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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움베르토 에토-푸코의 진자 2

by Casey,Riley 2023. 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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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에트 인 아르카디라 이고.> 그날 밤의 술집 필라데는 황금시대를 
방불케 했다. 혁명 전야 같은 분위기가 팽배해 있는 것 뿐만이 아니다. 
제조업 조합원들이 잣아서 술값 계산서를 떠맡는 거름 밤이었다. 수염을 
기른 파카 차림의 제명 공장 사장이, 머지않은 장래에 국외로 도피할 정장 
차림의 정상배들과 한자리에 앉아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곳이 술집 
필라데밖에 더 있었겠는가. 60년대 초 까지만 해도 수염 기른 사람은 모두 
파시스트였다. 따라서 모두들 이탈로 발보처럼 뺨을 싹싹 밀고 다녀야 
했다. 그런데 68년에 들어오면서부터 저항의 상징이었던 수염이 
그즈음부터는 중도와 보편의 상징이 되어 감으로써 지극히 개인적인 장신 
수단의 하나가 되었다. 일찍이 가짜수엽이 가면 노릇을 하던 시대(남의 
눈에 뜨이기 싫은 사람은 그래서 가짜 수염을 달았다)와는 달리 70년대 
초반부터는 진짜 수염도 가면 노릇을 했다. 그래서 수염을 기르면 아주 
교묘하게 비틀거리거나 아리송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따라서 수염을 
통하여 그것을 기른 사람의 인생관을 추측하기는 불가능했다. 그날 밤 
필라데에서 수염 기른 사람들은 수염을 깨끗이 깎은 사람들, 그래서 
어쩐지 도전적인 느낌을 주는 사람들 앞에서 기를 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야기가 빗나갔다. 벨보와 디오탈레비는 약간 긴장한 모습으로 조금 
전에 파한 저녁자리 이야기를 계속하면서 술집으로 들어섰다. 나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끝난 뒤에야 가라몬드씨와의 그날 저녁 자리 분위기를 
들을 수 있었다.
  벨보는 군말없이 증류 독주를 시켰고, 디오탈레비는 한동안 꾸물럭거려 
봐야 겨우 토닉 워터였다. 우리 뒤에 조그만 테이블이 하나 있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하는 전동차 기관사들이 그 자리를 뜨고 있었다.
  "각설하고, 성당 기사단 전설이 오늘의 도마에 오를 모양인데..."
  디오탈레비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 말씀하기면 곤란합니다. 기록이 있다니까요..."
  "우리는 기록보다는 구전을 더 재미있어하지..."
  벨보가 중얼거렸다.
  "구전이 더 신비스러워, 하느님은 말씀으로써 세상을 창조하셨다네, 전보 
쳐서 창조한 게 아니고..."
  디오탈레비가 웃었다.
  "암, 피아트 룩스, 거기서 스톱,,,,"
  " '데살로니카 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이야긴가요."
  "성당 기사단 얘기 좀 하라니까?"
  벨보가 채근했다.
  "하죠, 어떻게 시작되는고 하니..."
  "<어떻게 시작되는고 하니>로 시작되는 이야기 재미없더라."
  디오탈레비가 핀잔을 주었다.
  "어떻게 시작되는고 하니... 제 1차 십자군 원정 있었지요, 고드프로아는 
성묘 수호자 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왕위를 사퇴하지만, 기어이 이 
성묘를 경배함으로써 서원한 바를 성취합니다. 형의 사퇴에 힘입어 그 
아우인 보드웽은 예루살렘의 초대국왕이 되고요. 이로써 성지에 기독교 
왕국이 섭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을 장악하는 것은 시작에 불과했지요, 
이들의 속셈은 팔레스티나 땅을 모조리 차지하는 것이었으니까요. 당시 
사라센은 몰락의 길을 걷고 있기는 했지만 아주 망했던 것은 아니었으니 
만치 점령자들이나 순례자들의 역정은 여간 고달픈 것이 아니었죠, 보드웽 
2세가 예루살렘을 다스릴 당시인 1118년 위그 드 파양이라는 친구가 
이끄는 아홉 청년이 예루살렘에 도착, <그리스도의 가난한 군병>이라는 
조직을 결성합니다. 일종의 수도회였습니다. 말이 수도회였지 이들에게는 
칼과 방패가 있었어요, 이 수도회는 세 가지 고전적인 미덕인 청빈과 
순결과 복종 이외에 한 가지 서원을 더 세웠어요. 순례자 보호가 
그것이이죠, 이렇게 되자 왕과 주교는 물론이고 예루살렘의 유지들이 돈을 
걷어 주고 이들에게 기사단의 본부를 마련해 준답시고 옛 솔로몬 성전을 
은서지로 제공합니다. 이 때부터 이들은 성당 기사단으로 알려지게 
됩니다."
  "정체는 무엇이었나?"
  "위그를 비롯한 여덟 기사는 십자군이라고 하는 자못 장엄한 분위기에 
홀딱 반한 이상주의자들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뒤에 여기에 합류하게 
되는 젊은이들은 대부분이 애송이 모험가들이었어요, 당시의 예루살렘이 
이른바 골드러시 때의 캘리포니아라고 가정해 보세요. 한 밑천 잡으려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건 당연하지 않겠어요. 당시 젊은이들은, 집에 있어 
전망이 뻔했나 봅니다. 당시의 기사들 중에는 이런 저런 이유로 가출한 
청년들이 많았던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지요, 따라서 당시의 기사단은 
일종의 외인 부대 같은 것으로 보면 될 겁니다. 집안에서, 혹은 사회에서 
사고를 친다...그러면 성당 기사단을 지원하는 거죠, 싸움은 조금만 하고, 
세상 구경은 많이 하고, 그러면서 틈틈이 재미도 좀 보고... 먹여주겠다. 
입혀주겠다. 영혼의 구원이 보너스로 따라붙겠다...어떤 젊은이의 구미인들 
당기지 않았겠어요, 하지만 근무조건이 열악하기는 했어요, 성당 기사가 
된다는 것은 곧 황야에서 구경한다는 것은 고작 다른 성당 기사 아니면 
터키인... 게다가 뙤약볕 아래 말을 달려야 하죠. 갈증으로 죽어 가다못해 
죽어 가는 애마의 동맥을 끊고 그 피라도 마셔야죠..."
  나는 말을 잠깐 끊었다가 계속했다.
  "내가 이야기를 너무 서부극 분위기로 몰아가는 것 같죠? 그러나 
여기에는 서부극에는 없는 제3의 국면 같은 게 있습니다. 이 교단이 
막강해지니까, 집에서 잘 먹고 잘 살던 사람들까지도 여기에 합류하고 
싶어했어요. 게다가, 당시에는 성지로 파견되지 않는 성당 기사도 
있었어요. 말하자면 고향에서 성당 기사 노릇을 할 수 있었던 거지요. 
바야흐로 조직이 복잡해집니다. 성당 기사단이라는 말은 때로는 무법자 
기사단이라는 뜻으로 때로는 낭만적인 기사단이라는 뜻으로 쓰이게 되죠. 
말하자면 여러 가지 뉘앙스를 풍겼던 겁니다. 가령, 성당 기사단이 인종 
우월주의자들이 아니었다는 것 한 가지만 보고도 알 수 있습니다. 인종 
우월주의자 같으면서도 아니었던 것이죠. 성당 기사들은 물론 회교도들과 
싸웠습니다. 그러자고 만들어진 기사단이었으니까요. 그러나 그들은 그냥 
싸운 게 아니고 기사도에 입각해서, 어디까지나 상호 존중하는 정신에 
입각해서 싸웠어요. 한번은 다마스쿠스 회교도 세습 수장의 사자가 
예루살렘으로 옵니다. 그때 예루살렘의 성당 기사들은 이 사자를, 당시에는 
기독교 교회가 되어 있던 조그만 모스크를 내어 주고 그들 나름대로 
기도하는 시간까지 갖게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유럽인이 왔다가 
성소에 회교도가 들어와 있는 것을 보고는 기겁을 하고는 이들을 
몰아내려고 했어요. 그러자 성당 기사들은, 이 옹졸한 유럽 인을 
예루살렘으로 쫓아 버리고 회교도들에게 사과까지 합니다. 그런데 결국 
적과의 이러한 동아리 의식이 성당 기사단의 몰락을 재촉하게 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뒷날 성당 기사단 재판에서 종교 재판관들이 성당 
기사들을 기소하면서 들이댄 죄목 중 하나가 바로 이 배교적인 
회교도들과의 접촉입니다. 접촉한 것은 사실이었을 겁니다. 19세기의 
탐험가들도 아프리카 토인들과 접촉하고 아프리카 병에 걸렸었다니까요. 
수도회에서 정식으로 신학 교육을 받지 못했던 성당 기사들은 기독교 
신학의 요체를 알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아라비아에 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아라비아 족장 차림을 하고 설치고 다니는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상상해 보세요. 아마 비슷할 겁니다. 하지만 이들의 행동 양식을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기욤 드 띠르같이 기독교의 입장에서 역사를 
기술하는 역사가들은 이들을 죽일 놈들로 싸잡아 비방했지요."
  "왜?"
  "성당 기사단의 세력이 지나칠 정도로 급속하게 확산되고 있었거든요. 
성 베르나르가 등장하고부터 특히 그런 양상을 보이고 있었어요. 두 분은 
다 잘 아시겠지만, 생 베르나르는 조직의 명수였습니다. 베네딕트 수도원의 
종교를 개혁하고, 교회로부터 장식적인 모든 요소를 깡그리 청소해 낸 
장본인입니다. 생 베르나르는 비위에 거슬리는 자가 있으면 메카시 
스타일로 공격해 가지고는 기어이 화형주에 다 겁니다. 아멜라르가 이렇게 
당했지요. 사람을 태워 죽일 수 없다면 하다못해 그 사람이 쓴 책이라도 
태웠지요. 물론 십자군을 상대로, <우리는 무기를 들 테니, 너희들은 가서 
싸워라>라고 한 장본인도 바로 생 베르나릅니다."
  "자네, 생 베르나르를 안 좋아하는 모양이군?"
  벨보가 중얼거렸다.
  "내 식으로 말하자면, 생 베르나르는 연옥의 불길 속에서 영원히 타고 
있을 겁니다. <생>은 무슨 빌어먹을 <생>이에요? 하지만 자기 선전의 
수완 하나는 하여튼 대단했던 모양입니다. 단테가 생 베르나르 대접하는 
걸 보세요. 단테는 이자를 마돈나의 오른팔로 그리고 있습니다. 의인을 
상대로 알랑방귀나 뀌는 게 성인이라면 이자에게도 성인의 자격이 있기는 
합니다.
  각설하고…… 성당 기사단 이야기로 돌아가지요. 베르나르는 척 보고는 
성당 기사단에 대한 자기 아이디어에 실용 가능성이 있다는 걸 
간파합니다. 그래서 바로 손을 써서 성당 기사간을 결성한 아홉 기사들의 
뒤를 미는 한편, 이들을 <그리스도의 청빈 기사단>으로 둔갑하게 합니다. 
성당 기사단의 영웅적인 행적은 다 이 사람의 발명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1128년에 이르자 베르나르는 이 아홉 수도 기사들의 존재 
이유를 확고하게 기정 사실화해 주고 새로운 승군 무리의 종규를 마련해 
주기 위해 트로와로 지휘자들을 회동하게 합니다. 그리고는 몇 년 뒤, 종규 
시안을 확정, 72항목에 이르는 시안을 정식 종규로 선포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항목이라는 게 여간 재미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일 미사를 
거르지 말 것, 파문당한 기사와는 친교하지 말 것, 성당 기사단 지원자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성령을 받아들일 것……. 내가 외인 부대 이야기를 왜 
했는지 아시겠습니까? 이들은, 양가죽 혹은 염소 가죽으로 만들어진, 하얀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 털 달린 것은 안 되고, 당시에 유행하던, 주둥이가 
꼬부라진 신발도 신을 수 없었어요. 잠은 속옷 바람으로 자되, 침대 
하나에, 깔개 하나에, 담요 한 장에……."
  "무지하게 더웠을텐데, 냄새깨나 났겠구나……."
  벨보가 거들었다.
  "그러지 않으셔도 조금 있으면 냄세 이야기도 나옵니다. 성당 기사단 
계율에는 끔찍한 대목이 있습니다. 두 기사에 식기는 하나…… 식사 
중에는 묵언입니다. 고기는 한 주일에 세 번, 금요일에는 금식…… 조기 
기상은 기본이지만 전날의 근무가 몹시 고달펐던 경우는 잠을 딱 한 시간 
더 자되 그 대신 잠자리에서 주기도문을 열세 번씩 욀 것 등등……
  계급으로는 기사가 있고, 그 아래로는 준기사, 종자, 수행자, 하인 같은 
졸병이 있는데, 기사에게는 말 세 마리와 종자 하나가 지급됩니다. 기사가 
타는 말의 고삐, 안장, 박차에는 장식이 있어서는 안 되었죠. 무기는 
겉모습은 소박해도 무시무시했던 모양입니다. 사냥은, 사자 사냥을 
제외하고는 절대 금기. 요컨대 기사로서의 삶은 참회와 전투의 연속입니다. 
게다가 정결의 서원에 대해 특히 더 엄격합니다. 하지만 이들이 수도원 
안에서 산 사람들이 아니라는 걸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수도원살이 대신, 
전쟁터에서 싸워야 했던 사람들, 세상살이를 해야 했던 사람들에게 그게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세상살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성당 
기사들에게는 성지가 곧 세상이었으니 당시의 성지는 쥐방구리 
난장판이었던 모양이죠? 성당 기사단 계율은 여성 관계에 대해서도 
또라지게 명문화하고 있습니다. 여성과의 관계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이, 
상대가 자기 어머니, 누이, 그리고 아주머니가 아니면 절대로 입맞춤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 하는 식으로요."
 "아주머니씩이나? 아주머니라는 말이 수상해서, 나 같으면 신경을 좀 
썼겠어. 그런데, 내가 기억하기로 성당 기사들은 남색 혐의도 더러 받는 
것으로 아는데? 끌로소프스끼라는 사람이 쓴 『바포메트』라는 책이 
있었네. 바포메트는 성당 기사들이 섬기던 마신이었던 것으로 아는데?"
 "그 이야기도 곧 하게 됩니다. 하지만 잠깐 이런 상황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몇 달이고,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광야에서 살아야 합니다. 
밤이면, 하루 내내 같은 식기로 밥을 먹던 동료와 한 천막 안에서 자야 
합니다. 지친데다, 춥기도 하고 목도 마르고, 겁도 납니다. 여자가 
그립겠지요.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테베 외인 군단의 사랑…… 남색밖에 더 있겠어?"
  벨보가 반문했다.
 "성당 기사간에는 성당 기사의 서원을 세우지 않은 기사들도 있었습니다. 
도시를 점령하면, 이 기사들은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무어 여자들을 
겁탈합니다. 뱃가죽은 호박색이고 눈은 새카만 무어 여자들을요. 레바논의 
송백나무 숲에서 송진 냄새를 맡으면서 성당 기사들이 무얼 했는지 
아세요? <성당 기사처럼 마시고, 성당 기사처럼 놀고……>, 이런 유행가가 
괜히 나돌았겠어요? 무식한 병사들과 함께 마시고, 함께 욕지거리를 
나누는 참호 속의 군목들이나 마찬가집니다. 성당 기사단의 문장을 모세요. 
말 한 마리에 두 기사가 타고 있어요. 기사 당 말 세 마리씩 지급되었는데 
그럴 필요가 어디 있겠어요? 베르나르의 아이디어였을 겁니다. 청빈을 
드러내는 동시에 성당 기사는 곧 수도사다……. 이걸 강조하려고 문장을 
그렇게 만든 것일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걸 보고 뭘 상상하겠습니까? 
말 잔등에 두 기사가 올라앉아 있는 걸 보고요? 한 기사의 등에 배를 찰싹 
붙이고 앉아 있는 다른 기사를 보고요? 당시의 기사들, 그 문장 때문에 
손가락질이나 받았을 겁니다."
  벨보가 내 얘기를 자르고 들어왔다.
  "지도자라는 것들은 성당 기사들이 그러기를 은근히 바란 셈인가? 
이것만 봐도 생 베르나르가 바보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바보라고요? 천만에요. 베르나르는 수도사였어요. 당시 수도사들은, 
인간의 육체에 관한 한 되게 요상한 관념에 사로잡혀 있었어요. 아까 
이야기를 너무 서부극식으로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죠? 실제로 
그랬어요. 베르나르가, 사랑하는 성당 기사들에게 뭐라고 했을지 아세요? 
하도 재미있어서 한번 인용해 보겠어요. <성당 기사들은 마술쟁이 흉내, 
요술쟁이 흉내를 내지 않는다. 음탕한 노래, 익살스러운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성당 기사는 머리카락을 짧게 깎는다. 이는 사도들이, 남자가 
머리카락을 길게 기르는 것은 창피스러운 노릇이라고 하였습디다. 성당 
기사는 머리를 단정하지 않고, 자주 감지도 않는다. 성당 기사의 수염은 
단정하지 않아도 좋다. 갑옷은 땀과 먼지에 절여져 있어도 좋다. 
운운……>"
  "나 같은 사람은 성당 기사들과 한 집에서는 못 살겠구나>"
  벨보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은자의 풍신은 고루 갖추었군 그래. 은자들은 불결함을 강조함으로써 
육신을 능멸했다니까……. 마카리우스 성자였지 아마……. 원주 꼭대기에 
살면서, 자기 옷에서 떨어진 벼룩을 다시 주워, 같은 하느님의 피조물인즉 
실컷 파먹을 권리가 있다면서 자기 옷 속에다 다시 넣었다는 성자가?"
  디오탈레비의 말에 벨보가 응수했다.
  "그 주두행자는 마카리우스가 아니라 시메온 성자일세. 아래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침 뱉기 좋게 기둥 꼭대기에 살았다지 아마."
  "계몽주의 시대의 이따위 시니시즘, 진절머리가 나. 마카리우스였는지 
시메온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온몸에 벌레를 잔뜩 끓이고 살던 
주두행자가였다는 건 분명해. 하지만 내가 이 방면에 전문가일 수가 없지. 
이방인들 하는 짓거리가 꼴같잖아서 말이야."
  "자네들의 게노라 라비들은 어디 깔끔만 떤 줄 아나?"
  "그분들이 누항살이 하신 것은 자네들 이방인들이 게토에다 쳐넣었기 
때문이지 어디 그분들 취미였던가."
  나는 두 사람의 입씨름을 뜯어말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얘기를 엉뚱한 데로 몰고 가지 마세요. 하루 종일 행군한 신병 교육 
소대를 보신 적 있으시죠? 내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까닭은요, 성당 
기사들이 처한 딜레마를 이해하시려면 하루 종일 행군한 신병 교육 소대를 
떠올릴 필요가 있기 때문이랍니다. 성당 기사들은 종교적이어야 했고 
금욕적이어야 했으며, 게다가 변변히 먹지도 마시지도 쉬지도 못한 채 
사막을 누비며 그리스도 원수들의 목을 베어야 했답니다. 이렇게 벤 목의 
수효가 많으면 많을수록 천국과의 거리는 그 만큼 줄어들었던 거죠. 성당 
기사들의 몸에서는 말이 갈수록 악취가 심해져 가고, 머리에서는 터럭이 
길어 갈 수 밖에요. 그래서 베르나르는, 도시를 점령한 뒤에도 노소를 
막론하고 여자 위로는 절대로 올라가지 못하게 했답니다. 달도 없고, 
사방에서는 모래의 폭풍이 사막을 휩쓰는 무정한 밤이 되어도 성당 기사들 
옆에는 전우밖에는 없었어요. 하지만 전우로부터 무슨 위로를 받을 수 
있겠어요? 생각해 보세요. 수도사 노릇과 칼잡이 노릇을 동시에 해야 하는 
딜레마, 칼로 남의 배를 가르고는 조금 뒤에는 아베 마리아를 불러야 하는 
진퇴유곡의 상황을요. 높은 사람들은, 비록 사촌간이라도 여자 눈은 절대로 
들여다보아서는 안 된다고 하지요……. 며칠 동안 도시를 포위 공격하다가 
마침내 입성하면 다른 십자군들은 금욕주의자들인 성당 기사들 앞에서 
칼리프의 계집들을 거머먹지요……. 살집 좋은 술람미 여자들은 
젖가리개를 풀어헤치고, <저를 가지시되 죽이지만 마소서>하고 
애원하지요……. 베르나르의 소원대로, 털북숭이가 괸 채 악취를 풍풍 
풍기면서도 성당 기사들은 만과 기도문을 읆조렸지요. 이 점에 관해서는 
『묵상』이라는 글에 아주 잘 나와 있답니다."
  "어디에?"
  "후대에, 말하자면 교단의 조직이 완료된 뒤에 조성된 일종의 규약집 
같은 겁니다. 그것은 그렇고…… 전투가 끝나고 난 뒤의 군대만큼 비참한 
것도 없지요. 전투가 끝나면 금기투성입니다. 남을 비방해서도 안 되고, 
기독교도끼리의 결투도 안 되고, 여자와의 수작하는 것도 안 되고, 형제를 
중상하는 것도 안 됩니다. 성당 기사는 노예의 탈주를 방조해도 안 되고, 
상대가 사라센이라고 해서 화를 내면서 위협해서도 안 되고, 말을 
나돌아다니게 해서도 안 되고, 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을 제외한 어떤 
동물도 남에게 양도해서도 안 되고, 허락 없이 바리를 비워서도 안 되고, 
상관의 봉인을 훼손해서도 안 되고, 야밤에 막사 밖으로 나가는 것도 안 
괴도, 허락 없이 공금을 써서도 안 되고, 화가 난다고 옷을 벗어 땅바닥에 
팽개치는 것도 안 됩니다."
  "성당 기사단의 금기 사항을 들으니 우리가 평소에 어떻게 사는지 
알겠어. 해서는 안 된다는걸 제대로 하는 게 곧 보통 사람의 일상 생활일 
테니까."
  벨보가 중얼거렸다.
  디오탈레비가 한 마디 했다.
  "자, 이런 경우를 한번 상상해 보세. 한 성당 기사가, 형제들이 한 말에, 
아니면 형제들이 한 짓에 마음이 몹시 상한 나머지 외출증도 없이, 사라센 
꼬마에게 장닭 서너 마리를 들려 가지고 부대를 빠져 나간다. 그리고는 
도덕이 느슨한 여자를 하나 찾아내어 닭 세 마리를 끌러 주고는 점잖지 
못하게 하룻밤 몸을 산다. 우리의 성당 기사가 이러고 있는데 사라센 
꼬마는 성당 기사의 말을 타고 도망쳐 버린다. 성당 기사는 전투에서 뺀 
것 이상을 땀을 뺀 후줄근한 모습으로, 기가 팍 죽은 모습으로 다리 
사이에다 꼬랑지를 쳐박은 채 야영지로 귀대한다. 이 성당 기사는 말을 
구하려고, 독수리처럼 횃대에 앉아 규칙 위반자를 기다리는 유대 인 
암거래상에게 성당 기사단의 공금을 슬쩍 찔러 넣어 준다……."
  "카아파여, 그것은 네 말이다."
  벨보가 성서를 인용해서 말했다.
  "규칙 위반의 스테레오타이프를 한번 만들어 보자는 거야. 이 성당 
기사는, 사라센 꼬마는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돈으로 말만은 어떻게든 
벌충해 놓으려고 한다. 그런데 동료 성당 기사가 불운한 동료가 당한 일의 
낌새를 알고는, 어느 날 잠 저녁 먹는 자리에서 동료들에게 슬쩍 힌트를 
준다. 그런 단체일수록 선망은 전염성이 강하거든. 이렇게 되자 대장은 
재수 없는 성당 기사를 의심하고, 소문의 주인공은 얼굴을 붉히면서 
단도를 뽑아 들고 형제에게 달려든다……."
  "형제에게 달려드는 것이 아니라 배신자에게 달려드는 것이겠지."
  "그래, 배신자에게 달려든다……. 달려들어 배신자의 뺨을 갈긴다. 
그러면 배신자 역시 단도를 뽑아 들고…… 바야흐로 난투가 벌러진다. 
대장은 이들을 뜯어말리고 질서를 잡느라고 우왕좌왕한다. 다른 형제들은 
낄낄거리고……."
  "성당 기사처럼 마시고 성당 기사처럼 논다는 말이 헛말이 아니었군."
  벨보가 거들었다.
  "하늘에 계신 우리 하느님…… 우리 하느님께서 진퇴양난 
이시로다……."
  나도 좀 과장해서 맞장구를 쳐주었다.
  "드디어 우리 주인공이 화가 났다……. 성당 기사가 화나면 어떻게 
되지?"
  "얼굴이 새파랗게 되지."
  벨보가 대답했다.
  "맞아, 얼굴이 파랗게 질리면, 옷을 벗어 땅바닥에 팽개치지."
  "화가 난 김에, <이까짓 것은 얼마든지 짓밟아 줄 수 있다. 빌어먹을 
성당도 유린할 수 있다>, 이럴 수는 있는 거지요. 그리고는 칼로 봉인을 
뜯어 버리고는, 사라센과 한편이 되겠다고 선언하는 겁니다."
  "규율을 어기되, 한꺼번에 한 여덟 가지를 어겨 버리는 셈인가……"
  "본론으로 들어가서…… 자, 사라센과 한편이 되겠다는 성당 기사가 
생기는 상황을 가정해 봅시다. 그러면 왕의 종교 심판관이 어느 날 이 
기사를 체포하고 새빨갛게 단 쇠꼬챙이를 보여 주면서 묻습니다. <자, 
고백하라……이 건달아, 네가 형제의 후장을 먹었다는 것을 인정해라.>, 
<누구 말이오, 나 말이오? 쇠꼬챙이로 사람 웃기지 마슈. 형제의 후장뿐만 
아니라, 당신의 후장, 교황의 후장까지도 먹을 수 있소. 가까이 있기만 
하다면 필립 왕의 후장도 먹을 용의가 있소!>, 요컨대 그 성당 기사는 
일을 이 지경에 이르기까지 버르집어 버립니다."
  "자백이지……암, 자백이라는 것은 그렇게 받아 내는 것이고 말고. 
지하감옥이 이 기사를 기다릴 테지. 화형주에 올렸을 때 불이 잘 붙도록 
옥사장은 매일 이 기사의 몸에 기름을 바를 것이고……."
  벨보가 변죽을 올렸다.
  "요컨대 애들 장난이었을 거야"
  디오탈레비가 결론을 내렸다.
  우리의 대화에 코에 딸기 모양의 모반이 있는 처녀 하나가 끼여드는 
바람에 끊기고 말았다. 손에 종이를 한 장 들고 온 처녀는 우리에게, 
투옥된 아르헨티나 인 동지들의 구명을 요구하는 탄원서에 서명 좀 
해달라고 말했다. 벨보는 탄원서를 읽어 보지도 않고 서명했다.
  "나보다 더 재수 없는 녀석들이군."
  벨보는 이러면서 탄원서를 디오탈레비에게 넘겨주었다.
  디오탈레비는 어정쩡한 표정으로 벨보를 건너다보기만 했다. 그러자 
벨보가 처녀에게 말했다.
  "서명할 수 없나 봐. 이 친구는 인도의 소수 민족에 속하는데, 그 민족의 
규칙으로는 아무데나 이름을 써서는 안 된다는 거야. 그런데 정부의 
탄압이 심해서 그 민족의 대부분은 다 감옥에 있다지."
  처녀는 별 사람 다 본다는 듯이 디오탈레비를 일별하고는 탄원서를 내게 
내밀었다.
  "누군데요?"
  내가 물었다.
  "누구라니오? 아르헨티나 인 동지들이라고 했잖아요?"
  "무슨 그룹에 속하느냐는 거예요."
  "타쿠아라에 속해요."
  "타쿠아라? 파시스트 그룹 아닌가요?"
  내가, 아르헨티나 운동권 그룹을 잘 아는 듯이 반문했다.
  "파시스트 돼지같으니라고."
  처녀는, 나를 향해 혀를 낼름 내밀고는 가버렸다.

  "그러니까 자네 말의 요지가 뭐야? 성당 기사들은 거러지 상놈들이었다. 
그 말인가?"
  디오탈레비가 물었다.
  "아닙니다. 얘기를 재미있게 하느라고 살을 좀 붙여 본 것 뿐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얘기한 건 모두 하급 기사들에 관한 것들이었어요. 하지만 
기사단은 처음부터 막대한 기부금을 받아 왔는데, 이 기부금 덕에 유럽 
전역으로 세력을 확장해 가고 있었어요. 기부금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말입니다만, 가령 아라공의 알폰소 같은 사람은 자기의 영지 전부를 성당 
기사단에 유증하기까지 했답니다. 서면 유언이 없을 경우, 자기 공국 
자체를 성당 기사단에 넘긴다는 단서를 달았으니까요. 그러자 성당 
기사단에서는 이것을 믿지 못하고, 절충을 벌입니다. 재산을 먼저 받아 
놓자는 심사에서 그렇게 했을 테지요. 이 절충 담합의 결과로 성당 
기사단은 스페인에 있는 성채를 대여섯 개나 받았어요. 포르투갈 왕은 
성당 기사단에 거대한 삼림을 희사합니다. 그런데 당시 이 삼림은 공격, 
무어 인들을 몰아내고 여기에 코임브라를 세웠다고 하는데, 이건 아마 
후대의 과장이 좀 섞여 있을 겁니다. 중요한 것은, 팔레스티나에서 싸우고 
있는 성당 기사들은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러니 어떻게 
되었겠어요? 어떤 사람이 팔레스티나로 간다고 칩시다. 돈이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렇다고 해서 보석이나 금은붙이를 가지고 팔레스티나까지 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이런 성지 순례자들을 위해서 성당 기사단이 
요상한 제도 하나를 만듭니다. 말하자면, 돈 보석이나 금은붙이는 프랑스나 
스페인이나 이탈리아에 있는 성당 기사단 사령부에 맡기고 가는 겁니다. 
성당 기사단에서는 이런 사람들에게 보관증이나 영수증 같은 걸 써 
줍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걸 가지고 팔레스티나로 가서 현금으로 바꿔 
쓰는 겁니다."
  "신용장 같은 것이로군."
  "바로 그겁니다. 성당 기사단은 피렌체에 은행가들이 나타나기 훨씬 
이전에 이미 여행자 수표 제도를 만든 겁니다. 귀족으로 긁어 들인 막대한 
기부금, 자체의 무력 시위, 재산의 위탁 관리를 통한 수수료 챙기기…… 
이런 것들을 통해 성당 기사단은 당시에 이미 다국적 기업이 되어 있었던 
겁니다. 이런 장사를 하자면 이런 데 눈밝은 사람이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 꾀주머니들은 교황 인노켄테우스 2세를 설득해서 성당 기사단에 
이같이 지극히 예외적인 금융 특혜를 베풀게 해주고는 막대한 수수료를 
챙겼지요. 성당 기사단은 이러한 외교적인 노력을 병행한 덕분에 전리품을 
독식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이고, 왕이나 주교나 예루살렘의 고위 
성직자들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던 겁니다. 성당 기사단에게 
설명을 요구할 수 있는 것은 교황뿐이었던 것이지요. 성당 기사단은 
교황청으로부터 십일조를 면제받고 있었던 것은 물론, 저희들이 관리하는 
땅 백성들에게는 십일조를 부과하기까지 했답니다……. 요컨대 이 조직은 
흑막이 있었지만 이것을 조사할 권한을 가진 사람이나 단체는 전무했던 
것입니다. 주교나 영주들이 이들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닙니까? 하지만 당시 이들 없이는 되는 일도 없었어요. 십자군은 기강이 
엄정한 군대였습니다. 십자군은, 어디로 가는 것인지, 그곳에 가면 무엇이 
있을 것인지, 아무 것도 모르는 채 그저 싸우고, 이기고, 철군하고는 
했습니다. 그러나 성당 기사단은 이와 정반대였지요. 성당 기사단은 적을 
다루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고, 지역 사정에도 아주 밝았으며, 싸우는 
기술도 십자군보다는 한 수 위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교단으로서의 성당 
기사단은 엄연한 다국적 사업체였던 것입니다. 공격군이 더할 나위 없이 
용감하다는 소문이 없었던들 성당 기사단의 위명이 도무지 가능하지 
않기는 했겠습니다만……"
  "용감한 것은 허장성세였던가?"
  디오탈레비가 물었다.
  "대개는요. 말하자면 정치적 역량 및 행정적인 수완과, 머리보다는 
배짱을 믿는 그린베레 식 특공 능력의 눈부신 절충이었지요. 아스칼롱 
이야기가 좋은 본보기가 되겠군요."
  "어디 들어보세."
  탐욕스러운 눈길로 돌로레스라는 처녀를 좇느라고 내 이야기에서 멀어져 
있던 벨보가 의자를 당겼다.
  "아스칼롱 이야기라면 나도 좀 들어야 해요."
  처녀도 끼여들었다.
  "좋아요, 하지요. 어느 날, 프랑스 국왕,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예루살렘 왕 보드웽 3세, 성당 기사단 사령관, 병원 기사단 사령관이 만장 
일치로 아스칼롱을 포위하기로 결의했어요. 왕, 대신들, 사교들, 십자가와 
군기를 든 사제들, 티로, 나자렛, 카이사리아의 주교들…… 이들이 모두 
공격군에 가담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 왕의 적기와 국기는 하늘에 펄펄 
날고, 적의 성채 근방으로는 군막이 쫑긋쫑긋 서고, 북소리 둥둥 
울리고…… 그런 잔치판이 없었지요. 아스칼롱에는 150여 개의 방어용 
성루가 있었고, 주민들은 오래 전부터 포위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습니다. 
집집의 벽이라는 벽에는 모두 구멍이 뚫려 있었어요. 그 구멍이 모두 
화살을 쏘아 보낼 구멍이었으니, 집이 아니라 성채 속의 성채였던 거지요. 
성당 기사들이 싸움에서는 십자군보다 한 수 위였다고 했죠? 성당 
기사단은 이걸 다 알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성당 기사단에서는 이걸 
예견하고 파성추와 목탑을 만들었습니다. 파성추나 목탑 같은 거 잘 
아시지요? 둘 다 밑에 바퀴가 달려 있는 거대한 공격용 구조물입니다. 
투석기가 성채 안으로 바위를 쏘아 보내는 틈을 타서 기사들은 파성추로 
성벽을 허무는 동시에 목탑에 올라가 선 안으로 바위를 쏘고, 창을 던지고, 
불화살을 쏘는 겁니다. 이렇게 되자 아스칼롱 방위군은 목탑에다 불을 
지릅니다. 하지만 풍향이 좋지 않았어요. 오히려 성채에 불이 붙고 
말았으니까요. 성벽의 갓돌도 일부가 허물어집니다. 공격군이 그 틈을 
놓칠리 없지요. 그런데 이때부터 묘한 일이 벌어집니다. 성당 기사단 
사령관이 하고많은 공격군을 두고 저희 성당 기사들을 주력 부대로 편성, 
성벽의 갓돌을 헐어 내고 입성하게 합니다. 비아냥거리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성당 기사단 사령관이 전리품을 독식하려고 그랬다고 
주장합니다. 성당 기사단 쪽에서는, 허물어진 성벽이 적의 함정인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용감하기로 소문난 성당 기사들을 들여보냈다고 
주장합니다. 어쨌든 40명에 이르는 성당 기사들은 갓돌 허물어진 성벽을 
통해 입성한 뒤에야, 아뿔사, 하게 됩니다. 사라센 인들이 이들을 덮쳐 
바위를 굴리고 창을 던집니다. 대부분의 성당 기사들은 성당 기사단 
특공대를 전멸시킨 뒤에야 성벽의 갓돌을 제자리에 끼우고 기사들의 
시체를 성벽에 내걸고는 온갖 음탕한 몸짓으로 기독교도들을 놀려댑니다."
  "무어 인들 잔인한 건 알아줘야 해"
  벨보의 반응이었다.
  "애들 장난이야."
  디오탈레비의 대꾸였다.
  "당신네들의 이 성당 기사들 그거 대단한 문제아들이었군요.'
  돌로레스가 혀를 내둘렀다.
  "톰과 제리가 따로 없군."
  벨보가 중얼거렸다.

  나는 죄 의식을 느꼈다. 어쨌거나 나는 2년 동안을 성당 기사단과 함께 
살아온 셈이었다. 나는 그들을 좋아했다. 그런데도 듣는 사람의 속물 
근성에 야합해서 메뉴를 짜다 보니 성당 기사들을 만화 주인공같이 묘사해 
내고 만 셈이었다. 이 모두가 저 칠칠치 못한 역사가 기욤 드 띠르 탓이다. 
내 눈에는 성당 기사들의 위용이 보이는 듯하다. 바람에 휘날리는 수염, 
불꽃 같은 눈빛, 눈같이 흰 제복 위로 선연하게 드러나는 선홍색 십자가, 
하얀 바탕에 검은 무늬로 그려진 보샹 깃발이 분에 보이는 듯하다. 그들은 
죽음의 영광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어서 그렇게 용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생 베르나르가 그들에게 요구한 땀은 하찮은 것에 지나지 
않았으나 바로 그 하찮은 것이, 세상을 하직하면서 입가에 떠오르게 되는 
그들의 미소를 영광되게 할 터였다. 자끄 드 비트리의 말마따나 그들은 
싸움터에서는 사자였고, 평화시에는 순한 양이었다. 그들은 싸울 때는 
용감했고 기도할 때는 신심이 깊었다. 그들은 적에게는 잔혹했지만 
형제에게는 자애로웠다. 흑백으로 된 그들의 깃발도, 그리스도의 친구들 
눈에는 정결의 표상으로, 그리스도의 원수들 눈에는 엄혹의 상징으로 
보였을 터였다.
  믿음의 장렬한 승리, 기사도 시대의 황혼을 가른 한 줄기 섬광……. 내가 
곧 성당 기사단의 조앵빌이 될 터인데, 저 늙다리 시인 아리오스토의 말에 
귀 기울일 것은 또 무엇인가. 『성왕 루이 전』의 저자인 조앵빌은, 
기록관으로서 군인으로서 성왕 루이를 수행하여 성지까지 다녀온 걸출한 
인물이다. 나는 성당 기사단에 대한 조앵빌의 기록을 떠올린다. 조앵빌이 
이를 기록한 것은 성당 기사단이 창설되고 나서 180년이 지난 시점, 
사람들의 기억을 들추어내고 이를 기록하기에는 너무나 긴 세월이다. 
멜리장드 여왕, 나왕 보드웽 4세 같은 영웅적인 인물은 유령처럼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시점, 레바논을 피로 물들였던 저 내란도 종막을 고하던 
시점, 예루살렘은 한 차례 적의 수중으로 떨어지고, 적염 황제 프리드리히 
1세가 킬리키아에서 익사하고, 사자왕 리처드가 굴욕적인 패전에 쫓기어 
성당 기사로 변장하고 환국한 시점이다. 결국 기독교도들은 이 싸움에서 
패배한 셈이다. 무어 인들은, 상호 독립국으로서의 권위를 주장하느라고 
동맹을 맺는 데는 난색을 보였으니 이슬람 문화의 수호에는 일치 단결하는 
데 흔쾌하게 동의했다. 그들은 아라비아의 철학자 아비체나를 읽고 
있었으니 유럽인들같이 무식하지도 않았다. 조잡하고, 저급하고, 
야만적이고, 게르만적인 유럽 문화에 견주면 더할 나위없이 너그럽고, 
신비스럽고, 자유론운 이슬람 문화와 근 두세기에 걸쳐 살을 비벼 
왔으면서도 결국 그 유혹에 압도당하지 않았다는 것은 유럽 인들이 
무식하기 때문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 때문일 수 있는가. 아니나 다를까. 
1244년 치명적이고도 결정적인 예루살렘 함락이 뒤따랐다. 150년 전에 
시작된 전쟁에서 기독교가 패한 것이다. 기독교도들은, 평화의 노래와 
레바논의 송백나무 향내가 진동하는 그 땅에다 무기를 내려놓지 않느면 안 
되었다. 가련한 성당 기사들이여, 그대들의 무용이 헛되구나.
  영광이 퇴색하여 저만치 물러선 그들에게 남은 것은 우수뿐……. 
이렇듯이 우수에 젖어 있던 그들이, 회교 신비주의의 교리, 숨겨진 보고 
같은 이교도의 진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어쩌면 지금까지도 광기와 열망에 들린 사람들의 꿈을 어지럽히는 성당 
기사단의 전설, 씌어진 적도 없고, 고삐에서 풀려 본 적도 없는 전능한 
힘의 신화는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것인 지도 모른다.
  신화가 낙일을 맞고 있던 조앵빌의 시대에만 하더라도, 토마스 
아퀴나스와 겸상을 나눈 바도 있는 성왕 루이는, 우둔한 승리자에 의해 두 
세기의 꿈이 물거품으로 돌아갔슴에도 불구하고 십자군을 믿었다. 십자군 
원정은 다시 시작할 가기차 있는 것일까……. 루이 왕은 그럴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성당 기사단은 출전 준비가 완료된 상황이었고 그럴 
마음의 준비도 갖추어져 있었다. 그들은 전쟁이 직업이었으므로 루이 왕을 
따르기로 했다. 하기야 십자군 원정없이 성당 기사단의 존재가 합리화될 
수 없기도 했다.
  루이 왕은 바다 쪽에서 다미에타를 공격했다. 적국의 해변에는 기치 
창검과 도끼와 왕기와 방패와 반월도가 낭자했다. 햇빛을 받고 금빛으로 
빛나는 무기를 손에 든 미남 용사 조앵빌은 기사도 정신으로 무장한 
무사답게,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기어이 다미에타에 상륙하기로 
마음먹었다고 쓰고 있다. 그는 그래서 이렇게 호령한다.
  "충직한 신민들이여, 사랑으로 무장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무적이다. 이 
전투에서 패배하면 우리는 순교자가 된다. 승리하면 하느님의 영광은 더욱 
빛날 것이다."
  성당 기사들은 이 말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성당 기사들은 기사의 귀감 
노릇을 해야 하는 것으로 훈련되어 있었다. 따라서 성당 기사들은 
저희들이 기사의 귀감이라는 것을 행동으로 증명해 보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은 광기에 사로잡힌 채 루이 왕의 뒤를 따랐다.
  믿어지지 않게도 상륙 작전은 성공이었다. 또한 한 차례 믿어지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사라센 군이 다미에타를 버리고 퇴각한 것이었다. 위계가 
있을 것으로 판단한 루이 왕은 입성을 망설였지만, 위계 같은 것은 없었다. 
입성하기만 하면 다미에타 도성은 루이 왕의 것이 될 터였다. 그 많은 
재물과, 루이 왕이 곧 기독교 교회로 만들 터인 수많은 회교 사원 역시 
루이 왕의 것이 될 터였다. 다음 진격 목표 걱정도 해야 할 터였다. 
카이로? 알렉산드리아? 그래야 이집트의 심장부를 치고 들어갈 수 있을 
것이므로…….
  그러나 이 원정대에는 엉덩이에 뿔이 난 천재가 하나 있었다. 병적으로 
승리의 영광에 집착하던 왕제인 아르투아 백작 로베르가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는 책임감이 없는 전형적인 차자였다. 그는 루이 왕에게 
이집트의 심장부인 카이로로 진격해야 한다고 진언했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진군하던 성당 기사단도 이 즈음에는 어느 정도 정신이 
해이해져 있었다. 왕이 성당 기사단에 영을 내려 산발적인 전투를 피하게 
했는데도 불구하고 지휘관은 자신감만 믿고 이 영을 어겼다. 성당 기사단 
사령관은 술탄의 노예들로 구성된 한 무리 오합지졸을 보고 호령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저자들을 쳐라! 저것들을 눈 앞에 용납하는 치욕을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노라!"
  사라센은 만수라 근처의 강 가에 포진하고 있었다. 프랑스군은 둑을 
막아 그 위로 길을 내고 막사 주위에는 이동식 방어용 탑을 쌓았다. 그런 
사라센이 비잔티움으로부터 그리스 화약통 사용법을 배운 것을 뉘 
알았으랴. 그리스 화약통이라는 것은 앞 부분은 통으로 되어있으나 꼬리는 
창과 비슷하다. 불을 붙이면 이 화약통은 번개같이 혹은 비룡같이 난다.
이 화약통이 떨어지자 기독교군 막사에는 불이 붙어 환하기가 대낮 
같았다.
  막사가 불탈 동안 사라센의 반역자인 한 베두윈 전사가 루이 왕에게 
금화 3백 베장트만 주면, 물이 얕은 여울목을 가르쳐 주겠노라고 말했다. 
왕은 그 말을 믿었다. 여울을 건너기는 쉽지 않았다. 수많은 기사들이 
익사하거나 급류에 떠내려갔다. 거기에 대안에는 3백 명에 이르는 사라센 
기병대가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공격군이 무리한 공격을 감행해서 주력 
부대를 대안에 상륙시켰을 때 전위는 성당 기사단이었다. 아르투아 백작의 
부대는 바로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회교도 기병은 달아났다. 성당 
기사단이 뒤따라오는 기독교군을 기다리고 있을 동안 아르투아 백작이 
지휘하던 부대는 도주하는 적군을 추격했다.
  기다렸으면 좋았을 것을……. 불명예를 죽음보다 싫어하는 성당 
기사단은 추격대에 합류했다. 그러나 이들이 아르투아 부대를 따라잡은 
것은 이미 그 부대가 적의 진영을 깨뜨리고 살육전을 벌이고 있을 때였다. 
회교군은 만수라로 퇴각했다. 이것 역시 아르투아가 바라던 바였다. 그는 
회교군을 추격하여 만수라롤 들어갔다. 성당 기사단에서는 거기에서 
아르투아를 제지하려고 했다. 성당 기사단의 사령관이던 질르는 
아르투아에게, 그만하면 어느 누구의 공훈도 앞지를 것이라고 간언했다. 
그러나 영광에 굶주린 아르투아는, 성당 기사단을 겁쟁이들의 집단으로 
매도하면서, 성당 기사단과 병원 기사단이 자기만큼 싸워 주었더라면 그 
지역은 이미 오래 전에 정복되었을 거라고 호령했다. 그는 핏줄에 
사나이의 피가 흐르는 사나이는 그 경우에 어떻게 처신하는지 두 기사단 
앞에서 보여 주려고 했다. 아르투아가 해도 좋을 말은 아니었다. 
무용이라면 프랑스 군에 결코 뒤질 수 없던 성당 기사단으로서는 그것을 
행동으로 보여 줄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 군과 성당 기사단은 성 안으로 
쳐들어가 저항하는 적군을 반대편 성벽으로 밀어부쳤다. 그러나 한참 
밀어부친 뒤에야 성당 기사들은 아스칼롱에서 저지르던 실수를 고스란히 
되풀이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일부 기독교군이 술탄의 궁전을 뒤짐질할 
즈음. 회교군이 잔병을 모아 도적 무리와 다를 것이 없는 기독교군을 덮친 
것이었다.
  성당 기사단은 탐욕에 눈이 멀어 또 한 차례 일을 그르친 것일까? 
혹자는 입성하기 직전에 성당 기사단의 사령관이 아르투아에게 다음과 
같이 간곡하게 혹은 근엄하게 진언했다고 한다.
  "백작, 나와 내 형제들이 겁을 집어먹고 있는 것은 아니올시다. 우리는 
백작을 따라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간 길을 되짚어 나올 수 있을지 
그것은 심히 의심스럽습니다."
  그의 말이 옳았다. 아르투아는 2백80명에 이르는 성당 기사들과 죽음을 
당했다.
  패배 정도가 아니라 치욕이었다. 그러나 조앵빌은 이것을 치욕으로 
기록하는 대신 전쟁의 비장한 아름다움으로 기록하고 있다.
  조앵빌의 붓끝은 춤이라도 추듯이 경쾌하게 수많은 싸움터와 싸움판을 
누빈다. 잘린 머리가 도처에 뒹굴고, 하느님을 부르는 소리가 도처에 
낭자하다. 왕은 충직한 신민의 주검 앞에서 눈물을 뿌린다. 모든 묘사는 
총천연색이다. 선홍빛으로 물든 안장, 금박 입힌 마구, 노란 사막의 붉은 
태양 아래서 빛나는 투구와 칼, 그 배경을 이루는 쪽빛 바다……. 그러나 
알아야 한다. 성당 기사들 역시 그런 전장에서 죽어 가고 있었음을.
  조앵빌의 시각은 말잔등에서 떨어졌을 때가 다르고, 다른 말 한 마리를 
잡아탔을 때가 다르다. 말하자면 수직으로 수평으로 변화 무쌍한 것이다. 
세부적인 장면에는 초점이 잘 맞는데 원경에서는 약한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일 대 일의 사트를 그릴 때도 있다. 그런데 그 상황 묘사에 일관성이 
없다. 조앵빌은 와농 공작의 구원을 청하러 간다. 터키 인 하나가 외마디 
소리를 지르면서 창을 던진다. 조앵빌의 말이 폭싹 꼬꾸라진다. 말 머리 
위에 스러졌던 조앵빌은 일어나 칼을 뽑아 든다. 그러자 에라르 드 시베리 
기사(주여, 그의 명예를 지키소서)는 빈 집 한 채를 손가락질한다. 
기독교군은 그 빈 집에 숨어 위기를 모면하는가 싶은 순간에 터키 기병의 
습격을 받는다. 프레데릭 드 로뻬이가 뒤에서 날아온 창에 맞는다. 
<이로써 난 상처가 어찌나 컸던지 거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피는 술통에서 
콸콸콸 쏟아지는 포도주 같았다.> 시베리는 날아온 창에 얼굴을 맞았는데, 
<이 바람에 창날에 잘린 코가 입술 위에 매달린 채 대롱거렸다>. 원병이 
오기까지 기독교군은 이런 것으로 쓰러져 간다. 조앵빌은 빈집에서 나와 
다른 싸움판에 끼어든다. 이 싸움판에서는 더 많은 기독교군이 죽어 간다. 
도움을 청하는 소리, 죽어 가는 병사들이 성 야고보를 부르는 소리가 
낭자하다. 스와송 백작이 칼을 휘두르며 호령한다.
  "조앵빌, 개들이 짖겠다면 짖게 내버려두게나. 하느님이 보우하사. 
자네와 나는 고향 집에서 마누라와 함께 기필코 오늘의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네."
  루이 왕이 가까이 있는 기사에게, 아우 아르투아 백작의 안위를 묻는다. 
병원 기사단 사령관인 앙리 드 로네이가 대답한다.
  "좋은 소식입니다. 천국으로 들어갔답니다."
  그러자 루이 왕이 울먹인다.
  "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주님을 찬양할지라."
  조앵빌이 그런 것처럼 이 싸움판이 항상 춤판 같았던 것은 아니다. 
사령관 기욤 드 사나크는 그리스 화약통을 맞는 바람에 불에 타죽었다. 
시체가 곳곳에서 썩어 가고 있었는 데다 의약품 공급이 턱없이 모자라 
수많은 군병들이 괴혈병으로 죽어 갔다. 결국 성왕 루이의 군대는 
퇴각했다. 왕 자신은 적리에 걸려 있었다. 그래서 전투 중에 대변보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는 엉덩이가 닿는 안장에다 아예 구멍을 파놓아야 
했다. 다미에타는 다시 적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왕비는 사라센과 협상을 
벌이고 50만 리브르를 치르고, 나서야 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십자군 원정은 그릇된 믿음에서 발단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루이 왕은 생 장 다크르에서부터 개선 장군으로 대접받았다. 성직자를 
비롯, 남녀노소가 두루 나와 그를 맞았다. 성당 기사단은 바람의 방향을 
재빨리 감지하고 다마스쿠스에서 협상할 차비를 차렸다. 이 협상 무대에서 
자기가 소외된 것을 안 루이 왕은 불같이 화를 내며 회교도 사자 앞에서 
성당 기사단의 새 사령관을 모욕했다. 적군과의 약속을 지켜야 했던 
사령관은 루이 왕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 성당 기사들이, 십자군 
원정에서 쌓은 공훈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단지 루이 왕만이 
자기의 권위를 시위하기 위해 그를 욕보인 것이었다. 이로부터 반세기 
뒤에는 이 루이의 후임인 필립이 이번에는 자기 권세를 시위할 목적으로 
성당 기사들을 화형주에 매달게 된다.
  1291년 생 장 다크르는 무어 인들에게 유린당하고 주민들은 모두 
이교도의 칼날 아래 이슬이 된다. 이로써 예루살렘의 기독교 왕국은 
영원히 사라진다. 성당 기사단의 재산과 기사 수는 그 전에 견주어 
엄청나게 늘어나고 그 권세 또한 같은 정도로 늘어나게 된다. 그러나 
성지에서 싸울 목적으로 이루어진 집단인데도 성당 기사가 단 한 사람도 
남아 나지 못했다.
  성당 기사들은 유럽 전역, 그리고 파리 성당 같은 자기네 기사단에 
은거하되 호화스럽게 살았다. 그러나 꿈은 여전해서 그들은 옛날 호시절에 
보았던,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고원 지대를 꿈꾸고, 아름다운 노래를 듣던 
성 마리아 라테란의 교회를 꿈꾸었다. 어디 그 뿐이랴. 싸움터에서 
돌아오던 날의 그 흥청거리던 잔치 마당의 꿈도 꾸었다. 대장간, 마구상, 
2천 마리의 말이 쉬던 마구간, 전장으로 달려나가던, 기사와 종자와 
하인으로 이루어진 부대, 하얀 제복 위에서 반짝이던 선홍색 십자가, 
시종들이 입던 색깔이 짙은 군복, 커다란 터번 위로 금박 입힌 투구를 
쓰던 술탄의 경호병, 순례자, 멋쟁이, 순찰병과 탈영병이 북적거리던 
사거리, 돈궤에 돈이 가득 찰 때의 즐거움, 수많은 배가 본국으로 혹은 
섬으로 혹은 소아시아로 떠나던 항구…….
  가련한 성당 기사들이여, 이 모든 것은 끝났다.

  그날 밤 술집 필라데에서, 벨보가 부득부득 고집을 부려 가면서 산 다섯 
잔의 위스키를 마시면서 나는 깨달았다. 그 꿈은 성당 기사들이 꾼 꿈이 
아니라 내가 그 자리에서 창피하게도 큰 소리로 꾼 꿈이었음을……. 
하지만 내 이야기는 꽤 아름답고 감동적으로 들렸던 모양이다. 돌로레스의 
눈 가장 자리에는 눈물이 번져 있었다. 디오탈레비는 두 잔째의 
토닉워터를 시켜 놓고 천사처럼 하늘을, 정확하게 말하면, 신비스러울 
건덕지가 하나도 없는 술집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중얼거렸다.
  "성당 기사단이라는 거, 결국은 그런 거 아니겠어? 길 잃어 한심한 영혼, 
길 잃은 성자, 기사, 종자, 돈놀이꾼, 영웅……."
  "굉장한 사람들이었던 것만은 분명하지……. 그런데 까소봉, 당신 말 좀 
들어 보세. 당신 성당 기사들 좋아하나?"
  벨보가, 나의 긴 이야기를 요약하려는 듯이 물었다.
  "논문의 주제가 이것이니 어쩌겠어요? 매독을 주제로 논문을 쓰다 보면 
스피로헤타 팔리다 균에까지 정이 푹 들어 버리는 법입니다."
  "재미있어요. 흡사 영화 같아요. 하지만 나는 지금 가야 해요. 내일 
아침까지 광고지 시안을 만들어야 하거든요. 마렐리 공장에 가서 시위 
주동도 해야 하고요."
  "잘 해봐요. 당신이라면 잘할거라."
  벨보는 털복숭이 손으로 돌로레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마지막 
잔이라고 우기면서 위스키를 주문했다.
  "자정이 다 됐다는 거 알고 있어. 이 말은 아무에게나 하는 말이 아니고 
디오탈레비에게만 특별히 하는 말이야. 하지만 계속하세. 재판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누가, 무엇을, 언제, 왜?"
  "좋고 말고……<쿠르>,<쿠오모도>,<쿠안도>……"
  디오탈레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14.  
  침묵과 역설과 불가사의와 우행이 복잡하게 어우러진 재판.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져 보이는 것이 바로 우행이었다. 우행이라는 것은 설명이 
불가능해서, 세월이 경과하면서 불가사의에 편입되고 만다. 동지를 
전후해서 얼마간, 나는 불가사의의 근원은 바로 우행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전망경실에 있던 날 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가사의한 것, 따라서 
알다가도 모를 것은 <광기>의 가면을 쓴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 나는 온 세상이 바로 불가사의, 무해한 불가사의라고 
믿기에 이른다. 그 안에 무슨 진리가 있겠거니 여기고 해석을 시도하는 
바람에 자꾸만 어렵게만 꼬여 가는 불가사의…….

  성지에 있던 기독교 왕국이 무너지면서 성당 기사단은 설자리를 잃었다. 
아니, 잃었다기보다는 겨냥을 바꾸었다는 편이 옳겠다. 그들은 막대한 
재산을 관리하는 것으로 소일했다. 강력한 중앙 집권을 노리던 군주인 
공정왕 필립이 이런 성당 기사단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은 당연하다. 당시 
성당 기사단은 국왕의 통제가 미치지 못하는, 말하자면 치외 법권 지대에 
위치해 있었다. 성당 기사단 사령관은 혈맹 집단의 맹주였다. 그는 군대를 
지휘했고 광활한 토지를 관리했으며 황제로 군림하면서 그 치외 법권 
지대의 절대권을 오롯이 누렸다. 프랑스의 재보라는 재보는 모두 파리에 
본부를 둔 성당 기사단에 있었다. 왕권도 거기에는 미치지 못했다. 성당 
기사단은 재산의 수탁 기관, 대행 기관, 국왕의 이름으로나 가능했던 
재산권의 집행 기관이었다. 성당 기사단 동아리는 기금의 출납을 자유롭게 
관리했고, 모든 종류의 특권과 면책 특권을 두루 찾아 누렸다. 요컨대 
국왕의 돈줄이 성당 기사단이었다. 이런 상황에 군주가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수 있었겠는가.
  두들겨 줄 수 없으면 한편으로 끌어들인다……. 필립 왕은 성당 
기사단을 정화하기에 앞서 일단 추파를 던져 보았다. 왕의 요구는 
묵살되었다. 그것은 어떤 왕이 되었든, 왕으로서는 감내하기 어려운 
모욕이었다. 필립 왕은 교황에게, 교황청에서 성당 기사단과 병원 기사단 
문제에 개입하고, 이 두 교단을 합병한 뒤에 자기 아들 중 하나에게 
관리를 맡기면 어떠하겠느냐고 제안했다. 그러나 이런 즈음에 망명한 군주 
모양으로 사이프러스에 살고 있던 성당 기사단의 사령관 자끄 드 몰레가 
거들먹거리며 파리로 상경했다. 자끄 드 몰레는, 겉으로 보면 국왕의 
합병안에 일리가 있음을 인정하는 탄원서, 그러나 실제로는 그 부당성을 
강조하는 탄원서를 교황에게 제출했다. 몰레는, 성당 기사단은 병원 
기사단보다 재정이 가며한즉, 이 양자를 병합한다는 것은 전자의 재정으로 
후자를 살찌우는 것이고 따라서 성당 기사들의 사기를 크게 저하시킬 
우려가 있는 처사라고 역설했다. 첫 라운드는 일단 몰레의 승리였다. 병합 
계획은 보류되었다.
  남은 방법은 중상 모략이었다. 국왕에게는, 이 방안에 관한 한 썩 괜찮은 
카드가 한 장 있었다. 파리에는 오래 전부터 성당 기사단에 대한 한 가지 
소문이 떠돌고 있었다. 자, 사고 방식이 온전한 프랑스 인들에게, 
식민지에게는 십일조를 긁어 들이면서도 성묘를 수호하는 피붙이들에게는 
한 푼도 내어 놓지 않는 이 성당 기사단이라는 이름의 <식민지 
거주민들>이 어떻게 비쳤을까? 성당 기사들이 프랑스 인들인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프랑스 인들이었던 것은 아니다. 
사람들을 성당 기사들을 <삐에 누아르>, 즉 <검은 발>이라고 불렀는데 
이 말은 <신출내기>라는 뜻이다. 성당 기사들은 이국적인 차림을 하고 
돌아다니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들 중에는 물론 현지에서 쓰기 버릇해서 
그랬을 테지만 파리에서까지 불구하고 이들의 태도는 상당히 위압적이고 
분위기가 야성적이었다는 것은 상식에 속했다. 교황 이노켄테우스 3세가 
일찍이「성당 기사단의 오만 불손함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칙서를 낸 
적도 있을 정도였다. 성당 기사들은 청빈을 서약한 사람들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생활 방식은 거들먹거리기를 좋아하는 귀족의 생활이었다. 
이들에게는 신흥 상인 계급의 탐욕과 근위 기병대의 오만 불손함이 
있었다.
  오래지 않아 성당 기사들이 사실은 동성 연예자들, 이교도들, 족보가 
불분명한 털보 우두머리를 섬기는 우상 숭배자들이라는 소문이 항간에 
나돌았다. 산옹계열에 속하는 회교도 암살 비밀 결사와 모종의 거래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스마일 파 비의를 믿는지도 모른다는 소문도 
떠돌았다. 필립 왕과 그 측근들은 이 소문을 교묘하게 이용했다.
  필립 왕에게는 뱃속이 시커먼 두 천재가 있었으니 마리니와 노가레가 
바로 이들이다. 마리니는, 성당 기사단의 재산 관리에 손을 대러, 이 
재산의 상당 부분이 병원 기사단으로 넘어가기까지 왕을 대산히여 이를 
감독한 장본인이다. 이 재산에서 범뭄 대신이었던 노가레는 1303년에 터진 
이른바 아아니 사건의 막후 조종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아나니 사건이란, 
시아라 콜로나라는 인물이 아나니에서 교황 보니파치우스 8세의 뺨을 친 
사건을 말한다. 교황은 이의 모욕감을 이기지 못하고 한 달 뒤에 세상을 
떠났다.
  그 다음으로는 에스켕 드 플로아랑이라는 사람이 전면으로 떠오른다. 
불특정 범죄 혐의를 받고 수감되어 사형을 앞두고 있던 플로아랑은 
감방에서 우연히 성당 기사단 출신 배교자를 만나고 이 배교자로부터 
무서운 고백을 듣게 된다. 플로아랑은, 사형을 면제하고 상당한 액수의 
사례금을 확약 받은 뒤에 배교자로부터 알아낸 것을 당국에 밀고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플로아랑이 감방에서 듣고 당국에 밀고한 것은, 당시 
항간에 떠돌던 소문과 그대로 일치했다. 말하자면 소문이, 종교 재판 
조사관들에 의해 정식 공술로 확인된 계제에 이른 것이다. 필립 왕은, 
플로아랑의 충격적인 폭로를 그즈음 아비뇽의 교황석을 차지하고 있던 
교황 클레멘스 5세에게 넘긴다. 교황 클레멘스는 폭로 사실의 상당 부분에 
근거가 있을 것이라고 빋는다. 그러나 아무리 교황이라도 성당 기사단 
문제에 개입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버티는 데까지 버티다가 
1307년에 이르러서야 공식적인 공개 심문회를 열자는 필립 왕의 제안에 
동의한다. 이윽고 성당 기사단의 사령관 몰레가 소환된다. 몰레는 양심의 
결백을 주장한다. 왕실 쪽에서 볼 때, 몰레는 여전히 교황청의 공식 행사에 
등장하는 왕자 중의 왕자, 따라서 섣불리 건드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런데 클레멘스 5세가 이 문제에서 발을 뽑으려는 눈치를 보인다. 필립 
왕은 교황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교황이 성당 기사단에, 증거 인멸에 
필료한 시간을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이다. 성당 기사들은 충전등화와의 위기가 닥쳐오고 있는 줄도 
모르고 저희 영지에서 질창한 술자치와 신성모독을 계속한다. 이것이 
첫번째 불가사의다.
  1307년 9월 14일, 필립왕은 자기 영토 안에 있는 지방 장관과 
가령들에게, 성당 기사들을 검속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라는 밀지를 
보낸다. 필립 왕이 이 교단을 문제삼고 성당 기사들을 체포하는 일은 
그로부터 한 달이 되는 10월 13일까지 계속된다. 그런데도 성당 기사단은 
필립 왕의 속셈을 의심해 보지 않고 있다가 10울 13일 아침, 필립 왕의 
함정에 빠진 채 칼 한번 뽑아보지도 못하고 손을 든다. 또 하나의 
불가사의가 아닐 수 없다. 검거가 시작되기 전 필립 왕의 측근들은, 이 
일제 검거 및 재산 몰수에서 빠져나갈 수 없도록 전국의 성당 기사들 
명단과 재산명세서까지 작성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도 성당 
기사단은 어떤식으로든 손을 쓰지 않았다. 지방 장관의 군대가 왔을 때도 
성당 기사들은, 어서 오시오, 우리는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겠소이다, 이런 
식이었다.
  필립 왕으로부터 저간의 사정을 보고 받은 교황은 거친 항의 서한을 
보냈다. 그러나 때늦은 다음이었다. 필립 왕 쪽에서는 이미 형틀을 차린 
뒤였다. 성당 기사들은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속속 저희 죄상을 자백하기 
시작했다. 자백한 기사들은 조사관들에게 넘어갔다. 비록 자백한 성당 
기사들의 죗값이 화형주행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조사관들에게는 
어떻게든 기어이 화형주에 거는 나름의 방법이 있었다. 한 기사의 
자백에는 다른 기사들의 확인이 따라 붙었다.
  이것이 바로 세 번째 불가사의다. 심문과정에서 36명의 기사들이 목숨을 
잃었다니까, 만일에 심문 과정에 고문이었었다면 그것은 무서운 
고문이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잔인한 터키 인과의 전투로 단련된 이 
강철 같은 사나이들 중에 체포에 저항한 기사가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 
불가사의하다. 파리의 경우, 체포된 138명의 기사들 중 자백을 거부한 
기사는 겨우 넷 뿐이었다. 자끄 드 몰레를 비롯, 거의 모든 기사들은 
순순히 자백한 것이다.
  "뭘 자백했는데?"
  벨보가 물었다.
  "기소된 죄목을 거의 액면 그대로 인정한 거지요. 다른 기사의 증언도 
혐의자의 자백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었어요. 적어도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는 그랬지요. 영국에서는 대다수의 국민이 재판을 바라지 
않았어요. 공술 조서에는 교회법에 저촉되는 혐의도 있었지만, 소문일 
가능성이 있는 것, 교단으로서의 성당 기사단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사항들은 불문에 붙여졌지요. 다른 말로 하자면 성당 기사들은, 질문 받은 
사항에 대해서만, 기소된 죄목에 대해서만 자백하면 되었던 것이지요."
  "전형적인 종교 재판이었군 그래. 그리 드문 예가 아니지."
  벨보가 중얼거렸다.
  "그런데 말이지요, 기소된 피의자들 하는 짓이 이상했어요. 기소된 
죄목이라는 게 이렇습니다. 입문자의 신고식 과정에서 성당 기사들은 세 
번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그리스도의 수난산에 침을 뱉고, 옷을 벗은 다음 
다른 기사의, 점잖게 말하자면 <포스테리오리 파르테 스피네 도르시>, 
쉽게 말하자면 궁둥이와, 배꼽과 입술에 차례로 키스하는 겁니다. <후마네 
디그니타티스 오프로브리움>의 의미에서 말이지요. 이 순서는 바로 상호 
간음의 순서로 이어집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이 짓이 끝나고 나면 신고식 
집행자들은 신참에게 털보 우상의 대가리를 하나 내보입니다. 신참은 이 
우상을 경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답니다. 그렇다면 피고들은 이러한 기소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아세요? 몰레와 함께 뒷날 화형주에 매달려 
화형을 당한 조프로아 드 샤르네는 이것을 모두 사실로 인정했습니다. 
자기도 그런 신고식을 치렀고, 신참에게도 시켰다고 자백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부정한 일은 있지만 그것은 입술로 부정한 것이지 
마음으로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고 토를 답니다. 수난상에 침을 뱉었는지 
안 뱉었는지 그것은, 신고식이 하도 숨가쁘게 진행되는 바람에 어떻게 
넘어갔는지 모르겠다고 했고요. 궁둥이에 입을 맞추었다는 혐의 사실에 
대해서는, 그런 일이 있었다고 대답했습니다. 오베르뉘라고 하는 지부 
기사장으로부터, 여자와 어울려 그러기보다는 형제들과 어울려 그러는 
편이 낫다는 말을 듣고 그 말을 옳게 여겨 그랬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신고식이 끝난 뒤로는 개인적으로 다른 기사들과 어울려 육체적인 죄를 
지은 적은 없다고 증언합니다. 피고의 자백을 요약하면 이렇게 됩니다. 
<네, 사실입니다. 하지만 장난이었습니다.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부정하자고 
그런 짓을 한 것이 아닙니다. 다른 기사들도 그랬다니까, 그 사람들에 대한 
대접으로 저도 그랬던 것뿐입니다…….> 사령관이었던 자끄 드 몰레는, 
자기가 신고할 때는 선배 기사들이 침을 뱉으라면서 수난상을 내밀었지만 
짐짓 거기에다 뱉는 척하면서 사실은 땅바닥에 뱉었다고 증언합니다. 그는 
또, 신참 입문자에 대한 신고식은, 대체로 심문관들이 묘사하는 것과 
비슷하나, 사실대로 말하자면 자기 재임 기간에는 그런 신고를 시킨 적이 
없기 때문에 곡 그대로라고 할 수는 없다고 덧붙였습니다. 기사들 중에는, 
<키스하기는 했다, 그러나 엉덩이에 한 것이 아니고 입술에다 했다, 
엉덩이에 키스한 것은 바로 나에게 신고를 시키는 기사였다>, 이런 증언을 
하는 기사도 있습니다. 개중에는, 심문관들이 요구하는 것 이상으로 
자세하게 증언하는 기사도 있었고요. 말하자면, 그리스도를 부정한 것에 
그치지 않고, 그분을 악당이라고 불렀고, 마리아의 처녀 수태를 부정했고, 
수나나상에다 오줌을 누었다고 하는가 하면, 신고식 당일에만 그랬던 것이 
아니고 부활제 직전의 성주간 내내 오줌을 누었다고 한 기사도 있습니다. 
별의별 자백이 다 나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바포메트는 기본이고 고양이 형상을 한 악마를 경배했다고 자백한 기사도 
있습니다……"
  왕과 교황 사이를 오가는 <빠 드 되>도 추악해 보이기는 마찬가지이다. 
교황은 이 재판을 관장하고 되도록 기록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못하도록 
하고 싶어하니 왕은 이 재판에서 피고들이 막다른 골목까지 몰리는 것을 
보고 싶어한다. 교황은 막판에, 성당 기사들은 처단하되 성당 기사단이라는 
수도 교단을 방안을 제시한다. 말하자면 유죄로 판단되는 기사들은 화형에 
처하는 한이 있더라도 처음의 그 순수했던 설립 동기를 보아 성당 
기사단만은 재정비, 존속시키자는 것이다. 그러나 왕은 이 추문을 널리 
공포하고, 교단 전체가 여기에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어한다. 
그래야 교단 전체가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결국은 재정적으로 와해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참으로 걸작이라고 할 만한 문서 한 건이 작성된다. 
몇몇 신학자들이, 피고들이 자백을 번복할지도 모르는 상황을 예견하고, 
이들에게는 어떤 변호인도, 자기 변호도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탄원서를 
작성하고 이를 요로에 역설한 것이다. 신학자들은, 재판이라고 하는 것은 
어차피 혐의 사실이 명료하지 못할 때 이를 밝히기 위해 열리는 것이지 그 
혐의 자체에 의혹이 있어서 열리는 것은 아니라고 해괴한 주장을 편다.
  "이런 자들에게 어째서 자기 변호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것인가? 
변호의 기회를 준다는 것은, 이들에게 기왕에 인정한 범죄 사실을 
변명하게 함으로써 자기 방어의 방패를 마련 할 기회를 주는 것과 다름이 
없다. 증거는, 저들에 대한 징벌을 불가피하게 하고 있지 않은가……."
  신학자들이 이런 주장을 하고 나선 것은, 그대로 두면 교황이 재판에 
나서서 재판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필립 왕과 
노가래는 트로와의 주교가 연루된, 지극히 선동적인 거치가 있는 사건 
하나를 들추어내고 이를 여론화했다. 노포 데이라는 이름의 정체 불명의 
책사가 밀고한 바에 따르면, 트로와의 주교는 교회범에서는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는 마술을 썼다는 것이었다. 오래지 않아 노포데이의 밀고가 
무고인 것으로 드러나기는 했지만(그는 이 위증의 죗값을 교수형으로 
물었다), 그것은 이 가엾은 주교가 공개리에 동성 연예군, 신성 모독자, 
고리 대금업자로 기소된, 말하자면 성당 기사들과 똑같은 혐의를 받게 된 
뒤의 일이었다. 필립 왕은 이로써 프랑스의 신민들에게는, 교회 역시 
결백하지 못한 만큼 교회에다 성당 기사단의 재판을 맡길 수 없음을 
시위하는 한편, 교황에게는 문제에서 손을 떼고 가만히 있는 편이 신상에 
이로울 곳이라고 경고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양상은 혼미에 혼미를 
거듭한다. 갖가지 정치 권력과 비밀 정보 업무, 상호 비방과 익명 투서의 
공방이 거듭된다. 이 때문에 궁지에 몰린 교황은 마침내, 고문당하면서 한 
자백을 인정하는 74명의 성당 기사에 대한 종교 재판을 승인한다. 그러나 
교황은 이들이 참회한 것으로 보고 이들을 용서하는 구실로 성직 탈퇴를 
카드로 활용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예기치 못한 사태가 발생한다. 이것은 내가 논문을 
통해 해명해야 할 문제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아는 진상과는 
모순되는 자료가 속속 발견되는 바람에 심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문제는, 성당 기사들에 대한 사법권을 손에 넣는 순간, 교황은 이것을 필립 
왕에게 넘겨주어 버린다는 점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자끄 드 몰레가 자백을 번복하고, 교황은 그에게 자기 변호의 기회를 주는 
한편, 세 추기경으로 하여금 그를 심문하게 한다. 1309년 11월 26일 몰레는 
당당하게 성당 기사단의 정당성과 순수성을 변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기네들을 기소한 세력을 위협하기까지 한다. 그런데 바로 이 시점에서, 
몰레는 왕의 밀사인 기욤 드 쁠레장(몰레는 이 쁠레장을 자기 편으로 
여겼다)의 방문을 받는다. 이때 모종의 언질을 받았던지 몰레는 11월 
28일에 이상한 서면 증언을 한다. 자신은 가난하고 무식한 기사로서, 
아득한 옛날에 있었던 성당 기사단의 미덕과, 박애의 실천과, 성지에서 
흘린 성당 기사단의 피의 수고를 손가락으로 꼽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로 이때 노가레가 등장해서, 성당 기사단이 한때 살라진과 
접촉한 적이 있다고 폭로한다. 몰레는 졸지에 국사범이 되는 셈이다. 
몰레는 눈물겹게 자신을 변호하면서 감옥에서 2년을 썩는데, 그동안 그는 
성격 파탄자와 비슷한 꼴을 보인다. 다음해 3월에 이르자 몰레는 세 
번째의 서면 증언에서 새로운 전략을 선보인다. 교황을 독대하기까지는 
절대로 증언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이 극적인 반전에서, 한 차례의 서사극이 펼쳐진다. 1310년 4월, 550명의 
성당 기사들이, 발언을 통하여 교단을 변호할 기회를 줄 것을 요구한다. 이 
발언 기회를 통하여 이들은, 자기네들의 자백은 고문으로 인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자기네들에게 걸린 혐의 사실을 깡그리 부정해 버린다. 그러나 
필립 왕과 노가레에게도 복안이 없지 않았다. 일부 선당 기사들이 자백을 
번복했어? 좋아. 공술 번복자, 위증자로 몰아 버리면 되는 것이었다. 공술 
번복과 위증은 중죄에 해당되던 시절이었다. 자백하고 참회하면 용서를 
받는 수도 있었다. 그러나 참회하기는커녕 자백을 번복한다는 것은 참회할 
의사가 없슴을 천명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죄인은 죽어야 한다. 
오래지 않아 50명의 기사들이 처형당했다.
  다른 죄수들의 반응을 미리 헤아리기는 어렵지 않다. 자백하면 구금된 
상태이기는 하나 목숨을 부지할 수는 있다. 그런데 자백을 거부한다. 
더구나 자백을 번복한다? 화형주가 지척이었다. 그때까지 감옥에 남아 
있던 500명의 자술 번복자들은 번복을 또 한 번 번복했다.
  자백했거나, 공술의 번복을 번복한 기사들은 역시 현명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1313년, 자백하지 않은 기사들은 종신형을 받았고, 자백한 
기사들은 사면을 받았다. 필립 왕이 노린 것이 대학살이 아니었다. 오로지 
성당 기사단을 와해시키면 그만이었다. 4, 5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느라고 
몸과 마음이 망그러질 대로 망그러진 기사들은 사면을 얻자마자 다른 
교단으로 옮겨갔다. 그들이 원한 것은 오로지 사면 그것뿐이었다. 그들은 
항복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이들이 조용히 다른 교단으로 사라지는 
사건이 바로 성당 기사단 사건에 기름을 끼얹게 된다. 성당 기사든은 
지하로 잠적한 뒤로도 활동을 계속한다는 전설에…….
  몰레에게는 여전히 교황에게 소명의 기회를 요구하고 있었다. 1311년 
교황은 비엔나 공의회를 소집했지만 몰레에게는 소환되지 않았다. 성당 
기사간에 대한 압박이 가중되면서 성당 기사단 재산은 병원 기사단으로 
넘어갔다. 성당 기사단이 잠정적이기는 하지만 필립 왕의 관리 체제 
아래로 들어온 것이었다.
  또 3년 세월이 흘러간다. 결국 교황과 필립 왕 사이에 하나의 합의가 
이루어진다. 1314년 3월 19일 노뜨르담 대사원 뜰에세 몰레는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몰레가 위엄을 잃지 았았던 것은, 언젠가는 교황이 다신에게 
자기 변호의 기회를 베풀어 줄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에 
종신형. 몰레는 심한 배신감을 느낀다. 그렇다고 해서 기왕에 자백한 것을 
번복하면 공술 번복자, 위증자로 처벌을 면할 수 없다. 7년 뒤에야 다시 
재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심문관 앞에 있는 그의 심정은 착잡했을 
것이다. 그는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앞서 간 기사들처럼 위엄을 잃지 
말자고 다짐했던 것일까? 비록, 자기와 자기 형제들은 무죄라고 
주장했다가 무고를 당한 처지이지만 떳떳하게 죽자고 결심했던 것일까?
  그러나 그는 주장한다. 성당 기사단에게는 한 가지 죄, 오직 한 가지 
죄가 있을 뿐이다……. 그것은 무모하게도 교회를 상대로 싸움을 걸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은 그런 싸움을 벌일 수가 없다.
  노가레는 환호 작약한다. 공적에게는, 판결이 결정적이고 즉각적인 인민 
재판이 유효하다. 노르망디의 지부 기사장 조프로아 드 샤르네도 몰레의 
뒤를 따른다. 왕은 당일로 판결을 집행하게 한다. 시떼 섬에 화형주가 
서고, 해질 무렵 몰레와 샤르네는 그 화형주에서 화형을 당한다.
  전설에 따르면 이 성당 기사단의 사령관은 죽기 전에 자기를 박해한 
자들의 운명을 예언한다. 실제로 교황과 필립 왕과 노가레는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 왕이 죽자 마리니가 횡령 혐의를 받는다. 
마리니의 정적들은 위계 횡령을 들쑤셔 내고는 그를 교수대로 보내 버리고 
만다. 이 때부터 많은 사람들은 몰레를 순교자로 여기게 된다. 단테조차도 
성당 기사단에 대한 박해를 고성으로 비방하고 나선다.
  여기에서 역사가 끝나고 전설이 시작된다. 한 전설에 따르면 루이 
16세가 기요틴에 올라갔을 때, 사형대로 따라 올라가 이렇게 외친 사람이 
있다.
  "자끄 드 몰레, 복수는 끝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날 밤 술집 필라데에서, 끊임없는 말허리 자르기와 
참견에 시달리면서 내가 그들에게 들려준 이야기이다.
  내 이야기가 진행될 동안 벨보는 심지어는 이런 말까지 했다.
  "당신 혹시 조지 오웰이나 아더 케슬러의 책 읽은 거 아냐? 그 이야기 
혹시, 거 이름이 뭣이냐, 문화 혁명 때, 저 거시기라는 사람이 당한 일을 
그대로 꾸며서 하고 있는 건 아닌가?"
  "<히스토리아 마기스트라 뷔타에…….>"
  디오탈레비도 끊임없이 끼엳르면서 이런 식의 말장난 비슷한 참견을 
하고는 했다.
  "까소봉, 신경 쓰지 말고 얘기나 계속하게. 카발리스트는 역사라는 걸 
믿지 않으니까……."
 
