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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김성수 [한국위인전집]

by Casey,Riley 2023.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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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수(1891∼1955)
  정치가, 교육가, 언론인으로 호는 인촌이다. 1914년 일본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
를 졸업한 뒤 귀국하여 중앙 중학교를 인수하여 교장이 되었다. 1919년에는 경성
방직 회사를 창설하여 경제 자립과 민족 자본을 육성시키는 한편, 1920년  동아
일보 를 창간하여 민족 사상 고취에 힘썼다. 1932년 보성 전문 학교(현재의 고려
대학교)를 인수하여 교장에 취임하였다. 광복 후 미군정청 수석 고문관, 한국민주
당 수석총무, 동아 일보사 제 9대 사장 취임, 대한 독립 촉성국민회 부회장 등을
역임하다가 한국민주당의 당수가 되었다. 1950년 제2대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반대하여 1951년 사임하였다. 1952년 민주국민당의 고문으
로 야당에서 활약하였다. 1962년 대한 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을 수여받았다.


  1. 개구쟁이 시절

   어머니, 옆집은 우리와 어떻게 되지요?
   그야 작은집이지. 우린 큰집이고. 우리 판석이가 아직 그것을 모르고 있었구
나.
  일곱 살 된 판석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다시 물었다.
   그럼, 작은 집에 놀러 가도 되나요?
   그야 괜찮지만, 어째서 갑자기 작은집에 갈 생각을 하게 되었니?
   아기가 보고 싶어서요.
  이씨 부인은 계집종을 불렀다.
   도련님을 모시고 작은집에 다녀오너라.
  판석은 계집종을 따라 작은집엘 갔다. 작은어머니 고씨 부인은 판석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판석이가 이렇게 오니까 작은어머닌 몹시 기쁘구나. 우리 판석이가 이젠 아주
의젓한 아이가 되었네. 그런데 어쩐 일로 갑자기 작은 집엘 다 왔니?
  판석은 말똥말똥한 눈으로 고씨 부인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동생을 보러 왔어요.
   옳아, 아기를 보러 왔구나.
  판석은 방으로 들어가더니 아기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백 일쯤 지난 아기는
손가락을 꼬무락거리며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그럼, 아기를 좀 보고 있어라. 판석 도령이 오셨으니 작은어머니가 맛있는 걸
대접해야지.
  고씨 부인이 방에서 나가자, 판석은 계집종에게 살그머니 물었다.
   저분이 우리 어머니야?
  계집종은 깜짝 놀란 얼굴로 말했다.
   도련님의 어머님은 큰댁에 계시잖아요.
  판석은 화가 난 얼굴이 되어 가지고 따졌다.
   얼마 전에 그랬잖아. 작은집에 계신 분들이 내 진짜 부모라고.
  계집종은 망설이다가 하는 수 없이 대답했다.
   네, 저분이 도련님을 낳아 주신 어머니세요. 하지만 큰댁 마님께서 도련님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줄 잘 아시죠? 지금, 도련님의 어머닌 큰댁 마님이세요. 그리
고 이 말 제가 했다고 아무에게도 말씀 드리면 안돼요. 약속하실 수 있지요?
  그러나 판석의 목소리는 거침없이 커졌다.
   그러면 이 아기는 내 친동생이잖아. 난 여기서 살겠어.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
리고 큰 집 엄마한테로 돌아가지 않겠어.
  마침 이 때, 쟁반에 곶감을 담아 가지고 오던 고씨 부인이 방문 앞에서 판석의
말을 들었다.
  고씨 부인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가슴이 마구 뛰고 현기증마저 느껴졌다.
  조금 사이를 두었다가 곶감 그릇을 마루에 있는 뒤주위에 놓고는 방문을 열고
판석을 불렀다.
   판석아, 잠깐 이리 나오너라. 작은어머니가 네게 꼭 할 말이 있다.
  판석은 곧 방에서 나왔다. 겁먹은 얼굴로 계집종이 뒤따라 나오자 고씨 부인은
무서운 눈으로 호령했다.
   너 먼저 집으로 돌아가거라, 도련님은 곧 돌려 보낼테니. 어서!
  판석은 작은어머니가 왜 그렇듯 갑자기 화를 내는지 까닭을 몰라 어리둥절해했
다. 고씨 부인은 판석의 손목을 잡고는 건넌방으로 갔다. 그리고 문고리를 걸었
다.
   판석아! 방금 안방에서 뭐라고 했지?
  너무도 무서운 작은어머니의 모습에 판석은 새파랗게 질린 채 아무 대답도 못
했다.
   잘 들어라! 여긴 네 집이 아니다. 더구나 난 네 어머니가 아니고, 네 어머님은
큰댁에 계시다.
   하지만…….
   내 말이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구나. 그렇다면 내가 네 어머니가 아니란 것을
똑똑히 보여주마.
  고씨 부인은 회초리를 잡더니, 판석을 잡아 일으켰다. 판석은 이제껏 매라고는
맞아 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의 회초리가 철썩 종아리에 감기자, 판석은 울음을
터뜨렸다.
   잘못 했어요. 다시는 그러지 않겠어요. 우리 엄마라고 하지 않을게요.
  그렇지만 회초리는 사정없이 내려쳐졌다. 울면 울수록 더 아프게 때렸다.
  그 때, 밖에서 누군가 거칠게 문을 잡아 흔들며 소리질렀다.
   문 열어라, 문!
  할머니였다. 어머니는 그제야 매질을 멈추었지만, 판석은 할머니 목소리를 듣자
더욱 크게 울었다.
  판석이 어머니는 판석이 위로 아들 셋을 낳았으나 모두 돌도 넘기지 못하고 죽
고, 오로지 딸 하나만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고씨 부인은 흥덕에 있는 소요암이
라는 암자에 가서 불공을 드렸다.
  그러던 어느 날, 꿈을 꾸었다.
  한 뼘은 됨직한 커다란 왕새우가 개천에서 몸을 오므렸다 폈다 하며 기운차게
헤엄을 치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고씨 부인은 정신없이 뛰어들어
왕새우를 치마폭으로 싸 가지고 기슭으로 나왔다. 그리고 펴보니 새우는 간 데
없고, 그 대신 길이가 석 자나 되는 잉어가 퍼덕이고 있었다.
  판석은 1891년 10월 11일(음력 9월 9일), 전라 북도 고창군 부안면 봉암리 인촌
에서 김경중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 때, 아버지 나이는 스물아홉 살이었고, 어머
니는 서른 살이었다. 세 아들을 잃고 온갖 정성을 들인 끝에 겨우 얻은 아들인지
라 기쁨은 더욱 컸다.
  판석이 한참 재롱을 부릴 나이인 세 살 때, 경중은 부인에게 말했다.
   부인, 한 가지 부탁할 말이 있소.
   무슨 말씀이신데요?
  고씨 부인은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그 부탁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산 김경중의 형님인 원파 김기중은 1859년에 태어났다. 1888년 진사가 되어
 의령원 참봉 을 지냈다.  원 은 왕세자나 세자빈의 산소를 말하며, 임금이나 왕후
의 무덤인  능 보다 격이 낮았다. 이런 원파 김기중에게는 자녀가 없었다.
  김경중은 무거운 입을 다시 열었다.
   형님에게 자녀가 없는 것이 늘 마음에 걸리오. 그래서 생각한 것인데……. 판
석을 형님께 양자로 드릴까 하오.
  얼마나 어렵게 얻은 아들인가. 고씨 부인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하기야 양자로 드린다 해도 지금 당장 보내자는 것은 아니오. 아직 세 살밖에
안 됐으니……. 그리고 형님 댁에 보낸다 해도 한 울안에 있으니 언제라도 만나
볼 수 있을 거요.
  그들 형제의 집은 인촌 마을 넓은 터에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다만 솟을 대문
이 있는 행랑채로 그 경계가 되어 있을 뿐이다. 따라서 한 집이나 다름없었다.
  고씨 부인은 이윽고 고개를 들고는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닙니다. 어차피 큰 집에 보낼 거라면 빠를수록 좋겠습니다. 그리고 저도 되
도록 만나 보지 않겠습니다. 그래야 형님 내외분을 친부모처럼 잘 따를 게 아니
겠어요.
  그리하여 판석은 세 살 때 큰아버지 김기중의 양자로 들어가 할아버지, 할머니
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자라게 되었다. 특히 할머니는 끔찍이도 판석이를 사랑
해 주었다.
   할머니, 옛날 이야기 해 주세요!
  판석이 무릎에 앉아 조르면, 할머니는 얼굴 가득히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왜 할아버지께 해 달라고 하지 않고, 할머니에게 조르는 게냐?
   할머니가 더 좋으니까.
   요녀석, 거짓말하는구나.
   정말이예요.
  그러면 할머니는 흐뭇한 마음이 되어 옛날 이야기를 해 주곤 했다. 그렇게 얼
마쯤 지나자, 할머니의 옛날 이야기 밑천은 다 떨어져 버렸다.
   이제는 할아버지께 가서 해 달라고 해라.
  할아버지 낙재 김요협은 화순, 진안, 군위 세 고을 현감을 지냈기 때문에 벼슬
에서 물러난 지금에도 찾아오는 손님이 많았다. 큰사랑에 나갔던 판석은 얼마 지
나지 않아 다시 쪼르르 할머니에게 달려왔다. 그리고 할아버지 방에서 있었던 일
을 하나하나 일러바치는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바쁘시대요. 그래서 내가 할아버지 턱수염을 잡아당겼지!
   저런!
  할머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랬더니 할아버진 내 볼기를 찰싹 때리셨어요.
   볼기를? 그래, 아프게 때리셨어?
  판석은 고개를 저었다.
   아녜요. 조금도 아프지 않았어요.
   그러셨을 테지. 네가 어떤 손자라고! 만약 널 아프게 때렸다면 이 할미가 가만
있지 않으려고 했지.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이길 수 있어?
   그럼.
  그런 판석이 웬일인지 요 며칠 동안 할머니 곁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할머
니가 판석을 붙잡고 물었다.
   어째서 요즘 할미한테 통 오지를 않니?
   할아버지가 더 좋으니까.
   뭐라고? 할아버지께서 새로운 옛날 이야기라도 해 주셨니?
   아녜요. 할아버진 옛날 이야기를 해 달라도 조를 적마다 엽전을 한 닢씩 주시
거든.
  판석은 할아버지,할머니에게만 귀염을 받은 게 아니었다. 양어머니도 그를 몹시
사랑했다.
  판석은 자라면서 작은집과 큰집을 왔다갔다 했다. 친어머니는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그를 꾸짖지는 않았다.
  다만 가끔 판석이가 친어머니 집에서 자고 가겠다고 때를 쓰면, 아주 엄한 얼
굴로 타일렀다.
   여긴 네 집이 아니잖느냐!
  양아버지 원파는 이 무렵, 용담 현감을 거쳐 평택 현감으로 나가 있었기 때문
에 집에 없었다. 양어머니는 할머니만큼 판석의 응석을 받아 주진 않았지만 매우
인자했다. 때리거나 야단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개구쟁이 판석도 친어머니만은 무서워했다. 어렸을 때 종아리가 부르트도록 맞
은 것이 내내 그런 느낌을 가지게 한 모양이었다.
  판석의 장난은 동네에서도 소문이 났을 만큼 짓궂었다. 마을 아이들과 몰려다
니며 온갖 개구쟁이짓을 일삼았다.
   판석아, 우리 참새 잡으러 가자.
  추수가 끝나고 산과 들에 눈이 쌓이면 참새들도 보금자리를 마련한다.
  참새들은 초가 지붕 추녀 속에 구멍을 파고 들어가 있었다. 호기심 많은 장난
꾸러기들이 그걸 발견하지 못할리 없다.
  참새잡이는 밤에 하는데, 그것은 어두워지면 참새들도 자기 집에 돌아와 잠을
자기 때문이다. 그런 때 아이들은 등불을 가지고 다니면서 구멍을 들여다본다.
  뱀이란 놈이 먼저 들어가 있거나, 박쥐가 숨어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날, 판석은 제 또래 아이들과 참새잡이를 나섰다가 큰일을 당할 뻔했다.
  아이들이 사다리로 쓸 지게를 가져와 아래에서 붙들고 있는 동안, 판석은 등불
을 들고 낮에 봐 두었던 구멍을 더듬으려고 지게 위로 올라섰다. 그 때 마침, 집
주인이 방문을 열고 나왔다. 깜짝 놀란 아이들이 그대로 도망치는 바람에 판석은
중심을 잃고 떨어지고 말았다.
  다행히도 밑에는 짚단이 쌓여 있어서 다치지는 않았지만, 등불이 떨어지면서
기름이 흘러 짚단에 불이 붙었다.
  불은 짚단을 몇 다발 그을리고 금방 꺼졌으나 판석은 주인에게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요녀석, 집에 불이 붙으면 어쩌려고 그런 짓을 하느냐!
  뒷덜미를 움켜쥐고 주먹으로 알밤을 주려다가 주인은 깜짝 놀랐다.
   아니? 판석 도령이군요.
  그는 차마 때리지는 못했지만, 그 대신 목을 어찌나 세게 눌렀는지 판석은 너
무 아파서 눈물이 나올 뻔했다.
  그는 판석을 데리고 집에까지 와서는 모든 걸 이야기했다. 할머니는 그 사람이
돌아가자 말했다.
   어멈아, 이 녀석의 종아리를 좀 단단히 때려서 다시는 그런 짓을 못 하도록
버릇을 고쳐 놓아라.
   네, 어머님.
  판석으로선 뜻밖의 말이었다. 친어머니에게 종아리를 맞았을 땐 그렇게도 역성
을 들어 준 할머니였는데…….
  판석은 인촌 김성수의 어릴 때 이름이다. 이제부터는 판석을 인촌 김성수라고
하겠다. 인촌의 집안은  울산 김씨 로, 조상은 멀리 신라 경순왕의 아들 김덕지 공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가까운 조상으로는 하서 김인후(1510∼1560)를 꼽을 수 있다. 하서는 퇴계 이황
과 성균관에서 함께 공부한 조선조 제 11대 중종 때의 성리학자이다.
