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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스버그의 나팔 [엘러리 퀸]

by Casey,Riley 2023.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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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스버그의 나팔
                                          AS SIMPLE AS ABC 
                                     엘러리 퀸

 퀸의 이야기가 모두 그런 것처럼 이 또한 매우 오래된 시대의 이야기이다. 엘러리가 아직 젊었을 때의 일로, 그가 그 재능을 의미도 없이 흩뿌린 것을 니키 포터라는 이름의 빨간 머리 여성이 타이프로 옮기기 시작했을 때의 이야기다. 그렇다고 김빠진 맥주 같은 이야기라는 것은 아니다. 한 번 그 맛을 본 사람들은 지금도 그 향기를 유쾌하게 기억하고 있을 정도다.
 이 미국이란 나라는 예나 지금이나 1861년에서 1865년 남북전쟁이라는 딱지가 붙어있는 요리라면 어떠한 것이든 게걸스럽게 달려드는 식도락가들이 수없이 많다. 이 패거리들은 그 요리에 다음과 같은 재료가 들어 있다고 듣는 것만으로도 갑자기 달콤한 술이 입을 타고 넘어가 득의양양하게 흘러 들어가는 기분을 맛보는 것이었다. 굳이 링컨을 들먹일 것까지도 없이 블러디 앵글, 미니식 총탄, 맥클런 장군, <텐팅 투나잇>이란 군가, 그랜트 장군등의 요리 재료만으로도 맛을 내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다. 이들 역사 속에서 꿈을 찾는 사람들은 남북전쟁을 참된 의미에서의 <대전쟁>으로, 얼룩무늬 군복을 입은 병사들을 인간 이상의 고귀한 존재로 받아들였다.
 이를테면 그들은 로맨티스트이며 역사를 장식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한밤중에 포토맥 강변을 거닐면서 이 포토맥 전선을 지키는 것은 고인들이 아닌 자신들이고 군용트럭이 오가는 소리, 대포에서 솟구쳐 오르는 포성, 패주하는 남군 병사의 비명소리를 실제인 것처럼 듣는다. 시체가 즐비하게 쌓이고 화염 속에 타 들어갈 때 참혹한 지옥을 빠져 나와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는 것도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 최후의 고통에 몸을 떨고 있는 부상병 위에서 군의관과 함께 동정어린 눈길로 몸을 숙이고 있는 것도 그들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아직 이들 옛날 전사들의 무덤 앞에서 자그마한 깃발을 흩날리며 꽃을 올려놓는 것도 바로 그들이었다. 
 엘러리 역시 그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바로 이런 까닭으로 펜실베니아 주 잭스버그에서 일어난 한 노인의 사건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던 것이다.
 좋은 일은 미처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오는 경우가 흔하지만 엘러리와 니키 역시 생각지도 않게 우연히 잭스버그 마을을 지나게 되었다.
 그들 두 사람은 워싱턴에서 뉴욕을 향해 차를 달리고 있었다. 엘러리는 워싱턴 국회도서관에서 탐정수사에 관한 자료를 살펴보고 뉴욕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어쩌면 포토맥 강의 경치, 앨링턴 국립묘지, 그리고 전쟁의 비애로 인해 커다란 슬픔에 잠긴 링컨의 표정이 엘러리로 하여금 조국을 위해 숨져간 이들이 잠들어 있는 게티스버그로 발길을 향하게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니키 포터가 아직 한 번도 그곳에 가본 적이 없었다는 이유도 있었다. 게다가 그날은 5월도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어 누구든 감상적인 기분에 젖을 시기였다.
 그들은 메릴랜드와 펜실베니아 주 경계선을 지나 몇 시간에 걸쳐 컬프즈 힐, 세미너리 리지, 리틀 라운드 톱, 스팽글러즈 스프링 등의 유물기념관을 누비고 다녔다. 그곳은 영원한 생명이 숨쉬고 있는 장소였다. 관광객들의 눈에는 지금도 여전히 피켓과 젭 스튜어트 두 장군 휘하의 병사들이 돌격을 거듭하면서 피를 흘리고 있었으며 키가 크고 못생긴 사내인 링컨이 무덤을 바라보며 울음소리를 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엘러리와 니키는 그곳을 떠났을 때도 일종의 신비로운 기분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시간과 공간이 의식에서 사라져 때마침 하늘이 어두워져 주변이 컴컴해진 것조차, 또한 그들의 차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조차 잊어버린 상태가 되었다. 그렇게 얼마 동안 있다가 두 사람은 자연의 자명종, 때아닌 천둥소리에 갑자기 깨어났다. 하늘은 머리 위에서 입을 벌려 눈 깜짝한 사이에 두 사람의 몸을 흠뻑 적셨다. 등 뒤 지평선 너머의 게티스버그는 다시 전쟁터로 바뀌었다. 어둑어둑한 하늘 저편으로 포성과 불빛이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엘러리가 차를 멈추고 본네트를 들어올려 점화장치에 결정적인 이상이 생겼음을 발견했을 때 그의 기분은 다시 일그러졌다. 머나먼 이국 땅에 내팽겨쳐진 것 같다고 니키가 투덜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이 엘러리를 더 화나게 했다.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엘러리 선생님! 이렇게 옷을 적신 채로는 갈 수 없잖아요?"
 "글쎄, 이토록 인적이 끊긴 곳에 잠을 잘 만한 곳이 있을까? 이 정도의 고장은 별거 아니야. 좀 살펴봐야겠군....."
 그러나 그 순간 멀리 앞쪽에서 희미한 불빛이 보이자 엘러리는 표정이 밝아졌다.
 "옳지, 여기가 어디며 얼마나 더 가야 하는 지나 알아봐야겠군. 또 누가 알아? 카센터라도 있을지."
 그곳은 질퍽질퍽한 도로 위에 세워진 자그마한 흰색 가옥이었으며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낮은 돌담은 온통 담쟁이덩굴로 뒤덮여 있었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여행객들을 위해 문을 열어준 사내 역시 자신의 집처럼 자그마했다. 아니 집보다도 더 작은 듯한 느낌을 자아냈다. 주름진 피부를 지니고 있었으며 펜실베니아 산지에 뿌리를 내리며 사는 사람의 눈매였다. 그의 두 눈은 기쁜 듯 미소를 머금었으나 두 사람의 흠뻑 젖은 모습을 보는 순간 이내 걱정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몰인정하게 내쫓을 수는 없는 형편이군."
그는 놀라우리 만치 정정한 목소리로 말하며 껄껄 웃었다. 
 "담쟁이덩굴에 덮여 간판은 안 보일 테지만 이건 의사로서의 사명감으로 하는 소리요. 옷이라도 갈아입어야 하질 않겠소?"
 "네, 그래요!"
니키가 기다렸다는 듯이 소리쳤다. 엘러리는 이곳에 묵는다는 게 약간 망설여졌다. 집은 조촐하고도 깔끔했으며 따뜻한 난롯불이 있었다. 그들의 등뒤에서는 요란스럽게 비가 쏟아져 내렸다.
 "네, 고맙습니다만..., 카센터에 연락하려고 하는데 전화를 좀 써도 되는지요. 차 수리를 맡겨야 될 형편이라서요."
 "그런 일은 내게 맡겨 주시오. 자, 키를 내게 주면 내 다 알아서 처리해 주겠소." 
 "이거 너무 폐를 끼쳐서..."
 "별 말씀 다 하시오. 주님의 은총이 길 잃은 사람을 안내해 주는 거요. 자, 보시오. 이제 폭우는 밤새 계속 쏟아질 것이고 길도 몹시 미끄럽소."