  "바로 그거야. 만사는 되풀이되게 마련이야. 둥글둥글. 역사라는 것은 
우리의 스승이지. 왜? 역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 
주니까. 중요한 것은 순열이야."
  벨보가 싸잡아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아직 진짜 문제의 해답을 얻지 못했네. 도대체 성당 기사단의 
정체가 뭐야? 당신 얘기를 들으니까 성당 기사들이라는 게, 처음에는 존 
포드 영화에 나오는 기병대 상사 같더니 그게 아니야. 조금 더 들으니까 
차츰 건달 패거리로 보이기 시작하고, 또 조금 더 들으니까 조명을 기가 
막히게 잘 받고 있는 꼬마 기사 인형, 그 다음에는 온당하지 못한 거래에 
손을 댄 하느님 담당 은행가, 그 다음에는 지리멸렬한 군대, 그 다음에는 
악마 교단의 신도, 그리고 자유 사상의 순교자로 보여서 뭐가 뭔지 종잡을 
수가 없네. 결국 성당 기사단이라는 건 무엇이었는가?"
  "아마 그 전부였는지도 모르지요. 서기 3천년쯤 되어서 화성의 
역사가들은 이런 질문을 한 차례 던지게 될는지도 모르지요. <카톨릭 
교회라고 하는 것이 결국 무엇인가? 스스로 사자 우리로 뛰어든 집단, 
이교도들을 청소한 집단인가>……. 그러니까 다 정답일 수 있는 거지요."
  "도대체 성당 기사들은 당신이 열거한 끔찍한 일들을 저지른 건가, 안 
저지른 건가?" 
  "재미있는 말이죠, 성당 기사단의 추종 세력들, 말하자면 그 시대 이래의 
각종 신 성당 기사단의 단원들은 그 시절의 성당 기사들이 아닌게 아니라 
그런 일을 능히 저질렀을 거라고 주장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면서도 이것을 
합리화 하는 거죠. 신래 침학을 합리화하듯이 말이죠. 신참자에게 선배 
기사가 묻습니다. 너, 정말 성당 기사가 되고 싶은 거냐? 그렇습니다. 
그러면 그럴 만한 용기가 있다는 걸 증명해라, 먼저 십자가에다 침을 뱉어 
봐라. 하느님이 그 자리에서 네 대가리를 갈기는지 안 갈기는지 어디 한번 
보게……. 우리 기사단에 들어오면 형제들에게 입을 맞출 수 있도록 네 
엉덩이를 까바칠 용기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식이죠. 그런데 
여기에서 이들이 그리스도를 부정한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점이 내게는 
적잖은 짐이 됩니다. 왜 그리스도를 부정했을까요? 두 가지 이유를 가정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사라센의 포로가 되었을 경우를 생각해서 미리 그런 
연습을 시키지 않았을까 하는 겁니다. 만일에 그렇다면 이건 좀 
엉뚱합니다. 왜냐? 고문이 요구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자백하게 함으로써 
고문에 저항하는 법을 가르치다……. 이런 모순이 어디 있어요? 또 한가지 
논증이 필요한 명제가 있습니다. 무엇인고 하니, 동방에서 이 성당 
기사들은, 십자가를 업신여기고 이것을 하나님의 고문 도구로 여기는 
이단적인 마니교 신도들과 접촉하지 않았을까, 하는 겁니다. 마니교에서는 
세상을 등질 것을 가르치고, 혼인과 출산의 무상함을 일깨우기도 합니다. 
이건 마니교 뿐만 아니라 원시 기독교 시대의 이단자들이 기독교를 능욕할 
때 흔히 써먹던 아주 오래된 교리지요. 이 교리는 나중에 카타리 파에서도 
흡수합니다. 그런데 전승은, 성당 기사단이 바로 이 카타리 파의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을 줄기차게 하고 있습니다. 이 전설을 믿어 준다면, 성당 
기사들에게 일반화되어 있었다고 믿어지던 남색의 전통은 설명이 
가능해집니다. 물론 상징적으로 말이지요. 성당 기사들이 이단적인 마니 
교와 접촉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성당 기사들은 
지적이고 교양 있는 사람들이었다기 보다는 순진하고 속물적이고 
<에스쁘리 드 꼬르>가 강한 사람들이었죠. 그래서 이들은 다른 십자군과 
다르다는 것을 과시할 목적으로 나름의 의식 같은 것을 만들어 내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는 채 그저 
남들로부터 인지되기 위해 갖가지 제의적인 짓거리를 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바포메트에게 경배했다는 것도 그렇게 이해해야 하나?"
  "<피구라 바포메트는 수많은 공술 조서에 등장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처음 이 말을 받아쓰기한 서기의 오기에서 비롯, 그 뒤의 문서에서도 
계속해서 베껴 쓴데서 온 착각일 가능성, 아니면 고의적으로 변조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몇몇 재판 기록에는 <마호메트>라는 말이 등장하는데, 
이것을 보면 성당 기사들의 저희 나름으로 일종의 혼교주의적인 예배 
양식을 만들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재판 기록을 보면 이들은 기도하면서 
<얄라>라는 이름을 부른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만 아는 이것을 <알라>의 
와전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회교도들도 마호메트 상을 경배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건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많은 재판의 증언 
기록에는, 성당 기사들 가운데 바포메트의 두상을 본 기사들이 많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기록에 따라서, 두상이 아니고 전신상이었다는 
대목도 나옵니다. 나무로 깎고 금박을 입힌 조상, 수염이 텁수룩한 얼굴, 
온통 헝클어진 머리카락. 심문관들은 이런 조상을 찾아 피고와 대질까지 
시켰던 모양입니다만 이걸 입증할 만한 재판 기록은 하나도 발견되지 
않습니다. 성당 기사는 누구나 이 조상을 보았다는 전설이 있는가 하면, 본 
성당 기사는 하나도 없다는 정반대 되는 전설도 있습니다. 고양이 
이야기와 아주 비슷한 거죠. 성당 기사 중에는 회색 고양이를 보았노라는 
기사도 있고, 붉은 고양이를 보았노라는 기사도 있습니다. 자, 벌겋게 단 
쇠꼬챙이 앞에서 고문을 당하고 있는 성당 기사의 모습을 상상해 봅시다. 
심문관이 묻습니다. 신고식 때 고양이를 보았느냐? 고양이요? 많이 봤지요. 
성당 기사든의 부대에 창고가 있다는 건 조금도 이상할 건덕지가 없지요? 
창고가 있으면 곡식이 있을 테고 곡식이 있으면 쥐가 있을 테지요? 쥐가 
있으면, 이 쥐를 잡아먹는 고양이가 있는 건 당연하지 않겠어요? 당시 
유럽에서는 고양이가, 일반 가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애완 동물이 
아니었어요. 하지만 이집트에서는 얼마든지 볼 수 있었죠. 경우에 따라 이 
동물을 이상한 눈으로 본 사람도 없지 않았겠지만 성당 기사들 중에는 이 
동물을 집에서 기른 기사도 있었을 것입니다. 바포메트의 두상도 비슷하지 
않았을까요? 어쩌면 악마의 두상이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 눈에는 
생소하게 보였을 터인 두상 모양의 성보 상자였는지도 모르지요. 하기야 
이 바포메트를 두고 연금술사였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없지는 
않습니다."
  "연금술사는 약방의 감초로군. 성당 기사들 중에도 연금 비법을 아는 
기사가 있었을거라……."
  비오탈레비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물론 있었을 테지. 연금술이라는 거, 그거 간단한 거야. 사라센의 
도시를 공격하고, 아녀자의 목을 조르고, 붙박이가 아닌 것은 모조리 
약탈한다……. 이게 바로 연금 비법이지. 거 되게 복잡하게 돌아가네."
  "복잡한 건 성당 기사들의 머리였을 테죠. 이런 사람들에게 교리 토론 
같은 게 무슨 의미가 있었겠어요? 인류 역사에는, 동아리 나름의 생활 
양식과 밀접한 관계를 지닌 무수한 꼬마 종파들이 등장합니다. 동아리는 
그 종파를 때로는 허장성세하는 데 때로는 세상에 대한 신비로운 눈을 
기르는데 이용했을 테지요. 그러나 성당 기사들은 이단을 하고 있으면서도 
저희들이 이단을 하고 있는 줄도 몰랐을 겁니다. 그런데 말이죠, 재미있는 
것은 어느 시대에든, 이들의 행위를 밀교와 관련시켜서 설명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성당 기사들은 저희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동방의 밀교에서 유래한 전례 양식을 저희 것으로 
만들고, 여기에다 엉덩이에 입을 맞추는 등의 제의적인 의미를 부여했다는 
것입니다."
  "엉덩이에 입맞추는 의식의 의미를 간단하게 좀 설명해 주게."
  "그러지요. 오늘날의 밀교도들은, 당시의 성당 기사들의 모종의 인도 
예배 양식을 재현시켰다는 주장을 폅니다. 엉덩이에 키스함으로써 척주 맨 
아래쪽의 생식선에 깃들어 있는 사신 쿤달리니의 잠을 깨운다는 것이죠. 
이렇게 잠을 깬 쿤달리니는 송과선까지 올라와서……"
  "데카르트가 말한 그 송과선 말인가?"
  "같은 것일 겁니다. 쿤달리니가 송과선으로 올라오면 미간에 있는 제 
3의 눈이 열립니다. 이 눈이 열리면 시간과 공간을 꿰뚫어 볼 수 있게 
됩니다. 사람들이 지금도 성당 기사단의 비밀을 캐고 있는 까닭은, 어쩌면 
여기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공정왕 필립은 그 애꿎은 성당 기사들 대신 밀교도들을 화형주에 
매달았어야 했는데 그랬어."
  "그렇기는 하지만 오늘날의 밀교도들이라고 해서 성기를 두 개씩 달고 
자가 발전 하는건 아닙니다."
  내 말 끝을 벨보가 이었다.
  "당신 얘기를 듣고 있으려니까, 세상의 하고많은 미치광이들이 성당 
기사에 미쳐 있는 까닭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군."
  "얼마전에 하신 말씀과 비슷합니다. 성당 기사단과 관련된 사건은 
얽히고설킨 삼단 논법 같은 겁니다. 미치광이가 되어 봐야 이 영원의 
수수께끼에 합류할 수 있는 거지요. 아브라카다브라, 마넬 데켈 파레스, 
파페 사탄 파페 사탄 알레페, 르 비에르쥬, 르 비바스 에 그벨 오쥬르 
뒤……. 시인이나 사제나 추장이나 마법사가 헛소리를 한마디 하면, 인간은 
이 메시지를 해독한답시고 몇 세기를 좋이 씁니다. 성당 기사들 역시, 그 
정신 상태가 혼돈을 방불케 하는 바가 없지 않아서 도무지 읽히지 
않습니다. 많은 살마들이 성당 기사들을 숭배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을 
겁니다."
  "실로 실증적인 설명일세."
  디오탈레비가 중얼거렸다.
  "그래요, 나는 실증주의자인지도 모릅니다. 송과선에 약간의 외과적인 
수술을 해줄 수 있으면 성당 기사는 병원 기사로 변했을 겁니다. 요컨대 
정상적인 인간이 되었을 것이라는 얘기죠. 전쟁은 때로 두뇌 회로를 
손상시키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대포 소리, 아니면 그리스 화약통 소리가 
그렇게 했는지도 모르지요. 우리 시대의 장군들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지요."
  1시였다. 토닉 워터에 취한 디오탈레비가 휘청거렸다.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속이 후련했다. 그들 역시 그랬을 터였다. 그날까지만 해도 
우리는 불장난을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부수고 태우고 하는 
그리스 화약통의 불장난을……."
  
15.
  벨보와 디오탈레비를 만나 기나긴 성당 기사단 이야기를 나눈 그날 밤 
이후로는 어쩌다 벨보를 만나도 인사만 하고 헤어졌을 뿐 필라데에는 자주 
들를 수가 없었다. 논문 때문에 그만큼 바빠졌던 것이다.
  거리에서 반파시스트 음모에 저항하는 시위가 있던 날이었다. 나는 
학교에서 공부나 할 생각이었지만 빗발치는 좌익 지식인들의 참가 권유에 
못 이겨 들을 떠밀리다시피 시위 현장으로 갔다. 경찰이 삼엄한 경계망을 
펴고 있었다. 그러나 경찰과 시위대 사이에는 엄격한 불문율적 이해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즈음에는 그리 구경하기 어려운 풍경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시위가 허용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심각한 
불상사가 생기지 않는 한, 시위 군중이 밀라노 중심가로 통하는 가상 
경계선(당시에는 이런 지역적인 양해 사항이 많았다)을 넘지 않는 한, 
경찰은 구경할 뿐 개입하지는 않았다. 그 날의 시위 군중은 아우구스토 
광장에서 시위 행진을 했다. 
  파시스트들은 산 바빌라 광장과 인근 도로에 진치고 있었다. 어느 
편에서든 가상의 경계선을 넘으면 불상사가 생길 터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아무 일 없이 끝날 조짐이 보였다. 서커스 사자와 조련사와의 
관계에 견주면 설명이 쉽겠다. 우리는 사자가 조련사를 공격할 경우, 
조련사는 채찍을 휘두르거나, 공포탄을 쏘거나 해서 사자를 격퇴시키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이다. 조련사는 사자를 조련실에 
공격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상태로 만들어 놓는 것이다. 
  말하자면 사자로 하여금 조련사를 공격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상태로 
만들어 놓는 것이다. 다른 동물도 마찬가지지만 사자는 자기만의 공간을 
갖고 싶어한다. 조련사가 이공간만 범하지 않으면 사자는 가만히 있다. 
그러나 조련사가 이공간으로 한 발짝이라도 들여놓으면, 다시 말해서 
사자의 사적인 공간을 범하면 사자는 으르렁거린다. 이때 조련사는 채찍을 
든다. 채찍만 드는 것이 아니고 들여놓았던 발을 뒤로 뽑는다. 그러면 
사자도 조금 전처럼 가만히 있게 된다. 꼬마 혁명이라고 할 수 있는 
시위에도 이와 유사한 규칙이 있다.  
  나는 시위 현장에 나갔지만 무리에 휩쓸리지는 않고 산토테파노 
광장에서 구경만 했다. 일치 단결의 의사 표시를 위해 거기에 나온 신문 
기자들, 편집자들, 예술가들이 내 옆에 수두룩했다. 대부분이 필라에의 
단골이었다. 언제 왔는지 벨보와, 필라데에서 더러 본 적이 있는 여자가 내 
평에 서 있었다. 나는 그때 여자를 벨보의 애인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여기서 뭘 하고 있어요?'  
  벨보는 웃었다. 약간 당황한 것 같았다.  
  '뭘 하고 이는지 보고 있으면서... 어떻게든 영혼 구제는 하고 봐야 하지 
않겠어?' 저 광경을 보니까 뭐 생각나는 것 없어?'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햇살이 밝은 오후, 밀라노가 자랑하는 아름다운 
날이었다. 건물의 노란 파사드, 부드러운 금속빛 하늘, 광장 건너편에 있는 
경찰관들은 헬멧과 플라스틱 방패로 무장하고 있었다. 햇빛을 되쏘는 
바람에 플라스틱 방패가 흡사 철제 방패 같았다. 사복 차림의 간부가 
촌스러운 삼색 현장을 두르고는 부하들 앞에 서성거리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시위 군중이 선두를 바라보았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서로 뜸을 
들이는 시간이기가 쉬웠다. 시위 군중은 정열이랍시고 하고 있었지만 
대오가 엉터리여서 그저 장사진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였다. 군중은 손에 
손에 몽둥이, 깃발, 플래카드 같은 것들을 들고 있었다. 성질 급한 일부 
군중은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대열 양 옆으로는 행동대원들이 전후좌우로 움직이며 군중을 독려하고 
있었다. 얼굴을 가린 붉은 수건, 알락달락한 윗도리, 징이 박힌 허리띠, 
풍상에 찌든 바지... 불법 무기를 감추느라고 둘둘 만 깃발을 색깔이 
팔레트에 묻은 물감 색깔로 보였다. 나는 듀피를 생각했다. 듀피의 밝은 
색감을 생각했다. 연상은 듀피에서 기욤 뒤페로 자유롭게 옮겨 다녔다. 
플랑드르의 세밀화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대열 양 옆에 모인, 몇 
안되는 지휘자 무리에는, 용감하게 싸움으로써 불퇴전의 용기를 과시할 
것을 약속하고, 그렇게 과시할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듯한 남자 같은 
여자들도 섞여 있었다. 이 모든 광경은 순식간에 내 머릿속을 지나가고 
있었다. 
  이 모든 광경은 순식간에 내 머릿속을 지나가고 있어서, 분명히 어떤 
상황을 경험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상황이 내게 인지되지 못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아스칼룽이 따로 없군 그래.  
  벨보의 말이었다.  
  '성 야고보에 맹세코 그렇군요. 이거야말로 십자가의 전투 아닙니까? 
오늘 밤 이들 중 몇몇은 천국에 들어가겠군요.  
  여부가 있게나만, 사라센은 어디에 있지?  
  경찰은 튜튼 기사단임에 분명한 모양이니, 우리는 알렉산드로 
네프스끼가 이끄는 유목민이라도 되는 건가요? 내가 지금 텍스트를 
혼동하고 있는게 분명합니다. 오라, 저기 저 사라들 좀 보세요. 싸우고 
싶어서 안달을 부리는 아르투아 백작의 군대로군요. 저건 방어 체계가 
아니잖아요? 함성으로 이교도들을 위협하면서 벌써 적진을 쳐들어가고 
있잖아요?'  
  일이 벌어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러나 나는 그때의 일을 선명하게는 
기억하고 있지 못하다. 군중은 움직이고 있었다. 스키 마스크를 하고 
쇠사슬을 든 행동대원들이 함성을 지르면서 산 바질라 광장에 진치고 있는 
경찰 저지선을 뚫고 있었다. 사자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경찰 
저지선의 앞쪽이 열리면서 소방 호스가 나타났다. 시위대의 선두 쪽에서 
첫 번째 볼 베어링, 첫 번째 돌멩이가 날았다. 경찰 특공대가 진압봉을 
휘두르며 나서자 시위대가 주춤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멀리서, 마르게토가 쪽에서 총소리가 들린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타이어가 터지는 소리, 혹은 폭죽이 터지는 소리였는지 모른다. 아니면 
시위 군중 쪽에서건 경찰 쪽에서건, 당시에 널리 쓰이던 P-38s를 쏜 
것인지도 모른다.  
  상황은 순식간에 난장판으로 변했다. 경찰은 일제히 진압봉을 뽑아 
들었다. 공격 나팔소리가 울린 셈이었다. 시위 군중도 두 패로, 말하자면 
싸울 준비가 된 투사 패거리와, 그만하면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하고 
도망치는 패거리로 나뉘었다. 곤봉 같은, 길 잃은 무기에 맞을까 겁이 
났다. 나는 라르가 쪽으로 내달았다. 달리면서 보니 벨보와 그 여자도 내 
옆에 붙어 달리고 있었다. 빠른 속도였다. 벨보는 겁을 먹은 것 같지 
않았다. 라스트렐리 가 모퉁이에서 벨보가 내 어깨를 잡았다.  
  '이 사람아, 이쪽으로 가야 해.'  
  나는 이유를 묻고 싶었다. 라르가 거리는 여느 길보다 넓어서 통행이 
많았다. 벨보가 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페코라리가와 대주교관 사이의 
골목이었다. 나는 미로 같은 골목길을 떠올리고는 몸서리를 쳤다. 벨보가 
들어가자고 하는 골목길에는 숨을 테가 마땅치 않았다. 따라서 경찰의 
추격을 받거나 진로를 차단 당할 경우 빠질 데가 없었다. 그러나 벨보는, 
조용히 따라오라는 신호를 보내고는 보조를 늦추어 골목길로 들어갔다. 
나도 천천히 벨보의 뒤를 따라갔다. 성당 뒷길이었다. 그 길의 교통량은 
여느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불과 2백 미터 떨어진 곳은 난장판이 
되어 있었는데 그 길에서는 고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우리는 천천히 
성당을 돌아 갈레리아 맞은편으로 나왔다. 
  벨보는 튀긴 옥수수를 한 봉지 사 들고, 천사 같은 몸짓으로 비둘기 
떼를 먹이기까지 했다. 우리는 감쪽같이 토요일 나들이 패에 합류할 수 
있었다. 벨보와 나는 넥타이까지 맨 정장 차림, 여자는 밀라노 여성이 
정복이라고 할 수 있는 회색 터틀넥 위로 진주 목걸이를 걸고 있었다. 
모조품이던가, 진짜던가...  
  벨보가 그제서야 여자와 나 사이에 다리를 놓았다. 
  '이쪽은 산드라.. 두 사람, 서로 알지?'  
  '뵌 적은 있었요. 안녕하세요.' 
  여자가 말했다.  
  '이것 보게, 까소봉. 이런 때는 큰실로 도망쳐서는 안 되네. 나폴레옹 
3세는 토리노의 사보이아 가를 본떠 가지고 파리의 길이라는 길은 모조리 
고쳐, 오늘날 우리가 감탄하여 마지않는, 저 그물코 같은 볼바르를 만든 
거라네. 가히 도시 계획의 걸작품이라고 할 만하지. 뿐인가. 넓고 곧은 
길은, 성난 군중을 제압하기로도 이상적인 곳이야. 그래서 샹젤리제 같은 
샛길까지, 가능한 경우 모두 넓고 곧은 길로 만들어 버린 것이라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 곳이 있기는해. 가령 라땡 구의 좁은 길... 68년 5월 시위 
때 시위 군중이 이 길을 얼마나 요긴하게 써먹은 줄알아? 도망칠 때는 
샛길로 들어가야 하네. 경찰 병력이, 샛길이라는 샛길은 다 막을 수는 
없지. 시위 군중의 일부가 샛길로 들어가면 경찰이 추격할 것 같지? 
천만에.. 경찰도 숫자에 밀리면 겁이 나서 따라 들어가지 못해. 시위 
군중과 경찰의 수가 비슷 할 겨우, 경찰 쪽이 겁을 더 내는 법이네. 그래서 
시위 군중과 경찰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도망치는 일이 더러 벌어지고는 
하지.  
  잘 모르는 곳에서 시위를 해야 할 겨우, 전날 그 지역을 답사해 둘 
필요가 있는 것은 다 이때문이네, 그리고 시위가 시작되면 골목길이나 
샛길을 끼고 돌아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고,,,
  '볼리바아 같은 데서 정규 과목으로 이수한 것 같군요.'  
  '생존 기술은 어릴 때만 익힐 수 있는 걸세. 어른이 되어서는, 그린베레 
같은 데 들어가면 또 모르지만 익히는 게 쉽지 않아. 전쟁 중에 약간 
지독한 경험을 했어. 유격대가 도처에 출몰할 때니까...'
  그는 몽페라토와 랑게 사이에 있는 어느 곳 지명을 대면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43년, 주민이 그곳에서 소개당하고 있을 때의 이야기네. 43년의 
대소개... 우리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긴 그때, 그 곳의 이야기라네. 대량 
검속, 나치 친위대, 거리에서 들리던 기관총소리... 어느 날 밤 나는 우유를 
구하려고 언덕 위에 있는 농장으로 가고 있었네. 그런데 숲속에서 그 
소리를 들었네. 드르륵, 드르륵... 꽤 멀리 떨어진 언덕에서 내 뒤쪽의 
계곡을 겨냥하고 기관총을 쏘고 있었네. 본능적으로 내달았지. 아니면, 
땅에 팍 엎드렸던가? 내 실수였어. 도망이라니... 계곡 쪽으로 달리는데, 내 
주위의 벌판에서 갑자기 탕탕탕 소리가 들리는 거라. 총알이 내 바로 앞에 
있는 철로 위로 마구 떨어졌네. 그 때 나는, 적이 언덕에서 계곡 쪽으로 
총을 쏠 경우, 언덕 위로 달려 올라 가야 살아 남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네.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총알과 머리의 거리는 그만큼 멀어져. 우리 
할머니도 총격전에 휘말린 적이 있네. 옥수수 밭을 사이에 두고 
파시스트와 유격대가 벌이는 총격전에... 발 내딛는 곳마다 총알이 팍팍 
박히더라지. 그래서 할머니는 옥수수 밭에 엎드렸다네. 흙에다 얼굴을 
묻고... 그 총격전의 와중에서 할머니는 한 10분쯤 그렇게 엎드려 있었대. 
한동안 그러나 끝나겠지... 하면서. 할머니는 운이 좋았어. 어린 시절에 
이런 경험을 해놓으면 신경 계통에 아주 콱 박히는 법이지.'  
  '레지스땅스 편이었군요, 진작부터.' 
  구경꾼었지...' 
  그가 가볍게 당황해 하고 있다는 걸 목소리로 느낄 수 있었다.  
  '...1943년에 겨우 열한 살이었네. 종전될 즈음에는 열세 살이었고... 
참전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지만 따라다니면서 구경하기에는 충분한 나이 
아니겠어? 따라다니면서, 그걸 뭐라고 하지, 그래, 머리에다 사진 찍기에는 
충분한 나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그것밖에 없었네. 따라다니면서 
구경하고, 그러다 아니다 싶으면 도망치고... 오늘 우리처럼.'  
  '남의 책만 편집하고 있을 게 아니라 그걸 좀 써보시지 그래요?' 
  '이것 보게, 까소봉. 쓸 것이 없어. 남들이 다 써버려서... 그때의 내 
나이가 스물만 되었어도 50대쯤에 시적인 회고록 한 권 쯤은 쓸수 있었을 
거야. 하지만 다행히도 그때 나는 너무 어렸네. 쓸 만한 나이가 되고 보니, 
내가 할수 있는 일이라고는 남들이 써놓은 걸 읽는 것뿐이더라고. 별로 
후회 안해. 그때 그 언덕에서 머리에 총알을 맞고 죽었을 수도 있는 
일이잖아?'  
  '어느 편의 총알을 맞고요...' 
  나는 이렇게 묻다 말고, 아뿔싸, 했다.  
  '...미안합니다. 농담이었어요.'  
  '농담한 게 아니야, 만일에 맞았다면 어느 편의 총알을 맞았을지 지금은 
알아. 하지만 그때야 뭘 알았겠어? 사람은 한 평생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면서 사는 거야. 그릇된 것을 선택했다면 참회를 통해 용서를 받는 
것도 가능해. 그러나 정당한 것을 선택함으로써 자기가 어떤 인간인가를 
증명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그러지 못했다는 양심의 가책... 이거 사람 
죽이는 거라고. 당시의 나는, 언제든지 배신자가 도리 가능성이 있는, 그런 
아이였네. 그런 내가 무슨 낯으로 글을 써서 남들을 가르치겠어?'  
  '미안한 말씀이라지만, 살인자가 될 수도 있었던 것 아닙니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일종의 신경증입니다. 그런 것 
때문에 양심의 가책에 시달린다면요.'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가? 아참, 신경증 이야기를 들으니까 바그네르 
박사와의 약속이 생각나는 군. 델라 스칼라 광장에서 택시를 잡자. 산드라, 
같이 갈 거지?'  
  '바그너 박사요? 사적인 용문가요?' 
  '아니라고 해야겠지. 며칠 동안 밀라노에 머문대. 잘 꼬셔가지고, 미발표 
수필 원고나 좀 얻어 얄팍한 책이나 한 권만 들어 낼까 하고.'  
  벨보는 그때 이미 바그너 박사와 접촉하고 있었던 셈이다. 어쩌면 
바그너 박사로부터, 하는 사람은 하는 줄도 모르고, 당하는 사람은 당하는 
줄도 모르는 채, 정신 분석을 당한 것은 바로 이날 밤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벨보로부터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은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이상한 일이다. 벨보는 나에게 기억을 들추어 가면서, 일종의 영웅주위적인 
분위기를 가미해 가면서 러린 시절 도망치던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이 
도망 사건은 뒷날 공범이자 증인인 나와 함께 별로 교묘하나 별로 
영웅적이지 못하게 도망치게 된 연후에 다시 그의 기억에서 떠오르게 
된다.  
  
    16  
  아불라피아에서 나는 벨보의 도망 이야기를 읽을 수 있었다. 전망경실의 
어둠 속에서도 나는 간단없이 들려 오는 부스럭거린느 소리, 삐걱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벨보의 이야기를 생각했다. 소리가 못비 신경에 거슬렸던 
나머지 나는 나 자신을 타일러야 했다. 두려워 할 것 없다... 박물관, 
도서관, 고궁에서는 원래 이런 소리가 나는 법이다. 소장품이 저희들끼리 
나누는 밀어... 낡은 찬장이 덜그럭거리는 소리, 창틀이 눅눅한 밤 공기에 
화답하는 소리... 한세기에 밀리미터 단위로 회벽이 뒤틀리는 소리... 벽이 
우는 소리... 참아라. 너는 여기에서 도망칠 수도 없다. 도망치고 싶지만 
도망치고 싶은 욕망과 필사적으로 절망적으로 저항하고 싶어하던 한 
사나이의 내명, 그토록 오래 진실과의 대면을 미루어 온 그 사람과의 
만나기 위해 여기에 와 있으니까... 
  
  파일명 - 운하  
  나는 무엇으로부터 도망쳤던가? 경찰의 추격으로부터, 아니면 
역사로부터? 그런다고 무엇이 달라진단 말인가. 나의 시위 참가는 도족적 
선택을 따른 것이었던가? 아니면 또 하나의 기회에 나 자신을 맡겨 보는 
전략이었던가? 그 기회가 너무 늦거나 너무 일렀다면 그것은 나의 
생년월일 때문이다. 다시 총탄인 날아다니는 그 벌판에 서고 싶다. 
할머니가 총탄에 희생될 위험이 있기는 하지만 나는 서고 싶다. 나는 
할머니 옆에 있지 않았다. 나이 때문이었다. 내가 겁쟁이여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좋다. 그럼 오늘의 시위 행진은? 나는 또 도망쳤다. 세대 차를 
이유로... 그 싸움은 나의 싸움이 아니라는 것을 이유로... 그러나 나는 꼭 
그래야 할 이유가 없더라도 거기에서 위험과 맞서보았어야 했다. 
  그 위험과 맞섬으로써, 다시 한 번 총탄이 날아다니는 벌판에 선다고 
하더라도 떳떳하게 고개를 들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어야 했다. 자신에게 
좋은 기회를 선택할수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나쁜 기회를 
선택하는 수도 있는 것인가. 나에게 기회라는 것이 있기는 있었던가? 오늘 
시위한 사람들 중 과연 몇 사람이 그런 이유에서 싸웠는지 궁금하다. 그런 
조작한 기회는 좋은 기회가 아니다. 
  하찮은 일에서 다른 사람의 용기가 자기 용기를 앞지른다고 해서 자신을 
겁쟁이라고 불러도 되는 것인가. 지혜는 이렇게 해서 사람을 겁쟁이를 
만든다. 이렇게 해서 기회는 모두 놓치고 구경꾼으로 평생을 보내게 된다. 
기회가 오면 그것이 기회인 줄을 모르고, 말하자면 본능적으로 잡아야 
한다. 내게, 기회를 기회인 줄 모르고 잡은 일이 있던가? 잘못된 시대에 
태어났을 뿐인데 나는 왜 자신을 겁쟁이라고 여기는가. 정답 한때 겁쟁이 
노릇을 한 전력이 있어서 너는 저 자신을 겁쟁이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포도원으로 둘러싸인 언덕 위에 있던 모처의 외딴집을 그려보자. 마을 
어구로 통하던 길, 마을 맨 끝집으로 통하던 길을 그려보자. 가족들의 
보호도 마디하고 큰길을 걸어 유혹희 도시를 들어가. 그토록 무서워하던 
그 골목으로 쳐들어가는 한 꼬마 소개민을. 
  그 골목길을 그 마을 골목패 아이들이 모이던 곳이었다. 모두 
지저분하고 시끄러운 촌아이들이었다. 그런 아아들에게 견주면 나는 
지나치게 도시화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런 아이들과는 멀찍이 떨어진 채 
지내야 했다. 하지만 광장으로 나가려면, 신문 가판대나 문방구점에 
가려면, 운하 옆을 지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둘러 가는 길이 있기는 
했지만, 그 길을 지구를 반 바퀴 도는 것만큼이나 멀었다. 게다가 나는 
일부로 놈들을 피해 가고 싶지 않았다. 골목패 아이들은, 운하패에 비하면 
꼬마 신사들이었다. 운하패가 진치고 있는 운하는, 옛 이름이 운하일 뿐 
사실은 도시의 빈민굴로 통하는 하수도였다. 운하패 아이들은 빈민굴 
아이들로 난폭하기 그지없었다. 
  골먹패 아이들은 운하패 아이들이 노는 지역으로 갈 수 없었다. 
갔다가는 얻어맞고 돌아오기가 일쑤였다. 나는 내가 골목패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거기에 간지 얼마 안 되어 운하패 아이들이 나를 
골목패 아이로 정해 버린 것이었다. 나는 이렇게 해서 운하패의 적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나는 어린이 잡지로 얼굴을 가린채로 운하패 아이들 
지역을 지나갔다. 나는 걸으면서 그 잡지를 읽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곧 운하패 아이들에게 들키고 말았다. 도망쳤다. 아이들은 나를 
뒤쫓으면서 돌멩이를 던졌다. 돌멩이 하나가, 그때까지도 내가 얼굴을 
가리고 있던 잡지에 맞았다. 나는, 체면을 잃지 않으려고 잰 걸음으로 
도망치면서도 내내 잡지를 읽는 척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사히 도망치기는 
했지만 집에 와 보니 잡지가 없었다. 다음날 나는 골목패에 가입하기로 
결심했다.  
  골목패 산헤드린에 출두했다. 아이들은 야우로 나를 맞았다. 당시 내 
머리카락은 숲이 많았다. 그 많은 머리카락이 머리 위로 뻣뻣하게 일어서 
있어서, 헤어스타일은 자연 그대로 벌써 슈트루벌페터 스타일이었다. 
이것은 당시 크게 유행하던 스타일로 영화나 광고에서는 자주 볼수 
있었다. 주일 미사가 끝나며 거리를 나돌아 다니는, 어깨거 넓고, 
더블재킷을 입은, 수염 기른 젊은이들은 거의가 이 스타일로 머리를 
손질하고 다녔다. 머리에다 기름을 발라 두피에 바싹 붙도록 빗어 넘긴 
스타일... 이게 바로 내가 좋아하던 스타일이었다. 월요일이면 사장 
거리에서 꿀병만큼이나 실팍한 머릿기름을 사는 데 꽤 많은 돈을 쓰고는 
했다. 머릿기름은 사온 뒤로는 머리카락이 반짝반짝 빛날 때까지 공들여 
기름을 발라, 가죽 모자인 카마우로를 쓴 것 같이 만들고, 다음에는 머리가 
일어서지 못하게 그물을 뒤집어쓰는 것이었다.   
  골목패 아이들은 내가 그물 뒤집어쓴 것을 보고는, 알아들을 수는 
있어도 흉내낼 수는 없는 지독한 사투리로 삼하게 나를 놀리고는 했다. 
그래서 산헤드린에 출두하는 날은 그물을 벗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집에서 두 시간 동안 쓰고 있다가는 그물을 벗었다. 그리고는 거울 앞에서 
머리카락이 그물에 눌려 두피에 바삭 붙은 것을 확인하고는, 가입 서약을 
하게 되어 있는 골목패 산헤드린에 출두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거기에 
도착하는 순간에 발생했다. 그물이 벗겨진 다음이라 머리카락이 일제히 
수직으로 얼어서 버린 것이엇다. 나를 둘러싼 골목패 아이들에게서 야우가 
쏟아져 나왔다. 나는 가입 신청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불행히도 이탈리아 어로 말했다. 골목패에 관한 한 표준 이탈리아 어는  
  아웃사이더의 언어였다. 나보다 머리하나가 큰 골목패 대장 
마르티네티가 내게 다가왔다. 맨발이었다. 그는, 가입하려면 엉덩이를 
걷어참으로써 사니쿤달리니의 잠이라도 깨우려고 했던 것일까. 나는 
그러라고 하고는 벽에 붙어 섰다. 두 녀석이 내 팔을 하나씩 잡았다. 나는 
어정쩡하게 벽을 안고 선 채 엉덩이를 백번이나 걷어차였다. 마르티네티는 
요령도 있고 기술도 있었다. 발가락을 다치지 않도록 발의 옆등으로 차는 
솜씨는 보통이 아니었다. 골목패의 대원들은 합창대원들처럼 내가 
걷어차일 때마다 수를 세었다. 엉덩이 차기가 끝나자 대장은 나를 
토끼자에 가두었다. 나는 반시간동안이나 토끼장에 갇혀 있어야 했다. 
그동안 아이들이 나를 토끼장에서 꺼내 준 것은 내 다리의 감각이 거의 
마비되고 있을 때였다. 야만족의 신고식에 무사히 통과했다는 것이 그러헤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나는 말이라는 새이름을 받았다.   
  모년 즈음, 우리가 살던 곳에는 신튜튼 기사단이 주둔해 있었다. 이들의 
경계 태세는, 유격대의 존재가 미미했던 만큼 그다지 튼튼하지 못했다. 
43년 말이었던가, 44년 초였던가, 우리의 첫 번째 원정 목표는 창고였다. 
우리 통패 하나가, 살라미 소시지와 잼이 든 어마어마하게 큰 샌드위치를 
먹고 있는 랑고바르트 인 경비병에게 아양을 떨 동안 창고에 숨어 들기로 
되어있었다. 통패가 독일군 병사에게 다가가, 총이 근사하다느니, 옷시 
멋있다느니 하면서 바람을 잡을 동안 우리는 창고 뒤켠의, 유달리 엉성해 
보이는 판자를 뜬어내고 안으로 들어가 티엔티 몇 개를 훔쳐내었다. 
마르티네티는 한적한 시골로 들어가 불꽃놀이를 하자고 한 것 같지만, 
내가 기억하기로 그걸로 무슨 장난을 한 것 같지는 않다. 당시 우리가 
알고 있던 폭죽 제조 기술은 조잡한 것이었던 만큼,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고 하더라도 성공할 확률은 지극히 낮았을 것이다. 여기에 주둔하고 
이던 독일군은 뒷날 데키마 마스의 파시스트 소년 해병대로 바뀌었다. 
파시스트 소년 해병대는 강가에다 저지선 구축하는 작업을 했다.  
  이 강가에는 십자로가 있었는데, 매일 오후 6시면 산타 마리아 
아우실리아드리체 학교 여학생들이 이 길을 지나고는 했다. 마르티네티는 
데키마르마스 해병대원들과 짜고는 이 여학생들을 곯려 주기로 했다. 
독일군이 미쳐 다 회수해 가지 못해 기지에 남아 있던 수류탄을 강물 
속에다 숨겨 놓고, 여학생이 지나갈 때 철사를 연결시켜 안전핀을 뽑아 
터뜨리자는 것이었다. 마르티네티는, 안전핀이 뽑히고 나서 수류탄이 
폭발하기까지의 시간을 계산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마르티네티는 
열심히 해병대원들을 꼬여 이 장난을 했다. 효과 만점이었다. 수류탄은, 
여학생들이 길모퉁이를 돌아가는 순간에 엄청난 폭음과 함께 폭발하면서 
물기둥을 울리고는 했다. 여학생든은 기적 초풍, 혼비백산했고, 우리 
동패와 해병대원들은 그걸 보면서 허리가 끊어져라 웃었다. 전쟁에서 살아 
남은 우리 동패들은 모두 그 영관의 날들을 기억할 터였다. 자끄 몰레가 
화형을 당한 이래로 우리에게는 가장 멋진 날이 되었던 그 영관의 순간 
순간을...  
  우리 골목패 동패들의 놀이 중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탄피 따위 
군수품을 모으는 것이었다. 낡은 철모, 탄창, 배낭, 실탄... 9월 8일 
이탈리아가 독일군에 점령된 뒤부터는 주위에 이런 것들이 흔했다. 실탄을 
주우면, 먼저 탄피를 꼭 쥐고는 총알을 열쇠 같은 데 끼우고는 비틀어 
탄피에서 총알만 뽑아 낸다. 탄피에 든 화약은 땅바닥에 쏟되, 뱀이 기어간 
자국처럼 꾸불텅꾸불텅하게 쏟고는 여기에다 불을 지른다. 탄피는, 총알이 
멀짱할 경우에는 재활용이 가능해서 아이들에게는 훌륭한 수집품이 된다. 
꽤 많이 모은 아이는, 이것을 종류, 모양, 색깔, 제조 국가에 따라 
분류하고는, 기관단총 및 경기관총 탄피로는 보병 소대를 1981년형 소형 
탄피로는 기사단을 평정했다. 아이들에게 가장 인기 있었던 것은 역시 
중기관총 탄피였다. 중기관총 탄피는 이렇게 편성된 총사령관 노릇을 했다.  
  어느 날 밤, 이렇게 평화롭게 탄피나 수집하고 있던 우리에게 
마르티네니는 비장하게 결전의 순간이 왔노라면서 운하패에 도전할 것을 
제안했다. 우리는 곧 도전장을 보냈다. 운하패는 기꺼이 우리의 도전장을 
접수했다. 결전장은 역사 뒤의 공터로 결정되었다. 시간은 밤 9시...  
  여름 날의 늦은 오후, 누구든 나른해지는 시간이었다. 우리는 흥분해 
있었다. 우리는 공격 무기를 주으러 다녔다. 각자 손에 들기 적당한 
몽둥이를 고르고, 탄통과 배낭은 굵기가 다양한 돌멩이로 채웠다. 몇몇은 
소총 멜방으로 채찍을 만들기도 했다. 제대로 휘두르기만 한다면 채찍은 
치명적인 공격 무기가 될 수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기까지 우리는 무슨 
영웅이나 된 것처럼 들떠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들떠 있었던 것은 
내가 아니었나 싶다. 그날 우리를 지배한 것은, 공격 직전의 짜릿한 흥분, 
바로 그것이었다. 가슴 저리고, 고통스럽고, 그러면서도 황홀한 순간... 
엄마, 안녕, 나 요코하마로 떠나요. 편지는 그쪽으로 하세요... 요컨대 
우리는 조국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고 있었다. 9월 8일까지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사나이란 모름지기 그래야 한다고 가르쳤듯이...
  마르티네티의 작전은 치밀했다. 우리는 북쪽에 있는 철둑을 넘어 
후방에서 기습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초반에 승세를 굳히기로 했다. 
어두워질 무렵 우리는 몽둥이와 돌멩이로 무장하고는 자갈길을 더듬어 
갔다. 철둑에 오르자, 역사 뒤켠의 숲 속에 누워 있는 적군이 보였다. 
그러나 적운 우리가 뒤에서 기습 공격을 감행한다는 것을 알고는 뒤쪽에 
경계병까지 배치하고 있었다.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기습 
공격으로 적의 전열을 흩뜨려 놓고는, 그들이 그 전열을 재정비하기 전에 
전격 작전으로 끝내는 것이었다.  
  포도주 찌꺼기를 먹은 아이는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술취한 사람처럼 
고함을 지르며 공격해 들어갔다. 그러나 역사에서 1백 미터쯤 되는 곳까지 
진격하고서야 우리는 공수가 뒤바뀐 것을 알았다. 적은 마을 끝 
집에서부터 우리를 맞았다. 수가 많지 않았던 적은 전면 배수진을 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군 중에서 담이 센 아이들은 겁 없이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담이 세지 못한 아이들은 슬슬 공격의 고삐를 늦추었다가는, 
바야흐로 시작될 건곤일척의 한판 싸움을 멀리서 지켜볼 요량으로 슬며시 
남의 집 담 그늘로 숨어들었다. 마르티네티가 전위와 후위를 따로 
편성했더라면 우리는 승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위와 후위가 
따로 없었다. 굳이 있었다고 한다면 담이 센 아이들은 전위, 겁이 많은 
아이들은 후위 노릇을 했을 뿐이다. 우리는 숨어서 전투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내가 숨어 있는 곳이 전장에서 가장 멀었다. 그러나 전투는 
시작되지 않았다.  
  몇 미터 거리까지 접근하자 두 패는 서로 으르렁거리기만 했다. 두 패의 
두목들이 나서서 회담을 벌였다. 얄타회담이었다. 두 두목은, 서로의 관할 
지역을 나누되, 필요하다고 인정되면, 기독교도들이 성지에서 회교도 지역 
정찰을 허용 받고 있었듯이, 상대방에 위한 지역 정찰을 허용하기로 
합의했다. 두 기사단 두목의 합의로 전투의 김은 빠지고 말았다. 양쪽 
진영의 병사들은 서로 상대의 용기 하나만을 확인하고는 서로 반대 방향에 
있던 각자의 본부를 향해 사이 좋게 갈라섰다.  
  이제 내가 왜 전투에 가담하지 않았는지 그 까닭을 말해야겠다. 
우스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시에 이런 핑계를 마련했던 것은 아니다. 
당시에는, 나는 겁쟁이여서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나는 겁이 많았다. 그때보다 훨씬 더 겁이 많아진 오늘날, 나는 나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하고는 한다. 그때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다른 
아이들과 함께 공격군의 전위에 가담할 수 있었더라면 지금 훨씬 나은 
인간이 되어 있을 것이라고.. 나는 내 나이 열두 살에 맞은 기회를 놓친 
셈이다. 첫 번째 기회를 맞고서도 씩씩하게 발기시키는데 실패한 사람중에 
평생을 불구로 지내는 사람들이 많다.   
  한 달 뒤, 어느 편에선가 위약하는 바람에 골목패와 운하패는 또 한번 
맞붙었다. 양 진영 사이의 공터에서는 흙덩이가 날고 흙먼지가 일었다. 
전투 기피의 이력에 죄 의식을 느꼈기 때문일까, 그래서 순교나 하자고 
결심했던 걸일까, 나는 두 번째 전투에서는 죽기를 무릅쓰고 선봉에 
나섰다. 그러다 속에 돌멩이가 든 흙덩이에 맞아 입술이 터졌다. 나는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화장대에서 족집게를 꺼내어, 터진 내 
입술에서 흙덩어리를 끄집어내었다. 내 오른쪽 송곳니 아래에는 이때 생긴 
살덩어리 흉터가 남아 있다. 지금도 혀로 부근을 문지르면서 전율이 인다.  
   그러나 이 흉터는 나를 구원하지 못한다. 용기가 있었기 때문에 생긴 
흉터가 아니라 무모해서 얻은 흉터이기 때문이다. 혀끝으로 이 흉터를 
건드릴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뭘 할 것이냐... 써야 한다... 그러나 조잡한 
문학 역시 나를 구원하지는 못할 것이다.  
  시위 행진이 있고 난 뒤로, 근 1년 동안이나 벨보를 만날 수 없었다. 
내가 암파로와 사랑에 빠진 나머지 술집 필라데에 발을 끊었기 
때문이었다. 아니다. 몇 번 들른 적이 있었으니까 아주 발을 끊었던 것은 
아니다. 들을 때마다 벨보는 술집에 와 있지 않았다. 암파로는 그 술집을 
좋아하지 않았다. 암파로의 도덕적, 정치적 기준으로 보아 술집 필라데의 
자유주의적인 멋이나, 암파로의 표현에 따르면 방만한 당디슴은, 
자본주의자들의 음모가 써낸 정교한 시나리오 같은 것이었다. 나에게 그 
한 해는 진지하고도 황홀한 육체적 범행의 기간이었다. 나는 논문을 쓰는 
일도 즐겁게, 그리고 진지하게 해 낼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가라몬드 
출판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운하 가에서 벨보를 만났다. 그는 유쾌해 
보였다.  
  '사랑하는 성당 기사 아니신가... 이거 얼마 만인가. 귀하디 귀한 술 한 
병 선물로 받아 뒀다네. 옛날 옛적에 빚어진 불사주 한 병을... 사무실 한번 
들르지 그래? 내게는 종이컵도 있고 텅 빈 오후도 있다네.'  
  '액식어법이로군요. 있다가 종이컵에도 걸리고 텅빈 오후에도 걸리니까 
조금 이상한데요.'
  ,비번이야, 알라모 요새가 함락되기 전에 병입한 술이라, 이 말일세.'  
  벨보를 따라 가라몬드 출판사로 들어갔다. 겨우 한 모금씩하는 참인데 
구드룬이 들어와 벨보에게, 한 신사 분이 찾아왔다고 했다. 벨보는 자기 
이마를 찰싹 소리가 나게 때렸다. 중요한 약속을 잊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약속을 깜빡 잊고 마시니까 더 맛나는데... 이렇게 누리는 기회에는 
음모의 맛이 나거든... 벨보가 중얼거렸다. 그는 어떤 자료로 어떻게 썼는지 
모르지만 성당 기사단에 관련된 원고를 보여 주겠다는 사람이 있다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금방 쫓아 버리고 오지. 아니야. 골치 아픈 문제가 나오면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질지도 모르겠어.'
  내게는 좋은 기회일 수도 있었다. 나는 이렇게 해서 성단 기사단의 
그물에 걸려들었다. 
  
    17  
  그는 1940년대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우리 집 지하실에서 우연히 
발견한 40년대의 잡지를 보면서, 나는 그 잡지에 나온 사람들의 얼굴이 
모두 40년대의 얼굴인 데 놀란 적이 있다. 전시였기 때문에 그랬을 테지만 
40년대 사람들의 뺨은 하나같이 푹 꺼져 있고, 눈빛은 유난히 불안해 
보였다. 나는, 총구를 마주하고 있던 양 진영의 병사들 사진을 통해 그런 
얼굴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즈음에는 얼굴이 그런 사람들이 서로를 쏘아 
죽이고 죽고 했던 것이다.  
  우리가 만난  사람은 하얀 셔츠와 파란 양복 차림에 회색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문득 그가 사복하고 있는 까닭이 궁금했다. 물기름을 먹여 곱게 두 
갈래로 빗어 넘긴 유달리 까만 머리 카락은 이마를 중심으로 약간 
오므라든 V자를 그리고 있었다. 살짝 벗겨진 이마 위로 전화 줄 
동여매듯이 다정하게 벗어 넘긴 머리 매무새... 적당하게 그을린 얼굴은 
선이 뚜렷했다. 식민지 신사풍의 주름살 때문만은 아닌 듯 했다. 입가에서 
귀까지 난 왼쪽 뺨의 파란 흉터는 아돌프 망주 식으로 가늘게 기른 까만 
수염에 반쯤 가려져 있었다. 흉터 위의 피부로 보아 1밀리미터쯤 깍아 
내리는 성형 수술을 몇 차례 받은 것 같았다. 총상으로 인한 흉터였을까.  
  자신은 아르덴티 대령이라고 소개한 그는 벨보 에게는 손을 내밀면서도 
내 쪽으로는 흘깃 눈길만 던졌다. 벨보가 나를 자기 조수라고 소개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무릎이 보일 만큼 바지 가랑이를 
걷어 올렸다. 복사뼈까지 올라오는 밤색 양말을 신고 있었다. 벨보가 
물었다.  
  '대령이시라는데... 현역 이신가요?'  
  아르덴티 대령은 꽤 고급인 듯한 의치를 드러내면서 대답했다.  
  '퇴역입니다. 예비역이라고 생각하셔도 좋고요. 젊어 보일테지만 
실제로는 나이를 좀 먹었답니다.' 
  '나이를 잡수신 것 같지 않은데요?' 
  '전쟁을 네 차례나 치렀는데요?' 
  '첫 번째는 가리발디 장군과 함께 싸우셨겠군요?' 
  '아니오. 이디오피아 전쟁에 지원했습니다. 그때가 중위. 스페인 
전쟁에도 
지원했지요. 그때가 대위. 아프리카로 다시 갔을 때가 소령. 우리가 
식민지를 포기할 때까지 아프리카에서 근무했지요. 몽땅 잃었지요. 명예만 
빼고... 하지만 용기라고 할까, 그런 게 좀 있었어요.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지요. 외인 부대에 들어가 밑바닥부터 시작했어요. 특수전 학교도 
나오고... 46년에는 상사. 58년에는 마쑤에서 대령을 달았습니다. 나는 역시 
지는 편에서 싸울 팔자를 타고 난 모양이더군요. 드골의 좌파가 
우세해졌을 때는 은퇴해서 프랑스에 살러 갔지요. 알제리아에서는 썩 좋은 
친구들도 사귀었어요. 덕분에 마르세이유에서 수출입 회사를 하나 차릴 
수도 있었고요. 다행히도 이 싸움만은 이기는 편에 가담한 모양입니다. 
수입도 썩 괜찮아서 하고 싶어하던 일도 할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있으니까요. 최근 몇 년간 나는 그동안 연구해 오던 것으로 책을 한 권 
썼습니다. 그 원고가 바로 이겁니다...'  
  그는 가죽 가방에서 두툼한 원고 뭉치를 꺼냈다. 내 눈에는 그 원고 
뭉치가 붉어 보였다. 벨보가 물었다.  
  '성당 기사에 관한 원고입니까?' 
  대령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답했다.  
  '성당 기사단... 그렇습니다. 소시적부터 정열을 쏟았었지요. 성당 기사들 
역시 영광을 찾아 지중해를 건너는 행운을 누린 군인들이었으니까요.'  
  '여기에 있는 이 까소봉 씨가 오랫동안 성당 기사단 연구를 해왔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에 관한 한 저보다 까소봉 씨가 더 잘 알 것입니다. 내요을 
좀 들려주시겠습니까?'  
  '나는 오래 전부터 성당 기사단에 관심을 가져 왔습니다. 트리폴리 이쪽 
저쪽의 야만인들에게 유럽 문명을 전한, 참으로 관대한 군인들이었지요.'  
  '성당 기사의 적이 반드시 야만인이었던 것은 아니지요.'  
  내가 끼어들어 토를 달았다. 
  '마가레브에서 적도들의 포로가 되어 보았소?'  
  아니꼽다는 듯한 말투였다. 그는 나를 노려보았다. 그가 지휘하는 부대에 
근무해 보지 않은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가 벨보에게 말했다.  
  '나와 이 젊은이는 세대가 다릅니다.'  
  그리고는 내 쪽을 보면서 말을 이었다.  
  '...이거, 나를 재판하는 자리는 아닐 테지요.'  
  벨보가 그의 말허리를 잘랐다.  
  '대령님, 우리는 지금 대령님의 작품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 작품 
이야기를 좀 들려주시지요.'  
  대령은 한 손으로 원고를 잡은 채 말했다.  
  '한 가지를 분명히 짚고 넘어갑시다. 내게는 이 책의 제작비를 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귀출판사가 내 책으로 손해보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학술적인 평가가 필요하다면 그것도 내가 주선하지요. 두 시간 
전에 나는, 나를 만나러 파리에서 여기까지 온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분이라면 내 책에다 아주 권위 있는 서문을 써줄 것입니다.'  
  그는 벨보의 질문까지 지레짐작하고 대답까지 마련해 온 것 같았다. 
만일에 벨보가, 파리에서 왔다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면 그는 틀림없이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그 분의 이름은 밝히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주 미묘한 문제가 되어 놔서요.  
  '벨보 박사... 내 원고에는 성당 기사단의 정수라고 할 만한 것은 다 
들어 
있습니다. 진실의 기록인 것이지요. 이것은 아무나 쓸수 있는 그런 
이야기는 아닌 것입니다. 미국의 어떤 스릴러 작가가 쓴 소설보다 더 스릴 
있는 이야기라는 편이 어울리겠군요.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중요한, 아주 
중요한 사실을 한가지 알아내었습니다만 이것은 시작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는 세상을 향해,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겁니다. 그러면 
나머지 수수께끼를 풀어 줄 누군가가 나타나겠지요. 누군가가. 내 책을 
읽고 나서겠지요. 요컨대 이 책의 출판은 일종의 낚시질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 이 낚시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 중 하나는 이미 죽음을 당했는지도 모릅니다. 
비밀을 누설할 것을 두려워하는 자들 손에요.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 이 
사실을 책으로 엮어 내고, 이로써 2천 명쯤의 독자가 생긴 뒤에는 나를 
죽이는 것은 의미가 없어집니다...'  
  그는 잠깐 말을 끊었다가 이렇게 덧붙여 물었다.  
  '...두 분 중에 성당 기사들이 체포된 사건을 아시는 분이 있습니까?'  
  '여기에 있는 까소봉 씨가 최근에 내게 그 이야기를 해주더군요. 나는 
기사들이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체포당했다는 사실, 기습적으로 
체포당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약간 충격을 받았습니다만...'  
  대령은 그제서야 손 아랫사람을 대하는 듯하던 자세를 고치고 
조심스럽게 웃었다.  
  '사실입니다. 하지만, 프랑스 국왕을 위협할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하던 
무리가, 몇몇 소인 간신배들이 왕을 또 교황을 꼬드기고 있었는데 이걸 
모르고 있었으리라는 건 어불성설입니다. 이게 뭘 말합니까? 성당 
기사단에게는 계획이 있었다는 뜻이지요. 무시무시한 계획이... 이들이 
세계를 정복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고, 또 어마어마한 힘의 원천에 대한 
비밀을 간직하고 있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힘의 원천에 대한 성당 
기사단의 비밀은, 파리에 있던 성당 기사단 사령부,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등지에 산재해 있던 수많은 기사단, 성지에 있던 성채, 수도원 
재산 등. 모든 것을 희생시켜 가면서라도 지킬 가치가 있는 비밀이었다고 
가정해 보는 겁니다. 공정오아 필립은 바로 이 부분을 의심했던 것이지요. 
그렇지 않았다면 프랑스 국왕 필립이, 프랑스 기사도의 꽃으로 불리던 
성당 기사단을 불신했을 턱이 없지요. 성당 기사단에서는 국왕이 저희들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따라서 조만간 철퇴가 날아오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어요. 맞받아 칠 수 없다는 것까지요... 왜냐... 성당 기사들에게는 
원대한 계획이 있었거든요. 성사시키는데 세월을 요하는 원대한 계획이요.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원대한 계획을 성사시키자면 막대한 재원도 
마련되어야 했던 모양입니다. 아니면 계획의 속성상 아주 서서히 
진행되어야 하는 것이었거나... 하여튼 성당 기사단의 추밀 요원들 말인데... 
오늘날에야 공공연한 비밀이 되어 있습니다만.'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겁니까?'  
  '없고 말고요. 추밀 요원들 없이 그토록 막강하던 조직이 그렇게 
오랫동안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완벽한 추론이로군요.' 
  벨보가 내 눈치를 살피면서 맞장구를 쳤다. 대령이 말을 이었다.  
  '사령관 역시 이 추밀 요원에 속합니다. 그런데도 사령관은 국외자들을 
기만하기 위해 외부적으로만 위장 활동을 했을 겁니다. 기사단과, 기사단의 
밀사에서 골티에 발터, 세계 정복을 겨냥하던 성당 기사단의 계획은 서기 
2천 년에 가서야 밝혀질 것이라고 했어요. 성당 기사단은 지하로 
들어가기로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뿌리가 잘린 것처럼 보이도록 
위장했다는 겁입니다. 그래서 뿌리가 잘린 것처럼 보이도록 위장했다는 
겁니다. 말하자면 성당 기사단은 성당 기사단을 희생시킵니다. 지금까지 
이들이 해온 게 바로 이거예요. 사령관들도 그랬고요. 성당 기사들 중 
일부는 자진해서 죽음을 당합니다. 어쩌면 제비를 뽑아 순번을 정했는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박해를 받을 경우, 이들은 평범한 시민들 속으로 섞여 
들고 맙니다. 하급 관리, 수련수사, 목수, 유리 장수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이들이 모여 프리메이슨을 결성하고, 이 비밀 결사 조직을 온 세상에 
침투시켰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그러나 영국에서는 
사정이 달랐어요  .
  영국의 국왕은 교황이 뭐라고 하건 성당 기사들에게 연금을 주고 퇴직을 
시켰어요. 성당 기사들은, 교단의 으리으리한 본부에서 옛말 하면서 아주 
양순하게 살았다고 하지요. 양순하게... 이걸 믿어요. 나는 안 믿습니다. 
스페인에서는 성당 기사단은 그 이름을 몬테사 수도회로 바꾸었습니다. 
신사들이었지요. 국왕의 버르장머리를 고칠 수 있을 만큼 막강한 
신사들이었어요. 어떻게요 이들에게는 국왕이 발행한 약속 어음이 한 아름 
있었답니다.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한 주일안에 국왕을 파산시킬 수도 
있었답니다. 포르투갈의 경우, 국왕이 성당 기사단에게 뭐라고 한지 
아십니까. 여보게들, 이렇게 하세, 이제 성당 기사단 그만하고 그리스도 
기사단으로 이름을 바꾸어 주게, 그러면 나 다리 좀 뻗고 자겠네... 
도이치에서는, 성당 기사단은 핍박을 거의 받지 않았어요. 공식적으로는 
성당 기사단은 교단이 문을 닫기는 했지만요... 그런데 도이치에는 성당 
기사단의 형제뻘 되는 교단이 있었답니다. 튜튼 기사단이었지요. 이들은 
국가 안에 있는 국가 정도라 아니라 바로 국가 그 자체였어요. 이들은 
국가를 상대로, 지금은 러시아 치하에 있는 지역과 크기가 맞먹는 지역을 
요구했어요. 실제로 이들은 15세기, 그러니까 몽고족이 쳐들어오기 
직전까지 저희 지역을 확장시켜 왔고요. 하지만 이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몽고족은 지금은 우리 문 앞을 지키고 있으니까... 아니, 이야기가 옆길로 
새면 안 되는데...'  
  '그렇습니다. 옆길로 새지 않게 합시다.' 
  '그래요, 그래요...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필립 왕이 성당 기사들에 대한 
구금 영장을 집행하기 한 달 전에, 황소가 끄는 건초 수레 한 대가 성당 
기사단 건물을 나서서 어디론 가로 갑니다. 노스트라다무스는 저서 
상뛰르에서 이걸 이렇게 노래하고 있어요.' 
  대령은 원고를 펼치고 인용문을 읽었다.  
  
  쑤라빠스뛰르 다니모 뤼미낭  
  바르 외 꽁뒤 오 방트르 에르비뿔리끄  
  쏠다 까셰, 레 자름 브뤼 모낭...  
  
  나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건초 수레 운운하는 것은 전설입니다. 노스트라다무스가 역사적인 
사실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고 보기도 어렵고요.'  
  '까소봉 씨, 당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당신과는 달리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에 상당한 관심을 보인답니다. 나는 건초 수레라는 
말을 글자 그래로 믿을 만큼 순진한 사람도 아닙니다. 그건 상징이에요. 
자끄 드 몰레가, 조만간 체포 당할 것을 알고 수도회의 지휘권과 밀지를 
보쥬 백작에게 넘겨줌으로써 비빌 결사인 성당 기사단의 사령관직을 
계승시킨 구체적인 사실을 상징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것을 확증할 만한 문서가 있습니까.'  
  대령은 심술궂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정사라는 것은 항상 승리자의 손에서 쓰여집니다. 정사에는 우리 같은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그것 때문입니다. 그래요. 이 건초 수레 이야기 
뒤에는 뭔가가 있었어요. 성당 기사단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추밀 
요원들은 피비린내 나는 박해의 폭풍이 몰아치지 않는 곳으로 도피합니다. 
그곳에서 조직을 확산시키기 위해서요. 몇 년 동안이나 나는 나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 보았답니다. 이 영웅주의적인 친구들은 어디로 갔는가... 
전역하고 사생활을 되찾는 대로 나는 그 뒤를 추적해 보기로 결심했어요. 
건초 수레가 출발한 곳은 프랑습니다. 그래서 나는 프랑스야말로 이 비밀 
결사들의 추밀 요원들이 모여 있었던 곳을 찾아볼 만한 곳이라고요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 넓은 프랑스 어디에서 찾아야 한다지요.' 
  그에게는 무대 배우의 기질이 있었다. 벨보와 나는 그의 이야기에 
정신없이 빠져 들었다. 우리는 겨우, 아 그렇겠군요. 이런 장단이나 
맞추면서 현란한 그의 이야기에 빠져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말씀드리리다. 성당 기사들은 어디로 숨었을까요. 위그드 빠이양이 어디 
출신이던가요. 트로와에서 가까운 상빠뉴 출신입니다. 성당 기사단이 
결성될 무렵 이 상빠뉴를 지배하고 있던 사람은 위그 드 상빠뉴인데, 이 
사람은 그로부터 몇 년 뒤에 예루살렘에서 성당 기사단에 합류합니다. 이 
사람은, 귀국한 뒤에도 시또 수도원장과 접촉하고, 바로 위원장을 지원해서 
수도원에서 히브리 텍스트를 공부하게 하고 번역하게 하는 장본인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생 베르나르의 베네딕트 수도원은 백인 기독교들로 
득실거리던 곳이었는데, 바로 이 베네딕트 수도원도 부르고뉴에 있던 
유대교의 라비들을 시또로 불러, 위그 드 상빠뉴가 팔레스티나에서 가져 
온 텍스트를 가르치게 합니다. 위그 드 상빠뉴는, 심지어는 생 베르나르 
수도회에다 바르 수르 오브 삼림을 기증하기까지 합니다. 후일 이 숲에 
끌레르보 수도원이 서게 되지요. 그렇다면 생 베르나르는 무엇이 
되었지요.'
  '성당 기사단의 사령관이 되었지요.'  
  '왜요. 생 베르나르는 성당 기사단을 베네딕트 수도회 이상으로 
막강하게 
키워 놓았다는 것을 알고 있겠지요. 그는 베네딕트 수도원에 대해서는 
토지나 저택을 기부받는 것을 엄금하면서 그런 토지나 저택은 성당 
기사단에 기부하게 했어요. 포레 도리앙이 트로와 근처에 있다는 건 알고 
있겠지요. 이 숲의 거대한 성채가 속속 들어섰답니다. 그 동안 
팔레스티나에 있던 성당 기사들이 전투를 벌이고 회교도를 죽이는 대신 
성채에 죽치고 앉아서 회교도 친구들을 사귀고 있었다는 걸 아십니까. 그 
즈음의 성당 기사들은, 요컨대, 회교 신비주의에 경도 되어 있었던 겁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생 베르나르는 위그 드 상빠뉴 백작의 재정적인 지원을 
얻어 성지에다 수도원을 설립했는데 이 수도회는 성지에서 아랍 및 유대의 
밀교와 접촉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것은 또 다른 말로 하자면, 성당 
기사단의 안팎 살림을, 눈에 보이지 않는 추밀 요원들에게 맡기고 
있었다는 셈이 됩니다. 그러니까 이 추밀 요원들은 왕정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권력의 조직을 키워 나가고 있었던 겁니다. 나는 행동하는 
사람이지 과학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근거도 없는 낭설로 더하기 
빼기를 하는 대신에, 난다 긴다 하는 학자들도 감히 해내지 못하는 일을 
해내었습니다. 나는 성당 기사단의 근거지, 근 두 세기 동안이나 이들이 
본바닥으로 삼던 곳, 이들이 물 속의 물고기처럼 놀던 곳을 일일이 답사한 
것입니다...  
  ' 기야 모주석도, 물고기가 물에서 놀 듯이 혁명가는 인민 사이에서 
놀아야 한다고 합디다.'  
  내가 한마디 거들었다.  
  '주석 좋아하지 마시오. 성당 기사단은 선생의 그 변별한 
공산주의자들보다 훨씬 위대한 혁명을 준비하고 있었답니다.'  
  '중국인들도 이제 변발은 하지 않습니다.'  
  '안 해요. 그것 참 안됐구먼... 앞에서도 말했지만, 성당 기사달은 상빠뉴 
지방을 피신처로 삼았을 겁니다. 어딜까요. 빠이양. 트로와. 동방의 숲. 
천만에요. 당신의 빠이양은 조그만 마을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당시에는 겨우 성이 하나 있었던가, 트로와는 토시였어요. 왕당파가 너무 
많은 도시... 성당 기사단 소유로 되어 있던 동방의 숲. 사단이 나자 왕의 
근위병들이 맨 먼저 수색한 곳이 바로 이 동방의 숲이었어요. 따라서 
단언하거니와 이 세 곳은 아닙니다. 그러면 어딜까요. 그럴 만한 곳은 
프로뱅뿐입니다.'  
  
