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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걸림 돌을 디딤돌로 삼아라 [신시아 커지]

by Casey,Riley 2023.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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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걸림돌을 디딤돌로 삼아라!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천연자원은 물이나 땅속에 있는 것도 아니고, 숲이나 들판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꺾일 줄 모르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깃들여 있는 정신이다. 그리고 그
들의 정신은 우리 모두에게 이익을 가져다준다. 
  
  신시아 커지
    첫 번째 특징 
    '목표'는 마음에 불을 지핀다
  제 1장에서 만나게 될 일곱 사람은 목표야말로 불굴의 정신에 불을 지핀 연료라는 사실은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들은 진정으로 흥미를 느끼는 일에 매진했다. 도중에 장애물이 나타나
면 강한 의지로 어려움을 극복했다. 그들의 목표는 너무나  중요해서 어떤 장애물도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지 못했다. 
  이 책을 읽어 나가는 동안, 당신은 진정한 소망을 이루는  데 목표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
을 하는지를 직접 보게 될 것이다. 자신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인식하지 못했다 해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당신만 그런 것은 아니니까. 사실은 대다수 사람들이 아직 자신의 목표
를 설정하지 못한 상태에 있다. 
  이 장 말미에는 자신의  목표를 확인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단계별 지침-'실행 계획'-이 
마련되어 있다. 일단 의지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면 당신도 불굴의인간이 될 것이다!
  
  "장애물은 나를 꺾을 수 없다. 
  굳은 의지에 굴복하지 않는 장애물은 없다. 
  타고난 기질은 고수하는 사람은 결코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그녀는 동정의 편지를 보냈다
      어느 어머니가 마음으로 보낸 편지
    린다 브렘너는 알지도 못하는 아이들에게 매주 천 통의 편지를 보낸다. 낯선 사람의 편
지가 자녀에게 배달되는 것을 보고 언짢게 생각할 부모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린다의 편지
를 받는 아이들의 부모는 그렇지 않다. 아이들은 린다에게 답장을 보내고, 그 부모들도 감사 
편지를 써서 보낸다. 린다의 편지를 아이들에게 희망을 안겨주고, 아이들이 좀더 오래 살 수 
있게 해준다. 아니, 목숨을 연장해 주지는 않더라도, 집배원 아저씨가 우편물을 들고 걸어오
는 모습을 보면, 그것만으로도 아이들은 한결 기분이 밝아진다.
  그 일은 우편물로 시작되었다. 1980년 11월, 린다의 여덟 살 바기 아들 앤디가 호지킨병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았다. 앤디가 퇴원해서 집으로 돌아오자, 친구와 친척들이 수십 통의  카
드와 편지를 보내 축하해 주었다.
  그 때를 회고하면서 린다는 이렇게 말했다.
"집배원이 오기 전에는 아무리 기분이 나쁘다가도, 우편물을 받고 나면 언제나 기분이 좋아
지곤 했답니다. "
  그러나 홍수처럼 쏟아지던 카드와 편지는 서서히 줄어들었다. 그러자 앤디의 쾌활하던 기
분도 차츰 줄어들었다. 걱정이 된 린다는 편지를 직접 써서, '너의 비밀 친구'라는 이름으로  
아들에게 보냈다. 앤디는 기운을 되찾았다. 그  후 린다는 어린 아들을 위해 유쾌한  편지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우체통에 넣었다.
한 달쯤 지난 어느 날, 린다는 앤디가 일각수 두  마리를 그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뭐냐고 
물었더니, 앤디는 '비밀 친구'에게 보낼 그림이라고 말했다. 그날 밤  앤디를 재운  뒤에 린
다 는 아들이 그린 그림을  살펴보았다. 그림아래쪽에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추신-엄마, 
사랑해요."
  편지를 보내주는 사람이 누구인지, 앤디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중요한 것은 그 편지가 앤디를 행복하게 해주고 기운 나게 해주었다는 사
실이다. 그러나 앤디의 소중한 생명은 그 후 4년도 지나기 전에 막을 내렸다. 앤디는 1984년 
8월 31일에 세상을 떠났다. 
"앤디 말고도 두 아이가 있었지만, 앤디를 잃은 슬픔과 고통은 참을 수가  없었어요. 앤디가
죽었으니 내 인생도 끝났다는 기분이 들었답니다." 
린다는 아들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벽장 속에서 구두 상자를  발견했다. 상자 안에는 앤디가 
죽기 얼마 전에 암 병동에서 사귄 친구들의 이름과 주소가  적힌 주소록이 들어 있었다. 그
것을 본 린다는, 앤디에게 그랬던 것처럼 앤디의  병든 친구들에게도 '비밀친구'가 되어주면 
앤디도 무척 좋아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린다는 앤디의 주소록에 적혀 있는 아이들 모두에게 카드를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그 일이 
다 끝나기도 전에 열 두  살 짜리 소년이 린다에게 감사편지를  보내왔다. 편지에서 소년은 
이렇게 말했다."제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어요."
이 말에 린다는 자기만 상처입고 고통받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린다의 눈에서는 눈
물이 하염없이 흘러나왔다. 이번에 흘린 눈물은 그녀 자신이나 앤디 때문에 흘린 슬픔과 아
픔의 눈물이 아니라, 죽음의 공포에 떨면서 주군가의 관심을  원하고 있는 외로운 아이들에 
대한 동정과 연민의 눈물이었다.
  소년에게 답장을 보내자마자, 린다의 카드를 받은 또 다른  아이가 비슷한 내용의 편지를 
보내왔다. 바로 이거야! 린다는 자신의  사명을 깨달았다. 자신의 삶에 열정과  의미를 주는 
목표를 발견한 것이다. 린다는 다짐했다. 그녀의 관심을 필요로 하는 모든 아이들에게  위문 
편지를 쓰겠다고. 아이들이 더 이상 답장을 보내 오지 않을 때까지 그 일을 계속하겠다고.
  린다의 카드와 편지는 짤막했지만 긍정적이었고, 내용도 각각 달랐다. 아이들은 계속 답장
을 보내 왔고, 부모들도 자기 아이에게 기운을 되찾게 해주어서 고맙다는 편지를  보내왔다. 
린다의 친구들과 이웃들도 이 일을 거들게 되었다. 편지 쓰는 사람들의 조직이 생겨나기 시
작했다. 이 단체의 이름은 '사랑의 편지'였다.
  린다는 몇몇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병마와 힘겹게  싸우고 있는 아이들을 돕기 위해  지칠 
줄 모르고 일했다. 하지만 '사랑의 편지'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너무 많았다. 그들이  도와
야 할 사람은 많은데 자금이  턱없이 모자랐다. 우편물을 보낼 때마다  우편 요금이나 카드 
제작비를 어떻게 마련할지를 걱정해야 했다.'사랑의 편지'는 기증  받은 임시 사무실에서 일
하면서, '로터리클럽'이나 '상공회의소' 같은 단체가 기부한 우표와 돈과 사무용품에 의존하
여 간신히 버텨 나가고 있었다. 
  '사랑의 편지'는 40여 개 단체나 회사에 후원을   부탁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하지만 '
사랑의 편지'는 한 번도 편지 보내는 일을  거르지 않았다. 린다와 35명의  자원봉사자들에
게는 아이들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던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든 어려움을 이겨냈다. 집에서 만
든 빵이나 과자를 팔기도 하고, 티셔츠를 팔기도 하고, 그래도 모자라면 자기 주머니를 털기
도 했다.
  린다가 만나본 적도 없는 아이에게 첫 번째 편지를  보낸 지 10여 년이 지난 오늘날, '사
랑의 편지'는 해마다 6만 통 이상의 우편물을  보내고 있다.  이 단체의 재원은 아직  부족
하지만, 그들의 의지는 충만하다. 35명의 자원봉사자가 카드와 편지를 쓰는 데 바치는  시간
을 합치면 매주 400시간에 이른다. 90명 내지 110명에게 생일선물도 보내고 있다. 특히 힘겨
운 시기를 겪고 있는 아이들에게는 날마다 우편물이 배달되도록 마음을 쓴다. '사랑의 편지'
는 매년 약 200명의 아이들을 명단에서 지운다. 병이  나아서 퇴원했거나 세상을 떠난 아이
들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빈자리는 늘 새로운 이름으로 다시 채워지고 있다.
린다는 '사랑의 편지'를 꾸려 나가기 위해 매주 70시간  내지 80시간을 일한다. 지쳐서 쓰러
질 것 같을 때도 있다. 그럴 때  전화벨이 울린다. '사랑의 편지'가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를 말하기 위해 아이나 부모가 걸어온 전화다.
"그런 전화를 받으면 기운이 다시 솟아난답니다. '사랑의  편지'가 영혼을 치유하는 데 얼마
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를 직접 경험했으니까요."
린다 브렘너는 남에게 베푸는 만큼, 아니 그보다  더 많은 보답을 받고 있다. 삶의 이유, 사
랑의 순환, 목적 의식-이것이 린다가 받는 보답이다.
  
  "나는 죽을 때까지 이 일을 계속 할 거예요. 너무나 중요한 일이니까요. 나는 우는 아이도  
  보았고 웃는 아이도 보았어요.
  나는 웃음이 좋아요. 어떤 아이가 미소를 짓는 데 내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음을 안다  
  는 게 나한테는 정말로 중요하답니다. " 
  린다 브렘너
  
  한 가슴이 찢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면,
  내 인생도 헛되지는 않으리.
  한 생명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다면,
  하나의 고통을 가라앉힐 수 있다면,
  땅에 떨어진 지빠귀가
  둥지로 다시 올라가도록 도와줄 수 있다면,
  내 인생도 헛되지는 않으리라.
  에밀리 디킨슨, '한 가슴이 찢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면'
  
      진행중인 사명
      멀고도 험한 맨발의 모험 여행
    가진 것이라고는 성경과 <천로역정>(그의 두  가지 보물), 닷새 치  식량, 호신용 작은 
도끼 하나와 담요 한 장 뿐 이었다. 이것들을 가지고 레그손 카이라는 기운차게 일생일대의 
여행을 떠났다. 그의 부족이 살고 있는 니아살랜드(1964년에 말라위로 독립)의 작은 마을에
서 동부 아프리카의 황무지를 가로질러 카이로까지 걸어간 다음,  배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
가 대학에 진학할 작정이었다.
  1958년 10월, 당시 레그손은 열 예닐곱 살이었다. 나이가 열 여섯인지 열 일곱인지는 어머
니도 알지 못했다. 그의 부모는 까막눈이어서, 미국이라는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 얼마나 멀
리 떨어져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고향을 떠나는 아들을 마지못해 축복해 주었다. 
  레스손에게는 엉뚱한 꿈이 있었고, 그 꿈은 어떻게든 배우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부추겼다. 
그래서 고향을 떠난 것이다. 그가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영웅은 링컨 대통령이었다.  가난을 
딛고 일어나 미국 대통령이 되어, 노예를 해방시키기 위해 지칠 줄 모르고 싸운 에이브러햄 
링컨. 이 링컨 같은 인물이 되는 게 그의 꿈이었다. 그는 또한 노예의 굴레에서 벗어나 미국
의 위대한 개혁자이자 교육가가 되어 자신과 흑인들에게 희망을 주고 인간의 존엄성을 부여
한 부커 T.워싱턴 같은 인물이 되고 싶었다.
  레그손은 이 위대한 본보기들처럼 인류를  위해 봉사하고 세상에 영향을  미치고 싶었다.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최고의 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최고의 교육을 받기에 가장 
좋은 곳은 미국이었다. 
  동전 한 닢 없고, 배 삯을 낼 방법도 없지만, 그런 것은 개의치 말자.
  어떤 대학에 들어갈지, 아니 대학에서  과연 받아줄지 어떨지도 모르지만, 그것도  개의치 
말자.
  카이로는 장장 5,000km 나 떨어져 있고, 그곳까지 가려면 수백 개  부족들이 사는 마을을 
지나가야 하지만, 그것도 개의치 말자. 그 부족들은 레그손이 전혀 모르는 50여 가지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도 개의치 말자. 
  그 모든 것을 개의치 말자. 레그손은 개의치 않았다. 그래야 했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스
스로 개척할 수 있는 나라에 가겠다는 꿈 말고는 모든 것을 마음에서 몰아냈다.
  레그손이 어릴 적부터 그렇게 심지가 굳었던 것은 아니다. 어렸을 때는 학교 공부를 게을
리 하거나, 무언가를 이루지 못했을 경우 가난을 핑계삼은 적도 있었다. 나는 가난한 아이일 
뿐이야. 그런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친구들도 대부분 그랬듯이, 니아살랜드의 카롱가에 사는 가난한 소년에게 공부는 시간 낭
비뿐이라고 속 편하게 생각했다. 그러다가 선교사한테 선물 받은 책에서 에이브러햄 링컨과 
부커 T. 워싱턴을 발견했다. 레그손은 자신의 인생에 대해 더 많은 것을 꿈꾸게 되었고, 교
육이 첫 단계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카이로까지 걸어갈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꼬박 닷새 동안 아프리카의 험한  산악지대를 걸었지만, 50km 밖에 걷지  못했다. 식량은 
벌써 바닥이 났고, 물도 다 떨어져 가고 있었다. 돈도 한푼 없었다. 앞으로 4,950km를 더 걸
어가야 하는데, 이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꿈을  포기
하는 것, 가난하고 무식한 인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미국에 도착할 때까지는 절대로 걸음을 멈추지 않겠어. 죽음 때까지 해보는 거야.  쓰러져 
죽기 전에는 멈추지 않겠어. 그는 자신에게 약속하고 계속 걸었다.
  때로는 낯선 사람들과 함께 걷기도 했지만, 대개는 혼자서 걸었다. 마을이 나타나면, 그곳 
원주민들이 어떻게 나올지 몰라서 조심스럽게 마을로 들어가곤 했다. 일거리와 잠자리를 구
할 때도 있었지만, 별이 총총한 밤하늘을 이불 삼아 한뎃잠을 잘 때가 많았다. 먹을 것이 없
으면 야생 열매를 찾아서 끼니를 때웠다. 레그손은 점점 여위고 쇠약해졌다.
  결국 열병에 걸려 쓰러졌다. 낯선 사람들이 약초로 그를 치료해 주고, 푹 쉬면서 몸을  추
스릴 곳을 마련해 주었다. 지치고 낙심한 레그손은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했다. 목숨까지 걸
면서 이런 무모한 여행을 계속할 필요가 있을까. 차라리 돌아가는 게 낫겠어.
  그러나 레그손은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보물처럼 소중히 간직해 온 두 권의 책에 도움을 
청했다. 수없이 읽어서 외다시피 한 말들을 다시 읽으면서 자신과 목표에 대한 믿음을 되살
렸다. 험난한  여행을  시작한 지   15개월 뒤인  1960년 1월   19일, 레그손은  카롱가에서 
1,500km 떨어진 우간다의 수도 캄팔라에 이르렀다. 이제는  몸도  튼튼해졌고, 생존 기술도 
전보다 훨씬 많이 알게 되었다. 그는 여섯 달 동안 캄팔라에 머물면서 틈틈이 일을 하여 돈
을 벌고, 남는 시간은 도서관에서 책을 읽으면 보냈다. 
  그 도서관에서 레그손은 사진이 실려 있는 미국 대학 편람을 발견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사진 한 장이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웅장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친밀감이 느껴지는 건물 
사진이었다. 새파란 하늘을 머리에 이고 서있는 그 건물을  아름다운 분수와 잔디밭으로 장
식되어 있고, 고향의 웅장한 산봉우리를 연상시키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것은 워싱턴 주 마운트 버넌에 있는 스캐짓 밸리 대학이었다. 그 대학을 보는 순간,  불
가능해 보였던 꿈이 처음으로 구체적인 모습을 띠게 되었다. 레그손은 당장 스캐짓 밸리 대
학 학장에게 편지를 써서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고 장학금을  신청했다. 스캐짓 대학에서 받
아주지 않으면 , 얼마 안 되는 돈이 바닥날 때까지 여러 대학에 편지를 보낼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스캐짓 대학 학장은 레그손의  결심에 감동하여 입학을 허락
하고 장학금을 주었을 뿐 아니라, 하숙비를 마련할 수 있도록 일자리까지 제공해 주었다. 
  꿈의 한 조각이 이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앞길에는 아직도 많은 장애물이 놓여 있었
다. 미국에 가려면 여권과 비자가 필요했고, 여권을 받으려면 정부에 출생증명서를 제출해야 
했다. 또다시 그는 펜과 종이를 집어들고, 어릴 적부터 그를 가르쳐 준 선교사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들은 정부 관계자를 통해 레그손이 여권을 발급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하지만 
비자를 받는데 필요한 항공운임을 마련할 길은 여전히 막막했다. 
  그래도 레그손은 낙심하지 않고 카이로로 떠났다. 카이로에만 가면 어떻게든 돈을 마련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만만했다. 스캐짓 밸리 대학 교문을 맨발로 들어서지 않
으려면 신발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그 동안 모든 돈을 탈탈 털어서 구두를 샀을 정도였다.
  몇 달이 지나자 그의 용감한 여행에  대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가 돈  한 푼 없이 
기진맥진한 상태로 수단의 수도 하르툼에 도착했을 때쯤에는  레그손 카이라에 대한 '전설'
이 아프리카 대륙에서 대서양을 건너 워싱턴 주 마운트 버넌까지 퍼져 있었다. 스캐짓 밸리 
대학 학생들은 그 곳 시민들의 성금 650 달러를 미국 행 여비로 보내주었다. 
  그들의 인정을 알았을 때 레그손은 털썩 무릎을 꿇었다. 더  이상 서있을 수도 없을 만큼 
지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기쁨과 고마움의 표시였다. 집을 떠난 지 2년  2개월이 
지난 1960년 12월, 레그손 카이라는 마침내 스캐짓 밸리 대학에 도착했다. 그는 보물처럼 소
중히 간직해 온 두 권의 책을 가슴에 안고, 하늘을 향해 높이 솟은 대학 교문을 자랑스럽게 
들어섰다. 
  그러나 레그손 카이라는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학문적 여행을  계속하여, 영국 캠브리지 
대학의 정치학 교수이자 널리 존경받는 작가가 되었다. 
  마음의 영웅인 에이브러햄 링컨이나 부커 T. 워싱턴처럼 레그손 카이라도 시작은 초라했
지만, 온갖 역경을 딛고 일어나 자신의 운명을 개척했다. 그는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당당한 
등대가 되었다. 그 등대의 불빛은 지금도 그를 뒤따르는 이들에게 길을 안내해 주고 있다.
  
  "나는 내가 환경의 희생자가 아니라 그 주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레그손 카이라
  
  그대의 삶이 끝날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아예 시작도 하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라.
  뉴먼 추기경
  
      집은 마음의 안식처
      재산을 버리고 망치와 톱을 들다
    '아메리칸 드림'이 무일푼으로 시작하여 백만 장자가 되는  것을 뜻한다면, 밀러드 풀러
의 이야기는 거기에 딱 들어맞는다. 하지만 밀러드는 자신의 꿈이 악몽으로 변했을 때 미래
에 대한 설계를 재검토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서른 살에 이미 백만장자가 된 밀러드는 천만장자가 되겠다는  야심을 품었고, 그럴 만한 
기량과 재간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호화 저택과 호숫가의 별장,  250만 평의 토지, 쾌속 보
트와 최고급 승용차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마냥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다. 일이  너무 
바빠서 아내와 두 아이의 얼굴을 볼 시간도 거의 없는 게 가슴이 아팠다. 그의 제국은 일어
나고 있었지만 가정은 무너지고 있었다. 이런 일은 부와  권력을 추구하는 수많은 이들에게 
일어난다. 이런 상황을 바꿀만한 용기를 가진 백만장자는 백만 명에 한 명 정도다. 밀러드는 
바로 그 백만 명중의 한 명이었다. 
  하루는 사무실에서 갑자기 심장발작이 일어났다. 동맥이  막혀서 생기는 심장발작이 아니
라, 슬픔과 회한이 갑자기 홍수처럼 밀려와 심장이 멎어 버리는 듯했다는 뜻이다. 그날 저녁
에 아내 린다는 마치 최후  통첩이라도 보내듯 선언했다. 나한테 과연  남편이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니,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지도 확신할 수 없다면서, 뉴욕에 가서 목사와 상담하
겠다고 말했다. 밀러드는 어안이 벙벙했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면 뭐든지 다 주었는데, 
어떻게 아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밀러드는 당시를 회고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 다음주는 내 평생에 가장 외롭고 괴로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는 사업을 일으키느라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모두 잃어버렸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
다. 어느 날 밤에 영화를 보다가 "계획된 인생은 즐길 수 없다. 다만 참고 견딜 수 있을 뿐" 
이라는 대사를 듣고 그는 이 깨달음을 더욱  통감했다. '계획된 인생'-그는 바로 그런 인생
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계획에 뜻 있는 목표를 포함시키는 것은 잊고 있었다. 
  밀러드는 당장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만나고 싶다고 간청했다. 린다가 마지못해 동의하자 
밀러드는 당장 비행기를 타고 뉴욕으로 날아갔다. 그 후 며칠동안 부부는 눈물을 쏟으면 가
슴속에 쌓인 응어리와 감정을 모두 털어놓고, 소중한 것을  바탕으로 인생을 다시 설계하기
로 굳게 약속했다. 
  "우리는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둘 다 하느님의 존재를 강하게 느꼈습니다. 새로
운 인생을 살라고 하느님이 명령하신다고 느꼈지요." 
  이 새로운 인생이 무엇이든,  그것을 준비하려면 먼저 그들과  하느님 사이를 갈라놓았던 
것-사업과 재산-을 모조리 없앨 필요가 있다고 린다와 밀러드는 생각했다. 
  그들은 회사, 저택, 별장, 보트 등 모든 재산을 팔아서 그 돈을 교회와 대학과 자선단체에 
기부했다. 친구들은 미쳤다고 수군거렸지만, 밀러드는 그 때만큼 정신이 멀쩡한 적은 없었다
고 생각했다. 그는 벌써 기분이 좋아지고 있었다. 그런데 다음에는 뭘 하지?
  그 답은 클래런스 조던을 찾아갔을 때 떠올랐다. 작업복  차림의 신학자인 클래런스는 애
틀랜타에서 남쪽으로 200km쯤 떨어진 조지아  주 남서부의 아메리커스라는 소도시  근처에 
'코이노니아'라는 기독교 공동체를 세운 참이었다. 클래런스는 먼지  나는 시골길을 따라 늘
어서 있는 다 찌그러진 판잣집들을 밀러드에게 보여주었다. 비가  새고 난방 시설도 상하수
도 설비도 없는 이 오두막들을 수백 세대의 가난한 가족들이 보금자리로 삼고 있었다. 이것
은 미국만이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수없이 되풀이된  모습이었다. 세계 인구의 25%에 이르
는 14억 명이 최소한의 설비도 갖추어지지 않은 집에서 살고  있거나, 아예 그런 집조차 없
는 신세이기 때문이다.
  밀러드와 클래런스는 뜻을 같이하는 몇몇 동지들과 함께 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집을 지어
주기 시작했다. 기독교 신앙을 그런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처음에는 한 두 채로  시작하
여, 점점 집이 늘어났다. 안타깝게도 클래런스 조던은 첫 번째 집이 완공되기 전에 심장마비
로 떠났다. 밀러드와 동료들은 4년 반 동안 '코이노니아'에서 집 짓는 일을 계속했다. 
  소박하지만 번듯한 집을 얻은 가족들은 놀랄 만큼 달라졌고,  이에 감동한 밀러드는 조지
아 남부에서 시작된 구상이 세계의 다른 지역에도 적용될 수 있는지 알고 싶었다. 밀러드와 
린다는 중앙 아프리카의 자이르로 가서,  개신교 연합회와 손잡고 3년  동안 자이르 전역에 
집을 짓는 성과를 거두었다. 밀러드와 린다는 자신들의 구상이 세계 어디서나 통할 수 있다
는 믿음을 안고 1976년에 조지아 주로  돌아왔다. 밀러드는 '국제 해비태트 협회'를 창설했
다.
  한때 밀러드의 목표는 천만장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새로운 목표를 갖게 되
었다. 내가 천만 명에게 집을 지어줄  수 있을까? 감히 그런 꿈을  꿀 수 있을까? 밀러드와 
린다는 자신들의 사명이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라고  생각했다. 바로 "인간은 누구나 편
안히 잠잘 수 있는 곳을 가져야 한다. 소박하나마 남부끄럽지 않은 집을 구할 수 있어야 한
다"는 것이었다. 주택을 공급하는 일은 진정한 종교의 요체라고 할 수 있는 "기본적인 선행
과 사랑"이라는 것이 밀러드의 신념이다. 
  '해비태트'의 기본 구상은 이렇게 단순하다. 그러나 회의적인 사람들은 황당한 생각이라고 
주장했다. 미친 짓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있었다. 밀러드의 구상은 '무 수익-무이자 대
출'에 바탕을 두고 있다. 반대론자들은 이것이 "반미국적이고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 이라
고 말했다. 하지만 '국제 해비태트  협회'는 잘 돌아가고 있다. 불량주택에서  얼마 안 되는 
수입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난생 처음으로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적당한  가격에 
집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얻고 있다. 
  '해비태트'는 자원봉사자들의 협력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집을 지어본 경
험이 전혀 없다. 다양한 단체와 기업 및 교회가 현금과 건축자재를 기증한다.  각계각층에서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시간과 기술을 무료로  제공한다. 하지만 '해비태트'는 자선
단체가 아니다. 혜택을 받는 가족들도  자기 집과 이웃집을 짓는 데  참여하여 수백 시간씩 
땀흘려 일한다. 새로 입주한 가족이 '무이자-무 수익  저당'으로 대출을 받아 집 값을 내면, 
'해비태트'는 그 돈으로 더 많은 집을 짓는다. 
  그 많은 사람과 단체가 이 운동에 그토록 헌신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 가지 이유는 성
과가 눈에 보인다는 점이다. 세상에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가난한 사람이 너무 많아서,  한 
사람의 노력으로는 성과를 거두기 어려워 보일 때가  많다. '해비태트'의 자원봉사자들은 새
로 입주할 사람들과 함께 일한다. 집이 완공되면 모두 뿌듯한 만족감과 기쁨을 집주인과 함
께 나눈다. 
  '해비태트'의 목표는 전세계에서 불량주택과 무 주택자를 없애는 것이다. 
  "이 목표가 너무 대담해서 사람들을 흥분시키고 관심을 불러일으킨다는 걸 나는 느꼈습니
다. 해마다 그런 대담함이 낳는 기적에 우리도 놀라고 있습니다."
  밀러드의 대담한 계획에 따라 '해비태트'는 벌써 전세계에 6만 채 이상의 주택을 지어, 적
어도 30만 명에게 안전하고 번듯한  집을 적당한 가격에 공급했다.  '국제 해비태트 협회'는 
미국의 50개 주에 1,400개 이상의  지부를 두고 있으며, 해외에도 250여  지부를 두고 있다. 
'해비태트'는 미국 이외의 51개 국가에서 약 800건의 주택 건축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해비태트'가 세우는 것은 집만이 아니다. 가족과 공동체와 희망도 세우고 있다. 
  "어떤 가족이 자택을 갖는 것은 더 높은 지위로 올라가는 첫 단계인 경우가 많고, 절망과 
나태의 악순환을 끊어줄 수도 있습니다. 동네에서는 마약과 쓰레기가 자취를 감추고, 태풍과 
지진과 홍수를 견뎌낸 주택들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해비태트'는 모든 경제, 종교,  사회, 인종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을 결속시켜 준다. 
전진 대통령 지미 카터와 그의 아내 로절린 카터가 작업복 차림으로 못질을 하거나 목재를 
자르며 한낮의 뙤약볕 아래서 땀흘리는 사지을 보지 못한 미국인은 거의 없다. 밀러드가 도
움을 청하자 이들 전직 대통령 내외는 두말 없이 응했다.
  "나는 그분께 열다섯 가지 지원  방안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면  적어도 한두 가지 부탁은 
들어주리라 생각했던 거죠. 그런데 놀랍게도 그분은 그 열 다섯 가지를 전부 받아들였지 뭡
니까."
  이 운동에 동참하여 시간과 돈을 바치고  지원을 아끼지 않는 저명인사는 카터 내외만이 
아니다. 수십만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집을  지을 때 나오는 쓰레기를  치우고, 벽을 세우고, 
페인트칠을 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들은 비록  이름이 알려진 저명인사는 아니
지만, 그들의 행위만은 누구 못지 않게 훌륭하다. 
  20 세기 말 쯤 이면 '국제 해비태트 협회'는 전세계에서 가장   많은 주택을 지은 건설업
자가 될 것이다. '해비태트'의 주택 건축에 들어가는 벽돌은  집만이 아니라 새로운 인생도 
건설하고 있다. 그것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보다 나은 것을 위해 기꺼이 재물을 포기한 일
에서 시작되었다. 밀러드와 린다는 이제 자신들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라
고 믿고 있다. 
  
  "불량주택을 없애는 것이 우리의 꿈입니다.  그 꿈을 이루리 위해서는  우리 앞길에 놓여  
  있는 숱한 장애물을 뛰어넘어야 하겠지요. 그러나 차근차근, 한번에 한 채씩 집을 짓다 보  
  면, 언젠가는 목표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밀러드 풀러 
  
  언젠가 상담 신부님께 내 소명에 대해 조언을 청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물었지요. 
  "내가 과연 하느님의 부름을 받은  것인지 어떤지, 부름을 받았다면  무엇 때문에 부름을  
 
  받은 것인지, 내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러자 그 분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네가 행복을 느끼는지 어떤 지로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이 너에게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봉사하라고 요구하신다는  생각이 너를 행복하게 해주면,  그것은 네가 하느님의 부  
  름을 받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마더 테레사 
  
      상상력을 발동하라
      날씬한 몸매를 쫓는 세상에서 그녀는 작게 생각하기를 거부했다
    요즘은 부쩍 마른 몸매가 인기 있는 세상이다. 하도 날씬해서 신경성 식욕 부진증에 걸
린 게 아닌가 싶은 슈퍼모델이나 영화배우들이 인기를 얻고 있고, 여성의 아름다움은 5사이
즈 몸매에서 시작된다는 점을 끊임없이 환기시키는 것들이 주변에 널려 있다. 
  하지만 언제 5사이즈였던 적이  있었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여성들도 많다. 오랫동안 
그들은 체중계 눈금이 90 kg을 지나고 130 kg을 지나  꾸준히 올라가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보았다. 몸에 맞는 옷을 찾으려는 노력은 포기한 지 이미 오래다. 살을 빼려고  에어
로빅 강좌에 등록해도, 빠른 발놀림과 강도 놓은 운동에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뿐더러 창
피만 당하는 게 고작이다. 
  샬린 파웰은 알고 있다. 마흔 두  살 되던 1983년에 그녀의 옷  사이즈는  '24'였다. 당시 
그녀는 워싱턴 주 예키모에 살고 있었는데, 아이들을 키우느라  너무 바빠서 운동하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 무렵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샬린은 어머니가 정맥염으
로 고통스럽게 죽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쌍둥이  아들을 바라보고 거울을 들여
다보면서 자기도 결국은 어머니처럼 죽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뭔가 달라져야 한다!
  샬린은 용기를 내어 동네에 있는 에어로빅 교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수 반 년 동안 예
키모의 에어로빅 교실을 하나도 빠짐없이 돌아다녔다. 어느 교실에서가  가장 덩치가 큰 사
람은 '언제나' 샬린이었고, 늘씬하고 유연한 몸매를 꽈배기처럼 뒤틀 수 있는 강사의 동작은 
그녀가 아무리 애를 써도 따라갈 수 없었다. 충격이  덜한 에어로빅 프로그램이 개발되려면 
몇 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1983년 당시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샬린은 
날씬해지려면 자기가 직접 에어로빅 강좌를 개설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5사이즈가 아니면서도 운동하고 싶어하는 여자가, 얘키모에만  나말고도 최소한 다섯 명
은 더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남편에게 200달러를 빌려 큰방을 한 임대하고, 그녀의 생각을 비웃지 않을 강사를 
찾아 나섰다. 샬린의 이야기를 들은 강사들은 하나같이 "뚱뚱한 여자들은 운동을 하려 들지 
않아요. 너무 게으르거든요" 하고 말했지만, 그런 말은 하지 않을 강사가 한  사람쯤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마침내 강좌를 맡아주겠다는 강사가 나타나자 샬린은 신문에 작은 광고를 냈다. 다음주에 
에어로빅 교실을 열 예정이니 몸집이 큰 여성들은 첫 교습에 참가하라는 광고였다.
  첫날 교습에 나온 여성은 예순 명이었다.
  "대여성 명만 왔더라도 나는 행복했을 거예요"하고  샬린은 회고했다. 교습생은 보름만에 
150명으로 늘어나, 하루에 두 번 교습하는 것으로 시간표를 조정해야 했다. 그때 샬린은  이
게 내가 가야 할 길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샬린의 에어로빅 교실은 두 달만에 문을 닫았다. 그녀는 자신의 실수를 솔직히 인
정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던 거예요. 내가 제공한  프로그램도 본질적으로는 다른 프로
그램과 똑같았으니까요. 강사도 날씬했고, 운동 방식도 전혀 다를  게 없었고, 모든 게 똑같
았어요." 
  샬린의 에어로빅 교실은 덩치 큰 여성들이  충분한 도움을 받으면서 안전하게 운동할  수 
있는 공간이었지만, 프로그램 자체는 똑같이 격렬해서 좌절감만 안겨주었다. 교습생들을  열
패감만 안고 떠나갔다.
  샬린이 두 달만에 에어로빅 교실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그
러면 그렇지 하고 빈정거렸다. 그들은  처음부터 줄곧 "뚱뚱한 여자들은  운동을 하려 들지 
않는다"고 말했고, 샬린의 시도가 실패로 끝난 것은 그 말이 맞다는 것을 확인해 주었을 뿐
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샬린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기존의 것과는 다른  프로그램을 
제공할 수만 있다면 덩치 큰 여자들도 운동하고 싶어할 거라고 확신했다.
  "내 구상을 포기할 수도 있었지만, 다시 한 번 시도해서 이번에는 내가 처음에 원했던 대
로 해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자면 나 자신이 에어로빅 강사가 되어야 했지요."
  샬린은 운동과 건강에 대한 자료를 구해서 열심히 공부했다.  교습에 참여하여 다른 강사
들을 유심히 관찰하고, 그들의 동작을 큰  몸집에 알맞게 변형시켰다. 그리고 친구 한  명과 
함께 새로운 프로그램을 직접 시험해 보았다. 남을 가르칠 준비가 되었다는 판단이 들자, 샬
린은 전과 같은 장소에 '풍만한  여성을 위한 피트니스 클럽'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친구와 
함께 다시 교습을 시작했다. 
  첫 주에 110 명의 교습생이 몰려들었다. 두 달 뒤에는 250명으로 늘어났다. 찾아오는 고객
을 돌려보내야 하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샬린은 남편에게 다시 1만 달러를 빌려, 대
지 1,000평에 건평이 약 200평인 건물을 구입했다. 건물은 낡았지만, 전에 쓰던 방보다 훨씬 
넓었다. 
  건강하고 날씬한 몸매를 만들기 위한 샬린의 노력은 이제 어엿한 사업이 되었다. 샬린과 
그녀의 고객들이 건강하고 날씬해질수록 그녀의 사업도 번창했다. 샬린은 좀더 좋은 강사가 
되기로 작정하고 추가 훈련을 받을 수 있는 곳을 찾기  시작했다. 샬린이 이제껏 만나본 장
애물 가운데 가장 크고 예기치 않은 장애물에 부닥친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 장애물은 바
로 피트니스(몸매 만들기)산업 그 자체였다. 샬린은 자기보다 훨씬 몸집이 큰 강사 친구와 
함께 샌디에이고에서 열린 피트니스 대회에  참석했다. 거기에 가면 새로운  기술은 배우고  
피트니스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교류할 수도 있으리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우리를 빤히 쳐다보는 거예요. '저 여자들이 여기엔 뭐 하러 왔지?' 하는  눈초
리로, 우리가 몹쓸 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말이예요. 우리는 뚱보였으니까, 그 사람들이 보기
에는 병자였죠. 그 사람들은 뚱보한테는 심한 혐오감을 느꼈어요."
  샬린과 친구는 강사 자격증을 따고 싶었지만, 자격증 교부  위원회는 그들의 신청을 단호
히 거부했다. 
  "그들이 말하기를, '당신이 도대체 뭘 하려는 건지  모르겠군요. 당신 같은 사람들에게 자
격증을 주는 건 생각해 본 적도 없어요' 하더군요." 이 말은 샬린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
다."나는 화가 나고 맥이 풀린 채 샌디에이고를  떠났어요. 그리고 생각했죠. 피트니스 전문
가들이 나 같은 사람을 그런 식으로 다룬다면, 우리는  어떤 피트니스 클럽에서도 환영받지 
못할 거라고 말이예요."
  집에 도착했을 때쯤, 참담한 기분은 이미 단호한 결심으로 바뀌어 있었다. 샬린은  자기처
럼 피트니스 업계만이 아니라 모든 업종에서  무시다하고 있는 여자가 수없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몸에 맞는 바지 하나를 사려면 남성복 매장에 가야 하는 여자들, 고를 수 있는 
색깔이라고는 갈색이나 검정 색 밖에 없는 여자들이 얼마든지  있었다. 붐비는 시간에 슈퍼
마켓에 가면 모두 힐끗 쳐다보면서 비웃거나 놀리는 게 싫어서 자정이 지난 뒤에만 가는 여
자들도 많았다. 그런 일을 당하면 샬린과 친구가 피트니스 대회에서 당한 것과 똑같은 기분
이 들기 때문에, 뚱뚱한 여자들은 되도록 사람들 눈에 띄는 것을 피하곤 했다. 
  뭔가 달라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뭐든지 다 하겠다고, 샬린은 
다시 한 번 다짐했다. 샬린은 그녀의 클럽에 들어오는 여자들에게 깊은 동정심을 가지고 따
뜻하게 대해 주었다. 체중 문제에 따르는 좌절감과 자존심 문제를 다루기 위한 모임을 만들
어, 용기를 잃지 않도록 격려하고 도와주었다. 클럽을 자주 찾아오도록 장려하기 위해, 클럽
에 올 때마다 '하트'를 하나씩 주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많이 모은 고객에게는 상을 주었
다. 남편과 함께 리무진에 태우고 멋진 호텔로 데려가서 저녁을 대접한  다음 하룻밤 묵게 
해주는 것이다. 샬린과 클럽 직원들은 호텔 객실을 싱싱한 꽃으로 가득 채우고, 침대 시트를 
벗겨 장미꽃잎을 뿌려 놓았다. 
  " 그 여자들한테 특별한 사람이 된 기분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어요. 그러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다 해주고 싶었죠."
  샬린의 사업은 갈수록 번창해서, '풍만한 여성을 위한 피트니스 클럽'을 개설한 지 2년 뒤
에는 지점을 내기로 결정했다. 샬린이  조사해 보니, 표준체중을 초과하는 여성이  미국에만 
무려 6천만 명이나 되었다. 게다가 샬린은 피트니스 클럽이라는 시장 현황, 수요자들의 요구
와 그 해결 방안에 대해서도 직접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1987년에 '풍만한 여성을 위
한 피트니스 클럽' 지점은 어느새 52개로 늘어나 있었다. 
  그러나 여기까지 오는 동안 만사가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샬린은 모퉁이를 돌 때마다 
장애물에 부닥쳤다. 몸집이 큰 여성을 위한 레오타드와 타이츠가 필요해서 제조업체에 주문
했더니, 업체 관계자들은 맞대놓고 비웃으면서 말했다. 
  "돈만 낭비하게 될 겁니다. 뚱뚱한 여자들은 운동을 하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샬린은 미국 서부의 태평양 연안을 돌아다닌 끝에,  오리건 주에서 건실한 중소기
업을 찾아냈다. 규모는 작아도 활기가 넘치는 회사였다. 이 회사는 그야말로 행운을  붙잡은 
셈이었다. 행운을 붙잡은 것은 샬린도 마찬가지여서, 두어 달도 지나기 전에 대형  사이즈의 
운동복을 팔아서 버는 돈이 그녀의 사업체가 벌어들이는 총수익의 3분의 1이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샬린은  '풍만한 여성을 위한 피트니스 클럽'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살거나 집안에서 운
동하고 싶어하는 여자들을 도우려면 운동 비디오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당시에는 제인 폰
다의 에어로빅 비디오가 시장을 독점하고 있었다. 샬린은 클럽 회원들에게 구상을 털어놓았
지만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우리를 비디오에 출연시키고 싶다고요? 싫어요!"
  그들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만했다. 그래서 샬린은 그녀의  피트니스 클럽이 생기기 전
에 덩치 큰 여성을 위한 운동 비디오가 있었다면  얼마나 도움이 되었겠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예순 다섯 명이 몸에 찰싹 달라붙는 레오타드를 입고 카메라  앞에서 운동하겠다
고 나서더군요. 우리는 모두 헐렁한 티셔츠를 입었어요. 남의 눈을 의식해서 어색한  기분을 
느끼면 안 되니까요."
  그 비디오를 본 로스앤젤레스의 비디오 배급업자들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비디오 판
매를 맡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아무도 없자, 샬린은 이번에도 자기가  직접 그 일을 할 수밖
에 없다고 결심했다. '풍만한 여성을 위한 운동' 비디오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샬린은 홍보
대행사와 계약을 맺었다. 오래지 않아 미국 전역의 신문 잡지가 샬린과 그녀의 클럽을 특집
으로 다루었다. 첫 번째 비디오는 5만 개가 팔렸다. 두 번째 비디오는 백만 개가 넘게 팔렸
다. 뒤이어 세 번째 비디오가 나왔고,  샬린은 전국 망 텔레비전에 방영될 광고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샬린은 자신이 좀더 건강하고 날씬해지기 위해 시작했지만, 다른 사람들의 삶을 바꾸는데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샬린은 자신의 성공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한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 이예요. 정말로 하고 싶은 마음이 우러나는 일을 찾
아내면, 누구나 나처럼 할 수 있어요. 물론 어느 정도의 위험은 감수할 필요가 있고, 비웃음
과 무시를 당할 수도 있겠죠. 대가를 치르지 않고는 성공할 수가 없어요. 하지만 계속  밀고 
나가면, 자기가 할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을 멋지게 해낼 수 있어요."
  
  "이것은 단순한 사업이 아니라 사명이었어요.
  그래서 나를, 또한 내 도움이 필요한 분들을 방해하려 드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결코  용  
  납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답니다."
  샬린 파웰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가에 대해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아. 욕구를 충족시  
  킨다고 해서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가치 있는 목표를 위해 자신을 바  
  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을 얻는 지름길이다.
  헬렌 켈러
  
      진지한 원숭이 사업
      그녀는 독립전쟁에 참가할 특별한 병사들을 훈련시켰다
    1997년, 메리 조안 윌러드는 보스턴에 있는 터프츠 뉴 잉글랜드 종합병원에서 환자들을 
순방하고 있었다. 심한 신체손상으로 재활훈련을 받고 있는 환자들을 살펴보는 것이 연구원
인 메리 조안이 날마다 해야 하는 일이었다. 거기서 그녀는 스물 세 살 된 조를 만났다. 
  조는 목 아래가 온통 마비된 환자였다. 교통사고를 당하기  전에는 활동적이고 건장한 청
년이었으나, 이제는 온종일 휠체어에 무력하게 앉아 있는  신세였다. VTR에 테이프를 넣을 
수도 없었고, 샌드위치를 만들 수도 없었고, 미칠 듯이 가려워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
었다. 남의 도움이 없이는 용변조차도 해결하지 못했다. 이 같은 사지마비 환자가  미국에만 
십만 명이 넘었다. 
  그런 일까지 남의 손을 빌려야 하다니.  메리 조안은 가슴이 아팠다. 죽을 때까지 남에게 
의존해야 한다면 기분이 어떨까. 진취적 정신을 가진 메리 조안은 그저 상상으로만 그 기분
을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메리 조안은 심리학자였기 때문에, 그런 상황이 사지마비  환자에
게 얼마나 큰 정신적 고통을 줄 지 알 수 있었다. 사지마비 환자들은 인생을 포기하는 경우
가 많고, 신체만이 아니라 정신까지도 마비된다. 조금이라고 자립성을 얻을 수 있다면  정신
도 다시 살아날 거라고 메리 조안은 확신했다. 
  하루는 침대에 누워 있는데 문득 한 가지 착상이 떠올랐다. 바로 침팬지였다. 식사나 용변 
같은 일상적인 일을 할 수 있도록 침팬지를 훈련시키면 조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도
움이 되지 않을까?
  이튿날 메리 조안은 하버드 대학  심리학 교수인 B.  F. 스키너 박사를 찾아갔다. 스키너 
박사는 동물과 행동 교정에 대한 선구적 연구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학자였다. 메리 조안은 
스키너 박사 밑에서 3년 동안 조교로 일한 적이 있기 때문에  그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스키너가 자신의 착상을 터무니없게 여기지는 않으리라고 기대했다. 
  메리 조안의 기대는 빗나가지 않았다. 메리 조안의 이야기를 듣더니, 스키너 박사는 참 좋
은 아이디어라고 말했지만, 그러나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침팬지는 성장하면 사람만큼 덩치
가 커지고, 사람보다 힘이 세질 뿐 아니라, 까다롭고  심술궂은 기질을 가지고 있다. 스키너
는 이 점을 지적하면서, 침팬지 대신 꼬리감기 원숭이를 훈련시키는 게 어떠냐고  제의했다. 
꼬리감기 원숭이는 길거리에서 "오르간을 연주할"  정도로 영리해서 훈련시키기가 쉽고, 게
다가 주인에게도 잘  따른다는 것이다.  됐어! 메리 조안은  스키너 박사의  동의를 얻었다.  
 
이어서 메리 조안은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고 나섰다. 다양한 자료를 면밀히 조사한 끝에, 메
리 조안은 터프츠 대학에서 그녀의 심리학  연구 프로젝트를 지도해 주고 있는 교수에게 기
획 안을 제출했다. 지도교수는 기획 안의 제목만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웃느라 의자에
서 굴러 떨어질 뻔했을 정도였다.  '원숭이를 훈련시켜  환자를 돌보게  한다'-이것이 기획 
안의 제목이었다. 그러나 메리 조안 에게는 웃을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진지하게 설명을 계
속했고, 그녀의 이야기는 설득력이 있었다.  지도교수는 결국 그녀의 주장에 일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녀가 2,000달러의 연구 지원비를 받을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 이 돈이 
'도우미 Helping Hands'라는 단체의 밑거름이 되었다.  초라한 시작이었지만, 이 돈은 원숭
이 네 마리와 우리를 구입하고, 시간당 1달러로 학생 조련사를 고용하기에는 충분했다.
  메리 조안은 다양한 자료를 조사한 뒤, 원숭이를 훈련시키는 데 약 8주가 걸릴 것으로 예
상했다. 그러나 8주가 지났건만 그녀는 원숭이들을 우리에서 꺼내는 데에도 여전히 애를 먹
고 있었다. 다 자란 이 원숭이들은 실험실에서 실험용으로 사용하던 원숭이였고, 고립된  상
태에서 사육되었기 때문에 사람을 무서워했다. 2년간의 시행착오 끝에 마침내 원숭이 한 마
리가 일을 시작할 준비가 되었다.
  일이 예상보다 훨씬 늦어졌지만, 메리 조안과 그녀의 동료인  주디 자줄라는 필요한 자금
을 모으기 위해 바삐 뛰어다녔다. 서른 여덟 곳에 지원비를 신청했지만 모조리  퇴짜맞았다. 
메리 조안은 출발점으로 되돌아와, 돈을 마련하기 위해 임상심리학자로 시간제 일자리를 얻
었다. 
  중증 신체장애자와 관련된 몇몇 기관과 단체가 그녀의 아이디어에 관심을 보이긴 했지만, 
하나같이 회의적인 태도였다. 원숭이의 도움을 받는 것은 사지마비 환자들의 인격을 손상시
킨다고 항의하는 사람도 있었다.
  메리 조안은 이렇게 반문했다.
  "그럼, 맹도견은요? 맹도견도 맹인의 인격을 손상시키나요?"
  사지마비 환자를 돕는 데에는 로봇이 더 적당하지 않겠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럼, 로봇이 당신 무릎에 앉아서 당신을 두 팔로 안아줄 수 있나요?"
  메리 조안과 주디는 그밖에도 원숭이 훈련과 관련하여 숱한 어려움에 부닥쳤다. 원숭이가 
특정한 방에는 들어가지 않도록 훈련시키기도 어려웠고,  장난치기 좋아하는 원숭이가 아무 
것에나 손을 대어 말썽을 일으키지 않도록 훈련시키는 것도  어려웠다. 메리 조안은 마지막
으로 지원비를 신청한 곳에서 거절하는 편지를 받았을 때를 회고했다. 그때 메리 조안은 편
지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주디와 나란히 앉아서, 훈련중인  원숭이 헬리온이 방을 엉망으로 
어지럽히고 있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 방을 좀 봐! 저런 녀석한테 어는 누가 돈을 대겠어!" 
메리 조안은 이렇게 외치고는 주디와 함께 미스테리 환자처럼 웃어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메리 조안의 인내심과 결단력,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목적 의식이 마침내 성과를  
거두었다. 2년 뒤, 훈련된 첫 번째 원숭이 헬리온이 스물 다섯 살의 사지마비 환자인 로버트
를 만날 준비가 되었다. 로버트는 하루에 아홉 시간 동안 혼자 지내야 했다. 헬리온은  로버
트의 콧등이 가려울 때면 수건으로 긁어줄 수 있었고, VTR에 테이프를 집어넣을 수도 있었
다. 로버트의 머리를 부드럽게 빗겨줄 수도 있었고, 전등을  켜거나 끌 수도 있었고, 포장된 
음식을 전자레인지에 넣을 수도 있었고,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꺼내다가 로버트에게 갖다줄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로버트가 입에 물고 사용하는 막대기를 집어줄 수 있었
다는 점이다. 막대히는 사지마비 환자가 전화를 걸고 전자레인지를 작동시키고 책장을 넘기
는 등, 수많은 일에 사용하는 가장 중요한 도구다. 게다가 헬리온은 로버트를 즐겁게 해주고 
절대적인 애정을 바치는 헌신적인 친구였다.  헬리온과 로버트가 이렇게  성공적인  팀워크
를 이룬 덕분에, 메리  조안은  1979년에 미국 신체마비자 제대군인 협회에서  처음으로 큰 
액수의 자원 비를 받을 수  있었다. 이 돈으로 메리 조안과 주디는  약간의 봉급을 받을 수 
있었고, 필요한  장비와 새로 훈련시킬 어린 원숭이 몇 마리를 구입할 수 있었다. 
  오래지 않아 전국의 사지마비 환자한테서 원숭이를 보내 달라는 요구가 쏟아져 들어왔다. 
이제 문제는 훈련 가능한 원숭이를  제때에 공급해 줄 믿을 만한  공급처를 찾는 일이었다. 
메리 조안과 주디는 실험용 원숭이나 야생에서 붙잡힌 원숭이는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체적으로 번식하는 원숭이 무리였다.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친 것은 꿈의 실현을 상징하는  기업,  '디즈니'사였다. 플로리
다 주에 있는 '디즈니 월드'가 메리 조안의  요청을 받아들여,  '디즈니 월드' 안에  있는 '
발견의 섬'에 꼬리감기 원숭이의 집단 서식처를   마련하고, '도우미'가 필요로 하는  어린 
원숭이를 공급해 주었다. 5년 뒤, '디즈니'사는   '디즈니  월드'를 확장하느라 원숭이 서식
처를  폐쇄하게 되자, 이 원숭이  무리를 보스턴의 한 동물원으로 옮기는  비용까지 제공해 
주었다.
  원숭이들은 생후 6주  내지 8주가 되면  무리와 헤어져 자원봉사자인  '양부모'의 집으로  
보내진다. 그 후 3년 내지 5년  동안 원숭이들은 기본적인 기술을 배우고, 사람들과  가깝게 
지내는 데 익숙해진다. 원숭이들이 '도우미'에 올 때쯤에는 집안을 더럽히지 않고 깔끔하게 
생활하는 교육을 받고 "우리에 길들여져" 있을 뿐  아니라, 자기 '방'으로 가라는 명령에 복
종하는 법도 배우고, 방에 들어간 뒤에는 문을 닫을 줄도 안다. 마지막 열두 달 동안 원숭이
들은 머리를 빗겨주거나 입에 무는 막대기를 다루는 법 등,   사지마비 환자들과 함께 지낼 
때 사용할 특별한 기술을 배우게 된다.
  이 과정이 너무 오래 걸린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메리 조안 윌러드처럼 꿈을 가
진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을 만나면 메리 조안은 맹
도견의 경우를 상기시킨다. 개를 훈련시켜 맹인의 길잡이로 만든다는  발상이 숱한 논의 과
정을 거쳐 실행에 옮겨지기까지는 무려 100년의 세월이 걸렸다는 것이다. 1997년에는 약160
마리의 꼬리감기 원숭이가 자원봉사자들의 집에서  살고 있었다. 그 동안 '도우미'원숭이를
받은 사지마비 환자는 35명에 이르렀다.  메리 조안에게 처음으로 착상을 안겨준 조는 오른
팔의 운동 능력을 어느 정도 되찾아,  이제는 원숭이의 도움이 필요 없게 되었다. 하지만 모
두가 그렇게 운이 좋은 것은 아니다. 아직도 수백 명의 사지마비  환자들이 비범한 '도우미' 
원숭이를 얻게 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도우미'는 그들이 영영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것, 
즉 약간의 자립성과 특별한 친구, 그리고 작은 기쁨을 그들에게 되돌려줄 것이다.
  "주디와 나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우리가 이 일을 끝까지  해내지 않으면 아무도 할 사람  
  이 없다고. 이런 일을 할만큼 미친 사람은 우리 말고는 아무도 없을 테니까요.  우리가 도  
  중에 포기했다면, 사지마비 환자들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도 고통에서 벗어나기 힘들었을  
  거예요."
  메리 조안 윌러드
  
  사람은 누구나 살아 생전에 이루어야 할 자신만의 특별한 사명을 지니고 있다....
  그 점에서는 아무도 그를 대신할 수 없고, 
  그의 인생을 그대로 되풀이 할 수도 없다. 
  따라서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일은 그 자신만이 해낼
  수 있는 유일한 것이고, 그 일을 해낼 특별한 
  기회도 역시 유일한 것이다.
  빅토르 프랭클
  
      육성 고백
      나는 성공을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혼자서는 자신의 최고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더라도, 그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남을 
도와주는 사람이 있다. 우리 어머니 루비 로이드 윌슨이 바로 그런 분이셨다.
  우리 어머니를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어머니를 '돌Doll'이라고 불렀다. 내가 태어난 지 아
홉달만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어머니는 열 여덟 살에 과부가   되어 당신 혼자서 
아이를 키워야 했다. 내가 어렸을 때는 돈이 없어서, 일주일 내내 강낭콩 몇 줌으로  연명해
야 할 때도 있었다. 먹을 것은 모자랐지만, 어머니의  사랑과 헌신은 넘쳐흘렀다. 밤마다 어
머니는 나를 무릎에 앉히시고, 내 인생을 바꾸어 놓을 이야기를 들려주시곤 했다. 
  "게먼스야, 너는 장차 큰 인물이 될 운명을 타고났어. 정성껏 열심히 노력하기만 하면, 너
는 이 세상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단다."
  열 네 살 때 나는 차에  치여 다리를 다쳤는데, 병원에서는 내가 영영  걷지 못할 거라고 
말했다. 그때 어머니는 정육공장에 다니고 있었는데, 나를 보살피기 위해 휴가를 얻어 내 병
실로 거처를 옮기셨다. 날마다 어머니는 다정한 목소리로 나를 달래주곤 했다. 의사  선생님
이 뭐라고 말하든, 네가 간절히 원하기만 하면 다시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어머니의  말씀은 
내 가슴속에 깊이 스며들어, 마침내 나도 어머니의 말을 믿게 되었다. 1년 뒤에 나는 학교로 
돌아갔다. 내 발로 걸어서, 대공황이 닥쳤을 때 수 백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어머니도 마
찬가지였다. 당시 나는 열 일곱 살이었는데, 먹고사는 일이 무엇보다 급했기 때문에, 어머니
의 만류를 뿌리치고 학교를 중퇴했다.  그 순간 나는 맹세했다.  부자가 되겠다고.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꼭 성공하고 말겠다고. 그때부터 성공하는 것이 내 필생의 목표가 되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는 사업에서 성공도 맛보았고 실패도 경험했다. 
하지만 진정한 전기가 찾아온 것은 1951년에 아내와 함께 다섯 아이를 데리고 휴가를 떠났
을 때였다. 가족용 객실은 다른 객실보다 설비도 좋지 않았고, 게다가 아이 한 명당 2달러씩 
추가요금을 내야 했다. 나는 화가 났다. 미국의 보통 가정이 부담하기에는 너무 비싼 요금이
었다. 그때 나는 결심했다. 평범한 미국인들이 부담 없이 이용할 수 있는 숙박시설을 제공하
겠다고. 그래서 아내한테 말했다. 아이들에게는 추가요금을 물리지 않는 가족용  모텔사업을 
시작하겠다. 모텔에는 사람들이 신뢰할 수 있는 간판을 내걸 작정이었다. 자동차로 하루거리
인 250km 이내에 모텔이 하나씩  들어서도록, 전국에 400개 정도의  모텔을 세우면 적당할 
거라고 판단했다. 당시만 해도 너무나 엉뚱한 발상이었기 때문에, 실패할 게 뻔하다면서  미
심쩍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놀랄 일도 아니지만, 나를 가장 강력하게 지지해 주고 가장  먼저 협력을 자청한 분은 어
머니였다. 어머니는 책상 앞에 앉아서 사무를 처리하고, 맨 처음 문을 연 호텔 객실의  실내
장식까지 맡아주었다. 다른 사업과 마찬가지로 이 사업에서도 숱한 어려움을 겪었다. 몇  년 
동안은 현금이 모자라서 직원들에게 성탄절 보너스로 약속어음을 주어야 할 정도였다. 하지
만 어머니의 말씀이 내 영혼에 깊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나는 성공을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15년 뒤에 우리는 호텔 업계에서 가장 이름난 세계  최초의 호텔 체인을 가지게 되
었다. 
  좋은 환경에서 인생을 시작하지는 못했을지라도, 노력할 가치가 있는 필생의 사업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리고 당신 자신에 대한  믿음만 가지고 있다면, 어떤 난관도 당신의  성공을
막지 못할 것이다.
  
  케먼스 윌슨은 1951년에 최초의 '홀리데이 인' 호텔을 세웠고,  이 호텔은 세계 최대의 호  
  텔 체인으로 성장했다. 케먼스가 1979년에 은퇴했을 당시 그의 회사는 50여  나라에 1,759  
  개의 호텔을 소유하고 있었고, 연간 수입은 10억 달러에 이르렀다.
  
