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2-원제 라센
프롤로그
안도 미쓰오는 바닷속으로 가라앉는 꿈을 꾸다가 잠에서 깨어났
다. 파도 소리에 따르르르르릉 거리는 전화벨 소리가 겹쳐지는가 싶
더니,다음 순간 파도에 휩쓸려 하늘로 높이 솟구쳐 오르는 것 같았
다. 그와 동시에 퍼뜩 제정신이 들었다.
안도는 침대에서 손을 뻗어 수화기를 잡았다
"여 보세요‥‥"
잠시 동안 수화기에서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여보세요?"
말끝을올려 상대방의 대답을 재촉했다. 곧이어 오싹할 정도로어
두운 여자의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도착했어 요?"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안도는 어두운 수렁 속으로 끌려들어가는
듯한 허탈감이 몰려왔다. 방금 전까지 꾸고 있던 꿈의 광경이 고스란
히 되살아났다.
해변에 서 있던 자신이 갑작스레 솟구치는 파도에 삼켜져 방향 감
각을 잃고 바닷속 깊이 가라앉아 어찌할 도리도 없이 파도에 조롱당
하는 꿈· . 꿈을 꾸고 난 후에는 언제나 무릎 언저리를 만지작거리
는 작은 손의 존재가 느껴졌다. 바다꿈을 꿀 때마다 늘 작은 손의
감촉이 발치에서 되살아났다. 말미잘 비슷한 다섯 개의 손가락이 주
르륵 미끄러지는 것처럼 바다 밑바닥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어 가슴만 답답했다. 손을 뻗으면 금방이라
토 닿을 듯한데, 도대체 그것을 붙잡을 수가 없었다 가늘고 부드러
운 몇 가닥의 머리카락만을 손에 남기고 몸뚱이는 깊이깊이 가라앉
아 버렸다
여자의 목소리는 꿈 속에 나오는 머리카락의 부드러운 감촉을 너
무나도 생생히 떠올리게 했다.
"그래 , 도착했어 ."
진저리를 치듯 안도는 가볍게 몸을 떨며 대답했다
아내의 이름으로 서명 날인된 이혼장은 2∼3일 전에 이미 도착해
있었다. 안도가 서명하고 도장을 찍으면 본래의 제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해 낼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직 그렇게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됐죠'~l"
아내는 왠지 모를 나른 함으로 재촉했다. 7년 동안의 결혼 생활에
종지부를 찍으려는데도 아내는 너무하다 싶을 만큼 아주 간단하게
나왔다
"어 떻 게 라니 ?"
"서명 날인한 뒤 우편으로 보내 주었으면 하는데요."
안도는 잠자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 번 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
고 싶다는 말을 지금까지 몇 번이나 분명하게 전달했었다. 하지만 그
때마다 아내는 실현 불가능한 조건을 제시하면서 자신의 단호함을
보여 주었다 자존심을 모두 팽개친 채 매달렸던 그도 이제는 슬슬
지치기 시작했다
"알았어 ,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지 ."
안도는 의외로 간단히 꺾이고 만다.
아내는 잠시 잠자코 있었다.
"그래, 어떤 것 같아요?"
이어 쉰 듯한 목소리로 계속 설명을 요구해 왔다.
"어떻다니, 뭐가?"
멍청한 물음이었다.
"그러니까 당신이 나한테 한 일 말예요."
안도는 수화기를 꼭 쥔 채 두 눈을 감았다.
·끼혼을 해도 난 매일 아침 전화로 똑같은 비난을 받아야 하는 걸
까?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
진심을 담을 겨를도 없이 선뜻 말해 버린 것이 그녀의 기분을 상하
게 한 모양이었다.
"귀엽지 않았던 거죠?"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애초에· . ."
"다 알고 있는 걸 새삼스럽게 또 묻지 마 "
"그럼 왜 그런 짓을 한 거죠?"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반광란 상태에 빠지기 일보 직전의 증상
이었다 마음속으론 '두번 다시 걸지 마!' 라고 외치며 수화기를내
동댕이치고 싶었다 그러나 안도는 꾹 눌러 참았다.
그것은 부족하나마 나름대로 속죄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잠자
코 아내의 비난을 창아 내며 슬픔의 배출구가 되어 주는 것 말고는
지금 안도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뭐라고 말 좀 해 봐요."
아내는 거의 우는 목소리가 되어 있었다
"뭐라고라니‥‥ 요 1년하고 3개월, 우린 매일 그 일만 되풀이 해서
얘기해 왔어 . 이제 말할 건 아무 것도 없어 ."
"돌려 줘요!"
앞뒤 맥락을 일체 무시한비통한외침이었다 무엇을 돌려받고 싶
은 건지 물을 필요도 없었다. 돌려받고 싶은 건 안토 역시 마찬가지
였다.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매일 신에게 기도해 왔던 것이다. 돌
려 달라, 소원이니까 돌려 달라고. 하지만 그것은·
"그건 무리야."
상대방을 진정시켜 보려고 알아듣도록 말했다
"돌려 달라니까!"
과거의 불행에 刻매여 새로운 인생을 살려고 하지 않는 아내의 모
습이 견딜 수 없이 가여웠다.
안도는 좀더 건설적으로 살아 볼 생각이었다 잃어버린 것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이다 부부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앞으로의
삶을 생각하자고, 그렇게 아내를 설득해 보려고 무진 애를 썼다. 결
코 이런 일로 이혼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다. 이전의 사이좋은 부부
관계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어떤 노력도 아끼지 않겠다고 각오하고
관계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어떤 노력도 아끼지 않겠다고 각오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내는 일방적으로 책임만 강요할 뿐, 미래로 눈을
돌리려고 하지 않았다.
"돌려 줘요!"
"이 이상 어떻게 하라는 거야?"
"당신은 자신이 한 짓을 도무지 모르고 있어요!"
안도는 수화기 저편에서 분명히 들을 수 있도록 크게 한숨을 내쉬
었다 계속 되풀이되는 의미 없는 대사의 반복.정신이 병들어 있는
게 분명했다. 친구인 정신과 의사라도 소개해 주어야 마땅하겠지만
친정아버지가 병원장인만큼 그녀에겐 쓸데없는 참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제 끊어야겠어 ."
"언제나 도망만 치고."
'빨리 잊고 다시 일어났으면 좋겠어."
무리인 줄은 알았지만 달리 뭐라고 하면 좋을지 생각이 나지 않았
다.
안도는 수화기를 놓으려 했다. 그 순간, 전화기 저편에서 절규가
터져나왔다.
"돌려 달란 말예요, 나의 다카노리· .. "
전화는 끊겼지만 아래로 내려진 수화기로부터 다카노리라는 이름
의 잔향이 순식간에 넘쳐나와 방 안을 가득히 채워 갔다. 안도는 자
기도 모르게 소리내어 중얼거리고 있었다.
· .다카노리 , 다카노리 , 다카노리.
머리를 감싸쥔 채 침대 위에서 태아처럼 몸을 구부린 안도는 한동
안 움직이지 않았다. 시계를 보니 언제까지 이러고만 있을 수는 없었
다 슬슬 일을 하러 가야 할 시간이었다.
다시는 전화가 걸려오지 않도록 전화선을 뽑아 버린 안도는 창가
에 섰다. 실내의 답답한 공기를 바꾸기 위해 창문을 열자 요요기 공
원에서 날아와 근처 전깃줄에 앉은 까마귀의 울음소리가 놀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들려왔다 시커먼 해저의 괌과 아들을 부르는 아내
의 절규를 듣고 난후라서 그런지 멀리서나마 들려오는 까마귀의 울
음소리가 다소 마음을 보듬어 준다. 화창한 가을, 온화한 분위기의
토요일이 시작되고 있었다.
멋진 날씨가 오히려 아픈 상처를 건드렸는지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아서 안도는 티슈로 코를 풀었다. 원룸에는 자기 혼자
밖에 없었다. 안도는 다시 침대 위로 쓰러졌다. 방긍 전 참아 낸 줄
알았던 눈물이 뜻하지 않게도 양쪽 눈가에서 흘러나왔다.
조용히 흘러내리던 눈물이 끝내는 오열로 변해 버렸다. 그는 베개
를 껴안은 채 몇 번이고 아들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결국 이렇게 무
너져 내리는 자신이 한심했다. 슬픔이란 매일 연속해서 찾아오는 것
이 아니라 어떤 계기를 통해 봇물처럼 한꺼번에 넘쳐나오는 모양이
었다.
지난 2주일 동안은 죽은 아들 때문에 눈물을 흘린 적이 한 번도 없
었다. 눈물과 눈물의 간격은 확실히 멀어져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쑥불쑥 솟아오르는 슬픔의 깊이는 예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앞으로 몇 년 동안은 이 슬픔의 깊이가 지속될 것이다 틀림없이 그
럴 것이라 생각하니 절망적인 기분에 사로잡혔다.
안도는 책과 책 사이에 끼워져 있던 봉투 안에서 엉켜 있는 몇 가
닥의 머리카락을 꺼냈다. 아들이 남겨 놓은 신체의 일부이다. 남은
것은 이것뿐이다. 아들의 머리에 손이 닿아 끌어당기려 하는 순간,
슬쩍 뽑히더니 손가락에 엉겨붙은 것이다.
바닷속을 헤집고 돌아다녔는데도 떨어지지 않고 손가락에 붙어 있
었다는 사실은 기적에 가까웠다. 약지에 긴 결혼 반지 틈새에 붙어
있었던 것이다 사체가 떠오르지 않아 화장도 못했기 때문에 이 머리
카락이 유골 대신인 셈이다
안도는 머리카락을 嘗에 대 보았다. 아들의 피부 감촉이 떠오른다.
눈을감자바로 거기에 있는 것처럼 아들의 얼굴이 선명하게 되살아
났다.
이를 다 닦은 후에도 안도는 상반신을 벗은 채 그대로 거을 앞에
서 있었다. 턱에 손을 대고 가볍게 좌우로 움직여 보았다. 혀끝으로
입 안을훌어보니 아직 치석이 이빨 안쪽에 약간남아 있었다 턱 바
로 아래, 목덜미 쪽으로 면도 자국이 나 있었다. 안도는 면도날을 목
덜미에 대고 몇 가닥의 수염을 깎아 내고는 그 자세 그대로 자신의
상반신을 응시했다. 그리고는 턱을 위로 쳐들어 죽 뻗은 하얀 목을
거울에 비춰 보았다
면도날을 바꿔 쥐고 끝부분을 목 언저리에 고쳐 대더니 목에서 가
슴, 배를 향해 면도날을 내려뜨리다가 배꼽 언저리에서 손을 멈추었
다. 양쪽 유두의 한가운데를지나배까지,피부표면을 할퀸 하얀 선
이 그어져 있었다. 그는 면도칼을 메스로 생각하고 자신의 육체를 해
부하는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다.
늘 사체를 메스로 갈라 열고 있는 안도로서는 가슴 안쪽의 모습이
손바닥 보듯 훤하게 그려진다 지금 이 순간에도 주먹 크기만한 심장
은 두 개의 선홍색 폐에 안겨 있는 듯한 모습으로 확실하게 고동을
치고 있으리라. 의식을 하나로 집중시키자, 내부에서부터 소리가 들
려오는 것 같았다. 집요한 가슴의 통증 비탄(悲嘆)은 장기 어디에
붙어 있는 것일까?만일 심장이 그곳이라면 깊은 회한이 뒤얽힌 그
부분을 이 칼로 도려내 버리고 싶었다.
배어 나오는 땀으로 인해 손에 쥐고 있던 면도칼이 미끄러질 것 같
아 안도는 면도칼을 세면대 선반 위에 올려놓았다. 얼굴을 옆으로 돌
려 보니 오른쪽 목에 상처가 나 있었다. 수염을 玲을 때 잘못해서 피
부를 벤 것이리라. 칼끝이 피부 속으로 파고들어가는 순간, 분명 찌
릿한 통증이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펏자국만 있을 뿐 당연히 동반되
어야 할 통증은 그닥 느껴지지 않았다. 왠지 최근 들어 통증을 느끼
는 감각이 둔해진 것 같았다 피를 보고 나서야 비로소 상처가 났다
는 사실을 깨달은 적이 몇 번이나 있었다 삶에의 정열이 雲어진 탓
일지도 모른다.
타월로 목덜미를 누르면서 안도는 풀어 놓았던 손목시계를 손에
들었다 8시 반. 슬슬 일하러 나갈 시간이었다. 지금 그를 구원할수
있는 것은 일밖에 없었다. 일에 몰두하는 동안만큼은 과거의 기억에
서 도망칠 수가 있었다.
K대학 의학부의 법의학 강사와 도쿄 검시원 소속의 검시의(檢羅
醫)를 겸임하고 있는 안도에겐 사체를 해부할 때가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을 잊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얄궂게도 사체와 함께 있
을 때에야 비로소 가장 가까운 사람의 죽음에서 해방될 수 있었던
현관에서 나와 아파트 로비를 빠져나갈 때 , 안도는 평소 습관대로
손목시계를 보았다. 평소보다j분 정도 늦었다 이흔장의 서명 날인
에 할애한 i분이었다. 단 5분 만에 가느다랗게 연결되어 있던 아내와
의 인연이 완전히 끊어져 버렸다.
안도가 알고 있는 한, 대학까지의 출근길에 우체통이 세 개는 있었
다. 제일 첫 번째 우체통에 집어넣어야겠다고 마음먹은 그는 전철역
까지 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제1장
봉합된 刷부 틈새로
신문지 조각이 불業 나와 있었다.
사체를 운반아면서 생긴 반동에 의매 신문지가
쑤욱 妾아올라 裂긴 틈을 발괸아고 얼굴을 내민 것일까?
신문지 조각에 인쇄된 妾자를 덴었다.
세 개씩 秊 萎로 나뉜
털섯 刊의 妾자.
해부 당직의인 안도는 검시의 사무실에서 잠시 후에 해부할 예정
인 사체의 검시 조서 내용을 대충 훌어보았다. 현장 상황을 찍은 폴
라로이드 사진을 보는 동안 손에 땀이 배어 멎 번이나 세면장으로
가서 손을 씻었다 10월 중순이라 땀이 많이 날 계절은 아니었지만,
원래 땀이 많이 나는 안도는 하루에도 몇 번이나 손을 씻는 습관이
있었다
안도는 다시 한번 사체의 검시 조서에 첨부된 몇 장의 폴라로이드
사진을 책상 위에 펼쳐 놓고 하나하나 조용히 살펴보았다 딱 벌어진
체격의 사내가 침대 끝에 머리를 기댄 채 숨이 괍어져 있는 사진. 외
상은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다음 사진은 얼굴을 클로즈업 해서 크게
찍어 놓았다. 멍도 없고 목 졸린 흔적도 없었다. 어느 사진을 보아도
사인을 확실하게 집어 낼 만한 특징적인 단서가 없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범죄와 무관한 것 같다고 생각되지만, 그럼에도 검시의의 판
단에 따라 해부를 하게 된 것이었다. 아마도 돌연사겠지만 일단은 변
사(變死)임에 틀림없었으므로 법률상 사인이 밝혀지지 않은 채로 화
장할 수는 없도록 되어 있었다.
두손 두발을 최대한으로 펼친 이른바 큰 대(大)자 모양의 사체.
안도는 그 사내를 잘 알고 있었다. 대학 시절의 동기를 자기 손으로
해부하게 될 줄은 정말이지 꿈에도 생각 못했다. 불과 12시간 전까지
살아 있던 사내 다카야마 류지는 의학부 6년 간을 함께 지낸 동기
생이었다.
동기생들 대부분은 임상의를 목표로 하다가 법의학 교실에 들어간
안도를 괴짜라고 수군했지만, 안도 이상으로 코스를 일탈한 것이 바
로 다카야마 류지였다. 그는 톱 클래스의 성적으로 의학부를 졸업했
음에도 같은 대학의 문학부 철학과에 편입 학했다. 사망 당시의 직업
은 문학부 철학과 전임강사로서, 전공은 논리학. 학부가 다르긴 했지
만 안도처럼 전임강사라는 지위를 손에 넣은 것이다. 의학부를 졸업
하고 문학부 3학년에 다시 입학했던 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빠른 출세
였다. 나이는 52세 세번이나 대학에 떨어진 후, 입학한 안도보다 두
살이나 적었다.
안도는 사망 시각이 적힌 난을 주의해서 보았다. 거기에는 어젯밤
9시 49분이라고 쓰여 있었다.
"사망 시각이 상당히 정확하군요."
안도는 의문이 담긴 듯한 목소리로 해부 입회인인 키 큰 경장을 올
려다보았다 류지는 히가시나카노의 아파트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혼자 사는 남자가 자기 집에서 돌연사를 당한 경우치고는 사망 시각
이 너무나 정확했기 때문이다.
"뭐 , 우연이죠."
경장은 태연히 그렇게 말하고는 옆에 있던 의자에 앉았다.
"우연이 라구요? 어떤‥‥‥
안도가 물었다. 경장은 또 한 사람의 입회인인 젊은 경사 쪽을 돌
아보았다.
"다카노 마이 씨 , 확실히 와 있겠지?"
"예, 와 계십니다. 유족 대합실 쪽에서 조금 전에 만났습니다. "
"불러 주지 않겠나?"
"알겠습니다. "
경사는 사무실에서 나갔다.
"유족은 아닙니다만, 사체를 처음 발견했던 여성이 마침 여기에 와
있습니다. 다카야마 교수를 스승으로서 사모하는 여대생입니다만
뭐. 요컨대 애인이 라고나 할까요?조서를 대충 훌어보고 나서 뭔가
수상한 점이 있다면 선생님 쪽에서 무엇이든 물어 보십시오."
해부가끝나는 대로사체는 유족에게 인도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
래서 대합실에는 지금 다카야마 류지의 어머니와 형 부부가 기다리
고 있었는데, 사체 발견자이자 애인인 다카노 마이라는 여성도 함께
있다는 얘기였다
방으로 들어서려던 다카노 마이는 일단 멈춰 서서 좌우를 살폈다.
그 모습을 본 안도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실례가 많습니다' 라고
말하고는 의자를 권했다.
다카노 마이는 짙은 감색의 수수한 원피스를 입고 손에는 횐 손수
건을 쥐고 있었다. 과연 여성의 아름다움은 얼마만큼이나 위대할 수
있을까? 죽음을 친근하게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 걸까? 화사한 육체에서 죽 뻗어나온 손발은 가늘었으며 , 짙은
색 원피스 탓인지 하얀 피부는 더욱 돋보였다. 반듯한 계란형의 얼
굴, 두개골은 조금도 찌그러짐 없이 아름다운 곡선을 이루고 있었
다. 안도는 해부하지 않아도 마치 손바닥위에 얹어 놓은 것처럼 금
세 알아차려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그녀의 피부 밑에 있는 장기의
색깔, 정돈된 골격 . 그것을 만져 보고 싶은 욕구가 갑자기 물밀듯 몰
려왔다.
경사의 소개로 통성명을 한 후, 안도가 권하는 대로 의자에 앉으려
던 다카노 마이는 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옆에 놓인 책상에 손을 댔다.
"괜찮습니까?"
안도는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마이의 안색을 살폈다. 횐 피부 안쪽
으로 회색 빛이 비치는 게 빈혈이 아닌가 싶었다.
"아뇨, 별일 아니에요."
마이는 이마에 손수건을 대고 머리를 약간 숙인 자세로 바닥의 한
점을 응시하고 있었다. 경사가 가져온 물을 마시고 다소 진정되자
그녀는 고개를 들고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
했다.
'죄송합니다, 잠깐‥‥‥
안도는 곧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마이는 생리 중인데다가 정신적
인 피로가 겹쳐 빈혈 기미를 보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다
지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실은, 죽은 다카야마 류지는 저의 대학 친구였습니다. "
긴장을 풀어 주고 싶기도 하여 안도는 자신과 다카야마 류지가 의
학부 시절의 동기라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마이는 내리뜨고 있던 눈을 번쩍 들었다.
"안도 씨 , 라고 하셨죠?"
"예, 그렇습니다만."
마이는 안도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더니 친밀감을 가득 담은 눈
길이 리었다. 그리고 그리운 사람을 만난 것 같은 표정으로 꾸벅 고
개를 숙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
친구라면 시신을 아무렇게나 다루지는 않을 거야. 분명히‥‥ 안도
는 마이의 표정 변화를 그런 식으로 해석했다. 하지만 친구든 아니든
안도의 메스 놀림에는 조금도 변할 것이 없었다.
'죄송합니다만, 사체 발견시의 상황을 다시 한번 선생님께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경장이 끼여들었다. 범죄 혐의도 없는 변사체에만 느긋하게 매달
려 있을 수는 없었다 이 상황에서 고인을 그리워하며 추억 얘기로
꽃을 피우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먼저 선수를 친 것이다.
처음 사체를 발견한 다카노 마이에게 와 달라고 부탁한 이유는 어
젯밤 9시 50분 전후의 일을 해부 담당 의사에게 직접 들려 주고 싶었
기 때문이다 상황을 확실하게 알고 있으면 사인을 밝혀 내는 데 도
움이 될 것이라는 배려에서였다.
마이는 목소리 톤을 떨어뜨리고 어젯밤 경찰관에게 설명했던 것과
거의 같은 내용을 다시 한번 안도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전화가 울린 건 목욕을 마치고 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리고 있을 때
였어요. 그때 전 시계를 業죠. 그건 제 버릇이에요. 걸려오는 시간을
보면 상대가 누군지 대충 짐작이 가거든요.다카야마 선생님한테는
주로 제가 전화를 거는 편이었고,선생님이 저한테 전화를 걸어오는
적은 거의 없었어요. 설사 전화를 걸었다고 해도 밤 9시를 넘긴 경우
는 극히 드물었죠. 그래서 처음엔 선생님 전화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
했어요. 저는 수화기를 들고 그저 '예' 라고만 대답했어요. 그런데 잠
깐 사이를 두고는 수화기 저쪽에서 비명 소리가 나는 거예요. 처음엔
장난 전화인가 싶어서 깜짝 놀라 수화기를 귀에서 떼었는데, 비명이
곧바로 신음 소리로 변하더니 마침내 그것마저 끊어지고‥‥뭔가 이
세상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무거운 정적에 쉽싸였던 거예요. 쭈
項거리며 어쩔 줄 몰라하다가 수화기를 귀에 댄 채로 저쪽의 분위기
를 살폈어요.그런데 갑자기 다카야마선생님의 얼굴이 불쑥 떠오르
는 것이었어요. 언젠가 선생님의 비명 소리를 들었던 적이 있거든요.
다카야마 선생님의 목소리와 비슷했어요. 전 일단 전화를 끊은 다음,
이번엔 제 쪽에서 선생님 댁으로 전화를 걸었죠. 그런데 몇 번을 걸
어도 계속 통화중이라는 신호만 떨어졌어요. 그제서야 겨우 전화를
걸어온 사람이 선생님이고, 선생님에게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난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던 거예요."
"류지와는 전화로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군요?"
안도가 그렇게 묻자 마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한마디도요. 그저 비명 소리만 들었을 뿐이에요."
안도는 가까이에 있던 메모 용지에 뭔가를 적더니 계속 이야기할
것을 재촉했다
"그래서 그 후에는요?"
"한 시간 정도 걸려 전철을 갈아타고 선생님 아파트에 찾아갔죠.
그리고 방에 들어가서 부엌 안쪽의 작은 방 침대에 ."
"열쇠는요?"
"선생님께서 열쇠를 한 벌 맡기셔서 요."
부끄러운 듯이 그렇게 말하는 모습이 순진해 보였다
"아니 그런 말이 아니고,그러니까 방이 안쪽에서 잠겨 있었다는
말인가요?"
"예 , 잠겨 있었어요."
안도는 계속 재촉했다
"그래서 방으로 들어가니까 어떻던가요?"
"선생님은 침대 끝에 머리를 얹고, 위를 향한 자세로 두손 두발을
벌리고‥‥‥
마이는 말끝을 흐렸다. 그때의 광경이 생생히 떠오르는지 계속해
서 고개를 흔들며 그 장면을 떨어 내려 했다
마이의 다음 설명을 기다릴 것도 없었다. 안도의 손에는 몇 장의
사진이 들려 있었다. 숨이 끊어진 류지의 사체 사진이 여실하게 말
해 주고 있었다.
안도는 그 사진을 부채삼아 땀이 밴 얼굴에 바람을 보냈다.
"방 모양 말인데요, 뭔가 달라진 점은 없었나요?"
'별로요. 이렇다 할‥‥ 아아, 한데 수화기가 들린 채여서 삐 하는 소
리가 계속 울리고 있었어요."
안도는 사체 검안 조서의 기록과 마이의 말을 참고로 상황을 정리
해 보았다. 류지는 무언가 몸에 이변이 일어난 것을 알고 애인인 다
카로 마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도움을 받고 싶었기 때문일까? 그렇
다면 왜 119를 부르지 않았던 것일까?예를 들면 가슴에 통증을 느
껴 전화할 만한 여유가 있었다고 하면, 보통은 일단 구급차를 부를
것이다.
"119로 전화한 건 누구죠?"
"저예요."
"어디서요?"
"다카야마 선생님 방에서요."
"그러니까 그 전에 류지가 119에 전화를 걸었던 건 아니군요."
힐끗 눈길을 주자 경장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구급차 요청 전
화가 없었다는 것은 이미 확인이 끝난 모양이었다.
순간, 안도는 자살 가능성을 떠올렸다 갑자기 냉담해진 애인 때문
에 고민하다가 자살을 결심하고 독극물을 마신다 그런 뒤에 자신을
자살로 내몬 당사자에게 전화를 걸어 괴롭히려 한다. 하지만단말마
의 비명을 지르는 것으로 끝나고 만다는 어줍잖은 시나리오였다.
하지만 조서에 의하면 자살 가능성은 낮았다. 독극물이 들어 있음
직한 용기도 현장에서 발견되지 않았고,마이가 갖고 갔다는 증거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표정을 보니 그런 의심이 일순간에 날아
가 버리고 말았다. 남녀간의 미묘한 관계에 눈치가 없는 사람이라도
금방 알아챌 수 있을 만큼 이 여성은 다카야마 류지라는 남자를 엄청
나게 존경했었던 듯했다. 가끔씩 내비치는 눈가의 물기는 사랑하는
사람을자살로 내몬 것에 대한 회한 때문이 아니었다. 두 번 다시는
그 육체를 만질 수 없다는 슬픔 때문이었다.
안도는 마치 거울을 보는 것 같았다. 매일 아침 그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아 왔으므로 슬픔의 표정에는 아주 익숙해져 있었
다. 슬퍼하는 척 꾸미는 것 따윈 절대로 통하지 않았다. 병원에까지
와서 해부한 후의 사체를 인도받으려는 것만봐도 이들의 관계가 얼
마나 좋았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더군다나 류지만큼 호방한 사내가
애인에게 차였다는 것 정도로 자살할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역시 심장이나 머리 어딘가에서 문제가 생겼겠군
안도는 급성 심부전이나 뇌출혈일 거라고 짐작했다. 물론 해부 결
과, 위장 내용물에서 청산가리 같은 독극물이 발견되지 않으리라고
는 장담할 수 없었다. 혹은 식중독이나 일 산화탄소 중독, 그 외의 전
혀 예기치 않은 사인으로 밝혀지는 경우도 드물게는 있었다. 그렇지
만 지금까지 예상을 크게 벗어난 적은 거의 없었다.
육체의 갑작스런 이변을 감지함과 동시에 다카야마 류지는 죽음을
각오하고 애인인 다카노 마이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들으려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미 때가 늦어 얄궂게도 단말마의 비명만
을리고 류지의 심장은 정지했다‥‥ 대략 그런 것이리라.
그때, 해부 조수를 맡고 있는 임상 검사 기사가 사무실에 얼굴을
내밀고 작은 소리로 알렸다.
"선생님, 준비됐습니다. "
안도는 일어나서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말했다
"그럼 , 슬=슬."
어쨌든 해부를 마치면 사실은 명확해질 것이다. 다카야마 류지의 사
인. 지금까지 사인이 밝혀지지 않았던 예는 단 한 건도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안도는 이번 경우도 대단치 않게 보고 있었다. 이번에도 역시
류지의 목숨을 빼앗아간 것의 정체가 아주 싱겁게 밝혀지리라고.
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어둡고 습한 분위기가 드리워져 있어서인지,
걸을 때마다 '쿡쿡' 고무장화 우는 소리가 왠지 기분 나쁘게 울려퍼
졌다. 집도의인 안도, 임상 검사 기사, 두 명의 경찰관.복도에서 울
리는 발소리는 이들 네 사람의 것이었다. 나머지 스탭인 조수, 기록
담당, 사진 기사는 이미 해부실에서 해부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문을 열자 힘차게 흘러나오는 수돗물 소리가 들렸다. 해부대 바로
옆에 설치된 싱크대 앞에서 조수가 지금부터 사용할 용기들을 씻고
있었다. 수도꼭지 구멍이 보통 꼭지보다 넓어서 쏟아져 내리는 물기
등이 다른 것보다 더 하얗고 굵었다. 열 평 정도의 해부실 바닥은 이
미 물에 잠겨 있었다. 두 명의 입회 경찰관을 포함해 해부실에 있는
여덟 명 모두가 고무장화를 신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통상 해
부하는 동안은 물이 그대로 흐르도록 내버려 둔다.
해부대 위에서는 알몸인 다카야마 류지가 하얀 배를 드러낸 채 안
도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장은 1미터 60 안팎이었지만, 불룩한
배 주변과 어깨에서부터 가슴에 걸쳐 발달된 근육 상태가 드럼통처
럼 튼튼한 육체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안도는 그 육체의 일부인 오
른팔을 가볍게 들어올렸다. 중력 이외엔 아무런 힘도 느껴지지 않았
다. 생명이 빠져나갔다는 증거였다. 일찍이 강한 힘을 자랑하던 한
사내의 팔이 마치 아기 팔처럼 아무 힘도 쓰지 못하게 되었다 류지
는 동기 중에서 가장 팔 힘이 세서 팔씨름에는 상대가 없었다. 동기
들 모두가 힘을 넣을 새토 없이 테이블 위에 내동댕이쳐졌던 것이다.
그랬던 팔이 이제는 지탱해 주던 것을 빼내기만 하면 그대로 해부대
위에 맥없이 떨어져 버렸다.
하복부 쪽으로 얼굴을 돌려 드러나 있는 성기에서 시선을 멈추었
다. 새까만 음모 속에서 그것은 시들하니 오그라져 있었다. 귀두의
대부분이 포피로 덮여 있는 그 기관은 강인한 육체와 비교해 볼 때
상상할수 없을 만큼 빈약했다. 류지와 다카노 마이 사이에 남녀 관
계 따윈 없었을는지 도 모른다. 적어도 성기에 남아 있는 묘한 미숙함
이 그런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
메스를 손에 들자마자 턱 아래로 찔러 넣은 다음 하복부까지 , 두터
운 근육을 일직선으로 갈라 나갔다. 체온은 사후 12시간이 지난 사체
에서 완전히 빠져나가 있었다. 커터로 늑골을 자르고 한가닥 한가닥
배를 제거한 다음 좌우의 폐를 꺼내 조수에게 건넸다 학창 시절의
류지는 완고한 금연주의자였는데 마지막까지 금연주의를 일관했을
까? 폐는 깨끗한 선홍색을 띠고 있었다. 조수는 재빨리 폐의 중량과
크기를 잰 후에 그 결과를 큰 소리로 말했고, 기록 담당은 빠짐없이
기록해 나갔다. 그 동안 장기는 모든 방향에서 사진으로 찍히기 때문
에 해부실에서는 끊임없이 플래시가 빛났다. 일련의 작업은 숙련된
스탭들에 의해 조금의 멈춤도 없이 진행되어 갔다.
심장은 얇은 지방막으로 덮여 있었다. 빛이 비치는 데 따라 노르스
름하게도 부옇게도 보였는데 평균치보다 큰 편이었다. 312그램. 그
것이 다카야마 류지, 마음의 무게였다. 체중의 0.36퍼센트의 중량.
12시간 전까지 확실하게 고동치고 있었을 심장은 겉으로 보기만 해
도 광범위하게 괴사(壞死, 생체 내의 조직이나 세포가 부분적으로 죽
는 일 역자주)가 일어났음을 알수 있었다 지방막아래의 왼쪽대
부분이 다른 부분에 비해 짙은 적갈색을 띠고 있었다. 심장 표면에서
나뉘어 둘러싸고 있는 관동맥의 일부가 혈전(血樓, 혈관 안의 굳은
피 :역자 주) 등의 원인으로 꽉 막혀서 혈액이 제대로 흐르지 못해
심장 활동이 정지한 것이었다. 눈으로 보기만 해도 금방 알 수 있는
전형적인 심근경색 증상이었다.
괴사된 정도를 통해서 안도는 혈관이 막혀 있는 부위를 추측해 낼
수 있었다 왼쪽 관동맥이 갈라지기 직전의 부분, 이 부분이 막혔을
경우 치사율은 매우 높다. 어떤 원인으로 혈관이 막혔는지 는 내일 이
후에 있을 검사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지만,어쨌든 사인은 명확했
다 안도는 자신감을 가지고 '왼쪽 관동맥 폐색에 의한심근경색'이
라고 큰 소리로 말하고는 간 쪽으로 옮겨갔다.
그런 다음 신장, 비장을 비롯해 다른 모든 장기에 이상이 없는지를
확인하고, 위장의 내용물을 조사했다. 하지만 특별히 주의를 끄는 것
은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두개골을 절단하려 할 즈음,조수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선생님, 잠간 거기 , 목 있는데 말인데요· . "
그렇게 말한 조수는 손가락 끝으로 넓게 벌려 놓은 목 안을 가리켰
다 가까이 들여다보니 인두부 점막 부분에 궤양이 생겨 있었다. 그
리 큰 것은 아니라서 조수가 지적하지 않았다면 깜빡 못 보고 지나쳤
을 것이다 안도로선 처음 보는 증상‥‥ 사인과는 무관하겠지만 확실
히 하기 위해 조직을 약간 잘라 냈다. 이 궤양이 무엇인지는 조직 표
본을 작성한 뒤 , 화학 검사 결과를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다음에 안도는 류지의 머리에 칼집을 넣어 후두부에서 이마 방향으
로 두피를 벗기자 얼굴의 표면 즉 눈과 코와 입 부분으로 뻣뻣한 털
이 덮이고, 두피의 하얀 안쪽 면이 무영등(그림자가 생기지 않도록 설
계된 조명등 역자주)아래로 드러나게 되었다 가죽한장으로얼굴
이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안도는 두개골을 열고 뇌를 꺼냈다.
뇌는 전체적으로 횐 빛을 띠고, 무수한 주름으로 덮여 있었다. 의
학부는 엘리트 학생들의 집합체였는데 그 중에서도 류지의 능력은
아주뛰어났다 영어 ·독어 ·불어 등외국어에 능통했고, 최근 발표
된 논문을 業어보지 않으면 대답할 수 없을 만한 질문을 많이 던져서
교수들을 쩔쩔매게 했다. 하지만 의학을 깊이 공부하면 할수록 류지
의 관심은 순수 수학의 영역으로 옮겨갔다.
한태 의대생들 사이에서 암호 놀이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각자 차
례대로 암호를 만들어 출제해서 누가 가장 빨리 해독하는지를 겨루
는 게임이었다 그 게임에서 류지는 늘 톱을 차지했다 안도가 절대
로 풀 수 없을 거라고 자신 있게 출제한 암호까지 아주 쉽게 해독해
냈다. 안도는 그의 수학적 재능에 질리기보다도 마음속을 읽힌 듯한
느낌에, 가벼운 한기를 느꼈다. 자신의 암호를 그렇게 쉽게 풀어 냈
다는사실이 아무래도 이해되지 않았다 다른동기들 중에는 안도가
출제한 암호를 해독해 낼 수 있었던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안도를 제외한 다른 학생들은 류지가 출제한 암호를 끝내
한 번도 풀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안도만이 단 한 번 류지가 출제
한 암호를 해독했다. 어쩌다 맞힌 것에 지나지 않음을 그 자신은 잘
알고 있었다 논리적 사고의 결과가 아니라 난처해진 나머지 시선을
돌렸는데, 창 밖으로 꽃집 간판이 눈에 띄었고 그 간판에 쓰인 전화
번호에서 힌트를 얻어 키워드의 수수께끼를 풀어 냈던 것이다 막연
한 짐작이 우연히도 류지의 사고 방향과 맞아떨어졌던 것에 불과했
다 안도는 아직도 그렇게 굳게 믿고 있었다.
당시 , 안도가 류지에게 품었던 감정은 질투에 가까웠다. 결코 류지
를 이길 수 없으며 , 언제나 류지보다 한 단계 밑에 있다는 압박감 때
문에 안도는 몇 번이고 자신감을 잃곤 했다
지금 안도는 그 비범했던 두뇌를 바라보고 있었다. 평균보다 약간
무거을 뿐, 겉모양은 보통 인간의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생전
에 류지는 이 세포들을 구사해서 무엇을 생각하고 궁리했던 것일까?
순수 수학에 대한 흥미가 그대로 점점 커지면서 이윽고 수학을버리
고 논리학에 도달하게 된다. 그 과정은 이해할 만했다.
앞으로 10년쯤 더 살았더라면 그 방면에서 두드러진 업적을 쌓았
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정말이지 보기 드문 류지의 재능을 안도는 얼
마나 동경하고 질투했던가. 대뇌 종렬의 골은 깊었고, 결코 정복할
수 없는 봉우리처럼 전두엽이 솟아 있었다.
그러나 이제 끝난 것이다 이 세포는 정지해 있다. 심근경색에 의
해 멈춰 버린 심장 때문에 뇌가 죽어 버렸다. 지금 류지의 육체는 안
도의 손 안에 있었다. 안도는 뇌 내부에 출혈 같은 게 없는지 확인한
다음 두개골을 원래대로 돌려 놓았다.
메스를 든 지 50분 정도가 경과해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해부는
한 시간 전후로 종료된다. 대충 조사가 끝나갈 무렵, 안도는 갑자기
생각난 듯이 비워진 류지의 하복부 안쪽으로 손을 찔러 넣고 손가락
끝으로 더듬어 메추리 알만한 구슬 두 개를 꺼냈다 회색빛을 띤 두
개의 고환이 실로 귀엽게 움직였다.
자식을 남기지 않고 죽어 버린 류지와. 세 살하고도 4개월 된 아들
을 잘못해서 죽게 만든 자신과 어느 쪽이 더 불쌍한 걸까? 안도는 자
문해 보았다.
·깨 쪽이다
주저하지 않고 안도는 대답했다. 적어도 류지는 그 슬픔을 모른 채
죽어 버렸다. 류지의 인생은 질량 없는 슬픔의 감정이 강한 아픔이
되어 가슴으로 파고들어오는 시련과 무관하다. 아이로 해서 얻게 되
는 기쁨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그렇지만 그 자식을 잃어버린 슬
픔은 설사 몇백 년의 세월이 흐른다 해도 결코 지워지지 않을 것이
다 안도는 아무 것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역할을 끝내 버린 두 개의
고환을 복잡한 심경으로 해부대 위에 굴렸다.
나머지는 봉합하는 일뿐이었다. 텅 빈 가슴과 배에 등글게 만 신문
지를 넣어 볼륨을 만든 후 천천히 꿰매 갔다. 머리까지 꿰매고는 온
몸을 깨끗하게 닦은 후에 유카타(목욕을 한 뒤나 여름철에 입는 무명
홑옷 . 역자 주)를 입혔다 장기가 빠진 만큼 해부 전보다는 o撚어
보였다
‥‥말라 버렸구나, 류지 .
왜일까? 아까부터 안도는 자꾸 마음속으로 사체에게 말을 걸고 있
었다. 평소엔 이런 일이 없었는데 말을 걸고 싶은 분위기를 사체가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학창 시절부터 잘 아는 사이라서
그럴까? 물론 안도 쪽에서 일방적으로 말을 걸고 있을 뿐 류지는 아
무 대답도 없었다. 그런데 사체를 관에 넣기 위해 두 명의 조수가 들
어올렸을 때. 가슴 안쪽의 깊은 곳에서 류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한 기분이 들었다 특히 배꼽 부근이 묘하게 간지러웠다. 손으로 긁
어 보았지만 가려움은 쉬 가시지 않았다. 마치 가려움이 자신의 육체
를 떠나 바로 근처에서 떠돌고 있는 것 같았다
안도는 마음에 걸려 관 옆에 서서 류지의 가슴에서부터 배까지 손
으로 어루만져 보았다. 배 부근의 한곳에 작고 단단한 것이 튀어나온
감촉이 느껴져 가만히 유카타를 젖혀 보았다. 자세히 보니 배꼽 바로
위의 봉합된 피부 틈새로 신문지 조각이 불쑥 나와 있었다. 꼼꼼하게
봉합했을 텐데 아주 조금 접힌 신문지 끝이 밖으로 나와 있는 것이었
다. 뱃속에 밀어넣었던 신문지가 사체를 움직인 반동에 의해 쑤욱 솟
아올라 찢긴 틈을 발견하고 얼굴을 내민 것일까? 雲게 피가 밴 종이
조각에 하얀색 지방이 군데군데 붙어 있었다 그 하얀 막을 치우자
인쇄된 숫자가 보였다. 읽기 어려운 작은 숫자. 안도의 얼굴이 신문
지 조각으로 끌어 당겨졌다. 그곳에 쓰인 숫자를 읽었다. 세 개씩 두
줄로 나뉜 여섯 개의 숫자.
주식란이 펼쳐져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연락처인 전화번호가 때
마침 두 줄로 나란히 있었던 것인지 , 혹은 텔레비전 프로그램란의 G
코드 숫자인지‥‥ 어찌 됐든 간에 접힌 신문의 모서리 쪽에 숫자만 여
섯 개 늘어서 있을확률은그리 크지 않을 것이다. 안도는 이유 없이
그 여섯 개의 숫자를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178, 136
그리고는 고무장갑을 낀 상태 그대로의 손가락 끝으로 비어져 나
온 신문지를 뱃속에 밀어넣고 가볍게 탁탁 두드렸다. 다시 솟아올라
오지 않는 것을 확인한 뒤에 옷을 여며 주고 다시 한번 그 위를 손으
로 어루만졌다. 둥그런 모양의 배 표면에서 이제는 걸리적거리는 곳
이 아무데도 없었다. 안도는 한 발 두 발 관에서 물러났다.
그런데 까닭 없이 후들후들 몸이 떨리고 오한이 등줄기를 달려나
갔다. 고무장갑을 벗으려고 팔을 들자 손등에서부터 팔꿈치에 걸쳐
솜털이 곤두서 있는 게 보였다 옆에 놓여 있던 접사다리에 상반신을
기대고 안도는 류지의 얼굴을 주시했다. 조용히 감긴 두 눈과 속눈썹
이 지금이라도 바로 열릴 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물 흐르는 소리가 요란했다. 해부실에 있는 다른 사랑들은 각자의
일에 바빠서 농밀하게 솟아오르고 있는 미묘한 분위기를 깨닫지 못
하는 것 같았다 그걸 느끼고 있는 건 유일하게 안도뿐이었다. 정말
이 녀석은 죽어 있는 것일까? 너무나도 어리석은 의문· .
장기 대신에 안에 넣어 둔 신문지 다발이 내부에서 움직여 배가 가
볍게 오르내렸다. 조수나 입회한 경찰관이나 어째서 이렇게도 무관
심할 수 있는지 정말로 이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갑자기 오줌이 마려웠다. 뱃속에 신문지를 잔뜩 집어넣고 신문지
스치는 소리를 내며 류지가 걸어가는 모습을 상상하는 순간 안도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배설욕구를 느꼈다.
오전에 해부를 마친 안도는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오즈카 역 쪽으
로 걸어갔다. 안도는 몇 번이고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불안의
출처도,그것이 의미하는 바도 분명치 않았다. 아들 생각을 하고 있
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까지 해부한 사체의 수는 천 명이 넘을 것이
다. 그런데 왜 오늘따라 유난히 까닭 모를 불안감이 몰려오는 것일
까? 안도는 항상 일처리에 있어 서만큼은 완벽하고 꼼꼼했다. 봉합한
피부 틈새로 신문지가 비어져 나오는 일 같은 건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아주 사소한 실수‥‥ 뭔가 자꾸만 마음에 걸리는 건 바로 그
점 때문인가? 아니 , 그렇지는 않았다.
단골 중국집에 들어가 오늘의 정식을 주문했다. 12시에서 5분 정
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도 평소에 비해 손님이 아주 적었다. 안도 외
에는 계산대 옆의 테이블에 앉아 면 종류를 훌쩍거리고 있는 초로의
남자 한 명뿐이었다. 가죽 등산모를 쓴 그 남자는 가끔 안도에게 시
선을 던졌다. 왜 모자를 벗지 않는 건지 , 왜 말똥말똥 이쪽만 쳐다보
는 건지 , 공연히 마음이 쓰였다. 사소한 데서도 의미를 인어 내려 하
는 것은 아마도 신경이 많이 예민해져 있기 때문이리라.
류지의 배에서 튀어나온 신문지 , 그리고 그 귀퉁이에 인쇄된 숫자
열이 인화지처럼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무리 떨쳐 내려 애써도 좀처
럼 잊혀지지 않는 멜로디처럼 여섯 개의 숫자가 눈꺼풀 안쪽에서 명
멸했다.
· .전화번호?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어 등산모를 쓴 남자 뒤에 놓여 있는 분홍색
전화기로 눈길을 돌렸다. 수화기를 들고 이 번호를 돌려 볼까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도쿄에는 여섯 자리 전화번호가 없다. 그러므로 누
구와도 통화가 되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만일 누
군가가 전화를 받는다면‥‥
·.야, 안도. 아까는 상당히 혼이 났는 걸. 고환까지 잡아빼다니 말
야.
류지의 목소리가 그런 식으로 질문해 온다면‥‥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
억양 없는 목소리와 함께 중국식 덮밥과 수프가 테이블 위에 놓였
다 중국식 덮밥에는 삶은 메추리알 두 개가 고명으로 야채 속에 숨
어 있었다. 딱 류지의 고환만한 크기였다.
안도는 침을 꿀꺽 삼귀고 미지근해진 물을 단숨에 마셔 버렸다. 초
자연적인 현상을 모두 부정할 생각은 없었지만 굳이 숫자에 구애받
고 있는 자신이 너무나 어리석게 느껴졌다. 그런데도 마음에 걸리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178, 136. 뭔가 특별한 의미라도 있는 걸까? 암
호광인 류지의 배에서 튀어나온 여섯 개의 숫자
· .암호.
중국식 숟가락으로 수프를 뜨면서 안도는 테이블 위에 냅킨을 펼
치고 가슴에 꽃혀 있던 볼펜을 뽑아 숫자를 적어 보았다.
· 178, 136.
A를 0, B를 1, C를 2, D를 3, E를 4, 『를 5‥‥B를 25로 적용시키면
26개의 알파벳은 0에서 25까지의 숫자로 바꿔 놓을 수 있다. 환자식
(換字式, 어떤 글자를 다른 글자와 1대1로 치환하는 방법 역자 주)
암호의 기초이며 암호로서는 가장 간단한 것이다. 안도는 일단시험
삼아 숫자를 1, 7, 8, 1, 3, 6의 한 자리 숫자 여섯 개로 분해한 다음
각각을 알파벳으로 바꾸어 보았다.
BHI, BDG
연속해서 읽으면 BHIBDG' 사전을 찾아보지 않아도 이런 단어
가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건 분명했다. 그렇다면 다음 방법으로 한 자
리와 두 자리의 숫자로 나누어 보았다. 알파벳을 26진법 숫자로 보는
환자 암호라고 가정한다면 78이나 81처럼 25 이상의 두 자리 숫자는
절대로 있을 수가 없다. 그 경우에 생각할 수 있는 숫자의 구분 방법
과 그에 대응하는 알파벳을 종이 냅킨에 적어 보았다.
178 1 56
RIBDG
1 78136
BHING
17 8 15 6
RING
이 중에서 의미를 가진 단어는 단 하나, RING뿐이다
·.링 .
안도는 그 울림을 확인해 보았다. 영어의 RING에는 '고리' 라는 의
미의 명사 외에 '울리다. 울려 퍼지다, 알리다. 신호하다' 등 동시적
인 의미가 있다.
우연일까? 류지의 뱃속에서 신문지가 튀어나오고, 튀어나온 부분
에 인쇄되어 있던 숫자의 열을 알파벳으로 바꿔 보니 우연히 RING
이라는 글자가 만들어진다 그저 단순히 단어에 지나지 않는 걸까?
어디선가 경보기가 울리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시골에서 보
낸 어린 시절, 딱 한 번 화재를 알리는 사이렌 소리를 들었던 적이 있
다. 부모님 모두 야근 때문에 집에 안 계시고 할머니와 자신밖에 없
었다. 조용한 밤공기를 깨뜨리는 소리에 안도는 귀를 틀어막고 할머
니의 무릎 위에 웅크린 채로 떨었다. 화재가 났다는 걸 알리는 소리
임을 알았던 건 아니었다. 그저 화재 감시 대에서 들리는 시끄러운 울
림에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겁이 났던 것이다. 불행의 예
고가 소리를 통해 전달되고 있었다. 실제로 그 소리를 들은 지 꼭 1년
후에 아버지는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했다.
식욕이 완전히 없어지면서 구역질까지 났다. 안도는 덮밥을 望으
로 치우고는 물을 더 달라고 했다.
‥‥류지 , 너 , 나한테 윌 알려 주고 싶은 거냐?
속이 빈 양철 인형으로 변해 판에 넣어진 류지는 유족들에게 인도
될 때, 아래쪽이 불룩한 횐 뺨을 약간 풀어 웃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남겼다. 그 온화한 표정을 보고 다카노 마이가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정중하게 인사를 한 것이 바로 한 시간쯤 전의 일이다. 오늘밤 유해
를 지키며 밤샘을 하고 내일중으로 화장을 할 것이다. 사체를 나르는
장의차는 지금쯤 사가미오노에 있는 류지의 본가에 어느만큼 다다라
있을까?할 수만 있다면, 류지의 육체가 재가 되는 것을 두 눈으로
화인하고 싶었다. 왠지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듯한 묘한 기분이 들어
견딜 수가 없었다.
약속 장소는 도서관 옆 벤치였다. 대학 본부 캠퍼스에서 열린 법학
부 주최 강연회를 듣고 나서 안도는 시간을 확인한후,약속한 장소
로 향했다.
다카노 마이가 검시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온 것은 바로 어제의 일
이었다. 마침 해부 당직 일이어서 안도가 그 전화를 직접 받았다. 그
는 전화 목소리를 듣자마자 이내 상대방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었다.
해부한 사체의 가까운 친족으로부터 전화를 받는 일은 가끔 있었지
만, 대부분은 사인에 관한 문의였다. 하지만 다카노 마이가 일부러
전화를 해 온 주된 뜻은 따로 있었다 해부가 끝난 날 밤, 빈소가 마
련된 류지의 본가에서 빠져나와 그 아파트에서 미발표된 논문을 정
리하고 있을 때 다소 마음에 걸리는 사건과 마주쳤다는 것이다. 어쩌
면 류지의 사인과 어떤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며 , 마이는 주
저하는 기색을 보였다
귀중한 정보를 얻고 싶기도 했지만, 다시 한번 다카노 마이의 청초
한미모를 보고 싶다는 기분이 더 강하게 들었다. 안도는 내일 오후
대학 본부에서 열리는 강연회에 출석할 예정임을 알리고, 강연회가
끝난 후라면 시간을 낼 수 있을 테니까 자세히 얘기를 들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던 것이다.
강연회가 끝나는 시각을 말해 주자 다카노 마이가 약속 장소를 정
했다.
· ,도서관 앞, 벚나무 아래에 있는 벤치
교양 과정 2년 간을 다녔던 캠퍼스였지 만 안도는 도서관 앞 벤치
에서 친구들과 만나기로 약속해 본 적이 없었다. 문학부 학생이었던
아내와는 문과대 앞 은행나무 아래서 만나곤 했다.
벤치에 앉아 있는 여성은 멀리서 보아도 다카노 마이임을 알 수 있
었다. 원색의 원피스를 입고 있는 탓인지 , 열흘 전 검시 사무실에서
만났을 때보다 훨씬 발랄해 보였다. 안도는 정면으로 다가가 얼굴을
확인하려 했지만 그녀는 문고판 책에 시선을 떨군 채 얼굴을 들려고
하지 않았다.
발소리를 크게 내며 다가가자 그제서야 겨우 마이가 얼굴을 들었
다.
"다카노· 마이‥‥ 씨 ."
안도가 먼저 말을 걸었다.
"지난번에는 감사했습니다. "
말을 하면서 마이는 자리에서 조금 일어나 보였다 애인의 사체를
해부한 의사에게 뭐라고 인사를 하면 좋을지 그 이외에는 적당한 말
이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직업적인 특징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가늘고 길며 상당히 손재주
가 있어 보이는 손으로 안도는 서류 가방을 안고 있었다.
"앉아도 되겠습니까?"
안도는 마이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벤치 옆에 앉아 발을
꼬며 몸을 돌렸다.
"검사 결과. 벌써 나왔나요?"
억양 없는 목소리로 마이가 물었다. 안도는 힐끗 시계를 보았다.
"시간 있으십니까? 괜찮다면 차라도 한잔 마시면서 얘기를 나누고
싶은데요."
마이는 말없이 일어나더니 스커트 자락을 잡아당기며 단정히 정리
한 후 앞장 서서 걸어갔다.
안도는 다카노 마이가 안내하는 찻집으로 들어섰다. 학생들이 모
이는 장소치고는 그다지 시끄럽지 않아서 호텔 라운지 비슷한 분위
기가 감돌고 있었다. 길거리가 내다보이는 창가 자리에 앉자 여종업
원이 물과 물수건을 가져왔다.
"후르츠 파르페 ."
마이는 곧바로 주문했다. 그 재빠름에 놀라, 망설일 틈도 없이 안
도도 급히 '커피' 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여리기만 한 것처럼 보였
던 열흘 전의 인상이 너무나도 빨리 사라져 버렸다
"좋아해요."
여종업원이 가 버리자, 마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안
도는 '좋아해◎라는 문장 앞에 자신을 목적어로 끼워 넣어 보려다
가, 이내 그것이 '후르츠 파르페' 라는 것을 깨닫고는 바보 같은 공상
을 했던 자신을 질책했다. 나잇살이나 먹어서 무슨 잠꼬대를 해 대느
냐고.
빨간 체리와 웨하스가 얹힌 화려한 후르츠 파르페가 날라왔다. 마
이가 이 찻집의 후르츠 파르페를 마음에 들어하는 것은 먹는 모습만
보아도 긍방 알 수 있었다. 예전에 아들이 그랬던 것과 똑같이 좋아
하는 것을 먹을 때의 진지함이 견딜 수 없을 만큼 귀엾게 보였다. 찻
숟가락을 놀리는 모습이 너무나 진지해 안도는 커피엔 입도 대지 않
은 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아내는 이런 데 와서 후르츠 파르페 같은 종류는 절대로 주문하지
않았다. 설탕을 뺀 레몬티‥‥ 다이어트에 열심인 나머지 단것은 전혀
입에 대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겉 모습만으로 보건대, 마이 쪽이
건강할 때의 아내보다 더 말라 있었다. 별거할 무렵의 아내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말랐었다. 그렇지만 지금 떠올린 아내의
얼굴은 아직 결혼할 당시의 포동포동함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이는 체리를 입에 물고 타원형 유리 그릇에 씨를 뱉어 랜 다음
냅킨으로 입술을 닦았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즐거워
지는 여성은 정말이지 난생 처음이었다. 부슬부슬 부스러기를 테이
블에 흘리며 웨하스를 먹고 난 마이는 그릇 바닥에 붙어 있는 생크림
이 아쉬운 듯 器어지게 응시를 했다 항아 버릴까 말까 망설이고 있
음이 틀림없었다
그런 식으로 맛있게 후르츠 파르페를 다 먹은 마이는 해부 후에 다
쾨야마 류지의 장기들이 어떤 검사를 받게 되는지 안도에게 질문했
다. 막후르츠 파르페를 먹은 젊은 여성에게 잘게 자른 장기의 행방
을 말한다는 것이 정말이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어쨌든 안도는 어디에서부터 얘기를 해야 할까 궁리를 했다.
지난번 해부한 유족에게 해부 후의 검사에 대해 설명을 하다가 얘
기가서로 맞지 않아 애를 먹은 적이 있었다. 상대방이 조직 표본이
라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표본이라는 말
만 듣고는 포르말린에 담긴 장기를 상상했던 모양이다. 결국 그렇게
서로 엇갈리는 문답에 쓸데없는 시간을 허비해야만 했다 안도에게
있어 조직 표본은 사무원이 쓰는 필기도구만큼이나 익숙한 것이었
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형태, 크기 , 작성 방법 등 설명을 듣지
않는 한 자세히 알 도리가 없었다. 안도는 조직 표본을 만드는 방법
부터 설명하기로 했다.
"·.치,작업의 대부분은 연구실에서 행해지는 셈입니다만,간단히
설명하면 이런 순서가 됩니다. 심근경색을 일으킨 부분을 작은 조각
으로 잘라 낸 다음 우선 포르말린으로 고정합니다. 이어 생선회 모양
으로 잘라 내고 다음에는 파라핀으로 고정시킵니다. 파라핀이라는
건 다시 말하자면 양초입니다. 그 다음 슬라이스해서 프레파라트로
만들고 양초 부분을 떼어내 염색하죠. 이로써 조직 표본은 완성되고,
나머지는 기초 교실로 회부해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겁니다. "
"조직을 얇게 썰어서 유리판 사이에 끼운 것을 상상하면 될까요?"
"뭐 , 그런 정돕니다 "
"그렇게 하면 검사하기가 쉬워지나요?"
"물론입니다. 염색도 했으니까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세포의 구
조도 훨씬 더 자세하게 관찰할 수 있죠."
"보셨나요?"
보셨나요·, 뭘?물론 다카야마 류지의 세포일 것이다. 그런데 왠
지 안도는 그 말에서 이상한 뉘앙스가 느껴졌다.
"기초 교실로 회부하기 전에 좀 들여다봤습니다. "
"어땠나요?"
마이는 몸을 약간 앞으로 내밀었다.
"왼쪽관동맥 회선지 앞쪽이 폐색을 일으켜서 혈액이 앞으로흐르
지 못하게 되어 류지의 심장이 정지한 거죠. 전번에 그렇게 설명한
것 같습니다만, 실제로 단계적으로 잘라 낸 문제 부위를 현미경으로
보고선· . 저도 놀랐습니다. 아시겠습니까? 보통은, 심근경색이란 동
맥이 굳어져 내막에 콜레스테를 등의 지방이 쌓이면서 혈관이 좁아
진 상태에서 아테롬(atheroma, 종기 등을 이르는 의학 용어 :역자
주)이 파괴되며 생기는 핏덩어리로 막혀 버리는 증상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류지의 경우 분명히 혈관은 폐색되어 있었지만 그것은 동맥
경화에 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확실히 다른 것입니다. "
'刻죠?"
마이는 아주 짧은 말로 그 정체를 물었다.
"육종(肉經)입니다. "
안도의 대답은 극히 간결했다
"육종?"
"그래요. 아직은 그것이 특정 조직의 세포인지. 아니면 미분화된
종양인지 딱히 꼬집어 말할수는 없습니다. 하지만관동맥의 내막과
중막 부분에 여지껏 본 적이 없는 세포의 종류(經痛, 부스럼 · 종기 ·
혹 등을 통틀어 이르는 말:역자주)‥‥요컨대 혹이 생겨 그 결과로
혈관이 막혀 버린 겁니다. "
"암세포 같은 건가요?"
"뭐,그렇게 생각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혈관 내부에 육종이 생
기는 일은 보통 있을 수가 없어요."
"검사 결과가 나오면 어떤 원인으로 육종이 생긴 건지 알겠네요?"
안도는 웃으면서 고개를 옆으로 젓는다.
"증후군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아마 원인은 알 수 없을 겁니다
에이즈를 예로 들 것도 없이· ."
과학 만능인 현대 사회에서도 원인 불명의 질병들이 많이 있다. 이
증상이 증후군으로 나타날 괴병인지 아닌지는 현단계로선 판단할 수
없는 것이다.
안도는 계속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가능성‥‥류지는 선천적으로 관동맥에 결함을
지니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
의학 지식이 부족한 사람이라도 어느 정도는 상상할 수 있는 일이
었다. 심장을 둘러싸고 있는 관동맥 일부에 태어날 때부터 혹 같은
것이 있었다면 운동 능력이 현저히 떨어져야 하는 게 아닌가 하고.
"하지 만 다카야마 선생님은· .. "
"맞아요. 고교 시절, 전국 고교 대회에서 상위 입상할 정도의 육상
선수였습니다. 그의 종목은 분명 투포환 던지기였죠?"
"그래요."
"태어날 때부터 장애를 갖고 있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겠군요 그
래서 묻고 싶은 겁니다. 류지가 평소에 가슴의 통증 같은 걸 호소한
적이 있었나요."
안도와 류지의 교제는 학부 졸업과 동시에 거의 끝나 있었다. 대학
구내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나 '어이' 하고서로불러 볼 정도였으
니 신체의 변화 같은 건 알 수 없었다
"선생님과의 교제는 2년도 채 되지 않아서요."
"그 정도로도 괜찮습니다. "
"보통 사람보다 튼튼했어요. 제가 기억하는 한, 감기에 걸린 적도
없었고· 참을성이 많은 성격이었으니까 입 밖에 내지 않았을 뿐인
지 모르지 만요. 특별히 눈치챌 만한 일은 아무 것도‥‥‥
"뭐든 좋습니다, 뭔가 걸리는 게 있다면‥‥‥
"실은 그 일 말인데요."
안도는 그제야 문득 생각이 났다 해부 결과를 말해 주기 위해서
마이를 부른 것이 아니었다. 빈소를 지키다 말고 류지의 아파트에서
논문 정리를 하고 있었을 때의 사건을 들려 주고 싶다고 해서 지금
이렇게 나와 있는 것이다.
"그렇군요‥‥ 그럼 한번 들어 볼까요?"
"그치만 다카야마 선생님의 사인과 관련이 있을지 어떨지는‥‥‥
부끄러운 듯 머뭇거리는 마이가 안타깜고 사랑스러워졌다. 안도는
눈에 힘을 넣으며 재촉했다.
"얼른 들려 주십시오."
"그날 밤에 빈소를 빠져나와 선생님 아파트에서 미발표 논문들을
정리하고 있을 때 전화가 울렸어요. 망설였지만 전 수화기를 들었죠.
상대는 아사카와 씨라는 선생님의 고등학교 친구였어요."
"아시는 분입니까?"
"예. 딱 한 번 만난 적이 있어요. 돌아가시기 4∼1일 전, 선생님의
아파트에서 우연히 마주쳤었죠 "
"남자?"
"네 ."
"그래요? 그래서?"
"선생님이 돌아가신 걸 모르는 것 같아 알려 줬죠. 간밤의 일을 간
단하게 . 그랬더니 몹시 놀란 목소리로 지금 곧 그리로 가겠다고 말했
어 요."
"그리로, 라는 건?"
"다카야마 선생님의 아파트요."
"그래 , 나타났나요?"
"예, 생각보다 훨씬 빨리요. 들어오자마자 눈을 번뜩이며 온 방 안
을 돌아다니며 원가를 찾는 기색이었어요. 그리고 자』만 저를 향해
뭔가 특별한 게 없었느냐고 물어왔어요. 아주 다급한 모습으로 선생
님이 돌아가신 직후, 방 안에서 뭔가 이상한 걸 발견하지 않았느냐
고 몇 번이나 묻는 거였어요 한데, 이상하다고 느낀 건 그 다음 말
이었죠."
마이는 거기서 말을 멈추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뭐 라고 그랬나요? 그 사람이 ,"
"한 마디 한 마디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요.그사람은 이렇게 말했
어요. '정말 류지는 당신에게 아무 말도 남기지 않은 거죠?예를 들
면, 비디오테이프에 대해서 라든지' 하는 거예요,"
"비디오테이프?"
안도는 되물었다.
"그래요. 정말 이상하죠?"
간밤에 돌연사를 한 친구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맥락에서 보면 너
무나도 뜻밖이고 엉뚱한 반응이었다. 어째서 비디오테이프라고 하는
무기물이 화제에 오른 것일까?
"그런데 당신은 류지한테 비디오테이프에 관해 뭔가 들은 게 있습
니까?"
"아뇨, 아무 것도."
"비디오테이프라 ·.."
안도는 똑같은 말을 되뇌이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열흘
전, 사체를 해부했던 토요일 밤에 류지의 방을 찾아온 아사카와라는
남자의 존재에서 어딘지 모르게 불길한 그림자가 엿보였다.
"그러니까 이건 제 생각인데요, 만일 비디오테이프에 녹화된 내용
이 충격적이라면 심장에 쇼크를 주는 일도 있지 않을까 해서.전 그
런 식으로‥‥‥
"그렇군요."
안도는 마이의 뇌리에 맴돌고 있는 의문을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류지의 사인을 확인한 다음이 아니었다면 차마 부끄러워서 말도 꺼
내지 못했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2∼3일 전 TV에서 방영되었던 서스펜스 드라마에도 비슷한 장면이
있었다. 남편의 부하와 정사를 거듭하던 부인이 어느 날 비디오테이
프 하나를 우편으로 받는다 부인 자신은 깨닫지 못했지만 그녀는 이
미 함정에 빠져 버린 것이다. 러브 호텔에서 남편의 부하와 가졌던
정사 장면이 고스란히 비디오테이프에 담겨 있었고, 협박장도 함에
날아왔다. 부인은 집 안에 혼자 앉아 비디오테이프를 넣고 화면을 본
다. 지∼ 하고 흔들리던 화면이 도중에 끊기고 느닷없이 끼여드는 영
상. 젊은 사내와 겹쳐진 나체, 헐떡이는 소리 . 그 피사체가 자신임을
확인하는 순간 부인은 그만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린다 보고 있는
것이 바보스러울 만큼 통속적인 내용이었다.
분명 비디오테이프 같은 것을 이용해서 시각과 청각, 양쪽을 동시
에 자극하면 상당한 쇼크를 줄 수 있다. 나쁜 조건이 겹쳐질 경우 죽
음에 이르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안도는 류지
의 몸을 자세히 보았고 등글게 썬 관동맥 조직 표본까지 만들었다.
"아니,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류지는 분명 왼쪽 관동맥에 폐색을
일으켰습니다. 특히나 그 대단한 다카야마 류지가 비디오를 보고 쇼
3사를 일으키다니 그런 일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마지막 부분은 거의 웃음소리가 되어 있었다.
"그건 물론‥‥‥
마이도 그 의견에 동감인 듯 희미하게 웃음을 홀렸다. 둘 다 류지
에 대한 인식은 일치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기가 질릴 정도로 호방하
고 담력이 있는 사내였다. 어지간한 일로는 그의 정신과 육체를 쉽게
상처내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그 아사카와라는 사람의 연락처 말인데요, 혹시 알고 계십
니까?"
"아뇨, 거기까지는· . . "
그렇게 말하다가 말고 마이는 입에 손을 댔다.
"그래요, M신문사의 아사카와 가즈유키‥‥ 분명히 선생님한테 그
렇게 소개받았어요."
'狀신문사의 아사카와 가즈유키 ."
안도는 그 이름을 수첩에 메모해 두었다. M신문사에 문의하면 아
사카와라고 하는 사람의 연락처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인물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 볼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수첩에 적은 글자가 눈에 띄었는지 , 마이는 턱에 손을 대고는 조그
맣게 '어머1'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왜 그러시죠?"
안도가 고개를 들었다.
"가즈유키 라는 그 한자."
마이가 지적하자 안도는 다시 한번 수첩에 눈을 떨구었다
‥‥M신문사, 천천화행(淺川和行).
수첩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잠시 그 글자를 바라보던 안도는
그제야 깨달았다. 어째서 아무 의심도 없이 천천화행(淺川和行)이
라는 한자를 써 버린 것일까? 아사괴와에는 천천(淺川), 조천(朝
川) 마천(諦川)‥‥ 이름인 가즈유키에도 일행(一幸), 화행諦H幸).
화지祥H之)· 등그에 해당하는 한자가 많이 있었다. 그런데도 처음
부터 알고 있는 사람의 이름인 것처럼 자신 있게 한자로 이름을 쓴
것이었다.
"어떻게 한자를 아시는 거죠?"
마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왔지만, 안도는 뭐라고 대답할 수
가 없었다. 어떤 예지 능력이 작용한 걸까? 가까운 장래에 이 사람과
깊은 연관이 생길 것 같은 느낌‥‥안도의 가슴속에 어떤 예감이 점
점 더 팽창되어 갔다.
거의 1년 반 만에 안도는 식사를 하면서 반주로 청주를 마셨다 아
들이 죽은 이후,술을 마시고 싶은 기분이 든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
다. 아들을 잃은 죄책감 때문에 좋아하던 술을 끊었던 건 아니다. 알
코올의 취기에는 그때의 기분을 증폭시키는 작용이 있다. 기쁠 때 마
시면 그 기쁨이 두 배가 되어 더욱 즐거워지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슬플 때 마시면 슬픔도 보통 때보다 더 크게 부풀어오른다
지난 1년 반 동안은 슬픔의 감정이 늘 따라다녔으므로 필연적으로
알코올을 입에 댈 수가 없었다. 일단 입에 대면 만취할 때까지 가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죽음의 충동을 억제할 수 없게 될 것 같아 술
을 마실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10월 말에 내리는 비치고는 드물게 안개처럼 뿌옇게 흩날리며 빗
줄기가 우산 바로 아래 목덜미까지 감돌고 있었다. 하지만 별로 춥지
는 않았다. 술기운이 온몸을 따뜻하게 감싸주었기 때문이다. 아파트
로 돌아가는 도중에 안도는 몇 번이고 우산 밖으로 손을 내밀어 빗방
울을 받아 보려 했다. 그러나 손바닥에 잡히는 것은 빗방울이 아니라
안개 같은 한기뿐이었다
안도는 역에서 내려 돌아가는 길에 위스키 한 병을 사려고 편의점
앞에 멈춰 섰다 가까운 곳에 초고층 빌딩가의 야경이 다가서 있었
다. 가끔 도회지의 야경은 자연의 풍경 이상으로 아름답다. 야간 조
명을 받고 있는 도쿄 도청이 비에 젖어 요염하게 빛나고 있었다 빌
딩 꼭대기에서 깜빡이는 빨간 빛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모르스
부호의 메시지로 보였다. 느린 속도로 깜빡이는 빛의 리듬이 우물우
물거리며 말하는 우둔한 괴물을 연상시켰다.
요요기 공원 근처에 있는 4층짜리 낡은 아파트가 아내와 별거한
이후 안도가 살고 있는 곳이다. 전에 살았던 미나미아오야마(도쿄의
고급 주택가 : 역자 주)의 아파트에 비하면 형편없는 곳이라 할 만했
다. 주차장도 없어서 구입한 지 얼마 안 되는 BMW를 거리에 세워놓
지 않을 수 없었다. 학창 시절로 다시 돌아가 버린 듯한 초라한 원룸.
