기척을 머
리에서 쫓아내려 했다. 그러자 기척은 어느새 한 발짝 쑥 물러나 밤
의 어둠에 섞여 하늘로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사라진 기척을 확신하고 가오루는 몸을 돌려 등을 난간에 기댔다.
조금 전과 마찬가지였다 주방에서 梁어 나온 빛줄기 속에 엄마의 그
림자가 흔들리고 있다. 자신의 배후에 있던 무수히 많은 눈들은 모두
어디로 가버린 걸까? 그래, 분명히 가오루는 여러 개의 눈을 느꼈다
무수히 많은 눈에 의해 관찰당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밤을 등지고 실내를 들여다보았을 때야말로 새까만 눈을 뒤에서
느껴야 할 테지만,그렇게 하면 오히려 눈은 어둠에 동화된 듯사라
져 버린다.
대체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가오루는 아버
지를 향해 이 물음을 던진 적이 없었다. 아무리 아버지라도 대답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늦더위에도 불구하고 왠지 한기가 느껴졌다. 더 이상 발코니에 서
있을 기분이 들지 않았다. 가오루는 발코니에서 거실로 돌아와엄마
가 있는 부엌을 살짝 들여다보았다 설거지를 마치고 엄마는 싱크대
가장자리를 행주로 닦고 있었다. 등을 이쪽으로 돌린 채 콧노래를 부
르고 있었다. 자신의 시선을 눈치채 주기를 마음속으로 빌면서 날씬
한 어깨 근처를 가만히 응시했다. 하지만 엄마는 돌아보지 않고 콧노
래를 계속 부르고 있을 뿐이었다.
가오루는 엄마에게로 살며시 다가가 등뒤에서 소리쳤다.
"엄마, 아빠는 몇 시쯤 돌아와?"
별로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지만 소리도 없이 다가가 말한
것치고는 소리가 좀 컸던 모양이다. 마치코는 튕겨 오르듯 두 팔을
움찔하고 움직이는 바람에 싱크대 가장자리에 놓여 있던 작은 접시
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으이그, 깝짝 놀랐잖니?"
마치코는 숨을 멈추고, 가슴에 양 손을 대면서 돌아본다.
"ㅁ1 t:3H ."
가오루는 사과를 했다. 그럴 생각이 아니었는데도 간혹 기습적으
로 엄마를 놀라게 하는 적이 종종 있었다.
"가오루, 언제부터 거기 서 있었니?"
"지금 막 왔어 ."
"엄마, 심장 약하다니 까. 놀래지 마라."
어느새 마치코는 책망하는 어조가 되었다.
"미안해. 놀랠 생각은 없었는데‥‥‥
"그래? 그런데 놀랐잖니 , 엄만."
"몰TM? 나, 아주 잠깐이지만 엄마 등을 쳐다보고 있었어."
"알 리가 있겠니? 엄마는 등에까지 눈이 붙어 있지 않은걸."
"에, 하지만, 난‥‥‥
말을 하려다 가오루는 그만두었다
· .난 뒤를 보지 않아도 등뒤에서 쏟아지는 시선을 느낄 수 있어 .
그런 말을 입에 담으면, 소심한 엄마를 더 놀라게 할 뿐이다
"아빠는 몇 시쯤 돌아와?"
가오루는 처음 질문을 반복했다. 아버지의 귀가 시간을 엄마가 파
악하고 있었던 적은 없으므로 질문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다.
"늦는 거 아닐까, 오늘도?"
아니나다를까 엄마는 애매한 대답을 하고 거실 시계로 슬며시 눈
을 돌렸다.
"또 늦어?"
재미없다는 듯 그렇게 말하는 가오루에게 마치코는 아버지의 입장
을 설명했다.
"지금,아버지 일이 힘들참니』새로운 연구 테마에 막 착수했으니
까 .'
아버지의 늦은 귀가에 엄마는 불만스런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자지 말고 기다릴까, 오늘은?"
설거지를 모두 마치자 마치코는 가오루 옆으로 와 타월로 손을 닦
았다.
"왜? 아버지한테 또 묻고 싶은 게 있니?"
"조금 "
"뭘 물어 보고 싶은데?"
"아니 , 아니야."
"엄마가 대신 들어 줄까?"
마치코는 자신이 듣는 역할이 되어 줄까 하고 제안해 보았다
"응?"
가초루는 그만 엉뚱한 소리를 내며 웃고 말았다.
'떠머, 엄마를 무시하면 안 돼. 엄마도 대학원까지 나왔다구 "
"알고 있어 . 하지만 영문과잖아?"
마치코가 대학에서 배운 것은 영문학이 아니라 미국 문화였다. 특
히 아메리카 원주민의 민간 전승에는 훤해서 지금도 독학삼아 관련
책을 읽고 있다
"괜찮으니까 얘기해 봐. 엄만 네 얘기가 듣고 싶어 ."
마치코는 손에 타월을 든 채 아들을 거실로 재촉했다. 오늘밤엔 왜
엄마가 흥미를 나타내는 걸까 하고, 가오루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평
소와 약간 반응이 달랐다.
가로루는 일단 자기 방으로 돌아가, 두 장의 프린트물을 가져와서
는 엄마 옆 소파에 앉았다.
"뭐야, 뭐야? 또 어려운 숫자만 빼곡히 늘어서 있는 건 아니겠지?"
마치코는 가오루의 손에 쥐어진 두 장의 종이를 보자마자 그렇게
말했다. 순수 수학 이야기가 나오면 마치 코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
"아니 , 그렇게 어려운 거 아니야."
가오루가 표를 위로 해서 두 장의 종이를 건네자, 마치코는 한 손
에 한 장씩 들었다. 양쪽종이에는 세계 지도 비슷한 것이 프린트되
어 있었다.
수학과 관련이 없다는 걸 알자 마치코는 겨우 안심이 된 모양이다.
"웬일이니? 지리 공부야?"
지리에 관해서 라면 마치코도 자신이 있었다. 북아메리카 대륙에
관해서는 특히 훤히 알고 있어서, 그 분야라면 아들의 지식을 훨씬
능가한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아니 , 중력 이상인데· . ."
"뭐야· . "
역시 마치 코에게는 관계가 먼 분야였던 모양이다 엷은 실망의 기
색이 눈에 떠오른다. 가오루는 몸을 내밀고 지구의 중력 이상을 한눈
에 알 수 있는 그 세계 지도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있지 , 중력식으로 얻을 수 있는 값하고, 중력 가속도를 지오이드
면상의 수치로 보정한 값 사이에는 작은 차이가 있는데, 그 차이를
플러스 마이너스 숫자로 지도에 표기한 거야."
두 장의 종이에는 각각 1, 2로 번호가 매겨져 있었다 1쪽의 세계
지도에는 중력 이상을나타내는등고선이 무수하게 그어져 있고,선
마다 '+'와 '-'가붙은 숫자가 적혀 있었다. 보통지도책의 등고선
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플러스 수치가 커지면 해발이 높아지고, 마이
너스 수치가 커지면 수심이 깊어지는 것과 같다.
중력 이상 분포도의 경우, 플러스 수치가 커지면 중력이 강하고
마이너스 수치가 커지면 그 지점에서의 중력이 약해지는 것을 의미
한다. 단위는 meal(밀리갈). 엷은색으로 농도가 그려져 있어, 횐색
으로되어 있는 부분은 플러스중력 이상,짙은 색으로 되어 있는부
분은 마이너스 준력 이상이라고 한눈에 알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
다.
마치코는 중력 이상의 분포도를 가만히 바라보고 나서 얼굴을 들
었다.
"그런데 중력 이상이란 게 뭐니?"
마치코는 아들 앞에서 아는 체하는 것 따윈 일찌감치 포기하고 있
었다.
"엄마, 지구의 중력이 어디에서나 같다고 생각하는 거 아냐?"
"태어난 이 래 그런 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실제로는 지구의 중력에 차이가 있어 ."
"이 지도로 말하자면 플러스 숫자가 커지면 중력은 크고. 마이너스
숫자가 커지면 중력은 작아진다는 거니?"
"응,지구 내부를 구성하는 물질의 질량이 균일하지 않다는 거야.
중력 이상이 마이너스인 경우. 그 아래쪽의 지질에는 질량이 작은 것
이 있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야. 일반적으로는 위도가 커짐에 따라서
중력도 커지는 거지만."
"그래서 , 그쪽 종이는?"
마치코는 2라고 번호가 매겨진 종이를 가리켰다 그것 또한 세계
지도였는데, 복잡한 등고선은 없고 대신에 검은 점이 수십 개 찍혀
있었다.
"세계의 장수촌이 있는 장소야."
"장수촌이라면, 오래 사는 노인들이 살고 있는 곳?"
중력 이상의 분포도 다음은 장수촌의 위치를 나타내는 세계 지도
이다. 마치코가 혼란스러워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리다.
"응 세계에는 다른 지역과 비교해서 분명히 오래 사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역이 이만큼 있는 모양이야."
가오루는 지도 위의 검은 점을 가리켰다. 특별히 이중 동그라미를
쳐둔 지점이 네 개 있었다 흑해 연안의 카프카스 지방, 일본의 사메
시마 제도, 카라코람 산맥의 카슈미르 지방, 남아메리카 에콰도르의
남부 지방. 모두 유명한 장수촌이 있는 지역이다
두 번째 종이에 관해서는 그 이상의 설명은 필요없었다. 마치코는
처음 보는 장수촌의 분포도를 대충 훌어보고 아들을 재촉했다.
"그래서?"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물론 두 장의 세계 지도의 관계이다.
"겹쳐 봐, 그 두 장을 "
마치코는 들은 대로 두 장의 종이를 겹쳤다
"불에 비춰 봐 "
가오루는 거실의 샹들리에를 가리켰다
마치코는 두 장의 종이를 겹친 채, 서서히 위로 올렸다. 무수한 등
고선 속에서 검은 점이 비쳐 보였다
"봐, 알겠지?"
가오루가 그렇게 말했지만 마치코는 아직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재지 말고 가르쳐 줘 "
"장수촌이 있는 위치하고, 중력 이상의 마이너스 지역이 딱 겹쳐지
崙短1 "
마치코는 종이를 겹친 채 일어나 빛으로 다가가서 보다 확실히 그
것을 확인해 보았다
분명히 장수촌의 위치를 나타내는 검은 점은 첫 번째 세계 지도의
마이너스 곡선으로 둘러싸인 범위에서만 나타났다. 게다가 그 마이
너스 수치가 매우 큰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다.
마치코는 과장되게 놀란 척해 보였다. 하지만 아무래도 석연치 않
은 듯 고개를 갸웃거리고만 있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쟁명과 중력 사이에는 뭔가 관계가 있는 건지도 몰라."
"아버지한테 물어 보고 싶다는 게 그거니7"
"응,뭐. 그런데 엄마,지구상에 생명이 자연 발생할 확률이 어느
정도일 거라고 생각해?"
"복권 1등에 당첨될 정도랄까?"
엄마의 대답에 가오루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작다구.
기적 일지도 모르고."
"그래도 제비뽑기에 뽑히는 사람은 꼭 있지 않니?"
"엄마가 말하는 건, 백 개 중 한 개가 당첨되는 제비뽑기를 백 명
이 산 경우고, 내가 말하는 건 주사위를 백 번 흔들어서 , 모두 여섯
개의 눈이 나온다면 어떨까 하는 거라구."
"속임수야, 그건 "
"속임수?"
"주사위가 백 번 계속해서 같은 눈이 나왔다면, 누군가 그 주사위
에 농간을 부린 게 뻔하지 않겠니?"
당연한 얘기잖아.'라고 말하는 듯 마치코는 가오루의 이마에 살짝
손가락을 댔다.
"농간이 라· . . "
가오루는 잠시 동안 떡하니 입을 벌리고 생각했다.
"그래, 농간‥‥ 어떤 속임수가 있는 거야.그렇지 않은 게 오히려
이상해 ."
"그렇지?"
"인간은 아직 그 장치를 알아채지 못하고 있을 뿐이야 하지만 엄
마, 만일 아무 속임수도 없는 주사위가 백 번 계속해서 같은 눈이 나
왔다고 한다면?"
"글쎄, 신 아니겠니? 그런 걸 할 수 있다는 전."
엄마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 어떤지 가오루로서
는 헤아리기 어려웠다.
"그런데 엄마, 어제 낮 드라마 기억나?"
가오루는 화제를 발전시켜 갔다
낮 드라마라는 것은 TV의 멜로 드라마를 말하는 것이다. 가오루는
낮에 방영하는 멜로물을 좋아해서 연속극 같은 것은 VTR로 녹화하
면서까지 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서 보지 못했어."
"글쎄,사유리 씨하고 다이조씨가,추억의 해변에서 재회했지 뭐
야."
TV의 등장 인물에 '씨' 자를붙여 가며 가오루는 어제 낮에 본 멜
로물의 내용을 간단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대충 다음과 같
은 스토리였다.
결혼 1년째인 젊은 커플, 사유리와 다이조는 여러 가지 오해가 겹
쳐 이혼의 위기에 빠져 있었다. 아직 서로 사랑하는 감정은 남아 있
었지만, 아주 사소한 사건들이 겹쳐지고 두 사람을 둘러싼 오해들이
뒤얽혀 수렁에서 빠져나을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런데 별거중인 두 사람은 어느 날 우연히 동해(일본에서 보면 서
쪽 바다로 발전이 덜 된 어촌이 많다:역자 주)와 접한 해변에서 재
회한다. 그곳은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추억의 땅이다. 두 사람은 공
유했던 그리운 시간을 기억해 내고, 당시의 감정이 되살아남에 따라
오해는 하나하나 풀리고, 애정의 재확인이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 진부하고 흔해빠진 스토리에는 마음이 따뜻해지는 역전
극이 준비되어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추억의 해변에서 우연히 재회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실은 그런 것이 아니고 두 사람 사이가
다시 좋아지길 바라는 친구들이 쓸데없는 참견을 하고 나서서 두 사
람이 그 해변에서 우연히 마주칠 수 있도록 계획을 짜놓은 것이었다.
"알았어, 엄마? 별거중인 커플이 해변에서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우
연히 만날 확률이란 게 어느 정도일 거라고 생각해?분명히 제로는
아니겠지. 우연히 만날 수도 있어. 하지만 아주 작은 우연에서밖에
얻을 수 없는 것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한다면, 뒤에서 조종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훨씬 자연스러울걸. 이 경우, 농간을 부린 것
은 사유리 씨하고 다이조 씨의 친구들이 되겠지만 "
"결국 이렇게 말하고 싶은 거니?제로에 가까운 확률을 극복하고
생명은 발생했다. 봐라, 우린 이렇게 존재하고 있다. 그렇다고 한다
면,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존재가 있을 것이다‥‥ 네가 말하고 싶은
건 대충 이런 거겠지?"
평소 가오루가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관찰당하고 조종당하고 있
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문득 뇌리에 끼여들었다. 그것이 자신에
게만 나타나는 특이한 현상인지 , 아니면 보편적인 것인지는 아직 확
인해 보지 못했다.
갑자기 오한에 횝싸여 가오루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보니까 창문
이 아직까지 조금 열려 있었다. 가오루는 소파에 앉은 그대로 몸을
비틀어 창문을 닫았다.
가오루는 좀처럼 잠들 수가 없었다. 아버지를 기다리는 걸 포기하
고,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간 지 30분이 지나고 있었다
후타미 가(家)에서는 부모 자식 세 사람이 일본식 다다미 방에서
함께 자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있었다. 서양식 방이 세 개, 다다미 방
이 하나, 5평 정도의 거실이 있는 집 구조는3인 가족에게는 충분히
넓은 것이어서 각각의 개인 방이 마련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잘 때
가 되면 모두 다다미 방에 모여들어 내천(川 )자 모양으로 눕는다. 요
를 제 장 깔고 한가운데 가 마치코, 양끝이 히데유키와 가오루의 자리
였다. 이것은 가오루가 태어난 이래 줄곧 변하지 않는 잠자리 형태였
다. 가오루는 눈을 천장으로 향한 채, 바로 옆에 있는 엄마를 작은 소
리로 불러 보았다.
"엄 마."
대답이 없다 마치코는 늘 이불 속에 들어가는 것과 거의 동시에
잠이 들어 버린다.
흥분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가오루의 가슴속에는 희미하게 설
레는 것이 있었다 중력 이상 분포도와 장수촌의 위치 관계에서 우연
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분명한 특색을 볼 수 있었다. 간단히 해석
해 본다면 인간의 생명, 혹은 지구상의 모든 생명과 중력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다는 얘기이다.
우연히 그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마침 Tlr에서 장수촌 특집을 하고
있을 때, 애용하는 PC의 디스플레이에 세계의 중력 이상 분포도가
표시되어 있었던 것이다. 최근 PC로 놀다 보면,어찌된 일인지 중력
이상에 관한 정보가 흘러들어 오곤 해서, 중력에 관한 것이 늘 마음에
자리잡게 되었다. 7V 화면과 PC 디스플레이· 제6감에 직감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있어 가오루는 장수촌의 위치를 중력 이상 분포도에
겹쳐 보았다
그것은 인간에게만 주어진 직감이다 아무리 정보 처리 능력이 뛰
어나고 계산이 빠르다고 해도 PC에는 영감이라는 기능은 갖추어져
있지 않다.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는 두 개의 사상(事象)을 붙여 고
찰해 보는 일 같은 것은 기계로서는 불가능하다. 인간의 뇌세포를 교
묘하게 하드웨어 속에 집어넣을 수 있다면 그것이 가능할지도 모르
지만
‥‥인간과 컴퓨터의 교미.
해보면 재미 있겠는걸. 그 결과 어떤 지적 생명체가 이 제상에 생겨
나게 될까? 가오루는 생각해 보았다. 상상의 나래는 끝이 없었다.
세계의 구조를 알고 싶다는 가오루의 소원은 여러 가지 물음이 되
어 겉으로 나타났는데, 무엇보다도 기본적인 것은 생명의 기원에 대
한 물음이었다
· .생명은 어떻게 해서 탄생한 걸까? 아니, 나 자신은 왜 여기에 있
걸까?
는
진화론이나 유전학에도 흥미를 느끼지만, 생물에 관한 의문은 그
한 점에 집약되었다. 무기물의 세계에서 서서히 발전을 이룬 RNA,
그리고 DNA가 생겼다고 하는, 코아세르베이트 가설의 변형을 가오
루가 일방적으로 믿고 있는 것은 아니다 생명을 끝까지 파고들어가
면, '자기 복제'가 큰 포인트가 될 것임을 이해하고 있었다. 자기 복
제를 담당하는 것이 DNA이며, 그 유전 정보에 의해 생명의 기초인
단백질이 합성된다. 단백질은 20종류의 아미노산 수백 개가 늘어서
만들어진다 DNA속에 들어 있는 암호라는 것은그나열 방식을지
정하는 언어이다.
아미노산은 어떤 결정된 나열 방식을 취하지 않는 한, 의미가 있는
생명으로서의 단백질이 될 수 없다. 원시의 바다는 생명 탄생의 계기
로 가득 찬 농밀한 수프에 비유된다. 어떤 힘에 의해 농밀한 수프가
어지럽게 뒤섞여 우연히 의미 있는 나열 방식이 되었다고 한다면, 그
확률은 대체 어느 정도일까?
좀더 알기 쉽게 가오루는 실제보다도 훨씬 작게, 자르기 좋은 숫자
를 가지고 생각해 보기로 했다. 가령 , 20종류의 아미노산이 백 개 늘
어서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생명의 기초가 되는 단백질이 된다고
하자. 그러면 확률은 20의 100승분의 1이 된다. 20의 100승이라고
하는 수는 전 우주의 수소 원자의 수보다도 훨씬 많다.
확률로서는 전 우주라고 하는 범위 안에서 단 한 개의 수소 원자가
당첨되는 제비뽑기를 여러 번 계속했는데 그 전부가 들어맞아 버린
것과도 같다
그것은 확률적 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은 탄생
했다. 어떤 조작이 있는 게 틀림없다. 어떻게 해서 확률의 벽을 극복
한 것인지 가오루는 알고 싶었다. '신'의 개념을 끌어내지 않고 그 농
간을 해명해 내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모든 것이 환상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솟구치는 적
도 있다 정말 육체가 육체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인지 확인할 수가
없다. 인식 능력에 의해 '있다'고 굳게 믿고 있을 뿐이라고 한다면,
실체는 거짓일 가능성이 있다.
소형 전구만이 비추고 있는 약간 어두운 다다미 방 안,고요한 탓
인지 가슴의 고동이 두드러지게 들린다. 역시 지금 이 순간,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심장 소리를 믿고 싶은 기분이
었다
오토바이의 폭음이 가오루의 귀에 올려퍼졌다. 들릴 리가 없는 소
리 . 실제로는 귀에 닿지 않을 소리였다.
"아 아빠다. "
가오루의 눈에는 100미터 아래의 지하 차고로 오프로드 바이크(비
포장 도로를 달리기에 적당한 구조의 경량 오토바이 ' 역자 주)를 몰
고 미끄러져 들어가는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새로 구입해 아직
2개월도 되지 않은 오토바이 . 오토바이에서 내린 아버지는 만족스런
얼굴로 새 오토바이를 바라보고 있다.
평소 탈 만한 시간이 없어서인지 히데유키는 직장을 오가는 데 오
토바이를 이용하고 있었다. 지금 막 일을 마치고 아버지가 돌아온 것
이다. 그 분위기가 좀더 구체적으로 전해져 온다. 틀림없다. 떨어져
있어도 오늘밤의 가오루는 제6감으로 아버지의 움직임을 포착할 수
있었다
가오루는 아버지의 일거수 일투족을 떠올리고 움직임을 이미지 속
에서 좇았다 오토바이의 엔진을 끄고, 헬멧을 겨드랑이에 끼고, 엘
리베이터 홀에 서서 층수가 표시된 램프를 올려다보는 아버지 .
29층까지 올라가는 시간을 가오루는 하나, 둘 하고 셌다. 엘리베이
터 문이 열리고, 융단이 깔린 복도를 아버지가 빠른 발걸음으로 걷고
있다. 그리고 바로 지금, 2916호 앞에 막 섰다. 주머니를 뒤져 카드
키를 꺼내 찔러넣고‥‥
상상 속에서의 움직임과 소리가 현실의 움직임과 소리를 대신하게
된 것은 현관문이 열리며 '찰칵' 하는 순간부터 이다. 공상과현실이
만나는 아슬아슬한 순간, 그 반응을 얻은 가오루는 가슴속에서 외쳤
다.
역시 아빠야.
가오루는 벌떡 일어나 아버지를 맞이하러 가려 했지만, 충동을 억
지로 억눌렀다. 지금부터의 아버지 행동을 계속 예상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자고 있는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히데유키는 조심성 없이 복도
를 걷고 있는 것 같다. 겨드랑이에 긴 헬멧이 복도 벽에 부딪혀 소리
를 냈다. 평소와 다름없는 음량으로 롯노래를 부르고 있다. 히데유키
가 움직이자 왠지 평소보다도 큰 소리가 났다. 몸에서 발산되는 에너
지가 많기 때문일까?
가오루는 그때부터 갑자기 아버지 행동을 읽을 수가 없게 되었다.
모든 소리가 멈추고,아버지가 어디에 있는지 짐작할 수 없게 된 것
이다. 머릿속이 텅 빈 것같이 느껴지더니 다다미 방 문이 난폭하게
열렸다 복도조명이 갑자기 쏟아져 들어왔다 그다지 밝지 않은데도
가오루는 눈이 부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예상치 못한 행동이었다.
히데유키는 다다미를 밟고 들어와 가오루가 자고 있는 이불 옆에 서
서 무릎을 꿇고 입을 가까이 했다.
"이놈, 일마나."
아버지는 가끔 가오루를 '이놈'이라고 불렀다. 가오루는 지금 막
잠이 깬 것처럼 가장하고 물었다.
"어, 아빠, 지금 몇 시야?"
'밤 1시다. "
'벌써 ?"
'발리 일어나."
아버지는 종종 밤중에 억지로 깨워서 새벽녀까지 맥주를 마시며
잡담하는 것을 즐겼다. 그런 다음날, 가오루는 학교를 쉬고 오전 내
내 잠을 잔다.
지난 주에도 이틀, 아버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지각을 했다. 히데
유키는 초등학교 공부 따윈 무의미하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가오루
는 아버지의 비상식적인 행동에 종종 기가 막혔다. 학교는 아이에게
있어서 공부하는 곳뿐만 아니라 놀이터이기도 한데 , 아버지는 그 점
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일, 나, 학교에 가고 싶은데."
가오루는 옆에서 숨소리를 내고 있는 어머니를 깨우지 않도록 목
소리를 낮춰 말했다. 일어나서 함께 이야기하는 것도 좋고, 바라는
바이기도 하지만 너무 늦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다짐을 해둘 작
정이었다.
"개구쟁이 주제에 분별은 있군 넌 대체 누굴 닳은 거냐?"
소리를 죽이는 가오루의 노력을 무위로 돌리는 듯한 거침없는 말
투에 가오루는 항복을 하고 벌떡 일어났다 아버지를 빨리 이 방에서
내보내지 않으면 어머니가 깨고 만다.
정말 누구를 닮은 것일까? 가오루와 아버지는 얼굴 생김새가 별로
닳지 않았다. 성격으로 말하면, 덜렁대는 아버지에 비해 가오루의 신
경은 정장히 섬세했다. 아이답다고 한다면 그것으로 그만이지만, 아
버지와 아들의 성격과 겉모습의 불일치를 가오루는 가끔 이상하게
여겼0.
가토루는 아버지의 등을 밀어 다다미 방을 가로질러 복도로 나왔
다. 이어 아버지의 몸을 계속 밀어 거실 입구를 막 빠져나갔을 때,
'후유, 무거워 .' 하고 한숨을 쉬며 멈춰 畿다.
아들의 힘에 밀려 밖으로 나가며 히데유키는 일부러 힘을 넣어 방
귀를 뀌어 보기도 하고. 천박한 웃음소리를 내거나 하며 맥없는 저항
을 하고 있었지만, 주방 식탁 옆에 가오루가 멈춰 서자 생각이 난 듯
이 '슥' 몸을돌려 냉장고를 열었다.
맥주를 꺼내 유리잔에 붓고는 아직도 '하아 하아' 하고 숨을 몰아
쉬는 가오루 앞에 내밀었다.
"너도 마실래?"
히데유키는 밖에서 술을 마시고 들어온 게 아니었다 멀정한 얼굴
이었다.
"안 돼. 그런 말 하면 또 엄마가 화낸단 말이야 "
"철든 척하는 말을 하고 있군."
히데유키는 과시하는 듯이 맥주를 비우고 입을 닦았다.
"아빠 같은 사람을 아버지로 두고 있으면, 자식은 정신 차리지 않
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게 돼."
히데유키는 목젖을 울리며 벌컥벌컥 두 잔째를 비웠는가 싶더니
깔짝할 사이에 맥주 한 병을 비웠다.
"후, 이렇게 가오루 녀석의 얼굴을 보면서 마시는 맥주가 세상에서으
눈
제일 맛있지 "
가오루 역시 아버지가 술 마시는 데 함께 있는 것이 싫지 않았다.
바라보고 있기만 해도 즐거워질 정도로 맛있게 마시는데다가 직장에
서의 피로가 풀려 기분이 편안해져 가는 모습을 손바닥 보는 것처럼
알 수 있어 자기 기분까지 편안해졌다.
가오루는 눈치 빠르게 냉장고에서 맥주 한 병을 더 꺼내 아버지 잔
에 따라 주었다. 하지만 히데유키는 아들에게 '고맙다'라고 말하지도
않고 반대로 명령을 내린다.
"야. 이놈아. 가서 마치 깨워 와."
마치는 물론 어머니인 마치코를 말한다.
"안 돼, 엄만 피곤해서 자고 있으니까."
나도 피곤한데 이렇게 깨 있잖아?"
"아빠는 좋아서 하는 거니까 괜찮지만 · ."
"괜찮으니까 깨워 와."
"엄마한테 무슨 볼일 있어?"
'긴어. 맥주를 마시게 해야지 ."
"엄만 마시고 싶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괜찮아, 내가 부른다고 하면 벌떡 일어날 거야."
"아빠하고 나만 있어도 되잖아 물어 보고 싶은 것도 있는데."
"음 딱딱한 말은 하지 않길 부탁한다. 마치만 따돌릴 수는 없잖
냐."
"결국 늘 이렇게 된다니까."
가오루는 마지못해 침실로 향했다. 어찌된 일인지 자고 있는 어머
니를 깨우는 것은 아버지가 아닌 가오루의 역할이 되어 있었다. 몇
년 전인가, 히데유키는 밤중에 깨우려다가 아내가 기분 나빠하는 바
람에 혼이 났던 모양이다.
후타미 가(家)에서는 마지막에 늘 아버지의 고집이 통하고 만다
히데유키가 아버지로서의 위엄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반
대로 세 식구 중에서 제일 유치한 면이 있기 때문이다.
가오루는 과학자로서의 아버지의 재능을 존경하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성인으로서는 뭔가 부족한 점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 확실히 이해하
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의 숙면을 방해하는 것은 마음이 무거웠다. 가오루는 침실
로 돌아가자 주저하면서 문을 살짝 열어 보았다. 그런데 마치코는 요
위에서 상반신을 일으키고 손으로 머리를 매만지고 있었다. 일부러
깨을 것까지도 없었던 것이다. 귀가한 아버지의 소란스러움에 잠이
깨고 말았던 모양이다.
"엄마, 미안해 ."
가오루는 아버지를 대신해 사과했다.
"괜찮아."
가오루는 어머니에게 혼난 적이 거의 없었다 원래 무리한 요구 같
은 것은 하지 않기 때문이지만, 가오루의 소원은 늘 어머니에 의해
이루어졌다. 아직 어린 가오루에게 전적인 신뢰를 보내고 있는 것을
말투나 행동을 통해 알 수 있어 기쁨과 동시에 책임감을 느끼는 때가
많았다.
후타미 가의 3자 견제 상태, 가오루는 부모와 자신의 관계를 그렇
게 부르고 있었다. 마치 가위 바위 보와 같아서 아버지와 어머니와
가오루에게는 각각 강한 상대와 약한 상대가 있다.
가오루는 엄마에게는 강하지만 아버지에게는 약하다. 그래서 아버
지의 불합리한 행동에 동참하게 되거나 명령을 듣는 처지가 되고 만
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강해서 멋대로 대우할 수 있지만, 아내인 마치
코에게는 왠지 강한 태도로 임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내의 기분이 나
빠지거나 하면, 그야말로 안색을 바꾸고 조그맣게 움츠러들고 만다.
그래서 자고 있는 아내를 깨우러 가는 역할을 아들에게 떠맡길 수
밖에 없다. 엄마는 아들의 요구에는 관용적 이지만 남편의 비상식적
인 행동에는 때로 강하게 나와서 마치 어린애를 다루는 듯한 충고 방
식을 취하곤 한다
강약 관계의 멋진 균형에 의해 가족의 안녕은 유지되는 것이라고
아버지가 자랑스러운 듯 말한 적이 있었다. '카오스의 가장자리',
'자기 조직◎ 등의 낡은 용어를 사용하며 히데유괴는 과학자답게 가
족의 관계를 얼버무린다. 가족 구성원이 의도한 결과로 생긴 것은 아
니다. 특징 있는 관계는 3자의 캐릭터가서로섞여 갈등을 반복하는
중에 자연스럼게 표면에 드러난 것이다.
"아빠는 뭐하니 ?"
마치코는 자신의 목덜미에 가볍게 손톱을 세워 천천히 머리를 빗
어 올리면서 물었다
"맥주 마시고 있어 ."
"못 말리는 사람이야, 이런 늦은 시간에."
"엄마도 같이 있는 게 어떠냐고 했어 ."
마치코는 코웃음을 치면서 이부자리에서 일어났다.
"배가 고픈 걸까?"
"글쎄, 엄마 얼굴이 보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닐까?"
가오루가 진지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마치코는 다시
코웃음을 치면서 미소를 머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라고 말
하고 싶은 듯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가오루는 부모의 음란한 면을 벌써 알아차리고 있었다.
3개월 전, 장마철인데도 비가 내리지 않아 이번 여름 열대야의 시
작을 예감하게 하던 6월 중순의 밤, 가오루는 생각지도 못한 모습을
한 아버지와 주방에서 마주쳐 약간의 충격을 맛보았던 것이다
그날 밤, 자기 방에 틀어박혀 PC로 놀고 있던 가오루는 갈증을 참
지 못해 생수라도 마시려고 주방으로 발길을 옮겼다 일이 있어서라
며 아버지와 어머니는 각각의 방에 틀어박혀 온 방은 쥐죽은 듯이 조
용했다.
일하는도중에 부모는 그대로 잠들어 버리는 적이 있었다 가오루
는 오늘밤도 또 그런가 보다라고 만 여기고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가 같은 방에 있었다는 것은 깨닫지도 못했던 것이다.
가오루는 불도 켜지 않은 채, 어둠 속에 서서 생수를 컵에 붓고 얼
음 덩어리 한 개를 입에 처넣었다
페트병을 냉장고에 집어넣으려고 다시 한 번 냉장고를 열었을 때 ,
가오루는 갑자기 주방으로 들어온 히데유키와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
았다. 냉장고에서 새어나오는 빛이 전라인 아버지를 비추고 있었다.
히데유키는 놀라 홱 물러설 뻔했지만,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뭐야, 깨 있었냐?"
라며 자신이 알몸인 것 따윈 상관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마시고 있던
컵을 가오루에게서 빼앗아 꿀꺽꿀꺽 물을 마셨다
가오루가 놀란 것은 아버지가 전라인데다가 성기가 평소보다 커져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엷은 액체에 덮여 번들번들한 빛을 발하
고 있었다. 함께 목욕할 때는 힘없이 늘어져 있는 때가 많았다. 그런
데 지금은 신체 기관의 일부로서 역할을 다한 자신감을 내비치면서
생생하게 우뚝 솟아 맥박치고 있다.
아버지가 물을 다 마실 때까지 가오루는 아버지의 그 부분에서 눈
을 뗄 수가 없었다.
"뭘 보고 있어? 부럽냐?"
"별로 ."
가오루는 쌀쌀맞게 대답했다 히데유키는 약간 등을 구부려 자신
의 성기 끝에 오른쪽 집게손가락을 대고 정액 한 방울을 집어 가오루
의 눈앞으로 내밀었다.
"봐라, 네 선조님이다. "
자못 진지하게 아버지는 그렇게 말해 버리더니 가오루가 기대고
있던 시스템 키친의 싱크대 가장자리에 손가락을 문질러 발랐다.
"01 ?"
가오루는 몸을 비틀어 싱크대 가장자리에 묻은 하얀 방울을 바라
보았다.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히데유키는 몸을 돌려 등을
보였는가 싶더니 화장실 쪽으로 사라져 갔다. 잠시 지나자 활짝 열린
화장실로부터 모호한 방뇨 소리가 들려왔다
가오루는 가끔 아버지가 멍청한 것인지 영리한 것인지 알수 없었
다. 정보 공학계의 뛰어난 연구자임에는 틀림없지만, 취하는 행동으
로 말하자면 어린아이 이하이다. 존경은 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안심
하고 보고 있을 수 없는 구석이 있었다. 어머니의 마음 고생을 조금
알 것 같았다
가오루는 그런 것을 생각하면서 , 아버지가 말한 '선조님'의 모습을
엿보았다
콩알 크기의 물방울 속에서 헤엄쳐 다니던 정자는 스테인리스에
열을 빼앗겨 서서히 죽어갔다. 물론 육안으로 그 모습은 보이지 않는
다. 하지만 가오루는 하층부부터 시체를 쌓아 올려가며 죽어가는 정
자들 한마리 한마리의 얼굴까지 상상해 가면서 정자 무리들의 리얼
한 운동을 파악해 보려 했다.
아버지의 몸 속에서 감수 분열을 반복해 탄생한 정자는 난자와 마
찬가지로 염색체의 수가 체세포의 절반이다. 수정란이 되어서야 겨
우 세포와 같은 수의 염색체를 갖기에 이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쪽
짜리라고 할 수는 없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정자와 난자야말로 신
체의 기본적인 구성 단위라 할 수 있다. 생식 세포만은 생명 탄생 이
래 면면히 이어지고 있어서. 불사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토 과언이 아
니다.
그건 그렇고.아버지의 정액을 육안으로 찬찬히 관찰하는 기회를
가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자신이라고 하는 생명의 근
원이 여기에 있다.
·정말 난 이런 작은 것에서 태어난 걸까?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이상한 기분이 되었다. 아버지의 몸에서 만들
어지기까지 , 정자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무에서의 창조. 생명
만이 가지는 신비의 힘이다.
아버지가 방뇨를 마치고 돌아온 걸 깨닫지 못하고, 가오루는 계속
관찰하고 있었다.
"뭐하냐, 이놈아?"
스테인리스에 부착된 정액을 계속 바라보고 있는 가오루에게 아
버지가 물었다. 자신의 일시적인 장난 따윈 이미 잊어버린 모양이
다.
"아빠 걸 관찰하고 있어 ."
가오루는 얼굴도 들지 않고 말했다. 히데유키는 가오루가 보고 있
는 것에 그제야 생각이 미쳐 짧게 웃었다.
"바보 그런 걸 열심히 관찰하는 놈이 어딨냐'1 창피하지 않냐',l"
히데유키는 부엌에 놓인 행주로 정자를 닦더니 싱크대 속으로 툭
던져 넣었다. 동시에 가오루의 머릿속에서 형성되고 있던 생명의 이
미지가 차츰 약해져 사라져 버렸다.
뭔가 기분 나쁜 예감에 사로잡혔다. 자신의 몸이 걸레로 닦여 툭
던져져 버린 듯한 연상이 솟구쳤기 때문이다.
맞닥뜨려서는 안 되는 부모의 비밀도 아버지와 같은 태도로 나오
면, 금기고 뭐고 있을 턱이 없었다. 3개월 전의 밤을 가오루는 어젯
밤 일처럼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물론 마치코는 침실을 빠져나와 냉장고를 열거나 화장실에
들르거나 한 과정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어떤 장난을 쳤는지 알 길
이 없었다.
알았다면 수치스러운 나머지 불같이 화를 내고 한동안은 남편과
말도 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오늘밤만 하더라도 일어나서 술
안주를 만들어 주려는 따위의 마음은 들지 않았을 것이다
"못 말려 ."
마치코는 몇 번이고 중얼거리면서도 무슨 까닭인지 부랴부랴 머리
를 매만지고, 엇갈려 있던 파자마 단추를 다시 채웠다. 그런 광경도
가오루에게는 흐뭇하게 비쳤다.
슬리퍼를 신고 걸어가는 어머니의 뒤를 따라 가오루는 거실로 들
어갔다.
"미안하군, 깨워서 ."
히데유키가 마치코를 향해 말했다.
"됐어요. 그것보다 배고픈 거 아니에요?"
"응, 조금 "
"뭐 만들까?"
바로 주방에 서려 하는 마치코를 말리며 히데유키는 맥주 잔을 내
밀었다.
"우선 한잔 마셔 "
마치코는 잔을 받아들고 홀짝홀짝 할듯이 마셨다. 탄산이 질색인
마치코는 단숨에 맥주를 비우지 못한다 그렇다고 알코올에 약한 것
은 아니고 상당히 버틸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이다.
아내가 맥주로 한숨 돌리는 것을 보고서야 히데유키는 겨우 렉타
이를 풀었다 연구원이라는 직업상,그다지 넥타이를 착용할 의무는
없다.
그러나 히데유키는 단정하게 양복을 입고 셔츠 윗 단추까지 채우고
는 오토바이로 연구소로 출퇴근한다. 양복 차림으로 오프로드 바이
크를 모는 것은 남의 눈에 상당히 기이하게 비쳐질 테지만, 히데유키
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소시지를 볶는 어머니 옆에서 아버지는
오늘 하루 연구실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들려 주기 시작했다. 아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히데유키는 동료 이름을 들먹이며 때로 玲아내리면
서 재미있고 우습게 하루의 사건들을 이야기했다 아들이 옆에 있는
것을 잊은 듯 부모가 둘만의 세계에 몰두하자, 할 일이 없어진 가오
루는 서서히 따분해져 갔다
남겨진 가오루를 깨달은 듯, 마치코가 화제를 바꾸었다.
"그러고 보니 가오루, 아빠한테 그거 보이면 어때?"
"뭐 ?"
갑자기 화제를 바꾸자 가오루는 이야기의 흐름을 읽어 내지 못했
다.
"그 중력 이상이 어떠니 저떠니 하는‥‥‥
"아, 그거?"
가오루는 서랍에 넣어 둔 두 장의 프린트에 손을 榮어 히데유키 쪽
으로 내밀었다.
"놀랄 거예요. 이 애의 대 발견이니까 "
어머니는 야단스럽게 그런 식으로 말하지만, 가오루에게는 그다지
대발견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어디 어디?"
히데유키는 두 장의 프린트를 받아들어 얼굴 가까이에 대고 보았
다. 등고선이 그어진 세계 지도에 플러스 마이너스 숫자가 기입된 프
린트를 보자 히데유키는 몇 초 만에 의미를 깨달았다.
"뭐야? 중력 이상 분포도 아냐?"
눈을 돌려 다른 한쪽 프린트를 보았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간단히
정체를 알아낼 수 없는지 히데유키는 얼굴을 찡그렸다. 히데유키의
뇌에는 지구상의 지질 분포도가 거의 들어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보
아도 두 번째 프린트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검은 마크가 무엇을 의
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중력 이상과 관련해서 갖가지 추리를 하며 지하에서 잠자는 광물
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리라
"뭐냐, 이건?"
히데유괴는 항복하고 아들에게 물었다.
"전세계의 장수촌 위치야."
"장수촌?"
말을 받음과 동시에 히데유키는 두 장의 프린트를 서로 겹쳐 본다.
"뭐야? 중력 이상의 마이너스 지역에만 장수촌이 존재하잖아?"
과연 하고 가오루는 감탄하고 만다. 멋진 번뜩임을 발견하는 것이
아버지와 대화하는 즐거움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렇지?"
가오루는 신이 나서 대답했다
"어떻게 된 걸까?"
히데유키는 자문하더니 프린트에서 얼굴을 든다.
"Olfl 5·H010t?"
가오루가 걱정한 것은 자신만 몰랐을 뿐이지 일부 사람들은 이미
이 우연의 일치를 깨닫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아니. 적어도 난 몰라."
"그래 ?"
"그럼 인간의 수명과 중력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다는 건가? 이만
큼 명확한 특징이 있다면 우연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거지 . 그런데
이 녀석아, 장수촌의 정의는 뭐지7"
히데유키가 의아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같은 의문을 가오루
도 느끼고 있었다. 도대체 '장수촌'의 정의라는 것은 무엇인가',1 다른
지역과 비교해 오래 사는 사람이 많다는 것,혹은 평균 수명이 다른
지역보다 길다는 것이라면, 일본 전역을 거대한 장수촌으로 간주해
도 지장이 없을 것이다.
좀더 한정된 지점으로 주위의 지역과 분명히 선을 그어 100살 이
상의 인구가 마을 총 인구에 대한 비율이 높은 지역이라고 규정하는
쪽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는 장수촌의 수학적인 정의가 이루어져 있지
않다. 통계적 ·경험적으로 장수하는 사람이 많다고 간주되고 있는
지역이 그렇게 불리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다지 과학적인 정의 따윈 없는 것 같아,"
인간 냄새가 빠지지 않는 장수촌이라는 말의 느낌과 수치로서 명
확히 표현되는 중력 이상 분포도가 딱 부합되는 것이 이상해서 견딜
수가 없다
가오루나 히데유키토 그 생각은 마찬가지였다.
"모호해. 하지만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오는 걸까?"
아무래도 납득이 안 되는 듯 히데유키는 같은 말만 중얼거리고 있
었다
"아빠는 중력과 생명의 관계에 대해서 뭐 들은 것 있어?"
"응, 무중력 공간에서 닭에게 달걀을 낳게 하는 실험을 했더니 무
정란이었다고 하는 얘기는 들은 적이 있어."
"그거라면 나도 알아 상당히 옛날 얘기잖아?"
가오루는 3개월 전에 관찰한 아버지의 정자를 머리 한 구석에 떠
올리며 무중력 공간에서 교미한 후 무정란을 낳은 닭에 관한 기사를
기억해 내고 있었다 어떤 실험이었는지는 잊어버렸다. 훨씬 이전에
행해진 실험 결과를 현재의 성풍속과 연관지어 대중 잡지에서 보도
했던 것이다
수정하지 않고 난자의 세포 분열만으로 탄생해 성장한다면,과연
어떤 인간이 만들어질까 하고 상상력은 비약한다. 겉보기는 맨들거
리는 달걀 모양 얼굴을 한 여자가 가오루의 뇌리에 떠올랐다 부
f: El
몸을 떨어 이미지를뿌리치려 했다 그러나 반들반들한 여자의 얼굴
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논리적인 연관은 아직 아무것도 되어 있지 않을 테지만‥‥ 그런데
넌 왜 중력 이상과 장수촌을 연결시켜 본 거냐?"
가오루는TV에서 장수촌 특집을 하고 있을 때,중력 이상 분포도
가 PC에 떠올라 직감을 얻은 것을 설명했다
"그러니까 단순한 우연이야."
"무의미한 우연으로부터 는 아무것도 태어나지 않아 예를 들면, 그
래, 징크스야.
"징크스?"
그다지 과학적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징크스류를 왜 여기에서
아버지가 늘고 나오는 것인지 가오루는 어느 절도 이해할 수 있었다
마치코도 대화에 참여할 수 있게 실마리를 만들려는 것이다.
술안주를 대충 다 만들고 주방 테이블에 앉아 있던 마치코는 한마
디도 끼여들지 않고 남편과 아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
다지 재미 없어하는 모습도 보이고 있지 않았지만 남편의 입에서 징
크스라는 말이 나오자 약간 몸을 내밀었다.
히데유키는 아내의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이봐, 마치 . 뭐 재미있는 징크스 몰라?"
"왜 나한테 물어요?"
"왜는. 좋아하지 않나?점이라든가 주술이라든가. 알고 있지',l마
치는 늘 주간지의 점 코너를 業어보고 있잖아. 게다가 세계의 민화에
도 철하구."
"글쎄요, 징크스라. '애인한테 손수건을 선물하면 헤어지게 된다 '
라는 건 어때요?"
"그런 건 누구나 알고 있어 좀더‥‥ 뭐라고 할까? 색다른 건 없을
까?"
가오루는 아버지가 어떤 징크스를 요구하고 있는 것인지 어느 정
도 추측할 수 있었다. 전혀 관계 없는 사상(事象)과 사상(事象)이 우
연으로 연결되어 있는 예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색다른 거요?그럼, 이런 건 어때요'~l '강을 헤엄치고 있는 검은
고양이를 보면 가까운 사람이 죽는다. '"
"어 , 진짜 그런 게 있어?"
가오루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끼여들었다
"있어. 당신도 알고 있죠?"
마치코는 히데유키에게 동의를 구했다. 하지만 히데유키는 웃으면
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말했다
"좀더 엉뚱한 건 없나?"
"'집을 나을 때 의자 등이 창 쪽을 향해 있으면 지갑을 잃어버린
다. 같은 거는요?"
히데유키는 탁 하고 두 손을 쳤다.
"좋아,그걸로 얘길 해보자. 됐냐'~7진위는 명확하지 않지만,실제
로 그런 징크스가 있다고 가정하고."
"있어요."
"알았어, 알았어 ."
마치코가 입을 삐죽 내미는 것을 보고 히데유키는 두 손을 모아 사
과하는 시늡을 해보였다.
"여기에는 두 가지 사상이 나열되어 있어. '집을 나을 때 의자등
이 창 쪽을 향하고 있다. 라고 하는 사상과 '지갑을 잃어버린다. '라고
하는 사상. 이 둘은 과학적으로는 아무런 관계도 없지. 세계에는 여
러 가지 징크스가 있는데 그 종류에 따라 생겨나는 방식도 다를 거
야. 그렇지만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거리상으로 떨어져 있
어서 사람의 왕래가 없는 장소에도 아주 똑같은 징크스가 있다는 점
이야. 만일 지금, 마치가 말한 색다른 징크스가 세계의 여기저기에
있다고 한다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하고 생각하는 게 당연하겠지 "
"그래서 똑같은 징크스가 실제로 있어?"
가오루는 마치코와 히데유키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어때, 마치?"
히데유키는 아내에게 대답을 재촉했다
"물론 있어요. 아주 똑같아요.지금 내가 말한 것도 그런 거니까.
유럽에도 아메리카 대륙에도 있어요."
이번에는 가오루와 히데유키가 수상쩍다는 듯이 얼굴을 마주 본
다.
"그런데 마치는 징크스가 왜 생기는지 생각해 본 적 있어?"
'崙어요."
단호하게 마치코가 말했다
"임마, 넌 어때?"
"그런 건 심리에 관한 거잖아? 그러니까 난 아직 자신 없어 ."
히데유키의 앞에는 이미 빈 맥주 병 5개가늘어서 있다. 슬슬 대화
에 시동이 걸리기 시작할 무렵이다.
"대체 징크스란는 건 뭘까? 어떤 장면을 보거나 경험하거나 한 후
에는 반드시 정해진 사건이 생긴다고 하는 전설이야. 그 사건은 보통
나쁜 쪽이 많지만, 물론 좋은 내용도 있고, 또 길흉이라는 표현으로
한정지을 수 없는 것도 있어 알기 쉽게 말해 버린다면, 징크스라는
건 어떤 사상과 사상을 관계짓는 것이지 . 그 관계가 과학적으로 설명
되는 경우도 있어 . 예를 들면, '동에서 서로 구름이 흘러가면 비'라고
하는 징크스는, 현대 기상학으로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 거지 . 혹
은 감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 '사진에 찍히면 수명이 짧아진
다. 라고 하는 것도 대략 이해할 수 있어 . 젓가락이 부러진다거나 조
리의 발가락 끈이 끊어진다거나,검은 고양이나 뱀을 본다거나 하는
것도뭐 이해할수 있겠지 어쩐지 기분 나쁘니까 말야.검은고양이
나 뱀이라는 건 인류 공통의 불안한 기분을 일깨우는 뭔가를 갖고 있
으니까.
여기서 문제삼고 싶은 건, 이치에 기초하고 있지 않은 것이야.모
호하고 왜 이런 징크스가 생겨 버렸는지 전혀 알 수 없는 것. 예를 들
면,마치가말한 것이 그에 해당되지. '방을나설 때 의자등이 창쪽
을 향하고 있다. '라고 하는 장면과 '지갑을 잃어버린다. '라고 하는 사
건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다는 거지?"
히데유키는 거기에서 말을 멈추고 가오루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
았다.
"경험적으로 많다는 거지?"
"그런 거겠지. '방을 나설 때 의자 등이 창 쪽을 향하고 있다'면
'지갑을 잃어버릴' 확률이 높아지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거
fl ."
"그렇지만 통계적으로 봐서 그대로일 필요는 없지?"
"어쩐지 · 정도로 충분한 거야. 지갑을 잃어버렸을 때 , 마침 의자
등이 창 쪽을 향하고 있었다고 하자. 다음에 지갑을 잃어버렸을 때도
역시 의자 등이 창 쪽을 향하고 있었다. 당사자는 이 두 가지 사상이
관련되어 있다고 주목하고 다른 사람에게 말한다. 거기에서 중요한
것은들은사람에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 '음,그런 일이란 게 있
어.'라고 맞장구를 치는 거야. 제3자에 의해 무시되어 버리면 아마
구전으로 정착되는 일은 없을 테지 . 하지만 일단 징크스로 정착되어
버리면, 의식하는 것에 의해 거꾸로 영향을 미치게 되어 살아남을 기
회가 많아지지 일단 관계가 생겨 버리면, 공통으로 의식되는 것에
의해 기반이 보다 견고해져 가는 게 아닐까?현실과 가상이 호응하
기 시작하는 거야."
"'방을 나설 때 의자 등이 창 쪽을 향하고 있다. '고 하는 사상과
'지갑을 잃어버린다. '고 하는 사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서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거야?"
"깊은 곳에서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을 완전히 버릴 수는 없지 ."
징크스의 비유를 사용해서 아버지는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걸까?
징크스 대신에 생명을 갖다 놓아도 이야기가 성립되는 듯한 기분이
든다
"생명‥‥‥
가오루는 중얼거렸다. 그 말을 신호로 해서 세 사람이 서로 마주
보았다.
"루프를 연상시키네요."
화제를 바꾼 것은 마치 코였다 '생명'이라고 하는 말에서 자연스럽
게 발상된 모양이다. 그러나 히데유키는 마치코에게 눈짓을 해 화제
의 전환을 재촉했다. 히데유키는 루프를 화제로 올리고 싶지 않은 모
양이다.
의학부 출신인 히데유키는 졸업 후에 논리학으로 전공을 바꾸어
대학원에 진학, 메타 수학의 개념을 배우게 되었는데, 그럭저럭 하는
동안에 일단 사그라들었던 생물계에 대한 흥미가 되살아났다. 그 무
렵 수학의 언어로 생명이 설명될 수 있다면 재미 있겠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생물에 대한 흥미가 수학이라는 표현
방법을 얻어 활기를 떤 것이다.
그런 경위도 있어서, 대학원 박사 과정을 마칠 무렵, 미일 합동 인
공 생명 개발 프로젝트 연구원으로 초빙을 받자, 두말 없이 응했다.
컴퓨터 내부에 인공 생명을 만들어 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히데유
키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이었다.
그때 히데유키는 20대 후반이었는데, 결혼은 했지만 아이가 아직
없었다. 연구원이 된 지 5년 후, 예상치 못하게 프로젝트가 중단되었
다. 실패가 아닌, 일단의 성과를 올린 후의 종료였다. 그렇지만 히데
유키의 눈에는성공으로비치지 않았다. 종료 방식이 아무래도납득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히데유키가 젊은 정열을 쏟다 도중에서 좌절해 버린 인공 생명 프
로젝트‥‥ 그 이름이 바로 루프였다.
히데유키는 억지로 루프에서 화제를 돌려 가오루에게 새로운 의문
제시했다.
"생명의 발생은 우연일까 혹은 필연일까? 넌 어느 쪽이라고 생각
을
하니?"
"그 물음에 관해서는 잘 모르겠어."
가오루는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 자신이 존재하고 있
다고 해서 필연이라고는 딱 잘라 말할 수 없다. 지구 외의 곳에서 생
명이 확인되지 않은 이상,우주에서 유일한 우연의 선물일지도 모르
는 것이다
"넌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고 있는 거야."
"현대 과학으로도 알 수 없는 걸 모른다고 인정하는 것은 중요하다
고, 아빠가 늘 말했잖아."
그 말을 듣고 히데유키는 히죽히죽 웃었다. 안색에서도 취기가 상
당히 도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빈 맥주 병은 벌써 6병째 늘어서 있었
다.
"안다니까. 그러니까 이건 게임이라고 생각해 놀이의 세계 . 네 직
감을 난 알고 싶다구. 단지 그뿐이야."
마치코는 주방에 들어가 아키 소바(면에 소스를 넣고 볶은 요리,
조리가 간단하여 간식이나 야식으로 흔히 먹는다:역자 주)를 만들
고 있었는데, 그 손길을 멈추고 가오루 쪽을 응시하며 두 눈을 빛내
고 있었다.
가오루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생각했다. 우주나 생명의 발생에는
아무래도 상상력이 미치지 않는 영역이 있다. 알기 쉽게 하기 위해서
개체 발생을 예로 드는 게 좋을 것이다.
제일 먼저, 자신의 탄생을 언제라고 생각해야 할까?어머니의 태
내에서 기어나와 탯줄이 끊겼을 때일까, 아니면 난관에서 수정해서
자궁으로의 착상이 완료된 때일까?
발생이라고 하는 점에서 생각하면.수정이 그 첫걸음이 될 것 같
다. 신경계가 생기는 것은 수정 후 3주일 정도 지난 무렵이다.
설사 그 무렵의 태아에게 의식이 있고 사고 능력이 있다고 해보자.
그에게 있어서 어머니의 자궁은 우주 그 자체이다. 왜 자신이 여기에
있는지 , 태아가 생각한다. 양수라고 하는 물에 잠겨 있으면서 탄생의
구조에 대해 이것저것 생각하겠지만, 자궁 바깥 세계를 알지 못하는
그에게는 설마 자신의 탄생 이전에 생식 행위가 있었으리라고는 상
상도 하지 못하고, 자궁 내부에 남은 모든 흔적에 의지하여 추리하는
수밖에 없다.
우선 양수 그 자체를 생명의 부모라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우
리라. 양수를 원시 지구를 뒤덮고 있는 유기 분자의 농축 수프로 보
고, 휘젓는 사이에 20종류의 아미노산이 사이 좋게 손을 잡아 생명의
원천인 단백질이 완성되어 자기 복제를 시작한 것이라고‥‥ 그 확률
은 원숭이에게 타이프를 두드리게 해 세익스피어의 한 구절과 완전
히 같은 문장을 완성시킨 것과 같다.
몇 조 마리나 되는 원숭이가 몇 조 년 동안 타이프를 계속 두드린
다 해도 불가능하다고 단언할 수 있는 확률 만일 세익스피어의 한
구절이 완성되었다고 하면 사람들은 이것을 우연이라고 생각할까?
틀림없이 어떤 조작을 의심할 것이 뻔하다. 원숭이의 모습을 한 인간
이 대신 타이프를 쳤다· 혹은 그 원숭이에게는 지능이 있다‥‥
하지만 양수에 잠긴 태아는 자기 탄생을 우연이라고 생각하기만
하고, 그뒤의 조작에까지는 상상력이 미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바깥 세계를 알치 못하기 때문이다.
약36주에 걸쳐 태내에서 성장하여 산도를 통해 기어나와서야 비
로소 그는 자신을 낳은 어머니의 겉모습을 접한다. 더욱 성장하여 지
식을 늘린 후에야 그는 어떻게 자신이 탄생한 것인지 그 구조를 정확
히 알 수가 있다.
자궁이든, 우주든, 내부에 있는 기간에는 구조를 알 수 없도록 인
식 능력이 닫혀 있는 것이 틀림없다
가오루는 자궁이라는 세계에서 성장하는 태아의 비유를 우주와 지
구 생명의 문제에 적용시켜 보려 했다.
자궁에는 수정한 태아를 성장시키는 기능이 대부분의 경우 선천적
으로 갖추어져 있다. 하지만 늘 태아를 품고 있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수정이라고 하는 현상은 상당 부분 우연에 의해 좌우된다. 의
도적으로 아이를 낳지 않는 여성도 많다.
평생 두 아이를 낳았다고 치면 자궁 내부에 태아가 있는 기간은 총
2년에도 못 미치는 것이다. 즉 기능이 갖추어져 있음에도,자궁에는
태아가 없는 때가 훨씬 많은 셈이다.
되돌아 우주를 바라보면 어떨까? 우리들이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것으로 볼 때 우주가 생명을 양육하는 기능을 갖고 있음은 확실한 것
같다
그렇다면 그 역시 필연인가? 아니 , 가령 양육하는 기능을 갖고 있
다고 해도 자궁에는 태아가 없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역시 우연일
까?항상 우주에 생명이 가득 차 있는 것이 아니고,생명을 품고 있
지 않는 우주 쪽이 자연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역시 가오루로서는 답을 알아낼 수가 없었다.
히데유키는 아들의 대답을 기대하며 연신 맥주를 마시고 있다.
"어쩌면, 우주에 존재하는 생명은 우리들뿐인지도 몰라 "
가오루가 그렇게 말하자, 히데유키는 흠흠 하고 맞장구를 친다.
"직감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니?"
히데유키는 흥미 있는 듯 가오루를 응시하다 그 시선을 아내 쪽으
로 옮겨 갔다. 마치코는 테이블 위에 포갠 자신의 두 손을 베개삼아
편안한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야, 마치한테 담요 좀 가져다 줘라.'
히데유키는 아들에게 명령했다
"알았어 ."
가오루는 바로 침실에서 담요를 들고 와서 히데유키에게 건넸다
히데유키는 마치코의 어깨에 담요를 덮고 자는 얼굴에 웃음을 지어
보이고 나서 얼굴을 들었다.
동쪽 하늘은 어느새 하얘졌고, 방 온도도 낮아졌다. 후타미 가의
밤은 끝나고 잘 시간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김빠진 맥주를 마저 마시려는 히데유키의 눈은 어딘가 공허했다.
"있지. 아빠 부탁이 있는데."
맥주를 다 마시길 기다렸다가 가오루가 말했다.
"뭔데?"
가오루는 중력 이상 세계 지도를 다시 아버지 앞에 펼쳤다
"여기 말인데 , 어떻게 생각해?"
가오루는 세계 지도의 어느 한 점을 새끼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곳은 북아메리카 대륙의 서쪽, 애리조나 주, 뉴멕시코 주, 유타 주,
콜로라도 주 등 4개의 주에 걸쳐 있는 포코나즈라 불리는 사막 지대
였다.
"여기가 왜?"
히데유키는 눈을 깜박거리면서 그 지점에 눈을 가까이 한다.
"아빠, 이 부근의 중력 이상 수치를 다시 한 번 잘 봐."
피곤한 눈에 숫자가 뿌옇게 보이는지 히데유키는 몇 번이고 눈을
비빈다.
"흠흠 "
"이 지점을 향해서 등고선 수치가 자꾸 작아져 가지?"
"분명히 그런 것 같군."
"극단적인 중력 이상을 나타내고 있어."
"그래, 마이너스치 가 상당히 큰 것 같다 "
"지질적으로 볼 때 이 부근에 뭔가가 있는 것 같아. 특별 질량의
작은 물질이 이 장소에서 한참 지하 속에 잠들어 있다든가‥‥‥
가오루는 4개의 주가 교차되는 부근에 볼펜으로 叢표시를 했다. 그
지점의 정확한 중력치가 기입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주위를 둘러싼
등고선의 모양으로 어느 한 점의 중력이 가장 작다고 예측할 수 있을
뿐이다.
가오루와 히데유키는 잠자코 지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잠
든 줄만 알았던 마치코가 비스듬히 얼굴을 들고 나른한 목소리로 끼
여들었다.
"분명히 아무것도 없어요, 그 밑에는."
자는 척하면서 약삭빠르게 부자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던 것이다
"뭐야, 깨 있었어?"
엄마의 말은 자극적이었다. 가오루는 사막의 훨씬 밑에 잠자고 있
다는 것을 가오루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히데유키는 못 쓰는 글씨로 서약서를 다 쓰고는 종이 쪽지를 펄럭
거렸다.
"자, 나 분명히 약속했다. "
가오루는 서약서를 받아들고 내용을 확인했다. 만족스런 기분이었
다. 이제 푹 잘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밤은 밝고, 9월도 끝나려는데 한여름 이상으로 쨍쨍한 태양이 동
쪽에서 떠오르고 있었다. 서쪽 하늘에는 당장에라도 스러질 것 같은
허망함으로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명암을 가르는 선이 없어 , 어디부터가 아침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시간이 경과해 가는 모습이 색의 변화로 나타나는 순간을 가오루는
진심으로 사랑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침실로 사라지고 나서도 가오루는 창가에 계속
서 있었다.
매립지의 땅을 울리며 도시의 태동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눈앞
의 도쿄 만에는 큰 무리의 새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아기 울음소리
비슷한 새 지저귐이 사라져 가는 별 아래에서 생명을 주장하고 있는
것 같다.
세계의 구조를 해명하고 싶다는 소원은 검은 바다와 미묘한 색조
로 변해 가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때 한층 강해진다 높은 곳에서
부터 풍경을 접하면 상상력은 더 자극받게 된다.
동쪽지평에서 태양이 나타나고 밤이 밀려나 사라져 버리자,가오
루는 다다미 방으로 들어가 자신의 이불로 기어들어갔다.
히데유키와마치코는 각각의 모양으로 이미 잠에 빠져 있었다. 히
데유키는 담요도 덮지 않고 대(大)자 모양으로, 마치코는 꾸깃꾸깃
한 담요를 껴안은 형태로 몸을 등글게 하고 있었다
가오루는 그 옆에서 사막으로의 여행 약속을 적은 서약서를 머리
맡에 놓고 베개를 품에 안으며 잠을 청했다. 등이 굽은 채로 베개를
품은 그 모습은 마치 자궁 속의 태아를 연상케 했다
'루프피 생명이 암화한 원인은 어디에 있는 걸까요?"
"그야뭐니 뭐녀해도 '링바이러스'의 출현입니다. 루프계에서 암생성은
원인 불명의 바이러스의 출현과 그것을 축으로 전개된
어떤 사건을 계기로 생겼습니다 그 사건의 중심에 있던
인공 생명은 '높은 산(識山)'이라는 의미의 다카야마라고 불렸습니다.
그를 포함해 '聖은 강(淺川 )'이라는 의미의 아사카와,
'산 속 마을(山材)' 이라
는 의미의
야마무라‥‥ 3개의 인공 생명이 루프계의 암 생성
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판명되었습
니다. "
가오루는 최근 20살인 자신의 실제 나이보다 위로 보는 사람들이
많아 기분이 그다지 유쾌하지 않다 꼭 얼굴이 者었다는 것만은 아니
다. 평균보다 큰 체격이 풍채를 강하게 보이는 것말고도 내면으로부
터 풍겨나오는 어른 같은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이에 비해 야
무지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13살 무렵부터 한 집안의 기등 역할을 담당해야 했으므로 그런 것
도 당연하다고 가오루는 생각했다. 10년 전 초등학생이었을 무렵에
는 몸이 마르고 작아서 나이보다 아래로 보였다. 아버지로부터는 자
연과학을, 어머니로부터는 어학을 배워 다소 머리만 큰 어린애였던
것이다 매일 잡다한 생각에 얽매이는 일 없이 세계의 구조는 어떻게
되어 있는 걸까 하고 공상을 하는 것이 주된 일이었다
10년 전과 현재를 비교하면 참 많이 변했다. 그 무렵엔 부모님과
밤을새워 이야기하고, PC를 갖고 노는등집안의 앞날에 어두운그
림자는 털끝만큼도 없었다. 장수촌의 위치와 중력 이상 사이에 관계
가 있는 것 같다는 공상이 중력 이상의 마이너스치가심한 북아메리
카 대륙의 애리조나, 유타, 콜로라도, 뉴멕시코4개 주에 걸친 지역
을 방문하자는 가족 여행 계획으로까지 발전하여 아버지가 서약서를
쓸 정도로 화목한 가정이었다.
가오루는 북아메리카 여행을 약속한 아버지의 서약서를 아직도 소
중히 책상 안에 보관하고 있다. 결국 지키지 못한 서약서.아버지는
아직 지킬 마음이 있는 모양이지만, 그런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 정도
는 의대생인 가오루가 가장 잘 알고 있다.
아버지의 체내에 언제 어떤 경로를 거쳐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
가 침입한 것인지 가오루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위의 불편함을 호소
했던 몇 년 전, 바이러스가 체세포 한 개를 암세포로 전이시킨 것이
틀림없다. 그렇게 탄생한 암세포가 아버지의 체내에서 최초의 세포
분열을 한 것은 아마 사막으로의 여행을 약속하고 나서 얼마 안 되었
을무렵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암세포의 증식은 소리 없이 착실하
게 진행되어 북아메리카 사막으로의 가족 여행은 이루지 못할 꿈이
되고 있었다.
히데유키가뉴멕시코의 연구소를 방문할 계획은 처음의 예정보다
늦춰져, 북아메리카 여행을 약속한 지 3년이 지나서야 겨우 갈 수 있
게 되었다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와 잰타페이 연구소에서의 아버지
체류 일정은 약 5개월이었다. 마치코와 가오루를 데리고 2주일 빨리
출발하여 , 가오루가 흥미를 갖고 있는 중력 이상의 마이너스 장소를
방문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2개월 전에 항공권을 마련하여 가족 모두가 여행에 대한 기대로
매일매일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 초여름, 아버지는 갑자기 위의 통증
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의사한테 진찰받는 게 어때요?
마치코의 의견에는 귀기울이지도 않고 히데유키는 멋대로 위염이
라고 단정하고 그때까지 해왔던 생활을 개선하려고 한지 않았다
한여름에 접어들자 위의 통증은 점점 더 심해지고, 출발 예정일 3
주일 전, 드디어 구토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그래도 히데유키는 별일
없다고 우겨댔다. 가족이 기대하고 있는 여행이므로 취소할 수 없다
며 정밀 검사를 계속 거부했던 것이다.
증상은 인내의 한계를 넘어섰고 마침내 히데유키는 친구인 한 대
학 병원 의사의 진찰을 받는 것에 겨우 동의했다. 정밀 검사 결과, 위
의 유문부에 폴립 (점막 피부 등에 돌출하는 종양류 : 역자 주)이 있다
고 진단되어 입원 수속이 취해졌다.
여행은 물론 취소되었다. 가오루도 마치코도 이미 여행은 생각지
않고 있었다. 담당 의사로부터 폴립이 악성이라는 말을 들었던 것이
다
이렇게 가오루의 13살 여름은 갑자기 천국에서 지옥으로 추락했
다 기대하고 있던 여행이 무산되었을 뿐만 아니라,가족은 더운 여
름 대부분을 병원과 집 사이를 왕복하며 보내게 되었다.
·쌔년엔 병을 치료하여 약속대로 사막으로 여행을 떠나자.
허세를 부리는 아버지의 밝은 모습만이 유일한 위로였다
마치코는 남편의 말을 믿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론 만일의 사태를
상상하고는 비관적이 되어 심신이 모두 쇠약해져 갔다
가오루가 가족의 중심적인 역할을 다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은 이
런 사정 때문이었다. 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으려는 엄마에게 억지로
먹을 것을 입에 밀어넣는 것도 가오루였고, 의학적 지식을 기초로 아
버지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인식시키려고 하는 것도 가오루였다.
위의 3분의 2를 절제하는 수술은 잘 끝나 전이만 되지 않으면 치유
될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되자, 히데유키는 가
정과 연구실로 복귀할 수 있었다.
가오루에 대한 히데유키의 태도에 변화가 보이기 시작한 것은 그
무렵부터였다. 히데유키는 입원중에 보인 아들의 믿음직스런 태도에
신뢰를 보이면서 보다 강한 남자로 키우려고 이전과 달리 엄격한 태
도로 대했다. '임마'라고 부르던 것도 그만두고, 컴퓨터와의 놀이보
다 육체 단련에 아들이 힘쏟기를 원했다. 뭔가 필사적으로 자신의 육
체 가운데에서 사라지고 있는 것을 아들의 신체로 옮기려 하고 있구
나, 하고 감지한 가포루는 저항 없이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해 갔다.
아버지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실감 그 의지를 이어받아 특별한
인간이 된 듯한 기분이 들어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은 뿌듯하기만 했
다.
그렇게 아무 일 없이 2년이 지나고, 가오루는 15살의 생일을 맞이
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몸 안에서는 불길한 변화가 착착 진행되고 있
었다. 변화가 겉으로 나타난 것은 하혈에 의해서였다.
하혈은 암세포가 다른 기관으로 퍼진, 즉 '전이'를 알리는 신호였
다 히데유키는 망설이지 않고 의사를 찾아가 바륨을 주장(注湯, 약
물 따위를 항문으로부터 장에 넣는 것 ' 역자 주)한 뒤 班레이 촬영을
했다 그러자5자 모양의 결장에 주먹 반만한 그림자가 확인되었다.
수술에 의한 절제 이외는 생각할 수 없는 상태였다.
수술 방법은 두 가지가 있었다 항문 부분을 남기는 방법과 보다
광범위하게 절제해 인공 항문을 붙이는 방법 . 전자의 경우, 자칫하면
침투한 암세포가 다시 퍼져 재발할 가능성을 남길 우려가 있고, 후자
의 경우는5자모양의 결장을 모두제거해서 보다 완벽을 기할수가
있다. 의사로서는 보다 완전한 인공 항문을 권하고 싶지만, 생활의
불편을 생각하면 마지막 결정은 역시 환자의 판단에 맡기는 수밖에
그런데 히데유키는 아주 시원스럽게 인공 항문을 선택했다
·.개복을 해봐서 암세포의 침투 가능성이 절대 없다고 단언하지
못한다면, 망설일 것 없이 절제해 ·
스스로 그렇게 요구한 것이다. 살아 남을 가능성이 큰 쪽에 운명을
걸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여름에 입원해서 수술을 받았다 개복해 보니 생각보
다는 침투 정도가 심하지 않아, 보통의 경우라면 반반의 확률로 항문
을 남기는 상황이었겠지만 집도의는 환자의 판단을 고려하여 5자 모
양의 결장을 모두 제거했다.
퇴원은 2년 전과 마찬가지로 가을이 되고 나서였다 그로부터 2년
동안, 재발의 징후를 두려워하면서 히데유키는 인공 항문을 껴안은
생활에 익숙해지려는 노력을 더해 갔다.
꼭 2년 뒤, 이번 징조는 '황색'으로 나타났다. 발열과 함께 히데유
키의 몸은 노랗게 물들었고, 날이 갈수록 더 심해졌다. 간이 암에 침
범당했음을 알 수 있는 증상이었다.
지난 번 두 차례에 걸친 수술로 간과 림프선의 전이 여부를 확인했
을 텐데 하고 의사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무렵부터 가오루는 뭔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질병‥‥ 암의 일종으
로 이제까지의 것과는 뭔가 다른 질병이 출현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
심을 가지고 기초 의학에 대한 흥미를 더욱 높여 갔다. 17살 여름, 고
등학교를 앞당겨 졸업한 가오루는 아버지가 졸업한 같은 대학의 의
학부 1학년에 입학했다.
위와 직장 제거에 이은 세 번째 수술대에 올라 히데유키는 간의 절
반을 잃었다. 수술을 끝내고 퇴원을 했지만 가오루와 마치코는 도저
히 히데유키의 암이 완치되었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다음은 어디로
전이할까 하고 전전긍긍하며 암세포가 취하고 나을 태도를 주목할
뿐, 이전처럼 평온한 단란함은 기대할 수조차 없었다.