      육성고백
      목적의식은 사람들을 감화시킨다.
    경찰에 전화해서 도움을 청할 수 없다면, 도대체 누구한테 도움을 청해야 한단 말인가? 
이것이 바로 11년 전에 내가 부닥친 딜레마였다. 한 주민이 나한테 하소연하기를, 전화 폭력
에 시달리다 못해 경찰에 신고를 했지만 경찰관들은 들은 척도 않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주
민들의 불만 사항을 조사해 보니, 누구나 할 것 없이 지역 사회 전체가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주민들은 자기가 살고 있는 동네에 대한 자부심을 잃어버린 채, 길거리에서  일어나
고 있는 불법행위와 황폐한 환경에 대해서도 속수무책으로 순응하고 있었다. 그들의 처지가 
내 마음을 움직였다. 나는 무슨 수를 써야겠다고 결심했다. 내가 맨 처음 한 일은 비록 구태
의연한 방식이긴  하지만 효과적인 청소작업이었다. 비번일 때면 공원에서 야유회를 개최하
고, 청소 작업을 도와주는  분들에게는 바비큐와 음식을 제공했다. 첫날에는 190명이 참여했
다.  우리는 당장 일을 시작했다.  함부로 버려진 차들을 치우고, 집 앞에 무성하게 자란 잡
초를 뽑고, 눈에 띄는 낙서는 모조리 페인트로 지워  버렸다.
  그래도 거리는 여전히 마약 밀매꾼과 중독자들의 차지였다. 그래서 나는 인력을 총동원하
여 그들을 추적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동네가 주민들끼리 긴밀한 관계로 묶여 있는 공동
체라는 점이었다. 내가 체포한 불법자들은 내 청소 작업을 도와주는 분들의 아들이나  형제, 
친구나 친척이었다. 즉각 반응이 일어났다.
  나는 생명에 위협을 받았다. 한 녀석이  나를 죽이려 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내가  거리에 
나타나면 사람들은 온갖 악담을 퍼부었다. 일단 정지 표지판에 스프레이 페인트로 "웨인 바
턴을 죽여라"라고 써놓은 사람도 있었다. 사람들은 내가 동네에서 떠나주기를 바라는 게 분
명했다. 하지만 나는 그럴 마음이 없었다. 나는 하느님의  소명을 강하게 느꼈고, 그분의 말
씀은 너무나 분명했다. "목표를 이루는 데만 전념하고, 그 목표를 이룰 때까지는  절대 멈추
지 마라. " 이것이 하느님의 메시지였다. 나는 그 곳에 계속 남아 있어야 했고, 시간이 지나
면 사람들도 정말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될 거라고 믿었다.
  전기는 우연한 기회에 찾아왔다. 어느 모임에 참석했는데, 잔뜩 화가 난 사람들이  나한테 
동네를 떠나라고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때 잭슨이라는 젊은 여자가 일어나더니,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제 안심하고 우편함으로 우편물을 가지러 나갈 수 있고,  마룻바닥
에서 잠을 자지 않아도 됩니다. 빗나간 총알이 내 머리에 박힐까봐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까
요, 그게 다 누구 덕인가요? 이분이 오기 전에는 우리 동네에 평화라고는 전혀 없었어요."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경험을 털어놓았다. 그 모임은  모든 것을 완전히 바꾸
어 놓았다.
  우리는 관계 기관의 협조를 얻어 동네 아이들을 위한  공부방을 열었다. 여기서는 날마다 
오후 3시부터 7시까지 유급 교사 세 명이 아이들을 가르쳤다. 아이들을 위한 컴퓨터 교습을 
시작했고, 고등학교 졸업 자격증을 따고 싶어하는 부모들을 위해 워크숍을 실시하고, 신용대
출을 상담하고, 무 주택자들이 집을 장만할 수 있도록 자금 조달 계획을 세워 주고,  그밖에
도 많은 서비스를 제공했다. 동네에 문제가 발생하면 나는  해결책을 찾으려고 백방으로 뛰
어다녔다.
  1년 사이에 얼마나 많은 변화가 일어났는지 모른다.  지역 주민들은 경찰관에게 돌멩이나 
술병을 내던지는 대신 환호를 보내주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개설한 핫라인을 통해  폭력
범죄에 대한 정보도 제공해 주었다. 공동체 의식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주민들은 이런  변화
에서 그들이 맡은 역할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그렇다. 그들이 얻
은 대가는 자식들이 마음놓고 뛰어  놀 수 있는 동네에 사는  것이었다. 아이들이 마음놓고 
뛰어 놀 수 있게 된 지도 벌써 10년이 넘었다. 
  목표를 추구하다가 난관에 부딪히더라도, 당신의 목표에만 전념하라. 앞길을 가로막는  장
애물은 뭐든지 다 처리하겠다는 결심을 굽히지 말라. 당신이 끝까지 버티면, 당신의  목적의
식은 다른 이들을 감화시킬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그들과 더불어 불굴의 인간이 될 것이다.
  
  웨인 바턴은 플로리다 주 보카러턴에서 17년 동안 시경에 근무했고, 10년 동안 파출소 소  
  장을 맡아 지역 치안을 담당했다.  1988년에는 <퍼레이드>지가 수여하는 '올해의 경찰관'  
  상을 받았고, 1990년에는 우수 공무원에게 수여하는 '제퍼슨 공직자' 상을 받았다.
  
  한 노인이 한적한 길을 걸어 내려와
  춥고 음산한 저녁에
  크고 깊고 넓은 골짜기에 이르렀다.
  바닷물이 골짜기를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노인은 어스름한 해질녘에 그 골짜기를 건넜다.
  불어난 물도 노인은 전혀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노인은 건너편으로 무사히 건너가자 돌아서서,
  골짜기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놓았다.
  
  옆에 있던 동료 순례자가 말했다.
  "영감님, 여기다 다리를 놓는 건 괜한 수고를 하시는 거예요.
  오늘이 지나면 영감님의 여행도 끝날 테니
  이제 다시는 이 길을 지나가실 필요가 없잖습니까.
  영감님은 깊고 넓은 골짜기를 이미 건너셨는데,
  무엇 하러 저녁 답에 이 다리를 놓으십니까?"
  
  다리 놓는 사람은 백발이 성성한 머리를 들고 말했다.
  "이보게 친구, 내가 지나온 길로 
  오늘 한 젊은이가 내 뒤를 따라오고 있다네.
  그 젊은이는 반드시 이 길을 지나올 것일세.
  이 불어난 물이 나한테는 아무 것도 아니었지만
  그 금발의 젊은이에게는 위험할 수도 있지.
  그 젊은이도 어스름한 해질녘에 이 골짜기를 건너야 하니까.
  이보게, 나는 그 젊은이를 위해 이 다리를 놓고 있다네."
  
  윌 앨런 드롬굴, '다리 놓는 사람'
  
    실행계획: 마음속에서 목표에 불을 지피기
  목표는 당신의 열정에 불을 지펴, 당신의 삶에 의미와 깊은 만족감을 줄 수 있다.  목표는 
당신이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이자 당신에게 주어진 특별한 소명이다. 목표는 당신이 이 세
상에 가져와 당신의 세계에 바칠 수 있는 독특한 선물이며 통찰이다. 목표는 당신의 노력에 
연료를 공급하고, 어떤 난관에 부딪혀도 계속 나갈 수 있는 추진력을 제공한다. 목표에 따라 
사는 것이 풍요롭고  의미 있는 인생을 사는 비결이라  해도,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자신의 
목표를 모르는 사람들은 어떻게 그 목표를 발견할 것인가? 답변하기는 어렵지만 아주 중요
한 질문이다. 지속적인  행복은 이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려 있기 때
문이다. 
  저명한 심리학자인 윌리엄 마스턴은 3,000명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당신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그러자 무려 94%에 달하는 사람이 뚜렷한 인생 목표가 없다
고 답변했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하지만 누구나 진정으로 사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마스턴의 조사  결과는 슬프게도  이 말을  뒷받침하고 있다.  소로우(미국의 사상가. 
1817 ~ 1862)가 "조용한 절망의 삶"이라고 부른 인생을 사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나는 도대
체 무엇 하러 살고 있을까  궁금해하면서, 신의 계시로 어느 한  순간 목표가 확연해지기를 
바라면서 참고 기다리는 게 고작이다. 목표가 확연해질 때까지는  그저 목숨을 부지할 뿐이
다. 불꽃처럼 번득이는 생기를 경험하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마지못해 기계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들은 인생이 쏜살같이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진정한 기쁨이나 깊은 목적의식
을 경험하기도 전에 인생이 끝나 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당신도 그런 기분을 느낀 적이 있는가? 당신의 삶에 무언가가 빠져 있다는 느낌을 가져본 
적이 있는가? 나는 있다. 지난 5년 동안 나는 인생에서 하고 싶은 일을 찾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재계순위 500위안에 드는 대기업에 근무하면서, 연봉 십만 달러가 넘는 소득을 포함하
여 많은 보상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내 일은 흥미롭고 해 볼 만한 것이
긴 하지만,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는 그게 아니라는 것을.
  나는 온종일 직장에서 힘겹게 일하면서도, 밤이나 주말에는 다른 가능성을 모색하곤 했다. 
나는 갖가지 업종 중에서 내가 시작할 수 있는 분야를 조사했다. 몇 가지만 예를 들자면, 나
는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땄고, 수출입 업무에 관한 강좌를 들었으며, 친구를 도와  예술품전
문 홈쇼핑 TV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런데 여기서  도대체 뭐가 잘못되었을까? 첫
째, 노력을 분산시킨 게 잘못이었다. 둘째, 여러 가지  가능성을 모색하긴 했지만 결정을 내
리는 데 필요한 판단 기준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어떤  가능성이 흥미로워 보이고 많은 경
제적 보상을 가져다줄 만한 잠재력이 있으면, 나는 무엇에나 관심을 쏟았던 것이다. 내가 인
생에서 나아가야 할 옳은 방향을 알게 된 것은  내 진정한 목표를 발견한 뒤였다. 
일단 목표를 찾아내자, 마침내 개인적으로나 직업적으로나  어떤 관심사와 활동에 진력해야 
할 것인지를 판단하는 지침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모
든 일들이 하룻밤 사이에 일어나지 않았다.  이 과정은 자성과 인내를 필요로 했다.  자성과 
인내는 대다수 사람들이 좀처럼 갖기 어려운 자질이다. 하지만 진정한 목표를 확인하자,  그 
목표가 내 마음에 새로운 활력과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게다가 내 인생과 목적지에 대해
서도 더 이상 두려움이나 불안을 갖지 않게 되었다.
  당신도 진정한 목표를 확인하면 그렇게 될  수 있다! 다음 과정은 내가  목표를 확인하는 
데 특히 큰 도움을 주었다. 당신도 한 번 시도해 보기 바란다.
  
      제1단계- 당신의 목표를 찾아내라
    실행1:우선 종이에다 이렇게 적어 보라."나는 남들에게 어떻게 기억되고  싶은가?" 아내
나 남편, 자녀들, 친구와 직장 동료들, 지역 사회, 나아가서는 세상이 기억해  주었으면 싶은 
당신의 자질과 행위와 특징을 목록으로 만들어 보라. 교회나 단체나 클럽 같은 집단이나 개
인들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면, 그것도 목록에 포함 시키라. 목록을 만들다 보면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고, 당신의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원천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내 경
우를 예로 들면, 나는 남편에게 애정이 넘치는 아내로 기억되고 싶었다. 언제나 남편을 믿고 
사랑하며, 남편에게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시야를  넓혀 인생의 궁극적 잠재력을 최
대한 발휘하라고 격려해 주는 반려자로 기억되고 싶었다. 아들에게도 다정한 어머니로 기억
되고 싶었다. 언제나 아들을 깊이 사랑하고 믿어주는 어머니, 목표를 이루기 위해 열심히 노
력하면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해낼 수 있고 이 사회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다는 것
을 깨닫도록 도와준  어머니로 기억되고  싶었다. 그러면  친구들한테는? 그들에게도  역시 
그런 친구로 기억되고 싶었다. 
  내가 인생에서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는  과정이 끝나자, 내가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패턴이 뚜렷이 드러났다. 나에게 추진력을 제공하
는 진정한 목표는 바로 남을 격려해 주는 것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내 목표는 남
들이 저마다 자신의 더 큰 가능성을 깨닫고 인생에서 그 가능성을 실제로 추구하도록 격려
해 주는 것이었다. 남을 격려하는 것이야말로  나를 들뜨게 만든다. 내 천부적 재능은 바로 
거기에 있다. 
  일단 목표가 분명해지자, 나는 이 책을 쓰는 것을 첫  번째 과제로 선택했다. 나는 '낮일'
을 그만두고, 내가 선택한 길을 추구하는  데 전념했다. 여태껏 어떤 '일'에서도   이런  열
정과 기쁨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내가 지금 추구하고 있는 계획은  모두 내 진정한 목표와 
연결되어 있다. 이런 계획을 추구할 때는 활기가 넘치고 기운이 나고 충일감을 느낀다.
  피터 드러커(<무수익 조직을 운영하는 법>의 저자)는 이렇게 말했다.
" '나는 남에게 어떻게 기억되기를  원하는가?'를 자문해 보면 새로운  자신으로  거듭나고 
싶은 마음이 생길 것이다. 나는 어떤 인간이 될 수 있는가를 생각하고, 자신을 그런  인간으
로 여기게 될 것이다."
  이 과정을 마치면 거기서 드러나는 패턴을 관찰하여,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자신만의 
사명을 창조하라. 목표를 명확히 설정하는 것이 당신의 가장 중요한 성취일지도 모른다.
  
  "당신이 생전에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일은 당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찾아  
  내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은 그 희망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 희망을 멀리서 동경만 하지 말고, 그 희망  안에서, 그 희망의 지붕 아래서  살도록 하  
  라."
  바버라 킹솔버
  
    실행2: 다음 도표는 <승리를 위한 도전>의 공동저자인 마크  빅터 한센과 잭 캔필드가 
제시한 것으로 당신이 목표를 분명히 깨닫도록 도와주는 훌륭한 도구다.
    
  제1항   나는   남을  위해   이  '행동'을  하는   내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  
                 )
  제2항    내가   봉사하고  싶은   '사람,   조직,   명분'의   유형은   이런  것이다.(   
                 )
  제3항  그런 사람, 조직, 명분과 함께 이루고 싶은 목표는 이것이다.(                  )
  내 인생의 목표는..............(                  )
  
  당신의 도표 작성을 돕기 위해  각 항목마다 당신이 선택할 수  있는 목록을 제시하겠다. 
이 목록은 결코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 이 
목록을 보면 자극이 될 것이다.
  
    제1항: 다음 목록에서 당신의 개인적  소명을 가장 잘 나타내거나  당신을 가장 들뜨게 
만드는 행동을 골라, 그 낱말을 제 1항의 빈칸에 적어 넣어 보자. 당신은 이미 그런  행동을 
자연스럽게 하고 있을 가능성이 많다.
  
행동유형
     가르친다       강화한다          개량한다          갱생시킨다
     격려한다       경청한다          계몽한다         고통을 덜어준다
     교화한다      권한을 준다         기록한다.         기억한다
     도와준다     무언가를 준다        발견한다          발전시킨다
     보조한다       봉사한다           북돋운다          분발시킨다
     숭배한다     영향을 미친다     의사를 전달한다      인정한다
     입증한다       조장한다         조직을 만든다       준비한다
   즐겁게 해준다     지도한다          지원한다          지켜준다
      짓는다        창조한다           치료한다          칭찬한다
      키운다        탐험한다           표출한다          해방시킨다
  
    제2항: 당신이 돕고 싶은 사람이나 조직이나 명분의 유형을 목록으로 만들었다. 이 목록
을 활용하여, 가장 당신의 관심을 끄는 개인이나 조직이나 명분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리고 
당신이 가장 이바지하고 싶은 대상을 골라서 제2항의 빈칸에 적어보자.
  
  개인, 조직, 명분
  가족문제         가족을 잃은 사람       공동체 문제         교회
  기아                   노인                대학생          동물보조
  무주택자             문맹퇴치            범죄피해자        불량주택
  불우이웃               빈민               소수민족        신체장애자
  십대임신             아동보호               안전          약물중독자
  어린이                 여성               여성 문제    위험에 빠진 젊은이
이민                     인권               장기기증        전문 사업가 
정치환경               제대 군인             청소년         치명적인 질병
풀뿌리 정치          학대받는 사람            환경
  
    제3항: 세 번째 칸은 당신이 개인이나 조직이나 명분을 위해  설정해 주고 싶은 목표나 
결과를 적어 넣는 칸이다. 이 목표는 당신이 모든 시간과  역량을 기꺼이 바칠 만큼 중요한 
가치나 이상이나 쟁점이어야 한다.
  
  목표
    건강/활력             기쁨                  기여            남을 섬기는 것
    방위                  사랑                  성장                 성취
    신앙                  안전              유능한 인물              인정
    자급자족            자기실현                자립                자부심 
    자신감                자유                  정의                 증여
  책임있는 생활       최고가 되는 것        충분한 재력           충실한 인생
    쾌락                  평등                  품위                 학식
  
  작성된 도표의 예를 몇 가지 들어보겠다.
                       제1항                 제2항                     제3항
내 인생의 목표는     지도하기         위험에 빠진 젊은이         자부심 키우기
내 인생의 목표는     교육하기         장기기증의 중요성을        남의 생명을 구하기
                                       대중에게 알리기                             
내 인생의 목표는     지원하기          신체장애자            신체장애자의 자활능력을  
                                                                     키우기           
신시아 커지의       지원하기           각계각층의 사람들       가능성을 깨닫고 실천할  
 인생목표는                                                      수 있도록 도와주기
  
  이제는 당신도 당신만의 소명을 좀더 잘 이해하게 되었으리라 믿는다.
대개의 경우, 목표가 명확하게 한정되기까지는 오랫동안 점진적인 조정과정을 거쳐야  한다. 
나도 그랬다.
  하지만 당신의 투자가 가져다줄 이익을 생각해 보라.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 그 이
유가 무엇인지를 일단 정하고 나면, 당신의 진정한 목적의식과  부합하지도 않고 의미도 별
로 없는 활동이나 직업에는 나서지 않을 테니까. 잠재적으로는 수년의 시간을 절약할 수 있
을 것이다. 인생은 무의미한 활동을 하면서 보내기에는 너무 짧다.
  일단 목표를 깨달으면, 어떤 장애물도 당신의 앞길을 가로막을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의 목
표는 너무 중요하다! 당신은 더욱 행복해지고 강해지고 건강해질 것이다. 목표는 열정에 불
을 지피고, 영혼을 치유해 주기 때문이다.
  
  "시시한 계획은 아예 세우지도 말라.
  시시한 계획은 인간의 피를 끓게 하는 마력이 없다. 거창한 계획을 세우라."
  희망을 가지고 높은 목표를 세운 다음,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라."
  대니얼 H. 버넘(시카고의 건축설계사)
  
    제2단계-목표를 일상생활 속에 융합시키라
  일단 목표를 명확하게 한정하면, 정력과 노력을 어디에 집중시켜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면 단기적인 목표를 세우고 계획을 짤 수 있다. 단기적인 목표와 계획은 필생의 목표에 
이바지하고, 좀더 의미 있는 삶을 만들어 가도록 도와준다. 현재와 미래의 단기적인  목표는 
"과연 필생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되는가?"라는 하나의 기준으로만  평가되어야 한
다.
  필생의 목표를 갖는다고 해서 직장을 그만두거나, 재산을 버리거나, 캘커타의  선교단체에 
들어가거나 할 필요는 없다. 물론 직장도 재산도 다 버리고  선교사가 되는 게 당신이 진정
으로 바라는 것이라면 그렇게 해도 좋지만,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어도 '목표에 따라' 살아
갈 수 있다. 웨인 바턴의 경우가 좋은 예다 그는 경찰관이지만, 그 직업은 공동체를  변화시
키겠다는 훨씬 원대한 목적 의식의 일부일 뿐이다. 그의 단기적인 목표와 활동은 근무 중일 
때나 비번일 때나 늘 그 목표를 이루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실행: 필생의 목표를 직업이나 본분이나  공동체를 통해 당신의 일상생활  속에 융합시킬 
수 있는 방도를 찾으라. 가령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 당신의 목표라고 하자.  당신의 
직업이 무엇이든-전업 주부든, 예술가든, 사업가든-다음 단계는 이것이다.
  
  지금까지 참여를 거절했던 위원회에 참여한다.
  매달 하루씩 남을 위해 자원봉사를 한다.
  신입사원을 가르치고 조언해 주는 선배가 된다.
  비행 청소년을 교화하는 형님이나 누나가 된다.
  중병에 걸린 아이들에게 위문 편지를 써서 '사랑의 편지'를 지원한다.
  '국제 해비태트 협회'에 동참하여 가난한 가족들을 위해 집 짓는 일을 돕는다.
  글을 모르는 사람에게 글 읽는 법을 가르친다.
  고객들에게 단순히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 '이외의'  특별 조치를 취하거나,  당신의 직무  
  내용 설명서에 적혀 있지 않은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다.
  
  이번 주에 당장 실행에 나서겠다고 다짐하라. 그러면 당신의  단기적인 목표는 곧 실현되
기 시작할 테고, 삶의 모든 측면은 필생의 목표를 반영하고 거기에 봉사하게 될 것이다.  그
렇게 되면 당신은 일찍이 가져본 적이 없는 불굴의 힘으로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게 될  것
이다.
  
  "실패는 노력을 그만두었을 때 생겨나고, 패배는 바로 내부에서 시작된다.
  마음속에서 목적 의식이 약해진 것을 빼고는 사실상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이란 없다."
  앨버트 허버드
  
      두 번째 특징 
      '열정'은 무진장한 에너지를 제공한다
    
    목표가 마음에 불을 지피면,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길이 일어난다. 불굴의 정신을  가진 
이들의 가슴속에서 활활 타오르는 그 불길은 곧 열정이다. 여러분이 앞으로 만나게 될 사람
들은 그 열정의 생생한 사례들이다.
  그들을 직접 만나보면, 그들의 눈빛에서 열정을 볼 수 있고, 그들의 음성에서 열정을 들을 
수 있고, 그들의 존재 자체에서 열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열정은 그들에게 에너지를  제
공했다. 열정은 좌절과 역경을 극복할 수 있는 추진력을 주었고, 물질적 보상을 받지 못했을 
때에도 기쁨을 안겨 주었다.
  당신은 자신의 삶에 열정을 가지고 있는가?  당신은 자신이 하는 일은 사랑하고 있는가?
당신은 자신에게 무진장한 에너지를 제공하는 목표를 추구하고 있는가? 당신은 스스로 열정
을 바칠 수 있는 활동에 종사하고 있는가? 설령 그렇지 않다  해도 절망할 필요는 없다. 다
음에 나올 이야기들을 읽은 뒤에 '실행 계획'을 보면, 당신의 열정을 확인하는 방법과 그 열
정을 당신의 일상과 활동 속에 융합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될 것이다.
  목표에 따라 살고, 타고난 재능이나  자연스러운 소망과 부합하는 꿈과 목표를  추구하면, 
거의 힘들이지 않고 불굴의 열정을 창조해  낼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이  세상의 그 무엇도 
당신을 막을 수 없다.
  
  "기꺼이 위험을 무릅쓰고, 장애물을 뛰어넘고, 앞길을 가로막는 장벽을 뚫고 나아갈 수 있  
을만큼 당신이 사랑하는  대상을 찾아야 한다.  하는 일에  대해 그런 감정을  느끼지 못한  
다면, 당신은 첫 번째 장애물이 나타났을 때 그만 주저앉게 될 것이다."
조지 루커스 (영화감독)
  
      폐허에서 일어나기
      기적이 필요했다-그래서 그는 기적을 찾아냈다
  
    프란시스코 부시오의 가장 간절한 소망은 외과의사가 되는 것이었다. 
  스물 일곱 살 때 그는 꿈을 거의 이룬 듯이 보였다. 기량이 뛰어난 덕에 멕시코시티 종합
병원 성형외과의 레지던트가 될 수 있었고, 몇 년 뒤에는  개인병원을 차릴 수도 있을 터였
다. 그런데 1985년 9월 19일, 프란시스코의 세계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리히터 지진계로 8.1의 강도를 기록한 사상 최대의 지진이 4,20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 지진이 인간의 꿈에 안겨준 피해는 지진계로는 잴 수 없을 정도였다.
  진동이 시작되었을 때 프란시스코는 병원 5층의 자기 방에 있었다. 그러나 진동이 끝났을 
때는 1층에 있었다. 수십 톤의 건물 파편이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동료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프란시스코는 오른손이 
무거운 강철 빔에 깔려 있는 것을 알았다. 오른손은 그가 수술할 때 사용하는, 의사인  그로
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손이었다. 프란시스코는 지독한 통증을 참으면서 손을 빼내려고 했지
만, 손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프란시스코는 공포에 떨기  시작했다. 피가 통하지 않으면 손
이 회저에 걸릴 테고, 그렇게 되면 손을 잡아 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프란시스코는 의식이 오락가락하는 가운데 차츰 기력을 잃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무너진 건물 밖에서는 그를 구해 내고야 말겠다는 가족들의 굳은 결의가 효
과를 거두기 시작했다. 프란시스코의 아버지와 여섯 형제는 삽과  곡괭이를 들고 수많은 자
원봉사자들과 함께 미친 듯이 폐허 더미를 파헤쳤다. 가족들은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나흘 뒤에 그들은 마침내 프란시스코가 묻혀 있는 곳에 이르렀다.
  현장에 있던 인명 구조 전문가들은,  프란시스코를 꺼내려면 손을 잘라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외과의사가 되겠다는 프란시스코의 꿈을 알고 있는 가족들은 절대로 손을 자르면 안 
된다고 고집했다. 그래서 구조대는 크레인을 동원하여 프란시스코의 손을 짓누르고 있는 강
철 빔을 들어올리기 위해 다시 세 시간 동안 구슬땀을 흘렸다. 간신히 구조된 프란시스코는 
당장 다른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그 후 몇 달 동안 멕시코는 피해 복구에 힘을 쏟았고, 프란
시스코 부시오는 자신의 꿈을 복구하는 데 힘을 쏟았다. 
  첫 번째 단계는 18시간에 걸친 대수술이었다. 의사들은 수술을 하면 프란시스코의 망가진 
손을 구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하지만 프란시스코의 희망은 날이 갈수록 희미해졌다.  손
가락 신경은 끝내 되살아나지 않았다. 3주일 뒤, 결국 의사들은 엄지손가락만 남기고 나머지
네 손가락을 모두 절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쯤 프란시스코는 이미  앞날의 난관을 뚫고 
나가기 위해 자신을 강철처럼 단련하고 있었다. 이제 그의  단기적인 목표는 오른손의 남은 
부분을 구하는 일이었다. 그후 몇 달 동안 프란시스코는 다섯 차례의 수술을 더 받았다.  그
래도 손의 기능은 회복되지 않았다. 오른손이 없으면 어떻게 환자들을 수술할 수 있겠는가? 
프란시스코는 기적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해리 벙크 박사
를 찾아냈다. 데이비스 종합병원의 현미경 수술과장인 벙크 박사는 잃어버린 손가락을 발가
락으로 대체하는 새로운 이식수술의 선구자였다. 프란시스코에게는  벙크 박사가 마지막 남
은 희망이었다. 그는 '벙크 박사가 수술을 성공적으로 끝낼 수만 있다면, 그 다음은 내가 책
임지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벙크 박사는 프란시스코의 발가락 두 개를 약손가락과 새끼손가락 자리에 이식했다. 오랫
동안 피나는 훈련을 거듭한 끝에  프란시스코는 엄지손가락과 두 개의  '손가락'으로  물건
을 쥘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단추를  채우는 따위의 간단한 일은 오른손으로 할 수  있었다. 
복잡한 수술에서 회복된 뒤, 프란시스코는  집중치료와 운동요법에 온 힘을 쏟았다.  구멍난  
판에 못을 꽂는 연습, 이름을 제대로 쓸  수 있을 때까지 종이에다 연필로 글씨  쓰는 연습
을 몇 시간이고, 반복했다. 힘들고 괴로운 시간이었지만, 벙크  박사의 말에서 용기를  얻었
다. 벙크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손은 주인이 요구하는 동작에 맞추어 자신의 기능을  회복시키는 법이라네. 손이 섬세하
고 복잡한 일을 할 필요가 있으면 손재주도 따라서 좋아지지."
  몇 달 동안 열심히 재활 훈련을 받은 뒤, 프란시스코는 멕시코시티로 돌아와 다시 병원에
서 일하게 되었다. 그런 손으로 해낼 수 있는 일은 상당히 제한되어 있었지만, 그는 맡은 일
을 훌륭히 해내면서 올림픽 선수처럼 훈련을 계속했다.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수영을  하고, 
손을 강화하는 훈련을 거듭했다. 매듭을 수천 번씩 묶었다 푸는 연습, 헝겊을 바늘로 꿰매는 
연습, 음식을 잘게 써는 연습, 새로  얻은 손가락으로 고무공을 굴리는 연습 따위를  틈나는 
대로 반복했다. 처음에는 가장 간단한 동작조차 끝내기가 어려워 좌절감에 빠지곤 했다.  하
지만 프란시스코는 모든 동작을 제대로  해낼 수 있을 때까지 끈기  있게 연습했다. 그리고 
양손을 쓰는 데 익숙해지도록 왼손도 단련했다. 
  그러던 어느 날 프란시스코는 중대한 시험을 받게 되었다.
  처음에는 상처를 소독하고 붕대를 감는  게 고작이었던 프란시스코가 사마귀를  제거하는 
따위의 간단한 처치도 해내게 되자, 이를 눈여겨본 어느 선임 레지던트가 코뼈가 부러진 남
자의 수술을 도와달라고 프란시스코에게 부탁한 것이었다. 이 수술은 정교한 솜씨가 요구되
는 까다로운 수술이었기 때문에, 프란시스코는 수술 도구를 건네주는 일이나 맡게 될 줄 알
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선임 레지던트는 환자의 갈비뼈에서 코를 재건하는 데 쓸 연골
을 때어낼 준비만 갖추어 놓고는 프란시스코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자네가 연골을 떼어내
게."
  프란시스코가 중대한 고비를 맞은 순간이었다. 프란시스코는 그것을 알았다. 이번에  성공
하면 다시 수술을 할 수 있게  되겠지만, 실패하면 그것으로 끝장이었다. 그는 용기를  내어
'두 손'으로 정성껏 연골을 떼어냈다. 다른 의사라면 10분만에 끝냈을 일을 한시간이나 걸려
서 해냈지만, 그것은 승리의 한 시간이었다. 나중에 그 일을 회고하면서 프란시스코는  이렇
게 말했다. 
  "그건 숙련된 기술이 요구되는 처치였습니다. 그 일을 해냈을  때 나는 이제 무엇이든 다
해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오늘날 프란시스코 부시오는 존경받는 성형외과 전문의로서, 티후아나에 병원을 개업하고
온갖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봉사활동에도 시간을 쪼개어,  언청
이 아이들의 구개열을 교정하고 화상을 입은 아이들의 복원수술을 맡고 있다.
  "나는 환자들에게 진심으로 공감할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이 여섯  번이나 수술을 받았기 
때문이죠. 두렵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나는 알고 있습니다."
  그를 '발로 수술하는 의사'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지만, 이 말에는  애정이 담겨  있다. 그
런 말을 들어도 프란시스코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 그는  미소와 함께 '손가락'을 내려다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녀석이 보기엔 흉할 지 몰라도  일은 아주 잘합니다.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실로 기적이예요. 물론 그것도 기적이지만, 기적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무언
가를 돌려줄 수 있다는 것도 기적이지요."
  
  "우리는 누구나 인생에서 이런저런 장애물에 부닥칩니다. 하지만  가장 뜨거운 열정을 연  
료로 이용할 수만 있다면,  가던 길을 되돌아와 다른  길로 들어서서 결국 꿈을  실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프란시스코 부시오 
  
  오직 열정만이,
  커다란 열정만이
  영혼을 
  높이 끌어올릴 수 있다.
  디드로
  
      꿈마다 그 안에는 시나리오가 하나씩 들어 있었다 
      열정이 길을 열어 주었다.
    스티븐 J. 캐널은 싹수부터 노란 아이였다. 초등학교 시절에 그는 또래 아이들이 상급반
으로 착착 올라가는 동안 아직도 글읽기를 배우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교사들은 그를 낙
제시키려 했다. 1950년대만 해도 성적이 나쁜 학생은 낙제시키는 게 보통이었다. 1학년을 마
칠 때까지 글읽기조차 익히지 못한 그는 낙제했다. 1학년이면 자신의 가치와 잠재력에 대한 
자의식이 발달하기 시작하는 민감한 나이다. 교사들은 4학년 때 그를 또 낙제시키고, 이번에
는 아예 자퇴할 것을 요구했다. 그 학교는 사립이었기 때문에, 성적이나 행실이 불량한 학생
에 대해서는 학교가 마음대로 퇴학시킬 수 있었다. 스티븐은 학습 지진아를 위한 학교에 들
어갔다. 그런데 이 학교에서는 스티븐이 글을  읽지 못하는 것을 눈이 나쁜 탓으로  돌렸다. 
스티븐의 시력은 양쪽 다 2.0이었지만, 이런  사실은 염두에도 두지 않고 날마다 한  시간씩 
스티븐에게 지루한 시력 강화 훈련을 시켰다. 코네티컷 주의  사립 고등학교에 들어간 뒤에
도 상태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그는 3학년 때 또다시 낙제했고, 또다시 자퇴 요구를 받
았다. 스티븐은 다른 학교로 전학하여  3학년을 다시 다닌 뒤, 결국 꼴찌로 간신히 고등학교
를 졸업했다.
  이런 경험은 그의 용기를 꺾어 버리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2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서른 다섯 살 때, 스티븐은 자기가 난독증(지능과는 무관한 학습장애일 뿐이다)에 걸린 
것을 알았다. 오늘날에는 난독증을 조기에 확인하여 치료할 수 있다. 하지만 스티븐이  학교
에 다니던 시절에는 난독증에 걸린 아이들이 '바보'로  낙인찍히는 경우가 많았다. 스티븐보
다 훨씬 앞서 태어난 앨버트 아인슈타인과 토머스 에디슨,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도 어
린 시절에 똑같은 수모를 당했을 게 분명하다.
  그토록 낙제와 자퇴를 거듭했으니, 스티븐은 자긍심도 완전히 잃어버리고 야심도 훨씬 줄
어들었을 거라고 생각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스티븐에게  유리하게 작용한 것도 몇 
가지는 있었다. 축구와 달리기를 잘한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를 격려해 주는  아버지
의 존재가 그랬다. 아버지도 아들과 마찬가지로 어린 시절에 학교에서 좌절을 겪었고,  나중
에야 자신도 아들과 똑같은 학습장애에 걸렸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스티븐은 학
교 성적은 형편없었지만 상상력만큼은 어느 누구보다도 풍부했다.
  그의 상상력은 정말 대단했다. 다른 학생들이 우등상을 타기 위해 기를 쓰고 공부하는 동
안, 스티븐은 창밖을 내다보며 공상에 잠기곤 했다. 스티븐은 언제나 재미난 이야기를  지어
내어 다른 아이들을 즐겁게 해주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스티븐을 '이야기꾼'이라고 불렀
다. 
스티븐은 글도 떠듬거렸고 기억력도 모자랐지만, 상상할 때는 머리가 빠르고 활기차게 돌아
갔다. 
  1961년에 스티븐은 미식축구 특기생으로 장학금을 받아  오리건 대학에 들어갔다. 하지만 
형편없는 성적 때문에 장학생 자격은  나중에 박탈당했다. 오리건 대학에서  스티븐은 랠프 
솔즈베리 교수를 만났다. 문예창작 담당인 솔즈베리 교수는 스티븐을 격려하면서, 상상을 글
로 바꾸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스티븐이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이 경험  때문이었다. 
영어 과목에서 거의 해마다 낙제 점수를 받은 학생으로서는 재미난 선택이었다.
  "나는 반에서 제일 멍청한 아이였기 때문에 백 점짜리 답안지를 쓰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어요. 나는 언제나 스스로 즐기기 위해 글을 썼고, 그러면 글쓰기가 한결 쉬
워졌습니다. 중압감을 없애주었으니까요."
  학업을 마친 뒤 스티븐은 아버지 회사(실내 디자인과 실내 장식)에 들어갔다. 저녁에 집으
로 돌아오면 타자기 앞에 앉아서 소설을 썼다. 퇴근하고 한  시간씩 쓰던 것이 나중에는 두 
시간으로 늘어났다. 오래지 않아서 스티븐은 매일 밤 적어도  네 시간씩 단편소설이나 텔레
비전 드라마나 영화 줄거리를 미롯하여 강렬한 상상력에서 나온 다양한 소재를 타자로 치면
서 보내게 되었다. 
  "속으로는 언제나 내가 주변 사람들보다 똑똑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겉으로는 
늘 '알 게 뭐냐?'는 태도를 취했지요. 요즘은 거기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으려고 합니다. 스
티븐은 정말로 좋아하는 천직을 찾았다. 열정이  있는 곳에는  의심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그는 1966년에 <아담 12>라는 텔레비전  연속극 대본을 팔았고, 이를  계기로 작가 생활을 
시작했다. 첫 대본을 판 이후 그는 텔레비전 역사상 어느 누구보다도 많은 텔레비전용 영화
를 혼자서 또는 공동으로 창작했다.  <록퍼드 파일> <바레타> <A팀>  <사냥꾼> <역조> 
<건방진 녀석> <카미시> 같은 작품은 전국 방송망을 통해 큰 인기를 얻었다. 스티븐은 또
한 황금시간대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가장 많이 만드는 독립  제작자가 되었고, 에미 상의 
단골 수상자였다. 마침내 그는 독자적인 스튜디오를 세워, 지금까지 10억 달러가 넘는  매출
액을 기록했다. 지금은 세 번째 소설을 쓰는 중이고, 방영중이거나 제작 중에 있는 텔레비전 
프로그램도 여러 편에 이른다. 
  스티븐은 데뷔 초기에 그를 "뛰어난 재능을 가진... 유망한 천재"라고 평한 텔레비전 평론
기사를 읽었을 때의 놀라움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스티븐은  자기가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다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해심  많고 용기를 북돋워 주는 부모님
은 둔 것은 행운이었다. 부모님은 그가 자신의 열정을 추구하여 꿈을 실현하도록 격려를 아
끼지 않았다. 스티븐은 아버지를 최고의  친구이자 스승이라고 부른다. 그의 사무실  벽에는 
아버지의 사진이 걸려 있다.
  스티븐 J. 캐널은 난독증이라는 장애를 극복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장애를 오히려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했다. 그가 창조한 등장인물 가운데 가장 매력적인  인물은 그 자신과 마찬가
지로 기존 체제에 순응하지 못하는 아웃사이더들이다. 그는 사업에서 어려움에 부닥칠 때마
다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복원력과 추진력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은 어릴 때  겪은 
좌절 덕분이라고 믿고 있다. 특히나 어린 시절에 피난처가 되어준 상상과 환상의 세계는 그
가 텔레비전 극작가이자 소설가로서  수많은 착상을 얻을  수 있는 풍요로운  곳이 되었다.  
 
그 풍부한 착상과 흥미 있는 이야기를 세상과 함께 나누고  싶은, 바꿔 말하면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일에 대한 열정은 낙제생을 방송계에서 가장 성공한 인물로 바꾸어 놓았다.
  
  "나는 내가 하고픈 일을 했고, 그것만큼 내가 성공하는 데 큰 도움을 준 것은 없습니다.
물론 아내와 가족은 빼고요." 스티븐 J. 캐널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선택하라.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즐기지 않으면,
  성공하는 데 필요한 시간과 노력과 열정을
  그 일에 쏟기가 어려울 것이다. 흥미있고 즐거운
  직업을 선택하면, 그 직업에 필요한 일은 뭐든지
  다 할 것이다. 시간과 노력을 아낌없이 바칠
  테고, 성공하기 위해 희생하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을 것이다.
  캐시 휘트워스(프로골퍼)
  
      그녀는 신발 산업을 탈바꿈시켰다
      그리고는 거기에 영혼을 더했다  
    못할 이유가 뭐람? 에어로빅을 마치고  나올 때마다 셰리 포가  스스로 던진 질문이다. 
운동을 하고 나면 척추와 발이 아팠다.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이유는 좋지 않은  신발 
때문이었다. 셰리가 조사해 보니, 시장에 나와 있는 여성용 운동화는 남성용 운동화를  크기
만 줄인 것이었다. 여자의 발은 그 형태가 남자와 다른데도 말이다. 때마침 셰리와 남편  비
리텔라는 창업을 염두에 두고 적당한  업종을 찾고 있었다. 그래서  셰리는 생각했다. 그래, 
못할 건 또 뭐야? 운동화 회사를 차려서 여성의 발에 맞게 특별히 디자인한 운동화, 그야말
로 '발에 딱 맞는' 신발을 만들면 돼. 못할 이유는 없어.
  그러나 사람들은 '못할 이유'를 조목조목 말해  주었다. 우선 비리텔라 부부는 자본도 없
고, 신발 산업에 종사해 본 경험도 없었다.  전문가들의 충고가  이랬다. '나이키'와  '리복'
같은 대기업이 운동화 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판에 그들과 맞서  경쟁하려 들다니,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정신나간 짓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셰리와 마틴은 대학 졸업장도 없었다. 셰리는  
대학 1학년 때 성폭행을 당하고 학교를 그만두었다. 이 사건은 그녀에게 정신적. 신체적으로 
커다란 후유증을 남겼다. 여러 해 동안 그녀는 포식증과 간염을 비롯하여, 강간에서  비롯된 
갖가지 건강 문제에 시달렸다.  셰리는 건강을 되찾는 데에만 열중한  끝에 힘든 치료 과정
을 끝마칠 수 있었다. 가장 큰 장애를 이겨낸 셰리는 이제  완벽한 여성용 운동화를 만드는 
일에도 당당히 도전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우선 그녀는 발로 뛰어다니며 사람들을 만났다. 몇 달 동안 대학원생을 가장하여 수백 명
의 고객과 신발가게 점원을 면담했다. 이 같은 시장조사 결과, 그녀는 여성용 운동화가 절실
히 필요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사업 밑천을 마련하기 위해 셰리와 남편은 그리  크지도 않은 집을 세 번째로 저당 잡히
고, 친구와 가족은 물론 그들의 사업계획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돈을 빌렸다. 그래도 밑천이 딸리자 그들은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벤처 투자가들을 찾아다
녔다. 셰리는 그때 일을 이렇게 회고했다.
  "어디서나 반응은 똑같았어요. 신발 산업에 경험도 없으면서, 그토록 경쟁이  치열한 시장
에 뛰어들어 새로운 브랜드를 창출한다는 건 미친  짓이라는 거였죠. 차라리 아이디어를  '
나이키'나 '리복'에 팔고, 우리가 직접 나서서  그 일을 하겠다는 생각을 깨끗이  잊어버리
라는 거예요.
  우리가 '뤼케'를 시작한 것은 수요가  많은데도 그 요구에 관심을  돌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예요. 언젠가는 에어로빅 강사들이 우리 운동화를 신고, 매장에  우
리 운동화가 진열되고, 스포츠용품 박람회에서 '나이키'와 '리복' 바로  옆에 우리 전시장을 
갖게 되는 날이 오리라. 우리는 그날을   꿈꾸었죠. 그걸 상상하면 너무나  기분이  좋아서, 
아무리 부정적인 말을 들어도 아랑곳하지 않았어요."
  그래도 일은 쉽지 않았다. 꿈을 실현하려면 우선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벤처  투자가들
은 창업한 회사의 주식을 일반에  공개하는 것이 자금을 조달하는  최선책이라고 조언했다. 
몇 달 뒤에 셰리와 마틴은  '여성이 여성을 위해 만든  신발'이라는 아이디어가 기발하다고 
여기는 투자 은행가를 찾아냈다. 그 은행가는  25만 달러를 대출해 주고, 1988년 봄에  주식
을 공개하는 데 동의한다는 의향서를 주었다. 셰리와 마틴의 사업은  마침내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타이밍이 가장 중요하다고 흔히들 말하지만, 시간은 셰리와 마틴의 편이 아닌 것 같
았다. 주식 공개를 바로 앞두고 주식 시장이 무너진 것이었다. 셰리는 그 때를 이렇게  회고
했다.
  "정말로 가슴이 철렁 내려앉더군요. 주가가 폭락한 직후인데  어떻게 신주 공모에 성공하
리라고 생각할 수 있겠어요?"
  그들은 돈을 갚으라는 은행가의 전화를 기다렸다. 하지만 이튿날 전화를 걸어온 은행가는 
아직도 '뤼케'에 엄청난 관심이 쏠려 있으니까 신주 공모를 밀어붙이라고 말했다.
  '뤼케'사는 다섯 달 뒤에 주식을  공개했다. '뤼케'가 아직 운동화  한 짝도  시장에 내놓
기 전에 주식 시장에서 400만 달러가 조달되었다. 앞날은 실로 밝아 보였다. 셰리와  마틴은  
꺼지지 않는 열정과 노력으로 커다란 장애물을 이겨낼 수 있었다.   앞으로도 몇 달 동안은 
그런 헌신적인 노력이 필요할 터였다.
  특별 주문에 따라 최초로 제작된 운동화 한 켤레가  셰리에게 배달되었다. 그것을 신어본 
셰리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그 신발은 그녀가 디자인한 것과는 전혀 달랐다.  공장에서 
실수로 잘못된 형틀을 사용하여, 남성용 신발의 축소판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들의  사업
은 초장부터 뒤틀려 버렸다. 수천 켤레의 운동화가 이미 전국 판매점으로 보내진 뒤였다.
  셰리는 재빨리 움직였다. 주요 판매점과 바이어들에게 연락하여 문제를 해명했다.  판매점
들은 신발을 반품했고, 셰리는 원래의 디자인 명세서에 따라  신발을 다시 만들게 했다. '뤼
케'는 영업을 다시 시작했지만, 판매  시즌을 놓쳐 버린 후였다.  시간 낭비는 큰 장애였다. 
셰리는 신제품에 관한 소문을 퍼뜨리는  편이 낫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도  하루 빨리 하
는 
편이 나았다. 자금이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셰리는 걸어 다니는 광고판이 될 수 있는  여
성들인 에어로빅 강사들을 대상으로 한 홍보 전략을  짰다. 그녀는 에어로빅 강사들에게  '
뤼케'운동화를 싼값에 제공하고, 시험 삼아 한번 신어보라고  제의했다.  에어로빅 강사들은 
그 
운동화를 신자마자 당장 차이를 느꼈다.  그들은 '뤼케'운동화가 좋다는 소문을   퍼뜨렸고, 
풀뿌리 캠페인이 시작되었다.
  셰리는 이제 팔을 좀더 멀리 뻗을 때가  왔다고 판단했다. 이번에도 '못할 이유가 뭐야?'
하는 생각이 들었다. 1987년에만 해도 운동화 업계에는 여성 경영자가 거의 없었다.  셰리는 
자신의 희소성을 적극 활용하고 싶었다. '뤼케'는 제품을 전국적으로 광고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셰리는 다른 광고 전략을 궁리해 냈다. 셰리는 자신의 성공담을 언론매체에  제공했
다. 값이 싼 홍보대행사와 계약을 맺고, 주요한  신문 잡지  편집장들에게 운동화 한 켤레와  
'뤼케'스토리를 담은 편지를  보냈다. 이 전략은  효과를 거두었다. 1년도  지나기 전에 <여
성 기업가>와 <일하는 여성>이 셰리를  특집기사로 다루었고, 스포츠용품업계를  대상으로  
하는 간행물에도 수십 차례나 그녀의 기사가 실렸다.
  오프라 윈프리(미국의 저명한 방송인)도 셰리의 소포를 받은  유명한 여성 가운데 하나였
다. 셰리는 오프라와 그녀의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방송사 직원들에게 몇 달에 한 번씩 신발 
상자와 티셔츠를 보냈다. 그러면 그들의 관심을 끌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루
는 전화벨이 울리더니, 오프라의 프로듀서가 그녀의 토크쇼에 출연해 달라고 요청했다. 셰리
는 그때를 회고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너무 놀라서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고, 숨도 거의 쉴 수 없었답니다."
  프로듀서의 말에 따르면 셰리는 원래 오프라의 초대손님 명단에 들어있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제작회의에서 다음 번 토크쇼에 출연시킬 여성 기업가를  생각하고 있을 때, 오프라
가 방 한구석에 쌓여 있는  '뤼케'운동화 상자를 알아보고는, "아,  생각났다. 뤼케 여사장은 
어때요?" 하고 제의했다는 것이다.
  텔레비전 출연은 셰리가 개발한 운동화를 전국의  수백 만 여성 시청자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기회였다. 몇 주만에 '뤼케' 운동화는 다 팔려 나갔고, 재고도 바닥이 나버렸다. 그런데 
뜻밖의 행운이 되었어야 마땅한 일이 공급 부족으로 오히려  큰 위기가 되었다. '뤼케'가 이 
실패를 딛고 일어서기까지는 석 달이 걸렸다. 그 동안 셰리는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회사를 
개편했다. 
  몇 년 뒤에 또다시 예기치 못한 행운이 찾아왔다.  영국의 다이애나 세자빈이 포식증과의 
싸움을 고백했다는 기사를 읽고 연민을 느낀 셰리는 충동적으로 세자빈에게 편지를 써서 자
신의 경험을 털어놓았다. 그것은 신발 제조업자로서 쓴 편지가 아니라, 포식증과의 싸움에서 
살아남은 동지로서 순수한 동정과 공감을 표현한 편지였다.  셰리는 영국의 '뤼케' 도매업자
에게 부탁해서 다이애나 세자빈의 트레이너 이름을  알아냈다. 소포는 트레이너에게 보내졌
고, 트레이너는 편지와 운동화를 세자빈에게 전달하겠다고 약속했다. 셰리의 편지는  뜻하지 
않은 보상을 가져다주었다. 그후 석  달 동안 셰리가 본 다이애나의  사진에서 세자빈은 늘 
'뤼케'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전세계 여성들도 다이애나가 신은 '뤼케'운동화를 보고 그  신발을 사기 시작했다. 매출은 
계속 늘어났다 1994년에 '뤼케'의 매상은 사상 최고인 1,500만  달러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
런 성공에도 불구하고 셰리는 회사의 진정한 정신이 빠져 있다고 느꼈다.
  "우리는 여성에게만 제품을 파는 회사예요. 나는 회사  차원에서 여성 복지에 이바지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죠. 내 회사가 이익을 내게 되면 이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싶다는 게 내가 
늘 품고 있던 꿈이었어요."
  여성들이 신체 손상을 입는 주요 원인이 가정 폭력이라는 것을 알고, 셰리는 별도의 비영
리 재단인 '자존심 회복 재단 ROSE'를 설립했다.  이 재단은 매맞는 여성들에게 쉼터와 자
활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성폭력  긴급상담소를 운영하고 있다.  또한 '뤼케'운동화에는 
안전 수칙과 공격당했을 경우의 행동요령 등 여성에게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는 꼬리표가 달
려 있다.
  셰리 포는 스포츠 용품 업계에 여성 시장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었다. 그 수 여성용 운동화
는 연간 50억 달러의 매출을 올리는 산업으로 성장했다.
'뤼케'는 이제 '글로벌 스포트'와 합병하여, 여성의 발에  맞게 특별히  디자인한 신발을 팔
고 있다. '뤼케'창업자인 셰리는  여전히 '뤼케' 대변인으로  활동하면서, 지금은  아동용품 
개발에 또다시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셰리 포의 열정과 결단력 덕분에 여성들은 이제 자신의 요구에 들어맞는 신발을 신고 운
동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신발이 많이 팔릴수록 수만  명의 
학대받는 여성들이 더욱 안전해지고 자신감을 갖게 된다는 점이다.
  그래, 못할 이유가 뭐야?
  
  "우리가 이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운동화 시장에 그런 신발에 대한 수요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있었고, 그 일을 해내기 위해
  전력투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우리의 열의는 전염성을 갖고 있어서, 
  많은 분들이 우리를 도와주고 싶어했답니다."  셰리 포
  
  지상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는 인간의 불타는 영혼이다. 페르디낭 포슈(프랑스 육군 원수)  

      심장의 리듬에 맞춰 춤추기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한 전문가는 
      더 큰 무대를 찾는다
    그것은 어쩌면 사무실에서 째깍거리는 시계소리였을까. 아니면 그녀의 머릿속에서 끊임
없이 들려 오는 성가신 목소리였는 지도 모른다. 몇 해 동안 아무리 애를 써도 그 목소리를 
가라앉힐 수는 없었다. 
  그게 무엇이든, 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로빈 앨런의 인생에 뛰어들었다. 그날 로빈은 정해
진 퇴근 시간에 사무실을 나가서  택시를 잡아타고 춤을 추러 갈  작정이었다. 이 세상에서 
그녀가 춤만큼 좋아하는 일은 없었다.
  "나는 속으로 다짐했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시간에 택시를 타고 가서 무용 교습을 다
시 받겠다고. 그래서 택시를 타긴 했지만, 여느 때처럼 늦게까지 일하지 않고 제시간에 퇴근
해 버린 게 미안했어요. 심한 죄책감을 느꼈죠. 하지만 다음 번에는 좀 쉬웠어요. 그리고 그
후로는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쉬워졌죠." 
  로빈은 캐나다 밴쿠버에 있는 금융기관에서  고위 간부로 일하고 있었다.  사랑스러운 두 
아이와 아름다운 집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가 빠져 있었다. 로빈은 늘 허전함을 느꼈
다. 열 여섯 살 때 처음으로 무용 교습을 받았는데, 그 때 그녀는 무용가가 되고  싶다는 열
망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이따금 춤을 배우고 반직업적으로 공연도 했지만, 성공하는 데  필
요한 재능은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었다. 춤보다는 경제학 공부가 훨씬 쉬웠다. 그녀는  경
제학 석사학위를 따고 경제학자로 출세했다.
  "부모님은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라고, 남보다 뛰어나게  할 수 없는 일은 하지 말라
고 가르치셨죠. 나는 춤을 무척 좋아했어요. 하지만 위대한 무용가가 될 재능은 없었기 때문
에, 무용을 계속해야 할 지 말지를 놓고 마음속에서는 갈등이 끊임없이 벌어졌답니다."
  부모님 말씀도 있었지만, 사회가 자기한테 기대하는 것도 무용가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
다. 로빈은 결국 열정을 가슴에 묻고 가족과 직업에 자신을 바쳤다. 정식 무용극을 제작하여 
공연하고 싶다는 꿈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끊임없이 그런 공상에 잠기면서도 자기한테는 그 
일을 성공적으로 해낼 만한 시간도, 능력도, 창의력도, 돈도 없다고 자신을 타일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사무실에 앉아 있다가 섬뜩한 환상을  보았다. 그녀는 서른 두 살
이었지만, 환상 속의 그녀는 더 이상 무대에서 춤을 출 수 없는 노파, 꿈을 이루지  못한 인
생을 돌이켜 보며 후회하는 노파의 모습이었다. 그 순간 그녀는 결심했다. 사람들이  비웃어
도 좋다. 텅 빈 극장에서 혼자 춤을 추는 한이 있더라도 무용극을 만들고야 말겠다.  그녀가 
굳은 결심으로 택시를 타고 다시 무용 교습을 받으러 간 것은 바로 그날이었다.
  열정과 헌신은 곧잘 행운을 불러온다. 로빈이 결심한 지 며칠 뒤에 친구가 신문기사를 가
져와 보여주었는데, 로스앤젤레스에서 안무가 겸 무용가로  활동하고 있는 앤드러비 메이스
가 가까운 화이트록에서 교습회를 열  계획이라는 내용이 실려 있었다.  로빈은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어 메이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시의 소감을 로빈은 이렇게 말했다.
  "그건 꼭 마술 같았어요. 우리는 만났고,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앤드러비와 함께 내 꿈
에 몰두하고 있더군요."  
  로빈과 앤드러비는 틈틈이 <유리잔을 깨지 마라>를 썼다.  이것은 무대와 실생활에서 자
신이 맡은 역할을 감내하는 한 여인을  다룬 뮤지컬 코미디였다. 그들은 함께 안무를  했고, 
공연에서 주역을 맡았고, 나머지 역할을 맡을 배우와 무용수를 모았다. 앤드러비야 말로  로
빈이 필요로 하는 스승이자 파트너였다.
  "앤드러비는 어떻게 하면 내 장점에 조명을 맞추어 나를 멋지게 보일 수 있는지, 그 방법
을 알고 있었어요. 유능한 사진사가  조명이나 카메라 앵글을 이용하여  피사체를 아름답게 
표출하는 것처럼 말이예요. 앤드러비는 무용수였기 때문에 내가 무용에서  할 수 있는 동작
과 할 수 없는 동작을 알고 있었어요."
  앤드러비는 로빈의 장점을 드러내는  법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로빈이 무대에 서려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다. 일이 원하는 만큼 순조롭지 못하고 고통을 줄 때도 끈기를 발휘하
여 작품에 몰두해야 했다. 로빈은 연습에 연습을 거듭한 끝에 결국 실력을 비약적으로 향상
시켰고, 만삭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로빈은 자신의 꿈을 추구하기 위해 나머지 생활을 모두 희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
다. 이것이 로빈에게는 가장 큰 놀라움이었다.
  "나는 많은 노력이 필요한 일을  하려면 가정에도 소홀해지고 직장에서 출세하는  데에도 
지장을 받을 거라고 늘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실제로는 직장에서도 어느  때보다 생산성이 
높아져서 전보다 훨씬 좋은 성과를 얻었죠. 자신감과 자의식을  되찾은 것이 일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던 거예요. 아이들이 곁에 있을 때도 전보다 훨씬 즐겁고 자연스럽게 행동할 수 있
었죠. 아이들도 그 일을 무척 좋아했답니다.  우리 식구가 함께 보내는 시간도 전보다  훨씬 
많아졌어요."
  앤드러비를 처음 만난 지 7개월 뒤, <유리잔을  깨지 마라>가 밴쿠버에서 성공적으로 막
을 올렸다. 반응이 아주 좋았기 때문에 로빈과 앤드러비는  무대를 화이트록으로 옮겨서 연
장 공연을 했다.
  "관객들은 작품 속에서 드들 자신의  모습을 보았던 거예요. 끝내  소망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자아발견이라는 귀중한 보물을 찾을 기회를  놓치는 사람도 너무 많고
요. 많은 사람들이 현재의 자신과  꿈꾸는 자신 사이에서 춤을 추다가  그만 기회를 놓치고 
말죠."
  로빈은 직장과 무대를 오가며 두 가지 활동을 계속했다. 얼마 후에는 캐나다 최대의 보험
회사인 '브리티시 콜럼비아'에서 최고 경영자로 일하게 되었다.  지금은 독립하여 경영 컨설
턴트 겸 강연자로 바쁘게 지내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틈을 내어 네 편의 무
용극을 제작했다. 그녀가 안무하고 직접 출연까지 한 이 네  편의 무용극은 많은 관객을 끌
어 모았고, 평론가들의 격찬을 받았다. 로빈 앨런은 마음속의 음악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자
신의 인생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 자신의 열정에 따라 자기가 가장 원하는 것을 추구하기를 두려워하죠.
  그러려면 위험을 무릅써야 하고, 자칫하면 실패를 감수해야 하니까요.
  하지만 진심으로 자신의 열정을 추구하는 것은 그 자체가 성공이예요.
  가장 큰 실패는 한 번도 진지하게 시도해 보지도 않고 인생을 마치는 거죠."
  로빈 앨런
  
  싫어하는 일을 하여
  성공하기보다는
  차라리 좋아하는 일을 하다가 
  실패하는 게 낫다.
  조지 번스
  
      육성고백 
      열정은 장벽을 돌파하는 열쇠이다.
  