생활에 대한 집착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방에 있는 가구라고 해
봐야 책장과 간이 침대 정도였다.
방에 들어가 창문을 열고 있는 참에 전화벨이 울렸다.
"예 , 여보세요."
수화기를 들었다.
"나야."
상대방이 누군지 이내 알 수 있었다. 이름을 대는 일도 없이 느닷
없이 말을 시작하는 것은 학부 시절의 동창, 미야시타뿐이었다.
"후나코시 송별회 초대장은 받았니?"
"송별회가 언제지?"
안도는 수화기를 귀에 댄 채 어깨로 받치고는 수첩을 넘기면서 물
었다.
"다음주 금요일이 야."
"금요일이라· ."
스케줄을 확인할 것도 없었다. 불과 세 시간 전, 마이와 헤어질 때
이미 식사 약속을 해 놓았다. 다음주 금요일 오후 6시 . 어느 쪽을 우
선해야 하는가는 명확했다. 10년 만에 젊은 여성에게 식사 초대를
해, 겨우겨우 오케이 대답을 얻었는데 백지로 돌릴 수는 없었다.
"어때?"
미야시타는 재촉했다.
"미안한데,안돼 선약이 있어서."
"술을 마시기 싫으면 안 마셔도 돼."
"그런 게 아냐."
"그런 게 아니라면 좋아하는 여자라도 생긴 거냐?"
"후나코시의 송별회를 잊어버리게 할 정도의 여자란 말야."
"축하할 일이야. 그치만 상관없어 . 데리고 오면 돼, 그녀도 같이.
환영할게."
"아직 그런 사이가 아니야."
"뭐 , 무리하라고는 말하지 않겠지만‥‥‥
"미안하다. "
"그런데· .."
안도는 화제를 바꾸었다.
"류지의 조직 표본, 뭔가 알아 냈냐?"
사체의 질환 부분 검사는 주로 미야시타가 있는 병리학 연구실이
담당하고 있었다.
"아, 그거."
미야시타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래?"
"왜 그래?"
"그게 말이야, 뭐라고 하면 좋을지 나로선 확실히 알 수가 없게 돼
버렸어. 너, 세키 교수를 어떻게 생각하냐?"
세키는 병리학 담당 교수로 암세포 발생 형식에 대한 연구로 유명
했다.
"어떻게 생각하냐니, 새삼스럽게· ."
"그 할아범, 가끔 묘한 말을 꺼내잖냐."
"뭐라고 했는데?"
"세키 할아범이 일단 문제시하고 있는 건 관동맥 폐색 부분 쪽이
아냐. 류지의 인두부에 궤양이 생긴 거, 너 기억하고 있냐?"
"물론,"
그리 큰 것은 아니었지만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해부중에 깜빡
못 보고 지나칠 뻔했지만 桑수가 지적하는 바람에 알아차리고는 해
부 후에 비교적 큰 덩어리로 잘라 냈던 것이다.
"세키 할아범, 그 궤양 덩어리를 육안으로 힐끔 보기만 하고는 이
렇게 말하는 거야. 근데 너, 그 할아범이 궤양 부분을 보고 뭐랑 비슷
하다고 말했을 것 같냐?"
"그런 말투 좀 그만둬라."
"알았어, 알았어. 그럼 말하지 . 천연두 환자의 궤양과 비슷하다. 그
러더라구."
"천연두?"
안도는 자신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를 내고 말았다.
천연두는 백신에 의한 박멸 계획에 따라 이 지구상에서 근절되었
다. 1977년. 소말리아에서 나타난 환자 이후로 세계 어느 곳에서도
천연두 발병이 보고되지 않아 1979년에는WHO에 의해 전세계 근
절 선언이 나왔다. 천연두는 사람에게만 감엄된다. 따라서 환자의 발
생이 없다고 하는 것은 천연두 바이러스가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한
다. 현존하는 최후의 천연두 바이러스는 액체 질소 속에 냉동 보관되
어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와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연구시설
에서 잠자고 있다 따라서 만일 현재 세계 어딘가에서 천연두가 발생
했다고 한다면 이 중 어느 연구 시설에서 흘러나왔다고 생각할 수밖
에 없었다. 그러나 엄중한 경비하에 있었으므로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놀랬냐?"
"뭔가 착각이 겠지 ."
"아마 그렇겠지 . 하지만 그 세키 할아범이 그렇게 말했단 말야. 흘
려 버릴 수는 없어 ."
"결과는 언제 알 수 있지?"
"일주일만 지나면‥‥ 가령 병소부(병원균이 모여 조직이 허물어진
부분 : 역자 주)에서 진성 천연두 바이러스가 발견되거나 한다면, 일
대 사건이다 "
미야시타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어 댔다 믿지 않는 것이다. 그
역시 뭔가 착각한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실감이 나지 않는 것
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들 나이에서는 실제로 천연두 환자를 진찰해
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바이러스 관계 전문 서적에서 지식을 끌어
내는 것이 질병을 파악할수 있는 유일한 실마리였다. 책 속에서 안
도는 온몸이 천연두 발진으로 뒤덮인 유아의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
콩알만한 크기의 발진에 무참히 오염된 채로 멍한 눈을 카메라로 돌
리고 있던 귀여운 젖먹이 . 천연두의 표면적인 특색은 바로 전신을 뒤
덮는 발진이었다. 발진은 감염 후 7일 정도면 최대로 퍼져 나간다‥‥
안도는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류지의 피부엔 발진이 없었어."
그건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분명한 사실이었다. 류지의 피부는 무
영등 아래에서 반들반들 빛나고 있었다.
"야. 란 이런 바보 같은 말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어쨌든 간에 천
연두 바이러스 중에는 강한 혈관장애를 일으켜 사망률이 백 퍼센트
가까운 게 있다는 거 알고 있냐?"
안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
"있다구, 그런 게."
"설마.류지의 관동맥 폐색이 그 때문에 일어났다는 말을 하는 건
아니지?'
"그런 뜻은 아니지만. 관동맥 내부에 있던 그 육종, 그건 대체 뭐
지? 榮지, 너도? 현미경으로."
"왜 그런 게 생겼을까?"
"너 , 우두는 제대로 맞았냐?"
미야시타는 자못 우습다는 듯이 말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웃어 버릴 일은 아니겠지,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농담은 이쯤 하고, 지금 언뜻 생각난 건데· .. "
"뭔데?"
"천연두 건은 그렇다 치고, 만일 혈관 내부에 생긴 육종이 무슨 바
이러스에 의해 생겼다고 하면 당연히 같은 증상으로 죽은 사람이 그
외에도 있을 거야."
미야시타가 수화기 저편에서 신음했다. 가능성을 음미하고 있는
것이다.
"그야 있을 수 있겠지 ."
"시간 있으면 다른 대학에 알아봐 주지 않겠니? 네 인맥을 쓰면 쉬
울 거야."
"알았어 . 같은 증상으로 죽은 사람이 그 외에도 또 있는지를 찾아
보면 되겠지 . 그런데 만약 이게 증후군이 되어 나타나기라도 한다면,
정말이지 대단해지겠는 걸."
"아냐, 기우로 끝날 거야."
그런 다음, 가볍게 인사를 나눈 두 사람은 동시에 수화기를 놓았
다.
열어 놓은 창문으로 축축한 밤공기가 스며들고 있었다 창문을 닫
으려던 안도는 발코니에 얼굴을 내밀어 보았다. 비는 이미 그친 모양
이었다.
만일 류지의 몸에서 바이러스가 발견되었을 경우, 다카노 마이도
이미 감염되었을 것이다. 생전에 두 사람은 친밀한 관계를 맺어 왔
다. 예컨대 천연두 바이러스의 경우, 구강 내 점막에서 병소는 궤양
화되고 바이러스를 방출한다. 따라서 타액은 강한 감염력을 지니게
된다. 안도는 마이와 류지가 입맞추는 장면을 연상하다가 머리를 흔
들며 황급히 뿌리쳤다.
위스키를 잔에 따라 스트레이트로 마셔 버렸다. 거의 1년 반 만에
알코올이 몸에 들어가자마자 강력하게 작용하기 시작했다. 목을 태
우고 위에 스며듦과 동시에 허탈감에 사로잡히게 했다. 뇌의 일부만
을 남겨 놓은 채 온몸을 어이없이 늘어지게 만들어 버렸다. 간이 침
대에 등을 기댄 안도는 얼룩져 부풀어오른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아들이 익사하기 전날에 꾸었던 바다의 꿈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그런 확신이 더욱더 짙어졌다. 그러나 내일
닥칠 운명을 미리 알고 있었음에도 안도는 그걸 막아 낼 수 없었다.
그같은 회한이 안도를 다소 신중하게 만들었다
지금 이 순간 그에겐 확실한 예감이 들었다 해부 후, 류지의 배에
서 튀어나왔던 신문지 조각. 거기에 나열된 수열을RING이라고 하
는 단어로 치환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한 우연일까? 안도로선 도저
히 우연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류지는 무언가 알리려고 하는 것이
다. 그의 언어, 그만이 조종할 수 있는 매체를 이용해서‥‥ 류지의 육
체는 거의 전부 재가 되었지만 일부는 조직 표본이 되어 보존되어 있
다. 흩어진 부품이 되어서도 아직 말을 걸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
다 그가 살아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바로 그 탓이었다. 육체
는 재가 되었지만, 류지는 말파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잃지 않고 있는
것이다.
만취에 이르기 일보 직전의 단계에서 안도는 그런 황당무계한 공
상을 즐기고 있었다. 진심인지 장난인지 가릴 새도 없이 하나의 망상
은 차례로 새로운 스토리를 짜 나갔다.
꺼리석다
객관적인 이성이 갑자기 고개를 쳐들자, 안도는 큰 대(大)자로 침
대에 기대어 퍼져 있는 자신의 몸을 육체에서 이탈한 영혼의 시선으
로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언젠가 한번 보았던 기억이 있는
모습이다. 바로 최근에, 어딘가에서 보았던 것이다. 강렬한 졸음에
쉽싸여 가는 가운데 그는 떠올렸다. 폴라로이드 사진에 찍혀 있던 류
지가절명했을때의 모습 그것과똑같은모습이었다 침대에 머리를
얹고 대자로 손발을 한껏 뻗고 있었다 졸음에 저항하며 가까스로 일
어난 안도는 침대로 기어들어가 이불을 덮었다. 본격적인 잠에 빠지
기 전까지 그는 몸을 계속해서 떨고 있었다.
검시원에서 두 구의 사체를 해부하고 난 안도는 나머지 일을 동
료에게 맡기고 대학으로 되돌아갔다. 미야시타에게 연락을 받은 그
는 류지의 사인에 대해 뭔가 진전이 있음을 감지하고는 안절부절못
하게 된 것이다 더 이상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안
도는 계단을 달려 올라가 지하철역에서 지상으로 빠져나왔다
부속 병원의 현관으로 들어가 두 건물을 잇는 복도를 통해 구 병동
쪽으로걸어갔다. 현관이 있는 신관은 지은지 2년밖에 되지 않았다.
모든 것이 현대화된 17층짜리 고층 빌딩은 단지처럼 밀집되어 세워
진 구식 건물군과는복도와계단으로연결되어 있었다 마치 미로 같
았다. 처음 방문한 사람들은 길을 잃고 미아가 되지 않은 사람이 없
을 정도였다. 신구가 뒤얽혀 있어 앞으로 나아감에 따라 복도의 색,
폭, 삐걱이는 정도, 냄새까지 모두 변해 갔다 경계선이 되는 철제 문
을 통해 신관의 넓은 복도를 되돌아보면 원근감이 어긋나서 미래를
바라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고 말았다.
병리학 연구실의 문 틈새로 등받이 없는 동그란 의자에 앉아 있는
미야시타의 등이 보였다. 실험 기구를 마주 대하고 있는 것이 아니
라, 중앙에 놓인 책상에서 문헌이라도 조사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펼
쳐 놓은 책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열심히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안
도는 등뒤로 다가가 군살이 붙은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미야시타는 뒤돌아보더니 안경을 벗고 읽다 만 책을 뒤집어 책상
위에 놓았다.
"이봐, 무슨 바이러스라도 발견한 거야?"
안도가 재촉하자 미야시타는 고개를 가로저 었다.
"류지하고 같은 증상으로 죽은 사체를 해부해 보았는지에 대해 다
른 학교의 법의학 교실에 문의했는데, 그 결과가 나왔어 "
"그래, 있었던 거야? 같은 사인으로 죽은 사체가."
"있었어. 내가 확인한 것만 해도 모두 여섯 구."
'며섯 구‥‥‥
6이라는 숫자가 많은지 적은지는 아직 뭐라 판단할 수 없었다.
"그쪽도 놀라고 있었어 . 이런 기묘한 사체를 해부한 건 자기네뿐이
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야."
"어느 학교야? 해부한 건."
미야시타는 책상에 배를 눌러 붙이고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파일
쪽으로 손을 뻗었다
"5대학에서 두 구, T대학에서 한 구, 요코하마의 Y대학에서 세 구
총 여섯 구야. 더 나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어 "
"좀 보여 줘 "
안도는 미 야시타의 손에서 파일을 받아 들었다
오늘 오전중에 필요한 자료를 팩스로 주고받았다 사체 검안 조서
나 해부 보고서 등의 서류는 일단 복사한 다음에 팩스로 보냈기 때문
에 어느 것이나 인쇄가 선명치 않았다. 안도는 파일에서 복사본을 뽑
아 내서 필요한 사항만을 골라 읽어 나갔다.
우선 T대학에서 해부한 사체. 이름은 이와다 슈이치 , 만 19세. 을
해 9월 5일, 오후 11시 전후. 50cc짜리 오토바이 운전중, 시나가와
역 앞의 네거리에서 사망.해부 결과,심장을 둘러싼 관동맥이 원인
불명의 종류(緩癩)에 의해 폐색 , 심근경색을 일으킨 것으로 판명 .
Y대학에서 해부한 세 구 중에서 두 구는 젊은 커플이었다. 특히 눈
에 띄는 점은 이들 두 사람이 동시에 사망했다는 것이다 노미 다케
히코는 만 19세.쓰지 요코는 만 17세.마찬가지로9월 6일 사망 가
나가와 현의 요코스카 시 오쿠스야마라는 산기슭에 주차된 렌터카
안에서 사체로 발견됨. 발견 당시,쓰지 요코의 팬티는 발목에 걸려
있었고,노미 다케히코의 청바지와 팬티는 무릎까지 내려져 있었다.
심야에 차를 숲 속에 세우고 카 섹스를 벌이려던 찰나, 두 사람의 심
장이 동시에 멎은 셈이다. 해부 결과 역시, 혈관 내에 생긴 종류(雇
癩)에 의한 관동맥 폐색임이 밝혀졌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안도는 중얼거리고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차 안의 젊은 커플 말이냐?"
미야시타가 물었다.
"그래. 두 사람은 같은 장소에서 동시에 심근경색을 일으킨 셈이
되잖아 게다가T대학에서 해부한 이와다 슈이치를 포함하면 네 사
람이 거의 같은 시각에 관동맥 폐색을 일으키고 있어. 대체 어떻게
된 거지?"
"게다가 같은 증상이야. 다음 장에 있는 모녀 건은 대충 읽었냐?"
안도는 천장을 향하고 있던 얼굴을 되돌렸다.
"아니 , 아직 ."
"그걸 좀 봐. 류지와 마찬가지로 인두부에 궤양이 있었어 "
서둘러 다음 파일을 넘겼다. 5대학에서 해부한 모녀의 사체. 어머
니는 아사카와 시즈카,30세. 딸은 하루코, 1년 6개월.
안도는 그 이름을 보자 묘하게 걸려오는 것이 있음을 느꼈다. 손길
을 멈추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뭐지? 뭔가 석연치 않다.
"왜 그래?"
미야시타가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아니 , 아무 것도 아냐."
그리고는 파일을 계속 읽어 갔다.
‥‥올해 10월 21일 정오경 수도고속도로의 포이 인터체인지 출구
부근에서 아사카와 시즈카와 하루코 모녀는 남편이 운전하는 승용차
에 타고 있다가 사고를 당했다. 우라야스 방면에서 오이 방면으로 향
했을 때 도쿄항 터널 입구 부근에서 정 체중이었는데, 모녀가 탄 승용
차는 인터체인지 출구에서 나오기 위해 늘어선 줄의 맨 뒤에 서 있던
경트럭과 추돌한 것이다. 차는 보닛이 크게 부서져 됫좌석에 앉아 있
던 아내와 딸이 목숨을 잃고, 운전하고 있던 남편은 중상을 입었다.
"왜 이게 사법 해부로 회부된 거지?"
초조해진 듯 안도가 물었다 교통사고로 사망한 사람을 사법 해부
에 회부하는 예는 별로 없다. 검사의 입회하에 사법 해부를 하는 것
은 범죄와 관계 있다고 보는 경우뿐이다.
"뭐 , 그렇게 안달하지 말고 계속 읽어 봐."
"웬만하면 새 팩스로 바꾸는 게 어때?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도 유
분수지 . 읽기 힘들어서 머리가 아플 지경이다. "
안도는 곧바로 등글게 말려 버리는 팩스를 미 야시타의 눈앞에 대
고 흔들어 보였다. 인쇄가 선명치 않은 파일을 읽는 것은 여간 성가
신 일이 아니다. 내용을 빨리 알고 싶어 좀이 쑤시는데 사건의 개요
가 금방금방 머릿속으로 들어오지 않으니 초조해지 기까지 했다
"참을성 없는 녀석이군."
서론을 말한 다음 미야시타가 설명하기 시작했다.
"당초 추돌 사고에 의한 사망이라고 본 것은 확실해. 한데 조사해
보니까 치명상 같은 상처가 없었어. 차가 크게 부서졌다고 해도 아내
와 딸은 됫좌석에 있었거든.그러니까 의심을 갖게 된 거지.아내와
딸의 사체는 면밀한 검시를 받았다. 그러자 분명히 사고에 의해 생긴
타박상이나 열상은 모녀의 이마와 얼굴, 발 등에서 발견되었지만 상
처에는 생확 반응(외상이 생긴 자리에서 살아 있을 때만 나타나는 여
러 가지 반응 :역자 주)이 없었다‥‥그런 얘기야. 여 기서부터는 네
영역 아니냐?"
사체의 상처를 보고 그것이 생전에 입은 상처인지 , 사후에 입은 장
처인지 하는 것은 생활 반응의 유무로 금방 알아 낼 수 있다. 그런데
모녀의 상처에서는 생환 반응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밖에 없었다. 사고가 일어났을 때, 모녀는 이미 사망해 있었던
것이다.
"운전하고 있던 남편이 차로 아내와 딸의 사체를 나르고 있었다,
그런 말인가?"
미 야시타는 잠자코 두 손을 펼쳤다.
"· . ·그런 얘기지 ."
그렇게 되면 당연히 사법 해부 수속이 취해진다. 아마도 제일 먼저
생각할 수 있는 케이스는 이런 것이리라, 무리한 동반 자살을 꾀한
남편이 아내와 딸을 목 졸라 살해하고 자신이 죽을 장소를 찾아 차로
이동중,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해부 결과. 남편의 혐의는
풀렸다. 어머니와 딸의 관동맥도 다른 예와 마찬가지로 폐색을 일으
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타살일 리 없는 것이다. 차로 고속도로를 한
창 달리고 있을 때 아내와 딸이 심근경색으로 사망했고, 그 직후에
사고를 당한 게 된다
그런 사실을 근거로 보면 왜 남편이 운전을 잘못했는지 쉽게 상상
이 갔다. 처음에 그는 자신의 아내와 딸이 죽어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일 잠자듯이 아내와 딸이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면 어떨까? 남편은 운전하면서 됫좌석의 아내와 아이가 자고 있
다고만 믿었을 것이다. 아까부터 쭉 엄마는 아이를 앞으로 안고 있는
자세였다. 그만 일어나라고 핸들을 쥔 채 앞좌석 틈새로 손을 뻗어
아내의 몸을 흔든다. 하지만 일어나지 않는다. 다시 한번 전방을 확
인하면서 아내의 무릎 근처에 손을 뻗는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아내
의 몸에 닥친 이변을 눈치챘을 것이다. 너무나 당황한 그는 정체된
차량들의 끝부분이 다가오고 있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앞을 보고
있어야 할 시선을 아내와 아이 쪽으로만 쏟는다.
대략 그랬을 것이다. 아들을 잃은 경험이 있는 안도는 운전중인 남
편을 덮친 그 당황의 정도를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도 그랬었던
것이다. 갑작스런 당황만 극복할 수 있었다면 귀엽고 사랑스런 존재
를 잃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남자의 경우, 당황을 극복해
봤자 상황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으리라. 아내와 아이는 이미 죽어 있
었던 것이다.
"근데 운전하고 있던 남편은 어떻게 됐어?"
안도는 바로 2주일 전에 아내와 아이를 잃은 남자의 장래에 동정
심을 느꼈다.
"물론 입원중이야."
"상처의 정도는?"
"육체 쪽은 그리 대단한 게 없어. 다친 건 정신 쪽인 모양이야 "
"정신이라‥‥‥
"응, 아내와 아이의 사체와 함께 실려온 뒤 혼수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는 거야."
혼수 상태라는 것은 정신 활동이 정지한 채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을 말한다 의식은 있어도 식사와 배뇨마저 제대로 할 수 없는 경우
가 많다.
"안됐군· ."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정신적인 충격이 얼마나 큰지를 충분히 말해
주고 있었다. 한순간에 아내와 아이를 빼앗긴 충격이 뇌에 미친 것이
다. 쇼크의 격심함으로 볼 때 그 남자는 아내와 아이를 깊이 사랑하
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미야시타의 손에서 팩스 종이를 빼앗은 안도는 손가락에 침을 묻
혀 얄팍한 종이를 넘겼다. 남편이 입원중인 병원을 알고 싶었기 때문
이다. 증상이 흥미로웠다. 아는 의사가 있는 병원이라면 사정을 자세
히 들을 수도 있을 것이다.
맨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그의 이름이었다.
‥‥천천화행(淺川和行)
"아니?!"
너무 놀란 나머지 그만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아사카와 가
즈유키 . 이틀 전, 수첩에 적어 두었던 이름이다. 류지가 죽은 다음날
밤. 아파트에 와서 마침 그 자리에 있던 마이에게 비디오테이프에 관
해 뭔가 아는 게 없냐고 아주 엉뚱한 질문을 퍼부었던 사내.
"아는 사람이 야?"
하품을 하면서 미야시타가 물었다
"류지가 알던 사람이야."
"류지가?"
"운전하고 있던 아사카와 가즈유키란 사람이 바로 류지의 고등학
교 동창이야."
"어떻게 알았지?"
안도는 간단히 설명했다. 다카노 마이라고 하는 여성이 류지의 아
파트에서 논문정리를 하고 있는 중에 아사카와 가즈유키라는 사람
이 나타났던 일을
"이거, 뭔가 느낌이 좋지 않은 걸."
안도가 무엇에 대해 '좋지 않다'고 느꼈는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
가 없었다 류지를 포함한 일곱 명의 사람이 같은 증상으로 죽었다. 9
월 5일에 네 명 , 10월 19일에 한 명 , 10월 21일에 두 명 . 오쿠스야마
에서는 두 사람이 동시에, 오이 인터체인지 출구에서 교통사고를 당
한 일가족도 어머니와 딸이 거의 동시에 죽었는데, 그 남편은 바로
류지의 친구이다.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 사람들끼리 육종에 의한 관
동맥 폐색이라는, 이제까지 없었던 증상으로 죽었다. 당연하게 떠을
릴 수 있는 것은 이 새로운 질병이 전염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가능
성이다. 희생자의 범위가 한정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공기 감염이 되
는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에이즈와 마찬가지로 매우 감염되
기 쉽지 않은 천염병' 일 가능성이 높았다.
안도는 다카노 마이를 걱정하고 있었다. 류지와의 육체적 접촉이
있었으리라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녀에게 뭐라고 설명해야 할
까? 그걸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지금은 아직 뭔가 좋지 않은 일
이 다가오고 있다고밖에는 말할 수 없었다. 그런 애매한 표현이 마이
에게 경고가 될 수 있을까?
· .5대학에 가 보자.
손에 든 파일의 내용만으로는 정보량이 부족했다. 아사카와의 아
내와 딸을 해부한 집 도의한테 직접 얘기를 듣는 것이 제일 좋다. 미
야시타에게 양해를 얻은 후 안도는 5대학 방문을 예약하기 위해 수화
기를 들었다.
연휴가 끝난 월요일, 안도는 도쿄 오타 구에 있는 5대학 의학부를
방문했다. 약속한 1시까지 10분 정도 시간이 남아 있었다 법의학 연
구실은 외과나 내과와는 달리 스탭의 수가 매우 적다.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서너 명 정도일 스탭 모두가 나가 버리고 없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할까,하고 그 자리에 서 있던 안도에게 타이밍도 좋게 등
뒤에서 누가 말을 걸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돌아보니,테 없는 안경을쓴작은몸집의 청년이 서 있었다 법의
학 강사치고는 너무 젊어 보이기도 했지만, 약간 고음인 그 목소리를
들어 본 적이 있는 듯했다 안도는 명함을 내밀면서 이름을 대고 방
문 목적을 전했다. 상대방 역시 '처음 뵙겠습니다'라며 명함을 내밀
었다. 기억한 대로 금요일에 전화통화를 한 상대였다 명함에는 5대
학법의학강사라는직함이 쓰여 있었다 이름은구라하시 가즈요시.
현재의 지위로 볼 때, 아마 안도와는 동갑일 테지만 20대 전반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그는 젊어 보였다. 학생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그러는
지 가슴을 펴고 말하는 어투에 침착함과 위엄이 과장되어 있었다
"자, 이쪽으로."
구라하시는 정 중하고 겸손한 태도로 안도를 교실로 맞아들였다
팩스로 교환할 수 있는 정보는 데충 읽어 두었다. 이번 방문 목적
은 그 이외의 것을 관찰해 보거나, 집 도의로부터 직접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다.
안도와 구라하시는 세상 얘기를 주고 받으면서 해부한 사체의 소견
에 대해 이야기했다. 관동맥 내의 육종에 의한 심근경색이라고 하는,
이제까지 없었던 사인에 대해 구라하시 자신도 상당히 놀라고 있었
던 모양이다 이야기가 거기에까지 미치자 냉정한 어조마저 흐트러
졌다.
"한번 보시겠습니까?"
구라하시는 자리에서 일어나 관동맥이 폐색된 부분의 조직 표본을
꺼내왔다 안도는 한참 동안 육안으로 본 뒤 , 현미경으로 세포를 관
찰했다 세포에 다카야마 류지와완전히 똑같은 변화가 생겨 있음을
금방 알 수 있었다. 헤마톡시린 에 오진으로 염색된 세포는 세포질은
빨강, 핵 부분이 파랑으로 분리된다.
정상적인 세포와 비교해 보면 질환부의 세포는 형태가 일그러지고
핵 부분이 커진다 따라서 정상적인 세포가 전체적으로 불그스름하
게 보인다면, 비정상인 세포는 푸르스름하게 보인다 지금 안도의 눈
앞에는 파랑색 위에 아메바 모양으로 붉은 반점이 퍼져 있었다. 이
변화를 만들어 낸 것이 무엇인지,그 원인을 지금부터 찾아내지 않
으면 안 된다. 육체의 손상을 통하여 흥기와 범인을 알아 내는 것 이
상으로 어려운 작업이 될 것임은 분명했다
안도는 현미경에서 눈을 떼고 심호흡을 한 번 했다. 계속 보고 있
자니 왠지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그런데 이건 누구의 세포입니까?"
미야시타가 보여 준 파일에 따르면 이 대학에서 해부한 사체는 아
사카와 가즈유키의 아내와 딸일 것이다.
"부인 쪽입니다. "
벽면에 늘어선 선반 앞에 서서 파일을 뽑아 냈다가 도로 집어넣고
있던 구라하시는 얼굴을 약간 옆으로 돌리고 말했다. 찾고 있는 것이
좀처럼 발견되지 않는 모양으로 구라하시는 거듭 고개를 갸우뚱거리
고 있었다.
안도는 다시 한번 현미경으로 눈을 돌렸다 마이크로의 세계가눈
앞으로 다가온다.
‥‥아사카와 가즈유키의 아내의 세포인가.
세포의 주인을 안 다음 그 개체에 생긴 이변을 될 수 있는 한 구체
적으로 상상해 보려 했다 아사카와 가즈유키가 운전하는 승용차가
오이 인터체인지 출구에서 추돌 사고를 일으킨 것은 지난달 10월 21
일, 일요일 정오 무렵의 일이었다. 해부 결과, 아내와 딸이 사망한 것
은 그보다 한 시간 정도 전이라는 게 확인되었다. 결국 오전 11시에
모녀가 동시에 목숨을 잃은 것이다. 더욱이 완전히 똑같은 증상,그
점이 아무래도 이해되지 않았다.
몸 전체로 볼 때. 관동맥의 일부에 생긴 육종 같은 것은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했다. 그것이 동맥을 막을 정도로 커져서 심장의 작동을
정지시켰다. 두 목숨을 동시에 빼앗은 사실로 보아 그 육종이 서서히
시간을 들여 커졌다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았다. 같은 시기에 어떤
종류의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고 해도 그 증상이란 반드시 잠복기를
거쳐 나타나게 마련이다. 또한 죽음에 이르기까지 몇 개월이 걸린다
고 할 때, 동시에 사망할 리는 없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개인차가 있
다 특히 30년 가까운 나이차의 엄마와 딸이라면 나이에 의한 차이점
이 당연히 나타나야만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연의 일치란 말인
가‥‥ 아니 , 그럴 리가 없다. 안도는 기억하고 있었다. Y대학에서 해
부한 젊은 남녀도 동시에 사망했음이 확인되었던 것이다. 결국 우연
이 아니라고 한다면, 감염되고 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이 극
히 짧았다고 생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바이러스로는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일단
안도는 바이러스 원인설을 부정하고 식중독 같은 것을 상상했다. 식
중독이라면 식사를 같이 한사람이 거의 동시에 같은 증상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한마디로 식중독이라고 해도 자연독, 화학독, 세균성
등으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렇지만 관동맥에 육종을 만드는
독 같은 건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혹, 어느 연구실에서
극비리에 연구되고 있던 세균이 사고로 변이를 일으켜 누출된 것일
까‥‥
안도는 다시 얼굴을 들었다. 어떤 가능성도 공상의 한계를 넘지 못
하고 헛수고로 끝나리라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구라하시는 파일을 손에 들고 안도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다가와
옆에 놓인 의자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속에서 열 몇 장의 사진을 꺼
냈다. 사고 현장을 찍은 것이었다.
"사망 당시의 상황입니다만, 참고가 좀 되실지 ."
사고 당시의 상황을 찍어 놓은 사진을 보았지만 뭔가 실마리를 잡
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문제는 세포 차원에서 일어난 이변이
며 , 운전자의 부주의로 추돌 사고를 일으킨 현장 상황이 해결의 단서
를 제공할 리 없다고 안도는 단정짓고 있었다. 하지만 애써 내민 사
진을 딱 잘라 되돌려 줄 수는 없어서 안도는 형식적으로 한 장 한 장
집어들었다
맨 처음사진에는 크게 부서진 차가찍혀 있었다. 차 앞쪽의 보릿
이 산 모양으로 솟아올라 있었고 범퍼도, 헤드라이트도 심하게 찌부
러져 있었다. 앞유리도 산산조각이 났는데,센터필러(자동차의 앞뒤
문짝 사이에 있는 기등 ' 역자 주)가 찌부러지지 않은 것을 보면 크게
부서졌다고 해도 됫좌석까지는 충격이 미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다음은 노면 상황이 찍힌 사진이었다 마른 노면에 브레이크를 밟
은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아사카와 가즈유키가 한눈을 팔면서 운
전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어디
를 보고 있었던 것일까· 분명 됫좌석을 돌아보며 차가워진 아내와
딸의 몸을 만지고 있었던 것이다. 3일 전, 미 야시타의 연구실에서 상
상했던 정황이 되살아났다
안도는 계속해서 두 장 세 장 트럼프 카드라도 나눠 주는 것처럼
사진을 테이블 위에 펼쳤다 주의를끌 만한 것은 없었지만 그의 손
이 문득 어떤 사진 앞에서 멈췄다. 자동차의 내부를 찍은 사진이 안
도의 손으로 들어갔다. 운전석 쪽의 창에 카메라를 놓고 앞부분만을
찍은것이었다 운전석에는 안전 벨트가축 늘어져 있었고,조수석은
앞으로 고꾸라져 있었다. 안도는 器어지게 보았다. 왜 자신이 이 사
진에 유독 흥미를 느끼는 것인지 순간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웠기 떼
문이다
책장을 아무렇게나 넘기다가 이와 같은 경험을 한 적이 몇 번인가
있었다. 어떤 말이 뇌리에 스쳐 퍼뜩 책장 넘기던 손을 멈추면서도
어느 부분의 어느 말이 마음에 걸리는 것인지를 알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안도의 손에 땀이 배어 갔다. 직감이 작용하고 있었다. 이 사진
은 확실히 뭔가를 알리려 하고 있다. 코끝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가
져온 사진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몇 번이나 시선이 기어갔다.
안도는 한점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리고 드디어 숨어 있는 것을 발
견했다.
고꾸라진 조수석 등받이 아래에 앞면의 일부와 측면만이 보이는
검은 물체가 끼여 있었고, 좌석 발치에도 똑같이 검고 평평한 물체가
머리 받침대에 눌려 있었다. 안도는 아주 급박한 목소리로 구라하시
를 불렀다.
'자, 잠간. 이거 말인데요."
안도는 구라하시 앞으로 사진을 내밀며 그 장소를 손가락으로 가
리켰다 구라하시는 안경을 벗고 얼굴을 가까이 대더니 아무 말 없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건의 정체를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린 것이
아니었다. 왜 이런 것에 흥미를 갖는 것인지, 안도의 진의를 헤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게, 어떻다는· ?"
사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구라하시가 중얼거렸다.
"전 YTR처 럼 보이는데요."
안도는 구라하시에게 동의를 구했다.
"네 , YTR 같군요."
구라하시는 정체를 확인함과 동시에 사진을 안도 쪽으로 다시 밀
어 놓았다. 측면의 검은 직사각형만 보면 조수석에 놓인 과자 상자로
도 볼 수 있었지만, 잘 관찰해 보니 전면 오른쪽 끝에 등글고 검은 손
잡이 같은 게 보였다. YTR이나 튜너 , 혹은 앰프 종류라고 생각할 수
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도는 VTR이라고 단정지었다. 머리
받침대에 눌린 물체는 노트북이나 워드프로세서처럼도 보였다. 아사
카와의 직업을 생각하면 늘 노트북을 휴대했다고 해도 하나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렇지만 VFR이 되면 얘기는 달라진다.
"왜 이런 곳에 VTR이· .."
VFR이라고 단정지은 것은 다카노 마이한테 들은 이야기가 머릿속
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류지가 죽은 다음날, 아사카와는 류지의
아파트에 찾아와 심각한 표정으로 비디오테이프에 관한 질문을 퍼부
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사카와는 VTR을 조수석에 싣고 어
딘가로 외출했다가 키타시나가와에 있는 자택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사고를 만났다. VfR을 차에 싣고 아사카와는 대체 어디를 갔다온 것
일까?수리를 하려고 했다면 고속도로를 탈 필요도 없이 근처 전자
대리점에 가지고 가면 간단히 끝날 일이었다. 그 목적이 왠지 마음에
걸렸다. 어지간한 이유가 없다면 VTR을 차에 싣고 달리는 일은 결코
없으리라
안도는 다시 열 몇 장의 사진을 확인해 갔다. 그러다가 차 넘버가
찍혀 있는 것을 보고는 가방에서 수첩을 꺼내 메모했다
"시나가와 와5287 "
'와' 라는 번호판으로 이 차가 렌터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렌터
카를 빌리면서까지 아사카와는 일부러 VFR을 운반하려 했던 것이
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안도는 그의 입장에 서서 생각했다. 만일
VfR을 운반해야 했다면 어떤 이유에서일까?
‥‥복사
다른 이유는 떠오르지 않았다 예를 들어,멀리 있는 친구가 전화
를 걸어 멋진 비디오를 손에 넣었다고 연락했다 치자. 복사히써고 해
도 친구집에 있는 VTR은 한 대뿐 꼭 복사를 하고 싶다고 한다면 이
쪽에서 YTR을 가지고 가서 복사하는 수밖에 없다‥‥하지만, 설사
그렇다고 해도.
안도는 머리를 감싸러었다.
‥‥그런 비디오테이프가 일련의 변사 사건과 무슨 관계가 있는 걸
까?
어쨌든 아사카와의 입에서 사건의 진상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팩스에 따르면 아사카와는 혼수 상태인 그대로 병원에 실려가 있
었다. 열흘 이상 경과한 지금,그의 증상에 변화가 생겼을 가능성도
있었다. 의사 소통이 이루어지는 정도가 되었다면 당장이라도 만나
서 이야기하고 싶었다
"아사카와 가즈유키가 입원한 곳을 아십니까?"
안도는 구라하시에게 물었다.
"시나가와 재생 병원· .끼었던 것 같습니다만."
말하고 나서 구라하시는 파일에서 확인했다.
"맞습니다. 틀림없군요. 그런데 이 환자, 혼수 상태로 되어 있어
요"
"어쨌든 한번 만나 보겠습니다 "
말을 하면서 안도는 자기 자신을 납득시키려는 듯이 몇 번이나 고
개를 끄덕였다
aa안도는 택시의 유리창에 얼굴을 비벼 대며 졸고 있었다.
오른손을 헛짚는 바람에 무너지듯 운전석 뒤에 이마를 세게 부딪
혔을 때 경종 같은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손목시계를
보았다 오후 2시 10분. 5대학을 떠나 바로 택시를 잡았으니 채 10
분도 되지 않았다 깜빡 졸았던 것은 불과 2∼3분일 것이다. 그런데
도 시간의 흐름이 길게 느껴졌다. 5대학을 방문해서 구라하시 강사
에게 사고 당시의 사진을 받아 본 것이 마치 며칠 전처럼 아득하게
생각되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딘가 멀리 끌려와 버린 듯한
기분으로 안도는 땡땡거리며 울리는 경종을 밀폐된 유리창을 통해
듣고 있었다.
택시는 한자리에 멈춘 그대로였다. 4차선의 제일 왼쪽 라인은 좌
회전 전용인 듯 다른 라인의 흐름은 순조로운데도 유독 그곳만이 움
직이지 않았다 상반신을 구부리고 앞유리 너머로 왼쪽 앞을 보니
내려온 차단기와 깜박이는 건널목 경보기가 눈에 들어왔다. 기분 탓
인지 깜빡이는 리듬과 땡땡거리는 소리가 미묘하게 어긋나는 것처
럼 들려왔다 게이힝 급행 열차가 지나가는 건널목 앞에서 조금 전
부터 안도가 탄 차는 발이 묶인 채 꼼짝하지 못했다. 목표인 시나가
와 재생 병인은 건널목 너머에 있었다 상행 전철이 통과하고서도
차단기는올라가지 않고 대신 하행 전철을 나타내는 표시에 불이 켜
졌다 간단히 빠져나갈 수 있을것 같지 않았다. 택시 운전기사는벌
써 포기한 듯 클립으로 묶인 메모지를 한 장 한 장 넘기며 뭔가를 적
고 있었다.
‥‥그다지 서두를 건 없어. 면회 시간이 끝나는 5시까지는 시간이
충분하니까.
안도는 다시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아무도 없는6월의 바다. 아들과 함께 직사각형 튜브에 엎드려 첨
벙거리며 바다로 바다로 나아갔다. 등뒤에서 아내의 목소리가 들린
다.
‥‥다카야, 이제 돌아와라.
하지만 아래위로 몸을 흔들며 신나서 까부는 아들에게 엄마의 목
소리는 닿지 않는다.
·.여보, 슬슬 돌아오세 요.
이제 아내의 목소리는 신경질적으로 변해 갔다
파도도 높아지고 슬슬 돌아갈 때라는 예감이 들어서 튜브의 방향
을 바꾸려는 순간, 눈앞에서 하얀 파도가 일어 눈 깔짝할 사이에 튜
브가 뒤집히고 아들과 함께 바다로 내동댕이쳐졌다. 머리까지 가라
앉자 비로소 그곳이 어른 키가 넘을 정도로 깊은 곳임을 깨닫고 당황
하기 시작했다. 바다 위로 얼굴을 내밀었지만 아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선 채로 빙그르르 한 바퀴를 돌아보니 해변에서 아내가 옷을
입은 채로 들어오고 있는 것이 보이고, 동시에 발에 매달리는 손의
감촉을 느꼈다. 아들의 손이었다. 몸 가까이로 끌어당기려고서둘러
몸의 방향을 바꾼 것이 좋지 않았다. 장딴지에서부터 아들의 손이 떨
어지고, 뻗은 왼손 끝에는 머리카락만이 만져졌다.
반미치광이 상태가 되어 물을 가르는 아내의 절규가 6월의 바다에
울려퍼지고 있었다. 하나뿐인 아들이 그렇게 영원히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약지 손가락에 긴 결혼 반지 안에 휘감긴 몇 가닥의 머리카
락만을 남기고는.
선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안도는 가슴이 답답한 듯 자』만 넥타
이를 풀어 헤치고 눈을 뜨려 했지만 쉽게 눈이 떠지지 않았다. 그 당
시로 다시 되돌아간 듯 정신이 몽롱하기만 했다. 안도는 꿈 속에서도
소리 없이 오열했다.
택시 운전사는 이미 눈치채고 있었던 모양인지 백미러로 힐끔힐끔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 .더 무너지기 전에 정신 차려 !
안도의 자아가 명령을 하자 눈이 떠졌다. 혼자 자는 침대 안이라면
몰라도 대낮에,그것도 이런 택시 안에서 평정을 望을 수는 없었다.
현실로 끌어당겨 줄 수 있는 힘을 지닌 공상이라면 어떤 것이라도 좋
았다 문득 안도의 뇌리에 다카노 마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유리 그
릇마저 할아 버릴 듯이 열심히 후르츠 파르페를 숟갈로 떠서 입으로
나르고 있었다. 원피스 사이로 횐 블라우스 자락을 보이면서 왼손을
무릎에 얹고 있었다. 파르페를 다 먹고 난 마이는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일어섰다. 한 줄기 밝은 빛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안도는 마이
에 대한 성적인 망상만이 슬픔의 수렁에서 건져올려 주는 힘을 갖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생각해 보면 아들을 잃고 아내와 별거를 시작한
후여성에 대해 망상을 품은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삶에 대한 집착
을 잃어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택시는 아래위로 흔들리면서 철로를 넘어갔다. 그와 동시에 안도
의 머릿속에서도 다카노 마이의 나체가 아래위로 흔들리고 있었다.
오다큐선 사가미오노 역에서 내려 큰길로 나온 다카노 마이는 막
상 어느 쪽으로 꺾어 들어가야 할지 방향을 잡지 못했다. 2주일 전에
같은 길을 거꾸로 지나온 적이 있긴 했지만, 그때는 밤이기도 했고
처음 와 보는 길이라 생소하기만 했었다. 더욱이 화장을 하기 위해
다카야마 류지의 본가로 향했을 때는 검시 원에서부터 차를 얻어 타
고 갔었다. 그래서인지 이제 전철에서 내려 혼자 걷게 되니 몇십 미
터도 채 못 가서 어디가 어딘지 통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물론 이런
경우를 처음 당해 보는 것은 아니었다. 한 번밖에 가 보지 못한 장소
를 다시 찾아갈 때면 그녀는 으레 길을 잃곤 했다.
본가의 전화번호를 적어 두었으니 길을 찾지 못하면 전화로 물어
보면 된다 하지만 너무 일찍 전화를 걸어 류지의 어머니가 마중을
나오게 하는 것도 죄송스런 일이었다 자신의 감각에 의지해 좀더 걸
어 보기로 했다 전철역에서 집까지는 10분 정도만 걸으면 된다고 했
으니까 그리 대단할 것은 없었다
문득 안도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번 주 금요일,식사 약속을 했지
만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너무 경솔하지 않았나 싶다. 마이는 조금씩
후회되기 시작했다. 마이에게 있어 류지의 친구인 안도는 고인을 함
께 그리는 점도의 상대였다. 학창 시절에 있었던 에피소드들을 들으
면 류지의 난해한 사상을 이해할 수 있는 힌트를 얻을지도 모른다는,
약간의 계산적인 생각이 작용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안도 쪽에서
보통의 남자들이 여자에게 품는 의도를 갖고 있다면 두고두고 귀찮
아질 것이다.
마이는 대학에 들어와서 남자와 여자가 추구하는 것이 사뭇 다르
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지적인 자극
을 주고받고 싶다고 해도 남자 친구의 관심은 서서히 성적인 것으로
만 쏠린다. 그럴 땐 완곡하게 거절하는 수밖에 없었지만, 그 뒤 상대
방의 당황해 하는 태도 때문에 늘 자신은 난처한 입장에 처하곤 했다
몇 장의 사파 편지를 보내와 상처를 다시 건드리는가 하면, 전화를
걸어오는 경우엔 언제나 입을 열자마자 '전엔 미안했어' 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사과 같은 건 받고 싶지 않았다. 그저 하나의 경
험으로 자신을 성장시키는 데 좋은 밑거름이 되면 그만인 것이다.
마이는 남자가 부끄러움을 에너지화해서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싶
었다. 한층 더 성장한 모습으로 나타나면 언제라도 우정이 다시 이어
질 수 있다고 믿었다. 완전히 성장하지 못한 어린애 같은 유치한 정
신 구조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면 친구 관계 따인 이루어질 수가 없
는 것이다.
지금까지 마이가 사귄 유일한 남성은 바로 다카야마 류지였다. 대
부분의 남자들은 모두 유치하게 보였지만, 다카야마 류지의 존재는
아주 각별했다. 서로 주고받은 것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만
일 안도와의 사귐이 류지와 같다면 식사 초대에는 몇 번이라도 응할
것이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마이는 경험으로 익
히 알고 있었다 남자다운 남자를 만날 기회 같은 건,유감스런 일이
지만 일본에서는 거의 제로나 마찬가지다. 그래도 마이는 안도라고
하는 존재에 신경이 쓰였다.
예전에 마이는 류지의 입에서 안도의 이름을 들은 적이 있었다. 유
전자 공학의 기술에 대해 한창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에 중심 화제에
서 벗어나 무심결에 튀어나온 것이 그의 이름이었다.
마이는 DNA와 유전자의 차이도 명확히 이해하지 못해, 두 개가
똑같은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마이의 잘못을 안 류지는 DNA는 유
전 정보가 기록된 화학 물질의 이름이며 , 유전자라는 것은 무수히 존
재하는 유전 정보의 한 단위라는 것을 알기 쉽게 설명해 주었다. 이
야기가 발전하여 제한 효소를 이용하여 DNA를 작은 조각으로 나누
어 편집하는 기술에까지 미치자, 마이는 그 처리 방법을 '퍼즐 같다'
고표현했다 그때 류지는고개를끄덕이며 '맞아.퍼즐이자,암호해
독이지'라고 대답했다. 거기서부터 화제가 옆길로 빠져 학창시절의
에피소드로 발전했다.
DNA를 취급하는 기술에 암호 해독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을 알고,
의학부수업 틈틈이 동기들과 암호놀이에 빠진 적이 있다‥‥ 류지는
그런 식으로 학창 시절의 일화를 재미있고도 우습게 마이에게 들려
주기 시작했다. 당시 , 분자생물학에 흥미를 가진 의대생들이 많아 류
지의 권유에 응해 놀이에 가담한 사람이 열 명 가까이로 늘어났다.
게임 방식은 극히 간단했다. 한 사람의 출제자가 제시한 암호를 일정
기일 내에 누가 가장 빨리 해독할 수 있는가를 겨루는 것이었다 수
학이나 논리학 지식을 시험해 볼 수도 있고, 순간적인 번뜩임이 요구
되는 것이어서 의대 학생들은 열심히 게임에 참가했다.
출제자의 능력에 따라 암호의 난이도는 다양했는데,출제된 대부
분을 류지는 해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류지가 출제한 암호를 해독할
수 있었던 동기는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그 단 한
사람이 바로 안도 미쓰오였다. 류지는 자신이 출제한 암호를 안도가
해독했을 때의 쇼크를 마이에게 털어놓았다.
‥‥마음속을 읽힌 것 같아서 약간 한기가 느껴졌지
그때 안도 미쓰오라는 이름이 마이의 인상에 강하게 남게 되었다.
그래서 검 시원에서 담당 경사에게 안도를 소개받았을 때, 마이는
놀라고 말았던 것이다. 본인 스스로 류지의 친구였다고 이름을 밝힌
이상에는 틀림없었다. 류지가 출제한 암호를 해독할 수 있었던 유일
한 사람이라는 것을 안 마이는 그가 믿음직스러웠던 것이다 이 사람
이 다룬다면 메스 놀림도 훌릅해서 , 사체도 이전과 똑같이 복구되고
사인도 간단히 밝혀질 것이라고,
마이는 1주일 전에 죽은 사람의 말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 생전에 '
류지의 입에서 안도의 이름을 듣지 않았더라면 안도가 있는 검시원
에 전화 같은 건 걸지 않았을 테고,대학에서 만날 약속에도 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식사 약속을 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불쑥 류
지의 입에서 흘러나온 한 마디에 마이는 미묘하게 속박당하고 있었
다.
큰길을 돌아 복잡하게 얽힌 주택가의 골목길로 들어가자 편의점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본 적이 있는 간판이었다. 여기까지 왔으니
더 이상 헤매는 일은 없을 것이다 편의점 모퉁이를 들면 다카야마
류지의 본가가 있었다. 2주일 전의 기억이 되살아나자 마이는 발걸음
을 재촉했다.
백 평 정도의 부지에 세워진 이렇다 할 특색이 없는 집이었다. 방
샘할 때의 기억으로는 1층에는 일곱 평 정도의 거실이 네 평짜리 다
다미방과 이어져 있었다
현관 벨을 누르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류지의 어머니가 반갑게
얼굴을 내밀고는, 마이를 2층으로 안내했다. 안내받은 방은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 2학년까지 류지가 생활했던 공부방이었다. 대학 3학년
이 되자 통학이 가능한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류지는 본가에서 나와
대학 근처에서 하숙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이 방은 류지가 본가에
돌아왔을 때에만 공부방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류지의 어머니는 케이크 한 조각과 커피 한 잔을 놓고 방에서 나갔
다. 머리를 숙이고 복도를 걷는 모습은 우을 그 자체로, 막 아들을 잃
은 어머니의 쓰라림이 몸에 저미도록 느껴졌다.
혼자 남겨진 마이는 새삼스럽게 방 안을 둘러보았다 네 평짜리 다
다미방 한쪽에 한 평 정도 크기로괴펫이 깔려 있고 그 위에 책상이
놓여 있었다. 벽 한면은 책장으로 둘러싸여 있었지만 바닥에 쌓아올
린 종이 상자와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전자제품에 가려 윗부분밖에
는 보이지 않았다. 상자가 모두 몇 개인지 대충 세어 보았다. 27개였
다. 이것들은 류지가죽은후 히가시나카노에 있는그의 아파트에서
옮겨온 것이었다. 침대나 책상 같은 큼지막한 가구는 딴 곳으로 옮겨
놓았고, 책을 비롯해 다른 물건들만 본가로 갖다 놓은 것이다. 상자
에 들어 있는 내용물은 주로 서적류인 듯싶었다.
다다미 위에 앉은 마이는 한숨을 쉬고 나서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
다. 찾지 못했을 경우를 생각해 두는 것이 좋아‥‥ 반은 포기하고 있
었다. 만일 이 중에 섞여 들어갔다고 해도 몇 장의 원고를 찾아 낸다
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로 여겨졌다. 상자 안에 없다면 전부 헛수고
로 끝난다.
상자는 하나하나 테이프로 봉해져 있었다. 카디건을 벗은 다음 소
매를 걷어올리고는 시험삼아 제일 앞에 놓인 상자 하나를 열어 보았
다. 내용물은 문고판 서적이었다. 무심코 몇 권인가 손에 들었다. 그
가운데 한 권은 마이가 선물한 것이었다. 류지가 무척이나 그리웠다
히가시나카노에 있는 류지의 아파트 냄새가 책 표지에 배어 있었다.
·.내가 지금 감상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지 ,
흘러넘칠 것 같은 눈물을 억지로 참으며 마이는 다시 상자 안의 물
건을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상자 바닥까지 살펴봤자 4백자 원고지가 나을 것 같지는 않았다.
잘못 섞여 들어갔다면 어디일까? 마이는 추리를 해 보았다. 참고 문
헌 속일까, 아니면 자료를 넣어 두는 파일 속일까? 봉해 놓은 상자들
을 차례로 열어 나갔다.
등에서 땀이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상자 속에 들어 있는 책들을
하나씩 끄집어 내면서 쓰다 만 원고지를 찾는 일이랄 상당히 힘든 작
업이었다. 상자 세 개를 막 정리하고 났을 때 마이는 손을 멈춘 채 원
고의 빠진 부분을 자신의 언어로 메워 갈 수 있을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기호논리학의 난해한 사상은 이미 전문지에 단편적
으로 발표되어 왔다. 그러나 이번 논문은 전문적인 것이 아니라, 일
반 독자들을 대상으로 한 논리학에다 과학이나 사치 문제 등을 곁들
인 장편이었다. 내용도 그다지 난해하지 않았다 대형 출판사가 내는
월간지에 연재하는 형식으로 시작했을 때부터 마이는 원고의 정서를
맡고 있었고 편집 담당자와의 사전 협의에도 동석한 적이 있었다. 그
덕분에 이론의 흐름이나 문체를 완전히 머리에 담아 두고 있었다. 두
장 정도의 분량이라면 앞뒤를 맞추는 것쯤은 별로 문제될 게 없을 것
같았다.
· .그저 한 장뿐이라고 생각했다면,
빠져 있는 부분이 단 한 장뿐이라고 생각했다면 마이는 그런 유혹
에 넘어가고 말았을 것이다 연재 1회분의 분량이 4백자 원고지로
약 40매 정도. 37매일 때도 있었지만 40매일 때가 많았다 총 12회
연재의 최종 분량 중에서 몇 장이 늘어났는지,또 몇 장이 누락되었
는지 마이로선 알 길이 없었다. 빈소에서 빠져나와 류지의 아파트에
서 원고를 찾았을 때.마이의 손에 들린 것은 막써 놓은38매의 자
필 원고였다. 페이지가38매로 끝나 있었고, 빠진 원고지도 없었기
때문에 마이는 원고 중에서 설마 빠진 것이 있으리라고는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더욱이 장례식이다 뭐다 해서 원고에는 신경 쓸 겨를
이 없었다.
그러다가 마감 직전이 되어서야 정서를 하기 시작했는데,그때에
야 비로소 마지막 페이지와 그 앞 페이지 사이에 내용이 뭉텅 빠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페이지 번호는37, 38로 매겨져 있었지만 결론
이라고도 할 수 있는 중요한 뭔가가 빠져 버려서 논리가 통하지 않았
던 것이다 37페이지의 마지막 두 줄에 만년필로 가로줄이 그어져 있
었고,그곳에서 화살표가 왼쪽 위를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음 페
이지에는 연결을 의미하는 화살표가 그려져 있지 않았다. 보충해서
더 쓴 내용이 있긴 한데 그 부분이 사라져 버린 것으로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마이는 깡짝 놀라서 몇 번이나 처음부터 다시 읽어 보았다. 그렇게
다시 읽어 볼수록 빠진 부분이 있는 게 점점 더 명확해졌다. 횟수를
더할 때마다 반복되며 팽창되었던 사상을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
에' 라고 하는 말로써 일단 정지시키고, 대리 명제라고 할 수 있는 전
개를 넌지시 비춘 시점에서 문장이 끊어진 채 갑자기 끝나 버린 것이
다. 맥락을 더듬어 갈수록 몇 장이나 되는 중요한 부분이 빠져 있다
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총 12회, 5백 매에 이르는 논문은 이미
단행본으로 발간하기로 결정되어 있었다. 그 마지막 손질인만큼 마
이는 신중했다.
곧바로 류지의 본가에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장례
식이 끝난 후 2∼3일 사이에 류지가 살고 있던 아파트는 처분되었고
책과 기타의 신변 물건은 본가에 있는 그의 방에 옮겨졌다 마이는
만일 누락된 원고가 잘못 섞여 들어갔다고 한다면 그 안에 있을지도
모르니까 찾아보고 싶다고 말했던 것이다.
쌓여 있는 상자를 마주한 마이는 그만 소리내어 울고 싶어졌다.
· .왜 벌써 죽은 거예요?
마지막 연재를 마친 직후, 숨을 거둔다는 아슬아슬한 짓을 해치운
류지가 원망스러웠다.
· 지금 여기 다시 나타나서 잃어버린 원고가 있는 곳을 가르쳐 주
세요.
마이는 다 식은 커피에 손을 뻗었다. 좀더 일찍 대충이라도 류지의
원고를 훑어보았더라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후회
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만일 누락된 부분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결국엔 마이가 스스로 보충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류지의 사상과 어긋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걸 생각하면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정말이지 주제넘는 짓이었다. 대학원 진학이 결정되
었다고는 해도 스무 살을 갓 넘긴 애송이가 앞날이 촉망되던 논리학
자의 유작에 손을 대어 결론 부분을 멋대로 고친다· .
· .역시 무리야.
어떻게든 찾아 내야 한다고 마이는 자신에게 타이른 후 옆에 놓인
상자의 봉해진 부분을 뜯었다.
4시가조금지났을무렵,동향인 방이 약간 어두워졌기 때문에 마
이는 불을 켰다. 11월로 들어서자 눈에 띄게 해가 짧아졌다. 그렇지
만 춥지는 않았다 마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커튼을 쳤다. 아까부터
뭔가 마음에 걸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누군가 창 밖에서 이쪽을 엿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이미 상자의 반 이상을 조사했다. 하지만 원고는 아직까지 발견되
지 않았다. 돌연 심장의 고동 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의 가슴 안쪽이
격렬하게 고동치고 있었다. 마이는 움직임을 멈추고, 무릎을 안고 웅
크리고 앉은 채로 심장고동이 진정되길 기다렸다 지금까지 이렇게
심한 심장고동에 시달린 경험은 없었다.
마이는 가만히 왼쪽 가슴에 손을 대고 '왜 이런 증상이 나타나는
걸까「!' 하고 이유를 생각했다. 은사의 원고를 잃어버린 죄책감 때문
일까‥‥ 아니, 그렇지는 않다. 이 방 안에 뭔가가 숨어 있다. 아까는
창 밖에 시선이 있다고 생각되었지만,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상자
그늘에서 불쑥 고양이라도 튀어나올 듯한 섬뜩한 분위기였다.
후두부에서 목덜미에 걸쳐 섬뜩한 감촉이 지나갔다.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시선‥‥ 마이는 뒤를 돌아보았다. 분흥색 카디건이 상자 위
에 걸쳐 있었다.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벗어 놓았던 것이다. 씨실과
날실 사이의 가는 틈새가 방의 조명을 반사시켜 마치 빛나는 눈동자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이는 콰디건을 집어들었다. 그러자 밑에 놓
여 있던 VTR이 눈에 들어왔다.
몸체가 새까만VTR이 코드에 둘둘 감겨 상자 위에 얹혀 있었다.
분명 류지의 방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책을 이곳으로 옮겨올 때 같
이 실려온 게 틀림없었다. VTR 옆에는 비디오테이프도 보이지 않았
고,1"~와도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마이는 주춤주춤 손을 뻗어 YfR 가장자리를 만져 보았다. 코드가
한가운데 감겨 있어 그 튀어나온 부분 때문에 시소처럼 좌우로 흔들
렸다.
·.내가 VTR 위에 카디건을 걸쳤었나?
자문해 보았다. 그러나 기억이 애매했다 물론 달리 해석할 방도는
없었다.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카디건을 벗어 아무 생각 없이 VTR
위에 걸쳐 두었다고밖에는.
한 1분 남짓 동안 VTR과 서로 노려보는 사이에 그녀는 원고에 대
한 생각을 싹 잊어버렸다. 대신 VTR에 관한 의문이 소용돌이쳤다.
'정말 류지는 당신에게 아무 말도 남기지 않은 거죠? 예를 들면,
비디오테이프에 대해서 라든지‥‥‥
류지가 죽은 다음날, 아사카와 가즈유키가 했던 말을 잊을 수가 없
마이는 ◎rE 본체에 감겨 있던 코드를 풀어 나갔다. 전원 코드 끝
을 잡고 콘센트를 찾았다. 책상 아래에 연장 코드가 아무렇게나 던져
져 있었다. 마이는 VTR의 전원을 넣었다. 그러자 타이머 표시부에
나란히 자리한 네 개의 0이 일제히 깜박이기 시작했다. 죽은 사람이
또다시 숨쉬기 시작하는 것 같은 기계의 고동.쭉 뻗어 있던 마이의
오른손 검지가 몇 번이나 비디오 앞에서 서성거렸다. 망설여졌다.
'만지지 마' 라는 목소리가 들린다. 그렇지만 마이는 꺼냄 버튼을 눌
렀다. 테이프 삽입구가 열리고 기계음과 함께 안에서부터 비디오테
이프가 밀려나왔다. 라벨에 타이틀이 붙어 있었다.
'라이자미넬리 프랭크시내트라 ·새미 데이비스JR,1989.' 밀려
나온 비디오테이프는 거대한 괴물의 혀 같았다. I~rR이 아래 눈꺼풀
을 뒤집어 보이며 약을 올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마이는 그 검은 혀를 손으로 잡아 뽑았다.
10
시나가와 재생 병원을 눈앞에 둔 곳에서 요란스럽게 사이렌을 을
리며 달려가는 구급차가 안도의 택시를 추월했다 일방통행로였기
때문에 구급차를 먼저 보내려면 한 줄로 주차시키듯이 정차중인 작
은 트럭 뒤로 차를 바짝 붙여야만 했다 차를 다시 빼내자면 최소한
한두번의 전후진이 필요할 것 같아서 안도는 그만 택시에서 내리기
로 했다. 바로 코앞에 11층짜리 시나가와 재생 병원이 우뚝서 있었
다. 아무래도 차에서 내리는 쪽이 더 빠르겠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
다
상가에서부터 병원 정면의 현관으로 쩐어들자 아까 보았던 구급차
가 신관과 구관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상가를 빠져
나가는 데 시간이 걸릴 것 같아 도중에 택시에서 내린 안도와 별로
큰 차이가 없는 도착 시간이었다.
경고등의 빨간 반점을 병원 벽면에 빙그르르 내던지며 사이렌 소
리만이 멈췄다. 이어 맑은 하늘로부터 정적이 내려앉아 스포트라이
트처럼 구급차 둘레에 무음(無音)의 공간을 만들어 냈다. 병원 안으
로 들어가려면 구급차 옆을 통과해야만 했다.
경고등의 회전도 서서히 멈추기 시작해 소리의 여운이 하늘로 사
라지려는 참이었다 당장에라도 구급차 뒷문이 열리고 구급 요원과
함께 들것이 내려올 것 같은 분위기가 짙게 감돌았지만 좀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안도는 발길을 멈추고 지켜보았다. 10초‥‥ 20초‥‥ 문은 열리지
않고 정적만이 지속되었다. 30초·. 주위의 공기가 얼어붙어 갔다.
병동 쪽에서도 아무도 뛰어나오지 않았다.
정신을 차린 안도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차의 뒷문
이 힘차게 열렸다. 퉁기듯이 구급차 밖으로 굴러나온 구급 요원 한
명 . 차 안에 남아 있는 다른 구급 요원의 도움을 받아 솜씨 좋게 들것
을 내렸다. 환자를 바로 실어내릴 수 없는 어떤 사정이 있었다고 해
도 대응 속도가 너무 느렸다.
들것이 비스듬하게 기울어지면서, 산소 마스크를 한 환자의 얼굴
과 그를 들여다보는 모양새가 된 안도의 얼굴이 나란히 위치하게 되
었다 그 순간이었다. 서로의 눈과눈이 마주쳤다 몸을 비틀어 안도
에게 옆구리를 보이는가 싶더니 환자의 움직임이 그대로 멈추었다.
그 눈에는 이미 생기가 없었다. 위독한 상태로 구급차에 실려와 지금
막 임종을 맞이한 것이었다.
직업상 환자의 임종에 입회한 적은 몇 번이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우연을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불길함을 느낀 안도는 죽은 사람에게
서 눈길을 돌렸다. 안도는 요즘 들어 사소한 것에서도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예전엔 징크스나 점에 얽매여 꼼짝 못하는 인간을
보면 어리석은 자라고 경멸했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도 어쩔 수 없이
그들과 같은 부류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시나가와 재생 병원은 5대학 계열의 종합 병원으로, 담당 의사인
와다 역시 5대학에서 파견한사람이었다 선배인 구라하시에게 연락
을 받았던 모양인지 방문 목적을 알려 주자마자, 안도는 서병동 7층
으로 안내되었다
침대에 누워 있는 아사카와의 눈을 들여다보는 순간, 안도는 그만
방금 전에 임종을 맞은 응급 환자의 눈을 떠올리고 말았다. 완전히
똑같은 눈이 거기에 있었다 죽은 사람의 눈이었다
두 종류의 링거액을 팔에 꽃은 아사카와는 천장으로 얼굴을 향한
채 꼼짝도하지 않았다. 예전의 모습은 알길이 없었지만,아마 체중
의 반은 줄어들었을 것이다. 볼은 흘쭉했고 아무렇게나 자란 수염의
반 이상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안도는 가만히 옆으로 다가가 작은 소리로 말을 걸었다.
"아사괴와 씨 ."
대답이 없었다. 어깨 근처를 만지려다가 멈칫하고 와다 의사의 안
색을 살폈다. 와다가 끄덕이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는 손을 뻗
어 아사카와의 어깨에 놓았다. 탄력 없는 피부가 환자복 속에 있었
다. 그 속에 있는 견갑골의 감촉까지 고스란히 전해지자 안도는 무심
코 손을 허공으로 거둬들였다. 역시 아무 반응이 없었다.
"내내 이런 상태입니까?"
아사카와의 칭대 곁을 떠나 안도가 와다를 향해 돌아섰다.
"예, 그렇습니다. "
와다는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교통사고로 실려 들어온 것이 지난
달 21일이니까, 오늘까지 만 15일 동안 아사카와는 아무 말도 없고,
울지도 않고, 웃지도 않고, 화내지도 않고, 먹지도 않고, 배뇨와 배변
도 하지 않는 채로 일상을 보내고 있는 셈이었다.
"선생님께선 원인을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안도는 정중하게 물었다
"사고로 인해 뇌가 외상을 입은 것 같습니다만, 검사 결과는 아무
이상이 없었습니다. 아마 내인성이겠죠."
"정신적인 쇼크 말인가요?"
"아마도·.. "
아내와 딸을 동시에 빼앗긴 쇼크 때문에 아사카와의 정신이 붕괴
되었다‥‥ 정말 그뿐일까V 안도는 석연치 않았다. 현장 사진을 본 탓
인지 안도는 이상스러울 정도로 리얼하게 아사카와가 일으킨 사고의
순간을 상상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떠올릴 때마다 시선이 조수석으로 쏠렸다. 자리잡
고 있는 VTR이 이미지 속에서 점점 더 커져만 갔다. 무슨 목적으로
VTR을 자동차에 실었고, 어디를 갔다온 것일까‥‥ 본인에게 들을 수
있으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안도는 아사카와의 머리맡으로 등근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꿈
의 세계에 잠긴 아사카와의 옆얼굴을 잠시 응시하다가 그가 떠돌고
있을 세계를 상상해 보았다 만약 현실의 세계와 망상의 세계 중에서
어느 한곳을 택해서 살 수 있다면 과연 어느 쪽이 행복할까?아마
망상의 세계에서는 아내와 딸이 아직도 살아 있을 게 분명했다. 품안
에 딸을 안고 장난이라도 치고 있는 것일까?
"아사카와 씨 "
같은 슬픔을 맛본 아버지로서 , 안도는 진심을 담아 그의 이름을 불
렀다. 류지와는 고교 동창이라니까 자신보다 두 살 적을 것이다 하
지만 지금 그의 모습은 예순이 넘은 노인으로 보였다. 대체 무엇 때
문에 이런 급격한 변화가 생긴 것일까?
슬픔은 사람을 빨리 告게 만든다. 확실히 안도 자신도 지난 1년 동
안 상당히 告어 버렸다. 예전엔 모두들 안도를 실제 나이보다 어리
게 보았는데 요즘 들어선 제 나이보다 告게 보는 사람들이 부쩍 많
아졌다.
"아사카와 씨 ,"
두 번째로 이름을 불렀을 때 , 보다 못한 와다가 끼여들었다
"소용없을 겁니다. 아무리 말을 걸어도."
와다가 말하는 대로, 여러 번 말을 걸어도 반응이 전혀 없었다. 안
도는 포기하고 일어섰다
"회복될 가능성은요?"
와다는 가볍게 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신만이 아시는 일 아니겠습니까?"
이런 환자의 경우는 아무 조짐도 없이 갑자기 증상이 좋아지기도 하
고, 또 나빠지기도 해서 의학적으로 예측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증상에 변화가 생기면 꼭 알려 주셨으면 합니다. "
"알겠습니다 "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의미가 없어진 안도와 와다는 병실을 나섰다.
안도는 문 있는 곳에서 잠시 멈춰 서서 다시 한번 침대 쪽으로 눈을
돌렸지만 아사카와의 얼굴에서는 아무런 변화도 찾아볼 수 없었다.
죽은 사람의 눈으로 천장만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11
다리 없는 의자의 등받이를 한껏 뒤로 젖힌 다카노 마이는 얼굴을
천장으로 향했다. 막다른 곳에 이르렀을 때의 습관이었다. 몸을 뒤로
젖힌 상태가 되자 등뒤 책장에 늘어서 있는 책들의 제목이 거꾸로
읽혀졌다. 샴푸후의 덜 마른 머리카락이 바닥에 아무렇게나흩어져
있는 것도 아랑곳 않고, 무리한 자세 그대로 마이는 눈을 감았다
욕실과 미니 주방을 포함해 채 다섯 평도 되지 않는 좁은 원룸이었
다 벽 한쪽이 모두 책장에 점령당해 침대와 책상을 둘 공간이 없었
기 때문에 잠을 잘 때면 책상을 대신하고 있는 좌탁을 구석으로 밀어
놓고 이불을 깔아야 했다. 부모님이 보내 주시는 돈과 가정교사 아르
바이트만으로 학교 근처에 방을 빌리려다 보니 공간이 작아질 수밖
에 없었다. 학교와 가깝고,욕실과 화장실이 딸려 있으며,프라이버
시가 보장될 것. 이 세 가지가 방을 고를 때 생각했던 최소한의 조건
이었다.
대략 생활비의 절반이 집세로 나가고 있었다. 그래도 마이는 만족
해하고 있었다. 조금만 교외로 나간다면 넓은 방을 얻을 수도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사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앉은 채로 손
만 뻗으면 필요한 물건에 손이 닿는, 그 좁음이 오히려 편했다.