 작달막한 사내는 재빨리 비옷을 입고 장화를 신었다.
 "당신 차는 카센터의 수리공 리우 베이글리를 불러서 가져가라고 해야겠소. 키를 주시오."
  반시간쯤 뒤에도 밖에서는 여전히 억수같이 비가 퍼붓고 있었지만 두사람은 쾌적한 응접실에서 몸을 말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틴 스트롱 박사가 손수 만들어준 양귀비 씨 요리며 스크래플과 커피를 마셨다.
 박사는 혼자 살고 있었으며 자칭 요리사였다. 그리고 껄껄 웃는 그의 말을 빌자면 그는 잭스버그 마을의 촌장인 동시에 경찰서장이었다.
 "이 마을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몇 가지 일을 겸하죠. 철물점을 하는 빌 요더는 장의사이기도 하죠. 리우 베이글리는 소방소장이기도 하고요. 에드 맥쉐인은..."
 "그러다간 잭스버그의 모든 직업이 다 나오겠군요, 스트롱 박사님. 하지만 제가 보기엔 무엇보다도 선량한 사마리아인처럼 보이는군요."
 엘러리가 말했다.
 "할렐루야."
 니키는 경건하게 기도를 해보였다.
 "퀸 씨! 이것은 뭐랄까요. 저의 취미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내 편한 대로 살다보니 보시는 바와 같이 길가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요. 새로운 얼굴을 볼 기회도 별로 없어서 사람 사귀는 것을 좋아하답니다. 그렇지만 이 잭스버그 마을의 534명의 주민의 얼굴은 주름살과 혹의 생김새까지 훤히 알고 있죠."
 "경찰서장을 하시면서도 바쁘지 않나보군요."
 "일은 별로 없지요. 하지만 지난 해..."
 스트롱 박사의 눈살이 찌푸려지더니 일어나서 난롯불을 쑤셨다.
 "포터 양, 퀸 씨는 탐정처럼 보이는데 맞습니까?"
 "그런 셈이죠! 스트롱 박사님, 그는 더할 수 없이 어려운 문제도..."
 "저의 부친은 뉴욕 경찰서의 경감이죠."
 엘러리가 새로 들어온 비서의 말을 막았다.
 "때때로 범죄사건에 관여하는 일이 있습니다만. 그런데 박사님, 작년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잠시 생각 좀 해봅시다."
 잭스버그의 촌장이 생각에 잠기며 말했다.
 "아까 당신 말을 들으니 오늘 게티스버그를 다녀온 모양이군요. 그리고 범죄에도 많은 관심을..."
 스트롱 박사가 감자기 말을 돌렸다.
 "내가 참 바보군요. 하지만 걱정되는군요."
 "뭐가 말씀이죠?"
 "글쎄요...내일은 <전사자 기념일(역주; 남북전쟁 전사자 추모일. 5월 30일. 전사자의 묘를 꽃으로 장식한다는 데서 장식일이라고도 함)>이죠. 그런데 내 생애 처으으로 내일이 별로 기다려지지 않는군요. 잭스버그에선 정말 대단한 행사가 벌어지죠. 어쨌든 남북전쟁의 영웅 가운데서 세 사람이 현재 살고 있는 곳은 우리 마을 뿐이니까요."
 "세 사람이나!"
 니키가 소리쳤다. 스트롱 박사가 씽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잭스버그에서 의사노릇을 한다는 게 얼마나 한가로운 일인지 상상이 가십니까? 개척자 타입의 여자들의 대부분이고 장수촌으로 불릴 만큼...그런데 방금 이야기인데 남북전쟁에 참가한 세 명의 노병사 얘긴 정말 빼놓을 수가 없죠. 아트웰 가의 칼렘 아트웰은 97세죠. 그 일가족은 이곳에서만도 수십 명에 이를 만큼 꽤 큰 가문입니다. 다음은 자크 비게로우. 그는 95세이고 손자인 앤디 내외와 그들의 7명의 아이들과 함께 살죠. 또 하나가 애브너 체이스라는 94세의 노인인데 키시 체이스의 증조부죠. 그런데 금년에는 두 명밖에 없어요. 칼렙 아트웰이 지난 해 기념일에 세상을 떴거든요."
 "A, B, C군요."
 엘러리가 중얼거렸다.
 "전 도서관 사서를 닮은 데가 있죠, 박사님. 아트웰(Artwell), 비겔로우(Bigelow), 체이스(Chase). 알파벳 순이죠. 이렇게 배열하는 것이 기억하기에 좋죠. 그 중에 A가 작년 기념일에 사망했죠. 당신이 금년 기념일이 기다려지지 않는 건 이것 때문 아닙니까? A 다음에는 B가 올 테니까요. 안 그래요?"
 "그 정도 일이라면 매우 장수를 누리는 노인들 일이기 때문에 그다지 신경쓸 일이 아니죠."
 스트롱 박사가 마치 엘러리의 말에 도전이라도 하듯이 말했다. 
 "저는 두렵습니다. 이것은 겉보기마냥 간단한 이야기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을 이해시키기 위해선, 우선 칼렙 아트웰이 어떻게 죽었나 말해 주는 편이 낫겠군요. 해마다 칼렙과 자크와 애브너는 기념일 행사의 스타였죠. 후커스타운 가의 옛 묘지의 행사에서 말이죠. 가장 나이가 많은...."
 "그건 A겠죠. 칼렙 아트웰 말입니다."
 "그렇소. 가장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칼렙이 늘 행사 시작을 알리는 기념 나팔을 불었죠. 그를 닮은 낡은 나팔이었죠. 세 사람은 나란히 알렉산더 S. 웹 준장이 지휘하는 행콕 제2군의 펜실베니아 72연대 병사였죠. 이 72연대는 게티스버그에서 불멸의 공적을 세웠죠. 피켓의 공격을 맞이해 물리친 전투였습니다. 그들의 전투에서는 나팔이 꽤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그때 이래 그것은 게티스버그의 나팔로서 세상에 알려졌지요. 적어도 이 잭스버그에서는 그렇습니다." 
 잭스버그의 조그마한 촌장은 부드러운 눈길로 먼 옛날을 회상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내가 기억하는 한에서는 훨씬 옛날부터 그날이 오면 생존한 노병사 가운데 가장 연장자가 나팔을 불었던 겁니다. 지금도 확실히 기억하고 있어요. 아직 내가 어렸을 적에 북군종군회 사람들이 마로니 오프카트의 - 이 오프카트란 사람도 죽었지만 그로부터 이제 38년이 지났지요 - 상점 앞에 모여 번갈아 가며 나팔을 부는 연습을 하곤 했지요. 언제 자신의 차례가 돌아와도 훌륭하게 불 수 있도록 준비한 거죠. 어쨌든 그때는 아직 병사들이 많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죠. 그것을 나 같은 아이들은 넋을 잃고 바라보곤 했습니다."
 스트롱 박사는 거기에서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그리고 자크 비겔로우가 칼렙 아트웰 다음으로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기수가 되었고 세 번째로 나이가 많은 애브 체이스는 묘지의 기념비에 화환을 바쳤습니다. 칼렙으로선 지금까지 스무 번 가까이 불어 온 나팔이었죠. 나팔소리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갑자기 칼렙이 무릎을 꿇었죠. 길바닥에 쓰러졌습니다. 월요일의 교회보다 더 고요해졌죠."
 "너무 긴장한 탓이었나 보군요. 하지만 남북전쟁의 영웅다운 시적인 최후를 맞이한 셈이군요."
 엘러리가 감개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스트롱 박사는 그를 기묘한 눈초리로 응시했다.