    분명히 말하건대, 여태까지 내가 이룩한 것은 주로 열정 덕분이었다. 나는 무언가에 사
로잡혀 정신없이 빠져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내  경험에 따르면 열정은 전염
성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이런 태도는 내가 연예계에서 성공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남을 돕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다. 남을 돕는  일은 개인적인 출세나 직업상의 
성공보다 훨씬 큰 보람을 가져다 줄 때가  많았다. 내가 1986년에 조직한 '미국을 가로지르
는 인간 띠'캠페인도 그런 비영리 사업 가운데  하나였다. 그때 나에게 영감을 준 것은 '위 
아 더 월드'캠페인이었다. 기아에 허덕이는 아프리카 난민을  돕기 위해 수십 명의 일류 음
악가와 가수들이 모여서 '위 아 더 월드'라는 노래를 녹음하여 6천만 달러를 모금한 것이다. 
나는 '위 아 더 월드' 라는 노래를  녹음하여 6천만 달러를 모금한 것이다. 나는 '위  아 더 
월드'에 주최자로 참여하면서 이런 생각을 떠올렸다. 1986년  현충일(5월 마지막  월요일)에 
미국을 동서로 횡단하는 인간 띠를 만들어, 기아와 무주택의 문제 해결에 다 함께 동참하자
는 메시지를 전달하면 어떨까. 정신나간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나는 그때 수백만 명이  손에  
손을 잡고 17개 주를 가로질러 6,5000km가 넘는 인간   띠를 이루고 있는 광경을 상상했던 
것이다.
  이 착상을 처음 입 밖에 냈을 때 사람들은 참  기발한 생각이라고 말했지만, 여기에 동참
하는 사람들을 나르고 음식을 공급하는 따위의 현실적 문제 때문에 실행은 불가능하지 않겠
느냐는 반응을 보였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정확히 어떤 식으로 그 일을 해낼지는 알지 못
했지만, 내 생각에 들뜬 나머지 분명 성공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나는 '코카콜라'의 
마케팅 담당 부사장인 서지오 자이먼을 만나, '인간 띠' 사업의 실현을  위해 500만 달러를 
지원해 달라고 설득했다. 그 밑천을 가지고 행사에 따른 준비와 홍보를 시작했는데, 하지만 
얼마 안 가서 우리가 얼마나 어려운 일에 도전했는가를 깨닫게 되었다. 그야말로 죽을 맛이
었다. 지역 공동체마다 집회 허가를 받기 위해 끝없는 관료주의를 뚫고 나가야 했고, 보증금
만도 300만 달러나 들었다. 언론은 처음부터 내 생각을 무턱대고 비난하는 데 열을  올렸다. 
'미국을 가로지르는 인간 띠'는 코미디 프로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나는 더 이상 비행기의 
창가 좌석에 앉지 않았다. 창가에 앉아 끝없이 펼쳐진  땅을 내려다보면서 저곳을 어떻게든 
사람들로 가득 채워야 한다고 생각하면 막막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날마다 서너 개 도시를 돌아다니며 연설과 텔레비전 인터뷰를 하고, 자원봉사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려고 애썼다. 하지만 5월 25일 행사가 두  달도 채 남지 않았는데 참가자
는 백만 명을 밑돌았다. 행사에 필요한 인원의 20%도 안 되는 숫자였다. 그래서  우리는 미
국 전역을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행사를 홍보하고 동참을 호소했다.
  마침내 1986년 현충일이 다가왔다. 민족과 종파와 피부색이  가지각색인 550만 명의 남녀
노소가 손에 손을 잡기 위해  모여들었다. '미국을 가로지르는 인간 띠'  는 3,400만 달러를 
모금했을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 참가하는 단일 행사로는 사상 최대 규모의 행사가  되었다. 
직접 참가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전세계에서 수억  명이 희망과 인류애의 상징인 이  행사를 
지켜보았던 것이다.
  생전에 뭔가 대단한 일을 해내고 싶으면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  맨 먼저 감당해야 할 모
험은 자기가 원하는 일,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깊이 깨닫고 거기에 대해 열
정을 갖는 것이다. 여기에도 용기와 의지가 필요하다. 당신의 꿈이 한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
이든 수백만 명을 감동시키는 것이든, 열정은 장벽을 돌파하는 열쇠이다.
  
  켄 크레이건은 할리우드에서 가장 성공하고 가장  존경받는 매니저이자 제작자로서, 케니 
로저스와 트래비스 트릿, 트리샤 이어우드,  라이어넬 리치 같은 유명인사를 고객으로  두고 
있다.
  
      육성 고백
      마음이 가는 대로 따라가라
    나는 일찍부터 결심했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나는 음악가가 되고 싶다고. 이  열정만은 
결코 포기하지 않겠노라고. 나는 스코틀랜드 북동부의 시골에서 태어나 자랐는데,  피아노를 
처음 배운 게 여덟 살 때였다. 나이가 들수록 음악에 대한 열정은 커졌지만, 차츰 청력을 잃
기 시작했다. 열두 살 때 나는 차츰 청력을 잃기 시작했다. 열두 살 때 나는 완전히 귀머거
리가 되었다. 하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타악기 독주자는 한 사람도 없을 때였는데, 나는 그것을 목표로 삼았다. 나는 
음악을 연주하기 위해, 내 몸과  상상력을 통해 느껴지는 진동으로 음의 고저를 분간할 수 
있다. 내 소리 세계는 내가 가진 감각을 거의 다 활용함으로써 존재한다.
  나는 귀머거리 음악가가 아니라 정상인과 똑같은  음악가로서 평가받기로 작정하고, 런던
의 유명한 왕립 음악원에 입학원서를  냈다. 그때까지만 해도 청각장애인이 입학원서를 낸 
예가 없었기 때문에 일부 선생님은  나를 받아들이는데 반대했다. 하지만 나는 실기시험에 
통과하여 당당히 입학 허가를 받았고, 최우등생으로 음악원을 졸업했다.
  그후 나는 사실상 최초의 전문 타악기 독주자로 명성을 얻었다. 타악기 독주자를 위해 특
별히 만들어진 작품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내가 직접 수많은 작품을 작곡하고 편곡했다.
  병원에서는 내가 청력을 완전히 잃었다고 진단했지만, 귀가 먹었다고  해서 내 열망을 실
현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일찍부터 그렇게 결심했고, 그랬기 때문에 벌써 10년이  넘
도록 독주자로 활동하고 있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거기에 구애받지 말라. 당신 자신의 열정
에 따르도록 하라. 마음이 가는 대로 따라가라. 그러면 당신이 원하는 곳으로 가게 될  것이
다.
  
  이블린 글레니는 최초의 여성 타악기 독주자로 명성을 얻고 있다. 그녀는 해마다 120회의  
  연주회를 갖고 있으며, 지금까지 9장의 독집 앨범을 발표했다.
  
    실행계획: 열정을 북돋우기
  열정은 영양제나 운동뿐 아니라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어떤 건강법보다 풍부하고 확실한 
에너지를 공급해 준다. 자기가 하는 일에 열정을 가지면, 목적지만이 아니라 거기에  이르는 
과정 전체가 중요해진다. 목적지까지 가는 여행은 처음부터 끝까지 가슴 설레는 체험이다.
  자기가 하는 일을 좋아하면 어떤 장애도 이겨낼 수 있는  활력이 솟아난다.  자기가 좋아
하는 일을 하는 데에는 세 가지 직접적인 이익이 있다.
  
  1. 동기가 부여된다.
  열정은 추진력의 연료다. 활력과 낙천적인 기분이 샘물처럼 솟아난다. 
  열정이 없으면, 불굴의 인간이 되는 데 필요한 활력과 흥미를 유지하기가 불가능하다.
사실 열정이 없으면, 삶은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는  평범하고 시시한 생존 수준으로 떨어
지고 만다. 
  선택은 당신의 몫이다. 뚜렷한 목표를  세우고 열정에 불을 지피는  활동을 추구함으로써 
삶의 활력소를 얻는 길을 택할 수도 있다. 아니면 자기가  경험하는 것들을 대부분 놓친 채 
그저 참고 견디는 상태로 힘든 인생 길을 터벅터벅 걸어갈  수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삶을 
구경만 할 뿐, 삶의 즐거움을 경험하지 못한다. 인생이 교향곡이라면, 그들은 단순히 멜로디
만 들을 뿐, 그 작품에 깃들여 있는 정신은  알아차리지 못한다. 인생이 진귀한 보석이라면, 
그들은 그저 색깔만 볼 뿐,  정교한 세공에는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다. 인생이 소설이라면, 
그들은 줄거리만 이해할 뿐, 미묘한 이미지와 상징은 보지 못한다.
  열정이 없는 삶은 인생의 경이와 드라마와 흥분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하는 삶이다. 열정
을 가지고 살면, 당신의 감각을 충분히 경험할 수 있다.
  열정은 어떤 장애물도 뚫고 나아가 꿈을 실현할 수 있게 해주는 활력이다.
  
  "열정을 가지면, 구태여 노력하지 않아도  정신을 집중할 수 있고, 단호하게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당신의 몸과 마음은 일치 단결하여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
  마샤 위더 (<꿈을 실현하기>의 저자)
  
  2. 일이 놀이처럼 느껴진다.
  열정을 가진 이들은 '일' 이라는 단어를 쓰는 데 능숙하지 못하다. 열정을 가진 이들은 자
기가 가장 즐기는 일, 개인적으로 보람있는 일에 종사하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한정된 시간
을 가지고 태어난다. 지금 이 순간 무엇을 하고  있든(일하든, 놀든, 불평하든, 감사하든) 우
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끊임없이 소비된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보다 더 귀중한 것은 없다. 열
정을 추구하는 것은 단순히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니다. 목적지까지 가는 
여행 자체도 결과에 못지않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인생의 종착역에 이르러 '나는 내 인생을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성공의 궁극적인 정의다.
  
  3. 열정과 열광은 남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
  열정은 남을 자석처럼 끌어당긴다. 때로는 열정에 이끌려 당신의 목적에 동참한 사람들이 
자기가 왜 그랬는지조차 분명히 알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들은 이성적으로는 '싫다'고 하
지만, 본능적으로 '좋다'고 말한다. 열정만큼 잘 팔리는 상품도 없다는 말이 있다. 당신이 조
금 전에 읽은 사례들이 그 말의 진실성을 입증해 준다.
  셰리 포는 경쟁이 치열한 신발 산업에  종사해 본  경험도 없었지만, '여성이 여성을  위
해 만든 신발'이라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투자가를 설득하여 남편과 함께  창업한 회사의 주
식을 일반에 공개할 수 있었다. 켄 크레이건은 개인적으로 참여하는 단일 행사로는 사상 최
대 규모의 행사를 주최하고, 6,500km에 이르는 인간 띠를 조직하는 데 동참하도록 550만 명
의 남녀노소를 설득하여 무주택자를 위한 기금 3,400만 달러를 모금했다. 셰리와 켄은  어떻
게  목표를 이루었는가? 그들의 열정이 사람들에게 그들의 목적을 지원해 주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사람들은 셰리와 켄의 열정에 저항하지 못했다.
  화장품 업계의 거물인 메리 케이 애시는 이렇게 말했다.
  "열광을 불러일으키는 평범한 생각이 열광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위대한  생각보다 가치
가 있다."
  당신의 열정은 유용한 자산이다. 그  자산을 이용하여 남에게 열광을  불러일으키고 남의 
지원을 얻으라. 사람들은 결국 열정적인 헌신에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다.
  
  "자신이 먼저 열광하지 못하면, 남을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클래런스 데이
  
    제1단계-열정을 확인하라
  당신의 삶에 열정을 주입하려면 먼저 목표로 되돌아가야 한다.  목표에 이르는 데에는 수
많은 길이 존재할 수 있다. 당신만의 독특한 개성과 소망, 장점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면  당
신에게 가장 알맞은 길을 선택할 수 있다. 다음 과제는 그 길을 찾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실행1: 당신이 무엇을 좋아하는가를 먼저 결정하라. 켄  크레이건은 <인생은 접촉이 허
용되는 스포츠다>에서 그것을 "개인의 대차대조표"라고 부르고 있다. 바버라 윈터는 <직업
도 없이 생계를 꾸리는 법>에서 그것을 "당신의 자산을 발견하기"라고 부르고 있다. <당신
만의 무지개>의 공동저자인 홉슨과 스캘리는 그것을 "개인의 특성 열람표"라고 부른다.
이것들은 모두 다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결정하는 데  효과적인 도구다. 그것을 뭐라고 부
르든, 중요한 점은 당신의 현재 위치와 하고 싶은 일, 그리고 당신이 목록에 적은 자산을 바
탕으로 하여 현실적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다시 연필과 종이를  꺼내, 당신이 '좋아하는 일'
과 '싫어하는 일', 당신의 '장점' 과  '개선할 점'을 적어보라. 특히 당신이   좋아하는 일과 
장점에 주목하라. 바로 거기에 당신이 인생에서 가장 열정을 쏟을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열쇠가 들어 있다. 
  내가 이 책을 쓰기 전에 작성해 본 목록을 보기로 제시하겠다.
    
      좋아하는 일                                                         싫어하는 일
         배우기              부정적 사고를 가진/불평하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질문하기                                                             잡담하기  
  어렵고 다양한 측면을 가진                                     많은 직원을 관리하기
프로젝트를 책임지고 관리하기                                              
     남을 격려하기                                        남에게 나쁜 소식을 전하기
                                                          :예컨대 해고하거나 거절하기
독서                                                                        사무
     브레인스토밍                                   관청이나 회사 경영 문제를 다루기
적극적이고 행동 지향적인                                   세부적인 일을 처리하기
    사람만나기                                                                      
     신제품 만들기                                 남이 내 생활을 통제하도록 허용하기
       재택 근무                                                               출퇴근
   원대한 목표 가지기                                               회계/장부 다루기
  
              장점                                                        개선할 점
상상력이 풍부하고 포부가 크다                          돈을 변통하는 재간이 부족하다
행동 지향적이다-운명에 대해 책임진다           통신업계 외부와의 연줄이 한정되어있다
열정적/열광적/정력적이다                        회계/금융에 대한 지식이 제한되어 있다
세일즈에 성공한 적이 있다                     생활의 일부분야에서 균형감각이 부족하다
사교적/외향적이다                               자신에게 지나치게 엄격한 완벽주의자다
일에 몰두하는 편이다                        공격적이다-너무 집요한 인상을 줄 수 있다
임기응변에 능하고 창의적이다                              평범한 것을 참지 못한다
나 자신을 믿는다                                      걸음이 빨라서 남과 잘 부딪친다
가족의 지원을 받고 있다                                                완고하다
성취욕이 강하다                                                       성미가 급하다   
  
  
    실행 2: 당신의 취향에 바탕을 둔 활동이 무엇인지 확인하라. 당신의 장점과 개인적 기
호를 바탕으로, 당신의 목표와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세 가지 활동이나 목표를 확인하라.  내 
경우를 예로 들면, 내 목표는 남들이 저마다 인생의 보다  큰 가능성을 깨닫고 행동에 나서
도록 격려하는 것이다. 그 목표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수녀나 목사가 된다  
  평화봉사단에 들어간다
  대기업에 들어가 신입사원을 가르치는 트레이너가 된다
  글을 모르는 어른이나 어린이에게 글을 가르친다
  마음에 드는 자선활동에 시간을 바친다
  양부모가 된다
  상담자가 된다
  교사가 된다
  교회에서 봉사활동을 이끈다
  병원에서 자원봉사를 한다
  전화 상담자가 된다
  도움이 필요한 조카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
  책을 쓴다
  
  타고난 장점과 개선할 점, 좋아하는 일과 싫어하는 일을 평가해 보니 나에게 어울리지 않
는 활동이 무엇인지 분명해졌다. 아마 여러분도 내 목록을 검토해 본 뒤에는 그것을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수녀나 대기업의 트레이너가 되거나 평화봉사단에 들어가는 것은 내 목
록의 첫머리에 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자선활동에 시간을 바치거나  상담자가 되거나 
책을 쓰는 것은 내 목록의 첫머리에 오를 수 있다. 일단 그 과정을 거치자 결정을 내리기가 
한결 쉬워졌다.
  날마다 자기 생활과 활동에 열정을 주입하면 삶이 얼마나 더 풍요로워 질지 상상해 보라. 
필생의 목표에 맞는 단기적 목표와 활동을 선택하고 타고난 장점과 취향을 북돋우면 열정은 
저절로 솟아날 것이다. 기대와 경이와  환희에 찬 눈을 크게 뜨고  하루하루를 바라보게 될 
것이다.
  당신이 좋아하는 일, 몸과 마음을 바칠 수  있는 일을 찾으라. 일단 그 일을 찾으면  어떤 
장애물도 당신을 막지 못할 것이다.
  
  세월은 피부를 주름지게 하지만,
  열정을 포기하는 것은
  영혼을 주름지게 한다.
  사무엘 울만, '청춘' 중에서
      
    세 번째 특징 
    '신념'은 여행을 계속하게 만든다  
  이 장에 나오는 사람들은, 주위에서 다들 불가능하다고 하는데도  끝내 포기하지 않고 자
신의 목표를 계속 추구했다. 그 원동력은  무엇일까? 바로 신념이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믿지 않았지만, 그 꿈에 대한 그들의 믿음은 확고했다. 믿음이야말로 불굴의 인간이 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조건이다. 믿음을 가지면  추상적인 목표를 구체적인 현실로 바꿀 수  있다. 
믿음의 힘을 진정으로 신뢰하고 이해하면, 어떤 실패도 견뎌낼 수 있고 필요한 변화에도 적
응할 수 있다. 
  믿음이 확신으로 발전하면, 믿음이 당신의 영혼에 닻을 내려 어떤 것도 그 믿음을 파괴할 
수 없게 되면, 믿음은 신념이 된다. 그리고 신념은 강력한 힘이다.
  그렇다고 불굴의 인간이 되기 위해 운동장 만한 신념을 가질 필요는 없다. 겨자씨만큼 작
은 신념만 있으면 충분하다. 다음에 나올 '실행 계획'에는 불굴의 신념 체계를 개발할 수 있
는 단계별 과정이 마련되어 있다.
  불굴의 신념 체계를 개발하면 비판적인 사람들과  장애물을 따돌리고 앞서 나갈 수  있을 
테고, 당신이 이룰 수 있는 일은 무한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  
  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가라!'고 하면 그대로 될 것이요, 너희가 못할 일이 없으리로다."
  마태복음 17장 20절    
      별종의 달리는 전사들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불굴의 투지
    그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휠체어를 탄 사지마비 환자가 마라톤과 삼종경기, 심
지어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철인경주에까지 참가하다니, 실로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는 
다른 선수들을 절반이나 제치고 또다시 결승선을 넘는다. 얼굴에는 어느덧 구경꾼들이 기대
하고 사랑하게 된 그 환한 웃음을 활짝 띤 채.
  릭 호이트는 지난 20년 동안 그 결승선을 무려  631번이나 넘었다. 대개는 상위 50%안에 
들었고, 우승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절대로 혼자서  결승선을 넘지 않는다. 때로는 앞
에, 때로는 뒤에, '호이트 팀'의 반쪽이 있다. 아버지인 딕이다.
  사람들은 딕이 하는 일도 역시 믿기 어려운 일이라고 입을 모은다. 중년 남자가 휠체어에 
탄 아들을 밀면서 그 먼 거리를 달리다니. 자전거에 아들을 태우고 언덕을 오르내리다니. 물 
속에서 아들을 끌어당기며 3km가 넘는 거리를 헤엄치다니.
  그러나 호이트 가족은 불가능한 일을 하는 데 이력이 났다.
  릭은 1962년에 태어났다. 그때 의사들은 부모인 딕과 주디에게 아이의 상태를 알려주면서, 
그런 아들은 키워봤자 가슴만 아플테니 보육 시설에 보내라고  말했다. 당신네 아들은 경련
성 뇌성마비로 사지가 마비되어  있어서 평생을 식물인간으로 보내게  될 거라고, 사회에서 
정상아들과 함께 교육받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의사들은 그렇게 단정하고 경고했다.
  호이트 부부는 전문가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아들을 매사추세츠 주 노스레딩에 있는  집으
로 데려왔다. 딕과 주디는 아들을 정상아와 똑같이 키우기로 결심했다. 그때만 해도  전문가
들은 뇌성마비에 대해 별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릭의  '장애'가 어느 정도인지를 정확히 알
지 못했다. 심한 장애를 가진 아이와 함께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은 어떤 부모에게도 힘겨운 
일로 여겨졌다. 그러나 호이트  부부는 여느  부모가  아니었다. 그들은 '신체장애'가  넘을  
수 없는 장벽이 아니라 극복해야 할 난관일 뿐이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시작했다.
  릭의 의사전달 방법을 고새를 끄덕이거나 젓는 것뿐이었다. 언어 전문가들은 릭이 절대로 
말을 할 수 없을 거라고 말했지만, 호이트 부부는 그렇게 생각지 않았다. 그들은 5천 달러를 
모아, 최초의 대화식 의사 전달기를 만드는 데 써달라고 터프츠 대학에 기부했다. 의사 전달
기는 문자와 숫자를 전자식으로 스크롤하여 완전한 메시지를 이루도록 올바른 문자와  숫자
를 선택하면 말은 못하는 사람도 '말할' 수 있게 해주는 장치였다. 릭이  열두 살  때, 마침
내 의사 전달기 시제품이 완성되었다.  터프츠 대학에서 온 공학자들과  호이트  가족은 릭 
주위에 둘러서서 들뜬 얼굴로 릭의 첫마디를 기다렸다. 릭이  머리를 사용하여 전자식 스위
치를 누르자 화면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됐어요, 곰 아저씨들!"
  딕은 그때 일을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는 모두 웃음을 터뜨렸지요. 그 동안 우리가 줄곧  갖고 있었던 믿음을 릭이 확인해 
주었으니까요. 우리는 그  애가 건강하고 활기찬 정신과 유머 감각을  갖고 있을 거라고 늘 
믿었거든요."
  릭이 스포츠에 흥미를 보였기 때문에, 온 가족은 그를 강으로 데려가서 낚시를 하거나 카
누를 탔다. 심지어는 릭을 아버지 등에 끈으로 졸라매고 암벽을 오르기까지 했다. 호이트 가
족은 릭이 모험심과 도전 정신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의 눈에 비친 릭은 정상
적인 지능과 인간적 욕구와 희망을 가진 인간, 존중받기를 갈망하는 인간이었다. 릭이 제 생
각과 관심사를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은 주로 대화식 의사  전달기 덕분이었다. 이 장치를 통
해 호기심이 강하고 재치 있는 릭의 성격이 드러났다. 하지만  학교 당국은 릭이 걸을 수도 
없고 스스로 먹지도 못하고 혼자 힘으로는 말도 못한다는 이유로 입학을 거절했다. 의사 전
달기를 통해 '말하는' 능력이 점점  향상되고, 모든 아동에게 학교에  다닐 권리를 인정하는 
새로운 법률이 제정된 덕분에, 릭은 열 네 살 때 마침내 고등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몸을 
움직일 필요가 있는 수업은 릭이 혼자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특별 조수들의 도움을 받았
다. 학교에 다니는 동안 릭은 신체적. 정신적으로 놀랄 만큼 성장했다. 릭이 체육 확동을 시
작하는 데 촉매작용을 한 사건도 이 시기에 일어났다. 
  릭이 열 여섯 살 때인 1977년에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은 한 대학생을 돕기 위한 10km 달
리기 대회가 열렸다. 릭은 이것을 알고, 의사전달기를 이용하여 아버지에게 자기도 그  대학
생을 돕기 위해 '달리고' 싶다고 말했다. 딕은 머리를 한 방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걱정부터 앞서더군요. 나는 그 때 마흔 살이었고, 체중 유지를 위해 일주일에  사나흘 조
깅을 하고 있었지만, 훈련된 달리기 선수는 아니었으니까요. 그런 내가 휠체어에 탄 릭을 밀
면서 10km를 뛸 수 있을까? 하지만 릭에게는 그게 너무도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
문에, '좋다. 한번 해보다꾸나'하고 말했습니다."
  대회가 끝난 뒤, 딕은 꼬박 보름 동안 거의 움직이지도 못했다. 온몸이 쑤시고 아팠다. 하
루는 저녁에 아픈 근육을 '사리염'에 담그고 있는데, 릭이  다가오더니 타이프로 친 쪽지 한 
장을 건냈다. 쪽지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아빠, 달리고  있을 때는 저도 장애자가 
아닌 듯한 기분이 들어요."
이 한마디가 딕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아들은 마침내 자신을  자유롭게 해 주는 것을 찾
아낸 것이다. 달리기는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줄 수 없었던 자유를 릭에게 준 것이다. 그 순
간 딕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을 깨달았다. 릭이 운동선수가  되어 달리기 대회에 참가하고 싶
어한다면, 그애의 꿈이 이루어 지도록 내 팔다리를 빌려주자.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좀더 가
벼운 경주용 휠체어를 고안할 필요가 있었다. 무거운 휠체어를  밀면서 달리다가 쓰러져 죽
기라도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기술자와 함께 특수 휠체어를 고안하여  만드는 데에는 2년이 넘게  걸렸다. 그 동안에도 
딕은 아들과 함께 낡은 휠체어를 이용하여 훈련을 계속하고,  인근에서 열리는 달리기 대회
에 참가했다. 그들이 처음으로 참가한 공식 대회였다. 여기서 그들은 300명 가운데  150등을 
차지했다. 그 후에는 주말마다 여러도시를 돌아다니며 달리기 대회에 참가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보스턴 마라톤 대회도 그  중 하나였다. 42,195km 는  정상인들도 버거운 거리였다. 
릭과 딕은 하반신이 마비된 장애자들이 오래  전부터 참가하고 있는 휠체어 부문에  참가를 
신청했다. 하지만 혼자 힘으로 경주를 벌이는 하반신마비 장애자들과는 달리, 릭은 파트너가 
필요한 사지마비 장애자였기 때문에 참가를 거절당했다. 그래도 호이트 부자는 어쨌든 대회
에 참가하여, 출발선에 늘어서 있는  휠체어들 뒤에 자리를 잡았다. 후원사도  조직위원회도 
그들의 참가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지만, 길거리에  몰려나온 구경꾼들은 박수갈채로 그들을 
격려해 주었다. 호이트 부자가 마침내 결승선에 들어오자  군중은 환호로 맞아주었다. 7,400
명의 참가자 가운데 호이트 부자는 6,500등 정도를 차지했다. 이를 시작으로 그들은  수많은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여 완주했다.
  그 동안 릭은 자기가 단순히 별난 운동선수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그는 보스
턴 대학에서 특수교육을 전공하여  학위를 받았다. '말도  못하는'사지마비 장애자가 대학을 
졸업한 것은 사상 처음이었다.
  어느새 노련한 달리기 선수가 된 딕은 1984년에 삼종경이  대회에 초청을 받았다. 장거리 
수영. 장거리 자전거 경주. 크로스컨트리 달리기를 결합한 삼종경기는 엄청난 체력을 요하는 
경기다. 조직위원회는 딕이 참가하기를  바랐지만, 혼자서 참가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딕은 거절했다. 이듬해에도 조직위원회는 똑같은 제의를 했지만, 이번에도 딕은 아들과 함께
가 아니면 참가할 수 없다고 고집하면서 거절했다. 딕은  조직위원회 관계자에게 이렇게 말
했다.
  "애당초 내가 달리기를 시작한 건 아들 때문이었소. 나  혼자 경주에 참가하고 싶은 마음
은 전혀 없습니다. 릭은 나를 달리게 하는 원동력이자 추진력입니다. 게다가 그 애가 없으면 
나는 두 팔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도 모를 겁니다."
  결국은 대회 관계자들도 양보했다. 딕이 안전하고 튼튼한 장비를  고안할 수만 있다면 아
들과 함께 참가해도 좋다고 나온 것이다. 딕은 헤엄칠 줄도 몰랐고, 여섯 살 때 이후로는 자
전거를 타본 적도 없었지만,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아들이 이미 해낸 일에 비하면  그런 
것쯤은 사소한 장애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딕은 당장 훈련에 착수하는 한편,  물 속에서 릭을 밀거나 자전거에  태우고 페달을 밟을 
때 도움이 될 장비를 고안하기 시작했다. 자전거 무게는 27kg, 릭의 몸무게는 41kg, 딕의 몸
무게는 77kg, 합해서 145kg이 언덕을  오르내리고, 고통스러운 신체적. 정신적 장벽을  뚫고 
나가야 할 것이다. 이 삼종경기 대회에서  릭과 딕은 완주를 기록했고, 그 후에는  삼종경기 
대회가 열릴 때마다 빠짐없이 참가하여 상위 50% 이내의 성적으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이 과정에서 딕은 좌우명 하나를 만들어냈다. " 우리가 함께 하면 못할 게 없다." 그랬다. 
아버지와 아들은 함께 악명 높은 철인경주를 완주했다. 수영 3.85km에  자전거 180km와 달
리기 42.195km를 결합한 철인경주는 대다수 참가자들이 도중에 탈락하지 않고 끝까지 가는 
것만으로도 만족해하는 경주다. 더구나 하와이 섬에서 열리는 이  철인 경주는 인간의 한계
를 시험하는 그 끔찍한 조건(섭씨  38도까지 올라가는 기온, 높은 습도,  험한 언덕) 때문에 
각별한 준비가 필요했다. 릭과 딕은 훈련을 위해 1년 동안 주말마다 지방 대회에  참가했다. 
릭이 학교에 가 있는 평일에도 딕은 날마다 혼자서 훈련을 거듭했다. 매일같이 3km를 헤엄
치고, 릭의 경주용 휠체어와 자전거용  휠체어에 45kg 짜리 모래주머니를 실은  채 10km를 
달리고, 자전거로 50km 내지 60km를 달렸다. 그 후 딕과 릭은 철인 경주에 네 번 참가하여 
모두 완주했다.
  그들은 또한 자전거를 타거나 두 발로 달려서 미국을 횡단했다. 로스엔젤레스에서 보스턴
까지 6,000km 가 넘는 거리를 하루도 쉬지 않고 45일 만에 달린 것이다.  그리고 보스턴 마
라톤 대회-1981년에 그들의 참가를 거부했던 대회-에서 열 다섯 번이나  완주한 뒤, 보스턴 
마라톤 100주년 기념일에 이 대회의 영웅으로 상을 받기도 했다.
  운동 선수는 자기가 아니라 아들이라고, 딕은 아직도 그렇게 주장하고 있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들이 탄  휠체어 뒤에 서면 무슨 일인가가  일어납니다. 우리 
팀의 추진력은 릭입니다. 나는 릭에게 내 몸을 빌려주지만, 우리를 계속 앞으로 나아가게 하
는 것은 릭의 정신입니다."
  릭과 딕 호이트는 20년 동안 달리기 대회에 참가했고, 달리기에는 끝이 없다고 말한다. 몇 
등으로 결승선에 들어오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출발선에 선 순간부터 그들의 달리기는 이미 
승리였기 때문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아무 일도 못할 거라는 말만 들었습니다.
  하지만 부모님과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줄곧 다른 사람들이 틀렸다는 걸 보여주었지요."
  릭 호이트
  
  나는 평균보다 낮은 능력밖에 갖지 못한 보통
  사람일 뿐이다. 어떤 남자나 여자도 나만큼
  노력하고 나와 같은 희망과 신념을 키우면,
  내가 이룩한 일쯤은 얼마든지 해낼 수 있다.
  마하트마 간디
  
      모르는 게 약 
      모르는 것이 오히려 당신의 생명을 구할 수도 있다.
    팸 론터스는 장사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경험도 없었다.  기껏해야 중학생 정도의 지식
밖에는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일류 장사꾼이 되었으니, 성공담의 주인공이 되는 것
도 당연하다.
  팸은 경험도 지식도 없는 세일즈  일을 해보겠다고 나섰다. 그리고는  비현실적인 목표를 
세운 다음, 색다른 방법으로 그 목표를  추구했다. 말하자면 승산이 가장 낮은 곳에  내기를 
건 셈이다. 그런 일이 몇 번이고 되풀이되었다. 그녀는 단지 물정을 몰랐을 뿐이다.
  그녀가 그렇게 세상 물정에 어두운  것은 거의 평생 동안 남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이다. 
팸이 어릴 때부터 부모는 위험한  곳에는 아예 접근도 못하게 했다.  팸은 '물에 빠져 죽을 
지 
모른다'는 이유로 해변에 가지도 못했고,  시내에서 쇼핑하는 것은 '너무  위험하기' 때문에 

구들과 어울려 번화가로 물건을 사러 가지도 못했다. 그렇게 자라서 결혼하자, 남편은  심리
학 공부를 그만두고 교직 과목을 이수해서 좀더 안전한 직업인 교사가 되라고 설득했다. 그
녀는 심리학을 좋아했고, 교사가 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지만, 남편 말에 따랐다.
  팸은 3년 동안 교사로 일했지만 아무 보람도 느끼지  못했다. 전업주부가 되면 인생이 의
미를 갖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3년만에 교직을 그만두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또 
다른 것이 그녀를 지배했다. 바로 그녀 자신의 절망감이었다.
  수많은 여성들이 이런 일을 겪었다. 팸  론터스에게는 두 아이가 있고, 교외에 멋진  집이 
있고, 다정다감하지는 않지만 사회적으로 출세한  남편이 있었다. 그런데도 마음 한  구석이 
텅 빈 듯한 공허감과 허탈감을 느꼈고, 모든 게 덧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목숨이  붙어 
있을 뿐, 그것은 사는 게 아니었다. 자신이 아무 쓸모도 없는 인간처럼 느껴졌다. 이것을 의
식할수록 그녀는 점점 더 우울해 졌다.
  우울증을 처리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약을 먹는 사람도 있고, 술이나 마약에 의존하는  사
람도 있다. 팸은 침대로 가서 드러누웠다. 그리고  그후 5년 동안 거의 침대를 떠나지 않았
다. 아침마다 일어나서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돌아오면, 잠이 가져다주는 행복한 망각 
속으로 빠져들곤 했다.
  팸이 30대에 접어들었을 때는 하루에 18시간씩 잠을 잤고, 몸무게는 표준체중보다 18kg이
나 많아져 있었다. 자존심과 자신감은  완전히 사라졌고, 살아갈 이유도  전혀 없었다. 깨어 
있는 몇 시간 동안은 계속 자살만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자살을 실제로 시도하지도  못했다. 
우울증이 심각해지자, 이제 그녀에게는 한 가지 선택밖에 남지 않았다.
  인생이 살 가치가 없다면, 그런데도 자살할 수 없다면, 남은 선택은 인생을 바꾸는 것뿐이
다.
  "나는 내 인생을 바꾸어줄 누군가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평생을 보냈지만, 백마 탄 기사
가 홀연히 나타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어요."
  인생을 바꾼다는 게 겁이 났지만, 의미 있는 인생을 찾기  위해서는 그녀 스스로 만든 질
곡에서 과감하게 뛰쳐나올 수밖에 없었다.
  세상으로 돌아가는 첫걸음은 날씬한 몸매를 되찾기 위해 헬스클럽 가는 것으로  시작되었
다. 그것은 작은 걸음처럼 보였지만, 클럽 문을 들어 선 순간 팸은 새로운 생활 속으로 들어
갔다.
  헬스클럽 관장인 짐은 활기차고 적극적인 사람이었다. 팸에게 도움이 필요하나는 것을 알
아차린 짐은, 운동을 꾸준히 계속하면 눈에 보이는 결과가  나타날 거라고 장담하면서 그녀
를 격려해 주었다. 운동하고 싶은 마음이 우러나도록 동기를  부여해 주는 테이프를 빌려주
기도 했다. 팸은 그 테이프를 수십 번이나 들었다.
  몸무게가 서서히 줄어들자, 그와 함께 두려움도 줄어들었다. 몇 달 뒤에는 이제까지  감히 
물어볼 엄두도 못 냈던 질문을 자신에게 던질 수 있을 만큼 용감해져 있었다.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이 뭐지?" 십대 시절에 팸은 가족의 생계를 돕기 위해 신발 매장에서 아르바이
트를 한 적이 있었다. 내가 신나게 할 수 있는 일은 어쩌면 장사인지도 몰라. 나는 헬스클럽
에서 놀라운 결과를 경험했고, 운동이 몸에 좋다는 걸 진심으로 믿고 있으니까,  헬스클럽에
서 그 일을 시작해 보면 어떨까?
  팸은 헬스클럽 회원권을 팔아본 경험도 없었고 세일즈 교육을  받은 적도 없었지만, 헬스
클럽 회원권을 파는 일거리를 달라고 짐에게 부탁했다. "당신은 나한테 테이프를 주고, 인생
에서 뭔가를 해볼 마음을 불러일으킨 사람이니까, 마땅히 나를 채용해야 되요!"하고 팸은 당
당하게 요구했다. 짐은 팸에게 일자리를 주었지만, 그것만 준 게 아니었다. 자신의 낙천적인 
인생관도 팸에게 나누어주었고, 팸이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도록 격려도 아끼지 않았다.  팸
은 이제껏 한 번도 시내까지 차를 몰고 가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겁이 난다고 말하자, 짐은 
팸을 차에 태우고 자신은 조수석에 앉아서 방향을 일러주어, 팸이 시내까지 차를 몰고 가게 
했다.
  자신감이 커지자, 그에 따라 회원권 판매 실적도 올라갔다. 몇 주도 지나기 전에 팸은  차
를 몰로 도시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다른 판매원들보다 훨씬  많은 실적을 올리게 되었다. 
그녀는 놀랄 만큼 짧은 기간에 놀랄 만큼 먼길을 온  것이다. "해보지도 않고 못 한다고 말
하지 마라!"는 짐의 인생 철학은 이제 팸의 좌우명이 되었다.
  그해에 멋진 성공을 거둔 팸은 새로운 도전에 나설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마침 시내에 라
디오 방송사가 새로 문을 열었다. 팸은 전무를 만나, 봉급은 한푼도 받지 않고 판매  실적에 
따른 수당만 받을 테니까 광고 시간을 파는 영업사원으로 채용해 달라고 설득했다.
  신생 방송사는 기존 청취자가 없기 때문에 광고 시간을 팔기도 그만큼 어렵다. 하지만 팸
은 이런 사실을 알지 못했다. 큰 회사들은 청취자가 많은 방송사에 광고를 내기 때문에,  팸
이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작은 회사의 광고밖에는 얻지 못할 거라고 전무는 생각했지만, 팸
은 이것도 알지 못했다. 그녀는 몰랐기 때문에, 큰 회사든 작은 회사든 가리지 않고  용감하
게 찾아가서, 청취자의 수가 아니라 청취자의 질과 구매력을 근거로 광고 시간을 팔았다.
  해마다 성탄절 휴가가 끝난 뒤인  1월은 세일즈에 불리한 달이었지만,  팸은 이것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다른 영업사원들은 2월이 오기를 기다리며 빈둥거렸지만, 팸은 1월에도 다른 
달처럼 열심히 뛰어다녔다. 팸이 1월분  수당으로 받은 금액은 댈러스의  라이오 광고 판매 
사상 사장 큰 액수였다. 그때부터 팸은 최고 실적을 올리는 영업사원 자리를 놓치지 않았고, 
다른 여섯 명의 영업사원이 판매한 액수를 모두 합쳐야 겨우 팸이 혼자 판매한 액수와 맞먹
을 정도였다.
  더욱 자신감을 얻은 팸은 이제 남편과의 문제에도 맞설 용기가 생겼다. 그녀는 남편과 함
께 문제를 해결하려고 여러 번 시도하다가 결국 헤어지기로 합의했다.
  방송사 생활은 문자 그대로 오르락내리락했다. 청취율은 밑바닥까지 떨어졌다. 이렇게  불
안정한 시기에는 재빨리 빠져나가는 것이 이 업계의 관례였지만, 팸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주위 사람들이 모두 방송사를 떠나는데도 그녀는  이제 공석이 된 영업부장 자리를  달라고 
요구했다. 전무는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못하고 그녀의 요구를 수락했다. 팸은 세상에서 가
장 형편없는 일자리를 얻고는 마치 세상이라도 얻은 양 흥분했다!
  첫 번째 영업회의 때 팸은 칠판에다 그 달의  목표액을 적었다. 10만 달러! 모두 입을 딱 
벌렸다. 팸은 매달 평균 35,000달러의 실적을 올리고 있었다. 그래서 다른 세 명의 영업사원
도 그 정도는 팔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회의가 끝난  뒤에 전무는 팸을 자기 방
으로 불러서, 방송사의 월 평균 광고 수입이  42,000달러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그녀가 벌
어들인 35,000달러를 빼면, 나머지 세 명의 영업사원이 겨우 7,000달러를 벌어들인다는 거였
다. 그런데 10만 달러를 목표로 삼는 것은 너무나 비현실적이라고 전무는 말했다.
  그날 밤에 팸은 목표액을 5만 달러로 줄이는 문제를  검토했다. 하지만 이튿날 아침 출근
길에 짐이 준 테이프를 다시 듣고는 '비현실적인' 목표액 10만 달러를 고수하기로 결심했다. 
그 날 아침, 그녀는 팀 동료들을 만나서 목표액을 달성할 수  있다는 믿음을 다시 한 번 강
조했다.
  그 달 마지막 날 오후 4시 반까지 그녀의 팀이 올린 액수는 100,018 달러에 이르렀다.  12
월에는 한 달 판매액이 14만 달러까지 올라갔다. 석 달 뒤에는 다시 18만 달러로  늘어났다. 
11월에 팸의 팀은 272,000달러를 판매하는 기록을 세웠다. 방송사 청취율은 조금밖에 오르지 
않았는데도 이런 유례없는 성과를 거둔 것이다. 팸은 불과 2년 동안 영업부장으로 일한  뒤, 
영업 담당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원래는 한  단계 위인 전무로 승진하는 게 원칙이지만,  그 
단계를 건너 뛰어 일약 부사장이 된 것이다. 부사장이 되려면 최소한 5년 내지 10년은 걸리
는 게 보통이고, 지금까지 영업부장에서  곧장 부사장으로 승진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팸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팸은 이렇게 말했다. "몰랐던 게 다행이예요. 그걸 알았더라면 아직도 영업부장 자리에 머
물러 있을지도 모르죠."
  4년 동안 라디오 방송사에서 성공적인 경력을 쌓은 뒤에 팸은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 위해 
방송사를 떠났다. 오늘날 팸 론터스는 동기 부여에 대해 강연도  하고 책도 쓰는 저명한 강
사이자 작가일 뿐 아니라, 세일즈와 마케팅에 관한 컨설턴트로 활약하고 있다. 팸은  상담하
러 오는 이들에게 한계가 아니라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저절로 우러나게 해준다. 그녀가 한 
일이 바로 '자신의 가능성을 믿는 것'이었다. 
  팸은 슬로건 하나를 채택하여, 목표를 달성하기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을 만날 때마
다 그 슬로건을 말해 준다. 여러분께도 그걸 말해 주겠다고 한다.
  "상대방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이렇게 말하세요.
  '해보지도 않고 불가능하다고 말하지 마세요' 라고."
  팸 론터스
  
  -생각 코너-
  '텍사스 인스투르먼트' 회장인 마크 셰퍼드는 1970년대에 웨스팅하우스와 GE 및 RCA 같  
  은 업계의 거인들과 맞서  승리한 원인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 회사들은 가능하지 않은  
  
  일을 모두 알고 있었지만, 우리는 그걸 몰랐습니다. 우둔했던 것이지요."
  
      무일푼에서 1,500만 달러까지
      그녀는 전문가를 믿지 않고 자기 자신을 믿었다
    콜롬비아의 마리아 엘레나 이바네스가 십대 소녀였을 때, 아버지가 소형 컴퓨터 프로그
래밍 강좌에 딸을 등록시켰다.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컴퓨터가 10만 달러나 되는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점점  흔해지고 
있었다. 마리아 엘레나는 이 혁신적인 테크놀러지에 당장 매료되었다.1973년에 그녀는  컴퓨
터공학을 배우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대학을 졸업한 뒤,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미국에서는 개인용 컴퓨터가 8,000달러에  팔리고 있었다. 라틴아메리카의 기업들이  소형 
컴퓨터 값으로 지불하고 있는 돈에  비하면 푼돈이었다. 마리아 엘레나는 거기에  착안했다. 
"미국 국경 남쪽에는 개발되기만 기다리고 있는 비옥한 시장이 있어. 그곳에 개인용 컴퓨터
를 보급하는 일을 시작해 보면 어떨까?" 1980년에 그녀는 몇몇 컴퓨터 회사를 찾아가 그 아
이디어를 제시하고, 그 회사에서 만든 제품을 자신의 고국에  보급할 기회를 달라고 요구했
다. 
  마리아 엘레나는 그때 일을 이렇게 회고했다.
  "컴퓨터 회사 간부들은 나를 상대도 하지 않았어요. 말도 안 된다는 거죠. 라틴아메리카는 
지금 한창 경제 위기를 겪고 있다.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가난해서 돈이 없다.  라틴아메리
카는 시장이 너무 작아서 개척할 가치가 없다는 거예요."
  마리아 엘레나는 상황을 그들과는 다르게 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한계를 보는 곳에
서 그녀는 기회를 감지했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시장규모가 1천만 달러에 불과하다 해도, 그만하면 나한테는 충
분히 큰 거야. 지금 그 시장에 뛰어들면 돈을 벌 수 있을 거야. 게다가 시장이 너무 작으니
까 다른 사람은 아무도 그 시장을 탐내지 않을 거야."  
  마리아 엘레나는 여자였고, 스물 세 살밖에 안 된데다, 세일즈나 마케팅 경험도 전혀 없었
다. 그녀를 만난 컴퓨터 회사 간부들은 이 세 가지로  그녀가 삼진 아웃을 당했다고 생각했
다. 하지만 그녀는 두 가지 사실을  알고 있었다. 미국은 컴퓨터 가격이  싸다는 것, 그리고 
라틴아메리카는 컴퓨터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 마리아 엘레나는 만사가 잘되리라는 희망
에 부풀어, 은행을 찾아가서 신용대출을 요청했다. 은행에서는  사업 계획서를 보자고 했다. 
마리아 엘레나는 사업 계획서란 말을 들어본 적도 없었다. 두 번째로 찾아간 은행에서는 마
케팅 계획안을 요구했다. 마리아 엘레나는 마케팅 계획안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녀
는 유통업자를 직접 찾아가기로 했다. 유통업자들은 대부분 그녀를 만나려고도 하지 않았고, 
어렵사리 만난 두 사람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지금 현재 라틴아메리카에서 컴퓨터를 
몇 대나 팔고 계십니까?"하고 그녀가 묻자, 그들은 한 대도 안 판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마
리아 엘레나는 말했다. "내가 라틴아메리카에서 당신네 제품을 1년에 1만 달러 어치씩 팔겠
습니다." 그들은 물건값은 모두 선불로 내라고 요구했다. 이 요구를 마리아 엘레나는 받아들
일 수밖에 없었다. '앨토스 컴퓨터'는 9개월 동안 그녀에게 독점  판매권을 주었다.  그들로
서는 믿져야 본전이었다.
  다음 단계는 여행사에 전화를 거는 것이었다. 마리아 엘레나의 요구는  간단했다. "마이애
미에서 아르헨티나까지 가는 비행기표를 사고 싶은데요. 가능하면 추가요금을 물지 않고 도
중에 있는 주요 도시에 모두 들르고 싶어요." 이것이 그녀가 짠 마케팅 계획이었다. 그때 일
을 말하다 말고 그녀는 이렇게 덧붙였다.
  "때로는 모르는 게 오히려 속 편할 수 있고, 기대 이상의 성과를 가져다 줄  수도 있어요. 
나는 그때 내가 무엇에 발을 들여놓으려 하는지 전혀 몰랐어요."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의 길잡이가 된 것은 자신의  목표와 분별력에 대한 믿음뿐이
었다. 콜롬비아에 도착한 그녀는 호텔에  방을 잡고, 전화번호부를 뒤져서 컴퓨터  판매점에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전화번호부에 실린 광고가 클수록 판매점  규모도 클 거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제일 큰 
광고를 낸 판매점들을 맨 먼저 골랐어요."
  이튿날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판매상들과  만날 약속으로 꽉 차  있어서, 그녀는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녀야 했다. 1980년대에는 여성 엔지니어가 드물었고, 라틴아메리카의  사
업가들은 대부분 여자를 상대하는 데  익숙지 못했다. 더구나 몸집이 작고  나이도 열 여덟 
살 정도밖에 안 되어 보이는 금발 여자와 사업 이야기를 나누어 본 경험은 전혀 없었다. 마
리아 엘레나는 젊은이다운 열정과 미국에서 배운 전문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 두 가지가 
절묘한 균형을 이루어, 나이 어린 여자라는 불리한 조건이  오히려 유리한 강점으로 바뀌었
다. 마리아 엘레나는 장래 고객들의 반응을 이렇게 묘사했다.
  "나이도 어린 여자가 자기들도 모르는 첨단 기술에 대해 이야기하니까 다들  넋을 잃더군
요. 내가 내놓은 제품이 굉장히 좋으데다 가격도 거의 환상적이었기 때문에, 반응은 아주 호
의적이었어요. 그렇게 좋은 제품을 그렇게 싼값에 공급받을 수 있다면, 업계의 거물들과  충
분히 경쟁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녀는 한 달 동안 에콰도르. 칠레. 페루. 아르헨티나를 회오리바람처럼 휩쓸고 다녔다. 어
느 나라에서나 그녀는 전화번호부를 이용한 판매 전략을 썼다.
  "원래는 1년에 1만 달러 어치를 파는 게 목표였지만, 불과  한 달 뒤에 10만 달러 어치를 
주문 받아서 미국으로 돌아갔어요. 선불로 받은 자기앞수표를 손에 쥐고 말이에요."
  대학에 다닐 때 컴퓨터 실습실에서 조교로 일하면서 시간당 6달러를 벌었던 사람에게 10
만 달러의 수표는 수백만 달러처럼 여겨졌다.
  결국 마리아 엘레나는 수백만 달러 어치를 팔게 되었다. 5년 뒤에는 판매고가 무려  1,500
만 달러로 늘어났다. 1987년에 <인코퍼레이트>지는 그녀가  설립한 '국제 마이크로 시스템'
을 가장 급 성장하는 500개 기업 가운데 55위에  올려놓았다. 1988년에 마리아 엘레나는 이 
회사를 매각했지만, 그 후에도 판매고가  7천만 달러에 이를 때까지 3년  동안 회사에 남아 
있었다. 
  그 후 마리아 엘레나는 아프리카로 건너가서 컴퓨터 판매회사를 차렸다. 이번에도 마케팅 
전문가들은 고개를 저었다. 아프리카는 너무 가난해서 개인용 컴퓨터를 살 여유가 없다.  더
구나 남성 지배적인 문화권에서 아프리카인도 아닌 여자가 파는 컴퓨터를 누가  사겠느냐고 
그들은 말했다. 마리아 엘레나는 이제 그런 부정적인 반응에는 익숙해져 있었다. 그녀가  보
기에는 전문가들이 너무  근시안적이었다. 그녀는 미래를  내다보는 자신의 능력을  믿었다. 
1991년에 그녀는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로 날아갔다. 가진 무기라고는 제품 카달로그와 지도 
한 장뿐이었다. 그녀는 여느 때처럼 호텔에 방을 잡고 전화번호부를 집어들었다. 보름  뒤에 
그녀는 15만 달러 어치의 주문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다.
  처음에는 자기 집 차고에서 일하다가, 얼마 뒤에는 작은  창고에서 제품을 실어내기 시작
했다. 주문은 계속 늘어났다. 넉 달 뒤에는 70만 달러 어치의 컴퓨터를 선적했다. 2년째에는 
판매고가 240만 달러에 이르렀고, 이듬해에는 두 배, 그 이듬해에도 다시 두 배로 늘어났다. 
<인코퍼레이트>지는 1990년대 초에 연평균 1,300 만  달러의 매출액을 기록한  '국제 하이
테크 마케팅'을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500개 기업가운데  하나로 선정했다. 무일푼으로  시
작하여 두 개의 기업을 권위 있는 <인코퍼레이트>지의 명단에 올려놓은 사람은 마리아  엘
레나 뿐이다. 
  마리아 엘레나 이바네스는 판매하기 좋은  제품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성공은 
자신에 대한 믿음과 결단력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이  세상의 어떤 '마케팅 계획안'도 자신
에 대한 믿음과 결단력을 줄 수는 없다.
  
  "당신더러 무언가를 하지 말라고 충고하면서 그 이유를 늘어놓는 데에는 모든  사람이 전  
  문가입니다. 그러니까 남들이 뭐라고 하든 신경  쓰지 마세요. 장애물에 부닥치거든, 그것  
  을 세상의 종말로 생각지 말고 기회로  생각하세요. 장애물을 빨리 지나치려면, 필요한 일  
  은 뭐든지 다 하세요. 당신의 꿈을 믿으면, 반드시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마리아 엘레나 이바네스
  
  -생각 코너-
  우리에게 최대의 적은 바로 우리들 자신이다.  우리는 자신의 한계를 '알고 있기' 때문이
다. 
선견지명을 가진 다음 여성들은 내면의 목소리를 무시할 수  있었고, 낙관적인 행복감에 도
취되어 한 단계 높은 수준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들은 자신의 한계를 알지 못했고, 
그래서 한계를 갖지 않았다.
  
  마거릿 미드는 스물 다섯 살 난 여자가 뉴기니와 사모아 섬의 밀림을 혼자 돌아다니면 
안 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마거릿 대처는 영국 유권자들이 여성 총리를 받아들일지 어떨지를 굳이 묻지 않았다.
  오프라 윈프리는 필 도나휴가 토크쇼 시장을 독점하고 있는데도 전혀 기죽지 않았다. 
  그들은 결코 질문하지 않았고, 그래서 마치 당연한 권리라도  되는 듯이 공중누각 안으로 
당당하게 들어갔다.
  진 랜드럼, <천재 여성들의 프로필>에서 발췌 
  
      육성 고백
      도저히 믿을 수 없다
    나는 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 분교에서 수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이었다. 여느 때처럼 
수업에 지각한 나는 칠판에 수학 문제 두 개가 적혀 있는  것을 보고, 숙제인 줄 알고 공책
에다 재빨리 적었다. 저녁 때 풀려고 해보니, 교수님이 이제까지 숙제로 낸 문제 중에서  가
장 어려웠다. 나는 밤마다 그 문제를 가지고 씨름했다. 한 문제를 풀려고 끙끙대다가 안  되
면 다른 문제와 맞붙었지만, 문제는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계속해서 문제를 붙
잡고 늘어졌다. 
  며칠 뒤, 마침내 돌파구를 발견하여 두 문제를 모두 풀어냈다. 그리고 이튿날 수업 시간에 
숙제를 가져갔다. 교수님은 자기책상 위에 과제물을 놓아두라고 하셨다. 책상 위에는 리포트
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기 때문에, 내 과제물이 그 속에서 미아가 되어버리지나 않을까 걱
정스러웠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과제물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돌아섰다.
  그리고는 한 달이 지났다. 일요일 아침이라 모처럼 늦잠을 자고 있는데, 문을 쾅쾅 두드리
는 소리가 들렸다. 누굴까 하고 나가보니, 놀랍게도  교수님이었다. 교수님은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조지! 조지! 자네가 그 문제를 풀었어!"
  "예, 물론이죠. 저더러 그 문제를 풀라고 하신 거 아닙니까?"
  그러자 교수님이 사정을 설명해 주었다. 칠판에 적힌 두 문제는 숙제가 아니라,  이제까지 
내로라 하는 수학자들도 풀지 못한  유명한 미해결 문제라고. 그런데 내가  단 며칠만에 두 
문제를 모두 풀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다고. 그 문제가 유명한 미해결 문제라고  누군가가 
말해 주었다면, 나는 아마 문제를 풀려고 애써 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조지 댄치그는 스탠퍼드 대학에서 컴퓨터공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생각 코너- 
  NBA(미국 프로 농구 협회) 소속 농구단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복권에 당첨될 가
능성이 더 높다. 그런데 거기에다 NBA 선수의 평균  신장보다 40cm나 작은 160cm의 단신
이라는 여건을 추가해 보라. 타이론 보그스가 프로 농구선수가 되겠다는 꿈을 가졌을 때, 그 
자신 말고는 아무도 그의 꿈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타이론은 자신의 꿈을 진지하
게 추구했고, 그가 NBA 사상 가장 키 작은 선수가 된 것은 그 때문이다.  
  "자신에 대한 강한 믿음, 강한 의지, 두둑한  배짱, 그리고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본보기가 
있다면, 살아 생전에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
  타이론 '땅꼬마' 보그스, <거인들의 땅에서>
  
      육성 고백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
    글을 쓰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고, 그 동안 저축해 둔 돈으로 먹고살면서, 내가 쓰고  있
는 글이 쓰레기가 아니라 상품성  있는 원고가 되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나는 회사에서 
11년 동안 마케팅 컨설턴트로 일했고,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임원까지 되었다. 이렇게 직장에
서는 성공했지만, 무언가가 빠져 있었다. 때마침  이혼의 아픔을 겪은 것이 내 인생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마음속에서 작은  목소리가 속삭였다. '너는 언제나  책읽기를 좋아했잖아.' 하지만 
나는 글쓰고 싶다는 생각을 인정하기가  두려웠다. 그러자 또 다른  목소리가 물었다. '너는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
  내가 과연 작가로 성공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자신할 만한 근거는 전혀 없었다. 어릴 때
부터 책읽기를 좋아하긴 했지만, 글쓰기는 배워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는 언제나 이야기를 하고 싶은 욕구를 느끼고 있었다. 그  순간까지만 해도 그것은 감히 생
각해 볼 엄두도 내지 못한 꿈이었다. 그런데 서른 다섯 살 나이에  그 꿈을 나 자신에게 속
삭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속삭임이 들린 뒤에는, 부정적으로만 생각하는 나  자신에 
대해 회의가 일어났다.
  두렵긴 했지만, 어쨌든 직장을 그만두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결심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하루에 다섯 장씩은 쓰겠다고. 글이 형편없으면 시시한 다섯 장이 될 테고, 글이  괜
찮으면 충실한 다섯 장이 되겠지만. 대개는 시시했다.
  2년 반이 지난 뒤, 드디어 원고가 마무리되었다. 나는 손으로 쓴 원고를 타이핑  전문가에
게 보냈다. 타자로 정서된 원고를 찾아올  용기가 나기까지는 석 달이 걸렸다. 내  마음속의 
목소리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무도 내  원고를 사지 않을 거야!' 일단  원고를 찾아오
자, 가장 어려운 문제가 앞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원고를 파는 일이었다.
  <조강지처 클럽>을 열 한 군데 출판사에 보냈지만,  돌아온 것은 "우리가 청탁하지 않은 
원고는 읽지 않습니다"라는 판에 박힌 편지들 뿐 이었다. 마침내 한 편집자가 내 원고를 읽
어주었지만, 그 편집자도 내 소설이  "너무나 황당하고... 남편에게 버림받은 중년  여자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면서 출판을 거절했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내 소설에 나오는 여자들이 겪은 불행은 나 자신과 여동생, 여자친구들, 나아가 우리 어머니 
세대의 여자들에게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이런 유형의  책을 원하는 독자층이 있다
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출판 대행업자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몇 달 위, 드디어 대리인이 되
어주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 사람은  우선 원고를 고치라고 요구했다. 소설에  등장하는 
세 여주인공이 별로 동정심을 자아내지 못한다면서, 그는 세 가지를 제의했다. 한 여자는 백
혈병에 걸린 고양이를 키우는 것으로 하고, 두 번째 여자한테는 정신장애야 딸이 있는 것으
로 하고, 세 번째 여자는 갓난아기를 잃은 것으로  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단호히 거절했다. 
여주인공들을 비현실적으로 고상하게 묘사하거나 남편들을 철저히 야비하게 묘사하고  싶지
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수없이 다툰  끝에, 내 대리인은 '전문가'니까 뭐가  좋고 나쁜 지도 
잘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마지못해 원고를 고쳤다.
  전문가의 충고대로 고친 원고는 그 전문가가  가장 확실한 연줄을 갖고 있는  출판사에서 
보기 좋게 퇴짜를 맞고 말았다. 나는 의기소침한 정도가 아니라 완전한 좌절감에 빠져 있었
다. 그런데 그 원고가 할리우드로 보내져 토드 해리스의 눈에 띤 것은 그야말로 행운이었다. 
토드 해리스는 내 원고의 가치를 한눈에 알아보고, 그것을 세 명의 여성 제작자에게 보냈다. 
'파라마운트 영화'사의 셰리 랜싱 사장이 내 원고에 대한  판권을 사들이고,  <조강지처 클
럽>에서 세 가지만 빼고는 모두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셰리 랜싱이 마음에 안 든다고 지적
한 세 가지가 뭐냐고? 그것은  백혈병에 걸린 고양이, 정신 장애아  딸, 죽은 갓난아기였다.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나는 원래의 원고와 최대한 가깝게 다시 고쳐  썼고, 마침내 '사이
먼 슈스터 출판사'에서 책이 나왔다.
  이 경험에서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교훈을 얻었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통찰력을 믿는 것
만큼 귀중한 재산은 없다. 그것을 포기하는 것은 인간적으로 파산 선고를 받은 거나 마찬가
지라고 할 수 있다.
  