눈을 감은 그대로 마이는 손으로 더듬어서 CD 플레이어를 켜고 마
음에 드는 곡을 틀었다. 곡에 맞추어 마이는 두 손으로 허벅지 근처
를 두드렸다. 중고등학교 시절, 단거리 육상 선수로 활약한 탓인지
그녀의 다리는 부드럽기보다는 단단한 편이었다.
꽃무의 잠옷으로 감싼 가슴을 음악에 맞춰 부풀리며 호흡을 가다
듬고는 좋은 생각이 떠오르길 기원하면서 일정한 리듬으로 콧구멍
을 닫았다 열었다 했다. 마이는 오늘밤 안으로 원고가 완성될 수 있
을지 없을지 , 그것만 생각하면 불안한 나머지 모든 사고가 흐트러지
곤 했다
내일 오후에는 5출판사의 편집 담당자인 기무라를 만나 류지의 원
고를 건네 줄 예정이었다. 하지만 아직껏 원고의 마지막을 어떻게 고
쳐야 할지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 류지의 본가까지 찾아
가 보았지만 분실한 원고를 끝내 발견하지 못했다.
이 이상 원고를 찾는 데 시간을 낭비할 여유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나머지 원고가 정말로 존재하는 것인지, 마이는 의심스러워지기 시
작했던 것이다. 나중에 덧붙이려 했는데 미완성의 상태로 류지가 죽
어 버렸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렇다면 찾는 것을 포기하고 마지막회
에 상응하는 모양새로 다듬는 데 전력을 다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마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까부터 그녀는 막힌 채로 단 한 줄도 보태지 못하고 있었다. 샤
워로 기분 전환을 시도해 보았지만 펜은좀처럼 앞으로 나가지 않았
다. 썼다가 찢어 버리고, 또 썼다가 찢어 버리는 것의 반복이었다.
순간, 마이는 번뜩임을 얻고 눈을 떴다.
‥‥덧붙이려고 하기 때문에 말이 떠오르지 않는 거야.
원고 마지막에 있는 공백의 띠를 자신의 말로 메우려 하기 때문에
고생스러운것이다 다카야마류지의,종종비약하는 경향이 있는사
고의 흐름을 추측해 보려는 것 자체가 애당초 무리한 일이었다 그렇
다면 앞뒤가 맞도록 전후의 내용을 적당히 빼 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마이는 다시 일어나 다리 없는 의자의 등받이를 거의 수직으로 조
절했다. 광명이 보였다. 말을 덧붙이기보다는 삭제해 버리는 쪽이 훨
씬 쉬울 것이다. 류지도 틀림없이 그쪽을 더 좋아할 것이다. 미처 말
하지 못한 생각이 남았다고 해도, 제멋대로 개작해 사상을 왜곡시키
는 것보다는 훨씬 더 나으리라
해결책이 떠오르자 마이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그 틈을 타고 한
편의 비디오테이프가 시야 속으로 뛰어들어왔다. 류지의 본가에서
말없이 가져온 것이었다. 본가의 공부방에서 발견했을 때 그녀는 비
디오테이프의 내용을 꼭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하지
만VTR에는 비디오 배선이 빠져 있었고,방에는TV도 없었다 비디
오테이프를 보려면 가져오는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그 집안 사람에게 양해를 구한 후에 빌려올 셈이었다. 그런
데 원고 찾기를 포기하고 집에서 나을 때가되자,미리 말을준비해
두긴 했는데도 막상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갑자기 혼란스러
워졌던 것이다
· .치송합니다. 이 비디오테이프, 너무나 마음에 걸려서요. 빌려가
도 될까요?
모호한 표현이었다. 마음에 걸린다는 건 도대체 어떤 것인가?설
명을 요구당해도 딱히 대답할 수가 없었다. 결국 백 안에 감춘 채 마
이는 허락도 없이 비디오테이프를 가지고 나온 꼴이 되었다.
'라이자 미넬리 · 프랭크 시내트라 · 새미 데이비스JR,1989.'
'음악 프로를 녹화한 것이겠지' 라고 가볍게 여겼지만 마음은 어느
새 별로 색다를 게 없는 비디오테이프에 빼앗기고 만 것이었다. 언제
백에서 꺼내 I"V 위에 얹어 놓았는지 , 마이의 기억은 분명치 않았다.
14인치 비디오 비전 위에서 그것이 유혹하고 있었다. 류지의 방에
서 VTR이라는 기계 상자에 들어 있을 때에도 비디오 테이프는 흡인
력을 내뿜고 있었다 껍데기에서 꺼내 그대로 방치해 두고 보니 온몸
이 통째로 빨려들어갈 것만 같았다.
제목만 보면, 류지의 음악 취미와는 전혀 달랐다.
마이가 아는 한 류지는 거의 음악을 듣지 않았다. 가끔 듣는다고
해도 클래식 소품뿐이었다. 무엇보다도 라벨에 쓰인 타이틀의 필적
만 보아도 류지의 테이프가 아님이 분명했다.
제5자에 의해 녹화된 것이 히가시나카노에 있는 류지의 아파트로
옮겨져 들어왔고,그렇게 돌고 돌다가 지금 이렇게 마이의 방에까지
오게 된 것이다.
마이는 앉은 채로 손을 뻗어 테이프를 t"rR에 넣었다. 스위치가 자
동적으로 ON으로 되었다. 채널을 맞추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찰칵' 소리를 내고 작동되기 시작한 시점에서 마이는 황급히 일
시정지 버튼에 손을 댔다 봐서는 안 되는 것이라면 어떻게 하지 , 하
는 망설임이 생긴 것이다.
일단, 뇌리에 새겨진 영상을 지우고 백지 상태로 되돌리는 것은 불
가능한 일이다. 후회하기 전에 그만두는 된이 좋을지도 모른다. 그러
나 망설임은 있었지만 역시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마이는 일시정
지를 해제시켰다.
잡음과 함께 화면이 흐트러졌다가 한 템포 정도 사이를 둔 후, 먹
물을 흘리고 있는 듯한 영상이 눈으로 뛰어들어왔다. 이제 되돌아갈
수는 없다. 마이는 각오했다. 그 다음에 전개된 것은 제목에선 상상
조차 할 수 없었던 의미 불명의 장면들이었다
영상이 끝나자마자 마이는 구역질이 나서 욕실로 급히 뛰어갔다
도중에 껐으면 좋으련만 영상의 압도적인 힘에 저항하지도 못하고
마지막까지 다 보고 말았다. 아니 , 보고 말았다기보다는 보도록 강요
당했다는 표현이 더 적절했다. 마이는 도저히 중간에 정지 버튼을 누
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땀에 흠뻑 젖은 몸이 가늘게 떨렸고, 위장에서부터 목으로 치밀어
오르는 것이 있었다. 공포감보다도 혐오감 쪽이 더 강했다.
몸 안쪽의 깊은 곳으로 생경스런 이물질이 들어와 버린 듯한 기분
이 들었다 빼내야겠다는 강박 관념으로 목에 손가락을 찔러 넣어 토
해 내려고 했다. 하지만 넘어오는 위액 때문에 숨이 막혀 콜록거리다
가 그만 눈물까지 쏟았다. 멍하니 허공에 시선을 띄운 채로 마이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자기 자신이 소멸해 가는 감각을 잠시 느낀 다
음, 그녀의 의식은 갑자기 까마득히 멀어져만 갔다
제2장
」ㄴ1臺드
‥‥ RING !
류지의 배에서 튀어나왔던 妾자의 앙모!
이제 이것은 우연일 수 없다. 아사가와는 일련의
변사 사건을 상세이 辛적안 리포트를 작성해서 거기에
'링'이라는 타이틀을 붙여 암호 則의 문서로
나누어 저장앴던 것이다. 그킬고 류리는
그 對이틀을 배에서부터
튀어나오도록 製다.
약속 시간에서 15분이 지났을 무렵부터 안도는 안절부절못하기 시
작했다. 수첩을 꺼내 다시 한번 스케줄을 확인했다.
‥‥11월 9일, 금요일, JR 시부야 역의 서쪽 출구 모아이 상(남태평
양 이스터 섬에 있는 사람 얼굴을 한 거대한 석상을 본따 만든 조
각 . 역자 주) 앞,6시.
틀림없었다 마이와 식사 약속을 한 시간이 수첩에 확실히 적혀 있
었다
혼잡함을 가르듯 안도는 가볍게 주위를 한 바퀴 돌면서 비슷한 나
이의 여성이 있으면 가까이 다가가 얼굴을 들여다보기까지 했다. 하
지만 누구도 마이는 아니었다.
30분이 지났을 때였다. 약속을 잊어버렸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안도는 공중 전화에서 마이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여섯 번, 일곱
번 벨 소리가 반복되고 있었다. 그녀가 사는 방이 얼마나 좁은지는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좁아요. 다섯 평도 채 안 되니까요.
열 번째로 울리는 벨 소리 , 이젠 분명했다. 마이는 방에 없었다. 안
도는 수화기를 귀에서 떼어 냈다. 뭔가 사정이 있어 늦어지고 있지
만, 아마지금쯤은 이쪽으로 오고 있으리라.그렇게 빌며 안도는 수
화기를 내려놓았다.
눈길이 계속해서 시계로 쏠린다. 어느새 한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 .한 시간이 지나면 일단 포기하고 돌아가자
여자와 데이트를 한 지가 왜 오랜만이라서 약속 상대를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조차 잊고 말았다 생각해 보면 바람맞은 경험도 없
었다. 아내와 사귈 때에는 시간 관념이 정확한 아내 쪽이 기다린 적
은 있어도 자신이 아내를 기다려 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약속 시간에 관한 과거의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떠올리고 있는 동
안에 허무하게 한 시간이 지나가 버렸다. 그러나 안도는 자리에서 움
직일 수가 없었다 한 가닥의 희망을 버릴 수 없었기에 '앞으로 j분
만 더' 를 되뇌이며 스스로에게 타일렀다. 일주일 내내 오늘의 만남을
기다려 왔던 것이다. 쉽사리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국 안도는 1시간 33분 동안 시부야의 혼잡한 거리에 서 있었다.
그렇지만 끝내 마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호텔에 들어서자마자 로비로 간 안도는 송별회장이 어디인지 물어
보았다. 고향의 병원을 물려받게 된 후나코시의 송별회에는 이미 참
석하지 못하겠다고 얘기해 두었다. 하지만 마이에게 바람을 맞은 지
금 참석하지 못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추워지기 시작한 계절, 시
부야 역 앞의 젊은이들이 내뿜는 열기를 뒤집어쓴 채, 아무도 없는 아
파트로 직행하는 것은 정말이지 쓸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가끔씩
은 친구들과 술 마시고 떠드는 것도 괜찮을 거라고 위로하며 안도는
수포로 돌아간 데이트를 보상받을 겸 이미 거절했던 송별회에 참석하
기로 결심했다.
송별회는 끝날 시간이 가까워져 친한 사람 몇 명만 남아 삼삼오오
모여서 2차를 계획하고 있었다. 대개 교수들은 1차만 참석하고 돌아
가고, 친한 친구들과 격의 없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은 2차부터
였다. 안도는 타이밍을 잘 맞춰서 그 흐름을 자연스럽게 탄 셈이 되
었다.
미야시타 쪽에서 먼저 알아보고 다가와 안도의 어깨에 손을 얹었
다
"뭐야, 너 데이트 안 했냐?"
"바람맞았다. "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가볍게 말해 버렸다.
"그래? 유감이군 어쨌든 잠간만 이리로 와 봐."
미야시타는 안도의 소맷부리를 잡고 문 안쪽으로 잡아당겼다. 여
자에게 바람맞은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파고들려 고도 하지 않았다.
"왜 그래?"
안도는 의 아해했다.
미야시타가 뭔가 말하려고 하는데 두 사람 곁을 제2내과의 야스카
와 교수가 지나갔다. 미야시타는 빠른 말투로 속삭였다
"너 2차 하러 갈 거지?"
"응 그럴 생각이야."
"좋아. 그럼 그 자리에서 잠깐 일러 두고 싶은 말이 있어 ."
미야시타는 그렇게만 말하고는 붙임성 있게 야스카와 교수에게 다
가갔다. 그리고는 모임의 간사로서 송별회에 참석해 준 데 대해서 강
사의 예를 표하고,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살찐 얼굴에 함박 웃음을 터
뜨리고 있었다. 어느 교수한테나 귀여움을 받고 있는 미야시타만의
타고난 재능이었다 그의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안도는 공연히 감탄
스러워진다. 만일 다른사람이 그렇게 했다면,모르긴 몰라도 좨 불
쾌하게 비쳤을 것이다 하지만 미야시타에겐 그 모든 것이 자연스러
웠다
안도는 문가에 서서 미야시타와 야스카와 교수의 대화가 끝나기
를 기다렸다. 그 사이에 아는 얼굴 몇이 안도 옆을 지나갔다. 하지만
가볍게 인사만 보낼 뿐,멈춰 서서 친하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은 없
었다.
작년 여름, 바다에서 아들을 잃은 이후로 가깔게 왕래하는 친구들
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하지만 떠나간 친구들을 책망할 마음 따윈
털끝만치도없었다. 안도는 자신에게 잘못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안
도의 사고 소식을 들은 많은 친구들이 그에게 달려와 온갖 방법으로
위로해 주러 했다. 그렇지만 그는 친구들의 호의에 응할 수가 없었
다. 안도는 계속해서 슬픔을 질질 끌고 다니며 친구들에게 우울한 얼
굴을 보여 주었다. '기운 내라' 는 말을 들었다고 해서 정말로 기운을
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러자 친구들은 하나둘 떠나갔고,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미야시타만이 남아 있었다.
미야시타는 안도가 아무리 비장한 얼굴을 하고 있어도 전혀 개의
치 않고 농담을 던지며 불행조차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바로그렇게
해 주었기 때문에 그를 대하고 있을 때만은 슬픔을 잊을 수가 있었
다. 이제 안도는 미야시타와 다른 친구들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어느
정도 깨닫게 되었다. 다른 친구들은 안도에게 기운을 북돋워 주기 위
해서 왔다. 하지만미아시타는달랐다 함께 놀기 위해서 온 것이다.
사실 '기운내라'라는틀에 박힌 말만큼 무의미한 말은 없다 정말로
기운이 나길 원한다면 그저 망각의 세계로 갈 수 있도록 도와 주면
된다. '기운 내라'라는 말을 듣는 순간, 기운을 잃게 만들었던 바로
그 원인으로 의식이 되돌아 가고 마는 것이다.
안도는 지난 1년 반 동안, 한 번도 밝은 표정을 지어 본 적이 없었
다. 그 정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다카노 마이의 입장에 서서 자
신의 얼굴을 객관적으로 상상해 보았다. 가슴이 답답해질 정도로 우
울한 얼굴. 함께 식사를 해 業자 조금도 즐겁지 않으리라,
‥‥그래서 나오지 않은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한심했다. 1년 반 전까지만 해도 자신은 그 누구
보다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고 전도양양했다. 부부 사이는 좋았고,
아들은 귀여웠으며 , 미나미아오야마의 호화 아파트에, 천연 가죽 시
트의 BMW도 있었다. 그리고 장차 자신의 손에 들어올 병원장이라
는 지위· .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 모두가 아내나 장인의 명의였다.
대수롭지 않은 계기로 이 모든 보장된 미래가 스르륵 손에서 미끄러
져 떨어져 나가게 된 것이다.
미야시타와 야스카와 교수의 이야기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다
할 일 없이 이리저리 로비를 둘러보는데, 저만큼 세 대가 나란히 놓 1
인 공중 전화기가 눈에 들어왔다. 안도는 전화 카드를 꺼내면서 공중
전화기로 다가가서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다시 한번 마이의 전화
번호를 눌렀다 어깨와 귀 사이에 수화기를 끼우고 눈만 미야시타 쪽
으로돌리고 있었다 그의 모습을 놓쳐 2차에 가지 못한다면 이곳에
온 의미가 없어질 것이다 분위기를 리드하는 입장인 미야시타 望에
있기만 하면 고립될 일은 없었다.
전화벨이 여덟 번 울렸을 때, 안도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무심코 시
계를 보았다. 이제 곧 9시가 되려 하고 있었다. 약속 시간에서 세 시
간이나 지났는데도 마이는 집에 돌아와 있지 않은 것이다.
·어디로 가 버린 걸까?
안도는 그녀에게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 게 아닐까 싶어 걱정스러
웠다
이야기가 끝난 듯 깊숙이 머리 숙여 인사한 미야시타는 야스카와
교수에게서 멀어져 갔다 안도는 그의 등뒤로 다가가미야시타와 어
깨를 나란히 했다.
"많이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교수를 대할 때와는 사뭇 다른, 편안한 자세로 돌아와 있었다.
"나한테 일러 두고 싶다는 게 뭐야?"
안도는 아까부터 그것이 마음에 걸렸다.
미야시타는 두터운 혀를 뻗어 양 입술을 교대로 할고 있었다 송별
회 요리로 나온 로스트비프 기름을 닦고 있는 것이리라. 번들거리며
붉게 빛나는 그 입술을 바삐 움직이며 그가 말했다
"발견됐어 ."
"뭐가?"
"바이 러 스야."
" · .바이러스?"
"오늘 오후 요코하마의 t'대학에서 연락이 왔어. Y대학에서 해부
한 젊은 남녀 , 기억 나냐?"
"응 차 안에서 동시에 심근경색을 일으킨 케이스지 ."
"그래. 그 두 사람의 병변부(病變部, 병으로 인해 변화를 일으킨
부위 · 역자 주)에서 같은 형태의 바이러스가 발견됐어 "
"어떤 건데?"
미야시타는 입을 오므리고 숨을 토해냈다.
"놀랍게도 천연두 바이러스하고 똑같은 거야."
안도는 잠시 말을 잃었다.
"과연 세키 교수의 진단은 멋져 , 인두부의 궤양만 보고도 천연두라
는 이름을 꺼냈으니까 말야."
"믿을 수 없어 ."
안도는 중얼거렸다.
"믿고 못 믿고 간에, 아마 류지의 표본에서도 같은 바이러스가 발
견될 거야. 아무튼 실물을 눈앞에 두면 믿을 수밖에 없겠지 ."
미야시타의 얼굴은 알코을 때문에 평소와는 다른 홍조를 띠고 있
었다. 그래서 그의 얼굴은 왠지 기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듯싶었
다 이해할 수 없는 바이러스의 등장은 의학자들에겐 공포심보다는
흥분을 가져다 주는 것일까?
하지만 안도는 달랐다. 아까부터 의식의 화살은 다카노 마이 쪽을
향하고 있었다 지금 이 시간, 그녀가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사실이
꺼림칙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다카노 마이의 부재와 천연두와 흡사 :
한 바이러스의 발견이 기묘하게 연결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기분 나
쁜 예감이 들었다
‥‥류지의 몸에 일어난 것과 똑같은 것이 다카노 마이의 몸에서도
일어나려고 하는 건 아닐까? 아니 , 벌써 일어나 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래. 그 두 사람의 병변부(病變部, 병으로 인해 변화를 일으킨
부위 : 역자 주)에서 같은 형태의 바이러스가 발견됐어 ."
"어떤 건데?"
미야시타는 입을 오므리고 숭을 토해냈다.
"놀랄게도 천연두 바이러스하고 똑같은 거야."
안도는 잠시 말을 잃었다
"과연 세키 교수의 진단은 멋져 . 인두부의 궤양만 보고-도.천연두라
는 이름을 꺼냈으니까 말야."
"믿을 수 없어 ."
안도는 중얼거렸다.
"믿고 못 믿고 간에, 아마 류지의 표본에서도 같은 바이러스가 발
견될 거야. 아무튼 실물을 눈앞에 두면 믿을 수밖에 없겠지 ."
미야시타의 얼굴은 알코을 때문에 평소와는 다른 홍조를 띠고 있
었다. 그래서 그의 얼굴은 왠지 기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듯싶었
다. 이해할 수 없는 바이러스의 등장은 의학자들에겐 공포심보다는
흥분을 가져다 주는 것일까?
하지만 안도는 달랐다 아까부터 의식의 화살은다카노 마이 쪽을
향하고 있었다. 지금 이 시간 그녀가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사실이
꺼림칙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다카노 마이의 부재와 천연두와 흡사
한 바이러스의 발견이 기묘하게 연결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기분 나
쁜 예감이 들었다.
‥‥류지의 몸에 일어난 것과 똑같은 것이 다카노 마이의 몸에서도
일어나려고 하는 건 아닐까? 아니 , 벌써 일어나 버렸는지도 모른다
11월 14일 수요일
안도는 대학 본부의 문학부 철학과 연구실을 방문해 담당 교수와
전임 강사에게 다과노 마이의 최근 출결 상황을 물어 보았다. 그런데
어느 교수나 한결같이 요 일주일 동안 마이를 보지 못했다고 했다.
워낙 여학생이 적은 철 학과에서 꽃 같은 존재였던 마이여서 그런지
그녀의 '부재'는 상당히 표가 나는 모양이었다.
지난주 금요일 이후로 안도는 매일 두세 번씩 마이의 집에 전화를
걸고 있었다. 하지만 수화기를 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혹시 보이
프렌드의 방에 틀어박혀 있는 건 아닐까해서 철학과 연구실까지 가
서 문의해 본 것이지만, 그 결과 안도의 걱정은 더 깊어지고 말았다
어쩌면 본가에 돌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안도는
학생과를 찾아갔다. 학생과 주임에게 사정 이야기를 하고 학생 명부
를 보니 , 마이의 본적지는 시즈오카 현 이아타 군 도요타초라고 되어
있었다. 신칸센을 이용하면 도쿄에서 두세 시간 걸리는 거리였다. 안
도는 전화번호와 함께 확실히 해두기 위해 주소를 적어 두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안도는 적어 두었던 번호를 눌
렀다. 전화를 받은 것은 마이의 어머니였다 안도가 신분을 대자, 수
화기 저쪽에서 마이의 어머니는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상대가 딸이
다니는 대학의, 그것도 의학부 강사라는 말을 듣고는 혼란을 일으킨
듯했다. 문학부 강사라면 모르지만 의 학부라면 뭔가 나쁜 병을 알려
주려 그러는 게 아닐까 싶어서 몸이 굳어진 것이리라. 같은 대학의
학생들은 부속 병원에서 모두 무료로 진찰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부
모에게 알리지 알고 진찰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마이의 어머니는 처음 한동안 안도가 전화를 걸어온 이유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했다. 적어도 한 달에 두세 번씩은 딸과 연락을 취하
고 있었다 때마침 지난주에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마침 집에 없어서
3주정도 딸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렇지만 불과 일주일 정도밖
에 얼굴을 보지 못했다고 해서 본가에까지 전화를 걸어오는 것은 왠
지 꺼림칙했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그런 의문이 뭔가를 살피는
분위기로 변해 목소리에 담겨 있음을 안도는 알아챘다.
"그렇습니까? 지난주에 전화하셨을 때 따님은 집에 계시지 알았군
요."
어머니의 설명을 듣고 안도는 눈썹을 찌푸렸다. 혹시 부모님 집에
가서 쉬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던 낙천적인 공상이 어이없이 무너
져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지난주에 전화했을 때에도 마이는 방에 없
었던 게 된다.
"예, 그렇지만 반 년쯤 전에도 서로 연락이 엇갈려서 두 달 가까이
나 목소리를 듣지 못한 적도 있었어요."
안도는 사정을 설명하고 싶었지만, 뭐라 얘기할 수가 없어서 가슴
만 답답했다. 어제, 류지의 조직 표본에서도 요코하마의 대학에서 발
견된 것과 똑같은 바이러스가 발견된 것이다. 어떤 경로를 거쳐 바이
러스가 감염되었는가 하는 등의 상세한 분석은 지금부터 해야 할 일
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매스컴에 발표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 따라
서 여기에서 있는 그대로를 다 말해 버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실례입니다만, 따님이 자주 외박하는 편입니까?"
"아뇨.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어머니는 확신을 갖고 대답했다.
"지난주에 전화하셨다고 했는데, 정확한 날짜를 기억하실 수 있겠
습니까?"
그 물음에 잠깐 사이를 두고 어머니는 대답했다
"화요일이 에요."
"· . ·화요일 ."
화요일에 전화했을 때, 이미 마이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오늘이
수요일이니까, 만 일주일 이상이 된다
"혼자서 여행을 떠났을 가능성은 없을까요?"
"아뇨. 있을 수 없어요."
단정적인 어투에 안도는 무심코 이유를 묻고 싶어졌다.
"어째서죠?"
"그 아이는 부모에게 부담을 주지 않겠다며 가정교사 아르바이트
로 생활비를 벌고 있어요. 일주일 이상이나 여행을 떠날 돈 같은 게
있을 것 같지 않아요."
돌연 안도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마이는 지금 꼼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에 빠져 있는 것이다. 지난주 금요일, 그녀는 아무런 연락도 없
이 안도를 바람맞혔다. 사실 연락을 취하지 못할 장소 같은 건 없다.
만약 데이트가 부담스러웠다면 전날에라도 전화를 걸어 거절하면 되
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여기까지 생각해 보
면,이유는 명백하다 연락을취할수 있을만한상황이 아니었던 것
면,이유는 명백하다 연락을취할수 있을만한상황이 아니었던 것
이다. 뿌리쳐도 뿌리쳐도 큰 대자로 뻗은 류지의 사지가 문득 안도의
뇌리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마이 씨의 방을 한번 보고 싶습니다 "
안도의 말에 마이의 어머니는 약간 당황하는 눈치였다.
"글쎄요."
"번거로우시겠습니다만 관리인한테 전화해서 내일 오후 2시에서 3
시 사이에 저, 안도 미쓰오가 간다고 어머님 쪽에서 양해를 구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관리인 입회하에 마이 씨의 방을 조사하겠습니다. "
"Ul‥‥‥
애매한 대답이었다.
"부탁드립니다 저 같은 사람이 어슬렁어슬렁 찾아간다면 관리인
은 아마 열쇠를 주지 않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전화해서 얘기해 놓겠습니다. "
"부탁드립니다. 또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드리겠습니다. "
안도는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
"아, 저‥‥‥
"딸애를 만나시면 집으로 전화 좀 해달라고 해 주세요."
·아아,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안도는 아무 것도 모르는 마이의 어머니를 떠올리며 복잡한 심정
으로 수화기를 놓았다.
대학에서 마이의 아파트까지는 전철을 한 번만 타면 되었다. 역 개
대학에서 마이의 아파트까지는 전철을 한 번만 타면 되었다. 역 개
찰구를 빠져나온 안도는 수첩에 적은 주소와 비교하면서 한손에 지
도를 들고 목적지인 아파트를 찾아갔다.
도중에 오렌지색 기모노를 입은 여자아이가 부모와 같이 걷고 있
는 것을 보고는 그들을 앞질러 걸으며 여자아이의 얼굴을 힐끗 들여
다보았다. 일곱 살이라고 하기엔 몸집도 컸고 정돈된 얼굴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오후의 햇살 속에서, 시치고산(아이들 성장을 축하하는
전통 행사로 남자아이는 3세, j세, 여자아이는 3세, 7세 되는 해의 11
월 15일에 전통 복장을 입고 신사에 간다 ' 역자 주)의 나들이옷이 눈
에 확 들어 왔다.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익숙하지 않은 조리 (샌들형
의 일본 전통 신발 : 역자 주)를 신고 치맛자락을 가볍게 톡톡 차 을
리며 걸어가는 모습이 못 견디게 귀여웠다 안도는 시치고산 행사에
나선 모녀를 앞지르고 나서도 몇 번이나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앞
으로 li년만 지나면 다카노 마이를 닮은 미인으로 성장할 거라고 상
상하면서 ‥‥
상가와 접해 지어진 7층짜리 아파트 번지와 수첩에 적힌 번지는
일치했다. 깔끔한 꾸밈새지만 밖에서 바라보기만 해도 방이 얼마나
좁을지는 가히 상상할 수 있었다. 집세가관 만큼 방을 많이 만들어
서 입주자를 가득 채워 넣은 것이다
안도는 뒤로 돌아가 관리인실의 벨을 눌렀다. 초로의 관리인이 안
안도는 뒤로 돌아가 관리인실의 벨을 눌렀다. 초로의 관리인이 안
에서 얼굴을 내보이며 작은 창문을 열었다 안도는 이름을 댔다
"아, 어서 오십시오. 다카노 씨 어머니한테 연락을 받았습니다. "
관리인은 열쇠 꾸러미를 찰랑거리면서 관리인실에서 나왔다.
"번거롭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
"아는. 선생님 쪽이야말로 수고 많으십니다. 큰일이라죠?다카노
씨 댁 따님 ."
마이의 어머니에게 어떤 식으로 얘기를 들었는지 모르지만, 안도
는 '예, 뭐' 라고 대충 얼버무리며 관리인의 뒤를 따랐다
엘리베이터 흘 앞의 벽 한면에 늘어서 있는 우편함이 보였다. 잘
살펴보니까 그 중 하나에서 신문이 몇 부 튀어나와 있었다. 마이의
우편함일 거라고 짐작한 안도가 다가갔다. 이름은 생각한 대로 '다카
노' 였다. 4단으로 늘어선 우편함 제일 원단이었다
"아아, 다카노 씨 겁니다 이런 일은 좀체 없습니다만."
안도는 우편함에 억지로 밀어넣은 신문을 꺼내, 한 부 한 부 날짜
를 확인했다 제일 오래 된 것이 11월 8일자 목요일 조간이었다. 그
날부터 헤아려 보면 오늘이 7일째에 해당되었다. 7일 동안 마이는 신
문을 가지러 내려오지 않았다. 마이가 외박을 계속하고 있다고는 도
저히 생각할수 없었다 그녀는 지금 방에 있을 것이다. 다만신문조
차 가지러 나올수없는상태에 빠져 있다· .모든 상황이 그 가능성
을 시사하고 있었다.
"저· 괜찮으십니까'.l"
관리인이 재촉했다. 여차하면 꽁무니를 삘 것 같은 안도를 간파하
고 있는 듯한 말투였다.
"갑시다. "
스스로에게 용기를 불어 넣으며 안도는 관리인의 뒤를 따라 엘리베
이터를 탔다.
안도는 무의식 중에 문에서부터 몸을 떼고 있었다.
‥‥수술용 고무장갑을 갖고 왔으면 좋았을 걸.
후회하고 있었다. 류지를 죽음에 이르게 한 바이러스는 공기로 감
염되는 건 아닐 것이다. 에이즈 바이러스와 마찬가지로 극히 감염되
기 어려운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체 불명인만큼 조심
에 조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었다. 물론 목숨에 미련은 없었다 그러
나 적어도 이번 사건을 해명할 때까지는 죽고 싶지 않았다.
'찰칵' 자물쇠 벗겨지는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안도는 이어
한 걸음 물러났다 하지만 후각만은 문 안쪽으로 집중시켰다. 사체의
냄새에는 익숙했다 11월 보름의 건조한 계절이라고 해도 사체의 부
패 냄새는 상당히 강렬할 것이다. 안도는 자세를 갖추었다. 상상한
대로의 광경이 덮쳐온다고 해도 마음의 동요를 최소한으로 억누를
자신은 있었다
문이 몇십 센티 정도 열리자 방에서 빠져나온 바람이 복도를 향해
불어나왔다. 발코니 쪽 창문이 열린 채로 있는 것 같았다. 안도는 그
바람을 정면으로 받고는 쭈뼛거리며 코로 공기를 들이마셨다. 사체
특유의 냄새는 맡아지지 않았다. 몇 번이고 들이마셨다가 다시 내쉬
어 보았다 역시 썩는 냄새는 나지 않았다. 발치부터 서서히 풀려오
는 안도감 때문에 복도 벽에 손을 대고 몸을 지탱시켰다.
"자, 들어오시죠."
관리인이 문 안쪽에 서서 안도를 들어오라고 했다 현관에 들어서
기만 해도 방 안의 모든 것이 한눈에 들어왔다. 새삼 둘러볼 것도 없
었다. 방 안 어디에서도 다카노 마이는 눈에 띄지 않았다. 예상이 어
긋나 버린 것이다 긴장이 풀렸는지 안도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안도는 신발을 벗고 관리인 앞을 지나 방으로 들어갔다
"대체 어딜 간 거지‥‥‥
등뒤에서 노인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안도는 묘하게 답답한 기분이 되었다. 예상했던 광경을 보지 알게
되었으니 마음을 놓아도 될 텐데 가슴은 계속 방망이질하고 있었다.
방 안에 가득한 기묘한 분위기 그렇지만 안도로선 그 분위기가 어디
서부터 생겨나는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일주일 동안, 마이는 이 집에 없었던 셈이다.
상황으로 봐서 그렇게 결론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대체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일까?
새로운 의문 그 대답이 방 안에 준비되어 있을까?
현관 바로 옆에 욕실이 있었다. 문을 조금 열어 안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다음 안도는 한 번 더 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좁은 방을 합리적으로 사용하려 했던 흔적이 여기저기서 엿보였
다. 이불은 깨끗하게 접혀 방 한구석에 겹쳐 쌓여 있었다. 침대를 놓
을 공간이 없어서 그렇다고는 해도 이불을 넣어 둘 만한 벽장조차 없
는 것이다. 책상 대신에 겨울에는 고타스(조그마한 좌탁 밑에 화로를
넣고 위에 이불을 덮는 형태의 난방 기구 : 역자 주)로 변하는 좌탁이
놓여 있었고,그위에 원고지가 흩어져 있었다 잘못쓴원고지는 커
피잔 받침이 되어 있었다. 잔에는4분의 1 정도의 우유가 남아 있었
다 벽 한면을 메우고 있는 책장· .그 구석에 비디오 비전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다른 전자 제품들도 모두 좁은 방을 고려하여 구입한
것인 듯, 있어야 할 곳에 자리잡고 있는 모습이어서 마치 세트로 마
련한 가구처 럼 멋지게 보였다
좌탁 앞에는 펭귄 무의가그려져 있는 다리 없는 의자가불안정하
게 흔들리고 있었다. 엉덩이 부분에는 깨끗하게 접힌 잠옷이 얹혀 있
었고, 바로 옆에 브래지어와 팬티가 돌돌 말려 있었다.
‥‥젊은 여자의 방이라서 그런가?
아까부터 안도는 아무래도 거북한 기분을 떨쳐 버릴 수가없었다.
숨이 가쁘고,심장의 고동은 격렬했다 그 이유를 마이의 속옷을 보
고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여자의 방을 훔쳐보고 싶어하는 변
태성욕자의 심리를
"어떻습니까, 선생님?"
관리인은 신발도 벗지 않고, 방으로 들어오려고도 하지 않았다 주
인이 없는 걸 눈으로 보고 확인했으니까 빨리 가자고 재촉하고 있는
것이다.
안도는 잠자코 미니 주방으로 갔다. 마룻바닥인데도 두터운 융단
을 밟는 것처럼 한 발 한 발 가라앉아 들어가는 감촉이 느껴졌다. 주
방 앞에 서서 올려다보니 10와트짜리 형광등이 그대로 켜져 있었다.
오후의 햇살 때문에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싱크대에는
유리잔 두 개가 ◎굴고 있었다 수도꼭지를 튼 채로 잠시 내버려 두
자 따뜻한 물이 나왔다. 형광등에 매달린 끈을 당겨 불을 끈 다음 안
도는 주방에서 나왔다. 불이 꺼지는 순간 안도의 몸에 갑자기 소름
이 돋았다
대충 둘러본 것이지만 마이의 행방을 알려 줄 듯한 물건은 방 안
어느 곳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어느 곳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가실까요?"
안도는 관리인의 얼굴을 보지도 않은 채 그렇게 말하고는 신발을
신으면서 현관에서 나왔다. 등뒤로 열쇠를 잠그는 소리가 났다. 신발
을 신기 위해 구부리고 있던 몸을 일으킨 안도는 앞장서서 엘리베이
터 앞으로 걸어갔다.
둘이 나란히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밑도 끝도 없이 올해
여름 자택 아파트에서 목 졸라 살해된 젊은 여성의 사체를 해부했을
때의 광경이 떠올랐다. 사후 열 시간 이상 경과했다고 들었지만, 막
상 해부해 보니 장기에 체온과 같은 정도의 온기가 남아 있어서 꽤
놀랐던 적이 있었다. 인간은 죽게 되면 한 시간에 섭씨 1도 정도씩
체온이 하강한다. 그러나 이 수치는 어디까지나 평균적인 것이고,
기후나 장소에 따라 상당히 차이가 난다. 그렇다곤 해도 열 시간 이
상이나 지난 후에도 체온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은 극히 드문 일
이었다.
엘리베이터가 3층에서 멈추고 안도 앞에서 문이 열리려는 참이었다
"잠간만 기다려 주십시오."
뭔가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면서 이 자리에서 떠나고 싶지 않았다.
마이의 방에 들어섰을 때의 묘한 압박감‥‥ 발을 내디딜 때마다 느
낀, 바닥이 녹아 부드럽게 변하는 것 같은 감촉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 만한 말을 찾아 냈던 것이다.
‥‥사후 열 시간이 지난 사체를 해부하려다가 장기에 온기를 느꼈
던 때의 느낌과 똑같다.
방에 충만해 있던 기묘한 분위기도 그런 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다 열렸는데도 안도는 타려고 하지 않았다. 안도
의 몸이 가로막고 있어서 관리인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안 탈 겁니까?"
안도는 대답하지 않고 거꾸로 되물었다.
"요 일주일 정도, 다카노 마이 씨의 모습을 못 보셨죠?"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1층으로 내려가 버렸다.
"당신도 봤잖아요, 아무 것도· . "
적어도 관리인은 그녀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거의 결석하는 일 없
이 다니고 있던 대학에 일주일 이상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고,몇 번
이나 전화를 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게다가 아파트의 우편함에
는 지난주 목요일 이후로 신문지가 잔뜩 쌓여 있었다. 누가 봐도 분
명했다. 마이는 지난주 목요일 이후로 방을 비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위기· . 그것은 일주일 동안 주인을 잃고 있던 방의
분위기가 아니었다 온기가 남아 있었다. 으레 방에서 느껴지는 정도
의 온도가 아니라, 바로 조금 전까지도 방에 누군가가 있었음을 느끼
게 하는 분위기가 감돌았던 것이다.
"다시 한번 방에 들어가 보고 싶군요 "
안도는 관리인을 돌아보았다 관리인은 약간 놀라는 표정이 되더
니 서서히 곤혹스런 기색을 띄웠다 그리고 그 곤혹스러움은 순식간
에 두려움으로 변했다. 안도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이 노인도 뭔가를 겁내고 있다.
"돌아가실 때 관리인실에 열쇠를 돌려 주시고 가시면 됩니다. "
관리인은 열쇠 꾸러미를 안도에게 내밀었다 다시 한번 보고 싶다
면 마음대로 해라, 난 사양하겠으니까 그렇게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안도는 관리인이 그 방에서 어떤 인상을 받았는지 알고 싶어졌다.
하지만 막상 물어 보면 아마도 대답이 마땅치 않을 것이다. 간단히
표현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미묘한 분위기를
어떻게 설명해 보라고 하겠는가.
"그럼. 좀 빌리겠습니다. "
열쇠 꾸러미를 받아든 안도는 획 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꾸물거리
고 있다간 용기가 瑞일 것 같았다. 도대체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 내
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 그것이 확인되면 바로 떠날 생각이었다.
다시 한번 문을 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문을 열어 두고 싶었다. 그
러나 손을 떼면 문은 자동적으로 닫히게 되어 있었다 문이 닫히는
순간, 공기의 흐름도 딱 멈추었다
안도는 신발을 벗고 창가로 다가가 알루미늄 새시로 된 창을 닫고
레이스 커튼을 최대한으로 열어젖혔다. 오후 3시가 지나자 남향 창문
으로 비스듬히 해가 들어왔다 안도는 햇살을 흠뻑 받으면서 다시 한
번 방 안을 둘러보았다. 방의 분위기는 여성적 이지도 않고 남성적이
지도 않았다. 펭귄 무의의 다리 없는 의자 옆에 앉아 마이의 속옷을
손에 들었다 코끝으로 가져와 향기를 맡고는 일단 떼었다가 다시 코
끝으로 가져왔다. 우유 냄새가 났다. 아들이 아장아장 걸을 무렵 , 속
옷 냄새를 맡았을 때 곧잘 이런 냄새가 났다. 그녀는 아직 남자를 모
르는 몸일까? 순진한 처녀의 냄새는 유아의 그것과 비슷하다.
속옷을 제자리에 놓고 그대로 몸을 반쯤 틀자TV가 눈에 들어왔
다. 붉은 작동 램프가 조그맣게 켜져 있었다. VTR 전원이 켜진 상태
로 있는 모양이었다. 꺼냄 버튼을 누르자 비디오테이프가 삽입구에
서 얼굴을 내밀었다. 하얀 라벨에 타이틀이 기입되어 있었다.
'라이자 미넬리 · 프랭크 시내트라 · 새미 데이비스JR,1989.
여자의 필적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崙은 사인펜으로 조잡하게 쓰
여진 글씨였다. 손에 들고 살펴보니 테이프는 완전히 되감겨 있었다
이리저리 잘 살펴보고 나서 삽입구로 다시 밀어넣었다. 안도는 이 일
련의 사건과 비디오테이프와의 연관성을 떠올리고 있었다. 다카노 마
이한테 들었던 아사카와의 이야기 그리고 아사카와의 차가 추돌했을
때 조수석에 VTR이 실려 있었다는 사실도 잊지 않고 있었다.
안도는 재생 버튼을 눌렀다
불과 2초 내지 3초 정도, 점도 높은 액체에 먹물을 흘려 넣고 휘저
은 것 같은 영상이 떠올랐다. 검게 구불거리는 화면에 빛의 점이 나
타나 명멸을 반복하면서 좌우로 뛰어다니다가 서서히 빛이 팽창해
간다. 짧은 순간이긴 했지만 안도는 불쾌한 기분에 쉽싸엿다. 빛의
점이 어떤 형태를 만들어 보이려 할 때, 영상은 최근 들어 곧잘 나오
는CF로싹 바뀌었다. 강렬한 명암의 대비였다. 암흑이 끊기고 밝은
일상이 얼굴을 내미는 것처럼, 불과 몇 초 사이의 일이었지만 안도는
마음을 놓으면서 어깨의 힘을 ◎다.
이어지는 것은 연속해서 흐르는 광고. 빨리 감기를 해서 CF를 건
너뛰어 보니 일기 예보가 시작되었다. 웃는 얼굴의 여성이 일기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다시 빨리 감기를 했다. 모닝쇼로 보이는 세트. 장
면이 바뀌어 마이크를 손에 든 리포터가 배후의 lIft카메라를 향해
떠들면서 멀어져 간다. 연예인의 이혼 소식을 알리고 있는 모양이었
다. 계속 빨리 감기를 해 봤지만 제목에 들어맞을 만한 음악 방송 영
상은 나오지 않았다 한 번 녹화했던 테이프 위에 다시 녹화를 한 것
이리라.
보고 있는 동안 안도의 몸에서 긴장이 풀렸다. 프랭크 시내트라나
라이자 미넬리의 쇼가 아닌 뭔가 좀더 무서운 영상이 나오는 게 아닐
까 하고 걱정하면서 두려워하고 있었는데, 앞부분에서 잠간 나오는
것말고는 예상을 뒤엎고 매우 진부한 I∼ 방송이 비춰질 뿐이었다
모닝쇼가 끝나자 이번에는 사극의 재방송이 시작되었다. 안도는 테
이프를 멈추고 되감기를 했다. 맨 앞쪽에 있었던 일기 예보를 다시
한번 보기 위해서였다.
일기 예보의 처음 부분에서 재생 버튼을 눌렀다. 여자 목소리‥‥
"그럼 11월 13일 화요일의 날씨를 보겠습니다·.. "
안도는 거기서 일시정지 버튼을 눌러 영상을 정지시켰다.
‥‥11월 13일이ㄹRL?
오늘이 11월 15일이니까, 비디오테이프는 그저께 아침에 녹화된
것이다. 대체 누가 녹화 버튼을 누른 것일까?
· .그저께 아침 , 마이가 이 방에 있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우편함에 처박힌 신문 다발이 설명되지 않았다. 단순한
건망증?
‥‥아니면.
안도는 VTR 앞면의 平껑을 열고 예약 녹화 데이터가 남아 있는지
를 체크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일주일 전 마이가 이 방에서 나갈
때, 예약 녹화 타이머를 그저께 아침으로 맞춰 두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그때 어디선가 똑똑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안도는 그 자
리에 주저앉은 채 얼굴을 들어 주방의 수도쪽지로 눈을 돌렸다. 하지
만 물방울은 떨어지지 않았다. VTR을 그대로 두고 일어나 현관 옆의
욕실을 들여다보았다.
문은 아까 들여다보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조금 열려 있었다. 안도
는 욕실 전등을 켠 다음 문을 활짝 열려고 했다. 그런데 변기에 걸려
반 정도 열리다가 멈춰 버렸다. 그 틈으로 상반신을 밀어넣었다. 무
릎을 접어야 겨우 들어갈 정도의 작은 욕조 안쪽으로 나일론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 커튼을 바깥쪽으로 걷어 내고 욕조 안을 보았다.
천장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면서 '똑' 하는 소리를 냈다. 욕조 바닥에
물이 고였다. 안도는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다시 물방울이 떨어지면
서 욕조의 수면을 약간 흔들었다. 바닥에 10센티 정도의 깊이로 고인
물은 일부분에 소용돌이 같은 움직임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표면으
로 떠오른 가느다란 머리카락 몇 가닥이 뒤엉키며 물의 움직임에 따
라서 회전하고 있었다.
상반신을 구부려 욕조 안쪽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살펴보았다. 등
글고 검은 배수구의 뚜껑이 뽑혀 있었다. 안도는 그 의미를 재빨리
알아채지 못했다. 배수관 안에 비누나 머리카락이 꽉 차 있어서인지
물이 빠져나가는 속도가 굉장히 느렸던 것이다 그렇긴 해도 가만히
물의 선을 관찰하고 있자니, 그것이 서서히 하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안도는 그제야 겨우 깨달았다. 동시에 의문이 떠올랐다.
‥‥도대체 누가 이 平껑을 뽑은 거지?
관리인이 아님은 분명했다. 그는 신발도 벗지 않은 채 현관에 서서
한 걸음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면 대체 누가?
안도는 욕실 안으로 한 걸음 들이밀고는 몸을 구부렸다. 머뭇거리
안도는 욕실 안으로 한 걸음 들이밀고는 몸을 구부렸다. 머뭇거리
며 솔을 뻗어 물을 만져 보았다. 약간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완전히
식지 않았던 것이다. 몇 가닥의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휘감겨 왔다.
그때의 감각과 똑같았다 사후 열 몇 시간이 경과했지만 여전히 온기
가 남아 있던 사체에 손을 찔러 컬었을 때의 느낌· , 일주일 동안 아
무도 없었을 방에서, 한 시간쯤 전에 누군가 욕조에 더운 물을 채우
고 충분히 환기시킨 다음, 바로 조금 전에 뚜껑을 뽑은 것이다
안도는 서둘러 손을 빼고 바짓자락에 묻은 물기를 닦았다.
변기 맞은 편,화장지 바로 아랫부분에 갈색의 오물이 눈에 띄었
다 대변은 아니었다 위에서 토해낸 토사물인 듯,미처 소화되지 않
은 음식물이 엷은 막으로 뒤덮인 채 남아 있었다. 홍당무 같은 붉은
고형물이 흐물거리고 있었다.
· .마이가 토한 걸까?
안도는 좁은 욕실에 한쪽 발만 들여놓은 자세로 웅크리고 있었는
데, 토사물의 내용을 확인하려고 좀더 가까이 다가앉으려다가 그만
균형을 잃고 변기 가장자리에 뺨을 부딪히고 말았다. 讀은 크림색 변
기가 뺨으로 깊숙이 파고들어 와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것을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순간, 등뒤에서 웃음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안도는 비명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으면서 꼴사나운 모습 그대
로의 상태에서 몸의 움직임을 멈췄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훗,후후' 하고 등뒤의 아주낮은 위치
에서 소리가 났던 것이다 땅에서 솟아올라오는 듯한‥‥ 바로 그런
느낌이었다 지면에서 줄기를 뻗어 꽃을 피우는 식물처럼 밑바닥으
로부터 웃음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안도는 몸을 경직시키고 숨을
죽였다.
이어서 '킥' 하는 웃음소리가 또 들렸다. 역시 환청이 아니었다.
농밀한 기척도 느껴졌다. 분명 등뒤에 누군가가 있었다. 안도는 돌아
보기는커녕 미동조차 할 수 없었다. 지금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
이 서지 않았다. 매끈매끈한 감촉의 변기에 얼굴을 꽉 누른 채 전리
인 아저씨, 거기 있어요?' 하고 아주 얼빠진 소리를 외쳐 보았지만,
목소리의 떨림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욕실 바깥쪽에 내놓고 있던
발에서 공기의 흐름이 느껴졌다. 뭔가 이동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바
짓자락과 홀러내려온 양말 사이로만 피부가 노출되어 있었는데, 그
곳으로 뭔가가 와닿는다 미끈미끈한 감촉을 남기며 그것은 옆으로
비스듬히 이동해 갔다. 하반신을 움츠리며 안도는 자기도 모르게 비
명을 지를 뻔했다. 방에 숨어 있던 고양이가 아킬레스건 부근을 한은
것에 불과하다‥‥ 그렇게 스스로를 납득시궈 보려 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몸 전체의 오감이 벌써 알아채고 있었다. 그런 것이 아니
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것이 바로 등뒤에 있다고 알려주었다.
얼굴이 욕조 가장자리보다 아래로 내려와 있었으므로 안을 들여다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바닥에 고인 물이 다 빠져나가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스르르르르 미끄러지듯 소용돌이치면서 머리카락과 함께
배수관으로 물이 삼켜 들어가는 소리가 戒다. 그 소리에 겹쳐지듯 바
닥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물이 천천히 멀어져 가는 소리였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안도는 소리를 질렀다. 의미도 없이 그저 신
음하다가 고함치 면서 무릎으로 욕실 문을 차면서 쿵쿵 소리를 갰다.
그러다가 손잡이를 눌러 변기의 물을 내렸다. 그렇게 혼자 만들어 낸
떠들썩함에 용기를 얻어 서서히 자세를 바로잡아 갔다. 손으로 상반
신을 버티고 일어나 직립에 가까운 자세로 등뒤의 낌새를 엿보았다.
돌아보지 않고 방 밖으로 나가는 방법이 없을까 하고 안도는 진지하
게 궁리했다. 무수하게 많은 가느다란 거미가 등을 기어가고 있는 것
처럼 목덜미에 소름이 돋아 있었다.
한 발 한 발 됫걸음질치다가 발꿈치에 아무 것도 닿지 않는 걸 확
인하고 나서 단숨에 방향을 틀어 문의 손잡이를 돌려 복도로 뛰어나
왔다. 벽에 부딪힌 어깨의 고통을 참으면서 저절로 닫혀 가는 문을
곁눈으로 확인했다.
거칠게 숨을 내뱉으며 안도는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열쇠 꾸러미가 찰랑찰랑소리를 냈다. 방에 두고 오지 않
아 참으로 다행이라고 안심했다. 두 번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저 방에는 틀림없이 뭔가가 있다. 방의 세세한 부분까지 안도는 정확
히 떠올릴 수 있었다. 숨을 장소 같은 건 아무데도 없었다 겹쳐서 쌓
아 놓은 이불. 폭도 좁고 깊이도 없는 붙박이장. 어디에도 숨을 장소
같은 건 없었다. 어지간히 조그만 생물이 아닌 한‥‥
계절에 걸맞지 않은 모기가 귓가에서 날고 있었다. 뿌리쳐도 뿌리
쳐도 귀찮게 윙윙거리고 있었다. 안도는 힘없이 기침을 하고는 주머
니에 두 손을 찔러 넣었다. 갑자기 온몸에 한기가 드는 것 같았다. 엘
리베이터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너무 늦는 것에 초조
해하면서 위를 올려다보자, 1층에서 정지한 채 움직이지 않고 있었
다. 그러나 별다른 일은 아니었다. 버튼 누르는 것을 잊고 있었던 것
이다. 두 번 세 번 다짐하듯 버튼을 누른 안도는 손을 다시 주머니에
찔러넣었다.
"어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미야시타가 어깨를 두드렸을 때에야 비로소 안도는 멍하니 넋을
잃고 있는 자신을 깨달았다. 불과 두 시간쯤 전에 맛보았던 감각이
해일처럼 전신을덮쳐와의식을송두리째 쉽쓸어 버리려 했다. 필사
적으로 저항해 보아도 피부에 소름만 돋을 뿐, 열심히 떠들고 있는
미야시타의 말이 토막토막 끊기는 형태로밖에는 뇌리에 와닿지 알
았다.
"야! 너 듣고 있는 거야?"
미야시타는 초조한 듯이 목소리를 거칠게 냈다.
"응? 어어, 듣고 있어 ."
마음이 딴 곳에 있는 듯한 표정의 안도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뭔가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으면 말해 봐."
미야시타는 테이블 아래에서 등근 의자를 끌어내,자신의 두 발을
가뿐하게 얹었다 안도의 연구실임에도 그는 마치 제 방인 양 마음대
로 행동했다.
지금 법의학 연구실에 있는 사람은 안도와 미야시타뿐이었다. 창
밖이 완전히 어두워졌다고는해도아직 시간은6시 전이었다 다카노
마이의 아파트에서 뭐라고 말하기 힘든 불쾌한 느낌을 경험했던 안
도는 대학 연구실에 돌아오자마자 미야시타가 찾아오는 바람에 마음
의 평정을 되찾을 사이도 없이 아까부터 바이러스에 관한 얘기를 듣
고 있었다.
"특별히 마음에 걸리는 건 없어 "
마이의 방에서 체험했던 것을 미야시타에게 얘기할 마음은 없었
다. 표현하려고 해도 마땅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멋진
비유가 생각나지 않았다. 방중에 화장실에 서 있을 때, 누군가 등뒤
에 서 있는 듯한 착각이라고 말하면 될까? 일단 그 기척을 느끼게 되
면 돌아봄으로써 환상을 쫓아 낼 때까지는 공상 속의 괴물이 계속 커
져만 가게 마련이다. 하지만 안도가 느낀 것은 그런 평범한 느낌이
아니었다. 마이의 방 욕실에서 균형을 잃고 변기에 帶을 꽉 눌렸을
때,틀림없이 배후에는 뭔가가 있었다. 공상의 산물이 아니었다. 높
은 웃음소리를 내는 그 어떤 것 결코 겁쟁이라고 할 수 없는 안도가
차마 돌아볼 수조차 없었던 것이다
"오늘, 특히 안색이 안 좋아."
미야시타는 그렇게 말하면서 횐 가운으로 안경 렌즈를 닦았다.
"요즘 수면이 부족해· . . "
거짓말은 아니었다. 안도는 최근 밤중에 잠을 깬 다음 다시 잠들지
못하는 경 우가 많았다.
"뭐 , 괜찮아지겠지 . 어쨌든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되묻지 말라구 말
할 때 기분을 잡치는 건 너도 싫겠지?"
"미안해 ."
안도는 순순히 사과했다.
"아무튼, 얘길 계속 진행해도 되겠냐?"
"응 부탁해 계속해 줘."
"그런데 그 요코하마에서 해부한 두 구의 사체에서 발견된 바이러
스 말인데‥‥‥
"천연두 바이러스와 똑같은 거 말이지?"
안도가 끼여들었다.
"그래 , 그거야."
"겉모양이 비슷했던 건가?"
미야시타는 테이블 위를 손으로 가볍게 쳤다 약간 질린 얼굴로 물
끄러미 안도의 눈을 들여다본다.
"역시 안 듣고 있었잖아? 아까 말했잖아? DNA 자동 분석 장치에
걸어서 새로 발견된 바이러스의 염기 배열을 분석했다구.그리고 컴
퓨터에도 걸었어 그랬더니 어땠겠냐? 라이브러리에 보관되어 있는
천연두 바이러스의 것과 거의 겹쳐졌어‥‥‥
"천연두하고 똑같다는 건 아니군."
안도는 확인했다.
"그래. 7할이 똑같다는 얘기야."
"나머지 3할은?"
"놀라지 마라. 효소를 가지고 있는 유전자의 염기 배열과 일치해."
"효소? 어떤 생물?"
"인간이야."
"농담이 겠지 ."
"믿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그치만사실이야 동종의 다른
바이러스는 인간의 단백질 유전자를 포함하고 있었어, 결국 새로 발
견된 바이러스는 천연두 유전자와 인간 유전자로 이루어져 있는 거
야."
천연두는 DNA 바이러스일 것이다 레트로 바이러스라면 인간의
유전자를 받아들인 것이 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역전사
효소(逆轉寫難素)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통 역전사효소를
갖고 있지 않은 DlfA 바이러스가 어떻게 인간의 유전자를 자신의 체
내로 받아들인 것일까‥‥
안도는 그 과정을 설명해 낼 수가 없었다. 게다가 어떤 바이러스는
효소, 어떤 바이러스는 단백질이라는 형태로 제각각 잘라 낸 상태로
인간의 유전자를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 마치 인간의 육체를 수십만
개의 부속품으로 분해한 다음 그 한 개 한 개를 바이러스가 분담해서
보유하고 있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류지의 몸에서 발견된 바이러스도 똑같은 거야?'
"겨우 거기까지 얘기가 진행된 셈이군. 댕동 보관되어 있던 류지의
혈액에서도 바로 요전날 거의 같은 바이러스가 발견되었어."
"역시 천연두 바이러스와 인간의 혼성 부대인가?"
"거 의 ,"
"거의 ?"
"거의 같기는 해.그런데 극히 일부에 동일 영기 배열의 반복이 보
여"
"마치 긴타로 엿(어느 부분을 자르든 그 단면에 붉고 살찐 얼굴의
긴타로가 나타나도록 만든 엿가락 : 역자 주)처럼 어느 부분을 잘라
내도 40 염기 정도의 반복이 집요하게 나오고 있어."
안도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알았냐? 요코하마에서 해부한 두 구의 사체에는 그런 게 없었어 ."
"그럼 결국 요코하마의 두 구에서 발견된 바이러스하고, 류지의 혈
액에서 발견된 바이러스가 미묘하게 다르다는 얘기냐?"
"그래. 비슷하긴 하지만 아주 약간 달라 뭐, 다른 대학들의 데이터
는 모아지지 않아서 뭐라고 단정지어 말할 수 없는 단계지만 "
그때, 책상에 나란히 놓인 세 개의 전화기 중에서 제일 끝에 있던
것이 울렸다. 미야시타는 ◎' 하고혀를찼다
"이번에는 전환가?"
"잠간 실례."
안도는 일어나 수화기를 들었다.
"예 , 여보세요."
'街신문사의 요시노라고 합니다만, 안도 선생님 계십니까?"
"접니다만."
'법의학 강사이신 안도 선생님이 맞죠?"
요시노라고 이름을 댄 사내는 다시금 확인을 해 왔다.
"예 , 그렇습니다. "
"지난달 20일, 도쿄 검시 원에서 다카야마 류지 씨의 해부를 맡으
신 게 선생님인지 궁금해서 전화드렸습니다. 맞습니까?"
"예 , 제가 집도했습니다 "
"그렇습니까? 실은 말이죠, 그 건으로 여쭙고 싶은 말이 있는데 시
간 좀 내주시겠습니까?"
"아· ."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자, 미야시타가 귓가에서 속삭
였다.
"누구Ot?"
안도는 수화기의 송화구를 손으로 누르며 대답했다.
漸신문사 기자야."
곧바로 수화기를 원래대로 되돌려 놓고 안도가 되물었다.
"어떤 용건이신가요?"
"이번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에 관해 선생님의 의견을 여쭙고 싶어
서요‥‥‥
안도는 일련의 사건이라는 표현에 적잖이 놀랐다. 매스컴에서 벌
써 냄새를 맡은 것일까? 사정이야 어떻든 너무 빠른 것 같다는 기분
이 들었다. 해부를 담당한 의 학부에서조차 불과 2주일 전에야 이전의
변사 사건과의 연관성을 발견한 참인데.
"일련의 사건이라면‥‥‥
안도는 시치미를 떼고 상대가 어느 정도 알고 있는지 떠보았다
"다카야마 류지 씨를 비롯해서 오이시 도모코,쓰지 요코, 이와다
슈이치 , 노미 다케히코, 거기에다가 아사카와의 아내와 딸 등 일련의
변사 사건 말입니다. "
대체 어디에서 정보가 샌 것일까? 안도는 여우에 홀린 듯한 기분
으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선생님 , 어떠십니까? 만나 뵐 수 있을까요?"
안도는 머리를 회전시켰다. 정보는 반드시 많은 쪽에서 적은 쪽으
로 흐르는 법이다. 만일 요시노라는 신문 기자가 이번 사건에 관해서
보다 많은 정보를 쥐고 있다면 그것을 듣지 않을 수 없다. 이쪽의 속
셈을 모두 내보일 필요는 없다. 비밀은 유지한 채 상대로부터 필요한
정보만 얻으면 된다.
"알겠습니다 만납시다. "
"언제가 좋으십니까?"
안도는 수첩을 펼쳐 스케줄을 확인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죠? 내일이라면 정오부터 두 시간 정도 비
어 있습니다. "
잠시 사이를 두었다. 요시노도 스케줄 조정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
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12시 정각에 연구실로 찾아뵙겠습니다. "
안도와 요시노는 거의 동시에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뭐래?"
미야시타가 가까이 다가와 안도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신문 기자야."
"그래, 뭐라는 거야?"
"만나고 싶대 ."
"너를?"
"응. 듣고 싶은 게 있는 모양이야."
"흠 "
미야시타는 생각에 잠겼다.
"저쪽은 이미 모두 알고 있는 것 같아."
"알 수 없군, 관계자 중 누군가가 정보를 흘렸다는 얘긴가?"
"글쎄, 그것도 내일 만났을 때 물어 보지."
"쓸데없는 말은 떠들지마 "
"알고 있어 ."
"특히 바이러스에 관계된 건 "
"그래 만일 상대가 아직 모르고 있다면 말야."
안도는 그때 문득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아사카와도 요시노와 마
찬가지로M신문사의 기자였음을.두사람이 아는 사이로 이 사건에
깊숙이 개입되어 있다면 내일 정오엔 재미있는 정보를 듣게 될지도
모른다. 안도의 호기심은 점차 부풀어 갔다.
요시노는 아까부터 몇 번이나 물컵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잔
을 쥐려는 시능을 하다가는 다시 손목시계로 눈길을 떨구었다. 다음
약속이 있는지 시간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미안합니다. 잠깐 실례 하겠습니다. "
요시노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천
카페의 테이블사이를 빠른 걸음으로 빠져나간 그는 계산대 옆의 공
중전화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수첩을 펼치고서 분주하게 버튼을
누르는 모습을 보고 있는 동안, 안도는 이제야 겨우 한숨 돌리게 되
었다는 표정으로 의자 등받이에 몸을 맡겼다
12시 정각에 대학의 연구실로 찾아온 요시노를 역 앞의 노천 카페
로 데리고 나온 것은 한 시간 전이었다. 테이블 위에는 아직 그의 명
함이 얹혀 있었다.
街신문사 요코스카 지국 요시노 겐조.'
그 요시노에게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얘기를 들은 안도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거의 일방적으로 떠들면서 안도의 머리에 의문만을
심어 둔 채, 요시노는 자리에서 일어나 지금 어딘가로 전화를 걸고
있었다.
요시노의 말에 따르면 일련의 사건이 벌어진 발단은 8월 29일 밤,
이즈 반도의 경계 부분에 위치하는 리조트 클럽, 미나미하코네 퍼시
픽랜드의 대여 별장-빌라로그캐빈인 것 같았다. 빌라로그캐빈 B-4
호에 숙박했던 네 명의 남녀가 어떤 여자의 염력에 의해 녹화된 비디
오테이프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비디오테이프를
본 사람은 정확히 일주일 후에 죽을 운명에 처하고 만다니· .
아무리 생각해 봐도 황당무계함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요시노
는 '아마도 염사(念寫, 정신 능력만으로 필름이나 인화지에 화상을
새겨 넣는 초능력 ' 역자 주) 같은 것이겠죠' 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
해 버렸지만, 비디오테이프에 영상을 염사하는 일 따위는 절대로 불
가능하다. 하지만 어떨까· .해부 후 류지의 배에서 튀어나온 신문
지 한귀퉁이에 늘어선 숫자나, 마이의 방에서 경험한 이상한 분위기
토 다른 사람에게 말한다면 황당무계한 것이 되어 버리지 않을까?
실제로 체험하는 것과 남에게 간접적으로 듣는 것은 분명히 현실감
의 정도가 다르다. 적어도 요시노는 이번 사건에 직접적인 연관을 갖
고 그 근거를 토대로 해서 말하고 있었다. 요시노는 사건을 직접 조
사한 아사카와 가즈유괴와 다카야마 류지의 배후에서 뒷받침을 했던
것이다. 그의 말은 그 나름대로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기다리게 해서‥‥‥
요시노는 자리로 돌아오자마자 수첩에 뭔가를 적고는 수염으로 뒤
덮인 뺨을 펜 끝으로 찔렀다. 아무리 보아도 너무 뻣뻣해 보이는 수
염이었다. 雲어지기 시작한 머리숱을 커버하려는 것처럼 뺨에서부터
턱에 걸쳐 수염을 길게 드리우고 있었다.
"어디까지 얘기했죠?"
요시노는 그렇게 말하며 수염 부분을 앞으로 내밀어 왔다. 말투에
는 붙임성이 묻어 있었다.
"다카야마 류지 가 응한 부분까지 입니다. "
"실례합니다만, 다카야마 씨와 선생님은‥‥‥
"동창입니다, 대학 시절."
"그렇죠? 그렇게 들었습니다. "
충분히 조사한 뒤에 연락을 취해 온 것이다‥‥ 안도는 그렇게 이해
했다.
"그런데 요시노 씨는 보셨습니까. 그 테이프를?"
안도는 아까부터 마음에 걸리던 의문점에 대해 물어 보았다.
"설마 "
요시노는 동그란 눈을 더 동그랗게 떴다.
"만일 致다면, 저도 지금쯤 이미 해부되었을 겁니다. 그걸 볼 용기
같은 건 전혀 없었습니다. "
요시노는 조금 웃어 보였다
안도는 이전부터 어렴풋이 비디오테이프가 일련의 변사 사건과 연
관이 있을 것 같다고 짐작해 왔다. 그렇지만 정확히 일주일 후에 영
상을 보았던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비디오테이프가 있으리라곤
생각조차 못했다. 안도는 아직까지도 믿겨지지 않았다.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아마 직접 영상을 보고 일주일 후에 죽음이 찾아오는
그 순간이 되지 않는 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았다.
요시노는 시간이 지나서 식은 커피를 천천히 입으로 가져갔다. 시
간에 여유가 생겼는지 , 상대편을 재촉해 대는 듯한 동작이 사라졌다.
"그럼 왜 아사카와 씨는 살아 있는 겁니까? 아사카와 씨도 테이프
의 영상을 봤죠?"
안도의 어조에는 이 모든 것을 무시하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 있었
다. 혼수 상태에 빠져 있다고는 해도 아사카와는 아직 살아 있다. 그
점이 안도로선 납득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바로 그 점입니다, 제가 의문을 갖고 있는 게."
요시노는 이어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뭐 , 본인에게 묻는 게 제일이겠다 싶어서 아사카와가 입원중인 병
원에 갔었습니다. 하지만 그 상태에서 전혀 진전이 없어서요."
요시노 역시 시나가와 재생 병원까지 면회를 갔던 모양이다. 그리
고 의사 소통이 불가능한 아사카와를 보고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 "
요시노는 무슨 생각이 떠오른 듯, 상대에게 기대감을 갖게 하는 말
투로 입을 열었다
"아마도?"
"알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만 손에 넣으면‥‥‥
"그거 , 라뇨?"
"아사카와는 주간지 기자입니다. "
안도는 뭐라고 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른 방향으로 얘기가
퉁겨나가 버린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예, 알고 있습니다 "
"그 녀석한테 들었습니다. 이번 사건에 대한 적나라한 리포트를 작
성중이라구요. 그 친구는 특종을 손에 넣기 위해 사건을 쫓기 시작한
거니까요. 아사카와는 류지와 손잡고 비디오테이프의 수수께끼를 풀
기 위해 이즈 오시마와 아타미까지 조사하러 다녔죠. 그리고 그때 분
명 뭔가를 포착했을 겁니다. 조사했던 내용은 틀림없이 문서가 되어
디스켓에 보관되어 있을 겁니다. "
단숨에 말하고 난 요시로는 안도에게서 시선을 돌려 옆얼굴을 보
였다.
"그렇군요."
요시노는 시선을 되돌려 자못 후회스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디에 있는지 , 방에선 발견되지 않았고· . . "
요시노의 시선은 먼 곳에서 헤매고 있었다.
"방이라뇨?"
아사카와는 입원중이고 아내와 딸은 죽어 버렸다. 지긍 그의 아파
트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몰래 방에 들어가 뒤져 보기라도 했다는
걸까?
"뭐 , 그런 곳의 관리인 따윈 그럴싸한 말만 만들어 내면 바로 예비
열쇠로 열어 주니까요."
바로 그저께, 마이의 신변이 걱정된 나머지 안도도 같은 짓을 하고
난 직후였다. 그래서 요시노의 행위를 비난할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
았다. 목적이 다르다고는 해도 주인이 없는 방을 뒤졌다는 행위는 똑
같은 것이다
요시노는 자꾸만 안타까움이 앞서는지 계속 혀를 찼다.
"구석구석까지 다 찾아봤지만 아무데서도 발견되지 않았어요. 노
트북도, 디스켓도‥‥‥
방정맞게 무릎을 떨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요시노는 서둘러 무릎
에 손을 얹으며 일부러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안도의 뇌리에 아사카와의 사고 현장사진이 다시금 차례로 스쳐
지나갔다. 그 중의 한 장, 운전석 쪽에서 차 안의 앞쪽을 찍은 사진에
는 조수석 시트에 깔린 VTR같은 물체가 찍혀 있었다. 그리고 조수
석 발밑에는 노트북 비슷한 물체가 ◎굴고 있었다 두 개의 검은 물
체가 강렬한 임펙트로 안도의 뇌리에 남아 있었다. 지금, 그곳에서
영감이 이끌려 나왔다.
안도는 요시노가 보는 시선과는 다른 쪽인 전철역에서 흘러나오는
인파를 보는 척하면서 열심히 생각의 나래를 펼쳤다.
‥‥난 일련의 변사 사건이 상세히 담긴 문서를 발견할지도 모른다
요시노 정도 되니까 아사카와의 방을 자세히 수색했겠지만, 방에
는 노트북도 디스켓도 없었다고 한다 요시노는 모르고 있다. 아사카
와가 마지막에 있었던 장소‥‥ 즉 사고를 일으킨 자동차 조수석에 그
것이 놓여 있었다는 사실을.
안도는 자신이 디스켓을 손에 넣을 수 있겠다는 확신이 서서히 차
올랐다. 하지만 요시노에게 털어놓을 생각은 없었다. 손에 넣었다고
해도 언론 쪽 사람에게 건네느냐 아니냐는 내용에 따라 생각이 달라
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현재 일곱 구의 변사체에서 모두 천연두와 흡사한 바이러스가 발
견되었다고 한다 학회에 발표된 것은 물론이고 5대학과 요코하마의
Y대학을 중심으로 연구회 발족 움직임마저 보이는 시점이다 이럴
때 함부로 언론이 떠들어 댄다면, 정체 불명의 바이러스인만큼 어떤
혼란을 일으킬지 모르는 일이다. 신중하게 일을 진행시키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벙할 수도 있다.