 "어쩌면 그랬는지도 모르겠죠. 그런 종류의 시를 좋아한다면 말입니다."
그는 장작불을 쑤셔서 불꽃을 일으켰다.
 "하지만 박사님."
엘러리는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97세나 된 노인의 죽음을 의심할 순 없는 것 아닙니까?"
 "하긴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나 나는 뭔가 이상하다고 확신하고 있소. 어쩌면 그가 죽기 바로 전날 건강진단을 한 사람이 바로 나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소. 난 내 의사자격증을 걸어도 좋소. 그 노인은 백 세를 넘어 몇 년간은 끄떡없이 살 양반이었소. 나는 지금까지 그렇게 건강한 노인을 본 적이 없어요. 내가 알기로는 그는 아주 건강한 구릿빛 얼굴이었단 말이오. 구릿빛 얼굴!...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 내가 판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우리들의 영웅의 명예를 손상시킬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소? 칼렙은 세미트리 릿지 전투에서 한쪽 눈을 잃었소. 나도 이미 노인 아닌가. 그래서 이렇게 작년 일을...마음에 두고 있다오."
 "그의 죽음을 의심하는 겁니까, 박사님?"
 엘러리는 이번에는 웃음을 애써서 눌러 참아야 했다. 그건 스트롱 박사의 실망스러운 표정을 분명히 보았기 때문이다.
 "왜 그런 의심이 드는 건지는 나도 모르겠소."
 시골 의사는 짤막하게 말했다.
 "내가 일단 부검을 하자고 했지만 아트웰 일가족을 시작으로 모두 어리석은 짓이라고 하면서 상대조차 해 주지 않았소. 97세나 된 노인이 자연사가 아닌 다른 원인으로 죽었다고 생각하는 건 모독일 테니까요. 결국은 나 자신도 그런 기분이 들어 칼렙은 그대로 매장되었습니다."
 "하지만 박사님, 그 나이라면 아무런 예고 없이도 언제든 쓰러질 수 있지요. 박사님께서 꺼림칙하게 생각하는 데에는 노령 이외에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박사님께서 알고 계시는 동기라도 있습니까?"
 "글쎄요...어쩌면."
 "그는 부자였을 거예요."
 니키가 뭔가 알아차린 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러나 스트롱 박사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자기 것이라고는 그릇 하나도 없었소. 하지만 그가 죽으면 누군가 얻는 게 있었을 거요. 다시 말해서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사실이라면...아실지 모르지만 잭스버그에서는 세 분 노인에 대해 일종의 전설 같은 것이 있죠, 퀸 씨. 내가 그걸 처음 들은 건 아주 어렸을 때였죠. 그때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였죠. 지금도 여전히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있답니다. 그 이야기는 1865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칼렙과 자크, 그리고 애브너가 같은 부대에 근무했을 때의 일인데 그들 세 사람이 어떤 종류의 보석을 발견했다는 겁니다."
 "보석..."
 니키가 킥킥거리기 시작했다.
 "보석이었죠."
 스트롱 박사가 완고하게 반복했다.
 "들리는 얘기로는 그들은 그걸 잭스버그로 가지고 와서 숨겨놓고는 숨긴 장소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기로 맹세했다는 겁니다. 물론 전쟁이 끝나고 나면 그처럼 온갖 얘기가 떠도는 법이긴 합니다만...."
 그는 눈동자를 빛내며 니키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많은 사람들이 코웃음을 치거나 히스테리 발작을 일으키겠지만 이 이야기를 듣고 나는 뭔가 믿을 만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죠. 어쨌든 내일이 불안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조금도 변함이 없기 때문에, 내일 행사가 무사히 끝나고, 자크 비겔로우가 칼렙 아트웰의 나팔을 내년에도 불 수 있다면 비로소 마음이 후련해질 것 같습니다. 내일은 자크가 가장 나이가 많은 생존자니까 나팔을 불겠죠."
 엘러리는 다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들이 50년 이상이나 보석을 숨겨놓았단 말입니까? 사실, 그 보석이 있다고 한다면 조금도 고민할 것이 없습니다, 박사님. 보석은 상상 속에 있을 때나 흥분을 자아내는 법입니다. 얼마큼 소동이 일어나겠지만 어차피 아무것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 소문은 그들이 맹세를 했다는 쪽으로 흘러가죠."
 잭스버그의 촌장이 중얼거렸다.
 "한 사람 말고 모두가 죽을 때까지는 보석에 손을 대지 않겠다는 말 아닙니까?"
 엘러리는 이제 소리내어 웃으며 말했다.
 "마지막 생존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는 거죠, 박사님. 대부분의 얘기가 다 그런 식으로 흘러가니까요."
 엘러리는 하품을 하며 일어섰다.
 "저쪽 객실에서 저를 부르고 있는 것 같군요. 니키, 눈에 졸음이 가득해 보이는군. 제 말대로 하시죠, 박사님. 조금도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모두와 마찬가지로 그 선례를 따라주세요. 박사님께선 내일 모임에서 게티스버그 연설을 낭독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때 악동들이 소동을 일으키지 않도록 다른 데는 신경을 쓰시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나중에서야 안 일이지만 바로 그날 밤부터 엘러리는 마틴 스트롱 박사가 기념일에 대해서 갖는 근심을 서로 나누어 가지게 되었다. 새벽이 되자 엘러리와 니키는 찜찜한 기분으로 잠을 잤다. 다음날은 간밤의 피로를 깨끗이 풀어버리고 빛나는 눈과 부스스한 표정으로 침대에서 일어날 수가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거의 같은 시간에 계단을 내려왔을 때 잭스버그의 촌장이 부엌에서 서성이는 것을 발견했다.
 "안녕히 주무셨소?"
 스트롱 박사가 큰 소리로 인사를 했지만 어딘가 이상스럽게 느껴졌다.
 "당신들이 먹을 걸 장만해 놓고 한 시간 정도 자려고 생각했는데."
 "밤새 걱정하시느라 못 주무셨나 보군요?"
 "전혀 눈을 붙이지 못했소. 잠을 잘까 했는데 전화가 왔지 뭐요. 키시 체이스한테서 온 긴급전화였죠....."
 "키시 체이스라구요, 당신이 어젯밤에 말씀하신...?"
 엘러리는 주인을 바라보았다.
 "애브너 체이스 노인의 증손녀죠. 맞아요, 퀸 씨. 키시는 고아이고 애브너의 유일한 혈육이죠. 그녀는 열 살부터 할아버지를 모시고 함께 살았죠."
 스트롱 박사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엘러리는 특유의 음성으로 말했다.
 "함께 살고 있는 애브너 노인은...?"
 "난 밤새도록 애브너와 함께 있었소. 그는 오늘 아침 6시 반에 저 세상으로 여행을 떠났소."
 "기념일에 말이죠!"
 니키는 죽음이라는 인간의 중대한 문제를 처음 겪는 소녀처럼 크게 소리를 질러댔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스트롱 박사가 돼지고기를 굽는 소리에 침묵은 한층 깊어졌다. 마침내 엘러리가 말문을 열었다.
 "애브너 체이스는 왜 죽었죠?"
 "뇌일혈이었소."
 "누구한테 맞았나요?"
 스트롱 박사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화가 난 듯했다. 그러나 그는 이내 머리를 흔들었다.
 "퀸 씨, 난 이름난 의사도 아니고 아직 모르는 의학지식도 많아요. 하지만 첫눈에 뇌일혈임을 알 수 있었소. 애브너 체이스는 그래서 죽은 거요. 94세의 노인이고 보면 자연사로 봐도 무방할 거요....아니, 이런 죽음에는 재미있는 구석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소."