  올리비아 골드스미스는 <조강지처  클럽>의 작가다. 이  소설은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1996년에는 영화로 제작되어 최고의 흥행 수입을  올렸다. 올리비아 골드스미스의 작품으로
는 그밖에 <베스트셀러> <결혼하는 엄마> <일대 역전> 등이 있다.
  
  -생각 코너-
  메리 케이 애시의 화장품 회사의 마스코트는 어리호박벌이다.
  "어리호박벌은 날개는 작은데 몸이 무거워서, 공기역학적으로는  당연히 날 수 없어야 돼
요. 그런데도 어리호박벌은 그걸 모르니까 어떻게 해서든 날아다니죠."
  
      육성 고백
      다른 일에는 결코 만족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진퇴양난에 빠져 있었다. 한편으로는 간호사가 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하루에 네 시간씩 공부하는 게 너무도 싫었기 때문이다. 내가 공부에 흥미를 느
끼지 못하는 것은 성적표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열 아홉 살 때 간호학교에 들어갔지만,  1
학년 때 낙제했고, 이듬해에도 마찬가지였다. 
  간호학교에는 내가 평생 잊지 못할 선생님이 계셨는데, 그분은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 
학생한테는 별로 인내심이 없었다. 공부에 열의가 없는 나는 불행히도 그 범주에  들어갔다. 
선생님이 나보고 이러셨다. 너는 간호사가 되는 데 필요한 자질이 없으니까 자퇴하는 게 낫
겠다고.
  그 말이 내 마음에 달라붙어 떠나지를 않는 것이었다. 나는  간호사가 될 자격이 없는 지
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로  낙제하자, 나는 정말로 간호사가 될 자격이  없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두 번씩이나 낙제한 게  너무 창피해서, 나는 가족과 친구들을 떠나  다른 
도시로 이사했다. 내 인생에 대해 생각해 볼 시간이  필요했다. 일자리도 구해야 했다. 나는 
병원을 좋아했기 때문에 의사의 말을 글로 받아적는 일거리를 얻었다. 일은 그런 대로 해냈
지만, 간호사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다른 일에는 결코  만족할 
수 없으리라는 게 분명해졌다. 하지만 간호사가 되고 싶다는 소망 못지 않게 또다시 실패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나를 짓눌렀다.
  그 후 5년 동안 나는 해마다 간호학교로 돌아갈 계획을 세우곤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실
패에 대한 두려움이 내 발목을 잡았다. 등록기간이 되면, 나는 등록하지 않을 핑계를 수없이 
찾아내곤 했다. 일이 너무 바쁘다느니, 등록금을 낼 여유가 없다느니, 직장에서 나를 필요로 
한다느니...
  몇 년이 지났지만, 나는 진정으로 원하는 것에 한 발짝도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다. 혼자서
는 내가 원하는 것에 다가갈 용기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하느님께 도움을 청했다.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나는 성경을 읽기 시작했고, 친구들이 권해
준 책을 읽으면서 '긍정적 사고'라는  개념을 알게 되었다. 신앙심이 강해졌고,  그와  함께 
용기와 자부심도 강해졌다. 하느님이 도와주신다면 내가 못할 일은  없다는 믿음이 차츰 나
를 강하게 만들어 주었다. 
  1978년이 되고, 간호학교 등록이 시작되었을 때, 나는  학교 문을 들어섰다. 겁이 났냐고? 
물론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하느님이 끝까지 도와주실 거라고 확신했다.  2년 뒤, 나는 반
에서 5%안에 드는 우수한 성적으로 간호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행복하게도 그때부터 지
금까지 줄곧 간호사로 일하고 있다. 
  내가 신앙을 찾고, 자신감을 얻고, 다시 한 번 시도해 볼 용기를 얻는 데 무려 5년이란 세
월이 걸렸던 것이다.
  
  수잔 로비슨은 플로리다 주 올랜도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다.
  그 사실을 깨닫기 전부터 나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
  나한테 불가능한 일은 없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다.
  나는 보통 사람보다 갑절로 위대한 사람이다.
  그렇지 않다고는 말하지 말라.
  무하마드 알리(프로 권투 선수)
  
    실행 계획: 신념으로 가는 여행
  당신은 이제 목표를 확인하고, 열정을 불태울  수 있는 단기 목표를 세웠다. 그렇다면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준비는 끝난 셈이다. 모닝커피를 마시면서  친구에게 당신 생각을 말
해 보라. 첫마디가 끝나기도 전에 친구는  당신 말을 가로막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자네가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 지는 알겠지만, 그건 전에도 시도했다가 실패하지 않았느냐고. 아무래
도 지금은 그렇게 함부로 나설 때가 아닌 것 같다고.  곰곰이 생각해 보면 자신감이 흔들릴 
것이다. 이 일은 내 계획보다 좀 어려운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애당초 그렇게 터무니없는 생각을 해낸 것을 일시적인 열광 탓으로 돌리지 않고 그날 하
루를 끝낸다면, 당신이 승리했다고 생각해도 좋다. 당신의 꿈은 갓 태어났을 때가 가장 취약
할 게 분명하다.
  당신의 꿈을 살리기 위해서는 신념 체계를 강화하고 취약점을 최소화하는 조치를  취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적절한 식이요법과 운동과 휴식으로 신체의 면역 체계를 강화할 수 있
듯이, 신념 체계도 키우고 강화할 수 있다. 다행히도 우리는 특정한 행동을 통해 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불굴의 신념 체계를 개발하는 10단계
      제1단계-당장 행동에 나서라
    행동을 취하는 것과 신념 체계를 강화하는 게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생각할 지 모르나, 
행동은 신념을 반영하는 법이다. 다시 말해서, 당신의 행동은 당신이 무엇을 믿고  있는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당신은 아주 사소한 행동으로도 당신이 자신과 꿈을 믿고 있다는 것을 당
신 자신과 이 세상에 알릴 수 있다. 
  처음에는 불굴의 의지는 고사하고 용기와 자신감도 부족한 것처럼 '느낄 지' 모른다. 그러
나 일관성 있는 행동을 취하면, 결국에는 영혼 밑바닥까지  자신감으로 충만한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될 것이다. 당신이 취하는 행동 하나 하나가 자부심과 자신감을 높여준다. 당신은 더 
이상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기를  막연히 기다리며 허숭세월 하지 않게  된다. 당신 자신이 
그 '기적'을 만들어 내는 창조자다. 자부심이 높아지면 꿈을 이루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유명한 화장품 회사 설립자인 메리 케이 애시는 동료들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성공할 때
까지는 성공한 척하라"고. 그녀는 엄청난 비결을 하나 알고 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이상형
이 있고, 자신도 그 이상형처럼  되기를 바란다. 그런데 자신을  그런 이상형으로 상상하고, 
이상형이 된 '듯이' 연기를 하다  보면, 조만간 그것은 연기가 아니라  실제가  되어버린다. 
자기가 꿈꾸던 이상형이 실제로 되는 것이다. 불굴의 인간이 되고 싶거든, 당신이 자신을 믿
는다는 사실을 세상에 보여주라. 자신만만하게 행동하라. 확신을 가지고 행동하라.
  실행: 꿈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여러 가지 행동 가운데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한 가지 행
동을 종이에 적으라. 그리고 지금 당장 그 행동을 실천에 옮기라!
  
      제2단계-아직 개발되지 않은 당신의 잠재력을 인정하라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보통 사람들은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능력의 일부밖에 이용하
지 못한다. 우리는 가진 능력을 거의  이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할 수 있고 지금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는 엄청난 잠재력을 자기고  있
다. 먼저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실행: 현재의 능력을 있는 그대로 평가하라. 그런 다음,  그 능력이 10% 쯤 늘어났다고 
상상하라. 당신의 능력이나 기술이나 재능이 지금 당장 10%늘어난다면 당신은 무엇을 하겠
는가. 당신의 잠재력을 믿고, 여태까지  당신이 안주해 왔던 영역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난다
면, 오늘 당장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믿는 자에게 불가능한 일은 없다."
  마가복음 9장 23절
  
      제 3단계-내면의 목소리를 경계하라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은가?  매사에 '그러나'를 연발하고 있지는   않은
가? 
부정적인 생각은 떠오르자마자 잘라 버리는 게 중요하다. "만사는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
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생각하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하지만 
목표 달성이 어렵다는 생각에만 계속 몰두하면, 그 목표는 영영 이루지 못할 것이다. 
  가능성에 주의를 집중시키면 부정적인 생각을 몰아낼 수 있다.  우리의 말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보다. 힘겨운 목표를 생각한 다음, 자신에게 이렇게  말해 보라."도대
체 이런 목표를 어떻게 이룰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목표가 너무 커. 너무 어려워.  도저
히 불가능해! 내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지?"
  귀에 익은 소리처럼 들리지 않는가? 당신은  이런 내면의 대화를 한 번도 해보지  않았을 
지 모르나, 나는 그런 내면의 목소리와 수없이 싸워야  했다. 그런 생각이 마음에 떠오르면, 
다음과 같은 내면의 대화로 당장 바꿔 치우라. "내 목표는 절대 불가능한 게 아니야. 전에도 
이 목표를 이룬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나라고 못할 게 뭐  있어? 나는 반드시 이 목
표를 이루어야 돼. 나의 진정한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거야."
  이 두 가지 대화의 차이점을 깨달을 수 있는가? 첫 번째 대화를 너무 오래 계속하면 결국
은 곤경에 빠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두 번째 대화는 당장 의욕을 되살려,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로 당신을 데려가 줄 것이다. 그런 긍정적인 정신 상태에서는 자신에게 더 나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목표를 이루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지?  나를 도와줄 만한 사람이 
누구일까? 다른 방향에서 이 문제에 접근하면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실행: 당신이 일상적으로 거듭하는 부정적인 내면의 대화 몇 가지를 종이에 적어 보라. 
그 대화를 어떻게 수정하면 당신의 생각과 그 결과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 생각
해 보라. 예를 들면 "왜 하필 나야?"라든가 "나는 왜 못하지?"라고 묻지 말고, "어떻게 하면 
형세를 호전시킬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  인생을 바꿀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사태를 
개선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 소망을 이룰 수 있을까? 라고 자문해 보라. 그러면 당장
에 관심의 초점이 바뀌고, 힘이 솟아날 것이다.
  
  "나는 부정적인 생각을 모조리 몰아내려고 애썼어요. 신념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그 책에  
  나온 대로 신념을 발동시켜 그냥 계속 믿으려고 애썼답니다."
  재키 조이너 커시
  
      제4단계-두려움과 위험을 중화시키라
    두려움은 변화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사람들이  새로운 일에 나서기를 망설이고 
과거의 방식, 즉 안전하고 현안하고 익숙한 방식을 택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 두려움 때
문일 것이다. 미지의 영역으로 들어갈  때는 '누구나' 두려움을 느낀다는  사실을 깨닫는 게 
중요하다. 두려움은 우리가 맞설 준비를 해야 하거나 달아날 필요가 있는 사실에 대해 우리
의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한 자연스러운 생리적 반응이다. 하지만  이 두려움에 어떻게 대응
하느냐가 성공과 실패를 결정짓게 된다. 성공한 사람과 실패한  사람의 차이는 바로 그것이
다. 성공한 사람은 두려움을 인정하고, 그 두려움의 원인과  맞선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앞
에 놓인 난관을 이겨낼 수 있는가를 생각한다. 자신이 가장 유능한 사람처럼 느껴지고 가장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해주는 행동이 어떤 것인지를 판단한다.
  내가 두려움을 처리하는 방식은 철저한 준비다. 나는 언제나  이 전략을 가지고 두려움과 
맞서 왔다. 큰 거래가 걸려 있는 중요한 제품 설명회에서  상품을 소개하거나 많은 청중 앞
에서 연설할 때, 나는 절대로 '즉흥  연기'를 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겁이 나고  주눅이  들 
수 있지만, 철저히 준비하면 할수록 자신감이 생긴다.
  릴리 윌터스는 <강사의 성공 비법>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연습과 준비는 두려움
의 75%를 줄여줄 수 있다. 심호흡을  하면 두려움의 15%가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10%는 심리적 준비를 통해 이겨낼 수 있다." 이  비율은 당신의 정신 상태에 큰 영향을 미
칠 수 있다.
  두려움을 이겨내려면 두려워하는 대상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그렇게 위험을 무릅써야
만 자신감을 키울 수 있다. 코넬 대학에서 노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어느 연구 조사는 노인
들에게 지나온 인생에서 후회스러운 점이 있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 결과, 늘 하고 싶었던 
일을 하지 못한 게 가장 후회스럽다는 대답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노인들을 괴롭힌 것은 그
들이 무릅쓴 위험이 아니라 무릅쓰지 '않은' 위험이었다.
  당신도 두려움 때문에 그런 후회를 남겨서는 안 된다. 두려움을 인정하라. 두려움에  대비
하라. 그리고 행동하라.
  
    실행: 목표 달성을 가로막고 있는 두려움의 실체를 확인하라.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당
신이 준비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판단하여, 두려움을  중화시키라. 그런 다음, 그 준비에 
몰두하라. 결과가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해도 당신의 용기를 자축하고, 그 경험에서  무엇을 
배웠는가를 생각하라. 계획을 수정해서 다시 한 번 시도해 보라. (제 4장에서는 불굴의 계획
을 만들기 위한 단계별 과정을 논할 것이다.)
  
  "여러분은 신의 자식입니다. 시시하게 노는 것은 세상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꽁무니를 빼면 조금도 세상에 빛을 던져주지 못하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여  
   러분 곁에 있어도 조금도 불안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신의 영광을 증명하도록 태어났습니다.  신의 영광은 일부만이 아  
  니라 모든 사람에게 깃들여 있습니다. 우리의 빛이 빛나게 하면,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다  
  른 이들도 그 영향을  받아서 내면의 빛을 발할 수  잇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두려움에서  
  해방되면, 우리의 존재는 자동적으로 남을 해방시키게 됩니다." 
  넬슨 만델라
  
      제 5단계-성공을 마음속에 그려 보라
    로버트 케네디는 조지 버나드 쇼의  말을 빗대어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왜'라고 묻는다. 나는 사물의  가능성을 보고 '왜 안돼?'  라고 묻는다." 
이 말은 한계에 싫증이 나 있는 사회, 잠재력을 재발견하고 싶어하는 사회의 찬송가가 되었
다.
  모든 가능성을 마음속에 그려보는 것은, 단순히 가능성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그
것을 눈앞에 그려보는 것이다. 이 상상의 과정을 시각화라고 부른다. 원하는 일이 실제로 일
어나기 전에 시각화하는 것은 목표를 달성한 사람들이 사용하는 가장 효과적인 전략 가운데 
하나다. 그들은 열정에 다시 불을 지피고, 단기 목표를  명확히 하고, 신념을 강화하기 위해 
시각화 전략을 사용한다. 
  예컨대 강사로 성공하고 싶으면, 우선 많은 청중 앞에 서  있는 당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
라. 열심히 경청하는 수백 명의  청중 앞에서 유창하게 연설하고 있는  당신을 눈앞에 그려 
보라. 자신 있고 활기찬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당신 용기를 북돋워주는 사람들의 박수 갈채
를 들어 보라. 청중의 열광과 호응을 느껴 보라. 연단에  놓여 있는 꽃향기를 맡아 보라. 물 
잔에 담겨 있는 시원한 냉수를 맛 보라.
  당신이 지니고 있는 풍부한 상상력을 해방시키기만 하면, 그렇게 생생하고 선명한 환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목표를 정하면 그것을 최대한 상세하게  시각적으
로 눈앞에 그려 보라. 당신이 원하고 기대하는 대로 그 일이 일어난다고 상상해 보라.  마침
내 목표를 달성했을 때 "내가 전에도 이걸 경험해 보지 않았던가?" 하는  생각이 들만큼 강
력한 환상을 만들어내라. 그렇다. 당신은 상상 속에서 수천 번이나 그것을 경험했고, 그때마
다 그 경험은 점점 사실적이 되었다. 
  마틴 쇼트는 여덟 살 때부터 규칙적으로 시각화를 실행했다. 그는 연예인이 되는 것을 상
상했다. 틈만 나면 다락방에서 '마틴 쇼트 쇼'를 공연하고 했다. 노래를 부르고, 사람들을 인
터뷰하고, 열정적인 공연이 끝나면 박수갈채가 녹음된 레코드를 틀었다. 심지어는 누구를 초
대손님으로 부를 것인가를 타자로 쳐서 자신만의  <TV 가이드> 용 명단을 만들기까지 했
다. 그가 연예인으로 성공한 것은 시각화가 지닌 위력을 실증해 준다.
  
    실행: 당신의 목표와 열정을 뒷받침해 주는 특정한 단기 목표를 확인하라. 그 목표를 이
루고 있는 자신을 자세히 상상해 보라. 그 순간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옷을 입고 있는
지, 누구와 함께 있는지, 날씨는 어떤지, 당신 자신은  어떤 기분을 느끼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라.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도저히 저항할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인 환상을 만들어  내
라. 그런 다음, 당신이 상상한 것을 종이에 적어 두거나 카세트 테이프에 녹음해 두라. 녹음
할 때, 배경음악이나 평화로운 자연의 소리를 추가하면 더욱 효과를 높일 수 있다. 
  날마다 종이에 적어둔 것을 읽거나 테이프를 들으라. 그러면  당신의 신념과 자신감을 차
츰 강해질 것이다. 신념이 강해지면 더 많은 행동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오래지 않아 당신
은 확고한 불굴의 신념을 가지고, 그 바탕 위에서 행동하게 될 것이다.
  
  "성공은 하나의 정신 상태다. 성공하기를 원한다면, 먼저 당신을 성공한  사람으로 상상하  
  는 일부터 시작하라."   조이스 브라더스 박사
  
      제 6단계-긍정하라
    베스트셀러인 <생각할수록 부자가 된다>를 쓴 나폴레온 힐은 잠재의식에 대해  적극적
인 긍정을 되풀이하는 것이 신념을 키우는 훌륭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자신에 대한 긍정
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면, 결국 당신은 그것을 믿게 된다.
  
    실행: 당신이 이루고 싶은 일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목록으로 만들라. 그런 다음 조용한 
곳으로 가서, 눈을 감고 그 목록을 큰 소리로 암송하라. 암송하면서 목표를 이룬 당신  자신
을 상상하라. 아침저녁으로 되풀이하다 보면,  자신이 점점 목표에 다가가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목표가 적힌 종이를 복사해서, 아침저녁으로 볼 수 있는 곳에 붙여 두라.
  
  "무릇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의 됨됨이도 그러하리니."   잠언 23장 7절
  
      제 7단계-신념을 공유할 사람을 찾으라
    어려운 시기에는, 긍정적인 사람들이 당신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준다해도 긍정적인 사
고를 유지하기가 어렵다. 하물며 부정적인 사람들과 어울리면 당신의  꿈은 죽은 거나 마찬
가지일 수 있다. 이 책에 실린 주인공들은 대부분 그들의  꿈을 뒷받침해 주지 못하는 부정
적인 사람들을 싫어했다. <에보니>지는 창간한 존 존슨(제6장에 나올 것이다)은, 그가 목표
를 이루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말한 직원들을 모조리  해고해 버렸다. 1996년 애틀랜
타 올림픽 조직 위원장인 빌리 페인(이 사람의 이야기는 제  5장에 나올 것이다)도 그의 꿈
이 실현될 리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과는 상대도 하지 않았다. 전문가나 조언자도 예외는 아
니었다. 당신도 그들을 본받는 게 현명하다.
  부정적인 사람들을 당신의 인생에서 모조리 몰아내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당신의 부모
나 형제자매, 직장 동료, 가장  친한 친구, 심지어는 배우자까지도  당신에게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오랫동안 당신을 알아왔기 때문에, 당신의 현재 모습이
나 미래의 모습이 아니라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당신을 판단할 것이다. 예컨대 당신이 브로
드웨이에서 공연하고 싶다는 꿈을 형에게 털어놓으면, 형은 당신이  학예회 연극에 처음 출
연했을 때 무대에서 넘어진 일을 기억해 낼 것이다.  붙박이장을 만드는 회사를 차리겠다고 
어머니한테 말하면, 어머니는 당신이 어린 시절에 벽장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던 일을 기
억해 내고는, 벽장에 가득 들어 있는 물건이 쏟아질까 봐 벽장문을 함부로 열지도 못했었노
라고 말할 것이다. "예언자는 고향에서 존경받지 못한다"는 말은 만고의 진리다.
  때로는 전혀 모르는 사람한테 지지를 받기가 더 쉽다. 모르는  사람은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나 할 수 없는 일에 대한  선입견을 갖고 있지 않다. 제6장에서는  당신의 꿈을 지지해 
주는 사람들과 만나서 팀을 짤 수 있는 방법을 논할  예정이다. 우리는 누구나 자기를 믿어
줄 사람이 필요하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그 역할을  맡기에 가장 적합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 역할의 적임자를 찾아내는 것이다.
  
    실행: 주변 사람들의 명단을 작성하라. 당신의 꿈을 지지해 주고 격려해 줄 수 있는 사
람을 확인하라. 그런 사람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거든 제 6장을 읽어 보라. 그러면 그런 사람
들을 만나기에 가장 좋은 곳이 어딘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꿈을 실현하는 초기 단계에서는 
당신을 지지해 주는 사람한테만 그 꿈을 털어 놓으라.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길에는 부정적
인 사람들이 수없이 나타나 앞길을 가로막을 게 분명하다. 당신의 꿈이 구체적인 형태를 이
루고 당신의 믿음이 좀더 강해지면,  그 때 당신은 당신의 계획을  방해하는 그런 부정적인 
사람들을 좀더 잘 다룰 수 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처음에는 사람을 가려서 말하라.
  
  내가 만나본 사람들 가운데 하나는 내가 부정적인 생각을 '독처럼' 다룬다고 말했다. 그렇
다. 부정적인 생각은 혈액 속에 들어간 독처럼 작용한다.  그 힘에 굴복하면, 당신의 자신감
은 약해지고 꿈은 죽어버릴 것이다. 그런 일을 허용하기에는  당신의 목표가 너무나 중요하
다!
  
      제8단계-더 높은 힘에서 용기를 얻으라
    불굴의 인간들은 대부분 신에게서 힘을 얻었다. 신에게 의지함으로써 온갖 장애와 회의
를 이겨낼 수 있었다. 나는 두 가지 믿음에서 힘을 얻었다. 하나는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신
다는 믿음이다. 또 하나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고, 결국에는  그 
이유가 나에게 도움이 될 거라는 믿음이다. 어떤 역경 속에도 그에 못지 않은, 또는  그보다 
더 큰 이익을 가져다줄 씨앗이  들어 있다는 믿음을 키우면, 경험에서  교훈을 얻고 미래에 
대해 희망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실행 : 노먼 빈센트 필 박사는 <긍정적 사고의 힘>이라는 책에서 "하느님은 나와 함께 
계신다. 하느님은 나를 도와주신다. 하느님은 나를 인도해 주신다"는 말을 날마다 수없이 되
풀이하라고 권한다.
  하느님이 당신과 함께 있으니 세상의  그 무엇도 당신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라. 
조물주가 당신에게 힘을 준다고 믿으라. 이런 말을 날마다 몇 번씩 되풀이하고 하느님의 존
재를 상상하면, 당신의 신념은 더욱 강하고 깊어질 것이다.
  
  "신앙은 나한테 대단히 중요합니다. 나는  모든 일을 혼자 힘으로  해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나는 어려운 상황에 얼마든지 맞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보다 훨씬 강한 힘  
  의 원천이 존재하는 것을 느낍니다. 무거운 짐을 나 혼자 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엘리자베스 돌
  
 당신을 해야 할 일이 많을 것이다.
그 많은 일을 어떻게 다 하나 싶을 때도 있을 것이다....
당신이 걷는 길이 험할  때도 많을 것이다.
넘을 수 없는 언덕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명심하라. 앞을 가로막은 언덕은 
결코 겉보기만큼 가파르지 않다.
마음속에 신념을 가지고 올라가라.
꿈을 이룰 때까지 계속 올라가라.
  
인생에서 가치 있는 일 가운데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이 신념을 가지고 노력한다면, 
신념을 가지고 굳게 믿는다면....
  
신념은 지식이나 권력이나 기술보다 
더 위대한 힘이다.
많은 실패는 승리로 바뀔 것이다.
하느님의 지혜와 의지를 믿는다면....
  
신념은 산도 움직인다.
하느님이 할 수 없는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마음속에 신념을 가지고 오늘 당장 시작하라.
그리고 꿈이 실현될 때까지 계속 올라가라.
헬렌 스타이너 라이스, '꿈이 실현될 때까지'
  
      제9단계-비판과 거절에 대처하라 
  
    "나는 불가능한 일을 모르는 무한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찾고 있다."  헨리 포드
  
    "사람은 누구나 비판적이다"라는 말이 있다. 당신이 꿈을 추구하면서 남의 도움을 얻으
려고 애쓸 때만큼 그것을 절감하게 되는 순간은 없을 것이다. 당신을 '비현실적인 환상'에서 
'보호'해 주고 싶어하는 선의의 사람들은 늘상 있게 마련이다.  이 책에 실린 주인공들은 대
부분 비판적인 사람들의 방해를 받았다. 그들은 꿈을 추구하는 이들을 단념시키려고 애쓴다. 
꿈을 추구할 자격이 없다고 말하기도  하고, 발상이 너무 엉뚱해서 제대로  될 리가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 제품을 누가 사겠느냐고 말하기도 한다.  너무 키가 작다거나, 너무 젊
다거나, 너무 이르다거나, 너무 늦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  책에 실린 주인공들은 모두 그런 
부정적인 의견을 무시하고, 결국 목표를 달성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당신의 꿈에 대한 당신 자신의  의견뿐이다. 남들의 부정적인 의견은 
'당신'의 한계가 아니라 '그들'의 한계를 반영할  뿐이다. 당신의 목표와 부합하고,  당신의 
열정에 불을 지피는 꿈,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인내할 마음이 내키는 꿈, 그것
은 어떤 꿈이든 간에 결코  비현실적이지 않다. 그런 정력과 열정을  가지고 일에 몰두하는 
사람이 성공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쪽이 오히려 비현실적이다. 
  
    실행: 예비조사를 하라. 부정적인 의견에 가장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방법은 당신이 이루
고 싶어하는 일에 대해 철저히  아는 것이다. 목표를 추구하는 동안  마주치게 될 문제들을 
미리 확인하라.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전략을 세우라. 지식과 계획으로 무장하면, 비판적
인 사람들이 아무리 쓸데없는 충고를 해도 자신감을 잃지 않고 훨씬 유리한 위치에서 그들
과 강력하게 맞설 수 있다.
  내가 책을 쓰겠다고, 그것도 보통 책이 아니라 베스트셀러를 쓸 작정이라고 말하자,  사람
들은 내 목표가 비현실적이라면서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그런 말
을 들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예비조사를  했기 때문에 그들의 충고를 받아
들이지 않았다. 나는 출판업계를 조사하고, 다른 베스트셀러 작가와 출판사들이 한 일을  바
탕으로 전략을 세웠다. 그들을 본받으면 나도 베스트셀러를 쓸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도 해
냈는데 나라고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다음 사람들도 나처럼 비판자들과 마주쳤다. 다행히 그들도 부정적인 충고에 귀를 기울이
지 않았다.
  
    비판자 코너
  "넌 도대체 언제까지 체육관에서 온종일 운동만 하면서 환상 속에서 살 거냐?"
  아놀드 슈워제네거의 가족은 미스터  유니버스가 되겠다는 그의 꿈을   이해하지 못하고,  
'번듯한' 직업을 가지라고 그를 야단쳤다.
  "지금 당장 회사를 청산하고 현금을  최대한 회수하세요. 안  그러면 결국  땡전 한푼 없 
는 빈털터리가 되고 말 겁니다."
  화장품 업계의 거물인 메리 케이 애시가 첫 번째 매장을 열기 몇 주정에 변호사가 한 말.
  "그 사업은 경쟁이 너무 치열해서 성공할 가능성이 전혀 없습니다."
  매출액이 수십 억 달러에 이르는 화장품 제국을 설립한 에스티 로더에게 회계사가 한 말.
  "이 바닥은 말이 너무 거칠고 여자용 화장실도 없습니다."
  뮤리얼 시버트가 1967년에 뉴욕 증권거래소의 주식 중개인이 되고 싶어했을 때, 증권거래  
소 직원의 반응, 그래도 그녀는 결국 주식 중개인이  되었고, 9년 동안 그 자리를  지킨 유  
 
일한 여성이 되었다.
  "당신의 목소리는 방송에 더없이 좋은  목소리지만, 비서 자리를 알아보는  게  좋겠어요.  
여기서는 여자를 쓰지 않으니까 말이오."
  샐리 제시 래피얼이 칼럼비아 대학을 졸업하고 NBC 라디오에 입사하려고 했을  때, 아나  
운서들이 한 말.
  "육상선수가 근력 운동으로  체중을 줄이면  속도와 순발력이  떨어진다. 보디빌딩은  치  
 
질과 헤르니아의 원인이 된다." 나중에  피트니스 전문가로서 텔레비전 인기  스타가 된 잭 
라랜을 '얼간이'라고 부른  건강 전문가들의 견해.
  "너는 피아노를 칠 수도 없고  노래를  부를 수도 없어. 차라리  의자 짜는  법을 배우는  
게 나을 거다. 그러면 그럭저럭 먹고 살 수는 있을 테니까." 맹인 가수 레이  찰스가 학교에 
다닐 때 선생님들이 한 말.
  "심야 프로그램으로 시청률을 올리는 건  보통 힘든 일이 아니야.  텔레비전 토크쇼를 흑  
인이 진행하는 건 시기상조야. 사람들은 아직 그걸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여긴  
미국이라구. 그걸 잊으면 안 돼."
아세니오 홀이 심야 토크쇼 진행을 맡아  달라는 파라마운트사의 제의를 받아들이기  전의  
 
'일반 통념'.
  "네 목소리는 좋지만, 특별하지 않아."
인기 가수 다이애나 로스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교내에서 공연하는 뮤지컬 배역을  얻으려  
고 오디션을 받은 뒤, 담당교사가 로스를 불합격시키면서 한 말.
  "당신은 금발도 아니고 푸른 눈도 아니니까, 절대로 <보그>지의 표지 모델을 될 수 없  
을 겁니다." 사진작가 리처으 애버던이 셰어에게 한 말. 셰어가  표지에 모델로 등장하자 <
보그>지는 날개돋친 듯이 팔려서 사상 최고의 판매부수를 기록했다.
  "자네는 출판업계에서 장래가 촉망되는 훌륭한 편집자일세. 그런데 왜 그 모든 것을 내  
던지고 작가가 되려는 거지? 나도 자네가  쓴  책을 읽어보았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저 그  
 
래." 뉴욕의 어느 출판업자가 제임스 미치너의 처녀작 <남태평양>을  논평한 말. 이 작품으
로 미치너는 퓰리처 상을 받았다. 
  "콜라를 물처럼 마시는 나라에서 소다수를 팔려고 애쓰는 건 바보짓입니다."
구스타브 리븐이 미국에 발포성 광천수인 '페리에'판배 사업을 시작하려고 했을 때, 그 계  
획을 들은 컨설팅 전문가들이 충고한 말.
  
      제 10단계-전문가들에게 대처하라
  
    "초심자의 마음속에는 수많은 가능성이  있고, 전문가의 마음속에는  가능성이 거의 없  
    다." 스즈키 (학자)
  
    또 다른 부류의 비판자는 바로 '전문가'다. 이들은 부정적인 비판을 하는 사람들과는 좀 
다르지만, 그보다 훨씬 위협적이다. <웹스터>사전은 전문가를  '훈련과 경험을 통해 전문적
인 지식이나 기술을 가진 사람'으로  정의하고 있다. 예컨대 당신의  삼촌은 당신의 분야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지만 그 분야에서 당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해서는 훤히 알고 있다. 
이런 아저씨보다는 그 분야의 전문가가 훨씬 위협적일 수 있다.
  전문가들은 전문적인 식견을 제공할 수 있고, 정보나 지식의 공급원이 될 수도 있다. 하지
만 다음을 생각해 보라.
  
  전문 지식은 과거의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것은  미래의 혁신적인 발상에는 적합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전문가들은 창의력과 상상력이 풍부한 경우가 거의  없다. 선구자와 혁신자들은 직관을  
  이용하는 반면, 전문가들은 데이터를  이용한다. 그 데이터는 과거의 모델에는  적용될 지  
  몰라도 현재나 미래의 모델과는 관련성이 없을 수도  있다. 실업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  
  물 가운데 하나인 피터 드러커는 이렇게 말했다. "시장조사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존재하  
  지도 않는 것에 대해 시장조사를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꿈꾸는 자의 영역은 아직 증명  
  되지 않은 가능성의 세계이고, 그 영역은 전문가에게는 낯선 지역이다.
  전문가들은 현상 유지에  기득권을 가지고 있다. 진  랜드럼은 <천재들의 프로필>에서   
  그 점에 관한 통찰을  제공하고 있다. "전문가들의 견해가  지니고 있는 문제점은 그들이  
  현재의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고자  하는 강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그들의 전문 분야에 자신을 투자했기 때문에 현상을  유지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  
  들이 현재의 방식을 파괴하려고 애쓴다면, 그것은 본질적으로 그들 자신의 신뢰성을 파괴  
  하게 된다. 따라서 전문가들은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다. 토머스 쿤이 <과학 혁명의 구조  
  >(1959년)에서 어떤 새로운 개념이  받아들여지는 데 30년이 걸린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다. 나이 든 과학자들은 죽을 때까지 그들의 믿음에 어긋나는 새로  
  운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실증한 연구도 있다."
  
  그리 멀지 않는 과거에 전문가들이 공상적인 기업가에게 제시한 실제 의견을 살펴보자.
  
  "텔레비전 화면 앞에 서서 핀볼처럼 신체적 활동이 없는 게임을 즐길 사람은 아무도 없  
  을 거요."
  '에터리'를 창업한 놀런 부시넬이 최초의 비디오게임인  '퐁'을 실제로 사용하여  제품을 
설명했을 때, 그것을 본 회사 경영자가 한 말.
  "녹음도 안 되는 테이프 플레이어를 살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소니' 회장인 모리타 아키오가 워크맨을 처음  제안했을 때, 시장 조사원들이 내놓은 의
견.
  "위험이 너무 크고, 절대로 날지 못할 것이다."
  빌 리어가 설계한 제트기에 대한 항공공학자의 평가.
  "개인용 컴퓨터는 도락에 열중하는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열광하는 대상일 뿐이다."
  IBM과 인텔, HP, 애터리를 비롯한 수많은 컴퓨터 회사의 예언.
  "사람들은 비디오 테이프를 빌려 보긴 해도, 구입하지는 않을 것이다."
  미디어 전문가들의 이같은 견해는 나중에 제인 폰다의 운동 테이프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  
  면서 잘못된 것으로 입증되었다.
  "전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24시간 뉴스 네트워크는 절대로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CNN을 세우겠다는 테드 터너의 계획에 대한 네트워크 경영자들의 반응.
  "그건 전혀 시장성이 없습니다. 시장성이 있다면  주요 항공사들이 벌써 상품으로 내놓  
  았을 겁니다. 더구나 믿을 만한 여행업자를 찾아내지 못할 겁니다."
  '페더럴 익스프레스'를 창업한 프레드 스미스에게 컨설팅 전문가들이 제시한 결론.
  
    실행: '전문가'가 당신의 꿈을 공격하거든,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을 이룬 사람
들도 그들의 목표가 실현 불가능하다는 말을 들었다는 사실에서  위안을 얻기 바란다. 당신
의 직관과 소망을 믿고 계속 전진하라. 위험을 무릅쓰고 미지의 것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낼 
때마다 당신의 자신감은 커질 것이다.
  
  불굴의 인간이 되는 것은 전문가들의  평가나 과거의 경험, 업계에서의  경력이나 IQ와는 
거의 관계가 없다. 당신의 꿈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추진력은 지적능력이나 이치가 아니
라, 직관과 상상력과 신념이다. 대담한 신념은 놀라운 힘을 지니고 있어서, 비판자나 전문가
들도 당신이 거둔 성과에 깜짝 놀랄 것이다.
  
  자신을 믿으라. 그러면 남들도 당신을 믿을 수밖에 없는 날이 올 것이다.       
    네 번째 특징 
    '준비' 는 성공의 토대를 만든다. 
  계획하기는 제4장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성공에 필수 불가결한 요소였다.  그들은 계획을 
세우고, 시장을 조사하고, 남들에게 기꺼이 조언을 청하고, 정보를 수집하고,  기술을 개발하
는 등, 꿈을 실현하기 위해 철저히 준비했다. 기회가 왔을 때 그들은 이미 준비가 끝나 있었
다. 
  보통 사람들은 진정한 장래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다. 꿈이나 희망은 있을지 몰라도 계획
은 없다. '실행 계획' 에서는 목표로 삼은 꿈을 명확한 형태로 구체화시키고 인생 계획을 단
계별로 체계화하는 방법에 관해서 논할 예정이다.   
  
  "한 걸음에 성층권으로 도약할 수는 없습니다.
  피라미드도 한 걸음씩 천천히 힘겹게 올라가야만 꼭대기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벤 스타인
  
      계획하는 인생은 보상을 가져다준다.
      그가 판 것은 햄버거가 아니라 희망이었다.  
  
  "자네 미쳤군!"
1971년 리 던 햄이 경찰관이라는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고 평생 모은 재산을 위험부담이 큰 
요식업에 투자했을 때, 친구들은 한결같이 그렇게 말했다. 특히 그가 차린 식당은 그저 사업
이 망하는 정도로 끝나는 게 아니라 목숨까지 잃을 수도  있었다. 그의 식당은 뉴욕 시내에
서도 범죄 소굴로 유명한 할 렘 한복판에 처음 생긴 `맥도널드` 체인점이었기 때문이다.  리
는 줄곧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이 브루클린의 공터에서 공놀이를 할 때,  리는 
장차 사업가가 될 계획을 세우고, 그 밑천을 모으기 위해  우유 병을 모아서 식품점에 돌려
주는 일을 했다. 구두닦이와 신문배달도 했고, 식품점에서  종업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일찍
부터 그는 어머니에게 약속했다. 언젠가는 어머니가 생활비를 벌기 위해 남의 옷을 빨지 않
아도 되는 날이 올 거라고. 언젠가는 자기가 사업을 시작해서 어머니를 부양하겠다고.  그러
면 어머니는 "입 닥치고 숙제나 해"라고 말하곤 했다. 던햄 네 가족 중에는 가게를 가진 사
람이 하나도 없었다. 사장은커녕 평생을 뼈빠지게 일해야 하는  노동자 신세를 벗어난 사람
도 없었다. 어머니는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네가 가게를  낸다고? 그건 절대로  불가능
해." 몇 년이 지났지만 꿈을 꾸고 계획을 세우는 리의 버릇은 여전했다.  고등학교를 마치자 
그는 공군에 들어갔다. 군대에 있는 동안 언젠가는 레스토랑을  열겠다는 꿈이 구체적인 형
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는 공군 조리학교에 들어가 열심히 노력한 끝에, 장교식당  요리사
로 발탁될 만큼 뛰어난 요리사가 되었다. 제대한 뒤에는 뉴욕의 유명한 `월도프 애스토리아 
호텔`을 비롯하여 여러 식당에서 4년 동안 경험을 쌓았다. 리는  식당을 시작하고 싶었지만, 
아직은 경영 기술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실업학교에 들어가 야간  수업을 받으면서 
경찰관 모집에 지원하여 순경으로 채용되었다.  그는 15년 동안 경찰관으로 봉직했다. 비번
일 때는 부업으로 목수 일을 하면서  실업학교에 다녔다. 그 시절을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경찰관 봉급을 고스란히 저축했습니다. 10년 동안 한푼도 쓰지 않았어요. 영화도 보지 
않았고, 휴가도 가지 않았고, 야구장에도 가지 않았습니다. 나한테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일
과 공부,  그리고 내  가게를 갖고야  말겠다는 평생의  꿈뿐이었어요."   1971년까지 리는 
42,000달러를 저축했다. 마침내 꿈을 실현할 때가 온  것이다. 리는 브루클린에 고급 레스토
랑을 내고 싶었다. 그는 사업 계획서를 들고 융자를 받으러 다니기 시작했다. 은행에서는 대
출을 거절했다. 레스토랑을 낼 자금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리는  체인점으
로 방향을 돌려 여러 곳에 신청서를 냈다. `맥도널드`가 그에게 독점 영업권을 주겠다고 제
의했지만, 한 가지 조건을 달았다. 체인점을 도심에 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그때까지만 해
도 도심에는 `맥도널드` 체인점이 하나도 없었다. `맥도널드`는  도심에서도 그런 유형의 패
스트푸드점이 성공할 수 있는지 알고 싶어했다. 리는 그  최초의 체인점을 운영할 적임자로 
여겨졌다.  독점 영업권을 얻으려면 평생 모은 돈을 몽땅 투자하고도 15,000달러를 더 빌려
야 했다. 그 동안 그는 한 가지 목표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그 오랜 세월을 바쳤는데, `맥도
널드`가 제시한 조건을 수락한다면 그 모든  것을 걸고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야  할 터였
다. 게다가 친구들의 말에 따르면 그것은 아주 가느다란 줄이었다. 리는 결정을 내리기 전에 
몇 날 며칠을 잠도 못 자고 고민을 거듭했다. 결국 그는 준비에 투자한 세월 꿈을  꾸고, 계
획을 세우고, 공부하고, 저축하면서 보낸 세월을 믿고, 미국 최초로 도심에서 `맥도널드`체인
점을 운영한다는 계약서에 서명했다.  처음 몇 달은 재난의 연속이었다. 그의 식당은 갱들의 
싸움과 총격을 비롯한 온갖 폭력사건에 시달렸고, 손님들은 겁이 나서 발길을 끊었다.  종업
원들은 음식과 돈을 훔쳤고, 기회만 있으면  금고에 손을 댔다. 본사에서 아무 도움도  받을 
수 없는 것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본사 직원들은 겁이  나서 흑인 빈민가에는 발을 들
여놓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리는 모든 일을 혼자 힘으로 감당해 내야 했다. 리는 비록 음식
과 수익금과 자신감을 빼앗겼지만, 꿈만은  빼앗기지 않을 작정이었다. 리는 언제나  믿었던 
방법, 즉 준비와 계획을 다시 시작했다.  리는 한 가지 전략을 세웠다. 우선 `맥도널드`는 폭
력배들의 세력권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동네  깡패들에게 보냈다. 이 최후 
통첩이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범죄와 폭력을 대신할 대안을  제시할 필요가 있었다. 그 
아이들의 눈 속에서 리는 제 가족에게서 본 것과 똑같은  무력감을 보았다. 그는 그 동네에 
희망과 기회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아이들에게 증명해 보일 작정이었다.  그는 
지역 사회에 식사 이상의 것을 제공하기로 결심했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공하기로 한 
것이다. 리는 깡패들과 진솔하게 대화를 나누면서, 인생을  다시 설계하라고 요구했다. 그리
고는 그들을 고용하여 일을 시켰다. 이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는 도둑질을 근절하기 위해 종업원들을 엄격히 단속하고, 예고도 없이 신체검사를 
했다. 한편으로는 근로조건을 개선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종업원들에게 고객 서비스와 관리
를 가르쳤다. 그는 개인적이고, 직업적인 목표를 가지라고  종업원들을 격려했다. 그는 항상 
두 가지를 강조했다. 그의 식당은 꿈도 희망도 없는 빈민가의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는 탈
출구라는 것, 그리고 종업원들이 손님들에게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서비스할수록 그 탈출구
는 번창하리라는 것.  리는 길거리로 나와 헤매는 아이들을  시민회관과 학교로 들여보내기 
위해 지역 사회의 운동 팀을  후원하고 장학금을 기부했다. 그의 식당은  1년에 150만 달러 
이상의 매출을 올려, 세계 곳곳에 산재해  있는 `맥도널드`체인점 가운데 가장 많은  수익을 
올리는 식당이 되었다. 몇 달 전만 해도 할 렘에 발을 들여놓는 것조차 꺼렸던 본사 직원들
은 리가 어떻게 그 일을 해냈는지 알고 싶어서, 이제는  떼를 지어 리의 식당으로 몰려들었
다. 리의 대답은 간단했다. "손님과 종업원, 그리고 지역 사회에 봉사하라."  오늘날 리 던햄
은 아홉 군데의 식당을 소유하고 있고, 종업원은 435명에 이르며, 날마다 수천 명에게  식사
를 제공하고 있다. 어머니가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 세탁부 노릇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미 먼 옛날 이야기였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리가 수많은  아프리카 계 미국인들에게 
꿈을 실현하고 지역 사회에 봉사하고 희망을 키우기 위해 애쓰는 사업가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는 사실이다.  이 모든 것은 어린 소년이 꿈을 꾸고  계획을 세우고 미래를 준비
해야 할 필요성을 깨달은 덕분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인생만이 아니라 남들
의 인생도 바꾸어 놓았다.     
  
  "나는 언제나 좀더 훌륭하고 좋은 일을 하겠다는 꿈을 잃지 않았습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내 가족과 지역 사회를 위해서라도 그런 일을 하고 싶었어   
  요.
  당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시작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훌륭한 일을 하려면 사전에 계획과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 준비에 나는 15년 세월을 기꺼이 바쳤습니다."
  리 던햄
    
  벼락출세한 사람이 실제로 있는지는 모르지만, 
  성공은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성공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세 살 반 때부터였다.
  그해 부활절에 '코지어스코 교회'에서 연단에 선 것이 
  내 출세의 출발점이었다.
  그 후의 모든 연설, 내가 읽은 모든 책, 대중 앞에서 
  털어놓은 모든 경험은 벽돌처럼 차곡차곡 쌓여서 성공이라는 
  하나의 건물을 이루었다.
  내가 처음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서 오디션을 받을 때,
  누군가가 "이걸 읽어보시오"라고 말했다.
  그때 내가 그토록 편한 기분으로 원고를 읽을 수 있었던 것은 
  내가 그토록 오랫동안 그 일을 해왔기 때문이다....
  행운은 누구에게나 오는 것이 아니다.
  행운은 기회가 왔을 때
  그것을 붙잡을 준비를 갖춘 사람한테만 온다.
  오프라 윈프리
  
      승리는 준비하는 자의 것
      그는 어떻게 1루로 나갔고, 계속 달렸는가
    메이저 리그 스타가 될 가망이 거의  없는 야구선수 순위라는 게 있다면 1순위는  단연 
모리 윌스였다. 1950년에 `브루클린 다저스` 구단에서 입단 심사를 받았을 때 그는 키가 173
센티미터에 몸무게는 68킬로그램이었다. 이렇게 작은 체구로는 어떤 포지션도 맡기  힘들다. 
그는 대단한 단거리 선수였고, 유망한 투수였고, 훌륭한 야수였지만, 이렇다 할 안타는 치지 
못했다. `다서스`는 그와 재계약을 맺었지만, 기량을 더 쌓으라고 마이너리그로  내려보냈다. 
모리는 친구들에게 말했다. "2년 뒤에는 재키 로빈슨과 함께 뛸 테니까 두고 봐."  
  모리는 그렇게 자신만만했지만, 무려 8년 반 동안이나  마이너리그에 남아서 설움을 맛보
아야 했다. 하지만 마침내 마이너리그를 탈출하여 메이저리그로 올라갔을 뿐 아니라, 메이저
리그에서도 위대한 선수가 되었다. 그것은 인내와 준비,  그리고 끊임없는 훈련의 결과였다. 
그는 `다저스`구단에서 가장 낮은 등급인 D급으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D급 선수는 다음 
번 경기장으로 이동할 때 버스를 타야 하고, 인종차별이 심한 도시에서는 온갖 시달림을 받
아야 했다. 게다가 월급도 150달러에 불과했다. 그 쥐꼬리만한 월급으로는 점점 늘어나는 식
구를 먹여 살리기도 힘들었다. 그는 부족한 타격만 보완하면 메이저리그에서도 충분히 통할 
수 있다고 믿었다. 모리는 날마다 몇 시간씩 타격 연습을 계속했다. 하지만 몇 년 동안 몸이 
녹초가 되도록 힘든 연습과 훈련을 거듭했는데도 메이저리그 선수가 되기에는 아직도  한참 
부족했다. 
  그러나 모리는 포기하는 대신에 타격방법을 바꾸었다. 하루는 그가  타격 연습을 하고 있
는데, 감독인 보비 브래건이 왼쪽 타석에 서서 방망이를 휘두르는 모리를 유심히  관찰했다. 
보비는 모리가 커브 공에 머리를 맞을까봐 겁을 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커브 공을 치지 
못하면 결코 일류 선수가 될 수 없다.  보비는 모리에게 `스위치 히팅`을 시도해 보라고 했
다. 우완 투수가 등장했을 때 왼쪽 타석에서 배팅을 하면  공이 몸에 맞을까봐 겁먹지 않아
도 될 테니까, 오른손만이 아니라 왼손으로도 공을 치는 타격 법을 익히라고 제안한 것이다. 
보비는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오른손 타자로  7년 반 동안 슬럼프에 빠져 있었어.  밑져야 
본전이잖아. 내일 아침 일찍 구장으로 나오게. 내가 공을 던져줄 테니까." 이튿날 아침, 보비
는 다른 선수들이 도착하기 전에 몇  시간동안 모리에게 공을 던져주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다. 나흘 뒤, 모리는 스위치 히팅을 시도해 보고  싶어서 안달이 났지만, 보비는 홈구
장 팬들 앞에서 망신당하면 안  되니까 원정 경기를 떠날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했다. 보름 
뒤에 마침내 기회가 왔다. 모리는 안타 두 개를 쳐냈다. 
  그때를 회고하면서 모리는 이렇게 말했다. "다시 야구선수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그 두 개
의 안타는 메이저리그로 돌아가겠다는 내 꿈과 희망을 되살려주었지요."  시즌이 끝날 때까
지 모리는 유격수로서 수비 기술을 더욱 완벽하게 다듬었고,  스위치 히터로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그의 기량이 놀랄 만큼 좋아졌는데도 `브루클린  다저스`는 여전히 그를 메
이저리그로 끌어올리려 하지 않았다. 마이너리그 생활 8년째, 모리는 계속 보비와 함께 타격 
연습을 거듭했다. 처음 25게임에서 그는 도루 25개와 3할 1푼 3리의 타율을 기록했다.  그때 
마침 `다저스`의 유격수가 발가락이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기 때문에, 총감독은 그를 대신할 
선수를 찾고 있었다. 보비 브래건은 구단 본부로 전화를 걸었다.  "마땅한 유격수를 찾고 있
는 모양인데, 그 선수가 바로  이곳에 있어요." "모리 윌스요? 그  친구는 안 돼요. 그 동안 
계속 헛 방망이만 휘둘렀잖습니까." 이것이 구단 본부의 반응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완전히 
다른 선수가 됐어요." 
  `다저스`는 보비의 조언을 무시하고 탐색을 계속했다. 일주일 뒤,  마땅한 선수를 찾지 못
한 구단 본부는 어쩔 수 없이 모리에게 전화를 걸었고,  모리는 팀과 합류하기 위해 밀워키
로 날아갔다. 그후 두어 경기에서  모리는,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것은 마이너리그에서  뛰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뼈아픈 깨달음을 얻었다. 유격수로서 수비 솜씨는 훌륭했지만, 타격은 
아직도 메이저리그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 감독은 경기 때마다 두어 번 그에게 타격을 시켜
보고는 7회쯤 되면 그를 빼고 대타를 집어넣었다. 모리는 그때를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알
아차렸어요. 좀더 잘 치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다시  마이너리그로 쫓겨나리라는 걸 말입니
다." 하지만 모리는 마침내 꿈을 맛보았기 때문에, 다시는 마이너리그로 돌아갈 마음이 없었
다. 모리는 1루 베이스 코치인 피트 레이저를 찾아가서 도움을 청했다. 피트는 날마다  정례 
훈련이 시작되기 전에 두 시간 동안 모리의 타격 연습을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모리는 비
가 오든 눈이 오든 상관하지 않고,  날마다 연습을 계속했다. 나중에는 손에 물집이  생기고 
피가 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타격 솜씨는 여전했다. 7회에 대타로 교체
되는 것도 여전했다. 낙담한 모리는 마침내 은퇴를 생각했다. 피트는 은퇴를 허락하지  않았
다. 피트는 모리의 준비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부분이 빠져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동안 손과 팔, 타격 자세와 스윙은 철저히 연습했다. 어쩌면 가장 큰 장애는 모리의  자
신감이 아닐까. 그래서 피트는 훈련 방식을 바꾸었다. 연습 때마다 피트와 모리는 30분 동안 
공을 치고, 나머지 90분은 모리의 정신적 준비에 몰두했다. 피트는 외야에 앉아서 모리의 생
각과 태도에 주의를 쏟곤 했다. 피트는 모리에게 장담했다. 자네는 충분한 자질을 가지고 있
으니까 끈기 있게 훈련을 계속하면 언젠가는 그 노력이 열매를 맺을 거라고. 모리는 이렇게 
말했다. "10타수 무안타 상태에서 다시 타석에 나서기는 정말 힘들었습니다.  걸음을 떼어놓
기가 어려웠지요. 하지만 자신감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뒤에야 얻을 수 있고, 성공은  숱
한 연습과 준비를 거친 뒤에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보름 뒤에 모리는 처음으
로 안타를 쳤다. 그리고 두 번째 타석에서도 안타를 쳐냈다. 공포의 7회가 오자 모리는 어깨 
너머로 월터 올스턴 감독을 돌아보며, 덕아웃으로 돌아오라는 신호를 기다렸다. 그런데 올스
턴은 고개를 끄덕여 계속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모리는 또다시 안타를 쳐냈다. 8년 반  동안 
좌절을 겪은 뒤, 마침내 `최고의 상태`에 도달한 것이다. 이튿날  모리는 안타 두 개를 얻었
고, 그 이튿날에는 안타 네 개를 기록했다. 타율은 순식간에 치솟았다.  메이저리그 첫 시즌
에서 모리는 마침내 유격수 겸 타자로 자리를 굳혔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가 타고난 
최고의 재능, `빠른 발`은 아직 다  발휘하지 못했다. 모리는 상대 투수의 동작을  연구하고, 
상대 포수의 투구 시간을 재고, 효과적인 출발과 상대 선수를 속이는 절묘한 슬라이딩을 연
습하여 야구의 전당에 들어간 위대한 야구선수 타이 코브를 빼고는 야구 역사상 어떤 선수
도 따라가지 못할 도루 솜씨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다저스`에 합류한 뒤 두 번째 시즌에서 모리는 도루왕이 되었다. 도루는 투수의 정신을 
흩뜨리고 포수의 실투를 유발하는 모리의 특별 무기가 되었다. 게다가 그의 묘기를 보기 위
해 야구장을 찾는 팬이 수천 명이나 늘어났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모리가 `다저스`의 
승리에 이바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래도 모리는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더 많은 것을 
이루고 싶어했다. 타이 코브의 도루 기록을 깨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코브는 1915년에  156
게임에서 96개의 도루를 기록했다. 1962년의 정규시즌은 162게임으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모
리는 코브처럼 156게임만에 그 기록을  깨는 것을 목표로 정했다.  모리는 신들린 사람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슬라이딩을 너무 많이 해서 엉덩이에서 발목에  이르는 살갗이 모두 벗겨
질 정도였다. 피가 나고 멍이 들었지만, 그는 상처에 붕대를 감고 통증도 잊은 채 계속 달렸
다. 아무리 아파도 속력을 늦추지 않았다.  155번째 경기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팀과의 
원정 경기였다. 도루 한 개만 얻어내면 타이 코브와 동점 기록이 되고, 두 개만 얻으면 신기
록을 세울 수 있었다. 야구장의 모든 눈이 그에게 쏠려 있었다.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시청
자들의 눈도 모두 그에게 쏠려 있었다. 모리는  안타 두 개와 도루 두 개를 얻어냈다.  무려 
47년 동안 버티고 있던 메이저 리그 기록을 갱신한 것이다. 
  시즌이 끝났을 때 모리는 나중에 야구의 전당에 들어간 윌리 메이스와 돈 드라이스데일, 
샌디 쿠팩스 같은 거물들과 함께 내셔널리그 MVP로 선정되었다.  한때 마이너리그에서 영
영 벗어나지 못할 것처럼 보였던 선수, 평범한 이류 선수로 끝날 운명이었던 선수가 이제는 
진정한 스타로 탈바꿈했다. 그 것은 오로지 모리 윌스가 수년 동안 계속 퇴짜를 맞으면서도 
고집스럽게 준비를 계속한 덕분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기회가 왔을 때, 별처럼 눈부시게  빛
을 낼 순간이 왔을 때, 그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행운은 준비에 응할 기회입니다."
  모리 윌스
  
  - 생각 코너-
  1984-85년 시즌에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는 강력한 경쟁자인 '보스턴 셀틱스'를 물리치
고 NBA 챔피언이 되었다. 하지만 다음 시즌에서는 팻 라일리 감독의 말대로  "자기 만족이
라는 잠행성 질병"에 걸렸고, 서부지구 결승전에서  자멸하여 '휴스턴'에 패하고 말았다. 라
일리 감독은 여름 내내 코치들과 함께 팀의 약점과 패인을  분석하여,  어느 부분을 보완해
야 할 것인가를 정확히 알아냈다.
  다음 시즌을 위한 합숙 훈련이 시작되자, 코치들은 농구  경기에서 가장 중요한 5개 분야
의 최고 기록을 1%씩만  끌어올리라고 선수들에게 주문했다. 1%라면  대단치 않게 들릴지 
모르나, 선수권을 따본 경험이 있는 12명의 선수가 저마다  5개의 주요 분야에서 최고 기록
을 1%씩 높이면 팀 전체의 효율성은 60%나 올라간다.
  이렇게 작고 현실적인 목표를 세웠기 때문에 선수들도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실제로 대부
분의 선수가 목표치를 훨씬 초과했다. 15%나 20%, 심지어는  50%까지 최고 기록을 끌어올
린 선수도 있었다. 그 시즌에 '레이커스'는 NBA 챔피언  결정전을 포함하여 67게임에서 승
리를 거두었고, 다음 시즌에서는 19년 만에 처음으로 2년 연속 NBA 타이틀을 거머쥔 팀이 
되었다.
  
