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의 종말
제사카 스틸
1장
언제나 밝은 베리티 다이아몬드의 얼굴이 오늘은 약간 흐려져 있었다. 그녀가 아버
지가 경영하는 회사의 역원회에 들어가겠다는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왠지 애매해지는
아버지의 태도 때문이었다.
베리티가 그 이야기를 꺼낸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꽤 규모가 큰 경공구 제
조 회사를 경영해 나가는 아버지로서도 신경써야 할 일이 이만저만 많은 게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가만히 참고 기다리면서 아버지가 먼저 말을 꺼내
기를 기다리기로 작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21세의 생일 축하 파티를 연 지 벌써 일주일이 됐는데도 아직 이렇다 할 이
야기 한 마디 없다.
아버지는 이미 3년 전에, 내가 장차 아버지 회사에서 그만한 지위를 얻게 될 거라고
분명하게 약속해 주셨었는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전화벨이 울렸다. 그녀
는 수화기를 집어들어 미란다 베드우즈의 목소리를 듣자 다시 여느 때의 쾌활한 유머
를 되찾았다. 미란다는 지난밤 자기가 어떻게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 모양이다.
"어젯저녁 내가 너무 지나쳤지?" 하고 미란다는 물었다.
"누구나 다 마찬가지였어!" 베리티는 키득키득 웃으면서 대답했다. "운전을 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나누어지긴 했지만."
"나도 너처럼 남자의 배웅을 받지 않고 내가 직접 운전하기로 했더라면 마지막 한
잔은 물리칠 수 있었을 텐데."
"넌 과음한 적은 별로 없지 않니?" 미란다가 비틀거리도록 마시는 경우는 좀처럼 없
었기 때문에 베리티는 진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건 그렇고, 내가 전화한 건 말이야, 오늘 저녁에도 내가 파티에 나가기로 되어
있는지 어떤지 알고 싶기 때문이야. 어디로 간다고 약속을 한 거 같기는 한데 기억이
나지 않지 뭐니."
"로로 호디슨한테 가기로 했잖니. 부모가 집을 비운다고 그 축하를 한다나."
그 말에 두 사람은 킥킥 웃었다. 그러고는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유복한 집안의
자녀지만 부모에게 지나치게 구속받고 있는 불쌍한 로로에 대한 이야기를 한동안 나누
었다.
"참, 넌 아버지로부터 무슨 시원한 말을 아직 못 들었니?" 미란다가 물었다.
베리티는 제일 가까운 친구인 미란다에게만은 그 일에 대해 다 털어놓고 있었다. 아
버지로부터 생일 선물로 눈부신 진주목걸이를 받았지만 거기에 <역원회 입회 환영>이
라는 등의 유머러스한 문구가 쓰인 쪽지가 곁들여져 있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고 말했
던 것이다.
"아직 무소식이지 뭐니." 베리티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러면서 그 순간 마음을
정했다....
"그래서 오늘 저녁에는 집에 있을생각이야. 아빠하고 이야
기를 좀 나눠 봐야겠어."
"그럼 로로의 파티에는 가지 않겠다는 거니?"
"무슨 이야기든 시작하게 되면 아빠는 내가 회사에 들어가는 일에 대해서도 말씀하시게
될거야."
"그러면 나중에라도 오지 않겠니? 오늘도 틀림없이 밤을 새우게 될 텐데!"
"아빠한테 나도 진지하고 책임을 다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드리고 싶어. 요전에 문제를
일으켰기 때문에 약간 화가 나 계시거든."
"언제 말이니?"
"그다지 오래 되지 않았어. " 베리티는 몇 달 전에 또래하고 같이 불법 카지노에 몰려갔다
가 갑자기 들이닥친 경찰관에게 붙들려갔던 일이며, 이튿날 아침 아버지로부터 야단을 맞은
뒤로 얌전하게 지내고 있다는 둥, 수다스럽게 늘어놓았다.
"하지만 오늘 저녁에는 꼭 와야 하지 않겠지? 조이론은 네가 오지 않으면 실망이 클 텐데.
" 미란다는 끈덕지게 끌어내려고 들었다.
사실, 베리티는 조이론 로비에게는 약간 넌더리가 나 있었다. 그의 프로포즈를 거절했는데
도 그는, 베리티가 자기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고 지금도 여전히 치근거
리고 있다.
그러나 전화를 끊고 나자 조이론에 대해서는 곧 잊어버렸다.
아버지가 돌아오시려면 아직 몇 시간이 남아 있다.
베리티는, 자기가 여자라고 해서 차별대우를 받을 이유는 조금도 없다고 생각하며 자랐다.
사촌오빠 베이질은 머리가 별로 뛰어나지 못한데도 당연한 것처럼 벌써 역원회의 회원이
되어 있다. 베리티는 아버지가 여자라고 자기에게 베이질과 같은 권리를 주지 않을 턱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녀가 18세가 되었을 때 비로소, 21세가 되면 그 권리를 주겠다고 약속
했었다.
그녀는 그때의 일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일곱 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뜬 뒤로
어머니의 역할까지 한 아버지의 곁을 떠나면 아버지가 너무 쓸쓸해 하실까 싶어 베리티는
대학에도 가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그녀가 18세에 고교를 졸업했을 때, 어떤 자리라도 좋으
으니 아버지 회사에서 일하고 싶다고 하자 아버지는, 지금은 어느 과에도 빈자리가 없다고
했던 것이다.
아버지는 딸 베리티에게는 언제나 솔직했다. 그래서 그때도, 자리 하나쯤은 당장에라도 마
련할 수 있지만, 그것이 중요한 자리가 못 될 때, 활발하고 행동적인 그녀가 따분해 할 것이
므로 굳이 그렇게 하지 않을 거라고 설명했다.
베리티는 실망의 빛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써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자기의 행동이 얌전치
못했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솔직한
성격인 그녀는, 자기가 그동안 몇번인가 탈선을 했었던 것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실망은 곧 사라졌다. 아버지가 곧 이어, 베리티가 21세가 되면 기꺼이 그녀을 역원
원회의 일원으로 맞이하겠다고 약속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 뒤로 3년 동안 베리티는 아버지에게 자신은 이제 철부지 티를 벗었다는 것을 보여주려
려고 한껏 노력해 왔다. 어쩌다 울컥 성질이 나 운전을 하다가 사고를 내어 차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역원회의 자리는 보류하겠다는 으름장은 사고보다도
베리티를 떨게 만들었다. 그녀는 그 뒤로 역원회의 내용에 대해서 닥치는 대로 자료를 모아
탐독했다. 공장 일에 대해서도 어렵기는 했지만 이것저것 열심히 공부하여 왔다. 그뿐아니라
경영자 코스까지 마쳤다. 자기가 얼마나 아버지의 경공구 회사의 책임 있는 일원이 되고 싶
어 하는지를 충분히 보여주었다고 베르티는 믿고 있었다.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 클레멘트 다이아몬드는, 지난 몇 주 동안의 긴장이 많이
풀린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금방 중대한 이야기를 꺼낼수는 없다 싶어 베리티는
조급해지는 마음을 억눌렀다.
"술 한 잔 드시겠어요? " 일이 힘들었던 날 저녁에는 꼭 술을 한 잔 정도 마셨기 때문에,
베리티는 그렇게 물어 보았다.
"홍차나 마시겠다. "
아버지의 대답에 베리티는 마음이 놓였다. 술을 마시고 싶을 만큼 힘든 하루가 아니었다면
아버지와 천천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제가 끓여 올께요." 그녀는 예쁜 갈색 눈을 기대로 반짝이며 말했다. "도로시는 저녁식사
준비로 바쁜 것같으니까요."
그러나 흥분은 이내 깨끗이 사라져 버렸다.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 침실에서 드
레스로 갈아입는 동안, 그녀가 먼저 중역 자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까지는 아버지는 입
을 다물고 계시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머리를 들었던 것이다.
어쩌면 아버지는 내가 얼마나 진지한가를 시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긴 검은 머리를 곱게
빗으면서 그녀는 그런 결론을 얻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기가 찾아낸 그 답이 별로 들어
맞지 않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는 그 답이 별로 들어맞지 않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는 지금
까지 그녀를 시험해 보려고 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얼마나 역원회의 일원이
되기를 바라는지는 시험해 볼 것도 업이 너무나 잘 알고 계실 것이다.
"오늘 저녁은 집에서 식사를 하는 거냐?" 클레멘트 다이아몬드는 베리티가 아래층으로 내
려오자 장난스럽게 놀라는 시늉을 해 보였다.
아버지가 분명 기분이 좋은 것을 보자 그녀의 걱정은 다소 사라졌다. 저녁식사는 화기애애
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하지만 베리티는 묻고 싶은 말을 꺼내기를 삼가고 있었다.
식사가 거의 끝나자 미세스 투루디 트루먼 -- 정식으로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은 베리티뿐
이었다. 몇 년이나 이 집에서 일해 온 그녀는 가정부라기보다는 친구였다. --이 들어와 아
버지에게 커피는 집에서 드시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베리티는 또다시 불안감이 솟아나, 아
버지가 대답하기 전에 얼른 큰소리로 끼어들었다.
"밖에 나가시는건 아니죠, 아빠?"
"너는 밤에 자주 나다니면서 나는 나가면 안 된다는거냐? " 클레멘트는 장난기를 담고 말
했다. 그러나 미세스 트루먼이 나가고 딸이 긴장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보자 장난기
어린 태도는 금세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 자신도 긴장한 표정을 띠고 딸의 눈길을 외면
했다. 이윽고 클레멘트는 결심한 듯 조용히 물었다. "내가 집에 있어야 할 특별한 이유라고
있니?"
베리티는 갑자기 주위의 공기가 딱딱해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곧, 이 문제는 몇 년이나
전에 결정된 것이 아니냐 생각하면서 자신감을 되찾고는 가지런한 고운 이를 보이며 웃었다
.
"저, 저 말이예요, 제품의 질을 세계적으로 자랑하는 훌륭한 회사의 다음 역원회에 나가도
록 되어 있지요? 그래서, 제게 무엇을 기대하고 계신지 회장님께서 직접 말씀해 주셨으면
싶어서요."
아버지가 또다시 눈길을 외면하는 바람에 그녀는 의아스런 느낌이 들었다. 갑자기 자신감
이 사라져 버리고 얼굴에 미소를 간직하기가 힘들게 되었다.
"뭐가.......잘 안 돼 가는 건가요? " 베리티는 초조하게 물었다. 아버지는 처음 보는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생각지도 못했던 의문이 갑자기 머리에 떠올라 오싹 소름이
끼쳤다. " 아빠는...절 역원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으신 거예요?" 아버지가 그녀
에게 시선을 돌리는 것을 보고 그녀는 갈라진 목소리로 외쳤다.
"너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게 아니란다........."
" 아, 다행이군요!." 베리티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으나 아버지의 얼굴에 또다시 엄격한 표
정이 떠오른 것을 보고 뭔가가 있다고 느꼈다. 아버지는 과거에 몇번인가 그녀의 행실이 얌
전치 못한 것에 대해 매우 화를 낸 적이 있었다. 그것이 생각나 베리티는 다시 자신감을 잃
고 당황하여 말했다. "제가 맡은 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지 않을 거라고 걱정하신다면 마
음 푹 놓으세요. 약속하겠어요. 전에 좀 저......반항을 하여 아빠께 걱정을 끼쳐 드린 것은 잘
알아요. 하지만 경영자 코스를 열심히 공부해서 수료증까지 땄어요. 제가 진심으로 그 자리
에 앉고 싶어한다는 것은 아버지도 아시겠지요? 그리고 최근 여러 달 동안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았잖아요."
"그만둬라, 베리티." 클레멘트 다이아몬드는 날카롭게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아버지는
베리티의 하소연에 짜증이 났다기보다는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버지
의 얼굴에 아까 귀가했을때는 없었던 긴장의 빛이 떠오른 것을 보고 그녀도 다시 몸이 굳어
졌다.
"왜 그러시죠?" 뭔가 이상하다, 보통 때와는 다르다고 속삭이는 본능의 소리를 밀어내며
베리티는 물었다. 아직도 일이 이상하게 진행되어 간다는 것을 믿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강했
다.
"내가 좀더 일찍 말해 주어야 했는데......." 클레멘트는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무슨 얘기예요, 아빠? 무엇을 저한테 말했어야 한다고......"
"역원회에는 네가 들어올 자리가 없단다. " 클레멘트는 그녀의 말을 한마디로 잘라 버렸다.
너무나 큰 쇼크에 베리티는 할말을 잃고 물끄러미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형님인 월터 백부가 퇴직했기 때문에 빈자리가 하나 생겼을 것이 아닌가. 베리티
는 아버지가 가끔 진지한 얼굴을 하면서 장난을 치는 일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 내고는 바
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아버지는 지금 날 놀리고 계실 뿐이야.
" 그 수법은 이제 먹혀들지 않아요, 아빠." 베리티는 환하게 미소지으며 반대로 아버지를
놀렸다. "월터 백부님이 연말에 퇴직하시고 그 뒤 누구도 그 자리에 임명을 받지 않은 것
을 저도 다 알고 있어요. 그러니 제가......"
"다른 사람이 이미 임명되었단다." 아버지는 단숨에 모든 것을 말해 버리려고 결심했는지
바로 말을 이었다. "미안하다, 베리티. 네가 얼마나 그 자리를 바라고 있는지 나도 잘 안다.
하지만 이미 결정이 나 버린 일이다. 네가 네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자리는 채워져 버렸
고, 다른 자리는 당분가..."
"자리가 없어져 버렸단 말이예요? " 베리티는 몸을 떨며 갈색의 눈을 크게 떴다. 미친 듯
이 소리내어 울며 항의하고 싶었다.
"미안하다." 아버지는 다시 한번 그렇게 말했다. 정말로 미안해 하는 모습이었다. "좀더 일
찍 너에게 말해 주었어야 했는데...."
"농담이시죠?"
그러나 클레멘트는 진지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절대로 농담이 아니다, 베리티. 회장으로서의 나는, 그리고 다른 역원들도 나하고 같은 의
견이지만....저어, 외부 사람을 맞이하는 것이 회사로서 이익이 된다고 생각한 거란다. 게다
가....."
"외부사람이라구요?" 베리티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아빠는 지금
까지 최고 경영진에는 우리 집안 사람만 앉히고 계셨잖아요.? 아빠가 회사를 시작한 뒤로
다이아몬드 집안 이외의 사람이 역원회에 들어온 일이 한 번이라도 있었어요?"
"외부 사람을 끌어들인 중요한 이유는 첫째......."
클레멘트의 설명은 베리티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그로부터 30 분 동안이나 베리티는
자기의 입장을 뜨겁게 호소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절대로 꺽이지 않으리란 것을 차츰 깨달 게 되었다.
그것은 베리티의 생애에 있어서 최악의 30분이었다. 미세스 트루먼은 커피를 가져와 부녀
간에 말다툼이 벌어진 것을 보고는 바로 나가 버렸다. 자기의 꿈과 희망이 누군지 모를 다
른 사람에게 짓밟혀 버렸다는 현실을 차츰 그녀는 생생하게 느꼈다. 베리티는 열심히만 하
면 자기도 어느 날엔가는 회장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까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사람이 도대체 누구지요?" 30 분이 지났을 때도 아버지가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자 마
침내 베리티는 분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누구예요, 그 외부 사람? 남자지요, 물론?"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아도 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약속된 자리로부터 그녀를
밀어낸 사람이 남자든 여자든 실망감의 쓰디쓴 맛은 변함이 없었다.
"이름은 너도 들은 일이 있을 거다만 만나본 일은 없을 거다. 홀트 제퍼슨이라는 남잔데.
그는...."
"그에 대한 설명은 하실 필요 없어요. " 아버지의 말처럼, 그 남자는 만난 일도 없고 만나
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실업계의 거물 홀트 제퍼슨의 이름은 수없이 들어 온 터였다. "그
사람은 지금까지의 경력으로 보아 다이아몬드 경공업 따위는 시시하게 생각할텐데요."
베리티는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아니면 내 자리뿐만아니라 아빠의 자리까지 노리고 들어
온거예요?"
"그는 역원이 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단다."
"길게 가지는 못할 거예요." 베리티는 심술궂게 말했다. "바로 얼마전에도 그를 철석같이
믿고 있던 회사를 보기좋게 들어먹었잖아요!" 자세한 사정은 모르나 홀트 제퍼슨이 어느
회사에 교묘하게 들어가서 그 회사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린 이야기는 분명히 들었었다.
"그런일이 있긴 했지만, 그것은 우리 역원회와는 아무 관계도 없다." 클레멘트는 점점 흥분
이 더해 가는 딸의 마음을 다독거리려고 미소지으며 말했다. "홀트 제퍼슨이 다이아몬드 경
공업을 지배할 생각이 없는 것은 재가 보장하마. 그는 내가 믿고 중요한 일을 맡길 수 있는
남자란다."
"아빠도 저와 마찬가지로 마음이 무척 태평하신 분같군요." 아버지는 지금까지 그녀가 하
고 싶은 일이라면 거의 시켜 주었다. 그러나 이따금 전혀 딴사람처럼 고집불통이 된 때도
있었다. 베리티는, 지금이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을수 없었다.
클레멘트는 태평하다는 말을 듣자 화가 난 것 같았다. 그러나, 베리티의 실망이 너무나 크
리라는 배려에서인지 그녕의 버릇없음을 나무라지는 않았다.
"네가 서운해 하는 것은 잘 알겠다, 베리티. 하지만 좋은 면도 생각하려무나. 너는....."
"좋은 면이라니요? " 베리티는 울컥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 좋은 면이 어디 있단
말이예요? 아빠는 제게 자리를 주겠다고 약속하시고는 그 자리를 옆에서 밀고 들어온 남자
에게 주어 버리셨어요. 그는 여기저기의 너무나 많은 회사와 관계를 맺고 있어서 우리 역
원회에 제대로 나올 겨를도 없을 텐데 말이예요."
베리티는 격심한 노여움으로 눈물을 흘리려 2층의 침실로 뛰올라갔다. 아버지에게 눈물을
보이기는 싫었다. 어디로 가겠다는 목적도 없이 차의 키를 핸드백에 집어놓고 다시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그러나 현관으로 가는 도중에 아버지의 엄격한 목소리에 붙들려 어디로 가느냐는 다그침을
받았다.
"운전할 생각이라면 나가서는 안 된다. " 클레멘트는 다시 잔소리 많은 부모로 돌아가, 베
리티가 전에 울컥 성질을 내어 차를 몰다가 사고를 냈던 일을 상기시켰다.
아버지의 말에 베리티는 다소 마음이 누그러졌다. 그러나 마음의 상처는 아직 너무나 생생
해서, 그녀는 한마디 말도 없이 차의 키를 현관의 테이블 위에 내던지고는 반항적인 몸짓으
로 횡하니 밖으로 나가버렸다.
베리티는 오랫동안 쏘다녔다. 불타는 것 같았던 노여움은 가라앉았지만 크나큰 실망감은
주체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는 아버지와 오랫동안 틀어져 있은 적이 없는 베리티였다. 그러나 고집이 센 그녀
는 이번만큼은 사흘이 지나도 아버지와 말을 할 마음이 나지 않았다. 그녀는 그래도 아버지
를 사랑하고 있었으나, 자기의 자리를 가로챈 홀트 제퍼슨에 대해서는 증오심을 느끼지 않
을수 없었다.
그 일이 있고 나흘 후, 조이론 로비가 전화를 걸어왔다. 여전히 홀트 제퍼슨에 대한 증오심
으로 속을 끓이고 있던 베리티는, 어떤 소동에라도 휩쓸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조이
론의 전화는 그저 그날 저녁식사를 함께 하자는 내용이었다.
"우리 집에서 곧장 나가는 길에 새 클럽이 생겼어요."
베리티는 그 클럽이 문을 여는 걸 아버지가 크게 반대했던 일은 언급하지 않았다. "사람을
좀더 부르기로 해요. 뭔가 새로운 일을 할 만한 때도 됐잖아요.?"
"하지만 난 당신과 단둘이......"
베리티는 고집스럽게 조이론의 말을 가로 막고, 다른 친구들과 함께 만나는 것이 아니면
나가지 않겠다고 했다.
결국 조이론이 아드리안 로베트와 로로 호디슨을 부르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래도 모
자라는 듯해서 베리티는 몇 명에게 더 전화를 걸어, 그날 저녁에는 여섯명이 모이기로 되었
다. 남자들 셋이 베리티와 새리 놀즈와 미란다를 그 새 컨틀리 클럽의 바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초록빛 벨베트의 팬츠에 공단 블라우스를 입고 막나가려고 하던 베리티는 마침 밖에서 돌
아오던 아버지와 마주쳤다. 아버지의 말없는 바람을 거스르는 행동을 하는 것 같아 마음이
켕기지 않는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만일 자기를 다이아몬드 경공업에 받아들여 주었다면
지금쯤 아버지와 함께 귀가할 거라 싶으니 그런 미안함은 이내 사라져 버렸다.
"일이 늦으셨군요. " 베리티는 가볍게 말을 걸었다.
"어디로 가는 길이냐?"
"로워 파세트 커트리 클럽의 경기를 좋아지게 해주려고요. " 베리티는 차에 올라타면서 그
렇게 말하고, 뭐라고 하는 아버지의 말을 무시하고 차의 문을 쾅 닫아 버렸다. 대문으로 이
이르는 길을 반도 못 가서 베리티는 후회했다. 울지 않으려 해도 눈물이 솟구쳤다. 자신의
태도가 너무 심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먼저 나에게 상처를 입힌 것이
아닌가. 베리티는 상처를 입으면 그대로 지나치지 못하는 성미였다. 결국 자신의 괴로움을
가중시키는 결과가 된다 할지라도.
어쨌건 컨트리 클럽에 가자는 말은 베리티가 먼저 꺼낸 것이므로 가지 않을수는 없었다.
가보니 벌써 일행은 도착해 있었다.
클럽의 회원은 아니었지만 베리티는 입구의 계원에게 애교를 떨어 어렵지 않게 안으로 들
어갈 수 있었다. 일행 중 남자 셋만 강제로 정회원에 가입했다는 것을 알자 기분이 좋았다.
식사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언제나 그랬듯이, 허울없는 기분으로 여섯명은 끊임없이 농담을
주고 받으며 웃고 떠들었다. 그러고는 식사를 하는 사이사이에 플로어로 나가 춤을 즐겼다.
베리티는 주위의 손님들이 자기와 동행에게 던지는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하찮은 농담
을 주고받았다.
로로가 포도주 때문에 웨이터에게 시비를 걸었으나 대행히 베리티와 마찬가지로 여러 잔을
마셨어도 정신이 말짱한 아드리안이 잘 무마하여 무사히 넘어갔다. 그로 인해 식어 버린
분위기는 오래 가지 않았고, 또다시 떠들썩한 웃음이 되살아났다.
그러나 일행은 차츰 궤도를 벗어나는 행동을 했다. 베리티는 아드리안의 <남녀 평등에 대
한> 싫증나는 수다에 다른 사람처럼 귀를 기울일 수가 없었다.
베리티는 갑자기 즐거운 기분이 사라져 버렸다. 만일 그녀가 남자로 태어났다면 엉뚱한 사
람에게 자리를 빼앗기는 일 따위는 절대로 없었을 것이다. 머리가 뛰어나지 못한 사촌오빠
베이질은 이미 여러해 전부터 역원회의 멤버로 일하고 있는데 자신은 뭔가. 그녀는 어느새
<외부 사람>에 대한 증오심에 사로잡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이내, 일행의 시끄러운 웃음소리로 인해 그녀는 현실로 돌아왔다. 무엇이 그렇게 재
미있느냐고 베리티가 물으려고 하는데, 그새 그녀의 옆으로 자리를 옮겨 앉아 있던 조이론
이 목소리를 낮추려고도 하지않고 말했다.
"옆 테이블의 어떤 사람이 우리를 못마땅해 하는 것같아. "
베리티는 몸을 돌려 조이론의 시선을 쫓았다. 그이 말은 주위를 끌기 위해 공연히 한 소리
가 아니었다. 옆테이블에 앉아 있는 남자의 얼음 같은 잿빛 눈이 그녀의 눈과 정면으로 마
주쳤다. 베리티는 고압적인 눈초리로, 먼저 눈길을 돌리려고 하지않고 노려보았다.
"저 거만스런 자는 누구지? " 그녀는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물었다.
그러나 그 검은 머리의 사나이는 깔보는 듯한 눈초리로 베리티를 쏘아보고는 자기 옆에 앉
아 있는 대단히 아름다운 블론드의 미인에게로 눈길을 돌려 버렸다. 그 바람에 그녀는 승리
리의 기분을 맛볼 수가 없었다.
그 남자는 여덟명의 동행과 같이 샴페인을 몇 병째 비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베리티
일행의 반 정도도 기분을 내고 있지 않았다. 베리티는 곧 동행에게로 돌아앉아 아드리안의
말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방금 뭐라고 했지? 그녀는 <제퍼슨>이라는 이름을 분명히 들은 것 같아, 취기가 한꺼번
에 확 달아나버렸다.
"네가 저 거만스런 남자가 누구냐고 물었잖아?" 아드린안이 말했다. "로워 파세트 컨트리
클럽이 최고급 고객을 계속 유치하면 좋겠다고 말한거야. 우리 같은 고객에다 다른 사람이
아닌 홀트 제퍼슨까지 와 있으니 말이야."
베리티는 그가 말한 이름을 믿을 수가 없었다. 가슴속에 차가운 것이 스치고 지나갔다. 억
지로 웃음을 띠어 치밀어오르는 증오심을 숨기고 베리티는 다짐하듯 물었다.
"내 왼쪽 테이블의 남자, 블론드의 미인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이 홀트 제퍼슨이라는 말이
야?"
"그렇지." 베리티의 미소에 속아넘어간 아드리안은 그녀의 눈에 번뜩이는 증오심은 알아
채지 못했다. "소개를 해주지 못해 미안하군" 그는 또 신소리를 했다.
"언제가 내가 아버지 회사에 있었을 때 가옥에 대해서 뭔가 물으러 그가 찾아 왔었기 때문
에 이름만 알고 있을 뿐이거든."
" 미안해 하지 마 ." 베리티는 몸이 굳어지고 미소가 사라지는 것을 의식하면서 대답했다.
"모르는 것이 백배나으니까."
2
베리티는 마침 화장실에 간 미란다와 새디가 돌아올때까지, 겨우 화제를 돌렸다. 그러나 두
사람이 돌아와 대화에 끼여들자 베리티는 옆 테이블의 남자에게 완전히 마음을 빼앗겨 버
렸다.
그날 밤의 모임을 더 이상 즐길수가 없게 되었다. 내 인생을 망쳐버린 것으로는 부족해서
일행과 어울리는 것까지 찬물을 끼얹는군! 베리티는 홀트 제퍼슨이 더욱 미워졌다.
내 꿈을 산산이 깨버린 남자를 좀더 자세히 보고 싶다. 그런 마음을 누를 수가 없어 베리
티는, 긴 다리가 테이블에 닿아 불편하다는 듯이 태연하게 의자를 뒤로 밀어내고 고래를 돌
리지 않고도 얄미운 남자를 볼 수 있도록 앉았다. 저 사람이 실업계의 거물이란 말인가!
홀트 제퍼슨은 베리티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젊어, 30대로 막 접어든 것 같아 보였다.
그러나 나이가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녀는 적대감이 담긴 눈으로 그이 지적인 분위기가
풍기는 높은 이마와 크지도 작지도 않은 코, 야무지게 생긴 턱의 선을 가만히 훑어보았다.
그러는 동안 베리티는 홀트 제퍼슨이 다른 손님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낮은 목소리로 이
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와 동행들이 세련된 매무새나 태도에 묘하게 강
강한 인상을 받게 되었다.
자기나 자기 일행이 그들과는 대조적으로 거칠게 보일 것이라 싶으니 베리티는 은근히 약
이 올랐다. 그러나 그런 것을 느낀 자체가 더욱 화가 났다. 홀트 제퍼슨은 오늘 처음 보았을
뿐이고 이야기도 나누지 않았는데--그와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지만--자
기네가 어린 아이처럼 보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 약올라 하다니. 베리티는 홀트 제퍼슨을 반
항적인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마침 그가 블론드의 여자로부터 눈길을 돌렸을 때였다.
자기를 노려보고 있는 시선을 느낀 홀트가 어떻게 나올것인지 그녀는 상상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자기를 노려보는 베리티의 시선을 분명하게 알았을 텐데도 완전히 무시해 버
리고는 태연하게 자기 동행에게로 시선을 옮길 줄은 생각도 못했다. 무시당하는 일에 익숙
숙지 못한 그녀는 심한 굴욕감을 느끼고, 그가 도저히 자기를 무시할 수 없는 행동을 하고
싶은 기분에 사로 잡히게 되었다.
"베리티!" 조이론이 불렀다.
"응?"
"춤을 추자고 청했잖아."
그는 조금 전에도 말한 모양인데 베리티에게는 들리지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몇 쌍의 남녀
가 서로 꼭 껴안고 춤을 추고 있는 댄스플로어로 눈길을 돌렸다.
"나......"베리티는 조이론의 가슴에 자기 몸이 세게 밀어붙여지는 것은 질색이라 싶어 거절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때 마침 블론드의 여자를 앞세운 검은 머리의 남자가 플로어로 나가
가는 것을 보았다. "그래 좋아." 베리티는 그렇게 말하고 자기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도 잘
모른 채 자리에서 일어나 홀트의 뒤를 따랐다.
조이론과 춤을 추는 것은 예상한 대로 불쾌한 일이었다.
"숨을 쉴수가 없어." 조이론이 너무나 세게 끌어안았기 때문에 베리티는 투덜거렸다.
"미안!" 조이론은 바로 사과했으나 팔은 조금밖에 늦추지 않았다.
아까는 좋은 생각이라고 여겼는데, 이제 와서 보니 도대체가 무엇 때문에 홀틀의 뒤를 따
따라 플로어로 나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조이론이 너무나 세게 끌어않아 진절머리가 나기
시작했을 때, 베리티는 홀트와 그의 파트너가 바로 옆에서 춤을 추고 있는 것을 알았다. 그
녀는 블론드이 여자가 홀트에게 교태가 담긴 눈길을 던지고 있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조이
론이 턴을 하는 바람에 베리티는 또다시 조금 전에 자기를 무시한 남자의 눈과 정면으로 마
주치게 되었다. 그녀는 증오심과 적개심에 사로잡혀, 이 남자가 또 자기를 못 본척 몸을 돌
리지 못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베리티는 조이론뿐 아니라 주위의 사람들에게도 들리도록 목청을 돋우어 말했다.
" 나 돌아가겠어."
조이론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춤을 멈추었다.
" 돌아가? 왜? 즐기는 줄 알았는데."
"즐거웠어," 하고 베리티는 대답했다. 그리고 홀트제퍼슨이 이쪽을 보고 있는 것을 알고 그
가 눈길을 돌리지 못하도록 그를 쏘아보며 말을 이었다. " 이 자리에 인간 쓰레기가 들어
와 있다는 것을 알기 전에는 ."
베리티는 남자의 눈에 차가운 빛이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그 자리에
서 움직이지 않았으며, 베리티도 그 정도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그건 좀 심한 소리가 아닐까?" 조이론이 난처하게 말했을 때, 베리티는 벌써 되받아줄 말
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뭐가 심하지?" 베리티는 조이론에게 어깨를 기댔으나 홀트가 마주 보이는 위치에서는 움
직이지 않았다. " 내 바로 옆에 전대미문의 흉악하고 비열한 강도가 앉아있는데." 베리티의
거친 말은 누구의 귀에도 어김없이 들렸다. 그녀는 홀트에게 눈길을 고정한 채, 자기의 말
이 의도한 대로 그에게 전해졌는가를 살폈다. 눈치가 빠른 홀트의 의아스런 표정이 적대감
이 담긴 험악한 눈초리로 확 바뀌자 베리티는 기다렸다는 듯이 한마디 더 했다. "더러움이
옮겨 붙는 것 같단 말이야!" 그러고는 조이론에게 얼굴을 돌리고 말했다.
"난 돌아가겠어."
베리티는 웬일인지 갑자기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왜 그러냐고 묻는 조이론에게
홱 등을 돌리고 턱을 앞으로 내밀고 테이블로 돌아와 핸드백을 집어들었다.
"나 돌아가겠어." 베리티는 로로가 빼내 준 의자를 거절하고 일행에게 말했다.
"아직 이르지 않니!" 미란다가 소리쳤다.
그러나 베리티는 거침없이 작별 인사를 하고 연주중인 곡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클럽을 나
왔다.
주차장까지는 조금 걸어야 했다. 그러나 밤의 찬 기운이 몸에 닿자 도리어 아까부터 느끼
고 있었던 떨림이 가라앉았다.
그자이레 남아 좀더 뭐라고 퍼부어 줄 걸 그랬다고 생각하면서 베리티는 자기 차가 있는
데까지 왔다.
도어에 키를 꽂으려고 했을 때, 주차하고 있는 차 사이를 누비며 곧장 그녀 쪽으로 걸어오
고 있는 늘씬하고 어깨가 떡 벌어진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홀트 제퍼슨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자 금세 베리티의 신경은 팽팽하게 긴장됐다. 그는 내 말
에 화가 나서 시비를 걸기 위해 뒤쫓아온 거야. 어떠한 난관에서도 몸을 빼서 도망치는 일
이 절대로 없는 베리티는, 그녀가 전적으로 옳을 때는 더욱 그렇지만, 등을 꼿곳이 세우고
남자에게로 한 걸음 내디뎠다.
"아직도 내 말을 더 듣고 싶은가요?" 베리티는 이것이 우연한 만남이 아님을 알고 있다는
듯이 먼저 입을 열었다.
홀트 제퍼슨은 그녀의 바로 앞까지 바싹 다가섰다. 평소에 자기 키가 크다고 생각하고 있
는 베리티가 올려다보아야 할 만큼 그는 장신이었다.
"당신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알자면 더들어 봐야겠어. "홀트는 턱을 치켜들고
말했다.
베리티는 조금도 꿀리지 않았다. 그녀는 어떤 남자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를 상대하지 않
겠다는 듯 어깨를 추썩이고 몸을 구부려 차의 문에 키를 밀ㅇ으려고 했다.