 "만약 기념일에 그 일이 생기지 않았다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죠."
 엘러리는 주인을 바라보았다.  
 "인간이란 참 묘한 동물이죠. 그에게 거짓말을 해보시오. 그는 아무 의심없이 덜컥 받아들이죠. 그에게 사실을 말해 보시오. 그럼 이번에는 뭔가 토를 단단 말이오. 어쩌면 신은 고마움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인간에게 신물이 난 나머지 장난을 치기로 한 것 같소."
 그러나 스트롱 박사는 엘러리를 향해서라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향해 말하는 듯했다.
 "당신, 계란 좋아하시오?"
 "그럼요, 박사님, 계란요리는 제가 할 테니 위층에 가셔서 좀 주무세요."
 니키가 힘을 주어 말했다.
 "예의 그 경건한 일을 오늘 또 해야 되니 쉬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군."
 잭스버그 촌장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지만 애브너 체이스가 죽는 바람에 오늘 행사는 예년보다 더 엄숙하게 치러질 거요. 빌 요더의 말을 빌자면 애브너의 장례를 허둥지둥 해치워서 그가 평생 해온 명예로운 장의사 일을 망칠 생각은 조금도 없다고 하더군요. 아마 그의 말이 틀림없을 거요. 만약 우리가 체이스의 장례식을 오늘 행사 일정에 포함시킨다면 에이브라함 링컨의 불멸의 연설도 빛을 잃을까 걱정되는군요! 퀸 씨, 아무튼 오늘 아침 리우 베이글리한테 내 일러두었으니 한 시간 안에 차를 가지고 이리 올 거요. 특별 서비스로 말이오. 당신들은 촌장의 손님이니까."
 스트롱 박사가 껄껄 웃으며 덧붙였다.
 "언제쯤 떠날 참이오?"
 "제 생각엔..."
 엘러리는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니키가 내심 피곤한 선생이군 하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미 퀸의 표정만 보고도 그가 중요한 얘기를 꺼내려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무래도 자크가 그 소식을 어떻게 받아들일는지 궁금하군요."
 엘러리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아, 그 얘기였군요. 그는 이미 알고 있소, 퀸 씨. 오는 길에 앤디 비겔로우의 집에 들렀으니 말이오. 하지만 난 가능한 한 빨리 자크에게 그 소식을 알려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소."
 "가엾어라. 이제 혼자 남았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프실까."
 니키가 옆에서 말하며 계란을 잘랐다.
 "자크는 그런 것에 구애받는 남자가 아니죠."
  스트롱 박사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때 그가 말한 건 내 기억으로는 이것뿐이었소. <일이 좀 성가시게 된 거야. 내가 게티스버그에서 나팔을 불면 꽃다발은 누가 놓을까!> 사람이 95세나 되고 보면 나처럼 63세 정도의 젊은 사람들과는 달리 죽음이라는 걸 전혀 다른 관점에서 보는 것 같소. 때로는 말이오. 몇 시에 떠날 참이오, 퀸 씨?"
 엘러리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니키, 뭔가 특별히 바쁜 일은 없나?"
 "글쎄요, 어떻게 하죠?"
 "하지만 여기가지 와서 행사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건 나의 애국심이 용납치 않을 것 같군. 박사님, 어떻습니까. 잭스버그 사람들의 전사자 기념일에 저희 뉴욕 인사 두 명을 특별히 참석시켜도 되겠습니까?"     
 


 잭스버그 마을에는 포장도로가 하나 있고, 도로 한쪽 끝에는 교통신호등이 덩그라니 선 채 유리가 깨져 마치 시력을 잃은 눈처럼 얼빠진 듯한 외관을 드러내고 있었다. 다른 쪽 도로 끝에는 리우 베이글리의 카센터 앞에 두 개의 가솔린 펌프가 세워져 있었다. 그 사이로 몇 채의 가게가 페인트가 벗겨진 모습으로 햇볕을 받으며 휴일을 즐기고 있었다. 빨강, 파랑, 흰색의 종이 테이프가 거리를 온통 메우다시피 흩날렸다. 이 마을에서는 가장 번화한 거리였으나 거리 양쪽 끝으로 초라한 목조가옥이 몇 채인가 늘어서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곳에도 온통 성조기가 나부끼고 있었다.
 엘러리와 니키는 스트롱 박사가 가르쳐준 장소에서 체이스의 집을 찾아냈다. 담쟁이덩굴로 온통 뒤덮인 교회와 잭스버그 자체 소방서 사이에 있는 베이글리 카센터에서 모퉁이를 막 돌아선 곳에 체이스의 집이 있었다. 그러나 촌장이 그렇게까지 자세히 가르쳐 줄 필요는 없었다. 현관에 사람들로 북적대는 유일한 집이었기 때문이다.
 어깨가 축 늘어진 젊은 여자가 검정색 상복을 입은 군중들 한가운데 놓인 흔들의자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녀의 코는 커다란 양손과 마찬가지로 새빨갛게 변해 있었는데 주위에서 퍼붓는 위로의 말에 그녀는 애써 웃는 얼굴을 지어 보이려고 노력했다.
 "고맙습니다, 프럼 부인.....그런 것 같아요. 슈미트 씨. 그건 그래요...하지만 몹시 정정하신 분이었어요. 에머슨, 믿기지가 않아요."
 "키시 체이스 양인가요?"
 순간 거짓말처럼 주변의 소음이 뚝 그쳤다. 남부군 스파이가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더라도 지금처럼 쥐죽은 듯 고요해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잭스버그 사람들은 엘러리와 니키를 차가운 시선으로 말없이 응시하면서 다들 나름대로 추측하는 듯했다.
 "저는 퀸이고 이쪽은 포터 양입니다. 우리들은 잭스버그 마을의 기념일 행사에 촌장인 스트롱 박사의 손님으로 참석했죠."
 서풍처럼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나직한 속삭임이 현관 주위를 한 차례 훑고 지나갔다. 
 "그 분은 우리들더러 여기서 기다리라고 하셨기 때문에 염치 불구하고 찾아왔습니다. 증조부님 일에 대해선 뭐라고 위로를 드려야 좋을지 모르겠군요."
 "할아버지께선 정말 훌륭한 일을 하셨더군요."
 니키도 인사말을 건넸다.
 "고마워요. 훌륭한 분이셨죠.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안으로 들어가시죠. 할아버지의 몸은 이제 없지만...얼음을 가득 채워서 빌 요더의 가게로 옮겼어요."
 젊은 여자는 평정을 잃고 울기 시작했다. 니키는 그녀의 팔을 붙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엘러리는 이젠 완전히 경계심을 푼 채 호기심 어린 시선을 던지는 마을 사람들과 뭔가 나눌 말이 없을까 생각하며 잠시 머뭇거렸다. 다음 순간 그는 그녀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그곳은 초라하고 자그마한 집으로 방은 축축하고 어둑어둑했다
 "자, 기운을 내세요. 안정이 제일 주요한 때입니다. 키시. 키시라고 불러도 되죠?"
 니키는 달래는 투로 말했다.  
 "게다가 마을 사람들과는 좀 떨어져 있는 게 좋아요. 엘러리 선생님, 이 아가씬 아직 어린애인가 봐요!"
 지나치게 어린애 같은 말투, 창백한 표정, 퀭한 눈. 이렇게 느꼈을 때 엘러리는 교통신호등을 지나 북쪽으로 떠났으면 좋았을걸 하고 약간은 후회의 감정을 느꼈다.
 "묘지로 향하는 시가행진이 당신 집 앞에서 출발하는 걸로 알고 있소. 그런데 앤디 비겔로우와 그의 할아버지 자크 씨는 아직 안 왔나요?"
