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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김용기 [한국위인전집]

by Casey,Riley 2023.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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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기 (1912-1988)
  기독교인 부모 밑에서 자라 기독교 정신을 실천하며 가나안 농군 학교를 설립한 농촌지도
자이다.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농사꾼이 된 김용기는 이상촌 건설에 뜻을 두어 1937년 능
내리의 황폐한 산비탈 3,000평을 사들여 첫발을 내디뎠다.  1939년 장로가 된 그는 신사 참
배, 일본식 성명을 강요하는 일제에 굽히지 않고 대적하다 모진 고초를 당하기도 하였다.
해방 뒤  농민 동맹 을 조직 하였으나 공산주의자들의  농민 조합 에 밀려났다.  1958년 정신
교육의 터전으로 이름난 가나안 농군 학교를 세우고, 1973년 강원도 원주시에 제 2 가나안
농군 학교를 세워 농민 운동에 앞장 섰다.  1966년 필리핀의 막사이사이상 사회봉사 부문을
수상하였고, 1973년 새마을 훈장 협동장, 제 1 회 인촌문화상을 수상하였다.  그는 필리핀
세이비어 대학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부터 그의 사상과 발자취를 담은 책들을
계속 펴냈다.
  1. 저를 믿는 자마다

  한강은 양평군 양수리에서 시작된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 한 줄기의 큰 흐름이 되어
한강을 이루고 서해로 흘러들어간다.
  한강이 시작되는 곳에서 하류 쪽으로 조금 내려오면 강 가까이 아늑한 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양주군 와부면 능내리 봉안 마을, 늘 잠자는 듯 조용한 동네, 이따금 강바람과 예봉산 바
람에 미루나무와 소나무가 속삭일 뿐인 한적한 마을이다.
  서기 1912년 9월5일, 논 15마지기와 밭 2천 8백평의 소농 김춘교의 집에서 한 아이가 태
어났다.
  갓 태어난 김춘교의 넷째아들은 누구나 그렇듯이 겨우 사람 모습만 갖춘 핏덩어리에 지나
지 않았다.
  이 아기가  용기 라는 이름을 얻은 것을 출생 신고를 하기 바로 전이었다.
  그 무렵, 우리 나라는 험한 세월을 겪은 끝에 마침내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다. 서기
1910년, 그러니까 용기가 태어나기 2년 전에 우리나라는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온 백성이
가슴에 응어리진 한을 달래고 있을 때, 김용기가 태어난 것이다.
  그로부터 3년 후, 이제 겨우 세 살짜리 용기가 갑자기 열이 펄펄 오르면서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할 만큼 심하게 앓았다. 의원들이 와서 저마다 맥을 짚어 보고 이마를 짚어 보았지
만, 무슨 병인지 알지를 못했다. 온갖 약을 다 써 보아도 전혀 효험이 없었다.
  이때, 겨우 몇 마디 말을 배우기 시작한 용기는 정기가 사라져 버린 눈을 괴로운 듯이 떴
다 감았다 할 뿐이었다.
   무슨 병인지조차 모르다니, 이런 변이 어디 있소? 푸닥거리라도 해야겠구려. 무당집에 좀
다녀오시오.
  본디 한학자였으나 농사꾼이 된 용기의 아버지 김춘교는 생각다 못해 무당을 불러 병귀신
을 쫓아내도록 할 생각이었다.
  용기 어머니가 용하다는 소경 무당을 불러왔다. 떡이며 음식을 잔뜩 차리고, 주문을 외고,
집 안 구석구석을 뒤져 가며 소경 무당이 귀신을 쫓았다.
  그러나 아이의 병은 전혀 나아지는 것 같지 않았다.
   아무래도 용기가 죽을 것만 같아요!
  어머니 김공윤은 남편에게 근심스럽게 말했다. 그녀는 경주 김씨고, 김춘교는 조선 끝 무
렵,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세도가 당당했던 안동 김씨였다.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병이 있는 법이오. 그러니 어쩌겠소. 하늘의 뜻에 맡길 수
밖에…….
  그들은 이미 포기한 채 어린 용기가 숨을 거두기만을 기다렸다. 하루라도 괴로움을 덜 겪
고 차라리 숨을 거두었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김춘교가 들에 있을 때였다. 울창 너머로 하얀 종이쪽지 하나가 너울너울
바람을 타고 내려와 살포시 내려앉았다. 그는  그 종이쪽지를 집어들었다.
  거기엔 무슨 글인가 적혀 있었다.
   하느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
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리고 밑에 조그만 글씨로  요한복음 3장 16절 이라고 적혀 있었다.
  김춘교는 이 글이 어디에 들어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한학 지식이 남달리 깊은 그였
지만, 자기가 배운 책에는 어디에도 이런 구절이 없었다. 더구나  요한 복음 이란 무슨 책이
름 같기는 한데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하였다.
  그런데 그 짤막한 글 가운데서 그를 사로잡는 말이 있었다.  멸망, 영생 이란 두 낱말이었
다.
   한학에 있는  순천자흥, 역천자망 이란 말과 비슷하군. 비슷하지만 다른 것도 같고.
   순천자흥 이란 하늘을 따르는 자는 흥한다는 뚯이고,  역천자망 이란 하늘을 거스르는 자
는 망한다는 뜻으로 한학에 나오는 말이다.
  그런데 그의 손에 쥐어 있는 종이쪽지에는 흥한다는 정도가 아니라  영생 이라 했다. 또,
망한다는 것이 아니라  멸망 이라 했다. 이건 굉장한 차이였다.
  또 영생은  무궁하다 와 통하며, 멸망은  소멸하다 와 통한다.
   대체 이런 종이쪽지를 돌리고 다니는 사람은 누구일까?
  김춘교는 대문 밖으로 달려 나갔다.
  한 청년이 종이 다발을 겨드랑이에 낀 채 밭둑 샛길 저만큼 가고 있었다. 김춘교는 그 청
년을 불러 세웠다.
   이 종이를 넣은 사람이 당신이오?
   그렇습니다만…….
  청년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 무렵에는 사람들은 만나 예수를 믿으라고 하면 욕이나 먹기 일쑤였다. 예수를 믿던 사
람들이 새남터에서 처형된 끔찍한 일을 모두들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고, 갓 들어온 서양
종교가 오랫동안 동양에 깊이 뿌리박힌 공자, 맹자의 유교 사상을 단번에 누르기는 힘들었
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전도지를 몰래 집집마다 던져 넣곤 했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기독교가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당한 가장 큰 이유는 제사를 우상 숭
배라고 지내지 못하게 한 데 있었다.,
   조상에게 제사도 못 지내게 하는 못된 예수쟁이들 같으니! 그야말로 불효하자는 종교가
아니고 뭔가!
  모두들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김춘교는 지금 그런 말에 신경을 쓸 처지가 아니었다.
   이 글을 보니,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고 했는데 사실이오?
  그는 지금 방 안에 누운 채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 있는 아들을 생각하고 물었다
   그렇습니다. 하는님께서는 믿는 자에게 모든 것을 다 주십니다.
  청년은 김춘교의 관심 있는 물음에 힘을 얻어 전도를 시작하였다.
   하느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죽은 사람도 살려 내시고, 걷지 못하는 앉은뱅이도
일어나 걷게 하시고, 많은 문둥이의 병도 깨끗하게 고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많
은 이적을 행하시고 난 뒤, 하늘나라에 올라가셔서 지금은 하느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김춘교는 청년이 한 말에 귀가 솔깃했다.
   죽은 사람도 살려 냈다니 그게 정말입니까?
  재우쳐 묻는 김춘교의 말에 청년은 자신 있게 설명하였다.
   네, 정말이고말고요.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을 적은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
수님만 독실히 믿으면 모든 재앙과 불행을 물리치고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김춘교에게는 모두 놀랄 만한 말이었다.
  그 날로 김춘교는 10리밖에 있는 용진 교회까지 달려가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아들을 살
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한가닥 희망 때문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가 예수를 믿기 시작한 지 얼마안 되어 아들의 병은 씻은 듯이 나았
다.
  기적이 일어나 헤어날 수 없는 슬픔에 잠겼던 가정을 구원해 준 것이다.
   하느님은 살아 계신다! 믿는 자에게는 바라는 것을 주신다!
  죽어 가던 아들이 살아나자 김춘교는 용기를 얻었다.
  이 무렵, 우리나라 사회는 일부 지식인들이 서양의 새로운 문화와 학문을 받아들여 개화
를 부르짖기는 했지만, 그것은 서울이나 큰 도시에만 다소의 영향을 미쳤을 뿐이지 농촌에
서는 전과 다름없이 유교 제도와 관습을 존중하고 이를 지키고 있었다
  따라서 고을 이나 마을에는 유교 사상에 바탕를 둔  향약 이라는 것이 있었다.
  향약이란 조선 시대에 착한 행실을 권장하고 악한 행실에는 벌을주며, 한편 상부 상조를
목적으로 마련하였던 향촌의 자치적인 규약이다
 그 기원은 중국 북송 말기의 여씨 일문에서 도학으로 이름이 높던 대충·대방·대균·대림
4형제가 일가 친척 뿐 아니라 향리 전체를 교화하고 선도하기 위해서 처음으로  여씨 향약
을 만든 데에서 비롯되었다.
 이것이 고려 말에 우리 나라에 전해졌고, 조선 왕조에 이어져 중종 때 조광조가 다시 향약
의 실시를 주장하여 전국 각지에 향약을 반포하게 됨으로써 장려되었다.
  이 때 시행된 향약의 기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좋은 일은 서로 권장한다.
  둘째, 잘못을 서로 고쳐 준다.
  셋째, 서로 사귐에 있어 예의를 지킨다.
  넷째, 어려운 일을 당하면 서로 구제한다.
  이것은 당시 지방 유학자들의 이념과도 일치하여 자발적으로 향리마다 보급되었다.
  그 뒤, 우리 풍습과 사상에 알맞은 새로운 향약의 필요성이 요구되어, 명종 임금 때에는
퇴계 이황이  여씨 향약 을 고쳐서  예안 향약 을 만들었고, 선조 임금 때에는 율곡 이이가
 해주향약 을 만들었다.
  이들 향약은 조선 후기에 가장 널리 보급되어 고을이나 마을의 규율을 다스리는 데 큰 기
틀이 되었다.
  김춘교가 사는 능내리 봉안 마을은 특히 안동 김씨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으로 이와 같은
향약을 전부터 지켜 왔던 것이다.
  그런데 난데없이 김춘교가 서양에서 들어온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는 것은 김씨 문중에 큰
충격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 하면, 기독교는 조상의 신주를 모시지 않기 때문이다
  오랜 유교 사상에 젖어온 김씨 문중의 어른들은 노발대발하였다.
  향약에 기독교를 믿지 말라는 말은 없다. 하지만 향약 자체가 조상 숭배를 존중히 여기는
 효 의 사상을 담고 있는 만큼 김춘교가 교회에 나가는 것은 향약을 어긴 불효한 행동일 뿐
아니라 김씨 문중에 먹칠을 하는 짓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뭐? 김춘교가 교회에 다녀? 저런 몹쓸 녀석 보았나! 조상의 낯에 먹칠을 하다니!
  소식을 들은 안동 김씨 문중에서 들고 일어났다. 제사를 드리지않고 예수를 믿다니, 문중
으로서는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문중에서 회의한 끝에 김춘교를 불러 마지막으로 둘중 하나를 택하라고 했다.
   예수를 믿지 말든가 동네를 떠나든가 하게!
  한마디로 문중에서 몰아내겠다는 것이었다. 김춘교는 이런 말을 듣고도 꺾이지 않았다.
  문중 회의에서 돌아온 그는 아내에게 이야기를 들려 주고 난 뒤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용기의 목숨을 구했소. 하느님은 우리의 조상보다 아득히 위
에 계신 분이오. 자, 짐을 꾸려서 마을을 떠나도록 합시다.
  비록 문중으로부터 압박받아 고향에서 쫓겨나게 되었지만, 그들 내외의 마음 속에는 두려
움이나 불안 따위는 털끝만큼도 없었다.
   하느님이 늘 함께 하신다. 는 말을 가슴속에 두고 이제까지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

  이사갈 결심을 하고 집안을 정리하며 짐을 거의 다 꾸렸을 때, 문중의 한 청년이 헐레벌
떡 뛰어왔다,
   어르신네들께서 동네를 떠나지 않으셔도 된다고 합니다
  뜻밖의 소식이었다
   이것은 주님의 은총이시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신 거야.
  이렇게 생각한 김춘교 부부는 친척들과 동네 사람들에게 전보다 더 친절하게 대했고 궂은
일은 도맡아서 했다. 남을 도와야 할 일이 있으면 누구보다도 앞장 서서 도왔다. 제삿날에는
젯상은 차리지 않았으나 음식과 술을 장만하여 문중 어른들을 대접함으로써 제사를 대신했

  그러자 문중 어른들은 두 내외의 조상을 위하는 성의를 알게 되었고, 기독교가 어떤 것인
지도 차츰 깨닫게 되었다.
  문중 어른들도 한 두 사람씩 교회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두 사람을 동네에서
쫓아내자고 앞장 섰던 그의 삼촌까지 갓을 쓴 채 교회에 나타났다.
  마침내 김춘교는 능내리 봉안 마을에  봉안 교회 를 세웠다
  한편, 병이 말끔히 나은 용기는 건강하게 자랐다.
  용기는 기독교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가정에서 자라며, 일찍부터 하느님을 알았다.
  용기의 아버지 김춘교는 본디 한학자였다
  또한, 그의 조상들은 안동 김씨의 세도 아래 권세를 누려 왔던 터라, 손수 농사를 짓지 않
고도 가만히 앉아서 쌀밥을 먹을 수 있었다 그런 만큼 그도 손에 흙을 묻히지 않고 얼마든
지 편안히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조상들이 놀고 먹었다는 사실을 늘 부끄럽게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자식들
을 불러 앉혀 놓고 귀가 따갑도록 말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아느냐? 일하지 않고 앉아서 먹는 일
이다. 땀흘려 먹을것을 얻는 것이야말로 떳떳한 일이다.
  그는 또 이런말을 해 주었다.
   용기야, 너도 이 세상에 태어났으니 나라를 위해 일해야 한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가장
급한 일은 식량을 많이 거두는 일이다. 우리 겨레가 서로 시기하고 인심이 없으며 도둑질이
잦은 것도 모두 먹을 것이 넉넉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서글픈 일이란다. 오죽하면 밥
세 끼를 제대로 못먹어  진지 잡수셨습니까? 하는 것이 인사가 되었겠느냐.
  그러고 나서 그는 구약성서 창세기 3장 18절을 외웠다.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
  김춘교는 이 가르침을 가장 충실하게 따랐다.
  어머니 김공윤도 남편과 마찬가지로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으며 인정이 많았다.
  마을의 가난한 집에서 아기를 낳으면 미역을 사다 주고 쌀을 갖다 주었다. 또, 늘 마을을
살피고 다니다가 끼니때가 지나도록 굴뚝에서 연기가 나지 않는 집이 있으면 몰래 쌀을 퍼
다 주었다.
  용기는 이런 부모 밑에서 자라 서당에 들어가게 되었다.
  집 가까이에는 신식 학교가 없었다.
  김춘교는 신앙 생활을 시작하면서 새 사상을 받아들여 한학이 시대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교육 기관이 서당밖에 없었으므로, 어쩔수 없이 아들 용기에게 한학
을 배우도록 했다.
  용기는 그런 대로 공부를 잘 했다.
   너는 문리가 났구나
  용기는  문리가 났다. 는 말의 뜻을 알 수 없어 솔직하게 물었다.
   선생님, 무슨 말씀이신지 그 뜻을 잘 모르겠습니다.