·.사람의 몸에서 장기가 하나도 남지 않고 제거될 때까지 암세포
는 결코 공격을 멈추지 않아
마치코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으며 가오루가 어떤 의학적 지식을
말해도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되어 갔다. 신종 백신이 개발되었다는 소
문만 들어도 그 효과가 화인되기 전부터 손에 넣으려고 동분서주했
다. 비타민 치료가 잘 듣는다고 하면 바로 시도했고, 림프구 요법을
의사에게 강요하는 한편 신흥 종교에 도움을 구하기조차 했다. 무엇
이든 좋았다. 남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악마에게라도 혼을
팔 것 같은‥‥소름끼치는 표정으로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엄마의 모
습을 보자 가오루는 암담한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의 죽음은 그대로
엄마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후 히데유키는 대부분의 시간을 병원 침대에서 지내게 되었다.
이제 49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겉모습은 70살의 노인처럼 보였다 항
암제의 부작용으로 머리는 모두 빠졌고 홀쭉해졌으며 피부 윤기도
사라져 '가려워 가려워' 하며 온몸을 손가락으로 긁어댔다 하지만
그래도 삶에 대한 집착은 잃지 않고 있었다.
"어이 , 알고 있지? 내년에는 북아메리카 사막이야."
병원 침대 옆에 앉은 아내와 아들의 손을 잡고 무리하게 웃어 보이
곤 했다. 허세가 아닌, 진심으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병과 싸우는 모
습은 믿음직스럽기도 하고 애처롭기도 했다.
아버지가삶에 대해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는 한. 가오루의 가슴에
'포기'라는 단어는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리 상황이 악화되어도 끝내
아버지는 병을 극복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이 무렵부터 히데유키와 같은 증상으로 진행되는 암이 증후군처럼
일본을비롯하여 세계 각지에서 확인되기 시작했다. 당시는 아직 이
런 타입의 암을 유발하는 것의 정체를 뭐라고 특정짓지 못하고 있었
다. 신종 바이러스로 인해 세포가 암세포화되없다고 주장하는 의사
도 몇 사람 있었지만, 그 신종 바이러스가 종래 암세포를 발병시킨
것과 어떻게 다른지는 읽혀지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바이러스의 순
수 분리에 성공했다는 예는 세계 어디에서도 보고되지 않았다. 다만
아무래도 신종 바이러스가 원인인 암이 만연하기 시작한 것 같다는
분위기가 감돌 뿐이었다 전세계적으로 새로운 암 바이러스가 퍼졌
다는 불안감이 서서히 높아져 갔다. 그런데 1년 전, K대학 의학부 연
구실에서 신종 암 바이러스의 순수 분리에 성공하였다 이 신종 암
바이러스는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라고 명명되었다.
의사자격 국가 시험이 일년 앞으로 다가왔지만 가오루는 아버지의
간병과 아르바이트로 많은 시간을 빼앗겨 공부할 처지가 아니었다.
게다가엄마의 정신 상태 역시 그다지 정상적이지 않아항상 긴장을
멈출 수 없었다.
만약 엄마를 그냥 내버려 두면 암 특효약이라고 이름 붙은 것이라
면 무엇이든지 손을 梁을 것 같아 끊임없이 감시하지 않으면 수습하
지 못할 상황이 올지도 몰랐다.
아버지는 가오루가 아르바이트하는 것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공부에 열중해야 하는 시간을 쓸데없이 허비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
문일 것이다. 원인이 자신의 병에 있으므로 더욱 초조해 하였다. 그러
면서 대학 등록금 정도는 낼 수 있고, 아직 저축된 돈이 있을 것이라
고 우겨 대기도 했다. 허풍, 호언장담은 아직도 건재하여 그나마 가오
루는 마음의 위안을 받았다.
현재 가족의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가오루의 입장에서 보면,여유
따윈 전혀 없어서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궁핍함을 줄
곧 아버지에게 숨기고 있었다. 왜냐하면 아버지에게 심각한 현재의
상황을 알려 봤자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버
지에게는 아르바이트의 이유를 노는 데 돈이 필요해서라고 거짓말하
고 있었다.
함께 있을 때는 될 수 있는 한 아버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싶었다. 병 때문에 수입이 줄어 아내와 아들이 생활에 곤란을 겪고
있는 모습을 아버지에게 결코 보여선 안 된다. 다행히 의대생을 간판
삼아 가정교사를 하면 상당한 고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가오
루가 다니는 대학의 부속 병원에는 어린이 입원 환자가 많아 복학해
서 학교 공부를 쫓아갈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에 가정교사 자리는 얼
마든지 있었다.
막 여름 방학에 들어간 어느 날. 부속 병원의 독실에서 중학생에게
수학과 영어를 가르치고 나온 가오루는 옥외 카페에서 간단한 점심
을 먹고 있었다. 아버지도 같은 병원에 입원해 있었는데, 방금 폐에
암세포가 전이됐을 우려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탓에 기분이 우을
했다. 초여름인 이 계절,아버지가 늘 하는 입버릇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올해야말로 북아메리카 사막의 장수 촌으로 가족 여행을 가자.
울림은 공허했다 언제나와 같은 시기 , 변함 없는 대사가 튀어나오
는 것에 호응하듯 폐 전이에 대한 두려움이 부상해 왔던 것이다.
스기우라 레이코와 료지 모자의 모습을 부속 병원 옥외 카페에서
본 것은, 가오루가 아버지의 병상이나 앞으로의 가족의 앞날을 생각
하고 한숨을 쉬기 시작했을 때였다.
3층의 카페테리아는 안뜰을 유리로 둘러싼 ㄷ자 모양을 하고 있었
다. 안뜰에는 분수가 있어 자리에 앉은 눈 높이까지 물보라가 올라온
다. 부속 병원의 식당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인테리어에 공
을 들였고 요리 맛도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뿜어 오르는 분수의 모
양을 바라보고 있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가오루의 눈은 입구 쪽에서 웨이트리스의 안내를 받으며 빈자리로
가고 있는 아름다운 여성에게 향했다. 극히 자연스럽게 마음을 빼앗
긴 것이다
베이지색 여름 드레스로 알맞게 그을린 몸을 감싼, 화장기 없는 얼
굴은 남의 눈을끌 만큼 반듯하다. 옆에 아들이 없었다면 여자의 나
이는 10살쯤 속일 수 있었을 것이다
웨이트리스에게 안내받은 대로 여자와 남자 아이는 가오루의 대각
선 앞 테이블에 앉았다. 이들 모자가 앉고 나서도 가오루는 여자의
짧은 치마 밑으로 밴어 나온 다리에 눈이 못 박히고 말았다.
가오루는 이들 모자를 2주일 전, 호텔 수영장에서 우연히 본 적이
있었다 가정교사로 있는 집에서 성적이 오른 포상으로 이번 여름 동
안 이용할 수 있는 호텔 수영장 자유 이용권을 받았다. 그 티켓을 사
용하여 수영하던 첫날 수영장 가의 데크 체어에 앉은 이 모자와 우
연히 만났던 것이다.
그린색 수영복 차림의 여자를 보자마자, 한눈에 옛날 어딘가에서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었지만 언제 어디에서 만났는
지는 전혀 기억할 수가 없었다. 기억력에는 자신이 있던 가오루가 기
억의 밑바닥에서 그녀의 모습을 찾아내지 못해 상쾌하지 않았던 기
억이 되살아났다. 저만한 미모라면 당연히 기억이 날 텐데토 기억해
내지 못하는 것이 이상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착각일 것이라고 그때
는 억지로 잊어버 렸다.
특히 소년은 몸매가 매우 이상하게 보였다. 엉거주춤 쓰고 있는 수
영 모자와 물안경 , 한눈에 수영용이 아님을 알 수 있는 체크 무의 잔
은 팬츠, 가는 0자형 다리 , 이상하게 흰 괴부 색, 아주 옛날 'N의 싸
구려 프로그램에 등장한 우주인의 사체를 방불케 했다. 기묘한 언밸
런스를 드러내는 소년이었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여자, 그리고
이상한 체구의 소년, 이 모자의 인상은 가오루의 가슴에 강하게 남아
있었다.
그 두 사람이 지금 가오루의 대각선 맞은편 테이블에 앉아 있다.
분수를 내려다보는 창가에 있는 까닭에 유리창에 그들 두 사람의 모
습이 詞게 비친다. 가오루는 실상이 아닌,유리에 비친 상을 살그머
니 관찰했다.
잠시 보고 있는 사이에 첫인상에서 얻은 소년의 기묘한 언밸런스
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모발이었다. 수영장
가장자리에서 그를 보았을 때,수영 모자 속에 있어야 할 머리숱이
단연 모자랐던 것이다.
소년은 테이블에 앉고 나서 잠시 후,머리에 얹고 있던 모자를 벗
었다. 그와 동시에 머리숱이 하나도 없는 매끈한 머리가 나타났다.
가오루는 사정을 이해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암 환자임
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입원 환자의 병문안을 온 모자가 아니라 아
들의 항암제 치료에 어머니가 함께 온 모양이다 히데유키도 같은 치
료를 받고 있어서 부작용으로 역시 머리가 빠져 있었지만 소년의 머
리에서는그 이상의 참혹함이 있었다 빈틈없이 피부에 딱 달라붙어
있던 수영 모자가 수영장에서 기묘한 인상을 던졌던 것이다. 이제 와
서야 겨우 설명이 되었다
가오루는 멍하니 턱을 괴고 30대 전반으로 생각되는 아름다운 어
머니와 초등학교 고학년인 아들이 잠자코 점심을 먹는 모습을 바라
보았다. 무의식중에 입원중인 아버지와 비교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49살, 이 소년은 11 ∼12살. 똑같이 암 치료를 위해 항암제를 투여받
고 있다.
베이지색 여름 정장을 입고 병원에서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화
려한 분위기를 흩뿌리고 있는 어머니는 이따금 얼굴을 들어 공허한
눈빛을 창 밖으로 던졌다. 요리를 먹는 자세에서 맛을 보는 것이 아
닌, '할수 없이 먹는다'라는 될 대로 되라는 식의 태도가 느껴졌다
그리고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미소인지 한숨인지 구별이 안 되는 애
매모호한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여자는 허공에 멈춰 있던 스푼으로 접시 위의 음식을 뜨고, 입으로
가져가려다가 망설이더니 갑자기 시선을 비스듬하게 던져 왔다 '아
까부터 윌 보고 있는 거예요',7'라는 가시 돋친 시선이었는데 가오루
와 눈이 마주치자 점차 부드러워졌다. 가오루는 시선을 피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전에 수영장에서 만난 얼굴이네.' 하고 여자 쪽에서도 알아챈 모
양이다. 무언가 말하고 싶어하는 듯한 표정을 보이고 있었다. 가오루
가 가볍게 고개를 숙이자 여자도 같은 동작으로 응해 왔다.
그뒤 곧바로 여자는 젓가락과 스푼을 내던지며 떼를 쓰는 아들에
게 뭔가 작은 소리로 말하기 시작하면서 이미 가오루는 안중에도 없
어진 것 같았다. 그래도 가초루는 그 모자를 계속 관찰했다. 아무 저
항도 하지 못하고 의식을 송두리째 빼앗겼던 것이다.
며칠 후, 가오루는 병원 안뜰에서 그 모자와 대화를 나눌 기회를
얻게 되었다. 벤치에서 서로 옆에 앉게 되어 다행스럽게도 극히 자연
스런 형태로 어느 쪽에서 먼저랄 것도 없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
던 것이다
엄마는 스기우라 레이코, 소년은 료지라고 이름을 말했다. 료지는
폐에 생긴 암세포가 뇌로 전이됐을 우려가 생겨 방사선 치료와 항암
제 치료를 앞두고, 검사로 매일매일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료지는 최근 순수 분리에 막 성공한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에 간
염된 것으로, 발생에서 전이의 흐름까지 아버지의 증상과 비슷했다.
가오루는 친근감이 솟구쳤다. 같은 적을 상대로 싸우는 동지 의식
이라고나 할까?
아이의 엄마인 레이코 역시 그런 표현을 썼다. 하지만 바로 며칠
전 카페테리아에서의 두 사람의 표정을 알고 있는만큼, 가오루는 레
이코의 이 말을 믿을수 없었다. 요전날두 사람의 얼굴에 있었던 것
은 포기의 표정이 아니었을까'』
"저 , 전에 , 어디선가 만난 적 없습니까?"
여자를 유혹할 때 쓰는 상투적인 수법 같아 멋찍음을 느꼈지만, 달
리 물을 길이 없었다.
그에 대해 레이코는 의미 불명의 미소를 보내고는 부끄러운 듯이
말했다.
"그런 말을 자주 듣네요. 예전에 활동하던 여배우와 닮아선가?"
가오루에게는 이 말이 거짓말처럼 들렸다 닳은 것이 아니라본인
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과거를 지우고 싶어서 거짓
말을 하고 있는 것이라면 더 이상 파고들어서 는 안 될 것이다.
안뜰에서 헤어질 때, 레이코는 독실 방 번호를 가오루에게 알려 주
고는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다음에 꼭 놀러 와요. 부탁해요."
젊고 싱싱한 손이었다. 온몸에서는 은은한 향기를 피워올리고 있
었다
세 번째의 우연한 만남을 통해 가오루는 스기우라 레이코라고 하
는 여성으로부터 점점 눈을 뗄 수가 없게 되었다.
레이코의 초대를 진심으로 받아들여 료지의 병실 문을 노크한 것
은 그 다음날이었다. 방으로 들어가 보니 료지는 침대에 앉아서 양
발을흔들흔들하며 책을읽고 있었다 의학부에 적을둔가오루는들
어서자마자 병실의 가격을 알 수 있었다. 하루 비용이 일반 병실의 5
배 이상 드는 독방으로 욕조까지 갖춰져 있었다.
"고마워요, 와주셔서 ."
감사의 말이 레이코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인사치레로 방에 놀러
와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을 뿐 진짜 오리라고는 기대하지 못한 모
양이다. 레이코는 기뻐서 어쩔 줄 모르면서 료지에게 재촉하듯 말했
다.
"자, 자."
가오루는 이내 알 수 있었다. 레이코는 아들의 대화 상대로서 가오
루를 불렀던 것이다. 약간 기대에 어긋난 듯한 기분이었다.
가오루가 마음이 끌리는 상대는 료지가 아니라 레이코였다 가오
루는 연애 경험이 별로 없었지만, 가오루의 눈길을 결코 피하는 일
없이 받아내면서 뭔가 요구하는 듯한 레이코의 시선에서 성적인 향
취를 감지해 내고 있었다. 긴장이 풀린 듯하며 애교가 있는 커다란
눈동자, 도톰한 입술· . 특별히 가슴이 풍만한 건 아니지만, 160센티
미터에 미치지 않는 자그마한 몸에서는 여성스러움이 피어오르고 있
었다. 같은 또래 젊은 여성에게선 느낄 수 없는 세련된 아름다움이
가오루의 몸 속을 들쑤시는 것 같았다
그에 비해 료지의 시선에는 놀랄 정도로 집착이 없었다. 침대 옆
의자에 마주 앉았을 때, 가오루는 료지의 눈이 머금은 빛의 약함에
깜짝 놀랐다. 게다가 시선을 마주치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쪽을 보고
있는 것 같지만 눈은 분명히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시선이 가
오루의 몸을 지나 등뒤의 벽 근처를 헤매고 있었다. 언제까지 고 초점
은 정해지지 않은 그대로였다
료지는 페이지 중간에 손가락을 끼운 채 무릎 위에 단행본을 뒤집
어 얹었다. 이야기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가오루는 상반신을 구부려
읽다 만 책의 됫표지를 보았다
『바이 러스의 공포』란 책이었다.
환자는 자신의 병에 관해 자세히 알고 싶어하는 법이다 료지도 예
외는 아니었다 몸에 침입한 이물질의 정체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당
연하다
가오루는 자신이 의학부 학생인 것을 알린 뒤에 바이러스에 관해
몇 가지 질문을 시도해 보았다. 그러자 초등학교 6학년이라고 하는
나이치고는 놀랄 정도로 정확한 대답이 돌아왔다. 료지가 바이러스
의 특징을 잘 이해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DNA의 구조뿐만 아니라,
생명 현상의 최첨단에 이르기까지 자기 나름대로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문답을 반복해 가는 동안에 가오루는 어린 시절의 자신을 바라보
고 있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과학 지식으로 무장한 소년을 대하는
시선은 마치 아버지와 같아서 가오루는 얼마간 어른이 된 듯한 기분
에 잠길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도 길게 계속되진 않았다. 서로 마음을 터놓고 겨우
대화가 활기를 띨 무렵 , 담당 간호사가 들어와 료지를 검사실로 데려
가 버렸기 때문이다.
병실에 두 사람만 남게 되자 가오루는 갑자기 안절부절 못하기 시
작했다. 하지만 레이코는 그때까지 기대어 서 있던 창가에서 떨어져
시치미를 떼고 침대 옆에 앉았다.
"20살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어요."
료지와의 대화 가운데에서 넌지시 나이를 언급했던 것을 귀담아
들었던 모양이다.
'◎ 살로 보였습니까?"
가오루는늘 실제 나이보다 위로 보여서 이런 말에 익숙해져 있었
다.
"글쎄요, 5살쯤은 위가 아닐까 하고‥‥‥
레이코는 말끝을 흐렸다.
"늙어 보입니까?"
"상당히 야무지신 것 같은걸요."
告었다고 말하면 상처를 입겠지만, 야무지다고 하면 칭찬의 말이
된다.
"부모님 사이가 아주 좋으셨으니까요."
"어머, 처음 듣는 얘긴데요. 부부 사이가 좋으면 아이는 나이보다
더 들어 보이는 건가요?"
"부모님 두 분만 계셔도 충분히 행복하신 것 같으면, 저도 빨리 자
립하지 않을 수 없죠."
"1래_S‥‥‥
레이코는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아들의 빈 침대를 바라보았
다.
가토루는 레이코의 남편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어쩐지 료지에
게는 아버지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았다. 부모의 이혼이나 사별, 혹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인지, 아버지와의 관계가 희박하다는 인상을 받
았다
"그럼 , 이 아이는 영원히 자립하지 못할지도 모르겠네요
레이코는 빈 침대에서 눈을 돌리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가오루는 주의 깊게 자세를 갖췄다. 상대가 먼저 말을 꺼내기를 기
다리는 수밖에 없다
"암이 었어 요‥‥‥
"그렇습니 까?"
"2년 전이었어요. 료지는 아버지가 죽어도 조금도 슬퍼하지 않았
는걸요."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저 아이는 눈물조차 보이지 않
았을 것이다
"원래 그런 법이죠."
본심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상상하기만해도 억제할수 없
을 정도의 슬픔이 가슴 밑바닥에서 솟아올라온다. 아버지의 죽음을
직면하면 극복해 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아직
자신은 완전히 자립하지 못했나 싶었다
"가오루 씨 , 괜찮다면‥‥‥
레이코는 거기에서 일단 말을 끊고, 매달리는 듯한 눈길을 보내 왔
다
"저 아이의 공부를 봐주시지 않을래요?"
"가정교사 말입니까?"
"11."
어린애에게 공부를 가르치는 것은 가오루가자신 있어 하는 부분
이었고, 한 사람이나 두 사람 정도라면 시간의 여유도 있을 것 같았
다 하지만 과연 료지에게 가정교사가 필요한지, 아닌지 그 점이 의
문이었다. 조금 전 대화로만 봤도 분명하게 료지의 학력은 같은 나이
의 학생을 훨씬 능가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암이 폐나 뇌로 전이하고 있다면, 아무리 가정교
사를 고용해서 공부해 業자 헛수고로 끝난다는 건 눈으로 보듯 뻔한
일이다 일단 학교로 돌아갈수 있는 기회가 있을 리 없다. 그렇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가정교사를 고용해야 한다. 복학하여 공부를 다
시 시작할 때를 준비시킴으로써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게 하기 위해 .
네 미래를 결코 포기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나타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좋습니다. 일 주일에 2시간 정도라면 여유는 있습니다. "
레이코는 가토루 쪽으로 두세 걸음 다가와 손등에 손바닥을 포갰
다.
"고마워요. 학교 공부는 둘째치고, 좋은 애기 상대가 되어 줄 수
있다면, 저 아이도 기뻐할 거예요."
"알겠습니다. "
아마도 료지에게는 친구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가오루도 마찬가
지였기 때문에 료지의 마음을 잘 안다 학교라고 하는 사회에는 그다
지 친숙해질 수 없었다. 그래도 고독을 느끼지 않고 졸업할수 있었
던 것은 부모와의 관계가 좋았기 때문이다. 비상식적인 아버지이긴
했지만 이야기 상대로서는 최고였다. 아버지와 어머니와 대화를 나
누다 보면 자신이 왜 이 세상에 태어났을까 하며 아이덴티티의 확립
에 고민한 적이 없었다.
레이코가 가오루에게 요구하는 것은 아버지를 대신할 존재이다.
물론 그래도 불만은 없다. 역할을 다할 자신도 있다.
·레이코는 남편을 대신할 존재를 원하진 않는 걸까?
가오루는 망상에 사로잡혔다. 가능하다면 한 사람의 남자로서 레
이코와 마주하고 싶었다.
다음에 찾아을 날짜를 약속한 뒤에 가오루는 료지의 병실을 뒤로
했다
약속한 날짜에 가오루가 료지의 병실을 방문했을 때 료지는 평소
처럼 침대에 책상다리를 하고 몸을 흔들고 있었다 창가 의자에 앉아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을 레이코도 어지간히 졸린지 아들의
움직 임에 맞추어 머리를 앞뒤로 막 흔들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지금 네가 흥미를 갖고 있는 게 그거니?"
료지는 유전자에 관한 여러 가지 질문을 가오루에게 던지기 시작
했다
"뭐 「1"
료지는 평소처럼 공허한 눈을 똑바로 앞을 향하고 침대 위에서 등
을편다. 우습지도 않은데 얼굴에 미소를 띄우고 있는 것은 늘 있는
일이었다. 건강하게 웃는 얼굴이 아니다. 이제 곧 목숨이 다하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 현세를 우습게 보는 듯한 축 늘어진 웃음이었다.
이전보다 익숙해졌다고는 해도 보고 있으면 아직도 조금 화가 난다
만일 아버지의 얼굴에 똑같은 표정이 나타났다면,설사 아버지라고
해도 야단을 치고 대들었을 것이다.
료지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자 가오루의 눈앞에 반들반들한 대머리
가 보였다 등을 구부리고 있기 때문에 그의 머리 꼭대기가 바로 코
앞에 있었다. 이 마르고 작은 육체 내부에서도 격렬한 세포의 공방전
이 벌어지고 있다 아버지 히데유키도 마찬가지였다. 위의 대부분과
대장과 간의 일부를 잃었다. 그 대신 미지의 암세포는 새로운 부위에
정착하여 열심히 꿈틀거 리고 있다.
갑자기 어떤 영감이 솟구쳤다.
암세포는 정상적인 내장 기관의 색도, 형태도 바꾸고, 새로운 융기
를 만들어 내 기관의 움직임을 불완전하게 만들어 개체의 죽음을초
래한다 부정적인 측면만 두드러지지 만 암세포의 활동은 무언가 더
듬어 찾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다. 혈액이나 림프의 흐름을
타고 여기저기의 세포를 半석거리며 불로불사의 성질을 부분적으로
이식하면서 실험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미래에 적응할 수 있는 새로운 장기를 신체 어느 부분에 만들어 내
기 위함이다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의 환동,그것은 새로운 장기
를 체내에 창조하기 위한 시행 착오가 아닐까?
가오루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적어도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쪽
으로 눈을 돌리고 싶었다. 아버지는 앙의 희생물이 되려는 것이 아니
라 진화를 이루는 선구자의 한 사람이 되려는 것이라고.
다시 태어난다는 것. 만일 가능하다면 가오루도 그것을 원했을 것
이다. 재생에의 소망은 누구에게나 있다 최고의 선물은 영원한 생명
이다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의 특징이 불로불사의 세포를 계속 만드
는 것에 있다고 한다면, 공상은 당연히 거기에 미친다. 기회는 물론
료지에게도 있다.
그런 가능성을 말하려다가 가오루는 그만두었다. 병을 긍정하는
듯한 말이 삶에 대한 집착을 만든다곤 할 수 없다.
바로 뒤에서 희미한 숨소리가 들렸다. 아까부터 꾸벅꾸벅 졸고 있
던 레이코는 테이블에 얼굴을 묻고 잠든 모양이었다. 가오루와 료.·',1
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는 픽 웃었다.
8시 전, 아직 잠이 들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다. 창 저쪽 초여름의
땅거미 속에서는 대도시의 야경이 떠오르고 있었다 바로 아래에서
고속도로를 흘러가는 차 소리가 한층 柔게 솟구쳐 올라왔다. 레이코
의 팔꿈치가 꿈적하고 움직이자 그 반동으로 빈 주스 캔이 바닥에 떨
어져 굴렀지만 깨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가오루는 갈 준비를 차리며 말했다.
"너희 어머닌 잠들었구나, 난 슬슬 갈게."
가정교사로서의 약속 시간은 벌써 지났다
"가오루 아저씨 , 아까 나한테 뭔가 말하려고 하지 않았어요7"
아직 이야기가 충분하지 않은지 료지는 불만스런 듯한 얼굴을 했
다
"다음에 또 오늘 하던 얘기 계속하자."
가오루는 의자에서 일어나 실내를 둘러보았다. 레이코는 포갠 손
등에 오른쪽 뺨을 얹고 얼굴을 이쪽으로 돌리고 있었다. 눈은 감고
있어도 입은 반쯤 벌리고 있어 손등이 침으로 젖어 있었다. 깊은 잠
에 빠져 사랑스럽게 곤히 자는 얼굴이었다
10살 이상이나 연상인 여성을 사랑스럽다고 느낀 것은 처음이었
다 가오루는 레이코의 온몸에 사랑스러움을 느껴 문득 몸을 만져 보
고 싶은 욕망을 품었다.
"엄마, 엄마."
료지는 침대에서 손을 뻗어 어깨를 흔들었다 일어날 기미가 보이
지 않았다.
"안 돼요, 완전히 깊은 잠에 빠져 버렸어요."
료지는 천진난만한 눈동자를 가오루에게 향한 후, 그대로 시선을
옆에 딸린 침대로 옮겨 갔다
"엄마는 내 병간호로 지쳐 있어요. 잠이 들었을 때 푹 자게 해주고
싶어요. 오늘밤도 또 밤중에 일어나야 될 테니까 "
료지가 담담하게 말했다.
가오루는 왠지 료지에게 속마음을 들킨 기분이 들어 몸에 이상한
화끈거 림을 느꼈다
·엄마를 안아서 옆 침대로 옮겨 주었으면 좋겠어요
가오루에게는 료지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안아서 움직이는 거리는 2미터도 안 된다 짤막한 귈로트에서 뻗
은 레이코의 다리는 닿는 것을 거부하는 듯이 양 무릎이 꼭 맞붙어
있었다. 가초루의 체력이라면 여자 한 사람을 침대로 옮기는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서로 닿는 피부 감촉에서 어떤 자극을 받
을지 몰라,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지 않을까 하고 걱정이 되었다.
"엄마는 한번 잠들면 일어나질 못한다니까."
그렇게 말하고 료지는 의미 있는 듯한 얼굴을 했다. 일부러 가오루
로부터 얼굴을 돌리고 있었다. 그러면서 가오루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가오루가 레이코에게 이성으로서의 흥미
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부추기는 것처럼 느껴졌다
‥‥보라구,우리 엄마만지고싶지?좋아.내가 허락할 테니까 자,
어서 , 내가 기회를 줄 테니까‥‥
묘한 웃음을 띠며 료지는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가오루는 잠자코 옆에 딸린 간이 침대를 정리했다. 료지의 도발에
진 것이 아니다. 레이코의 몸을 만져 감정이 한 걸음 깊어진다면, 스
스로를 거기에 맡겨 보고 싶었다. 육체의 접촉이 정신에 주는 영향을
가오루는 아직 충분히 경험하지 못한 것이다.
가오루는 레이코의 목덜미와 양 무릎 아래에 손을 넣어 단숨에 안
아올려 침대로 옮겼다 침대에 떨어뜨렸을 때의 반동으로 레이코의
입술이 아주 짧은 순간, 가오루의 목덜미에 닿았다 레이코는 눈을
약간 뜨고 양 손에 힘을 넣어 가오루의 몸을 끌어 당기는가 싶더니 안
심한 표정으로 힘을 풀고 그대로 다시 잠에 빠져 갔다.
찌금 움직이면 일어나 버릴 것이라고 생각한 가오루는 조용히 꼼
짝하지 않고 몇 초간, 레이코의 몸을 자신의 몸으로 덮고 있었다. 가
슴과 배 중간 위치에 얼굴을 묻고 옷을 통해 몸의 탄력을 느끼면서,
눈만은 얼굴 쪽을 향했다. 레이코의 얼굴을 아래쪽에서 들여다보는
모양새였다. 가느다란 턱의 선, 그 위에는 검은 두 개의 콧구멍이 있
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앵글이었다.
서서히 몸을 일으켜 레이코의 몸에서 떨어지면서 가오루는 자문자
답을 반복한다
‥‥좋아하게 돼버린 걸까?
목덜미에 와닿았던 입술의 감촉이 아직 생생하다.
"그럼 , 다음 주에 또 보자 "
가슴의 고동이 들키지 않도록 가오루는 조심스럽게 문 손잡이에
손을 대었다
료지는 책상다리를 한 채 무릎을 아래 위로 흔들며 뚝뚝 손가락 관
절로 소리를 냈다. 조금 전과는 돌변하여 표정이 사라져 있었다. 도
발하는 것도 아니고,비웃는 것도 아니다 감정을 드러내려 하지 않
은 채 무표정하게 죽은 얼굴이 거기 있었다
"안녕히 가세요."
가오루는 재빨리 방에서 나왔다. 어색하게 웃는 료지의 얼굴이 가
오루가 사라진 후에도 문에 붙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가오루는 직감했다. 앞으로 자신의 인생에 레이코와 료지는 깊이
관련될 것이라고. 이 만남은 우연이 아니었다.
병리학 교실에 적을 둔 사이키 조교수에게 놀러 가는 것은 가오루
에게 있어서는 즐거움 중 하나였다.
사이키는 가오루가 다니는 대학의 조교수이면서 아버지의 대학 동
창이기도해서 이것저것 상의하는 일이 많았다. 게다가 근래에는 아
버지의 병세가 더 악화되어 마음이 불안해서 찾아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지도 교수는 아니지만 가족끼리 안 지가 오래되어 어린 시
절부터 친했던 것이다.
가오루가 정기적으로 사이키를 방문하는 데는 한 가지 목적이 더
있었다. 아버지를 괴롭히고 있는 암세포가 현재 그의 연구실에서 배
양되고 있어 그 모습을 현미경으로 보기 위해서였다. 적의 공격을 방
어하기 위해서는 우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일단 병동에서 밖으로 나온 가오루는 병리, 법의학, 미생물 등의
기초 의학 연구실을 수용하고 있는 건물로 들어갔다 신구 건물이 뒤
섞여 있는 대학 병원 가운데에서도 오래 전에 지어진 건물이다 2층
이 법의학 교실,그리고3층에 가오루가목표로 하는 병리학 교실이
있다. 계단을 올라가 왼쪽으로 꺾어지자 양쪽에 작은 연구실이 늘어
선 복도가 나타났다
가오루는 사이키 교수의 연구실 앞에 서서 문을 노크했다
"들어와요."
사이키 교수의 목소리가 들리자 가오루는 얼굴 반쪽을 문 틈으로
들이 밀고 들여다보았다.
"어 , 왔나 "
사이키는 평소와 같은 말로 가오루를 맞이했다.
"방해됐나요?"
"보시다시피 바쁘네 . 볼일이 있으면 알아서 하게 "
사이키는 오늘 오후 절제한 환부 조직의 세포 검사로 바쁜 듯, 제
대로 돌아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혼자인 편이 신
경 쓸 일 없이 느긋하게 관찰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럼 , 실례하겠습니다. "
가오루는 대형 냉장고 같은 모양을 한 이산화탄소 인큐베이터 문
을 열고 아버지의 세포를 찾았다. 인큐베이터 내부는 항온으로 유지
되어 있고 게다가 이산화탄소수치도 거의 일정했다. 오랫동안문을
열어 둘 수는 없다
아버지의 암세포를 배양하고 있는 플라스틱 샬레는 평소와 같은
장소에 있어서 바로 발견할 수 있었다. 이것이 소멸되지 않는 영원한
생명인가 싶자 가오루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절제된 아버지의 간은 불그스름한 원래 색에서 하얀 가루가 뿜어
져 나온 반점 모양으로 변화하여 포르말린이 담긴 유리병에 틀어박
혀 다른 캐비닛에 놓여 있었다. 3년 전부터 계속 보존되어 온 것이
다. 빛의 가감으로 그렇게 보이는 것인지, 가끔 몸부림치는 것처럼
꿈틀대는 때가 있었다.
포르말린에 담긴 간은 물론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살아 있는 것
은 샬레 속에서 배양되고 있는 암세포뿐이다.
가오루는 아버지를 괴롭히는 암세포에 대한 증오와 선입관을 버리
고 표본을 관찰했다. 배율을 높여 가자 세포가 모여 덩어리를 만들어
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반투명에다 홀쭉하게 가늘고 긴 세포가
빽빽하게 자라나 刻은 녹색으로 물들어 있다. 세포 본래의 색 때문에
녹색으로 보이는 것은 아니다. 현미경에 녹색 필터가 장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세포는 어느 부분이나 부풀어 오르는 일 없이 똑같아서
평면적이고 전체적으로 정연한데, 이 암세포는 여기저기 녹색의 짙
은 그림fl를 떨구고 있었다.
무수한 점이 확실히 보였다. 동그랗게 드문드문 부풀어올라 반짝
반짝 빛을 발하고 있다. 분열중인 세포이다.
가오루는 몇 번이고 샬레를 교환하여 정상 세포와 암세포를 비교
해 보았다. 표면적인 차이는 명백했다. 암세포에는 혼란을 머금은 지
저분함이 있었다.
세포의 표면을 살피는 것까지가 한계로 세포 내부, 핵이나 DNA가
있는 그대로의 상태까지는 광학 현미경의 힘이 미치지 않는다 그러
나 가오루는 싫증내지 않고 계속 관찰했다. 이런 짓을 하고 있어 봤
자 소용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겉모습을 바라보고 있어 봤자
대체 무엇을 알 수 있다는 말인가'1하지만 그렇게 마-음속에서 원망
을 마구 퍼부으면서도 하나하나의 표정을 정성들여 살폈다.
세포는 어느 것이나 모두 똑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 .똑같은 얼굴이다
가오루는 위상차 현미경에서 얼굴을 들었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가오루는 세포를 인간 얼굴에 비유하고 있었
다. 가오루에게는 똑같은 얼굴이 무수하게 모여 울퉁불퉁한 덩어리
가 되어 반점 모양을 만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잠시 동안 위상차 현미경에서 눈을 뗄 수밖에 없었다.
· .직감적 인 이미지를 얻은 것에 어떤 이유가 있는 걸까?
일단 그 점을 가포루는 의심하기 시작했다. 직감을 중요시하라는
것은 아버지의 가르침이었다
책을 읽고 있다가, 거리를 걷고 있다가, 갑자기 다른 장면을 떠을
리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다. 보통 일일이 그 이유를 생각하지는 않
는다. 거리를 걷고 있다가 어떤 탤런트의 포스터를 접하고 얼굴이 닳
은 아는 사람을 떠올리기도 한다‥‥ 그런 경우 포스터를 보았다고 하
는의식이 없다면 아무런 관계도 없이 갑자기 이미지가 떠오른 것처
럼 느껴지는 법이다.
일종의 싱크로니서티(Synchonicity, 동시성 :역자 주)라고 한다
면, 어디와 어디가 싱크로된 것인지 가오루는 분석해 보고 싶었다.
암세포를 약 200배로 보고 있다가 무언가에 촉발되어 세포 하나하나
가 인간의 얼굴로 보이고 말았다.
과연 이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일까?
궁리해 봤지만 해답을 발견할 수 없어 가오루는 눈을 다시 위상차
현미경으로 되돌렸다. 이미지를 유발시킨 것이 있을 터이다. 입체적
으로 겹쳐 있는 가늘고 긴 세포.반짝반짝 떠오르는 공 모양의 입자
가오루는 조금 전과 같은 말을 다시 중얼거리고 있었다
· 역시 어느 것이나 모두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
게다가 분명히 남자의 이미지는 아니었다. 여자의 냄새가 난다 달
걀 모양의 반듯한 얼굴을 하고 있고 피부는 반들반들 매끈하다
이상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위상차 현미경으로 세포를 관찰하다
가 인간의 얼굴을 떠올힌 것은 처음이었다.
가오루는 병실에서 료지와 마주하고 있었지만 욕실에서 나는 물소
리가 마음에 걸려 견딜 수가 없었다. 레이코는 조금 전부터 줄곧 욕
실에 틀어박혀 뭔가하고 있었다. 샤워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속
옷인지 뭔지를 빨고 있는 것이다 료지에게 공부를 가르치려고 방문
을 열었을 때 레이코가 방 여기저기에 놓여 있던 속옷을 황급히 거둬
들이는 것을 본 것이다.
마음이 떠난 상태로 가오루는 료지에게서 질문받은 아버지의 병상
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대충 이야기를 마쳤는데도 료지는 좀더 듣고 싶은 듯한 기색을 보
였다 자신의 병이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가오루 아버지의 병
상을 참고삼아 마음속으로 미래를 그려 보고 싶은 모양이다.
가오루는 아버지의 암이 폐로 전이될 가능성을 엿보이기 전에 이
아기를 일단락지으려 했다 료지에게 나쁜 영향을 주지 않을까하는
고려도 있지만, 가오루 자신이 굳이 말하고 싶지 않았던 이유가 더
컸다.
폐로의 전이가 농후해지자 아버지는 약한 면을 보이면서 자신이
없어졌을 경우를 대비해 아들에게 어머니를 맡기려 했다.
· 마치를 부탁한다.
그런 식으로 약한 모습을 보일 때면 가오루는 아버지에게 분노를
터뜨리고 싶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남편을 잃은 뒤의 어머니를 어떻
게 위로하라는 건가, 자신에게 무리한 일을 강요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
침대에 누운 채인 료지와 마주하고 아버지의 병상을 말하고 있는
동안 가오루의 뇌리에는 아버지의 모습이 선명히 떠올라 입이 무거
워졌다. 어느새 입을 다물어 버린 가오루의 기분을 알아채지 못하고
료지는 하하하' 하고꾸며 낸듯한억지 웃음소리를 냈다.
"그러고 보니 나,가오루 아저씨의 아버지하고 한 번 얘기한적이
있어요."
똑같은 병으로 몇 번이고 입원과 퇴원을 반복한 두 사람이다. 거대
한 대학 병원이라고는 해도 어딘가에서 접촉점이 있다 한들 이상할
게 없다.
"그래 ?"
')B에 있는 키 큰 아저씨죠?"
"응, 맞아."
"강한사람이에요.간호사의 엉덩이를 만지고,늘 떠들어 대며 돌
아다니고 있어요."
틀림없는 아버지였다. 쾌활함을 잃지 않고 병과 싸우는 자세를 무
너뜨리지 않는 아버지의 존재는 일부 환자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
었다. 죽음에의 공포를 털끝만큼도 보이지 않고 밝게 행동하는 아버
지를 보고 있으면 주위의 환자는 약간의 가능성에 걸고 있는 희망을
완전히 버릴 수 없게 되는 모양이었다. 위와 대장과 간 일부를 잃고,
폐로의 전이도 예상된다고 하면 이미 운명은 다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남 앞에서는 무리한 쾌활함을 연출하
고 있었다. 유일하게 가오루 앞에서만은 약한 모습을 보이곤 했지
마‥‥
"어머니는요? 가오루 아저씨의 어머니는 어때요?"
걱정하는 기색도 없이 료지가 물었다.
욕실에서 나와 침대 위에서 빨랫감을 정리하고 있던 레이코가 벌
떡 일어나 다시 욕실로 사라졌다.
가오루는 그 뒷모습을 눈으로 쫓았지만 곧이어 들려야 할 물소리
가 욕실 안에서 들려오지 않았다. 레이코는 이 자리를 피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가오루의 어머니가 화제에 올랐기 때문일까'1
·럼프구의 접촉에 의해서도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가 감염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담당 의사로부터 그렇게 들었을 때, 가오루가 가장 걱정한 것은 어
머니였다. 림프구의 접촉으로 옮는다고 하는 의심을 가질 수 있던 시
점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성관계를 끊었을 테지만, 그 이전 단계에
서 어머니에게 감염되었을 가능성도 크다 가오루의 설득에 의해 어
머니가 혈액 검사를 받은 것은 겨우 최근의 일이었다.
결과는 양성. 아직 발병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전이성 인간 암 바이
러스는 어머니 세포의 DNA에 발붙이고 있었다.
현재로서는 그 단계에서 멈춰 있지만, 언제 세포를 암세포화시킬
지 모르는 일이다 아니,표면에 나타나지 않았을 뿐 이미 암으로의
변화가 시작되었을 우려도 있다.
언제 어떻게 해서 염색체에 발붙인 프로바이러스(숙주 세포의 유
전 형질과 결합하여 자신의 유전 정보를 복제해 나가는 바이러스 ' 역
자 주)가 세포를 암세포화하는가 하는 메커니즘은 불명확하여 앞으
로의 전개는 전혀 예측할 수 없다 단계가 다음으로 진행되면 숙주
세포로부터 새로운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가 계속해서 방출될 것
‥‥발병한다고 해도 난 절대로 수술은 싫어 .
결과가 나옴과 동시에 어머니는 그렇게 선언했다. 전이를 피할 수
없다면 수술하는 정도로는 소용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수술은 단지
진행을 늦추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고, 완치할 방법은 없다.
아버지의 병을 보아 온 어머니인만큼 몸을 절제하는 것을 싫어하
마음이 강했던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귀찮은 일은 현대 의학으로 치료가 곤란하다면 스스
로 기적을 불러 모으겠다고, 그 이후 어머니가 신비의 세계로 빠져든
것이다. 어머니가 구하고 싶은 것은 곧 암에 걸리게 될 자신의 미래
라기보다는 암 말기로 향하고 있는 남편의 생명이었다.
악마에게 혼을 팔아넘기는 일도 마다하지 않을 열의로 어머니는
북아메리카 인디언에 관한 옛 문헌을 조사하기도 했다. 어머니 책상
위에는 어디에서 보내온 것인지 모르는 원서 자료가 가득 쌓여 있었
다
‥‥민화의 세계에 암을 치료할 방법이 암시되어 있다
어머니는 잠꼬대처럼 그렇게 우겨대는 것이다.
욕실에서 두 번 고의적인 것 같은 물 흐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반응해서 료지는 흘끗 욕실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엄 만 보균자야."
소리를 낮추고 가오루가 말했다
"그래요? 그럼 , 가오루 아저씨도· . "
료지는 감정을 전혀 섞지 않고 물었지만,가오루는 천천히 얼굴을
옆으로 저었다. 가오루는 바로 2개월 전 검사에서 음성 판정을 받았
다
그러나 가오루가 음성이라는 걸 알고 료지는 웃었다. 암 바이러스
에 감염되지 않든 것을 알고 안심하는 웃음이 아니었다. 반대로 감염
되지 않은 것을 비웃으며 불창히 여기는 듯한, 킥킥거리는 웃음이었
다. 가오루는 불끈해 료지를 노려보았다.
"뭐 가 우습냐?"
"그래도 불쌍한걸 요."
"내가?"
가오루 자신이 자기 얼굴을 가리키자 료지는 두 번 연속해서 고개
를 끄덕였다.
"가오루 아저씨는 체격도 좋고 건강해 보이고, 좨 오래 살지 않을
까, 그렇게 생각하니 "
오토바이를 좋아하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瑞살 때부터 모터크로스
를 시작, 아버지의 초보적인 가르침을 받은 가오루는 경주에 나갈 정
도의 실력이 있었다. PC와의 놀이에 몰두하던 어린 시절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늠름한 신체로 성장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료지
는 지금 티셔츠 위에서도 확실히 드러나는 가오루의 근육을 불쌍하
다고 비웃는 것이다. 아버지로부터 이어받은 것을 조롱당한 가오루
는 여느 때와 달리 진지한 자세로 반론했다.
"살아가는 건 네가 생각하고 있는 것만큼 불쌍한 게 아냐."
한편으로 료지의 기분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언제 어떻게 해서
감염되었는지는 모르지만,그는 아직 12살의 어린 나이다 수술 항
암 치료, 입원과 퇴원을 되풀이한 지금까지의 인생은 괴로움의 연속
이었을 것이다. 자신이 거슬러온 인생을 보편화해서 모두 그럴 것이
라고 의심하고 싶어지는 것도 수긍이 간다
"그렇지만 인간은 어차피 죽죠',l"
료지는 공허한 눈을 천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가오루는 반론할 마
음을 잃었다.
어디나 모두 죽음으로 넘쳐 있었다. 눈앞에는 반들반들 벗겨진 작
은 머리가 있다.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항암 치료의 괴로움은 경험한 사람이 아니면 모른다. 격렬한 구토
감에 시달리고,식욕이 없어서 먹은 것을 단시간 안에 토해 내고 한
잠도 자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런 인생을 살아오면서 가까운 장래에
괴로움 속에서 인생을 마칠 료지에 대해 도대체 어떤 말이 위로가 될
것인가?
가오루는 피로를 느꼈다. 육체적인 것이 아니다 마음이 폐색 상태
가 되어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이다. 자유로운 비상을 하고 싶었다.
속박 없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웃음을 갖고 싶다 몸과 몸이 맞닿
는 농밀한 시간을 갖고 싶다.
"나는 애초부터 태어나는 것 따윈 원치 않았는걸 "
굳게 침묵을 지키고 있는 가오루는 아랑곳하지 않고 료지가 그렇
게 말한순간,욕실에서 레이코가나와 말의 여운을 받아냈다. 레이
코는 그대로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방을 가로질러 복도로 나갔다.
쌔 나를 낳은 거야?
아들의 그런 비난 섞인 말을 참지 못하고 그 자리를 떠난 것인지,
단순히 볼일이 있어서 밖으로 나간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조금 전부터 가오루는 레이코의 움직임이 마음에 걸렸다 그와 동
시에 두 가지 의문이 고개를 쳐들었다 우선 첫째로, 레이코가 전이
성 인간 암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있는 것인지, 아닌지 둘째로 어떤
경로로 료지가 전이성 인간 암 바이 러스에 감염된 것인지 . 가족의 비
밀을 건드리는 일이기도 해서 쉽사리 캐물어 볼 수 없는 질문이었다.
"그럼 , 간다
더 이상 료지의 옆에 있고 싶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레이코의 뒤
를 쫓아가고 싶어진 것이다. 가오루는 료지의 침대에서 떨어져 복도
로 난 문을 열었다. 좀더 깊이 레이코의 몸과 그 내면을 만져 보고 싶
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에 대한 흥미가 연애의 일종인지 어떤지
는 스스로도 판단하기 어려웠다. 좁은 병실에서 바깥 세계로 레이코
가 자신을 유혹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충동에 이끌려 가오루는 레이코의 모습을 찾아 병동의 긴 복도를
헤매기 시작했다.
레이코가 어디에 있는지 가오루는 왠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대로의 평온함은 이 병원의 가장 높은 곳에서 넓은 시야로
도심을 보는 거예요.
며칠 전 저녁.병동 맨 꼭대기 층에 있는 레스토랑 옆에 서서 유리
창에 얼굴을 딱 붙이고 밖을 내려다보는 레이코에게 '뭐하고 계십니
까?'라고 물었더니 그녀는 자신의 행위를 그렇게 설명했다
초여름, 1년 중에서 가장 낮이 긴 계절 해도 서서히 서쪽으로 기
울어 도시의 초고층 빌딩 실루엣이 검고 아름답게 부상되는 시간이
다 이 시간의 도심 전망을 레이코가 가장 좋아한다는 것을 가오루는
알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로 17층에 올라가 왼쪽 복도로 나가자 기등에 기대듯이
멈춰 선 여성의 그림자가 눈에 띄었다. 가오루는 소리 내지 않고 다
가가 살짝 옆에 나란히 섰다.
석양을 받은 레이코의 얼굴에 붉은 기가 돌아 요염하게 뺨을 빛내
고 있었다
가토루가 옆에 오는 것을 창 유리의 반사를 통해 바로 알아본 레이
코는 유리 속의 가오루를 향해 엷은 웃음을 보였다.
"미안해요."
무엇에 대해 사과하는 것인지 가오루는 알 수 없었다. 노력이 많이
가는 아들의 가정교사를 잘 해내 주기 때문일까?그렇다고 한다면
'고마워◎ 일 텐데, 뚜렷한 이유도 없이 사과를 받으니 대답할 말이
없었다.
"어지간히 높은 곳을 좋아하시네요."
가오루는굳이 '미안한' 이유를 묻지 않았다.
"좋아해요. 늘 지면에 닿을락말락하게 살아왔으니까요."
단독 주택에서 살았다는 걸까? 그렇다면 가오루와는 대조적인 주
거 환경에서 살아온 것이 된다. 가오루는지금도 도쿄 만에 접해 있
는 고층 맨션에서 어머니와 살고 있다.
어색한 분위기를 밀어젖히려는 듯 레이코는 괌 이야기를 들고 나
와 신나게 떠들어 댔다. 아들의 병이 나았을 때, 일단 맨 처음으로 무
엇을 하고 싶은지 잇따라 말을 이어갔던 것이다 '아들의 병이 나으
면'이라는 전제에 무리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 어떤 비현실적인 꿈을
들어도 상관없었다. 그 가운데 상당히 현실적인 꿈으로서 해외 여행
이 있었다
그래서, 레이코가 '당신의 꿈은 뭐죠?' 하고 화제를 돌렸을 때 가
오루는 망설이지 않고 10년 전부터 계획하고 있던 북아메리카 사막
으로의 가족 여행을 언급했다.
가오루는 간단히 10년 전 늦은 밤에 가족이 나눈 대화를 레이코에
게 들려 주었다 중력과 생명의 관계, 생명 탄생의 신비, 거기서부터
도출되는 장수촌의 가능성‥‥
아버지가 북아메리카 사막으로의 여행을 약속해 준 것이 기뻐서
이후 줄곧 세계의 장수촌에 흥미를 갖고, 암의 발병을 계기로 보다
상세하게 조사한 결과 장수촌과 암 환자수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지
않나 하고 의심해 왔다는 것을 알기 쉽게 설명했다.
레이코는 그 점에 흥미를 갖고 유리창을 스칠 듯 가오루 쪽으로
돌아보았다.
"관계라뇨?"
"아직 잘 모르지 만요,무시할수 없을 정도의 통계상 특색이 나타
났거든요."
레이코가 흥미 있는 듯 귀기울이는 바람에 가오루의 이야기도 열
기를 띠어 갔다.
"그날 밤 중력 이상과 장수촌을 연결지어 생각한 건 우연이 아니
었죠. 직감이 있었거든요. 과학상의 발견은 대부분의 경우 직감에 의
하죠. 직감이 우선되고, 이치는 나중에 따라오는 겁니다. 그날 밤 일
을 어떤 암시로 받아들이지 못할 것도 없어요.
아버지의 암이 간으로 전이된 무렵부터 난 세계 각지의 장수촌에
관해 자세히 조사하기 시작했죠 직감의 산물이 아닌, 존재가 확인되
고 있는 세계 각지의 장수촌을 여러 가지 데이터를 근거로 분석해 봤
어요. 공통점이 있다면 찾아내려고요.
골라 낸 건 특히 유명한4군데의 장수촌.흑해 연안,카프카스 지
방의 아브카시어.페루와 에콰도르 국경 부근의 성스러운 계곡 비르
카밤바. 카라코람 산맥과 힌두쿠시 산맥 사이에 끼여 주위로부터 격
리된 산지 훈자. 그리고 일본 사메시마 제도에 속한 사메이도. 실제
자신의 발로 조사하는 것은 무리니까, 이들 지역에 관한 문헌을 모아
가능한 한도 내에서 훌어보면서 직접 통계를 만들어 畿죠. 그러자 명
확한 특색이 눈에 띄었어요. 단언하기는 아직 좀 어렵지만, 이들 지
역에 사는 사람들 중에서는 암에 의한 사망자가 한 사람도 나오지 않
은 것 같아요. 전세계의 의학자나 생물학자가 장수촌으로 조사를 떠
나 여러 가지 보고를 남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보고에서도 암에
의한 사망이 기술돼 있지 않는 겁니다.
암이 적은 원인으로 제일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건 식생활의 차이일
거라고, 일단 어느 보고서나 설명을 붙이고 있죠. 그러나 발암 메커
니즘이 확실히 해명되어 있지 않은 이상, 추측의 범위를 넘어선 적은
없어요 이들 지역 주민이 야채나 곡물을 주로 한 검소한 식생활을
하고 있는 건 틀림없다지만 담배나 술에 관해서는 다른 지역 이상의
양을 소비하고 있다고 하는 데이터도 있어서 발암 물질의 섭취량이
다른 곳보다 적다고 단언할 수는 없죠
그러니까 나로선 너무나 이상한 거예요. 장수촌에는 왜 암 환자가
적은 것인가. 그래서‥‥ 아세요',l 암세포는 정상 세포를 불로불사화하
는 작용이 있어요.이게 뭔가관계되어 있는건지,아닌지.그리고 장
수촌의 위치와 중력 이상의 마이너스 지점이 딱 겯쳐지는 것을어떻
게 설명하면 되는 건지. 뭔가 합당한 해석이 있겠지만, 전혀 떠오르
지 않아요.
가오루는 거기에서 한 호흡을 사이에 두었다. 이야기하고 있는 동
안에 묘한 고양감이 솟구쳐 왔다.
레이코는 잠시 잠자코 가오루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입술
을 한고 나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런데 현재 맹위를 떨치고 있는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는 어디
에서 온 거예요?"
요점을 벗어났다고 생각할 수 있는 레이코의 질문이었다.
"왜 그런 걸 묻죠?"
눈을 크게 뜨고 진지한 얼굴로 질문의 대답을 원하고 있는 레이코
가 가오루는 못 견디게 사랑스러웠다 상대가 10살이나 연상인 것을
잊고, 다정하게 양 손으로 뺨을 감싸 얼굴을 가까이 대고 싶어진다.
"웃지 말아요. 하지만 어쩌면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의 발상지가
당신이 말하는 장수촌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떠올라서요."
가오루로서는 레이코의 사고 순서를 추측할 수 있다. 이전에 그런
소설을 읽은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전신을 암세포에 침범당해 , 죽은
것이 아니라 반대로 불사성을 지니게 된 사람의 이야기.
·장수촌의 사람은 암과 공존하는 기술을 습득하여 그 때문에 수
명이 길어지고 말았다.
레이코는 그런 식으로 상상력을 동원한 것이리라 암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장수촌에는 암이 넘쳐나고 있다. 다만 그것이 원인이 되어 죽
는 사람이 없을 뿐이 아닐까? 그리고 장수촌이야말로 암 바이러스의
발상지 임 에 틀림없다고‥‥
"장수촌 주민이 지닌 암 유전자가 바이러스의 힘에 의해 꺼내져 전
이성 인판 암 바이러스가 되어 세계에 퍼졌다. 당신은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거죠?"
"어려운 건 몰라요. 문득 생각이 났을 뿐이니까요. 신경 쓰지 말아
레이코는 눈을 아래로 떨구었다. 몇 분 사이에 하늘 색깔은 어지럼
게 변화하여 그 변화가 점점 현저하게 레이코의 표정에 반영되고 있
었다 눈가의 움푹 파인 곳과 콧날에서 눈 아랫부분으로 그림자가 비
쳐 음영이 깊어 보였다. 밖이 어두워지자 창 유리는 거울의 역할을
더 많이 담당하기 시작했다. 도시의 고층 빌딩을 배경으로 한 레이코
의 얼굴은 유리에 비쳐져 어둠 속에 얼굴만 떠올라 있는 것처럼 보였
다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에 의한 암환자가특히 많은 곳은 일본
과 미국입니다. "
분명히 환자의 분포는 두드러지는 특색을 나타내고 있다. 환자 수
는 일본과 미국이 각각 100만 명 규모, 유럽 선진국에서는 수십만
명 정도이고, 장수촌이 있을 만한 변경 땅에서의 발병은 거의 보고되
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 가설에는 무리가 있다고 가오루는 넌지시
말할 참이었다.
"당신이 말하는 북아메리카 사막 지대는 어때요? 마이너스 중력
이상이 강하니까 장수촌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죠?"
"추측의 범위를 넘지 않아요."
"근거는 아무것도 없다는 얘기예요?"
"말하자면 단순한 게임에 지나지 않죠."
게임'이라는 표현이 상당히 충격적이었는지 레이코는 눈에 띄게
낙담했다.
"뭐예요?"
낙담했을 뿐만 아니라, 레이코는 불쾌하게 얼굴을 찡그리며 가오
루를 외면해 버리려는 몸짓을 보였다.
"왜 그래요?"
갑작스런 태도의 변화에 가오루는 약간 당황했다
"지금은 기적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단 말이에요."
얼굴을 돌린 채 레이코는 말한다.
기적! 가오루는 진저리가 났다 어머니가 빠진 올가미에 레이코도
빠지려 하고 있다.
"기적이라, 그만두세요."
"아뇨, 그만두지 않을래요."
"당신에겐 그런 것말고도 해야 할 일이 있어요."
가오루는 레이코가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레
이코는 가오루가 말하는 것 따윈 듣고 있지 않았다. 원인을 따지면
자신이 뿌린 씨앗이다. 중력 이상이나 장수촌의 일 따윈 떠들지 않는
게 좋았다고 가오루는 후회했다.
"부탁합니다. 내가 말한 것 따윈 잊었으면 좋겠군요 "
"아는. 안 잊을 거예요. 암의 나쁜 점을 없애고 악성을 양성으로
바꾸는 인자가 당신이 가려던 사막 지대에 존재하는 거예요."
가오루는 가볍게 두 손을 들어 레이코를 제지하려 했지만 소용없
었다 레이코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열의를 나타냈다.
"역시 당신, 가는 게 좋겠어요, 그곳으로. 죽음을 삶으로 바꾸는
인자를 얻기 위해서 "
"잠깐 기다려요."
여자의 얼굴이 바로 가까이에 있었다 어느새 가오루의 손이 주먹
을 꼭 쥐고 있었다.
"부탁해요."
레이코의 손이 부드러운 감촉을 전해 온다.
"이젠 싫어요, 이런 생활. 이제 곧 네 번째 화학 요법이 시작돼요."
"그전 괴롭죠."
"갈 수 있다면, 나도 가고 싶어요
가족과 함께 계획하던 여행이 갑작스런 변화를 이루려 하고 있다
레이코와 둘이서 북아메리카 사막 지대를 찾아가는 상상만 해도 몸
의 한가운데 가 뜨거워진다. 뉴멕시코, 애리조나, 유타, 콜로라도 4개
주의 경계에 존재하는 강렬한 마이너스의 중력 이상. 깊고 깊은 구렁
텅이가 소용돌이치며 닥치는 대로 빨아들이려는 것 같았다 마이너
스의 중력 이상에 끌려든다‥‥ 아니 , 지금의 가오루는 눈앞으로 다가
선 눈동자에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엷게 립스틱을 발랐을 뿐, 화장기 없는 맨얼굴이 자연스런 향기를
감돌게 하고 있었다. 형광등이 비치는 복도에서 굵은 기등이 내뻗어
가오루와 레이코는 그 그림자에 폭 들어가 있었다. 전면의 유리창은
바야흐로 완전히 거울이 되어 드물게 복도를 오고 가는 인기척을 비
추고 있다.
알지 못하는 사이에 가오루는 레이코의 손을 다시 꼭 쥐고 있었다.
그래서 서로의 손을 가지고 장난하고 손가락과 손가락을 걸어 눈과
눈으로 상대의 의사를 서로 확인했다.
복도에서 모든 발소리가 사라지자 두 사람은 갑자기 찾아든 적막
을 노렸던 것처럼 몸을 끌어당겨 서로를 안았다. 17층 복도에서 사람
그림자가 사라지는 순간을 포착했던 것이다
양 팔을 상대의 등에 두르고, 서로의 육체는 격렬하게 맥박치면서
고동 소리가 들릴 듯했다 두 사랑의 피의 리듬이 동시에 일어나 勢
은 천 한 장을 통해 서로의 세포를 자극했다 가오루의 그곳은 우뚝
선 채 레이코의 배 근처를 누르고 있었다.
가오루는 일단 머리를 떼어 상대의 얼굴을 위로 향하게 해 입술을
찾았지만 레이코는 가오루의 움직임에 응하려 하지 않고 더욱 세게
가오루의 등을 더듬어 왔다. 이마를 가오루의 턱에 딱 붙이고 일부러
옆으로 돌리는 것 같은 행동이 완강하게 키스를 거부하고 있는 것으로 느껴 졌다.
그렇게 몇 번이나 키스를 시도했는데도 얼굴을 피하고
나서야 가오루는 겨우 깨달았다.
‥‥레이코도 감염된 건가',?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는 타액의 접촉에 의해 감염되는 경우가
있는데.레이코는 가오루의 몸을 걱정해서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말
없는 행위의 의미를 깨닫기 시작했다. 바로조금 전 료지가 '나는 애
초부터 태어나는 것 따윈 원치 않았는걸 '이라고 말했을 때 레이코는
조용히 그 자리를 피했다
료지는 어머니의 태내에 있을 때 이미 감염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
래서 어머니를 비난하는 말이 그만 입에서 나오자 그것을 들은 레이
코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진 것이다.
그러나 감염될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가오루의 욕구를 식히는 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부드럽게 몸을 떼고 두 손으로 뺨을 감싸면서,
눈빛으로 사정을 깨달았음을 전하고는 그대로 다짜고짜 입술을 포개
었다.
이번에는 레이코도 거부하려 하지 않았다.
한쪽 손을 목덜미에 두르고 다른 한쪽 손을 히프에 댄 가오루는 레
이코의 몸을 자신에게 끌어당겼다. 그 바람에 힘이 너무 들어가서 이
와 이가 가볍게 부딪쳐 입술의 부드러움과 이의 딱딱함과 타액이 뒤
섞인 음탕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숨을 멈추고 서로의 입을 빨다가 격렬함에 견디지 못하고 일단 입
술을 돌려 努과 뺨을 붙이자 서로의 입에서 괴로운 듯한 숨결이 새어
나왔다. 레이코는 발돋움을 해 자신의 입을 될 수 있는 한 가오루의
귓가에 가까이 댔다. 그리고 어지러워지는 호흡에 헐떡이면서 필사
적으로 말을 꺼냈다.
"부탁이에요· .."
귓가에서 몇 번이고 반복되는, 숨결이라고도 애원이라고도 할 수
없는 공기의 진동
레이코가 구하고 싶은 것은 아들의 목숨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생
명 이기도 했다.
"부탁해요‥‥ 도와줘요."
"난, 신· .끼 아니에요."
그 말이 고작이었다. 신체 기관이 충혈되어 정상적인 사고마저 뜻
대로 안 되는 지금, 그런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자신 또한 죽음의
영역에 한 걸음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망설임 없이 육
체가 명하는 대로 레이코를 부등켜안고 입술을 포개 버린 것을 후회
하는 것은 아니다 몇 번이든 같은 경우에 놓였더라도 역시 같은 길
을 택했을 거라 생각했다. 저항할 수 없는 힘이 레이코의 전신에서
발산되고 있었다.
"부탁해요, 당신은 가는 거예요, 그곳으로."
레이코마저도 강렬하게 마이너스중력 이상의 땅으로 몰아세우려
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북아메리카 사막지대로의 여행은 마치 구원
의 여행처럼 가오루 안에서 그 뿌리를 단단히 내리며 자라나고 있었
다.
가오루가 아버지의 병실에 들어서자, 마침 침대 옆 의자에서 사이
키 조교수가 일어서고 있었다
"어 이 ."
사이키는 가오루의 얼굴을 보더니 가볍게 손을 들어 보이기만 하
고 그대로 병실에서 나가려 했다.
"좀더 있다 가세요."
아버지를 병 문안하는 아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눈치 빠르게
일어난 것이라고 한다면, 가오루로서는 사이키를 말릴 의무가 있다.
"그렇게 못 해. 아시다시피 나도 바빠서 말야."
사교성 인사가 아니라, 사이키는 정말 바쁜 듯이 목을 가볍게 흔들
며 일어서고 있었다.
"그렇습니까?"
"응, 좀 부탁받은 게 있어서 여기에 들렀어 .'
사이키는 그렇게 말하고 히데유키 쪽으로 시선을 보내더니 '그럼
하고 한 손을 들어 보이고는 방을 나갔다 가오루는 그 뒷모습을 끝
까지 지켜보고 나서 아버지 옆으로 다가갔다.
"아버지 , 몸은 어때요')"
위에서부터 내려다보며 안색과 뺨의 탄력을 확인하고 나서 가오루
는 그때까지 사이키가 앉아 있던 의자에 앉으려 했다.
시선을 천장에 고정시킨 채 히 데유쾨는 정신이 나간 듯했다
"왜 그래요'?"
"사이키 녀석 , 나쁜 소식만 전해 주고 자빠졌어 "
의학부 동창인 사이키는 임상이 아닌 기초 의학에 적을 두고 있는
까닭에 히데유키의 증상을 직접 진찰하는 일은 없다 그래서 더욱 더
나쁜 소식이라는 게 뭘까 하고 마음에 걸렸다.
"나쁜 소식이라구요?"
"나카무라 마사토 알지 ?"
히데유키의 목소리는 약간 쉰 것 같았다.
"네, 아버지 친구잖아요?"
가오루는 나카무라라고 하는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히데유키가
이전에 '루프' 연구에 관계했을 무렵의 동료로,현재 지방 대학의 공
학부 교수였다.
"죽었어 ."
무뚝뚝한 말투였다
"그래요?"
"녀석도, 죽었다구."
가오루는 침을 꿀꺽 삼켰다. 죽음의 그림자가 한발 한발 아버지의
곁으로 살며시 다가오고 있었다.
히데유키는 그에 이어 세 사람의 이름을 말하고는 마찬가지로 '죽
었어'라는 불평으로 매듭을 지었다
"이상한 것 같지 않니? 지금 말한 이름은 모두 인공 생명을 테마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던 동료랑 그 일에 협력했던 사람들뿐이 야."
"그들 모두 전이 성 인간 암 바이러스 때문에 죽었다는 거예요?"
"현재 일본에 감염자는 몇 명 정도 있지?"
레이코나 엄마처럼 감염되고도 아직 발병하지 않은 사람까지 포함
해서 약 100만 명이라고 하는 숫자가 데이터로 나와 있었다
'약 100만 명이랄까',l"
"많다고는 해도 전 인구의 1%에 지나지 않아 그런데 내 주위엔
감염되지 않은 놈이 없어 ."
히데유키는 흘끗 가오루 쪽으로 눈을 돌렸다. 처음 한동안은 상대
를 살피는 듯한 강한 시선이었지만 점차 부드럽게 기도하는 표정을
머금어 갔다.
'넌 괜찮은 거지',l"
히데유키는 시트 아래에서 손을 뻗어 청바지로 덜인 가오루의 무
릎을 만졌다. 사실은 손을 만지고 싶은 것이겠지만 피부와 피부의
접촉조차 꺼리고 있는 것이다. 아내가 감염된 뒤에 아들에게까지 바
이러스가 옮겨 갔다고 하면. 히데유괴는 암파 싸우려는 기력을 잃을
지도 모른다
가오루는 정차 약해져 가는 아버지의 시선에서 눈을 피했다.
"검사 결과엔 문.제 없냐',l"
"걱정하지 말라니까요."
마음속을 들킨 기분.쭈뼛쭈뼛거리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 고작
이었다. 분명히 2개월 전 검사 결과는 음성이었다. 하지만 다음 달
검사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알 길이 없었다.
복도에서 울려퍼지는 발소리에 반응하는 것처럼 가장하며 얼굴을
돌렸다 가오루의 뇌리에 어제 오후의 , 료지의 병실에서 몸을 꿈틀거
리게 만들었던 충동과 감각의 기복 등이 단편적으로 이어지며 되살
아났다.
그저께 저녁은 레이코와의 접촉을 키스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병동 맨 꼭대기 복도여서 두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은 불과 몇 분에
지나지 않았다. 병원이라고 하는 장소의 성질을 생각하면 그 이상의
일은 바랄 수 없었다.
그런데 어제 오후 료지의 병실에 놔두고 온 병리학 교과서를 가지
러 들렀을 때 료지는 검사를 받기 위해 방사선과로 불려간 직후였다.
그 시간에 검사가 있는 것을 가오루는 알지 못했고, 레이코로부터 듣
지도 못했다. 하지만 가오루는 료지가 검사하러 나간 시간을 골라 병
실을 찾은 셈이 되어 버렸다
조그맣게 노크하자마자 병실 문이 열렸다. 문의 가는 틈으로 보인
것은 젖은 레이코의 얼굴이었다 손에 타월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세수를 하는 중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문 바로 왼쪽에 세면대가 있
고그위에는lOW짜리 형광등이 켜져 있었다 레이코는욕실이 아니
라 손을 씻기 위한 간이 세면대에서 화장을 지우고 있었던 모양이다.
타월로 얼굴을 닦으면서 레이코는 숨 죽인 소리로 물었다
"잊고 간 물건 찾으러 왔죠?"
"죄송해요, 갑자기 ."
가오루도 덩달아 소리를 낮추었다. 방 안에 료지가 있는 기색은 없
었다.
"들어와요."
레이코는 가오루의 손을 끌어 방으로 끌어들이고 문을 닫았다. 두
사람은 세면대 옆에 거울을 앞에 두고 마주 섰다. 레이코는 가지고
있던 타월로 얼굴을 마저 닦고, 가오루 앞에 맨얼굴을 보였다 나이
에 맞게 눈가에는 주름이 져 오히려 매력적이었다.
가오루는 칸막이 안쪽 침대를 턱으로 가리키고는 료지가 없는 까
닭을 넌지시 물었다.
"방금 간호사를 따라갔어요."
"검사?"
"네 ."
"무슨 검사요?"
"신티그램 검사‥‥‥
익숙하지 않은 듯 더듬거리는 발음으로 그렇게 말했다
화학요법에 앞서 하는 신티그램 검사는 조영제를 혈관에 주사하기
때문에 최소한 2시간 정도 걸린다. 검사가 끝나기까지 방 안에 들어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레이코와 가오루는 잠깐 동안 두
사람만의 독실을 얻은 것이다
료지가 검사받으러 나가자 레이코는 아들의 화학요법이 눈앞에 다
가온 것을 실감하고 초조해 하고 있었다. 또 괴로운 싸움이 시작되는
것이다. 항암제는 암세포를 공격할 뿐만 아니라 정상적인 세포도 상
처를 입힌다. 몸의 나른함과 식욕부진, 구역질 등에 시달리는 아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무엇보다도 괴롭다. 게다가 이 괴로운 싸움을 견며
냈다고 해서 암세포가 소멸되는 것도 아니다. 세포 증식의 속도를 약
간 억제시켜 결정적인 시기를 늦출 뿐이다. 이 암의 경우 전이는 피
할 수 없는 운명이다.
가오루는 아들을 검사실로 보낸 어머니에게 어떤 말을 하면 좋을
지 몰랐다 속보이는 일시적인 위안은 레이코를 더욱 의기소침하게
만들 뿐이다
레이코는 정면에서 가오루의 눈을 응시했다.
"기적이 란 거 기다리고 있으면 와요',7"
두손으로 가오루의 손을 감싸질었다 버릇처럼 레이코는 바로손
을 대온다
"모릅니다. "
"이제 진저리나요, 이런 생확."
"나도 마찬가지 예요."
"어떻게든 부탁해요. 저 아이와 날 도와줘요. 당신이라면 할 수 있
죠'7"
·할 수 있을 게 뭐야!
가슴속으로는 그렇게 외치면서도 결코 말로는 할 수 없었다
레이코의 앞 머리카락 몇 가닥이 물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
다. 그 밑에서 물기를 머금은 눈에 애원의 빛이 떠오른다. 지금이라
도을 것처럼 입가가 비뚤어져 있어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사랑스러
움이 더해졌다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었다. 이 가련한 육체가 사라지
는 것을 어찌할 도리 없이 바라보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다.
바로 옆 세면대에서는 꼭지가 꼭 잠겨 있지 않아서 물이 가늘게 흐
르고 있었다. '조르르 조르르' 하는 소리가 좁은 방에 가득 차 욕망을
자극했다. 물소리가 행위를 재촉하고 있는 것 같았다.
레이코는 수도꼭지에 눈을 돌려 꼭지를 꼭 잠그기 위해 가오루에
게서 손을 떼려 했다 하지만 가오루는 반대로 그 손을 다시 쥐고 강
한 힘으로 레이코를 끌어당겼다.
처음 한동안 저항하는 포즈를 취하던 레이코는 복잡한 심정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상반되는 감정이 육체 안에서 싸우는 모습을 가오
루는 촉감으로 알 수 있었다 어머니로서의 감정 , 그리고 여자로서의
욕구.
레이코를 부등켜안은 채 몸의 위치를 바꿔 그대로 침대에 쓰러뜨
리려 했다. 그런데 사소한 저항을 만나 침대 옆에 등을 꽉 붙인 듯한
자세로 레이코는 주저앉아 버렸다.
주인이 빠진 병실 침대에 확 눌려 등에 죽음을 짊어진 것 같은 형
태로 레이코는 밀려오는 충동에 맞서고 있었다. 여기저기에서 물델
듯이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 그 한편에서 솟구쳐 오르는 성욕은 살
아 있다는 증거였다 이러고 있는 지금, 료지는 가혹한 검사에 몸을
맡기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레이코의 성욕은 시들해지기 시
작했다. 어머니로서의 본능이 정욕을 누르고 있었다.
그러나 가오루는 그렇지 않았다. 수습할 수 떫을 정도까지 흥분되
어, 마음과 육체가 한 몸을 이루어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치달았다
레이코가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에 감껌되어 있다는 사실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성기 점막을 서로 마찰하는 행위는 입과 입을 맞추
는 것 이상의 높은 확률로 바이러스를 옮긴다는 데이터도 가오루의
뇌리에서 완전히 씻겨 내려갔다.