  나는 훈련이 몹시 싫었지만,
  "멈추지 마라. 지금 힘든 것을 참고 견디면
  평생을 챔피언으로 살 수 있다"고 
  자신을 타일렀다.
  무하마드 알리
  
      일등이 되는 것은 제2의 천성이다. 
      그녀의 좌우명- 철저히 준비하라
    법률가 지망생들은 대부분 대학에 다닐 때 법과대학원에 진학할 것을 고려하기  시작한
다. 포부를 가지고 있는 일부 사람들은 그보다 이른 고등학교 시절에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하지만 리어 시어스는 자전거나 롤러 스케이트를  타기 시작할 나이에 벌써 법률가가  되는 
것을 목표로 정했다. 그리고 일곱 살 때 법과대학원 편람을 우편으로 주문했다. 
  편람에 실린 사진들 중에서도 특히 하버드 대학과 예일대학을 유심히 들여다보던  리어는 
자기가 편람에 실린 어느 누구와도 다르게 생긴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의 피부는 검은색이
었지만, 사진에 나온 졸업생들은 거의 백인이고  남자였다. 그녀는 마치 자기가 2등  시민인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 순간 한  가지 결심이 그녀의 심중에 자리잡았다. 그때를  회고하며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대단한 인물이 되고 싶었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그런 상황을  바꾸어야 했죠." 그녀 
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중산층 군인 가정에서  자라고 있는 그녀보다 더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그런 상황은 바뀌어야 했다. 인생에서 더 많은 기회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 소수
파로 밀려난 사람들, 거울 속에서 `하찮은 존재`에 불과한 자신을 발견하고 자포자기할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그녀는 변화를 일으키고 싶었다. 
  성공하려면 지금 당장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부모의 지지와 격려는 리어의 자신감을 키워주었고,  학교에서 우등생이 되겠다는 의욕도 
커졌다. 리어는 특별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녀가 다니는 고등학교에서는  그때까
지 아프리카 계 미국인이 치어 리더가 된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리어는 포기하지 않고 열
심히 연습하여 응원단에 뽑혔다. 학교의 인종 차별을 무너뜨린 것이다. 하지만 리어는  언제
나 공부를 우선했다. 
  "내 목표를 달성하려면 일류 대학에서 학위를 따는 게  중요한데, 부모님은 나를 그런 대
학에 보내줄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어떻게든 장학금을 받아야 했어요." 
  이런 노력은 보상을 받았다. 리어는 코넬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여 1976년 6월에 우등
생으로 졸업한 뒤 1980년에 에머리 대학의 법과대학원에서 법률  공부를 마쳤다. 그리고 25
세에 애틀랜타의 유명한 `올스턴 법률회사`에 들어갔다. 그런데 여기서 일하면서 경제적으로
는 충분한 보상을 받을 수  있었지만, "서류 작업은 너무 많고  사람과 접촉하는 일은 너무 
적었다." 이런 일은 원래의 목표와는 동떨어져 있었다. 2년 뒤에 리어는  법률회사를 그만두
고 보수가 훨씬 적은 애틀랜타 교통법원의 판사가 되었다.  리어에게는 이것이 올바른 결정
으로 느껴졌다. 
  "나는 민권운동과 여권운동의 교차점에서 성장했고 법률이나 같은 처지의  사람들에게 많
은 변화를 일으키는 걸 보았어요."
  리어가 준비에 쏟은 오랜 세월은 소기의 성과를 가져다주었다. 이제 리어는 한 걸음 내디
딜 때마다 새로운 땅을 개척하게  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흑인 법률가는  아주 드물었고, 
흑인 여자 법률가는 하나도 없었어요. 그래서 나는 믿을 만한 의논 상대도 없었고, 본보기로 
삼을 만한 스승도 전혀 없었지요." 
  리어는 미국에서 유일한 흑인 여성 법률가라는  처지 때문에 무슨 일이든 갑절로  열심히 
했다. 1983년과 1986년에 아이를 낳았을 때에도 판사와 어머니  역할을 병행하느라 일을 소
홀히 하지는 않았다. 1988년에 조지아 주 고등법원 판사 후보로 나섰을 때는, 출마를 선언한 
날부터 치열한 접전을 벌인 선거는 리어의 승리로 끝났다. 리어는 조지아 주 고등법원 사상 
최연소 판사이자 최초의 흑인 여성 판사가 되었다. 
  4년 뒤 리어는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큰 걸음을 내디뎠다. 조지아 주지사인 젤 밀러가 리
어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조지아 주 최고 법원 판사로 임명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당
시 리어의 나이는 36세, 조지아 주  최고법원 사상 최연소 판사이자 최초의 여성  판사였고, 
아프리카 계 미국인으로는 두 번째였다. 
  하지만 역풍도 있었다. 리어는 훌륭한  교육을 받았고, 철저한 준비를  했고, 남보다 훨씬 
열심히 일했는데도, 많은 사람들은 그녀가 흑인과 여성에 대한  체면치레용 배려 덕분에 최
고법원 판사로 임명되었다면서 그녀를 깎아 내렸다. 
  "사람들은 내가 훌륭한 판사라서 이 자리를 얻은 게 아니라, 내가 여성이거나 흑인이라서 
이 자리를 얻었다고 생각했어요." 
  리어는 그들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지만, 자신과 다른 판사들 사이에 또 다른 간
격이 있음을 발견했다. 최고법원 판사로 임명된 지  며칠 되지 않은 어느 날, 나이 든  남자 
판사가 전쟁 이야기를 꺼냈다. 리어가 "무슨 전쟁요?" 하고 묻자,  남자 판사는 "제2차 세계
대전 말이오"하고 대답했다. 리어는 그 일을 회고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 전쟁은 곧 
베트남 전쟁이었어요. 그 일은 나와 다른 판사들 사이의 간격이 어떤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
주었죠. 그 판사는 나에게 몸을 기울이면서 퉁명스럽게  말하더군요. `당신 말이야, 이런 법
원에 들어오기에는 너무 젊어!` 그래요, 내가 너무 젊은 건 분명했어요. 나보다 먼저 법률가
가 된 동료 판사나 변호사들의 존경을 얻으려면 어느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하고 더 많은 준
비를 해야 한다는 걸 알았지요." 그때부터 그녀는 날마다 누구보다도 일찍 새벽5시 반에 출
근하여 담당 사건을 검토하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리어와 부하 직원들은 모든 서류를 읽고 날마다 아침 회의에서 사건을 토론했다. 일주일
에 한 번씩 판사 회의가 열리기 전에 리어는 회의석상에서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문서로  준
비했다. `즉흥적으로 발언하는`일은 결코 없었다. 회의가 끝날 때마다 직원들은 리어의 발언
에 솔직하게  비판했다. 그러면 다음 번 회의가 열릴 때까지 리어는 개선할 필요가 있는 분
야를 집중적으로 보완했다. "나는 많은 것을 배우고 싶어서 끊임없이 동료 판사들에게 말을 
걸고 질문을 던졌어요. 그분들이 나한테 진저리를 내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상관하지  않았
어요. 그러자 차츰 그분들이나를 점심에 초대하기 시작하더군요. 하루는 내가 의견을 말했더
니, 그분들 반응이 여느 때와는 달랐어요. 마치 협력자를 대하는 듯한 반응이었죠. 그러다가 
마침내 내 의견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는 날이 온 거예요." 오늘날 리어 시어스 판사는 어
린 시절에 꿈꾸었던 변화를 일으키는 데 헌신하고 있다. 리어는 한 번에 한 가지씩, 한 사람
씩 변화시켜 세상을 바꾸고 있다. "내 성공이 평생을 준비하고 열심히 노력한 결과인 건 의
심할 여지가 없어요. 그것은 벽돌을 하나씩 차곡차곡 쌓아올리는 과정이었죠. 언제든 기회가 
왔을 때 나는 준비가 갖추어져 있었어요."
  
  "당신에 대한 비판을 떨쳐버릴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철저히 준비하고 빈틈없는 일솜씨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당신이 이야기하고 있는 사항에 대해 완벽하게 알아두세요.
  즉흥적으로 발언하지 마세요.
  탁월함과 철저함은 반드시 사람들의 존경을 얻게 마련입니다."
  리어 시어스
  
      작품소재
      어느 단편소설 작가의 긴 여행
    퇴짜. 그것은 우편함에서 굴러 나오고,  전화기에서 흘러나오고, 팩스에서 기어  나온다. 
퇴짜를 피할 수 있는 작가는 거의  없다. 많은 작가들이 여기에 굴복했지만, 노린  에어스는 
그렇지 않았다. 무려 35년이 걸렸지만, 결국 그녀는 퇴짜가 성공담의 초고일 뿐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노린은 열네 살 때부터 작가를 꿈꾸었다. 선생님 한 분이 노린의 재능을 알아치리고, 대학
에 진학할 계획을 세워보라고 권했다. 그러나 노린에게 대학은 꿈 같은 이야기였다.  그녀의 
가족 중에는 대학은커녕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도 없었다. 부모는 교육에  대해 이야기한 
적도 없었다. 
  선생님의 권고가 없었다면 노린 자신도 대학에 진학하거나 직업 여성으로 성공할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선생님의 한마디는 노린의 마음속에 불을 지폈다.  노린
은 열 일곱 살 때 집을 나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대학을 마쳤다.   대학에 다닐 때에도 교
수님들은 노린의 글에서 뭔가 특별한 점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노린은 글을 제대로 써보기도 전에 결혼하여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
녀의 인생은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7년 동안 전업 주부로 지낸 뒤, 교사가 되기 위해  8년 
동안 틈틈이 대학 강의를 들어 석사 학위를 땄다. 그리고는 이따금 비서나 교사로 일하면서 
남는 시간에 시와 단편소설을 썼다. 몇 년이 쏜살같이 지나갔는데도 노린은 아직 문단에 발 
하나를 겨우 들여놓은 상태였다. 노린은  출판사에 취직하여 교정을 보거나  전문적인 글을 
쓰는 일을 맡았다. 그렇게 다시 6년이 지났건만 성공은 여전히 노린을 피해갈 뿐이었다.  그
녀의 단편이 상을 받고, 편집자들이 격려 편지를 보내  오기도 했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녀의 책을 내겠다고 나서는 출판사가 없었던 것이다. 
  시간이 거의 바닥나고 있었다. 노린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오래 전에 첫 남편과  이혼한 
노린은 서른여덟 살 때 역시 야심 있는 작가인 톰 글래골라와 재혼했다. 그들은 두 가지 약
속을 했다. 하나는 혼인 서약이었고, 또 하나는 책을  출판할 작가가 되겠다는 맹세였다. 그
들은 직장에서 온종일 일하고, 남는 시간은 모두 글쓰는 일에 바쳤다. 거의 자포자기 상태에 
빠진 노린과 남편은 대담한 조치를  취했다. 모든 시간을 글쓰는 일에  바치기 위해 직장을 
그만둔 것이다. 생계를 위해 그들은 집을 저당잡혔다. 비록 성공하지 못한다 해도  예순다섯 
살이 되어 지나온 인생을 돌아보았을 때 좋은 작품을 쓰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생각이 들
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노린은 열심히 단편소설을 써서 여기저기에 원고를 보냈다. 시간은 시시각각 지나고 있었
다. 1년 반이 지나도록 작품 한 편도 발표되지 않았다. 낙담한 노린은 의기소침해지기  시작
했다. 아무래도 나한테는 작가가 되는데 필요한 자질이 없는 게 아닐까. 그녀는 중요한 고비
에 이르러 있었다. 꿈을 포기할 것이냐, 아니면 모든 의지와 용기를 짜내어 꿈을 이루기  위
해 끝까지 싸울 것이냐. 갈림길에 선 순간, 노린 에어스는  싸우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작
가 모임에 들어갔다. 회원들의 격려와 충고에 자극을 받아 추리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녀
는 첫 번째 `범인 찾기` 추리소설을 33명의 출판대리인에게 보냈고, 33통의 퇴짜 편지를 받
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대리인이 아니라 출판사 세 군데에 직접 원고를 보냈지만, 결과는 마
찬가지였다. 문체는 좋은데 스토리를 풀어나가는 솜씨가 부족하다는 것이 그녀의 작품에 대
한 평가였다. 노린은 퇴짜를 배움의 기회로  삼아, 범죄 수사와 법의학에 관한 강의를  듣고 
신문과 잡지에서 범죄 기사를 모으고 그 분야의 전문가들을 인터뷰했다. 어느 날 노린은 한 
사건을 접하게 되었다. 부지런한 편의점 종업원이 강도에게 잔인하게 살해된 사건이었다. 이 
사연에 마음이 끌린 노린은 당장 책상 앞에 앉아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노린은 이 작품 원고를 작가 모임에 가져갔다. 그  모임에는 출판대리인들도 참석할 예정
이었다. 모임에 가기 전에 노린은  세심히 준비했다. 모든 대리인의  경력을 조사하여, 그중 
적당한 사람을 몇 명 골랐다. 그리고 모임에서 노린은  1순위로 택한 대리인에게 원고를 보
여주었다. 그 사람은 유명한 `월리엄 모리스 에이전시`의 대표로 참석한 대리인이었다. 이번
에는 퇴짜를 맞지 않았다. 대리인은 한 가지 질문만 했을 뿐이었다. "선불로  얼마를 원하십
니까?" 책을 한 권도 출판하지 않은 작가에게는  대개 5천 내지 7천 달러를 선금으로  주는 
것이 관례였다. 노린은 그것을 몰랐기 때문에, 2년 동안 다른 일을 하지 않고 그 작품만  쓰
면서 생계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액수를 불쑥 말했다. "15만 달러요."  대리인은 나중에 다시 
연락하겠다고 말했다. 며칠 뒤 그가 전화를 걸어왔다. 12만 달러를 제시했고, 책 두 권에 대
한 출판 계약을 요구했다. 신인 작가에게는 거의 유례없는 대우였다. 
  노린은 쉰 두 살에 마침내 책을 출판한 작가가 되었다.  1992년에 출판된 첫 번째 작품 `
소금 빛깔처럼`은 극찬을  받았고, 열렬한  애독자도 생겼다.  두 번째 작품  `시체 거래`는 
1994년에 출판되었고, 최근에는 세 번째 작품 `주언 도 살인사건`이 마무리되었다. 
  노린은 30년이 넘도록 글을 쓴 뒤에야 겨우 책을 출판했지만 결국 목표를 이루었다. 노린
이 앞으로 무엇을 쓸 것인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지만, 적어도  인생을 후회하는 작품은 
아닐 것이다.
  
  "작가는 성공이 언제 올 것인지를 선택할 수 없습니다.
  아니, 과연 성공이 찾아올 것인지도 선택할 수 없습니다.
  다만 최선을 다하고, 기회가 찾아온 순간에 대비하여
  글을 쓰고 또 쓰면서 준비할 수 있을 뿐입니다."
  노린 에어스
   
  근면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실망스럽겠지만, '열심히 일할수록 운이 좋아질 
  것입니다.' 최선의 노력을 다하지 않고는 
  만족하지 마세요. 최고가 되려고 애쓰면, 설령 
  실패하더라도 여전히 많은 사람보다 앞설 수 
  있습니다.
  제럴드 R. 포드(미국 제38 대 대통령)
  
      육성 고백
      어떤 분야에서도 성공할 수 있다.
    나를 낳았을 때 어머니는 고작 아홉 살밖에 안 된 소녀였다. 그래서 노스캐롤라이나 주
의 농촌에 사시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나를 키우셨다. 나는 뚱보에다 안짱다리여서 걸핏하면 
넘어지곤 했다. 게다가 언어장애까지 가지고 있었다. 내가 말을 하면 입안에서 돌멩이가  구
르는 것처럼 들렸다. 그래서 아무도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에 내가 말만 하면 모두 
웃어댔다. 나는 어린 시절을 대부분 할머니의 치마폭 안에 숨어서 보냈다. 
  학교에 들어갔지만, 상황은 더욱 나빠졌을  뿐이다. 나는 발음이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고, 하도 놀림을 받아서 나중에는 입도 열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도 그런 나를  알
아보시고 내가 다시 말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 선생님이 두 분 계셨다. 
  페어 선생님은 대학을 갓 졸업한 여자 선생님이었는데, 창의적인 분이었다. 페어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소설을 써오라는 숙제를 내고는 , 반 아이들 앞에서 그것을 읽으라고  요구했다. 
나는 따귀라도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아이들이 나를 비웃고 못살게 구
는데, 더 이상 망신을 당하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내가 앞에 나가서  소설을 읽
으면 아이들은 나를 흉내내며 놀릴 게 뻔한데, 그걸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는가. 내가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선생님은 나보고 훌륭한 소설을 써오면  선생님이 대신 읽어주겠노라고 약속
했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했다.  
  나는 나름데로 열심히 쓰기 시작했다. 때로는 괜찮은 작품을  써서 선생님의 칭찬을 받기
도 했다. 오래지 않아 급우들이 나한테 와서, 어떻게 글을  쓰는 게 좋으냐, 무엇에 대해 쓰
면 좋으냐고 묻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 자부심을 높여주었다. 나한테 물어봐야 할 것이 있을 
때는 아이들도 나를 비웃거나 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인생이 정말로 바뀐 것은 열 네 살 때였다. 하루는 어린 남동생이 유리병을 건
네주다가 실수로 내 얼굴을 때렸다. 입이 퉁퉁 부어오르고 이빨이 흔들거렸다. 보름이  지나
자 이빨이 검게 변했다. 엄마는 나를 치과에 데려갔다. 의사는 내 구강을 진찰해 보더니  무
언가가 잘못되어 있는 것을 알았다. 이빨 두 개가 치조에 박혀 있었던 것이다. 내 발음에 문
제가 있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의사는 말했다. 그리고 고칠  수 있는 방법도 말해  주었다.  
의사는 내 윗니를 다 뽑아내고 틀니를 끼워주었지만, 입천장이  흉하게 변형되고 흉터가 남
았다. 그해 가을에 고등학교에 들어갔을 때도 발음에 문제가 있는 것은 여전했다. 영어 시간
에 선생님이 나더러 책을 읽어보라고 했다. 내가 진땀을 흘리며  책을 읽는 것을 보고는 방
과후에 찾아오라고 말했다. 그분의 이름은 애브나 애그리 랭카스터였다. 나는 선생님을 찾아
가서 내 이가 틀니라고 털어놓고,  비밀로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랭카스터  선생님은 
날마다 방과후에 자기 방으로 와서 공부를 좀 해보라고 권했다. 
  4년 동안 날마다 방과후에 공부를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랭카스터 선생님은 시
와 셰익스피어의 독백을 외어서 암송하게 했다. 암송할 때는 낱말 하나 하나에 주의를 집중
하도록 했다. 나는 말하는 법만이 아니라 호흡법, 횡경막을 이용한 발성법까지 배웠다. 날마
다 선생님의 방으로 가면서, 선생님이 안 계시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선생님은  언제
나 계셨다. 
  졸업반 때 학교에서 웅변대회가 열렸다. 나는 무대에 서서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독백을 
암송했다. 암송을 마치자 전교생이 일어나서 박수갈채를 보냈다.  나는 속으로 히죽 웃었다. 
여태껏 친구들은 발음 때문에 나를 놀렸는데 웅변대회에서 1등을 했기 때문이다. 
  얄궂게도 내가 가진 가장 심각한 장애인 언어 장애가 내 최고의 재능을 개발하도록 도와
준 셈이다. 하지만 나는 여기에 도달할 때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했고 또 얼마나 오
랜 세월이 걸렸는지를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저마다 약점을 가지고 있지만, 그 약점을 극복하여  오히려 성공의 발판으로 이용
할 수 있는 잠재력도 지니고 있다. 기꺼운 마음으로 부지런히 연습하고 기술을 개발하면, 어
떤 분야에서도 성공할 수 있다.  
  
  재키 토런스는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구연대회와 대학, 라디오와  텔레비전에서 이야기를 
들려주어 청중을 열광시키는 직업적인 이야기꾼이다.
  
    실행 계획: 미래를 위해 준비하라
  중요한 것은 이기려는 의지다. 더욱 중요한 것은 계획을 세우려는 의지다. 이것은 어느 대
학 축구 코치가 한 말이다. 그의 팀이 축구장에서 거둔 승리는 이 말이 옳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승리를 원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보상과 영광을 바라고, 뿌듯한 성취감을 
맛보고 싶어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거기에서 한 단계 더 올라가 그 성공을 위해 실제로 
계획을 세우는 사람은 거의 없다. 승리는  황홀한 매력을 갖고 있지만, 계획을 세우는  것은 
그런 매력을 갖고 있지 않다. 계획을 세우는 것은 힘들고 당장 돌아오는 이득도 전혀  없다. 
하지만 계획이 없으면 당신의 미래는 운명의 변덕에 맡겨질 수밖에 없다. 상황의 포로가 되
어버리는 것이다. 계획을 세우면, 당신 자신이 인생의 지휘자가 되어 당신의 미래가  나아가
야 할 방향을 결정할 수 있다. 
  대다수 사람들은 인생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다. 얼마  동안 일하다가 은퇴하겠다는 생각
을 갖고 있는 게 고작이다. 꿈과 희망을 가진 사람은 있겠지만 계획은 갖고 있지 않다. 이들
은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에 즉흥적으로 대응한다.  혁신적인 착상이 
떠올라도 그 착상이 쓸모 없는 이유는 찾아낼 때까지 몇 번이고 이리저리 뒤적여본다. 미처 
준비가 되기도 전에 앞서나가는 사람도 있다. 가령 장사를  시작하려면 우선 표적으로 삼을 
시장을 결정하고 가장 목 좋은 위치를 정하고 기반을 잡을 때까지 버티는 데 필요한 자금을 
계산해야 한다. 그런데도 그런 이들은 아무런 준비도 없이 무작정 가게부터 벌여 놓고 본다. 
  어떤 사람은 쉽게 직장을 옮기거나  아예 직업 자체를 바꾼다. 새  직장에서 즐겁게 일할 
수 있을지 어떨지도 생각해 보지 않고, 심지어는 그 분야에 종사하고 싶은지 어떤지도 고려
하지 않고 대개는 눈앞의 이익을 좇아서 직장이나 직업을 바꾸는 것이다. 이것은 엄청난 시
간과 수고와 돈을 낭비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제1장에서 말했듯이  나도  내 목표나 
열정과 부합하지 않는 일을 하느라 많은 시간과 돈을 낭비한  경험이 있다. 다행히 나는 나
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결정하려고 애쓰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고 다음에는 나
에게 가장 중요한 것만 추구했다. 다음 단계는 당신이 실행  계획을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제1단계-원하는 결과가 무엇인지를 확인하라 
  계획을 세울 때 첫 단계는 당신이 생각하는 최종 결과를 내다보는 것이다. 당신이 궁극적
으로 성취하고 싶어하는 것을 머릿속에 또렷이 그려보면, 거기에 이르는 단계를 확인하기가 
한결 쉬워질 것이다. 
  
    실행: 구체적으로 무엇을 언제까지 성취하고 싶은가를 간단명료하게 적어 보라. 그것이 
당신의 인생 목표나 열정과 부합하는지를 확인하라.
  
    제2단계-당신에게 필요한 기술이 무엇인지를 결정하라  
  불굴의 정신을 가지 이들은 기꺼이  학생이 된다. 그들은 꿈을 이루는  데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얻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배우기 위해 희생이 필요하면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
는다. 
  다시 학교로 돌아가거나 야간수업을 들어야 할지도 모른다. 조사하고  연구하는 데 몇 달 
또는 몇 년을 투자해야 할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훈련을 받거나 새로운 일에 종사하면
서 경험과 지식을 넓히고 있다.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비하여 충분한 준비를 쌓는데 `필요
한 거라면 뭐든지` 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가져야 한다. 당신도 예외가 아니다.
  위대한 업적에서부터 개인적인 성취에 이르기까지  모든 성공에는 반드시 준비가  필요하
다. 가령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의예과 과정을  밟아야 하고, 의과대학에 다녀야 하고, 
레지던트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개업할 수 있다. 음악가들은 몇 년  동
안 날마다 몇 시간씩 연습하면서 재능을 키운다. 사업가들은  필요한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야간수업을 받거나 세미나와 회의에 참석하거나 대학이나 대학원에서 학위를 따느라 몇  년
을 보낸다.  
  
    조언: 당신이 지금 대기업에서 일하고 있다면 풍부한 학습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라. 회
사가 제공하는 교육은 실무적이고 효과적이다.  많은 회사가 사원 연수를  실시하고 있으며 
대학이나 대학원에서 공부를 계속하는 비용을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부는 보조해 줄 것이다.  
  나는 `스프린트`에서 10년 동안 일하면서 경영학  학사학위를 따고 경영학 석사과정을 밟
았다. 게다가 판매와 교섭, 문제  해결, 제품을 설명하는 기술, 프로젝트  관리, 경영기법 등 
다양한 강좌를  비롯한 사내연수와 수많은 세미나에도 참석했다. 나는 시간을 투자하여 `스
프린트`사원으로서 기술과 지식을 쌓았고 그리하여 회사에  이익을 주었다. 그리고 나 자신
도 성장했다. 그것은 모두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준비작업이었다. 
  
    실행: 당신의 목표를 이루는 데 필요한 기술과 교육과 경험을 조사하고 확인하라. 당신
이 원하는 일을 현재  하고 있는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해보면 그 일을 하는 데 어떤 기술이 
필요하고 어떤 교육을 받아야 하고 어떤 경험을 쌓아야 하는지 알 수 있다. 
  
    제3단계-실행 계획을 만들라  
  꿈이란 본디 막연한 법이다. 불굴의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그 막연한 꿈을 구체적인 현실
로 바꿔야 한다. 당신의 목표를 작은 단계로 세분하면 보다 쉽게 꿈을 현실로 바꿀 수 있다. 
그런 다음 우선 순위에 따라 그 단계들을 배열하고, 최종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언제까지 
그 단계에 도달할 것인지, 각 단계에 이르는 일정표를 작성하라. 이렇게 명쾌하고  체계적인 
접근 방식을 사용하면, 최종 목표에 지레 겁먹지 않고 꾸준히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 세 단계를 좀 더 분명하게 설명하게 위해 내가 마련했던 실행 계획에서 몇 가지  발췌
해보았다. 
  원하는 결과가 무엇인지를 확인하라 
  베스트셀러를 쓰는 것. 이 책의 목적은 사람들에게 인생의 더 큰 가능성을 깨닫게 해주고 
그 가능성을 실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것이다. 이 책은 1998년 봄에 출간
하기로 하고 실행 계획을 준비했다. 
  필요한 기술이 무엇인지를 결정하라  
  1. 취재/조사
  2. 인터뷰
  3. 집필/편집
  
  실행 계획을 만들라
  취재/조사 
  1. 내 책에 등장할 불굴의 주인공들을 찾아내기  위해, 취재 및 조사 활동에 능한  사람을  
  
  조수로 채용한다. (1996년 1월)
  2. 책에 포함시킬 인물들을 선정한다. (1996년 3월) 
  3. 관계자들을 면담한다. (1996년 3월부터 6월까지) 
  인터뷰  
  1. 인터뷰에 관한 책을 골라서 읽는다. 
  2. 다른 작가들을 만나서 인터뷰 방법과 기술에 대한 조언을 듣는다. 
  3. 녹음된 인터뷰 내용을 문자로 옮길 사람을 채용한다.  
  집필/편집 
  1.책을 만들고 편집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을 채용한다.(1996년 1월)
  2.책을 쓴다. (1996년 6월부터 12월까지)
  3. 책을 편집한다. (1997년 1월부터 2월까지) 
  나는 일을 하면서 줄곧 이 과제와 일정을 수정했다. 하지만  실행 계획은 내가 목표를 달
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귀중한 도구였다. 이 책의 완성은  최종 목표를 향한 일보 전진이
고, 계획을 종이에 적고 거기에 따르는 방식이 효과적이라는 증거다. 
  
    실행: 이제는 당신이 불굴의 실행 계획을 세워야 할 때다. 
  1. 구체적으로 무엇을 언제까지 성취하고 싶은가를 간단명료하게 적어 보라. 
  2. 그 목표를 단계별로 행동별로 세분하라. 
  3. 각 단계의 우선 순위를 매기고 최종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각 단계를 언제까지 달성
할 것인지 그 일정을 각 단계 옆에 적어 넣어라. 
  4. 실행 계획을 날마다 검토하라. 
  5. 목표에 다가가기 위해 날마다 적어도 한 가지씩은 하도록 명심하라.  
  계획을 종이에 적은 것만으로도 목표 달성이 상당히 가까워졌다고  말할 수 있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이제야 겨우 깨닫기 시작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당신이 무
엇을 이루고 싶어하든 그것은 꿈으로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계획이 없으면, 당신의 꿈은  영
원히 꿈으로 끝날 수도 있다. 
  지금 당장 시작하라! 실행 계획을 만들라. 그런 다음,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를 명심하
라. 
  
  "위대한 사람들은 한순간에 훌쩍 날아올라
  그만한 높이에 이른 것이 아니다.
  그들은 남들이 다 잠든 밤중에
  힘들게 위로 올라갔다."
  헨리 위즈워스 롱펠로
  
       다섯 번째 특징 
      `팀워크`는 대의명분을 강화시킨다. 
    꿈을 추구하는 것은 때로 고독하게 느껴질지 모르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제5장에
서 만나게 될 주인공들은 줄곧  옆에서 지지와 격려를 보내준  친구와  가족, 동료, 조언자, 
믿을 만한 상담자 등으로  지원팀을 만들었다. 처음  시작했을 때 가까이에  도와줄 사람이  
없으면, 밖에 나가서 협력자를 찾았다. 팀은  규모가 큰 경우도 있고 작은 경우도  있었지만 
심정적으로 그들을 뒷받침해 줄만큼 강력했고, 그들을 성공으로 이끌어줄 만큼 박식했다. 
  당신도 혼자서 해낼 필요는 없다. 또, 그래서도 안 된다. 팀이 강할수록 당신은 더욱 불굴
의 인간이 될 수 있다. 
  `실행 계획`은 본보기를 찾기에 가장 좋은 곳이 어디인지, 그리고  당신의 `드림 팀`을 어
떻게 하면 쉽게 조직할 수 있는지를 알려줄 것이다. 
 
  "당신 혼자서도 그 일을 잘 해낼 수 있겠지만,
  여럿이 함께 하면 더욱 쉽게 해낼 수 있습니다."
  베티 포드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도움을 청하는 법을 배울 때까지
  
    `호레이쇼 앨저 상`은 엄청난 시련을 이겨내고 자기 분야에서 큰 업적을 이룬 사람들에
게 해마나 수여하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하고 영예로운 상이다. 심사위원회는 이 상을 톰 하
켄에게 주었지만, 그가 누구보다도 이 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 이유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아니, 톰의 놀라운 수상 연설을 들을 때까지는 청중만이 아니라 심사위원들로 그가 겪은 시
련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지 못했다. 그 날 저녁에 톰  하켄은 50년 동안이나 가슴속에 묻어
둔 비밀을 털어놓았다. 
  자수성가한 백만장자이며 `카사 올레` 레스토랑 체인점 회장인 톰 하켄은 거의 평생 동안 
까막눈이였다. 그 사실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고백한 것이다. 또래 아이들이 학교에서 `얼룩 
송아지`를 배우고 있을 때 톰은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소아마비에 걸리는 바람에 1년 동안 
호흡보조장치를 달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1년 뒤에 퇴원했지만, 이번에는 결핵에 걸려 다
시 8개월 동안 집안에 갇혀 있었다. 그렇게 병치레를 하다 보니  톰의 학업은 몇 년이나 지
체될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학교로 돌아갔지만, 그는 `고양이`라는 간단한 낱말도 이해하지 
못했다. 어떤 무신경한 교사가 그런 톰을 놀려댔다. 이 일로 해서 톰의 자신감은 산산이  부
서졌다. 톰은 학교를 중퇴하고, 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멋진 말주변과  열심히 일하는 능력"
에 의지했다. 
  나중에는 늘 곁에서 남편의 용기를 북돋워주는  재치 있고 영리한 아내 멜바의  도움에도 
의지할 수 있게 되었다. `미스 멜바`는 결혼하기 전에  남편이 까막눈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혼인 신고 서를 작성할 때 톰이 "나 대신 당신이  써야 할거야"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톰
은 오클라호마 주에서 진공청소기 외판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청소기를 팔  때마다 그는 
고객의 이름과 주소와 신용정보 따위를 외워 두었다가, 집에  돌아오면 아이들이 잠든 한밤
중에 비상한 기억력을 발휘하여 상세한 고개 정보를 멜바에게  말해 주었다. 그러면 멜바가 
필요한 서류를 작성하곤 했다. 
  톰은 지칠 줄 모르는 끈기와  굳은 의지를 가지고 있었지만, 백  가구를 돌아다닌 뒤에야 
겨우 청소기 한 대를 파는 날도 드물지 않았다. 그는 열심히 일해서 `커비 진공청소기`사의 
명예의 전당에 들어갔다. 하지만 아직도 글을 읽지는 못했다. 
  몇 년 뒤, 톰은 아내의 도움과 격려에 용기를 얻어 레저용 차량 판매 대리점을  사들였다. 
그리고 이 업계에서 최고 매출액을 올리는 독립 판매업자가 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글을 알
지는 못했다. 그의 다음 모험은 레스토랑을  개업한 것이다. 이 식당을 시작하는 톰은  결국 
12개의 체인점을 소유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레스토랑의 메뉴조차 읽지  못했다.  
밖에서 식사를 할 때에는 언제나 치즈버거를 주문했다. 치즈버거를  팔지 않는 식당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몇 년 동안은 괜찮았지만, 어느 날 처음 들어간 식당에서 종업원
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니, 글도 못 읽으세요? 우린  치즈버거 안 팔아요." 톰은 평생 동
안 거의 날마다 이런 수모를 겪었다. 하지만 가장 서글픈 경험은 레스토랑이 아니라 집에서 
소파에 앉아 있을 때였다. 두 아들은 걸핏하면 쪼르르 달려와 그이 무릎에 앉아서 만화책을 
읽어 달라고 졸라대곤 했다. 그때마다 멜바가 재'발리 끼여들어, 아빠는 너무 바쁘시니까 엄
마가 대신 읽어주겠다고 말하곤 했다. 두 아들은 자라서 사업가가 되었지만, 아버지가  까막
눈이라는 사실은 끝내 알지 못했다. 
  톰은 고속도로의 도로 표지는 읽을 수 없었지만 자기 인생의  표지는 읽을 수 있었다. 글
을 배울 때까지는 결코 자유롭거나 행복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마침내 그는 인생
에서 가장 힘든 모험을 떠났다. 문맹에서  벗어나는 여행길에 오른 것이다. 가장 괴로운  첫 
단계는 남에게 도움을 청하는 일이었다. "도움을 받으려면 겸손하고 악착같아야  돼. 그렇기
만 하면 이 세상에 불가능한 일은 없어" 하고 톰은 생각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가 도움을 
청하기에 가장 적당한 사람은 평생  그를 믿고 따라준 아내였다. 멜바는  밤마다 한 마디씩 
글 읽는 법을 가르쳤다. 읽기를 배우는 데에는 몇 년이 걸렸다. 게다가 톰은 다루기 쉬운 학
생도 아니었다. 톰은 좌절감에 사로 잡혔고, 때로는 화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모진 마음으
로 공부를 계속하여, 처음에는 간단한  문장을 읽다가 나중에는 긴 성경  구절까지 읽을 수 
있게 되었다. 
  `호레이쇼 앨저 상`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톰은 감격했다. 곰곰이 생각한 끝
에 톰은 그들 부부가 그토록 오랫동안 간직해 온 비밀을 공개하기로 결심했다. 그의 고백을 
듣고 다른 문맹자들로 용기를 얻어 글을 배우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고백하고 나면, 자신도 수치심이라는 무거운 짐에서 해방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
했다.  그는 우선 두 아들에게 사실을 털어놓았다. 두 아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하지만 그
들의 반응은 `호레이쇼 앨저 상` 시상식장에서 청중이 보인 반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
었다. 각 분야에서 최고의 업적을 쌓은 수백 명의 남녀는 최근에야 겨우 까막눈에서 벗어났
다는 톰의 고백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수상 연설이 끝나자  청중은 벌떡 일어나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감동의 눈물을 흘리게 한 사람과 악수를 나누기 위
해 앞으로 몰려나갔다. 
  위대한 업적을 쌓은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톰 하켄도 과거의 고난을 유감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가 자신의 장점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그 고난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그 장점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있다. 글을 깨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설파하
기 위해 500번이 넘는 강연회를 가졌고, 그때마다 그는  문맹에서 벗어나기 위한 여행을 시
작하라고 격려했다.  "그 여행길에 이따금 길을 잃을 수도 있고, 혼란과 분노에 사로잡힐 수
도 있지만, 이 단어에서 저 단어로, 수치심에서 자부심으로 당신들을 이끌어줄 사람이  반드
시 있게 마련입니다."   
  "좀 도와주시겠어요? 이렇게만 말하면 됩니다.
  그러면 반드시 누군가가 당신을 도와줄 것입니다."
  톰 하켄
  
  모든 일을 혼자서 할 수는 없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남의 도움 받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오프라 윈프리
  
      그는 불가능한 일을 이루었다 
      친구들의 작은 도움으로.
    이크발 마시는 파키스탄의 음침한 카펫 공장에서 베틀에 묶여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
크발이 네 살 때, 부모가 16달러의 빚을 갚으려고 어린 아들을 고용살이로 내보냈기 때문이
다. 그 날부터 이크발은 하루도 쉬지  못하고 하루에 12시간 내지 16시간씩 일했다.  그렇게 
일하고 받는 임금은 한 달에 1달러도 안 되었다. 글은 물론 배우지 못했고, 몸은 영양실조로 
비쩍 말랐다. 
  크레이그 킬버거는 캐나다 토론토의 쾌적한 교외에서 교사인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낮에는 학교에 갔고, 한가한 시간에는 롤러 블레이드와 수영과  스키를 
즐기면서 활기차게 뛰어 놀았다.  이들 두 소년은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해 있었다. 둘 다 열
두 살이 될 때까지는 동양의 가난한 아이와 서양의 혜택받은 아이가 맺어진 것은 어린이를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키려는 전 세계적인 노력을 상징하는 성과였다.  
  이크발은 열 살 때 감옥이나 다름없는 공장에서 구출되었고, 그 후 2년 동안 국제적인 영
웅 대접을 받았다. 이크발은 파키스탄 카펫 산업의 강제  노동을 근절하려는 십자군 운동의 
살아 있는 상징이었다. 그러다가 열두 살 때 살해되었다. 그의 목소리는 영원히 침묵 속으로 
사라졌다. 
  지구를 반 바퀴 돈 캐나다에서 크레이그 킬버거는 이크발의 삶과 죽음을 다룬 신문기사를 
읽었다. 그 순간, 크레이그의 안락한  어린 시절은 막을 내렸다.  연민과 정의감에 사로잡힌 
크레이그는 아동 노동자에 대한 착취를  근절시키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맹세했다. 
하지만 영리하고 신중한 크레이그는 그  일을 혼자서 해낼 수는 없고,  사람들을 끌어 모아 
아동 착취를 근절하는 대의명분 아래 단결해야 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사람들은 말했다.  그
런 일을 하기에는 너무 어리다고, 아무도 네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거라고 , 하지만 클이
그 킬버거는 열두 살의 나이에 벌써 뛰어난 활동가였다.  크레이그는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단결시켜 같은 목적을 위해 함께 노력할 수 있는가를 알고 있었다. 
  지구상에는 노예나 다름없는 상태에서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아이들이 2억 명이나  있었
다. 크레이그는 이들에 대한 자료를 가능한 한 모두 구해서 읽었다. 하지만 자료를 읽는  것
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크레이그는 아이들을  직접 만나서, 그들이 어떤 환경에서  일하고 
있는지를 눈으로 보고 싶었다. 부모도 처음에는 반대했다. 아들이 혼자서는 시내까지 지하철
을 타고 갈 수 있는 나이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크레이그의 결심은 단호했다. 크레이
그는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장난감을 팔았다. 크레이그의 결심에  감동한 부모님은 결국 두 
달 동안 아시아를 여행하는 것을 허락하고, 친척들의 도움을  받아 모자라는 여비를 보태주
었다 
  크레이그는 비디오 카메라로 무장한 채, 태국과 방글라데시를 거쳐 인도와 네팔과 파키스
탄을 여행했다. 가는 곳마다 현지의 인권운동가들이 따라다니며 돌봐주었다. 크레이그는  창
문도 없고 통풍도 안 되는 공장들을 돌아다녔으며, 찜통 같은 방에서 하루에 11시간씩 사탕
을 봉지에 담고 있는 소녀와 축구공을 꿰매고 있는 맨발의  소년을 만났다. 그는 이 아이들
에게 말을 건넸고 이 아이들은 그동안 겪은 고생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막혀 있던 
봇물이 터진 듯했다. 여행을 끝내면서 크레이그는 이크발의 여행이 끝난 곳을 참배했다.  이
크발은 작은 묘지의 묘비도 없는 무덤 속에 누워 있었다. 
  크레이그가 아시아를 여행하는 기간에 캐나다 총리도  아시아를 방문했다. 크레이그는 총
리에게 면담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결국 크레이그는 선거권도 없는 어린 아이일 뿐이었
다. 그러나 언론은 크레이그와 그가 만난 두 아동 노동자의 이야기에 큰 흥미를 보였다.  잇
따른 보도는 대중을 격분시켰다. 아동  노동자 문제는 캐나다에서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다. 
그러자 총리도 갑자기 마음을 바꾸어 크레이그를 만나고 싶어했다. 
  크레이그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알았지만, 혼자서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그
에게는 팀이 필요했다. 자기처럼 "너무 어려서 철이 없는" 친구들보다 더 좋은 동지가 어디 
있겠는가. 집으로 돌아온 크레이그는 급우들에게 충격적인 사진을 보여주고, 끔찍한  이야기
를 들려주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여기에 문제가 있어.  너희들도 돕고 싶지 않니?" 급우들
은 열렬히 호응했다. 그들은 '아동 해방'이라는 단체를 결성하고, 매주  한 번씩  모여서 정
보를 교환하고 전략을 논의했다. 그 후 크레이그는 더 많은  정보와 지원을 얻기 위해 다른 
단체와도 접촉을 가졌다. 그이 팀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크레이그가 '온타리오 노동조합 총연맹'의 연례 대표자 회의에서 연설하는 것을 듣고, 2천
명의 노조 지도자들이 그의 노력에  동참하여 '아동 해방'에 15만  달러를 기부했다. 토론토 
시장은 아동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공장에서 만든 꽃불에 대해  판매금지 조치를 취했다. 외
무부 장관은 크레이그를 캐나다 정부의 자문위원으로 임명했고 미국 의회는 크레이그를  초
빙하여 연설을 들었다. 캐나다는 이제 용납할 수 없는 형태의  아동 노동과 아동 착취를 근
절하기 위해 앞장서는 나라가 되었다. 크레이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이들은  특별한 자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자질은 어른들보다 훨씬 강한 힘을  줍니다. 아이들은 상상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아직도 하늘을 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2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아동  해방'은 수천 명의  회원으로 이루어진 팀이  되어 유럽과  
아시아 각 국에 지부를 둔 국제 운동으로 성장했다. '아동 해방'은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어 
놓았다. 그것은 법률을 바꾸었고 2억에 이르는 어린이들의 삶을 바꾸기 시작했다.   어린애 
같은 짓이라고? 그건 당신이 판단하라.
  
  "실상을 모른 채 '나는 그 문제에 대해 아는 게 없다'고 말하는 편이 더 쉽고 속 편한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일단 문제를 알게 되면, 아이들의 눈에서 문제를 보게 되면, 
  어떻게든 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게 됩니다. 많은 수가 모이면 강한 힘이 생깁니다.
  우리가 똘똘 뭉쳐서 다 함께 노력하면, 아무도 우리를 막을 수 없습니다."
  크레이그 킬버거
  
  젊은이는 이해타산을 따질 만한 분별이 없다.
  그래서 불가능한 일을 시도하고,
  그것을 성취한다.
  그렇게 세대가 이어져 가는 것이다.
  펄 S. 벅
  
      어머니가 가장 잘 안다.  
      모성애가 회사 가족을 만들어 가족 회사를 구했다. 
    거트루드 보일은 세계 최대의 운동복 제조업체인 '컬럼비아 스포츠웨어'의 회장이자, 배
후에서 회사를 이끌어 가는 정신적 지도자다. 하지만 거트는 대부분의 경영자들처럼 밑바닥
에서 출발하여 정상까지 올라간 것은 아니다. 그녀는 가정을 덮친  비극 때문에 어쩔 수 없
이 회사에 들어갔을 뿐이다. 그런 거트가 업계에서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성공까지 한 것은 
어머니 역할을 하면서 팀을 만드는 본능을 키운 덕택이었다.  
  그녀는 일찍부터 생존 기술을 배웠다.  우대인 출신인 그녀의 가족은  히틀러의 집권으로 
불길한 그림자가 드리워졌을 때 재빨리 독일을 탈출했다. 미국으로 건너온 뒤, 아버지는  오
리건 주 포틀랜드에 정착하여 '컬럼비아  모자 상회'를 차렸다. 그리고  1960년대 중엽에 이 
상회를 거트의 남편인 닐에게 물려주었다. 거트가 세 아이를 키우는 동안, 닐은 상회를 사냥 
복과 낚시 복을 만들어 파는 중소기업으로 키웠다. 그런데  중소기업청에서 15만 달러를 대
출 받은 지 불과 석 달만에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닐은 집과 해변 별장, 거트의 
어머니가 살고 있는 집과 자신의 생명보험증서가지 담보로 내놓은  상태였다.  47세의 나이
에 거트는 중대한 문제에 직면했다. 남편이 죽었을 때 거트는  회사에 대해 거의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장례를 치른 이튿날 거트는 공장에서 회의를 열고, 40명의  직원들에게 
자기가 회사를 계속 운영해 나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남편  대신 사장이 되는 
것은 만만찮은 일이었다. 그 후  몇 달 동안 그녀는 걸핏하면  "당신 남편이라면 일을 그런 
식으로 하지 않았을 겁니다!" 하는 식의 핀잔을 들어야 했다. 오랫동안 회사를 위해 일해 온 
고문 변호사와 회계사는 둘 다 회사를 포기하라고  권했다. "이봐요, 거트 당신은 여자예요. 
이런 회사를 어떻게 경영해야 할지 전혀 모르고 있어요. 하지만 여기서 그만두면, 가족의 경
제적 안정만이 아니라 남편이 이룩한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결과가 될 터였다. 
  그래서 거트는 버텼다. 변호사와 회계사를 해고하고, 회사 내부의 반대자들도 모조리 해고
했다. 그리고는 오리건 대학에 다니고 있는 아들 팀에게 주말마다 집에 와서 도와달라고 부
탁했다. 회사를 경영하는 일은 거트나 팀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려웠다. "우리는 '컬럼
비아'를 거의 망쳐 놓았어요. 실수란 실수는 다 저질렀고,  우리 사업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
는 사람은 모조리 해고했답니다." 그녀는 솔직히 실수를 인정했다. 그리고 장부는 그것을 입
증했다. 그녀가 경영을 맡은 첫해에 매출액이 20만 달러나 감소한 것이다. 
  거트는 지치고 좌절감에 사로잡혔다. 거래 은행은 언제라도 대출금을 회수할 태세가 되어 
있었다. 이렇게 되자 거트는 회사를 매각하는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했다. 하지만 회사를  사
겠다고 나선 사람은 그녀에게 1.400달러만 지불하고 회사를 해체해 버릴 계획이었다. 거트는 
깜짝 놀랐다. 가족이 30년 동안 일한 대각 고작 1.400달러라니! 거트는 그에게 말했다. "제기
랄. 1,400달러를 받고 팔 바에는 차라리 내가 죽기살기로 끝가지 회사를 경영하겠어요."  거
트는 '컬럼비아'를 구하겠다고 새롭게 다짐하고, 남은 용기를  모조리 긁어모아 회사를 재건
하는 일에 쏟아 부었다. 하지만 회사를 구하기 위해서는 그녀를 도와줄 팀이 필요했다. 거트
는 우선 직원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리고 생산성을 향상시키기 위해, 회사가 성공하면  직
원들에게 장려금을 주는 인센티브 제도를  마련했다. 이어서 거트는 회사  건물을 대출금에 
대한 추가 담보로 내놓았다. 은행은 대출금을 회수하겠다는 위협을 철회했을 뿐이니라, 거트
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동맹자가 되었다. 담당 은행원은 론  넬슨과 만나 상의해 보라고 권
했다. 론은 근처에 있는  유망한 신발 회사인  '나이키'에서 일하고 있었다.  거트의 열성에  
감동한 론은 '커럼비아'의 이사로 취임했다. 론의 영입은 '컬럼비아'의  전환점이었다. '컬럼
비아'가 직면한 문제는 모두 론과 '나이키'가 이미 경험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론의 식견과 
직원들의 도움 덕분에 '컬럼비아'는 가장 어려운 시기를 헤쳐 날갈 수 있었다. 
  거트는 경험도 부족한 아들 팀을 영업 담당  책임자로 앉혔을 때 또 한번 모험을 감행했
다. 팀은 '컬럼비아'가 다른 회사의  제품을 판매하여 손해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내고, 
알맞은 가격의 고품질  운동복을 강조하는 '컬럼비아'의  전문 분야에 관심을  집중시킬 수  
있는 틈새 시장을 찾아보자고 제의했다. 
  이렇게 주안점을 바꾼 결과, 컬럼비아는 고어텍스(공기는 통하지만 물기는 스며들지 않는 
방수 섬유)를 사용하여 운동복에 혁명을 일으킨  첫 번째 회사가 되었다. '컬럼비아'는 또한 
안쪽에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는 털가죽을 댄 '버거부 파카'를 시장에 처음 내놓았다. 이제
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해진 이  '버거부 파카'는 비슷한 재킷의  절반 가격으로  
시판되어 순식간에 경쟁 상대를 물리치고 날개 돋친 듯이 팔려  나갔다. 거트는 그 후 운동
복의 품목을 늘려, 스키용 방한복에서부터 신발에 이르기까지 모든 제품을 생산했다. 
  거트는 실업계를 지배하고 있는 배타적 경향과도 싸워야 했다.  기업체 사장들은 대개 나
이 든 남자였고, 이들은 서로 똘똘 뭉쳐 여자를 따돌리는 경향이 강했다. 회사로 전화를  걸
어온 어떤 사람은 거트가 사장이라고 말해도 좀처럼 믿지 않고 더 높은 사람을 바꾸라고 요
구했다. 마침내 거트는 그 고집불통에게 이렇게  대꾸했다. "미안하지만, 하느님은 바쁘시네
요."  결국 거트는 자기가 여자라는 사실을 이용하는 독특한 방법을 찾아냈다. 그녀는 '할머
니 경영자'라는 이미지를 이용한 광고를 승인했다.  공고에서 거트는 제품의 내구성을 시험
해 보도록 아들을 닦달하고 잔소리를 늘어놓는 '거트 아줌마'로  등장한다. 어떤 광고에서는 
재킷을 입고 세차기를 통과하여 '컬럼비아'의  재킷이 방수라는 것을 입증해  보라고  아들
에게 강요한다. 또 다른 광고에서는 아들이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는 어머니를 '뜻하지 않
게' 절벽에서 밀어 떨어뜨린 뒤, 자기가 입고  있던 파카의 겉감과 안감을 연결하여 어머니
를 끌어올린다.  '전문가'들은 어떤 옷을 입으라고 잔소리해 대는  어머니의 이미지가 남자
들에게는 먹혀들지 않을 거라고 경고했다. 그래도 거트는 자신을  깎아 내리는 광고를 계속 
밀고 나아갔다. 소비자들은 소파에 앉아 광고를 보면서 배꼽을 쥐고 웃어댔다. 광고는  엄청
난  성공을 거두었고, 매출액은 1982년의 1천만 달러에서 1995년에는  3억 6천만 달러로 늘
어났다.  1989년에 팀 보일이 사장 자리를 물려받았지만, 상상력과 통찰력이  풍부한 어머니
는 여전히 회사의 중요한 결정과 판촉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오늘날 '컬럼비아 스
포츠 웨어'사는 운동복 시장의 약 30%를  점유하고 있으며, 연평균 성장률은 40%에  이른
다. 비즈니스 위크지는 거트루드 보일을 미국 최고의 경영자로 찬양했고, 워킹  우먼지는 그
녀를 미국 최고의 여성 기업인으로 선정했다.
  이 모든 영예와 찬사 뒤에는 회사 가족을 만들어 가족  회사를 구한 여성이 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점이다.
  
  "모르는 게 있으면, 두려워하지 말고 도움을 청하세요."
  거트루드 보일
  
  나는 오랜 세월에 걸쳐 중요 인물 집단을 만들었다.
  그들은 나에게 중요한 사람들,
  내가 정신적 스승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아랫동네 정원사일 수도 있고,
  소젖을 짜는 농부일 수도 있고,
  아주 특별한 교수일 수 있다.
  내가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사람,
  책으로만 읽은 사람일 수도 있다.
  예를 들면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아르헨티나의 작가)가 그런 사람이다.
  그분을 만나는 것이 내 꿈이다.
  하지만 그들은 내 정신적 스승이다.
  조지 엘리엇은 위대한 소설가이고,
  제인 오스틴은 나에게 문체를 가르쳐주는 스승이다.
  그래서 나는 비공식적으로 
  내 삶 속에 정신적 스승들로 이루어진 
  이 구조물을 세웠다.
  마사 스튜어트
  
      그는 학교 성적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팀워크로 기업 제국을 건설했다.
    읽기, 쓰기, 셈하기. 이 세 가지는 모든 교육의 밑거름이다. 인생에서 성공하려면 반다시  
필요한 것들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귀에 못이 박이게들은 바로는 그렇다. 퐆  오펄리는 
학교에서 이 세 가지 가운데 한 가지밖에 터득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20세기 후반에 가장 
주목할 만한 성공담의 주인공이 되었다. 
  책은 폴에게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그는 알파벳도 몰랐기 때문에 2학년 때 낙제했다. 3학
년 때도 읽기와 쓰기를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결국 그는 공립학교에서 쫓겨나 학습 지
진아들을 위한 특수학교로 전학했다. 두 달 뒤에 어머니는 아들을 시험해 보고 아들의 지적 
능력에는 아무 결함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사실 그의 지능지수는 128이었다. 어머니는 당장 
폴을 특수학교에서 빼냈지만, 특수학교에 보내지 않으려면  다시 공립학교로 돌려보낼 수밖
에 없었다. 안과의사와 읽기 전문가를 수없이 찾아다녔지만 폴이  글을 배우지 못하는 이유
는 아무도 알아내지 못했다. 불행히도 세상은 아직 난독증에 대해 거의 모르고 있었다. 
  다행히 풀은 부모의 강력한 뒷받침을 받았다. "주위 사람들은 하나같이 나를 바보로 취급
했지만, 부모님만은 언제나 내 편이었습니다. 부모님은 내가 낱말 하나를 익힐 때마다  가정
교사와 특수학교에 50달러를 지불해야 한다고 농담을 했지만 결코 나를 탓하지는 않았어요. 
부모님이 나에게 준 것은 격려뿐이었지요."   학교 성적은 형편없었지만 체스  같은 게임은 
아주 잘했기 때문에 폴은 여전히 자신감을 잃지 않았다.  그는 일찍부터 증권시장에 호기심
을 보였다. 의류 사업을하고 있던 어버지는 저축과 투자의 중요성을 폴에게 가르쳤다.  폴이 
여덟 살 때 아버지는 폴이 최초의 주식을 사도록 도와주었다.  학교에 다니는 동안 폴은 용
돈을 주식에 투자했다. 
  마침내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성적은 꼴찌에 가까웠다.  폴은 음료수 판매원으로 취직했
지만, 주문서를 잘못 읽는 바램에  해고되었다. 다시 주유소에서 일자리를 얻었지만  전표에 
적힌 그의 글씨를 사장이 알아볼 수 없었기 때문에 그 날로 쫓겨났다. "아무도 나를 채용해 
주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인생에서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으면 
남의 도움이 필요하리라는 걸 깨달았지요."  청소년  시절에는 두 사촌이 그를 도와주었다. 
사촌들은 집 앞 연석에 페인트로 주소를 써주고 돈을 벌기로 작정했다. 폴은 페인트로 숫자
를 쓰는 일은 맡을 수 없었지만,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일거리를 얻는 것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빨리 마르는 페인트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숫자를 쓰면 페인트가 줄줄 흘러
내려 번져 버렸다. 결국 이 사업은 시작하자마자 실패로 끝났다. 
  그 후 삼 형제는 길가에서 야채 노점을 운영하여 그런  대로 성공을 거두었다. 야채를 팔
던 그해 여름 폴은 중요한 사실을  배웠다. 이것은 장차 어떤 사업을 할  것인지 그 방향을 
결정해 주었다. "아버지는 숙녀복을 만들었고 나는 야채를  팔았는데 시간이 지나면 야채는 
썩고 옷은 유행에 뒤떨어집니다 나는  다짐했지요. 사업을 하더라도 재고가  쌓이는 사업은 
하지 않겠다고."  폴은 적당한 사업을 찾았지만, 대학을 졸업하는 게 중요한 목표가 되었다. 
그는 누구에게도 열등감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남 캘리포니아  대학에 들어가려면 지역 대
학에서 평균 B학점 이상을 따야 했다. 고등학교도 간신히 졸업한 폴에게는 사실 벅찬  목표
였다. 하지만 그는 지역 대학에 등록하여 친구와 가정교사의  도움을 받고 약간의 창의력을 
발휘하여 평균B학점을 따는데 성공했다. 그는 자기가 잘하는 분야인 대수학, 기하학, 금융을 
중심으로 과목을 선택했고, 나머지 과목은 창의성을 발휘하여 시험에 통과했다. 그는 17권의 
책을 읽어야 하는 전통적인 문학  과목 대신 '위대한 희곡'이라는  강의를 들었다. 난독증을 
가진 사람이 책 17권을 읽으려면 아마 평생이 걸릴 것이다. 남캘리포니아 대학에서는 1학년 
때 들어야 하는 교양 영어를 마지막까지 미루다가 간신히 D학점을 받았다. 
  폴은 남캘리포니아 대학에 들어가 재정학을  전공하고 평균 C학점으로 졸업했다.  대학에 
다니는 동안 폴은 자기가 찾고 있던 사업을 발견했다.  "나는 프로젝트를 공동 연구하는 스
터디 그룹에 배정되었지만, 난독증 때문에 논문을 읽을 수도 없었고, 논문 작성을 도울 수도 
없었어요. 그래서 친구들과 협약을 맺었지요. 너희가 논문을 쓰면 나는 잔심부름을 해주겠다
고."  폴은 스터디 그룹을 위해 복사를 하느라 대학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복사기에 
매료되었다. 1970년대 초반인 당시만 해도 복사기는 신 개발품이었다.  "그 기계는 작동법이 
아주 간단했습니다. 플러그를 꽂기만 하면 기계가 알아서 서류를 복사해 주었으니까요."  그
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문서를 복사해 주는 장사는 재고품을 쌓아 둘 필요가 없다는  점
이었다.  폴은 마케팅 강의에서 제품의 '라이프 사이클'을 공부하면서 복사기가 앞으로 수십 
년 동안 문서 작업에 혁명을 일으킬 거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대학에 들어간지 5년째  되던 
해에 폴은 은행에서 5천 달러를 빌려  대학 근처에 있는 햄버거 노점을 임대하여  대학생을 
위한 작은 복사가게를 차렸다.  
  이번에도 폴은 사업을 해나가려면 남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금세 깨달았다. 원래 기
계를 작동하고 수리하는 것은 그의 장기가 아니었다. 폴은 기계 다루는 솜씨를 타고난 학생 
하나를 찾아내어 그 학생을 동업자로 맞아들였다. 
  그들은 한 장을 복사해 주는 데 4센트를 받았다. 대학 도서관에서 받는 25센트 보다 훨씬 
싼 값 이었다. 작은 가게는 당장에 무전성시를 이루었다.  "나는 내 아이디어가 어떤 대학에
서도 통하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대학마다 복사가게를 내고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동업자를 맞아들였지요 그들은 현금을  제공하고, 가게의 경영권을 좌우할  수 있는 지분을 
나에게 주었어요. 덕분에 나는 외부 자본을 끌어쓰지 않고도 사업을 급속히 확장할 수 있었
지요."  동업자를 끌어 모아 협력관계를  맺는 것이 사업을 키우는 데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처음에는 학우들 중에서 그의 팀에 끼고 싶어하는 학생을 찾았다. 그는 우선 최소
한의 자금을 투자하라고 요구하고, 서해안을 돌아다니면 2만 명 이상의 학생이 다니는 대학 
근처에 새 가게 터를 물색하라고 권했다. 폴은 사업의 위험과 성공을 나누어 가질 동업자를 
찾았을 뿐만 아니라 자존심을 키워주고 동기를 부여해 주는 기업 문화를 확립했다. 폴은 직
원'이나 '부하'라는 용어를 싫어했고 ,누군가를 위해  일한다는 생각도 좋아하지 않았다. 이
런 경영철학 때문에 그는 종업원을 모두  '동료'라고 불렀다.  창구에서 금전등록기를 맡고 
있는 종업원도, 가게의 공동 소유자도 그에게는 모두 동료였다. 이익금도 모두 똑같이  나누
어  가졌다. 폴의 목표는 동료들이 저마다 팀의 소중한 멤버가 된 기분을 느끼도록 금전 등
록기를 두드리면 자기한테도 이익이 돌아온다는 것을 알고 즐겁게 일하도록 해주는  것이었
다. 
  팀워크 개념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폴은 '제록스'나 '코닥'이나 '스프린트'같은 대기업
과도 전략적인 제휴관계를 맺었다. 덕분에 폴은 최신식 장비를  구입하는 대신 임대로 들여
놓을 수 있었다. 따라서 필요한 자본은 최소한으로 줄어들었고, 궁극적으로 폴의 사업은  경
쟁에서 늘 앞서 나갈 수 있었다.   1990년에는 미국  전역에 산재해  있는 '킨코' 영업점이 
480개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불과  7년 뒤에는 그 수가 580개로   늘어났고 지역도 전세
계로 확대되었다. 동료는 23000명 고객은 하루  평균 20만 명에 이르렀다. 놀랍게도  1997년  
1월까지 폴과 동업자들은 외부  자본을 전혀 끌어들이지  않았고 회사는 여저히  개인 소유
였다. 
1997년 1월에 '킨코'는 공격적인  사업 확장 계획을  세우고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외부 투자자를 끌어들였다. 투자 회사는  아제 '킨코'이 지분 가운데 약  30%를 갖고 있다. 
나머지 70%는 대부분 폴과 동업자들이 나우어 갖고 있다. 
  "결코 쉽지는 않았습니다. '킨코'가 영업을 시작한 뒤  27년 동안 우리는 경쟁자들을 물리
쳐야 했고, 시도해 보고 싶은 아이디어는 수없이 많았지만 그것을 실현할 만한 현금을 가지
고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우리가 27년 동안이나  회사를 공개하지 않고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기적입니다. 물론 그 기적은 나 혼자 이룬 것이 아닙니다. 나는 일찍부터  팀워
크의 필요성을 깨달았습니다. 유능하고 의욕적인 사람들을 내 주위에  끌어 모아 팀을 이루
고 성공을 모두 똑같이 나누어  가질 수 있는 환경을 만들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았지요." 
폴 오펄리는 읽기와  쓰기를 정복하지는 못했을지 모른다. 기계 다루는 솜씨도 타고나지 못
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어떤 일을 이루는 데 가장  알맞은 인재들을 끌어 모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이해했고, 협력과 팀워크의 가치를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문서 관
리와 사무 서비스를 제공하는 세계 최대의 회사를 창조했다.
  
