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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선지 [한국위인전집]

by Casey,Riley 2023.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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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카한국위인전집 (4)고선지.

  


  고선지(?∼755)
  중국 당나라의 장군이다. 원래는 고구려 유민이었으나,고구려가 망하자 할아버지 대에서 당나라
에 건너가 살게 되었다. 20세에 장군이 되어 당나라 황제의 명으로 여러 차례 파미르 고원을 넘
어 탈해부와 소발률국을 정복하는 등 72개국을 모두 정복하였고, 안서군 총사령관이 되어 타슈켄
트를 토벌하기도 했다. 그러나 제3차 토벌 때는 아라비아 연합군과 탈라스 강변의 싸움에서 패배
하였다. 이 싸움은 사라센과 당나라의 패권을 건 유명한 싸움으로, 이때 포로가 된 당나라 군사에
의해 종이 만드는 법이 서방 세계에 전해지게 되었다. 755년 안녹산의 난이 일어나자 현종의 명
으로 부원수가 되어 출전하였으나, 그를 시기하던 변영성의 모함으로 처형당하였다. 그는 동양의
알렉산더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용감하며, 지략이 뛰어난 장군이었다.


  1. 유민의 아들

  “무엇을 꾸물거리고 있느냐. 어서 그 자를 끌고 가라.” 지휘자인 듯한 말탄 장수가 호통을 치
자, 창검을 번득 거리며 군사들이 달려가서 한 젊은이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복장과 태도로 보아,
군사들한테 멱살을 잡힌 젊은이는 고구려의 귀족인 것 같았다. 그리고 젊은이의 어머니와 아내인
듯한 두 여인이 장수에게 매달리며 애원하였다.
  “나리, 저희들도 함께 가도록 해 주십시오. 제발 부탁합니다.” “장군님의 명령이다! 그리고
너희들은 나중에 가게 될거다. 그 때 만나면 될 게 아니 냐?”
  여인들의 애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군사들은 젊은이를 끌고 갔다.
  이러한 일은 나.당 연합군에게 망한 고구려 땅 이곳저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다.
  고구려는 나라가 세워지면서부터 중국과 많은 전쟁을 하였다. 특히 당나라와는 크고 작은 전쟁
을 여러 번 해왔다. 당나라 이전에도 수나라와 크게 세 번이나 싸워 을지문덕 장군 등의 활약으
로 적을 무찔렀다.
  그러자 수나라를 뒤이은 당나라는 고구려 제 28대 보장왕 4년, 서기 645년에 당나라 태종 이세
민이 직접 대군을 이끌고 와서 안시성을 포위하였다.
  이 때, 안시성 성주 양만춘은 화살로 이세민의 눈 하나를 멀게 하였고, 당나라 군사들은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스스로 물러갔다.
  이에 한을 품은 이세민은 복수를 하기 위해 우진달을 시켜 고구려를 다시 침략했지만 연개소문
이 이를 잘 막아 냈다. 결국 이세민은 고구려를 치지 못한 채 죽었다. 그러자 당나라는 교묘히 신
라와 손을 잡았던 것이다.
  보장왕 18년, 당나라는 요동을 공격하였다. 백제를 공격하기 위한 양동 작전이었다.
  이듬해 6월, 당나라는 신라군과 함게 백제를 공격하여 사비성(부여)을 함락시키고, 백제의 의자
와과 백제의 백성 1만 2000여 명을 포로로 잡아 당나라로 끌고 갔던 것이다(서기660년).
  백제가 망하자 백제의 유민인 복신, 흑치상지는 백제 부흥운동을 일으켜,왜국에 가 있던 왕자
풍을 왕으로 추대하고 주류성(한산)에서 저항 운동을 계속하였다.
  이들은 한동안 백제의 영토를 거의 수복하는 듯싶었으나, 서기663년에 나.당 연합군에게 패하고
주류성을 점령당하자, 백제왕 풍은 남은 무리를 이끌고 고구려로 달아났다. 이로써 백제는 완전히
멸망하였다.  보장왕 25년 고구려에서는 막리지였던 연개소문이 세상을 떠났다. 그에게는 세 아들
이 있었는데, 이들이 서로 권력 다툼을 하여 고구려는 이 때부터 이미 멸망의 길로 들어선 것이
다.
  이를 기회로 당나라 군사들은 요동과 바다로 공격해왔고, 신라군은 남쪽에서 쳐들어왔다. 고구
려는 이들을 처음에는 격퇴했지만, 이듬해에 다시 침략을 받아 평양성이 함락되고 고구려는 멸망
했던 것이다.(서기668년).
  그 후 50년이 지났다.
  자기네가 이 곳 당나라까지 오게 된 내력을 듣고 있던 소년 고선지는 아버지 고사계에게 물었
다. 연약해 보이는 어린이였으나, 눈에는 총기가 번뜩였고 호기심이 많았다.
  “그 때, 할아버지는 증조 할머니와 할머니를 다시 만날 수 있었나요?” “어떻게 만날 수 있
었겠니? 당나라 군사에게 끌려가는 고구려 유민들은 평양성에서 수 천 리나 떨어진 요동의 영주
(잉저우)까지 줄곧 걸어야 했단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병이 나도 치료는커녕 채직질을 받아 가
며 끌려갔지.” “같은 사람으로서 어찌 그럴 수가 있었을까요?”
  “남자들은 그래도 나은 편이었다. 여자들은 말로는 다할 수 없는 모욕을 당하였다. 실 컷 부려
먹다가는 대부분 숙신(말갈족)에게 노예로 팔아 버렸단다.” 아버지 고사계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고선지는 가슴에서 피가 끓었다. 벌써 고구려가 멸망한 지 50년이 지났지만, 민족의 얼과 핏줄은
엄연히 살아 있었던 것이다.
  “그 뒤 고구려는 어떻게 되었지요?”
  아버지 고사계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는 당나라의 군인으로, ‘교장’이라는 말단 장교였다.
  “당나라는 평양성을 점령하자‘안동 도호부’라는 것을 두었다. 도호부 아래 9개의  ‘도독부
’를 두어, 고구려 유민들을 억눌렀지. 나라가 망하자 유민 일부는 신라로 탈 출했단다. 그래서
서기 670년에 검모잠이 안승을 왕으로 추대하며 고구려 부흥 운동 을 일으켰었지.”
  고구려 부흥 운동은 몇 년을 두고 불길처럼 활활 타올랐다. 신라는 이런 부흥운동과 백제 유민
들을 모아 당나라 군사를 한반도에서 몰아 내는데 힘썼고, 서기 672년에는 안동 도호부가 요양으
로 쫓겨갔다.
  그렇지만 고구려는 명망하였고 유민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고선지가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는
안타깝게도 알 수 없다. 다만, 당나라로 끌려간 그의 할아버지가 당나라 군대에 들어가, 그의 가
문은 대대로 군인으로서 살게 되었고, 고선지도 아버지의 직접을 잇기 위해 어려서부터 무예와
병법을 열심히 배웠다.
  고선지에 대한 기록은 당나라 역사책에 나오는데, 당나라 역사를 기록한 ‘구당서’나 ‘신당
서’도 믿을 게 못된다는 게 요즘 학자들의 지적이다.
  하지만 우리가 고선지를 알려면 우선 당나라에 대하여 알아 두어야 할 것이 있다.
  본디 중국의 역사는 자기 나라 주변의 민족은 모두 야만족이라 생각하고, 한족에 불리한 사실
은 되도록 감추고 없애 버렸기 때문에 사실과 어긋나는 것이 많다.
  먼저 당나라 태종 이세민은 역사상 보기 드문 명군이었다. 그는 23년 동안 황제로 있었고, 그
동안 실시한 정치는 ‘정관정요’에 기록되어 뒷날 왕들의 모범 교과서처럼 되었다.
  이세민은 황제가 되기 위해 자기의 형제들과 조카들, 그리고 많은 중신들을 죽이고, 서기 626년
에 황제로 즉위하였다.
  그 날로부터 겨우 12일뒤, 돌궐족의 10만 여 대군이 당나라 수도인 장안(시안) 근처의 무공까지
침입했다. 이세민은 할 수 없이 이정의 건의를 받아들여 창고에 있는 금은 재물을 몽땅 바치고
가까스로 물러나게 했다.
  도루걸은 터키계 유목민으로 알려져 있으나 수수께끼의 민족이다. 그들 자신의 문자가 없어 기
록을 남기지 못한채 민족이 멸망했기 때문이다.
  그 후 서기 629년, 이세민은 이정을 시켜 동돌궐을 멸망시켰다. 강력한 동돌궐이 패한 까닭은
내부의 싸움으로 부족의 힘이 분열된데다가 이상 기후로 극심한 추위가 몰아닥치고 큰 눈이 왔기
때문이다.
  동돌궐을 격파함으로써 당은 서역 여러 나라와의 교역이 가능해졌고, 서기 635년에는 기독교의
한 분파인 네스토리우스 교가 들어와 ‘경교’라 불렀다. ‘서유기’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현장
법사가 불교를 다시 부흥시키기 위해 장안을 출발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그 당시 당의 세력권은 둔황 일대까지 넓혀졌고 ‘옥문관’이란 국경 초소가 있었다.
  옥문관을 나서서 사막과 산악 지대를 지나 수백 리를 가면 투루판 분지가 있다. 이 곳에 ‘고
창국’이란 나라가 있었는데, 서기 640년 당나라는 고찰국을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안서 도호부
’를 설치하였다.
  30여 년 후, 고구려에서 끌려온 고선지의 할아버지는 처음에 투루판 분지에 보내져 고생을 한
것이다. 아버지는 입버릇처럼 선지에게 말하였다.
  “할아버지는 이 아버지가 어렸을 때, 어디에 가서 살거나 중요한 것은 조상의 전통과  풍습을
버려서는 안된다고 가르쳐 주셨단다.”
  사실 고선지는 어려서는 유약했지만, 자라면서 건장한 젊은이가 되었다. 가혹한 기후 조건이 고
선지를 늠름하게 만들었고 남달리 용감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고선지는 아버지를 따라 전장에도 자주 나갔다. 대개 도호부 근처에 있는 다른 유목민을 토벌
하는 일이었다.
  고선지는 싸움에 나가면 선두에 서서 적과 싸웠다. 이 때의 전투는 대개 장수가 앞장 서서 적
에게 공포감을 주고, 적장을 거꾸러뜨림을써 결판이 났다.
  이 때, 실크 로드(비단길)가 개척되었다.
  실크 로드는 둔황에서 톈산 북로와 톈산 남로의 두 길로 갈라져 있었다. 그 가운데 톈산 남로
는 옥문관을 나와 사막을 지나 이오에 이르렀고, 다시 고창(투루판)을 거쳐 연기(옌치), 쿠처 등
사막과 건조 지대의 오아시스를 따라 이어져 있었다.
  이 실크 로드를 통해 서역의 물자가 흘러들어와 당나라는 번영을 누렸다.
  당나라 태종 이세민은 서기 649년에 죽었고, 아들 이치가 뒤를 이었는데, 이 사람이 당나라 고
종이다.
  이 때, 고종의 황후로 무측천이란 여인이 정치의 실권을 잡았는데, 무측천은 이윽고 측천무후가
되어 황제 노릇을 했다.
  당나라는 계속 발전을 거듭하여 서기 649년에는 서돌궐마저 멸망시키고, 안서 도호부를 쿠처로
옮겼다. 당의 영토가 그만큼 넓어진 셈이엇다. 그리고 서기 679년에는 고주(하노이)에 ‘안남 도
호부’를 두었다.
  이런 때에 고구려가 망하고 고선지의 할아버지가 당나라 에 끌려왔던 것으로 추측된다.
  고선지는 아버지가 쿠처로 전임이 되자, 그 곳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 쿠처는 투루판과는 달
리 모든 것이 고선지에게 낯설었다.
  이 때, 고선지는 이미 스무 살 가까운 젊은이였다. 아버지는 그런 고선지를 보며 대견스럽게 여
겼다.
  “너도 이제 아내를 맞아 한 가정을 이루고도 남을 나이다. 안타까운 것은 이 곳에 고 구려 핏
줄을 이어받은 처녀가 없는 것이로구나.”
  그러던 어느 날, 대상들이 사막길에서 도둑의 무리에게 습격을 받았다는 급보가 도호부에 알려
졌다. 고선지는 몇 명의 부하를 이끌고 달려갔다.
  그리고 순식간에 도둑들을 베어 죽이고 대상들을 위기에서 구해 주었다.
  대상들 중에는 외국인도 많았으며, 회교도가 많았다.
  “오, 위대한 알라 신이여, 우리가 기도한 보람이 있어 당신과 같은 용사를 보내 주셨 습니다.
생명의 은인이시니 아무쪼록 이것을 받아 주십시오.” 하며 선물을 내놓았다. 그러나 고선지는 이
를 사양했다.
  고선지는 몇 번이고 사양했지만, 그들은 선물을 받으라며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았다.
  회교도는 자기가 고마움을 느껴 선물을 줄 때, 이를 받지 않으면 자기를 멸시하는 모욕으로 안
다. 그래서 사양이란 것은 그들에게 통하지 않았다.
  고선지는 그것을 알게 되자, 미소를 띠고 말하였다.
  “그렇다면 선물을 받는 대신 청이 하나 있소?”
  “그 청이 무엇입니까?”
  “나는 장가들 나이가 되었는데, 같은 핏줄을 지닌 고구려 처녀가 없어 곤란을 받고 있
    소. 당신들은 교역을 하여 멀리 장안까지도 갈 수 있으니, 돌아오는 길에 참한 고구려  처녀
를 하나 구해 주시오.”
  그러자 대상의 우두머리는 씨익 웃었다.
  “그런 부탁이라면 어렵지 않소. 알라 신에게 맹세하고 우리가 반드시 훌륭한 고구려  처녀를
구해 드리겠소.“
  얼마 뒤, 고선지는 안서 도호부의 유격 장군이 되었다. 그리고 우전이란 곳에 파견되었다가 연
기(옌치) 도독부의 진수사가 되어 부임했다.
  한편, 서기 698년에는 고구려 유민 대조영이 ‘발해’를 일으켰다. 그래서 이 방면의 안동 도호
부를 도독부로 격을 낮추었고, 보장왕의 손자 고덕무를 도독에 임명하고, 일선 지휘관의 권한을
높여 주었다.
  고선지의 아버지와 고선지가 당나라 군사에게 차츰 지위가 높아진 것도 이런 데에 가닭이 있었
을 것이다.
  진수사가 된 고선지는 부하들을 잘 돌봐 주고, 백성들의 생활을 보살피는 데 힘썼다.
  이 때, 알게 된 부하로 단수실, 이사엽, 봉상청 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고선지를 존경하였고, 그
를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바치겠다고 맹세하였다.
  “고 장군께서 우리를 부모처럼 잘 대해 주는데 우리가 그 보답을 하지 않느다면 짐승 만도 못
하다.”
  특히, 봉상청은 일찍 부모를 여의고 외조부 밑에서 자랐는데, 그는 불구자였다.
  “애꾸눈에 절름발이!”
  봉상청은 어려서 아이들에게 이러한 놀림을 받으며 서럽게 자랐다. 그는 이런 분한 마음을 참
아 가며 글공부를 열심히 했고 병서를 많이 읽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병신이라고 그를 업신여겼다.
  어느 날, 봉상청은 시장에 가다가 질풍처럼 달려오는 말에 채어 나둥그러지고 말았다.
  “지금 나를 넘어뜨리고 달려간 사람이 누구입니까?” 봉상청이 주위 사람들에게 묻자, 사람들
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선뜻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봉상청이 거듭 묻자, 한 사람이 겨우 가르
쳐 주었다.
  “이 곳 진수사 어름의 유모 아들이오, 그러니까 고 장군과는 어려서 함께 젖을 먹고  자란 사
이라오.”
  “여보시오, 재수가 좀 없었다고 생각하고 단념하시오. 괜히 고발했다가 당신만 매를  맞게 될
것이오.”
  사람들이 봉상청에게 충고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그는 남달리 강직하고 고집이 세었던 것이
다.
  당시의 당나라에서는 측천무후가 50년 가까이 독재정치를 하며 국방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또한 측전무후는 행정 구역을 정비하여 전국을 10개의 ‘도’로 나누었다.
  그런데 이 도가 너무나 넓어 순찰사를 두어 각지의 관리들을 감독하게 했다. 이름 그대로 순찰
사는 한 군데 있지 않고 여기저기를 순찰하며 직무를 수행하였다. 이것이‘안찰사’로 바뀌고, 다
시 ‘절도사’가 되어 도의 정치.군사의 권한을 모두 쥐게 되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또, 지방에는 ‘주’와 ‘현’이 있었고, 특히 중요한 곳을 ‘부’라고 했다. 그리고 군대를 주
둔시키는 요지는 ‘도독부’, 변경에는 ‘도호부’를 두었던 것이다.
  진수사는 그 지방의 군사와 행정을 모두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력이 막강하였다.
  따라서 사람들이 봉상청에게 고발하지 말라고 충고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봉상청은 관청에 가서 고발하였다. 진수사인 고선지는 봉상청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봉
상청은 비록 남루한 옷에 다리까지 절고 눈 하나가 먼 사람이었으나, 그의 말에는 조리가 있었고
당당했다.
  “알았다. 네 말이 사실이라고 보장할 증인이 있으냐?” “시장 사람들 여럿이 보았습니다. 좁
은 시장에서 그렇듯 함부로 말을 몰고 가면 앞으 로도 다치는 사람이 계속 생길 것입니다.”
  고선지는 곧 부하를 시켜 봉상청의 말이 사실인지를 확인하고, 유모의 아들을 잡아들여 곤장을
때렸다.
  유모는 자기 아들을 무참하게 때린 고선지를 원망했으나, 고선지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그를
달랬다.
  “법이란 누구에게나 공평한 것입니다. 만일, 내 자신이 정에 이끌려 법을 어긴다면 남 을 다스
리는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지요.”
  봉상청은 이 때부터 고선지의 부하가 되었다.