   배운 것을 곧 실천에 옮기고 있다는 말이다. 너는 글을 배우고 그것을 바로 써 먹을 줄
아는 아이다.
  용기는 그 때서야  문리가 났다. 는 말이 무슨 뚯인지 알았다.
  그 때 용기는  소학 을 배우고 있었다. 소학은 어린사람의 몸가짐, 어른에 대한 예의와 범
절을 가르치는 책이다. 용기는 그 가르침을 되도록 그대로 지키려고 애썼다.
  가르침을 그대로 지킨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용기는 배운 대로 지키려고 있는 정성을 다 기울였다.
  평소에 아버지와 어머니의 행동을 본받은 탓도 잇었지만, 그는 겨울철 눈이 내린 날이면
마을 아낙네들이 우물물을 길러 가는 길을 직접 쓸었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었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칭찬했다.
   용기는 정말 훌륭한 아이야. 어린 것이 벌써부터 스스로 동네 도움될 일을 하다니.
  그 무렵 용기는 교회에서 배운 성경의 가르침과 한학의 가르침을 비교해 보고 있었다.
  서당에서 배우기를, 군자는 길 가다가 소나기를 만나도 꼴 사납게 뛰어서는 안 되므로 뛸
수 없다고 했다.
   한학은 결과야 어찌되건, 또 사실이야 어떻든 겉치레만 갖추면 된다고 하고 있어. 이런
알맹이 없는 학문이 꼭 필요할까?
  이런 생각도 하였지만, 성경의 가르침은 마음의 문제였다. 용기는 그 때 비로소 양심에 대
해 깊이 생각해 보았다.
   사람의 행동에는 하느님께서 반드시 원하시는 것과 원하시지 않는 것이 있어. 원하시는
것은 좋은 행동이며, 원하시지 않고 금하시는 것은 나쁜 행동이야. 그런데 내가 군자의 도를
지킨답시고 쓸데없이 비를 맞는 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시지도 않고, 비가 올 때 뛰는 것을
금하시지도 않아. 그러니까 비를 맞으며 걷는 다는 것은 병만 얻게 되는 어리석은 짓이야.
  용기에게는 하느님은 인간 생활에 아주 실용적인 것을 가르치고 공자는 아무 이득 없는
겉치레만을 가르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기는 열네 살 때 광동 중학교에 입학했다. 이 학교는 몽양 여운형이 양주에 세운 학교
이다.
  김용기는 그 무렵의 보통 학교, 즉 초등학교도 거치지 않은 채 바로 중학교에 들어간 셈
이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어려서 한학을 배운 덕분이었다.
  학생들 수준은 말이 아니었다. 모두 용기처럼 보통 학교 공부를 하지 못했거나 집안이 가
난한 사람들이었다. 한문을 배우다가 들어온 학생도 많았다. 또 장가를 들어 갓을 쓰고 다니
는 애아버지도 있었다.
  그러니 그런 학생들이 모여 공부를 한다고 해 보았자 뻔한 노릇이었다.
  용기는 그 가운데서 제법 공부를 잘 했다. 반에서 늘 일등을 했다.
   네가 일등이니 반장을 맡아 하거라.
  교장 선생은 용기를 반장으로 임명했다.
  용기에게는 어려운 임무였다. 공부는 일등일지라도 나이가 어렸다. 그러니 한 반 학생들을
이끌기가 무척 어려웠다.
   코흘리개가 뭘 안다고 그래.
  나이 많은 학생들은 아예 열네 살 소년인 용기를 상대도 하지 않았다. 용기의 말 따윈 하
나도 통하지 않았다.
   이래서는 안 되겠어. 어쩌지?
  용기는 괴로워하던 끝에 방법을 하나 생각해 냈다.
   말로 통하지 않을 때에는 부득이 힘으로 다스릴 수밖에 없어.
  어린 용기는 주먹을 쓰기로 마음 먹었다.
  용기는 스스로, 나이는 비록 어리지만 자기에겐 강한 정신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체구에
비해서는 굳센 기상도 있었다.
  그러나 용기가 애아버지들까지 주먹으로 다스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반장이라는 권위였
다. 반장만이 갖고 있는 고유한 권한으로 용기는 자기가 지닌 힘을 갑절로 쓸수 있었고, 애
아버지들은 용기가 주먹을 휘두르면 고스란히 맞을 수밖에 없었다.
  반장이라는 권위로 주먹을 휘둘러 통솔하는 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어느 날, 같은 반 학
생들의 어머니들이 용기네 집으로 몰려왔다.
   댁의 아들이 반장이라고 걸핏하면 아이들을 때리는데, 그래 가지고서야 어디 무서워서
학교를 다닐 수 있겠어요? 우리 아이는 글쎄 학교를 못 가겠대요. 우리 아이가 공부 못하는
것은 댁의 아들 탓이니 알아서 하세요.
  용기 어머니는 수없이 빈 다음, 그들을 돌려 보냈다.
  그리고 용기를 불렀다.
   주먹질을 한다는 것은 좋지 못한 일인 줄 모르느냐?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제멋대로여서…….
   그래도 폭력은 안 된다. 앞으로 다시는 주먹을 쓰지 말아라.
   네.
  대답은 했지만 학생들이 말을 듣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또 주먹이 앞질러 나갔다.
  어느 날, 어머니가 두 번째로 용기를 불렀다.
   이리 와 앉아라.
  어머니는 늘 나지막하게 말하곤 했는데, 그 날도 목소리는 그리 높지 않았다.
  그러나 용기는 어머니가 몹시 화가 났음을 알았다. 다만 큰 소리를 치지 않았을 뿐이었다.
  용기는 마당에서 마루로 올라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용기의 눈에는 어머니 옆에 있는 뽕
나무 회초리 다발이 보였다.
   너는 이제 어미 말도 듣지 않는구나!
  어머니의 목소리른 여전히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나 다음에 나온 어머니의 목소리
는 가늘게 떨렸다.
   아마 내가 너를 잘못 가르쳤나 보다.
  어머니는 뽕나무 회초리 다발을 한 손에 쥐었다. 용기는 종아리 맞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말이 없었다. 그 대신 어머니는 자신의 치마를 무릎까지 걷어 올렸
다.
  용기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벌써 회초리 다발은 어머니의 정강이에서 매서운 소리를 내고
있었다. 용기가 놀라 일어서서 회초리 다발을 어머니에게 빼았으려 했을 때에는 벌써 두 번
째 매가 떨어지고 있었다.
  어머니의 정강이에 이내 피멍이 맺혔다.
  용기는 저도 모르게 어머니의 정강이 위로 엎드리며 회초리 다발을 붙잡았다.
   어머니, 다시는 주먹을 쓰지 않겠어요. 이번 한 번만 용서헤 주세요.
   정말 다시는 안 그러겠느냐?
   네, 다시는 안 그러겠어요.
  어머니는 한 번으로는 미덥지 않았는지 몇 번이고 다짐한 뒤에야 손에 들었던 회초리 다
발을 내려 놓았다.
  그리고 곧 하느님께 기도했다.
   아들을 잘못 가르친 저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용기는 놀라움이 아직 채 가시지 않은 채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어머니는 꽤 길게 기도
했는데, 그 다음 말은 용기의 귀에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 때까지 용기의 신앙은 형식적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하니까 따라서 기도하고 예배
드렸을 뿐이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니까 했을 뿐이었다.
  그러한 용기에게 어머니는 예수를 보여 주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인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힌 빛나는 증거를 어머니는 행동으로 보여 주었던 것이다.

  2. 한 알의 씨앗

  그 뒤로 용기는 반 아이들을 이끄는 지침으로  근로, 봉사, 희생  세가지를 세웠다. 이것은
성경 정신이기도 했다.
  용기는 곧 실천하기 시직했다.
   아니 반장이 웬일이지? 전 같으면 책상이 비뚤게 놓이면 주먹부터 퍼붓고 나서 바로 놓
으라고 고함을 질렀는데, 아무말 없이 자기 손으로 바로잡아 놓으니 말이야.
   그뿐이야? 교실 바닥에 휴지가 떨어져 있으면 뺨부터 때리고 주우라고 호통치더니 지금
은 말없이 자기 손으로 줍고 있다니.
  반 아이들은 용기의 태도가 달라진 것이 해괴한 일이기라도 한 듯 쑥덕거렸다.
  용기는 자기가 세운 지침을 철저하게 지켜 나갔다.
  전에는 나이 많고 기운 센 아이가 말을 듣지 않으면 어린 아이들을 모아 패를 지어 혼내
주었지만, 지금은 나이 많은 학생들에게 형 대우를 하며 되도록 청소도 덜 시켰다.
  또, 어린 학생들이 나이 많은 학생에게 건방지게 굴면 그들을 타일렀다.
   형처럼 생각해야지, 그럼 못써.
  학생들은 처음에는 못마땅해했으나, 곧 용기의 뜻을 따라 주었다.
  용기는 학교를 오가는 길에 짚신이 해어진 아이를 보면 그 자리에서 그 아이와 신을 바꿔
신었다. 점심을 굶은 아이가 있으면 자기 도시락을 주었다. 학교가 끝나 집으로 돌아갈 때,
몸이 불편한 아이가 있으면 업거나 부축해서 그 아이 집까지 데려다가 눕히고야 돌아왔다.
  효과는 빨리 나타났다.
  반 아이들은 처음에는 이상하게 생각했으나, 끝내는 모두 용기를 대장처럼 여기고 따랐다.
  솔선 수범으로 비롯되는 감화는 주먹보다 다스리기 쉽고, 무서워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존경심에서 따른다는 것을 깨달은 용기는 어머니에게 다시금 감사했다.
  광동 중학교에는 조원택 선생이란 분이 있었다.
  그는 공부 시간에 곧잘 민족혼에 대해 말하곤 했다. 조원택 선생이 조선과 배달 민족에
대해 말할 때면 학생들은 분노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떨었다.
  그의 한 마디 한 마디는 한창 머리가 깨어 가는 학생들의 피를 끓게 했다.
   왜놈들은 우리에게 글을 배워 갔다. 그들은 백제의 왕인 박사가 한문을 전해 주어서야
비로소 문자가 무엇인지 알게 된 섬나라 야만족이다. 아득한 삼국 시대, 우리는 예술적으로
아름답고도 뛰어난 문화를 이루었다.
  그 때, 섬나라 일본은 야만 생활을 하며 저희들끼리 이웃 나라 땅를 빼앗아 먹고 살 궁리
만 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조그만 섬나라에 먹혀 버린 것이다.
  그럼 우리 민족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왜 지금 나라를 빼앗기고 이렇듯 왜놈의 총칼
아래 노예로 살아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 민족이 넓은 세계에 미처 눈뜨지 못했기 때문이
다. 우리 나라의 힘을 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원택 선생의 말에 학생들은 어금니를 꽉 물었다.
  조원택 선생의 정신 교육은 학생들을 애국자로 이끌었다.
   정신 교육의 힘이 이토록 큰 것인가?
  어린 용기는 이 때 정신교육의 중요성에 눈을 떴다.
  선생님이 해 주는 이야기 가운데는 아버지에게서는 듣지 못한 것도 많았다. 하지만 선생
님은 자세히 설명해 주지 않았으므로, 의문나는 대목은 아버지에게 물어 보곤 하였다.
   왜놈들이야말로 사람의 탈을 쓴 짐승이야!
  용기는 이렇게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조원택 선생은 역사지식과 애국심과 자유 사상을 누
구보다도 강하게 심어 주었다. 말하다가 스스로 감정을 억누를 수 없게 되면 교탁을 힘껏
내리치며 이렇게 말했다.
   제군들! 함차게 앞으로 나아가는 거다!
  애국심을 갖게 되고 우리나라가 걸어온 길을 알게 됨에 따라 용기는 이제 세계의 역사와
지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일본은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미국은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을까?
  용기는 하루하루 새롭게 자기 지식을 쌓아가며, 세계 역사와 지리에 재미를 붙였다.
 열여덟 살 되던 해 봄, 김용기는 광동 중학교를 졸업했다. 그 때는 벌써 꽤많은 지식을 머
리에 담은 의젓한 청년이 되어 있었다.
  사람은 한 가지 일에 깊이 빠져 스스로 흥분하게 되면 냉정한 판단을 잃기 쉽다.
  김용기가 바로 그랬다.
   우리나라가 떳떳이 행세한 적이 있는가? 5천 년 역사라고 자랑하지만, 5천 년 동안 우리
가 우리 주권으로 산 날이 얼마나 되는가? 삼국 시대도 그렇고, 고려때도 그렇고, 조선 때도
그렇다.
  우리 나라 왕들은 왕위에 오르면 중국 황제에게 왕이 되었다는 것을 보고해야 했고 우리
나라의 운명은 늘 중국 그늘에 묻혀서 살아 왔다. 중국이 한민족을 지배할 때는 그들의 눈
치 속에 살아야 했고, 몽고족이 지배할 때에는 원나라의 호령 한 마디에 벌벌 떨어야 했다.
또 만주족이 지배할 때에는 청나라의 입김에도 신경을 써야 했다.
  지도를 펼쳐 놓고 보니 우리나라가 그런 슬픈 운명을 짊어지고 살아 온 것은 어쩔 수 없
는 듯했다.
  우리 나라는 땅덩어리가  중국이나 만주에 비해 매우 작았다. 섬나라 일본보다도 작았다.
인구도 일본의 반밖에 되지 않았다.
   이러니 우리나라가 기를 펴고 살수 있겠어? 임진왜란 때 일본에게 그렇게 호된 시련을
겪고, 또다시 이번엔 나라마저 아주 빼앗겨 버리지 않았는가. 우리나라의 힘을 어떻게 기를
수 있을까?
  지도를 한참 동안 노려보며 생각하던 김용기의 머리에 동명 성왕, 대조영 같은 분들의 영
상이 또렷이 떠올랐다.
   동명성왕은 졸본에서 고구려를 세웠고, 대조영은 고구려가 망하자 유민들을 이끌고 만주
에 발해라는 대제국을 세웠다.
  넓고 넓은 만주 벌판에서 거대한 나라를 세워 우리나라의 몇십 배나 되는 땅덩어리를 차
지하고 다스렸던 우리조상들…….
  만주 벌판은 그 옛날 우리 땅이었다. 어째서 우리나라 사람이 다시 그 땅을 차지하면 안
된단 말인가?
  열아홉 살 된 김용기의 가슴은 크나큰 꿈으로 터질 것만 같았다.
   20세기의 동명 성왕, 20세기의 대조영이 되자, 내가 만주에 가서 넓은 대륙을 차지하지
못할게 어디 있어. 만주 대륙을 지배하고 말 테다.
  김용기의 마음은 굳었다. 이렇게 결심이 서자 김용기는 하루라도 더 집에 머무를 수가 없
었다.
  김용기는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다. 40장이나 되는 긴 편지였다.
   ……만주 대륙을 지배하고자 집을 떠나니 찾지 마십시오. 뜻을 이루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김용기는 몇 푼 안 되는 노자만 가지고 집을 나섰다.
  경성(서울)으로 올라온 김용기는 남대문역으로 갔다. 지금의 서울역이다. 그는 만주 봉천
행 기차표를 샀다.
  밤새껏 달린 기차는 아침에 압록강 철교를 건넜다.
  달려도 달려도 벌판뿐인 만주 땅, 김용기의 가슴은 몹시 뛰었다. 봉천시는 마치 세상의 끝
같았다.
  오후 5시쯤, 봉천역에 닿았다. 개찰구를 빠져 나오자 조선과는 다른 도시 모습이 눈에 띄
었다.
   먼저 잠잘 곳을 찾아야지
  김용기는 주머니에 남은 돈을 생각하며 마땅한 여관을 찾으려 했다.