  "내 좌우명은 누구든 나보다 잘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남의 도움을 얻고 그들에게 지분을 나누어준 덕택에, 나는 내 장점에만
  정신을 집중하여 모든 사람에게 이익을 주는 회사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폴 오펄리
  
       금메달을 향하여
       우정은 한 도시를 올림피아 산으로 데려간다
    그는 전문 경영에는 경험도 없는 부동산 전문 변호사였다. 해외  출장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운동 경험도 20년 전에 대학에 다닐 때 축구를 해본 게 고작이었다. 그리고 그
가 사는 도시는 국제적인 중심지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빌리 페인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도시 애틀랜타에 1996년도 하계 올림픽을 유치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친구들 때문입니다. 우정은 합리성을 따지기 전에 친구의  노력과 아이디어를 지지해 주
게 마련이죠."
  1987년 2월 8일에 빌리가  올림픽을 유지하겠다는 생각을 털어놓았을  때, 친구들 중에도 
몇몇은 그가 제정신인지 의심했다. 그날 빌리는 교회에서 새 제단을 봉납하고 있었다.  그도 
그 제단을 만들기 위한 모금 활동을 거들었다. 주변 사람들은 200만 달러를 모을 수 있다고 
믿으면서, 열심히 모금 활동에 참여하고 기꺼이 돈을 바쳤다. 비용이 예산을 초과하자  그들
은 재정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더 깊이 그 일에 빠져들었다. 빌리는 꿈을 이루기 위해 계속 
돈을 내면서 긍지와 기쁨을 느끼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리고 오늘 그들은  이 교회에 모여 
기쁨과 성취감을 나누고 있었다. 
  빌리는 아내 마사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우리가 오늘 이 교회에서 맛본 기분을 온 시민이 맛볼 수 있다면 멋지지 않겠소? 방법을 
생각해 봅시다."
  그의 머리에 처음 떠오른 것은 슈퍼볼(미국 프로 축구의 챔피언 결정전)과 민주당 전당대
회였지만, 이 두 행사는 이미 애틀란타 시의 일정표에 올라 있었다. 빌리 페인은 그보다  더 
거창한 것을 생각해 내야 한다고 판단했다. 
  "남부 사람들의 친절함이 올림픽과 결합하면, 그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겠어?"
  1996년도 하계 올림픽은 아직 개최지를 결정하지 않은 상태였으나, 1996년은 근대 올림픽 
탄생 백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에 당연히 2,500년 전에 원래의 올림픽 대회가 열린 그리스 
아테네가 가장 유력한 후보지로 꼽히고 있었다. 두 번째로  유력한 후보자는 엄청난 물적·
인적 자원을 투입하겠다고 제의한 캐나다  토론토였다. 애틀랜타는 이제껏 한  번도 올림픽 
개최지 경합에 뛰어든 적이 없었다. 더구나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올
림픽이 재게된 이래 유치를 처음 신청한 도시를 개최지로 선정한 예가 거의 없었다. 
  애틀랜타는 승산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애틀랜타에는 빌리 페인이 있었다. 빌리는  강한 
추진력과 열의를 가지고 있었고, 또한 경쟁을 좋아했지만, 이런 성격을 표출하는 방식은  이
제 전과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빌리는 이렇게 회고했다.
  "젊은 시절에는 경쟁심이 너무 강해서  남에게 지는 것을 참지  못했어요. 그래서 친구가 
별로 없었지요. 서른 살쯤 된 어느 날 문득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빌리는 이 깨달음을 아내에게 털어놓은 뒤, 계속 경쟁심을 가지고 있어야 할 분야와 이기
는 것보다 우정과 인간 관계가 더 중요한 분야를 목록으로 작성했다.
  "하룻밤 사이에 친구가 늘어나기 시작하더군요. 그리고 친구가 많아질수록 직업에서의 기
회,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일, 또는 시민으로서 해야 할 일이 극적으로 늘어난다는  것도 
깨달았지요. 하루 일과를 마치면 사람들은 누구나 친구와 어울리고 싶어지는 법입니다."
  그러나 빌리의 인생에 가장 큰 변화를 일으킨 것은 1982에 덮친 심장발작이었다. 죽을 고
비를 넘긴 빌리는 자기가 언젠가는  죽을 운명임을 깨닫고, 최고의 선善에  헌신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애쓰면서 여생을 보내기로 결심했다.
  "목표를 세울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목표가 자신만이 아니라 남에게도 중요한지 어떤지
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기적인  성향이 강합니다. '큰집을 갖고 싶다',   '사장이 
되고 싶다', '부자가 되고 싶다'는 따위의 목표는 이기적인 것이죠. 하지만 자신에게 이익을 
가져다주고 동기를 부여해 주는 목표가 남에게도 이익을 가져다줄 때 우리는 인생에서 진정
한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애틀랜타에 올림픽을 유치하는 일은 그 판단 기준에 딱 들어맞았다. 이제는 그 꿈을 공유
하도록 친구들을 설득할 필요가 있었다.  아내는 친구인 피터 캔들러를 초대하라고  말했다. 
피터 캔들러라면 남편을 설득해서 올림픽을  유치하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단념시킬  거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피터는 그 생각을 지지했을 뿐 아니라, 애틀랜타의  여성 
실업가들을 접촉해 보라고 권하기까지 했다.  여성 실업가들은 빌리의 생각이  가진 매력을 
확산시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지역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을 납득시키는데  도움이 
되리라는 거였다. 
  3월에는 빌리의 올림픽 유치 팀이 네 명으로 늘어났다.  빌리는 올림픽 유치 운동에 전력
을 쏟기 위해 법률회사를 그만두었다. 생활비는 부동산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해결했다.  다
음 단계는 정계 유력자들을 끌어들이는 일이었다. 피터는 친구인 호레이스 시블리가 애틀랜
타 시장인 앤드루 영과 다리를 놓아줄지 모르니까 그와 접촉해 보라고 권했다. 그러나 호레
이스의 측근들은 빌리의 엉뚱한  발상을 소문으로 듣고, 호레이스가  빌리와 접촉하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결국 빌린는 호레이스와 영 시장을 직접 찾아갔지만, 둘 다 그의 생각을  터
무니없는 것으로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시장이 내 생각을 탐탁치않게 여기는 기색이 역력했기 때문에, 나는 대화 도중에 방법을 
바꾸었습니다." 빌리는 앤드루 영 시장이  유엔 주재 대사였을 뿐  아니라 저명한 민권운동 
지도자였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올림픽을 유치하겠다는  생각도 시민들에게 호소력을 가져
야 했다. "나는 올림픽 유치에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 시도가 남기게 될 훌륭한 유산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우리 지역 사회의 청소년 스포츠  활동에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고, 그것은 우리 지역 사회에 상당한 도움이 될 거라고 말했지요."
  영 시장은 빌리가 꿈 같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직장까지 그만두었다는 것을 알고, 그의 
헌신적인 열성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빌리는 기금 모금에 대해 이야기했고, 기업들도  올림
픽 유치라는 꿈을 공유하게 되면 모금에 기꺼이 동참할 테니까 애틀랜타 시가 새로운 세금
을 신설할 필요는 없을 거라고 말했다.
  "내가 '걱정 마십시오. 시에는 한푼도 부담시키지 않을 테니까요'  하고  말했을 때쯤, 시
장은 이미 내 낚시에 걸려들어 있었습니다."
  6월에 영 시장이 올림픽 조직위원회에 참여했을 때쯤,  빌리의 드림팀은 이미  '애틀랜타
의 9인방'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 '9인방'은 지지를 얻기 위해 애틀랜타  구석구석으로 침투
해 들어갔다. <애틀랜타 저널 컨스티튜션>지는 그것을 '허황한  꿈'이라 부르고, 그들의 노
력을 무모한 도박으로 폄하했다. 스포츠용품 회사들은 '9인방'을  완전히 정신나간 사람들로 
취급했다. 상공회의소조차도 그건 멋진 생각이긴 하지만 애틀랜타 전체가 힘들게 번 돈을 "
가능성도 전혀 없는" 일에 쏟아 부을 수는 없다고 말했다. 
  "올림픽을 유치하겠다는 생각 자체보다 그 생각의 규모에 더 많은 우려와  비판이 쏟아졌
습니다. 이성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지나치게 큰 것에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 '시간 낭비'가 지역 사회에 얼마나  긍정적인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느냐 
하는 맥락에서 그것을 받아들이고 판단하기는 어렵지요."
  빌리와 그의 팀은 '그건 불가능하다'는 말만 되뇌는  전문가와 자문위원회들을 피해 끈질
긴 설득 작업을 계속해 나갔다. 
  "나에게는 한결같은 성질이 한 가지 있습니다. 부정적인  사람들과는 상종도 하기 싫다는 
거죠. 우리는 승산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할 필요는 없었어요. 우리에게  필요
한 건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를 가질 수 있는 사람, 전략과 해결 방안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이었지요. 결국 우리는 사실상 모든 일을 우리끼리 하게 되었고, 우리 자신의  실수에서 
교훈을 얻기로 결심했습니다."
  빌리와 그의 팀은 영 시장을 앞세워 해외로 떠났다. 애틀랜타  특유의 풍물을 맛볼 수 있
는 것도 조금 가져갔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애틀랜타 하우스'를 차리고, IOC위원들을 초
대하여 하룻밤 동안 미국 남부의 요리와 환대를 맛보게 해주었다. 그들의 목표는 IOC위원들
이 다른 어느 지역 사람들 보다 애틀랜타 사람들을 좋아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때쯤 빌리는 '애틀랜타 올림픽 조직위원회ACOG' 위원장이자 최고 경영자로서 한 달에 
20일을 해외 여행으로 보내고 있었다. 봉급은 물론 여비도 한푼 받지 않았다.  "올림픽은 선
의에 바탕을 둔 개념이니까, 애틀랜타의 친절은 목표를 이룰  수 있게 해줄 것"이라고 믿으
면서, 그냥 계속 돌아다녔다.
  몇 주일은 몇 달로 이어졌고, 몇  달은 다시 2년 반으로 이어졌다.  마침내 IOC가 결정을 
내릴 때가 왔다. 투표 전날 밤, 회의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빌리는 금새라도 가슴이 터
질 듯한 기분을 느꼈다.
  "나는 친구인 찰리 베틀에게 다가가서 '나를 여기서 데리고 나가달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얼굴에 미소를 띠고 걸어 나왔지만, 사실은 찰리가 문자 그대로 내 몸을 떠받치고 있었어요.
나는 겁이 났지만, 그것을 얼굴에 드러낼 수는 없었지요."
  현지 의사들은 빌리를 진찰한 뒤, 이번에는 심장이 아니라 스트레스가 원인이라는 진찰을 
내렸다. 그래도 빌리와 그의 팀은 투표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까봐, 다른 사람들에게  빌리의 
상태를 알리고 싶지 않았다. 이튿날인 1990년 9월 18일, 빌리의 팀이 보여준 남부 식 환대는 
보답을 받았다. IOC는 전통과 관례적인 정치 논리를 모두 무시하고 애틀랜타를 1996년 하계
올림픽 개최지로 선정한 것이다.
  "내 인생에서 최고의 순간이었습니다. 최악의 사태에 대비하면서 최선을 기대한다는 말이 
있지요. 그 기분은 무어라 형언할 수가 없습니다."
  애틀랜타로 돌아와 보니  도시 전체가 축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패인이 없었으면   
승리도 없었다! 고마워요. 빌리!'라는 문구가 적힌 광고판이 내걸려 있었다.  하지만 빌리는 
일이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올림픽을 조직하고 자금을 마련하는 
등의 복잡하고 세부적인 준비 작업을  진행하려면 꼬박 5년이 필요한  터였다. 이제는 빌리
도 봉급을 받았지만, 그가 맡은 일은 후원업체와 민간 부문에서   15억 달러를 모금하는 것
이었다. 이번에도 사람들은 불가능한 목표라고 말했고, 이번에도 빌리는 친구들에게  의지했
다.
  "우리가 애초에 생각했던 것보다는 오래 걸렸습니다." 빌리는 솔직히 인정했다. "네이션스 
은행이 3억 달러 짜리 신용장을  내주지 않았다면 문제가 생겼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그 
돈을 갚을 수 있다는 증거는 전혀 없었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신념과 자신감에 
찬 말이었지요. 그게 결국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어 우리를 도울 마음이 내키게 한 겁니다."
  빌리와 ACOG는 1년 전에 지원을 거절했던 상공회의소를  다시 찾아가, 이번에는 열흘도 
되기 전에 550만 달러를 모금했다. 후원금은 사상 최고액인 4천만 달러에 이르렀다.  ACOG
가 미국 지역 텔레비전 중계권료로 4억 달러를 요구했을 때, 전문가들은 터무니없는 액수라
고 생각했다. NBC는 1992년도 바르셀로나 올림픽 중계로 1억 달러의 손실을 보았기 때문이
다. 그러나 결국 빌리는 텔레비전 중계권료로 4억 5천만 달러를 받아냈다.
  하지만 성공은 개인적인 희생을 요구했다. 꿈을 실현하기 위해 빌리는 날마다 새벽 4시부
터 밤늦게까지 일에 매달렸다. 기력을 몽땅 쏟아 부어 녹초가 될 때까지 일하고, 이튿날  아
침에는 다시 기력을 되찾아 일을 시작했다. 이런 과로는  그의 심장이 견뎌내기에는 지나친 
부담이었다. 이번에는 병원에서 의식을 되찾아, 3중 바이패스 수술을 받았다. 친구들은 동요
했지만, 그가 회복하는 동안 올림픽 준비 작업을 계속했다. 한 달도 지나기 전에 빌리는  의
사의 지시를 어기고 다시 일로 돌아왔다.
  9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열심히 일하고 헌신적으로 노력한 끝에 빌리는 거의 모든 사람이 
불가능하다고 말한 일을 해냈다. 잊을 수 없는 17일  동안 전세계에서 500만 명이 애틀랜타
에 모여 2,500년 전에 시작된 역사의 한 장면에 참여했다. 그리고 빌리 페인은 개막식  때부
터 폐막식 때까지 모든 순간을 음미하면서 그 현장에 있었다.  어디서나 그는 그 일이 성사
되도록 그를 도와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의 팀. 동료들. 친구들.
  
  "그렇게 엄청난 일을 해내려면 다른 분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일을 끝까지 성공적으로 진행할 수 있느냐의 여부는 남들의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나 개
인의 결과에 미친 영향은 5년 전에 이미 끝났을 것입니다. 권한을 부여받은 다른 분들이 헌
신적인 열성을 가지고 중요한 챔임을 떠맡았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성공을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빌리 페인
  
  사람에게는 어린 시절만이 아니라 인생이 끝날 
  때까지 모두 구비마다 본보기가 필요하다.
  본보기가 저절로 나타날 거라고 기대하지는 말라.
  세상에는 남을 도와주고 싶어하는 멋진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 누군가가 찾아와서 당신의 날개로
  감싸주기를 기다리지 말고, 당신이 밖으로 나가서
  깃들이기에 좋은 날개를 찾아 보라.
  데이브 토머스('웬디스 햄버거' 창업자)
  
      육성고백
      그 일은 혼자서는 해낼 수 없다
    8년 동안 지구상에 가장 크고 인상적인 호수들과 바다를 가로지르는 마라톤 수영대회에 
60번이나 참가한 뒤, 나는 상상을 뛰어넘는 모험으로 선수 생활을 끝마치기로 결심했다.  당
시 바다에서의 남녀 수영 기록은  60마일이었는데, 내 꿈은 바다에서  100마일을 쉬지 않고 
헤엄치는 것이었다. 나는 몇 주 동안 조사한 끝에 바하마 제도에서 플로리다 해안에 이르는 
바다를 선택했다. 열심히 헤엄쳐도 꼬박 이틀은 걸리는 거리였다. 이 일을 혼자 해낼 수  없
을 것은 분명했다.
  마라톤 수영대회의 거리는 보통 25마일 내지 40마일이었다. 그만한 거리를 헤엄칠 때에도 
코치나 트레이너 같은 협력자에게 의존해야  한다. 코치나 트레이너는 보트를  타고 선수와 
10미터 간격을 유지하면서 때맞춰 음식을 공급해 주고, 선수를 격려해 주고, 현재 몇 등으로 
헤엄치고 있는지를 알려준다.
  망망대해에서 100마일을 헤엄치는 것은 그보다 훨씬 어렵고  복잡한 일이다. 목적지 해안
에 도착하려면 거친 파도를 헤치며 방향을 잡고, 수시로 바뀌는 풍향과 해류를 계산하고, 상
어의 공격에 대비하고, 글리코겐 수준을 유지하는 따위의 문제가 중요하다. 나는 이 일이 성
공하려면 정교한 팀워크가 필요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할 일은 1년 동안  날마다 8시간씩 훈련하는 것이었다. 훈련하는  동안 나는 대단한 
모험심과 우정만이 아니라 여러 분야에 전문적 지식을 가진 사람들로 팀을 짰다. 우선 아메
리카 컵(국제 요트 경기)의 향해 전문가로 오랜 경험을 쌓은  켄 건더셀에게 바다에서 나를 
인도해 달라고 부탁했다. 켄은 수영을 시작하는 데 가장 바람직한 순간을 선택해 주었을 뿐 
아니라, 바람과 해류가 바뀔 때마다, 그리고 장애물이 앞길을 가로지를 때마다 15분에  한번
씩 그야말로 우리의 진로를 바꾸었다.  켄은 또한 꼬마 함대를 조정할  젊은 선원들도 함께 
데려왔다. 이 함대는 이틀 동안 줄곧 시속 3km의 굼벵이 같은 속도로 항해해야 했다.
  자크 쿠스토(프랑스의 해양 탐험가)는 상어에 정통한 잠수부 네 명을 소개해 주었다. 그들
은 수중 음파탐지기를 이용하여 내가 헤엄치는 바다 밑에 덩치 큰 물고기가 나타난 것을 확
인하면, 물 속으로 잠수하여 상어의 주의를 다른 데로 돌렸다. 나는  NASA(미국 항공 우주
국)의 지구력 전문가에게도 조언을 청했다. 글리코겐 수준을 효과적으로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한  시간마다 순수 포도당을 1,100칼로리씩 섭취하라고  권했
다. 훈련 과정에서 그의 조언에 따랐더니, 포도당의 단맛이 짠 바닷물과 섞여서 구역질이 났
다. 그러자 그는 요구르트를 포도당에 섞어서 단맛을 줄이라고 조언했다. 
  마라톤 수영은 선수가 방향을 잃거나 지쳤을 때  도와주는 세컨드(내 경우에는 트레이너)
가 항시 옆에 대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권투와 비슷하다. 바하마에서  플로리다까지 헤엄쳐 
오는 동안 내 몸무게는 13kg이 줄었고, 견디기 힘든 오한과 구역질,  환각, 심지어는 절망까
지 나를 덮쳐왔다. 내가 더 이상 계속할 수 없다고 느낄 때마다, 가까운 친구들인  트레이너
들은 적절한 말로 나를 응원해 주곤 했다. 그들의 격려에서 나는 스무 번쯤 더 팔을 움직일 
수 있었다면 쉰 번도 움직일 수 있을  테고, 쉰 번을 움직일 수 있다면  백 번도 움직일 수 
있을 거라고.
 그때 내가 헤엄친 100마일은 여자만이 아니라 남자도 세우지 못한 기록이었고, 그 세계 기
록은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았다. 공식 기록에는 내 이름만 올라 있지만, 51명으로  이루어진 
우리 팀은 각자의 노력이 내 성공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잘 알고 있다. 우리는 모
두 인생이라는 마라톤 수영에서 좌절과 실패라는 불가피한 물결이 우리를 덮칠 때마다 기운
을 북돋워주고 우리를 믿어줄 사람이 필요하다.
  
  다이애나 나이애드는 지난 10년 동안 세계 최고의 장거리  수영 선수였다. 그녀는 역사상 
가장 먼 거리인 100마일을 헤엄쳐 이 부문의 세계  기록을 세웠고, 여성 스포츠의 선구자로 
존경받고 있다.
  
      육성고백
      전문가들로 팀을 짜라
    서른 다섯 살 때 나는 실직한 이혼녀였다. 두 아이를 어떻게 먹여 살릴 지,  생각할수록 
앞이 캄캄했다. 전에는 크레인과 트럭을  빌려주는 남편 회사에서 시간제로 일했다.  지금은 
무슨 일을 해서 먹고살 것인가 하는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나는 건설업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중장비를 설치하는 전문 회사를 차리기로 결심했다.
  내 계획을 털어놓았을 때, 사람들은 의례적인 예의조차 차리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이렇
게 말했다. 그런 정신나간 생각을 하다니 미쳤느냐, 너는  경험도 거의 없다, 덴버의 경제는 
지금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이런 시기에 초심자가 사업을 시작했다가는 망할 게 뻔하다. 그
러나 내게는 다른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이 계획이 잘 되어야 했다. 그래서 나는 착실히 전
진했다.
  우선 저축해 둔 5만 달러로 작은 건물을 임대하고,  13년 된 고물 트럭 한 대를 샀다.  내 
지식에서 곳곳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 구멍을 메워줄 팀이 필요했다. 나는 건설업에 대해 
상세하고 실용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을 찾았다. 
  내가 맨 처음 한 일은 확실한 전문 기술을 가지 현장 직원을 고용하는 것이었다. 그 다음
에는 건설업에 종사하는 친구를 통해 적당한 보증보험회사를 찾았다. 그는 건설장비 대여에 
대해 잘 아는 은행을 소개해 주었다. 건설업에 풍부한  경험을 가진 변호사와 공인회계사가 
우리 팀에 합류했다. 그후 15년이 지났지만, 이들은 모두 내 회사의 비공식 이사로서 아직도 
나를 도와주고 있다.
  내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내 장점과 약점을 솔직하게 평가하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회사를 이끌어 가는 데 필요한 전문가들로 팀을 짰기 때문이다.
  
  바버라 그로건은 덴버의  건설자문회사인 '웨스턴 인더스트리얼  컨트랙터스'의 사장이다. 
그녀가 1982년에 차린 이 회사는 연간 매출액이 1천만 달러에 이르는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실행 계획 :당신의 팀을 만들라
  
  "거미줄이 모이면 사자도 묶을 수 있다."
  이디오피아 속담
  
  위대한 성취자 뒤에는 또 다른  성취자가 있게 마련이다. 위대한 업적을  혼자서 이룰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불굴의 인간의 되기로  작정했다면, 우선 당신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과 
자원을 되도록 많이 끌어 모으라. 불굴의 정신을 가진 사람은 당신에게 무엇보다 귀중한 자
원이다. 당신은 그들을 찾아내서 도움을 청하기만 하면 된다. 그들이 도움을 거절하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장대높이뛰기 선수로 올림픽에서 두 차례나 금메달을 딴 보브 리처즈는 네덜란드의  와르
메르담이 세운 기록을 깨려고 애쓰던 때의 일을 털어놓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의 기록은 
여전히 와르메르담의 기록 보다 30cm나 낮았다. 결국 그는 대담한 조치를 취했다. 와르메르
담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한 것이다. 와르메르담은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줄 테
니 네덜란드로 찾아오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정말로 그 약속을 지켰다. 와르메르담은  사흘 
동안 보브의 코치가 되어 잘못된 점을 바로잡아주었다.  그 결과 보브의 기록은 20cm나 올
라갔다.
  불굴의 인간은 역시 불굴의 인간이 되고자 하는 이들을  기꺼이 도와준다. 거트루드 보일
은 자신의 회사가 곤경에 빠졌을 때 경쟁사인 '나이키'의  간부를 찾아갔고, 그 간부는 기꺼
이 그녀에게 조언을 해주었다. 크레이그 킬버그가 급우와 노동조합 지도자들과 정부 지도자
들에게 도움을 청하고, 아동 착취를 근절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자고 호소했을 때, 그들은 기
꺼이 크레이크를 도와주었다. 다이애나 나이애드가 바다에서 100마일을 헤엄치는 세계 신기
록을 작성하기로 결정하자, 전문 지식만이 아니라 그녀와 같은  모험심까지 갖춘 많은 사람
들이 팀을 이루어 그녀를 도와주었다.
  
    제1단계: 당신의 본보기를 찾으라
  이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온갖  부류의 사람들한테서 영감을 얻었다.  과거의 위대한 
지도자들, 특정 분야에 뛰어난 업적을 이룬 사람들, 심지어는 소설이나 신화에 등장하는  인
물도 그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이들  본보기는 무엇이 가능한지를 실제로 보여주고,  동기와 
용기의 희망의 귀중한 원천이 된다.
  많은 이들이 책 속의 등장인물들 속에서 최고의 모델을  찾아냈고, 이 등장인물들은 평생 
동안 그들의 본보기가 되었다. 토크쇼 사회자인 오프라 윈프리의 경우도 그러했다. 오프라는 
어렸을 때 남녀 영웅들에 대한 책을 읽고, 허구적인 본보기를 내면에 구체화했다. 나중에 오
프라는 그 영웅적인 인물들이 그녀의 인생에 "문을 열어주었다"고 말했다. 그들은 그녀에게 
희망을 주고, 자신의 잠재력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안겨주었다.
  아놀드 슈워제네거는 보디빌딩 잡지에서 자신의 본보기인  레그 파크를 발견했다. 레그는 
당시 보디빌딩계에서 가장 힘센  사람이었고, 레그처럼 거대한 근육을  갖는 것이 아놀드의 
꿈이었다. 아놀드는 레그의 훈련 프로그램,  식이요법, 생활양식 등 레그에  대해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전부 배웠다. 레그에 대해 많이 알고 그를 본받을수록 아놀드는 자기도 레그처럼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동기 부여 테이프에서 자신의 본보기를 찾아낸 팸 론터스처럼, 비디오나 오디오 카세트에
서 모델을 찾아내는 사람도 있다.  스티븐 캐널의 본보기는 아버지였다. 본보기는  어디에나 
있고, 다양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45명도 당신의 본보기가 될 수 있다.  당신에게 가장 많은 용기와 희망
을 주는 사람에게서 힘을 얻으라. 이들은 당신이 멈추기를  거부하고 계속 나아가면 무엇을 
이룰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이다.
  
    실행: 당신 개인의 '불굴의 본보기 전시실을 만들라. 이것은 작가이자 강사이며 내 친구
인 크리스토퍼 헤거티가 제공한 생각이다. 크리스토퍼는 20년 동안 강연을 했는데, 그의  강
연을 들은 사람들은 이 생각이  자신들의 인생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입을 모은다. 당신도 
한번 시험해 보고 싶을 것이다.
  전시실을 만들려면 우선 당신에게 정말로 영감을 주는 사람을 서너 명 찾아야 한다. 그들
의 꿈이 당신의 꿈과 아주  비슷할지도 모른다. 또는 그들이 마주친  장애가 당신의 경우와 
거의 같을 수도 있다. 본보기를 정했으면, 어려운 시기에 그들이 계속 전진할 수 있었던  원
동력은 무엇인지, 그들이 '어떻게' 어려움을 이겨내고 목적을  달성했는지에 대해 되도록 많
이 알아내라. 
  그들의 사진을 구해서, 혼자 조용히 생각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에 붙여 두라.  그런 
곳이 없으면, 당신의 사무실이나 자주 볼 수 있는 곳에 그들의 사진을 놓아 두라.
  어려운 상황에 부딪히거나 용기가 꺾이는 것을 느끼면, 본보기의 사진을 들여다 보라.  그
들의 정신에서 힘을 얻으라. 그들도 당신처럼 어려움을 겪었지만 이겨냈다는 사실을 상기하
라. 그들이 해냈다면 당신도 해낼 수 있다!
  이 책을 쓰는 동안, 나도 이 책에 실린 인물들의 삶을 곰곰 생각하면서 수없이 용기를 되
살렸다. 이따금 돈이 떨어지면 나는 '도미노 피자' 창업자인 톰 모너헌(제7장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을 생각하곤 했다. 톰은 몇 년 동안  지독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지만 끝내 포기하
지 않았다. 내가 어떤 생각에 열중해 있을 때 누군가가  "그런 일은 여태 일어날 적이 없었
다"는 이유로 내 열정을 외면하면, 나는 빌리 페인과 올림픽에 대한 그이 꿈을 생각했다. 거
의 모든 사람이 이룰 수 없는 꿈이라고 말했지만 빌리 페인은 그 꿈을 이루어냈다! 내가 너
무 "거창하거나 불가능한" 목표를 세운 게 아닐까 하는 회의가 생길 때마다 나는 팸 론터스 
한테서 용기를 얻었다. 팸은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유례없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들이 성공했기 때문에 나도 성공하리라고 믿었다.     
  
  "희망을 갖는 능력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재능이다.    
  그것은 인간에게 목적 의식을 주고, 출발할 수 있는 힘을 준다."     
  노먼 커즌스
  
    제2단계: 당신의 연고자 명단을 만들라      
    전화 한 통이면 누구하고나 접촉할 수 있다   
  빌리 페인의 성공담은 꿈을 실현하는 데 친구들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가를 여실히 보
여준다. 당신은 빌리 페인 처럼 영향력 있는 친구가 없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신의 
인맥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넓을 게 분명하다. 당신의 실제 인맥은 일상적인 교제 
범위를 훨씬 넘어선다. 이 광범한 인맥에는  지금 당신과 함께 일하고 있는 사람들,  과거에 
함께 일했던 사람들, 동창들, 친인척, 당신이 다니는  교회 신도들, 지방의 상공회의소, 자녀
가 다니는 학교의 학부형들, 세미나나 집회에서 만난 사람들이 포함된다. 이 인맥에 속한 사
람들과 관계가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당신의 인맥에 포함될 수 있다.
  누구나 대여섯 다리만 거치면 대통령과 연결된다는 말이 있다.  당신이 아는 사람이 누군
가를 알고, 그 누군가가 또 누군가를 알고... 그런 식으로 나가면 백악관 집무실까지  통하게 
된다는 것이다. 대여섯 다리만 거치면 대통령과도 연결될 수 있으니까, 대여섯 다리만  거치
면 당신이 만나고 싶은 사람은 누구든 만날 수  있다. 대기업 회장도, 할리우드의 제작자도, 
저명인사도 만날 수 있다. 만나서 당신의 대의를 밝히고 지원해  달라고 도움을 청할 수 있
다.
  
    현재 맺고 있는 관계를 이용하라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기를 좋아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
들을 돕는 것도 좋아한다. 나는 이 책을 쓰기 시작할 때, 목표를 달성하고 싶으면  베스트셀
러를 만들어 판매한 실적을 가진 일류 전문가들과 제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무명
작가인 나와 함께 일하기 위해 사람들이 내 집으로 몰려들지는 않았다.
  당신이나 당신의 제품이 잘 알려져 있지 않을 때, 당신의 아이디어를 남들에게 팔기 위한 
주요 전략은 그 착상을 유명 인사와 결부시키는 것이다.  하비 매케이는 "당신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지 않으면, 널리 알려진 이름을 하나 빌리라"고 말했다. 당시 내가 아는 사람들 가
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은 '킨코' 창업자이자 회장인 폴 오펄리였다. '킨코'는 내가 '스
프린트'에서 일할 때 6년 동안 거래처였다. 나는 '킨코'를 위해 열심히 일했고, 폴과도 좋은 
관계를 맺었다. '스프린트'를 그만둔 뒤에 나는  폴에게 추천서를 써달라고 여러 번  부탁했
다. 
그는 인심 좋게 추천서를 써주었다. 폴이 써준 추천서는 내 프로젝트의 신뢰성을 주었다. 폴
의 추천서도 없이 내 책만 달랑 보냈다면 사람들의 반응은 사뭇 달라졌을 것이다.
  
    실행: 당신의 연고자 명단을 만들라. 과거의 거래했던 회사 사장을 포함하여 당신이 아
는 사람, 함께 일했던 사람을 모두 생각해 내라. 이런 인맥을 가장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
는 전략을 짜라. 그들은 당신을 위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줄 수도 있고, 당신의 특정  업
계의 연고자에게 소개해 줄 수도  있고, 추천서를 부탁할 때는 그  초안을 당신이 써주도록 
하라. 초안을 써주면,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낼 필요가 없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절약될  것이
다. 초안을 보낼 때는 그 초안을 당신의 팩스 번호를 함께 적어 보내거나, 우표를 붙이고 당
신의 주소를 쓴 회신용 봉투를 동봉하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꺼이 도와줄 것이다.  그들이 
중요한 지위를 얻은 것은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성격 때문이  아니었다. 특히 힘있는 사람들
은 약간 '뻔뻔스러운' 사람을 좋게 생각한다. 부탁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남에게 부탁
하지 않는 것은 그의 존재를 부정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제3단계: 당신의 '측근그룹'을 만들라
  고위 관리직 출신이 아니더라도 'OB클럽'(퇴임자  동우회)이라는 용어쯤은 알 수   있다. 
이 엘리트 '집단'은 어느 분야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불행히도  우리들 대다수는 이 클럽 
회원이 아니다. 수십 년 동안 고위직에 몸담은 남자들은 효과적으로 자기네 팀을 짜는 명수
들이었다. 그들은 인생의 모든 영역에 이익을 가져다주는 강력한 지원 체제를 구축했다.  이
것이 바로 그들의 노력이 낳은 결과였다.
  이 관계는 마술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여 관
계를 발전시켰다. 직장 동료나 사업상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과 골프를 치고, 지역 사회의 
기금 모금에 참여하고, 사교 클럽이나 협회에 가입했다.
  인맥을 만드는 기술은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지만, 꿈을 이루기  위해 남의 도움이 필요
한 경우에는 아주 중요한 기술이다. 그 기술을 배우고 싶으면  그 분야에 뛰어난 사람의 본
보기를 따르는 게 상책이다. 내가 보기에 인맥 만들기에서는 하비 매케이가 사상 최고의 달
인이다. <목이 마르기 전에 우물을 파라>는 그의 책은  인맥을 만들고 유지하는 방법에 대
한 통찰을 제공해 주는 탁월한 지침서다.
  당신의 목표는 고위 공무원이나 기업의 고위 간부가 되는 게 아닐 수도 있지만 그건 중요
하지 않다. 당신의 목표가 무엇이든 원칙은 마찬가지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측근 그룹'
에서 이익을 얻을 수 있다.
  
  "자고로 지도자가 된 사람들은 가장 힘이 세거나 가장 사나운 사람이 아니라,
  친구나 연줄이 가장 많은 사람들이다."
  윌리엄 F. 올먼(<지금은 석기시대>의 저자)
  
    당신의 '측근 그룹에 들어갈 후보자를 찾으라
   비영리 단체: 남에게 관심이 많고 활동적인 사람을 찾기에 가장 좋은 곳은 비영리 단체  
다. 비영리 단체의  이사회는 대게  행정기관의 고위 관리,  기업가, 지역  사회의 지도자들  
로 이루어져  있다. 아무리  바빠도  비영리 단체에  참여하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투자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잃게 된다.  비영리 단체에 참여하면,  지역 사회를 움직이는  사람들  
과 함께 일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의 목표와 열정이  돋보이게 해주는  비영리 단체를  찾으라. 자진해서  위원회에 참  
여하라.  당신의 시간과  역량을 제공하면,  지역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보통은 접촉할 수 없었을 높은 사람들과 만날 기회가 생길 것이다.
  직능 단체와 대표자 대회: 업계의 대표자 대회에는 아이디어와 방법과 기술을 교환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든다. 이런  모임은 새로운  인맥을 만들고  각 분야에  
서 최고의 성공을 거둔  사람들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우선 해야  할 일  
은 사전 조사다.  당신이 종사하고 싶은  분야나 직종을 확인한  뒤, 도서관에 가거나  컴퓨  
터 통신으로 그  분야와 관련된 단체를  찾아 보라. 단체에  전화를 걸어, 앞으로  예정되어  
있는 대표자  대회나 세미나,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출판물이나 그  밖의 자료를   알
려 달라고 요구하라. 가장  만나고 싶은 사람을  확인한 다음, 그가  참석하는 모임에 참석  
하 여, 그에게 당신을 소개하라. 수줍어해서는 안 된다! 
  현재의 직장: 당신이 지금 회사에 다니고 있다면, 기존 자원을 극대화 할 수 있는 귀중  
한 기회를 놓치지  말라. 직장인은 누구나  직함과 직무 내용  설명서를 갖고 있다.  불행히  
  도 대부분 직장인은  자신의 직무 범위에서  벗어나는 일은  절대로 하려  들지  않는다. 
당신이 성장하여 불굴의  인간이 되고 싶으면,  좁은 '상자' 속에  갇혀 있지 말고  거기서 
걸어나와 당신의 직무  범위를 넘어서야  한다. 전향적으로 행동하라.  사장들은 대부분  적
극적으로 주장을 펴는  창의적인 사원에게 기회를  주는 법이다.  어떤 이들은 내가  이 생
각을 '예술'의 경지로 발전시켰다고 말하기도 했다.
  '스프린트'에서 일하고 있을  때, 나는  사상 최고의 전국  망 화상회의 프로젝트를 포함  
하여 3천만 달러 짜리  계약을 성사시켰다. 이  정도 규모의 계약을  맺으려면 사내 수많은  
부서의 지원이 필요했다.  나는 내  직무 범위인 고객  관리(영업) 안에  머물지 않고 프로  
젝트 관리, 설치, 교육,  마케팅, 홍보를 포함하여 계약의  모든 측면에 적극적으로 관여 했   
다. 전형적인 영업  담당자도 그런 회의에  참석하기는  하겠지만, 나는 그것을 한 단계 위  
로 끌어올렸다. 두 가지만 예를 들어보자.
  내 거래처인  '킨코'는 전국  대리점 회의를  개최할 계획이었다.   '킨코'에서는 '스프린
트' 의 간부가  그 회의에  참석하여 750명의  '킨코' 영업사원들에게  '스프린터'와 '킨코'
의  새로운 화상회의  사업에 대한   기조 연설을  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  일을 대가    
맡겠다고 자청해서 나섰다.  '킨코'에서는  아마 자기네  영업사원들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기조  연설을 좋은 기회로  생각했다. 그것은 내
가  전력 을 다해 내  표현력을 한 단계  끌어올릴 수 있는  기회였다. '킨코'는 심사숙고한  
끝에 내 제의를 받아들였다.
  나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연설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최대한  준비를 갖추  
고 싶었다. 그래서  미국 강연자  협회에 들어가  워크숍에 참가하고,  직업적인 강사를  고  
용하여 연설 요령을  배웠다. 그렇게  노력한 결과,  토니 로빈슨만큼은  아니지만 꽤  훌륭  
한 연설을 할 수  있었다. 나는 많은  청중 앞에서 강연하는 귀중한  경험을 얻었다. 몇  달  
뒤 '킨코'에서는   2,500명이 참석하는   연례회의에서 '스프린트' 대표가   연설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번에는 그들이 자진해서 나를 불렀다.
  '스프린트'는 전국에 산재해  있는 150여  '킨코' 대리점의  영업사원 750명에게  화상회
의 네트워크 판매  방법을 교육시키는  일을 맡았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적은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올릴  수 있느냐가 문제였다.  이번에도  내가 자청해서  나섰다. 나는 교육  
전문가가 아니었지만,  제품 판매   방법을 영업직보다  더 잘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어디있겠는가? 우리는  '스프린트'와 '킨코'에서  영업사원 교육을  담당하는  부서의   지
원을 받아, 화상회의 로드쇼를  계획했다. 나는 두  사람과 함께 화상회의  기술을 이용하여  
150여 대리점의 영업사원을  교육시키는 일을   두 달도 지나기   전에 끝내 버렸다.  여행
가방을 꾸릴 필요도 없었다.  이 프로젝트를 실시하면서  나도 많은 것을  배웠고, 내 기술
과  경험 을 확대할 수 있었다. 나는 '적합한' 부서에  이 기회를  넘겨줄 수도  있었을 것
이다.  이 프로젝트는  분명 내 직무 범위를 벗어난  것이었고, 그때까지 그런  일을 한  번
도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다소 겁먹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대담하게 기회를   잡은 덕
분에, 나는  내가 한 번도  탐험해 본 적이 없는,  대중 연설이라는 영역을  개척할 수  있
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인생에 새로운 방향을 설정하게 된 것이다.
  당신이 자신의 능력을  좀더 충분히 개발할  수 있는  기회를 생각해 보라.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어떻게 하면 극대화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보라. 직장에서  당신이 존경  
하는 사람은  누구이며 누구를  배우고 싶은가?  '상자' 밖으로  나오라.  당신을  위해 이
런 기회를 만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당신이   스스로 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보
통은 함께 일할 기회가  없었을 사람들과  함께  일하면서 많은  소득을 얻게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당신의 능력을 키우고, 이제껏 생각지도 못한 선택권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코치를 찾으라: 개인 코치는 1990년대의  독특한 직업이 되었다. 코치들은 온갖 부류의   
사람들과 협력하여  그들의 직업에서의  목표나 개인적인  목표를 정하고  이룰 수  있도록  
도와준다. 코치들은  매주 30분씩  전화로 상담하고  한 달에  150달러 내지  500달러를 받  
는 게 보통이다.  코치는 창업에서부터  테니스의 백핸드  기술을 키우는  문제에 이르기까  
지 모든 것을 대해 조언해 줄 수 있다.
  코치에게 주는 사례금이  부담스럽다면, 대안이  있다. 당신의 도움을  받고 싶은  분야에  
전문 지식을 가진  사람을 찾으라. 당신이  가진 기술이나  능력 가운데 그  사람에게 쓸모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한 다음, 서로를 코치해 주기로 협약을 맺으라.
  실례를 들어보자.  내가 내슈빌에서  비행기를 탔을  때 만난  멋진 남자와  친구가 되었  
다. 그는 독립적으로  몇몇 주요  음반회사와 판촉 활동을  담당하면서, 최고의  음악가들을  
위해 일하고 있었다.  그는 이 업계에서  20년의 경험을 쌓았고,  뛰어난 판촉 활동으로  10  
억 장이  넘는 음반을  팔았다. 내가  책을 쓰려는  계획을 간략히  설명하자, 그는  자기가  
지금까지 벌인  판촉 활동  가운데 가장  엉뚱하면서도 가장  성공적이었던 예를  몇 가지  
말해 주었다.
  그와 이야기를 계속하면서  나는 주요 음반회사의  마케팅 담당이 되는  게 목표라는 것  
을 알았다. 그는  다양한 판매 술로  꾸준한 실적을 올리고  있었다. 그는 이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지만, 제삼자인 내가 보기에는  좀더 실적을 끌어올릴 필요가  있었다. 나는 그  동안  
직장에서 쌓은 경험을  토대로, 그가 미처  모르는 판매 전략을  가르쳐줄 수 있었다.  그때  
부터 우리는  정기적으로 전자  우편을 통해  접촉하면서,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서로 의 견을  나누고 있다. 우리는  둘 다 상대편의 전문  지식에서 이익을 얻고,  서 
로를 격려해 준다. 게다가 공짜로!
  
    실행: 당신이 좀더 배우고 싶은 분야가 무엇인지를 확인하라. 당신은 컨설팅 사업을 시
작하거나 음반을 내는 음악가가 되거나 인터넷용 신제품을 개발할 계획을 갖고 있을지도 모
른다. 거기에 필요한 전문 지식을 누가  제공해 줄 수 있을까? 가능성  있는 사람을 되도록 
많이 찾아내라. 당신이 다니고 있는 회사에 그런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에게 접근하라. 당
신의 측근 그룹과 이야기하여, 그 분야에 아는 사람이 없느냐고 물어 보라. 그렇게 해서  많
은 사람을 추천 받아도, 실제로  만나보면 당신이 정말로 만날 필요가  있는 사람인 경우는 
드물다. 결국 막다른 골목에 이르면, 조사를 해 보라. 그  문제에 대해 최근에 글을 쓴 사람
을 확인하라. 그들에게 편지를 쓰거나 전자우편을 이용해서 물어 보라. 요즘은 전자우편  덕
택에 대학 교수에서부터 기업체 사장에 이르기까지 온갖 부류의 사람들과 빠르고 쉽게 접촉
할 수 있다. 그들에게 적당한 사람을 추천해 달라고 부탁하거나, 누구에게 물어보면  좋은지 
알려 달라고 부탁하라. 전자우편을 이용하면 빌 게이츠와도 접촉할 수 있다. 첨단기술을  이
용하고 행동을 취하라!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밑져야 본전이다. 그렇게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당신의 목표에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될 것이다.
  "현명한 사람은 남의 경험에서 배운다. 보통 사람은 자신의 경험에서 배운다.
  멍청한 사람은 누구의 경험에서도 배우지 못한다."
  번 매클린
    제4단계: 당신의 '기획팀'을 만들라
  나폴레온 힐은 <생각할수록 부자가 된다>에서 '기획팀'을  "명확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
해 
여럿이 조화를 이루어 지식과  노력을 통합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속담이 옳다면, 완벽한 팀워크를 이룰  경우에는 기적 같은 일을 할 수  있다. 힐은 
이렇게 말을 잇고 있다. "조화로운 정신으로 성심 성의껏 도와주는 사람들의 충고와 조언과 
협력에 둘러싸여 있으며, 누구나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다. 이런 형태의 협력은 모든  행
운의 토대였다."
  '방향 전환 프로그램 Turn-Around Program'의 창시자인 셰리  펠런은 온갖 부류의 개인
과 단체를 위한 기획팀을 이끌었다. 그녀는 기획팀이 가져다주는 이익을 크게 세 가지로 보
고 있다. 첫째, 어떤 생각이나 의견에 대한 반응을 보여준다. 둘째, 정보나 지식을 제공해 준
다. 셋째, 문제가 생겼을 때 책임을 진다.
  당신의 꿈이 세계일주 항해든, 드라마 대본을 쓰는 것이든, 어떤 사회 운동을 지원하는 것
이든, 기획팀에서 이익을 얻을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당신과 비슷한 관심과 기술을  갖고 
있다. 그들은 당신을 도울 수 있고,  거꾸로 당신의 전문 지식에서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하나의 기획팀에 속하는 사람들은 하나의 특정한 이유 때문에, 즉 각자가 자기 목표를 달성
하도록 도와주기 위해서 다양한 배경과 정보와 인맥을 통합한다.
  기획팀은 당신의 측근 그룹이 남을 이롭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기획팀에 속하는 
사람들은 비영리 단체를 위해 일하든 대기업의  간부든 간에 다양한 사람들에게 큰  가치를 
가질 수 있는 지식과 인맥을 갖고 있다. 나도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그런 경험을 했다. 
이 책을 쓰기 위해 '홀리데이 인스' 호텔 창업자인  케먼스 윌슨을 찾아가 인터뷰하는 중에, 
그에게 내 이력서를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킨코'와 화상회의  계약을 성사시켰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는 전세계에 산재해 있는 '홀리데이 인스' 체인점에 화상회의 센터를 설치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알고 싶어했다. 나는 그 가능성을 조사해 볼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
고, 그가 협력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람들을 소개해 주었다. 이 저명한 혁신자에게 내가 귀
중한 정보원이 될 수 있으리라고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당신 자신과 당신의 지식을 과소평가하지 말라. 항상  당신이 먼저 남에게 도
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으라. '베푸는 사람'이라는 평판을  얻도록 노력하라. 당신의  전
문 지식과 인맥으로 남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라. 당신이  길을 걸어갈 때 사람들이 
서둘러 길을 비키거나 모퉁이에 숨으면, 당신의 대인관계의 방식을  재고할 필요가 있을 것
이다.
  먼저 베푸는 사람이 되라. 남을 돕는  데서 만족감을 얻으라.  그리고 '인과응보'의  섭리
를 명심하라. 남에게 베풀면 사람들은 당신에게 보답하고 싶어할 것이다!
  
    실행: 도움이 필요한 분야 세 가지를 확인하라. 이들 세 분야 가운데 하나에서 당신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은 다음, 그 사람을 찾아가 당신의 기획팀에 끌어들이라.  각자
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서로 도울 수 있는 방법을 그 사람과 연구해 보라. 앞으로 기획팀
에 끌어들일 만한 사람, 기존 인맥, 서로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을 소개해 주겠노라고  제의하
라.
  
  팀워크에는 학교에서 배운 수학이 적용되지 않는다.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보다 훨씬 많
다. 그리고 하나에다 어떤 수를 더해도, 무한대의 결과가 나올 수 있다.
  
  (기획팀을 조직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부록에 자세히 나와 있다.)
  
       여섯 번째 특징
      '창의성'은 잠재능력을 끌어낸다
    목표를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경험하는 바지만, 원하는 것을 정하고, 계획을 세우고  첫 
번째 조치를 취하고 나면 예기치 않았던 문제들이 발생한다.
  예컨대 대출 받는 일이 수포로  돌아간다. 동업자는 만사를 포기하고  시골로 이사하기로 
결심한다. 당신이 3년 동안 노력한 끝에 개발한 제품을  누군가 벌써 개발하여 광고를 하고 
있다.
  세상에 뜻대로 되는 일은 하나도 없다. 제6장에서 만나게  될 주인공들은 그런 현실을 보
여주게 될 것이다. 그들은 날마다 전쟁을 치렀다. 이런 상황을 이겨내는 데에는 창의성이 중
요한 역할을 했다. 다른 해결책을 생각해내지 못했다면 그들의 꿈은 죽어 버렸을 것이고, 장
애물이 승리를 거두었을 것이다.
  '실행 계획'에는 타고난 창의성을  키우고 새로운 해결책을 찾아냄으로써  꿈을 되살리는 
방법이 제시되어 있다. 불굴의 인간들은 어떤 문제든 반드시 해결책이 있다고 믿는다.  그렇
게 믿는 것만으로도 목적지까지 절반은 간 셈이다!
  
  "장애물을 만났다고 해서 걸음을 멈추면 안 된다. 벽에 부닥쳐도 포기하지 말라.
  벽을 타고 넘거나 돌파하거나 우회할 길을 찾으라."
  마이클 조던
  
      기업의 얼굴 바꾸기
      화장품 회사를 세우기
    창업에 성공하고 싶으면,
  대기업들이 이미 지배하고 있는 업종은 택하지 마라.
  광고도 하지 않고  제품을 팔겠다는 계획은 세우지 마라.
  정치와 판매를 연결시키지 마라.
  하버드 경영대학원을 졸업한 사람이면 누구나 당신한테 이 세 가지 원칙을 말해 줄 것이
다. 애니타 로딕이 하버드 경영대학원 출신은 절대로 채용하지 않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애니타는 천연 화장품을 파는 '바디 숍'을 창업했을 때,  경영학 서적에 나오는 규칙을 거
의 다 깨뜨렸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규칙을 깨뜨리고 있다. 물론 그런 엉뚱함은  색다른 
결과를 낳게 마련이다. 애니타의 경우,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바디 숍'은 오늘날 전세계에 
1,500개가 넘는 대리점을 거느리고 있으며, 연간 매출액은  5억 달러가 넘고, 주요 경쟁사들
의 제품과 마케팅에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이것은 사업이라는  무대에서 얻은 결과의 뿐이
다. '바디 숍'은 사회와 환경에 대한 인식이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그것을 변화시키는 효과
적인 수단이다. 애니타에게는 이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결과다. 
  기업가들은 대부분 부자가 되기 위해서 회사를 세운다. 그러나 애니타가 1976년에 천연성 
화장품 가게를 열기로 작정했을  때, 그녀의 사고방식은 일반적인  상식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그 무렵 애니타의 남편(여느 남편들과 마찬가지로 독불장군이었다)은 2년에 걸쳐 아
르헨티나에서 뉴욕까지 말을 타고 달리는 모험에 나서 있었고,  그래서 애티나는 자신과 두 
아이의 생계 수단을 찾고 있었을 뿐이다. 
  첫 번째 난관은 그녀가 원하는 제품을 만들어줄 화장품 업체를 찾는 일이었다. 그녀는 여
러 업체와 접촉해 보았지만, 어떤  회사도 호호바 오일이나 알로에 베라  겔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코코아 버터를 초콜릿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당시
에는 그녀 자신도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애니타는 폭발 직전의 시장을 발견했던 것이다.  젊
은 여성 화장품을 원하고 있었다. 제조업체들이 그런 쪽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있을 때,  애
니타는 자기한테 필요한 일을 할 수 있는 식물학자를 찾아냈다.
  애니타는 일반적인 사업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거의 빈손으로 회사를 세우는 것이 얼마나 
불리하고 어려운지를 전혀 깨닫지 못했다. 그녀는 돈을 절약하기 위해, 병원에서 소변  샘플
을 담는데 쓰는 플라스틱 용기에 화장품을 담았다. 그리고 화장품을  다 쓴 뒤에는 빈 통을 
가져와 내용물만 다시 채워 가라고 고객들에게 권했다. 애니타는  라벨을 인쇄할 돈이 없었
기 때문에, 친구들과 함께 일일이 손으로 찍어냈다. 애니타가 이런 포장 방법을 일부러 계획
했다 해도 그보다 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날 애니타의 제품은 포장을 개선하여, 화
장품 자체와 마찬가지로 자연적이고 지구적인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애니타는 영국 브라이턴에 첫 번째 '바디 숍' 대리점을 냈다.  가게가 문을 열었을 때, 인
근의 업주들은 그 가게가 얼마나 오래 버틸지를 놓고 내기를   걸었다. 애니타의 가게를 더 
못마땅하게 여긴 것은 그 동네의 장의사들이었다(영어의 body   에는 시체라는 뜻도 있음). 
그들은 어느 누가 '바디 숍' 근처에 있는 장의사에게  장례를 맡기고 싶어 하겠느냐면서, 애
니타에게 가게 이름을 바꾸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애니타는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첫 번째 대리점은 겨우 적자를 면할 정도였다. 그래도 애니타는 두 번째 대리점을 내기로 
결심했다. 은행은 그녀의 사업 계획에 의문을 품고 대출을 거절했다. 그래서 애니타는  사채
를 쓰기로 했다. 친구의 친구가 '바디 숍'의 지분  50%를  얻는 대신 6,400달러를 빌려 \주
었다. 그 지분의 가치는 오늘날 1억  4천만 달러에 이른다. 애니타가 여태까지 저지른  진짜  
실수는 이처럼 지분의 절반을 헐값에 팔아넘긴 것뿐이다. 하지만   실수처럼 보이는 결정을 
그것만이 아니었다. 세 가지만 예를 들어보자.
  미국에 대리점을  냈을 때에도  애니타는 광고를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광고 지원도   
없이 새로운 시장에 들어가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애니타는 자사 제품을 '바디  숍' 대리점에서만 팔았다.  (예외가 있다면,  백화점에 매장  
을 갖고 있는 아시아 지역의 일부 대리점뿐이다.) 
  애니타는 일찍부터 자사  대리점을 화장품 업계가 아니라  세계 전반에 변화를 일으키    
는 촉매로 삼기로 결심했다.
  결과적으로 이런 결정을 소매업 사상 가장 고무적인  '실수'였다. 1990년대 중반까지 애니
타는 광고비를 한푼도 지출하지 않았지만, 관습에 얽매이지 않은 그녀의 사고방식에 흥미를 
느낀 언론은 수많은 기사와 인터뷰에서 그녀를 다루었고, 이것이  엄청난 홍보 효과를 발휘
했다. 애니타가 뉴욕에 낸 첫 번째 대리점은 첫날부터 몰려든  고객으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롤러 스케이트를 타고  온 서른 다섯 살의  한 여성의 두 팔을  번쩍 치켜들면서 
"할렐루야! 당신이 마침내 이곳에 오셨군요!" 하고 외쳤다. 그런데 뭐 하러 광고를 하겠는가.
  '바디 숍'은 평균 사흘마다 하나씩 세계 어딘가에 새  대리점을 내고 있다. 애니타는 쇼핑
몰에 가게를 낼 때 종종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고난을 극복하며 살아온 애니타는 창의적
인 해결책을 찾는데 익숙해져 있다. 예컨대 어느 쇼핑몰이 점포 임대를 거절하자,  애니타는 
그 쇼핑몰에서 반경 200km 이내에 사는 우편주문 고객들에게 부탁하여  쇼핑몰 경영자에게 
항의 편지를 쓰게 했다. 몇 달도 안 가서 그 쇼핑몰에 '바디 숍' 대리점이 문을 열었다.
  애니타는 이윤보다 이상을 앞세우는 비관행적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창업 초기부터 애니
타는 고객의 얼굴만 바꾸는 게 아니라 기업의 얼굴도 완전히 바꾸고 싶어했다. 그녀는 사회
적 책임감을 가진, 인간미 넘치는 기업을 꿈꾸었다. 
  "사업에서는 인간 정신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일이 꼭 지겹고 힘들 필요는  없습니다. 
돈벌이에만 초점을 맞추면 안 됩니다. 회사는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즐거움을 
느끼는 인간적인 기업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바디 숍'의 제품 원료 가운데 일부는 저개발지역 주민들이 채취한다. 그들은 이일로 상당
한 소득을 올리고 있다. '바디 숍'은 고래를 구하고, 화장품  업계의 관행인  동물실험을 금
지하고, 집 없이 사람들을 돕고, 열대 우림을 보호하는  운동을 시작했다. 이런 운동은 모두 
현지 고객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바디 숍' 사원들은 이런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그들은  매달 한나절씩 유급 
휴가를 얻어 지역 사회에서 자원봉사를 한다. 일부 사원들은  루마니아에 가서 고아원 건축
공사를 돕기로 했다. 가게를 찾은 고객들은 갖가지 권유를 듣는다. 투표에 참여하라. 플라스
틱 화장품 용기를 재활용하라. 종이와 비닐을 절약하기 위해 장바구니를 들고  다니라...이런 
활동 때문에 애니타의 회사는 '바디 숍'이 아니라는  사실은 '바디 앤  솔 숍'(몸과 영혼의 
가게)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바디 숍'에 들른 고객들은 얼굴만 고와진 게 아니
라 마음까지 고와져서 즐거운 기분으로 가게문을 나선다.
  '관행적인 방식'은 애니타 로딕의 성미에  맞지 않는다. 하지만 애니타의  경우, 관행에서 
벗어난 행동이 그 모든 변화를 일으켰다.
  