  2. 타클라마칸 사막을 거너다

  당나라는 측천무후가 죽자, 본래 당나라의 왕족이었던 이씨가 다시 황제의 자리를 잇게 되었다.
  측천무후는 그 동안 자기의 친정 쪽 친척을 대장군 등에 임명하고, 나라 이름을 ‘주’라고 바
꾸는 등 세도를 부려 백성들의 불만이 컸다.
  그 후, 중종이 황제가 되자 또 소동이 벌어졌다. 서기 710년 중종의 황후 위씨가 딸 안락 공주
와 짜고 황제를 독살했던 것이다. 황후 위씨는 자기도 측천무후처럼 황제가 되어 권세를 마음껏
누리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이런 혼란은 오래가지 않았다. 서기 712년 이융기가 군사를 일으켜 위씨를 몰아 내고 정
권을 잡았는데, 이 사람이 중국 역사상 유명한 당나라 ‘현종’이다.
  당나라 현종은 45년 동안 황제의 자리에 있으면서 찬란한 뭉화의 꽃을 피웠다. 유명한 시인 이
백(이태백), 두보 등도 이 때의 사람이다.
  당시 당나라의 세력은 톈산 산맥과 파미르 고원 저 편까지 뻗쳐 있었다. 또, 안서 도호부가 쿠
처에 있으면서 실크 로드를 보호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상들은 안심하고 중국의 비단.죽세공품.화
약.종이 등을 아라비아나로마까지 가져갔고, 그 곳에서 유리.말.약제.향료.쇠붙이 등을 당나라에 가
져왔다.  또, 많은 서역 사람들이 장안에 와서 살았다. 아랍인, 유럽 인, 그리고 흑인까지도 있었
다.
  이 때가 당나라의 전성기로 정치 학문, 예술 등에서 극치를 이루었다.
  당시의 군사 제도는 백성들에게 농토를 나누어 주고 농사를 짓게 하다가 농한기에는 군사 훈련
을 시켜 군사로뽑아 쓰던 부병제였다.
  그런데 서기 722년경에 도망치는 군사가 많아지자 부병제는 무너지고 말았다. 그래서 새로이
백성들에게 의무적으로 병역의 의무를 지우는 징병제가 실시되었고, 이어서 일정한 돈을 주어 군
인을 고용하는 용병 제도가 실시되었다.
  어느 날, 고선지에게 ‘달해부’를 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달해부는 톈산 산맥 서쪽에 있는
작은 나라였다.
  명령을 받은 고선지는 부하들에게 지시를 하였다.
  “달해부를 치려면 큰 사막을 지나가야 하므로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특히, 식량과 음 료수를
충분히 준비해야 한다.”
  연기에서 달해부로 가려면 타클라마칸 사막을 지나야했다. 이 사막은 쿤룬 산맥 북쪽에 있는
넓은 사막으로 동서로 길이가 1000킬로미터나 되고, 남북으로 폭이 200∼400킬로미터나 되었다.
  더욱 무서운 것은 ‘모래 폭풍’으로 이것이 불었다 하면 눈도 뜰 수 없고, 사람도 말도 순식
간에 모래에 파묻히고 만다. 그리고 모래산이 새로 생기든가 없어지든가 하기도 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이 곳을 지나가기 위해서는 죽음을 각오해야만 했다.
  고선지의 지시를 듣고 있던 고선지의 참모들은 모두 구개를 끄덕였다. 그 때, 가만히 듣고 있던
봉상청이 입을 열었다.
  “문론이지요. 준비란 아무리 많이 해도 결코 지나친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번 원정 에는 몇
가지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적은 천연의 방어물인 사막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
쪽으로 쳐들어오리라는 것은 미처 생각하지도 못하고 방비도 허술하 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볍게 무장한 2000명의 기마 부대로 적을 기습 공 격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차
림이 간단해야 하고, 물이나 식량은 다소 적어도  됩니다. 다만, 그 곳의 지리를 잘 알고 있는 믿
을 수 있는 길 안내인이 필요합니다.” 봉상청의 의견은 언제나 적절하였다. 고선지는 고개를 끄
덕였다.
  그는 곧 2000명의 정예 부대를 편성하였다.
  고선지는 평소 부하들을 강하게 훈련시키기로 소문이나 있었다. 부하들 중에는 이런 심한 훈련
때문에 불만을 터뜨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럴 때에는 고선지는 부하들을 따뜻하게 타일렀다.
  “지금 너희들은 쉬지도 못 하게 하고 고된 훈련만 시킨다고 나를 원망할지 모른다. 그 러나
전장에 나아가 적과 싸울 때, 고된 훈련을 받은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알 때가 있을
것이다. 지금 너희들이 흘리는 땀 한 방울이 전장에서 피 한 방울이라는  것을알면 훈련을 게을
리할 수 없을 것이다.”
  고선지의 적은 비단 창과 칼을 들고 덤비는 적군만이 아니었다. 고선지는 일생을 두고 불모의
황무지며 천 리도 더 되는 사막과 싸워야 했고, 또한 높은 산맥을 넘고 몇 달씩 강행군을 해야만
했다.
  이와 같은 자연의 적은 인간의 적과 달라서 끊임없이 병사들을 괴롭혔다. 그렇게 때문에 고선
지는 부하들을 평소부터 훈련을 엄하게 시켰다. 물론, 병사들만 고생시키고 자기는 천막에서 편하
게 지낸 것은 아니었다. 고선지 자신이 병사들과 더불어 소금물에 적신 주먹밥을 먹었고, 밤에는
추위와 거센 모래 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 땅바닥에 거적을 깔고 밤하늘의 별을 보며 잤다. 그렇
기 때문에 고선지 밑에 있는 다른 장수들도 병사들과 똑같이 먹고 잤다.
  이러한 고선지를 보고, 하루는 봉상청이 말하였다.
  “장군님은 부하들을 너무 사랑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군사를 지나치게 부드럽게  대하면
도리어 고마움을 잊고 버릇이 없어질 염려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네가 잘 모른 소리다. 옛날
춘추 전국 시대에 오기라는 장군은 병사들과 똑 같이 먹고 잤으며, 행군을 할 때에는 자기 말에
부상병을 태우고 자기는 병사들과 똑같 이 걸었으며, 다리에 종기가 난 병사가 있으면 자기 입으
로 종기 고름까지도 빨아 주었 다. 그정도의 지휘관이라면 부하들은 진심으로 그를 따르고 전투
를 할 때에는 목숨을  바쳐 싸울 것이다.”
  장군이라면 위엄이 있어야 한다고 봉상청은 말했던 것이었으나, 고선지는 부하들에 대한 위엄
은 맹훈련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였다.
  고선지는 잘 훈련된 정예 군사들을 이끌고 타클라마칸 사막을 가로질어 달렸다. 이 사막은 좁
은 곳이라도 500리나 되었다. 언제 모래 폭풍이 불어 닥칠지 모르는 일이었다.
  이 곳을 통과하기 위하여 고선지는 선발대로 2개 중대를 뽑아 명령을 내렸다.
  “너희 2개 중대는 본대보다 앞서 전진하여, 한 시각후 그 곳에 높은 기둥을 세워라.
  그런 뒤, 1개 중대는 갔던 길로 되돌아오고, 나머지 1개 중대는 그대로 전진했다가 다 시 한 시
각이 되면 갔던 길을 되돌아오라.”
  고선지의 명령을 듣고 있던 병사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자기들끼리 불만을 털어놓았다.
  “일부 병력이 먼저 나아가 적을 경계하며 정찰하라는 것은 알 수 있다. 그러나 장군의  명령
대로 하면 같은 거리를 왔다갔다 하라는 것이 아닌가?” 고선지는 병사들의 이런 불만을 모른 체
하고 사막을 전진하면서 선발된 2개 중대를 내보냈다가 1개 중대는 갔던 길을 반드시 되돌아오게
하였다. 그런 뒤, 그 말발굽 자국을 따라 본대를 나아가게 하였고, 기둥을 세운 곳에서 새로운 2
개 중대를 다시 출발시켜 전과 같이 반복시켰던 것이다.
  고선지의 명령에 의문을 품었던 병사들의 불만은 사막의 한복판에서 갑자기 모래 폭풍을 만나
고 나서야 없어졌다. 선발대가 왔다갔다 한 곳에는 군마의 발자국이 있으므로, 아무리 모래 폭풍
이 심해도 그 흔적이 약간은 남아 있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모래 폭풍이 지나간 후에도 방향을 잃지 않고 앞서간 선발대들의 발
자국을 따라 무사히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고선지가 이끈 부대는 달해부를 기습하였다.
  사막 쪽에는 아무런 방비도 하지 않고 있던 달해부는 고선지 부대이 기습을 받아 곳곳에서 불
길이 치솟는 가운데 갈팡질팡하였다.
  이리하여 고선지는 별다른 피해 없이 승리를 거두고 많은 포로들을 사로잡았다.
  승전 보고서가 조정에 올라가자, 고선지에게 안서 도호부 부도호 겸 도지병마사라는 직책이 내
려졌다.
  당나라는 서기 733년에 전국을 15도로 나누었고, 서기 742년에는 10개의 절도사를 두었다. 고선
지가 안서 보호부의 부도호가 된 것도 이 무렵이었으리라고 여겨진다.
  이 대는 당나라가 최고의 번영르 누리고 있을 때였다.
  서기 744년, 당나라 현종은 이제는 정치에 관한 일에는 싫증을 내고 사치와 방탕으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오늘도 현종은 술에 취한 채 양귀비(본래는 양옥환이며, 귀비가 된 것은 후의 일
이지만 여기서는 그대로 양귀비로 함)를 옆에 앉히고 모란꽃을 감상하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황제와 양귀비의 흥을 돋우기 위해 서역에서 온, 눈이 파랗고 붉은 머리의 이국인
들이 여러 가지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모란꽃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바라보던 현종은 갑자기 옆에있는 환관 고역사를 돌아 보며 명
하였다.
  “악사들을 물러가게 하고, 시인 이백을 불러오도록 하여라.!” 황제의 명령이 내려지자, 벼슬아
치들이 이백을 찾아 나섰다.
  이백은 벼슬아치는 아니었지만, 그의 시는 씩씩하고 웅대하였으며, 때로는 감미로운 것이 도저
히 이 세상 사람이 지은 것이라고 볼 수 없을 만큼 훌륭하였다. 그리하여 이백은 ‘시선’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현종도 그의 시를 좋아하여 이백을 자주 궁중에 불러들였다.
  현종 자신도 시를 짓는 예술가였지만, 이백을 불러 양귀비와 모란꽃의 아름다움을 시로 지으라
고 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 때, 이백은 쉰다섯 살이었다. 그는 늘 술을 마시고 언제나 취해 있었다.
  이 날도 이백은 자안 뒷골목의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벼슬아치는 술에 취해 있는 이백
을 찾아 내어 가마에 억지로 태워 궁전으로 데령왔다.
  고역사가 궁정 층계 아래까지 내려가 몸을 가누지 못하는 이백을 부축하려 했다.
  “여보시오. 아무리 술이 취했다 하더라도 정신을 차려서 몸을 바로 하시오.” “뭐라고. 술을
취하도록 먹자고? 거 좋지, 좋아. 그런데 당신하고는 먹고 싶지 않은데 ?”
이백은 고역사를 좋아하지 않았다. 환관이면서 황제의 총애를 믿고, 대신 이상의 권세를 휘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역사 역시 이백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백은 벼슬에도 관심이 없었으며, 도통 겁나는 것이 없
을 만큼 바른소리를 잘하여 자기와 같은 사람은 인간 취급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꾹
참고 이백에게 말하였다.
  “여보시오, 여기는 폐하의 어전이오. 정신 차리시오, 정신!” 그러나 이백은 건주정(취하지 않
았으면서 공연히 하는 주정)을 계속하였다.
  “어, 취한다. 이봐, 내 신이 더러우니 신발 좀 벗겨주게. 그래야 천자님을 뵙지.” 고역사는 아
니꼬웠다. 그렇지만 황제가 있는 곳이라 끓어오르는 부아를 억지로 눌렀다. 후일 이 일 때문에 이
백은 고역사의 모함을 받아 추방되고 비극적인 죽음을 당하였다.
  당나라의 번영도 이 때부터 이미 내리막길을 달리고 있었다. 황제는 사치를 즐기고 매일처럼
잔치나 벌이며, 어여쁜 미인들과 노는 데만 열중해 있었다. 정치를 하는 귀족들 또한 타락하였다.
  이 때의 장안 시민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생활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외국의 것을 좋아하였
고, 사치스러운 생활에 빠져 있었다.
  기록을 보면, 장안의 길가에 푸른 색깔의 휘장이 드리워진 터키 천막을 치고, 그 안에서 낮잠을
즐기는 자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남녀가 통이 좁은 홀태바지를 입고 있었다고 씌어 잇는데 이것은 실크 로드를 통해 외국
의 우수한 말이 대량으로 수입되고 승마를 즐기는 사람이 많았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귀족들은 외국에서 수입한 것으로 온갖 즐거움을 누렸다. 예를 들어, 인도네시아산 앵무새, 사
마르칸트산의 애완용 개, 신라산 매를 기르고 있었다. 또, 여자들은 캄보디아산 웅황을 이마에 바
르고, 베트남산의 새빨간 연지를 볼에 찍는 일이 유행되었다.
  이 모두가 산업에 이용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즐길 목적으로 수입되는 것이었다.
  귀족들의 식탁에는 티베트산 호배추, 만주산 숭어, 페르시아산 복숭아, 신라산 잣, 인도산 후추
가 매일 올랐다. 이 밖에 온갖 것들이 외국에서 들어오고 있었는데, 그것은 일일이 다 말할 수 없
을 정도이다.
  또, 귀족들의 즐거움을 얻기 위한 도구로써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노예였다.
  변경에서 고선지 같은 장군들이 적과 목숨을 걸고 싸워 잡은 포로들은 노예로서 당나라에 보내
졌다. 귀족들의 향락을 위해서는 말과 소처럼 묵묵히 일하는 노예가 무엇보다 필요했기 때문이다.
  서기 742년에 당나라에서 10명의 절도사가 임명되었다. 당나라에서 절도사를 둔 것은, 언제나
긴급 사태가 예상되는 변겨에서는 군대의 지휘자가 행정권도 아울러 갖는 게 사태를 초기에 수습
하는 데 바람직했기 때문이다.
  갑자기 적군이 국경을 넘어 쳐들어왔을 때, 그것을 수만 리나 떨어져 있는 황제에게 보고하고
지시를 받아 대처하려면 이미 때는 늦고 만다. 이런 생각은 식민지에 총독을 두어 통치했던 것과
도 같았다.
  ‘자치  통감’에 나타나 있는 당나라의 10절도사의 명칭과 주둔지, 병력을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안서 절도사 쿠처 2만 4000명
  북정 정도사 정부(우루무치)2만 명
  하서 절도사 양주 7만 3000명
  삭방 절도사 영주 6만 4700명
  하동 절도사 태원 5만 5000명
  범양 절도사 유주 9만 1400명
  평노 절도사 영주 3만 7500명
  농우 절도사 선주 7만 5000명
  검남 절도사 성도 3만 900명
  영남 오부 절도사 광주 1만 5400명
  그런데 이 10곳의 절도사 중에 안녹산이 현종의 신임을 받아 평노뿐 아니라 하도, 범양의 절도
사도 겸하고 있다.
  이리하여 그가 다스리고 있는 땅은 어마어마하게 넓었고, 그의 밑에는 많은 병력이 있어 세력
이 대단히 컸다. 또, 그는 양귀비를 어머니라고 부를 만큼 총애를 받고 있었다.
  안녹산의 고선지에 비하여 비교적 많은 기록이 전해지고 있지만, 그래도 밝혀지지 않은 점이
많다.
  안녹산은 고선지의 운명과도 관계가 깊다. 그 역시 한족이 아니라 왼국인끼리의 혼혈로 ‘잡호
’라고 불리우는 혼혈 종족 출신이었다.
  그의 아버지의 이름은 안연언이라 전해지는데, 이것으로 보면 중앙 아시아에 있던 안식국 출신
인 것 같다.
  그러나 ‘신당서’에는 안녹산의 본디의 성이‘강’이라고 나와 있다. 그렇다면 사마르칸트 출
신이었는지도 모른다.
  참고적으로 말하면, 중국 고대의 기록에 나오는 사람은 성으로써 그가 어떤 나라 출신인지 알
수 잇게 되어있다.
  고선지도 이런 원칙에 다라 고구려 출신임을 알 수가 있었던 것이다.