  옛날에는 학자로서 뛰어난 사람은 제자들이  서원 을 세워 그 학문을 기리고 제
사를 받들었다. 흥선 대원군이  서원 철폐령 을 내리게 되자, 그 때까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던 서원이 모두 없어졌다. 그래서 전라도에는 오직 세 서원만 남겨지게
되었다. 신라의 대 유학자 최치원을 모신 태인의  무성 서원 , 임진 왜란 때의 의
병장 고경명을 모신 광주의  포충사 , 그리고 하서 김인후를 모신 장성의  필암 서
원 이다.
  어느 해 겨울, 가난해 보이는 선비 하나가 어느 부잣집 대문을 두드렸다. 주인
은 그 사람을 사랑에 맞아들여 정중히 인사를 청했다. 선비가 말했다.
   나는 장성에 사는 김명환이라 합니다. 하룻밤 묵어가게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
다.
   장성 김씨라면 하서공의 자손이 아니시오?
  주인인 진사과에 급제한 정씨 성을 쓰는 사람으로 인촌리에서  만석꾼 으로 소
문난 큰 부자였다. 주인과 나그네는 10년을 사귄 친구처럼 친해졌다.
   필시 전생의 인연인 듯합니다. 우리 사돈을 맺읍시다.
  이리하여 김명환의 아들 낙재 김요협과 정 진사의 외동딸은 혼례를 올리게 되
었다. 이들이 바로 성수의 할아버지와 할머니이시다. 그리고 성수의 할아버지 김
요협은 정든 장성을 떠나 인촌 마을로 옮겨와 살았다.
  김요협은 아들 기중과 경중 형제를 두었다. 성수의 할아버지는 큰아들 기중에
게는 1000석, 둘째 아들 경중에게는 200석 지기의 땅을 물려주었다.
  성수의 장난이 지나친 것을 걱정한 할아버지는 훈장을 한 사람 데려오기로 하
였다.
   이제부터 너도 글을 배워야 한다. 스승은 어버이나 다름없으니 잘못한 일이
있으면 종아리를 맞아야 한다.
   네.
  성수는 훈장이 무서워서라기보다는 처음 보는 사람이라 공손히 대답했다.
   그리고 너는 오늘부터 여기서 자야 한다. 이제 곧 여덟 살이 되니 그렇게 하
거라.
   할머니, 할머니!
  큰사랑에서 물러나온 성수는 후닥닥 안채로 뛰어갔다. 방금 있었던 일을 어서
빨리 할머니에게 알리기 위해서였다.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오늘부터는 사랑에서 자라고 하셨어요. 이제부터는 할머
니와 자면 안돼요?
   안 된다.
   어째서이죠?
   할아버지께서 그리 말씀하셨으니 분부대로 해야지.
  성수는 뾰로통해졌다. 할머니는 바느질하던 손을 멈추고 말했다.
   그리고 말이다……. 이제부터는 안채에 필요없이 들랑거려서도 안 된다.
   왜죠?
   너도 글을 배울 나이가 되었으니 점잖은 행실을 익혀야 하지 않겠느냐. 할아
버지나 아버지께서는 어지간해서는 안채에 납시지 않잖느냐? 본디 어엿한 선비는
가벼이 행동하지 않는 법이란다.
   그럼, 이제 나도 어른이 된 거예요?
  성수는 대번에 기분이 좋아졌다.
  성수는 처음 몇 달은 글공부가 재미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마음껏 뛰어놀 나이
였다.
  여름철이 되자, 성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싱그러운 나뭇잎 향기와 따가
운 햇살이 손짓하며 그를 불러냈다.
  그러나 마음놓고 놀 수도 없었다. 아이들과 한창 어울려 신나게 놀려고 하면
하인이 나타나 부르는 것이었다.
   도련님, 공부할 시간이래요.
  성수는 생각했다.
   아이들과 함께 줄곧 같이 있을 방법이 없을까?
  이런저런 궁리 끝에 성수는 한 가지 꾀를 생각해 내고는 곧 할아버지에게 달려
갔다.
   할아버지, 우리 글방에 동네 아이들도 와서 공부하게 하면 어때요?
   그거 참 좋은 생각이다. 내가 어째서 그런 생각을 진작 못 했는지 모르겠구
나.
  할아버지는 성수를 몹시 대견스럽게 여겼다.
   성수야, 네가 생각한 일이니 네가 아이들에게 권하여 글방에 오도록 하려무나.
돈 걱정은 하지 말고.
   네, 할아버지!
  1899년, 성수가 아홉 살 때 동생 재수가 태어났다.
   나에게도 동생이 생겼어!
  성수는 그것이 자랑스럽기만 했다. 그래서 작은집의 누나 수남과 동생 연수를
만나면 곧잘 자랑하곤 했다.
  성수가 열두 살 때 양아버지는 전라도 동복 군수가 되어 부임해 갔다. 가족들
도 함께 따라갔다. 동복은 지금의 화순군 동복면이다. 성수는 그 곳에 내려간 지
며칠이 지나자 벌써 골목대장이 되었다. 군사놀이, 죄인놀이를 하며 놀았다.
  아이들로선 으리으리한 관아 건물이 놀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낮에는  동헌 에
얼씬도 못했지만, 저녁때가 되면 아이들 놀이터가 되었다.
   오늘은 무슨 놀이를 할까?
  성수의 말에 형방의 아들이 대답했다.
   도련님은 사또님이 되어요, 난 형방이 될 테니.
   그럼, 죄인놀이를 하자. 사령은 어서 죄인을 데려오너라!
  사령이 된 아이가 죄수를 데려왔다. 사또가 된 성수는 호령했다.
   너는 무슨 죄를 지었지?
   집의 꿀을 훔쳐 먹었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죄인에게 벌을 주어야지!
  사령이 된 두 아이가 죄인을 붙잡고, 형방이 그 얼굴에 숯검정을 칠했다. 이 죄
인놀이도 자꾸 하니 싫증이 났다. 그래서 생각해 낸 장난이 낙서였다. 동헌의 기
둥이나 벽에 숯검정으로 그림을 그리며 놀았다.
  관아의 사령들은 이런 낙서를 보고 입을 비쭉거렸다.
   장난이 심하다 심하다 해도 이렇듯 심한 아이는 처음 보았어.
  원파 김기중은 사령들의 말을 듣고 껄껄 웃었다.
  이런 성수도 어느덧 열세 살이 되어 인촌리에 돌아와 있었다. 줄포에 가서 이
당시 아주 드문 사진을 찍었는데, 그 때부터 어딘지 몸가짐이 달라졌다. 글공부도
열심이었고, 동생들과 싸우는 일도 적어졌다.
   그녀석, 요즘은 제법 의젓해졌어.
  할아버지의 말에 할머니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꾸했다.
   그러니 영감…….
   아니, 또 무슨 말을 하려는 거요?
   어서 손주 며느리를 맞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할머니는 이 말을 입버릇처럼 되뇌었다. 이 때문에 마침내 신부감을 고르게 되
었다. 창평에 사는 장흥 고씨인 고정주의 맏딸로 이름은 광석이라 했고, 열세 살
짜리 신랑보다 네 살 위인 열일곱 살이었다.
  신부감을 고르자 할머니는 혼사를 서둘렀다.
   신부 집안이 좋을 뿐 아니라  부덕 을 골고루 갖추었다고 합디다. 어서 혼인을
시키도록 합시다.
  그 해 여름,  성수가 장가들어 처음으로 처가에 다니러 갔을때였다. 창평은 워
낙 먼 곳이라 신랑은 당나귀를 타고 하인 하나를 데리고 갔다.
  집을 떠나 홍덕, 송암, 무림, 송촌을 거쳐 고창으로 갔다. 거기서 장성군으로 들
어가 죽림, 덕산, 장성읍까지 가서 하룻밤을 묵었다.
  다음날 새벽, 다시 길을 떠나 율곡을 거쳐 담양군에 들어섰고, 드디어 창평에
이르렀다.
   무척 덥군요, 서방님.
  하인이 땀을 닦으면서 말했다. 그 말에 성수가 당나귀 고삐를 잡아당겨 멈추었
다.
  성수는 냇가에서 물장구를 치고 노는 발가숭이 아이들의 모습을 뚫어져라 바라
보고 있었다.
   덥다고? 그렇다면 당나귀를 끌고 물가로 가자!
  하인은  아차!  싶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성수는 벌써 당나귀에서 내리고 있었다.
   신랑은 덥지 않다더냐?
   그렇지만 신랑이 발가벗고 미역을 감는다면 큰 웃음거리가 될 겁니다요.
  성수가 생각해 보니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그럼 옷을 벗지 않으면 될 게 아니냐?
  하인은 미처 말릴 겨를도 없었다. 성수는 두루마기까지 입은 그대로 물 속으로
첨벙 뛰어들었다.
  처가에선 여러 날 묵었다. 밤마다 성수는 바느질하는 신부 곁에서 심심해하며
앉아 있었다.
  그렇게 며칠을 지내자 슬그머니 장난기가 고개를 들었다.
  신부는 부끄러워서 얼굴이 빨개진 채 고개도 들지 못하고 열심히 바느질만 했
다. 옷깃을 접는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신부 옆에는 화로가 있고 옷깃을 펴는 데 쓰는 인두가 숯불에 꽂혀 있었다. 그
것을 보자 성수는 장난 대신 색시를 도와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황하며 인두를 뺏으려는 신부와 빼앗기지 않으려는 성수의 승강이 끝에 그만
인두가 성수의 팔에 닿았다.
   앗, 뜨거워!
  덴 자리는 금방 물집이 생기고 부어올랐다. 처가에선 깜짝 놀라 허겁지겁 약을
발라 주었지만 덴 자국은 그래도 남았다.
  팔에 화상을 입고 집에 돌아온 성수를 보자, 할머니는 깜짝 놀랐다.
   아니, 이것은 덴 자국이 아니냐? 대체 어찌된 노릇이냐?
   제가 장난하다가 데었어요. 곧 나을거예요.
  할머니는 성수의 대답이 어딘지 어색해서 창평에 같이 갔던 하인을 불러 물었
다.
   서방님께선 옷을 입으신 채로 냇가에 뛰어들 만큼 장난이 심하셨지요. 하지만
덴 것은 아씨께서 실수하여 그랬다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들은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딘지 흐뭇한 표정이었다. 색시를 감
싸 주는 성수의 마음이 어른스럽고 대견했기 때문이다.
  성수는 열여섯 살 되던 해인 1906년 봄,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양부모의 슬하
를 떠나 처가가 있는 창평으로 갔다. 양아버지는 이 때까지도 동복 군수로 있었
고, 친아버지는 그 전해에 진산 군수를 마지막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
와 있었다.
  성수의 장인 고정주는 호남에서 손꼽히는 선각자였다. 그는 일찍이  규장각 직
각  벼슬을 지냈으나 뜻한 바가 있어 고향에 돌아와  창흥 의숙 을 세웠다.
   지금 시대는 빠른 속도로 바뀌어 가고 있다. 우물쭈물하다가는 딴 나라에 뒤
지고 말리라.


  2. 젊은 뜻

  창흥 의숙에선 한문 이외에도 신학문으로 영어, 일어, 산수를 가르쳤다.
   일어보다는 영어를 더 배울만하다고 생각하네. 일본도 서양에서 배운 것이니,
우리도 왜놈의 흉내나 낼게 아니라 서양을 직접 배우세.
  이런 생각에서 성수의 장인은 사위를 위해  영학숙 을 열어 주었다. 성수는 영
학숙에서 처남 고광준과 함께 배웠다.
   아무것도 모르니 잘 이끌어 주십시오.
   아니지요! 신학문은 우리 모두 처음 배우는 것이니 선생이 따로 없지요. 나이
가 많든 적든 함께 공부하며 경쟁하는 상대라 할까요. 참, 앞으로 수재가 또 한
사람 오게 되어 있지요.
   수재라니……, 누구지요?
   이름은 송진우라고 합니다.
   그도 지금껏 한문만 배웠겠지요?
   세 살 때부터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일곱 살 때에는 성리학자이자 의병장이
던 기삼연 선생께 더욱 높은 학문을 배웠다 합니다. 선생께서 그에게  고하 라는
호를 지어주셨다더군요. 마을에 우뚝 솟은 고비산의 꿋꿋함을 본떠 지어 주셨다
고 합니다.
  한 달쯤 지나서 송진우가 영학숙에 들어왔다. 사귀면 사귈수록 생각이 깊고 좋
은 사람으로 여겨졌다.
  성수가 아직은 조금 서먹한 느낌이 남아 있는 진우에게 물었다.
   송 형은 어째서 영학숙에 오셨지요? 내가 알기로는 한문 공부가 깊다고 들었
는데요?
  그러자 진우는 종이에 정성껏 싼 것을 말없이 꺼내 놓았다.
   이게 무엇이지요?
   풀어 보십시오.
  성수는 그것을 풀어 보고 놀라며 물었다.
   이것은 헌 신문 조각이 아닙니까?
   그렇지요. 그러나 나에겐 거기에 씌어 있는 글이 보물처럼 보입니다.
   황성 신문 의 사설로  이 날, 목놓아 크게 우노라 라는 글이었다. 을사조약이 맺
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황성 신문 의 주필이던 위암 장지연이 분에 못 이겨 쓴 것
이다. 진우는 말했다.
   나도 이 글을 읽고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가 왜 이런 꼴이
되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진우는 그로부터 6개월도 못 되어 성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여기보다 더 넓은 세계로 나가겠소.
  그리고 진우는 고향으로 가 버렸다.
  성수는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다. 이 해 겨울, 성수도 인촌 마을로 돌아와 버렸
다. 집에 돌아오자 양아버지 원파가 물었다.
   창평에서 얻은 것이 무엇이냐?
   똑똑한 친구를 하나 얻었습니다.
   호오, 그것 무척 반가운 일이오구나. 그래, 어떤 인물이지?
   담양의 손곡리에 사는 송진우라 하는데, 품은 뜻이 높고 마음이 컸습니다. 위
암 장지연의 글을 보물처럼 가지고 다녔습니다.
  원파는 아들이 좋은 친구를 가릴 줄 아는 것이 무척 기뻤다.
  이 무렵, 성수의 집은 대가족이었다. 나이 많으신 할아버지, 할머니를 비롯하여
부모님, 그리고 동생 재수와 많은 하인들이 있었다.
  또, 생가에는 친부모, 시집간 누님인 수남, 벌써 열 한 살이 된 동생 연수, 그
아래로 누이동생 영수와 점효가 있었다.