그러나 키가 열쇠 구멍에 닿기도 전에 강철같이 단단한 손이 그녀의 팔을 잡아 자기쪽으로
홱 돌려 세워 자기와 마주 보게 만들었다. 끝장을 보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역력히 보이면
서.
거칠게 다루는데 굴욕감을 느낀 베리티는, 화가 치밀어 팔을 홰 잡아당겼다.
"더러운 손 놓아요!"
"나는 다른 사람의 빈정거림 따위에 신경을 쓰는 일이 별로 없지. " 홀트의 손은, 베리티가
아무리 뿌리치려 해도 까딱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당신이 댄스 플로어에서 한 말은 분명
히 나를 겨냥한 거야. " 엄격한 말투로 그가 진지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곳의 모든
손님에게 들릴 만큼 큰소리로 빈정거려 놓고는 왜 단둘이 있을 때는 말할 배짱이 없나?"
"그 블론드의 여자가 당신 부인이에요?" 되받아 주려고 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물음이 입
밖으로 튀어나와 베리티는 깜짝 놀랐다.
"난 결혼하지 않았소." 그는 쌀쌀하게 말했다.
"어디엔가 고약한 신세를 면한 재수 좋은 여자가 있군요. " 그 블론드의 여자가 차지하고
싶다는 듯한 눈길로 홀트 제퍼슨을 바라보던 것이 생각나 베리티는 말을 이었다. "모든 여
자가 당시을 최고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에게 알렸다고 트집잡을 건 없잖아요."
"내가 당신이 좋아하는 타이프의 남자 리스트의 맨 아래에 있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소"
홀트는 야멸차게 되받았다. 그러나 그의 말투로나 주차장의 조명으로 볼 수 있는 표정으로
그가 태연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만, 내 옆에 있으면 어떤 더러움이 옮겨 붙는지 그
것을 말해 주었으면 좋겠어. "
"당신이 원하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서 써먹었던 더러운 수법을 내가 어떻게 다 알겠어
요?" 베리티는 새로운 노여움이 치밀어올라 팔을 뿌리치려고 했으나 헛수고였다.
"내가 당신에게 무슨 더러운 수법을 썼단 말이지?" 홀트가 너무나 뻔뻔스럽게 반문했으므
로 베리티는 그의 정강이를 걷어차고 싶은 심정이었다.
"당신은 일이 자기 유리한대로만 돌아가면 상처받은 상대에 대해서는 전혀 마음을 쓰지 않
는 모양이군요." 역원 자리를 그녀가 그토록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아버지가 알고 있는 이상
더러운 수법을 쓰지 않고는 홀트가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베리티는 너무나 화가 나서 앞
뒤를 가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베리티는 이내 이 남자 앞에서는 말을 조심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잡
고 있던 손을 조금 늦추었으나 여저히 날카로운 말투로 물었다.
"내가 당신한테 무슨 상처를 입혔단 말이오?"
베리티는 쓸데없는 말을 해버리고 만 것이 후회가 되었다. 이 비열한 남자에게 상처받았다
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에게 상처를 입혔다구요?" 그녀는 온 몸에 멸시의 태도를 나타내면 비웃음을 띠었다. "
"제퍼슨씨, 당신에게 나에게 상철를 입힐 힘이 어떻게 있겠어요.?"
자기가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것은 아드리안이 자기에게 한 말들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베리티는 생각했다. 팔이 놓여 그녀가 차 쪽으로 난폭하게 몸을 돌리려고 했을
때, 홀트는 냉정하게 그녀의 손에서 키를 빼앗아 갔다.
"이게 무슨 짓이예요? 베리티는 벌컥 노여움이 솟구쳤다.
그러나 그는 동작과 마찬가지로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신은 지금 운전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야. 당신의 동행을 불러 바래다 주게 하겠어."
"내가 취했다고 잘도 말하는군요. " 베리티는 분놀로 목소리가 떨렸다. "잘도......"
"당신이 취하지 않은 것은 인정하고." 홀트는 냉정하게 그녀의 말을 막았다. "하지만 운전
하기에는 너무 흥분해 있어요. 당신도 그것은..."
"비켜요.!" 베리티는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조금 남은 자존심으로
가까스로 자신의 장기인 상소리를 퍼붇는 것만은 참았다. 그 자존심으로 해서 그녀는 키를
도로 빼앗으려고 이 더러운 남자에게 손을 대거나 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그녀는 등을 꼿
꼿이한 채 말했다. "열쇠는 얼마든지 걸을 수 있다구요!" 베리티는 홱 등을 돌려 거친 발걸
음으로 주차장에서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금방 또 홀트에게 팔을 붙잡혀 버렸다.
"어디 사는지는 모르지만 이곳에서 제일 가까운 집도 2킬로는 떨어져 있단 말이야. 코트도
없이, 얼어 죽고 싶나?"
베리티는 홀트가 무슨 말을 하든 알 바가 아니라고 생각했으나, 그가 자기 일행을 불러오
는 수치는 절대로 당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짐짓 기세좋게 말했다.
"굉장히 추운 밤에도 2킬로 가까이나 걸어서 집으로 돌아간 적이 있다군요."
팔을 놓지 않으면 정강이를 걷어차 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홀트는 눈치 빠르게 베리티의 그 마음을 알아차렸다.
"당신 집은 버치우드 하우지.!"
베리티는 깜짝 놀랐다. 그가 그녀의 집을 알고 있다는 것은, 그녀가 모르는 사이에 집에 왔
다갔을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게 생각하자 또 분통이 터졌다.
"당신은 우리 집에 온 일이 있군요?" 그녀는 흠칫 놀라며 소리쳤다. "아빠가 당신을...."
"아하, 당신이 클레멘트의 따님이구!"
두사람중 어느쪽이 더 쇼크가 컸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홀트가 먼저 마음을 가다
다듬고 독백처럼 말했다.
"놀랍군, 당신이 상당한 아가씨라는 말은 듣고 있었지만....."
베리티는 더 이상 말을 계속하게 놓아두지 않았다.
"누가 나에 대해서 이야기했죠?" 그녀은 울컥해서 말했다. 제일 의심스러운 사람은 월터
백부였다. 그는 베리티가 여덟 살 때 자기 아들에게 난폭한 짓을 한 것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고양이를 못살게 굴던 열 네 살짜리 사촌오빠 베이질을 냇물 속으로 떠다 밀
었던 것이다. "아빠는 절대로...."
이번에는 그녀가 방해를 받았다.
"추운가? 당신 떨고 있잖아.." 홀트는 걱정스럽게 말했으나, 그녀는 춥기보다는 분통이 터
져서 떨고 있었던 것이다.
홀트는 이제 말다툼은 끝났다는 듯이, 베리티가 거스르려고 하는것도 아랑곳없이 무리하게
그녀를 끌고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세워 놓은 번쩍거리는 리무진으로 갔다. 베리티가 어이없
어하는 사이에 홀트는 차의 문을 열고 그녀를 차 안으로 밀어넣었다. 뛰쳐나가려고 하던 베
리티는, 그의 엄격한 한마디에 보기 좋게 콧대가 꺽여 버리고 말았다.
"내가 바래다 주는 것이 싫다면 클럽으로 돌아가 당신의 일행 중에서 제일 멀쩡한 자에게
그 명예를 넘겨주어야겠군?"
"어쩌면 이렇게도 사람이 야비해." 답답증과 노여움이 뒤범벅이 되어 베리티는 소리를 빽
질렀다. 약이 오르는 노릇이었지만 그는 그녀의 약점을 잡고 있었다.
그녀가 벌컥 화를 내며 흥분할 만큼 숫된 데가 있다는 것을 장난꾸러기 일행이 알게 되면
그들에게 다시는 큰소리를 칠 수 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베리티가 더 뭐라고 말하기 전에 홀트는 얼른 이그니션 스위치를 넣어 차를 발진시
켰다.
"무척 서두시는군요." 베리티는 비웃듯이 말했다.
"오래 기다리게 하면 블론드 아가씨의 열이 식을깍봐 걱정이 되나요?"
"당신 아버지가 당신을 무척 귀여워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당신 아버지를 위해서 바
래다 주는 거요."
홀트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베리티나 마찬가지로 그도 분명 넌더리가 난 모습이었다. "바로
돌아오겠지만 오해가 없도록 미리 손을 써 놓았지. 빠질 수 없는 파티가 돼 나서."
"다이아몬드 경공업의 중역이 된 축하가 틀림없지요?" 베리티는 갑자기 솟구친 눈물을 참
참느라 기를 썼다. 샴페인은 그녀의 취임을 축하하기 위해 그녀의 테이블 위에서 넘쳐흘러
야 했는데.....
"사실 생일 축하요."
베리티는 통렬한 비아냥거림으로 눈물을 누를 수가 있었다.
"축하의 말은 해줄 수 없으니 오해가 없도록."
홀트는 짧게 웃었다. 그가 자기의 생일 축하가 아니라고 말하려고 하는 동안 차는 어느새
버치우드 하우스에 당도했다.
베리티는 도착하기가 무섭게 인사 한마디 없이 뛰어 내릴 생각으로 있었다. 그런데 홀트의
거침없는 운전은 그가 분명 이 집에 와 본일이 있다는 것을 말해 주어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어서 뜻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는 벼로 서두는 기색도 없이 차를 세우고 말했다.
"아하, 이제 알 것 같군. 당신이 날 한사코 싫어하는 것은 내가 최근에 다이아몬드 경공업
에 들어간 것과 관계가 있는 모양이군."
"머리가 좋으시군요." 베리티는 비아냥거렸다.
홀트는 그녀의 말을 무시했으나 눈에 언뜻 차가운 빛이 비쳤다.
"알가 알수 없는 것은, 무엇 때문에 내가 역원이 된 것을 당신이 그렇게 싫어하는가, 어째
서 나보고 더러운 수법을 썼다고 비난하는가요."
"달리 어떻게 그 자리를 손에 넣을 수 있었겠어요?"
베리티는 자신의 감정 상태가 폭발 직전에 다다른 것을 느꼈다. "아버지는 역원자리를 나
에게 주겠다고 약속했어요. 그런데 당신이...... 끼어들어 나한테서 그 자리를 빼앗아 가고 말
았어요!."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베리티는 거세게 숨을 몰아쉬어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았
다. 운전하기에는 너무 흥분해 있다고 한 홀트의 말이 당연하게 생각했다.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베리티는 서둘러 차에서 내렸다. 가까스로 흐느낌을 억
누르면서 현관의 열쇠를 찾느라 백속을 휘젓고 있을 때, 홀트가 차에서 내려 옆으로 다가왔
다. 그는 진심이 담긴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그 자리를 당신한테 주기로 약속이 되어 있는 줄은 몰랐어. 난....."
"알고 있었다면 사태가 지금과는 달라졌을 거라는 말인가요?" 울컥 화가 치미는데, 열쇠조
차 쉽게 손에 잡히지 않아 베리티는 더욱 속을 끓였다.
베리티가 겨우 열쇠를 찾았을 때 ,홀트가 조용하게 말했다.
"물론 달라졌을거요. "
"당신은 이 나랑 모든 회사의 중역이 될 작정인가요?" 베리티는 떨리는 손으로 열쇠를 구
멍에 끼워넣으면서 대답은 기대하지 않고 물었다. 하지만 그이 대답이 없자 역시 불만스러
웠다. 그녀는 더욱 화를 돋우며 말했다. "그렇다면 이번 자리를 한껏 활용해 보시죠. 제퍼슨
씨. 그러나 오래 가진 못할거예요."
"당신은......" 그는 한순간 망설였으나, 곧 조용히 , 그러나 야무지게 베리티가 아까 클럽에
서 썼던 말을 써 먹었다. "당신은 더러운 수법을 써서 나한테서 그 자리를 강탈하겠다. 그
말이지?"
조용하고 자신이 있어 보이는 그의 말투에서, 그가 그런 찬스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베리티는 알 수 있었다. 그를 한껏 후려치고 싶은 마음에 몰리면서도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그 자리는 당연히 내 것이예요. " 그러고는 한 마디 한 마디에 의지를 담고 선언했다.
"내 손에 넣을 생각이니 그런줄 아세요!"
홀트는 분명 그녀의 선언을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뜻밖에도 베리티가 모를는 무언
가를 알고 있는 것 같은 모습으로. 그러고는 어처구니없어하는 그녀를 현관에 밀어넣으면서
홀트는 놀리는 듯한 말투로 외쳤다.
"뛰어난 자가 이길수 있기를!
3
베리티는 이튼날 아침 일찍 잠이 깼다. 다른 때 같으면, 전날 밤 늦게 돌아온 날은 깨고
나서도 한 시간 가량 멍하니 앉아 있기 일쑤였다. 한데 그날 아침은 홀트 제퍼슨이 머리
에 떠오라 잠이 단번에 달아나 버렸다.
어젯저녁은 그다지 늦은 게 아니었다. 그 사나이 덕분에 친구들과 밤새워 떠들려던 것을
일찌감치 그만두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억지로 그녀를 바래다 준 것을 생각하면 화
가 치밀었다. 더구나 그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둔 자신이 못마땅해서 베리티는 더욱 노영
움이 타올랐다.
누구로부터 지시를 받아 본 일이 없는 베리티는 어젯저녁의 일이 하나하나 머리에 떠오를
수록 점점 더 약이 올랐다. 그의 정강이를 걷어차 주려다가 참은 것이 후회가 되었다. '뛰어
난 자가 이길 수 있도록!' 홀트 제퍼슨이 비웃으며 한 말이 생각났다. 베리티는 너무나 화가
치밀어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침대에서 뛰쳐나와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를 하면서, 자기가 틀림없이 이기겠다고 베리티는 별렸다. 홀트는 내가 모르는 일을 알
고 있는 것 같아. 하지만 그가 아버지를 속여 자리를 가로 챈 것은 틀림없어. 구체적인 작전
은 떠오르지 않지만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반드시 이기고 말겠다고 베리티는 다시 한번 마
음을 다졌다. 자기에게 약속되었던 자리에서 홀트 제퍼슨을 몰아낼 때까지는 긴장을 늦추지
않을 결심이었다.
작전이 분명하게 설 때까지는 아버지와 화해하는 것이 낫겠다고 베리티는 생각했다. 아래
층에 내려가 식당에서 아버지와 얼굴이 마주친 순간 또다시 화가 났다. 홀트 덕분에 걸어서
차를 가지러 가야 한다는 것이 생각나 떨떠름한 얼굴이 되었따. 더구나 그가 클럽에 키를
맡겨 두지 않았다면 어떻게 할까?
클레멘트 다이아몬드는 방문이 열리자 신문을 내려 베리티를 흘끔 바라보았다. 싸움이 아
직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은 그녀를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전에도 말했지 않니." 아버지는 '잘잤니?'라고도 하지않고 기분이 않좋은 얼굴로 말했다.
"무엇을요?" 베리티는 나쁜 것은 내가 아니라 아버지라는 생각을 버리기가 힘들었다. 그러
나 아버지와의 냉전은 이제 끝을 내고 싶었다.
"밤새 현관 앞에 차를 세워 두지 말라고." 클레멘트는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다시 신문을
펼쳐 들었기 때문에 베리티의 반응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차의 문을 잠그지도 않고,
이그니션 키를 뽑지도 않고 그대로 뒀지?"
"네.....그런 것 같아요." 홀트 제퍼슨이 그녀의 차를 여기까지 몰아다 놓고는 친구의 차를
타고 돌아간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자 베리티는 다시 놀랐다. '달갑지가 않군.그런 남자의
신세를 지다니. 정말 질색이야!."
홀트를 만난 일을 아버지한테 이야기해야 할 것인가. 그러나 모처럼 아버지와 화해를 하고
싶은데, 그 남자 이야기를 꺼내게 되면 금방 또 화가 치밀 것은 너무나 뻔했다. 그래서는
아버지와의 관계를 더욱 안좋게 만들 뿐이다.
미세스 트루먼이 아침식사는 어떻게 하겠는가를 물으러 왔다.
"토스트만 부탁해요. " 베리티는 대답했다. 미세스 트루먼은 베리티의 언동에 비판적일 때
도 있고 서슴없이 잔소리를 할 때 도 있다. 그래도 베리티는 가정부가 좋았다.
"살이 찔 염려는 없겠군요. " 비아냥거리면서 미세스 트루먼은 나갔다.
침묵이 계속되었다. 1분, 2분, <타임지>지 넘기는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은
채 시간이 흘렀다. 베리티는 아버지와 화해하고 싶은 마음이 더욱 커졌다. 3분이 지나자 그
녀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게 되었다.
"아빠 제가 지난밤 새 컨트리 클럽에 갔기 때문에 호라르 내고 계신 거예요?"
"너는 이제 21세란다." 아버지는 딱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베리티는 3년 전부터 어엿한 성인으로 자처하고 있는 데, 아버지는 성인의 나이는 여전히
21세라는 것을 말해 주었다. 그러니 클럽에 가는 건 자유라는 듯이 들렸다.
긴장은 풀렸으나, 21세가 되자마자 얼마나 씁쓸한 느낌을 맛보았었는지를 이 자리에서는
잊어버리려고 베리티는 애썼다.
"별로 대단한 클럽은 아니에요. " 그녀는 잠깐 사이를 두고 말했다. "전 이제 다시는 거기
에 가지 않을 거예요.
클레멘트의 표정은 아직도 굳어 있었으나 눈이 잠시 반작 빛났다.
"거기서 쫓겨난 건 아니지?" 회사에 나기기 위해 현관으로 걸어가면서 아버지가 중얼거렸
다. 그 말에는 놀리는 것 같은 울림이 들어 있어서 베리티의 입이 저절로 벙긋거렸다.
미세스 트루먼이 들어왔을 때 베리티는 아까보다 기분이 가벼워져 있었다.
"테이블은 내가 치우겠어요. " 그녀는 말했다.
"무엇을 꾀하고 있군요?" 빈틈이 없는 미세스 트루먼이 의심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그녀는
베리티가 어릴 때부터 함께 살아왔다. 성질이 거센 젊은 여주인의 잔소리를 들으며 살아온
만큼 좀처럼 속아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아무 것도 꾀하는 게 없어요." 베리티는 부정했으나 원래가 정직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덧
붙여 말했다.
"하긴 뭔가 있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당신이 아빠한테 일러바칠 만한 일은 못 돼요. 아빠
도 결국 기뻐해 주실 일이니까요."
"그 말을 들으니 반갑군요." 미세스 트루먼은 그렇게 말하고 앞치마 호주머니에서 베리티
의 차의 키를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난 아가씨가 저지른 일을 하나에서 열까지 아버님
께 일러바치진 않아요." 미세스 트루먼은 웃음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어디에 있었지요?"
"우편함에요. " 미세스 트루먼은 베리티의 행동에는 조금도 놀라지 않는다는 태도를 보여
주었다.
그릇을 주방으로 날라다 놓은 뒤 베리티는 어떻게 하면 홀트 제퍼슨에게 올가미를 씌울 수
있을까를 궁리하느라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실현성이 없는 것만 떠오랐다. 아버지가 홀트 제퍼슨을 몰아
낼 만한 아이디어는 떠오르지 않았다.
베리티는 헛된 생각을 이어가는 데 지쳐 버렸다. 그래서 미란다에게 전화를 걸어 수다나
떨기로 했다. 그러나, 미란다가 클럽을 나올 때는 자기 차가 아직도 그곳 주차장에 세워져
있었을 것이라는 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주차장에 서 있는 베리티의 차를
본 조이론이 수색대를 내자고 말했다고 미란다가 말했기 때문이다. 베리티는 무슨 핑계를
대지 않으면 안 될 형편에 몰리게 되었다.
"걸어서 돌아오기로 했던 거야." 친구한테 거짓말을 하기는 싫었으나, 자존심이 강한 그녀
로서는 거드름을 피우던 그 남자에게 굴복했다고는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너 과음했었니?" 늘 음주운전으로 걸릴까 겁을 내고 있는 미란다는, 베리티의 그런 간단
한 설명에 납득이 간 모양이었다.
조이론과 로로의 소문을 한차례 주고받은 뒤에 미란다는 그때까지 참고 있었던 일을 입에
올렸다.
"요전날 밤말이야, 네가 나오지 않았을 때말인데......너의 아버지는........"
"그일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해 줄게." 베리티가 얼른 그녀의 말을 가로막아 버리자 미
란다는 더 이상 캐묻지 않고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옮겼다. 미란다은 역시 좋은 친구다.
"내일 런던에 나가지 않겠니?"
"그거 좋겠구나. " 베리티가 찬성했다. 가장 가까운 역까지 자동차로 가면 런던은 어렵지
않게 당일로 다녀올 수 있고, 벌써 오랫동안 가보지 않았던 것이다. 아침 일찍 기차를 탈 약
속을 하고 수다는 끝을 냈다.
베리티는 또다시 홀트 제퍼슨에게 복수할 방법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몇 분이
지나자 이번에는 밖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그것이 누구의 전화인지 미리 알 수 있었더라면
그녀는 결코 수화기를 집어들지 않았을 것이다.
홀트 제퍼슨이 침착한 목소리로 이름을 대는 것을 듣고 너무나 노라 베리티는 수화기를 던
지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있었다. 멍하니 있는 그녀에게 홀트는 오늘 아침 몸이 좀 어떠냐고
물었다.
"숙취 같은 건 없어요. 당신과 이야기하면 취기가 싹 가시겠지만, 그럴 취기가 남아 있어야
말이지요."
그렇게 쏘아줘도 홀트는 상처받은 기색 없이 태연했다.
"취하지 않았다면 어제 당신이 한 말은 모두 진심이었군. 오늘 아침에도 역시 내가 당신
자리를 가로챘으니 몰아내야할 녀석이라고 생각하고 있단 말이지?"
놀리는 것 같은 말투에 베리티는 머리로 피가 확 몰리는 것 같았다.
"그 자리에 편안하게 ㅇ아 있겠다는 생각은 일찌감치 버리는 게 좋을 거예요. 어차피 오래
붙어 있지는 못할 테니까." 그러고는 그녀는 처음에 그렇게 해야 했는데, 하고 수화기를 척
컥 내려놓았다.
어쩌면 저렇게 뻔뻔스러운 남자가 다 있을까. 베리티는 화가 나서 방안을 이리저리 서성거
리다가 이윽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남자는 사실은 아버지한테 전화를 걸어 왔는데
내가 받는 바람에 놀리는 즐거움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 틀림없어. 이런 시간에 아버지
가 집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버지를 허수아비 회장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야. 아
아, 어떻게 그 남자를 몰아낼 방법이 없을까.
그날 밤 아버지와 저녁식사 자리에 마주 앉을 무렵 베리티의 화는 어느 정도 가라앉아 있
었다. 홀트 제퍼슨을 몰아낼 만한 작전을 세우지 못한 것은 결굴 그 남자에 대해서 충분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식사가 끝날 무렵, 그녀는 홀트 제퍼슨에 대해서 좀
더 알아내려고 작정하고, 아버지에게 물었다.
"홀트 제퍼슨은 이근처에 살고 있나요?"
베리티는 아버지가 갑자기 의아해 하는 표정을 띠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미소를
잃지 않도록 애썼다. 그리고 그날 아침 그녀가 먼저 화해를 청한 것을 아버지가 기억하고
있기를, 또 죽어도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녀가 마침내 체념하고 받아들일 마음이 된 거
라고 아버지가 생각해 주기를 바랐다.
클레멘트는 딸과의 휴전은 잠시 동안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으나 결국 베리티의 질문
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최근 드레이크스 나이튼에 새 집을 사서 이사했어."
베리티는 언젠가 그 거리를 차로 지난 일이 있었다. 여기에서 5,60킬로는 떨어져 있으나
그래도 그녀에게는 너무나 가까웠다.
"전에는 어디에 살고 있었어요?" 베리티는 태연한 태도로 오렌지를 하나 집어 껍질을 벗기
기 시작했다.
"런던이었지. 지금도 그곳에 플랫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클레멘트는 또 눈치를 살
피듯이 베리티를 보면서 말했다.
"부인과 아이들에게 시골 공기를 마시게 하고 싶었던 모양이지요? " 그녀는 가책을 누르고
방긋 웃었다.
"홀트는 결혼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그를 아주 친근하게 퍼스트 네임으로 부르는 것을 듣자 하마터면 푹발할 것 같은
분노를 베리티는 겨우 눌렀다. 그러고는 그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이제 싫증이 안 척
했다.
"대머리에다 살이 찐, 90세 가량의 노인이겠지요, 홀트 제퍼슨이라는 사람?"
그 말에 클레멘트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차차 소개해 주마"
클레멘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했으나, 딸이 실망을 딛고 일어섰는지 어떤지 눈치를
보는 것을 베리티는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가까스로 미소를 띠며 좀 더 알아내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날 저녁 침대에 들어가 생각해 보니 수확은 아주 초라했다. 베리티는 잠도 오지
않아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홀트가 결혼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일이었다. 드레
리크스 나이튼에 사로 있다는 것을 안 것이 그녀의 소망을 이루는 데 무슨 도움이 될 것 같
지도도 않았다. 게다가 홀트가 실업계에서 얼마나 높이 평가받고 있는가, 아버지 자신도 그
를 얼마나 신뢰하고 있는가를 되풀이해 들려주는 바람에 진절머리가 났던 것이다.
다음날 베리티는 런던에 나가 단골 가게를 둘러보면 서 미란다와 수다를 떨었다. 그러나
아직 미란다에게 이번 일을 털어놓을수 마음은 나지 않았다. 돌아오는 기차 속에서 그날
저녁 베리티가 미란다의 집에 가 토요일 져녁을 어떻게 지낼까를 결정하기로 했다.
"그럼 이따가 봐." 베리티가 미란다의 짐 싣는 것을 거들고 있을 때 미란다가 말했다. "그
때까지는 에너지를 되찾아 놓겠어."
미란다의 말에 떠올랐던 베리티의 미소는 미란다의 차가 역전을 빠져나가는 것을 바라보는
동안 사라져 버렸다. 간신히 머리 밖으로 몰아냈던 남자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던 것이다.
내가 자기한테 상처를 받은 것이 아닌가 하고 홀트가 생각할 것이라 싶자 베리티는 굳어진
표정으로 약점을 그에게 보인 것은 분명했다. 베리티는 깊은 생각에 잠겨서 현관을 들어서
다가, 미세스 트루먼이 모습을 나타냈을때도 얼른 표정을 바꿀수 없었다.
"조이론 로비가 오늘 세 번이나 전화를 걸어 왔다고 말해도 아가씨는 기분이 좋아질 것 같
지 않은데요."
"또 걸려 오면 난 오늘 저녁 데이트가 있다고 전해줘요.:
"그런 일은 스스로 처리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미세스 트루먼은 그렇게 말했으나 입가에
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렇게 하겠어요." 베리티는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조이론은 그녀의 머
리에 없었다.
그녀는 2층으로 올라가 샤워를 하고 미란다와 저녁을 즐기기위해 옷을 갈아입었다.
베리티는 집을 나서기 전에 뭐든 요기를 좀 해야겠다 싶어 주방으로 들어갔다. 미세스 트
루먼과 서로 요리를 하겠다고 다투고 있는데 현관의 벨이 울렸다.
"이걸로 결정이 되었어요" 미세스 트루먼이 말했다.
"아가씨가 도어맨이니 난 요리를 하겠어요."
"당신은 좀더 나이가 들면 주인 노릇을 톡톡히 하려 들 거예요 " 베리티는 웃으며 패배를
인정했다.
그러나 <주인노릇>이라는 말이 홀트 제퍼슨을 생각나게 해서 현관으로 가는 동안 미소는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그녀는 애써 홀트 제퍼슨을 머리에서 몰아냈다. 그리고 현관으로 가
는 동안 미소는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현관에 와 있는 것이 조이론이라면 지금까지보다 더
쌀쌀하게 대해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걸어갔다.
그러나 현관문을 열고 방문자가 조이론이 아니라 홀트인 것을 보았을 때, 베리티는 아무말
도 할 수가 없었다. 뭐라고 말을 해야겠다고 애를 태우면서도 기묘하게도 그가 꽤 멋이 있
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요전에 디너 자케트 차림의 그도 상당이 멋있었지만 검은 스웨터와 바지 차림도 그만 못하
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홀트는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와 태연하게 말했다.
"또 만났군요."
베리티는 그가 아버지를 만나러 왔음을 생각하고, 서슴없이 들어서는 그이 뻔뻔스럼움을
겨우 참았다.
"나는 곧 나갈거예요. 아버지는 아마 당신이 오기로 한 것을 잊으셨나봐요. 저녁 약속이
있다며 벌써 나가신걸요. " 그녀는 약간의 쾌감을 느끼며 쌀쌀하게 말했다. 아버지가 그와
의 약속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는 것으로 그가 상처를 받았으면 싶었다. 그러나 그녀의
희망은 금방 무너져 버렸다.
"당신 아버지는 가넘씨 댁에서 브리지를 하고 계시지." 홀트 제퍼슨은 아버지가 집에 없다
는 것을 알고 찾아온 것이다. "어제 내가 전화했을 때 그렇게 신경질만 부리지 말고 내 이
야기를 들어주었다면 구태여 내가 이렇게 찾아온 것까진 없었는데."
어제의 전화도, 오늘 찾아온 것도 아버지에게 볼일이 있어서가 아니라는 것을 알자 베리티
는 깜짝 놀랐다.
"그럼 당신은 날 만나러 왔단 말인가요?"
홀트는 서두는 기색도 없이 들을 돌려 현관문을 닫았다. 베리티는 그가 더 이상 안으로 들
어오지 못하게 하려고 그가 돌아서기 전에 벌서 두 번째 화살을 준비하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내가 이런 꼴을 당해야 하지요?" 베리티는 잔뜩 빈정거리며 물었다. 순간 홀
트의 눈이 반짝 빛났으나, 그 빛은 금방 사라졌다. "알았어요. 가로챈 자리에서 쫓겨나지 않
으려고 나한테 사정하러 온거군요."
홀트는 그녀의 비아냥거림을 듣고도 태연한 목소리로 용건은 현관에서 마치겠다는 말을 했
다. 그녀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제 내가 전화했던 것은, 우리의 첫 만남이 너무 엉망이었기 때문에 그로 인한 상처를
치료해 주려고 했던 거요."
베리티는 우스운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당신이 술에 대해서 설교를 할 작정으로 전화한 줄 알더라 그 말이군요?"
홀트의 눈이 또 반짝 빛났다. 이번에는 치솟는 감정을 억누르려고 애쓰고 있다는 것을 턱
의 움직임이 잘 말해 주고 있었다.
"당신이 큰 실망을 맛보았으리라는 것은 나도 잘 알아요. 그렇기 때문에 당신의 심한 무례
를 용서할 생각이오."
그가 날 용서하다니! 벌컥 화가 치솟으며 그이 볼을 한방 가려 주려고 했다. 그 순간 베리
티는 그의 말에 발목을 꽉 잡혔다.
"내가 오늘 이곳에 온 것은 당신을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아니오. 오직 당신 아버지를
위해서요."
"아버지를 위해서라니요!" 베리티는 소리쳤다. "그게 무슨 뜻이지요? 아버지에게 무슨 일
이 있나요?" 지나치게 흥분한 그녀를 보고 홀트는 대답했다.
"아무 일도 없어요. 다만 당신 아버지는 회사를 운영해 나가기 위해 무신 애를 쓰고 있다
그 말이오."
아버지에게 심장의 발작이나 그 비슷한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니었구나 생각하고 안도했다.
그러나 곧 안도감을 밀어내며 불쾌감이 솟았다.
"당신이 오기 전까지는 회사의 경영은 아주 순조로왔어요!"
그녀의 통렬한 비아냥거림을 홀트 제퍼슨은 대수롭지않게 넘겨 버렸다.
"당신 아버지는 자기 나이의 반도 안되는 젊은이보다 더 많은 일을 하고 있단 말이오. 그
래서 당신 아버지가 집에서 편안하게 쉴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해 찾아온 거요. 그리고 또
하나, 당신 눈에 내가 나쁜놈으로 보이는 모양이기에 그렇지 않다는 걸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해서요."
베리티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이 남자가 마땅히 그녀의 것이 되었어야 할 것을 손에 넣었
다는 것, 그래서 그녀는 그것을 되찾아야 한다는 것 뿐이었다.
"나에게 하는 식의 공격을 아버지에게도 퍼붓는다면 그렇지." 홀트 제퍼슨의 입가에는 뜻
밖에도 깊은 주름이 새겨졌고, 베리티는 자신의 비아냥이 얼마나 그를 괴롭히고 있는가를
엿볼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회사에서나 집에서나 당신 아버지는 퍽 고달플 거라 생각
각되어서 말이오."
그 장미빛의 꿈이 엉망이 된 뒤로, 자기가 아버지에게 사랑스런 딸이었다고는 할 수 없다
는 것을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베리티는 여전히 고압적으로 물었다.
"그렇다고 그것이 당신한테 어떻다는 거지요?"
"나는 클레멘트가 지금까지 해온 모든 일로 해서 그를 경애하고 있는 거요." 홀트는, 자기
의 마음은 배리티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거라는 분노를 담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
면서 짧게 대답했다.
"그래서요?" 다이아몬드 경고업은 창립 초기에 아버지가 밤늦게까지 일한 덕분에 성공했
다는 것을 베리티 이상으로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으리라. 그런데 홀트가 아버지의 업적을
이러쿵저러쿵하는 데 그녀는 또 짜증이 났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 아버지는 집에 돌아오면 편안한 마음으로 쉴 권리가 있단 말이오."
그도 그녀와 마찬가지로 적대감을 드러내며 야무지게 말했다.
"인정이 많으시군요." 베리티는 비웃었다. "아니면, 당신은 아버지가 집에서 계속 쉬기를
바라고 있는 거지요?"
"그게 도대체 무슨 뜻이오?" 홀트는 노여움을 폭발시키며 되물었다.
"말한 그대로예요." 베리티의 눈도 불타고 있었다.
"내 의자를 가로채더니 이번에는 아버지를 쉬게 하여 아버지를 몰아내고 회장자리까지 차
지하려는 속셈이군요?"
"당신은......." 순간 베리티는 그의 입에서 지독한 욕설이 터져 나올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월터 다이아몬드가 당신을 대단한 아가씨라고 한 말은 농담
이 아니었군." 그리고 그녀가 뭐라고 하기 전에 말을 계속했다. "베리티 다이아몬드, 당신은
이제 겨우 21세밖에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이제 슬슬 인생의 고충을 아는 법을
배우는 게 어때요?"