병실 바닥에 바싹 마주 앉아 입술과 입술을 포개면서 가오루는 재
빠르게 레이코의 블라우스 단추를 풀렸다. 연애 경험도 변변치 않으
면서 굉장한 플레이 보이처럼 행동하는 자신이 다른 사람처럼 느껴
졌다.
가오루가 어제의 회상에 잠겨 있을 때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만은
이 절망적인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집요하
게 늘어놓고 있었다.
·혈액 검사는 음성이었냐?
넌 젊으니까 여자를 조심해라.
무슨 일에나 충분한 주의를 게을리하지 않도록 해라
·한때의 유혹에 빠지지 마라.
말은 공허하게 머리 위를 지나갔다. 아버지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없었다. 여자를 사랑한다고 하는 순수한 행동이 한편으로는 아버지
의 기대를 배반하고 있는 것이다.
"야, 임마. 듣고 있는 거냐!'
위쪽 허공에 어중간하게 시선을 두고 있는 가오루에게 히데유키는
자극을 주어 활력을 불어넣었다.
'임마'라핀 불리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가오루의 의식은 현실
로 되돌아왔다.
'걱정하지 말라니까요."
그렇게 말해도 히데유키는 의심스러워하는 듯한 시선을 거두려 들
지 않았다.
두 사람은 잠시 동안 아무 말 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그렇게 함으
로써 말로 얻을 수 있는 이상의 정보를 교환한 후, 히데유키는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가오루의 무릎 위에 손을 뻗었다.
"야, 알고 있냐? 넌, 내 보물이야."
가오루는 아버지의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네,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런 것에 지지마.싸우는 거다 모든지력(知力)을 최
대한 쥐어짜내, 그 젊은 몸을 멸하려는 적과 맞서 ."
레이코는 '도와줘요'라고 매달리고, 아버지는 싸워라'고 무작정
독려한다 양쪽 모두타인으로부터의 압력이었다 하지만 가령 바이
러스에 감염되어 전이성 인간 암 발병의 위험에 빠진다면 이것은 남
의 일이 아니게 된다. 자기 몸을 지키기 위한 싸움에 스스로를 몰아
세우는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바로 조금 전,사이키로부터 옛날 동료가 잇따라 이 병으로 쓰러
졌다는 소식을 듣고, 갑자기 생각난 거다. 내 주위에만 너무 많지 않
나 하고."
히데유끼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럴지도 몰라요."
가오루는 맞장구를 쳤다. 아버지와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은 왠지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의 보균자가 많다
"뭔가 이유가 있을지도 몰라 "
"연구자가 걸리기 쉼다든가· ."
"너라면 자신 있겠지 . 세계의 중력 이상 분포도에서 장수촌의 존재
를 탐지해 낸 정도니까 말야. 알겠냐?일본하고 미국에서의 감염자
분포도를 만들어 보는 거야 혹은 직업별 감염자의 비율· .모을수
있는 한 데이터를 모아서 통계를 잡아."
"알았어요. 해볼게요."
"예감이 든다. 우리 주위에 이 병이 많은 건 우연이 아닌 것 같다. "
히데유키는 얼굴을 천장으로 향한 채 왼손을 수납장으로 뻗어 부
근을 만지작거렸다. 뭔가를 찾고 있는 모양이다. 가오루의 눈에 수납
장에 얹힌 수십 장의 프린트물이 들어왔다 아버지보다도 먼저 집어
올려 보이며 물었다
"이거예요?"
첫 번째 프린트물에는 다음과 같은 알파벳의 나열이 있었다.
A AfG C TA C TA C TAf TA GTA GA Af rGArG C C AC C mC A G C TC G C G C C C
CA‥‥
흘끗 보기만 해도 유전자의 염기 배열을 나타낸 것임을 알 수 있
다.
"사이키가 놓고 간 거야."
"무슨 유전자를 해석한 거예요?"
"이거지 뭐 ."
히데유키는 그렇게 말하고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폐로의 전이
가의심되어 검사에 많은 나날을 보내고 있는 현재,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를 가리키는 데에는 증오를 담아 가슴을 두드리는 것으로
충분했다.
·전이성 인간 암 바이 러스의 모든 염기 배열이 바로 여기에 있다.
가오루는 감개무량해서 알파벳의 나열을 바라보았다. 수십 장의
프린트물에는 아홉 가지의 유전자 염기 배열이 기재되어 있었다. 프
린트물을 가득 메운 수천에서 수천만의 염기 배열이 바로 악마의 바
이러스 설계도였다.
일단 가오루가 찾아가기로 한 것은 '루프'의 방대한 메모리를 관리
하고 있는 연구소였다 루프라고 하는 가상 공간의 역사는620테라
(10의 12승 . 역자 주)라는 용량을 자랑하는 흘로그래픽 메모리에 분
산되어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소중하게 보존되고 있었다
연구소에 가려면 지하철을 이용하기보다 신교통 시스템(무인 경전
철을 이용한 대중 교통 시스템으로 일본 주요 도시에 건설되고 있다
:역자 주)을 이용하는 쪽이 u◎를 것 같았다. 가오루는 대학 병원을
뒤로 한 채 묵묵히 역을 향해 걸었다.
조금 걸었을 뿐인데도 티셔츠가 온통 各으로 젖었다. 오후지만 이
른 시간이어서인지 차 안에는 승객이 적어 냉방이 지나치게 잘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젖은 티셔츠가 금세 차가워져 가오루는 으스스함
을 느꼈다.
좌석에 앉아 서류 가방에서 조금 전 아버지에게서 막 받은 전이성
인간암 바이러스의 염기 배열이 기록된 프린트를 꺼냈다. 뉴클레오
티도(염기) 종류를 나타내는 ATCC 4개의 알파벳 나열을 아무리 바
라보아도아무소용이 없었다 하지만 가오루에게는 이것 외에 달리
할 일이 없었다 문고판 책이라도 가지고 있었다면 페이지를 넘겼을
테지만, 공교롭게도 서류 가방 속에는 시간을 때울 만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유전자라는 것은 정보의 한 단위로,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의 경
우 그것은 고작 9개밖에 없다. 덧붙여 말하자면 인간은 약 30만 개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으니 그 크기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하나의 유전자는 수천에서 수십만에 이르는 염기 배열로 표시
되고 세 개의 염기는 하나의 아미노산을 지정한다. 예를 들면,
ATGC‥‥로 알파벳이 3천 개 나열되어 있다면, 아미노산 1천 개가 손
을 맞잡아 단백질을 만들고 있는 게 된다.
가오루는 이리저리 꼼꼼히 프린트를 넘기다가 눈이 피로해지면 얼
굴을 들어 바깥 풍경을 보거나 했다. 글자가 작아서 흔들리는 전철
속에서 보고 있자니 속이 메슥거렸다. 알파벳 위에는 십 단위로 숫자
가 매겨져 있었다. 어떤 염기가 처음부터 몇 번째에 위치하는 것인지
바로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 숫자에 따르면, 9개의 유전자를 구성하는 염기의 수는 바로 알
幸있다
F
첫 번째 유전자 · 염7
수 3,072
두 번째 유전자 ‥‥ 염7
수 393,216
수 If◎88
네 번째 유전자 ‥‥ 염기
수 786,432
다섯 번째 유전자 ‥‥ 염기수 24,576
여섯 번째 유전자 ‥‥ 염기수 49,152
일곱 번째 유전자 ‥‥ 염기수 196,608
여덟 번째 유전자 ‥‥ 염기수 6,144
아흡번째 유전자· 염기수 98,304
각각의 유전자가 염기수 수천에서 수십만대였다.
가오루는 좌석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이동했다. 냉방 바람이 아까
부터 몸 왼쪽에만 닿고 있다. 부자연스럽게 몽이 차가워지는 것을 가
오루는 특히 싫어했다. 추운 기분을 느낄 정도라면 서 있는 편이 낫
다.
전철 문에 몸을 기대고 가오루는 멍하니 레이코의 얼굴을 뇌리에
그리곤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병상에 있는 아버지의 지치고 여윈 얼
굴이 떠오른다.
지금 향하고 있는 연구소는 아버지의 예전 직장 일부를 그대로 남
겨 놓은 것이었다. 25년 전, 대학의 박사과정을 마치자마자 바로 아
버지는 '루프 프로젝트'의 연구원으로 초빙되어 약 j년이라고 하는
세월을 인공 생명 연구에 바쳤다.
자신이 태어나기 이전 아버지가 연구하고 있던 테마여서 가오루
는 자세히 모른다.
캐물으려 해봤지만 그때마다 아버지의 입은 함구하기가 일쑤였다
가오루는 아버지의 무거운 입과 무뚝뚝한 그 말투에서부터 연구 결
과가 그다지 좋지 않은 게 아닐까 하고 추측해 왔을 뿐이다. 히데유
키는 연구에 공적을 올리면 신이 나서 크게 떠들어 대는 한편, 실패
에 대해서는 굳게 입을 다물어 버리는 경향이 있었파.그래서 가오루
는 그런 사정을 알아차리고 시시콜콜 묻지 않았다.
그런데 나이를 먹고, 병 탓으로 마음이 약해진 것일까? 바로 조금
전,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 염기 배열 프린트를 들고 아버지 병실
을 나오려는데 불러세웠다.
"야, 임마."
아버지 쪽에서 먼저 』0년 전 이상의 연구 테마를 들고 나온 것이
fl
"내 테마는 생명 탄생을 컴퓨터로 시뮬레이션하는 일이었어 ."
아버지는 간단히 그렇게 설명했다. 지구상의 생명이 어떻게 탄생
하는가를 밝히는 것이 오랜 세월 동안의 꿈이었노라고.
그러나 가오루가 생각하고 있던 대로 그 시도는 예측할 수 없는 결
말을 맞이해 중단되고 말았다. 아버지는 실패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
았다. 연구 과정은 대성공이라고 해도 좋다. 다만, 왜 그런 결과가 나
왔는지 그 이유를 아직도 알 수 없다고 했다
"루프는 말하자면 '암화'한 것과 같은 거야 "
'암화(係化)'라고 하는 것은 모든 패턴이 특정한 패턴에만 흡수되
어 . 다양성을 잃고 정지해 버리는 젓이다.
가오루는 투정 비슷한 아버지의 말을 들어 봤자 무슨 말인지 도무
지 알 수가 없었다. 진행시키고 있던 연구 전체나 방법론을 볼 수 없
으니 이해할 수 없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한편으로는 아버지가 옛날에 다루던 연구를 알고 싶다는 욕구가
있었다. 또 한편으로는 연구소의 아버지 동료가 전이성 인간 암 바이
러스에 의해 대부분 죽어 버렸다는 사실이 우연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고 싶다는 욕구가 있었다
그리하여 연구소를 방문해 보고 싶다고 말한 것은 가오루가 먼저
였다. 아버지는 생존하고 있는 연구된 이름을 가오루에게 가르쳐 주
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도록 준비를 갖춰 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아버지의 연락은 지금쯤 이미 연구소사람에게 닿아 있을 터였다.
가기만 하면 가오루는 정중히 응대받을 것이다.
가오루는 거기에서 생각 없이 프린트로 눈을 떨구었다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의 9개 유전자를 암호화한 염기수가 어딘
지 가슴에 걸린다. 4자리에서 6자리의 숫자 9개가 프린트 위에 나열
되어 있었다. 숫자는 모든 유전자의 염기수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3,072
393,216
12,288
786,432
24,576
49,152
196,608
6,144
98,304
가오루는 숫자에 관해 특이한 능력을 작동시킬 수가 있었다 그 능
력이 경고를 발하고 있는 것 같긴 한데,당장 하나의 포인트로 완전
히 좁힐 수가 없었다
‥‥9개의 숫자에는 공통정이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것은 확신할 수 있다. 직감이 강하게 작용해 오는 것이다
기분 전환삼아 가오루는 창 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양쪽에 초고
층 빌딩이 빽빽이 서 있고,그 틈사이를 누비며 유선형 차량들이 소
리도 없이 달리고 있었다
역 플랫폼에 들어가기 시작하면서 전철은 속도를 늦췄다 건축중
인 빌딩 저쪽에 원색으로 도장된 화려한 빌딩이 보였다.
지상 300미터까지 뻗은 4개 동의 초고층 빌딩 집단은 유기적인 연
관을 이루어 하나의 타운을 형성하고 있었다. 빌덩의 이름은 너무나
도 유명했다.
‥‥스퀘어 빌딩
스퀘어· . 정사각형이라는 의미가 있다. 그 외에도·
가오루는 깜짝 놀라 프린트에 눈을 돌려 늘어서 있는 9개의 숫자
에 의식을 집중시켰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작은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스퀘어에는 제곱(2승)이라는 의미도
있었는데 그 연장으로 인해 번뜩하고 다른 것으로 생각이 미친 것이
다
3,072 2의 10승H3
393,216 2의 17승H3
12,288 2의 12승H3
786,432 2의 18승x3
24,576 2의 13승X3
49,152 2의 14승x3
196,608 2의 16승x3
6,144 2의 11승x3
98,304 2의 15승x3
놀랍게도 나열된 9개의 숫자가 모두 2의 N승의 3배였다.
가오루는 머릿속에서 재빨리 계산했다 4자리에서 6자리 숫자를
무작위로 9개 늘어놓았을 때 그것이 모두 2의 脚승의 3배가 될 확률
은 어느 정도일까 하고. 6자리까지의 숫자 중에 2의 N승을 3배한 숫
자는 18개밖에 없다.
정확한 숫자를 계산해 보지 않아도 가오루는 알 수 있었다. 확률은
한없이 제로에 가깝다.
‥‥왜 이 바이러스 유전자는 (2의 N승x3)개의 염기 배열로 되어
있는 것일까'1
한없이 제로에 가까운 확률의 벽을 넘어 9개의 숫자가 배열되어
있다고 한다면, 일단 우연은 있을 수 없다. 의미가 있다고 의심해 봐
아 할 것이다
분명히 10년 전, 아버지와 논의하고 있었던 때에도 같은 결론에 이
르렀던 것 같다 그때의 테마는 역시 생명 탄생의 수수께끼였다. 거
기에 징크스· 우연 뒤에는 조종하고 있는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게 옳다.
전철이 목적한 역에 도착한 것을 알리는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그
소리는 멀리서 나오는 목소리처럼 들렸다
가오루는 문에서 튕겨나가 플랫폼에 섰다. 역에서 연구소까지 아
버지의 말에 따르면 걸어서 불과 10분이다.
유령 같은 얼굴로 열기가 후끈거리는 플랫폼을 헤매며 출구로 나
아갔다. 차가운 차 안에 있다가 늘어질 듯한 무더운 곳으로 나가자
몽이 축 늘어지고 지쳤지만 가오루는 아버지가 가르쳐 준 길대로 연
구소로 향했다.
역에서부터의 거리는 그다지 멀지 않았지만 비탈길이 많아 연구金
에 도착했을 때는 땀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대사관 뒤의 고풍스런 빌
딩 앞에 서서 가오루는 메모해 온 주소와 비교해 보았다. 틀림없는
것 같았다 이 빌딩 4층과I층이 '루프'의 데이터를 관리하는 연구소
일 것이다.
가오루는 엘리베이터로 4층까지 올라가 접수처에서 아마노라는
사람을 찾기로 했다. 아버지가 가르쳐 준 이름이다.
· .연구실에 도착하면 일단 아마노라는 남자를 불러 달라고 해. 내
가 애기해 놓을 테니 .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고 몇 번이나 다짐을 받았다.
점수처의 여성은 손 밑의 인터폰을 들어 방문객의 뜻을 전했다.
"후타미 가오루 씨라고 하는 분이 오셨습니다. "
간단하게 그렇게 말하고는 접수처 담당 여성은 상냥한 얼굴로 '잠
시 기다려 주십시오.'라고 말하며 홀에 놓인 소파를 가리켰다.
가초루는 소파에 앉아 아마노라는 남자가 오기를 기다리며 고개를
돌려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아버지가 20년 전에 일했던 직장이 여기
구나 생각하니 감개무량했다. 자신이 태어나기 전, 아버지는 매일 아
침 지금 보고 있는 이 접수처 앞을 지나 연구실로 들어갔을까?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
전혀 예기치 않은 방향에서 소리가 울려 왔다. 접수처 저쪽 층계
안쪽에서 아마노가 나타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반대로 엘리베
이터 홀에서 등장했다. 가오루는 일어나서 꾸벅 머리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후타미 가오루입니다 아버님께서 늘 신세를 지
고 계신다고 하시더군요."
"아뇨 아뇨, 신세지는 건 접니다. "
아마노는 그렇게 말하고 명함집에서 명함을 한 장 꺼내어 가오루
에게 건넸다. 연구소 명칭 밑에 의학 박사라는 직함이 써 있고, 이름
은 '아마노 토오루'라고 되어 있다.
컴퓨터 계통의 체재를 취하고 있는 연구소여서 의학 박사라는 직
함이 기이하게 여겨졌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아버지도 의학부 출신
이다.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죄송합니다. 바쁘신데."
"아뇨, 아닙니다. 자, 그럼 안내해 드리죠."
아마노는 가오루를 엘리베이터로 안내하고 위층 버튼을 눌렀다.
위층에도 비슷한 접수처가 있었는데, 아마노는 가오루를 데리고
접수처를 그냥 지나쳤다.
안내받은 곳은 10평 정도 넓이의 개인 방이었다. 양쪽 벽이 책으로
메워져 있필 책상 위에는 몇 대의 rC가 놓여 있다
아마노는 자기 의자에 앉아 손님용 의자를 가오루에게 권했다.
"후타미 히데유키 선생님의 연구 내용을 자세히 알고 싶으시다고
들었습니다만."
"네 , 그렇습니다. "
"그런데, 선생님 몸은 어떠십니까'?"
아마노는 인사치레가 아니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폐로의 전이가 확인되면 증상은 절망적이다. 가오루는 적당히 말을
얼버무렸다.
"네, 그저 그렇습니다. "
"선생님으로부터 여러 가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
아마노는 과거를 그리워하는 표정을 짓고는 계속 말했다
"그런데 요 몇 년 만에 떤해 버렸습니다 왠지 한산해져 버렸죠."
한산해졌다고 하는 것은 연구소를 말하는 걸까? 그러고 보니 , 가
오루는 접수처의 여성과 아마노 이외에는 연구소에서 사람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가초루는 그 이유가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에 있는
걸까 하고 수상쩍게 여겼다.
"아버지에게서 들었습니다. '루프' 연구에 관계해 온분중에 암으
로 돌아가신 분이 많다고· .
"실제로 많습니다. "
"뭔가 이유가 있을까요?"
"글쎄요 그 점에 관해서는 아직 아무런 연구 결과도 없지 않은가
요',l"
가오루에게는 단순한 우연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만일 어떤 인
과 관계가 발견된다면 바이러스성 암을 치료하는 획기적인 방법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최초의 환자가 발견된 곳이 어딘지 아십니까?"
아마노 박사의 전공은 미생물학이라고 들었으니까 그런 것에 훤할
터이다
"종래형 암과의 구별이 어려워서 통계는 잡기 어렵습니다만, 전이
성 인간 암 바이러스가 최초로 발견된 곳은 미국입니다. "
가오루도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의 발상지가 미국인 것 같다는
소문은 듣고 있었다.
"미국 어딥니까7"
"뉴멕시코 주 앨버커키에 사는 컴퓨터 기사입니다
그렇게 말하더니 아마노는 얼굴을 찡그렸다. 기묘한 일치를 깨달
은 것이다. 세계에서 최초로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가 발견된 곳이
컴퓨터 기사의 체내였다는 사실. 그리고 컴퓨터 관련의 이 연구소에
소속된 연구원의 발병률이 일반적인 비율에 비해 명백히 높다는 사
실. 그렇다고 해서 우연으로 설명될 수 있는 범위를 넘는 것은 아니
지만‥‥
아마노가얼굴을찡그린 것은한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아니'7' 하
고 느낄 정도로 특별한 이유를 달아야 할 만한 것은 아니라고 다시
생각하고 부정한 모양이다
그러한 마음속을 나타내듯 아마노는 기세 좋게 일어났다.
"이제 슬슬 아주 옛날 비디오라도 보시겠습니까?"
"비디 오라뇨「)"
"후타미 선생님의 스태프가 제작한 겁니다 연구 테마나 방법을 알
기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柔. 여기저기에 로비를 해서 예산을 잘 끌어
내는 것도 업무 중 하나입니다. 프로모션용입니다만, 루프'의 목적
이 무엇인지 금방 이해하는 데는 이게 제일입니다. "
아마노는 앞서 문으로 나가더니 '자, 가시죠.'라고 가오루에게 재
촉했다.
아마노는 복도를 반 바퀴 돌아 소파와 테이블이 놓인, 응접실로 가
오루를 안내했다.
연구소의 정중앙에 있기 때문인지 방에는 창문이 하나도 없었다.
연구소의 응접실이라기보다는 갤러리를 연상케 하는 여러 가지 실내
집기들 벽에는 현대 예술을 찍어 놓은 사진이 액자에 넣어져 걸려
있었다.
유달리 이상한 것은 동서 남북 벽에 각각 한 장씰 마치 부적처럼
같은 위치에 맞춰 같은 크기의 액자를 걸어 둔 것이었다. 액자속에
는 사진을 이용한 현대 회화가 들어 있었다.
가오루의 눈은 그림에 고정되었다. 전후 좌우에 직육면체 모양을
한 모던 아트를 빙 들러보자니 하나의 네모난 창조물 속에 자기 자신
이 둘러싸여 버린 듯한 인상을 받았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모던 아
트의 오브제에는 등근 것을 일체 배제한 냉철하고 딱딱한 이미지가
있었다. 더구나 실물도 아닌 그 그림을 사방 벽에 한치 어긋남도 없
이 배치한 취미, 그 꽁꼼함이 그링을통하여 강제되고 있는 것 같았
다.
가오루는 그림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제작자의 이름을 刻어 보려
했다. 외국인의 이름이 사인되어 있었는데 잘 읽을 수가 없다
C‥‥ Eriot‥‥
"자, 앉으십시오."
등뒤에서 아마노의 목소리가 들리자 가오루는 퍼뜩 제정신으로 돌
아마노가 가리키는 소파에 앉자 바로 정면에 32인치 TV가 나타났
다. 캐비닛에 묻혀 있던 것을 아마노가끌어 낸 모양이다 아마노는
이어 옆 캐비닛을 열어 비디오 테이프 한 개를 꺼내 왔다 비디오 테
이프의 등에는 라벨이 붙여져 있고 타이틀이 크게 기록되어 있다. 가
오루는 재빨리 그 타이틀을 읽었다.
루프 .'
유난히 크게 기록된 타이틀이라 금세 가오루의 눈에 들어왔다
10
비디오 테이프는 인공 생명의 개념에 대한 설명에서부터 시작되었
다 일반인용으로 제작된 비디오 테이프라서 일단은 기초적인 확인
이 필요할 것이라는 배려에서였다
아마노는 가오루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웃으면서 물었다.
'넘길까요?"
후타미 히데유키의 아들이니 인공 생명이 어떤 것인지 정도는 정
확히 파악하고 있을 것이라고 예상한 것이다. 가오루는 고개를 끄덕
였다
tV화면은 여러 가지 기하학적인 모양이 생성되고 패턴을 바꾸면
서 점멸하다가 흘러 사라져 가는 모습을 비춰 갔다.
인공 생명이라고는 해도 실험실 속에서 바이오 기술을 구사하여
DDFA를 잘라 붙여 인공 괴물을 탄생시키는 것과는 사정이 다르다
컴퓨터를 이용한 시뮬레이션이며 실제 생명과 같은 모양의 인공적
인 생명이 모니터상에 떠올랐다가 사라져 가는 것이어서 클론 등을
탄생시키는 기술과는 다른 개념이다.
아마노는 빨리 감기를 하고 있던 VTR를 적당한 부분에서 스톱시
키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여기부터가 '루프'의 연구 테마입니다 "
T◎ 화면에 아버지의 얼굴이 비쳐졌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무렵의 젊디젊은 아버지의 얼굴을 보자 가오루는 그리운 나머지 가
슴이 옥죄는 기분이 들었다. 머리카락도 풍성하고 전신에 정열과 자
신감이 넘쳐나고 있었다. 근육의 정쟁함을 옷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
었다.
생각해 보면 자신이 태어나기 이전의 아버지 영상을 보는 것은 이
것이 처음이다. 예기치 않게 나타난 영상인만큼 허를 찔린 가오루는
동요되 고 말았다.
다음 화면에는 광대한 미국의 사막지대가 비쳐졌다 훨씬 이전에
계획이 중지되어 사용할 수 없게 된 직경 50킬로미터에 이르는 초전
도 초대형 가속기의 항공 사진에 의한 외관에서부터 그 내부의 모양
을 카메라가 고정하고 있었다. 쓸모없는 물건으로 변한 링 모양의 거
대 연구시설 내부에는 방대한수의 초병릴 슈퍼 컹퓨터가늘어서 있
다. 사막 지하에 잠자는 컴퓨터의 수는 64만 대, 실로 압권이었다.
장면은 갑자기 초고층 빌딩이 빽빽이 들어서 있는 도쿄로 변했다.
카메라는지하로 기어들어갔다 현재는 사용하지 않게 된 지하철 터
널이 거미집처럼 둘러쳐진 지하미로·. 거기에도 또한64만 대의 초
병렬 슈퍼 컴퓨터가 설치되어 있다. 1년을 통틀어 온도차가 적고 습
기도 적은 지하라고 하는 환경은 컴퓨터를 설치하기에 최적이다 일
본, 미국 합해서 128만 대라고 하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의 초병렬 슈
퍼 컴퓨터 군이 '루프'를 지탱하는 것이다
화면에는 다시 아버지의 얼굴이 나타났다 '루프'를 움직이는 하드
웨어를 보이고 나서 소프트웨어 면의 설법에 들어갈 찰이리라.
아버지는 컴퓨터 모니터를 가리키며 세포의 분화가 기호를 이용하
여 표현되어 가는 모양을 하나하나 말을 끊어 꼼꼼하게 설명하고 있
었다. 평소의 아버지는 빠른 말투에 기세 좋게 떠들어 대는 타입이지
만, 화면에 등장한 아버지는 자신감을 유지하면서도 수줍은 듯 카메
라에서부터 눈을 피하고 있다. 순진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지금 히데유키가 설명하고 있는 내용을 가오루는 이미 이해하고
있었다. 20여 년 전에 진행되고 있던 연구를 현재 시점에서 이해한다
는 것은 상당히 쉬욱 작업이다.
추구하려던 테마에 대해 연구자들은 어떤 방법론으로 맞서려 했던
걸까'~l 구체적인 영상이 나타나는 것은 이것이 처음이어서 흥미가 솟
았다.
아버지가 가리키는 모니터에는 어떤 생물 세포의 발생이 시간 흐
름을 따라 그려지고, 그 옆에는 기호를 사용하여 완전히 똑같이 인공
적으로 재현한 그림이 나타나 있었다. 자연적인 세포와 인공적인 세
포의 병렬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양자는 거의 똑같은 모양으로 형성
되어 갔다. 실제 생물이 형성되어 가는 과정을 기호로 바꿔 씀으로써
컴퓨터로 시뮬레이션하고 있었다. 여기에 여러 가지 알고리즘을 조
합시키면 모니터상에 생물의 모습이 출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미일 공동의 거대 프로젝트로 '루프'가 내세운 테마는 컴퓨
터의 가상 공간에 생명을 탄생시켜 DNA 정보를 다음 세대로 전하면
서, 돌연변이나 기생, 면역 등의 메커니즘을 할께 담아지구 생명의
진화를 모방한 독자적인 생물계를 만들어 내는 것‥‥ 간단히 설명하
면 현실과 똑같은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아따노는 거기에서 비디오 테이프를 일단 정지시키고 가오루 쪽으
◎ 얼굴을 돌렸다.
'떠기까지에서 뭐 의문점이 있습니까?"
가오루는 얼굴을 옆으로 흔들려 다가,
"글쎄요."
하고 소리를 높였다.
"이 연구는 실제로는 어떤 분야에 도움이 되는 건가요?"
조금 전부터 의문을 품고 있던 것은 연구 비용이 어디에서 나와서
어떤 분야로의 응용이 가능한 것인가 하는 점이다 예산은 국가적인
규모에 달할 것이다. 지구 생명 탄생의 수수께끼나 진화의 메커니즘
이 밝혀지면, 순수하게 학문적인 호기심은 만족시킬 수 있겠지만 돈
벌이에 도움이 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상당히 앞까지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바로 눈앞의 미래만 보았다
가는 장래가 뻔하니까요. 기초적인 연구에서 저변을 넓혀 두면 앞으
로의 전개 과정에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르죠. 응용할 수 있는 분야
는 그야말로 무수히 있었습니다. 의학, 생리학을 비롯해서 생물학,
물리, 기상학‥‥ 이화학 분야뿐만 아니라, 주가 동향부터 인구 증가
라고 하는 사회 과학 문제까지 그 범위가 끝이 없었죠."
아마노는 그렇게 말하고 웃었다.
실제로 루프의 연구 성과는 각 방면에 많은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
지구 환경이나 생태계의 균형이 파괴되는 한계점을 알아내어 그 제
어 이론을 수립할 수 있었다든지, 개체 발생이나 뇌의 발생 과정에
있어서 어디에서 의식이 나오는 것인지에 대한 연구가 획기적으로
진행되기도 했다. 몇 가지 난치병의 치료 방법이 분명해져 의학생리
학에서의 공헌도 컸다.
후반은 주로 방법론에 대한설명에 시간이 할애되어 있었다 카오
스, 비선형성 , L시스템, 유전적 알고리즘 등의 이론을 응용하여 프로
그램 자체가 학습되고 진화되어 가는 복잡한 메커니즘을 그림을 이
용하여 알기 쉽게 설명했다.
예로서 세포 분열 영상이 단편적으로 삽입되어 있었다 한 개의 세
포가 분열되고 분열을 반복하는 동안에 한 마리의 생물로 성장하고
맥동하면서 화면을 가로질러 가는 모습이 빨리 감기의 영상처럼 전
개되었다 네트워크가 다이내믹하게 형성되어 가는 과정은 마치 암
세포에 모세혈관이 대거 뻗어가는 것 같았다. 기계적인 시뮬레이션
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은 아무리 보아도 생명 그 자체였다.
방법론을 자세히 서술하고 도입 부분을 제시한 시점에서 비디오
테이프는 끝나 있었다. 이 이후의 것은 현실의 연구 과정을 지켜보기
바란다는 것인 모양이다. 가오루에게는 충분히 설득력 있는 프로모
션 비디오로 느껴졌다
생명의 탄생과 진화를 컴퓨터로 시뮬레이션화하는 것 자체는 조금
도 신기한 일이 아니어서 세계에서 몇 번이나 행해져 왔다. 하지만
이토록 복잡하고도 면밀하게 무수한 패러미터를 함께 넣은 프로그램
은 첫 시도가 아닐까 하고 가오루는 놀라움을 느꼈다
생명 탄생 이래, 40억 년에 이르는 진화의 역사를 파악 가능한 디
지털 시간으로 응축하려는 실험이다 수십억 년이라고 하는 시간은
컴퓨터 속에서 십수년이라는 시간으로 단축되지만, 세계의 양상은
가상 공간에 완벽하게 재현된 것이다.
가오루는 이 이후의 연구 흐름에 흥미를 품었다.
"그런데 '루프'는 어디에서 진행한 건가요?"
가오루는 테이프 되감기를 시작한 아마노에게 물었다
"후타미 선생님에게서 못 들으셨습니까?"
"들은 건 패턴이 암화됐다는 결과뿐입니다. "
아마노는 곤혹스러운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 그 정돕니다. "
"경과를 좀더 자세히 알고 싶은데요."
"아실지 모르겠지만 시간이 무한하다면 몰라도 보는 것만으로도
당신의 일생은 간단히 끝나 버립니다 "
가오루는 자못 일부러 한숨을 쉬어 보였다
"알겠습니다. 잠시 방을옮겨 커피라도 마시면서 얘기하지 않겠습
니까? 저도 후타미 선생님의 근황을 알고 싶습니다.
아마노는 가오루를 새로운 방으로 안내했다. 안내받은 방은 개인
방이 아니라, 철제 책상과 파이프 의자가 나란히 있는, 연수나 업무
상 미팅에 사용될 만한 살벌한 풍경의 방이었다 벽에는 모던 아트
대신에 세계 지도가 붙어 있고 학교 교실을 작게 만든 듯한, 아무런
느낌도 없는 방이었다.
그들이 테이블에 마주 앉자 접수처의 여성이 들어와 커피 두 잔을
놓고 갔다.
일회용 컵에서 김이 피어오르는 것으로 보아 커피는 뜨거을 것 같
았다. 두 손으로 감싸쥐듯이 해서 커피를 입으로 가져갔다 창이 없
는 방은 냉방이 지나치게 잘 되어 있었다 이야기를 듣는 데 열중한
나머지 가오루는 연구소 추위에 무관심해져 있었던 모양이다. 추운
듯이 커피를 입으로 옮기는 아마노의 모습을 보고서야 가오루는 겨
우 팔에 소름이 돋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마노는 커피를 입으로 옮기면서 가상 세계의 역사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가오루는 아마노가 말하는 역사 속으로 빠질 수 있었다 지구의 역
사를 재체험하는 것은 상당히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즐거움을 느낀
것은 마지막에 이르기 직 전까지였다
11
"· .자기 증식 가능한 의미가 담긴 RNA를 심고 나서도 한동안 단
조롭고 혼돈된 세계가 계속되었습니다 혹시 이대로 아무런 변화도
없는 것인가 하고 일부 스태프 중에 좋지 않은 분위기가 감돌았다고
합니다.
그러나낙관론을가지고 있던 사람도몇 명 있었습니다 실제 생명
도 같은 전개를 해왔기 때문입니다. 원시 생명이 탄생한 지 약 ,)억
년은 진화의 양상을 보이는 일 없이 단세포 생물인 채 거의 변화가
없었으니까요.
예상대로, 마치 현실의 생명이 캄브리아기에 대폭발을 일으킨 것
처럼 어떤 날을 경계로 해서 갑자기 복잡한 생명이 출현하기 시작했
습니다 왜, 이 시기에 갑자기 다종다양한 생명이 나타난 것인지 이
치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단세포 생물과 같은 극히 단순한
생명이 다세포 생물을 새로 만들어 내가는 메커니즘은 현실의 지구
에서 일어난 경과와 똑 같았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발생한 생명은 그후에 전개되는 생물 세계 모두의 원형
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생명은 같은 형태를 유지한 채 자연 소
멸해 가고, 어떤 생명은 계속해서 복잡한 것으로 진화를 시작했습니
다. 계통수는 나뉘어 기생과 공생이라고 하는 현상도 나타나 흥미 있
는 움직임을 보이는 생명이 생겨났습니다. 지렁이와 비슷하게 땅 속
을 꿈틀꿈틀 기어가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는 것. 바닷속을 재빨리 이
동해 움직이는 것. 조류처럼 공간을 비상하는 것. 혹은 완전한 정체
에 지배당해 단세포인 채 진화하는 것을 그만두어 버린 생명 . 이 것은
아마도 세균이나 바이러스에 비유할 수 있겠죠. 몸집은 커도 이동하
는 일 없는 생명은 지구상과 마찬가지로 수목의 형태를 취해 나갔습
니다.
하나하나의 생명은 물론 유전자에 상당하는 정보를 갖고 있어서
증식을 할 때마다 어떤 일정한 비율로 에러가 생겨 돌연변이를 일으
키고, 보다 좋은 방향으로 진화하거나 정체하거나 소멸하거나 해가
는 겁니다. 자연 도태, 혹은 생존 경쟁의 논리가 충분히 담겨 있죠
그런 과정 속에서 놀란 건 성의 탄생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는 현상
이 생긴 겁니다 자연계에 있어서도 왜 암수로 나뉘게 된 것인지는
수수께기로 되어 있습니다. 이 세계에서도 분명히 암수로서 파악하
지 않으면 설명할 수 없는 하나의 분기가 생긴 겁니다
어떤 단순한 생명은 동종과의 교미 없이 증식이 가능하지만,복잡
한 형태의 생명은 동종간의 교미 없이는 새로운 짜기 복제가불가능
하게 되어 갔던 겁니다. 예상된 대로 성별을 얻어 유전 정보는 보다
다이내믹하게 다시 짜여져 다음 세대로 전해지면서 다양성을 얻어
진화의 속도도 늘었습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전 실제로 본 건 아닙니다. 선배들이
이야기한 것을 들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뭔가 두근두근하죠? 컴퓨터
속에서 진화된 인공 생명이 섹스를 하다니 재미 있지 않습니까?
캄브리아기의 대폭발을 계기로 생명은 놀랄 만한 기세로 복잡한
패턴으로 변화해 갔습니다 공룡과 비슷한 거대한 생명이 나타났나
싶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멸망해 갔습니다
그후에 나타난 것은 다음 세대 정보를 부모 세대 내부에서 되살려
어느 정도 성숙하는 것을 기다렸다가 분열해 나가는 생명이었습니
다. 아시겠죠? 포유류의 등장입니다.
그로부터 얼마후,드디어 인류의 선조로 생각되는 생명이 출현한
겁니다
전 그 장면만 뽑아서 본 적이 있습니다.
상상하실 수 있습니까?전체적으로 오랑우탄의 움직임과 비슷했
습니다 시행 착오를 반복하면서 보행이 점차 부드러워지고, 처음 한
동안 보였던 어색함이 사라져 갔습니다.
내부에 깃들인 유전 정보는 방대해져서 아마도 이것이 인류가 아
닌가 하고 생각되는 생명이 그 직후에 등장했습니다.
그것은 분명하게 자신을 의식하고, 지능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렇
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생명끼리 뭔가신호를 주고받고 있는 듯한낌
새가 엿보였기 때문입니다.
0과 1의 디지털 신호를 교환하는 것에 의해 생명이 다를 수 있는
정보량이 확실히 늘어 갔습니다. 결과적으로 살아남는 비율도 높아졌
죠. 벌써 언어를 손에 넣었다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생명끼리 주고받는 0과 1의 나열을 분석한 결과, 그들이 행하고 있
는 정보의 교환을 언어로 번역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루프 내부의
생명의 입장에서 보면 2진댑으로 주고받을 생각은 전혀 없었겠죠.
저희들과 같은 복잡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의식하고 있었을 겁
니다.
그들의 언어가 분화되고 자동 번역기를 이용해 이해할 수 있게 되
자 세계는 더욱 재미를 더했다고 합니다. 어떤 장면을 디스플레이의
,1차원 영상에 비추면 마치 자신이 영화의 등장인물이 된 것 같은 기
분이 되죠.
인공 생명은 스스로의 역사를 만들기 시작한 겁니다. 닮은 자들끼
리 모여들어 집단을 만들고, 국가 간에 투쟁을 하거나 정치적인 교섭
을 행하기도 했습니다. 문명을 진보시켜 제 것인 양 세계를 디자인端
간 겁니다. 그 모습은 인간의 역사 그 자체를 보고 있는 듯한 것이었
다고 합니다
그 대신, 역사가 진행됨에 따라 정보량이 늘어 시대의 흐름은 느려
져 갔습니다 컴퓨터의 계산 능력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구 탄생 이 래 최초의 30억 년은 반 년 동안 컴퓨터를 작동시키는
것만으로 lf:행되었습니다. 그런데 생명이 늘자 그 속도는 서서히 느
려져 갔죠 그리고 인간과 아주 똑같은 지적 생명으로 진화하자 최종
적으로는 루프를 수백 년 진행시키는 데에 컴퓨터를 2년이고 3년이
고 작동시키지 않을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연구소 스태프에게 있어서 이 가상 세계 '루프'는 인지 가능합니
다. 하지만 '루프'에 살고 있는지적 생명이 창조주인 우리를 인지하
는 건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우린 실로 신 그 자체
겠죠. 루프의 내부에 있는 한 그들은 세계의 구조까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외부로 나오는 것
그것밖에는 있을 수 없습니다
문명의 성숙은 훌릅했습니다. 그들이 만들어 낸 거리에는 환락가
의 네온 사인이 점멸하고, 소리와 색채가 범람해 갔습니다 여러 가
지 미디어가 출현해서 정보는 신속하게 퍼지고, 사람들은 음악과 문
자를 이용한 예술을 마음껏 즐기는 생활을 보내고 있었죠 이미 우리
의 생활과 거의 다름 없었습니다 모차르트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꼭 닳은 예술가도 존재해, 현실의 역사에 새긴 것과 같은 역할을 다
해 문화에 채색을 덧붙여 갔던 검니다 아름다움과 동시에 퇴폐의 무
드가 감들아 어떤 스태프는 그만 빠져들고, 또 어떤 스태프는 멸망의
예감 비슷한 것을 입에 담게 되었습니다 뭔가 예기치 않은 일이 생
길 것 같은 징후가 여기저기에서 보인 겁니다.
그리고 그 예감은 멋지게 적중했습니다 루프라고 하는 생명 세계
전체가 암화되기 시작한 겁니다‥‥
거기까지 말하더니 아마노는 숨을 내쉬고 커피잔을 입가에 댔다.
커피 잔이 빈 것을 알면서도 따분함을 때우기 위한 행동이었다. 담배
를 피우는 사람이라면 이쯤에서 담배에 불을 붙였을 것이다
"암화라면',l"
아마노는 양쪽 어깨를 가볍게 올리며 손을 펼쳐 보였다. 손 들었다
는 포즈인 셈이리라.
"루프의 생명계는 동일한 유전자에게 점령당해, 다양성이 없어지
고 멸망의 길로 들어선 겁니다. "
가오루는 평소의 버릇대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마노가 말한 내
용을 머릿속에서 정리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초고속 슈퍼 컴퓨터 내부에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3차원의 가상
공간을 만들고 그 공간을 '루프'라고 이름붙였다 '루프' 내부의 생
명에서 본다면 무한이라고 말해도 좋은 우주 규모의 광대한 공간이
다. 또한 원시 지구와 똑같이 되도록 토양을 갖추고,지형을 일치시
켜 물리 조건을 동일하게 설정했다. 수학적으로 보아 현실의 지구와
완전히 공통된 공식과 논리로 유지되는 세계 . 중력 가속도와 물이 器
는 온도뿐만 아니라 풍경까지 현실과 모두 똑같은 것이다.
탄소(C) , 수소(H). 헬륨(He), 질소(N), 나트륨(Na), 산소(0), 마
그네슘(Mg) , 칼슘(Ca) , 철(Fe)· . 등, 111개의 원소는 그 성질을 답
습한 패턴으로 흩뿌려져 있었다. 예컨대, 두 개의 수소 원자狀~)와
산소 원자(0)가 같이 있으면 물(H)0)이라는 분자가 퇴고, 질소 분
자(N:)와 반응하면 암모니아(NH,)가 된다고 하는 형태로 지구를 둘
러싼 우주와 조금도 차이가 없도록 룰을 정해 둔 것이다.
애초에 2개의 수소 원자와 산소 원자가 합쳐지면 왜 물이 되는가
하는 이유는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룰로서 정해져 있기 때문이
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문제이다. 누가 룰을 정했는지 굳이 이름을
들자면 신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루프'에서의 진화 양상이 실제 생물계의 진화와 똑같은 것은 최초
로 탄생시킨 RhFA원시 생명에 그 원인이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아
니 그보다도 '루프' 자체가 현실의 세계를 모방하여 물리 조건을 똑
같이 만든 것이므로 과거의 진화 코스에서 벗어나는 일도 없었던 것
이리 라.
'루프'의 연구 목적 중 하나는 실제 진화의 과정을 더듬어 가는 것
이기도 하다. 가령 '루프'가 현실의 진화를 똑같이 더듬어 갔다면
루프'의 결과는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된다
거기에서 가초루의 듣줄기에는오한이 지나갔다 그렇다. '루프'에
는 지구 생명의 미래를 예측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가 전 생명의 암화
‥‥뭔가, 이것은. 지금 상황과 똑같지 않은가!
암세포는 안하무인격으로 증식하며 암수도 없고, 게다가 죽지도
않는다. 아직 세계적으로 수백만 명 규모의 환자밖에 나오지 않았지
만,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의 돌연변이나 폭발적 증식에 의해 환자
수가급증하지 않으리라고 할수 없다. '루프'의 전말그대로인 것이
다. 이것은 우연일까'?아니면 역시 루프'는 미래를 정확히 예측한
것이 되는 셈인가?
지금 가오루의 눈앞에 있는 아마노는 현실과 '루프'의 결말이 비슷
하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연관짓고 있지 않은 것 같다. 당연하리라
이런 기가 막힌 일을 그렇게 간단히 믿는 사람이 있을 리 없다.
놀라움을 억지로 누르고 가오루는 냉정함을 유지하면서 물었다
"루프의 생명이 암화한 원인은 어디에 있는 걸까요?"
아마노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야, 뭐니 뭐니 해도 렁 바이러스의 출현입니다. '링 바이러스'
는 우리로선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마술 같은 방법으로 출현했습니
다"
"단 하나의 바이러스가 '루프'상의 모든 패턴에 영향을 주었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나비 한 마리의 날갯짓이 세계의 기상을 바꾸어 버릴
정도니까, 뭐 , 있을 수 없는 일도 아니겠죠."
나비 날개의 아주 작은 움직임이 세계의 기상에 영향을 미친다고
하는 비유는 버터플라이 효과라고 불리고 있다 링 바이러스'의 출
현에 의해 '루프'의 운명이 크게 변해 버렸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
하지만 기묘한 것은 웨 '링 바이러스 가 출현했는가 하는 점이다.
"'링 바이러스 출현에 대한 수수께끼에 관해 뭔가 가설이 없습니
가설 말입니까?"
"예를 들면, 연구 스태프 중 누군가가
가.·. "
"아뇨, 시큐리티는 완벽했으니 까요."
"그럼 컴퓨터 바이러스의 침입은· ." 프로그램에 개 입 했다든
"가능성이 없지는 않죠. 실제로 그 설을
답니다. "
취하는 의견이 제일 많았
아마노는 뭔가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는 모양으로 생각에 잠기는
몸짓을 보였다.
"실례합니다만, 당시 연구 스태프였던 분으로 지금 연락을 취할 수
있는 분은· ."
아마노는 힘없이 웃었다
"저 뿐이에요, 생존자는."
말하고 나서 아마노는 실수했다는 표정으로 입에 손을 댔다. 후타
미 히데유키는 아직 죽은 게 아니다. 가오루는 마음에 두지 않고 쓴
웃음을 흘린다.
아마노는 당황해서 말을 보충했다
"제가 이 프로젝트에 참가한 건 종료 직전이었습니다. 프로젝트 전
체의 생모이기도 한 크리스토프 엘리엇 씨를 방문하는 것이 제일 손
쉽겠지만, 그는 현재 세간의 시선을 피해 몸을 숨기고 있고· .
아마노는 의미가 담긴 듯한 시선을 가오루에게 던지고 나서 이어
나갔다.
"또 있군요. 미국인 연구자입니다만, 상당히 중앙부에 있던 사람을
한 명 알고 있습니다. 성깔이 좀 있는 인물이어서 팀워크가 흐트러졌
다고 하더군요."
"이 름을 아십니까')"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
아마노는 그렇게 말을 남기고 방을 나갔다. 몇 분 뒤 돌아왔을 때
는 겨드랑이에 파일을 끼고 있었다.
"아, 있네요.'
파일을 넘기면서 중얼거리고는 눈을 치켜떠 가오루를 보았다
"케네스 로스만입 니 다. "
"케네스 로스만‥‥‥
가오루는 그 이름을 반복했다. 아버지의 오랜 친구이다. j년 전,
집에 놀러 왔을 때 맨션 발코니에 나란히 서서 도쿄 만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도 했다 연구 발표를 겸해 일본을 방문했을 때, 이전부
터 친구였던 아버지에게 들러 며칠간 머물렀던 것이다.
로스만과 지낸 며칠간은 가오루의 기억에 깊이 새겨져 있었다. 마
른 턱에 염소 같은 수염을 늘어뜨리고, 목과 손에 늘 짤랑짤랑 금 사
슬을 감고 있던 겉모습은 물론이거니와, 과학 설교 도중 냉소적인 웃
음을 보이며 오싹할 정도로 비관적으로 장래를 분석하는 등, 예리하
고 논리적인 말솜씨가 인상적이었다.
"이 인물에 대해 후타미 선생님으로부터 뭔가 들은 적이 있습니
까',1"
"네, 아버지 친굽니다. 저도 j년 전에 한 번 만나 뵌 적이 있습니
다. 턱수염 이 아주 인상적 인 분이 셨죠. 그는 지금 어디 계시는지 · . .'?"
아마노는 다시 파일을 넘겼다.
"이 자료에 의하면 10년 전, 케임브리지에서 뉴멕시코 주의 로스
앨러모스 연구소로 연구 장소를 옮긴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
뉴멕시코 주, 로스앨러모스.
그 장소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10년 전부터 가족 여행을 계획했
던 곳, 뉴멕시코, 애리조나, 유타, 콜로라도의 주 경계에서 좨 가까운
위치였다.
케네스 로스만은 10년 전에 로스앨러모스로 이동했다. 게다가 전
이성 인간 암 바이 러스에 의한 최초의 희생자가 나온 곳 역시 뉴멕시
코 주라는 일치 감까지‥‥
가오루는 두 눈을 굳게 감았다 역시 그가 있는 지역에 중대한 힌
트가 숨겨져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와 연락을 취할 수 있습니까',l"
기도하는 듯한 마음으로 가오루가 물었다. 그런데 아마노는 간단
하게 대답했다.
'쉽지 않을 겁니다. "
"네'~l 어째서죠?"
"마지막으로 연락이 있었던 게 반 년 전이었습니다. 마음에 걸리는
말을 남긴 채 연락을 취할 수 없게 돼버렸거든요 "
"마음에 걸리는 말이라뇨?"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의 정체를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열
쇠를 쥔 것은 다카야마다‥‥ 뭔가 의미 있는 듯한 말이죠「1"
"다카야마‥‥ 사람 이름이군요. 대체 누굽니까·,l"
"간단히 설명하겠습니다 루프계(界)에서의 암 생성은 원인 불법
바이러스의 출현과 그것을 축으로 전개된 어떤 사건을 계기로 생겼
습니다 그사건의 중심에 있던 인공 생명은 '높은 산'이라는 의미의
다카야마라고 불렸습니다. 그를 포함해 '얕은 강'이라는 의미의 아
사카와, '산 속 마◎ 이라고 하는 의미를 지닌 야마무라‥‥ 이 3개의
인공 생명이 루프계의 암 생성에 관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판명되
었습니다. "
"인공 생명에도 이름이 붙어 있는 거군요."
"당연하죠."
"그래서 다카야마라는 이름을 알려 준 채 케네스 로스만이 사라져
버렸다',1"
"네, 어쨌든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가 맹위를 떨치고 있는 시대
라서 갑자기 연락이 두절되었다 해도, 아,그도 결국 당했을지도 모
른다고 짐작만 할 정도니까 "
아마노는 가볍게 두 손을 들어 보인다
"특히 그의 경우 웨인스록이라고 하는 주위로부터 고립된 작은 마
을에서 개인적인 연구를 계속하고 있었으니까, 언제 소식이 두절된
들 이상하지 않은 환경이기도 하죠."
'레 인스록이 요',1"
"뉴멕시코 주, 웨인스록. 사막의 한가운데 있는 거의 폐허 같은 마
을입니다. "
가오루는 한숨을 쉬고는 세계 지도와 마주했다. 손가락 끝으로 어
떤 한 지점을 누른다.
· .뉴멕시코 주, 웨인스록
그 마을의 작은 연구실에서 케네스 로스만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마노 씨는 다카야마와 아사카와가 얽힌 사건의 전모를 본 적이
는
있습니까?"
"아뇨."
아마노는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스태프 중에서도 실제로 본 건 일부가 아닐까 하고 생각됩니다.
메모리는 여기가 아닌 미국에 보존되어 있거든요."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가오루의 흥미는 더욱 커졌다.
"제가 보는 게 가능합니까?"
"시간은 걸리겠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시간 낭비라
고 생각되는데요."
아마노의 대답을 들으면서도 가오루는 지도의 한 점을 계속 누르
고 있었다.
12
가오루는 오랜만에 발코니로 나와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지상 100
미터 높이에서도 바랑을 느낄 수 없을 만큼 더운 밤이다. 도쿄 만의
검은 해면에 잔물결 하나 일지 않았다.
오늘 낮, 아버지의 부하 직원이었던 아마노로부터 '루프'의 내용을
자세히 알게 된 탓인지 이렇게 바라보는 밤하늘의 인상이 지금까지
와는 새삼 다르게 보였다. 어린 시절에는 세상의 구조를 못 견디게
알고 싶어 , 바라보고 있으면 알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열심히
별들의 반짝임을 응시했었다.
‥‥우주의 끝은 어떻게 되어 있는 걸까'~l
이런 소박한 의문이 자주 고개를 쳐들었다 지금은 바라보고 있는
우주의 바깥쪽이 어떻게 되어 있을까 따윈 상상해 보려 해도 감히 상
상력이 미치지 않는 영 역이다.
가오루는 '루프' 속의 인공 생명이 된 심정으로 온갖 상상력을 동
원해 보았다. 만일 자신이 시간과 공간을 인식할 수 있는 생명이라고
한다면, 그 우주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고. 아마도 우주는 팽창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게 아닐까'S '루프'는 시간의 변화와 함께
서서히 커져 간 것이다. 프로그램을 작동시키기 전,거기에는 아무것
도 없었다. 실리콘 칩으로 된 산이 만들어져 있었다고는 해도 시간
도, 공간도 존재하지 않았다. 연구 스태프가 프로그램을 작동시킨 순
간부터 공간은 폭발적으로 커져 갔다 그것은 '빅뱅' 그자체다.
지하에 자리잡고 앉은 초병렬 슈퍼 컴퓨터 속에 '루프'라는 공간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관 스크린에 광대한 대자연이 비쳐져 있
다고 해도 스크린 자체가 그 공간을 내포하고 있지 않은 것과 마찬가
지이다. 컴퓨터 안이든 밖이든 공간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인식 가
능한 생명에게만 공간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진화해서 생명의 인식
능력이 높아지면, 인식해 보려는 눈으로부터 도망치듯 공간이 팽창
해 나팔 것이다.
가오루는 현실의 하늘로 눈을 돌렸다. 지금 바라보고 있는 우주도
팽창하고 있지만 단순히 우리들은 지구상DNA의 인식 능력에서 도
망쳐 띨리 가려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문
폭 떠올랐다. '루프'와 같은 가상 공간이 현실의 우주일 가능성도완
전히 버릴 수는 없다. 그렇게 파악한다고 한들 대체 무슨 지장이 있
을 것인가?
오히려 현실 역시 가상 공간이라고 파악하는 쪽이 보다 진리에 가
까워지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
가령 이 우주가 가상 공간이라고 한다면 공간에 뻥 뚫린 창문을 통
해 관찰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인간이 루프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것과 똑같다. 시간과 공간을 설정하면 디스플레이에는 어느 지점, 어
느 시간의 영상이 3차원으로 전개되는 것이다.
한 손을 자신의 팔에 대고 가슴에서 배, 이어 그 아래로 손을 밀어
옮겨 보았다.
‥‥육체가 있다고 느끼고 있을 뿐 현실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일까?
신체의 중심에서 조금 아래에 위치하는 자그마하고 보잘것없는 기
관. 거기에서 合구치는 욕망이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
었다. 어루만지면서 밤하늘에 레이코의 얼굴을 비춰 보았다.
등뒤치 유리창 저쪽에는 아무도 없었다. TV 화면에서는 조금 전과
다른 영상이 흘러나오고 있다. 어머니는 지금쯤 자신의 방에 틀어박
혀 미국 원주민의 신화에 열중해 있을 것이다.
가오루는 살짝 뒤를 엿보고는 앞에 있을지도 모르는 우주의 창을
향해 기관을 우뚝 솟게 하고는 자신의 존재를 어필했다.
·끼 살이 가공의 존재일 리 없다. 부등켜안은 레이코의 살이 가공
의 것일 리가 없다.
밤하늘을 향해서 가오루는 소리 높여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13
찜찜한 침묵 속에서 가오루는 방금 막 알게 된 두 가지 사실을 반
추하고 있었다. 두 가지 모두 매우 나쁜 뉴스로 자신을 납득시키는
데에 좨 시간이 걸렸다. 언젠가 이렇게 되리라고는 각오하고 있었지
만 막상 알게 되고 보니 몸은 긴장되고 부자연스럽게 힘이 들어간 자
세로 아버지를 내려다보게 되고 마는 것이다.
바로 조금 전까지 가오루는 료지의 병실에 있었다. 료지가검사하
러 간 뒤 병실 문을 잠그고 레이코와의 정사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의 방에 들어서자마자 들은 뉴스는 장소를 가리지 않은 응탕
한 행위의 징벌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레이코의 살 냄새가 콧구멍
안쪽에 아직 남아 있었다 부드러운 살의 감촉도 신체 여기저기에 흔
적을 남기고 있었다. 세포 안쪽 깊숙한 곳의 흥분을 식히지도 않고,
이렇게 여자의 여운을 질질 끌며 아버지의 병실에 들러서는 안 될 일
이지 않았나 하고 후회했다.
요 떠칠 동안에 아버지의 몸은 한층 더 작아져 버렸다. 침대에 누
위 있는 모습에는 가슴 부근의 두께가 부족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
의 몸은 거인처럼 보였다. 두껄게 부풀어오른 가슴의 근육은 두 주먹
으로 때려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과학자와는 어울리지 않던 힘센 육
체가 시트와 시트 틈의 얼마 안 되는 얇은 두께로 변하고 말았다.
그래서 폐로의 암 전이가 결정적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도 놀라움
은 적었다. 뒤로 미루고 있던 듣고 싶xl 않은 나쁜 뉴스를 알게 된 것
이라는 혐오감이 일단 앞서 , 사실이 침투해 옴에 따라 분노와도 같은
감정이 솟구쳤다.
"서 있지 말고 앉아라."
분노의 표정으로 내내 서 있는 가오루에게 히데유키는 부드러운
얼굴을 돌렸다. 그때야 비로소 가오루는 서 있는 자세 그대로 두 가
지 나쁜 뉴스를 듣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가오루는 아버지의 말에 따라서 등받이 없는 작은 의자에 앉았다
어디서랄 것도 없이 힘이 빠지면서 동시에 분노가 차츰 가라앉아 갔
다
"수술은 하실 겁니까7"
자신의 목소리가 공허하게 들렸다.
"아니 , 그만둘 거다. "
히데유키는 아주 간단하게 대답했다. 가오루도 같은 의견이었다.
폐로 전이된 암을 절제해 봤자 수명이 연장되는 것은 아니다. 결과는
충분히 알고 있다 목숨을 단축시킬 가능성이 오히려 높은 것이다.
"맞아요."
아버지의 결심에 가오루는 맞장구를 쳤다.
"나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아, 그것보다도 큰일났구나."
히데유키는 바로 조금 전 사이키 조교수로부터 들은 뉴스로 화제
를 돌렸다
두 번째 뉴스라는 것은 일본과 미국에서 거의 동시에 행해진 동물
실험 결과에 관한 정보였다.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는 지금까지 인
간에게만 감염된다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쥐와 기니피그의 동물 실
험을 반복하던 중에 암 바이러스라는 것이 인간 이외의 동물에도 감
염되는 것으로 판명된 것이다.
돌연변이를 일으킨 것인지 . 아니면 동물에게도 감염된다는 특징을
놓치고 있었던 것인지 아직까지 확실한 결론은 나와 있지 않다 다만
중요한 것은 사람 가까이에 사는 개나 고양이 , 혹은 좀더 작은 동물
에게까지 감염되어 그들 동물이 바이러스의 운반책이 될 가능성이
나온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되게 폭발적인 감염이
예측되는 것이다.
레이코에게서 바이러스를 받지 않아도,곧 다른 루트로 침략을 받
는 것이 불가피할것이다 가오루는 그렇게 해서 레이코와의 관계를
정당화하려 했다 그뒤에 기다리고 있는 멸망을 향한 상상력을가둬
두=
고‥‥
귀에 닿는 아버지의 목소리는 어딘가 먼 곳의 것처럼 들렸다.
"11 ?"
가오루가 되물었다
"야. 건성으로 듣기냐?"
"죄송해요."
"아마노를 만나 얘기는 들었겠지? 인상은 어때?"
히데유키는 애매한 질문을 한다.
"뭐 , 선뜻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많았어요 "
히데유괴는 고개를 끄덕여 맞장구를 치고는 중얼거렸다.
"그렇겠지."
" '루프계'가 암화된 원인 말인데요‥‥‥
가오루가 넌지시 말하자 히데유키는 이내 대답했다.
" '링 바이 러스'의 출현 때문이야 "
"있죠, 아버지. 누굴가가 프로그램에 개입했다고 생각할 순 없었나
요?"
거기에서 가오루는 한 사람의 이름을 내놓았다
"궤네스 로스만이 란 사람 아시죠?"
"궤네스 로스만이 란 사람 아시죠?"
위를 향해 누운 자세 그대로 히데유뤼는 눈만 가오루 쪽으로 돌렸
다.
"그 사람이 왜?"
히데유키는 내뱉듯이 물었다. 또 사망 통지를 받는 것이 아닌가 싶
어 준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 어디에 있는지 혹시 아세요?"
"뉴멕시코에서 변함없이 인공 생명을 연구하고 있다고 들었는
111· . ."
"네, 뉴멕시코 주 로스앨러모스 연구소로 옮긴 모양이에요. 그런데
현재 소식은 확실치 않대요. 마지막으로 온 연락에 그가 의미 깊은
말을남긴 모양인데·.·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의 정체를 알았다‥‥
열쇠를 쥔 것은 다카야마다. '라고‥‥
"다카야마‥‥‥
"아버진 '루프' 속에서 다카야마와관련된 영상을 본적 있어요「,l"
가오루의 물음에 히데유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눈의 움직임이
격렬하다. 약하디 약한 생명 활동 속에서 그래도 필사적으로 뭔가를
생각해 내려 하고 있다
히데유키는 겉보기에도 확실할 정도로 동요하고 있었다. 몇 번의
큰 수술과 그후의 투병 생활로 기억이 흐려진 것도 당연하다 기억의
어둠에 맞서 아무런 반응도 얻지 못한 것에 히데유키의 신경은 심하
게 초조해졌다.
"아니 못 본 것 같다. "
가오루는 아버지의 갈등을 완화시켜 주고 싶어 화제를 바꾸기로
"아버지,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의 모든 염기 배열이 판명됐죠?
유전자는 9개밖에 없었어요."
"이틀 전에 사이키가 출력해서 갖고 왔잖아 "
"잠깐 이 숫자를 봐주세요."
가오루는 염기 배열을 기록한 프린트를 아버지에게 보인다. 유전
자마다 염기수 부분이 형광펜으로 강조되어 있었다
"이게 뭐?"
"염기 수 말인데요."
3,072, 393,216, 12,288, 786,432, 24,576,
49,152, 196,608, 6,144, 98,504
히데유키는 9개의 숫자를 순서대로 소리내어 읽어 갔다. 하지만
1무것도 깨달은 점이 없는 듯 미심적어하는 눈을 가오루에게 향한
다
가오루는 똑똑한 발음으로 말했다.
"모르시겠어요, 아버지? 9개의 숫자는 전부 2의 N승 곱하기 3으
로 되어 있어요."
그 말을 듣고서야 히데유키는 숫자로 눈을 되돌렸다. 몇 번인가 음
미한 후 감탄의 소리를 지른다.
"오호, 용케도 알아냈구나."
순간 히데유키의 얼굴에는 아들과 과학 문답에 빠져 있던 잇시절
의 반짝임이 스쳐 지나갔다. 가오루는 기쁨과 동시에 가슴이 미어졌
다. 아버지로부터 칭찬받은 것은 오랜만의 일이다.
"이것도 우연이라고 생각하세요?"
"아니, 우연일 리가 없지. 6자리까지의 숫자 9개 모두가 2의 脚승
곱하기 3일 확률은 아주 낮아. 우연의 벽을 뛰어넘은 것에는 모두 의
미가 있어 너였지? 10년 전 밤, 그렇게 말한 건.
히데유키는 그렇게 말하고는 힘없이 웃었다. 가오루의 뇌리에는
10년 전 가족이 주고받던 말들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마찬가지로 더
운 여름, 북아메리카 사막으로의 여행에 기대를 더했던 어린 시절의
꿈 즐거을 것 같던 가족 여행의 목적지는 무섭게 변모한 채 지금도
강하게 가오루를 조여 오고 있었다.
가오루와 히데유키가 예전에 행복했던 생환을 생각하고 있을 때였
다. 갑자기 병원 복도가 소란스러워졌다. 구급 병동도 아닌데 복도를
달리는 두세 명의 긴박한 발소리에서 이상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가
오루는 걷잡을 수 없는 불안감이 일어 소리 나는 쪽으로 귀를 기을
였다.
짧은 명령조의 사내 목소리에 섞여 비명 같은 여자 목소리가 들렸
다. 들은 기억이 있는 목소리이다. 틀림없이 레이코의 목소리였다
"잠깐만요."
아버지에게 눈짓을 하고 가오루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문을 열고 복도를 살펴보았다. 경비원 제복을 입은 사내를 따라 종
종걸음으로 재촉하는 여자의 지친 뒷모습이 보였다. 노란색 홈드레
스 차림의 뒷모습‥‥ 등에 있는 지퍼가 약간 내려가 있었다. 방금 전
가오루가 손으로 더듬어 내렸던 지퍼 그 위의 흰 목덜미. 틀림없는
레이코였다
맨발에 급히 샌들을 신은 모습이다. 잘 보니 샌들을 신고 있는 것
은 한쪽 발뿐이었다. 걸음을 걸을 때마다 절뚝절뚝 한쪽 어깨가 처진
다. 어지간히 급하게 병실에서 뛰쳐나온 모양이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가오루는 레이코의 이름을 부르면서 뒤를
쫓아갔다. 레이코와 두 경비원은 이름을 불러도 돌아보지 않고 복도
모퉁이를 돌아 엘리베이터 옆에 있는 계단 문으로 뛰어들어갔다.
레이코는 의미 불명의 외침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름을 부르고 있
는 것처럼 들렸지만 소음에 의해 싹 지워져 분명치 않았다
"레이코 씨 ."
가오루는 레이코의 이름을 부르며 빠른 걸음으로 따라잡아 코앞에
서 닫힌 문을 다시 비틀어 열고는 계단 문으로 뛰어들어갔다. 계단
안쪽에는 화물 운반용 엘리베이터가 있고. 이어 그 맞은편에 비상 계
단의 방화문이 있다. 긴급시에 사용되는 비상 계단 문은 유사시를 대
비해 안쪽에서도 열린다 하지만 용무도 없이 이곳에 침입하는 자는
경비실 모니터에 나타나고 경비원이 긴급히 달려오는 시스템으로 되
어 있었다. 물론 투신 자살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다.
레이코 일행이 방화문을 열었을 때, 가오루는 경비원의 머리 너머
로 작은 사람 그림자를 보았다. 붉은 삼각형이 붙은 창문(일본의 모
든 빌딩에는 화재 진압이나 비상 탈출용 창문에 붉은 삼각형을 붙이
게 되어 있다:역자 주). 화재시에 소방대원이 출입할 수 있도록 안
쪽에서도 바깥쪽에서도 열리는 창틀에 몸을 구부리고 앉아 있는 것
은‥‥ 료지였다.
료지는 반은 생을 포기한 듯한, 반은 조롱하는 듯한 눈길로 어른들
의 당황하는 모습을 내려다보며 평소 버릇대로 무릎을 달랑달랑 흔
들고 있었다.
료지의 모습을 보자파자 경비원들은 움직임을 멈추고 저마다 설득
을 시작했다.
'친정해라 "
"그만둬 ."
"자, 이쪽으로 오렴 "
레이코는 창문에 앉은 료지를 올려다보고 소리를 쥐어짰다.
"료지야1"
료지는 어머니 뒤에서 얼굴을 내미는 가오루의 모습도 알아챈 모
양이었다. 가오루는 료지와 눈이 마주쳤다 료지는 빙그르르 눈알을
뒤집듯이 횐자위를 드러내더니 비스듬히 뒤쪽으로 몸을 기울여 갔
다. 마지막으로 본 료지의 횐자위는 이미 살아 있는 사람의 것이 아
니었다.
다음 순간, 료지는 창 뒤에 있는 저녁 어둠 속으로 몸을 던져 사라
져 버렸다
1增
윽조 옆에 앉아 흘러나오는 미지근한 물에 손을 대고 있었다. 처음
에는 약간 뜨거웠지만, 익숙해지자 체온에 가까운 온도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욕조에 들어가 뜨거운 물 속에 어깨까지 담그고 잠시 동안
그대로 있었다. 수도꼭지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것이 멈추자
욕실은 조용해졌다. 이런 식으로 평일 오후에 목욕하는 것은 좀처럼
없던 일이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며 가오루는 욕조 가장자리에 됫머리를 대고
눈을 감았다. 그대로 양 무릎을 안아 몸을 등글게 만들어 태아의 포
즈를 취했다. 심장음이 물 속으로 전해져 윽조 전체를 파도치게 만드
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음을 비우려 해도 소용없었다 늘 똑같은 장면만 떠올랐다.
료지가 병원 비상 탈출용 창문에서 뛰어내려 자살하고 난 후 꼭 일
주일이 지나고 있다.
· ,저하고 료지를 도와줘요.
레이코의 마음을 저버리듯이 가오루의 눈앞에서 료지는 어린 생을
마감했다
뛰어내리기 전후의 광경은 가오루의 뇌리에 강렬한 충격을 주었
다. 비상 계단의 작은 창문에서 밖으로 몸을 기울여 간 료지의 공허
한 눈길 레이코의 비명. 영상과 음향의 자세한 편린이 불행하게도
가오루의 뇌리에 깊게 새겨져 버린 것이다. 지난 일 주일 동안 료지
가 꿈에 보이지 않은 날이 없었다
료지가 뛰어내린 직후, 가오루와 레이코 일행은 작은 창문으로 우
르르 달려가 밖을 내다보았다. 콘크리트에 내동댕이쳐진 료지의 몸
이 부자연스럽게 뒤틀려 있었다. 석양속에서 검붉게 빛나고 있었던
것은 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핏줄기였다 기절해서 그 자리에 쓰러져
버린 레이코를 끌어올리고, 료지의 몸을 구급 병동에 수용하도록 조
치했지만, 이미 때늦은 일임은 겉보기에도 분명했다. 12층에서 콘크
리트 바닥에 내동댕이쳐졌으니 생존 가능성은 제로나 마찬가지였다.
꿈에 콘크리트 바닥엔 얼룩진 료지의 핏자국이 보이는 적도 있었
다. 실제로 지금도 병동 안뜰에 그 얼룩이 남아 있다. 사라진 목숨이
그림자가 되어 노면에 비쳐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가오루
는 그 장소에 가까이 다가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료지의 자살은 발작적이기도 했고 계획적인 것이기도 했다. 비상
계단의 창문만이 안쪽에서 열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쏜살같이 그
장소로 달려간 것이어서 이전부터 어느 정도 점찍고 있었던 셈이 된
다
자살의 이유는 명확했다. 신티그램 검사가 끝나 네 번째 화학요법
을 눈앞에 두고 다시 그 괴로운 싸움이 시작되는 것인가 하고 마음속
으로 진저리를 치고 있었던 것이리라 게다가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상대도 아니었다. 언젠가는 괴로움 속에 생애를 마치게 된다. 조금
더 살아괴로움을 축적시키는 것과 인생을 짧게 마감하여 괴로움의
양을 줄이는 것, 어느 쪽이 좋은지 저울질한 게 틀림없다. 혹은 옆에
서 지켜보는 어머니의 괴로움도 고려했는지 모른다.
가오루는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에 걸려 죽음을 선택한 료지의
기분을 뼈저리도록 이해할 수 있었다. 남의 일이 아닌, 그리 멀지 않
은 장래에 틀림없이 자신에게 쏟아져 내릴 재앙이기도 하다. 가오루
자신도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상대이다. 료지의 기분을 이해하긴 하
지만 그와 같은 길을 걷고 싶지는 않다
‥‥모든 지력 (知力)을 최대한 쥐어짜내, 그 젊은 몸을 멸하려는 적
과 맞서.
아버지의 말이다. 죽음을 피하고 싶으면 적파싸워 이기지 않으면
안 된다. 무기는 하나. 아버지가 말한 대로 두뇌뿐이다.
가오루는 더욱 깊이 욕조에 몸을 담갔다. 뜨거운 물의 표면이 귓불
까지 다가왔다.
‥‥나한테 그런 힘이 있는 걸까?
생각해 보면 정말 이상하다.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를 둘러싼 사
건이 자신의 신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다. 세계를 구할 사명이 주어진 것처럼 일방적으로 가오루의
몸을 덮쳐 오고 있다
·과대 평가야
뜨거움을 참지 못하고 가오루는 욕조에서 일어섰다.
세계를 구한다는 소리는 듣기에 좋았다. 구세주인 척하는 행동은
정말 영웅적이다. 하지만 가오루에게는 당장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되
는 개인적인 문제가 있다. 세계를 구한다는 거창한 것이 아니다. 좀
더 가까운 영역에 관한 것.오늘 저녁 일 주일 만에 레이코와의 밀회
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물을 깨끗이 닦은 가오루는 새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었다.
레이코의 얼굴을 보는 것은 료지의 장례식 이후 처음이다. 그 동안
그녀는 완고하게 만나는 것조차 거부했다. 오늘밤 겨우 한 시간 정도
이야기할 시간을 내준 것이다 유일하게 주어진 기회 . 레이코가 마음
을 닫은 이유를 가오루는 들어야만 했다
15
녹음이 짙은 고지대 한 모퉁이에 레이코가 사는 맨션이 자리하고
있었다. 붉은 벽돌 외벽으로 치장된 호화로운 3층짜리 건물이다
가오루는 건물로 들어가 집 호수의 초인종을 누르고 응답을 기다
렸다.
"ㅂ1 ."
스피커에서 레이코의 목소리가 작게 들렸다. 한 템포를 두고 문이
열렸다.
병원 병실에 료지를 입원시킨 것으로 보아 경제적인 여유가 있을
것이라고 상상했지만 로비에서 엘리베이터 홀까지 응단이 깔린 복도
만으로도 상당히 부자인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물론 가오루는 돈의 출처에 관해서 캔 적이 없었다 레이코에게 직
접 물은 적도 없거니와 본인 스스로 말한 적도 없다. 다만 말투에서
남편이 사회적으로 성공했던 것 같은 인상을 엿보게 할 뿐이다. 남편
이라고 해도 몇 년 전에 암으로 죽었다.