  이런 대가족의 맏이라 성수는 책임이 무거웠다. 양아버지는 집안의 가훈을 입
버릇처럼 되뇌곤 했다.
   일을 할 땐 공정하게, 밝은 햇빛처럼 떳떳해야 한다. 사람을 대할 땐 봄바람과
도 같은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도록 해라.
  1907년, 성수네 집은 줄포로 이사했다. 줄포는 지금의 부안군 줄포면이다. 이
곳은 포구로서 인구가 많았고, 인촌 마을에 비하면 도회지였다.
  양아버지 기중은 줄포에 신학문을 가르치는  영신 학교 를 세웠다.
   창평 사돈께서도 세우셨는데 우리도 그만한 일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
  줄포로 이사 온 어느 날, 원파는 성수에게 말했다.
   우리는 인촌 마을에서 제법 부자라는 소리를 들으며 살았고 그것이 사실이라
믿었다. 그런데 이 곳에 와보니 세상이 크고 넓다는 것 새삼 느끼게 되는구나. 사
람들은 흔히 부자란 하늘이 내려 주는 걸로 알고 있다. 그러나 무슨 일이고 노력
과 계획이 필요한 것처럼 부자가 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넌 할머니의 교훈이신
 양입계출 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할머니는 근검 절약으로 이름난 분이었다. 성수의 집이 이만큼 살게 되기까진
할머니의 힘이 컸다고 성수는 어려서부터 들어왔다.
   일 년에 벼 1만 가마가 우리 집에 들어온다고 하자. 그 들어오는 양을 정확히
아는 게  양입 이다. 정확한 양입을 알아야 쓸 수 있는 돈을 계산해 가며 지출할
수 있을 게 아니냐? 그것이  계출 이다. 이 두 가지가 제대로 되어야 집안도 튼튼
해지는 법이니라.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 무렵, 성수에게 새 친구가 생겼다. 줄포에서 20리쯤 떨어진 홍덕에 사는 백
관수라는 사람이었다.
  관수는 성수보다 두 살 위였고, 두 집안은 서로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성수, 자네는 영어를 알고, 나는 한문을 조금 알고 있네. 우리 서로 모자라는
것을 가르쳐 주면 어떨까?
   그것 참 좋은 생각이군. 그러나 집에 있으면 공부가 안 되니 절에 가서 배우
도록 하세.
  부안군 변산에 있는 내소사는 백제 무왕 때 세워진 오래 된 절이다. 청련암은
내소사 뒷산 가봉 중턱에 있는 매우 조용한 암자였다.
  성수와 관수가 청련암에 온 지 며칠이 지나서 뜻밖의 사람이 찾아왔다.
   아니, 이게 뉘시오? 송 형이 아니오!
  세 젊은이가 모이자 청련암은 한결 활기를 띠었다. 송진우는 나라 형편이며, 일
본 통감부의 횡포를 하나하나 얘기하며 울분을 터뜨렸다.
  어느 날, 관수가 말했다.
   지금 서울에는 신식 학교가 많이 생겼네. 우리 그 곳으로 공부하러 가세.
   아니야, 원수의 나라이지만 오늘날 동양에서 신학문을 배울 곳은 일본밖에 없
네. 그 곳에 건너가 공부할 계획을 세우세.
  진우의 이런 주장에 성수가 결론을 내리듯 말했다.
   서울로 가든지 일본으로 가든지 먼저 부모님 허락을 받아야 하니 저마다 집으
로 돌아갔다가 나중에 만나기로 하세.
  줄포로 돌아온 성수는 기회를 보아 부모님에게 유학할 뜻을 밝혔다.
   나라가 어지러울수록 공부를 더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관수는 서울
유학을 말합니다만, 저는 차라리 일본으로 가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너는 장손이다. 나라가 어지러워 내일을 알 수 없는 지금, 어찌 나라 밖으로
나갈 수 있단 말이냐? 그런말은 다시 입 밖에도 내지 마라.
  성수는 고민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1908년, 성수의 나이 열여덟 살이 되었
다. 하루는 우편국 주사로 있는 사람이 군산 가는 길에 줄포에 들렀다. 성수는 그
에게 물었다.
   저는 줄곧 영어가 모자란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혹시 군산에 영어를 가르치는
좋은 학교가 있는지요?
   글쎄, 학교는 모르지만  굿멸 병원 에서 영어를 가르친다는 소문은 들었네.
  성수와 관수는 둘이서 굿멸 병원을 찾아갔다. 이 곳은 선교사가 경영하는 병원
으로 기독교를 믿어야 영어를 가르쳐 준다는 바람에 되돌아오고 말았다.
  며칠 뒤, 후포에서 연설회가 있었다. 관수의 말에 이끌려 성수도 따라갔다.
   연사로 한승리가 나온다네. 그는 군산에서 금호 학교를 경영하고 있지.
  잠시 후, 연설이 시작되었다.
   여러분! 나라의 주인은 임금이 아니라 국민입니다. 따라서 국민은 임금이 하는
정치에 잘못이 있으면 비판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것이  민권 입니다. 우리 나
라엔 아직도 양반이다, 상놈이다 하는 차별이 남아 있습니다. 이런 것은 모든 사
람이 평등하다는 국민의 소망으로 볼 때 크게 어긋나는 일입니다.
  성수는 이 말을 듣고 강한 충격을 받았다. 임금의 정치를 백성이 바판할 수 있
다? 얼마나 새롭고 놀라운 생각인가. 말 한 마디만 잘못하여도 역적이 되어 그
가족까지 모두 죽임을 당했던 시대가 겨우 10여 년 전이 아닌가!
  주권 재민, 만민 평등이란  민권 을 알게 된 성수와 관수는 연설회가 끝나자 한
승리를 찾아갔다.
   선생님, 저희들은 오늘 강연을 듣고 멀었던 눈을 뜬 느낌입니다. 선생님의 학
교에서 배우게 해 주십시오.
  성수가 말하자, 한승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군산에 있는 금호 학교로 찾아오라
고 했다.
  성수는 곧 부모의 허락을 받아 관수와 함께 금호 학교에 들어갔다. 성수는 이
학교에서 오래 있지는 않았지만 신학문에 눈을 뜬 귀중한 몇 달이었다.
  학교에서는 국어, 산수, 역사, 지리, 영어 말고도 물리, 화학, 체조, 창가까지 가
르쳐 주었다.
  이 해 여름, 양아버지 원파가 군산에 왔다.
   아버님께서 웬일이십니까?
   귀한 친구가 서울서 배편으로 내려온다기에 마중 나왔다.
  며칠 뒤, 성수가 학교에서 돌아오자, 원파와 어떤 사람이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
고 있었다. 학생복에 머리를 박박 깎은 청년이 함께 와 있었다.
   어른께 인사드려라. 이분은 이번 금산 군수로 내려오신 홍범식 어른이시다.
  홍범식은 원파와 아주 가까운 친구인 듯 싶었다. 홍 군수는 성수의 절을 받은
뒤 말했다.
   자네 어르신네와는 잘 아는 사이일세. 이 애는 내 아들 명희라네. 서로 알고
지내게.
  성수는 명희에게 눈짓을 보내고 밖으로 나왔다. 명희와 이야기하고 싶었기 때
문이다.
   서울에 있는 학교에 다니십니까?
   아닙니다. 일본 도쿄에 있는 타이세이 중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그럼, 벌써 몇 년 전에……?
   3년 전부터이지요. 여름 방학이라 잠깐 나왔습니다.
  성수는 이어 그가 충북 괴산이 고향이며, 나이도 자기보다 세 살이 많음을 알
았다.
   일본은 어떻습니까?
   슬픈 일이지만 우리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앞서 있지요. 특히 교육 시설이
잘 되어 있어요.
  성수는 명희와 만나면서부터 일본에 가겠다는 뜻을 단단히 굳혔다. 다시 며칠
뒤, 송진우가 갑자기 군산으로 성수를 찾아왔다.
   늦어서 미안하네. 아버님 허락을 받아 내느라고 이제야 왔네.
   그래, 어떻게 할 생각인가?
   일본 유학은 허락 받지 못했네. 그 대신 서울에 올라가 한성 교원 양성소에
들어가라는…….
   아냐, 결심을 바꾸지 말게.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일본에 건너갈 생각이네.
함께 가지 않겠나?
  성수와 진우는 마침내 1908년 10월, 군산에서 일본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할아
버지는 물론이고 친아버지, 이해심이 가장 많던 양아버지까지도 반대한 일본 유
학이었다. 줄포의 성수 집에선 뒤늦게 이것을 알고 마치 초상이라도 난 듯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다.
  처음 몇 달 동안은 너무나도 공부에 몰두해 있었기 때문에 언제 날이 가고 달
이 갔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일본어 실력은 서로 비슷했지만, 영어는 성수의 성적이 앞섰고, 수학은 진우가
잘 했다. 두 사람은 영어와 수학의 중요성에 대해 곧잘 말다툼을 했다.
   나는 영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네. 새로운 문명을 받아들이자면 아무래도 영
어를 할 줄 알아야 할 테니까 말이야.
  성수가 이렇게 말하면 진우는 진우대로 우겼다.
   아닐세. 수학이야말로 두뇌 활동을 단련하는 학문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리고
서양 문명의 특징은 바로 과학인데, 수학이 그 바탕이 되고 있네.
  두 사람은 이렇듯 성격과 의견이 달랐지만 형제 이상으로 친했다. 성수는 할아
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잠시 귀국했다가 다시 도쿄로 돌아왔다.
  1909년 4월, 긴조 중학 5학년으로 편입되어 본격적으로 대학 입시 준비를 시작
했다. 1910년이 되자, 성수에겐 기쁜 일이 겹쳤다. 하루는 고향에서 편지가 왔는
데 아들이 태어났다고 전해 왔다. 또, 4월엔 진우와 함께 와세다 대학 예과에 입
학했다.
  와세다 대학은 우리 나라 학생이 많이 다니는 학교로 유명하다. 분위기가 자유
로웠고, 민권 사상이 강하게 풍겼다. 학제는 예과가 1년 6개월이고, 그 본과는 3
년이었다.
  이 해 8월, 우리의 국권을 빼앗는 한일 합병 조약이 맺어졌다. 성수와 진우는
그 소식을 듣고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우리 국민은 이제 어찌 될 것인가? 나라가 무너졌는데 공부를 계속해야 할 것
인가! 그것도 원수의 나라 수도에서!
  그 때,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성수가 나가서 문을 열었더
니, 홍명희가 창백한 얼굴로 서 있었다.
   아니, 홍 형께서 이런 꼭두새벽에 어쩐 일이시오?
  명희는 말없이 손에 쥐고 있던 전보 용지를 내밀었다.
   아버님 순국, 서둘러 돌아오라.
  명희의 아버지 금산 군수 홍범식은 국권 강탈이 일어나자 분격한 나머지 스스
로 목을 매어 자결했던 것이다.
  이튿날 아침, 이 무렵 상해를 거쳐 도쿄에 와 있던 처남 고광준이 찾아왔다. 그
가 입을 열기도 전에 성수가 말했다.
   형님도 귀국하실 생각이군요. 저에게 같이 가자는 말을 하러 오셨군요.
   용케 알아맞추는군.
   그러나 저는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더욱 참고 이겨내며 공부를
마치겠습니다.
  성수의 결심은 굳었으나 진우, 명희, 광준 세 사람은 며칠 뒤 귀국해 버렸다.
성수도 그들과 함께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다.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공
부를 하겠다고 적국의 수도에 그대로 주저앉은 것이 과연 겨레를 위해 떳떳한가
하는 점이었다.
   그러나 지금 고향에 돌아간다는 것은 한낱 감상이 아닐까? 감상에 젖거나 감
정에 휩쓸린다고 무슨 일이 이루어질 것인가? 역시 이성으로써 행동하는게 옳지
않은가!
  1911년 1월, 열여섯 살이 된 동생 연수가 일본에 공부하러 건너왔다.
  이 때, 송진우도 연수와 함께 다시 일본에 왔다.
   역시 자네 말이 옳았어. 그 때는 당장 무엇인가 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뜻대
로 되지 않더군. 늘 자네 생각이 나보다 앞서 잇으니 이거 참……. 그러나 큰 그
릇은 더디 이루어진다고, 어디 두고 보세.
  이 해 가을, 성수는 예과를 마치고 와세다 대학의 정치경제학과로 진학했다. 성
수는 본과에 진학하면서 더욱 열심히 공부했다. 강의 시간에 빠지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진우는 그렇지 않았다. 신문 잡지에 실린 논설을 찾아 읽는 데 열심이
었다. 그리고 무슨 연설회가 있으면 즐겨 찾아다녔다.
  진우가 저녁 늦게 하숙집에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성수에게 말했다.
   마치 중학생 같군 그래.
  성수는 얼음 주머니를 머리에 얹고 공부하고 있었다.
   내가 중학생이라면 오죽 좋겠나? 그렇다면 공부를 그만큼 더 많이 할 수 있을
게 아닌가.
   건강에 나빠. 때로는 세상 돌아가는 일도 들어가면서 울분을 터뜨리는 게 대
학생일세.
  이 때, 일본은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에 이김으로써 사람으로 말하자면 성년기
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러나 이 성년기를 잘못 이끌어 멸망의 길로 달리고 있었
던 것이다.
  성수는 몹시 겸손했고, 인정이 있었다. 당시의 유학생들 사이에 이런 이야기가
오고 갔다.
   김성수는 과연 큰 부잣집 아들답더군. 이 세상의 추악한 것은 하나도 모르는
사람 같아.
   아냐. 그러면서도 믿을 만한 사람일세. 누구라고는 말하고 싶지 않지만 내 친
구 하나가 그런 말을 하더군.
   어떤 얘기인데?
   그 친구가 고향에서 부쳐 온 돈을 딴 일로 몽땅 써 버렸다네. 그러니 그 친구
큰일났지 않은가? 그런 참에 김성수가 놀러 왔다네. 그 친구는 몇 번이고 돈을
꿔 달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차마 그 말을 못했다네. 그런데 성수가
돌아간 뒤 무심코 요 밑을 보니 돈 몇 십원이 있더라는 거야. 성수는 친구의 딱
한 사정을 알고 말없이 가지고 있던 돈을 전부 두고 간 것일세.
   음, 듣고 보니 그 친구 사람됨이 크군.