그 후, 요시노는 상투적인 질문을 던져왔다. 해부 결과는 어떤 것
이었는지, 사인은 판명되었는지 , 지금 자신이 얘기한 내용과 해부 결
과를 비교할 때 뭔가 새로운 발견이 있었는지‥‥
안도는 어떤 질문에도 될 수 있는 한 정중히 , 그러나 다른 일의 진
행에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만 대답해 주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
의 의식은 불쑥불쑥 다른 방면으로 튀어가 버리기 일쑤였다. 지금 당
장이라도 디스켓을 손에 털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걸 입수하
려면 일단 어떻게 하는 게 제일 좋을까, 그것만 궁리하고 있었던 것
이다.
이튿날은 토요일이었다 안도는 검시 원에서 두 구의 사체를 해부
한 뒤, 마침 그 자리에 있던 젊은 경사를 잡고 사고 차량의 처리 방법
에 대해 물었다. 가령 수도 고속도로의 오이 인터체인지 출구 부근에
서 사고가 났을 경우 부서진 차량은 어떻게 취급되는가·
"글쎄요, 우선 현장 답사를 합니다. "
안경을 써서 올곧아 보이는 젊은이는 그렇게 대답했다. 몇 번인가
본 적이 있는 얼굴이긴 해도 정작 말을 나누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나서는요?"
"차를 소유주에게 돌려줍니다. "
"렌터카인 경우는요?"
"그야 물론 렌터카 회사로 돌려 보내겠죠."
"그럼 이런 경우는 어떻게 하나요? 타고 있던 사람은 젊은 부부와
딸, 세 사람이에요. 아, 이 가족은 시나가와 구의 아파트에서 셋이서
만 살았습니다. 아내와 딸은 사고로 그 자리에서 죽고, 남편은 중상
을 입고 병원으로 실려갔죠. 그렇다면, 사고 처리 후 차 안에 남겨진
물건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관할 경찰서의 교통과가 일시적으로 보관하게 됩니다 "
"오이에서 사고를 일으켰다면, 관할은 어디죠?"
"출구 부근입니까?"
"음, 그래요. 출구 부근."
"아니, 수도 고속도로는 안이냐 밖이냐에 따라 관할이 달라집니
다. "
안도는 사고 현장의 사진을 떠올렸다. 틀림없이 사고를 일으킨 것
은 수도 고속도로상이었다 도쿄 만의 해저 터널 입구‥‥어떤 파일
에선가 그런 기록을 본 기억이 났다.
"수도 고속도로상이 던가?"
"그렇다면 수도 고속도로 교통경찰대겠네요."
안도로선 처음 듣는 명칭이었다
"어디에 있나요?"
"신토미초입니다. "
"알겠습니다. 그럼 짐은 일단 거기에 보관한다, 그리고 나서는 어
떻게 되죠?"
"가족들에게 연락을 취해서 가지러 오도록 합니다. "
"그러니까 가족이 모두 죽어 버렸다고 하면‥‥‥
"입원한 남자의 친형제까지도 말입니까?"
아사카와의 부모나 형제에 관해서 안도는 아무런 정보도 갖고 있
지 않았다. 나이로 볼 때 아사카와의 부모는 생존할 확률이 높다. 그
렇다면 차에 남겨진 짐은 아사카와의 부모에게 인도될 가능성이 높
아진다. 아사카와와 류지는 고등학교 등창이었다. 류지의 본가가 사
가미오노 부근이니까 아사카와의 본가도 아마 그 근처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어쨌든 우선은 아사카와의 본가가 어디인지를 조사해서 연
락을 취하는 게 급선무일 듯싶었다.
"알겠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
안도는 젊은 경사를 해방시켜 주고는 곧바로 아사카와의 본가 연
락처를 조사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아사카와의 부모는 예상대로 모두 생존했고, 주소는 자마 시의 구
리하라인 것으로 밝혀졌다. 전화를 걸어서 아사카와의 자동차에 남
겨진 물건의 행방을 묻자 부친은 쉰 목소리로 도쿄 간다의 아파트에
사는 장남의 이름을 댔다. 아사카와는 3형제 중 막내로 위로는 종합
출판사인 5출판의 문예서 적부에 근무하는 장남과 중학교 국어 교사
인 차남이 있었다. 부친은 분명 경찰로부터 연락을 받고, 보관하고
있는 짐을 찾아 가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가
지 않고,간다에 사는 장남의 이름을 알려 주었단다. 수도 고속도로
교통경찰대가 있는 신토미초와 간다가 가깝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칠순이 넘은 노령이어서 아무래도 VTR이나 노트북을 가져올 형편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장남에게 물건을 건네 주라고 시키고 경
찰에서 온 전화를 끊었던 것이다.
다음에 안도가 연락을 취한 사람은 물론 간다의 아파트에서 아내
와 함께 사는 아사카와의 형, 아사카와 준이치로였다 밤이 돼서야
겨우 전화가 연결되자 안도는 단도직입적으로 사실을 털어놓았다.
섣불리 숨기거나 거짓말을 꾸며 대서 준이치로의 기분을 상하게 했
다가 디스켓을 손에 넣지 못하면 곤란하다. 그렇다고는 해도 요시노
에게 들은 얘기를 그대로 전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안도 자신도
거의 믿기 어려운 내용을 그대로 지껄였다가는 제절신이 아니라고
의심받기 십상이다. 그 부분은 적당히 생략하고, 아사카와가 사건 해
명의 단서가 될지도 모르는 귀중한 문서를 남겼을 가능성이 충분하
다는 것만을 강조했다 그리고 검시의로서 그 문서를 꼭 손에 털고
싶으니 복사해 줄 수 없겠느냐고 정중히 말을 꺼냈던 것이다.
"하지만 물건 속에 정말 그런 게 있는지 어떤지는‥‥‥
준이치로는 믿을 수 없다는 식으로 중얼거렸다. 어조로 볼 때 자신
이 맡고 있는 물건을 아직 확인하지 않은 듯했다.
"노트북은 있었습니까?"
안도가 물었다
"있습니다. 근데 아마 부서졌을 겁니다. "
"그 안에 디스켓이 들어 있는 채였나요?"
"글쎄요, 거기까지는 미처 못 봤습니다. 실은 상자에 넣어 가지고
온 그대로여서 내용물을 제대로 보지 않았어요."
"저‥‥ 그것하고 I~rR도 함께 있지 않던가요?"
"있었습니다. 하지만 버렸는데요‥‥ 뭐가 잘못됐나요?"
"버려요?"
안도는 숨을 멉추었다.
"업무상 노트북을 가지고 다니는 건 이해하겠는데, 왜 차에 VfR
같은 걸 싣고 있었던 건지·.. "
"버렸다고 하셨습니까?'
"예 완전히 부셔졌거든요. 바로 얼마 전에, 못 쓰는 TV를 내놓을
때 같이 가져가도록 했습니다. 수리해도 사용할 수 없을 정도였거든
요. 가즈유키도 뭐라 하지 않을 겁니다. "
실은 두 마리의 사냥감이 한꺼번에 걸릴 뻔한 일이었다. 그런데 한
마리는 그만 놓치고 말았다 변사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는 비디오테
이프 역시 VfR에 삽입된 채였다면‥‥ 잘하면 비디오테이프와 디스켓
양쪽을 동시에 손에 넣을수도 있는 일이었다. 좀더 빨리 연락을취
했다면‥‥ 안도는 후회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erR말고 비디오테이프는 없었습니까?"
안도는 기도하는 심정으로 물었다.
"모르겠네 요. 노트북하고 VfR하고, 그리고 나머지는 검은 여행용
가방이 둘. 여행용 가방은 제수씨하고 조카딸 짐일 것 같아서 열어
보지도 않았습니다. "
어쨌든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었다 안도는 서두르듯이 말했다.
"찾아의도 될까요?"
"좋습니다 "
준이치로는 의외로 시원하게 대답했다.
"내일은 어떠십니까?"
일요일이었다.
"담당 작가와 골프가 있어서· . 하지만 7시쯤엔 집에 돌아와 있을
것 같은데요."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저녁 7시에 찾아뵙겠습니다. "
안도는 메모 용지에 )시'라고 적고는 그 아래에 볼펜으로 몇 번
이고 계속해서 선을 긋고 있었다.
일요일 오후 7시, 안도는 간다 사루가쿠초에 있는 준이치로의 아
파트를방문했다 오피스빌딩 사이에 끼여 있는 모양으로 세워진 아
파트는 일상 생활의 랭새를 거의 풍기지 않았다 대부분 사무실로 이
용되고 있어서인지, 일요일 저녁이 되니 너무나도 한산해서 괜히 기
분까지 나빠지는 것 같았다.
벨을 누르자 문 안쪽에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십니까?"
"어제 전화드린 안도라고 합니다. "
이름을 대자마자 문이 열리면서 '수고 많으십니다' 라는 말로 안도
를 맞아들였다 골프를 치고 돌아와 막 샤워를 마친 것처럼 보이는
준이치로는 트레이닝복을 입고 쉬고 있었던 모양이다. 전화 목소리
만 들었을 때는 연약하고 신경질적인 사람을 상상하고 있었는데, 실
제 그는 조금 살이 찌고 붙임성 있는 얼굴이었다. 장남이 종합 출판
사의 편집자이고, 차남이 중학교 국어 교사,그리고 막내가 대형 신
문사의 기자. 세 형제가 선택한 직업이 '문자를 다룬다' 는 점에서 비
슷해 보였다. 아마도 장남이 영향을 주었으리라.
"자, 들어오시죠."
안도는 안쪽으로 이끄는 준이치로의 등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
고 있었다 안도 자신도 고교 생물 교사인 형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의사의 길을 택했기 때문이다.
옷 등 허드렛 물건을 넣어 두는 방에서 준이치로는 상자를 꺼내 왔
다. 여행 가방과 노트북이 들어 있었다
"보시 겠습니까?"
바닥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준이치로는 안도 앞으로 상자를 내
밀었다.
"실례하겠습니다. "
안도는 일단 노트북을 꺼내 메이커 이름과 기종을 메모했다. 노트
북 본체는 충돌 때의 쇼크로 부서진 듯 뚜껑을 열어 보려 해도 열리
지 않았고 전원도 들어오지 않았다 무릎 위에 세로로 세워 보니 옆
구리에 플로피 디스켓 드라이브의 버튼이 튀어나와 있는 게 보였다.
이어 안을 들여다보니 디스켓 삽입구 안쪽에 파란 디스켓이 들어 있
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안
도는버튼을눌렀다 그때 기계가 낸 '찰칵' 하는소리가안도에게는
'당첨'이라고 들렸다. 디스켓을 꺼내 손바닥에 얹고 안팎을 확인했
다. 라벨은 붙어 있지 않았고, 따라서 제목 같은 것도 없었다. 그래도
바로 이것이 찾고 있던 디스켓이라는 감이 왔다. 튀어나을 때 들렸던
소리의 울림이 좋았기 때문이다.
안도는 당장이라도 디스켓의 내용을 확인하고 싶었다.
"내용을 확인하고 싶습니다만 "
안도는 준이치로를 돌아보았다.
안도는 준이치로를 돌아보았다.
"공교롭게도 제가 쓰고 있는 컴퓨터가 고장이 나서요."
"그러면 이 디스켓을 2클일 정도 빌려도 될까요?"
"예, 상관없습니다만."
"일이 끝나는 대로 바로 반송하겠습니다. "
"뭐가 기록돼 있는 겁니까, 이 안에?"
안토의 흥분이 그에게 전해진 것 같았다. 준이치로도 강한 호기심
을 내비치고 있었다.
"글쎄 , 모르겠습니다. "
안도는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될 수 있는 한, 빨리 돌려 주십시오."
출판사 편집자로서의 피가 끓기 시작한 것인지 , 준이치로 역시 한
시라도 빨리 문서를 읽고 싶어진 모양이다.
재킷 주머니에 디스켓을 떨구자 안심이 됨과 동시에 안도에게 또
다른 욕구가 생겼다 검은 여행 가방‥‥소용없으리라는 건 알고 있
었지만, 만의 하나 테이프가 들어 있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가방 안의 내용물, 좀 볼 수 있겠습니까?"
신중한 어조였다. 여자의 여행 가방을 뒤지는 것은 역시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무 것도 없을 겁니다. "
준이치로는 웃으면서 그렇게 말하고는 '그러세요'라고 내밀었다.
가방 안에 비디오테이프가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한 가닥 기대감
을 품었지만, 옷 종류와 종이 기저귀가 대부분이었고 목표로 하던 물
건은 역시 없었다. 예측한 대로 테이프는VTR내부에 삽입된 채 함
께 버려진 것이었다
그렇지만 디스켓을 손에 넣은 것만으로도 잘된 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준이치로의 집을 떠날 때, 안도는 설레는 기분을 억누를 수
가 없었다. 내일 대학에 가면 바로 컴퓨터에서 문서를 불러내야지.
안도는 앞으로 읽을 것에 대한 기대감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병리학 연구실에 얼굴을 내민 안도가 미아시타의 모습을 발견하고
말을 걸려는 찰나, 오히려 미야시타 쪽에서 먼저 말을 걸어왔다.
"아, 마침 잘 왔다 너, 이거 어떻게 생각하냐?"
출력된 인쇄물을 한손에 쥔 미야시타가 손짓하고 있었다. 그 옆에
는 생화학 연구실의 조수인 네모토가서 있었다. 네모토와 미야시타
는 체형이 똑같아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기라도 하면 보는 쪽에서
무심코 웃음이 나왔다. 160센티 안팎의 신장에 80킬로는 족히 넘을
것 같은 체중, 다리 길이, 허리 둘레, 얼굴, 옷 입는 센스, 목소리 톤,
무엇 하나 틀린 게 없는 아주 흡사한 모습이었다.
"어이 형제 , 같이 있었구만."
안도는 평소처럼 농담을 던지며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만도 선배, 싫습니다. 똑같이 취급하지 말아 주세요."
네모토는 자못 못마땅한 듯이 얼굴을 찡그려 보인다. 하지만 내심
으로는 2년 선배인 미야시타와 말았다는 놀림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어쨌든 미야시타는 적절한 처세와 학문적 능력을 인정받아 장래의
교수 후보로 촉망받는 존재 였다.
"이놈 저놈, 닳았다 닳았다 하니까 난 엄청 괴롭다구 너라도 다이
어트 해서 살 좀 빼면 어떻겠냐?"
그렇게 말한 미야시타는 네모토의 출렁거리는 배를 찔렀다.
"저도 다이어트를 할 테니, 미야시타 선배님도 같이 살 좀 빼세
"바보같이· . 두 사람 다 살을 빼면 도로아미타불, 아무 의미도 없
미야시타는 손에 쥔 복사지를 안도 쪽으로 내밀어 구태의연한 농
담에 종지부를 찍었다.
안도는 건네 받은 복사지를 펼쳤다. 인쇄된 내용은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아주 일부분의 DNA를 염기 자동해석 장치에 걸어 읽어 낸
결과였다.
바이러스를 포함한 지구상의 모든 생명은 aNA(일부 RNA)를 포
함하는 세포의 집합체[혹은 단체(單體)]이다. 세포 중심부의 핵 속
에는 핵산이라고 불리는 분자 화합물이 들어 있다. 핵산에는
DhFA(디옥시리보 핵산)와 RlfA(리보 핵산)의 두 종류가 있는데, 각
각의 역할은 다르다. 유전자의 본체로서 유전 정보가 기록되어 있는
aNA는 꼬여 있는 두 개의 실 모양을 한 기다란 분자화합물이며 , 이
구조는 일반적으로 이중 나선으로 되어있다 그 이중 구조 속에 모든
유전 정보가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유전 정보라는 것은 어떤 특정한
단백질을 제조하는 방법의 설계도이며 , 유전자라는 것은 그 가운데
한 장의 설계도인 것이다. 즉, 유전자는 DNA 그 자체가 아니라, 절
보의 한 단위라는 얘기가 된다.
400
‥‥‥‥‥‥‥677'rAAA6◎A
490 5()0 il() i20 i10
TTTGACGGCGATTCAATGAATitTTTATGACGATTCCCCA~TATTCOACC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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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90 600 610 1?0 f,)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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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0 flU 6AO 570 bOO
TTATCATAC 7776 CTCTTACTATC CGTC~TAATT壽GTTTTC G壽6 TTA'
190 700 710 720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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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0 710 760 770 7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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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0 000 RIO 820 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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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AAGAT~ACTCTT'Fl'TACI'ATA'77'· .
iii영기∼行6염기 및 Hli염기∼H◎ 염기에 걸쳐,
A 7c C AA C AA 6.LA TATG ~ TTATATTG CTC GTC CT琉A A CAA C .LA
라는 42刊 염기의 반복이 보인다
DNA상의 아미노산 번역 방법
1문자열 │ ?문자열 │3문자% 이하, 20증류의 倂
미노산 약어와
1 │ TCAG │4 끙식 聖칭을 표기한
다
────┼────┬───┬───┬───┼──── Phe 페닐아라닌 His
히스티딘
│ rho │ Ser │ Tγr│C Y ,i│T Leu 류신 Cln 글루
타민
│ Phr │誘근r │T )'r │C ? ,1│C I性 이소류신 4%n아
스파라긴
T │L e ㄴ1 │.j e r│정지 │정지 │A Mtt Nl티오닌 Ly,i
코슨
│L t Ll │tar │정지 │TrF │G Yal 알린 Afp 01스
파르트산
────┼────┼───┼───┼───┼──── Ser )11린 C狀 글루
뜸산
│1 e ~l │P r ()│Hll │Arg │T Pro 프롤른 Cys 시
스테인
│LCU │Pro │His │Arg │C Thr 트레오닌 T辯
트립토판
悲 │1. e u │fro │Gln │Ar誇 │A Ala 알라닌 Arg 아
르기닌
│L e Ll │r f f)│Cln │Ar祭 │6 Tyr 티로신 Cty 글
리신
────┼────┼───┼───┼───┼────
│lIt │Thr │4,i n │Str │T
│Ite │Thr │Abn │.i r r│G
.t │lie │Thr │Lys │Ar歸 │A
│Mtt │Thr │Ly) │Arg │C
────┼────┼───┼───┼───┼────
│∼1 a 1 │A 1 ;1│ALp │G 1 )-│T
│∼~ a 1 │Al4 │Ahp │Gly │C
f │V ;1 1 │Ala │~IU │c1γ │A
│YAI │Ala │C 1 Ll│GIy │fl
────┴────┴───┴───┴───┴────
,)刊 염기가 1刊 세트를 이룬 코돈은 위에 표시된 법칙에 叫라 Ol미노
산으로 번역된다
예를 들어 7G7는 신글(Ser)으로, AAT는 아스파라긴(Asn), GAA는 글루
탐산(G111)刻라는 식이다 또한 '濫지'라는 것은 하나의 유전자를 모두
崇었음을 의미하는 裂인데, 반또로 「H시 코드는 ATC이다
그러면 도대체 설계도는 어떤 말로 기록되는 것인가? 여기에서 문
자의 역할을 짊어지는 것은 염기라고 불리는 네 개의 화합물이다. 아
데닌(A) , 구아런(G), 시토신(C) , 티민(T) . RNA의 경우 우라실(U)이
라는 네 개의 염기 가운데 제 개가 한 조를 이루어 코돈을 이루고 일
정한 법칙에 따라 아미노산으로 번역된다. 예를 들면 AAC라고 하는
코돈은 아스파라긴으로, CCA라고 하는 코돈은 알라닌이라고 하는
식이다
단백질은 20종의 아미노산 수백 개가 결합해서 생긴 것이므로 한
개의 단백질 설계도만 해도 수백 x3개 분량의 염기 배열이 필요해진
다.
TCTCTATACCACTTGGAAAATTAy‥‥라는 식으로 한 장의 유전
자 설계도는 알파벳이 쭉 늘어서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
경우, 번역하자면 TCT=세린(Ser), CTA=류신(Leu), TAC=티로신
(Tyr). CAG=글루타민(Cln), 77G=류신(Leu), GAA=글루탐산
(Glu), AAT=아스파라긴(Asn), TAT=티로신(Tyr)‥‥이라는 아미노산
배열이 된다.
안도는 프린트 한 장에 걸쳐서 인쇄된 영기 번호와 무작위로 늘어
선 ATGC네 개의 알파벳 배열을 다시 한번 대충 훌어보았다 세 개
의 줄에 형광펜이 그어져 다른 것과 구별되어 있었다. 안도는 찬찬히
그 의미를 물었다
"뭐지 , 이게?"
미야시타는 네모토를 향해 눈짓을 했다. 설명해 달라는 의미인 듯
했다.
"다카야마 류지의 혈액에서 발견된 바이러스의 DNA 일부를 해석
한 겁니다. "
"류지의‥‥ 그래서 그게 어쨌는데?"
"다카야마 류지의 체내에서 발견된 바이러스에만 뭔가 기묘한 염
기 배열이 섞여 있었어요."
"형광펜이 쳐진 부분인가?"
"예 , 그렇습니다. "
안도는 형광펜이 쳐진 알파벳의 나열을 다시 자세히 살폈다.
AT G GA AG A AGA AIAT C G T TATAT T C CT C C T C C T C A ACA ACA A
다른 한 군데 블럭이 쳐진 장소로 시선을 옮겨 비교해 보았다. 완
전히 똑같은 배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1,000을 넘지 못하는 염
기 중에서 완전히 똑같은 배열이 두 군데서나 나오고 있는 것이었다.
안도는 프린트에서 눈을 떼고 네모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마치 긴타로 엿처럼 어느 단면을 조사해도 그런 배열이 들어 있는
겁니다. "
"이게 몇 개나 있지?"
"염기 수 말입니까?"
"그래 ."
"42입니다. "
"42‥‥ 즉, 14 코돈 적군."
"의미가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
네모토는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기묘한 건 말야, 안도‥‥‥
미야시타가 옆에서 끼여들었다.
"이 무의미한 반복이 다카야마 류지의 혈액에서 채취된 바이러스
에만 보이고, 다른 두 구의 바이러스에서는 보이지 않는다는 거야."
손들었지? 라는 식으로 미야시타는 두 손을 들어 보였다.
그러니까 어떻게 말하면 좋은 걸까? 안도는 좋은 비유가 없을까
하고 궁리해 보았다. 예를 들면 세익스피어의 희곡집 『리어왕』을가
진 세 명의 사람(한 사람은 류지)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류지가 갖
고 있는 『리어왕』에만 문장과 문장 사이에 무의미한 알파벳 배열이
끼여 있는 것이다. 염기 숫자로 해서 42∼43개가 한 조를 이루어 한
개의 아미노산을 이루므로 글자로 고치면 14개의 알파벳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14개의 글자가 계속 반복되면서 어느 페이지에나 무
작위로삽입되어 있다고 한다. 희곡이 『리어왕』이라는 것만 미리 알
고 있다면 나중에 삽입된 의미 불명의 부분 같은 건 곧바로 찾아 내
어 형광펜으로 표시를 해 두는 것도 가능한 일이다.
"어떻게 생각해?"
미야시타는 자못 재미있다는 듯 안도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진
짜 과학자는 해석 불가능한 사실에 부닥치면 오히려 마음이 설레는
법이다.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 봤자, 이것만 가지고는 아무 것도‥‥‥
세 사람은 잠시 아무 말 없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안도는
어중간하게 프린트를 들고 있었다.
묘하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 안도는 좀더
시간을들여 염기의 무의미한 배열을 바라보고 싶었다 이 가운데에
분명 뭔가가 있다. 그런 예감이 드는 것이다. 문제는 어디에 있는 것
일까?무의미한 염기 배열이 들어가 있다면,그것이 언제 들어간 걸
까? 공교롭게도 류지의 몸에 침입한 바이러스만이 특이했던 것일까?
아니면 류지의 몸 안에서 바이러스가 변이를 일으켜 14코돈의 염기
배열이 도처에 삽입되는 결과를 낳은 것일까?실제로 그런 일이 가
능한 걸까?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세 사람 사이에 답답한 침묵이 흘렀다 여기서 아무리 생각해 보아
도 해석 따위가 성 립될 리 없었다.
안도와 네모토는 의학부의 다소 어두운 복도를 나란히 걸어갔다
안도는 앞단추를 채우지 않은 가운 자락을 펄럭이며 , 재킷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은 채 디스켓을 질고 있었다.
네모토가 생화학 연구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안도는 주머
니에서 디스켓을 꺼내 왼손에 쥐고 오른손으로 문을 잡았다
"우에다 잠깐만."
네모토는 교실 구석에 앉아 있는 비쩍 마른 청년에게 손짓했다.
"무슨 일이세요?"
우에다는 회전 의자를 옆으로 돌려 네모토를 향했지만 자리에서
일어서려고는 하지 않았다. 네모토는 상냥한 표정으로 다가갔다.
"자네 지금 컴퓨터 쓰나?"
"아뇨."
"잘됐다. 저쪽 안도 선생님께 잠깐 빌려 줄 수 없을까?"
우에다는안도의 얼굴을 올려다보고는 '아,안녕하세요?' 하며 고
개를 숙였다.
우에다는 발밑에 기대 세워 둔 豈트북을 들어올려 책상 위에 놓았
다.
"잠깐만 이 자리에서 확인해 봐도 될까?"
"네 , 그럼요."
노트북의 뚜껑을 열고 전원을 넣자 모니터 화면에 초기 메뉴가 떠
올랐다. 안도는 그 중에서 문서 작성 항목을 택하고 손에 들고 있던
디스켓을 집어넣었다. 다음 화면에는 '새글'과 '불러오기' 두 개의
항목이 나란히 떴다. 안도는 '불러오기'에 커서를 맞추고 엔터를 눌
렀다. 직∼하는 소리를 내고 본체는 디스켓의 문서를 읽어 나갔다
이윽고 디스켓에 저장된 문서 이름이 화면에 나타났다.
RINGg 199x· 10 · 21
RINGB 199x · 10 · 20
RING7 199x· 10· 19
RING6 199x· 10· 17
RINGS 199x · 10 15
RING4 199× 10 12
nING3 199x· 10· 7
RING2 199x· 10· 4
RINGI 199x· 10· 2
"링, 링, 링, 링·.. "
안도는 제로로 아홉 개나 늘어서 있는 문서명에 이끌려 잠꼬대처
럼 소리내어 읽었다.
‥‥RING !
뭐야? 류지의 배에서 튀어나왔던 숫자 암호 아닌가!
'패 그러세요?"
망연자실한 안도의 표정을 살피며 네모토가 걱정스러운 듯 속삭였
다. 그러나 안도는 그저 고개를 옆으로 흔들 뿐이었다.
이제 이것은 우연일 수가 없다 아사카와는 일련의 변사 사건을 상
세히 추적한 리포트를 작성해서 거기에 '링' 이라는 타이틀을 붙여 아
홉 개의 문서로 나누어 저장했던 것이다 그리고 류지는 그 타이틀을
배에서부터 튀어나오도록 했다.
· .꺼떻게 설명하면 되지? 이런 건 당연히 불가능해
안도는 더욱더 완고하게 부정해 보려 했다 장기가 텅 비워져,속
빈 양철 인형처럼 되고 난 류지가 메시지를 배 안에서 짜냈다는 얘긴
가? '링' 이라는 이름의 문서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해부 직후에 보았던 류지의 표정이 떠올랐다 각진 얼굴의 턱 근처
살을 천천히 흔들면서 류지는 알몸인 그대로 조소하는 듯한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안도의 가슴속에서 요시노로부터 들은 황당무계한 스토리가 갑자
기 현실감을 갖기 시작했다. 어쩌면 정말일지도 모른다 영상을 본
사람을 정확히 일주일 후에 죽음으로 몰고 가는 비디오테이프가 이
세상에는 존재할는지도 모른다‥‥
지지직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컴퓨터는 쉴새없이 출력을 해 댔다.
인쇄가 끝날 때마다 안도는 프린터에서 종이를 빼내 차례대로 훌어
나갔다
B5 용지에는 약 1,000자의 글자가 메워져 있었는데. 인쇄에 걸리
는 시간보다 읽는 시간이 훨씬 빨랐다. 하드 카피가 필요할 거라고
예측하고 화면으로 읽는 것에 앞서 인쇄를 시작했던 것인데, 한 장
을 인쇄하는 데 2분 내지 3분이나걸리고 보니 초조함만 더해질 뿐
이었다.
결국 우에다에게 양해를 얻어 그의 노트북을 빌려서 집으로 갖고
가게 되었다. 대충 살펴봐도 백 장 가까이나 되는 문서를 연구실에서
전부 출력할 수는 없었다. 아파트에 가서 밤을 샐 각오로 출력할 수
밖에 없었다.
대학에서 돌아오는 길에 근처의 편의점에서 산 도시락을 먹으면서
안도가 21장째의 원고를 다 읽어 갈 즈음이었다. 거기까지는 지난주
금요일 요시노한테 들었던 이야기를 다시 한번 충실히 더듬어 가는
내용이었다. 점심 식사 후 노천 카페에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요시
노한테 대략적인 이야기를 듣는 것과는 달리. 시간과 장소 등이 상세
히 기록된 리포트는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믿게 만들 만한 힘을 지니
고 있었다. 잡지 기자답게 쓸데없는 수식어를 배제하고 깔끔한 문체
를 써서 그런지 꾸며 낸 이야기라고는 의심할 여지조차 주지 않았다.
금년 9월 5일 밤, 도쿄와 가나가와에서 동시에 심근경색을 일으켜
사망한 네 명의 젊은 남녀를 조사하던 중 아사카와는 변사 원인이
어떤 바이러스일 가능성을 떠올린다. 과학적으로 생각할 때 당연한
결론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네 사람의 사체를 해부한
결과 천연두 바이러스와 매우 유사한 바이러스가 발견되었으므로 아
사카와의 착상은 틀림없었던 게 된다 그런데 아사카와는 네 사람이
동시에 죽은 것으로부터 네 사람이 동일한 장소에서 동시에, 동일한
바이러스에 접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론을 했다. 어디에서 바이러스
를 접한 것일까, 즉 감염 루트가 사건 해명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 판
단한 것이다.
아사카와는 공통의 시간과 장소를 찾아 내는 데 성공한다. 네 사람
이 죽기 일주일 전인 8월 29일 미나미하코네 퍼시픽랜드의 대여 별
장, 빌라 로그캐빈 B-4호였다.
다음 페이지 22장째에는 아사카와 가즈유키 본인이 그 장소로 향
하는 장면의 묘사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신칸센을 타고 아타미
에서 내려 렌터카를 빌려 , 네츠칸 도로를 경유하여 고원에 자리한 리
조트 단지 미나미하코네 퍼시픽랜드까지 달려간다. 늦은 밤에 비가
와서 시야가 나빴던데다 고원의 길이 험했다. 낮에 예약한 빌라 로그
캐빈의 B-4호에 체크인한 것은 오후 H시가 지나서였다. 이 방에서 네
명의 남녀가 하룻밤을 보냈다· . 그렇게 생각하니 아사귀와는 별안
간 공포를 느끼게 된다. B-4호에 묵은 네 명의 남녀가 일주일 후 동시
에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자신에게도 똑같은 마(魔)의 손길이 뻗칠
가능성도 충분히 예상할수 있었다. 하지만 잡지 기자로서의 호기심
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그는 B-』호 실내를 구석구석 조사해 나간다.
아사카와는 노트에 남겨진 메모에서 네 사람의 남녀가 비디오테이
프를 본 사실을 알아 내고 관리인실에 가서 같은 테이프를 찾아보았
다. 그러다가 라벨도 붙어 있지 않은 테이프 한 개가 진열장 아래쪽
에서 ◎굴고 있음을 발견한다. 이것이 찾고 있던 비디오테이프일까?
아사카와는 관리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것을 B-4호로 갖고 돌아와
거실에 비치되어 있던 VTR에 집어 넣어 문제의 비디오테이프를 보
고 만 것이다.
일단비춰진 것은 암흑의 세계였다 그 영상의 맨 처음 장면을 아
사카와는 이런 식으로 묘사하고 있었다.
"새까만 화면에 바늘 끝만한 빛의 점이 나타났다 명멸하기 시작하
는가 싶더니 그것이 서서히 부풀어 좌우로 날아다니다가 이윽고 왼
쪽 구석에 고정되어 갔다 그리고 가지를 뻗어 나가더니 양끝이 터진
빛의 다발 모양으로 지렁이처럼 기어 돌아다니면서· ."
안도는 다시 프린트에서 얼굴을 들었다. 문장을 읽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영상을 떠올릴 수 있었다. 서두 부분을 읽은 지금, 문득 머
릿속에 영상이 떠올랐는데, 안도는 그 영상을 실제로 어디에선가 본
적이 있다고 느꼈던 것이다 검은 화면을 날아다니면서 커져 가는 개
똥벌레‥‥ 그리고 빛의 점이 붓처럼 갈라져 간다. 아주 짧은 장면이었
다 바로 최근에 그런 영상을 어딘가에서 본 기억이 있었다
기억을 더듬는 데는 그다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역시 다카노 마
이의 방에서 그녀의 흔적을 찾으려다가 VTK에 삽입되어 있던 비디
오테이프를재생시킨 적이 있었다 라벨에는 남자글씨로 '라이자미
렐리 · 프랭크 시내트라· . ·' 라는 이름이 쓰여 있었다. 그 테이프의 서
렐리 · 프랭크 시내트라· . ·' 라는 이름이 쓰여 있었다. 그 테이프의 서
두 몇 초 동안에 이 표현과 아주 똑같은 영상이 있었던 것이다.
마이의 방에 있었던 테이프는 서두의 이 장면이 불과 몇 초만 계속
되었을 뿐, 화면은 곧바로 밝은 것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처음에 있
었던 영상을 지우기 위해 tV 프로를 계속 복사한 듯 모닝쇼와 시대
극 재방송이 테이프 끝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안도는 이내 이해할 수 있었다 마이는 어떤 방법을 통해서 였는지-
아마도 류지를 통한 루트겠지 만-문제의 비디오테이프를 손에 넣어
rl신의 방에서 보고 만 것이다. 그리고 다 보자마자 영상 전부를 깨
끗하게 지우려 했다. 지우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있었는지도 모른
다. 그렇지만 앞부분을 완전히 지우는 것은 어려우므로, 처음 몇 초
동안의 영상이 떨어지지 않은 채 테이프에 남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
다고 한다면, 아사카와가 빌라 로그캐빈에서 발견한 비디오테이프가
돌고 돌아 다카노 마이의 손까지 흘러들어 왔다는 셈인가?
안도는 복잡한 머 릿속을 정 리 했다.
· .아니 다르다 빌라로그캐빈에서 발견한 테이프와 마이의 방에
있었던 테이프는 분명히 다른 물건이다. 리포트에 의하면 빌라 로그
캐빈에 있었던 것에는 라벨이 붙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 마이의 방에
있었던 것에는 사인펜으로 타이틀이 기입되어 있었다. 그렇다는 것
은‥‥ 결국 복사되었다는 얘기가 된다
빌라 로그괘빈에서 발견된 것이 오리지널 테이프라고 한다면, 마
이의 방에 있었던 테이프는 그 복사본임에 틀림없다. 복사되기도 하
고, 지워지기도 하고, 어지러울 정도로 변모하면서 여기저기로 테이
프가 이동하고 있는 모양이다. 바이러스와 비슷하다. 안도는 비디오
테이프의 성질이 생명과 비생명의 중간에 위치하는 바이 러스와 사뭇
닮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말 마이의 실종은 비디오테이프를 보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일
까? 안도는 마음에 걸려 견딜 수가 없었다. 마이는 그 후 줄곧 방을
비운 채 실종 상태이다. 학교에는 오지 알았고,본가에도 연락이 없
었다. 그렇다고 해서 젊은 여성의 변사체가 발견되었다는 뉴스도 들
리지 않는다
마이의 신변에 일어날 만한 일을 이것저것 상상하면서 안도는 잠
시 동안 멍한 상태로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어딘가에서 변사를 당한
것일까?스물두 살이라고 하는 젊음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사랑의 예감 비슷한 것이 있었던만큼 더더욱 가여웠다
마지막 한 장의 인쇄를 마친 프린터가 요란하게 소리를 내는 바람
에 안도는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어쨌든 이것저것 고민하는 것보다
비디오테이프의 내용을 알아 내는 것이 급선무였다
10
다음 페이지부터는 몇 장에 걸쳐 비디오의 묘사가 아주 자세하게
화면에 질척질척하고 새빨간 것이 솟구쳐서, 활화산임을 한눈에
알 수 있는 산 풍경이 흐른다. 화구에서 흘러나오는 용암과 땅울림
밤하늘을 태우며 격렬하게 분화하고 있다. 갑자기 영상이 끊기는가
싶더니 백지에 검게 淡'이라는 한자가 떠올랐다가 사라지고,두개
의 주사위가 그릇 바닥에서 굴렀다
다음 장면에서야 겨우 사람이 등장한다. 얼굴이 온통 주름살투성
이인 노파가 다다미 위에 오도과니 앉아 정면을 보고 말을 건다. 사
투리가 심해 의미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어떤 인간의 미래를 예지하
고, 주의를 주고 있다는 여운이 감지된다.
갓 태어난 아기가 우렁차게 울고 있다. 장면과 장면의 연결 방법에
는 아무런 맥락이 보이지 않는다. 자기 멋대로 그림 다발을 잘라내
는 듯한 당돌한 전환 방식 이 다.
아기가사라지자 '거짓말쟁이' , '사기꾼'이라는 집단의 웅성거림을
배경으로 화면에 파고든 수백 개 인간의 얼굴이 세포 분열처럼 증식
해 나간다. 이어 낡아빠진 I"V의 화면에 떠오르는 '◎ 이라는 글자.
갑자기 사내의 얼굴이 나타난다. 사내는 거칠게 호흡하며,얼굴에
서 땀방울을뚝뚝 떨어뜨리고 있다 배후에는 울창한 나무숲이 보인
다. 살의가 감춰진 충혈된 눈. 침을 흘리고 입을 일그러뜨리며 사내
가 소리지른다. 그 벗은 어깨 끝에서 피가 흘러 떨어지고 있다. 그리
고 어디에서랄 것도 없이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화면 중앙에 떠
오른 보름달에서 주먹 크기만한 돌이 떨어지더니 여기저기 부딪혀
둔탁한 소리를 낸다
마지막에 다시 글자가 떠오른다.
'이 영상을 본 자는 일주일 후 이 시간에 죽을 운명에 놓여 있다.
죽고싶지 않다면,지금부터 말하는 것을 실행에 옮겨라 즉· '
거기에서 화면은 싹 바뀐다. I~에서 곧잘 나오는 모기향 CF가 죽
음의 운명에서 도망치는 방법이 실려 있을 장소에 삽입되어 있는 것
이다. CF가 끝나고 화면이 제자리로 돌아와도 앞서와 같이 기분 나
쁜 영상의 여운이 남아 있다.
의미 불명의 영상들을 다 보고, 아사카와가 그럭저럭 이해할 수 있
었던 것은 단두가지였다 이것을본사람은정확히 일주일 후에 죽
을 운명에 놓인다는 것. 그리고 죽음을 피하는 방법이 기록되어 있는
부분은 고의로 TV 프로그램을 복사해서 지워져 있다는 것. 맨 처음
비디오를 보았던 네 명의 남녀가 장난삼아 지워 버린 것이다. 아사카
와로서는 비디오테이프를 가방에 숨겨 빌라 로그캐빈 B-4호에서 도
망쳐 돌아온 것이 고작이었다.
안도는 '휴우', 하고 한숨을 내쉬고는 일단 원고를 내려놓았다.
‥‥못 참겠군, 이거야 정말.
아사카와의 리포트는 약 20분에 걸친 기분 나쁜 영상을 아주 자세
하게 묘사해 놓았다. 시각과 청각에 직접 호소하는 영상이라는 미디
어를, 언어를 매개로 삼아 독자의 뇌리에 재현시키려는 아사카와의
노력은 상당 부분 성공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사실 안도의 뇌리
에는 아직까지도 자신의 눈과 귀로 받아들인 것처럼 생생한 영상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인간의 얼굴 생김새까지 선명하게 뇌리에 떠
올랐던 것이다. '휴우', 하는 한숨이 저절로 나을 정도로 안도는 피곤
함을 느꼈다. 그렇다기보다. 아사카와를 사로잡았던 공포가 스스로
의 일처럼 생각된 나머지 일단은 뿌리치고 싶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잠깐 동안의 휴식은 그 앞 얘기를 알고 싶다고 하는 호기심
을 점점 부풀릴 뿐이었다. 안도는 한손으로 차를 마시면서 다른 한쪽
손으로 리포트를 집어들고 아까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읽어 나갔다.
도쿄로 돌아온 아사카와는 바로 다카야마 류지에게 연락을 해서
사건의 대략을 이야기한다. 혼자서 해결할 만한 용기가 없었거니와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의지가 될 만한 짝을 원했던 아사카와가 당연
한 것처럼 떠올린 사람은 고교 동창생 다카야마 류지였다. 요시노에
게도 의논을 했지만, 그는 '봐 달라' 며 피하고 비디오의 영상조차 보
려고 하지 않았다. 영상의 위력을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 아주 조금
이라도 재앙이 내릴 가능성을 배제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류지는 정반대였다. 영상을 본 인간의 목숨을 정확히 일
주일 후에 빼앗아 간다는 테이프의 존재를 알자마자 바로 말해 버린
다.
"일단 그 비디오를 보여 줘 ,"
아사카와의 아파트에서 류지는 흥미진진하게 비디오를 보았다 그
리고 다 보자마자 복사해 달라고 아사카와에게 부탁한 것이다.
복사라는 말에 반응해 안도는 고개를 들었다. 그 후의 비디오테이
프의 행방에 관해 정리하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빌라 로그캐빈에서 갖고 나온 오리지널 테이프는 당연히 아사카와
가보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사고를 일으킨 차에 놓여 있던
VTR 안에 남겨진 채로, 형인 준이치로의 손에 건네졌다가 쓰레기로
버려진다.
그리고 또 다른 한 개, 다카노 마이의 방에도 서두 부분에 흔적을
남긴 테이프가 있었다. 아마 아사카와가 류지를 위해 복사한 것일 게
다. 비디오 라벨에는 남성적인 굵은 필체로 제목이 기입되어 있었다.
아사카와가 쓴 것임에 틀림없다. 류지에게서 복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아사카와는 새 비디오테이프를 사용하지 않고, 과거에 썼던 음
악 프로 테이프를 다시 이용한 것이다. 그것이 류지를 통해 마이의
손으로 건네졌다 그렇게 보면 앞뒤가 통한다.
하지만 대체 언제 류지에게서 마이의 손으로 건너간 걸까? 테이프
를 갖고 있다는 얘길 마이한테 들은 적은 없었다. 류지가 죽은 후 며
칠이 지나 마이가 우연히 테이프를 손에 넣고, 위험한 것인지 알지도
못한 채 보고 말았다‥‥?
어쨌든 테이프는 아사카와의 아파트에서 두 개로 나뉜 것이다. 안
도는 이 사실을 머릿속에 확실히 새겨 넣었다
그런데 류지는 복사해 받은 테이프를 자기 집으로 가지고 가서 지
워진 메시지 (아사카와와 류지는 이 부분을 주문이라 부르기로 했다)
의 해독에 착수한다. 두사람이 공통으로 가졌덜 의문은 왜 이런 기
분 나쁜 테이프가 빌라 로그캐빈 B-4호에 놓여 있었던가 하는 점이
었다. 처음 한동안은 비디오 카메라로 촬영된 테이프가 흘러들어온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네 명의 남녀가 로그캐빈에 묵기 3일 전, B-4호를 이용했던 가족이
방의 VfR에 테이프를 꽃아 두고 녹화 상태로 해 놓은 채 잊어버리고
돌아갔던 모양이다. 즉, 다른 장소에서 촬영된 테이프를 가지고 들어
온 것이 아니라, 녹화 상태로 맞춰진 빌라 로그캐빈 H-4호의 VTR에
멋대로 전파가 뛰어들어 모르는 사이에 녹화된 것이 된다.
그 다음 로그캐빈에 들어온 사람들은 예의 네 명의 남녀였다. 시간
이 남아돌아 비디오라도 볼까 하고VTR을 조작하자 안에서 비디오
테이프가 나왔다 그들은 영상을 보았다. 마지막에 있는 의협 문구는
자못 네 사람을 흥미진진하게 만들었으리라. 어떤 일을 실행하지 않
으면 일주일 후에 죽는다고? 네 사람은 짓궂은 장난을 생각해 냈다.
죽음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지운 후에 다른 숙박객들에게 보여 주어
더욱더 두려워하게 만들자고. 물론 테이프에 들어 있는 주문 따윈 믿
지 않았던 것이다. 만약 그걸 믿었다면 결코 장난 따윈 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테이프는 다음날 관리인의 손에 의해 관리인실 진열
장으로 옮겨져 아사카와가 보기 전까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았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녹화 상태인 VFR에 영상이 뛰어들어온 것
일까? 아사카와는 마니아에 의한 해적 방송을 연상하고, 발신 장소
를 찾아보려 했다. 그러나 그때, 아사카와가 없는 사이 아사카와의
아내와 딸이 그만 비디오테이프의 영상을 보고 만다. 이리하여 아사
카와는 자신의 목숨뿐만 아니라, 아내와 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뛰
어다니게 된다.
그 무렵 , 류지는 놀랄 단한 사실을 발견해 내기 시작한다. 자기 집
에서 몇 번이고 영상을 반복해 보다가 문득 번뜩이는 게 있어 표를
작성한 결과, 영상은 전부 12개의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발견했
다. 게다가 두 개의 그룹으로 크게 나눌 수 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영상은 추상적인 심상(心象)의 풍경이라고 할 수 있는 머리에 떠오
른 장면과 실제로 눈을 통해 본 현실의 장면, 이렇게 두 개의 그룹으
로 나뉘어져 있었다. 예를 들어 화산 분화나사내의 얼굴 장면은 분
명히 눈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이며 , 서두 부분의 암흑 속에 날아다
니는 개똥벌레 비슷한 빛의 다발은 꿈과 마찬가지로 마음속에서 떠
올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류지는 12개의 장면을 '현실'과 '추상'으로 나누어 비교했
다. 그러자 현실 장면에서만 화면이 새까만 막으로 뒤덮이는 게 분당
15회의 비율로 나타나고 있음을 발견했다 추상적인 장면 쪽에서는
검은 막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류지
는 이 검은 막이 '눈 깜빡임' 이 아니겠는가 하고 결론짓는다. 실제로
눈으로 바라본 장면에서는 나타나지만 마음의 눈으로 본 쪽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다. 게다가 그 횟수는 여성의 평균 깔빡임 수와 일치하
고 있다. 깔빡임이라고 생각해도 일단 틀림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거기서 이끌어 낼 수 있는 결론‥‥ 테이프에 녹화된 영상은 비디오
카메라로 촬영한 것이 아니라 어느 인간의 시각과 이미지를 통해 염
사된 것이다.
안도는 아무래도 이 부분을 믿을 수가 없었다. 테이프에 영상을 염
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가능성 따위를 논하는 것만도 어이없는 일
이다. 필름에 대한 염사 정도라면,뭐 그런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조금쯤 인정해 줄 수가 있다. 하지만 영상이 되고 보면 얘기는 완전
히 달라진다. 류지의 착안에 감동하면서도 안도는 이 점에 대해서는
일단 보류해 두고 읽어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염력에 의해 녹화된 영상이라면, 도대체 누가 염 (念)을 날
려보낸 것일까? 목표를 그 한 점으로 좁힌 아사카와와 류지는 가마
쿠라의 미우라 데쓰조 박사 기념관으로 향했다. 초심리학 연구가인
미우라 데쓰조는 독자적인 방법으로 전국의 초능력fl를 찾아 내어
그 자료를 파일로 보존하고 있었다. 비디오테이프에 염사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지닌 자라면 틀림없이 미우라 박사의 눈에 띄었을 것
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수천 권에 달하는 파일을 닥치는 대로 조사했
다. 몇 시간의 조사로 두 사람은 마침내 그럴싸한 인물을 찾아 낸다.
그 인물의 이름은 야마무라 사다코(山村貞子).
출신은 이즈 오시마의 사시키지 .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열 살 때 이미 ◎'과 凌'이라는 한자를
필름에 염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비디오 영상에도 같은 한자가 나타
나 있었다. 아사카와와 류지는 사다코임에 틀림없다고 확신하고 다
음날 오시마로 가는 배를 탔다. 야마무라 사다코의 성장 배경이나 주
변 인물을 알아내는 것에 따라 비디오테이프에 숨겨진 수수께끼도
풀릴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M신문사의 오시마 통신부원의 힘을 빌리고, 도쿄에 있는 요시노
와 전화 연락을 취하면서 아사카와와 류지는 야마무라 사다코라는
인물에 대해 차례로 밝혀 나간다
야마무라 사다코는 1947년, 불세출의 초능력자로서 한때 매스컴을
떠들썩하게 했던 야마무라 시즈코와 그녀를 실험의 대상으로 삼았던
초심리학자인 T대학 정신과 조교수 이구마 헤이하치로와의 사이에
서 태어났다. 어머니인 시즈코와 아버지인 헤이하치로 콤비는 처음
한동안은 세간의 호기심을 온몸에 받았고 매스컴 역시 이들을 격찬
한다. 하지만 어느 권위 있는 학자 그룹이 시즈코의 초능력을 가짜라
고 결정짓자마자 대중과 매스컴은 일제히 손바닥 뒤집듯이 공격하는
쪽으로 돌아선다. 그것이 원인이 되어 헤이하치로는 대학에서 쫓겨
나고, 너무 무리한 나머지 결핵에 걸리고 만다. 또한 시즈코는 신경
쇠약을 앓다가 미하라야마의 화산에 몽을 던져 자살한다.
사다코는 오시마의 친척에게 맡겨져 고교 졸업 때까지 섬에서 산
다. 초등학교4학년 때,미하라야마의 분화를 예언하여 한때 교내에
서 유명해졌지만 그 이후로는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초능력을 과시하
는 일이 없었다. 고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상경한 사다코는 극단 비상
에 입단, 여배우의 길에 뜻을 둔다. 극단 비상 입단 후의 행적을 알아
내는 것은 도쿄에 있는 요시노의 역할이었다
오시마에 있는 아사카와로부터 연락을 받자 요시노는 바로 요츠야
에 있는 극단 비상의 연습실을 찾아가 극단 간부인 아리마로부터 야
마무라 사다코라고 하는 여성에 대해 이야기를 듣는다. 사다코가 극
단에 있었던 것은 25년 전의 일이었지만 아리마는 그녀를 잘 기억하
고 있었다 어딘가 인간을 초월하는 힘을 숨기고 있었던 모양으로,
전원이 들어와 있지 않은I∼'화면에 영상을 자유롭게 비춘 적도 있
었다. 어머니를 훨씬 능가하는 초능력의 소유자라는 말이 된다. 요시
노는 그 자리에서 사다코의 사진을 손에 넣는 데 성공한다. 입단시의
이력서가 그때까지 보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력서의 흑백 사진
은 두 장이었다. 하나는 상반신, 또 하나는 전신을 찍은 것. 양쪽 모
두 아름답다는 표현이 오히려 부족할 정도로 완벽하게 정돈된 생김
새의 사다코가 적혀 있었다
결국 사다코의 그 후 소식은 포착할 수가 없었다. 요시노는 M신문
사 오시마 통신부를 향해 사다코의 사진을 비롯해서 입수한 정보를
모두 팩스로 송신한다.
팩스를 받아든 아사괴와는 극단을 그만둔 사다코의 그 후 소식이
명확치 않음을 알고 큰 충격을 받는다. 사다코의 자취가 확실하지 않
다면 '주문'의 수수께끼는 풀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거기서 새롭게 아이디어를 낸 것은 역시 류지였다. 그는 야마무라
사다코의 행적을 순서대로 알아낼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그보다
왜 빌라 로그캐빈 B-4호의 VTR에 영상이 날아든 것일까? 그 장소로
관심을 돌려야 하는 건 아닐까? 어떤 인과 관계가 있는 건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미나미하코네 퍼시픽랜드의 시설은 모두 새것이다.
과거에 다른 시설이 있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아사카와는 다시 도
쿄의 요시노에게 연락을 취해 새로운 조사를 의뢰한다. 미나미하코
네 퍼시픽랜드가 생기기 이전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조사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다음날 부랴부랴 요시노는 팩스를 보내왔다. 미나미하코네 퍼시픽
랜드의 일부에 일찍이 결핵 요양소가 있었음을 밝혀 낸 요시노는그
배치도까지 보내왔던 것이다. 게다가 아타미 시내에서 내과 · 소아과
의원을 개업하고 있는 나가오 조타로의 이름과 주소, 약력을 기록한
프린트까지 첨부되어 있었다. 현재 57세인 나가오는 1962년부터 67
년까지 5년 간, 미나미하코네 요양소의 의사로 근무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예전의 결핵 요양소에 관해 더욱 상세한 정보를 얻고 싶다면
나가오를 조사해야 할 것이라는 배려였던 모양이다.
아사카와와 류지는 요시노에게 얻은 정보에 의지하여 고속정을 타
고 아타미로 향했다. 아사카와가 비디오테이프를 본 지 오늘로 꼭 일
주일째.오늘밤 10시 전후까지 '주문'의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면 아
사카와는 죽는다. 그리고 류지의 마감 시간이 다음날 10시 . 아사카와
의 아내와 딸은 다음 다음날 오전 11시 ,
렌터카에 올라타자 두 사람은 바로 나가요 의원으로 향했다. 조금
이라도 정보를 얻을 수만 있다면 하는 기대감은 좋은 쪽으로 배반을
당했다. 그들 앞에 나타난 나가오의 얼굴은 아사괴와도 류지도 본 기
억이 있었던 것이다. 비디오테이프의 마지막 부분쯤에 서 상반신을
벗은 사내가 등장해 거칠게 숨쉬며 땀을 흘리다가 어깨 끝에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는 장면이 나왔던 것이다. 나이를 먹어서 머리가 벗겨
졌다고는 해도 나가오는 틀림없이 그 사내였다. 사다코의 시각은 이
사내의 얼굴을 바로 가까이 에서 포착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그
녀의 '눈' 은 이 사내를 사악한 것으로 보고 있었다.
류지는 타고난 능력을 발휘해서 나가오를 강하게 추궁해 모든 것
을 자백시켰다. 2i년 정도 전의 더운 여름날의 사건을· .
의사인 나가오는 환자로부터 천연두가 전염돼, 천연두 초기 증상
이 나타나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열과 두통에 시달렸지만 천연두라
고까지는 생각하지 못해 감기 정도로만 믿고, 평소처럼 결핵 환자들
을 치료하고 있었다. 그때 나가오는 요양소 안뜰에서 야마무라 사다
코를 우연히 만난다. 사다코는 입원중인 아버지를 병 문안하기 위해
곧잘 요양소에 왔었다. 극단을 그만둔 직후라서 마땅히 갈 곳도 없는
사다코는 아버지가 있는 요양소에 틀어박혀 있었던 것이다.
나가오는 사다코의 빼어난 아름다움에 순간적으로 마음을 빼앗겨
무언가에 이끌리는 것처럼 사다코를 숲 안쪽에 있는 폐가로 끌고 들
어가 사용하지 않고 있던 우물 앞에서 강간을 하고 만다. 집요하게
저항하던 사다코가 나가오의 어깨 근처를 물어뜯은 것은 바로 그때
였다. 어깨에서 피를 흘리며 격렬한 성행위를 벌일 때에는 깨닫지
못했지만, 나가오는 사다코가 고환성여성화증후군이라는 사실을 알
게 된다. 사다코는 람녀 양쪽의 성기를 같이 갖고 있는, 매우 드문
육체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이 증후군인 인간은 유방, 외음부, 질은
갖고 있지만 자궁이나 난관이 없는 경우가 많다. 겉모습만 보면 완
전한 여성이지만 성 염색체는 XY로 남성 형으로 아이를 낳을 수가 없
는 것이다
나가오는 매우 드문 육체적 특징을 지닌 사다코의 목을 졸라 우물
속으로 떨어뜨린다. 그리고 이어 위에서부터 돌을 던져 넣는다
나가오의 고백을 듣고 난 아사카와는 미나미하코네 퍼시픽랜드의
배치도를 제시하고 옛날 우물이 있었던 장소를 물어 본다. 나가오는
대략적인 장소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는데, 끄곳은 분명 빌라 로그캐
빈이 흩어져 있는 부근이었다. 아사카와와 류지는 곧바로 미나미하
코네 퍼시픽랜드, 빌라 로그캐빈을 향해 달려간다.
아사카와와 류지는 미나미하코네 퍼시픽랜드의 빌라 로그쾌빈이
흩어져 있는 부근에서 바로 그 우물을 찾아 낸다. 그리고 완만한 경
사면에 서 있는 B-4호 밑에서 콘크리트 뚜껑이 덮인, 등그런 우물 가
장자리를 발견한다. 우물 속에서 날려보낸 야마무라 사다코의 강한
원한이 똑바로 위를 향해 올라갔다면 정확히 7"V와 VTR이 놓여 있는
곳으로 이어진다. 녹화 상태인 비디오테이프에 염사가 이루어졌다고
해도 조금도 이상할 게 없는 위치였다
아사카와와 류지는 베니어판을 부수고 로그캐빈 아래로 들어가 우
물 뚜껑을 열고 야마무라 사다코의 유골을 찾는 작업에 착수한다. 비
디오테이프를 본 인간에게 야마무라 사다코가 맡긴 일은 닫힌 공간
으로부터 유골을 해방시켜 안장하는 것‥‥ 아사괴와와 류지 두 사람
은 모두 '주문'의 내용을 그렇게 해석했던 것이다. 두 사람은 교대로
우물 바닥에 내려가 바닥에 고인 물을 양동이로 퍼 올려 야마무라 사
다코의 뼈를 찾아 낸다. 그리고 성공적으로 야마무라 사다코의 것이
라고 생각되는 해골을 흙탕물 속에서 찾아 냈을 무렵은 밤 10시를 지
나고 있었다. 아사카와의 데드라인은 그날밤10시.그는 죽지 않은
것이다. 즉, 테이프에 담긴 '주문'의 수수께끼를 풀었다‥‥ 두 사람
은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그 후 아사카와는 야마무라 사다코의 유골을 가지고 이즈 오시마
로 건너갔고. 류지는 논문 집필 때문에 도쿄의 히가시나카노의 아파
트로 돌아간다. 일련의 변사사건은 희대의 초능력자 야마무라사다
코의 유골을 어두운 우물 바닥에서 건져 내는 것으로 끝났다. 뼈를
주워 안장하는 것으로‥‥ 아사카와도 류지도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
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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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까지 읽은 안도는 원고를 든채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열어
젖혔다. 우물 속으로 로프를 타고 내려가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 보
자 너무 답답한 나머지 질식할 것만 같았다. 한낮에 들어가도 캄캄하
게 어두운집 바닥,게다가 직경 1미터도 안되는 우물.이중으로 닫
힌 공간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일시적인 폐소공포증에 빠져 밖의
공기가그리워졌다 창 바로 아래에서는 메이지 신궁의 어두운수풀
이 바스락바스락 흔들리고 있었다. 손에 쥐어져 있는 원고도 같은 바
람을 맞고 파닥파닥 소리를 냈다. 남은 원고는 지금 인쇄중인 한 장
뿐. 그러니까 앞으로 한 장만 읽으면 아사과와 가즈유키의 기록은 끝
나는 것이다. 안도의 귀에 인쇄 종료를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프린
터에서 대부분 공백으로 비어 있는 용지가 얼굴을 내밀었다. 안도는
마지막 한 장을 손에 들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10월 21일, 일요일
바이러스의 특징 , 증식 .
주문은 복사해서 복사본을 만드는 것
마지막 페이지는 그렇게 끝나 있었다. 그저 중요한 포인트를 메모
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10월 21일이라는 것은 아사과와가 수도 고속도로에서 추돌 사건을
일으킨 날이다. 그 전날 오전에 안도는 류지의 사체를 해부하고 검시
원에서 다카노 마이를 우연히 만났다. 따라서 원고가 도중에서 끝나
있긴 해도 안도는 어느 정도 이야기를 덧붙일 수 있었다.
10월 19일, 야마무라 사다코의 유골을 고향에 사는 친척에게 건넨
시점에서 모든사건이 끝난 게 아니었다 아사카와가오시마의 호텔
에서 사건에 대한 상세한 리포트를 작성하던중, 류지는 자신의 아파
트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도쿄로 돌아와 류지의 죽음을 알게
된 아사카와는 서둘러 그의 아파트로 향했고, 마침 그곳에 와 있던
다과노 마이에게 아주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정말 류지는 당신에게 아무 말도 남기지 않은 거죠? 예를 들면,
비디오테이프에 대해서 라든지 ."
그가 당황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비디오테이프에 담긴 수수
께끼를 밝혀 죽음에서 피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했다고 믿었는데, 실
은 그렇지가 않았던 것이다. 저주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렇지만
아사카와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류지는 죽고, 자신은
살아 있는가? 다음날 일요일 오전 11시경에는 아사과와의 아내와 딸
이 데드라인을 맞이한다 아사카와는 혼자서 , 게다가 몇 시간 이내에
다시 '주문'의 수수께끼를 풀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면, 아사카와는 비디오테이프가 '해 주었으면 하고 바라던
것'을 최근 일주일 동안에 우연히 해 버린 셈이 된다 또한 류지는 분
명히 하지 않은 어떤 것을, 비디오테이프에 대해 자신은 하고 류지는
하지 않았던 일이 무엇일까?아마 한숨도못자고 밤을 새웠을 것이
다. 다음날인 )0월 21일이 되자, 아사카와는 영감을 얻었는지 '주문'
의 수수께끼를 완전히 풀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확실히 해
두기 위해 노트북에 날짜와 메모를 남긴 것이다.
10월 21일, 일요일.
바이러스의 특징 , 증식 .
주문은 복사해서 복사본을 만드는 것 ,
여기에서 바이러스라고 하는 것은 바로 천연두 바이러스다. 야마
무라 사다코는 죽기 직전, 일본의 마지막 천연두 환자인 나가오 조타
로와 육체 관계를 가졌다. 당연히 천연두 바이러스가 그녀의 몸에 침
입했다고 봐도 된다. 멸절의 위기에 직면한 천연두 바이러스가 야마
무라사디코의 특이한 능력을 빌려 바이러스의 존재 이유이기도 한
자기 증식을 꾀하려 했다. 하지만 비디오테이프로 모습을 바꾼 바이
러스는 스스로 증식할 수가 없었다. 인간의 손을 통해 억지로 복사되
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사라져 버린 테이프의 마지막에 말을
보충하면 이렇게 된다.
'이 영상을 본 자는 일주일 후 이 시간에 죽을 운명에 있다. 죽고
싶지 않다면,지금부터 말하는 것을 실행하라.즉, 테이프를 복사해
서 새로운 제3자에게 보일 것 '
그렇게 생각하면 앞뒤 맥락이 통한다 아사카와는 영상을 보고 난
다음날 류지에게 보여 주고 복사를 했다.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테이
프의 증식을 도와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류지는 복사 같은 걸 하지
않았다.
확신을 얻은 아사카와는 그 후 바로 VTR을 렌터카에 싣고 어딘가
로 향했다. 복사본 두 개를 만들어 두 명의 사람에게 보여 주기 위해
서다. 한 개는 아내 몫. 한 개는 딸 몫‥‥ 비디오를 본 사람은 새로운
먹이를 찾아 다시 비디오를 보여 주고 복사본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된
다 그렇지만 데단한문제는 아니다. 우선 그가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아내와 딸의 목숨을 구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들의 목숨을 구했다고 안심하는 찰나, 아사
콰와는 됫좌석에 손을 뻗어 차가워진 아내와 딸을 만지게 된다 그리
고 교통사고를 낸다.
안도로선 아사카와가 혼수 상태에 빠진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은 물론이거니와 그는 지금도 계
속 묻고 있음에 틀림없다 대체 '주문'의 진짜 해답은 무엇인가 하
고 이번에야말로 진짜 밝혀 냈다고 생각한 순간, 해답은 스르르 손
에서 빠져나가 모습을 바꾸고 아주 간단하게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
아가 버렸다 분노와 슬픔, 그리고 차례차례 덮치는 끝없는 의문.
왜,왜,왜‥‥ 그럼에도 불구하고,왜 자신은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
인가?
안도는 출력된 원고를 한데 묶어 테이블 위에 얹어 놓았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에 대고 물었다.
· .허는 이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믿는 거냐?
고개를 조용히 옆으로 젓는다.
· .모르겠어 .
달리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류지의 관동맥 내에 생긴 부자
연스런 육종을 실제로 보았다. 일곱 명에게서 나타나는 공통된 사인
게다가혈액 중에서 발견된 천연두와 흡사한 바이러스의 존재.다과
노마이는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분명 비어 있어야 할그녀의
방에서 느꼈던 그 이상한 분위기 . 인간이 아닌 뭔가의 존재를 암시하
는그 방의 소름끼칠 정도의 거북함 VTR에 꽃혀 있던 비디오테이프
에 남은 흔적. 현재에도 비디오테이프는 증식을 반복하고, 그 결과
희 생자가 계속 늘어가고 있는 짓일까? 생각하면 할수록 의문만 늘어
갈 뿐이었다.
12
생화학 연구실에 들러 노트북을 우에다에게 돌려주고 난 안도는
병리학 연구실로 향했다. 옆에는 어젯밤 출력한 원고를 안고 있었다
미야시타에게 읽히려고 가지고 온 것이다.
"이봐, 이거 읽어 보지 않겠어?"
안도가 말하자 미야시타는 놀란 표정 그대로 다시 안도의 얼굴을
응시한다.
"뭐야? 느닷없이 "
"읽고 의견을 들려 뒀으면 좋겠어 "
미야시타는 원고를 손에 들었다.
"길군 ."
"길긴 하지만, 흥미로운 내용이니까 금방 읽을 수 있어."
"설마 네가 소설이라도 썼다는 건 아니겠지?"
"아사카와 가즈유키가 일련의 변사 사건을 기록한 거야."
"아사카와라구? 그‥‥?"
"그래 "
미야시타는 흥미를 느꼈는지 원고를 펄럭거리며 넘겨 본다.
"오호."
"그럼 부탁한다 다 읽고 나서 의견을 말해 줘 ,"
물러가려는 안도를 미야시타가 불러 세웠다.
"잠깐 기다려 ."
"왜 ?"
"너 , 암호 해독이 특기였지?"
미야시타는 손으로 턱을 괴고는 볼펜 끝으로 테이블을 두드리고
있었다.
"특기랄 정도는 아냐‥‥ 학창 시절, 친구들하고 게임을 했을 정도
지 ."
"흐음 "
미야시타는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는 동작을 멈추지 않았다
"근데 왜?"
"이거 말이야, 이거 ."
미야시타는 팔꿈치로 누르고 있던 프런트를 안도 쪽으로 내놓고는
그 중앙을 볼펜으로 두드리기 시작했다. 안도가 들여다보니 어제 본
류지의 혈액 중에서 발견된 바이러스를 염기 자동해석 장치에 걸어
해독하고 출력한 것이었다.
"바이러스의 염기 배열‥‥ 어제 보여 준 거잖아?"
"역시 이상해서 견딜 수가 없단 말야."
미야시타는 안도의 눈에서 시선을 떼려 하지 않았다
"야, 이상하다고 생각 안 해?"
"그야 물론‥‥‥
톡톡거리던 볼펜 소리가 멈추었다.
"암호가 아닐까? 언뜻 그런 생각이 드는데 "
안도는 꿀꺽 침을 삼켰다 해부 후 류찌의 배에서 튀어나온 신문지
모퉁이에 늘어선 숫자가 RING이라는 알파벳으로 치환되었다는 사
실을 미야시타에겐 얘기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야시
타는 암호를 연상한 것이다.
"가령 암호라고 치면, 발신지는 어디야?"
"류지지 ."
안도는 두 눈을 굳게 감았다. 믿고 싶지 않은 사실을 미야시타는
아무렇지도 않게 들이대 온다.
"류지는 죽었어. 내가 해부했는 걸 "
"어쨌든, 너 이거 해독해 봐."
동요하는 기색도 없이 미야시타가 말했다 42개의 염기 배열이 어
떤 단어로 치환될 젓이라는 얘긴가? 178136이 간단히 KIhTG으로 치
환되었던 것처럼 42개의 염기 배열도 단어를 형성해 뭔가 중요한사
실을 알리려고 하는 건가?저승에 있는 류지가 조직 표본으로 남겨
진 자신의 기관에 반복하고 반복해서 같은 단어를 새겼다?
프린트물을 든 손이 떨렸다. 아사카와가 빠졌던 것과 똑같은 막다
른 골목에 자신도 빠지고 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몰아붙이니 꽁무니를 ◎ 수가 없었다. 안도 자신, 어제
이 염기 배열을 본 순간 암호라는 두 글자를 떠올렸지 만 억지로 의
식을 잠재웠던 것이다. 그렇게 라도 하지 않으면 과학의 틀은 점점
더 비뚤어져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프린트물 줄 테니까, 천천히 씨름해 봐."
과학자인 주제에 비과학적인 놀이를 부추기는 미 야시타의 속을 알
수가 없었다.
"됐어 , 너라면 해독할 수 있어 ."
그렇게 말하고 미야시타는 안도의 엉덩이를 냅다 후려쳤다.
제5장
MUTAT10N (돌연변이)을
어떻게 해석해야 되는 건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류지, 너 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거니?
말을 걸고 있는 안도의 목소리는
刊독에 성긍안 응분 崙인지
가晝峯에서부터
여 종업원이 안내하는 대로 안도와 미야시타는 창가 테이블에 앉았
다. 대학 병원의 맨 꼭대기층에 있는 레스토랑은 창 아래로 메이지
신궁의 바깥 정원이 내려다보여 전망이 멋지고, 대학의 교직원들은
할인 서비스도 받을 수 있었다. 두 사람 모두 횐 가운을 벗고 있었지
만 여 종업원은 일반 병문안 손님이 아닌 것을 한눈에 간파하고 대학
직원용 런치 메뉴를 내밀었다. 안도와 미야시타는 망설이는 일 없이
오늘의 정식에 커피를 덧붙여 주문했다.
"읽었어 ."
여종업윈이 가자 마자 미야시타가 먼저 말을 꺼냈다. 정심 식사를
하자고 했을 때부터 안도는 미야시타가 이렇게 이야기를 꺼내을 거
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미야시타는 아사카와가 쓴 리포트 '링' 을 읽
고 그 감상을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그래, 어떻게 생각해7"
안도는 몸을 내밀었다.
"솔직히 놀랐어 ."
"믿는 거야?"
"믿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 앞뒤가 딱 맞잖아. 리포트에 있는 사람
의 이름과 사망 시각이 모두실제와 일치하고 있어.우리도 사체 검
시 조서와 해부 소견을 대충 인었잖아?"