  3. 파미르를 넘다

  한편, 고선지가 안서 보호부 부도호로 있을 때, 토번이 크게 세력을 늘려 가끔 비단길을 막고
중국을 오가는 상인들을 괴롭혔다.
  토번은 현재의 티베트에 있던 부족으로, 그 무렵 이들의 세력은 매우 강성하였다. 카슈미르의
북쪽에 있었던 소발률국(지금의 길기트)은 작은 나라였지만 교통의 요지로, 중앙 아시아 서부와
안서 도호부를 잇는 중앙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 나라는 당나라에 속해 있었는데, 토번은 예전부
터 이 곳을 노리고 있었다.
  본디 이 일대는 사막과 일 년 내내 비 한 바울 내리지 않는 건조 지대이며, 주변에는 높은 산
들이 장벽처럼 솟아 있다. 그러나 사막에는 군데군데 오아시스가 있어 오아시스마다 작은 부족
국가들이 나라를 이루고 있다. 실크 로드는 이런 오아시스 국가를 이어가며 나 있고, 강국.안식국.
석국(타슈켄트).미국.사국.조국 등 20여 개의 나라가 당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있었다.
  토번의 왕 손챈감포는 소발률국을 자기 세력 아래에 두려고 했다. 그 까닭은 소발률국만 순아
귀에 넣는다면 당나라로 가는 길을 막아 20여 개국의 진귀한 특산물을 모두 자기 손에 넣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토번왕은 자기 딸을 소발률국의 왕비로 들여보내으로써 이 계획은 성공했다.
  당나라 현종은 토번왕의 이런 야망을 안서 도호부 절도사 부몽영찰의 보고를 받고서야 알았다.
그래서 즉시 토번 정벌의 원정군을 몇 차례 보냈지만 번번이 실패하였다.
  현종은 조정에서 대신들과 대책을 의논하였다.
  “토번의 세력이 날로 강대해져 톄산 남로의 통상로가 끊어졌소. 원정군을 몇 번 보냈 지만 번
번이 실패했으니 이를 어쩌면 좋겠소?”
  “폐하, 이 작전에는 현지의 사정을 잘 아는 장군을 보내야 합니다. 지금 안서의 부도 호로 있
는 고선지 장군을 쓰심이 어떠신지요?”
  “오, 고선지 장군! 그게 좋겠소. 그는 그 지방의 지리에 훤하고, 지략이 뛰어나다고  짐도 익히
들어왔소.”
  서기 747년, 고선지는 ‘행영 절도사’로 임명되고 토번을 치라는 황제의 명령을 받았다. 행영
절도사는 원정군의 사령관인 셈이다. 병력은 기병과 보병을 합하여 1만 명이었다.
  “황제의 명령인지라 어쩔 수 없지만, 나도 총령(파미르) 너머의 지형이나 토번에 대해 서는 잘
모르네,”
하고 고선지는 참모 봉상청에게 말하였다
  파미르 고원은 평균 높이가 4000미터나 되는 험한 곳으로 ‘세계의 지붕’이라 일컬어지는 곳
이다. 이 곳에서 히말라야.쿤룬.톄산.힌두쿠시 등의 대산맥이 사방으로 뻗쳐 있다.
  고선지의 원정군은 이 가운데 톈산 산맥의 험준한 고개를 넘어야 했다.
  톈산 산맥은 파미르 고원의 동북동 방향에 있고, 그 최고봉은 승리봉으로 높이가 7439미터나
된다.
  뒷날, 나폴레옹이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에 침공하여 승리를 거두었다고 해서 명장으로 손꼽
히고 있지만, 고선지는 그보다 1000여 년 전에 알프스보다 더 높은 산맥을 넘었던 것이다. 더욱이
고선지는 수백 리나 되는 사막과 건조 지대를 돌파하였고, 빙하를 건너가며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물론, 톈산 산맥에는 동쪽과 서쪽을 잇는 양의 창자처럼 꼬불꼬불한 고갯길이 있어, 대상들이
옛날부터 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장사를 하는 대상의완래와 군대의 행진은 성격이 다르다.
  지혜로운 봉상청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도 장군 생각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 곳의 지리를 잘 알고 있는 사람으로 길잡이를  내세
우면 되겠지요.”
  “길잡이만으로는 부족하오. 길잡이를 포함한 특수 보대를 편성하고 쉴 새 없이 적군의  동정
을 살피면서 진군하는 게 좋겠소.”
  고선지는 젊었을 때, 사막에서 도둑들의 습격을 받은 대상을 구해 주고, 그들을 통해 고구려 처
녀와 혼인할 수 있었다. 그 후, 그 곳의 대상들과 맺어진 우정은 지금껏 계속되고 있었다.
  본디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는 중앙 앙시아의 여러 나라에 전해졌다가 실크 로드를 통해 중국에
전해졌고, 다시 우리나라에도 들어왔던 것이다.
  그러나 중앙 아시아의 불교 국가는 그 뒤 회교 국가의 전투적인 선교 활동에 밀려 멸망되거나
종교를 회교로 바꾸었다.
  고선지와 그의 부대는 쿠처를 출발하였다. 때는 가을로 내륙 지방에는 추위가 시작되는 계절이
었다. 첫 목적지는 카슈가르(지금의 카스거얼)이었다. 이 곳은 톈산 남로 서쪽 끝에 있는 도시로
톈산 산맥의 높은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주위를 둘러싸며 솟아 있는 산기슭이었다.
  원정군이 이 곳까지 이르는 데도 고생이 많았다.
  쿠처를 출발할 때 장병들은 수군거렸다.
  “닥쳐오는 겨울을 앞두고 하필 가을에 출발하실까?” “장군께서 어련히 아시고 결정하셨겠
나.”
  그러나 봄에는 날씨가 따뜻한 대신 바람이 강하다. 강한 바람에 먼지가 일어 제대로 눈을 뜰
수가 없는 것이다. 또 여름에는 아무리 강우량이 적은 곳이라도 조금만 비가 오게 되면 길이 진
구렁이 되어 행군에 지장을 초래할 염려가 있었따.
  이런 것은 수십 년을 두고 이 길을 오가는 대상들을 통해 알 수도 있었지만, 고선지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추위는 심하지만 행군하기가 보다 나은 겨울을 택하
게 된 것이다.
  “서둘러라! 익숙한 길에서는 되도록 빨리 가야 한다.” 카슈가르까지는 토번의 세력권이 아니
기 때문에 행군을 빨리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방심은 금물이다. 고선지는 어떤 경우라도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리고 카슈가르에 이르자 필요한 물과 식량을 보충한 뒤, 곧장 파미르에 올
랐다. 멀리 적의 도시가 보였다.
  벌써 한겨울이었다.
  고갯길은 눈이 쌓여 있고 빙판이 져 있었다. 앞서 가는 말이나 사람이 마치, 자기의 머리 위에
올라서 있는 것처럼 가파랐다. 이러한 곳에서 조금만 실수해서 미끄러지면 타고 있던 말과 더불
어 천 길 만 길 되는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고 마는 형편이었다.
  고선지는 이런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말에도 짚신을 신겼다. 발굽에 짚을 싸매어 미끄러짐을
방지한 것이다.
  “병력 손실은 되도록 막아야 한다. 하지만 이렇게 오르기 힘든 길일수록 적은 안심하 고 있을
게 아닌가!”
  사실 토번왕은 고선지의 부대가 겨울에 산을 넘어 공격해 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다.
  “그들은 기껏해야 카슈가르에서 겨울을 나고 봄에 눈이 녹으면 파미르를 넘을 것이다.
  그리고 봄철에 그들이 재를 넘어온다 해도 겁날 게 없다. 먼저 번에 왔던 당나라 군사 들처럼
한 놈도 살려 돌려보내지 않겠다.”
  토번왕은 이렇게 호언 장담을 하면서 마음을 푹 놓고 있었다.
  고선지는 바로 적의 이와 같은 방심을 노리고 있었다. 더욱이 겨울철엔 파미르가 눈에 막혀 대
상들의 왕래조차도 완전히 근ㅎ어지고 만다. 따라서 이 쪽의 정보가 토번왕에게 새어 나갈 염려
도 없었다.
  고선지는 파미르에 올라서자 장병들을 위로하였다.
  “이 곳에서 하루나 이틀쯤 더 내려가면 호밀도의 계곡이 있다. 그 곳까지만 가면 푹  쉴 수
있다. 아무쪼록 조금만 더 참고 힘을 내어 다오.” 눈과 얼음으로 덮인 고갯길은 오르는 것 못지
않게 내려가는 것도 힘들도 위험하였다. 보급품을 실은 수레에서 말은 떼어 내고, 수레를 돌려 긴
밧줄을 매고 조금씩 늦추어 가며 내려가도록 해야 했다.
  먼저 편성한 특별 수색대의 정찰로 호밀도 계곡은 대부대가 휴식하기에 알맞은 곳임을 알았다.
  군사들이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계곡에 이르자, 고선지는 약속대로 며칠 동안 휴식을 하도록
명했다.
  병사들은 쌓인 눈을 치우거나 벽처럼 쌓아 바람을 막는 등 휴식 장소를 마련하였다.
  병사들이 휴식을 하는 동안에도 고선지는 참모와 부장들을 수시로 집합시켜 작전을 의논했다.
  “작전을 세우자면 세밀한 지도가 필요하오. 이 일대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곳이므로,  대원을
선발하고 한 명의 길잡이를 딸려 지형 조사를 철저히 하도록 하오.” 이리하여 군사 다섯 명에
길잡이 한 명씩을 붙인 여러조의 수색대가 호밀도 계곡 주변의 지형을 조사하였다.
  고선지는 이들이 돌아와 보고하는 내용을 종합한 뒤, 화공을 시켜 그림지도를 만들라고 명하였
다.
  그런 작업을 하는 데 꼭 20일이 걸렸다.
  20일째 되는 날 밤, 고선지는 주요 지휘관을 긴급 소집했다. 그리고 그 동안 만든 지도를 앞에
놓고 작전 회의를 시작하였다.
  “여러분!”
  고선지는 눈을 크게 뜨고 장수들을 둘러보았다. 그선지의 용맹스러움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
다.
  장수들은 자기도 모르게 긴장되어 고선지의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들었다.
  “내일 새벽 묘시 이 곳을 출발하오. 20여 일 동안 병사들도 푹 쉬었다고 생각하오. 그 들 가운
데는 좀더 쉬었으면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인간의 욕심은 한이 없는 것이오.
  그러니 지금부터 출발할 준기를 하도록 하시오!”
  고선지도 군사를 더 휴식시켜 주고 싶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휴식을 하다 보면 긴장이 너무 풀
려 버린다.
  고선지는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의 앞에는 두 부류의 적이 있소. 하나는 토번의 부대로 여운채에 진을 치고 있 소. 또 하
나는 소발률국인데, 어느 쪽의 적을 먼저 치느냐가 오늘 밤의 작전의제요. 여 러분의 읜견을 기탄
없이 말해 주시오.“
  모인 장수들은 잠시 말이 없었다. 이윽고 조숭비라는 부장이 발언하였다.
  “저는 소발률국을 먼저 치는 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오?”
  “약한 자를 먼저 치고 그런 다음 강한 적을 치는 게 순서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장군
의 의견도 일리가 있소. 그렇지만 소발률국은 여기서 거리가 멀고 우리가 그 곳 을 공격하는 동
안 우리의 뜻하는 바를 연운채의 적이 안다면 양쪽에서 합공당할 위험이  있소. 또, 병법에도 강
한 적을 먼저 치고 이를 무찌른다면, 나머지 적은 싸우기도 전에  사기를 잃고 쉽게 격파할 수
있다고 하였소. 그러기 때문에 거리상으로도 가깝고 소발 률국보다 힘이 강한 연운채의 적을 먼
저 치도록 합시다.” 작전 목표가 세워지자, 다음에는 행동 방침이 각 부장들에게 내려졌다.
  “지금, 지도를 보고도 알 수 있지만 연운채로 진격하자면 세 갈래의 길이 있소. 그러 므로 전
군을 삼분하여 제1대는 호밀도 계곡을 곧장 내려가겠소. 지휘는 내가 직접 맡겠 소. 제2대는 북쪽
의 절벽을 따라 북쪽 골짜기로 진격하시오. 지휘는 조숭비 장군이 맡 으시오.”
  “넷!”
  “제3대는 파륵강(아피판자 강) 상류의 적불당으로 진격하시오. 지휘는 가승관 장군이 오.”
  “넷!”
  고선지는 지도의 지점을 가리키며 다시 설명하였다.
  “제1대, 제2대, 제3대의 집결지까지는 각각 3일 내지 5일이 걸릴 것이오. 주의할 것은  그 곳
까지 가는 동안 야간에라도 불빛을 사용해서는 안 되고 밥을 짓는 연기도 나부끼 게 해서는 안
되오. 절대로 적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시오.” “알았습니다.”
  “각각 집결지에 도달하면, 오는 정원 보름날 묘시를 기하여 총공격을 할 것이오. 적은  아마도
명절 기분에 들더 방심하고 있을 것이오.”
  고선지는 이 밖에 공격 시간 엄수를 몇 번이고 다짐하였다. 3개 부댁가 동시에 시간을  맞추어
공격해야 보다 큰 효과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었다.
  고선지의 본대는 주로 기병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고선지는 물소 가죽으로 된 갑옷에 투구를 쓰고 앞장서서 진군했다. 그 옆에는 조정에서 군을
감독하기 위해 파견된 감군 변영성이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나아갔다.
  변영성은 일종의 감찰관이었다. 처음에는 황제 직속이라는 권한을 믿고 뽐내는 일이 있었으나,
차츰 고선지의 인격에 감화된 듯 깍듯한 태도를 보였다.
  “장군, 연운채에는 토번군이 얼마나 있소?”
  “저희들 정보로서는 성채에 1만 명 정도가 있고, 그곳에서 20리 떨어진 흑운산에도 1   만 명
의 병력이 있다고 합니다.”
  “그럼 꼭 우리의 갑절이군요.”
  “그러나 별로 걱정할 것은 없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이 곳에 와 있다는 것을 모를 테 니까요.