3층 모퉁이가 레이코의 집이었다. 문을 두드릴 필요도 없이 집 앞
에 서자마자 문이 열렸다. 시간을 가늠하고 어안 렌즈로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이리라
일 주일 만에 보는 레이코의 옆얼굴이었다. 문틈으로 반쯤 얼굴이
나오더니 가오루의 바로 코앞에 레이코의 머리가 놓여졌다. 머리를
뒤로 묶고 고무줄로 동여맨 모습이다. 단정하게 빗은 머리카락 가운
데 몇 가닥의 횐 머리가 눈에 띄었다.
"들어 와요."
기어들어갈 것 같은 레이코의 목소리 .
"오랜만이 군요."
응접실로 안내되어 소파에 앉아서도 잠시 두사람은 말을하지 않
았다. 가오루는 어색함을 느끼고 있었다. 레이코가 왜 자신을 차갑게
대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어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대화의
실마리를 찾을 수 없었다.
레이코는 잠자코 보리차가 든 유리잔을 가오루 앞에 놓고 정면에
마주 앉았다.
"보고 싶었어요."
가오루는 레이코의 몸에 손을 뻗으려고 했다. 하지만 레이코는 손
을 피해 소파에 깊숙이 고쳐 앉아 가오루와의 거리를 멀리 했다.
장례식 때에도 비슷한 행동을 했었다. 외아들을 잃은 슬픔을 달래
줄 수 있는 것은 자신뿐이라는 자부심에 상복 차림의 레이코 어깨에
살짝 팔을 두르려고 했지만,몸을 비틀며 거부했다. 아무리 여자 경
험이 적은 가오루라도 똑같은 행위를 몇 번이고 보고 나면 짐작이 간
다. 집요하게 거절당하는 이유를 아무래도 이해할 수 없었다 깊숙이
살을 섞었던 여자로부터 어느 날을 기점으로 만지는 것도 싫다는 취
급을 받고 있는 것이다
레이코는 자신을 부등켜 안듯이 팔짱을 끼고 손바닥으로 팔을 문지
르며 추운 척하고 있었다. 방의 냉방은 적당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어
춥다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가오루는 오히려 더웠다.
레이코의 겉모습을 관찰하며 그녀 마음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으
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들을 잃은 슬픔에 마음을 닫고 있는 것이라
면, 그것을 위로할 방법을 발견할 수는 없을까 하는‥‥
상대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거나, 위로하기 위한 말· . 가슴에 떠오
르는 말은 모두 무력하고, 작위적인 것 같고, 부끄럽다. '힘을 내라구
요.' 따윈 입이 찢어져도 할수 없는 말이다. 쉽사리 대화가성립되지
않는 것은 그 탓이었다.
"언제까지 말 안 하고 있을 생각이에요?"
눈을 아래로 떨구고 레이코는 차갑게 말했다. 여지껏 상대의 입을
다물 수밖에 없게 만들었으면서 지금의 이 말투는 뭔가. 가오루는 불
끈했다
"이제 좀 그만 해요."
가오루는 최대한으로 소리를 쥐어짰다.
"뭔 요?"
양 손으로 머리를 쥐고 레이코는 몸을 심하게 흔들었다. 울고 있는
걸까, 가끔 오열이 새어나온다
"난 당신의 슬픔을 어떻게든 줄여 주고 싶어요. 하지만 어떻게 하
면 좋을지 방법을 모르겠어요."
레이코는 '아아' 하는신음소리를새어나초게 하고는얼굴을들고
아랫입술을 이로 깨물었다. 울어서 빨갛게 퉁퉁 부은 눈 밑은 촉촉히
눈물로 젖어 있었다.
"만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거예요, 당신을 "
가오루는 깜짝 놀랐다.
'내가 싫어진 거예요?"
‥‥그럴 리가 없어
가오루는 무언의 외침을 발했다. 정말 싫어진 것이라면 만나는 것
조차 거절했을 것이다. 보고 싶다고 호소하는 전화를 계속 무시했으
면 이런 어색한 시간을 갖지 않고 끝났을 것이다. 단 한 시간이라고
하는 조건부로 오늘의 만남이 마련되었다. 레이코는 뭔가 의논거리
를 안고 있을 것이고, 만나야 할 정당한 이유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
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애가, 알고 있었어요."
갑자기 레이코의 목소리가 편안해졌다.
"11 ?"
"당신하고 내 일을· . ."
"당신하고 내가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걸 말이에요'1"
"서로 사랑하고 있다구요? 그게 서로 사랑하고 있는 모습이에요?"
레이코는 자조 떤 웃음을 나타냈다
· 씨로 사랑하는 모습.
"알고 있었다니 , 뭘요?"
가오루는 퍼뜩 등줄기를 폈다.
"당신하고 내가 그 방에서 했던 일이요."
다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가오루는 꿀꺽 침을 삼키고 말했다
"그럴 리가 없어요."
"그 앤 눈치가 빠른 애였어요. 벌써 눈치채고 있었다구요. 우리가
바보였어요. 그런 짓을 하다니 , 그런 짓을 하다니 .'
레이코의 마음이 무너지고 있었다
"하지 만· . . "
"유서에 써 있었어요."
"l1?"
"뭐라고 써 있었을 것 같아요?"
". .
가오루는 각오하고 침을 삼켰다
"나, 없어질 테니까 다음엔 야무지게 처리해."
레이코는 료지의 말투를 흥내내어 그렇게 말했다.
· .치야 이거
수영 모자를 뒤집어쓴료지의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수영장 가에
서서 헐렁헐렁한 짧은 바지를 입은 모습으로 같은 대사를 반복했다.
‥‥나, 없어질 테니까 다음엔 야무지게 처리해. 나, 없어질 테니까
다음엔 야무지게 처리해. 나, 없어질 테니까 다음엔 야무지게 처리
해
조심에 조심을 거듭했다 료지가 두 시간 정도 걸리는 검사를 받으
러 갈 때에만 두 사람은 관계를 했다. 행위 그 자체는 10분도 계속되
지 않았고, 마친 뒤에는 허탈과 회한의 표정을 띄우며 당장에라도 을
것 같은 시전을저로 나누었던 것이다. '사랑해.'라고 속삭이면서 가
오추는 레이펀의 눈물을 한거나 입맞춤을 해주었다.
레이코는 발작적으로 상반신을 격하게 흔들고 있었다. 료지의 유
서를 소리내 읽은 탓으로 냉정함을 잃고 만 것이다.
잠시 동안 우는 대로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울다지치면 언젠
가는 진정할 것이다.
가오루는 료지의 입장에 서서 상상해 보았다. 자신은괴로운검사
에 몸을 맡기는 동안에 어머니는 기다렸다는 듯 쾌락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료지의 입장에서 보면, 배반이나 다름없는 행위로 비쳐졌을
것이다. 함께 싸워 주어야 할 어머니가 자신은 끌려나가 괴로운 싸움
을 벌이는 틈을 타서 즐기고 있다. 환멸스러운 것도 무리가 아니다.
싸우려고 하는 마음이 없어진다. 료지가 자살한 것은 병과의 싸움을
포기했기 때문이라고 이해하고 있었는데 진상은 완전히 달랐던 것이
다
가오루가 료지의 자살에 대해 별로 깊은 슬픔을 품지 않았던 것은,
가까운 장래에 확실히 죽을 운명이라는 것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이
제 곧 끊어지게 될 목숨을 자신의 힘으로 조금 줄인 것이라고 하면
그쪽이 오히려 잘된 것인지도 모른다고,어딘가안심하는 구석이 있
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머니의 행위가 자살의 방아쇠가 된 것이라면, 죽음을 결
심한 료지의 생각은 복잡했음에 틀림없다.
레이코의 경우도 생각이 같을 것이다. 비싼 돈을 지불하고 독방을
얻어, 언젠가는 학교로 돌아갈 거라는 생각에 가정교사를 고용하여
삶을 향한 의욕을 내비칠 셈이었다. 죽을 것을 알고 있는 상대에 대
하여 함께 싸우겠다는 태도를 명확하게 나타내는 것이야말로 애정의
증거이다. 최후의 순간까지 나는 너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태도를 보
이고 싶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죽음으로 인도해 버리고 만 것이
다.
료지가 절망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래서 지금, 레이코는 자
신의 아들에게 절망의 끝인 죽음을 가져다 주고 만 일을 몹시 후회하
고 있다 공범자인 가오루에게 분노의 화살을 돌려 버린 것이다. 장
례식 때, 어깨를 감싸려던 가오루의 팔에서 몸을 비틀 듯이 도망친
이유를 가오루는 겨우 이해할 수 있었다. 료지의 위패 앞에서 순간의
접촉조차 드러내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잠시 생각하는 시간을 갖고 싶었다. 젊은 가오루로서는 어떻게 대
처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두사람의 관계를 끝내고 싶은 것이
라면 아무 문제도 없다. 그렇지만 가오루에겐 그럴 마음이 없었다.
절망적인 지금의 상황을 극복하고 관계를 회복할 방법을 필사적으로
찾고 있었다.
"좀 시간을 주지 않겠어요?"
솔직하게 기분을 호소했다. 시간을 두고 두 사람의 미래를 냉정히
생각해 보고 싶었다.
"안 돼요."
레이코는 심하게 고개를 옆으로 젓는다.
"나로선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군요."
"나도 그래요. 그러니까 이렇게· . . "
유일한요청이었다 레이코는 두사람의 관계에 종지부를 찍고 싶
어 가오루를 부른 것이 아니다. 그녀 자신이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
르겠다는 마음의 망설임을 토로하고 있다. 스스로도 결정하기 어려
운 것이다.
단 한 시간이라고 약속했지만, 창 밖에는 이미 늦여름의 황혼이 다
가오고 있었다. 레이코와 알게 된 것은 장마철 무렵. 사귄 지 이제 겨
우 3개월이 지났을 뿐이다. 가오루에게는 더욱 길었던 것 같은 생각
이 들지만
말을 나누기보다 잠자코 있는 시간이 훨씬 많았다 침묵은 때로 십
여 분에 달했다. 그래도 레이코는 '돌아가요.'라고 말하지 않았다. 가
오루에게는 레이코의 태도가 어딘가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아까부
터 몇 번이고 하고 싶은 말을 입 밖으로 내려다가 속으로 말을 삼키
고만 있다.
"레이코, 나한테 숨기는 거 있어요?"
가오루에게 추궁당하자 레이코는 결심을 한 듯 얼굴을 들었다. 도
발적인 표정이 담겨 있었다.
"생긴 것 같아요."
의미를 이해하기까지 몇 초가 필요했다
'쟁겼다구요?"
"11."
가오루와 레이코는 눈과 눈으로 서로 사실을 확인했다
충격이 등줄기를 지나간다. 정말이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좁은
병실에서 실로 죽음과 탄생이 서로 이웃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상의
얄궂음에 화가 났다. 눈에 보이지 않는 악의조차 느껴졌다.
"그랬군요."
가오루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 것 같아요?"
'낳았으면 좋겠어요."
가오루는 몸을 내밀었다. 레이코와는 장난으로 사귄 게 아니다. 아
이가 생겼다면 낳아 기르면서 함께 살고 싶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거 예요?"
레이코는 소파 옆 잡지꽃이에서 신문을 한 부 꺼내 가오루 쪽으로
던졌다. 오늘 아침 조간이었다. 보지 않아도 레이코가 말하고 싶은
것을 알 수 있었다. 가오루도 오늘 신문에서 사회면 그 기사를 대충
읽었다.
그 기사에는 미국 애리조나 주에 있는 사막성 수목 집단의 사진이
소개되어 있었다. 플랙스타프와 그랜드캐니언을 연결하는 US 하이
웨이 180번 도로 근처에서 그 수목군이 우연히 발견된 모양이다. 갈
색의 대지에 무성한 키 작은 관목과 식물 대부분이 뿌리와 가지 부
분, 잎 끝에 이르기까지 이상한 모양으로 부풀어올라 있다고 한다.
바이러스가 수목에 감염되어 혹을 만들어 내거나 잎을 마르게 해버
리는 일은 흔히 있지만, 그 부근 일대의 광경은 예전에 볼 수 없었던
규모의 바이러스 감염을 떠올리게 했다. 뿌리와 가지, 잎의 형태를
바꿔 버린 것· . 그것은 어떤 종류의 바이러스의 소행인 듯하다. 게다
가 세계적으로 맹위를 떨치고 있는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의 변종
이 원인이라는 설이 갑자기 부상했다고 한다. 동물뿐만 아니라 전이
성 인간 암 바이러스의 촉수는 식물에까지 미치고 있었다. 사막에 출
현한 괴기한 수목군은 이 세상의 종말을 강하게 예언하고 있는 듯했
다. 신문의 논조도 짐짓 종말감을 부채질하는 듯한 모양으로 맺음하
고 있었다
레이코는 발병하지 않고 있을 뿐 이미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 보
균자이다. 그 위협이 동물뿐만이 아니라 식물에도 미치게 되면 세계
에 대한 희망 따윈 품을수 없다 레이코의 자궁에서 태어나려고 하
는 아이는 암 바이러스에 감염될 확률이 매우 높다.
낳고 싶다는 따위의 안이한 말을 쉽게도 하네요.'라는 시선으로
레이코는 가오루에게 추궁을 했다.
"어디에 희망이 있다는 거죠?"
"시간을 주지 않겠어요7"
간청하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 결론을 내는 것은 무리이다.
"결정을 연장하게 되면 길이 열리나요? 이젠 싫어요, 저 . 정말이지
진저리 나요‥‥그렇지만 지우고 싶지 않아요.알죠?저 아이의 죽음
과 맞바꿔 생긴 생명이에요.소중히 하고 싶은게 당연하지 않아요?
하지만, 못 견디겠어요. 다시 저 아이와 같은 운명을 걷는 게 아닌가
싶어서 애써 태어나 이 세상의 생을 누려 業자 짧고, 그저 괴롭기만
한 인생이라니· . 네?도와줘요.부탁이에요 뭘 어떻게 하면 좋을지
이제 전혀 모르겠어요."
레이코 옆으로 다가가 그녀의 호소를 들어 주고 싶었다. 부등켜안
아 마음의 갈등을 없애 주고 싶었다. 그러나 시기상조일 거라고 가오
루는 그 생각을 어떻게든 억눌렀다.
"지우는 건 생각하고 있지 않은 거죠?"
가오루가 다짐을 하자 레이코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기력조차 없어요."
지을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하지만 선뜻 낳는다는 판단도 하기 어
려워하고 있다.
가오루는 레이코의 눈동자를 통해 마음속을 엿보고 어떤 결의의
편린을 감지해 내고 있었다. 낙태는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낳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자살이라는 선택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가오루의 바람은 하나이다. 레이코를 살아 있게 하고 싶었다. 그러
기 위해서는 레이코와 새로 태어날 생명에게 세계가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명확히 증명할 필요가 있다
방법은 하나, 멸망하여 다시 혼돈의 우주로 탈바꿈하려는 세계의
흐름을 이 손으로 바꾸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필요한 시간은 대체 어느 정도일까?
2개월, 아니면 3개월?엉거주춤 시간이 흘러 배가불러 오면 레이
코는 죽음을 선택할 것이다. 앞으로 3개월이 고작, 그 이상은 신경이
견뎌낼 것 같지 않다.
"3개월만 기다려 줘요. 부탁이에요, 날 믿어 주면 좋겠어요."
"3개월이라니 무리예요. 난 견딜 수 없어요."
레이코는 약하디 약하게 비명을 질렀다.
"그럼 , 2개월."
원망스러운 듯이 레이코는 가오루를 올려다보았다.
"약속은 못 해요."
"안 돼요. 약속해요. 앞으로 2개월 동안 무슨 일이 있어도 자살하
지 않겠다고."
가오루는 두 손을 테이블에 대고 레이코에게 다가갔다. 힘에 압도
되어 주춤하던 레이코는 해방된, 묘하게 상쾌한 표정이 얼굴에 나타
났다. 어정정했던 마음 상태가 한쪽으로 진정되고 있는 모양이다. 일
단 방향이라도 정해지면, 조금이라도 괴로움은 경감되는 법이다.
육체적으로 거부당하고 있다는 불명예스런 사태를 회복하기 위해
서라도 레이코와의 사이에 잠시 거리를 두는 편이 좋을 것 같다. 2개
월은 적당한 기간이라고 가오루는 생각했다.
"2개월 "
레이코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요, 2개월 후에 만나요. 그때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떻게
든 살아 있어 줘요."
"살아 있으면 되는 거죠?"
"당신의 가슴이 고동치고, 호흡하고, 그리고 가끙 날 생각해 주면,
그 세 가지 조건만 지키고 있으면 돼요."
레이코는 엷게 웃음을 흘렸다.
초늘 처음 보인 레이코의 밝은 표정에 가오루의 마음이 누그러졌
다.
레이코가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저 신뢰해 주길 바랐다. fl신이 있
느냐고 묻는다면, 불투명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힌트 몇 가지는 손에 넣은 것 같다.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의 염
기 수가 2n x3이라는 두드러진 특징을 가진 것은 어째서인가? 이 바
이러스가 가까운 곳에서 발생한 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도 작용한다
발생의 비밀을 밝혀 내면 종식시킬 방법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
다 기간은 2개월, 레이코와 운명을 함께 할 작정으로 사태에 임하는
수밖에 없었다.
16
자신의 아파트인 29층으로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가오루는
예의 귀울림을느끼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는 기압의 변화를 받지 않
는 구조로 되어 있는데 오늘은 귓속이 윙윙거리고 그와 동시에 잔상
이 어른거렸다.
료지의 몸이 콘크리트에 내동댕이쳐져 검붉은 핏덩어리와 함께 瑞
가부서지는 소리가 귀 안쪽에 남아 있었다. 낙하해 가는 그의 모습
을 실제로 본 것은 아니다 창문으로 다가가는 도중 몸이 격돌하는
둔탁한 소리를 들은 것 같은 기분이 들 뿐이다. 하지만 소리의 기억
은 좀처럼 흐려지지 않았다. 상승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어느 순간,
소리의 기억에 의해 촉발되어 보지도 않은 영상이 되살아난 것이다.
가오루는 약간 머리를 숙이면서 아파트 문을 열고 소리쳤다.
"다녀 왔습니다. "
대답이 없었다. 신경 쓰는 일 없이 신을 벗어 신발장에 넣고 얼굴
을들었다 어느새 나타났는지 어머니 마치코가서 있었다.
"잠간 이리 와라."
손을 잡힌 채 어머니 방으로 억지로 끌려 들어갔다 어머니의 눈에
는 뭔가를 발견했을 때의 흥분이 어려있었다.
"왜요, 어머니?"
당황하면서도 어머니의 기세에 눌려 가오루는 거역하지 않고 따라
갔다.
오랜만에 들어가는 어머니 방에는 책과 잡지 , 복사본 등이 어지럽
제 쌓여 있었다 지금까지의 어머니 방은 매우 깔끙하게 정돈되어 있
었다. 어머니의 표정에서도 다른 사람 같은 인상을 받았다 함께 살
고 있어도 어머니의 얼굴을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에요, 대체?"
료지가 자살한 후이기도 해서 가오루는 신경과민이 되어 있었다.
어머니의 심리 상태가 걱정이 돼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가오루의 걱정 따윈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다.
"이걸 좀 봐라
마치코는 『rHo FANTASTIC WORLDs라는 이름의 잡지를 가오
루에게 건넸다.
"판타스틱 월드‥‥ 이게 왜요?"
가오루는 진저리가 났다. 잡지 이름에서 신비주의적인 세계에 관
한 갖가지 화제를 다룬 것이리라 추측할 수 있었다.
마치코는 가오루로부터 잡지를 낚아채 47페이지를 펼친 다응 다시
가오루에게 건넸다. 어머니에게 어울리지 않는 난폭한 행동이었다.
"이 기사를 읽어 봐 "
가오루는 순순히 어머니의 말에 따랐다. 기사 타이틀에는 '말기 암
으로부터의 생환'으로 되어 있다.
· 그렇지 , 그런 거군
가오루는 납득했다. 요즘 어머니가 열중해서 정열을 쏟고 있는 것
은 획기적인 암 치료법을 발견하는 일이었다. 현대 의학의 영역에서
가 아니다. 마치코는 민화나 신화를 비롯한 신비로운 세계에서 그 실
마리를 발견하려 하고 있었다. 연금술이라고 말해 버리면 그것으로
끝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머니에게 맞춰 주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가오루는 기사를 대충 훌어 갔다.
오리건 주 포틀랜드에 사는 은퇴한 측량 기사 플랜츠 보어는 몇 년
전,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몸 안에 전이된 암 때문에
앞으로 3개월밖에 살지 못한다는 의사의 선고를 받았다.
그런데 그는 의사가 권하는 치료를 거부하고 여행을 떠나 어떤 장
소에서 2주일 정도 지냈다 한 달쯤 뒤 플랜츠 보어가 포틀랜드에 돌
아오자 그의 몸을 진찰한 의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
로저었다 절제가불가능할정도로퍼져 있던 암세포가 깨끗하게 없
어진 것이다. 게다가 59세의 플랜츠 보어의 세포를 채취해서 분열 횟
수를 조사했더니 , 같은 나이의 평균보다 훨씬 많다는 것이 판명되었
다.
결국 플랜츠 보어는 그 땅에서 두 가지 것을 손에 넣은 것이다. 잃
을 목숨, 그리고 또 하나는 장수. 그런데 혼자 사는 플랜츠 보어는 어
디에서 그 기적을 얻었는지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고 사고로 어이
없게 죽어 버렸다. 모두들 그가 어디에서 무엇을 했었는지 알려고 기
를 썼다
단서는 거의 없다. 다만 어떤 잡지 기자가 집요하게 조사한 결과,
선고를 받은 직후 플랜츠 보어가 로스앤젤레스에서 렌터카를 빌렸다
는 사실이 판명되었다. 그 이외에 그가 어디로 향했는지를 알 수 있
는 단서는 전혀 없다.
기사에 씌어 있는 내용은 대충 그런 것이었다
마치코는 가오루의 반응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말기 암에서
의 기적적인 생환 따윈 그다지 신기하지 않았다. 어디에나 흔히 있는
이야기였다. 굳이 보지 않아도 기대로 가슴이 뛰고 있을 마치코를 상
상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가오루는 '그런데 어떻게 하라는
건가?'라는 표정으로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어때 ?"
마치코는 기사를 읽고 난 감상을 물었다
포틀랜드에서 LA까지는 아마 비행기로 갔을 것이다. 향한 곳이 애
리조나와 뉴멕시코 부근의 사막 지대라면, 당연히 LA에서 렌터카를
빌릴 필요가 생긴다 앞뒤가 맞는다.
"엄마가 말하고 싶은 게 뭔지 알아요. 플랜츠 보어가 향했던 장소
야말로내가 옛날부터 말하던 사막의 장수촌이다. 그렇게 말하고 싶
은 거죠?"
어머니는 긍정하지도 않고, 대신 번쩍번쩍 타오르는 눈을 가오루
쪽으로 접근시켜 왔다. 확신이 있다고 눈동자가 호소하고 있다.
"실은 증거가 또 하나 있어 ."
"뭔데요?"
"이것도 봐."
마치코는 등뒤에 숨기고 있던 원서를 가오루 쪽으로 내밀었다
fOLKLORES OF NORTH AMERICAN INDIANS (북아메리
카 인디언의 민간전승)』
타이틀 밑에는 태양과 햇살을 정면으로 받으며 언덕에 서 있는 사
람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머리에 깃털 장식을 한 남자 인디언이 그
림자처럼 검게 물들어 있다. 인디언은 기도하는 포즈를 취하고 있었
다. 오래된 책이어서인지 표지 색은 바랬고 페이지 중간 정도는 손때
가 묻어 있다.
마치코로부터 책을 받아들자마자 가오루는 차례를 펼쳤다 세 페
이지에 이르는 차례에는 74개의 항목이 늘어서 있었다. 인어도 의미
가 통하지 않는 단어가 어느 항목에나 최소한 하나는 흩어져 있었다.
예를 들면, HIAQUA라는 단어를 가오루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
다 언뜻 볼 때 영어 사전에도 실려 있지 않은 단어라는 짐작이 갔다.
계속해서 페이지를 넘기자 몇 장의 사진이 나타났다. 그 가운데 한
장에는 한쪽 무릎을 세운 자세로 활을 쏠 자세를 취하고 있는 인디언
이 찍혀 있었다.
책에서 얼굴을 들고 가오루는 어머니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북아메리카 인디언 민화야."
"그런 건 보면 알아요. 내가 알고 싶은 건 북아메리카 인디언 민화
하고 아까 읽은 『판타스틱 월드』 기사 사이에 대체 어떤 관계가 있는
가 하는 거예요."
마치코는 앉은 자세를 바로 했다. 그 동작에 아들에게 무언가 가르
칠 수 있다는 기쁨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인디언에게는 여러 가지 신화나 전승이 있어 . 하지만 북아메리카
인디언은 문자를 갖고 있지 않아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있지 ."
마치코는 가오루의 손에서 책을 빼앗아 페이지를 넘겼다.
"그래서, 여기에 있는 74가지 짧은 이야기는 거의 인디언 이외의
사람에 의해 수집되고 수록된 것이야. 봐라."
마치코는 책 안에 있는 페이지를 가리켰다.
"자, 각각의 이야기 처음에는 타이틀 이외에 그 이야기가 언제, 어
디서 , 누구의 손에 의해 채록됐는지 가 명기되어 있어 . 이야기를 구전
하고 있는 부족 이름도."
가오루는 마치코가 가리키는 부분의 타이틀을 읽어 보았다.
「어떻게 산들의 정상은 태양까지 도달했는가?~
이어 去팡카아 부족과 교류를 하면서 이야기를 전해 듣고 기록하
기에 이른 백인 남성의 에피소드가 나온 후에야 겨우, 태양에까지 도
달해 버린 산들의 이야기가 씌어져 있었다
이야기 자체는 짧아서 기껏해야 한 페이지나 두 페이지로 끝났다
이와 같은 것이 책 안에 74편이 수록되어 있는 것이다. 타이틀은 문
장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 많아 고유 명사 하나로 이루어진 것은
거의 없었다.
"있지 , 가오루, 이 이야기 좀 읽어 봐라"
마치코가 펼친 페이지의 타이틀 위에 34라는 번호가 매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34번째 이야기인 모양이다.
가오루는 타이틀에서 어떤 번뜩임을 얻었다.
· .끼것도 역시 우연일까?
타이틀은 이러했다.
「무수한 눈에게 강시당하고 있다」
수동형이지만, '누가' '무엇'에 감시당하고 있는 것인지는 상상이
가지 않았다. 가오루는 슬슬 됫걸음질쳐 손으로 더듬어 의자를 확인
하고서는 앉아서 읽기 시작했다. 어느새 마치코가 제시한 세계로 빠
져들어가 버린 것이다.
「무수한 눈에게 감시당하고 있다」
타리키트즉
낭둑 전쟁이 한창인 1802년. 서남두의 사막 지대를 들에서 서로
여행하는 도중, 포장마차 대늰을 善친 백인 목사, 인지인 위클리프
는 타리키트족에 의해 구들돼, 며질 동안 그들과 함께 생활하게 되
었다.
어느 至용한 담, 인디언들은 둘을 둘러싸고 장로가 말하는 이야
기를 듣고 있었다 마짐 둘 근처에 있던 위클리프는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담하늘에 피어오르는 불기등과 억양 없이
이야기하는 장로의 말은 인상 깊게 위클리프의 뇌리에 새겨져, 그
는 그날 담 안으로 이것을 써두게 되었다
아득한 옛날에 자연계의 모든 생물은 모두 똑같은 것에서 태어
났다. 그리고 그 어미이자 인간과 동물을 불쌍히 여기는 바다와 강
과 대지, 태양과 달과 덜은 더욱 큰 생물의 端에 안겨 있었다. 대지
에 정령이 가득 차 있다고 느끼는 것은 큰 생물의 마음과 인간의
마음이 서로 통하고 梨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이 나은 행동을 하
면, 큰 생물의 마음은 법들고 그 결과 재앙이 인간을 덮지게 된다.
어느 날, 덜들이 큰 생물의 피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 달렸는데,
그중 하나가 대지에 이르러 타리키트라고 하는 인간 남성이 되었
다 그는 刻니아라고 하는 이름의 臺수(湖水)와 결혼해 두 명의 사
내 아이를 얻었다. 두부는 큰 생물의 대 위에 晴 있는 대지에서 정
령의 業을 저더리는 그 點이 아이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Ol이들은 이윽고 멋지게 성장하여 아더지와 어머니를 돕게 되었
다. 응감하고 사냥을 매우 잘했기 때문에 형제들은 늘 커다란 사냥
감을 가지고 부모에게 돌아을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타리키트는 발에 통증을 느끼게 되어 그것을 아
내와 아이들에페 알렸다. 아내와 아이들은 타리키트의 몸을 걱정梨
지만, 그안은 은연중에 자신의 몸이 마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지만, 그안은 은연중에 자신의 몸이 마른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는 이 대지로 흘러들어와 정착하기 이전부터 무수한 눈에 의
해 감시 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인간은 동물을 잡Ol먹
어도 雲다. 큰 동물은 작은 동물을 잡아먹어도 雲다. 그러나 너무
많이 먹는 梨은 안 된다고 되어 梨었다. 또한 잡은 사냥감을 지Ll
치게 堂01 두는 裂도 안 된다고 되어 있었다. 잡은 사냥감에게도
경의를 崙지 않으면 안 되는 裂脚다. 이것을 지켜보기 위해 자연계
의 아더지이기도 한 큰 생물은 산꼭대기에 거대한 눈을 두기로 梨
다. 산꼭대기에 자리잡은 눈은 매우 梨지만 단 하나뿐이어서 동시
에 모든 당향의 인간을 지켜보지 못했고, 이윽고 사람들은 이 눈을
피해 큰 생물의 뜻을 거역하는 裂위를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큰 생물은 결코 눈으로부터 도망치지 못하도록 눈을 인
간의 몸 속에 묻어 두기로 한 것이다.
"그 눈이 지금 내 통을 아프게 하고 梨는 거야."
타리키트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그렇게 설望梨다.
"그렇지만 아데지가 큰 생물의 뜻을 거역하고 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點어요."
"틀링없이 내 자신이 刻닫지 못하는 사이에 거역하고 있었던 거
야."
타리키트는 그런 말을 남기고 죽었ㄷ1
뒤에 남겨진 어머니와 형제들은 너무 슬퍼 큰 생물의 처사를 원
망했다.
잠시 卒 형이 허리께가 아프다고 이야기했다. 이어 동생의 등에
도 통증이 지Ll梨다. 서로의 몸을 보자 형의 허리화 동생의 등에
주먹만한 크기의 '눈'이 瑞올라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두 사람은
깜짝 놀라 어머니 레니아에게 도움을 청했다.
레니아는 강을 따라 내려가 삼림의 정령을 勢아 아들들을 도을
당덥을 물었다.
"곧장 서쪽으로 가 전사가 나타나기를 기다려라. 그리고 전사의
잠들을 확인한 후, 그가 이끄는 대로 [[1르라."
삼림의 정령이 그렇게 대답했기 때문에 형과 동생은 곧바로 서
쪽을 향해 여행을 脚나 전사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형 허리에 梨
는 '눈'은 점점 커지고, 동생 등에 있는 '눈'은 [[H로 방을 같은 큰
눈물까지 도이지 되었다
이윽고 어디에서랄 것도 架이 짐승의 등에 올라탄 힘센 사내 하
나가 나타나 형과 동생을 산맥이 誇어진 곳으로 인도해 梨다.
멎 개나 되는 강을 건너자 臺원은 사막으로 빈하고, 북쪽에서 뻗
어 나온 거대한 산맥도 業겼다. 남쪽을 우회하자 작고 높은 언덕에
이를 수 있었다. 언덕에서 서쪽을 바라보니 산꼭대기에서 넘져난
물이 刊곡을 흘러 강이 되고 서쪽의 대해로 홀러들어가는 裂이 보
였다. 그리고 동쪽을 다라보니 마찬가지로 강의 흐름이 동쪽의 대
해로 홀러들어가는 梨이 보였다. 그곳은 臺로 산맥과 산맥의 계곡
사이에 깔린 활 모양의 산등성이 이자, 두 개의 큰 바다에 이르는
강의 원천이 되는 곳이었다.
전사는 능선이 가장 높아진 곳에 이르자 짐승의 등에서 내려 걸
어 폭포를 거슬러 올라갔다. 폭포 위에는 검은 동굴이 떡하니 입을
벌리고 있었고 그 안에는 '오래된 자'가 살고 있었다. 更래된 자'
는 형제에게 천지창조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마치 경험한 것처
럼 과거의 일을 자세히 알고 있어서 형이 '오래된 자'에게 나이를
물었더 니 그가 대답했다
"돈 그대로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생각난 것을 내게 말하라."
형도 동생도, 料무것도 마음에 暗오르지 않아 대답할 수가 點있
다.
'오래된 자'는 나이를 알려 주는 대신에 이렇게 말했다.
"난 삼라만상이 畿긴 무렵부터 이긋에 있었다. "
형제는 허리에 생긴 '는'과 등에 생긴 '눈'을 I[11어 내고 싶다고
臺소했다 그러자 그는 대답했다.
"雲다. 하지만 내 대신에 오늘부터 너희들이 지켜보지 않으면 안
된 다. "
'豊래된 자'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사라져 梨다. 그러자 '눈'은
몸에서 똑 떨어져 바위 위를 굴러 검은 돌로 변했다. 壽제들은 열
원한 畿명을 얻고 그 땅에서 지켜보게 되었다. 서쪽과 동쪽의 대해
로 흘러들어가는 강을 가진 그 땅은 지리보기에 딱 雲은 장소였다.
읽기를 마치자 마치코는 가오루에게 동의를 구했다.
"그렇지? 알겠지 ?"
가오루는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질색이었다. 원래 소설류는 별,펄
읽지 않는 편이었고, 민화라든가 신화는 더욱 그러했다. 한없이 현실
감이 부족해 읽어 봐도 제대로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 이야기도 전개가 너무 급진전되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지
잘 이해되지 않았다. 의미가 있는 듯한 말도 해석하기에 따라 어느
것으로도 해석이 가능했다. 과연 이 속에 교훈이 들어 있는 것인지?
아닌지? 때문에 어머니의 '알겠지?'라는 질문에 가오루는 대답이 궁
할 뿐이다.
"다른 이야기도 대체로 이런 거예요?"
가오루는 되물었다.
"뭐 대략."
" '오래된 자'란 건 글자 그래도 노인이라고 받아들이면 되는 걸까
요?"
'오래된 자'도, '지켜보고 있는 무수한 눈'도 비유일 거라는 상상
이 간다. '오래된 자'라는 것은 장수촌을말하는 걸까?그렇다고 한
다면 '지켜보고 있는 무수한 눈'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아무래도 감
이 오지 않는다.
"문제는 이거야."
마치코는 책 마지막에 첨부되어 있는 북아메리카 지도를 꺼내 가
오루 앞에 펼쳤다. 지도에는 북아메리카에 흩어져 있는 주요 인디언
종족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다.
"있지 , 민화나 신화는 완전한 가공의 이야기일까? 어느 학자에 따
르면, 신화는 민족 초기 시절의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어떤 종류의
바람을 담은 거래.대홍수의 흔적이 세계 각지에 남아 있고,방주의
전설이 어느 정도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 따윈 이미 상식이라
고도 할 수 있어 .
그러니까 가오루 네가 지금 읽은 이야기가 어느 정도 사실을 근거
로 하고 있다고 가정하고‥‥ 알겠니? 타리키트족은 오클라호마 서쪽
을 거주지로 삼고 있던 오키족의 일부 부족이야."
거기에서 마치코는 지도상의 한 점을 새끼손가락 끝으로 가리켰
다. 그곳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타리키트족의 거주지였다
"이야기에서 형제들은 여기에서 정서 향으로 나아갔다고 되어 있
Xl ?"
마치코는 그대로 새끼손가락 끝을 왼쪽으로 움직여 가다가 도중에
서 손가락을 멍췄다.
"그런데 형제는 대체 어디로 향한 걸까? 이야기에서는 두 사람이
선 언덕은 거대한 산맥 남쪽이 끊긴 곳이고. 서쪽 대해와 동쪽 대해
로 흘러들어가는 강의 원천이 되는 곳이라고 써 있어 . 산맥이라는 건
이 경우, 지리적으로 봐서 로키 산맥 이외에는 생각할 수 없어 ,"
마치코는 손가락을 남북 방향으로 지나가게 했다. 캐나다에서 똑
바로 내려와 손가락을 멈춘 지점에서 산맥은 끝나 있다. 타리키트족
의 거주지에서 정서쪽에 해당하며, 바로 남쪽에는4천 미터급의 산
이 우뚝 솟아 있다 지금 마치코가 손가락을 두고 있는 지점은 확 모
양으로 뻗은 대지를 안은 큰 계곡을 이루고 있으며 , 사막 지대였다.
마치코는 이어 새끼손가락 끝으로 확 모양으로 뻗은 언덕 꼭대기
에 x표시를 했다. 그 약간 왼쪽에서 태평양-캘리포니아만으로 흘
러들어가는 콜로라도 강 지류인 리틀콜로라도 강이 가늘어지다가 사
라지고. 바로 오른쪽에서는 대서양-멕시코 만으로 흘러들어가는 리
초그란데 강 지류가 점선이 되다가 사라지고 있었다. 세계의 두 대
해 , 태평양과 대서양에 이르는 강의 수원이 이 지점에서 능선을 끼고
바로 이웃하고 있다 능선은 물을 동과 서로 나누는 대륙 분수령이었
다
그리고 이 지대야말로 뉴멕시코, 애리조나, 유타, 클로라도 주 접
경 근처 . 마이너스 중력 이상이 특히 커 장수촌의 존재가 예측되었던
지역이다.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에서 그리 멀지 않으며 , 이상한 모양
으로 부풀어오른 수목군이 발견된 지역 . 가오루가 10년 전에 출력한
중력 이상 분포도에 기록된 x표시와 딱 겹쳐지는 곳이었다.
가포루는 현기증을 느낀다. 언덕 꼭대기에 서서 서쪽을 향하면 산
표면에서 배어나온 물이 태평양으로 흘러가는 것이 보이고, 동쪽으
로도 비슷한 풍경을 멀리 바라볼수 있다. 번쩍이는 물의 흐름이 끊
겨 있는 곳은 황량한 사막의 대지였다.
갑자기 풍경이 눈에 떠올랐다. 산등성이의 양쪽을 좌우각각의 발
로 힘주어 딛고, 불안정하게 저 있는 자신의 모습. 간 적이 없는 장소
인데도 지도에 그려진 등고선만으로도 명료하게 풍경을 상상할 수
있었다. 물론, 그가 동요하고 있는 것은 그 때문만이 아니다. 자신의
추론· .장수촌의 존재가 갑자기 진실성을 띠고 그를 기다리고 있다
는 것에 경외로움을 느꼈던 것이다 가오루에게는 신화가 단순히 꾸
며 낸 이야기인지, 아닌지 따윈 이미 아무래도 좋았다 자신이 만들
어 내려 하는 신화에 얼마만큼 많은 염원을 담을 수 있을 것인가, 중
요한 것은 그것뿐이다. 아버지와 레이코가 강하게 바라고 있다 그리
고 지금, 어머니까지도‥‥
마치코는 가오루의 무릎에 손을 놓고 속삭였다. 작은 목소리지만
화신에 가득 차 있었다.
"응? 너 갔다 와 줄 거지?"
가오루에게는 아직 모르는 것이 있다.
"어머니는 플랜츠 보어가 찾아간 곳도 여기다. 그렇게 확신하고 있
는 거죠?"
마치코는 의미 있는 듯한 웃음을 나타냈다.
"플랜츠 보어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었는지 기사에 씌어 있었던
것 같은데 , 기억할 수 있어?"
"분명히 은퇴한 측량 기사라고."
'오리건 주 포틀랜드에 사는 은퇴한 측량 기사 플랜츠 보어는·
기사는 이런 식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직업은 측량 기사였지만, 그는 미국 민간전승학회 회원이기도 했
어 . 몰랐지?"
"물론 알 리 없죠."
"게다가 이 책은· .
마치코는 『북아메리카 인디언 민간 전승』을 꺼냈다.
"사실은 이거 , 복수 편자에 의해 편찬된 거야. 책 끝부분에 각각의
이야기 책임자가명기되어 있어."
책 끝부분에는 6명의 편자 이름이 기록되어 각자가 담당한 항목의
번호가그밑에 명기되어 있었다 그리고34번째 항목 「무수한눈에
감시당하고 있다」는 놀랍게도 플랜츠 보어에 의해 편찬된 것이었다
"그랬어요?"
앙 말기 증상으로 남은 생이 3개월이라고 선고받은 플랜츠 보어는
마지막 바람으로 서남부 사막 지대가 있는 지점으로 향했다 가령 거
기에서 기적을 얻지 못했다고 해도 그로서는 상관없는 일이었을 것
이다. 플랜츠 보어는 민간 전승 연구가이기도 해서 살아 있는 동안
한번 방문해 보고 싶었던 장소가 마침 그곳이었는지토 모른다. 내버
려 두면 분명 죽는다. 그렇다면 가보기만이라도 하자. 하지만 목표로
한 장소에서 그는 정말로 기적을 얻은 것이다
"「무수한 눈에 감시당하고 있다」는 이야기에는 여러 가지 변형이
있어 여기에 실려 있는 건 가장 기본적인 것이야. 어떤 이야기에서
는 '오래된 자'를 만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형과 누이동생으로
되어 있고,또 어떤 이야기에선 레니아의 산후회복이 나쁜 것을 걱
정한 타리키트가 '오래된 자'를 방문해 샘물을 얻어 마시게 함으로써
아내의 몸을 낫게 한 것으로 되어 있어 . 타이틀이 다른 것도 있지 . 그
러나 장소에 대한 기술은 모두 일치하고 있어.여기야.반드시 이 땅
에서 병을 치료하는 힘을 얻을 수 있을 거야."
마치코는 지도의 한 점을 몇 번이고 손가락으로 찔렀다.
"그러니까 플랜츠 보어는 이 땅으로 떠나기로 한 거야."
"이 장소‥‥‥
"가오루, 언제였니, 엄마한테 보여 줬지?중력 이상 분포도. 애리
조나인가 어디 사막에 표시를 했잖니?그지도,다시 한 번 보여 주
지 않으련?"
가오루 자신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설사 분포도를 보지
않아도 그 장소가 틀림없는 게 분명했지만 다짐을 하기 위해 그는 자
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잠간 기다리제요."
최근 몇 년 동안 세계의 중력 이상 분포도는 본 적이 없었기 때문
에 찾는 데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책장과 책상 서랍을 뒤졌지만 없
었다 출력한 종이 같은 것은 찾으려 들면 다소 고생스럽다. 하지만
별 문제는 아니다. 10년 전과 같은 방법으로 데이터 베이스에 접속해
정보를 찾으면 그것으로 끝난다.
가오루는 PC 전원을 켰다. 이젠 상당히 낡은 기종이다. 꼭 10년
전 밤, 이 디스플레이에 세계의 중력 이상 분포도가표시되었던 것이
다.
가오루는 그낱 밤과 똑같은 경로를 거 쳐야겠다고 생각하며 기억을
한 곳으로 모았다 우선 통신 선로를 통해 데이터 베이스에 접속한
다. 그 다음엔 어떻게 검색했더라‥‥ 카테고리 선택, 과학 기술 정보
이다. 그 다음 중력장을 선택. 다음에 중력 이상. 그리고 장소 지정으
로는 세계 .
디스플레이에 서기 표시가 늘어섰다 서기 몇 년의 중력 이상 분포
도를 원하는가 하고 PC가 묻고 있다. 가오루는 10년 전에 출력한 것
과 똑같은 분포도를 손에 넣으려고 아래에서 위로 연도를 거슬러 올
라갔다.
디스플레이에 중력 이상 분포도가 비쳐졌다. 가오루는 이전에 체
크했을 북아메리카 한 지점을 확대해 갔다.
가모루는 깜짝 놀랐다. 중력 이상 등고선은 아무런 특징도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10년 전, 북아메리카 사막의 어느 지점에서 마이
너스 수치가 두드러지게 상승해 있었다 분명 장소를 암시하는 것 같
은 명확한 중력 이상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분포토에서는그런 특징이 싹사라져 있
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확실히 보았을 터이다. 거실 조명에 비추어
중력 이상의 마이너스 수치가 높은 장소에 장수촌이 존재하는 사실
을 셋이 모두 확인했다
가오루는 10년 전과 똑같은 순서를 밟아 몇 번이고 처음부터 다시
해보았다. 그런데 몇 번을 되풀이해도 디스플레이에 나온 분포도에
는 아무런 특징도 없는 등고선이 돌아다니고 무의미한 슷자만 늘어
서 있을 뿐이었다
10년 전 분포도를 잘못 읽었을 가능성은 있을 수 없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기억도 확실하다 아버지는 그때의 분포도를 보고 나서 북
아메리카 사막으로의 여행을 약속했던 것이다. 아버지가 쓴 서약서
는 지금도 가오루의 책상에 보관되어 있다.
그렇다면 10년 전의 그 정보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관자놀이 부근이 아팠다. 10년 전, PC 회선은 어디에 연결되었던
것인가? 그것을 생각하자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가오루는 PC 전원을 끄고 눈을 감았다. 그때까지 막연했던 사막
장수촌의 이미지가 서서히 떠오른다.
· .실재하는 거다, 분명히 .
단 한 번의 충격으로 무너져 갈 만큼 세상의 윤곽은 약한 것일까?
그 약함을 본 가오루는 반대로 확신했다. 만일 10년 전과 똑같은 정
보를 끌어낼 수 있었다면 이런 기분은 들지 않았을 것이고, 결심도
서지 않았을 것이다.
완만하게 부풀어올라 가는 대지 너머로 강이 삼켜지고, 활 모양의
언덕이 시야로 들어온다. 하늘을 나는 매가 내려다보는 시선을 가오
루는 상상 속에서 조종할 수 있었다. 깊게 파인 계곡과 그 품에 안긴
나무들의 녹음이 싱싱하다. 태평양과 대서양으로 흘러들어가는 수원
(水源)을 양 옆에 끼고 '오래된 자'는 지금도 세계를 지켜보고 있는
지 모른다. 물은 체내를 순환하는 혈액과 림프처럼 세계를 돈다. 불
치의 병과 불로장수,중력의 강약이 일으키는 밀물과 썰물, 삶과 죽
음. 모든 모순이 혼연일체가 되어 사막에서 부풀어올라 오는 것 같았
다. 모든 것이 이 장소로 향하라고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새 마치코가 등뒤에 서 있었다. 가오루는 어머니를 돌아보고
말했다.
"갔다 올게요, 어머니 ."
"어떻게?"
"아버지 오토바이를 가지고 LA까지 가서 거기서부터 사막으로 타
고 가겠어요."
가오루의 말에 마치코는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땅끝 여행
백미러를 들여다보니 검은 어둠이 비쳐져 있다. 동쪽지평선에서
부터 서서히 빛이 밝아오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하늘은 아직 밤에 의
해 지배당하고 있었다. 희미한 빛을 향해 어둠 속에서 나아가는 모습
은 현재의 가오루 그대로였다. 아주 작은 단서 하나에 의지해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의 공략법을 찾아낸다는 사명을 짊어지고 있었다.
전모는 어둠 속에 있다고 해도 희미한 빛을 목표로 나아가는 것 외에
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모하비 사막을 횡단하는 심야의 인터스테이트 하이웨이에 다른 차
의 흐름은 거의 없어 한동안 가오루는 백미러도 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아침 기운이 앞쪽에서 밀려오자 백미러를 보는 빈도가 늘어
났다 밤의 지배에서 벗어나 하늘이 서서히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풍경이 변화하는 모습이 가오루의 눈에 아름답게만 느껴졌다. 갈색
의 대지는 앞쪽에서부터 아침 해의 침식을 받아 재빠르게 뒤쪽의 어
둠을 붉게 물들여 갔다. 하이웨이의 양쪽으로 산의 능선들이 그림자
처럼 떠오르려 하고 있었다
가오루는 10년 전에 아버지가 구입한 600cc 오프로드 바이크인
班LR의 핸들에 양손을 얹은 채 주변으로 얼굴을 돌렸다. 백미러가 아
닌 자신의 눈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즐기고 싶었다
열 살 무렵부터 꿈꾸던 풍경이다. 미국으로 건너가 여섯 시간 정도
오토바이를 달려 지금에서야 겨우 눈앞에 둔 황량한 사막이었다
어제 오후 늦게야 공수되어 온 XLR를 받았던 것이다. 사막을 끝까
지 달릴 수 있도록 짐꾸리기를 마치고 LA를 출발한 것은 밤 10시가
가까워서였다. 호텔에서 느긋하게 쉬고 내일 아침 출발하는 것도 생
각했지만, 동쪽으로 펼쳐진 사막을 생각하면 그냥 있을 수가 없어 야
간 출발을 단행한 것이다.
모하비 사막을 달리고 있음은 알고 있었지만 해가 없으면 아무것
도 보이지 않았기에 고원을 달리는 것과 그리 다를 바 없었다. 어둠
을 향해 곧장 뻗은 하이웨이에 핸들을 고정시킬 뿐이었다. 해가 뜨고
나서야 비로소 대지의 모습을 눈으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어제 아침에 출발해서 내리 달렸더라면 좋았을걸, 가오루는 생각
했다. 풍경의 변화를 체험할수 있고,어쨌든 하루를 허비하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 정확히 오늘이 9월 1일. 앞
으로 2개월 안에 뭔가 결론을 내지 않으면 레이코뿐 아니라, 막 잉태
한 아이의 목숨마저 위험해진다.
4사이클 OHC 2기통의 굵은 엔진 소리와 진동에 여섯 시간 동안
빠져 있었다. 포장도로이긴 했지만 무릎자세를 풀지 않고 가오루는
완벽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버지로부터 지겹게 훈련받은 오
프로드 바이크를 타는 테크닉이었다 가랑이를 벌린 볼썽사나운 꼴
로 오토바이를 타면 아버지는 무릎을 탁 치며 노기 띤 목소리를 퍼붓
기 시작하곤 했다
· .임마, 무릎으로 탱크 양쪽을 단단히 조이는 거야.
내내 그대로 해왔다 어깨의 힘을 빼고, 스텝에 적당히 체중을 싣
는다. 암을 정복하기 위해 나선 여행이라 그런지 특히 아버지의 한마
디 한마디가 가슴에 사무쳐 정확한 자세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그 때문인지 같은 자세로 몇 시간 연속 주행을 했지만 지치지 않았
다. 아버지가 오랫동안 손때 나게 쓴 오토바이를 타고 있자니 뭔가
자신감 같은 것이 솟기도 했다.
즈괘 깃린겠느 辨角ㅁt01_으 Ll 0진 崙◎ 이03ㄷ1 요칼 洲긴틴근淡美
1
거대한 가솔린 탱크를 가진 10.R는 하이웨이라면 연속 350마일의 주
행이 가능하다 이제 급유를해야 할때다. 이 이상 달리면 가솔린이
부족할 우려가 생긴다. 방심하고 있다가는 200마일이나 되는 구간
사이에 주유소가 하나도 없을 수 있다 짐 싣는 곳에 예비로 플라스
틱 탱크를 실었지만, 내용물은 없었다. 적당한 곳에서 모텔을 찾아
침대에서 누을 생각에 그만 너무 달리고 만 모양이다
‥‥다음 마을이 나타나면 망설이지 말고 오토바이를 세우고 아침
식사를 하자.
가오루는 자신에게 타일렀다. 확실히 타일러 두지 않으면 연료가
떨어질 때까지 아버지 오토바이를 달리고 말 것만 같았다. 멈춰 서
는 것도 아깝다. 밤에서 아침으로 변하는 모습은 지구가 자전하고 있
는 사실을 가오루에게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멈춰 서면 지구의
자전에서 제외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백미러에서 밤의 색이 사라지고 완전한 빛으로 대지가 감싸였을
무렵, 앞쪽에 희미한 마을의 모습이 떠올랐다. 주유소를 겸한 작은
카페가 아마도 그 거리에 있을 것이다.
정오가 조금 지나 모텔에 체크인을 하자마자 가오루는 샤워를 하
고 침대에 누웠다 자려고 했지만 몸에 축적된 엔진의 진동이 세포를
덜덜 떨게 만들어 근질근질 가려웠다. 누웠지만 아직 오토바이를 타
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특히 가솔린 탱크를 계속 끼고 있었던
넓적다리 안쪽에는 자신의 피부가 아닌 것 같은 감촉이 남아 있었다.
‥‥결국 몇 시간이나 오토바이를 달린 거지?
가오루는 손가락을 꼽아 보았다. LA에서 여섯 시간, 그후 가게가
열리기를 기다렸다가 천천히 아침을 먹고 연료를 넣은 다음 또 세 시
간을달렸다 모두 합하면 아홉 시간달린 것이 된다. 앞으로똑같은
시간 인터스테이트 하이웨이 40번을 따라 동쪽으로 달리면 앨버커
괴 부근까지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앨버커키 앞쪽에서 왼쪽으로 꺾어 25번 도로를 타고 북쪽으로 나
아가 샌타페이를 경유해 로스앨러모스에 이르러 궤네스 로스만이 마
지막으로 살았다는 주거지를 찾아갈 작정이었다. 최종 목적지는 애
리조나,뉴멕시코, 유타, 콜로라도의 4개 주가 걸쳐 있는 지역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로스만의 소식을 묻고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의
진의를 파악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되었다.
가오루는 침대 옆에 둔 가방에 손을 뻗어 안을뒤졌다 지갑 안에
두 장의 사진이 들어 있다. 지갑에서 사진을 뽑아서 찍혀 있는사람
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침대에 누운 채 위로 들어 사랑하는 얼굴을
향해 말을 걸었다. 물론 사진 속의 사람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일본을 떠나기 전, 가오루는 미국으로 간다는 보고를 하기 위해 아
버지의 병실을 찾았다. 왜 가지 않으면 안 되는지 그 이유를 이야기
하자 히데유키는 납득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
가오루는 레이코의 일도 숨기지 않고 고백했다. 어쩌면 자신이 일
본을 비운 사이에 아버지는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에 목숨을 빼앗
길지도 모른다 말하려면 이 기회밖에 없다.
레이코라고 하는 여성의 자궁에서 자신의 손주가 자라고 있다는
걸 알고 히데유키는 자못 우습다는 듯이 소리내어 웃었다.
"한가닥 하잖아, 녀석 "
건강했을 무렵의 말투가 조금 돌아온 히데유키는 품위 없이 호기
심을 드러내며 레이코의 용모를 물었다.
"야, 괜찮은 여자냐?"
"저 한텐 최고예요."
가오루가 그렇게 대답하자 히데유괴는 몇 번이고 기쁜 듯이 몸을
흔든다.
"너도 여간 아니구나."
이어 진지하게 덧붙였다.
"손주의 얼굴을 볼 때까지 살아 있고 싶다
그 말을 듣고 가오루는 레이코의 일을 이야기하기를 잘 했다고 생
각했다.
가오루는 레이코의 사진에서 눈을 떼고 몸을 돌려 다시 가방을 더
듬어 사진을 넣었다. 가슴의 고동이 격렬했다 바라보고 있기만 해도
고독감이 깊어 왔다.
마음이 심란해지려 해서 가오루는 침대에 누운 채 지금 있는 방을
둘러보았다. 벽에는 화려한 모양의 등근 태피스트리가 걸려 있고, 천
장에서 돌아가는 선풍기는 부드럽게 바람을 불어 내고 있었다. 선풍
기 날개의 회 전음보다 주방에 놓인 냉장고의 모터 소리가 더 신경 쓰
였다.
방에 비치된 가구와 전기 제품은 이 모텔과 마찬가지로 모두 낡았
다 매트리스 아래에서 살금살금 무언가가 기어가는 소리가 들려왔
다. 바퀴벌레 소리일까? 바로 조금 전, 주방 바닥에서 한 마리를 발
견했다. 그것이 침대 밑으로 이동해 온 것인지도 모른다.
가오루는 바퀴벌레라면 질색했다. 도쿄 만에 면한 맨션의 29층에
서는 바퀴벌레를 본 적이 없어서 익숙하지 않은 탓토 있었다.
모텔에 체크인을 할 때는 침대에 눕기만 하면 바로 잠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피곤했다 야간 여행 때문이라기보다는해
가 뜬 다음의 직사광전에 체력이 많이 소모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예상과 달리 잠은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일본을 떠나 처음으로 묵
는 모텔의 침대라는 흥분도 있었다.
사실은 이런 여행이 될 게 아니었다. 10년 전, 꿈에 그리던 여행 장
면과 지금 현실의 갭을 생각하면 가오루는 눈에 눈물이 맺힐 것 같았
다. 안고 있는 문제가 너무 많다. 위기에 빠져 있는 아버지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레이코의 망설임에 결론을 내기 위해, 세포 분열을 막
시작한 내 아이에게 세계가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
해‥‥
목적을 나열해 용기를 불러일으키려 했다 흥분, 감상, 피로, 진동,
사명 , 공포, 열기가 일체가 되어 무수한 개미가 몸 안을 기어 돌아다
니는 것 같았다. 마음의 흥분 상태를 억누르지 않으면 언제까지 고 잠
들 수 없을 것 같았다.
가오루는 1자 모양을 한 모텔 안뜰에 작은 수영장이 있음을 문득
기억해 냈다 수영을 하면 이 근질근질함이 씻겨 내려갈지도 모른다.
가오루는 침대에서 일어나 수영장으로 갔다
수영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가오루는 옷을 다 벗고 수영장으로 뛰
어들어서는 물에 누워 편안한 마음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특히
물 속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면, 물과 공기 두 층을 동시에 즐길 수 있
다. 눈부신 태양이 물 속에서는 비뚤어져 보인다.
몸을 수면에서 내밀고 수영장 중앙에 섰다 責자 모양의 건물이
끊어진 한쪽 끝에서부터 끝없이 이어지는 사막을 멀찍이 내다볼 수
있었다. 물에 잠겨 있어서인지 건조한대지의 울퉁불퉁한 모습이 리
얼하게 느껴졌다.
뜨거운 욕구가 몸 속에서 녹아 없어지는 것 같았다. 마지막 욕정의
찌꺼기가 다 녹아 없어졌다는 실감이 들자, 가오루는 물에서 나와 방
으로 돌아갔다. 이제 겨우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햇살은 서서히 강해져 갔다. 긴 소매 셔츠에 가죽 장갑, 청바지 자
락을 깔끔하게 부츠 안에 넣고 있어 햇볕에 노출되는 부분은 헬멧 아
래로 내다보이는 목덜미 일부뿐이다. 그래도 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온몸을 태우는 태양을 느꼈다.
어쨌거나 목표로 삼고 있는 장소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었다.
'뉴멕시코 주, 로스앨러모스 교외, 웨인스록.'
그뿐이다. 일본을 출발하기 직전 아마노에게 부탁해 케네스 로스
만이 마지막으로 살았던 장소를 알아냈다. 아파트 같은 곳이 아니라
낡은 민가를 사들여 주거와 일을 겸하고 있었다고 한다. 어떤 사정으
로 연락을 끊었던만큼, 로스만이 지금도 그곳에 살고 있을지도 모른
다는 기대가 있었다. 가령 로스만이 없더라도 그가 살던 집은 어떤
형태로든 남아 있을 것이다. 거기에서 단서를 발견할 수 있을 가능성
이 충분히 있었다
교통량이 적은 사막의 하이웨이를 달렸기 때문에 시간 예상은 정
확하게 들어맞았다. 앨버커키에는 시간에 맞게 도착했다. 인터스테
이트 하이웨이 25번을 따라 북상하여 잠시 나아간 다음 주도(州道)
로 꺾어들어 로스앨러모스로 향했다. 로스앨러모스 직전에 로스만이
살았다는 웨인스록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을 것이다.
목적지가 다가오자 가오루는 주유소에서 오토바이를 세웠다. 가솔
린은 아직 충분히 남아 있었다. 가솔린을 넣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길
을 묻고 싶었다. 주도를 따라 있는 주유소는 대부분의 경우 잡화점을
겸하고 있어서 사람이 없는 경우는 있을 수 없다. 이곳을 통과하면
언제 또 사람을 만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만일을 위해 가솔린을 가득 채운 가오루는 값을 치르기 위해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수염을 기른 중년 남자가 가오루를 보고는 눈으로
만 '하이∼' 하는 제스처를 보내 왔다.
1갤런도 되지 않는 적은 가솔린 값을 치르고 가오루는 웨인스록으
로 가는 길을 물었다.
남자는 북쪽 방향을 가리키며 ◎마일 '이라고만 말했다
"알았어 고마워 "
인사를 하고 나가려는데 불러 세웠다
"거기 무슨 볼 일이 있지?"
남자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입을 '~'자 모양으로 구부리고 있었다.
무뚝뚝한 말투였지만, 악의는 없어 보였다.
"옛 친구가 살고 있어 ."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지 몰라 가오루는 짧게 말했다.
"낫씽 ."
남자는 입술 근처를 옆으로 흔들면서 단 한마디로 대꾸하고는 두
손을 가볍게 위로 올렸다.
"낫씽 ‥‥‥
가오루는 앵무새처럼 되받아 같은 말을 하고 납득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묵묵히 가오루를 응시하고 있었다. '낫씽'이라는 말을 들었
다는 걸로 의지가 바펄 리도 없었다. 어쨌든 가볼 뿐이다
"땡 큐."
일부러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하고 가오루는 가게를 나섰다.
주위에는 사람 하나 없었다. 대체, 오늘 하루 종일 자기 이외의 손
님이 있었을까 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한산한 주유소를 뒤로 하고 가
오루는 북쪽으로 향했다.
달리는 도중에 시간을 확인하려고 손목시계를 찬 왼손을 핸들에서
떼었다. 하지만 가죽 장갑이 방해가 되어 좀처럼 문자판이 보이지 않
는다. 턱을 사용해 장갑을 잡아당기려고 시선을 일단 떨군 다음 다시
원래대로 되돌린 순간, 내건성(耐乾性) 식물이 우거진 울룩불룩한
저편으로 사막을 따라 북쪽으로 늘어선 고목 행렬을 발견했다. 보통
운전자라면 못 보고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오루는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조금 전 주유소를 지나 정확히 5마일 지점
이었다
나무 행렬을 따라비포장도로 같아 보이는 줄이 눈에 띄었다 가
오루는 길 입구 쪽에 일단 오토바이를 세웠다 몇십 미터 간격으로
늘어선 나무 기등은 도중에서 끊어진 검은 전선을 여기저기에 늘어
뜨리고 있어 아무리 보아도 송전을 위한 전봇대 로밖에 보이지 않았
다. 못 쓰게 된 지 쫴 오래된 것 같았다.
주의해서 보지 않으면, 그곳이 도로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전신주 행렬과 평행으로 대지가 약간 고르게 되어 있었다.
굽은 팔을 공중으로 뻗은 선인장은 가늘고 긴 띠 안쪽에는 없었다.
예전에 여기가 길이었다는 증거이다.
전신주를 따라 길을 나아가면 웨인스록이 나올까, 가오루는 북쪽
평지를 멀리 바라다보았다. 길은 작고 높은 언덕을 넘어 그 저쪽에서
사라지고 있다. 하이웨이에서는 웨인스록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
렇지만 멀리서 폐허가 부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전신주를 따라 왕복하면 되는 거니까, 하이웨이로 돌아오지 못
할 염려는 없어 .
가오루는 자신에게 그렇게 타이르고는 핸들을 왼쪽으로 꺾어 사막
의 한복판으로 달려나갔다. 미국에 건너와 포장도로 이외의 길을 달
리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도로 앞에 띠 모양의 둔덕이 보였지만, 그다지 큰 것이라고는 생각
되지 않았다. 그 둔덕을 넘을 때, 오토바이가 예상 외로 튀어올랐다
가오루는 허리를 들어 올려 점프하는 데 맡겼다가 착지할 땐는 날뛰
는 핸들을 억지로 눌러 아슬아슬하게 차체를 안정시켰다. 핸들 조작
이 잘못되면 전복되어도 이상할 것 없는 상황이었다. 방심을 경계하
며 그 다음부터는 도로에 생긴 등성이를 될 수 있는 한 피하면서 주
행했다.
도로의 기복을 넘자 평탄하고 똑바른 길이 잠시 계속되었다. 길 한
쪽에 평행하게 깡마른 나무 기등이 여기저기 늘어서 있었다 도로와
줄지어 선 나무 기등이 문명과 미개를 연결하는 모호한 선처럼 여겨
졌다.
"아 ."
가오루는 조그맣게 소리를 질렀다. 바로 앞에 작은 산이 나타나고,
그 깊이 파인 골짜기 사이로 스러져 가는 몇 채의 건물이 보였기 때
문이다. 도로와 줄지은 나무 기등은 그 촌락 안에 삼켜져 사라지고
있었다. 현재도 이어져 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예전엔 이 촌
락에 전기 공급이 있었고 전화선이 연결되어 있던 것이 분명하다. 촌
락 끝까지 나무 기등이 뻗어 있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곳이 막다른
곳인 것 같다
촌락에서 100미터 정도 앞쪽 언덕에 오토바이를 세우고, 시트에
걸터앉은 자세 그대로 가오루는 갈색 돌로 만들어진 집을 20채까지
셌다 골짜기 저쪽 보이지 않는 장소에 가옥이 있다 해도 기것해야
몇십 채 정도 크기의 촌락이다. 맨 처음 여기에 살기 시작한 사람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무엇을 찾아 사막 한복판에 살려 했던 것인가?
집 건축 방법을 보면 최초의 사람이 여기에 주거를 정한 것은 이미
상당히 오래 전의 일임을 알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촌락 전체에
풍화가 미쳐 초라했다 100미퍼 이상 떨어진 거리에서도 그곳이 폐
허임을 알 수 있었다.
낫씽
도로변 주유소에서 사내가 했던 말이 되살아났다. 맞아, 그 사람이
말한 대로 거기에는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예전에 사람이 살았다
는 흔적만 남기고 있을 뿐 완전히 썩어 버리기만을 기다리는 고스트
타운이었다.
햇살은 서쪽 하늘로 기울어 가고 있다. 시계를 보니 오후 5시를 막
지났다. 밝을 동안에 도로로 돌아가 사람이 사는 마을로 나가 모텔을
찾기에는 어중간한 시간이다.
사막 한복판에 자리잡은 폐허 , '레인스록'에 원초적인 공포가 느껴
졌다. '공포의 원천이 무엇일까?'라고 자문했지만 알 수 없었다 정
보 공학의 최첨단 지식을 지닌 케네스 로스만이라는 사람이 왜 이런
외진 땅에 주거를 정했는지 , 모를 일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되돌아갈 수는 없다. 가오루는 슬로틀을 두 번 열어
엔진을 공회전시키고는, 제어 가능한 그 호쾌한 소리에 고무되어 촌
락으로 향하는 도로를 단숨에 달려 내려갔다.
도중에 눈에 띈 것은 미국의 거리에서 종종 보이는 입 간판이었다.
'웰컴 , 웨인스록.'
가오루에게는 그 말이 질 나쁜 농담으로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다가감에 따라 가옥 벽에 붙은 그물 눈 모양이 두드러졌다. 바람에
실려 왔을 것이리라. 여기저기 무너져 가는 돌 틈새에는 모래와 자갈
이 붙어 있었다. 번화가로 보이는 거리에는 몇 대의 차가 방치되어
있었고 이것 역시 전체가 모래로 뒤덮여 있었다.
잡화점을 겸한 주유소도 있었다. 금이 간 콘크리트 바닥에 가솔린
펌프가 한 대 있었고, 제자리에서 벗어난 펌프 호스가 길바닥에 방치
되어 있었다. 펌프 호스는 검고. 뱀처럼 몸을 구불거리고 있었으며,
급유 노즐 끝은 목을 쳐든 코브라의 머리와 비슷했다. 잡화점 창에는
널빤지가 단단하게 못박혀 있고, 유리 파편이 주변에 흩어져 있었다
느긋한 속도로 번화가를 달려 양 옆에 늘어선 폐가 한채 한채에 눈
길을 주면서 다른 팻말이 있는지 확인했다.
가오루는 거리를 달리다 어느 폐가 지붕 아래에 오토바이를 몰아
넣고는 실제로 부서진 지붕 틈으로 하늘을 엿보았다 작은 틈으로 비
스듬히 석양이 비쳐 공기 중의 먼지가 띠 모양으로 떠올랐다 가느다
란 흙먼지가 한결 같은 색조로 반짝이고 있었다.
사람은 어디로 간 것일까? 모두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에 감염
되어 사멸한 걸까?혹은 여기서 빠져나가 병원이 있는 도시로 이주
해 간 걸까?
"하01."
가오루는 안쪽을 향해 소리쳐 보았다. 물론 대답이 없다. 목소리의
진동으로 빛줄기가 조금 흔들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부서진 벽 저쪽에 광장 같은 평탄한 공간이 틈새로 살짝 엿보였다.
광장을 중심으로 가옥이 몇 채 나란히 서 있었다.
가모루는 오토바이에서 내려 언제라도 도망칠 수 있도록 오토바이
의 앞머리를 촌락 출구로 돌렸다. 그리고 가방에 손을 찔러넣고 생수
를 꺼내 충분히 목을 축였다
여기 온 목적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목적이라는 것은 케네스
로스만의 주거를 찾아 그가 현재 어디에 있는지 그 흔적을 찾는 것이
다. 걸어서 한채 한채 돌아다니는 방법밖에 없을 것 같다
가오루는 천장에서 석양이 비쳐드는 폐가 내부를 가로질러 광장으
로 나아갔다 웨인스록의 공용 장소인 듯한 광장 중심에는 스페인풍
기념물이 세워져 畿었다. 여성을 본뜬 석회석 기념물이 반원형으로
촌락 중심점에 있고, 두 줄로 늘어선 가옥의 반대 방향에는 언덕 경
사면이 다가서 있다.
중심에 서서 가오루는 이 촌락을 하늘에서 봤을 때의 그림을 상상
해 보았다 이내 알 수 있는 것은 넉넉한 부채꼴을 이중으로 감싼 모
습으로 가옥이 늘어서 있는 것이다.
난간으로 둘러싸인 기념물 뒤쪽에는 뻥 뚫린 절구 모양의 구멍이
있었다. 또한 안쪽에는 원 모양의 테두리가 등글게 입을 벌리고 있
다 우물임에 틀림없었다 역시 물이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
문에 이런 장소에 촌락이 형성된 것이다. 바닥을 들여다보니, 시큼한
물 냄새가 코를 찌른다 촌락 전체가 몹시 건조해 있는데도 우물 안
쪽에서는 물 냄새가 강하게 피어오르고 있다.
서서히 파내려간 우물은 달팽이와 비슷했다 바깝쪽에서부터 감싸
돌며 우물 가장자리를 따라 내려가는 것처럼 계단이 붙어 있어서 달
팽이 껍데기의 내부 그대로였던 것이다.
우물에는 뚜껑이 없어 스며드는 바람이 피리 같은 소리를 내고 있
다
우물 가장자리 바로 옆에는 검고 작은 덩어리가 구르고 있었다. 주
먹만한 돌인가 생각했지만, 잠시 바라보니 배를 위로 향한 쥐의 시체
임을 알 수 있었다. 한 마리나 두 마리가 아니고, 광장 전체에 수십
마리의 쥐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가오루는 극히 자연스럽게 쥐의 시체를 눈으로 쫓아갔다. 그러자
광장 끝에 있는,멀리서 보기에도 암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수목
아래에 검은 점이 보다 많이 밀집해 있었다. 나무 아래에 벤치가 놓
여 있다. 그리고 벤치에는 쥐 시체와 같은 색을 한 사람이 앉아 있다.
등으로부터 석양을 받은 사람은 검은 그림자 그 자체였다
가오루는 벤치로 다가가 10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에 멈춰 섰다 남
자의 사체는 양쪽 무릎을 크게 벌리고, 양손을 힘없이 늘어뜨린 채,
후두부를 벤치 등받이에 꼭 붙이고, 턱을 내민 자세로 반 미라화되어
있다. 턱에는 긴 수염이 몇 가닥 드리워져 있다. 예전에 가오루가 염
소 같다고 표현한 수염· . 손과 목에 감긴 금사슬만이 썩지 않고 무기
질의 반짝임을 발하고 있었다
가오루는 쭈뼛쭈뼛 다가가 얼굴을 아래에서 들여다보며 그 특징을
관찰했다. 케네스 로스만은 가느다란 모습의 인상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고, 특히 두드러진 것은 긴 턱수염이었다. 게다가 손과 목에는
생전의 그가 자주 걸고 있던 금사슬이 남아 있다. 이 사체를 로스만
이라고 간주해도 거의 틀림없을 것 같다.
암 치료를 받지 않고, 자기 집에서 천명을 다한 것이리라.
극
케네스 로스만의 사체를 지나 언덕을 오르자 몇 채 늘어서 있는 폐
가지붕에 예리한 빛의 가느다란 줄기가 보였다 돌로 만든 지붕은
대지와 같은 색이어서 둔탁하게 주위에 녹아들어 있다. 지붕이 빛을
반사시킬 리도 없는데, 하고 가오루는 눈을 가늘게 뜨며 빛의 정체를
찾았다.
잘 관찰해 보니 2중으로 들어선 촌락의 중간 정도에 무너지다 만
붉은 기와 지붕에 직사긱헝으로 잘라낸 검은 널빤지가 얹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직사각형의 가장자리를 두른 스테인리스 스틸이 기을
고 있는 태양 광선을 반사시킨 모양이다
검은 널빤지는 지붕 위에서 아무리 봐도 이질적인 ◎을 발하고 있
었다 폐가에 놓여 있는것치고는기묘하게도새로움이 돋보인다 간
선 도로에서 벗어난 촌락이기 때문에 이런 시스템이 필요한 것인지
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도 위화감은 부정할 수 없다.