"어른이 되어라 어쩌라 하는 설교 따위는 듣기 싫어요?" 홀트 제퍼슨의 말에 베리티의 노
여움은 폭발하고 말았다. "만일 내가 월터 백부가 사랑하는 베이질과 마찬가지로 사내로
태어났다면 당신의 나의 권리를 가로챌 찬스 따위는 없었을 거예요." 베리티는 너무나 화
가난 나머지 고함을 쳤다. 그러나 갑자기 홀트에게서 공격적인 빛이 자취를 감춘 것을 깨
닫고 깜짝 놀랐다.
그는 천천히 눈으로 베리티의 여자다운 몸매를 더듬으면서 교묘하게 그녀의 노여움을 가라
앉혔다. 이윽고 그는 처음과 똑같은 조용한 목소리로, 잿빛의 눈에 온화한 빛을 띠고 말했다
"그 자리를 놓친 것이 당신에게 그렇게 해가 되었단 말이오?"
"해라니....." 베리티는 갑자기 그의 말투가 바뀌는 바람에 어리둥절하여 말을 더듬었다.
"화를 낼 때나 차분하게 있을 때나 당신은 참 예쁘군, 스타일도 그만하며 매력적이고. 하
지만 남자로 태어났더라면......"
"아첨해 봐야 아무 소용없어요." 베리티는 그에게 더 이상 말할 기회를 주지 않으려고 야
멸차게 가로막았다. 그 바람에 마음이 딴 데로 돌아가 말다툼의 핵심을 잊어 버려 문득 그
날 저녁 홀트의 옆자리에 앉았던 블론드 아가씨를 떠올렸다. r"당신이 바라보는 예쁜 얼굴
은 내가 처음이 아닐 텐데 뭘 그래요." 그녀는 한껏 싫은 소리를 퍼부었다.
"당신은 샐리 애스턴에 대해서 말하는 건가?" 베리티는 속마음을 눈치채이지 않으려고 했
으나 헛일이었다. "산뜻한 느낌의 여자지." 그는 한순간 베리티에 대해서는 잊어버린 듯 중
얼거렸다.
남에게 무시당하는 것에 익숙하지 못한 그녀는 또 벌컥 화가 치밀었다.
"게다가 자기의 희망을 여자가 가로막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는 사람이 아닌가요?" 베
베리티는 날카롭게 되받았다.
"만일 샐리가 내 여자가 아니냐고 하는 말이라면 나는 당신이 더 좋다고 말해야겠는데."
"그 사람이 당신의 여자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예요. 하지만 나에게는 당신이
누구하고 침대를 같이 하는가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어요. 다만 내가 보기에는 그 블론드
미인은 당신에게 홀딱 반해 있으니까. 그녀가 만일 나같은 처지에 있다면, 자기 아버지의
회장 의자라고 기꺼이 당신한테 양보하겠지요."
그 말에 홀트 제퍼슨은 말없이 베리티를 바라보았다. 베리티는, 아버지가 약속을 깸으로써
자기가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가를 바보스럽게 그에게 드러내 보였다고 후회를 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비아냥거릴 뿐이었다.
"당신 남자 친구도 당신과 뭐 그렇고 그런 사이 아니요?"
"조이론 로비말인가요?"
"당신과 춤추던 그 남자 이름이오? 당신과 어울리는 타이프가 아닌 것 같던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베리티는 덤벼들 듯이 말했다. 조이론이 자기와 어울리
는 타이프가 아니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친구를 헐뜯는 데는 그냥 있을 수 없었다.
"모서리를 둥글게 깎으라구." 홀트 제퍼슨은 조용하게 말했다. "그 남자의 성격에 허점이
있다는 말은 아니오. 다만 내가 보는 한, 당신의 결혼 상대는......"
"결혼이라니요!" 조이론 로비와의 결혼 따위는 생각지도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베리
티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친구인 조이론을 얕보는 것처럼 들리지 않았나
싶어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말을 슬쩍 돌렸다. "요즘 결혼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얼마든지 있지."
"하지만 당신은 그렇지가 않지요?" 그녀는 슬그머니 빈정거리며 희미한 기쁨을 맛보았다.
"제퍼슨씨, 만일 이상적인 상대가 나타나기를 기다리신다면, 시한이 다해 가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녀의 비아냥거림은 빗나가고 말았다.
"이제 31세니 독신주의자라는 말을 들으려면 아직 몇 년은 더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당신, 샐리 애스턴과 결혼할 거예요?" 베리티는 자신이 생각지도 않은 말을 내뱉자 스스
로도 깜짝 놀랐다.
"반대하는거요?"
베리티는 이제 홀트와 더 이야기를 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한 가지, 반대하는 이유가 있어요. 그것이 무엇인지 말할 필요는 없겠지요." 그녀는 그렇
게 말하면서 현관문을 활짝 열었다.
"날 그 자리에서 몰아낼 방법은 생각해 놓았소?"
홀트는 태연하게 말하고, 약속에 늦었다는 듯이 시계를 봄으로써 베리티가 그를 몰아내는
즐거움에 찬물을 끼얹었다.
"지금 생각하고 있는 중이예요." 그녀는 따끔하게 말해 주었다.
"당신 아버지를 너무 괴롭히지 말아요. 미스 다이아몬드." 그는 작별의 인사를 하더니, 화
가 난 베리티가 손을 치켜들 겨를도 없이 횡허케 나가 버렸다.
그의 말에 담겨 있는 도전에 분통이 터져 베리티는 현관문을 부서져라 하고 힘껏 닫았다.
어떤 수법이라도 써보라고 그녀에게 싸움을 거는 것 같았다. 베리티 다이아몬드는 지금까
지 도전에 등을 돌려 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4
다음 금요일이었다. 베리티는 여전히 안절부절 못하는 마음으로 아침식사를 하러 내려갔다.
홀트 제퍼슨의 도전을 받고도 도무지 좋은 수단이 생각나지 않아 약이 오를 뿐아니라 이제
는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아빠!" 식당에 들어서면서 그녀는 맥없는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자리에 앉아 커피 포트에 손을 뻗으면서 무심코 보니, 아버지는 여느 때와는 달리 <타임스
>에서 눈길을 떼고 안경 너머로 날카롭게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 불편하니?" 의아스러운 듯 베리티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아버지는 말했다.
"아니요. 괜찮은데요." 그녀는 될수록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제 싸움의 상대는 아버지
가 아니라 홀트 제퍼슨인 것이다. 그것은 그녀 개인의 싸움이었다.
"너는 어젯저녁, 집에 있었지? 그리고 그저께도?"
베리티가 이틀 저녁이나 밖에 나가지 않고 집에 있었으면서 <괜찮다>는 말을 하는 것을
믿을 수가 없다는 말투였다.
"그것이 그렇게도 놀라운 일인가요?" 하고 말하며 베리티는 놀리듯이 웃어 보였다. 화요일
에는 낮에 잠간 외출하여 친구들은 만났으나 미란다와 아드리안을 제외하고는 갑자기 모두
햇병아리처럼 유치해보였다.
친구를 좋아하는 그녀로서는 그런 마음의 변화를 아버지에게까지 털어놓을 생각이 들지 않
았다.
신문이라면 만사 제쳐놓고 보는 아버지가 <타임스>를 내려놓고 있는 데 베리티는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그리고 어딘지 불안스런 아버지의 표정을 보고 본능적으로 경계심이 일었다.
아버지는 무언가 할 얘기가 있는 것 같았다. 무슨 얘긴지 알 수는 없으나 그녀의 마음에 들
지 않는 일인 것만은 분명했다.
다시 몇 초가 흘렀을 때, 마침내 클레멘트가 입을 열었다.
"오늘 저녁에도 집에 있어 줄 수 없겠니?"
베리티는 그날 저녁 별 계획이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조심스런 태도에 그녀도 조심하기
로 했다.
"저녁에 뭐 특별한 일이 있나요?" 그녀는 방긋 웃으면서 물었으나 아버지의 대답에 그 웃
음은 곧 사라지고 말았다. 한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특별한 손님이 온단다."
마음에 들지 않는 소리를 듣게 되리라는 직감은 어긋나지 않았다. 그녀는 아버지의 친구나
동료들은 거의 다 알고 있다. 그들은 모두 한번은 이집의 저녁식사에 초대를 받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특별한 손님>이라면 새로운 멤버가 틀림이 없었다. 그가 누구인지 물어 볼 필요
는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베리티와의 약속을 깨는 원인이 된 당사자를 저녁식사에 초대했을 뿐만
아니라, 집에 있으면서 호스테스 역할을 해주기를 바라다니. 너무나 난감했다. 그리고 오싹
소름이 끼쳤다. 그러나 홀트 제퍼슨과의 싸움은 아버지와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자기를 타이
르자 태연을 가장할수 있었다.
"어마, 그거 유감이군요.!" 자신의 연기력을 미덥지 않게 생각하면서 그녀는 미안한 얼굴을
해보였다. "제가 없으면 아빠의 손님이 기분 나빠할까요?" 그러고는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듯이 물었다.
"누구지요? 제가 아는 분이에요?"
"너는 아직 그 사람을 만나 보지 못했을 거다." 클레멘트는 천천히 말했다. "하지만 요전에
네가 그에게 흥미를 나타냈고, 소개해 주겠다고 했을 때도 별로 싫어하는 것 같지 않아서
나는......"
"홀트 제퍼슨이군요?"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베리티가 손님의 이름을 듣고도 별 얘기가 없는 것을 보
고는 안심한 듯한 모습이었다.
"왜 싫으냐?"
내가 그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아버지는 알 수 없을 것이다. 저녁식사에 초대하게 된 것을
보면 아버지와 홀트 제퍼슨 사이에 연락이 오갔음이 분명한데, 그는 나를 만난 일을 아버지
에게 말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러나 베리티는 '싫으냐?' 라는 아버지의 물음에 거짓말을 하
는것은 피했다.
"저한테 소개하기 위해서 일부러 초대하신 거예요?"
"그런 셈이지." 클레멘트 이렇게 대답했으나 불안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사업상의 이야기
도 많이 있지만, 실은.....그는 오늘 저녁 우리 집에서 묵기로 했단다."
"묵다니요!" 저도 모르게 베리티의 목소리가 커졌다. 홀트 제퍼슨이 이 집에서 식사를 할
뿐만 아니라 이 지붕 아래에서 잠을 자다니! 그러나 그녀는 얼른 노여움을 거두고 미소지으
면서 다소 거친 소리로 아버지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그러고는, "아빠, 그 사람은 이 근처에
살고 있다고 하셨잖아요.?" 하고 추궁했다.
"드레이크스 나이튼까지는 차로 한시간이면 갈수 있지." 클레멘트는 베리티가 반대하고 있
는 것이 아니라, 그저 멀지 않은 곳에 사는 동료를 굳이 집에서 묵도록 하는 데 놀라고 있
을 뿐이라고 생각하여 안심을 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것저것 사업상 할 얘기가 많아
한밤중까지 끌 것 같아서 말이야."
베리티는 비로소 납득이 갔다. 아버지는 홀트 제퍼슨을 그녀에게 소개하기 위해서 초대하
는 체했으나 사실은 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클레멘트가 출근을 하고 나자 베리티는 이제 불쾌한 감정을 숨길 필요가 없어졌다. 미세스
트루먼이 식탁을 치우기 위해 들어올 때까지 그녀는 식당에서 시무룩하게 생각에 잠겨 있었
다.
미세스 트루먼은 그녀의 얼굴을 보자 말했다.
"왜 또 기분이 안 좋으시죠?"
베리티는 생긋 웃어 보이며, 오늘 저녁 집에서 묵는 손님이 있다는 것을 그녀에게 말할까
말까 잠시 망설였다. 홀트 제퍼슨에게 자기가 잘 방의 베드메이킹을 시키는 것도 고소할 거
야. 그러나 결국 극진한 손님접대를 자랑거리로 아는 아버지를 위해 베리티는 입을 열었다.
"오늘 저녁 손님이 와서 묵게 된대요."
"알고 있어요." 미세스 트루먼의 대답에 베리티는 깜짝 놀랐다. "아버지로부터 어젯저녁,
제일 좋은 객실을 준비하라는 분부를 받았거든....."
"어제라고요!" 그렇다면 아버지는 어제 이미 결정을 하고 있었는데, 그녀의 반응이 걱정되
어 조금 전까지 말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잊고 계셨던 게지요." 클레멘트의 건망증을 잘 알고 있는 미세스 트루먼이 말했다.
"그래요, 내게 오늘 저녁은 집에서 식사를 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자 아빠는 생각이 난 거
겠죠."
"조이론 로비의 끈덕진 호출에 항복하고 말았군요?"
미세스 트루먼이 물었다.
베리티는 일어서며 말했다.
"덕분에 생각이 났어요. 전화를 걸어야겠어요."
여기저기에 전화를 건 끝에 결국, 각자 음식을 가져와 새디 놀즈의 집에서 파티를 열자는
것으로 낙착되었다.
베리티는 오전 내내 파티에 가지고 갈 파이를 구웠다. <특별한 손님> 때문에 울컥했던 것
을 생각하면, 비교적 잘 만들어진 셈이다.
아버지가 지금까지 그녀의 친구에 대해서 여러번 잔소리를 한 일을 생각하면 베리티는 아
버지에게도 화가 났다. 그러나 오늘 아버지는, 내가 큰 파티에 가야 한다고 해도 반대하지
않으셨다. 나와 관계가 없는 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니 내가 없는 것이 더 나은 것
일까?
오후가 되어, 아버지가 손님에 대한 말을 꺼내기를 얼마나 망설였을까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베리티는 기분이 바뀌어 반항적인 마음이 가라앉았다. 자긍심 강한 아버지를 생각하
여 홀트 제퍼슨과의 악수를 거절하거나 하지 말자, 그녀가 소동을 일으키는 것이 아닌가 하
는 아버지의 걱정은 쓸데없는 것이었다는 걸 보여 드리자,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홀트 제퍼슨이 도착하는 모습을 창을 통해 보았을 때, 그녀의 결심은 갑자기 시들
해져 버렸다. 그를 스스럼없이 대함으로써 아버지가 준 쓴 약을 얼마나 잘 삼켰는지 보여
드려 아버지를 감탄케 만들자고 생각했었는데.
그녀는 다시 한번 마음을 고쳐먹고 완벽한 호스테스 노릇을 하자고 다지며 아래층으로 내
려갔다. 홀트 제퍼슨은 이미 응접실에서 아버지와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마중을 나가지 못해서 미안해요." 베리티는 손을 내밀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러나 과
장되지 않도록 조심하며 말했다.
"딸 베리티요." 클레멘트는 잠깐 사이를 두어 의심스러운 듯이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베리티, 이쪽은 홀트 제퍼슨씨다. 이분이 최근....."
아버지가 차마 말을 잊지 못하는 것을 보고 베리티는, '역원회의 내 의자를 가로챈 사람이
군요.' 하고 뒤를 이어 주고 싶었다. 축하를 한다는 것은 지나친 일이겠지.
"최근 드레이크스 나이튼으로 이사를 오셨다고 아버지한테 들었어요."
"그 거리에 가보셨습니까?" 눈빛이 재미있다는 듯 반짝이는 것말고는 홀트도 베리티 못지
않게 완벽하게 연기를 할 작정인 모양이었다.
"지나간 적이 있어요." 그러고는 아버지를 보고 말했다. "제퍼슨씨를 방으로 안내할까요?"
아버지의 미소만이 자연스러웠다. 폭풍 전의 정적이 아닌가 하는 의심은 이제 아버지의
눈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홀트가 현관에 두고 온 짐을 가져오기를 기다려 두사람은 넓은 계단을 올라갔다. 그는 아
버지의 곁에서 물러난 뒤로 한마디도 지껄이지 않는 베리티를 곁눈으로 보면서 말했다.
"베리티, 눈부시군!"
베리티는, 홀트가 자신을 위해서 불붙는 듯한 빨간 드레스를 입었다고 생각하게 할 수는
없었다.
"저는 저녁식사에는 동석하지 못할 거예요." 베리티는 객실의 문을 활짝 열면서 차갑게 말
했다.
"조이론을 위해서 나를 남겨두고 떠난다는 말은 아니겠지?" 홀트는 그녀가 없어서야 식욕
이 나지 않는다는 듯이 짐짓 큰소리로 말했다.
"돌아오면 약혼 반지를 보여드리겠어요." 내가 있건 없건 그는 마찬가지고, 그가 아무리 그
런 말을 해도 나역시 감동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그녀는 야멸차게 쏘아붙였다.
그러자 홀트는 웃음기 띤 표정을 지우고 갑자기 묻는 것이었다.
"당신 정말 약혼하는 거야?"
베리티는 하마터면 부정할뻔했으나 아슬아슬하게 몸을 사렸다.
"필요한 것은 다 갖추어져 있는 것 같군요. " 그녀는 그의 질문을 무시하고 말했다. "더 필
요한 것이 있으면 서슴없이 가정부 미세스 트루먼에게 말씀해 주세요." 그렇게만 말하고 베
리티는 방을 나왔다. 다른 손님같으면 '필요한 것이 있으면 제게 말씀해 주세요.'라고 했을
테지만. 홀트는 그녀가 차갑게 대하려고 결심한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녀의 마
지막 말로 무언가 알아챘을 것이다.
베리티는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파티는 사실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았고, 나가기에는 아직
시간도 이르고 해서 잠깐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자기는 그와 저녁식사를 같이 하
지 않는 것을 아무렇지도않게 생각한다는 태도를 일부러 그에게 보여줄 때 느꼈던 기묘한
기분이 생각났다. 그러자 왠지 혼자서 멍하니 있기가 싫어졌다.
"저녁식사에는 뭐 맛있는 게 있어요?" 파티를 위해서 만든 파이를 가지러 주방으로 가지러
내려온 베리티는, 미세스 트루먼에게 물었다.
"있고말고요." 미세스 트루먼은 신이 난다는 듯 말했다. "그것을 안 들고 나가신다니 유감
이군요. "
"천만에요." 베리티는 일부러 과장되게 대답하고, 시간을 보내고 싶어 얼른 덧붙여 말했다.
"차를 끓여 드릴까요?"
한데 미세스 트루먼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아가씨에게도 자상한 일면이 있다는 것은 언제나 인정하고 있어요."
베리티는 차를 끓이면서 저도 모르게 물었다.
"내가 그렇게 손도 못 댈 만큼 엉망인 사람인가요? 트루먼?"
"어디에서부터 이야기를 할까요. 글세...." 하고 그녀는 놀리며 베리티의 심각해진 얼굴을
흘끔 바라보았다. "이상적인 상대가 나타나면 아가씨도 좀 차분해 지겠죠."
그 말에 베리티는 문득 홀트가 생각났다. 하지만 그저 <이상적인 상대>를 기다릴 나이가
지난 것이아니라고 한 그의 말 때문에 연상한 것이 틀림없다.
그녀는 다시 30분 동안이나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미세스 트루먼이 <특별한 손님>을
위해서 요리에 성심을 다하기 위해 혼자 있고 싶어하는 눈치를 보이자 몸을 일으켰다.
베리티는 아버지에게 외출한다는 말을 하러 응접실로 갔다. 아버지는 홀트 제퍼슨과 같이
있었다.
"그럼 다녀오겠어요." 베리티는 아버지에게 말했다.
그리고 아버지 앞에서는 손님에게도 정중하게 인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거라." 하고 아버지는 대답했다.
베리티는 손님에게로 돌아서서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띠고 예의바르게 말했다.
"실례하겠어요, 제퍼슨 씨. 전..."
"홀트라고 불러주시오." 홀트 제퍼슨은 부드럽게 그녀으 말을 가로채 버렸다. 그의 날씬한
키와 세련된 태도, 그의 모든 것에 갑자기 압도되어 베리티는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
다.
하지만 지금까지 한번도 겁을 내본 일이 없는 그녀는, 그의 태도에 기가 눌리자 앞으로는
절대로 겁을 먹지 말자고 마음에 다졌다. 베리티는 눈을 깜빡거려, 자기으 눈길을 홀트 제퍼
슨의 눈에 비끄러매고 있는 마법의 실을 잘랐다.
"즐거운 저녁이 되시길.....홀트." 남모를 노력 끝에 베리티는 정중하게 말했다. "아마 아침
식사 때나 뵙게 될 거예요."
새디의 파티는 언제나와 똑같았다. 지금까지는 이런 모임을 마음껏 즐겼던 베리티였지만,
그 날 밤은 시계바늘이 열 한 시를 가리키자 언제까지 여기에 있어야 할까, 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음료수를 가져 왔어. " 조이론이 옆으로 왔다. 그는 글라스를 건네다가 주스를 조금 엎질
렀다. 그러고는 당황하여 사과하면서 베리티의 옷을 닦아 주다가 그녀의 팔을 쳐서 또다시
주스를 엎지르고 말았다.
'아아, 이게 뭐람!, 그녀는 속으로 신음했다. 집에서 침대에 누워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조이론의 칠칠지 못한 태도는 홀트 제퍼슨의 세련된 태도와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홀트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으나 도저히 그를 머릿속에서 몰아낼 수가 없었
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분명히 잠자리를 들었다고 생각될 때까지 집으로 돌아가서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조이론도 들은 일이 있는 따분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그것으로 베리티를 즐겁게 해줄 생각으로.
그러나 다행히도, 새디는 그 밖에도 몇 명의 여자 친구를 불렀는데, 그중의 한 사람이 조이
론과 가까워지고 싶어하는 눈치를 보였다. 조이론이 한 이야기를 끝내고 또다른 분한 이
야기를 시작하려고 했을 때, 귀에 선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 당신으 보이프랜드를 실례해도 괜찮을까요?"
"거칠게 다루지는 말아 줘요." 댄스 플로어로 끌려가는 조이론의 얼굴이 밝아지는 것을
보자 베리티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전혀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그때 얼음이 떨어졌다고 누군가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자기가 가져오겠다고
하여 주방으로 도망쳤다.
베리티는 거기서 마음을 가다듬으려고 했다. 어떤 사건의 소용돌이에 말려들었다 해도 그
것을 남에게 눈치채이기는 싫었다.
잠시 동안이라도 혼자 있고 싶었는데, 베리티가 냉장고의 문에 손을 댔을 때 미란다가 기
세 좋게 주방으로 뛰어들어왔다. 누구보다도 베리티를 잘 알고 있는 미란다는, 그 녀가 여
느때와는 다르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구나.?" 베리티가 먼저 말을 걸었다.
"넌 즐겁지 않은 모양인데?" 미란다는 될 수 있다면 그녀의 힘이 되어 주고 싶었다. "춤추
고 웃기는 하지만, 모든 게 건성이야. 그렇지?"
미란다만은 속일 수 없다 싶어 베리티는 굳이 거짓말을 둘러대지는 않았다.
"응, 좀 내키지가 않아." 하고 그녀는 털어놓았다.
"몸이라도 불편하니?" 미란다는 금세 걱정스런 얼굴이 되어, 베리틱 말릴 사이도 없이 의
자를 끌어 왔다.
몸이 불편한것도 아닌데 미란다가 그렇게 마음을 써주니 미안했다.
"몸은 아무렇지도 않아." 베리티는 조심성 없이 그만 입을 놀려 버리고 말았다. "누워 있는
닥 해서 나을병도 아니야." 그러고는, 깜짝 놀라는 미란다에게 그녀는 모든 것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네 아버지는 그 자리를 네게 주겠다고 약속하셨지 않니!" 미란다는 이야기를 다
듣고 나자 숨을 삼키며 말했다. 베리티의 꿈이 산산이 부서져 버린 쇼크를 이해한다는 놀라
움인 것 같았다. "그건 당연히 네 거지." 미란다는 회사의 일이며, 베리티의 사촌오빠 베이
질이 대학을 마치자 바로 회사에 들어간 일도 잘 알고 있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단다." 베리티는 시무룩하게 말했다.
"게다가 너의 아버지는 네가 역원이 되기를 얼마나 열망하고 있었는지 잘 아실텐데." 미란
다는 아직도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야 우리는 약간 괘도를 벗어난 일도 없진
않았지......" 미란다는 약속이 깨진 이유를 알아내려고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넌 경영자
코스를 다닐 때 강의를 빼먹거나 한 적이 한번도 없었잖니? 우리가 낮에 사방으로 놀러다닐
때도 너는 번번이 같이 가고 싶은 것을 참았잖아."
미란다의 동정을 받았으나, 속으로는 아버지를 끔찍히 생각하는 베리티는 미란다에게 말했
다. 홀트 제퍼슨이 그녀의 자리를 가로챈 것은 아버지 탓으로 생각지 않는다., 홀트 제퍼슨
이 어떤 수법을 써서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기어이 몰아내고 말겠다고 결의를 다졌
노라고.
"문제는, 아무리 머리를 짜봐도 신통한 방법이 없지뭐니. 아무런 방법도 생각해 내지 못하
고 있어. " 베리티는 힘없이 말을 마쳤다.
미란다도 베리티나 한가지로 좋은 꾀가 떠오르지 않았다. 누군가가 얼음을 가지러 주방으
로 들어왔다. 그것을 계기로 베리티는 그럭저럭 웃는 얼굴을 지으며 미란다와 같이 분위기
가 한창 익어가고 있는 파티장으로 돌아왔다.
한 시간쯤이 되자 두사람씩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베리티는, 아버지와 홀트가 일에 관
한 이야기로 한창 열을 올리고 있으리라, 싶어 서두루지 않았다.
두 시경에, 본이라는 남자가 조이론이 베리티를 독차지하고 있다고 시비를 거는 바람에 조
이론이 파르르 성질을 냈다. 그녀는 난처해질 수밖에 없었다. 조이론이 본에게 펀치를 한 대
먹이고 기세 등등해 있을 때 문득 베리티의 눈에 미란다가 독특한 표정으로 자기를 바라보
고 있는 것이 들어왔다. 그것은 베리티가 잘 알고 있는, 명안이 떠올랐을 때의 그녀의 표정
이었다.
베리티는 싸움의 소용돌이 속에서 빠져나가 미란다가 아드리안과 같이 서 있는 곳으로 갔
다.
"나한테 뭐 할 이야기라도 있니?"
"응, 그래....잠간 실례, 아드리안." 미란다는 베리티에게 눈을 찡긋해 보이며 말했다. 그녀의
눈은 흥분으로 빛나고 있었고, 아드리안도 그 표정을 아까부터 알고 있는 눈치였다.
"하느님, 도움을 내려 주십시오." 그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두 사람을 남겨놓고 기고만장해
있는 조인론을 진정시키기 위해 갔다.
"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니?" 베리티는 약간 걱정이 되었다. 그 좋지 못한 카지노에 몰려갔
다가 경찰에 붙들린 것도 분명 미란다의 엉뚱한 발상 때문이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럼!" 미란다는 큰소리 치고는 바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렇게...하는 것이
어떻겠니?"
베리티의 생각으로는 그것은 별로 뛰어난 아이디어는 아니었다.
"홀트 제퍼슨에게 마음이 있는 체하라구? 도대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니?"
"너 내말, 믿고 있지 않지?" 미란다는 투덜거렸다. 그러고는 베리티 때문에 시비를 벌이고
있는 두남자며 그들과 이야기하고 있는 아드리안 쪽으로 눈길을 보냈다. "너 저 두 남자를
손안에 넣고 있잖니. 조이론, 아니, 본도 역시 마찬가지겠지만, 네가 부탁하면 바로 물러나
너에게 자리를 양보할 것이 분명하잖아."
베리티는, 저 사람들도 그런 일을 해줄 턱이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또 미란다의 비약이
지나친 아이디어였다. 미란다의 말로, 자기가 요전에 홀트에게 샐리 애스턴과 그에 관해 같
은 소리를 한 것이 생각났다. 그 생각은 바로 떨어버렸다.
어쨌든 홀트는 조이론이나 본하고는 전혀 다른 타이프의 사람이다. 인간의 격이 달랐다. 아
무리 상상력을 동원해 보아도 그를 함락시킬 방도가 생각날 것 같지 않았다. 그래도 베리티
는 그녀으 도움이 되어 주고 싶어하는 미란다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좀더 이 이야기를 계
속했다.
"홀트 제퍼슨에게는 그런 수법이 먹혀 들지 않아. 그는 너무나 거만한 사람인데다가....."
베리티는 그 기품있고 날렵한 몸매의 블론드 아가씨를 잊지 않고 있었다. "난 그가 좋아하
는 타이프가 아닐거야."
"홀트 제퍼슨은 남자가 아니니." 미란다는 고집을 부렸다. "멋있는 남자잖아." 그러고 보니
미란다도 요전에 클럽에서 그를 보았던 것이다. "하여튼 한번 해보라구! 밑져야 본전 아니
니."
그건 사실이었다.
"생각해 보겠어. " 베리티는 대답했으나 그럴 마음은 없었다. 미란다에게 쓸데없는 아이디
어를 잊어버리게 하려고 덧붙였다. "미란다, 우리 한 잔 더 마시지 않겠니?"
5
베리티는 네 시에 새디의 집을 나왔다. 아지도 한 두 사람은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제 집으로 돌아가도 괜찮을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사업상의 이야기로부터 밀려
난 이상, 그 자리에 고개를 들이밀 생각이 없다는 것을 보이며 느지막하게 돌아가는 것이
안전하다 싶었던 것이다.
15분 뒤에 버치우드 하우스의 계단을 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올라갔다. 그러면서 이렇게
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집에 묵는 손님과 일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다.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며 위스키병을 비우기가 일
쑤였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쯤은 두 사람 다 수면제를 여러알 먹은 것보다 더 깊이 잠들어
있을 것이 틀림없다.
언제나의 습관대로, 시간이 너무 늦긴 했지만 네글리제로 갈아입기 전에 샤워를 했다. 그
때 베리티는 또 미란다의 바보같은 제안이 생각났다.
아직 홀트 제퍼슨에게 아무런 시도도 해보지 않았지만, 시원치 못한 이 아이디로 뭔가 될
것 같이는 생가되지 않았다. 홀트는 그녀가 자리를 되찾겠다고 선언한 것을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눈을 깜박거리며 그의 마음을 사로 잡으려고 애쓰는 베리티의 속을 빤히 들여다보고 오히
려 재미있어할 그의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런 일은 베리티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
일이었다. 그건 어쨌든, 만일 그가 샐리에게 결혼을 신청하려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의 마음
을 차지할 기회 따위는 도저히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지금까지보다 더 무거운 기분을 안고 베리티는 침대에 누워 불을 켰다. 그러나 홀트와 샐
리에 대한 생각으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내일 아침 그가 무지무지한 두통에 시달리게 되
면 좋겠는데.
베리티는 오늘 저녁 이 집에서 정중한 대접을 받았을 홀트에 대해 이것저것 생각했다. 몸
은 하루종일 이라도 잘 수 있을 만큼 피곤했지만, 막상 자리에 누우니 하품조차 나오지 않
았다. 그와 아버지는 죽은 듯이 잠들어 있으리라 싶으니 괜히 화가 났다.
불쌍한 미세스 트루먼은 - 그녀를 불쌍하다고 생각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 아침이 되
면 틀림없이 숙취로 잠에 곯아떨어져 있는 두 남자를 흔들어 깨워야겠지. 그러게 생각한
순간 무언가가 머리를 스쳤다.
명안이 떠오르려고 한 것이다!
그 생각은 한동안 안개처럼 희미하더니, 자꾸 좆고 또 쫓아가니 문득 어떤 반짝이는 빛을
느끼게 되었다. 꼭 붙들기 전에 그 아이디어가 도망쳐 버릴까 싶어 그녀는 기를 쓰며 생각
을 정리했다.
손님이 묵은 다음날 아침이면 미세스 트루먼은 차를 들고 가서 손님을 깨우는 게 습관으로
되어 있었다. 홀트 제퍼슨의 마음을 끌어보라는 미란다의 권유와 베리티가 좋지 못한 짓을
저지르면 바로 아버지에게 일러바치는 미세스 트루먼의 버릇을 생각하고 그녀는 한동안
마음을 정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홀트를 비즈니스맨으로 누구보다도 높이 평가하고 있다
는 것ㅇ도 물론 생각 속에 있었다.
베리티는 돌파구를 찾아 더욱 추적해 가다가, 아버지가 홀트는 어떤 일이라도 맡길수 있는
남자라도 한 말이 생각났다. 그래서 그녀는 얼른 불을 켜고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너무나 흥분한 나머지 머리가 혼란해져서 모든 생각들이 제자리를 잡을 때까지는
다시 한번 정신을 집중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베리티는 필사적으로 애를 쓴 끝
에 마침내 생각을 정리할 수가 있었다. 그 순간 그녀의 입가에는 저절로 미소가 떠오랐다.
10분 뒤에 베리티는 지금까지 그녀가 부려온 심술중에서도 가장 난폭한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실행하는 데는 담력이 필요했으나, 그것말고는 어디에도 차질이 없을 것 같
았다.
베리티는 홀트가 어떤 수법이라도 써 보라고 싸움을 걸어 온 것을 잊지 않고 있다. 어차피
담력이 필요할 만한 사태가 벌어질 것이라는 것은 그때 이미 알고 있었던 일이 아닌가.
벽에 부딪친 베리티의 상황에 돌파구를 열어 준 것도 홀트 제퍼슨을 유혹하라고 말한 미란
다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와서야 베리티는 알게 되었다. 그녀가 움직여야 할 사람은
홀트가 아니라 자기 아버지라는 것을!
아버지는 홀트를 일에 관한 한 전적으로 신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아버지
는 그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무엇을 알고 있을까? 홀트가 대단한 바람둥이라는 것은 의심하
지 않을것이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몇 시간 뒤에 미세스 트루먼이 아버지한테 뛰어가면서
일러바친다면 어떻게 될까. 딸과의 약속을 저버리면서까지 지위를 준 남자, 손님으로서 따뜻
한 대접을 다해 준 남자가 다른 곳도 아닌 자기 집 지붕 아래서 순진한 딸을 유혹했다고 하
면 일이 어떻게 될까. 아버지가 그를 해고하지 않는다면 이상할 것이다.
어쩌면 이렇게도 기발한 아이디어가 다 있을까 생각하자 베리티는 흥분이 되었다. 월요일
역원 한 사람이 쫓겨나고 첫 여성 멤버가 들어선다 해도 놀랄 것이 없다.