  사흘째 되는 날, 저녁때가 되어 예정된 집결 지점에 이르렀다. 고선지가 이끄는 제1대 그 곳에
서 하루를 푹 쉬었다.
  이제 등성이 하나만 넘으면 적의 본거지인 연운채였다.
  밤이 되자, 고선지는 문득 시 한 수가 생각났다.

밤의 강은 평평하여 움직이지 않고, 봄의 꽃은 활짝 피어 있구나.
  출렁이는 물은 달을 싣고 가 버렸지만, 조수 물이 별을 싣고 오네.

  이것은 수나라 양제가 지었다는 ‘춘강하월야’라는 시였다. 수 양제와 같은 폭군도 강과 꽃,
그리고 달과 별을 생각하는 감상이 있었을까?“ 고선지는 이따금 할아버지의 옛 고향인 고구려에
가면 볼 수 있다는 바다를 상상해 보기도 하였다.
  드디어 공격 개시의 시간이 되었다. 고선지와 그의 기병대는 등성이를 넘었다. 아직도 새벽이고
해가 떠오르지 않아서인지 뿌연 안개가 골짜기를 덮고 있었다. 그런데 앞을 가로막는 게 있었다.
큰 계곡물이었다.
  “어떻게 하면 좋지?”
  고선지로서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난관에 부딪혔다. 고선지의 참모로서 지혜가 뛰어난 봉상청
도 좋은 생각을 내놓지 못했다.
  고선지는 앞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그의 본대가 이 갑작스레 불어난 계곡물을 건너지 못한다면
총공격의 시간에 댈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전군의 힘이 모아지지 않아 적에게  격파될지도 모
를 일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여기까지 와서 뜻밖의 계곡물 때문에 일을 그르친다면 어떻게 될까?’ 그 때,
계곡 건너편에 무언가 거무스름한 것이 보였다.
  “저것은 무엇이냐?”
  길잡이 하나가 살펴보더니 대답하였다.
  “나무입니다. 아마도 미루나무 같습니다.”
  “그렇다면 됐다! 가느다란 밧줄을 가져오라. 그리고 병사들에게 속히 굵은 밧줄을 꼬 도록 하
라.”
  “그것으로 어떻게 하실려고……?”
하고 봉상청은 물으려고 했으나 얼른 그만두었다. 그 역시 고선지의 생각을 알았기 때문이다.
  고선지는 화살에 가는 밧줄을 매고 건너편 미루나무를 향해 쏘았다. 밧줄이 매인 화살이 건너
편 미루나무에 박히자, 헤엄을 잘 치는 길잡이 몇 사람이 그 밧줄을 붙잡고 계곡물을 건너 굵은
밧줄을 끌어다가 단단히 나무에 맸다. 이렇듯 몇 개의 굵은 밧줄이 빠르고 세차게 흐르는 계곡물
을 건너 단단히 매어졌다.
  그들은 밧줄을 타고 모두가 무사히 건널 수 있었다.
  병사들이 계곡을 무사히 건너자, 고선지가 감군 변영성에게 말하였다.
  “정말 아슬아슬한 순간이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계곡을 건너고 있을 때에 적의 공격을  받았
다면 전멸의 비운을 겪었을지도 모릅니다. 하늘이 우리를 도와 주신것입니다.” “아니오, 그것은
장군의 겸손이오. 장군의 꾀가 아니었다면 우리가 어찌 무사히 저 무 서운 계곡물을 건널 수가
있었겠소?”
거만한 변영성도 고선지의 뛰어난 지혜를 칭찬하였다.
이윽고 제1대, 제2대, 제3대가 모두 제2의 집결지에 도착하자 고선지는 공격 신호로 석포를 쏘도
록 하였다.
  토번군은 안심하고 있다가 당나라 군사의 기습을 받아 이리저리 허둥거리다가 겨우 반 시간도
되기 전에 모두 항복하였다.
  고선지는 숨 돌릴 새도 없이 흑운산에 있는 토번군의 산채를 격파하기 위해 작전을 세웠다.
  포로를 심문한 결과, 흑운산에 있는 산채는 높은 곳에 있고 방비가 엄하다는 것을 알았다.
  “할 수 없다. 기책을 쓸 수밖에…….”
  기책이란 정상적인 전투 방법이 아닌 기발한 꾀를 말한다. 고선지는 포로로 잡힌 토번군의 군
복을 벗겼다. 그리고 그 옷을 자기편 군사 500명에게 입히고 단수실에게 명하였다.
  “너의들은 본대에 앞서서 패잔한 토번군처럼 가장하고 흑운산의 산채로 가라. 머리를  풀어헤
치고 얼굴에 진흙이나 피를 바른 뒤, 맨발로 간다면 흑운산 산채에서도 의심하지  않고 문을 열
어 줄 것이다. 그러면 곧바로 성내로 진격하여 불을 지르고 적을 마구 베 어 죽여라. 불길이 오르
면 우리 본대가 즉시 달려갈 것이다.” “네, 알았습니다.”
  단수실의 위장 부대가 먼저 떠나자 고선지는 포로 감시와 연운채 수비로 2000명의 보병을 남겨
두고, 나머지를 이끌고 흑운산 산채를 향해 출발하였다.
  흑운산 산채에서는 토번군으로 위장한 단수실의 부대를 보고 의심하지 않고 문을 열어 주었다.
곧이어 창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무섭게 들리며 불길이 솟아올랐다.
  “이 때다, 총공격이다! 단수실과 그 부하들을 죽게 해서는 안 된다.” 이 흑운산 전투는 격전
이었으나, 마침내 흑운산에 해영 절도사의 가치가 높이 세워져 바람에 펄럭였다. 대승리를 거둔
것이었다.
  고선지는 두 번의 싸움에서 적군 7000여 명을 죽였고, 1만 남짓한 포로를 잡았다. 이에 비하여
이군은 1000명 가량이 죽거나 다쳤다.
  감군 변영성은 기뻐 외쳤다.
  “고 장군, 대승리요. 즉시 승전 보고를 조정에 올리도록 합시다. 폐하께서 이 사실을  아시면
얼마나 기뻐하시겠소.”
  “아닙니다. 저에게는 아직도 임무가 남아 있습니다.” “아니, 임무라니요?”
  “소발률국을 쳐야 합니다.”
  물론, 이 원정의 목적은 소발률국을 공격하고 토번의 세력을 몰아 내는 데 있었다. 또, 그렇게
해야만 막혔던 통상로가 다시 뚫리고 소발률국 서쪽에 있는 20여 나라의 조공도 다시 받을 수 있
는 것이었다.