  그 때  한성 여관 이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한성 은 서울의 옛 이름이다
   틀림없이 우리 나라 사람이 하는 여관일 거야.
  김용기는 한성 여관으로 들어섰다.
   저……조선에서 왔습니다만 오래 묵을까 하는데 하루 얼마씩 내야 합니까?
   아! 조선 사람이군요. 반갑습니다. 그런데 하루 이틀 묵을 게 아니라면 우리 여관은 좀
무리일 거요. 호텔 처럼 운영하고 있어 싸게 해 준다 해도 한도가 있지요. 오래 묵으려면 조
선인 마을로 가서 묵는 것이 좋을 거요. 하숙을 하면 돈이 훨씬 싸게 먹힙니다. 그리로 가
보도록 해요.  십간방 이라고 하숙을 받아 주는 집이 있을 거요.
  주인 말로는  십간방 은 그 여관에서 인력거로 반 시간도 채 안되는 곳이라고 했다.
  십간방엔 정말 집집마다 조선 사람이 살고 있었다. 마치 우리 나라 어느 도시에 온 듯한
착가마저 들었다.
  김용기는 값싼 하숙집을 찾다가 정씨라는 사람이 주인인 집에 하숙을 잡았다. 그 집이 가
장 값이 쌌기 때문이다.
   그래, 아직 나이도 많지 않은 청년이 무슨 일로 혼자 이런 곳까지 왔소?
  정씨는 경상도 억양이 강한 말투로 물었다.
   만주 땅을 지배해 보려고요.
  김용기의 말에 주인은 농담으로 알아듣고 껄껄 웃었다.
  이튿날부터 김용기는 거리 구경을 하기로 했다. 만주를 지배하려면 우선 만주가 어떤 곳
인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구경해 보니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것은 거의가 담배가게 아니면 음식점과 술집이었다.
눈에 띄는 가게마다 사람들이 앉아서 그저 먹어대고 있었다.
   마치 먹는 것밖에 모르는 돼지 같잖아.
  모두들 호떡이나 큰 빵을 먹고,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울 뿐이었다. 책을 손에 들고 있는
사람은 물론, 진지하게 의논하는 사람도 불 수 없었다.
   이 따위 만주족들을 지배하기는 쉽겠는걸.
 그런데 김용기의 이런 자신감과는 반대로 가슴을 아프게 쥐어뜯는 것이 있었다. 봉천의 조
선 사람들이었다.
  거리에서  싸우는 사람들은 거의가 조선 사람들이었고, 가난한 노동자들도 거의 조선 사
람들이었다.
  정씨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이런 대답이 나왔다.
   고향에서 소작이나 부치다가 만주에 가면 무슨 수가 없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로 떠나오
는 게으른 사람들이 많아요. 그네들은 하루하루 품을 팔아 겨우 목구명에 풀칠이나 하면서
한다는 짓이 맨날 싸움이지요. 악밖에 남은 게 없으니까요.
  한심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이 없어서 먼 나라까지 온 사람들이 여전히 게으름만 피우고, 한 푼 벌어서는 술 마시
고, 홧김에 싸움이나 해서야 되겠는가.
  일요일이 되었다.
  김용기는 정씨 하숙집 가까이  석탑교회 가 있음을 알고 그리로 예배를 드리러 갔다. 석탑
교회는 조선인 교회라고 했다.
  교회에 들어선 김용기는 눈이 동그래졌다.
  믿을 수 없었다. 틀림없이 조선인 교회라고 들었는데, 중국옷을 입은 사람들이 가득 앉아
있었다.
   조선인 교회에 중국옷이라니!
  그런데 들리는 소리는 조선말이었다. 김용기는 한구석에 앉아 예배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예배가 끝나자 옆에 있던 한 청년에게 물어 보았다.
   왜 모두 중국옷을 입고 있는지 모르겠군요.
   조선 사람이라는 것이 창피해서 그럽니다. 착실히 일해서 돈을 번 사람들은 모두 창피하
게 생각하지요. 길거리에서 싸움질이나 하고 게을러빠진 사람들 때문에 중국인이나 만주인
들은 모두 조선 사람이라면 아예 무시해 버립니다. 그래서 중국옷을 입고 다니지요.
   동포가 부끄러워 남의 나라 옷을 입고 다니다니!
  김용기의 가슴은 미어지는 듯했다.
  모두들 돌아간 뒤, 김용기는 목사를 찾아갔다.
   김용기라고 합니다. 경기도 양주군에서 왔습니다.
   나는 이성낙이오. 그런데 부모님께서는?
   혼자 왔습니다.
  이성낙 목사는 깜짝 놀랐다.
   아니, 아직 스물도 넘어 뵈지 않는데 혼자서 왔단 말이오?
   네, 까닭이 있습니다.
   까닭이라니?
   다음에 말씀드리지요.
  이성낙 목사와의 첫 만남은 이렇게 끝났다.
  그러던 어는 날이었다. 남자는 봇짐을 지고 여자는 봇짐을 머리에 인, 한 가족처럼 보이는
일행이 십간방을 찾아들었다. 아무리 보아도 거지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조선에서 압록강
을 건너오는 사람들 가운데도 그처럼 초라한 일행은 없었다.
  누군가가 조선말로 물었다.
   어디서 오는 길이오?
  남자가 맥없이 대답했다.
   사평 쪽에서 오는 길입니다. 겨우 황무지를 일구고 열댓 집이모여 살고 있었는데, 그만
마적에게 당했습니다.
  김용기는 이 때 마적이란 말을 처음 들었다.
  그 날 밤 주인에게 물었다.
   만주에는 마적단이 대단한가요?
   대단하지요, 워낙 땅덩어리가 넓은데다가 치안 상태가 좋지 않아 제 세상처럼 날뛰는 걸
요.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으로만 조직된 마적단도 있다오. 그들은 왜 놈들만 습격하지요. 왜
군 부대를 습격해서 무기도 빼앗곤 해요.  독립 투쟁 부대 라 해도 좋지만, 여기서는 그냥 마
적단 이라고 부르지요.
  그 날 밤, 김용기의 생각은 날개가 돋친 듯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백제 첫 임금 온조는 몇몇 사람만 거느리고 남쪽으로 내려와 나라를 세웠다. 견훤도 무리
를 모아 신라 조정까지 휩쓸지 않았던가.
  마적단에 들어가기는 쉬울것 같았다. 마적단의 소굴로 찾아가기만 하면 받아 주지 않을
까닭이 없었다.
  김용기의 눈은 점점 말똥말똥해졌다. 말발굽 소리도 요란하게 흙먼지를 노랗게 일으키면
서 끝없는 만주 벌판을 휩쓰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만주 꼭두각시 정부야 있으나마나한 존재이다. 제대로 다스려지지 않는 만주쯤 휩쓸지 못
할 게 어디 있는가.
  꼬박 밤을 새운 김용기는 먼동이 틀 무렵 석탑 교회로 갔다. 십간방에서 의논할 만한 상
대는 이성낙 목사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성낙 목사는 꼭두새벽부터 찾아온 김용기를 보고 놀랐다.
   이렇게 일찍 웬일이오?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들어오시오.
  방 안에 마주앉자 이 목사는 김용기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이제야 말씀드리지만, 사실 저는 큰 꿈을 품고 만주로 왔습니다.
   젊은 사람이라면 그런 꿈이 있어야지요.
   만주 땅을 정복하려고 왔습니다.
  목사의 얼굴은 온통 놀라는 표정으로 뒤덮였다.
  김용기는 어제 밤새껏 잠 못 이루고 생각한 것을 말하였다.
  먼저 마적단의 우두머리가 된 뒤, 다른 마적단과 합쳐서 차츰 세력을 키운 후에 왜놈들이
세운 만주의 꼭두각시 정부를 쓰러뜨리고, 섬나라 일본을 정복한다는 큰 포부였다.
  그러자 이 목사는 대뜸 이렇게 말했다.
   아직 아침을 들기 전이지요?
   네.
   아침이나 먹으러 갑시다.
  두 사람은 교회를 나왔다. 아침 일찍 음식점을 찾아드는 사람은 노동자 아니면 장사꾼들
뿐이었다. 그래서 그 시간에 문을 여는 음식점치고 제대로 된 곳은 없었다. 모두 값싸고 맛
없는 음식만 파는 집 뿐이었다.
  두 사람은 어느 식당으로 들어갔다. 채소를 듬성듬성 썰어서 띄운 국과 안에 아무것도 들
어 있지 않은 밀가루 빵 꺼빙이 나왔다. 그 집에서는 그것밖에는 팔지 않았다. 꺼빙은 어찌
나 큰지 지름이 20센티미터는 되어 보였다.
   이걸 한 입에 먹어 보시오.
   네?
  김용기는 얼른 알아듣지 못하고 목사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 꺼빙을 한 입에 먹어 보라는 거요.
   아니, 이걸 어떻게 한 입에 먹습니까?
   그것 보시오. 용기 군의 꿈은 커서 좋지만 이룰 가망성이 있는 꿈과 이루지 못할 꿈이
있소. 만주 벌판을 지배하고, 나아가 동양을 지배해 보겠다는 꿈은 이 꺼빙을 한 입에 먹겠
다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오. 알겠소?
  이성낙 목사는 차분한 말투로 김용기의 꿈이 얼마나 덧없는가를 타일렀다.
   나라를 위해 일하겠다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를, 이 넓은 벌판에서 시작할 게
아니라 나라 안에서부터 시작하시오.
  한 알의 씨앗이 될 꿈이라면 나라 안에도 얼마든지 할 일이 있을 거요. 비록 용기 군 자
신은 작더라도 거기에서 난 싹이 쭉쭉 뻗는 그런 씨앗이 되시오.
  이 말에 김용기는 자기 꿈이 부질없는 것임을 깨달았다. 동명 성왕, 대조영, 온조왕 때와
는 시대가 다르다는 생각을 못 하고 성급하게 달려온 자신이 부끄러웠다.
   만주 지배의 꿈을 못 이룰 바에야 여기에 더 있을 필요가 있을까?
  김용기는 교향으로 돌아갈 결심을 했다.
  봉천역에서 남대문역까지 가는 기차표를 끊으려던 김용기는 문득 생각이 달라졌다.
   평양역까지요.
  평양역까지의 삯만 매표구에 들이밀었다.
  찬란한 옛 역사와 더불어 고난의 역사를 지닌 평양을 보려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되도
록 그 곳에서 자기의 일을 찾아보겠다는 마음에서였다.
   경성에는 일본놈들의 총독부가 있어. 그 곳에서 일하는 것보다는 우리 조상의 얼이 서린
이 곳에서 일하는게 낫지 않을까?
  기자 조선의 역사, 한사군의 낙랑을 멸망시킨 고구려의 호동 왕자 이야기, 그리고 신라에
게 도읍을 내주어야 했던 고구려의 마지막 눈물이 어린 땅 평양.
   무슨 일을 할 것인가. 일할 만한 곳이 어디인가. 먼저 그것부터 살펴보자.
  김용기는 평양에 도착하자 뒷골목의 조그만 여관으로 찾아들었다.
  봉천에서 그랬듯이 그는 막연히 거리로 나섰다.
  그의 발길은 절로, 고적지로 옮겨졌다. 모란봉, 을밀대, 부벽루, 기자묘로 해서 며칠 동안
대동문 바깥까지 샅샅이 훑었다.
  여관으로 돌아오던 길에 배가 고파 냉면집에 들어갔다. 평양 냉면은 소문대로 땀을 쭉 내
게 함은 물론 그 맛이 혀를 녹여 버릴 것 같았다.
  두 그릇을 먹고 여관으로 돌아왔는데, 날이 어두울 무렵부터 김용기는 명치께가 찢어지는
듯 아프기 시작하더니 창자가 뒤틀렸다. 방 안을 데굴데굴 구를 만큼 아픔이 심해졌다.
  여관 주인이 달려와 이마에 물수건을 얹어 주고 배를 쓸어 주고 청심환을 갖다 주기도 했
지만 더 이상 어쩌지는 못 했다.
  병원 치료비가 워낙 비싸 약방에서 약이나 사다 먹을 도리밖에 없었다. 그러나 약을 먹어
도 낫지 않았다. 숨도 못 쉴 정도로 견디기 어려웠다.
   큰 꿈이고 뭐고 이제 나는 여기서 죽는구나. 내 마지막이 이렇듯 덧없다니…….
  살아나지 못하리라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한구석에서 세차게 그를 격려하는 소
리가 들렸다.
   너는 이대로 죽어서는 안된다. 너는 할 일이 있다.
  김용기는 그 소리에 안간힘을 써서 몸을 일으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았다. 그는 아픔
때문에 이지러질 대로 이지러진 표정으로 기도드렸다.
   하느님 아버지, 저를 이대로 버리지 말아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저를 이 세상에 보내실
때에는 제게도 무엇인가 아버지의 일을 시키기 우ㅐ허사가 아니었습니까? 제가 아버지의 일
을 할 수 있도록 건져 주옵소서.
  기도를 드리자 아픔이 가신 것은 아닌데 웬일인지 머릿속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맑아진 머릿속에 번개같이 스쳐간 생각이 있었다. 그러자 김용기는 온몸이 화끈하도록 부
끄러움을 느꼈다. 그 때까지 생각조차 않았던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나 하나의 힘이 크면 얼마나 크랴. 그런데 나는 내 머리로 계획을 세우고 내 힘으로 하려
했어.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반 아이들을 이끌 때도 잘 하게 해 달라고 기도드렸어야 했다. 만주를 정복하겠다는 들뜬
꿈을 품었을 때도 기도드렸어야 했고, 만주로 떠날 때도, 평양에 와서도 기도드렸어야 했다.
  기도의 탓인지, 이튿날 아침 아픔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평양에서 나흘을 묵고 경성행 열차를 탔다. 김용기는 고향을 떠난 지 두 달 열흘 만에 고
향으로 돌아왔다.
  보기에는 아무 소득이 없는 여행 같았지만 가장 큰 소득을 가지고 돌아온 여행이었다.
  어머니는 김용기를 보자 두 손부터 모았다. 그리고 잠깐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가 들었
을 때, 그의 눈에는 눈물이 어려 있었다.
  김용기는 열심히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이성낙 목사님 말씀대로 내가 한 알의 씨앗이 되어 싹을 틔우려면 하느님의 힘을 빌려야
해. 기도하자. 산에 들어가 기도하자!
  그는 서슴지 않고 강화도 마니산을 택했다. 마니산을 택한 데는 까닭이 있었다. 세종 대왕
이 마니산에 들어가 3일 기도를 드리자 마니산이 흔들렸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하룻밤을 묵고 이튿날 몸을 정결하게 씻은 뒤, 산에 올라 기도를 시작했다.
  김용기는 산이 흔들릴 때까지 기도드리기로 결심했다.
  기도드린 지 어느덧 30일이 지났다. 그래도 산은 흔들리지 않았다. 10일을 더 기도했다.
40일 기도가 끝나도록 하느님은 아무런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여기서 김용기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이적이나 기적을 기다리지 않는 것, 하느님이 만드신
섭리대로 따르는 것, 그것이 하느님을 믿고 순종하는 길임을 깊이 깨달은 것이다.
  김용기는 마니산을 내려오면서 사람이던 순종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다시 한 번 생각
하였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일하자!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은 성공할 수 없고, 한때 성공한
다 해도 인류에게 해를 끼칠망정 베풀음은 되지 않는다!
  김용기는 양주로 달리는 버스 안에서도 이것이 하느님의 길을 따라 달리는 것이라 믿었
다.
  어느덧 스물한 살이 된 김용기는 김봉희라는 처녀와 결혼을 했다.