베리티는 새벽이 되기 전에 침실을 빠져나와 최고급의 객실로 발소리를 죽이고 걸어갔다.
자기의 가슴이 뛰는 소리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베리티는 오랫동안 방문 밖에
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살며시 방문의 손잡이를 돌려 살짝 밀었다. 온몸에
가득 찬 흥분을 가눌 길 없어 베리티는 잠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나 곧, 침대 쪽에서 잠
이 든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리는가를 확인하기 위해 귀에 전신경을 모았다.
아니나다를까, 홀트 제퍼슨은 곤하게 잠들어 있었다. 숨소리로 미루어 미세스 트루먼이 차
를 가지고 올때까지 깰 것 같지는 않았다.
얼마 동안을 그렇게 숨소리를 들으며 거기에 서 있었는지 모른다. 이윽고 그녀는 용기를
내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신은 기도를 하지않는 사람이지요?'라고 한 말, 어떤 수법이라도
써보라고 도전을 받은 일을 생각하니 새삼 용기가 솟았다. 베리티는 소리가 나지 않게 살며
시 안으로 들어가 방문을 닫고 더블베드로 다갔다.
모포에 손을 대는 데는 더욱 용기가 필요했다. 파고들 틈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더욱더, 하
지만 재수좋게 베리티 쪽에 침대가 비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몰아대면서 조금씩 조금씩
모포와 시트 사이로 몸을 밀어 넣었다.
침대한 따뜻함에 홀트 제퍼슨이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강하게 느끼게 되어 베리티는 긴장
으로 몸이 굳어졌다. 그때 갑자기 모포가 움직이고 홀트가 돌아누웠다. 순간, 베리티의 머릿
속에서 비상벨이 큰소리로 울렸다.
베리티는 공포심으로 온몸이 얼어붙는 듯했다. 들키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무서움으로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으면, 침대에서 뛰쳐나가는 본능적인 반응조차 보일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런 마취상태에서 팔다리가 풀렸을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홀트이 한 팔이 그녀의 몸위에
엊혀져 있었던 것이다. '들켜 버렸군.' 하고 베리티는 각오를 했다. 계획보다 너무나 일찍, 게
다가 미세스 트루먼이 아닌 홀트 제퍼슨에게.
그러나 모든 것이 끝장이 난 것은 아니었다. 얇은 네글리제를 통해서 뜨겁게 느껴지는 홀
트의 드러난 팔뚝 밑에서 베리티는 몸이 굳어져 가만히 있었다. 그러나 그 이사은 아무 일
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가 불을 켜서 누구를 붙잡았는지 보려고 하는 기척도 없었다. 방망
이질을 치던 가슴의 고동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에 따라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왔다.
홀트는 아직도 잠들어 있는 것이다!
아직도 성공의 찬스가 남아 있는 행운을 기뻐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기묘하게도 베
리티는 다른 일이 마음에 걸려 기뻐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많이 취했다고 하지만 옆에 여
자가 있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만큼 홀트는 여자와 침대를 같이하는 데 익숙해져
있는 것일까. 그런 생각이 들자 격렬한 분노가 치미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베리티는 홀트를 흔들어 깨워 자기를 샐리 애스턴이 아니라 베리티 다이아몬드라고 밝히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을 참아내면 보답이 얼마나 큰가에 생각이 미쳐 겨우 그
마음을 눌렀다.
드러난 팔뚝으로 미루어 홀트는 파자마을 입지 않고 잠들어 버린 것이 틀림없다. 가지고
오는 것을 잊었는지도 모른다. 다시 말하면, 망칙하게도 나는 벌거벗은 남자의 침재에 들어
와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베리티는 그것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기를 썼다.
다시 미친 듯이 가슴이 두근거렸다. 미세스 트루먼이 들어왔을 때, 모포가 떠들려 있고 홀
트이 드러난 팔뚝이 자기의 몸에 얹혀 있는 장면을 보이는 것이 더 효과적일지도 모른다.
그가 다시 돌아누워 미세스 트루먼이 왔을 때 자기에게 등을 돌리거나, 하지 않으면 좋겠는
데. 이대로의 자세로 있어준다면, 이미 <친밀한 관계>정도가 아니라고 보일 것이다.
홀트의 침대에 누운 후 처음 30분은 영원처럼 길었다. 그러나 그 다음의 30분동안은, 길고
긴 밤 사이 한숨도 눈을 붙이지 않았던 베리티로서는 졸음이 와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
는 눈을 깜박거리며 졸음을 쫓으려고 애썼다.
멀지 않아 미세스 트루먼이 올 것이다. 홀트의 팔은 아직도 그녀의 몸 위에 얹혀져 있다.
순간 미세스 트루먼은 질겁을 하며 뛰어나가 주인한테 고해 바칠 것이 뻔하다.
그러나 일이 그렇게 되어 주지를 않았다. 베리티가 끝내 잠에 빠져들어 버린 것이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잠이 깼으나, 그때는 홀트가 다정스럽게 자기 몸에 팔을 감고 있는 장면을
미세스 트루먼에게 보여주기에는 이미 늦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것이 도리어 잘된 거라고 베리티는 생각했다. 차잔을 엊은 쟁반을 들고 방에 들
어온 미세스 트루먼의 얼굴은 정말 볼만했다.
그녀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베리티를 쳐다보았다. 베리티는 미간을
찌푸리고 되쳐다보았다. 곧 미세스 트루먼은, 홀트의 객실 앞을 지나쳐 버렸는가 싶은지 반
대쪽을 보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받아 보지 못한 큰 쇼크를 받은 모습으로 젊은 여주인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한마디 말도 없이, 그러나 베리틱 잘 알고 있는, 가만두지 않겠다는
표정으로 홱 등을 돌리자 부리나케 방에서 나가 등위로 약간 난폭하게 방문을 닫았다.
아기 적부터 자기를 길러 준 친절한 그녀에게 사실을 고백할 수 있는 것은 몇 달, 아니 몇
년이 지나야 할 것이라 싶으니 마음이 켕기면서도 베리티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이겼다! 나는 이긴 것이다! 승리감에 취하여, 옆에 잠들어 있는 홀트를 힐끗쳐다본 베리티
의 미소는 이죽거리는 웃음으로 바뀌었다. 그녀가 우악스럽게 잡아흔들린 것은 그때였다.
뭐가 뭔지 모른 채 베게 쪽을 돌아본 베리티의 눈은 홀트 제퍼슨의 크게 떠진 잿빛의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녀는 순간 입이 딱 벌어졌고, 그가 얼마 전부터 깨 있었던 것이 아닌
가 하는 무서운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그래도 그녀는 아직도 자랑스런 기분으로 불안한 느
낌을 다소나마 떨쳐낼 수 있었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궁지에 몰렸지만, 그때마다 잘 빠져나
왔으므로.
베리티가 몸을 이르키자 홀트도 여전히 몸에 팔을 감은 채 일어났다. 어떤 사태가 벌어질
것인가를 충분히 알고 있을 텐데도 그는 여전히 자신에 찬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베리티는 그의 그런 태도에 감탄할 마음은 나지 않았다. 단지, 지금의 이 자랑스런 기분을
망칠 짓을 시킬게 뭐냐 싶었다.
홀트는 사정은 납득했으나 너무나 놀라 말을 못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 그렇게 생각하고
베리티는 방긋 웃었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그녀였다.
"아침의 차를 놓치신 것 같군요, 홀트. 아니면, 제퍼슨씨라고 불러도 좋을까요?" 그렇게 말
하면서 그녀는 장애물같은 홀트의 팔을 밀어내려고 했다. 아버지는 모든 사정을 들었겠지.
이젠 이렇게 하고 있을 필요가 없어.
그러나 묘한 일로, 그녀의 몸에 감겨져 있던 팔은 갑자기 쇠붙이처럼 굳어져 치우려 해도
까딱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베리티는 홀트가 매우 침착하게, 천천히 입을 열었을 때가지는
아무 걱정도 하고 있지 않았다.
"그런 것 같군."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진 말에 베리티는 홀트의 팔을 밀어내는 것을 깜박
잊어버리고 말았다. "예고를 받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말이야."
"내가 가로채인 자리를 꼭 되찾을 생각이라고 말했던 것말인가요?" 왜 자기가 홀트의 침대
에 있는가에 대해서 숨길 것은 하나도 없었다.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어차피 그도 알게 될
것이므로.
그러나 홀트가 고개를 저었기 때문에 베리티는 의아스런 생각이 들었다.
불처럼 화를 내야 할 사태인데도 그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어젯밤, 당신의 아버지와 일에 대한 이야기만 나누었던 것은 아니오."
"그럼 무슨 이야기를 했단 말이에요?" 베리티는 의아스런 생각에 승리자의 자랑스런 기분
이 약간 감소되었다.
"내가 역원이 된것을 당신이 재미없게 생각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당신 아버지한테
이야기했지."
베리티는 자기가 화제에 올랐다는 것을 알자 불쾌한 느낌이 들었다.
"당신은 평소에 남의 이야기를 잘하는 사람인가보죠?" 그녀는 싸움을 걸 것처럼 말했다.
홀트는 또 한번 웃었다. 베리티는 그것이 아까의 그 웃음보다 더욱 기분이 나빴다.
"클레멘트는 당신이 멀지 않아 반드시 실망을 딛고 일어서 거라고 말했지. 당신은 뚜렷한
주관을 지닌 당돌한 아가씨라며 자랑스러워했어. 하지만 지금까지 보였던 왈패 노릇으로 화
제가 미치자, 그럴 마음만 먹으면 당신이 무슨 짓을 꾀할지 알수가 없다고 경고도 해주었
지"
아버지가 자기의 자립심을 높이 사주고 있다는 말을 들은 것이 이것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홀트한테 자기의 이야기를 했다니 불쾌했다. 어찌되었든 베리티는 이제 그와 같이 있을 필
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새삼 그의 팔을 밀어내려고 했으나, 그는 놓을 생각이 전혀
없는 듯 여저히 베리티를 잡아누르고 있는 것이었다.
베리티는 적대감을 담은 눈으로 홀트를 노려봤다. 그러나, 남자다운 넓은 가슴이 눈에 들어
오자 당황하여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잠시 후 베리티는, 아버지가 달려들어올 때 여기에 있
어도 좋고 없어도 상관없다 싶어 가만한 눈초리로 홀트를 되쳐다보며 아무렇지도 않은 체하
고 말했다.
"그럼 이제 아셨겠군요. 지금쯤 미세스 트루먼이 아버지께 내가 당신과 같은 침대에 있다
고 이야기하고 있을 거예요. 아버지는 곧 들어올실 거고요. " 아버지가 홀트에게 얼마나 노
발대발할 것인가를 생각하자 통쾌한 마음을 누를 수가 없었다. 그렇게 곤하게 잠들어 있을
일이 아니었어요, 제퍼슨씨." 베리티는 다시 방긋 웃었다. 그녀는 웃을 만한 일이었다.
금방이라도 아버지가 성난 황소처럼 밀고 들어오리라는 것을 아라차린 홀트가 그녀를 침대
에서 밀쳐내는 것도 그녀로서는 웃을 만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홀트는 벨리티 못지않게 오만한 태도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당신의 환상을 깨지 않을 수가 없군, 미스 다이아몬드. 나는 곤하게 잠들어 있기는커녕
어떤 소리에도 잠이 깨는 체질이 되어 놔서 말이오." 베리티는 홀트의 방에 들어왔을 때
아주 작은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고 자신할 수 있다. 그래서 그의 말을 일소에 부치려 했
으나 홀트는 말을 이었다. "참고로 말하면, 나는 수면 시간이 매우 짧아서 두세 시간밖에
자지 않는 때도 자주 있지."
베리티는 홀트의 말을 믿을 생각이 없었다. 그의 규칙적인 잠든 숨소리가 생각나 그의 거
만한 말에 코웃음을 쳤다.
"내가 이방에 들어왔을 때 분면 깨 있었다, 그 말이예요?"
"당신이 들어오는 것이 2분만 늦었던들 나는 불을 켜고 책을 읽고 있었을 거요. 그런 시간
에 일어나 다니면서 집안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기보다는 책을 읽는 것이 낫겠다 생각했었
지." 베리티는 처음으로 확신이 흔들려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런데 당신이 침댈에 파고들
어와 주는 바람에 심심풀이로 책을 읽는 것보다 훨씬 낫게 된 셈이지."
홀트의 말을 믿는다면 자기가 방문을 열었을 때 벌써 그가 알아채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
다. 베ㄹ이는 속으로는 깜짝 놀랐으나 다시 솟아오르는 투지로 불안감을 몰아내고 쌀쌀하게
말했다.
"당신의 말 따위는 믿지 않아요. 다음에는, 침대로 들어온 것이 나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나의 목적도 이미 알고 있었다고 말하겠지요?"
"다른 사람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 홀트는 빈정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내가 돌아누
워 당신의 몸에 팔을 얹었을 때 당신이 다가드는 기척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이런
방문의 영예를 얻게 되었는지 이상하게 생각했지. 그때, 당신은 필요하다면 무슨 수단이라도
서슴지 않는다는 당신 아버지의 경고가 생각난 거요."
"당신, 일.....일부러 나에게 팔을 얹혔던 거군요? 나의 반응을 보기 위해서!" 이처럼 미워하
는 남자에게 자기가 몸을 갖다 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한 일로 해서 베리티는 숨이 막힐
것 같처럼 화가 났다. "당신은 처음 내가....." 베리티는 이야기의 앞뒤를 맞추려고 했다. "당
신은 난 줄 몰랐어요. 샐리 애스턴이라고 생각하고....."
"샐리 애스턴을 팔에 아는 감촉은 당신과는 전혀 다르단 말이오, 베리티 다이아몬드."
홀트의 잿빛 눈이 네글리제만 입은 자신의 몸에 가만히 쏠려 있다는 것을 알자 베리티는
난처해졌다. 생각해 보면 샐리는 예쁠 뿐 아니라 몸매도 날씬했다.
홀트가 베리티를 안아 보고 언제나의 걸프랜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에 그녀는 갑
자기 혐오감을 느꼈다.
"자, 이제 내 몸을 놓아 주시죠!" 베리티는 울컥하여 쏘아붙였다. 자랑스런 기분은 사라져
버리고, 오직 자기 방으로 돌아가고만 싶었다.
"하지만 베리티, 당신은 자기 발로 내 침대에 들어왔단 말이오."
베리티는 순간 말이 딱 막혔으나 어떻게든 따져서 입장을 세우려고 했다.
"이제 날 보내 주는 게 좋을 거예요. 금방이라도 아버지가 오서서....."
"당신은 그걸 바랐던 것이 아닌가?" 홀트는 그렇게 말하며 베리티의 속셈을 처음 몇 분 사
이에 알아챘다는 것을 다시 한번 그녀에게 밝혔다. 그녀를 놓아 줄 마음이 도무지 없는 것
같았다.
베리티는 홀트에게 한방 먹이지 못한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그렇다고 얼마나
큰 쇼크를 받았는지 내색하고 싶지도 않았다. 다리를 침대 가장자리로 옮기면서, 계획은
여전히 잘 진행되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나가기 전에 홀트에게 해줄 말은 딱 한가지였다.
'아버지는 내가 당신에게 안겨 있는 것을 눈으로 보지 않았어도 미세스 트루먼한테 벌써 이
야기를 듣고 알고 있을 거예요.' 베리티는 다시 한번 홀트의 팔을 뿌리치려고 그의 가슴을
밀어 보았으나 떨어지기는커녕 더욱 감겨드는 것이었다.
"안돼요, 장난꾸러기 아가씨." 하고 그는 말하면서 놀랍게도, 아버지가 금방이라도 들어올
지 모르는데 그런 것은 아랑곳없이 나머지 한 팔도 뻗어 그녀를 확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피부의 온기가 직접 느껴지도록 꽉 끌어안아 버렸다.
"놓아요!" 베리티는 패닉 상태가 되어 소리쳤다.
"왜 놓아야 하지?" 홀트는 거센 말투로 비웃었다.
지금까지 얼굴에 있었던 미소는 사라지고 딱딱한 눈초리로 가차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 "내가 당신의 침대 속에 있는 게 아니라 당신이 내 침대 속에 있는데, 도대체 어떻게 내가
당신 아버지의 호의를 배신했다고 믿게 만들 작정이지? 내가 당신을 이리고 끌고와 덮쳤다
고 말하지 않는 한."
"당신한테 강간죄를 덮어씌울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 베리티가 그렇게 소리쳤기 때문에
홀트의 노여움은 조금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녀는 아버지가 오는 것이 왜 이렇게 더딜까
생각하면서 다시 정직하게 말했다. "그것을 알았다면 이렇게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거
기까진 생각을 못했어요."
"하늘도 조금은 인정이 있군." 홀트는 불쑥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가식적인 웃음이 떠올라
있었으나, 굳어진 눈빛으로 그가 아직도 화를 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윽고 그의 시선
은 베리티의 얼굴에서 드러난 어깨로 옮겨 갔고, 천천히 가슴을 더듬었다. "하지만 만일 당
신이 나에게 바람둥이의 낙인을......"
홀트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베리티는 재빨리 몸을 빼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시도는 허
사였다. 홀트는 너무나 재빨랐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베리티의 상반신에 홀트의 묵직한 가
슴이 얹혀 있었다. 그리고 소리를 지를 사이도 없이 그의 두 손이 얼굴을 감싸며, 그녀는 키
스를 받고 있진 않은가!
홀트의 입술이 따뜻하게 움직이자 강한 전류 같은 쇼크가 온몸을 스쳤다. 만일 아버지가
여기에 들어와 자기 딸이 홀트 제퍼슨과 다투고 있는 장면을 본다면 그녀의 계획은 보기
좋게 들어맞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격해 있는 바람에 미처 그런 냉정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정신없이 버둥거릴 뿐이었다.
베리티는 미친 듯이 홀트의 단단한 팔뚝을 주먹으로 두들겼으나 아무 효과도 없었다. 그는
키스를 계속하고 있었다. 입술 뿐 아니라 베리티의 온 얼굴에 홀트의 입술이 와 닿았다. 그
밀어내려고 했으나 귓가에 그의 입김이 느껴졌다.
"상대해 줄 거요?" 베리티가 거세게 몸부림을 치자 홀트가 놀리듯이 물었다.
"세상없어도 그런 짓은 하지 않아요!" 그의 입술이 또다시 다가오자 베리티는 갈라진 목소
리로 말했다.
베리티는 다시 헛되이 홀트의 팔을 두들겼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것은 팔이 아니라 그의
벌거벗은 등이었다. 어느새 그의 강이한 팔은 그녀의 등뒤로 돌아가 있었다.
"당신은 상대하기가 좋을 거라고 생각했지." 하고 홀트는 중얼거리고 또다시 키스를 했다.
"놓아요, 놓으라구요!" 베리티는 얼굴이 빨개지도록 화를 내면서 버둥거리며 그를 밀어내려
고 기를 썼다.
"왜 놓아야 한단 말이지? " 홀트는 되받았다. 그 말투는 기묘하게 달라졌으며, 그리고 베리
티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정말 예쁘군."하고 그는 속삭였다.
지금까지와는 딴판으로 달라진 홀트의 따뜻한 태도에 베리티는 멍해졌다.
그녀의 몸은 아직도 굳어 있었으나, 그는 다시 따뜻함이 담긴 키스를 시작했다. 홀트가 쓰
다듬듯이 그녀의 어깨에 가만히 손을 대었을 때, 베리티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렇게 거세
기만 하던 남자가 이렇게 갑자기 달라질수 있다니!
말다툼이었다면 그녀는 끝까지 싸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홀트의 입술이 또다시 거의 느
낄 수 없을 정도로 살며시 베리티의 입술에 와 닿자, 한번도 꺾여 본 일이 없는 그녀의 투
지가 지금까지 전혀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에 슬며시 밀려났다. 베리티는 모든 긴장을 풀고
기쁩의 숨을 들이마셨다.
홀트는 키스와 애무를 언제까지나 계속하고 있었는데, 베리티는 시간 감각을 완전히 잊어
버리고 있었다. 베리티가 알고 있는 것은 자기가 몸으로나 마음으로나 홀트를 바라고 있다
는 것 뿐이었다. 그러나 그때, 난생 처음으로 느끼는 격렬한 욕망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녀는
무슨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홀트도 그것을 알았는지 갑자기 몸의 움직임을 멈췄다. 두 사람이 들은 것은 방문이 닫히
는 소리였다.
베리티는 몸이 움츠러들어 관능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분명하게 의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지금까지의 계획과는 정반대로 자기가 이제는 아버지가 들어오
기를 전혀 바라지 않는다는 것뿐이었다.
그녀는 긴장이 되어 방문의 손잡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발소리가 다가오더니
방문 앞을 지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녀는 숨을 죽이고 그것을 듣고 있다가는 휴우 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너무나 여러 가지 감정을 한꺼번에 맛본 베리티는, 홀트가 몸을 떼었을 때, 다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거의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방문에서 홀트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그런데, 당연히 느꼈어야할 안도감이나 욕망의 빛이 그의 얼굴에는 전혀 떠올라 있지 않은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다구나 어이없는 것은, 그저 빈정거리며 재미있어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었다.
베리티의 자존심이 맹렬한 기세로 되살아난 것은 그때였다. 홀트의 애무에 잠시 멍해 있었
던 그녀의 투지가 노도처럼 치밀어 올랐다. 냉정하게 조소를 띠고 방금 일어난 일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얼굴을 하고 있는 그에 대한 격심한 노여움과 함께 자존심이 되살아 났
다.
베리티의 손이 공기를 가르고 홀트의 볼에서 소리가 울리자 그녀는 조그만 만족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뒤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무엇을 했다는 거지?" 방문을 향해 급히 가는 베리티의 등뒤에서 놀리는 것 같은 질
문이 쫓아왔다.
베리티는 방문 바로 앞에서 돌아서서 침대의 헤드보드에 무관심한 얼굴로 몸을 기대고 있
는 남자를 증오가 담긴 눈으로 노려보고는 쏘아붙였다.
"방금 그것은, 내가 싫어하지 않았다면 당신이 했을 일에 대한 보복이예요."
비웃는 듯한 웃음이 방문을 통해서 베리티에게 들려왔다. 그것은, 그녀가 싫어했다는 따위
는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것을 홀트가 환히 알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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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리티는 분노 속에 자기 방으로 돌아와 샤워를 뒤집어썼다. 홀트에 대한 증오심을 불태우
면서 샤워 밑에서 있는 동안 그녀의 타고난 솔직성이 차츰 되살아났다. 아무리 더운 물로
몸을 씻어내도 홀트의 품에 안겨 있을 때 그녀를 사로잡았던 그 격렬한 정열의 기억은 씻어
낼 수가 없었다.
이제 그의 건장한 품에서 벗어나고 보니, 자기가 알고 있는 자신하고는 전혀 딴사람처럼
굴었던 일이 꿈만 같았다. 그토록 미워하던 남자에게 1초의 몇분의 1이라 할지라도 기꺼이
응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베리티는 자기의 몸에 닿았던 홀트의 손의 감촉과 그것이 불러
일으킨 욕망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에 의해서 베리티가 맛보았던
감정을 그가 환히 들여다보고 있었다는 지독한 굴욕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당황하여
머리를 딴데로 돌려 좀더 절박한 문제에 생각을 모으려고 했다.
미세스 트루먼이 오늘 아침 객실에서 본 일을 아직 아버지한테 이야기하지 않은 것이 분명
하다. 왜일까? 미세스 트루먼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을까? 그렇다! 아마 자기 딸이 믿었던
동료와 침대 속에 같이 있는 것을 보는 고통을 주인에게 주지 않으려고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일이 다 망쳐져 버린 것은 아니라고 베리티는 얼른 생각했다. 아침식사가 끝
나기가 무섭게 미세스 트루먼은 아버지에게 단둘이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할 것이 틀림없
다. 홀트 제퍼슨이 밀려나게 되는 순간을 꼭 보고 싶다. 미세스 트루먼이 아버지에게 이야
기가 있다고 말할 때 꼭 그 자리에 같이 있고 싶다고 생각하며 베리티는 서둘러 옷을 입고
머리를 빗었다.
급히 아래층으로 내려가다가 그녀는 문득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아버지가 사정을 물으면,
자기 침대는 싱글이기 때문에 홀트가 객실의 침대로 꾀었다고 거짓말을 하지 ㅇ으면 안된
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베리티의 눈에는 다시 투지가 가득 찼다. 그 자리는 그녀에게 약속
되어 있었던 것이다 ― 그것만으로도 거짓말은 정당화될 수 있다.
베리티는 아버지가 이미 식당에 나와 있는 줄 알고 서슴없이 들어서다가 우뚝 그 자리에
멈춰서고 말았다. 그녀는 홀트와 얼굴이 마주치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던 것이다. 아버지는
보이지 않고 홀트가 혼자 거기에 있는 것을 보자 아까 그 기억이 되살아나 얼굴이 확 붉어
졌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등을 도려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을 본 홀트가 비아냥
거리는 듯한 웃음을 떠올리는 것을 보자 그에 대한 증오심이 한꺼번에 타올랐다.
"아직 별로 배가 고프지 않은가?" 홀트는 중얼거림으로 그녀의 발걸음을 멈추게 만들었다.
베리티가 뭐라고 되받으려고 하는데 아버지가 뒤에서 모습을 나타냈다. 그녀는 앞으로 나
아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언제나의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아버지가 홀트에게 전화를 받느라 자리를 비운 것
을 사과하는 동안 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 아버지와 한마디로 주고받지 않은
베리티는 여기에서 어떤 태도로 나갈 것인가를, 순진한 딸이 상처를 받았다는 얼굴을 할 것
인가 어쩔 것인가를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너는 잠을 못 잔 것 같구나. " 아버지의 관찰은 이따가 미세스 트루먼한테 듣게 될 이야
기와 잘 맞아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런 뒤에 아버지가 입에 올린 가벼운 농담으로 베리
티는 울컥해졌다. "어젯밤엔 늦게라도 돌아왔겠지?"
아버지가 홀트 제퍼슨 앞에서 마치 그녀가 함부로 외박을 하는 것같이 말했기 때문에 베
리티는 화가 나서 아버지를 흘겨보았다. 이제는 아버지도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베리티
의 또래 중에는 누구하나 침대를 같이하고 싶은 남자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방금 아버지
가 한 말과 오늘 아침의 그 일로 해서 홀트는 그녀가 어떤 남자에게도 서슴없이 응하고 있
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 아닌가.
기분이 안 좋은 것은 베리티뿐이 아니었다. 마침 그때 방문이 열리고 험악한 얼굴을 한 미
세스 트루먼이 들어왔다. 그녀는 커피를 난폭하게 내려놓고는 언제나처럼 베리티에게 무엇
을 먹겠느냐고 묻지도 않고 그녀 앞에 토스를 던지듯이 놓자 한마디도 말도 없이 문을 쾅
닫고 나가 버렸다. 클레멘트는 깜짝 놀라 딸에게 물었다.
"트루먼 부인이 도대체 왜 저러지?"
베리티는 모른체 어깨를 추썩였다.
"저도 모르겠어요."
"딱한 일이군." 아버지는 홀트에게 가정부의 버릇없는 행동을 사과하는 표정을 보이며 중
얼거렸다. "이따가 왜 그러는지 물어 봐야겠구나."
그 말에 베리티는 반가운 눈길을 흘끔 홀트에게 향했다. 이 남자는 벌써 역원회의 의자에
서 쫓겨나고 있는 거야.
"저도 떠나기 저에 이야기 할 시간을 좀 얻을 수있겠습니까/"
"물론 좋습니다." 클레멘트는 기분좋게 대답했다.
"언제든지 서재로 갑시다."
베리티의 기쁨은 금방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식사를 끝내자 베리티가 그들의 비밀
이야기를 방해할 핑계를 생각하기도 전에 두 사람은 일어섰다. 어떻게 해야지 하고 애을 태
우는 동안 홀트는, "그럼 이만 실례합니다, 미스 다이아몬드."라고 말하고는 아버지를 따라
나가 버렸다.
물론 어젯밤 잊어버리고 못한 일 관계의 이야기일수도 있다. 그러나 베리티는 그렇지 않다
는 것을 충분히 눈치채면서도 손을 쓸 길이 없어 발만 구르고 있을 뿐이었다.
베리티가 허공을 노려본 채 가만히 앉아 있는 동안 몇 분 지났다. 지금까지보다 더욱더 홀
트 제퍼슨이 미워졌다. 선수를 가로채인 것은 이것이 두 번째였다.
자기는 역원회의 의자와는 영 인연이 없는가 싶으니 화가 났다. 금방이라도 아버지가 들어
와 벼락을 떨어뜨리겠지.
베리티는 아버지를 식당까지 찾아오게 할 것 없다 싶어 뿌루퉁한 얼굴로 일어서서 서재로
가볼까 생각했다. 아버지와 홀트와의 이야기는 예상보다 시간을 많이 끌었다. 홀트 앞에서는
화를 참고 있겠지만 나를 보면 야단을 치시겠지. 다달이 주는 용돈을 끊겠다고 지금까지 몇
번이나 되풀이했던 으름장을 이번에야말로 실행헤 옮기실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25세가
되면 어머니의 유산에서 매달 일정한 금액의 돈이 나오기로 되어 있긴 하지만, 그때까지는
아버지는 1페니도 거기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하겠지.
자기가 형편없이 초라한 입장에 있는 줄은 알면서도 ― 미세스 트루먼조차도 그녀의 편이
되어 주지 않을 것이다.―베리티는 고집스럽게 자기가 저지른 짓을 후회하려 하지 않았다.
그때 서재의 문이 조용히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놀랍게도 아버지가 큰소리를 치며 들이닥치는 대신 홀트 제퍼슨이 조용하가게 들어온 것
이다.
그는 그녀를 궁지에 몰아넣어 다이아몬드 경공업의 역원 자리에 앉겠다는 그녀의 마직막
희망의 줄을 끊어 버린 것을 보여주며 큰기침을 하기 위해 온 것이겠지. 하지만 그런 일을
하게 내버려두지 않겠다고 베리티는 생각했다.
"아버지한테 모두 이야기해 버렸죠?" 그녀는 불쾌한 듯이 말했다.
"아버지가 가정부한테서 듣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거요?" 홀트는 뻣뻣이 선 채 물었
다.
"이야기했단 말인가요?" 베리티는 씁쓸하게 말했다. 홀트가 미세스 트루먼을 앞질러 아버
지한테 이야기를 한데는 무언가 속셈이 있을 것이다.
"도두 다 털어놓은 건 아니오." 홀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베리티는, 그렇다면 아직 계획
을 밀고 나갈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희망도 홀트의 눈에 놀리는 것 같은
빛이 되돌아온 것을 보자 사라져 버렸다. "예를 들면, 당신이 얼마나 정열적인가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소."
"고마운 노릇인군요.!" 베리티의 볼이 핑크빛으로 물들었다.
"물론 아버지는 당신의 정열적인 성격에 대해서는 알고 계실 줄 알지만...." 그러더니 홀트
는 갑자기 생각이 난 것처럼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가 당신을 만나겠다고 하셨소."
"아버지는 날 묶어 놓을 생각은 벌써 포기하셨어요." 베리티는 의자를 뒤로 밀어내면서 기
죽지 않고 말했다. 잔소리를 들어러 가야 한다는 것을 홀트의 입으로 전해 듣는 굴욕감이
자존심을 상하게 했지만.
베리티는 식당을 나와 서재 앞에 멈추어 서자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방문을 열고 들어갔
다.
다짜고짜 야단을 맞겠지 싶었는데, 놀랍게도 아버지는 가만히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아
버지가 돌아보았을 때, 그 얼굴에는 노여움의 빛은 없었다.
"아, 베리티냐. 거기 앉아라." 아버지는 조용하게 말했다.
베리티가 좋지 못한 일을 저질렀을 때 아버지가 이렇게 조용했던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베리티는 어리둥절했다. 더구나 이번 일로 아버지가 자기한테 책이라도 내던지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베리티는 마음을 놓으며 벽난로 앞의 의자에 앉았다. 왜 아버지는 벼락
치듯 성을 내지 않는 것일까.
베리티가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는 동안 아버지는 신중하게 말을 선택하는 모습으로 그녀
가 앉은 의자 뒤로 돌아갔다. 몇 초간의 침묵이 있은 뒤에 아버지는 입을 열었다.
"나는 너희들 세대같이 새로운 생각을 가지려고 애를 많이 쓰고 있다."
베리티는 그 말로, 아버지는 이번 일을 입에 올리기가 난처해서 야단을 치지 못하고 있다
는 것을 알았다. 베리티는 뒤를 돌아보려고 하다가 그만두었다. 뒤에서 말을 해주는 것이
얼굴을 마주 대하지 않게 되어 아버지도 난처함이 덜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클레멘트가 그럭저럭 적당한 말을 찾아냈을 때, 베리티는 여전히 벽난로를 바라보고 있었
다.
"너에게 실망하지 않았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아버지는 슬픈 듯이 말했다. 만일 아버지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면 베리티는 반항하여 말대답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로
서는 아버지의 슬픈 목소리는 채찍으로 맞는 것보다 더 무서웠다.
그런데 아버지의 그다음 말로 베리티는 입이 딱 벌어지고 슬픈 마음이 깨끗이 사라지고 말
았다. 아버지는 무겁게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물론 홀트는 나쁜 것은 자기라고 말했지만...."
"나쁜 것은 자기라고요!" 베리티는 너무나 놀라 몸을 들면서 의자에서 거의 튀기듯이 일어
나 큰소리로 외쳤다.
"그래, 그는 그렇게 말했다."
베리티는 다시금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홀트로서는 그녀에게 보복할 절호의
찬스가 아닌가. 유혹하지도 않았는데 새벽녘네 그녀 스스로 자기 침대에 파고든 것에 대해
서 자기에게 책임이 있다고 말하다니! 정말 어이없는 일이다.
"왜......그런 말을 했을까요?" 그녀는 의아해 하면서 물었다.
"왜냐하면,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은 어쨌든 홀트가 훌륭한 남자기 때문이다." 베리티는 홀트
의 좋은 점이 재확인되어 버린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다시 조용하게 말
했다. "둘 다 정말 이성을 잃고 있었다고 그는 말했다. "
그 말에 베리티는 흠칫했으나 벽난로를 쳐다본 채 가만히 있었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홀트가 따뜻하게 애무를 시작했을 때, 그녀는
분명 자제심을 잃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방문앞을 지나갔을 때의 냉정
하고 빈정거리는, 더구나 재미있어하고 있었던 홀트의 표정을 생각하자, 그가 완전히 평상시
의 마음이었던 것도 의심할 길이 없었다.