  진우가 하루는 이런 말을 했다.
   장덕수에 대해서 소문을 들었나?
  성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와세다 대학 주최로 열린  일본 전국 대학생 웅변 대
회 에서 당당히 1 등을 차지한 학생이었기 때문이다.
   웅변 대회의 심사 위원이던 일본인 교수가 장덕수를 크게 칭찬하면서 말했지.
 자네가 원하기만 한다면 총독부 관리로 다장 추천하겠다. 고. 그런데 덕수는  선
생님 밑에서 공부한 것은 그런 말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고 멋지게 거절
했다더군.
  설산 장덕수는 1895년 황해도 재령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고, 서너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그후로, 급사, 점원 노릇을 하는 등 상점에서 일하며
고학을 했다.
   나는 아버님으로부터 이런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나에게 후한 자는 남에게 후
할 수 없다. 라고 말입니다.
  성수는 덕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덕수의 날카로운 눈빛이 가늘게
떨리는 것 같았다.
   길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당신과 친해지고 싶습니다. 툭 터놓고 말해 나
는 당신에게 투자하고 싶습니다. 나는 경제를 배우는 사람으로 장 형에게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걸 발견했습니다. 내 부탁을 거절하지 말고 받아 주십시오.
승낙할 때까지 이 곳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덕수는 이윽고 물었다.
   다른 사람도 많을텐데 하필이면 왜 나한테 투자하려 하십니까?
   당신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언젠가 나가이 교수가 통
독부 관리로 추천했다면서요? 장 형이 우리 조선 사람을 위해 그 재주를 써 준다
면 좋지만, 조선 총독부엔 빼앗기고 싶지 않습니다.
  덕수는 한참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사람의 마음은 알 수가 없는 법이지요. 선배께서 만일 나에게 투자했다가 실
패를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제야 성수는 미소지었다.
   장사꾼이 돈을 투자하여 손해본다면, 그것은 자기 잘못이니 체념할 수밖에 없
지요.
   좋습니다. 선배의 제의를 받아들이겠습니다.
  이리하여 송진우, 조만식 등과 힘써 1912년 10월  조선인 유학생 학우회 가 태
어났다. 학우회는  배움의 빛 이라는 잡지까지 발행했다.
  성수가 졸업을 몇 달 앞둔 1913년 10월, 두 아버지가 도쿄에 왔다. 아들도 만나
보고 일본 구경도 하기 위해서였다. 일본 안내는 성수와 낭산 김준연이 번갈아
맡았다.
   여보게, 되도록이면 두 분을 여러 학교로 모시돌고 하게.
   그것은 또 무슨 이유인가? 모처럼 오셨는데 명승지나 변화를 구경시켜 드리는
게 도리가 아닌가?
   그야 그럴 테지. 하지만 나도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러는 걸세.
  성수는 이 때 교육 사업도 계획하고 있었다. 두 아버지를 와세다 대학 창립 30
주년 기념 행사에도 참관케 했다. 이 날, 일본의 총리 대신과 유럽, 미국의 각 대
학대표를 비롯한 나라 안팎 손님들이 2천 명 남짓 참석했다.
  양아버지와 친아버지는 그 기념식의 어마어마한 규모에 놀란 모양이었다.
   아버님, 오늘 행사를 보셨겠지요? 저희 와세다 대학만 하더라도 교직원 300명
에 학생은 1만 명이 넘습니다. 저는 일본이 짧은 기간 동안 이렇듯 발전한 힘은
모두 교육에 있다고 봅니다. 우리 민족이 일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교
육의 힘으로 그들을 따라 잡아야 합니다.


  3. 교육과 산업

  1914년 7월, 김성수는 6년 동안의 유학 생활을 청산하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성수는 이제 커다란 포부를 지닌 스물네 살의 당당한 청년이 되었다.
  고향 줄포는 온통 잔치 분위기였다. 집안 식구는 물론이고, 마을 사람들까지 모
두 기뻐했다.
   일본에서 큰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셨으니 이젠 무엇을 하실까?
   나리처럼 군수 한 자리는 하실지도 모르지.
  성수는 집에서 며칠 쉰 뒤, 아내와 함꼐 창평 처가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마땅히 다녀와야지. 그리고 들으니 송 군의 병이 몹시 위중하다고 하더구나.
이 세상에 친구보다 귀중한 것은 없으니 찾아 보도록 해라.
  창평에 머무르는 동안, 성수는 이름난 의원을 데리고 진우 집을 찾아갔다. 몰라
보게 여윈 진우는 멀리서 찾아온 성수를 보자 그의 손을 잡으며 눈물을 글썽거렸
다. 그리곤 나무라듯이 말했다.
   아니, 아직도 시골에서 머뭇거리고 있다니 무슨 일인가? 지금 우리 국민의 교
육이 하루가 급한데, 도쿄에서의 맹세는 빈말이었나?
   그러니 이렇듯 찾아온 게 아닌가? 자, 어서 병에서 완쾌하여 우리 함께 도쿄
에서의 약속을 지키도록 하세.
  이 한 마디가 진우로선 어떤 약이나 의사보다도 힘이 되었다.
  성수는 줄포로 돌아오자 곧 서울로 올라갔다. 먼저 우리 나라 교육계의 형편을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성수는 서울에서 한 달 남짓 머무르는 동안 민세 안재홍과 육당 최남선을 알았
다.
   그래서 학교 경영은 단념했습니까?
  민세 안재홍이 물었다.
   아닙니다. 처음 품은 뜻을 끝까지 밀고 나가야지요.
   조선의 부자들이 모두 김 형과 같은 생각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 조
선 사람들은 일본인의 압박 아래서 조금 돈을 모았다 하면 고작 땅을 사는 일밖
에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돈은 죽은 투자이지요. 땅은 백 년 천 년 가야 누가 떠
가랴 하는 생각이겠지만, 땅 부자가 되었다 해서 무슨 발전이 있겠습니까?
  성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육당이 물었다.
   김 형, 그러나 총독부에선 좀처럼 학교 인가를 내주지 않을 겁니다.
   그것은 나도 각오하고 있지요. 그것보다 최 형께서 좋은 학교 이름이나 하나
지어 주시지요.
  육당 최남선은 189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육당은 1904년 열다섯 살 때에 최린
등과 더불어 고종 황제가 보내는 50명의 유학생 가운데 하나로 일본에 건너갔다.
그리고 와세다 대학 고등사범부 지리역사과에 다녔다.
  따라서 최남선은 성수의 선배였고, 육당의 동생 최두선은 성수의 후배였다.
   김 형, 학교의 경영 방침을 들려 주십시오.
   네, 돈은 좀 들더라도 천 년 가더라도 무너지지 않는 돌집을 짓고 싶습니다.
   호오,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셨습니까?
   건물이 훌륭하고 튼튼해야 왜인의 기를 꺾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처음
에 집을 지을 때 견고하게 지어야 심한 비바람에도 견뎌내고 오래 갑니다.
   맞습니다. 바로 그 말을 듣고 싶었습니다.
  육당은 무릎을 치며 감탄했다.
   일본인을 이기려면 건물 하나를 짓더라도 그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시작해야
합니다. 방금 학교 이름이 생각났어요.  백산 학교 라고 하면 어떨까요?
  성수는 계획을 세우자, 총독부 허가를 얻기 위해 뛰어다녔다.
  총독부 학무 국장은 신청서를 보더니 학교 이름부터 트집을 잡았다.
   백산이라면 바로 백두산을 가리키는 게 아닌가? 백두산 학교를 지으려면 백두
산 꼭대기에 지을 것이지, 왜 경성에 짓겠다는 거야?
   김성수가 학교를 세우겠다고 총독부와 옥신각신한다는군. 젊은 청년이 얼마나
갸륵한 뜻인가. 경제적 어려움이 많은 우리 학교를 맡아 달라고 부탁하면 어떨
까?
  운양 김윤식이 월남 이상재를 만났을 때 문득 이렇게 말했다. 이들은  중앙 학
회 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육당, 중앙 학교를 맡아 달라는 교섭이 있었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야 괜찮겠지. 그러나 중앙 학회 회장인 운양 노인이 보통 깐깐한 분이 아니
라서.
  운양 김윤식은 1835년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나  경술국치 무렵에 대제학까지 올
라 있었다. 그는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이란 작위까지 받았으나 결코 친일파는 아
니었다.
  그 때 나이 스물다섯 살인 성수는 운양, 월남 등 원로급 민족 지도자와도 만났
다. 운양은 좀처럼 말을 하지 않았다. 뚫어져라고 성수를 보더니 비로소 입을 열
었다.
   자네가 학교를 운영하겠다고? 그래,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가? 숨김없이 말
해보게.
   네, 저는 이 곳에 오기 전에 제 나름대로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 이왕
학교를 맡겨 주신다면 중앙 학회는 학교에서 완전히 손을 떼 주셔야겠습니다.
   뭐라고? 그럼 학회는 바지저고리가 되란 말인고!
   송구스러우나 그렇습니다. 하지만 여러 어른께 말씀드리겠습니다. 학회와 학
교, 어느 쪽이 중요합니까? 저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학교를 살려 놓고야 말겠습
니다.
  월남 이상재, 석농 유근은 말없이 쳐다보았다. 그들은 성수의 눈을 지켜 보고
있었다. 지혜로운 이는 상대의 눈만 보아도 그 사람의 마음이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는 법이다.
  마침내 운양이 무겁게 입을 떼었다.
   좋아, 자네에게 맡기겠네.
  성수는 곧바로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래, 운양 어른께서 네게 그런 말씀을 하셨다고? 참으로 큰 일을 해냈구나.
   네, 저는 교육 사업에 목숨을 바칠 각오가 돼 있습니다. 아무쪼록 자금을 대어
주십시오.
  양아버지는 선뜻 3천 마지기의 논을 내놓았다.
  중앙 학교는 화동 홍수렛골에 있었다. 학교는 한옥으로 겨우 80평 남짓 되었다.
  성수는 곧 석농 유근을 교장, 민세 안재홍을 학감으로 앉혔다. 그리고 자기는
교사가 되었다.
  석농은 경기도 용인 사람으로  황성 신문  주필을 지냈고, 휘문 의숙 교장을 지
냈다.
  그 동안의 병석에서 일어난 송진우가 1915년 7월, 일본에서 학업을 마치고 돌
아왔다. 성수는 진우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자네가 와 주니 백만 대군을 얻은 듯하네.
  성수는 진우에게 교무를 맡기고, 자기는 계속 영어와 경제 과목을 맡았다.
   아무래도 새 건물이 필요해. 이제야말로 돌집을 지을 때일세.
  1917년의 어느 날, 성수는 진우에게 말했다. 이 무렵 석농이 그만두어 성수는
교장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야 이를 말인가. 우선 계획이 튼튼해야 하네.
   염려 말게. 교육 사업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날부터 이 날을 기다리며 설계해
왔네.
  새 학교 부지로 계동 1번지를 정하고, 그 언저리 땅을 사들였다. 이 무렵, 이
곳은 나무가 우거져 있는 골짜기로 인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외진 장소였다.
  부지를 사들이자 곧 터고르기 작업에 들어갔다. 비탈을 깎아 낮은 곳은 메우고
축대를 쌓았다.
  1917년 11월, 벽돌 건물 2층에 돌까지 붙인 200평 남짓의 학교가 마침내 준공
되었다.
  학교 낙성식에는 중앙 학회의 김윤식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초청되었다. 성
수의 두 아버지도 시골에서 올라오고, 총독부 학무 국장도 초대되었다.
  양아버지는 친아버지를 돌아보며 기쁜 목소리로 크게 말했다.
   어때, 장하지 않아! 우리 재산이 이처럼 쓸모 있게 쓰이다니 정말 뿌듯하군.
  성수 주위에는 많은 인재들이 모여 학생들을 가르쳤다. 수학 교사 최규동은
1881년 경북 성주 출신으로, 수학을 잘 가르쳐  최대수 라는 별명이 생겼다.
  또, 1890년생으로 경기도 김포 사람인 권덕규는 사학가이자 국어 학자였다.
  이 밖에도 최두선, 이강현, 현상윤, 변영태 등의 쟁쟁한 인물들이 교편을 잡았
던 것이다.
  이런 이들이 성수를 중심으로 모여들자 총독부에선 바짝 긴장하여 감시의 눈을
번뜩였다.
  학교의 교육 이념은  웅원, 용견, 성신 이었다. 웅원은 남자로서 뜻을 크고 멀리
가지라는 것, 용견은 정신력과 체력을 단련하여 어떤 일에도 꺾이거나 굽히지 말
라는 것, 성신은 무슨 일이든 성의와 신념을 가지고 하라는 뜻이다.
  어느 날, 총독부에서 지시 공문이 전달되었다.
   국경일에 축하 선물로 일본 천황의 문장이 찍힌 일본떡을 학생들에게 나눠 줄
것.
  그러나 성수와 진우는 일본식 찹쌀떡을 나눠 주는 대신 자기 집에서 만든 인절
미를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작은 일 같지만 민족 정신을 잃지 않으려는 생
각이었다.
  이 무렵은 국내가 소리 없는 저항의 불길을 준비하고 있었던 때이다.
  1919년 3월 1일의 독립 만세 운동은 중앙 학교 숙직실에서 처음 계획되었다.
1918년 겨울부터 이듬해 1월에 걸쳐 성수, 진우, 상윤은 거의 매일 만나 의논했
다.
   지금 나라 안팎으로 독립의 기운이 높아지고 있네. 뜻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
은밀히 계획을 꾸미고 있는 모양인데, 우선 천도교의 움직임을 알아보는 게 어떨
까?
   천도교라면 나에게 맡기게. 보성 학교 최린 선생이 내 은사니까.
  이리하여 천도교와의 연락은 현상윤이 맡았다. 이 무렵, 도쿄 유학생회의 밀사
송계백이 은밀히 서울에 들어와 한밤중에 중앙 학교 숙직실로 성수를 만나러 왔
다.
   백관수 선배님이 서울에 가거든 먼저 중앙 학교를 찾으라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모자 속에 감추어 가지고 온 유학생들의 독립선언서 초안을 꺼내 놓
았다. 그것을 읽고 성수, 진우, 상윤은 크게 감격했다.
   육당도 부르세. 그가 읽으면 얼마나 감격하겠는가?