  그 후 2년 뒤, 김용기는 아버지와 사별해야만 했다. 김춘교는 쉰여덟 살의 나이에 위장병
으로 쓰러진 것이다.
  김용기는 아버지가 눈을 감기 전 그 앞에 불려갔다. 죽음의 문턱에서 숨을 가쁘게 몰아
쉬면서도 아버지는 한 마디 한 마디 똑똑하게 말했다.
   용기야, 이것은 내가 마지막으로 하는 부탁이다. 너는 흙에서 살아라. 네가 진정 우리 나
라를 사랑한다면, 그리고 인류를 위해 살기를 바란다면 흙에서 살아야 한다!
  김용기는 놀랐다. 그 때까지 그는 흙에서 살겠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하느님 뜻
에 따라 나라를 위하고 남을 위해 일하겠다고 생각해 왔을 뿐, 농사를 짓겠다는 생각은 눈
꼽만큼도 한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숨을 가다듬었다가 한참 뒤에 다시 말을 이었다.
   나라에 양식이 넉넉해야 그 나라가 부강한 법이다. 그런데 우리 나라가 이렇게 농촌을
돌보지 않다가는 어찌 되겠느냐? 배운 사람들은 농촌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래서 우리 나라
의 힘을 뿌리부터 길러야 해. 너는 농천에서 살아라. 흙을 떠나지 마라.
  김용기는 그제서야 아버지가 한학에 깊은 지식이 있어 중국 역사, 조선 역사 등 모르는
게 없을 정도인데도 굳이 농촌을 지킨 뜻을 비로소 깨달았다.
   아버지 말씀대로 흙에서 살자! 흙에서 살면서 이 나라에 씨앗을 뿌리자.
  김용기는 그 자리에서 마음을 굳혔다.
   그렇다!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일이란 바로 이것이 아닐까?
  자기 방으로 돌아온 김용기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농사 짓는 사람은 일하는 날은 열심히 일하지만 다른 날은 마음대로 쉴 수 있다. 한 달
내내 일하는 사람에 견줄 때 쉬는 시간이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일하고 싶은 날만 잡아서
들판으로 나가면 된다.
  농사꾼 스스로가 천대받는 직업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또 정말로 그렇게 보는 사람도 있
지만, 이것은 봉건적 유교 사상에서 나온 잘못된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천대받을 이유가 어
디 있는가.
  다른 나라에서는 그렇지 않다. 농사꾼 역시 당당한 생산자이다. 게다가 있어도 살고 없어
도 사는 공업 생산품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왜 긍지를 못 갖는가. 긍지를 갖지 말란 법이 어디에 있는가.
  희망이 없다는 말도 그렇다.
  다른 직업은 어떤가? 정해진 임기가 있다. 어느 시기까지 일하면 일손을 놓고 실업자가
되어야 한다. 또, 그만두라면 그만두어야 한다. 시간에 묶여 출근하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몇 푼의 퇴직금뿐이다.
  농사꾼은 임기도 없고, 출퇴근 시간도 없다. 열심히 일하면 논이 한 마지기, 두 마지기씩
불어난다. 왜 희망이 없단 말인가.
   농사꾼이 되자! 농사를 짓는 것이야말로 내게 주어진 삶의 길이다.
  김용기는 자랑스러운 농민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가벼운 흥분으로 밤이 깊도록 잠들지 못
했다.
  한 번 결심한 용기는 무섭게 실천으로 옮겼다.
  새벽 4시면 일어나 30분동안 새벽 기도를 드리고, 곧장 일터로 나갔다. 부인이 식사를 날
라 왔고 해가 진 뒤에야 어둠을 더듬으며 돌아왔다.
   아무리 일찍 들판에 나가도 김용기는 벌써 나와 있더군.
   할 일이 없어도 꼭 논밭에 나와서 시간을 보낸다고.
   일이 없을 때는 책을 읽더군.
  마을 어른이나 주민들은 곧 이런 말을 주고받게 되었다.
  이 무렵 그의 가슴 속에는 새로운 꿈이 싹트기 시작했다. 좀더 나은 내일을 위해 늘 끓어
오르던 가슴에  에덴 동산 이 그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오곡이 풍성하게 익고 과일이 주렁주렁 달린 땅, 젖소가 풀밭마다 한가로이 노니는 땅, 포
근히 내리쬐는 가을 햇살 밑에서 기쁨에 찬 얼굴들이 서로 다정하게 지내는 땅, 일요일이면
모든 사람들이 환한 얼굴로 교회에 모여 드는 마을.
  이런 곳이야말로 이 땅의 낙원이 아니겠는가.이런 에덴 동산을 땅 위에 만들 수는 없을
까?
  김용기의 꿈은 나날이 부풀어 갔다. 그러나 그에게는 너무나 벅찬 꿈이었다.
  김용기에게는 형이 셋 있었다. 김용기는 넷째이고 밑으로 아우가 하나 있었으므로 모두
다섯 형제이다. 성기, 원기, 운기, 용기, 인기 순이었다.
  타향에 나가 있던 맏형 김성기가 돌아온 것은 바로 이때였다.
  아버지가 물려준 땅을 성기 형이 맡았다. 그러자 결혼하여 맏아들 종일이까지 둔 김용기
는 따로 살림을 날 수밖에 없었다.
  살림을 나서 독림한다 해도 나누어 가지고 나올 재산이 없었다. 논밭을 한데 합쳐도 몇천
평 되지 않아 맏형 집안이 먹고 살기에도 벅찼다.
   하느님은 하다못해 미물에게도 먹고 살길을 마련하여 세상에 내놓으셨소. 그런데 설마
사람이 굶기야 하겠소.
  앞으로 살아갈 일을 걱정하는 부인에게 김용기는 이렇게 위로했다.
  가슴은 낙원을 이룩하려는 희망으로 부풀어 있었으나, 손 안에는 돈이 한 푼도 없었다.
  김용기는 먼저 열 집쯤 살 수 있는 마을부터 시작할 셈이었다. 열 집이 낙원을 이루고 살
려면 땅이 2천 4백평 가량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사려면 5000원 가량의 돈이 필요했다.
그 즈음 경성과 경주를 잇는 중앙선 건설 공사가 시작되었다.
   공사판에 가서 5000원을 벌자.
  김용기는 하느님이 주신 기회라고 생각하며, 계획을 세웠다.
   인부들을 상대로 장사하면 낙원의 건설비 5000원을 벌게 될지도 모른다.
  김용기는 한 번 결심하면 물러서 본 일이 없었다. 곧 행동으로 옮기는 성미였다. 그래서
밑천으로 돈 200원을 빌렸다.
  용기는 중앙선 공사판 한쪽 구석에다 가게를 차렸다. 한쪽에는 공사장 인부들이 늘 필요
로 하는 잡화 가게를, 그리고 다른 한쪽에는 이발소를 차렸다. 어느 인부든 머리는 깎아야
할 것이고, 늘 써야 하는 물건은 사야 하리라고 생각해서 벌인 장사였다.
   여보, 당신은 그 동안 친정에 가서 지내 주오. 공사판에 당신을 끌고 다니기는 싫소.
  살림방을 한 구석에 넣을 수도 있었지만, 김용기는 그러지 않았다.
  인부들은 거칠다. 거친 사나이들의 세계를 부인에게 보이기가 싫었기 때문이다.
  부인은 김용기의 뜻을 어겨 본 일이 없었다. 무조건 남편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여자
였다.
  김봉희는 보통 학교는 나왔다. 농촌에서 학교 문에라도 가 본 여자는 가뭄에 콩나기보다
도 귀한 때였다.
  그 뒤, 김용기는 아내를 경성 고등 성경 학교에 유학을 보냈다. 자기가 밥짓고 빨래하면서
공부를 시킨 것이다. 김봉희는 그 일을 늘 더없이 감사하게 여겼고, 남편을 하늘처럼 알아
그 뜻을 거스른 적이 없었다.
  김용기는 철도 공사가 끝날 때까지 2년 동안 장사를 하였다. 계획은 들어맞아 인부들이
끊임없이 찾아들었다. 공사가 끝나고 계산을 해 보니 빌린 돈 200원에 이자까지 갚고도
3500원이 남았다.
  큰 돈이었다. 그러나 이상촌 건설에는 아직 1500원이 모자랐다.
   1500원을 어떻게 마련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철도 공사 같은 좋은 기회가 또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 무렵, 남필원이란 사람이 김용기를 찾아왔다.
   김용기씨, 광산일 해 보지 않겠습니까? 금광말입니다. 여기 견본이 있습니다.
  남필원은 주먹만한 돌을 내놓았다. 김용기가 집어들고 이리저리 신기한 듯이 살피자 거듭
말했다.
   이 돌은 청계산에서 가지고 온 것입니다. 한 번 분석해 보시지요. 그러면 금을 얼마쯤 캘
수 있을지 알게 될 겁니다.
  이튿날, 김용기는 남필원이 준 돌을 가지고 경성으로 올라갔다.
  돌을 들여다보는 감정 기사의 눈이 빛났다.
   보시다시피 많은 금이 들어 있습니다. 노다지 굴을 찾으셨군요.
   이게 사실이라면 이상촌을 세울 수 있다.
  김용기의 눈에는 벌써 이상촌이 선하게 그려졌다.
  김용기는 곧 조선 총독부 광산과에 금광 채굴 허가를 신청하여 청계산에 금광을 차렸다.
꼬박 1년 반을 팠다. 그러나 광맥은커녕 금맥이 비치는 돌조차 없었다.
  김용기는 광산 채굴에서 손을 떼기로 했다.
  허망했다. 2년 동안 모은 돈을 1년 반만에 싹 없앤 것이었다. 그러니 3년 반이란 귀중한
세월만 뜻없이 흘려 보냈다.
  그 때, 김용기는 하느님이 그에게 들려 주는 소리를 들었다.
   제 자신의 피와 땀으로 세워라!
  김용기는 무엇으로 이상촌을 세워야 하는지 이제야 비로소 깨달았다.
  그러나 아무리 뜻과 정신과 몸으로만 한다 하더라도 황무지와 다름없는 황폐한 땅마저 살
돈이 없었다. 안타깝기 짝이 없었다.
  그 때, 하느님의 도우심인지 김용기는 경기도 광주 소성에 돈놀이하는 부자가 있다는 말
을 듣고 찾아갔다.
   양주군 와부면 능내리에 사는 김용기라고 합니다.
   무슨 일로 여기까지 왔는가? 돈 이야기인가?
   네, 400원만 빌려 주십시오.
   담보물은 있겠지?
   담보는 있지만 담보물은 없습니다.
   뭐라고?
   네, 제 몸이 담보입니다.
  소성 부자는 너무 어처구니가 없는지 한동안 할 말을 잊었다.
   400원을 손에 쥐기까지는 이 집에서 한 발짝도 물러나지 않을 결심을 하고 왔습니다.
   허어, 생떼도 분수가 있지.
  소성 부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 말 없이 훌쩍 나가버렸다. 김용기는 꿈쩍도 하지 않았
다.
  얼마 안 지나 이내 돌아온 소성 부자의 손에는 돈이 들려 있었다.
   400원일세. 부디 성공하게.
   알겠습니다.
  이튿날, 김용기는 곧 마을 너머 황폐한 산비탈을 사들였다. 3천 평 되는 땅을 90원에 사고
나니 과일 나무 묘목 값이며 쓸 돈이 넉넉하게 남았다.
  산비탈 개간은 돌이 지천으로 박혀 있어 버려진 풀밭 개간보다 몇 곱 힘이 들었다. 돌뿐
이라면 또 괜찮겠는데, 바위도 있고 온통 떨기나무가 거치적거렸다. 김용기 내외가 손에 물
집이 잡히도록 일했어도 겨우 10평 정도 개간했을까말까였다.
  이런 김용기를 보고 오촌 당숙은 물론 장인도 화를 냈다. 그러나 김용기 내외는 남이야
뭐라든 날마다 똑같은 일을 되풀이했다.
  과연 끝이 날까 싶던 황무지 3천 평이 희멀건 모래흙밭으로 바뀌고야 말았다.
  과일 나무 묘목을 심고 사이사이에 고구마를 심었다. 여름에 고구마 40가마를 캐냈을 때,
마을 사람들은 모두 놀랐다.
   김용기는 틀림없이 보통 사람이 아니야.
   그런 땅에서 고구마 40가마를 캐내다니!
  사람들은 모이기만 하면 이런 말을 주고받았다.
  땅 주인은 속을 태우며 후회하였다.
   그럴 줄 알았으면 팔지 말걸.
  또 다른 사람들은 진작 그 땅을 못 산 것을 후회했다.
   평당 3전 씩인데 그것을 못 사다니!
  김용기는 3년 동안 고구마만 심었다. 해마다 40가마니, 50가마니씩 거두어들였고, 그 사이
과일 나무 묘목은 한 자, 두 자씩 자랐다.
  수입은 올랐으나 해마다 같은 농사만 되풀이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김용기의 꿈은 이상
촌 건설이 아닌가.
  그러나 막상 시작하려 하니 3천 평은 이상촌의 발판으로 삼기에 너무 좁았다. 그래서 김
용기는 좀더 넓은 땅을 찾아보았다. 마침 4천백 평짜리 땅이 나왔다. 김용기는 개간한 과수
원을 팔았다. 과일이 익을 것이 틀림없으므로 살 때 값의 10배도 넘게 1200원을 받았다.
  그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먼저 빛을 갚고 와야겠소. 빚을 갚아도 800원이 남으니 충분히 세 땅을 살 수 있을 거
요.
  소성 부자는 김용기가 꾼 돈 400원을 내놓았을 때 그리 놀라지는 않았다.
   내가 믿은 대로군. 날짜는 더 끌 줄 알았는데 용하군. 자네는 앞으로 큰 인물이 될 걸세.
내가 도울 일이 있거든 또 찾아오게. 그러나 이자는 꼭 받아야겠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여러 번 찾아와 괴롭혀 드릴지 모릅니다.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다짐했다.
   다시는 돈을 꾸지 않고 내 뜻과 내 힘으로 해 나갈테다. 이제부터는 피땀만 있으면 된다.
  꾼 돈 400원을 갚은 뒤, 김용기는 남은 돈으로 땅을 샀다.
   아니, 욕심도 어느 정도지, 저렇게 땅을 늘려 어쩌려는 거지? 그 농사를 누구 손을 빌려
해내려고…….
  김용기는 양평에 사는 여운혁에게 편지를 띄웠다. 여운혁은 그가 철도 공사장에서 장사할
때 사귄 청년이었다.
  그보다 일곱 살이나 아래였다. 여운혁은 편지를 받자마자 달려왔다. 함께 이상촌을 건설하
기로 한 것이다.
  그는 이상촌 건설에 밑거름이 될 만한 사람들을 차례로 불렀다.
  신학교에 다니던 김수상, 서울에서 김재홍, 홍천에서 이인준, 광릉에서 최공렬 형제가 달
려왔다.
  모두들 이상촌 건설의 뜻을 편지로 받아보고, 십자가를 지겠다는 굳은 각오로 달려온 것
이다.
   열집 마을 부터 시작하기로 작정했는데 그 열집이 다 모였다.
  김용기는 그들에게 집터를 주고 살집을 짓도록 했다.
  설계는 김용기가 스스로 했다. 바람이 잘 통하고 햇볕이 잘 들고 쓰기 편하도록 설계했다.
   담장을 쌓지 맙시다. 담장 대신 무궁화를 심읍시다.
  김용기가 집터 경계를 무궁화로 두르자는 데는 특별한 뜻이 있었다. 집을 드나들 때마다
나라를 잊지 말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을 한가운데에 교회를 세웠다.
  이상촌 건설을 위해 모인 사람들은 예배 시간을 빼놓고서는 눈만 뜨면 황무지에 나가 손
에 물집이 생기도록 일을 했다.