    18   
  '왜 하필이면 프로뱅입니까' 
  '프로뱅에 가보셨소 참으로 불가사의한 곳이오. 오늘날에도 그걸 느낄 
수 
있어요. 가보세요. 아직도 비밀의 냄새가 물씬물씬 풍기는 불가사의한 
곳이랍니다. 11세기의 프로뱅은 상빠뉴 백작의 근거지이자, 중앙 정부의 
권력이 미치지 못하던 자유령 이었어요. 말하자면 중앙 정부도 이곳의 
일이라면 감 놓아라 배 놓아라 할 수 없었던 곳이었지요. 성당 기사단은 
이곳에 터를 잡았어요. 그래서 지금도 이곳에 는 성당 기사단을 
상기시키는 지명이 있고, 교회도 있고, 고궁도 있고, 평원을 내려다볼 수 
있는 성채도 있어요. 게다가 돈도 많고, 장사하는 상인들도 많고, 거래도 
많고... 그러다 보니 지방 전체가 난장 형국이었어요. 딴 데의 낯선 
사람들이 드나들어도 모를 그런 곳이었지요. 하지만 이 지방의 명물 중의 
명물은 역시 선사 시대부터 있어 온 바로 동굴이었지요. 벌집 같은 동굴 
망이 산 속에 좌악 퍼져 있는 겁니다. 카타 콤베가 따로 없어요.  
  동굴 중에서 오늘날에는 일반에 공개되는 동굴도 있답니다. 그러니까 
이런 동굴은. 사람들의 은밀한 밀회소, 적이 쳐들어오면 순식간에 잠적할 
수 있는 좋은 은신처가 되었던 겁니다. 적은 아마 이곳사람들이 허공으로 
증발해 버린 줄 알았을 거예요. 내부를 잘 아는 사람은 한쪽 동굴로 
들어가 반대편에 있는 동굴 입구를 찾아 나갈 수도 있었어요. 고양이처럼 
아무도 모르게 감쪽같이 말이지요. 침략자가 동굴로 들어온다면 어둠 속을 
헤치고 살금살금 다가가 목을 쓰윽 도려 버릴 수도 있었던 것이지요. 
따라서 이 동굴은 특공 유격대원들에게는 그렇게 요긴할 수가 없었어요. 
이 동굴의 내부를 잘 아는 유격대원이 입에는 칼을 물고 양손에는 
수류탄을 하나씩 들고 나다니면 침입자는 그저 고양이 앞의 쥐 신세가 
되는 겁니다.' 
  이야기를 계속하는 그의 눈은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프로뱅이, 숨어 살기에 얼마나 좋은 곳이었는가를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성당 기사단의 추밀 요원들은 아무도 모르게 지하에서 회합을 
가질 수도 있었어요. 원래 그 땅에 터 잡고 살던 주민들은, 추밀 요원들이 
회동하는 광경을 보았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보았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어요. 공정왕 필립의 군대가 이 프로뱅을 뒤진 것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국왕의 군대는 프로뱅을 뒤지고, 눈에 띄는. 그러니까 노출되어 
있는 성당 기사들을 잡아 파리로 압송했지요. 레이노 드 프로뱅도 이렇게 
압송되어 간 성당 기사 중의 하나였어요. 레이노 드 프로뱅은 파리에서 
모진 고문을 당합니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모르기는 하지만, 어떤 계획에 따라 짐짓 체포되었을 겁니다. 국왕에게. 
프로뱅에 있던 기사들 역시 소탕되었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그렇게 총대를 
매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레이노 드 프로뱅은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내 입을 다물어 
버림으로써 나머지 기사들에게 어떤 밀지를 전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프로뱅은 절대로 항복하지 않는다, 성당기사단의 새로운 삶터인 프로뱅은 
절대로 굴복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프로뱅에 있는 전우들이여 절대로 
항복해서는 안 된다 뭐 이런 밀지를 전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프로뱅의 동굴 중에는 건물과 건물을 한 줄로 연결시키는 동굴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곡물 창고로 들어가 교회로 나오게 하는 동굴 같은 것 
말입니다. 어떤 동굴의 내부에는 기둥도 있고, 들보도 있고, 사람이 만든 
둥근 천장도 있습디다. 오늘날에도 프로뱅 고지대의 집에 들어가 보면 
천장이 맞보로 되어있는 지하실을 볼 수 있어요. 볼 수 있는 정도가 
아니고 합하면 수백 개는 실히 될 겁니다. 이런 지하실은 대개 동굴과 
통해 있지요.'
  '억측이군요. 나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천만에요, 젊은이. 사실이오. 당신은 프로뱅의 동굴을 보지 못했으니까 
그러는 겁니다. 땅속 깊은 곳에 있는 동굴 방의 벽이라는 벽은 모두 
고대의 낙서 천지예요. 동굴 낙서가 가장 많이 남은 방이. 동굴학자들이 
측실이라고 부르는 방입니다. 로마인들이 들어오기 전에 그려진 듯한 
드루이드 풍의 상형 문자를 상상해 보세요. 카이사르가 땅 위로 지나갈 
동안 사람들은 땅 밑에서 저항의 칼을 갈고 있었던 겁니다. 여기에는 
카타리 파의 상징도 있어요. 물론 지금이야 프로뱅의 카타리 파는 소탕 
당한지 오래지만 당시에는 프로뱅 뿐만 아니라 상빠뉴에서도 카타리 파 
이교도 잔당들이 카타콤베에서 비밀 집회를 열고 있었어요. 땅 위에서 
183명의 카타리 이교도들이 화형을 당하고 있을 동안에도 땅 밑에서는 
카타리 파 비밀 집회가 열리고 있었던 것이다. 역사가들은 이들을 
부그르와 마니교도라고 부르고 있지요. 부르그가 뭡니까 바로 즉 
불가리아의 카타리파가 아닙니까 그런데 프랑스 어 부그르에서 뭔가 
짚이는게 없어요. 원래 이 말은 남색이라는 뜻입니다. 불가리아의 카타리 
파 이단자들이 이렇게 불린 것은, 이들에게 남색하는 약점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대령은 신경질적으로 웃고는 말을 이었다. 
  '남색의 혐의를 받은 집단이 또 있어요. 바로 성당 기사단입니다. 
공교로운 일 아닙니까'
  '요점만 말씀하시지요. 그즈음 쎄는 이단자를 처단할 때마다 손쉽게 
끌어다 붙이는 죄목이 바로 남색이었어요.' 
  '그런 옳아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성당 기사들이 정말 
남색꾼들이었다고 믿는 줄 알면 안 됩니다. 성당 기사들은 군인들이었어요. 
그리고 우리 같은 직업 군인들은 아름다운 여자들을 좋아합니다. 성당 
기사들은 정결의 서원을 세웠지만, 서원을 세웠든 안 세웠든 남자라는 건 
어디 안 갑니다. 남자는 남자지요. 내가 남색 이야기를 한 까닭은 카타리파 
이단자들이 성당 기사단의 근거지를 피난처로 삼은 것은 우연의 
일치가아니지 않느냐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성당 기사들이 이 
카타리 이단자들로부터 동굴을 이용하는 방법을 배운 것은 사실입니다.' 
  '사실이라기보다는 아직까지도 가설이겠지요.'
  벨보가물었다.   
  '그렇습니다. 모든 정설은 가설로 시작됩니다. 지금부터 내가 왜 
프로뱅에 갔느냐, 그걸 설명하겠습니다만 그 전 에이거 하나만 짚고 
넘어갑시다. 이것은 가설이 아니라 사실이에요. 프로뱅 중심에는 그랑쥬 오 
딤므라고 불리는 왜 규모가 큰 고딕 식 건물이 있어요. 십일조 곡창이라는 
뜻이랍니다 성당 기사단의 재정 수입 중 가장 중요한 수입원이 지역 
백성들로부터 거두어들이는 십일조라는 거, 알고 있었겠지요 성당 
기사단은 이렇게 거두어들인 십일조를 국가에 한 푼도 들여놓지 않고 독립 
채산으로 저희 살림을 꾸렸지요. 각설하고... 다른 건물의 지하도 그랬지만 
이 건물의 지하 역시 동굴 망과 연결되어 있었어요. 오늘날에는 상태가 
아주 나쁘기는 합니다만 분명히 동굴 망과 연결되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프로뱅의 고문서 관리국을 뒤지던 나는, 어느 날 1894년에 발견된 
프로뱅 지방 신문 한 장을 찾아내었어요. 그 신문에는, 신문이 발행되기 
얼마 전에 그 곡창의 지하를 조사한 용감한 두 용기병에 관한 기사가 
실려있었어요. 두 용기병 중 한 사람은 뚜르 출신인 까미유 라포
르슈, 또 한사람은 뻬쩨르부르그 출신의 에두아르 앙골프였습니다. 나는 
뻬쩨르부르그라는 말을 분명히 확인했어요. 이 두 용기병은 관리인의 
안내를 받아 지하로.정확하게는 지하 1층으로 내려갔어요. 관리인은 그 
지하 1층 밑에도 다른 지하실이 있다는 걸 보여 주느라고 발로 바닥을 
쾅쾅 굴려 보였던 모양입니다. 울리는 소리가 분명히 들리더랍니다. 이 
신문의 기자는 이 용감한 두 용기병을 찬양하고 있습디다. 두 용기병은 
관리인을 지상으로 보내어 등잔과 밧줄을 가져 오게 한 뒤, 탄광 속으로 
들어가는 아이들처럼 그 밧줄을 타고 내려가 신비스러운 지하 갱도로 
기어들어 갑니다.  
  신문 기사에 따르면 이 두 사람은 오래지 않아 아주 넓은 방에이릅니다. 
이 방에는 아주 잘 만들어진 난로도 있고, 중앙에는 마르기는 했어도 샘도 
있더랍니다. 두 사람은 밧줄을 끌어다 끝에다 돌을 매단 다음 샘의 깊이를 
재어 보았는데, 자그마치 11미터나 되더랍니다. 일단 지상으로 올라온 
이들은 한 주일 뒤에 보다 튼튼한 밧줄을 준비하고는 다시 내려갔어요. 두 
번째 탐험에는 두 용기병 말고도 한사람이 더 따라 내려간 모양입니다. 
두사람은 앙골프 용지병의 몸에 밧줄을 묶고는 샘 속으로 내려 보냅니다. 
샘 바닥으로 내려간 앙골프는 여기에서 또 하나의 방을 찾아냅니다. 가로 
세로가 각각 10미터, 높이가4미터나 되는 방을요... 믿어집니까 나머지 두 
사람도 앙골프를 따라 내려갑니다. 그리고 세 사람은 지표에서 근 
30미터나 내려가 지하 3충에 이르게 됩니다. 이들이 이 지하 3층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무슨 짓을 했는지 우리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신문의 
기자는, 용기병들이 내려가는 것을 분명히 목격했다고 쓰고 있습니다. 
  자기도 따라 들어가고 싶었지만 그런 용기가 없었다는 것도 고백하고 
있었고요... 나는 이 이야기를 읽는 순간 몹시 흥분하고 말았어요. 꼭 한번 
들어가 보고 싶었는데, 지난 세기 말에 동굴의 천장이 모두 내려앉고 
말았다더군요. 샘이 있었다는 건 확인된 셈이지만, 그걸 찾아낼 방법은 
이제 없어지고 만 겁니다. 문득, 용기병들이 거기에서 빈손으로 나오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마침 그즈음은 렌느 르 샤토의 비밀에 
관한 책을 읽은 참이었어요. 역시 성당 기사단의 비밀을 다룬 이 책은 
신도가 겨우2백 명인 조그만 시골 교회의 가난한 목사 입니다. 이 목사가 
어느 날 교회 바닥을 뜯어내다가 아주 오래된 문서가 든 상자를 하나 
발견합니다. 문서 뿐 이었겠습니까만. 그 다음 이야기는 이 책에 자세하게 
나와있지 않아서 분명치 않습니다.  
  하지만 이때부터 목사는 돈을 물 쓰듯이 하게 됩니다. 얼마나 뿌려 
대었던지 뒷날에는 재판까지 받을 정도로 타락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자, 
두 용기병 중 한 사람에게, 흑은 두 사람 모두에게,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날 수 있을 법한 거 아닙니까 먼저 내려간 사람은 앙골픔니다. 가령 
지하로 내려간 앙골프는 작은 귀금속, 옷 속에 숨길 수 있을 정도로 작은 
귀중품을 한 점 건집니다. 그리고는 올라온 뒤에도 동료에게는 아무 말도 
않습니다... 이런 일이 없었다는 보장은 없는 것이죠. 나도 참 어지간히 
끈질긴 사람이지요. 하기야 어지간히 끈질긴 사람이 아니었다면 이 험한 
세상에 이렇듯이 번듯하게 살아 남을 도리가 없었을 테지요.  
  '대령은 이러면서 처음에는 얼굴의 흉터, 다음에는 관자놀이, 
마지막으로는 목 뒤를 쓰다듬었다. 목이 제자리에 붙어 있는지 그걸 
확인하려는 듯이... 
  '나는 파리의 중앙 전화국으로 가서, 앙골프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프랑스에 있는지 없는지 알아본답시고 온 나라전화 번호부를 다뒤졌어요. 
아, 그랬더니, 딱 한사람 있더군요. 오세르에 사는 앙골프... 나는 아마추어 
고고학자라고나 자신을 소개하고는 한번 만나고 싶다는 간곡한 내용의 
편지를 보냈어요. 두 주일 뒤에 답장이 왔습디다. 신문에 났던 문제의 
앙골프 용기병의 딸이라면서요. 아주 나이가 많은 부인입디다. 부인은 내가 
자기 선친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놀라면서 오히려 내게서 윌 좀 
알아내고 싶은 모양입디다. 내게서 오히려 자기 선친 이야기를 듣고 
싶어한다... 여기에 뭔가가 있겠구나... 이런 감이 잡힙디다. 서둘러 
오세르로 갔지요. 마드무아젤 앙골프는 담쟁이덩굴이 푹 파묻힌 조그만 
집에 살고 있더군요. 나무문은 굳게 잠겨져 있습디다. 문 양쪽에다 못을 
박고, 이 두 개의 못을 끈으로 꽁꽁 묶어 둔 채로 살고 있었으니 
어지간하지요. 앙골프 여사는 체구가 작고 친절합디다.  
  교육을 그다지 많이 받은 것 같지 않았고요. 여사는 나를 만나자마자, 
자기 선친에 대해 뭘 알고 있느냐고 물었어요. 나는, 프로뱅의 동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그 지역에 관한 역사 논문을 쓰는 중이라고 했어요. 
여사는 몹시 놀라는 눈칩디다만, 선친이 프로뱅에 갔었다는사실은 모르고 
있었어요. 앙골프는 용기병이었지만 이 딸이 태어나기 전인 1895년에 
제대했으니까 모르는 것도 당연하지요. 제대한 그는 오세르에서 그 집을 
사고, 돈이 왜 많은 그 지방 여자와 결혼한 것으로 되어 있어요. 그러나 
앙골프 여사가 다섯 살 때인 1915년 앙골프 부인은 세상을 떠납니다. 
그리고 20년 뒤인 1935년에는 앙골프가 실종됩니다. 글자 그래도 사라져 
버린 겁니다. 그즈음 앙골프는 파리에 1년에 두 번 꼴로 파리에 출입하고 
있었는데, 실종 사건도 이런 여행 중에 일어난 것입니다. 지방 경찰이 파리 
경찰에 앙골프의 행방을 조회하고 탐문합니다만 앙골프는 그야말로 
증발이라도 한 것처럼 깨끗이 실종되어 버리고 맙니다.  
  결국 지방 경찰은 사망으로 추정하고 수사를 종결합니다. 홀로 남은 딸 
앙골프 여사는 유산도 별로 없고 해서, 어릴 때부터 혼자서 생계를 
꾸립니다. 몰론 결혼도 하지 못하고 늙었지요. 노파가 한숨에 섞어서 한 
이야기를 듣고 있으려니까 사연이 많았던 모양입디다. 평생에 단 한 번 
있었던 혼담도, 이루어지기는 고사하고 뒤끝마저 좋지 못했다더군요. 
노파는 내게 이럽디다. 무슈 아르덴티, 나는 불쌍한 우리 아버지의 소식도 
모르고 사는 게 그렇게 죄스럽고 분할 수가 없어요. 산소라도 있으면... 
있으면 어디에 있는지 그것만이라도 알았으면 원이 없겠어요 ... 노파는 
자기 아버지 이야기를 그렇게 하고 싶어하더군요. 성격이 조용조용하고. 
다정다감하고, 젊은 날을 공부로 보낸 아주 교양이 있고, 성격에 빈틈이 
없는 그런 분이었다... 이따금씩은 인근의 초지를 누비면서, 역시 지금은 
작고하신 본초학자와 얘기 나누는 걸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틈나면 
사업차 파리에도 자주 드나들었는데 올 때는 책을 한 보따리싸 가지고 
오고는 했다... 아닌게아니라 서재에는 책이 아주 많았어요. 앙골프 여사는 
자기 아버지 서재를 보여주고 싶어하면서 2층 서재로 안내까지 해줍디다. 
깨끗하게 정돈된 조그만 방이었지요.  
  여사는. 세상을 떠났을 터인 선친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다면서 한 주일에 한번씩 치운다고 하더군요. 여사는 그 방을 선친의 
생전 모양그대로 관리하고 싶어했어요. 공부를 많이 해서 선친의 책을 
읽어보는 게 소원이기는 하지만, 그게 하고 싶다고 아무나 할 수 있는 
겁니까 고대 프랑스 어, 라틴 어, 독일 어, 심지어는 러시아 어로 된 책도 
있었는데... 앙골프 씨는 러시아 태생이라고 합디다. 아버지는 프랑스 
대사관 관리를 지냈다지요, 아마. 어쨌든 그 서재는 천여 권의 책이 
있었는데 대부분이 성당 기사단 재판과 관련이 있는 것들입디다. 1813년에 
출판된, 레누아르의 떵당 기사단의 처형과 관련된 역사적 유물 같은 
희귀본도 있었어요. 그런데 비밀 문서에 해당하는 이런 책의 상당수는 
암호 해독법 총서를 방불케 하더군요. 고문서에 관한 책, 외교사에 관한 
책도 더러 보입디다. 그런데 낡은 금전 출납부를 뒤적거리던 나는 그 중의 
한 적요란을 열고는 몹시 놀라고 말았어요. 상자를 판 돈이라는 언급이 
있을 뿐, 다른 설명은 전혀 없는 적요가 기록되어 있는 겁니다. 구매자의 
이름은 물론이고, 거래가도 없었어요.  
  1895년의 기록이었지요. 그런데 다른 항목의 기록은 그렇게 꼼꼼할 수가 
없었어요. 다른 항목은 그렇게 기록하는 위인, 좁쌀에 흠을 팔 정도의 
위인이 금전 출납부의 적요를 그런 식으로 썼다는 게 믿어지지 않습디다. 
그런데 그 아래에는 파리의 고서점에서 책을 몇 권 샀다는 기록이 
나옵디다. 아하, 그래서 그랬구나, 싶대요. 앙골프는, 프로뱅의 미로 같은 
동굴에서 보석이 박친 금제보석 상자를 하나 찾아내었을 겁니다. 모르기는 
하지만 앙골프는 별 생각없이 이걸 주머니에 넣었다가, 동료 용기병에게
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냥 집으로 왔을 겁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상자 안에 든 양피지 조각을 발견합니다. 처음에는 그게 무엇인지 물론 
몰랐을 테지요. 그래서 파리로 가서 골동품 전문가와 접촉하고는 그 
상자를 팔았을 겁니다. 상자 하나 팔아서 금방 부자가 된 것은 아니었지만 
약간의 여유는 생겼겠지요 .용기병에서 제대한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고문서와 고서를 사들이는 한편 그 피지에 남은 기록을 연구하기 
시작합니다.  
  처음부터 앙골프는 어쩌면 보물찾기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지요. 그가 
프로뱅의 동굴을 뒤지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교육도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그 지식을 밑천으로 앙골프는 조용히, 
그러나 열심히 30여 년 동안 피지의 글귀를 연구합니다. 대단한 
외골이지요. 자기의 연구 결과를 혹 다른 사람들에게 발설했을까요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요. 어쨌든 1935년을 전후해서는 연구에 상당한 진척을 
보았다고, 혹은 끝내었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연구 결과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거나, 아니면 적어도 자기가 아는 누구에게, 아니면 그런 
정보가 몹시 필요한 것으로 알려진 사람에게 발설하기로 결심했을 
것입니다. 그는, 그 문서의 내용이 중요한 극비 사항이고, 그런 비밀을 
발설하면 듣는 사람은 자기를 그냥 두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고있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이야기를 이 사람이 남긴 고서로 돌려 봅시다. 나는 
앙골프가 혹 무슨 단서를 남기지 않았을까 해서 앙골프여사에게, 선친의 
고서를 좀더 살펴보게 해달라고 했어요. 고서를 뒤져보면 앙골프가 
프로뱅에서 가지고 온 물건이 무엇이었는지 단서가 잡힐 것 같아서였지요. 
단서만 잡히면 나는 덕분에 굉장한 글을 쓸 수 있게 되는 판입니다. 
  앙골프 여사는 선친의 일에 관한 한 아주 열성적이어서, 내게 그 날 
오후 내내 선친의 서재에서 고서를 살펴보아도 좋은 것은 물론이고 
필요하면 다음날 다시 찾아와도 좋다는 말까지 했어요. 뿐만 아니라 
서재의 불도 밝혀 주고, 커피도 끓여다 주고. 방해하고 싶지 않다면서 
서재를 비워 주기까지 하는 겁니다. 벽이 하얀 그 방은 찬장도 선반도 
없고, 물건을 숨길 만한 후미진 곳이나 벽 틈 같은 것도 없었어요. 나는 
두어 점밖에 안 되는 가구지만 아래위, 안팎을 샅샅이 뒤졌습니다. 
옷가지가 서너 점 걸려 있는, 좀약 냄새가 나는 옷장도 뒤지고, 풍경화 
액자 뒤까지 살펴보았어요.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합시다. 요컨대 나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가령, 안락 의자가 있다고 칩시다. 나는 그저 겉을 
만져 보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바늘 같은 것으로 쑤셔 보고, 그 
안에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다는 걸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미지요.  
  나는 그제서야. 대령이라는 사람은 전쟁터만 누빈 위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앙골프가 남긴 책의 서명 목록도 모두 작성하고, 그가 그은 밑줄, 
난뫼의 낙서 같은 것도 일일이 점검했습니다. 하찮은 낙서라도 대단히 
암시적인 의미를 지닌 낙서일 수 있으니까요. 이 지루한 작업 중에, 왜 
두꺼운 책을 한 권 무심결에 집어 들었다가 어찌나 무거웠는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떨어뜨리고 말았어요. 그런데 여기에서 공책장이 한 장 
떨어지는 겁니다. 뭔가가 씌어져 있더군요. 지질이나 잉크의 색깔로 봐서 
그렇게 오래된 기록은 아닌 것 같더군요. 앙골프가 말년에 쓴 것이기가 
쉬울 겁니다. 대수롭지 알게 여기고 치우려는데 문득. 1894년 프로뱅이라는 
글씨가 눈에 들어오는 게 아니겠어요 내가 얼마나 흥분했는지 두 분은 
모를 겁니다. 피가 머리로 확 솟구치는 것 같았지요. 그제서야 뭔가 짚이는 
게 있습디다. 앙골프는 양피지 원본을 파리로 가져 가면서 그 내용을 
공책장에다 필사해 놓았던 것입니다.  
  앙골프 여사는 수십 년 동안이나 선친의 서재를 손질하면서도 그 
공책장은 못 보았던 거지요. 봤다면 내게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 리가 
없지요. 오냐, 기왕에 몰랐을 테니 끝내 모르게 하자... 이 세상에는 이기는 
사람도 있고 지는 사람도있다... 지는 거라면 지긋지긋하게 했으니까 
이번에는 한번 이겨 보자, 그럴 때도 되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공책장을 접어 주머니에 넣었어요. 서재에서 나온 나는 앙골프 여사에게 
작별 인사를 하면서, 홍미로운 자료는 찾지 못했지만 곧 책을 쓰게 되면 
선친의 이름을 반드시 언급 하겠노라는 말을 남기고 그 집을 나왔어요. 
여사는 제발 성공하시기를 빌어요, 그러더군요. 야심과 정열을 불태우면서, 
나같이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인간이, 연세를 지긋이 잡수신 할마시에게 
양심의 가책 같은 것을 느껴서는 큰일을 못하는 법이지요...  
 '기왕지사 그렇게 된 것, 변명 제하시고... 나머지 말씀이나 계속하시지요.' 
  벨보가 채근했다.  
  '미안하지만 두 분께 그 공책장을 보여 드릴 수는 없습니다. 복사한 걸 
용서하세요. 믿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공책장 원본이 말썽에 휘말리는 게 
싫어서 이렇게 한 것뿐이니까...'
  '앙골프의 공책장도 원본은 아닙니다. 원본은 피지였으니까...'
  내가 싫은 소리를 했다. 
  '까소봉 씨, 원본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요. 그러니까한 장남은 
복사본이 바로 원본인 게지...'  
  '하지만 앙골프가 오독했는지도 모르잖습니까'  
  '제대로 읽었는지도 모르잖소 하지만 나는 알아요. 앙골프가 제대로 
해독했다는 걸 나만은 알아요. 왜냐 달리는 해석할 수 없으니까... 따라서 
앙골프의 복사본은 바로 원본이오. 자, 이쯤 해서 내 말을 믿겠소, 아니면 
말장난을 한번이 잡는 듯이 한번 샅샅이 해보겠소'  
  '그럴 필요 없어요. 그 원본 복사본이라는 걸 좀 봅시다.' 
  벨보가 명쾌하게 말했다. 
  
    19   
  
  막연하게나마 우리가 그 계획과 접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 날 
벨보의 사무실에 있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이일에 말려들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 다른 곳에 있을 터이다. 사마르칸트에서 깨를 팔고 있을지, 
브라이유 점자 총서를 편집하고 있을지, 북극해에 뜬 프란츠 죠셉 랜드 
섬의 퍼스트 내셔널 뱅크의 지점장을 하고 있을지 누가알겠는가. 전제 
조건이 애시당초 위여서 가정의 결과는 항상 진이다. 그러나 그 날 나는 
거기에 있었다 그래서 오늘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대령은 잔뜩 바람을 
잡아 가면서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어 우리 앞에 내밀었다. 그 
복사지는 아직도 내가 쓴 논문과 함께 플라스틱 폴더 안에 들어 있다. 
당시에 쓰이던 감열지에다 사진 복사한 것이어서 이 복사지만 유난히 
누렇게 변색해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가 기록되어 있다. 하나는, 종이의 
지면을 반쯤 차지하는 첫번째 기록, 그리고 나머지는, 산문으로 된 두 번째 
기록이다. 산문 기록에는 군데군데 탈자가 있다. 첫번째 기록은 셈 어로 
장난을 친, 미치광이의 주문 같다. 

  Kuabris Defrabax Rexulon Ukkazaal Ukzaab Urpaefel
  Taculbain Habrak Hacoruin Maquafel Tebrain HmcatuinRokasor  
  Himesor Argaabil Kaquaan Docrabax ReisazReisabrax Decaiquan 
  Oiquaquil Zaitabor Qaxaop DugraqXaelobran Disaeda Magisuan Raitak 
Huidal UscoldaArabaom Zipreus Mecrim Cosmae Duquifas Rocarbis.

  '뭐가 뭔지 모르겠는데요,'  
  벨보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대령이 약간 능청스러운 얼굴을 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요. 어느 날 우연히 고본 노점 옴룰틴에서 트리테미우스의 
책을 
한 권 사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직도 이 암호를 해독하느라고 진땀을 빼고 
있을 터인데, 처음 보고 본명은 요하네스 폰 하이델베르크. 16세기 
도이치의 베네딕트 수도회 수도원장을 지냈다. 역사가인 그의 저서 
스테노그라피아는. 암호 조립 방법과 해독 방법을 비롯. 카발라에서 착상한 
당시의수비학 연구 업적을 망라하고 있다. 뭐가 뭔지 모르겠다고 하는 게 
당연하지요. 나는 이 책에서
이런 암호 밀지를 보았어요. Pamersiel Oshurmy DelmusonThafloyn...   
  나는 이것을 실마리로 삼고 용맹 정진했지요. 사실 나는 트리테미우스에 
대해서는 사전 지식이 별로없었어요. 그런데 우연히, 1606년 
프랑크푸르트에서 발행된그 책, 스테가노그라피아, 호크 에스트 아르스 
페르 오쿨탐스크립투람 아니미 수이 불룬타템 아브센티부스 아스페리엔디 
케르타를 구할 수 있었답니다. 암호 문자를 사용해서 멀리 있는 사람에게 
진의를 전하는 기술에 관한 서라는 뜻입니다. 이 트리테미우스라는 양반, 
참 굉장합디다. 15세기말에서 16세기 초까지 스판히임의 베네딕트 
수도원장을 지낸 이 양반은 히브리 어와 칼데아 어, 심지어는 따따르 어 
같은 동방어까지 통달한 학자였어요. 뿐만 아니라 수많은 신학자, 
카발라학자, 연금술사들과도 교분을 가지고 있었더군요. 네테스하임의 
코르넬리우스 아그리파 같은 사람과도 친교한게 확실해 보이고 
파라켈수스와도그랬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트리테미우스가 
그때까지만 해도 마법의 안개에 가려져 있던 비밀, 암호 편지 쓰는 비결을 
독자들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는 조금 전에 인용한 것과 같은 암호 밀지를추천합니다. 이런 편지를 
받는 사람은 이걸 해독하느라고 파메르시엘, 파디엘, 도로티엘 같은 
천사에게 호소하겠지요. 그러다가 바로 이 주문이 밀지의 핵심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그가 이 책에서 기술하는 암호 
편지는 군사 비밀을 전하는 데 가장 많이 쓰여지는 것들입니다. 실제로 
왕권 백작이자 바이에른공작이었던 필립에게 헌정된 이 책은 암호문 
체계를 연구하는데 필요한, 상당히 진지한단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내가 잘못 알고 있다면 고쳐 주세요. 조금 전에 대령께서는 
트리테미우스가 이런 책을 쓴 것은, 우리가 논의하던 문제의 암호 원고가 
쐬어지고도 백 년도 더 지난 후대가 아닙니까내가물었다. '트리테미우스는, 
철학. 천문학, 피타고라스 수학에까지전념하던 소달리타스 켈티카켈트 
동우회에 소속되어 있던 사람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 지 아시73지요 
성당 기사단은, 당시에 널리 알려져 있던 고대 켈트 족의 문화 
유산으로부터 입문식APT의 틀을 빌어 쓰던 교단입니다. 아무튼 
트리테미우스가, 당시 성당 기사단에서 쓰이던 암호 체계를 알고 있었다고 
추론하는 데는 무리가 없습니다.  
  '놀랍군요. 암호문 문제로 돌아가시죠, 이게 대체 무슨 
뜻입니까벨보가물었다.'  
  '여러분, 진정하세요. 트리테미우스는 앞서 말한 책에서40가지의 대암호 
체계와 10가지의 소암호 체계를 제시하고있습니다.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트리테미우스의 암호 체계를 알아낼 순 있었기 때문에 
운이 좋은 사람이었고, 프르뱅의 성당 기사들이 머리를 별로 쓰지 않았기 
때문에 운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요, 프로뱅의 성당 기사들은 어차피 
이 암호 체계에 도전할 자가 없을 것으로 알고 아주 느슨하게 짜는 데 
만족했어요. 나는 먼저 이 암호를 대암호 체계 중 하나에 속하는 것으로 
보고 각 단어의 두문자만을 문제삼아 보았지요.' 
  벨보는 암호문을 들여다보면서 중얼거렸다. 
  '두문자요 두문자만 읽어 봐도 여전히 미치광이 잠꼬대 같은데요... 
kdruuuth... 이게 대체 뭡니까 대령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모르는 게 당연하지요. 성당 기사들이 머리를 별로 쓰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놀고 있었던 것만은 아니지요. 두 
문자만 모은 것 자체가 또 하나의 암호랍니다. 나는 소암호 체계를 동원해 
가면서 해석을 시도해 보았습니다. 그래도 풀리지 않더군요.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지요. 두 번째 암호를 해석하자면,트리테미우스의 암호 해독반이 
필요한 겁니다. 보세요, 여기에 첫 번째 암호 체계를 해석할 바퀴꼴의 
해독반이있어요.' 
  대령은 또 한 장의 사진 복사지를 꺼내어 탁자에 놓고는 의자를 
끌어당김으로써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키고는 만년필로 그림을 짚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건 간단한 겁니다. 바깥쪽 테를 보세요. 암호문을 쓰기 위해서는 원래 
쓰려던 글자의 앞 글자를 쓰면 됩니다. 가령 A를 쓰고 싶으면 그 앞 자인 
Z를, B를 쓰고 싶으면 그 앞 자인 A를 쓰는 식입니다. 요즘 아이들의 
첩보원 놀이에 등장할 법한 지극히 유치한 암호 체계입니다만 당시로서는 
거의 마법에 가까운 것이었지요. 해독할 때는 역순으로, 해당 글자의 다음 
글자를 읽으면 됩니다. 나는 이런 식으로 일단 글자를 읽고 한 자씩 
써보았어요. 단번에 알아내었으니까, 나는 역시 운이 좋은 사람이지요 한 
자씩 읽어서 모으면 다음과 같은 글귀가 됩니다.  
  0-es 36 inuisibles separez onsix bandes... 
  무슨 뜻이냐...여섯 무리로 나뉘어진, 서른 여섯 명의 보이지 않는 
자들이라는 뜻이지요.' 
  '그러니까 이게 무슨 뜻이냐는 겁니다.'  
  '언뜻 보면 아무 의미도 없는 것 같아요. 무슨 단체가 결성되었다는 
사실을 보도한 신문의 헤드라인 같지요 그러나 제의적인 이유에서 은어로 
쓰여졌다는 데 유념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성당 기사단은 저희의 
밀지를 신성 불가침의 성문으로 바꾸되, 그 용기로는14세기의 프랑스 어를 
삼는데 만족한 것입니다. 자, 두 번째 기록을 볼까요.'  
  두 번째 기륵은 다음과 같았다.  
  '이게 해독된 암호문이라는 겁니까.'  
  벨보가 물었다. 실망한 기색, 어이없어 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점으로 된 부분은 앙골프의 펄사 원본에서도 읽을 수 없었던 
부분입니다. 양피지가 삭아서 앙골프도 읽을 수 없었던 모양이지요 그러나 
나는 내 양심에 걸고 감히 말하거니와, 어느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추리력으로 완벽한 문서로 이를 재구성 번역까지 했습니다. 말하자면 나는 
고전의 빛나는 옛모습을 되찾은 것입니다.'  
  흡사 마술쟁이 같은 몸짓으로 복사지 위로 허리를 굽힌 그는 
대문자만으로 된 자신의 메모를 보여 주었다. 성 요한의 건초 수레 
사건으로부터 36년 봉인으로 밀봉된 6가지 밀지
횐 망토를 두른 성당 기사들을 위하여 복수하기 위한 프로뱅의 계획은 
이러하다 6개소에 6 곱하기 6각회 20년 91 120년 제1진 은성으로 120년 뒤 
제2진은 빵 가진 사람들과 합류할 것 다시 은신처로 다시 강가에 있는 
노뜨르담으로다시 포펠리칸이 묵는 곳으로 다시 돌이 있는 곳으로 위대한 
창부의 잔치 전에 3 곱하기 666 오리무중이군요.' 
  벨보의 말이었다.  
  '당연하지요. 아직 해석이 남아 있으니까. 그러나 앙골프도 나처럼 
완벽에 가깝게 해석했던 모양이오. 성당 기사단의 역사를 알고 나면 
생각만큼은 오리무중이 아닐 겁니다.' 
  말 끊고... 그는 물을 한 잔 청해 마시고는 다시 해석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자. 다시 해봅시다. 성 요한의 밤, 건초 수레 사건 이후36년째 되는 해, 
그러니까 1307년 9월 밀지를 통해 성당 기사단의 운명을 짊어지게 된 성당 
기사들이 건초 수레를 타고는 일제 검거령을 피해 탈출합니다. 당시에는 
부활절부터 다음부활절까지를 1년으로 쳤어요. 그러니까 1301년이 끝나는 
것은 우리가 1308년으로 계산하는 부활절의 끝 무렵이 됩니다. 1307년의 
끝, 그러니까 1308년의 부활절로부터 만 36년이 되는 날은 1344년의 
부활절이 됩니다. 따라서 이 밀지가 예고하고 있는 36년 뒤는. 지금 우리가 
쓰는 달력으로는1344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밀지는 암호문으로 
받으러 아주 귀중한 상자에 담긴 채, 그것도 지하의 납골당 같은데 
보관되어 있었다는 데 유념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 밀지는, 이 밀교단이 
결성되고부터 36년째 되는 해의 성 요한 절전날 밤에 어떤 사건이 
있었슴을 증언하는 셈이지요.  
  그게 언제냐 하면 1344년 6월 23일이 되는 것입니다.' 
  '왜 하필이면 1344년입니까'이건 내 생각인데요,1307년에서 1344년 
사이의 어떤 시점에, 이 밀교단은 양피지에 기록되어 있는 어떤 계획을 
실행할 목적으로 재조직된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세론 이 
쫌 진정되고, 5,6개국에 흩어져 있던 성당 기사들 간에 연락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던 것이죠. 만일에 성당 기사단이,35년도 아리고 37년도 아닌, 
36년을 기다려야 했다면, 암호문이 말하고 있듯이 36이라는 숫자가 
이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36 숫자를 구성하는 
3과 6의 합은 9입니다. 이 9라는 숫자가 상징적으로 지니는 심오한 의미 
같은 것은 다시 설명할 필요도 엄을 테지요.'  
  '방해해서 미안합니다.' 
  프로뱅의 성당 기사처럼 불쑥 나타난 디오탈레비가 우리들 이야기에 
끼여들었다.  
  '자네답군.'  
  벨보가 이렇게 중얼거리고는 디오탈레비를 대령에게 소개했다. 대령은, 
디오탈레비의 염려와는 달리 방해를 받기는커녕 듣는 사람이 늘어난 것을 
다행으로 여기는 듯했다. 대령이 설명을 계속하자 디오탈레비는 숫자가 
많이 나오는 화제라서 신이 났던지 침을 삼켰다 순수한 게마트리아의 
세계를즐기고 있슴에 분명했다.  
  '이제 봉인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하지요. 봉인된 여섯 건의 밀지. 이게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앙골프는 봉인된 상자 하나를 발견합니다. 
그런데 이 상자는 도대체 누구를 위해 봉인된 것일까요 물론 횐 망토를 
걸친 자들의 무리 일 백의 단뜨출토, 즉 성당 기사단을 위해 섭니다. 
그런데 바로 이 대목에서 논이 나오고, 이어서 몇 자가 인멸된 뒤에 교가 
나옵니다. 나는 이것을 공술 번복자로 읽습니다. 왜냐 다 아시겠지만 이 
공술 번복자들은 일단 죄상을 자백한 피고들입니다. 이들은 뒤에 다시 
소환되지만 성당 기사단 재판에서 아주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 공술 번복자들입니다. 프로뱅의 성당 기사들은 스스로 
공술번복자가 되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공술을 번복함으로써 
재판이라는 이름의 사악한 코메디의 출연을 거부한 장본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자, 그런데 이들이 뭔가를 준비한다는 겁니다. 뭘까요 그것은 
우리가 해독했다시피 복수입니다. 복수를 준비한다는 겁니다. 
  '윌 복수한다는 거지요.' 
  '참 답답들 하십니다. 재판이 시작되고 나서부터 이 성당기사단이라는 
밀교단은 오로지 한 가지 목적에만 매달렸어요. 무엇이냐 그들의 목적이란 
자끄 드 몰레의 복수를 하는 것에 집약됩니다. 나는, 프리메이슨의 의식은. 
성당 기사단 의식의 부르주아적 캐리커처에 지나지 않는다고 대충 
이해하고 넘어가는 사림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리메이슨 
의식은 비록 희미하기는 해도 분명히 성당 기사단 전통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스코틀랜드 프리메이슨 단체에서는 특정 계급을 카도쉬 
기사라고 하지요. 복수의 기사라는 뜻입니다.' 
  '좋습니다. 성당 기사들은 복수를 준비하고 있었다고 칩시다. 다이 
궁금하군요.' 
  '문제는 복수의 시기입니다. 암호 밀지를 보면. 6개소에 6곱하기 6이라는 
언급이 나오지요 36명으로 이루어진 6개기 사단이라는 뜻일 겁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에 각 회 20이라는 말이 나오지요. 그 다음은 불분명한데, 
앙골프는 이 글씨를 주로 쓴 것 같아요. 그렇다면 년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20년마다 한 번씩이 되겠지요. 그래서나는,20년에 한 
번씩 6회면 120년이 될 거라고 해석했습니다. 이 밀지의 후반부를 보면 
6처, 혹은 이들이 결행해야 할6가지 과업을 암시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계획, 절차를 뜻하는 오르도나시옹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뿐만 아니라,제1진은 성, 혹은 지하감옥으로, 제2진은 또 어디로, 
제3진은 또 어디로... 이런 식으로 각 기사단의 행선지까지 밝혀져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문맥으로 보아비밀 문서는 이것뿐만이 아니라 
6개소에 분산 보관되어 있으며 120년을 주기로 하나씩 개봉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그렇다면 각 회 20년이라는 건 무슨 뜻입니까'이 
복수의 기사들은 120년마다 특정 지역에서 임무를 수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계주같은 것이지요.
  따라서 1344년 6월 23일 밤에는 36명씩 6개 부대로 편성된 성당 
기사단이 각기 계획에 밝혀져 있는 여섯 지역 중 하나인 목적지를 향해 
떠났을 겁니다. 그러나 첫 번째 봉인을 뜯은 기사가 120년 동안 살아서 
임무를 수행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각 봉인을 개봉한 추밀 
요원은 20년 동안 지휘관으로 재직하고 이걸 다음 세대에 물려주었을 
것입니다. 20년이라면 사실 쾌 합리적인 기간이기도 하지요. 봉인 한 개에 
딸린 6기사가 20년씩 봉직하면 도합 120년이 되지 않습니까 그러다 이 
120년이 지나 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면 마지막으로 봉인을 관리한 
기사가 밀지를 읽고는 다음 봉인을 열고 이를 관리할 선두 주자에게 
넘깁니다...어떻습니까 이 밀지에 나오는 동사가 복수 동사로 되어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것입니다. 
  제1번 봉인의 개봉자는 이리로, 제2번 봉인 개봉자는 저리로, 하는 
식이지요. 각 기사단의 근거지는, 120년 동안 각기 20년씩 봉직하는 6명의 
기사들로부터 감시 감독을 받습니다. 그러면 어디 한번 계산해볼까요 
기사들이 6회에 걸쳐 출동한다고 했지요 120년마다 한 번씩 모두6회 
출동하려면 얼마나 걸릴까요.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첫 번째 출동이 
시작되고 나서 출동이 끝나기까지는 120년이라는 세월이 5번 
되풀이됩니다. 따라서 120 곱하기 5는 600... 1344년에 출동이 시작되니까 
1344 더하기 600은 1944년 ‥‥ 마지막 줄에서 우리는 출동이 끝나는 해가 
1944년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게 됩니다. 일목요연하지 않습니까'무엇이 
일목요연하다는 겁니까'마지막 줄을 보세요. 위대한 창부의 잔치 전에 3 
곱하기 6666... 이것 역시 숫자 놀이입니다. 1944를 구성하는 수의 합계는 
18입니다. 즉 3의 6배수이지요. 그런데 이 기묘한 수적 우연의 일치가 
지극히 미묘한 성당 기사단 수수께끼를 암시합니다. 1944년은 성당 기사단 
계획의 마지막 해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또 하나의 목표에 대한 암시가 
들어있습니다. 성당 기사단은 2천 년 즉 2천 년대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죠. 성당 기사들은,2천 년기에는 저희들의 예루살렘, 세속의 예루살렘, 
반 예루살렘의 도래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어요. 성당 기사단은 
이단으로 처단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교회를 증오한 나머지 스스로를 반 
그리스도와 동일시하게 된 겁니다. 이들은 신비주의 전통에서 666이라는 
수를 짐승을 상징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어요. 보세요, l3H년부터 
666번째로 맞게 되는 해가 몇 년인가요 서기 2000년 아닌가요 성당 
기사들은 바로 이 해에 복수를 완료한다고 믿은 듯합니다. 반 예루살렘은 
신생하는 바빌론입니다. 1944년이 요한의 묵시록에 나오는 바빌론의 라 
그랑 삐뜨, 즉 위대한 창부가 승리하는 해인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666이라는 숫자는 투사들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한 일종의 
자극제, 사기 진작용 같은 것입니다. 요즘 말로 하자면 저항의 봉화 같은 
거라고 할까요. 굉장한 이야기인 것 같은데,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표정은 그의 눈은 젖어 있었다. 입술과 수염도 젖어 있었다. 그는 
우리를 바라보면서 가방을 툭툭 두드렸다. 굉장한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좋습니다. 추밀 요원들의 밀지라는 것이 계획과 관련된 시간표라고 
칩시다. 그렇다면 계획이라는 건 뭡니까'  
  '질문. 또 질문... 질문이 너무 많으시군요. 내가 그걸 다안다면 미끼를 
던질 필요도 없게요 그러나 나도 한 가지 만은 확실하게 압니다. 이 글을 
저어 보고 나서 나는, 뭔가가 잘 못되었다. 그래서 그 계획은 실행으로 
옮겨지지 못했다, 이런 걸 알게 되었어요. 이제 내가 이렇게 발설했으니 
나만 아는 게 아니고 우리 모두가 알게 된 셈이군요. 이제 나는 계획이 
실행되지 못한 까닭도 압니다. 1944년은 그런 일을 벌일만한 해가 
아니었던 겁니다. 1344년의 성당 기사들은 저 무서운 세계 대전이 
일어나리라고는 예상도 못한 것입니다.'
  디오델레비가끼여 들었다. 
  '말을 끊어서 미안합니다만, 내가 제대로 이해했다면 첫 번째 봉인은 
개봉되었고. 봉인 관리자의 대물림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끝난 게 
아니라는 얘기죠. 이런 대물림은 마지막 봉인이 열릴 때까지, 이 교단의 
대표들이 한자리에 회동할 때까지 계속됩니다. 한 세기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매 120년마다 각처에는 6명의 봉인 관리자가, 도합 36명의 
관리자가 있게 되는 셈이군요.'  
  '그령지요.'  
  '36명의 기사들이 여섯 군데에 있으니까 도합 216이 되는 셈입니다. 이 
수를 구성하는 숫자의 합은 9가 되는군요. 성당 기사단 이래 6세기가 
흘렀지요 216 곱하기 6... 1296이 됩니다. 1296이라는 수를 구성하는 숫자의 
합은 18, 혹은3 곱하기 6, 혹은666이 되는군요.'
  벨보가, 장난이 심한 아들을 흘기는 듯한 어머니의 눈을 하지 
않았더라면 디오탈레비는 전세계를 숫자 놀이로 재구론발했을 터였다. 
그러나 대령은 그 말을 듣고는 디오탈레비야말로 머리가 깬 사람으로 본 
모양이었다.  
  '대단하군요, 교수님 계시의 섬광이 번뜩인 것 같군요. 그런데 혹시, 
예루살렘에다 성전을 지은 기사들 수가 9명이었다는 것을 아시는지요'  
  '테트라그라마톤체 나타난 거룩한 하느님의 이름은 72자랍니다. 이 72를 
구성하는 두 개의 수를 더하면... 7더하기2는 9가 됩니다. 괜찮으시다면 
계속하지요. 유대 밀교에서 보관하고 있는혹은 유대 밀교에 영감을 준 
피타고라스 파의 기록을 보면 1부터 7까지의 홀수의 합은 16이고.2부터 
8까지의 짝수의 합은 20, 이 둘을 더하면 36이 됩니다. 알고계셨는지요' 
  '놀랍습니다, 교수님 알고 있었지요, 알고 있었고말고요. 교수님 말씀을 
듣고 보니. 이야기를 계속할 만한 힘이 생기는군요. 이제 진리에 접근하고 
있는 것 같군요.'
  디오탈레비는 산수를 종교로. 흑은 종교를 산수로 환원시키고 있었던 
것일까 어쩌면 산수를 종교로 환원시키는 동시에 종교를 산수로 
환원시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디오탈레비는 하늘을 찌를 
듯이 기고만장한 무신론자였는지도 모른다. 룰렛을 했으면 명수가 되었을 
덴데도 3편이 훨씬 나았을지도 모르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자칭 믿음이 
없는 라비였다 정확한 경위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든 벨보가 불쑥 
끼여들어 피에드몬트 식 재치로 이 해괴한 화제를 거기에서 중단시켰던 
듯하다. 아르덴티 대령에게는 해석해야 할 밀지가 몇줄 더 있었고, 나와 
벨보는 그 내용이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다. 여섯 시였다. 오후 여섯 시... 
나는 그 시각을 18시로 인식했다. 벨보가 말매듭을 지웠다. 
  '한 세기에 36명씩... 기사들은 차근차근 돌이 있는 곳에 모일 준비를 
합니다. 그런데 이 돌이라는 게 대체 윌니볼은 질문입니다. 돌이라는 게 
성배 뭐겠어요.' 
  아 덴티 대령이 대답했다. 
         푸코의 진자 2
    지은이: 움베르토 에토
    출판사: 열린 책들
    봉사자: 구희수
  
    34
  <용기폭발>.(16세기의 유대교 신비주의자 이프하크 루리아에 의해 
확립된 히브리 카발리즘의 한 교리.이 교리에 따르면 하느님은 빛을 
머금은 한 용기를 폭발시킨다. 용기가 폭발하자 그 안에 있던 빛은 
용기로부터 나와서 사물 속으로 들어가 모습을 감춘다. 따라서 사물이나 
인간의 속에 들어 있는 그 빛의 흔적을 추적하고 이를 재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디오탈레비에 따르면 이것은 이츠하크 루리아가 확립한 후기 
카발리즘으로, 질서 정연하던 세피로트 접합의 무너짐이다. 루리아에게 
창조라고 하는 것은 하느님의 초조한 호흡의 들숨날숨.혹은 고함 
내지르기의 산물이다.
  "하느님의 천식이군."
  벨보가 주석을 달았다.
  "무에서 뭘 창조한다고 생각해 봐. 얼마나 어려웠을 것인가. 사람에게는 
딱 한 가지 경우에만 창조가 가능하다. 유리병 만드는 걸 생각해 봐. 
하느님은 유리 방울을 불어 유리병을 만들 듯이, 숨을 들이쉬고는 한동안 
참고 있다가 빛나는 열 개의 세피로트를 훅 불어 내었을 것이다."
  "훅 부니까 빛이라..."
  :하느님이 훅 부시매 거기에 빛이 있었다..."
  "멀티미디어가 따로 없군."
  "그러나 세피로트의 빛은 이것을 흩지 않고 온전하게 담을 용기가 
필요한데 이 용기는 케테르, 호흐마, 비나까지는 그 섬광과 함께 담을 수 
있었어. 그러나 헤세드에서 예소드에 이르는 하급의 세피로트까지 담기자 
용기는 견딜 수 없었다. 그 날숨이 어찌나 강한지 단 한 번에 용기가 
부서져 버린 것이다. 그 빛의 파편은 우주로 튀었고, 이로써 조악한 것들이 
탄생하게 된 거다."
  디오탈레비는,용기의 폭발은 우주의 파국을 뜻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생각들 해봐. 유산당한 세계보다 무서운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태초부터 
이 우주에는 어떤 결함이 있는 것임에 분명했다. 그러나 아무리 박식한 
라비도 그것을 완전하게 해명해 내지는 못한다. 어쩌면 하느님이 날숨을 
쉼으로써 속을 비워 내는 그 순간 용기에는 기름 한 방울이, 어떤 물질의 
찌꺼기 혹은 <레쉬무>같은 것이 남아 있다가 하느님의 정수에 혼합되면서 
그것을 오염시키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조가비(켈리포트, 다시 
말해서 파국의 시작)가 어딘가에 그 껍데기를 닫고 매복해 있었는지도 
모른다.
  "켈리포트...끈적거리는 물건...악마 푸 만추 박사(영국이 소설가 A.S. 
워드의 소설에 등장하는 중국인 악당, 그의 팔자 수염은 <푸 만추 
수염>으로 불린다.)의 하수인...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가?"
  벨보가 물었다.
  디오탈레비는 끈기있게 설명했다. 
  장님 신학자 이츠하크 루리아의 설명에 따르면, <게부라>혹은 <지엄한 
심판>(<파카트> 혹은 <공포>)의 섬광 안에서 <악마>의 세피라가 
등장한다. 조가비가 실존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그 조가비는 우리 중에 있는 것인가?"
  벨보가 물었다.
  "둘러봐."
  디오탈레비가 대답했다.
  "파국을 면하는 방법은 없는 건가?"
  "사실은 둘러 가는 길이 하나 있기는 하다. 이 세상 만물은 하느님이 
<췸춤> 안에다 수축시키고 있던 것을 방출시킨 것이지. 그런데 문제는 
<티쿤>, 즉 <복구>를 실현시키는 일, 다시 말해서 최초의 인류 아담 
콰드몬을 복원시키는 일이야. 그런 연후에 세피로트를 대신할 
<파르주핌>(<얼굴>, 혹은 <형상>)의 조화 안에서 모든 것을 복원해야 
한다. 영혼의 승천이라는 것은, 어둠 속을 몸부림치는 신심 깊은 사람에게 
빛에 이르는 길을 가르치는 비단 끈과도 같은 것이다. 이 세계는 그래서 
<토라>의 문자를 조합함으로써, 무서운 혼돈 상태를 벗고 원초적인 
형태를 복원하려고 발버둥르 치는 것이네."
  
  그것은 내가 이 한밤중에 구릉지의 심상치 않은 고요 속에서 하고 있는 
짓거리이기도 하다.(화자 까소봉의 회고는 두 갈래로 크게 나뉜다. 첫째는 
1984년 6월 23일과 24일에 걸쳐 파리 국립 공예원 박물관 전망경실에서 
하는 회고, 둘째는 그로부터 이틀 뒤인 6월 26일, 구릉지에 있는 벨보의 
시골집에서 하는 전반적인 회고가 그것이다. 까소봉의 회고는 이 두 
시점을 넘나든다.) 그러나 전망경실에 있을 당시는 도처가 조가비의 
끈적끈적한 수령, 도처가 고요속에서 동면 중인 기압계와 녹슨 태엽 장치 
틈서리의 박물관 유리 상자에 갇힌 끈적끈적한 괄태충의 수렁이었다. 
만일에 용기의 폭발이 있었다면, 용기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리오에서 
움반다 강신제가 열리던 날 밤이고, 본격적인 폭발이 시작된 것은 내 
나라로 귀국한 순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폭발은 그 과정이 
지극히 느리고 또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 셋은 모두 
하나같이, 아득한 옛날부터 독충이 우글거리는, 구역질 나는 것들로 가득 
찬 저습지에 갇혀 있다는 느낌을 뿌리치지 못했던 것 같다.
  
  브라질에서 돌아오고 보니 나는 나 자신이 누군지 알 수 없게 되고 만 
형국이었다. 서른 살이 내일 모레였다. 내 아버지는 그 나이에 이미 어엿한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그때 이미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 뿌리박고 살고 
있는지 알았을 테지만 내게는 그게 불가능했다.
  국내에서 엄청난 일이 꼬리를 물고 벌어지고 있을 동안 나는 내 
나라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일들이 전설로 전해지는, 믿어지지 않는 것들이 우글거리는 세계에 
살고 있었던 셈이었다.
  남반구를 떠나기 직전, 나는 브라질 체류가 끝나기 전에 비행기로 
아마존 상공이나 날고 싶어서 리오를 떠나 포르탈레짜에 잠시 기착했다가 
우연히 신문 한 장을 펼쳐들게 되었다. 맨 앞면에, 달려와 안기듯이 눈에 
들어오는 사진 한 장이 있었다.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필라데에서 자주 
백포도주를 홀짝거리던 사람이었다. 사진의 설명이 놀라웠다. <모로 수상 
시해범>...
  귀국하고 나서야 나는 그가 물론 모로 수상의 살해범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장전된 권총을 넘겨받은 줄도 모르고 작동 여부를 
점검하다가 오발로 자기 귀에다 총을 쏘아 넣은 데 지나지 않았다. 진상은 
이랬다. 테러 진압 특수 부대가 총소리가 났다는 제보를 받고 그의 방을 
덮쳐 보니 그는 죽은 채 방 한 칸 짜리 아파트의 유일한 가구인 침대 위에 
쓰러져 있고 침대 밑에는 세 정의 권총과 두 다발의 폭약이 있더라는 
것이었다. 사실 그 방은 68년 사건의 잔당들이 육욕을 채우는 장소로 쓰기 
위해 세낸 방에 지나지 않았다. 만일에 그 방에 체 게바라의 포스터 한 
장만 붙어 있지 않았더라도 여느 독신자가 쓰는 숙소로 여겨졌을 터였다. 
이 방의 세입자는 공동 명의로 되어 있었는데 문제의 <모로 수상 
시해범>은 그 한방 식구가 68년 사건의 잔당인 무장 집단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채 그 집단의 안가에다 돈을 대고 있었던 셈이었다. 이 
일로 무장 집단의 잔당들은 1년을 옥살이 하다가 사형을 당했다.
  지난 몇 년 동안 이탈리아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 내가 아는 것은 
거의 없었다. 내가 떠날 당시, 정확하게 빚쟁이에게 쫓겨 야반 도주하듯이 
죄 의식을 느끼면서 달아날 당시 이탈리아는 중대한 변화의 국면을 맞고 
있었다. 떠나기 전에는 말 몇 마디를 듣고도 그 사람의 이데올로기를 
알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되돌아왔을 때는 아무리 이야기를 들어도 어느 
편에 속하는지조차 짐작할 수 없었다. 혁명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새로운 것이 있다면 사람들에게 의식이 없다는 것이었다. 좌파 
논객을 자처하는 사람도 니체와 셀린느(L,F, 셀린느(1894~1961). 프랑스의 
의사이자 소설가. 반체제. 반 유대의 입장을 취한 것으로 인해 제 2차 
세계대전 후에는 전범 작가라는 낙인이 찍혔다. 이 때문에 덴마크로 
망명하게 된다.)를 인용하는가 하면 우파의 잡지들은 제 3세계의 혁명에 
박수 갈채를 보내고 있었다.
  술집 필라데로 가 보았지만 낯선 땅에 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당구대는 여전했다. 화가군은 그대로였지만 청년군은 바뀌어 있었다. 
예전의 단골 중에는 초월 명상법을 가르치는 학원이나 건강 식품 식당을 
연 사람도 있었다. 움반다를 생각하는 사람은 없는 것임에 분명했다. 나는 
시대를 앞서 가고 있었다.
  필라데 씨는, 술집 필라데 역사의 핵심을 이루던 단골들을 위해, 골동품 
도매 시장에서 헐값에 산 것임에 분명한, 리히텐슈타인의 그림을 복사한 
듯한 구식 회전 당구대 하나는 남겨 두고 있었다. 회전당구대 옆의 신형 
오락 기계 주위에는 젊은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형광 화면에, 
도식화시킨 유도탄이나 X행성에서 날아온 카미카제 특공대, 아니면 
일본말로 팔짝팔짝 뒷면서 일본말로 개굴거리는 개구리가 무수히 나오는 
기계들이었다. 술집 필라데는 음침하게 번쩍거리는 무수한 불빛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아케이드였다. 모병 임무를 띠고 온 <붉은 여단>(1978년 
알도 모로 전 수상을 납치 살해한 이탈리아 극좌파 테러단.)의 밀사들이 
새 오락기계 앞에서 우주 침략자들을 상대하고 있는 것도 당연했다 
.허리에 권총을 찼으니 회전 당구는 언감생심일 터였다.
  내가 이것을 깨달은 것은 어느 날 밤 벨보의 시선을 좇아 가다가 회전 
당구대 앞에 선 그의 로렌짜 펠레그리니를 보았을 때였을 것이다. 아니다. 
어쩌면 훨씬 뒤에 다음과 같은 그의 아불라피아 파일을 열었을 EO인지도 
모르겠다. 로렌짜의 이름은 구체적으로 등장하지 않았지만 이 글이 
로렌짜를 그리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도 없었다. 이 글에 뵤사된 대로 
회전 당구를 치는 사람은 로렌찌밖에 없었으므로.
  
    #파일 명 : 회전 당구
  
  회전 당구는 손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타구니로도 하는 것이다. 
회전 당구에서 중요한 것은 바닥에 뚫린 구멍이 삼키기 전에 공을 멎게 
하는 것도 아니고, 미식축구의 하프백 노릇을 하는 미드필드로 공을 되쳐 
내는 것이 아니다. 회전 당구에서 중요한 것은 불이 들어온 표적 가까이 
공을 머물게 하되 서로 되퉁기게 하고 서로 되퉁기게 하되 공이 자유 
의지로 떠돌고, 우왕좌왕하고, 흥분한 것처럼 보이게 해야 한다. 이것은 
강타를 통해서가 아니라, 몸의 떨림을 그 회전 당구 상자에, 그 틀에 
전달함으로써 이루어져야 한다. 기계가 눈치채면 무효를 선언당할 
것이므로 주의해야 한다. 이것은 사타구니로써만, 혹은 오르가즘의 여부를 
조종하는 둔부의 놀림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만일에 둔부가 원초적인 
본능에 따라 움직인다면 앞으로 미는 힘을 제공하는 것은 엉덩이이다. 
엉덩이가 미는 힘은 차차로 약화하는 것이어서 골반에 이를 때는 지극히 
부드러워진다. 동종 요법에서 용제를 흔들면 흔들수록 약품은 늘어나는 
용매에 그만큼 더 고루 섞이다가 마침내 흔적조차 없어져야 의학적으로 
효과가 높아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따라서, 사타구니에서 극미한 파동이 
당구대로 전해지고, 기계가 여기에 복종하고, 공은 본능과 관성과 중력의 
법칙과 역학, 그리고 마침내 그 기계가 사람의 의지에 복종하지 않기를 
바라던 기계 설계자의 교활한 의지까지도 거스르면서 움직인다. 이렇게 
되면 공은 <비스모벤디(원동력)>에 중독된 듯이 시간을 망각하고 
바운드를 계속하는데, 공에다 원동력을 제공한 사람은 공이 움직이고 
있는지 정지해 있는지 알지 못해야 한다. 이때 공에다 원동력을 제공하는 
여성의 사타구니는 한 가지 갖추어야 할 조건이 있다. 회장과 기계 
사이에는 해면체 같은 것도 개재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사이에 
직립체가 개재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오로지 그 사이에는 
살갗과 신경과 바지 천에 가린 뼈, 승화된 에로틱한 격정, 가벼운 새침, 
상대의 반응에 대한 무관심한 순응력, 자기의 과잉 욕망은 살짝 숨기고 
상대의 욕망에 불을 지르는 취미 같은 것 이외의 어떤 것도 개재해서는 안 
된다. 아마존의 전사라면 회전 당구대를 미치게 만들고, 훌쩍 당구대를 
떠나는 생각을 재미를 누릴 것임에 분명하다.
#
  
  나는 벨보가 로렌짜 펠레그리니를 사랑하게 된 것은, 로렌짜 
펠레그리니야말로 그토록 성취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던 행복을 약속해 줄 
수 있는 여성으로 보게 된 것은, 회전 당구치는 모습을 보는 순간부터였을 
거라고 믿는다. 벨보가 자동화한 세계의 에로틱한 본질을 인식하고, 기계를 
우주의 몸체를 상징하는 것으로, 기계가 지니고 있는 놀이의 기능을 
부적을 통한 초혼의 의례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도 로렌짜 펠레그리니를 
통해서였다고 믿는다. 그는 이미 아불라피아에 사로잡히면서 <헤르메스 
례획>의 청사진을 그리기 시작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그 진자를 
보았던 것임에 분명하다. 그 전말을 자세히는 알 수 없으되, 로렌짜 
펠레그리니가 그에게 진자에 대한 약속을 제시했던 것임에 분명하다.
  나는 필라데에 재적응하느라고 애를 먹었다. 밤마다 갔던 것은 아니지만 
나는 조금씩조금씩 낯선 얼굴의 숲속에서 낯익은 얼굴, 격동의 세월에서 
잔존한 얼굴을 만날 수 있었다. 낯익은 얼굴인지 낯선 얼굴인지 
확인하느라고 너무 오래 보아 당사자를 무안하게 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이 친구는 광고 대행사의 카피라이터, 이 사람은 세금 상담원, 체 
게바라의 책이 초본학과 불교와 점성술 책으로 바뀐 것만 다를 뿐 이 
친구는 여전한 월부 책 장사... 그 동안 몸이 조금 불어나고 휜 머리카락이 
늘어난 정도의 변화는 있었지만 손에 들고 서 있는 스카치 언더 락스 잔은 
10년 전의 바로 그 잔이지 싶었다. 아끼느라고 반년에 한 방울씩 마시고 
있었던 것 같았다.
  "당신 요새 뜸하던데... 자주 와서 우리랑도 좀 어울리지 그래?"
  낯익은 얼굴 하나가 말했다.
  "요즘은 누가 <우리> 인데?"
  그는 한 세기 만에 만나는 사람 보듯이 나를 보면서 대답했다.
  "시교위의 관리들이지..."
  나는 너무 많은 박자를 빼먹은 셈이었다.
  
  나는 직업을 하나 고안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잡다한 것을 많이 알고 
있었고, 서로 아무 관계도 없는 것들도, 도서관에 몇 시간만 틀어박히면 
관계가 있는 것으로 만드는 재주도 있었다. 나는 한때, 사람에게는 
모름지기 자기 이론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는 했다. 그런데 문제는 
나에게는 이론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민할 것은 없었다. 세월이 
바뀌어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이론이 아니라 정보였다. 사람들은 
정보, 특히 한물간 정보에 대단히 탐욕스러웠다. 나는, 혹 내가 끼여들 
자리가 있을까 해서 대학도 기웃거렸다. 강의실은 조용했고, 학생들은 
유령의 무리처럼 복도를 오가면서 조잡하기 짝이 없는 문헌 목록을 서로 
주고받고 있었다. 나는 좋은 문헌 목록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어느 날 박사 반 학생이 내가 교수인 줄 알고 (그즈음 들어 선생은 
학생과, 학생은 선생과 나이 차가 별로 없었다), 경제학 시간에 경제의 
주기적인 위기 이야기와 함께 <로드 칸도그>라는 말이 자주 나오던데 
그게 누구냐고 물었다. 나는, 칸도스 경은 경제학자가 아니라 호프만시탈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바로 그날 밤 옛 친구들 파티에 갔다가 출판사에서 일하는 친구 하나를 
만났다. 그 친구는 알바니아 정치에 개입한 적이 있는 프랑스 인들이 
공저한 책을 출판해서 떼돈을 번 출판사의 편집장이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정부의 눈치를 보는 것만 다를 뿐 정치적인 책도 자주 출판된다고 
했다. 괜찮을 경우 철학 서적의 원고도 거절하지 않는다면서도 그 친구는, 
<고전 철학 계열이기만 하다면 말이야> 하면서 덧붙였다.
  "그런데 자네가 철학자니까 하는 말인데..."
  "고맙네만 나는 불행히도 철학자가 아닐세."
  "자네는 모르는 게 없는 사람이 아닌가. 아까 마르크주의의 위기에 관한 
책의 번역 원고를 점검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켄터베리의 
안셀름>으로부터 인용한 구절이 있었네. 이게 도대체 누구야? 저자 인명 
사전에도 이런 이름은 나와 있지 않던데?"
  "아오스타의 안세르모야. 다른 나라와 고유명사의 표기가 달라야만 
직성이 풀리는 영국인들은 이 사람은 기어이 켄터베리의 안셀름으로 
만들어 놓고 만 것이지."
  나는 이렇게 대답하는 순간 문득, 내게도 직업이 있을 수 있겠구나, 싶은 
생각이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다. 문화 연구대행업소를 차려, 말하자면 
일종의 학문 사랍 탕정이 되는 것이었다.
  철야 주점이나 유곽에 코를 처박고 있는 대신 서점과 도서관과 대학교 
복도를 슬슬 돌아다닌다. 그 다음에는 내 사무실에서 책상 위에 발을 
올려놓은 채로, 모퉁이 가게에서 사서 종이 봉지에 넣어 가지고 온 
위스키를 일회용 종이컵으로 따라 마시면서 기다린다. 그러면 전화가 
울리고 한 사내가 말한다.
  "여보세요. 지금 책을 번역 중인데요, '모타칼리뮌'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게 사람 이름인지 사물 이름인지 모르겠습니다. 도대체 이게 
뭐지요?"
  이틀만 여유를 주십시오...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리고는 도서관으로 
가서 카드 목록을 한동안 뒤적거리다가 참고실 계원에게 담배 한 대 
권하고 실마리를 얻어 낸다. 그날 밤에 나는 이슬람 연구소의 전임 강사 
하나를 한잔 하자면서 물러 낸다. 맥주 두어 잔이면 전임 강사는 경계심을 
푸고 내게 공짜로 자세한 것을 알려 준다.이제 고객에게 전화를 걸면 된다.
  "됐습니다. '모타칼리뮌'은 아비케나와 동시대의 급진적인 이슬람 신학자 
이름입니다. 이 양반은. 이 세계라고 하는 것은 어떤 불의의 사고로 
이루어진 먼지 그름 같은 것인데. 이것이 신의 의지에 따라 특정한 형태로 
응고된다고 했답니다. 따라서 만일에 신이 잠깐 이라도 딴 데 정신을 팔면 
우주는 다시 산산조각 흩어져 무의미하고 무질서한 원자 상태로 떨어지고 
마는 것이지요. 충분하지요? 이걸 조사하는데 사흘이 걸렸습니다.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만큼만 지불하십시오."
  다행히도 나는 교외의 한 낡은 건물의, 방 두 개에 작은 부엌 하나가 
딸린 아파트를 찾아낼 수 있었다. 원래는 공장 건물에 날개처럼 달린, 
일련의 사무실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아파트 입구는 긴 보도였다. 내 
집은 부동산 중개소와 박제소(간판은 <A. 살론 박제소>) 사이에 있었다. 
흡사 30년대 미국의 한 마천루에 세든 기분이었다. 내 집에 유리  문이 
하나 있으면 필립 말로우 기분이 날 것 같았다. 나는 뒷방에는 소파 
침대를 놓고 앞방은 사무실로 쓸 생각이었다. 두 개의 책장에다 지도와 
백과 사전, 그리고 그동안에 주워 모은 도서 목록을 꽂았다. 처음에, 
절망적인 대학생들을 위해 레포트를 대필할 때는 내 양심의 소리는 애써 
못 들은 척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힘들 것은 없었다. 도서관으로 가서 
10년 전에 발표된 것을 베끼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내가 하는 일이 
조금 알려지자 친구들은 읽고 검토해 달라면서 외국 원서나 원고를 보내기 
시작했다. 이건 매력도 없는 일인데다 들어오는 돈도 보잘것없었다.
  그러나 경험을 쌓고 정보를 축적시키는 데는 더없이 요긴했다. 나는 
어떤 것도 버리지 않고 모아들였다. 바야흐로 컴퓨터가 시장에 나오고 
있었고 벨보가 선구자로 등장할 터였으니 나는 컴퓨터 이용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컴퓨터 대신 나에게는 상호 참조 색인 카드가 있었다. 네불라에와 
수학자 라플라스, 수학자 라플라스와 칸트, 칸트의 출생지인 
쾨니히스베르그와 쾨니히스베르그에 있는 일곱 개의 교량과 토폴로지의 
제이론... 이것은 관념의 연상을 통해 소시지에서 플라톤까지 가야 하는 말 
놀이와 비슷했다. 가령 소시지에서 플라톤까지는 이렇게 간다. 소시지... 
돼지털... 화필... 매너리즘... 이데아... 플라톤... 식은 죽 먹기였다. 따라서 
아무리 맥빠지는 원고라도 내 비장의 무기인 색인 카드 파일에 적어도 
스무 장은 보태 줄 터였다. 내게는 엄격한 규칙이 있었는데, 모르기는 
하지만 정보 기관에도 그런 규칙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정보 위에 정보 
없다는 원칙이었다. 힘이라고 하는 것은, 정보가 파일에 모이고, 특정 
정보와 정보의 관계가 규명될 때만 발휘될 수 있는 것이다. 관계라고 하는 
것은 어차피 있는 것이니까 찾아내려고 마음만 먹으면 되는 것이었다.
  나는 2년 동안 이런 일을 했는데, 내가 생각하기에도 썩 만족스러운 
직업이었다. 재미도 있었다. 리아를 만난 것은 이즈음이다.
  
    35
  
  리아... (까소봉이 두 번째로 만나는 여성의 이름 '리아'는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리아와 이름이 같다. 단테의 리아는 생각하는 생활인이 아닌 
행동하는 생활인이다. 까소봉의 리아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인 여성이자 까소봉이 처음 만난 여성의 이름 '암파로'는 '옴팔로스 
배꼽', 즉 '중심'을 연상시킨다.) 리아와의 재회는 절망적이다. 그러나 
리아를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보다 훨씬 비참할 
것이다. 리아가 여기에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여기에서, 스스로 
무너뜨린 것을 다시 세우는 내 손을 잡아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리아는 그러겠다고 약속한 적도 있다. 그러나 아니다. 리아와 내 아이는 이 
일에 끼여들면 안 된다. 리아 모자가 더디 왔으면 좋겠다. 어떻게 끝나든, 
모든 것이 다 끝난 다음에 왔으면 좋겠다.
  