  "문제가 있으면 그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새롭게 고찰하는 방식을 재빨리 확인한 것이 우  
  리를 여러번 위기에서 구해 주었습니다. 언제나 유연성을 잃지 않고 창의적인 해결책을
  기꺼이 받아들인 것은 기적적인 결과를 낳았습니다."
  애니타 로딕
  
  -생각 코너- 
  '콘세코'의 회장이자 최고경영자인 스티븐 힐버트는 창업 자금을  모으는 것이 평생에 가
장 힘든 일이었다고 말했다. 신생 보험회사에 기꺼이 투자할  자본가나 은행은 하나도 없었
다.
  그래도 스티브는 포기하지 않고 거리로 나왔다. 대학에 다닐  때 백과사전 외판원으로 학
비를 번 경험이 있는 스티븐은 같은 방법으로 자사 주식을 팔기로 작정했다. 1980년에는 금
융시장에 투자한 사람들이 17%의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란다.
  스티븐과 동업자는 사람들에게 석 장짜리 사업계획서를 보여주고 신생회사의 주식을 사라
고 권했다. 1979년부터 1982년까지 그들은 수천 가구를 방문하여 결국 400달러를 모금했다.
  '콘세코'는 오늘날 자본금 10억 달러의 보험회사로 성장했고,  스티븐 힐버트는 51세의 나
이에 <포브스>지가 뽑은 1997년도 세계 최고 부자 400명의 명단에 올랐다.
  
      이웃을 구하는 법
      창의성이 로키의 주제였다 
    그의 본명은 제임스지만, 사라들은 그를 '로키'라고 부른다. 그에게는  딱  들어맞는 애
칭이다. 180cm가 넘는 키에 덩치가 크고, 필요할 때는 뚝심도 발휘한다. 제임스 '로키' 로빈
슨은 뉴욕 시 베드 스타이 지구에 살고 있고, 이곳에서 일하고 있다. 이곳은 미국에서  가장 
가난하고 위험한 동네로 꼽힌다. 하지마 베드 스타이에서 그는 일찍이 아무도 해본 적이 없
는 방식으로 생명을 구하고, 지역공동체를 되살리고 있다.
  일곱 살 난 조카가 베드 스타이에서 차에 치여 죽은 것은 로키가 스물 여섯 살이던  1966
년이었다. 사고 현장에 있던 사람이 응급 처치 법이나 심폐 소생 술을 알고 있었다면,  조카
는 목숨을 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숨진 뒤였다.
  어린 조카의 허망한 죽음도 로키가 의료 종사자가 된 이유  중의 하나였다. 그는 뉴욕 시
의 구급 의료 대에서 일하면서, 응급 환자의 절반 이상이 범죄율이 높은 지역에서 발생한다
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더구나 부유한 백인동네에서  119전화가 걸려오면 구급차가 당장에 
달려가지만, 베드 스타이처 범죄가 만연한 소수민족  거주지역에서는 구급차가 늦게 도착하
여(26분이나 기다려야 할 때도 있었다). 그 바람에 로키의 조카처럼 죽지 않아도 될 사람이 
죽는 경우가 많았다.
  이 문제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아본 결과, 부유한 동네는  자체 구급 대를 조직하여 폭주
하는 긴급전화에 시달리는 뉴욕 시의 구급의료체계를 보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로키는 친구이자 동료 대원인 조 페레즈에게 말했다. "그게 성공 비결이라면, 우리도 베르스
타이에 자체 구급대를 만들면 되잖아!"
  1988년에 로키와 조는 구급대를 만드는 일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그것이 소
수민족이 운영하는 미국 최초의 구급대가 될 줄은 전혀 몰랐고, 그 과정에는 숱한 장애물이 
놓여 있으며, 이를 극복하려면, 엄청난 창의성을 발휘해야 하리라는 것도 예상치 못했다. 두 
사람이 맨 처음 부닥친 난관은 본부로 쓸 건물을 구하는  일이었다. 그들은 평소에 마약 밀
매꾼들이 사용하는 버려진 건물을 인수했다. "마약 밀매꾼들이 생명을 빼앗기 위해 그 건물
을 사용할 수 있다면, 우리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그  건물을 사용할 수 있을 거야"하고 로
키는 친구에게 말했다. 그 건물에는 전기도 수도도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햇빛이 있는 낮
에만 일할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긴급 전화를 받기  위해 송수신 겸용 무전기를 이용했
다.
  로키와 조는 새 본부에 그럭저럭 일을 해나갈 수 있었지만, 아직도 구급대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빠져 있었다. 바로 구급차였다. 그들은 낡은 시보레를  타고 사고 현장으로, 화재 현
장으로, 총격이나 칼부림이 벌어진 현장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차가 너무 낡아서 시동이  걸
리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래서 때로는 구급낭과 산소통을  짊어지고 현장으로 달려가야 했
다. 생명을 구하기 위해, 그들은 야유하는 마약 밀매꾼들과 빈정거리는 경찰, 놀라서 쳐다보
는 구경꾼들 사이를 뚫고 달렸다. 로키와 조가 도착했을 때  아직 살아 있던 피해자를 제외
하고는, 모두가 그들을 비웃었다.
  낡은 건물은 외풍이 심해서 겨울에는  너무 추웠다. 로키와 조는 트레일러  한 대를 기증 
받아, 길 건너 빈터에 그 트레일러를 옮겨놓았다. 그곳에는 마약 밀매꾼들이 사용하는  움막 
두 채가 있었다. 그들은 그 움막을 때려부수고 사무실을 차렸다. 마약 밀매꾼들의  입장에서
는 선전포고나 마찬가지였다. 그후 여덟 달 동안, 마약 밀매꾼들은 로키와 조가 긴급 전화를 
받고 출동하면, 그들을 향해 총을 쏘아 대기도 했다. 그러나 로키와 조는 허리를 잔뜩  구부
린 채 계속 달렸다. 그렇게 현장으로 달려가 보면, 한바탕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벌어진  길
바닥에 피해자들이 널 부러져 있었다. 로키와 조는 다친 사람들을 구했는데 이들 중에는 마
약 밀매꾼들의 가족이나 친척도 포함되어 있었다. 마약 밀매꾼들도  마침내 이런 사실을 깨
달았고, 그 후에는 로키와 조를 쫓아내는 것을 포기했다.
  2인조 구급대원은 그들을 경쟁자로  여기는 동료들한테도 공격을 받았다.  이들의 무기는 
총알이 아니라 말이었다. 두 사람은 온갖 험담과 비방의 표적이 되었고, 무능하다는  헛소문
에 시달렸다. 그들을 침묵시키는 방법은 하나뿐이라는 것을 로키는 알고 있었다. 영세한  구
급대를 제대로 훈련된 본격적인 구조대로 바꾸어야 했다. 그래서  모두 긴급 전화에 신속하
게 대응하고, 살릴 수 있는 생명은 모두 살려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같은 목적을 위해 헌신하는 진정한  '구조대', 다시 말해서 자원봉사자가 
필요했다. 로키는 구조대를 조직하기 위해 지역 공동체에서 자원봉사자를 뽑았다. 베드 스타
이는 전형적인 도심 공동체였다. 베드 스타이에는  마약 중독자들이 모여서 크랙(마약의 일
종)을 즐기는 장소가 무려 250군데나 있었고, 길거리에는  수백 명의 마약 밀매꾼과 창녀들
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가출한 부랑자와  학교를 중퇴한 청소년은 수없이 많았고,  일자리가 
없어서 생활 보호를 받고 있는 사람이  육체노동으로 근근히 살아가는 노동자 수와  맞먹을 
정도였다. 주민들은 119에 전화를 해도 얻지 못한 것을  풋내기 자원봉사대가 제공할 수 있
으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그래서 로키와 조는 동네를 홍보 전단으로 도배하다시피 하고,  어쩌다 관심을 보이는 사
람에게는 자신들의 새로운 서비스를 열심히 설명했다. 주일들은 2인조 구급대의 부지런하고 
열성적인 활동을 보고 마침내 납득하기 시작했다.
  로키는 알코올 중독에서 회복되고 있는 사람들, 일자리가 없는 사람들, 성실하게 살아보려
고 애쓰는 마약 밀매꾼들 중에서  자원봉사자를 구했다. 몇 달도 지나기  전에 로키와 조는 
수십 명의 젊은이를 선발하여 생명을 구하는 법을 가르치고 있었다. 자원봉사자들은 응급처
치법과 심폐 소생 술을 배운 뒤, 전화를 받고 출동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대원들이  기술을 
배웠고, 인생의 목적을 찾았고, 절망에서 자신을 구해 냈다. 일부는 공부를 계속하여 간호사
나 의사가 되었다. 로키는 이제 죽어 가는 사람만 구하고 있는 게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도 
구하고 있었다.
  <데일리 뉴스>지가 "산소 통을 짊어지고 동네를 뛰어 다니는 사람들"에  대한 기사를 실
었다. 어느 자선가가 이 기사를 읽고 낡은 구급차 한 대를 기증했다. 마침내 로키는  구급차
를 갖게 된 것이다. 구급차가 도착한 첫날, 구조대는 화재 현장에 먼저 도착하여 불타는  건
물 속에서 열 명을 구해냈다. 이튿날은 산모의 출산을 도왔다. 로키의 구조대원들이  현장에 
맨 먼저 도착하는 경우가 많아지자, 로키를 그토록 욕하던  뉴욕 시 구급의료대원들이 그들
의 가치를 깨닫기 시작했다.
  여러 재단에서 기증품과 기부금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몬태나에서는 이런 편지가 
날아왔다. "우리는 이곳 농장에서 일하는 무식한 백인이지만, 당신들이 하고 있는 일에 감명
을 받아서 당신들을 돕고 싶습니다." 불경기로 기부금이 줄어들어 운영자금이  바닥나자, 로
키는 돈을 마련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았다. 길거리에서 세차용 세제를 팔면서 기부금을 
부탁했다. 건물 임대료를 내고, 자원봉사자들을 훈련시키고, 각종 소모품을 구입하기 위해서
는, 아니 무엇보다도 귀중한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소수민족이 운영하는 미국 최고의 구급대인  '베드 스타이 자원 응급  구조대'에서는  이
제 350명의 자원봉사자가 활동하고 있다. 이  구조대에는 매달 300통의  긴급 전화가  걸려
온다. 
그들의 활동에 감사하는 경찰, 인원이 부족해서 쩔쩔매는 뉴욕 시 구급 의료 대, 이제  신속
하고 믿을 만한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시민들이 전화를 걸어온다.
  상상력과 창조적 정신의 가치는 수치로 나타낼 수 없지만, 로키 로빈슨과 조 페레즈의 경
우에는 그 가치를 수치로 매길 수 있다. 그 가치는 26분이다. 26분은 버려진 건물과  버려진 
영혼들로 가득 찬 지역 공동체에서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시간이다. 
  
  "어떤 장애물이 닥쳐와도 나는 기죽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는 그 장애물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정신을 집중합니다.
   장벽이 너무 높으면 그 밑으로 지나가고, 장벽이 너무 낮으면 그 위로 넘어갑니다.
  그러면 어떤 장애물도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건 길은 있게 마련입니다!"
  제임스 '로키' 로빈슨
  
  싸움에
  이기기 위해서는 
  여러 번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
  마가릿 대처 
  
      성공의 달콤한 냄새
      오래된 장애물을 통과하는 새로운 길을 찾아낸 머저리
    그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포춘>지가 선정한  500대 기업에 속하는 대기업의 경
제분석가로서 편하고 안정된 직장을 갖고  있었다.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꼽히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의 힐턴헤드에 멋진 집도 갖고 있었다. 뜨겁게  사랑한 여자를 새 신부
로 맞이했다. 그런데 존 모트너는 무엇을 했을까? 어렵게 올라간  산에서 다시 내려오는 어
리석기 짝이 없는 계획에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걸었다.
  존은 좌절감에 빠져 있었다. 지금 다니는 직장에서는 평생을  일해도 그가 원하는 개인적 
자유나 경제적 자유를 얻을 수 없을 터였다. 출세의  사다리를 올라가려고 버둥거리는 것은 
이미 매력을 잃어버렸다. 존은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싶었다. 자기 사업을 하는  것이야말로 
경제적 안정을 얻을 수 있는 비결이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존은 대다수 사람들과 달랐다. 그냥 꿈만 꾼 게 아니라, 그것을 실천에 옮긴  것이
다. 1990년에 그는 직장을 그만두고, 멋진 집도 포기하고, 아름다운 힐턴헤드를 떠났다. 친구
와 가족들도 모두 그가 미쳤다고 했지만, 그는 아내 앤과  함께 플로리다 주 올랜도로 이사
했다. 올랜도는 관광 산업이 호황을 누리고 있는 도시였다.
  존은 아몬드나 호두에 계피가루와 설탕을 뿌려서 볶은 즉석 요리를 길거리에서  따끈따끈
한 상태로 팔 계획이었다. 유럽의 도시에서 포장마차와 노점상들을  보고 이런 착상을 얻었
다. 원래 요리를 좋아하는 존은 많은 시간을 들여서 자신만의 독특한 요리법을 개발했다. 존
은 1만 달러를 대출 받아 사업을 시작했다. 포장마차를 한 대 마련하여 아몬드와 호두 볶음
이 조리되는 과정을 손님들이 직접 볼 수 있도록  설비를 갖춘 다음, '너티 바바리안'이라는 
간판도 내걸었다. ('너티 바바리안'은 '미련한 바이에른 사람', '견과堅果로  만든 후식용 과
자', 
'맛있는 바바루아 과자' 등 여러 가지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창의적인 상호, 창의적인 진열, 창의적인 제품. 하지만  이런 창의성에도 불구하고 처음에
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기존 상인들의 방해 때문에 상업지역에는 발을 들여놓지도  못했다. 
첫해에 존은 거의 파산할 뻔했다. 아내가 간호사로 취직하여 일한 덕분에 겨우 파산을 면할 
수 있었다. 
  일이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계획을 바꾸어야 했다. 상황을 호전시키기 위해서
는 목 좋은 곳을 차지해야 했다. 올랜도 지역에서 고급 스낵을 팔기에 가장 좋은 곳은 세계
적으로 이름난 테마 유원지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곳에 들어가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어
려운 문제였다. '유니버셜 영화' 사에서는 자사가 운영하는  유원지에 들어오려면 10만 달러
를 자릿세로 내고 제품을 공급하는 납품업자가 되는  게 유일한 길이라고 말했다. 요컨대 '
유니버셜'이 경영권을 쥐고 그의 포장마차를 관리하겠다는  얘기였다.  '오빌 레덴바허'나 '
하겐다즈' 같은 대기업들은 이미 그렇게 하고 있었다. 하지만 '너티 바바리안'은 첫  걸음마
도 떼지 않은 영세 업체였다. 이런 업체가 10만 달러를  벌려면 엄청난 양의 호두를 팔아야 
할 터였다. 존은 접근방식을 바꾸었다. 대기업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통상적인 경로를 우회하
는 독창적인 길을 찾아내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는 '유니버셜'의 식품사업부에 전화를  걸어 부사장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존은 자사의 
제품,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좋을 만큼 맛있는 아몬드와 호두의 볶음"에 대해 설명했다. 
부사장은 신청서를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존은 당장 신청서를 냈지만, 몇 주가 지나서  부사
장한테서 아무 연락이 오지 않았다. 존은 한 달 동안 날마다 전화를 걸었다. 제품 샘플과 편
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래도 연락이 없자, 마침내 존은 부사장이 30분 동안 만나주거나 아니
면 맞대놓고 '꺼지라'고 말할 때까지 계속 전화를 걸겠다고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가 먹혀들었다. 부사장이 그를 만나기로 동의한 것이다. 이제 존의 상상력이  진정
한 시험대에 오르는 순간이 왔다. 존은 이 30분 동안의 면담에서 평생 잊을 수 없는 강렬한 
인상을 부사장에게 심어주어야 했다. 갓 볶은 아몬드와 호두는 누구나 침을 흘리게 만들 만
한 풍미를 지니고 있었다. 존은 이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부사장에게 자신의 제품을  직접 
선보이기로 결심했다. 마침내 그날이 왔다. 존은 이사회  회의실에 조리기구를 들여놓고, 계
피가루를 뿌린 호두 볶음을 만들기 시작했다. 호두가 탁탁 튀면서 구리냄비에 부딪쳤다.  고
소한 냄새가 회의실을 가득 채우고 복도까지 새어나갔다. 곧이어  다른 간부들이 무슨 요리
를 하고 있는지 보려고 회의실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간부들은  구리냄비 속에 김이 모락모
락 나고 계피가루로 윤을 낸 호두가 가득 들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모두 호두 볶음을 시식했다. 한번 먹어본 간부들은 더 먹고 싶어서 군침을 흘렸다. 
하지만 침샘이 그렇게 자극을 받았는데도, 간부들은 좀 더 시간을 두고 존의 신청을 고려해 
보고 싶어했다.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그렇게 되면 존은 요리  재료인 아몬드와 호두를 사
기 위해 부업거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존은 지금이 아니면  영영 기회가 없다는 것을 알았
다. 그때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이렇게 제안했지요. 한 달 동안만 시험기간을 달라, 그 동안 날마다 열두 시간씩 내
가 직접 포장마차를 운영하겠다. 그리고 매상의 25%를  '유니버셜' 측에 주겠다. 그렇게 되
면 당신들은 위험 부담이 전혀 없을 테고,   나는 나 자신과 내 제품을 시험해   볼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간부들은 이 제의에 동의했다.
  약속한 한 달 동안 존은 4만 달러의 수입을 올렸다. 매상은 꾸준히 늘어났고, 두 번째  달
이 지났을 때 존은 '유니버셜'과 2년 계약을 맺었다. 첫해에 존은 단 두 대의 포장마차로 무
려 100만 달러의 매상을 올렸다.
  "당시에 몰랐지만, '유니버셜'은 음식  장수가 외부에서 유원지에  들어와 '유니버셜'과는 
전혀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장사하는 것을 한 번도 허락한 적이 없었어요. 내 경우는 전례없
는 
조치였지요."
  오늘날에는 미국 내의 150개 지역과 해외의 3개 나라에서 '너티  바바리안'의 인기를  받
은 포장마차가 영업을 하고 있다.  연간 매출액은 1천만 달러가  넘는다. 존은 독특한 호두   
볶음과 아몬드 볶음은 클린턴 대통령이 즐겨 먹는 간식이고, 두   차례의 취임식 만찬 때도 
후식으로 나왔다. CNN 방송은  '너티 바바리안' 스낵을 특집으로  다루었고, 브라이언트 검
블과 윌러드 스콧은 NBC 방송의 '투 나잇 쇼'에서 이 스낵을 격찬했다.
  존은 친절하게도 자신의 '비법'을 알려주었다. 약간의 신념에  배짱을 조금 넣고 창의성을 
듬뿍 넣어서 볶으면 된다고.
  
  "이 모든 게 가능했던 것은, 맨 처음 거절당했을 때에도, 백 번째로 거절당했을 때에도
  멈추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접근방식이 효과가 없으면 저런 접근방식을 
  시도해 보곤 했지요. 그리고 나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존 모터너 
  
  평범한 '말단' 직원도 잠재적으로는
  큰 집무실에 앉아 있는 최고경영자만큼
   창의적일 수 있다.
  문제는 말단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탁월함을 믿지 않고, 따라서
  자신의 아이디어를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로버트 슐러,
  '시련은 오래가지 않지만, 시련을 이겨내는 사람은 오래간다'
  
      창조적 정신의 힘
      애팔래치아 산맥에서 산을 옮기기
    율라 홀은 정식 면허를 가진 의사가 아니지만, 날마다  병자와 부상자를 돌보면서 지내
고 있다. 정식으로 정치학이나 법률을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로비  활
동과 구호금 모금에서는 미국에서 가장  유능한 인물로 꼽힌다. 그녀의  방에는 사회복지학 
학위증은 커녕 고등학교 졸업장조차 걸려 있지 않지만, 그녀는  늙고 병들고 가난하고 학대
받는 사람들을 위한 카운슬러 겸 대변자다.
  세상이 동정심과 창의성과 인내심에  학위를 준다면, 율라 홀은  박사학위를 받고도 남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켄터키 주의 애팔래치아 산맥 깊숙한  곳의 초라한 오두막에서 일하
고 있는 '첩첩 산골의 극빈자'다. 그녀가 하는 일은  고향에서 사람들이 겪는 고통을 덜어주
는 것이다. 인간의 고통에 대해서라면 율라는 누구보다도 풍부한 직접 경험을 갖고 있다.
  율라는 1927년에 켄터키 주 파이크 군에서 태어났다. 형제는 7남매였는데, 대부분이  어떤 
형태로든 신체 장애를 갖고 있었다. 율라는 5남매를 낳았는데, 모두 집에서 낳았다. 산전 관
리는 고사하고 산후 조리도 받지 못했다.  미숙아로 태어난 한 아이는 청각 장애자였고,  또 
한 아이는 첫돌도 되기 전에 죽었다. 율라는 평생 동안 주위의 아이들이 영양실조와 기생충 
감염으로 죽어 가는 것을 보았다. 그 지역에는 병원은커녕 의사나 약품도 없었고, 가장 기본
적인 의료 서비스를 받을 돈도 없었기 때문이다.
  18세 생일을 맞이했을 무렵 율라의 꿈은 이미 분명해져 있었다.  남을 돕는 일을 하고 싶
다는 게 율라의 소망이었다. 중학교 때 중퇴하는 바람에 변변한 과학 수업 한 번 받아본 적
이 없는 소녀가 장차 진료소를 세우겠다고 결심했다.  율라의 삯일을 해서 일주일에 50달러
를 벌었다. 그후 7년 동안 한푼 두 푼 부지런히 저축하여, 머드 크리크 지역의 한적한  길가
에 있는 외딴 오두막을 월세 40달러로 빌릴 수 있게 되었다.
  진료소를 운영하려면 자금을 모을 필요가 있었지만, 그보다  훨씬 어려운 일은 의사를  '
모으는' 일이었다. 애팔래치아는 머드 크리크 주민들이 평생  버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을 한  
달 만에 벌 수 있는 똑똑한 젊은 의사들이 꿈꿀 만한 곳은  아니다. 몇몇 의사가 흥미를 가
지고 찾아왔지만, 마땅한 거처조차 없는 것을  보고는 금방 떠나버렸다. 그래서 율라는  의
사들을 자기 집에 묵게 하고, 손수 만든 맛있는 음식을 대접했다. 율라는 미국 영주권을  얻
기  위해 빈민촌에서 의료 봉사해야 하는 외국인 의사들 중에게 의료진을 구했다.
  진료소가 문을 연 첫날부터 가난한 환자들이  몰려들었다. 손가락이 으스러진 환자에서부
터 폐에 울혈이 생긴 환자에 이르기까지  질병의 종류도 다양했다.  환자들 중에는 평생 의
사를 본 적이 없는 사람도 많았다. 대부분은 명목뿐인 진료비 5달러도 간신히 마련할 수 있
을 만큼 가난했다. 3년 동안 그들은 절실히 필요로 했던 치료를 받기 위해 율라의 진료소를 
찾아왔다. 하지만 율라의 문제 해결 능력은 이제 막 시험대에 오르려 하고 있었다.
  하루는 진료소에 화재가 나서 하룻밤 사이에 잿더미가 되어버렸다. 평생의 꿈이 송두리째 
무너지고, 10년 동안의 노고의 헌신이 수포로 돌아갔다. 연기를  내고 있는 폐허 앞에 서서, 
율라는 이제 그녀가 돌봐야 할 15,000명의  주민을 생각했다. 재가 되어버린 건물과  약품과 
의료기구를 생각했다. 눈물이 펑펑 쏟아져 나왔다.
  "까맣게 타버린 그 잔해만큼 내 가슴을 깊이 찌른 건 없었어요. 그렇게 뼈에 사무치는 고
통은 내 평생에 처음이었답니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슬픔을 밀어내고  직원들에게 선언했다. "건물은 없어졌지만,  우리는 
여기 있잖아요."
  그날 밤 그녀는 일에 관심을 돌려, 병원을 재건할 방법을 생각했다. 이튿날 그녀는 야외에
서 피크닉용 벤치를 이용하여 환자를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화회사를  설득하여 나무에 
전화를 가설했다. 들판에 환자들이 장사진을 쳤고, 의료진은  환자들을 열심히 치료했다. 율
라는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병원 재건 자금을 모으려고 애썼다. 라디오에 출연하고,  손님들
에게 간단한 식사를 대접하는 만찬회를 개최하고,  노후연금이나 장애보험금이 나오는 날에
는 모금함을 들고 가까운 간선도로에 서 있기까지 했다. 석  달도 지나기 전에 그녀는 10만 
달러를 모았다. 이 정도면 연방정부의 보조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학교가 여름방학에 들어가자, 율라는 진료소를 학교로 옮겼다. 가을에는 트레일러를  진료
소로 삼았다. 한 번에 한 걸음씩, 한 번에 1달러씩, 새 진료소가 착착 세워졌다.  중앙난방과 
에어콘 만이 아니라 포장된 주차장까지 갖춘 현대식 진료소였다. 지칠 줄 모르는 율라의 창
의적 비전 덕분에 원래의 진료소를 파괴한 불길은  오히려 더 크고 좋은 진료소가 생길 수 
있는 길을 활짝 열어 주었다.
  '머드 크리크 진료소'를 찾아오는 환자들은  능력 껏 치료비를 낸다.  반경 수백 킬로미터 
이내에 이런 병원은 '머드 크리크 진료소'뿐이다. 사람들은  아이에게 예방주사를 맞히기 위
해, 혈압을 재기 위해, 또는 심장병 치료약에 대한 처방을 받기 위해 산을 넘고 골짜기를 건
너서 '머드 트리크 진료소'를 찾아온다. 진료소가 도울 수 없는  환자도 있다. 그러면  율라
는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을 찾아준다.  율라는 가난한 암 환자들을  무료로 수술해  주
었다. 
한 번은 차가 뒤집히는 바람에 율라의 어깨뼈가 부러졌다.  그러나 이튿날 아침에는 일터로 
돌아갔다. 놀라운 정력만이 아니라 그녀의 인생 철학도 율라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추진
력이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장미 침대를 약속 받고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비가 온 뒤에는 반드시 태양이 
빛나는 법이지요."
  율라는 자기가 교육만 충분히 받았다면 남을 위해  훨씬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을 거라고 
주장한다. '훨씬 많은 일'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상상하기 어렵다.  율라는 진폐증 환자를 비
롯한 가난한 환자들을 위해 소송을  제기하여 보상금을 받아냈다. 수원지를  재조정하고 수
백 군데의 오염된 우물을 대신 할  정수장을 짓기 위해 주 정부의   보조금을 받아냈다. 거
동이 불편하여 집에만 갇혀  있는 노약자들에게 식사를 배달하기  위해 자동차를 마련하고, 
학생들에게 무료 점심을 제공하고, 양로원을  짓기 위해 돈을 모금했다. 율라는  마음속으로  
상상한 일은 무엇이든 현실로 바꾸었다.
  오늘도 율라의 전화는 온종일 쉬지 않고 울려 댄다. 그녀 자신도 관절염과 심장병을 앓고 
있다. 몇 년 전에는 입원까지 했는데도 "사람은 열심히 일한다고 해서 죽지는 않는다."고 강
조한다.
  진료소는 율라의 강력한 비전과  꾸준한 노력, 그리고 창의성을  기리는 기념비처럼 우뚝 
서 있다. 날마다 백여 명의 환자들이 걷거나 차를 타고 구불구불한 산길을 지나서 진료소를  
찾아온다. 진료소 안에서는 두 명의 의사를 포함한 17명의 직원이 좋은 설비를 갖춘 7개 진
료실에서 환자들을 보살피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율라가 받는 연봉은 고작 2만 2천 달러에 불과하다. 지난 4년  동안 휴가를 받은 적도 없
다. 진료소가 문을 여는 날에는 어김없이 진료소에 나가고, 마지막 환자가 진찰과 치료를 끝
낼 때까지 기다리느라 날이 어두워진 뒤에야 문을 닫을 때도  많다. 그리고 진료소 문을 닫
은 뒤에야 율라 홀은 자기 '아이들'이 안전하게 보살핌을 받고  있으리라 확신하면서  집으
로 돌아간다. 하룻밤은 행복한 휴식을 얻기 위해.
  
  "일은 그냥 저절로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누군가가 그 일이 일어나도록 해야 합니다.
  계획한 대로 되는 일도 별로 없습니다. 열심히 일하고  창의적으로 해결책을 찾아야만 인  
  생의 온갖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찾게 될 것입니다." 
  율라 홀
  
  - 생각 코너 -
  <니그로 다이제스트>와 <제트> 및 <에보니>  잡지의 설립자인 존 존신은  다음과 같이 
권하고 있다. 벽에 부닥쳤을 때, 그 벽을 돌아서 가는 길이 보이지 않으면 이렇게 자문해 보
라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내가 지금 가진 것으로 할 수 있는 게 무엇인가?"
  존은 자신에게 수없이 이 질문을 던졌고,  그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존 존슨이  흑인에 
관한 흑인을 위한 신문을 창간하려 했을 때, 주위 사람들은 모두 미친 짓이라고 말했다.  하
지만 존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어머니의 집을 담보로 은행에서 500달러를 빌려, 1942년  
11월 1일에 <니그로 다이제스트> 창간호를 발행했다.
  존슨은 2천 부를 찍었지만, 이 신문을 취급하겠다는 배급업자가 하나도 없었다. 존은 그래
도 좌절하지 않고 친구 30명에게 부탁했다. 차를 타고  시내를 돌아다니며 신문 판매소마다 
들러서 <니그로 다이제스트>를 파는지 물어보라고. 오래지 않아  한 배급업자는 존에게 전
화를 걸어, 그의 신문을 취급하겠다고 나섰다.
  
      육성고백
      장애물을 우회하는 길을 찾아내라
    스물 두 살 때 나는  남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회계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대학에서 두 
학기를 보낸 뒤, 나는 인생을 회계사로 살아가고 싶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사업가가 
되고 싶었고, USC 경영대학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경영자 과정을 수강하고 싶었다.
  문제는 내가 USC 경영대학원을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학생처장은  내가 전에 다닌 
대학에서 받은 평균 학점이 별로 높지 않고, 게다가 결원도  없어서 나를 받아들일 수 없다
고 말했다.
  나는 정말로 경영대학원을 졸업하고 싶었다. 하지만 공식 통로는  모두 닫혀 있었기 때문
에, 창의성을 발휘하여 눈에 잘 띄지 않는 샛길을 찾아야했다. 곰곰 생각한 끝에 한 가지 전
략을 궁리해 냈다. 모든 강좌에 '비집고 들어가' 경영자  과정의 모든 강의에 등록하는 것이
었다. 강좌에 비집고 들어가려면 수강 등록을 하지 않았어도  수업 첫날 강의실에 나타나야 
하고, 그후 몇 주 동안 수강 등록을 취소한 학생이 나오면 그 빈자리를 재빨리 낚아채야 한
다.  
  2년 동안 나는 경영자 과정의 필수과목 7개 강좌에 모두 비집고 들어가 수강 인정서를 받
아냈다. 마지막 학기에 나는 학생처장을 만나러 갔다. 나는 그에게 성적 증명서를 보여주고, 
어떻게 학점을 따냈는지를 설명한 다음, 정식으로 입학하지 않았어도 경영자 과정을 졸업할 
수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깜짝 놀랐지만, 깊은 인상을 받았다.
  학생처장은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모든 의미에서 경영자인 것 같군. 어떻게 하면 자네 요구를 거절할 수 있을지 모
르겠네."
  그해 봄에 나는 경영자 과정에서 받은 증명서로 USC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이는 어떤 
장애물에 부닥쳐도 좌절하지 않고 상상력을 발휘하여 장애물을 우회하는 길을 찾아낸  덕분
이다.
  
  사업가로 성공한 팀 베어러는 젊은 시절에 창의성과 두둑한 배짱으로 학업과 인생의 진로  
  를 바꾼 순간을 회고하고 있다.
  
      육성고백
      우리의 성공 비결은 용기와 창의성이다
    1979년에 애틀랜타 공항이 건설되고 있을 때, 우리는 의욕으로  똘똘 뭉친 신생 회사였
다. 그때 마침 '내셔널 카 렌탈'사는 한  가지 시급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공항이  개항했
을 때 차들이 주차장에 대기할 수 있도록 5천 평의 맨땅을 포장해야 했는데, 공식 개항일이 
불과 열흘 앞으로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포장공사를 도맡는 현지 업체들은 그렇게 짧은 기
간에 5천 평이나 되는 땅을 포장할 수는 없다면서, 그 일을 맡으려고 하지 않았다.
  우리는 신생 업체인데다 일감이 절실하게 필요했기 때문에 더욱 열심히 노력할  작정이었
다. 우리는 '내셔널'사의 입장에서는 밑질  게 없고, 우리가 성공하면 많은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점을 강조했다. 
  우리는 그 일거리를 따내어 당장  작업에 들어갔다. 하루 2교대로  일하려면 야간에 불을 
밝혀야 했기 때문에, 나는 휴대용 발전기를  빌렸다. 다음 문제는 포장 재료의 수분  함량을 
항시 적당한 수준으로 유지하는 일이었다. 그 지역의 물 운반차는 모두 공항 건설공사에 동
원되었고, 우리는 물 운반차를 구입할 돈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특별허가를 얻어 소방차 호
스를 빌려서 가까운 소화전에 연결했다. 그리고는 그 소방 호스 가운데 하나를 직접 맡아서 
포장 재료에 물을 뿌렸다.
  그 열흘은 그야말로 시련의 연속이었고, 문제가 잇달아 발생할 때마다 창의적인 해결책을 
강구하느라 밤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마침내 아흐레가 지나고, 공항 개항일 전날 밤에 새 
공항의 렌트카 전용 주차장에 차량을 대기시킨 렌터카 회사는 '내셔널 카 렌탈'사뿐이었다.
  우리는 성공 비결은 어떤 일거리도  떠맡을 만한 용기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일을 해내기 위해 창의적인 접근방식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C & S 포장공사'의 창업자인 캐럴린  스트래들리는 그녀에게 상상력을 자극함으로써 도
약의 발판이    되었던 작업을 회고하고 있다.
  
    실행계획: 창의성을 개발하기
  하나의 목표를 추구하는 것은 끊임없는 진화 과정이다. 꿈을 추구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
가운데, 아무 장애물도 없는 곧은길을 지나 힘들이지 않고  제때에 목적지에 도착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꿈을 추구하는 길은 곧게 뻗은 고속도로가 아니라, 곳곳에 장애물이  도사리고 
있는 꼬불꼬불하고 울퉁불퉁한 길이다. 이 길을 따라 여행하려면  생각과 행동을 몇 번이고 
되풀이 수정하고 조정해야 한다. 그것은 유연하고 창의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이 숙련된 조종사라고 상상해 보라. 항공 전문가들은 뉴욕에서 하와이까지 날아갈 때 
비행 시간의 90%는 정해진 항로를 약간 벗어나는  것이 보통이라고 말한다. 조종사나 컴퓨
터는 항공기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끊임없이 미세 조정을  거듭해야 한다. 뛰어난 항공
기 조종사처럼, 이 책에 실린 주인공들도 저마다 자신의 운명을 조종했다. 그들은  끊임없이 
항로를 수정했고, 계속 바뀌는 날씨에  맞추어 계기를 조정했고, 유연하고 창의적인  태도로 
온갖 난관에 대처했다. 이것이 그들의 성공을 보장해 준 것이다.
  
    제1단계-타고난 창의성을 개발하라
    창의성은 근육과 같다
  "지식보다 상상력이 더 중요하다." 이것은  앨버트 아인슈타인의 말이다. 그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인류 역사상 가장 지적인 사람이다. 그는 과학의 가장 큰  수
수께끼, 수백 년 동안 과학자들이 골머리를 앓아온 수수께끼를 몇 개나 해결했다.  아인슈타
인은 문제 해결에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었지만, 자신의 가장  큰 장점은 지적 능력이 아니
라 상상력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
  다행히도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아인슈타인만큼 상상력이 풍부할 필요는  없
다. 우리는 누구나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있는 풍부한 창의성을 내부에 가지고 있다.  문제
는 정신을 굳세게, 그러면서도 유연하게 유지하는 것이다. 정신 기능은 근육과 비슷해서, 사
용하지 않으면 그 기능을 잃게 된다. 불굴의 문제 해결자가 되기 위해서는, 규칙적인 운동으
로 신체를 단련하듯 규칙적인 훈련으로  두뇌를 단련해야 한다. 정신  기능을 단련시키려면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을  줄이고, 어떻게 하면 해결책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인가를 
놓고 생각하거나 상상하거나, 남들과 활발한 토론을 벌이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써야 할 것
이다.
  
  창의성을 키우기 위한 훈련 
  창의성 문제 해결의 힘을 보여주는 훈련 법 가운데 내가 특히 좋아하는 방법은 로버트 슐
러 박사가 창안한 것이다. 그는 30여 년 동안 각종 세미나에서 이 훈련을 사용했고, 수천 명
이 거기에서 도움을 받았다. 그는 이 훈련 법을 '가능성 생각하기 게임'이라고 부른다.
  이 게임에 필요한 도구는 종이와 연필뿐이다. 우선 무엇이 문제인지를 정하고, 종이  위쪽
에 그 문제점을 적으라. 다음에는 종이 왼쪽에서 위에서  아래로 1부터 10까지의 숫자를 적
고, 마지막으로 가능한 해결책을 열 가지를 적으라.
  이 훈련의 목적은 상상력을 극대화시켜 무의식 속에 묻혀  있는 자원을 개발하는 것이다. 
슐러 박사는 캘리포니아에서 개척교회를 시작할 때 임대 할 수 있는 빈 건물이 하나도 없다
는 말을 듣고, 자신에게 처음으로 이 훈련  법을 써먹었다. 그가 종이에 적은 열 가지  가능
성, 즉 직관적으로 떠오른 해결책 중에는 학교 건물이나  시체 안치소나 드라이브인 극장을 
임대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을 하나씩 적어 나가면서  슐러는 자신의 태도가 갑자기 바뀐  것을 
깨닫고 놀랐다. 처음에는 해결책을 생각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하지만 다 끝낸 뒤에는 '불가
능'이라는 낱말 자체가 부질없고 무책임하게 여겨졌다. 그의  꿈과 그 꿈에 대한 그의 믿음
은 이렇게 해서 완전히 되살아났다.
  다음 단계는 각 해결책을 검토하여, 실효성 없는 것들을 하나씩 지우는 것이다. 슐러의 경
우, 여덟 가지 해결책을 지운 뒤에야 비로소 실효성 있는 해결책(드라이브인 극장)에 이르렀
다. 직관과 상상력만 발휘하여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적다  보니 정신나간 생각처럼 여
겨지는 몇 가지 포함되었지만, 결국 슐러는 그 방법을 통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을 수 
있었다.  
  나도 남편과 함께 이 방법을 써먹은 적이 있다. 남편은 건축업자라서 일에 기복이 심하다. 
꼭대기로 올라갈 때가 있는가 하면, 순식간에 골짜기로 떨어지기도 한다. 당시 남편은  깊은 
골짜기로 내려가고 있었다. 큰 공사를 거의 다 끝냈는데 새 계약을 하나도 맺지 못했다.  나
는 남편에게 이렇게 제의했다. 전화를 걸어서 일거리를 소개해 달라고 부탁할 수 있는 사람
을 열 명만 적어보라고. 그러자 남편은, 자기한테 일거리를 소개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열 명
씩이나 알지는 못한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둘이서 함께 이리저리 머리를 굴린 끝에, 30분 만
에 열 명을 찾아낼 수 있었다. 남편은 그 열 명한테서 단서를 얻어, 결국 두 건의 계약을 따
냈다.
  
    실행: 이 훈련을 당신이 지금 안고 있는 문제에 적용해 보라. 당신은 신규 사업을 시작
하기 위해 자금을 마련할 방법을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 당신이 개발한 신제품을 시중에 내  
놓을 수 있도록  도와줄 사람을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  또는 공동체 문제에  관한 묘책을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열  가지 방안은 모두 실행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상상  
력을 최대한 발휘하라.
  
    문제가 무엇이든, 그 해결책은 모두 당신 내부에 있다. 이 점을 명심하라. 몇 분 동안만  
 조용히 않아서 이 훈련  법을 효과적으로 끝내기만 하면,  또는 친구와 함께 브레인스토밍 
방식으로 가능한 해결책을 모색하기만 하면,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을 생
각하든 그것을 자유롭게 행할 수 있는 능력은 필연적으로 내적 지식과 연결되어 있게 마련
이다. 이 훈련 법을 사용하여 해결책을 찾아내면, 가능성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지고  새로운 
열정으로 목표에 더욱 전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제2단계-유연성을 가져라
  
  "상상력은 앞날의 인생에 일어날 흥미로운 일들을 미리 보여주는 예고편이다."
  앨버트 아인슈타인
  
  '창의성' '유연성' '상상력', 이 세 낱말은 서로 바꾸어 써도  거의 뜻이 통한다. 창의적인 
사람은 문제를 해결하는 대안, 자신의 수완이나 기술에 적합하고   자신의 가치를 반영하는 
대안을 생각해 낼 수 있다. 유연한 사람은 계획을 바꾸거나 수정할 수 있고, 필요한 때는 기
꺼이 바꾼다.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은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을 마음속
으로 그려볼 수 있다. 물질계에서 여태까지 보지 못한 것까지도 마음의 눈으로 불 수  있다. 
이 세 낱말은 모두 새로운 접근방식과 새로운 해결책을 기꺼이  시험해 보는 특성을 가리킨
다. 당신이 이런 자질을 갖고 있다면, 난관에 부닥쳤을 때  구부러지기는 할망정 부러지지는 
않을 것이다.
  
  세찬 바람이  불면, 딱딱한  것은 부러지게  마련이다. 부드러운  것은  구부러진다. 바람 
이 잔잔해져 날씨가 다시 평온해지면, 부드러운 것은 다시 일어선다. 
  발명가들은 창의성이 거의 무한하다. 라이트 형제, 일라이 휘트니, 토머스 에디슨, 헨리 포
드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누구나 다 읽었을 것이다. 이들의 성공 비결은 상상력과 유연성
이다. 그들은 당시만 해도 비현실적이거나 터무니없게 보였던 새로운 재료와 기술을 실험했
다. 오랫동안 실패를 거듭하면서 결코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았다. 실패할 때마다  그들은 
실패한 방법을 포기하고 이론을 수정한 다음, 성공할 만한 새로운 방법을 모색했다.  그들은 
남들의 생각과 실험을 배우고, 그것을  자신의 포로젝트에 채택할 만큼 유연하고  겸손했다.  
  
  경영에 관한 저술가이자 컨설턴트인 브라이언 트레이시는 기존 제품과 5%만 다른 제품을 
내놓으면 성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신제품이 기존 제품과 너무  다르면 '시대를 앞서가게' 
될지도 모르고, 소비자들은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수도 있다. 따라서 창의
적 발상이 의미 있는 결과를  낳기 위해서는 '아주 조금만' 색달라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애니타 로딕의 경우는 생각을 조금만 바꾸는 것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실례다. 그녀는 화장
품 업계가 오랫동안 번창하면서 대기업의 지배를 받고 있을 때 그 업계에 진출했다. 애니타
의 '바디 숍' 제품은 대기업 제품과 완전히 다르지는 않았지만, 천연 성분과 포장이 조금 색
달랐다. 그리고 이 약간의 차이가 애니타에게 성공을 안겨주었다.
  불굴의 인간들은 장벽에 부닥칠 때마다 그 장벽을 타고 넘거나 돌아서 가거나 밑으로 빠
져나가는 길을 찾아낸다. 벽돌담은 위협적이지만, 넘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불굴의 인간들
은, 어떤 난관에 부닥쳐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해결책을 찾으면 어딘가 에는 반드시 해결책
이 있다고 믿는다. 
  당신더러 셰익스피어만큼 창의적이 되라거나 마술사 후디니 만큼 유연해지라거나  레오나
르도 다빈치만큼 상상력을 가지라고 요구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당신의 내면에 얼마나 많
은 창의성과 유연성과 상상력이 잠재해있는지  알면 당신은 깜짝 놀랄지도  모른다. 당신의 
내면에 있는 창의성의 우물 속으로 깊이 들어가라.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다 보면 불가피하
게 이런저런 어려운 문제와 마주치게 마련이다. 그러면 상상력과 창의성과 융통성을 발휘하
라. 잠재능력의 5%만 개발하면, 머지않아 100% 불굴의 인간이 될 수 있다.
  
  "다리에 이를 때까지는 다리를 건너지 말라는 말이 있다. 문제가 생길 때까지는 쓸데없이
  문제와 씨름하지 말고, 문제가 생기면 그때 가서 해결책을 생각하라는 말이다. 하지만 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남들보다 한 발짝 먼저 상상 속에서 '다리를 건넌' 사람들이다."
  스피커스 라이브러리
  
       일곱 번째 특징 
       '인내'는 쓰나 그 열매는 달다
    이 책 전체에서 교훈을 한  가지만 얻으라고 한다면, '인내'를 택하라.  인내는 쓰나 그 

매는 달다! 이 책에 실린  교훈들은 그 하나 하나가  다 중요한 성공 비결이지만, 궁극적인 
비결-성공한 사람과 성공하지 못한 사람을  가장 극적으로 갈라놓은 특징-은  바로 인내다. 
이 책에 실린 주인공들은 인내의 위력을 보여주는 살아 있는 증거들이다. 인내만 자기 것으
로 내면화하고 다른 특징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목표를 향한 여행은 일곱 가지 특징을 모
두 받아들였을 때보다 느리고 길어지겠지만, 그래도 목적지에 도달할 가능성은 충분하다.
  이 마지막 장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슈퍼맨이 아니라 놀라운 인내심을 가진 보통 사람들
이다. 그들이 온갖 시련을 겪으면서도 얼마나 끈기 있게 참고 견디는지에 주목하기  바란다. 
그들의 태도는 어떠했는가? 그들을 앞으로 계속 나아가게 만든 추진력은 무엇인가?
  인내심 개발을 돕기 위한 '실행 계획'에는 네 가지 전략이 제시되어 있다. 이 전략을 사용
하면, 꿈이 실현될 때까지 먼 길을 끈기 있게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에게 유익한 충고를 하나만 말해 달라고 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시련은 누구  
  도 피할 수 없는 삶의 일부다. 시련이 찾아오거든, 고개를 꼿꼿이 쳐들고 시련의  눈을 똑  
  바로 쳐다보면서, '나는 너보다 커질 것이다. 너는 결코 나를 이길 수 없다'고 말하라."
  앤 랜더스
  
      세일즈의 영웅
      두 발로 서기 위해 먼길을 걷는다
    그는 세일즈로 생계를 꾸리는 수십만 명의 미국인 가운데  하나다. 여느 세일즈맨과 마
찬가지로 그도 날마다 아침 일찍 일어나 하루 일을 준비한다. 하지만 여느 세일즈맨과는 달
리, 그는 담당 구역까지 가는 데만에 세 시간이 걸린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빌 포터는 그  힘든 일과를 충실히 지킨다.  빌에게는 일이 전부다. 
일은 그의 생존 수단이다. 하지만 일은 그가 인간으로서 지니고 있는 가치의 중요한 일부이
다. 한때 세상은 그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다. 몇 년 전, 빌은  선택권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희생자가 될 수도 있었고, 희생자가  되기를 거부할 수도 있었다. 일하
고 있을 때는 희생자가 아니라 어엿한 세일즈맨이다.
  빌은 1932년에 태어났다. 지독한 난산이었다. 의사들은 겸자를  써서 빌을 꺼내다가, 실수
로 빌의 뇌를 손상시켰다. 겸자에 눌려서  뇌의 일부가 찌그러진 것이다. 뇌 손상의  결과는 
뇌성마비였다. 뇌성마비는 신경계를 혼란시켜, 말하는 능력과 걷는 능력, 팔다리를 통제하는 
능력에 영향을 미치는 병이다. 빌이 성장했을 때, 사람들은 그를 정신박약자로 여겼다. 해당 
관청에서는 그에게 '고용 부적격자'라는 딱지를 붙였다. 전문가들은 그가 절대로 일을 할 수 
없을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사회복지기관들은 인간 정신을 측정하는 수단을  갖고 있지 않았다. 행정기관들은 
빌이 할 수 없는 일만 보았다. 빌은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에 주안점
을 맞추었다. 어머니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넌 할 수 있어. 얼마든지 자립할 수 있어."
  빌은 어머니의 도움과 격려에 힘입어 세일즈 활동에  관심을 쏟았다. 그는 결코 사진을 '
무능력자'로 생각지 않았다. 그가 맨 처음 지원한   회사는 '풀러 브러시'사였지만, 샘플 가
방을 들고 다닐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와트킨스'사도 똑같은 이유로 퇴짜를 놓았
다. 하지만 빌은 일할 수 있다고 맹세하면서 채용해 달라고 고집스럽게 요구했다. 그가 집요
하게 나오자 '와트킨스'사도 결국은 그의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
을 내세웠다. 오리건 주 포틀랜드를 담당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곳은 아무도 맡고  싶어하
지  않는 지역이었다. 그러나 빌에게는 기회였다. 빌은 기회를 붙잡았다.
  이렇게 해서 빌은 1959년에 방문 판매를 시작했다. 그러나 쉽지는 않았다. 네 차례나 시도
한 뒤에야 겨우 용기를 내어 첫 번째 집의 초인종을 누를 수 있었다. 현관문을 열어준 사람
은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옆집도, 그 옆집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세일즈맨으로 살아가
려면 강인한 생존 기술을 개발해야 했다.  고객이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 그는 고객이  사고 
싶어하는 제품을 찾아낼 때까지 몇 번이고 그 집을 찾아가곤 했다.
  그가 세일즈맨으로 살아온 지도 어언 38년이 흘렀지만, 그의 일과는 한결같았다. 아침마다 
빌은 담당 구역으로 가는 길에 구두닦이한테 들러서 구두끈을  매달라고 부탁한다. 그의 손
은 너무 뒤틀려 있어서 구두끈을 맨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호텔에 들르면,  도어맨
이 빌의 와이셔츠 단추를 채워주고 넥타이를 매만져 빌이 최대한 단정해 보이도록 매무시를 
가다듬어준다.
  날씨가 좋든 나쁘든, 빌은 날마다 15킬로미터를 돌아다닌다. 쓸 수 없는 오른팔을 뒤로 감
춘 채, 무거운 샘플 가방을 끌고 언덕을 오르내린다. 담당 구역에 있는 집들을 모두  돌아다
니려면 석 달이 걸리지만, 그는 한 집도 빠짐없이 문을 두드린다. 거래가 성립되면, 빌은 펜
을 쥐기가 어렵기 때문에 고객들이 직접 주문서를 작성한다.
  빌은 14시간을 일한 뒤 기진맥진한 상태로 귀가한다. 온몸이 쑤시고, 편두통으로 지끈거릴 
때도 많다. 2, 3주마다 그는 어디에 무슨 물건을  배달하라는 지시서를 타이프로 쳐서, 배달 
꾼으로 고용한 여자에게 건네준다. 제대로 움직이는 손가락이 하나뿐이기 때문에, 그 간단한 
일을 하는 데에도 열 시간은 걸린다. 마침내 잠자리에 들면, 자명종을 이튿날 아침 4시 45분
에 맞추어둔다.
  날이 가고 해가 갈수록 빌은 반갑게 맞아들이는 집이 많아졌고, 그의 판매 실적도 꾸준히 
올라갔다. 24년 동안 수백만 가구의 문을 두드린 뒤,  그는 마침내 목표를 이루었다.  '와트
킨스'사의 서부지역 판매왕으로 선정된 것이다. 그때부터 그는  한 번도 판매 왕 자리를 뺏
기지 않았다.
  빌은 이제 60대 노인이 되었다. 가정용품을 생산하는 '와트킨스'사에는 6만 명의 세일즈맨
이 있지만, 아직도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물건을 파는 사람은 빌 뿐이다. 이제는 대다수 사람
들이 대형 할인점을 주로 이용하기 때문에, 그의 일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이처럼 구매
자의 성향이 바뀌고 있는데도 빌은 변명도 불평도 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담당 구역에 가서 고객들을 돌보는 일을 묵묵히 계속할 뿐이다.
  1996년 여름, '와트킨스'사는 전국대회를 열었다. 빌은 이번에는 문을  두드릴  필요도 없
었고, 제품을 사라고 누군가를 설득할 필요도 없었다. 이번에는   빌 자신이 제품이었다. 이 
회사가 설립된 이래 최고의 제품이었다.  '와트킨스'사는 유명한  '회장 특별상'의 첫  번째 
수상자로 빌을 선정하여, 빌이 인간으로서 보여준 놀라운 용기와 뛰어난 업적을 경의를  표
했다. 
이 상은 앞으로 빌 포터와 비슷한 능력과 자질을 보여주는 사람에게만 드물게 수여될 예정
이다.
  시상식이 진행되는 동안, 동료들은 모두 일어나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갈채와  눈물
은 5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와트킨스'사의 최고경영자인  어윈 제이콥스는 사원들에게 이
렇게 말했다.
  "빌은 사람이 마음속에 목표를 가지고, 마음과 영혼과 정신을  다 바쳐 그 목표를 이루는  
  데 전념하면 삶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상징하는 분입니다."
  그날 밤 빌 포터의 눈에는 아무 고통도 없었다. 있는 것은 오직 자부심뿐이었다.
  "인생에서 얻고 싶은 게 무엇인지 정하세요. 긍정적인 면을 보세요.
  그리고 원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 절대로 포기하지 마세요."
  빌 포터  
  
      반죽을 밀다가 돈더미에서 뒹굴기
      기업가는 실패를 재평가하여 성공을 거둔다
    톰 모너헌이 사업에 실패한 이유를 변명한다면, 적어도  100가지 '핑계'는 댈 수 있었을 
것이다. 고아원에서 자라 소년원을 들락거린  것도 좋은 핑계였고, 사업이 뭔지도  모르면서 
시작한 것, 사업을 너무 빨리 확장한 것도  핑계가 될 수 있었다. 그는 파산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렸고, 다시 재기했지만 또다시 모든 것을 잃을 뻔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톰 모너헌은 어떤 핑계도 대지 않았다.  완전히 포기할 때까지는 실패한 
게 아니라는 것이 그의 사고방식이다.
  그가 사업에 처음 뛰어든 것은 대학 다닐 때였다. 1960년에 톰은 형과 함께 900달러를 빌
려서, 미시간 주 입실랜티의 동미시간 대학 근처에 피자가게를 냈다. 학기 중에는 장사가 꽤 
잘됐다. 그러다가 학교가 방학에 들어가면 매상이 75%나 줄었다. 날마다 소스와  밀가루 반
죽을 만들고, 피자에 얹을 채소와 고기를 준비하고, 치즈를  다졌다. 이 일은 해도해도 끝이 
없어서, 몇 시간이고 치즈만 다지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반면에 형은 우체국에 안정된 일자리를 갖고 있어서, 사업에  쏟는 시간은 동생보다 훨씬 
적었다. 사업이 최악의 상태에 빠진 것처럼 보이자, 형과 아우의 동업관계가 흔들리기  시작
했다. 형은 배달용 차량으로 쓰고 있는 1959년형 폴크스바겐을 갖는 대신, 자신의 지분을 동
생에게 넘겼다. 톰은 그때를 이렇게 회고했다.
  "그건 좌절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낙천적이었지요. 이제부터 사업의 성패는 순전
히 내 손에 달려 있었습니다. 오히려 나는 그게 좋았어요."
  톰은 학교를 계속 다니고 싶었지만, 혼자서 가게를 맡게 된 이상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
는 사업 확장의 꿈을 이루기 위해 함께 일할 사람을 찾았다. 톰은 찾아낸 사람은 피자 가게
를 운영해 본 경험이 있고, 처음으로  무료 배달을 실시한 사람이었다. 톰은 그를  직원으로 
채용하겠다고 말했지만, 그는 500달러로 지분을 사들여 대등한 동업자가 되겠다고 고집했다. 
톰은 마지못해 그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톰과 새 동업자는 그해 가을에 두 곳에 피자 가게를 냈고, 1월에는 정식 레스토랑을 개업
했다. 문제는 톰은 아직도 동업자의 500달러를 구경조차 못했다는 것, 동업자가 과거에 파산
했기 때문에 모든 재산이 아직도 톰의 명의로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톰은 일주일에 100시
간씩 일하고, 고물 '램블러'를 몰고  다니고, 주급으로 125달러 짜리  수표를 받았다. 반면에 
동업자는 고급 승용차와 부동산을 구입하고 집을 호화판으로 개조하면서 흥청망청 돈을  써 
댔다. 톰의 친구들은 동업자가 그를 이용하고 있다고 경고했지만, 톰은 동업자의 경험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톰은 계속 사업 확장에 몰두했다.
  "내가 올바르게 처신하면 동업자도 나한테 해를 끼치지는 않을 거라고 믿었습니다."
  몇 년 뒤 동업자가 병원에 입원하면서 동업관계를 해소하자고 요구했을 때에도 톰은 여전
히 신용이 최고의 사업 전략이라고 믿었다. 동업관계가 너무나  복잡하게 얽혀 있었기 때문
에, 톰의 변호사는 파산을 선언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라고 권했다. 그러나 톰은  단호히 
거절하고, 동업자의 지분을 2만 달러에 사들여 동업관계를 해소했다. 동업자가 다시 빚을 지
게 되면, 톰의 명의로 돈을 빌려 그에게 빚을 떠넘길 게 뻔했다. 톰은 이것을 잘  알고 있었
다. 그는 동업자가 건강을 회복해서 빚을 같을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하며, 동업자가 잘되기를 
빌어주었다. 그리고는 다시 피자를 만들기 위해 가게로 돌아왔다.
  톰의 목표는 최고 피자 가게가 되는 것, 입실랜티에 가장 맛있는 피자를 만든다는 평판을 
얻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 그는 피자에 들어가는 모든 재료에 대한 엄격한 지침을 세웠다. 
모든 재료는 최상급이어야 한고, 특히 밀가루 반죽은 날마다 신선하게 만들어져야 했다.
  사업은 번창했고, 톰은 동업자 때문에 생긴 악성 부채를 조금씩 갚아 나갔다. 그는 하루도 
쉬지 않고 아침 10시부터 이튿날 새벽 4시까지 18시간씩 일했다. 몇 년 동안 이렇게 열심히 
일하자 어음을 발행할 수 있게 되었고, 일하며 보낸 휴가이긴  했지만 휴가도 얻을 수 있었
다. 휴가 기간에는 그는 3년 전에 결혼한 아내와 함께 되도록 많은 피자 가게를 찾아다녔다. 
더 많은 가게를 운영하려면 피자를  어떤 식으로 만들면 되는지, 그것을  배우는 것이 피자 
가게를 돌아다닌 목적이었다. 톰은 입실랜티와 그 주변 지역에만  머물지 않고 사업을 계속 
확장하고 싶었다. '도미노 피자'가 미시간 주 전역으로 퍼지는 광경을 상상하면 가슴이 설레
곤 했다.
  동업관계가 해소된 지 2년 뒤, 톰이  그토록 염려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났다.  동업자였던 
사내가 파산을 선언한 것이다. 추수감사절 날,  톰은 명절 기분이 싹 달아나게 하는  소식을 
아내에게 전했다. 톰은 이제 7만 5천 달러가 넘는 악성 부채를 떠 안게 되었다.
  "나는 이 사업을 일으키고 키우기 위해 그토록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걸 전부 다 잃는다
는 건 상상할 수도 없었어요."
  톰은 채권자들을 만나 부채상환 계획을 세우고, 부채는 한푼도 빠짐없이 갚겠다고 약속했
다. 성공하겠다는 결심은 어느 때보다 강해졌다. 톰은 다시 피자 만드는 일로 돌아갔다.
  이듬해에 톰은 채권자들에게 약속을 지키면서도 5만 달러의 순이익을 올릴 수 있었다. 하
지만 불행히도 이 수익금은 그의 주머니 속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본점에 불이 나서 몽땅 
잿더미가 되어버린 것이다. 보험회사에서는 총 피해액 15만 달러  가운데 1만 3천 달러밖에 
보상해 주지 않았다. '도미노  피자'는 이제 망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톰은 정신을  