  4. 쿤제랍 고개를 넘어서

  이 때, 대상들은 각지의 진귀한 상품을 당나라에 운반하여 막대한 이익을 올리고 있었다.
  멀리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부터는 금붙이와 직물, 지금의 시리아에 있는 안티오키아(고대
시리아 왕국의 수도)로부터는 유리 제품과 직물, 페르시아(지금의 이란)로부터는 복숭아.양탄자.재
스민.문돋이 옷감.대추야자.파키스탄 지방으로부터는 사프란.수련, 그리고 인도의 마투라 지방에서
는 시금치,인도 남부로부터는 약제.백단 등이 당나라에 수입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토번 때문에 막히고 들어오지 않아 지금 당나라에서는 야단들이었다.
  이러한 사정을 알고 있는 고선지는 소발률국을 쳐야 한다고 말한 것이었다.
  그러나 변영성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소발률국으로 가자면 다시 빙하로 덮인 높은 산을 넘어야 하지 않소.” 그는 눈 덮인
높은 산들을 멀리 바라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입 밖에 내놓지는 못했지만 그는 마음 속으로 그
동안의 고생스러운 행군에진저리를 내고 있었다.
  소발률국은 산 속에 있는 작은 나라이다. 따라서 고선지가 이 나라를 공격하자면 4939미터의
쿤제랍 고개를 넘어 훨씬 남쪽으로 내려가야만 했다.
  “절도사는 정말로 작전을 감행하시겠소?”
  변영성은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말을 꺼냈다.
  “네, 그러하옵니다.”
  고선지는 새삼스럽게무슨 말이냐고 묻는 표정이었다.
  군인은 예나 지금이나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 것이다. 변영성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침착한 고선지의 대답에 당황하며 변명하듯 말했다.
  “그렇긴 하지만 절도사,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게 좋을듯 하오. 물론, 절도사의 뜻을  모른 것
은 아니오. 그 동안 조정에서 보낸 원정군은 번번이 패했고 막대한 피해를 입었 었소. 그런데 이
번에 장군의 뛰어난 작전으로 토번군을 무찔렀던 것이오. 폐하께서는 1 명이 넘는 포로를 잡고
토번군을 무찔렀다는 소식만 들어도 기뻐하실 것이오. 그러니  이쯤에서 돌아가도록 합시다.”
  감군의 입장이 고선지와 거꾸로 된 셈이었다. 원래 감군의 임무는 싸움을 안 하려는 장군이 있
다면, 그를 재촉하여 싸움을 시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변영성은 오히려 작전의 곤란한 점을 갖가
지로 들며, 명령에 따라 소발률국을 치려고 하는 고선지의 결심을 바꾸게 하려고 하였다.
  “만일, 어려운 작전을 강행했다가 실수라도 저지르면 어찌하겠소? 지금의 승리만으로 도 조정
의 명령에 충실한 것이니 그만 돌아기로 합시다.” 마침내 변영성은 자기의 속셈을 실토하고 말
았다. 고선지가 실패한다면 감군의 지위에 있는 자기의 책임도 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고선지는 이런 변영성의 속셈을 알고 오히려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저는 임무를 저버릴 수 없습니다. 모든 책임은 제가 지겠으니 조정에 대한 승 전 보
고나 올리도록 하십시오.”
  변영성도 더 이상 고집을 피우지 못하였다. 그는 연운채와 흑운산의 승전 보고 소식을 조정에
올렸다.
  소발률국으로 가려면 카슈가르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쿤제랍 고개를 지나야 한다. 고개라고는
하지만 우리의 상식을 초월하는 까마득하게 높은 산등성이를 향해 군대를 진군시켜야만 했다.
  고선지는 대자연의 이와 같은 시련과 싸웠다. 사실 적과 싸워 죽은 군사보다 눈보라, 낙석(돌이
떨어지는 것), 붕괴(길이 무너짐), 그리고 추위에 얼어 죽은 병사가 더 많았다.
  뒷날, 영국의 고고학자로 고선지의 진격로를 직접 탐험한 스타인 경은 이렇게 썼다. 스타인 경
은 인도(당시는 인도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등이 분리되지 않고 모두 영국 식 민지였음) 방면
에서 출발하여 길기트 일대를 탐사한 일이 있었다.
  “우리는 인도 서북쪽의 치트랄에서 아르곤 협곡을 지나 힌두쿠시 산맥의 높은 봉우리 의 하나
인 바르길재를 넘어 다르코트 재에 이르렀다.
  대원들은 마치 절벽을 타고 오르는 등반대처럼 허리에 밧줄을 감고 거대한 용의 비늘과도 같은
벼랑과 빙하를 기어올랐다. 꼬불꼬불한 절벽에 나 있는 길은 두 사람이 나란히 걸을 수도 없을
만큼 비좁았으며, 그 아래는 까마득한 낭더러지였다.
  계곡이 얼마나 깊은지 밑이 보이지 않았고 구름은 산 중턱에 걸려 있었으며, 계곡 밑에서는 안
개가 솟아올라 눈길을 가로막았다. 게다가 안개에서는 역겨운 독한 냄새가 풍기는 듯싶었고, 찬바
람이 불대마다 심장이 얼어 붙는 것만 같았다…….” 현대적 장비를 가지고서도 쿤제랍 고갯길은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고선지와 그 부대는 1250여 년전에 이 험한 고개를 넘으려는 것이
었다.
  고선지는 이 진격을 위해 7000명의 용사를 뽑았다.
  “기사병은 모두 말에서 내려 앞장서서 고삐를 끌며 묵묵히 행진하라. 옆도 보지 말고  뒤도
돌아보지 말며, 오로지 앞쪽의 말 엉덩이만 보고 걸어라.” 고개를 넘으려면 깊은 계곡도 지나야
하는데, 향군하면서 떠들거나 하면 깊은 골짜기에 울려 마치 괴물의 울부짖음처럼 크게 들린다.
옆을 보거나 뒤를 돌아보면 행군에 지장이 있다. 시커먼 지옥처럼 입을 벌리고 있는 계곡을 내려
다보면 오금이 떨려 걷지를 못한다. 뒤를 돌아보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앞만
보고 걸어야 다소나마 위험을 줄일 수 있는 것이다.
  7000명의 병사와 군마가 한 마음 한 덩어리가 되어 묵묵히 진군하는 중에 조금이라도 혼란이
일어나면, 걷잡을 수 없게 대열은 흩어지고 만다.
  말도 동물이라고는 하지만 자기 고삐를 이끌어 주는 병사의 마음을 예민하게 알아차린다.
  만일, 자기 고삐를 붙잡고 가는 병사가 무서워한다면 말도 무서워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말
도 군사도 순간적으로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져 시체조차도 찾지 못하게 된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조금씩 내쉬도록 하라. 옆에서 바위가 굴러도 동료가 떨어져도  동요
하거나 무서워하지 말며 못 본 체하고 전진하라.” 고갯길을 높이 올라갈수록 위험은 더욱 가중
되었다. 산소가 적어지며 호흡이 곤란해졌던 것이다. 병사와 말의 숨이 저절로 헐떡거렸고, 호흡
하는 데 쌕쌕 바람 소리가 났다.
  고선지 자신도 겁을 내는 부하들에게 북돋워주고 주의를 주면서도 이렇게 험한 길을 장사를 하
기 위해 대상들이 오간다는 생각을 하자 혀마저 내둘러졌다.
  ‘목숨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돈이란 말인가?’
  대상들은 막대한 이익을 보려고 생명의 위험마저도 무릅쓰고 이 길을 걸었으리라.
  ‘그런 상인들이 넘은 길을 전투와 훈련으로 단련된 우리가 못 넘을 게 무엇인가?’ 그런 생각
으로 고선지는 이 고갯길을 오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런 험한 고개를 보고 겁을 낸 감군 변영성은 어느 날 밤 도망을 가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혼자 행동하다간 목숨이 위태로울 것 같아 다시 되돌아왔다.
  감군 변영성 말고도 현지에서 고용한 길잡이들이 반이나 도망쳤다. 장수들이 칼을 뽑아 들고
그들을 붙잡아 다시 데려가려고 했지만, 그들은 두 손을 싹싹 비벼 가며 애원하였다.
  “장군님, 제발 그 고개만은 넘지 마십시오. 그 계곡에는 독기를 내뿜는 악한 용이 살 고 있어,
그 곳을 지나는 나그네 중 열의 아홉은 죽는다고 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그런 것은 미신
에 지나지 않는다! 모두 나를 믿고 따라오라. 용이  나오면 내가 그 용을 잡아 죽이리라.”
  고선지는 그렇게 호령했지만 그 역시 지금 머리가 빠개질 듯이 아프고 구역질이 자꾸 나서 정
말로 용이 있다고 믿어질 정도였다. 머리가 아프고 호흡 곤란을 일으킨 것은 일종의 고산병이었
다.
  고선지의 호령과 위로를 들으며, 그들은 다시 고개를 올랐다.
  드디어 고갯마루에 올라섰다. 당나라 군사들은 너도나도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였다. 그러나 오
르는 것만큼 내려가는 길도 힘들었다.
  고선지는 고개에서 500미터 정도 남쪽으로 내려간 곳에서 군대를 야영시켰다.
  물론, 그 곳에 넓은 빈 터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움푹 들어간 곳이라 강한 바람을 막을
수 있었고, 곳곳에 한두 평 넓이의 평평한 장소가 있었다.
  고선지는 참모 봉상청과 부장들을 소집하여 내일의 행동을 의논하였다. 회의를 마친 뒤, 봉상청
과 단 둘만이 천막에 남았다.
  “한 고비는 넘겼지만 앞으로 또 야신 계곡의 절벽같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까도
부장들에게 주의를 주었소마는 올라올 때마다 내려갈 때 더 조심을 해 야 하오. 올라올 때에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긴장을 하여 희생자가 많지 않았소. 하지 만 내려갈 때는 긴장을 풀고 안심
하기 쉬워 자칫 방심했다가는 우리에게 더 많은 희생 자가 생기게 될 것이오. 그리고 이 곳은 토
번들의 세력권이니 각별히 조심하시오.계곡 의 절벽길을 지날 때 토번 군사들이 산 위에서 바위
를 굴리거나 공격을 하면 우리의 타 격이 클 것이오.”
  “다연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군사들의 사기가 중요합니다. 사기를 계속 오 르게 하
려면…….”
하고 봉상청은 고선지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고선지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튿날 새벽이었다.
  고선지는 평소에 신임하던 용기 있는 병사 10여 명을 은밀히 불렀다.
  “지금 모든 병사들은 지쳐 있다. 더구나 오늘 이 곳에서 조금 내려가면 우리가 올라왔 던 절
벽길 못지않은 야신 계곡이 30리나 이어진다. 그 험준함을 보면 군사들이 두려워 하며 잘 나아가
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은 먼저 출발해 야신 계곡 입구에서  기다려라. 우리가 나중
에 그 곳에 이르면, 너희들은 아노월(소발률국의 수도)에서 우리 를 마중 나왔다고 해라. 그러면
군사들도 안심을 하고 계곡을 지나갈 것이다. 모든 일 이 너희들 손에 달렸으니 잘 하기 바란다.

고선지는 그들에게 아노월 사람의 복장을 주어 비밀리에 출발시켰다.
  그 동안 고선지는 군사를 충분히 쉬게 하고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려 출발하기로 했다. 그들이
출발했을 때에는 벌써 해가 높이 떠 있었다.
  하산할 때에는 부대를 일곱으로 나누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내려가도록 했다.
  이윽고 길모퉁이를 돌아서자, 야신 계곡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지옥까지 뻗쳐 있는 듯한 아득하게 이어진 좁은 절벽길, 주위의 산에는 빙하기 있어 햇빛에 반
짝였고 멀리서 보기에는 차라리 아름다웠다. 그리고 아득하게 보이는 계곡 아래 인더스 강의 상
류가 흰 실뱀처럼 꾸불거리며 흐르고 있었다.
  야신 계곡은 상상 이상의 험난한 길이었다. 병사들의 얼굴에는 동요의 빛이 나타났다.
  “고 장군께서는 혹시 우리를 지옥으로 끌고 가려는 것은 아니실까?” “누가 아니라나. 날아
다니는 새가 아니고서는 이런 절벽길을 어떻게 지나가지?” 불안에 떨고 잇는 병사들이 웅성거리
고 있을 때, 갑자기 앞쪽에서 10여 명의 사람들이 나귀에 무엇인가를 싣고 나타났다. 복장으로 보
아 당나라 군사는 아니었다.
  그들을 발견한 당나라 군사들은 긴장을 하며, 그들을 지켜보았다.
  이윽고 소발률국 복자으이 그 사내들은 고선지 장군 앞에 오서 꿇어 엎드렸다.
  “장군님, 어서 오십시오. 저희들은 장군님을 마중하러 이렇듯 여기까지 올라왔습니 다.”
  “마중을 왔다니, 너희들은 대체 누구냐?”
  고선지는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저희들은 소발률국의 백성입니다. 평소 이 곳을 지나는 대상들로부터 장군님의 어진  인품을
듣고서 장군님을 사모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이 곳에 오신다는 소문을 듣고 이 렇듯 나귀에 술과
고기를 싣고 장군님과 군사들을 환영하러 왔습니다. 부디 저희들의  정성을 물리치지 마십시오.”
  “음, 매우 고마운 일이다. 그렇다면 너희들은 이 근처 지리를 잘 알고 있느냐?” “그럼요. 저
희들은 이 곳에서 태어나 지금껏 여기에서 살아왔습죠. 이 곳의 지리는 손 바닥처럼 환히 알고
있습니다. 사실 저희들은 장군님께 길 안내를 해 드리려 고 여기까 지 올라왔습죠.”
  이런 대화를 들은 군사들은 모두 안심하는 얼굴빛이 되었다.
  무서움이나 두려움은 모두 마음먹기에 달려 있는 것이다. 무서울 때에는 누가 조금만 도와 주
어도 불안이 안심으로 바뀌는 법이다.
  “좋다. 이들의 성의를 물리쳐서는 안 되겠지. 앞으로 진격한다! 그러나 모두들 길을  조심하면
서 안내인 뒤를 따르도록 하라.”
  놀랍게도 당나라 군사들은 단 한 명의 사고도 없이 험한 야신 계곡을 통과하였다. 그리고 고개
를 내려온 지 닷새 만에 멀리 아노월 성을 굽어보는 산허리에 이르렀다.
  고선지는 거기서 부대를 일단 멈추고 1000명의 정예 군사를 뽑아 이사엽에게 지휘를 맡겼다.
  “너희들은 샛길로 돌아 아노월 성의 뒤쪽으로 가라. 그리고 연기로 신호를 하면, 꽹과 리나 북
을 시끄럽게 울리며 적에게 대군이 공격하는 듯 겁을 주어라. 그러나 적을 공격 하지는 말아라.
적군이 너희들에게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우리가 비탈을 단숨에 달려  내려가 성문을 부술 것이
다.”
  옛날의 통신 방법은 지금처럼 무전기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대로 빠른 연락 방법이 있
었다. 그 방법을 몇 가지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소리로 연락하는 방법이 있었다.
  꽹과리나 징을 울려 전투 중 아군의 공격이나 후퇴를 지시하기도 하였고, 북을 사용하기도 했
다.
  둘째, 불로 연락하는 방법이 있었다.
  봉화로서, 높은 산에 봉수대를 쌓고 그 곳에 불을 피워 연락하였다. 이 당시의 당나라에서도 봉
화가 많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안서 도호부에서 옥문관까지는 건조 지대와 사막이라 높은 산이 없다. 그래서 일정한
거리마다 망루처럼 봉수대를 쌓고 불빛으로 연락하였다.
  셋째, 연기로 연락하는 방법이 있었다.
  이사엽은 고선지로부터 명령을 받자, 곧 출발했다.
  고선지가 연기를 올리자, 이사엽도 연기를 올리며 작전을 시작했음을 알려 왔다.  이사엽의 부
대가 있는 쪽에서 꽹과리, 북, 징, 군사들의 함성 소리가 들리자, 고선지의 정예 기마병 600명은
타르코트의 비탈을 질풍처럼 달려 내려갔다. 아노월 성의 수비병들은 이 갑작스런 기습에 갈팡질
팡하였다.
  고선지는 쉽게 아노월 성을 점령할 수 있었다.
  적은 안심하고 있다가 고선지의 기습을 받자 몹시 당황하였다.
  “아, 하늘에서 군사가 내려왔다!”
  그들이 이렇게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야신 계곡을 지나는 쿤제랍 고갯길은 대상들도
잘 이용하지 않는 길이었다.
  “고선지는 귀신을 부리는 장군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 겨울철에 쿤제랍을 넘지 못한 다.”
군사들보다도 성 안의 백성들이 더 동요되었다. 그들은 토번과 협력한 대신들을 결박하고 고선지
앞에 나와 두 손을 싹싹 빌었다.
  “장군님, 저희들은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자신들의 부귀 영화를 위하여 토번과 협력 한 이 대
신들이야말로 장군님의 적이옵니다.”
  “장군님, 너그럽게 자비를 베푸소서.”
  성 안 한 구역에서는 아직도 소탕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아노월 성에 와 있던 소수의 토번군이
소발률국의 국왕과 왕비를 보좌하며 끝까지 대항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도 마침내 섬멸되었고, 국왕과 왕비는 고선지의 포로가 되었다.
  고선지는 국왕에게 말하였다.
  “당신의 운명은 이제 우리 당나라 황제 폐하께 달려 있소. 그러나 내가 묻는 대로 순 순히 대
답하여, 우리에게 협력해 준다면 황제께 올리는 상서에 당신을 좋게 말하여 나 라를 보전하게 할
수도 있소.”
  “좋소. 무엇이든지 대답해 드리리다.”
  “이 곳과 토번의 연락길을 가르쳐 주시오. 이 곳에 있던 토번의 대장은 손챈감포에게  구원을
청했소?”
  “그렇소, 구원을 청했소.”
  손챈감포는 토번의 왕으로 소발률국의 이웃에 있었다.
  고선지와 당나라 장수들은 토번 대장이 손챈감포에게 구원군을 청했다는 이야기를 듣자, 새로
운 적을 맞게 된다는 생각에서 긴장하게 되었다. 그 때 소발률국의 국왕은 말하였다.
  “그러나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이 곳에서 동쪽으로 60리쯤 되는 곳에 다리가 있소.” “다리?