  1981년 7월 16일의 일이다. 밀라노는 텅텅 비어 가고 있었다. 도서관 
참고실은 한산했다.
  "여보세요, '109번'은 내가 보려고 뽑아 놓은 것이오."
  "그럼 이게 왜 여기 있죠?"
  "메모한 것과 대조해 보느라고 잠깐 내 자리에 다녀왔을 뿐이라고요."
  "그건 이유가 못 돼요."
  리아는 부득부득 그 책을 가지고 자기 자리로 갔다. 나는 리아의 
맞은편에 앉아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비아냥거렸다.
  "어떻게 읽으려고요? 점자책도 아닌데?"
  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먼저 보였는지 목덜미가 먼저 보였는지 
모르겠다.
  "뭐라고요? 안광이 지배를 뚫는다는 말도 못 들어 봤어요?"
  리아는 이러면서 턱을 들었다. 눈이 파랬다.
  "와, 파랗구나."
  "물론, 뭐가 잘못됐어요?"
  "잘못되다니... 눈 파란 사람이 늘어나야겠지, 그러자면 낳아야 하고..."
  그렇게 시작되었다.
  "먹여요. 당신은 바지랑대처럼 말랐어요."
  저녁 먹으면서 리아가 한 말이다. 우리는 술집 필라데 근처의 한 그리스 
식당에 있었다. 우리가 서로 내력을 밝히는 동안 병목에 꽂힌 초에서는 
촛농이 흐르고 있었다. 우리 두 사람은 하는 일도 비슷했다. 리아는 백과 
사전의 표제어를 조사하고 있었으니까...
  나는 아무래도 리아에게 고백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정확하게 12시 
30분, 리아가 내 모습을 똑똑히 볼 요량으로 손 빗으로 머리카락을 옆으로 
쓸어 넘길 때, 나는 엄지손가락을 세운 채 집게손가락을 리아에게 
겨누고는 방아쇠를 당겼다.
  "핌... (이탈리아어로는 '핌', 영어로는 '파우'. 굳이 번역하면 총소리의 
의성어인 '빠방'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 별명은 에드가 엘런포우의 작품 
'고든 핌의 모험'의 주인고,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려 배를 남쪽으로 
남쪽으로 몰아가는 고든 핌을 연상시킨다. 까소봉이 막바지로 몰리는 
상황은, 고든 핌이 처하는 흡사하다.)
  "나도..."
  리아도 같은 시늉을 했다.
  이날 밤 우리는 한 몸이 되었다. 이날부터 리아에게 내 별명은 '핌'이 
되었다.
  
  신혼 살림을 차릴 집 마련은 무리였다. 잠은 리아네 아파트에서 잤고 
일은 내 사무실에서 함께 했다. 추적 조사하는 리아의 솜씨는 나보다 
나았다. 관련성 연상에도 능했다.
  "우리에게는 장미 십자단을 조사하다 만 카드 파일이 있는 것 
같은데요?"
  어느 날 리아가 지적했다.
  "조만간 마쳐야지. 브라질에서 하던 일이야."
  "예이츠도 상호 참조의 대상이 되겠군요."
  "아니, 예이츠가 장미 십자단과 무슨 관계가 있어서?"
  "많죠. 예이츠는 '스텔라 마투티나(새벽별)'라는 장미 십자단에 소속되어 
있었다고요."
  "당신 아니었으면 어쨌을까 몰라..."
  
  술집 필라데에도 다시 가기 시작했다. 고객이 우글거리는 장터와 같은 
곳이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밤 벨보를 다시 만났다. 그 역시 지난 몇 년 
동안은 별로 자주 출입하지 않았던 모양이나 로렌짜 펠레그리니를 만난 
뒤로는 정기적으로 나타난다고 했다. 흰 머리카락이 늘고 체중이 조금 준 
것 같았으나 모습은 옛날과 대체로 비슷했다. 
  지난날 얘기, 우리가 연루되었던 지난 사건이나 일련의 서신 교환에 
대해 의도적으로 삼가는 태도... 그의포용성에 한계가 있다고 가정할 때 
우리의 재회는 그래도 따뜻한 편에 속했다. 데 안젤리스 경위로부터는 
아무 연락도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영구 미제가 되어 가고 있었던 
것일까? 
  나는 그에게, 내가 하고 있는 일 이야기를 했다. 구미가 동하는 
눈치였다. 
  "문화의 샘 스페이드... 바로 내가 하고 싶어하던 일이네. 일당 20달러 
플러스 경비..."
  "매력적이고 신비스러운 여자 손님이 없고, '말타의 매' 이야기하러 오는 
사람이 없다 뿐이지 대체로..."
  "올지도 모르지. 재미는 있어?"
  "재미요? 배운 도둑질이죠."
  나는 그의 말투를 흉내내었다.
  "굿 포 유(잘났군)."
  어쨌든 다시 만난 셈이고 해서 나는 브라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나 그는 전보다 더 무심했다. 로렌짜 펠레그리니가 나타나기 전에는 
줄곧 출입구만 바라보고 있더니 들어온 뒤로는 이따금씩 초조해 하는 
시선으로 바 안을 둘러볼 뿐 대개는 이 여자의 일거수 일투족을 좇고 
있었다. 술집이 문을 닫기 직전에 그가, 시선은 여전히 딴 데 둔 채 이런 
말을 했다.
  "우리 회사가 당신을 쓸 수 있을 지도 모르겠어. 단일한 정보 검색 
의뢰가 아니야. 당신, 우리를 위해 매주 며칠씩 오후 시간을 내어 줄 수 
있겠나?"
  "상담을 해봐야지요. 무슨 일인데요?.
  "한 철강 회사가 우리에게 금속 전반에 관한 책 한 권의 제작을 
의뢰했네. 삽화가 좀 많이 들어가는 책이야. 딱딱할 수 밖에 없지만 겨냥은 
대중 시장 겨냥이지. 인류 역사 속의 금속... 철기 시대부터 우주선까지... 
뭐 이런 거, 당신도 잘 알고 있지 않나? 도서관이나 고문서관 같은 데를 
파고 돌아다니면서 괜찮은 도판, 오래된 세밀화, 19세기의 판화로 된, 제련 
관계 자료나, 피뢰침의 그림 같은 걸 찾아낼 사람이 필요해."
  "좋아요, 내일 들르지요."
  로렌짜 펠리그리니가 그에게 다가섰다.
  "집까지 좀 데려다 줄래요?"
  "내가 왜?"
  벨보가 물었다.
  "당신은 내 꿈속에 나오는 남자니까요."
  벨보는 할 줄 아는 건 그것뿐인 듯이 낯을 붉히고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여기 증인이 있군..."
  벨보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말을 이었다.
  "...들었지? 내가 꿈속에 나오는 남자라는군. 이쪽은 로렌짜일세."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벨보는 일어서서 로렌짜의 귀에다 입술을 대고 뭐라고 속삭였다. 
로렌짜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집까지 태워다 달라고 했어요. 그것뿐이에요."
  "그래. 까소봉, 나 먼저 가네. 딴 남자의 꿈에 나오는 여자를 위해 
운전사 노릇을 해야 한다네."
  "바보 같아."
  로렌짜는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벨보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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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벨보와 로렌짜 펠레그리니 사이에 뭔가가 있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그러나 나는 정확하게 그게 무엇인지, 언제부터 그런 일이 두 사람 사이에 
개재해 있었는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두 사람 사이의 일을 알아내는 데는 
아불라피아도 벼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가령, 바그너 박사와 저녁 식사를 함께 했다는 대목에서는 날짜조차 
없었다. 벨보는 내가 브라질로 떠나기 전부터 바그너 박사를 알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내가 가라몬드 출판사 일을 시작해서 나 역시 개인적으로 
그를 접촉할 즈음에는 그 접촉이 깊숙해졌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니까 
벨보가 말하는 바그너 박사와의 저녁 식사라는 것은. 내가 전에 한번 들은 
적이 있는 저녁 식사 전후의 일일 것이다. 만일에 후자에 속하는 저녁 
식사였다면 벨보의 당혹감과, 심상치 않은 절망감은 이해할 만도 하다.
  오랫동안 오스트리아에서 개업의로 일해 온 바그너 박사(그와의 교분을 
뽐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이 이름을 반드시 <바그네르>라고 발음 
한다)는 1968년 이후의 두 혁신 단체의 초청으로 10년 간격으로 밀라노로 
오고 있었다. 이 두 혁신 단체는 바그너 박사에 관해 서로 다투었으니, 
그의 사상을 과격하게 해석하는 시합이라도 벌였음직하다. 그러나 
나로서는 이 유명 인사가 스스로 나서서 과격 분자들의 후원을 받는 
까닭이나 경위를 알 수 없었다. 그의 이론에는 아무런 정치적인 색채가 
없었다. 따라서 본인이 원할 경우 대학이나 병원이나 학술원의 초청을 
받기가 훨씬 쉬워 보였다.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혁신 단체의 
초청을 선호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쾌락주의자여서 국왕 팔자를 부러워하지 
않아도 될 주최축의 대접을 좋아했기 때문이었다고 믿는다. 실제로 학교나 
병원이나 학술원보다는 혁신 단체가 훨씬 더 많은 돈을 내놓을 수 있었다. 
말하자면 바그너 박사에게 혁신 단체의 초청 수락은, 치료비와 맞먹는 
보수의 강연과 세미나 사례금과 항공기 일등석과 고급 호텔을 의미했을 
것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이 두 단체가 무슨 근거에서 바그너의 사상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는가 하는 것은 문제의 핵심과 관계가 없다. 그 시절의 <바그너>L 
상표가 붙는 정신 분석학은 혁명 활동을 위한 어떤 이론적 정당성을 
제공할 수 있을 만큼 파괴적이고 파행적이고 리비도적(충동적)이고 반 
데카르트적이기는 했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노동자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난 뒤로 
이 두 단체는 어떤 시점부터는 노동자와 바그너를 택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 이들은 바그너를 택함으로써 새로운 혁명의 주역은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라 정신병자라는 이론을 낳았다.
  "프롤레타리아를 정신병자로 만드는 것보다는 정신병자를 
프롤레타리아로 만드는 쪽이 나을걸. 바그너 박사의 가격을 생각해 볼 때 
그쪽이 훨씬 경제적일 것 같거든."
  어느 날 벨보가 내게 한 말이었다.
  바그너 박사의 혁명은 역사상 비용이 가장 많이 드는 것이었다.
  가라몬드 출판사는 한 대학 심리학과의 보조를 받아 바그너 박사의 
소논문(지극히 전문적이고 희귀해서 추종자들 사이에서는 대단한 인기가 
있는)을 모아 번역, 출판했는데, 바그너는 그 책의 홍보를 위해 밀라노에 
온 시점에서 벨보와의 교우가 시작되었던 것 같다.
  
  # 파일 명: 독터 바그너
    
  악마적인 독터 바그너
  스물여섯 번째 입력
  
  잿빛 아침의, 그 사람
  
  논쟁의 도중에 내가 반론을 제기했다. 악마 같은 노인은, 속으로야 
짜증이 났겠지만 그걸 드러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가 나를 자기 의견 
쪽으로 유인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샤를류스와 쥬시안, 벌과 꿀의 관계... 천재는 사랑을 받지 못하면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천재는 반론자를 꾀고 반론자로 하여금 자기를 사랑하도록 
만들어 버린다. 그는 성공했다. 나는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별하는 날 밤에 치명타를 날린 것으로 봐서, 그는 나를 
용서하지 않았던 것임에 분명하다. 그는 의식보다는 무의식으로, 
이성적보다는 본능으로 나를 유혹하고는 무의식으로 나를 처벌했다. 박사 
스스로 의무론적인 값을 치른 셈이기는 하나 덕분에 나는 정신 분석을 
공짜로 받은 셈이 된다. 무의식은 그것을 다루는 사람조차도 물어뜯는 
모양이다.
  
  '까르뜨 뱅 뜨레즈'(93년. 빅또르 위고의 소설 제목)에 나오는 랑뜨냑 
후작 이야기.
  방데 반혁명파 일행을 태운 배가 브르타뉴 연안을 항해하는 도중 사고가 
발생했다. 배가 상하 좌우로 흔들리는 대로 대포는 갑판 위를 질주, 한 
마리 미쳐 버린 괴물이 되어 좌현과 우현의 난간을 부수고 다녔다. 그때 
한 포병(아, 잠깐의 소홀로 대포를 포좌에다 고정시키지 못했던 정본인)이 
쇠사슬을 들고 불퇴전의 용기로 목숨을 걸고 그 괴물에게 달려들어 괴물을 
묶어 포좌에 다시 앉힘으로써 배와 선원들과 반혁명파 인사들을 살릴 수 
있었다.
  무섭기로 소문난 랑뜨냑 후작은 선상으로 사람들을 모아 으리으리한 
훈장 수여식을 열고, 포병의 영웅적인 행동을 입이 마르게 칭송하면서 
자기 목에 걸려 있던 훈장을 풀어 그 포병에게 걸어 주니 선원들의 만세 
소리가 하늘에 사무쳤다. 이런 연후에 랑뜨냑 후작은 준엄한 어조로 
부하들에게, 공은 공이고, 배를 위기에 처한 일차적인 책임은 훈장을 받은 
그 포병에게 있는 것임을 상기시키고, 그 책임을 물어 그 자리에서 
총살하라고 명했다.
  놀랍다. 과연 고결한 사나이, 부패에 저항하는 사나이 랑뜨냑이다. 
바그너 박사가 내게 그랬다. 바그너 박사는 우정으로 내게 영광을 베풀고 
진실로써 나를 처형했다.
  
  내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폭로하면서
  
  내가 바라는 것과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 다르지 않음을 폭로하면서...
  
  술집에서 시작되는 사랑의 이야기. 사랑에 빠지고 싶다는 욕구.
  뭔가가 시작될 것 같은 느낌. 사랑에는 아무나 빠지는 게 아니다. 빠질 
필요가 있어야, 간절한 바람이 있어야 빠지는 것이다. 그러나 필요를 느낄 
때는 조심해야 한다. 미약을 마시는 것처럼 첫 대면한 상대에게 아찔하게 
반해 버리니까. 상대가 오리 주둥이를 가진 오리너구리일지언정...(동물학자 
콘래드 로렌쯔 박사는, <오리는 알을 까고 나와 맨 처음 보는 대상에게서 
모성애를 느낀다>는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실제로 수많은 오리를 
거느리고 다니기도 했다.)
  그즈음 나는 절박한 필요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침 술을 
끊은 즈음이었다. 간장과 심장 때문에. 새 사랑은 음주 재개의 훌륭한 
핑계가 된다. 함께 술집으로 갈 사람이 생긴 것이다. 함께 있으면 그냥 
기분이 좋은 그런 사람.
  술집은 단촐하고 은밀하다. 술집에 가기로 된 날은 하루종일 길고 
달콤한 기대로 가슴이 설렌다. 터억 들어가서 가죽 의자 사이의 어둠에 
몸을 숨긴다. 6시의 술집은 한산하다. 추레한 단골과 피아니스트가 이윽고 
들어선다. 오후에는 텅 비기 마련인 미국식 술집으로 택할 필요가 있다. 
웨이터는 다음 마티니를 준비하고 있으면서도 세 번 부르지 않으면 올 
생각을 안 한다.
  마티니여야 한다. 위스키가 아니라 마티니여야 한다. 마티니는 맑다. 
잔을 들고 올리브 빛깔 너머로 여자를 본다. 작고 얇은 마티니 스트레이트 
잔을 통해 보는 사랑하는 여자의 모습과, 두꺼운 마티니 언더 락스 잔을 
통해 보는 사랑하는 여자 모습의 차이. 두꺼운 마티니 언더 락스 
글래스에서 여자의 이미지는 투명한 얼음의 입방체에 부서지고 만다. 서로 
이마를 마티니 잔에다 대고 술잔의 냉기를 이마로 느끼면서, 잔이 서로 
맞닿을 때까지 얼굴을 기울일 수 있으면 효과는 배가된다. 두 개의 마티니 
잔을 사이에 둔 이마와 이마. 그러나 위스키 잔으로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술집에서 보내는 시간은 짧다. 끝나면 떨리는 가슴으로 다음날을 
기약한다. 약속의 협박으로부터도 자유롭게.
  
  술집에서 사랑에 빠지는 사람에게 반드시 자기만의 여자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언제든지 꾸어다 쓸 여자가 있기 마련이므로.
  
  그의 역할. 그는 여자에게 무제한적 자유를 허용한다. 자기는 맨날 
여행이나 다니니까. 그의 관용에는 한계가 있다. 나 같으면 한밤중에라도 
전화하겠다. 그는 그 자리에 있는데 당신은 없다. 그는 말한다. 당신 어디 
갔었어? 그렇다. 내가 당신과 통화하고 있었는데, 그 여자가 어디로 갔는지 
무슨 수로 알아내? 희귀한 질투의 순간. 하지만 나 역시 이런 식으로 그 
색소폰 주자에게 재칠리아를 빼았겼다. 나는 그걸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사랑이라고 믿는 것일까? 해묵은 복수심에 불타는 영원한 사제의 
사랑이라고?
  
  산드라와는 사정이 복잡하다. 이 경우에 산드라는 내가 너무 깊이 빠져 
든 것을 눈치챈 모양이다. 부부로서의 우리 삶은 이제 억지예요. 우리, 
갈라서야 할까요? 그럼 갈라서자. 안 돼요. 잠깐만요. 이야기는 마저 
해야죠. 아니야, 이런 식으로는 계속할 수는 없어. 문제는, 요컨데, 
산드라였다.
  술집에서 빈둥거릴 때 사람을 사로잡는 사랑의 드라마는 만나는 여자의 
드라마가 아니라 떠난 여자의 드라마. 그리고 바그너 박사의 저녁 식사. 
강연에서, 반론자에게 정신 분석을 정의한 직후. <라 쁘씨까날리즈? 쎄 
깡뜨르롬 에 라 팜... 셰르자미... 싸 느 꼴 파...>(정신 분석 말인가요? 그거, 
남자와 여자 사이... 친한 친구 사이에서는 제대로 안 되는 것이랍니다.)
  이어서 토론. 법적인 허구로서의 부부 그리고 이혼. 내 문제도 있고 해서 
용감하게 뛰어들었다. 바그너 박사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논리적인 난상 토론을 했다. 도사님이 목전에 있다는 것도 잊고... 
도사님은 수심에 잠겨 있었다.
  
  선량함을 위장한 음헐한 표정을 하고
  
  우울증을 해탈한 표정을 하고
  
  그는 장난삼아 우리 논쟁에 끼여드는 듯이 끼여들고는 주제와는 
상관없는 소리를 했다(마음에다 깎아 맞추어 가지고 다니는 것 같아서 
그가 한 말을 정확하게 기억한다). 나는 이 직업에 종사하면서 이혼 
때문에 신경증을 앓는 사람을 한두 번 보아 온게 아니올시다. 문제의 
발단은 늘 <타인>의 이혼인 것이 보통이지요.
  바그너 박사는 <타인>을 유난히 강조한다. 내가 살모사에 물린 것처럼 
화들짝 놀랐을 수밖에.
  
  자작은 살무사에 물린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이마에는 식은땀을 구슬처럼 매달고.
  
  남작은, 가느다란 러시아 엽궐련의 느릿한 연기자락 사이로 그를 
바라보았다.
  
  나는 물었다.
  아니 그럼 박사께서는, 사람은 제가 한 이혼으로 좌절하는 게 아니라,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제 3자의 이혼으로 좌절한다는 겁니까? 
당사자에게 위기감을 조성할 수 있는 다른 구성원의 이혼 때문에 
좌절한다는 것입니까?
  바그너 박사는 정신 장애자를 난생 처음 보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박사는, 그게 무슨 뜻이오, 하고 물었다. 고백하건대, 의미야 어떻든 
표헌이 서툴렀던 모양이다. 나는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싶었다. 그래서 
식탁에서 스푼을 집어 포크 옆에다 놓고 설명했다.
  여기에 있는 이 스푼이, 포크라는 여자와 결혼한 <나>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다른 부부가 있습니다. 스테이크 나이프, 별명은 독일 말로 
<마키 메써>와 결혼한 과일 나이프입니다. 그런데 <나>, 스푼은 떠나기는 
싫은데 부득이 포크를 떠나야 하기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과일 나이프를 사랑하지만, 이 여자가 스테이크 나이프와 
함께 살든 안 살든 그건 문제가 안됩니다. 바그너 박사, 그런데 바그너 
박사께서는 내가 고통스러워하는 까닭은 과일 나이프가 스테이크 나이프를 
떠나지 않으려 하는 데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까?
  바그너 박사는 식탁에 앉은 다른 사람에게, 자기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아니, 안 하셨다뇨? 신경증의 원인이 자기의 이혼이 아니라 <타인>의 
이혼에 있는 경우를 한두 차례 본 것이 아니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바그너 박사는 지겹다는 듯이, 그랬나요, 기억이 안 나는 걸요, 하고 
중얼거렸다.
  "만일에 그랬다면,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겁니까?"
  
  바그너는 잠시 침묵했다.
  
  다른 사람들은 입 안의 음식을 삼키지도 못한 채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바그너는 급사에게 포도주 잔을 채우라고 손짓했다. 
이윽고 잔이 차자, 불빛을 등지고 선 포도주 잔을 찬찬히 살피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당신이 이해한 것은, 이해하고 싶었던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고 나서는 시선을 돌리더니, 날씨가 덥다고 하더니, 콧노래로 무슨 
아리아인가를 부르고 딱딱한 막대기 빵을 집어 들고 지휘자가 오케스트라 
지휘를 하는 시늉을 하는가 하면, 하품을 하고, 거품 크림에 덮인 케이크를 
노려보고, 그러다 또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이윽고 나에게 호텔까지 
좀 태워다 주지 않겠느냐고 했다.
  도사님의 한 말씀을 기다리던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내가 
그날 심포지움을 망친 장본인이기라도 한 것처럼 곱지 않았다.
  
  진실을 말하자면... 그날 나는 <진리>를 접한 것이다. 전화를 걸었다. 
당신은 집에 있기는 있는데 <타인>과 있었다. 나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는 깨달았다. 내가 견딜 수 없었던 것은 당신이 그와 함께 있는 
것이었음을... 산드라는 이 일과 아무 상관이 없음을...
  
  그로부터 반년간이라는 극적인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나는 당신에게 
달라붙어 당신을 괴롭혔고, 당신의 결혼 생활이 파탄에 직면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무수히 당신이 내 곁에 있어야 하고, 그 <타인>에 대한 당신의 
증오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러자 당신은 그와 싸우기 
시작했고, 그는 당신을 질투하면서 까다롭게 굴기 시작했다. 그는 밤에는 
외출을 삼갔고, 여행 중에는 하루에 두 번씩 한밤중에 전화를 했고, 
급기야는 당신을 때리기까지 했다. 당신은 나에게 도피 자금을 부탁했다. 
나는 은행에 남아 있던 얼마 안 된는 돈을 긁어 당신에게 주었다. 당신은 
그 결혼을 뒤집어엎고, 주소도 남기지 않은 채 친구들과 함께 산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타인>은 내게 전화를 걸어, 다급한 목소리로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나는 모른다고 했지만 곧이 들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신이 그에게, 나 때문에 떠난다고 했기 때문이다.
  밝은 표정으로 돌아온 당신은, 그에게 작별의 편지를 썼다고 했다. 나는, 
산드라와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했다. 그러나 당신은 나에게 
말했다. 볼에 흉터가 있기는 하지만 접시 같은 아파트를 가진 사람을 
만났으니 이제 그 사람과 살겠다고 했다.
  "그럼 당신은 이제 날 사랑하지 않는 건가?"
  "물론 사랑하죠. 당신은 내가 만난 유일한 남자예요.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고 나서 생각해 보니 내게도 이런 체험이 필요하겠어요. 바보같이 굴지 
말고 이해하려고 애써 줘요. 어쨌든 나는 당신 때문에 남편과 헤어졌어요. 
누구나 나름대로 사는 방법이 있는 거 아니겠어요? 사는 방법? 날 버리고 
딴 놈 찾아간다며?"
  "당신은 인텔리인 데다 좌익이잖아요? 마피아같이 굴지 말아요. 곧 또 
만날 수 있을 테니까..."
  모든 것은 바그너 박사 덕분이다.
  #
  
    37   
  
  재가 가라몬드 출판사에 첫 출근한 날 아침, 사람들은 아불라피아를 
설치하느라고 법석을 떨고 있었다. 벨보와 디오탈레비는 거명까지 
해가면서 산들을 씹느라고 정신이 업었고, 구드룬은 불안한 시선으로 
먼지투성이인 원고 더미 사이에다 이 요상한 물건을 설치하는 사람들을 
좇고 있었다.
  "앉게 까소봉, 금속사 출판 계획, 초안이 나왔네."
  단둘이 앉게 되자 벨보는 색인과 각 장의 개요와, 고려의 대상이 되고 
있는 배면 계획을 펼쳐 보였다. 내가 할 일은 본문을 읽고 도판거리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나는 정보 자료가 꼭 있을 만한 밀라노의 몇몇 도서관 
이름을 대었다.
  "그걸로는 기별이 안 갈 테니 다른 곳도 뒤져 봐야지. 가령 뮌헨의 과학 
박물관에는 사진에 관한 한 굉장한 고문서관이 있다네. 파리에는 국립 
공예원 박물관이 있고... 시간이 있으면 나도 다시 가보고 싶은 곳이라네."
  "재미있었나 보군요."
  "현란하지. 고딕 풍 교회에 우리 시대 기계 문명의 찬란한 승리가 
숨쉬고 있다네..."
  그는 말을 이으려다가 책상 위에 놓인 문건을 추스르면서 머뭇거렸다. 
그러다가 자기 말에 너무 무게를 싣게 되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지 천천히 
덧붙였다.
  "... 그리고 진자가 있네"
  "무슨 진자요?"
  "진자 말이야. 푸코의 진자..."
  벨보는 이러면서 내가 이틀 전 토요일에 보았던 모양 그대로 그 진자를 
묘사해 보였다. 아니, 내가 그 진자를 그런 모양으로 본 것은 벨보가 
그렇게 보도록 미리 만들어 놓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지나친 관심을 보인 것이 탈이었다. 벨보는, 내가 시스티나 
성당을 다 구경하고, <이게 전부요> 하고 시담잖게 묻기라도 한 것처럼 
나를 바라보면서 설명했다.
  "푸코의 진자가 있는 곳이 교회여서, 말하자면 분위기 탓인지는 몰라도 
정말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네. 이 진자를 보고 있으면, 이 세상 만물은 
움직인다, 그러나 저 위, 우주 어딘가에는 불변하는 단 하나의 고정점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거든. 신심이 없는 사람도 이걸 
보노라면 신의 존재를 생각하게 되어 있어. 무신론을 청산하게 된다는 
뜻은 물론 아닐세. 왜냐... 그 불변하는 극점 역시 공일 테니까. 따라서 
하루 세끼 절망을 먹고 사는 우리 세대에게는 위안이 될 수도 있을 거라."
  "제 세대는 더 지독한 절망을 먹고 사는데요?"
  "생각하기 나름이겠지만 그런 것은 아닐걸세. 당신 세대에 절망은 
하나의 국면이거든. 당신 세대는 그래도 <까르마뉼>도 부르고 반동의 
거리 방데 가로 뛰쳐나갈 수 있었거든. 하지만 우리 세대는 달라. 우리 
세대의 태초에는 파시즘이 있었네. 우리가 어린 시절이어서 그게 무슨 
모험담처럼 들리기는 했어도, 어쨌든 우리에게는 우리 나라의 영원한 
숙명에 대한 인식이 하나의 고정점으로 존재하고 있었네. 그 다음의 
고정점은 레지스땅스... 레지스땅스 운동을 구경하고 있던 나 같은 방관자 
세대에게 그것을 통과의례, 혹은 춘분제냐 하지제냐... 나는 이걸 종종 
혼동하거든, 하여튼 그런 것이었네. 그 다음의 고정점을 신으로 옮긴 
사람도 있고, 노동 계급으로 옮긴 사람도 있네. 이 양자를 고정점으로 삼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지. 지식인들은, 세계를 개조할 준비가 잘 되어 있는, 
건강하고 잘생긴 노동자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신이 나고는 했네. 그러나 
지금은, 당신도 잘 알겠지만, 노동자는 있어도 노동 계급은 없네. 어쩌면 
헝가리 같은 데서 집단으로 살해당한 것인지도 모르지. 그 다음에 당신네 
세대가 왔어. 당신들 세대에게, 그 시대 일은 어쩌면 자연스럽게 
보였을지도 모르겠네. 그래서 휴가 즐기는 기분으로 시위에 가담했을 테지. 
그러나 우리 세대에게는 그렇지 못했어. 우리에게 시위는 보복, 가책, 후회, 
갱생의 순간순간이었네. 우리는 처절하게 실패했는데 당신네 세대는 
열성과 용기와 자기 비판으로 무장하고 나타나 당시 30대 후잔 아니면 
40대 초반이던 우리에게 희망을 주었네. 정확하게 말하자면 희망과 
굴욕감이었네만 어쨌든 희망은 있어 보였지. 우리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희생을 치르는 한이 있어도 당신네들을 본받아야 했네. 그래서 
우리는 넥타이를 풀고, 트렌치 코트를 벗어 던지고 중고품 반코트를 샀네. 
제도권 섬기는 것이 싫다면서 직장을 때려치운 사람들도 있었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여 물었다. 지나치게 열을 내고 있다는 걸 의식하는 
눈치였다. 자제를 무너뜨린 데 대한 일종의 사죄 표현 같은 것이었다.
  "... 그런데 당신들 세대 역시 포기하고 마는군. 우리는 아우슈비츠를 
향하는 순례자의 심정으로 코카콜라의 광고 카피 쓰는 것도 거부했네. 
반파시스트로서 그런 일을 할 수는 없었던 거지. 우리 세대는 가라몬드 
출판사에서 일하는 데 만족하네. 적어도 책은 민중을 위한것이니까... 
그러나 당신네 세대는, 당신네 세대가 전복시키는 데 실패한 부르주아에게 
복수하는 심정으로 이들에게 비디오 카세트와 오토바이 광을 위한 잡지를 
팔고, 선과 오토바이 정비 기술로 이들을 세뇌시켰네. 나는 당신네 세대가 
모택동의 사상을 복사해서 우리에게 헐값으로 팔고, 그 돈으로 폭죽을 
사서 새세대의 창의력을 자축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네. 우리가 
부끄러워하면서 인생을 조심조심 살고 있을 동안에 당신네 세대들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그런 일을 했네. 우리에게는 볼리비아 민병대와 
맞설 용기가 없었지만 당신네 세대는 거리를 걷고 있는 불쌍한 볼리비아 
민병대의 등을 쏘는 짓도 새양하지 않았네. 10년 전에 우리 세대는 당신네 
세대를 감옥에서 꺼내기 위해 거짓말을 했네만, 당신네 세대는 친구들을 
감옥에 보내기 위해서 거짓말을 했네, 그래서 나는 컴퓨터 같은 기계를 
좋아하네. 컴퓨터는 어리석네. 믿지도 않고 내게 믿음을 강요하지도 않아. 
내가 하라는 대로 할 뿐이지. 어리석은 나와 어리석은 기계의 관계... 
정직한 관계 아닌가."
  "하지만 나는..."
  "까소봉, 당신에게는 죄가 없어. 당신은 돌멩이를 던지는 대신 달아났고, 
학위를 땄고, 아무도 쏜 일이 없거든. 그럼에도 불구하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당신한테서 위협을 느끼고 있었네. 개인적인 위협이라기보다는 
세대간에 되풀이되는 위협 같은 것이었네. 그러다가 작년에 푸코의 진자를 
본 순간 나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네."
  "모든 것인가요?"
  "정직하게 말하면 거의 모든 것을... 까소봉, 그 진자까지도 가짜 
예언자라네. 사람들은 그 진자를 바라보면서 우주 속에 있는 하나의 
고정점을 상정하겠지만, 그걸 박물관 천장에서 떼어 내어 사탕굴에 매달아 
놓는다고 하더라도 진자의 움직임은 달라지지 않네. 뿐인가, 진자는 도처에 
있네. 뉴욕의 유엔 본부에도 있고, 센프란시스코 박물관에도 있네. 진자는 
도처에 있네. 어디에다 매달아 두든, 지구가 자전하는 한 푸코의 진자는 
부동점을 중심으로 진동하게 되어 있네. 따라서 우주의 모든 점이 불변의 
고정점이 될 수 있는 것이지. 진자를 부동점에 걸어 놓기만 하면 되는 
걸세."
  "신 또한 도처에 있다는 뜻이겠지요?"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 그러나 바로 이 점 때문에 
진자가 나를 헛갈리게 하는군. 진자가 내게 숙제를 던지고 있는 것이지. 
내게도 무한자가 있다... 나의 무한자는 어디에다 걸어야 할 것인가 하는 
숙제. 그러니까 진자를 섬기는 것으로는 안 돼. 나름의 진자를 어디에 
걸어야 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데 아직..."
  "아직은?"
  "그런데 아직은... 당신 내 말 진지하게 듣지 않는 것 같군. 좋아, 
상관없어. 우리 세대는 사물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세대가 아닌 걸... 당신 
이런 생각을 하는 거지? 수많은 곳에다 진자를 거는 일로 세월을 보냈지만 
진자는 흔들리지 않더라, 그런데 공예원 박물관에서는 흔들리더라...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지? 당신은 우주에 특별한 곳이 있다고 생각하나? 가령, 
이 방의 천장 어디에 특별한 한 점이 있는 것일까? 없어. 그런 걸 믿는 
사람은 없어. 그래. 분위기가 중요할거라. 모르겠어. 우리는 늘 그 점을 
찾고 있고, 실제로 그런 점은 우리 가까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 그것은 그렇고, 가라몬드 사장을 
만나러 가야겠지?"
  "만나서 진자를 달아야겠지요?"
  "농담이 아닐세. 지금부터는 좀 진지하게 굴 필요가 있네/ 월급을 
받으려면 사장이 당신을 보고 만지고 냄새 맡을 수 있도록 몸을 맡길 수 
있어야 하네. 가세. 가서 사장으로 하여금 당신을 좀 만지게 하세. 사장의 
약손에는 연주창도 낫는다네."
  
    38
  
  복도를 지나고, 계단 세 개를 오르고, 반투명 유리 문을 들어서니 
별천지였다. 들어가기 직전까지 보았던, 어둡고, 먼지투성이고, 페인트 칠이 
군데군데 벗겨진 방에 견주면 공항의 VIP 라운지 같은 방이었다. 부드러운 
음악, 특별히 디자인된 가구가 즐비한 호화로운 응접실, 하원 의원처럼 
보이는 신사가 상원 의원처럼 보이는 신사에게 날개 달린 승리의 여신상을 
증정하는 사진이 무수히 걸린 파란 벽... 커피 테이블에는 치과 병원 
대기실이 그렇듯이 일류 잡지가 아무렇지도 않게 놓여 있었다. '문학과 
기지', '시의 아타노르(연금술에서 말하는, 연료 자동 공급식 소화로)', 
'장미와 가시', '이탈리아 파르나소스', '자유시'... 처음 보는 책들이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일이지만, 그것은 마누찌오 출판사 고객들에게만 
배포되는 책이었다. 
  처음에는 그 방이 가라몬드 출판사의 임원들 집무실이거니 여겼는데 
아니었다. 마누찌오 출판사는 가라몬드와는 완전히 다른 또 하나의 
출판사였다. 가라몬드 출판사 로비에는 먼지가 낀 작은 유리 전시대가 
있고, 그 안에는 최근에 가라몬드가 출판한 책이 전시되어 있었다. 
프랑스의 대학 출판물을 흉내내어 페이지가 개봉되어 있지 않고(프랑스의 
출판물에는, 측면을 제단하지 않은 책이 더러 있다. 따라서 이런 책은 한 
페이지씩 뜯어 가면서 읽어야 한다.) 표지는 수수하게 회색이 주조를 
이루는, 겉모양이 소박한 책들이었다. 게다가 종이는 몇 년만 지나면 
누렇게 변색하는 것이어서 저자가 새파랗게 젊더라도 책만 보나서는 아주 
오래 전에 출판된 것처럼 보이기가 일쑤였다. 그런데 마누찌오 출판사 
서적 전시 상자 안에는 불이 켜져 있고 바로 그 환한 유리 상자 안에는 
마누찌오 출판사의 책들이 황홀한 모습을 자랑하듯이 펼쳐져 있었다. 
우아한 투명지에 싸인 하얀 표지, 고급 닥종이에 찍힌 깔끔한 글씨가 
그렇게 깔끔할 수 없었다. 
  가라몬드 출판사의 목록이 '인문학 연구'나 '철학의 세계'처럼 제목부터가 
약간 무뚝뚝한 느낌을 주는 학문적 연작물을 아우르고 있는 것에 견주어 
마누찌오의 시리즈 제목은 지극히 섬세하고 시적이었다. '꺾이지 않는 
꽃'(시집), '미지의 땅'(소설), '협죽도 시대'('어느 병든 소녀의 일기'같은 
작품이 들어 있는), '이스터 섬'(수필집 시리즈가 아니었나 싶다), '새 
아틀란티스', 이런 식이었다. '새 아틀란티스' 시리즈 중 최근간은, '해방된 
쾨니히스베르크 ; 초월적 체계와 현상적 본체학으로 동시에 제시되는 
미래에 곤한 형이상학적 서설'이니, 한마디로 가관이었다. 표지에는 
마누찌오 출판사의 로고인, 야자나무 아래 서 있는 펠리칸과 함께 <나는< 
내가 준 것만큼만 누린다>는 다눈찌오의 경구가 찍혀 있었다. 
  벨보는 역시 입이 무거운 사람이었다. 그는 가라몬드 씨가 두 개의 
출판사를 소유하고 있다는 말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가라몬드 
출판사와 마누찌오 출판사 사이에 통로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대외비라는 
것을 안 것은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뒤였다. 가라몬드 출판사의 정문은 
너저분한 신체로 레나토 가에 있었지만 마누찌오 출판사의 정문은 
마르께즈 구알디 가에 있었다. 말하자면 신체로 레나토 가가아니라, 건물이 
깔끔깔끔하고, 널찍한 보도 양쪽이 알루미늄 승강기 로비로 번쩍거리는 
거리였다. 신체로 레나토 가에 있는 한 너저분한 건물이, 깔끔한 마르께즈 
구알디 가의 건물과 서로 통하고 있으리라고 짐작할 만한 사람은 많지 
않을 터였다. 모르기느 하지만 가라몬드 씨는 건ㅌ축 허가를 얻느라고 
애깨나 썼음직했다. 나는 가라몬드 사장이, 마누찌오 출판사의 저자 중 한 
사람인 도시 계획국의 한 관리를 집중적으로 구워삶아을 것이라고 맏고 
있다.
  벽 색깔과 조화가 잘 되는 수제 스카프를 두른 그라찌아 양이 은은하게 
웃으면서 부드럽고 점잖게 우리를 맞아들이고는 사장실로 우리를 
안내했다.
  크지는 않았지만 베네치아 궁전에 있는 무솔리니의 집무실을 연상시키는 
방이었다. 문 가까이 지구의가 있었다. 방 한 끝에, 마호가니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이가 가라몬드 사장이었다. 가라몬드 사장의 모습은 흡사 
거꾸로 들고 보는 쌍안경에 잡히는 풍경 같았다. 그는 우리에게 가까이 
오라는 몸짓을 했다. 묘하게도 질리는 느낌이었다. 잠시 후 데 
그베르나티스 씨가 들어왔을 때 가라몬드 사장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고 
그를 맞으러 갔는데, 이런 사소한 몸짓은 그 출판 업자의 관록을 더없이 
돋보이게 했다. 사장이 방을 가로질러 오는 것을 보다가 얼김에 주인에게 
팔짱을 끼인 채로 방을 가로질러 가다 보면 그 공간이 두 배로 늘어나 
보일 터였다.
  가라몬드 사장은 우리에게, 책상 맞은 편 자리에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외양은 퉁명스러울 것 같은데 뜻밖에도 사근사근했다.
  "까소봉 박사, 벨보 박사가 당신을 높이 평가합디다. 우리에게는 좋은 
분들이 필요합니다. 물론 잘 아시겠지만 우리는 박사를 편집진으로 
모시고자 하느 것이 아닙니다. 그럴 여유가 없어서요. 그러나 박사의 
노고에 대한 대가는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노고라기 보다는 헌신이라고 
하는 편이 낫겠군요. 나는 우리가 하는 일에 사명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는 일단 작업에 필요한 시간을 추정해 내고 나에게 시간급을 
제시했다. 당시로서는 합리적읜 금액이었다. 나는 받아들였다.
  수하로 들어가는 순간 <박사> 칭호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좋소, 까소봉. 이 금속사는 걸작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아름다운 작품이 
되어야 하오. 대중적인 동시에 학문적이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자면 
독자의 상상력을 사로잡지 않으면 안 돼요. 말하자면 하나의 본보기가 
되자는 거요. 여기 이 초고에는 구체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뭐더라... 
그래요, 마그데부르크 반구였지... 두 개의 반구를 마주 붙이고 그 안의 
공기를 다 빨아내고 진공 상태로 만들면, 몇 필의 말로 끌어도 반구는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지요? 이것은 과학적인 정보올시다. 이 과학적인 
정보를 아주 특별하게 포장하고 도판으로 보여 주는 겁니다. 모든 
정보로부터 이러한 화화적 요서를 뽑아 내고, 프레스코 화가 되었든 
유화가 되었든 거기에 알맞은 도판을 찾아내시오. 그러면 우리는 컬러로 
한 페이지씩을 배면하겠소."
  "마그데부르크의 반구라면 내가 아는 판화가 있습니다."
  "브라보, 전면... 그것도 컬러로."
  "석판화라서 흑백으로 앉혀야 합니다."
  "좋아, 그럼 흑백으로 하지 뭐. 정확성을 최우선 과제로. 배경은 
금박으로 때립시다. 그 실험 현장에 있는 기분을 맛보게 함으로써 
독바에게 충격을 주는 겁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과학적인 실증, 
사실주의, 우리의 정열, 여기에다 로망까지 곁들여 독자의 모가지를 비틀어 
버리는 겁니다. 퀴리 부인 이야기도 그냥은 안 돼요. 드라마를 곁들이는 
겁니다. 어느 날 밤 퀴리 부인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어둠 속에서 
반짝거리는 물체를 본다... 저게 뭘까? 탄화수소일까? 골콘다의 다이아몬드 
플로지스톤? 워든 상곤없어요. 이러저라한 일 끝에 마리 퀴리는 
엑스레이를 발명합니다. 극적인 효과를 내는 겁니다. 역사적 사실을 
절대적으로 존중해 가면서 말이지요."
  "엑스레이와 금속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라듐은 금속 아니랍니까?"         
  "그렇기는 하죠."
  "그럼 됐잖소? 지식 체계 전체가 금속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겁니다. 벨보, 우리가 이 책을 뭐라고 부르기로 했지요?" 
  "(금속) 같은, 쌈박한 제목을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그래요, 쌈박해야지. 하지만 내용을 짐작케 하는 말이 들어가야 하지 
않겠소. 말하자면미끼 같은 거... 어디 봅시다. (금속;세계사), 어때요? 
중국도 포함되겠지요?"
  "그렇습니다."
  "그럼 (세계사)가 틀림없구먼. 광고적인 트릭이 아니오. 역사적 사실 
중심이오. 가만잇자...(금속의 경이로운 모험)은 어떻소?"
  이때 그라찌아 양이 데 구베르나티스 씨의 도착을 알려 왔다. 가라몬드 
사장은 머뭇거리며 나를 바라보앗다. 벨보가 믿어도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듯한 몸짓을 햇다.  사장은 데 구베르나티스 씨를 안내하라고 
지시하고는 천천히 그를 맞으러 갔다. 더블 양복 차림의 데 구베르나티스 
씨는 옷깃 에는 장미를, 가슴 주머니에는 만년필을, 옆 주머니에는 신문을 
꽂은 채로 들어 왔다. 겨드랑이에는 가죽으로 만든 서류 가방을 끼고 
있었다. 
  가라몬드 사장이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선생님. 이렇게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내 친구 데 
암브로지스 군으로부터 선생님 말씀을 익히 들었습니다. 공복 으로 평생을 
보내시고 훈장까지 받으셨다는 것도 놀라운데 시적인 재능까지도 갖추고 
계시다고요. 보여 주십시오. 들고 계신 그 보물을 제게 보여 
주십시오...하지만 먼저 저의 편집 간부 중 두 분을 소개해 올리는 게 
순서이겠군요..."
  가라몬드 사장은 원고가 가득히 쌓인 책상 앞에 손님을 앉히고는 떨리는 
손끝으로 원고의 표지를 쓰다듬으면서 말을이었다. 
  "...아무 말씀도 마십시오. 한마디도 마십시오.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답니다. 선생님은 위대한 도시, 우아한 도시 비티페노 출신이시지요? 
비티페노 세관에서 근무하셨지요? 공복으로 일하시면서도, 시작에 대한 
정열에 쫓기면서 밤이면 밤마다 원고지를 메꾸어 나가셨겠지요? 시라고 
하는 것은 사포로부터는 젊음을 소진시키면서도 괴테에게는 노년의 
자양분을 주었으니 요물이지요. 그리스 인들은 시가 독인 동시에 약이라는 
뜻으로 (마약)이라고 불렀지요. 물론 우리는 선생님이 창조하신 이 작품을 
읽어 보아야 합니다. 나는 언제나 세 사람에게 읽히고 내용을 보고 받는 
형식을 고집합니다. 세 사람 중 한 사람은 회사 직원, 두 사람은 자문 위원 
들이지요. 죄송합니다, 자문 위원들의 존함은 밝히지 앉는 편이 좋겠군요, 
하여튼 유명 인사들입니다. 우리 마누찌오 출판사는 질, 그렇습니다, 
질입니다. 여기에 확신이 가지 않는 한 어떤 사람의 책도 출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책의 질이라고 하는 게, 나보다 더 잘 아시겠지만, 쉽게 
감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제6감을 통해서만 감지되는 것입니다. 
책에 불완전한 요소나 결함이 없을 수는 없지요. 스베보도 이따금씩 
졸작을 남겼으니까요. 그러나 제6감은 좋은 책의 사상과 리듬과 저력을 
감지합니다. 아, 알고 있습니다... 겸양하시는 말씀이시겠지요. 선생님의 
원고 첫 장을 얼핏 보는 순간 내게 오는 것이 있군요. 하지만 나 자신이 
직접 판단하고 싶지는 않군요. 물론 여러 차례읽은 사람들의 보고가 
미온적일 때는 내가 나서서 그 보고를 기각시켜버리는 일도 없지 않아요. 
한 저자의 리듬을 파악하지 않고는 지망지망히 평가할 수 없는 
것이니까요. 가령, 선생님의 원고를 무작위로 들추이보면, 바로 한 시구에 
눈이 갑니다. <가을인 듯, 여윈 눈까풀은...>, 좋군요, 이 시행이 어떻게 
이어지게 되는지 나는 알지 못하지만 벌써 어떤 영감 같은 것은 내게 
옵니다. 이 영감을 통해서 나는 이미지를 보게 되지요. 때로는 이렇게 넋을 
잃은 채, 황홀하게 한 작품을 끝까지 써나가는 수도 있겠지요.
  아, 하지만... 우리가 늘 우리 좋은 짓만 하고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출판 역시 장사, 장사 중에서 가장 고상한 장사올습니다만, 
장사는 어디까지나 장삽니다. 요즘 인쇄비가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종이 값은요? 오늘 아침 뉴스 보셨겠지요? 월 스트리트의 표준 금리 
말입니다. 그게 우리에게 영향이 없을 거라고는 안 하시겠지요? 분명히 
영향이 있습니다. 우리의 재고품에도 세금이 떨어집니다. 나는 따라서 
실패의 값까지지 치르고 있는 셈이지요. 말하자면 실리주의자들이 
알아주지 않는 천재의 골고다 언덕인 것이지요. 얇은 반투명지를 
쓰셨군요... 원고를 이런 얇은 종이에 타자히시다니, 실례지만 굉장히 
세련된 분이십니다. 원고에서 벌써 시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군요. 
엉터리들은 읽는 사람의 눈을 부시게 만들고 정신을 헛갈리게 하기 위해 
양피지를 씁니다. 가슴으로 쓴 시편임에 분명합니다. 이 양파 껍질 같은 
반투명지에다 쓰는 것은 곧 지폐에다 쓰는 것과 같았을 테니까요...
  전화가 울렸다. 가라몬드 사장이 얘기 도중에 책상 밑에 있는 벨을 살짝 
눌렀고, 그라찌아 양이 이 신호를 받고는 오지도 않은 가짜 전화를 
사장에게 연결한다는 것을 안 것은 뒷날이다.
  "아이고, 선생님... 뭐라고요? 대단하십니다... 사건입니다, 사건... 이럴 때 
종이 따르릉따르릉 사납게 울렸다는 건 길조임에 분명합니다... 선생님의 
붓끝에서 새 작품이 나왔다는 것부터가 벌써 사건이지요... 아, 물론입니다. 
우리 마누찌오 출판사의 필진에 선생님이 가세하셨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는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자랑스럽다 못해서 몸이 저리기까지 
한걸요. 선생님의 근작 서사시에 대한 신문서평을 보셨겠지요? 노벨상 
감이라고들 하더군요. 하지만 선생님은 불행히도 시대를 앞서 가십니다. 
우리는 3천 부 파는 데도 애를 먹었으니까요..."
  데 구베르나티스 씨가 낯색을 잃었다. 3천 부는, 그로서는 언감생심일 
터였기 때문이다.
  가라몬드 사장은 전화통에다 대고 말을 이었다.
  "... 판매가가 제작 원가를 충당하지 못한 것이지요. 유리문을 통해서 
보시면 우리 편집부에 얼마나 많은 직원들이 있는지 아시게 될 겁니다. 
요즘은 제작비를 채우고 나가자면 적어도 1만 부는 팔아야 합니다. 
닿행히도 1만 부를 상화하는 팩도 있기는 합니다만 그런 작가들은, 
뭐랄까요, 천분이 있는 분들이지요. 발자크도 위대한 작가이고 프루스크도 
위대한 작가이지만, 발자크의 소설은 호떡처럼 팔려 나갔지만 프루스트는 
자비 출판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답니다. 선생님의 시집도 학교가 
권장하는 명시선에는 들어가겠지만 지하철 역의 가판대에는 오르지 
못합니다. 조이스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났었지요. 조이스도 프루스트처럼 
자비 출판을 한 겁니다. 내가 선생님같이 위대한 시인의 시집을 펴내는 
특권, 그거 자주 행사할 수가 없습니다. 2,3년만에 한 번씩이면 또 
모르지만요... 제게 3년만 시간을 주셨으면 합니다만..."
  긴 침묵이 이어졌다. 가라몬드 사장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그 얼굴은 곧 밝아졌다.
  "... 뭐라고요? 선생님의 자비로 말인가요? 아닙니다, 아니에요. 그만한 
금액은 아닙니다. 우리도 제작 원가를 낮출 수도 있어요... 하지만 우리 
마누찌오 출판사 원칙은... 옳고말고요. 조이스와 프루스트도... 물론 
이해합니다..."
  다시 괴로운 침묵...
  "... 좋습니다. 이야기로 문제를 풀어 나갑시다. 나는 정직하게 말씀드린 
것인데, 선생님이 그렇게 급하시다니... 미국인들의 소위 <조인트 
벤처>라는 걸 한번 해봅시다. 양키들은 항상 우리보다 한발 앞선다니까요. 
내일 들르시지요. 함께 계산을 좀 뽑아 보기로 합시다. 정말 존경스럽고 
놀라운 분이십니다..."
  가라몬드 사장은 꿈에서 깨어나는 사람 같은 얼굴을 하고는 전화 
수화기를 놓았다. 그는 눈을 비빌 때야 비로소 방문객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듯한 얼굴을 했다.
  "아, 용서하십시오. 시인이었습니다. 진정한 시인, 위대한 시인의 반열에 
드는 시인일 겁니다. 하지만 바로 이 때문에... 독자의 외면을 당한답니다. 
이럴 때는 정말 이 직업이 싫어진다니까요. 소명 의식이 없이는 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어디까지 얘기했던가요? 그래요, 할 얘기는 끝난 
것 같군요. 연락을 드리겠습니 . 작품을 맡겨 주시면 한 달 뒤에 연락 
드리겠습니다. 작품은 잘 간수할 것이구요..."
  데 구베르나티스 씨는 말없이 나갔다. 그는 이미 명예를 버리는 
대장간에 한발 들여놓은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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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누찌오는 APS(Autore a Proprie Spese(자비 출판 저자))를 위한 
출판사였다.
  마누찌오 출판사의 은어로 <APs>가 무슨 뜻이었는가 하면...아니, 
<었는가>라니... 어째서 나는 과거 시제를 쓰고 있는가. APS는 아직도 
엄여하게 존재하는데? 만사는 여일하게 진행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파리의 공예원 박물관에서 밀라노로 돌아온 뒤로, 나는 그런 일들을 
아득히 먼 과거 일로 치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틀 전 생 마르땡 데샹에 
있는 수도원 교회의 회중석에서 나는 시공을 분열시키고 세기를 
역전시켰던 것일까? 아니다. 어쩌면 내가 그날 밤에 나이를 열 살쯤 더 
먹어 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르겠고, 정맥을 자른 채 욕조에 누워 몸이 피 
속에 잠기고 죽음이 찾아 오기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몰락하는 한 제국의 
연대기를 기술하는 듯이 이것으 쓰고 있는 것은 어쩌면 <그들>이 나를 
찾아내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때문인지도 모른다.
  <APS>는 자기 돈으로 자기 책을 출판하는 저자를 뜻한다. 그리고 
마누찌오는 APS만 전문으로 상대하는 출판사다. APS만 상대하면 
총경비는 적게 들고 소득은 대단히 높다. 직원이라고는 가라몬드 사장, 
그라찌아 양, 뒤켠의 아담한 사무실에서 일하는 경리 사원, 그리고 거대한 
반지하 창고에서 발송을 담당하고 있는 장애자 루치아노, 이렇게 네 
사람이 전부다.
  벨보는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루치아노가 한 팔로 그 많은 책을 어떻게 포장하고 발송하는지 
궁금했네. 이빨을 쓸 거라는 생각도 해보았지. 하지만 알고 보니 
루치아노가 포장하고 발송해야 하는 책은 얼마 되지 않아. 여느 
출판업자들은 서점으로 책을 발송하지만 루치아노는 저자들에게만 
발송하면 되거든. 마누찌오는 독자에게 관심이 없어... 가라몬드 사장은 
늘상, 중요한 것은 저자들과의 의리를 지키는 것이라고 주장하지. 요컨대 
독자 없이도 잘 꾸려 나갈 수 있다는 거지."
  벨보는 가라몬드 사장에게 감탄하고 있었다. 그는, 가라몬드 사장에게는, 
자기에게는 결여된 어떤 힘이 이는 것으로 믿었다.
  마누찌오의 영업 시스템은 간단하다. 지방 신문, 전문 문예지, 지방의 
문예 비평지, 그 중에서도 몇 호 발행하다 죽어 버리기 십상인 문예 
비평지에 몇 차례 광고를 낸다. 저자의 사진과 함께, <우리 시단의, 지극히 
고상한 목소리>라든지 <'플로리아나 자매'의 저자가 최근에 이룩한 눈부신 
소설의 업적>같은, 몇 줄의 날카로운 평문을 넣은 중간 크기의 
광고들이다. 
  "그물에 걸리는 것이지. 자비 출판 저자들은 그물째 가라몬드의 숲으로 
들어오네. 숲이 그물로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벨보의 설명이었다. 
  :그리고는요?"
  "데 구베르나티스 씨의 예를 한번 들어 볼까? 지금부터 한 달 뒤, 이 
은퇴한 세관원은 안절부절 못하고 세월을 보내던 중에 가라몬드 씨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게 될걸세. 이로써 데 구베르나티스 씨는 작가들과의 
만찬에 초대되는 것이네. 이 만찬은 최고급 아랍 식당에서 베풀어지네. 
간판도 없고, 고객이 벨을 누르면 창구멍에 얼굴이 하나 나타나고, 그 
얼굴의 임자에게 이름을 대어야 들어갈 수 있는, 말하자면 특별한 
계급이나 출입할 수 있는  그런 식당일세. 호화로은 내장, 부드러운 조명, 
이국적인 음악... 가라몬드 씨는 주인과 악수를 하고, 웨이터들에게 반말을 
해가면서 분위기를 잡다가 한 번쯤은 웨이터ㄷ가 날라 온 포도주를, 제조 
연도가 마음에 맞지 않는다면서 돌려보내겠지. 아니면 이런 식으로 음식 
투정을 하거나... <미안하네만 이건 우리가 마라케쉬에서 먹던 꾸스꾸스와 
다른데 그래...> 데 구베르나티스씨는 공항장 X씨에게 소개될걸세. 
가라몬드 사장은 데 구베르나티스 씨에게, X씨는 공항 업무를 관장하는 
실력자이지만  이 실제로 명성이 드높은 까닭은 이 양반이 유네스코에서 
고려 중인 세계 평화를 위한 공통어 <코스모란토>의 창시자이자 그 
사도이기 때문이라고 소개할 걸세. Y 교수도 그 자리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이지. 데 구베르나티스 씨, 이분은 위애한 소설가이시자 1980년도 
<페뜨루쩨리스 델라 가티나> 상 수상자이시면서 선도적인 
의학자이시지요. 교수님, 몇 년이나 가르치셨지요... 재가 교수로 임용되던 
시절이 좋았지요. 그 시절 사람들은 교육을 진지하게 생각했거든요... 
마지막으로 우리의 매력적인 여류 시인이자 멋쟁이인 '순결의 전율'의 저자 
오돌린다 메쪼판띠 사사베티 씨가 소개되겠지. 데 구베르나티스 씨도 
'순결의 전율'을 읽으셨겠지요... 이런 식으로..."
  벨보는 나에게, 어째서 자비 출판하는 여류는 모두가 <라우레따 
솔리메니 깔깐띠>라든지 <도라 아르덴찌 피야마>라든지 <카롤리나 
파스토렐리 쩨팔루> 같이 두 개의 성을 쓰는지 궁금했다고 말하면 이렇게 
덧붙였다.
  "... <아이비 컴튼 - 머네트> 같은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중요한 작가는 
대부분 성과 이름만 Tm는데 자비 출판하는 여류들은 왜 구태여 
<오돌린다 메쪼판띠 사사베티> 식으로 불려야 직성이 풀리는 것일까? 
<꼴레뜨>는 아예 성조차도 안 쓰는 여류 아닌가? 나는, 진짜 작가는 
오로지 작품에 대한 사랑이 이끌려 작품을 쓰고, 따라서 자기 이름이 
알려지는 것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데 비해 자비 출판 여류들은 지금의 
이웃이나 옛날의 이웃으로부터 두루 인정받고 싶어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해. 진짜 작가들 보라고. <네르발> 같이 아P 가명을 
써버리는 작가도 있지 않아? 남자는 성 하나로 충분한 반면에 여자는 
결혼하면 성을 바꾸어야 하니까 여러 개가 줄줄 따라 붙는 것일거라. 
결혼하기 전에 알던 사람에게도 시집 출판을 알려야 하고, 초혼 때 알던 
사람, 재혼하고 나서 알게 된 사람에게도 알려야 할 터이거든...
  어쨋거나 그날 저녁은 지적인 경험이 흐드러지는 만찬이 되겠지. 데 
그베르나티스 씨는 LSD 칵테일을 쭈욱 들이킨 기분이 될러라... 데 
구베르나티프 씨는 소님들이 주고받는 문단 동정에 귀를 기울이데 되겠지. 
이른바 위대한 시인이라는 모모 씨 말입니다, 지독한 성불구자인데다 
실제로 작품도 별 것 아니라던데요... 이런 일화도 들게 될 것이고, 이윽고 
데 구베르나티스 씨는 반짝거리는 눈길로 최신판 '이탈리아 저명 인사 
백과'를 보고는 감동을 주체할 수 없게 될 걸세. 가라몬드 사장이, X 
씨에게 해당 페이지를 보여 줄 요량으로 그 자리로 가지고 나갔을 
것이거든. 공항장님도 이 빵떼옹에 들어가 계시는군요, 하기야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지만요... 운운..."
  벨보는 나에게도 그 '... 백과'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내가 당신에게 설료를 하고 있었네만, 이 
세상에 죄 없는 사람은 없는 법일세. 이 백과 사전을 만든 장본인은 나와 
디오탈레비일세. 그러나 맹세하거니와, 우리가 돈 때문에 이런 사전을 만든 
것은 아니야. 백과사전의 편찬은 여기에서 우리가 하는 일 중에서도 가장 
재미나는 일 중의 하나라네. 우리는 해마다 최신판을 만드네. 요령을 좀 
부리지. 자비 출판 작가는 되도록 유명한 작가 가까이 있게 만들되, 유명 
작가에게는 지면을 아주 조금만 할애하고 자비 출판 작가에게는 푸짐하게 
베풀어 주네. 가령 <L> 항목을 보기로 할까..."
  람페두사, 주세뻬 토마시 디(1896~1957) : 시칠리아에서 출생한 작가. 
생전에는 주목받지 못하다가 소설 '표범'으로 사후에 명성을 얻었다.
  
  람푸스트리, 아데오다토(1919~ ) : 작가, 교육가, 퇴역군인 
(도앙프리카에서 동성 훈장), 사상가, 소설가, 시인, 현대 이탈리아 문단의 
귀재. 람푸스트리의 재능은 1959년, 문학의 새로운 장을 여는 3부작 제 
1부인 '카르마시 형제'를 통해 유감없이 드러난다. 한 루마니아 어부의 
가정을 가차없는 리얼리즘과 고귀한 시적 영감으로 그려 낸 이 처녀작으로 
람푸스트리는 1960년도 <페뜨루쩨리스 델라 가티나> 상을 수상했다. 그는 
이어서 '해고'와 '속눈썹 없는 표범'을 발표했는데, 이 두 작품 역시 
처녀작을 운가핼 만큼, 서사적 격류와 눈부신 조형적 창작력, 다른 
예술가와는 확연하게 구분되는 서정적 흐름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근면한 
국방부 관리인 람푸스트리를 두고 지인들은,강직한 공무원, 모범적인 
아버지이며 지아비, 놀랄 만한 대중 연설가로 평가하고 있다.
  
  "이러니, 데 구베르나티스 씨가 이 백과 사전에 들어가고 싶지 않겠나? 
데 구베르나티스 씨가, 유명 인사들의 명성이란 실로 추켜세우는 
평론가들의 공모로 이루어지는, 사기와 다를 바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니는 사람이면 무슨 소용이 있나? 하지만 고급 공무원, 은행 지점장, 
귀족, 지방 장관들이 우글거리는 백과 사전에 들어가고 싶을걸. 당장 교제 
범위가 넓어질 것이거든. 만일에 데 구베르나티스 씨가 거기에 들어가고 
싶다면? 그는 어디에다 청을 넣으면 되는지 잘 알고 있네. 가라몬드 
사장이지. 가라몬드 사장이라면 지방에서 얼쩡거리던 데 구베르나티스 
씨를 하루 아침에 정상으로 던져 넣어 줄 힘을 가진 실력자거든... 이걸 잘 
아는 가라몬드 사장은 만찬이 끝날 무렵, 내일 사무실에나 한번 들르시죠... 
하고 은근슬쩍 귀띔할 테지."
  "다음날 오면요?"
  "온다는 것은 기정 사실이고... 아데오다토 람푸스트리류의 출세를 
꿈꾸느라고 밤새 뒤척거렸을 테니까."
  "그 다음에는요?"
  "가라몬드 사장은 이러겠지... 좌중에서 이런 소리를 하면 다른 사람들을 
욕보이는 짓이 될 것 같아서 어제는 감히 말씀을 못 드렸습니다만, 당신의 
작품은 탁월합니다. 읽은 사람들이 열광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 역시 그 
작품의 출판 문제를 생각하느라고 뜬 눈으로 밤을 밝혔답니다. 대단합니다. 
대단해요... 이러고 나서 가라몬드 사장은 자기 책상으로 돌아가 그 원고를 
툭툭 두드리고,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이 자비 출판 후보자를 응시하면서, 
이 일을 어쩌지요, 이 일을 어쩌면 좋지요, 할 테지. 그때쯤 원고는 이미 
애정 어린 독자들의 손때가 묻고 귀퉁이가 날강날강해져 있을걸세. 원고를 
구겨 놓는 게 그라찌아 양이 하는 일 중의 하나거든... 어쨋든, 가라몬드 
사장 난처해 하면 데 그베르나티스 씨는 왜 그러시느냐고 묻겠지. 
가라몬드 사장은 이럴 것이네... 작품의 가치에는 일말의 의심의 여지도 
없습니다. 그러나 선생의 작품은 시대를 앞서 가고 있어서 2천 부 팔기가 
힘에 겨울 것이고, 최고로 잡아야 2천 5백부가 되겠어요... 데 구베르나티스 
씨는 뜨끔해지겠지. 자기가 아는 사람을 다 합쳐도 2천명은 안 될 
것이거든. 자비 출판 작가는 세상을 넓게 보지 않네. 기껏해야 동창, 은행 
지점장, 은사, 은퇴한 공무원 또래 등, 낯익은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지. 
하지만 자비 출판 작가는 그 사람들에게, 심지어는 단골 푸줏간 주인이나 
경찰서장에게까지, 말하자면 시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자기 
시집을 보여 주고 싶어하거든. 가라몬드 사장이 퇴짜 놓는 경우도 고려해 
보겠지. 생각해 보게, 데 구베르나티스 씨가 원고를 밀라노의 모모한 
출판사로 가지고 간 것을 식구들과 이웃은 물론이고 온 도시가 다 아는 
판인데... 이렇게 되면 데 구베르나티스 씨는 재빨리 계산을 해볼걸세. 
예금을 인출하고, 연금을 담보로 대부를 얻고, 집을 저당 잡히고, 얼마 안 
되는 정부 공채를 현금으로 바꾼다... 이렇게 계산을 뽑아 보고는 가라몬드 
사장에게 제작 비용의 일부는 자기가 부담하겠다고 제안할 테지... 
가라몬드 사장 왈... 좋습니다만 이것은 선생과 나만 아는 밀약입니다. 
선생은 기어이 나를 설득하고야 마는군요, 현실이 이러하니 프루스트와 
조이스까지도 어쩔 수 없었던 만큼 현실이 이러하니 프루스트와 
조이스까지도 어쩔 수 없었던 만큼 현실을 좇아야지요. 제작 비용은 물론 
엄청납니다. 계약서는 1만 부를 기준으로 작성될 것입니다만, 현재 우리가 
계획하고 있는 것은 2천 부입니다. 2천 부 중에서, 선생이 지인들에게 
보내게 될 2백 부의 저자 증정본과 2백 부의 신간 서평용을 빼면 1천 6백 
부가 남게 됩니다. 서점으로는 이 1천 6백 부가 배포될 것입니다. 신간 
서평용으로 우리는 선생의 책을 스티븐 킹의 책처럼 판촉해 볼 겁니다. 
그리고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서 못박아 둡니다만 초판 2천 부의 인세를 
지불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이 책이 인기를 얻어 재판에 돌입하게 되면 
그때부터 선생은 12퍼센트의 인세를 받게 딥니다..."
  뒷날 나는 마약에 취한 듯이 시를 쓰고 있었을 터인데 구베르나티스 
씨와 마누찌오 사이의 계약서를 읽어 보고는 적지 않게 놀랐다. 제작 
비용이 터무니없이 낮게 책정되었다고 꿍얼거리는 경리 사원 앞에서 
서명했을 테니까 데 구베르나티스씨가 계약서를 제대로 읽어 보았을 리 
없을 터이다. 8포인트 활자로 찍힌 무려 10페이지에 이르는 계약서에는 
해외 판권, 그화, 라디오와 텔레비전, 영화를 위한 극화, 맹인영 점자책, 
'리더스 다이제스트' 같은 잡지의 게재 같은 부수적인 권리 조항, 편집상의 
문제와 관련될 경우의 저자의 권한, 분쟁이 발생할 경우 밀라노 법원에서 
조정되어야 할 세부 사항... 이런 것들이 빽빽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그러나 
명예의 꿈에 도취된 이 자비 출판 저자는 중요한 계약상의 하자를 눈여겨 
보았을 리 없다. 계약서에는 발행 부수의 상한은 1만 부로 명시되어 
있었지만 최저 발행 부수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재판 
이후로 있게 될 인쇄 부수에 따른 인세 지불 조항도 없었다. 그것은 구두 
약속에 지나지 못했다. 그러나 데 구베르나티스 씨가 눈여겨보지 않은 
조항 중에서 가장 중요한 조항은, 출판사는 1년이 경과하기까지 판매되지 
않는 책은 저자가 표시가의 반액으로 매입하지 않는 한 펄프로 재생시킬 
권한을 갖는다. 점선 부분에 서명하시오... 바로 이것이었다. 
  시작은 근사할 터이다. 저자 연보와 비평문이 실린 10페이지짜리 보도 
자료가 풀릴 것이다. 그러나 언감생심... 신문의 편집자는 쓰레기통에 
처박을 것이다. 거기에다 실제로 인쇄되는 것은, 계약서에 인쇄 하한 
부수가 명시되어 있지 않은 만큼 겨우 1천 부에 지나지 못한다. 이 중에서 
제본이 되는 것은 겨우 3백 50부... 3백 50부 중에서 2백 부는 저자 
증정본으로 나가고, 50부는 신간 소개에 몇 줄 나갈 경우를 대비해서 
신문사로 갈 것이지만 필경은 나중에 신문사에서는 이런 책을 모아 
병원이나 형무소에 기증하게 될 것이다. 이쯤 되면 병원에서는 환자들이 
잘 낫지 않고 형무소에서는 죄수들이 회개를 못 하는지 알 만해진다.
  여름이 되면 데 구베르나티스 씨에게 <페뜨루쩨리스 델라가티나>상이 
수상될 것이지만, 이 문학상은 가라몬드 사장이 만든 것이니 만큼 좋아할 
것도 없다. 이 문학상을 시상하기 위해 가라몬드 사장이 지출하는 것은 
심사 위원들을 위한 이틀 분의 숙식비, 수상자에게 수여될 심홍색 
사모트라케의 승리의 여신상, 마누찌오 출판사의 필진들 것으로 위장될 
축전 비용 정도에 지나지 못한다.
  그러나 1년 반이 지나면 진실의 순간이 온다. 가라몬드 사장은 데 
구베르나티스 씨에게 편지를 쓴다. 
  친애하는 데 구베르나티스 선생, 내가 우려하던 순간이 오고야 
말았습니다. 역시 선생은 독자들보다 50년 앞서 있었던 것입니다. 격찬의 
서평, 비평의 갈채, 빛나는 수상... <싸바 아상 디르>(더 말할 나위도 
없지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부 팔리지 않았습니다. 
대중에게는 선생을 읽을 준비가 외어 있지 않았던 것이지요.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창고에 공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사본을 동봉합니다만 계약서에 
명시되어 있는 대로, 선생이 재고를 표시가의 반액으로 매입하는 권리를 
행사하지 않는 한 우리는 그것을 펄프로 재생시킬 권한을 행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데 구베르나티스 씨는 슬픔으로 가슴이 미어질 것이다. 그러나 지인들은 
위로할 것이다. 대중이 당신을 이해하지 못할 뿐이다. 만일에 당신이 
모모한 문학 파벌에 속해 있었거나, 어디에다 적당하게 뇌물이라도 
바쳤더라면 지금쯤 '꼬리에레 델라 세라'같은 신문 서평이 나왔을 겁니다. 
이것들 순마피아들이라고요. 이겨내어야 합니다. 당신에게는 저자 증정본이 
다섯 권밖에 안 남았잖아요? 제대로 보내야 할 데 당신의 시집을 다시 
보냅시다. 당신의 시집이 펄프로, 화장지로 재생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함께 얼마나 긁어 모을 수 있을지, 어디 한번 힘을 모아 보면 
5백부는 사들일 수 있을 겁니다... 나머지는... <시크 트란시트 클로리아 
문디>(세상 영광이 무상하다.)라는 걸 이로써 깨달은 셈치고 
잊어버립시다...
  마누찌오 출판사에는 인쇄만 외었을 분 제본되지 않은 책이 6백 50부쯤 
있다. 가라몬드 사장은 그 중에서 5백 부를 제본하여 <대금 상환>으로 
발송한다. 마지막 대차 대조표... 저자는 2천 부의 제작비를 대었다. 
마누찌오는 1천 부를 인쇄하고 이 가운데 8백 50부만 제본했다. 그리고 이 
중의 5백부에 대해서는 데 구베르나티스로부터 이중으로 돈을 받은 셈이 
된다. 1년에 이런 자비 출판 저자가 약50명... 마누찌오 출판사는 톡톡하게 
흑자를 기록할 수밖에...
  가라몬드 사장은 양심의 가책 같은 것은 느끼지도 않는다. 
  하기야 행복을 파는셈이니 그럴 일도 아니긴 하다...
  