말 그대로였다 미나미하코네 퍼시픽랜드 빌라 로그캐빈에서 죽은
네 사람의 해부 소견과 다른 서류의 복사본을 입수해 두고 있었다
거기에 기재된 사망 시각은 아사카와의 리포트에 쓰인 그대로였다
모순점은 어디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안도가 의외라고 느낀 것
은 날카로운 병리학자인 미야시타가 원한이나 초능력의 존재에 거부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는 거야?"
"저항이 없는 건 아냐. 하지만 말야, 잘 생각해 보면 근본적인 물음
에 대해 현대 과학으로 대답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구. 지구 최초
의 생명이 어떻게 탄생한 것인지 , 진화는 어떻게 해서 이루어지는 것
인지,진화는 우연의 연속인 것인지 아니면 목적론적으로 방향이 정
해져 있는 것인지· .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무엇 하나 증명되고 있
지 않잖아.원자 구조는 태양계의 축소판이 아니라 잠재 능력이라고
표현해야 할 막연한 상태이기 때문에 원자 레벨 이하의 세계를 관측
하려고 하면 관측자의 마음이 미묘하게 개입되어 버리는 거야.마음
이야, 마음. 데카르트 이후의 기계론자가 신체를 기계로 보고 그 종
속물이라고 경시했던 마음이 어떤 형태를 통해 관측 결과에 연관되
는 거지.그러니 손들 수밖에. 난놀라지 않아 이 세계에서 무슨 일
이 일어나든 다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어. 현대 과학이 만능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놈들은 정말 어리숙한 거라구."
안도도 과학의 만능성을 적잖이 의심하고 있었지만, 미야시타만큼
극단적이지는 않았다. 그렇게까지 회의적 이라면 과학자로서 몸둘 j
이 없어진다.
"극단적 이군."
"너한테는 말하지 않았지만, 난 사실은 유심론자야."
"유심 론‥‥‥
"흔히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고 말하지."
안도는 미야시타가 말하려는 게 무엇인지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유심론과 색 즉시공과의 사이에 상당한 말의 생략이 있는 것 같았지
만, 지금은 미 야시타의 사상에 대해 운운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리포트를 읽고 뭔가 이상한 점이 없었어?"
안도는 자신이 가졌던 의문과 미 야시타의 그것이 일치하는지 어떤
지를 일단 확인하고 싶었다.
"이상한 점? 그런 건 태산만큼 많지."
미야시타는 막 가져온 커피에 크림과 설탕을 듬뿍 넣고 찻숟갈로
휘저었다. 유리창 너머의 햇살을 정면으로 받아 얼굴은 홍조를 띄우
고 있었다.
"우선 첫째로, 비디오테이프를 業는데도 불구하고 왜 아사카와만
살아남았는가 하는 점 이 야."
미야시타는 그렇게 말하고 커피를 마셨다.
"주문의 수수께끼를 풀었기 때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건가?"
"주문?"
"비디오테이프의 마지막 일부분이 장난에 의해 지워져 있었지?"
"테이프를 본 사람에게 뭔가를 강제적으로 시키고 싶어하는 부분
"아사카와가 주문의 내용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행했다면‥‥‥
"뭔가를 했다는 거야?"
"리포트 마지막에 이렇게 돼 있잖아?바이러스의 특징, 증식, 주
문, 복사해서 복사본을 만드는 것."
안도는 히야시타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사실을 간단하게 설
명해 주었다 추돌 사고를 일으킨 아사카와의 차 안에 남겨진 비디오
와 다카노 마이의 방에 남겨진 비디오테이프의 존재.
미야시타는 설명을 듣고서야 겨우 납득한 모양이었다.
"그렇군, 그런 의미였던 거군. 결국 아사카와는 주문의 내용이 비
디오테이프를 복사해서 아직 못 본 사람에게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
했다?"
"그는 틀림없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
"사고를 일으킨 당일 날 아침 , 아사괴와는 YFR을 차에 싣고 어디
론가 외출한 거지?"
"당연히 테이프를 봐 줄 사람들이 있는 곳이지.그는 분명히 아내
와 딸의 목숨을 구하고 싶었을 거야."
"하지만 위험한 테이프를 생판 얼굴도 모르는 남한테 보여 줄 수는
없었겠지 ."
"아마도 아사카와의 장인 장모일 거야. 아사카와의 부모는 아냐.
아사카와의 부친은 건재해. 지난번에 전화 통화를 했으니까 "
"아내와 딸을 구하기 위해 장인과 장모를 일시적인 위험에 노출시
켰다는 거야?"
"처가가 어딘지를 조사해서 그곳 경찰에 문의해 볼 필요가 있겠
어 ."
일주일 이내에 복사해야 한다는 혈박문이 첨가되어 두 개로 나뉜
테이프가 반복 복사되어 증식되고 있다면 아사카와의 처가 근처에서
는 이미 몇 사람인가의 희생자가 나왔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렇지
만 아직 수면 아래서만 진행되고 있을 뿐인지, 언론은 아무 것도 떠
들어 대지 않고 있었다.
비디오테이프가 바이러스처럼 번식력을 가졌다는 것에 생각이 미
치자, 미야시타는 엷은 미소를 띄우며 안도를 놀렸다
"너 , 더 많은 변사체를 해부하게 되겠다. "
미야시타의 말에 안도는 소름이 돋았다. 상황으로 볼 때, 다카노
마이도 테이프를 봤을 가능성이 충분했다 그녀가 사라져 버린 지 벌
써 ?주일 가까이나 지났다. 안도는 자신의 손으로 마이의 몸을 해부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해부대에 길게 누운 아름
다운 몸을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그러나 아사카와는 살아 있어 ."
안도의 중얼거림에는 마이의 무사함을 기도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
다.
"아사카와가 순조롭게 두 개의 복사본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고 하
면, 왜 아사카와의 아내와 딸은 죽은 걸까?역시 그게 제일 큰 의문
이겠지 "
"반대로 말하면, 왜 아사카와는 살아 있는 건가 하는 거야."
"모르겠군. 천연두 바이러스가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 복사해
서 증식을 돕는 게 주문이라고 생각하면 앞뒤가 맞을 것 같은데·. . "
'사실 류지가 죽은 시점까지는 앞뒤가 맞아. 그러다가 아사카와의
아내와 딸이 죽으면서부터 얘기가 엉켜 버리게 됐어 ."
"복사본을 만들게 하는 게 비디오테이프의 목적이 아니라는 거
야?"
"몰라."
달리 뭐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석하면 되는 걸까‥‥주
문이 의도하는 바가 다른 데 있는 걸까? 아니면 복사의 과정에서 뭔
가 문제가 있었던 걸까?그렇다면 아사카와만이 살아 있는 이유를
파악할 수가 없게 된다.
점심 식사가 나와서 두 사람은 잠시 대화를 멈추고 먹는 데에만 전
념했다
'걸레마군."
포크를 쥔 손을 멈추고 미야시타가 말했다.
"뭐가?"
"그런 비디오테이프가 있다면 난 보고 싶어. 그런데 만약 본다고
하면 목숨을 보장받을 수가 없지 . 역시 딜레마야. 일주일이라면 너무
팎거든."
"너무 팎다구?"
"주문을 풀기엔 말야. 흥미진진해지는 걸? 그럭저럭 과학적으로
설명해 보자면 시각과 청각이라는 감각 기관을 통해서 인간의 뇌에
호소하는, 영상이라는 미디어가 체내에 천연두 바이러스와 똑같은
바이러스를 낳게 했다는 건데."
"낳았다기보다는 영상의 힘에 의해 체세포의 DNA가 영향을 받아
미지의 바이러스로 변한 건지도 몰라 "
"음, 결국 그런 얘기야. 난 에이즈 바이러스가 연상되는데. 그 기원
은 아직 해명되지 않았지만, 이제까지 존재하던 사람과 원숭이의 바
이러스가 어떤 영향을 받아 진화되어 탄생했다고 보고 있어. 어쨌든
이러스가 어떤 영향을 받아 진화되어 탄생했다고 보고 있어. 어쨌든
에이즈 바이러스는 몇백 년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게 아니야. 염기
배열을 조사하면 알 수 있지만 바로 150년 전에 두 계통으로 나뉘었
어 . 엉뚱한 계기에 의해."
"그 엉뚱한 계기라는 게 뭔지 알고 싶군."
"내 생각엔, 어떤 형태로든 '마음' 이 연관되어 있는 게 아닐까 해."
미야시타는 상반신을 앞으로 내밀어 안도의 코끝에 얼굴을 들이밀
었다.
스트레스가 위벽에 구멍을 뚫는다는 예를 굳이 들 것도 없이, 질량
을 갖지 않은 마음의 상태가 육체에 여러 가지 영향을 준다는 건 모
두들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미 야시타도, 안도도 거의 같은 것을 생
각하고 있었다. 영상을 보는 것에 의해 어떤 마음의 상태가 형성되
고, 그 영향에 의해 이미 존재하는 체내의 DNA가 변모를 일으켜 천
연두 바이러스와 흡사한 미지의 바이러스가 탄생된다. 그리고 유사
천연두 바이러스라고 부를 수 있는 바이러스는 인간의 심장을 둘러
싸는 관동맥 내부를 암으로 변화시켜 육종을 만들어 낸다. 정확히 일
주일 만에 육종은 최대가 되고, 혈액의 흐름이 차단된 심장은 작동을
멈추게 된다. 그러나 바이러스 그 자체는 암 바이러스와 같이 관동맥
중막의 Dl4A에 들어가서 세포 변이를 일으킬 뿐, 거의 전염성은 없
다. 지금까지의 분석 결과로부터 이끌어 낼 수 있는 것은 대강 그 정
도의 추론이었다.
"보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들어?"
미야시타는 자신의 눈으로 현물을 확인하고 싶어서 안달이 날 지
경이었다.
"그야. 뭐."
"비디오테이프만이라도 손에 넣고 싶어 ."
"관둬라 관둬.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라구. 그건 류지의 전철을 밟
는 거야."
"류지라고 하면‥‥ 참, 바이러스의 영기 배열에 들어 있던 암호, 해
독했냐?"
"아니, 아직.가령 암호로 볼 때 단지 ·i2 염기라면 너무적어. 말이
된다고 해도 기껏해야 몇 단어겠지."
안도는 변명을 했다 몇 번인가 시도해 畿지만 도입 부분에서 포기
했던 것이다.
"내일 휴일은 그것이나 풀면서 보내야겠군."
미야시타의 말을 듣고서야 안도는 비로소 내일이 '근로 감사의 ◎
(11월 23일로서 공휴일 '역자 주)이라는 것을 생각해 냈다. 게다가
내일 모레인 토요일도 쉬니까 3일 연휴가 된다. 아들을 잃고 아내와
헤어지고 나서는 휴일에 대한 생각이 없어져 버렸다. 방에 흔자 있는
것은 고통에 지나지 않았다
"뭐, 할 만큼은 해 보겠지만 "
안도는 생각없이 대꾸했다. 연휴의 시간 때두기고 죽은 자가 보낸
암호와 씨름해 業자 기분이 밝아지기는커녕 오히려 우울해질 게 뻔
했다 그렇지만 해독해 낼 수만 있다면 그 나름대로 충족감을 맛볼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을 고펴 먹었다 어쨌든 마음을 달랠 수만 있다
면 뭐든 상관없었다.
"월요일에는 가르쳐 주지 류지가 보낸 메시지를."
안도는 .)일 안에 해독할 수 있을 거라고 미야시타에게 약속했다.
"부탁해."
미야시타는 테이블 너머로 손을 뻗어 안도의 왼쪽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점심 식사 후, 연구실로 돌아오자마자 안도는 도치기 현 우쓰노미
야에 있는」의대 법의학 교실에 문의했다. 아사카와 가즈유키의 처가
를 알아본 바, 도치기 현 아시카가에 있는 것이 판명되었고, 그 주변
에서 변사체가 나왔을 경우 해부를 담당하는 것은」의대 외에는 달리
없었기 때문이다.
법의학 연구실의 조교수가 전화를 받자, 안도는 지난달 하순경에
관동맥 폐색에 의한 심근경색으로 사망한 환자가 있는지 없는지를
물었다
그러자 조교수는 곤혹스러운 듯 말끝을 흐리며 거꾸로 질문을 해
왔다.
"죄송합니다만, 의도를 잘 모르겠습니다. "
안도는 도쿄를 중심으로 심근경색에 의한 변사체가 지금까지 일곱
구 발견되었고 앞으로도 많은 희생자가 예상된다는 뜻을 전했다.
'링'에 기록되어 있는 초심리학에 대한 언급은 빼고 안도는 간단히
설명했다.
"칸토 지역의 모든 의학부에 문의하고 계신 겁니까?"
조교수는 다시 집요하게 질문을 던져왔다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
"그럼 왜 저희 대학에?"
"가능성이 있어서요."
"우쓰노미야 근처에서 사체가 발견됐다는?"
"아뇨, 아시카가입니다. "
"아시카가‥‥‥
아시카가라는 지명을 듣자 조교수는 상당히 놀란 모양이었다. 말
을 멈추고 수화기를 쥐는 손에 힘이 들어가는 분위기가 안도에게까
지 그대로 전해져 왔다.
"놀랐습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사실 10월 20일, 아시카가에서
발견된 노부부의 변사체를 그 다음날 저희 연구실에서 해부했습니
다. "
"그 노부부의 이름은요?"
"분명 성은 '오다' 였고,남편 쪽은 잊어버렸습니다만아내의 이름
은 세스코입니다. "
아사카와의 장인 장모의 이름이 오다 도오루와 세스코라는 것은
이미 확인이 끝난 상태였다. 틀림없었다. 이것으로 확실한 증명이 되
는 것이다. 1()월 21일 오전, 아사카와는 렌터카에 YTR을 싣고 아시
카가에 있는 처가에 가서 두 개분의 테이프를 복사해 노부부에게 보
여 준 것이다. 일주일 이내에 복사해서 다른사람에게 보여 주면 생
명엔 별 지장이 없다고 장인 장모를 설득했으리라. 무리하게 설득하
지 않았더라도, 또 사위의 엉뚱한 얘기를 믿지 않는다고 해도 딸과
손녀의 목숨이 달린 것이라면 장인 장모는 부탁에 응했을 게 틀림없
다. 두 사랑에게 비디오테이프의 영상을 보이고 복사본을 만든 것으
로 아사카와는 아내와 딸의 목숨을 건졌다고 믿었다. 그런데 귀가길
에 아내와 딸을 동시에 잃었고, 그로부터 정화히 일주일 후에는 비디
오테이프를 본 장인 장모도 목숨을 잃게 되었다·.
"해부해 보고 놀라셨죠'1"
변사체 두 구가 동시에 들어왔다면 놀라움도 한층 더했을 것이라
고 안도는 스탭의 마음을 상상해 보았다.
"그야, 뭐 어쨌든 사망 시각이 거의 같고, 게다가 유서까지 있었기
때문에 동반 자살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데 막상 해부해 보니, 그거 있죠?독극물이 발견되기는커녕 관동맥
에 기묘한 육종이 생겨 있었어요. 너무 놀라서· . ."
안도가 끼여들었다.
"잠깐만요 "
"왜 그러시죠?"
'지금 유서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나요「)"
"예 떼모 정도의 것입니다만, 죽기 직전에 쓴 것으로 보이는 유서
가 사체 머리맡에 놓여 있었습니다 "
안도는 혼란스러워졌다. 어떻게 된 일일까'1 왜 유서가 있는 거지「)
"유서의 내용을 알려 주실 수 있을까요?"
"잠깐만요."
조교수는 수화기를 그 자리에 놓고 잠시 전화에서 멀어졌지만 불
과 십여 초 만에 돌아왔다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은데, 나중에 팩스로 보내 드려도 될까요',l"
"그렇게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안도는 팩스 번호를 알려 주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안도는 그대로 책상 앞에서 떨어질 수가 없었다. 회전 의자를 4i도
돌려 팩스와 마주 보도록 한 다음 안도는 문서가 도착하길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안도는 자세를 거의 흐트러뜨리는 일 없이 지금까
지의 경위를 몇 번이고 머릿속에서 반복해 보았다. 언제 움직이기 시
작할지 알 수 없는 팩스가 마음에 걸려 새로운 생각을 할 여유도 없
이 그저 사건 경위만 반복시킬 뿐이었다.
이윽고 '지지지지지' 하는 소리를 내며 팩스에서 종이가 토해져
나왔다. 출력이 완전히 끝나자 안도는 자리에서 일어나 팩스 종이를
찢어 들고 다시 의자로 돌아와 책상 위에 펼쳤다
~대학 의학부, 안도 선생님.
오다 부두의 유서로 싱쪽되는 문서를 보내 드립니다 윈가 진
전이 있으시면 꼭 알려 주십시오
비디오테이프는 책임진고 처리했습니다.
OPll 아무 걱정할 필오 없을ㄴ1ㄷ1.정말 Rl곤할ㄴ1ㄷ1.
요시미 , 노리코, 됫일을 잘 부탁한다.
10월 2駱일 o침
垈과 도오루 , 세스코.
사인펜으로 휘갈겨 쓴 조교수의 글씨 아래에 오다 부부 양쪽의 서
명이 쓰인 몇 줄의 문장이 첨부되어 있었다. 원본을 그대로 복사한
것인지 조교수의 필적파는 달랐다.
짧지만, 분명 죽음을 앞둔 메시지임에 틀림없었다 요시미와 노리
코라고 하는 것은 장녀와 차녀의 이름인 것 같은데 그 앞에 있는 문
장은 대체 누구를 향해 말하고 있는 걸까?
비디오테이프는 책임지고 처리했다?
처리했다고 하는 것은 묻어 버렸다는 것인가? 여기서 처리라고 하
는 말을 복사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은 일단 불가능했다
안도는 오다 부부의 심리를 차례대로 더듬어 보았다.
10월 21일 일요일,두 사람은 사위인 아사과와의 방문을 받고 비
디오에 담긴 불길한 저주 탓으로 딸과 손녀의 목숨이 위험에 빠져 있
다는 말을 듣고 자신들도 테이프를 보고 복사하는 일에 동의한다
그런데 같은 날, 딸과 손녀는 예고된 시간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오다 부부가 처음 한동안 아사카와가 말하는 것에 반신반의했었다고
해도 그 사실에 의해 테이프의 힘을 믿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딸과 손녀의 장례식을 치르고, 해부 결과 원인 불명의 심근경색이
사인이라고 들은 그들 부부는 자신들의 생을 포기하겠다고 결심했음
에 틀림없다 비디오테이프의 명령에 따라 복사했음에도 딸과 손녀
의 목숨이 사라진 것이다.
아무리 발버등쳐도 살아날 수 없다고 단념하고 장례식 됫처리다
뭐다 해서 피로했던데다가 염세적인 기분도 겯쳐 그들은 비디오를
복사하지 않고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기다렸다‥‥
그런데 유서의 내용에 따른다면 죽음을 기다리는 사이에 그들은
불행의 원흉인 비디오테이프를 '처리' 했다는 것이다.
오다 부부가 비디오테이프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안도로선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완전히 소거한 뒤에 위험물로 버린 것인지, 아니면
정원에다 묻은 것인지. 어쨌든 완전히 이 세상에서 말살했다고 가정
한 안도는 옆에 있는 메모지에 비디오테이프가 퍼져 나간 계통도를
그려 보았다.
일단 미나미하코네 퍼시픽랜드 빌라 로그캐빈 B-4호에서 녹화 상
태인 비디오테이프에 영상이 흘러들어와 악마의 테이프가 한 개 탄
생한다. 그것을 자기 집 아파트로 가지고 돌아온 아사카와는 다카야
마 류지를 위해 한 개를 복사한다
여기서 테이프는 두 개로 나누어진다. 그러다가 류지의 테이프는
마이의 손에 건네지는데, 처음 몇십 초만을 남긴 채 나머지는 지워져
버린 것으로 추측된다. 아사카와의 테이프는 형인 준이치로에게 가
서 부서진 VfR과 함께 버려지고 만다
이어 아사카와가 가진 오리지널 테이프에서 갈라져 나온 두 개의
테이프는 오다 부부의 손에 의해 처리된다. 그렇다면 야마무라 사다
코라는 여성의 원한으로 탄생한 비디오테이프는 이 세상에서 모두
모습을 감춘 게 되지 않는가?
안도는 몇 번이고 계통도를 더듬어 이 점을 확인했다. 아무리 생각
해도 씨가 마르듯 비디오테이프가 소멸해 버린 것이 된다. 8월 말에
이 세상에 나온 비디오테이프는 총 아홉 명의 희생자를 내고 단 2개
원 만에 멸망한 것이다.
그것을 증명하듯이 지난 1개월 동안 새로운 희생자는 한 명도 나오
지 않았다 하지만‥‥ 안도는 생각했다. 복사하고 안하고에 관계없
이, 영상을 본 인간을 모두 죽음으로 몰아넣는 비디오테이프라면 조
만간 소멸되는 게 당연한 이치가 아닐까?
일주일 내에 복사하지 않으면 죽는다고 협박할 수 있어야만 비로
소 비디오테이프는 증식이 가능하고,환경에 적응해 살아남을 수 있
다. 협박이 거짓이라는 게 알려지면 이내 막다른 길펄 내몰릴 게 뻔
한 일 아닌가'S
만일 정말로 소멸돼 버렸다고 하면, 이번 일련의 변사 사건은 해결
된 셈이 된다. 그 덩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제 어느 누구도 원인
불명의 심근경색으로 목숨을 잃을 염려는 없다 그런데 근본적인 의
문이 안도의 뇌리에 되살아났다.
·.쌔 아사카와만 살아 있는 것인가',l
이어 생각은 마이에게로까지 미쳤다.
‥‥다카노 마이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논리적으로 따져 보면 비디오테이프는 소멸된 것처럼 보인다. 그
러나 안도의 직감은 소멸을 부정하고 있었다. 그렇게 간단히 끝날 리
가 없다. 어딘가 석연치 않았던 것이다
3
도서관 접수계 에서 사물함 키를 받아든 안도는 걸음을 옮기면서
재킷을 벗었다 이제 곧 겨울이 다가올 때라 날씨가 좨 쌀쌀해져서,
얄팍한 셔츠 한 장만 걸친 안도의 가벼운 차림은 몹시 추워 보였다
하지만 안도는 땀을 잘 흘리는 체질이라 셔츠 한 장만 입고도 상온으
로 유지되는 도서관 실내가 더을 정도였다 서류 가방에서 노트와 펜
을 꺼낸 안도는 가방을 재킷에 감싸서 사물함에 넣었다
노트에는 류지의 혈액에서 발견된 유사 천연두 바이러스의 염기
배열을 해독한 프린트가 꽃혀 있었다. 오늘이야말로 본격적으로 암
호 해독에 나서야겠다고 마음먹고 아침 일찍 도서관에 나온 것이다.
그러나 종이에 인쇄되어 있는 염기 배열을 보기만 해도 그 무질서한
나열로 현기증이 나서,도저히 해독할 수 없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
이 들곤 했다.
어쨌거나 안도에겐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
도 연휴를 보내는 하나의 방법이라 할 수 있었다. 특별히 하는 일토
없이 .)일 연휴를 보낼 수 있는 계획이 달리 없을 듯 싶었던 것이다.
노트를 겨드랑이에 끼고 안도는 3층 열람실로 올라가서 창가 자리
에 앉았다. 류지와 함께 암호 놀이에 열중하던 학창 시절에는 암호
에 관한 해독서를 많이 구입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암호에
대한흥미를 잃은 탓에 그런 종류의 책들은 이사를 다니는 사이, 모
두 어딘가로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암호의 종류에 따라서는 전문서
에 기재된 환자표와 빈도 분석표가 없으면 풀 수 없는 것이 있어서
자료 없이 무턱대고 씨름해 봤자 헛수고일 때가 있었다. 그렇지만
다시 사는 것도 좀 우스운 일이라 결국 도서관으로 발길을 옮길 수
밖에 없었다.
십몇 년 전에 열중했던 암호의 조립과 해독의 기본을 다시 이해하
기 위해 안도는 입문서를 대충 훌어 내려갔다. 그리고 일단 유사 천
연두 바이러스의 염기 배열이 암호의 어떤 형식에 속하는 것일까부
터 , 분류해 보기로 했다.
암호를 크게 나누어 보면 문장을 다른 문자나 기호, 숫자로 바꾸는
환자식(煥字式), 단어의 순서를 바꿔서 나열하는 전치식(轉置式),
단어 사이에 필요없는 말을 삽입하는 삽입식의 세 종류가 있다. 예를
들면 해부 후 류지의 배에서 튀어나온 숫자가 'RING'이라는 영어
알파벳으로 바뀌는 것은 환자식이다.
유사 천연두 바이러스의 염기 배열에 담긴 암호는 깊이 생각할 필
요도 없이 환자식 형태일 거라고 추측되었다. 여기에 있는 것은
ATGC네 개의 염기가 나열되어 있는 것이므로,어느특정한 조합이
하나의 문자를 지정하는 게 무엇보다도 암호 같다고 생각되었기 때
문이다.
자신이 떠올린 '암호 같다'라는 말에 스스로도 놀라 안도는 얼굴
을 들었다. 원래 암호의 목적이란 제3자에겐 알려지지 않으면서 특정
한 상대에게만 점보를 전달하는 데 있다. 학창 시절, 그것은 놀이의
도구였으며 지적인 게임 이외엔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해독의
성공 여부가 전쟁 상황을 지배할지도 모르는 조건하에서 , 제3자에 의
한 해독을 막으려면 언뜻 보기만 해서는 암호라고 알아챌 수 없을 만
한 구조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적의 스파이를 붙잡아 소지품 중에서
아무리 봐도 수상쩍은 숫자가 나열된 수첩이 나온다면, 기밀 사항을
메모한 암호일 거라고 의심받는 것은 당연하다. 속임수라면 몰라도
암호라고 판단되는 시점에서부터 해독의 가능성은 상당히 높아지는
것이다.
안도는 될 수 있는 한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려고 노력했다. 제3자
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정보를 전하는 것이 암호의 목적이라고 볼 때,
암호는 정보를 전달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만 암호답지 않으면 안 된
다. 지금 응시하고 있는 염기 배열 중에 들어 있는42염기의 반복을
안도는 매우 암호답다고 느끼고 있었다 처음 본 순간부터 확실히 그
런 인상을 받았던 것이다.
대체 어째서일까?
안도는 자신이 받은 느낌의 출처를 냉정하게 다시 응시했다. 왜 암
호다운 것인가? 염기 배열을 분석했을 때 의미를 알 수 없는 반복이
들어간 예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런데도 이 반복은 아무래도 뭔
가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긴타로 엿처럼 어느 단면을 잘라 봐도 똑
같은표정의 얼굴을 내민다. '암호란 말이야.' 하고뻔한자기 주장을
펴고 있는 것 같았다 해부 후, 류지의 사체에서 튀어나온 슷자가
'RIhFC'이라는 알파벳으로 치환되었다는 경험이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에 염기 배열의 똑같은 반복이 아무래도 암호처럼 보였던 것이
다 즉,류지가 'RING'이라는 단어를 배에서 튀어나오게 한 데에는
두가지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저 단순히 'RINC'이라는 문서의 존
재를 알리는 것 이외에, 이후에도 수시로 암호를 출현시킬 테니까 놓
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경고의 의미 . 숫자를 알파벳으로
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경고의 의미 . 숫자를 알파벳으로
바꿔 놓는다고 하는 환자식의 가장 간단한 암호를 사용한 것은 먼 훗
날에의 복선을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염기 배열의 동일한 반복이 류지의 혈액에 숨어 있는 유사 천연두
바이러스에서만 발견된 것을 볼 때. 발신인은 류지라고 가정할 수 있
다 류지가죽어 재가된 것은 이미 움직일 수 없는사실이지만그의
조직 표본은 아직 연구실에 남아 있다 류지라고 하는 개체의 설계도
인 DNA는 표본 내의 세포 중에 아직도 무수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
다. 그 DNA가 류지의 '의지'를 이어받아 내게 '말'을 하려고 하는
것 이 라면‥‥
해부학자로선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너뚜나도 황당무계한 가정
이었다. 그렇지만 만일 이 염기 배열이 특정한 말로 바꿔진다면 다른
해석은 존재할 수가 없다. 논리적으로 류지의 혈액 표본에서 하나의
DNA를 추출해서 류지와 똑같은 개체(클론)를 만드는 것이 가능하
다. 공통된 의지를 지닌 I)NA의 집합이 혈액에 섞인 유사 천연두 바
이러스에 영향을 주어 어떤 '말' 을 삽입했다. 게다가 유사 천연두 바
이러스에만 말을 삽입했다는 사실이 류지가 지닌 통찰력의 깊이와
재능을 느끼게 한다
그렇다면 왜 적혈구 DNA가 아니라, 하필이면 외부로부터의 침입
자인 유사 천연두 바이러스에만 말을 삽입한 것일까? 그것은 다른
세포의 aNA는 해독될 가능성이 없다는 걸 의학부 출신인 류지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일어난 일련의 변사 사건을 일으킨 바
이러스라면 틀림없이 염기 자동해독 장치에 걸어 배열을 밝힐 것이
라는 사실을 알고, 그는 유사 천연두 바이러스의 DNA에만 정보를
제공한 것이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말이 읽는 쪽에 도달할 수 있
도록.
안도는 하나의 결론을 이끌어 내려고 했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것
은 대충 보기만 해도 금방 암호처럼 보이므로 암호의 본래 목적을 잃
어버리고 있다는 말이 된다. 류지의 DNA가 의지를 갖고 외부를 향
해 커뮤니케이션을 취하려 한다면, 다른 수단이 있을 수 있을까?
DNA의 이중 나전이 ATGC, 네 개의 염기 배열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면 이 네 개의 알파벳을 조합해서 의지를 전달하는 것 이외에 달
리 방법이 없을 것 같았다. 제3자에게 해독되는 걸 막기 위해 암호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다른 전달 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네 개의 염기를 이용한 젓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류지는 네 개의 알
파벳 이외에는 다른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바로 조금 전까지 느꼈던,도저히 해독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체념
이 거짓말처럼 자신감으로 바뀌어 갔다.
· .풀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안도는 가슴속에서 외치고 있었다. DNA 내부에 남아 있는 류지의
의지가 염기 배열을 사용해 안도에게 말하려고 하는 것이라면 그 말
은 안도가꿜게 해독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일부러 어렵게 만들
필요가 없다 논리에 오류가 있는지 어떤지 안도는 몇 번이고 순서를
더듬어 확인했다. 입구부터 틀려 버리면 막다른 골목까지 헤매고 들
어가다가 결국 해답을 찾을 수 없게 된다
안도는 이미 이 게임을단순한시간때우기로만 생각하고 있지 않
았다. 풀 수 있다는 전망이 보인 이상 안도는 한시라도 빨리 그 해답
을 찾아 내고 싶어서 마음이 조급해졌다
점심 식사 전까지 안도가 시도한 것은 다음의 두 가지 방법이었다.
AT G GA AGA AGA ATAT C 67 TATAT T C C T C C T C C T CA ACA ACA A
이상 42개의 알파벳을 어떻게 구분짓느냐가 최초의 난관이었다.
둘씩 구분하는 방법과 셋씩 구분하는 방법, 두 가지 방법을 생각할
수 있었다.
예1) 두개씩 구분한 경우
AT GG AA GA A6 AA
TA TC G7 TA TA 77
CC TC CU CC TC AA
CA AC AA
네 개의 알파벳 두개씩을 하나의 단위로 간주하면 4×4로 총 16
종류의 조합이 생긴다. 그리고 하나의 조합에 하나의 문자가 상응한
다고 생각해 보자
여기서 떠오르는 것은 이 암호는 도대체 어느 나라 언어로 쓰여져
있는가 하는 문제다.
일본어의 경우, 탁점이나 파열음을 포함하면 50개 가까이 되므로
16개 조합으로는 도저히 전부를 표현할 수 없다. 영어나 프랑스어의
알파벳이라면 26자가 필요하지만 이태리어라면 20자로 끝난다. 그러
나 일본어를 알파벳으로 표현했을 가능성토 있으므로 어느 나라말인
가를 알아 내는 것은 암호를 해독하는 데 있어 상당히 중요한 포인트
가 된다.
그렇지만 실은 안도에게 있어 이 문제는 이미 해결이 나 있었다.
178136이라고 하는 숫자가 'RING 이라는 영어 알파벳으로 치환된
것으로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일단 틀림없다고
생각되었다. 암호의 언어는 거의 영어로 결정된 거나 다름없었다.
42의 염기 배열을 둘씩 구분지어 가면 전부 21개의 조합이 생긴
다. 하지만 AA가 두 개, TA와 TC가 각각 세 개, CC가 한 개씩 중복
되고 있기 때문에 조합 수는 모두 13이 된다. 안도는 이 숫자를 노트
에 적은 뒤 해설서의 페이지를 넘겨 영문에서의 출현 문자 종류수의
표를 찾아 확인하고자 했다
예를 들어 영어의 경우, 알파벳에는 26개의 종류가 있지만 실제 문
장으로 쓸 경우, 사용되는 빈도에 상당한 편향이 생긴다. E나 T나 A
등은 자주 얼굴을 내밀지만 Q나 B 등은 원서 한 페이지에 한 개나 두
개 정도밖에 나오지 않는다 영문에서의 출현 빈도 종류수는 통계 자
료로서 암호 해독서의 끝부분에 실려 있는 경우가 많다. 이 통계와
일치하면 암호가 어떤 언어로 쓰여졌는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영문 21개 문자 중에서 출현 종류수의 평균은 약 12 "
그것이 통계 결과였다.
안도는 흥분되었다 왠지 해독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평균 12는 15에 아주 가까운 숫자다 즉, 42개의 염기 배열을 둘씩
21조합으로 나누고,각각의 조합이 영어 알파벳 하나에 해당된다고
했을 경우. 통계상 아무 모순도 생기지 않음이 명백해진 것이다
안도는 이 점을 잠시 유보해 둔 채로, 염기 배열을 세 개씩 구분지
었을 경우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예2) 세 개씰 구분한 경우
AIG GAA GAA GAA TAT
C금T TAT ATT CCT CCT
CCT CAA CAA CAA
조합의 수는 14로, 종류는 ATG, GAA, TAT, CGT, ATT, CCT.
CAA의 7종류이다. 영문 14글자 중에서 출현 문자 종류수의 평균은
약 9이므로,7종류라는 숫자는 평균에서 그렇게 벗어나 있지 않다
그런데 안도는 그것을 곰곰이 바라보다가 중복이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CAA, CCT, CAA는 각각 세 번, TAT는 두 번 중복되고
있다. 안도가 마음에 걸려한 것은 7AA, CCT, CAA가 세 번 연속되
어 있다는 점이다. 즉, 하나의 조합이 하나의 알파벳에 해당된다고
한다면 같은 알파벳의 연속이 세 군데나 나타나 버리고 만다 Feel,
Glass처럼 알파벳이 두 개 연속해서 사용되는 단어는 적지 않다. 그
렇지만 같은 알파벳이 세 개 연속되는 영어 단어는 없으며 , 있을 수
있다면 ‥‥tr)o old· , will link ·퍼럼 특정 단어가 두개 연속되었을
경우뿐이다.
안도는 가까이에 놓인 원서를 손에 들고 시험삼아 한 페이지 안에
같은 알파벳이 세 개 연속된 곳이 어느 정도 있는지 세어 보았다. i ,
』페이지를 넘겨서야 겨우 한 군데를 찾을까 말까였다. 단 14글자 중
에 같은 알파벳이 세 개씩 세 번이나 연속될 확률은 거의 제로나 마
찬가지였다. 그에 대해 24 염기를 두개씩 조합할 경우, 같은 알파벳
이 두 번 연속되는 곳은 단 한 번만 나타났다. 이러한 관점에서 42 염
기를 두개씩 烈조로 나누는 게 통계상 가장 자연스러울 거라고 안도
는 판단했다.
목표가 좁혀 졌으니, 이젠 시행착오를 반복하는 일만 남았다
ATGG AA GA AGAA
TA TC G7 TA TA 77
CCT壽 CT CC TCAA
CA A硫 AA
AA조가 네 번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AA가 지정하는 알파벳이 상
당히 많이 사용된다고 예상할 수 있었다. 이어 안도는 암호 전문 서
적을 펼쳐 영문에서의 알파벳 사용 빈도표를 찾았다. 사용 빈도가 가
장 높은 것은 물론 I였다. 안도는 일단 AA가 I를 가리키는 것으로
가정했다. 다음에 출현수가 많은 것은 TA와 TC로 각각 세 번씩이다
게다가 AA 뒤에 TA가 오고, TC 뒤에 AA가 오는 곳이 각각 한 번씩
보인다. 이것은 중요한 힌트가 된다. 글자의 연속(알파벳이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에는 특징이 있고,이것 역시 통계로 정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안도는 통계표를 옆에 두고 TA와TC에 알파벳을 맞추어
나갔다.
I 뒤에 따라오기 쉬운 알파벳 중에서, 게다가 사용 빈도가 높은 것
을 찾아보면 바로A이다 따라서 이것으로부터 TA는A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TC에 T를 맞춰 본다 CC는 연속
방법으로 보아 N이라고 짐작해 볼 수 있다. 거기까지는 통계상 아무
문제가 없이 멋지게 합치되고 있었다.
NT NTE
‥‥ E
무질서하게 늘어서 있는 짓 같았던 염기 배열을 두개씩 21조로 ㄴ
누어 빈도 분석에 의해 알파벳을 맞춰 갔더니, 영문의 윤곽 같은 f
떠올랐다. 이것을 기초로 모음과 자음의 관계,연접 빈도 등을 단서
로 계속해서 틈을 메워 나가면 어떻게 될까?
S HEaDE
NTINTE
CME
앞쪽의 SHE는 '그니' 라는 의미를 가질 수 있지만, 그 이하는 아무
리 구분지어 봐도의미 있는 문장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안도는I와
4, T와N의 위치를 바꿔 넣거나 생각나는 대로 알파뗏을 바꿔 나열
해 보았다 볼펜으로 쓰는 데 걸리는 시간을 덜기 위해 노트를 찢어
26장의 카드를 만들고, 알파벳을 적어 넣고 게임과 같은 요령으로 여
러 가지로 바꿔 보았다
THEYWE
RBORRL
NBINBE
CME
이 배열을 보았을 때 안도의 머리에는,
'THEY WERE BORN· . '
라고 하는 영문이 떠올랐다. 정확히 그렇게 있을 수는 없지만 무리하
게 갖다 붙이면 읽을 수 없는 것도 아니라는 수준이다.
"그들(그녀들)은 태어났다. "
왠지 신경이 쓰이는 의미이긴 하지만 좀더 딱 들어맞는 게 있을 것
이다. 안도는 게임을 계속했다.
대략 10분 정도 씨름한 것만으로도 결과를 예상할 수 있을 정도가
되자 안도는 잠시 멈추었다 만일 여기에 PC가 있다면 이 정도의 작
업은 훨씬 쉬워질 것이다 3번째, 6번째, 19번째, 21번째의 알파벳
이 동일 7번째, 10번째 11번째의 알파벳이 동일. 8번째, 14번째,
17번째 알파벳이 동일. 13번째, 16번째의 알파벳이 동일, 문장의 길
이는 21자. 이상의 조건을 입력하고 사용 빈도의 조정을 수작업으로
실행하면 컴퓨터가 해답을 토해 내리라 다만 컴퓨터는 틀링없이 복
수의 대답을 토해낼 것이다. 위의 조건에 맞는 21자의 의미 있는 영
어 문장 같은 건 분명 수없이 많이 존재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떤
것이 류지가보낸 통신문인지 구별할수 없게 되어 버린다. 글끝에
서명을해 놓은 것처럼 한눈에 류지로부터의 암호문이라고 알수 있
는 장치가 되어 있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면 판단을 내릴 수 없
게 된다.
데드 엔드.
이제 와서 깨닫다니. 이렇게 둔할 수가 안도는 머리를 감싸질었
다. 학창 시절처럼 암호에 대한 감이 뛰어났던 무렵이라면 불파 1∼2
분 만에 이 정도는 쉽게 간파해 냈을 것이다 사고 방식을 바꾸지 않
으면 안 된다. 가정을 다시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
열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안도는 시간이 흐르는 걸 잊고 있었다. 손
목시계를 보니 벌써 오후 1시가 다 되어 있었다 동시에 허기가 느껴
졌다. 4층 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려고 안도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기
분전환에는식사가안성맞춤이다. '시행착◎와 '번뜩임'.양쪽이 잘
맞물리지 않으면 해독은 어렵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식사 중에 그런
번뜩임을 얻은 바 있다.
·.해답은 자연스럽게 하나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
주문처럼 그렇게 되뇌이면서 안도는 4층 식당으로 올라갔다.
脚
4층 식당에서 정식을 먹으면서 안도는 바로 가까이 에서 그네와 시
소를 타며 놀고 있는 어린애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점심때가 좀 지
나서인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가득 찼던 식당에 드문드문 빈자리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 양은 쟁반 옆에는 염기 배열 프린트가 놓여 있
었지만 그의 시선은 암호에서 벗어나 창 밖의 풍경을 향하고 있었다.
2년 전쯤. 미나미아오야마의 아파트에 살던 무렵의 일이다. 일요
일 오후였는데,갑자기 연구회의 발표 자료가 부족하다는 게 생각나
서 아들과 산보도 할 겸 지금 있는 도서관까지 걸어왔던 적이 있었
다. 그런데 입구에 '18세 미만은 입장할수 없습니다'라는 게시판을
보게 되었다. 아무리 일이 중요하다고는 해도 아이만 혼자 밖에서 기
다리게 할 수가 없어서 일을 포기하고 아이와 함께 공원에서 놀기로
했다 흔들리는 그네 뒤에 서서 아들의 등을 일정한 리듬으로 계속
밀어 주었다. 지금도 그때의 것과 똑같은 그네가 노란 은행나무 아래
서 흔들리고 있었다.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다리를 구부렸다 폈다
하는 아이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안도의 귓가에서는 세 살배기 아
들의 목소리가 되살아나고 있었다.
바깥 풍경을 보고 있으면 그만 쓸데없는 생각을 떠올리게 된다. 안
도는 시선을 되돌려 손에 볼펜을 들었다.
앙호 해독의 기본으로 되돌아가자. 몇 개의 가정을 세우고 어느
정도까지 깊이 파고들어 갔다가, 그 가정이 틀렸다는 걸 알게 되면
깨끗이 포기해 가며 진행시키는 것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20자
정도의 길이만 가지고는 사용 빈도나 연접도수표에 의지할 수도 없
으려니와, 만약 특정 환자표가 필요할 정도라면 지나치게 난해해지
므로 상대에게 정보를 전달하지 못할 수도 있다 가정을 세운 다음
하나하나 논리를 따라가다가 해답이 발견되면 그것으로 좋고, 발견
되지 않으면 가정 그 자체를 버린다는 시행착오를 반복할 수밖에 없
는 것이다.
안도는 어느 하나의 가정을 너무나 쉽게 버리는 건 아닌가 하는 생
각이 들었다. 애너그램(어구의 철자 순서 바꾸기)의 가능성이 머릿속
에서 번뜩였기 때문이다.
에서 번뜩였기 때문이다.
식당에서 열람실로 돌아오자마자 안도는 다시 한번 42개의 염기를
3개씩 1조로 나눈 다음 바라보았다.
ATG GAA GAA GAA TAT CGT TAT ATT CCT CCT CCT
CAA CAA CAA
아까는 GAA, CCT, CAA가 연속 세 번 중복되어 있으므로 문장이
이루어지기 어렵다고 판단해서 3개 1조의 가정을 버렸다. 그렇지만
글자자리를 적당히 바꿔 놓은 것이라면, 이 가정이 다시 성립될 여
지는 충분하다.
예를 들어 , 다음과 같이 중복이 많은 글자열을 생각해 보자.
0000EEEBBDDTPNHR
그런데 어떤 규칙에 따라 이 글자열을 다시 나열하면 다음과 같은
의미 있는 문장이 출현한다
BOB OPiNED THE DOOR(밥은 문을 열었다).
‥‥안 될지도 모른다.
다시 시작해 보려던 안도의 손길이 잠시 멈춰졌다 이내 앞이 보였
기 때문이다 CAA나 CCT가 가리키는 알파벳을 결정하고, 이어 재
배열이 필요하다고 볼 때 해독에 걸리는 시간이 지나치게 길어질 수
있다 그렇게 시간을 너무 많이 들이다 보면 풀 수 없을지도 모른다.
어떤 키워드 같은 게 없으면 2개 1조합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해답을
하나로 결정할 수 없게 되고 만다. 어쩌면 'RING'으로 치환된
178136이라는 숫자가 재배열될 경우의 순서를 지정하고 있는 키워
드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도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그 전에 알파벳
을 정확히 정해 놓지 않으면 안 된다.
또 다시 데드 엔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안도는 강하게 자신을 타일렀다. 시행착오를 하고 있다고 해도 아
까부터 같은 발상에만 머물러 있다. 2개 1조, 혹은 3개 1조가 하나의
알파벳을 가리킨다는 사고 방식을 너무 고집하고 있는 건 아닐까?
希답은 하나로만 나을 수 있고, 게다가 복잡한 과정을 거치지 않
고 간단히 손에 넣을 수 있는 게 아니면 안 된다.
집중이 잘 안 되면서, 염기 배열 프린트에 쏟는 시선도 자꾸만 산
만해졌다. 문득 깨닫고 보면 책상 대각선 쪽에 앉아 있는 젊은 여성
의 머리를 응시하고 있곤 했다. 고개를 숙인 이마가 다카노 마이하고
많이 닳았다.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마이의 신변이 걱정되었다 일찍이 류지의 애인이었던 다카노 마
01.
·어쩌면 류지는 이 암호로 마이가 있는 장소를 알리려는 건 아닐
f)?
그런 의문이 안도의 뇌리를 스쳤지만, 너무나 만화 같은 공상에 쓴
웃음을 지었다. 자기 자신을 위기에 빠진 주인공을 구해 내는 명탐정
쯤으로 가정해 두는 유치함. 안도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갑자기
어리석게 여겨졌다.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어떤 작용에 의해 바
이러스의 1)NA에 ·i2 염기의 특별한 반복이 삽입되어 있을 뿐, 실은
암호도 다른 아무 것도 아닌 게 아닐까?그런 가능성이 순간이나마
떠올라도 해독을 향한 정열은 엷어져 갔다. 애초 시간이나 때을 생각
이긴 했지만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는 것도 힘든 법이다.
석양이 뻗어와 두 팔의 솜털을 금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오전중
엔 제법 집중이 잘 되었는데 오후가 되자 집중력이 급속히 쇠퇴해 갔
다. 햇살이 닿지 않는 자리로 옮길까 하고 안도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돌아보았다. 자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
는 수험생들과 대학생들이 책 그늘 속에서 졸고 있었다. 자리를 옮긴
다고 해서 집중이 잘 될 리도 없을 것이다. 졸음이 열람실 전체를 뒤
덮고 있었다. 안도는 다시 제자리에 앉아 자세를 가다듬었다.
‥‥논리 , 논리 .
그렇게 중얼거려 보았다.
‥‥함수가 아니면 안 된다.
안도는 자세를 바로잡았다. 3개 1조를 이루는 염기에 다양한 알파
벳을 맞춰 보는 것으로는 함수가 되지 않는다. 다수 대 1이나 1 대 1
대응이라면 자연히 해답이 하나로 정해진다. 다수 대 1, 혹은 1 대 1
대응· 그런 대응 방법이 어디 없을까?
안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논리적으로 순서를 더듬어 갈수록 다
른 방법은 없을 것 같았다. 해답에 한 걸음 다가갔다는 직감이 졸음
을 날려 버리고 행동으로 몰아갔다.
자연과학 서가에 다가가 DNA에 관한 전문 서적을 뽑아 서둘러 페
이지를넘겼다 흥분이 되어 그의 손바닥에 땀이 밴다. 찾아야할 것
은 3개 1조의 염기가 어떤 아미노산에 대응하는가를 정리한 표이다.
(153페이지 참조)
안도는 자신이 찾아 낸 페이지를 펴서 암호와 함께 책상 위에 나란
히 놓았다.
』개 1조의 염기 (코돈)는 단백질을 합성할 때, 안도가 지금 펼쳐 놓
은 표에 나타난 법칙에 따라 아미노산으로 번역된다. 아미노산의 종
류는 전부20종류.네 개의 염기(T · C A G :역자주)가3개 1조
로 만들어지는 조합은 64종류. 64개 조합으로 20종류의 아미노산을
지정하자면 중복이 생기고 만다. 그러나 3개 1조의 염기가 아미노산
을지정하는 한 다수 대 1 대응이고,어느 조합이 반드시 하나의 아
미노산 혹은 '정지' 라고 하는 의미에 해당한다.
안도는 표에 따라42개의 염기를 순서대로 아미노산의 약어에 맞
춰 나갔다.
ATG GAA GAA GAA
(Met) (Glu) (Glu) (Glu)
TAT CGT TAT ATT
(Tyr) (Arg) (Tyr) (lie)
CCT CCT CCT CAA
(Pro) (Pro) (Pro) (Cln)
CAA CAA
(Gln) (Gln)
아미노산의 머리글자만을 취해 가로로 나열해 보았다.
MGGGtATIPPPGGG
의미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
세 개 연속해서 중복되는 곳을 어떻게 해석하는가가 역시 중요한
포인트가 될 것 같았다. 뭔가 다른 해석이 있음에 틀림없었다. 요컨
대 세 개가 연속된 경우, 뒤의 두 개는 한 자를 띄워서 보라는 의미일
수도 있다.
MG - TATIP - G -
역시 문장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안도에겐 확실한 느낌이 있었다. 틀림없이 해답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왠지 그런 느낌이 들었다. 앞으로 조금만 더 하면 의
미 있는 단어가 생길 것 같았다
Glu , Pro, Gln만이 세 번 연속되고 있다
안도는 나열 방식에 변화를 주었다.
Pro(37f)
Gln(3개)
취하라'고 지정하고 있는 것이다.
團et
G 1團
團y -
Brg
團y r
11 I e
P rm
G 1驪
따라서 해답은,
MUTAT10N'
번역하면 '돌연변이'
안도는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깨닫지 못한 채 신음소리l
내고 있었다. 함수의 논리에 서서 시행착오의 결과를 모두 고려해 해
독할 때, 다른 해답이 나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단순하면서도 명확하
게 해답이 하나로 정해졌다.
안도는 머리를 감싸쥐었다 MUTAT10N(돌연변이)을 생물학의
전문 용어로 본다 쳐도 그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되는 건지 전혀 짐작
이 가지 않았다.
·류지, 너 대체 윌 말하고 싶은 거냐?
말을 걸고 있는 안도의 목소리는 해독에 성공한 흥분 탓인지 가슴
속에서부터 떨리고 있었다.
안도는 도서관로비에 있는 공중 전화 앞에 서서 미 야시타의 전화
번호를 눌렀다. 3일 연휴의 첫날 저녁이라서 받지 않을 것을 각오하
고 있었는데, 예상과는 달리 그는 가족과 함께 집에 있었던 것이다.
안도는 전화를 받은 미야시타에게 암호를 해독한 것 같다는 말을 전
할 수 있었다.
거실에 있는지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아내와 아이들의 목소리가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미야시타가주위 잡음이 들어가지 않도록 손
으로 수화기를 둘러치고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그래도 따뜻한
분위기를 완전히 지을 수는 없었다.
"잘했어 , 잘했어 . 근데 어떤 문장이 됐어?"
손으로 둘러치고 있는데다가 원래 목소리가 큰 탓도 있어서 미야
시타의 목소리가 귀에 울려 퍼졌다.
"문장이 아니라, 하나의 단어야."
"재지 말고 빨리 가르쳐 줘 ."
"뮤테이션."
"뮤테이션‥‥ 돌연변이 말야?"
미야시타는 이어 몇 번이고 '뮤테이션, 뮤테이션' 하고 중얼거렸
다. 어감을 확인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떤 의미라고 생각해?"
안도가 물었다.
"몰라. 너 , 뭔가 짐작 가는 데는?"
"무슨 뜻인지 전혀 ."
"음, 지금 이리로 오지 않을래?"
미야시타 쪽이 요청해 왔다. 미야시타는 쓰루미구 기타데라오에
있는 고급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일단 시나가와 역으로 나갔다가 게
이힝 급행으로 갈아타야하지만시간상으로는 채 한시간이 안걸리
는 거리였다
'◎ 상관 없지만·. ."
"역에 도착하면 전화해 줄래? 역 앞에 좋은 가게가 있으니까 한잔
하면서 얘기 듣지 ."
유치원에 다니는 딸이 아버지의 외출을 알아챈 듯,
"아, 아빠 가면 안 돼 ."
아우성을 치면서 미 야시타의 허리에 덤벼들기 시작했다 안도를
기다리게 하는 게 미안해서 미야시타는 수화기를 손으로 꼭 막고 딸
을 야단친 다음, 전화기를 쥔 상태로 딸에게서 도망쳐 여기저기로 뛰
어다니고 있는 모양이었다. 안도 쪽에서 만나자고 한 건 아니지만 뭔
가 자신이 나쁜 짓을 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동시
에 뭐라 말할 수 없는 상실감과 질투심이 솟구쳐 올랐다.
"다음으로 미룰까?"
안도가 제의해 榮지만 미야시타는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안 돼. 당장 자세한 얘길 듣고 싶어 . 미안하지만 역에 도착하면 전
화 줘 바로 날아갈 테니까,"
미야시타는 안도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수화기를 놓았다. 미야
시타 집의 온화한 분위기가 계속 귓가에 남아 있었다. 참을 수 없는
상실감에 긴 한숨을 쉬면서 , 안도는 도서관을 나와 전철역으로 갔다.
안도가 게이힝 급행을 탄 것은 8일 전에 다카노 마이의 아파트를
방문한 이후 처음이었다 키타시나가와 역을 지난 부근부터 고가 선
로로 바뀌어 양편에 늘어선 집과 상점가의 네온이 눈 아래로 내려다
보였다. 11월 하순 저녁 6시쯤 되고 보니 이미 주위가 거의 새까맣게
어두워 있었다 도쿄 만 쪽으로 눈을 돌리니 운하를 끼고 있는 주택
단지의 바둑판 모양 창문들에서 드문드문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
다. 휴일 저녁인데도 불이 꺼져 있는 집이 많았다. 아침부터 암호 해
독에만 온 신경을 쏟아서인지 , 안도는 불빛이 만들어 내는 명암 모양
을 문자로 꿰어 맞춰 보려 했다. 무수히 늘어서 있는 고층 아파트 건
물 중 하나가 글자 비슷한 모양을 떠올리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별
다른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었다.
‥‥뮤테이션, 뮤테이션.
안도는 먼 풍경을 바라보면서 같은 말을 읖조리고 있었다. 중얼거
리고 있으면 류지의 진의가 전해질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하면서‥‥
멀리서 뱃고동 소리가 울려왔다. 전철은 정거장으로 미끄러져 들
어가더니 다른 급행 열차를 위해 대기한다는 방송을 한 다음 멈춰
섰다. 제일 끝차량에 타고 있던 안도는 문에서 얼굴을 내밀어 역 이
름을 보았다. 그곳이 다카노 마이의 아파트가 있는 역이라는 게 확
인되자 8일 전의 기억에 의지하여 그녀의 아파트를 상가 사이에서
찾아보았다. 마이의 방에서 밖을 내다보았을 때, 전철역이 바로 눈
높이까지 올라와 있어 플랫폼에 서 있는 사람들 모습까지 보였던 기
억이 났다. 그것은 반대로 플랫폼에서도 마이의 아파트가 보일 거라
는 얘기였다.
차 안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안도는 플랫폼으로 내려서
저 끝쪽으로 다가가 철책 너머로 얼굴을 내밀었다. 선로와 직각을 이
룬 형태로 상가가동쪽으로 뻗어 있고, 거기서 수십 미터 정도 앞쪽
에 이전에 본 기억이 있는 7층짜리 원룸 아파트 건물이 보였다.
값자기 시나가와 방면에서 급행 전철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 전철이 역을 통과하면 안도가 타고 있던 전철의 문이 자동으로 닫
히고 곧이어 가와사키 방면으로 출발할 것이다. 안도는 서둘러 3층
창문을 찾았다 마이의 방은 분명 303호실이었다 오른쪽에서 세 번
째 방이다. 급행 전철이 통과하자 발차를 알리는 벨이 울렸다. 안도
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6시를 막 지난 시각. 미야시타가 가족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있을 시간이다. 너무 빨리 도착해서 저녁 식사의
단란함을 방해하는 것도 면목없는 일이다. 30분 정도 이른 것이다.
안도는 전철 한 대를 그냥 보내기로 했다. 전철은 안도를 플랫폼에
남기고 사라졌다.
플랫폼과 거의 같은 높이의 3층 창문을 오른쪽부터 순서대로 살펴
보았다 그러나 불이 켜져 있는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 .턱시 마이는 없는 건가?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깨끗이 무너지고 나서 시선을 제자리로 돌
리려는순간이었다 오른쪽에서부터 세 번째 방에서 엷은 띠 모양의
청색 빛이 흘러나오는 게 보였다. 착각이 아닐까 하고 눈을 가늘게
떠 보았지만, 창백한 빛의 띠가 아주 희미하게, 마치 깃발처럼 흔들
리고 있었다 주의하지 않으면 못 보고 지나칠 만한 엷은 빛이 그때
그때 쑥 나타났다가 돌연 다시 사라지곤 했다. 안도는 몸을 내밀고
빛의 정체를 확인해 보려 했지만 너무 멀어서 자세히 확인할도리가
없었다.
안도는 다시 마이의 아파트에 가 보고 싶어졌다. 20분 정도 들렀다
가면 적당히 시간 조절도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망설임 없이 개찰
구를 빠져나가 상가로 이어지는 길로 나섰다.
안도는 바로 아래에 서서 3층 창문을 올려다보고서 야 빛의 정체를
겨우 파악할 수가 있었다. 열어젖힌 창문에서 레이스 커튼이 바깥쪽
으로 날아오르고, 그 순백의 천에 바로 정면에 있는 렌터카 회사의
네온사인이 반사되고 있었던 것이다. 새하얀 천에 원색의 빛을 받으
면 형광 염료처럼 색이 비쳐 보이곤 한다. 레이스 커튼은 파란 네온
사인을 받아 엷은 청색으로 펄럭였고, 그 모습이 역까지 희미하게 비
쳤던 것이다
그래도 안도로선 납득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았다. H일 전, 마이
의 방을 찾았을 때 열려 있던 창문을 닫고 어중간하게 쳐져 있던 레
이스 커튼을 한끝으로 모아 놓았던 걸 기억하고 있었다. 결코 열어
놓지 않았었다. 게다가 더 이상한 것은,바람 없는 초겨울 저녁임에
도 발코니 난간 너머까지 거의 수평으로 커튼을 날려 올릴 수 있는
바람이 도대체 어디서 불어 오느냐 하는 것이었다. 바람 소리조차 들
리지 않았다. 상가 가로수만 보더라도 바람의 자취는 전혀 없었다.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나뭇가지 위로 힘차게 펄럭이고 있는 커튼은
아무래도 이상했다. 그리고 어쩐지 기분 나쁜 인상을 주었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 누구 하나 올려다보는 이가 없었다. 이 이상한 광경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다.
추리해 낼 수 있는 유일한 원인은 기계적인 힘뿐이다. 방 안쪽에서
강력한 선풍기를 돌려 인공적으로 풍압을 만들어 내는 것 외에는 다
른 방법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대체 무엇 때문에‥‥호기심
이 일었다.
안도는 아파트 로비로 들어갔다 어쨌든 다시 한번 마이의 방 안을
둘러 보는 수밖에 없을 듯했다.
공휴일에는 관리인도 쉬는지 관리인실에는 커튼이 쳐져 있었다.
아파트 전체가 아주 조용했고, 어느 곳에서도 인기척을 느낄 수가 없
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돌라가 3층에서 내려 303호실로 다가가면 갈수
록 안도는 걸음의 폭이 좁아지면서 움직임도 둔해졌다. 본능의 일부
에서는 되돌아갈 것을 명령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호기심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바깥 복도 문은 열린 채였고 그 끝에는 나선형의 비상
계단이 있었다. 유사시에는 엘리베이터를 사용하지 않고 계단을 뛰
어내려가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공포심을 부추기고 있는 대상
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지도 못하면서 안도는 막연히 피난 경로를 머
릿속에 담아 두었다.
303호실 문에는 'TAKANO' 라고 쓰인 빨간색 명패가 초인종 아래
붙어 있었다. 전과 마찬가지였다. 안도는 초인종을 누르려다가 멈칫
하고 복도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다음 문에다 귀를 갖다 댔다. 선
풍기를 돌리는 모터 소리는 고사하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지
금 이 순간에도 레이스 커튼이 밖으로 날아오르고 있을까?귀로 살
피고 있는 실내 모습에서는 도저히 그런 감을 느낄 수 없었다.
"다카노 마이 씨 ."
초인종을 누르는 대신에 안도는 방 주인의 이름을 작은 목소리로
부르며 노크했다. 대답은 없었다
마이는 분명 그 비디오테이프를 보았다‥‥ 안도는 그 사실을 확신
하고 있었다 기묘한 것은 비디오테이프의 영상이 지워져 있다는 것
이다. 게다가 안도가 찾아오기 전전날에 지운 것으로 보인다. 마이가
실종된 지 5일째. 대체 누가 무슨 목적으로 마이의 방에 들어가 영상
을 지운 것일까?
갑자기 안도는 이 방 내부를 바라보며 , 장기관 안쪽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지을 수 없었다 욕조에 고인 소량의 더운 물, 물 떨어지는 소
리 , 아킬레스건 근처를 스치던 미끄러운 감촉· .
안도는 문 앞에서 한 걸음 두 걸음 물러섰다. 어쨌든 이 세상에 탄
생한 악마의 비디오테이프는 네 개 모두 파기된 것이다 이것으로 사
건은 종결되었다. 일간 다카노 마이의 사체가 발견될 것이다. 지금
여기서 아무리 발버등친다고 해도 변할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안도는
그렇게 자신을 타이르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이상 야룻한 현상을 내던져 둔 채 안도는 서둘러 이 자리
를 떠나고만 싶었다. 왜 늘 이렇게 흐지부지되는 걸까? 이 아파트에
오기만 하면 공연히 도망치고 싶어진다.
엘리베이터를 부르기 위해 내림 버튼을 누른 안도는 '뮤테이션:
'뮤테이션'을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무엇이든 좋았다. 이 아파트에
관한 미묘한 느낌이 아닌 다른 것을 생각하고 싶었다 엘리베이터는
좀처럼 올라오지 않았다
그때 오른쪽 복도 안쪽쯤이라고 생각되는 곳에서 '찰◎ 열쇠 돌
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안도는 온몸이 굳어져 몸을 완전히 돌리지도
못한 채, 겨우 턱만 약간 비스듬하게 돌려 소리나는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303호실 안쪽에서 천천히 문이 열리는 게 보였다. 초인종 아
래 붙어 있는 빨간색 명패로 짐작해 볼 때 305호실 문인 게 틀림없었
다. 안도는 무의식중에 몇 번이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는 애가 탈 정도로 느리게 1층에서 Y턴해 올라오기 시작
했다.
문 안쪽에서 사람 그림자 같은 게 나타나는 것을 본 안도는 퍼뜩
자세를 바로잡았다. 여름 윈피스로온몸을감싼여성이 안도에게 옆
얼굴을 보이며 핸드백에서 열쇠를 꺼내 잠그려는 참이었다. 그 옆얼
굴을가만히 관찰했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지만 분명 마이가아닌
다른 누구였다 무서워할 이유 따윈 전혀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이
성을 설득시켜도 안도의 육체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안도는 안으로 미』1러지듯이 재빨리
들어가 '닫힘' 버튼을 누르려다가 잘못해서 '열림'버튼을 누르고 말
았다. 한 템포 느리게 문이 닫히려는 순간, 문과 문 틈으로 길고 하얀
손이 쑤욱 들어왔다 문 틈에 이상한 게 끼여 있음을 감지한 엘리베
이터는 다시 문을 크게 열어젖혔다.
정면에 낯선 여자가 서 있었다. 선글라스 때문에 눈의 표정까지는
알 길이 없었다. 25세 전후로 보이는 반듯한 생김새의 여성이 문가에
손을 대고 빙글 돌아서더니 차분하게 '닫힘' 버튼을 누르고, 이어 1
층 버튼을 눌렀다 안도는 한 발 한 발 조금씩 뒤로 물러나 등과 양
팔꿈치를 엘리베이터 벽에 붙이고는 발돋움까지 하고 있었다. 그 자
세 그대로 303호실에서 나온 여자의 등에 말없는 질문을 던졌다.
‥‥누구지 , 당신은?
향수도 아닌 기묘한 냄새가 코를 찔러와 안도는 얼굴을 찡그리고
숨을 멈춰 버렸다. 무슨 냄새지? 철분을 포함한 피 냄새와 비슷했다
여자의 머리카락은 등 한가운데 까지 길게 뻗어 있었고, 벽에 대고 있
는 손은 속이 비쳐 보일 듯이 하얗다. 손을 잘 보니 둘째손가락 손톱
끝이 갈라져 있었다. 계절에 걸맞지 않은 소매 없는 여름 원피스는
보기만 해도 몹시 추운 느낌을 주었고, 스타킹도 신지 않은 채 굽 높
은 샌들을 걸치 기만한 발에는 보라색으로 변색된 멍이 있었다. 안도
는 오싹했다. 왜 그런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참으려 해도 참으려 해
도 몸 안쪽에서부터 오한이 밀려왔다
여자와 단 둘만 있는 좁은 상자 안, 잠깐의 시간이 몹시도 길게 느
껴진다. 1층에 도착해서 문이 열릴 때까지 안도는 줄곧 숭을 멈추고
있었다 여자는 곧장 아파트 로비를 빠져나가 밤의 상가 사이로 유유
히 사라져 갔다.
1미터 60센티가 약간 못 되는 크지않은 신장에 균형 잡힌 몸매가
인상적이었다. 무릎 위 10센티의 타이트 스커트는 히프의 형태를 매
력적으로 두드러지게 만들었고, 발 움직임에는 나긋나긋함이 있었
다. 스타킹을 신지 않아서인지 , 특히 하얀 무릎 안쪽 피부에 생긴 장
딴지 멍이 더욱 선명했다. 거리를 지나는 두 사람 중 한 명은 겨을
코트를 걸치는 지금 계절에 , 여자는 소매 없는 여름 원피스를 입은
채 오슬오슬 추운 겨울밤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간 것이다.
안도는 엘리베이터에서 나와서까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로 언제
까지나 여자가 사라져 간 어둠 속을 응시하고 있었다.
안도는 약속한 은행 앞에서 미야시타가 오기를 기다렸다 휴일 밤,
셔터가 내려진 은행 주위는 평소 모습과는 달리 묘하게도 가지런했
다 자그마하고 아담한 어둠 저쪽. 미야시타가 오게 될 방향으로 시
선을 던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303호실에서 나타난 낯선 여자
의 뒷모습이 눈에 아른거리고 있었다 미묘한 느낌과 함께 닦아도 닦
아도 지워지지 않았다.
그녀의 모습이 망막에 새겨진 채 쉽사리 떠나질 않았다. 마이의 아
파트에서부터 몽유병 환자 같은 힘없는 발걸음으로 전철역으로 돌아
와 흔들리는 전철에 몸을 실어 쓰루미 역까지 오는 동안, 안도의 뇌
리에서는 한시도 여자의 모습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 여자는 누구일까?
바로 떠올릴 수 있는 그럴싸한 대답이라고 한다면, 마이의 언니나
여동생이 마이의 부재를 걱정해 집 안을 둘러보러 왔을 거라는 것 정
도다. 마이의 어머니에겐 딸에 관한 소식을 간단히 전한 바 있다. 그
러니 만약 마이에게 자매가 있고,그녀 역시 도쿄에 살고 있다면 마
이의 방을 찾아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여자의 몸에서 풍기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미묘한 분위기는
안도의 안이한 대답을 부정하고 있었다. 다시 한번 엘리베이터에 같
이 탔을 때의 오싹함이 되살아났다.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도저히 생
각할 수 없는, 그렇다고 해서 유령이나 귀신 같은 것이라고도 할 수
없는 그 무엇이었다. 하지만 그 여자는 분명 육체로서 실재했다. 그
것은 확실하다 차라리 안도로선 실체가 없는 유령 쪽이라면 납득하
기도 쉽고, 받아들이기도 간단했을 것이다.
"어이 , 안도."
누군가 불러서 그쪽을 보니 아내의 자전거를 빌려 왔는지. 바구니
가 달린 아줌마 자전거에 올라타고 전속력으로 달려오는 미야시타가
보였다.
미야시타는 브레이크 소리를 내며 급하게 자전거를 세웠다. 안장
에 앉은 그대로 '하아, 하아' 하고 숨을 헐떡이면서 말하는 것조차
괴로운 듯 핸들에 양 팔꿈치를 얹고는 목을 아래위로 흔들었다.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호흡이 가빠져 숨이 끊어질 듯한 사람이 전속력을
다해 자전거를 타고 달려온 것이었다.
"좨 빠른데 "
최소한 10분은 기다릴 거라고 예상하고 있던 안도는 미야시타의
최소한 10분은 기다릴 거라고 예상하고 있던 안도는 미야시타의
빠른 도착에 놀랐다. 이전까지 미야시타는 약속 시간보다 빨리 왔던
적이 거의 없었다.
역 앞의 인도에 자전거를 세워 두고, 미야시타는 안도의 등을 밀어
선술집들이 늘어서 있는 골목으로 들어 갔다. 이젠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있는지 미야시타가 걸어가면서 얘기를 꺼냈다.
"뮤테이션‥‥ 돌연변이의 의미를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래서 미야시타는 무리를 하면서까지 급히 자전거로 날아왔던 것
이다. 그 내용을 한시라도 빨리 안도에게 알리기 위해서.
"뭐 ?"
안도는 짧게 물었다.
"음, 어쨌든 맥주라도 마시면서 이야기 나누자."
'우설(牛舌)' 이라고 쓰인 선술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미야시타는
안도에게 묻지도 않고 생맥주 두 잔과 소혀 소금 요리를 주문했다. 가
게 주인과는 잘 아는 사이인 듯 미야시타는 가볍게 눈인사를 나누고
안쪽 자리에 앉았다 그곳은 선술집에서 가장 조용한 자리였다
미야시타는 우선 류지의 바이러스에 들어 있는 염기 배열 암호를
어떻게 해독했는지 , 그 방법을 안도에게 물었다. 서류 가방에서 프린
트를 꺼내 해독까지의 경위를 안도가 간단히 설명하자, 미야시타는
계속 '응,응' 무의식적으로끄덕이기만하다가미처 반도듣기 전에
방법의 옳음을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음, 뮤테이션 틀림없는 것 같아. 이런 방법이라면 하나의 해답밖
에는 나을 수가 없지 ."
미야시타는 빠른 어조로 그렇게 말하고는 안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런데 말야, 상당한 유사점이 보이는데 넌 눈치 못 챘냐?"
"유사점?"
미야시타는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은 메모지를 꺼내 폈다. 메모
지에는 어떤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떠오른 아이디어를 보다 확실히
하기 위해 급하게 메모 삼아 그린 그림이었다
"잠간 이걸 좀 볼래?"