  “깊은 계곡에 걸린 조교로 그 곳만 지키면 100만 명의 대군이 다려와도 두려울 게 없 소.”
  조교란 절벽의 양쪽을 밧줄로 묶어 사람들이 오갈 수 있게 만든 구름다리인 것이다.
  고선지는 아노월 성의 수비를 조숭비에게 맡기고 자기는 봉상청 등을 데리고 소발률국의 왕이
가르쳐 준 곳으로 달려갔다.
  그 곳에는 등나무와 칡덩굴로 밧줄을 꼬아 만든 다리가 계곡을 질러 놓여 잇었는데, 깊은 계곡
에서 바람이 불어 올라와 항상 출렁이며 흔들리고 있었다.
  고선지는 군사를 잠복시키고 토번군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계곡 저 편에 소발률국을 구원하기 위해 달려온 토번군들이 나타났다. 토번군들은 말을
타고 겁도 없이 조교를 건너오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적교를 반쯤 건너왔을 때였다.
  고선지는 다리를 지키고 있던 군사들에게 명령하였다.
  “다리를 끊어라!”
  병사들이 도끼로 밧줄을 찍자, 조교는 그대로 끊어졌고 건너오던 토번군들은 쏟아지듯 계곡 아
래로 떨어졌다. 비명만 허공에서 메아리쳤을 뿐 그들의 모습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건너편에 남아
있던 토번군들은 아우성을 치며 뭐라고 욕을 했지만,강한 바람에 그 목소리마저 찢기고 말았다.
  고선지는 다시 군사들을 이끌고 아노월 성으로 돌아왔다. 끊어진 다리는 이 쪽의 협력 없이는
다시 놓을 수 없기 때문에 이젠 안심해도 되었다.
  협력이 있다 하더라도 그 다리를 다시 놓는 데에는 적어도 일 년은 걸릴 듯싶었다.
  “자, 이제는 토번의 진출을 겁낼 필요가 없게 되었다.
  남은 문제는 옛날에 당나라한테 공물을 받쳤던 나라들에게 사자를 보내어 항복을 받고, 그 동
안 밀린 조공을 받아 내는 일뿐이다.“ 그러나 사자를 보내기도 전에 먼저 20여 개 나라의 왕들
이 직접 찾아오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토번의 연운채 본채와 흑운산 산채, 소발률국이 하루아침에 고선지가 이끄는 당나라 군
대에게 패배했다는 소문을 듣고 혹시 불똥이 자기 나라에 튈까 걱정을 하며, 제각기 진귀한 특산
물을 가져와 고선지에게 바쳤다.
  그러나 고선지는 오해를 받을까 싶어 서기를 따로 임명하여 그들이 가져온 특산물의 목록을 세
밀히 작성하고 물건을 엄중히 보관하였다. 모두 장안에 있는 황제에게 보내야 할  것들이기 때문
이었다.
  강국의 국왕이 오색 찬란한 수정을 바친 데 이어, 많은 나라들이 중국에서는 볼 수 없는 물품
들을 보내왔다.
  그런데 석국의 국왕만은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이번에는 감군 변영성이 핏대를 올렸다.
  “고 장군, 석국의 왕이 괘씸하지 않소. 아무런 조공도 가져오지 않고 있으니 말이 오.”
  “글쎄요.”
  “망설일 것도 없소. 즉시 군사를 동원시켜 무찔러 버립시다.” 고선지는 씀웃음이 나왔다. 이
전에 소발률국을 공격하자고 했을 때에는 그렇게도 말렸으며, 쿤제랍 고개를 넘을 때에는 한동안
도망을 갔던 그가 아니었던가? 고선지는 조용히 거절하였다.
  “그것은 안됩니다.”
  “어째서요? 폐하의 적을 치겠다는 것인데?”
  “저는 황제 폐하로부터 토번의 세력을 꺾고 소발률국을 확보하는 명령을 받았을 뿐입 니다.”
  석국을 치려면 황제의 명령을 새로 받아야 하는 것이다. 변영성도 고선지의 말에는 대꾸를 하
못하였다.
  5. 안서 도호부 절도사에 오르다

  이제 개선할 날도 머지않았다. 고선지는 부하 장병의 군기를 엄하게 하고 남의 물건을 함부로
빼앗거나 훼손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이 공정하고 어진 태도에 감탄한 소발률국의 사람들은 길에
서 그를 보게 되면 땅에 꿇어 엎드려 절을 하였다. 고선지를 마치 어버이처럼 우러르는 것이었다.
  고선지는 이 곳을 떠나면서 성 밖 강가에 제단을 쌓고 성대한 위령제를 올렸다. 지나간 6개월
남짓 동안 전사한 당나라 군사뿐 아니라 토번군, 아노월 성의 사람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제사였
다. 소발률국의 사람들은 자기네 전사자들의 영혼까지 위로해 주는 제사를 지내 주었기 때문에
고선지에 대한 존경은 더욱 대단해졌다.
  “고선지 장군은 참으로 훌륭한 분이시다. 아마 그런 분은 우리로서는 다시 만날 수 없 을 거
야.”
  그래서 소발률국 사람들은 자청해서 야신 계곡의 좁은 절벽길을 넓혀 주었고, 무너진 곳에는
돌을 다시 쌓기도 하였다.
  소발률국 사람들은 많은 나라들로부터 침략을 당했었지만, 고선지가 이끄는 당나라 군대와 같
은 군사는 처음이었다.
  예전의 침략자들은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면 노략질을 일삼고, 부녀자들을 겁탈하는 등 많은 행
패를 부렸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와 같은 일이 벌어질 줄 알고 전전긍긍하였으나, 그런 일은 결
코 일어나지 않았다.
  더욱이 전투에서 희생당한 자기네 전사자들의 명복을 빌어 주자, 그들은 매우 감격하였던 것이
다.
  절벽길이 고쳐지자, 고선지는 당나라로 떠날 준비를 하였다. 소발률국 왕은 더 쉬었다 가라고
만류했으나 여기서 계속 머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여기서 더 머물고 있는 동안 토번의 무리들이 어떤 흉계를 꾸며서 철수할 때 공격을 가할지 모
를 일이었다.
  그리고 고선지의 공로를 자기 공으로 돌려서 당나라 황제에게 어서 빨리 보고하여는 변영성의
재촉 때문에도 한시바삐 돌아가야 했다.
  소발률국 왕은 온갖 진귀한 것들을 고선지에게 선물로 주었다.
  떠나기 앞서 고선지는 소발률국 왕에게 당부하였다.
  “잘 있으시오. 그리고 다시는 토번의 꾐에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소발률국의 국왕은 눈물을
흘려 가며 작별을 진심으로 아쉬워하였다. 그는 포로로서 마땅히 당나라의 장안까지 끌려가야만
했지만, 고선지가 보고서에 잘 써 주어 그대로 왕으로서 남아 있게 된 것이었다.
  쿤제랍 고개를 무사히 넘어 카슈가르에 돌아오자, 거기에도 많은 사람들이 환영 나와 있었다.
특히. 우전의 사람들이 와서 그에게 옥을 바쳤다.
  우전은 쿤룬 산맥 아래에 있는 옥의 산지이다. 옥은 어떤 보석보다도 이 무렵 가장 귀하에 여
기던 돌이었다.
  “고맙소. 이것을 장안에 계신 황제 폐하께 올려 당신들의 충성심을 폐하께 아뢰겠 소.”
  쿠처에선 더 큰 환영이 기다리고 있었다. 고선지의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와 아
내가 고선지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고선지는 감군 변영성에게 그 동안 얻은 많은 전리품과 포로, 군마 등을 넘겨 주어 장안으로
먼저 가게 하였다. 자기가 직접 황제께 보고를 하여 칭찬을 듣는다면 그것은 다시 없는 영광일
것이다. 그러면 황제는 고선지의 공을 위로하고 보다 높은 벼슬을 내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
러나 고선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공명심이 많은 변영성에게 자기의 공을 아뢰게 하였다.
  “감군 영감, 제 대신 황제 폐하께 잘 말씀드려 주십시오. 제 대신에 봉상청을 함께 가 도록 했
으니, 그 역시 잘 돌봐 주시기 바랍니다.”
  변영성은 좋아서 입이 함박만큼 벌어졌다. 고선지가 함께 가지 않는다면 특별한 전공이 없는
자기의 공적을 부풀려 보고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겉으로는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허허, 장군처럼 욕심 없는 분도 없을 것이오. 제가 장군의 공적을 폐하께 잘 말씀드 려 좀더
높은 벼슬에 오르도록 할 테니 걱정 마시오.” 변영성은 무슨 인심이라도 쓰는 것처럼 말하였다.
그가 말하지 않더라도 고선지의 이름은 이미 조정에도 잘 알려져 있었다. 그 당시 당나라 제일의
명장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었던 것이다.
  고선지는 변영성과 봉상청을 떠나보낸 뒤, 안서 도호부로 가서 절도사 부몽영찰에게 인사를 올
렸다. 그런데 부몽영찰은 고선지를 보더니 인사도 받지 않고 얼굴을 홱 돌려 버렸다.
  고선지로서는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이상하다. 대체 무엇 때문에 화를 내고 있을까?’   ‘구당서’에는 이 때 부몽영찰이 고선
지를 욕한 말이 기록되어 있다. 이것을 그대로 옮기면 “개 창자를 먹는 고구려 놈아, 개똥을 먹
는 고구려 놈아!” 등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지독한 욕이었다.
  그러나 고선지는 영문을 모른 채 잠자코 있었다. 그런 고선지를 본 부몽영찰은 제풀에 지쳤다.
  이 부몽영찰은 서강(티베트 족) 출신이었다. 그러나 토번과는 다른 종족이다.
  “고 장군!”
  이윽고 부몽영찰은 화가 난 투로 말하였다.
  “네.”
  “안서 도호부의 최고 책임자가 누구요? 이 곳의 절도사는 나란 말이오. 나는 엄연히  당신의
상관이오.”
  “그야 그렇습니다만?”
  “그렇다면 어째서 나를 무시했소? 조그만 공을 세웠다고 해서 내가 보이지도 않았던  모양이
구여.”
  “절도사님, 저는 털끝만큼도 장군님을 무시한 일이 없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화 를 내고
계신지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저에게 허물이 있다면 속시원히 말씀해 주십시 오.”
  “흥, 뻔뻔스럽게도!”
  부몽영찰은 혀를 차고는 자기가 왜 화를 내고 있는지 그 까닭을 말하였다.
  “연운채와 흑운산의 토번군을 무찔렀을 때, 어째서 전승 보고서를 황제께 직접 올렸소 ? 상관
인 내가 있는데 계통을 무시하고 조정에 멋대로 보고했소! 군대는 계통을 통해  보고하고 지휘를
받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지 않소?” 고선지는 그제서야 자기의 실수를 깨달았다. 부몽영찰은 고
선지가 공적을 혼자 독점하는가 싶어 질투를 하고 화를 내고 있는 것이었다.
 고선지는 결코 욕심이 없었다. 더욱이 그 승전 보고서는 감군 변영성이 올린 것이었다. 하지만
고선지는 변명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사실대로 이야기해 보아야 이해해 줄 부몽영찰이 아니었다.
고선지는 그를 달랠 마음으로 자기가 실수했다고 고개를 숙였다.
  “이제 보니 저의 큰 잘못이었습니다. 앞으로는 절대로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사오니  노여움
을 푸십시오.”
  고선지의 말을 들은 부몽영찰은 그제서야 화를 가라앉혔다.
  당나라 현종 때에는 과거, 특히 진사과(예전에 우리나라에 있었던 과거 제도와는 조금 다름)에
합격한 관리와 문벌에 의해 등용된 고나리 사이에 파벌 싸움이 심했다.
  진사파의 대표적 인물은 장열, 장구령 같은 사람인데 이들은 현종을 도와 훌륭한 정치를 하였
다.
  문벌이란 공신의 가문이나 대대로 벼슬을 해 온 집안이다. 이런 물벌 출신은 조상들의 공적 덕
분에 벼슬아치가 된 자들로, 별 능력도 없으면서 높은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부패의 근원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당시의 문벌파 대표는 이임보였다.
  이임보는 그의 증조부가 이연(당나라 고조)의 사촌이라, 황족의 한 사람이었다. 이임보는 서기
734년 예부상서 겸 중서성(당의 최고 행정 기관) 문하 삼품이 되었고, 이어 서기 736년 진사파의
장구령을 몰아 내고 중서령이 되었다. 중서령은 중서성의 최고 벼슬아치로 여러 재상 가운데 으
뜸이었다.
  이임보는 20년 이상이나 최고 권력자로 권세를 누렸다. 현종 황제가 양옥환이라는 여자에게 빠
져 서기 745년에 그녀를 귀비로 봉했다. 이 사람이 바로 양귀비이다.
  이 해에 안녹산은 평노 절도사로서 거란군을 크게 무찔러 이름을 널리 떨쳤다. 그러니까 안녹
산과 고선지는 이 당시 쌍벽을 이루는 장군이었다.
  아무튼 이임보는 무혜비(양귀비가 나타나기 전 현종의 총애를 받은 후궁)나 환관 고역사의 비
위를 맞추어 가며 오랜 권세를 누렸다.
  그러나 양귀비가 나타나자, 이임보의 지위도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이 시대는 나라의 정치가 여자의 말 한 마디에 좌지우지되며, 일국의 정승 자리가 오락가락하
던 시대인지라 양귀비의 청에 따라 현종은 양귀비의 오라비인 양국충을 재상에 임명하였던 것이
다.
 한편, 토번을 평정한 공으로 고선지에게는 ‘홍로경 어사중승’이란 관직이 내려졌고, 서기 747
년 12월에는 안서 도호부 절도사가 되었다. 부몽영찰이 물러나고 그 뒷자리를 이은 것이다.
  서기 750년 현종은 고선지에게 명하였다.
  “토번이 다시 일어나려고 하고, 석국은 조공을 바치지 않고 있다. 이들을 쳐서 평정하 도록 하
라.”
  고선지에게 한 번 혼이 난 토번은 다시 힘을 모으자, 서쪽으로 진출하여 사라센 제국과 손을
잡으려 하고 있었다.
  사라센 제국은 회교도인 아랍 사람들의 나라로, 서기 661년 다마스쿠스(시리아)에 우마이야 왕
조를 세움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리고 사라센은 칼리프(교주)를 대대의 왕으로 하며, 동로마 제국
과 싸우는 등 지금이 중동 일대에서 세력을 누렸다. 그뿐 아니라 서기 8세기 초에는 북아프리카,
에스파냐에도 침입하여 그 곳을 점령하였다. 서기 750년경 이슬람의 다른 종파가 우마이야 왕조
를 쓰러뜨리고 아바스 왕조를 바그다드에 세우자 사라센 제국은 동서로 분열되었다.
  토번은 사라센과 손을 잡기 위해 갈사국(파키스탄의 치트랄 지방)을 점령하였고, 다시 토하라국
에 압력을 가했다. 토하라 국왕은 위급함을 당나라에 알리고 구원을 요청하였다.
  “토번에 가담한 갈사국이 우리 나라를 침공하고 있습니다. 급히 구해 주시기 바랍니 다. ”
  고선지는 즉시 단수실, 이사엽 두 장수와 병력 1만 명을 이끌고 쿠처를 출발하였다. 길에는 많
은 사람들이 나와 이들을 환송하였다.
  석국 근처는 초원 지대로 지평선이 아득하게 보였다.
  테렉 고개를 넘어 며칠 동안을 앞으로 나아갔지만 적은 만나지 못하였다.
  “적이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니 경계를 엄중히 하고 방심하지 말라.” 고선지는 부하 장
수들에게 경계령을 내렸다.
  석국에서는 고선지의 당나라 군사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혼란에 빠졌다. 당시의 석국은 나라라
고는 하지만 하나의 도시 국가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고선지는 석국을 포위하고 사자를 보냈다.
  “만일 항복한다면 우리 황제 폐하께 상주하여 목숨만은 살려 주라고 하겠다. 속히 성 문을 열
고 항복하라. 만일 대적한다면 성 안에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죽음을 면하지 못 하리라.”
  고선지의 말을 전해 들은 석국의 나구차비시 왕은 대신들과 상의하여 성벽에 백기를 내걸었다.
그리고 스스로 자기 몸을 묶게 한 다음, 고선지 앞에 꿇어 엎드리며 살려 달라고 애원하였다.
  이것이 당시의 항복 방법이었던 것이다.
  고선지는 꿇어 엎드린 국왕의 결박을 풀어 주며 그를 위로하였다.
  “참으로 훌륭한 결심을 해 주셨습니다. 만일 전쟁을 하면 양쪽의 장병은 물론이고 무 고한 백
성들이 죽게 되니까요.”
  고선지의 말에 나구차비시 왕은 눈물을 흘리며 고마워 하였다.
  고선지는 이 곳에서 10일쯤 군사들을 휴식시킨 후 갈사국 토벌에 나섰다.
  갈사국의 토벌을 쉽게 마치고 고선지는 석국으로 돌아와 나구차비시 왕에게 말하였다.
  “처음에도 말했지만 당신읨 목숨은 우리 황제 폐하께 달려 있습니다. 나는 당신을 이      곳
에 그대로 머물게 하고 싶지만 당신을 장안으로 보내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섭섭하 게 생각하
지 마십시오.”
  고선지와 그의 군대는 석국과 갈사국을 토벌하고 쿠처로 돌아오고, 나구차비시 왕은 장안으로
보내졌다.