    40
  
벨보는, 저명한 가라몬드 저자들의 작품을 제작하고 이런 진짜 
저자들로부터 자기가 자랑스러워할 만한 원고를 얻어내는 데 헌신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해적과 같은 열성으로 재수 없는 마누찌오 저자들을 
속여넘기는 일까지 하고 있는 셈이었다. 내가 보아소 잘 알고 있듯이, 
벨보는 마누찌오에 대해서 심지어는 아르덴티 대령의 경우처럼 가라몬드에 
적합하지 않은 필자는 마누찌오로 돌리는 일까지 하고 있었다. 나는 
벨보가 보이는 이 양면성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벨보와 함께 일하면서 나는, 그가 그런 식의 편법을 용인하는 까닭이 
궁금했다. 돈 때문인 것은 분명히 아니었다. 유능한 편집자였던 만큼, 
원한다면 보수가 나은 자리를 찾는것도 그에게는 어렵지 않았다.
  한동안 나는, 벨보가 그건 편법을 용인하면서도 자리를 지키는 것은 그 
자리가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한 그의 공부를 계속할 수 있게 하는 
이상적인 관찰 지점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끊임없이 언표해 
왔거니와, 그는 이른바 인간의 어리석음(나무랄 데 없는 논쟁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난공불락의 가짜 추론과 잠행성 섬망 상태)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결국은 그 자체도 또 하나의 가면이었다. 디오탈레비 역시, 
어느 날엔가 마누찌오에서 나온 책이 어쩌면 '토라' 해석에서 일찍이 그 
유례가 없는 열쇠가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에서, 혹은 재미로 그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나도 다를 것이 없었다. 나 역시 호기심에서, 재미로, 
혹은 반어적인 어떤 분위기 때문에, 특히 가라몬드가 헤르메스 계획을 
발진시킨 뒤로 열성적으로 그 일에 가담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벨보의 경우 내 해석은 옳지 않았다. 나는 그의 다음과 같은 
파일을 열어 본 뒤에야 그걸 깨달았다.
  
    # 파일 명 : 복수
  
  여자는 이런 식이다. 사무실에 사람이 있건 없건 내 옷깃을 잡고, 얼굴을 
내밀어 내게 입을 맞춘다. 그 노래 가사 어떻게 되죠? <안나는 발끝으로 
서서 쪽쪽쪽...> 여자는 회전 당구하듯이 내게 키스한다. 
  그렇게 하면 내 입장이 난처해진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도 보란 듯이 
그런다.
  거짓말은 않는다.
  사랑해요.
  일요일에 만날까?
  안 돼요. 주말 선약이 있거든요.
  친구? 여자겠지?
  아뇨. 남자 친구. 당신도 알 거예요. 지난 주 필라데에서 함께 마시던 
사람... 약속까지 했어요. 당신 설마 날 약속 어기는 여자로 만들고 싶은 건 
아닐 테죠?
  그럼 약속도 어기지 말고, 사무실로도 찾아오지 마. 필자가 오기로 
했으니까...
  출판을 개시하는 천잰가요?
  아니야, 곧 끝날 얼간이야.
  
  .............................................................
  
  곧 끝날 얼간이
  
  .............................................................
  
  필라데로 당신을 데리러 갔다. 당신은 거기에 없었다. 오래 기다리다가 
혼자 나왔다. 문 닫기 전에 화랑에 들러봐야 할 것 같아서. 화랑에 있던 
사람들은 당신이 손님들에 휩쓸려 그 레스토랑으로 갔다고 했다. 그림을 
보는 척한다. 보고 있으려니까 그 그림이 내게 속삭인다. 뭘 보세요, 
예술은 휠덜린 이후로 죽고 말았어요. 레스토랑을 찾는데 20분이나 걸렸다. 
화상이라는 것들은 꼭 다음 달에야 유명해지게 될 레스토랑만 골라서...
  당신은 거기, 낯선 얼굴 사이에 있었다. 당신 옆에는 예의 그 흉터쟁이. 
당신은 별로 당혹해 하는 것 같지 않았다. 당신은 복잡하면서도 도전적인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당신이 이 두 가지를 어떻게 동시에 
드러내는지 궁금하다. 그래서 어쨌다는 거예요? 당신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흉터쟁이 틈입자는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리고 보니 
틈입자는 흉터쟁이가 아니라 내가 된 것 같다. 일행이 모두 우리 두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기다렸다. 나는 싸울 구실을 만들어야 했다. 그러나, 
그자가 선방으로 때렸더라도 나는 레스토랑을 잘 빠져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신이 내 약을 올리기 위해 흉터쟁이와 거기에 있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까 내 역할은 기정 사실이었다. 좌우지간 나는 
구경거리가 되어 있었던 셈이다.
  구경거리가 있기는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나는 이 극중 극에서 희극을 
골라다. 붙임성 있게 대화에 가담했다. 그러면 누군가가, 참을성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해줄 것 같아서.
  그러나 내게 감탄하는 것은 나뿐이었다.
  가면을 쓴 복수자. 클라크 켄트(신문 기자로 일하면서 슈퍼맨이 쓰는 
이름)처럼 나는 빛 못 보는 젊은 챈재들을 돌본다. 슈퍼맨이 정의의 
이름을 빌어 빛 못 보는 늙은 천재들을 쳐부수듯이... 나는 용기 있게, 나 
같은 용기가 없어서 구경꾼 노릇에 머물지 못하는 자들을 이용해 먹는 
일에 협력하고 있다.
  이런 일이 가능한가? 벌받은 줄도 모르는 자들을 벌하는 데 일생을 
보내는 일이? 그러니까 너는 호메로스가 될 생각인 모양이구나. 비열한 
인간. 여기에도 달려들고 저기에도 달려들고 해봐.
  나는, 제 정열의 환상을 내게 팔아 넘기려 하는 놈들이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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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쨌든 내 임무는 마누찌오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었다. 내 임무는 
어디까지나 <금속의 경이로운 모험>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나는 밀라노의 
도서관을 뒤지는 것으로 일을 시작했다. 우선 원고를 가지고 카드 파일로 
문헌 목록을 만든 다음 이것을 들고 원전을 뒤져 옛 것이 되었든 새것이 
되었든 거기에 알맞은 도판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우주 여행을 다루는 한 
장에다 최근의 미국 인공 위성의 사진을 실어야 하는 것보다 더 맥빠지는 
노릇은 없었다. 가라몬드 씨의 가르침에 따르면 아무리 우주 여행 
항목이라고 하더라도 도레의 동판화에 나오는 천사 그림 정도는 들어가야 
했다.
  호기심이 동하는 복제화를 한 무더기 들고 갔지만 가라몬드 씨의 성에는 
차지 못했다. 그는 도판 금속사 한 페이지를 위해 적어도 열 점 이상의 
그림에 퇴짜를 놓았다. 
  나흘 동안의 파리 여행 결제가 났다. 나흘이면, 고문서관을 모조리 뒤질 
만한 시간이 못 되었다. 리아가 동행했다. 우리는 목요일에 파리에 
도착했다. 월요일 야간 열차표를 예약하고, 월요일 낮에 국립 공예원 
박물관에 가기로 예정을 잡았는데, 이건 내 실수였다. 나는 그 박물관이 
월요일에 문을 닫는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었다. 우리는 낙심한 채 공예원 
박물관은 구경도 못하고 밀라노로 돌아가야 했다. 
  벨보는 우리가 공예원 박물관을 놓친 것을 몹시 아까워했다. 그러나 
다른 데서 모은 자료가 꽤 되었기 때문에 함께 가라몬드 씨에게 보이러 
갔다. 가라몬드 씨는 대부분이 컬러로 되어 있는 복제화를 들여다본 뒤, 내 
청구서를 보고는 휘파람 소리를 내었다.
  "이런 친구... 우리는 사명감으로 이 일을 하는 것이오. 우리가 문화 
분야의 역군이라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인 분명한 사실이오. 그러나 
우리는 적십자도 아니고, 유니세프는 더욱 아니오. 이 많은 자료를 굳이 
구입할 필요가 있었을까? 아브라카다브라 주문과 산양좌에 둘러싸여 있는, 
염소 수염에다 잠옷 바람의 이 달따냥 같은 친구는 대체 누구요? 
누구지요? 극화에 등장하는 만드레이크인가요?"
  "원시 의학의 전문가인 주술사 같은 겁니다. 12궁 별자리가 인체의 특정 
부위에 미치는 영향과, 그리고 그 특정 부위에 해당하는 약초 및 광물의 
관계를 그려 놓은 그림인 것이죠. 물론 이 광물에는 금속이 포함됩니다. 
인체를 소우주로 보는 이론이지요. 주술과 의삭의 구분이 분명하지 않던 
시절 일을 도판으로 나타낸 겁니다."
  "재미있기는 하지만, 이 도판에 쓰인 <필로소피아 모이사이카>라 
표제는 또 뭐요? 모세와 이것과 무슨 상관이 있소? 시대에 너무 
뒤떨어지는 것 아닐Rdy?"
  "<운구엔툼 아르마리움>, 즉 무기 연고라는 겁니다. 저명한 의사들이 
50년 동안이나 논쟁을 벌였던 주젭니다. 연고를 무기에다 발라 놓으면, 그 
무기로부터 입은 상처가 자동으로 치료된다 만다 하는 걸 두고 벌어졌던 
논쟁이지요."
  "믿어지지 않는군. 그것도 과학이오?"
  "오늘날 통용되는 의미에서는 과학이 아니지요.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이런 문제에 진지했습니다. 자석의 놀라운 힘을 발견한 직후의 일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원격 마술의 가능성을 진지하게 검토했을 테지요. 물론 
이들이야 실패했지만 볼타와 마르코니는 결국 성취하지 않았습니까? 원격 
작동의 가능성을 고려에 넣지 않았다면 전자니 라디오니 하는 건 결국 
언감생심이 아니었겠습니까?"
  "옳거니, 까소봉... 과학과 마술이 어깨동무를 하고 간다... 그래, 굉장한 
아이디어야. 이걸 밀고 나갑시다. 꼴보기 싫은 발전기 도판을 몇 개 
들어내어 버리고 만드레이크를 좀더 집어 넣읍시다. 가령 금박 배경을 
등지고 선, 악마를 연상시키는 것으로..."
  "지나치게는 밀고 나가고 싶지 않습니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금속의 
경이로운 모험>입니다. 엽기적인 것은 시의 적절할 때만 효과가 있을 
듯합니다."
  "<금속의 경이로운 모험>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과학적 오류의 
역사가 되어야 한다는 거요. 독자들 눈에 명백히 오류로 보이는 도판을 
넣고는 설명문에 틀린 것을 지적하는 거요. 독자들은 보는 순간에 
걸려들어요. 독자는, 아, 위대한 과학자들도 우리처럼 엉뚱한 생각을 더러 
했구나... 하고요."
  나는 파리의 생 미살 부두 근처의 한 서점에서 보았던, 내 딴에는 꽤 
이상하게 보이던 광경을 가라몬드 씨와 벨보와 디오찰레비에게 
들려주었다. 서점 입구에 놓인 좌우 대칭인 쇼윈도에는, 한쪽에는 컴퓨터와 
미래의 진자 공학에 대한 전문서, 다른 한쪽에는 은비학에 관한 책이 
진열되어 있어서 서점이 스스로 정신 분열을 광고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서점 내부도 마찬가지였다. 말하자면 애플 컴퓨터에 관한 서적과 카발리즘 
교리서가 나란히 공존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럴 리가..."
  벨보의 반응이었다.
  디오탈레비의 반응은 조금 달랐다.
  "일리가 있군 그래. 야코포 자네야말로 놀라도 마지막으로 놀라야 할 
사람이야. 기게의 세계가 창조의 비밀에 도전했다는 뜻이네. 문자와 숫자로 
이루어진 세계에 도전했다는 뜻이네."
  가라몬드 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기도하듯이 두 손을 깍지낀 
채 허공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던 그가 돌연 손뼉을 타악 소리가 나게 
쳤다.
  "옳거니! 그 말 듣고 보니 이제 알겠소. 내 아이디어가 기발했다는 걸. 
한동안 나는 기가 죽어서... 하지만 타이밍이 대단히 좋아요. 검토의 여지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진행합시다. 까소봉, 수고했어요. 
당신과의 계약서 다시 봐야 하겠는 걸... 당신은 아무래두 보물 덩어리 
같으니까. 그리고, 그래요, 카발라와 컴퓨터 듬뿍 집어 넣으시오. 컴퓨터는 
실리콘으로 만들어지는 거 아닌가요?"
  "실리콘은 금속이 아닙니다. 유금속이기는 하지만..."
  "금속, 비금속을 어째 그리 꼬치꼬치 따지는 건가? 장미와 찔레 같은 것 
아니겠어요? 컴퓨터와 카발라는 그럼 어떻게 되는 거요?"
  "카발라도 금속이 아닙니다."
  내가 대답했다. 
  문간까지 우리를 따라 나온 그가 문턱에서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까소봉, 출판은 과학이 아니라 하나의 예술이오. 혁명가처럼 
으시딱딱하게 생각할 것 없어요. 그런 시절은 지나갔으니까. 카발라도 집어 
넣읍시다. 그리고 당신 출장 경비 문젠데, 나는 <꾸세뜨>(침대 차의 
칸막이 방) 요금의 지불을 거절하는 권리를 누리지 않을 수 없소. 자료 
조사 작업에는, 뭐라고 할까... 일종의 스파르타 정신이 필요한 것이오. 
왕창왕창 쓰면서 돌아다니다 보면 신념이 무너지기 십상이거든..."
  
  며칠 뒤 가라몬드 씨는 벨보를 통해, 우리를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면서 우리 셋을 불러들였다.
  사장실로 들어갔다. 가라몬드 사장은, 턱이 없는 데다 짐승의 코를 
연상시키는 주먹만한 코 밑에 밤색 수염까지 달고 있어서 맥인, 한 살진 
신사를 응대하고 있었다. 누군지 알 것 같아Te. 리오에서 특강을 했던, 
장미 십자단 간부인가 뭔가 하던 브라만티 교수였다.
  우리가 좌정하자 가라몬드 사장이 입을 열었다.
  "브라마티 교수께서는, 지금이야말로 한 시대의 문화 기후에 민감한 
현명한 출판사가 은비학 시리즈를 출판하기 알맞은 순간이라고 
하십니다만..."
  "글세요, 마누찌오로서는..."
  벨보가 난색을 보였다.
  가라몬드 사장이 교활하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당연히 그렇지요. 브리만티 교수를 내게 추천하신 분은, 오래 우리가 
펴낸 걸작 중의 하나인 '12궁도의 연대기'의 저자인 내 친구 데 아마치스 
박사올시다만, 하여튼 브라만티 박사의 말씀은, 당신의 전공 분야와 관련된 
이 방명의 출판물이, 한결같이 경박하고 믿음이 기울어지지 않는 
출판사에서 나온 것들이니 어련하겠소만, 깊고도 풍부한 이 분야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는 작금의 사태를 개탄하신다는 것이오."
  브라만티 교수가 그 말을 받았다.
  "현대의 유토피아 건설이 실패로 돌아간 지금이야말로, 망각 속으로 
사라진 과거의 문화를 재평가하기에는 바야흐로 무르익은 순간인 
것입니다."
  "교수님 말씀이야말로 신성한 진리올습니다. 하지만 그 분야에 익숙하지 
못한(이걸 무식이라고는 말하고 싶지 않군요) 우리의 불찰을 용서해 
주셔야 겠습니다. 교수께서 은비학이라고 할 때 정확하게 염두에 두고 
계신 것은 어떤 것입니까? 심령술입니까, 점성술입니까, 아니면 흑마술 
같은 것입니까?"
  브라만티 교수는 당혹스럽다는 표정을 하고는 대답했다.
  "농담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순진한 사람들을 속여넘기려는 헛소리 
같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비록 이름은 은비학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일종의 과학입니다. 물론, 필요할 때라면 점성술이 가세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한 타이피스트 아가씨에게, 다음 일요일에는 그리던 
남자를 만나게 될 것이다. 이런 것을 가르쳐 주는 그런 종류의 점성술이 
아닙니다. 암요. 내가 말하는 것은 가령 황도 12궁과 36데칸(장로)에 대한 
진지한 연구인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역시 과학적인 것이군요. 과학이라면 우리의 방침에도 
부합합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브라만티 교수는 안락 의자에 깊숙히 파묻히면서, 별들로부터 영감을 
구하듯이 방을 한바퀴 둘러보았다.
  "기꺼이 말씀 드리지요. 예를 들어서 말씀 드리지요. 내가 말하는 총서의 
이상적인 독자는 장미 십자단원 같은 사람들이라고 해도 좋겠지요. 
말하자면 <마기아>(마술), <네크로만티아>(강령술), 
<아스트롤로기아>(점성술), <게오만티아>(토점술), <피로만티아>(화점술), 
<히드로만티아>(수점술), <카오만티아>(수점술), <메디키님 
아데프타>(비약술)에 정진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러한 
제술은 사술이 아니라, '라프투스 필로소포룸'(철학의 황홀)에 따르면, 한 
정체 불명의 처녀가 스타오로포루스에게 내렸다는 '아소트 서'로부터 
인용된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전수한 비법 전수자의 지식은 당연히 
다른 분야에도 미치기 마련입니다. 첫째로 그러한 비법 중에는 영지학 
계열로는 은비 물리학, 정력학, 동력학, 운동 역학, 점성술, 비교 생물학, 
초자연계의 범령학, 연금술적 동물학, 생물학적 점성학 등에 관한 연구가 
포함될 수 있고, 다음 우주 인지학 계열로는 점성술을 우주론적, 생리학적, 
존재론적, 측면에서 연구하는 학문으로서 상동 해부학, 예지 능력 분석학, 
영적 생리학, 신통 역학, 사회 점성술, 연금술사 등을 연구하는 자연 
인지학이나 정성 분석의 수학 연구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만 이것은 결국, 
이름이 암시하고 있거니와 결국은 수비술의 연구가 될 것입다만. 그러나 
것에 접하려면 기본적인 소양이 있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불가시적인 우주 
형태론의 요소라고 할 수 있는 자기, 극광, 수면, 영능, 탐혼술, 천리안 
같은 것을 갖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오감의 초능력 연구가 있어야 
합니다만, 이것은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웃기는 학문이 되기 
십상입니다. 이런 류의 점성술이라고 하는 것은, 예지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닌 한, 타락한 지식 체계밖에는 안 됩니다. 여기에다 인상학, 독심술, 
예지 능력(타록, 해몽서), 고급한 것으로는 예언술이나 접신술이 기세해야 
합니다. 연금술, <스파기리쿠스>(파라켈수스가 창안한 <연금학>), 
텔레파시, 축귀술, 빙령이나 강신 등의 심령술에 관한 정보도 또한 
불가결하지요. 정식 은비학 연구라면 원시 카발리즘, 바라문교, 요가, 
그리고 멤피스 신성 문자의 연구도 병행하라고 충고하고 싶군요..."   
  "성당 기사 현상학은요?"
  벨보가 끼어들었다.
  브라만티의 눈이 일순 불을 뿜었다.
  "바로 그겁니다. 깜박 잊을 뻔했군요. 이민족의 무속과 주술, 성명 철학, 
접신 상태의 조기, 자발적인 기술 자기 최면 요가, 몽유병, 수은 화학에 
대한 기초 지식도 필요하겠지요. 브론스끼가 신비스러운 소질을 발휘하는 
데 유의하라면서 권한 것들이 무엇인고 하니, 바로 루동 수녀들의 접신술, 
생 메다르의 발작, 이집트 포도주, 생명의 불로불사주, 비소가 든 물 같은 
것이에요, 그 다음, 이 총서 중 가장 미묘한 부분인 악의 본질에 돤한 
문제입니다. 나는 이 문제에 관한 한, 우리 독자들에게도 긍정적인 
파괴본능의 원천으로서의 베엘제붑 비의, 실각한 왕자로서의 사탄, 
에우뤼노미우스와 물록, 여성의 몽마인 수쿠부스와 남성의 몽마인 
인쿠부스의 존재에 관해 읽을 기회를 베풀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긍정저긴 원리를 가르치는 <아가토데몬>(선한 악마)의 신비도 읽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비의로는 아시스, 미트라, 모르페우스, 
사모트라케, 엘레우시스, 남셩 상징의 신비로는 남근상 팔루스, 생명의 
나무, 학문의 열쇠, 바포메트, 나무 몽둥이... 여성의 상징의 신비로는 
케레스, 크테이스,파테라, 퀴벨레, 아스타르테를 읽혀야 합니다..."
  가라몬드 사장이 의미 심장한 미소를 띤 채 허리를 구부리면서 입을 
열었다.
  "그노시스 학파를 빼서는 안 되겠지요."
  "빼다니 당치 않습니다. 단지 이 그노시스 학파에 관한 한 상당한 
쓰레기 이론이 횡행합니다. 그러나 은비학에 그노시스가 빠질 수는 없는 
일이지요."
  "내가 하려던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가라몬드 사장의 응수였다.
  "이거면 충분한 겁니까?"
  벨보가 물었다.
  브라만티가 뺨을 부풀리는 바람에 맥이 다람쥐로 둔갑하는 것 같았다.
  "충분하냐고요? 이렇게 시작하는 겁니다. 이런 농담을 해서 
미안합니다만 <충분>이라는 말은 초보자들에게나 어울리는 말입니다. 
우선 한 50권 만들면 이 방면의 권위 있는 전문가의 충고를 기다리던 수천 
독자들을 확보할 수 있겠지요. 내가 가라몬드 박사를 이렇게 개인적으로 
찾아온 것은 가라몬드 박사만이 이런 관대한 투자를 견딜 뜻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금이라고 해봐야 몇 억 리라와, 이 
총서의 편집 책임자가 될 나에게 지불할 적정 금액의 인세면 되는 
일입니다."
  브라만티는 까다롭게 굴어도 너무 심한 셈이었다. 가라몬드 사장은 벌써 
흥미를 잃고 있었다. 방문객은 약속만 푸짐하게 받고 그 자리에서 
쫓겨났다. 편집 자문 위원회가 머지않아 그 제안의 무게를 조심스럽게 달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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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리만티가 방에서 쫓겨나다시피 하자 벨보는, 저 친구 마개를 빼고 
김을 좀 뽑았으면 좋았을 걸, 하고 말했다. 가라몬드 사장은 이런 표현에 
익숙지 않았다. 벨보가 조심스럽게 말을 골라 가면서 설명했지만 알아듣게 
하는데 성공을 거두는 것 같지는 않았다.
  "말장난 맙시다. 아까 이 양반이 다섯 마디도 하기 전에 나는 벌써 
우리와 인연이 없다는 걸 간파했어요. 이 양반은 안돼요. 하지만 이 양반이 
말하던 사람의 문제, 다시 말해서 필자와 독자의 문제, 이건 다릅니다. 
브라만티 교수는 내가 며칠 고민하던 문제를 지나가는 말로 아주 산뜻하게 
지적해 냈어요. 이걸 좀 보세요..."
  그는 극적인 몸짓으로 서랍에서 책 세 권을 꺼내 보이면서 말을 이었다.
  "... 최근에 나온 책 세 권입니다. 세 권 다 성공을 거두었지요. 첫 번째 
책은 영어로 씌어진 겁니다. 읽어 보지는 않았지만 저자는 유명한 
평론가예요. 소재가 무엇이냐? 부제가 <그노시수 소설>로 되어 있어요. 
그리고 이걸 보세요. 미스터리 쪽 베스트셀럽니다. 어떤 내용이냐? 토리노 
근방의 그노시스 교회 이야깁니다. 여러분은 이 그노시스교도들이 누군지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그는 잠시 말을 중단하고 손을 내저었다.
  "... 그노시스교도들이 누구냐, 하는 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분위기, 
어쩐지 귀신이 나올 듯한 분위기...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겁니다. 내가 너무 
서두르고 있는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나는 여러분처럼 말을 빙빙 돌려 
가면서 하지는 않겠어요. 나도 브라만티처럼 얘기하겠어요. 무슨 말이냐 
하면, 브라만티가 출판업자의 입장을 도외시하고 얘기했듯이 나도 비교 
그세놀로지 교수니 뭐니 하는 것들의 입장을 도외시하고 오로지 
출판업자로서만 얘기하겠다. 이겁니다. 브라만티 교수와 얘기를 나누는 
도중에 나는 놀라운 걸 하나 알아내었어요. 브라만티 교수는 내 눈을 여는 
동시에 나를 자극하면서 중요한 가능성을 하나 안겨 준 겁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인접하는 모든 학문을 한 그릇에다 쏟아넣고 비비는 듯한 
그의 희귀한 재능입니다. 브라만티 교수는 <그노시스 학파>를 구체적으로 
거론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토점>이니, <불로불사약>이니, <수은 
요법>이니 하면서 사실은 그노시스의 핵심을 건드려 놓은 것입니다. 내가 
왜 이걸 이렇게 중요하게 여길까요. 여기에 책 한 권이 더 있어요. 유명한 
저널리스트가 쓴 책입니다. 이 책의 저자느 토리노에서 일어나고 있는, 
참으로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를 쓰고 있어요. 아시겠어요? 자동차의 도시 
토리노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괴한 현상의 보고서라는 것입니다. 요술과 흑 
미사, 악마를 부르는 의례가 버젓이 횡행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게 
남부의 가난뱅이 농민을 위해 베풀어지는 공짜 푸닥거리가 아니라 돈 내는 
고객의 주문을 받고 벌이는 유료 굿판이라는 겁니다. 까소봉, 벨보의 말을 
듣자 하니 당신도 브라질에서 그곳 토인들이 벌이는 악마제 비슷한 걸 
보고 왔다면서요? 좋아요, 나중에 그 이야기 좀 들읍시다. 중요한 것은 
토리노에서 벌어지든 브라질에서 벌어지든 이게 똑같은 것이라는 
점이에요. 브라질이 멀리 있는 게 아니다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겁니다. 며칠 
전 혼자서 서점을 기웃거린 일이 있어요. 서점 이름이 뭐더라... 까짓... 
이름 같은 건 신경쓸 거 없어요. 왜 있잖소? 6,7년 전만 하더라도 
무정부주의, 혁명 사상, <투파마로>(좌익 게릴라.), 테러리스트,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교과서 아니면 안 팔던 서점 말이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더군, 전행한 겁니다. 
마르크스주의 대신 조금 전에 브라만티가 말하던 그런 책이 꽤 많습디다. 
우리가 혼란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말, 빈말이 아닌 것 같습니다. 가톨릭 
서점에 가보세요. 교리 문답서 아류만 잔뜩 쌓아 놓고 팔던 가톨릭 서점에 
마르틴 루터를 재평가하자는 주장이 담긴 책이 버젓이 진열되어 있어요. 
아직까지, 종교는 몽땅 사기라는 주장이 담긴 책까지 등장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오. 그러나 내가 며칠 전에 들렀던 좌경 교과서 서점에는 
기독교도 저자의 책과, 종교는 몽땅 사기라고 주장하는 저자의 책이 
공존하고 있습디다. 세상 만사를 하나로 아우르는 거, 그걸 뭐라고 
한댔지요? 그런 테마를 통틀어서?"
  "헤르메스적 주장이라고 하시는 겁니까?"
  디오탈레비가 반문했다.
  "맞아요. 바로 그겁니다. 연금술에 관한 책도 여남은 권 봤어요. 내가 
여러분에게 하고 싶은 말이 바로 이겁니다. <헤르메스 계획>, 어때요? 
새로운 총서를 한번 기획해 보자는 겁니다. 새로운 총서의 가지를 하나 
만들어 보자는 겁니다."
  "황금 가지가 되겠군요."
  "바로 그겁니다..."
  가라몬드 사장은 거두절미하고 자기 주장을 밀고 나갔다.
  "... 나는 깨달았어요. 독자들이 헤르메스적인 것에 열심히 메달리고 
있다는 걸...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과는 정반대 되는 견해를 제시하는 책에 
매달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렇다면 이런 걸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이게 바로 우리가 지고 있는 문화적인 의무이기도 한 것이지요. 나는 자선 
사업가가 아니기는 합니다만, 이 암흑의 시대에 믿음을 심어 주는 일, 
초자연적인 현상을 엿보는 기회를 제공하는 일까지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가라몬드 출판사에는 학문적인 사명감 같은 것도 
있는 겁니다..."
  "마누찌오를 염드에 두고 계시는 줄 알았는데요?"
  벨보가 의아하다는 얼굴을 했다.
  "일석이조가 바람직하겠지요. 나는 문제의 서점을 한동안 기웃거리다 그 
옆에 있는 대형 서점으로 들어가 보았어요. 그랬더니, 거기에도 은비학 
관계서적만 전문으로 진열하는 코너가 있는 게 아니겠어요? 보자 하니, 
대학생 또래들이 서가 앞에 쭈그리고 앉아, 브라만티 같은 사람이 썼을 
법한 책을 열심히 읽고 있더라는 말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브라만티 같은 
사람은 대학 교수 저자들과는 별 인연이 없어 보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교수들의 책을 읽기는 하겠지요. 읽고는 그런 저자들과 동급인 것으로 
믿고, 자기도 쓰기만 하면 그렇게 얽힐 것이라고 믿는 거지요. 브라만티 
같은 사람은요, 우리가 뭐라고 하면 대뜸 자기 문제를 언급하는 줄 알아요. 
아전인수도 유만부동이지... 제 생각만 하는 고양이처럼요. 부부가 이혼 
문제를 놓고 티격태격하면, 고양이는 이걸 보면서, 저에게 뭘 먹일 것이냐 
하는 문제를 놓고 부부가 다투는 줄 안다고 하지요. 벨보도 아까 봤지요? 
벨보가 성당 기사단 이야기를 하니까 그 친구 바로 고개를 끄덕거리지 
않습디까? 성당 기사단 이야기가 나오면, 그거 좋지요, 카발라 이야기가 
나오면, 그것도 좋지요, 복권 추첨 이야기가 나왔어도, 그거 좋지요, 했을 
거요. 요컨대 잡식성이에요. 잡식 동물... 브라만티의 얼굴 봤지요? 쥐 
상입디다.
  각설하고... 독자 군단은 두 부류로 나뉩니다. 내 눈에는 두 줄로 선 독자 
군단이 보이는 듯합니다. 누군가가 이들을 위해 글을 쓰기만 하면 
마누찌오는 이런 필자들을 껴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당장 해야 하는 일은, 대중성이 있는 일련의 기획물을 만들고, 이것을 
미끼삼아 독자를 꾀야 합니다. 자, 이 일련의 기획물은 뭐라고 할까요?"
  "<타불라 스마락디나>(<에메랄드 총서>. 전설적인 인물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의 저작으로 알려져 있는 저서의 제목이기도 하다.) 라고 
하면 어떨는지요?"
  디오탈레비가 제안했다.
  "뭐? 안 돼요. 너무 어려워요. 내가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걸. 
우리가 바라는 건 뭔가 암시적이고, 뭔가..."
  "<너울 벗은 이시스>(이시는 이집트의 여신. 오시리스의 아내. 사자를 
저승으로 인도하는 여신이라는 의미에서 그리스 신화의 헤르메스와 
비슷하다. 밀교적 성격이 강한 이시스교는 로마 제국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너울 벗은 이시스'는 엘레나 페트로브나 블라바츠키의 중요한 저작의 
제목이기도 하다.) 는 어떻습니까?"
  내가 제안했다.
  "<너울 벗은 이시스>! 브라보, 까소봉... <너울 벗은 이시스>, 하니까 
투탕카멘이나 피라미드와 스카라베까지 싸잡혀 들어가는군. 거무스름하고, 
다소 신비스러워 보이는 표지로 싼 <너울 벗은 이시스>... 하지만 정도껏 
합시다. 지나친 과정은 말고요. 하던 이야기 계속합시다. 독자 군단중의 두 
번째 범주, 그러니까 이런 책을 살 독자들을 좀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 압니다. 마누찌오가 언제 책 사는 
독자들을 염두에 두었더냐고 하고 싶겠지요? 그러나 독자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아야 한다는 법은 없어요. 그러니까 이번에는 마누찌오의 책을 
만들어 팔아 보는 겁니다. 질적인 비약을 해보는 겁니다. 아시겠지요?"
  하지만 역시 학문적인 연구에 대한 우리의 사명감을 저버릴 수는 
없어요. 이번에는 반대로, 가라몬드 출판사가 이럿을 떠맡는 겁니다. 역사 
연구와 대학 총서를 내되, 이 일을 전문으로 다룰 전문가, 말하자면 자문 
위원을 구하고, 한 해에 서너 권씩 내는 겁니다. 내용이 견고한 시리즈 
제목이 붙은 아카데미 총서... 총서 제목을 뭐라고 하면 좋을까요?"
  "<헤르메티가(헤르메스 총서)>!"
  디오탈레비가 제안했다.
  "좋군요. 고전적인 위엄이 있어요. 여러분은 나에게 묻고 싶겠지요? 
마누찌오로도 충분한 채산성이 있는데 왜 가라몬드에서는 돈을 쓰느냐고? 
궁금할 겁니다. 하지만 아카데미 총서가 미끼 노릇을 한다는 걸 생각해 
보세요. 이 총서가 지식인들을 끌어들입니다. 이 양반들이 우리에게 좋은 
충고도 해줄 것이고, 새 방향도 제시해 주겠지요. 브라만티 같은 사람들을 
끌어들이느 겁니다. 브라만티 같은 사람이야 필경은 마누찌오로 넘어갈 
사람이지만요. 내가 보기에 이만하면 완벽합니다. <헤르메스 계획>... 
훌륭합니다. 지극히 명쾌하고요. 두 회사 사이의 관념적인 흐름을 
강화시킬, 지극히 생산적인 계획이 될 겁니다... 일합시다. 찾아 다녀야 할 
도서관도 많을 것이고, 모아들여야 할 문헌, 신청해야 할 도서 목록도 많을 
겁니다. 그리고 외국에서, 이런 류의 작업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고 있는지 
조사하세요. 압니까? 다른 사람들이 벌써 손을 썼는지? 남들이 시작했대도 
상관없습니다. 그자들의 보물을 우리가 쓰레기로 만들어 버리면 되는 
일이니까... 까소봉, 금속사에 연금술사를 살짝 가미하는 거 잊지 마세요. 
내가 아는 한, 금 역시 금속입니다. 할말이 있어도 나중에 듣겠어요. 나는, 
무릇 교양있는 사람들이 다 그렇듯이, 비판받을 준비, 제안을 수용할 준비, 
반박을 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오. 그러면 이 계획은 지금 이 
순간부터 발효합니다. 참, 시뇨라 그라찌아, 그 신사분이 두 시간이나 
기다리셨지? 필자들을 이렇게 대접해서는 도리가 아 지. 어서 
들어오시라고 해요!"
  가라몬드 사장은, 자기 목소리가 손님 귀에 충분히 들리도록 고함을 
질렀다.
  
    43
  
  나는 <헤르메스 계획> 이 어떤 아이디어의 밑그림에 지나지 않을 뿐, 
진짜 계획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점에 관한 
한 가라몬드 사장을 고소 평가하고 있었다. 이 계획이 입안된 이후 내가 
도서관을 돌아다니면서 밤늦도록 금속사 도판을 찾고 있을 동안 그들은 
이미 마누찌오에서 이 <헤르메스 계획>을 발진시키고 있었다.
  두 달 뒤 나는 벨보의 사무실에 들렀다가, 갓 나온 잡지 '파르나소스 
이탈리코'에 실린, <은비학의 부활>이라는 제하의, 비교적 긴 기사를 
보았다. 연금술의 대가 모에비우스 박사는 이 기사에서, 현대 세계에서 
은비학이 르네상스를 맞는 것을, 일단은 불가사의한 현상이라고 진단하고, 
마누찌오가 <너울 벗은 이시스>라는 세 총서를 앞세워 이 방행의 책을 
시리즈로 출간하게 될 것이라고 공표하고 있었다. <모에비우스 박사>는 
다른 사람이 아닌, 벨보의 필명이었다.
  가라몬드 씨는 그동안 연금학, 점성학, 타로트, UFO의 문제를 다루는 
갖가지 잡지사에 이런 저런 익명으로 편지를 보내어, 마누찌오가 출간을 
예고한 시리즈에 대한 반응을 탐지하고 있었다. 가라몬드 사장이 이렇게 
나오자 각 잡지사 편집자들은 되려 마누찌오에 전화를 걸어 시리즈에 대한 
정보를 캐려고 했다. 이러한 잡지사 편집자들의 요구에 대해 가라몬드 
사장은 기묘한 태도를 보였다. 출간 작업이 진행 중인만큼 10권짜리 
시리즈 제목은 밝힐 수 없노라고 했다. 요컨대 가라몬드 사장은 한차례 
북을 울림으로써 은비학계의 관심을 <헤르베스 계획>에다 집중되도록 한 
것이었다.
  우리를 자기 집무실로 부른 가라몬드 사장은 말했다.
  "우리는 꽃으로 변장했습니다. 이제 벌이 몰려들겠지요."
  가라몬드 사장은 우리에게 광고 전단도 보여 주었다. 사장은 이 
<데쁠리앙(광고 전단)>을 밀라노 출판업계의 사투리로 
<데에쁠리앙>이라고 발음했다. 네 쪽짜리의 단촐한 전단이었지만 종이가 
아주 두꺼웠다. 첫 쪽에는 연작물의 표지를 축소하여 실을 예정이라고 
했다. 검은 바탕에다 황금의 봉인(사장의 설명에 따르면 <솔로몬의 
오망성)> 같은 것을 찍되, 봉인의 주위에는 만자 문양을 넣는다는 
것이었다. 가라몬드 사장은 봉인 주위에 들어갈 문양이 나치의 철십자, 즉 
시계방향으로 꼬부라지는 스바스티카가 아니라 동양의 <만>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제목이 들어갈 자리에는, <천지간에는 우리가 모르는 세계가 
있다>는 캐치프레이즈, 2쪽과 3쪽에는 마누찌오 출판사의 영광스러운 
문화적 발자취를 열거하고, 현대 사회는 과학이 마련해 줄 수 있는 것 
이상으로 깊고 오묘한 진리에 목말라 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이집트, 
칼데아, 티벳에서 사라진 고대의 지혜가 서구의 정신적 재생을 위해 
여기에서 이렇듯이 부활한다>는 구절을 넣는다는 것이었다. 
  벨보가, 광고 전단을 어디로 보낼 것이냐고 묻자 가라몬드씨는 기묘한 
웃음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벨보 같으면, 타락한 천사의 저주를 받은 
영혼만 찾아 다니는 윌리엄 경의 미소에다 견주었을 것이다.
  "프랑스로 벌써, 오늘날 세계에 산재하는 비밀 결사의 주소록을 주문해 
놓았어요. 비밀 결사의 주소록... 그런 게 있는 줄 몰랐지요? 있어요. 앙리 
베이리에르가 펴낸 겁니다. 주소, 전화 번호, 우편 번호까지 있어요. 벨보 
박사는 이걸 보고 말이지요, 필요 없는 걸 골라내세요. 내가 보니까 필요 
없는 것도 많습니다. 예수회, <오푸스 데이>(하느님의 걸작)회, 
<카르보나리>(19세기 나폴리에서 결성된 이탈리아 급진 공화주의자들의 
비밀 결사)결사, 로타리 클럽... 이런 건 필요 없어요. 은비적은 경향이 
있는 비밀 결사만 뽑아 내어야 합니다. 내가 벌써 밑줄을 그어 놓은 
단체도 있어요..."
  가라몬드 사장은 페이지를 넘기면서 설명해 나갔다.
  "... 어디 한번 봅시다. <절대회>라, 만물의 메타모르포시스, 즉 변신을 
믿는 단쳅니다. 캘리포니아의 <아에테르 회>, 이건 화성인과의 텔레파시 
교신을 믿는 사람들의 단체... 로잔느의 <아스타라 회>... 목숨을 걸고 
비밀을 지키겠다고 맹세해야 가입이 가능한 단체랍니다... 영국의 
<이탈리아 회>, 잃어버린 행복을 찾는 사람들이 모임입니다... 얼마든지 더 
있어요. 연금술과 카발라와 점성술을 믿는, 캘리포니아의 <성소 건설자 
협회>, 사랑의 여신이자 사자의 산의 수호 여신 하트호르를 섬기는 
페르키니안의 <세르끌 E.B.>, 몰의 <세르끌 엘리파스레비>... 그런데 이 
<레비>가 무슨 레비인지 모르겠어요. 설마 문화 인류학자 앙리 레비 
스트로스의 <레비>일 리는 없을 것이고... 어쨌든... 뚤루즈의 <성당 
기사단 연맹>, 골의 <드루이드 학회>, 제리꼬의 <꾸방 
스삐리뚜알리스뜨>, 플로리다의 <우주 진리교>, 스위스 에꼬네의 
<전통주의 신학교>, <모르몬교>... 모르몬 말인데, 탐정 소설에서 읽은 
적이 있는데 아직까지도 있을지 몰라... 하여튼 런던과 브뤼셀에 있는 
<미트라 교회>, 로스엔젤리스에 있는 <악마 교회>, 프랑스에 있는 <연합 
악마 교회>, 브뤼셀에 있는 <장미 십자단 사도 교회>, 아이보리 코스트에 
있는 <어둠의 자식들 회> 및 <녹색 교단>... 하지만 이 아이보리 
코스티에 있는 건 빼기로 합시다. 이들이 어떤 언어를 쓰고 있는지 
알도리가 없으니까... 몬테비데오의 <에스꾸엘라 에르메티스타 옥시덴탈>, 
맨하탄에 있는 <전국 카발라 협회>, 오하이오에 있는 <중부 오하이오 
헤르메스 신전>, 시카고에 있는 <테트라 그노시스 교단>, 생 시르 - 쉬르 
- 메르에 있는 <장미 십자 장로 우애회>, 카셀에 있는 <성당 기사단 
부활을 위한 요한 우애단>, 그로노블에 있는 <국제 이시스 우애단>,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고대 바바리아 문화 중흥회>, 미국의 <아베리카 
성배 재단>, 브라질의 <소시에다데 도 그랄 도 브라질>, 즉 브라질 
성배회, 룩소르의 <헤르메스 형제회>, 네덜란드에 있는 <렉토리움 
로지크루시아눔(장미 십자 렉토리움)>, 스트라스부르의 <성배 운동 본부>, 
뉴욕에 있는 <아누비스 교단>, 맨체스터에 있는 <검은 펜타클 신전>, 
플로리다에 있는 <오딘 동우회>, 영국 여왕도 가입하고 있을터인 <가터 
교단>, 신 나치 단체로서 주소 불명인 <가면 기사단>, 몽뼁리에에 있는 
<밀리시아 템플리(성당 기사군단)>, 몬테 카를로에 있는 <태양 신전 최고 
기사단>, 할렘의 <장미 시자단>... 보세요, 드디어 흑인도 가세하지요? 
카발라에 나오는 72시령을 섬기는 켈트 식 악마 교단인 <위카 교단>... 더 
소개햐야 할까요?"
  "이런 것들이 정말 실재하는 단체들입니까?"
  벨보가 물었다.
  "있다마다됴... 자, 시작합시다. 필요한 명단을 뽑읍시다. 명단을 뽑아 
우편으로 날리는 겁니다. 외국. 이들에게 광고 전단을 보내면 소문이 좌악 
퍼지지요. 해야 할 일이 이것 뿐만이 아닙니다. 서점과 독자들 귀에도, 
이러저러한 연작 총서가 나온다는 소문을 퍼뜨려야 합니다."
  디오탈레비는 반대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공연히 이쪽의 존재를 
노출시킬 것이 아니라 우리를 대신해서 광고 전단을 발송해 줄 사람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가라몬드 사장은 찾아보는 것은 좋으나, 대신 
<무료 봉사>할 사람을 찾으라고 말했다.
  
  자기 방으로 돌아오자 벨보가 투덜댔다.
  "지나친 요구 같은데..."
  그러나 지하의 여신들이 우리를 가호하고 있었다. 벨보의 사기가 꺾이는 
순간 로렌짜 펠레그리니가 더할 나위 없이 밝은 표정으로 들어와 그 
사기를 드높여 준 것이었다. 로렌짜는 광고 전단을 읽고는 호기심을 가눌 
수 없어서 달려왔다고 햇다. 
  옆 사무실에서 진행되는 <헤르메스 계획> 이야기를 듣고 로렌짜가 
말했다. 
  "굉장하군요, 이건...걸맞은 친구가 하나 있어요. 우루과이 
투파마로(극좌파) 출신인데, 지금은 '피카트릭스'라는 잡지를 만들고 
있어요. 큼만 나면 내게 강신 셍세앙스를 구경시켜 주고는 하죠. 나, 그런 
데서 광장한 <엑토플라슴>을 사귀게 되었는데, 내게 뭐라고 한지 아세요? 
자기가 물화할 때마다 와서 구경하라는 거예요."
  벨보는, 무슨 부탁이라도 할 듯이 로렌짜를 보다가 마음을 고쳐 
먹었는지 고개를 돌려 버렸다. <광장한 친구>라면서 로렌짜가 자기 남자 
친구 이야기를 하는데 질려 버린 데다, 그런 남자 친구라면 자기와 
로렌짜의 관계(사실 무슨 관계가 있기는 있었던가...)에 득될 것이 없다고 
여긴 듯했다. 그러니까 '피카트릭스'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나는 
아르덴티대령을 생각한 데 견주어 벨보는 투파마로 출신이라는 로렌짜의 
남자 친구를 생각한 것임에 분명했다. 로렌짜는 f화제를 바꾸어, <너울 
벗은 이시스>총서 같은 책을 집중적으로 파는 서점을 알고 있다고 했다.
  "그런 서점 졸아다니면 재미있어요. 이런 서점 주인들은 
<호문쿨루스>만드는 비약이나 비법 아는 사람이 많다고요. 파우스티 
박사도 이런 식으로 트로이아의 헬레네를 만들었다고 하지 않아요? 
야코포, 둘이서 안 만들어 볼래요? 당신의 몸에서 나온 호문쿨루스 하나 
갖고 싶어요. 둘이서 애완견 기르듯이 길러 보면 좋잖아요? 책 보면 
쉬워요. 사람의 씨를 시험관에 넣어 두면 돼요. 바보같이 낯을 붉히기는... 
정자를 시험관에 넣은 다음에 여기에다 암말의 히포메네를 섞으면 된대요. 
이 <히포메네>라는 것은요, 뭐더라... 배설물이던가? 아니야, 배설물은 
아니야. 뭐죠?"
  "<분비물>이라고 하는 겁니다."
  디오탈레비가 거들었다.
  "... 그래요. 하여튼 암말이 이걸 분비한대요. 하지만 구하기는 좀 
어려울거라. 내가 암말이라도 사람에게, 더구나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분비물을 빼앗기기는 싫거든... 포장된 걸 살 수도 있대요. 이스트처럼 진공 
포장된걸로... 시험관에다 이것과 사람의 씨앗을 섞어서 40일 동안 그대로 
두면 시험 속에는 태아 같은 조그만 덩어리가 생긴대요. 이걸 두 달 더 
두면 호문쿨루스가 되는 거죠. 이윽고 달이 차면 이게 밖으로 나와 시중을 
들어 준다니 얼마나 좋아요? 죽지도 않는대요. 생각해 보세요. 당신이 죽은 
뒤에도 무덤에 꽃도 꺾어다 놓을 호문쿨루스를..."
  "그런 서점의 고객은 주로 어떤 사람들이야?"
  "환상적인 사람들이죠. 천사와 대회를 나누는 사람, 연금하는 사람, 
얼굴이 진짜 점쟁이 얼굴 같은 진짜 점쟁이들..."
  "진짜 점쟁이 얼굴을 어떤데?"
  "매부리코, 러시아 인의 눈썹, 안광이 형형한 눈, 화가 같은 장발... 
수염도 있기는 있는데 숱이 안 많아요. 뺨과 턱 사이에 조금만 기르거든... 
콧수염은 겨우 입술을 덮을 정도로만 기르죠. 그런데도 자연스러워요. 
입술이 워낙 얇거든. 이빨은 앞으로 뻐드러지고... 이빨이 이러니까 웃으면 
흉한데도 잘 웃어요, 그것도 예쁘게... 하지만 그 형형한 눈빛은 앞에 있는 
사람을 꿰뚫어 버린답니다."
  "헤르메스의 얼굴이군."
  디오탈레비가 응수했다.
  "그래요? 뭘 아시나 봐. 손님이 들어와 책을 골라 달라고 하죠. 가령 
축귀 경문이라든지... 하여튼 주인에게 책 제목을 제대로 대기는 하지만 
대개의 경우 서점의 서가에는 없는 책이죠. 이런 손님과 흉허물이 
없어지게 되면 축귀 경문 같은 게 효험이 있더냐고 물어본 적이 있는데, 
이런 손님들은 나 같은 사람을 어린아이 대하듯이 하면서, 그런 책은 
위험하니까 조심해야 한다, 이런 말을 하죠. 자기 친구 중 몇몇은 악마에게 
혼이 났다는 이야기를 겿들이다가 내가 잔뜩 겁을 집어먹으니까, 악마라는 
건 사실 히스테리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러데요. 요컨데, 나는 그 
사람들이 악마의 존재를 믿고 있는지 믿지 않고 있는지 도무지 
모르겠더라고요. 서점 주인들은 대개 나 같은 사람에게 선향 같은 걸 
선물로 주요. 어떤 서점 주인은 악마의 눈길을 막는 부적이라면서 상아로 
깎은 손을 주더군요."
  로렌짜 펠레그리니의 말을 듣고 있던 벨보가 한마디했다.
  "그런 데 가서 죽일 시간이 있거든 주인에게 마누찌오 시리즈를 
아느냐고 물어 봐. 모른다고 하거든 우리 광고 전단 좀 전해 주고..."
  로렌짜 펠레그리니는 광고 전단을 한 뭉치 들고 사무실을 나갔다. 
서점에다 그 전단을 다 돌리자면 몇 주일이 실히 걸릴 터였다. 계획은 
예상 밖의,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진행되었다. 은비학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기 위해 자비 츨판 필자들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하고부터 
그라찌아 양의 업무도 폭주하기 시작했다. 자비 출판 필자들은 여깃 그 
방면의 막강한 군단이었다.
  
   44
  
  운이 따라 주었다. 입문이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질적으로 
만족할 만한 수준의 첫 화합을 가질 수 잇었다. 
  벨보, 디오탈레비, 까소봉, 이렇게 삼총사가 머리를 맞대자마자 첫 
손님이 든 것이었다. 우리는 어찌나 기분이 좋았던지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을 정도였다. 손님의 얼굴을, 로렌짜 펠레그리니가 묘사하던 바로 그 
헤르메스 상 이었다. 게다가 옷까지 검은 양복으로 입고 있었다. 
  우리를 둘러 본 그는 자신을 카메스트레스 교수라고 소개했다. 
  "무슨 과 교수이신지요?"
  우리가 묻자 그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자기를 좀더 점잖게 대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눈치 같았다. 
  "미안하지만 나는 세 신사 분이 어떤 식으로 이 방면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말하자면 전문적인 관심인지, 아니면 은비학 단체에 
가입하고 있기 때문에 보이는 관심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은비학에 과심을 보이는 까닭을 설명했다. 그제서야 그가 입을 
열었다. 
  "여러분을 너무 경계하고 있었군요. 하지만 나도 <오토>단 단원들과 
관련되는 게 꺼림칙해서 그랬지요..."
  "...<오토OTO>라고 하는 것은 <오르도 템플리 오리엔티스>의 
약자올습니다. 알레이스터 크로울리에 대한 마지막 신봉자들을 자처하는 
비밀 결사이지요... 혹시나 여러분이 거기에 소속되어 있지 않았나 해서 
경계했는데, 아니었군요. 좋습니다. 여러분에게 편견을 가질 필요가 
없겠어요..."
  우리가 권한 자리에 좌정한 그는 말을 이었다.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지금부터 여러분께 보여 드릴 이 자료는 
알레이스터 크로울리와 맞서는 일인 만큼 대단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내가 
소속되어 있는 우리 동아리는 '리베르 알 벨 레기스' 의 계시를 
신봉합니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이 '리베르 알 벨 레기스'는 1904년 
카이로에서 아이와쯔라고 하는 수호 천사가 알레이스터 크로울리에게 
구술한 책입니다. 오토 단원들은 이날 이때까지도 이 책의 내용을 
섬깁니다. 오토 단원들이 기묘한 집착을 보이는 이 책은 지금까지 모두 
4판이 나왔는데, 초판이 나오고 9개월 뒤에는 발칸 반도에서 전쟁이 
터졌고, 재판이 나오고 9개월 뒤에는 제1차 세계 대전이, 3판이 나오고 
9개월 뒤에는 중일 전쟁, 4판이 나오고 9개월 뒤에는 스페인 내란이 
터졌습니다..."
  나는 손가락을 꼽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카메스트레스 교수는, 
장례식장에 온 조문객 같은 얼굴을 하고 나를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여러분이 약간 당혹해 하시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겁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제5판, 말하자면 수정 증보판의 출판을 제의하기 위해 이렇게 
왔습니다. 제5판이 나오고 9개월 뒤에는 무슨 일도 터지지 않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해석의 범위를 확장시킨 '리베르 알 벨 레기스'의 
증보판입니다. 나는 <알>, 즉 <지고한 실체>를 수호령으로 모시고 있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알>의 계시를 직접 배청한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라 호오르 크후이트>와 신비스러운 쌍둥이이신 최고위 왕으로, 때로 
<호오르 파아르 크라트>라고도 불리는 <알>은, 알레이스터 크로울리에게 
책을 구슬시킬 만큼 대단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혹, 알레이스터 
크로울리를 섬기는 오토 단원들의 훼방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라서 이걸 
차단하기 위해서라도 동지전에 출판되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가능할 겁니다"
  벨보가 대답했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런 다행이 없겠지요. 이 책이 출판되면 비밀 
결사의 입문자들 사이에 엄청난 물의가 빚어질 것입니다. 아시게 되겠지만, 
내가 여기에서 다루는 신비스러운 자료는 알레이스터 크로울 리가 다룬 
걱보다 훨씬 심오하고 정통적인 것입니다. 나는 알레이스터 크로울 리가 
<검>의 전례를도외시하고 어떻게 <짐승의 의례>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칼을 뽑아야 <마하프랄라야>, 
즉 쿤달리니의 제3의 눈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크로울리의 수비술은 모두 짐승의 수에 근거하는 것으로, <93>, <118>, 
<444>, <868>,<1001> 같은 새로운 수를 검토의 대상으로 전혀 
떠올리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게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수비술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디오탈레비가 신경을 곤두 세우면서 
물었다. 
  "...'리베르 알 벨 레기스'도 언급하고 있듯이 숫자라고 하는 것은 영원한 
것이고 따라서 변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알겠습니다만, 일반 독자들에게는 너무 생소할 것 같지 않습니까?"
  벨보가 물었다.
  카메스트레스 교수는 의자에서 뛰어오를 듯이 놀라면서 대답했다.
  "절대 불가결한 책인데,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적당한 준비 없이 이런 
비의에 뛰어드는 것은 심연에 머리를 처박는 거나 다름이 없답니다. 
너울에 가려진 채로 대중 앞에 내어 놓아도 괜찮을 테니까 나를 믿으세요. 
나도 위험을 각오하고 이러는 겁니다. 나는 야수를 숭배하는 땅에다 한 
발을 집어 넣고 이걸 썼습니다. 크로울리보다 훨씬 과격하게요... 내 책 
'콩그레수스 쿰 다에모네'를 보면 신전 성물 배치 이야기나, <심홍의 
악녀>가 탈것인 <야수>와 육체적으로 교접하는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말하자면 크로울리는 자연에 반하는 이른바 육체적 교접에서 붓을 
꺾었지만 나는 이 제의를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수준의 악마를 훨씬 뛰어 
넘는 수준까지 끌고 갑니다. 나는 상상을 초월하는 극한까지 갑니다. 
말하자면, 흑마술 저주의 절대적인 순결의 상징인 <바스 아움근>과 <사 
바 프트>의 극한까지 몰고 가는 것입니다..."
  이제 벨보에게 남은 일은 카메스트레스 교수에게, 재정적인 부담 능력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는 말을 빙빙 돌려 가면서 길게 이야기했다. 
브라만티 교수가 그랬듯이 카메스트레스에게도 자비 출판할 능력은 
없었다. 드디어 필자를 돌려보내는, 지난한 작업이 시작되었다. 원고를 한 
주일 정도 보관할 수 있게 해주면, 편집진이 윤독한 다음에 돌려 드리기로 
하겠다... 이런 순서가 마악 시작되는 판인데 카메스트레스는 원고 
보따리를 싸면서, 이런 식으로 불신당해 보기는 처음이다, 모욕한 대가를 
뒷날 반드시 치르게 하고야 말겠다... 이런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자비 출판 필자들로부터 무수한 원고가 날아들었다. 
서점 판매용이므로 선별 작업이 필요한 것은 물론이었다. 그러나 분량이 
엄청나서 다 읽을 도리는 없었다. 우리는 목차와 색인만 검토하고 난상 
토론을 갖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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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벨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사라진 문명과 신비의 대륙에 대한 원고가 있는데 말이야... 
오스트레일리아 부근 어딘가에 <무>라는 대륙이 있었는데, 그 땅에 살던 
사람들이 다른 대륙으로 이주해 갔다는 거라. 아발롱으로도 가고, 
코카서스로도 가고, 인더스 강 발워지로도 갔다는 거라. 켈트 족이 된 
그룹도 있고, 이집트 문명을 창시한 그룹도 있고, 아틀란티스 대륙으로 간 
그룹도 있다는 거야."
  "진부한 소립니다. <무> 대륙에 관한 책이 필요하다면 그 책상이 
파묻히도록 구해다 줄 수도 있어요."
  내가 핀잔을 주었다.
  "하지만 이 원고는 돈이 되겠는데... 그 중의 한 장, 그리스 인의 유카탄 
반도 이주설을 다룬 장은 아주 괜찮아. 치쩨 이쨔에 있는 전사의 
돋을새김은 로마 군단의 부조를 빼다 박았다는 거야. 한 콩깍지에서 나온 
콩알처럼... ."
  "전세계의 투구를 보면 으레 술 장식이나 말총이 달려 있어. 그게 문화 
유입의 증거가 될 수는 없어."
  디오탈레비도 나섰다.
  "자네에겐 그렇게 보일지 모르지만 이 필자의 생각은 달라. 이 원고 
필자에 따르면, 이 세계의 모든 문화권이 뱀을 숭배한다면, 그 문화의 
기원이 단일하기 때문이 아니겠느냐는 거라... ."
  "뱀을 숭배하지 않는 문화권도 있던가? 선민만은 차하에 부재하지만... ."
  디오탈레비는 물러서지 않았다.
  "선민은 송아지만 섬기셨던가."
  "믿음이 약해졌을 때만 송아지를 섬겼지. 어쨌든 나는 그 원고 못 
믿겠다. 아무리 자비 출판이라도... . 목차를 좀 보라고... 켈트주의와 
아리안주의, 칼리 유가, 서구의 몰락, 나치 친위대 정신... . 내가 
편집광이든가, 아니면 그자가 나치 추종자이든가 둘 중 하날거다... ."
  "가라몬드 사장은, 나치라는 이유만으로 물러서지는 않을걸."
  "그럴테지. 하지만 해도 정도껏 해야지. 이 원고 좀 보라고. 따의 요정, 
물의 요정, 불속에 사는 살라만드로스, 꼬마 요정, 대기의 요정... . 이걸로 
아리안의 기원을 설명하려는 모양인데... 그러면 나치 친위대의 기원은 
일곱 난쟁이로 설명이 가능하겠군... ."
  "나치 친위대의 기원은 일곱 난쟁이가 아니라 니벨룽겐 족 결사대가 
아니던가?"
  "여기에서 말한는 난쟁이는 아일랜드의 엘프 나라 백성이야. 나쁜 건 
요정이지 엘프가 아니라고. 엘프는 약간 짓궂을뿐, 마음씨는 착해."
  "별 거 아니니까 고려의 대상에서 제외시켜 버려. 까소봉, 당신이 읽은 
원고에 물건 좀 없었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에 관한 자료가 하나 있군요. 저자는 콜럼버스의 
서명을 분석하고 그 서명 안에 파라미드에 대한 암시가 들어 있다고 
주장하고 있어요. 콜럼버스가 추방당한 기사단의 사령관이어서 신대룍을 
찾는 목적도 예루살렘 기사단의 재건에 있었다는 겁니다. 포루투갈의 유대 
인이자 전문 카발리스트였던 콜럼버스는 주문을 외워서 폭풍을 잠재우거나 
부하 선원들의 각기병을 낫우었다는군요. 디오탈레비 씨가 전문적으로 
검토하고 있어서 카발라가 들어간 자료는 전부 그쪽으로 넘겼는데 
여기에도 카발라의 복병이 숨어 있군요..."
  "해몽서에서 사진 복사한 히브리 어 문자가 다 틀렸어."
"이 사람들아, 우리가 지금 <너울 벗은 이시스> 총서 원고를 찾고 있다는 
걸 명심하게. 문헌학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닐세. 악마 연수가들이 해몽서에 
히브리 어를 복사하겠다면 그러라고 해. 그런데 이상한 게 있네. 수많은 
원고가 왜 하나같이 프리메이슨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게 굴고 있느냐는 
거야. 가라몬드 사장도 이 점에 각별하게 신경을 써달라고 했네. 종교 
의례를 두고 설왕설래하게 되는 구설수에는 휘말리고 싶지 않은 건가? 
하지만 룰르드 동굴에 남아 있는 프리메이슨의 상징적인 유물에 대한 이 
원고는 버릴 수가 없는데? 그리고 생 제르맹 백작 같은, 수수께끼의 
인물ㅇ르 다룬 이 원고도 그래. 이 수수께끼의 인물은 미합중국 국기 
창안에 관여한 프랭클린 및 라파이에뜨와도 교우했다는군. 그렇다면 
미합중국 국기에 별이 들어간 까닭은 설명이 되는 셈인데... 하지만 줄이 
들어간 까닭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잖아..."
  "아니, 생 제르맹 백작이라고요?"
  "까소봉, 당신 그 사람 알고 있나?"
  "안다면 믿겠어요? 잊어버립시다. 이 원고는 현대 과학의 오류를 
해부하는 4백 페이지찌리 원곤데요... 원자와 유대 인들의 허풍... 
아인슈타인의 오류와 에너지의 신비, 갈릴레이의 환상과, 해와 달의 
빗물질성..."
  "그런 책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주제는, 퐅의 이론에 대한 
논평이라네."
  디오찰레비가 끼여들었다.
  "포트가 누군데요?"
  "챠를스 호이 포트... 불가해한 현상을 무진장 수집한 양반이야. 버밍엄의 
개구리 소나기, 데본의 거대한 동물 발자국, 어떤 산꼭대기에 나 있는 
계단과 흡반 모양의 발자국, 춘분과 추분의 세차 운동에 일어난 이변, 
운석에 새겨진 음각문, 검은 눈, 핏빚 바람, 팔레르모 상공에 나타난, 
온몸에 털리 난 키 8천 미터짜리 생물, 해상에서 빛나는 바퀴, 거인의 
유해, 프랑스에 쏟아진 낙엽 소나기, 수마트라의 짐승 소나기, 맞추피추나 
남아메리카 여러 산꼭대기에 그려진 거대한 음각화... 특히 음각화 같은 걸 
놓고는, 선사 시대에 강력한 우주선이 착륙한 증거라는 거야. 말하자면 
우주에 인간만 사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지..."
  "나쁘지 않군. 하지만 피라미드에 대한 5백 페이지짜리 원고 이야기도 
들어 볼 텐가? 자네들, 쿠프 왕의 피라미드가 북위 30도 선상에 있다는 걸 
아는가? 해수면상의 육지가 가장 많은 곳이 바로 이 북위 30도 선상이라는 
것도 아는가? 그런데 그 쿠프 왕 피라미드 내부에서 확인된 기하학적 
방식이, 아마존 지방 페드라 핀타다에서 확인된 것과 정확하게 일치 
한다네. 뿐만 아니라 이집트 유적에는, 한 마리는 투탕카멘 왕의 옥좌에, 
또 한 마리는 사카라의 피라미드 위에 있는데, 이 날개 달린 두 마리의 
뱀은 정확하게 머리로 꿰짤꼬아뜰(아즈텍 족의 신. 날개 달린 뱀의 모양을 
하고 있다. 멕시코 시티의 옛이름이기도 하다.)을 가리킨다는군."
  "꿰짤꼬아뜰은 멕시코 만신전과 관계가 있는 것이지 아마존과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무슨 관계가 있다고 한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나는군. 하지만 무슨 
관계가 있기는 있을거야.만일에 없다면, 이스터섬에 있는 거석상이 켈트 
족의 거석상과 똑같다는 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야>라는 폴리네시아 
신의 이름은 분명히 유대의 <요드>라는 신, 헝가리의 위대한 
선신<이오브>와 무슨 관계가 있을걸세. 고대 멕시코의 한 필사 원고는, 
지구는 바다로 둘러싸인 네모 번듯한 땅인데, 그 땅 한가운데엔 
<아즈틀란>라는 명문이 붙은 피라미드가 있다고 했네. <아즈틀란>은 
<아틀라스>나 <아틀란티스>와 무관한 것일까? 피라미드가 왜 애틀랜틱 
오션(대서양) 양쪽에서 발견되는 것일까?"
  "피라미드 건조가 구체 구조물 건조보다 훨씬 쉬우니까 그런 게 
아닐까요? 그리고 바람이 피라미드 모양의 언덕을 만들지언정 파르테논 
신전 같은 언덕은 만들지 못하지 않나요?"
  "나는 계몽주의 정신이라는 게 싫더라."
  디오탈레비가 비어지는 소리를 했다.
  "더 들어 보게, 이집트의 태양신 <라>도, 신왕조 이전에는 없던 신일세. 
따라서 이집트로 건너간 켈트 족의 신일 가능성이 아주 높은 걸세. 성 
니콜라이, 즉 산타클로스와 썰매의 관계를 생각해 보라고. 유사 이전의 
이집트에서 썰매는 곧 태양의 배였다네. 이집트에는 눈이 내리지 않는데 
썰매가 등장한 거라... 북구의 영향을 입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벨보의 주장에 승복할 수 없었다.
  "바퀴가 발명되기까지 모래 위에서도 썰매가 이용되었다고요."
  "억지 쓰지 말게. 이 원고에 따르면 일단 두 유사한 현상을 동일시하고, 
그 근거를 밝혀야 한다고 했네. 근거가 밝힌다는 게 뭔가, 곧 과학 아닌가? 
이 원고의 주장에 따르면 이집트 인들은 전기를 알고 있었다는 것이네. 
전기를 모르고는 그렇게 엄청난 것들을 건조해 내지 못했을 거라는 게 
필자의 결론이지. 바그다드의 하수 공사를 담당하고 있던 한 독일의 토목 
기사는 그때까지도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페르시아 사산 조 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건전지를 발견했다고 하네. 바빌론 유적에서도 4천 년 전에 
만들어진 축전지가 발견되었다는군. 뿐인가? 십계명과 아론의 지팡이와 
사막의 만나 단지가 든 성궤도 5백 볼트를 낼 수 있는 일종의 발전 
상자였다는 거라..."
  "그건 나도 영화에서 본 적이 있어요."
  "그랬어? 그렇다면 영화쟁이들은 뭘 보고 그런 발상을 했겠나? 성궤는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고 밖에다 금박을 씌운 것이었다고 하네. 이건 
콘덴서와 원리가 같아. 하나의 절연체로 분리된 두 개의 도체... 금제 
조화로 둘러싸인 이 성궤가 안치되어 있었다는 곳도 생각해 보게. 성궤 
안치대는 높이 1미터당 자장이 5백 내지 6백 볼트에 이르는 건조한 곳에 
놓여 있었다고 하네. 에트루리아의 왕 포르세나가 전기의 힘을 빌어 
<볼트>라는 무서운 동물한테서 자기 나라를 구했다는 전설도 있지..."
  "알렉산드로 볼타는 그럼 이국적인 가명을 썼던 것이군요? 본명이 
<스즈므르스즐린 카라즈나파브스키에>쯤 되었는데?"
  "농담이 아니라고. 내게는 이 원고말고도, 잔 다르크와 <시뷜레>(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영생 불사하는 무녀. <시뷜레>의 서책은 일종의 
예언서이다.)의 서책, '탈무드'의 수호 여신인 릴리뜨(유대 전설에 등장하는 
마성의 어머니. 아담의 전처였다고 한다.)와 양성의 태모, 유전자 정보와 
화성의 자모의 관계, 식물의 특급 정보 시스템, 우주론 및 정신 분석학과  
신천사론적으로 해석한 마르크스 및 니체의 관계, <황금수>와 그랜드 
캐넌, 칸트와 은비학, 엘레우시스의 수수께끼와 재즈 음악, 
까글리오스뜨로와 원자력, 동성 연애와 그노시스, 골렘과 계급 투쟁과의 
관계... 등등, 얼마든지 있네. 그리고 <성배>와 <성심>이라는 제목으로 
8권짜리 전집도 너끈하게 써낼 만한 자료도 있다네."
  "그 자료의 주제가 뭔가요? 성배가 그리스도 심장의 알레고리라는 
건가요, 아니면 그리슷도의 심장이 성배의 알레고리라는 건가요?"
  "필자는 양자를 다 옳다고 주장하고 싶은가 봐. 솔직하게 말해서, 나도 
뭐가 뭔지 모르겠네. 가라몬드 사장 얘기를 들어 봐야겠어."
  그래서 우리는 가라몬드 사장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는, 어느 것 하나도 
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원칙으로 세우고 검토하라고 했다.
  나는 그에게 항변했다.
  "하지만, 이 중에는, 버스 정거장 가판대 잡지에 나오는 주장까지 
되풀이하는 원고도 적지 않습니다. 이미 책을 낸 바 있는 필자도 남의 
주장을 베끼고, 별것도 아닌 것들이 권위있는 견해인 양 서로 인용하는 
겁니다. 말하자면 저희 주장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근거로 이암블리코스의 
<정수론>을 이용하는 정돕니다."
  "그렇다고 해서 독자들이 이해도 못 하는 책을 팔 수는 없는 거지요. 
우리 <너울 벗은 이시스> 총서의 논의는, 다른 책이 다루는 논의를 
정확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하지만 서로 인용하고 서로 논증한다면 그게 
곧 <참>이 되는 거 아닙니까? 독불장군의 독창성이라는 거, 그거 사실 
없는 겁니다."
  "우리로서는 어느 주장이 사실이고 어느 주장이 공론인지, 그걸 
모르겠습니다. 자문할 사람이라도 있으면 좋겠십니다만..."
  벨보의 말이었다.
  "어떤 종류의 자문이 필요한가요?"
  "글세요. 우리 시리즈 필자들같이 경솔해서는 안 되겠죠. 대신 그들의 
세계를 잘 아는 사람이어야겠고... 그러면서도 우리에게, <헤르메스 
계획>의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으면 좋겠지요. 르네상스 시대의 연금학을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면 이상적이겠지요."
  "그런 사람이라면 야코포 자네가 <성배>니 <성심>이니 하는 얘기를 
꺼내자마자 문을 쾅 닫고 나가 버릴 텐데?"
  디오탈레비가 끼어들었다.
  "설마 그러기야..."
  내 머리에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딱 맞는 사람이 하나 생각납니다. 진짜 박식한 사람입니다. 이런 종류의 
은비학을 광장히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고요.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대단히 고상하면서도 냉소적입니다. 브라질에서 만났습니다만, 지금쯤은 
밀라노에 있을 겁니다."
  "접촉하시오, 까소봉. 대접은 물론 당분간의 촉탁입니다. 저쪽의 요구에 
따라 이쪽의 대접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거요... 그리고 되도록 
<금속의 경이로운 모험>에서도 이용할 가능성을 적극 타진해 보도록 
하세요..."
  아글리에는, 내 연락을 반가워하는 것 같았다. 그는 암파로의 안부를 
물었다. 내가 끝났다는 암시를 던지자 아글리에는 아주 교묘한 말투로, 
쓸데없는 질문을 던져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 좋게 말하면 언제든지 언제든지 인생의 새 장을 펼칠 수 있어서 
젊음을 좋다고 하는 거 아니겠어요..."
  나는 편집 기획 이야기를 했다. 그는 관심을 보이고, 자기 집에서 우리를 
만나겠다면서 시간을 정해 주었다.
  <헤르메스 계획>이 발진한 순간부터 그날까지 나는 무수한 필자들을 
희생시키면서 신나는 나날을 보낸 셈이다. 그러니 지금은 어떤가? 그들이 
나에게 청구서 보낼 차비를 하고 있다. 나는, 우리가 끌어들이려고 하던 
벌과 다를 것이 없었다. 나는, 그게 무슨 꽃인지도 모르면서, 꾐에 빠진 
채로 그 꽃으로 날아들고 있었던 셈이다.
  