  이리하여 3.1 운동은 전국으로 퍼져 갔고, 이 때문에 송진우와 현상윤도 잡혀가
서 재판을 받았다.
  성수는 이 독립 만세 운동에 깊이 관계되지는 않았다. 하루는 물리와 수학을
가르치는 이강현이 불쑥 말했다.
   인촌, 지금 민족 회사 하나가 문을 닫으려 하는데 맡아 살려 내실 생각은 없
습니까?
  이강현은 1888년 서울 출생으로, 일본 구라마에 고등공업 학교를 졸업한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 방직 기술자이다.
   자세히 말씀해주십시오.
   회사 이름은  경성 직뉴 라고 합니다. 댕기나 주머니끈 따위를 만드는 회사이
지요.
  경성 직뉴는 1911년, 직조 공업으로선 맨 처음 조선사람이 세운 회사다. 자본금
은 10만 원으로, 사장은 윤치소(윤보선 전 대통령의 아버지)였다.
   좋습니다. 잘 알아보도록 하시지요.
  이 무렵, 성수는 진우에게 중앙 학교 교장을 맡기고 있었다. 언젠가 성수는 동
생 연수에게 말했다.
   사람을 쓰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를 믿고 일체 간섭하지 않는 데 있다. 물론
어떤 일을 맡길 때에는 그 사람이 나보다 낫다는 확고한 판단이 서야만 하겠지.
그리고 한 번 맡기면 조금 마음에 안 든다고 바꾸는 일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된
다.
  교장 자리를 내놓고 나자, 성수는 비로소 학교 가까이에 집을 마련했다. 부모님
도 서울로 올라오게 하여 오랜만에 한가족이 모이게 되었다.
  그 동안 성수에겐 장녀와 차남이 잇따라 태어나 그는 어느덧 세 자녀의 아버지
가 되었다.
  1019년 9월, 진우가 독립 만세 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자 뒤를 이어 최두선을 교
장 자리에 앉혔다.
   중앙 학교는 자네가 맡아 주게. 나는 나대로의 할 일이 또 있네.
  그는 그 뒤로 경성 직뉴를 맡았을 때 힘쓴 이강현과 자주 만나 의논했다.
   경성 직뉴에서 고작 끈 따위를 생산하는 것보다 피륙을 짜는 게 어떨까? 생활
필수품 가운데 가장 먼저 국산화시킬 것이 의류라고 생각되는데.
  성수의 말에 강현은 대찬성이었다.
   나도 그 점을 생각하여 조사해 보았지요. 그 가운데서도 면포가 가장 유망합
니다.
  면포는 목화에서 실을 뽑아 짜는 무명을 말한다. 옛날부터 우리 나라에선 여자
들이 길쌈을 하여 자급 자족해 왔다. 그러나 일본 제품이 들어옴으로써 무명은
시들해져 버렸다.
  베틀로 짜 내는 무명은 폭이 좁은 데다가 매끄럽지 못하고, 품도 많이 들어 대
량 생산을 할 수가 없다. 그것에 비해 기계로 짜면 제품도 우수하고 폭도 넓은
광목을 생산할 수가 있었다. 이강현은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공장의 벽돌 건물도
튼튼히 다시 짓고, 일본의 도요다 직기 회사에서 직조기 40대를 들여와 설치했다.
  경성 직뉴에서 생산된 면포에  삼성표 란 상표를 붙여 시장에 내놓았다. 성수는
말했다.
   아직은 수입 제품에 눌리겠지만 그나마 우리의 국산품이 있다는 것이 자랑스
럽구려.
  강현이 성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회사를 더 확장했으면 좋겠습니다.
   나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엇지요. 하지만  회사령 이 있어 마음대로 회사를 세울
수 없는 게 한입니다.
  회사령이란 총독부의 허가 없이는 회사를 세우지 못하게 만든 법이었는데, 조
선 사람의 산업을 억누르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3.1운동이 있은 뒤, 총독부도 이른바  무단 정치 를 버리고  문화정치 를
하였다.
  이 때문에 1919년 8월,  경성 방직 회사  허가가 총독부에서 나왔다.
  성수는 회사를 만들 때 자기 혼자 이익을 보자는 생각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
이 참여하고 이익을 서로 나누는 회사를 만들려고 하였다.
  그래서 주식으로 여러 사람으로부터 자본을 모으는, 주식 회사를 세우기로 마
음 먹었다.
  오늘날은 누구나 쉽게  주식 회사 를 떠올릴 수 있지만 그 당시는 아무도 생각
이 못 미쳤다.


  4. 사회의 목탁

  경성 방직 회사는 자본금 100만원에 사장은 박영효를 앉혔다. 성수가 가장 힘
들었던 것은 주식을 모으는 일이었다.
   주식이 대체 뭐요? 돈을 내고 주권이라는 종잇장을 사라는 말인 듯한데, 잘
되면 또 몰라도 망하면 한푼도 건지지 못하는 그런 위험한 짓은 할 수 없소.
  이렇게 말하며 손을 내젓는 사람이 많았다. 성수는 직접 전국을 돌아다니며 회
사의 설립 목적과 주식의 성격을 설명했다.
  이 무렵, 그에게 슬픈 일이 생겼다. 부인이 줄포 집에서 아기를 낳다가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아기는 남자 쌍둥이로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고생만 하다가 겨우 34년을 살고 간단 말인가!
  한편, 하몽 이상협과 추송 장덕준은 신문을 만들고 싶어했다. 하몽은  매일 신
보  편집장을 지냈기 때문에 편집, 인쇄와 같은 신문 제작뿐 아니라 광고, 판매와
같은 영업 분야에도 밝았다. 또, 장덕준은 장덕수의 친형님으로, 도쿄에서 조선
기독교 청년회 일을 보다가 귀국해 있었다.
  이상협은 중앙 학교 교장 최두선을 통해 성수의 의중을 알아달라고 부탁했다.
   글쎄, 알아볼 수는 있겠지만, 신문에는 별 생각이 없을 거요. 학교를 하나 더
만들 계획이 있는 데다가 경성 방직 회사를 운영해 나가기 바쁘니까요.
   하지만 한 번 만나 보고 싶소. 며칠 뒤 찾아가겠다고 전해 주시구려.
  하몽은 쉽게 단념하지 않았다. 그는 석농 유근과 함께 성수를 찾아갔다.
   아니, 석농께서 웬일이십니까?
   인촌, 내가 온 것은 학교도 급하지만 신문은 더욱더 급하다는 것을 말하기 위
해서라네. 저들 일본인이 민간 신문을 한두 개 허가할 뜻이 있는 지금이야말로
놓칠 수 없는 절호의 기회일세. 신문이 국민을 일깨워 주고 희망을 주는 힘이 얼
마나 큰가는 새삼 말할 필요도 없겠지.
   선생님! 며칠만 생각할 여유를 주십시오.
   며칠이 아니라 넉넉히 한 달쯤 주겠네. 그 사이에 의문나는 점이 있다면 하몽
과 잘 의논해 보게.
  김성수는 마침내 1919년 10월 9일에 제호를  동아일보 로 하는 신문 발행 허가
신청을 총독부에 냈다.
   신문 이름은 동아 일보로 하게. 조선 민족이 독립을 위해 싸워 이기려면 마땅
히 동아(동양) 전체를 무대로 삼아야 할 게 아닌가.
  석농 유근이 내놓은 이 이름은,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아닌 동아의 한 나라
라는 뜻이었다. 까다롭기 이를데 없는 경무국도 신문 이름에 이런 깊은 뜻이 숨
어 있다는 것은 꿈에도 몰랐다.
   일찍이 이토 히로부미조차도 이런 말을 했소. 나의 백 마디 말보다 신문의 한
줄 글이 조선인의 마음을 감동케 한다고! 이토의 한탄처럼 우리 민족의 신문이
나온다면 그만큼 독립도 빨라질 것이오.
  양기탁뿐 아니라 장덕수도 달려왔다. 장덕수와는 이미 도쿄에서 서로 알고 지
낸 사이였다. 그들은 손을 굳게 잡은 채 할 말을 잃었다. 아니 말할 필요가 없는
만남이었다.
  그 후, 석 달이 지난 1920년 1월 6일에 허가를 받았다. 같은 날짜로 조선 일보
와 시사 신문도 허가가 나왔다.
  곧이어 1월 14일, 주식 회사 동아 일보 발기인 총회를 열었다.
   동아 일보는 전 민족의 발표 기관이 되어야 한다. 그런 만큼 마땅히 각 지방
의 유지들이 주주로 참여해 주어야 한다.
  더욱이 인촌은 지방색을 떠난 단합된 나라 신문이 되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창립 총회에는 78명이 모였는데, 전국 13도에서 적어도 한 명 이상은 꼭 참여
하도록 했다. 이 창립 총회에서 자본금은 경성 방직과 똑같은 100만원으로 하고,
50원짜리 주식 2만 주를 경성 방직주로 발행하기로 결정했다.
  편집장으로 양기탁, 유근이 취임했고, 주필은 장덕수였다. 그리고 신문사의  사
시 로 세 가지를 정했다.
   민족주의, 민주주의, 문화주의
  신문사는 우선 옛날의 중앙 학교 교사이던 화동의 한옥을 쓰기로 했다. 건물이
야 어떻든 사원들은 모두 희망에 차 있었다.
  그러나 시작부터 동아 일보는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창간 목표일이 3월 1일인데, 제 1회 불입금 25만원이 모이지 않아 큰일일세.
   그것도 무리는 아니지. 기미년의 상처가 채 아물지도 않았고, 작년에 가문이
심하여 농촌 형편은 말이 아니라네.
   그거야 나도 알고 있지만, 허가된 날로부터 두 달 안에 신문을 내지 못하면
발행을 취소당하니 하는 말이 아닌가.
  간부들은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걱정했다. 인촌은 연기 신청을 내어 4월 1
일까지 미루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 날은 금방 닥쳤고, 자금은 여전히 돌지 않
았다. 마침내 빚을 내어 신문 제작을 시작했다.
  이리하여 4월 1일자 창간호가 그 전날 석간으로 나왔다. 주필 장덕수는 창간사
로  주된 뜻을 널리 알리노라 를 썼다.
   동방 아시아 무궁화 동산 속에 2천만 조선 민중은 하나의 큰 빛을 보리라. 공
기를 마시리라. 아! 정말로 살았구나! 부활했구나! 앞으로 온몸의 용기와 힘을 다
내어 멀고 먼 길을 씩씩하게 달려가려 하니, 그 목표가 무엇인가. 자유와 발달이
로다.
  신문은 뜨거운 불길을 내뿜고 있었다. 독립이나 애국을 표면에 직접 내세우지
는 않고 있었으나, 가슴을 울려주는 뭉클함이 들어 있었다.
  이를테면 사이토 총독에게 폭탄을 던진 강우규 의사의 재판 기사가 매일같이
실렸다. 재판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 총독부도 그 기사를 막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것을 읽으며 가슴 깊이 느꼈다.
  4월 1일에 태어난 동아 일보는 4월 26일의 복심 재판부터 보도했다. 강 의사는
11월 29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내가 자나깨나 잊지 못하는 것은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너는 나의 유언을 전국 학교와
교회에 알려라. 조선 청년들이 향할 곳은 기독교이니, 먼저 심령을 밝게 한 뒤 공
부를 해야 할 것이다.
  동아 일보는 이 밖에도 황태자 이은과 약혼자의 슬픈 이야기를 실었다. 황태자
이은이 일본에 끌려 가 일본 황녀와 강제로 결혼하게 된 것을 꼬집은 기사였다.
  총독부 경무국 도서과에서 신문 기사를 검열했다. 그들은 자기네들 마음에 맞
지 않는 기사를 샅샅이 찾아 내어 다시 찍게 했다. 그러면 동아 일보에선 일부러
다시 채우라는 부분을 비워 둔 채 찍어 냈다.
  사람들은 흰 종이 부분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며 한 마디씩 했다.
   또, 총독부 왜놈들이 장난질을 했구나. 대체 무슨 기사였기에 그들이 삭제하라
고 명령했을까?
  한편, 경성 방직도 큰 손해가 나서 어려움을 맞게 되었다.
  경방은 그 동안 물건을 만들기가 무섭게 팔려 나갔으며, 재료를 사서 그대로
쌓아 두기만 하여도 저절로 돈이 남았다. 이강현은 이런 호황을 노려 목화와 무
명실 등을 미리부터 많이 사 두었다. 그런데 강현의 생각은 빗나갔고 사 두었던
물건은 헐값에도 사는 사람이 없어 10만원 남짓의 손해를 보았다.
  10만 원이라면 당시 엄청난 돈이었다. 더구나 경방은 이 때 공장을 노량진에서
영등포로 자리를 바꾸어 짓고 있어서 그 타격은 너무나도 컸다.
  성수는 회의를 열어 중역들의 의견을 물었다.
   손해가 더 커지기 전에 파산을 선언하고 회사 문을 닫아야 합니다.
  모두가 비슷한 의견이었다. 처음부터 이렇듯 큰 회사를 만든 것이 우리 민족
자본으로는 모험이었다며 한숨짓는 사람도 있었다.
  인촌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나도 3.1 운동이 없었다면 회사 문을 닫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
나 3.1 운동은 우리에게 희망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우리는 작으나마 국민이 지켜
보는 그 희망 가운데 하나입니다. 지금 우리가 손해를 겁내고 문을 닫는다면 국
민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희망을 아주 잃어버려, 우리 자본으로는 이만한 근대
산업도 좀처럼 일으켜 보려고 나서지 않을 겁니다. 나는 우리 경방의 손해보다
그것을 더욱 두려워 합니다.
  중역들은 인촌의 말에 고개를 숙이고 자기들의 짧은 생각을 부끄러워했다.
   하지만 회사가 새출발을 하자면 책임만은 분명히 따지고 넘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인촌은 말했다.
   마땅히 책임을 따진다면 이강현은 회사를 그만두어야 하겠지요. 그러나 사람
은 누구나 실수를 하게 마련입니다. 그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도록 합시다.
  인촌은  사람은 곧 재산 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인촌은 이 때 회사를 되살리기 위해 줄포에 내려가 두 아버지를 설득했다. 두
아버지는 설명을 듣고는 땅 문서를 내놓았다.
  인촌은 한 보따리나 되는 땅 문서를 가지고 서울로 올라와 은행에 담보로 맡기
고 8만 원을 융자받았다.