멀리서 보기에도 검은 널빤지는 태양광 발전 시스템임을 알 수 있
었다. 집 한 채분의 전력은 그것으로 충분히 조달할 수 있을 것이다
각 집에 설치해 놓으면 촌락에 이르는 길 한편에 늘어서 있던 전신주
따윈 의미가 없어지겠지만, 아무리 찾아보아도 다른 집에는 똑같은
것이 발견되지 않았다 촌락 가운데 한 집만이 특별한 시스템이 설치
되어 있다.
케네스 로스만은 개인 연구소를 자택에 병설해 놓았다고 했다. 그
렇다고 한다면 태양광 발전 시스템이 있다 한들 이상하지 않다.
가오루는 깊숙하게 들어간 집과 집의 틈 사이를 더듬어 태양광 발
전 시스템이 설치된 폐가를 찾았다. 언덕 위에서 점찍어 두었지만 미
로에 들어선 것처럼 방향 감각을 잃고 우왕좌왕했다.
가오루는 벽에 가로막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어느 사이엔가 가옥
내부로 들어가 복도 같은 장소로 나와 버린 모양이다
벽 틈으로 스며든 바람이 피리 비슷한 음색을 내는가 싶더니 갈 곳
을 잃고 발 밑에서 작은 소용돌이를 치고 있다 바람 소리에 맞추어
미국 원주민이 장단을 맞추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지 않으면 새 우
는 소리 , 아니면 가지와 가지가 스치는 소리일까?
소리를 죽이고 가오루는 귀를 기울였다. 소리의 원근감이 무너져
내린 모양이다. 어딘가 멀리서 사람 소리가 들려왔나 싶자 다음 순
간,귓가에서 속삭이는 것 같은 감각이 느껴졌다. 남자의 쉰 목소리
였다. 벽 오른쪽에서 소곤소곤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일단 끊어졌다
소리가 되살아나자 다시 바람을 타고 등등 떠 왼쪽 벽으로 돌아 나갔
다
목소리와 피리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떠돌고 있다. 무너진 벽 틈새
를 바람이 빠져나갔을 때는 비브라토처럼 떨렸다
공기가건조한탓인지 공포심은 솟지 않았다 산뜻하게 건조한 공
기에는 오한을 가져오는 무수한 촉수가 없다 몸을 드러내고 있노라
면 피부가 수분을 잃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될 것 같다.
가오루는 그저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오감을 집중시켰다. 확실치
않던 소리의 출처가 점차 명확해져 갔다. 어느 곳을 점찍어 두고 두
번 연속하여 벽의 구멍을 빠져나가자 그곳은 주변과는 조금 다른 세
계였다
엷은 냄새가 있다. 지금까지 맡은 적이 없는, 도무지 자연계에는
있을 수 없는 인공적인 냄새가 무너지다 만 벽에 둘러싸인 20제곱미
터 정도의 공간에 감돌고 있었다.
방 구석에는 파이프로 만든 침대가 놓여 있었다. 이불은 깔려 있지
않았고, 몇 개의 스프링이 매트리스에서 튀어나와 있다. 침대 옆에는
튼튼해 보이는 목재 그릇장이, 그 옆에는 집 안보다는 바닷가에 어울
릴 것 같은 데크 체어가 두 다리를 마주하고 있다. 전기 스탠드는 바
닥에서 ◎굴고, 쫴 낡은 가죽 여행용 가방이 불안정한 모습으로 그릇
장에 기대어져 있었다 붙박이 선반은 널빤지가 부러진 탓에 집기들
이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고, 아랫단에는 누름돌처럼 두꺼운 책 몇 권
이 얹혀 있었다.
방 안 물건은 모두 미묘한 밸런스 위에 놓여 있다 선반 널빤지 한
장을 빼기만 해도,혹은 여행용 가방이 기대 있는 그릇장을 몇 센티
미터 옆으로 빼기만 해도 도미노처럼 가구들이 쓰러져 버릴 것 같았
다.
어디에서인지 모르게 들려오던 남자의 쉰 목소리가 생생한 호흡을
동반해 귓가에서 되살아났다. 가오루는 튕기듯이 뒤로 물러서서 사
방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소리가 바로 끊기더니 '지지 지지' 하는 단속적인
잡음을 낸다. 그릇장과 벽 틈으로 눈을 떨구자 전기 코드가 끼워져
있는 것이 보였다 방금 깨달은 것이지만 그릇장에는 라디오가 비치
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접촉 불량인 모양이다
가오루는 직접 코드를 잡고 전후 좌우로 움직여 보았다. 잡음이 점
차 멈추고 담자 목소리가 일정한 톤으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목소
리의 배후에서는 울적한 기타 반주가 들려왔다 라디오 방송인 것은
틀림없다. 남자는 블루스풍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 같았다. 기타에
맞춰 먼 옛날에 끝난 사랑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구나 하고 가사내
용까지 이해하게 되었다
가오루는 몸을 앞으로 굽히고 주파수를 조정하여 잡음을 더욱 작
게 만들었다. 바로 조금 전까지 중간중간 끊겨 바람에 실려 좌로 우
로 떠돌던 목소리의 원천이 이곳에 있었다. 어찌된 일인지 전원이 들
어온 상태 그대로여서 전파를 수신한 라디오가 노래를 흘려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 폐허에 전선에 의한 전기 공급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전기 따윈 이미 끊겨 버렸다.
지붕에 설치된 태양광 발전 시스템 전력이 이곳으로 보내지고 있
는 것이다. 태양광 발전 시스템이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현재까지 라디오가 계속 울리고 있다는 것은 설명이 불가능하다.
가오루는 다시 한 번 코드를 끌어당겨 전원을 확인하고 볼륨을 조
정해 보았다. 틀림없이 어딘가에서 전기가 흐르고 있다.
· .앞으로 가보자.
가오루는 스스로를 고무시켰다. 사막의 폐허에 어울리지 않게 이
집의 지붕에 근대 과학의 관(冠)이 얹혀 있다고 생각하자편지 용기
가 생긴다.
방 한쪽 벽에는 다음 방으로 이어지는 문이 있었다. 손잡이에 손을
대자 문은 간단히 열렸다
문 앞쪽은 작은 홀로 되어 있는데 지하 입구로 이어지는 것 같았
다. 지하로 가는 계단 끝은 검은 어둠에 삼켜져 있었다. 아니 , 완전한
어둠은 아니었다 문의 네 모퉁이에서 아주희미한 빛줄기가새어나
오고 있다. 지하실 안에 전등이 켜져 있는 것이다.
계단 끝에 서서 내려다보고 있으니 , 이끌리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
었다.
‥‥전등이 켜져 있다.
가오루는 그 사실을 몇 번이고 음미했다. 라디오와 마찬가지로 단
순히 켜둔 채 잊어버린 걸까?
가오루는 한걸음 한걸음 지하로 가는 계단을 내려갔다
문 앞에 서서 귀를 대고 방 안 모습을 살폈다. 소리는 없고, 사람이
있는 기척도 없었다 문 틈으로 새어나오는 빛은 생각보다 양도 적고
약하디약했다
노크를 하려던 가오루는 곧 어리석음을 깨닫고 단숨에 문 손잡이
를 돌려 발을 들여놓았다.
천장에서부터 매달린 한 개의 형광등이 약하게 지하실 전체를 비
추고 있다. 하지만 그외에도 문명을 상징하는 어떤 특수한 반짝임이
방의 중앙에서 발산되고 있었다
상당히 널찍한 지하실로. 사용 목적은 확실했다. PC 세트가 방 중
앙에 설치되어 있고 관련 캐비닛에 둘러싸여 있었다. 더구나디스플
레이에는 빛이 깜빡이고 있다.
멀찍이 돌아 들어가는 듯한 모습으로 가오루는 디스플레이 앞으로
나아갔다. 바로 옆에 머리 부분에 쏙 들어가는 헬멧이 놓여 있는 것
띠 눈에 띄었다. 헬멧 안과 밖에는 전자기기가 박혀 있다. 헤드 마운
티드 디스플레이 (머리에 쓰는 타입의 영상 표출 장치 : 역자 주)일 것
이다. 어린 시절, 이것을 이용하여 가상 현실 게임을 한 적이 있다.
최근에는 거의 쓰고 있지 않아서 가오루는 왠지 그리운 기분이 들었
다.
헬멧과 나란히 와이어가 붙은 데이터 글러브도 있었는데 가오루는
그것에 손대지 않고 곧장 디스플레이의 앞에 섰다.
디스플레이는 가오루가 앞에 선 것을 신호로 받은 것처럼 글자를
띄워 왔다.
'」 e 1. c, o. m.e."
한 글자 한 글자 구분지어 띄우는 수법은 어린애 장난을 연상케 해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디스플레이 앞에 사람이 서는 것을감지하여
작동하는 구조로 되어 있으리라 여겨졌다
현기증이 나는 것을 참으면서 가오루는 디스플레이 앞 의자에 몸
을 기대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팔걸이 의자에 몸을 밀어 넣은 다음
한숨 돌리고 나서 PC에게 말을 걸었다.
"누군가, 당신은?"
PC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 대신에 어떤 풍경을 비추었다.
황량한 사막에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다. 기복이 심한 대지이다. 화
면이 흔들려 보고 있는 사람에게 마치 사막의 대지를 달리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대지에 닿을락말락하게 미끄러져 가는 듯한 움
직임이었다 길을 올라갔다 내려가자 촌락의 모습이 떠을랐다. 어디
선가 본 풍경이다
현재의 모습과는 다르지만, 그곳이 웨인스록이라는 것을 가오루는
알아챘다. 촌락의 규모는 훨씬 작아 단 몇 채의 집이 멀리 바라다보
일 뿐이고,집들은 돌이 아닌 나무로 만들어져 있다. 특징이 있는산
표면 풍경이 없었더라면 그곳이 웨인스록이라는 것을 몰랐을 것이
다
대체 얼마 전의 영상일까? 100년, 아니 좀더 옛날일지도 모른다
사람 그림자도 없고, 시대를 알 만한 단서도 현재로선 없다. 화면에
는 대서부의 모습이 짙게 감돌고 있었다.
· .영화일까?
당연한 의문이다.
당연한 의문이다.
당연한 의문이다.
도저히 컴퓨터 그래픽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컴퓨터 그래픽
이라기보다는 영화에 가깝다고 느껴졌다. 기록 영화라고 말하고 싶
지만, 100년 이상이나 전의 영상이 이토록 선명하게 남아 있을 리가
없다. 특수 기술을 이용하여 현재의 웨인스록에 과거에 늘어서 있던
집들을 재현시킨 것이리라. 그렇지만 현실에 발을 들여놓은 듯 선명
한 영상이었다.
등뒤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그 실감나는 울림에 놀라 돌아보
니 돌로 된 벽에 스피커가 설치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디스플레이 화면은 2차원이다. 하지만 음성에는 3차원적 넓이가
있었다.
가오루의 시선은 조금 전부터 힐끔힐끔 디스플레이 옆에 ◎굴고
있는헤드 마운티드 디스플레이와 데이터 글러브에 쏠려 있었다 그
것이 지시하는 바를 겨우 깨달았기 때문이다.
· .3차원 공간을 얻고 싶다면, 헬멧과 글러브를 낄 것.
헬멧을 머리에 얹고 데이터 글러브를 손에 끼었다 그러자 자신의
머리를 돌리기만 해도 풍경은 360도의 퍼짐새를 가지고 뇌리에 전개
되기 시작했다.
배후에서 다가오는 말발굽은 이미 3차원의 것이 아니었다 대단한
현장감이 뇌를 엄습해 왔다.
대지를 흔드는 진동까지 체감된다. 부츠를 신고 있는데도 선인장
가시가 발을 찔러 예리한 통증이 느껴졌다.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는
몸을 억누르는 듯하다. 뜨뜻미지근한 바람이 목줄기를 어루만져 와
갈증이 느껴졌다. 땀이 온몸에서 뚝뚝 떨어진다.
등뒤에서 압도해 오는 기척에 쫓겨 가오루는 앞으로 앞으로 도망
치려 했다. 견디지 못하고 돌아보니 말을 탄 인디언 열 몇 명이 태양
을 등지고 색깔이 선명한 머리의 깃털 장식을 우뚝 去아 보이게 하고
있었다
‥‥이 대로라면 밟혀 죽는다
가오루는 인디언들의 궤도에서 벗어나 옆으로 뛰어 도망치려고 했
지만,그순간늠름한팔이 겨드랑이 아래에 쑥 하고끼워져 말위로
끌려 올라갔다. 겨드랑이 밑에 끼워진 팔의 감촉은 분명한 것이었다.
땀과 흙 냄새가 강하게 코를 찌르는가 싶더니 울퉁불퉁한 팔에 조종
되어 어느새 말 등에 걸터앉아 있었다.
꿈을 꾸고 있는 것이라고 자신에게 타일렀다. 이것이 현실이 아님
을 가오루는 알고 있다. 하지만 늠름한 인디언의 등에 얼굴을 바싹
대고 말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달라붙었을 때, 장식처럼 어깨에서
드리워진 두피 다발이 눈에 들어왔다 그중 하나는 아직 새것으로 두
피 안쪽에 붙어 있는 피부가 덜 말라 피비린내가 생생하게 눈에 스며
왔다.
어지럽고, 머리가 앞뒤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낙마하면 죽는다는
본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선이 무너진 것은 그 순간부터였다
말에 흔들리던 시간의 감각이 아무래도 잡히지 않는다. 몇 분이라
고 해도, 몇십 분이라고 해도 납득하고 말 것이다.
골짜기 밑으로 내려가 강가에 서니 생각보다 풍부한 수량에 다소
놀랐다 강은 깊이 패어 들어간 골짜기 밑을 구불거리며 흐르고 있었
다. 계곡 위에서 내려다보았을 때 가늘게 보이던 흐름이 이 정도로
풍부한 물을 담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갈색의 대지가 물에 녹아 맑은 색이라고는 말하기 어렵다 그렇지
만 건조한 공기 속에서 강가에 자욱한 물의 기운은 말 위 사람들의
마음을 매우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었다. 그러한 집단의 의식을 가오
루 또한 공유할 수 있었던 모양이다.
물보라를 올리며 강가를 달려 골짜기 밑이 넓게 터진 지점에서 일
행은 말을 멈추었다. 계곡을 올려다보면서 몇 명의 사내들이 짐승 우
는 시늡을 냈다. 그 이외의 사내들은 두 집단으로 나뉘어 강 상류와
하류에 날카롭게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쫓아오는 자, 혹은 매복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자를 경계하는 눈빛이었다.
쨍쨍 내리쬐는 태양이 대지를 달구어 그 열이 발에서부터 전해져
왔다 시간이 아주 많이 지났음을 체감할 수 있었다.
골짜기 경사면을 뒤덮는 나무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무와 바
위 그림자에서 삼삼오오 모습을 나타낸 것은 여자와 아이 , 노인들이
었다. 말 위의 사내들 수에 비해 여자와 아이의 수가 훨씬 많았다.
처음 한동안, 여자들은 주범주범 다가오는 태도였다. 기대와 긴장,
기쁨과 공포가 뒤섞인, 신에게 애원하는 듯한 시선을 여기저기로 보
내며 말 위에 있는 사내를 바라본다. 찾고자하는 얼굴을 찾아낸 여
자는 비명 비슷한 소리를 치르며 달려가고,사내 역시 그 소리에 응
해 말에서 내려와 여자를 부등켜 안았다. 서로 상대를 찾아 재회를 이
루고 서로의 무사를 확인하는 모습은 경계를 위해 충분히 소비했던
시간에서 돌변한, 성급한 것이었다.
여자들이 지르는 소리는 모두 울음소리처럼 들렸다. 하지만 잘 들
으면 두 종류로 나뉘었다. 기쁨으로 인해 우는 자, 슬픔으로 인해 우
는 자 말 위의 집단에 찾는 사내의 얼굴이 없다는 것을 알자마자 어
느 여자는 무릎을 꿇고 땅에 엎드려 대지를 두 주먹으로 두드리며 저
주의 소리를 질렀다. 아직 어린 아이들을 부등켜안고 하늘을 올려다
보는 여자도 있는가 하면, 노인과 손을 맞잡고 힘없이 주저앉는 여자
도 있다.
가오루는 순간적으로 깨달았다. 이 부근을 거주지로 한 인디언의
어떤 부족이 전사들을 모아 싸우러 나섰음에 틀림없다 이곳을떠날
때 몇 명의 전사들이 있었던 걸까?얼싸안고 무사를 기뻐하는 여자
의 수와 비통으로 머리를 숙인 여자의 수가 반반이라고 한다면, 약 2
배의 인원이 싸우러 떠난 셈이 된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전사들이
반으로 줄었다 귀환한 집단 가운데 찾는 사내의 얼굴이 없다면 죽었
다고 단념하는 수밖에 없다. 아내나 가까운 가족들은 희비가 엇갈린
감정의 흥분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가오루만이 객관적인 눈으로 이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셈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집단의 한복판에서 몸 둘 바 모르는 거북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강한 힘으로 손이 쥐어지고 억지로 몸이 옆으로 돌려지면
서 , 자신이 어느 세계의 사람인지 알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눈앞에는
두 눈에 눈물을 머금고 다가오는 여자의 얼굴이 있었다. 그 진지한
눈길은 자신만이 예외라고 대수롭지 않게 보는 자세를 거절하고 있
었다 동시에 10살 정도의 사내아이가 허리로 뛰어들었다. 가오루의
머리는 혼란스러웠다. 강제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던져진 듯했던
것이다
여자는 가슴에 갓 태어난 아기를 안고 있었다 긴 머리를 등으로
땋아 늘어뜨리고, 이마는 수려하고 넓다. 가슴에 안은 아기는 아랑곳
없이 여자는 자신의 몸을 한 가지 일에만 맡기고 있었다. 가오루는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상대방이 하는 대로 몸을 맡기고 격
정에 떠밀려 여자의 어깨와 등에 팔을 둘렀다.
가오루는 눈앞에 있는 여자에게 레이코의 얼굴을 겹쳐 보았다 그
러고 보니 닳았다. 머리카락의 길이도, 머리 모양도 다르지만 얼굴의
윤곽부터 크고 긴장이 풀린 듯한 눈의 특징이 똑같았다. 어쩌면 자신
의 바람에 의한 단순한 믿음일지도 모른다 사막에 온 이후, 레이코
와 만나고 싶다는 감정이 전에 없이 諸어오름을 보였던 것이다.
아기를 찌부러뜨릴 듯한 자세로 서로 껴안고 손이나 팔, 그 피부를
만지는 동안 여자의 마음이 자신의 가슴으로 흘러들어 왔다 순간적
인 일이었다. 자신과 이 여자는 틀림없이 결혼해 있는 것이리라. 허
리에 찰싹달라붙어 있는 사내아이는 장남일 것이고,눌려 찌부러질
것처럼 되어 울음소리를 내는 아기는 갓 태어난 장녀임에 틀림없다.
지금까지 자신과 이 여자가 어떤 생활을 해왔는지 알수 있을 것 같
은 기분이 들었다.
가오루는 이제 임시로 머문 이 육체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강가에
豊그리고 앉으면 이제까지와 조금도 닳지 않은 모습이 물에 비쳐진
다. 갈색 피부,목과 어깨는 상당히 굵고 어깨 근처에 문신이 있다
손으로 몸 여기저기를 만지면 육체는 그 나름대로 반응을 다시 보내
온다. 다만 얼굴 윤곽만은 물이 흔들려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다. 그
동안 아내를 몇 번이나 안았고, 그때마다 친밀감은 더해 갔다.
부족은 같은 장소에 정착하는 것이 아니라, 늘 이동할 수밖에 없었
다. 동과 남에서 피부색이 다른 부족의 압박을 받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서쪽으로 향하는 루트를 더듬어 가는 수밖에 없다. 물과 음료를
확보한 다음 적과의 만남을 최소한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되므로 지도
자들의 판단에는 늘 신중함이 요구되었다. 판단을 그르치면 부족은
어이없이 멸망한다
이동하는 도중 적어 졌다고는 하나 족히 2백 명은 넘는 대부족이
다. 이동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일단 민첩한 척후 몇 명이 교대로 전
방을 살펴 적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에 본대를 이끈다. 게다가식량
조달도 빼놓을 수가 없다.
밤에는 적당한 장소에 천막을 치고, 모닥불을 둘러싸고 낮에 잡은
짐승의 고기를 가족과 먹었다. 배불리 먹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남
은 고기를 훈제로 만들기는커녕 식량은 언제나 부족한 편이었다.
물가로 나서게 되면 몸을 씻고, 보다 깨끗한 음료수를 찾아 지류를
따라 위로 위로 거슬러 올라갔다. 살아남으려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바로 물이다. 물을 발견한 자는 모두로부터 감사의 인사를 받는
것이 상례였다.
앞으로 봉우리를 둘만 넘으면 전설의 땅에 도달할 수 있을 터였다.
목적지를 눈앞에 두고 삼림에 야영하며 마지막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우연히 물을 발견하였다
수원을 발견한 것은 아이들이었다. 몇 명의 아이들이 놀이에 열중
해 나무 사이를 뛰어 돌아다니다가 나무 틈새로 얼굴을 내민 바위 표
면에 깨끗한 물줄기가 흐르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근처에 있던 몇
명의 어른이 저마다 불려와 손에 손에 그릇을 들고 물을 향해 나서게
되었다
중간중간 멈춰 서서 주위로 얼굴을 돌린다. 가오루의 눈은 산의 경
사면을 올라가는 사람의 수를 세고 있었다 앞에 세 사람, 뒤에 네 사
람, 자신을 포함해 모두 여덟 명이었다. 뒤에 있는 네 사람은 모두 여
자로 아내와 딸의 얼굴도그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앞의 세 사람은
모두 어린이뿐으로, 공을 세우려고 평소와 달리 힘이 넘치는 아들의
모습도 섞여 있다.
물을 보았다는 아이의 말은 거짓이 아니다 산 표면에서 내뻗은 큰
바위에 가는 물줄기가 나 있었다. 다만, 너무나 가늘어 그릇에 담◎
것이 고생스러울 것 같았다.
좀더 貴은 물줄기를 찾아 위로 올라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등뒤의 잡초가 흔들렸다.
갑자기 나타난 것은 자신과 얼굴 생김새가 다른 사내들이었다. 푸
른색 제복을 아무렇게나 걸친 자가 많았다 찢어진 윗옷을 허리에 두
르고 횐 셔츠만 입은 자부터 , 검은 셔츠에 가죽 바지를 입은 자까지
대략 열몇 명이었다. 통일성을 가진 군대는 아닌 듯했다. 역시 물을
찾아 산 속을 헤매고 있는 것인지 손에 물통을 들고 있는 자도 몇 있
었다. 다른자의 손에는 총이 쥐어져 있다. 몇 명이 입고 있는 횐 셔
츠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두 그룹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양측 모두 상대의 출현에 놀란
모습이었다 상대 그룹 안에서 서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긴장을
머금은 공기가 주위에 충만했다. 망설이고 있을 새가 없다 여자와
애들을 데리고는 싸움이 안 된다. 상대에게 싸을 의사가 보이면 도망
친다. 그게 아니라도 급작스런 움직임으로 자극하지 않는 편이 상책
이리라.
상대 그룹은 긴장을 내보이며 두어 마디 건넸다. 그러나 내용은 알
길이 없다. 여기서 또다시 시간 감각이 흩어졌다. 마주친 지 시간이 2
초나 3초 정도에 불과할 텐데 몇 분에 해당하는 시간이 흐른 것 같
다
돌연.세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산을 굴러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
이의 등을 향하고 있던 총이 동료의 손에 의해 치워지자 그것을 신호
로 한 것처럼 몇 명의 사내들이 아이들의 앞으로 돌아가 앞길을 막았
다.
사내들은 총을 쓰고 싶지 않은 듯했다. 큰 소리를 내어 밑에 있는
본대에 들키는 것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살아남을 가능
성은 거의 없는 셈이다. 이들은 한명도 남김 없이 이쪽의 입을 막아
버릴 작정이다
그런 결론에 이르러 아내 쪽으로 몸을 돌렸을 때,사내의 손에 잡
혀 땅바닥에 눌려 있던 아들의 머리가 돌에 의해 쪼개져 나가는 광경
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들은 두꺼운 팔에 의해 턱과 입을 틀어막혀 소리 낼 겨를도 없
이 뇌를 주변 대지에 흩뿌리고 있었다. 잿빛 바위가 피로 물들어 가
는 모습은 모니터상에서 컴퓨터 그래픽으로 붉은 장미가 한 순간 만
개하는 것과도 같았다. 돌을 차는 사내들의 구두 소리가 등뒤에서 들
려왔다.
아킬레스건 부근으로 격렬한 아픔이 지나갔다. 건이 끊어진 것이
아니다 뼈 그 자체가 가루가 난 듯,균형을 잃은 신체는 바위 위에
쓰러졌다 몸을 뒤집으며 쓰러졌기 때문에 옆구리를 바위에 부딪혔
지만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손을 뻗어 아내의 몸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도 빨리 세 여
자는 각각 사내들에게 들쳐업힌 채 무성한 잡초 속으로 사라졌다.
있는 힘을 다해 상반신을 일으켜 보러 했지만 사내들에게 짓눌리
고, 거기에 머리칼을 잡혀 바위 위에 뒤통수를 찧게 되자 움직이는
것조차 여의치 않았다
얼굴 바로 옆에서 '우지끈' 하며 둔탁한 소리가 났다 봐서는 안
될 것이었다. 그러나 고깃덩이가 찢기는 그 소리를 쫓아 눈은 빙그르
르 옆으로 기울었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안아 주던 작고 사랑스러운 몸뚱이가 어른 머
리 높이에서 바위로 동댕이쳐져 있었다 금방 숨이 끊어질 듯한 딸
쪽으로 모든 생각이 돌아갔지만 몸이 전혀 말을 듣지 않는다. 통증이
라기보다 전신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몸 어디를 상처입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통증 같은 건 문제도 아니었다 죽음은 각오하고 있었고,
공포 같은 걸 느낄 여유도 없다. 더 이상 견려낼 수 없었던 것은 가까
운 사람에게 가해지는 폭력이었으며 , 예상치 못했던 소멸이었다
다시 한번 딸의 몸이 쳐들리더니 같은 높이에서 동댕이쳐졌다. 이
제 살아 있지 않으리라. 숨이 끊어진 보드라운 몸뚱이가 바위 들사
이에 버려졌다
딸을 두번 세번 내던졌던 사내는 다른 흥밋거리를 찾아낸 듯 풀을
밟으며 나무 사이로 들어가고 있었다.
느릿한 사내의 움직임을 눈으로 쫓는 것은 가능했다 사내는 걸으
면서 바지에서 叫져나온셔츠에 자신의 손등을 문지르고 있었다. 무
엇을 하고 있는 걸까? 지금까지 하얗던 셔츠에 핏줄기가 나 있었다.
피뿐이 아니라 아주 작은 살덩이가 셔츠에 붙어 있다 딸아이로부터
흘러나온 피,혹은 신체의 일부분일 것이다. 사내는 그렇게 몇 번이
나 셔츠에 손을 닦으며 더러운 것을 털어내려는 듯, 이번에는 가죽
바지에 두 손바닥을 문질렀다.
아내의 소리가 끊길 듯 끊길 듯 들려온다. 아주 가까운 곳에 넘어
져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시선을 이동시켜 봐도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수풀 속에 잠겨 있는 것 같다. 남자들이 우뚝
선 채로, 혹은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은 자세로 아내를 둘러싸고 있
는 모습만이 눈에 띄었다.
머리카락을 쥔 손이 바뀌었다. 보다 강한 힘에 의해 머리칼이 뒤로
잡아당겨져 바로 위로 떠오른 태양에 목을 완전히 드러내는 꼴이 되
었다 태양쪽에 또 하나의 예리한 빛의 반사가 있었다. 빛은오른쪽
에서 왼쪽으로 달려나갔다.
목 안에서 쿨럭쿨럭하더니 쉬익 하는 소리가 난 듯한 기분이 든다.
가슴 위로 뜨겁게 흐르는 액체의 감각이 느껴졌다 더욱 뒤쪽으로 머
리가 기울고 있는 것 같았다
햇살의 빛이 변하고 차츰 짙어지더니 배경이 모노톤으로 가라앉으
면서 어두운 부분이 많아져 갔다. 붉은 태양도 급기야 어둠이 끼고
망막 전체가 암흑에 덮여 갔다. 그러나 청각만은 아직 기능하고 있는
듯했다.
아내가 내는 소리가 들린다. 괴로움에 헐떡인다기보다는 약하게 웃
는 것 같은 소리였다 의식이 사라지는 순간까지 아내의 소리가 귀를
사로잡았다 적어도 이 세계에서는 함께 시간을 공유했던 여자이다.
자신의 죽음과 사랑하는 자의 죽음, 그것은 동시에 찾아왔다.
의가 등받이에 녹초가 되어 눌어붙은 가오루는 잠시 동안 암흑 속
에 잠겨 있었다. 옆에서 보기에는 허탈 상태에 빠져 있다고밖에 보이
지 않을것이다 그러나가오루가경험한것은바로 '죽음' 그자체였
고, 그의 몸은 지금 혼이 빠진 껍데기와 어느 것 하나 다름이 없었다
죽어가는 순간에 가오루가 체험한 감각은 인간이 의식을 잃어갈
때의 그것이 아니다. 기절한다고 해도 뇌는 제대로 움직이고 있다.
심장이 작동을 정지하고 그 다음 서서히 뇌사에 이르는 시간과 공간
이 소멸해 가기까지의 감각을 정말 일순간에 맛보았던 것이다
암흑 저편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자, 일어나라."
억제된, 힘있는 남자의 어투였다.
"이곳으로 오는 거다. "
행위를 재촉하고 난 다음 잔향을 이끌고 소리는 사라져 갔다
가오루는 흠칫 몸을 떨고는 의자에서 뛰쳐 일어났다. 그리고 크게
숨을 들이쉬고 무의식중에 몸을 뻗어 보려 했다. 물에 빠진 사람이
공기를 찾아 수면에서 얼굴을 내놓으려는 움직임과 닮았다
헤드 마운티드 디스플레이를 머리에서 벗어 홱 던지듯 책상에 놓
았다. 데이터 글로브를 벗어 마찬가지로 던져 버렸다.
심장이 꽉꽉 조여드는 느낌이다. 일단 의자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
으킨 가오루는 천천히 호흡을 골랐다. 육체가 현실 공간에 익숙해짐
에 따라 거꾸로 심장 박동이 격해진다 기억은 선명했다. 추억이 분
명하게 남아 있다.
눈물이 흐르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슬픔인지 고통인지 말로 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든다.
가오루는 책상에 쓰러져 울었다. 현실이 아니라는 말을 듣는다 해
도 솟아오르는 격정을 달랠 길이 없었다. 울며 시계를 보고 나서 헤
드 마운티드 디스플레이를 머리에 썼다가 벗기까지의 시간은 고작
몇십 분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위안이 되지는 않았다. 1분이 1년에 상
당하는 만큼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지금 막 경험한 가상 현실이 누구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는지 모르
지만, 가오루는 저편 세계에 있는 어떤 하나의 인생을 살았다는 확실
한 느낌이 있었다. 저편 세계에서 여자와 서로사랑하고,자식을 얻
고, 부족을 위해 싸우고, 죽었다 望으면 손 닿을 곳에 두고서도 구하
지 못하고사랑하는사람을자신의 죽음과 동시에 잃고 말았던 것이
다
"라이치 ."
가오루는 그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몇 번이고 불러 익숙해진 아내
의 이름이었다 냇가에서 서로의 몸을 닦아 주며 살갗과 살갗이 닿을
때의 감각이 생생히 남아 있었다.
"코치스."
딸의 이름이었다. 태어나서 걷기 시작할 때까지 가슴에 안고 등에
업어 넘었던 봉우리의 수는 셀 수도 없다
아내와 딸의 이름은 외우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이름은도무지
기억이 애매하다. 아내나 딸의 얼굴은 잘 기억하고 있으면서도 자신
의 얼굴은 흐리멍덩하다. 죽음의 순간에 찾아온 고통 같은 것도 거의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사랑하는 사람들의 기억,수많은 추
억에 압도될 뿐이었다
가오루는 비틀비틀 일어나 벽 쪽으로 다가가 자신의 어깨를 벽데
부딪혀 보았다. 통증이 덮쳐왔다. 가슴의 아픔을 잊기 위해 일부러
몸을 상하게 하고픈 기분이 든다
· .끼 일의 의미를 분석하지 않으면 안 돼.
가오루는 그렇게 자신에게 타이르며 이성을 회복하는 것을 통해
슬픔을 잊으려 했다.
가오루가 맛본 체험은 영화를 본 것과는 의미가 다르다. 가상 공간
에 몸이 통째로 흠뻑 녹아 들어갔다고 표현할 수 있지만, 현실을 그
대로 재현한 듯한 가상 공간이 어떻게 가능한 걸까 하는 의문은 없어
지지 않는다.
· .루프.
우선 떠오르는 것은 이 가상 공간은 루프의 일부가 아닐까 하는 의
문이었다.
조금 전 쓴 것과 같은 헤드 마운티드 디스플레이를 머리에 얹고 시
간과 공간을 설정하면 우리는 루프에서의 어떤 역사적 순간에 입회
할 수 있게 된다. 루프계의 생명에 대해 신과 같은 입장을 취하는 것
도 가능하고, 어떤 특정한 개인의 시청각을 얻어 가상의 인생을 사는
것도 가능하다.
루프에 생명이 탄생하고 여러 가지 역사를 반복해 온 모양은 방대
한 양의 흘로그래픽 메모리에 보존되어 있다. 원하기만 하면 역사의
어떤 일면이든 관찰하고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가오루는 지금 막 경험한 세계가 루프의 일부가 아닌가 하
는 추리를 한 것이다. 초기의 RNA 생명으로 루프에서 탄생하고, 진
화를 이루어 온 생명이기에 컴퓨터 그래픽과는 차원이 다른 생생한
육체로 표현되는 것은 아닐까?
접촉하는 것으로 애정이 깊어진, 만들어 낸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신체였다 떠올리기만 해도 젊은 가오루의 가슴에는 치밀어오
르는 것이 있었다.
가상 공간에서 자신의 죽음과 헤어짐을 경험할 덕택에 격렬한 결
의가 솟구쳐 온다. 잃을 수는 없다. 현실 세계에서의 사별은 훨씬 더
괴로울 것이다. 이런 경험은 한 번으로 족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
계적인 규모로 만연하기 시작한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의 수수께
끼를 풀고 치료법을 발견해야만 한다.
‥‥루프에서의 암화가 현실 세계에 영향을 주고 있다.
그런 생각이 점점 강해졌다. 실제로 가상 세계의 일부분을들여다
본 후 가오루의 마음은 심한 동요를 느꼈다. 강한 영향을 받은 것이
다. 가상 세계가 현실 세계에 영향을 미쳤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
다.
그런데 이 방에 담겨진 의미는 무엇일까?가오루가 여기에 올 것
을 예상하고 복잡하게 刻힌 시스템을 남기고 간 자가 있는 것이다.
그가 케네스 로스만이라고 해도 의도가 명확하지 않았다.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끌려 가고 있다는 인상을 지을 수가
없다. 설령 이끌리고 있다고 해도 지금은 이끄는 대로 저편의 지시에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향해야 할 장소를 지정받은 것인지도 모른다.
어머니인 마치코는 미국 원주민에 관한 민화를 들어 전사의 인도
에 따라 서쪽으로 나아자라는 말을 했다. 가상 공간에서 행동을 함께
한 부족도 로키 산맥 남쪽의 끊어진 곳에 위대한 정령이 지켜보고 있
어서 영원한 인생을 살 수 있는 장소가 있다는 전설을 믿고, 서쪽으
로 서쪽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그들이 더듬어 간 길은 가오루의 뇌리
에 확실히 새겨져 있었다.
앞으로 두 개의 봉우리만 더 넘으면 목적한 땅에 도착할 수 있는데
그 직전에 처자식과 함께 뜻밖의 죽음을 당하고 말았지만, 그때까지
의 루트를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때로는 수개월에 이르는 야영
을 하면서 더듬어 간 코스는 일상 생활의 터전이기도 했다.
‥‥부족이 더듬어 간 대로 서쪽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가오루는 앞으로 취해야 할 행동을 파악했다.
하지만 그 전에 할 일이 있다 위성 통신 회선을 이용하여 일본과
연락을 취하는 일이다. 상대는 컴퓨터 연구소에 있을 아마노이다.
가오루는 통신 회선을 이용하여 아마노의 컴퓨터에 접속하기로 했
다.
"다카야마와 아사카와가 등장하는 영상이 수배되는 대로 이쪽으
로 전송하기 바람."
일본을 떠나기 전에 강하게 요청해 두었던 것이다.
루프는 현실 세계와 거의 다름없는 규모로 작동해 왔다 몇십억이
라고 하는 지적 생명체가 각각의 인생을 살고, 민족의 역사를 형성해
갔으니 기억량은 방대할 것이다. 그중에서 세계의 암화가 시작된 전
후의 기록을 골라내는 것이기 때문에, 상당히 힘든 작업이 될 것이라
고 생각되었다.
그 부분의 영상이 입수되면, 조금 전과 같은 요령으로 헤드 마운티
드 디스플레이와 데이터 글러브를 장착해 리얼 타임으로 관찰과 조
사가 가능해진다. 일단 루프 세계의 한 개인에게 초점을 고정시켜,
왜 암화가 시작되었는가를 해명해 줄 단서를 찾는 것이다. 그 정보에
의해 중대한 힌트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마노의 응답을 기다리는 동안, 가오루는 레이코의 목소리를 듣
고 싶다는 유혹을 억누를 수 없었다 지금 일본은 몇 시일까? 시차는
8시간이니까, 아침 9시경일 것이다 레이코는 일어났을까? 가상 공
간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경험한만큼 더욱더 그녀의 존재
를 가까이 느끼고 싶었다. 적어도 건강하게 있는지만이라도 알고 싶
었다
가오루는 위성 전화를 이용하여 그녀의 번호를 눌렀다.
벨 소리가 일곱 번 울렸을때, '네.' 하고 나른한 목소리가되돌아
왔다. 현실 세계는 아직 괜찮은 모양이다. '네.'라는 레이코의 목소리
를 접했을 뿐인데도 뭐라 말할 수 없는 안도감에 감싸였다. 발 밑이
불안한 늪에서 빠져나와 확고한 대지에 착지한 것 같은 안도감‥‥
"레이코."
한 호흡 사이를 둔 다음 레이코는 재빨리 앉음새를 고치는 기색을
보였다. 나른함은 그림자를 감추고 바짝 긴장하게 된 모양이다.
"아니 , 당신이에요? 아, 지금 어디예요? 건강해요?"
연달아 질문을 퍼부어 댔다. 그녀가 자신을 걱정해 줘서 가오루는
기뻤다.
가오루는 질문 하나하나에 대답하고는,
"괜찮아요, 안심하고 기다렸으면 좋겠어요."
라며 다짐해 두고 전화를 끊었다. 오랜 전화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가도루는 쓰러져 가는 간이 침대에서 선잠을 자면서 아마노로부터
의 응답을 기다렸다.
암 바이러스의 만연과 루프의 암화가 서로 관계가 있다고 의심하
고 있는 사람은 가오루뿐이었다. 다른 루트에서 같은 실마리를 발견
한 사람이 존재할 가능성도 지을 수는 없지만 아직 아무런 정보도 들
어와 있지 않다. 루프를 관리하는 쪽 사람인 아마노가 그런 사실을
언급하고 있지 않은 이상, 역시 가오루는 유일하게 자신뿐이라고 생
각하고 싶었다
그 추측을 가지고 루프가 암화한 원인을 찾으면, 지금까지 깨닫지
못했던 다른측면에 빛이 닿을지도 모른다. 루프의 암화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몇 번이고 조사되어 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20년
이상이나 전의 일이고,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가 눈에 띄는 움직 임
을 보이지 않았을 무렵의 일이다.
루프가 암화된 직후부터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의 존재가 확인
되고, 특히 최근에 와서 인간 이외의 동물과 식물로의 감염이 폭발적
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를 구성하는 9개의 유전자 염기
수가 모두 2의 If승의 3배라는 것도 기묘한 우연이다. 」진법으로 계
산하는 컴퓨터가 발생원임을 암시하는 것 같았다.
컴퓨터에 어떤 접속이 있는 것 같은 기척이 보이자 깜박깜박 졸고
있던 가오루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책상 앞에 앉아서 디스플레이를 보니 생각한 대로 아마노로부터의
책상 앞에 앉아서 디스플레이를 보니 생각한 대로 아마노로부터의
응답이 도착해 있었다. 디스플레이에 몇 가지 지시가 나열되어 있다.
가오루는 지시대로 키보드를 두드렸다. 나머지는 루프의 메모리
일부와 이쪽 컴퓨터가 접속되는 것을 기다리는 일뿐이다.
접속이 완료되었다.
가오루는 이번에는 자신의 의지로 헤드 마운티드 디스플레이와 데
이터 글러브를 몸에 장착했다.
전송되어 온 연대는 루프년 1990년 여름 이후의 어느 인물의 눈과
귀를 통해 얻어진 풍경과 사건이다.
예를 들면, 루프년 1990, 10, 14, 14시 39분 35도 fIN, 139도
46E 등으로 시간과 공간을 지정하면, 그 지점에서의 영상이 간단히
손에 들어온다. 장소를 고정시킨 다음 시간을 움직이면 디스플레이
에는 장소의 연대기가 펼쳐진다. 줌 기능을 이용하면 더욱 정밀한 장
소의 지정도 가능했다.
가령 '긴자4가'라는 장소를 입력하면,그 일대의 광경을 어느 시
대의 것이든지 볼 수 있다 관찰자는 상하 좌우 360도에 걸쳐 광범위
한 부감(情職)을 손에 넣고,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 틈에 시선을 찔러
넣고 유령과 마찬가지로 둘러볼 수 있다 저쪽은 이쪽을 감지할 수
없지만, 이쪽은 저쪽 세계를 투명 인간처럼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어떤 개체의 감각에 관찰자의 감각을 고정시킬 수도 있다. 그
경우, 가상 공간에서의 인물 캐릭터에 자신의 시청각이 겹쳐진다
이번에 가오루가 손에 넣은 것은 어떤 인물의 뇌리에 새겨진 기억
이었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수년에 걸친 인생을 불과 수십 분 만에 체험한
것처럼 , 루프의 암화에 얽힌 중요 인물의 시점으로 사건을 바라보려
하는 것이다 여기에 기억되어 있는 것은 다카야마 류지를 비롯한
몇 명의 체험이다.
그런데 다카야마의 인생은 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호기심도 있었
지만, 두려움 쪽이 더 컸다. 또 어쩔 수 없이 마음의 고통을 맛보아야
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주저하고 있다간 용기가 꺾일 것 같다. 사이를 두지 않고,가오루
는 프로그램을 작동시키기로 했다.
가오루는 자신의 의지로 루프에 플러그 인 했다.
지금 있는 곳은 번화가의 찻집인 모양이다. 창 밖에서 번쩍이는 네
온사인이 가게 안에 화려한 빛줄기를 던져 넣고 있었다 가오루가 고
정한 사내 · 다카야마는 찻집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한 사내와 마주
하고 있었다. 다카야마의 친구인 아사카와다 보고 있기만 해도 가
엾어 보일 정도로 아사카와는 아주 초췌하다. 그도 그럴 터였다. 아
사카와는 어젯밤 참으로 무서운 비디오 테이프를 보고 말았다. 그는
자신이 빠진 궁지에서 구해 줄 상대로 다 카야마를 택해 찻집으로 불
러내 지금까지의 경위를 설명하고 의논을 시작한 것이다.
다카야마는 테이블 위에 놓인 유리잔에서 얼음 하나를 꺼내 입에
넣고 깨물어 부됐다. 그러자 가오루의 입 안에도 그 차가움이 삭 하
고 퍼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두렵기도 하고 흥분하기도 한 탓인지 , 아사카와가 말하는 내용은
가끔 전후 관계가 어긋나기도 했다 다카야마는 자기 나름대로 아사
카와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머릿속에서 정리한다.
아사카와의 불행은 무작정 얘기하기를 좋아하는 기사가 운전하는
택시를 탄 것에서부터 시작된 모양이다. 그 택시 기사로부터 아사카
와는 어느 교차로에서의 오토바이 사고 모습을 들었던 것이다
택시 기사가 빨간 불에서 차를 세우고 있는데, 그저 옆으로 쓰러지
기만 했을 뿐인데도 오토바이 운전자가 심부전 증상을 보이고 숨졌
다고 한다 헬멧을 벗으려고 발버등치며 괴로워하는 표정이 인상에
남아 왠지 기분이 나빠 견딜 수 없었다고,무서운 체험을 서로 주고
받으면서 기뻐하는 어린애 같은 말투로 운전 기사가 말했던 것이다.
몰라도 상관없을 정보를 얻은 덕분에 아사카와의 인생은 전혀 다른
것이 되고 말았다.
그후, 아사카와가 더듬어 간 말로는 비참한 것이었다.
아사카와는 우연히 얻은 택시 운전수로부터의 정보에 의지해 돌연
사에 관해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같은 시각,다른 장소에서 네
명의 젊은이가 똑같은 증상의 돌연사로 죽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중 하나가 아사카와의 처조카였다는 것 이상으로, 네 사람이 같은
시각에 죽었다고 하는 점에 아사카와의 호기심이 몹시 자극되었다.
네 명의 죽음은 모두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처리되었다. 주간지 기자
의 특성이 이 사건 뒤에 있는 이상한 낌새를 감지한 모양이다. 같은
시각에 네 명의 남녀가 같은 증상으로 죽을 확률이 낮다는 것을 생각
할 때, 뭔가 좀더 납득할 수 있는 원인을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
고 판단한 것이다.
아사카와는 죽은 네 명의 공통점을 찾기로 했다 네 사람은 서로
친구 사이이고, 죽기 꼭 일 주일 전에 산간의 임대 별장에서 지냈다
는 것을 알아냈다 아사카와는 즉시 그 장소,산간의 리조트 클럽에
세워진 임대 별장으로 가기로 했다. 거기에서 죽음의 원인이 되는 어
떤 상황에 맞닥뜨린 것은 아닐까 하고 추측했기 때문이다.
처음 한동안 아사카와는 바이러스 같은 것을 상상하고 있었던 모
양이다 네 사람은 그 장소에서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정확히 일 주일
후 예정된 죽음의 세례를 받은 것은 아닐까 하고.
하지만 아사카와가 산간 임대 별장에서 발견한 것은 의외로 한 개
의 비디오 테이프였다·
다카야마는 거기까지 듣더니 아사카와에게 말했다
"우선 그 테이프를 보여 줘 ."
불끈하여 얼굴을 든 아사카와는 간신히 초조함을 억누르고 있는
모양이다.
" ·못 들었냐, 내 얘기? 위험하다고 했잖아."
다카야마는 유리잔에서 또 하나의 얼음을 꺼내 입에 넣고 우물우
물 움직였다. 그 행동이 아사카와에게는 무시당하고 있는 것처럼 여
겨진 모양이다.
결국, 목숨의 위험이 있든 없든 비디오 테이프를 보지 않고저는 시
작할 수 없다. 다카야마는 아사카와의 집을 찾아가 산간 별장에서
가지고 온 비디오 테이프를 보기로 했다.
아사카와의 집 거실에서 다카야마는 뚫어져라 그 영상을 보았다.
그의 시각을 통해 영상이 가오루의 뇌리로 홀러들어왔다
관계 없는 단편적인 영상의 나열이었다. 화산 장면부터 시작되어
갓 태어난 아기의 얼굴을 확대하는 등 갑작스럽게 화면이 변해 갔다.
단편적이기는 해도 하나하나의 장면이 묘하게 인상에 남았다. 아기
의 울음소리 따위를 깔면서 정경이 담담하게 흘러갔다
컴퓨터 그래픽도 아니거니와 TV 카메라로 촬영된 것도 아니었다
그 이외의 방법으로 만들어진 영상이었다. 루프에 사는 지적 생명이
만들어 낸,또 다른 한층 아래의 가상 공간을 비춘 영상처럼 받아들
여지기도 했다.
이윽고 낯선 사내의 얼굴이 아래에서 잡은 앵글로 크게 비치고, 이
어 어깨 근처가 클로즈업되더니 피가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통증 때
문인지 사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얼굴은 일단 화면에서 사라졌다
가 다시 나타났는데 이번에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화내고 있다
기보다는 알지 못할 공포와 두려움이 교차된 표정이었다.
시야 전체가 좁아져 작고 등글게 도려내진 하늘 가운데로 주먹 크
기의 검은 덩어리가 내려왔다. 탁 하는 둔탁한 소리를 내며 덩어리는
무언가에 부딪혔다 가오루의 몸에 뜻하지 않은 통증이 스쳤다.
· .치야, 이건?
가오루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의문은 해소되지 않은 채 시야는 서서히 좁아지고 이윽고
완전한 앙흑에 싸여 갔다.
영상이 끝날 무렵에 자막 처리된 글자 같은 것이 흘렀다. 붓과 먹
을 이용해 쓴, 크기가 들쑥날쑥한 서투른 글자이다. 거기에는 이렇게
되어 있었다.
"이 영상을본 자는 일 주일 후 이 시간에 죽을 운명에 놓여 있다.
죽고 싶지 않다면, 지금부터 말하는 것을 실행에 옮겨라. 즉‥‥‥
거기에서 화면은 전혀 이질적인 것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음성을
동반한 밝은 영상이다. 강가에 불꽃놀이 불꽃이 오르고, 유카타 차림
의 사람들이 여름밤을 즐기고 있다. 어둡고 기분 나쁜 영상이 돌연
넘쳐날 듯한 건전함에 의해 차단되어 버린 것이다.
몇 초 후, 영상은 완전히 멈추었다
가오루와 다카야마는 동시에 디스플레이에서 얼굴을 들었다.
정리해서 좁혀가면, 하나의 사실이 떠오른다.
‥‥같은 시각에 수수께끼의 죽음을 당한 네 명의 남녀는 틀림없이
이 비디오 영상을 보았다. 그리고 여기에서 예고된 말대로 정확히 일
주일 후 죽고 만다 즉 비디오에 예언된 '죽음'은 사실이었던 것이
다. 그것을 본 사람을 정확히 일 주일 후 죽음으로 몰아넣는 비디오
테이프가 존재하고, 게다가 죽음에서 벗어날 방법이 기록된 부분이
지워져 버렸다. 이래서는 살아날 방법이 없었다.
산간의 임대 별장에서 이 비디오를 본 아사카와는 절망하여 심하
게 동요했지만 다카야마는 그렇지 않았다 죽음을 건 게임에 참가할
수 있는 것이 못 견디게 기뻐 어느 사이엔가 휘파람을 불고 있다 자
신이 고정해 놓은 상대가 상당히 대담한 인물이라는 것을 가오루는
짐작할 수 있었다.
가오루는 다카야마의 의식에서 일단 떨어져 나와 좀더 냉정히 이
것을 분석하려 했다.
루프 속에 사는 생명체가 자기 손으로 그것을 본 개체를 일 주일
후에 죽여 버리는 비디오 테이프를 작성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불가
능할 것이다. 물론, 현실 세계에서 루프에 개입하면 이런 비디오 테
이프는 쉽게 제작할 수 있고, 컴퓨터 바이러스의 장난이라고 해도 설
명은 된다
가오루는 의문을 품은 채, 대담무방한 다카야마의 인생에 함께 하
기로 했다.
다카야마는 아사카와에게 비디오 테이프를 복사해 받아 서로 지
혜를 짜내 분석해 나가기로 했다.
마침 그때 다카야마는 아사카와의 아내와 딸이 부주의하게 방치
되어 있던 비디오 테이프를 보고 만 사실을 듣는다. 아사카와는 자신
의 목숨뿐만 아니라, 아내와 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분주해지게 된
것이다
다카야마는 우선 비디오 테이프의 영상이 어떻게 촬껑된 것인지
그 방법부터 찾기 시작한다. 자료를 모으고 추리를 한 결과 도출된
결론은 예상을 뒤엎는 것이었다.
영상은TV카메라 등의 기계로 촬영된 것이 아니라 개체가 개체
자신만의 정신 작용을 이용하여 비디오 테이프에 직접 찍어 넣은 염
사(念寫) 방법으로 제작된 것이다. 산간 임대 별장에 우연히 비디오
테이프가 VTR에 세트된 채로 있었고, 거기에 염력에 의한 영상이
흘러들어갔던 것이다.
루프는 닫힌 세계이다 그 내부에 있어서 내부의 물리 과학 법칙에
따른다면 이런 일은 절대로 실현 불가능한 설정이다.
가오루는 잘 만들어져 있지만몇 가지의 유치한 설정이 깔려 있는
영화를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두사람은 염사라는 특수한 능력을 이용한 것이 누구인지 조사하
기 시작했다 모든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데이터를 모은 결과, 겨우
개체의 이름이 밝혀진다.
·야마무라 사다코
그 시점에서 파악한 한도 내에서 개체의 성별은 여자였던 모양이
다. 두 사람은 그녀의 출신지인 섬을 찾아가 알아볼 수 있는 한 데이
터를 수집한다.
그 결과 알게 된 것은 야마무라 사다코가 현실을 훨씬 뛰어넘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태어나서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해
도시로 건너갔을 때까지의 종적은 잡았다. 그렇지만 루프 시간으로
20년 전에 야마무라 사다코의 소식은 두절되어 있었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했다 왜 산간 임대 별장의 비디오에 영상이 흘
러든 것인지 그 의문으로 시선을 옮기기로 한 것이다.
다카야마와 아사카와는 다시 산간 임대 별장을 찾아가기로 하는
데, 그 전에 어떤 인물을 만날 기회를 가졌다 산간 별장지에 전에 어
떤 시설이 있었는지 조사해 보았더니,어떤 바이러스성 질병 요양소
가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거기에서 의사로 있던 남자가 별장지 근처
에서 의원을 개업하고 있음을 안 것이다.
그 의원을 찾아가 의사의 얼굴을 보고, 가오루 자신은 깜짝 놀랐
다. 비디오 테이프의 마지막 부분, 어깻죽지에서 피를 흘리며 공포와
체념이 교차되는 표정을 띄우고 있던 그 사내였기 때문이다.
다카야마의 추궁에 전혀 맞서지 못한 의사는 이십몇 년 전에 야마
무라 사다코라는 여성을 죽이고 우물에 처넣은 것을 자백했다. 우물
위에는 현재 임대 별장이 세워져 있을 터이다. 이십몇 년 전에 우물
밑바닥에서 죽었을 야마무라 사다코‥‥ 그 원한이 곧장 위로 뻗어
올라가 임대 별장의 VTR에 세트된 비디오 테이프에 이상한 영상을
보낸 것 같다는 것이다 게다가 여성이라고만 굳게 믿고 있던 야마무
라 사다코가 자웅 양쪽의 성을 동시에 소유한 존재라는 것도 밝혀졌
다.
다카야마는 임대 별장의 바닥 아래로 들어가 우물 뚜껑을 떼어 내
고 안으로 내려가 야마무라 사다코의 유골을 주워 모아 안장하기로
했다 시체를 안장함으로써 비디오 테이프에 담긴 저주가 해제될 것
이라는 바람을 담고서
루프 시간으로 정확히 일 주일이 지나려 하고 있었다. 비디오의 예
고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사카와는 살아 있다. 이것으로 수수께끼는
풀렸다. 살았다고 실감한 아사카와는 그대로 기절해 버린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다음날로 되어 있던 다카야
마의 사망 예고 시간 정각에 다카야마에게 원인 불명의 심부전이 덮
쳐왔던 것이다. 아무래도 야마무라 사다코의 유골을 주워 모아 안장
하는 것이 비디오 테이프의 바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다카야마에게 죽음이 다가오기 직전, 가오루는 주저없이 고정시킨
상대를 아사카와로 바꾸기로 했다. 가상 공간이라지만 죽음의 체험
은 상당히 쓰리다. 될 수 있는 한 피하고 싶었다.
다카야마가 죽어 버린 것을 알고 아사카와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
했다. 비디오 테이프의 수수께끼를 정말로 푼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왜 아사카와는 살아 있는 것인가? 이유는 하나 지난 일 주일 동안
에 의식하지 않은 채 비디오에 담겨 있던 바람을 이루어 준 것이다.
다카야마가 하지 않고 자신만이 한 일.그것이 무엇인가 하고 아사
카와는 고민했다 자신의 목숨이 살아났다고 는 해도 정답을 찾지 않
으면 아내와 딸이 목숨을 잃게 된다 대체 비디오 테이프는 무엇을
바라고 있는 것일까?
그때 아사카와의 뇌리에 어떤 영감이 흘러들어 왔다.
· .바이러스의 특징 , 증식 .
문득 깨닫게 되었다 비디오 테이프는 바이러스와 같은 활동을 하
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그렇다면, 바라고 있는 것은 증식하는 것.
즉,비디오를 복사해서 아직 보지 않은 인물에게 보여 주어 개체 수
의 증가를 돕는 것이다. 이것으로 앞뒤가 맞는다. 아사카와는 비디오
테이프를 복사해서 다카야마에게 건넸다. 그런데 다카야마는 복사
하지 않았다.
아사카와는 그 사실에 생각이 미치자 VTR를 안고 처가로 차를 몰
,
H
~
틴
았다. 복사한 다음, 장인 장모에게 영상을 보여 줌으로써
그것과 맞
바꾸어 아내와 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무사히 복사를 마치고 처가에서 돌아오는 길에
아사카와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시련이 찾아왔다.
차가 슬슬 고속도로 출구에서 나오려 하고 있었다. 백
미러로 보니
아내와 딸은 됫좌석에 포개듯이 하여 자고 있다 "이제 곧
집에 도착
할 거야 "라고 운전석에서 손을 뻗어 몸에 댔더니 두 사람
모두 차가
워져 있었다. 아내와 딸은 예고된 시간에 급성 심부전을
일으켜 죽고
말았다 복사했는데도 비디오 테이프의 저주는 사라지지 않
았던 것 이다.
아사카와는 절망과 슬픔의 구렁텅이에서 제정신을 잃었
다. 머리가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러워 바로 앞으로 닥쳐온 정
체된 차량
에 주의를 기울일 새도 없이 추돌 사고를 일으킨 것이다.
쿵 하는 충격이 몸을 통해 빠져나가고 의식을 잃어 가
는 순간, 그
는 자문을 계속했다
‥‥왜 아내와 딸이? 그런데 왜 나만 살아 있는 거지?
육체와 정신이 받은 2중 쇼크에 의해 아사카와의 뇌는
회복 불가
능할 정도의 타격을 입었다.
아사카와의 눈은 열려 있었다. 시선은 고정되지 않아 천장의 어느
한 점을 중심으로 천천히 원을 그리는 듯 움직이고 있었다. 정경이
망막을 통해 뇌에 도달되고는 있지만 '본다'는 능동적인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수동적으로 멍하니 안구를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의지를 갖지 않은 안구의 움직임만으로도 가오루는 아사카
와가 현재 놓여 있는 장소를 알 수 있었다. 옆 침대와 구분하는 횐 커
튼, 은색으로 빛나는 링거액 스탠드. 가오루는 그리움과 가엾음을 동
시에 느꼈다. 레이코와 나눈 정사 장소가 떠오른다. 아무래도 아사카
와는 병실 침대에 누워 있는 것 같았다.
고속도로에서 추돌 사고를 일으키고 곧바로 병원으로 옮겨 온 게
틀림없다. 이후, 거의 의식을 잃고 있었던 것인지 디스플레이가 새까
만 상태인 경우가 많았다.
대부분의 시간, 아사카와의 망막은 검게 덮여 있었는데, 가끔 눈을
뜨고 이렇게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는 때가 있었다.
아사카와의 망막을 통해,가오루는두남자의 얼굴에 시선을고정
시키고 있었다. 한 사람은 몇 번인가 어렴풋이 본 얼굴이고 횐 옷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사카와의 담당 의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한 사람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 처음 보는 얼굴이 아사카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아사카와 씨 .'
아사카와의 어깨 부근에 남자의 손이 놓였다 피부 감각을 자극해
서 어떤 반응을 얻으려 한 것이겠지만 소용없다. 아사카와는 가오루
의 의식도 미치지 않는 깊은 구렁을 헤매고 있으므로 여간한 자극으
로는 혼미 상태에서 벗어날 리 없다
"내내 이런 상태입니까?"
남자는 아사카와의 침대에서 떨어져 의사에게 물었다
"네 , 그렇습니다. "
그후 남자와 의사는 두세 마디 말을 나누었다. 이야기 내용으로 보
아 남자 쪽도 의학적 지식이 풍부하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
역시 의사일지도 모른다.
"아사카와 씨 ."
허리를 더욱 굽혀 낮춘 자세로 아사카와의 얼굴을 지켜보다가 남
자는 감정이 어린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눈에는 같은 경험을 한
사람에게 공통된 깊은 자비의 표정이 어려 있다
"소용없을 겁니다, 말을 걸어도."
등뒤에서 의사가 억양 없이 말했다.
"증상에 변화가 생기면 꼭 알려 주셨으면 합니다. "
남자는 그렇게 말하더니 포기하고 침대에서 멀어졌다. 가오루는
특히 남자의 표정에 흥미를 가졌다. 남자는 아사카와라고 하는 입원
환자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이상 아사카와의 시점에 고정시키고 있어 畿자 의미가 없다. 침
대에 누운 채 몽롱한 상태가 계속되고 있어서 정보를 끌어낼 기회는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쯤에서 고정 상대를 바꾸는 것이 좋겠다.
가오루는 그렇게 판단했다.
고정할 상대로서 자비심 깊은 시선을 보내는 이 남자가 최적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도 어딘지 친근감이 느껴진
다. 의사와의 대화에서 판단해 봐도 사건과 깊이 연관되어 있는 것이
확실하다.
가오루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키보드를 조정하여 아사카와에 동화
(同化)시키고 있던 시청각을 해체하고 병실에서 나가려는 남자에게
다시 설정했다
그 순간부터 가오루는 아사카와의 마음을 뽑아 내고 다른 한 남자,
안도 미쓰오의 시각과 청각을 손에 넣는 것이다 하지만 안도 미쓰오
의 마음 어디에도 평온한 자리는 없었다. 다시 답답한 인생을 체험해
야 할 것 같다. 이것도 그런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체험한 가오
루는 남 모를 깊은 한숨을 쉬고 있었다
잠시 후 가모루는 자신이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인물에 감각
이 고정됐음을 알았다.
안도는 아사카와와 함께 비디오 테이프의 수수께끼를 쫓고 있던
다카야마를해부한의사이고,생각한 대로사건과 깊이 연관되어 있
는 것이 밝혀졌다. 대학 병원 법의학 연구실에 적을 두고 동료 병리
학자와 힘을 합해 사건의 전모를 밝히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현재 판명되어 있는 것만 해도, 비디오 테이프를 본 것에 의해 죽
은 개체가7구에 달하고 있었다 같은 시각에 죽은 네 명의 젊은 남
녀 , 다카야마 류지, 아사카와의 아내와 딸, 이상 모두 7구이다.
게다가 그들 모두에게서 신종 바이러스가 발견되었다. 안도는 동
료 의사로부터 바이러스의 존재를 듣고 상당히 놀랐다. 그것은 가오
루도 마찬가지였다. 이 바이러스와 현재 세계에 만연하고 있는 전이
성 인간 암 바이러스의 관계에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가오루는 가까운 곳의 메모지를 끌어당겨 간단히 메모를 했다.
‥‥루프에 발생한 바이러스의 DNA를 해석할 것.
설마 같은 배열일 리는 없겠지만 어딘가에서 유사정이 발견될 수
도 있다. 루프계에 발생한 바이러스 유전 정보를 해석하는 작업은 매
우 간단할 것이다.
안도의 눈과 귀를 통해 바라보는 세계는 온통 슬픔으로 가득 차 있
었다. 가오루는 그 슬픔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의
성격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곳에 원인이 있는 것일까? 의미도 모르
는 채 자주 망막 안쪽이 눈물로 흐려지는 때가 있는 것으로 보아 상
당히 깊은사연이 있으리라고 짐작이 됐다 과거의 어떤 사건에 기인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현재 안도의 고독한 생활 형태에서도 슬픔의
편린을 볼 수 있었다.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안도의 과거를 찾아 느끼고 싶었다. 슬픔의
정체는 흥미롭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처지가 아니다. 마음에 두고
있던 젊은 여성의 실종이 』招져 안도가 그 수색에 막 착수한 터였
다.
실종된 사람은 다카야마의 제자이기도 한 다카노 마이라고 하는
젊은 여성이었다. 원룸에 혼자 살고 있었는데, 최근 일 주일 동안 연
락을 취할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안도는 다카야마 가까이에 있던 마이의 신변에 뭔가 좋지 않은 일
이 일어났으리라 판단하고, 그녀의 방을 찾아가기로 했다. 그녀도 정
체 불명의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을 가능성을 완전히 떨쳐 버릴 수 없
었기 때문이다.
가보니 그녀의 방은 비어 있었다. 그런데 방VTR에는 그 비디오
테이프가 세트되어 있다. 본사람은 정확히 일 주일 만에 죽음에 이
르게 한다는 그 문제의 비디오 테이프를 다카노 마이도 본 게 틀림없
는 것 같다. 하지만 비디오 테이프는 약간의 부분을 제외하고 깨끗하
게 지워져 있었다.
안도는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고민한다. 비디오 테이프를
보고 만 것이라면 다카노 마이는 살아남지 못한다. 유체가 발견되지
않았으니, 지금쯤 어딘가 다른 장소에 죽어 있다는 얘기가 된다.
비디오 테이프를 보았는데도 불구하고 살아 있는 사람은 지금까지
아사카와 단 한 사람뿐이다. 그는 테이프를 복사해서 살아났다 그런
데 아내와 딸은 복사했는데도 목숨을 잃었다. 대체, 비디오 테이프의
비밀은 무엇일까? 죽이는 자, 사는 자, 그저 멋대로 움직이고 있을
뿐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논리적인 이치가 있다면 일단 그것을 발
견해야 한다
다카노 마이의 방을 나오려던 안도는 지금까지 경험한 적이 없는
생물의 기척을 느낀다. 작고, 미끈미끈하고, 소녀 같은 웃음소리를
내는 생물
그 기척은 역시 디스플레이에 몰입한 가오루에게도 전해져 왔다.
복사뼈 근처에 뭔가가 닿았다 미끈미끈한 감촉이 두 발의 아킬레스
건 부근에서 느껴졌다.
안도는 공포에 사로잡혀 방문을 열었다.
· .끼 방 안에 뭔가가 있다.
방에서 넘어지듯이 급히 나오면서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대학에서는 바이러스의 해석 작업이 상당히 진척되고 있었다.
안도는 신문 기자라고 밝히는 남자로부터 연락을 받게 된다. 신문
기자가 아사카와의 동료라고 밝혔기 때문에 안도는 만나 보기로 했
다.
안도는 신문 기자로부터 사건의 줄거리를 자세히 기술한 디스켓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기사를 쓴 것은 아사카와이다.
안도는 디스켓이 어디에 있는지 짐작해, 겨우겨우 손에 넣는 데 성
공한다. 사고를 일으킨 차에 방치된 노트북은 아사카와의 형이 갖고
있었다. 디스켓은 노트북에 끼워진 채 있었던 것이다.
안도는디스켓에서 문서를 불러내 읽기 시작했다 문서는 '링'이라
는 이름이 붙여져 정리되어 있다. 거기에 기술된 사실을 가오루는 이
미 알고 있었다. 다카야마 류지와 아사카와의 눈과 귀를 통해 체험
한 것과 거의 일치하고 있었다
아사카와의 감각 기관을 통해 얻은 정보를 이번에는 문자라고 하
는 매체를 이용해 재확인하게 되었다. 비디오 테이프의 내용은 '링'
이라는 문서로 변화해 있었던 것이다
그런 때, 안도에게 DNA 염기 배열의 암호로 된 하나의 메시지가
도달했다.
"뮤테 이 션 (돌연변이 ) ."
염기 배열을 힌트로 암호를 푼 안도는 추리를 한다 다카노 마이치
방에 남겨져 있던 비디오 테이프는 지워져 있었다. 남은 두 개도 어
떤 방법으로 처치되어 비디오 테이프 자체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맨 처음에 발견된 테이프는 네 남녀의 장난에 의해 마지막 부
분이 지워져 있었다. DNA에 비유한다면 유전자의 일부에 상처를
입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여기에서 제3자의 손을 빌려 복사되는 비디오 테이프와 바이러스
의 유사점에 생각이 미쳐 , 유전자가 상처받은 것에 의해 비디오 테이
프가 돌연변이를 일으켜 새로운 종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가정해 본
다. 그렇게 되면 낡은 종인 비디오 테이프는 필요없게 되어 버린다.
모두 없어져도 그만이다.
여기에서 문제는 두 가지로 좁혀진다.
· .비디오 테이프는 진화해서 무엇이 된 것인가?
·아사카와는 왜 살아 있는 것인가?
거기에 또 하나의 힌트가 주어졌다. 다카노 마이의 유체가 마침내
발견된 것이다.
그녀는 초라한 빌딩 옥상 배수구에서 아사인지 동사인지 판단되지
않는 상태로 발견되었다. 해부해 보았더니 급성 심근경색의 소견이
없어 다른 7구의 사망 원인과는 확실히 다른 단순한 쇠약사 그러므
로 빌딩 배수구에 굴러 떨어지지 않았다면 죽는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더욱이 이상한 일은 배수구에 떨어진 직후, 다카노 마이가 그 자리
에서 출산한 흔적이 있다는 얘기였다. 태반이 벗겨진 것에 의한 상처
와 탯줄이라고 생각되는 살점이 그 증거였다.
여기에서 또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다카노 마이는 무엇을 낳은 것인가?
그러나 생전의 다카노 마이를 아는 안도로서는 이상해서 견딜 수
가 없었다. 그녀는 전혀 임신부의 체형을 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
다.
대학 병원에서는 여러 가지 각도에서 분석이 행해졌다. 비디오 테
이프에 관련되어 목숨을 잃은 유체는 모두 11구에 달했다. 의식이 돌
아오지 않은 채 병실 침대에서 죽어간 아사카와도 이중에 포함되어
있다
그들은 비디오 테이프를 본 것에 의해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있었
는데, 바이러스에는 현저한 특징이 보였다. 링 모양으로 고리를 이룬
바이러스와 고리가 끊어져 끈 모양의 바이러스, 두 가지 형태가 존재
했던 것이다.
급성 심근경색 이외의 원인으로 죽은 아사카와와 다카노 마이의
사체 2구에서는 끈 모양의 바이러스가 많이 발견되었고 나머지 9구
에서는 링 모양의 바이러스만 발견되었다. 바이러스가 죽음을 초래
하는지 아닌지의 분기점은 거기에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고리가 끊
어지면 살고, 링 모양 그대로라면 일 주일 만에 확실한 죽음을 맞이
하는 것이다.
논리적인 해석을 찾아내려고 안도는 기를 썼다. 거기에서 문득 어
떤 유사점을 깨달았다
‥‥끈 모양의 바이러스는 정자의 움직임과 비슷하다
다카노 마이의 유체에는 뭔가를 출산한 흔적이 남아 있다. 만일 다
카노 마이가 배란일에 비디오 테이프의 영상을 보았다면 어떨까? 발
생한 바이러스가 심장의 관동맥이 아니라 배란된 난자를 항한 것이
라면‥‥
그리하여 그녀는 임신이 되고 어떤 것을 출산했다.
·무엇을 출산했을까?
아마도 다카노 마이의 방에 있었던 것이 그것임에 틀림없다
안도는 같은 논법을 아사카와에게도 적용시켜 본다
‥‥아사카와는 남자니까 아이를 낳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그는 무
엇을 낳은 것인가?
그런데 안도는 동시에 이 의문의 해답을 얻게 된다.
마침 그때,안도는다카노 마이의 언니라고 밝히는 여성의 방문을
받는다. 다카노 마이가 추락사한 빌딩 옥상에서 우연히 만나, 우연한
재회를 기회로 친해진다.
그녀가 샤워를 하고 있는 동안에 마침 신간 안내 소책자를 손에 들
고 있다가 신간으로 '링'이라는 타이틀이 눈에 띄었다. 놀랍게도 아
사카와가 쓴 리포트가 책으로 출간되어 대량으로 유포되려 하고 있
었다.
남자인 아사카와가낳은것,그것은 바로 '링'이었다 비디오테이
프는 '링'이라 이름붙여진 책으로 진화하여 폭발적인 증식을 이루려
하고 있었다. 아사카와는 리포트 '링'을 작성하여 바이러스 증식에
도움을 준 것이다
그때, 안도에게 생전의 야마무라 사다코를 찍은 사진이 팩스로 보
내져 왔다. 그 얼굴을 보고 안도는 더욱 큰 경악에 횝싸인다 방금 막
샤워를 하고 나온, 다카노 마이의 언니라고 밝힌 여성이 야마무라
사다코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카노 마이가 낳은
것‥‥ 그것은 야마무라 사다코였다.
20년 전, 산간 우물에서 완전히 썩었을 야마무라 사다코가 다카노
마이의 자궁을 빌려 되살아났다· . 그 사실이 머리에 침투하기도 전
에 안도는 의식을 잃고 말았다.
이윽고 의식을 되찾은 안도에게 야마무라 사다코는 자신에게 협
력하기를 요청한다. 비디오 테이프는 '링'으로 진화하고 폭발적인 증
식을 이루려 하지만, 그것을 눈치챘다고 해서 방해를 하지 말아 주었
으면 한다고
'링'은 '링'을 읽어 버린 독자들의 힘을 빌려 갖가지 매체로 변화
해 갈 터였다. 배란일에 그 매체와 접촉한 여성은 임신하여 야마무라
사다코를 낳고, 그 이외에 살아남는 사람은 증식에 손을 빌려 준 자
뿐이다.
이리하여 崙'은 출판과 영화, 게임. 인터넷 등 다양한 매체를 통
해 세계에 침투하게 된다.
이 재앙이 어떤 결말을 야기할것인지 안도로서는 상상이 되지 않
았다. 간단히 해석하면, 야마무라 사다코라고 하는 자웅동체.단일
유전 정보가 잇따라 재생산되고, 링 바이러스는 돌연변이를 반복하
면서 착착 배출되어 나가게 된다.