    46
  
  아글리에는 삐아찔레 수자 지역에 있었다. 세기말의 아르누보 양식에 
가까운 듯한 그의 집은 사람들의 눈을 피하려는 듯이 좁은 골목에 
들이밖혀 있었다. 줄무늬 양복 차림의 나이 지긋한 집사가 우리를 맞아 
작은 응접실로 안내하고는, 거기에서 백작을 기다리라고 한 뒤 안으로 
들어갔다.
  "진짜 백작이라는 거로군?"
  벨보가 속삭였다.
  "얘기하지 않았어요? 생 제르맹 백작의 화신이라고."
  "죽지 않고 화신하는 법이 어디에 있나? 방랑하는 유대 
인아하스에로스가 아닌 것은 확실한가?"
  이번에는 디오탈레비가 나지막한 소리로 물었다.
  "생 제르맹이 아하스에로스라는 설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또 그 소리." 
  아글리에가 들어섰다. 언제 보아도 말쑥했다. 우리와 악수를 나눈 그는 
먼저 양해를 구했다. 예정에 없던 사람의 방문을 받는 바람에 자기 
서재에서 맥빠지는 응대를 십여 분 더 계속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집사에게 커피를 들여오게 하고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양해를 구하고는, 
오래된 가죽 커튼을 열고 들어갔다. 두껍기는 했지만 가죽 커튼은 문이 
아니었다. 커피를 마시고 있으려니 옆방에서 잔뜩 흥분한 듯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우리는 처음에는 엿듣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고 부러 
큰소리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벨보가, 우리 대화가 오히려 저쪽의 
대화를 방해한다고 지적하는 바람에 음성을 낮추었다. 한동안 침묵이 
흐르더니 저쪽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디오탈레비는 자리에서 일어나 커튼 옆에 걸려 있는 17세기의 판화를 
감상하는 척하면서 저쪽의 얘기를 엿들었다. 판화에서는, 순례자들이 
동굴로 이어지는 일곱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벨보와 나도 판화 앞으로 
다가갔다.
  "이것 봐요. 나는 사람 사는 집에다 악마를 보내지는 않아."
  이렇게 말하고 있는 사람은 분명히 브라만티였다.
  그날 우리는 브라만티 교수의 외양만 맥 같은 게 아니라 목소리조차도 
맥의 목소리와 비슷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 다른 목소리는 우리가 들어 본 적이 없는 목소리였다. 프랑스 억양이 
심한 말투, 신경질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날카로운 어조... 이따금씩 
둘을 달래는 듯한 아글리에의 부드러운 음성이 섞여 들었다.
  "이것들 보세요. 내게 판정을 부탁하는 영광을 내렸으면 내 말도 좀 
들어야지요. 그리고 먼저 지적해 두거니와, 삐에르, 당신이 좀 경솔했어요. 
적어도 그런 공개 서한은..."
  프랑스 억양이 아글리에의 말허리를 잘랐다.
  "<무슈 르 꽁뜨(백작)>, 그건 지극히 간단한 문제올시다. 여기에 있는 
브라만티 씨 말인데요, 브리만티 씨는 우리가 공히 인정하는 잡지에다 
글을 쓰고 있는데, 바로 이 글에서 특정 <루키페로스(악마) 파>를 상당히 
강한 어조로 비아냥 거리고 있습니다. 그 특정 <루키페로스 파>가, 
성찬에서의 그리스도 실재설을 믿지 않으면서 성체만 탐을 내는가 하면 
성체를 금으로든 은으로든 바꾼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거기까지는 좋다고 
칩시다. 루키페로스 파 중에서도, 내가 감피 <타우로볼리아스떼>(고대 
미트라. 혹은 퀴벨레 비의에서 제물인 황소를 잡고, 그 피를 입문자에게 
뿌리는 제관.)와 <프쉬코폼포스>(영혼의 안내자)로 봉직하고 있는 <엘리제 
루키 페로스 파>가 유일하게 공인된 루키페로스 파라는 것이 세상이 다 
압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가 그렇게 저속한 악마주의에 빠지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그 귀한 성체로 시래기 죽을 만들지 않는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공개 서한에서 나는, 우리 교파는 <그랑 
떼낭시에 뒤 말>(위대한 악의 제왕)을 섬기는 <비외 죄 
사따니스뜨>(진부한 악마주의자.)의 무리도 아니고, 우리는 성체 용기든 
<세쥬블>(사제복.)이든 로마 교회의 흉내도 일체 낸 적이 없다는 것을 
밝혔을 뿐입니다. <오 꽁트레르>(오히려.). 우리야말로 <팔라디앙>(지혜의 
여신 팔라스 아테나를 섬기는 무리.)에 속한다는 건 세상이 다 압니다. 
우리에게 루키페로스는 선의 원리일 뿐입니다. 굳이 말하자면 
루키페로스가 그렇게 말리는데도 이 세상을 창조한 <아도나이>(히브리 
인들이 하느님을 완곡하게 부르는 말.) 야말로 악의 원리인 것입니다..."
  "내가 그런 논조로 쓴 것은 사실이오. 내가 다소 경솔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인정하지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당신네들이 마술을 써서 나를 
협박해도 좋은 것은 아니오."
  브라만티의 노기 띤 음성이 들려 왔다.
  "아아! 그건 메타포어에 지나지 않아요. 당신야말로 내게 
<앙부뜨망>(주문)을 건 장본인이 아니오?"
  "저런, 나와 내 형제들에게 시간이 남아나서 꼬마 악마나 내돌리면서 
하느작거리겠군요. 우리가 실천하는 것은 <고등 마술의 교리와 의식>이오. 
우리는 요술쟁이들이 아니오."
  "무슈 르 꽁뜨... 저의 하소연을 좀 들어 보시오. 시뇨르 브라만티가 
부트루 수도원장과 교우하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이 주교가 
하느님을 짓밟는 풍신으로 발바닥에다 십자가 문신을 하고 다닌다는 것은 
백작도 익히 아시지요? 일주일 전에 나는 소위 주교라는 자를 < 뒤 
상그레알 > 서점에서 만났습니다. 이자가 교활하게 웃으면서... 이자에세는 
그렇게 웃는 버릇이 있습니다만, 하여튼 교활하게 웃으면서 내게, 
<양일간에 소식이 갈 겁니다.> 이러는 겁니다. 양일간에... 이게 무슨 
뜻이겠어요? 이틀 뒤부터 악마의 방문이 시작된 겁니다. 잠자리에 누우면, 
절퍼덕, 소리가 나게 초콜릿 덩어리가, 물렁물렁한 초콜릿 덩어리가 얼굴로 
떨어지는 겁니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싶대요..."
  "당신 슬리퍼가 얼굴에 떨어졌던 모양이군."
  "그래요? 그렇다고 칩시다. 그러면 왜 내 방에 있는 골동품은 왜 
날아다닙니까? 증류기가 왜 내 정수리로 떨어지고, 바포메트 석고상이 왜 
바닥으로 떨어집니까? 왜 돌아가신 선친께서 꿈에 나타나고, 벽에 세 개의 
피빛 문자가 그려진답니까? 형언할 수조차 없이 사위스러운 일들이 수도 
없이 일어났어요. 백작께서는 잘 아시겠지요? 불과 일년도 안 된 일입니다. 
고 모슈 그로스가 똥으로, 이런 표현을 용서하십시오만, 하여튼 똥으로 
찜질 약을 만든다고 수도원장을 비난하자, 수도원장은 무슈 그로스에게 
사형을 선고했지요. 그리고 두 주일 뒤에, 불쌍한 무슈 그로스는 의문의 
죽음을 당사지 않았습니까? 이 부트루 수도원장은 독약을 다루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리옹의 마르띠니스트> 수도회가 소집한 명예 
배심원들이 그랬다더군요."
  "이런 중상 모략이 어디 있소?"
  브라만티가 고함을 질렀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까? 그런 재판에서 상황 증거로 
채택되었는데도 딴 소리를 할 참이오?"
  "그래서 재판정에서는, 그로스 씨가 간경화증의 말기 증상을 보이는 
알코올 중독자였다는 걸 폭로하는 증인 하나 없었던 거군요..."
  "유치한 소리는... 마술이라고 하는 것도 자연의 순리를 좇는 법이오. 
간경화증 환자를 죽일 때는 간경화증으로 그 환자를 공격하는 법이오. 
흑마술의 <알파베타>인데 그것도 몰라요?"
  "그렇다면 간경화증 환자는 모두 부트루 수도원장 손에 죽음을 당하는 
것이겠구만..."
  "그렇다면 지난 두 주일 동안 리옹에서 있었던 일이나 좀 얘기해 
보시지. 성별된 교회가 더럽혀지고, <테트라그 라마톤>가 성체 노릇을 
하고... 부트루 수도원장은 십자가가 거꾸로 그려진 붉은 망토를 걸치고 
나왔고, 원장의 개인 점성술사인 마담 올꼬는 이마에다 삼지창을 그리고 
나와서 설쳤고, 비어 있던 성찬배에는 저절로 피가 고이고, 원장은 신도들 
이에다 침을 밷었다는데... 이건 사실이오, 아니오?"
  "당신은 위스망스의 책을 너무 읽은 모양이구료. 그건 위카 교회나 
드루이드 승려 양성소의 문화 행사나 가장 행렬에나 나오는 것이오."
  브라만티는 어이가 없는지 웃었다.
  "아주 베니스의 사육제라고 하시지 그래..."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브라만티가 프랑스 인에게 달려들었던 
모양이었다. 아글리에가 브라만티를 저지하는 것 같았다.
  이어서 프랑스 인의 음성이 들려 왔다.
  "보셨지요, 백작께서도 보셨지요? 그리고 브라만티 당신, 몸조심해! 당신 
친구 부트루 원장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안부도 좀 여쭙고... 그자가 지금 
병원에 있다는 거 모르지? 누가 그렇게 절단을 내더냐고 물어보라고. 나는 
당신들이 쓰는 유치한 마술은 안 써. 그러나 나도 조금 알기는 해. 내 집이 
잡귀로 들끓는다는 걸 안 뒤로 나도 마루에다 방부를 그렸다고... 영험이 
있을 거라고는 믿지 않았는데, 당신네들이 보낸 잡귀에는 기가 막히게 
듣더군. 카르멜 수도회의 수도복을 벗고 방부로 역습을 했지. 수도원장 그 
친구, 혼이 좀 났을 걸."
  "보시오, 백작, 보시라고요. 이자야말로 마술을 부리는 자요."
  브라만티의 고함 소리가 들려 왔다.
  아글리에가 정중하면서도 단호한 어조로 타일렀다.
  "어지간히들 하시고 내 말 좀 들어 보세요. 당신들은 일찍이 사라진 
이런 제의를 인식 차원에서 재조명하는 일을 얼마나 귀중하게 여기고 
있는지 잘 알고 있을 것이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나는, 교리가 다르기는 
하나 루키페로스 교파나 악마 신앙을 같은 정도로 존중하는 것이오. 
당신들은 내가 무신론자라는 것도 알고 있을 것이오. 하지만 결국, 우리는 
정신적으로는 같은 기사단에 소속되어 있어요. 그러니 당부하거니와 
최소한의 연대감이라도 가져 달라는 거요. 그런데. 개인적인 불화에 
<암픅의 제왕>을 이용하다니, 이 무슨 유치한 짓거리들이오? 이거야말로 
은비주의자들이나 하는 짓거리들 아니오? 당신네들은 싸구려 프리메이슨 
단원들처럼 굴고 있으니... 한심한 일이오. 솔직히 말해서 부트루스는 벌써 
우리 체제를 이탈했어요. 그러니 브라만티, 당신 혹 그 사람 만나거든, 
보이토의 '메페스토펠레' 소도구 같은 잡동사니는 고물 장수에게 팔아 
버리라고 하시오." 
  "지당하신 말씀. 당연히 고물 장수에게 팔아 버려야지요."
  프랑스 인이 빈정거리고 있었다. 
  "이 일을  큰 맥락에서 짚어 봅시다. 지금까지 우리 사이에서 이른바 
전례의 절차 문제를 두고 논쟁이 있어 왔고, 이 때문에 양쪽 모두 신경을 
곤두세웠던 것은 사실이오. 그러나 두더지가 파놓은 흙을 산이라고 하지는 
마시오. 삐에르 당신, 당신 집 안에 잡귀가 들어와 있었단는 말을 내가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오. 그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니까...하지만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보았더라면 그게 폴터가이스트 의 장난이라는 걸 
눈치챌 수 있었을 것이오."
  "나도 그런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행성이 서로 접근하고 
잇는시점 아닙니까..."
  브라만티의 음성이었다. 
  "됐어요. 악수해요. 동지들이니 포옹도 하고..."
  아글리에의 목소리.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 오는 것으로 보아 서로 사과하는 모양이었다.
  "...비의를 전수하기 위해서는 먼저 민간 전승에 접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것도 믿지 않는 프랑스 <대동방 화사>의 직원들에게도 입문 의례 
같은 것은 있는 모양입니다."
  브라만티의 소리였다.
  "물론이지요...의례라는 거, 그거 중요하지요."
  삐에르의 음성도 들려 왔다.
  "하지만 지금은 크로울리의 시대가 아니오. 아시겠지요? 이만 합시다. 
다른 손님이 기다리고 있어서..."
  아글리에의 결론이었다.
  우리는 재빨리 안락 의자로 돌아가, 태연한 얼굴로 아글리에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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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분 뒤 아글리에가 돌아와서 우리에게 말했다.
  "용서해 주시오. 아무리 인심 좋게 말해도 유감스럽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짜증스러운 입씨름을 해결하고 오느라고 늦었어요. 내 친구 까소봉도 
알다시피 나는 종교사가를 자처하는 사람인데, 이 때문에 꽤 많은 
사람들이 조언을 듣는답시고 쳐들어오고는 하지요. 내 학식보다는 상식이 
필요해서 쳐들어오는 것일 테지만 ... 그런데, 마음 공부의 전문가들 중에 
성격 이상자가 종종 발견되니, 참으로 이상한 일도 다 있지요. 초월적인 
것에서 위안을 찾으려는 보통 사람이나, 약간의 우울증 소질을 타고난 
사람 이야기가 아니라 심오한 학식과 지적으로도 세련된 사람들 
이야깁니다. 이런 사람들 중에 밤마다 기괴한 몽상에 빠진다든가 전통적인 
진리와 기묘한 만화경의 세계를 분간하지 못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것이지요. 조금 전에 내가 만나고 온 사람들도 유치한 넘겨짚기로 
입씨름을 벌이고 있었지요. 통탄스럽게도, 이런 일들은 자칭 최고의 지성인 
그룹에도 생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렇고... 내 작은 서재로 
가실까요? 좀더 편한 분위기에서 느긋하게 이야기를 나누기로 합시다..."
  그는 가죽 커튼을 들어올리고 응접실에 이웃한 서재로 우리를 안내했다.
  <작은 서재>라는 말에는 어폐가 있었다. 서재는 넓었다. 서재 벽에는, 
장정이 훌륭한 고서가 빼곡이 들어찬 고급스럽고 구풍스러운 서가가 
즐비했다. 고서보다 더 우리 눈길을 끌었던 것은 무엇인지 알아보기 힘든 
물건<보석이었던가>이 가득 든 작은 유리 상자였다. 유리 상자 안에는 
작은 동물도 들어 있었다. 박제한 것인지, 방부한 것인지, 아니면 섬세하게 
복제한 것인지 겉으로 보아서는 알 수 없었다. 세로로 창살을 대고 
다이압몬드 모양의 투명한 호박색 유리를 끼운 이중 유리창을 통해 은은한 
빛줄기가 들어와 방안을 물들이고 있었다. 창을 통해 들어온 빛은 여러 
가지 서류가 가득 놓인 검은 마호가니 책상 위에서 커다란 전등의 불빛과 
뒤섞이고 있었다. 고색 창연한 도서관 열람대에나 있을 법한 전등의 
초록색 유리 갓은 책상 위에 놓인 책에 타원형 불빛을 던지면서 주변에 
푸르스름한 그늘을 지어 내었다. 창을 통해 들어온 햇빛이나 전등이 
던지는 불빛은 둘 다 자연광이라기보다는 인공적인 빛에 가까웠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런 빛은 천장의 다채로운 장식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찬장은 돔꼴로, 외면상으로는 장식적인 네 개의 원주가 떠받치는 
형국을 하고 있었다. 원주에는 금박을 붙였을 터인데도 색깔은 벽돌색에 
가까웠다. 천장에는 일곱 구힉으로 나뉜 천장화가 그려져 있었다. 입체 
화법으로 그려진 천장화 때문에 방 전체의 분위기가 어쩐지 사자가 안치된 
교회당 같았다. 어쩐지 죄 의식이 고를 들고 우울한 관능이 되살아 나는 
그런 분위기였다.
  아글리에는 서재를 둘러보고 있는 우리에게 내부 장식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의 소극장올시다. 시각적인 백과 사전이라고 할까, 이 세사으이 단편 
같은 것들을 펼쳐 놓은 듯한, 말하자면 르네상스 시대의 환상적인 수법을 
빈 양식이지요. 사람 사는 집이라기보다는 기억의 장치 같은 것입니다. 
여기에 이쓴ㄴ 그림치고, 다른 이미지와 결합하면서 우주의 신비를 
체현하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만뚜아 공작의 궁전에 있던 것을 본떠 그린 
저 인물화를 보세요. 이른바 <36장로>, <천상의 대성들>이랍니다. 누가 
모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 훌륭한 복제를 손에 넣고 나서 그 
전통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그 그림과 상징적으로 조응할 만한 작은 
물건들을 사서 유리 상자에 모으기 시작했지요. 유리 상자에 든 물건들은 
우주의 근본적인 요소, 즉 지수화풍의 사대를 상징합니다. 박제하는 내 
친구의 걸작인 귀여운 살라만드로스가 여기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섭니다. 
그리고 이것은 헤로의 <아에올리필레>(기원전 2세기에 고안된 증기에 
의한 회전 장치)를 섬세하게 축소 복제한 것입니다. 골동품은 아니고, 
후대의 작품입니다. 이 구체속에는 공기가 들어 있는데, 알코올 램프로 
구체를 가열하면 그 속에 있던 공기가 이 길쭉한 주둥이를 빠져 나가면서 
구체를 회전시키게 되어 있지요. 신기한 장치 아닙니까? 옛 문헌을 보면 
이집트의 신관들도 사원에 이런 걸 두고 있었다더군요. 이 싸구려 기적을 
구경시키면 어리석은 백성은 이것을 경배하기까지 했더랍니다. 그러나 
기적이라고 하는 것은 황금률에 존재하는 것인데, 황금률이 무엇인가요? 
기적을 창조하는 단순한 메커니즘을 통제하는, 공기와 불이라고 하는 
기본적인 법칙에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닌가요. 고대인들과 연금학자들은 
이것을 알았을 터인데 현대의 사이클로트론의 기술자는 이걸 모릅니다. 
이것이 내가 이 기억의 소극장을 자주 바라보는 소이연입니다 .과거 
위대한 학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대극장의 꼬마 복제품을 가만히 바라 
보고 있으면 얻는 것이 많습니다. 나는 압니다. 나는 이른바 학식 있는 
사람들 이상으로 알고 있습니다. 땅에서 일어나는 일은 곧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 이상으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없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굵고 모양이 이상한 쿠바 산 여송연을 권했다. 여송연은 
꼬이고 휘어져 있었다. 맛은 탄성이 절로 나올만했다. 디오탈레비가 서가 
쪽으로 다가가자 아글리에가 말을 이었다.
  "보시다시피 장서의 양은 보잘것없습니다. 2백 권 정도 될까요? 내 집에 
가면 더 있지요. 하지만, 이렇게 말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여기에 있는 
책에는 다 나름의 강점과 가치가 있답니다. 서가에도 무작위로 꽂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책의 주제는 천장화 이미지와, 상자 속에 든 물건과 
조응하게 되어 있습니다."
  디오탈레비가 그 중의 한 권을 뽑아 보려는 듯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 뽑아 보세요. 그건 아타나시우스 키르허의 '오이디푸스 
아에귑티아누스'(이집트의 오이디푸스) 랍니다. 아시겠지만 키르허는 
호라폴론 이후 최초로 상형 문자의 해독을 시도한 사람입니다. 대단히 
매력적인 인물이지요. 나의 이 서재도 그 사람이 만들었다는 경이의 
박물관 같았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 박물관은, 지금은 유실되었거나 
자료가 풍비박산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복원은 불가능합니다. 어떻게 
찾아야 할지 모르는 시대 앞에는 영원히 나타나지 않는 법입니다. 
키르허라는 양반... 대단한 재담가이기도 했던 모양이에요. 이 상형 
문자라는 것을, <신성한 오시리스의 은총은 거룩한 의식을 통해서, 
수호신들과의 연대를 통해서 마련되는 것>이라고 해독했을 때는 얼마나 
자랑스러웠을까요? 그런데 뒤를 이어서 사기꾼 샹뽈리옹이 나타납니다. 내 
말 믿으세요. 생뽈리옹, 이거 가증스럽고, 유치한 허영심의 덩어립니다. 
이자가 나타나서는, 상형 문자는 파라오의 이름과 일치한다고 주장하게 
되지요. 현대인들이라는 거, 신성한 상징을 오염시키는 데는 뭐가 있는 
것들입니다... 아, 그거요? 그건 별로 귀한게 아닙니다. 메르세데스 벤츠 한 
대 값도 안 될걸요. 하지만 이걸 보세요. 쿤라트가 쓴 '암피테아트룸 
사피엔티아에 아에테르나에(영원하 예지의 원형 극장)'의 초판으로 
1595년에 나온 겁니다. 세계에 두 권밖에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세 권째 희귀본이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것은 
부르네티우스가 쓴 '텔루리스 테오기아 사크라'(지구 신성론)의 
초판이랍니다. 밤중에 이 책의 도판을 보고 있노라면 신비스러운 폐쇄 
공포증이 느껴지지 않을 때가 없답니다. 이 지구의 심원함... 사람들은 이 
지구의 심원함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무지하답니다... 디오탈레비 
박사께서는 비주네르의 '수비론'에 나오는 히브리 문자에 관심이 있으신 
모양이군요. 그렇다면 이 책을 한번 보시지요. 크리스티안 크노르 폰 
로젠로트의 '카발라 제누다타'(너울 벗은 카발라' 초판입니다. 금세기 초 
철면피 맥그리거 매더스 손에 일부만 조악하게 영어로 번역이 되기는 
했지요... <황금의 새벽 교단>이라고, 영국의 탐미주의자들을 완전히 
사로잡았던 비밀 결사 아시지요? 은비학에 관한 사료를 날조할 수 이쓴ㄴ 
엉터리 비밀 결사였으니 만티, <스텔라 마투티나(새벽별 교단)>에서 영국 
병에 들어 있던 특정 부류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는 악마를 부르는 것도 
마다하지 않던 알레이스터 크로울리의 악마 교단에 이르기까지 저질 
교리를 유포할 수 있었을 겁니다. 이런 공부를 하다 보면 별별 악당도 다 
만납니다. 이 분야의 책을 출판하다 보면 여러분도 직접 경험하시게 될 
겁니다."
  벨보는, 아글리에의 말을 끝나기가 무섭게 본론을 꺼냈다. 그는, 
가라몬드 사장이 비의적인 현상에 관한 책을 한 해에 몇 권씩 출판하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비의>라고 하셨나요?"
  아글리에가 웃으면서 물었다. 벨보는 얼굴을 붉혔다. 
  "연금술이라고나 할까요..."
  "아, 연금술..."
  아글리에는 또 웃었다.
  "제가 용어 선택을 잘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제가 어떤 분야 이야기를 하는지 잘 아실 것입니다."
  아글리에는 여전히 웃으면서 말을 풀어 나갔다.
  "분야가 아닙니다. 지식인 것이지요. 여러분이 하고자 하는 것은 출판을 
통해서 아직은 오염되지 않은 지식을 개관하는 것이지요. 여러분에게는 
그게 단지 편집 기획상의 선택일 지 모르겠지만 - 내게는 이 일에 
관여하게 될 경우가 되겠습니다만 - 내게는 진리의 탐구, <성배의 
탐색>이 될 것입니다."
  "어부가 그물을 던지면 고기는 안 올라오고 빈 조개 껍질이나 비닐 
주머니 같은 것만 올라올 때도 있듯이, 이 일이 시작되면 우리 가라몬드 
출판사로도 쓰레기 같은 원고가 많이 들어올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기로는 
엄정한 선자가 있어서, 알곡과 가라지를 가려 주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가라지 중에서도 흥미로운 주제를 다루는 원고가 있으면, 우리와 대단히 
가까운 또 하나의 출판사가 있는 만큼 필자를 그쪽으로 돌릴 수도 
있습니다... 이런 선별 작업에 따른 사례는 당연히 적절한 수준에서 지급될 
것이고요..."
  "하느님이 보우하사 내게 재산이 좀 있는 것이 다행이군요. 나는 어쩌면 
좀 약은 재산가인지도 모르겠어요. 나는, 자료를 검토하다가 쿤라트 같은 
저자의 원고를 발굴한다거나, 멋진 박제 살라만드로스를 만난다거나 일각 
고래의 뿔이라도 하나 건진다면 간단하고 기분좋은 거래를 통해 여러분이 
내게 줄 터인 10년간의 고문역 사례비 이상의 돈을 만질 수도 있답니다. 
일각 고래의 뿔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입니다만 나는 그걸 차마 이 방에다 
전시하지 못하는데, 비엔나의 박물관에서는 뻔뻔스럽게도 이걸 유니콘의 
뿔이라면서 전시하고 있더군요. 원고를 겸허한 마음을 검토해 보지요. 
아무리 진부한 원고라도 진리의 불꽃이 튀지 못한다면 하다못해 허위의 
불꽃이라도 튀는 법인데 이 양자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지겹게 
여기는 것은 지극히 평범한 원고를 검토할 경우이겠는데, 그때는 여러분이 
나의 지겨움을 보상해 주어야 합니다. 연말이 되면 간단한 청구서를 
보내게 될 커인데, 그때의 dr수는 내가 얼마나 지겨웠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만 금액이라는 것은 어차피 상징적인 것입니다. 그게 너무 무리한 
액수라고 판단되면 포도주 한 상자만 보내 주어도 족하겠지요."
  벨보는 뛸뜻이 기뻐했다. 불평 불만투성이의 굶주린 필자만을 상대하던 
그에게 아글리에는 구세주와 같았을 것이다. 그는 가지고 간 가방을 열고 
두꺼운 원고 뭉치를 꺼냈다.
  "너무 낙관하실 일만은 아닙니다. 가령, 이 원고를 좀 보십시오. 
대부분이 이런 식입니다."
  아글리에는 원고 뭉치를 받아 들고 목차를 일별했다.
  "'피라미드의 비밀'이라... 목차를 어디 좀 보자... 
<피라미디온(소피라미드)>... 카나번 경의 죽음... 헤로도투스의 증언..."
  아글리에는 원고를 덮으면서 물었다.
  "... 여러분은 이 원고 읽어 봤어요?"
  "대충 훑었습니다."
  벨보가 대답했다.
  아글리에는 원고 뭉치를 벨보에게 돌려 주면서 말했다.
  "... 내가 이 원고를 한번 요약해 보지요. 내가 제대로 하고 있나 어디 
한번 보세요..."
  그는 책상머리에 앉더니 조끼 주머니에서 내가 브라질에서 본 적이 있는 
예의 그 정제가 든 상자를 꺼내더니, 조금 전에 애장서를 애무하던 그 
손길로 뚜껑을 돌리는 한편 천장화를 응시하면서, 오래 전부터 알고 잇던 
책을 낭독하듯이 말을 이어나갔다.
  "... 그 원고의 필자는 틀림없이, 1864년 피아찌 스미드가 발견한, 
피라미드에 깃들어 있는 상징적인 계수를 언급할 것이오. 소수점 이하는 
반올림해서 내가 말해 볼 테니 잘 들어 보세요. 사실 이 나이가 되면 
기억력이 쇠퇴하거든... 피라미드의 바닥은 사각형인데, 가로 세로가 각각 
232미터입니다. 피라미드의 원래 높이는 148미터... 이것을 이집트의 신성한 
큐비트 단위로 환산하면 366큐피트... 윤년의 날 수와 일치하지요. 피아찌 
스미드에 따르면 피라미드 높이에 10의 9승을 곱하면 지구와 태양간의 
거리가 됩니다. 1억 4천 9백 50만 킬로미터이니까요. 그러나 현대인이 
계산해 낸 수치가 반드시 맞는다고 할 수만은 없으니까, 놀라운 건 놀라운 
거지요. 그리고 바닥의 한 면 길이를 돌 하나의 높이로 나누면 365가 
나옵니다. 바닥의 둘레는 931미터... 이걸 높이의 2배수로 나누면 3.14... 
원주율이 됩니다. 놀랍지 않아요?"
  질려 버린 벨보가 쓴웃음을 지었다.
  "놀랍군요... 아니 어떻게 그렇게 다 아시는지요..."
  "여보게, 야코포, 아글리에 박사의 말씀을 끊지 말게..."
  디오탈레비가 참견했다.
  아글리에는 고맙다는 표시로 고개를 까딱했다. 그는 말을 하면서 줄곧 
천장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내가 보기에 그의 시선은 일정한 궤도를 
지니고 있는 것 같았다. 말하자면 그는 기억 속에서 수치를 끌어내는 
척했지만 사실은 천장화에 쓰여진 것을 읽는데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는 것이다.
  
    48
  "모르기는 하지만 이 원고의 필자는 쿠프 왕의 피라미드 높이는 네 바닥 
면 길이를 합한 수치의 제곱근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 이 수치는 피트 
단위로 환산해야 합니다. 피트 단위야말로 고대 이집트와 피브리 큐비트에 
가까우니까요. 미터 단위로는 안 됩니다. 미터 단위라고 하는 것은 현대에 
발명된 추상적인 단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집트의 큐비트는 1.728피트에 
해당합니다. 대피라미드의 정확한 높이를 산출하기 어려울 때는 
피라미디온을 이용하면 됩니다. 피라미디온이란, 대피라미트 꼭대기에 
뾰족탑으로 얹힌 작은 피라미드를 말하는데, 대개의 경우 햇빛을 받으면 
빛을 내는 금이나 여타 금속으로 만들어집니다. 이 피라미디온의 높이에 
대피라미드의 높이를 곱하고, 여기에서 나온 수치에다 10의 5승을 곱하면 
지구 둘레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피라미드 네 바닥 면 길이를 합한 
수치에 24의 3승을 곱하고 이를 2로 나누면 지구의 반경이 됩니다. 더 
해볼까요? 피라미드 바닥 면적에 96을 곱하고, 다시 10의 8승을 곱하면 
196,810,000 평방 마일이 되는데, 이 값은 지표 면적과 동일합니다. 내 말이 
맞지요?"
  벨보는 놀라움을 나타낼 때면 영화 '양키 두들 댄디'에서 주이공 제임스 
케그니가 하던 대사, <아임 플래버게스티드!>(놀라 버렸네!)를 영어 
그대로 인용하기를 좋아했다. 아글리에의 말이 끝났을 때도 벨보는 똑같은 
말을 했다. 아글리에도 이 솔직한 찬사에 만족하는 것으로 보아 구어 
영어를 알고 있는게 분명했다. 아글리에가 말을 이었다.
  "... 보세요. 필자가 누구든 상관없어요. 누구든 피라미드의 신비에 관한 
책을 쓴다면, 이제는 어린아이까지 다 아는 이런 내용을 다룰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새로운 것을 추가 한다면 그거야 깜짝 놀랄 일이겠지요."
  "그렇다면 이 필자는, 이미 확인된 진실을 되풀이하고 있는데 지나지 
않는다는 것인지요?"
  아글리에가 웃었다. 그는 우리에게 그 이상하게 생긴 여송연을 다시 
권했다.
  "... 진실이라고 했나요? <쿠이두 에스트 베리타스?>(진실이라는 게 
무엇이냐?)... 내 친구가 오래 전에 하던 말이오. 사실이 되었든 진실이 
되었든, 이것의 대부분은 헛소리예요. 어디 한번 볼까요? 피라미드 바닥의 
네 변 길이를 높이의 두 배로 나눕니다. 그리고 반올림을 하면 원주율이 
나오고 반올림을 안 하면 3.1417254가 나옵니다. 미세한 수치지만 이건 
중요한 차입니다. 그리고 피아찌 스미드의 제자 중에 플란더스 페뜨리라는 
사람이 있어요. 스톤헨지를 측량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어느 날 피아찌 
스미드가 왕묘 전실의 화강암을 쪼고 있는 걸 본 적이 있답니다. 피아찌 
스미드가 왜 그랬겠어요? 자기 계산이 맞다는 걸 억지로 입증시키려고 
그랬던 거지요... 뜬소문인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피아찌 스미드는 이런 
식의 석연찮은 짓을 많이 한 사람이에요. 넥타이 매는 시대에 
멋부리느라고 크라뱃을 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헛소리에는 틀림없는 사실도 더러 끼어 있기는 하지요. 함께 
창가로 가실까요..."
  아글리에는 과장된 동작으로 셔터를 열고는 손가락질을 했다. 좁은 
골목과 넓은 거리가 만나는 모퉁이에는 복권을 파는 곳인 듯한 가판대가 
있었다.
  "... 내려가서 저 가판대를 한번 재어 보시겠어요?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어요. 여기에서도 다 알 수 잇으니까... 계산대 길이는 149센티미터, 다시 
말하면 지구와 태양간 거리의 천억 분의 일이 됩니다. 뒤쪽의 높이는 
176센티미터, 그걸 유리창 너비인 56센티로 나누면 3.14가 나옵니다. 
앞면의 높이는 19센티미터, 그리스의 월력의 연수와 일치합니다. 앞면의 
양쪽 모서리와 뒷면 모서리의 높이를 합하면 190 곱하기 2 더하기 176 
곱하기 2... 이 값은 732... 이것은 곧 프랑스 군이 뽀아띠에에서 사라센 
군을 격파한 승전의 해가 딥니다. 계산대의 두께는 3.10센티, 유리창 
배내기의 넣ㅂ이는 8.8센티미터, 소수 앞의 자연수를 거기에 대응하는 
알파벳으로 바꾸면, 다시 말해서 3 대신에 세 번째 알파벳인 <C>, 8 
대신에 여덟 번째 알파벳인 <H>를 넣으면 <C10H8>, 득 나프탈렌의 화학 
방정식이 됩니다."
  "굉장하군요. 가판대를 직접 측정하신 것인가요?"
  "아니오. 내가 말하는 수치는 장 삐에르 아담이라는 사람이 다른 
가판대를 재어서 얻은 수치랍니다. 하지만 이 세상의 복권 가판대라는 
가판대는 모두 비슷한 크기로 되어 있을 것이라는 게 내 생각입니다. 
숫자를 가지고 할 수 있는 장난은 무궁무진합니다. 신성한 수 <9>를 
가지고 장난을 해볼까요? 여기에다 카르타고가 멸망한 운명적인 해 146을 
곱하면 1314가 됩니다. 자끄 드몰레가 처형당한 해, 나처럼 성당 기사단의 
전통을 중히 여기는 사람에게는 중요한 연대가 됩니다. 어떻게 그런 
결론에 이르게 되느냐고요? 1314를 2나 3으로 계속 나누어 나가면서 우리 
논리에 필요한 수를 찾으면 되는 거지요. 가령 3.14의 배수인 6.28로 
1314를 한번 나누어 볼 수도 잇지요. 결과는 209... 페르가몬의 왕 아탈로스 
1세가 로마에 대항하여 반마케도니아 동맹을 결성한 해입니다."
  "그렇다면 수비학이라는 걸 믿지 않는다느 말씀이신가요?"
  숫자에 매달리기를 좋아하던 디오탈레비가 실망했다는 어조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건 아니오. 나는 숫자에 깊은 의미가 숨어 있다고 믿은 사람이에요. 
나는 우주야말로 여러 숫자간에 이루어지는 조응 관계의 교향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숫자가 상징하는 비밀을 깨치면 특별한 지혜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하늘과 땅이 상호 조응한다면, 피라미드가 
되었든 가판대가 되었든 인간이 만드는 모든 것은 알게 모르게 우주의 
조화를 반영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어요? 그런데도 이른 바 
피라미드 학자들은 복잡하기 짝이 없는 방법을 써서, 눈밝은 사람들에게는 
이미 오래 전에, 그리고 확연하게 알려진 사실을 새롭게 발견해 내지요. 
연구나 발견의 논리는 매우 복잡합니다. 왜냐? 과학의 논리를 좇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지혜의 논리는 발견을 요하지 않아요. 왜냐? 기지의 
사실이니까...당연한 것을 증명할 필요가 있어요? 만일에 거기에 무슨 
비밀이 있다면 허투루 발견될 그런 비밀은 아닐겁니다. 모르기는 하지만 
문제의 원고는, 이집트 인들이 전기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종래에 확립된 이론을 또 한차례 장황하게 늘어놓고 있을 테지요..." 
  "참으로 놀랍습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놀라울 것도 없지요. 이집트 인들은 전기에 훤하기가 마르코니 뺨쳤을 
겁니다. 방사능 같은 건 기초 과목이었을 테고요. 재미있는 얘기 하나 
할까요? 이집트 인들이 원자력을 이용했다고 가정하면, 전기설로는 도무지 
설명이 안 되는 투탕카멘 왕의 저주도 설명이 쉬워집니다. 이집트 인들은, 
피라미드에 쓰인 그 큰 바위를 어떻게 들어올려을까요? 전기적인 충격을 
이용했을까요? 핵분열로 공중에다 날려을까요? 아닙니다. 이집트 인들은 
중력을 제거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을 겁니다. 말하자면 물체를 
부양시키는 비밀을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얘기죠. 부양력, 이건  또 다른 
형태의 에너지랍니다... 칼데아의 제관들이 소리만으로 신성한 기계를 
작동시켰다는 기록이 있고, 카르나크와 테베의 제관들 역시 육성으로 신전 
문을 여닫았다는 전설이 있어요. 이게 바로 <열려라, 참깨> 전설의 원형이 
아니겠어요?"
  "재미있군요."
  "내 생각은 이래요. 전기, 방사능, 원자력... 눈 밝은 비법 전수자들 눈에 
이런 것들은 은유 아니면 표면적인 가면, 공인된 거짓말에 지나지 않을 
거요. 좀더 높게 평가해 준다면, 인류가 일찍이 상실해 버린 어떤 힘을 
찾는 데 필요한 정서적 대용물 같은 것이었을 테죠. 비법의 전수자들은 
지금도 이 힘을 찾고 있고, 결국은 찾게 될 거예요. 이게 혹시..."
  아글리에는 잠시 망설인 끝에 가만히 덧붙였다. 
  "...지자기류가 아닐까 몰라..."
  "뭐라고요?"
  우리 중 누군가가 물었다. 누가 물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글리에는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모르셨군... 여러분의 필자 중에 내게 재미있는 얘기를 들려줄 필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죠...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좌우지간 우리는 
손을 잡은 겁니다. 지금까지 한 헛소리는 늙은 학자의 넋두리였거니 
하세요."
  작별의 악수를 나누는 참인데 집사가 들어와 아글리에에게 귀엣말을 
했다. 
  "아, 그 친구가 오셨어? 깜박 잊고 있었네. 잠깐만 기다리시라고 하게. 
아니, 거실 말고 <터키 살롱>에서..."
  <친구>라고 불린 사람은 그 집의 구조를 익히 알고 있는 사람임에 
분명했다. 서재 문간에 있던 <친구>는 우리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노을 
빛을 받으며 아글리에에게 다가가더니 뺨을 톡톡 건드리면서 속삭였다. 
  "시몬, 밖에서 기다리게 놔두실 생각이신 건 아니겠죠?"
  놀랍게도 <친구>는 로렌짜 펠레그리니였다. 
  아글리에는 옆으로 약간 몸을 일으키더니 로렌짜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 
우리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아름다운 나의 소피아, 당신은 언제든 대환영이야. 당신이 들어서면 집 
안이 훤해지거든. 이 손님들과 작별 인사를 하느라고 그랬어."
  로렌짜는 우리 쪽으로 돌아서면서 밝은 얼굴로 손을 흔들어 아는 체를 
했다. 나는 로렌짜가 당혹해 하거나 염치없어 하는 걸 본 적이 없다. 
  "반갑네요. 여러분도 제 친구를 아시는군요? 안녕, 야코포..."
  벨보가 낯색을 잃었다. 작별 인사가 길어졌다. 아글리에는 우리가 
로렌짜와 구면이라는 걸 재미있어 했다. 
  "우리가 더불어 사귀는 이 친구는, 내가 지금까지 만난 친구 중 가장 
진국이랍니다. 이 늙은 학인의 주착을 용서한다면, 이 싱싱한 아가씨는 
지상으로 유배 온<소피아>지요. 하지만 소피아, 짬이 없어서 연락을 
못했는데 우리 저녁 약속은 몇 주 연기됐어. 미안...
  "괜찮아요. 기다리죠, 뭐. 술집으로 갈 거죠?"
  로렌짜가 우리에게 물었다. 질문이 아니라 숫제 가라는 명령이었다. 
  "...좋아요. 나는 여기 반시간쯤 더 있을 거예요. 시몬이 불로불사주를 
준대요. 당신네들도 맛을 보면 좋겠지만, 특별한 사람에게만 준다니까 어쩔 
수 없네요. 그럼 거기에서 만나요."
  아글리에는 질녀의 어리광을 받는 숙부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 로렌짜를 
자리에 앉힌 뒤 우리를 문간까지 배웅했다.
  
  우리는 내 차로 술집 필라데로 갔다. 벨보는 말이 없었다. 서로 아무 
말없이 필라데까지 갔다. 하지만 술집에서는 무슨 말인가를 해야 했다.
   "내가 두 분을 미치광이들 떼거리에다 갖다 붙인 거나 아닌지 
모르겠군요..."
  내가 운을 떼었다.
  "아니야. 그 양반 굉장히 예민하고 영리하던 걸... 우리와는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것 같더군... 다른 세상..."
  벨보는 어두운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고는 조금 있다가 덧붙였다.
  "... 거의 다른 세상이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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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까소봉, 자네가 소개한 이 아글리에라는 사람, 정체를 알 것 같아..."
  디오탈레비가 필라데에 들어가자마자 백포도주를 주문하고는 말을 
이었다. 그는 기어이 우리에게 자신의 도덕적 건강에 대한 염려를 끼티는 
셈이었다.
  "... 아글리에는 비학에 호기심이 많고, 귀동냥으로 풀어 먹는 
딜레땅뜨들을 못 미더워하는 양반이더라고, 하지만, 오늘 우리가 
보았다시피, 딜레땅드 비학자들을 경멸하면서도 귀는 기울이고, 
비난하면서도 돌아서지는 못하는 사람같더라."
  "아글리에 <씨>가 되었든, <백작>이 되었든, <후작>이 되었든... 오늘 
아주 의미 심장한 소리를 하더군. <정신적인 기사단>이라는 표현이 
인상적이더군. 말하자면 딜레땅뜨 비학자들과는 정신적 기사도를 
공유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지. 그 양반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벨보가 중얼거렸다.
  "공유한다니... 무슨 뜻이지요?"
  벨보는 마타니를 석 잔째 마시고 있었다. 그는 밤에는 보통 위스키를 
마시고, 오후에는 마티니를 마시고는 했다. 위스키는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마티니는 기운이 돌게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언젠가 내게 귀뜸한 적이 있는, 모모한 데서 보낸 어린 시절 
이야기를 했다.
  "1943년과 1945년 사이... 파시즘에서 민주주의로 돌아서고, 민주주의가 
다시 살로 공화국의 파시스트 독재로 돌아서고, 투사의 잔당이 
산악지대에서 전투를 계속하고 있을 즈음이니까 내 나이 열한 살... , 당시 
우리는 까를로 백부 댁으로 소개를 결행하신 거지.
  까를로 백부와 까떼리나 백모는 당시 모모한 데 살고 있었네. 까를로 
백부는 원래 농투성이라서 모모한 데 있는 집과 땅을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았던 것이네. 땅은 당시 아델리노 까네빠라는 소작인이 짓고 있었네. 
소작인은 파종도 하고, 추수도 하고, 술도 담그고 했지만 어쨌든 수확의 
반은 백부에게 바치게 되어 있었네. 당시의 상황이 좀 절박했어? 그래서 
이 절반이라는 소작료를 놓고, 소작인은 지주로부터 착취당한다고 
생각했고 지주는 지주대로 소작료를 겨우 수확량이 반밖에는 못 받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랬을 테지만, 지주와 소작인의 사이가 좋지 않았어. 
까를로 백부의 경우, 지주와 소작인이 한 집에 살게 되었으니 
일촉즉발이었을 테지.
  일찍이 1914년에 까를로 백부는 <산악 부대>에 지원 근무한 적이 있네. 
무뚝뚝한 피에드몬트 사람 아니랄까 봐 백부는 애국심과 국민된 도리에 
투철했네. 백부는 이 산악 부대에서 중위에서 대위로 승진했네. 그런데 
유고 국경의 카르소 전투에 참가했을 당시 백부 옆에 있던 한 멍청한 
병사가 수류탄을 손에 든 채로 터뜨리고 말았네. 이름이 수류탄이지, 그게 
어디 손에 든 채로 터뜨리는 물건이야? 멍청이는 즉사했지. 백부는 숨이 
붙은 채로 위생병 눈에 띄었다는군. 야전 병원에서는, 안구에서 튀어나와 
덜렁거리는 백부의 한쪽 눈을 뽑고, 한쪽 팔까지 절단했네. 까떼리나 백모 
말을 빌면 조각이 떨어져 나간 두개골에는 철판을 넣었다던가... , 하여튼 
외과 수술의 걸작, 희대의 영웅이 이로써 탄생한 것이네. 백부는 이로써 
은성 무공 훈장과 <이탈리아 훈공 십자상> 훈장을 받았네. 전쟁이 끝난 
뒤로 백부는 정부에서 마련해 준 안정성있고 보수도 후한 직장에 취직까지 
하게 되었네. 하여튼 까를로 백부는 공직의 길로 들어 만년에는 
세무서장까지 지내면서 본가로 되돌아가 재산을 상속받고, 아델리노 
까네빠의 식구들과 한집에서 살게 된 것이지.
  세무서장을 지냈으니까 당연히 그 지방의 유지 노릇을 했을 테고, 상이 
군인인데다 이탈리아 정부의  훈작까지 받은 처지였으니 당연히 
친정부였을 수밖에... . 그런데 백부가 지지하던 정부는 파시스트 독재 
정권이었네. 그렇다고 해서 백부까지 파시스트였던 것일까?
  글쎄, 당시의 파시스트 정부는 퇴역 군인들의 사회적 지위를, 훈장과 
연금으로 보장해 주고 있었으니까 까를로 백부도 약간은 파시스트였다고 
할 수 있겠지. 백부의 정치적 성향이 이랬으니, 철저한 반파시스트였던 
소작인 아델리노 까네빠에게는 백부가 눈엣가시였을 수밖에 더 있겠나?
  까네빠는 해마다 까를로 백부에게 그 해의 수확량이 얼마인지 자세하게 
보고하게 되어 있었네. 까네빠는 해마다 백모에게 계란 몇 꾸러미를 
뇌물로 바쳐 온 깜냥으로 약간 위세스러웠네. 백부야 전쟁 영웅이니까 
계란 같은 것에 매수될 턱이 없지. 까네빠와 백부는 자주 다투었네. 백부는 
까네빠가 수확량을 얼마나 빼돌리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까네빠가 아무리 소작료를 깍아 달라고 해도 한푼 안 깎아 주었네. 이렇게 
되자 까네빠는 파시스트의 탄압을 받고 있다고 생각할 수 밖에. 그래서 
까네빠는 백부를 중상 모략하기 시작했네.
  백부네는 2층에, 까네빠네는 1층에 살았지만 이 두 양반은 아침 
저녁으로 만나도 인사조차 주고받지 않았어. 두 집안간의 연락은 주로 
까떼리나 백모를 통해서 이루어졌는데, 우리가 그 집으로 들어가고부터는 
우리 어머니가 그 역할을 맡았네. 까네빠는 우리 어머니에게 잘 보이려고 
무진 애를 쓰더군. 어머니가 백모의 계수가 되었으니 그럴 수밖에 더 
있었겠어? 
  백부는 회색 양복에 중산모를 차림으로 출근했다가는, 저녁 6시만 되면 
읽다 만 "라 스탐파"를 들고 돌아오시고는 했네. 알프스에서 싸웠던 퇴역 
군인답게 백부는 걷는 자세도 늠름했고 눈빛도 형형했던 것으로 기억하네. 
백부는 집안으로 들어오면서도, 정원 벤치에 까네빠가 쉬고 있어도 못 
본척하고 지나치고는 하더군. 문간에서 까네빠 부인을 만나면 어쩔 수없이 
모자를 들어 인사를 하는 척하고는 했지만... 좌우지간 이런 식으로 몇 
년이 흘렀네... ."
  8시였다. 온다던 로렌짜 펠레그리니는 소식이 없었다. 벨보는 마티니를 
다섯 잔째 마시고 있었다.
  ".... 그러다 1943년이 되었네. 어느 날 아침 우리 방으로 들어온 백부는, 
잠자고 있던 나를 깨우고는 이러시더군. <얘야, 너 올해의 가장 큰 뉴스가 
무엇인지 아느냐? 무솔리니의 실각이란다>.... 백부가 무솔리니의 실각으로 
상심했는지 어쨌는지는 나도 몰라. 정직한 시민이고 국가의 공복이었으니 
아무렇지도 않기야 했겠나? 속이야 상했겠지만 드러내지는 않더군. 
무솔리니에 이어서 들어선 바돌리오 정권 아래서도 백부는 계속해서 
세무서장을 지냈네. 그러던 중, 9월 8일이 되면서 우리가 살던 지역은 
파시스트 사회주의 공화국 체제로 들어가자 백부는 이번에는 사회주의 
공화국을 위해서 세금을 걷어들일 수밖에.... . 말하자면 숙부는 하루 
아침에 바돌리오 잔당의 적이 되어 버린 셈이네.
  당시 까네빠는 산중에서 조직되고 있던 민병대와 끈이 닿는 걸 위세 
부리고 다니면서, 틈만 나면 까를로 백부에게 본 때를 보인다고 으름장을 
놓곤 하더군. 우리 애들이야 민병대가 뭔지 알았나? 소문만 무성했지 
실제로 민병대원을 본 사람도 없었어. 소문에 따르면 바돌리오 파 
민병대장의 별명은 <몽고>. - 만화 주인공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던가 - 
몽고는 헌병 상사 출신으로, 파시스트와 나치 친위대와의 전투에서 한쪽 
다리를 잃은 상이 군인이면서도 그 지역 산중의 민병대를 총지휘하고 
있었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올 것이 왔네. 민병대가 시내에 나타난 것이지. 
제복 마련이 안 되어 겨우 목에 퍼런 수건 한 장씩만 두른 민병대원들은 
자기네 존재를 사람들에게 알린답시고 공포를 뻥뻥 쏘고 다니더라고. 
사람들은 문을 걸어 잠그고 두문불출했네. 민병대의 정체 파악이 안 된 
상태였거든. 백모는 별로 걱정을 안 하더라고. 민병대는 까네빠와 끈이 
닿을 테고, 까네빠는 까를로 백부를 친구라고 했다니까 민병대가 동지의 
동지를 해코지하지는 않을 것이거든... . 하지만 이건 백모의 오산이었어. 
밤 11시 반이 되자 불길한 소식이 날아들었네. 민병대원들이 세무서장실에 
나타나 자동 소총을 겨누고는 백부를 납치해 어딘가로 데려갔다는 소식... 
백모는 게거품을 뿜더군... . 너희 백부는 죽고 말 게다... . 소총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한 대만 맞아도 돌아가시고 말 게다... . 머릿속에 
철판이 들어 있는데 이를 어쩌면 좋으냐... .
  백모가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까네빠가 제 식구들 데리고 나타났네. 이 
유다 같은 놈, 네가 그 양반을 민병대에 고발했지? 그 양반이 사회주의 
공화국을 위해 세금을 걷어들인다고 고발했지... 성인들에게 맹세코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시내에서 조금 떠들어낸 것은 있으닌까 전혀 
상관없는 것은 아니지만요... 백모는 까네빠에게 소작을 내놓으라고 했네. 
까네빠는 백모에게 애걸복걸하다 안 되니까 우리 어머니에게 매달리더군. 
토끼나 닭을 헐값으로 판 정리를 생각해서라도 중간에서 손을 좀 
써달라고. 어머니도 아무 말씀 안 하시더군. 몸부림치면서 울부짖는 백모를 
보면서 나도 아마 울었을거라...
  그렇게 두어 시간이 지났나... 바깥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내다보니까 까를로 백부가 한 손으로 자전거를 몰면서 들어오는 거라. 
나들이에서 돌아오는 것처럼, 백부는 집안이 난장판이 된 것을 보고는 
퉁명스럽게 물었네. 나니, 도대체 왜들 이래... 그 지방 사람들 원래 요란한 
침대에서 몸부림치면서 울부짖고 있었고... 백부왈, 이게 대체 무슨 
난리야..."
  "백부라는 분, 어떻게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죠?"
  "들어 보게. 까네빠가 시내에서 세무서장 욕을 하고 다니니까 
민병대에서는 백부가 사회주의 정부의 그 지방 대표쯤으로  생각했던 
것이네. 그래서 혼구멍을 냄으로써 마을 전체에 대한 본보기로 삼을 
생각이었을 테지. 민병대원들은 백부를 짐차에 싣고 몽고 대장에게 꿀고 
갔네. 몽고는 가슴에 훈장을 단 채, 오른손으로 총을, 왼손으로는 목발을 
짚고 서 있었다고 하네. 백보는 차렷자세를 취하고... 약아서 
그랬다기보다는 퇴역 군인의 습관으로 혹은 격식을 차리느라고 
그랬을거라... 어쨌든 차렷자세를 취하고 자기 소개를 했다더군... 예비역 
대위 까를로 코바소, 알프스 연대 소속, 일급 상이 군인, 은성 무공 훈장...
  그러자 몽고도 차렷자세를 취하면서 자기 소개로 화답했다네.
  바돌리오 정부군 베티노 리카졸리 여단 사령관 레보텡고, 왕실 헌병대 
선임 하사 역임, 동성 무공 훈장...
  <어느 전투에서 부상했습니까?>
  백부가 물었네. 
  <포르도이 산327고지올시다.>
  몽고가 대답했네.
  <이럴 수가... 내가 부상을 당한 것은 328고지였소. 사소스투리아 대령이 
이끄는 제3연대...하지 전투였소>
  <그래요, 그때가 하지였소.>
  <오지산이 집중 포격을 당할 때요?>
  <이럴수가... 그걸 내가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소?>
  <성 크리핀의 날 전야의 백병전도 기억하오?>
  <그걸 내가 어떻게 잊을 수 있겠소?>
  이런 식이었네. 한쪽 다리가 없는 몽고와 한쪽 팔이 없는 백부는 서로를 
포옹했다는군. 몽고가 물었네.
  <그런데 대위, 당신이 독일군 앞잡이인 파시스트 정부를 위해 세금을 
거두어들인다는데 사실이오?>
  <이것 보시오, 사령관, 내게는 딸린 가족이 있고, 정부로부터 월급도 
받고 있소. 그게 어떤 정부인지 나로서는 상관할 수가 없소.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오. 사령관,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 같소?>
  <친애하는 대위, 내가 당신이었대도 똑같은 일을 하고 있을 것이오. 
하지만 세금을 거두되, 짜내지는 않도록 하시오.>
  <그러리다. 나는 당신네들에게 아무 원한이 없소. 당신들 역시 조국 
이탈리아의 아들이자 용감한 군인들이기 때문이오.>
  두 사람을 서로를 이해했네. 조국이야말로 이 세상의 어떤 무었보다도 
소중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한 것일세. 몽고는 부하들에게, 자전거를 한 대 
내어 주라고 했네, 백부는 그 자전거를 타고 무사히 귀가한 것이네. 
아델리노 까네빠가 얼굴을 내밀 수 없는 것은 정한 이치...
  이 양반들이 공유한 것이 정신의 기사도 같은 것이었는지 그것은 
모르겠네만, 정파와 당파를 초월하는 어떤 유대감이 있었던 것만은 확실할 
것이네..."
  
    50
  
  로렌짜 펠레그리니가 들어왔다. 베보는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다가 
마티니를 다시 시켰다. 주변에 긴장감이 감돌앗다. 내가 일어서려고 하자 
로렌짜가 말렸다.
  "가지 마세요. 세 분 다 나랑 같이 가요. 오늘 밤 리카르도의 전시회 
축하 파티가 있답니다. 새 스타일을 선보인대요. 괜찮은 화가예요. 야코포, 
당신 리카르도 알죠?>
  리카르도가 누군지는 나도 알고 있었다. 언제 보아도 술집 필라데에서 
빈둥거리고 있는 화가였다. 나는 벨보의 파일을 열어 본 뒤에야 벨보가 왜 
천장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는지 까닭을 알 수 있었다. 리카르도는 
얼굴에 흉터가 많았다. 베보에게는 그런 사내와 맞설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로렌짜는 전시회장이 필라데에서 멀지도 않다면서 계속 졸라댔다. 
주최측이 멋진 파티, 상당히 요란한 연회를 준비할 거라는 말도 보탰다. 
디오탈레비는 심란해 하던 얼굴을 하더니, 집으로 돌아가야겠다면서 
일어섰다. 나는 망설였다. 로렌짜는 내가 함께 가야 한다고 우겼는데 이게 
나와 벨보를 동시에 괴롭혔다. 내가 따라가면 벨보로서는 로렌짜와 단둘이 
있을 가능성이 그만큼 묽어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로렌짜의 청을 
물리칠 수 없었다. 결국 우리 셋은 나란히 술집을 나섰다. 
  나는 리카르도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60년대 초만 하더라도 
지겨운 그림만 그리던 화가였다. 검은 색과 회색이 주조를 이루는, 
기하학적이면서도 광학적이어서 보고 있으면 눈이 어지러워지는, 그나마 
겨우 소품이나 제작하던 화가엿다. 제목도 대충 <콤포지션 15>, 
<시차17>, <유클리드X>, 이런 식이어서 지겹기 짝이 없었다. 1968년에는 
고유지에다 무단으로 세운 화실에서 전시회를 연 적도 있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회색 대신에 난폭한 흑백이 들어서면서 붓질이 대담지고, 화제도, 
<이것이 시작이 아닙니다>. <몰로토프>, <백화 난만>하는 식으로 바뀌어 
있었다. 브라질에서 밀라노로 돌아온 직후, 바그너 박사의 강연회가 있던 
바로 그 클럽에서 열린 그의 전시회를 본 적이 있었다. 검은색을 거의 
쓰지 않고 흰색을 주조로 삼으면서, 파브리아노 화지에 물감을 다양하게 
칠하거나 아주 짜바르는 듯이 함으로써 대비 효과를 얻어 내고 있었다. 
따라서 그날 리카르도 자신이 설명했었던 것처럼, 그의 그림은 조명에 
따라 시각적인 효과가 달랐다. 화제도, <다의 예찬>, <A / 트라버스>, 
<이드>, <베르크 가>, <비 15>하는 식으로 변해 있었다. 
  벨보 로렌짜와 함께 전시장에 들어섰을 때 나는 리카르도의 화풍이 또 
한차례 바뀌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전시회 주제는 <메칼레 
아포파시스> 였다. 그림의 대부분은 눈부신 색채로 그린 비 구상화였다. 
그런데 이 비구상화라는  것이 어찌나 모방이 심한지, 흡사 유명한 그림의 
슬라이드를 화폭에다 투사하고 그 위에다 덧칠했다는 느낌까지 줄 
정도였다. 그가 모방한 그림은 주로 세기말의 요란한 화가들과 20세기 
초의 상징파 화가들 작품이었다. 흡사 화폭에 투사된 그림을, 점묘화 
수법의 다양한 색채와 농담으로 채운 다음, 자신이 드러내고자 하는 
종교적, 혹은 우주론적인 개념을 형상화시킨 것 같았다. 그래서 불타는 
듯이 밝던 화면의 중심부가 밖으로 향하면서 서서히 암전하다가 
가장자리에 이르러서는 까맣게 되는 그림도 있고, 정반대의 순서를 밝는 
그림도 있었다. 산에서 빛살이 터져 나와 작고 희미한 천체로 흩어지는 
그림도 있고, 구스타브 도레가 그린 천국 풍경화처럼 투명한 날개가 달린 
천사들이 겹겹이 동심원을 그려 보이는 작품도 있었다. <베아뜨리체>, 
<신비의 장미>, <단테 가브리엘 33>, <사랑의 노예>, <아타노르>, 
<호문쿨루스666> 같은 화제를 읽고 있자니 나는 로렌짜가 호문쿨루스를 
좋아하는 것과 리카르도의 화제는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큰 그림의 화제는 <소피아>였다. 검은 옷을 입은 천사들이 무수히 떨어져 
지상에 내리면서 여자의 형상이 되고, 크고 하얀 손이 그 여자를 
어루만지는 그림이었다. 하늘로 솟는 손은 아무래도 피카소의 
<게르니카>에서 베낀 것 같았다. 리카르도의 혼교주의 화풍은 가까이서 
보면 조잡하기 그지 없으나 2, 3미터만 떨어져서 보면 자못 
서정적이기까지 했다. 
  "나는 구닥다리 현실주의자일세. 그래서 몬드리안까지빆에는 이해 못 해. 
기하학적이지만 못한 이 그림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건가."
  벨보가 속삭엿다.
  "이 친구 한때는 기히학적인 그림도 그렸어요."
  내가 응수해 주었다. 
  "그건 기하학적인 도형이 아니라 목욕탕 타일이었을 테지."
  로렌짜는 리카르도를 껴안아 줄 태세로 연회장 중앙으로 쳐들어가고 
있었다. 벨보는 리카르도를 향해 고개짓만 까딱했다. 전시장은 사람들로 꽤 
붐비고 있었다. 뉴욕의 로프트 분위기를 낸답시고 전시장 내장은 백색 
일색이었다. 천자의 난방용 파이프나 수도관도 밖으로 드러나 있었다. 
따라서 신식을 부러 구식으로 뜯어 고쳤으니 돈깨나 들었음직했다. 구석에 
놓인 전축에서는 동양의 음악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곡목은 알 수 없어도 
악기는 인도의 현악기 시타르 같았다. 손님들은 뚱한 얼굴을 하고 묵묵히 
그림 앞을 지나 탁자 위에 놓인 종이컵을 집으로 다녔다. 담배 연기가 
자옥한 실내에서 가끔 춤추는 시늉을 하는 여자들도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은 수다를 떨면서 먹느라고 딴 정신들이 없었다. 안락의자 앞에는 
마침 샐러드와 과일 그릇이 있었다. 저녁을 거른 참이라 먹으려고 
들여다보았더니 샐러드와 과일은 누군가의 발에 밟힌 것 같았다. 그럴 
만도 했다. 바닥에는 백포도주가 군데군데 엎질러져 있는 데다가, 몸을 
가누느라고 애를먹는 사람도 있었다. 
  벨보는 종이컵을 들고 다니면서 이따금씩은 아는 사람의 어깨를 툭툭 
치기는 했지만, 대개는 마땅하게 갈 데가 없는 사람처럼 느릿느릿 
전시장을 걷고 있었다. 눈길로 로렌짜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 
  대부분의 손님들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숨을 꽃을 찾는 벌떼처럼 
끊임없이 방안을 누비고 있었다. 나 역시 특별히 만나야 하는 사람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사람의 물결에 떠밀려 흘러 다니고 있었다. 로렙짜는 
내게서 별로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이 남자 저 남자와 인사를 
주고받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로렌짜는 머리는 쳐들고, 눈은 부러 가늘게 
뜨고, 등은 곧추세우고, 가슴은 내민 채로 분주를 떠는 품이 흡사 기린 
같았다. 한동안 밀려다니다 탁자 앞으로 돌아가니 벨보와 로렌짜가 나란히 
등을 보이며 앉아 있었다. 밀려다니다가 우연히 만난 모양이었다. 실내가 
시끄러워 가까이 있는 사람의 말소리도 들리지 않은 지경이었으니 내가 
옆에 와 있는 것도 몰랐을 것이다. 로렌짜와 벨보는, 남들 귀에 들리지 
않겠거니 여기고 큰 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따라서 나는 하는 
수가 없어서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은 셈이 된다. 
  "당신의 그 아글리에를 어디에서 만났어?"
  벨보가 물었다. 
  "내 아글리에? 보니까 당신의 아글리에도 넉넉히 되겠던데? 당신은 
시몬을 알아도 괜찮고 나는 알면 안 되나요?"
  "왜 하필이면 <시몬>이야? 그리고 당신은 왜 하필이면 <소피아>야?"
  "장난이에요. 친구 집에서 만났어요, 됐어요? 아주 매력적인 
사람이라고요. 그 사람 내 손등에다 입을 맞추면 나는 공주님 기분이 
나는걸요. 우리 아버지 나이는 됐을걸요."
  "조심하지 않으면 당신 아들의 아버지가 되는 수가 있어."
  이건, 바이아에서 나와 암파로가 나눈 얘기와 너무나 흡사했다. 로렌짜의 
말이 옳았다. 아글리에는, 손등으로 남자의 입술을 받아 본 적이 없는 
아가씨들을 능숙하게 요리하고 있었던 셈이다. 
  "왜 시몬과 소피아냐고. 그자의 이름이 시몬이야?"
  "재미있는 사연이 있어요. 당신 알아요? 이 우주가 생겨난 것은 
누군가의 실수 때문이고, 당신도 작으나마 책임이 있다는걸? 하느님은 
여성과 남성 반반 이루어져 있는데 소피아는 하느님의 여격이래요. 그런 
하느님에다 수염을 달고 남성 명사를 붙인 건 당신네 남자들이죠. 
말하자면 나는 하느님의 좋은 부분인 것이죠. 시몬의 말에 따르면, 나 
소피아(아니, 잠깐, 소피아가 아니고 <엔노이아>였나....)가 세상을 
창조하자고 하자, 남성인 하느님의 반은 싫다고 했대요. 그럴 용기가 
없거나 성적으로 무능했던 거죠. 그래서 소피아는 하느님이 지닌 남성의 
속성과 교합하지 않고 혼자서 이 세상을 창조하기로 했대요. 소피아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대요. 세상을 너무너무 사랑했다니까요. 아마 그랬을 
거예요. 나 역시 이 뒤죽박죽인 세상을 너무너무 좋아하거든요. 시몬은, 
그래서 내가 바로 이 세상의 영혼이라는 거죠."
  "세상의 영혼이라서 좋겠군. 아글리에는 여자 만날 때마다 그러나?"
  "바보같이.... 내게만 그래요. 시몬은 당신 이상으로 나를 잘 
이해하니까...., 그분은 나를 자기 같은 사람으로 만들려고 애 안 써요. 나는 
내 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걸 잘 알거든...., 그리고 소피아도 그래요. 
소피아도 세상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원형질에 직면하죠. 
태초에는 탈취제가 없어서 구역질이 나는 원형질에요. 그러다가 우연히 
<데미....> 뭐라고 하는 걸 만든 거예요....,"
  "<데미우르고스> ?"
  "맞아요. 하지만 데미우르고스를 만든 건 소피아가 아닌지도 몰라. 
소피아가, 이미 존재하고 있던 데미우르고스를 꼬여 이 세상을 만들게 
했는지도 몰라. 재미있잖아요. 어쩌고 하면서.... 하지만 이 세상을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만든 걸 보면 그 데미우르고스, 정말 형편없었나봐. 실제로 
데미우르고스는 손을 대지 말아야 할 것에 손을 댄 거래요...., 왜냐? 
첫째는 원형질이라는 게 질이 형편없이 나빴고, 둘째로는 
데미우르고스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었대요...., 어쨌든 데미우르고스는 
세상이라고 하는 이 한심하기 짝이 없는 덩어리를 만들었고, 소피아는 이 
세상에 갇히게 된 거죠. 세상의 수인이 되었다고 할까....,"
  로렌짜는 거침없이 마시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구석에서 눈을 감은 
채 춤추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리카르도는 몇분마다 한번씩 나타나서는 
로렌짜의 잔을 채워 주었다. 벨보는 과하다면서 리카르도의 손길을 
제지하려 했으나 리카르도도 말을 듣지 않았고 로렌짜도 말을 듣지 
않았다. 로렌짜는 벨보에게 화를 내면서 <나는 당신보다 젊으니까 더 
마셔도 끄덕 안 해요>, 이런 소리까지 했다.
  "좋아, 이 할아버지 말은 안 듣고 시몬 할아버지 말만 듣겠다 이거지. 
좌우지간, 계속해 
봐."
  벨보가 재촉했다.
  "응, 어디까지 했더라.... 소피아는 세상의 수인, 세상보다 더 나쁜 
천사들의 수인이라고 했어요. 천사가 왜 나쁘냐고요? 이 이야기에선 
그래요. 천사들이 데미우르고스를 도와 이 한심한 세상을 만들거든...., 
하여튼 이 고약한 천사들이 나를 볼모로 잡고 있어요. 내가 달아날까 봐 
가두어 놓고 괴롭히는 거예요. 하지만 가끔은 이렇게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어요. 시몬처럼...., 시몬은, 천년 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고 하대요? 참, 당신, 시몬이 영생 불사하는 인간이라는 거 모르지? 
그 양반이 살아오면서 겪은 일들, 정말 굉장하더라고...., " 
  "그럴테지, 그러니까 이제 그만 마셔."
  "시시시.... 시몬은 띠로에서 나를 본 적이 있대요. 띠로에서 창녀 
노릇하는 걸 본 적이 있대요. 그때의 내 이름은 헬레네였대요."
  "그 영감이 그랬어? 그런데도 해해거려? 영감은 그랬을테지. 이 한심한 
세상의 창부여, 그대 손에 입맞추게 해주오. 신사? 참 빌어먹게 눈부신 
신사로군....,"
  "어쨌든 헬레네는 창녀였대요. 당시의 창녀가 뭔지나 아세요? 자유로운 
여성, 매인 데 없는 여성, 주부가 되기를 거부하는 지성인...., 창녀 중에는 
살롱을 가진 여자도 있었대요. 오늘날 같으면 광고업을 했을 거야. 당신, 
광고업에 종사하는 여자를, 고속 도로에서 트럭 운전사나 꼬시는 창녀라고 
할 용기 있어요?" 
  리카르도가 다가와 로렌짜의 팔을 붙잡으면서 속삭였다.
  "가서 춥시다..."
  두 사람은 방 한가운데서 꿈이라도 꾸는 듯이 천천히 북이라도 울리는 
듯이, 하느적거리면서 춤을 추었다. 가끔씩 리카르도는 로렌짜를 바싹 
끌어당기면서 목덜미에 손을 대고는 했다. 로렌짜는 발갛게 상기된 얼굴을 
젖히고 머리카락을 늘어뜨리면서 몸을 비틀고는 했다. 벨보는 줄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로렌짜는 리카르도의 허리를 안은 채로 벨보 옆으로 다가섰다. 그리고는 
여전히 춤을 추면서 벨보가 들고 있던 종이컵을 빼았고는, 왼손은 
리카르도의 어깨에 댄 채, 오른손으로 종이컵을 내밀면서 벨보를 응시했다.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는데도 입은 웃고 있었다. 
  "그때뿐만이 아니래요."
  "아니라니 뭐가?"
  "시몬이 소피아를 만난 거요... 그로부터 몇 백 년 뒤에 시몬은 <기욤 
포스텔>로 환생햇대요."
  "우체부?"
  "바보... 유대 어를 연구한 르네상스 시대의 학자라고요..."
  "히브리 어겠지."
  "뭐가 달라요? 하여튼 기욤 포스텔은 애들이 사전도 없이  '슈퍼맨' 
읽듯이 그렇게 히브리 어를 읽었대요. 그러다 베네치아의 한 병원에서 
늙고 무식한 하녀 조안나를 만났대요... 만나서는, 아, 당신은 여성의 
덩어리이자 엔노이아의 화신인 소피아... 세상을 구하러 오신 위대한 
세계의 어머니랍니다... 이렀대요. 그리고는 조안나를 데리고 병원을 
나갔대요. 사람들로부터 미치광이 소리를 들으면서도 기욤 포스텔은 
조안나를 섬기는 한편 천사들 손에서 구해 내려고 무진 애를 썼대요. 
이윽고 조안나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몇 시간 동안이나 태양을 노려보고 
있었는가 하면, 그 뒤로는 며칠 동안이나 식음까지 전폐했다죠. 그러면서도 
하는 행동은 조안나가 살아 있을 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대요. 왜냐? 
조안나는 바로 거기에 있었던 거나, 이세상에살고 있는 거나 다를 것이 
없으니까요. 머지않아 환생할 것이니까요... 당신은 이런 이야기를 듣고도 
눈물이 안 나와요?"
  "펑펑 쏟아지는군, 그래. 소피아가 그렇게 좋아?"
  "나는 당신에게도 소피아예요. 나를 만나기 전 만해도 당신은 끔직한 
넥타이나 매고 다니고, 어깨에는 비듬이 수북히 쌓이고 그랬잖아요."
  리카르도가 로렌짜의 목을 어루만지면서 수작을 걸었다. 
  "얘기에 나도 좀 낍시다."
  "입 다물고 춤이나 춰요. 당신도 내 해갈의 수단이 지나지 못해요."
  "좋아요."
  리카르도가 대답했다.
  벨보는 리카르도의 존재를 무시한 채 로렌짜에게 하던 말을 계속했다. 
  "그래서 당신은 그자의 전용 창녀이자, 광고업에 종사하는 페미니스트군 
그래. 그자는 당신의 시몬이고..."
  "나는 시몬이 아니에요."
  리카르도가 취기 어린 목소리로 꿍얼거렸다. 
  "당신 얘길 하고 있는 게 아니야."
  벨보를 지켜보고 있자니 불안했다. 평소는 여간해서는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벨보가 다른 남자 앞에서, 심지어는 경쟁자일 수도 있는 
리카르도 앞에서 사랑 싸움을 하고 있는 셈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벨보는 로렌짜 앞에서 리카르도에게 큰 소리로 자기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이 한마디로 로렌짜의 소유권을 자기 식으로 주장한 
것이엇다. 
  로렌짜가 술을 따르라고 잔을 내밀면서 속삭였다. 
  "다 농담이었어요. 당신을 사랑해요."
  "미워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야. 나는 가봐야겠어. 배가 
아파서... 나는 아직도 저급한 물질의 수인인가 봐. 시몬의 은총도 받은 
바가 없고. 같이 안 갈테야?"
  "좀더 있다가 가요. 멋지고 재미있잖아요? 나 아직 그 그림도 못 
봤는데... 리카르도가 나를 그렸다는 그림..."
  "당신에게 해주고 싶은 건 그밖에도 많아요."
  리카르도가 끼여들었다. 
  "야해라... 그만 둬요. 나는 지금 야코포와 얘길하고 있어요. 야코포, 
당신만 친구들과 유식한 농담 나눌 줄 알아요? 나를 띠로의 
창녀처럼다루고 있는 게 누군가요? 바로 당신 아닌가요?"
  "몰랐군. 내가 그런 사람인 줄을... 그래 내가 당신을 늙은이들 품안으로 
밀어 넣었군 그래."
  "그분은 나를 안은 적이 없어요. 그분은 오입쟁이가 아니에요. 그분이 
나를 침대로 끌어들이기는커녕 지적인 동반자로 대접하닌까 당신이 그렇게 
못 견뎌 하는 것이라고요."
  "지적인 뚜쟁이 말인가?"
  "말 한번 잘 하는군요. 리카르도, 술 더 줘요."
  "안 돼. 마시지 말고 조금만 기다려. 한마디만 더 듣자. 그자를 그렇게 
대단하게 생각해? 그만 마시라고... 말해 봐. 그자가 그렇게 대단해?"
  "장난이라니까요. 그 양반과 나 사이의... 이 이야기의 백미가 뭔지 
알아요? 소피아가 자아를 발견하고 천사들에게서 풀려 나면 그동안 지은 
죄로부터도 사면을 받는다는 거예요."
  "죄는 이제 그만 지을 거구먼?"
  "그건 생각해 보고 정해야지요."
  리카르도가 로렌짜의 이마에 입술을 대면서 속삭였다. 
  로렌짜는 리카르도를 무시한 채 벨보에게 말했다. 
  "지을 필요가 없잖아요. 하고 싶은 건 뭐든 해도 좋으니까... 육신에서 
해방되면 선악으로부터도 해방되는 거니까요..."
  리카르도를 밀어내고 나서 로렌짜가 덧붙였다.
  "몰라요? 나는 소피아예요.소피아는 천사들 손에서 벗어나기 f]위해서는 
온갖 죄, 기상천외한 죄도 범   범   범해야 한다고요..."
  로렌짜는 심하게 비틀거리며 구석 자리로 다가갔다. 구석자리 의자에는 
검은 옷차림에 마스카라가 진한 여인이 창백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로렌짜는 그 여자를 방 한가운데로 데리고 나와 함께 춤을 추었다. 둘 다 
양 손을 배에 대고 어색하게 춤을 추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할 수도 있다고요..."
  로렌짜가 이러면서 그 여자의 입술에다 키스했다. 
  호기심이 동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벨보는 스크린 테스트를 지켜보는 
감독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벨보의 이마에서는 땀이 
배고 있었다. 왼쪽 눈 가장자리도 전에 없이 경련했다. 로렌짜가 선정적인 
몸짓을 해가면서 5분 가까이 춤을 추었을 때 벨보가 소리를 질렀다. 
  "이제, 이리 나와."
  로렌짜는 춤을 멈추는 대신 다리를 벌리고 팔을 내뻗으며 외쳤다. 
  "나는 성녀이자 창녀로다..."
  "사타구니라 하거라."
  벨보는 벌떡 일어나 똑바로 다가가더니 로렌짜의 손목을 잡고는 
문간으로 끌고 갔다. 
  "이거 놔요?"
  로렌짜는 이렇게소리를 지르다가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며 벨보의 목을 
부여안았다. 
  "그러지 말아요, 나는 당신의 소피아예요. 그런데 왜 내게 화를 내어요?"
  벨보는 부드럽게 로렌짜의 어깨를껴안고 관자놀이에 입술을 대고는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는 좌중을 돌아보면서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이 사람, 이렇게 술을 마셔 본 적이 없어서요..."
  킬킬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벨보도 들었을 터였다. 그런데 그는 문간에서 
나를 보더니 기상천외한 짓을 했다. 아니, 나더러 보라고 그랬는지, 다른 
사람들더러 보라고 그랬는지, 그냥 그러고 싶어서 그랬는지 그것은 잘 
모르겠다. 자기네 두 사람에게서 떠나 버린 사람들의 주위를 환기시키려는 
속삭임 같은 것이었을까?
  여전히 로렌짜의 어깨를 안은 채 벨보가 작은 소리로, 당연한 것을 
애기하는 어조로 사람들에게 이렇게 속삭인 것이다. 
  "꼬끼오, 꼬, 꼬..."
  