  이제 이상촌뿐만 아니라 봉안 마을 모두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돈이 필요한 사람은 봉안의 공동 금고에서 이자 없이 돈을 빌려 쓸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것도 5년이나 10년에 걸쳐 나누어 갚게 했다. 이런 일의 중심자는 바로 김용기였다.
  부지런히 일한 보람이 있어서 어느덧 이런 말이 이웃마을까지 퍼졌고, 다시 그 옆 마을로
퍼져나갔다.
   봉안 이상촌은 꿈 같은 마을이라더군!
  모두 하느님을 믿고 근로, 봉사, 희생의 세 가지 정신으로 살아갔다.
  김용기는 이상촌 안에 세운 교회에서 예배드릴 때,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다 같은 하느님의 아들딸입니다. 우리는 모두 근로, 봉사, 희생 정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정신입니다.
  발 없는 소문은 빠른 법이다.
  사람들은 줄을 지어 능내리 봉안 마을로 모여들었다. 서울에서 또 이웃 마을에서 견학하
러 왔다.
  그 때, 이일선 목사가 이 마을을 찾았다. 예수의 뜻대로 한 곳에 모여 하느님과 함께 농사
짓는 마을이라는 이야기가 이일선 목사의 발길을 옮기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는 아직 보지 못한 봉안 이상촌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차창에 기대앉아 생각했다.
   우리 나라에서 농촌 개혁 운동이 일어난 곳은 많다. 그러나 눈에 띌 만한 성과를 거둔 곳
은 거의 없다. 그런데 봉안 마을은 우리 나라 안의 덴마크라고 한다. 과연 얼마만큼이나 풍
요로울까?
  봉안 이상촌을 둘러본 이일선 목사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김용기는 조선의 달가스로구나.
  달가스, 그는 오늘날의 농업 천국 덴마크를 이룬 농촌 개혁 지도자이다.
  황폐한 덴마크 농촌을 개혁하여 부강한 나라로 만든 흙의 지도자였다.
  틀림없이 김용기도 그렇게 해낼 것 같았다.
  봉안 이상촌은 해마다 달라졌다. 과일이 무르익고, 꽃이 흐드러지고, 사람마다 이 곳을 처
음 개척할때의 고생은 모두 잊은 듯 모두들 밝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아직 땅 위의 천국은 아니었다. 우리 나라, 우리 땅을 일본이 다스리는 세상이었으
나, 봉안 마을이라해서 그냥 놓아 둘 리 없었다. 맨 먼저 다쳐온 시련은 신사 참배였다. 일
본 침략자들은 기어이 온갖 방법을 다 써서 예수교인들을 꺾고 말았다.
  서기 1938년 9월 18일, 조선 예수교 장로회 제27회 정기총회가 열렸다. 총회가 열린 평양
서문 교회에서 총회장 홍태기 목사를 비롯한 총회가 예수교인의 신사 참배를 결의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이제 떳떳하게 예수교인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총회에서 결의하였는데 신사 참배를 거부하는 이유가 뭐냐? 총회에서 결의한 것을 지키
지 않으니 정치적 거부로밖에는 볼 수 없다. 정치적인 반항은 나라의 반역자다.
  일본 총독부 관리들로서는 반역자로 몰 수 있는 구실까지 갖게 되었다.
  그러나 봉안 교회의 김용기가 신사 참배를 할 리가 없었다. 그는 신사 참배뿐 아니라 일
본식 성명 강요와 공출도 거부하였다.
   우상 숭배는 할 수 없다! 만약 한다 해도 어찌 원수의 나라 신에게 하며, 부모가 지어 주
신 이름을 두고 어찌 왜놈의 이름으로 바꿀쏘냐! 왜놈들에게 바치려고 피땀흘려 농사를 짓
지는 않았다. 공출도 할 수 없다!
  양주 경찰서 고등계 홍종혁 형사는 어떻게든 김용기에게 신사 참배를 시키라는 고등계 주
임의 명령을 받았다. 그런데 몇 번 말해도 김용기가 통 말을 듣지 않자 홍 형사는 김용기를
경찰서로 끌고 와 고문하였다.
  그럴 즈음 스물일곱 살의 김용기는 봉안 교회의 장로로 추대되었다.
  장로 교회 규칙에 따르면 서른 살 이하는 장로가 될 수 없었다. 그런데 김용기는 그 규칙
을 깨고 스물일곱살로 장로가 되어 장로 장립식을 갖게 되었다.
  여기에는 까닭이 있었다. 봉안 교회에는 목사가 없었다. 신사 참배, 일본식 성명, 공출을
모두 거부하는 봉안교회에 목사가 오지 못하도록 양주 경찰서가 꾸민 것이었다. 그리하여
집사인 김용기가 교회 일을 맡아 볼 수 밖에 없었다.
  경기 교회에서는 이 일을 안타깝게 여기다가 할 수 없이 김용기를 장로로 장립하기에 이
르렀다.
  서기 1939년, 김용기의 장로 장립식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그런데 장립식은 시작부터 말썽이었다.
  그 당시에는 모든 의식에 앞서 황군(일본군)의 무운 장구를 비는 묵도와 동방 요배를 하
게 되어 있었다.  동방 요배 란 일본왕이 있는 도쿄를 향해 절을 하는 것이다.
   우리 교회에서는 일본을 위한 어떤 일도 하지 않기로 하고 있습니다. 동방 요배와 묵도
를 빼고 식을 거행하겠습니다.
  몇몇 목사가 김용기의 뜻을 바꾸려 했지만 김용기는 끝내 굽히지 않았다. 김용기는 이렇
게 해서 장로가 되었던 것이다.
  마침내 양주 경찰서 고등계 주임 다타치는 홍종혁 형사에게 김용기를 잡아오라고 명령했
다.
  경찰서 고등계는 사상범만 다루는 곳이므로 잔인한 성질을 가진 사람만 골라서 형사로 임
명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남의 고통을 보고 쾌감을 느끼는 악마의 자손 같은 자들이었다.
  그들은 김용기에게 심한 매를 때리고 고문했다. 신사 참배를 거부하므로 사상이 불순하다
는 것이었다.
  나중에는 고등계 주임 다타치까지 나서서 김용기를 살살 구슬렸다.
   신사 참배나 동방 요배는 국민 의례가 아닌가. 당신 하나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곤란하지
아나? 국민 의례쯤 형식적으로 치르면 어때? 그런다고 당신네 하느님이 죽는 것도 아니잖
아.
  김용기는 모진 고문으로 엉망이 된 얼굴을 들어 다타치를 노려보며 말했다.
   나는 못하오! 형식적으로 하고 마음 속으로는 비웃는다면 그 인사를 받는 당신네 천황이
좋아하겠소? 어디 한 번 말해 보시오.
  다타치는 할 말이 없어 김용기를 돌려 보내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의 압력은 다른 방향에서 들어왔다. 소학교 2학년이던 김용기의 맏아들 종일
을 학교에서 퇴학시킨 것이다. 그래도 김용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얼마 안 되어 일본의 일본식 성명 강요가 심해지면서 개명하지 않은 사람들이 줄줄이 경
찰서로 잡혀 들어갔다.
  그래도 김용기는 여봐란 듯이  김용기 란 이름 석 자를 크게 써서 대문에 붙였다.
   아무래도 죽여 버려야겠다.
  이렇게 생각한 양주 경찰서 형사들은 김용기 집으로 우르르 몰려와 문패를 떼어낸 다음,
김용기를 경찰서로 끌고 갔다.
   김용기란 녀석을 어쩌면 좋지? 마음 같아서는 당장 밤중에 한강 속에 처넣고 싶지만 장
로회가 뒤에 버티고 있으니 그럴 수도 없고…….
  김용기는 일본식 성명뿐만 아니라 공출도 거부했다. 못내겠다고 거부한 게 아니라 아예
말도 못 붙이게 작전을 짰다. 봄에 그는 이상촌 식구들에게 밭곡식을 심으라고 했다.
   논이고 밭이고, 모든 땅에 몽땅 밭곡식을 심으시오. 벼는 한 포기도 심지 말아요.
  김용기는 밭곡식 심을 구실을 마련하려고 영양가를 분석해 보았다. 밀, 보리, 옥수수 등의
영양가가 쌀에 뒤지지 않는다는 결과가 나오자 밀고 나가기로 했다.
  곧 양주 경찰서에서 사람이 나왔다.
   왜 논에 벼를 안 심는가?
   우리는 식생활을 개선하려 하오. 지금까지 쌀농사를 중심으로 해 온 것이 크게 잘못이었
음을 알았기 때문이오.
  그리고 김용기는 집집마다 영양 식단표를 써 붙이게 했다.

  한 사람당 식단표
  빵 2개, 양젖 1컵, 고구마 1개, 옥수수 1자루

  곧이어 김용기는 고구마 저장법을 생각해 냈듯이 겨울철에도 옥수수를 먹을 수 있도록 옥
수수 저장법도 생각해 내고야 말았다.
  일본은 전쟁에 필요한 물자가 부족하여 궁지에 몰리자 교회 종까지도 거두어 가려고 했
다.
  양주 경찰서장은 이시하라는 고등계 주임과 홍종혁을 거느리고 이상촌으로 찾아왔다.
   지난 일은 묻지 않겠다. 종을 바쳐라! 그것 하나만으로 지난 잘못은 모두 용서하겠다.
   못 떼어 내겠소. 교회의 종은 하느님의 종이지 일본의 종이 아니오.
   그럼 이 종을 하느님이 하늘에서 내려주었단 말이냐? 다시 한 번 기회를 준다. 종을 바
쳐라!
  총칼로 교인들을 찌르고서라도 종을 떼어 갈 것만 같았다.
   종보다 몇 곱 더 되게 쇠를 모아서 줄 테니 이 종만은 떼어 가지 마시오.
  밥그릇이건 수저건 다 모아 주겠다고 하자 경찰서장도 그 제안에 꺾이고 말았다.
  모여 섰던 교인들은 뿔뿔이 흩어져 가더니 곧 놋그릇을 한아름씩 안고 돌아왔다. 이내 종
보다 더 많은 쇠가 모아졌다.
  그들은 그것을 그대로 운반하려 했다. 그러자 김용기가 그들을 막았다.
   이걸 그냥 가져갈 수는 없소! 우리가 교회 종 대신 주는 것이니 서장이 각서를 써 놓고
가져 가시오!
  김용기는 종의 안전을 보장받을 문서를 받아 놓으려는 것이었다.
  경찰서장은 못마땅하기 짝이 없었지만 각서를 써서 넘겨 주었다.
  서기 1941년부터 일본은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으나 점점 기세를 잃어갔다.
  그러자 조선 총독부에서는 적군 비행기가 날아와 폭격하면 큰일이라는 생각에서 밀집된
도시 주민을 시골로 옮기라는 소개 명령을 내렸다.
  그 때 중앙 일보 사장으로 여운형이 있었다. 그는 일본에 항거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특히
웅변을 잘 하고 지조가 굳어 총독부에서 골치를 썩고 있었는데, 소개 명령이 내리자 그들은
마침내 잘됐다 싶어 여운형을 찾아갔다.
   몽양선생, 어서 경성을 벗어 나시오. 소개령이 내려졌소.
  몽양 여운형도 법령을 들고 나와 서울을 떠나라는 데에는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여운형
은 갈 곳이 없었다. 친척들이 있긴 했지만 모두 여운형이 자기 집으로 오는 것을 꺼려 했다.
  그를 받아들였다가는 가족들이 바깥 출입도 마음대로 하지 못할 만큼 감시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김용기는 여운형의 6촌 동생 여운혁에게서 그 소식을 듣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
다.
  그는 곧 여운형이 있는 경성으로 올라갔다.
  김용기는 여운형을 만나자 자기가 찾아온 뜻을 이야기했다.
  여운형은 이상촌으로 내려가겠다고 쾌히 승낙했다.
  여운형과 함께 사는 동안 김용기는 새로운 것을 알게 되었다. 그가 철저한 민족주의자라
는 사실이었다.
  그는 늘 이렇게 주장했다.
   5천 년 배달 민족의 정기를 살려 우리만의 문화를 이루자! 조선 동포 모두가 잘 살 수
있는 평등 사회를 만들자!
  김용기는 여운형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더더욱 그가 훌륭해 보였다.
  또, 여운형은 김용기에게 설교법을 지도해 주기도 하였다.
  삼천리 강산에서 으뜸가는 웅변가로 이름난 그는 김용기의 손짓과 표정, 말의 억양 하나
하나를 자세히 지도해주었다.
  여운형이 그의 집에 머무는 동안 김용기는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을 만큼 뛰어난 웅
변술을 익혔다.
  어느 날, 조선 총독부 정무 총감인 엔도가 봉안 이상촌에 나타났다.
  정무 총감이란 지금의 국무 총리쯤 된다. 양주 경찰서를 비롯해서 양주 군청과 군수, 그리
고 양주군 와부면의 사람들 모두가 마치 임금님이라도 맞는 것처럼 야단법석이었다.
   봉안 이상촌 시찰.
  이것이 양주 나들이의 목적이었지만 사실은 몽양 여운형을 만나러 온 것이었다.
  엔도는 수행원이 40명이나 되었지만 여운형과 단둘이서만 회담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엔도는 몽양에게 마음을 바꾸라고 부탁을 했지만, 몽양은 어떠한 제안도 받
아들이지 않았다.
  이윽고 점심때가 되자 김용기는 점심 식사를 이상촌 식구들이 늘 먹는 대로 똑같이 대접
했다. 한 사람 앞에 삶은 고구마 1개, 빵 2개, 양젖 1컵, 옥수수 1자루뿐이었다.
  정무총감 엔도는 두말할 것도 없고 수행원 40명도 이런 점심 식사는 난생 처음 대하는 형
편없이 초라한 식사였다.
  정무총감은 껄걸 웃으며, 점심상을 앞에 두고 못마땅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수행원들에게
말했다.
   과연 김용기는 듣던 대로 훌륭한 사람이야. 아마 다른 사람이라면 우리가 왔다고 해서
소 한 마리쯤은 잡았을 텐데. 이런 일은 웬만한 사람으로선 태연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
야.
  김용기는 좀처럼 있기 어려운 이런 자리에서 한가지를 다짐해 두고 싶었다.
   정무 총감님, 우리는 기독교 신자입니다. 우리에게 동방 요배와 신사 참배를 강요하지 말
아 주십시오.
  엔도는 그 즉시 옆에 있는 수행원에게 말했다.
   김용기에게 강요하지 말도록 하라.
  서기 1945년 8월 15일 12시, 드디어 일본왕은 특별 방송을 통해 항복한다는 사실을 알렸
다.
  방송이 끝나기가 무섭게 김용기는 교회 종탑으로 달려가 사연 깊은 종을 요란스레 흔들어
댔다. 이상촌 사람들이 하나둘 몰려들었다.
   대한 독립 만세!
  봉안 이상촌 가족들이 소리 높여 합창했다. 그 소리는 온 봉안 마을에 쩌렁쩌렁 울렸다.
  김용기는 8월 20일 서울로 올라왔다. 온 농민의 힘을 모아 농촌 부흥 운동을 일으키려는
생각으로  농민 동맹 을 조직하였다.
  그런데 김용기의 농민 동맹이 미처 첫발도 내딛기 전에 몰래 조직되어 있던 공산주의자들
의  농민 조합 이 나타났다. 자연히 두 단체가 맞섰지만 미리부터 조직되어있던 강력한 단체
인 농민 조합을 누를 길이 없었다.
  서울에서 농민 운동이 뜻대로 안 되자 김용기는 고향으로 내려가기로 마음먹었다.
  막 내려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이웃집 사람이 김용기를 찾아왔다.