미야시타는 메모지를 건네며 말했다. 안도는 메모지를 받아 테이
블 위에 펼쳤다.
보는 순간 바로 이해가 되었다. 세포 내의 DNA 이중 나선이 어떻
게 해서 자기 복제를 해 나가는지를 나타낸 것이었다. 이중 나선은
상호 보완적인 관계로 되어 있어 한쪽 구조가 결정되면 다른 한쪽 사
슬의 구조는 자동적으로 결정되어 버린다. 즉, 세포 분열 때마다 두
가닥의 사슬은 두 개로 분리되어, 충실히 다음 세대로 복제되어 나가
는 것이다 유전의 기본은 유전자가 복제되어 부모로부터 자식에게
전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물론 안도도 알고 있는 사항이었다.
"이게 뭐 ?"
안도는 미야시타에게 얼굴을 돌리고 재촉했다.
"어떤 메커니즘으로 종의 진화가 일어나는 건지 잠깐 생각해 볼
래?"
진화의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은 점이 많았다. 예를 들어
네오 다위니즘과 이마니시 킨지 (今西錦司)의 진화론 간에는 기본 개
념조차 완전히 달라서 아직껏 어느 쪽이 옳으냐는 결론에도 도달하
지 못하고 있다. 그 외에도 진화론에 관한 가설은 백화요란(百花燎
亂, 갖가지 꽃이 불붙듯이 피어남 : 역자 주)처럼 많은 생물학자로부
터 철학자까지 휘말린 다양한 해석 논쟁이 줄곧 지금까지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그 와중에 결정적인 근거가 부족하긴 해도, 분자생물학
의 성과로 인해 진화의 요인이 돌연변이와 유전자재편성에 있는 것
같다는 사실이 최근에서야 겨우 밝혀진 바 있다.
"돌연변이가 그 시작이군 "
안도는 자신감을 갖고 대답했다 암호의 해답이 '뮤테이션'인 것
으로 보아 이야기의 방향을 쉽게 헤아릴 수 있었다
"맞아, 돌연변이가 진화를 일으키는 방아치가 되는 거야. 그러면
대체 돌연변이는 어떻게 생기느냐?"
미야시타는 생맥주를 꿀꺽 단숨에 들이키더니 주머니에서 볼펜을
꺼냈다.
‥‥돌연변이가 일어나는 이유?
안도가 대꾸하는 것에 앞서 , 미야시타는 조금 전의 그림에 볼펜으
로 뭔가를 적어 갔다 안도는 볼펜 쥔 손 위로 나타나는 그림을 들여
다보았다(p. 233 그림 참조).
"우연에 의한 유전자의 결손과 재편성 같은 에러가 생기고,그 에
러가 그대로 복제되면서 돌연변이가 나타나지. 됐냐? 이게 현재까지
연구된 돌연변이의 메커니즘이야."
볼펜으로 그림을 가리키면서 미야시타가 확인해 보였다. 안도에게
는 설명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었다. X선이나 자외선을 豊임으로써
인공적으로 일으킬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우연히
생긴다. 올바로 복제되어 자손에게 전해져야 할 DNA의 염기 배열이
우연한 복제 잘못으로 인해 돌연변이를 일으키고, 이어 복제가 되풀
이되는 것을 통해 새로운 종으로 발전한다. 그것이 진화에의 첫걸음
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이다
"유사하잖아, 정말."
미야시타가 귓가에 대고 중얼거렸다. 안도는 그때서야 겨우 짐작
할 수 있었다. 미야시타가 말하고 있는 것의 의미 . 무엇하고 무엇이
비슷한지를 듣고 보니, 분명히 똑같았다.
"비디오테이프의 복사‥‥ 말인가?"
가까스로 그렇게 밖에는 말할 수 없었다.
"어때? 같다고 생각되지 않냐7"
미야시타는 소혀 두 개를 한꺼번에 입에 넣고는 맥주를 마셔 버렸
안도는 유사점을 정리해 보기 위해 테이블에 펼쳐진 메모지를 뒤
집어 미 야시타의 볼펜으로 그림을 그려 보려 했다. 전부 이해했다고
해도 사고를 정리하는 데에는 그림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8월 26일, 미나미하코네 퍼시픽랜드 빌라 로그캐빈에서 한 개의
비디오테이프가 탄생한다 그런데 29일 밤, 같은 동에 투숙한 네 명
의 남녀가 비디오테이프에 장난을 친다. '이 영상을 본 자는 일주일
이내에 복사해서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으면 안 된다' 는 메시지가
담긴 마지막 부분을 지워 버리고 T"V -CF로 대체하는 것이다 비디오
테이프의 입장에서 보면 예기치 않은 어떤 우연한 사고에 의해, 유전
자라고도 할 수 있는 영상에 에러가 생긴 것이다. 그리고 에러가 생
긴 그대로 아사카와의 손에 의해 비디오테이프가 또다시 복사된다.
당연히 에러도 충실히 복제된다. 이 과정은 DNA의 자기 복제과정과
완전히 똑같다. 그런데 비디오테이프의 마지막에 담긴 메시지는 테
이프 자신의 복제에 관해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다.
DNA에 비유하면 조절 유전자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DNA의 경
우, 조절 유전자가 타격을 받으면 돌연변이가 생기기 쉽다 그와 마
찬가지로, 마지막 부분에 타격을 받은 비디오테이프가 돌연변이를
일으켰을까? 미야시타는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인가?
안도는 거기에서 펜을 멈추었다
"잠간만 비디오테이프는 생명도 아무 것도 아니야."
미리 준비해 두었던 듯 미 야시타의 되물음은 숨돌릴 틈조차 주지
않았다.
"생명을 정의하라고 하면, 넌 뭐라고 대답할 거냐?"
생명의 정의는 자기 복제 능력과 껍데기를 갖춘 것,크게 말해 그
두 가지다. 하나의 세포를 예로 들자면 자기 복제를 담당하는 것은
DNA이고, 껍데기에 해당하는 것은 단백질이다. 그런데 비디오테이
프는‥‥ 확실히 플라스틱 껍데기를 갖고 있다. 대개의 경우 껍데기는
직사각형으로 검고 단단하다. 하지만 자기 복제 능력은‥‥ 갖고 있다
고 할 수 없다.
"자기 힘으로 스스로 복제하는 힘이 비디오테이프에는 없어."
"그러니까· . . "
미야시타는 초조한 듯이 말했다
"그러니까 말야. 바이러스와 똑같다는 거야."
안도는 소리를 지를 뻔했다. 바이러스라는 것은 실로 기묘한 생물
체로서 스스로는 증식하는 힘이 없다. 그 점에선 생물과 무생물의 중
간적 존재이다. 그렇지만 바이러스는 다른 생물의 세포 속에 잠입해,
그 세포를 이용함으로써 증식해 나간다. 증식 능력을 갖지 못한 비디
오테이프가 '일주일 이내에 복사하지 않으면 목숨을 빼앗겠다'라고
협박해서 , 그 주술로써 인간을 꼼짝 못하게 만들어 인간의 손을 빌려
증식해 나가는 과정 역시 바이러스의 증식과정과 똑같은 게 아닌가?
"그렇지 만‥‥‥
안도는 부정하고 싶었다. 무슨 말이라도 좋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이 사실을 부정하지 않으면 엄청난 재앙이 덮쳐올 것 같은 불안한 기
분이 드는 것이다.
"그렇지만 비디오테이프는 모두 파기뤘어 "
그러니까 이제 아무 위험도 없다고 안도는 그렇게 스스로를 달랬
다. 비디오테이프가 바이러스와 똑같은 생명력을 지니고 있었다 해
도 이젠 모두 소멸되어 버렸다 이 세상에 존재했던 네 개의 비디오
테이프는 모두 소멸되었다.
"분명히 그 비디오테이프는 소멸됐어 . 하지만 그건 옛날 종이야 "
맥주를 마실 때마다 미 야시타의 이마에 맺히는 땀방울이 점점 더
커져 갔다.
"옛날 종?"
"그래, 돌연변이를 일으킨 비디오테이프는 복사되는 사이에 진화
해서 신종으로 다시 태어나 지금도 어딘가에 숨어 있어. 이전과는 완
전히 다른 형태를 띠고 말야 난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어 ."
안도는 입을 반쯤 벌린 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맥주잔은 이
미 비워져 있었다. 알코올 도수가 좀더 높은술을 마시고 싶었다 소
주 언더록(일본에서는 위스키처럼 소주에 얼음을 넣어 마시기도
함 : 역자 주)을 주문하려고 했지만 도중에 목소리가 갈라져 가게 주
인에게까지 전달되지 않았다. 대신 미야시타가손을 들어 '소주!'라
고 짧게 외치며 둘째손가락과 셋째손가락을 세웠다. 소주 글라스 두
개가 테이블에 놓이자마자 안도는 손을 뻗어 단숨에 3분의 1 정도를
마셔버렸다. 그 모습을 곁눈으로 보면서 미야시타가 말했다.
"비디오테이프가 돌연변이를 일으켜 복사되고 있는 사이에 다른
매체로 진화했다고 한다면, 옛날 종이 소멸됐다 한들 무슨 문제가
있겠냐. 알았어?류지 녀석 정도니까DNA의 염기 배열을 이용해서
저승에서 말을 걸어온 거야. 다른 해석이 있으리 라곤 생각할 수 없
어. 이쯤에서 '뮤테이션'에 대해 좀더 새로운해석을내려야하지 않
겠냐?
소주 언더록을 몇 잔이나 마셨지만 취기는 느껴지지 않고 머리는
묘하게도 점점 맑아져만 갔다.
· 있을 수 있는 일인지도 모른다.
안도 또한 미 야시타의 생각 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뮤테이
션' 이라는 키워드를 사용해 류지는 경고를 해 준 것이다.
'안도! 소멸되었다고 보고 안심해선 안 돼. 돌연변이에 의해 탄생
한 신종이 너희 주위에 나타난 거야.'
웃음 가득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는 류지가 눈앞에 나타난 듯했다.
예를 들어 에이즈 바이러스는 수백 년 전부터 존재하고 있던 어떤
종의 바이러스가 돌연변이를 일으켜 탄생했다고 한다. 이전에 있었
던 바이러스는 인간에겐 감염되지 않는, 무해한 것이었는지도 모른
다. 그러나 돌연변이에 의한 에이즈 바이러스는 인간의 면역 계통을
토막토막 파괴해 버리는 가공할 만한 힘을 지니고 재생했다. 같은 일
이 비디오테이프에도 생겼다고 한다면‥‥ 안도는 반대 패턴이 되기
를 기원하는 도리밖에는 없었다. 유해한 존재가 무해한 것으로 변화
하는 것.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무해한 매체가 되기는커녕 , 돌연변
이를 일으킨 비디오테이프는 복사 여부와 관계없이 영상을 본 모든
인간을 죽여 버리토록 변화하였다. 보다 질이 나빠진 건 아닐까? 예
외는 아사카와뿐. 마이의 실종을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 걸까?지금
단계로선 아직 뭐라고도 할 수 없었다. 다만 아사카와라는 예외가 있
을뿐
"아사카와는 왜 살아 있는 거지?"
어제와 똑같은 질문을 미야시타에게 던져 본다.
"그게 중요한 포인트야. 비디오테이프가 무엇으로 변했는지를 알
아 낼 단서가 달리 없어."
"아니 또 한 사람 있어."
안도는 다카노 마이라고 하는 여성에 대해 간추려 말했다. 아사카
와가 복사한 비디오테이프는 류지의 손을 통해 다카노 마이라고 하
는 여성에게 건네졌고, 그녀는 비디오를 본 흔적을 방 안에 남긴 채
벌써 3주 가까이나 집을 비우고 있다.
"결국,두사람이 있다는 거군.비디오테이프를 보고도 아직 죽지
않은 인간이‥‥‥
"의식 불명의 중환자라고는 해도 아사카와는 아직 살아 있어. 그렇
지만 마이는 생사 불명 상태야."
"그 여자는 살아 있었으면 좋겠군."
"왜 ?"
"당연하잖아. 힌트는 하나보다 둘이 있는 게 좋아."
확실히 그렇다. 마이가 지금도 살아 있다면, 그녀와 아사카와의 공
통점을 찾는 것으로 해답이 발견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것보
다 안도는 순수한 마음으로 마이의 무사함을 빌고 있었다.
다 안도는 순수한 마음으로 마이의 무사함을 빌고 있었다.
제4장
편모를 위저으대 刻엉지는 링 바이러스.
이것은 자궁구를 향애 刻엄지는 정자와 너무나 비슷하다.
"정자?" 안도는 그 말을 입에 담아 본다.
‥배란일이다‥‥그렇다면. 무수안 링 바이러스는
마이의 난자에 짐입한 채
DNA로 기어가 ‥‥
‥‥수정(受精)된 것이다.
11월 26일 월요일 오후.
강에서 익사한 소년의 해부를 마친 안도는 소년의 아버지로부터
자세한 사정 얘기를 들으면서 해부 보고서 작성을 끝내려 하고 있었
다.
소년의 생년월일과 이름을 확인하기도 하고,사고 당일의 행동을
묻기도 했는데, 아버지가 대답하는 방식에 요령이 없어서 일이 빨리
끝나지 않았다. 소년의 아버지는 대화가 끊기면 창 밖으로 시선을
던지기도 하고, 슬픔과 지루함이 혼합된 듯한 멍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몸에서 힘이 다 빠져나가 잠든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안도는
서둘러 일을 끝내고 약해질 대로 약해진 아버지를 해방시켜 주고 싶
었다.
검시원 사무실이 별안간 시끄러워졌다 또 한 구,신원 불명의 여
자 사체가 실려 들어온 참이라서 사체 처리와 해부 준비가 동시에 이
루어지기 때문이었다 신원 불명의 여자 사체는 안도의 선배인 나과
야마 의사가 해부하기로 되어 있었다. 방금 전 경찰에서 여자 변사체
가 빌딩 옥상 배 기구에서 발견되었다고 연락을 했던 것이다. 연달아
두 구의 사체를 해부하는 통에 조수들과 경찰관들의 출입이 갑자기
많아졌다.
"여자 변사체가 도착했습니다. "
해부 조수의 목소리가 사무실에 울려 퍼지자, 안도는 몸을 움찔하
면서 목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았다. 문을 반쯤 열고 나 카야마를 향해
조수인 이케다가 말한 것이었다. 안도는 왠지 그 말이 자기한테 하는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준비 좀 해 주세요 "
대답하고 난 나카야마는 천천히 일어섰다. 나카야마는 안도의 2년
선배로.r의대 법의학 연구실에 적을 두고 있었다
조수가 모습을 감추자 대신 경찰관 한 명이 나타나 나카야마에게
다가갔다. 두세 마디 인사를 나눈 다음 경찰관은 가까이에 있는 의자
를 당겨 나카야마 옆에 앉았다.
안도는 고개를 제자리로 돌려 자신의 일로 돌아왔다. 하지만 나카
야마와 경찰관의 대화가 등뒤에서 들려와 자신의 일에 집중할 수 없
었다. 두 사람의 말이 단편적으로 안도의 귀에 들려왔다 경찰관은
지금부터 사체를 해부할 나카야마에게 사체를 발견했을 때의 정황을
설명하고 있는 듯싶었다.
안도는 서류를 작성하던 펜을 잠시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원
불명' , '젊은 여성' 이라는 말이 자꾸 반복되어 머릿속을 맵돌았다.
"하지만 왜 빌딩 옥상 같은 데에?"
물어 본 것은 나카야마였다.
"글쎄요. 어떤 이유로 올라갔는지 는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자살하
고 싶었는지도 모르죠."
경찰관이 대답했다.
"유서 같은 건요?"
"현재로선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
'빌딩 옥상 배기구라구요?도와 달라고 소리쳐도 들리지 않았던
건가요?'
"주택가가 아니니까요."
"장소는 어느 쪽입니까?"
"시나가와 구, 히 가시오이 해안길의 14층짜리 낡은 빌딩입니다 "
안도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뇌리에 떠오른 것은 게이힝 급행
열차의 철로변 풍경. 주택가를 빠져나가 이어지는 해안 철로변에 창
고와빌딩들이 한산하게 늘어서 있었다. 마이가사는맨션에서 엎드
리면 코가 닿을 만한 거리였다. 신원 불명의 젊은 여성 , 해안길의 빌
딩 옥상‥‥ 같은 말을 마음속으로 계속 몇 번이나 되뇌었다
"대단히 수고 많으셨습니다. 확실치 않은 점이 있으면 다시 전화드
리겠습니다. "
소년의 부친에게 양해를 구한 안도는 자친의 일을 일단 마무리지
었다. 등뒤에서 들리는 나카야마와 경찰관의 대화가 마음에 걸려 보
고서를 제대로 작성할 수가 없었다. 더 물어 봐야 할 게 남은 것 같기
도 했지만 나중에 어떻게든 보충할 수 있을 것이다.
안도는 서류를 파일에 끼우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동시에 나
카야마와 경찰관도 일어섰다. 안도는 두 사람에게 다가가 나카야마
의 어깨를 살짝 쳤다. 동시에 안면이 있는 경찰관과 가볍게 눈인사를
나누고 나서 물었다.
"지금부터 해부할 여성 , 신원 불명이라구요?"
안도는 검시원 사무실에서 해부실까지 복도를 함께 걷기 시작했
다.
"그래요. 신원을 밝혀 줄 물건이 하나도 없어서요."
안도의 질문에 대답을 한 건 경찰관 쪽이었다
'현 살 정도의 여성입니까?"
"젊어요. 스무 살 전후가 아닐까 싶은데. 살아 있다면 상당한 미인
이었을 것 같아요."
스무 살 전후‥‥ 다카노 마이는 스물두 살이었지만, 10대처럼 앳된
모습이 많이 남아 있었다. 안도는 침이 목안에서 엉기는 것 같은 답
답한 느낌을 받았다
"다른 특징은 없습니까?"
사체를 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전에 마음의 준
비를 단단히 해 둘 필요가 있다. 될 수 있으면 그녀가 아니라고 하는
확증을 얻은 다음,사체를 확인하지 않고 이 자리에서 사라지고 싶
다.
"왜 그래, 안도 선생?"
나카야마가 히죽 웃으며 안도의 진지해진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젊은 미인이라고 하니까 흥미진진한가?"
"아뇨. 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서요."
안도는 농담에 응하지 않고 진지하게 대답했다. 안도의 심각한 표
정을 본 나카야마는 히죽거리던 웃음을 곧바로 거둬들였다.
"아, 그러고 보니 좀 묘한 점이 있습니다. 이건 꼭 나카야마 선생님
께 말씀드려야겠네요."
"뭐죠?"
"실은 속옷을 입고 있지 않았습니다. "
"속옷· . 아래위, 모두 말입니까?"
"아뇨, 하의만요."
"발견됐을 당시 옷의 흐트러짐은요?"
안도와 나카야마의 머리에는 같은 생각이 동시에 떠올랐다. 젊은
여성이 빌딩 옥상에서 강간을 당하고 배기구에 내버려졌을 거라는
가능성.
"옷이 흐트러지진 않았고, 외견상으로도 강간의 흔적은 없는 것으
로 보입니다. "
"복장은요?"
"두꺼운 원피스 스타일의 치마에 긴 양말, 위에는 트레이닝복을 걸
친 아주 일반적인, 어느 쪽이냐면 뭐 , 수수한 복장이라고 해도 좋겠
죠"
그런데 여자는 팬티만은 입고 있지 않았다. 11월의 , 이제 곧 한겨
울로 접어드는 추운 계절에 노팬티 차림이라니 . 자신이 알고 있는 마
이의 평소 이미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빌딩 옥상 배 기구라고 하는 게."
안도로선 아무래도 사체가 발견된 장소의 모습이 잘 떠오르지 않
았다
"옥상 기계실 옆에 깊이 3미터, 폭 1미터 정도의 움푹 패인 곳이
있는데 평소에는 철망으로 덮여 있지만, 아무래도 일부가 망가져 있
었던 모양입니다. "
"그러니까 그 틈으로 굴러 떨어졌다는 겁니까?"
"아마도."
"잘못해서 굴러 떨어질 만한 곳인가요?"
"아뇨.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그곳엔 갈 일이 없을 겁니다 일단 옥
상으로 나가는 출입구가 잠겨 있으니까요."
"그럼 어떻게?"
"비상용 나선 계단으로 올라간 다음 빌딩 벽에 붙은 사다리를 탔겠
죠. 그외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여자는 그런 곳에서 무엇을 하려
했던 것일까?
"그런데 속옷 말인데요, 그 여자가 배기 구에서 일부러 속옷을 벗었
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걸까요?"
배기구는 3미터 깊이라고 했다. 굴러 떨어졌다면 당연히 다쳤을 것
이다. 팬티를 벗어 붕대 대신 다친 곳에 댔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혹은 배 기구에서 탈출을 시도하는 도구로 이용했든가· .
"찾아봤습니다. 배기구 안도, 옥상도, 구석구석까지 샅샅이요. 확
실히 하기 위해 빌딩 주변까지 찾았단 말입니다. "
'빌딩 주변이오?"
나카야마가 끼여들었다.
"천조각 같은 걸로 싸서 내던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요. 배기
구 바닥에서 살려 달라고 소리쳐 봤자 일단은 들리지 않겠죠. 그렇게
되면 자신이 있는 장소를 알리기 위해 밖을 향해 뭔가눈에 띄는 것
을 내던지는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결국 그것도 불가능한 걸
로 %補져서."
"왜 불가능하죠?"
"배기구 바닥에 서서 던졌다고 해도 옥상 철책을 넘어 바깥에까지
던질 수는 없습니다 "
아마 각도의 문제이리라. 안도는 그 이유를 물으려 하지 않았다.
"결국 그 여자는 집에서 나을 때부터 이미 팬티를 입고 있지 않았
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가장 자연스럽겠군요."
"현재로선 달리 해석할 방법이 없습니다. "
해부실 앞에서 세 사람이 멈춰 섰다.
"안도 선생도 입회할 건가?"
나카야마가 물었다.
"예, 잠간."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까? 사체가 다카노 마이가 아니라면 가슴을
쓸어내리고 그 자리를 떠날 것이고, 만일 다카노 마이라고 해도 나카
야마에게 맡기고 역시 그 자리를 떠날 것이다. 어쨌든 안도가 할 수
있는 것은 사체 확인 작업뿐이었다
평소대로 수도꼭지에서 쏟아지는 물소리가 문 저쪽에서부터 들려
왔다. 안쪽의 움직임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던 안도는 갑자기 그 자리
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위장이 밑에서부터 밀려
올라오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리고,손과 발 끝이 조금씩 떨려 왔다.
다카노 마이가 아니기를 비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안도의 결심이 미처 정해지기도 전에 나카야마는 문을 열고 앞장
서서 해부실로 들어갔다 다음에 따라 들어간 사람은 경찰관이었다.
안도는 방에 들어가지 않고 열린 문 틈으로 해부대 위에 길게 누워
있는 하얀 나체를 힐끔 쳐다보았다.
왠지 오래 전부터 이런 날이 올 것만 같은 익숙한 느낌이 물결처럼
다가왔다. 어떤 종류의 예감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현실로 그 젊은
여자의 사체를 아주 가까이서 보게 된 안도는 쇼크로 인해 전신이 얼
어붙고 말았다
나카야마와 경찰관 뒤에 선 채로 억지로 천천히 사체 가까이 다가
가긴 했지만 여전히 확인하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하얀 얼굴을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았다. 후두부 부근의 머리카락에 묻은 흙탕물이 말
라서 굳어 있었다. 발목이 부자연스런 형태로 구부러져 있고,그 부
분의 피부색만 검붉게 변해 있었다. 골절이나 염좌일 거라고 생각되
었다. 목을 졸린 흔적도 없고, 특별히 외상도 보이지 않았다. 사후 경
직의 완해(緩解)도 충분히 종료된 사후 90시간 이상이 경과된 사체
였다.
안도는 마이가 살아있었던 때의 아름답던 피부색을 기억하고 있었
다. 할 수만 있다면 이 몸을 안고 피부를 맞대 보고 싶은 망상을 몇번
이나 했던가? 그러나 기회는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윤기를 잃어 바
싹 마른 사체‥‥ 연정을 품었던 아름다운 여성이 이토록 딴판으로 변
해 버린 채 무참한 모습으로 누워 있다. 안도는 안타까운 현실을 참
아 내지 못하고 격렬한 분노에 쉽싸였다.
"아!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안도의 입에서 탄식의 소리가 새어나오자, 나 카야마와 경찰관◎
동시에 그를 돌아보았다.
"아시는 분입니까?"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표정으로 경찰관이 물었다. 안도는 가볍게
눈으로 수긍했다.
"이런‥‥‥
나카야마는 이 여성과 안도가 얼마나 친밀했는지 알수 없어서 애
매하게 말끝을 흐렸다.
"저, 이 사람의 연락처, 혹시 아십니까?"
경찰관이 천천히 말을 끊으면서 물어 왔다 조심스럽게 묻는 말투
뒤에 기대감이 묻어났다. 안도가 만약 사체의 신원을 알고 있으면 이
후에 이어질 지루한 신원 파악 작업에서 해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안도는 아무 말 없이 수첩을 꺼내 페이지를 넘겼다. 다카노 마이의
본가 전화번호를 수첩에 적어 놓았던 것이다 번호를 찾아 낸 다음
메모를해서 건네 주었다. 경찰관은 메모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보면
서 다시 한번 확인했다.
"정말 틀림없으신 거죠?"
아주 정중한 말투였다.
"틀림없어요. 이 사람은 다괴노 마이 양입니다. "
안도가 단언하자, 경찰관은 해부실에서 뛰어나갔다. 본가에 연락
을 취한 다음 마이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서다.
전화벨이 울리고 수화기를 들자, 경시청의 아무개라고 밝힌 상대
가 점잔을 빼는 듯한 우울한 어조로 마이의 죽음을 알린다‥‥ 그 순
간을 떠올리자 안도는 오싹하는 전율이 느껴졌다. 마이의 어머니가
가여워 견딜 수가 없었다. 흐트러지지도 않고 울지도 않으면서, 마이
의 어머니는 rl신을 둘러싼 풍경이 자신으로부터 한 발자국씩 물러
서는 것 같은 생경스런 느낌을 이제부터 맛보게 될 것이다.
더 이상 해부실에 있고 싶지 않았다. 다카노 마이의 몸에 일단 메
스가 들어가면 지금 감도는 사체 냄새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심한
냄새가 해부실을 꽉 채울 것이다. 거기에 장기의 벽을 갈라 찢고 위
나 장의 내용물을 조사하게 되면 그 악취는 그야말로 처절하다. 냄새
의 기억은 의외로 길게 꼬리를 끄는 법이다. 안도는 그 냄새를 맡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청초하고 아름다운 육체였다고 해도 참을 수 없
는 악취를 뿜어 내게 된다‥‥ 물론 그것이 살아남은 자의 운명이라는
걸 충분히 알고 있었다. 마이의 끔찍한 모습과 냄새-그런 기억이 자
신에게 들러붙는 것만은 정말이지 피하고 싶었다.
"전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
나괴야마의 귀에 대고 그렇게 속삭이자 그는 의아해하는 얼굴을
돌려 안도를 쳐다보았다.
"어 , 입회 안 해?"
"연구실 일이 좀 남아서요. 나중에 자세히 들려 주십시오."
"그래, 알았어 "
안도는 나카야마의 어깨에 손을 얹고 귓가에 속삭였다
"심장의 관동맥을 자세히 살펴봐 주십시오. 그 부분의 조직 표본을
절대 잊지 않도록 말입니다. "
왜 안도가 사인에 관해 자제한 말을 하는 것인지, 나카야마로선 도
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사람, 평소 협심증이라도 있었나?"
안도는 그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나카야마의 어깨에 얹은 손에
한층 힘을 넣었다.
"부탁드립 니다. "
이유를 물어 봐야 곤란할 뿐이라고, 안도의 눈이 호소하고 있었다.
나카야마는 그 마음을 헤아리고 두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검시원 사무실로 돌아오자 안도는 나카야마 옆에 있는 책상에서
의자를 잡아당겨 등받이를 가슴에 껴안은 자세로 앉았다. 나카야마
가 서류를 다 쓰기까지 그 자세 그대로 기다렸다.
"어지간히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군."
나카야마는 쓰다 만 보고서에서 얼굴을 들지 않은 채로 말했다
"=Ifl ."
"볼 텐가, 해부 보고서?"
나카야마가 안도 앞에 서류 뭉치를 내밀었다.
"아는. 포인트만."
나카야마가 안도 쪽으로 돌아섰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사인은 관동맥 폐색에 의한 심근경색이
아니었어 ."
안도는 해부 전에 관동맥 폐색이 사인일지도 모른다고 나카야마에
게 넌지시 암시를 주었는데,사인은 그게 아니라고 한다. 이 사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안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결국 마이 양은 그 비디오테이프를 보지 않았다는 건가?그게
아니라면, 아사카와와 마찬가지로 혈액의 흐름을 멈추게 할 정도까
지 육종이 성장하지 않았다는 건가?
"흑시 관동맥 내부에 육종이 없었나요?"
그 점을 재차 확인했다.
"내가 본 바론 없어 ."
"전혀?"
"아니, 확실한 건 조직 표본이 완성되길 기다리지 않으면 뭐라고
말할 수 없겠지만."
어쨌든 현재로선 마이의 혈관에 육종 같은 게 발견되지 않은 것이
다
"그럼 사인은요?"
"동사일 거야. 상당히 쇠약해진 끝에."
"외상은요?"
"왼쪽 발목 골절하고 양 팔꿈치 열상. 아마 굴러 떨어질 때 입은 거
겠지 . 상처에 콘크리트 파편이 박혀 있었으니까."
발끝부터 글러떨어져 배가 부러진 마이는 일어설 수가 없었던 것
이다. 깊이 3미터, 폭 1미터의 배기구 바닥에서 그녀는 스스로의 힘
으로 탈출하지 못하고, 빗물로 갈증을 달래며 며칠 간 목숨을 부지한
것이다.
"배기구 바닥에서 마이 양은 며칠 정도나 살아 있었을까‥‥‥
나카야마에게 물었다기보다는 옥상 배기구에 혼자 남겨진 자의 불
안과 절망을 떠올리며 안도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마 10일 전후겠지 ."
위와 장에 내용물이 없었고,피부지방도 완전히 분해되어 없어진
모양이었다.
"10일 정도라· . "
안도는 수첩을 펼쳤다 가령 글러떨어진 후 10일 만에 사망하고,
사후 5일이 지나 발견되었다면 마이가 실종된 것은 11월 10일 전후
라는 계산이 나온다. 안도와 데이트 약속을 한 것이 11월 9일이고 그
날 하루 종일 전화를 받지 않았던 것으로 볼 때 그녀의 실종은 그 이
전에 일어났다고 추정할 수 있다 마이가 사는 아파트의 우편함에는
8일자 신문부터 그대로 들어 있었다. 그렇다면 11월 8-9일 사이에
마이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겨 집을 나간 것이 된다.
안도는 '11월 8일 또는 9일' 이라고 수첩에 적어 두었다.
· ,그 3일 동안에 그녀의 신변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다.
안도는 마이의 입장에 서서 상상력을 동원해 보았다. 발견되었을
때 마이는 트레이닝복에 긴 치마 차림이었다. 마치 갑작스레 무슨 일
이 생겨 집에서 뛰쳐나온 듯한 모습이었다. 게다가 너무나 이상하게
도 그녀는 팬티를 입고 있지 않았다.
안도는 마이의 방을 찾아갔을 때의 인상이 다시금 생생하게 되살
아났다 그녀의 집을 찾아간 것은 11월 15일이다. 해부 결과를 믿는
다면,그날 이미 마이는 빌딩 옥상에 갇힌 채 구조를 기다리는 몸이
었다. 수일 간에 이르는 주인의 부재는 분명하게 증명된다. 그럼에도
안도는 그 방에서 이상한 것의 존재를 탐지해 냈던 것이다 아무도
없어야 할 방에서 무언가가 숨어서 살고 있는 것 같은 이상한 분위기
없어야 할 방에서 무언가가 숨어서 살고 있는 것 같은 이상한 분위기
를 안도는 틀림없이 느꼈던 것이다.
"아아, 그거하고."
나카야마는 한 가지 중대한 사실이 생각났다는 듯이 둘째손가락
하나를 세웠다.
"뭔데요?"
"안도 선생은 생전의 그녀와 친했지?"
"친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죠. 두 번밖에 만나지 않았으니까요."
"그래? 마지막에 만난 게 언제지?"
"지난달 말이었나?"
"그렇다면 사망하기 20일 전쯤 되는군."
뭔가 말하지 않으면 안 될 중요한 사실이 있는 거야. 한데 지금 망
설이고 있어· . 나카야마의 태도는 그렇게 보였다. 안도는심각한눈
길을 선배에게 보내며 '자, 괜찮으니까 말씀해 주십시◎ 라고 재촉했
다.
"그녀는 임신하고 있었지?"
나카야마는 빠른 어조로 그렇게 말했다. 안도는 나카야마가 누구
얘기를 하고 있는지 순간 이해되지 않았다.
"그녀라뇨?"
"물론 다카노 마이 씨지 ."
나카야마는 안도의 당황하는 기색에 눈을 크게 떴다.
"몰랐어?"
"산달인 여성의 분명한 특징을 못 봤나?"
"산달‥‥‥
안도는 대답할 말이 없어서 천장을 올려다보며 마이의 몸매를정
확히 떠올려 보려고 애썼다. 두 번의 만남을 떠올려 보았지만 마이의
허리께는 늘 날씬하게 조여져 있었던 것 같다. 전체적으로 날씬한 인
상을 주던 마이의 잘록한 허리는 특히 매력적이었다. 안도는 마이의
육체에서 처녀의 향취를 감지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녀의 배가 불룩
했다는 얘긴가?
· 러욱이 산달?
찬찬히 주의해서 관찰한 적은 없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이미지가
희미해지고, 기억 또한 애매해져 갔다. 아니 , 역시 뭔가 잘못됐다. 산
달일 리 없다. 무엇보다도 이 눈으로 마이의 사체를 보았던 것이다.
그녀의 배는 거의 등에 달라붙은 것처럼 빠짠 말라 있었다.
"산달일 리 없습니다 "
안도는 부정 했다.
"그런 여성들이 더러 있지.산달인데도 별로 배가 나오지 않는 여
성이 "
"정도의 문제가 아닙니다 저 역시 그녀의 사체를 이 눈으로 봤으
니까요."
"응?"
나카야마는 안도가 오해하고 있음을 알아채고는 '아니, 그게 아니
고'라는 듯 손을 옆으로 크게 젓고는 세 가지 사실을 천천히 열거해
나갔다.
"자궁이 크게 부풀어 태반이 떨어져 나가면서 생긴 상처가 크게 나
있었어 . 질 내부는 갈색 빛을 띤 분비물로 가득 차 있었고. 질 내부에
작은 살점이 남아 있었는데, 그건 아무래도 탯줄 같아."
‥‥그런 말토 안 되는.
안도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소리쳤다. 그러나 나카야만 같은 법의
학자가 초보적인 실수를 범했으리라곤 생각할 수 없었다. 마이의 체
내에 그런 세 가지 증거가 각인되어 있다면, 이어지는 끝은 하나뿐이
다. 배기구로 굴러 떨어지기 직전에 다카노 마이가 아이를 출산한 것
이 된다.
만약 출산했다는 게 사실이라면, 마이의 행적은 어떻게 되는 것인
가? 이번 달 7일경 , 갑자기 산기를 느낀 마이는 부랴부랴 산부인과로
직행한다. 그리고 출산. 5일 내지 6일 동안 입원한 후, 12일이나 13
일경에 퇴원 어쩌면 사산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슬픈 나머지 비틀
비틀 빌딩 옥상으로 올라가 배기구로 굴러 떨어진다 그리고 나서 10
일 정도 배기구 바닥에 있다가 오늘 아침 사체로 발견된다‥‥
시간적으로 보면 그렇게 무리한 점은 없었다. 출산을 가정하면, 실
종수수께끼도 풀린다 당연히 고향의 어머니에겐 말하지 않았을 것
이다.
하지만 석연치가 않았다. 마이의 배가 별로 나오지 않았다는 건 개
인차가 있는만큼 여기서 문제삼지 않는다 해도, 처음 대했을 때의 인
상을 지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이와 처음 만난 건 지괌 있는 바로 이 사무실이었다. 다카야마
류지를 해부하기 직전,사체 발견자인 마이에게 현장 상황을자세히
듣기 위해서였다 담당 경사와 함께 그녀는 이 방으로 들어왔다. 그
때 마이는 의자에 앉으려다가 비틀거리며 책상에 손을 짚었다. 언뜻
보기만 해도 빈혈기 도는 안색임을 알 수 있었다. 안도는 마이의 몸
안쪽에서 나는 미미한 피 냄새를 느끼고, 생리에서 오는 빈혈일 거라
고 생각했다. '죄송합니다. 잠깐‥‥이라고 부끄러운 듯이 말하는 마
이의 표정에서도 그것은 분명했다. 순간, 안도와 마이는 서로 눈이
마주치고 이심전심으로 주고받았던 것이다.
(여자들에게 늘 있는 그것이니까 걱정 마세요.)
(알겠습니다. )
류지의 사체를 해부하는 검시원이라는 장소의 성질상 호들갑스럽
게 소란을 피우지 않았으면, 하고 마이는 눈으로 호소해 왔던 것이
다. 직접 말하지 않고도 의사 전달이 이루어졌던 체험은 묘하게 기억
의 밑바닥에 남아 있어 , 안도는 지금도 그것을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
다. 류지를 해부한 것은 지난달 20일. 그렇다면 이상한 일이다. 이번
달에 아이를 낳은 여성이 어떻게 지난달 하순경에 생리를 할 수 있을
까. 물론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임신과 동시에 여성의 생리는 멈추
기 때문이다
· .쌔가 오해했던 건가? 서로 의사가 통했다고 굳게 믿고 있었던
건 결국 단순한 오해였단 말인가?
생각하면 할수록 석연치가 않았다 하지만 안도는 그때의 직감에
대해 강한 자신감이 있었다.
해부 결과를 안도의 직감이 부정하고 있었다.
안도는 의자에서 일어나 해부 보고서를 가리켰다.
"일단 이걸 복사해도 되겠습니까?"
집에 돌아가서 차분히 읽고 싶었다.
"그러게 ."
나카야마는 서류 뭉치를 다시 내밀었다.
"아, 그거하고 또 하나."
안도는 생각난 듯이 덧붙였다.
"혈액 샘플, 채취했죠?"
"음, 물론."
"좀 나눠 가질 수 있습니까?"
"조금이라면 상관없지 ."
안도는 마이의 혈액 중에 유사 천연두 바이러스가 발견될지 어떨
지를 곧바로 조사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바이러스가
발견되면 마이가 그 비디오테이프를 보았다는 증거가 된다. 마이를
덮친 비극이 비디오테이프를 보고 만 것에서 기인하는 것인지 , 아니
면 비디오테이프와는 전혀 다른 원인에 의한 것인지를 확실히 해 두
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확실한 데이터를 하나하나
쌓아가는 것뿐이다. 비디오테이프와의 연관성이 밝혀지면, '돌연변
이' 의 수수께끼를 향해 한 걸음 더 다가가는 것이 되리라·
어제 발견된 다카노 마이의 사체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듯 안도
는 아사카와 가즈유키의 죽음을 통보받았다. 병세가 악화되어 시나
가와 재생 병원에서 5대학 의학부 부속병원으로 옮기자마자 숨을 거
두었다는 것이다. 안도는 변화가 있는 대로 연락을 받기로 되어 있었
기 때문에 이토록 어이없이 죽어 버리리라곤 생각조차 못했다. 담당
의의 설명에 따르면, 아사카와는 감염에 의해 사망했기 때문에 마치
노쇠하여 죽은 것처럼 편안히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사고로 잃은 의
식은 끝내 회복되지 않았다.
안도는5대학 부속병원에까지 가서 아사카와를 병리 해부할 때의
주의점 몇 가지를 담당의 에게 알려 주었다. 육종에 의한 관동맥 폐색
이 있는지 없는지. 병변부에 천연두 비슷한 바이러스가 발견되는지
안 되는지를· . 앞으로의 사태를 예측하는 데 그 두가지 점이 중요
한 포인트가 되는 것이다. 안도는 담당의 에게 재차 다짐을 받은 다
음, 5대학 부속병원을 뒤로했다.
역을 향해 걷는데 새삼 분통이 치 밀어올랐다. 아사카와의 의식이
회복되지 않은 게 정말이지 유감스러워 참을 수가 없었다. 아사카와
는 중요한 정보를 쥔 채, 아무에게도 알려 주지 않고 그냥 가 버렸다
만일 그의 입에서 정보를 들을수만 있었다면 앞으로의 전망을세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안도에게 있어 미래는 너무나도 막연했다. 한
치의 예측조차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무엇보다도 아사카와의 죽음이 우연인 것인지 필연인 것인지 하
는 판단에서부터 안도는 고민스러웠다 그것은 마이에게도 해당되
는 일이었다. 아사카와의 경우는 교통 사고가, 마이의 경우는 추락
사고가 방아치가 되어 모두 쇠약해진 끝에 숨을 거두었다. 죽음의
방식에서는 공통점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그들 두사람의
죽음이 비디오테이프를 본 것 때문인지 아닌지는 아무래도 판단이
서지 않았다.
걸어가는 도중에 안도는 문득 깨달았다. 5대학 부속병원에서 그렇
게 멀지 않은 곳에 마이의 사체가 발견된 빌딩이 있다는 것을. 마이
가 왜 낡아빠진 임대 빌딩 옥상으로 올라간 것인지, 줄곧 마음에 걸
렸었다 현장을 보면 그 이유를 알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흔
적이 사라지기 전에 될 수 있는 한 빨리 가 보는 게 좋을 것이다.
안도는 택시를 잡기로 했다. 여기서 현장까지는 10분 정도 걸린다
도중에 꽃집에 들러 작은 꽃다발을 산 안도는 T 운송 회사의 창고
앞에서 택시를 내렸다. 검시 원에서 들었던 것은 운송 회사의 이름뿐
으로, 빌딩의 정식 명칭은 알지 못했다 문제의 빌딩은 창고 남쪽 바
로 옆이라고 했다.
길에 서서 남쪽 바로 옆의 빌딩을 올려다보았다. 틀림없는 것 같았
다 층수를 세어 보니 14층이었고,드러나 있는 비상 계단은 창고와
빌딩 사이에 생긴 좁은 공간을 나선형으로 나누고 있었다
안도는 정면 현관으로 들어가려다 발을 멈추고 비상 계단 입구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다카노 마이가 과연 어떤 방법으로 옥상까지
올라간 것인지 , 그 점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엘리베이터로 14층까
지 올라가 일단 비상 계단으로 나와, 옥상으로 이어지는 사다리를 타
고 올라간 것인지 , 아니면 1층부터 바깥 계단을 이용한 것인지 . 밤이
되면 정면의 현관 셔터는 내려지고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서는 수
위가 있는 문을 지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심야가 되면 수위는 사라
질 것이고 문도 닫힐 것이다. 따라서 올라간 게 밤이라고 한다면 비
상 계단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다.
비상 계단의 2층 층계 끝에 격자형 철책이 보여, 그 이상 위로는
올라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안도는 일단 2층까지 올라가 보기로 했다.철책에 손잡이
가 붙어 있었다. 돌려 보려고 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철책에 손잡이가 붙어 있었다. 돌려 보려고 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안쪽에서 자물쇠를 잠근 모양이었다. 하지
만 철책은 1.8미터 정도로, 몸이 가벼운 사람이라면 간단히 기어오를
수 있는 높이였다. 중고교시 절에 육상선수를 했던 다카노 마이라면
그리 힘들지 않게 넘을 수 있었을 것이다.
눈을 옆으로 돌리자 빌딩 안으로 통하는 문이 보였다 손잡이를 돌
리려 했지만 역시 이곳 문도 잠겨 있었다. 다카노 마이는 언제 이 빌
딩을 올라간 것일까?낮이었다면 14층까지 엘리베이터를 이용했겠
지만, 밤이었다면 철책을 넘어 바깥 계단을 오르는 것 외에는 달리
길이 없다.
안도는 정면 현관을 통해 빌딩으로 들어가서 엘리베이터 앞에 섰
다. 엘리베이터는 두 대가 있었는데, 두 대 모두 정지한 상태였다 임
대 빌딩답게 층수마다 입주해 있는 사무실 이름이 기재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절반 가까이는 지워져 있었다. 이사 가고 난 후, 새로 입주
하는 사무실들이 없는 모양이었다 빌딩 전체가 한산하고 인기척도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14층에서 엘리베이터를 내려 어두운 복도를 걸으면서 옥상으로 나
갈 수 있는 계단을 찾아보았다. 끝에서 끝까지 걸어 보았지만 눈에
띄지 않았다. 일단 비상 계단으로 나가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막
다른 곳에 있는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 보니, 바다에서 강한 바람이
불어와 안도는 무심코 코트 깃을 세웠다 빌딩의 맨 꼭대기 층에 와
서야 비로소 도쿄 만이 바로 가까이에 있음을 깨달았다. 게이힝 운하
반대쪽, 오이 부두 앞쪽으로 도쿄 만의 터널이 바닷속으로 삼켜 들어
가고 있었다 이 위치에서 보니 두 개의 검은 터널 구멍이 아주 부자
연스럽게 보였다 벌렁 누운 채 떠오른 익사체의 콧구멍 같았다.
빌딩 규모에 비해 14층이 좁았던 것도 수긍이 갔다. 14층의 안쪽
바닥 면적은 다른 층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둘레를 발코니가
감싸고 있었다. 그 발코니의 한 모퉁이에 비상 계단으로 이어지는 넓
은 층계가 있었다. 그러나 다카노 마이의 사체가 발견된 것은 이보다
위였0.
문 바로 옆에는 위로 올라가는 사다리가 붙어 있었다 벽에 붙어
있는 사다리는 수직으로 3미터 정도 되는 높이였다.
안도는 될 수 있는 한 다카노 마이의 입장에 서서 사다리를 올라갔
다. 꽃다발을 입에 문 채 두 손의 힘으로만 몸을 끌어 올렸다.
· .왜 그녀는 이런 곳에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한 계단 한 계단 몸을 끌어올려 위로 올라가면서도 안도는 의식을
집중시켰다. 떨어져 자살하기 위함이 아닌 것 같았다 그것은 이 빌
딩의 구조가 증명하고 있었다. 14층보다 위로 올라가 옥상에서 몸을
던져 業자 몸은 2.3미터 아래, 한층 아래의 발코니 부분에 떨어질 뿐
이다. 14층의 비상 계단에서 뛰어내리지 않는다면 몸은 지면에 도달
하지 않을 것이다.
그곳은 옥상이라고 할 만한 장소가 아니었다 방수용 도료간 벗겨
지기 시작해서 걸을 때마다 울렁울렁 우그러들어 기분 나쁜 감촉이
발끝을 지나갔다. 주위에는 난간이 없었기 때문에 사방이 발코니로
둘러싸여 있다는 걸 알면서도 끝으로 다가설 기분이 들지 않았다.
테트라 포드(방파제 앞에 파도의 침식을 막기 위해 쌓아 놓는 콘크
리트 블록 성게처럼 사방에 원통형 돌기가 솟아 있다:역자 주)와
비슷한 콘크리트 돌기물이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서 있었다. 무엇 때
문에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앉아 있기에는 좋은 높이였다.
옥상 끝까지 가 보는 대신에 안도는 그 돌기 중 하나에 올라가 사방
을 둘러보았다.
오후 5시가 조금 못 된 시각, 겨울철이라 그런지 해가 빨리 져서
빌딩과 상가에는 슬슬 조명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운하치 반대쪽에
는 고가철로 위를 달리는 게이힝 급행의 빨간 전차가 보였다. 전철역
플랫폼이 하얀 빛에 싸여 있다 이 시간치고는 인기척이 드물었다.
역을 기점으로 삼아 길을 더듬어 마이가 살던 아파트로 시선을 움
직여 보았다. 직선 거리로 3∼4백 미터. 엎드리면 코 닿을 거리에 마
이의 아파트가 보였다. 계속해서 시선을 옮겨갔다. 상가를 빠져나가
해안길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100미터. 그것이 지금 서 있는 빌딩의
위치다.
굳이 여기가 아니라도 빌딩 옥상은 얼마든지 많다. 올라가려면 마
이가 살던 아파트의 옥상도 괜찮았을 것이다. 그런데 왜? 다시 한번
눈을 돌려 마이가 살던 아파트의 옥상을 바라보았다. 천장이 낮은 원
룸 아파트인 탓인지 .7층 건물이라고 해도 높이는 이 빌딩의 반 이하
였다 그래도 옥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공간은 제대로 있었다. 그러
나 상가가 자리한 떠들썩한 장소에 세워져 있는만큼 층수 높은 빌딩
이나다른 아파트에 둘러싸며 있었고,서쪽에 있는9층짜리 임대 빌
딩에서는 옥상이 쉽게 내려다보였다. 그것이 이 빌딩과 다른 점이었
다 해안로 연변의 창고 거리에는 근처에 달리 높은 빌딩이 없어서,
바로 눈 아래로 내려다보일 염려가 전혀 없었다.
안도는 돌기들 위에서 내려와 나란히 있는 두 옥탑 사이에 섰다.
한쪽 옥탑은 엘리베이터 기계실, 다른 한쪽은 공조 기기가 있는 곳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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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생각되었다. 남쪽에 위치해 있는 옥탑 위에는 왜 큰 물탱크가자
로 생각되었다. 남쪽에 위치해 있는 옥탑 위에는 왜 큰 물탱크가자
로 생각되었다. 남쪽에 위치해 있는 옥탑 위에는 왜 큰 물탱크가자
리잡고 있었다
옥탑과 옥탑 사이 구석진 곳에 배기구의 역할을 하는, 깊은 홈이
있었다. 안도는 한 걸음 한 걸음 발밑을 확인하면서 앞으로 나아가
흠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철망으로 뒤덮여 있었지만 군데군데 구
멍이 뚫려 있었다. 빌딩 관계자 외에는 아무도 이런 곳에 올라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구멍을 방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두운 직사
각형의 테두리에 발을 대기만 해도 갈라진 밑바닥으로 빠져들 것 같
은 기분이 들어서 안도는 그 이상 다가갈 수가 없었다. 앞으로 숙인
자세를 취하고는 쭈뼛쭈뼛 구멍들 중의 하나에 손에 쥐고 있던 꽃다
발을 던져 넣은 다음 마이의 명복을 빌며 손을 모았다 어제 엘리베
이터 점검 기사가 이곳에 올라오지 않았다면, 사체의 발견은 더 늦어
졌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어둠은 빨리 찾아왔다. 어둠에 쉽싸인 콘크리트옥상의 좁은 공간
으로 해풍이 소용돌이치면서 불어닥쳤다. 안도는 추위로 몸을 떨었
다. 좀더 이른 시간, 한낮 무렵에 왔어야 했다. 하지만 해가높이 떠
있었다고 해도 배기구 밑바닥까지 내려다볼 용기는 나지 않았을 것
이다 어제까지 사체가 방치되어 있었던 구멍 . 그 생각만으로도 온몸
에 소름이 끼치고 오한이 느껴졌다. 좁은 공간에서 죽음을 기다렸다
는 상황이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굴러떨어질 때의 충격으
로 발목이 부러져 제대로 서지도 못한 채 3미터 위의 가늘고 긴 하늘
을 올려다보면서 다카노 마이는 죽기까지 몇 날이나 여기서 지냈던
것일까? 공중에 뜬 관에 산 채로 갇혀 서서히 희망을 잃어 간다· .
안도는 숨이 막힐 듯한 압박감에 쉽싸였다. 사고라고 하기엔 상황이
너무나도 부자연스럽다.
옥탑 내부에서 윙윙거리며 와이어가 윈치에 감기는 것 같은 소리
가 들려왔다.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한 걸까?안도는 등을 돌
리고 슬슬 물러나 옥탑 사이에서 나오려 했다. 옥탑의 까끌까끌한 검
은빛을 띤 표면은 여기저기 벗겨져 있어 좀처럼 사람이 오지 않는 장
소라는 걸 암시하고 있었다.
안도는 빠른 걸음으로 그 자리를 떠나, 옥상에서 14층 발코니로 내
려가는사다리로 갔다. 마지막 한 단은 바닥에서 1미터 높이에 있었
기 때문에 뛰어내리는 수밖에 없었다. 안도는 잘못 착지하는 바람에
발바닥이 저려와 몸을 웅크렸다. 녹슨 사다리가 바로 눈앞에 놓여 있
었다.
안도는 비상 계단을 통해 14층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 앞까지 걸
었다 두 대의 엘리베이터 중에서 한 대가 느릿느릿 올라오고 있는
중이었다. 안도는 그쪽 버튼을 누르고 문 앞에서 기다렸다.
기다리면서 마이가 왜 이 빌딩 옥상에 올라왔는지, 그 이유를 여러
가지로 상상해 보았다. 우선 무엇인가에 쫓기고 있었을 가능성이 떠
올랐다. 심야의 창고 거리에는 사람의 왕래가 거의 없다 인도를 걷
고 있다가 무언가에 쫓겨 철책이 달린 비상 계단을 발견했다고 치자.
자신은 철책을 넘을 수 있지만 쫓아오는 쪽은 넘을 수 없을 것 같다
고 판단했을 경우, 몸이 가벼운 마이였으므로 철책을 겅었을지도 모
른다 그러나 마이의 예상을 뒤엎고, 쫓는 쪽 역시 철책을 넘었다고
하자. 마이는 갈 곳을 잃고 계속 위로 올라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최초의 판단 착오가 그녀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게 된다. 희망의
밧줄은 옥상으로 올라가는 사다리. 첫째 단은 바닥에서 1미터나 떨어
져있다. 마이는 이번에야말로 쫓는 쪽이 포기할 거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사다리를 오른다. 하지만 과연 쫓는 쪽도 오를 수 있었는지
없었는지‥‥ 수직으로 설치된 사다리를 질색하는 생물은 무엇일까?
안도로선 네 발 달린 맹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엘리베이터는 비
어 있지 않았다 발밑에 떨구고 있던 시선을 든 순간. 안도의 눈은 젊
은 여자의 눈과 마주쳤다. 여자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한 눈길
을던졌다. 잘못봤을리 없다. 예전에 한번,이것과 아주똑같은상
황에서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는 여자. 다카노 마이의 방에서 나와
엘리베이터를 함께 탄 여자‥‥ 손톱은 갈라지고, 그때까지 맡아본 적
이 없는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 이상한 분위기는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다.
여자가 정면으로 막아서고 있어 안도는 꼼짝할 수가 없게 되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워 제대로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신체의 자유를
잃어버린 듯한 상태였다.
‥‥왜 이런 곳에?
안도는 필사적으로 그 이유를 찾아보려 했지만 도저히 찾아지지가
않았다. 안도가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이유가 없다' 는 바로 이 사태
였다. 설명을 붙일 수만 있다면 대개의 공포는 몰아 낼 수 있다
마주 선 두 사람 사이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 하자 여자는 손
을쭉 뻗어 문을 눌러 열린 상태를 유지시켰다. 여자의 동작은 여유
있고 느긋해서 보기가 좋았다. 파란 물방을 모양의 스커트 밑으로 늘
씬한 다리가 시원스럽게 보인다. 발은 역시 스타킹을 신지 않은 맨발
이다. 오른손은 문을 누르고 있었고 왼손에는 작은 꽃다발을 들고 있
었다.
· .꽃다발!
안도는 그 꽃다발을 주의해서 보았다.
"한번 뵌 적이 있죠?"
여자 쪽에서 먼저 입을 열었다. 매력적인 울림이었다. 날씬한 몸매
에 비해 목소리들은 낮았다
입을 반쯤 벌리고 얼이 빠져 있던 안도는 바싹 말라 있는 목 안쪽
에서 겨우 말을 토해냈다.
"아, 마이 씨 언니 십니까?"
그랬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담고 안도가 물었다 지금 자신의 눈앞
에 있는 여자가 마이의 자매라면 앞뒤가 모두 맞는다. 마이의 방에서
나타났던 것, 오늘 이 빌딩 옥상에 올라온 것, 꽃다발을 손에 들고 있
는 것‥‥ 전부 설명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질문을 받자 여자는 미묘하게 목을 조금 움직였다. 확실히
목을 세로로 끄덕인 것은 아니었다. 긍정 부정 어느 쪽이라고도 할
수 있는 몸짓이었다. 하지만 안도는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이기로 결
정했다.
‥‥마이가 죽은 빌딩 옥상에 묵념하기 위해 그녀의 언니가 꽃을 가
지고 왔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웠고, 안도 스스로 납득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것만 믿
으려 하는 법이다.
일단 그렇게 굳게 믿어 버리자 안도는 지금까지의 두려움이 우스
워졌다. 무엇을 그렇게 두려워했던 걸까, 자신의 심리를 잘 설명할
수 없었다 처음 여자를 보았을 때 안도는 여자의 온몸에서 강한 요
기를 느꼈다. 하지만 수수께끼가 풀린 지금, 요기는 거짓말처럼 그림
자를 감추었고 그 반대로 여자의 수려한 미모만이 클로즈업되었다.
가늘고 긴 콧마루, 부드럽고 등근 형태를 띤 볼의 라인, 눈꼬리가 약
간 올라간 커다란 눈에 진 쌍꺼풀. 뭔가를 쳐다보는 것도 아니고 일
부러 초점을 흐리고 있는 듯한 묘한 눈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요염
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래 눈이다.
요전날, 마이의 아파트에서 만났을 때에는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
서 눈을 볼 수 없었다. 지금에야 비로소 안도는 그녀의 눈을 본 것이
다 끌려들어갈 듯한 강렬한 시선을 정면으로 받은 안도는 답답함을
느꼈다. 심장이 고동치고 있었다.
"실례 합니다만?"
여자는 말꼬리를 올리며 턱끝을 옆으로 올렸다 아마도 마이와의
관계를 알고 싶은 것이리라
崙대학 의학부의 안도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
안도는자신의 신분을 알려 주었다. 그러나 마이와의 관계를 정확
히 말한 것은 아니었다.
여자는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와서 문을 누른 채 빨리 타라고 눈으
로 재촉했다.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여자의 우아한 동작에는 이유
를물을수없는강한힘이 담겨 있었다 거역할수없는지시라도받
은것처럼 안도는여자와자리를바꿔 엘리베이터에 탔다 그리고아
까와는 반대 위치에서 서로 마주 섰다
"다음엔 부탁하러 찾아뵐게요."
문이 닫히기 직전,여자는 그렇게 말했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니5
다 여자는 분명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이 ㅁ
치 카메라의 렌즈 같았다. 이제 여자는 안도의 시야에서 사라졌지B
그의 뇌리에는 여자의 모습이 어느 때보다도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엘리베이터의 하강 도중 안도는 억누를 수 없을 정도의 욕정을 느
꼈다. 아내와 헤어진 이후, 성적 대상으로 몽상을 품은 것은 마이7',
처음이었지만 충격 면에서는 이번 경우가 보다 강렬했다. 불과 몇십
초밖에 되지 않은 만남임에도 잘록한 발목, 쌍꺼풀진 매력적인 눈脚
리에 이르기까지 전체가 선명하게 새겨졌다. 그녀의 얼굴이 흐려질
것 같지 않았다. 갑자기 밀려온 성충동을 참지 못해 안도는 빌딩 밖
으로 나오자마자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가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택시 안에서 안도는 여자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다음엔 부탁하러 찾아될게요.
부탁이라는 건 무슨 의미인가? 찾아뵙는다는 건 대체 어느 장소를
가리키는 것인가? 단순히 사교적인 발언인가‥‥
여자의 시선에 재촉당한 것처럼 엘리베이터에 탔고, 빌딩에서 나
오자마자 택시를 잡아타고 말았다. 적어도 이름과 전화번호 정도는
물어 봤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은 걸 안도는 후회했다. 왜
그렇게 하지 않았는지 이상스러웠다. 그녀가 옥상에서 내려오길 기
다려도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니 , 그렇게 하
지 않았다기보다는 할수가 없었다 여자에 의해 일거수일투족을 조
종당해 자신의 뜻과는 반대로 행동하고 만 것처럼 생각돼, 안도는 견
딜 수가 없었다
마이를 해부한 지 일주일이 지나 12월로 들어서자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다 안도는 원래 겨울을 싫어하고 봄부터 여름에 걸친 계절을
좋아했다. 하지만 아들을 잃고 난 뒤부터는 계절의 변화에 도통 무관
심해졌다. 그렇지만 오늘 아침 갑자기 추워지는 통에 안도는 싫어도
겨울이 왔음을 실감하게 되었다. 아파트에서 나와 대학으로 가다가
스웨터를 가지러 다시 집으로 돌아갈까, 하고 몇 번이나 걸음을 멈추
고 망설였을 정도였다. 결국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귀찮았던 탓도
있었지만, 걸어가는 동안 몸이 많이 따뜻해졌기 때문이다.
산구바시에 있는 아파트에서 대학 병원까지는 걸어가겠다고 마음
만 먹으면 얼마든지 걸어갈 수 있는 거리였다. 이렇게 거리가 가깝긴
했지만 전철로 가려면 갈아타야 하는 불편이 있어서 안도는 운동을
할 겸 걸어서 집과 병원 사이를 오갔던 적이 몇 번 있었다. 오늘 아침
도 그렇게 해 볼까 하고 생각했다가 도중에 마음이 변해 요요기에서
전철을 탔다 역시 될 수 있는 한 빨리 대학에 도착하고 싶었다
두 번째 역에서 내려야 하기 때문에 안도는 전철에 흔들리면서 천
천히 생각에 잠길 여유가 없었다. 오늘 오전,미야시타와 전자 현미
경 전문가인 네모토와 함께 마이와 류지의 세포를 전자 현미경에 걸
기로 했다. 그걸 생각하자 설레는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는 비디오테이프를 본 사람 이외에는 유사 천연두 바이러
스가발견되지 않았고,육체적인 접촉에 의한 감염도 아직 보고되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마이의 방에는 내용이 지워진 비디오테이프가
있었다 이상의 두 가지 점에서 만일 마이의 혈액 세포에서 유사 천
연두 바이러스가 발견된다면 마이가 비디오의 영상을 보았다고 결론
을 내려도 좋을 것이다. 결국 그녀의 몸에 생긴 이변은 비디오테이프
에서 비롯된 것이 된다.
하마터면 지나칠 뻔했지만 안도는 문이 닫히기 직전, 가까스로 열
차에서 뛰쳐나왔다. 그리고 그대로 인파에 쉽쓸려 개찰구로 나왔다
역 바로 앞에는 대학 병원이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연구실에 얼굴을 내밀자 미야시타가 상기된 얼굴을 돌렸다.
"야, 기다리고 있었어 ."
지난 일주일 동안 미야시타와 네모토는 전자 현미경으로 들여다
볼 수 있는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바이러스의 경우, 보고 싶다고 해서
바로 전자 현미경으로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원심 분리기에 걸거
나 세포를 절단하는 등, 사전준비 작업이 산더미처럼 많아 문외한인
안도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미야시타 자신도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 오늘 아침 일찍부터 작업을 서두르고 있었던 것
이다.
"조명을 꺼주세요."
네모들÷가 말했다
"오케이 ."
미야시타가 얼른 대답하고는 조명을 꺼나갔다. 그 얼굴에는 황홀
한 표정이 드러나 있었다 염기 배열 해석은 끝나 있었지만 직접 눈
으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제부터 안도와미야시타는 류지와마
이의 혈액에서 발견된 바이러스를 보게 되는 것이다.
네모토는 혼자 암실로 가서 아주 얇은 조각을 홀더에 고정시켰다.
그 사이 안도와 미야시타는 한마디 말도 없이 콘솔(조정 장치가 설치
되어 있는 테이블 : 역자 주) 앞에 앉아 오로지 스크린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스크린에는 아직 아무 것도 없었다. 하지만 두사람의 뇌리
에는 이런저런 영상이 번뜩이고 있는지, 눈빛이 생생해지면서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잠시 후 네모토가 돌아와 자기 손으로 마지막 조명을 껐다. 준비가
완료된 것이다. 세 사람은 숨이 멎을 것 같은 심정으로 조용히 스크
린을 응시했다. 이윽고 세포의 아주 勢은 조각에 전자 빔을 쏘이자,
마이크로의 세계가 눈앞에 나타났다
"누구 거야?"
미야시타가 네 모토에게 물었다.
"다카야마 류지 씨입니다. "
먼저 세트된 것은 류지의 세포 조각이었다.
스크린에 비친 녹색의 모양은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를 이루고 있
었다. 콘솔 의의 다이얼을 돌리자 스크린에 세포 표면이 흘러간다.
이 중 어딘가에 바이러스가 숨어 있는 것이다
"배율을 올려 봐."
미야시타가 지시하자, 네모토는 곧바로 9,000배까지 올렸다 이어
표면을훌자,죽어 가던 세포의 양상이 분명히 확인되었다 세포질은
밝게 빛나고 소기관은 검은 덩어리로 붕괴되어 있었다.
"오른쪽 위의 세포질에 맞춰서 배율을 좀더 올려 줘."
그렇게 지시를 내리는 미 야시타의 얼굴은 죽어 가는 세포의 반점
모양이 비쳐 동상처럼 둔탁하게 빛나고 있었다. 네모토는 16,000배
로 배율을 올렸다.
"좀더 ."
21,000ㅂ』 ,
"거기야, 스톱."
미야시타는 소리를 지르고는 안도 쪽으로 힐끗 얼굴을 돌렸다. 안
도는 상반신을 내밀어 스크린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있다, 우글거리고 있다!
죽어 가고 있는 세포 속에 그것이 무수한 뱀처럼 우글거리며 염색
질 표면에 달라붙어 있었다
‥‥‥
(링 바이러스 21,000대)
안도의 등줄기에 오한이 스쳐 갔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
는 종류의 바이러스다. 안도는 의학부 교과서에서 두세 번 정도 보았
을 뿐, 천연두 바이러스를 전자 현미경으로 직접 들여다본 적은 없었
다. 그러나 분명 그것과 모양이 달랐다.
"놀라워 "
미야시타는 입을 B)쯤 벌린 채 자꾸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이 바이러스가 혈관을 지나 관동맥까지 운반되어 혈관 내막에 정
착하고, 그 부분의 세포에 변이를 일으켜 종류(雇痛)를 만들어 냈
다‥‥ 그렇게 그 구조를 이해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너무나도 이상
한 점은 지금 보고 있는 바이러스가 '의식'의 작용에 의해 탄생되었
다는 것이다. 외부에서 침입한 것이 아니라, 비디오테이프의 영상을
본 것에 의한 의식 작용이 낳은 것이기 때문에 이상스러움을 넘어 그
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무에서 유로,관념에서 물질로의 변화.지
구 탄생 이래 이런 일이 이뤄진 것은 오직 태초의 생명이 태어난 순
간뿐일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생명이 태어났던 순간에도 어떤 의식 작용이
있었던 것일까?
안도의 사고가 빗나가려는 순간, 미야시타가 중얼거렸다.
"링 같은 건 어떨까?"
안도는 다시 스크린으로 눈길을 돌렸다. 미야시타가 무엇을 말하
고 싶어하는지 금방감이 왔다. 바이러스의 모양을 무엇에 비유해야
할까‥‥ 구불구불 구부러지고 항아리 모양으로 된 것도 있지만 대부
분은 찌그러진 반지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래,확실히 반지라
고 하는 게 가장 잘 들어맞는다. 받침이나 보석알에 해당하는 불룩한
부분까지 있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뒤얽힌 반지와 뱀, 바닥에
흩뿌려진 동그란 고무줄, 이라고나 할까?
참으로 기묘한 바이러스. 그것을 발견한 안도와 미야시타가 지금
거기에 이름을 붙이려는 참이었다
'링 바이러스' 라고.
"어때 ?"
미야시타는 안도의 판단을 기다렸다. 실로 딱 들어맞는 이름이지
만, 오히려 그것이 안도를 불안하게 했다. 너무나도 딱 들어맞아서
'신' 이라는 존재가 개입되어 있는 건 아닐까 하고 의심하고 싶어질
정도였다. 사건이 일어난 최초의 발단은 무엇일까? 안도는 생각해
보았다. 류지의 배에서 튀어나온 신문의 숫자, 178, 136. 영어로 고
치면 '링'. 그리고 '링'으로 이름붙여진 리포트의 발견 거기에 쓰여
있는 놀랄 만한 사실 그리고 지금 보고 있는 이 바이러스다.
링 모양의 바이러스 무리.윤회 때마다 모양을 바꾸어, 보다 강한
것으로 다시 태어나고자하는 의지가 형상으로 상징되어 있는 것 같
다. 바라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난다. 마이크로의 세계에는 주기적이
고 반복 구조를 지닌 아름다움이 존재하기도 하지만, 지금 보고 있는
것은 그것과는 극을 이루는 추악함이 다. 인간에게 악을 행한다는 걸
알고 있기에 추악해 보이는 것이 아니다. 뱀처럼 어떤 생명체에 대한
본능적인 혐오와 비슷하다. 아무 선입관 없이 이 영상을 본다 해도
거의 모든 사람이 무서워 할 것이다
그 증거로, 바이러스의 출처를 자세히 알 리 없는 네 모토조차 평소
와는달리 촬영하는 손이 약간 떨리고 있었다 그러는동안기계만이
아무감정 없이 네거티브 필름을토해 냈다 일곱 장을 촬영했을때,
네모토는 네거티브 필름을 암실로 옮겼다. 그것을 현상에 걸면서 이
번에는 다카노 마이의 아주 얇은 혈액 세포 조각을 흘더에 세트했다.
콘솔 앞으로 돌아온 그는 천천히 스위치를 넣었다.
"이번엔 다카노 마이 씨의 세포입니다. "
류지의 세포와 마찬가지로 서서히 배율을 올려 갔다. 그러자 어려
움 없이 찾아낼 수 있었다. 틀림없이 동일한 바이러스였다 역시 우
글우글 모여 있었다.
"똑같아."
안도와 미야시타는 동시에 입을 열었다. 두 사람의 눈에는 완전히
동일한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전자 현미경 전문가인
네모토는 미묘한 차이를 감지해 낼 수 있었다
턱에 손을 대고 네모토가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미야시타가 물었
다.
"왜 ?"
"아뇨, 아직 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진으로 자세히 비교해 보
지 않고는요."
매사에 신중한 네모토는 먼저 보았던 류지의 바이러스만 가지고
성급히 결론을 내리려 하지 않았다. 과학자로서 단순한 인상만 가지
고 무엇을 말해 버려서는 안 된다, 제대로 된 근거가 필요하다. 그의
지론이었다. 그러나 그건 그렇다 쳐도 네모토의 눈에는 아무래도 수
적인 차이가 있는 것처럼 비쳤던 것이다. 전체 숫자가 아니었다 류
지의 바이러스에 비해 마이의 바이러스 쪽에 풀어져 있는 링의 숫자
가 더 많은 것처럼 느껴졌다. 류지의 바이러스에도 링의 일부가 끊어
져 있는 것, 항아리 모양을 한 것, 몸을 도사린 뱀 같은 모양의 것 등
이 있었지만 대부분은 제대로 된 링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마이의
바이러스에는 링의 일부분이 끊어져 관 모양으로 길게 뻗어 있는 것
이 이상하게 많았다
네모토는 자신이 받았던 인상을 객관적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뚜
렷하게 특징을 드러내는 한마리의 바이러스에 초점을 맞추었다 반
지에 비유하자면 받침 바로 옆에서 끊긴, 받침대와 보석알을 머리로
해서 구불구불 꿈틀대는 듯한 한 마리가 스크린에 크게 비춰졌다.