짝 차리고, 줄일 수 있는 경비는 모두 줄였다. 그리고 화재 피해를 메울 수 있는  방법을 생
각했다. 또다시 톰은 피자 만드는 일로 돌아갔다.
  1967년 4월 1일, '도미노 피자'의 독점 판매권을 가진 첫  번째 체인점이 문을 열었다. 톰
의 변호사는 사업 확장 속도를 늦추고 경영에 좀더 관심을 쏟으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톰은 
세세한 법률 조항을 따지고 있을  만한 인내심이 없었다. 그는 계속  사업을 키우면서 자기
가 제일 잘하는 일에 전념했다. 그리고 여는 때처럼 열심히 일했다.
  그의 노력은 보상을 받았다. 1년 반 뒤에 '도미노 피자'는 다시 일어섰다.  '도미노 피자'
는 12개의 체인점을 낼만큼  성장했고, 12개가  개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톰은 오찬회에서   
성공 비결에 대해 강연해 달라는 요청까지 받게 되었다. '도미노 피자'는 조직으로서 성숙기
에 접어들었고, 조만간 주식을 공개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톰은 인생의 절정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10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날마다 16시간 내지  18시간씩 일해 온 노고가 마침내 
열매를 맺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성공은 사실이라고 믿기에는 너무  굉장해 보였고, 실제로 그러했다. 그러나  18개월  
만에 현금이 바닥났다. '도미노  피자'는 곤경에 빠졌다. 도처에서  부도난 수표가 돌아오고, 
'도미노 피자'가 보수를 지불하지 못했기 때문에 회계사도  일을 그만두었다. 회계사의 보고
서가 없는 상태에서는 부채가 얼마나 되는 지도 알 수 없었다. 장부에는 부채가 150만 달러
라고 적혀 있었지만, 톰은 이 숫자를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또다시' 파산 직전에 이르러 있었다.
  톰은 실패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사업을 지나치게 확장한데다, 어떤 지역에 먼저 진출한 가게가 제대로 기반을 잡기도 전
에 다시 새 가게를 냈습니다. 훈련도 받지 않고 경험도 전혀 없는 사람을 새 가게에 지배인
으로 보낸 것도 실수였고, 본사에 필요 이상으로 많은 직원을 둔 것도 실수였습니다."
  몇 달 전만 해도 그에게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동료 사업가들은 이제 그를 머저리처럼 취
급했다. 톰은 회사를 살리기 위해 합병 상대를 찾기  시작했지만,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
도미노 피자'에 상당한 금액을 대출해  준 은행에게는 곤경에 빠진 회사를  구한 경험이 있
는 지역 사업가를 영입하라고 톰은 설득했다.
  1970년 5월 1일, 톰 모너헌은 회사에 대한 경영권을 상실했다. 그는 마지못해 은행에 주식 
일부를 양도하고, 나머지는 지역 사업가에게 양도했다. 하지만 합의에 따라 톰은 권한도  없
는 사장 자리에 계속 남을 사람을 어디  가서 찾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그의 소유  재산이 
빈약한 것을 보면(그는 아직도 낡은 고물 차를  몰고 다녔고, 집안에 있는 가구라고는 침대 
두어 개와 간이 부엌뿐이었다)그가 돈을 낭비하지 않은 것은 분명했다.
  샐러리맨 사장으로 일하는 것은 괴로웠지만, 덕분에 톰은 파산을 면할 수 있었다. 새 경영
진은 이익을 내지 못하는 가게를 폐쇄하고, 사원을 줄이고, 남은 인원을 재편성하는 구조 조
정을 단행했다. 톰은 12개 점포를 맡게 되었다. 이 가게에서 저 가게로 돌아다닐 때는  경비
를 아끼기 위해 자동차 안에 잠을 잤다.
  그래도 충분치 않았다. 열 달 뒤, 지역  사업가는 '도미노 피자'가 희생  할 가망이  없다
는 판단을 내리고, 사업에서 손을 떼고 싶어했다. '도미노 피자'가 조만간 파산할 거라고 생
각한 사업가는 톰의 체인점 가운데 하나를 받는 대신 자기  주식을 톰에게 돌려주기로 동의
했다. 
톰은 '도미노 피자'에 대한 경영권을 되찾은 뒤, 그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얼마간만 시간
을 주면 빚을  다 청산하겠다고 채권자와  납품업자들에게 장담했다. 대부분은  동의했지만, 
'도미노 피자'의 체인점 업주들은 그렇게 동정적이지 않았다.  그들은 '도미노 피자'가 반트
러스트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집단 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출두통지서를 받았을  때 톰
은 책상에 앉아서 흐느껴 울었다.
  그후 9년 동안, 톰은 서서히 사업을 일으켜 세우면서 빚을 모두 갚았다. 5년 동안은 '도미
노 설탕'이 제기한 상표권 침해 소송에서 치열한 법정 싸움을  벌인 끝에 겨우 승리를 거두
었다. 그리고 피자 산업이 갑자기 커지면서 내부 경쟁이 치열해지자, 이번에는 이 경쟁의 물
결에 맞서 살아남기 위해 싸워야 했다.
  그러나 톰은 그냥 살아남기만 한 게 아니었다. '도미노 피자'는 고객의 주문을 받은 뒤 30
분 안에 따끈따끈하고 맛있는 피자를 고객의 집까지 배달할 수 있는 식당으로서 타의 추종
을 불허하고 평판을 확립했다. 이로써 '도미노 피자'는 세계  최대의 배달 피자 업체가 되었
고, '도미노 피자'의 주식 97%를 소유하고 있는  톰은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기업가로 꼽히
게 되었다.
  톰은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사업 밑천도 거의 없었고, 대학을 중퇴했으니 학력도 고
등학교 졸업이나 다름없는 수준이었다. 그런데도  성공의 정점에 도달했다. 톰은 변명할  이
유, 실패한 이유, 그만둘 이유가 많았지만, '포기한다'는  것은 톰 모너헌의 사전에는 존재하
지 않는 낱말이다. 그의 사전에 존재하는 낱말은 '인내와 끈기'다
  
  "그 모든 좌절은 내가 교훈을 얻는 수단이었습니다.
  나는 그것을 징검다리로 이용했지, 결코 실패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실패란 노력을 멈추는 것입니다.
  나는 결코 노력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톰 모너헌
  
      처음에 성공하지 못하거든...
      다시 하고, 다시 하고...(47번까지) 다시 해 보라 
    당신은 한 시간 동안 전화를 붙잡고 20명에게 상품을 소개했지만 한 건도 거래가 이루
어지지 않았다. 5개 은행에 중소기업 지원자금 대출을 신청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영화제
작사에 보낸 시나리오가 또다시 '정중한' 거절 편지와 함께 되돌아왔다.
  이런 때야말로 턱을 치켜들고, 어깨를 쫙 펴고, 자신에게 말해 주어야 할  순간이다 "맥시 
파일러!"라고.
  왜? 무엇 때문에? 맥시 파일러가 1966년에  처음으로 캘리포니아 주 변호사 시험에 응시
했을 때, 그의 나이가 서른 여섯  살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시험에서 합격하지  못했지만 
다시 도전했다. 두 번째도, 세 번째도, 네 번째도 떨어졌지만 다시 또 도전했다.  로스앤젤레
스, 샌디에이고, 리버사이드, 샌프란시스코, 캘리포니아 주 등 변호사 시험이  치러지는 곳이
면 어디든 찾아가서 시험을 쳤다. 자식들이 아직 집에서 살고  있을 때 시험을 치기 시작하
여, 두 아들이 법과대학원을 졸업한 뒤에는 그들과 함께 시험을 쳤다. 두 아들의 법률사무소
에서 보조로 일하기 시작한 뒤에도 변호사 시험을 쳤다.  대다수 사람들이 은퇴를 고려하기 
시작할 나이가 된 뒤에도 계속 응시했다.
  그리고 마침내 합격했다. 25년 동안 수험료로 갖다 바친 돈이 5만 달러에 이르고,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법률 연습 강좌를 듣고, 통틀어 144일을 시험장에서 보낸 뒤, 48번째로 
변호사 시험에 응시해서 드디어 합격한 것이다. 맥시의 나이는 예순 한 살이었다.
  왜? 무엇 때문에?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그만둘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아요. 나는 변호사 시험에 합격
할 수 있고, 언젠가는 성공할 거라는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보았습니다. 포기할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시험에 빈번히 떨어지면서도 맥시는 자신의 실패자로 생각지 않았다. 그는 1950년대에 법
률과 재판이 흑인에게 늘 공정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변호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는 
서굿 마셜, 너새니얼 존스, 로렌  밀러같은 법률가들이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한 것을 보고, 
자기도 법률을 이용하여 사회를 변화시키고 싶다는 꿈을 품었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한 뒤에 곧바로 법과대학원에 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부양해야 할 자
녀가 일곱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밴 노먼 대학 법과대학원에 진학하여 결국 졸
업한 것은 8년 뒤였다.
  맥시는 세 번째로 변호사 시험을 쳤을 때도 48번째로 시험을 쳤을 때만큼 법률을 잘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법률 연습 강좌에서 꾸준히 상위 10%이내의 성적을  올렸다. 맥시
는 콤턴에서 시 의원회 의원으로 일하면서 소송사건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아들들에게 깊
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고소장은 모두 그가 작성했고, 소송과 관련된 일은 그가  도맡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였을까?
  맥시가 시험을 잘 치르지 못한 것은 분명하다. 미국에서도  가장 합격률이 낮은 캘리포니
아 주 변호사 시험은 논술 문제가 포함되어  있는데, 아들들이 지적했듯이 맥시의 문장은 '
법률가다운' 문체가 아니었다. 맥시는 분명  문제를 알고 있었지만, 법률상의  문제를  다룰 
때 학문적인 문제보다는 실제적인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도 갖고 있었다.
  대다수 사람들은 몇 번 실패하면 벌써 다른 분야로  방향을 바꾸었겠지만, 맥시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 앞으로 계속 나아가게 만든 추진력은 무엇이었을까?
  가족과 친구들의 한결같은 후원이라고 그는 말했다. 실패할 때마다 아내는 당장에 다음번 
지원서를 타이프로 쳐주면서 말하곤 했다. "여보, 이번에는  거의 합격할 뻔했어요. 다시 한 
번 해보세요. 다음 번에는 틀림없이 합격할 거예요."
  학창시절에는 공부를 게을리 했는데도 지금은  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친구들을  떠올리는 
것도 맥시 파일러에게는 도움이 되었다. "그런 애들도 합격했는데, 내가 왜 포기해야 하지?" 
맥시는 이렇게 자문하곤 했다.
  "응시할 때마다 처음으로 시험을 치른다는 마음가짐을 가졌고, 그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언젠가는 꼭 합격할 거라는 믿음, 기필코 합격하고야 말겠다는 결심도 도움을 주었다.
  "내 생각엔 시험을 칠 때마다 합격했습니다. 시험관들이  나를 합격시키지 않았을 뿐이지
요."
  48번째 시험을 치른 뒤, 집으로 우송된 봉투를 개봉한 것은 아들이었다. 맥시는 지난 25년 
동안 그랬듯이 그 봉투를 뜯지도 않은 채 벽난로 위에  던져놓았고, 그래서 봉투는 그 집에
서 가장 아름다운 도자기들 틈에 몇 시간 동안이나 내버려져 있었다. 아들이 마침내 봉투를 
뜯어보고는 소리를 지르면 아버지에게 덤벼들어 끌어안고  키스를 퍼붓기 시작했다. 맥시는 
"축하합니다, 파일러 씨..."로 시작되는 합격통지서를 몇 번이고 읽었지만, 그게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40분이 걸렸다.
  맥시의 선서식에는 수많은 동료 변호사들이 참석하여, 그들이 이제껏  본 적이 없는 낙천
적 정신과 불굴의 인내심을 가진 인물에게 경의를 표했다.
  오늘날 맥시 파일러는 캘리포니아 주 콤턴 법원에서 1km 쯤 떨어진 곳에  사무실을 내고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그가 끝까지 싸우겠다고 말하면, 의뢰인들은 그 말을 믿어도 좋다.
  
  "계속 전진하라. '기필코 성공하고야 말겠다'고 말하라.
  그러면 성공할 것이다."
  맥시 파일러
  - 생각 코너 -
  
  데이비드 세이퍼스타인은 장편소설 <고치>의 원고를 여러 곳에 보냈지만, 에이전트와 출
판업자, 영화사와 제작자한테 쉰 두 번이나 퇴짜를 맞았다. 그들은 으레 이렇게  말했다 "이
건 노인네 이야기라서..." "노인들은 영화관에 오지 않습니다." "늙은 고집쟁이한테는 아무도 
관심이 없습니다..." 이것은 데이비드가 쓴 첫 소설이었다.
  마침내 제작자인 리처드 자누크가 그 원고를 영화화하기로 결정했지만, '무명작가'인 데이
비드에게 시나리오 작업을 맡기려 하지 않았다. 괜찮은 영화를 만들려면 '대단한 작가'가 시
나리오를 써야 한다는 거였다. 5년 동안 여러 작가들이 데이비드의 원고에 손을 댔지만,  마
지막 작가는 결구 데이비드의 원래 줄거리로 돌아왔고 드디어 영화가 만들어졌다.
  이런 경험을 토대로 데이비드는 이렇게 말했다.
  "불굴의 끈기와 자신에 대한  믿음이 '유일한' 핵심입니다. 여기에  약간의 재능과 약간의 
행운, 그리고 많은 인내를 덧붙일 수 있겠지요."
  데이비드의 사례는 51번이나 퇴짜를 맞고도 좌절하지 않고 계속 나아가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행운을 창조할 수 있다는 증거다.
  
     꿈은 '쓰레기'로 간다
     시청과는 싸울 수 없다고 누가 말하는가?
    또래 소녀들의 전화통에 매달려, 새로 열을 올리기 시작한  사내아이에 대해 수다를 떨
며 킬킬거리고 있을 때, 열두 살 난 로라 베스 무어는 전화통에 매달려, 도시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바꾸려고 시장과 통화하고 있었다. 다른 소녀들이 쇼핑센터를 어슬렁거리고 있을 
때, 로라 베스는 청원서를 들고 동네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학교 친구들이 영화를 보러 가거
나 함께 어울려 노는 동안, 로라 베스는 집에서 또다시  전화통에 매달려 자신의 꿈에 대한 
지지를 얻으려고 온종일 땀을 쏟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로라 베스의 꿈이 비현실적이
라고 말했다.
  로라 베스가 신나게 노는 대신 열심히  일하면서 여름방학을 보내기로 작정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로라에게 그런 열정과 신념을 심어준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쓰레기다. 정확히 말하면 재활용되지 않은 쓰레기다.
  1990년 '지구의 날'에 벌어진 시위를 본 뒤, 로라  베스는 고향인 휴스턴시가 쓰레기 재활
용에 대한 어떤 프로그램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로라  베스는 그런 현실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쓰레기를 재활용하지 않으면,  우리는 이 지구를 쓰레기처럼  내던지고 
있는 거야"하고 로라 베스는 생각했다.
  로라 베스는 당장 조사에 나섰지만, 처음부터 벽에 부딪혔다. 시청에 문의 전화를 했더니, 
답변은커녕, 그런 문제는 어린애가 나설 일이 아니라면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러나 로라는 
그만두지 않았다. 마침내 로라의 통화하기를 거부하지 않는 사람과 전화가 연결되었지만, 그 
사람도 로라의 문제 제기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로라는 시장에게 편지를 써서, 큰길의 
인도 가장자리에 재활용품을 모아두는 곳을 마련해 줄 수 없느냐고 물었다. 대답은 그럴 계
획이 없다는 것이었지만, 로라는 반 년 뒤에 휴스턴 시가  시범 지역을 정하여 재활용품 분
리수거를 시험해 볼 예정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시범 지역에  자기 동네가 포함되기를 바란 
로라 베스는 수백 명의 서명을 받은 청원서를 들고 시청으로 갔다. 이번에도 반응은 부정적
이었다. 도시 전체의 쓰레기를 재활용하는 것은 "비용에 비해 효과가 적다"는 것이었다.
  로라 베스는 그때 일을 이렇게 회고했다.
  "시장은 나를 내쫓았어요. 요컨대 '너는 아직 어린애일 뿐이야'라는 거죠."
  사실이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로라 베스의 부모는 계속 노력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
다는 믿음을 가지라고 가르쳤다.
  "이 세상에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어요. 무엇이든 열심히 노력해야 얻을 수  있죠. 목
소리가 아무리 작아도, 계속 외치다 보면 언젠가는 변화를 일으킬 수 있어요."
  때로는 접근방식만 바꾸어도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로라 베스는  정부기관이 도와주지 
않는다 해도 민간 기업은 도와줄 거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재활용 회사에 전화를 걸기 시작
했다. 그 회사들은 기꺼이 도움이나 조언을  해줄 거라고 기대했지만, 열두 살 짜리  소녀의 
이야기를 귓등으로 듣는 것은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로라의 어머니는 딸이 "제 힘에 부치는 일을 하면서" 교훈을 얻어  십자군 운동을 스스로 
포기하리라 믿고,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교훈을 얻은 것은 어머니였다. 로라
의 어머니는 열두 살 짜리 소녀가 얼마나 단호할 수 있는가를 새삼 깨달았다.
  로라 베스는 끈질기게 노력했지만,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거절당할 때마다  로라는 
속으로 말하곤 했다. "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갔을 뿐이야. 한 번  더 전화를 걸었을 뿐이야. 
내가 상대해야 할 사람이 한 사람 더 줄어들었을 뿐이야. 이 사람이 안 되면 다음 사람으로 
넘어가고, 그렇게 계속하다 보면 언젠가는 나를 도와줄 사람을 만날 수 있겠지."
  그러나 자기를 도와줄 사람이 자기 자신밖에 없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결국 로라 베스는 
동네를 위한 쓰레기 재활용 계획안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여름 내내 로라는, 계획을  실행에 
옮길 때 비용이 들지 않는  방법을 찾으려고 애쓰면서, 회사와 정부  기관에 정보와 지원을 
요청했다. 마침내 내용이 충실하고 실효성  있는 계획안을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자,  로라는 
동네 사람들의 모임에 나가서 자신의 계획안을 발표했다. 그들은  그 방안을 찬성하고 지원
을 약속했다.
  하지만 아직도 한 가지 장애가 남아 있었다. 동네 사람들이 재활용품을 놓아둘 곳이 필요
했다. 로라가 보기에는 학교가 가장 적당했다. 전에도 그랬듯이, 교장 선생은 로라의 전화를 
받는 것조차 거부했다. 이번에도 로라 베스는 굽히지 않았다. 몇 달 동안 수없이 전화를  걸
자, 마침내 학부모들이 로라를 도우러 나섰다. 학부모들은 로라가 하는 일에 협조하라고  교
장을 설득했다.
  "그때 도움을 얻지 못했다면, 나는 지금도 계속하고 있을 거예요. 아무리 시간이  오래 걸
려도, 이 일을 반드시 해낼 작정이었으니까요."
  1991년 봄, 처음으로 재활용품을 수집하는 날, 수백 명의 주민이 재활용 쓰레기를  가져왔
다. 여러 자원봉사자가 픽업 트럭을 몰고 나타나 쓰레기를  모아서 재활용 공장으로 가져갔
다. 석 달 동안 재활용 프로그램은 성공적으로 진행되는 듯이 보였다. 그러다가  자원봉사자
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로라 베스는 또 다른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다. 한 달에 20달러씩  받
는 용돈으로 트럭을 빌리고, 종이와 깡통, 알루미늄, 유리, 플라스틱을 재활용 공장으로 실어  
나를 자원봉사자를 구했다.
  2년 뒤에 트럭은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운행되고, 재활용품을 팔아서 얻는 수익금은 재
활용 프로그램을 운영하고도 남았다. 어느  토용일 하루에 만17톤의 자원이 모였다.  재활용 
프로그램이 없었다면 이 자원은 그대로 쓰레기 매립 지에 묻혔을 테지만, 지금은 쓸모 있는  
제품으로 재생되고 있다.
  재활용 프로그램이 운영되기 시작한 지 몇 년 뒤, 새로  취임한 휴스턴 시장은 다른 동네
에서도 비슷한 재활용 프로그램을 실시하는 게 좋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시장이 관리들에게 
재활용 방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했을 때, 그들은 누구한테 상의해야  할지를 정확히 알고 있
었다. 이번에는 시청 직원들이 먼저 전화를 걸었고, 그들이 전화를 건 상대는 로라 베스  무
어였다.
  
  "절대로 포기하지 마세요. 끝까지 해보는 거예요.
  그러면 누군가가 마침내 당신을 이해하고 도와줄 겁니다."
  로라 베스 무어 
  
      육성 고백
      포기하지 말라! 절대로!   
    나는 기억도 가물가물할 만큼 오래 전부터 연예인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기억도 가물
가물할 만큼 오래 전부터 퇴짜를 맞았다.
  1958년 12월 7일, 나는 마침내 보스턴의  '쇼바'에 일자리를 얻었다. 밤마다  두 차례  쇼
를 하고, 일주일에 125달러를 받기로  했다. 나는 벌써  길 건너  호텔에 방까지 빌려 놓고   
있었다.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싸구려  호텔이었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내게는 이곳이 
첫 직장이었다.
  해리 브렌트를 만난 것은 뉴욕의 모든 에이전트들에게 퇴짜를  맞은 뒤였다. 해리는 흔쾌
히 나와 함께 일하고  싶어했다. 내가 연기의 틀을  잡아주고, '페퍼 재뉴어리... 촌철살인의 
코미디!'를 내세워 '쇼바'와 출연 계약을  맺게 해준 것도 해리였다. 그때는  정말이지 모든 
게  상승곡선을 타고 있는 것 같았다. 적어도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첫 번째 쇼가 끝난 뒤
에 지배인이 나를 부르더니, 한마디 내뱉었다. "이봐, 페퍼. 당신은 해고야."
  나는 기절할 것만 같았다. 해고라고! 첫 직장에서, 그것도 첫날 해고되다니! 나는 호텔 방
으로 돌아가서 침대에 쓰러졌다. 울음을 그칠 수가 없었다. 더러운 욕조에 들어가 샤워를 하
면서도 내내 울었다. 발이 다치지 않도록  양말을 신고, 영화 <사이코>에 나오는  살인자가 
몰래 다가오지 못하도록 샤워 커튼을 열어둔 채, 샤워 꼭지  밑에 서서 물을 뒤집어쓰며 엉
엉 울었다. 시커멓게 때묻은 그 욕조 안에 서서 울고 있으려니까, 내 안에서 밖으로  나오려
고 몸부림치는 것이 재능인지 아니면 단순한 집념인지도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나
는 포기하지 않았다.
  곧바로 두 번째 일자리를  얻었지만, 거기서도 얼마 못  가서 해고당했다. 해리  브렌트도 
'페퍼 재뉴어리'라는 예명을 가지고 나를 떠났다. 해리는  이렇게 변명했다. "여자 코미디언
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지만, 이렇게 멋진 이름은 좀처럼 갖기 어려워!" 나는 출발점으로 되
돌아갔다.
  나는 온갖 수단 방법을 다 시도해 보고, 누구든 찾아가서 일자리를 부탁했다. 하지만 효과
가 없었다. 모두 나를 거절했다. 어머니는 말했다. "너는 재능이 없어. 넌 지금  인생을 낭비
하고 있는 거야." NBC 방송의 '투나잇  쇼' 담당자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텔레비전에
서 통할 것 같지 않습니다." 평결이 이미   내려진 것 같았다. 그래도 나는 도저히  단념할 
수가 없었다.
  나는 돈이 한푼도 없었다. 내  사무실은 그랜드센트롤 역의 공중전화 부스였다.  아버지가 
나를 정신병원에 집어넣겠다고 위협했기 때문에, 작은 여행가방 하나만  달랑 들고 집을 나
와 일정한 거처도 없이 떠돌아다니면서, 차안에서 새우잠을 잤다. 악몽 같은 시절이었다. 하
지만 그 시절은 인내와 끈기, 결단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후 살아오면서 이때 키
운 인내심과 결단력에 도움을 청한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특히 아이들은 성공을 누구나 재수만 좋으면  얻을 수 있는 '행운의  복권' 쯤으로  여기
는 경우가 있다. 내가 서른 한  살에 성공했다는 점은 특별히  언급해 두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나는 31년  동안 퇴짜만  맞으며 보냈다. '좋다'는 대답을  
듣기 시작할 때까지 31년이라는 긴 세월을 보내야 했다. 게다가 가장 암울했던 순간에도 나
는 단호한 추진력이야말로 나의 가장  중요한  재산임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인내와 
끈기는 언제나 재능만큼 중요하다.
  믿음을 버리지 말라! 포기하지 말라! 그만두지 말라! 절대로!
  
  존 리버스는 코미디언이자 작가, 여배우,  극작가, 사업가 겸 어머니지만,  시청자들에게는  
  에미 상을 받은 텔레비전 토크쇼 진행자로 가장 잘 알려져 있을 것이다. '투나잇 쇼' 최초  
  의 고정 게스트 진행자인 리버스는 현재 'E! TV'(엔터네인먼트  텔레비전)의 '패션 리뷰'
를  진행하고 있으며, 딸 멜리사와 함께  'E! TV'의  '라이브 쇼' 지행을  맡고 있다. 또한 
아카데미 상과 골든 글로브 상 및  에미 상의 텔레비전 중계에서 시상식 전에 벌어지는  쇼
의 실황 해설도 맡고 있다.   
  
      육성 고백
      나는 내 꿈을 믿었다
    스커넥터디 출신의 가정주부가 경주용 자동차  운전석에 무슨 볼일이 있느냐? 당시  내 
주면에 있던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면 거의 다 "아무  볼일도 없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하
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았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오직 자동차를 모는 것뿐이었지만,  1960년대 중반에는 여자가 자동
차 경주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것이 불가능했다.  당시만 해도 드래그 레이스(고속으로 달릴 
수 있도록 개조한 자동차)는 전적으로 남성위주의  스포츠였고, 여자가 그들과 경쟁하는 것
은 아예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자동차  회사들은 내 후원자가 되기를  거부했다. '미국 개조 
자동차 협회 NERA'는  나를 우습게 여겼고, 내가 스스로 떠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투사다.
  나는 꾹 참고 견디면서 조금씩 내  꿈에 다가갔다. 후원자가 없었기 때문에, 남편과  나는 
직접 차를 만들 계획을 세웠다. 경주 도중에 차를 수리하는 일은 남편이 맡기로 했다.  경주
에 참가하려면, 미국의 모든 자동차 경주를 관장하는 NHRA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우리는 
NHRA가 요구하는 자격 조건을 모두 충족시킨 뒤에도, 개조  자동차 부문에 여자를 출전시
키지 않는 NHRA의 오랜 방침을 뒤집기 위해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했다.
  넘어야 할 장애물이 너무 많았다. 우리는  전국 규모의 경주에 한 번도 출전하지  못했다. 
나는 1970년에 마침내 기회를 얻어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열린  'US 내셔널'  대회에 참가했
지만, 0.12초 차이로 예선을 통과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 기록은 우리가 만만찮은 경쟁자임
을 보여주었다. 나는 계속해서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경주에 참가했고, 1976년에  여성으
로는 처음으로 NHRA의 개조 자동차  경주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이듬해에는  개조 자동차 
부문에서 잇달아 3개 대회를 석권한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
  나는 내 꿈을 믿었다. 그랬기 때문에 온갖 어려움에 맞서서 끈기 있게 버텨낼 수  있었다. 
꿈을 이루기 위해 싸우는 것보다 실현되지 못한 열정을 안고 살아가는 쪽이 내게는 훨씬 힘
들었을 것이다.
  나는 내 꿈에 늘 충실했기 때문에,  이제는 5천 마력의 엔진이 주는 느낌,  시속 500km로 
달리는 기분을 알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챔피언이 된  기분을 알고 있다는 
점이다.
    셜리 멀도니는 지금 IHRA(국제 개조 자동차  협회)의 순회대회에 참가하고 있으며, 나  
  머지 일정도 초청 경주대회로 가득 차 있다. 셜리는  세계선수권을 네 번 차지한 것을 비  
  롯하여 뛰어난 기록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 1997년에는 속도 부문에서 IHRA의 기록을 네  
  차례나 갱신했고, 지금은 시속  303.70마일(약 488.74km)의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미국 
스포츠 아카데미'는 셜리 멀도니를 지난 25년 동안 가장  우수한 25명의 여자 프로 선수 가  
운데 하나로 선정했다.
  
    실행 계획: 인내에는 보상이 따른다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
  
  윈스턴 처칠은 오랫동안 군사적 실책과 정치적 실수를 저지른 뒤, 이 다섯 마디의 충고를 
했다. 평범한 정치가가 그런 실책과 실수를 저질렀다면 정치 생명이 끝장났을 것이다.  하지
만 처칠은 계속 전진하여,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총리로서 연합국의 주요 지도자가 되
었다.
  인내와 끈기는 정치가만이 아니라 기업가에게도 필요하다.  인내와 끈기는 총리만이 아니
라 예술가가 성공하는 데에도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자질이다.
  이 책에 실린 주인공들은 슈퍼맨이  아니었다. 우리에게는 없는 특수한  재능이나 소질을 
타고 난 사람들도 아니었다. 그들은 놀라운 인내와 끈기를 가진 평범한 인간들이다.  그들은 
이 책에 담긴 주요한 교훈, 즉 목적 의식, 열정, 신념, 준비, 창의성, 팀워크, 인내심 등을 받
아들여 이미 자기 것으로 내면화했기 때문에,  신체적·정신적·감정적 고통을 겪으면서 고
난을 이겨냈다.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그들은 이 강력한 전략을 사용했기 때문에, 꿈
이 실현될 때까지 먼 길을 꿋꿋이 걸어갈 수 있었다.
  
    제1단계-목표에 정신을 집중시켜라.
  불굴의 성취자들은 한순간도 목표에서 눌을 떼지 않는다. 추구하는 목적을 끊임없이 상기
하기 위해 시각적인 실마리를 활용하는 경우도 많다.
  올림픽 십종경기에서 금메달을 딴 브루스 제너는 날마다 자신의 목표를 상기하기 위해 집 
안 전체를 운동장비 전시실처럼 꾸며놓기까지  했다. 그래서 훈련하지 않는  시간에도 늘상 
운동장비와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가장 취약한 종목이 110m 허들이었기 때문에, 그는 거실 
한복판에 허들 하나를 세워두고 하루에 서른 번씩 그것을 넘어 다녔다. 현관문의 버팀 쇠는 
투포환에 쓰는 쇳덩이였다. 테라스에는 바벨이 놓여 있었고, 소파 뒤에는 장대 높이  뛰기에 
쓰는 장대와 투창이 놓여 있었다. 벽장에는  운동복과 운동화가 가득 들어 있었다. 이  별난 
실내장식은 올림픽 금메달을 준비하는 동안 자세를 개선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그
는 마침내 금메달을 따냈다!
  
    실행: 목표를 끊임없이 상기하라. 지금쯤 당신은 목표를  확인하고, 당신의 소명을 종이
에 적고 ,당신의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꿈을 창조했으리라 믿는다. 다음 단계는 그 꿈을 유지  
하는 것이다. 그 방법은 수없이 많지만, 그 중에서 몇 가지만 제시하겠다.
  
  메모지나 스티커에 당신의 소명과 단기 목표를 적어서, 집과 사무실 곳곳에 전략적으로  
    배치하라.
  오디오 카세트에 당신의 소명과 단기 목표를  녹음하고, 운전할 때나 집안 일을 할 때, 
쉴 때나 명상할 때 그 테이프를 듣도록 하라.
  단기 목표를 컴퓨터의 초기 화면에 입력해 두라.
  내 경우를 예를 들면, 나는 최고 목표를 컴퓨터에 입력하여 예쁜 종이에 출력한 다음,  그 
종이를 내 사무실과 침실 거울과 냉장고 문짝에 붙여두었다. 한 장을 코팅하여 일정표 앞에 
걸어두었다. 이렇게 하면 목표는 사실상 언제 어디서나 눈에 띄고, 그래서 나에게 가장 중요
한 것에 언제든지 주의를 집중하도록 도와준다.
  꿈으로 자신을 둘러싸고 꿈에 대한  헌신을 키우는 방법은 수백 가지나  된다. 그 중에서 
어떤 방법 택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무언가를  하는 것이다! 브루스 제너의 
방법은 놀랄 만큼 창의적이고 극단적이기까지 하지만, 결과도 그러했다. 브루스처럼  끊임없
이 목표에 관심을 쏟으려고 노력하면, 아무 것도 당신을 막을 수 없다.
  아이작 뉴턴은 어떻게 만류인력의 법칙을 발견했느냐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했다.
  "거기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는 겁니다."
  
    제2단계-실패를 유익한 경험으로 받아 들이라
  
  "가장 큰 명예는 한 번도 넘어지지 않는 게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나는 것이다."
  공자
  
  불굴의 인간은 실패를 믿지 않는다. 그들은 실수를 실패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기
술과 전략을 배우고 개발하는 기회로 생각한다. 실패는 아무  것도 얻는 게 없는 '낭비'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사람들은 성공으로 가는 길에 저지르는 모든 실
수와 좌절에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실수와 실패는  불가피하고, 필수적이기까지 하다. 
그것은 당신이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증거다. 실수를 많이  저지를수록 성공할 가능성도 커
진다. 실패는 모험의 증거이며, 모험이  없으면 성공도 없다. 불굴의  인간은 실해할 때마다 
꿈의 실현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간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성공을 꿈꿉니다. 성공은 거듭된 실패와 반성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성공은 여러분이 쏟은 노력의 1%에 불과하지만,
  그 1%는 흔히 실패라고 부르는 99%의 노력이 낳은 결과인 것입니다."  
  혼다 소이치로
  
  혼다는 수백 명의 성공자들이 그보다 먼저 한 말을 되풀이했을 뿐이다. 에디슨은 "4천 번
의 실험에서 실패하지 않았다면 결코 전구를 발명하지 못했을 거"라고 말했다. 토머스 헉슬
리는 실패가 "가장 큰 실제적 이익"을 주었다고 말했다. 수잔 B. 앤소니는 실패란 "결코 있
을 수 없다"고 말했다. 안톤 체호프는 "성공과 실패의 차이를 구별하기 위해서는 신이 되어
야 할 거"라고 말했다.
  역사는 체호프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계산
을 잘못하는 바람에 인도를 찾으려다가 엉뚱하게도 신세계를 발견했다. 그는 실패자인가 성
공자인가? 
  "과녁에 명중하는 화살은 백 번의  실패가 낳은 결과다"라는 속담이  있다. 이 책에 실린 
주인공들은 모두 이 말에 동의할 것이다.  우리는 역경과 실패를 통해 결국 승리를  거둔다. 
실패를 배움과 향상의 기회로 볼 수 있는 능력은 불굴의  인간이 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실패를 한순간도 참지 못하는 사람은 평범한 인간이 될 수밖에 없다. 불편하거나 익숙지 않
은 곳을 지나지 않고는 그 너머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공은 그 너머에 살고 
있다.
  작가이자 직업 강사인 짐 론은 이렇게 말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유별한 일에  도전하지 않으면, 언제까지나  평범한 사람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안주하지 말라.
  
  "잿빛 어스름 속에 살면서 승리도 패배로 모르기 때문에 그다지 즐겁지도 않고
  그다지 고통받지도 않는 무기력한 자들 틈에 끼여 있기보다는,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위험을 무릅쓰고 굉장한 일에 도전하여 영광스러운 승리를 얻는 편이 훨씬 낫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불굴의 '실패자들'
  브룩스 로빈슨은 야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3루수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메이저 리그에  
서 1년 동안 기대어 어긋나는 성적을 올리고 마이너 리그로 보내졌다.
  하워드 헤드는 스키와 테니스에 혁명을 일으킨  발명가지만, 18개월 동안 노심초사하여  
만든 6벌의 금속제  스키를 어느  신통치 않은  선수에게 신겼다가  불과 30분  만에 몽땅  
  
망가지는 꼴을 보아야  했다. 그후 4년  동안 40벌의 수제  스키를 만든 뒤에야  마침내 그  
는 아무도 망가뜨릴 수 없는 스키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에이미 그랜트는 1978년에 첫 앨범을 발표한 뒤 첫 번째  판촉 여행에 나섰다. 이 여행  
의 하이라이트는 어느  레코드 가게에서  90분 동안  공연하는 일이었다.  매니저는 에이미  
의 공연을 홍보하기  위해 1,200장의  초대장을 보내고,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  거라고  
기대했다. 그런데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다. 레코드  가게 고객들조차  그녀의  공연을  
보러 오지  않았다.  90분 동안    에이미는 유일한 청중인   레코드  가게  주인을 위해   
노래를 불렀다.
  '베이워치'는 방영된 지 불과 한 시즌 만에 도중 하차했다. 방영 첫해에 막을 내리는 수  
백 개의 텔레비전 프로그램과  같은 신세가  된 것이다..  하지만 '베이워치'는   다른 수백  
개의 프로그램이 지니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데이비드  하셀호프였다.  
데이비드는 '베이워치'의  상품성을 믿고   그 판권을  사들였다.  그리고는  '베이워치'를 
미국의 한  배급업자와 유럽의  배급업자 조직에  팔았다. 오늘날  시리즈는 140여   나라
에서 방영되고 있다.
  테드 코펠은 해외 통신원으로 일하고 싶어서  여러 곳에 지원했지만 번번이 퇴짜를 맞
았다. 그가 받은 거절 편지는  방 하나를 도배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한때는 일자리를  얻기  
위해 필사적이 된  나머지, 광고회사  면접시험을 보기도 했다.  광고회사에 들어가면  적어  
도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광고회사들도 그를  채용하려 하지  
않았다.
  랜디 트래비스는 내슈빌에  있는 모든 음반회사로부터 두  차례 이상 거절당한 경험이 
있다.
  케이티 커릭이 텔레비젼 뉴스에 처음 출연했을  때, CNN 회장은 두 번 다시 화면에서    
그녀를 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제3단계-장기적인 안목을 키우라
  우리는 즉각적인 만족을 요구하고 거기에 익숙해진 사회에 살고  있다. 오늘날 대다수 사
람들은 목표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인내심이 부족하다. 불행하게도 꿈을 즉석에서 요리하여 
식탁에 내놓는 패스트푸드점은 존재하지 않는다. 꿈을 이루려면 시간이 걸린다. 일하고 있을 
때는 매순간마다 꿈에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 깨달음에게 위안을 얻을 
수 있다. 당신의 노력, 꿈을 향해 다가가는 그 여행 자체가 모험이며, 절반의 보상이다. 편하
고 빠른 지름길을 찾지 말라.
  
  "'불가능 하다'는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라.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배운 게 있다  
  면, 그것은 세상에 불가능한 일이 하룻밤 사이에 가능해질
  수는 없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불가능한 일도 가능해진다."
  얼 그레이브스
  
    제4단계-결코 포기하지 말라
  앤 랜더스는 이렇게 충고한다.
  "시련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삶의 일부다. 시련이 찾아오거든, 고개를 꼿꼿이  쳐들고 시
련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나는 너보다 커질  것이다. 너는 결코 나를  이길 수  없다'
고 말하라."
  이 책에 실린 주인공들의 메시지는 한결같다. 신념을 가지고 대담하게 꿈을 추구하되,  절
대로 절대로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포기하지 않으면 실패할 수도 없다. 당신은 꿈
을 이룰 수 있을 뿐 아니라, 당신의 헌신과 용기와  신념은 무엇보다 위대한 승리로 떠오를 
것이다.
  
  "나한테 글재주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는 15년이 걸렸지만, 
  이런 사실을 알았을 때에는 내가 너무 유명해져 있어서 글쓰기를 포기할 수 없었다."
  로버트 벤출리
  
      맺는말
      당신의 유산-강인한 불굴의 정신!
    당신과 나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우리는 비슷한 정신을 갖고 있으리라  믿는다. 
성장하려는 열망, 풍요롭고 의미 있는 인생을 창조하고자 하는  열망이 우리를 한데 묶어주
었다.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든지 간에, 당신은 더  많은 것을 원하고 있다. 당신이 지
금 성공을 누리고 있다 할지라도, 그 성공과 관계없이, 당신의 영혼 깊은 곳에서는 더 큰 성
공을 꿈꾸고 있다. 당신은 당신이 지금보다 훨씬 위대한  운명을 타고났다고 진심으로 믿고 
있다.
  당신은 뛰어난 프로 선수, 기업가, 또는 훌륭한 시민이나 부모가 되기를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무엇을 바라고 있든지 간에, 당신은 당신만의 독특한 위대함에 도달하는 데  필요한 
것을 모두 갖추고 있다. 이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이 책에 실린 주인공들과  마찬가
지로, 당신도 불굴의 인간이 될 수 있다. 자신의 인생과 미래에 책임을 지고,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놓이더라도 그것을 실패의 구실로 삼지 않으면, 당신도 불굴의 유산을 창조할 수 있
다.
  다음 조건만 갖추어지면, 아무리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모두 이룰 수 있다.
  자신의 진정한 '목표에 매진한다.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는 '열정'에 따른다.
  자신에 대한 '신념'을 가진다.
  만반의 '준비'를 갖춘다.
  '팀워크'를 중요하게 여긴다.
  '창의적' 해결책을 모색한다.
  어떤 난관에 부닥쳐도 '인내심'을 가지고 버틴다.
  
  이 책에 실린 주인공들은 당신에게 영감을 불어 넣어주고 어떻게 하면 불굴의 인간이 될 
수 있는가를 생생히 보여주는 살아 있는 본보기들이다. 그들의 메시지를 확인하고, '실행 계
획'을 마쳤으면, 이제는 행동에 나설 시간이다.  지금 이 순간보다 더 좋은 때는  없을 것이
다. 
지금 당장 시작하라! 나중으로 미루지  말라. 관성의 법칙을 상기하라. 정지해  있는 물체는 
계속 정지해 있으려 하고, 움직이는 물체는 계속 움직이려는 경향이 있다. 물리학의 기본 법
칙은 당신 편이다. 아무리 사소한 행동도 강력한 추진력으로 증대될 수 있다.
  당신은 대단한 업적을 이룬 사람들을 만났다. 한 소년은  수천 킬로미터를 걸어서 아프리
카를 가로질렀다. 이 책에 실린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시련과 실패를 이겨냈다. 한 여자는 신
체에 대한 편견을 극복했다. 그럼으로써 무사안일에 빠진 예속 상태를 벗어났다. 한  여자는 
화장품 업계의 거물들에게 도전했다. 그럼으로써 회의와 불신이라는 폭군을 정복했다. 두 여
자는 성의 장벽을 돌파하여 남성들이 지배해 온 영역으로  쳐들어갔다. 그럼으로써 그들 자
신의 두려움과 자기변명의 장벽을 무너뜨렸다. 한 남자는 '풀 수  없는' 문제를 풀었다.  그
럼으로써 불가능의 세계에서 가능의 세계로 다리를 놓았다.
  그들은 모두 불굴의 인간이었다. 당신도 불굴의 인간이 될 수 있다.
  이 책이 당신의 꺼진 꿈에 다시금 불을 지피고, 지금 당신이 품고 있는 꿈에 새로운 활력
을 불어넣고, 더욱 정력적으로 더욱 단호하게 목표를 추구할 마음을 불러일으켰으면 좋겠다. 
이 책에 실린 불굴의 인간들한테서 용기와 힘을 얻기 바란다. 그들이 당신보다 먼저 걸어간 
길을 따라가라. 당신의 꿈이 실현되는 것을 보라. 대담하게 행동하라. 불굴의 인간이 되라!
  
그들은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거인처럼 보인다.
평범한 보통 사람은 아닌 듯이 보인다.
역경과 고난에 부닥쳐도,
그들은 멈추기를 거부하고 계속 돌진한다.
  
그들을 앞으로 계속 나아가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대다수 사람들은 돌아서는 게 보통인데, 왜 그들은 돌아서지 않는 것일까?
그들은 어떻게 다른가? 그들과 다른 사람을 구별하는 차이점은 무엇인가?
나도 가슴속에 그런 열정과 용기를 가지고 어려움을 헤쳐나갈 수 있을까?
  
진실은 너무나 간단해서, 오히려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들은 운이 좋은 거도, 혜택받은 것도, 특별한 재능을 가진 것도 아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역시 회의와 불안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차이점은 생활방식이다. 
  
그들의 삶에는 목표가 있다. 무엇과도 타협하지 않고
중요한 것을 끝까지 추구한다.
열정에 불타고, 일을 사랑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기꺼이 도움을 청한다.
  
그들은 결과까지 포함해서 모든 것을 마음속에 그려본다.
면밀한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을 계속 갈고 다듬는다.
시련이 나타나 덮치려 들면,
그들은 새로운 항로를 찾아 뱃길을 방향을 바꾼다.
  
그들은 신념에 집착하고, 꿈을 버리지 않는다.
그들은 절대로 포기하거나 단념하지 않는다.
그들은 고집쟁이라고 불러도 좋으리라. 그들은 굴복하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인내와 끈기로 버틴다. 그리고 마침내 승자가 된다.
  
가슴에 품은 꿈을 추구하려면, 
그들이 간 길을 따라가려면, 머뭇거리지 말고 당장 떠나라.
그러면 꿈을 실현할 수 있고, 모든 난관을 돌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처럼 승자-불굴의 인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신시아 커지, '걸림돌을 디딤돌로 삼아라' 
  
    - 부록 -
    당신의 기획팀을 조직하는 비결
  셰리 펠런은 당신의 목적 달성을 도와줄 수 있는 강력한 기획팀을 조직하는 여섯 단계를 
상세히 설명했다.
  
    제1단계-구성원을 주의 깊게 선정하라.
  기획팀은 6명 내지 8명으로 구성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적어도  1년 동안 기획팀에 
헌신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사람, 모임이 있을 때마다. 꼭 참석하려고 애쓸 만한 사람을  찾
으라. 구성원들 사이에 친밀한 신뢰관계가 형성되려면 시간이 걸린다. 성과가 나타나려면 시
간이 필요하다.
  기획팀은 다양한 기술과 경험 수준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다.  거기에 어떤 종류의 기술
을 포함시키고 싶은지, 어느 정도의 경험을 가진 사람이 필요한지를 결정하라. 당신의  요구 
조건을 충족시키고 모임에 헌신할 사람을 표적으로 삼으라. 당신의 경쟁 상대가 아닌  사람, 
자신의 장점과 약점에 솔직한 사람, 자신의 전문 기술이나 지식을 아낌없이 제공할 사람, 그
리고 비밀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이상적이다. 신입 회원을 참여시키려면 기존 회원들이 만
장일치로 동의해야 한다.
  
    제2단계-정기적으로 모이는 날짜를 정하라
  가능하면 매달 두 번씩 같은 날 모임을 가져야 한다. 예를 들면 매달 첫째 토요일과 셋째 
토요일을 모임 날짜로 정할 수도 있다. 만나는 횟수가 이  정도는 되어야 꾸준한 발전을 촉
진할 수 있다. 이렇게 2주의 간격을  두면, 구성원들은 지난번 모임에서 논의된  아이디어를 
검토하거나 실행하고, 다음 번 모임 때 소개할 새로운  아이디어를 개발하거나 새롭게 제기
할 문제와 논점을 확인할 시간 여유를 가질 수 있다.  
  모임은 두 시간 내지 두 시간 반 동안 지속되는  것이 이상적이다. 오전 모임을 선호하는 
사람도 있다. 아침에는 대개 머리가 맑고 정신을 집중하기가 쉽다. 따라서 모임이 내실 있게 
진행되고, 모든 회원을 동참시킬 시간 여유를 가질 수 있다. 무엇보다 제한된 시간에 최대의 
효과를 얻으려면, 회원 각자가 간단명료하게 발언하고 남의 이야기를 귀담아듣는 것이 중요
하다.
  
    제3단계-협약을 맺으라
  첫 모임에서 회칙을 정하라. 비밀 유지, 정시에 시작하기,  규칙적인 출석 같은 항목에 대
해 토론하라. 회원 상호간의 연락과 참여 같은 문제를 논의할 수도 있다. 합의 서를  작성하
여 기존 회원과 신입 회원의 서명을 받으라.
  
    제4단계-분기별 실행 계획을 세우라
  분기별로 한 번씩 목표를 정하고 구체적인 실행 계획을 세워야 한다. 이런 분기별 모임은 
팀의 발전과 지난 3개월 동안의 모임에서 논의된 쟁점에  주안점을 맞추고, 분기별 모임 사
이에 실행된 항목을 집중적으로 논의한다. 분기마다  우선적으로 실행하고 싶은 프로젝트를 
한두 개 골라서, 그 프로젝트를 끝내는 데 필요한 조치를 취하도록 노력하라.
  
    제5단계-의사 일정을 정하라
  정기 모임의 의사 일정에는 그 동안 이룬 업적을 축하하고, 문제를 해결하고, 회원들이 저
마다 책임진 일을 보고하는 순서가  포함되어야 한다. 회원들은 모임에서  토론할 논점이나 
문제점만이 아니라 다른 회원들에게 제안할 아이디어나 해결책도 준비해 와야 한다.
  모임이 열릴 때마다 회원들은 교대로 '의장 석'에 앉는다. 그 순서는 미리 정해 둘 필요가 
있다. 각 회원에게는 똑같은 시간이 주어진다. 일단 의장이 되면, 그 회원은 다음과 같은 일
을 한다.
  ⑴ 그 동안 거둔 성과를 간략하게 보고한다.
  ⑵ 지난번 모임 후에 이루어진 발전과 새로 발생한 문제점을 제시한다.
  ⑶ 팀 내부의 문제점을 간략하게 제기하고, 그 배경을 지적한다.
  ⑷ 회원들이 자유롭게 해결책을 제시하는 동안, 그들이 내놓은 방안을 받아 적는다. 이 시
점에서는 되도록 많은 지혜를 흡수하는 데 중점을 둔다. 해결책은 모임이 끝난 뒤에 재검토
하여 평가해도 좋다. 
  ⑸ 다음 번 모임 때까지 결과를 얻는 데 진력한다.
    제6단계-구성원 각자의 주된 역할을 정하라
  회원들은 저마다 효율적인 팀을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가장 중요한 역할은 순조
로운 의사 진행을 책임지는 사람인데, 이 역할은 항상 같은 사람이 맡아야 한다. 의사  진행
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지도록 주의를 기울이고, 회의가 중구난방 식으로 진행되지 않도록 한
두 가지 쟁점에 주안점을 맞추고,  문제를 해결하는 쪽으로 토론을 이끌어  가는 것이 그의 
역할이다. 또한 '의장 석'에 앉은 회원에게 주어진 시간이 끝나면 그 사실을  알려주는  '타
이머' 역할도 맡는다.
  
    - 부록 - 
    베푸는 삶의 기회 
    다른 이들도 성공담의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도와 주라   
  
  이 책에 소개된 사연들 외에도 수많은 성공담이 글로  발표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불우한 
처지에서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는 가족이나 어린이는 얼마든지 있다.
  이런 도움을 제공하고 있는 단체 가운데 하나는 '국제  해비태트 협회'다. 지난 20년 동안 
'국제 해비태트 협회'는 기증자들이 아낌없는 지원과 각계각층  사람들의 노력으로 수준 이

의 집이나 위험한 건물에서 살고 있는 가족을 위해 6만 채가 넘는 주택을 지었다. 행동하는 
사랑을 실천적으로 보여준 이 운동은 수많은 남녀노소에게 삶의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한 베트남 참전 군인은 일자리도 없고  집도 없는 까막눈이였지만, '해비태트'가 마련해  
준 집으로 이사한  지 불과 3년  만에 자신의  인생과 가족의 미래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
다. 학교에서 낙제생이었던  자녀들은 모든  과목에서 A학점을  받아 우등상을  타기 시작
했다. 딸 하나는  이제 의과대학에 가고  싶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것은 모두   '해비태트'
가 지어준 집이 그들의 생활에 일으킨 변화 덕택이다. 
  '해비태트'가 지은 첫 번째 집에 입주한 사람은 완전한 까막눈이여서 저당증서에 이름도  
쓰지 못했다. 하지만  '해비태트'의 집에서 자란  다섯 자녀는  이제 모두 성공해서,   간호
사와 변호사, 카운슬러 등의 전문 직업인으로 활약하고 있다.
  '해비태트'의 집에 입주한 한 여성은 원래 버려진 트레일러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깨  
진 창문에  발라둔 신문지에서  '해비태트'에 관한  기사를 읽고,  자식과  남편에게 새로운  
삶을 마련해 주었다.  자녀들은 공부를 통해  자신의 삶을  개선하는 데 흥미를  갖기 시작  
했고, 온종일 저임금 중노동에  시달리는 데다 열악한  생활 환경으로 계속  나빠지기만 했  
던 남편의  심장도 급속히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녀도 이제  일자리를 얻어서  돈을 벌고  
있다. 이 모두가 '해비태트'가 마련해 준 집 덕분이다.
  미국에는 200만 가구 이상의 빈곤 가정이 수준 이하의 저택에서 하루하루 연명해야 한다
(아예 살집이 없는 경우도 많다). 그런 이들에게 최소한의 생활 여건을 갖춘 집을 마련해 주
는 일에, 편안하고 쾌적하고 깨끗한 환경에서 살고 있는  모든 가정이 양심적으로 발로에서 
동참하도록 만드는 것이 '해비태트'의 목표이다.  '무 수익·무이자·자조自助'라는 '해비태
트'의 원칙은 번듯한 집을 가질 가망이  없는 이들에게 '내 집 마련'의  수단으로 제공한다. 
생활과 가정과 안정된 미래의 발판이 될 확고한  토대를 쌓을 가망이 없는 이들에게 그 토
대를   마련해 준다.
  이 책의 저자인 신시아 커지는 '국제 해비태트 협회'를 이 책의  대의에 가장 걸맞는  비
영리단체로 선정하고, 이 단체가 사명을 완수하도록 돕기 위해  시간과 지식과 노력을 바쳐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또한 신시아 커지는 '해비태트'의 사업을  돕기 위해 이 책에서 
나오는 인세의 1%를 '국제 해비태트 협회'에 기부할 예정이다.
  여러분도 이 일에 동참해 주기 바란다. 시간과 돈(또는 그중  하나)으로 '해비태트'를  지
원하는 문제를 검토해 주기 바란다. 가난한  가정의 희망을 선사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
지, 지금 당장 전화나 편지로 문의하기 바란다.
  
  "사려 깊고 헌신적인 사람들의 작은 집단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말라.
  지금까지 세상을 바꾼 것은 사실 그런 집단뿐이다."
  마거릿 미드 
  
    - 부록 -
    속편 예고...
  
  우리는 <걸림돌을 디딤돌로 삼아라> 속편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여성과 어린이,  세일즈
맨, 기업가, 일상적으로 마주치는 평범한 사람들을 다룬 특별 판을 포함하여, 해마다 새로운 
<걸림돌을 디딤돌로 삼아라>을  발간할 계획입니다. 내가  <걸림돌을 디딤돌로 삼아라>에 
애해 이야기할 때마다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은 대체로 다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그러니 다음 번 책에는 내가 나와야 한다." 또  하나는 "불굴의 정신을 
가진 사람을 나도 알고 있는데, 소개해 줄까?" 
  당신도 그렇게 생각한다면, 당신의 사연을 적어서 보내주기 바랍니다. 또는 지방 신문이나 
잡지에서 읽은 기사를 통해 불굴의 인간을 발견했거나, 당신의 직장 동료들 가운데 그런 사
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편지를 보내주기 바랍니다. 당신의 이야기나 남에게 들은 이야기를 적어서 보내주세요. 불
굴의 정신을 가진 사람의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를 잊지 말고 써주기 바랍니다. 신문이나 잡
지에서 읽었거나 텔레비전에서 본 경우에는 언제 어디서 보았는지를 적어주세요. 당신의 이
름과 주소, 직장이나 집 전화번호, 팩스 번호나 전자우편 주소를 쓰는 것도 잊지 말기  바랍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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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은이의 말 -
    불굴의 여행을 떠나는 당신께
  
  내가 언젠가는 책을 한 권 쓸 거라는 말을 몇 년  전에 들었다면, 다른 누구보다도 나 자
신이 가장 놀랐을 것입니다. 나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야심  따위는 전혀 갖고 있지 않았습
니다. 하지만 3년 전에 깨달은 한 가지 사실이 내 인생을 영원히 바꾸어 버렸고, 이 책은 그 
깨달음이 낳은 산물입니다.
  내가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는 앞날이 별로 밝지  않았습니다. 젊은 시절에 신시내티
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한 나는 비서 같은 번듯한 일자리를 얻지  못했지만, 몇 년 뒤에는 내 
분야에서 최고의 지위까지 올라가 '스프린트' 사에서 연봉 10만 달러  이상의 소득을  올리
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내 인생에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그런 대로 '성공한' 직장여
성이었지만, 정보통신 제품을 파는 일은 깊은 만족감을 주지 못했습니다.
  여러분도 경험했을지 모르지만, 나는 늘그막에 지나온  인생을 되돌아보며 허무감에 빠지
지나 않을까 차츰 걱정이 되었습니다. 열심히 일하고 늘 바쁘게 행동했지만, 그 활동이 진정
한 의미와 목표를 갖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면 얼마나  허무하겠습니까. 하루하루가 지날 때
마다, 내 유일한 소명을 찾아서 뭔가  뜻하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점점  강해졌습니다. 
나는 자성과 깨달음의 과정을 통해, 나에게 가장 큰 기쁨을 주는 일을 찾아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좀더 강한 자신감을 갖도록 격려하고, 인내와 열정을  가지고 자신의 꿈을 추구
하도록 용기를 북돋워주는 일이었습니다.
  나는 첫 번째 프로젝트로 무슨 일을 할까 궁리하면서, 나에게 가장 많은 용기와 자신감을 
준 분야를 생각했습니다. 나는 '불굴의 인간들'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도 할 수 있다
는 의욕과 용기를 얻었습니다. 꿈을 가진 사람들, 좌절과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마침내  목표
를 이룬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는 나에게 커다란 희망을 안겨주었습니다. 곰곰 생각한 끝에,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들려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책을 쓰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나는 대학에 다닐 때  학기말 리포트를 써보았을 
뿐, 그보다 긴 글은 평생 한 번도 써본 적이  없습니다. 출판계에는 아무 연줄도 없었고, 출
판대리인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전혀 몰랐습니다. 친구나 동료들에게 내 계획을 털어놓으면, 
대다수는 내가 정신이 나갔다고 생각했습니다. 생소한 분야에 뛰어드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줄 아느냐 면서, 내가 제일 잘 아는 정보통신 분야에 그냥 남아 있으라고 권하는 사람도 있
었습니다.
  나는 책을 쓰는 일에 아무 경험도 없고, 문학적 소양도 대단치 않습니다. 이런 약점은  분
명하지만, 그래도 나는 새로운 계획에 대해 강한 열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 열정만 있으면 
목표를 이루는 데 필요한 일은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으리라 믿고, 나는 '낮일'을 그만두었습
니다. 그리고 남편과 내가 평생 동안 저축한 돈을 털어서,  수백 명의 '불굴의 인간들'을 취
재하고 면담하느라 16개월을 보냈습니다.
  그 일이 쉬웠다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을  통해서 나는 일찍이 어떤 '일'
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열정과  기쁨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2년이 지난 지금,  이 
'불굴의' 메시지를 여러분께 보내면서, 내 필생의 소병을 다하고 있다는 뿌듯한 행복감과 고
마움을 느낍니다.
  이 책이, 그리고 이 책에서 만나게 될 '불굴의 인간들'이,  나에게 큰 영향을 주었듯이 여
러분의 인생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들의 사연이 여러분의 인생
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고, 그들처럼   어려움을 이겨내고 무엇이든 성취할  수  있다는 
강한 신념을 여러분에게 심어주었으면 하는 것이 내 소망입니다.
  불굴의 여행을 떠나는 당신께 신의 가호가 있기를 빕니다.
  신시아 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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