 엘러리가 물었다.
 "글쎄요. 모르겠어요. 모든 게 다 꿈만 같아요."
 키시 케이스가 굼뜬 머리로 대답했다.
 "그렇겠죠. 혼자만 남아서 그럴 거예요. 그럼 친척은 한 사람도 없나요, 키시?"
 "네."
 "누군가 젊은 사람이 당신을....?"
 니키의 말에 키시는 격렬히 머리를 흔들었다.
 "저 같은 사람과 결혼해 줄 사람은 없어요. 지금 입고 있는 옷이 제가 가진 단 한 벌뿐인 옷이에요. 4년 전에 샀죠. 우린 증조부님의 연금과 제가 그날 그날 번 돈으로 겨우 지내왔죠. 그나마 일거리도 충분치가 않죠. 이제..."
 "내가 일거리를 한번 알아보죠."
 니키가 아주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잭스버그에서요?"
 니키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키시 양. 스트롱 박사는 보물 얘기를 하더군요. 그 얘기를 들어봤나요?"
 엘러리는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으나 고개를 들고 바라보지는 않았다.
 "네, 들어봤죠. 할아버지께서 말씀해 주셨어요. 세세한 것은 언제나 조금씩 틀렸지만 대개는 이런 종류의 얘기였죠. 전쟁 중에 그분과 칼렙 아트웰, 자크 비겔로우는 입대한 뒤 세 사람만 부대에서 따로 떨어진 적이 있었죠. 척후든가 먹을 것을 찾기 위해서인가 아무튼 그런 것 때문이었대요. 그것은 남부 어딘가 에서 벌어진 일이었어요. 그날 밤 그들은 반쯤 불에 타 무너진 낡은 빈집에 머물렀죠. 새벽이 되고 나서 그들은 뭔가 가져갈 만한 것이 없을까 해서 집 안팎을 뒤지다가 보물이 숨겨진 지하실을 찾아냈죠. 할아버지 말씀으로는 실로 엄청난 재산이라고 하시더군요. 세 사람은 그 많은 보물을 어떻게 운반할까 생각한 끝에 지하실 속에 다시 파묻고 그 장소를 지도로 그렸답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 다시 돌아와서 그걸 다시 꺼내기로 서로 굳게 약속했대요."
 "약속을 했다. 역시 그랬었군."
 엘러리의 말이었다.
 "그들은 세 사람 중 단 한 사람만 살아남았을 때 그곳으로 찾아가서 보물을 파내기로 약속한 거죠. 왜 그렇게 하기로 했는지는 저도 모르겠어요.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한 사람이 그것을 모두 자기 것으로 하자고 정한 것 같아요. 할아버지 말씀은 대개 그런 내용이었어요. 그것만은 언제나 변함이 없었죠."
 "가격이 얼마쯤 된다던가요?"
 엘러리가 묻자 키시는 웃으며 답했다.
 "20만 달러라고 하셨어요. 하지만 할아버지가 그저 해본 소리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더군요. 꼭 그렇지 않다고도 할 수는 없지만요."
 "그들이 북부로 가지고 와서 어디에 숨겻는지 힌트가 될 만한 말을 들은 적은 없나요?"
 "아뇨. 그 분은 무릎을 치며 제게 윙크를 해보였을 뿐이에요."
 "그 얘기엔 뭔가 깊은 의미가 있는 것 같군."
 "하지만 엘러리 선생님, 그 말이 진짜란 말인가요! 키시, 방금 선생님이 하신 얘길 들었어요?"
 니키가 눈을 흘겼다. 그러나 키시는 다만 모든 것이 피곤하다는 듯 한마디 내뱉었을 뿐이다.
 "그것이 정말이라면 모든 것은 자크 비겔로우의 차지가 되겠군요."
 그때 스트롱 박사가 들어왔다. 주름진 푸른 양복에 빳빳하게 깃을 세운 나비 넥타이 차림이었다. 그의 뒤를 따라 많은 사람들이 들어왔다. 엘러리와 니키는 잭스버그 사람들에게 키시 체이스를 넘겨주었다. 
 니키가 엘러리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저 아가씨의 얘기가 사실이고 스트롱 박사의 말이 틀림없다면 비겔로우 노인은 굉장한 악당인 셈이군요. 보물을 독차지하려고 친구 두 사람을 죽여버렸으니 말이에요!"
 "하지만 니키! 95세나 되는 나이에? 그런 노령에 그런 짓을 해서 보물을 빼앗을 마음이 생길까?"
 엘러리는 머리를 저었다.
 "그렇지 않다면 뭣 때문에...?"
 "글쎄.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촌장이 그들 쪽을 돌아보았다. 엘러리는 눈짓을 해보이며 그를 가까이 부른 후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행렬은 2시 정각에 출발했다. 잭스버그의 차가 거의 총출동 하다시피 했다. 스트롱 박사의 자랑에 따르면 무려 1백 대가 넘었다.
 니키는 좀 당황하긴 했지만 이것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라는 표정을 짓고서 선두차에 탔다. 이 차는 상당히 오래된 것이긴 했지만 리우 베이글리가 오늘 행사용으로 내놓은 대형차로 깨끗하게 손질해서 번쩍번쩍 윤이 났다. 정면 좌석에 앉아 있는 사람은 지난날 북군 모자를 눌러쓴 노인이었는데 어깨가 약간 처져 보이긴 했으나 그의 나이로 보면 그럴 만도 했다. 니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엘러리는 그 노인의 귀에다 대고 뭔가 나직하게 속삭이고 있었다. 자크 비겔로우는 운전사와 용맹한 얼굴에 붉은 빛깔의 목덜미를 지닌 한 사내 사이에 똑바로 앉아 있었다. 용맹한 얼굴의 사내는 노인의 손자 앤디 비겔로우였다.
 니키는 고개를 뒤로 돌려 차 한모퉁이에 꽂혀 있는 국기가 펄럭이는 가운데 주위의 경관이 빠른 속도로 뒷걸음치는 모습을 보았다. 검정색 망사를 드리운 키시 체이스는 뒤차에서 한 부인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울고 있었다. 잠시 후 니키는 엘러리와 스트롱 박사 사이로 자세를 바로 하여 앉았다. 정면에 놓여 있는 꽃들 사이로 성조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이미 죽음을 맞은 두 노인을 생각하며 두 사람의 비겔로우를 응시했다. 스트롱 박사가 소개했을 때 니키는 북군 용사이자 잭스버그의 유일한 생존자에게 고개를 까딱해 보이는 것으로서 그들이 지닌 역사적 중요성에 약간의 경의를 표시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엘러리는 넉살좋게 야수처럼 생긴 손자한테도 최대한의 경의와 친절을 베풀었다. 그는 앞으로 몸을 숙였다.
 "비겔로우 씨, 조부님을 뭐라고 불러야 좋을지 모르겠군요?"
 그러자 앤디 비겔로우는 큰소리로 대답했다.
 "위대한 장군이시죠."
 그리고 나서 그는 얼굴을 돌려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렇지 않아요, 할아버지?"
 그러나 자크 비겔로우는 자랑스러운 얼굴로 정면을 향한 채 무릎 위에 놓인 낡은 가방을 자랑스러운 듯 쓰다듬을 뿐이었다.
 "할아버지께선 전쟁 중에 일등병으로 참가했죠. 하지만 그런 얘기는 별로 좋아하지를 않죠."
 "비겔로우 장군...."
 엘러리가 말을 걸었다.
 "귀가 좀 먹었죠. 다시 한번 불러보세요." 
 "비겔로우 장군!"
 "응?" 