   내버린 것이나 다름없는 1만 3천 평짜리 과수원이 서울 가까이에 있는데 사시지 않겠습
니까?
  1만 3천 평이라는 엄청난 넓이에다 서울 가까이에 있다는 말에 선뜻 마음이 내켰다.
  김용기는 이웃 사람의 안내를 받아 구기리에 가 보았다. 아니나다를까, 말 그대로 황무지
나 다름 없었고, 또 11년 동안이나 비어 있었다는 큰 집은 거의 폐가가 되다시피했다.
  김용기는 곧 양주로 내려가 자기의 농장을 팔았다. 90만 원을 손에 넣어, 곧 그 값으로 구
기리 과수원을 샀다.
  서기 1946년 10월, 김용기는 가족들을 이끌고 구기리로 이사를 했다.
  구기리 과수원은 말뿐이지, 잡초밭 속에 커다란 집이 유령처럼 들어앉아 있는 게 무시무
시할 정도였다.
  게다가 그 집 지하실에서는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온 마을에 퍼져 있었다. 또한, 정말로
그 집 지하실에 들어갔던 한 어른이 기절했다가 깨어난 일이 있어, 흉가라는 소문이 나 있
었다.
   지하실 문을 열었더니 이상한 소리가 나지 않겠어? 그리고는 정신을 잃은 거야.
  그러나 김용기는 과학적으로 생각했다.
   지하실에는 가스가 차 있을지 모른다. 11년 동안이나 막혀있던 곳이니 독가스가 생김직하
다. 아마 그 사람은 독가스 때문에 기절했을 것이다.
  다음 날, 김용기는 지하실 문을 열어젖뜨리고 공기를 통하게 하였다. 얼마쯤 시간이 흐른
뒤에 그 곳엔 상쾌한 바람이 감돌았다.
  또다시 개간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김용기는 개간하는 데 뜻이 있지 기름지게 가꾸어진 땅에 씨앗을 뿌려 편안히 거두어들이
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지 않았다.
  김용기는 황폐해진 과수원을 바라보았다.
   이 곳도 잘 가꾸어 누구나 과일을 딸 수 있게 되면 다른 사람에게 물려 주고 다시 또 황
무지를 찾아 나서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쉴 새 없이 농장을 개간하였다.
  이 삼각산 농장을 개간하기 시작한 지도 일 년, 삼각산 농장은 하루가 다르게 탐스럽게
변해 갔다.
  서기 1949년 3월, 그 때 농림부 장관으로 있던 이종현이 김용기를 초청했다.
   기독교 청년회(YMCA)에서 강연 좀 해 주십시오. 농촌이 잘 살아야 나라가 잘 되는 법
입니다.
  김용기가 마다할 까닭이 없었다.
  그는 기독교 청년회에서 강연할 때, 여운형에게서 배운 웅변술로써 강당에 모인 사람들의
마음 속에 불을 질렀다.
   농촌으로 돌아갑시다! 농촌을 위해 진정으로 일할 마음이 있으면 농촌으로 돌아가야 합
니다. 아스팔트 위에서 어떻게 농사를 지으며, 잡초밭을 기름진 땅으로 바꾸어 놓겠다는 것
입니까?
  청중들은 숨소리도 내지 않고  한국의 달가스 라 일컬어지는 연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오늘날 미국이 어떻게 저토록 발전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완전한 농업국에서 출발
했기 때문입니다. 입에 발린 말뿐인 농촌 운동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농촌을 알려면
농촌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김용기는 목이 칼칼해지는 것도 잊고 열변을 토하였다.
  당시 우리 나라는 국민의 70퍼센트가 농업에 종사했다.
  그런데 농촌이 있고 농사꾼은 있어도, 농토를 늘릴 사람이 없었고 농촌을 기름지게 만드
는 사람이 없었다. 예로부터 흙과 거름을 만지는 사람은 천한 백성이요, 책상에 앉은 사람은
귀족처럼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배운 사람 가운데는 농사꾼이 없었다. 이것이 농촌의 큰 문제
점이었다.
  어느 날, 농장으로 낯선 사람이 찾아왔다.
   김 장로이시죠? 저는 목사 유재헌입니다. 해방 전 강원도 철원에서 기도원을 하다가 해
방된 뒤, 공산당 아래 있을 수 없어 38선을 넘어왔습니다. 이 곳은 제가 보기에 농장보다는
기도원의 터로 알맞을 것 같습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제게 파실 수 없겠습니까?
  김용기는 삼각산 농장이 완성되자, 언젠가 적당한 임자가 나타나면 넘겨 주고 새 황무지
를 찾을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으므로, 그 자리에서 승낙했다.
  팔기로 했지만 김용기의 마음 한구석에는 서운한 느낌이 남아 있었다. 삼각산 농장에는
잊지 못할 추억들이 많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농장을 유재헌 목사에게 넘긴 것은 6·25가 일어나기 한 달 전인 서기 1950년 5월이었다.
  서기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38선을 넘어 쳐들어왔다.
  김용기는 공산군이 탱크로 밀고 내려온다는 말을 듣고 분노로 몸을 떨었다.
  공산군이 밀고 내려오는데, 서울에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짐을 꾸렸다. 빈틈없는 준비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다시금 깨달았다.
  그는 가족에게 양주 능내리로 가자고 말했다.
  피난을 가는 동안에도 그는 눈에 띄는 밭과 논두렁마다 옥수수며 콩을 심었다.
   아니, 저 사람 미친 사람 아냐?
   서둘러 피난가야 할 사람이 제 밭도 아닌 남의 밭에 씨앗을 심다니…….
  피난민들이 수군거렸다.
  그러나 김용기는 말없이 씨앗을 심으며 양주 와부면으로 길을 재촉했다.
   심어 놓으면 싹이 트겠지. 싹이 터서 자라면 누가 따든 옥수수와 콩을 거둘 수 있을 거
야.
  이렇듯 김용기의 깊은 마음을 피난민들이 알 리가 없었다.
  양주 능내리로 간 김용기의 가족은 셋째형 운기의 집에 피난짐을 풀었다.
  그는 함께 일해 온 젊은이 20명도 데리고 갔기 때문에 형의 집에서는 편히 지낼 수 없었
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공산군이 쳐들어오면 김용기가 무사할 턱이 없었다.
  그는 젊은 청년들을 데리고 예봉산으로 들어가 토굴을 파고 지내기로 했다.
  예봉산에 들어간 지 석 달이 지나자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국군이 반격해서 서울을 되
찾았다는 것이다.
  김용기는 산에서 내려왔다.
  오랜만에 셋째형 집에서 편히 쉬는데, 갑자기 문 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김용기, 여기 있지! 나와라!
  김운기가 대문을 열었다. 인민군 세 명이 총부리를 들이댔다.
  김운기는 태연히 말했다.
   용기가 왜 우리집에 있겠소. 그가 어디 있는지 나도 모르오.
   다 알고 왔다. 숨기면 너까지도 혼날 줄 알아!
  김용기가 숨어서 듣고 있으려니 쉽게 물러날 것 같지 않았다. 자기가 그대로 있다가는 자
기뿐만 아니라 형에게까지도 큰 화가 미치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용기를 냈다.
   죽고 사는 것은 하느님이 알아서 하실 일이다.
  그러자 두려움이 사라졌다.
   나, 여기 있소.
  그는 소리치면서 바깥으로 나갔다.
   이 반동! 살려둘 수 없다!
  금방이라도 방아쇠를 당길 태세였다.
   나더러 반동 분자라는 건가! 내가 공산주의자들에게 미움받을 일을 한 것은 하느님을 믿
은 일밖에는 없다. 믿음과 양심으로 살며 이 세상에 낙원을 만들자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
런데 이런 것이 죄가 되는가?
  인민군들은 대꾸할 말이 없었다. 김용기는 뒤따라 나온 아내에게 말했다.
   밥상을 준비하시오. 이 군인들은 후퇴하기에 바빠 끼니도 제대로 잇지 못했을 것이오.
  몇 끼를 굶었는지, 그들은 식욕이 대단했다.
  밥상을 물리자마자 그들은 김용기의 가족이 자기네를 해치지 않으리란 것을 믿었는지 곧
곯아떨어졌다.
  얼마 뒤, 그들이 깨어났을 때 김용기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네들 신을 보니 다 헤어졌더군. 내가 새 신을 마련 해 놓았으니 어서 신고 떠나게. 그
리고 고향에 돌아가거든 부디 하느님을 믿는 훌륭한 청년들이 되게.
  그러자 그토록 험상궂은 인민군들의 눈에 이슬 같은 눈물이 고였다.
   고맙습니다.
  서기 1952년 3월, 봄철이라지만 아직 쌀쌀했다. 전쟁은 여전히 중부 전선에서 계속되고 있
었다.
  김용기는 이제 무엇 하나 가진 게 없었다.
   이런 때야말로 내게 할 일이 있는 게 아닐까?
  김용기는 새로 개간할 땅을 찾으려 했다. 그 때 정홍섭을 만났다. 그는 경기도 용인에 사
는 사람인데, 김용기가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도 개간할 땅을 찾는다니까 대뜸 말했
다.
   그러시다면 아주 잘 되었습니다. 용인군 용삼면 사암리에 황무지 6만 평이 있는데, 아마
살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6만 평이면 아무리 황무지라도 돈이 많아야 할텐데, 마련할 도리가 없었다.
  이 궁리 저 궁리를 해 보았으나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느님, 그 땅을 그대로 내버려 두시렵니까? 제가 개간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제 피
와 땀을 그곳에 바쳐 하느님의 일을 이루겠나이다.
  이상한 일이었다. 기도를 끝냈을 때 머릿속에 강태국 목사가 퍼뜩 떠올랐다. 그는 신당동
신일 교회 담임 목사로, 김용기가 서울에 살게 될 때 알게 된 사람이다.
  그 뒤, 김용기가 삼각산 농장을 경영할 때 그 곳에 와서 함께 고생을 했으므로, 두 사람
사이는 꽤 가까웠다. 그들은 삼각산 농장에서 함께 전국적인 농촌 운동을 펴자고 굳은 악수
를 나눈 사이였다.
  김용기의 말을 듣고 난 강태국 목사는 선뜻 큰 돈을 내놓았다. 그런 뒤로 한에녹 장로가
참가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용인 농장은 강태국, 한에녹, 김용기 세 사람의 힘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그
러자 여운혁, 표광렬, 박승복을 비롯한 젊은이 40명이 함께 따라 나섰다.
  서기 1952년 5월, 전쟁이 여전히 38선 근처에서 불꽃을 튕기고 있을 때, 김용기는 용인 땅
6만 평에다  에덴향 의 깃발을 꽂았다.
  개간 자금마저 모자란데다 개간은 처음부터 어렵기만 하였다.
   흙벽돌부터 만들기로 합시다.
  먼저 집이 있어야겠기에 흙벽돌을 찍어 냈다. 10평짜리 건물 일곱 채가 들어섰다.
  그런 다음 어디에서나 늘 그랬던 것처럼 김용기는 고구마부터 심었다.
  에덴향 개척지에서 일어나는 시각은 새벽 4시였고, 개간 작업이 끝나는 시각은 저녁 7시
로 쉴 틈 없는 작업이 계속되었지만 김용기는 힘든 줄을 몰랐다.
  이윽고 땅에서는 과일 나무가 무럭무럭 자라고 고구마가 여물었다.
그러나 이런 농작물 말고도 또 하나 그가 이 에덴향에 심은 것이 있었다. 교육 사업의 씨앗
이었다. 천막 한 채를 세우고, 그 곳에  복음 고등 농민 학원 이란 간판을 내걸었다. 60명 정
도의 학생은 쉽게 모아졌다.
  김용기는 학교 설립 허가를 받으려고 기독교 청년회를 중심으로 하여 유준호, 현동완, 오
근영 목사를 재단 이사로 초빙했다.
  교사들도 불러 왔다.
  학원을 시작하고 보니 돈이 더욱 모자랐다. 강 목사도 이젠 내놓을 돈이 없었다.
  어떻게 하면 학원을 키워 나갈 수 있을까? 하고 궁리하는 중에 뜻밖에 최호라는 사람이
찾아와서 학원에 투자하겠다고 말해 왔다.
  최호는 광산하던 사람으로 재산이 매우 많았다. 광산만도 5000만 원짜리였다. 몇 푼을 투
자하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제 광산을 몽땅 학교 재단에 투자한다면 저도 함께 일할 수 있겠습니까?
  김용기는 이 엄청난 돈에 오히려 눈앞이 어찔어찔할 정도였다.
  최호가 투자하자 용인군 안에서 그만큼 재단이 튼튼한 학교는 없게 되었다.
  이처럼 최호가 자기 발로 직접 찾아와 그 학교를 용인군 안에서 으뜸가는 재단의 학원으
로 만드는 데 도움을 주었으나, 김용기에게 계속해서 좋은 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정신력으로 안 되는 일은 없다.
  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아무리 정신력이 강해도 사람이 기계가 아닌 이상 체력에 한계가
있었다.
  김용기는 마침내 쓰러지고 말았다. 일 주일 동안 거의 정신을 잃고 신음 소리만 냈다. 하
루하루가 다르게 수척해지며 온몸이 불덩어리처럼 뜨거워져 좀처럼 열이 내릴줄을 몰랐다.
  그렇게 몇 달을 앓다가 일어나자, 이번에는 또다른 문제가 생겼다.
   최호는 농촌 운동을 하자는 것도 아니고, 교육 사업에 뜻을 두어 자기를 희생하려는 사
람은 더더구나 아니오. 그런데 돈을 냈다고 해서 그를 재단 이사장으로 앉힌다는 것은 도저
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오.
  강태국 목사가 최호의 참여를 반대하고 나섰다.
  농장터를 사들일 돈을 댄 강목사의 말은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진 것이 되었다.
  게다가 최호가 강 목사의 말에 맞서는 바람에 문제가 커졌다.
  두 사람의 싸움을 본 한에녹이 김용기에게 말했다.
   옳고 그른 것은 하느님이 심판하실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곳에 걸었던 모든 꿈을 버
리고 새로운 개간지를 찾아갑시다.
  김용기도 한 달 전부터 새로운 개간지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라, 한에녹 장로의
말을 듣고 결심을 확실히 했다.
  결심은 굳혔지만 이사갈 땅이 없었다. 초조한 마음으로 이곳 저곳으로 차를 타고 돌아다
니며 버려진 땅을 찾았다.
   황산리입니다.
  버스 차장의 목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황산리?
  김용기는 자리에서 소리쳤다.
   차 좀 세워주시오!
  버스가 떠난 뒤, 김용기는 그 자리에 서서 마을을 둘러보았다.
   내 생각이 맞았구나.  황산리 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고장이야.
  어디를 둘러보아도 거친 곳이었다. 산뿐만 아니라 들판도 마을도 모두 황폐했다. 김용기는
이 마을을 네 번째 개간지로 정했다.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풍산리. 당시 그 마을의 행정상 이름이다.
  그는 거저 준대도 갖지 않을 거친 야산 1만 평을 사서, 거기 1954년 11월 16일, 가족과 함
께 풍산리로 이사를 하였다.
  이사는 했지만 이미 겨울이 시작되고 있어서 이듬해 봄까지는 땅에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올겨울 동안 광주군 농촌에서 계몽 운동을 펴지!
  김용기는 계몽 계획을 세웠다.
  그는 서울로 가서 트럼펫, 트럼본, 심벌즈 등을 사가지고 내려와서는 세 아들과 함께 연주
법을 익히고 합주를 연습했다.
  그런 뒤, 곧 광주군 순회를 시작했다.
  이윽고 장터에 자리를 잡은 그들 4인조 악단은 연주를 시작했다.
   이건 또 무슨 구경거리인가? 약장수 패거리인가?