바로 다양성이 있기 때문에, 개체에게는 생명으로서의 재미가 생
긴다. 그것이 단 하나의 유전 점보로 수렴되어 가면,생명의 활력은
일체 사라져 버린다. 야마무라 사다코 개인에게 있어서는 영원한 생
명을 얻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그 이외의 생명은 모두
세계의 한 귀퉁이로 내몰려 어쩔 수 없이 멸망하고 마는 것이다.
안도는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야마무라 사다코의 협력자가
되어 살아남을 것인가, 혹은 매장될 것인가?
그런데 협력자가 되었을 경우의 보상은 너무나 컸다.
·2년 전 익사 사고로 잃은 아들의 부활
안도의 가슴에 깃들인 깊은 슬픔은 2년 전에 어린 아들을 잃은 것
에서 비롯되었다.
안도를 비롯한 대학 병원 스태프와 야마무라 사다코의 특수한 자
궁이 있다면, 죽은 아들의 재생은 가능하다. 바다에 빠지는 순간 안
도의 손가락에 아들의 머리카락 몇 개가 빠졌고, 그것은 지금도 손에
남아 있었다 아들의 유전 정보가 소중히 보관되어 있었다.
선택의 여지는 없을 것 같다. 협력자가 되든 되지 않든 생명체는
결국 멸망한다. 그렇다면 그토록 신에게 기원했던 아들의 재생문제
를 해결하고 싶어졌다.
가오루는 안도의 결단을 비난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아들을 재생
시키고 싶다는 절실한 마음은 가오루에게도 전해져 왔다. 같은 상황
에 처하게 된다면, 자신도 어쩌면 안도와 같은 행동을 했을지도 모르
기 때문이다.
안도 팀은 야마무라 사다코로부터 수정란을 꺼내 죽은 아들의 세
포핵과 교환한 뒤 다시 제자리에 놓았다. 일 주일 후, 안도의 아들은
아기로서 야마무라 사다코의 배에서 태어났다.
안도는 세계를 팔아넘기는 대신 2년 전에 잃은 아들의 목숨을 되
찾은 것이다.
'링'이 발간되자 얼마 지나지 않아 책을 읽은 독자 중 약 2만 명의
여성이 임신하여 야마무라 사다코를 출산했다 협력자의 손으로
'링'의 형태는 점차 변해 더욱더 감염자를 늘리고,폭발적인 증식으
로 발전했다. 기하급수적인 증가 방식이 아니었다. 하나의 유전자로
수렴되어 가는 모습은 요원(遙原)의 불길 같았다.
링 바이러스는 지적 생명체 이외의 여러 가지 생명에 영향을 미쳐,
다양성을 빼앗아가는 방향으로 생물계를 왜곡시켜 갔다. 가지 뻗음
도 좋아 광범위하게 잎을 벌리고 있던 생명수(生命樹)는 가냘프게
자란 한 자락 줄기 같은 형태로 되고 만다. 종은 단일한 유전자에게
점령당하고,종의 수 자체도 격감해 갔다. 그 모습은 생명수를 거슬
러 올라 태고의 생명으로 되돌아가는 것 같았다.
다양성을 잃은 대신에 얻은 것은 영원한 생명이었고, 카오스의 가
장자리에서 굴러 떨어져 얻은 것은 절대적인 안정이었다. 생명이 진
화한다는 것은 극히 미묘한 밸런스 감각을 가지고 험준한 봉우리를
더듬어 가는 것과 비슷하다. 봉우리를 포기하고 골짜기 밑에서 이상
향을 발견하고, 그곳을 안주의 땅으로 정해 버린다면 생명의 진화는
더 이상 성 림되기 어렵다.
루프계의 생명들은 지루하고 변화가 없는, 같은 것이 반복되는 인
생을 살면서 , 그 이후의 진화를 포기하고 앙화해 버렸던 것이다
가오루는 키보드를 조작하여 시점을 안도에게서 떼어 냈다. 서서
히 하늘로 올라가듯 시선을 높여 갔다. 루프에 꿈틀거리는 생명들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기 위해서이다. 개체는 우글거리는 조그만 무
리를 만들고 있었다. 생명들이 만든 모양은 단조롭기만 할 뿐 그다지
아름다운 것이 아니었다.
어디선가본적이 있는 광경이다 대학 병원 병리학 연구실에서 아
버지의 암세포를 배양하고 있는 샬레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적이
있다. 투명한샬레 속에서 암세포는 무질서한 증식을 반복하여 반점
모양의 흥한 모양을 만들고 있었는데, 그때의 모양과 지금 아득히 높
은 곳에서 루프계를 바라보았을 때의 모양이 꼭 닳았다.
가오루는 헤드 마운티드 디스플레이를 머리에서 벗고 중얼거렸다.
"루프는 암화한 것이다 "
루프가 암화한 경위는 이제 충분히 이해된 셈이다.
시간 감각이 마비되어 있었다 헤드 마운티드 디스플레이와 데이
터 글러브를 끼고 컴퓨터 앞에 몇 시간 동안 앉아 있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루프 안의 시간과 실제 시간은 흐르는 속도가 많이 다르다. 게다가
지하실이라고 하는 빛이 닿지 않는 환경 탓에 시간 파악이 매우 곤란
하다.
가오루는 의자에서 일어나려다 흔들흔들 비틀거렸다. 며칠 동안
마시지도 먹지도 않고 지낸 것 같기도 하다 극도의 피로감이 몰려왔
다. 갈증이 심하고 공복감은 어느새 한도를 넘었다
손목 시계를 보고 이미 날이 밝기 시작한 것을 확인하자 지하실 계
단을 올라와 지상으로 나왔다. 오토바이의 짐 싣는 곳에는 생수가 동
여매져 있으니 일단 물을 마시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사막의 새벽, 공기는 아주 차가워져 있었다. 가오루는 생수 병을
꺼내고는 목젖을 울리며 단숨에 반 정도를 들이켰더니 살아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루프라는 세계를 엿보고 있는 동안 가오루는 세계의
윤곽이 엷어져 가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혔다. 자신이 살고 있는 대지
의 확실한 감촉을 얻을 수 없었던 것이다. 현실과 가상이 유리되었다
가 또다시 흔들흔들 겹쳐지곤 한다.
가오루는 오토바이 시트에 기대어 남아 있는 생수를 전부 다 마셨
다. 물을 마시면 갈증은 가신다 육체의 정직한 반응이었다 이어 누
구에게 거리낄 것 없이 바지 지퍼를 내려 방뇨했다. 수분의 보급과
배설에 의해 몸은 아주 조금 되살아난 듯싶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
서 육체로서 존재한다는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
가오루는 비운 페트병을 손에 쥔 채, 다시 지하실 계단을 내려가
계단 중간에 앉았다. 루프가 암화한 경위는 바로지금 이 눈으로 확
인했다. 어딘지 꾸며낸 듯한 내용이 납득이 가지 않았다. 현실과 조
금도 다름 없는 영상‥‥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당무계한 불쾌감은 지
워 버리기 어려웠다
본 사람을 정확히 일 주일 후에 죽게 하는 비디오 테이프 같은 것
은 전자 공간이라면 간단히 만들어진다. 복사에 의해 죽음에서 벗어
나는 방법도 장치하기는 간단하다. 일 주일 후로 세트된 죽음의 프로
그램을 기일 내에 복사한 경우에 한해 해제하도록 설정해 두면 그뿐
이다.
문제는 루프라고 하는 공간 내부에 살고 있는 개체가 그 내부의 힘
에만 의지해서 할 수 있는 범위를 넘고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현
실로부터의 작용이 없는 한, 일 주일 후에 죽음을 초래하는 비디오
테이프의 작성이나 해제는 할 수 없다.
루프에서 체험한 죽음은 대부분의 경우, 비디오 테이프를 본 결과
로 비롯되고 있다.
가오루는 다시 한번 이 점을 확인하고 싶어졌고,이어 무거운 몸
을 움직여 컴퓨터 앞에 앉았다.
비디오 테이프의 영상을 본다는 행위가 루프에 있어서 몇 가지 죽
음의 방아쇠라고 한다면, 비디오의 영상을 보고 있는 순간을 구체적
으로 재조사할 필요가 있다.
가오루는 탐색을 시작했다 루프의 개체가 비디초 테이프의 영상
을 보는 장면을 차례로 디스플레이에 불러내 보는 것이다. 특정 개인
에게 고정시키지 않고 객관적인 시점에서 바라보기로 했다.
맨 처음에 나타난 것은 산장풍의 건물 거실에 놓인 TV 화면을 공
포와 조소를 반반 띄운 표정으로 응시하는 네 명의 남녀 얼굴이었다.
네 명 중 하나는 무리하게 공포를 감추고, 적의가 담긴 웃음을 주
위에 뿌리면서 다른 세 명을 자신의 페이스로 끌어들이려 하고 있었
다. 허세인 것이 빤히 들여다보인다.
젊은 여성 중 하나는 영상이 끝나자 얼굴이 창백해져 '싫어'라고만
말하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허세를 떨던 사내는 여자의 한마디에 의
해 주위의 분위기가 공포로 가득 차는 것을 피하려는 듯 tV 화면을
발로 걷어찼다
"이런 거 거짓말일 게 뻔해."
"잘 만든 협박 문구잖아?"
또 다른 여자의 얼굴에는 공포가 전혀 없었다. 태연히 담배를 피우
며 가면과도 비슷한 무표정한 얼굴로 비디오 테이프를 되감고는 다
른 세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당연한 처치인 듯 일 주일 후의 죽음
에서 피할 수 있는 방법이 기록된 부분을 지워 버린 것이다.
"이거 , 애들한테 보여 줘서 겁주자."
처음 한동안 여자는 비디오 테이프를 가지고 돌아가 친구에게 보
여 무섭게 만들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른 세 사람은 주저했다. 이
기분 나쁜 비디오 테이프와는 오늘밤으로 연을 끊고 싶었다 허세를
부려 業자 끝까지 연관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일부러 가지고 돌아가
쓸데없는 재앙을 떠맡을 필요가 어디에 있나· . 세 사람의 주장은 그
런 것이었다.
그때 방의 전화벨이 울렸다. 세 사람이 깜짝놀라숨을 죽이고 있
는 가운데 여자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수화기를 들어올렸다.
"네 , 여보세요."
여자의 얼굴로 판단해 볼 때, 수화기 저쪽에서는 계속 아무 말이
없는 토양이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
초조함을 담고 있던 여자의 목소리는 점차 떨리기 시작했다. 침을
꿀꺽 삼키고 수화기를 내동댕이치듯이 제자리에 놓은 여자는 일어나
큰소리를 치고 있다
"뭐야, 도대체?"
가오루에게는 어디선지 모르게 걸려 온 전화의 주변이 왠지 일그
러져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다음에 비디오 테이프를 본 것이 아사카와였고, 그 다음이 다카야
마였다. 양쪽 모두 이미 본 영상이라서 가오루는 건너뛰고 다음 순간
을 찾았다.
네 번째로 영상은 본 것은 아사카와의 아내와 딸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놓여 있던 비디오 테이프가 마음에 걸려 VTR에
세트시킨 순간, 특별히 볼 마음도 없었는데 시작되어 버린 영상이었
0.
딸을 옆 의자에 앉히고, 거둬들인 빨랫감을 다림질하면서 아사카
와의 아내는 TV 쪽으로 무심코 시선을 던졌다. 이내 자신도 모르게
파고들듯이 화면을 지켜보는 어머니를 따라 딸도 똑같은 포즈로 얼
굴을TV로 향한 것이었다
모녀가 비디오 테이프를 끝까지 본 것과 동시에 거실에 있던 전화
가 울렸다. 아사카와의 아내는 VTR의 전원을 켜둔 상태로 거실로 달
려 가 수화기를 들었다
"네, 아사카와 집입니다. "
대꾸하는 소리는 없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아사카와의 아내는 잠시 동안 수화기를 쥔 채로 있었다. 역시 똑같
았다 전화 주위의 공간에 일그러짐이 보인다. 물체가 아주 약간 이
중으로 되고, 직선이어야 할 선이 흐물거리게 구부러져 있다. 어지간
히 주의하지 않으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미묘한 일그러짐 무언가
가 혼란스러워져 있는 것 같았다.
다음에 비디오 영상을 본 것은 가오루가 예측하기로는 아사카와의
장인, 장모여야 했다. 그런데 실제로는 달랐다.
디스플레이에 표시된 것은 다카야마 류지의 방이었다. 날짜와시
간으로 판단해 보건대, 다카야마가 죽기 직전의 영상임을 알 수 있었
다.
다카야마는 죽음 직전에도 비디오 영상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가오루는 장면을 조금 앞으로 되돌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
번에는 꼼꼼히 관찰해 가기로 했다.
책상에 앉아 몰두하여 원고를 쓰고 있던 다카야마는 꾸벅꾸벅 고
개를 떨구고 잠에 빠져들고 있었는데, 잠들 사이도 없이 덜커덕 어깨
를 떨며 벌떡 일어났다. 목덜미에 주름이 잡히고 머리카락이 곤두서
있다. 뒤에서 보이는 다카야마는 조금 우스꽝스러운 몰골을 하고 있
었다.
가오루는 디스플레이의 시점을 어디에 고정시켜야 할지 망설였다.
이대로 다카야마의 등뒤에 두어야 할지 아니면 다카야마의 시청각
에 일치시켜야 할지 미처 신속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흔들흔들 등뒤를 헤매던 끝에 디스플레이의 시점은 다카야마 본인
의 시청각으로 고정되었다. 이 순간부터 가오루의 시청각은 다카야
마의 것과 겹쳐졌다.
다카야마의 호흡은 격렬했다. 몸에 이변이 생기고 있음을 직감으
로 깨달은 모양이다 다카야마는 바로 눈앞에 다가오고 있는 죽음을
상당히 냉정하게 받아들이려 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많은 것을 이
해하려고 부지런히 머리를 작동시킨다. 의문은 차례로 뇌리를 스쳤
다.
· .난 비디오 테이프의 수수께끼를 푼 게 아니었나?
‥‥그런데 왜, 아사카와는 살아 있지?
다카야마의 시선은 방 구석에 놓인 VTR로 향해졌다. VTR에는 그
비디오 테이프가 세트된 채 놓여 있었다. 다카야마는 VTR가 있는 데
까지 기어갔다. 심장 고동이 격렬하다. 몸을 움직이는 데 격렬한 고
통이 따른다.
가오루는 다카야마의 몸에 어떤 이변이 생기고 있는지 잘 알고 있
었다 심장 관동맥에 육종이 생겨 그것이 혈액의 흐름을 막으려 하고
있다. 급성 심근경색의 증상이었다.
다카야마는VTR에서 테이프를 꺼내더니 그 앞과 뒤를 자세히 관
찰했다.
다카야마가 생각하는 내용을 가오루로서는 알 수가 없다
다카야마는 떨리는 손으로 비디오 테이프를 쥐고 앞뒤를 돌려 등
라벨에 씌어진 제목을 읽었다.
그리고 무슨 생각에서 인지 시선을 천장으로 돌리고 창 밖과 벽, 책
장으로 재빠르게 이동시켜 갔다. 어떤 것을 찾고 있는 모양이다.
다시 다카야마의 시선은 손에 든 비디오 테이프에 고정되었다
다카야마는 분명 흥분하고 있었다. 가슴의 통증 때문이 아니라 제
정신을 잃고 당황해 부산을 떠는 모습이 손떨림으로 변해 화면에 나
타나고 있었다.
그리고 다카야마는 비디오 테이프를 삽입하고 재생 버튼을 누른
것이다.
‥‥왜 다카야마는 죽음 직전에 비디오 테이프의 영상을 보는 걸까?
가오루의 눈앞에는 이미 많이 보아 익숙해져 버린 그 영상이 비쳐
졌다
계속해서 다카야마는 책상 위에 놓인 시계로 눈을 돌렸다. 9시 48
분을 나타내고 있다.
시간을 확인하더니 그는 바닥에 ◎굴고 있는 수화기를 찾아 기어
갔다. 필사적인 생각이 가오루에게도 전해져 온다. 뭔가 활로를 찾았
다고 말하려는 걸까?
수화기를 쥐더니 황급히 번호를 눌렀다. 네 번 벨이 울리자 여자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울려퍼져 온다.
"여보세요· ."
가오루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고 있었다. 다카노 마이일 것이다.
다카야마는 귀에 수화기를 댄 채 눈으로는 계속IV화면의 영상
을 쫓고 있었다. TV화면에는 주사위 눈이 비쳐져 있었다 납 용기
속에서 천천히 회전하다 1에서 6까지의 숫자를 표시하는 주사위‥‥
다카야마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는 전화선을 통
해 다카노 마이의 귀에 도달한 모양이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다카노 마이는 다카야마의 몸이 걱정스러워 대답을 재촉했다
하지만 다카야마는 자신의 의지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 순간,
눈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포착하고 있었다. 가오루는 자신의
얼굴이 디스플레이에 비친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희미한 다카야마
의 망막을 통한 것이기 때문에 tV 영상을 명료하게 잡는 것은 이미
불가능하다. 심장의 고동은 격렬하고,혈관의 압력이 이곳저곳의 피
부를 자극하는 것 같다.
다카야마의 움직이지 않는 눈은 비디오 근처 공간에 고정되어 있
었다 그곳에서 안개 같은 연기가 피어올라 원통형을 이루어 천천히
회전하고 있다. 걸레를 쥐어짠 것 같은 형태로 공간이 뒤틀려 갔던
것이다
그때 다카야마는 전화기를 움직여 일그러져 있는 공간으로 이동시
키더니 또 다른 번호를 눌렀다. 가오루는 고개를 조금 숙여 다카야마
가 누르려는 번호를 보려 했다.
그러나 수화기를 볼 필요는 없었다. 비디오의 영상에 흐르는 주사
위의 눈· .
3325413624516342342541362451634343254136245163413
5354136245163f25425
다카야마는 주사위 눈을 연속해서 누르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았
다.
· .죽음을 앞에 두고 정상적인 사고력이 불가능해진 것일까?
가오루는 그렇게 판단내릴 작정이었다.
마침 그때, 컴퓨터 바로 옆에 세트된 위성 전화의 벨이 울렸다. 을
리고 있는 것을 깨닫기까지 가오루에게는 몇 초가 필요했다. 현실의
소리인지, 다카야마의 방에서 나는 소리인지 구별해 내지 못했기 때
문이다.
현실의 소리임을 알고 가오루는 수화기를 들어 헤드 마운티드 디
스플레이를 옆으로 밀고 귀에 대었다
들려온 것은 지금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 같은 호홉 소리였다. '하
아하아' 하는 격렬한 숨결이 귓가에 선명하게 강약의 리듬을 새겼다
그 리듬은 디스플레이에서 흐르는 호흡과 겹쳐졌다
가오루는 귀를 의심했다. 수화기에서 들려온 것은 분명 디스플레
이 속의 남자 목소리이다. 자동 번역 장치를 통하고 있었으므로 목소
리의 질이 조금 변해 있었다.
'지금 거기 있나?이봐,듣고 있어?부탁이 있다. 날 그쪽으로 데
려가줘.그쪽 세계로 가고 싶어. 이 이상 멋대로 하게 내버려 두지
않겠어."
가오루의 머리는 혼란스러웠다. 디스플레이에는 수화기를 꼭 쥔
다카야마의 왼손이 확대되어 있다. 전화를 걸고 있는 것은 틀림없이
다카야마이다 그리고 그 전화를 받은 것은 지금 여기에 있는 가오루
였다.
가오루가 혼란스러워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자기가 건 전화
를 자기가 받는 듯한 일이기 때문이다.
‥‥루프계에서 건 전화가 현실로 연결될 리 없다.
가오루는 말을 잃고, 그 암흑 속에서 다카야마로부터 온 전화는 끊
어졌다 하지만 뇌리에는 아직 그 목소리가 남아 있었다
날 그쪽으로 대려가 줘.
그 의미가 침투되기까지는 다시 몇 분이 필요했다.
10
가오루는 자신이 세운 절차를 몇 번이나 머릿속에서 반복해 보았
다 그리고 자신의 가설이 빗나간 것인지,혹은 진실에 접근하고 있
는 것인지 검증할 방법이 딱 하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맨 처음에 해야 할 것은 컴퓨터 연구소에 있는 아마노에게 사실 확
인을 의뢰하는 일이다.
"링 바이러스의 DNA를 해석하여 현재 세계에 만연되어 있는 전이
성 인간 암 바이러스의 유전자 배열과 비교할 것."
지시는 간단 명료했다.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의 DNA해석은
이미 완료되어,그 염기 배열도는 가오루도 갖고 있었다. 따라서 링
바이러스만 해석하면 양자의 비교는 간단히 된다.
링 바이러스의 유전자 배열은 어떤 법칙에 따라0과 1의 2진법이
ATGC네 개의 알파벳으로 바민져 있을 것이다 컴퓨터를 이용하면
해석은 눈 깔짝할 사이에 이루어진다.
가오루는 잠간 눈을 붙이면서 아마노의 대답을 기다리기로 했다.
가오루는 오토바이의 짐 싣는 곳을 열어 침낭을 꺼내 지하실로 가져
와 책상 옆에 펼쳤다. 물을 마시고 영양식을 배에 넣고 나서 침낭을
뒤집어쓰고 새우처럼 등을 구부렸다.
잠에 빠지기까지의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반 나절의 긴장도
아랑곳하지 않고젊은가오루의 체력에 의해 의식은 강제로 잠에 빠
져 들어갔다.
두 시간 후, 컴퓨터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디스플레이는 빛을 깜빡
거리고, 스피커는 신호음을 발신하고 있었다.
가오루는 침낭에서 빠져나와 책상에 앉았다. 단 두 시간의 수면으
로 체력은 충분히 회복되었다. 개운한 머리로 가오루는 아마노로부
터 회답을 받았다.
링 바이러스와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의 유전자 배열을 비교한
결과가 디스플레이에 늘어서 있었다. 염기 배열의 공통된 부분이 표
시되어 있었는데, 유전자 몇 개에는 명확한 유사점이 보였다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유사점이 많았다. 이 정도로 비슷하다면, 이미 다른
바이러스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원래는 똑같은 바이러스였던 것이
어떤 작용으로 다른 변종으로 변이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는 링 바이러스에서 유래됐다고 보아도 틀림없을
것 같다.
그런 사실을 확인하자, 가오루는 일단 컴퓨터가 표시하는 데이터
에서 멀어졌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일단 세워 두었던 가설을 부정하려
했다 상식과의 싸움이었다. 순서를 더듬어 가면 다른 해석은 성립할
것 같지 않은데도 상식이 방해를 한다.
·댕정히 생각해 .
가오루는자신을 질타했다. 고정 관념에 사로잡히지 말고,유연한
사고를 지속시 켜 야 한다.
가오루는 다카야마 류지 쪽에 서서 그의 몸에 일어난 일을 자연스
런 흐름으로 다시 파악하기로 했다. 죽음을 앞에 두고 죽음의 운명으
로부터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가 직면한 것
은 그야말로 근원적인 욕구였을 것이다.
가오루는 대담한 추리를 시작했다.
· .죽음 직전, 다카야마 류지는 직관으로 이해했던 것이 아닐까?
출발점은 그곳이었다 이해한 사항 가운데에는 모든 것이 포함되
어 있었다. 중요한 것은 그 점이다
‥‥루프계에 사는 다카야마 류지라고 하는 개체는 모든 것을 이해
했다
일단 그렇게 가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사카와가 살아 있고, 자신은 죽음의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은 어째
서인가?일 주일 동안에 아사카와가 알지 못하고 취한 행위 가운데
자신이 하지 않은 행위는 무엇인가?
다카야마 류지는 그 시점에서 비디오 테이프를 복사하는 것이 죽
음을 회피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실제로 아사카와는 다카
야마 류지를 위해 비디오 테이프를 복사했다
그런데 다카야마 류지의 이해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비디오
테이프를 보는 것에 의해 일 주일 후의 죽음이 세트되고, 비디오 테
이프를 복사하는 것에 의해 세트된 죽음이 해제된다‥‥ 그 가정을 한
걸음 앞으로 진행시킨 것이다.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할까라는 의문
을 한 점에 집중시켰다
"이 세상은 모두 가상 공간이다. "
평소부터의 사상이 영향을 끼친 것인지도 모르지만, 다카야마 류
지는 그가 존재하는 세계를 그렇게 이해했다.
가상 공간이라고 한다면 불합리한 죽음을 세팅하는 것도, 해제하
는 것도 자유자재이다. 조종자는 누구인가? 가상 공간을 만들었을
상위 개념이다
·신 .
어쩌면 그 말이 다카야마 류지의 뇌리에 번뜩인 것이 아닐까?
세계를 창조하고 작동시키는 것은 신의 역할일 것이다. 루프에 사
는 주민의 입장에서 보면 창조주는 바로 신이다.
다카야마 류지는 죽음 직전에 신과의 교섭을 가지려 했다. 그를
위해서 현실과 신의 세계의 접점(인터페이스)을 찾지 않으면 안 된
다. 인터페이스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하고 다카야마 류지는 필사적
인 모습_◎로 찾았다.
그의 눈이 방 천장과 벽을 기어다닌 것도 그 때문이다. 이 세상과
신의 세계를 잇는 한 가닥의 가는 선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비디오 테이프 이외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비디오 테이프를 재생시
키는 것에 의해 죽음이 세팅된다고 한다면, 필시 인터페이스는 그 부
근에 나타날 것이다. 출입구에는 아주 작은 공간의 일그러짐이 보일
것이다. 만일 인터페이스가 다른 곳에 있다고 해도 이미 때는 늦었다.
다카야마 류지는 되든 안 되든 비디오 테이프에 걸어 보기로 했
다.
비디오 영상의 재생을 시작했다. 마음이 흔들려 , 죽음을 회피할 시
간의 여유가 있든 없든 어쨌든 다카노 마이에게 전화하지만 그런 와
중에도 다카야마 류지의 눈은 비디오의 영상에 못박혀 있었다 TV
화면은 납 용기 내부에서 회전하는 주사위를 비추고 있었다 주사위
의 눈은 1에서 6까지의 숫자를 몇 번이고 화면에 표시했다
다카야마 류지는 비명과 같은 소리를 질렀다 단말마의 비명이 아
니었다. 주사위의 눈이 똑같은 숫자를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
기 때문이다
3325415624516342342541362451634343254136245163413
3254136245163423425
133, 234, 343을 빼면 주사위 눈은 '2541362451634'라고 하는 13
자리의 숫자를 집요하게 반복하고 있다. 유전자의 염기 배열에 환한
다카야마 류이는 이 3종류의 숫자가 정지 코드 암호인 것을 깨달은
것이다.
다과아마 류지는 다괴노 마이에게 걸던 전화를 도중에서 끊고 곧
바로 그 번호를 눌렀다.
회선이 연결되었다. 루프라는 가상 공간에서 현실로의 접속이 가
능해진 것이다
상위 개념과 접속된 것을 알자마자 다카야마는 자신의 바람을 말
한다.
"날 그쪽으로 데려가 줘 ."
노골적이고 단도직입적 인 바람이다. 과학자라면 누구나 절실히 원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죽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부 세계에서 그것을 만들어 낸 외부 세계로의 이행‥‥바로 세계
의 구조를 알아내는 것과 다름없다.
세계의 구조를 아는 것은 가오루의 꿈이기도 했다.
루프로부터 이쪽 세계로 이행할 수 있다면, 다카야마 류지의 꿈은
이루어진다. 루프를 움직이고 있는 법칙이 모두 이해되는 것이다. 그
들에게 있어서 우주의 바깥쪽에는 무엇이 있는 것인가? 혹은 우주가
탄생하기 이전,시간과 공간은 어떻게 되어 있었던 것인가?모든해
답을 알 수 있다.
'랄 그쪽으로 데려가 줘 ."
바람은 언뜻 보기에 어린애 같지만. 똑같은 바람을 가질 가오루로
서는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것이었다. 세계를 디자인한 신이 있다
면, 신의 세계로 가 곧바로 사실을 듣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루프계에서 전화를 건 직후, 다카야마는 죽게 된다. 디스플
레이는 다카야마의 죽음을 관찰하고 있었다. 루프를 조종하던 오퍼
레이터 한 사람은 가오루와 마찬가지로 다카야마가 희망하는 것을
들었을 것이다.
들었던 사람은 어떻게 했을까? 다카야마의 바람을 들어 주기로 한
것일까? 비디오 테이프의 수수께끼를 푸는 것뿐만 아니라, 현실을
가상 공간이라고 판단한 직감력은 월등한 것이다 뛰어난 능력에 홍
미를 품은 사람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가오루는 의학적인 지식을 구사하여 다카야마를 현실 세계에서 재
생시키는 방법을 생각했다.
다카야마의 육체를 구성하는 모든 분자 정보를 해석하여 그 상태
그대로 재생시키는 일은 일단 불가능하다. 다만, 그의 유전 정보는
메모리에 보존되어 있을 것이므로 그것을 이용하여 현실 세계에 탄
생시키는 것은 아마 가능할 것이다.
2,000메가 염기대의 조각을 만들 수 있고, 게다가 그 염색질 구조
를 재현할 수 있는 게놈 신시사이저가 개발된 것은 금세기 초였다.
그후 얼마 지나 완성된 것은 조각 하나하나를 서로 연결시켜
'게놈 플라그먼트 얼라이먼트 메소드(GFAM)'라는 기술이다. 이것
에 의해 모든 사람의 염색체의 재합성이 가능해졌다.
일단 수정란을 하나 준비한다. 그 핵 부분을 도려내 다카야마의 유
전 정보를 기초로 이들 기술을 응용하여 작성한 염색체를 묻는다 수
정란을 모체에 다시 넣는다. 그로부터 10개월만 지나면, 세계 어딘가
에서 다카야마 류지가 태어나게 된다. 물론 아기로서 이다. 아기이긴
하지만 유전자는 다카야마의 것과 똑같다.
그런데 단 하나 계산 착오가 있었다. 가령 다카야마를 재생시킨 사
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는 어떤 것을 잊었든지 , 순서 도중에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다카야마는 링 바이러스에 감염된 보균자이다. 그의 유전자를 게
놈 신시사이저를 이용해 현실의 분자로 재생할 때, 바이러스가 유출
되고 말았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지 않다면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
와 링 바이러스가 이토록 유사한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
그리고 유사점은 동시에 다카야마 류지가 현실 세계에서의 재생
을 이루었다고 하는 증거이기도 하다. 재생 과정에서 그가 갖고 있던
링 바이러스가 미묘하게 형태를 바꾸어 유출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납득되는 해석이기 때문이다.
가오루는 계속 자문했다.
‥‥대체 누가 다카야마를 이 세계로 재생시킨 것인가?
대답은 분명하지 않다. 또한 무엇 때문에 그를 현실 세계에 재생시
킨 것인지 그의도를전혀 알수 없었다 가상공간의 생명체였던 것
을 현실에 살림으로써 무슨 일이 생길 수 있을까?
어린 시절, 가오루는 TV 게임을 가지고 놀았던 적이 있다. 그다지
열중하지 못하고 바로 싫증이 났지만, 3차원 영상에서 등장하는 공
주님이나 왕자텀은 컴퓨터 그래픽으로,특유의 약간 울퉁불퉁한 곡
면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사람과 아주 똑같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름답다고 생각되는 여성 캐릭터는 많이 있었다. 그중 하나를 현실
세계에 등장시킨 것과 같다. 그리고 그녀가 가지고 있던 컴퓨터 바이
러스가 현실 바이러스로 세계를 석권하고 만 것이다.
비유해 보니 아무래도 황당무계했다 하지만루프가세계 최고 수
준의 컴퓨터 시뮬레이션이라고 한다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이론
상으로는 실현 가능한 것이다.
‥‥다카야마 류지는 현재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진상에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케네스 로스만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의 발생원을 알았다. 열쇠를 쥐고 있는
건 다카야마이다
이제야 가오루도 그 말을 믿기 시작했다
11
계단을 올라 지상으로 나왔을 때, 가오루는 지하실 컴퓨터를 상대
로 몇 년이나 지낸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혔다. 태양은 하늘 한복판
에 있어 강한 햇살이 쨍쨍 대지를 태우고 있다. 빛의 많음과 공간의
넓이에 있어 지하실과는 천양지차였다
자신의 육체가 예전과 달라져 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몇 가
지 인생을산탓일 것이다 그러나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던 것은총
42시간에 지나지 않았다. 응축된 시간을 맛본 것이다.
오토바이 탱크에는 모래 먼지가 붙어 있었다. 계곡을 넘는 바람이
'휘휘' 하고 폐가 틈새로 끼여들고 있었다. 여기저기 사막 표면에서
먼지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지하실에서 지낸 시간이 적었음을 증명
하듯 탱크에 내려와 쌓인 모래 먼지는 얇았다.
앞으로 향해야 할 장소는 확실히 상상할 수 있었다. 계곡을 따라
곧장 서쪽으로 나아가 수원(水源)이 있는 언덕을 가로지르고, 계속
해서 커다란 봉우리 두 개를 넘는 것이다.
지금 가오루에게 중요한 것은 그저 이끌리는 대로 커다란 힘에 몸
을 맡기는 것뿐이다 분명히 누군가의 손에 의해 자신이 이끌리고 있
었다.
도대체 언제부터일까? 10년 전, 가족 여행 계획을 세웠을 때부터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장기간에 걸쳐 짜여진
계획을 지금 실행에 옮기고 있을 뿐이다.
자, 가자.
가오루는 핸들을 꺾어 린턴해 온 길을 되돌아갔다.
일단 간선 도로로 돌아가 모텔에 체크인을 하고 휴식을 취한 후,
음식과 예비 가솔린을 보충해 길 없는 사막 지대를 종주할 작정이었
다.
웨인스록을 출발한 지 이틀 후, 가오루는 드디어 하이웨이에서 꺾
어 사막으로 들어갔다. 평탄한 대지를 10마일 정도 달리자 작고 높은
산이 나타나고, 그 경사면을 오토바이가 달려 올라갔다
경사면을 오를수록 더욱 고요해졌다. 흐르는 물줄기는 가늘어지
고,나무들이 호흡하는 숨결이 들려왔다. 이 주변에는 아직 인간 암
바이러스에 의한 암화의 영향이 보이지 않았다.
식물이 흘리는 희미한 숨결이 여기저기에서 싱싱하게 느껴졌다
오를수록 고요한 정도는 더해 갔다.
사막 한가운데 에 이 정도로 짙은 녹음이 있으리라고는 가오루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저편 멀리에서 깊이 玲아지른 듯 자리잡고 있는 골짜기가 시야에
들어왔을 때, 계곡 크기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오토바
이로 달려와 보니 단순히 나무들이 우거진 정도가 아니라 여기에 펼
쳐진 녹음은 완전한 숲이었다 게다가 전체가 쏙 하니 거대한 계곡에
둘러싸여 있다.
갈색 골짜기 안쪽에만 나무들이 서식하고,그 이외의 땅은지금까
지의 풍경과 마찬가지로 갈색의 황량한 대지였다 이 정도로 깊은 골
짜기에 숨겨져 있다면 하늘에서라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바위가 수없이 튀어나와 있고 나무가 좁은 간격으로 늘어서 있어
아무리 오프로드 바이크라고 해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이 이
상 오토바이로 올라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가오루는 나무와 나무 사이의 우거진 곳에 살짝 오토바이를 뉘었
다 짐 싣는 곳에서 필요한 것만 꺼내 등에 짊어지기로 했다. 부츠를
벗고 운동화로 갈아 신고는 잊어버리지 않도록 그 장소를 뇌리에 새
겼다.
나머지는 자신의 발에 의지할 뿐이다.
가오루는 가끔 멈춰 서서, 가는 물의 흐름이 침식한 대지의 깊은
골짜기를 올려다보았다. 길잡이가 되는 것은 강의 흐름뿐이다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려 수백 미터 깊이의 골짜기가 형성된 것일
까? 소비한 시간과 에너지를 상상하면 현기증이 날 것 같다.
유구한 세월과 끊임없는 반복. 가오루가 살고 있는 초고층 맨션 따
윈 골짜기 속에 쏙 잠겨 버린다. 맨션이 완성되는 데 필요한 시간은
겨우 3년이다 그런데 골짜기는 수억이라는 세월의 흐름으로도 아직
모자라 물의 힘을 빌려 지금도 가느다랗게 깎이고 있다.
서쪽으로 기울고 있는 태양이 골짜기 아래에 비치는 햇살의 선
(線)을 서서히 높이고 있었다. 햇살이 흙 표면을 한는 모습은 골짜기
전체가 살아 있는 것 같은 착각을 가져다 주었다.
바위에서 바위로 뛰어 건너 , 강물에 두 손을 넣고 물을 마셨다. 식
도에서 위로 오싹한 감촉이 떨어져 간다. 그건 그렇고 바로 옆에 강
이 있는 것은 다행이다. 적어도 갈증에 시달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가오루는 다시 한 번 물을 퍼마시고는 바위 위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고립된 땅에는 고요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 이곳과 닳은 이질적
인 공기를 예전에 한 번 경험한 것 같은 기억에 맞닥뜨렸다 연상된
것은 대자연 깊은 곳이 아니었다. 반대로, 가장 고도한 문명이 응축
된 장소‥‥ 병원의 집중 치료실 분위기와 어딘가 비슷하다.
암세포를 절제할 때마다. 가오루의 아버지는 집중 치료실로 들어
갔다. 밀폐된 공간에서 고동하는 것은 인공호흡기의 리듬이고, 환자
의 육체는 생사의 구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내내 정적만이 얽혀 있었
다 아버지를 간병할 때마다 가오루는 살아 있는 것은 기계이며 , 인
간은 무기질 기계 이하의 수준으로 내려가 버린 것 같은 인상을 받았
다.
아버지의 얼굴과 머리에서 뻗은 몇 개의 관은 애처로웠고, 수가 많
으면 많을수록 꺼져가는 생명을 상징하는 것 같아 으스스함을 느끼
기도 했다. 집중 치료실에 감도는 정적과 이 골짜기 전체를 뒤덮은
정적은 어딘가 닮았다
· .아버지는 지금쯤 어떻게 하고 있을까?
아버지의 병상에 생각이 미치자, 언제까지나 느긋하게 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적어도 자신이 돌아갈 때까지는 견디어 주었으면 좋
겠다 그렇지 않으면 무엇 때문에 사막까지 온것인지 알수 없게 되
어 버린다.
어머니의 몸도 마찬가지로 걱정이었다. 지금도 아직 미국의 민간
전승에 목을 매고 아버지의 몸에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도하고 있는
걸까? 가오루는 어머니가 좀더 현실적인 대응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고 생각했다.
레이코는· .
그 이름을 떠올리자 가슴이 메어 온다
가오루는 안주머니에서 궤이코의 사진 두 장을 꺼냈다 한 장은 병
원의 카페테리아에서 찍은 것이었다
곧게 목을 뻗은 가오루에 비해, 레이코는 고개를 갸웃하여 가오루
의 어깨에 머리를 얹을 듯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셔터를 누른 것은
료지였다. 그는 어떤 기분으로 두 사람을 카메라에 담은 걸까?
어머니가 취하는 포즈에선 가오루에 대한 호의가 노골적으로 느껴
졌다 어머니로서보다는 여인으로서의 분위기를 강하게 발산하고 있
다. 아들의 입장에서는 보고 싶지 않은 포즈가 아니었을까?료지는
복잡한 기분으로 파인더를 들여다보았을 것이다.
레이코의 얼굴을 떠올리기 위해 사진을 꺼냈던 것인데, 료지와의
슬픈 추억이 강하게 되살아났다.
가오루는 또 한 장의 사진으로 시선을 옮겼다. 레이코 혼자 방 안
융단위에 앉아 있다. 아마도 자기 집 거실이리라. 폭신폭신한 융단
위에 정좌가 아닌 옆으로 비껴 앉은 모습으로 두 손은 뒤로 뻗고 있
다. 헤어스타일이 지금과 달랐다. 2년인가3년 전의 것이다 료지의
발병 전인지 후인지는 사진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레이코와 육체 관계를 맺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 가오루는 레
이코의 젊은 시절 사진을 갖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젊은 시절의 사진'이라는 말에 발끈한 모양이었다. 레이코는 '뭐
예요?'라고 달갑지 않은 듯한 얼굴로 옆구리를 찔렀지만 그 다음날
가오루는 몇 장의 사진을 건네 받았다.
사진 속에서 레이코는 여러 가지 표정을 띄고 있었다
자택에서 홍 파티를 열었을 때의 사진인 듯 몇 명의 친구들에게 둘
러싸여 글라스를 손에 든 레이코는 알코올 기운으로 볼이 붉게 물들
어 있었다
한 손을 위로 들고 다른 한쪽 손은 허리에 대고 포즈를 취한 것도
있다.
그런가하면 오렌지색의 품위 있는 기모노를 입고 국화꽃으로 꾸
민 인형을 옆에 두고 새침한 표정을 띠기도 했다
자기 집 부엌 싱크대에 서서 설거지를 하는 도중, 뒤에서 누가 불
러서 뒤돌아본 순간을 멋지게 포착한 사진도 있었다.
그것은 아마 아들인 료지가 찍었을 것이다.
등뒤로 살그머니 다가가,
"엄 마!"
하고 소리쳐 놀라게 하고서 셔터를 누른 것이다. 지어낸 것이 아닌
자연스런 표정 놀람과 웃음이 뒤섞인,평소라면 결코 보지 못할 얼
굴을 포착한 귀중한 사진이다.
가오루는 그 사진도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미국 사막으로 건너오
기 직전, 두 장만이라고 정하고 고른 사진에서는 빼기로 했다.
가오루와 나란히 찍은 한 장, 융단 위에 다리를 옆으로 하고 핀히
앉아 찍은 한 장. 그 두 장의 사진을 주머니에 숨겨 온 것이다.
그때 레이코가 입고 있던 것은 모직 원피스였다. 상반신만을 보면
스웨터를 입고 있는 것과 구별이 가지 않는다. 원피스라기 보다는 길
이가 긴 스웨터라고 하는 게 좋을 것이다 U자형의 네크라인은 대담
한 커트가 아니어서 가슴의 봉긋한 부분은 조금도 들여다보이지 않
는다. 원래 가슴은 작은 편이다. 가오루의 손바닥에 쏙 들어가는 정
도의 크기 . 적당한 봉긋함과 탄력성이 매력이었다.
옷의 소재가 허리 라인을 두드러져 보이게 하지 않았다. 그보다도
가오루의 시선은 그녀의 다리에 쏠려 있었다
앉았기 때문에 원피스 자락은 무릎 조금 위까지 당겨 올라가 있었
다. 몸을 뒤로 젖히고 있어서 무릎은 융단에서 약간 들려 있다.
무릎과 무릎 사이로부터 짙은 어둠이 안에서 뻗어났다. 가오루가
몇 번이고 얼굴을 묻었던 부드러운 골짜기이다
료지가 검사에 불려간 틈을 노려 낮에 태양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
리는 병실의 간이 침대에서 가오루는 레이코의 스커트를 걷어올리
고,속옷을 내리고 아래를 자세히 관찰한 적이 있다. 그것은 육체를
구성하는 하나의 기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어째서 이토록관
심이 끌리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애정에 의해 커다란 가치가 주어
진 육체의 일부였다.
다리 사이에 묻고 있던 얼굴을 들자, 커른도 닫지 않은 창문에서
눈부실 정도의 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강한 햇살 때문에 자신
의 행동이 몹시 부도덕한 것으로 느껴졌다 그래도 유혹을 떨칠
1◎二
없었다. 햇살을 피하려는 것처럼 다시 얼굴을 묻고 넘쳐 나오는 체액
을 혀로 받으면서 시간이 영원히 계속되기를 기원했다.
그 결과 레이코의 자궁에 자신의 아이가 생명을 얻은 것이다.
가오루는 화사한 몸매의 레이코 허리에 시선을 떨구었다
·.치금, 어느 정도의 크기일까?
대충 상상은 갔다. 2센티미터 정도로 해마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
을 것이다. 자신의 유전자를 이어받은 존재보다도 배에 새로운 생명
을 품은 레이코의 존재가 견딜 수 誤이 사랑스럽다.
바위 위에서 느긋하게 쉬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뇌리를 오가는 몇
개의 얼굴이 자서둘러,하고 움직여 온다. 가오루는 일어서서 산꼭
대기를 향하기로 했다.
12
날은 산등성이 저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캄캄해지기 전에 노숙할
수 있는 장소를 정해 두어야겠다고 생각하고 가오루는 서둘렀다.
3면이 거대한 바위로 둘러싸인 평탄한 지점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
았다. 노숙할 장소로서는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예전에 한번 찾아온 적이 있는 장소였다. 웨인스록의 폐허에서 컴
퓨터 앞에 앉자마자 인디언의 시점이 되어 끌려갔는데, 그들 부족이
더듬어 갔던 길 도중에 이것과 똑같은 풍경이 있었던 것 같다
‥‥전사의 인도에 따르라.
어머니로부터 제시받은 미국 원주민의 민간 전승에는 그렇게 되어
있었다. 현실에 전사가 나타난 것은 아니다 전사가 인도해 가는 장
소는 기억이 되어 가오루의 뇌리에 넣어져 있었다. 그 기억의 실을
한가닥 한가닥 더듬거나, 현실과의 비교 뒤에 취해야 할 루트를 결정
해 가면 된다 가오루는 등산용 배낭을 등에서 내려놓고 쉬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발을 내딛는 걸음마다 가오루의 감각이 되살
아났다. 전혀 관계도 없이 여러 가지 감각이 끓어오르는 적이 있었
다. 예를 들면 공포라는 감각은 어떤 원인이 있어 생기는 것인데, 아
무 원인도 없이 공포라든가 질투, 기쁨의 감정에 사로잡혀 관능을 자
극당하기도 했다 감정의 근원을 과거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다 보
니 자신이 태어난 순간의 모습에까지 도달해 버릴 것 같았다.
평탄한 바위 위에 매트를 깔고 침낭을 둘렀다. 아직 그정도는 아
니지만 밤이 깊어지면 사막의 기온은 극도로 하강할 것이다. 침낭 속
에서 가오루는 빵을 떼어먹고 위스키를 마셨다.
가오루는 퍼뜩 상반신을 들어올려 주위의 모습을 살폈다 뭔가가
내쉬는 숨결이 목덜미에 닿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매트와 침낭을 통해 바위의 차가움이 침투해 왔다. 토해 나온 숨에
는 일정한 리듬이 있다 인공 호흡기 같은 일정한 리듬‥‥사냥감을
노리고 있는 듯한, 육체와 정신을 진정시키려는 느긋하고 일정한 리
듬이다.
어떤 명확한 의지를 가진 시선이 같은 방향에서 느껴졌다. 시선은
후두부 아래 근처에 꽃혀 심장 고동을 격렬하게 만들었다
참을 수 없게 된 가오루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10미터 정도
앞의 나무 그늘에 벌거벗은 사내 하나가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활
을 겨누고 있는 것이 보였다. 피부가 약간 검어 어둠에 동화되어 있
을 터인데도 가오루는 어렴풋이 그 그림자를 포착할 수 있었다.
사내는 긴 머리를 뒤로 묶었을 뿐, 깃털 장식류는 달고 있지 않았
다. 중간 살집 , 중간 키로 근육의 부풀음은 없었지만 활을 겨눈 자세
에는 숙련자 특유의 품격이 갖추어져 있었다.
가오루는 움직이려 해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쇠사슬로 단단히 묶
인 것처럼 사내가 겨눈 화살을 응시할 따름이었다.
사내는 오른손 엄지를 구부려 활을 잔뜩 잡아당겨 가오루의 머리
를 겨냥했다. 화살 끝에는 흑요석을 갈아 만든 칼날이 번뜩여 고무
장난감이 아님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사내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증오도, 자비의 마음도, 도취도
없다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다하려는 사냥꾼의 눈을 하고 있었다.
가오루는 멍하니 당겨져 가는 화살 끝을 응시했다. 공포는 없었다.
머리 어딘가에서는 이것은 현실이 아님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활에 축적된 에너지가 정점에 달한 것을 확인하자 갑자기
가오루의 뇌리에는 동물로 변한 자신의 이미지가 분출하여 반사적으
로 상반신을 엎드리려 했다. 한순간 빠르게 화살이 날아와 소리도 없
이 회전하는 화살촉이 가오루의 시야에서 커져 갔다. 날아오는 화살
에 스스로 뛰어드는 듯한 모습으로 가오루는 앞으로 고꾸라지고 의
식은 멀어져 갔다.
실신해 있던 것은 일순간이었다 눈을 떴어도 잠시 그 자세 그대로
가오루는 하늘에 뻗은 나무 줄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앞으로 쓰러졌
을 텐데 어느새인가 몸은 위를 향하고 있었다 화살이 관통했을 오른
쪽 눈에 손을 대 상처가 없는 것을 확인한 다음 몸을 일으켜 활을 쏜
사내의 얼굴을 찾았다. 사내의 모습은 없었다. 기척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골짜기가 내포한 독특한 분위기 탓일까, 아니면 각인된 기억이 되
살아난 탓일까, 아무래도 환각을 본 모양이다. 갈색 피부를 한 사내
는 강하게 가오루의 뇌리에 죽음의 감각을 남기고 소멸했다. 직접 죽
음을 내리쬔 것과 같다.
환상이라고는 해도 회전하는 화살에 눈을 찔려 암흑으로 이끌려
갔던 이미지는 지을 길이 없다. 차례로 덮쳐오는 죽음의 유사 체험이
다. 고통보다는 죽음이 가져다 주는 공허감으로 마음은 한없이 무거
웠다.
죽음을 실감할 때마다 두드러지는 것은 바로 삶의 충실이었다. 죽
음과 삶이 닿을락말락한 곳에서 스치며 교차되고 있다. 가오루는 지
금 비로소 재생의 예감을 얻었다.
점차 호흡이 가다듬어 졌다. 안정을 되찾자 느긋하게 대지에 누웠
다. 머리 아래로 손을 포개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골짜기가 끊어진
사이로 보름달이 나타났다. 이미 인간은 달을 밟아본적이 있다 벌
써 몇십 년이나 전의 이야기이다 그 사실에 따른다면 인간의 인식
능력이 지탱하는 범위 내에 달이 존재하는 것이 확실한 것 같다. 태
양도 아마 태양계의 중심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루프의 생명에게도 달이나 태양은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
만 가오루는 그것이 실질적으로 존재하지 않음을 알고 있다. 시간과
공간을 인식할수 있도록루프내의 생명이 프로그램되어 있을뿐이
다.
그러고 보니 가오루는 어린 시절, 인간이 달에 섰을 당시의 우주
비행사의 코멘트를 아버지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달 위에서의 모든 것은 시뮬레이션 그대로였다. "
우주 비행사는 코멘트를 요청받자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달에 도착하기 이전에 우주 비행사들은 달의 중력과 똑같은 물리
공간을 미국 사막에 인공적으로 만들어 놓고 면밀한 시뮬레이션을
몇 번이나 행했다 가상 체험을 반복한 후 실제로 달에 내려 현실의
체험을 하게 된 셈인데 우주 비행사가 체험한 가상과 현실은 완전히
똑같았다고 말한 것이다. 면밀한 계산에 의해 가상 공간을 만들었다
고는 해도 조금쯤 어긋나도 좋지 않을까?
"신은 자신의 모습과 비슷하게 이 세계를 창조했다. "
성경의 말이 연상된다 루프라고 하는 가상 공간이 결과적으로 현
실과 아주 똑같게 된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원시 환경에서
루프는 자연 발생적인 생명의 탄생을 보여 주지 않았다. 거기에서 연
구자들은 RffA생명을 심어 넣었다. 그것이 마치 생명의 씨앗인 양
현실 세계와 똑같은 생명수(生命樹)로 성장했다. 물리적인 법칙을
공통으로 해둔 이상, 같은 형태를 취했다 한들 그리 이상할 것도 없
다
·계시일까?
현실 역시 가상 공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지을 수가 없다. 그
가능성 을 부정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상위 개념으로서의 신 그 창조물로 현실의 생명을 파악한다고 해
도 위화감이 없다. 이 세상이 일종의 가상 공간이라고 한다면,성모
가 처녀인 채 신의 아들을 낳은 것도 가능한 일이다. 또한 한 번 죽은
신의 아들이 일 주일 후에 다시 살아나는 일도‥‥
인류가 위기에 처해 있는 지금, 신의 강림을 기대하고 싶은 처지이
다 이대로 두면 세계는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에 의해 멸망하고
만다. 신은 모습을 보이지 않고 오직 현실을 관찰하고 있을 것이다.
가오루는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면서 신의 강림에 골몰해 있었다.
13
이미 준비한 식량 중 반을 소비했다. 깊은 골짜기를 올라 산등성이
에 선 가오루는 북쪽을 향해 산정 부근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기억 속에 넣어져 있는 풍경이 가끔나타나는 인디언의 환각에 의
해 상기되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암시받았다. 가오루는 마음을 비우
고 인도되는 대로 따르고 있었다.
아무생각없이 걷다보면 문득바위 위에 서 있거나 강가에 서 있
는 인디언 안내자가 보이곤 했다. 그리고 가오루 쪽을 가만히 응시하
여 충분히 주의를 환기시킨 다음 몸을 돌려 앞쪽으로 사라져 갔다.
이전처럼 활을 당기는 일은 없었다 알기 쉬운 동작으로 걸음을 재촉
하는 것 같았다.
U자형으로 깎인 작은 골짜기 깊숙이 활 모양으로 굽은 갈색 벽 여
기저기 문양이 그려져 있기도 해 예감을 북돋아 일으켰다. 먼 옛날,
이 부근에 정착해 있던 인디언이 그린 것인지 동물과 인간의 얼굴이
추상적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기하학 문양은 보기에 따라서는DNA
2중 나선과도 닮았다. 가오루는 목표로 하는 장소가 다가오고 있음
을 실감했다.
거대한 동굴 속에는 자연의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고로(古老, 옛
일을 잘 알고 있는 노인 : 역자 주)들이 살고 있다‥‥ 가오루는 이윽
고 도달할 장소에 신비의 베일로 둘러싸인 비경의 이미지를 꿰어 맞
추고 있었다. 거기에는 마포론 띱은 고로늘이 식쑬 같든 삶을 살
고 있을 것이다. 몇천 년에 걸쳐 축적된 지혜를 가르침받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만 전한다는 사명을 띠고‥‥
그런데 그로부터 만 하루가 지나도 가오루의 의도와는 달리 고대
유적을 연상시키는 큰 동굴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식량이 바닥나고,체력의 한계가 오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슬슬
머리를 스칠 무렵이었다. 되돌아가려면 지금밖에 없다. 아직 식량이
조금 남아 있다. 오토바이를 세워 둔 장소로 내려가기만 하면 어떻게
든 될 것이다. 오토바이 탱크에 가솔린은 거의 가득 채워져 있다. 가
장 가까운 마을까지는 약 20마일, 오토바이라면 잠간 달릴 거리이다.
일단 마을로 돌아가 새로 식량을 보충하고 다시 출발하면 된다.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대응하면 된다. 가오루는 그렇게 생각하고
마음을 편히 하려고 노력했다. 막다른 길에 몰렸다고 생각하니 정신
적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어 버린다
이 부근에 숨어 있는 자를 '오래된 자'로 부르기로 할 때, 문제는
어떻게 '오래된 자'와 만나 그들로부터 세계의 구조를 가르침받을 것
인가이다 아버지의 목숨도, 어머니의 목숨도, 레이코의 목숨도 그것
에 달려 있다.
가오루는 어느새 '오래된 자'를 신에 가까운 존재로 간주하고 있었
다. 하지만 반대일 경우의 일도 생각해 두는 게 좋을 것이다. 그가 선
의로 가득 찬 존재일 거라는 보증은 어디에도 없다.
사악함의 편린을 보여 주려는 것처럼 구름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지금까지 사막의 기후에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다음날도,
다음날도, 전날과 아주 똑같이 맑은 날씨가 계속되어 왔기 때문에 완
전히 방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산등성이에서의 전망은 저 멀리 땅 끝까지 내다보이는 것 같았지
만 불과 한순간에 솟아오른 구름에 시야가 막히고, 하늘은 두껍게 잿
빛으로 덮여 버렸다
몇 곁으로 겹쳐진 구름이 움직이고 있다 무한의 높이를 지니고 있
던 하늘에 구름이 낮게 드리워져 머리 위로 덮쳐오는 것 같다 질식
할 것 같은 압박감이 몰려왔다.
비를 예상하고 가오루는 지붕이 있는 장소를 찾았다. 나무의 키는
낮고 잎의 양도 드문드문 줄어들어 나뭇가지 아래에 몸을 숨겨도도
저히 비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가오루가 찾는 것은 바위와 바위 틈
의 동굴 같은 곳이었다. 강 상류로 올라갈 때 몇 번인가 작은 동굴을
봤다 하지만 그것은 산 중턱에서의 일이고 산꼭대기나 산등성이에
서는 그리 간단하게 바위 동굴을 발견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뚝 하고 비 한 방울이 뺨에 닿았다. 가오루는 피할 곳만 있으면 뛰
어 들어가려고 자세를 취했지만 자갈뿐이어서 몸을 숨길 장소는 아
무 데도 없었다. 빗방울이 후두둑 후두둑 정수리를 두드리는가 싶더
니 급기야 굉음과 함께 천지를 뒤흔들었다. 바로 한 시간 전의 풍경
이 거짓말 같다. 강한 햇살에 달궈지던 대지는 처음 한동안 탁탁 하
고 소리를 내며 물을 삼켰지만, 흡수할 수 있는 양을 넘게 되자 이곳
저곳에 가는 물줄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가오루는 몸을 웅크리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아무래도 이
자연의 위협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비가 공포의
대상으로 인식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등산용 배낭 속에는 비닐 봉지가 들어 있었다 그러나 몇 장의 비
닐 봉지를 어떻게 쓰든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다 텐트는 갖고
있지 않았고,몸이 젖지 않도록응급처치할도구도 없었다 설사갖
고 있었다 해도 쓸모없는 물건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온몸이 젖어 버렸기 때문이다.
운동화는 물을 흡수해 무거워져서 걸을 때마다 속에서 물이 넘쳐
나왔다. 두툼한 청재킷 안쪽으로는 등줄기와 배를 타고 폭포처럼 물
이 내려간다. 시계 (視界)가 전혀 열리지 않아 이대로 걷고 있다간 어
느새 커진 물줄기에 발을 채일 것 같았다. 안전한 장소,도도록하게
부풀어올라 발디딤이 확실한 장소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일이 없다.
배낭 속에 비닐 봉지로 감싸 빵을 넣어 두었지만, 빗물이 들어와
조만간너덜너덜해지고 말것이다 그렇다고 이 빗속에서 먹을수도
없는 일이어서 멀뚱멀뚱 식 량을 잃어 가는 것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
었다. 단, 물만은 풍부했다. 가오루는 물만이라도 체내에 집어넣어
두려고 입을 크게 벌려 보았다.
비 아래에 장시간 얼굴을 내놓을 수가 없었다. 커다란 빗방울이 가
차없이 얼굴을 때려 아파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웅크리고 주저 앉았다.
뒤통수 아래 목덜미가 드러나자 그곳으로도 통증이 지나갔다. 피
부를 드러낼 수가 없었다. 가오루는 무릎을 껴안고 몸을 등글게 하고
는 배낭으로 후두부를 덮는 모습으로 비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사
막에 내리는 비는 잠깐 지나가는 것이리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비는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커다란 빗방울이 작아지고, 이
윽고 안개비 모양으로 피어올라 그치려나 생각했지만, 잠시 지나자
이전보다도 더 큰 빗줄기로 탁탁 하는 소리를 내기도 했다. 그 강약
의 정도가 사람을 우롱하고 비웃는 것처럼 들렸다.
가오루의 공포심은 점차 더해 갔다. 빗방울에 열을 빼앗겨 몸이 몹
시 차가워 졌고 저녁때와 함께 어둠이 다가온 것이다 추위와 어둠,
이어 공복이 雲아온다. 이대로 하룻밤 내내 계속 내리는가 생각하니
공포로 몸이 얼어붙어 버렸다
서서히 기온이 내려갔다. 땅거미가 진짜 어둠으로 변하자 고요 속
에서 빗소리가 더욱 두드러진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바로 가까이
에 누군가가 있어 등이든 머리든 가리지 않고 자신을 마구 손으로 두
들기는 것 같다 여러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뭇매를 맞고 있다. 지금
가오루의 상황은 집단 폭행을 당하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더한 불운이 추격해 왔다 갑자기 발 밑을 덮친 탁류에 놀라펄쩍
뛰었을 때,배낭을 떨어뜨리고 만 것이다 발디딤이 안 좋았던 가오
루는 한 바퀴 돌아 쓰러지고, 그 바람에 방향 감각을 잃었다 배낭을
떨어뜨린 장소를 소리의 기억에만 의지해 손으로 더듬어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주변 땅을 원을 그리듯이 꼼꼼히 두 손으로 확인해
갔다. 처음 장소에서 미묘하게 벗어나 버렸는지 , 아니면 탁류에 쓸려
굴러떨어졌는지 , 배낭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가오루는 움직이는 것도 뜻대로 되지 않아 암흑 한복판에 가만히
몸을 두고 있었다. 의지가 되는 것은 청각과 촉각뿐이었다. 웅크리고
있는 발 밑의 복사뼈 위로 탁류의 수위가 올라온다면 장소를 이동하
지 않으면 안 된다. 어디로 이동해야 할까? 역시 소리와 피부 감각에
만 의지할 수밖에 없다 발을 움직여 조금이라도 물이 적은 쪽으로
기어나가야 하는 것이다.
진흙탕 속에서 몸부림치며 다니는 지렁이가 되어 버린 것 같다 며
칠이고 계속내린 비 뒤에 아스팔트의 갈라진 통에서 무수한지렁이
가 기어나와 염천에 달궈져 말라 비틀어져 가는 것을 눈앞에서 본 적
이 있다. 비가 온 뒤 , 왜 지렁이는 땅 속에서 기어나오는 걸까? 탄산
가스가용해되어 있는 빗물에 약하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지만,진상
은 알 수 없다 비를 피하려고 간신히 흙에서 나온 것까지는 좋았는
데, 이번에는 자외선에 당해 말라 비틀어져 간다는 것은 지렁이에게
는 엎친 데 덮친 격이다 눈이 없는데도 지렁이는 빛에 반응해 땅 속
에서 기어나오는 걸까?
가오루는 조금이라도 좋으니까 반응할 수 있을 만큼의 빛을 바랐
다. 완전한 어둠에 방치된 지 벌써 몇 시간이나 지났다. 아니, 시간
감각도 완전히 잃고 있었다. 손목 시계의 바늘조차 읽을수 없는 것
이다.
지금 있는 장소의 지형이 불분명하므로 무작정 걸어다닐 수도 없
다. 올라오는 도중에 몇 번이나 100미터를 족히 넘는 벼랑을 보았다
발을 내딛으려는 곳 바로 앞에 떡하니 심연이 입을 벌리고 있지 않으
리라는 법이 없다
어딘가 바로가까운 곳에서 바위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가오루는
공포로 몸이 경직되었다. 작은 돌을 튕기며 몇 개의 바위가 굴러떨어
져 바로 곁에서 풍압을 느끼게 했다. 비 때문에 지반이 물러져 낙석
이 생긴 모양이다. 그런데 와르르 하는 굉음이 바로 앞에서 문득 사
라져 버린다.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지금 있는 장소 바로 아래쪽
에 골짜기가 입을 벌리고 있고, 바위는 허공을 소리도 없이 낙하해
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틀림없는 사실로 여겨졌다. 가오루가 정면
으로 잡고 있던 앞쪽의 어둠에는 깊은 골짜기 바닥이 잠자고 있는 모
양이다.
가오루는 등으로 땅을 비비듯이 천천히 몸을 위로 밀어올려 갔다.
끝도 알 수 없는 구렁텅이에서 될 수 있는 한 멀리 떨어지는 게 최고
다.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발이 미끄러져 몇십 센티미터만 아래로
떨어져도 엉덩이 근처의 근육이 부들거 린다.
정면으로 비를 맞아 帶을 때리는 것에도 무감각해지기 시작했다.
뺨에 눈물이 흐르는 것 같지만 울고 있는 자신이 마치 다른사람 같
았다
무서운 기세로 환각이 다가왔다 어떤 때에는 거센 파도 가운데 우
뚝 솟은 바위 끝에서 바닷물에 엉덩이를 씻기는 듯한 모습으로 달라
붙어 있는 자신의 모습이 상상되고, 또 어떤 때에는 바닥을 알 수 없
는 늪에 삼켜져 발버등칠 때마다 땅 속 깊이 가라앉아 가는 모습이
눈에 떠올랐다.
환각을 뿌리치고 현실로 되돌아올 때마다. 가오루는 강하게 죽음
을 의식했다. 몸은 차가워질 대로 차가워져 감각이 닫혀 가고 있었
다.
· 이에 맞아 죽다니
한번도비 걱정을 한적이 없었다 하물며 비에 맞아죽는따위의
일은 눈곱만큼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우습기 짝이 없었다. 세계가 암화하여 멸망하려는 이때,태평하게
비에 맞아 죽다니 .
생각해 보면, 비에 젖는 것은 상당히 오랜만의 경험이다. 한 달 전
쯤, 잔뜩 찌푸린 하늘을 보긴 했다. 한 시간도 되지 않는 짧은 소나기
를 병원 맨 꼭대기층 유리창 너머로 바라보았던 것이다.
두꺼운 유리판 저쪽에서 구름 색이 변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마을
풍경이 젖기 시작했다 유리 한 장을 사이에 두고 저쪽편의 세계가
마치 다른 세계처 럼 비쳐지고 있었다
냉방이 잘 된 병원 병실에서 가오루는 레이코와 어깨를 맞대고 몇
달 만에 내리는 비를 즐거운 듯 바라보았다 그 동안 맑은 날씨가 계
속되었기 때문에 단비로 여겨졌다. 료지는 아직 살아 있었으며 , 레이
코의 자궁에 생명이 막 탄생했을 무렵이었다
같은 비라도 한쪽은 단비이고, 한쪽은 지옥의 비이다.
레이코의 얼굴을 떠올리며 최악의 사태에만 골몰하는 짓을 그만두
려고 했다. 아버지나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려 용기를 북돋우려 해보
았다. 하지만 기력이 이어지지 않았다. 잠간 긴장을 늦추면 죽음의
그림자가 내리꽃힐 것 같았다.
잠들어 버리면 그것으로 끝일 것이다. 추위에 당해 그대로 암흑으
로 끌려갈 것이 틀림없다.
가오루는 의식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단편적으로 의식이 건너뛰고 있는 것으로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정신이 든 순간,지금 있는 장소를 알 수 없는 때가 생긴다. 이대로
의식을 잃고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죽음의 위험도 차츰 다가서는
것이다.
추운 나머지 몸이 덜덜 떨렸다 빨리 날이 밝았으면 좋겠다. 날이
밝기만 하면 기온은 얼마간 상승할 것이고, 어둠이라고 하는 공포에
서도 해방된다.
완전한 어둠은 망상의 온상이었다. 가오루는 바로 곁에서 인간의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인디언이 아닌, 좀더 생생하게 살 냄새를
풍기며 코앞을 획 하고 빠져나간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별할 수 없
었고, 의미 불명의 속삭임을 나누고 있었다‥‥ 두 사람 이상 있는 것
같은데, 그림자와 그림자가 서로 속삭이고 있다.
"거기 누구 있습니까?"
빗소리에 지지 않으려고, 악령을 뿌리 치려는 듯 큰 소리로 가오루
외쳤다.
는
그러나 그림자는 물러서는 일 없이 들에서 셋, 넷, 다섯으로 늘어
나주위를 포위하고 웅성거렸다 어떤 언어로 지껄이고 있는지 가오
루는 도저히 대화를 알아들을 길이 없다 분위기로 보면 동정받고 있
는 것 같기도 하다. 아니 , 억누른 조소도 섞여 있다. 사실은 코웃음치
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새벽이 가까워질 때까지 가오루는 계속 사람들이 나누는 소리를
들었다.
그럭저럭 하는 동안에 점차 빗발이 약해지고 주위의 풍경이 서서
히 떠올라 왔다. 풍경은 엷은 잿빛을 띠고 있었다. 아득히 멀리 종교
적인 기념비처럼 우뚝 솟은 바위산은 원래 불그스름하게 퇴색해 있
는 것이겠지만, 검은 그림자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모노크
롬의 세계이기는 해도 세계의 윤곽은 서서히 짙어져 갔다.
시간과 함께 변해 가는 풍경이 가오루에게 용기를 주고 있었다. 날
이 밝고, 비도 그치고 있다
그러나 가오루의 머리는 열에 들떠 몽롱해져 있었다. 육체는 차가
워질 대로 차가워져 체력이 극도로 소모되었다. 햇병아리 의사인 가
오루도 자신의 몸에 생긴 변화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다.
그냥 단순히 감기에 걸린 것이라 생각하고 싶었다. 폐 안쪽에서 색
색하는 괴로운 듯한 헐떡임이 나오고 있었다
·폐렴에 걸린 걸까?
감기에 걸려 이런 증상에 빠진 경험이 없었기에 판단을 내릴 수 없
었다. 이마에 손을 대고, 혹은 가슴이나 겨드랑이 밑에 손을 넣어 체
온을 짐작해 본다. 상당한 고열이었다 비는 그치고 날도 밝았는데,
몸을 움직일 기력이 솟지 않았다.
가오루는 반쯤 흙탕물 속에 잠긴 모습으로 웅크리고 있었다 새우
처럼 몸을 움직여 물이 고여 있지 않은 장소로 이동했다
지금 필요한 것은 햇살이다. 햇살을 흠뻑 받고 싶다. 해가 비치면
젖은 옷과 몸도 말릴 수 있다 물을 흡수한 옷이 고열로 인해 뜨뜻미
지근해져 뭐라 말할 수 없는 불쾌감을 가져온다.
가오루는옷을벗어 비틀었다 그것도 대단한 작업이었다 전혀 힘
이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맨살에 바람이 닿거나 하면, 전신에 오한
이 들어 쓰러질 것 같다. 그래도 가오루는 될 수 있는 한 수분을 제거
해 몸을 가볍게 했다.
한쪽 골짜기에서 불어 올라오는 바람을 피해 바위 틈으로 숨어들
어 휴식을 취했다. 더 이상 체력을 낭비할 수는 없다 기온이 상승할
때까지 몸을 움직이지 않고 있어야 한다
바위 틈에 몸을 눕히고 고열과 싸우고 있는 사이에도 세계는 서서
히 변화해 갔다. 모노톤의 풍경에 색이 들고, 먼 풍경에도 짙고 엷은
콘트라스트가 생겨 난다.
가오루는 변해 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구름이 갈라지기를 기다렸
다.
몇 시간이 지나 기온이 상승하자, 가오루는 단속적인 수면을 몇 번
이고 취하게 되었다. 꾸벅꾸벅거리다 깰 때마다 구름의 움직임에 눈
을 돌렸다. 하지만 아직 해가 비치지는 않았다.
굉음 때문에 가오루는잠에서 깼다 어젯밤 내내 시달렸던 빗소리
가 연상되어 공포와 함께 상반신을 튕겨 올렸다.
공중에 물체가 떠있는 것이 보인다. 마침 그 뒤에서부터 이제야
해가 비치고 있었다. 구름에 금이 가 있고,빛줄기는 공중에 떠오르
는 물체를 검게 비추고 있었다 가오루는 눈부신 나머지 눈을 가늘게
뜨고 검게 윤이 나는 기체 너머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출현은 가오루의 상상을 뒤엎는 것이었다. 이 장소에 대해 상상
하고 있던 것은 태고를 방불케 하는 폐허이고, 신비에 둘러싸인 인간
집단이다 그런데 등뒤에서 햇살을 받고 공중에 떠있는 것은 현대
과학의 정수를 모아 제조된 최신예 제트 헬리콥터였다. 게다가 인디
언이 활로 겨누고 있는 것처럼 앞으로 튀어나온 안테나는 정확하게
가오루를 조준하고 있다.
프로펠러의 회전에 의해 풍압은 완전히 가오루의 몸을 휘감고 있
었다. 마치 가오루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 출현 방법이었
다. 공중의 한 점에 정지한 채 잠시 동안 귀를 멍멍하게 하는 폭음을
퍼붓는가 싶더니, 헬리콥터는 아랫배를 보이며 회전하여 상승해 갔
다.
헬리콥터의 프로펠러가 구름을 갈라 찢고,풍압이 갈려나간 자리
를 확대시켜 갔다. 가오루에게는 틈새로부터 넘쳐 나오는 빛이 후광
처럼 느껴졌다.
"다카야마 류지는 죽기 직전에 이족 세계에 오고 싶다고 격렬하게 원했다네.
만일 우리에게 뉴캡 계획이 없었다면 그런 발생은 생겨나지 못했을지도 모르지.
아니 틀림없이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사물은 유기적인 관련 속에서
움직여 간다네. 나는 30년 앞을 내다본 셈이었지. 그래서 결심했던 걸세.
다카야마 류지의 소원을 들어주기를‥‥‥네? 뭐라고 하셨습니까
?"
가오루는 놀
라서 소리를 질렀다
눈을 뜨자마자 처음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회색 천장이었다. 가오
르는 눈으로 벽을 차례로 더듬어,보이는 범위 안의 것을 대충 둘러
보았다.
공간은 창 하나 없이 완전히 밀폐되어 있었다. 천장 구석에는 직사
각형의 격자가 붙어 있다 공기 조절 장치인 통풍구임에 틀림없다.
방의 온도가 적정 온도로 유지되고 있는 것은 에어컨디셔너 덕분일
것이다.
벽 표면에는 벽지가 아닌 가죽으로 발라져 있었다. 처음 얼마 동안
횐색으로 여겨지던 것이 눈이 익숙해지자 雲은 베이지색인 것도깨
닫게 되었다.
방을 관찰하면서 가오루는 자신의 의식이 건재하다는 것을 알았
다 아직 살아 있는 모양이다.