  경방이 위기를 넘기자, 신문에 어려움이 닥쳤다.
  앞에서도 말한 권덕규의  가짜 명나라 사람을 몽둥이로 후려친다. 는 글이 1920
년 5월 8일자에 실렸다. 글가운데 이런 대목이 있었다.
   일부 유림(선비들)은 아직도  사대 사상 에 젖어 있다. 비록 일본 유학자일망정
 공자가 만일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온다면, 먼저 공자를 베고 난 뒤 그 잘못을 따
져야 한다. 고 한 말은 옳다고 생각된다.
  유림의 반발은 엄청났다. 성토하는 글이 발표되고, 총독부를 움직여 동아 일보
의 문을 당장 닫게 하겠다는 소리까지 나왔다. 신문을 사 보지 말자는 불매 운동
까지 일어났다.
  신문사 안에서도 이 글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장 박영효는
말했다.
   신문에 사과문을 싣도록 합시다.
   아닙니다. 신문에 일일이 사과문을 싣는다면 어떻게 신념을 가지고 글을 쓰겠
습니까?
  이래서 사과문은 싣지 않기로 했지만 박영효는 이 일에 책임을 느껴 사임했다.
이래서 김성수는 사장직을 맡게 되었다. 창간된 지 겨우 석 달이 지난 1920년 7
월의 일이다.
  이 때의 구독료는 한 부에 3전, 한 달 보는 데는 60전이었다. 그러나 그 60전도
잘 걷히지 않았다. 또, 기업이 발달하지 않아 신문에 광고를 내는 회사도 아주 드
물었다.
   고난은 각오했던 일이다. 민족의 신문으로 부끄럽지 않게 키우자.
  인촌의 생각은 오로지 그것뿐이었다. 때마침 3.1운동 지도자 48명의 재판이 시
작되었다. 동아 일보는 이것을 낱낱이 보도하여 독자들의 민족 의식을 새삼 북돋
아 주었다.
  그의 나이 서른 살이었다. 친구들은 그에게 재혼하라고 권했다.
  인촌이, 평북 강계 사람으로 1899년에 태어난 이아주를 처음 본 것은 재판을
방청하러 갔을 때였다. 아주는 정신 학교 4학년 학생으로, 3.1 독립 만세를 부르
다가 체포되어 법정에 섰다.
   피고는 어째서 독립 만세를 불렀는가? 그것을 후회하지 않는가?
   조선 사람으로서 조선 독립 만세를 부른 것이 무슨 죄가 됩니까? 나는 조금도
후회하지 않고 오히려 떳떳하오.
  판사는 얼굴이 붉어졌지만 다시 위엄을 갖추어 말했다.
   피고는 어린 여학생이라 앞으로 다시는 그런 짓을 않겠다고 하면 너그러운 처
분이 있을 것이다.
  변호인 김우영이 귀띔했다. 잘못했다 하고서 이 곳을 빠져 나가는 게 좋지 않
겠느냐 하는 충고였다.
  그러나 아주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앞으로도 그렇게 해야 할 때가 오면 언제라도 독립만세를 부르겠다.
  이리하여 아주는 징역 6개월의 실형이 선고되었다. 인촌의 눈엔 그런 아주의
모습이 꿋꿋하고 똑똑한 학생으로 비쳤다.
  아주는 그 뒤 심한 귓병으로 보석되어 세브란스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인촌
은 꽃다발을 보내 주었고, 몇번 병문안을 갔다.
  인촌과 아주는 서로 마음이 이끌렸다. 그래서 인촌은 정신 학교 선생 김필례를
통해 청혼을 했다. 하지만 신문사에 문제가 잇따라 일어나 결혼식은 연기되었다.
  1920년 8월, 미국의 국회 의원 스물네명이 극동 시찰길에 올랐다.
   민족 자결주의를 주장하고 자유, 정의, 인권의 나라로 알려진 미국 의원들을
우리 나라에 꼭 오도록 해야 하오. 그래서 우리 나라 실정을 그들 눈으로 보게
하는 것이오.
  동아 일보 편집 고문 양기탁은 강력히 주장했다. 신문사에선 일본의 방해가 있
었지만 장덕준과 김동성 두 기자를 북경에 특파하여 미국 의원들 방문 승낙을 얻
는 데 성공했다.
  이 때, 양기탁은 도산 안창호와 은밀히 연락하여 한국의 독립 청원서를 의원단
에게 전하는 밀사를 보냈다. 그러나 밀사는 불행히도 신의주에서 붙잡히고, 양기
탁도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이런 일로 인촌은 총독부에 불려 갔다.
   동아 일보의 보도는 너무 지나치오. 당신은 사장으로서 그런 과격한 보도를
막아야 했지 않소?
   일본에서도 경영자는 신문 제작에 참견하지 않는 걸로 알고 있소. 다만 법에
어긋나는 일이 있으면 사장인 내가 언제라도 책임지겠소.
  이어 9월 25일, 신문사에 회오리바람이 불어닥쳤다. 일의 시작은, 경북 영주에
사는 한 아낙네가 강물에 몸을 던짐으로써 비롯되었다. 이 여인은 시어머니가 죽
자 아침저녁으로  상식 을 올리는 유교의 전통을 지키려 했다. 그러나 기독교 신
자인 남편은 제사를 우상 숭배라하며 반대했다. 여인은 고민하다가 강물에 몸을
던졌던 것이다.
  동아 일보 주필 장덕수는 사설을 썼다. 제사 모심과 우상 숭배는 다른 것이며,
제사를 모시는 것은 잘못이 아니라고 했다. 덕수는 그것을 설명하며 이렇게 썼다.
   ……거울이나 칼, 또는 구슬을 어딘가에 모셔 놓고 거기에 신령이 있느니 하는
게 진짜 우상 숭배로…….
  이런 글이 신문에 실리자 총독부는 발칵 뒤집혔다. 글가운데 인용된 거울, 구
슬, 칼은 일본 천황이  세 가지 신기 로 떠받드는 것들이었다. 일본인에게 있어 천
황은 신이었고, 세 가지 신기는 그 상징이었으므로 덕수의 이 글은 반역죄에 해
당된다고 떠들었다.
  이리하여 당장 신문사 문을 닫으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이것이 동아 일보의 제
1차 무기 정간이다.
  장덕수가 이런 글을 쓴 것은 까닭이 있었다. 1919년 7월, 총독부는 서울 남산에
신궁을 짓고 거기게 세 가지 신기의 모조품을 만들어 놓고, 우리 민족에게도 참
배하라고 강요했던 것이다.
   우리도 많이 참아 그 정도로 그쳤다고 생각하시오. 만일 동아 일보가 앞으로
는 건전한 방향으로 기사를 쓰겠다고 약속하면 내일이라도 정간을 풀어 줄 수도
있소.
   그것은 약속할 수 없습니다. 동아 일보는 이 김성수의 것이 아니고, 우리 2천
만 동포의 신문이오. 그러니 내가 어떻게 2천만을 대표해서 대답할 수 있겠소?
  총독부는 깡패를 보내어 협박도 하고 달래기도 했으나 소용없었다. 그렇다고
동아 일보를 아주 없애지도 못했다. 문화 정치를 한다고 모처럼 신문을 허가했다
가 폐간시키면 세계의 웃음거리가 되고 만다. 이래서 1921년 1월 10일 무기 정간
은 풀렸다.
  정간은 풀렸지만 동아 일보는 경영난에 허덕여야 했다. 신문이 정간되니 구독
료를 받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운영하는 데도 어려움이 따랐다. 직원들 봉급도
주지 못할 형편이었다.
  이 무렵, 민영달이 5천 원을 내놓았다. 민영달은 명성황후의 일가로 호조 판서
를 지냈고, 일본 정부가 작위를 주었으나 거절한 인물이다.
  이리하여 동아일보는 위기를 벗어나 1921년 2월 21일 속간호를 내보냈다. 동아
일보가 나오자 사람들은 만세와 박수를 보냈다.
   신문이 복간되면 또 바빠진다.
  인촌은 그 동안 미루었던 이아주와의 결혼식을 1월 30일 교회에서 올렸다.
  이것이 또한 화제가 되었다. 완고한 유교 사상에 젖은 시골 노인들은 혀를 찼
다.
   허허, 하서공의 자손이 예배당에서 혼례를 올리다니! 정말 알 수 없는 세상일
세.
  1921년 9월, 동아 일보는 회사를 새로이 가다듬고 제 3대 사장으로 송진우를
맞았다. 주필 장덕수, 편집국장 이상협은 전과 같았다. 송진우가 사장이 되면서
동아 일보는 다시금 날카로운 붓을 휘둘렀다.
  1922년 12월, 동아 일보는 일본에 있던 조선인 비행사 안창남의 고국 방문 비
행을 주최했다. 그 비행을 보고 많은 노인들이 눈물을 흘렸다.
   조선에도 저렇게 하늘을 나는 사람이 있다니!
  동아 일보의 이런 사업은 동포에게 꿈을 심어 주고 희망을 가지게 하려는 뜻에
서였다.
  1923년 5월, 신문 발행 1000호가 나왔다.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처음으로 문학
작품 현상 공모를 시작했다.
  또, 이 해 6월에는 전국 여자 정구 대회를 열어 집 안에 갇혀 있는 여자들의
사회 진출을 꾀했다.
  9월엔  관동 대지진 으로 우리 교포 수천 명이 학살되자 그것에 항의하는 기사
를 매일처럼 실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인촌과 고하는 3.1 운동을 이어받는 민
족사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리하여 동아 일보는 물산(국산) 장려 운동과 대학 설립 운동을 펴기로 했다.
   우리도 앞으로 독립된 나라의 국민이 되려면 대학을 가져야 할 것이 아닌가.
  이것은 조선의 뜻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바라던 일이었다. 그러나 총독부는
이를 방해했다. 이런 계획을 좌절시키고자 1924년 5월, 법학부와 의학부를 갖춘
경성제국 대학을 설립하고 그 날로 예과 학생을 모집했다.
   고하, 이것은 총독부의 음모일세. 일본인이 우리 조선 사람을 동화시키겠다는
속셈을 갖고 대학을 만든게 틀림없어.
   바로 그 점일세. 우리 아이들을 일본인이 세운 대학에서 공부시키는 것을 막
기 위해서는 반드시 민간 대학이 필요하네.
  또, 경제적으로 일본에 얽매이지 않아야 그들과 맞설수도 잇고, 독립을 찾을 수
있다며 시작한 것이  물산 장려 운동 이었다.
  물산 장려 운동을 벌이는 회원들은 말총 모자에 무명 두루마기, 옷고름 대신
단추를 단 옷을 입고 미투리나 헝겊신을 신었다.
  한편, 경방의 영등포 공장도 준공을 보아 1923년 4월 직조기 100대로 첫 제품
을 내놓았다. 인촌은 경방의 경영이 얼마쯤 자리잡히자 공부를 마치고 일본에서
돌아온 동생 연수에게 사장자리를 맡겼다. 경제를 공부한 연수에게 안성맞춤인
자리였다. 경방 제품에다  태극성  상표를 붙였다. 그리고 신문에  조선 사람은 조
선 사람 광목을 씁시다. 라고 알렸다.
  태극성 상표는 우리 민족의 상징인 태극기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으로 총독부
경무국에서 못마땅하게 여겼다. 경찰에 불려 간 이강현은 태연스레 설명했다.
   이것을 왜 태극기로 보십니까? 방직의 영어인 스피닝의 첫글자 에스(S)를 둥
그렇게 그려 넣은 것입니다.
  이 설명에 일본 경찰도 감쪽같이 속아넘어갔다. 태극성이 처음 나왔을 때, 이강
현은 포목 도매상들을 요릿집에 초대하여 호소했다.
   우리 회사 광목은 아직 일본 제품보다 품질이 떨어지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
나 이 태극성은 우리 자본과 우리의 가냘픈 딸들의 손으로 짠 우리의 광목입니
다.
  1922년이 되면서 민족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의 대립이 두드러졌다.
  이 무렵, 인촌과 고하는 만나기만 하면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우리도 민족 운동을 하는 데 있어 합법적 정치 단체를 가져 보는 게 어떨까?
인도의 간디를 보게. 그의  국민회의파 는 합법 단체로 영국의 식민 통치와 당당
히 싸우고 있지를 않은가.
  1923년 말쯤, 이들은 김성수의 집에서 모임을 가졌다. 이 때 모인 사람들은 인
촌과 고하를 포함해서 신석우, 안재홍, 최린, 이승훈, 조만식 등 17,8명쯤 됐다. 이
들은 의논 끝에  연정회 를 조직하자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인촌은 자기 생각을 춘원 이광수에게 구술하여  민족적 경륜 이란 글을 5회에
걸쳐 동아 일보에 실었다.
   조선 민족은 지금 정치적 생활이 없다. 조선 민족에겐 어째서 정치적 생활이
없을까? 그 대답은 간단하다. 일본이 조선을 합방한 뒤로 조선인에겐 모든 정치
활동을 금지한 것이 원인으로……. 그런 까닭에 지금까지 해 온 정치 운동은 일
본을 적국으로 보는 것뿐이었다.
  이 주장에는 먼 앞날을 내다보는 예언이 들어 있었다. 똑같은 식민지 통치라도
영국은 인도에서 인도인에게 정치와 행정의 훈련을 시켰다. 그런데 조선에선 그
런 것이 없었다. 만일 이런 정치와 행정 훈련이 되어 있었다면 해방 후의 저 혼
란도 적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처럼의 연정회 주장은 좌익 진영의 맹렬한 공격을 받았다. 동아 일보
의 민족주의가 그들의 비위에 거슬렸기 때문이다.
  친일파로 폭력배 우두머리였던 박춘금이 동아 일보사에 나타나 행패를 부린 것
도 이 무렵의 일이다.
  박춘금은 보통학교도 마치지 못한 채 일본에 건너가 사회의 밑바닥 생활을 하
며 갖은 고생을 했다. 1923년 9월, 관동 대지진이 일어나자 갑자기 이름이 알려졌
다.
  춘금은 한낱 노무자로 도쿄의 경시 총감을 찾아가 제의했다.
   이번 대지진으로 죽은 조선 사람의 시체 처리를 나에게 맡겨 주시오.