 노인은 떨리는 머리를 돌려 퀸을 응시했다.
 "안 돼요. 좀더 큰소리로 불러보세요. 그래야 들으시니까요."
 "비겔로우 장군!!!"
  엘러리는 좀더 큰 소리로 불렀다.
 "이제 보물은 당신 차지가 되었군요. 그걸 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뭐, 보물?" 
 그러자 옆에서 앤디 비겔로우가 소리쳤다.
 "보물이라구요, 할아버지. 뉴욕에서 소문을 들은 모양입니다. 그걸 어떻게 하실 생각이냐고 묻는군요."
 자크 노인은 그제야 알아들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왜 이분이 알려고 하는 거지? 안돼, 앤디. 절대 안되고 말고."
 "얼마나 되는데요, 장군?"
 엘러리는 소리쳤다. 자크 노인은 그를 바라보았다.
 "꽤나 끈질긴 사람이구만."
 그리고 나서 그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우리- 칼렙, 애브너, 그리고 나 - 세 사람이 계산을 해봤더니 100만 달러나 되더군. 맞아, 그랬지. 백만 달러였어."
 노인의 왼쪽 눈꺼풀이 놀랄 만큼 아래로 늘어졌다.
 "세상에 저만 잘난 줄 아는 사람들이 많지만 알고 보면 다 별 수 없더군. 자네들도 잠자코 기다리면서 지켜보기나 하는 게 좋아."
 앤디 비겔로우는 히죽히죽 웃었다. 니키는 노인의 목을 조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니키가 스트롱 박사를 돌아다보며 속삭였다.
 "키시의 얘기로는 애브너 체이스는 20만 달러뿐이라고 했다던데요."
 "자크는 말할 때마다 점점 더 액수를 불리고 있죠."
 촌장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 말 내 다 듣고 있어, 마틴 스트롱!"
 순간 자크 비겔로우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노인이 갑자기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니키는 머리 속의 생각을 그치고 멈칫했다.
 "다들 기다려! 반드시 보여줄 테니까. 건방진 녀석들, 손바람 한번만 일으키면 다 날아가 버리고 말걸!"
 "네, 네. 그렇구말구요. 바람은 좀 아껴두었다가 나팔 불 때나 쓰세요."
 스트롱 박사가 불만스러운 투로 말했다. 그러자 자크 비겔로우는 크게 웃으면서 무릎 위의 작은 가방을 툭툭 치고 개선장군처럼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엘러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스럽게도 그가 계속 주시하고 있는 것은 자크 노인이 아니라 앤디 비겔로우 쪽이었다. 이 젊은이는 조부의 곁에 붙어 앉아 인적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시골 풍경을 바라보며 눈에 보이지 않는 관중들을 향해 만족스러운 듯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었다. 그 역시 승리를 거두기라도 한 것처럼...아니면 지금 승리를 향해 다가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햇살은 뜨거웠다. 남자들은 상의를 벗어들었고 여자들은 손수건으로 부채질을 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들 살아있는 사람들을.....>
 아이들이 묘지 사이를 뛰어다니자 당황한 어머니들이 그들을 뒤쫓아 달려갔다. 거의 대부분의 묘지에는 싱싱한 꽃들이 놓여 있었다.
 <...명예롭게 돌아가신 이분들에게 꽃을 바치는 것은...>
 자그마한 미국 국기도 무덤 사이에서 펄럭이고 있었다.
 <...목숨마저 바쳐 나라를 위하고...>
 마틴 스트롱 박사의 목소리는 깊숙하면서도 확신에 차 있었다.
 <...이곳에 묻힌 분들은 결코 헛되이 목숨을 바치지 않았으며...>
 스트롱 박사는 깃발이 세워진 남북전쟁 기념비의 댓돌 위에 올라선 채 비바람에 씻긴 묘석의 행렬들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은 마치 근사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사령관의 모습처럼 보였다.
 <...우리들의 조국은 신들의 비호를 받아....>
 미국 재향군인회 잭스버그 지부의 기수가 촌장과 군중들 사이에 씩씩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일단의 재향군인들이 구식 샤프스식 라이플 소총을 들고 묘지 앞에 정렬해 있었다.
 <...그리고 인민의 정부는...>
 촌장의 옆에는 원숭이처럼 붉은 얼굴을 한 손자의 어깨에 손을 걸치지도 않고 자크 비겔로우 장군이 서 있었다. 샤프스 소총의 총신처럼 꼿꼿한 자세로 선 채 푸른 군복차림으로 작은 가방을 단단히 부여잡고 있었다.
 <...지상에서 결코 소멸되지 않을 것이며...>
 노인은 참을 수가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가방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분대! 세워 총!"
 "자, 준비하세요, 할아버지!"
 앤디 비겔로우가 소리쳤다. 노인은 뭔가 중얼거리며 작은 가방에서 나팔을 꺼내느라고 애썼다. 
 "자, 이리 주세요!"
 "앤디."
 잭스버그 촌장이 조용히 말했다.
 "할아버지 혼자서 하시게 가만두게. 서두를 필요는 없으니까."
 마침내 나팔이 모습을 드러냈다. 구식의 군용 나팔로서 자크 비겔로우 자신보다도 더 오래된 것이었다. 군데군데 상처가 나 있었다.
 노인은 나팔을 입술에 가져갔다....
 이제 그의 손은 더이상 떨리지 않았다.....
 이제 아이들마저 조용했다....
 이제 재향군인단은 바싹 긴장한 채 서 있었다.
 그리고 노인은 나팔을 불기 시작했다.
 그것은 연주라고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가 나팔을 불자 갈라진 소리가 터져 나왔다. 때로는 전혀 소리가 나지 않는 적도 있었다. 그럴 때면 노인의 목에는 힘줄이 툭 불거져 나오며 그의 얼굴은 불에 타오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붉게 변해갔다. 때로는 입가를 혀로 핥으며 침을 닦아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나팔을 불었다. 그리고 무덤 주위의 나무들도 산들바람에 살랑거렸고 사람들은 동물의 비명 같기도 한 노인의 나팔소리가 마치 감미로운 음악이라도 되는 것처럼 미동조차 않은 채 귀기울였다. 갑자기 나팔소리가 멎었다. 자크 비겔로우 노인은 두 눈이 휘둥그래진 채 서 있었다. 게티스버그의 나팔은 기념비의 댓돌 위로 조그만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순간 모든 것이 정지해버린 듯했다. 아이들의 조용한 움직임도, 사람들의 숨소리도, 그리고 나뭇잎들의 살랑거림도. 그리고 나서 그 진공 속으로 공포의 속삭임이 파고들었다. 니키는 믿기지 않을 만큼 크게 눈을 떴다가 눈을 곧 감았다. 그 짧은 순간에 그녀는 잭스버그 남북전쟁의 용사들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가 스트롱 박사와 앤디 비겔로우의 발 아래로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박사님, 이번에는 당신 말이 옳았군요."
 엘러리가 말했다. 그들은 앤디 비겔로우의 집에 있었다. 자크 노인의 시신은 묘지에서 그곳으로 옮겨졌다. 집 주위에는 재잘거리는 여자들과 뛰어다니는 아이들로 가득 차 있었지만 방안에는 몇 사람만이 남아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노인의 시신은 긴 의자 위에 덮개로 덮여 있었다. 스트롱 박사는 시신 옆 의자에 앉아 있었지만 눈의 띌 정도로 갑작스럽게 늙어보였다. 
 "이건 모두 내 잘못이야. 작년에 칼렙의 입 속을 검사하지 않았어. 나팔의 입술 부위도 검사했어야만 했는데."