      51
  
  밀라노와 파리에서 찾아낸 도판으로는 부족햇다. 가라몬드 사장은 
뮌헨에 있는 도이치 박물관에서 며칠간 일할 수 있는 비용을 결재해 
주었다. 
  밤 시간은 슈바빙에 있는 술집이나 수염을 기른, 가죽 바지 차림의 
노인들이 음악을 연주하고, 연인들이 엄청나게 큰 잔으로 맥주를 
들이키면서 돼지 고기 안주에서 무럭무럭 오르는 김 자락 사이로 미소를 
나누는 거대한 지하 술집에서 보냈다. 오후에는 주로 복제화의 카드 
목록을 훑었다. 이따금씩 고문관을 나와 박물관에도 들르기도 했다. 
박물관에는 인류의 발명품이 무수히 복제되어 있었다. 단추를 누르면 
실제로 작동하는 석유 시추기도 있었고, 진짜 잠수함 속으로 들어가 볼 
수도 있었다. 태양계의 행성을 마음대로 운행시켜 볼 수도 있었고 산을 
만들거나 연쇄 반응을 시험해 볼 수도 있었다. 파리의 공예원 박물관에 
견주면 훨씬 신식이고, 미래 지향적인 이 박물관은, 기술자를 꿈꾸는 
버르장머리 없는 학생들로 늘 붐볐다. 
  
  도이치 박물관에서는 광산의 구조를 가까이서 자세히 볼 수도 있다. 
사다리를 내려가면 광산이 있는데, 그 안에는 터널도 있고, 광부와 말을 
실어 나르는 승강기도 있고, 갱도 속을 기어 다니는, 착취당하고 있기가 
쉬운 허약한 어린아이들(다행히도 밀랍 인형인)도 있다. 끝없이 이어지는 
컴컴한 복도를 따라가다가, 바닥이 보이지 않는 수직갱 가장자리에 서면 
모골이 송연해진다. 여기에 서면 얼핏 메탄 가스 냄새가 코끝을 
스치기까지 한다. 모든 것은 실물 크기로 만들어져 있다.
  다시는 날빛을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느낌에 시달리면서 나는 갱도 
속을 방황하다가 문득 낯익어 보이는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 역시 난간 
너머로 수직갱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주름 잡힌 얼굴을 창백했다. 밸발 
아래서 빛나는 눈이 부엉이 눈처럼 퀭했다. 그런데 입은 옷 때문에 그를 
어디에서 만났는지 기억해 낼 수 없었다. 얼굴은 분명히 낯익었다. 무슨 
제복을 입은 모습으로 만났던 것 같았다. 흡사 몇 년 만에 민간복으로 
갈아 입은 목사, 수염을 깎은 카푸친 파 수도사를 만난 기분이었다. 
사나이도 나를 보았다. 그 역시 내 모습이 기억에 아물대는 모양이었다. 
그런상황에서는 의례 그러듯이 사나이는 내 모습을 흘끔흘끔 곁눈질하다가 
기선을 잡고 먼저 이탈리아 말로 인사를 걸어왔다. 문득 그가 여느때 입고 
있던 옷이 생각났다. 발치까지 치렁거리는 노란 앞치마만 입고 있었어도 
살론 씨를 보는 순간에 알아보았을 것이다. 박제사 A. 살론 씨... 그제서야 
생각났다. 내가 문화탐정 노릇을 할 때 쓰던, 공장 건물을 개조한 아파트에 
작업실을 가지고 있던 사람... 그래서 복도나 계단에서 더러 마주칠 때마다 
눈인사를 나눈 사이였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이상한 일이군요. 그렇게 오랫동안 같은 지붕 밑에 살았는데, 이렇게 
수천 리 떨어진 타향의 지하에서야 수인사를 하게 되다니 말이오..."
  우리는 서로 삼가 가면서 몇 마디를 나누었다. 그는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나야 그렇게 생가하지 
않았지만, 그는 내가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하는 것으로 알아주는 것을 
신기해 했다.
  "과학 기술 박물관에는 왠일이신가요? 귀출판사는 정신적인 분야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아셨습니까?"
  "귀동냥이지요. 우리 가게에는 손님이 하도 많이 드나들어서요."
  살론 씨가 머쓱해 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박제소에는 어떤 분들이 드나듭니까?"
  "여느 사람들처럼 박제업을 뭐 대단한 거라도 되는 줄 아시는 
모양이군요. 그저 평범한 직업이오. 하지만 손님은 늘 넉넉합니다. 온갖 
부류의 손님들이 다 드나들지요. 박물관 관계자도 있고, 개인 수집가도 
있고..."
  "저는 박제를 진열한 개인 별로 구경을 못 해봐서요."
  "집에 따라서... 혹은 지하실에 따라서 다르지요."
  "박제는 지하에다 둡니까?"
  "어떤 사람은 그러지요. 방이라고 다 햇빛 좋고 달빛 좋은데 있는 것은 
아니니까. 박제를 지하에 두는 사람들, 나는 조금 주의하는 편이오. 하지만 
잘 아시겠지만 직업이 직업이라서... 나는 지하에 있는 것은 별로 신용 
않는답니다."
  "그런데 지금 지하 갱도에 들어와 계시지 않습니까?"
  "점검하는 중이오. 나는 지하 세계를 의심하면서도 호기심을 가지고 
있어요. 이해하고 싶은 거지요. 지하 세계를 접하는 기회, 그리 흔치 
않아요. 로마의 카타콤베를 구경하면 되지 않겠나 싶으시겟지? 구경꾼이 
너무 많아서 신비스러운 데가 없어요. 게다가 교황청의 손때가 너무 
묻었어요. 파리의 하수도도 있기는 해요. 가보신 적 있소? 매주 월요일, 
수요일,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에는 입장이 가능하지요. 파리에도 물론 
카타콤베와 동굴이 있소. 자하철도 있고요. 라파에뜨 가 145번지에 가 
보셨소?"
  "부끄럽지만 아직..."
  "동부역과 북부역 사이... 좀 후미진 데 있지요. 밖에서 보면 그저 그런 
건물입니다. 그러나 가까이 가서 보면 달라요. 멀리서 보면 나무 문 같은데 
가까이서 보면 페인트를 칠한 철문이지요. 몇 세기 동안 비어 있었던 것 
같은 방에 유리창이 덩그렇게 끼어져 있는 것도 이상하고... 사람들은 그 
건물 앞을 지나다니면서도 내막을 모르지요."
  "내막이 뭔가요?"
  "가짜 건물이라는 거지요. 전면만 있는 건물... 뒤는 휑한 건물... 방이 
없어요. 지붕도 없고요. 말하자면 굴뚝과 같은 거요. 그 지역 지하철의 
배기를 위한 환기용 굴뚝 같은 거지요. 일단 이걸 알고 그 건물 앞에 서면, 
지하 세계의 입구에 서 있다는 느낌이 오지요. 실제로 그 벽을 뚫고 
들어가면 파리의 지하 세계로 들어갈 수 잇는 겁니다. 그 건물은 문의 
문을 숨기고 있는 문인 것이지요. 지구의 중심을 향한 여로의 출발점인 
것이오. 나는 그 문 앞에 몇 시간이고 서 있었던 적이 있소. 파리는 왜 
그런 걸 만들었다고 생각하오?"
  "지하철 환기 시설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환기 시설이라면 통풍구로 충분하지 않겠소? 그냥 환기 시설은 아닐 
거요. 그 지하도를 바라보고 있으면 문득 의혹이 일고는 해요. 왜 그런지 
아시오?"
  살론 씨는 어둠 이야기를 하면서 갱도의 불을 꺼버리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에게 왜 의혹이 이느냐고 물었다. 
  "만일에 <세계의 지배자>들이 존재한다면, 그 양반들이 있을 곳은 
지하밖에 없어요. 이것은 어떤 사람도 감히 입에 올리지 못하는 진실이오. 
활자를 통해서 대담하게도 이런 것을 발표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인물이 생 
띠브 달베드르(각주 4를 참고할 것)였을 겁니다. 이 사람을 아시겠지요?"
  아글리에나 브라만티나 카메스트레스를 비롯, 우리에게 원고를 보내오는 
<악마 연구가들>에게서 언뜻 들은 것도 같았지만 자신이 없었다. 
  "달베드르는 <세계의 제왕>이 있는 지하 사령부, <시나르키아>의 
은비주의적 중심인 아가르타 이야기를 쓴 사람이오. 겁이 없는 사람, 자기 
신념에 충실했던 사람이지요. 그러나 달베드르 이후로 이런 걸 지껄이던 
사람들은 모두 제거되고 말았소. 너무 많이 안다는 이유에서..."
  함께 지하 갱도를 걸으면서 살론 씨는 새 갱도가 나올 때마다, 그 
갱도의 어둠 속에서 자기의 의혹을 확인할 듯이 신경질적인 눈길을 갱도 
입구로 던지고는 했다.
  "지난 세기에 대도시들이 왜 다투어 지하철을 지었을까요? 의아하게 
생각해 본 적 없소?"
  "교통 문제를 해결하려고 그랬겠지요."
  "자동차가 발명되기 전인데도요? 마차밖에 없던 시절인데요? 똑똑한 
분들이라서, 좀 그렇듯한 설명이 있을 거라고 기대했는데..."
  "왜 그랬다고 생각하십니까?"
  "모르기는 하지만..."
  살론 씨는 이렇게 운을 때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대화는 살아나지 않았다. 조금 더 걷던 그는 어서 가봐야 한다고 
말했다. 나와 악수를 나눈 살론 씨는 잠깐 미적거리더니, 문득 생각난 듯이 
이런 말을 했다.
  "생각난 김에 하는 말인데... 그 대령, 이름이 뭐라더라... 선생께 성당 
기사단 보물 이야기를 하러 가라몬드 출판사에 왔던 사람... 그 사람 
어떻게 되었는지 아시오?"
  얼김에 뺨을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는 내가 지극히 사적인 비밀로 
묻어 두고 싶던 것을 무지막지하게, 아무 조심성도 없이 내밷은 것이었다. 
어떻게 아느냐고 묻고 싶었으나 그러기가 두려웠다. 그래서 태연한 어조로 
그의 예봉을 피하려고 했다.
  "아, 그 이야기요? 까맣게 잊고 있었어요. 하지만, <생각난 김에...>라고 
하셨는데, 왜 <생각난 김에>라고 하셨지요?"
  "내가 그랬소? 아, 그러고 보니 그랬군. 아무래도 그 양반이 뭔가를 
찾아낸 것 같아서요. 지하에서..."
  "어떻게 아시지요?"
  "말씀드릴 수가 없소. 누구로부터 들었는지 기억이 안 나거든... 아마, 
우리 가게로 오는 손님일 거요. 하지만 내 호기심은 지하 세계 이야기만 
나오면 걷잡을 수없이 동한답니다. 늙어빠진 보물찾기 광이라고나 할까요. 
이만 실례하오."
  살론 씨는 사라진 뒤에도 나는 거기에 서서, 그 이상한 만남의 의미를 
곱씹어 보았다."
  
      52
  
  뮌헨에서 돌아온 뒤 나는 벨보와 이오탈레비에게 이 이야기를 했다. 
우리는 다각도로 추리해 보았다. 우선 비학에 관심이 많고, 입이 가벼운 
기인 살론이 우연히 동호인인 아르텐티 대령을 만났을 가능성이 있었다. 
살론은 아르텐티의 실종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거나, 범인 의 끄나풀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악마 연구가들>의 원고를 검토하는 일에 부대끼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살론 씨 건은 우리 기억에서 밀려났다.
  어느 날 아글리에가 우리 사무실로 왔다. 벨보가 보낸 원고를 읽고 그 
의견을 개진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의견은 정확하고 예리하고 
포괄적이었다.
  역시 아글리에는 영리했다. 그는 벌써 가라몬드 출판사와 마누찌오 
출판사의 이중 거래를 간파하고, 우리 앞에서 공공연히 떠들어대기까지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런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아글리에는 
촌철 살인의 비평 몇 마디로 원고 한 건을 쳐부순 다음, 부드러우면서도 
차가운 웃음을 띤 채, 그래도 마누찌오 출판사용으로는 괜찮을 거라고 
했다.
  나는 그에게, 혹시 <아가르타>와 생 띠브 달베드르에 대해 아느냐고 
물어 보았다.
  "생 띠브 달베드르... 한마디로 싸잡아 기인이었지요. 소싯적부터 파브르 
돌리베의 신자들과 어울려 다녔어요. 내무성 사무관을 지냈지만, 그걸로는 
성에 안 차는 야심가였어요. 우리는 달베드르가 마리 빅또아르와 결혼하는 
것을 보고 그러면 그렇지 했어요..."
  아글리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옛일을 회상하듯이 주어를 
일인칭으로 바꿔 쓰고 있는 것 같았다.
  "마리 빅또아르는 누굽니까? 연애 이야기라면 언제 들어도 
재미있지요..."
  벨보가 끼어들었다.
  "마리 빅또아르 드 리즈니치... 으제니 왕비와 교우할 당시에는 실로 
아름다웠지요. 하지만 생 띠브를 만났을 당시에는 쉰 살을 훌쩍 넘긴 
과부였어요. 생 띠브는 30대 초반의 한창 나이... 빅또아르에게야 물론 내리 
혼인이었지요. 빅또아르는 젊은 신랑에게 작위를 마련해 주느라고, 
어디였는지는 기억이 안 납니다만 하여튼 달베드르 후작이라는 사람의 
영지를 사들였어요. 그런데 생 띠브, 이 염치없는 친구는 제 이름 뒤에다 
<달베드르>라는 이름을 달고 다녔더랍니다. 당시 파리에는 
<기둥서방>이라는 노래가 유행했으나 창피하기 이를 데 없었을 테지요. 
생 띠브는 마누라 덕분에 숨통이 트이게 되자 평소에 꿈꾸어 오던 일에 
전념했지요. 생 띠브는 조화에 바탕을 둔 정치 체제 구상에 매달린 것이오. 
그가 구상하던 정치 체제는 무정부주의의 반대 개념으로서의 과두 
체제였지요. 경제계, 사법계, 정신계(다시 말하자면 기독고와 인문 
과학계)의 권력을 대표하는 삼부회로 하여금 유럽 사회를 다스리게 하자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계몽주의적 과두 체제로 계급 투쟁의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었는데, 글세, 그리 나쁜 생각은 아니었소."
  "아가르타는 뭡니까?"
  "생 띠브는 어느 날 하찌 샤리프라고 하는 정체 불명의 아프간 인의 
방문을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하찌 샤리프>라는 이름은 알바니아 
이름이니 만치 아프간 인일 리가 없지요... 하여튼 이 사람이 생 띠브에게, 
<세계의 제왕>의 은거지에 대한 비밀을 귀띔합니다. 생 띠브 자신이 
<세계의 제왕>이니 하는 표현을 쓴 적은 없어요. 그저 <아가르타>라고만 
했지. <아가르타>... 찾을 수 없는 곳이라는 뜻이지요."
  "이런 내용을 어디에다 썼습니까?"
  "그 사람이 쓴 '우럽에서 인도의 사명'에 쓴 얘긴데, 공교롭게도 이 책이 
당시의 정치 사상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어요. 이 책에 따르면 
아가르타에서 무수한 지하 도시가 있고, 그 밑에, 다시 말해서 지구의 
중심과 더 가까운 곳에는 이러한 지하 도시를 다스리는 5천 현자가 
있어요. 여러분도 알거외다만, 5천이라는 숫자는 베다 언어의 난삽한 
어근의 수를 암시해요. 이 하나하나의 어근은 마술적인 신성 문자로 되어 
있는데 각기 천계의 힘에 의한 은혜와 명계의 힘에 의한 법칙과 상관이 
있답니다. 아가르타의 천장에는 거울 비슷한 것이 있고, 지표의 빛은 
이것을 통해 들어옵니다. 그런데 이 빛은 물리학 교과서에 나오는 
온음계적 태양광 스펙트럼과는 달리 세분율적인 색채 스펙트럼이랍니다. 
아가르타의 현자들은 이 세상의 온갖 신성한 언어를 다 연구한답니다. 
세계어, 즉 <바탄>을 만들기 위해서라지요. 이들은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를 만나면 공중으로 몸을 부양시키고, 가까이 있는 동료가 말리지 
않으면 천장에다 터질 때까지 머리를 찧는답니다. 번개를 벼른 것도 
이들이고, 양극간과 양회귀선간의 유동체 순환의 흐름, 다시 말해서 지구의 
위도와 경도가 서로 다른 지역의 간섭과 굴절의 방향을 조절하는 것도 
이들이랍니다. 이들은 또 종을 선택해서 영럭이 지극히 뛰어난 조그만 
동물을 만들기도 했답니다. 거북의 등껍질(노란 십자가 그려져 
있다지요.)에 덮인, 눈은 하나밖에 없는데 비해 입은 양쪽에 하나씩 붙어 
있는 동물, 발이 많아서 어느 방향으로든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동물, 
발이 많아서 어느 방향으로든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동물 같은 
것들이지요. 모르기는 하지만 아가르타는 성당 기사단이 와해되면서 숨어 
들어간 은거지가 아닌가 싶네요. 성당 기사들은 거기에서 경비군 노릇을 
했을 겁니다. 더 알고 싶은 게 있나요?"
  "하지만... 그게 제정신으로 한 소릴까요?"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그럴 거라고 믿어요. 우리도 처음에는 미친놈이라고 했지요. 
그러다가 그 양반이 어쩌면 환상을 통해, 상징을 통해 역사의 은비주의적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역사라고 하는 것은 피에 젖은 
무의미한 수수께끼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 있지요? 그럴 리가 없어요. 
역사에는 어떤 <섭리>가 작용하고 있을 겁니다. 섭리를 주관하는 
<정신>이 있는 게 분명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수 세기에 걸쳐 현자들이 
세계의 <주인> 혹은 <왕>의 존재를 상징. <확고한 의도>가 주기적으로 
잠정적으로 재생하는 존재로서의 <주인>이나 <왕>일 터입니다. 위대한 
성직자들이나 사라진 기사들은 틀림없이 이런 <의도>와 접촉했을 
것입니다."
  "정말 이걸 믿으시는 겁니까?"
  벨보가 물었다.
  "생 띠브 달베드르보다 더 양식 있는 사람들도 <미지의 초인>들을 찾아 
헤맸지요."
  "그래서 찾았나요?"
  아글리에는 웃었다. 자기 자신을 향한 웃음 같았다.
  "초심자 눈으로도 알아보게 될 바에야 그게 무슨 <미지의 초인>인가요? 
그러나저러나 여러분, 우리에게는 할 일이 많아요. 원고 여기 있어요. 
하지만 대단한 우연의 일치였어요. 비밀 결사에 관한 논문이었으니까 
말이오."
  "쓸 만한 소리를 하고 있습디까?"
  벨보가 물었다.
  "언감생심이오만, 마누찌오로 넘길 거리는 됩디다."
  
      53
  
  어느 날 작업실 문간에서 살론 씨를 만났다. 문득, 딱히 그럴 이유가 
없는데도 나는 살론 씨가 올빼미처럼 삑삑 소리를 내며 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막역지우라도 되는 듯이 인사를 건네더니 일은 
잘되어 가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저 그렇다는 몸짓만 해보인 뒤 미소를 
던지고는 바삐 그곳을 지났다.
  아가르타 이야기는 생각할수록 기이했다. 아글리에가 설명해준 생 띠브 
달베드르의 아가르타 아이디어는 우리 출판사 필자들인 <귀신 
떨거지들>에게야 흥미의 대상일 테지만 내가 보기에 경악의 대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뮌헨에서 만났을 당시 살론 씨의 
표정이나 말투를 미루어 보아 그것은, 적어도 그레게만은 분명히 경악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나는 시내로 나간 김에 도서관에 들러 '유럽에서 인도의 사명'을 
찾아보기로 했다.
  열람실과 대출 창구는 여느 때처럼 붐볐다.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해당 서랍을 열고 보니 마침 그 책이 도서관에 있었다. 대출 
카드를 작성하고 계원에게 내밀었다. 그런데도 계원은 나에게, 도서관에서 
흔히 경험할 수 있듯이, 무슨 자랑이라도 하는 듯이, 그 책은 대출되고 
없다고 말했다. 바로 그 순간 누군가가 내 뒤에서 말했다.
  "대출할 수 있을 겁니다. 내가 방금 반환했거든..."
  뒤를 돌아다 보니 데 안젤리스 경위였다.
  그는 나를 알아보았다. 문득, 너무 빨리 알아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우리가 만난 것은, 내 쪽에서 보면 특별한 상황이지만 그쪽에서 
보면 의례적인 수사 상황이었을 터이니 무리도 아니었다. 그러나 아르덴티 
사건 직후 나는 장발에 수염까지 기르고 있지 않았던가. 역시 무서운 
눈썰미였다.
  그는 내가 이탈리아로 돌아온 뒤로 줄곧 감시하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저 눈썰미가 좋은 데 지나지 않았던 것일까? 하기야 경찰관은 
관상을 본다든지, 외모나 이름을 기억하는 일이라면 도사의 경지에 이르러 
있어야 마땅할 터이다. 
  "사뇨르 까소봉, 우리는 같은 책을 읽는 셈이군요."
  나는 그제서야 손을 내밀었다.
  "이제는 <시뇨르 까소봉>이 아니고 <닥터 까소봉>랍니다. 학위를 딴 
지 좀 되었거든요. 처음 뵈었을 때 하시던 말씀대로, 이제 경찰 공무원 
시험도 볼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그랬더라면 내가 그 책을 먼저 대출받을 
수 있었을 테지요."
  "경찰이라서 먼저 대출할 수 있었던 게 아니오. 대출은 선착순이거든. 
하지만 내가 반납했으니까 박사가 빌어 볼 수 있을 거요. 커피나 한잔 살 
수 있으면 좋겠소만..."
  커피 마시자는 제안이 거북살스러웠지만 싫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우리는 가까운 까페에서 마주 앉았다. 그는 나에게 어떻게 
해서 <인도의 사명>에 관심을 갖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나는 되려 그에게, 
어떻게 해서 <인도의 사명>에 흥미를 갖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나는 먼저 
그의 의구심을 씻어 주어야 할 것 같아서, 시간 여유가 생기는 대로 성당 
기사단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고 설명해 주었다. 에센바흐에 따르면, 성당 
기사들은 유럽ㅇㄹ 떠나 인도로, 홀자에 따르면 아가르타 왕국으로 
떠났다고 합니다... 내가 여기에 관심을 기울이는 건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경위님은 왜 하필이면 이 책을 고르셨습니까?
  이제 그가 대답해야 할 차례였다.
  다 아시면서 그러시네, 박사가 성당 기사단에 관한 책을 추천해 주지 
않았어요? 그동안 나는 이 방면의 책을 읽어 왔지요. 성당 기사단의 
후일담이라면 아가르탁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라는 건 말씀드릴 필요도 
없겠지요..."
  정답을 말하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그가 말을 이었다.
  "... 농담이오. 비번때면 도서관을 기웃거리는 버릇이 있어요. 
로봇이랄까... 기게적인 형사 노릇을 하지 않으려면 이 수밖에 없어요. 박사 
같으면 이걸 세련되게 표현 할 텐데... 나는 잘 안 되는군요. 그것은 
그렇고, 박사는 어떻게 지내시나요?"
  나는 한차례 말 잔치를 벌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내 신상에 일어났던 
일부터 <금속의 경이로운 모험>에 이르기까지의 사연을 요약해서 
들려주었다.
  "박사가 소속되어 있는 출판사와, 바로 옆에 붙어 이쓴ㄴ 출판사에서는 
은비학 관계 서적을 준비하고 있지 않은가요?"
  그가 물었다. 그가 마누찌오의 일까지 알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벨보를 요주의 인물로 지목하고 몇 년 전부터 정보를 
수집해 왔던 것일까? 여전히 아르텐티 사건을 추적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가라몬드 출판사에는 아르덴치 대령 같은 사람이 줄창 드나들지요. 
마누찌오는 이런 사람들을 다루는 일을 합니다. 가라몬드 시장은 
은비학이라는 학문도 표층이 꽤 두터운 것으로 파악한 거지요. 그래서 
한번 갈아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그쪽 
필자는 한 트럭이라도 구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아르덴티 대령은 실종이오. 다른 필자들은 실종되지 말아야 할 
처인데 말이오."
  "아직은 실종딘 사람이 없습니다만, 실종되었으면 싶은 사람도 없지는 
않습니다. 경위님, 그나저나 내 궁금증 좀 풀어 주세요. 경위님은 업무상 
실종 혹은 그 이상의 끔찍한 일을 당하는 사람을 자주 만나게 될 터인데... 
사건이 생길 때마다 이렇게 오래 수사합니까?"
  경위는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무엇 때문에 내가 아직도 아르덴티 대령 실종 사건을 붙들고 있다고 
생각한 거지요?"
  그러면 그렇지... 그는 도박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판돈에다 
곱놓기까지 하고 있었다. 용기를 내어 도전에 맞섬으로써 그가 패를 
까보이게 만들든지, 꼬리를 내리고 물러서든지 그건 나에게 달린 셈이었다. 
하지만 나로서는 밑져야 본전이었다.
  "경위님, 왜 이러십니까? 가라몬드와 마누찌오를 마스터하고 아가르타 
관계 서적까지 찾아 읽는 지경이면서 이러실 거 없지요."
  "아르덴티가 박사에게 아가르타 얘기를 했다는 뜻이군요?"
  역시 정곡을 찌르고 들어왔다. 사실이 그랬다. 내가 기억하는 한 
아르덴티는 우리에게 아가르타 이야기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나는 슬쩍 
그의 겨냥을 흘렸다.
  "아뇨. 성당 기사단 이야기만 하더군요."
  "좋습니다. 박사는 우리가 사건 하나를 맡으면 해결될 때까지 줄곧 거기 
매달려 있는 줄을 아시는데, 아니랍니다. 해결될 때까지 물고 늘어지는 
일은 텔레비전에서만 일어납니다. 경찰관이라는 건 치과 의사나 
마찬가지예요. 환자가 오면 치료를 하고 약을 처방하고, 그 환자에게는, 
2주일 뒤에 오시오, 하고는 다음 환자를 봐야 합니다. 의사는 그 2주일 
동안 수백 명의 환자를 보게 됩니다. 대령 사건 같은 건 10년 이상 미제 
파일에 끼여 있을 수도 있지요. 그러다, 다른 사건을 수사하는 도중에 무슨 
자백을 받는다거나, 무슨 단서를 잡는다거나,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거나 
하면 다시 한 번 팔을 걷어붙여 보는 거지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걸로 끝입니다."
  "지름길의 가닥을 잡으신 것을 보니 최근에 뭔가 단서가 될만한 것 
발견하신 모양인데, 뭡니까?"
  "경솔한 질문이라고 생각지 않으시오? 하지만 나를 믿으시오만, 숨기고 
있는 건 없어요. 대령 사건은 우연히 다시 대두된 데 지나지 않아요. 
우리는, 전혀 다른 사건으로 한 인물에 눈을 대고 있었는데, 이 사람이 
상당한 시간을 피카트릭스 클럽에서 소일하는 게 아니겠어요? 피카트릭스 
클럽, 들어본 적 있지요?"
  "클럽은 모르겠고 잡지는 압니다. 뭘 하는 클럽인데요?"
  "아무것도 안 해요. 아무것도... 드나드는 사람들을 보면, 어디 나사라도 
하나 빠진 것 같은데, 하는 것들은 얌전해요. 그런데 문득, 아르덴티가 
거길 드나들고는 했다는 데 생각이 미칩니다. 남의 얼굴이나 이름을 
기억하는 재주 빼면 경찰관데게 무슨 재주가 있습니까? 기억력 하나는 
알아줘야죠. 심지어는 10년 저쪽의 얼굴도 기억합니다. 그래서 가라몬드 
출판사에서 일어나는 일이 궁금해졌던 것이죠. 그것뿐이에요."
  "피카트릭스 클럽과 경위님의 정치범 사이에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양심에 거리낄 게 없는 사람은 약간 무례해질 수도 있기는 합니다만 
박사의 호기심 정말 대단하군요."
  "커피를 마시자고 한 사람은 경위님 아니던가요?"
  "그렇군요. 우리 둘 다 비번이기도 하고요. 세상을 특정한 시각에서 보면 
말이지요. 저 일과 무관한 이 일은 없는 법이랍니다..."
  멋진 연금학적 명제올시다... 이 말을 해줄 참인데 그가 바트게 말을 
이었다.
  "...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정치 집단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술집에서 <붉은 여단>의 잔당을 잡는 수도 있고 무술 
도장에서 <검은 여단>의 잔당을 잡는 수도 더러 있었어요. 요즘 사정은 
정반대가 되었겠지만, 우리 경찰관들 참 희한한 세상에 살고 있어요. 
확언하지만, 우리 경찰관들 참 희한한 세상에 살고 있어요. 확언하거니와 
이 짓도 10년 전에는 해먹기가 쉬웠어요. 요즘은요, 이데올로기에도 
일관성이 없어요. 차라리 마약 단속반으로 옮길까 싶을 때도 있답니다. 
적어도 마약 장수에게는 마약을 판다는 일관성은 있거든요."
  잠깐 침묵이 감돌았다. 나는 경위가 말을 망설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한동안 뜸을 들이던 그가 주머니에서 미사 경본만한 수첩을 꺼냈다.
  "까소봉 박사, 박사는 업무상 해괴한 사람들도 더러 만나지요? 도서관을 
들락거리면서 이상한 책도 곧잘 읽으니까 말이오. 나 좀 도와주시오. 
<과두 체제>에 대해선 아는 것이 있으면 좀 가르쳐 주시오."
  "난처하게 만드시는군요. 아는 게 거의 없어요. 생 띠브 달베드르와 
관련해서 언급되어 있는 걸 주워들었을 뿐입니다. 그게 전부에요."
  "여기에 관해서 뭐라고들 합니까? 주위에서들."
  "뭐라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들은 게 없습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파시즘과 비슷한 것 같군요."
  "실제로 이런 이야기의 대부분은 프랑스 민족 행동파의 기관지인 
'악시옹 프랑세즈'를 통해서 흘러 나옵니다. 이것뿐이라면 문제될 것이 
없지요. 과두 체제 이야기를 하는 그룹이라고 해서 거기에 정치적 색깔을 
부여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하지만 내 독서에 따르면, 1929년 비비앙 
포스텔 뒤 마와 잔 까뉘도, 이 두 사람이 <폴라리스>(북극성)라는 단체를 
결성하는데, 이게 바로 <세계의 제왕> 신화 모티프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랍니다. 그런데 이들이 과도 체제 이야기를 하고 있지요. 요지는, 
자본주의의 이윤에 대항해서 사회주의적 복지 체제를 강화시키고, 협동 
조합 운동을 통해서 계급 투쟁을 배제하는 겁니다. 공동체와 자유 
의지론을 강조하는 일종의 페이비언 사회주의 같습니다. 하지만 유대 인 
중심의 과두체제 음모에 관련된 혐의로 <폴라리스>와 아일랜드 
페이비안주의 단체의 구성원들이 당국에 고발된 사태에 주의할 필요가 
있어요. 누가 고발했는지 아시오? 바로 <국제 비말 결사협회보>랍니다. 
바로 유대 인 - 프리메이슨 - 볼셰비키의 음모를 폭로하던 잡지 
아닌가요? 이 잡지의 협력자들 대부분은, 극우 통합주의의 비밀 결사인 
<라 사삐니에르>에 속해 있어요. 이 단체의 주장에 따르면, 혁명을 
획책하는 모든 정치 단체는 은비학자들의 사랑방에서 조직된, 악랄한 
악마주의자들의 전위 단체인 겁니다. 그렇다면 결국 생 띠브달베드르는 
개혁파 단체의 원조를 발진시킨 셈이고, 오늘날의 우익 단체는 이걸 
뭉뚱그려 민주주의 - 금권주의 - 사회주의 - 유대주의 사상 계열의 하부 
조직으로 본 겁니다. 무솔리니도 이렇게 보았어요. 그런데 문제는, 
은비주의자들의 사랑방이 관련되어 있다는 게 비난당할 근거가 되느냐는 
겁니다. 피카트릭스 글럽의 예를 들어봅시다. 많이는 모릅니다만 내가 아는 
한, 피카트릭스는 노동자들의 정치 운동에 하등의 관심도 나타내고 있지 
않아요."
  "소크라테스여, 내가 봐도 그렇습니다.... ."
  "소크라테스의 지혜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만.... . 이야기는 
이제부터가 중요합니다. 이 문제에 관한 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만큼 더 
헛갈려요. 좌우지간 40년대에는 다양한 형태의 자가 발전식 과두 
체제론자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납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당파를 
초월해서 몇몇 현명한 과두 체제 지도자들에게 유럽의 새 질서를 맡기자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주장이 어디로 수렴되었는지 아시지요? 바로 나치 
부역자들의 정권인 비시 정권이었답니다. 박사는 내가 틀렸다고 하고 
싶지요? 과두 체제는 좌익이 아나라 우익이라고 하시겠지요? 하지만 내 말 
조금만 더 들으세요. 여기까지 읽으니까 과두 체제론자들의 주장에 한 
가지 공통되는 주제가 있더란 말입니다. 무엇인고 하니, 과두 체제는 
지금도 존재하고, 지금도 막후에서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그러나>가 됩니다..... ,"
  "그러나?"
  "그러나 1937년 1월 24일, 프리메이슨 단원 겸 <마르띠니스트>(나는 
막연하게 무슨 비밀 결사단원이라는 것만 알 뿐, 이 마르띠니스트가 뭔지 
자세하게는 모릅니다)이자, 인민 전선의 경제 고문, 모스끄바 은행장인 
드미뜨리 나바히네라는 자가 자칭 <전국 혁명 행동대>라고 하는 비밀 
조직에 의해 암살당합니다. 무솔리니의 자금을 받고 있던 이 비밀 조직은 
<라 까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었어요. 당시 알려진 바에 
따르면, <라 까굴>는 모종의 과두 체제론자 단체의 비호를 받고 있었는데, 
나바히네는 바로 이 비밀에 접근하다가 살해당했다는 겁니다. 좌익 단체의 
기록을 읽어보면, 프랑스가 독일군에 패배하고 점령당한 것은 당시 
독일제국의 과두 체제론자들과의 협약 때문이었다는 겁니다. 즉, 포루투갈 
식 파시즘을 지향하는 밀약이 사전에 맺어져 있었다는 것이죠. 실제로 
뒷날  이 협약은 뒤 마와 까뉘도에 의해 초안된 것으로 드러나지요. 이 
협약의 기본 정신은 이 두 사람이 출판물을 통해 펼치던 주장이 고스란히 
반영된 것이라고 하지요. 말하자면 비밀이고 자시고 할 것이 없었던 
겁니다. 그런데 이런 정치 이념이 1946년 무슨 극비 사항인 것처럼 
위쏭이라는 사람에 의해 발표됩니다. 위쏭은 "과두 체제,  그 25년에 걸친 
극비 활동의 개요"라는 책을 통해 좌익에 의한 혁명적인 과두 체제적 
협정을 비난하고 나선 겁니다. 위쏭은 이 책을 가명으로 출판했는데. 가만 
있자, 가명이 뭐더라. 그래요, <죠프로아 드 샤르네>였어요."
  "얼시구.... 샤르네는, 성당 기사단 총수였던 몰레의 친구였어요. 둘 다 
화형을 당했지요. 그러니까 신 성당 기사단이 우익 쪽에서 과두 체제를 
공격한 것이군요. 하지만 과두 체제는 성당 기사단의 은서지인 
아가르타에서 성립된 정치 이념인데요?"
  "내가 뭐랍디까? 유감스럽게도 조금 더 헛갈리게 만들어서 그렇지 
박사는 벌써 내게 단서를 주고 있잖아요. 어쨌든 우익에서는 좌익 과두 
체제 협정을 사회주의적인 단체, 밀약의 당사자라고 비난하고 있어요. 
사실은 전혀 밀약이 아니었는데 말이지요. 박사도 잘 아시다시피 이 
단체는 좌익으로부터도 비난을 받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새로운 
사실들이 폭로됩니다. 즉 과두 체제는 제3공화국을 와해시키기 위한 
예수회 교단의 공작이라는 겁니다. 좌익에 속하는 로제 메네베의 논문을 
통해 나온 주장입니다. 그만하면 밤잠을 안 설쳐도 될까 싶었는데, 
이번에는 1943년 한 비시 군벌(뻬땅 파에 속하기는 해도 반 나치 성향이 
강한)이 유포시킨 자료가 내 손에 들어옵니다. 내용이 뭐냐 하니, 과두 
체제는 곧 나치의 음모라는 것이고, 히틀러는, 독일 제국의 건설에 
동참하기 위해 유대 - 볼세비키 음모로부터 손을 뗀 프리메이슨의 영향을 
받은 장미 십자단원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제 밤잠을 설치지 않아도 되겠군요?"
  "그랬다면 얼마나 좋겠소만, 여기에서 끝나지 않아요. 과두 체제론은 
국제 기술 만능주의자 단체가 꾸민 음모라는 것이오. 1960년에 출판된 
빌마레스뜨의 "5월 13일의 13번째 비밀"의 주장입니다. 빌마레스뜨에 
따르면, 이 기술 만능 - 과두 체제론자 단체가 각국 정부를 교란시키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고, 쿠데타를 지원하고, 정당 내의 분열을 조장하고, 각 
단체간의 분열을 획책한다는 겁니다. 자, 이런 과두 체제론자들이 누구인지 
아시겠지요?"
  "기가 막히는군요. 이건 <붉은 여단>이 몇 년 전까지 떠벌리던 <다국적 
제국주의 국가> 이론 아닌가요?"
  "정답입니다. 자, 형편이 이런데 만일에 데 안젤리스 경위가 또 다른 
곳에서 과두 체제론이 언급되어 있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하면 좋겠소? 데 
안젤리스 경위가 성당 기사단 전문가인 까소봉 박사에게 조언을 구하는 
겁니다."
  "까소봉 박사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이 세상에는, 전세계에 분파를 
거느린 비밀 결사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라는 것, 그리고 그 비밀 결사의 
목적이 전세계에다 세계 규모의 음모가 존재한다는 소문을 유포하는 것 
또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
  "농담이 아니에요. 나는."
  "나도 농담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한번 오셔서 마누찌오로 들어오는 
원고를 좀 읽어 보시지요. 진부한 설명이라도 좋다면 내가 한번 설명해 
보지요. 이런 원고가 난무하는 사태는, 말을 더듬는 사람이, 방송국에서 
당원증이 없다고 자기를 써주지 않더라고 불평하는 사태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추종자들을 단합시키는 데 필요한 외부의 
적을 찾는 경향이 있습니다. 복잡한 문제일수록 간단한 해결책이 있다는 
주장은 따라서 헛소리인 것입니다.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하면, 내가 만일에 기차에서, 과두 체제의 선전 전단에 싸인 폭탄을 
발견한다면, 이걸 복잡한 문제의 간단한 해결 방안이라고 해도 되겠소?"
  "무슨 소립니까? 그런 폭탄을 발견하기라도... 미안합니다. 이러는 게 
아닌데... 이건 내 소관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내게 이런 내 소관 밖의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궁금하군요?"
  "박사는 아무래도 나보다 더 많이 아실 것 같아서 물은 것이오. 그런데 
박사조차도 줄거리를 제대로 잡고 있지 못하다는 걸 확인하면 마음이 좀 
편해질 것 같아서 물은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박사는, 한 트럭이나 되는 
미치광이들의 원고를 밑도 끝도 없이 읽어야 하는 걸 시간 낭비라고 
했소만, 나는 달라요. 매게는 <미치광이>... 이건 박사의 표현이오, 내가 
말하는 <미치광이>는 정상적인 인간이라는 뜻이오... 하여튼 내게는 
미치광이들의 원고도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된답니다. 미치광이들이 쓴 
원고가 어쩌면 기차에다 폭탄을 장치하는 게 누군지 설명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박사는 경찰에 정보를 제공하는 게 두렵소?"
  "전혀. 더구나 목록을 보고 자료를 찾는 게 내 일입니다. 그럴싸한 
정보가 있으면 경위님을 염두에 두지요."
  데 안젤리스 경위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마지막으로 질문을 던졌다.
  "혹시 원고 중에... <즈레스>에 관한 언급은 없습디까?"
  "그게 뭡니까?"
  "나도 모르겠어요. 무슨 조직의 이름이겠지요. 이런 조직이 이쓴ㄴ지 
없는지 그것도 모르겠어요. 이런 말이 있다는 소리는 들었습니다. 박사의 
그 미치광이들가 무슨 관계가 있을 테지요. 벨보 박사에게 안부 
전해주시오. 그리고 나는 두 분 중 어느 분도 요주의 인물로 찍고 있지 
않더라는 말도 전해 주시오. 사실 말이지만 경찰관, 이거 못 해먹을 
직업이오. 그런데 문제는... 나는 이걸 즐기고 있단 말이야..."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오늘의 승자는 누구인가...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데 안젤리스는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나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셈이었다. 의심하기로 들면, 경위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게서 많은 
정보를 캐내었을 거라는 의심도 가능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러기가 싫었다. 
의심만 하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과두 체제 음모라는 이름의 
신경증에 걸릴 수도 있으니까...
  내가 그날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자 리아는 이런 말을 했다.
  "물으니까 하는 말이지만, 경위는 딴 뜻이 없었던 것 같네요? 그 양반은 
그저 그 복잡한 사연을 한차례 털어놓고 싶었던데 지나지 않았을 거예요. 
경찰청에서, 잔 까뉘도가 좌익이냐, 우익이냐 해봐야 누가 귀를 기울일 것 
같아요? 어림도 없는 얘기죠. 그러니까 경위는. 자기가 이 복잡한 과두 
체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자기 머리가 나빠서 그런지, 아니면 
과두 체제라는 게 너무 어려운 것이어서 그런지 그걸 한번 확인하고 
싶었을 거예요. 당신은 그런 사람에게 제대로 된 대답을 한마디 못 해준 
셈이고요..."
  "제대로 된 다답 한마디?"
  "물론이죠. 이해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과두 체제란 곧 하느님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거면 명쾌한 대답이 되었겠죠."
  "하느님?"
  "그래요. 인류는, 이 세계가 우연히, 혹은 누군가의 착오로, 말하자면 
의지가 없는 사원소를 미끌미끌한 고속 도로에서 서로 부딪치게 하는 
바람에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거라고요. 따라서 하느님, 
천사, 악마 같은 것들이 등장하는 우주적인 음모가 필요한 거죠. 과두 
체제는 규모가 작다 뿐이지, 같은 음모 역할을 하는 거랍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하느님을 찾느라고 기차에다 폭탄을 장치했다고 
대답할 것 그랬군?"
  "안 될 것도 없지."

    54

  가을이었다. 어느 날 아침, 마르께제 구알디 가에 있는 마누찌오에 
들렀다. 외국에서 천연색 도판을 수입하려면 가라몬드 사장의 결재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아글리에는 그라찌아 양의 방에서 마누찌오 
필자들의 원고를 검토하고 있었다. 나는 사장과의 약속 시간도 있고 해서 
아글리에에게는 인사도 하지 않고 바로 사장실로 들어갔다. 
  결재가 끝나자 나는 가라몬드 사장에게, 아글리에가 비서실에 
웬일이냐고 물어보았다. 
  가라몬드 사장은 이런 애기를 했다. 
  "그 양반 천재야, 천재. 정말 비상해. 예리하고 박식하고. 며칠 전, 
필자들과의 만찬이 있어서 이 양반을 모시고 갔더니 덕분에 내가 다 빛이 
납디다. 그 화술하며, 풍채하며, 구식신사, 아니 귀족이라고 하는 편이 
낫겠소. 우리 필자들 주눅이 팍 들어 버리는 거라. 그 박식이며 그 교양. 
아니, 박식이나 교양 정도라 아니라, 아주 정보통이라고 하는 게 좋겠소. 
한 세기 전 사람들의 일화를 들려주는데, 어찌나 거침이 없는지 흡사 
개인적으로 교우하던사람 이야기하듯 합디다. 돌아오는 차 속에서 뭐라고 
한지 아시오? 앉아서 <너울 벗은 이시스>의 필자를 기다릴 게 아니라는 
거라. 필자들에게 제작 비용을 감당할 의사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원고를 읽고 있다는 것은 시간 낭비라는 거요. 그 양반의 말에 
따르면 지난 20년 동안 마누찌오에서 책을 낸 필자 명단이야말로 우리의 
금광이라는 거요. 그 금광을 뒤적거리면서 우리 쪽에서 제안하자는 
아이디어지.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우리 쪽에서, 오래 전에 전성기를 
구가하던 필자들, 혹은 팔리고 남은 우리 재고를 몽땅 사들인 적이 있는 
필자들에게 편지를 내는 겁니다. 선생님, 금번 본사가 예지와 전통과 
고도의 정신성을 표방하는 시리즈를 기획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는지요... 
박학하시고 정세하신 선생님께서 이 <테라 인코그니타> 에 뛰어드시는데 
흥미가 있으시면... <에트 케테라, 에트 케테라>... 천재에요, 천재... 이번 
일요일에 무슨 집회가 있는데, 우리 모두 함께 가자고 합디다. 성이라던가, 
요새라던가... 아니, 토리노에 있는 무슨 별장이라고 합디다. 굉장한  일이 
거기에서 벌어질 거라더군요. 무슨 의식이라던가 제사라던가. 여기에서 
누군가가 연금 아니면 연은 시범을 보인답니다. 까소봉, 당신이 남다른 
정열로 몰두하고 있는 인문 과학도 내 물론 존중하오만, 이런 세계도 한번 
들여다보아야 하오. 아, 그것은 그렇고... 나는 당신이 하고 있는 일에도 
지극히 만족하고 있소. 그리고 그 돈 문제... 잊지 않고 있으니까, 곧 
처리합시다... 아글리에 말로는, 그 아름다운 아가씨라는 말에 어페가 
있으면 매력적인 아가씨라고 합시다... 눈이 특히 그랬으니까... 벨보의 
친구라지요, 이름이 뭐더라..."
  "로렌짜 펠레그리니라고 합니다."
  "그래요. 그것은 그렇고, 우리의 벨보와는 어떤 관계라지요?"
  "친구 사이인 모양입니다만..."
  "역시 신사다운 대답... 역시 까소봉이오. 내가 이렇게 궁금해 하는 것은 
늙은이의 호기심을 채우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당신네들이 모두 내 아들 
같아서... <알라게르 꼼 알라게르>, 뭐 이런 뜻으로 하는 말이오. 잘 
가시오."
  
  벨보는, 아글리에가 토리노 인근의 어떤 산장으로 우리를 초대했다고 
말했다. 그것도 두 군데나 우리를 데려간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초저녁에는 대부호인 장미 십자단원의 저택에서 벌어지는 파티에 참석하게 
되어 있는데, 이 파티가 끝나면 아글리에는 우리를 거기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데려간다는 것이었다. 
  "한밤중에 열린다니까, 모르기는 하지만 무슨 드루이드 의식 같은 
것이겠지..."
  벨보는 잠깐 생각을 가다듬고는 덧붙였다.
  "... 그렇지 않아도 어디 가서 우리끼리 머리를 모으고 금속사 편집 
문제를 좀 의논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네. 여기에서는 다른 일 
때문에 자꾸 밀리고 있거든... 그렇다면 토요일에 떠나는 게 어떨까? 
토요일에 떠나 내가 어릴 때 살던 집에서 며칠을 보내는 게... 아름다운 
곳이고, 특히 그곳 구룽지는 며칠 할애할 가치가 넉넉히 있을 것이네만... 
디오탈레비가 갈 곳이고, 로렌짜도 갈 것 같네. 원한다면 당신도 누구랑 
동행해도 좋아."
  벨보는 내가 누군가와 동거하고 있다는 것만 알 뿐 개인적으로는 리아를 
알지 못했다. 나는 혼자 가겠다고 했다. 리아와는 며칠 전에 다툰 일이 
있었다. 별 것 아니어서 며칠 지나면 서로 잊어버릴 만한 것이었다. 차제에 
나는 며칠 밀라노르 떠나 있고 싶었다.
  
  가라몬드 출판사의 삼총사와 로렌짜 펠레그리니는 이렇게 해서 
<모처>로 떠났다. 그런데 출발부터 긴장의 연속이었다. 모두 자동차에 
오르는 순간에 로렌짜가 이런 말을 했다.
  "아무래도 나는 남는 게 좋겠어요. 그래야 세 분이 조용하게 일을 할 수 
있을 테니까요. 뒤에 시몬과 함께 합류하죠, 뭐."
  벨보는 팔짱 낀 두 팔을 운전대 위에 올려 놓은 채 전방을 응시하면서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타!"
  로렌짜가 차에 올랐다. 로렌짜는 조수석에 앉은 채, 자동차가 달릴 동안 
시종 벨보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벨보는 아무 말업ㅂㅅ이 운전만 했다.
  벨보에 따르면 <모처>는, 전쟁 때 보던 모습 그대로였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집집이 좀 낡은 것과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나 머려 농사가 사양 
산업이 되어 있는 것 정도라고 벨보는 설명했다. 그는 잡초로 덮여 있는 
언덕을 가리키면서, 전에는 누런 곡식이 넘실대던 밭이었다고 했다. 벨보가 
살았다는 구룽 발치의 모롱이를 돌자 읍내가 보였다. 자동차가 구룽을 
오르고 있었을 때 벨보는 민둥산 꼭대기를 가리켰다. 민둥산 위에는 
성당이, 두 그루 소나무를 양쪽으로 끼고 서 있었다.
  "... 브리코 산이야. 자네들에게야 저 성당이 그저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성당으로 보일 테지. 우리는 부활절 다음날의 안젤로 축일에는 도시락을 
싸가지고 저 산으로 올라가고는 했네. 자동차로는 5분이면 오를 저 산을 
우리 어릴 때는 걸어서 오르면서 순례자 기분을 내고는 했다네."
  
    55
  이윽고 저택에 도착했다. 저택이라기보다는 지하에 널찍한 창고가 있는 
농가였다. 그 지하 창고야말로 까를로 백부를 민병대에 고발한 호전적인 
소작인 아델리노 까네빠가 꼬바소 농장 포도원에서 수확한 포도로 
포도주를 빚던 곳이었다. 까네빠가 쫓겨났다고는 내낸 비어 있었던 것 
같았다.
  거기에서 좀 떨어진 초라한 농가에는 아델리노 까네빠의 숙모만 생존해 
있었다. 벨보는, 까네빠의 숙모는 아주 나이가 많은 노파로, 조그만 
채마밭을 가꾸고 닭 몇 마리와 돼지 한 마리를 친다고 했다. 까를로 밸부 
내외나 까네빠 내외는 벌써 세상을 떤난 지 오래인데도 노파만은 백수하고 
있는 셈이었다. 농토는, 상속세 납부와 부채 청ㅇ산 때문에 벌써 남의 
손으로 넘어간 뒤였다. 벨보는 백수 노파가 사는 초라한 농가의 문을 
두드렸다. 이윽고 문을 열고 나타난ㄴ 노파는 이모저모를 한참 뜯어본 
다음에야 벨보를 알아보고 유난을 떨면서 안으로 들어오기 ㄹ 청했다. 
그러나 벨보는 노파를 껴안아 진정시킨 두에 그 자리에서 돌아섰다. 
  우리는 저택으로 들어갔다. 로렌짜는 계단과 복도와, 고가구가 놓인 
컴컴한 방을 들여다보고는 환성을 올렸다. 여느 때도 그렇듯이 벨보는 
차분하게 저택을 구경시킬 뿐 별말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가 그 
<타라>야말로 주인을 제대로 만난 셈이라고 했을 때만은 약간 기분이 
좋아진 내색을 했다. 그는, 이따금씩 그 저택을 찾지만 자주 오는 편은 
아니라면서 이런 말을 했다.
  "일하기 아주 좋은 곳일세. 벽이 아주 두꺼워서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냉기를 막아 주거든, 게다가 난로도 곳곳에 놓여 있네. 
피난민으로 이 집에 더부살이했던 만큼 당연한 일이지만 우리 식구는 복도 
끝에 있는 방 두 개만을 썼네. 지금은 백부 방이나 박모 방도 다 차지하고 
이렇게 쓸 수 있지만... 나는 일할 때는 여기 까를로 백부의 서재를 
쓴다네..."
  서재에는, 양쪽을 접을 수 있는 책상이 하나 잇었다. 위는 종이 한 장을 
겨우 올려 놓을 수 있으리 만티 좁았으니 조그만 서랍이 무수히 달려 
있었다. 밖으로 보이는 서랍도 있지만, 보이지 않는 서랍도 벨보는 말했다.
  "... 여기에 아불라피아를 놓을 수는 없지만, 이따금씩 와서 써보면 
컴퓨터로 쓰기보다는 어린 시절처럼 손으로 쓰는게 좋더라고..."
  웅장한 벽장을 가리키면서 그가 말을 이었다.
  "... 내가 죽거든, 잊지들 말게, 나의 <유베닐리아>(문학 청년 시절의 
습작)는 여기에 있다는 걸. 열여섯 살 때 쓴 시, 열여덟 살 때 쓴 여섯 
권짜리 대하 소설의 초고 등등..."
  "봐요, 어디 좀 봐요..."
  로렌짜가 한바탕 박수를 치고는, 부러 고양이처럼 가만가만 벽장으로 
다가가면서 소리쳤다.
  "동작 그만! 볼 것도 없다고. 나도 이제는 안 보는 걸... 나는 죽을 때가 
되면 여기 와서 이걸  모두 태워 버릴 생각이야."
  "그럼 여긴 귀신도 생긱고... 좋겠다."
  "지금도 있어. 까를로 백부가 살아 있을 당시에는 없었어. 귀신 대신에 
재미만 있었거든. 목가적이지? 내가 여기에 더러 오는 것도 목가적인 
분위기가 좋아서야. 골짜기의 개 짖는 소리를 들으면서 일하는 거... 
굉장하지."
  그는 우리에게, 우리 차지가 되는 방을 보여 주었다. 이건 디오탈레비의 
방, 이건 까소봉의 방, 이건 로렌짜의 방... 로렌짜는 제 방을 둘러보고는 
낡은 침대와 침대 겉덮개를 만져 보고, 홑이불 냄새를 맡아 보고는, 라벤더 
행수 냄새가 나는 것으로 보아 자기 할머니의 이야기에 등장하던 방 
같다고 했다. 벨보는 라벤더 행기가 아니라 곰팡이 냄새라고 했다.
  "무슨 냄새가 되었든..."
  로렌짜는 벽에 기대 서서, 회전 당구 칠 때 그러듯이 엉덩이를 뒤로 
비죽이 내밀면서 물었다.
  "... 여기서 나 혼자 자나요?"
  벨보는 먼산바라기를 하다가 눈길을 우리 쪽을 잠깐 돌리더니 다시 
몬산바라기로 바꾸었다. 그리고는 그 방에서 나갈 채비를 하면서 말했다.
  "그건 나중에 얘기하자고. 얘기가 어떻게 돌아가든, 원한다면 당신 혼자 
오붓이 이 방으로 피난해도 좋아."
  디오탈레비와 나는 그 방을 나왔다.
  뒤에서 로렌짜의 음성이 들려 왔다.
  "왜 그래요? 내가 창피한 거예요?"
  "이 방을 안 주었으면, 잘 방 주지 않는다고 또 투정을 부렸을 테지. 
어쨌든 나는 선수를 쳤으니까 알아서 택하라고..."
  벨보의 음성.
  "이런 터키 인 뺨칠 꼬보같으니... 뭐라고 하든 나는 여기 이 조그맣고 
예쁜 방에서 잘거야,"
  로렌짜의 목소리.
  "우리는 일 때문에 온 사람들이야. 테라스로 나가자고..."
  벨보의 짜증 섞인 목소리였다.
  
  우리는 담쟁이덩굴에 덮인 널찍한 테라스에서 일을 시작했다. 나가 보니 
벌써 시원한 음료수와 커피가 넉넉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알코올은 
저녁때까지는 마실 수 없었다.
  테라스에서는 브리코 산이 보였다. 산 밑으로, 운동장과 축구장이 딸린 
수수한 건물이 보였다. 운동장과 축구장에는 색색 가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우글거렸다. 내가 보기에는 애들 같았다.
  "살레지오 교구 교회라네. 돈 티코 사제가 우리에게 악기를 가릍치던 
곳이야. 악단을 만들어 가지고..."
  문득 꿈에 그리던 트럼펫이었으나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결국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던 벨보의 말이 생각났다. 그래서 벨보에게 물어 보았다.
  "트럼펫이던가요, 클라리넷이던가요?"
  벨보는 잠깐 기가 막힌다느 눈치를 보이더니 말했다.
  "아니,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아. 응, 그래, 당신에게 꿈 이야기를 했지... 
트럼펫 꿈... 돈 티코 사제에게는 트럼펫을 배웠지만 막상 악단에서는 
봄바르돈을 붙였지."
  "봄바르돈이 뭐더라?"
  "그런 게 있었네. 일이나 하세."
  
  그러나 일을 시작하고도 나는 벨보가 자주 그 교구 교회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는 한다는 걸 알았다. 벨보가, 교구 교회를 곁눈질할 핑계로 동네 
이야기를 꺼낸다는 인상을 받았을 정도였다. 가령, 그는 토론하는 
도중인데도 불구하고 이런 이야기를 곁들이기도 했다.
  "종전 무렵 저 아래에서 치열한 총격전이 있었네. 그 직전까지만 해도 
여기 이 <모처>에서는 파시스트와 유격대 사이에는 모종의 묵계가 
이루어져 있었지. 그래서 2년 내리 유격대가 봄만 되면 산에서 내려와 
마을을 점령해도 파시스트는 멀찍이 떨어져서 구경만 할 뿐 개입을 하지 
않았네. 파시스트는 이 근동 출신이 아니었지만 유격대원들은 전부 이 
동네 토박이들이었거든. 싸움이 벌어질 경우 유격대원의 기동성은 참으로 
놀라웠네. 옥수수 밭이든, 숲이든, 산울타리든 손금 보듯이 훤히 보고 
있었거든. 파시스트 군대는 시내에 진치고 있다가 이따금씩 기습 공격이나 
하는 정도였네. 겨울철이 되자 유격대원들은 평야에 있기가 점점 
어려워지게 되었네. 은폐물이나 엄폐물이 없는 데다가 눈이라도 쌓여 
있을라치면 1킬로미터 떨어진 기관총좌에서도 유격대의 움직임을 일곡 
기관총질을 해대고는 했거든. 그래서 유격대는 높은 산으로 올랐네. 산에 
있는 산길, 동굴, 은신처도 유격대원들은 손금 보듯 훤했을 테지. 
유격대원들이 산으로 오르자 파시스트들이 나타나 평야 지역을 장악했네. 
하지만, 그때가 종전 전야였을 거라. 파시스트들은 그때까지, 아무래도 
시내에 마지막 공격이 있을 거라고 전정긍긍하면서 평야 지대에 머물고 
있었네. 실제로 4월 35일에는 이들의 우려가 현실이 되고 말았지만...
  나는 파시스트와 유격대 사이에 모종의 연락이 있었을 것으로 믿어. 
유격대는, 조만간 모종의 결정적인 사채가 터질 것을 감지하고는 충돌을 
피하느라고 산악 지대에 그냥 숨어 있었거든. 밤이 되자 <라디오 런던>은 
고무적인 뉴스를 날렸네. 프래키 부대를 향해 띄우는 듯한 암호 방송은 
날이 갈수록 노골화되고 그만큼 빈번해졌네. 가령, 내일 또 비가 오겠다. 
피에트로 아저씨는 빵을 가져 왔다. 이런 식이었지. 디오탈레비 자네는 
아마 이런 방송 들었을 것이네. 그런데 유격대와 파시스트의 상호 연락에 
모종의 차질이 생겼나 봐. 파시스트가 후퇴하기도 전에 유격대가 산에서 
내려와 버린 것이지.
  어느 날 테라스에 나가 있던 내 누이가 집 안으로 들어오더니 밖에서 두 
사람이 총을 가지고 숨바꼭질을 하고 있다는 거라. 우리는 그저 그런가 
보다 했지. 오는 편이 되었든 총 가지고 장난하는 사람은 있는 법이니까... 
언젠가는 실제로 군인 둘이 총으로 장난하다가 총이 발사되는 바람에 
총알이 집 진입로의 나무 둥치에 박힌 적도 있거든. 내 누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바로 그 나무 둥치에 기대 서 있더라지.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내 누이가 기대 서 있는 나무 두치에 총알이 박히는 걸 보고는 누이에게, 
총 든 사람이 얼쩡거리면 집안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단단히 타이른 걸세. 
그러니까 내 누이는 자기가 말을 얼마나 잘 듣는지 자랑한답시고 군인들이 
총을 들고 얼쩡거리자 집 안으로 뛰어들어와 군인들이 총을 가지고 
숨바꼭질을 한다고 소리쳤던 거네. 누이가 들어온 직후에 첫 번째 총성이 
울리더니 이어서 두 번째, 세 번째. 급기야는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지는 
거리. 산탄총 소리, 다르륵 거리는 자동 소총 소리, 수류탄 터지는 소리인 
듯한 둔탁한 소리도 들렸네. 그제서야 우리는 더 이상 장난이 아니라는 걸 
알았지. 하지만 장난이라거니 아니라거니 입씨름할 수가 없었네. 총소리 
때문에 우리 목소리는 서로의 귀에 들리지도 않았거든.
  땅땅, 콰쾅, 따를륵따르륵... 나, 내 누이, 우리 어머니는 설거지 대 아래 
엎드려 있었네. 그때 까를로 백부가 복도를 기어오더니 우리가 적에게 
너무 노출되어 있으니까 자기네 방으로 가야 한다더군. 까떼리나 숙모는 
울고 있더군. 할머니가 출타 중이라면서..."
  "그때가, 할머니가 십자포화를 피해 밭에 엎드렸다는 게 바로 그때 
일이었군요?"
  내가 그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아나?"
  "73년, 시위가 있던 날, 시위 끝난 뒤에 그 이야길 하셨잖아요?"
  "세상에... 기억력 하나 끝내 주는군. 사람은 마땅히 말 조심해야 
한다니까. 맞아. 하지만 우리 아버지 역시 출타 중이었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양쪽에서 총을 쏴대고 특히 <검은 여단>의 경기관총수들이 
광장을 뒤지고 다니던 터라 밖으로 나올 수가 없더래. 그 자리에는 마침 
그 직전에 시장을 지낸 파시스트도 있었는데, 그 양반은 모퉁이 하나만 
돌아 나가면 자기 집이라며서 나가겠다고 부득부득 우기더라는군. 
그리고는 총소리가 잠시 뜸해진 틈을 타서 복도를 뛰쳐나가 길 모퉁이를 
돌아 나가더니 총탄을 맞고 쓰러지더라는 거라. 우리 아버지는, 1차 대전 
경험도 있고 해서, 그대로 복도에 피신해 있는 게 상책이라는 생각이 
들더라는군..."
  "말하자면 이곳이야말로 달콤한 추억의 명소로군 그래."
  디오탈레비의 말이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달콤하다>는 말은 사실이네. 내가 기억하는 것은 
대충 이런 것들 뿐이야."
  다른 사람들은 벨보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어렴풋이 
이해할 것 같았다.
  
  이제 나는 분명하게 안다. 몇 달간이나 <귀신 떨거지들>이 지어낸 
허위의 바다를 항해하고 있던 그에게, 세상에 대한 자신의 환멸을 
소설이라는 허구로 포장하고 잇던 그에게, <모처>에서 보낸 시절은 
희귀하게 명징한 시대였다. 맞든 피하든 총알은 총알이었고, 붉은 제복과 
붉은 제복으로 구분되는 두 적대 세력도 그 정체가 분명했다. 그것은 
명징했다. 만일에 그것이 명징한 것이 아니었다 해도 적어도 그에게만은 
그렇게 보였다. <시체는 시체>라는 것은, 곧 <시체는 시체>라는 것이지 
여기에 다른 어떤 관념의 장난은 개입할 수 없었다. 그 당시에는 아르덴티 
대령처럼 슬그머니 사라져 버리는 사람도 없었다. 나는 그에게, 당시 
우리들 사이로 살금살금 파고들던 과두 체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았다. 
까를로 백부와 몽고의 만남도, 서로 적대 세력권에 속하면서도 기사도라는 
동일한 이년 아래 한 덩어리가 되었으니 결국은 그 역시 과두 체제가 
아니겠느냐고. 그러나 나는 하지 않았다. 나는 벨보한테서 벨보의 
<꽁브레>를 빼앗고 싶지 않았다. 그 시대 추억이 그에게 <달콤>했던 
것은. 바로 그 추억이 그가 알던 유일한 진실을 곡진하게 들려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세상의 온갖 사물을 회의하게 된 것은 뒷날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가 나에게 암시했듯이, 이 진실의 시대에도 그는 여전한 
방관자였다. 그는 타인의 추억이 탄생하는 것, 타인의 역사가 탄생하는 것, 
혹은 수많은 역사적 사건이 탄생하는 것을 목격한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 
, 결국 그 역사는 그의 손에 씌어질 수도 없는 그런 역사였다. 그에게도 
영광과 선택의 순간이라는 게 있기는 있었던 것일까? 그가 이런 말을 
덧붙기에 하는 말이다.
  "내 평생, 딱 한 번 당당하게 영웅 흉내를 내어 본 것도 그 날이야."
  "어마나, 존 웨인 아저씨, 그게 뭐야?"
  로렌짜가 물었다.
  "별 것은 아니야. 식구들이 백부의 권유에 못 이겨 백부 방으로 옮겨 
가기로 했지만 나는 그 복도에 있겠다고 고집을 부렸어. 우리가 있던 곳이 
2층이고, 또 우리 있던 곳에는 창문이 없었거든. 그러니까 총알이 벽을 
치고 들어오지 않는 한 무사할 것 같았어.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총탄이 
빗발치듯이 쏟아지는 전장 한가운데 우뚝 선 대장 기분이 들더라고.... . 
그런데 백부는 화를 내면서 나를 자기 방으로 끌고 들어가는 거라. 한창 
즐기려는 판국에 끌려가게 되었으니 얼마나 화가 나? 그래서 마악 울음을 
터뜨리는 참인데 세 발의 총소리와, 유리창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뭔가가 튀는 소리가 나더군. 누군가가 복도에서 정구를 치고 있는 것 
같더라고. 결국 총알이 유리창을 뚫고 들어와, 송수관을 스치고는, 조금 
전까지 내가 서 있던 바로 그 복도 바닥에 박힌 거라. 내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틀림없이 크게 다쳤을거야. 모르기는 하지만."
  "다행이네요. 불구자라도 되었으면 나는 어떡해.... ."
  로렌짜가 볼멘소리를 했다.
  "차라리 불구자가 되는 게 나았는지 모르지."
  벨보가 중얼거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경우도 스스로 선택했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결국 백부에게 몸을 맡기고 끌려갔던 것이므로.... .
  한 시간쯤 지났을까... 벨보가 다시 일손을 멈추었다.
  "... 그러고 있는 참인데 아델리노 까네빠가 2층으로 올라오더군. 
아무래도 지하실이 더 안전할 것 같다면서... 당시 까네빠는 백부와 몇 년 
동안 말도 않고 지내던 사이였어. 그런데 다급해지니까 인간으로 돌아온 
거지. 백부는 까네빠에게 악수까지 청하더군. 우리는 컴컴한 지하실 
안에서는 술냄새가 코를 찌르고 바깥에서 총소리가 연신 들리고... 정신이 
없더라고. 한참 그러고 있으니까 총소리가 뜸해지더군. 어느 한쪽이 쫓겨간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참인데 작은 길목으로 뚫린 유리창을 통해 
지독한 사투리가 들려오는 거야. <몬쑤, 이에 들라 레푸불리까 벨레 
시>..."
  "그게 무슨 뜻이에요?"
  로렌짜가 물었다.
  "대충 <여보세요, 미안하지만 거기에 아직도 이탈리아 사회주의 공화국 
지지자가 있는지 알려 주실 수 있어요.>, 이런 뜻이야. <사회주의 공화국 
지지자>... 당시로서는 큰 욕이었어. 유격대원이, 유리창을 통해 바깥을 
내다보는 사람들에게 물었던 거지. 우리는 그제서야 파시스트가 
쫓겨갔다는 걸 알았어. 그때 이미 날은 어두워져 있었는데, 얼마 뒤에 
할머니와 아버지가 돌아와서는 각자의 무용담을 들려주었고... 어머니와 
까떼리나 백모는 저녁 준비를 했고... 백부와 까네빠는 절교 상태로 
되돌아갔고... 저녁 내내 산속에서 총소리가 들려오더군. 유격대원들이 
파시스트 패잔병을 쫓고 있었던 거라. 결국 우리가 이겼던 거지."
  로렌짜가 벨보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벨보는 코를 찡그렸다. 그는 
자기 편의 승리가 파시스트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영화에서처럼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던 셈이었다. 한순간이마 
그는 송수관을 맞고 되튀는 총탄을 무릅쓰고 영화의 화면 속으로 들어간 
셈이었다. 그러나 한순간이었다. 그나마 도망치면서...
  실제로 '헬짜포핀'에 그런 장면이 있다. 이 영화는 두 개의 영화를 
합성한 것인데, 말을 탄 인디언이 무도회장으로 뛰어들어, 놈들이 어디로 
가더냐고 묻는다. 춤을 추고 있던 사람들 중 하나가, <저쪽>이라고 
대답하면 인디언은 말을 달려 다른 이야기 속으로 섞여 들어간다.
  