  이런 표정을 지으며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사람이 어지간히 모이자 김용기는 연주를 그치고 연설을 시작했다.
   여러분! 여러분께서는 지금의 우리 나라와 우리 농촌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말에 벌써 흥미를 잃은 표정들이 몇몇 보였다.
  정치나 계몽이라면 해방된 뒤부터 날마다 들어와서 신물이 날 대로 난 사람들이었다.
  김용기는 사람들의 흥미 없는 표정을 보고 그것을 대뜸 알아차렸다.
   그러나 내 이야기는 좀 다르다.
  그는 자신이 있었다.
  김용기는 사람들이 입에도 올리지 않는 자세한 내용까지 끄집어내어 하나하나 펼쳐 나갔
다.
  먼저 농토를 떠나는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농토를 떠나는 사람이 많습니다. 농사짓는 것은 남에게 천대받고 돈도 생기지 않는 직업
이라 하여 모두들 도시로 떠납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농사를 짓는 것처럼 큰 이익이 나
는 일도 없습니다.
  이렇게 말을 시작한 김용기는 자기가 농사짓기로 결심했을 때, 혼자 해 보았던 일들을 농
민들에게 들려 주었다.
  계속해서 김용기는 식생활을 개선해야 한다는 이야기와 제사의 허례 허식에 대한 이야기
를 했다. 그리고 농촌의 집들을 개량시켜야 한다는 것과 미신을 없애야 한다는 이야기도 했
다.
  김용기의 말이 이렇듯 자기네 생활과 직접 관련이 있는 내용들이라 흥미를 느낀 사람들은
3시간이나 꼬박 선 채로 듣고 있었다.
  그러나 처음 모였던 사람의 반 가량만이 남아 끝까지 들었을 뿐이었다.
  그의 아들들은 듣는 사람이 적은 데에 낙심했다.
  김용기는 세 아들을 차분히 타이르며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다음 번 강연 때도 마찬가지로 듣는 사람이 반 가량 줄었지만, 김용기 부자는 장날마다
어김없이 장터를 찾아가 악기를 연주하며 계몽했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고 한다.
  김용기가 농촌 계몽 운동을 벌인다는 소문은 금세 광주군 안에 퍼졌다.
  그의 강연이 워낙 농사의 조그만 기술에 관한 지식까지 알려 주니 들으면 이득이 된다는
것을 시골의 농사꾼들이라도 알 수 있었다.
   면사무소 소재지에서만 할 게 아니라 우리 동네에도 와서 온 마을 사람들에게 기술을 알
려 주십시오.
  장터에 와서 그의 강연을 들은 사람들이 이렇게 부탁하기까지 했다. 처음 계획은 16군데
면사무소 소재지만 돌 작정이었으나, 김용기는 부탁하는 마을마다 빼놓지 않고 찾아가기로
했다.
  강연은 그 해 겨우내 이어졌다.
  김용기가 자리잡은 마을에는 교회가 없었다.
  그런데 마침 집에서 500미터쯤 떨어진 곳에 노는 땅이 있었다. 김용기는 그 곳에 천막을
쳤다. 천막 교회가 생겨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뒷날  가나안 교회 의 시작이 되었다.
  봄이 되었다. 거친 야산에서는 김용기 부자의 모습을 늘 볼 수 있었다.
   저런 야산에서 농사를 짓겠다니 원…… 토질이 어떤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풍산리 사람들은 그 곳 토질을 잘 알고 있기에 모두들 이렇게 말했다.
  그 곳 흙은 나중에  이화 산업 이라는 벽돌 공장이 들어섰을만큼 단단한 흙이었다.
  김용기는 개간한 곳에 고구마를 심었다. 마을 사람들은 고구마 줄기가 쭉쭉 뻗어 푸르게
땅을 덮자, 비로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니, 농사가 되는 땅 아냐?
  고구마를 거둘 때, 수확이 제법 많자 모두들 놀랐다.
   고구마는 저런 땅에서도 잘 되는 구나.
  모두들 김용기를 본떠 자기네 땅 가운데 그냥 놀리고 있던 곳에 고구마를 심었다. 그랬더
니 아니나다를까, 고구마 줄기가 뻗어 나왔다. 그제서야 그들은 고구마가 어떤 땅에서나 잘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구마에 대해서 잠깐 알아보기로 하자.
  첫째, 고구마는 풍년이나 흉년을 가리지 않고 어떤 땅에서나 잘 된다. 다른 곡식만큼 벌레
들이 많지도 않다.
  둘째, 고구마는 농사짓기가 편하다. 거름을 많이 주지 않아도 되고 덩굴이 있어 잡초가 잘
자라지 못한다. 또 김을 자주 매줄 필요가 없다.
  셋째, 고구마는 과일처럼 그대로 먹을 수 있다. 반찬없이 먹어 끼니를 때울 수도 있으며,
물과 불이 없어도 날것으로 먹을 수 있다.
  넷째, 늘 고구마를 먹으면 채독균뿐 아니라 기생충이 몸 안에 살지 못한다. 고구마에는 산
토닌이란 성분이 있어 요충, 회층, 십이지장충 등이 맥을 못 춘다. 또, 고혈압을 예방할 수도
있다.
  다섯째, 술·떡·된장·엿·잼 등 쌀보다 더 여러 가지로 요리해 먹을 수 있다.
  여섯째, 다른 농작물보다 수확량이 많다. 보통 쌀 대두 한 말과 고구마 스무 관들이 한 가
마니 값이 맞먹는다. 그런데 좋은 논 1평에서 쌀 대두 한 되밖에 못 얻는데 비해 고구마는
1평에서 다섯 관이나 거두어들일수 있다. 쌀은 10평이 있어야 대두 한 말이 나온다. 그와 값
이 같은 고구마 한 가마니는 4평에서 거두어들일수 있다. 그러니까 땅 6평이 이득인 셈이다.
  일곱째, 고구마 석 되는 쌀 한 말의 영양가와 거의 맞먹는다.
  이처럼 따져 볼 때, 쌀농사보다 고구마 농사가 얼마나 더 이득이 되는지 잘 알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고구마에는 비타민 에이(A)가 없으므로 다른 음식에서 섭취해야 한다. 그
런데 사과나무를 기르면 그것도 해결된다. 사과는 사철 아무때나 먹을 수 있고 보관도 편리
하니 가장 알맞았다.
  그렇다면 고구마를 심을 밭 몇 백평과 사과나무 몇 그루만 있으면, 너댓 가족은 문제 없
이 먹고 살 수 있다.
  김용기가 개간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이 고구마 농사에 눈을 떴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앙고라 토끼 중에  앙고라 지(G) 란 품종이 있다. 일본에서 프랑스 계통 토끼와 영국 토끼
를 개량하여 키워낸 것이 바로 이 앙고라 지이다.
  이 토끼를 우리 나라에서 250마리 수입하여 농과 대학 교수들과 가축 전문가 몇 사람이
나누어 시험삼아 길렀다. 암컷 4마리, 수컷 1마리를 1조로 나눠 기른 것이다. 김용기도 그
가운데 1조를 나눠 받았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실패했다.
  김용기는 앙고라 지 토끼를 가져오자 곧 책임자를 골랐다.
  셋째 아들 평일이 그 책임자가 되었다.
  평일은 먼저 다른 사람들이 실패한 원인을 하나하나 살펴본 결과 지나친 욕심 때문이라는
판단이 섰다.
  어미토끼는 한꺼번에 10마리씩 새끼를 낳는다. 사람들은 욕심을 내어 새끼 10마리를 모두
기르려고 생각했다. 그래서 1마리도 제대로 키워 내지 못하고 어미토끼마저 죽여 버리고 만
것이다. 평일은 10마리 새끼 가운데 몇 마리를 없앤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어쩔수
없이 4마리를 없앴다. 나머지 6마리만 키우니 잘 자랐다.
  이 일이 성공하자 평일에게도 욕심이 생겼다.
   4마리를 없애는 것은 아깝다. 어떻게든 그 10마리를 고스란히 키울 수는 없을까?
  하고 궁리했다. 그 때,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앙고라 새끼를 재래종 토끼와 함께 기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실패했다.
  재래종 토끼는 앙고라 토끼의 냄새가 자기 냄새와 다르므로, 물어 죽이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다음 번에는 앙고라 토끼를 넣기 전에 재래종 토끼의 코에 포마드를 발랐다.
  그 다음, 앙고라 새끼에다가 포마드를 발라서 들이밀었다. 그랬더니 재래종 어미토끼는 앙
고라 토끼 새끼를 핥아 주기도 하고 젖을 먹여 주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평일은 앙고라 지를 3000마리까지 늘리는 데 성공했다.
  평일은 이 희귀한 앙고라 지 토끼를 전국으로 골고루 나눠 주었다. 물론 재래종 토끼를
이용하여 새끼를 늘리는 방법도 함께 가르쳐 주었다.
  갑자기 앙고라 지 토끼 붐이 일어났다. 너도나도 앙고라 지를 키웠다.
  풍산리 농장에서는 재래종 토끼를 산에 놓아 길렀다. 이것도 성공이었다. 소도 길렀다.
  한편 포도나무, 복숭아나무, 살구나무, 밤나무도 심었다. 과일 나무 사이에는 고구마와 콩
을 심었다.
  이렇듯 고구마를 장려하고 스스로 고구마를 기르니까 마을 사람들이 김용기를 가리켜  고
구마 박사 라 부르게끔 되었다.
  어느 날, 김용기는 미군들이 쓰는 비를 보았다. 우리 나라 비와는 달리 무척 질기게 생긴
게 쉽게 망가질 것 같지는 않았다. 그것이 미국수수로 만들어진 것을 안 김용기는 어떻게든
미국수수를 심고 싶었다.
  그런데 씨앗을 좀처럼 얻기 어려웠다. 그 소식을 들은 한 청년이 경상 북도 청도에서 씨
앗을 가지고 찾아왔다. 6알의 씨앗은 4년 뒤 12가마가 되었다.
  농장은 자꾸 커져서 노래도 만들었다.

  동방의 정기 모여 빛나는 조국,
  그 중에도 살기 좋은 가나안 복지.
  얕은 산 봉이봉이 아름다운 돌,
  흐르는 한강물은 수정 같구나.
  대대로 살아 나갈 가나안 복지,
  억만 손 퍼져 나갈 복지 여기라.

  김용기가 직접 쓴 가사에 조승제가 곡을 붙인 것이다.
  이  가나안의 노래 가 아침 저녁으로 풍산리 농장에 울려 퍼지는 가운데 차츰 농장으로서
의 틀이 잡혀 갔다.
  서기 1958년, 김용기가 풍산리에 자리잡은 지도 어느덧 4년이 되었다. 이제 농장 과일 나
무에는 조그만 열매가 맺히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하루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버스가 풍산리까지 운행된다는 것이었다.
  이제까지는 풍산리에 세운 김용기의  가나안 농장 에서 북쪽으로 1킬로미터 떨어진 하일리
마을이 버스 종점이었다.
  가나안 농군 학교.
  김용기가 본디부터 계획하여 세운 학교는 아니었다. 천막 교회에서 비롯되어 농군 학교로
발전한 것이었다.
  김용기의 집은 학교로는 걸맞지 않았다. 아들 셋, 딸 둘, 그리고 김용기 내외가 쓸 방을
저마다 마련해 두었는데, 그것을 낮엔 강의실로 쓰고 밤에는 침실로 썼다.
  김용기는 어차피 가르칠 바에는 철저하게 가르쳐 말뿐이 아닌 지도자를 길러 내겠다고 결
심했다.
  그래서 이름을 군사  군 을 써서 농사를 짓는 군사라는 뜻으로  농군 학교 라 했다.
  김용기는 학교의 교육 이념을 정했다.
  첫째, 우리 민족의 주체성을 세우고,
  둘째, 바람직한 국민 윤리 규범을 생활로 삼고,
  셋째, 책임 있고 민족적인 지도자의 인격을 기르고,
  넷째, 올바른 국가관과 사회관 및 가정관을 세우며,
  다섯째, 우리 실정에 맞는 근검 절약 생활을 하고,
  여섯째, 능력 개발을 통해 빈곤을 막는 교육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먼저 정신 교육을 하기로 했다. 정신 교육을 통해 참된 인간을 만들지
않으면, 아무리 이념대로 교육해도 제대로 그 구실을 다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교육이 제대로 되면, 그 사람은 도덕적으로 완성되었다.
  이렇듯 시대에 앞선 정신 교육을 하게 되자, 온 나라 여기저기에서 정신 교육을 받고자
모여들었다.
  농군 학교 교육은 짧은 기간에 실시하였다.
  선생은 김용기와 아들 셋, 딸 둘이었다. 학생들이 많아지자 두 며느리까지 선생이 되었고,
또 사위들까지도 교육에 나섰다.
  교재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강의실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김용기의 가정 생활
이 곧 교재였고, 농장이 또한 교재였다. 그리고 식생활 개선을 실시하는 김용기의 부엌이 실
습장이 되었다.
  바로 산 교육이었다.
  가나안 교육이 널리 알려지자 학생들의 신분도 다양해져 갔다.
  농군 학교라고 이름 붙였듯이 농촌 지도자를 길러 내는 것이 본디 목적이었으나 정신 교
육, 식생활 개선 교육 같은 것을 하자, 대학 교수·박사·회사원·사업가·군인·학생·전과
자·소매치기·거지 등 온갖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나이로는 스무 살에서 예순 살까지였고, 종교도 기독교·카톨릭·불교 등 다양했다.
  새벽 4시 30분.
  기상 나팔 소리와 함께 가나안 농군 학교 학생들이 일어난다. 곧이어 5시부터 강의가 시
작된다.  눈물의 강의 로 유명한 첫 강의이다.
  새벽의 정신 교육에  눈물의 강의 라는 이름이 붙은 데에는 그만한 까닭이 있었다. 어지간
한 사람도 지나온 날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기 때문이다.
  이 강의를 들으면 어떤 사람이라도 각오를 새로이 하게 된다. 만일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그는 나무나 돌처럼 감정이 없는 사람이다.
  깡통 하나가 삶의 전부였던 거지가 가나안을 다녀간 뒤에는 새 출발하여 사장이 되기도
했다.
  전과 8범의 흉악범이 늘 품고 다니던 흉기를 내놓고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교육을 받은 뒤,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를 쓴 사람만도 수백 명이나 되었다.
  이렇듯 가나안의 정신 교육이 신기하고도 놀라운 효과를 내자, 정신 교육에 있어서는 거
의 완벽하다는 군인들까지도 정신 교육을 받으러 오기에 이르렀다.
  새벽에 정신 교육이 끝나면 구보를 한다. 그 유명한  가나안 구보 이다.
  6킬로미터 또는 8킬로미터 거리를 달릴 때 구호를 붙인다.
   개척! 정신!
  이것이 구호이다.
  달리기는 튼튼한 몸과 어려움을 이겨 낼 힘을 길러 준다. 구보가 끝나고 나면 학생들은
참기 어려운 것을 뛰어넘었다는 흐뭇한 만족감에 젖는다. 승리감으로 통하는 만족감이다.
  아침 식사는 8시에서 9시 사이이고, 9시부터 오후 6시 30분까지는 교육이 이어진다.
  취침은 오후 10시. 그러니 교육만 17시간, 18시간씩 계속 이어지는 셈이며, 다음 날 아침
4시 30분에 기상을 하니까 6시간 30분 동안 잠을 자는 것이다.
  교육은 열흘 또는 보름으로 되도록 짧게 시켰다. 길게 한다고 해서 별다른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다. 짧은 기간 동안 가나안의 정신을 가득 채워 넣어 주면 되는 것이었다.