 "박사님, 그건 그렇게  쉽게 찾아낼 수 있는 독이 아니었습니다. 잘 아실텐데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시 정황으로 봐서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었죠. 만약 해부를 했다면 그 사실을 곧 알아차렸겠지만 아트웰 가문의 유족들이 그 제안을 일소에 부친 이상 어쩔 수 없었습니다."
 엘러리가 그를 위로했다.
 "모두 죽었소. 세 사람 다 말이오. 하지만 나팔 속에 누가 독을 넣었을까요?"
 스트롱 박사가 날카롭게 고개를 치켜들고 물었다.
 "난 아닙니다. 박사. 그런 눈으로 절 쳐다보지 마세요. 누구든 손을 쓸 수가 있었죠."
 앤디 비겔로우가 다급하게 변명했다.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스트롱 박사가 소리쳤다.
 "이상하지 않은가, 앤디. 칼렙 아트웰이 죽었을 때 자크가 나팔을 가져왔고 그건 일년 동안 쭉 이 집에 있었단 말일세!"
 "누구든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쉽게 손을 댈 수가 있었죠. 밤을 이용해서 말입니다. 아무튼 칼렙 노인이 죽기 전에는 나팔이 이 집에 없었죠. 작년 기념일까지는 그걸 그 노인이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그렇다면 누군가가 그의 집에서 독을 쓴 셈입니다. 그것은 도대체 누굴까요?"
 "그런 식으로는 아무런 결론도 내릴 수가 없습니다, 비겔로우. 당신의 할아버지는 남북전쟁에서 우연히 발견한 보물에 대해 말한 적이 있습니까?"
 엘러리가 중얼거리는 듯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말씀하신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만."
 앤디는 그렇게 대답해 놓고 곧 후회가 되는 듯 눈을 깜박이며 입술을 깨물었다. 결국 자크가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을 반쯤은 시인한 셈이다.
 "그게 무슨 상관이죠?"
 "이번 일련의 살인사건의 동기는 돈입니다. 비겔로우 씨."
 "그런 건 난 전혀 모르는 얘기요. 아무튼 그 보물에 대해서 권리가 있는 사람은 나뿐이오."
 앤디 비겔로우는 넓은 가슴을 쭉 펴보였다.
 "애브너 체이스가 죽었을 때 할아버지는 마지막 생존자였죠. 그러니 당연히 그 보물은 자크 비겔로우의 것이죠. 난 그분의 장손이구요. 그렇다면 그 보물은 당연히 제것입니다."
 "앤디, 자넨 보물을 숨겨둔 곳을 알겠군. 어딘가?"
 스트롱 박사가 몸을 일으키며 눈을 빛냈다.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이곳은 우리 집이니 그만 나가주시죠!"
 "이봐, 앤디. 난 이곳 잭스버그에서 법률을 대표하는 사람일세. 이건 살인사건이야. 보물은 어디에 두었나?"
 스트롱 박사가 부드럽게 말했다. 비겔로우는 웃고 있었다.
 "비겔로우 씨, 당신도 모르는 것 아니오?"
 마침내 엘러리가 입을 열었다.
 "물론 모르죠."
 그는 다시 소리내어 웃었다.
 "아시겠습니까. 박사? 이분은 당신 편이죠. 그런 분이 이처럼 제가 모른다는 것을 증명해 주시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그것은 몇 분 전까지의 일이죠."
 엘러리의 말에 비겔로우의 얼굴에서 순간 미소가 사라졌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요?"
 "자크 비겔로우는 오늘 아침 편지를 썼죠. 스트롱 박사한테서 애브너 체이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에 말입니다."
 비겔로우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그리고 당신 할아버지는 그 편지를 봉투에 넣어서...."
 "누가 그런 말을 했나요?"
 비겔로우가 고함을 질렀다.
 "당신 아이들 가운데 한 명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노인의 시신을 묘지에서 이곳으로 운반하고 난 뒤 당신이 맨 처음 한 일은 노인의 침실로 들어가는 일이었죠. 자, 그것을 넘겨주시오."
 비겔로우는 손가락 관절을 꺾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다시 한번 소리내어 웃었다.
 "좋습니다. 보여드리죠. 저 대신 보물을 찾아주세요! 안 될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건 법률적으로 제 것이죠. 자, 여기 있으니 읽어보세요. 아시겠습니까? 할아버지께선 봉투에 제 이름을 썼습니다!"
 과연 그의 말대로였다. 봉투 속의 편지에도 같은 필체로 쓰여져 있었다.
 
{{
}}
 앤디 보아라.
 애브너 체이스는 죽었다. 이제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우리들이 감추어 둔 보물은 모두 네 것이다. 그것은 쇠로 된 상자에 넣어서 칼렙 아트웰의 관 속에 숨겨놓았다. 그것 모두를 내가 사랑하는 손자인 네게 주겠다. 잘 생각해서 처리하거라.
                                                           자크 비겔로우


 "칼렙의 관에!!"
 스트롱 박사가 목에 잠긴 듯한 목소리를 냈다. 엘러리의 얼굴은 조금도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박사님 발굴허가증을 받으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요?"
 "지금 당장이라도 가능하죠. 난 이 지역 보안관 대리이기도 하니까요!"
 

 그리고 나서 그들은 몇 사람의 인부를 데리고 낡은 묘지로 향했다. 그리고 해가 질 무렵에는 칼렙 아트웰의 시신을 파냈다. 관 뚜껑을 열자 시신의 무릎 위에서 비교적 잘 다듬어진 쇠상자를 발견했다. 걸쇠는 걸려 있었지만 자물쇠는 없었다.
 썩어 문드러진 관을 향해 앤디 비겔로우가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한 기세였지만 두 사람의 건장한 사내가 그의 두 팔을 꽉 움켜잡았다. 한편 의학 박사이자 촌장이며, 아우러 경찰서장이자 보안관 대리로 있는 마틴 스트롱은 숨을 몰아쉬며 잔뜩 긴장한 채 쇠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그곳에는 상자 가득히 고액지폐 다발이 들어 있었다. 남군 정부가 발행하 지폐였다. 잠시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앤디 비겔로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엘러리가 말하기 시작했다.
 "이것으로 이야기가 들어맞는군요. 세 사람이 남부의 폐허가 된 저택 지하실에서 상자를 발견했고 상자 속의 물건이 남군 정부의 지폐임을 알았죠. 전쟁이 끝난 뒤 그들은 혹시 쓸모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그것을 파내서 잭스버그로 가져왔죠. 하지만 나중에 그들은 이 지폐가 더이상 쓸모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좀 장난을 치기로 했습니다. 이를테면 1865년부터 세 노인의 짓궃은 장난이 시작된 거죠. 칼렙이 작년 기념일에 죽었을 때 애브너와 자크는 세 사람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칼렙이 남부에서 발견한 재보의 보관자가 되는 영예를 차지해야 한다고 결정했을 겁니다. 그래서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칼렙의 관에 못질을 하기 전에 쇠상자를 관속에 집어넣은 거죠. 자크의 편지를 한번 보세요. <사랑하는 손자>에게 <보물>을 준다는 내용은 그 노인이 한 마지막 장난이었던 겁니다."
 사람들은 킥킥거리며 웃었다. 다만 시신만이 우울하게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침묵이 다시 찾아왔다. 마침내 침묵을 깬 사람은 앤디 비겔로우의 약하디 약한 욕설과 당혹스런 스트롱 박사의 다음과 같은 말이었다.
 "하지만 퀸 씨, 그걸로 살인사건을 설명할 순 없죠."
 "물론이죠, 박사. 그걸로는 설명이 안 되죠."