위를 향해 누운 자세 그대로 가오루는 일단 보는 것을 그만두고,
신체 곳곳에 의식을 집중시켰다. 가슴에서 배, 두 손, 두 발, 이어 발
가락, 손가락을 꼼지락거려 보았다. 움직이고 있다는 확실한 실감이
있었다
처한상황을설명하는 것은 간단하다 가죽이 발라진 벽으로둘러
싸인 작은 방 침대 위에 누워 있다 단지 그뿐이다. 방 안에는 가오루
이외에 아무도 없었다
혼자 미국으로 건너와 사막의 어떤 지점을 목표로 하여 오토바이
를 타고 나섰다고 하는 행동이 현실의 것인지 꿈의 세계에서 있었던
사건인지 판단하지 못하고 헤매는 중이다. 아버지가 입원한 병원에
서 간호를 하다가 잠깐 꿈을 꾸었을 뿐이라고 해도 그런대로 납득이
될 것 같았다.
장수촌이 있다는 거대한 동굴을 찾아 산』성이를 걷던 도중, 몇 번
인가 고대 인디언이 그린 벽화를 보았다. 벽화는 작은 동굴 모양의
곡면을 묘사하여 앞으로 나타날 신비의 지하 공간을 상징하는 것 같
은 미묘한 분위기를 주었지만, 그뒤를 덮친 호우에 의해 인정사정 없
이 죽음과 공포의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날이 밝고 해가 비치기 직전에 들은 소리가 지금까지 머리에 남아
있다. 굉음을 흩뿌리면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물체가 공중에 떠 있
었다 최신예 제트 헬리콥터의 배가 보임과 동시에 몸이 상승하면서
의식을 잃은 것으로 생각된다.
순서대로 기억을 더듬어 가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기억이 실제
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수가 없었다. 현실과 가상이 이토록 어지럽게
들어와 있으니 어떤 기억에 대해서도 자신이 없었다
어쨌든 확인을 하자면, 제3자의 증언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하
지만 눈을 뜨고 나서도 왜 오랫동안 가오루는 그저 홀로 방치되어 있
었다
일어나 방에서 나가 볼까· 가꼬루는 천천히 상반신을 일으켰다
몸에 통증은 없었지만, 체력이 많이 소모되었다는 것은 상반신을 일
으키는 동작이 의외로 힘든 것만으로도 충분히 짐작되었다 침대에
앉은 그대로 호흡을 가다듬었다.
일어난 것은 좋았지만, 더 이상의 힘이 없어 움직이지도 못하고 그
대로 있었다. 눈을 떨구니 침대 바로 옆에 샌들이 준비되어 있다 가
오루의 물건이 아니다 누군가가 준비해 준 것이다 발이 푹 들어갈
정도로 큰 샌들이었다.
결국,샌들에 의해 앞으로의 행동을 재촉받는 꼴이었다. 가오루는
기력을 최대한 쥐어짜 침대 가장자리에서 두 다리를 내려 발을 샌들
에 넣어 보았다. 생각대로 헐렁헐렁했고, 게다가 무게도 상당했다.
가오루는 샌들을 신고 방을 천천히 가로지르려 했다. 걸어가는 앞
쪽에는 방과 외부를 잇는 유일한 인터페이스· 문이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다리가 나른한데, 너무 크고 무거운 샌들을 신어서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 하얀 가운 자락의 갈라진 틈으로 넓적다리
가들여다보였다. 가운속에 속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알몸위에 하
얀 가운만 입혀져 있는 것이다.
문은 바로 눈앞이었다. 문을 열고 어디로 가겠다는 목적도 없었다.
그저 지금 자신이 있는 장소를 알고 싶었다. 동기는 그것뿐이다. 여
기가 어디인가 하는 의문. 바깥 풍경을 보고 싶었다. 사람이 있다면,
누구라도 좋으니까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가오루는 손잡이에 손을 댔다 그 순간까지 문이 잠겨 있으리라고
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손잡이를 손으로 감싼 순간, 문이
잠겨 있다는 직감이 느껴졌다 실제로 돌려서 밀고 당겨 봤지만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가오루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더욱 확실하게 이해하게
되었다. 감금당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서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나돌아다니는 것은 포기하고 침대로 돌
아가야 하리라. 손잡이에서 손을 떼고 가오루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때,문짝 하나를 사이에 둔 저쪽 편에서 인기척이 났다. 가오루
는 깜짝놀라몸 움직임을 멈추고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이어 찰칵
하고 자물쇠 여는 소리가 났다
한발 두발 뒤로 물러나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앞으로 나타날 자
에 대한 정보는 완전히 전무한 상태였다. 아주 먼 옛날에 읽었던 SF
소설에 등장했던 캐릭터가 나타나서 화성인이라 칭해도 가오루는 놀
라지 않았을 것이다.
조용히 문이 열렸다. 틀림없이 누군가가서 있을거라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앉아 있었다. 휠체어에 앉은 노인은 똑바로 앞을 응
시하고 있었다.
"잠이 깼나?"
노인이 영어로 물었을 때 가오루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후타미 가오루 군이지? 잘 부탁하네. 내 이름은 크리스토프 엘리
엇이라네."
엘리엇이라고 이름을 댄 노인은 악수를 청해왔다. 내민 손을 보기
만 해도 그것이 이상하게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거대한 손· . 그리고 휠체어 바퀴 앞으로 나와 있는 발도 역시 거대
했다. 의자에 들어가 있지만 신체의 크기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서양인으로서는 작은 몸집일 것이다. 그런데 손과 발은 몸집에 비해
크기만 했다
엘리엇이라는 노인의 언밸런스한 신체에 정신을 빼앗겨 감탄하고
있을 처지가 아니었다 사실은 더욱 놀랐어야 하는 것이 있었다.
‥‥어떻게 이 노인은 내 이름을 알고 있는 거지?
신분을 증명하는 서류나 카드는 등산용 배낭과 함께 없어졌다.
악수에 응하면서 가오루는 노인의 용모를 자세히 관찰했다.
머리숱이 하나도 없는 얼굴은 오히려 말끔해 보였고, 피부는 창백
할 정도로 맑았다. 피부의 상태만을 본다면 노인이라고 말하는 것이
적당하지 않았다. 다만 목덜미에서 왼쪽 努에 걸쳐 노인 특유의 검버
섯이 피어올라, 횐 피부에 콘트라스트가 두드러졌다
엘리엇의 손을 놓은 가오루는 상대가 자신에게 적의가 전혀 없다
는 것을 깨닫고 조금 전부터 품고 있던 의문을 꺼내기로 했다.
"여긴 어딥니까?"
엘리엇은 회색 빛을 띤 눈을 가늘게 뜨고 입가에 웃음을 띄웠다
"자네가 오려고 했던 곳이네."
가오루가 향하고 있던 곳은 거대한 동굴이 있고, 장수촌의 존재가
예상되는 장소이 다.
가오루는 새삼스럽게 방 안을 둘러보았다. 엷은 베이지색 가죽으
로 밀폐된 작은 방‥‥ 이곳은 자신이 그리고 있던 장소와는 너무 달
랐다
엘리엇은 가오루의 표정에서 어리등절함을 감지한 모양이다. 그는
커다란 집게손가락을 위로 향하더니 오히려 질문을 했다.
"이 위에 뭐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방 천장, 그 위로 뭐가 있을지 가오루는 알 리가 없었다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엘리엇은 자신의 질문에 스스로 대
답했다.
"거대한 물의 층일세 ."
수조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노인은 물의 층이라는 표현을 썼다.
머리 위로 아득하게 물이 있다는 말을 들어도 가오루는 그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 비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려는 것일까?며칠간의 체
험과 대조해 보면 문맥이 통하는 것처럼 생각된다
엘리엇은 이번에는 같은 집게손가락을 아래로 향했다.
"자네가 서 있는 그 밑에는 뭐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작은 방 바닥 아래에 뭐가 있다는 것인가7땅이 있을 게 뻔하다.
하지만 가오루는 그런 뻔한 대답을 입에 담을 생각이 없어 잠자코 있
었다.
이 물음에도 엘리엇은 스스로 대답했다
"광대한 공간이다. "
'지금 너는 두꺼운 물의 층과 광대한 공간 사이에 끼여 있는 지점
에 있는 것이다. '라고 들었지만 아무런 느낌도 오지 않는다
다만 그렇다면 앞뒤가 맞는다. 엘리엇이 말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 부근의 중력 이상은 상당히 낮은 수치를 나타내게 된다. 중력은
그 밑에 질량이 무거운 물질이 있으면 플러스 수치를 나타내고, 반대
로 질량이 가벼운 물질이 있으면, 마이너스 수치를 나타낸다. 아무것
도 없는 광대한 공간이 발 밑에 잠자고 있다면 마이너스 수치를 나타
내는 이유로서는 상당한 설득력을 가진다.
그래도 가오루는 아직 믿을 수가 없었다. 정말 목적한 장소에 온
것인지, 아닌지. 만일 이곳이 가공의 중력 이상 분포도에서 제시된
장소라면 엘리엇이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 이상으로 놀라운
일이다
‥‥이 노인은 이곳 중력이 다른 곳보다 낮다고 넌지시 비치고 있다.
결국, 내가 어디로 향하고 있었던 것인지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극도의 혼란에 사로잡힌 가오루는 벽에 손을 대고 몸을 지탱했다.
"제가 여기에 올 것을 미리 알고 계셨습니까?"
그 말을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호흡은 격렬하고 짧아 들이쉬는 숨
의 양은 적었다. 왠지 모르게 답답하기만 했다
엘리엇은 무너질 것 같은 가오루의 몸을 거대한 손으로 받치고 자
비심 깊게 말했다.
"아 그렇다네.자넨여기에 오기로 예정되어 있었던 거야"
열이 다시 악화된 것인지 몸 전체가 뜨겁게 달아오른다.
"유일하게 예측하지 못했던 건 그 기록적인 호우였다네 · "
아니 , 더운 것인지 추운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열이 있는 걸 느
끼면서도 몸의 표면에는 오한이 느껴지고 있었다 더 이상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엘리엇의 말이 귓속에서 희미해져 갔다.
가오루는 엘리엇의 손을 뿌리치고 혼자 힘으로 침대까지 걸어가려
했지만, 도중에 고꾸라지고 말았다
그로부터 3일간 가오루에게 주어진 일은 체력 회복이었다. 사막에
내린 기록적인 호우만 없었다면, 이 시간은 소비될 필요가 없는 것이
었던 모양이다. 엘리엇의 말투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겨우 그 정도의
것이었다 체력만 회복된다면, 모든 의문에 대해 설명해 줄 것이다
결국, 자신이 빠진 상황을 전혀 모른 채 가오루는 작은 방에서 어
쩔 수 없이 병 조리를 하게 되었다.
가끔 엘리엇이 방 안에 얼굴을 내미는 일은 있었지만, 건강 체크에
서 일상사를 돌보아주는 것은 간호사인 '하나'였다
하나는 귀여운 이름이었다. 가오루는 본명이 무엇이냐고 물었지
만, 하나는 웃기만 할 뿐 아무것도 대답해 주지 않는다
"그렇게 불러 주면 돼요."
익숙해지면 부르기 쉬운 이름이다.
‥‥하나.
들판에 피는 가련한 꽃을 연상케 한다. 이름과 인물의 이미지가 딱
들어맞는다.
엘리엇이 모습을 감추고 하나만 방에 남겨지자 가오루는 그녀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껴기는 무슨 시설?
· .엘리엇은 어떤 인물?
·뭔가 목적이 있는 건가?
생각나는 대로 가오루는 질문을 열거했다. 그 기세가 어이없었는
지도 모르지만, 하나는 웃음을 피운 채 입을 꼭 다물고 고개를 옆으
로 젓고는 아무것도 대답하려고 하지 않았다.
하나는 얼굴도 체형도 마치 어린애 같았다. 키는 150센티를 약간
넘는 정도이고, 辯은 오통통하고 눈이 동글동글하다. 뒤로 묶은 머리
를 풀어 윤기 나는 검은 머리를 이마에서 흘러내리게 해서 등 가득히
펼치면 조금쯤 더 어른스럽게 보일지도 모른다 이마가 나와 있는 탓
에 어린 티가 쓸데없이 두드러져 보이는 것이다. 등글고 매끄러운 이
마가 그녀의 실제 나이를 알 수 없게 만들었다. 가슴도 성장 도중의
소녀처럼 작게 흔들렸지만,그 이상의 성장은 아마 바랄 만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동양계의 작은 얼굴 생김새에는 작은 가슴이 잘
어울렸다.
가오루는 처음 한동안 하나의 어린 모습에 속고 있었다. 자신의 물
음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은 사실을 알지 못해서라고. 때묻
지 않은 얼굴은 무지의 증거 같기도 해서 자신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
이 돌아오지 않아도 가오루는 화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어린애 같은 겉 모습과는 반대로 간호사로서의 기량은 상당
한 것이었다 철들 무렵부터 병원을 집처럼 드나들었던 탓에 가오루
는 간호사를 보는 안목이 갖추어져 있었다. 그녀는 가려운 곳을 긁어
주듯 행동에 빈틈이 없었다.
가오루는 하나의 지도를 바탕으로, 필요에 따라서 링거를 맞고, 항
생제를 먹고, 충분히 수면을 취하도록 주의했다.
하나는 말없이 묵묵히 일만 했다. 그 동작이나 행위에서 필요 이상
으로 재빨리 처리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자신의 몸에 손 대는
시간을 될 수 있는 한 줄이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그릇된 추측
을 하기도 했다. 솜씨가 좋은 것은 간호사로서 유능함의 표시일 것이
라고 해석하고 있었는데, 몸을 만지는 그녀의 손에 가끔 주저함이 보
이는 것이었다 자신을 훔쳐보는 시선에도 뭔가 이물질을 관찰하는
듯한 부자연스러움이 담겨 있었다. 시간이 지나는 동안에 가오루는
그런 것을 깨닫게 되었다
처음 하나와 만나고 다음 다음날의 일이다. 하나가 방에 들어오는
기척을 알아채자 가오루는 자는 척하며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재
빨리 링거병을 교환하면서 하나가 호기심에 가득 찬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것은 무서운 것을 業을 때의 시선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무서워하고 있는 반면, 가오루에게 흥미를 느낀다는 모습이다. 가오
루 역시 흥미가 당겼다. 자신의 어디에 반응해 하나가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일까 하고
링거병 교환이 끝나자마자 하나는 뒤로 물러선 자세 그대로 상반
신을 숙여 주저하면서 내려다보았다 자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지만 자고 있는 상대에 대해서도 역시 경계를 풀지
않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가오루는 눈을 번쩍 뜨고 하나의 활을 잡았다. 놀라게 할 생각은 아
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녀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목 안쪽에서
소리가막혀 '하아' 하고숨만토해 내고 있었다
"왜, 그런 식으로, 유령을 보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보지?"
가오루는 천천히 단어를 잘라 질문했다. 일단 상대를 진정시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나는 가오루에게 잡히지 않은 쪽의 손을 뺨에 댄
채,저항다운 저항은 보이지 않았다. 손을 흔들어 뿌리치지도 않고
얼굴을 돌리는 일도 없이, 입에 걸린 비명을 거두고 그저 멍하니 가
오루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 어린 모습
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가르쳐 줬으면 좋겠어 . 왜, 날, 그런 눈으로, 보는 거지?"
가오루는 같은 질문을 다시 한 번 했다. 그러자 하나는 슬픈 듯한
얼굴로 고개를 옆으로 젓고, '미안해요.'라고 진심으로 동정하는 것
처럼 사과했다. 가오루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되지는 않았다. 해석은
두 종류가 가능했다. 유령을 보는 듯이 당신을 봐서 미안하다고 하는
의미 또 하나는 아무것도 대답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하는 의미 아
니면 그 둘을 겸하고 있는 것인가?
가오루는 손을 풀었다.
하나에게 주어진 것은 간호사로서의 업무이며 그 이상의 일에 참
견하는 일은 금지되어 있는 것이다. 가오루를 응시하는 시선에 대해
서 이것저것 설명을 더하는 것 자체가 가오루에게 주어진 처지를 설
명해 버리는 것이 된다. 가오루는 사정을 알아채고,그 이상의 추궁
을 포기하기로 했다.
손이 풀렸는데도 하나는 가오루가 누운 침대 옆에 계속 서 있었다.
"얘기하는 거 괴롭지 않아요?"
간호사로서의 직무를 마치고 그녀는 일단 환자에게 몸의 상태를
물었다.
"괴롭기 는커녕 얘기하고 싶어서 근질근질해 요."
"그래요? 그럼, 괜찮으면 당신에 대해 들려 주세요 "
"나에 대해, 윌요?"
"음, 그래요, 태어나서 지금까지의 일, 전부."
"그런 걸 들어서 뭐하게요?"
"적어도 유령을 보는 듯한 눈으로 당신을 보는 일은 없어질 거라고
생각해요."
정보량이 부족하다는 얘기이다. 좀더 서로를 알게 되면 인간을 대
하는 시선이 생길 것이라는 말이리라.
"그 전에 당신에 대해서 한 가지 묻고 싶은데."
하나는 신중한 자세를 취했다.
"실례가 아니면, 나이를 가르쳐 주었으면 좋겠어요."
하나는 웃었다 이런 유의 질문을 몇 번이나 받았던 듯하다.
"51살, 결혼해서 아이가 둘 있어요. 둘 다 사내아이지만‥‥‥
가오루는너무놀라서 열린 입이 닫혀지지 않았다. 보기에는정말
소녀인데, 실제는 31살이라고 한다. 게다가 두 아이의 엄마‥‥ 전혀
예기치 못한 대답이었다.
"놀랐어요 "
"모두 같은 말을 하네요."
"나보다 연하라고만 생각하고 있었어요."
가오루가 20살이니 11살이나 연상이라는 얘기이다.
"당신은 몇 살이에요?"
가오루는 20살이라고 자기 나이를 알려 주었다. 하나는 눈썹을 놀
란듯움직이고작은목소리로 '그래요?' 하고 말한다.
"나이 들어 보이죠? 하지만 정말 20살이에요."
가오루는 勞에 손을 대보았다. 사막에 들어온 이후로 수염을 玲지
않았기 때문에 좀더 나이가 들어 보였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자기보다 어린 소녀라고 생각하고 있던 여성이 연상
이라고 알게 된 것은 쇼크였다. 앞으로의 접촉 방식에도 미묘하게 변
화가 올 것이다
서로 실제 나이를 교환하면서 대화를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가오루는 하나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틈틈이 자신의 인생을 이
1기했다.
하나는 이야기를 들어 주는 데 능숙했다 하루에 몇 번밖에 찾아오
지 않으므로 이야기하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었다 한 번에 10분 정도
겠지만, 그런 시간 제한 속에서도 그녀는 포인트에서 벗어나는 일 없
이 지금까지의 가오루의 인생을 파악해 나갔다
또한 가오루도 하나에게 이야기를 들려 주는 것이 즐거움이기도
했다. 현재 자신이 살아 있음을 재확인하려는 것이기도 했다. 문득
머리에 떠오르는 의문을 무리하게 옆으로 밀어내고 가오루는 조각조
각 자신을 이야기했다.
어린 시절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꿈을 갖고 있었는지. 아버지와
어머니와 지낸 생활의 단편. 미국 사막 지대로 가족이 여행가려고 계
획을 세웠던 일‥‥
이야기하는 것이 괴로운 적도 있었다. 아버지가 암에 걸린 것이 그
중 가장 괴로운 일이었다. 모처럼의 여행 계획도 물거품이 되고, 그
이후로는 집과 병원을 왔다갔다하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몇 년인가
지나서 아버지가 걸린 암이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를 원인으로 한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회복은 거의 절망적인 것이 되었다. 어머
니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미국 원주민의 민간 전승 속에 기적적인
쾌유의 힌트가 있다고 믿고, 신화에 매몰된 생활로 빠져 들어갔다. 아
버지의 병과 신비의 세계를 향한 어머니의 저돌적 전진‥‥ 양쪽의 균
형을 잡으면서 처음에 지망했던 우주물리학을 의학으로 바꿔 간 소
년 시절의 에피소드까지‥‥
이야기하는 중에 가오루는 그리움을 느꼈다. 나흘간에 걸쳐 하나
에게 이야기한 시간은, 모두 합해야 두 시간이나 세 시간 정도일 것
이다. 고작 그만한 시간에 자신의 인생을 다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아
니다. 잘라 버린 부분도 많다. 눈물을 참으면서 이야기한 적도 있는
가 하면. 아버지의 상식에 벗어난 행동을 설명하다가 무심코 웃음을
터뜨린 적도 있다.
단 두세 시간으로 말할 수 있는 인생‥‥ 정말이었을까?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에 먼 기억이 희미해져 가는 것 같기도 하다.
"사랑을 한 경험은 없나요?"
하나는 좋은 타이밍에 질문을 찔러 온다. 마침 가오루는 레이코의
일을 이야기할까 말라 하고 망설이고 있던 참이었다. 하나의 이 한마
디가 없었다면 레이코의 화제는 피해 지 나갔을지도 모른다.
레이코와의 연애를 이야기하려면, 당연히 료지의 이야기도 언급해
야 한다. 그것은 슬프다고 하기보다는 고통을 동반한 경험이었다. 사
려가 부족했던 행동이 부끄럽고 후회가 앞선다. 그러고 보니 레이코
와사랑을나눈 병실과 지금 있는 이 방은 어딘지 비슷하다 료지의
병실 서쪽은 전면이 유리창이라 강한 석양이 비쳤고, 공원의 녹음도
내려다보였다. 전면의 유리창만 있다면 넓이로 보나 벽 색깔로 보나
똑같았다.
그렇지만 레이코로 인해 얻은 사랑의 기쁨은 아무리 설명해 봤자
하나에게 전해질 리가 없을 것이다.
가오루는 정직하게 자신의 심정을 토로했다 하나는 때로 믿을 수
없다는표정을 떠올리며.고개를 옆으로 젓고는 '오,노.' 하고 어두
운 목소리로 맞장구를 친다. 특히 현재 레이코의 뱃속에 가오루의 아
이가 있다는 것을 털어놓자 하나의 표정은 얼어붙고 말았다.
"그 아인 태어나는 거죠?"
기묘한 질문 방식이었지만, 가오루는 신경 쓰지 않았다
"물론, 낳았으면 좋겠어요. 바로 그 때문에 난 여기에 있는 거예
_5.."
하나는 두 눈을 감았다. 잘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입술을 작게 움
직여 기도의 말을 입에 담은 것처럼 보였다.
베이지색 가죽이 발라진 작은 방에는 창문이 없어 시간의 경과는
시계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시계 바늘을 믿는다면 정확히 4일
째 밤의 일이었다.
가오루가 레이코와의 사이에 생긴 아이의 일을 다 이야기하자, 하
나는 '오늘은 여기까지 예요.' 하고 이야기를 자르고 방을 나가려고
했다.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것도 아닌 모양으로, 언제나 자르
기 적당한 부분에서 이야기를 중단시켰다.
"다음은 내일 들려 주세요."
소녀라고 여겼던 여성이 어느새 역전되어 자애로운 어머니가 된
듯한 상냥한 말투였다.
하나는 한 손을 가오루의 팔에 얹고 잠시 묵상하더니 문 앞까지 걸
어갔다. 거기에서 멈춰 서서 침대 쪽으로 눈길을 한 번 주고 나서 복
도로 나갔다.
문을 열면서 하나가 자신을 돌아보았을 때의 표정이 가오루의 눈
에 아로새겨져 떨어지지 않았다. 이전에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는 얼
굴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표정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다 기쁜 소식을 듣고 기뻐하는 순간이
나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기 직전의 표정처럼 . 상황이 같다면 같은 패
턴이 보이는 법이다.
그런데 하나가 마지막으로 방을 나갈 때의 표정은 어떤 패턴일까
하고 가오루는 궁리해 보았다.
문득 떠오른 것은 마음 어딘가에 걸려 있던 잊을 수 없는 광경이었
다.
상황은 매우 비슷했다. 병실에서 나가려다 방의 환자를 돌아본 여
성도 역시 하나와 마찬가지로 횐 옷을 입고 있었다. 역시 간호사였던
것이다
아버지의 직장에 생긴 암을 절제하고 경과도 양호했던 시절, 일시
적인 조치로아버지는큰방으로옮겨진 적이 있었다 그곳은4인 병
실로 암 환자만 있었다.
방을 드나드는 간호사 중 한 사람, 환자들로부터 인기가 있는 여성
이 있었다. 그다지 미인은 아니지만 애교 있는 얼굴이었고,몸 전체
에서 선의가 넘쳐나는 타입이었다. 환자가 멋대로 굴어도 참을성 있
게 싫은 얼굴 한 번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도 이 간호사를 마음에 들
어해서 농담을 섞어 그녀의 엉덩이를 만지고는 찰싹하고 어린애처
럼 야단맞는 것을 즐기곤 했다.
그런 그녀가 간호사 일을 중단하고 병원을 일시적으로 떠나게 되
었다. 그녀는 결혼한 지 2년째로 임신 7개월로 접어들어 있었다. 출
산을 위해 1년의 육아 휴가를 낸 것이다.
병원을 떠나려는 그날, 그녀는 가오루가 병문안 와 있던 아버지의
병실에 인사를 하러 왔다. 1년 후 업무에 복귀했을 때 다시 건강한
얼굴을 보여 달라는 간호사의 말에 환자 한 명이 농담으로 답했다.
·당신이 일에 복귀했을 무렵, 이 몸은 이미 퇴원했을 거야.
아버지를 제외한 나머지 두 사람도 같은 말을 했던 것 같다. 농담
인지 진담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그 말에 '그래요,그래요.' 하고 고
개를 끄덕 이면서 간호사는 한사람 한사람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방
을 나갔다
그렇게 방을 막 나가려던 참에 조금 전의 하나와 마찬가지로 환자
들이 있는 침대를 돌아보았다. 그 눈에 떠올랐던 표정을 가오루는 놓
치지 않았다 1년 후 병원에 복귀해도 네 사람의 환자중 몇 명과는
절대로 만날 수 없을 것이라는 불안이 눈에 넘쳐나고 있었다. 환자가
퇴원해 버리니까 만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살아 있는 그들을 다시
는 볼 수 없을 거라는 애절한 생각이 넘쳐났던 것이다.
아버지 옆 침대에 누워 있던 환자는 폐암이 뇌로 전이되었음이 판
명된 직후였다. 그 앞 침대에 있던 환자는 전립선 암으로 인해 남성
의 기능을 모두 절제당한 상태였다 아버지에게만은 아직 생명력이
남아 있었지만, 그외에는 모두 예정된 죽음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예정된 죽음에 동정심을 담아 응시하는 시선· . 가오루는 분명한
유사점을 감지해 내고 있었다.
·하나는 왜 저런 눈으로 날 돌아본 걸까?
불안이 마구 솟았다 할 수만 있다면 하나로부터 직접 그 이유를
듣고 싶었다.
그러나 가오루는 그 이후 두 번 다시 하나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다음날 아침, 평소와 같은 시간에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났다 가
오루는 하나일 거라고 기대하고 문을 열었지만, 거기에 있었던 것은
엘리엇이었다 휠체어 앞에 거대한 발을 내던지고, 양 바퀴에 거대한
손을 걸치고 있었다.
엘리엇은 가오루의 순조로운 회복을 보고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컨디션은 어떤가?"
여러 가지 의문에 대한 대답이 일체 보류되고 있는 것에 대해 가오
루의 참을성도 한계에 달해 있었다. 지금까지는 하나라고 하는 사랑
스러운 존재에 의해 억제되어 있었지만 엘리엇 앞에서는 폭발할 것
같았다.
· .컨디션이 어떠냐구? 왜 늘 질문에 답하는 건 이쪽이지? 체력이
돌아온 것은 좋지만, 이 대로라면 극도의 불안으로 신경이 상하고 만
다. 컨디션이 좋을 리가 없다
가오루는 언제 분출할지 모르는 분노를 꾹 참고 떨리는 목소리로
엘리엇에게 다가갔다.
"이젠 좀 그만 해두시죠."
엘리엇은 가오루의 목소리에서 심상치 않은 긴장을 감지했다. 두
손을 들어 , 좀 기다려 하고 말하려는 듯 손으로 제지하고 한 호흡 간
격을 둔다.
"알았네. 자네 기분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 . 슬슬 계획대로 옮겨
볼까?"
·계획. 무슨 계획인지 모르지만, 대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인가?
가오루는 험악한 표정으로 따지고 들었다
"일단,먼저 가르쳐 주었으면 좋겠어요.여긴 어디고 당신의 목적
은 무엇이죠?"
엘리엇은 가오루 앞에서 펼쳤던 양 손을 모아 기도하는 포즈를 취
했다.
"그 전에 묻고 싶군. 자낸 신을 믿는가?"
엘리엇은 가오루를 향해 엄숙하게 물었다.
엘리엇에게 안내받은 방에도 창문은 없었다. 어째서 어디나 밀폐
도가 높은 걸까?가오루는 창 없는 방이 싫었다 전의 방보다 크고
중앙에는 가죽으로 된 소파 세트가 놓여 있었다.
엘리엇은 우선 가오루에게 소파에 앉도록 권했다 그대로 소파에
앉자 엘리엇은 횔체어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뒤로 輕 모습으로 지팡
이도 짚지 않고 종종걸음으로 걸어와 가오루의 정면에 앉았다.
가오루는 눈을 크게 떴다. 횔체어에 앉아 있어서 걷지 못하리라고
만 생각했는데, 좀 보기 흥하기는 해도 상당히 튼실한 걸음걸이로 걷
는 것이 놀라웠다
가오루의 놀람을 알아채고 엘리엇은 얼굴에 득의에 찬 빛을 보였
다.
"선입견으로 사물을 봐서는 안 돼. 일단 모든 걸 의심으로 시작하
거 야."
모든 것을 의심하는 데에 가오루는 이미 익숙해지기 시작하고 있
었다. 미국의 사막을 가로지르는 동안 경험하고 얻은 것은 현실과 가
상의 애매한 경계선을 넘는 밸런스 감각이었다. 산등성 이를 걷다 호
우를 만났을 때도 가오루는 그 감각만은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것
이다.
"제 질문에는 언제 대답해 술 겁니까?"
엘리엇의 말을 무시하고 가오루는심통이 난것처럼 말했다. 엘리
엇은 '언제든지'라는 듯 두 손을 들었다.
질문하고 싶은 건 태산 같다 기본적인 물음은 제쳐두고 가오루는
처음에 엘리엇에게 듣고 나서 마음에 걸려 있던 말을 검증하는 것부
터 시작했다.
"훨씬 전부터 넌 여기에 올 운명이었다, 당신은 그런 식으로 말하
지 않았습니까?"
가오루는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진실이 아니라, 어떤 비유이겠지
만 몹시 마음에 걸리는 말투였다.
"그에 관해 대답하는 건 아직 이르네 자네가 물어 본 순서대로 설
명하면 자넨 아마 비명을 지르고 말 거야."
"그럼 , 내가 비명을 지르지 않도록,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이 군요."
가오루는 다시 격해지기 시작했다. 둘러대는 듯한 엘리엇의 말투
가 신경에 거슬려 견딜 수가 없다. 자신의 인생 항로의 키를 쥐고 아
버지와 어머니까지 조롱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 것이다.
"역시 이렇게 하는 수밖에 없었어 . 지금의 자넬 보면. 자넬 억지로
데려오지는 못했을 거야. 역시 자네의 의지로 오게 하는 수밖에 없었
던 것 같군 내 의도는 틀리지 않았어 ."
엘리엇은 그렇게 혼잣말을 하고는 싱글싱글 웃었다. 자신의 인생
에 멋대로 개입해 들어온 것 같은 말투였다 가오루는 눈앞에 있는
노인을 목 졸라 죽이고 싶을 정도로 초조함에 횝싸였다.
노려보는 듯한 가오루의 시선을 엘리엇은 태연스런 얼굴로 받아내
며, 두 사람은 잠시 입을 다물고 있었다.
"루프에 관해서 자낸 어느 정도 알고 있나?"
대화를 재개한 것은 엘리엇이었다. 팔짱을 끼면서 눈을 치켜떠 가
오루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이 든 얼굴에 소년의 모습이 남아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상당히 잘 만들어진 컴퓨터 시뮬레이션이라고 생각합니다. "
엘리엇은 불만스러운 듯이 눈썹을 찌푸렸다.
·상당히 잘 만들어졌다고? 그 정도가 아니야. 모든 의미에서 완벽
한 하나의 세계를 난 만들어 낸 거야."
'당신이 , 만들었다구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라는 게 되지만. 뭐, 맨 처음에 루프라는
구상을 머릿속에 떠올린 건 바로 나야."
루프를 말하기 시작하자마자 엘리엇의 태도에는 자신감이 넘쳐났
다. 둑이 터진 듯 말이 흘러나오고, 때때로 흡족해 하는 듯한 표정도
보인다.
"난 그 당시 MIT의 학생이었지 . 맞아, 지금의 딱 자네 나이, 지금
으로부터 70년쯤 전의 일이네. 세상은 달에 내려선 우주 비행사들에
게 갈채를 보내고, 이대로 과학이 진보하면 우주 정거장 건설과 우주
여행이 현실이 된다며 들떠 있던 그 무렵 난 우주가 아니라 내가 창
조하려는 전혀 다른 세계에 눈을 돌리고 있었네 "
거기까지 단숨에 말해 버리더니 엘리엇은 갑자기 목을 움츠리고
입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런데, 세계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자낸 알고 있나?"
"현실 세계 말입니까? 아니면 루프?"
루프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 것인지 상식적으로 보면 명확하다
루프계를 지탱하는 것은 에너지, 즉 전력이다. 하지만 현실 세계라
면
엘리엇은 사뭇 우스꽝스럽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현실도루프도그 점에선 제대로 겹쳐 있네. 양쪽모두똑같은원
리로 움직이지. 알겠나? 세계를 움직이는 건 예산이야."
엘리엇은 예산의 의미가 가오루의 머리에 침투하기를 기다렸다가
계속했다.
"루프라고 하는 거대한 프로젝트에 예산이 할당되어 있지 않았다
면, 그 세계는 존재하지 않았을 걸세. 그러니까 현실도 루프도 예산
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아."
그후에도 가오루는 일방적으로 듣는 역할에 머물렀다. 앞으로 이
야기가 어떻게 진행되고,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이 자신과 어떻
게 연관되는 걸까 하는 흥미가 생겨 엘리엇이 이야기하는 내용에 몰
입하게 되고 만 것이다
"예산만 있으면 우린 지금쯤 우주 정거장에 있을 수도 있었지 ."
엘리엇이 말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과학은 사회 정세를무
시하고 무작정 일직선으로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의 사정
에 맞추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바꾼다 그리고 예산은 그때그때의 사
회 정세와 국가간의 의도, 즉 사람들이 무엇을 가장 바라는가 하는
최우선 사항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70년 전, 다가올 미래도
를 그리는 가운데 메인 무대가 된 것은 광대한 우주 공간이었다. 화
성과 달은 마치 인간의 식민지처럼 취급되고, 행성과 행성은 스페이
스 셔틀 정기편에 의해 연결된다. 누구나 그런 미래를 상상하여 영화
나 소설의 소재로 다루어졌다.
그러나 그로부터 현재까지 화성은커녕 달에조차 인간이 운반되는
일은 없었다. 인류가 달에 도착한 것은 저 빛나는 순간뿐이었다. 그
이후 우주 계획은 소걸음으로 일관하다가 소처럼 잠들고 말았다. 그
이유는 단 하나
· .께산이 할당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생각하면 왜 이런 일을 예측하지 못했는지 이상할 정도이다.
단 엘리엇만은 그것을 예측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남
아돌아갈 정도의 재능을 다른 분야로 돌린 것이라고 거리낌 없이 자
랑했다.
그가 선택한 학문 영역은 현재와 비교하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느
린 계산 능력밖에 없었던 컴퓨터 세계였고, 2중 나선 구조가 명확해
진 지 얼마 되지 않은 분자생물학의 세계였다 엘리엇은 뛰어난 직감
을 작동시켜,생겨난지 얼마 안 된 두 세계를 결합시켜 갔다. 우선
먼저 테마로 삼은 것은 컴퓨터 속에 인공 생명을 발생시킬 수 없을까
하는 소박한 의문이었다. 그는 독자적인 방법으로 의문에 대한 해답
을 찾으려 했다.
연구의 성과는 서서히 결실을 맺어 갔다. 엘리엇의 예측대로사회
전반의 흥미는 어떻게 해서 우주 공간으로 나아갈까가 아니라, 어떻
게 해서 기분 좋은 정보 사회를 형성할까 하는 쪽으로 향하기 시작했
다. 컴퓨터가 시대의 꽃이 되어 감에 따라 엘리엇의 연구 테마에는
발표의 장이 주어지고 동조자도 모여들었다.
순풍을 받은 엘리엇은 세계에서 최초로 '자기 증식 프로그램'을 개
발하고, 프로그램 자체가 독자적으로 진화하는 소프트를 만들어 냈
다. 그는 최초에 떠올렸던 의문을 아직 잊지 않았던 것이다.
‥‥컴퓨터 안에 인공 생명을 발생시키는 일이 가능할까?
최초의 실현을 본 것은 생각보다도 빨라 20세기가 끝나려는 세기
말 무렵이었다 금세기 중에는 불가능하리라고 예상했던 엘리엇은
예상 밖으로 빠른 꿈의 실현에 맥이 빠지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다
만, 초기에는 인공 생명이라고 해도 극히 단순한 구조의 생명으로,
컴퓨터 디스플레이 안에서 돌아다니는 것은 오로지 선충(線蟲) 같은
것이었다.
자웅이 나뉘어 있는 선충을 생식시켜 컴퓨터 내부에 독자적으로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킨 것은 금세기가 시작되려는 시기였다.
새로 태어난 세포는 세포 분열을 반복하고, 이윽고 어미와 똑같은
움직임으로 디스플레이 안을 기어다니게 되었다 엘리엇의 눈에 그
모습은 신세기에 어울리는 광경으로 비쳤다고 한다.
그 다음부터는 가속도적으로 진보했다 어떤 생물이라도 기본에는
그다지 차이가 없고, 축적된 것의 응용으로 어류, 양서류로 나아가는
일은 문제없었던 것이다.
컴퓨터 시뮬레이션, 혹은 인공 생명의 진보를 눈앞에 두고 엘리엇
은 자신의 테마를 더욱 진전시켰다.
· .치구 규모의 생명권을 가상 공간에 만들어 내는 것이 가능할까?
루프라고 하는 프로젝트가 상당한 구체성을 띠고 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엘리엇의 부름에 응해 전세계의 과학자가 어느 한 가지의 목적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정보공학, 의학, 분자생물학, 진화론자, 우
주물리 , 지질학, 기상학‥‥ 이과계의 학문은 말할 것도 없고 경제학,
역사학, 정치학, 사회과학계의 학자들도 이 프로젝트에 흥미를 보였
다
지구와 똑같은 공간을 가상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에는 과학뿐만이
아니라 인문 사회학적인 발상도 필요했다 즉 루프라는 실험에 의한
열매는 모든 방면에 피드백되어 공헌할 것으로 예측되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수수께끼였던 진화론, 생물학의 문제는 말할 것도 없고
가상 공간에서의 지적 생명체가 탄생하면 왜 전쟁이 일어나는가라는
사회 문제부터 인구 증가나 주가의 움직임까지,이제까지 법칙이 발
견되지 않았던 문제에 어떤 힌트가 주어질 가능성이 생겨나는 것이
다 현대의 모든 분야에 발전을 가져을 것이 확실시되어,루프 프로
젝트의 중요성은 첨단을 걷는 학자라면 누구나 인정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루프는 현실로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국가 규모에서의
예산이 할당된 것이다.
국가간의 의도도 얽혀 처음 한동안은 오픈이라 할 것도 없었다. 거
기에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예상할 수 없고, 새로운 세계 전략이 가능
해질 수 있기도 하여 신중하게 일을 추진하기로 했다. 그래서 대대적
인 행사도 없이 미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프로젝트가 은밀하게 시작
되었다.
거기까지 이야기를 마치자 엘리엇은 그리운 이름을 꺼냈다.
"후타미 히데유키‥‥ 그도 상당히 우수한 연구자였지 . 대학원을 막
나와 아직 젊었지만, 일본인 연구자 가운데에서는 획기적인 역할을
해주었지 ."
엘리엇은 가오루의 귀를 간질이는 말을 했다. 자신의 아버지가 우
수하다고 칭찬받는 것은 물론 기분 나쁘지 않았다
"아버지를 만난 적이 있습니까?"
가오루는 벼르고 물었다.
"아니, 직접 만난 적은 없네.그러나 부하 직원을 통해 소문은 듣
고 있었지 "
아버지는 '루프'에 관해서는 그다지 많은 것을 말하지 않았다. 도
대체 아버지가 루프 프로젝트에서 한 역할은 어느 정도였을까 하고
가오루는 흥미가 당겼다. 다음에 만날 때 꼭 직접 물어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를 생각하는 가오루를 가로막고 엘리엇은 계속 말했다.
"그리고 루프가 어떻게 되었는지 자낸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
11."
"암화했죠."
가오루는 시원스럽게 말해 버렸다.
"최종적으로는 말이지 . 하지만 그때까지의 경과는 훌륭하다고 할
수 있네. 그렇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
엘리엇은 뭔가 사정이 있었던 듯 가오루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질
문을 재촉하는 것 같은 얼굴이 거기 있었다
"뭔가 예측과 달랐던 겁니까?"
"놀랍지 않은가? 자낸 루프의 일부를 그 눈으로 보고 있는 걸세."
"놀랄 만한 일이 너무나 많아서요."
일방적인 흥분에 맥이 빠진 모양이다
"물리적인 조건이 똑같다면 거의 같은 형상의 생명이 생길 것이라
고는 생각하고 있었지 . 하지만 이 정도까지 현실과 같으리 라고는 생
각지도 못했네. 진화는 우연에 좌우된다고 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통
설이었지 . 그렇다면 완전히 똑같게 될 리가 없는 거야."
가오루에게도 그것은 놀라움 중의 하나였다. 루프를 지배하는 것
이 지구와 완전히 똑같은 물리 조건이라고는 해도 생명 진화의 코스
부터 모두 완전히 똑같게 되었다는 것은 정말 이상하다.
"그래, 당신은 거기에서 어떤 결론을 끌어낸 겁니까7"
"루프에서 생명의 자연 발생은 볼 수 없었네. 그래서 우린 최초의
개입을 했지 . 초기 생명이라고 여겨지는 RPfA를 흩뿌린 거야. 그래,
마치 바다에 종자를 뿌리듯이 말이야. '종자를 뿌렸다'라는 비유를
사용했지만 실제로 비유가 아니었네 RPfA는 실로 종자 그 자체였어 .
어떤 정해진 생명수로 성장하기 위한 종자 그 자체였던 거지 ."
"결국 뭘 말하고 싶은 겁니까?"
가오루는 냉정하게 재촉했다.
"루프와 현실은 멋지게 일치하고 있네 루프에 생명은 자연 발생하
지 않았다. 그래서 생명의 종자가 뿌려지게 됐다. 이것이 무엇을 의
미하는 건지 자낸 모르겠는가?"
가오루의 생각이 미쳤다. 엘리엇과의 긴 대화가 시작되기 전에 그
가 한 말.
·자낸 신을 믿는가?
그렇다면 대답은 하나밖에 없다
"현실도 또한 가상 세계라고 말하고 싶은 거군요."
"당연하지 . 현실에 있어서도 지구상에 생명은 자연 발생하지 않았
다. 그러면 어떻게 우린 여기에 있지? 역시 똑같이 생명의 종자가 뿌
려진 거야. 누가 뿌렸느냐? 그래, 우리가 신이라고 칭해야 마땅할 존
재에 의해서지. 신은 자신의 모습과 비슷하게 이 세상에 생명을 탄생
시켰네. 성경의 말은 진실이었던 거야 "
그런 말을들어도가오루는놀라지 않았다. 현실이 가상 세계일지
도 모른다는 것은 여행 도중에 몇 번이나 생각한 일이었다. 다만, 증
명도 반론도 할 수 없을 뿐이다. 단순한 유추에 지나지 않아 현실에
변혁을 초래할 만한 효력이 없다. 검증이 불가능하므로 태연하게 믿
느냐 믿지 않느냐의 문제만 남을 뿐이다
"그렇다고 해도 현실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습니다. "
가오루의 냉정함에 밀린 듯한 모습으로 엘리엇은 소파에 등을 기
대고 말했다.
'현실을 신이 창조한 것이라고 해도, 물론 우리가 컴퓨터 속에 만
들어 낸 것과는 전혀 다른 방법이라는 의미네만‥‥‥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가오루가 끼여들었다
"그래서 신의 세계를 움직이는 것도 예산이라는 거군요."
가오루는 그렇게 말하고 웃었다.
순간, 엘리엇의 눈은 가늘어지고 차가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나를 우롱할 생각인가?"
하지만 험악함은 오래 가지 않았다. 엘리엇은 바로 표정을 누그러
뜨리고 이전의 온화함을 되찾았다.
가오루는 벽시계를 보았다. 엘리엇과의 대화는 이미 세 시간 정도
이어지고 있다. 슬슬 배도 고파 오고, 세 시간이나 떠들었는데 아직
이야기의 끝이 보이지 않는 탓인지 한층 피로가 느껴졌다.
엘리엇은 가오루의 기분을 알아채고 일단 대화를 일단락짓자고 했
다
"피곤하겠지. 옛날 영화라도 보면서 여기서 잠시 쉬는 게 좋겠네
점심 준비도 해두지 ."
그 얼굴에는 분노도 흥분도 없었다. 무표정이라고 해도 좋다. 엘리
엇은 리모트 컨트롤을 움직여 벽 한 면에 스크린을 내리고 재생 버튼
을 눌렀다.
혼자 힘으로 일어나서 휠체어로 걸어가 앉자 엘리엇은 양 바퀴를
밀어 방에서 나갔다 그모습을눈으로쫓고 있던 가오루는 문이 닫
힘과 동시에 문이 잠기는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가 좋든 싫든 지금
자신이 놓여 있는 상황을 설명하고 있었다. 역시 연금되어 있는 것이
다. 왜 이런 짓을 하는 것인지 이유를 듣지 않으면 안 된다.
스크린에는 예전에 본 적이 있는 옛날 영화가 흐르고 있었다. 10살
무렵 , 부모를 따라 보러 갔던 SF 영화이다. 테마송도 기억하고 있었
다. 마음에 드는 영화였기 때문에 어머니에게 사운드트랙 판을 사달
라고 해서 질릴 정도로 들었던 곡이다.
횐 옷을 입은 몸집이 큰 흑인 남자가 어느 사이엔가 가오루 앞에
샌드위치와 밀크 티를 두고 갔다
가오루는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영상은 보지
않고 음악만 듣고 있었다 그렇게 하니 더욱 그리움이 복받쳐 온다.
곡을 듣고 있기만 해도 눈꺼풀 안쪽에 영상이 떠오른다 아직 아버지
의 암은 표면에 나타나지 않았고,가정은 평안에 감싸여 있었다. 당
시의 추억이 음악에 의해 일깨워진다.
가오루는 얼마 동안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을 깨닫지 못했
다.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입술에 닿았을 때,가오루의 머리
애 이것 또한 우연일까라는 의문이 떠올랐다
지금 비쳐지고 있는 영화는 가오루에게 특별한 작품이다. 엘리엇
은 우연히 이것을 골라낸 걸까?아니면 가오루에게 추억이 깊은 영
화라는 것을 알고 이것을 택한 걸까?
만일 후자라면 연금당해 있다는 현재의 상황 이상으로 일이 심각
해진다.
‥‥ 나는 지금까지 엘리엇에게 감시당해 왔는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 어린 시절부터 누군가 보고 있다는 기색을 등으로 느
끼는 때가 종종 있었다. 기분 탓일 거라고,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던
감각이 지금 비로소 현실감을 갖고 되살아났다
增
가오루가 막 점심을 다 먹었을 때, 엘리엇이 돌아왔다.
"오호, 상당한 식욕이군. 좋아, 좋아."
비워진 쟁반을 보고 엘리엇은 만족스러운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재 이것으로 충분해요. 당신 덕분에 아주 기분이 엉망이라구
."
요
해결되기는커녕,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반대로 더 큰 의문이 누적
되어 갔다. 가오루는 빨리 이 일을 끝내고 싶었다. 무엇 때문에 여기
에 온 것인가?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를 해치울 힌트를 발견하기
위해서이다. 이런 곳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을 여유가 없다
'자, 오늘 오후의 테마는 한마디로 자네의 사명에 관해서야."
엘리엇은 그렇게 말하면서 소파에 앉았다. 또다시 속마음을 들키
고 만 모양이다. 이래서는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칠 수가 없다.
"내 사명?"
"그래,자넨 무엇 때문에 여기에 온 건가?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
스의 치유 방법을 찾기 위해서겠지?"
가오루와 엘리엇은 잠시 동안 서로의 눈을 응시했다
자신에 관한 정보를 상대가 모두 쥐고 있는데도, 엘리엇에 관해서
는 무엇 하나 제대로 아는 게 없다는 불공평함이 가오루의 신경을 초
조하게 했다. 과학사 중에서 그가 맡았던 역할은 그럭저럭 이해한 셈
이다. 하지만 가오루가 알고 싶은 것은 좀더 개인적인 일이다. 살아
있는 인간으로서의 모습이 좀더 구체적으로 떠올라 주면 이 거북함
은 望어질 것이다.
"먼저 자네한테 한 가지 질문을 하지 ."
가오루의 의도와는 반대로 엘리엇은 오른손 집게손가락을 천장을
향해 세운다 이번에는 선생이라도 될 생각일까?
"뉴트리노가 다른 물질과 인터랙션한 경우 뉴트리노 진동의 위상
이 어긋난다는 사실은 몇 년에 발표되었지?"
뉴트리노는 중성미자라고도 불리는 소립자의 일종이다. 그 성격으
로 세 가지 정도 열거하면, 광속으로 달리고, 전기를 갖지 않으며, 에
너지 덩어리라는 것이다. 이 점만을 보면 빛과 아주 비슷하다. 하지
만 결정적인 차이는 에너지를 갖고 있으면서도 어떤 것이라도 器고
나갈 수 있다고 하는 점이다. 태양에서 방사된 뉴트리노가 땅 속을
器고 나가지구의 반대쪽에 도달하면 지면에서 불어 낸 것처럼 어둠
속으로 나아간다.
· .뉴트리노. 소립자에 관한 발견이 왜 여기서 문제가 되는 거야?
가오루는 엘리엇의 질문에 반사적으로 대답하고 있었다.
"2001년 ."
가오루가 태어나기 전의 일이지만,과학사의 한 페이지에 남겨진
작은 발자취인만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맞았네.그때까지 질량이 제로라고 생각되던 뉴트리노에 질량의
존재가 확인되었던 거지 ."
"그래서 , 그게 대체‥‥‥
가오루는 초조한 나머지 끼여들려 했지만 엘리엇에게 제지당했다
"아,기다리게. 이야기는 끝까지 듣는 거야 알겠나?모든 계획은
유기적으로 서로 얽혀 있는 데에서 진행되지 . 이렇게 말해도 자낸 아
직 모를 테지만,만일 뉴트리노의 위상 어긋남이 발견되지 않았으면
아마 자낸 존재하지 않았을 거야."
"농담도 어지간히 했으면 좋겠군요. 뉴트리노의 어떤 성질이 밝혀
졌다는 사실과 나의 존재가 연관될 리가 없습니다. "
뉴트리노는 물질의 90퍼센트를 차지한다고 일컬어지는 소립자이
다. 어디에든 있는 것이다. 그런 것이 자신의 출생과 연관 있다는 따
위의 이야기는 참을 수 없었다.
"알았네 그저 머릿속 한쪽 구석에 놔두기만 하면 되니까. 앞으로
3분 동안은 뉴트리노를 화제로 삼아 주었으면 좋겠군."
그리고 엘리엇은 아주 간단하게 뉴트리노의 위상의 어긋남을 이용
)여 무엇을 할 수 있게 되는가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즉 어떤 물질에 뉴트리노를 조사(照射)하고 그 위상이 어긋나는
것을 계측해서 재합성하는 것을 통해 물질 미세 구조의 3차원 디지
털화가 가능해졌던 것이다. 조사하는 것은 무기물이든 유기물이든
상관없었지만, 주로 의학 생리학 분야로의 응용이 기대되었다. 어떤
생물의 모든 분자 정보를 디지털화해서 뽑아낸다는 기술이 꿈이 아
니게 된 것이다. 이것은 DPfA를 해석하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DNA
의 전 유전자 배열을 해석한다고 해도 그것은 한 개의 생물을 구성하
는 무수한 세포에서 단 하나의 세포를 뽑아내 검사한다는 데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뉴트리노 진동을 응용하면, 뇌의 활동 상태에서 마음
의 상태, 기억을 포함한 생체가 가진 모든 정보를 3차원 정보로 기록
하는 획기적인 기술이 가능해진 것이다
"뉴트리노 스캐닝 캡처 시스템‥‥ 머릿글자를 따서 NSCS, 혹은 우
린 줄여서 뉴캡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생물의 전 분자 구조를 즉시
파악하는 장치의 건설 계획은 루프 프로젝트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다른 연구자 그룹에 의해 착수되었네. 물론. 거액의 예산
을 받았기 때문이지 . 뉴캡의 건설에 내가 직접적으로는 관계하지 않
았지만 간접적인 어드바이스는 빼놓지 않았지 "
엘리엇은 거기에서 한숨을 돌렸다.
"자, 차라도 한 잔 마시는 게 어떻겠나? 머리를 좀 정리하는 게 좋
겠네 ."
권하는 대로 가오루는 찻잔에 입을 대었다. 이미 식어 버렸다. 뉴
트리노에 관한여러 가지 소문은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뉴캡 같은
대규모 장치의 건축 계획은 완전히 금시초문이다.
"혼란시켜서 미안하네. 그건 그렇고 드디어 얘기를 현재 우리를 위
협하는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로 옮기도록 하지 ."
"이제야 본 주제에 접근하는 겁니까?"
가오루는 다소 안심이 되었다. 관계 없는 이야기를 끝없이 듣게 되
는 건 아닐까 하고 다소 염려스러웠기 때문이다.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에 관해서 자네는 뭘 알고 있는가?"
"유전자의 염기 배열은 모두 해석되어 있어서 저도 그것을 봤습니
다. "
"그런데도 치료 방법도 모르거니와 백신의 개발도 진행되지 않고
있지 ."
"어째서 입니까?"
"바이러스의 발생원을 조사하는 건 의외로 시간이 걸리는 법일세.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의 경우 그 발상이 어디에 있는 건지 좀처럼
알 수 없었지 ."
가오루는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가 어디에서 홀러나온 것인지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루프죠."
기대에 반한 때문인지 엘리엇은 눈을 크게 떴다.
"자낸 어떻게 그걸 알았나?"
진심으로 놀라고 있는 엘리엇의 얼굴을 보는 것은 왜 즐거운 일이
었다 가오루는 대답을 미뤄 이 쾌락을 오래 끌어 볼까 생각했지만,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천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는 그다지 큰 것이 아닙니다 유전자수
는 9개이고 각각의 유전자를 구성하는 염기 수는 수천에서 수십만이
라는 오더(Order,정렬 대형 :역자주)입니다 그런데 그9개의 유
전자를 구성하는 염기 수가 모두 2의 Df승의 3배입니다. 이건 우연이
아니죠."
엘리엇은 신음 소리를 냈다.
"용케도 그걸 알아챘군."
"자랑은 아닙니다만, 난 숫자에 대해 이상한 직감을 발휘할 수 있
습니다. 6자리까지의 숫자 9개가 늘어서 있고, 그 모두가 2의 N승의
3배라는 걸 발견하는 일 따윈 어렵지 않은 것이죠."
"그래서 , 발생원에 다다랐다는 건가?"
"네, 왜 2의 N승x3일까. 3개의 염기가 1코돈이니 , 하나의 아미노
산을 지정하는 것으로 볼 때 3배의 의미는 대충 알 수 있죠. 하지만
왜 기수는 2가 아니면 안 되는 걸까. 물론 루프 프로젝트에 관한 지
식이 없었다면 이런 발상은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죠.기수가2인 건
컴퓨터가 2진법이기 때문입니다. 즉,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는 루
프에서 누설됐다. 발상원은 루프였던 겁니다. "
"그대로이네 ."
엘리엇은 어정정한 웃음을 띄우고, 두 손을 탁탁 쳤다 박수를 치
는 것일 테지만 무시당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루프가 발생원이라는 걸 알아냈으니, 치료 방법도 해명할 수 있는
겁니까?"
가오루는 목소리를 낮추고 냉정함을 가장하여 물었다. 전이성 인
간 암 바이러스의 치료 방법‥‥ 가장 중요한 점이었다.
"눈치챈 건 언제였나?"
엘리엇은 가오루의 질문을 무시하고 있었다
"11 ?"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의 발상원을 알아챈 게 언제인가?"
"한 달쯤 전의 일입니다. "
"그런가? 난 반 년 전일세."
반 년 빨리 깨닫고 있었던 것을 자랑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엘리엇
은 어딘가 방심한 표정으로 어린애 같은 눈길로 손가락을 꼽으며 수
를 세고 있었다. 얼굴에는 회한이 떠올라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
다
"당신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
가오루는 애원하는 듯한 어조가 되었다. 하지만 엘리엇은 긴 변명
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암 같은 흔한 병이었던 것이 틀렸어.좀더 특징이 있는 병이었다
면 빠른 단계에서 뭔가 손을 쓸 수 있었을지도 몰라. 그러나 일반적
인 암에 매몰되어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는 착착 기초를 만들어 갔
지 , 그래, 범죄자가 몸을 숨길 장소는 대도시가 가장 적합하다는 이
론과 비슷해. 암이라고 하는 흔한 병이었기 때문에 위장이 가능했던
거지 . 생각해 보게 . 루프 프로젝트에 관계했던 연구자가 암으로 죽었
다 한들 무슨 야단 법석이 필요하겠는가?원인 불명의 병이었다면
좀더 기를 쓰고 바이러스나 뭔가를 찾았겠지 . 하지만 어디에나 있는
병‥‥ 또 그 녀석인가? 하고 한탄하는 정도였네. 살짝 찾아와서는 순
식간에 차례로 빼앗아 가버렸어
가오루는 엘리엇의 슬픈 심정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전이성 인간
암이 지금까지와 다른 바이러스성임이 판명된 것이 겨우7년 전. 전
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의 순수분리에 성공한것은불과 1년 전의 일
이다. 그 동안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는 착착 기반을 다지고 폭발
적인 번식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엘리엇은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에 의해 아주 친한 사람
을 잃었음이 틀림없다 적의와 회환,슬픔이 뒤섞인 눈이 과거를 향
하고 있었다
엘리엇의 사람됨을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일지도 모르지만, 가오루
는 대화의 방향을 다시 똑바로 세우기로 했다.
"루프에서 어떻게 바이러스가 홀러나왔는지 그 경위는 파악하고
있는 겁니까?"
가오루의 말에 엘리엇은 깔짝 놀라 얼굴을 들었다.
"응? 아아, 물론, 파악하고 있지
"가르쳐 주십시오."
"루프는 이미 20년 전에 중단돼 버렸네. 저 세계는 얼어 버린 거
야. 시간은 스톱. 등장 인물은 전부 움직임을 멈춘 그대로야. 어째서
우리가 루프 프로젝트를 정지시켰는지 , 알겠나?"
"예산이 없어서겠죠?"
농담이 아니었다. 그러나 엘리엇은 순간 어이없어하다가 뱃속에서
부터 웃었다.
"그 말 그대로야. 제대로 알고 있군 그래. 실제로 예산은 다 떨어
져 가고 있었네.각 분야의 학문적인 피드백도 끝나고,성과도 더할
나위 없이 좋았지 . 예산에 상응할 만한 가치를 생산했다고 생각하네
하지만 하나의 프로젝트를 한없이 계속할 수는 없는 거야. 뉴멕시코
의 사막지하에 대체 몇 개의 초병렬 슈퍼 컴퓨터가 잠들어 있을 거
라고 생각하나? 64만 개야. 일본도 마찬가지로 도쿄 지하에 64만 개
가 배치되어 있지 . 이걸 움직이기 위해선 독자적인 발전소가 필요할
정도야.막대한 전력 그리고 유지비는 엄청난 액수에 달하지.언제
까지고 계속할 수는 없었네 그런 때, 마침 루프 그 자체가 암화를 시
작했지 ."
그 경위에 대해 가오루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웨인스록의 폐허에
서 직접 방아치가 되었던 장면을 눈과 귀로 체험했던 것이다.
그 사실을 엘리엇에게 말하자, 알고 있었다는 식으로 두 번 계속해
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자낸 畿지 . 業다기보다 체험했다고 하는 게 좋겠지 . 그런데
자낸 왜 루프가 암화를 시작했는지 그 연유를 몰라. 아니 , 먼저 말해
두지. 나 자신도 원인은 모른다네. 기묘한 비디오 테이프가 만들어지
고 지금까지 없던 바이러스가 만연하는 등의 일은 루프에 존재하는
개체에게는 절대로 설명 불가능한 사건이었을 거야. 루프에 존재하
는 개체에게 설명 불가능한 사상(事象)이라도 그것을 창조한 나라면
설명 가능할 게 아닌가 하고 자넨 생각할 게 틀림없어 . 하지만 솔직
히 말해서 나도 모르는 거야. 세계의 모든 현상을 설명할 수는 없어 .
우리는 늘 도전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고, 세계의 멸망은 어디에든지
있지 . 모순 없는 세계 따윈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거야. 현실계의
멸망이 루프에 전염된 것인지도 모르고, 혹은 다른 가능성으로서 컴
퓨터 바이러스의 짓이라는 것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네 완벽한 방어
가펼쳐져 있었지만,회선에 의해 바깥과 연결되어 있는 이상절대적
이라고 잘라 말할 수는 없으니까 말이야. 장난치고는 대단히 잘 만들
어졌지 . 그럼에도 내가 흥미를 가진 건 루프에서의 다카야마 류지라
는 개체에 대해서 였어 ."
엘리엇은 거기에서 중단하고 의미 있는 시선을 가오루에게 던졌
다. 동의를 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가오루는 맞장구를 쳤다.
"네, 상당히 재미있는 인물이죠."
"유니크하다고 할 수 있지 "
"그가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를 해치우는 열쇠를 쥐고 있는 거겠
죠?"
엘리엇은 가오루의 뇌 속을 들여다보려는 것처럼 눈을 가늘게 했
다. 가오루의 일거수 일투족에서 눈을 뗄 수 없다는 식이다.
"자네, 디스플레이에서 다카야마를 보지 않았나?"
느린 듯한, 그러면서도 뭔가 의심을 품고 있는 듯한 애매모호한 물
음이었다
"전, 다카야마의 시점에 서서 , 그 사건을 바라보았다고, 생각합니
다
엘리엇의 말투를 흉내내 가오루는 한마디 한마디를 잘라 대답했
다. 자신의 기억이 틀림없는지 확인하면서·
확실히 그러했다 가오루는 다카야마의 눈과 귀를 비롯해, 그의 오
감을 모두 활용하여 사건을 재체험했던 것이다.
"과연 그런가?"
엘리엇은 평소와 다른 소리를 내고 눈을 깜박깔박 했다. 가오루는
불안한 마음으로 재빨리 돌아가고 있는 엘리엇의 눈을 다시 응시할
뿐이었다
"그게 어떻다는 거죠?"
"아니, 아무것도. 좀 재미있는 방향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아서‥‥ 음, 그건 어쨌든 간에. 그럼 자낸 죽음 직전의 다카야마
의 목소리를 자기 자신의 목소리처럼 들었다고 하는 게 되겠군?"
"네 , 그렇습니다 "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가오루가 본 것, 들은 것 모두 다카야마의
시각과 청각으로 포착한 것이다. 죽음 직전, 그는 현실계와의 인터페
이스를 발견하고 전화를 걸어왔다 가오루자신의 몸 안에서부터 다
카야마의 목소리가 울려 나오는 것 같았다
"다카야마가 뭐라고 하던가?"
가오루는 되도록 다카야마가 말한 그대로, 어조를 흉내내 보았다
"날 그쪽으로 데려가 줘 .'
"어떤 의미라고 생각하나'~l"
"루프계의 창조주가 있는 것을 눈치챈 다카야마가, 그에게 있어서
는 신의 세계 , 즉 지금 우리가 사는 현실의 세계로 이 몸을 되살려 달
라‥‥ 난 그런 의미로 느꼈습니다. "
가오루로서는 다카야마의 소원을 이해할 수 있었다.
· .세계의 구조를 이해하고 싶다.
그 생각을 몇 번이나 아버지에게 토로했던가?하지만 이 세계는
구조를 완전히 이해하기에는 너무 복잡하다 따라잡았다 싶으면,그
끝은좀더 앞으로 나아가 버린다. 다람쥐 쳇바퀴 돌기가언제까지나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영구히 잡을 수 없는 그림자 같은 것이다 그러
나 가령 창조주의 세계가 있다면 소원은 간단히 이루어진다. 창조주
의 세계에 가기만 하면, 세계의 구조를 알 수 있다.
엘리엇은 온화하게 말했다.
"나로선 다카야마의 기분을 아주 잘 이해할 수 있었네 . 다카야마
는 죽는 것이 두려워 어떤 바람을 얘기한 게 아니야.마음속에서 그
를 움직인 건 경이로운 지식욕‥‥자기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세계를
알고 싶다는 호기심이 순간적으로 폭발해 그에게 기적을 일으킨 거
지"
"기적‥‥
"그렇네, 그에게 있어서는 기적이지 그는 죽기 직전에 이쪽 세계
에 오고 싶다고 격렬하게 원했어. 만일 우리 머리에 뉴캡 계획이 없
었다면 그런 발상은 생겨나지 못했을지도 모르지 . 아니 , 틀림없이 생
각조차 하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아까도 말한 것처럼 사물은 유기적
인 관련 속에서 움직여 간다네.난29년 앞, 30년 앞을 내다본 셈이
었지 . 그래서 결심했던 걸세. 다카야마의 소원을 들어 주기로."
"네? 뭐라고 하셨습니까?"
가오루는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다카야마의 소원을 들어 줄 수 있다
역시 생각한 대로 가상 공간의 개체를 이 현실 세계로 되살린다는
난폭한 행동으로 나온 것이다. 가오루는 어처구니가 없어 다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엘리엇은 냉정했다. 어떤 방법으로 다카야마 류지라는 개체를 현
실 세계로 되살렸는지 그 방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한 것이
다.
루프계에서 현실계로 다카야마라는 개체를 그의 경험의 축적에서
부터 기억,의식의 흐름까지 그 모든 것을 유지한성인 그대로 이송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능한 방법은 단 하나. 다카야마의 세포에서
꺼낸 유전 정보를 기초로 게놈 신시사이저와 CFAM을 이용하여 현
실 세계에서 통용되는 DNA를 만들어 둔다. DNA의 염기 배열만 해
석해 두면, 이런 장치를 이용하여 화학 물질로서 재합성하는 것이 가
능하다
다음에, 인간의 수정란 한 개를 준비한다. 수정란의 핵을 뽑아 내
인공적으로 만들어 낸 다카야마의 핵과 교환한다. 수정란을 모체에
되돌려 놓으면 나머지 할 일은 다카야마 류지의 탄생을 기다리는 것
뿐이라는 얘기가 된다 전세기에서 실현을 본 클론의 제조 방법과 별
차이가 없어 곤란한 기술은 아니었다. 다카야마가 현실계에 등장하
는 방법‥‥ 그것은 아기로 탄생하는 것 외에는 있을 수 없다. 다카야
마 류지와 아주 똑같은 유전 정보를 가진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새롭
게 탄생하는 것이다.
"물론 장대한 실험이기도 했지 . 가상 공간의 생명체를 현실 공간에
살려 내려 한 것이어서 우리의 흥분은 상당했지 . 그렇지만 일이 일인
만큼 극비리에 행해졌다네. 당연하지. 매스컴이 알게 된다면 생명의
모독이니 뭐니 하고 쓸데없는 소동을 불러일으킬 게 뻔하니까 말이
야.전세기 말무렵,인간의 클론에 대해 대단한 소동이 일어났잖나.
그런 소동에 휘말리는 건 딱 질색이었어. 뭐 , 자낸 당시의 일은 모르
리라생각하네만· . 그래서 이 계획은 루프에 관련된 대부분의 과학
자에게도 비밀리에 행해졌지 "
"아버지도 몰랐던 거군요."
엘리엇은 고개를 크게 한 번 끄덕였다.
"그래, 그는 몰랐네. 그리고 그쪽이 편했어
"아버진 모기장 밖에 놓여 있었군요."
"아니 , 그렇지 않아‥‥ 아, 뭐 그렇게 되나‥‥‥
엘리엇은 왠지 말하기 곤란한 듯 말을 얼버무렸다.
"그렇다는 건 결국· . "
가오루는 그 다음의 전개를 읽을 수 있었다.
"그래, 자네가 생각하고 있는 대로야. 우린 다카야마가 죽기 직전
의 유전 정보를 빼냈지 . 그때 이미 다카야마는 링 바이러스에 감염되
어 있었어.우린 다카야마의 유전자와 함께 링 바이러스의 유전자까
지 현실 세계로 옮겨 와 버린 거야."
"결국 루프계에 만연한 링 바이러스가 현재 맹위를 떨치고 있는 전
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의 원형이라는· . . "
"우린 그렇게 파악하고 있네. 양자의 염기 배열을 신중히 비교 검
토한 결과, 우연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유사점이 몇 개 발견되었
어 다카야마 류지를 현실계에 탄생시키는 계획 도중, 링 바이러스
는 우리의 틈새로 스르르 빠져나가 버렸네. 아마 대장균에 링 바이러
스의 RNA가 삽입되고 이어 불운이 겹쳐 외부로 흘러나가 버린 거겠
지 그래서 다른 바이러스의 예처럼 놀랄 만한 속도로 돌연변이를 거
듭해 갔어 . 이윽고 생긴 것이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느인 셈이지 "
성립 과정은 거의 가오루가 추측한 대로였다 하지만 문제는 그 해
결 방법이다
가초루는 엘리엇 쪽으로 얼굴을 갖다 댔다.
"확실히 해주시죠.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를 해치우는 방법을 당
신들이 개발했는지 , 어떤지 "
"그러니까 자네도 말했다시피 열쇠를 쥐고 있는 건 다카야마 류
지 야."
'다카야마 류지는 존재하는 거군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엘리엇은 손으로 턱을 괴면서 가오루의 눈동자를 응시하는가 싶더
니 딱 하고 손가락으로 소리를 냈다.
"그렇구나,눈의 착각이었어. 인간의 믿음은 어떤 경우 판단을그
르치게 하니까 말야."
고개를 옆으로 저으면서 가오루는 소파에 등을 기댔다 중요한 질
문을 하면 늘 얼버무려 버린다 어쩔 셈인가. 가오루는 엘리엇의 태
도에 불신감이 더해 갔다.
축늘어진 가오루를 옆에 두고 엘리엇이 재빨리 리모트 컨트롤을
조작하자 한쪽 벽에서 대형 디스플레이가 내려왔다.
"자낸 헤드 마운티드 디스플레이까지 쓰고 영상을 봤네 그러나 깨
닫지 못했다. 뭐, 그런 일도 있을 수 있지. 선입관이 인식 능력을 방
해하고 만 거겠지 ."
가오루에게는 엘리엇이 혼잣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노인
이 뜰에 내려선 작은 새에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가오루는 가만히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저항하거나 안달하는
소리 없이 엘리엇이 나눠 줄 카드를 응시했다.
엘리엇은 정면 디스플레이에 다카야아가 죽기 직전의 영상을 비추
고 있었다 처음부터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리라 간단한 순서를 거쳤
을 뿐인데 목표한 영상이 눈앞에 전개되려 하고 있었다
"자네가 체험한 것과 마찬가지로 다카야마의 시선에 고정시키기
로 하지 "
웨인스록의 폐가에서 한 번 체험한 영상이었다.
비디오 테이프를 본 지 꼭 일 주일 뒤, 자신에게 죽음의 징후가 찾
아왔음을 안 다카야마는 마지막 바람을 담아 VFR에 테이프를 세트
하고 재생을 시작한다. TV화면에는 의미 불명의 영상 조각이 흐르
고 있었다. 납 용기 속에서 회전하는 주사위· . 전화를 걸려던 다카야
마는 그러던 도중 연속해서 나타나는 주사위의 눈을 보고 비명에 가
까운 소리를 질렀다
바로 그때였다. 대각선 옆으로 놓여 있는 거울에 사람의 그림자가
비쳐졌다 귀에 수화기를 대고 경악스런 표정을 띠고 있는 인물‥‥ 다
카야마 류지가 틀림없다 수화기를 귀에 대면서 시선을 옆으로 옮겼
을 때, 다카야마는 순간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엘리엇은 거기에서 영상을 멈추고 거울에 비친 다카야마의 얼굴을
확대했다.
"자낸 다카야마의 시각에 고정되어 아주 큰 착각에 빠진 걸세 설
마 하는 선입관이 자네의 망막을 흐리게 했어 . 흔히 있는 일이지 . 자,
잘 보게나. 이 얼굴을 본 기억이 있지?"
엘리엇은 거을 속에 희미하게 뜬 다카야마의 얼굴에 명료한 윤곽
을 만들어 갔다
가오루는 입을 반쯤 벌린 상태로 거울에 비친 다카야마의 얼굴과
마주했다.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것인지 신경이 욱신욱신 아프다
디스플레이 속,다카야마는놀란나머지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다가오고 있는 죽음에 침식당해 단숨에 告어 버린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 얼굴의 윤곽, 억센 턱선에는 특징이 넘쳐 있었다. 어딘가
에서 본 얼굴 정도가 아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20년 동안 줄곧 익
숙해져 왔던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를 해치을 힌트를 쥐고 있는 건 이 남자
다카야마 류지, 즉 자네야."
엘리엇은 그렇게 말하고 거대한 손가락을 가오루의 가슴에 대고
마구 찔러댔다.
단어가 머리에 닿는 것을 방해한 셈이었지만 사실은 가차없이 가
오루의 몸에 침투해 들어왔다 세계가 붕괴되는 기분을 맛보고 있었
다 지금까지 자신의 몸이라 생각하고 있던 이 살 덩어리로부터 심한
배신을 당한 것 같았다
"그런 말도 안 되는‥‥‥
두 눈을 감은 얼굴이 서서히 천장을 향했다.
"우린 자네의 힘을 빌리고 싶네. 그러니까 협력해 주었으면 좋겠
어 ."