    56
  
  우리는 <금속의 경이로운 모험>에서, 수압관의 경이로움을 설명하는 
장에 이르러 있었다. 이 장에는 헤론의 '스피리탈리아'에서 복사해 낸 
16세기 동판화가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이 동판화는 어떤 제단을 그린 
것으로 이 제단에는 증기의 힘으로 나팔을 울리게 하는 장치가 있었다.
  나는 나팔 그림을 본 김에 벨보에게 다시 옛날 이야기를 졸랐다.
  "돈 티코 브라헤라던가, 누구던가... 그 양반 잉기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트럼펫을 가르텨 주었다는 사람 말입니다."
  "돈 티코 브라헤가 아니라 그냥 <돈 티코(티코 씨)>였다네. 나는 
<티코>가 그 양반의 성인지 이름인지 그것도 몰라. 그 뒤로 교구 
회당으로는 돌아가지 않았으니까... 처음 교구 회당에도 우연히 갔었어. 
교구 회당에서는 미사에도 참례하고, 교리 문답도 하고, 갖가지 시합도 
하고 그랬지... 시합에 이기면 돈 티코 사제는 현자 도메니코 성인이 
그려진 카드를 주고는 했네. 도메니코 성인 기억 나나? 헐무렁한 바지 
차림을 하고, 돈 보스꼬 성인의 성상에 매달려 있는 젊은 성자? 또래 
아이들의 지저분한 농담은 들은 척도 않고 하늘을 우러러보고 있던 성자... 
그 전에 나는 이미 돈 티코 사제가 열 살에서 열네 살에 이르는 
사내애들을 뽑아 악대를 만들었다는 걸 알고 있었네. 어린것들은 장난감 
클라리넷, 횡적, 소프라노 색소폰을 불었고, 나이가 좀더 든 축은 큐바와 
베이스 드럼을 연주하고 그랬지. 제복도 있었어. 카키색 윗도리, 파란 바지, 
그리고 각모... 얼마나 멋져 보이던지... 나도 거기에 들고 싶더군. 그런데 
돈 티코 사제는 마팀 봄바르돈 연주자가 하나 필요하다는 거라..."
  벨보는 우쭐대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우리가 진작에 다 알고 
있는 걸 되풀이하는 듯한 어조로 얘기를 계속 했다.
  "... 봄바드돈은 튜바의 일종이자 <마 단조>의 베이스 호른이야. 악대 
중에서 가장 인기도 멋대가리도 없는 악기였지. 대개는 그저 <붐빠, 붐빠> 
하는 게 고작이었고 박자가 바뀌어 봐야 <바빠, 바빠> 정도였거든. 
배우기도 쉬웠어. 금관족에 속하는 악기여서, 트럼펫과는 주법도 비슷해. 
트럼펫을 불자면 폐활량도 커야 하고... 입술을 마우스피스에다 잘 붙일 줄 
알아야 하고 <앙부쉐르>도 생겨야 하는데... 앙부쉐르 알아? 루이 
암스트롱의 윗입술에 굳은 살 같은 거 생겨 있는 걸 봤지? 입술을 
마우스피스에 잘 붙여야 소리도 맑고 깨끗해지고, 숨소리도 새어 나가지 
않게 돼. 중요한 건 뺌을 부풀리지 않아야 해. 트럼펫 불 때마다 뺨을 
부풀리는 연주자는 영화나 만화나 뉴 올리언스 사창가의 연주자밖에 
없어..."
  "트럼펫 어떻게 되었느냐니까요."
  "... 트럼펫은 독습했네. 한여름 오후, 애들이 교구 회당을 다 빠져 
나가면 조그만 극자으이 좌석 사이에 숨어서 트럼펫을 연습하고는 했네... 
하지만 내가 트럼펫을 배우기로 작정한 것은 일조의 연애 감정 
때문이었어. 교구 회당에서 한 1킬로쯤 떨어진 데 있는 조그만 별장 
보이지? 저 집이 당시 살레지오 회 후원회장의 딸 체칠리아가 살던 
집이네. 국경일에 교구 회당 운동장에서 행진이 있은 뒤나, 특히 극장에서 
아마추어 극단이 공연하기 전에 악단의 연주가 있을 때면 후원회장인 
어머니와 체칠리아는 맨 앞 줄의 귀빈석, 성당의 주임 사제 옆자리에 
앉고는 했네. 극장의 공연도 대대의 경우 악단의 '힘찬 출발' 연주와 함께 
시작되었네. 트럼펫 연주자들은 이때를 대비해서 금빛 은빛 트럼펫을 
번쩍번쩍 광이 나게 닦았고... 트럼펫 연주자들이 일어섰다가 앉으면 곡이 
시작되었거든. 내가 보기에, 체칠리아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는 트럼펫을 
부는 수밖에 없더라고..."
  "... 수밖에 없어요?"
  로렌짜가 가련하다는 듯이 물었다.
  "... 다른 방법이 없었어. 첫째, 나는 열세 살인데 체칠리아는 열세 살 
반이어. 여자는 열세 살 반이면 벌써 반은 여자나 다름이 없는데, 남자 
열세 살은 여전히 코찔찔이 아냐? 게다가 체칠리아는 벌써 앨토 색소폰을 
부는, 이름이 <빠삐> 뭣이던가, 내 눈에는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녀석을 
좋아했던 모양이야. 체칠리아는, 능청스럽게 몸을 흔들어 대면서 
색소폰으로 염소소리를 내는 그 녀석만 보는 것 같더라고. 색소폰이라는 
것도 오오넷 콜먼이 불 때라야 색소폰이지, 악대의 일부가 되어, 그것도 
쥐포수 같은 빠삐가 불었으니... 염소우는 소리가 날 수밖에... 술에 취한 채 
고객을 꾀는 패션 모델이라면 그런 소리를 낼거라, 아마..."
  "당신이 패션 모델이 손님 꾀는 소리를 어떻게 알아서요?"
  "... 하여튼, 체칠리아의 안중에는, 나 같은 건 있지도 않았어. 나는 
체칠리아와 함께 하룻밤에도 몇 개씩의 성을 쌓기도 하고 허물기도 했는데 
말이야. 저녁마다 농장으로 우유를 가지러 가느라고 산을 오를 때면 
체칠리아를 모델로 멋진 이야기를 꾸미고는 했지. 체칠리아는 <검은 
여단>에 납치되고... 나는 총탄이 휙휙 내 귀를 스쳐 밀 짚단에 팍팍 
박히는 걸 무릅쓰고 체칠리아로서는 상상도 못 할 나의 정체를 털어 
놓는다... 나는 지금까지 숨겨왔지만, 사실은 몬페라토 전 지역의 
레지스땅스를 지휘해 온 사람이다... 그러면 체칠리아는 당신 같은 사람이 
몬페라토 지역 레지스땅스르 지휘해주기를 진심으로 소원해 왔다는 걸 
고백하고... 그 순간이 되면 내 온몸의 핏줄이라느 핏줄은 꿀 같은 죄 
의식의 홍수가 자르르 흐르는 것 같았지... 오해하지 말라고... 축축해졌다는 
뜻이 아니야.
그보다 훨씬 장엄하고 훨씬 굉장한 느낌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면 
고백해야지... 나는 죄악, 사랑, 영광이라는 게 바로 이런 것이라고... 
침대보로 밧줄을 만들어 타고 게슈타포 본부를 빠져 나오는 동안 여자는 
내게 매달린 채, 꿈에 그리돈 순간이라고 속삭인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런 장엄한 순간들이라고. 나머지는 섹스, 짝짓기, 종족 보존을 위한 
짓거리에 지나지 않아. 요컨대, 내가 트럼펫 파트로 옮겨 가기만 하면 
체칠리아는 나를 무시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 번쩍거리는 
트럼펫을 들고 벌떡 일어서 있을 동안, 색소폰 주자는 초라한 행색을 하고 
제자리에 앉아 꼼지락거리고 있을 테니까... 트럼펫 소리는 호전적이고, 
천사적이고, 묵시적이고, 의기 양양하지. 트럼펫 소리는 공격적이야. 그거에 
비하면 색소폰 소리는 머리카락에다 기름을 발라 넘긴 꾀죄죄한 빈민가 
건달이 땀내나는 가난뱅이 아가씨와 춤추는데 반주나 하는 악기 아닌가. 
나는 죽어라고 트럼펫을 연습한 다음 돈 티코 사제에게 달려가 내 솜씨를 
보여 주었다. 브로드웨에서 진 켈리와 시험 흥행을 하던 오스카 레반트가 
내 기분이었을 거라... 돈 티코 사제 왈... <그래, 네 솜씨는 훌륭하다, 
그런데 문제는...>"
  "아이고 아슬아슬해라. 사람 조마조마하게 만들지 말고 시원시원하게 
계속해요."
  "... 내 봄바르돈을 대신 불어 줄아이가 있어야 한다는거야. 그러면서 
나더러 어떻게 좀 해보라는군... 나섰지. 당시 내가 살던 <모처>의 
마을에는 지지리도 못난 내 동급생이 둘 있었는데... 나이는 나보다 두 
살씩이나 많았어. 두 살씩 많은데도 동급생이다. 무슨 뜻이냐 하면 애들의 
학습 태도가 지독하게 나빴다는 뜻이야. 한 녀석의 이름은 
아니발레깐딸라메싸, 또 한 녀석은 피오 보... 별표 찍고... 역사적인 
사실이니까..."
  "그건 또 무슨 소리에요?"
  로렌짜가 물었다.
  벨보를 대신해서 내가 슬며시 설명해 주었다.
  "살거리에세는 모험 소설에다 실화나, 자기가 실화라고 생각하는 사건을 
이야기에 삽입할 때마다, 꼭 별표를 찍고 각주를 다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 
이야기에요. 가령 <리틀 빅혼> 전토 직후 인디언 추장 <시팅불>은 
인디언 사냥꾼인 카스터 장군의 심장을 먹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인요할 
경우 별표(*)를 찍고, <역사적 사실>이라는 각주를 달았던 거죠."
  "암, 그 두 얼간이의 이름이 각각 아니발레 깐딸라메싸와 피오 보였다는 
건 역사적 사실이므로 이름이 이 두 아이의 악동 짓거리를 실증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야. 녀석들 지독한 좀도둑이기도 했어. 잡지 가판대에서 
만화를 훔치지를 않나, 수집 취미가 있는 대들이 신주처럼 모시던 탄피를 
훔치지를 않나. 당시 나에게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바다 이야기를 
다룬 호화 장정 동화책이 있었는데, 두 녀석 중 하나는 학교로 가져온 
기름투성이의 살라미 샌드위치를 그 위에 다 올려 놓고 먹더라고. 그 
정도였어. 깐딸라메싸는 자칭 공산주의자, 보는 자칭 파시스트엿지만, 웬걸, 
새총 한 자루면 180도로 돌려 세우는 것도 언제든지 가능했지. 어디에서 
주워들은 어설픈 해부학 지식을 토대로 정력 자랑을 하는가 하면 전날 
수음한 횟수를 겨루는 그런 녀석들이었어. 추켜만 세워 놓으면 무슨 
일이든 할 녀석인데 잘만 요리하면 봄바르돈인들 마다할 것 같지 않았지. 
그래서 꾀기로 했어. 악대부 제복 자랑도 해주고 실제로 연주회도 
구경시켜주고... 잘만 하면 성모 마리아의 딸들을 애인으로 차지할 수도 
있다는 등... 끌려들 수밖에... 며칠을 극장으로 데려가 연습을 시켰지. '선교 
지침'이라는 소책자에서 본 대로 막대기를 하나 준비해 가지고 있다가 
박자를 놓칠 때마다 손등을 때려주기도 하면서... 봄바르돈은 키가 세 
개밖에 없어. 문제는, 조금 전에도 말해지만, 마우스피스와 입술을 
밀착시키는 방법이야. 애들 훈련시킨 얘기는 길게 않겠어. 오후에 낮잠도 
설쳐 가면서 극장에서 연습한 끝에 드디어 대들을 돈 티코 사제에게 
선보이는 날이 왔지.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런데로 괜찮더군. 돈 티코 
사제도 그런대로 괜찮겠다면서 애들에게는 제복을 내어 주고 나 보고는 
트럼펫 파트로 옮겨 가라고 하더라고. 그로부터 한 주일 뒤, 성모 마리아 
승천 축제가 열리고, 연극 '그들은 파리를 구경해야 했다.' 가 무대에 
오르게 되었지. 막이 오르기 직전 우리 악대는 관중들 앞에서 공연해야 
했고..."
  "신나는 순간이었겠군요. 체칠리아는요?"
  로렌짜가 부러 질투하는 표정까지 지어 보이면서 물었다.
  "거기에 없더군. 아팠던가... 모르겠어. 어쨌든 체칠리아는 있어야 할 
자리에 없었어..."
  벨보는 눈꼬리를 올리고 청중인 우리의 반응을 살폈다. 그럴 때의 그는 
영락 없는 음유 시인, 아니면 광대 같았다. 계산된 침묵 끝ㅌ에 그가 말을 
이었다.
  "... 이틀 뒤 돈 티코 사제가 부르길레 가봤더니, 아니발레 깐딸라메싸와 
피오 보 때문에 공연은 엉망이 되고 말았다고 펄쩍펄쩍 뛰는 거라. 박자를 
못 맞춘 것은 고사하고, 봄바르돈 파트가 연주하지 않고 있을 때는 객석을 
두리번거리지를 않나, 저희들끼리 장난을 하고 있지 않나... 그러는 것은 
좋은데, 봄바르돈 파트가 들어와야 하는데도 제 박자를 찾아 들어오지 
못하더라는 거야. 돈 티코 사제 왈, <봄바르돈은 악대의 중추이자, 율동의 
의식이며, 악대의 혼 같은 것이다. 악대를 양치는 일에다 견주자면, 악기는 
양떼, 악장은 목자, 봄바르돈은 양떼를 지키는 사납고 충실한 개 같은 
것이다. 악장이 맨 먼저 찾는 것은 바로 봄바르돈이다. 봄바르돈만 제대로 
좇아온다면 양떼는 봄바르돈을 좇아오기 마련인 게다. 야코포야, 이런 
부탁을 해서 미안하다마느 희생 정신을 한번 발휘해 줘야겠다. 
봄바르돈으로 되돌아가 다오. 너의 박자 감각은 탁월하다. 그러니까 나를 
대신해서 다른 두 애들의 박자를 이끌어 주어라. 내 약속하거니와, 두 
애들이 제대로 하게 되면 너를 트럼펫 파트로 옮겨 주마>... 돈 티코 사제 
덕분에 악대부원이 되었는데... 못하겠다고 할 수 있어? 그러마고했지. 다음 
축을 때 트럼펫 주자들은, 다시 그 자리에 나타난 체칠리아 앞에서 벌떡 
일어나 '힘찬 츨발'의 첫 소절을 불더군. 나는 사람들 눈에는 띄지도 않는 
컴컴한 구석 자리에서 봄바르돈 파트의 일원으로 봄바르돈을 불었고... 그 
두 녀석? 긑내 봄바르돈을 제대로 불어 내지 못했어. 그러니 나도 트럼펫 
파트로 되돌아갈 수 없었고... 전쟁 끝나고 나는 내가 살던 도시로 
되돌아가는 바람에 음악이니 금관족 악기니하는 것과는 영영 이별을 했어. 
그래서 체칠리아의 성이 뭔지도 몰라."
  "가엾어라. 하지만 내가 있잖아요?"
  로렌짜가 뒤에서 그를 껴안으면서 속삭였다.
  "당신은 색소폰을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벨보는 이러면서 돌아서서 로렌짜의 손에 입을 맞추고는, 진지한 말투로 
우리를 채근했다.
  "... 일이나 합시다... 우리가 여기에 있는 건 미래의 이야기를 창조하기 
위해서이지 과거를 추억하기 위해서는 아니니까..."
  
  그날 밤에는 금주령이 해제된 걸 서로 자축했다. 야코포 벨보는 그날 
낮의 그 우울했던 표정을 벗어 버리고 디오탈레비와 되지도 않은 기계 
이야기를 하느라고 열을 울렸다. 두 사람이, 발명하겠다고 열을 올리는 
기계는 벌써 발명이 끝난 기계가 대부분이었다. 하루를 힘들게 보내고 
자정이 되었다. 바야흐로 구릉지 저택에서 자는 희한한 경험을 하게 될 
터였다. 
  내 침대보는 오후에 내가 만져 보았을 때보다 더 눅눅했다. 야코포 
벨보는 우리에게, <신부>라는 걸 써야 할 거라고 했다. <신부>라고 하는 
것은, 침대보를 들어올리고 그 사이에다 조그만 잿불 화로를 넣게 되어 
있는 타원형 틀이었다.. 그는 어떻게 하든지 우리가 전원 행활의 기쁨을 
마음껏 맛ㅂㄹ 수 있도록 이런저론 잔걱정을 여가나 세심하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습기가 심할 경우, 이 구식 난방 기구는 눅눅한 것을 더 
눅눅하게 하는 법... 따뜻한 것은 좋은데, 침대보의 습기는 좀체 가시지 
않았다. 이런 빌어먹을! 나는 일어나서 불을 켰다. 주름갓이 달린 등이었다. 
시인들이 자주 이런 광경을 노래하거니와, 하루살이가 무수히 날아들어 
등을 맴돌다가 타죽고는 했다. 나는 잠을 청하느라고 신문을 읽기로 했다.
  마악 잠이 드는 참인데, 무엇인가가 내 문을  소리가 들려왔다. 
짐승이라고 잘라 말할 형편이 아니었다. 낮 동안 둘러보았지만 그 집에는 
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이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문득 그 긁는 소리가, 
일종의 유혹, 요철, 혹은 함정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벨보가 자기를 
감시하고 있는걸 잘 알고 로렌짜가 그런 짓을 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잇었다. 물론 아닐 수도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로렌짜는 벨보의 
여자다, 이렇게 간주하고 있었다. 게다가 나에게는 리아가 있었던 만큼 
다른 여자에게 관심을 가질 처지도 아니기는 했다. 그러나 로렌짜는 
사무실에서든 술집에섣든 벨보를 놀려먹을 때마다, 동지나 증인을 찾는 
듯이, 내 쪽으로 은밀한 시선, 공모의 시선을 던지던 생각이 났다. 나는 
로렌짜의 그런 시선을 장난의 일부이거니 여겨 오던 참이었다. 확실히 
로렌짜에게는, 상대가 어떤 남성이 되었든 그의 성적인 역량에 도전하는 
듯한 눈길으 던지는 기이한 재능이 있었다. 당신이 좋은 데... 당신이 
얼마나 겁쟁이인지 어디 볼까... 이렇게 말하는 듯한 이상하게 도전적인 
눈길... 그날 밤 손톱으로 내 문을 긁느 소리를 듣는 순간부터 나는 기이한 
느낌에 시달렸다. 그것은 욕망이었다. 나는 로렌짜를 바라고 있었던 것임에 
분명했다.
  나는 머릴르 베개에 파묻고 리아를 생각했다. 나는 나 자신에게 이런 
다짐을 했다.
  ... 리아와 나 사이에 아이가 생겼으면 좋겠다. 딸이 되었든 아들이 
되었든, 숨만 제대로 쉬면 그때부터 트럼펫을 가르쳤으면 좋겠다...
  
    57
  
  정오가 가까워지자 로렌짜가 화사한 웃음을 띤 채 테라스로 나와, 열두 
시 반에 <모처>에 서는 멋진 기차가 있는데, 한번만 갈아타면 오후에는 
밀라노에 당도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누가 되었든 
자기를 역까지만 태워다 달라는 것이었다.
  벨보는 검토하고 있던 자료에서 눈도 떼지 않고 말했다.
  "아글리에 역시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걸로 아는데? 이건 내 생각인데, 
아글리에가 이 회동을 주선한 건 전적으로 당신을 위해서였을 거라."
  "그건 아글리에의 사정이죠. 누가 날 태워다 주시겠어요?"
  로렌짜가 쏘는 소리를 했다.
  벨보가 일어나면서 우리에게 말했다.
  "잠깐이면 될걸세. 바로 되짚어 올 테니까... 두어 시간 여기에서 일을 더 
하자고. 로렌짜, 가방은 챙겼어?"
  역까지 가면서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모르겠다. 약20분 
뒤에 돌아온 벨보는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않는 채 일을 계속했다.
  
  오후 두 시. 우리는 시장 광장에서 좋은 음식점을 찾아낼 수 있었다. 
벨보는 음식을 주문하고 포도주를 시키고 나니 생기던지 어린 시절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러나 그의 말투를 보아, 흡사 남의 자서저을 
인용하는 것 같았다. 전날의 입담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식사가 
끝난 뒤 우리는 아글리에와 가라몬드 사장과 회동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벨보는 남서쪽으로 차를 몰았는데, 도로변 풍경이 시시각각으로 
바뀌었다. 늦가을이데도 불구하고 <모처>의 구릉지 풍경은 부드럽고 
향토적인데 견주어 우리가 자동차를 달리면서 만나는 풍경은 지평선이 
넓어지고, 모퉁이를 돌 때마다 봉우리가 높아졌다. 봉우리 위로는 간간이 
마을도 나타나고는 했다. 끝ㅇ없는 원경이었다. <다리엔 지협>이 따로 
없군. 단애와 단애 사이로 지평선을 바라보면서 디오탈레비가 촌평했다. 
우리는 기어를 3단으로 바꾸어 끝없이 펼쳐지는 산등성이를 올랐는데, 
고원 끝의 산에는 이미 겨울 안개가 뽀얗게 끼어 있었다. 산속으로 
들어왔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구릉진 평야에 있는 기분이었다. 흡사 
솜씨도 없는 조물주가 지나치게 높다고 여겨지는 산을 찌그러뜨리고 이걸 
질척하게 반죽 해서 바다에 이르기까지, 아니면 험악하고 고집스러운 산의 
사면에 이르기까지 꾹꾹 눌러 놓은 것 같았다.
  우리는 미리 약속해 둔 마을에 이르러, 동네 광장의 까페에서 기다리던 
아글리에와 가라몬드 사장을 만났다. 아글리에는, 로렌짜가 동행하지 않은 
것이 매우 섭섭했을 터인데도 그런 내색은 하지 않았다.
  "우리 멋쟁이 아가씨께서는 남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인간의 본바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이 밀교의 의식에는 참가하고 싶지 않았던가 보군요. 
그것이 바로 내가 높이 평가하는 절제의 미덕이라는 것이지요."
  이 말뿐이었다.
  우리는 목적지로 향했다. 가라몬드 사장의 메르세데스 벤츠가 앞서고 
벨보의 르노가 뒤를 따랐다. 해가 질 무렵에야 언덕 위에 서 있는 노란 
건물 앞이 우리 눈에 들어왔다. 건물은 18세기의 저책 같았다. 날이 
추웠는데도 체라스에는 꽃이 피어 있었다. 
  언덕의 기슭에는 수많은 자동차가 주차되어 있는 넓은 공터가 있었다.
  "여기에서 내려서, 걸어 올라가야 합니다."
  아글리에가 말했다.
  날이 저물면서 어둠이 내렸다. 오르막길 가에는 무수한 횃불이 있어서 
우리 발 아래를 비춰 주고 있었다.
  
  세상에 희한한 일도 다 있지... 그날 거기에 이르고부터 밤중까지 있었던 
일에 관한 한 내 기억은 또렷하면서도 뒤죽박죽이다. 이틀 전 파리의 
전망경실에서도 나는 이때 일을 떠올렸다. 그리고는 그날의 기억과 
전망경실에서의 경험이 지극히 유사한 것을 깨달았다.
  전망경실에서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 너는 지금 여기, 썩어 가는 나무 냄새에 취한 채 지극히 
초자연적인 상황을 만나고 있다. 너는 지금 무덤 속에, 혹은 선복 안에 
갇힌 채로 변신의 순간을 상상하고 잇다. 네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전망경실 바깥을 내다보는 일이 고작이다. 내다보면 어둠 속으로, 오늘 
낮에만 하더라도 정지하고 있던 온갖 물체가 지금은 마법의 향연속을 
엘레시우시스의 망령들처럼 흐느적거리는 광경이 보일 것이다. 
  그날 그 저택에서 한 경험도 이와 유사했다. 횃불 빛, 산길에 대한 
놀라움, 내가 들은 말, 그리고 향내... 이 모든 것이 어쩌면 그렇게도 꿈을 
꾸고 있다는 느낌을 지어 내게 하든지... 꿈은 꿈이되 비몽사몽간에 꾸는 
꿈을 꾸고 있는 꿈.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반대로 모든 것을 나는 
기억한다. 마치 내가 살았었던 것처럼이 아니라, 마치 누군가가 내게 
이야기한 듯이 말이다.
  내가 뜻밖에도 똜하게 기억하는 이런 일들은 실제로 일어났던 것인지, 
아니면 일어나기를 바랐던 것인지 그것은 나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가 
그 <계획>을 마음에 떠올린 것이 바로 그날 밤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우리는, 형상이 없는 것에 형상을 부여하고, 사람들이 현실이 되기를 
바라던 환상을 환상의 실재로 변용시키고 싶다는 욕망에 쫓긴 나머지 그런 
계획을 염두에 두게 되었던 것 같다.
  산길을 올라가면서 아글리에가 우리에게 이런 말을 했다.
  "이 길을 오르는 것부터가 벌써 하나의 의례랍니다. 이건 실제로 저 
위애한 장미 십자단 시대에 하이델베르크, 다시 말해서 선거후 프리드리히 
5세를 위해 살로몽드 꼬오가 고안했던 가공원과 똑같거나 거의 같습니다. 
조명이 어둡지요? 어두워야 합니다. 왜냐? 보기보다는 느껴야 하니까. 이 
집 주인은 살로몽 드 꼬오의 설계를 그대로 재현한 것이 아니라 좁은 
공간에 집약시킨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이델베르크 선거후가 대우주를 
형상화항한 것예 견주어 이 집 주인은 소우주를 모방한 것이지요. 저 
로까이유양식의 동굴을 보세요... 천연 동굴이 아니라 장식적인 동굴입니다. 
그러나 살로몽 드 꼬오는, 산호가 철인의 돌로 등장하는 미하엘 마이어의 
'아탈란타 푸리엔스 (발빠른 아탈란타)'의 상징을 염두에 두었던 것임에 
분명합니다. 배열의 전체적인 형식이 우주의 조화를 본뜨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살로몽 드 꼬오는 가공원이 어떻게 천계의 행성에 영향을 미칠 수가 
있습니까?"
  가라몬드 사장이 물었다.
  "기호 중에는 서로를 끌어당기는 기호도 있고 서로  시하는 기호도 
있고, 서로 껴안는 기호도 있고, 서로의 사랑을 강화하는 기호도 있는 
법입니다. 그러나 이런 기호는 특정의, 한정된 형상을 갖지 않습 ㄷ. 아니, 
가져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자기 혼의 격정이나 충동에 소박하게 순응할 
때 초자연적인 힘을 체험할 수 있어요. 이집트의 상형 문자를 대하던 고대 
이집트 인들에게도 바로 이런 일이 일어났었지요. 왜 그러냐 하면, 우리 
인간과 신들의 교감은 봉인이나 상징이나 기호나 의식을 통하지 않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가공원이 바로 그런 봉인이요, 
상징이요, 기호요, 의식인 것입니다. 이 테라스의 구석구석이 연금술의 
비법을 재현하고 있습니다만 불행히도 우리는 이것을 읽을 수가 없어요. 
이 집 주인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오랜 세월 여축한 재산을, 이제는 
아무도 그 의미를 해독하지 못하는 표의 문자 체계를 설계하는 데 바친 
것으로, 밀교에 귀의하고자 하는 이 집 주인의 흔하지 않은 정열은 
사장께서도 읽을 수 있겠지요."
  우리는 테라스를 하나씩 차례로 지났다. 테라스를 지남에 따라 가공원의 
모양도 바뀌었다. 미로의 형상을 한 테라스가 있는가 하면 상징 형상을 
하고 있는 테라스도 있었다. 공통되는 점이 있다면 어떤 테라스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지 않으면 그 전모를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왕관 모양의 테라스가 보였다. 옆을 지나치면서는 그 형상을 
끌어안을 수 없는 테라스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위에서 내려다본다고 
해도 형사으이 의미를 알아먹기는 쉽지 않았다. 산울타리 속을 지나면서 
볼 때의 형상이 따로 있고, 위에서 볼 때의 형상이 따로 있었다. 흡사 계단 
하나하나가 각기 다른 언어로 동시에 우리에게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꽤 높은 데 오르고 보니 조그만 구조물이 무수하게 눈에 들어왔다. 
홍예문 아니면 주랑 같은 구조물 아래에는 남근상 모양의 분수가 서 
있었다. 분수대 옆으로는 돌고래를 탄 해신 넵투누스, 설주가 어쩐지 
아시리아 풍을 연상시키는 문, 무수한 다각형 위에다 무수한 다각형을 
올려 놓은 듯한 이상한 형태의 홍예도 있었다. 이러한 그조물들은 
뿔사슴이나 원숭이나 사자 같은 동물상 위에 올려져 있었다.
  "이 모든 조상에 각기 의미가 있다는 것이지요?"
  가라몬드 사장이 물었다.
  "있다마다요! 핀치넬리의 '문두스 심볼리쿠스'만 읽어 봐도 자명해집니다. 
이 책은 공교롭게도 알키아티가 그 놀라운 선견지명으로 일찍이 출현을 
예언했던 책이지요. 이 가공원 전체는 한 권의 책으로, 혹은 하나의 
진언으로 읽힐 수 있는 것이랍니다. 하기야 책과 진언은 다른 것이 
아니지만요. 그 의미를 감청하게 되는 순간 누구든 이 가공원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될 테고, 그렇게 되는 사람은 달 아래 있는 이 세상의 
측량할 길 없는 권능을 제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 가공원은 
우주를 다스리는 도구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아글리에는 우리를 동굴로 안내했다. 해초 더미, 해수의 형태가 널려 
있었다. 진짜인지 알아보기 어려웠지만 짐작건대 석고나 돌로 빚은 것 
같았다... 꼬리에, 성경에 나오는 거대한 괴어처럼 비늘이 난 황소와 그 
황소를 껴안고 있는 해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반인 반어의 해신 
트리톤이 항아리 안 듯이 안고 있는 거대한 뿔고둥에서는 물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는데, 해정의 조상은 바로 그 물에 잠겨 있었다.
  "수력을 이용한 진부한 장난감으로 오해할 것 같아서 이 구조물의 
의미는 설명해 드리는 편이 좋겠군요. 살로몽 드꼬오는, 용기에 넘치도록 
물을 채우고 여기에 뚜껑을 하면, 설사 바닥에 구멍을 뚫어도 물이 한 
방울도 안 나온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물론 뚜껑에 구멍을 뚫으면 물은 
아래로 쏟아지지만요."
  "당연하지요. 뚜껑에 뚫린 구멍으로 공기가 들어가 그 기압으로 물을 
아래로 내리 누르니까요."
  내가 그의 말에 참견했다.
  "과학적인 설명의 전형이군요. 원인을 결과로, 혹은 결과를 원인으로 
오해한 설명이라는 말이오. 문제는 첫 번째 경우에는 왜 물이 안 쏟아지고 
두 번째 경우에는 왜 물이 쏟아지느냐, 하는 것이오."
  "그러면 첫 번째 경우에는 왜 물이 쏟아지지 않는 겁니까?"
  가라몬드 사장이 물었다.
  "왜냐? 첫 번째 경우에 물이 쏟아져 나오면 용기 안에 진공이 
생기거든요. 자연은 진공 상태를 싫어한답니다. <네쿠아 쿠암 바쿰>, 즉 
<공은 존재하지 않는다>야말로 현대 과학이 망실한 장미 십자단의 근본 
원리였던 것입니다."
  "대답합니다. 까소봉, 이걸 우리가 만들고 있는 <금속의 경이로운 
모험>에다 넣읍시다. 하이라이트로 말이지요. 유념하세요. 물은 금속이 
아니라는 말은 하지 마세요. 상상력을 동원해야 할 때니까요."
  가라몬드 사장의 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벨보가 아글리에에게 
대들었다.
  "죄송합니다만, 그 논법은 <포스트 호크 에르고 안테 호크>, 뒤에 오는 
것이 앞에 있는 것의 원인이라는 주장... 다시 말해서 선후를 뒤바꾼 
논법이 아니냐는 겁니다."
  "선조적 사고 방식은 곤란하지요. 이 분수의 물도 그렇지 않고, 자연도 
그렇지 않습니다. 자연은 시간을 모릅니다. 시간은 서구의 발명품일 
뿐입니다."
  
  올라가면서 다른 손님들도 보였다.
  "와, 하나같이 <파키에스 헤르메티가>!"
  디오탈레비가 중얼거리자 벨보가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헤르메스 
상을 한 순례자들 중에는 길 한쪽으로 비켜선 채 입술에 생색을 내는 
듯한, 딱딱한 미소를 개어 바른 살론 씨도 있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살론 씨를 아는가요?"
  아륵리에가 내게 물었다.
  "살론 씨를 아시는 모양이군요? 저도, 물론 압니다. 같은 건물에 
살았거든요. 살론 씨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가 반문했다.
  "잘은 몰라요. 믿을 만한 친구 하나는 경찰의 끄나풀이라고 하더군..."
  살론이 그래서 가라몬드 출판사와 아르덴티 일을 그처럼 소상하게 알고 
있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살론과 데 안젤리스의 정확한 관계는? 그러나 
나는 그런 의문은 내색도 않고 아글리에에게 이렇게만 물어 보았다.
  "아니, 이런 잔치에 경찰의 끄나풀에게 무슨 볼 일이 있어서요?"
  "경찰의 끄나풀이 안 가는 데도 잇나요? 경찰 끄나풀의 기밀 보고서 
작성에는 온갖 경험이 다 동원되는 법이랍니다. 경찰 업무에 관한 한, 많이 
알면 알수록, 혹은 많이 아는 체하면 많이 아는 체할수록 권력은 그만큼 
더 막강해지는 법이오. 그 앎의 대상이 참이냐 아니냐 하는 건 문제도 안 
돼요. 중요한 것은 기밀을 차지하는 것이에요."
  "그렇다면 주최측에서는 왜 살론 씨를 초대했을까요?"
  "이 집 주인이 구약 '지혜서'의 황금률을 존중하기 때문일 테지요. 
오류도, 우리가 알아보지 못할 뿐 어쩌면 진리인지도 모를지니... 그래서 
진정한 밀교는 모순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모든 모순은 결국 서로 만난다, 이런 말씀이시군요."
  "<쿠오드 우비퀘, 쿠오드 아브 옴니부스 에트 쿠오드 셈페르>가 바로 
거깁니다. 오의라는 것은 곧 불후의 철학을 찾아내는 일이지요."
  
  이런 식으로 만나는 사물을 철학화시키면서 오르다 보니 마지막 
테라스이자, 성 또는 저택의 입구까지 펼쳐지는 널따란 뜰 한중간의 
오솔길이었다. 산을 오르면서 본 것보다는 조금 큰, 열주의 횃불 사이로 
보니, 금빛 별이 무수히 찍힌, 푸른 옷차림의 처녀가 서 있었다. 처녀는 
손에 나팔을 들고 있었다. 오페라 시작을 알릴 때 쓰이는 그런 나팔이었다. 
주일 학교 연극에 등장하는, 화장지 날개를 달고 나온 천사처럼 처녀의 
등에도 크고 허연 날개가 달려 있었다. 날개에는 아몬드 모양 그림 
한가운데 점이 찍혀서 흡사 사람의 눈 같은 무늬가 무수히 수놓여 있었다.
  가라몬드 출판사로 찾아온 적이 있는, 우리 최초의 <귀신 떨거지>이자 
자칭 <오르도 템플리 오리엔티스의 반대 세력인> 카메스트레스 교수도 
거기에 와 있었다.
  "하늘 땅 사이에 우리가 모르는 일이 아직도 많다더니 참말이었구나."
  가라몬드 사장이 중얼거렸다.
  우리는, 제네바 공동 묘지를 연상시키는, 층계로 되어 있는 문간을 
지났다. 문의 상인방에는 정교한 신 고전주의 양식의 우의화와 함께 
<콘돌레오 에트 콩그라툴라토르> 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안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생기 있게 움직이고 있었다. 꽤 넓은 홀 
한가운데엔 뷔페 상이 차려져 있었는데 사람들은 주로 그 상을 중심으로 
모여 있었다. 홀에는 위층으로 통하는 두 개의 계단이 솟아 있었다. 낯선 
사람들 가운데에 브라만티와, 놀랍게도 가라몬드 사장 손에 한차례 
농락당한 바 있느 자비 출판 필자 데 구베르나티스도 끼어 있었다. 데 
구베르나티스가 사장에게 농락당했다고는 하나 사장에게 어찌나 
고분고분하게 굴었던지 그의 걸작이 펄프가 되는 끔찍한 사태는 그럭저럭 
면하고 있는 셈이었다. 아글리에에게 차례로 인사를 건네는 사람 중에는, 
눈빛이 형형하고 체수가 작은 사람이 유난히 눈에 뜨였다. 강한 프랑스 
억양을 쓰는 것으로 보아, 아글리에의 집 가죽 커튼 뒤에서 마술을 쓴다고 
브라만티를 비난하던 삐에르임에 분명했다.
  나도 뷔페 상으로 다가가싿. 생긴 것만으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색색의 
음료가 담긴 주전자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나는 포도주 비슷한, 노란 
음료를 컵에다 따라 마셨다. 구식 코디얼 맛이 도는, 과히 나쁘지 않은 
음료였지만 알코올 성분이 섞여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어쩌면 마약 
비슷한 게 섞여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마신 직후부터 머리가 어지러웠다. 
내 주위로 무수한 헤르메스 상, 은퇴한 지방 관리들의 근엄한 얼굴이 
우글거렸다. 이들이 나누는 대화도 간간이 내 귀에 들려 왔다.
  "첫 단계에 들어가면 먼저 나와 남들의 마음 사이를 오가던 일체의 
대화를 단절시켜야 한다. 두 번째 단계에 이르면 생각과 이미지를 인간 
이외의 존재에게 투사할 수 있게 되고, 처해 있는 장소에 정서적 영기를 
이입시킬수 있게 되며, 동물계를 제어하는 힘을 획득하게 된다. 세 번째 
단계에서는 자신과 동일 한 존재를 다른 곳에 출몰시킬 수 있는데 이것은 
요가 행자들의 이른바 이중 현현이라고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각기 다른 
두 곳에 각기 다른 모습으로 동시에 나타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식물의 뜻까지 짐작할 수 있는 초감각을 체득하는 단계를 
지나면 원래의 모습고 k하나도 다를 것이 없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도 
가능해진다. 마지막 단계는 수명 연장술인데..."
  "영생 불사술은 아니고?"
  "욕심은..."
  "당신 수준은?"
  "정신의 수양과 집중을 요하는 것이라 힘들어. 이 사람아, 내가 어디 
혈기 방장한 20대 청년이던가?"
   
  일행을 다시 찾아싿. 모서리가 둥그렇고 벽이 하얀 방으로 들어가는 
참이었다. 방안에는 두 개의 밀랍상이 서 있었다. 파리에 있는 그레방 밀립 
인형관을 연상시켰지만 내 뇌리에 언뜻 떠오르는 것은 리오의 <텐다 데 
움반다>에서 본 제단이었다. 금박처럼 반짝이는 금속을 입힌 등신대 밀랍 
인형은, 모조 다이아몬드가 박힌 티 하나 없는, 혹은 거의 없는 옷을 입고 
있었다. 여인상 머리 위로는 철사에 매달린 채, 30년 대에 유행하던 렌치 
사의 펠트 제품으로 만든 것인 듯한 정체 불명의 장식이 출렁거리고 
있었다. 한 구석에는 확성기가 있었다. 가브리엘리의 음악인 듯한 양질의 
트럼펫 연주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음향 효과 쪽이 시가 디자인보다 
질적으로 다소 나아 보였다. 오른쪽에 있는 또 하나의 밀랍 인형은 진흥 
공단 옷 위로 하얀 띠를 매고 있었다. 머리에는 월계관이 올려져 있었다. 
두 번째 밀랍 인형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금박을 입힌 천칭이었다. 
아글리에는 상징의 다양한 의미를 설명해 주고 있었지만 나는 그의 말에 
주의를 집중시킬 수 없었다. 감탄과 감동이 복잡하게 어린 표정을 하고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를 돌아다니며 나누는 손님들의 말이 내게는 훨씬 
인상적이었다.
  나는 벨보에게 말을 건넸다.
  "여기에 와 있는 손님들, 은빛 심장 무늬에 뒤덮인 색술 옷차림의 
흑성모를 구경하러 가는 순례자와 뭐가 다릅니까? 순례자들은 그 흑성모를 
살과 피로 유화한 그리스도의  어머니라고 생각할까요? 아닐 겁니다. 그 
반대로도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순례자들은 구경거리에서 환상을 보고, 
환상에서 현실을 보면서 그것이 서로 유사한 것을 즐기는 것일 테지요."
  "하긴 그래.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들이 성지를 순례하는 
기독교인들보다 나은가 못한가를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네. 나도 
자문자답을 하고 있는 중이야. 햄릿을 우리 회사 관리인보다 더 현실적인 
인물로 인식하는 우리는 우리 정체는 도대체 무엇이냐... 만나면 한바탕 
떠들고 싶어서 줄창 보바리 부인이나 찾아 다니는 나 같은 것에게 과연 
남을 심판할 권리가 있기는 있는 것이냐..."
  디오탈레비는 고개를 가로 젓더니 나지막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신들의 형상은 빚는 것이 아니야... 따라서 이런 것들은 모두 아론이 
만든 금송아지의 현현에 다를 바 없는 것이야..."
  그러나 디오탈레비는, 말을 이렇게 했을 뿐, 실제로는 그날 밤의 잔치를 
흠뻑 즐기는 눈치였다.

  58
 별안간 방안이 칠흑 어둠에 잠기면서 벽이 눈부시도록 환해졌다. 
둘러보니 벽의 4분의 3은 반원꼴로 된 영사막이었다. 거기에 영상을 
투사할 모양이었다. 영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뒤에야 나는 천장과 바닥의 
일부까지도 반사성 재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번쩍거리는 금속 
쪼가리, 천칭, 방패, 구리 화병 같은 것들이 그렇게 싸구려로 보였던 것도 
바로 빛을 반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이었다. 영사막에는 영상이 
비치고 반사성 재질에서는 영상이 반사되기 시작하자 우리는 물밑 세계로 
잠겨든 기분이었다. 영상은 중첩되기도 하고, 조각조각 나뉘기도 하는가 
하면, 참석자들의 그림자에 겹쳐 들기도 했다. 바닥은 천장을, 천장은 
바닥을 비추었다. 영사막에 나타난 영상은 천장과 바닥에도 고루 비쳤다. 
음악과 함께 이상한 향기가 방안을 채웠다. 처음에는 인도 향불 냄새가 
나더니 잠시 뒤에는 분간하기 힘든 향내로 바뀌었는데 둘 다 그렇게 
기분좋은 향내는 못 되었다.
  영사막에 남아 있던 희붐하던 빛줄기가 칠흑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이어서 부글부글 끓은 소리와 함께 시뻘건 용암이 나타났다. 우리는 
분화구로 들어온 형국이었다. 분화구 안에 서는 시커먼 점액질 물체가 
노랗고 파란 화염 속에서 끓어오르고 있었다.
  끈적끈적한 증기가 솟아올랐다가는 가라앉으면서 이슬 방울이나 빗방울 
같은 것으로 액화했다. 구린 흙 냄새가 났다. 무엇인가가 썩어 가는 
냄새였다. 무덤, 명부, 암흑을 들숨으로 빨아드리는 기분이었다. 내 
주위에서 유독한 액체가 스며 나와 똥, 부식토, 석탄재, 진흙, 연기, 납, 
더껑이, 나프타 사이로 스며들었다. 그러자 주위는 검은색보다 훨씬 더 
검게 변색하다가 이윽고 뿌옇게 바뀌면서 두 마리의 파충류(한 마리는 
밝은 청색, 또 한 마리는 붉은색)가 서로의 꼬리를 물어 동그라미 꼴을 
그리며 나타났다.
  만취한 기분이었다. 일행도 보이지 않았다. 모두 어둠 속으로 사라진 
것이었다. 내 옆을 스쳐 지나가는, 윤곽이 흐릿하고 흐느적거리는 영상을 
식별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 그때 누군가가 내 손을 잡았다. 나는, 기대에 
어긋날까 봐 내 손을 잡은 사람을 돌아다보지 않았다. 별안간 로렌짜가 
자주 쓰는 향수 냄새가 났기 때문이었다. 그제서야 로렌짜에 대한 내 
욕망이 얼마나 강렬한 것인가를 깨달았다. 로렌짜임에 분명했다. 로렌짜는 
손톱으로 내 방문을 긁으면서 못다 전한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전날 밤 
미완성으로 남겨 두었던 것을 완성시키기 위해 거기에 와서 내 손을 잡은 
것임에 분명했다. 유황과 수은이 눅진눅진하게 엉겨 붙는다는 느낌이 내 
아랫도리를 설레게 했다. 그러나 급할 것은 없었다. 
  나는 <백술>이 성취될 때 생겨난다는 철인의 소금인, 양성을 구유한 
청년 레비스를 기다렸다. 무불 통달하게 된 기분이었다. 지난 몇 달 간 
읽어서 얻은 모든 지식이 내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것 같았다. 어쩌면 
로렌짜가 내 손을 잡음으로써 그런 지식을 내게 전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로렌짜의 손바닥은 땀에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놀랍게도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연금술의 철인들이 <백술>에 
붙였던 이름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 이름과 함께 로렌짜를 부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고, 마음속으로 진혼의 기도문을 읊조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 백동, 흠이 없는 양, 아이바테스트, 알브라크, 성수, 정제 
수은, 웅황, 아조크, 대지의 지정, 붕산, 캄바르, 카스파, 버찌, 밀랍, 카이아, 
코메리손, 전자, 유프라테스, 이브, 파다, 파보니우스, 백술의 기초, 
시비니스의 보석, 금강석, 지바크, 지바, 너울, 수선, 백합, 어지자지, 하에, 
소태, 휠레, 처녀의 젖, 단일석, 만월, 어머니, 생유, 콩, 알, 점액, 점, 뿌리, 
천연염, 부엽토, 테보스, 틴카르, 증기, 금성, 바람, 처녀좌, 파라오의 거울, 
아기 오줌, 독수리, 태반, 경혈, 도망친 노예, 왼손잡이, 금속의 정액, 정기, 
주석, 수액, 유황유.... .
  검은 역청 속에서 거무튀튀한 바위와 고목의 윤곽이 나타나면서 검은 
태양이 지고 있었다. 이어서 눈을 찌를 듯한 섬광이 비치면서 도처에 
번쩍거리는 물체가 난무하면서 만화경 효과를 지어내고 있었다. 이때의 
냄새는 교회에서 벌어지는 의식을 연상시켰다. 골치가 아팠다. 무엇인가가 
내 이마를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화면에는 금빛 벽걸이가 걸린 넓은 
방이 나타났다. 결혼 피로연인지, 왕자 같은 신랑과 흰 옷으로 성장한 
신부, 왕관을 쓴 왕과 왕비가 보였다. 그 옆으로는 전사와 다른 흑인 왕이 
보였다. 흑인 왕 앞에는 제단이 있고, 제단 위에는 검은 공단으로 장정한 
책이 한 권 펼쳐져 있고, 그 옆으로는 불이 밝혀진 초가 상아 촉대에 꽂혀 
있었다. 촉대 옆에는 돌고 있는 지구의, 시뻘건 액체를 뿜는 조그만 수정 
분수대가 달린 시계가 있었다. 분수대 위에는, 한쪽 동공에서 뱀이 기어 
나오는 해골이 놓여 있었다.
  로렌짜가 내 귀에 입술을 대고 무슨 말인가를 속삭였다. 그러나 나는 
로렌짜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뱀은 느릿느릿하고 구슬픈 음악의 율동에 따라 움직였다. 왕과 왕비의 
어느새 상복 차림으로 바뀌어 있었다. 두 사람 앞에는 뚜껑이 닫힌, 여섯 
개의 관이 놓여 있었다. 음산한 튜바 소리가 한동안 울리더니 검은 두건을 
쓴 사람이 나타났다. 그러나 왕이 지극히 느린 동작으로 사제 같은 몸짓을 
하면서, 환희에 젖은 듯한 비장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숙이고 목을 
내밀었다. 두건을 쓴 사내는 도끼를 들더니 진자와 비슷한 원호를 
그리면서 내리찍었다. 그 순간 도끼날은 수많은 반사겅 표면에 반사되면서 
여러 개로 불어났고 참수된 머리 역시 무수히 불어나 바닥에 나뒹굴었다. 
이어서 다른 화면으로 이어졌으니 나는 도저히 그 이미지가 지어내는 
줄거리를 따라잡기가 어려웠다. 모르기는 하지만 흑인 왕을 포함해서, 
화면에 나타났던 인물 모두가 참수당하면서 입관당했던 것 같다. 벽걸이가 
걸려 있던 그 방은 곧 해변, 혹은 호안으로 바뀌었다. 여섯 척의 배가 
접안하자 관이 모두 배에 실렸다. 배는 해변 혹은 호안을 떠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 영상이 비칠 동안은 손에 만져질 듯이 진한 향내가 
방안을 채웠다. 순간적이지만 나 역시 침수된 사람들 중 하나라는 기분이 
들었다. 내 옆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결혼식, 결혼식>하고 중얼거렸다.
  로렌짜는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로렌짜를 찾으러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화면에 호화스러운 납골당 혹은 지하 묘지가 나타났다. 천장에 달려 
있는 어마어마하게 큰 석류석으로 주위가 훤했다.
  구석구석에서 처녀 차림을 한 여자들이 나타났다. 여자들은 2층 높이의 
거대한 요를 둘러쌌다. 바닥이 석재인 이 요는 입구가 화덕처럼 되어 
있어서 흡사 홍예문으로 지붕을 받친 조그만 성채 같았다. 두 개의 탑에서 
증류기 같은 것이 나와 계란꼴 그릇에 뭔가를 쏟아 내고 있었다. 맨 
가운데 있는 탑 꼭대기는 분수꼴로 되어 있었다. 
  요의 바닥에 놓인, 참수된 시체가 보였다. 여자들 중 하나가 들고 있던 
상자에서 둥그런 것을 꺼내어 가운데 탑의 감실에다 넣자 꼭대기에서 
분수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다행히 그 둥그런 물체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무어 인 같던 그 흑인 왕의 머리였다. 그 
머리가 감실에서 타면서 분수의 물을 끓게 한 것이었다. 분수대 
꼭대기에서 연기와 김이 솟아올랐다.
  그때 로렌짜가, 자동차 안에서 벨보를 그렇게 했듯이 이번에는 내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영상 속의 여자가 황금빛 구체를 들고 나오더니 요문을 열고는 새빨간 
점액질 액체를 구체 속으로 흘러 들어가게 했다. 그러자 구체가 열렸다. 
새빨간 점액질 액체가 들어 있을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굵고, 눈처럼 하얀 
알이 나타났다. 여자는 알을 꺼내어 가만히 바닥의 노란 모래 위에다 
내려놓았다. 곧 알이 깨지면서 새 한 마리가 기어나왔다. 아직 모양이 잘 
갖추어지지 않은 피투성이 새였다. 그러나 참수된 자들의 피 덕분인지 
새는 우리 눈앞에서 무서운 속도로 자라더니 곧 모양이 반듯해지면서 빛이 
났다.
  여자들은 이 새의 목을 친 뒤 조그만 제단에 놓고는 불에 태웠다. 
여자들 중 몇몇은 그 재를 반죽해서 두 개의 틀에다 붓고는 틀을 요 
속으로 밀어 넣었고, 다른 몇몇은 요에다 바람을 불어넣느라고 풀무질을 
했다.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 틀이 열리면서 사람이 둘 걸어 나왔다. 투명할 
정도로 창백한 선남선녀였다. 키는 네 뼘이 채 안 되어 보였다. 선남선녀는 
산 사람처럼 살갗이 부드럽고 통통해 보였지만 어쩐지 금속으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여자들이 이들을 방석에 앉히자 한 노인이 이들의 입에다 
핏방울을 떨어뜨렸다. 
  이번에는 다른 여자들이 나타났다. 초록색 꽃줄이 달린, 금빛 나팔을 든 
여자들이었다. 여자들 중 하나가 나팔을 노인에게 건네주자, 노인은, 식물 
인간이거나 동면 중인 동물 같은 두 선남선녀의 입에 나팔의 한 끝을 
물리고는 혼을 불어 넣었다. 이어서 방이 눈부시게 밝아지더니 곧 
암전되면서 주황색 불빛만 번쩍거리기 시작했다. 확성기에서 나팔소리가 
크고 우렁차게 울리는 동안 방안은 다시 호박색으로 밝아졌다. 돌아다보니 
로렌짜가 없었다. 문득, 로렌짜를 영영 찾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온 방안이 불붙은 듯이 붉어지다가 천천히 쪽빛으로, 보랏빛으로 
바뀌면서 화면에서 영상이 사라졌다. 이마가 견딜 수 없이 아파왔다.
  내 옆에서 아글리에가 조용히 속삭였다. 
  "<미스테리움 마그눔> .... . 죽음과 수난을 통한 새 인류의 탄생.... . 
상징에 대한 집착 때문에 국면 국면의 구분이 모호해진 감은 없지 않지만 
그래도 멋진 영상이었어요. 우리가 본 것은 일종의 행위 예술에 지나지 
않지만 그래도 <뭔가>를 말해 주는 굉장한 예술입니다. 이 집 주인이 
<뭔가>를 만들었다더니 과장이 아니었군요. 갑시다. 가서 이 집 주인이 
일으킨 기적이나 좀 구경합시다.

  59

  아글리에는 우리를 뜰로 안내했다. 밖으로 나오니 한결 견딜 만했다. 
감히, 로렌짜가 왔느냐고 물어 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내가 꿈을 꾸고 
있었는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출입구에서 몇 발짝을 더 
걸어 온실 안으로 들어 갔다. 이번에는 온실 안의 숨막힐 듯한 더위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열대 식물 사이에는 여섯 개의 유리 
단지가 놓여 있었다. 유리 단지는 어찌 보면 배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눈물 방울 같기도 했다. 푸르스름한 액체가 든 단지는 모두 단단히 
밀봉되어 있었다. 놀랍게도 단지 안에는 키가 20센티미터쯤 되는 사람 
형상을 한 물건이 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다른 사람이 아니라 늙은 왕과 
왕비, 흑인 왕, 전사, 그리고 각각 푸른 월계관과 분홍색 월계관을 쓴 예의 
그 선남선녀였다. 이들은 우아하게 수영하는 모습으로 전후좌우로 
떠다니고 있었다. 말하자면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물 속에서 사는 
사람들 같았다.
  이들이, 플라스틱이나 밀랍으로 만들어진 인형인지, 실제로 살아 있는 
사람인지 확인하기는 어려웠다. 이들이 잠겨있는 액체도 탁해서, 이들을 
살아 있는 사람으로 돋보이게 하는 맥박의 동계도 시각적인 착각으로 
비롯된 것인지, 실제로 뛰고 있는 맥박인지 확인이 불가능했다.
  아글리에가 이런 소리를 했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고 있는 것 같군요. 아침마다 저 단지를 말이 갓 싼 
뜨끈뜨끈한 말똥에 파묻어 주어야 한답니다. 저들이 자라자면 말똥의 
온기가 필요한 것이지요. 파라켈수스의 책에도, 저런 정자 미인은 말의 
체온과 똑같은 조건에서 길러야 한다고 나와 있지요. 이 집 주인 말에 
따르면 저것들이 주인에게 말도 걸고, 비법도 전수해 주고, 예언도 
한답니다. 솔로몬 신전의 치수를 일러준 것도 저것들이고, 축귀술을 가르쳐 
준 것도 저것들이라니 놀랍지요? 하지만 고백하거니와, 나는 저것들이 
말하는 걸 본 적이 없어요.... ."
  정자 미인들은 표정이 다양했다. 여왕을 보는 왕의 눈길은 그지없이 
부드러웠다.
  "....이 집 주인은, 어느날 아침에 와서 보니까 푸른 월계관을 쓴 
젊은이가 단지에서 빠져 나와 처녀가 들어 있는 단지의 봉인을 깨뜨리려 
하고 있는 걸 보고 기절 초풍.... . 물에 사는 것들이라서 공기 중에서는 
숨을 못 쉬니까, 주인이 조금만 늦게 나왔더라도 젊은이는 죽었을 거 
아니겠어요?"
  "끔찍하군요... . 나 같으면 저런 고생 못하겠다... . 어딜 가든지 저놈의 
단지를 들고 다녀야 하고, 어딜 가든지 말똥을 푸러 다녀야 하고... . 
여름에 휴가 떠날 때는 어떻게 한다지? 경비원에게 맞기고 가?"
  디오탈레비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중얼거렸다.
  "데카르트의 이른바 꼬마 도깨비, 혹은 자동 인형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르지요... ."
  아글리에가 아퀴 지으려는 듯이 말했다.
  "설마, 아글리에 박사께서는 내 앞에다 새 우주의 문을 열고 있어요. 
여러분, 우리 겸손해집시다. 하늘 땅 사이에 우리가 모르는 게 얼마나 
많은가요? <알라게르 꼼 알라게르>...."
  가라몬드 사장의 말이었다.
  사장은 완전히 위압당하고 만 눈치였다. 디오탈레비의 얼굴에는 
호기심과 냉소가 착찹하게 교차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벨보는 전혀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한시 바삐 로렌짜에 대한 의혹을 떨쳐 버리고 싶어서 미끼를 던져 
보았다.
  "로렌짜가 못 온 게 유감이군요. 와서 봤다면 틀림없이 좋아했을 텐데.... 
."
  "음, 글쎄 말이야."
  벨보는 들은 척도 않았다.
  결국 로렌짜는 그 자리에 합류하지 않았던 셈이었다.
  나는 괴상한 환상에 시달렸으니까 결국 리오에서 본 암파로 꼴이 된 
셈이었다. 몸과 마음이 아팠다. 사기당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내게 
타악기 <아고고>를 가져다 준 사람도 없었다.
  나는 일행에서 떨어져 사람들 틈을 비집고 집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뷔페 상 옆을 지나면서, 미약이 들어 있으면 어쩌나 하면서도 시원한 
음료를 한 잔 마셨다. 화장실을 찾아 들어가 관자놀이와 목을 찬물로 씻고 
나니 한결 기분이 상쾌했다. 밖으로 나오려는데 소용돌이꼴 계단이 보였다. 
호기심이 동했다. 새로운 모험에의 유혹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나는 
어쩌면, 환각 상태에서 깨어났다고 생각하면서도 계속해서 로렌짜를 찾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60
 계단을 내려갔다. 내려가 보니 조명이 희미한 지하의 방이었다. 벽은 
가공원의 분수대 처럼  로까이유 식이었다. 방 한 구석에는 나팔의 주둥이 
같은 구멍이 나 있었다. 거기에서 무슨 소리인가가 들려 오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소리가 분명해졌다. 그 앞에 서 있으려니, 누가 내 
옆에서 지껄이고 있는 듯이, 선명하고 정확하게 들렸다. 언필칭 참주 
디오니시우스의 귀였다.
  전성관은 분명히 위층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이 
전성관은, 이 장치 옆에서 진행되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지하로 전하고 있는 것이었다.
  "부인, 지금까지 아무한테도 안 한 얘기를 들려드리리다. 나도 이제 이 
짓이라면 신물이 나요. 지금까지 진사도 써보았고, 수은도 써보았어요. 
주정도 순화시켜 보았고, 주철의 산화물과 효소를 가지고 건류시켜 보기도 
했지만 <철인의 돌>은 찾아내지 못했어요. 침식성이 있는 강산 용액을 
비등시켜도 보았지만 모두 헛수고... . 내가 써본 걸 일일이 열거하자면 
끝이 없어요. 알 껍질, 유황, 황산염, 유산염, 비소, 염화암모니아, 석영, 
알칼리, 식염, 암염, 초석, 나트륨 화합물, 붕산염, 주석산염, 염화칼륨 등등, 
한이 없어요. 내 말을 믿으세요. 그런 걸 믿으면 안 됩니다. 불완전한 
금속은 피해야 합니다. 내 말 안 들으시면 나처럼 허송 세월하고 맙니다. 
나는 안 써본 게 없습니다. 혈액, 모발, 초산염, 백철광, 철단, 화성의 
사프란, 철의 정기, 산화연, 심지어는 안티몬까지 써봤습니다. 소용없어요. 
나는 은에서 물을 추출하기도 하고 소금을 넣기도 하고 빼기도 하면서 
은을 석회화시키기도 해봤어요. 화주를 이용해서 부식성 기름도 만들어 
봤습니다. 이러면서 우유, 포도주, 응유 효소, 땅 위로 떨어지는 운석의 
정자, 태반, 재, 그리고 심지어는.... "
  "심지어는... ."
  "부인, 이 세상에 진실만큼 말하기가 조심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진실을 
말한다는 것은  제 심장에다 거머리를 붙여 사혈하는 것과 다름이 
없지요."
  "됐어요. 그만하면 됐어요. 충분히 배웠네요.... ."
  "이 비밀은 당신에게만 귀뜸해 드리지요. 나는 곳과 때를 초월한 
사람이에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내 영생을 누리고 있는 거지요. 수호 
천사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답니다. 나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인 것이지요... . "
  "그렇다면 날 여기에 왜 데려왔어요?"
  "이것 보라고, 발사모 씨, 영생 불사의 신화로 장난치는 게 아니야."
  다른 목소리.
  "멍청하기는! 영생 불사는 신화가 아니야. 사실인 게지."
  이런 대화에 싫증이 나서 그 자리를 물러나려는 참이었다. 그런데 문득 
살론 씨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는, 누군가의 어깨라도 그러쥔 듯이, 
조용조용 말하고 있는데도 음성이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었다. 프랑스 
억양을 쓰는 삐에르의 목소리도 알아들을 수 잇었다. 
  먼저 살론의 음성. 
  "이러지 말라고... 설마 당신까지도 연금술의 잠꼬대를 들으려고 여기에 
와 있는 것은 아닐 테지. 설마 가공원의 시원한 바람이라도 쐬러 왔다고 
할 생각은 아닐 테지. 당신, 선거후 하이델베르크의 공원을 완성한 직후 
살로몽 드 꼬오가 프랑스 국왕으로부터 파리 정화 사업을 감독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는 건 모르시겠지?"
  "<르 빠사드?>"
  "살로몽 드 꼬오가 무슨 앙드레 말로 랍디까? 외관 정화나 하게? 하수구 
정화였을 거예요. 재미있잖소? 살로몽 드 꼬오 하면, 황제를 위해 상징적인 
오렌지 숲이나 사과 과수원을 설계하던 사람 아니오? 그런데 이런 사람이 
정작 관심을 가졌던 것은 파리의 지하 하수망 이었으니... 당시 파리에는 
하수망이라는 게 없었어. 당시의 하수망이라고 하는 건 지상 하수로와 
지하 암거를 절충한 수로에 지나지 않았어요. 지하 암거가 어떻게 뻗어 
있는지, 당시에는 그걸 아는 사람도 없었고. 로마 인들은 공화정 때부터 
오물 처리 시설에 정통해 있었는데 그로부터 1500년 뒤의 파리 사람들은 
자기 발밑에 뭐가 있는지 몰랐으니, 한심한 일 아니오? 살로몽 드 꼬오는 
도대체 파리의 뱃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 궁금했던 나머지 국왕의 부름에 
응하지요. 거기에서 뭘 찾아내었는지 아시오?
  살로몽 드 꼬오가 세상을 떠난 뒤, 꼴베르 장관이 암거를 청소한답시고 
죄수들을 내려보냈어요. 하지만 청소는 핑계에 지나지 않았어요. 이 시대가 
'철가면' 시대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하오. 그런데 죄수들은 똥물 사이를 
지나서 세느 강 줄기를 따라 도주해 버렸어요. 이유야 뻔하지. 당시에 
죄수들을 따라 지하 암거로 들어갈 만큼 배짱 좋은 사람들이 없었거든. 
말하자면 악취가 풍기는 진창과 파리 떼와맞서 보겠다는 관리가 없었던 
거요... 일이 이렇게 되자 꼴베르는 죄수를 투입하되 암거의 출입구라는 
출입구에는 모두 군관을 배치했어요. 그러니 죄수들이 어떻게 되었겠어요? 
거기에서 나올 수 없으니까 모두 그 안에서 죽었지. 그로부터 무려 300년 
동안 파리 시의 토목과가 건설한 지하 암거는 3킬로미터에 지나지 않아요. 
하지만 18세기, 프랑스 대혁명 직전까지 건설된 지하 암거만도 
26킬로미터나 되었답니다. 이게 뭘 뜻하는지 알기나 알아요?"
  "글세, 뭐라고 할까... ."
  "신 정권이 수립될 무렵, 이 신정권 참여자들은  구정권 인사들이 
모르던 걸 알고 있었어요. 나폴레옹은, 지하의 어둠 속으로, 말하자면 이 
수도의 암설 속으로 부하들을 내려 보냈어요. 지하에서 견딜 수 있을 
정도로 용기 있고 배짱이 좋은 사람들은 지하에서 금붙이, 목걸이, 보석, 
반지 같은 걸 건질 수 있었어요. 요컨데 지하 암거에는 없는 것이 없었던 
거요. 개중에는 지하에서 줍는 대로 일단 삼켰다가 밖으로 나와서 이걸 
배설해서 부자가 되기도 했지요. 나중에 알려졌지만, 지하실에 지하 암거로 
직통하는 뚜껑문 있는 집이 당시에는 굉장히 많았대요.... ."
  "<샤알로르....?>"
  "사람들이 요강을 길에다 비우던 시절이 아니오? 그런 시절에 양쪽으로 
보도가 나 있고, 벽에 손잡이 고리를 박은 지하 암거가 왜 있었겠느냐는 
거요. 그러니까 이 지하 통로는 당시에는, <뻬그르>라고 불리던 범죄자들 
<따삐 프랭> 의 대용이었던거요. 경찰이 들어오면, 지하를 도망쳐 
다니다가 도처에 산재해 있는 출입구를 통해 지상으로 올라오면 되는 
거지요."
  "설마. <레장드> 겠지... ."
  "전설이라고 생각하오? 당신, 도대체 누구를 비호해 주고 싶은 거요? 
나폴레옹 3세 때, 오스망 남작은 지하 수로법을 입법하고, 파리의 모든 
주택에 독립된 오물통을 만들게 하고 암거로 통하는 지하 회랑을 짓게 
했소. 높이 2미터, 넓이 1미터 반인 터널 말이오. 무슨 말인지 알겠소? 
파리의 모든 주택은 지하 회랑을 통해 지하 암거와 연결되어 있었다는 
뜻이오. 당신, 오늘날의 파리 지하 암거의 총 연장이 얼마나 되는지 알기나 
하오? 지하 몇 층에 걸쳐 자그만치 2천 킬로미터에 이르오. 이 모든 일이, 
하이델베르크에서 정원을 설계하던 사람 손에서 시작되었소... ."
  "그래요?"
  "말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군. 당신은 뭔가를 알고 있으면서도 말하고 
싶지 않은거지."
  "가겠소. 늦었으니까. 또 모임이 있거든."
  발자국 소리
  
  나는 살론이 그런 소리를 한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로까이유 양식의 
벽에다 귀를 댄 채 주위를 둘러 보고 나서야 나 역시 지하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문득 전성 장치의 집음관은 암흑의 터널로, 니벨룽겐 족이 살고 
있는 지구 중심으로 이어지는 통로 입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기가 
돌았다. 마악 계단으로 올라서려는데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세. 시작해야 하니까. 밀실에서 열릴 예정이니까 사람들 빨리 
소집하게."

  61

  일행과 합류했다. 나는 아글리에에게, 무슨 모임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무슨 모임이냐고 물어 보았다.
  "아, 그거요? 정말 호기심이 대단한 분이로군.... . 하지만 이해하겠어요. 
일단 연금 비학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김에 뿌리를 뽑겠다. 이거로군. 
내가 알기로, 오늘 밤에 고제 공인 장미 십자단 신입 회원의 입회식이 
있다나 보오."
  아글리에가 대답했다.
  "구경할 수 있을까요?"
  가라몬드 사장이 물었다.
  "안 됩니다. 구경해서는 안 됩니다. 구경할 수도 없고요. 금단의 신자를 
훔쳐 본, 그리스 신화의 등장 인물 시늉을 살짝은 할 수 있겠지요. 잠깐만 
들여다보게 해드리지."
  아글리에를 따라갔다. 비좁은 계단을 오르고 컴컴한 복도를 지난 
아글리에는 한곳에 이르러 휘장을 한쪽으로 걷었다. 밀폐된 유리창을 통해 
아래쪽의 방이 보였다. 타오르는 불꽃이 조명 노릇을 하고 있는 방이었다. 
벽에 걸린 능직 벽걸이 에는 백합이 무수히 수놓여 있었다. 방 한쪽에는 
금빛 천개가 달린 옥좌가 놓여 있었다. 옥좌 양쪽에는 각각 해와 달이 
삼각대 위에 올려져 있었다. 마분지나 플라스틱 같은 것을 잘라 모양을 
만들고 위에다 은박지나 금박지를 씌운 것일 테지만, 빙글빙글 도는 데다 
불꽃을 받아 되비치고 있어서 모양만은 꽤 괜찮았다. 천개 위로는 보석 
아니면 유리 조각이 무수히 박힌 굉장히 큰 별이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옥좌 앞에 놓인 것은 월계수 장식이 된 긴 탁자였다. 탁자 위에는 칼 한 
자루, 옥좌와 탁자 사이에는 입을 떠억 벌린 박제 사자가 놓여 있었다. 
사자의 머리에다 전구를 장치했는지 눈에서 불이 흐르고 목 언저리에서도 
불빛이 새어 나왔다. 살론 씨의 작품이기가 쉬웠다. 문득 뮌헨의 지하 
갱도에서 살론씨로부터 들은, 괴팍한 손님들 이야기가 떠올랐다. 탁자 뒤에 
앉은 사람은 브라만티였다. 브라만티는 심홍색 윗도리 위에다 수가 놓인 
녹색 두루마기를 입고 그 위에 금사 장식이 든 망또를 걸치고 있었다. 
목에는 반짝이는 십자 목걸이가 걸려 있었고 머리에 쓴 것은 붉은 털과 흰 
털로 장식이 된 주교관 비슷한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 앞에, 위계에 
맞추어 앉은 듯한 스무남은 명 가까운 사람들은 심홍색 윗도리만 입고 
있었다. 녹색 두루마기와 망토까지 갖추어 입은 사람은 브라만티뿐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목에 금빛 메달을 걸고 있었다. 당시 내가 생각하기로는 
르네상스 시대의 초상화를 새긴 것 같은 메달이었다. 합스부르크 가 
초상화 특유의 코가 큰 인물의 초상화와, 허리를 잡힌 채 다리를 늘어 
뜨리고 있는 불가사의한 양의 모습이 그려진 메달. 금양 모피 기사단 
기장의 장식을 흉내낸 것임에 분명했다.
  브라만티는 두 팔을 벌리고, 통성 기도를 하듯이 무슨 말인가를 하고 
있었고 앞에 앉은 사람들은 이따금씩 그 말에 화답했다. 이윽고 
브라만티가 탁자에 놓여 있던 칼을 잡아 쳐들자 다른 사람들도 품에서 
단검이나 종이 절단용 칼 같은 것을 꺼내 들었다.  바로, 그 순간 
아글리에가 휘장을 닫았다. 너무 많이 보았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대중 문화 정보통인 디오탈레비가 뒤에 정확하게 표현했듯이, 
<핑크 팬더> 처럼 걸어 복도를 지나고 계단을 올라 숨을 헐떡거리며 
가공원으로 올라섰다.
  "저들... . 프리메이슨 단원들인가요?"
  집회에 압도되고 만 듯한 가라몬드 사장의 질문이었다.
  "프리메이슨이라는 게 무엇이겠습니까? 저들은, 직접적으로는 장미 
십자단, 간접적으로는 성당 기사단으로부터 영감을 받고 모여든 기사단의 
열광적인 신봉자들입니다."
  아글리에가 대답햇다.
  "프리메이슨과는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가라몬드 사장이 다시 `물었다.
  "우리가 방금 본 저 의식이 프리메이슨의 의식과 공통점이 있다면 그건 
브라만티가 주재한 이 의식 역시 지방 유지들과 전문 직업인의 기분 
전환용 의식이라는 겁니다. 프리메이슨도 처음부터 그랬어요. 프리메이슨은 
성당 기사단 전설을 희미하게 흉내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저녁의 저 모임은 흉내의 흉내인 것이지요 유감스럽게도 이 
세상에는, 여러분이 오늘 본 부류와 비슷한 장미 십자단과 성당 기사단이 
우글거리고 있다는 겁니다. 이런 동패들에게서 무슨 계시 같은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간혹 믿을 만한 입회식을 치르는 동아리들을 
만나는 것도 가능하기는 하지만... ."
  "하지만 아글리에 박사도 종종 저들과 교유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박사께서는 어느 쪽을 믿습니까? 둘 다 믿으시는 겁니까?"
  벨보가 물었다. 비아냥이 아니었다. 개인적인 관심을 표명한데 지나지 
않았다.
  "물론 어느 쪽도 안 믿지요. 내가 아무거나 잘 믿는 사람으로 보였나요? 
나는 냉정한 객관성과 이해와 관심으로 저들을 대합니다. 말하자면 성 
제라노의 기적을 구경하러 몰려든 나폴리의 군중을 보는 신학자의 
시각이라고나 할 까요? 군중이라는 것은, 사람에게 지극히 요긴한, 믿음의 
증인과 같은 존재입니다. 신학자가, 땀내를 풍기고 침을 튀기는 군중 속을 
비집고 다니는 것은, 그들 가운데서 보다 고매한 진리를 깨친 사람, 삼위 
일체의 비의에 새 빛을 던져줄 그런 무명의 성인을 만날 수 있을까 
해서지요. 삼위 일체와 성 제나로는 별개이기는 합니다만... ."
  그는 속내를 털어놓지 않았다. 나는, 자기가 경멸하여 마지 않는 이 모든 
초자연성의 권위를 용인하게 만드는 이 지극히 고차원적인 불신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막연했다. 그것은 신비주의적 회의주의도 종교적 
냉소주의도 아니었다.
  아글리에는 벨보를 상대로 말을 계속했다.
  "지극히 간단합니다. 만일에 성당기사단, 진짜 성당 기사단이 밀지라는 
것을 남긴 것이 사실이고, 이 비밀 결사의 추밀단원들이 그것을 계승한 
것이 사실이라면 마땅히 그것을 찾아내어야 할 터인데... . 그렇다면 어디에 
있을까요?
 그들이 쉽게 은신할 수 있는 곳, 갖가지 의식과 신화를 창출함으로써 그 
속에다, 물 속의 물고기처럼 제 모습을 감출 수 있는 곳이 아니겠어요? 
경찰관이 악당의 괴수, 말하자면 그 악당 무리의 뿌리를 찾을 때 어디를 
뒤지는지 아시오? 시시한 곳, 악당의 괴수가 저지르는 거창한 범죄는 꿈도 
못 꾸는 시시한 잡범이 우글거리는 술집 같은 곳을 뒤진답니다. 
테러리스트 두목이 새 하수인을 찾을 때 어디로 가는지 아시오? 가짜 
테러리스트들이 우글거리는 곳, 진짜 테러리스트가 될 베짱이 없는 가짜들, 
그러나 저희들의 우상인 진짜 테러리스트의 위업을 공개적으로 흉내나 
내는 무리들의 소굴로 간답니다. 불씨는 어디에 있는지 아시오? 불속에 
있거나, 떨기나무 그루터기에 있거나, 밟히고 다져진 짐승의 똥덩어리에 
있답니다. 진짜 성당 기사단원을 찾는데 가짜 성당 기사단보다 더 나은 
곳은 없는 법이지요. 이제 내가 이들과 교우하는 까닭을 아시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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