  춘금은 이 일로 막대한 돈을 벌고 세력도 얻었다. 그런 춘금이 1924년 1월 말,
조선에 건너와 총독부 경무국장이 빌려 준 자동차를 타고 으스대며 신문사에 나
타난 것이다. 그는 사장실 책상을 주먹으로 치며 대뜸 협박조로 나왔다.
   내가 누군 줄 아시오? 이래봬도  노동상애회 를 조직하여 지진으로 희생된 조
선 사람 송장을 5000명이나 치워 준 박춘금이오. 경시 총감도 나에게는 굽실거린
단 말이오.
   그래, 무엇 때문에 왔소?
   동아 일보사에서 모금한 해외 동포 위문금을 나에게 주시오.!
  해외 동포 위문금은 국민들의 정성이 담긴 귀중한 돈으로 3만원 가까이 모금되
었다. 그러나 이 돈은 기독교 청년회를 통해 이미 해외 동포에 전달되고 있었다.
   그 돈이라면 이미 전달되었소. 그리고 있다 하더라도 당신에게는 주지 못하
오.
  박춘금은 그 뒤에도 육혈포를 가지고 다니며 신문 제작을 방해하고 협박을 일
삼았다. 총독부에선 이런 춘금의 행패를 보고도 못 본 체했다. 아니 오히려 부추
겼던 것이다.
  1924년 5월, 동아 일보 제 4대 사장으로 남강 이승훈이 취임했고, 주필 겸 편집
국장은 벽초 홍명희가 맡았다.
  이 해 9월, 인촌의 양어머니 이씨가 세상을 떠났다. 어려서부터 지극한 사랑을
쏟아 준 자애로운 어머니였기에 인촌의 슬픔도 컸다.
  이어 10월, 인촌은 두 번째로 동아 일보사 사장직을 맡았다. 이 때 현재 광화문
에 있는 동아 일보사 자리를 사들였다. 이 무렵, 조선 총독부 청사(종로구 세종로
에 위치) 건축 공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다. 어느 날, 거의 완성 돼 가고 있는
총독부 청사를 가리키며 고하에게 말했다.
   참, 터를 잘 잡았어. 보라고, 저기 총독부 청사를 짓고 있지 않나. 저들이 백
년 천 년 우리 강산을 차지하려 하는데 우리도 결코 져서는 안 되네.
  하루는 새로 취임한 경무 국장이 공사장 앞을 지나가다가 인촌의 모습을 보고
서 차를 세웠다.
   서울 장안에 좋은 자리가 많은데, 왜 하필이면 여기다가 짓는거요?
   경무국을 위해서지요.
   우리 경무국을 위해서라고요?
   화동(옛 중앙 학교의 자리)같은 구석진 곳에 있으면 나오시기 불편하지 않습
니까? 그리고 동아 일보가 여기 있으면 총독부에 드나드는 외국의 높은 양반들도
조선엔 언론의 자유가 있구나 하여 경무국을 칭찬할 게 아닙니까?
  경무 국장은 입을 딱 벌린 채 할 말을 잃었다. 동아 일보는 1926년 3월 7일, 제
2차 무기 정간을 당했다. 말썽이 된 기사 내용은  러시아에 있는 국제 농민회의말
을 조선 농민에게 전한다. 는 것이었다. 이 정간은 한달 만에 풀렸다. 이 무렵, 김
성수는 잡지 발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나중에 태어날  신동아 와  신가정 이었다.
전자는 젊은이를 위한 종합잡지였고, 후자는 여성들을 위한 잡지였다.
  1926년엔 6,10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중앙 고보 학생들도 6,10 만세 운동에 참
가했다. 이 때, 학생 106명이 경찰에 붙들려 갓다. 그 가운데 중앙 고보 학생은
43명이나 되었다.
  김성수는 경찰에 불려 가 갖은 모욕을 받았다. 이번 운동의 주동 세력이 중앙
고보였을 뿐 아니라 일부 학생이 뿌린 전단 가운데 경찰의 눈길을 끄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민중아! 우리의 철천지 원수는 자본 제국주의 일본이다. 2천만 동포여, 죽
음을 각오하고 싸우자! 만세, 만세, 조선 독립 만세!
  조선 민족 대표 김성수

  물론 인촌은 이름을 빌려 준 일이 없었다. 그러나 왜경은 어떻게든지 그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 했다.
   학생들이 중요한 문서에 당신 승낙도 없이 이름을 멋대로 썼다고 하는 거요?
   민족을 위한 일이라 미처 승낙받지 않고 그랬을지도 모르오.
   뭣이라고? 민족을 위한 일이라고! 여보, 다시 한 번 말해 보시오.
   민족을 위한다는게 죄가 된다면 2천만 명을 모두 감옥에 가두시오.
  인촌은 결국 풀려났지만 제 2차 무기 정간으로 재판을 받고 있던 송진우는 징
역 8개월이 선고되었다. 그 동안에도 동아 일보사의 새 건물은 꾸준히 쌓아올려
져 이 해 12월 10일에 준공되었다.
  1927년 10월, 인촌은 고하 송진우에게 다시 동아 일보를 맡겼다. 그의 계획으로
는 산업은 동생 연수에게, 언론은 송진우에게 맡기고, 자기는 교육에만 힘 쓸 생
각이었다.
  1929년에는 재단 법인 중앙 학원을 만들었다. 교육 사업을 더욱 넓게 펼치기
위한 준비였다. 이어 인촌은 전부터 계획한 세계 여행길에 올랐다. 이탈리아, 프
랑스, 영국 등지를 돌아보았다.
  인촌은 유럽 여러 나라 가운데 영국이 가장 인상적이어서 런던에 1년 남짓 머
물렀다.
   영국에서 만나 본 부자들은 양복 팔꿈치나 소매 끝에 가죽을 대어 입는 등 배
울게 많구나.
  인촌은 다시 에스파냐, 포르투갈, 독일,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핀란드, 소련
등의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보았다.
  유럽의 여러 나라를 돌아본 뒤, 인촌은 1931년 봄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거기에
서 미국의 발전상을 돌아보고 나서 하와이에 들러 이승만 박사를 만났다.
  인촌은 1년 8개월의 긴 외국 여행을 마치고, 1931년 8월 12일에 귀국했다. 이번
여행에서 인촌은 각국 나라의 일류 대학을 둘러보고 관계자들을 만났으며, 학교
시설을 카메라에 담아 가지고 왔다.
  이 무렵, 그에게 보성 전문 학교를 인수해 달라는 교섭이 있었다. 보성 전문 학
교는 1905년 이용익이 세웠고, 사립으로선 우리 나라 최초의 고등 교육 기관이었
다.
  인촌은 이 제의를 선뜻 받아들이지 않았다. 원래 전문 학교를 새로 세울 작정
이었기 때문이다.
   만일 보성 전문 학교를 인수하지 않으시면 학교가 문을 닫고 많은 학생들이
관립 학교로 몰려갈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인촌은 마음을 돌려 보성 전문 학교를 인수하기로 작정하였다.
  인수 인계는 보성 전문 학교의 대표 김병로, 허헌, 김용무 등 세 사람과 인촌
사이에, 1932년 3월 26일에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해 6월에 인촌은 보성 전문학
교의 제 10대 교장으로 취임했다.
  인촌은 설계부터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듯  신중히 했다. 설계자 박동진은
말했다.
   내가 맡아 감독하고 있던 공사장에 하루는 선생이 갑자기 나타나더니 그 뒤로
매일같이 오셔서 말없이 구경만 하고 가시곤 했지요. 그 때 현상윤 씨가 나를 비
로소 선생님께 소개했습니다.
  인촌은 그의 건축을 눈여겨보고 또 이야기를 듣더니 민족 재산이 될 학교 설계
를 그에게 맡겼다. 인촌은 자기 집에 설계실을 마련하고 박동진과 두 달 동안 함
께 살다시피 하며 여러 가지 의견을 내놓았다. 유럽과 미국을 다니면서 여러 대
학을 돌아본 인촌으로서는, 보성 전문 학교를 우리 나라에서 최고의 시설을 갖춘
학교로 만들어 보고 싶었다.
  그래서 인촌은 학교를 새로 지을 자리를 여기저기 찾아보다가 현재의 고려 대
학교 자리인 안암동 일대를 사들였다.
   유럽의 각 대학을 살펴본 결과, 석조 건물이 위엄도 있어 보이고, 또 오래 갈
수 있소.
  인촌은 설계를 맡긴 박동진을 집으로 불러 두 달 동안 본관 건축 설계에 온 힘
을 기울였다.
  보성 전문 학교의 신축 공사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된 1933년 9월 19일, 인촌은
양아버지의 상을 당했다.
  김성수가 그의 평생 사업을 시작할 때 깊이 이해하고 선뜻 재산을 내놓아 뒷바
라지해 준 아버지였다.
  보성 전문 본관 건물은 1934년 9월 중순에 준공되었다.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
고 또 다시 도서관 건축에 들어갔다.
  도서관을 세우는 데에는 많은 사람들이 힘을 모았다. 특히 이름없는 사람이 비
록 적은 돈이나마 정성껏 성금을 내놓은 데 값진 뜻이 있었다.
  어느 주막집의 과부 안씨는 평생 모은 70석의 토지문서를 직접 가져왔다. 그녀
는 보성 전문 도서관 건립을 위해 모금한다는 소문을 듣자 자신의 전재산인 땅을
몽땅 내놓았다.
  인촌은 너무나도 감격하여 주름투성이인 그녀의 손을 굳게 잡으며 말했다.
   할머니가 내놓으신 70석 땅은 내가 해 놓은 7천 석땅보다 더 값진 것입니다.
그 뜻은 학교와 더불어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본관 입구의 양옆에는 호랑이의 머리 모양을 조각하여 붙였다. 후문의 두 기둥
엔 무궁화 무의를 보일 듯 말 듯하게 새겨 놓았다.
  호랑이와 무궁화는 교육에 대한 김성수의 이상을 상징한다.
  인촌은 1935년  조선 기념 도서 출판관  설립을 마음먹었다. 이것은 그 무렵 회
갑이나 장례식 등에 엄청난 돈을 들이는 사람이 많았는데, 이 돈을 아껴 영원히
기념될 만한 책을 펴내는 게 어떤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여기에 많은 사람이 참
가했다.
  1936년엔 저 유명한  일장기 말살 사건 이 있었다. 1937년, 일본은 군국주의로
치닫고 있었다. 이 해 7월 7일, 중일 전쟁이 일어났다. 그리고 점점 통제가 강해
지면서 학생들을 노력 동원했다.
  보성 전문 학생들도 수원 서호 저수지의 흙을 파내는 일을 했었는데, 다른 일
본인 학교들보다 앞질러 책임량을 완수했다. 그만큼 단결심이 강했던 것이다.
  학생들은 서호 저수지 모래밭에 화톳불을 피워 놓고 밤이면 즐겁게 놀았다. 어
깨 동무를 하고 모래밭을 돌면서 목청껏 부른 교가, 응원가, 아리랑, 쾌지나 칭칭
나네 등의 노래 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5. 해방과 건국

  일본은 군국주의가 일어나면서 멸망의 벼랑을 향해 달렸다. 중일 전쟁만 하여
도 시작하고 보니 힘에 부쳤다.
  물자가 달리기 시작했고, 병력을 보충하는 데도 허덕였다. 이리하여 총독부는
이른바 지원병 제도를 만들어 우리 청년들을 싸움터로 끌고 갔다. 또,  공출 이라
는 이름 아래 농산물을 강제로 빼앗아갔다.
  1940년 2월, 총독부는  창씨 개명 이라는 새로운 굴레를 우리 민족에게 씌웠다.
이 창씨 개명을 하지 않으면 어떤 손해가 있었을까?
  1) 자녀의 학교 입학을 받아 주지 않는다.
  2) 공공 기관이든 사설 회사이든 취직이 안 되며, 현재 있는 사람도 파면된다.
  3) 민원 서류를 받아주지 않는다.
  4) 비국민으로 인정되어 경찰의 감시를 받는다. 뿐만 아니라 1차로 징용 대상
자가 되며, 각종 배급도 받지 못하게 된다.
  5) 철도국에서 짐을 받아 주지 않는다.
  총독부는 이런 창씨 개명으로 우리 민족의 뿌리를 아주 뽑아 없애 버리려 했
다. 하지만 인촌은 창씨 개명을 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송진우, 현상윤, 장덕
수, 백관수, 김준연, 김연수 등이 모두 일본 이름으로 바꾸기를 거부했다.
  동아 일보는 1940년 8월 10일, 기어이 폐간되고 말았다. 총독부의 손길은 동아
일보뿐 아니라 보성 전문학교에도 뻗쳐 왔다.
  1945년이 되자 일본의 패전은 이제 시간 문제가 되었다. 그러자 일본 정부는
갖가지 술책을 써서 조선 사람을 꾀기 시작했다.
  조선 사람에게도 10명 안팎의 귀족원 의원자리를 주고, 다음번 총선거에서 스
물세 명의 중의원 의원을 뽑게 한다는 것이었다.
   오늘 이렇게 오시라 한 것은 우리 천황 폐하의 특별한 은전으로……. 김 선생
께 남작 작위와 귀족원 의원직을 드리게 됨을 알리기 위해서이지요.
   저는 그런 영광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황공하옵게도 천황 폐하께서 내리시는 칙명을 거역하겠다는 것이
오?
  은근한 협박이었다.
   그게 아니고 아무런 공도 없는 제가 그런 영광을 차지한다면 오히려 일본 황
실의 존엄에 흠이 생길까 염려됩니다.
  1945년 4월 27일, 친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이 아버지의 별세로 성수는 마침
상중에 있었기 때문에 총독부의 귀찮은 권유를 물리치는 좋은 방패가 되었다.
  마침내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은 무조건 항복을 했고, 우리 나라는 해방의
감격을 맞았다.
  인촌의 나이 쉰다섯 살 때였다.
  그런데 우리 민족의 운명은 다른 곳에서 엉뚱하게 결정되고 있었다. 1945년 8
월 28일, 조선군(일본군) 사령부는 연합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명령을 받아 발
표했다.
   조선은 북위 38도 선을 경계로 미,소 양군이 분할 점령한다.
  사람들은 어리둥절해했지만 이것이 두고두고 민족 원한의 경계선이 될 줄은 꿈
에도 몰랐다. 북한에는 이미 소련군이 들어와 도시를 점령하고 공산화를 서두르
고 있었다. 이것에 비해 남한의 미군 진주는 한발 늦었다.