 그렇게 말한 엘러리는 말투를 완전히 바꾸어 설명하기 시작했다.
 "칼렙 노인의 시신을 처음 발견했던 때로 돌아가 다시 생각해 보기로 하죠. 검시를 하기 위해서는 얼마 후 다시 한번 시신을 관 속에서 꺼내야만 했을 겁니다. 어떻습니까, 박사? 그걸로 기념일 살인사건은 막을 내리지 않았을까요?"


 엘러리는 이 한 사건의 막을 내리기로 했다. 날이 어둑어둑해졌을 무렵, 장소는 마을의 중심지이고 마을 사람 누구나가 중요시하고 있는 장소인 키시 체이스의 집 현관이었다.
 엘러리와 니키, 스트롱 박사와 키시, 그리고 비겔로우-아직도 쇠상자에 대해 한 가닥 의문을 떨치지 못한 채-는 현관 앞에 서 있었다. 리우 베이글리와 빌 요다, 그 밖에 잭스버그의 마을 사람들이 모두 길가 잔디밭에 선 채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부드러운 초저녁 공기에는 어딘가 모르게 슬픔 같은 것이 배어 있었다. 이 마을의 생활에 생기와 흥분을 불어넣어주던 무언가가 이제 영원히 사라졌기 때문이다. 엘러리는 말문을 열었다. 
 "이번 사건에는 트릭 따위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또한 농담 같은 것도 섞여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번에 살해된 분이 비록 머지않아 죽음을 기다리는 노인이긴 했지만 끔찍한 살인사건임에는 틀림없으니까요. 그 해답은 그분들의 성의 머릿글자 순서만큼이나 간단한 것이죠. 발견되지 않은 보물이 남부의 지폐였으며 전혀 쓸모가 없는 것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것은 세 사람의 노인말고는 아무도 없습니다. 세 사람 중 어느 누구도 휴지나 다름없는 낡은 지폐를 손에 넣기 위해 다른 두 사람을 죽일 계획을 세웠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번 사건의 살인범은 보물이 진짜라고 믿은 누군가임에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오늘까지 보물을 숨겨둔 장소에 관해서는 단서를 조금도 지니지 못했기 때문에 법률상 그것을 요구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자임에 틀림없죠.
 여기까지 추리해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지만 최후에 남는 자가 모든 것을 손에 넣는다는 약속, 그건 모두 저 달빛 만큼이나 공허한 것임을 알 수 있죠. 칼렙과 자크, 그리고 애브너. 이 세 사람이 마을 사람들을 의문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그걸 보며 즐기려고 꾸며낸 얘기에 불관하죠. 하지만 살인범이라고 생각되는 인물은 그걸 몰랐던 겁니다. 그는 모든 이야기가 진실이라는 가정 아래 행동했죠.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는 애당초 살인계획 따윈 생각조차 안했을 테니까요.
 세 사람의 노인이 차례대로 죽을 경우 누가 이 보물들에 대한 법률상의 청구권을 가지고 있을까요? 물론 다른 두 사람이 죽으면 맨 마지막에 살아남은 한 사람이 합법적인 소유권을  갖춘다는 가정 아래서 말입니다."
 "최후에 남는 사람의 상속인이겠죠."
 스트롱 박사가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누가 그 상속인이 되겠습니까?"
 "자크 비겔로우의 손자, 앤디죠."
 작달막한 잭스버그의 촌장은 긴장된 시선으로 비겔로우를 노려보았다. 현관 아래 모여있던 사람들 속에서 술렁거림이 일었다. 비겔로우는 몸을 뒤로 빼며 키시의 등 뒤 벽에 붙어 섰다. 그러나 키시는 그를 비켜서며 말했다.
 "당신은 보물 얘기를 진짜라고 생각했군요. 그리고 칼렙 아트웰과 우리 할아버지를 죽였군요. 그리고 자신의 할아버지를 최후의 생존자로 만들어 놓은 다음 그를 죽여 보물을 차지하려고..."
 니키도 거들었다.
 "엘러리 선생님, 이 사람 말대로예요!"
 "니키, 유감스럽게도 그렇지가 않아. 전혀 틀렸어. 당신들은 모두 자크 비겔로우를 최후에 남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 같소만...."
 "사실이 그렇잖아요."
 니키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어째서 자크가 아니라는 거요? 칼렙과 애브너가 먼저 죽었으니...."
 스트롱 박사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분명히 사실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게 있습니다. 자크 비겔로우가 마지막 생존자라는 것은 단순히 과도한 우연의 결과일 뿐입니다. 애브너 체이스는 오늘 아침 죽었습니다. 하지만 독물이나 뭔가 폭력으로 죽었나요? 그건 아니었죠. 박사님. 단순히 뇌일혈로 사망했다는 것은 바로 당신이 한 말로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죠. 살해가 아니라 자연사였습니다. 자크 비겔로우는 오늘 오후 나팔을 애브너 노인에게 넘겨 주었을 테죠. 그리고 사실 그렇게 해서 1년 전 오늘 칼렙 아트웰이 죽었던 거죠....그리고 그 순간 애브너 체이스는 마지막 생존자가 되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애브너 체이스의 유일한 상속인은 누구일까요? 시간이 흐른 뒤 또는 그의 도움을 받아서 그러한 공작으로 보물의 상속인이 될 자는 누굴까요? 이 노인이 그의 친구와 함께 저 세상 사람이 된다는 것은 시간문제였던 겁니다. 키시, 당신은 우리들을 속였소!"
 잽싸게 손을 뻗어 엘러리는 잔뜩 겁에 질린 처녀를 움켜잡았다. 그날 오후 묘지에서 잭스버그 마을 사람들을 사로잡았던 공포가 지금 다시 이곳 군중들을 휘감았다.
 "당신은 보물 이야기를 믿지 않는 것 같은 얼굴을 했어. 하지만 그건 당신의 할아버지가 생각지도 않던 발작을 일으켜서 자크 노인이 독살되기 몇 시간 전에 죽고 나서부터였소! 그 막대한 보물을 차지할 수 없게 되었다는 걸 알고부터였소!"
 니키는 잭스버그를 출발해 25마일이나 올 때까지 한마디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 후 그녀가 꺼낸 말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면 이제 그 게티스버그의 나팔을 불 사람은 아무도 없군요."
 그리고 그녀는 남쪽의 어두운 곳을 묵묵히 바라다 보았다.

  

 엘러리 퀸 (Ellery Queen)
  맨프레드 B. 리(1905~1971)는 1928년 뉴욕에서 영화사에 근무하던 중 광고대행사에 있던 프레데릭 더네이(1905~1982)와 함께 반 다인의 성공에 자극받아 추리소설을 공동집필하기로 결심한다. 필며은 엘러리 퀸으로 정하고, 작품 속의 탐정의 이름도 엘러리 퀸으로 결정했다.
<로마 모자의 비밀<(1929)을 시작으로 <그리스 관의 비밀>,<차이나 오렌지의 비밀>,<이집트 십자가의 비밀>등 국명 시리즈를 비롯하여, 바나비 로스 명의로 <X의 비극>,<Y의 비극>,<Z의 비극>,<드루리 레인 최후의 사건>등 4부작과 가공의 도시 라이츠빌을 무대로 한 작품들이 대표작이다. 그들은 1941년에 <엘러리 퀸 미스터리 매거진>을 창간했는데, 이 잡지는 벌써 50주년이 넘었다. 애거서 크리스티가 미스터리 계의 여왕이라면 미스터리 계의 제왕은 엘러리 퀸이다. 그는 1960년 MWA 그랜드 마스터 상을 수상했다. 본편은 역사 미스터리로 비서 니키 포터가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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