베리티는 하마터면 아버지에게 사실을 털어놓아 자기를 이해해 주기를 청할 뻔했다. 그러
나 아버지의 다음 말이 앞지르는 바람에 그럴 겨를이 없었다.
"명예를 존중하는 남자로서 당연한 일이지만...."
하고 클레멘트는 잠시 멈칫거렸다. 베리티는 어떤 말이 이어질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홀
트는 너와 결혼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결혼이라니요!" 베리티는 오싹 소름이 끼쳐 비명을 지르고 눈에 공포의 빛을 띠고 아버지
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클레멘트는 너무나 낙심해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공포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가
만히 창밖만 바라볼 뿐이었다.
이윽고 아버지는 마음을 가다듬으려고 애쓰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홀트에게 끌리는 마음을 눌러 주었던들.......파티에서 돌아왔을 때 그와 쓸데없는 말
을 나누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하지만...." 홀트가 아버지에게 뭐라고 이야기했는지는 모르나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하려고 했다. 홀트에게 내가 끌리다니, 이런 당치 안은 말이 어디 있어!
베리티가 모든 것을 말하기를 망설이고 있는 동안 아버지가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홀트 같은 고결한 남자라도......충동에 몰리면 감정을 누르지 못하는 수도 있겠지."
큰기침을 하고 다리를 움직거리면서 아직도 난처해하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
다. 베리티는 아버지를 더 이상 난처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순
간 그녀는 문득 깨달았다. 홀트는 침대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냉정하게 있었는데, 아
버지로하여금 사실 이상의 일이 있었던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었다. 왜 그랬을까? 이유를 알
수가 없어서 베리티는 당황했다. 홀트는 아버지에게 두 사람이 정말로 애인 관계에 있다고
믿게 한 것인다.
"아빠는......." 베리티는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아빠는 완전히 오해를 하고 있다고 말하려
했던 것인다. 그러나 아버지가 한 말 중에서 그녀 자신에 대한 일은 거의 정확하다 싶으니
마음이 케겨 도저히 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대신 될 수록 야무진 목소리로 말했다.
"전......홀트하고는 결혼하지 않겠어요."
베리티와 결혼하겠다는 홀트의 제의가 클레멘트의 낙담을 다소나마 덜어 줄 수 있었는데,
그녀의 말로 그는 다시금 실망에 빠지고 말았다. 아버지는 한숨을 쉬고 낮은 목소리로 이렇
게 말하여 베리티를 더욱 혼란하게 만들었다.
"난 누구보다도 너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네가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와 침
대를 같이한 데는 너의 자제심보다 강한 어떤 감정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것은 너도 부정
하지 않겠지?"
베리티의 볼이 핑크빛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 솔직한 그녀는, 홀트의 방
으로 향하고 있을 때 자기가 분노와 증오로 이성을 잃고 있었던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
었다.
"네, 그것은 인정해요." 하고 그녀는 정직하게 대답했다.
클레멘트는 베리티가 솔직하게 인정하자 미소를 띠었다. 그러나 그뒤를 잇는 말이 또다시
그녀를 흠칫하게 만들었다.
"사랑한다는 것이 매우 개인적인 감정이라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다. 그러나......"
사랑한다니! 농담아니예요 !
"전 사랑 따위는........"
"사랑에 대해서만은 연극을 하지 말아라." 아버지는 얼른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 "그럴 필
요가 없다. 홀트는 네가 자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으니까."
홀트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나는 그에게 확실하게 말해 주었는데, 하고 베리티는 생각
했다.
아버지는 다시 말을 이었다.
"나도 알고 있다. 한눈에 반했다, 그거지?"
베리티는 너무나 큰 쇼크에 말을 할 수가 없어서 그저 거세게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겨우
입을 열 수 있게 되자 그녀는 기를 쓰고 부정했다.
"홀트를 사랑하다니요! 전 그를........"
"넌 언제나의 쓸데없는 고집을 또 부리는구나. 난 다 알고 있단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베
리티가 서재에 들어온 뒤로 처음으로 엄격해졌다. 아버지는 굳은 표정으로 날카롭게 말했다.
"네가 어떤 행위의 상대로서 흡족하다고 생각하는 남자가 여기에 있다. 미세스 트루먼이
오늘 아침에 목격한 명예롭지 못한 상황에서 너를 빠져나오게 해주려고 하는 남자다. 그런
데도 너는 아직 투덜거리고 있다."
"아빠는 마치 제가 홀트와 결혼하기를 발라고 있다는 듯이 말씀하시는군요." 홀트 따위는
결혼 상대로 안중에도 없다는 것을 아버지가 전연 알아주려고 하지 않아 베리티는 속이 탔
다. "아버지는 왜 그러시는 거죠?" 제가 엉뚱한 행동을 하면 미세스 트루먼이 성난 얼굴을
하는 것이 무섭기 때문인가요?"
"미세스 트루먼이 놀란것도 당연하다. 인생 최대의 쇼크였던 것이 틀림없으니 말이다."
베리티는 홀트 제퍼슨에게 뜨거운 키를 받은 뒤의 쇼크에 이은 쇼크로부터 겨우 벗어나
이제야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홀트는 아빠의 어떤 약점을 잡고 있지요?" 하고 그녀는 물었다. 이번에는 아버지가 놀랄
차례다. 역시 홀트가 무슨 책략을 써서 내 의자를 빼앗는 것이다. "그 남자는 아빠를 협박하
고 있는 거예요?"
"협박?" 아버지가 뭐라고 말할 수 없이 깜짝 놀라는 얼굴을 했기 때문에 자신의 추측이 틀
렸다는 것을 그녀는 알았다.
"그렇지 않더라도 틀림없이 무슨 고약한 일이 있었을 거예요." 베리티는 문득 아버지에 대
한 따뜻한 마음이 솟아나 홀트와의 결혼에 대한 공포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부
드럽게 말했다. "아빠, 이갸기해 주세요."
"이야기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버지는 베리티도 잘 알고 있는, 그녀 못지 않은 고집으로
대답했다.
"난 그런 말 믿지 않아요." 일단 시작한 이상은 반드시 진상을 캐낼 결심이었다. "아빠가
홀트 제퍼슨을 믿을 수 있는 남자라고 제게 믿게 만들려고 하시는 것처럼 저는 아빠를 믿을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해 왔어요. 그런데 아빠는 18세 때 저와 했던 진지한 약속을 깨셨어
요. 제가 회사에 들어가기를 얼마나 바라고 있는지 잘 알고 계시면서."
"난 … " 하고 아버지는 말을 꺼냈고, 베리티는 숨을 삼켰다. 그 뒤의 말을 듣고 싶었다.
아버지가 처음 안 좋은 소식을 그녀에게 전해 준 그날 저녁, 두 사람은 언성은 높여 말다툼
을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둘 다 냉정하다. 한동안이 지나자 클레멘트는 마침내 이야기를 시
작했다. "난… 너와 약속을 깨지 않을 수가 없었단다.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달리 어
쩔 수가 없었던 거야."
약속을 깨고 싶지 않았다는 아버지의 말에 베리티는 반가웠고 마음이 다소 풀렸다. 아버
지에 대한 애정이 커지고, 소중한 아빠에게 압력을 가하고 있을 것이 틀림없는 홀트에 대한
적대감이 솟아올랐다.
"아빠가 약속을 깨도록 하기 위해서 그 남자는 어떤 더러운 수법을…."
"더러운 수법?" 클레멘트는 그 말에 정말 놀란 얼굴이었다. "그런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는 야무지게 잘라 말했다. 그리고 베리티가 거기에 있는 것조차 잊어버린 것처럼 중얼거
림으로써 그녀를 아연하게 만들었다. "홀트가 아니었다면 다이아몬드 경공업은 쓰러질 뻔했
다."
"쓰러지다니요!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예요?"
베리티는 목이 콱 막혀 겨우 물었다.
그녀가 너무나 큰 쇼크를 받은 것을 보고 아버지는 문득 정신을 차려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를 깨달은 것 같았다.
"너에게…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
"왜죠?"그녀는 방금 들은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베리티를 놀라게 할 일은 또 있었다. 아버지가 결심을 하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첫째 이유는 자존심 때문이었다. 내 자존심이기도 하고 네 자존심이기도 하지. 너는 줄곧
내가 해온 일을 자랑으로 알고 있었고 나는 내 자존심 때문에, 몸이 가루가 되도록 일하여
세운 회사가 도산할 지경이라는 것을 차마 너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던 거다."
도산이라니! 베리티는 너무나 놀라 말도 못하고 멍하니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체 못할 만큼 많은 주문이 들어오고 있다고 하셨
잖아요?"
"주문은 들어온다." 베리티가 사정을 납득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아버지는 말을 이었다.
"그러나, 너도 아마 알고 있겠지만 대개의 회사은 은행의 빚으로 운영 되고 있다."
"그건 알고 있어요."
"네가 모르고 있는 것은 주문을 대량으로 받기 위해서 내가 위험을 무릅쓰고 새로운 기계
에 막대한 투자를 하지 않으면 안 됐었다는 것이다. 그랬는데 은행이 더 이상의 대출은 해
줄수 없다고 말해 오자 벽에 부딪치고 만 것란다."
"한데 무엇 때문에 꼭 더 대출을 받을 필요가 있었지요?"
"재료 때문이었지." 아버지는 간단하게 말했다. "경쟁회사에 지지않을 만큼 새로운 기계
설비는 모두 갖추어 놓고 나니 제품을 만들 재료를 사들일 자금이 떨어진 거지."
"돈이라면 제게도 조금은 이잖아요." 베리티는 모든 것을 아버지에게 주고 싶은 마음으로
얼른 말했다.
"아빠는 제 재산을 관리하시는 분이잖아요? 제가 스물 다섯 살이 될 때까지 기다리시지
않아도…."
"그런 게 아니란다." 아버지는 부드럽게 말했다. "그 적자는 엄마가 너에게 남겨 준 돈으
로 메울 수 있는 정도가 아니란다. "
베리티는 입을 다물었다. 어머니가 남겨 준 돈이 도움이 못 될 만큼 엄청난 적자라면 아버
지는 그만한 돈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자기의 뒤를 밀어줄 사람을 찾아다녔을 것이 틀림
없다.
"홀트 제퍼슨은 그렇게 돈이 많은 사림이에요?" 베리키는 물었다. 그가 그녀와 결혼하겠
다고 한 말 따위는 안중에 없었다.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마침 좋은 투자거리를 찾고 있었던 것이 나의 행운이었다. 당연한 일로 그가 그토
록 엄청난 액수를 투자해 놓고도 경영에 끼여들지 않으리라는 것은 기대 할 수도 없지 않
니?"
"홀트가 중역 자리를 요구한 건가요?" 이 일이 화제가 된 이래 베리티가 냉정해질 수 있
었던 것은 이번에 처음이었다.
"내가 그에게 취임하도록 제의한 거란다. 베리티. 다이아몬드 경공업은 많은 사람을 고용
하고 있다. 난 너만을 생각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 말로 베리티는 겨우 납득이 갔다. 지금까지는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해주던 아버지가
무엇 때문에 그녀가 무엇보다도 바라던 것을 빼앗아 버렸는지 이제야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녀는 그동안 긴장의 빛이 아버지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것이 생각났다. 아버직 걱정으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을 때, 자기는 아무것도 모르고 나돌아다니고만 있었던 것이 쓰라린 후
회가 되었다.
자기가 태평스럽게 놀고 있는 동안 아버지는 회사뿐 아니라 회사에 고용되고 있는 사람들
의 생활을 지켜 주기 위해서 며칠이고 잠 못이루는 밤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
렇게 생각하니 베리티는 갑자기 목에 뜨거운 것이 치밀어 반항적인 기분은 흔적도 없이 사
라져 버렸다.
"좀더 일찍 말씀해 주시기 그랬어요?" 왕 하고 울음을 터뜨리지 않고 할 수 있는 말은 겨
우 그 정도였다.
아버지가 그녀에게 중역의 자리를 줄 수 없다고 말한 뒤에 아버지에게 얼마나 쌀쌀하게
굴어 왔는가를 반성해 본들 이제 무슨 소용이 있으랴. 아버지가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장난
기를 보였기 때문에 베리티는 더욱 슬퍼졌다.
" 나도 자존심이 걸린 일에 대해서는 너보다 더 완강할 수 있단 말이다."
베리티는 겨우 눈물을 참았다. 야단을 맞을 각오로 서재에 들어올 때의 그녀와, 맥이 풀려
생각에 잠겨서 나올때의 그녀는 전혀 딴사람이었다.
베리티는 기계적으로 계단을 올라가 자기 방으로 갔다. 침대가 눈에 들어온 순간 몸이 가
눌수 없었다. 그렇다고 머리가 꽝꽝 울려 도저히 잠들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베리티는 곧 옷장에서 자케트를 꺼내 입고 습관적으로 숄더백을 집어들자 계단을 내려갔
다.
계단 아래까지 왔을 때, 어디선지 모르게 키가 큰 홀트 제퍼슨이 나타나 그녀의 앞을 가로
막아 섰다. 베리티는 말을 멈추고 그를 쳐다보았다.
"사랑에 괴로워하는 조이론 로비를 위해서 나를 버리는 건가?"
베리티는 너무나 의기 소침해져 있었기 때문에 홀트가 비아냥거리며 놀려도 언제나의 공
격의 불꽃을 튀기지 않았다. 베리티는 고개를 젓고 조용하고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산책을 가는 거예요."
홀트가 가만히 자기를 관찰하는 것을 느끼고 베리티ㅌ 고개를 숙였다. 그가 길을 비켜 주
지 않았기 때문에 더 놀릴 마음인 모양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나 홀트의 진지하고 조용한 목소리를 듣고는 깜짝 놀랐다.
"동행이 필요하지 않은가?"
베리티는 고개를 저었다. 홀트의 따뜻한 목소리에 또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그러나 홀
트가 숨을 한번 들이마신 뒤에 더 이상 아무말 않고 옆으로 비켜섰기 때문에 그녀는 최소한
체면을 세울 수 있었다. 베리티는 고맙다고도 하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현관을 빠져나갔다.
7
그로부터 30분이 지난 뒤, 로워 파세트 주변의 시골길을 터덜터덜 거닐고 있는 베리티의
머리는 집을 나 올 때 그대로의 혼란상태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말을 머릿속에 되풀이해 되뇌고 있는 동안, 약속이 깨진 이유를 알게 된
쇼크는 차츰 가라앉았다. 그 대신 아버지한테 들은 또다른 이야기가 머리에 떠올라 처음으
로 마음에 걸렸다.
그 계략을 생각해 냈을 때와 달리 지금은 낮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아버지한테 들은 심각
한 이야기로 그녀의 상식이 눈을 떴기 때문인지는 잘 모른다. 하여튼 눈부시다고 생각했던
그 아이디어가 이제 와서는 너무나 엉뚱한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었다.
베리티는 홀트의 애무를 받으면서 이성르 잃어버렸던 기억을 머리에서 몰아내려고 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일이 너무나 많았다. 무엇때문인지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모퉁이를 돌아 다른 오솔길로 접어 들었을때는 홀트의 결혼 신청은 진심이 아니라고 생각
되었다. 그러나 그 길 끝이 가까워질 무렵에는, 홀트의 성실성을 아버지가 얼마나 평가하고
있는가가 생각났다. 아버지가 그토록 신뢰하고 있는데, 그 사람은 과연 거짓 결혼 신청을 할
수 있을까?
베리티는 또, 홀트가 아버지를 걱정하며 집에서 마음놓고 쉴수 있도록 해드려야 한다고 말
했을 때의 일이 생각났다. 홀트는 아버지가 매우 긴장해 있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찾
아온 것이었다.
그는 내가 저지른 지독한 일을 모두 아버지한테 고해 바치지는 않았다는 것도 생가했다.
파티장에서 돌아온 베리티와 자기는 서로의 감정을 누를 수가 없어 같이 자기의 침실에
갔노라고 그는 말했던 것이다. 그것은, 진실을 가려 아버지에게 걱정거리를 더하게 하지않기
위해서였던 것이 분명하다.
"아아, 이럴 수가!" 베리티는 머리가 혼란해져 괴로움에 찬 소리를 질렀다.
홀트에 대한 생각과 아버지에 대한 생각을 번갈아 하는 동안, 베리티의 생각은 점점 더 수
렁으로 빠져들었다.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아버지는 자기와 홀트의 결혼을 바라는데 아
버지에게 차마 홀트와 결혼하지 않겠다고 말할 수가 없으며, 또 자기가 먼저 아버지의 손님
의 방으로 찾아갔다고 고백함으로써 아버지의 자존심을 엉망으로 만들수는 도저히 없다는
것이었다.
베리티는 사태를 좀더 잘 알게 되기까지는 무턱대고 아버지한테 사실을 고백하여 자기의
마음이나 가볍게 만들려고 들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시계를 보니 벌써 몇 시간이나
이렇게 쏘다니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버지에게 새로운 걱정을 끼치지 말자는 것밖에는 아무
결론도 얻지 못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 홀트가 결혼 신청한 이유를 정확하게 알기까지
는 아무것도 분명히 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베리티는 마지못해 발길을 집으로 향했다. 만일 홀트가 진심이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할 것
인지는 아직 알수가 없다. 그러나 지금은 자기가 아니라 아버지를 지켜 드려야 한다.
"돌아왔어요., 트루먼." 그녀는 뒷문으로 해서 주방으로 돌아가면서 미세스 트루먼의 차가
운 태도를 누그러뜨리려고 애써 미소를 지었다.
미세스 트루먼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제퍼슨씨가 어디 있는지 몰라요?" 하고 베리티는 물었다. 문득 그는 벌써 돌아가 버렸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당황하여 또 물었다. "아직도 우리 집에 있나요?"
"제일 좋은 객실에 가서 보면 알 것 아니예요" 미세스 트루먼은 딱딱한 목소리로 대답했
다.
베리티는 홀트를 찾아 이층으로 올라가면서,아버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마음이 놓였다.
그녀의 생각으로는 먼저 홀트를 만나 결혼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아버지에게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지는 그다음의 일이었다.
노크도 없이 베리티가 방안으로 들어가자 홀트는 흘끗 쳐다보았다. 그녀는 혀가 굳어져 무
슨 말을 먼저 해야할지 모르는 상태인데, 홀트는 말없이 태연스럽게 가방에 짐을 챙겨 넣고
있었다.
존재를 무시당하는 바람에 베리티는 이야기를 시작할 계기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홀트의 등을 한번 노려보고는, 무시해 봤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의자에 걸터앉았다.
홀트가 짐을 다 챙기고 나서 몸을 일으켰을 때, 베리티는 긴 다리를 쭉 뻗고 앉아 주머니
속에서 주먹을 움켜쥐고 있었다. 얼굴에는 절대로 자기가 먼저 입을 열지 않겠다는 고집스
런 표정을 떠올리고 있었다.
홀트가, 애써 웃음을 참으며 입술을 일그러뜨리고 있는 것을 베리티는 놓치지 않았다. 어쨌
든 홀트가 돌아가기 전에 이야기를 나누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마침내 베리티의 고집에 꺽여 홀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그의 말투는 베리티가 예상한대로
놀리는 투였다.
"이번 방문에는 어떤 보답을 드려야 할까?"그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베리티는 적개심이 치솟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여기서 말씨름을 벌여 봤자 아무 소용도
없다 싶어 노여움을 꾹 참았다. 그러고는 홀트를 노려볼 뿐 베리티는 될수록 태연한 목소리
로 대답했다.
"마음 푹 놓으세요, 난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으니까요."
홀트는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비웃는 것 같은 표정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
었으며, 빈정거림과 의심을 담고 그는 물었다.
"밖을 산책하는 동안 마음을 고쳐먹은 거요?"
베리티는 다리를 움찍움찍하며 손을 더욱 깊숙이 호주머니에 쑤셔넣고 덤벼들 것 같은 목
소리로 말했다.
"나와 결혼하고 싶다고 했다면서요?"
무슨 이야기를 하러 왔는지 밝힌 뒤에 다시 홀트의 시선을 맏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
었다. 그는 비웃음이 사라진 얼굴로 아까보다 더 오래 베리티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홀트는
뜻밖의 말을 입에 올렸다.
"당신은 잘못 들은 것 같은데, 미스 다이아몬드." 눈을 크게 뜨는 베리티에게 그는 쌀쌀하
게 덧붙였다.
"난 당신과 결혼하고 싶다는 말 따위는 한 기억이 없는데."
;"하지만 당신은 아버지한테…."베리티는 급하게 말했으나, 홀트가 그녀의 말은 듣기도 싫
다는 듯 등을 돌리고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기 때문에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홀트는 챙기기를 잊은 거프스 버튼을 찾고 나서 겨우 베리티를 돌아보고 아무렇지도 않은
투로 말했다.
"내 기억으로는 난 당신의 아버지한테 당신과 결혼하고 싶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결혼하겠다고 말했소."
신랄하고도 거친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으나 그녀는 다시 참았다. 대신, "아버지는 당신
의 명예를 존중하는 사람이라고 했어요." 라고 말했다. 그러나 뒤를 잇는 말에는 가시가 돋
쳐 있었다. "당신이 나와 결혼하겠다고 제의한 것은 분명, 그럴 마음은 없지만 아버지의 손
님으로서의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기 때문이지요?"
"그 밖에도 몇 가지 이유가 더 있지!" 홀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미세스 트루먼 때문이지요?" 홀트에 대한 적개심이 커져 그녀느 고압적으로 말을 계속했
다. "그녀에 대해서는 마음쓸 것 없어요, 제퍼슨씨, 여기저기 소문을 퍼뜨리고 다니거나 당
신한테 해를 기치지는 않을 테니까요. 나는 그녀의 험악한 얼굴을 자주 보았지만 언제나 무
사히 넘어가지…."
"당신은 언제 아버지의 손님의 침대에 기어드는 버릇이 있나?" 홀트는 날카롭게 베리티의
말을 가로채어 그녀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베리티는 그를 노려보며 바로 신랄하게 되받았다. "당신이 처음이에요, 이젠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거고요."
그녀의 싫은 소리도 홀트에게는 별로 자극이 되지 않았다. 그는 놀리는 것 같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클레멘트의 손님이 앞으로는 평화로운 밤을 보내게 되었으니, 나는 도움이 됨 셈이군."
그는 베리티의 눈빛이 협오감에게 증오심으로 바뀌는 것을 무관심한 태도로 쳐다보고 있었
다. 그러더니 그의 눈도 갑자기 험악해지면서 거센 목소리로 말했다. "또다시 그런 짓을 했
다간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 거라는 것을 명심해."
그는 노여움을 폭발시키며 소리를 질렀다. "정말 여자란 참으로 어리석군! 당신은 어떤 결
과가 초래될지 생각지도 못했나?"
어리석다는 말은 참을 수가 없었으나, 베리티는 자기에게 해가 끼칠줄은 전혀 생각지 못
했다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녀는 뿌루퉁하게, 그러나 정직하게 대답했다.
"당신은 순진한 얼굴만 하고 있으면 안전하다고 생각한 게로군." 홀트는 비웃으면서 다시
다그쳤다. "당신이 유혹을 하면 거역할 수 없는 남자도 있다는 것을 모르다니, 당신은 도대
체 어떻게 자란 거지?"
베리티는 아버지의 벼락에 귀를 막는 데는 익숙해져 있었으나 홀트가 추궁하는 것은 참을
수가 없었다.
"누구에게나 내가 그런 것을 하는 줄 알아요!" 베리티도 마주 소리르 질렀다. "게다가 난
…."거기서 그녀는 망설였으나 곧이어 말했다. "내가 처녀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인가요? 당
신이 도중에 저어…. " 홀트가 소스라치게 놀란 얼굴을 하는 것을 보고 그녀는 또다시 혼란
스러워져 자기가 무엇을 묻고 있는지 알수가 없게 되었다. " 당신은 몰랐나요?"베리티는 거
져 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홀트는 놀라움에서 깨나자 불처럼 화를 내며 고함을 질렀다.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야. 당신은 내 침대에 들어오는 것이 위험한 일인 줄 정말 몰랐단
말이야?"
"물론 알고 있었어요." 베리티는 울컥했다. 홀트의 설교 따위는 듣기도 싫었다. "하지만
난 당신이 하는 대로 가만히 있지는…."그녀느거기서 자기가 그의 품암안에서 얼마나 달아
올랐는지가 생각나 얼굴이 빨개지면서 그를 저주하고 자신을 저주했다.
"당신은 내가 하는대로 따라왔을 것이 틀림없어! 그것은 부인하지 않겠지? 당신 아버지의
방문 여닫는 소리에 내가 정신을 차리지 않았다면 당신은 지금쯤 내것이 되어 있을거야. 부
정 못하겠지?"
매사에 솔직한 베리티도 그것만은 그대로 인정할 수 가 없었다. 그때 홀트가 보기와는 달
리 냉정을 잃고 뜨겁게 타올랐다는 것도 위안이 되지 않았다. 그녀느 벌떡 일어나 빠른 걸
음으로 방을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문앞에까지 왔을 때, 겨우 침착을 되찾고 거드름을 피우
며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또 봐요."
베리티가 방문을 열려고 했을 때, 홀트가 조용히 대답했다.
"이를테면 교회에서?"
베리티는 어리둥절하여 돌아보고 말을 더듬었다.
"글쎄.....저어, 당신은 나와 결혼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에요?"
공격적인 태도는 사라졌으나 홀트는 어깨를 추썩이고 오만한 말투로 응수했다.
"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결혼하겠어."
"결혼하겠다니요!" 베리티는 홀트의 쌀쌀한 선언에 멍해져서 두세 발짝 앞으로 나가서야
겨우 되받을 말을 생각해냈다. "당신은......마치 내가 결혼에 동의하리라 생각하는 것 같군
요."
자신만만한 홀트의 대답은 오만하기 이를 데 없었다.
"당신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지, 베리티 다이아몬드양."
홀트가 너무나 자신에 차 있기 때문에 벨리티는 순간 망설였다. 그러나 바로 마음을 가다
듬고 도전하듯이 말했다.
"당신은 내가 모르는 일을 뭔가 알고 있다는 태도로군요?"
홀트는 신경에 거슬리는 미소를 띠었다.
"나는, 당신이 말괄량이고 앞뒤의 분간도 없이 행동하지만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은 누구
보다도 크다는 것을 알고 있지."
베리티는 <말괄량이>라고 불린 것 못지 않게 약점을 찔린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는 훤히
알고 있는데, 그녀는 그가 무엇을 겨냥하는지 통 알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은데요." 벨티는 가볍게 말을 끌어내려고 했다.
"이제 난 더 할말이 없어. 클레멘트가 당신한테 돈을 댈 사람이 나서지 않았다면 다이아몬
드 경공업은 망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었다는 말을 했다는 것도 들었으니."
그 말에 베리티는, 아버지가 그녀에게 사정을 이야기했다고 홀트에게 말하지 않았다면 홀
트 자신은 절대로 회사의 경영사애에 대해서 자기에게 이야기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제 와서 그가 그런 말을 꺼낸 것은 지금까지의 이야기와 관계가 있기 때문이리라. 순간
베리티는 홀트의 협박이 무엇인지를 알 것 같았다.
그녀는 홀트의 출자가 없어지면 어떻게 되는가 싶어 다그쳐 물었다.
"당신의 출자는......이미 계약이 끝난 거지요?" 어제 홀트가 아버지와 사업 이야기를 한 것
은 아직 그의 출자에 무언가 문제가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베리티는 더욱 애가 닳았다.
"이미 법률에 따라 계약이 끝났고......"
작성, 서명, 날인이 모두 끝났지." 홀트는 그녀의 말을 가로채어 말했다. 그러고는 즐거운
듯이 말을 이어 베리티의 패닉 상태를 더욱 들쑤셨다. "물론 면책 조항을 집어넣는 것은 잊
지 않았지만."
이미 늦어 버린 노릇이지만 베리티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술수에 능한 남자를 자신이 함
부로 상대해 버린 것을 겨우 알게 되었다. 그가 면책조항이라고 한 것은, 그것이 자기와의
결혼이나 뭐 그런 것과 관계가 잇기 때문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정리하려고 애썼으나 여전히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당신은......만일 내가 당신과 결혼하지 않겠다고 하면 그 면책조항을 거론하겠다는 말인가
요?"
홀트는 미소를 거두고 베리티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며 되물었다.
"당신은 당신 아버지가 요즈음 너무나 걱정에 시달려 왔다고 생각지 않나?"
8
베ㄹ티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주이는 어두워져 있었다. 그녀는 처음 자기가 어지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굳어진 몸을 움직여 차의 시트의 차가운 가죽에 손이 닿자 한꺼번
에 기억이 되살아났따.
베리티는 금방 분명한 의식이 되돌아와, 자기가 몇 시간 동안이나 잠들어 있었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니 그다지 놀랄 만한 일도 아니었다. 머리는 말할 것도 없
고 몸도 지칠 대로 지쳐 있어서 휴식이 필요했던 것이다.
베리티는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인 것을 느끼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헤드라이트를 켜고 차를
발진시켰다. 그때 갑자기 걱정거리가 머리에 떠올랐다. 만일 아버지가 또다시 나와 홀트의
결혼 문제를 꺼낸다면 어떻게 응하면 좋단 말인가. 그러나 아버지는 오늘 저녁 브리지를 하
러 나간다는 것이 바로 생각나 그 걱정에서는 일단 벗어날 수가 있었다. 홀트가 돌아가고
아버지가 외출하고 없다면, 입을 열지 않는 미세스 트루먼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기보다 어
디 조금마한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가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그러나 생각만큼은 식욕이 없었다. 반쯤 먹다가 나이프롸 포크를 내려놓았다. 아직은 집으
로 돌아가는 것도, 미세스 트루먼의 얼굴을 보는 것도 내키지가 않았다. 그래서 베리티는
커피를 포트째 주문했다. 이렇게 외톨토리가 된 기분은 지금까지 맛본 적이 없다고 생각하
면서도, 누구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불러내어 같이 있고 싶은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두 잔째의 커피를 마시면서 생각이 솟아올랐다. 홀트와의 결혼을 물리치는 것이 좋겠지만,
그렇게 하면 그는 또 예의 면책조항을 들고 나오는 것이 아닐까. 아버지는 홀트의 인품이
훌륭하다고 칭찬했으나, 의심스러웠다. 일이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 면책조하을 들고 나와 아
버지를 파멸시키겠다고 하는 홀트가, 설령 그것이 법에 어긋나지 않는 일이라 해도 인품이
좋을 턱이 없지 않은가.
홀트가 자기와 결혼하겠다는 것은 그저 그의 명예를 위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하니 베리
티는 다시 수렁에 빠져들었다. 그것은 아버지의 말처럼 홀트가 훌륭한 인간이라는 의미가
된다. 그처럼 책임을 지고 베리티에게 상처를 준 일을 인정하는 남자가 좀처럼 있을까?
그리고 다른 남자 같으면 아버지가 난처해지는 것도 아랑곳없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베
리티가 침대에 들어와 있더라고 태연하게 말했을 것이다.
석 잔째의 커피를 마시면서는, 아버지를 위해서라면, 나아가 아버지의 생명인 회사를 건지
기 위해서라면 나중에 후회가 될지언정 자기는 홀트와 결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굳히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놀랄 만한 어떤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자기의 보이프렌드 가운
데 재벌이라고 부를 만한 남자들도 몇 명인가 있다. 그러니 그중의 누구하고 결혼해도 좋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그녀는 레스토랑을 나와 집으로 향했다. 이제 생각이 너무나 뒤얽혀 뒤
죽ㄹ박죽이 된 머리를 괴롭히기보다는 미세스 트루먼의 얼굴을 보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브리지를 하러 나가고 홀트는 벌써 자기 지으로 돌아갔을 거라는 베리티
의 짐작은 완전 빗나가 버렸다. 온 집안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어 아버지가 예정대로 나가
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더구나 홀트의 차도 밖에 세워져 있었다. 이것은 그가 아직
도 무슨 이유론가 집에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반짝이는 것은 집안의 불빛만이 아니라는
것을 베리티는 알 길이 없었다.
폭풍은 그녀가 차의 키를 뽑으려고 할 때 갑자기 불어닥쳤다. 현관의 문이 열리고, 홀트가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와 말도 없이 그녀를 차에서 끌어내린 것이다.
홀트가 무섭게 화가 나 있다는 것은 금방 알 수가 있었다. 홀트는 베리티의 팔을 세게 움
켜잡은 채 계단을 끌고 올라가 현관 안으로 밀어넣었다. 베리티는 가슴을 두근거리며 겨우
숨을 쉬고 말했다.
"당신은 벌써 돌아간 줄 알았는데." 노여움이 불타는 홀트의 눈을 보고 그녀는 입을 다물
었다. 난폭한 취급에 항의할 생각이었는데, 그의 말을 듣고 너무나 놀라 소리가 나오지 않았
다.
홀트는 격한 노여움에 완전히 자제심을 잃고 있었으며, 후려치듯이 말했다.
"당신이 아홉 시간 전에 그렇게 미친 듯이 뛰쳐나가는 바람에 아버지가 심장 발작을 일으
킬 것 같아 남아 있는 거야!"
베리티는 어쩔 줄을 몰랐으나, 아버지가 서재에서 성큼서큼 나오는 모습을 보자 마음이 놓
였다. 꽝꽝 울리는 목소리로 보면 건강은 나무랄 데가 없었다.
"넌 미치광이 같은 운전 버릇을 아직도 버리지 못했냐!" 클레멘트는 베리티의 팔을 움켜잡
고 소리를 쳤다. "너 때문에 우리 두 사람이 얼마나 걱정한 줄 알기나 해/"
"두 사람 다?" 베리티는 힘없이 말했다. 자기가 얼마나 난폭하게 뛰쳐나갔는가 하는 것은
벌써 잊어버리고, 홀트까지 자기를 걱정했다는 것이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두 사람 다야!" 클레멘트는 또 고함을 쳤다.
"홀트는 해가 질 때까지 널 찾아다녔단 말이다!"
"홀트가요?" 베리티는 소리치며 거친 표정으로 자기를 노려보고 있는 홀트에게 저도 모르
게 눈길을 돌렸다.