  9월 7일, 미군이 겨우 인천에 상륙, 다음날 조선 총독 아베로부터 항복을 받았
고, 38선 이남에 군정을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남한에는 그 동안 말할 수 없는 혼란이 계속되었다. 공산당에 이용된 여운형이
 인민공화국 을 만들었다. 그러자 그 때까지 겨우 수십 명 또는 수백 명에 지나지
않던 공산주의자가 어중이떠중이 모여들어 몇천, 몇만 명으로 불어났다.
  아무것도 모르고 날뛰는 무리가 너무도 많았던 것이다.
   큰일났군! 몽양이 인민공화국을 만드는 철없는 짓을 하다니!
   그 사람 미쳤다니까. 자기 나름대로 애는 쓰고 있지만 결국 공산당 앞잡이 노
릇을 하고 있네.
  9월이 되어서야 김성수는 서상일, 김준연, 설의식, 장택상, 김동원 등의 사람들
과 함께  임시 정부 환영 준비 위원회 를 조직했다. 인촌은 임시 정부 지지를 내
세운 셈이다.
  그러나 미국의 군정 실시는 인민공화국은 물론이고, 대한 민국 임시 정부마저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 있어, 인촌은 새로운 결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부를 세우기에 앞서 공산 세력과 대결할 강력한 민족 정당이 필요하다.
  이리하여  한국민주당 이 9월 16일 결성되었다. 당수격인 수석 총무는 고하 송
진우였다. 이 때도 인촌은 겉에 나서지 않았다.
  한편, 미군정은 10월 5일 군정장관 고문을 임명했다. 지도급 인사로부터 자문을
받기 위해서였다. 김성수, 송진우, 여운형 등 11명이 선정되었다. 이어 10월 1일
군정 장관 아놀드 소장은 인민공화국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미 때늦은 결정이었다. 자꾸 늘어나는 공산세력에 쐐기를 박은 것은
틀림없지만, 이 때 그들은 이미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자라 있었다.
  10월 16일, 이승만이 33년 만에 돌아왔다. 이승만의 첫마디는  민족은 하나로
뭉쳐야 한다. 였다.
  인촌은 조선 호텔로 이 박사를 찾아갔다. 이승만은 인촌의 손을 잡으며 협력을
부탁했다. 한국민주당의 당원 장진섭이 자기 집을 이승만에게 내주었다. 이 후로
그집은  돈암장 이라고 불리게 된다.
  10월 24일, 한민당, 국민당, 공산당은 3당 공동 성명서를 국민에게 발표했다. 그
내용은 대한 민국 임시 정부 지지, 독립 촉성 중앙 협의회에 대한 협력, 정부 수
립을 위한 국민 대회 구성 등이었다.
  아무리 공산당이라도 임시 정부 대통령을 지냈고, 외교 수완이 뛰어나며 미국
과도 가깝다는 이승만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우선은 이 박사에게 협력하
는 체했다.
  11월 23일, 김구를 비롯한 임시 정부 요인들이 돌아왔다.
  이어 1945년 12월 28일,  조선을 신탁 통치한다. 는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정이
국내에 알려졌다.
  이 난데없는 신탁 통치안에 좌익이고 우익이고 모두 반대하고 일어섰다. 모처
럼의 민족 단결이 나타나는가 싶었다. 한민당은 목숨을 걸고 이 결정에 반대한다
고 결의했고, 수석 총무 송진우의 이름으로 담화를 발표했다.
  이 때, 임시 정부측에서 이런 제안을 했다.
   우리의 국민적 힘을 보여 주기 위해 일대 시위운동을 벌여야 하오.
  그러자 송진우가 말했다.
   신탁 통치엔 어디까지나 반대지만 과격한 반탁 운동을 벌여 군정 당국과 충돌
하는 것은 현명치 못한 방법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군정을 두둔하고 신탁 통치를 찬성한단 말이오?
   난 지금 분명히 반대한다고 하였소.
  회의실엔 한때 험악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12월 30일 새벽, 고하 송진우는 한현우 등 4명에게 습격당했다. 범인들이 쏜 13
발 가운데 6발을 맞아 고하는 쉰여섯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맨 먼저 달려온 김성수는 통곡하면서 중얼거렸다.
   고하, 자네는 깨끗한 인생을 살았네.
  인촌은 둘도 없는 동지를 잃은 셈이다. 마치 오른팔을 잃은 느낌이었다.
  고하가 죽자 인촌도 할 수 없이 정치 정면에 나서야만 했다. 1946년 1월 7일,
한민당의 수석 총무가 된 것이다.
  이 무렵, 공산당은 하루아침에  찬탁 으로 돌아서고 있었다. 한민당의 반탁은 곧
반공 투쟁이 되었다. 1946년 3월 26일부터  미소 공동 위원회 가 서울과 평양에서
번갈아 열렸다. 또, 미군정청은 하지 중장의 자문 기관으로  민주 의원 을 만들었
다.
  민주 의원은 의장에 이승만, 부의장에 김구와 김규식이 선출되었고, 하지 중장
의 뜻과는 달리 정권을 넘겨받기 위한 국민 대표 기관처럼 되어 버렸다.
  그러나 미소 공동위원회가 5월 6일 아무런 합의 없이 결렬되자 민주 의원도 있
으나마나 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이 무렵, 김성수는 이승만과 김구를 손잡도록 하려고 애썼다. 이 두 지도자가
단결되어야 민족 진영이 강해진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었다.
  인촌은, 해방 1주년을 맞아 동아 일보에  조선의 장래 란 긴 글을 실어 자기의
생각을 밝혔다.
   지금, 우리의 자주 독립이 순조롭게 이루어질 날은 불행히도 아득하다 하겠다.
그런데도 우리 겨레는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하려 했던가. 전 민족의 복지를
위한 창조적 사업에 우리의 모든 힘을 모을 수 있는 기회는 열려 있건만, 사람들
은 저마다 자기의 이익만 생각하고 이것을 유리하게 이끄는 데 조바심을 내고 있
을 뿐이다.
  우리는 냉담하고 침착하고 차분하게 자기 반성, 자기 희생의 태도로 우리의 현
실을 똑바로 보고, 이것에 바탕을 두어 국가 재건의 목표와 신조를 확립함으로써
이 날을 맞이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1947년, 다시 미소 공동위원회가 열렸다. 민족 진영은 이에 맞서 맹렬한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벌였다.
  이어 이 해 7월 19일, 몽양 여운형이 원남동 로터리에서 자동차를 타고 가다
총에 맞아 암살되었다.
  한편, 보성 전문 학교는 해방되던 해 10월에 다시 문을 열었다. 인촌은 보성 전
문 학교를 대학으로 승격시키려고 했다. 1946년 8월, 김성수는 재단법인 중앙 학
원의 이름으로 대학교 설립 인가 신청서를 군정청에 냈다. 곧 인가가 나왔다. 보
성 전문은 고려 대학으로 이름이 바뀌어 새출발을 했다.
  한편, 미소 공동 위원회가 다시 깨지자, 미국은 유엔 감시 아래 총선거를 실시
하기로 했다. 이 무렵인 12월 2일 장덕수가 암살되었다.
  비보를 듣고 달려온 인촌은 목메인 소리로 외쳤다.
   고하의 죽음이 민족 해방의 대가였다면, 설산의 죽음은 대한 민국 독립을 가
져오기 위한 희생이었어.
  유엔 감시 아래 총선거가 1948년 5월 10일, 남한에서만 실시되었다. 공산당이
유엔 한국 위원단의 북한 입국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김성수는 이 선거에 출마하
지 않았다.
  총선거 결과 국회가 조직되고 헌법이 제정되었으며,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
박사가 뽑혔다.
  이 때, 국회에서는 한민당의 세력이 컸다. 그래서 대통령은 마땅히 김성수를 국
무 총리에 임명할 거라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이승만은 남북 통일을 바란다는
구실아래 이윤영을 지명했다. 이러자 한민당은 이승만에게 이용만 당했다고 흥분
하며 비준 동의안을 부결시켜 버렸다.
  이승만은 다시 뜻밖의 인물인 철기 이범석을 국무 총리로 지명했다. 이러자 한
민당의 화는 더욱 치솟았다.
  그러나 인촌은 이범석도 부결시키자는 한민당 의원들을 타일렀다.
   이왕 이 박사를 모셨으니 그에게 협조해야 하오. 우리가 고집만 부린다면 사
사로운 이익만 쫓는다고 국민의 비난을 받을 게 아니오.
  정부가 들어서자 한민당은 그 세력이 약해졌다. 한민당에 대한 국민의 인상도
나빴다.
  인촌은 한민당에 대한 비판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터무니없는 비방도 있었
으나 옳은 비판도 있었다. 인촌은 국민의 소리를 따라야 한다고 믿었다.
  1949년 2월, 한민당과 국민당이 합쳐져 민주국민당(민국당)이 새로이 탄생했다.
  이 합당에는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인촌은 그들을 설득했다.
   나도 한민당을 사랑하는 마음에 있어선 여러분 못지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민당이 정신을 차리지 않는다면 죽고 말뿐입니다.
  자기 이익보다 나라와 민족을 먼저 생각함이 그의 신념이었다. 1949년 여름이
되면서 이 대통령에 대한 불만이 벌써 국민들 사이에서 나왔다. 그래서 헌법을
고쳐야 한다는 개헌론이 국회에서 고개를 들었다.
  인촌은 이 때도 반대했다.
  1950년 6월, 북괴의 남침으로 서울은 수라장이 되었다.
  유엔군의 반격으로 서울이 수복되자 부산으로 피난갔던 인촌은 10월 12일, 서
울로 돌아왔다. 북괴군이 지나간 곳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비참했다.
  시흥과 의정부의 경성 방직 공장은 완전 파괴되었고, 영등포 공장은 방직 공장
은 무사했으나 방적 공장은 불에 타 없어졌다.
  다만 동아 일보, 고려 대학, 중앙 중학의 건물은 다행히도 무사했다. 하지만 이
런 기쁨보다도 그가 알고 지내던 많은 사람들이 학살되거나 납치되어 인촌은 가
슴이 아팠다.
  1951년도 저물어 갈 무렵,  거창 사건 이 발생했다. 거창 사건은 공비 토벌을 하
던 군인과 경찰이 무고한 양민 573명을 학살한 사건이다.
  이 책임을 지고 부통령 이시영이 그 자리를 물러났다. 그러자 민국당 의원은
김성수를 부통령 후보로 내세웠다.
  인촌은 찾아온 사람들에게 말했다.
   생각들 해 보시오. 이시영 선생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물러선 자리에 내가
들어앉아 무슨 일을 할 수 있단 말이오?
  그러나 당 간부들은 열심히 권했다. 1951년 5월 6일, 그의 나이 예순한 살 때
제 2대 부통령이 되었다.
  이 무렵, 인촌은 건강이 좋지 않았다. 얼굴에 가벼운 마비 증세가 일어났고, 팔
다리도 움직일 수 없었다.
  의사가 달려와 진찰하고는  뇌혈전증 으로 밝혔다. 이병은 뇌의 혈관이 굳어져
피가 막히는, 고치기 어려운 병이었다.
  더욱이 이 병은 신경의 안정을 절대 필요로 했다. 하지만 이 무렵, 이승만은 독
재를 위해 다시 헌법을 고치려 하고 있었다.
  이래저래 인촌의 병은 더욱 악화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952년 5월 29일 부통
령직을 사임했다.
   이승만의 다른 잘못은 모두 용서되더라도 3선 개헌만은 역사의 심판을 받을
것이오!
  인촌은 그 뒤 3년 가까이 더 살다가 1955년 2월 18일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
긴 마지막 말은,
   나라의 앞날이 걱정이오.
  라는 한 마디였다.
  그는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나라의 장래를 걱정했던 것이다.


  *독서 감상문*
  <김성수를 읽고>
  매일 아침 동아일보 신문을 보는 집이 매우 많다. 동아 일보와 조선 일보는 일
제 시대 민족 독립을 위해 싸웠고 해방된 뒤 오늘까지 우리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민족 신문이라고 어른들은 말씀하신다. 나는 동아 일보를 만드신 김성
수 선생님의 전기를 읽고 일제에 맞서 독립을 되찾으려 싸운 언론의 힘을 똑바로
알 수 있었다.
  김성수는 1891년, 전라 북도 고창에서 큰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세 살
때 큰아버지 댁 양자로 가서 자랐다. 김성수는 열세 살에 결혼하여 그 뒤 영어
공부를 했으며 군산에서 금호 학교를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금호 학교는 1년도
채 다니지 못했으며 곧바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에서 영어 학교와 중학
교를 다닌 뒤 와세다 대학에서 공부했다.
  김성수는 일본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독립을 되찾기 위해서는 민족이 한결같이
무지의 잠에서 깨어나야 함을 깨달았다. 그는 조국으로 돌아오자마자 서울에서
중앙 학교를 사들여 교장이 되었다. 학교를 이끌어가면서 김성수는 다른 한편으
로 방직공장을 차려 돈을 벌었다. 독립 운동을 하는 데도 많은 돈이 필요하다는
데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 독립 운동을 펼쳐나갔
다. 김성수가 벌인 여러 가지 사업이 커가자 거기서 모아진 자본으로 동아 일보
사를 차렸다.
  김성수는 동아 일보를 통해  물산 장려 운동 을 벌였으며 부자들에게 대학을 세
우자고 호소했다. 동아 일보와 김성수는 여러 가지로 일제의 탄압을 받아 많은
괴로움을 당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김성수는 보성 전문학교까지 사들여 운영했다.
  해방과 함께 김성수는 우리 나라에서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리도록 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한국민주당의 지도자였으며 신탁 통치 반대 운동에 앞장 섰고
1951년에는 부통령이 되었다. 그는 1955년, 세상을 떠날때까지 이승만 대통령이
중심이 된 자유당의 독재 정치에 맞서 헌법을 지키자고 싸웠다. 나는 김성수 전
기를 읽고 나라의 독립이나 민주주의를 지키는 길은 모든 국민이 제 각기 자기한
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는 것임을 알았다.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기업가나
공장의 일꾼이나, 그리고 사회의 모든 일들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기 몫
을 다한다면 나라의 독립이나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음을 깊이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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