  6. 탈라스의 전투

  서기 751년이 되었다.
  사막에도 봄 소식이 있어, 풀과 꽃들이 모래땅에서 고개를 내밀며 예쁘게 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장안에서 황제의 칙사가 도착하였다.
  “폐하께서는 이번 석국과 갈사국을 평정한 장군의 공적을 아주 기뻐하시며, 개부 의동  삼사
라는 관직을 내리셨습니다.”
  고선지는 그런 관직을 별로 반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칙사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였다.
  “폐하의 성은이 망극할 뿐이옵니다”
  저녁에는 칙사를 위한 성대한 잔치가 열렸다. 고선지는 틈을 보아, 그 동안 궁금했던 일을 칙사
에게 조용히 물어 보았다.
  “장안으로 끌려간 석국의 나구차비시 왕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 그 사람, 사람들이 많
이 모이는 시장에서 목을 베었지요.” “아니, 그게 사실입니까?”
  칙사는 고선지가 너무도 놀라자 오히려 되물었다.
  “장군, 왜 그렇게 놀라시오?”
  “큰일났습니다.”
  “큰일나다니요? 그까짓 오랑캐 나라의 두목 하나 목벤것이 뭣이 그리 대단하다고 그러 십니
까?”
  칙사는 서역에 대하여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슬람 교도는 단결심도 강했고 복수심도 강했다. 만일 나구차비시 왕이 장안에서 목이 잘렸다
는 소식이 알려진다면 석국은 물론이고, 주변에 있는 작은 국가들이 모두 반란을 일으키고 말지
도 모를 일이었다.
  고선지의 설명을 듣자, 칙사는 그 때서야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정말 큰일이군요.”
  칙사가 떠난 뒤, 고선지는 봉상청에게 편지를 보내 자세한 소식을 알려고 했다.
  봉상청은 고선지의 추천으로 이 무렵 당나라 본토의 낙양 지구 사령관으로 있었다.
  그런데 그 동안에 나구차비시 왕의 죽음은 서역을 왕래하는 대상을 통해 석국에 알려졌다.
  장안에는 동문과 서문, 두 곳에 시장이 있었는데, 대상들은 이 곳에서만 물건을 사고 팔 수 있
게 되어 있었다.
  또한, 시장은 역적이나 죄인의 목을 베는 장소이기도 하였다. 죄인의 죽음을 되도록 많은 사람
들에게 구경시켜 경각심을 일깨워 주기 위해서였다.
  그런 만큼 대상들이 나구차비시 왕의 죽음을 보거나 소문을 듣자 석국에 알렸던 것이다.
  고선지가 염려하였던 일이 곧 일어났다. 석국을 비롯하여 서역의 많은 나라들이 당나라에 반기
를 들었던 것이다.
  전쟁의 기운이 감돌자, 서역과 당나라 사이의 교역도 한산해졌다.
  그러자 쿠처에 있는 백성들도 걱정이 되었다.
  “대상들의 발길이 뜸해졌어. 우린 이제 장사도 안 되고 큰일났어.” 서역의 여러 나라들이 당
나라에 반기를 들면 실크 로드가 막혀 대상들이 다니지 못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실크 로드는 당나라와 로마를 연결한 통상로를 통틀어 말하지만, 당의 지배권 아래 있는 길로
서는 톈산 북로와 톈산 남로가 가장 중요하다.
  이 두 길은 둔황의 옥문관에서 시작하여 톈산 산맥의 남쪽과 북쪽을 각각 지난다. 당나라에서
는 톈산 남로를 더 중요하게 여겼다. 안서 도호부가 있는 쿠처도 이 톈산 남로에 있음을 보면 그
것을 알 수 있다.
  참고적으로 말하면 톈산 남로는 둔황→누란→투루판→카라샤르→쿠처→아커쑤→카슈가르→코칸
트→코젠트→사마르칸트로 이어진다.
  그리고 톈산 북로는 둔황→하미→베제클릭→우루무치→쿨자→수이압→메르키→탈라스→타슈켄
트→사마르칸트에 이른다.
  톈산 북로나 톈산 남로 모두가 사막과 건조 지대 등에 자리잡고 있는 작은 오아시스 국가들은
중간 지점으로 삼아 연결되어 있는 만큼, 그들이 반기를 들면 그 누구도 이 곳을 지나다닐 수 없
었다.
  “좀더 강력하게 보고서를 써서 올려야 했어. 절대로 나구차비시 왕을 죽여서는 안 된 다고 황
제께 건의해야 했어. 그러나 지금은 모두 지난 일, 내 잘못이야.” 고선지가 후회를 하며 앞으로
의 일을 걱정하고 있는데, 봉상청에게서 답장이 왔다. 고선지는 그것을 읽자, 더욱 우울해졌다.
  “지금 조정에선 이임보의 세력이 크게 줄어들고 양국충의 세력은 떠오르는 해와 같습 니다….

  양국충의 세력이 커진 것은 그의 동생 양귀비의 덕분이었다. 본디 양귀비는 성씨도 모른 고아
로서 어려서 양씨 가문의 수양딸이 되었다. 그러므로 양국충은 핏줄이 이어진 것도 아닌데 하루
아침에 벼락 출세를 하게 되고, 어느덧 이임보마저 앞지르는 권세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또, 안녹산이 요즈음 세력을 얻고 있습니다. 지금 안녹산과 양국충이 서로 손을 잡고  이임보
를 쓰러뜨리려 하고 있는데, 세상의 소문에 의하면 그들도 언젠가는 서로 갈라질  거라고 합니다.

  안녹산은 엄청난 뚱뚱보로 체중이 200킬로그램 가까이 되어 말도 타지 못하였다. 이런 자가 어
떻게 장군으로 평노 절도사를 비롯한 세 곳의 절도사를 겸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매우 재치가 있어 양귀비를 ‘어머니’라 부르며 비위를 맞추고 있었다. 그가 세
력을 얻은 것도 양귀비를 통하여 현종의 신임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고선지는 편지를 읽고 나서 분개하였다. 변경의 위태로움도 모른 채 권력 다툼에 눈이 먼 조정
대신들이 기생충들처럼 여겨졌다.
  “조정이 이렇듯 썩었으니 앞일을 내다보지도 못하고 나구차비시 왕의 목을 베었구 나.”
  고선지는 나라일을 걱정하며 도호부 안을 거닐고 있었따. 그는 어느덧 마구간 앞에 이르렀다.
그러자 그의 애마가 주인을 알아보았다.
  “오, 너도 잠을 자지 않고 있었구나.”
  옛날, 한나라 무제 때, 장건이 서역으로 가다가 페르가나에서 좋은 말을 얻어 황제께 바쳤다.
무제는 이 말에 흠뻑 빠져 서역에서 많은 말을 구해 오게 하였던 것이다.
  이런 말을 ‘한혈마’또는 ‘천마’라고 불렀다. 한혈마란 피처럼 붉은 땀을 흘리고, 하루에 천
리를 달린다는 데서 나온 말이었다. 즉, 오늘날의 아라비아 말인 것이다. 이것이 서역과 교역을
함으로써 중국에까지 오게 되었는데, 고선지의 애마도 바로 그런 한혈마였다.
  자기네 왕이 당나라에서 죽임을 당했다는 데에 분노한 석국은 당나라에 반기르 들었다. 그러나
단독으로는 당나라에 맞설 수 없어 사라센 제국에 구원을 청하였다.
  또, 석국의 반란에 동조하여 주변의 탈라스 등도 반기를 들었다.
  현종은 고선지에게 이들을 토벌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리하여 고선지는 서기 751년에 3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세 번째로 파미르 고원을 넘었다.
  한편, 사라센의 아부 무슬림 왕은 지아드 이븐 살리라는 장군을 보내어 석국을 돕게 하였다.
  고선지는 이들과 격전을 벌였다. 고선지는 먼저 타슈켄트를 점령하였고, 다시 탈라스를 향해 진
격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전과 달리 꽤나 힘든 전쟁이었다. 종교의 힘으로 뭉친 서역 각국의 회교도군
이 전투에 강했던 것은 아니었다.
  고선지의 명성이 워낙 알려져 있어, 그들은 안서군을 보자 도망치기에 바빴다. 싸우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후방의 병참 부대를 습격하거나 유격전으로 나와 당나라 군사들을 괴롭혔다. 그
러니 당나라 군사들은 싸움을 할 수도 없고, 쉴 수도 없었다.
  “내 평생에 이렇듯 힘든 싸움은 처음이다. 마치 그림자를 보고 싸우는 것 같아 도무지  힘만
들고 효과는 적구나.”
  군사들도 지쳐서 차라리 후퇴하는 것이 낫겠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이럴 때마다 고선지는 부하들을 격려하였다.
  “조금도 두려워하지 말라. 물러서면 오히려 우리측이 불리해진다!” 고선지는 군사들을 야영할
때처럼 수레를 죽 늘어세우고, 그 뒤에서 막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 싸우도록 하였다.
  그는 부대를 세 줄로 배치하였다. 첫째 줄은 보병으로 긴 창이나 긴 자루가 달린 언월도를 가
지고 있었다.
  고선지는 보병들에게 일렀다.
  “궁수(활쏘는 군사)들이 뒤에서 화살을 쏘면 너희들은 언월도로 말다리를 후려 쳐라.
  그리고 긴 차으로 말위의 적병을 찔러 버려라!”
  사라센 군은 먼지를 날리며 무섭게 돌진해 왔다.
  당군의 둘째 줄과 셋째 줄은 활 부대였다. 활 부대를 두 줄로 배치한 것은 활을 번갈아 가며
쏘기 위해서였다. 둘째 줄의 궁사들이 돌진해 오는 적을 향해 화살을 쏘면, 셋째 줄의 궁사들이
잇달아 화살을 쏘았다. 이렇듯 번갈아 쏘면, 쉬지 않고 연속적으로 화살을 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해서도 말에서 떨어지지 않는 적병이 보병의 첫째 줄 가까이 오면 언월도로 말다리를
후리고, 장창으로 적을 찔러 죽이도록 작전을 세웠다.
  만약, 고선지의 작전대로만 되었다면 고선지의 당나라 군사들은 이 싸움에서 이겼을 것이다. 그
런데 등뒤에서 난데없는 적이 나타났다. 톈산 산맥 북쪽에서 유목 생활을 하는 카를루크 족이 힘
이 약한 석국을 동정하여 당나라 군사들을 뒤쪽에서 공격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당나라 군사들은 큰 혼란에 빠졌고, 많은 군사를 잃었다.
  고선지는 외쳤다.
  “한 덩어리로 뭉쳐라. 그리고 탈라스 성 쪽으로 이동하라. 흩어지면 안 된다. 흩어지 지만 않
는다면 살아날 길이 있다.”
  고선지의 지휘는 적절한 것이었다. 당나라 군사들은 흩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전멸을 모면하였
다. 그리고 탈라스 성에 이르자, 이를 점령하였던 것이다.
  이 때, 고선지는 이사엽, 단수실 등을 불러 말했다.
  “참패다. 그러나 끝까지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한다. 이런 때일수록 더욱 경계를 엄중이 하고 절
대로 방심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불안에 떨면 적들은 기세를 올려 더욱 세차게 공 격해 올 것이
다. 우리에게는 구원해줄 원병이 없다는 것을 알고, 죽기를 무릅쓰고 싸우면 반드시 승리할 것이
다.“ 그러나 군사들의 마음은 그렇지가 않았다. 하루 종일 싸웠기 때문에 지쳐 있었고, 그것보다
성벽이 적으로부터 자기들을 지켜 주리라는 생각에 성 안에 들어오자 그대로 아무렇게나 쓰러져
잠이 들어 버렸다.
  그러나 고선지만은 천막에 앉아 조용히 병서를 읽고 있었다. 여기서 병서를 읽고 무엇을 배우
겠다는 것보다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서였다.
  이윽고, 새벽녘, 바깥이 소란해지며 단수실이 허둥지둥 뛰어들어와 외쳤다.
  “장군님, 큰일났습니다. 우리 군에 배속되어 있던 서역병들이 모두 도망치고 적군이  공격해
오고 있습니다.”
  회교를 믿는 용병들이 밤 사이 몰래 도망쳤던 것이다.
고선지는 조용히 말하였다.
  “알았다. 코젠트까지 철수한다. 이번에도 결코 흩어져서는 안 된다고 전하여라. 모두 들 조금
도 방심하지 말고 정신을 바짝 차려라.”
  고선지가 이끈 당나라 군사들은 코젠트를 거쳐 쿠처로 돌아왔다. 이 싸움에서 당나라 군사들은
비참한 패배를 했지만, 그나마 전멸되지 않은 것도 고선지의 뛰어난 지휘 솜씨 덕분이었다.
  사라센의 역사책에 의하면, 이 때 당나라 군사들은 5만 명이 전사하고 2만 명이나 되는 병사들
이 포롤 잡혔다고 한다.
  그러나 당나라의 기록을 살펴보면, 고선지가 3만 명의 병력을 가지고 적군과 싸웠다고 되어 있
다.
  이런 상황으로 볼 때, 사라센의 역사는 자신들의 승리를 과장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고선지의 부대에 종이를 만드는 기술자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채륜이 발명한 중국의 종이 만드는 방법이 이때 사라센으로 전하여졌고, 이것이 ‘사라
센 문화’가 되어 다시 유럽에 전해졌던 것이다.
  쿠처에 돌아오자 고선지는 장안으로 가서 현종을 만나뵈었다. 그는 패전의 보고를 하고, 그 책
임을 자기가 지겠다고 아뢰었다.
  그러나 현종은 오히려 고선지를 수고를 위로하고, 그에게 ‘우림군 대장군’에 ‘밀운 군공’
의 작위를 내렸다.
  말하자면, 고선지는 변경의 절도사에서 당나라 본토의 대장군이 되고 식읍(영지)까지 하사받은
귀족이 된 것이었다.
  이것으로도 탈라스의 패전이 사라센측의 주장처럼 그렇게 심했던 것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때, 이미 당나라는 큰 변란을 맞으려 하고 있었다.

