"미친 사람처럼 차를 모는 당신을 보고, 전에도 당신이 차를 엉망으로 만든 적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아버지가 시킬 것도 없이 난 당신을 찾아나섰고, 아버지는 여기저기
병원에다 전화를 거시고 한 거야!"
"어머나, 그럴 수가!" 멍해진 베리티가 겨우 입에 울린 것은 그 말뿐이었다.
다그치듯이 아버지가 다시 고함을 쳤다.
"그럴수가라니! 내가 공연한 짓을 했지! 당장 그차를 잠그고 키를 내놔! 네가 자제심을 가
질 때까지는 절대로 차의 운전을 허락할 수 없어!" 클레멘트는 너무나 화가 나서 마구 소리
를 지러댔다. "키를 어서 내놔!"
베리티는 손에 키를 들고 있었으나, 아버지는 그녀가 건네 주는 것도 기다리지 않고 잡아
챘다. 그녀는 홀트가 보는 앞에서 아버지가 그렇게 하는 바람에 자존심이 상했다.
"이 사람 때문이예요!" 베리티는 화가 나서 혐오감이 가득 찬 눈으로 홀트를 쏘아보았다.
"하느님, 우리를 지켜 주십시오!" 베리티가 손님에게 죄를 덮어씌우려고 하는 것을 보자 클
레멘트는 무서운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그녀와는 이제 상대도 하지 않겠다는 태도로 서재
로 돌아가면서, 사람들에게 전화하여 베리티가 돌아온 것을 알리겠다고 홀트에게 말했다. 그
러고는 다시 덧붙였다. "난 이제 베리티와는 인연을 끊겠어!"
키는 빼앗기고 인연을 끊겠다는 아버지의 폭탄 선언에 우뚝 선 채 홀트와 홀에 남겨진 베
리티의 마음은 당황 정도가 아니었다.
"아빠는.......진심이 아니예요." 그녀는 무언가 말해야 할 것 같아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진심이라 해도 당연해." 홀트는 엄격하게 대답했다.
"또 싸움을 불러일으키지 말아요!" 베리티는 야멸차게 되받아 주고, 아버지에 이어 홀트의
설교 따위를 들어야 할 이유가 있나 싶어 계단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가 계단으로 따라오는 것이었다.
"악마에게 쫓기듯이 사력을 다해 뛰어나가 도대체 어디에 있었던 거지?"
베리티는 계단 중간에 서서, 아직도 화를 내고 있는 홀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당신보다 취향에 맞는 결혼상대를 찾으러 갔었다고 한다면 믿겠어요?" 그의 눈이 무서울
이만큼 번들거리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당신은 내가 아는 남자중에서
유일한 부자는 아니니까요."
순간 베리티는 홀트에게 내던져지는 것이 아닌가 하고 긴장했다. 그러나 그는 날카롭고도
뻔뻔스럽게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하지만 베리티, 당신은 당신 주위의 누구하고도 진정한 결혼을 생각하지 못하는 게 아니
오? 그렇지 않다면 벌써 옛날에 처녀성을 잃고 말았을 텐데."
베리티는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으나, 그러는데는 노력이 필요했다.
"글세, 어떨까요?" 그녀는 대수롭지 않은 체하며 말했다. "난 침대를 같이한 것은 당신뿐이
라고 말했어요. 하지만....한 번 그렇게 하고 났으니 누구하고 또 그렇게 하지 말란 법은 없
잖아요?"
"난 다 알고 있단 말이오." 홀트는 말했다.
"알고 있겠지요!" 그의 언제나의 자만심이라고 생각하면 베리티는 되받았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그녀는 그때 뜻밖의 질문을 뱉어내고 있었다. "저어......당신은 침대를 같이한 여자가
무척 맣겠죠?"
돌아온 대답은 무뚝뚝한 것이었다.
"당신한테 관계가 있는 것은 앞으로 내가 몇 명의 여자와 침대를 같이하느냐 하는 것 뿐이
지."
홀트가 또 결혼 이야기를 꺼낼 것이 틀림없다는 것을 알고 베리티는 다시 큰 충격을 느꼈
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번에는 화를 내거나 나처해 하는 대신 그녀는 갑자기 들뜬 기분에
사로잡혔다.
베리티는 한편으로 걱정스럽고 다른 한편으로 들뜬 기분이 들어서 말했다.
"즉 당신은.....결혼을 할 때까지는, 저어.......그런 짓을 하지 않겠다 그거지요?"
더욱 놀라운 일은, 홀트가 엄격한 표정을 싹 거두고 빙그레 웃자 갑자기 베리티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의 결혼은 곧 그녀의 결혼이라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처럼
홀트는 분명하게 말했다.
"약혼 기간을 오래 끌 생각은 없어"
베리티는 하마터면 미소를 지을 뻔하여, 당황해서 앞을 보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데
홀트가 한 단씩 같이 오르면서 갑자기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둘렀기 때문에 가슴이 더욱 세게
두근거렸다.
지금까지 말이 막혀 본 일이 한 번도 없는 베리티는, 심장이 터질 것같이 되어 뭔가 말을
해야 할 것 같아 애가 탔다.
"저어, 당신은 정말 날 찾으러 나갔었나요?"
"난 그렇게 나쁜 놈이 아니야." 홀트의 목소리에 깃들여 잇는 따뜻함도 베리티의 마음을
가라앉혀 주는 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다음 말에는 이미 따뜻함이 없었다. "집
에 있으면서 클레멘트가 걱정으로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있기보다는 당신을 찾아나서는 것
이 더 나을 거라고 생각한 거지."
홀트가 자기를 찾으러 나섰던 것은 자기보다 아버지를 염려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너무나
분명하게 보여주는 바람에 베리티의 들뜬 마음은 가라앉아 버렸다.
계단 위까지 왔을 때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아버지께는 내일 사과하겠어요."
"그게 당연하지." 베리티의 방 앞까지 같이 온 홀트가 중얼거렸다. 그녀한테 따지고 덤비대
신 처음으로 의견이 일치했다는 듯이 그가 조용히 말하는 소리를 듣고 그녀의 가슴은 두근
거리기 시작했다. "하여튼 당신은 무사히 돌아왔지."
"네." 베리티는 목이 콱 메었다. 이제는 홀트에 대한 증오심도, 말다툼을 할 마음도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이대로 무사히 있고 싶으면 내일 새벽에는 집안을 걸어다니거나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요."
홀트에게 웃음을 보이긴 싫었으나 이번만은 참을 수가 없었다. 베리티는 그를 쳐다보고 방
긋 웃었다.
"당신도 여기서 묵을 거예요?"
홀트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의 입으로 눈길을 옮기며 중얼거렸다.
"다시는 당신을 놓치지 않을 거야."
그리고 그의 얼굴이 다가왔을 때, 베리티는 정말 자연스럽게 그의 키스를 받아들였다. 홀트
의 키스는 전과 마찬가지로 따뜻했다. 그는 두 팔로 베리티를 껴안고 있었다. 그러나 더욱
세게 죄어 안으며 키스가 뜨거워져 그녀의 정열이 눈을 떳을 때, 홀트는 살며시 그녀를 밀
어냈다.
자기가 조금도 정항을 하지 않은 것을 깨닫고 베리티 가 놀라고 있는 동안 홀트는 그녀를
위해 방문을 열었다.
"잘 자요, 베리티." 그는 분명하게 말하고 문밖에 선 채 그녀를 방 안으로 밀어 들여보내고
방문을 닫았다.
"잘 자요, 홀트." 베리티는 속삭이고 나서 꿈꾸는 듯한 심정으로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잘
자요, 달링.' 그녀는 마음속으로 덧붙이고는 문득 깨달았다. 홀트에 대한 감정이 증오가 아니
라 사랑이라는 것을.
홀트에 대한 따뜻한 마음이 가슴에 꽉 차 베리티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 사람이 좋아, 하
고 그녀는 생각했다. 홀트와 떨어져 자기 방에 있는 것이 잘못된 일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오랫동안 그에 대해 생각을 하다가 겨우 멍한 기분으로 샤워를 하고는 옷을 갈아입었다. 침
대에 들어가서도 여전히 홀트에 대한 생각을 떨어버릴 수 없었다.
베리티는 눈이 점점 더 말똥말똥해져서 도저히 잠들 것 같지가 않았다. 홀트가 자기를 어
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키스의 유혹이 너무나 크다는 듯이 그녀를
방 안으로 밀어넣은 것은 하나의 증거가 된다.
두 번째는 놓치지 않겠다고 한 홀트의 말이 생각나자 베리티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떠올랐
다. 아아, 홀트, 달링! 그리운 사람! 그가 와주었으면. 그러나 홀트는 와주지 않았다.
베리티는 이튿날 아침 잠이 깨자 맨 먼저 홀트를 생각했다. 그러나 그를 사랑하는 몇 분의
일쯤은 그도 그녀를 사랑해 주는 것이 아닌가하는 어젯밤의 꿈은 아침 햇살과 함께 현실감
을 씻어 버린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신경이 곤두서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제는 한순간도 침대에 가만히 있
을 수가 없었다. 나와 결혼하겠다고 말한 홀트의 마음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생각하면서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가 면책조항에 의해서 아버지와의 계약에서 손을 떼겠다는
말을 한 것은 나와의 결혼을 강하게 바라기 때문이 아닐까?
홀트가 나를 사랑하고 있지 않는 것은 물론 알고 있다. 그러나 어젯저녁의 키스로 미루어
본다면 조금은 좋아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결혼은 그가 나를 사랑하도록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닐까?
약혼 기간을 길게 두지 말고 될 수록 일찍 결혼하자고 그녀는 마음을 결정하였다. 갑자기
견딜 수 없이 홀트를 만나고 싶어져 베리티는 방에서 뛰쳐나갔다.
계단을 반쯤 내려가다가 그녀는, 진즈와 스웨터보다 더 멋있는 옷을 입고 나올 걸 그랬다
싶었다. 그러나 홀트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 더 커서 그대로 홀을 가로 질러 식당을 들어갔
다.
아버지는 언제나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홀트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베리티는 약
간 실망이 되었다. 홀트에게 마음이 빼앗겨 있던 그녀는, 아버지가 자신에게 미소를 짓지 않
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잘 주무셨어요, 아빠!" 그녀는 기운 좋게 말을 걸었으나 아버지는 대답 대신 엄격한 얼굴
을 돌렸다. "왜 그러세요?"
"너 정말 정신 못차리겠니! 벌써 잊었다고는 못하겠지!" 아버지는 버럭 소리를 질러 베리
티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어마, 아빠 미안해요." 그녀는 진정으로 미안하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어젯저녁 그렇게
화를 내었으니 오늘 아침에 벌써 풀어졌을 턱이 없었다.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해." 아버지는 연신 고함을 쳤다.
"이제 절대로 그렇게 뛰쳐나가지 않겠어요." 베리티는 서둘러 말했다. 아버지가 홀트가 내
려오기 전에 꾸중을 마쳐 주었으면 싶었다.
"안 그럴 수가 없을 게다. 내가 힘이 있는 동안은 절대로 너에게 차를 몰레 하지는 않을
테니까!"
베리티는 그 말의 뜻을 생각하자 입이 벌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아버지는 멀지 않아
고삐를 늦추어 줄 생각으로 있는 것이다.
"웃으려무나. 하지만......."
"그렇게 화를 내지 마세요, 아빠." 베리티는 부드럽게 아버지의 말을 가로막았다. "아빠가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 그녀는 미소까지 지었다. "하지만......어제
일은 예외라고 생각하시겠지요?"
"그래. 예외고말고!" 아버지는 조금도 태도를 누그러뜨리지 않고 딱딱한 목소리로 되받았
다. "어제 아침, 서재에서 들었던 일은 끔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베리티는 당황하여 말했다.
쪼그만 소녀로만 생각하던 딸이 어엿한 여자가 된 걸 알고 아버지는 당황한 것이라 싶었
다. "어제 이야기를 나눈 것과 어느 정도 관계는 있어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 클레멘트는 어리둥절해 하더니 또 벌컥했다. "이젠 진절머
리가 난다! 또 뭘 꾀하고 있다면......."
"그런 게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베리티는 당황했다. 그리고 홀트에 대한 생각이 더욱 간
절해지면서 아버지도 자기와 마찬가지로 행복한 기분이 되어 주었으면 싶었다. 그래서 자기
말에 아버지가 기뻐할 거라고 생각하며 말했다. "아빠는 이미 아시는 일이에요. 저보다 먼저
아셨죠." 그녀는 또 저도 모르게 웃음을 띠었다.
아버지의 어리둥절한 얼굴은, 베리티의 말을 아직 납득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
다. 아버지는 의아함으로 굳어진 표정 그대로 날카롭게 말했다.
"난 상상놀이를 할 생각이 없다."
"아빠는, 어제는 하셨으면서 그래요." 베리티는 빙그레 웃으며 따뜻한 눈매로 조용하게 말
을 이었다. "그때 아빠는 제가 홀트를 사랑하고 있다고 상상하셨는데. 그것은 옳았어요."
베리티는 자김 말에 아버지가 할말을 잃어버릴 줄은 생각도 못했다. 아버지는 멍해져 있
었다. 한동안이 지나서야 그는 겨우 약간의 냉정을 되찾은 듯 물었다.
"너.......그게 진심이냐?"
"네, 진심이에요." 베리티는 미소 지으며 말했으나, 깜짝 놀라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자 미
소가 사라져 버렸다.
"또 내게 얼버무리려고 뭘 날조해서........"
"날조해요?" 아버지의 굳은 표정을 보고 베리티는 더욱 당황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 때
문에 골치를 썩일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아버지에게 알리려고 했다. "제가......저어.......지금까지
거칠게 행동하는 통에 아빠에게 쇼크를 드려 온 것은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앞으로 다시
는 그런 일이 없을 거라고 약속하겠어요." 자기의 말이 아빠에게 기운을 준 것 같아서 베리
티의 얼굴에는 미소가 되돌아왔다. 그녀는 부드럽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 홀트를 사
랑하게 되었어요. 아빠." 그리고 손으로 가볍게 입을 가리며 계속했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
는지는 묻지 말아 주세요. 저도 도무지 알 수가 없거든요. 알고 있는 것은 그가 무척 좋아졌
고, 그와 결혼하고 싶다는 것과...."
아버지가 괴로운 목소리로 그만두라고 하지 않았다면 베리티는 이야기를 계속했을 것이
다. 그러나 고뇌에 가득 찬 아버지의 말에 이번에는 그녀가 의아함으로 멍해지고 말았다.
"홀트는 너와 결혼하지 않는다."
기분이 내키면 아버지는 곧잘 베리티를 놀렸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표정으로 이번은 농담
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아직 믿고 싶지 않았다.
"아빠..........잘못 보신 거예요." 베리티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홀트는......자기 입으로
나와 결혼하겠다고 했어요. 그는........"
클레멘트는 고개를 저어 그녀의 입을 다물게 했다. 아버지는 그녀가 천천히 희망을 잃어
가는 것을 차마 볼 수가 없다는 듯이 단숨에 말했다.
"그건 홀트의 진심이 아니었단다. 그는 그저 자기와 내가 꾸몄던 계획에 따라 그렇게 말했
을 뿐이란다."
"아빠와 홀트가 꾸민 계획......" 베리티의 목소리를 꺼져들어 갔고, 아버지의 다음 말에 얼
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미세스 트루먼한테서 들은 이야기로 내가 난처해하는 것을 모면케 하기 위해서, 홀트는
네가 그의 침대에 들어온 진짜 이유를 이야기해 주었단다. 그는......."
"홀트가 사실을 말했어요?" 거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베리티는 숨을 헐떡였다. "내가 어
떻게.....그를 속이려 했는지 그가 아빠한테 이야기한 거예요?"
클레멘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홀트는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조심을 하며 대충 이야기해 주었따. 그러나 난
그때처럼 부끄러운 적이 없었다. 정말 견딜 수 없는 입장이었어. 당장이라도 너의 목을 죄고
싶었다."
베리티는 감각이 없어져 가는 것을 느꼈다. 죽을 것같은 기분이 들면서, 자기 때문에 아버
지가 그렇게 쓰라린 고통을 받은 것에 대해 죄책감조차 느끼지 않았다.
"아빠는 홀트에게.......아빠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했어요?" 베리티는 당돌하게 말했다.
"그럴 필요는 없었다. 내가 어떤 심정인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홀트는 나에게 보상을 하게 할 좋은 방법을 생각해낸 거로군요?" 베리티는 고통
을 느끼기보다는 무감각이 언제까지나 계속되어 주었으면 하고 생각하면서 말했다. "그것은
홀트의 아이디어였지요?" 아버지의 대답은 들을 필요도 없었다.
"난 너에 대해 불처럼 화를 내고, 방안에 가두어서라도 다시는 그런 짓을 못하게 만들어야
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홀트는, 너의 마음을 딴데로 돌리고 싶으면 네행위의 결과로 네가 그
와 결혼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는 걸 알려 주면 쇼크를 받을 거라고 말했단다."
"그리고 아빠는 그것을 명안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베리티는 무표정하게 물었다.
"그동안 나는 자존심에 얽매여서 너와의 약속을 깬 진짜 이유를 네게 말할 용기가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나자신에 대해서 화를 내고 있었지. 그러나 미친 듯이 차를 몰고 뛰쳐나가는
너를 보고, 나는 또 불처럼 화가 났다. 만일 네가 무사히 돌아온다면, 홀트의 계략에 의해
네가 인생이 뒤집힐 것 같은 쇼크를 받는 것은 당연한 보답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말에 의한 충격은 가라앉기 시작했으나 대신 아픔이 가슴을 찔렀다. 그러나 베
리티에게도 자존심이 있었다. ― 아버지 못지 않게.
"누가 바나나 껍질에 미끄러졌는지를 생각해 보기로 하지요." 그녀는 쾌활한 목소리로 말
했으나 농담의 효험은 없었다.
"유감이구나, 베리티." 자기를 닮은 딸의 자존심을 잘 알고 있는 클레멘트는 슬픈 듯이 말
했다. 그리고 약간 날카로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홀트는 널 사랑하는 체하지는 않았을 줄
아는데?"
베리티는 고개를 끄덕였다. 홀트는 그런 짓은 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
가 자기를 약간이나마 좋아하고 잇다면 그것이 애정으로 바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는지 베리티는 뼈저리게 느꼈다.
베리티는 아버지 앞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말자고 마음에 다지고 대답했다.
"홀트는 한 번도 사랑 따위의 말은 하지 않았어요. 다만.....만일 내가 결혼에 동의하지 않
는다면 면책조항으로 아빠와의 계약을 해소하겠다. 그렇게 되면 아빠는 또 고생하게 되고
회사는 도산하게 될 거라고 비쳤어요." 조금 목이 메이기는 했으나 베리티는 그럭저럭 눈물
을 숨기는 데 성공했다.
"그런 면책조항은 없단다. 베리티."
"없다니요!" 베리티는 입을 딱 벌리고, 놀라움을 숨기는 것도 잊어버렸다.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하지만....." 아버지는 어쩔 수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공
평한 입장에서 말하면, 그리고 네가 홀트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서 저지른 짓으로 본다면,
그때는 어떤 수법을 써도 별로 죄가 되지 않을 거라고......." 아버지는 누가 오는 소리를 들
었는지 거기서 입을 다물었다.
홀트다. 하고 생각한 베리티는 벌떡 일어서서 숨을 장소를 찾았다.
"미세스 트루먼이다."
"홀트도 바로 오겠지요." 베리티는 급하게 식당에서 나가려고 했다.
"홀트는 벌써 여기를 떠났다."
"떠났어요?"
"아홉시에. 어디에 사업상의 약속이 있었던 거야."
일요일 아침 아홉시에 무슨 사업상의 약속인가 하고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베리티의 얼굴
을 보고 아버지는 덧붙였다. "공장을 세울 예정인 현장에서 건축가를 만날 약속이 있단다."
어제나 다름없이 씁쓰레한 얼굴을 한 미세스 트루먼이 베리티앞에 커피와 토스트를 갖다
놓고는 한마디 말도 없이 나가는 동안 대화가 끊어졌다.
미세스 트루먼의 뿌루퉁한 얼굴에도, 아침식사에도 베리티는 관심이 없었다. 아버지도 이
제는 더 할 말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자리를 뜨기 전에 기어이 아버지로부터 받아내야 할
약속이 한가지 있었다.
"아빠가 어쩔수 없이 약속을 깨신 줄은 알겠어요. 하지만 이번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
로 내가.....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아빠의 입으로 그에게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시
겠어요?"
"마치 내가........." 클레멘트는 항의하려고 했다.
"약속해 주세요." 베리티가 다그쳤다. 자기가 얼마나 바보였는지 홀트가 알게 하는 것은
도저히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베리티는 잔뜩 긴장하고 기다렸다. 마침내 아버지는 말했다.
"약속하겠다, 베리티. 무슨 일이 있어도 홀트에게 오늘 아침 주고받은 이야기는 말하지 않
겠다고."
9
만일 자기만 생각하면서 지낼 수 있다면 베리티는 일요일을 혼자서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아버지를 위해서 에는 듯한 마음의 아픔을 참으며 먹고 싶지도 않은 점심을 들러 식
당으로 내려갔다.
베리티는 아버지가 이따금 자기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것을 보고 그의새로운 고민을 생각
했다. 그리고, 방에 틀어박혀 있지 말자고 생각했다. 그녀는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저에게 브리지를 좀 가르쳐 주시겠어요?"
"브리지를 배우고 싶다고?" 아버지의 표정이 밝아졌다.
"네, 다는 아니지만요." 브리지를 완전하게 배우자면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베리티는 애매하게 말했다. "두세 시간은 아빠와 상대할 수 있거든요."
"오늘 저녁은 밖에 안 나가는 거냐?" 아버지는 바로 물었다.
베리티는 하마터면 나가지 않겠다고 말할 뻔했다.
그녀는 그렇게 하면 자기와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아버지도 예정을 모두 취소할 거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이따가 미란다들을 만나기로 되어 있어요" 베리티는 아버지가 전날 밤에 자기 때문에 브리
지 파티에 가지 못한 것을 생각하고 말했다. "하지만, 집에 있어도 좋아요, 만일…"
"아니, 그럴 필요는 없다." 클레멘트는 친구들과의 어울림이 그녀에게 조금이라고 홀트를 잊
게 해줄거라고 생각했다. "리스데일의 집에서 일행이 모이기로 되어 있단다."
베리티는 일곱 시반에 기운 좋게 아버지를 배웅했다.
그리고 미란다에게는 속이 불편해서 가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수화기를 놓는 것과 동시에 베리티의 마음은 어두워졌고 투지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
렸다. 그녀는 축 처진 기분이 되어 홀트에 대한 증오심을 되찾을 마음조차 나지 않았다. 베
리티는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속았으면서도 역시 그를 미워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열시가 조금 지났다. 베리티가 처량한 얼굴로 멍하니 의자에 앉아 있기보다는 침대에 들어
가 잠이나 자는 게 낫겠다고 생가했을 때였다. 전화 벨이 올렸다.
수화기를 집어들어 될 수록 활기찬 목소리로 이름을 댔다. 그러자 놀랍게도 홀트 제퍼슨의
목소리로 이름을 댔다. 그러자 놀랍게도 홀트 제퍼슨의 목소리가 이름을 댔다. 그러자 놀랍
게도 홀트 제퍼슨의ㅡ 목소리가 들여 왔다. 베리티는 하마터면 수화기를 떨어 드릴 뻔했다.
베리티는 금방 신경이 곤두서 버렸다. 마음이 혼란해져 아무것도ㅜ 생각할 수가 없어서 급
하게 말했다.
"아버지는 지금 안계세요."그러나 홀트는 자기의 가짜 프로포즈가 어떤 사태를 불러 일으켰
는지 조금도 모르고 있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기가 막혔다. 그는 태평스런 목소리로 이렇
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건 집으로 와달라는 초대의 말인가?" 그 말이 베리티의 말문을 막아 아무말도 못하고
있으니가 홀트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통화하고 싶었던 사람은 당신 아버지가 아닌데."
이게 뭐야, 하고 베리티는 생각했다. 그러나 마음의 아픔을 감추려고 기를 쓰면서 그녀가
비아냥거릴 생각으로 한 말은 그녀 자신의 귀에는 전혀 비아냥거림으로 들리지 않았다.
"피앙세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는 말이에요?"
전화기 저쪽에서는 한순간 말이 없었다. 그러나 빈정거림의 효험은 없었다. 홀트는 금방 유
혹하듯이 대답했다.
"어쩐지 좋아하는 있는 것 같은 목소리군, 베리티."
베리티는 기력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끼고 태연한 목소리를 내려고 애썼다.
"저어.....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세요?"
"만나러 가고 싶었지만 시간이 늦어서 말이야. 내일 같이 식사하겠다고 약속해줄까 싶어
전화한거지."
날 언제까지 놀릴 작정인가, 하고 베리티는 생각했다. 그러나 겨우 감정을 누르고 담담하게
말했다.
"실은 내일 저녁에 다른 약속이 있어요."
그러나 모처럼의 그녀의 인내도 홀트의 공격적인 태도에 날아가 버렸다.
"우리가 결혼하기로 되어 있다는 걸 잊었소?"
"당신이나 마찬가지로 잘 알고 있어요!" 베리티는 날카롭게 쏘아붙이고 수화기를 꽝하고
내려놓았다.
30분이 지났을 때도 그녀는 마음이 가라앉히지 못하고 방안을 이리저리 서성이고 있었다.
내가 다른 사람과 데이트하는 것을 좋아하는 않는다는 듯이 말하다니 얼마나 뻔번스런 남장
니가!
겨우 침대에 들어가서도 자꾸만 잠이 깼다. 그때마다 베리티는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
다. 홀트는 한동안 약혼자인 체 연기를 하며 어떤 남자도 그녀 옆에 못 오게 할 것이라 싶
으니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
완전히 잠이 깨고 보니 밖은 이미 훤하게 밝아 있었다. 베리티는 투지가 되살아났다. 요전
에는 그렇게 지독하게 당했지만, 이번에는 어떻게 홀트의 책략을 뒤집어 놓을까 하고 이리
저리 생각을 굴렸다. 결혼할 마음은 처음부터 없었다고 그가 말하면 빙긋 웃고 이렇게 응수
하는 것이 어떨까. '어마, 그런 건 나도 알고 있었어요. 뭐 다른 이야기는 없나요?"
베리티는 다시 한번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굴복이란 죽어도 있을 수 없는 일
이다. 홀트가 게임을 할 생각이라면 그것을 피할 이유가 없다. 그가 날 속이겠다면 속는 체
하여 나도 그를 속이다. 결혼하겠다는 시늉을 하면 나도 응하는 체하는 거야. 게임의 끝에
가서는 그가 날 속인 것이 아니라 나에게 그가 속았다는 것을 알게 만들어야지!
식탁에서 베리티는 훨씬 기분이 좋았다. 아버지는 조금 의아스런 얼굴을 했으나, 차의 키를
돌려주고는 어제보다 안심이 된 얼굴로 회사에 나갔다.
베리티는 홀트가 회사에 출근했으리라 싶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계획의 첫발을 내디뎠다.
먼저 서재에 가서 아버지의 전화번호 메모에서 홀트이 번호를 찾았다. 홀트의 회사에서 아
버지가 매우 존중하게 여겨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클레멘트 다이아몬드의
딸이라고 이름을 대자 비서는 바로 홀트에게 돌려 주었기 때문이다.
"어제는 전화를 끊어서 미안해요. 좀 심란해서요."
베리티는 얌전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고, 어제의 보복으로 홀트가 전화를 끊어 버리지나
않을까 하여 서둘러 말을 이었다. "정말로 식사에 데리고 가줄 생각이었는지 알고 싶어서
전화한 거예요."
홀트는 잔뜩 빈정거리며 대답했다.
"다른 데이트 약속은 취소해 버린 거요/'
베리티는 화가 치밀었으나, 첫 허들을 넘으면서 신경질을 내서는 안 된다고 자기를 타이르
며 말했다.
"요전에 조이론 로비를 만났을 때와 같은 데이트가 아니에요." 그녀는 조용하게 대답했으
나 홀트가 아무말도 없었기 때문에 또다시 말을 계속했다. "오늘 그에게 더 이상 만나지 않
겠다고 말할 생각이에요."
수화기 저쪽에서는 여전히 침묵이 계속되었다. 베리티가 다시 홀트의 귀에 수화기를 내던
지는 소리를 들려주고 싶은 유혹과 싸우고 있을 때, 애인답지 않은 쌀쌀한 목소리가 들려왔
다.
"조이론 로비와는 전화로 그 말을 전할 수는 없는 사인가?"
"그에게 결혼 신청을 받았거든요." 베리티는 짜증스럽게 말했다. 조이론에 대한 화제는 이
제 끝내고 싶었다. 거짓말을 거듭하기는 싫었다. "당신은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게지만, 어
제 당신 전화를 받았을 때 생각했어요. 당신도 하루 저녁쯤 시간을 내서........"
"과거의 결말을 내라 그건가?"
"그래요."
"난 그럴 만한 상ㄷ가 없어." 홀틔 말에 베리티의 가슴은 뛰었다. 그는 따뜻한 목소리로 말
했다. "내일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고 하면 전화를 끊겠소?"
베리티는, 내일은 홀트와 데이트한다는 생각에 눈을 빛내며 전화에서 떠났다. 그러나 결국
이것은 보통의 데이트가 아니라고 생각하니 금방 가슴이 식어 버렸다. 데이트가 아니락 생
각하니 금방 가슴이 식어 버렸다. 현실이 밀려와 그녀의 들뜬 마음을 가라앉혔다. 홀트는 샐
리 애스턴과 헤어지지 않고 끝까지 날 속일 작정인 것이다.
그 날 결심을 굳힌 시간은 충분히 있었다. 그녀는 몇명의 친구들에게, 얼마 동안 여행을 떠
나는데 돌아오면 또 연락하겠다고 전화했다. 그것이 끝나자 이제는 속여할 사람은 아버지뿐
이었다. 아버지를 속이기는 싫었으나 몇 번인가 데이트를 하자면 아버지와 마주치게 될 테
니 어쩔수가 없었다.
베리티가 홀트한테서 전화가 왔었다는 이야기를 하자 아버지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내일 저녁 홀트와 만난다고!"
"그를 만나 봐야 아무 소용도 없다는 것은 알고 있어요, 아빠." 슬프지만 그것은 진심이었
따. 그러나 베리티는 밝게 웃었다. "하지만 말이에요, 홀트가 자기에 대한 나의 마음을 알아
차렸을지도 몰라요. 그러니 초대를 받아들여, 그것은 그의 오해였다는 것을 보여줄 좋은 찬
스라고 생각해요."
아버지가 물끄러미 바라보는 바람에, 또 무얼 꾀하고 있다고 의심받는 것이 아닌가 싶어
무서웠다. 그러나 아버지는 감탄하고 있었다.
"너야말로 다이아몬드 집안의 프라이드다!"
다음날 저녁, 그녀를 마중 온 홀트에게 그녀는 다른 의미에서 감탄했다. 아버지는 일 관계
로 회사에 나갔다고 말하자, 홀트는 그녀의 반짝이는 머리며 공들여 한 밝은 화장, 이리저리
생각한 끝에 고른 저지 드레스를 눈여겨 보며 공손하게 말했다.
"당신 아버지에게 볼일이 있어서 온 것이 아니라서 기쁘다고 하면 실례가 될까?"
베리티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나 평정을 되찾으려고 그에게 등을 돌
리고 말했다.
"백을 가져오겠어요."
차에 올랐다. 턱시도 차림의 건장한 홀트 바로 옆에 앉으니 베리티는 다시 두근거리는 마
음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겨우 마음이 가로앉을 무렵 홀트가 물었다.
"당신 쪽은 결말이 났나, 베리티?"
"당신 쪽이라니요?" 사랑을 하면 혈액 순환이 잘 안되는 걸까, 생각하며 되물었다.
"로비에게 당시은 저어......다른 남자와 약혼했다고 벌서 이야기한 거요?"
"아, 이야기했어요." 그녀는 거짓말을 하고 진실처럼 드리도록 덧붙였다. "그는, 저어, 별로
달가와하지않더군요."
"그거 안됐군." 홀트의 인사는 그것뿐이었다.
홀트가 데리고 간 레스토랑은 베리티가 가본 적이 없는 곳이었다. 로맨틱한 분위기를 자아
내느라 어슴푸레하게 만든 조명 때문에 주위는 잘 보이지 않았다. 단단히 연기를 해야겠다
고 생각했는데도 그녀는 이내 홀트의 매력에 끌려들 것 같았다.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는 무척 애를 써야 했다.
홀트는 가벼운 농담을 하여 베리티를 웃겼다. 미소하면서 맛있는 요리를 맛보고 있는 동안
그녀는 시간이 흘러가는 것도 잊고 있었다.
홀트 역시 그녀의 웃음이나 입술에 끌리는 것처럼 가만히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보이는 것은 조명 탓이라고 베리티는 자기를 타일렀다.
그러나 식사가 끝나고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 홀트가 그녀의 눈을 보면서 슬그머니 꺼낸
말에 베리티는 가슴이 철렁했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우리 집에 잠깐 들렀다 가지않겠어?"
그의 집에 들르다니! 그는 나를 속이는 것으로는 모자라 이번에는 유혹을 해서 오늘 저녁
의 끝맺음을 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은 많이 빼앗지 않겠소." 그는 매력이 넘치는 웃음을 띠었다.
'걸려들어서는 안돼.' 하고 베리티는 생각했다. 딱 잘라 거절하려고 했으나 그때, 홀트가 마
침내 결혼할 마음이 없다는 것을 말할 때가지는 연극을 계속하기로 결심한 것이 생각났다.
"벌서 나가고 싶어요?"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순진한 체 물었다. 계획을 성공시키자면 어
느 정도 그에게 맞장구를 쳐줘야 한다. 물론 침실로 유혹하려 들면 그때는 야멸차게 거절하
면 되는 거야.
베리티는 응접실로 안내를 받으며, 그가 언제 손을 뻗어 올까 하고 생각했다. 홀트가 시계
를 한 번 흘끔 보고는 우아한 탁자 쪽으로 걸어가면서 말을 걸 때도 속지 않았다.
"당시을 이리 데려온 이유 중의 하나는 당신에게 장래의 집을 구경시켜 주고 싶었기 때문
이지."