마치 머리에서 떨어나온 편모가 파도치듯 흔들리는 형태였다. 그
것과 똑같은 모양의 것을 안도도, 미 야시타도. 네모토도 잘 알고 있
었다. 세 사람은 동시에 같은 것을 연상하고 있었지만 굳이 입 밖으
로는 내지 않았다.
(원이 業어진 링 바이ㄹ1스 100,000대)
네모토가 맨 처음 받았던 인상은 링 바이러스의 사진을 서로 비교
해 봄으로써 증명되었다 분명히 어떤 한정된 공간에 있어서도 류지
보다는 마이 쪽에 원이 끊어진 바이러스(끈 모양으로 된 것)가 더 많
았다.
통계를내 보니,류지 쪽에는 10분의 1의 비율로밖에 존재하지 않
는데, 마이의 경우에는 절반의 비율로 분포되어 있었다. 어떤 이유가
있지 않고는 이런 명확한 차이가 나타날 리 없었다. 안도는 비디오테
이프를 보고 사망한 사람의 세포 모두를 전자 현미경에 걸어 달라고
요청했다.
데이터가 전부 갖춰진 것은 해가 바뀌고 나서였다 신년 휴가가 끝
나는 주의 금요일날, 안도와 미야시타는 연구실에 나와 있었다.
연구실 창문에서 내다보니 어젯밤에 내린 눈이 황량한 메이지 신
궁의 바깥 뜰에 아직도 약간 남아 있었다. 사진 분석에 지친 안도는
창가로 다가가 바깥 풍경을 보면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 동안에도
미야시타는 쉬지 않고 사진을 한 장 한 장씩 책상에 늘어놓으며 신중
히 비교하고 있었다.
아사카와와 마이를 포함해서 비디오테이프와 관련되어 죽은 사람
은 이제 모두 열한 명에 달한다. 열한 명 모두의 세포에서 같은 바이
러스가 발견되었으므로, 죽음의 원인이 이 바이러스라는 건 이제 의
심할 나위가 없었다. 그런데 원이 끊어진 바이러스의 비율에 있어서
심할 나위가 없었다. 그런데 원이 끊어진 바이러스의 비율에 있어서
는 확실히 두 그룹으로 나누어졌다
마이와 아사카와의 세포에서는 원이 끊어진 바이러스의 비율이 절
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외의 사람들은 모두 1할 이하
로 뚝 떨어졌다. 앞뒤가 들어맞았다. 생과사의 갈림길이 그 부근에
있는 것 같았다.
원이 끊어진 바이러스가 어떤 일정 비율보다 증가하면 심근경색에
의한 죽음에서 피할 수 있다고 통계가 말해 주고 있었다. 일정 비율
이 어느 정도인지는 현재로선 확실치 않았다
마이와 아사카와는 비디오테이프의 영상을 보았다. 그리고 체내에
링 바이러스를 탄생시켰다. 거기까지는 다른 아홉 명과 똑같았다. 그
런데 어떤 사정에 의해 바이러스의 원이 끊겨 나가 끈 모양으로 뻗기
시작했고, 그 수가 일정 비율을 넘어섰다.
비디오테이프를 장음에도 불구하고 마이와 아사카와가 심근경색
으로 죽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문제는 왜 마이와 아사카와의 체
내에서만 바이러스의 원이 끊어져 있는가 하는 점이다. 다른 아흡 명
과 비교할 때, 두 사람은 어딘가가 다른 점이 있었다.
"면역계의 차이인가?"
안도가 말하자 미야시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면역계라· . . "
"아니면‥‥‥
안도는 머뭇거렸다
"아니면 뭐7"
"그보단 바이러스 자체의 성질에서 비롯되는 요인이라고 봐야 하
지 않을까?"
"나도 그쪽이라고 생각해 ."
미야시타는 맞장구를 치고는 커다란 배를 앞으로 내밀면서 앞에
있는 의자에 두 발을 얹었다.
"맨 처음에 비디오를 보았던 네 명의 젊은이가 장난을 치는 바람에
애초부터 비디오테이프는 머지않아 소멸될 운명을 갖게 된 거야. 그
리고 바이러스는 새로운 출구를 발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돌연변
이를 일으킨 거지 .
여기까진 류지의 DNA메시지가 가르쳐 준 대로야.그럼 어떤 돌
연변이를 일으켜 어떤 것으로 진화한 것일까?그걸 풀어 낼 열쇠를
쥐고 있는 건 다카노 마이와 아사카와 가즈유키의 링 바이러스‥‥ 그
독특한 형 태가 아닐까?"
"바이러스의 특징은 숙주 세포를 빌려 증식하는 데 있어."
"물론이지 ."
"때때로 그 증식은 폭발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하지 ."
당연한 일이다. 중세에 대유행한 흑사병, 혹은 근대 스페인 감기
를 예로 들 것도 없이 바이러스는 때론 폭발적으로 유행하는 경우가
있다.
"1래서 ?"
미야시타는 안도에게 재촉했다.
"생각해 봐. '일주일 이내에 복사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메시지에
따라 한 개의 테이프를 두 개로 늘린다고 해도 그 증식 방법은 속도
가 아주 느리다고 할 수 있지 . 명령에 충실히 따른다고 해도 한 달에
네 개씩밖에는 늘어나지 않잖아?"
네 개씩밖에는 늘어나지 않잖아?"
"음, 그렇군."
"그런 거라면 별로 무섭지 않지 ."
"바이러스답지 않다고 말하고 싶은 거냐?"
"그래.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게 아니라면 증식이라고 할 수 없
어 ."
"대체 너, 뭘 말하고 싶은 거냐?"
미야시타는 안도의 눈을 응시했다.
"아냐, 그저‥‥‥
‥‥그저 뭐란 말인가?
안도는 스스로도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사물
을 너무 나쁘게만 받아들이려고 하는 건 아닐까? 단 한 개의 바이러
스가 눈 깜짝할 사이에 수천만 개로 증식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바이러스의 존재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자기 복제를 동시에, 그리고 대량으로 행하는 것이다. 하지만 비디
오테이프를 한 개 한 개 복사해 나가는 것은 너무나 비효율적이다.
실제로 탄생한 지 불과 3개월도 되기 전에 비디오테이프는 모두 소멸
해 버리지 않았는가? 만일 돌연변이에 의해 새롭게 태어났다면‥‥
"뭔가 좋지 않은 예감이 드는데 "
안도는 링 바이러스 사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엄청난 수의 바이
러스 입자들이 몇 겹으로 포개져 있었다. 여러 개로 포개진 모습은
마치 풀려 나간 비디오테이프처럼 보이기도 했다
야마무라 사다코라고 하는 초능력 자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어떤
정보를 영상으로 바꿔. 우물 밑바닥에 어떤 종류의 에너지를 남겼다.
그 에너지에 자극받아 탄생한 비디오테이프. 이어 비디오의 영상을
봄으로써 탄생한 링 바이러스 늘어가는 것은 물질이 아니다. 비디오
테이프와 DPfA에 새겨진 정보인 것이다
자신이 모르는 어떤 곳에서 뭔가 엄청난 변이가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아서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안도는 마이의 방에도 찾아갔었
고, 그녀가 글러떨어진 옥상 배기구도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방의 분위기나 옥상의 물컹물컹한 감촉을 직접 느껴 보았다. 그 때문
인지 몸 가까이로 다가오는 위기감이 미야시타보다 훨씬 강했다. 땅
아래에서부터 꿈틀거리는 태동이 들려오는 듯했다.
"자타스트로프(비극적인 결말 ' 역자 주)의 예감인가?"
미야시타는 느긋한 표정으로 대파국을 입에 담았다.
"정말로 카타스트로프다. 달리 뭐라 말할 수가 없어 ."
류지의 사체를 해부한 이래. 안도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끔
찍한 세계로 내던져지고 말았다. 견고해야 할 콘크리트까지 부드럽
게 발에 휘감기고, 아무도 없어야 할 빈방에서 생명의 냄새를 감지했
다. 설명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다
특히 마이가 낳은 그 어떤 것을 생각하면 무서워진다. 마이가 죽은
지 한달 반이 지났지만 그녀가 낳은 것에 관해서는 전혀 단서가 없는
상태다. 안도는 마이가 됐여운 아기를 낳았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
았다.
"그렇게 심각해하지 말라구.돌연변이를 만들어 냈다고 해도그게
환경에 잘 적응했을 거라고 볼 순 없잖아."
"결국 변이체 역시 소멸했다?"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 "
"낙천적이야, 넌."
"1918년에 크게 유행한 스페인 감기와 똑같은 바이러스가 1977년
미국에서 발견됐는데,그때는 아무도 죽지 않았어. 2천만에서 4천만
의 인간을 살육했던 바이러스가60년 뒤에는 거의 무해한 바이러스
가 되어 발견됐단 말이야."
"돌연변이에 의해 힘을 잃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 ."
확실히 마이의 사체가 발견된 이후로 이상한 죽음이라고 할 만한
사건은 아직 한 건도 없었다.
신문뿐만 아니라 경찰 정보망을 활용해 열심히 알아보았지만 지금
까지 그물에 걸릴 만한 사건은 아무 것도 없었다. 미야시타가 말한
대로 다시 태어난 변종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아주 짧은 기간 동
안에 감염력을 잃고 소멸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지금부터 무슨 계획 있어?"
미야시타는 발로 차서 회전의자를 돌렸다.
"한 가지 잊은 게 있어 ."
"뭔데?"
"다카노 마이가 언제 어디서 비디오테이프를 손에 넣었느냐 하는
점이야."
"중요한 건가?"
"응, 좀 걸려 . 날짜만은 확실히 해 두고 싶어 ."
사실은 좀더 빨리 확인했어야 했지만, 바이러스의 분석에 바빠 잊
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으로선 달리 할 수 있는 일도 없을 것 같았
다.
마이가 보았던 비디오테이프가 류지의 것이 거의 틀림없다고 본
다면, 문제는 그녀가 언제 어디에서 그것을 손에 넣었는가 하는 점
이다 안도는 알 수 없는 의문에 쉽싸였다.
생각 외로 간단히 안도는 마이가 언제 어디에서 비디오테이프를
손에 넣었는지 알아 낼 수 있었다.
죽은 지 2∼3일 사이에 류지의 물건들은 비디오테이프를 포함해서
모두 본가로 실려갔다고 한다. 비디오테이프를 건네 받은 장소가 달
리 있을수 없다고 본 안도는 일단 류지의 본가로 전화를 걸었던 것
이다.
류지의 어머니는 아들과 안도가 대학 동창이라는 것을 알자, 갑자
기 친밀함을 보였다. 이전에 다카노 마이라고 하는 여성이 찾아온 적
이 없는가 하고 안도가 묻자,류지의 어머니는 '예, 분명히'라고 대
답했다. 그리고 가계부에 붙여 놓은 조각케이크 1조각의 영수증에서
정확한 날짜를 찾아 주었던 것이다. 작년 11월 1일. 마이가 류지의
본가를 방문했던 날이다. 안도는 수첩에 그 날짜를 메모했다.
"그런데 마이 씨는 어떤 용건으로 찾아왔었나요?"
안도가 묻자, 어머니는 류지가 연재하고 있던 논문의 정서를 마이
가 도와 주고 있었던 것과 그 원고에 빠진 부분이 있는 것 같아서 찾
아왔음을 알려 주었다.
"그렇다면 마이 씨는 빠진 원고를 찾기 위해서 온 셈이군요."
다시 한번 확인하면서 안도는 류지가 연재하고 있던 월간지와 출
판사 이름을 메모했다.
그 정보를 얻고 난 후, 안도는 바로 전화를 끊었다. 다카노 마이의
근황을물으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죽음을 알게 되면 틀림없
이 질문 공세를 퍼부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를 납득시킬 만한 대답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안도는 잠시 동안 수화기 위에 손을 얹고 있었
다.
‥‥11월 1일에 마이는 류지의 본가를 찾아가 분실된 원고를 찾다가
그 비디오테이프를 발견하고는 자기 집으로 가지고 돌아왔다. 아마
도 틀림없이 그날 영상을 보았을 것이다.
안도는 11월 1일을 출발점으로 해서 하나씩 가정을 쌓아 갔다. 바
이러스의 효과는 일주일이면 최대치에 달한다. 따라서 11월 8일에
그녀의 육체에 어떤 변화가 생겼다고 봐야 할 것이다. 마이와 데이트
약속을 한 것은 11월 9일이었다. 이날 몇 번이나 전화를 했지만 그녀
는 받지 않았다 앞뒤가 들어맞는다. 방에 있으면서도 전화를 받을
수 없는 상태였든가, 아니면 이때 이미 빌딩 배기구에 굴러 떨어져 있
었든가, 둘 중 하나다.
안도는 거꾸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날짜를 확인했다. 마이
의 사체를 해부한 것에 의해 그녀가 어느 정도의 시간을 배기구 바닥
에서 살았고, 사후 몇 시간 후에 발견되었는지 , 그 부분은 대강 알고
있었다
해부 결과에 의하면 사망한 것이 11월 20일 전후, 굴러 떨어진 것
은 그보다 10일 정도 전이라는 얘기가 된다. 즉, 11월 8일이나 9일에
이변이 생겨 배기구에 굴러 떨어졌다고 가정하면 계산상 아무 무리도
없다. 마인가 비디오테이프를 본 날을 11월 1일이라고 해도 틀림없
을 것 같았다.
다음에 안도는 도서관으로 가서 잡지 코너에서 류지의 논문이 게
재된 월간지를 찾았다. 작년 11월 20일에 발행된 것 중에서 脚식의
구조』라는 제목이 붙은 류지의 논문 최종회가 게재되어 있었다. 그것
에서 안도는 또 하나의 정보를 얻었다.
마이는 류지의 원고를 정서해서 담당 편집자에게 넘길 수 있었
던 것이다.
비디오테이프를 보고나서 죽기 전까지 마이는분명 한사람과 접
촉을 한 셈이다
안도는 월간지 편집부에 전화를 걸어 담당 편집자와 약속을 한 뒤,
출판사를 방문하기로 했다. 전화가 아니라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듣
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스이도바시 역에서 내려 주소를 보면서 j분정도 걷자,종합출판
사인 5사의 11층짜리 건물이 보였다. 안내 데스크에서 월간지 『조류』
의 편집자인 기무라를 불러 달라고 부탁하고 안도는 로비를 둘러보
면서 기다렸다
기무라는 곧 로비로 내려온다고 했다. 생판 얼굴도 모르는 사람과
의 만남에 선뜻 응해 준 것이 안도로선 기뻤다. 전화 목소리로 판단
하건대 아직 20대 청년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응대에 예의 바르고 빈
틈이 없어 안도는 야무진 인상을 받았다. 은테 안경을 쓴 핸섬한젊
은 청년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안도 앞에 나타난 것은 체크 바지에 멜빵 차림을 한,
한겨울인데도 벗겨진 이마에서 땀이 번질거리고 있는 약간 살찐 남
자였다. 아무리 봐도 일류 출판사에서 현대 사상을 취급하는 원간지
편집자 같지 않았다.
"아이구,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
남자는 얼굴 가득 미소를 띄우며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냈다. 기무
라도모라는 이름 위에는 부편집장이라는 직함이 찍혀 있었다 나이
는 목소리에서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위인 것 같았다. 마흔을 바라보
는 나이쯤 되지 않았을까?
"바쁘신데 죄송합니다. 어디 이 근처에서 차라도‥‥‥
안도도 명함을 내밀며 밖으로 나갈 것을 권해 보았다.
"아니, 이 부근에는 좋은 데가 없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저희 회사
라운지로 가시겠습니까?"
"그럴까요?"
안도는 기무라의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이기로 하고, 그가 안내하
는 대로 엘리베이터에 탔다.
꼭대기층의 라운지는 안뜰과 접해 있는 정원풍의 상당히 호화스런
꾸밈새가돋보였다. 소파에 깊숙이 앉아 주위를 둘러보니 잡지나신
문에서 보았던 얼굴들이 여기저기서 보였다. 작가와 담당 편집자의
미팅 장소로 이용되고 있는 모양으로, 원고를 손에 든 사람도 있었
다
'정말이지 아까운 사람을 잃었습니다. "
그 말에서 안도는 산만해져 있던 집중력을되찾고 정면에 앉아 있
는 기무라의 기름진 얼굴로 시선을 되돌렸다
"실은 저와 다카야마 류지는 대학 동창이었습니다. "
아마도 효과를 발휘할 것이라고 안도는 예측하고 있었다. 이 말로
류지와 관계가 있었던 사람들의 마음을 얼마나 많이 끌었던가.
"예, 그렇습니까? 다카야마 선생님하고‥‥‥
기무라는 손에 들고 있던 안도의 명함에 힐끗 눈길을 주고는 납득
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에는 안도가 소속된 대학 이름이 나와
있었다. 류지가 같은 대학의 의학부 출신인 걸 기억해 냈음에 틀림없
었다.
"게다가 그의 사체를 해부한 게 접니다 "
기무라는 눈이 휘등그레져서 턱을 내밀고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신음 소리를 냈다
"그거 , 참‥‥‥
기무라는 커피잔을 쥔 안도의 손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류지
의 육체를 메스로 갈라 열어 본 그 손가락에 흥미가 끌렸던 것일까?
"하지만 오늘 찾아뵌 건 류지 군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가 아닙니
다"
안도는 잔에서 손을 떼고 두 손을 깍지 끼어 테이블 위에 놓았다.
"뭔가요?"
"그의 제자인 다카노 마이 씨 일로 좀 여쭙고 싶어서요."
마이의 이름이 나오자 기무라는 다소표정을풀고몸을 앞으로내
밀었다.
"마이 씨의 뭘?"
· .끼 사람은 아직 마이의 죽음을 모른다.
안도는 그렇게 직감했다. 그러나 언젠가는 알려야 할 것이다.
"마이 씨가 죽은 것, 아직 모르십니까?"
기무라는 아까보다도 더 기묘한 신음 소리를 내면서 반쯤 일어서
다가 말았다. 그의 얼굴 표정이 계속해서 변해 갔다. 희노애락에 따
라 천의 얼굴로 바뀌는 모습이 코믹하기조차 했다. 당장 희극 배우를
시켜도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저런, 마이 씨가 죽다니· ."
기무라는 비탄의 소리를 냈다
"작년 11월, 빌딩 배 기구에서 굴러 떨어져 사망했습니다 "
"아아 그래서 아무리 연락을 해도 연결이 안 된 거군요."
여기에도 자신과 동류가 있었다는 친근감이 솟구쳤다. 이 사내가
결혼했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기무라도 마이에 대해 어
렴풋한 연정을 품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마지막으로 마이 씨를 만났던 날을 기억하십니까?"
안도는 감상에 젖을 사이도 주지 않고 질문을 시작했다.
"그게 그러니까‥‥ 신년호 교정이 임박한 무렵이었죠. 11월 초순이
었습니다 "
"정확한 날짜를 알 수 있을까요?"
기무라는 작년 수첩을 꺼내 페이지를 넘겼다.
"11월 2일이네요."
11월 2일. 마이가 류지의 본가를 찾아갔다가 비디오테이프를 가지
고 온 다음날이다. 그때는 이미 마이가 비디오테이프의 영상을 다 보
았을 것이다.
"실례입니다만, 어디서 만나셨습니까?"
"마이 씨한테 원고 정서가 다 끝났다는 전화를 받자마자 제 쪽에서
가지러 갔었습니다. "
"마이 씨의 아파트에 말입니까?"
"아뇨. 역 앞에 있는 찻집에서 만났습니다. 늘 그렇게 했으니까
요"
기무라는 독신인 마이의 집에 들어간 일이 없음을 강조하는 것 같
았다
"마이 씨를 만났을 때 뭔가 평소와는 다른 점이 없었나요?"
기무라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질문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건 무슨?"
"실은 그녀의 사인에 이상한 점이 있어서요."
"이상한 점 ‥‥‥
기무라는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말하는 것이 다카노
마이의 해부 결과에 영향을 주게 되는 건 아닐까 하고 신중한 태도를
취하는 듯했다.
"아니 , 뭐든 좋습니다 뭔가 눈치챈 것이 있다면."
안도는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일부러 미소를 지어 보였다.
"분명히 그날의 마이 씨는 평소와 달랐어요."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면?"
"안색도 나빴고, 구역질이 나는지 자주 수건으로 입가를 막기도 했
습니다. "
안도는 구역질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다카노 마이의 방을뒤
졌을 때,욕실 바닥에 토사물 같은 갈색 덩어리가 있었음을 기억해
냈기 때문이다
"구역질이 나는 이유를 물어 보셨습니까?"
"아뇨. 왜냐하면 말나자마자 마이 씨가 먼저 어젯밤 다카야마 선생
님의 원고를 정서하느라 밤을 새워서 컨디션이 좋지 않다고 말했거
든요."
"그래요? 수면 부족 때문이라구요?"
"그렇습니다. "
"그 밖에 다른 얘기는 안 했나요?"
"저도 급해서요. 원고에 대한 인사와 단행본에 관한 계획만 간단히
얘기하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
"단행본이 라면, 류지의?"
"예, 원래 단행본으로 출판한다는 전제하에 시작된 연재였으니까
요"
"언제 출판하죠?"
"다음달, 서점에 내놓을 예정 입니다. "
"잘 팔리면 좋겠군요."
"딱딱한 내용의 책이어서 그리 큰 기대는 할 수 없죠."
'戈래도 혹시 모르◎ · ..'
"내용은 확실히 훌릉한데· . . "
거기서부터 얘기가 빗나가기 시작해, 류지의 에피소드 등에 이르
러 대화가 활기를 띠자 좀처럼 빠져나오기 어렵게 되었다. 다카노 마
이를 포함한 두 사람 관계의 이것저것을 화제로 삼는 동안 시간이 많
이 지나서 약속한 한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홀러가 버렸다
이번에는 쓸 만한 정보를 얻을 수 없었지만, 다시 만날 기회도 있
으니 만큼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서라도 끈질기게 달라붙을 수는 없
었다. 안도는 예의를 표하고 작별 인사를 하기로 했다.
마침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참에 안도는 라운지로 들어오는 세 명
의 남녀를 주의해서 보았다 남자 두명에 여자 한 명,세 사람 모두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여자 쪽은 소설이 영화화되는 바람에 단숨에 유명 작가의 지위에
오른 넌픽션 작가로, TY와 주간지에서 그 얼굴을 여러 번 본 적이 있
었다 남자 한 명은 그녀의 작품을 영화화한 감독이었다. 안도가의
아하게 생각한 것은 영화 감독 옆에 있는 40대 남성이었다. 얼굴은
기억하는데,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역시 작가나 뭐 그런 사람이
아닐까 싶어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그가 스쳐 가는 순간에 기무라가
말했다.
"아사카와 씨 , 잘됐군요, 기획이 통과돼서 "
‥‥아사카와.
기억해 냈다. 아사카와 가즈유키의 형,아사카와 준이치로가 아닌
가.
'링'이 저장된 디스켓을 받기 위해 간다에 있는그의 아파트를 방
문한 것은 작년 11월 중순의 일이었다. 원하던 것이 손에 들어온 기
쁨 때문에 허등지등 떠났지만 나중에 디스켓을 되돌려 줄 때에는 정
중한 인사의 말을 함께 끼워 넣었다.
이어 떠오른 것은 아사카와 준이치로에게 건네 받은 명함에 이 5출
판사 출판부 직함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우연인지, 아니면 아사카와
형제의 연줄로 그렇게 된 것인지,류지는 친구인 아사카와의 형,준
이치로가 근무하는 출판사에서 책을 내게 된 것이다.
준이치로도 안도를 알아본 듯 놀란 표정으로, 아주 조금 뒷걸음질
쳤다.
"아니 , 그때는 대단히· . ."
안도도 고개를 숙이며 디스켓을 빌려 준 데 대한 인사와 신년 인사
를 같이 하려고 했다. 하지만,준이치로는 살짝 눈을 피해 상대편이
입을 여는 것보다 더 빨리 몸을 피했다.
"그럼 , 이만."
그리고 곧바로 여류 작가와 영화 감독을 재촉해 빈 테이블에 앉아
버렸다. 안도는 그가 자신을 피하고 있다고 느꼈다 다시 한번 테이
블에 앉는 준이치로에게 눈길을 주었지만,그는 영화감독과의 이야
기에 열중해 얼굴을 돌리려고조차 하지 않았다. 어떤 명확한 의도를
가지고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는 것이었다.
준이치로는 왜 나를 피하고 있는 걸까, 안도는 기억을 더듬어 보았
다. 디스켓을 빌려 준 데 대한 인사는 정중히 했을 터이고, 실례되는
행동을 한 기억도 없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부자연스런 태도에 고
개를 갸웃거리면서 안도는 기무라와 함께 라운지에서 나왔다
같은 날 밤, 안도는 자기 아파트에 돌아오자마자 오랜만에 욕실에
더운 물을 받았다 아들이 살아 있었을 때에는 매일 밤 함께 목욕을
했다 혼자가 되고 나서는 더운 물을 받는 게 귀찮아서 샤워만으로
간단히 끝내는 때가 많았다.
욕조에서 나온 안도는 전자 현미경으로 촬영한 사진의 복사본을
벽에 붙여 두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기로 했다.
한쪽 벽은 책장으로 메워져 있었는데, 침대가 놓인 쪽 벽에는 아무
것도 없어 하얀 스크린처럼 되어 있었다. 안도는 X선 사진에 백라이
트를 비추는 것처럼 벽에 사진을 붙여 갔다.
17,000배 , 21,000배 , 100,000배라는 배율 순으로 마이의 혈액에서
분리된 바이러스 사진을 붙이고는 대상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몇 걸음 물러섰다 링 모양의 바이러스가 겹쳐져 있는모습은나선형
계단처럼 보이기도 했다. 뭔가 알아 낼 게 없을까? 안도는 정신을 집
중시켰다. 이전에는 빠뜨리고 보지 못한 뭔가를·
조명을어둡게 하고 스포트라이트를 비춰 보았다 빛이 닿자하얀
벽 위에 실제로 거대한 바이러스가 기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42,000
배로 확대된,원이 끊겨 끈 모양으로 뻗어 있는 바이러스사진에 조
명을 맞추었다.
마이와 아사카와의 혈액에서만 많이 보이고, 류지를 비롯한 다른
아흡명에게서는 거의 보이지 않았던 타입이다 마이의 경우,관동맥
의 내공이 좁아졌다는 징후는 전혀 없었지만 아사카와의 경우에는
혈관 내막에 작은 혹 같은 것이 생겨나고 있었다. 마이와 아사카와조
차 미묘하게 증상이 다르다.
‥‥왜 마이의 혈관에는 상처가 없었던 걸까?
안도의 의문은그 한 점에 집중되었다 지금 보고 있는 끈 모양의
바이러스는 마이의 관동맥 내막을 공격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곳이 타깃이 되어 있었는데, 왜 그녀만은 예외였던 걸까?
안도는 마음에 걸리는 것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10월 말에서 11월에 걸친 마이의 행동을 기록한 수첩을 펼쳐 빛에
비추어 보았다 처음 만난 것은 10월 20일. 다카야마 류지를 해부하
기 직전의 검시원.그때 마이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왜 좋지 않았던
것인지 , 안도는 그 이유를 나름대로 추측했었다. 생리임에 틀림없다
고. 그는 자신의 직감에 확신을 갖고 있었다
벽에 붙여 놓은 사진으로 눈을 되돌렸다 10만배로 확대된 끈 모양
의 바이러스. 대학에서 처음 이것을 보았을 때 어떤 인상을 받았던
가?
뭔가와 비슷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타원형의 머리를 가진 편
모를 구불거리고 있는 듯한 모습. 이것들은 마이의 혈관 안에서 구불
구불 헤엄치고 있었으면서도 관동맥 내막을 공격하지 않았다.
· .그러면 어디를 공격한 것인가?
안도는 머리가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아주 작은 구멍이 서서히 확
대되고, 그 틈에서 빛이 스며나왔다.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게 보
이는 순간이었다. 안도는 다시 수첩으로 눈을 돌렸다. 마이가 비디오
테이프를 봤다고 생각되는 날짜. 11월 1일 밤. 마이가 생리를 했던
날부터 세어 보면 12일 내지 13일째에 해당한다.
안도는 벽으로 한발 두발 다가갔다 편모를 휘저으며 헤엄치는 링
바이러스.
‥‥똑같지 않은가. 이건 자궁구를 향해 헤엄치는 정자의 모습과 너
무나 비슷하다.
"정자7"
안도는 감히 그 말을 입에 담아 본다.
·.깨란일이다.
개인차가 있긴 하지만 보통 여성들은 월경으로부터 2주일 지난 무
렵에 난자를 방출한다. 난자가 난관에 머무르는 것은 길어야 24시간
이다. 만일 마이가 비디오테이프를 보았던 날 밤 그녀의 난관에 난
자가 머물러 있었다면‥‥
갑자기 출구를 발견한 링 바이러스가 관동맥에서 난자로 공격 대
상을 바꾼 것이다 안도는 거칠게 호흡하며 침대에 앉았다. 이미 수
첩도, 사진도 볼 필요가 없었다.
비디오테이프를 보았을 때 마이는 배란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운이 좋았던 건지 나빴던 건지 한 달에 한 번밖에 없는 배란일에 우
연히 영상을 보고 말았다. 그래서 그녀만이 예외가 된 것이다. 비디
오테이프를 본 여성 중에서 때마침 배란일과 맞아떨어진 것은 마이
뿐이다.
· .그렇다면.
이후의 일을 떠올린 안도의 등줄기로 오한이 지나갔다. 그렇지만
사고를 정지시킬 수가 없었다
무수한 링 바이러스는 마이의 난자에 침입한 후 DNA로 들어가
서‥‥
‥‥수정 (受精)된 거다.
진화를 했다고 해도 링 바이러스의 기본 성질은 남아 있다. 정확
히 일주일 후. 수정란은 최대로 성장해 체외로 배출된다. 해부 결과
마이의 육체에 출산 직후의 흔적이 남아 있었던 것은 바로 그 때문
이다.
‥‥그런데 마이는 대체 무엇을 낳은 거지?
안도의 떨림은 보다 격렬해졌다. 발끝의 감촉이 생생하게 떠올랐
기 때문이다.
‥‥난 틀림없이 그것을 느꼈다.
그렇게 깨달은 순간, 안도는 구역질이 났다. 마이의 아파트를 찾아
갔을 때 아무도 없어야 할 방에서 생명이 헐떡이는 기척을 느꼈다.
욕실의 변기를 들여다보다가 무리한 자세 때문에 앞으로 고꾸라지게
되었고, 그때 흘러내린 양말 사이로 아킬레스건 언저리를 스치고 지
나가는 부드러운 것이 있었다
아마도틀림없이 그것이 그랬을 것이다 그저 방을 둘러보기만 해
서는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아주 작은 것. 아니면, 아직 성장 단계에
있었기 때문에 옷장 속에 간단히 숨을 수 있는 크기의 생명체가 확실
한 감촉을 남기면서 피부 표면을 꿈틀꿈틀 기어갔던 것이다
좀처럼 몸의 떨림이 가시지 않자 안도는 다시 한번 욕조에 몸을 담
그기 위해 잠옷을 벗었다 뚜껑을 뽑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더운 물
이 남아 있었다 수도꼭지를 틀어 80도의 뜨거운 물을 쏟아부어 전보
다 더 뜨겁게 한 다음 몸을 담갔다.
물 위로 발을 내밀고, 무리하게 비틀어 아킬레스건 부위를 관찰하
고는 가볍게 문질러 보았다. 물론 표면상으로는 아무 변화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불안이 가시는 것은 아니었다.
안도는 물 속에 발을 담그고 무릎을 감싸안는 자세를 잠시 유지했
다. 그렇게 하고 있는 동안에 다른 의문이 고개를 쳐들었다. 마이가
예외라는 것은 알았다. 그런데 아사카와는 왜?
아사카와는 남자가 아닌가?
아니면 그도 역시 무언가를 낳았다는 건가?
물이 너무 뜨거워서인지 갈증이 느껴졌다.
제5장
야마무라 사다코와 전연두 바이러스 ‥‥
두 가닥의 끈이 하나로 이어진 게
마(魔)의 却디오H洲프라고 만다면,
이제 零濫던 끈이 풀려
두 가닥의 끈으로 되돌아가려 하고 있다.
하나는 야마무라 사다코,
또 하나는 소설 '링'인 것이다
성인의 날(1월 15일로, 일본에서는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다 : 역자
주)이 낀 연휴 첫날. 미야시타는 전화를 걸어 안도에게 드라이브를
하자고 제의를 했다. 마침 연휴를 어떻게 보낼까 하고 고민하던 안도
는 그 제의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뭔가 감추고 있는 듯한 미야시
타의 태도가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일단 가겠다고 승낙을 하고 나서
물었다.
"어디로 갈 건데?"
"너한테 잠간 확인받고 싶은 게 있어 ."
그렇게만 말했을 뿐 미야시타는 어디로 가는지 가르쳐 주려 하지
않았다. 안도는 뭔가 이유가 있으리라 짐작하고는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본인을 만나 직접 물어 보면 되는 일이었다
아파트 앞까지 온 미 야시타의 차에 올라타자마자 안도는 바로 목
적지를 물었다.
"근데 어디로 가는 거야?"
"좀 이유가 있어서. 잠자코 따라오기나 해."
출발할 단계에 이르렀지만 미야시타는 도무지 가르쳐 주려 하지
않았다. 결국 안도는 목적지도 모르는 채 드라이브를 떠나게 되었다.
제3 게이힝 고속도로를 빠져나간 차는 요코하마 신도로로 들어섰
다. 후지사와 방면으로 갈 모양이었다. 당일치기가 가능한 범위라고
하면 그리 멀리까지 갈 것 같지는 않았다. 오다와라, 하코네, 이즈라
고 해 業자 기껏해야 아타미나 이토 근처까지다 안도는 여기저기 행
선지를 추측해 보면서 미스터리 투어를 즐기기로 했다
도로가 합류하기 바로 직전에 자동차는 발이 묶이고 말았다. 요코
하마신도로의 입구부근은늘 정체되는 장소였다 연휴 첫날이기도
해서 교통량이 왜 많았다. 핸들을 쥐고 있는 미야시타를 지루하게 만
들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 안도는 불과 며칠 전에 궁리해 낸 가설을
미야시타에게 얘기해 보기로 했다. 똑같이 비디오테이프를 보았는데
El, 왜 다카노 마이만 심장 혈관에 이상을 일으키지 않았던 걸까? 영
상을 본 날이 바로 그녀의 배란일이고, 링 바이러스는 심장의 관동맥
에서 난자로 공격 목표를 바됐기 때문이 아닐까?그리고 옥상 배기
구에 굴러 떨어지기 직전, 마이는 미지의 생명체를 출산했다. 불과 일
주일 간 태내에 품었던 한 생명체. 출산 직후임을 생각해 보면 마이
가 속옷을 입지 않았던 것도 설명된다‥‥
대충 듣고 나서도 미야시타는 잠자코 있었다 붙임성 있는 등근 눈
으로 정면을 응시하는가 싶더니 그 표정과는 정반대의 재빠른 동작
으로 차선을 변경해서 추월 차선 대열로 끼여들어 갔다.
"전자 현미경으로다카노마이의 링 바이러스를 들여다보았을 때,
실은 나도 그런 생각을 했었어 ,"
뒤따르던 차의 클랙슨 소리에도 안색 하나 바꾸는 일 없이 미야시
타가 말했다.
"그런 생각?"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그래, 이건 정충과 비슷하다고 말야."
"동감이야."
"네모토도 똑같은 말을 했어 ."
"세 사람 모두 똑같은 생각을 했다는 건가?"
"그래. 직감은 정말 중요해."
미야시타는 조수석에 앉은 안도에게 얼굴을 돌리고는 빙그레 웃Sl
다. 전방에 대한 주의가 소흘해졌다.
"야, 앞이나 제대로 봐."
빨간색 브레이크 램프가 접근해 오자, 안도는 무의식중에 두 8瑞
다 힘을 넣었다.
'◎찮아. 아사카와의 전철은 밟지 않아."
브레이크를 밟으면서 미야시타는 여유를 보였다. 그렇지만 앞 범
퍼가 거의 앞차와 접촉할 정도로 다가서 있었다. 안도는 식은땀을 흘
리며 미야시타에게 거리감이 결여되어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의심했
다. 이런 운전이라면 언젠가 사고를 일으킬지도 모른다.
"아사카와는· .그는 왜 심근경색으로 죽지 않은 걸까?정말 이상
해 ."
"남자한테는 배란일이 없으니까."
"다카노 마이와 마찬가지로 몸에 어떤 변화가 생겼을지도 몰라."
"아마 바이러스가 다른 출구를 발견한 걸 거야."
"출구?"
"그래, 보다 번성하기 위한 출구."
호도가야 우회 도로로 나가는 출구를 벗어나자 정체가 해소되면서
차의 흐름도 다소 순조로워 졌다 미야시타는 도로 표지판을 보고 나
서 '출구'와 같은 단어를 사용했으리라
미아시타는 계속했다.
"있지, 우린 해답을 찾아 내지 않으면 안 돼."
미야시타의 어조에는 지금까지의 태평함이 사라져 있었다.
"물론 그럴 생각이야."
"올해 신년 휴가, 넌 뭐 했냐?"
'그냥 ◎굴◎굴 특별히 하는 일 없이 보냈지 뭐."
"그래? 난 식구들이랑 미나미이즈 어촌에서 지냈어. 우리가 묵었
던 곳은 여행 안내서에도 실리지 알을 만큼 작은 민박집이었어. 왜
그런 시골스런 곳을 택했느냐고?내가 좋아하는 소설 중에 그 어촌
을 무대로 쓰여진 게 있는데 전부터 한번 가보고 싶었거든.소설엔
어촌에서 수평선을 바라보면 신기루를 볼수 있다고쓰여 있었어 난
그 말을 믿었지 ."
안도는 이야기의 방향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 건지 전혀 짐작할수
가 없었다. 그래서 맞장구도 치지 않고 그저 조용히 귀만 기울이고
있었다.
"너한텐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좀 뭣하지만, 아무튼 가족이란 정말
로 좋은 거야. 민박집에선 파도 소리가 들렸어 . 밤중에 문득 깨어나
서 아내와 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까 사무치게 그 소중함을 알겠더
라고."
안도는 그 소중함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신기루를 볼 수 있
다는 미나미이즈의 어촌에서 가족과 함께 보내는 정월‥‥ 혼자서라
면 외로움만 더해 줄 어촌에서의 휴가도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라면
분명 따뜻했으리라. 의식의 화살이, 무참히 깨어져버린 가족 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야시타는그 틈을 허락하지 않고 안도에
게 물었다.
"야, 내 마누라, 미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냐?"
안도는 미야시타의 아내가 아니라 이혼한 아내의 얼굴을 떠올리면
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래."
머릿속에 떠올린 것은 처음 만났을 무렵의 순진했던 표정이었다.
"난 땅딸보에다가 이런 면상이지만 그 사람은 달라. 미인인데다 성
격도 나무랄 데가 없지 . 난 징말 행복한 놈이라고 생각해."
미야시타의 아내는 그보다 키도 크고, 어느 인기 여배우와 쏙 닮은
생김새였다. 그것에 비하면 미 야시타의 외모는 상당히 빠진다고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순조롭게 나가면 의학부 교수의 지위를 손
에 넣을 수 있는 인물이다. 그다지 비하할 필요는 없다고 안도는 쓴
웃음을 지었다.
"그러니까 죽고 싶지 않아 좀 지나치게 낙관적인 건지도 몰라.있
지, 난 줄곧 이번 사건에서는 방관자인 척하기로 마음먹고 있었어.
아니 , 오히려 사건의 추이를 즐기기조차 했지."
안도는 좀더 심각하게 사태를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방관자라는
점에 있어서는 미야시타와 그다지 차이가 없었다. 아사카와와 류지
의 입장과는 근본적으로 달라서 사건을 해결하지 않는다고 해서 직
접 피해를 입는 일은 없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안도는 미야시타에게 동의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문득 깨달았던 거야, 이건 너무 안이한 생각일
지 모른다고."
"언제 ?"
'신년 연휴가 끝나고 미나미이즈에서 돌아온 다음에."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어?"
"신기 루를 못 業어 ."
안도는 얼굴을 찡그렸다. 이야기가 뒤죽박죽이 되어 가는 것 같았
다.
"신기루?"
"너도 소설의 무대를 실제로 찾아간 적이 있냐?"
"응, 있어 ."
좋아하는 소설의 무대를 찾아가고 싶다는 욕구라면 누구나 한번쯤
품어 봤을 것이다
"그래, 어떤 느낌을 받았니?"
"뭐 , 이런게 있어 ‥‥‥
"인상과 다르든?"
"실망한 경 우가 많았지 ."
"다시 말해, 소설을 읽으면서 상상하고 있던 풍경과 현실의 풍경이
많이 다르구나 하는 느낌7"
"딱 일치하는 일은 없을 거야."
"나도 그랬어. 미나미이즈에서 지내면서 '아아, 이게 그 소설의 무
대인가' 하는 실망감을 느꼈지.내가 갖고 있던 이미지와 상당히 어
긋났고, 신기루도 못 봤으니까."
입 밖으로는 내지 않았지만,안도는 미야시타가 말하는 게 너무나
유치한 것 같았다 작가는 자신의 필터를 통해 풍경을 보고 표현한
다. 그 필터가 작가의 독자적인 것인 이상, 독자가 멋대로 상상하는
풍경과 현실의 풍경이 어긋나는 건 당연하지 않은가? 사진, 혹은 비
디오 카메라 촬영 같은 수단에 의존하지 않는 한 제3자에게 정확히
풍경을 전달할 수는 없다. 문장이라고 하는 매체로는 한계가 있는 것
이다
"만일 반대로 말야, 가령‥‥‥
미야시타는 안도 쪽으로 얼굴을 바싹 갖다 댔다
"야, 앞을 보면서도 이야기는 할 수 있잖아."
심각한 얼굴로 안도가 앞을 가리키자 미야시타는 속도를 늦추고
주행 차선 쪽으로 차를 되돌렸다.
" '링' 을 언제 읽었는지 기억해?"
안도는 날짜까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사카와의 형,준이치
로한테 디스켓을 빌린 다음날이었다 노트북이 출력해 내는 것을 답
답해하면서 읽어 나갔던 것이다.
"그래, 날짜까지 확실히 기억하고 있어 . 작년 11월 19일이야."
"난 그 리포트를 대충 한 번 읽기만 했지 ."
안도도 마찬가지였다. 한 번 훌기만 했을 뿐 되풀이해서 읽지는
않았다.
"그게 뭐?"
"그런데도 장면들 하나하나가 선명하게 남아 있어 . 지금도 가끔씩
생각난다구 "
안도 역시 그랬다. '링' 에 묘사된 세계는 영상적 이어서 , 뇌의 주름
에 달라붙은 듯 한 장면 한 장면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떠올려 보
라고 하면 지금이라도 당장 명료하게 그릴 수 있었다. 확실히 영상적
인 문장이었다.
‥‥근데 그게 어쨌다는 건가?
미야시타의 의도를 알아챌 수가 없어 안도는 잠자코 있었다.
"그러니까,가령 '링'이라는 리포트가 풍경을 정확히 전달하고 있
다면 그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난 문득 그런 의문을 갖게 됐어."
말의 중대성에 비해 미 야시타의 옆얼굴은 묘하게도 온화했다
안도는 미야시타가 품은 의문을 음미해 보았다. 가령 '링'을 읽으
면서 떠올릴 수 있는 풍경이 실제 현실의 풍경과 조금도 다름없이 하
나로 겹쳐질 경우,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무엇보다도 그런
일이 가능한 걸까?
"가령 그렇다고 한다면?"
안도의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히터를 켜 놓아 차 안은 적당한
온도로 조절되고 있었지만, 좀 건조한 것 같았다.
"어쨌든, 일단 확인해 보려고."
"그랬구나 그것 때문에 날 데리고 나온 거야?"
안도는 그제서야 이번 드라이브의 목적지를 알 수 있었다. '링'의
주요 무대인 미나미하코네에서 아타미에 걸친 일대였다. 현실의 풍
경을 눈으로 보고 확인하자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 사람보다
는 두 사람 쪽이 바람직한다. 안도와 미 야시타의 눈으로 직접 확인한
다음 서로 정보를 교환해서 정확한 판단을 내린다
"사실은 현지에 도착할 때까지 잠자코 있으려고 했어 . 이상한 선입
견을 가지면 곤란하니까 말야."
"괜찮아 "
"깜빡했는데, 넌 미나미하코네 퍼시픽랜드가 처음이지?"
미야시타가 물었다. 미나미하코네 퍼시픽랜드. 마(鹿)의 비디오테
이프가 탄생된 레저 타운의 이름이다
"물론 그런데 넌?"
"이름조차 몰랐어 그걸 읽을 때까진."
두 사람 모두 한 번도 간 적이 없는 장소였다. 그러나 눈을 감자마
자 안도의 뇌리에는 완만한 경사면에 지어진 대여 별장 빌라 로그캐
빈의 건물 하나하나가 또렷이 떠올랐다. 그 가운데 한 동, B-4호에서
이 경탄할 만한 사건이 막을 올린 것이다. 별장 바닥 아래에서 입을
벌리고 있는, 지하 5미터쯤 되는 옛 우물. 25년 전 강간당한 뒤 우물
에 내던져진 야마무라 사다코라는 여성의 원한이 천연두 바이러스의
증식 소망과 한데 뒤섞여 버린 지하의 움막이다. 미야시타는 지금부
터 그 장소를 찾아가겠다는 것이다
구름 긴 하코네 산을 오른쪽으로 보면서 미야시타가 운전하는 차
는 마나즈루를 거쳐 아타미로 향했다. '링'에는 아타미에서 네츠칸
도로로 들어가자마자 미나미하코네 퍼시픽랜드로 가는 길 안내판이
나온다고 쓰여 있었다. 안도와 미야시타는 거기에 적힌 대로 따라가
보기로 했다.
네츠칸 도로를 지나는 것은 안도도, 미 야시타도 생전 처음이었다
그런데도 안도는 예전에 한 번 이곳을 지나간 것 같은 느낌을 받았
다. 아사카와 가즈유키가 이 길을 자동차로 지나간 것은 작년 10월
11일 밤의 일이었다. 그는 미나미하코네 퍼시픽랜드의 빌라 로그캐
빈 B-4호에서 기다리고 있는 어떤 것'을 알지 못한채 그러나왠지
가슴이 떨리는 것을 느끼면서,지금 두사람이 더듬어 가고 있는 이
길을 따라 올라갔다.
지금 시각은 정오에 가까웠고 날씨는 아주 맑았다. 작년 10월 11
일은 비가 내렸다 그쳤다 하는 날씨였던 모양으로, 아사카와가 운전
하는 차의 앞유리에는 와이퍼가 작동되고 있었다. 안도가 기억하건
대, '링'에는분명 그런 내용이 있었다. 아사카와는불안한표정으로
와이퍼가 스치는 앞유리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시간도, 날씨도 달랐
지만 안도의 뇌리에 어둡고 잔뜩 찌푸린 날씨가 플래시 백처럼 번뜩
이기 시작했다. 산 경사면에 접어들자 미나미하코네 퍼시픽랜드의
안내판이 눈에 띄었다 횐색 판넬에 검은색 페인트로 쓰여 있는독특
한 글씨도 본 기억이 난다. 미야시타 역시 마치 아는 길을 달리는 것
처럼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좁은 비탈길의 왼쪽으로 꺾어들었다.
계단식 밭 사이를 구불거리던 길이 다시 좁아지면서 오르막길로
변했다. 그리고 오르막길은 더욱더 험해졌다. 리조트 클럽에 이르는
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정비 불량인 나쁜 길이다. 제멋대
로 자란 나뭇가지와 마른 풀이 길 양쪽에서 차 바닥을 어루만지면서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냈다. 올라가면 갈수록 안도의 기시감(旣視
感, 현재 보고 있는 것이 과거 어느 때에 본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 역자 주)은 점점 더 강해졌다. 처음지나는 길인데도 예전에 한
번 지나가 본 적이 있는 듯한 느낌이 강하게 전해졌다
"언젠가 와본 적이 있는 것 같지 않냐?"
안도는 목소리를 낮추고 미야시타에게 물었다.
"나도 너한테 같은 걸 물으려고 했어."
미야시타도 같은 느낌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기시감의 경험은 몇
번 있었지만 이 정도로 감각이 오랫동안 정확하게 지속된 적은 없었
다. 게다가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더 강해졌다. 안도는 길을 다 오르
면 보이게 될 안내 센터의 외관을 확실히 떠올릴 수 있었다. 전면이
검은색 유리로 뒤덮인 3층짜리 멋진 빌딩이다.
주차장인 로터리로 나오자 정면에 안도가 상상했던 빌딩이 모습
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안내 센터였다 로비 안쪽에 있는 레스토랑
까지 안도는 떠올릴 수 있었다. 더 이상 확인할 필요가 없는 것 같았
다. 안도와 미야시타는 '링'을 읽음으로써 이 장소의 정화한 풍경을
머릭속에 담게 된 것이다. 그렇게 밖에는 달리 생각할 수가 없었다
산에서 내려와 아타미를 빠져나온 미 야시타의 자동차는 해안에
접해 있는 마나즈루 도로를 따라 모다와라 방면으로 달리고 있었다.
지금 막 보았던 광경, 막 만났던 사람들의 얼굴을 머릿속으로 반추
하고 있어서인지 두 사람의 대화는 자주 끊어졌다 깨끗하고 맑은
겨을 바다를 바라볼 여유도 없이 안도는 오늘의 드라이브가 가져온
사실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다 방금 전에 찾아갔던 미나미하코네 퍼
시픽랜드 빌라 로그캐빈이나, 바닥 밑에서 입을 벌리고 있는 옛 우
물의 광경이 흙냄새를 동반해 신기루처럼 바다 위로 떠올랐다가사
라졌다. 그리고 언젠가 본 기억이 있는 사내의 얼굴이 자꾸만 떠오
르는 것이었다.
미나미하코네 퍼시픽랜드의 시설들은 안내 센터에서 호텔로 이르
는 길 양쪽에 흩어져 있었다. 테니스 코트,수영장, 체육관,개인 별
장등등 대부분 산쪽이나, 계곡이나,경사면에 서 있었다. 그 중에
서 빌라 로그캐빈이 서 있는 경사면은 완만한 편이었다. 도로 쪽에서
캐빈이 늘어서 있는 계곡 쪽을 내려다보면 멀리 아래로 간나미에서
니라야마에 이르는 지역의 무수한 온실들이 보였다 온실의 하얀지
붕이 겨을 오후의 햇살을 반짝반짝 반사해 내고 있었다. 무엇이든 안
도와 미야시타에게는 예전에 본 적이 있는 풍경이었다
두 사람은 B-4호로 내려갔다 문의 손잡이를 돌렸지만 자물쇠가
채워져 있어 열리지 않았다. 발코니 밑으로 돌아 들어 가기로 했다.
허리를 굽히고 들여다보기만 해도 기등과 기등 사이의 벽 판자가 벗
겨지고 커다란 구멍이 器려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고의로 잡아뜯은
것 같았다 누가 이렇게 해 놓았는지는 분명했다.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다카야마 류지가 器어 놓은 것이다. 작년 10월 18일, 류지와
아사카와는 이 구멍을 통해 발코니 밑으로 기어들어 가 로프를 타고
우물 속으로 내려가 야마무라 사다코의 유골을 건져올렸다.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아슬아슬한 일을 해치운 것이다
미야시타는 준비한 플래시를 차에서 꺼내와 틈 사이에 집어넣고는
바닥 아래를 비추었다 거의 중앙에 위치한 검은 돌출 부분이 곧바
로 눈에 띄었다. 옛 우물의 윗부분이다. 그 옆에는 콘크리트로 만든
뚜껑이 나◎굴고 있었다 '링' 에 써 있는 그대로다.
안도는 밑으로 기어들어가 우물 안을 들여다볼 마음이 들지 않았
다. 그것은 마치 다카노 마이의 사체가 발견된 옥상의 배기구를 들여
다볼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저 가까이 다가갈
뿐, '도저히' 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어쨌든 밑바닥을 볼 용기가 나
지 않았다 야마무라 사다코라고 하는 여성은 우물에 내던져져 , 등근
테가 둘러쳐진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짧은 생을 마쳤다. 한편, 다카노
마이는 직사각형으로 테두리가 둘러쳐진 콘크리트 상자 바닥에서 숨
을 거두었다 산간 결핵 요양소 변두리에 있는 옛 우물과,해안가에
있는 빌딩의 옥상. 한쪽은 아주 조용한 삼림에 자리했던 우물이라 사
방에서 떨어나온 나뭇가지가 하늘을 가리고 있었고, 한쪽은 바다 냄
새가 떠도는 해안가에 있어 하늘을 가리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한쪽은 땅 속 깊이 가라앉은 원통형 관이고, 한쪽은 하늘에 뜬 직육
면체의 관이다. 야마무라 사다코와 다카노 마이가 숨을 거둔 장소는
이렇듯 기묘하게 대비되었고, 그 선명한 대비가 오히려 양자간의 유
사성을 강하게 부각시켰다.
안도의 심장 고동이 갑자기 빨라지기 시작했다 바닥 밑의 습기 찬
공기와, 손과 무릎에 닿는 지면의 감촉이 견딜 수 없이 싫었다. 흙냄
새가 코를 찔러와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 있었다. 질식할 것 같
았다.
그렇지만 미야시타는 돌아가려는 안도를 옆에 두고, 살찐 몸을 더
욱 집어넣으려 하고 있었다. 우물이 있는 데까지 나아갈 생각인가?
안도는 기가 막혀 강한 어조로 그를 막았다.
"그만둬 , 이제 됐어 ."
미야시타는 무리한 자세 그대로 움직임을 멈추고 잠시 주저했지
"그도 그렇군."
순순히 안도의 충고에 따라 후퇴하기 시작했다. 분명히 이제는 충
분하다. 이 이상 무엇을 더 확인할 필요가 있겠는가?
두 사람은 발코니 아래로 기어나와 바깥 공기를 실컷 들이마셨다.
서로 말을 나눌 필요가 없었다. '링' 에 쓰인 내용은 자세한 것 하나
까지 모두 사실임이 분명해졌다. 그리고 문장에 의해 상상된 풍경이
현실의 풍경과 똑같이 겹쳐지는 게 아닐까 하는 가설도 이것으로 증
명되었다 있어야 할 것이 모두 있어야 할 장소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겅'을 읽는 것에 의해 안도와 미야시타는 이 부근 일대의 풍
경을이미 한번 '본' 것이다. 습기 찬마루밑의 냄새에서 발끝의 감
촉에 이르기까지 , 아사카와 가즈유키가 경험한 것과 똑같은 감각을
다시 체험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도 미야시타는 아직 만족하지 못한 듯 안도를 유혹했다.
"모처럼 여기까지 왔으니까 나가오 조타로의 얼굴도 보고 가야
at ."
‥‥나가오 조타로.
안도는 그의 이름을 잊어 가고 있었다. 그에 대한 것은 '링' 에서만
읽었을 뿐,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그의 얼굴을 또렷이 떠올릴 수
가 있었다. 벗겨진 머리, 쉰일곱 살이라고 하는 나이치고는 윤기가
도는 반듯한 얼굴. 외모에서 주는 번질대는 인상과 비슷하게 말투도
그랬다. 어찌된 일인지 그의 말버릇까지 알고 있는 것이다.
20년 전까지 현재의 미나미하코네 퍼시픽랜드가 있는 장소에는 결
핵 요양소가 있었다. 아타미에서 개업하고 있는 나가오는 예전에 그
곳 의사로 근무하던중, 부친의 병문안을 온 야마무라 사다코를 강간
하고 우물에 던져넣었다. 그는 또한 일본에서의 마지막 천연두 환
라고 한다
"기노미야 역 앞 골목길로 막 들어서자 작은 단층집이 보였고,
관 입구에는 '나가오 의원, 내과, 소아과' 라는 간판이 있었다 "
'링'에는 그렇게 기록되어 있었다. 류지는 그곳에서 나가오 조』
로를 밀어붙여 그의 입을 통해 25년 전에 저질렀던 죄를 자백받았다
미011타는 같은 장소를 방문해 나가오 조타로의 얼굴을 보자는 3
이었다
하지만막상찾아가보니 병원 현관에는 커튼이 쳐져 있었다 휴일
이라서 휴진한다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장기간 문을 열지 않은 듯,
아래 틈에는 모래 먼지가 쌓여 있었고 창문 여기저기에는 거미줄이
쳐져 있었다 장기간에 걸친 휴업, 혹은 폐업이라는 분위기가 현관
부근만 아니라 건물 전체에 짙게 감돌고 있었다.
안도와 미야시타는 여기서 나가오 의사를 만나는 건 무리라고 생
각하고 길에 주차시켜 둔 자동차로 돌아가려 했다. 마침 그때,아타
미 국립 병원에서부터 좁은 비탈길을 내려오는 휠체어가 눈에 띄었
다 횐체어에는 머리가 벗겨진 노인이 동그마니 앉아 있었고, 밀고
있는 것은 30세 전후로 보이는 품위 있는 여성이었다. 초점이 맞지
않은 채 멍하니 뜨고 있는 노인의 두 눈은 무기력함으로 뒤덮여 있었
다. 첫눈에도 그가 정신 장애에 빠져 있음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안도와 미야시타는 노인의 얼굴을 보고 동시에 소리를 지르며 얼
굴을마주 보았다. 굉장히 많이 告긴 했지만,두사람은 순간적으로
그가 나가오 조타로임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근 』개월 사이에 나가오
는 갑자기 告어 버려 스무 살이나 나이를 더 먹어 버린 것처럼 보였
다 안도와미야시타는 者기 전 그의 얼굴을 확실히 기억해 낼 수가
있었고 현재의 모습에 예전의 모습을 겹쳐 볼 수도 있었던 것이다
"나가오 선생님 ."
미야시타는 노인 쪽으로 다가가면서 소리쳐 보았다. 노인은 아무
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지만 나가오의 딸인 듯한, 같이 있는 여자가
발길을 멈추고 소리나는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미야시타와 여자의
눈이 마주쳤을 때 미야시타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여자도 가볍
게 끄덕여 보였다.
"몸은 어떠십니까?"
"예 , 덕분에요."
미야시타는 이전부터 아는 사람인 것처럼 가장해 나가오의 용태를
물었다. 여자는 대강 인사치레만 하고 귀찮은 듯 총총히 사라졌다.
하지만 수확은 충분했다. 작년 10월, 아사카와와 류지의 방문을 받아
25년 전의 죄를 자백당한 쇼크가 방아치가 되어 나가오는 정신 이상
이 되었음에 틀림없다. 지금의 나가오에게는 바깥 세계를 지각할 힘
이 거의 없었다.
나가오와 딸은 병원 옆을 빠져나가 계속해서 안쪽 골목길로 들어
갔다. 안도와 미야시타는 나가오의 됫모습을지켜보면서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것은 나가오 혼자만의 일이 아니다. 횔체어에 탄
노인을 한번 본 순간 나가오임을 확인할 수 있었던 놀라움을 새삼 음
미하고 있었던 것이다.
'링'은 풍경뿐만 아니라 인간의 얼굴까지도 정확히 '기록'하고 있
었었다.
'오다와라 아츠키 도로 입구' 라는 표지판을 보고 안도는 미야시타
의 옆얼굴을 살짝 엿보았다.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 아침 일찍부터
핸들을 잡고 있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오다와라에서 내려 줘."
안도는 그렇게 말했다. 미야시타는 눈썹을 모으고 '왜?' 라는 식으
로 얼굴을 약간 옆으로 돌려 쳐다보았다.
"사양 안 해도 돼. 네 아파트까지 데려다 줄게,"
"그럼 멀리 돌아가게 돼. 오다와라에서 내리면 오다큐선 한 번만
타면 돼."
안도의 제안은 미야시타를 배려한 것이었다. 쓰루미에 사는 미야
시타에게 요요기까지 바래다 달라는 건 몇십 킬로나 필요 이상으로
달리게 하는 것이 된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피로의 기색이
짙은 미야시타를 생각할 때, 빨리 돌아가서 쉬게 하고 싶었다
"음, 그렇게 말한다면 오다와라에서 내려 줄까?"
내심 도심부를 왕복하는 수고가 덜어져 안심하고 있을 테지만 미
야시타는 그런 건 전혀 내색하지 않고, 너의 버릇없음을 봐주겠다는
태도를취했다 늘그랬다. 미야시타는 웬만한 일로는 '고맙다'는 인
사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마음속으론 고맙다고 생각해도 그걸 솔직
히 표현하는 데는 서툰 것이다.
오다와라의 시가지를 빠져나가 역 가까운 곳에서 미야시타는 툭
하고 한마디 중얼거렸다.
"연휴가 끝나면, 우리도 혈액 검사를 받는 게 좋을지 몰라 "
의미를 물어 볼 필요도 없었다. 안도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방관자였던 자가 당사자의 입장으로 내몰
리고 만 것이다. 마(魔)의 비디오테이프는 모두 이 세상에서 모습을
감추었고 자신들은 그 영상을 보지 않았으니 재앙에 횝쓸리는 일도
없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링' 이라고 이름붙은 리포트는 풍경과 인
물을 정확하고도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에이즈 환자를 진찰하
는 의사의 입장에 비유하자면 접촉한 바 없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
지 판명되지 않은 경로로 에이즈 바이러스가 침입해 온 것이나 마찬
가지다. 아직 확실히 증명된 것이 아니고, 약간의 의심이 떠오른 것
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안도는 몸 안쪽으로 들어온 이물질의 기척
에 겁먹고 있었다. 조금 전부터 줄곧 전자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링
바이러스와 같은 이물질이 피부 안쪽, 혈관 내부를 흘러 세포를 침범
하면서 몸 속을 돌아다니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
었다. 미 야시타도 같은 기분임에 틀림없었다.
안도는 저자인 아사카와 가즈유키를 제외하면 최초로 '링' 을 읽은
사람이다. 그리고 '링' 에는 비디오테이프의 영상이 아주 자세하게 묘
사되어 있다 묘사는 너무나 정확해서 한번 보기만해도나가오조타
로라고 하는 인물을 판별해 낼 수 있을 정도다. '링' 을 읽는 것을 통
해서도 비디오테이프를 보는 것과 똑같은 효과가 나타나는 게 아닐
까 하는 의문이 당연히 솟는다.
그렇지만 '링'을 읽은 것은 작년 11월 19일.이미 두 달이나지났
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비디오테이
프를 본 사람은 정화히 일주일 후면 관동맥 폐색을 일으켜 사망한다.
돌연변이에 의해 잠복 기간이 길어진 것일까? 아니면 바이러스 보균
자가 되기만 했을 뿐 발병하지 않았을 따름인가?
미야시타가 말하는 대로 연휴가 끝나고, 대학에 돌아가면 당장이
라도 혈액 검사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만일 체내에서
링 바이러스가 발견되면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어
떤 방법이 있다는 거지?
"가령 양성이라고 하면 어떻게 할 거냐?"
안도는 절망적인 기분으로 물었다.
"어쨌든, 팔짱만 끼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 뭔가 방법을 찾아야
fl ."
미야시타는 단호히 잘라 말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기분은 안도
보다도 훨씬 더 강할 것이다. 미야시타에겐 아내와 어린 딸이 있다.
그런 생각을 말의 여기저기에서 느낄 수 있었다
자동차는 오다와라 역 로터리로 들어가 한 바퀴 돈 다음 멈춰 섰
다. 조수석에서 내린 안도는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를 하고는, 달려
가는 미 야시타의 자동차를 줄곧 지켜보았다.
피말려 버린 건지도 몰라.
안도는 비로소 아사카와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문득 자신과
미야시타의 모습을 아사카와와 류지의 모습에 겹쳐 보았다. 두 사람
의 육체적인 특징과 성격을 떠올리자 정말이지 서로 닳은 사람들 같
아서 그만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이 경우 안도에 대응되는 것은 아
사카와이고, 미야시타에 대응되는 것은 류지다 그리고 두 사람 모
두‥‥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안도의 어중간했던 웃음이 갑자기 굳어
졌다. 두 사람 모두 죽은 것이다 게다가 류지는 이 손으로 해부했다.
오다와라 역 개찰구를지나플랫폼의 벤치에 앉았다. 안도는 등받
이의 오싹한 감촉을 등에 받자,해부대 위에 길게 누웠을 때에도 이
런 식으로 느끼게 될까, 하고 죽은 사람 같은 심정으로 생각했다 의
심에 빠지기 시작하면 보다 많은 괴로움이 생긴다 예를 들어 암이
아닐까 하고 의심하는 상태가, 분명하게 암이라고 선고받는 것보다
훨씬 괴로운 법이다. 인간은 현실로 직면하게 된 재앙은 어느 정도
아무렇지 않게 참아 낼 수 있지만, 어정정한 상태는 참아내지 못한
다는 기묘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미 링 바이러스에 감염된 게 아
닐까? 안도가 괴로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단 하나, 자신이 더 이상 살
아야 할 가치가 없다고 납득시키는 것이다. 자신의 실수로 어린 아들
을 죽게 했다는 회한 속에 빠져 버리면 그만큼 생명에 대한 집착도
가벼워질 것이다.
그렇다곤 해도 추운 역에 앉아 전철을 기다리는 동안, 안도의 떨림
은 조금도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전철에 앉아서도 안도는 창 밖 풍경을 바라보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일이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책을 보았을 테지만, 아무 준비도 없이
갑작스레 미 야시타의 차를 타고 떠났었기 때문에 읽을 만한 책이 없
었다. 그는 교외 풍경을 바라보는 사이에 스르르 몰려오는 졸음에 저
항하지 않고 그대로 눈을 감기로 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안도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수 없게 되
어 버렸다 잠이 든 채 멀리까지 옮겨진 것 같은 불안감으로 가슴의
고동이 빨라졌다. 심장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발을 쭉 뻗으려
다 상반신이 시트 등판에 부딪히자 몸이 움찔했다. 전철 특유의 진동
이 밑에서부터 밀려 올라오고, 멀리서 차단기 소리가 다가왔다
‥‥전철 안인가?
안심이 되면서, 안도는 바로 두 시간 전쯤 오다와라에서 미야시타
와 헤어져 운 좋게 급행 전철에 탈 수 있었던 것을 기억해 냈다. 벌써
며칠 전의 일처럼 느껴졌다. 미야시타와 함께 미나미하코네 퍼시픽
랜드를 찾아간 것이 훨씬 옛날 일처럼 생각되는 것이었다. 장소 역시
아주 먼 느낌이 들었지만 고원의 풍경과 나가오 조타로의 얼굴만은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었다.
안도는 두 손을 비비고 나서, 창 밖으로 눈을 돌렸다. 밤거리의 집
들이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종점인 신주쿠에 가까워져 전철이 속도
를늦추고 있었다. '땡땡' 건널목경보기가울리고빨간 램프가반짝
였다. 안도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스쳐 가는 역 이름을 읽
었다
·_SA기하치만
그의 집이 있는 산구바시 바로 전 정거장이었다 산구바시에서 내
리면 편할 테지만 이 열차는신주쿠까지 논스톱으로 달린다. 종점에
서 일단 내렸다가 두 정거장을 되돌아와야 하는 게 귀찮았다.
요요기하치만에서부터 선로는 거의 직각으로 구부러져 요요기 공
원의 어두운 녹음과 나란히 달리기 시작했다. 익숙한 거리였다. 안도
의 자리에서는 무리지만 오른쪽에서는 그의 아파트가 보일 것이다.
매일 타고 내리던 역을 통과할 때 , 안도는 왼쪽 유리창에 뺨을 대고
정 거 장을 바라보았다.
정 거 장을 바라보았다.
안도는 퉁겨오르듯 몸의 방향을 바꾸어 다시 얼굴을 가까이 대려
다가 유리에 뺨을 부딪혔다. 플랫폼에 서 있는 여자를 보았던 것이
다. 여자는 겨울밤인데도 윗옷만 걸친 가벼운 차림이었다 전철에 스
칠 듯한 자리에서 새침한 얼굴로 서서 열차 쪽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
었다 정거장 통과를 위해 속도를 떨어뜨렸다고는 해도 차 안에서 보
면, 플랫폼에 서 있는 사람 따윈 눈 깜짝할 사이에 시야 밖으로 흘러
간다. 하지만 그 순간, 안도는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착각이 아니라
눈과 눈이 마주쳤을 때의 반응을 확실히 느꼈던 것이다.
이 여자와 마주치는 것은 이것으로 세 번째다. 첫 번째는 마이의
방에서 나와 엘리베이터에 같이 탔다. 두 번째는 마이의 사체가 발견
된 빌딩 맨 꼭대기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림과 동시에 우연히 마
주쳤다 모습을 본 것은 단 두 번뿐. 그래도 안도는 여자의 얼굴을 기
억하고 있었다.
10분 후, 신주쿠에서 Y턴해 산구바시에 내려섰을 때 플랫폼과 플
랫폼 사이에는 상하행선 전철이 동시에 들어와 시야를 가리고 있었
다. 안도는 개찰구로 향하는 승객의 흐름에 맞서 플랫폼 중앙에 멈춰
서서 , 전철이 움직이기를 기다렸다. 반대쪽 플랫폼에 여자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안도에게는 10분이 지난지금도 여자
가 같은 장소에 계속 서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견딜 수가 없었
다 아마도 다시 한번 만나고 싶다는 소망이 그런 기분을 만들어 낸
것이리라.
벨이 울리고 상하행선이 동시에 발차하자,마치 문이 열리는 것처
럼 상행선 플랫폼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전철이 지나간 후의 여운이
감도는 가운데, 안도는 여자의 눈동자와 다시 마주쳤다. 예감이 적중
한 것이다. 여자는 아까와 같은 장소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한
시선을 던져왔다. 그 시선을 받고 안도는 끄덕였다. 여자의 지시에
알았다는 표시를 한 것이다
안도는 천천히 개찰구로 향했다. 여자는 안도의 움직임에 맞추는
것처럼 계단을 내려갔다. 두 사람은 개찰구 앞쪽에서 만났다.
"또 만나뵙네요."