  7. 무장의 최후

  서기 752년, 오랫동안 재상으로 있으면서 권세를 누렸던 이임보가 죽었다.
  그러자 그 동안 서로 손을 잡고 있던 양국충과 안녹산은 서로 세력을 넓히기 위해 상대방을 헐
뜯기 시작하였다.
  양국충은 중앙의 조정에 있고, 안녹산은 지방의 군사력을 쥐고 있는 절도사로 있었다.
이런 상황으로 볼 때, 좀더 유리한 입장에 있는 것이 양국충이었다.
  현종은 양국충의 참언을 귀가 아프도록 듣자 서서히 안녹산을 의심하게 되었다.
  하루는 안녹산이 장안에 나타났다. 그는 많은 진귀한 선물을 가져와 양귀비에게 바쳤고, 이어
황제 앞에 이르렀다. 그는 워낙 뚱뚱했기 때문에 뱃가죽이 축 늘어져 무릎을 가릴 정도였다고 한
다.
  현종이 안녹산에게 물었다.
  “장군의 그 뱃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그러자 안녹산은 재치 있게 대답하였다.
  “이 뱃속에는 폐하께 충성을 바치려는 마음이 가득 들어 있사옵니다.” 이 말을 듣자, 현종은
흡족한 듯이 껄껄 웃었다. 그러나 안녹산을 의심하는 마음을 가시지 않았다. 현종은 웃음을 거두
고 다시 안녹산에게 물었다.
  “장군은 양귀비에게 먼저 문안을 드리고 짐에게는 나중에 찾아오지 않았는가. 이게 어 찌 충
성스러운 신하가 할 행동인가?”
  이것도 어려운 질문이었다. 황제보다 귀비를 먼저 찾는다는 것은 얼마든지 죄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안녹산은 거침없이 대답하였다.
  “폐하, 저는 변방의 오랑캐 자식이옵니다. 오랑캐의 풍습으로는 어머니를 머저 찾아  뵙고, 그
다음 아버지를 찾아 뵙습니다. 이것은 어미를 중히 여기고 아비를 소홀히 하 는 뜻에서 나온 것
이 아니라, 웃어른을 나중에 찾아 뵙는 절창 불과한 것이옵니다.” 현종과 시녀는 이 대답에 또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안녹산은 이렇게 해서 위기를 모면했지만, 양국충은 아침 저녁으로 황제에게 끊임없이참언하였
다.
  이 때 현종은 일흔 살이 넘은 노인으로 판단력이 흐렸다. 그래서 양국충의 말을 들을 때마다
안녹산을 더욱 의심했는데, 이런 정보는 안녹산의 귀에도 들어갔다. 그는 궁중에 첩자를 두고 있
었던 것이다.
  첩자로부터 양국충이 자신을 모함하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들은 안녹산은 조정과 황제에 대한 불
만이 날로 더해 갔다.
  서기 755년 11월, 안녹산은 자기의 심복 부하인 사사명이란 자와 함께 드디어 반란을 일으켰다.
이것을 ‘안·사의 난’이라고 한다.
  반군이 장안을 향해 진격하자 봉상청은 낙양에서 이를 막았다. 그러나 안녹산이 이끄는 반군은
만리 장성 밖에서 강적 거란과 줄곧 싸워 그 힘이 막강한지라. 봉상청은 이를 막아 내지 못하고
패하여 달아났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현종은 고선지를 급히 불러 간곡히 부탁했다.
  “아무쪼록 고 장군이 역적을 막아 이 나라를 구해 주시오.” 당 현종으로서는 이제 믿을 사람
은 고선지밖에 없었다. 그러나 고선지 역시 이렇다 할 병력을 거느리지 않고 있었다.
  고선지는 급히 의병을 모았다. 그러나 양귀비의 품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은 현종을 위해 싸
워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고선지는 의병을 모으기 위해 다른 방법을 썼다. 그것은 의병에 지원하는 사람들에게 곡식을
주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곡식 창고를 열기 위해서는 황제의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그럴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고선지는 우선 곡식 창고를 열어 곡식을 나누어 준 후에 호아제의 허락을 받기로 했다. 그는
즉시 창고에 있는 곡식을 풀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군사들의 사기를 돋우었다. 이런 방법이
효과를 나타내어 의병은 그 수가 10만 명에 이르렀다. 하지만 모여든 10만의 의병은 농사를 짓는
사람이거나 집 없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사람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문제는 훈련되지 않은 이런 의병들로 어떻게 막강한 반군과 싸우느냐 하는 것이었다. 고선지는
이 문제로 혼자 고민하며, 의병들과 함께 장안을 떠나 동쪽으로 갔다.
  고선지와 그의 부대는 당당히 섬주를 향해 출발하였다. 섬주는 장안 동쪽에 있는 곳으로 낙양
에서 오는 적군의 침입로에 있었다.
  고선지의 부대는 ‘천무군’이라 불렀다. 중국에서는 옛날부터 하늘을 신으로 받들었고, 황제는
그 하늘을 대신하여 백성들을 다스린다 하여 ‘천자’라고도 하였다. 그러므로 천무군은 하늘의
군대로 천자를 배반한 역적을 친다는 뜻이었다.
  총사령관을 ‘도원수’라고 하는데, 현종의 여섯째 아들 이완이 그 자리에 앉았다. 고선지는 부
원수였으나, 실질적인 총사령관이었다. 이완은 군사적 경험이 없고 상징적 존재였기 때문이다. 감
군으로는 변영성이 뒤따랐다.
  변영성은 전부터 고선지를 미워하고 언젠가는 제거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까닭은 고선지가 매우 강직하여 자기에게 뇌물을 바칠 줄도 모르고 자기의 부정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본디 장안은 고대 중국의 역대 왕조들이 도읍을 두었던 곳이다. 즉, 주나라 때에는 ‘호경’이
라 했으며, 시황제의 진나라도, 유방의 한나라도, 수나라도 이 곳에 도읍을 두었고, 당나라도 그것
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었다.
  이 장안이 있는 일대는 평야 지대로 농산물이 풍부했으며, 특별히 ‘관중’이라 불렀다.
  관중은 ‘관(관문)으로 둘러싸인 고장’이란 뜻으로 전략상 아주 중요한 곳이었다. 동쪽에 동
관, 남동쪽에 무관, 서쪽에 소관 및 농관, 남서쪽에 대산관이 있어 이관문들만 튼튼하게 막으면
적군은 관중에 침입하지 못하였다.
  고선지는 이 곳에 진을 치고 반군을 막으려고 하였다. 그런데 변영성은 왜 나가서 적을 치지
않느냐고 성화를 부렸다.
  그는 이 기회에 고선지를 제거하고 싶었던 것이다.
  고선지는 그런 변영성을 타일렀다.
  “감군 영감, 적은 그 동안 수없이 많은 전투를 겪은 정예 부대이고, 우리는 백성들을  모아서
만든 부대입니다. 훈련을 거의 받지 않는 상태에서 함부로 적과 마주칠 수는 없 습니다. 우리가
그런 적과 정면 대결을 하면 패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이어서 말을 계속하였다.
    “그리고 적의 무리는 지금 약탈을 일삼고 있다지 않습니까? 이런 무리는 짐승이나  같아 처
음에는 기세가 대단하여 꺾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이 동관에서 관주을 굳게 지 키며 시간을 끌면
그들의 기세는 절로 꺾이고 스스로 자멸하고 말 것입니다.”   훈련이 안 된 신병을 데리고 싸우
자면 그런 방법밖에 없었다. 이런 말에 변영성도 어찌할 수 없었다. 그런데 고선지가 관문의 병력
배치를 끝내고 와 보니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반군에게 패하여 후퇴한 후, 고선지 부대에 와 있던 봉상청이 결박되어 목이 잘리 ㄴ시체로 뒹
굴고 있었던 것이다.
  고선지는 소리를 버럭 질렀다.
  “누가 이 따위 짓을 했느냐?”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 때, 수십 명의 형리를 뒤에 거느린 감군 변영성이 싱글거리며 나타났다.
  “내가 시켰소. 봉상청은 전장에서 도망친 죄로 목을 잘라 군법을 시행한 것이오.” “도망?”
  “그렇소. 그는 역적을 눈앞에 두고도 자신의 한 목숨만 살겠다고 도망을 친 거요. 어 떻게 이
런 자를 살려 둘 수 있겠소?”
  고선지는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낙양에서 안녹산에게 패하여 쫓겨온 봉상청은
전장에서 도망친 죄가 성립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강한 적을 앞에 두고 한 사람의 장수가 더 필요한 이 때에 이런 짓을 하다니 …….’
  더구나 봉상처은 고선지의 둘도 없는 참모로서 많은 전투에서 생사 고락을 같이했었다. 그런
봉상청이 시체가 되어 고선지의 눈앞에서 나뒹굴고 있었던 것이다.
  고선지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울고 잇는 고선지를 비웃는
듯 쳐다보던 변영성은 또 이렇게 말하였다.
  “안 되었지만 장군도 체포해야겠소.”
  “나를, 무슨 죄로?”
  “관의 창고를 무단 개방시킨 죄요. 다만 장군은 부원수니까 일단 체포만 하고 처형은  황제폐
하께 재가를 얻고서 시행할 방침이오. 자, 어서 장군의 인끈과 칼을 풀어 내놓으 시오.”
  고선지는 눈을 감았다. 창고를 개방시킨 것은 비상 시국을 맞아 군사의 사기르 돋우려 는 것이
었고, 또한 의병을 모집하려는 수단이었다.
  그 때문에 군사들의 사기가 얼마나 높아졌으며, 얼마나 많은 의병들이 모여들었던가? 이 모습
을 줄곧 옆에서 지켜 보고 있던 단수실이 분함을 참지 못해 외쳤다.
  “장군님! 저 따위 환관의 말을 들어서는 안 됩니다. 장군님이 명령만 내려주신다면 저 런 놈은
단칼에 베어 죽이겠습니다.”
  단수실의 말을 듣자, 변영성은 겁먹은 표정이 되어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러나 고선지는 고개를 저으며 조용히 말하였다.
  “아니다. 지금 죽는 한이 있더라도 황제의 명령 어겼다는 더러운 오점은 남길 수는 없 다. 이
것두 모두 운명일 테지.”
  고선지는 칼과 대장군의 인끈을 끌러 변영성에게 순순히 건네 주었다.
  “별다른 소원은 없소. 다만 부탁하고 싶은 것은 내가 죽은 뒤, 무인답게 땅에 파묻어  주시오.
그것도 봉상처의 무덤 옆에 묻어 주었으면 하오.” 고선지는 남아 있는 가족들에게 대해서는 아
무런 부탁도 하지 않았다. 고선지의 말을  들은 변영성도 한 가닥의 양심이 있었는지 고개를 끄
덕이며 약속하였다.
  “장군의 소원은 내 꼭 드어 주겠소. 그럼 빨리 시행합시다.” 변영성이 눈짓을 하자 언월도가
번쩍하며 고선지의 목이 잘려졌다.
  고선지는 서기 755년에 그 일생을 마쳤다. 동관을 지키고 있던 첨무군은 모두 장군의 죽음을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다.
  고선지가 없는 천무군은 이 전투에서 패하고 반군은 장안까지 밀고 들어갔으며, 현종은 스촨의
촉나라로 피신을 하였다.
  이 난리 통에 양귀비는 백성들의 비난을 받아 목을 메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후, 반군들 역시 내분이 일어나 ‘안·사의 난’은 서기 763년에 평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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