어쩌면 이렇게도 친절하실까! 다른 이유는 굳이 들을 필요가 없었다. 집안을 안내하면 당연
히 이층도 보게 될 것이 아닌가.
홀트에게 특별한 환상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너무나 뻔뻔스럽게 일을 밀고 나가는 그
에게 베리티는 왠지 실망을 느꼈다. 그가 책상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내 가지고 돌아왔다. 그
녀는 열심히 미소를 지으면서 한편으론 경계하며 그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당신의 집에까지 가자면 족히 한 시간은 걸릴 테니 시간이 없어. 이 집의 구경은 다음으
로 미루지."
"어마!" 베리티의 집에서 저도모르게 놀람의 소리가 새어나왔으나 곧 가볍게 말했다. "그래
요, 시간이 좀 늦어진 것 같군요." 이 게임은 도대체 언제까지나 계속될것인가.
"당신을 여기까지 데리고 온 이유는 말이오." 베리티는 그의 뺨을 갈길 사태가 벌어지지
않도록 해주십사고 빌면서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당신을 바래다 줄 때 당신의 아버지
가 아직도 깨어 있을 것 같아 그런거요."
행동으로 옮길 때 아버지가 가까이에 있지 않기를 바란다는 홀트의 약간 노골적인 태도에
그녀는 다시금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밤늦게까지 서재에서 일하시는 때가 많아요."
"그렇지가 않은가 싶었지." 그런데 다음 순간, 홀트는 조그만 보석함을 베리티에게 보이면
서 뜻밖의 말을 하여 그녀를 놀라게 만들었다. "이것을 당신한테 줄 때는 단둘이 있고 싶었
던 거요."
베리티는 홀트가 보석함의 뚜껑을 열고 눈부신 다이아몬드 반지를 꺼내는 것을 그저 멍하
니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가 흐릿해지고 말할 수가 없었다. 홀트가 자기의 왼손을 잡고 약손
가락에 반지를 끼울 때도 그녀는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마음에 들어요?"
"어머나, 홀트!" 베리티는 소리쳤다. 그녀는 너무나 경황이 없었기 때문에, 홀트가 몸을 수
그려 그녀의 볼에 살며시 키스했을 때 이것이 게임이라는 생각은 전혀 머리에 떠올리지 못
했다. 베리티는 가슴이 꽉 차고 눈물이 솟아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반지에서 눈을 떼고
홀트를 보았다. "아, 홀트!" 그녀는 다시 한번 말했다. 그 후 두사람이 키스를 주고 받는 것
은 참으로 자연스러운 진행이었다.
홀트의 키스를 받자, 마지막으로 웃는 자가 되자고 했던 계획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
다. 한번 홀트의 팔에 안기자 베리티는 이것이야말로 자기가 바라던 것이라는 것밖에는 아
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홀트의 키스를 받자, 마직막으로 웃는 자가 되자고 했던 계획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
다. 한번 홀트의 팔에 안기자 베리티는 이것이야말로 자기가 바라던 것이라는 것밖에는 아
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홀트에게 꼭 안겨서 키스를 하고 있는 동안, 그녀는 키스만으로는 끝낼 수 없을 만큼 가
슴이 뿌듯해 오는 것을 느꼈다. 언젠가의 아침처럼 홀트에 의해 정열이 들쑤셔져 그녀는 이
내 불처럼 확 달아올라 거세게 그를 바랐다.
베리티는 그의 품안에서 그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장의자까지 그에게 안겨서 갔는지
자기 발로 걸어서 갔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그저 그를 꼭 끌어 안고 그이 애무를 받는
것이 다시없는 기쁨이 되었다. 홀트의 손길 밑에서 가슴이 거세게 들썩거렸다. 그녀는 숨을
헐떡이고 한숨을 쉬며 욕망의 불길을 태웠다. 그녀의 몸을 쓰다듬던 손길은 머리를 감ㅆ고,
뜨거운 입술이 다시 키를 해왔다. 홀트도 뜨겁게 불타고 있었다. 두 사람의 애무는 요전에
넘지 못했던 선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러나 베리티는 그때의 일은 생각지도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이윽고 홀트가 베리티
를 바라는 거센 욕망에 눈을 빛내면서 신음하듯이 말했다.
"아, 당신을 갖고 싶어!" 홀트는 키스를 계속하면서 말했다. "좀더 일찍 당시을 돌려보내야
했어. 하지만 지금은 안 돼. 당신은 내것이야."
나도 그래요. 하는 느낌을 담은 베리티의 따뜻한 미소가 문득 얼어붙었다. 그때 뜻밖에도,
홀트가 전에 했던 ;두번재는 놓치지 않겠어.'라는 말이 뇌리에 떠오른 것이다.
그 순간 베리티는 조리 있게 생각한 결과에서라기보다는 본능에 의한 전광석화의 기세로
장의자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도대체 왜?" 홀트도 일어섰으나, 베리티는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
"안돼요!" 그녀는 굳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홀트에게 와락 팔을 붙잡혀 그에게로 몸이 돌려졌다.
"안 된다니?" 홀트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당신은...."
'내가 어땠는지 알고 있어요. 게다가......지금 어떤 마음인지도......." 베리티는 떨면서 모든
것을 말해 버리느냐 마느냐로 망설였다.
"당신은 나를 바라고 있어." 홀트느 쥐어짜는 목소리로 거칠게 말했다.
그는 다시 한번 베리티를 안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거세게 버둥거려 그의 손길에서
벗어났다.
"물론......나도 당신을 바라고 있어요." 베리티는 히스테릭하게 소리쳤다. 그를 육체적으로뿐
아니라 마음으로도 바라고 있다. 하지만 결코 그렇게 될 수 없을거라는 쓰라린 생각에 눈물
이 솟구쳤다. 이 자리에서 도망쳐 숨고 싶어. 마음의 상처를 보이기 싫어. 어디에 틀어박혀
다시는 나오기 싫다는 생각에 몰려, 홀트와의 말씨름을 견뎌낼 수 있을지 어떨지 알 수 없
었다. 그런데, 그녀가 홀트를 바라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 때문인디, 아니면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을 보았기 때문인지, 홀트이 말은 갑자기 따뜻해졌다. 말다툼을 그만두고
거절하는 까닭을 듣고 싶어했다.
"왜 그러는지 말해 주지 않겠소?" 그는 조용하게 물었다.
베리티는 그의 시선이 자기의 드러난 가슴께를 흘끔흘끔 쳐다보는 것을 알고 우선 옷매무
시를 고쳐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손을 놀릴 수는 없었다.
"특, 특별한.....이, 이유가 있는 것 아니에요." 베리티는 말을 더듬었다. 그녀가 너무나 당황
한 것을 보고 홀트는 잠시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나뭇잎처럼 떨고 있군." 드레스의 파스너를 올려주며 그는 시무룩하게 말했다.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조금 침착을 되찾게 되자, 자기가<나뭇잎처럼 떠는 것은>누구의 탓
도 아닌 바로 홀트의 탓이라는 공격적인 생각이 떠올랐다. 홀트의 손길에서 풀려나자 마음
이 놓여 차츰 제대로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그녀 앞으로 돌아와 얼굴을 마주보았
다.
"그렇게 갑자기 뛰쳐 일어나다니, 무언가가 있는 것이 틀림없지? 도대체가 뭐요?" 홀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갑자기 무서워진 거요? 무서워할 것은 하나도 없었는데. 난...."
"그게 아니에요." 베리티는 거짓말을 생각할 사이도 없이 정직한 천성을 그대로 드러내어
솔직하게 말했다.
"우린 아직 결혼하지 않았잖아요."
"아이구, 참!" 홀트는 어이없다는 듯이 내뱉었다.
그 말에 베리티는 울컥해졌다.
"당신은 그래도 좋겠지요.!" 그녀는 불처럼 화가 나서 말했다. "하지만 난 집으로 돌아가
아버지와 얼굴을 마주쳐야 한단 말이예요."
"당신 아버지가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는 짐작을 못하고 있는 줄 알아?"
홀트이 비아냥거림을 듣자 베리티는 더욱 속을 끓였다. 그러나 조금 전에 너무나 정직하게
지껄여 버린 것이 생각나 이번에는 조심했다. 그녀는 어렵게 홀트에게 등을 돌리고 말했다.
"당신은 이런 일을 전에도 해본 일이 있지요? 난.....없어요." 그러다가 결국은 정직하게 털
어놓아 버렸다.
"난.......집으로 돌아가 아버지의 눈을 볼 수 없을 것 같아요."
홀트는 오랫동안 아무말도 않고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윽고 베리티는 그가 등뒤로 다가오는 것을 느꼈고, 그의 손이 살며시 어깨 위에 얹혀지
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또 속으로 흠칫했다. 그러나 홀트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저 그녀
를 현관 쪽으로 이끌고 갔다. 그는 문간까지 가서 멈추어 서더니 베리티를 돌려 세우고 조
용히 물었다.
"나는 너무나 당신을 바라는 나머지 잘 알고 있는 베리티는 성실해 보이는 그의 표정에 속
아넘어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맞장구를 치기로 했다.
"아무것도 용서해 줄 일이 없어요." 베리티는 방긋웃으며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현관문에 자물쇠를 채우면서 홀트가 하는 말을 듣자, 그를 계단에서 떠밀어 곤두박
질치게 하고 싶어졌다. 그는 이렇게 말한 것이다.
"될수록 서둘러 결혼 준비를 하는 게 좋겠군."
10
베리티는 버치우드 하우스의 응접실에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가 고집을 버리고 빨리
자기 손으로 거짓 약혼에 끝장을 내주면 좋겠어. 홀트가 그렇게 나오기를 기다리는 건 너무
나 괴로웠다.
홀트가 그녀의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워 준 뒤로 줄곧 베리티는, 다음 데이트에서는
그가 그럴듯한 말로 반지를 돌려 달라고 할 것이라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때는 어떻게
대답해서 그를 한 대 먹여 줄 것인가 하는 것까지도.
약혼한 지 벌서 1개월이나 지났다. 한두 번 데이티를 하다가 홀트는 마침내 안녕이라는
말을 꺼낼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는데, 그는 아직도 그런 내색을 하지 않고 있다. 그의 작별
의 말을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 것과, 어차피 헤어질 것이 뻔한데도 그를 더욱 사랑하게 되
는 것, 어느 쪽이 더 괴로운지 알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베리티는 마음을 가다듬으려고 애쓰지 않는 것은 아니었따. 그러나 홀트와 같이 나다닐
때마다, 이제는 즐거운 마음을 갖지 말자, 그는 나를 속이며 웃고 있다, 하고 자기를 타일렀
지만 데이트의 끝맺음은 언제나 마찬가지였다. 베리티는 눈을 빛내며 방으로 올라가는 것이
었다. 홀트가 재미있는 말을 하기 때문에 베리티는 웃지 않을 수 없었고, 대개의 화제에서
그와 그녀는 의견의 일치를 보였다.
그런 것은 아무 쓸모가 없는 거야, 하고 베리티는 씁쓸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가 찢
어지는 듯 아픈 마음으로 약혼이야기를 했을 때, 아버지는 크게 기뻐했었다.
다이아몬드 반지를 주었던 그날 저녁, 홀트는 드레이크스 나이튼에서 그녀의 집까지 바래
다 주었다. 그때 시간이 너무 늦다는 핑계로 베리티는 그를 집으로 들어오라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고 있었다. 베리티가 걱정되어 일어나 있었던 것을
숨기면서, 데이트가 어땠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그녀가 데이트를 거듭할 마음을 가지고 있
지 않다는 것을 홀트가 아느냐고 슬그머니 물어 보았다.
"잘 모르는 것 같아요." 하고 베리티가 대답했다.
그러나 홀트의 진심 어린 키스를 받은 뒤였기 때문에 그녀의 눈을 빛나고 있었다. "사실
은 말이에요." 이것이 아버지에게 하는 최대의 거짓말이 되리라고 생각하면서 그녀는 말했
다. "나에 대한 홀트의 마음은, 그에 대한 내 마음과 똑같다는 것을 알았어요."
"다시 말해서.....그 남자가 널 사랑하고 있다 그 말이냐?" 클레멘트는 큰소리로 되물었다.
지금도 베리티는,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의, 그때의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릴 수가 있다.
이윽고 아버지는 홀트의 농담이 도가 지나치다고 생각했던지 표정을 굳혔다. 그러나 베리
티가 약속가락에서 반짝이고 있는 값비싼 다이아몬드 반지를 보이다 또 표정이 달라졌다.
아버지는 처음에는 입을 딱 벌리고 있더니, 다음 순간 얼굴빛이 변했다.
"너 홀트와 약혼했단 말이냐?" 아버지의 얼굴에 웃음이 넘치고, 말투는 자랑스러웠다. "네
어머니는 네가 언제가는 그 갈색의 커다란 눈으로 눈깜짝할 사이에 남자를 사로잡을 거라고
말했는데, 그게 맞았구나."
베리티는 아버지의 반응에 대해서는 아무런 예상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홀트의 책
략을 알고 있는 아버지가 베리티의 이야기를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사실이 그녀로
서는 뜻밖이었다.
"아빠는 저어, 이게 너무 갑작스런 일이라고는 생각지 않으세요?"
"너희 어머니하고 나도 그랬단다."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할 뿐이었다. 그러나 베리티늬 의
아해 하는 마음을 짐작했는지 금방 또 말을 이었다. "홀트는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머뭇거
리지 않고 행동에 옮겨 손에 넣는다는 평판이 있는 남자란다. 만일 어제의 그 이야기로 네
가 걱정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기우다. 그가 바라고 있는 것은 너라는 데는 이제 아무런 의
심도 가질 필요가 없어. 뭐니뭐니해도 너는 그가 준 약혼 반지를 끼고 있지 않니."
"그 일은 걱정도 하지 않아요." 베리티는 미소지었다.
그러나 홀트가 그녀를 골탕먹일 계획을 변경한 것으로 아버지가 믿는다면, 아버지는 홀트
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클레멘트는 빙그레 웃고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잘됐다. 너와 결혼할 마음이 없다면 홀트는 절대로 반지를 주거나 하지 않을 거다."
아버지는 기꺼이 홀트를 사위로 맞이하려고 하는 것이 분명했다. 기뻐한 사람은 아버지뿐
이 아니었다. 이튿날 아침식사로 무엇을 들겠느냐고 물어러 온 미세스 트루먼이 그 소식을
듣고, 베리티가 결혼하여 드레이크스 나이튼으로 가버린다면 쓸쓸해서 어떻게 살겠느냐고
눈가를 적셨다.
미란다도 눈물 젖은 목소리로 베리티를 놀라게 했다. 홀트가, 반지를 준 것은 연극이었다
는 최후의 말을 하러 금방이라도 찾아오는 것이 아닌가 두려워하고 있는 동안에 한주가 지
났다. 더 이상 또래들에게 어울려 나다니지 못하는 이유를 둘러댈 수가 없게 된 베리티는
마침내 미란다에게 전화를 걸어 홀트와 약혼했다고 말했던 것이다.
"어머나, 어쩜 그럴 수가!" 미란다는 괴성을 질렀다. "그를 유혹하라고 말해 준 것은 기억
하고 있지만 네가 그에게 빠지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어."
"나도 그랬어." 베리티는 저도 므르게 대답했다. 처음 홀트를 만난 순간, 베리티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에게 빠져 버렸던 것이다.
"어머나, 베리티!" 미란다의 목소리는 따뜻해졌다. 넌 정말 그를 사랑하고 있단 말이니?"
베리티는 헛기침을 했다. 속마음을 들여다보인 줄은 알았지만 그녀의 자존심은 친구에게
조차도 모든 것을 털어놓기를 거절했다. 그러나 미란다는 베리티의 침묵이 부끄러움 때문인
줄 알고 더욱 다그쳐 물었다.
"결혼식은 언제니?"
홀트는 될 수록 빨리 결혼을 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을 믿을 수 없는 증
거로, 그는 그뒤로 한번도 그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저어, 아직 날짜는 정하지 않았어."
베리티는 한동안 더 미란다와 이야기를 나눈 후 전화를 끊었다. 미란다가 늘어놓은 지난
주에 그녀 일행이 버렸던 소동 이야기가 그전처럼 재미있게 생각되어지지가 않았다. 그때
베리티는 자기가 모르는 사이에 어른이 되어 버린 것을 깨달았다.
사랑을 함으로서 어른이 되었다고 해도, 홀트를 알게 된 것은 나에게는 아무 이익도 되지
못한다. 그가 나의 인생에서 떠날 때면 나는 너무나 어른이 되어 친구도 없게 되겠지. 하지
만 그때는 이미 뒷걸음 칠 수도 없을 거야.
그날 저녁 홀트와 같이 나갈 채비를 마쳤을 때도 베리티는 여전히 무거운 기분에서 벗어
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헤어지자는 말을 하는 것은 오늘 저녁이 될까?
베리티는 온종일 신경이 팽팽하게 긴장돼 있었기 때문에, 만일 오늘도 홀트가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면 자존심과 함께 오랫동안 자기를 지탱시켜 준 고집의 벽이 무너질지도 모른다
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가 시작한 게이을 자기가 끝장내게 될지도 모른다 싶으니 무서워졌
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세상없어도 그가 끝내도록 해야지.
이런 상태를 언제가지고 끌고 갈 수는 없어. 그러니 만일 홀트가 끝낼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않는다면 무리하게 그렇게 하도록 만들 방법을 생각해야지.
홀트가 마중왔을 때, 베리티는 활짝 웃는 얼굴 뒤에 어두운 마음을 숨기고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나 정시군요." 그렇게 말하면서 자기를 안고 키스하는 홀트의 팔에서 빠져나왔다.
"당신을 골로 생각하고 최대한 스피드를 낸 거요." 홀트의 농담에 베리티는 미소를 지었고,
두 사람은 차 있는 데로 걸어갔다.
홀트는 개점한 지 얼마 안되어 요란하게 선전을 하고 있는 레스토랑으로 그녀를 데리고
갔다. 그러나 요리의 맛은 광고처럼 좋지 않았다. 그는 별로 요리에 손을 대지 않았으며 ,
두 사람은 이내 그곳을 나왔다. 베리티를 다시 차에 태우자 홀트는 말했다.
"우리 집에 가서 토스트나 콩을 먹는 게 어떨까/'
홀트는 농담으로 한 소리였다. 베리티도 그것을 알고 맞장구 치려고 했다. 그런데 뜻밖의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고 말아 곧 후회했다.
"그러고 보니, 당신이 집을 구경시켜 준다고 했는데, 아직도 못했군요."
홀트는 차를 로워 파세트 쪽으로 돌리고 나서 대답했다.
"당신은 그 이유를 모를 만큼 숙맥은 아니겠지?"
베리티는 순간 흠칫했다. 홀트는 그녀가 그의 게임에 응하고 있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나 싶어 오싹했다. 그러나 요즘 빈번하게 일 관계로 홀트를 만나고 있는 아버지조차
아무것도 모르는데 그럴 턱이 없다고 생각하자 쇼크는 사라졌다. 그녀는 시간을 벌고자 했
다.
"미안해요, 홀트. 난 분명 숙맥인가봐요. 이유를 모르겠는걸요." 베리티는, 내가 당신의 집
에 살 가능성은 전혀 없으니 구경할 필요도 없다는 이유라면 알겠지만, 하고 속으로 말했다.
"당신이 맨 처음 우리 집에 왔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잊었단 말인가?" 홀트는 약간 차
갑게 말했다.
"아, 그 약혼한 날 밤!" 베리티는 소리쳤다. "그렇군요." 그녀는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
았다.
홀트가 그녀의 집 앞에 차를 세울 무렵, 베리티는 그런 일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홀트가 말없이 차를 모는 동안 그녀는 새로운 방법을 생각해 내고 있었다. 홀트가 말없이
차를 모는 동안 그녀는 새로운 방버을 생각해 내고 실행에 옮기려고 결심을 다지고 있었던
것이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생각해 낸 것은 그녀의 초조감이 극도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신
경을 곤두서서, 때로는 지독한 우울증에 빠져 가면서까지, 홀트가 작별의 말을 꺼내기를 기
다릭 있어야 하는 마음이 없는데 욕망에 사로잡혀 그녀를 범하는 위험을 저지르지 말자고
마음을 다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버지가 그토록 높이 평가하는 홀트의 고결성을 시험해
볼 찬스가 오늘 밤이 아닐까 하고 베리티는 생각한 것이다.
베리티는 차에서 내리자 홀트에게 방긋 웃어 보이며 말했다.
"토스트는 못들겠지만, 잠깐 들어가 커피나 마시지 않겠어요?"
그는 대답 대신 베리티늬 팔을 잡고 현관의 계단을 올라갔다. 그녀는 미세스 트루먼이
친구 집에 묵으러 간 것을 말할 생각이 없었다. 게다가 묻지 않는다면 아버지가 없다는 것
도 이야기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위험한 시도이기는 하지만 그녀는 홀트를 시험해 볼 생각
이었다. 홀트가 그녀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 그의 고결성을 망쳐 버리거나, 아니면 그 한발
앞에서 멈추어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을 수 없는 꼴이 되거나 할거라고 베리티는 생각한 것
이다.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베리티는 홀트를 객실로 안내하여 의자를 권했다.
"같이 앉지."
홀트에게 손을 잡혀 장의자에 끌어당겨졌다. 이런식이라면 일이 뜻대로 착착 진행될 것
같았다.
"난 요즘 무지무지하게 바빴지." 홀트는 싱긋웃으며 순진해 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
았다. "하지만 그것도 모두 일의 매듭을 짓기 위해서였지."
홀트는 하필 이런 때 사업상의 이야기를 거내다니, 학고 베리티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
나 미소를 지으며 그의 옆에 앉았다.
그녀는 드레스 자락이 구겨진 것을 폈다. 그 순간 베리티의 볼이 홀트의 볼을 가볍게 스
쳤고, 그녀는 그에게로 고래르 돌렸다.
마치 마법과도 같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의 입에 유도 장치라도 달려 있는 것처럼 홀
트도 동시에 돌아보았고,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와 닿았다. 지금까지와 달리, 홀트가
몸을 뒤로 빼려고 하자 베리티는 두 손을 그의 어깨에 얹고 키스해 달라는 유혹의 빛을 분
명하게 떠올렸다.
홀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시선만을 그녀의눈에서 입술로 ㅇ겼다.
"지난 한달은 당신으로서도 괴로운 인내의 기간이었겠지?"그는 베리티의 갈생 누능로 다
시 눈길을 옮기면서 따뜻하게 물었다.
"지옥 같았어요." 하고 그녀는 인정했다. 그리고 갑자기 가슴을 찌르는 아픔을 홀트에게
눈치채이지 않으려고 눈을 내리깔고 말을 계속했다.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요."
"베리티…"홀트는 그녀의이름을 부르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대답으로 그는 만
족한 것 같았다.
그는 이토록 보복을 하는 것이 즐거울까? 베리티는 새삼 그에 대해 증오심을 느꼈다.
그런데 베리티의 욕망에 응하는 것처럼 홀트는 다시 한번 따뜻하게 입술을 포개왔다. 베
리티는 증오심과는 또 다른 감정의 폭풍에 휩쓸리게 되었다. 홀트의 팔에 힘이 가해졌다. 베
리티는 이번에는 이유가 있어서 홀트의 팔을 부리치지 않는 것이라고 합리화하기가 함이 들
었다. 이윽고 그녀 쪽에서 홀트의 가슴에 파고 들었다. 그의 욕망을 도발시킨 이유조차 차츰
희미해져 갔다.
홀트가 몸을 빼려고 했을 때 그녀는 문득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베리티는 그의 입술을 계
속 원했다. 홀트는 마침내 신음소리를 내면서 그녀를 장의자에 누이고는 몸을 포갰다.
홀트의 따뜻한 입맞춤을 받는 동안 베리티는 이내 모든 것을 잊었다. 그녀는 자신이 연극
을 시작한 이유를 잊어버렸고, 자기를 찾는 그와 그를 찾는 자기 말고는 아무것도 의식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언젠가의 밤처럼 이번에는 갑자기 홀트가 그녀로부터 몸을 떼어 떨어져 나갔다.
베리티는 고통을 맛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자업자득의 고통이었다. 자기와는 결혼할
마음이 없다는 것을 홀트의 입으로 직접 들으려다가 스스로 부른 고통이므로.
기억이 되살아나자 베리티는, 자기가 홀트를 더 미워하는지 자기 자신을 더 미워하는지조
차 알 수 없었다.―그녀가 정신이 없게 되었을 때도 이성을 잃지 않는 홀트가 얄미운가, 아
니면 다 알고 있으면서도 그의 키스에 황홀해지지 않을 수 없었던 자기가 더 증오스러운가.
그러나 아직 욕방을 가라앉히지 못한 홀트가 그녀의 가슴에 시선을 던지면서 거센 목소리
로 명령함으로써 그녀의 증오심을 강하게 불러일으켰다.
"부탁이니 옷을 좀 단정하게 입으라구!"
베리티는 한방먹은 기분이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매무시를 가다듬었다. 무슨일이 일
어날 것인가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몸을 고쳐 앉아. 홀트의 말에 대비하여 침착을 되찾으려
고 애썼다. 누구앞에서든 눈물을 보인다는 것은 자존심이 용서하지 않는 일이었다. 홀트가
반지를 돌려 달라고 했을 때 우는 꼴을 보이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베리티는 이
순간을 위해서 되풀이 연습했던 대사를 생각해 내려고 애썼다. 그러나 한마디도 떠오르지 d
않았다. 그 사이 홀트가 장의자 옆의 의자에 앉더니 불쑥 말했다.
"당신이 들렀다 가라고 한 이유를 잊어버리게 만든 것이 나빴어."
그러고 보니 아까 홀트가 그녀를 옆에 앉히고는, 요즘 바빴던 것은 일에 매듭을 짓기 위
해서였다고 한 말이 어려품이 생각났다.
"어쩐지…뜻밖에 일이 되어 버린 것 같군요." 베리티는 더듬거렸으나. 홀트가 무슨 말을
하든 끝까지 자존심을 지켜 나가겠다고 몸을 사렸다.
"하지만 이렇게 숨이 막힐 것 같은 느낌을 참아내냐 하는 날도 이제 얼마 안 남았소."
홀트가 진심을 밝히는 것이 얼마 안 남았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를 앞지르고 싶
어 안달이 나는 마음을 꾹 누르고, "그래요?" 하고 말했다.
홀트가 빙그레 웃는 것을 보자 노여움이 치밀어 올랐다. 노여움이야말로 자존심을 받쳐
주는데 가장 힘이 되는 것이다. 어쩌면 이렇게도 야비하고 비겁한 남자가 다 있을까 생각하
자 그녀느화가 났다. 몇 분 전만 해도 그녀 못지 않게 정열에 휩쓸려 있던 주제에 지금은
승리감에 노골적으로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는 거야!
베리티는 아슬아슬하게 노여움을 폭발시키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홀트의 그
다음말에 노여움도 무엇도 다 날아가 버렸고, 그녀는 말도 못하고 그저 멍하니 그를 쳐다보
고 있었다.
"다행히 오즘 기를 쓰고 일한 덕택에 겨우일 걱정을 하지 않고 당신과 허니문을 보낼 수
있게 된 거요."홀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 말이 머릿속에서 소요돌이를 쳤다. 베리티는 자기가 얼마동안 이나 홀트를 바라보고
멍하니 앉아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겨우 나온 목소리는 착 가라앉았고, 토막토막 끊어져
나왔다.
"허니문…이라니요?"
"놀란 것 같군" 홀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나의 일이 매듭이 지어졌으니 더 이상 기다릴 마음이 없어졌다는 것을 당신은알고 있겠
지."
그 때 몸이 얼어붙을 것 같은 느낌으로 베리티가 이해한 것은, 홀트의 보복에는 끝이 없
다는 것이었다. 그는 아직도 미간을 찌푸린 채 베리티를 더욱 혼란하게 하는 질문을 했다.
"이번 주말에 결혼한다 해도 당신은 아무 지장이 없겠지?"
만일 홀트가 성실한 사람이었다면 나는 이말에 얼마나 몸을 떨었을까.
"물론 좋아요."하고 그녀는 대답하고 미소까지 띠며, 자기가 정신없이 좋아하지 않는 이유
를 댔다. "미안해요, 난 아직 약간 멍해서요…아까 그 일 때문에."
"껴안은 것 말이오?"
베리티는 다시 한번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난 너무나…그런일에 익숙하지 못해서 금방…"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홀트가 의자에서 일어나 그녀 옆으로 왔다.
"불쌍한 베리티." 그는 그녀의 몸에 팔을 감고 중얼 거려ㅆ. 그러고는 놀리듯이 말했다.
"나로서도 대수롭지 않은 일이 아니었소. 믿어줘." 그러고는 바로 진지한 태도로 돌아갔다.
"아까 당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가만히 놓아 두신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이번에는 내가 찾
아가 우리의 예정을 이야기해야겠어. 서재에 계신가?"
"아버지는 오늘 저녁 밖에 나가셨어요."베리티는 털어놓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홀트는 전혀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그럼 상관없어요. 내일 만나기로 하지."
그날 저녁 베리티는 침대에 누워, 홀트가 결혼할 마음도 없으면서 결혼 날짜를 잡을 만큼
철저하게 나에게 복수하려고 한다 생각하자 마음의동요가 너무나 심해져 아무것도 생각할
수도 느낄 수도 없었다.
그러나 이튿날 아침 잠이 깼을 때는 얼음 같은 차가운 노여움이 그녀를 사로잡고 있었다.
그 노여움은 지금까지 경험한 불타는 것 같은 거세 노여움보다 더 고약한 것이었고, 그 뒤
의 며칠 동안을 베리티에게 달라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홀트의 음모를 생각 할 때마다 그
녀는 더욱더 노여움 속에 갇히게 되는 것이었다.
홀트는 그녀의 아버지를 만나는 일까지 서슴없이 해냈다. 홀트가 그렇게까지 할 수 있다
는 사실을 생각하자 베리티는 소름이 끼쳤다. 그녀는 그로부터 아무론 따뜻한 말도 듣지
못했기 때문에―기대한 것도 아니지만―결말을 낼 때가 오면 홀트는 인정사정없이 행동할
것라는 확신을 더욱 굳히게 되었다.
아버지의 눈을 속이기 우해 베리티는 하얀 드레스를 준비했다. 스커트 기장이 짧은 드레
스 였다. 아버지에게는 갑잡스런 일이기 때문에 조촐한 식을 올릴 것이므로 롱드레스는 어
울리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아버지와 미세스 트루먼에게 모든 것이 순조롭게 되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베리티는 자기의 홀트에 대한노여움이 더욱 커져 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홀트와
얼굴을 마주 대하면 이제 가식적인 미소를 짓는 것조차 힘들게 되었다.
그래서 베리티는 결혼을 위한 준비를 산더미처럼 많이 생각해 냈다. 홀트도 2개월 동안의
허니문을 떠나기 위해서 해치워야 할 일이 많은 듯했다. 그래서 결혼식 날까지는 만날 수
없을 것 같다는 그녀의 제안을 홀트가 납득해 주어 그녀는 마음이 놓였다.
밤마다 그에게서 전화가 오면 베리티는, 오늘이야말로 흰드레스는 필요없다는 말이 그의
입에서 나오지 않을까 하는 희미한 기대를 가졌다. 그러나 헛일이었다. 자기가 먼저 거절하
지는 말자는 베리티의 굳은 마으은 결혼식 전날인 목요일에는 콘크리처럼 굳어져 있었다.
"잘 되어가고 있나?" 그날 저녁 전화를 걸어 온 홀트가 물었다. 지금에 이르러서도 여전
히 자기와는 결혼을 원하는 체하는그의 말을 듣자 베리티의 가슴에는 찬바람이 일었다.
"걱정없어요. 바쁘지만."
"정말?"홀트는 다짐을 했다.
"마음 푹 놓으세요."베리티는 애써 소리내어 웃었다. "다만… 결혼을 앞두고 신경이 좀 곤
두서 있을 뿐이에요."
지금이다.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의걱정하는 척하는 말투가 꾸며낸 것이라면 지금이야
말로 홀트는 본심을 털어놓겠지. 그러나 홀튼 한동안 사이를 두었다가 이해한다는 듯한 목
소리로 말했다.
"무서워할 것 없어요. 베리티. 잘 될 것야. 내가 보장하지."
어쩌면 그는 이런 투로 말할 수가 있을까. 홀트가 결혼 날짜를 입에 올린 뒤로 베리티는
이때 제일 울고 싶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홀트의 말이 귀에 쟁쟁하게 울려 마음이 아팠
다.
그러나 절대로 울지 말자고 기를 썼다.
베리티는 감싸고 있던 얼음에 조금 금이 갔으나 이날 아침에는 다시 먼저처럼 메워졌다.
그러나 미세스 트루먼이 방긋 웃으며 침대에 아침식사를 날왔을 때 그녀는 또 하마터면 눈
물을 흘릴 뻔했다. 그 자리는 그럭저럭 얼버무리고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신부의 꽃이
준비가 안 된 것을 안 미세스 트루먼이 솜씨를 있는 대로 발휘하여 아주 작고 귀여운 꽃다
발을 공들여 만들어서 갖다 주었을 때, 그녀는 다시 코끝이 찡해오는 것을 느꼈다.
"고마와요, 투루디." 하고 베리티는 겨우 말했으나 목이 메어 고개를 돌렸다.
식은 열 한 시로 예정되어 있었다.
15분 전이 되었을 때도 홀트로부터 최후의 통고는 없었다. 차로 몇 분이면 갈 수 있는 교
회에 데리고 가기 위해서 곧 아버지가 모습을 나타낼 것이다. 그때, 미세스 트루먼의 따뜻한
보살핌으로 신부의 차림을 한 베리티의 가슴에 금이 가시 시작했다.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화장대 앞에 앉아 자기의 고집스러워 보이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
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고통이 가슴을 쿡 찌르더니, 이윽고 베리티가 지금까지 경험해
본 일이 없는 참을 수 없을 정도의 마음의 아픔이 덮쳐들었다. 요 며칠 동안 그녈르 가두어
놓고 있던 차가운 얼음이 느닷없이 깨지기 시작하더니 눈깜짝할 사이에 녹아 버리고 마는
것을 그녀는 어쩔 수가 없었다. 마침 그 순간에 아버지가 들어왔다.
"채비는 다 되었니?"