여자는 우연인 것처럼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안도는 우연한 만남
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전철을 타고 산구바시 역을 통과하리라
는 걸 미리 알고 기다리고 있었다·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
지만 눈앞에 서 있는 여자의 매력에 애써 저항하는 것은 헛된 일이었
다 두 사람은 함께 개찰구를 지나 상가 골목으로 들어갔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안도는 곁에서 자고 있던 여자가 부탁하는
바람에, 지난주에 막 개봉된 영화를 보러 나왔다. 휴일이기는 해도
아침 첫회라서 그런지 영화관은 그리 붐비지 않았다
여자는 좌석 하나를 비워 놓고 안도와 떨어져 앉았다. 영화관에 들
어올 때까지는 팔짱을 끼고 매달리듯 걸어왔으면서도 막상 영화관
안으로 들어오자 갑자기 서먹하게 자리 하나를 비우고 앉는 것이었
다. 사실 자리를 비우지 않아도, 공간은 충분했다. 또 의자도 편안해
서 결코 비좁지 않았다. 안도는 도무지 여자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부자연스런 행동을 하나하나 꼬집고 들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안도가 알고 있는 것은 그녀가 다카노 마이의 언
니로, 이름은 마사코라고 한다는 것 정도였다
영화를 보고 있어도 스토리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졸린 탓도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옆에 앉은 마사코의 존재가 마음에 걸렸기 때
문이다 어젯밤, 산구바시 역에서 만나 어떤 경위로 방에 데리고 들
어간 것인지 안도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역 앞의 술집으로 이끈 것
은 안도 쪽이었다. 그곳에서 맥주를 마시면서 안도는 그녀의 이름을
들었다.
‥‥다카노 마사코, 마이의 언니예요.
안도가 추측한 대로 마이보다 두 살 위인 언니는 도쿄의 여대를 나
와 증권 회사에 취직했다고 한다. 그런데 거기서부터가 불확실했다
만취할 정도로 마신 것도 아닌데 기억이 단편적으로만 남아 있었다
어느 쪽에서 유혹한 것인지,여하튼 마사코는 안도의 방에 들어오게
되었다.
다음 장면에서 들리는 것은 물소리였다. 조각난 기억 속에서도 그
정경이 선명히 떠오른다. 마사코는 샤워를 하고, 안도는 침대에 앉아
그녀가 나오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물소리가 그치자 마사코는 복도 안쪽에 모습을 감춘 그대로 아무
양해도 없이 방의 불을 꺼버렸다. 불이 꺼지고 칠흑같이 어두워진
순간이 강하게 인상에 남았다. 곧바로 마사코는 알몸의 상반신을 밀
착시켜 왔다. 타월로 묶은 젖은 머리를 왼손으로 떠받치면서 마사코
는 오른손으로 안도의 얼굴을 부등켜 안았다. 고운 피부에 코와 입이
막혀 질식할 것 같자 뒤로 약간 밀어내고 겨우 숨을 들이마셨다. 청
초한 살냄새를 맡은 안도는 마사코의 등에 두 손을 둘렀다‥‥
영화는 뒷전으로 하고 안도는 어젯밤, 마사코와 벌인 일의 단편적
인 장면들을 기억해 내고 있었다. 여자와 살을 섞은 것은 1년 반 만의
일이었다. 기억하는 한 안도는 세 번 사정했다. 그렇다고 해서 정력
이 강하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제 곧 서른다섯
이 되는 사내가 하룻밤에 세 번이나 가능했다는 것은 본인의 체력이
라기보다는상대에게 매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어젯밤 침대에서의 행위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이루어졌다. 아무
리 마사코가 아름답고 행위가 도발적 이었다고 해도 안도는 그 육체
를 눈으로 즐길 수는 없었다. 불을 끄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마사코는
머리맡의 탁상 시계까지 타월로 덮어 캄캄한 어둠으로 방을 꾸몄다.
시계 문자판 안쪽에서 새어나오는 희미한 빛조차 그녀는 허락하지
않았다. 행위 하나하나에 암흑에 대한 집요한 집착이 느껴졌다.
안도는 스크린을 보는 척하면서 아까부터 줄곧 옆자리만 바라보고
있었다. 암흑 속에서 마사코의 아름다움은 보다 돋보였다 어둠이 어
울린다‥‥ 그래, 이 여자에겐 실로 암흑이 어울린다.
영화를 보면서 마사코는 종종 눈을 감았다 그러나 자는 것은 아
니었다. 그 증거로 입술을 우물우물 움직이고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길
이 없어 안도는 왼쪽 팔꿈치에 체중을 실어 왼쪽으로 상반신을 기울여
스크린과 비교해 보는 것으로 겨우 알 수 있었다. 마사코는 영화에
나오는 등장 인물의 대사를 입 속에서 작게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스크린에는 유명한 악동이었던 소녀가 국가 조직의 손에 의해 살
인 기계로 훈련받아 최초의 임무를 향해 떠나는 장면이 비춰지고 있
었다. 검은 드레스로 몸을 감싼 여주인공이 핸드백에 대형 권총을 숨
기고 고급 레스토랑에 들어간다고 하는 긴장감 넘치는 장면으로, 짧
은 대사가 적당한 템포로 반복되고 있었다.
안도는 영화 따윈 제쳐두고 주인공의 대사를 반복하는 마사코를
관찰하고 있었다 순간,마사코의 목소리와 영화 주인공의 목소리가
하나로 겹쳐졌다 영화의 대사는 불어였는데,거의 동시에 마사코는
일본어로 맞춰 내고 있었다. 멋진 유니즌(unison,제창, 한 선율을 함
께 부르는 것 ' 역자 주)이었다. 때로는 자막보다도 빨리 마사코의 입
이 열리는 경우가 있어 안도는 깜짝 놀랐다. 이미 몇 번이고 봤기 때
문에 외우고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마사코는 황홀하고 행복해 보이는 표정으로 영화의 주인공이 되어
있었는데, 자신의 옆얼굴에 쏟아지고 있는 안도의 시선을 알아챈 듯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이후 마사코는 두 번 다시 입을 열지 않고
잠자코 스크린만 바라볼 뿐이 었다.
영화관에서 나오자 마사코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하품을 참으면서
안도의 팔을 잡았다. 겨을 휴일의 햇살은 온화해서 안도는 팔짱을 끼
는 것보다도 마사코의 피부에 직접 닿아 보고 싶어져 일단 팔짱을 풀
고 손을 잡았다. 순간, 싸늘한 감촉을 느꼈지만 손과 손의 체온은 금
방비슷해져 안도의 긴 손가락 안에 여자의 손이 부드럽게 녹아들어
왔다.
성인의 날이라서 후리소데(젊은 여성들이 입는 화려한 긴 소매의
기모노 · 역자 주) 차림의 젊은 여성들이 많았다 안도와 마사코는 유
라쿠초에서 긴자 방면으로 인파를 따라 걸었다. 어딘가에서 점심을
먹을 생각이긴 했지만 특별한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그저 어슬
렁어슬렁 걷다가 적당한 레스토랑을 찾을 생각이었다.
마사코는 좌우로 얼굴을 돌리며, 긴자의 길모퉁이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두리번거리다가 가끔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대화다운 대화
는 없었지만, 어색함을 느끼는 일도 없어서 안도는 묘하게 만족스런
기분으로 맑은 휴일의 긴자 산책을 즐겼다
마사코는 모퉁이의 햄버거 가게 앞에서 발길을 멈추고 입간판에
붙은 포스터를 진지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햄버거 포스터를 꼼짝 않
고 응시하는 표정에는 10대의 천진난만함이 엿보였다.
"여기서 먹고 싶어?"
"응 ."
안도가 묻자 마사코는 강하게 끄덕였다. 싸게 먹히니 좋겠군. 안도
는 햄버거 가게로 들어갔다.
마사코의 식욕은 경탄스러웠다. 눈깜짝할사이에 햄버거 두개와
감자 튀김을 모조리 먹어 치우고서도, 더 먹고 싶다는 듯한 시선을
다시 카운터 위에 쏟아붓고 있었다.
마사코는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다고 했다. 안도는 추가 주문을 해
서 아이스크림을 그녀에게 건네 주었다. 그러자 이번엔 다 먹기가 아
깝다는 손놀림으로 천천히 먹어 치워 갔다. 꼼꼼히 입으로 가져가긴
했지만 막 녹기 시작한 아이스크림이 무릎 위에 떨어지고 말았다. 스
타킹 위로 딸기 덩어리가 섞인 유백색 방울이 굴렀다. 마사코는 둘째
손가락으로 떠올려 핥고 있다가 아까웠던지 , 정강이를 양손으로 감
싸안듯이 올려 무릎에 직접 입을 대고 혀끝으로 날름 핥았다. 그 자
세 그대로 눈을 치켜 뜨고 안도의 안색을 살피며 의미 있는 시선을
던졌다 도발하는 듯한 눈이었지만 안도는 마사코의 눈에서 시선을
떼려 하지 않았다. 다 한고 무릎을 제자리로 돌려놓자, 산 지 얼마 안
된 스타킹에 줄이 가 있었다. 송곳니에 걸리고 말았음에 틀림없다.
오늘 아침 아파트에서 나오면서 역 앞의 편의점에 들러 안도가사
준 스타킹 이었다. 마사코는 스타킹이 없는 듯 한겨울인데도 맨발을
드러내고 있었다. 보고 있는 쪽에서 추워져 본인의 의향도 묻지 않고
사 준 것이었는데, 마사코는 건네자마자 바로 화장실로 달려가 신더
니 자꾸만 무릎께에 손가락을 대고 있었다.
안도는 마사코의 동작 하나하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
다.
·.치금 난 어디서 나타났는지도 모르는 이 여자에게 빠져 버린 걸
까?
안도는 그렇게 자문해 보았다 빠져 있다기보다 자포자기가 되어
있는지도 몰랐다. '링' 이라는 기묘한 스토리를 읽는 것에 의해 링 바
이러스 보균자가 되어 서서히 몸이 침식당해 가고 있는 것이라면,
이제 막손에 넣은 쾌락의 씨앗을 그렇게 빨리 놓을 까닭이 없는 것
이다.
학창 시절에 산간 마◎을 무대로 한 소설을 읽은 적이 있었다. 이
야기 중에는 안도가 지금 마주하고 있는 이 여자와 똑같은 타입의 여
자가 나온다 보통 사람보다 뛰어난 미모를 가졌지만 보통 사람과 다
른 특이한 언행 탓에 마을 사람들로부터 '머리가 돌았다' 는 꼬리표를
달게 된다. 그리고 정해진 상대 없이 사내들의 노리개가 된다. 살 집
도 없이, 남자 같은 차림새로 숲 속을 방황하다가 이 사람 저 사랄 구
별 없이 마을 사내들을 받아들인다 그런데 그 모습은 마을에서 떨어
진 산간이라는 상황 설정도 한몫 거들어 그윽한 에로티시즘을 자아
냈다 산간 마을이 아니고는 있을 수 없는 인물과 풍경의 멋진 조화
가 그 소설 속에는 있었다. 만약 현대 대도시에 그런 여자를 등장시
켰다면 금세 분위기가 깨져 버렸을 것이다‥‥ 책을 읽었을 때 안도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이곳은 도쿄의 한복판 긴자 거리다. 산간 마을이 아니다. 소설의
주인공과 마사코는 많이 닳아 있었다. 그렇지만 현대적인 미인인 마
사코는 햄버거 가게의 등근 의자에 앉아 있었고, 그것이 조금도 이상
해 보이지 않았다.
안도는 문득 소설의 마지막을 생각해 냈다. 여자는 아버지가 누구
인지도 모르는 아이를 산 속에서 혼자 낳는다. 그리고 아기의 울음
소리가 숲 속을 署고 멀리 산 표면에 메아리치면서 이야기는 끝난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
뒤돌아보며 안도는 자신에게 경고했다 마사코의 몸이 다치지 않
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안도는 어젯밤의 일을
떠올렸다 살을 섞으면서 느꼈던 기쁨과 흥분이 너무 커서 그만 피임
을 소홀히 하고 말았다.
마사코는 무릎 위를 손가락으로 문지르고 원을 그리면서 스타킹
구멍을 점점 넓히고 있었다. 찢어진 곳으로 엿보이는 다리가 눈부시
게 빛났다. 스타킹으로 가려 놓는 것이 아쉬울 정도였다
구멍이 자꾸만 커져 갔다. 안도는 마사코의 손 위에 자기 손을 얹
어 움직임을 멈추게 하고 나서 말했다.
"아까 영화관에서 뭐라고 중얼거렸어?"
영화의 등장 인물을 따라 대사를 반복하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는
지 물어 본 것이었다. 그런데 마사코의 대답은 엉뚱했다.
"책방에 가요."
늘 이렇게 질문을 얼버무리곤 한다 질문에 대답하는 것보다 자신
이 하고 싶은 것을 안도에게 부탁하는 횟수 쪽이 훨씬 많았다. 그렇
지만 안도는 싫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는 계속 마사코의
부탁을 들어 주었다
긴자에서 가장 큰 서점으로 데리고 가자 마사코는 책장 사이를 돌
아다니며 한 시간 이상이나 선 채로 책 읽기에 몰두했다. 서서 읽는
것에 그 정도의 정열을 쏟을 수 없었던 안도는 여기저기를 어슬렁거
리다가 계산대 옆의 진열대에서 5출판사 발행의 소책자를 발견했다.
바로 요전날 방문했던 5출판사의 책자인만큼 안도는 무료로 배포되
는 그 소책자를 손에 들어 보았다.
소책자에는 에세이 정도의 짧은 문장도 실려 있었지만 대개는 5출
판사에서 출판 예정인 책 광고에 할당되어 있었다.
· .꺼쩌면 다카야마 류지의 이름도 실려 있을지 모른다.
안도는 그런 기대감을 갖고 페이지를 넘겼다. 류지의 유작인 철학
논문집이 다음달 발행 예정이라는 것은 바로 요전날 담당 편집자인
기무라에게 들은 바 있었다. 친구의 이름을 활자로 보는 것은 정말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이름을 발견하기도 전에 안도는 마사코에게 이끌려 서점
밖으로 끌려나왔다
"괜찮으면 영화 한 편만 더 봐요."
부드럽게 졸랐지만 우격다짐으로 팔을 끌고 가는 행동은 거의 강
제적이었다 아마도 잡지 같은 걸 보고는, 거기에 실려 있는 영화가
갑자기 보고 싶어진 것이리라. 안도는 코트 주머니에 소책자를 넣고
는 마사코에게 물었다.
"뭐가 보고 싶은데?"
하지만 마사코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안도의 손만 세게 잡
1당겼다
"순 어거지군."
몸을 뒤로 젖히다가 안도는 마사코의 손에 정보 잡지가 쥐어져 있
는 걸 보고는 걸음을 멈췄다. 어젯밤부터 마사코는 돈이라곤 한 푼도
쓰지 않았다. 돈을내려는 의사가 전혀 보이지 않아 모두 안도가 냈
던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 그녀의 손에는 정보지가 들려 있다. 돈을
내고 산 것 같지가 않았다. 그 증거로, 서점 봉투도 없이 정보지만 달
랑 손에 쥐어져 있었다
·끼 녀석, 슬쩍했군.
안도는 서정 안을 둘러보았다. 쫓아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용
케 점원의 눈을속인 것이다 겨우3백 엔 정도하는 잡지였다. 들킨
다 해도 별로 대단한 일은 아닐 것이다. 마사코에게 이끌려 걷던 중
에 안도는 이제까지와는 달리 대담해져 가는 자신을 느꼈다.
열쇠 구멍에 키를 꽃았을 때, 방 안에서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안
열쇠 구멍에 키를 꽃았을 때, 방 안에서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안
열쇠 구멍에 키를 꽃았을 때, 방 안에서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안
도는 아마 못 받을 거라고 포기하고 서두르는 일 없이 손잡이를 돌렸
다. 집이 좁다는 걸 알고 있는 친구의 경우, 대여섯 번 울리기만 하고
끊어 버리는 경우가 많아 그 끊는 방식에 따라 누구한테서 온 전화인
지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생각했던 대로 문을 열어젖힘과 동시에
전화벨이 멈췄다 틀림없이 집이 좁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이 끊은
것 같았다. 안도의 집에 온 적이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아마
도 미 야시타일 거라고 짐작한 안도는 시계를 보았다 밤 8시를 조금
지난 시각이었다
문을 활짝 열어 마사코를 들어오게 한 안도는 방에 불을 켜고,에
어컨(일본에서 에어컨은 냉난방 겸용인 경우가 많다 : 역자 주) 스위
치를 올렸다. 오늘 아침 방에서 나을 때 벗어 놓은 옷이 그대로 흩어
져 있었다. 마사코는 오늘밤도 안도의 아파트에서 보내겠다고 생각
했는지 물건을 그대로 놔 두고 갔던 것이다.
오전과 오후, 두 번이나 연속해서 영화를 본 탓에 어깨부터 등에
걸쳐 叫근함이 느껴졌다. 더운 물에 담그고 싶었다
안도는 코트를 벗으려다가 주머니에 5출판사의 소책자가 들어 있
음을 깨닫고. 꺼내서 침대 옆 테이블에 놓았다. 목욕을 하고 나서 천
천히 훑어볼 생각이었다. 이미 사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으므로 류
지가 쓴 책의 제목과 발행일을 다시 한번 확인해 두려는 것이었다.
셔츠 한 장만 입고 소매를 걷어붙인 안도는 욕조를 획 닦아 내고
온도를 맞춰 더운 물을 틀었다. 좁은 욕조는 금방 더운 물로 넘쳐 욕
실 전체가 수증기로 뿌옇게 변해 갔다. 환풍기를 돌려도 별 효과가
없었다 마사코부터 먼저 욕조에 들어가게 해 줄 마음으로 방을 들여
다보니 마사코는 침대 끝에 앉아 스타킹을 벗으려는 참이었다.
"먼저 목욕하겠어?"
안도가 그렇게 말하자 마사코가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로 다가가는 안도와 교대하듯 마사코는 욕실로 모습을 감추고
커튼을 닫았다
생각대로 전화의 주인공은 미야시타였다. 수화기를 귀에 대자마자
미야시타는 호통부터 쳤다
"하루 종일 어딜 쏘다니고 자빠졌어?"
"영화 畿어 ."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이 돌아온 때문인지 미야시타는 얼빠진 소
리를 냈다
"뭐, 영화?"
"두 편 연속해서 "
"참, 태평도 하시군 "
정말 질렸다는 듯이 그렇게 말하고 난 미야시타는 불평을 했다.
'현 번이나 전화했었어 ."
"항상 집에 있으란 법도 없지."
"그래 좋아. 그런데 나, 지금 어디 있는 줄 알아?"
미야시타가 전화를 걸고 있는 장소‥‥ 자기 집은 아닐 것이다. 도로
변의 공중 전화 부스인 듯,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가 수화기에서 흘러
나오고 있었다.
"설마 근처에 와 있으니까 집에 오겠다는 건 아니지?"
지금은 곤란하다. 마사코가 목욕중이다. 어차피 안도는 거절할 생
각이었다.
"바보, 그런 게 아냐 극단이다, 극단."
"뭐 , 극단?"
이번에는 안도가 질릴 차례였다. 영화 보고 온 사람을 태평하다고
비웃던 놈이 연극 구경이라니,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를 하고 있냐
고. 그러나 미야시타는 연극 구경을 간 것이 아니었다.
"극단 비상의 사무실 앞이야."
"어제 '링' 에 쓰인 묘사가 마치 비디오 카메라의 뷰 파인더로 들여
다본 것처럼 객관적이고 정확했다는 걸 발견했어 ."
"그건 나도 확인했어 ."
왜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일까?의아해하면서 안도는 문득 눈에
띈 5출판사의 소책자를 가까이 잡아당겨 그 여백에 볼펜으로 메모를
시작했다. 안도는메모를하면서 전화하는버룻이 있었다 그렇게 하
면 이상하게 차분해졌다. 왼쪽 어깨에 수화기를 걸치고 오른손에 볼
펜을 쥐는 게 안도 특유의 스타일이었다.
"또 한 가지 확인해야 한다는 걸 오늘 깨달았지 . 역시 사람의 얼굴
말인데‥‥ 일부러 아타미까지 갈 것도 없이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의
얼굴이 가까이에 있었어 ."
안도는 안달이 났다. 미야시타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 건지 전
혀 짐작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약올리지 마. 확실히 말해 줘."
"야마무라 사다코야."
미야시타는 내뱉듯이 그 이름을 입에 담았다.
"야야, 야마무라 사다코는 1966년에 죽었어‥‥‥
안도는 거기서 일단 말을 멈추었다. 왜 미야시타가 극단 비상을 찾
아갔는가? 그 관련성이 문득 스쳐 갔기 때문이다.
"그렇군, 사진 말인가?"
'링' 속에는 M신문사 요코스카 지국의 요시노 기자가 극단 비상의
연습실을 찾아가 과거에 활동한 바 있는 야마무라사다코의 이력서
를 보았다는 대목이 있다. 입단시에 제출하는 이력서에는 상반신과
전신 사진 두 장이 붙어 있어 요시노 기자는 그 자리에서 사진을복
사했던 것이다.
"겨우 알았냐? 우린 야마무라 사다코의 얼굴을 손쉽게 볼 수 있었
던 거야."
안도는 야마무라사다코의 생김새를 그려 보았다. '링'을 읽은 것
에 의해 야마무라사다코의 얼굴은 강렬한 이미지로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날씬하니 지가 크고, 가슴의 볼륨은 그다지 없지만 몸의 균
형이 멋지게 잡혀 있다. 어느 쪽인가 하면, 얼굴은 중성적이고 이목
구비는 완벽해서 아무 흠잡을 데가 없다.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운 미
인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어땠어? 물론 사진은 본 거지?"
안도는 조급하게 물었다. 미야시타는 사진을 본 것이다. 그리고 생
각한 대로 야마무라 사다코의 얼굴과 그가 품고 있던 이미지가 딱 겹
쳐졌다. 그것을 알려 주기 위해 일부러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안도
는 미야시타가 전화한 이유를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수화기 저쪽에서 들려온 것은 깊은 탄식이었다.
"아니야."
"아니 라니 , 뭐가?"
"그러니까 얼굴이 달라."
안도는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음, 뭐라고 하면 좋을까‥‥ 사진으로 본 야마무라 사다코는 내가
상상하고 있던 야마무라 사다코와는 달라. 미인임에는 틀림없지만
뭐라고 하면 좋을까‥‥‥
"어떤데?"
"뭐랄까· 흔란스러워졌어. 그저 갑자기 생각났어. 내 친구 중에
초상화를 잘 그리는 녀석이 있어서 언젠가 그 녀석한테 물어 본 적이
있었거든 어떤 타입의 얼굴이 그리기 힘드냐구 그랬더니 그녀석은
그리기 힘든 얼굴 같은 건 없다고 했어 어떤 얼굴이든 그 나름대로
의 특징이 있어서 그림과 실물을 비슷하게 그리는 건 간단하다구 말
야. 그래도 하나 들라고 하면, 그리기 힘든 건 자기 얼굴이래.특히
그리는 사람의 자의식이 강한 경우, 자신의 얼굴과 그림은 자꾸 멀어
져서 다른 사람처럼 되어 버린다고 말야."
"그래서?"
그게 이번 경우와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거지?
"아니, 아무 것도 아냐. 그저 잠간 생각이 났을 뿐이야. 마(魔)의
비디오테이프라고 해도 그래. 그건 비디오 카메라로 촬영한 영상이
아니라 야마무라 사다코의 눈과 마음으로 만들어진 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 에도 불구하고?"
"풍경도, 인물도 충실히 재현되어 있어.'
"우리가 실제로 영상을 본 적은 없잖아,"
"그래. 하지만 '링' 에는 그렇게 써 있어."
안도는 약간 초조해졌다. 미 야시타의 말투에서 어딘가 주저하는
기색이 엿보였다. 발을 내딛긴 했는데 무서워서 더 이상은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하는 어린애 같다
"야, 미야시타 네가 생각하고 있는 걸 속시원히 말해 주지 않을
래?"
수화기 저쪽에서 미야시타는 숨을 들이쉬었다 멈추었다
" '링' 을 쓴 게 정말로 아사카와 가즈유키일까?"
‥‥그럼 누구란 말야?
그렇게 말하려는데 전화 카드가 다 돼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 안 되겠다. 카드가 다 됐어. 야, 니네 집 팩스, 사진 보내도 괜
찮냐?"
미야시타는 빠른 어조로 그렇게 물었다.
"괜찮아, 잘 나와. 그 선전 문구에 속아서 산 거니까
"그럼 지금 보낸다 너한테도 바로 확인받고 싶어. 이미지하고 사
진의 얼굴이 다른지 어떤지? 나만큼 멋대로인· . ."
거기에서 전화가 끊겼다.
수화기를 어깨에 긴 채로 안도는 잠시 멍하니 있었다. 욕실에서 들
리던 샤워 소리가 멈춰 방 안은 온통 정적에 싸여 있었다. 휘익휘익
하며 바람이 들어오는 통에 창문 쪽을 보니 새시가 조금 열려 , 그 틈
으로 한겨울의 밤기운이 방 안으로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멀리 떨어
진 도로에서 클랙슨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살벌하고 마른 울림이었
다. 바깥 공기가 건조하다는 걸 소리가 단적으로 전달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방의 공기는 습기를 머금고 있었다 욕실에서 새어나온 증
기로 방의 공기가 젖어 버린 것이다. 마사코는 아주 오랫동안 목욕을
했다.
안도는 미야시타에게 들은 것을 머릿속에서 반추해 보았다. 그의
심리 상태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도 오늘 하루종일 견디기 어
려웠을 것이다. '링'을 인은것에 의해 자신의 육체에 링 바이러스가
들어와 버린 것인지 아닌지‥‥ 그러나 그는 이것저것 생각만 하기보
다는 일단 움직였다.
극단비상의 사무실에 야마무라사다코의 사진이 보관되어 있음을
생각해 내, 확인해 보자는 정도의 생각으로 방문했던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미지와 사진이 달랐다 그는 자기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
인지 아닌지를 알아보기 위해 사진을 복사했다. 그리고 지금 팩스로
보내려는 참이었다
안도는 힐끔 팩스를 쳐다보았다 아직 움직이는 기미가보이지 않
았다. 팩스에서 얼굴을 돌리니 5출판사의 소책자가 눈에 들어왔다
시간이나 때워 보자는 생각으로 소책자를 들고는 펄럭펄럭 넘겼다.
출간 안내는 마지막 페이지에 실려 있었다. '2월에 나을 책'이라는
타이틀 아래, 열 몇 권의 책이름과 저자명이 죽 기록되어 있고 열 글
자 정도로 책 내용을 소개하고 있었다. 순서대로 읽다 보니 한가운데
쯤에서 다카야마 류지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제목은 지식의
구조』로,내용 설명에는 현대 사상의 최전선'으로 되어 있었다. 연
애 소설과 TV 무대의 됫이야기를 묶은 에세이집 사이에 끼여 류지의
작품은 한층 딱딱한 인상을 주었다. 이 책은 친구의 유작인 것이다.
설사 어렵다고 해도 읽지 않을 수 없다. 안도는 류지의 책에 볼펜으
로 표시를 해 두려고 했다.
한데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퉁겨 올라오는 느낌이 전해졌다. 익숙
해진 단어를 본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시선을 아래로 훌어내렸
다. 하단에는 3월 출판 예정인 책 제목들이 상단보다도 훨씬 작은 환
자로 쓰여 있었다. 그 마지막에서 세 번째 제목‥‥
안도는 너무 놀란 나머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단순한 우연인가 하
고 생각했지만 저자란에 기록된 이름을 볼 때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3월에 나을 책'
『링』, 아사카와 준이치로, 전율의 컬트 호러‥‥
안도는 무심코 소책자를 손에서 떨어뜨렸다.
‥‥출판할 생각인가!
5출판사의 라운지에서 아사카와 준이치로를 우연히 만났을 때, 그
는 너무나도 쌀쌀맞게 안도를 피하려 했다. 이제야 겨우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준이치로는 동생인 가즈유괴가 쓴 '링' 이라는 르포에 손질을 가해
소설로서의 모양새를 갖춰 발표하려는 것이다. 동생 작품을 무단으
로 차용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안도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준이
치로는 안도에게 냉담한 태도를 보였고, 인사도 하는 등 마는 등 도
망친 것이다. 오랫동안 얘기를 하면 화제가 거기에 미쳐 동료 편집자
에게 알려지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그는 어떻게 해서라도 자
신이 쓴 소설로서 책을 내고 싶었던 것이다.
"출판하게 할 수는 없어 !"
안도는 짧게 외쳤다. 적어도 崙'이 인체에 무해하다고 증명될 때
까지 출판을 연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의사로서의 사명이다.
내일, 안도와 미야시타는 혈액 검사를 받을 것이다 결과가 나을 때
까지는 며칠이 걸리겠지만 만일 양성‥‥ 즉 링 바이러스의 보균자라
고 밝혀질 경우, 책의 출판은 대단한 파국을 초래하게 된다. 최초로
탄생한 마(鹿)의 비디오테이프는 한 개뿐이다. 복사했다고 해도 한
개씩 늘어나는 데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출판이 되면 숫자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진다. 최소한 까딱 잘못하면 수십만, 수백만 단위까
지 팽창한다. 그것도 동시다발적으로 전국에 뿌려지는 것이다.
안도의 어금니가 딱딱 부딪치며 소리를 냈다 그가 상상한 것은 거
대한 해일이었다. 우뚝 솟아오르는 바다의 벽은 검었다. 하지만 소리
도 없이 다가오는 해일. 안도는 파도의 압력으로 불어오는 바람을 온
몸으로 맞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창가로 다가가 열려 있던 새시 창
문을 다시 한번 꼭 닫았다. 그 위치에서 눈을 돌리자 목욕 타월을 허
리에 감고 백에 손을 넣고 있는 마사코의 옆얼굴이 보였다. 속옷이라
도 찾고 있는 것인지 , 마사코는 백에 손을 넣고 바스락바스락 뒤지고
있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안도는 수화기를 귀에 대고 팩스인 것을확인하
고 나서 수화 모드를 바꾸었다. 미야시타가 사진을 보내려 하고 있는
다고 하자. 그 검은 양은 흰 양과 생식하는 수밖에 없는데, 태어나는
것이 흰색이나 회색 양이라고 하면 생식을 반복하는 동안에 '검정' 이
라는 특색이 엷어지다가 이윽고 사라져 버리게 된다. 동시에 암수 두
마리 이상의 검은 양이 태어나지 않는다면 '검정' 이라는 특색은 다음
세대로 이어질 수 없는 것이다
야마무라사다코의 경우, 이 난관은 벌써 극복해 놓고 있었다. 만
약 그녀에게 있어 무성 생식이 가능하다면, 특정 개체를 택해 생식할
필요가 없다. 흔자 마음대로 '야마무라 사다코' 라는 특색을 그대로
차세대에 전할 수가 있다.
그렇지만 야마무라 사다코가 또 한 사람의 야마무라 사다코를 낳
아 간다고 해도 그 증식 방식은 완만하다 비디오테이프를 한 개 한
개 복사하는 것과 그다지 큰 차이가 없다. 우물쭈물하고 있는 사이에
인류에 의해 제거당할 우려가 있다. 실제로 마(魔)의 비디오테이프
는 소멸되었다. 정착하기 위해서는 동시다발적 이고, 동시에 비약적
인 증식이 반드시 필요하다. 인류가 살고 있는 장소를 빼앗고, 그 들
으로 단숨에 흘러들어가는 방법을 통해 야마무라 사다코는 생존의
장을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야마무라 사다코는 폭발적으
로 번식할 수 있는 비결을 갖고 있는 걸까?
안도의 사고를 방해하려는 듯 미야시타가 편지를 계속 읽어 나가
기 시작했다.
장황하게 畿습니다만, 지금까지의 내용에 거짓은 點습니다
刻는 다만,제 몸에 생긴 던화를 당신께 솔직히 말했습니다 刻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 당신에)11 이해받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해받은 뒤, 실은 긴히 당신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刻 당신이지 않으면 안 되느냐? 당신이 전문
지식을 갖고 있는 전문가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 , 나왔군.
안도는 본능적으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만일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부탁'이라면· 그걸 생각하니 한층
더 불안해졌다
일단 깅'을 출판하지 못하도록 요구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 외에도 제가 하려는 것을 발해하지 말고, 협력해 주셨으
합니다.
면
들어 주실는지요? 협박할 생각은 默습니다만, 저를 방해하면
당신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걷니다. 어쨌든 당신은 이미
崙'이라는 글을 崇어 버린 걷니다. 늦었다고 생각해 주십시오.
거스르면 당신의 몸에 상당한 이던이 생길 걷니다 그러나 용
감한 당신이 죽음을 각오하고 제게 반항하지 않는다고 할 수
도 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탁을 들어 주셨을 경우,전 당신
에게 보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공자라는 건 아
닙니다. 어떠신지요? 제가 당신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 아마
도 당신이 가장 원하고 있는 梨,그것은‥‥
미야시타는 거기에서 말을 멈추고, 안도 쪽으로 노트를 내밀었다
이후의 내용은 그의 눈으로 읽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리라.
노트에 쓰여 있는 문장을 보자마자 안도는 노트를 손에서 떨어뜨
렸다. 순식간에 사고력을 빼앗기고, 몸에서 모든 힘이 빠져나갔다.
설마 이런 조건을 제시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미야시타는 안
도의 심중을 헤아렸는지 말을 걸려 하지 않았다.
안도는 어느샌가 눈을 감고 있었다. 야마무라 사다코는 인류를 배
반하라고 달콤하게 속삭여 오고 있다. 야마무라사다코라는 새로운
종의 편에 서서 자기 편이 되어 움직이라는 것이다. 인간 중에서 자
기를도와 주는 몇 명의 협력자가없으면 '야마무라사다코'라는 종
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걸 그녀는 정확히 알고 있다. 이를테면 '링'
을 출판하려는 아사카와 준이치로는 이미 그녀의 수족이 되어 움직
이고 있다. 그 자신은 아직 의식하지 못하겠지만,그를 움직이고 있
는 건 틀림없이 야마무라 사다코였다.
하지만 혼을 팔아넘기는 일에 대한 보답은 너무나도 감미로운 것
이었다 지금까지 얼마나 이같은 꿈을 이루게 해 달라고 신에게 기도
했던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꿈.
‥‥가능한 걸까?
그는 자문했다. 눈을 뜨고 정면의 책장을 보았다. 책과 책 사이에
끼워진 봉투에는 그것이 들어 있었다. 의학적으로는 가능하다 야마
무라 사다코의 힘을 빌리면 정말로 손에 넣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
안도는 고통에 찬 신음 소리를 토해냈다. 지금 야마무라를 막지
않으면 인류에게 얼마만한 재앙이 덮칠지는 알 수 없다. 인류의 한
사람인 자신에게 그런 배반이 용서될 수 있을까? 야마무라 사다코를
막아 낼 수 있는 방법‥‥ 결국엔 죽이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녀의
육체가 소멸해 버린다면 꿈은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그
녀의 육체를 건강하게 지켜 주지 않으면 안도의 꿈은 절대 실현되지
않는 것이다.
안도의 고민은 오열로 변해 갔다. 침대에 엎드려 몸을 떠는 그의
뇌리에 아들의 얼굴이 떠올라서는 없애려 없애려 해도 지워지지 않
았다
"미야시타, 난 어떻게 하면 되지?"
혼자서 결정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였다. 그는 우는 소리로 미야시
타에게 매달렸다
"네 문제야."
냉담한 말투는 아니었지만, 미 야시타의 목소리는 냉정하다 싶을
정 도로 아주 침 착했다.
"모르겠다구, 어떻게 하면 되는 건지 .
"생각해 봐 야마무라 사다코를 방해하면 너와 난 당장 죽임을 당
하고, 그 여자는 다른 협력자를 찾아 낼 거야. 단지 그뿐이야."
확실히 미야시타가 말하는 대로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분명하다. 지금까지 이루어진 안도와 야마무라 사다코
와의 만남은 우연도, 다른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안도를 늘 지
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다카노 마이의 아파트에서 만난 것도, 빌딩
옥상에서 만난 것도,산구바시 역에서 만난 것도, 모두 우연이 아니
었다. 그녀는 안도가 냄새를 맡고 진상에 접근하리라는 걸 예견하고
선수를 쳐온 것이다. 야마무라 사다코를 앞지르는 일 따윈 절대 불가
능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상한 행동을 보이기만 해도 체내에 잠입
한 링 바이러스가 날뛰기 시작할 게 뻔하다.
미야시타는 이 점을 근거로 해서 이미 결론을 내리고 있었지만, 안
도는 아직 결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협조하란 말이야?"
"달리 방법이 없어 "
"그럼 인류는 어떻게 되지?"
"야, 인류의 사도 같은 얼굴 하지 마. 게다가 너한텐 그만한 포상이
주어지잘아. 기회를 놓치겠다는 거냐7"
"불공평하군. 넌 아무 것도 얻지 못해."
"보험이 될 테지. 유사시에 말야. 응분의 준비만 게을리하지 않는
다면 ."
안도는 자신의 입장이 궁지에 몰려 있음을 실감했다. 몇 년 몇십
년이 흘러 자신의 이름이 역사에 새겨 질지도 모른다. 영웅으로서가
아니다. 인류를 멸망의 늪으로 몰아넣은 배반자라는 꼬리표가 붙어
서 ‥‥ 하지만 그것도 지금의 인류가 존속했을 때의 가정이다. 멸망한
다면 역사 자체가 사라져 버린다
깨당초 왜 이런 일에 발을 들여놓은 걸까?
안도는 후회하는 마음과 함께, 맨처음 이 일이 어떻게 시작되었는
지를 다시 한번 돌아보았다. 최초로 막이 열리던 때를 결코 잊을수
가 없다. 해부 직후, 류지의 배에서 튀어나온 '링' 이라는 암호에서부
터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그 암호에 의해 안도는 '링' 이라는 문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그리고 마침내 읽게 되었다. 그걸 읽지만 않
았다면 휘말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걸 읽지만 않았다면‥‥
안도의 사고가 일단 끊겼다. 기다려 , 뭔가가 이상해
"류지 ‥‥‥
중얼거리자 미야시타가 의아스러워하는 얼굴로 들여다보았다 아
랑곳하지 않고 안도는 사고를 진행시켜 나갔다. 우연이라고 생각되
었던 것의 배후에 하나의 의지가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한다. 류지는
단순히 호의로 'RIN6'이나 'MUTAT10N 이라는 암호를 보낸 것
일까? '정신 차려' 라는 주의를 주기 위해서인가? 그게 아니라는 느
낌이 든다. 딴길로 빠지려는 순간,궤도수정을 촉구하기 위해 메시
지를 보낸 것으로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다. 왜 그 녀석은 그런 짓을
한 걸까?
또 하나 어떻게 해서 다카노 마이는 마(魔)의 비디오테이프를 보
게 되었는가?만약 배란일에 비디오테이프를 보았다는 우연이 겹치
지만 않았다면 야마무라 사다코는 태어나지 않았다. 다카노 마이는
어디에서 테이프를 손에 넣었지?
류지의 방이다.
다카노 마이는 왜 류지의 방에 갔지?
‥‥류지의 원고가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빠져 있었던 걸까?
‥‥류지만이 알고 있다.
모든 것에 류지가 관련되어 있다.
‥‥류지 , 류지 , 류지
다카노 마이와 친하게 지내고 있던 류지라면 그녀의 생리 주기를
알고 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 다카노 마이는 바로 그날에
류지에 의해 인도된 것이다.
끼게 무슨 일이지?
의아스러운 듯 눈을 가늘게 뜬 미야시타에게 얼굴을 돌리며 안도
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말했다
"류지 ."
아직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한 미야시타는 더욱더 눈을 가늘
게 떴다.
"모르겠어?류지야. 야마무라사다코의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건
바로 류지야."
같은 이름을 반복하는 중에, 안도는 자신의 가설이 옳다는 것을 확
신하기에 이르렀다. 모두 류지의 장난에 놀아나고 있었던 것이다. 시
나리오를 쓴 것은 바로 그 녀석이었다
창 밖에서는 어둠에 잠긴 도시의 소음이 낮게 소용돌이치고 있었
다. 수도 고속도로를 흘러가는 자동차가 뭔가 무거운 것을 끌고 가는
듯한,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냈다 유리를 칼로 세게 긁어 대는 듯한
기분 나쁜 울림이었다
그 소리가 남자의 웃음소리로 변하는 것 같았다. 아득히 멀리서 솟
아오르는 기분 나쁜 소리 . 류지의 목소리와 비슷했다. 안도는 허공을
응시했다.
"류지 , 거기 있는 거냐?"
물론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안도는 확실한 기척을 느낄 수 있었
다. 야마무라 사다코와 한패가 되어 인류의 멸망을 위한 게임에 열중
하고 있는 사내가 지금 이 방에 숨어 동향을 엿보고 있는 것이다. 이
제사 알아채 봤자 이미 때는 늦었다고 비웃으면서·
안도는 깨달았다. 류지의 소망이 무엇인가를.
자신이 손을 빌려 주지 않으면 류지는 그것을 손에 넣을 수가 없는
것이다. 안도는 류지의 속셈을 겨우 알아챌 수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미 때가 늦어 선수를 칠 수도 없었다. 아
도는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소리 없이 웃음을 흘리는 류지의 말-9_
순순히 듣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에필로그
장마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맑게 갠 날에 안도는 바다를 찾
아갔다. 2년 전 이날, 이 모래밭에서 아들이 익사했다. 아들을 익사시
킨, 정말이지 혐오스럽고 끔찍한 바다였다. 작년엔 이곳에 오지 않았
다 하지만 올해 아들이 익사한 바로 그 날에는 오지 않으면 안 될 이
유가 있었다.
2년 전과는 달리 파도가 조용히 밀려왔다. 하얀 모래가 펼쳐진 해
변에 몇 명의 낚시꾼이 낚싯줄을 드리우고 있었다 아직 초여름이라
헤엄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족으로 보이는 두세 팀이 자리를
잡고 앉아서 피크닉을 즐기고 있을 뿐이었다.
안도는 2년 전 그날로 다시 돌아온 듯했다. 파도의 크기가 달랐고,
또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 모를 방파제가 바다 쪽으로 뻗어 있어 해
변의 모양도 많이 변해 있었다 하지만 안도에겐 모두 똑같아 보였
다. 지난 2년 동안, 악몽을 꾸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밖에는 생각
할 수 없었다.
에필로그 375
모래사장을 내려다보듯 제방에 앉은 안도는 한여름을 연상시키는
햇살을 정면으로 받고 있었다. 손을 이마에 대고 그늘을 만들어 물가
에서 노는 작은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물가라고는 해도 작은 그림자
는 결코 물에 다가서려 하지 않고, 맨발로 마른 모래 위에 웅크리고
앉아 구멍을 파거나 모래를 쌓아올리면서 놀고 있었다. 안도는 거기
서 눈을 멜 수가 없었다.
문득 이름이 불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잘못 들은 것 같기도 했지
만, 안도는 고개를 들어 전후좌우를 둘러보았다. 제방 위를 일직선으
로 걸어오는 땅딸막한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사내는 줄무의가 들어간 긴 소매 셔츠를 입고, 제일 위의 단추까지
꼭 채우고 있었다. 가슴에서 어깨에 걸쳐 부풀어오른 근육이 멋지게
솟아올라 마치 터져 버릴 것처럼 보였다. 짧은 목에는 이중 삼중으로
주름이 잡혀 있어 보기만 해도 답답했다. 각진 얼굴엔 땅방울이 흐르
고, 숨을 몰아쉬면서 사내는 편의점의 비닐 봉지를 앞뒤로 흔들고 있
었다.
언젠가 본 기억이 있는 얼굴이다. 이 얼굴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작년 10월. 검시원의 해부대 위에서였다.
사내는 안도의 옆에 앉더니 어깨를 쳤다
"어이 , 오랜만이군."
안도는 사내의 눈길을 피하면서, 물가에서 놀고 있는 작은 그림자
만을 눈으로 좇고 있었다
"목적지도 알리지 않고 사라져 버리다니, 매정하지 않아?"
사내는 그렇게 말하고는 비닐 봉지에서 차가운 우롱차를 꺼내 목
을 울리면서 비워 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다 마시고 나서야봉지에
서 다른 하나를 꺼내 안도에게 내밀었다.
"마실래?"
안도는 잠자코 받아 들고는 사내의 얼굴도 보지 않은 채 뚜껑을 잡
아당겼다
"어떻게 여긴지 알았냐?"
안도는 침 착한 어조로 물었다.
"미야시타한테 들었지 . 오늘이 네 아들 기일이라구 말야. 음 대충
상상이 가. 네가 생각하고 있는 것쯤은."
사내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그런데 무슨 용건이라도 있는 거냐?'
가라앉은 목소리로 안도가 물었다.
"기차에다 버스까지 타고 널 찾아왔다구. 좀 반갑게 맞아 주면 안
되냐?
"무리야."
안도는 가차없이 내뱉었다.
"쳇, 쌀쌀맞은 놈 "
엷은 미소를 띄운 채, 사내는 입을 삐죽거렸다.
"쌀쌀맞다구? 용케 그런 말을 하는군. 누구 덕분에 이렇게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냐?"
"너한테는 감사하고 있어 . 내 기대대로 움직여 주었으니까."
안도는 이 사내에게 조롱당했음을 새삼 瑞저리게 느꼈다. 학창 시
절 암호 놀이에 열중하고 있을 무렵 출제된 암호를 아무래도 풀 수
가 없었기에 역으로 짜내고 짜내서 만들어 냈던 암호를 시원스레 해
독당했을 때는 분함도 있었지만 그 비상함에 경외감을 갖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꼴좋게 이용당하고, 모욕당했다는 기분만 강
하게 들어서 조금도 칭찬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알았다.
안도는 자신들의 손으로 낳은 사내‥‥다카야마 류지의 옆얼굴을
응시했다. 볼 수 있다면 류지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리고
이 사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안도는 작년 10월,
실제로 류지의 대뇌를 손가락으로 만졌던 것을 기억해 겠다. 손가락
으로 만지는 것으로 이 사내의 생각을 일부만이라도 알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속셈을 알지도 못하고 암호에 이끌려 이번 사건에 휘말
리고 말았다. 만일 그날 검시 원에서 다카야마 류지의 사체를 해부하
지 않았다면 이렇게 연관되지 않고 끝날 수 있었을 것이다.
"너로서도 이렇게 돼서 다행이잖아."
생색내듯이 류지가 말했다
"모르겠어."
그는 정말로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돼서 다행인지 아닌
fl‥‥
물가에서 작은 그림자가 일어나더니 안도 쪽으로 손을 흔들어 보
인다. 안도도 목을 뻗어 올리는 듯한 몸짓으로 답해 주자, 모래를 차
올리면서 작은 그림자가 다가왔다.
안도 앞에서 그림자가 멈춰 서서 말했다
"아빠, 목말라."
안도는 류지한테 받은 우롱차를 아들 쪽으로 내밀었다 받아 들자
)자 아들은 캔에 입을 댔다.
바로 눈앞에서 아들의 하얀 목이 뻗어 있다. 차가운 액체가 목구멍
을 타고 들어가는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분명한 근육의 움직임이 있
었다.
류지의 얼굴에 떠있는 비지땀에 비하면 3년 반짜리 아들의 목줄
기를 타고 흐르는 땀방울은 마치 수정 같다. 안도에겐 그것이 같은
땀이라고 여겨지지 않았다
"야, 동류(同類) . 하나 더 마실래?"
류지는 안도의 아들에게 소리치고는 비닐 봉지에 손을 찔러 넣고
바스락바스락 뒤졌다.
동류라는 말이 안도에게는 걸렸다. 분명히 두사람은 같은자궁에
서 탄생했다. 그런만큼 안도는 두려웠다
아들은 류지를 향해 고개를 옆으로 젓고는 마시다만 우롱차를 머
리께로 가져갔다.
"이 거 , 다 마셔도 돼?"
"응, 괜찮아."
안도가 말하자, 아들은 캔을 흔들면서 물가로 돌아갔다. 빈 캔에
모래를 채워 넣으며 놀려는 것이리라. 그 등을 향해 안도가 외쳤다.
"다카노리 !"
아들이 멈춰 서서 돌아보았다.
"왜 ?"
"아직 바다에는 들어가지 마라."
알았다고 말하는 듯 빙그레 웃음을 짓고는, 아들은 다시 등을 돌렸
다.
일부러 다짐을 둘 필_a_도 없었다. 물에 빠졌던 순간의 일이 되살아
나는지 아들은 아직 물을 무서워하고 있었다. 스스로 바다에 들어갈
에필로그 379
것이다.
"귀여운 아이구나,"
류지의 말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귀여운 게 당연하다. 보물이다.
한 번 잃었던, 둘도 없는 보물 이 존재를 되찾기 위해 안도는 인류를
배반한 것이다 그래서 다행스러운 것인지 아닌지 , 안도의 마음은 아
직도 흔들리고 있었다.
야마무라 사다코의 협력자가 되는 보상으로 그녀가 제시한 것은 2
년 전에 익사한 아들의 부활이었다
지금으로부터 반 년 전, 자기 집 아파트에 놓인 야마무라 사다코의
편지를 미야시타와 함께 읽은 직후엔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존재
한다는 사실 자체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다
음 순간엔 이미 부활을 믿는 쪽으로 돌아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야마
무라 사다코라고 하는 증거를 눈앞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아
들의 DNA가들어 있는 머리카락이 책장에 소중히 보관되어 있었다.
아들의 세포가 전혀 남아 있지 않으면 부활은 불가능하다. 바닷속에
서 머리에 손이 닿았을 때 손가락에 얽혀 들어온 머리카락이 없었다
면 아들의 유전 정보는 영원히 잃어버리고 말았을 게 틀림없다.
과학적으로 보아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필요한 것은 단지
야마무라 사다코라는 특이한 기능을 갖춘 모체였으며, 그것만 있으
면 현대 의학으로 충분히 처리할 수 있는 작업이었다.
일단 암수 양쪽의 기능을 겸비한 야마무라사다코의 자궁에서 정
자와 난자를 수정시킨다. 남녀간의 교섭 없이 그녀는 혼자서 자궁 안
에 수정란을 착상시킬 수 있는 것이다. 다음에 이 수정란을 꺼내 수
정란의 DNA와 재생시키고자 하는 개체의 aNA를 서로 바꿔 넣는
다. 매니퓨레이터 (원격 자동 조종 기구 · 역자 주)를 이용해 다카노리
의 모발세포에서 핵만 꺼내 야마무라사다코의 수정란 핵과통째로
바꿔 넣는 작업은 섬세한 테크닉을 요한다. 하지만 전문가의 손에 의
해서라면 그렇게 어렵지토 않다 이론적으로는 DNA만 남아 있다면
아득히 먼 옛날에 멸망한 공룡까지도 부활시킬 수 있는 것이다
핵 교환을 마친 수정란은 원래대로 야마무라사다코의 자궁 안으
로 다시 집어넣는다. 이제 남은 일은 출산을 기다리는 것뿐이다 태
아는 거의 일주일이면 야마무라의 자궁에서 기어 나오고, 다음 일주
일이면 DNA가 마지막으로 개체에서 분리된 시점의 나이까지 성장
한다 다카노리의 경우, 바다에 빠지면서 머리카락이 뽑혀 안도의 손
가락에 뒤얽혔다. 그 머리카락의 세포에서 D%A를 뽑아 낸 이상, 재
생된 다카노리는 물에 빠진 순간까지의 나이로 성장하게 된다. 게다
가 기억은 DNA상의 인트론(유전 정보를 암호화하고 있지 않은 부
분)에도 축적되는 것인지 , 물에 빠질 때까지의 기억이 완벽하게 되살
아난다.
안도가 지금 보고 있는 아들은 예전의 아들과 완전히 똑같다고 봐
도 틀림없었다. 말투에서 버릇까지 , 하나에서 열까지 옛날 그대로다.
부모와의 추억도 제대로 그의 가슴에 들어 있는 듯, 얘길 해 봐도 전
혀 이상한 느낌을 주지 않았다.
아들을 안도에게 주자마자 야마무라 사다코는 바로 자신의 요구를
제시해 왔다. 안도로선 예상했던 대로의 전개였다. 그녀가 바란 것은
같은 방법으로 다카야마 류지를 부활시키는 일이었다. 다카노리를
재생시킨 것은, 보답이라기보다 본격적인 작업에 대비한 사전 연습
이기도 했던 것이다. 애초부터 해부 직후 배에서 숫자를 튀어나오게
한 것도, 링 바이러스의 DNA에 억지로 암호를 삽입시킨 것도 재생
을 이루려는 소망이 류지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의도대로 그
는 소망을 이루었고 현실적인 육체를 손에 넣어 지금 안도 옆에 앉아
있다. 류지야말로 야마무라 사다코의 강력한 파트너였다.
재생한 류지를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안도는 류지의 DNA
와 수정란의 DNA 교환이 끝난 것을 확인하자마자, 나머지를 미야시
타 일행에게 맡기고 목적지도 알리지 않고 아들만 데리고 그들 앞에
서 모습을 감추었다. 류지를 탄생시킨 시점에서 자신의 역할은끝났
다고 판단한 것이다. 류지가 있으면 이제 자신이 나설 일은 없다. 야
마무라 사다코에게 있어 최대의 소망은 류지라는, 의지가 될 만한 파
트너를 손에 넣는 일이다.
도대체 야마무라 사다코와 다카야마 류지는 언제 결탁한 것일까?
아마 DNA 차원에서 교신이 이루어져 , 서로가 상대방에 대해 파트너
로서의 가치를 인정하고 협력하면 이익이 될 거라고 예상했던 것이
리라
어쨌거나 지금의 안도에겐 그다지 흥미를 일으키지 않는 문제였
다. 그가 가장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이제부터 아들을 어떻게
키우는가 하는 일이다. 생각할 시간을 갖기 위해 안도는 두 달 전에
대학을 그만두고, 거처도 정하지 않은 채 관광을 다녔다. 이렇다 할
목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류지와 야마무라 사다코로부터 될 수 있
는 한 멀리 떨어져서 지내고 싶었을 뿐이다.
류지는 주머니를 뒤져 앰플 하나를 꺼내 안도 앞에 내밀었다.
"자."
"뭐 야?"
"링 바이러스로 만든 백신이야 "
"백신· ."
안도는 유리로 만들어진 작은 앰플을 받아 들고는 이리저리 자세
히 뜯어보았다.
안도와 미야시타는 혈액 검사를 받은 결과 양성으로 밝혀졌다. 예
상대로 '링' 이라는 리포트를 읽는 것에 의해 링 바이러스의 보균자가
되었던 것이다. 언제 날뛸지 모르는 바이러스를 몸 안에 품고 있는
꺼림칙한 상태였다.
"그걸 먹으면 바이러스는 억제될 거다. 이제 걱정할 거 없어 "
"너 , 이걸 주려고 여기까지 일부러 찾아온 거냐?"
"뭐 , 가끔 바다를 보는 것도 괜찮은 일이지 ."
류지는 그렇게 말하고 겸연쩍은 듯 웃었다. 안도는 다소 마음이 열
리는 것 같았다 가족과 함께 어딘가로 옮겨간다해도몸 안에 링 바
이러스가 그대로 있다면 안심할 수 없을 것이다.
"가르쳐 주지 않겠어? 앞으로 세계가 어떻게 될지 ."
가슴 주머니에 앰플을 집어넣은 안도는 단추를 채웠다.
"모르지 ."
류지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넌 모를 리 없어. 야마무라 사다코와 맞잡고 생물계를 디자인할
생각일 테니까 "
"가까운 장래의 일이라면 알아. 하지만 그 이후는‥‥ 아무리 나라고
해도 알 수가 없어."
"그럼 가까운 장래라도 좋아. 얘기해 주지 않을래?"
"『링』이 백만 부를 넘었어 ."
"백만 부라· . . "
신문 광고 등을 통해 안도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신문에 인쇄
된 '증판완성'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올 때마다 그의 뇌리에는 '증
식'이라고 하는 말이 떠올랐던 것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링'은 증
신을 이루었고 바이러스 보균자가 백만 명을 넘어선 것이다.
"게다가 영화화될 거야 "
"영화화? '링' 이 말야?"
"응. 주인공인 야마무라 사다코 역은 일반 공모 오디션으로 결정될
거 야."
"일반 공모· . . "
안도는 아까부터 류지가 한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류지는 갑자기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웃었다.
'띨반 공모야. 너 누가 야마무라 사다코 역을 따낼지 짐작할 수 있
겠니 f"
안도는 연예계 사정에 밝지 못했다. 누가 오디션을 통과하는가 따
위를 알 리가 없었다.
"누군데?"
류지는 몸을 구부리고 자지러지게 웃었다.
"둔한 자식이군 너도 잘 아는‥‥‥
"야마무라 사다코?"
그 이름을 입 밖에 내자마자 안도는 사건의 중대성을 깨달았다. 야
마무라 사다코는 원래 배우 지망생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상업 극단에 입단했었다. 아마추어가 아닌 것이다. 연기의 소양을 쌓
았던 경험자다 오디션을 받는다고 해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녀의 특이한 능력을 이용하면, 심사위원의 마음을 사로잡는 일 따
윈 손쉬울 것이다
게다가 야마무라 사다코 역. 자신의 역할을 자기 자신이 연기한
다· . 무엇을 위해서인가?안도는 그 속셈을 바로 읽어 낼 수 있었
다 비디오의 영상에 염력을 넣기 위해서다. 마(魔)의 비디오가 나오
는 영상 장면에 그녀는 또다시 자신의 유전 정보를 염사할 생각인 것
이다. 일단 사라졌던 마(鹿)의 비디오테이프도 다시 대량으로 부활
하게 된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 영화가 어느 정도 히트할지는 알 수 없지
만, 상당수의 여성 관객이 극장으로 향하게 될 것이다. 영화를 봤을
때, 마침 배란기에 해당하는 여성은 다카노 마이를 덮친 것과 같은
비극에 쉽싸이게 된다 일주일 후, 그녀들은 모두 야마무라 사다코를
낳을 것이고, 각각의 몸은 번데기가 되어 썩어 갈 것이다.
더욱이 그것이 비디오화되어 대여점에 놓이거나 tV로 방영된다
면, 비디오테이프를 복사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속도로 영상이 침
투하게 된다. 동시다발로 이루어지는 폭발적인 증식 . 게다가 증식한
야마무라 사다코는 독자적으로 아이를 낳을 수 있다 야마무라 사다
코는 눈 깜짝할 사이에 세계를 석권할 수 있는 방법을 간단하게 손에
넣는 것이다.
"매스 미디어와 야마무라 사다코의 교배야."
류지는 겨우 웃음을 멈추고는 고개를 들었다
"빨리 알아차릴 수만 있다면 그런 영화는 순식간에 없어질 거야."
영화뿐만이 아니다. 나돌던 책도 회수되어 소각될 게 뻔하다. 안도
는 인류의 반격을 믿고 싶었다
"무리야. 매개물 역할을 할 사람이 벌써 백만 명이나 있는 거야.
'링'을 없애도 링 바이러스에 감염된 인간의 손에 의해 미디어는 변
모를 이룬다. 비디오테이프가 책이라는 형태로 변이한 것처럼 말야.
음악, 게임 소프트, PC네트워크,어떤 곳이든 침입이 가능해 그리
고 새로 태어난 미디어와 야마무라 사다코의 교배에 의해 또다시 새
로운 미디어가 탄생하고, 그것과 접촉한 배란기의 여자들이 야마무
라 사다코를 낳는다. "
안도는 가슴 주머니에 손을 대어 링 바이러스 백신을 확인했다. 이
백신을 맞는다 해도 효과가 있는 것은 링 바이러스에 한해서일 뿐
변이된 미디어에 대해서는 아무 효과도 없다. 어떤 미디어로 변이되
어 갈지 예상할수 없는 한,사전에 백신을 개발하는 것은불가능하
다. 인간은 늘 선수를 빼앗길 수밖에 없다. 이리하여 야마무라 사다
코라고 하는 신종은 인류의 터전을 서서히 빼앗으면서 번식해 나가,
이윽고 인류를 멸망의 늪으로 몰아넣게 될 것이다
"그렇게 돼토 넌 아무렇지 않냐?"
인간이 죽고, 그 틈을 야마무라 사다코가 점령해 나가는 것을 아무
렇지도 않게 보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자신은 젖혀 두고라도, 적
극적으로 일에 나서는 류지의 기분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넌 인간의 시점에서 바라보고 있어 . 난 달라. 예컨대 한 사람의 인
간이 죽고 한 사람의 야마무라 사다코가 태어난다 그러니까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 섬 게임이 되는 거야. 아무 문제 없어 ."
"모르겠다 어쨌든 난 이해 못해."
류지는 땀이 밴 얼굴을 안도에게 불쑥 갖다 댔다.
"야, 이제 와서 이러니저러니 하는 게 아냐 넌 우리 편이니까 "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그런 짓을 해서 ."
"진화에 개입할 수 있는 거지. 그 자체만으로도 가치는 있어."
"진화‥‥ 이게 진환가?"
다종다양한 DNA가 야마무라 사다코라는 하나의 DNA로 수렴되
어 단일화되어 가는 것‥‥ 이것이 과연 진화라고 할 수 있을까? 생각
해 보면, 그 점이야말로 바로 약점이라 할 수 있었다. 다양성이 있기
때문에 페스트에 감염되어 죽는 자가 있는가 하면, 살아남는 자도 있
다 지구가 빙하로 뒤덮인다고 해도 에스키모인들은 살아남을지도
모른다. 그것 역시 인종의 다양성 덕분이다. 다양성이 없다면 아주
사소한 계기로 종 전체가 멸망해 버릴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만일
야마무라 사다코가 면역 계통에 결함을 갖고 있다면 그 결함은 전 개
체에 계승되어, 사소한 감기 정도로도 큰 타격을 입을 수 있다.
그러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야마무라사다코라는 종의 수명이
다하기를 기다리며 구차하게 살아가는 것말고는 이미 인간에게 남겨
진 길이 없다.
"생물이 왜 진화하는지 아냐?"
류지의 물음에 안도는 잠자코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세상이 넓
다고 해도 이 물음에 절대적인 자신감을 갖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류지는 자신 있게 말했다.
겠지만, 인간의 눈은 무섭도록 복잡한 메커니즘을 갖고 있어. 우연히
피부의 일부가 각막이나 동공으로 변화하고, 안구에서 시신경이 나
와뇌로 연결되어 볼 수가 있게 되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어.
눈이라고 하는 메커니즘이 생겼기 때문에 사물을 볼 수 있게 된 게
아냐. 그 이전에 보고 싶다는 의지가 생명 내부에서부터 솟아나지 않
았다면, 그런 복잡한 메커니즘 따위가 형성될 리 없지 . 바다 생물이
육지로 올라온 것도, 파충류가 하늘을 날았던 것도 우연이 아냐. 그
렇게 하고 싶다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야. 이런 말을 하면 대개의
학자 선생님들은 비 웃으시지 . 신비적인 목적론, 혐오하고 경멸해야
할 사상이라고.
너는 눈 없는 생물의 세계를 상상할 수 있냐? 땅 속을 기는 지렁이
에게는 암흑 속에서 몸에 와 닿는 것만이 세계의 전부야. 바다 밑바
닥에서 흔들리는 말미잘이나 불가사리의 경우에도 붙어 있는 바위의
감촉이나 해수의 흐름만이 세계의 전부야. 그런 생명에게 '본다'는
따위의 개념이 간단히 생겨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완전히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지. 우주의 끝을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절대로
인식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야. 그런데 지구상의 생명은 진화 과정의
어느 한 점에서 '본다'라는 개념을 손에 넣었어. 육지로 올라가고,
하늘을 날고, 마지막에는 문화를 손에 넣었지 . 오랑우탄은 바나나를
인식할 수 있지 . 그러나 절대 문화라는 개념을 인식할 수는 없어 . 인
식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손에 넣고 싶다는 의지만이 어디
에선가 오는 거야. 대체 어디에서 오는 건지는 나도 잘 몰라."
"오호, 너한테도 모르는 게 있냐?"
야유를 담고 안도가 대꾸했다.
"그러니까, 알았냐? 인류는 망하고 그 틈 사이를 야마무라 사다코
의 DNA가 빼앗는다면 그건 결국 인류의 의지라는 거다. "
"멸망을 바라는 종이 어디 있냐?"
"무의식 중에 그렇게 바라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나의 DNA로 통
일되면 개체 차이는 모두 없어져 버려. 전부 같은 체형에다가, 능력
이나 아름답고 추한것의 차이도 없어지지 . 사랑하는 자에 대한 집착
이 없어지고, 전쟁은커녕 싸움도 일어나지 않게 돼. 생과사를 초월
한 절대 평화의 평등한 세계. 죽음은 이제 두려워할 만한 것도 못 돼.
이봐, 너희들은 그런 걸 바라고 있었던 게 아냐?"
류지는 안도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다카노리는 아까부터 같은 자세로 빈 깡통에 모래를 채우며 놀고
있었다 안도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난 달라."
아들의 존재는 특별했다. 안도는 그것을 다른 사람과 똑같이 볼 수
있는 시점 같은 건 갖고 있지 않았다. 지금 그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헤헤 뭐, 좋아."
류지는 애매하게 중얼거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갈 거냐?"
"응, 슬슬 근데 넌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
"미디어가 미치지 않는 무인도 같은 곳에서 부모 자식 사이좋게 사
는 수밖에 없겠지 ,"
"야,과연 너답구나 난인류의 마지막을지켜볼거다 가는데까지
가다 보면 인간의 지혜가 미치지 않는 어떤 의지가 쏟아져 내릴지도
몰라. 놓칠 수 없지 , 그 순간을."
류지는 제방 위에 서서 걷기 시작했다.
"건강해라, 미야시타한테 안부 전해 줘."
안도의 말에 류지는 걸음을 멈추었다.
"마지막으로 또 하나 가르쳐 주지. 인간은 왜 문화적으로 진보를
이루었을까? 인간은 참을성이 많은 동물이야. 하지만 말야, 단 하나,
지루함만은 참아 낼 수가 없는 동물이야. 모든 출발점은 거기에 있는
거지 지루함에서 도망치기 위해 진보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거야.단
일 DNA에 의해 지배받으면 틀림없이 지루해지겠지 . 개체 차이 따윈
될 수 있는 한 있는 게 좋은 거야. 그치만 뭐 , 할 수 없잖아. 그걸 바
라는 인간이 있으니까. 그런데 너 , 무인도 생활이라니 , 지루할 텐데."
한손을 획 올려 흔들어 보이고는 류지가 떠나갔다.
어디에 살겠다는 확실한 계획이 있는건 아니었다 미래가너무막
연했다 치밀하게 계획을 세웠다 해도, 그것이 실현될 거라고 예상할
수는 없다 이제,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살아 나가는 수밖에 어쩔 도
리가 없다.
안도는 셔츠와 바지를 벗고 수영팬티 하나만 걸치고 아들 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아들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자, 가자"
오늘,안도는 아들에게 이제부터 해야 할 일에 관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일러 두었었다 2년 전과 마찬가지로 바다로 헤엄쳐 들어가
물에 빠진다. 하지만 이번엔 2년 전과 달리 물에 빠지기 직전에 손을
꽉 잡는다. 2년 전에 놓친 손을 이번에야말로 서로 단단히 붙잡는 것
시다
야마무라 사다코는 빌딩 옥상의 배기 구에서 태어났을 때,그곳이
예전에 자신이 죽었던 우물 바닥과 똑 같았다고 편지에 썼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힘으로 배기구 밑바닥에서 탈출해야만 비로소 새로운
세계로의 적응이 가능해질 거라는 직감을 얻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아들에게도 똑같은 과정이 필요한 게 아닐까? 안도는 그렇게 생각했
다. 2년 전과 똑같은 상황을 반복해서 다시 경험시켜야 한다.
아들은 극도로 물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극복하지 않으면 일상 생
활에 지장을 초래할 정도의 두려움이었다. 젖은 모래 위를 걷다가 바
닷물이 복사뼈에 닿기만 해도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약속이다, 아빠."
입술을 떨면서 다카노리는 다짐을 받는다.
"그래 , 꼭이다. "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해서 아들이 물의 공포를 극복했을 경우 아
들에게 주어질 상은 이미 준비해 두었다. 엄마를 만나게 해 주는 것
이다
"엄마, 놀라겠지?"
헤어진 아내는 아직 아들이 다시 살아난 것을 모른다. 아내와 아들
이 재회하는 그 순간을 떠올리면 안도는 마음이 설렌다 앞뒤가 맞는
이야기를 궁리해 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예를 들면, 익사한 줄 알
았던 아들이 실은 어선에 의해 구조되어 기억 상실인 채로 지난 2년
동안 낯선 곳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 정도의 이야기라도 괜찮을 것이
다. 어떤 황당무계한 억지라도 다카노리라고 하는 살아 있는 육체를
만지는 순간, 진실로 변하고 말 것이다.
부부로서 다시 시작하는 게 가능할지 어떨지는 아직 별개의 문제
다. 안도는 그렇게 되고 싶었다 아내를 설득할 자신은 절반 정도였
다.
한층 더 큰 파도가 밀려오자 아들의 몸이 등실 떠오르기 시작했다.
비명을 지르며 허리 근처로 매달려 오는 아들을 옆에 끼고 안도는 더
깊은 바닷속으로 걸어갔다. 피부와 피부를 통해 아들의 심장 뛰는 소
리가 쿵쾅거리며 전해져 온다. 붕괴되어 가는 세계를 눈앞에 둔 지
금, 확실한 것은 오직 아들의 심장 고동 소리뿐이다. 아들이 살아 있
다는 느낌이 확실하게 안도에게 전해져 왔다
작기의 말
이 소설은 『링』의 속편이며, 나에겐 네 번째 장편 소설이다. 전작
(前作)이 괜찮은 평가를 받았다고 신이 나서 또 한번 미꾸라지를 낚
아 보겠다는 생각으로 속편을 쓴 것은 아니다. 기획 자체는 『링』이
출판되기 전부터 이루어졌고,시놉시스단계에서 『링』을출판하면서
기획 회의를 거쳤던 것이다 결국 기획부터 완성까지 j년 가까이나
걸린 셈이다
전작은 마치 하이빔 (상향등)을 켜고 하이웨이를 질주하는 것처럼
스토리가 빠르게 전개되는 것이었다면 속편인 이번 작품은 발밑을
작은 손전등으로 비추면서 천천히 출구를 찾아나가는 방식이라, 중
간에 단편이나 중편 마감에 쫓겨 중단시켰던 시기를 제외하고도 족
히 3년이 란 긴 세월이 걸렸다.
지금까지 이토록 고생한 작품은 없다. 속편이라고 하는 수갑과 족
쇄에다가 전작을 능가해야 한다는 압박이 겹쳐 , 몇 번이고 출발선으
로 되돌아가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스토리
전개를 위해, 진부하게 흐를 것 같으면 가차없이 버렸기 때문에 한
장도 쓰지 못한 날이 얼마나 많았던가?작가에게 있어 쓰지 못하는
것만큼 지치는 일은 없다.
하지만 작업을 모두 마친 지금 그 피로감은 상쾌한 기분으로 바뀌
어져 있다. 깊은 한숨과 함께 나밖에 쓸 수 없는 소설을 써 냈다는 충
만감을 맛보고 있는 것이다.
출판사 편집부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출판사의 지원이 없었다면
『링』 속편의 길은 더욱 험난했을 것이다.
또한 의학 분야의 좋은 상담역이 되어 준 나카노 이쿠타로 선생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덕분에 황당무계한 스토리에 어느 정도의 리
얼리티를 지닐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발상의 전환을 도와 준 아내에게, 그리고 빨리 써 내라고 엉덩이를
냅다 차며 프린트를 도와 준 딸들에게도 감사!
스즈키 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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