가오루의 눈은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엘리엇의 말이 귀에 들
어오기는 해도 그 진위를 파악할 수는 없었다. 오로지 세계의 구조가
절벽으로 추락하는 데 그저 몸을 맡기고 있었다.
가오루는 무릎을 껴안고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평탄한 산등성이
끝에서는 수억 년이라는 세월에 의해 침식당한 깊은 협곡을 멀찍이
바라다볼 수 있었다. 불그스름하게 퇴색한 대지에는 여기저기 횐 빛
을 띤 반점들이 박혀 있다. 지평선에 우뚝 선 기암은자연의 창조물
이라기보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 같다 하지만 지금 보고 있는 풍
경은 전혀 인간의 손길이 들어가 있지 않은 것이다
산등성이를 걷다가 호우에 쉽싸이고, 그 다음에 본 광경은 비몽사
몽간이라서 잘 기억나지 않았다. 어둠에 몸을 숨기고 있던 것이 이런
광대한 풍경이었나 하고 가오루는 이제야 처음으로 보는 것처럼, 대
지에 새겨진 주름 하나하나를 응시했다. 극히 자연스럽게 대뇌에 새
겨진 주름이 연상되었다. 여러 가지 추억이 새겨져 있지만,가오루의
뇌의 역사는 아직 얕아불과20년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그 출생
은 보통과는 완전히 다르다. 생식에 의하지 않고,디지털 정보의 재
합성이라는 방법으로 이 세상에 탄생했다는 것이다.
먼 곳으로 눈을 돌리자, 황토빛을 띤 강이 원 두 개를 겹쳐 놓은 루
프 모양으로 흐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상한 광경이었다.
현실과 가상의 싱크로니서티가 여기서도 보이는 것인가‥‥
뒤돌아봤지만 뒤쪽에는 아무도 없었다. 지하 연구 시설로 내려가
는 엘리베이터 건물 옆에 헬기장이 있고,금속성으로 도장된 헬리콥
터가서 있다 호우뒤에,완전히 약해진 가오루의 몸을 운반해 주었
던 제트 헬리콥터이다.
엘리베이터 전물과 헬기장 한가운데 에 검은 어둠이 떡 하니 입을
벌리고 있었다. 땅 속 깊이 뻗은 광대한 종유 동굴 입구이다. 종유 동
굴 안쪽에는 공기 그릇 모양의 거대한 구덩이가 있어, 투명도 높은
물을 가득 담고 있다고 한다.
엘리엇의 말에 거짓은 없었다. 그는 천장에 손가락을 향하고 이 위
에는 물의 층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바닥 아래에는 거대한 공간이
있다고도 했다 양쪽 모두 진실을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하는 1천 미터 깊이까지 파여 있고, 그 밑에는 직경 200미터의
공 모양 공간이 거품처럼 떠 있다고 한다. 극히 투명도 높은 물의 층
은 외부로부터의 방사선이 공 모양의 공간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것
을 방어하기 위한 디텍터(검출기 역자 주)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자연의 지형을 잘 이용하여 뉴트리노 스캐닝 캡처 시스템이 지하 공
간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가포루는 아직 그 장치를 실제로 보지 못했다 전기 의자나 다를
바 없는,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게 될 그 장치를‥‥
지하 연구 시설에서 지낸 지 일 주일이 지나가고 있었다. 일 주일
이 지나서야 비로소 가오루는 바깥에서 자신이 있는 장소를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지상으로 나오고 싶다는 가오루의 희망이 겨우
이루어진 것이다. 도망치지도, 숨지도 않으리라는 것을 엘리엇이 이
해해 즌 모양이다.
온화한 날씨였다. 일 주일 만에 햇살을 흠뻑 받으면서 가오루는 사
막의 오후 날씨를 맛보고 있었다. 햇살만 있으면 티셔츠 한 장으로도
춥지 않다. 가슴 앞으로 팔짱 낀 두 손을 조금 움직여 두 팔을 비비면
서 생각을 정리해 보려 애썼다. 하지만 무엇 하나 정리되지 않았다
어떻게 결심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파악해야 하는지 , 전례가 없는만큼 가오루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엘리엇을 의심하는 것은 간단하다. 가장 간단한 해결 방법도 있다.
그것은 그가 말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모두 거부하는 것이다. 가상
공간의 유전 정보로부터 자신이 탄생했다는 따위의 농담 같은 것은
믿을 수 없었다. 존재를 근본부터 부정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뉴
캠의 실험을 하고 싶은 나머지 엘리엇은 유리한 이야기를 꾸며낸 것
에 지나지 않는다고 거부하고, 최대한의 온갖 욕설을 선물로 남기고
스스로의 의지로 이 산을 내려가면 된다. 하지만 그후의 인생은‥‥ 알
수 없다. 아마도 쾌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어 가면서 남는 것은 회한뿐일 것이다
몇 번이고 출발점으로 되돌아갔다. 유전자가 공통인 일란성 쌍생
아는 거의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가오루와 다카야마의 유전자가
공통이라고 한다면,가오루와 다카야마의 얼굴이 똑같은 것은 당연
하다. 다카야마의 목소리를 직접 들었을 때 이상한 감개(辯漑)에 사
로잡혔던 것은 이제 생각해 보면 마치 녹음된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것 같았다. 얼굴과 목소리의 일치 .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증거가
되지 않는다 컴퓨터로 처리하면 얼굴과 목소리 같은 것은 어떻게든
조작할 수 있다.
가오루는 그 의문을 엘리엇에게 들이댔다. 그러자 엘리엇은 분출
하는 의심을 예측한 듯 위성 전화 수화기를 가오루에게 내밀었다.
"자네 아버지와 연결되어 있네 . 얘기해 보는 게 좋을 거야."
가오루는 수화기를 받아들고 병실 침대에 누운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었다. 아버지의 말을 다 듣고 난 다음 엘리엇이 말하는 것에 신빙
성이 생기기 시작했다.
다카야마 류지의 클론을 키울 경우, 가장 좋은 것은 루프에 관계
하고 있는 연구자 중에서 적합한 사람을 골라 그의 아이로 키우게 하
는 일이었다.
당시 후타미 히데유키는 마치코와 결혼한 지 4년이 지나고 있었지
만 부부 사이에 아이가 생기지 않아, 산부인과에서 진찰을 받은 결과
아내의 불임증이 막 판명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아이를 원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은 엘리엇 일행은 여러
사람을 개입시켜 넌지시 양자 입양 이야기를 히데유키에게 꺼냈다.
히데유키도, 아내인 마치코도 갓 태어난 아기를 받아들여 자신들의
아이로 키우는 것에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야기는 착착 박자가 맞아 들어갔다. 엘리엇은 교묘한 루트를 이
용해 나중의 트러블을 막기 위해서라며 태생을 일체 밝히지 알은 채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가오루를 히데유키와 마치코 부부에게 건넸다.
루프라고 하는 가상 현실이 아기의 발상원이라는 것을 알아도 그들
부부가 역시 가오루를 받아들일지 어떨지 알 수 없었다.
그리하여 히데유키와 마치코는 양자라는 사실을 가오루에게 알리
지 않고, 친자식으로서 애정 깊게 기른 것이다.
위성 회선을 통해 가오루와 아버지인 히데유키는 연결되어 있었
다 병실 침대에서 힘없이 수화기를 쥔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떠오르
는 것 같았다.
"가오루‥‥냐?"
목소리는 한층 약해져 있었다. 아버지가 견딜 수 없이 그리웠다.
가오루와 히데유키는 우선 서로의 근황을 보고했다. 건강하게 있
다는것을전하자히데유키는 '그래,그래' 하고 기쁜듯이 중얼거리
고는, 거짓인지 진짜인지 '나도 최근 몸의 컨디션이 좋은 것 같구
고는, 거짓인지 진짜인지 '나도 최근 몸의 컨디션이 좋은 것 같구
나.'라고 이어갔다. 목소리만으로 판단하면 진짜일 리 없었다. 아버
지의 몸에는 이미 '그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가오루는 냉정함을 유지한 채, 자신의 출생에 관해 넌지시 물었다.
히데유키는 가오루가 어떻게 양자인 것을 알았는지 정말 놀란 모양
이었지만, 언젠가는 알 일이기도 했으므로 솔직하게 20년 전의 경위
를 이야기했다
가오루는 눈을 감고 기도하는 듯한 마음으로 아버지의 말을 듣고
있었다. 누구로부터 권유받고 어떤 루트로 가오루를 받아들였는
fl ‥‥
기도는 허무하게 끝났다. 아버지의 설명은 엘리엇으로부터 들은
양자 입양 경위와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다.
"아버진 자신의 유전자를 이어받지 않은 아이를 키우는 일에 아무
망설임도 없었던 거예요?"
가오루는 조용한 어조로 물었다. 어머니가 불임이라도 아버지의
유전자를 이어받은 아이를 탄생시키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중요한 건 유전자를 이어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가 아니다. 부모
와 자식은 접촉하는 것에 의해 정이 보다 깊어 가는 법이다. 지난 20
년 동안 너와 나의 관계를 되돌아봐라. 넌, 분명히, 내 아들이다. "
아버지의 말은 세포 하나하나에 스며들어오는 것 같았다
가오루는 이별의 말을 고하고 아버지와의 전화를 끊었다. 두 번 다
시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는 일은 없겠지‥‥ 가오루에게는 그렇게 느
껴졌다.
이어 가오루는 다카야마 류지의 반생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디스
플레이로 보았다 과학 전반에 흥미를 품고, 수학이나 물리에 유쎄
없는 재능을 발휘했던 소년 시절의 에피소드를 눈앞에 두고, 가오루
는 거기에 동일한 인간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수 없었다. 책을 읽
거나 깊이 생각하거나 할 때의 몸짓에서 습관까지 똑같았다.
디스플레이로 다카야마 류지를 관찰하는 것은 실로 기묘한 체험
이었다. 똑같은 유전자를 가지면서도 전혀 다른 환경‥‥ 아니 , 환경뿐
만 아니라 다른 공간에서 성장해 온 개체가 여기에 있다 자신과는
다른 사람으로, 다른 인격 , 다른 의식을 가지면서도 모습은 동일한
존재 일란성 쌍생아 그 자체였다
가오루는 일어나서 산등성이 끝을 향해 조금 걸었다 발 밑으로 아
래를 내려다보니 수직으로 希아지른 듯 솟아 있는 벼랑 바로 아래로
조그맣게 구불거리는 강이 보였다. 빛의 가감 때문인지, 아니면 흙
성분이 녹아 있기 때문인지 강의 수면이 초록빛을 띠고 있다 현재도
물에 의한 침식은 조금씩 계속되고 있는 모양이다.
역시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카야마 류지의 유전
정보를 재합성한 것에 의해 자신은 이 제상에 탄생했다. 앞뒤가 맞는
다. 사실을 직시하는 것이 좋으리라. 부정해도 운명으로부터는 도망
칠 수 없다.
그렇다. 가오루는 루프로 되돌아가도록 운명지어져 있었다.
바람이 더욱 강해졌다 가오루는 벼랑 끝에서 한 걸음 후퇴했다.
바람에 날려 벼랑 밑으로 굴러떨어지거나 하면 모든 것은 끝장이다.
귀중한 정보를 잃고 만다. 그것은 또한 두 세계의 종말을 의미했다.
엘리엇의 계획은 실로 악마적 이다. 자기가 말한 대로그의 직감은
20년 앞까지 내다보고 있었다 20년 전,왜 엘리엇은 다카야마의 희
망을 받아들이고 그의 유전자를 재합성하여 현실 세계에 다카야마의
클론을 탄생 시켰는가? 클론 그 자체의 실험이라는 이유도 있었을 테
지만 엘리엇의 머릿속에는 뉴트리노 스캐닝 캡처 시스템의 구상이
어떤 명료한 형태로 떠올라 있었던 것이다.
가오루가 태어나기 직전, 엘리엇의 뇌리에 날아든 것은 뉴캡을 사
용한 인체 분자 정보의 3차원 디지털화였다. 놀랍게도 뉴캡에 걸어
야 할 인간의 선택에까지 이미 그의 사고력은 미쳐 있었던 것이다.
스스로 뉴캡에 걸리길 바라는 인간은 있을 리가 없다. 지원자가 없
이는 실험이 성립되지 않는다. 무리한 생체 실험이 허락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완벽한 장치가 만들어졌다고 해도 젊고 건강한 인간
피험자가 없으면 얘기가 되지 않는 것이다
엘리엇의 말을 빌려 간단히 말해 버리면 이러한 것이 된다
"루프 로부터 개체 한 개를 뽑아 보존해 두면,뉴캡을 이용해 원래
세계로 되돌린다는 정당한 이유를 붙일 수 있는 게 아니겠나? '옛 보
금자리로 돌아가고 싶어한다면 그 바람을 들어 주자. 이 뉴캡을 사용
해서.' 루프 로부터 현실 세계로의 이행은 클론 작성 이외에는 있을
수 없어. 하지만 이쪽에서 루프로 이행하는 경우 뉴캡을 사용하면,
지금 이 순간의 정신 상태와 기억을 유지 보존한 그대로의 개체를 통
째로 루프계에 재합성하는 것이 가능하지 "
·옛 보금자리로 돌아가고 싶다고?
이 전제가 문제였다. 누가 그런 것을 바라는가? 돌아가 버리면 아
버지나어머니,레이코와도 두번 다시 만날수 없다. 레이코의 뱃속
에서 크고 있는 자신의 아이 얼굴도 영원히 볼 수가 없다 생식이라
고 하는 착실한 방법으로 가오루는 레이코의 배에 자신의 유전자를
심었다.
물론, 그저 그것만을 위해서 였다면, 엘리엇의 과학 게임에 동조할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설사 유전자가 가상 공간에서
왔다고 해도 자신은 확고하게 여기에 존재하고 있다. 이미 현실 세계
에 살고 있는 사람이므로 옛 보금자리가 있다는 말을 들어도 돌아갈
생각은 없다 탄생 후의 인생은 스스로 선택하여 걸어온 길이다. 여
기에서의 생활에 충분히 존재 가치가 있다.
그런데,우연이 작용하여 가오루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입
장에 내몰려 버린 것이다.
다카야마 류지의 유전자를 재합성하던 도중에 링 바이러스가 누
설되어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로 변화한 것은 진실일 것이다. 결국
링 바이러스는 다카야마의 유전자 속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게놈 신
시사이저로 합성하는 사이에 사소한 사고로 미완성 상태인 프래그먼
트가 잘못해서 대장균에 박혀 버린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카야
마의 유전자에서 링 바이러스가 도려내져서 DNA가 바이러스 감염
이 없는 정상적인 모습으로 되돌아왔다는 것은 아니다. 변함없이 유
전자에는 링 바이러스가 들어가 그 일부가 되어 있는 상태 그대로일
것이다.
엘리엇의 이야기를 들은 순간부터 가오루는 의문으로 여기고 있었
다.
· 애 유전자 속에 바이러스가 들어 있다면, 왜 나에게는 전이성 인
간 암이 발병하지 않았을까?
발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몇 번이나 검사해도 양성 반응조차
나타나지 않았다.
그 의문에 엘리엇은 이렇게 설명을 덧붙였다.
'hhrA에서 DNA로 전사할 때 일부가 돌연변이를 일으켜 정지 코
드가 들어갔기 때문에 검사에는 걸리지 않았지. 알았나?전이성 인
간 암 바이러스는 감염된 세포의 P53 유전자에 돌연변이를 일으킴과
동시에 바이러스 자신이 텔로메라제 배열을 가지고 있어서 감염된
세포DPfA에 TIAGGG를 덧붙이는 거야. 이것에 의해서 세포는 불
사화하고 암화해 가지.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의 발상원이 다카야마라는걸 알고난후
자네의 세포를 입수해 자세히 검사했지 .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 주게.
의미 불명의 혈액 검사가 있었다는 걸 기억하고 있겠지?그런데 말
이네, 놀랍게도 자네 세포는 텔로메어 영역의 배열이 TTAGGG가 아
니었네.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가 말단 텔로메라제를 발현시켜
DNA 말단부에 TTAGGG를 부가시켜도 불안정해져 바로 분해되고
마는 거야. 그러니까 세포 분열 수명이 늘어나지 않고, 자네 세포는
암화하지 않는 거지.자낸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에 대해 진정한
저항성을 가진, 전혀 새로운 타입의 인간인 거지."
엘리엇의 설명은 논리적으로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었다. 가오루
가 완벽한 저항을 가진 것은 현실계와 루프계에서의 유전자 배열의
미묘한 어긋남이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 이상한
출생을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엘리엇의 말이 뇌리에 명멸한다. 자신이 살아온 궤적이 계곡에 빛
의 꼬리를 끌며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빛이 나아가는 방향은 처
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가오루는 생각했다. 대체 언제쯤부터 이곳으로 오라는 암시가 주
어져 있었던 걸까 하고
컴퓨터 디스플레이에 중력 이상 분포도가제시된 것은 10살 무렵
이었다. 데이터 베이스에 들어 있지 않는데도 어디에선가 들어온 정
보‥‥ 발신원은 물론 엘리엇이다. 장수촌의 정보도 넌지시 흘려 둔 게
틀림없다. 늘 지금 있는 사막의 이 장소로 주의를 끌어 둘 필요가 있
었다 노골적이지 않게, 힌트를 조금씩 내놓는 방법으로 서서히 호기
심을 부추겨 간다. 우연과 우연을 겯치게 해 스스로의 발견인 것처럼
여기게 하여 사막의 어느 지점에서 떠오르는 의미, 그 구제 가능성을
특별히 신비적으로 강조한 것이다.
어머니가 인디언의 민간 전승과 마주친 것도, 과학 서적 중에서 암
에 걸렸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남자의 기사를 발견한 것도, 뒤에서
조종한 것은 엘리엇임에 틀림없다. 반 년 전부터 우송되어 오는 원서
가 갑자기 많아졌다. 아마도 좀더 많은 힌트가 던져졌으리라.그중
몇 가지가 가오루와 어머니의 그물에 걸렸다 가오루 스스로의 의지
로 여기까지 온 것이니 그것으로도 충분했던 것이다.
사명감과 자유 의지에 의해 혼자 힘으로 온다는 것. 이것은 엘리엇
에게 부과된 지상명제였다. 가오루의 신병을 구속하여 강제적 방법
으로 여기까지 데리고 왔다면, 잘 될 리가 없었을 것이다. 뉴트리노
가 조사되는 동안의 정신 상태는 그대로 디지털화되어 전해진다. 강
제적으로 눌려 공포를 느끼거나 싫어하거나 하면 그 감정도 그대로
이송되게 된다 어떤 강력한 희망을 가지고,스스로의 의지로, 차분
한 마음가짐으로 운명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요구되었던 것이다.
엘리엇은 '무리한 방법은 내 방식이 아니야.'라는 표현을 했지만,
진의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본인이 바라지 않는 모양새로 우격다짐
으로 뉴캡에 몰아붙이면 성공이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사명감과 자유 의지‥‥ 실로 엘리엇이 바란 이상의 의욕을 가지고
가오루는 이곳을 찾았다.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를 해치울 힌트는 모두 자네의 몸에 있
네 게놈의 3차원 구조와 세포 내의 미토콘드리아를 포함한 대사 사
이클과,분비성 인자의 전체적 영향을 조사하지 않으면 해결의 실마
리를 발견할 수 없을 거야. DNA의 배열을 해석하는 것만으로는 안
돼. 자네 전신을 디지털화하지 않는다면 말이지‥‥ 유력한 치료 방법
으로서 특수한 유전자 도입 방법을 생각할 수 있네만. 이 유전자 도
입의 영향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자네의 전 생체 데이터를
이용한 정밀한 시뮬레이션이 필요해지지
알겠는가?자네 몸에서 얻어진 지식은 바로 현실로 응용된 다네.
우선 최초로 자네 아버지. 어머니 , 그리고 애인· . 자신의 목숨을 건
자네의 순수한 행위에 보답하기 위해 그건 정말이지 당연한 일이야."
진지한 얼굴로 엘리엇은 이렇게 약속했다.
지금은 이미 환상으로 변한 사막의 장수촌, 그 유일한 자취는 얄궂
게도 엘리엇이라고 하는 노인 과학자뿐이다. 장수촌에서 가오루가
건진 것은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 치료에 대한 힌트였다. 사랑하는
사람의 목숨을 구하고 싶다는 바람 지구상의 생명 시스템이 대규모
의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에 의해 사멸돼 가는 현상을 구하고 싶다
는 바람. 상상도 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그 바람이 이루어진다. 자신
의 몸과 교환하는 조건으로‥‥
가오루의 몸이 획득하고 있는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의 완벽한
블록. 그 메커니즘을 순간적으로, 게다가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뉴캡을 이용하는 것이 최선의 수단이다. 기술은 즉각 현실에서 응용
될 것이다. 그후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의 공포는 사라지고, 아마
도 지구상 생명과 바이러스의 공생 관계가 생겨나게 될 것이다
이치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지금까지의 전통적인 방법
으로 해명하려 들면,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그러는 사이에 적
어도 아버지는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어머니는 발광하게 되고, 레
이코는 아이를 배에 품은 채 자살하고 말 것이다
태생이 가상 공간에 있다지만 그의 삶은 가치를 지니고 천수를 다
했다. 20년이라는 세월을 이 땅에서 분명하게 살아온 것이다 레이코
와 나눈 사랑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만일 레이코와의 일이 없었
다면, 이토록 분명한 삶으로부터의 반응을 얻을 순 없었을 것이다.
‥‥나는 지금, 분명히 이곳에 있다.
가오루는 자신감에 가득 찬 표정으로 기압과도 같은 산등성이의
돌출부 끝에 우뚝 서 있었다. 몸 속의 용기를 있는 대로 쥐어짜 한껏
소리를 질렀다
와-하는 외침이 계곡에 메아리치고 대지를 날아가듯 지평선 너
머로 사라져 갔다. 생명 역시 메아리와 마찬가지로 여운을 남기고 사
라져 가는 것이다
엘리엇에 대한 생각은 복잡해, 단순히 증오라고 하는 감정을 초월
해 버렸다. 그가 없었다면 자신의 육체가 존재하는 일도 있을 수 없
었다. 즐겁기도 하고 슬프고 괴롭기도 했던 이 20년간은 엘리엇의 즉
흥적인 착상으로 인해 주어진 것이었다. 그 삶을 바랐느냐고 묻는다
면 가오루는 분명하게 예스라고 대답할수 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는 자신의 육체가 없었다면 이 세계에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가 만
연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가오루에게는 아무런 책임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여지없이 양심은 가책을 받고 있다.
그러나 양심의 가책, 원한이나 증오의 감정에 사로잡혀 있을 때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몸을 걸고 빈틈없이 뒤처리를 하는 것.
응시해야 할 것은 언제나 미래여야 한다.
가오루는 세상을 한번 획 둘러보고는 힘찬 발걸음으로 벼랑에서
멀어져 갔다.
모든 준비가 갖추어지기까지 다시 십여 일이 흘러갔다. 그 동안 가
오루는 몇 번이고 루프에서 다카야마 류지의 기록을 체험하고, 죽음
에 이르기까지 그의 반생을 익혔다 부모와 친구와의 관계에서부터
학문 지식,사고 방식,버릇과 말투의 특징까지 하나하나자신의 것
으로 삼아 갔던 것이다
자동 번역 장치 없이도 대화를 이해할수 있게 되었을 무렵,그의
반생을 뇌리에 새기는 작업도 대충 끝났다 유전자가 완전히 똑같은
탓인지 완전히 다카야마 류지가 되는 일은 그리 부자연스런 작업도
아니었다. 오히려 알면 알수록, 남이라고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지
금까지의 인생이 겹쳐져 보이는 적도 있었다. 가오루라고 하는 인간
의 삶과 다카야마의 삶이 겹쳐지는 순간이었다.
그날 오후, 가오루는 엘리엇을 따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지하 1천 미터로 하강하는 동안, 가오루의 망설임은 싹 가셨다 이승
에서 저승으로 떠난다고 하는데도 이상스럽게 공포는 느껴지지 않았
다. 현장이 가진 독특한 분위기 때문일 것이리라. 엄숙한 기분마저
맛보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눈앞에 뉴캡 관리 구역의 일부가 보인다.
두꺼운 방호벽에 둘러싸인 초병렬 슈퍼 컴퓨터가 램프를 깔빡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아직 뉴캡의 내부가 아니다. 내부로 들어가는
것은 가오루 혼자뿐이다
엘리엇은 가오루와 똑같은 속도로 횔체어를 굴리고 있었다. 전동
횔체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팔의 근육을 단련하기 위해서라고 한
다. 최신 설비 가운데 구식 휠체어가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엘리엇은 희미하게 숨을 몰아쉬면서 말했다.
"먼저 물어 두지 그렇지 않으면 오해받을 수도 있으니까 말야. 설
마 자낸 내가 일부러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를 뿌렸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런 의심을 품은 적도 있었지만,의심은 이미 깨끗이 씻겨 있었
다
"무엇 때문에 당신이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를 뿌리겠습니까?"
가오루는 휠체어 뒤로 돌아가 밀어 주려 했지만, 엘리엇은 파리라
도 쫓듯이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말게."라며 친절을 거절하고 두 바퀴
를 미는 손에 힘을 넣었다.
"무엇 때문에라고? 뻔하지 않은가? 루프에 예산을 할당하기 위해
서일세."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를 박멸하기 위해 루프의 재개가 필요하
다는 것을 납득시키면 막대한 예산이 붙을 것은 확실하다. 전이성 인
간 암 바이러스 치료 방법의 발견은 전세계의 최우선 사항이다. 개발
이 성공하면, 각 방면에 막대한 부를 가져을 것이다. 사회적인 공헌
도도 물론이거니와 투자 보상도 더할 나위 없다. 예산이 할당되면 20
년 동안 동결되었던 루프를 재작동시킨다는 엘리엇의 꿈이 이루어진
다.
"설마, 당신이 그런 짓을 했을 리 없어요."
"오호, 어째서?"
"바이러스가 어떤 작용을 하는가 따윈 절대로 예측 못 합니다. 게
다가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에 대한 당신의 증오는 거짓이 아닐 겁
니 다. "
엘리엇은 침을 삼켜 목구멍 안쪽에서 기묘한 소리를 냈다. 그 자신
이 소중한사람 몇 명을 이 병으로 잃었다. 격렬한적개심을불태을
동기가 거기에 있음은 분명한 일이다.
"알아 주면 그걸로 됐네. 바이러스가 새어나간 것은 진짜 사고였
어. 이토록 흥계를 꾸미는 바이러스라는 걸 알았다면, 좀더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어야 했는데‥‥‥
후회스러운 듯 그렇게 말하는 엘리엇에게서 거짓의 냄새는 느낄
없었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난 일부러 이런 지하까지 내려
수
오지 않았습니다. "
엘리엇은 휠체어를 멈추고 멍한 표정으로 가오루를 올려다보았다
두 눈을 크게 뜨고. 雲은 눈물을 띄우고 있다
"자네는, 날 원망하고, 있지 않나?"
"무엇 때문에요?"
가오루는 같은 질문을 했다.
'떳대로 태어나게 해놓고서 시기가 왔으니까 돌아가라고 해서."
"당신이 없었다면 나라는 인간은 여기에 없었겠柔. 지금까지 20년
동안 나쁘지는 않았어요. 아니 , 나쁘기는커녕 멋진 추억을 많이 갖게
해줬죠. 원망 따윈 하지 않아요."
현세에 대한 완전한 긍정이 없다면 내세는 그저 공포의 대상이 될
뿐이다 그 점에서 가오루는 달관해 있었다. 아버지를 비롯해 어머니
와 레이코가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료지의 자살을 목
격하는 등의 불행이 계속되었다고 해도 전체적으로는 이 세상 역시
좋았다고 단정할 수 있다. 침착한 태도로 복도를 나아갈 수 있는 것
도 그 때문이다
"조금만, 여기서 얘기하지 않겠나?"
엘리엇은 평소처럼 입 끝으로 침을 흘리고 있었다.
"좋습니다. "
뉴캡으로 향하는 긴 복도 중간에서 두 사람은 잠시 시간을 보내기
로 했다. 가오루는 벽에 기대고 엘리엇은 횔체어 등에 지친 듯 뒷머
리를 기댄다. 각자의 그 편안한 자세가 서로의 웃음을 자아냈다.
"이전에도 말했는지 모르겠네 만, 뉴캡 계획이 없었다면 자넬 만들
어 내는 일도 없었을 테지. 여러 일은 유기적으로 서로 얽혀 진행되
지 . 뭔가 하나의 요소가 빠져도 지금처럼은 되지 않는 거야."
"우연이 겹쳐진 겁니까?"
"그래,우연이 작용해서 루프는 재개된다. 아니, 재개되지 않으면
안 돼. 어째서인가 하면, 현실과 루프는 깊은 곳에서 호응하고 있으
니 까."
가오루 자신도 그것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암화한 끝에 동결
된 가상 공간이 현실에 영향을 미치며 작용하는 것처럼 움직인다는
사실.
엘리엇은 다른 비유를 사용해 설명을 덧붙였다.
"특별히 과학에 취미가 있는 아이가 아니라도 한 번쯤은 이런 식의
상상을하는 경우가 있지 않을까?물질의 기본인 원자의 구조가 태
양계의 모델과 똑같은 것으로부터 원자나 소립자 역시 하나의 우주
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고, 그 작은 세계에도 우리와 마찬가지인 생명
이 살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 생명의 고리지. 루프라고 명명한 의미
는 여기에 있네."
"네, 초등학교 시절, 저도 아버지에게 얘기했던 적이 있습니다. "
극소의 세계만이 아니다. 극대의 세계에서도 같은 것을 생각할 수
있다. 태양계는 어떤 원자를 구성하고, 은하계는 원자가 모인 분자
같은 것으로, 소우주는 하나의 세포가 되고 우주 전체는 하나의 거대
한 생명이 된다. 생명의 뱃속에 또 다른 생명을 품고, 그 생명 속에는
좀더 작은 생명을 품고 있다는 구조는 예로부터의 종교관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은 또한 전세, 현세 내세로 이어지는 생명의 순
환과도 비슷하다.
"그렇다면, 고리가 끊어지면 어떻게 되리라고 생각하나? 극대와
극소는 연결되어 있지. 그 고리의 일부가 막히면 영향은 앞뒤에 미치
게 되지 "
"중간에서 끊어진 고리는 잇지 않으면 안 되죠."
'할아. 원래대로 고치는 건 아니지. 루프에 생긴 재앙을 극복한 뒤
에 새로 다시 잇는 거야."
"그럴 경우, 앙화한 루프의 역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진화의 막다른 골목으로 잘못 들어가 멸절한 종과 마찬가지이다.
더 갈 수 없게 되어 끝난 거지.루프의 기록 장치에 기록은 남지만,
암세포를절제해 버리듯이 현실의 역사에선 잘려 버리네.루프의 역
사는 일단 옆길로 빠져 나왔다가 새로운 페이지부터 다시 시작하게
되지 ."
대지를 깎아내면서 물이 흐르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물은 지형의
작용을 받아 높은 장소에서 낮은 장소로 흐르는데, 때로 막다른 길로
잘못 들어서 웅덩이 모양으로 불어 버리는 경우가 생긴다. 갈 길이
막혀도 물은 출구를 찾아 약한 부분의 흙을 깎아 새로운 루트를 만들
어 흘러나간다. 바다까지 이르러 강이 되고 나서 그 구불거리는 모양
을 바라보면 이전에 막다른 길이 있던 부분이 분명해진다 예각(銳
角)으로 굽은 부분은 섬이 되어 남기도 한다.
루프 역시 이 흐름과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출구가 막혀 정지한 상
태에 있다. 그러나 흐름이 막힌 상태로 두면 현실계에 악영향을 미친
다. 현실은 루프와 호응하고 있는 것이다. 현실적인 방법으로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스에 대처함과 동시에 루프계가 암화한 역사 자체를
바꿀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않을 것이
다.
문제를 극복한 뒤에 새로운 흐름을 만드는 것이 가오루에게 부과
된 두 번째 역할이었다.
엘리엇은 다시 신의 문제를 들었다.
"세계는 때로 신의 손을 필요로 하네. 신은 물론, 처녀의 모체에서
태어난다. 그리고 또 환생하는 거야. 준비는 갖추어져 있네."
신이 되라고 하지만 가오루에게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생생한 감
각을 여전히 지니고 있는 것이다. 억지로 등을 떼밀리고 있다는 기분
을 씻을 수가 없었다
가오루는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걸으면서 말없이 생각했다.
·쎄인스록의 폐허에서 보여 준 인디언의 생애는 대체 무엇을 의
미하는 걸까?
웨인스록에서 억지로 보게 된 가상 현실은 물론 엘리엇에 의해 준
비된 것이다. 그 이유를 엘리엇에게 따져 물은 적은 없다. 가오루 자
신은 죽음의 예행 연습을 시키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멋대로 해석
하고 있었다. 그러나 또 하나의 의미를 지금 막 떠올렸다.
인디언 사내는 눈앞에서 아내와 아이들의 죽음을 보았다 무참한
방법으로, 어찌할 도리가 없이 잃어 가는 생명에 대해 자신의 죽음
이상으로 견딜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죽음의 암막(暗幕)에 뒤덮이
기 직전까지 그의 뇌리는 그런 생각에 가득 차 있었다. 아내와 아이
들을 구하지 못했다는 회한의 감정,분노,공포. 마이너스의 이미지
만이 새까맣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헤드 마운티드 디스플레이를
벗었을 때 , 가오루는 가상 세계의 사건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체험만은 두번 다시 하고 싶지 않다고 절실히 느꼈던 것이다. 인디
언 사내의 이야기는 자신의 몸을 희생하여 아내와 아이들의 목숨을
구한 이야기가 아니다. 소중한 목숨이 빼앗기는 순간을, 어찌할 도리
없이 아주 가까이 에서 볼 수밖에 없다는 극히 잔혹한 이야기이다.
‥‥왜 인디언 이야기를 체험하는 것이 필요했던 걸까?
나중의 전개를 보면 그것이야말로 엘리엇이 의도한 대로여서,죽
음의 체험은 가오루의 정신에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체험만은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다는 감정이 몸을 희생한 구원으로 몰아갔
다 부모를 비롯해 사랑하는 사람을 죽게 내버려 둘 수 없다는 격정
의 원천이 되었다. 즉 엘리엇이 생각하는 대로 올가미에 빠져서,가
오루에게 강박 관념이 심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복잡한 심경으로 걸어가는 가오루의 뒤를 따라 엘리엇은 아무 생
각 없이 휠체어를 움직이고 있었다
"잠깐 기다려 주게. 전화를 하지 않아도 되겠나?"
가오루는 발길을 멈추었다.
"전화요?"
"그래 얘기하고 싶은 사람이 있지 않은가?"
아버지와는 얼마 전에 대화를 나눴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듣고 싶
지만, 이야기할 내용이 떠오를 것 같지 않다 지금부터 자신이 취할
행동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어머니는 혼란 상태에 빠질 게 뻔
하다.
‥‥레이코뿐이다.
얘기한다면, 레이코 이외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복도 중간을 꺾어 들어가 작은 방으로 안내받자 엘리엇이 아무 말
없이 수화기를 내밀었다.
가오루는 방에 그녀가 있기를 기도하면서 번호를 눌렀다. 엘리엇
은 소리를 내지 않고 몸짓으로 물었다.
‥‥그쪽 영상을 모니터에 비추지 않아도 되겠나?"
TV 전화를 쓸 필요는 없었다. 쓸데없는 점보를 빼고 목소리만 듣
는 것이 기억의 밑바닥에 확실히 심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
이다.
회선이 연결된 모양이다
"네, 여보세요· "
부드러운 레이코의 목소리를 접한 순간, 가오루는 예기치 않게 을
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여러 가지 감정이 성난 파도처럼 밀어닥친다.
영상이나 소리를 동반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목소리에 의해 촉발된
순간적인 폭발. 도저히 제어할 수가 없었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수화기에서 새어나오는 레이코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가오루는 역
시 전화 같은 건 걸지 말았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복도의 막다른 곳에는 검은 문이 있어, 그 앞에서 가오루는 엘리엇
과 헤어지 기로 했다.
엘리엇은 커다란 손을 내밀어 가오루에게 악수를 청해왔다.
'힘있게'라고 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지만 가오루는 엘리엇의 손을
받아 쥐었다 레이코와 나눈 마지막 말이 뇌리의 대부분을 차지하여
마음이 몹시 어지럽혀져 있었다. 마음은 딴 데 있는 상태로 눈은 공
중에서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너무 오래 산 모양이군."
문득 정신을 차려 엘리엇을 내려다보니, 거기에는 너무 나이 먹은
사내의 얼굴이 있었다. 자신의 수명이 앞으로어느정도인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얼굴이었다.
‥‥곧 자네 뒤를 따를 걸세.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이겠지만, 갈 곳이 서로 다르다 엘리엇이
가오루와 같은 장소에 도착할 일은 없다.
"약속한 것 부탁합니다. "
가오루는 다짐해 두었다. 자신의 생체 데이터로부터 얻은 지식을
즉시 부모와 레이코의 치료에 이용한다는 것 이외에 가오루는 또 하
나 엘리엇과 약속을 나누었다.
"알았네. 믿고 맡겨 두게나."
엘리엇의 대답을 확인하고 나서 가오루는 문을 열었다. 그곳에서
앞으로 나아가 들어갈 수 있는 것은 가오루뿐이다. 건너편으로 가오
루의 몸이 미끄러져 들어가자 문은 자동적으로 닫혔다.
이온 냄새일까? 이상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 이후, 지시는 스피
커를 통해 나오게 되어 있다.
스피커가 짱짱한 소리를 전하는 것 이외에 밖으로부터의 소리가
새어 들어오는 일은 전혀 없었다. 외계와는 완전히 차단되어 있었다.
가오루는 지시에 따라 걸치고 있던 가운과 속옷을 벗었다 샌들도
벗어 알몸으로 다음 방으로 들어갔다.
엘리엇으로부터 들은 대로라면 몇 개의 클린 룸을 통과할 것이다
앞으로 어떤 일이 행해질지 대충은 이해하고 있었다. 뉴캡이라고
하는 거대한 구체의 중심에 고정되어 로든 방향으로부터 뉴트리노가
조사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절차를 밟지 않으면 안
된다.
다음 방에서 가오루는 눈앞의 스트레처 (부상자 등을 운반하는 데
쓰는 이동용 침대 '역자 주)에 누우라는 지시를 받았다. 위를 보고
눕자 스트레처가 좁고 어두운 통로를 소리도 없이 이동하기 시작했
다. 그러는 사이에 가오루의 몸은 에어 샤워를 하고, 순수(純水)로
샤워하여 육체의 표면에서 일체의 불순물이 제거되어 갔다.
포인트를 지날 때마다 붉은 디지털 메터의 숫자가 한없이 100퍼센
트에 가까워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99.99, 99.999, 99.9999‥‥라는 식으로 숫자의 마지막 꼬리에 9가
더해져 간다. 방에서 불순물이 제거되어 가는 모양이 숫자로 표시되
는 구조이다.
스트레처는 그대로 가오루를 투명한 직육면체 용기 속으로 날랐
다. 체온보다 아주 조금 따뜻한 순수로 채워지기 시작하여 온몸이 푹
담긴다. 수조라기보다는 좀 큰 관 같은 모양이다
가오루의 육체는 어느새 단단히 고정되어 순수 위에 떠있었다
순수에 뜬 그대로 가오루의 몸은 계속 뉴트리노 스캐닝 캡처 시스
템의 중심을 향해 밀려 나갔다.
순수에 몸을 담그고 있어서인지 서서히 가오루의 정신이 진정되어
갔다. 어디까지가 자신의 몸이고 어디까지가 물인지 감각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물과의 완벽한 일체 감이다. 자아가 雲어지고, 무수한
거품이 되어 물 속으로 녹아들었다.
잃어 가는 자아 속에서, 마지막 저항을 시도하는 것처럼 방금 전
전화로 나눈 레이코의 말이 뇌리에 되살아난다.
‥‥있죠, 오늘 아침 아기가 움직였어요.
레이코는 기쁜 듯이 태내에서의 아이의 성장을 알려 줬다. 양수에
싸여 움직이는 아기의 이미지에 의해 자신이 놓인 상태를 객관적으
로판단할수있었다 생각해 보니 똑같았다 태어나려는 의지도.
새카만 어둠에 지배되는 하나의 우주가 여기에 있다. 중력이 사라
져 , 몸의 무게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직경 200미터나 되는 구체의
내면을 가오루의 눈이 포착하고 있을 텐데도 어둠 탓에 공간이 무한
정 펼쳐지는 것처 럼 느껴졌다.
어린 시절, 초고층 맨션의 발코니에 나와 밤하늘을 올려다보기를
좋아했다. 별과 달을 바라볼 때마다 세계의 구조를 알고 싶다는 생각
을 강하게 했던 것이다
초고층 맨션 발코니와 이곳은 대조적인 위치 관계에 있다 한쪽은
바다에 면해 선 높은 곳이고, 한쪽은 황량한 사막 지대에 파인 지하 1
천 미터의 구멍. 널찍한 공간에 감돌던 바닷물 향기에 반해 밀폐된
공간에는 인공적인 이온 냄새가 자욱하게 끼여 있다
지금 막, 머리 위 공간에 순간적으로 푸른 빛이 빛났던 것 같다 뉴
트리노의 조사가 시작된 것일까? 가오루에게는 푸른 번쩍임이 별의
깜빡임처럼 느껴졌다
구체 표면의 모든 방향에서 뉴트리노가 조사되고, 가오루의 몸을
뚫고 나가 반대쪽 벽에 도달하여 분자 정보를 차례대로 쌓아 올릴 것
이다. 그 양은 서서히 증가하여 쏘이면 쏘일수록 육체의 미세 구조에
대한 3차원 디지털화의 정밀도가 증가되어 간다. 초기의 조사는 육
체를 뚫고 지나갈 뿐으로 아무런 감각도 가져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
만 완벽한 정보를 손에 넣기 위해서는 그것으로 끝날 수 없는 일이어
서, 세포를 파괴할 정도의 조사가 필요하다. 그때 자신의 몸에 생길
이변을 가오루는 의식하지 않으려고 했다.
푸른 빛은 간격을 짧게 하여 팟팟 하고 어둠 속에서 명멸하고 있었
다.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빛나는 듯 푸른 빛이 횐 띠를 끌며 공간을
비스듬하게 가로질러 간다. 유성과 똑같다.
편안한 기분으로 가오루는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 버린 듯한 기분· .
어쩌면 우주 비행사의 체험도 이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지구를 바
깥쪽에서 바라본다는 체험은 인간을 신의 영역에 다가서게 한다고
한다. 그 점이 가오루의 입장과 조금 다르다. 가오루가 도달하려 하
는 것은 신 그 자체였다.
일체의 소리가 차단되어 있을 텐데 쿠앙 쿠앙 하고 고막을 압박하
는 힘이 있었다. 귀 근처에서 누군가가 큰 소리로 말을 걸고 있다. 인
간일 리 없는 존재· . 가상 공간의 디지털 신호일까?
갑자기 뇌리에 이미지가 끼여들었다. 샤갈의 그림을 머리 내부에
직접 삽입당한 듯한 상태였다.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VTR
의 잭이 직접 뇌에 꽃힌 것처럼 인상적인 극채색의 영상이 흐르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진다.
창백한 빛은 뒤얽힌 끈 모양의 띠를 이루어 허공에 무수히 교차되
고 있었다. 새카만 어둠이었던 것이 바야흐로 빛줄기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바로 귓가에 울려 퍼지고 있다.
들릴 리 없는 소리· . 디지털 신호의 소용돌이가 귓불을 어루만진다.
몸은 우주의 무중력 공간에 던져져 있었다. 순수가 담긴 수조에서
떠올라 빛의 소용돌이로 들어가는 것 같다. 육체에서 유리되어 마음
은 점점 맑게 개어 간다.
가오루의 여행은 종막을 맞이하려 하고 있었다. 사막의 어느 한 지
점을 향한 여행, 아니 , 그렇다기보다 죽음과 환생의 여행은 시시각각
으로 목적지에 다가서고 있었다.
뇌리에 끼워진 영상은 거친 입자로 만들어져 있었다. 모자이크 문
양이 덮여 있어 윤곽이 울퉁불퉁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이전처럼 매
끄럽고 자연스런 영상이 머리에 떠오르지 않는다. 해석되는 정보량
이 부족해서 일 것이다
뉴트궈노의 조사는 더욱 격렬함을 더해 가, 분자 구조를 디지털화
해 갔다.
그렇게 해상도가 올라감에 따라 울퉁불퉁한 모자이크 문양에서 각
이 없어져 가오루가 극히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영상이 뇌리
에 재현되어 왔다.
이미지가 원래대로 돌아온다. 빛의 통로 저편에서 현실과 꼭 닳은
황천을 본 듯한 생각이 든다.
가오루의 여행은 끝나려 하고 있었다. 현실계에서의 육체는 소멸
하고 루프계에서의 재생이 이루어지려 했다.
해석이 모두 종료되자 조금 전까지 가오루가 떠있었던 수조에 인
간의 자취는 없었다. 있는 것은 산산조각으로 파괴되어 물에 녹은 세
포의 잔해뿐이다. 자아가 물에 녹아가는 것과 병행해 육체도 차츰 분
쇄되고 세분화되어 물에 녹아들었다. 물은 순도를 잃고 있었다 창백
한 빛 탓에 피비린내 나는 참혹함은 없었지만, 지금까지와 다른 물컹
물컹한 액체로 변해 버린 것이다.
육체의 소멸에도 불구하고 가오루의 의식은 존재했다. 뉴트리노는
죽음 직전에 가오루의 뇌 상태∼시놉스,뉴런의 위치,화학 반응에
이르기까지 정확히 디지털화해 재현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종적인 청사진을 직접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발생 과정을제어
해 가면서 뉴캡으로 획득된 정보가 디자인되고 있었다. 루프 시간으
로 약 일 주일이 지나 아기로 탄생된 개체는 뉴캡에 들어간 시점의
체격으로 성장하고, 의식 상태가 되돌아올 것이다
가오루는지금자신이 있는 장소를 알수 있었다 자궁 속이다. 비
유가 아닌,실제로 자궁 안에 있다. 처녀의 모태에, 양수에 잠겨 있
다
멀리서 다가오는 것처럼 어머니의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두근 두
근 하는 소리가 어둡고 밀폐된 구체 속에 울려 퍼지고 있다 소리는
점차 커지고 있었다
‥‥두근두근두근 두근
가오루로서는 자신이 누구의 자궁에 있는 것인지 알 길이 없다 그
러나 탄생하기 직전인 것만은 확실하다.
세상으로 나가겠다는 강한 의지를 갖고 가오루는 자신의 몸을 밀
빛이 눈부셨다. 창백한 번쩍임이 아닌, 인공적인 횐 빛이었다. 병
원에서 자주 보는 무영등(수술할 때 쓰는 그림자가 생기지 않는 조명
기구 ' 역자 주)이 발광원인 모양이다.
빛에 비춰 보니 탯줄이 보였다. 자신과 어머니를 잇는 한 가닥의
그로테스크한 끈‥‥
끈에 손을 뻗어 스스로의 힘으로 끊으려고 하다가 그만 큰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보통 아기와 똑같은 울음소리
"응애 -응애 - ."
새로운 여행의 시작이다.
강 림
‥‥안도, 안심해. 세계는 네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되지는 않
아.
네가 생각하고 있는 멸망의 그림은 한번, 그대로 진행랠었
지.
하지만 이번에는 달쪽. 瑞냐하면 내가 그것 때문에 돌아온 거니까·.
다카야마는 시계를 보았다. 슬슬 약속 시칸이 되려 하고 있다.
시간이 되었음을 알리는 듯 정면의 구름이 개고, 바다 위로 빌이 쏟아져 默다.
瑞崙히 열린 인터페이스. 바람이 불어 구름이 갈라진 틈을 크게 만들었다.
관찰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가 사라졌다.
장마 기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하늘이 맑게 갠 날이었
다. 모래사장과 도로를 가르는 제방을 걸으면서 수평선으로 눈을 돌
리자 물굽이 저편 풍경이 희미해져 있다. 몇 명의 낚시꾼이 느긋하게
바다에 낚싯줄을드리우고 있었다 아직 이른여름이라헤엄치는사
람은 아무도 없다. 두 가족이 모래사장 위에 시트를 깔고 피크닉을
즐기고 있을 뿐이다.
해변의 화창한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곳이 가상 공간이라는
현실을 잊고 만다. 루프계로의 환생을 이룬 지 이미 반 년이 지나, 몸
도 의식도 제대로 이 세계에 적응된 것 같다
작년 10월에 다카야마 류지는 한 번 죽었다. 사체는 의학부 학생이
었던 무렵부터 친구이기도 한 해부의 안도 미쓰오의 손에 의해 해부
되어 죽음이 확실히 확인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 1월, 안도
를 비롯해 그 동료이자 병리학자인 미야시타 팀의 도움을 받아 류지
는 3개월에 이르는 잠에서 깨어 되살아났다. 야마무라 사다코라고
하는 처녀의 태내에서 기어나와. 스스로의 힘으로 탯줄을손으로잡
아 뜯는다는 방법으로 두 번째의 탄생을 이루고 단 일 주일 만에 뉴
램으로 들어갔을 때의 가오루와 똑같은 육체로 성장해 있었다. 루프
계가 상위 개념에 의해 창조된 것을모르는 안도나리야시타는 류지
가 되살아난 진짜 메커니존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다카야마 류지가 죽
었던 5개월은 가오루의 20년에 이르는 인생에 상당한다. 예전에는
가오루였던 의식이 , 지금 다카야마 류지의 육체를 걸치고 루프계에
서 살고 있는 것이다.
한번 죽은 인간이 자유로이 밖으로 나돌아다닐 수도 없는 일이므
로 생활은 답답했지만, 백신 개발을 연구하는 환경으로서는 안성맞
춤이었다. 지난 반 년 동안, 다카야마는 미야시타에게서 제공받은 연
구실에 틀어박혀 바이러스의 연구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
의 세포에 숨겨진 힌트를 하나씩 해명해 나가는 작업이기도 했다. 대
강의 연구가 끝나고 링 바이러스의 백신이 완성되기까지는 반 년이
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생각해 보니, 참으로 오랜만의 외출이다. 이렇게 온화한 바람을 흠
뻑 맞고 있으니 한결 마음이 깨끗해진다. 가오루였던 시절에 살던 고
층 맨션에서는 언제나 신선한 밤바람을 흠뻑 맞곤 했다. 기호는 변하
지 않은 모양이다.
피크닉을 하는 가족 저편에, 파도치는 곳에 선 사내 아이의 작은
그림자가 있었다. 사내 아이는 쭈뼛쭈뼛 파도에 다가갔다가 발이 젖
지 않게 홱 하고 물에서 떨어진다. 그런가 싶더니 모래 위에 쭈그리
고 앉아 구멍을 파거나 모래를 쌓아 올리거나 하고 있다. 상반신은
벗었고, 수영 팬츠를 입고 있는 것치고는 몸이 젖는 것을 싫어하는
모습이 역력했고 동작은 너무나 신중했다. 사내 아이가 몸에 걸치고
있는수영 팬츠는 몸에 꼭 맞는 비키니 타입이다 머리에는 수영 토
자를 쓰고 있지 않았다.
레이코를 처음으로 수영장에서 보았을 때, 아들인 료지는 기묘하
게 언밸런스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수영용이 아닌 체크 무의의 짧은
반바지를 입고 머리에 쓴 수영 모자에서는 머리카락 한 가닥도 삐져
나와 있지 않았다. 문득 그때의 광경을 떠올리고 만다. 레이코의 피
부 감촉, 그녀와 마지막으로 나눈 말‥‥ 기억 밑바닥에 영상과 목소리
가 확실히 남아 있다. 지금 그녀는 어떻게 하고 있을까?
바다 쪽으로도, 도로 쪽으로도 떨어지지 않도록 차가운 청량음료
가 든 비닐 봉지를 두 손에 들고 균형을 잡으면서 제방 위를 걸었다.
사막지대를 가로지르는 산등성 이와는 달리 제방 폭은 몇십 센티미
터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 이렇게 스스로의 발로 이렇게 좁은 길을
걷고 있으니 저승과 이승의 모호한 경계선을 건너고 있는 것 같은 기
분이 든다.
파도치는 곳을 떠나 사내 아이는 제방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사내
아이는 100미터 정도 앞 제방에 앉아 있는 남자를 향해 달리고 있었
다. 제방에 앉아 있는 남자는 그가 지금 만나려는 사람이며 사내 아
이의 아버지이다
남자는 시선을 온통 아들에게만 쏟고 있어 다가오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전혀 무방비 상태이다. 모든 관심이 아들에게만 향해 있다.
너무놀라게 하는 것은 좋지 않을 것 같아다카야마류지는 좀 떨어
진 곳에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어이 , 안도."
이름이 불리자 안도는 고개를 들고 전후 좌우로 얼굴을 돌렸다 그
리고 제방을 걸어 다가오는 류지에게 눈길을 멍추고는, 소리 없이 놀
란 표정만 지어 보였다
"야, 오랜만이다. "
지난 반 년간, 류지는 안도와 만나지 않았다 다카야마의 재생에
고 있었던 것이다.
다카야마는 안도 옆에 앉아 어깨가 닿을 정도로 몸을 붙였다. 그러
나 안도는 쌀쌀맞게 눈을 마주치려고도 하지 않고, 모래 위로 달려온
아들 쪽으로만 시선을 되돌렸다
할 수 없이 다카야마는 비닐 봉지에서 청 량음료를 꺼내 마셨다. 눈
깔짝할 사이에 다 마시더니 다른 캔 하나를 꺼내 안도 쪽으로 내민
다.
"마실래?"
안도는 잠자코 받아들더니 다카야마쪽을 보지 않고 꼭지를 당겨
올렸다
"내가 여기 있는지 어떻게 알았어?"
안도는 침 착한 어조로 물었다.
"미야시타한테서 들었어 ."
다카야마는 사실만을 간단히 대답했다. 안도 아들의 기일이 오늘
이라는 것으로 추리를 한 미야시타는 아마 이 장소일 것이라고, 다카
야마에게 안도가 있는 곳을 알려 준 것이다
아들의 기일이 오늘이라는 것도 묘한 이야기이다. 이곳과 똑같은
바다에서 아들이 빠져 죽은 것이 2년 전 오늘. 하지만 죽었던 아들은
눈앞에서 건강하게 뛰어다니고 있다. 자신의 존재를 제쳐두고,류지
는 그 사실에 쓴웃음을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무슨 용건이라도 있는 거냐?"
내리간 목소리로 안도가 냉정하게 물었다. 류지의 방문이 별로 기
쁘지 않은 모양이다. 연구실을 빠져나와 전철과 버스를 갈아타고 힘
들게 이곳까지 온 것이니 좀더 환영 받아도 좋을 텐데‥‥ 아무래도 오
해받고 있는 것 같다
엘리엇은 재생에 즈음해 모든 준비를 완벽하게 갖추었다고 말했
다. 어떤 세계에서나 한 번 죽은 생명이 되살아나는 사태는 그리 간
단히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 아니므로, 그 나름대로의 철저한 준비가
필요한 것이리라.
엘리엇은 빈틈없이 준비를 갖추었다. 재생에 즈음하여 힘이 되어
줄 안도에게 넌지시 암호를 보내 될 수 있는 한 무리 없는 방법으로
다카야마 류지가 재생할 수 있는 모든 환경을 갖춰 둔 것이다. 2년
전에 죽은 안도의 아들을 되살린 것도 다카야마를 재생시키는 데 도
움을 받기 위한 먹이였다.
루프계의 생명인 안도 아들의 경우, 뉴캡을 통과할 필요는 없었다.
루프에서 루프로의 이행이라면, 유전 정보의 재구성만으로도 재생은
얼마든지 간단히 이루어진다.
루프는 생명 체계가 암화를 시작하는 초기 부분으로 돌이켜 반 년
전으로 재시동되었다. 그 이전도, 이후도 아니고, 뿌려진 재앙을 극
복해야 하는 절묘한 타이밍에 다카야마 류지가 루프로 강림한 것이
다. 앞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면 루프는 같은 길을 밟아 암화
해 버릴 것이다. 스스로의 힘으로 막혀 있던 물의 흐름을 바꾸고,새
로운 역사를 구축해 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하면,이전에 살았
던 세계 역시 다양성을 되찾을 것이다.
"너한테는 감사하고 있어 . 내 기대대로 움직여 주었으니까."
다카야마는 진심으로 안도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루프계에 오기
직전, 다카야마의 반생은 확실하게 머리에 새겨 넣었다 대학 시절을
함께 보낸 안도의 우수함은 속속들이 알고 있다. 친구인 안도의 도움
이 없었다면,처녀의 자궁에서 탄생한다고 하는 합리적인 수단은 강
구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안도는 자신이 단순히 이용된 것이라는 의구심과 불쾌감을
씻어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리라 아니, 그러기는커녕 야마무라 사
다코와 결탁해 세계를 멸망시키기 위해 온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다카야마에게는 변명할 방법이 없었다. 자신의 정
체를 밝히는 것만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앞으로의 고독한
인생을 생각하면 다카야마는 오싹해지는 때가 많았다. 오직 하나, 가
슴에 품고 있는 강한 희망만이 고독한 인생을 견뎌내게 하는 힘의 원
천이었다.
파도치는 곳에서 사내 아이가 일어나 안도 쪽으로 손을 흔들었다.
안도가 답하자 사내 아이는 모래를 차며 다가왔다.
"아빠, 목말라."
안도는 다카야마로부터 받은 청량음료 캔을 아들 쪽으로 내밀었
다. 받아들자마자 사내 아이는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
바로 눈앞에 사내 아이의 횐 목이 뻗어 있어,차가운 액체가 흘러
떨어지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확실한 육체적 움직임이 있다
조금 다른 수단이기는 했지만, 자신과 마찬가지로 재생된 육체. 같은
모태에서 태어난 형제 같은 것이다
"하나 더 마실래?"
류지는 사내 아이에게 말을 건네면서 비닐 봉지에 손을 집어넣머
부스럭부스럭 안을 뒤졌다. 사내 아이는 머리를 옆으로 흔들고 다과
야마에게, "이제 됐어요"라고 대답하고는 아버지를 보고서, "이거,
다 마셔도 돼?"라며 마시다만 청 량음료를 머리께로 들고 와 묻는다.
"응, 괜찮아 "
안도가 허락하자 사내 아이는 캔을 흔들면서 파도치는 곳으로 돌
아간다. 빈 캔에 모래를 채워 넣고 놀려는 생각이리라. 그 등을 향해
안도가 외쳤다.
"다카노리 !"
사내 아이가 멈춰 서서 돌아본다.
"왜 '!"
"아직 바다에 들어가지 마라."
'알았어'라고 말하는 듯 웃는 얼굴을 보인 사내 아이는 다시 등을
돌렸다.
빠진 순간의 일을 기억하고 있어서 사내 아이는 아직 바다를 무서
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 공포를 극복하지 못하면 앞으로의 긴 인생을
헤쳐나갈 수 없을 것이다.
"귀여운 애구나."
류지가 말했다. 마음속에는 레이코의 자궁에서 자라고 있을 자신
의 아이에게 보내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안도는 다카야마의 말을 무시하고 질문해 왔다.
"이봐, 가르쳐 줘 . 세계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냐?"
'너라면 알고 있을 테지 ' 하고 안도는 노려보는 듯한 시선을 향해
온다. 확실히 알고 있기는 하다. 적어도 안도보다는 앞으로의 전개에
는 환하다. 그러나 그것을 말할 수는 없다
"너야말로 어떻게 생각해? 세계는 앞으로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
하냐?"
다카야마에게 재촉받은 안도가 말한 것은 암화해 갔던 루프의 결
말과 거의 비슷한 미래도였다.
링 바이러스는 전세계에 만연되고.비디오 테이프는 여러 가지 미
디어로 변모하여 역시 세계를 누비고 다닌다 배란기에 감염되거나
매체에 접촉한 여성은 야마무라 사다코와 동일한 유전자를 가진 개
체를 낳고,그 이외의 사람은 배제당한다.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새
로운 미디어를 떠맡게 된 극히 일부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배제되
어 간다. 그 결과 어떻게 되는지는 의학자인 안도가 아니라도 누구나
예측할 수 있다. 야마무라 사다코라는 유전자 이외에는 모두 쫓겨나
생명은 단일 유전자로 수렴되어 가게 된다.
"넌 그래도 아무렇지도 않냐?"
안도의 눈은 적의로 가득 차 있었다. 역시 오해받고 있는 모양이
다카야마는 무표정하게 주머니에서 앰풀을 하나 꺼내 안도에게 건
"이거 받아 둬라."
"뭐냐?"
"백신이야."
"백신‥‥‥
안도는 유리로 된 작은 앰풀을 받아들더니 이리저리 뜯어 보았다.
반 년 동안의 실험과 연구로 다카야마는 링 바이러스에 맞설 백신
제조에 성공했다. 자신의 세포에 담겨진 힌트를 단서로 연구를 시작
하여 간신히 완성 , 동물 실험에 의해 효과는 확인되었다
"이걸 접종하면 바이러스를 막을 수 있을 거야 이제 걱정할 것 없
어"
'너 , 이걸 건네주기 위해 일부러 찾아온 거냐?"
'刻 , 가끔 바다를 보는 것도 좋지 ."
다카야마는 그렇게 말하고 겸연쩍은 듯 웃었다. 안도의 표정은 조
금 누그러진 것 같다
"이봐, 가르쳐 주지 않겠냐, 세계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앰풀을 안주머니에 넣으면서 안도는 조금 전과 같은 질문을 던졌
지만 어느새 말투는 부드러워져 있었다
"모르지 ."
다카야마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넌 모를 리 없어 . 야마무라 사다코와 손잡고 세계를 디자인할 생
각일 테니까."
그 말을들은 다카야마는 웃을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여기에 있
어 봤자 쓸데없는 일일 것 같다.
다카야마는 일어나면서 중얼거렸다
"슬슬 가기로 할까?"
'벌써 가는 거냐?"
안도는 제방에 앉은 자세 그대로 다카야마를 올려다보았다.
"응, 슬슬 가야지 . 그런데 넌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
"미디어가 미치지 않는 무인도 같은 곳에서 부모 자식이 사이좋게
사는 수밖에 없겠지
"너답구나. 난 마지막까지 지켜볼 의무가 있어 갈 때까지 가면 인
간의 지혜가 미치지 않는 의지의 힘이 쏟아져 내릴지도 몰라 그 순
간을 놓칠 순 없지 ."
다카야마는 애매한 표현으로 미래를 어느 정도 시사한 셈이었다
·안심해 세계는 네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은 되지 않아. 네가
생각하고 있는 멸망의 그림은 한 번, 그대로 진행됐어.하지만 이번
에는 달라 왜냐하면 바로 그것 때문에 내가 돌아온 거니까.
다카야마는 제방 위에 서서 걷기 시작했다.
"건강하고, 미야시타한테 안부 전해 줘 ."
안도의 말에 다카야마는 발을 멈추었다.
"마지막으로 이것만은 기억해 뒀으면 좋겠다. 어떤 재앙을 당하든
정면으로 맞서서 극복하는 경험을 쌓는 것만이 세계를 변하게 하는
거야‥‥ 그러니까, 그래· . 괜찮을 거야."
손을 올린 다카야마는 그 자리에서 사라져 갔다. 마지막에 한 말의
진의는 안도에게는 아마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상관없다.
언젠가 알 때가 올 것이다.
올 퍼와 마찬가지로 제방을 걸으면서 다카야마는 가끔 뒤를 돌아
보았다 안도와 아들의 목소리가 조그맣게 들려왔기 때문이다.
"약속이다, 아빠."
사내 아이는 안도에게 다짐을 받고 있었다.
"그래 , 꼭이다. "
안도는 기대했던 대로 물의 공포를 극복했을 때의 포상을 아들에
게 확인시켜 주고 있었다.
"약속한다. 엄마를 만나게 해줄게."
안도는 아들의 죽음을 계기로 아내와 헤어졌다. 그 아내에게 아들
을 재회시키는 것이 성공적으로 물에 대한 공포를 극복했을 때의 보
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엄마, 깜짝 놀라겠지?"
짤막짤막 들리는 부자간의 대화에서 다카야마는 안도 일가가 재회
하는 장면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그것은 다카야마가 절대로 얻
을 수 없는 부러운 광경이기도 했다.
동경과 서경의 정확한 숫자는 제대로 기억되어 있었다. 시간도 마
찬가지로 기억되어 있다. 엘리엇과 약속한 시간과 장소를 잊을 리 없
다.
안도와 만난 해변 마을에서 똑바로 남쪽으로 내려간 다카야마는
예정보다 일찌감치 지정된 장소에 도착했다. 맞은편 해안이 희미하
게 바라다보이는 전망 좋은 산의 경사면이었다. 소나무 숲으로 덮인
완만한 경사면은 그대로 바다로 연결되어 있다.
다카야마는 풀 위에 앉아 시간이 오기를 기다렸다.
‥‥루프 시간, 1991년,6월 27일, 오후 2시 정각.
그것이 엘리엇과 약속한 시간이다. 아직 30분 정도 여유가 있었다
루프가 작동되고 나서 , 다카야마의 시간 감각으로는 반 년이 경과
했다 하지만 엘리엇이 있는 세계의 시간은 좀더 느렸다 이전과 똑
같은 수만큼의 초병렬 슈퍼 컴퓨터를 썼다면 루프가 좀더 빨리 움직
였을 테지만, 컴퓨터의 수를 억제한 결과, 1년간 작동시켰을 때 루프
가 움직이는 시간은 고작 5, 6년이라는 길이로 줄어들어 버렸다. 다
카야마에게 있어서의 반 년은 엘리엇이 있는 세계의 1개월 정도에
상당하는 것이 된다.
뉴트리노에 들어가기 직전에 아버지와 레이코에게 연락을 취했지
만,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나 있는 것이다. 사정을 설명하지 못하고 그
대로 이쪽 세계로 와버렸다 부모님과 레이코는 사막으로 여행을 떠
난 채 가오루가 행방불명이 되어 버렸다고 여기고 있을 것이다. 실제
로는 행방불명 정도가 아니라 육체의 완전한 소멸이었지만.
적어도 남겨 둔 생각을 전하고 싶었다. 자신이 취한 행동의 의미를
명확히 나타나는 방법 ·그것은 자신의 몸과 입을 이용하여 행하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을 것이다
시간과 장소만 지정해 둔다면, 다카야마의 모습은 저편 세계의 디
스플레이에 간단히 비쳐질 수 있다. 부모님과 레이코가 자신의 건강
한 모습을 디스플레이에서나마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엘리엇과 굳은
약속을 나누었다
다카야마는 시계를 보았다. 슬슬 약속 시간이 되려 하고 있다
시간이 왔음을 알리듯 정면의 구름이 개고, 바다 위로 빛이 쏟아져
왔다 마치 하늘에 생긴 창문처럼 느껴졌다. 빠끔히 열린 인터페이
스. 다카야마는 그 접점을 통해 상대의 얼굴과 표정을 볼 수 없다. 다
만 저쪽으로부터 일방적으로 관찰당할 뿐이다.
2시 정각. 영상은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다카야마는 얼굴을 약간
위로 향해 관찰하고 있을 사람들에게 우선 웃는 얼굴을 보였다.
한사람 한사람의 이름을 불러 말을 걸고,근황을 말했다. 묻고 싶
은 것이 많았지만, 그것은 할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의 육체의 정확한 디지털 정보에 의해 전이성 인간 암 바이러
스 박멸의 메커니즘이 밝혀진 걸까?메커니즘이 응용되어 아버지의
목숨이 구해 졌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레이코의 배에서 자라고 있는 아이는 전화로 얘기 나눈 이후 좀더
성장해 있을 것이다. 레이코는 자신의 세계에서 살아가겠다고 하는
희망을 보이기 시작했을까?지금 내 모습을 보고 분명히 결심해 주
었으면 좋겠다. 다카야마는 그렇게 바랐다.
루프에 만연해 가는 링 바이러스와 비디오 테이프의 변이 미디어
에 대해서는 단호한 처치를 취할 작정이다. 미디어와 접촉하는 것에
의해 일 주일 후의 죽음이 프로그램된다고 한다면, 그것을 해제하는
시스템은 간단히 만들 수 있다. 절대적인 자신감이 있었다. 어쨌든
자신은 극복해 내겠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저편 세계에서 이쪽 세계
로 내려온 것이다. 말하자면 신이나 다름없는 존재. 세계의 구조를
속속들이 알고 있다. 바이러스든 변이 미디어든 전혀 문제될 게 없
다.
가오루는 그런 생각을 하늘을 향해 말하면서 루프의 역사가정상
을 되찾고 그 영향을 받은 저편 세계도 서서히 다시 일어서는 과정을
상상해 보려 했다
사막 수목군은 추하게 암화되어 보기에도 무참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웨인스록의 폐허에서 본 쥐는 비대한 배를 위로 향해 땅에서
구르고 있었다.
추한 혹으로 뒤덮인 수목이 싱싱한 녹음을 되찾아 가는 순간을 원
했다. 언덕 경사면에 늘어진 마른 가지 끝에서 꽃이 피고 향기를 풍
겨내는 아름다움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루프가 다양성을 되찾기만
한다면, 다카야마가 상상하는 광경은 현실의 것이 될 것이다.
바람이 불어 구름이 갈라진 틈을크게 만들었다. 관찰자의 얼굴이
그 안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난 괜찮아."
다카야마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의 생각은 아마
이루어질 것이다
작자의 말
처녀작 『링』을 집필한 이래로 10년이 지나려 하고 있다. 속편인
◎2-원제 라낄은3년이라는 집필 기간을 거쳐 1995년에 발표되었
다. 그로부터 3년 만에 새로쓴 장편이 바로 이 책이다. 나스스로도
집필 속도가 너무 느렸다고 생각한다. 각 출판사 담당 편집자들이 한
탄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전체적인 구상을 세운 뒤에 이 시리즈를 쓰기 시작한 것은 아니다.
『링』을다썼을때, 『링2-원제 라센』는 전혀 머리에 없었고, 『링2-원
제 라낄를 다 썼을 때에도 瑞3-원제 ◎푸의 전개 같은 것은 전혀
떠오르지도 않았다. 하지만 타이틀만은 상당히 일찍 결정되어 있었
다. 『링』 『링2-원제 라센』이라면 완결편은 『링3-원제 루프』말고 없을
것이라고.
특정 종교를 믿지는 않지만, 소설을 쓰는 일은 한편으론 기도만을
계속하는 작업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야기를 의식적으로 서서히
구축해 가는 것은 아니다 머리 위쪽을 떠다니고 있는 이야기를 완력
으로 억지로 끌어당겨 자신의 몸을 통해 토해내는 것이, 나에게 있
어서 소설 창작 작업이다. 솔직히 말해 작가인 나로서도 한치 앞도
모를 만큼 어떻게 이야기가 전개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96년 가을, 2주간에 이르는 미국 취재 여행을 떠났다. 이야기의
무대를 미국 사막지대로 해야겠다고 막연히 정하고 있었기 때문이
다. 렌터카를 빌려 목적지도 정하지 않고 되는 대로 애리조나와 유타
의 사막 지대를 5천 킬로미터 정도 돌아다니다 왔는데, 그 도중에 들
른그랜드 캐니언의 풍경에 압도당했다. 지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물의 침식에 의해 깊게 旻개진 대지를 바라보면서 상상력이 자극을
받아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부글부글 솟구쳐 올라왔다 문
득 계곡 가장자리에 서서 멀리 아래쪽의 계곡 바닥을 내려다보니 '루
프'라고 이름 붙은 구불거리는 강 줄기가 있었다.
쓰기 시작하기 직전, 예비 조사를 위해 인공 생명에 관한 과학서적
을 대충 훌어보기로 했다. 책 페이지를 넘겨가다가 세계에서 처
즈느 0
로 자기 증식 프로그램을 완성시킨 크리스토퍼 랭턴에 판한 기록과
마주쳤다.
『링』 『링2-원제 라센』을 읽은 분들이 아시는 대로,자기 증식은키
워드의 하나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랭턴이 만들어 낸 프로그램은 '루
프'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이들 두 개의 싱크로니서티는 물론 우연이다. 소설을 준비하는 도
중에 만난 이상한 우연‥‥훨씬 이전부터 소설의 타이틀이 결정되어
있었는데도,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차례로 '루프'가 출현한 것이다.
아니, 또 있다. 책을 읽는 것뿐만 아니라, 인공 생명의 전문가로부
터 직접 조언을 얻으려고 일본에서 인공 생명 연구의 제일인자인 기
타노 씨를 만났다. 그런데 그분의 연구실이 집에서 걸어서 5분도 걸
리지 않는 거리에 있었다는 우연까지‥‥ 도처에서 우연을 만났다.
루프'가 가져온 싱크로니서티를 믿고 이 이야기가 어딘가에 존재
하기를 기도하면서 계속 글을 써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또한 많은 사람에게도 도움을 받았다. 소니 컴퓨터 사이언
스 연구소 시니어리서처의 기타노 히로아키 씨와의 왕래에서는 많은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어떤 황당무계한 질문에도 신속한 대답을 해
준 그분의 유연한 두뇌가 없었다면, 아마도 『링3-원제 루프』는 완성
되지 않았을 것이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전작 瑞2-원제 라낀에 이어 의학 분야의 좋은 상담역이 되어 준
의사 나카노 이구타 선생님 , 게이오 대학 의학부 미생물학 연구실 조
교 이마이 신이치로 씨에게도 많은 신세를 졌습니다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작품의 기획 단계에서부터 노고를 아끼지 않은 출판사측의 분발에
의해 『링』에서 『링2-원제 라』꾜, 『링2-원제 라센』에서 『링3-원제 루
프』에 이르는 고된 도정 (道程)이 지탱되었다.
어려울 때마다 얼굴을 내밀고 '코지 군은하면 된다니까' 하고격
려해 준 다른 출판사의 편집자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자네들의 말
은 마음에 사무친다네 .
총 5회, 연 30일 간에 이르는 통조림(출판사의 요청에 따라 외부
와의 접촉을 끊고 저술에만 몰두하는 일 ' 역자 주) 덕분에 아내와 딸
들에게는 외로움을 주고 말았다. 미안하다! 이래 가지고서야 교육 열
성 아빠로서는 실격이군.
1997년 12월 17일
스즈키 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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