베리티는 살을 에는 것 같은 고통에 싸여 말없이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이 고통을 제거하
기 위해서라면 아버지의 도움도, 누구의 도움도 마다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역
시 아버지의 귀여운 딸의 역할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괴로움은 한 여자로서의 괴로움으로,
아버지의 키스로 나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불안하니?" 베리틴의 눈에 지금까지 본 일이 없는, 무언가에 들씌운 것 같은 빛이 서린
것을 보고 아버지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너답지 않구나." 그는 따뜻하게 격려했다. "그럼
갈까? 시간에 늦는 것이 보통이라지만......"
"전.......가지 않겠어요."
"뭐, 뭐라고?" 클레멘트 다이안몬드는 자기가 잘못들은 줄 알았다.
"전.....홀트 제퍼슨과 결혼할 마음이 없다고 말한 거예요."
"농담이겠지?"
베리티는 고개를 저어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냈다. 이윽고 아버지의 표정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고통에 울부짖고 있는 베리티에게 이유를 물었다. 그녀가 대답을
못하자 그는 달래기 시작했다. 그것이 안되자 이번에는 명령으로 움직이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도 통하지 않는 것을 보고는 미친 듯이 화를 냈다. 슬픔에 가슴이 잡아찢기는 것 같은
베리티를 향하여 족히 5분 동안이나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그녀의 결심은 조금도 흔
들리지 않았다.
"이게 도대체 어찐 된 일이냐!" 아버지는 고함을 쳤다. "이런 소동은 절대 용서할 수 없
다! 여기서 움직이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 돌아와서 할말이 있으니까!"
아버지가 교회에 들어가 홀트에게 이야기해 봐야 헛일이라 생각했으나 베리티는 너무나
가슴이 아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 그토록 참아 온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탁 흘러내렸
다.
쓰디쓴 짭짤한 눈물과 함께 경련과도 같은 애끓는 흐느낌이 새어나왔다. 아무리 울어도
마음의 아픔은 씻어낼 수 없다. 그래도 흐느낌은 그치지 않았고, 눈물도 멈출 수 없었다.
얼마나 그렇게 울고 있었을까. 마치 그녀를 가두고 있던 얼음이 모두 녹아 눈물이 되어
흐르는 것처럼 베리티는 울고 또 울었다. 그러나 그녀는 마음이 잡아찢기는 아픔밖에는 아
무거도 느낄 수 없었다. 그때 그 고통을 꿰뚫는 것처럼 차가 맹렬한 스피드로 대문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베리티는 사정을 알게 된 아버지가 그녀에게 사과하러 서둘러 돌아오는 줄 알았다. 그녀
의 난폭 운전에 대해 몇 번이나 엄격하게 설교를 한 일도 잊어버리고.
그러나 엔진 소릭 멎고, 몸집이 뚱뚱한 아버지의 발소리보다 훨씬 기운 좋은 발소리가 귀
에 들렸다. 그러자 자존심이 강한 베리티의 손길은 본능적으로 눈물에 젖은 얼굴을 닦으려
고 티슈 페이퍼로 뻗어졌다. 그녀의 생각은 갈기갈기 찢기고 있었다.
11
베리티는 계단을 뛰어올라오는 힘찬 발소리를 들으면서 혼란스러워진 머릿속을 가다듬으
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아버지도 미세스 트루먼도 그렇게 계단을 올라오지 않는다는 것밖
에는 어떤 생각도 떠올릴 수 없었다. 두뇌 회전이 마비되고 심장까지 멈춰 버리지 않았나
싶을 때, 발소리는 그녀의 방으로 다가왔다.
베리티의 눈은 방문에 못박혔다. 벌컥 문이 열리고, 홀트 제퍼슨의 모습이 문간 가득 나타
나싸. 다시 베리티의 심장은 두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그의, 고풍스런 하얀 샤쓰단춧구멍
에 꽃을 꽂은 다크 슈트 차림을 보자 베리티는 가슴이 두근거려 숨도 쉴 수 없게 되고, 눈
은 투이어나올 것처럼 커다랗게 떠졌다. 홀트가 교회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것은
큰 잘못이었던 것이다.
그녀가 본 것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경첩이 빠지는게 아닌가 싶게 거칠게 방문을 연 태도
에서 홀트의 노여움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적대감에 찬 눈으로 가만히 베리티를 바라보고
있었다. 베리티는 평상시의 얼굴빛을 잃어버리고, 격심한 노여움에 사로잡혀 자기를 잊고 있
었다.
이윽고 무시무시할 정도로 엄한 목소리로 홀트가 말했다.
"알고 있었지! 당신이 무언가를 꾀하고 있을 텐데 일이 너무 순조롭게 진행된다 싶었지."
내가 무언가를 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니! 아아, 어쩌면 이렇게도 뻔뻔스러울수
가! 베리티는 이때 처음으로 노여움이 치밀어 오르는 것이 반갑게 여겨졌다. 홀트가 날 이
층의 창문 밖으로 내던질 만큼 미쳐 날뛴다 해도 상관없다.
"자, 이제 알았지요?" 베리티는 홀트의 눈이 험악해지는 것도 아랑곳없이 내뱉었다.
"알고말고." 그는 오싹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게 된 이상 당신한테 두 가지 길 중 하나
를 선택하가ㅔ 해주겠어."
"관대하시군요." 베리티의 노여움에는 투지까지 끼여들었다. 홀트는 두 주먹을 쥐었다. 폈
다 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한 발짝도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어떤 관대한 선택의 기회를 주
겠다는 거지요?"
그녀의 말이 홀트의 노여움에 더욱 부채질을 했다.
홀트의 노여움 따위는 대수롭지 않다 싶었으나, 그의 대답으로 베리티는 멍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은 자기 발로 교회에 가거나, 아니면 나한테 끌려 가거나 해야 해."
내가 교회에 발을 들여놓으리라고 생각하다니. 베리티는 입이 딱 벌어졌다. 그러나 그녀는
얼른 다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어느 쪽도 난 못하겠어요! 내게 야만스런 행동을 했다간 가만있지 않겠어요!" 베리티는
소리를 꽥 지를고는 그가 다가들 기색에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그리고 분노에 모려,
그가 결혼할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다는 것을 잊고 말했다. "내 머리카을 움켜잡아 제단 앞
으로 끌고 간다해도 당신 따위와는 결혼하지 않아요."
"안 하고는 못 뱃길걸" 홀트는 짧게 대답했다. 목소리는 조용했으나 눈은 노여움으로 번쩍
이고 있었다. "나와의 약속은 누구도 깰 수 없어. 베리티 다이아몬드. 당신도 마찬가지야."
"뭐라구요? 난 당신을 뱀보다 더 미워하고 있는데?"
베리티는 비웃었다.
그때 홀트의 마음속에서 뭔가가 폭발한 것 같았다.
홀트는 뚜벅뚜벅 방 안으로 들어오더니 미세스 트루먼이 만든 예쁜 꽃다발을 움켜잡아 그
것을 베리티의 손에 밀어붙이는 것과 동시에 그녀를 잡아 끌었다.
"얼마든지 미워하라구. 하지만 우린 결혼하는 거야."
"싫어요!" 베리티는 미친 듯이 고함을 치며 꽃다발을 침대 위에 내던지고 두 손으로 홀트
를 밀어내려고 했다.
"당시은 신부 차림을 하고 있으면서 뭘 그래!" 홀트는 강철같은 손으로 그녀의 팔을 붙잡
고 놓지 않았다.
"당신도 그랬으면서 무슨 큰소리예요!" 베리티는 울부짖었다. 홀트의 완력은 그녀가 아무
리 버둥거려도 구경거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있는 가운데 제단까지
끌고 가고도 남을 것이다 싶으니 분해서 눈물이 솟구쳤다. "하지만 그건........"
"울어?" 베리티가 숨기려 했는데도 홀트는 눈치빠르게 그녀의 눈물을 보았다. 그의 격렬한
분노가 좀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때가지는 분노에 몰려 그녀의 눈이 충혈되어 있는 것을
깨닫지 못했던 홀트는 할긋할긋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뜻밖이라는 듯이 말했다. "당신
울고 있었나?"
"울면 어떻다는 거예요!" 베리티는 금방 몸을 가누고 고압적으로 되받았다.
"왜 우는 거지?" 홀트의 눈에 빈틈없이 궤뚫어 보겠다는 빛이 떠올랐다.
"우는 이유도 말해야 하나요?" 그녀는 대수롭지 않는 듯이 쏘아붙였으나 홀트가 그대로
지나치지 않으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당신은 잘 우는 타이프가 아니니까 그렇지. 자존심 덩어리인 당신은 절대로 어느 사람앞
에서도 울지 않았을 텐데. 세상없어도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이를 악무는 사람 아니
냐?"
"무척 훌륭한 사람처럼 들리네요!"
베리티는 홀트가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하지만 당신은 예뻐." 그는 칭찬 같지도 않은 투로 말했다. "자존심이 가하고 게다가 아
름다워, 그러나 그건 그저 겉모습에 지나지 않아. 그것말고도 당신은 퍽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 홀트는 베리티가 빈정거니는 말을 가로채려고 하는 것을 무시하고 계속했다. "거세고
무슨일에나 웃어넘기려고 하는 당신은 겉모습 밑바닥에는 감수성이 풍부ㅠㅏ소 마음이 따뜻
한 인간이 ㅅ어 있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지. 당신은 유순하고나을 생각할 줄 아는 여자
야. 자기보다 아버지를…"
"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지 않군요." 베리티는 날카로운 말투로 가로막았다. 음모인
줄 알면서도 홀트의 결혼 신청을 받아들인 것도 아버지를 위해서였던 것은 사실이다.
"난당신에 대해서라면 어느정도는 알고 있지만, 당신이 눈물을 흘리다니, 그건 이만저만
큰 일이 아닌 것이 틀림없어."
베리티는 홀트가 자기의 성격을 훤히 꿰뚫고 있는 것에 마음을 써본 일은 없었다. 그러나
그때 문득, 그가 나를 이처럼 잘알고 있다면, 조금 더 생각한다면 곧 내가 홀트를 미워하고
있다고 한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것을 눈치챌 거라 싶으니 오싹해졌다.
그녀는 속마음과는 다르게 쾌활한 목소리를 꾸몄다. "당신은 기쁨의 눈물이 있다는 걸 모
르나요?"
"당신은 너무 좋아서 울었단 말이오?" 홀트는 입을 딱 벌렸다. 노여움이 되살아났는지 그
녀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이 가해졌다. "날 속인 것이 눈물이 날 만큼 기쁘다는 거야?"
"내가… 당신을 속이다니요!" 뜻밖의 말이었다.
"기가 막히는 말도 듣겠군요. 당신이…"라고 말하다가 그녀는 문득 홀트의 분노의 진짜 이
유를 알게 외어 바로 말을 이었다. "당신이 여기까지 ㅉ아온 것은 신랑이 참석하지 않아 신
부를 당황하게 하는 기쁨을 나한테 배았긴 것이 분했기 때문이군요!"
"아니, 별 이상한 생각을 다…"홀트가 말이 막이다니 뜻밖이었다. 그러나 그는 금방 마음
을 가다듬었다. "당신은 어쩌면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지?" "이제 와서 성인인 체하려고
하지 말아요, 홀트." 베리티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래 봤자 헛일이에요. 당신의 속셈은
진작부터 환히 알고 있었단 말이에요. 다만 몰랐던 것은 당신이 어디까지 끌고 갈 것인가
…"
"당신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홀트의 표정에도
그녀는 속지 않았다.
"잘 알고 있으면서 그래요!" 그녀는 버럭 소리를 질러 되받았다. 다시 한번 홀트의 가슴을
밀어내려고 했으나 까딱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더욱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당
신의 계획은 대체 어떤 것이에요? 내가 <맹세합니다>고 말하기를 기다렸다가 웃음거리로
만들려는 생각이에요?"
"제발 부탁이니 내가 알아들을 수는 있는 이야기를 하라구!" 홀트도 고함을 쳤다.
속셈을 들키고 나서도 그가 마지막까지 시치미를 뗄샘인가 싶으니 베리티는 눈물이 나왔
다."내가 무슨 말을 하는 지 모른다구요?" 속삭여도 들릴 만큼 가까운데서 홀트가 고함을
치는 바람에 베리티는 귀가 멍멍했다.
"안다면 뭣 때문에 물어!"
"어쩌면, 당신은 머리도 좋군요. 홀트. 당신만큼 두뇌 회전이 빠른 사람도 없을 거예요. 아
버지와 이야기를 나누었으면서도 잡아뗄 거예요?"
"당신 아버지와는 여러번 이야기를 나누었지. 일에 관해서뿐 아니라 약혼에 대해서도. 하
지만 교회에 당신 아버지가 혼자 나타나서 당신이 결혼실에 참석할 마음이 없다고 전하게
될 거라는 이야기는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
그 말로 베리티는 알게 되었다. 베리티는 알게 되었다. 베리티가 홀트를 사랑한다는 것을
그에게 말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아버지는 지켰다. 그뿐 아니라 결혼 문제로 베리티에게 겁
을 주자는 아버지와 홀트의 첫 계획을 베리티가 알고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지켰던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눈치가 빠르니 그녀가 결혼식장에 나타나지 않으려는 이유
를 짐작하여 홀트에게 힌트쯤은 줄수 있었을 텐데.
"어째서 내가 가지 않았는지 우리 아버지가 이야기 하지 않으셨다는 거예요.?"
"사람 놀리지 마!" 홀트는 고함을 쳤고, 베리티는 더욱 귀가 멍해졌다. "당신 아버지도 나
와 마찬가지로 영문을 모르고 있던 걸!"
어쩌면 이렇게도 그럴듯하게 둘러댈 수가 있을까!" 그녀는 홧김에 홀트의 손을 뿌리치고
는 눈을 빛내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홀트는 쫓아 오는가 싶더니 중도에서 멈추며 눈에 언뜻 실망의 빛을 떠올렸다.
"아하, 그게 그렇게 되었단 말이군."
홀트가 실망한들 내가 알게 뭐야. 그것은 나에 대한 실망이 아니라 나 때문에 자기의 계
획이 망쳐진 데 대한 실망인걸.
"이제 알았지요?"
"내가 당신 대신 중역이 된 것이 너무나 분하고 원통해서 날 골탕 먹일 심사라, 알고도
남았어." 홀트는 씁쓸하게 말했다.
그말에 눈이 휘둥그래진 베리티는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자리가 그토록 소원이라면 결혼 선물로 당신한테 넘겨 주겠어." 뻥해 있는 그녀에게
홀트는 또 한방을 먹였다. "자아, 제 발로 교회에 갈 거야, 나한테 끌려서 가거야?"
애타게 바라던 것이 손에 들어왔으니 그녀가 앞장서서 교회로 갈 거로 홀트는 생각한 모
양이었다.
"자, 잠깐 기다려 줘요." 홀트가 움직이려고 했기 때문에 베리티는 말을 더듬었다.
"아직도 무엇이 해결이 안 되었다는 건가?" 그는 의심스런 쌀쌀한 목소리로 물었다.
"많아요." 왠지 갑자기 수세에 몰리는 걸 느끼면서 베리티는 대답했다. 그러나 곧, 말없이
바라보는 적대감에 찬 홀트의 표정에 질 수 없다 싶어 차갑게 말했다.
"분명하게 말해서요, 홀트, 역원의 자리는 이제 내 중대사가 아니예요."
홀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러나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네, 그래요?" "너무 이러지 말아요!" 베리티는 울컥하는 바람에 요 몇 주동안 남몰래 생
각해 온 일을 저도 모르게 지껄여 버렸다. "당신이 나보다 좋은 중역이 될거예요, 당신도 알
잖아요!"
홀트는 그녀의 말을 빈틈없이 잡아서 물었다. "역원이 되는 것이 아무라도 좋다면, 대신
당신의 중대사가 도대체 무엇인지 말해주겠소?" 베리티는 대답이 막혔다. 애당초 그런 물음
에는 대답할 마음이 없었다. "왜 이렇게 귀찮게 따지고 들지요!" 그녀는 짜증이 났고, 수세
에 몰리게 된 것이 약이 올랐다.
홀트는 묘하게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뭘 숨기고 있지, 베리티?".순간 그녀는 경
계심이 솟아 얼른 대답했다. "내가 수, 숨기기는 뭘 숨긴다고 이래요!" 그녀는 말이 채 끝나
기 전에 홀트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당신은 뭔가를 숨기고 있어, 교회에 나타나지 않음으
로써 나에게 앙갚음을 하려고 한 일과 관계가 있어. 즉 뭔가 나하고 관계가 있는 일이야."
베리티는 꺾일 마음이 없었다 그러나 결심을 드러낸 홀트의 눈을 보니 진실을 밝혀 낼 때까
지는 그만 둘 것 같지가 않았다. 게다가 그녀의 자존심은 몸도 마음도 홀트를 동경하고 있
다는 것을 절대로 눈치채이기 싫었기 때문에 그가 알고 싶어하는 것을 말해 줄 수 밖에 없
었다.
"당신한테 앙갚음할 생각은 없어요." 그녀는 자기의 마음과 싸우면서 말했다. "애당초 당
신은 나와 결혼 할 마음이 없었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었어요. 다만 나는 교회에 가서…"
"내가 당신하고 결혼할 마음이 없었다구?" 홀트는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소리쳤
다. "내가 그런 짓을 해서 당신을 골탕먹일 생각이었다면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찾아왔겠
소?"
"난…당신이 교회에 올 줄은… 생각도 못했어요." 베리티는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고 머
리가 울려 말을 더듬거렸다.
홀트는 폭발할 것 같은 감정을 겨우 누르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들는 감정을 누른 조
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오늘 교회에 나타나지 않을 거란 생각을 할만한 일을 했단 말이오?"
"했어요!" 베리티는 대답하고 홀트가 그게 뭐내고 묻기도 전에 아버지와 그가 그녀에게
인생을 가르쳐 주려고 짰다는 이야기를아버지한테 들었노라고 말했다. "그래서 당신이 이
약혼 반지를 내 손가락에 끼워 주었을 때 내가 당신에게 한 행동에 대한 앙갚음을 할 생각
이라는 것을 알았던 거예요."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는 홀트의 표정을 보고 베리티의 목소
리는 차츰 기어 들어갔다.
"세상에 이럴 수가!" 멍해진 홀트가 처음 뱉어낸 말은 겨우 그것뿐이었다. 이윽고 정신을차
린 듯 그는 물었다.
"당신은 그렇게도 줄곧, 내가 당신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고 있다고 믿고 있었단 말인가? 결
혼식 날 당신을 속여 교회에 혼자 오게 만들 만큼?" 그는 그것을 인정하기가 괴로운 것 같
았다. "내가 당신에게 그런 치욕을 줄 만큼 당신을 하찮게 생각하는 줄로 알았단 말이야?"
홀트가 조금은 자기를 생각해 주는 구나 싶으니 가슴의 고동이 더욱 빨라지더니 이윽고두방
망이질 쳤다. 그러나 사랑하는 것과는 크게 거리가 있다 싶었으나, 가슴의 고동은 가라앉지
않았다.
"달리…어떻게 생각할 수 있단 말이지요?"베리티는 중얼 거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홀트의
대답에 심장이 멎을 것같이 되었다.
"당신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준 날 저녁, 난 연극을 집어치운 거요."
베리티는 숨도 쉴 수가 없었다. 그리고 문득, 홀트는 결혼할 마음이 없었다면 반지를 주거나
할 사람이 아니라고 아버지가 자신있게 한 말이 생각났다.
"연극을 그만두다니요…?' 그녀는숨을 허떡이며 겨우 그렇게 물을 뿐이었다.
"내가 사살을 밝히지 않을 것은, 당신이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알았기 때문이오, 사실을 알면
당신이 나와 결혼할 이유가 없다고 할까 두려웠기 때문이오."
입안이 바싹 마르고 목이 불에 타는 것같은 느낌으로 베리티는 더듬거리며 물었다.
"당신은…마치 나하고…결혼…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 같군요?
홀트의 목소리가 분명하게 들렸다.
"그래." 그리고 베리티에게 거절할 권리 같은 것은 주지 않겠다는 듯이 그는 성큼성큼 방
문을 향해 걸어가며 말했다. "시간이 많이 늦었으나 목사님은 기다리고 계시겠지. 만일 우리
가…."
"안ㄷ요!"
베리티의 말에 홀트는 발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그의 목소리는 거칠어졌다.
"모든 것이 밝혀지고, 아버지를 위해 결혼하는 게 아닌 것이 분명해진 이 마당에도 당신
은 나와 결혼하지 않겠다는 거야?"
"아니, 그게 아니에요." 그녀는 얼른 말하고, 홀트의얼굴에 안심의 빛이 떠오른 것을 믿을
수 없는 느낌으로 바라보았다. "난 그저, 저어…믿을 수가 없어서 …내가 복수에 불타고 있
다고 당신은 생각하면서…즉 어째서 당신은 나와…결혼하고 싶어하는 지 알수가 없어서요."
홀트는 잠시 망설였다. 애가 타고, 짜증이 나고, 사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어야 할 게 아
니냐고 말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 자신이 그렇게 하고 싶었고, 홀트를 얻을 찬스라
면 뭐가 어찌되든 두 손으로 꼭 틀어 잡고싶은 마음이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그녀 내부의
고집스런 성미가, 그가 왜 다른 사람 아닌 자기와 결혼하고 싶어하는지 그 이유를 알때까지
는 그 자리를 떠날 수없게 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홀트가 입을 열었다.
"난 진정 당신과 결혼하고 싶은 거요, 오늘 당신과 같이 결혼의 맹세를 하고 싶어 믿어줘,
베리티 당신의 생각처럼 교회에서 당신을 웃음거리로 만들 생각은 절대로 업소, 그리고 그
럴 수도 없는 거야."
"믿겠어요, 홀트."베리티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조용히 말했다. 홀트가 성실하지 못
하다고 생각하다니, 없었던 일처럼 생각되었다. 그래도 역시 그녀의 궁금증에 대한 대답은
되지 못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을 가려서 했다. "내가 지금까지 좀…말성꾸러기였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그리고 당신이 나를 신용 하지 않고 있다는 것도요. 그러니…어째서인지
가르쳐 주었으면 싶어요. 왜 나와 결혼하고 싶은 거지요?" 그녀는 숨을 들이마시고는 말하
기 어려운 일을 눈 딱 감고 말했다. "육체적으로 모든 일 이 일어 날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어요. 우리가…저어""우리가 하나가 되면." 홀트가 말을 도와주었다. 베리티는 고개를 끄
였다. "하지만 결혼을 바란다면 그 이상의 무엇이 있어야 할 게 아니겠어요?"
"마땅이 잇어야지." 홀트는 진지한 얼굴로대답하고는 갑자기 관절이 하얗게 되도록 주먹을 틀어쥐면서 조용한 목소리로 계속했다. "사실 뭔가 있지."
베리티의 불이 핑크빛으로 물들었다. 또 다시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당신은 저어…"너무
나 떨려 말을 끝맺을 수가 없었다.
홀트가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는 방을 가로 질러 오더니 그녀의 손을 잡았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려 어쩔 줄 몰라하는 베리티의 약지에서 약혼 반지를 뽑아 오른손의 중지에
기워 줌으로써 그녀를 놀라게 만들었다. 약ㅅ혼은 이제 해소됐으나 반지는 그대로 가지고있
어도 좋다는뜻인가 싶어 두려워하며 눈치를 보는 그녀에게 홀트는 조용히 말했다.
"내가 결혼 반지를 끼워 주면 그 반지는 왼손에 되돌려 껴도 좋아." 베리티는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는 감정을 누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나는 당신과결혼하고싶어, 내가 이 집에 묵고, 당신이 내 침실로 찾아왔던 그날 밤 이후, 나는 줄곧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과 결혼하리라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소.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과 "
"하지만 당신은 바라지 않았어요."베리티는 되받았다. "당신은 나와 결혼하겠다고는 말했
으나 결혼을 바라고 있지는 않다고분명하게 말했잖아요…" 그녀는 머리가 혼란해져서 거기
서 말을 그쳤다. 홀트는 그런 그녀를 보고 말했다. "내가 달리 무슨 말을 할 수 가 있었겠
소. 내마음을 나돔로랐으니."
이해할 수가 없게 되어 어리둥절한 느낌으로 베리티는 물었다. "무슨 말이지요?"
홀트는 아직도 그녀의 손을 잡은 채로 있었다. 조금 전까지는 서둘려 그녀를 끌고 가려고
했는데. 이번에는 가만히 그대로 있으며 말했다.
"예를 들면, 어떤 컨트리 클럽에서 눈에 뛴 예쁜 아가씨가 깜짝 놀랄 정도로 무례를 범했
지. 내게, 다른 때 같으면 그런 무례를 당하면 얄밉게 생각했을 아가씨를 주차장까지 뒤쫓아
가지 않을 수 없었던 데다가, 내가 자기의 자리를 뱃기 위해 지독한 처사를 했다고 그녀가
생각하고 있는 걸 알자 속을 끓이기까지 했지…"
베리티는 그날 밤의 일은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당신은 나를 집에까지 바래다 주었어요." 그녀는 중얼거렸다.
"그리고 다음날 전화를 하여 당신을 만나러 갔지. 어째서 내가 그런 짓을 했는지 나 자신
도 도무지 알 수가 없어."
"당신은…"하고 말하다가 베리티는 뭐가 뭔지 알수가 없게 되었다. "그때 당신은 우리 아
버지가 일을 너무 많이 하는 것이 제일 큰 걱정거린 것 같았어요."
홀트는 잿빛 눈을 못박힌 듯이 그녀에게 고정시키며 말했다. "당신 아버지는 그야말로 근
면으로 성공한 사람의 표본이오."
"그럼 아버지에게는 휴식이 필요하다고 한 것은…그 때날 찾아오기 위한 핑계였단 말이에
요?"
"그것 말고도 당신을 찾아갈 핑계거리는 얼마든지 있었지."
베리티의 보이 다시 빨갛게 물들었다. 지금 듣고 있는 말들을 믿고 싶었으나 잘못들은게
아닌가 싶어 두려움으로목소리가 나오지를 않았다.
"당신 아버지와 사업상의 이야기를하던 날 밤도 드레이크스 나이튼으로 돌아가지 못할 이
유가 없었지, 그러나 그때는 나도 몰랐지만, 알고 보니 당신 곁에 있고 싶었기 때문에 아버
지의 초대를 받아 들인 것이었소. 당신이 없는 저녁 식사를 하고는 침대에 들어가고 나서도
당신이 돌아올 때가지 한숨도 못 잤지. 당신이 돌아오는 소리가 들렸을 때. 그 로비라는 녀
석과 당신이 정말 약혼했을까 걱정하고 있었지."
베리티는 뜨거운 것이 가슴에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자기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 무서웠다. 자기의 마음을 그가 눈치챌까 두려워 그녀는 가까스로 말했다.
"당신은 …내가 당신 방에 들어갔을 때…자지 않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 책을 읽을 마음도 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누워 있었던 거야. 미세스 트루먼이 내
방에 들어올 때까지 몇 광년이 흐른 것같은 느낌이었지." 홀트의 목소리는 따뜻했다. "그리
고 당산한테 키스할 때는그 때까지 느껴 보지 못한 흥분을 느꼈던 거야, 당신을 품에 안고
있을 때처럼 충만된 기분을 맛본 적이 없어." 그는 계속 말을 이었다. " 그대 내가 어떤 벼
랑에서 있는 것을 느꼈지."
"당신은 그때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나요?" 베리티는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홀트는 베리티의 손을 놓고 그녀의 어깨를 따뜻하게 끌어 안았다. 그녀는 그의 모에 팔을
감았다. 그는 그녀를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는 몰랐지. 당신 아버지에게 당신이
내침대에 들어온 것은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고 말하려고 애썼어. 당신 아버지가 발작을 일
으킬 것처럼 화를 내는 것을 본뒤에야 겨우 내 마음을 알게 되었어. 이층에 올라가 당신한
테 '난 당신과 결혼하고 싶다고는 결코 말하지 않았다'고 설명하는 동안 문득, 당신과 진심
으로 결혼하고 싶어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거지. 그리고 그 까닭도 알게 되어 미칠 듯한 심
정이 되었지."
베리티는 애원했다.
"제발 홀트 왜 그렇게 느꼈는지 말해 줘요."
그녀의 어깨를 살며시 안고 있던 홀트의 손에 무서울 만큼 힘이 들어가다.
"당신은 마치…그것이 당신에게 무슨 중요한 이유가 되는 것처럼 말하는군."
그녀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럴지도 몰라요."
이번에는 홀트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베리티, 당신은 내게, 내가 당신에게 느끼고 있는 애정의 4분의 1쯤이라도 느끼고 있단말이오?"
멈추려야 멈출 수 없는 눈물이 베리티의 눈에서 넘쳐흘렀다. 그녀의 볼을 타고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난처한 듯이 바라보고 있는 홀트에게 그녀는 겨우 ㅁ라했다.
"아. 홀트 제퍼슨! 단신이 좋아요, 사랑하고 있어요." 벨리티는 홀트가 그처럼 뜻밖이라는
얼굴을 할 줄은 생각도 못했다.
"정말이야, 베리티?" 그는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부탁이니 진심이라고 말해줘. 거짓말
이 아니라고…"
"진심이에요." 그녀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었다. "당신이 처음 우리 집에 왔을 때, 난
당신 생각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았아요. 하지만…"
다음 순간 홀트는 으스러지게 그녀를 부둥켜안았고, 그녀의 얼굴은 그의 가슴에 파묻혀
있었다. 자존심이 강한 그녀의 눈에서 넘쳐흐르는 눈물은, 그녀가 사실을 말하고 있다는 무
엇보다 확실한 증거였다.
베리티가 기븜에 넘쳐서 홀트에게 안겨 있으려니 그는 조용히 말했다.
"마이 달링, 사랑하고 있어. 하지만 눈물이 당신의 사랑의 표시라 할지라도 당신이 우는
모습은 역시 볼수가 없군."
"난 도저히 멈출수가 없을 것 같아요."베리티는 미소지었다.
홀트는 그녀를 무릎 위에 앉히고 눈물을 따뜻하게 닦아 주었다. 베리티는 그의 마음씀에
목이 메었다.
"이제 기쁨의 눈물이 어떤 것인지 아시겠지요?"
홀트는 빙긋 웃고 몸을 숙으려 눈물에 젖은 그녀의 눈에 키스했다. 베리티가 울음을 그치
자 그는 그녀의 입술에 따뜻하게 키스했다.
홀트가 아쉬운 듯이 입술을 떼자, 베리티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아아, 홀트, 당신을 너무나 오랫동안 사랑하고있었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쓰라린 아픔
을 ㄲ고 싶지 않아요."
"베리티, 당시에게 고통을 줄 생각은 절대로 없어."
홀트는 고통의 흔적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려는 듯 그녀의 온 얼굴에 키스했다. "당신은
언제 나에 대해서 증오심 이외에 무언인가를 느끼고 있는 줄을 알게 됐지?"
"당신이 여기에 묵었던 둘쨋날 밤이에요." 베리티는 조용히, 그러나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아버지가 나의 무모한 운전을 양당치신 뒤에 당신이 나를 내 방의 문 앞가지 데려다 줬을
때 알았어요." 홀트는 그녀에게 키스했다. 그러고는 그 키스로는 모자란다는 듯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당신 아버지도 나도 미친 듯이 걱정했던 그날 말인가? 그날 밤 나는 당
신을 당신 방에 밀어넣고 내침실로 돌아와, 당신이 또 한번 와주지 않을까하고 잠 못 이루
는 밤을 보냈지." 홀트는 그녀를 일으켜 세우고는 말을 계속했다. " 그래서 말인데, 난 오늘
밤 침대에서 당신을 마음껏 끌어 안을 수 있을 까?"
베리티는 홀트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자신감에 방긋 웃었다. "당신과 결혼하겠는냐는 질
문이라면 대답은 <예스>에요." 홀트는 그녀에게 긴 키스를 하고나서 침대에서 꽃다발을 집
어들자 그녀에게 건네주고 길을 서둘렀다.
그에게 어떤 비밀도 갖고 싶지 않은 베리티는, 교회가지의 짧은 드라이브 동안에도 이야
기를 했다. 홀트가 갑자기 결혼 날짜를 정했던 날 밤, 그녀와 결혼할 마음이 없다는 것을 그
에게 인정하게 만들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가를 고백한 것이다.
그는 빙그레 웃고 대답했다.
"그 말이 났으니 말이지만, 내가 어떻게 그날 밤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는지는 나로서도
영원의 수수께끼지." 볼을 희미하게 물들인 베리티를 돌아보며 홀트는 고백을 계속했다. "나
는 당신한테 듣고싶지 않은 대답을 듣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어 애정을 고백하기가 무서웠
지. 그래서 몰아 붙이면 당신이 거절할 이유를 생각할 시간이 없을 거라 생각되어 갑작스레
결혼 날짜를 결정한 거요." 그는 따뜻하게 덧붙였다. "일단 결혼하고 나면 당신의 애정을 조
금은 얻어 낼 수도 있을 거라 싶어서였지."
교회에 당도하자, 불안한 듯 서성이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두 사람이 교
회의 문으로 향하자 아버지는 종종 걸음으로 다가왔다. 베리티의 환하게 반짝이는 얼굴을
흘끔 보는 순간 아버지의 걱정은 금방 사라졌다. 아버지는 그녀에게가 아니라, 그녀를 절대
로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팔을 꼭 잡고 있는 홀트에게 말을 걸었다.
"홀트, 말해주게, 나는 오늘 딸을 잃어 버리는가?"
홀트는 빙긋 웃었다. "베리티는 기꺼이 절 따라 온 겁니다. 안 그래?"
"이보다 더 기꺼이 하고 싶은 일은 없어요."그녀는 부드럽게 대답했다. 그리고 그녀는 아
버지의 애정과 남편의 애정으로 그녀를 사랑하는 두남 자 사이에 서서 교회로 들어갔다. 베
리티가 다음에 입어 올린 것은 맹세의 말뿐이었다. 주위의 시선 같은 것은 이미 의식에서
사라졌다. 두 사람을 남편과 아내로써 맺어 주는 서약의 말을 주고받으면서 베리티는 홀트
의 눈에도 자기와 마찬가지로 진정한 기쁨이 넘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살며시 속삭였
다.
"사랑하오, 베리티 제퍼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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