  어느 날, 한 사나이가 농군 학교에 들어왔다. 몹쓸 부랑아로, 자기 어머니를 발길로 걷어
차 갈비뼈를 부러뜨리기까지 한 사나이인데, 본인이 싫다는 것을 마을에서 억지로 끌어다가
김용기에게 맡긴 것이다.
  이 사나이는 일 주일 만에 사람이 달라졌다.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기 위해 사흘 동안
굶고, 머리를 박박 깎았다.
  그는 어머니에게 이제껏의 잘못을 비는 편지를 써 보냈다.
  편지를 받은 어머니는 목이 메었고 기뻐서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아들에게 걷어차인 허
리가 아픈 것도 참고 그 길로 가나안까지 달려 왔다. 어머니와 아들은 서로 부둥켜 안고 울
었다. 또한, 이런 일도 있었다.
  한 상사와 노 하사는 같은 부대에 근무하고 있었다.
  노 하사도 본디 상사였다. 한 상사와 둘도 없는 단짝이었는데, 술 때문에 두 계급이 낮아
져 하사가 되었다.
  노 하사가 상사 때 두 사람은 날마다 어울려 술을 마셨다. 퇴근만 하면 어느 한쪽이 꼭
부르러 갔다.
  노 하사와 한 상사는 바로 이웃에 살고 있었다.
   한 상사, 퇴근 후에 한 잔 하세.
  그러면 어느 쪽도 싫다 하지 않고 마셨다.
  퇴근해서 술 마시는 것까지는 좋은데 사고를 내고 근무중에 실수를 하게 되자, 어쩔 수
없이 하사로 강등시켜 버렸다.
  그래도 계속해서 술을 마시고 사고를 내자, 부대에서는 그들의 정신 상태를 바꾸게 할 생
각으로 가나안 농군 학교에 입학시켰다.
  그 무렵, 군대에서는 문제 사병을 100명씩 1조로 하여 계속 농군 학교에 위탁 교육시키고
있었는데, 그 틈에 끼여 오게 된 것이었다.
  두 사람은 가나안 교육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다. 고생스런 교육을 받았다고 부인들이 통
닭찜을 마련해서 술상을 차렸다.
  두 사람은 출장을 갔다 오거나 부대 교육이나 훈련에서 돌아오면 늘 술상을 차리게 하고
부인들을 귀찮게 했던 것이다.
  그런데 통닭찜이 얹힌 술상을 본 노 하사는 이렇게 말하는게 아닌가.
   여보, 나 술 끊었어. 통닭은 아이들과 당신이나 나눠먹구려.
  부인은 잘못 들은게 아닌가 싶어 다시 노 하사를 쳐다보았다.
   술을 끊었다니까.
  그제야 부인은 남편의 말이 틀림없음을 알았다.
  이튿날 새벽이었다. 부인은 집 안에서 나는 이상한 소리에 잠을 깼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
고 보다가 그만 깜짝 놀랐다.
  노 하사가 물을 길어 부엌으로 나르는 중이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노 하사는 부인의 기척을 알고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그 동안 당신을 고생시켜 미안하오.
  도무지 꿈만 같았다.
  남편이 출근하자 부인은 한 상사 집으로 달려갔다. 한 상사 부인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
했다.
  그러자 한 상사의 부인은 자기 남편도 똑같이 변했다고 말했다.
   살다보니 세상에 별 일도 다 있구려.
  두 부인은 서로 손을 마주잡고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렇듯 사고뭉치까지도 새 사람을 만들자니, 그에 따른 김용기 가족의 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너무나 힘든 나머지 드디어 어느 날, 아들 셋과 큰딸이 말없는 저항을 벌였던 일까지 있
었다.
  새벽 4시, 김용기는 늘 그렇듯이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 종을 쳤다. 이제 곧 아들딸들이 달
려 나오리라 생각하였다.
  그런데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전날 세 아들과 큰딸이 짰던 것이다.
   우리도 새벽잠을 어디 한 번 실컷 자 보자.
  김용기는 방문 밖을 왔다갔다 하며 혼자서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래도 아이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 때서야 그는 아들딸들의 말없는 저항을 눈치챘다.
  아울러 며칠 전 아들들이 자기에게 한 말이 퍼뜩 떠올랐다.
   아버지, 일이 너무 고됩니다. 잠 좀 푹 자게 해 주십시오.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 때, 김용기는 단호하게 말했다.
   누구보다 너희 자신이 더 잘 알 텐데 그런 말을 하느냐? 자고 싶은 대로 잠을 다 잔다면
일은 언제 하느냐?
  김용기는 그 날 아침, 그들의 말이 드디어 행동으로 나왔음을 알았다.
   이것은 그냥 넘길 일이 아니다.
  어떤 방법을 취할까 잠깐 생각했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김용기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갑자기 빗발에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불러 타이를 것도 없고 꾸짖을 것도 없다. 내가 저 세찬 빗속에 서 있자. 그것
을 보면 아이들의 마음도 바뀌겠지.
  김용기는 맨몸으로 빗속에 서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큰 아들, 둘째 아들, 막내 아들, 큰딸이 차례차례로 나타났다.
  그들은 비에 흠뻑 젖은 아버지를 보고 달려와 매달렸다.
   아버지, 용서해 주세요.
  12월로 접어들자, 큰아들과 둘째 아들이 일본에서 열리는 동남 아시아 농촌 지도자 교육
에 참석키 위해 일본으로 갔다. 셋쨰 아들 평일은 군대에 입대한 뒤여서 농군 학교에는 김
용기와 맏며느리, 맏딸 이렇게 셋만 강사로 남아 있었다.
  이 무렵, 중부 지방의 날씨는 살을 에는 듯이 찼다. 강사도 모자라는데 하필이면 이 때 귀
한 사람들이 교육을 받겠다고 입교했다. 군수와 기업가 70여명, 깡패 출신 젊은이들, 대학
재학생들이었다.
  김용기와 맏며느리, 맏딸은 밤낮없이 강의와 축산 일에 쫓겨야 했다.
  닭이며 토끼를 돌보는 데도 시간이 모잘라 정도인데 강의에 쫓겨 그런 일은 밤에만 하자
니 고되기 이를 데 없었다.
  이 때 화제가 일어났다. 양계장에 피워 둔 연탄 난로에서 불이 난 것이다.
  김용기가 달려갔을 때에는 벌써 닭 500마리, 앙고라 토끼 200마리가 불길속에 휩싸여 이
리 뛰고 저리 뛰고 했다. 교육생들이 모두 속옷 바람으로 뛰어나와 불을 끄느라고 야단이었
다.
  그러나 불길은 점점 기세를 더해 가서 도저히 잡을 수 없었다.
  김용기가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여러분, 이제 우리 모두 꿇어 앉아 저 처참한 광경에서 살아 있는 생명을 지켜보며 교육
을 받읍시다.
  모두 김용기의 지시에 따라 그 자리에 앉아서 말없이 수백의 생명이 타죽는 광경을 지켜
보았다.
  어떻게든 불길 속에서 살아나 보려는 가축들과 몸에 불이 붙어 불덩어리가 되었는데도 살
아나 보려고 날뛰는 짐승들. 김용기의 말대로 세상에 다시 없는 산 교육이었다.
   인간이 세상에서 죄를 짓고 살다가 그 죄를 씻기도 전에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이 찾아온
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저 불길보다 무서운 유황 불길이 이글거리는 지옥으로 떨어집니
다. 이번 불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지옥이 어떤가를 보여 주기 위해 일으키신 것입니다. 여러
분 가운데 지옥이 어디 있느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지옥
이 없다는 것은 또 무엇으로 증명하겠습니까? 지옥이 없다고 생각하며 나쁜 짓하던 사람이
죽었을 때, 지옥이 있어 그 곳에 떨어지게 된다면 아무리 후회해 보아야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니 지옥이 있다고 믿고 신앙 생활을 하면 죽음이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불길 속에서 죽어 가는 생명을 보면서 웅변술에 뛰어난 김용기의 말을 듣던 교육생들의
얼굴에는 심각한 빛이 떠올랐다.
  거세게 타오르던 불길은 축사와 가축들을 모두 태운후에야 가라앉았다.
  김용기는 교육생들을 데리고 교회로 들어갔다.
  그제서야 화재 현장에서 받았던 충격들이 바깥으로 터졌다. 우는 사람, 가슴을 치는 사람
…….
  이 때, 한 젊은이가 제단 앞으로 달려 나갔다.
   여러분, 나는 대전에서 온 깡패 두목입니다. 내 손으로 길러 낸 깡패만도 1000명이나 됩
니다. 나는 이 사회에서 돌에 맞아 마땅한 인간입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부터 새 사람이
될 것을 하느님 앞에 맹세합니다.
  그 날 밤, 그 불지옥을 구경하고 교회에서 깡패의 맹세를 들은 사람 가운데 임영철이라고
있었다.
  그는 경희 대학교 법과를 졸업하고, 사법 고시 제1차 시험에 합격하여 앞날이 밝은 청년
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날 밤 법관될 꿈을 버리고 평생 농촌을 위해 몸바치기로 결심했다.
그는 나중에 김용기의 사위가 되었다.
  가나안 농군 학교는 이제 흔들래야 흔들 수 없을 만큼 뿌리깊게 자리잡혔다.
  서기 1961년 5·16 군사 정변이 있고 나서 11월에 한 육군 대령이 가나안을 찾아왔다.
   국가 재건 최고 회의 의원 이명춘 대령입니다.
  그 무렵, 국가 재건 최고 회의 의원이라면 권력이 대단했다.
  이명춘 대령은 가나안 농군 학교를 구석구석 다 돌아보고 나서 말했다.
   내일 의장 각하께서 방문하실 겁니다.
  이튿날, 박정희 국가 재건 최고 회의 의장이 가나안에 나타났다.
  한신 내무부 장관, 장경순 농림부 장관들이 같이 왔으며, 신문 기자도 25명이나 따라왔다.
   김용기 선생님, 우리는 정치 혁명을 일으켰습니다만 선생님께서는 생활 혁명을 일으키셨
군요. 오늘 이 가나안에 와 보니 모든 것이 듣던 대로 훌륭합니다.
  박 의장 일행은 가나안의 식사 그대로인 점심을 대접받고 돌아갔다.
  20일 뒤, 전국의 읍·면장 600명이 다녀갔다. 이어서 군 재건 국민 운동 촉진 회장 140명
이 다녀갔다.
  또, 농군 학교를 경기도 국민 운동 본부 교육원으로 아홉 달이나 빌려 주기도 했다.
  가나안을 견학 오는 사람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얼마 뒤, 김용기는 공보부 장관으로부터 향토 문화 공로 표창으로 금메달과 부상을 받았
다.
  이로부터 시작되어 김용기가 받은 표창장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 중 서기 1966년에는  막사이사이상  수상자로 결정되었다.
  이 상은 필리핀 대통령이었던 라몬 막사이사이를 기념하고자 만든 것인데,  동양의 노벨
상 이라 할 정도로 권위 있는 상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장준하 씨에게 평화상이 돌아온 일이 있었을 뿐, 그 뒤로 수상자가 없었
다.
  그러다 서기 1966년에 김용기가 비로소 두 번째 수상자가 된 것이다.
  김용기는  사회 봉사상 을 타고 부상으로 1만 달러를 받았다.
   아시아를 통틀어도 사회 봉사에 있어서 김용기 장로를 따를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이번 수상은 그가 한 일로 보아 당연하다.
  모두들 이렇게 말했다.
  김용기가 시상식에 참석하러 가고자 비행장에 나타났을 대, 모여 있던 기자들은 깜짝 놀
랐다. 삼베로 만든 국민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시상식장에서 이렇게 다짐했다.
   국민을 공포와 무질서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키고, 그들에게 평화로운 세계를 주는 데
에 나의 남은 생애를 바치겠습니다.
  그는 부상으로 받은 1만 달러를 모두 가나안 농군 학교 시설과 교재 대금으로 썼다.
  서기 1973년, 어느 날 김용기는 낯선 사람으로부터 온 편지를 받았다.
  10만 평 남짓되는 산을 헐값에 팔겠다는 내용이었다.
  김용기는 사고 싶었지만 돈이 없었다.
  그 때 마침 김윤환 장로와 김기혜 장로가 가나안을 찾아왔다.
  김용기가 그 편지 이야기를 하자 그들은 곧 그 땅을 사들여서 김용기 이름으로 등기를 하
고 그에게 그 땅의 개간을 맡겼다.
  아무리 황무지라지만 그토록 황폐한 땅은 처음이었다. 산비탈 경사가 45도나 되고, 온통
자갈밭이었다. 곡식은커녕 나무나 잡초조차도 자랄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해서 안 될 일이 있는가. 그러한 땅이기에 김용기의 의지가 더욱 불타 올랐다.
  서기 1973년 3월 13일, 강원도 원성군 신림면에서 10만 평의 광대한 땅을 부지로 한 제2
가나안 농군 학교 기공식이 베풀어졌다. 이 날 기공식에는 5·16 정변 뒤, 내무부 장관을 지
내다 제1군 사령관이 된 ㅎ나신 장군, 정성모 강원도 도지사를 비롯하여 유명 인사 70명이
참석했다.
  바야흐로 태백 산맥 줄기에서 힘찬 개척의 괭이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이 해에 김용기는  새마을 협동상 과 제 1회  인촌 문화상 을 탔다.
  서기 1978년 2월 무렵, 필리핀 세이비어 대학 총장으로부터 김용기에게 편지가 날아왔다.
   우리 대학교 이사회에서는 개교 45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귀하에게 명예 인문학 박사
학위를 드리기로 결정했습니다. 부디 오셔서 박사 학위를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세이비어 대학 개교 기념일을 이틀 앞두고 필리핀에 도착한 김용기는 깜짝 놀랐다. 꿈에
도 생각지 못한 환영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필리핀 교포들이  김용기 장로 환영 이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나와 있었고, 막사이사이상
위원들도 모두 공항에 나와 있었다.
  그들은 목에 꽃다발을 걸어 주며 축하했다.
  2월 26일, 세이비어 대학 개교 기념식에서 김용기에게 인문학 박사 학위가 수여되었다.
  가나안 농군 학교를 통해 세계적인 인물이 된 김용기는 서기 1988년 8월 1일에 세상을 떠
났다.
  그러나 그는 오늘도 모든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평범한 진리를 가르치고 있다.
   모든 이에게 나처럼 되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개성이 있고 잘 해낼
수 있는 일이 있다. 모두 나처럼 되어서도 안 되며 될 수도 없다.
  한 나라에는 농사말고도 꼭 해야 할 일들이 너무도 많다. 나는 다만 어떤 일을 하든 저마
다 자기가 맡은 일을 충실히 하라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물론 이런 말은 흔히들 하고 또 흔히들 듣는 말이다. 그러나 그 흔한 말을 실천하기란 어
렵다. 왜냐 하면 진리란 실행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성경의 가르침은 모두가 진리이고 또한 평범하다. 그런데, 우리는 평범한 진리를 실행하기
가 어렵다. 그 또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평범 속에 있는 진리를 충실히 이행하는 사
람이 되어야 한다.
  가정은 사회의 중심이다. 가정에 충실치 못한 사람은 절대로 사회에서 성공을 거둘 수 없
다.
  자기 일에 충실치 못하면서 남의 일을 돕는다는 것은 봉사가 아니라 간섭이다. 사람들은
그런 사람으로부터 도움받기를 원치 않는다.
  흔히 자기 일에 충실치 못한 사람이 남이 하는 일을 비방하고 나라에 불평 불만을 한다.
그것은 남이 하는 일을 방해하고 나라가 하는 일에 방해하는 것이 된다.
  자기가 하는 일에 충실하다는 것은 단결과 화평을 뜻한다. 자기 일에 충실하면 남이 따르
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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