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희(1786∼1856)
조선시대 말기의 문신, 실학자, 서화가였다. 추사 완당이라는 호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는 호
가 매우 많으며 서체도 여러 가지이다. 충남 예산의 권세 높은 집에서 태어나 1819년 과거에 급
제하여 암행어사, 예조 참의, 설서, 검교, 대교, 시강원 보덕 등 주로 학문을 연구하는 벼슬을 지
냈다. 세도 다툼이 심하던 때라 여러 번 귀양을 갔으나 병조 참판, 성균관 대사성 등 정승급 벼슬
까지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벼슬자리에 있었던 동안보다 귀양살이했던 기간이 더 길었다.
귀양살이를 하면서 김정희는 학문과 예술 그리고 불교의 선 이론에 깊이 빠져들 수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실학자 박제가에게서 학문을 배워 실학자가 될 수 있었으며 청나라에 갔다가 고증학
자들을 만나 그 학문에 빠져들기도 했다. 그리고 그 영향으로 평생 금석학에 몰두했다. 그는 살아
서 많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자신의 실학 이론에 관한 책도 여러 권 남겼다.
1. 명문
봄바람이 아직도 차가운 북촌 골목길. 집집마다 대문에 입춘서 가 붙어 있다. 북촌은 대궐(경
복궁) 북쪽 동네란 뜻이며, 지금의 안국동, 재동, 계동, 가회동 일대이다.
북촌은 양반 세도가들이 많아, 시골에서 올라와 사는 가난한 양반들 동네인 남산골과는 대조적
이었다.
사인교를 하인에게 들려 타고 가던 대관이 어떤 집 대문에 써 붙인 입춘서를 보고 중얼거렸다.
허허, 그 글씨 참 잘 썼다! 저 집이 뉘 댁이냐?
네, 월성위 댁입니다.
그럼 김 판서 댁이로구나. 어쩐지 입춘서 하나에도 격이 있어 보인다 했지.
이 당시는 엄연한 신분 사회였다. 양반, 중인, 상인의 세 신분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김정희는 1786년(정조 10), 경주 김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김노경으로 이조 판서까지
지냈고, 어머니는 기계 유씨였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정희는 예사 아이와는 달리 24개월만에 태
어났다고 한다.
정희의 어머니 유씨 부인은 낳을 때가 지났는데도 아기가 태어나지 않아 몹시 걱정했다.
노경은 아내를 안심시키려고 명랑하게 말했다.
너무 걱정 마오. 옛날 김유신 장군도 어머니 뱃속에서 2년만에 태어났다고 하지 않소.
정희가 이렇듯 늦게 태어났다는 것이 그리 중요하지는 않다. 그는 충남 예산 용산월궁 에서 태
어났다. 즉 궁 이라 불리는 집에서 태어날 만큼 명문 출신이었다.
조선조 제16대 인조 때 김홍욱(1602∼1654)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벼슬이 황해 감사까지 올랐
다. 이 때, 궁중 비극이 있었다. 심양에 볼모로 갔다 돌아온 소현세자가 갑자기 죽는 사건이 있었
고, 세자빈 강씨가 음모에 말려 어린 세 아들이 차례로 죽었던 것이다. 김홍욱은 이런 강빈을 두
둔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인조의 심한 노여움을 사서, 임금에게 친히 심문을 받아 장살되었다.
그러나 홍욱의 증손 김흥경(1677∼1750)은 영의정까지 올라 가문을 다시 일으켰다. 흥경의 아들
김한신(1720∼1752)이 조선조 제21대 영조의 둘째 딸 화순옹주의 부마가 되어 월성위라 불렸다.
한신이 월성위가 된 것도 조상 중에 홍욱과 같은 훌륭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임금의 부마가 된다는 것은 신하로서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었다. 공주나 옹주는 영대봉사 라
하여 자자손손 제사를 모시며 가문의 자랑으로 삼았다. 더욱이 화순 옹주는 남편이 죽자 10여 일
동안 밥알 하나 입에 넣지 않고 슬피 울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래서 나라에선 열녀를 기리는 정
려문을 세워 주었고, 월성위 집안을 우러러 보게 되었다.
월성위가 죽자, 형의 아들 이주가 양자로 제사를 받들었고 예조 판서까지 올랐다. 이주에게는
아들이 4형제 있었는데, 둘째 아들이 노경이었다.
정희는 어려서 큰아버지 노영에게 아들이 없어 그 양자가 되었고, 월성위의 직계 후손이 되었
다. 소년 시절을 예산에서 지낸 정희는, 열살 때 한양으로 올라와 궁전처럼 으리으리한 큰 집에서
살게 되었다.
정희는 어려서부터 글읽기를 좋아했다. 글방에서 읽는데 만족하지 않고 조용한 절간을 찾아가
공부하기도 했다.
이 때는 일종의 문화 혁명기였다. 퇴계·율곡으로 대표되는 성리학 만 가지고서는 세상이 잘
다스려지지 않았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당파 싸움, 이런 것들이 원인이 되어 예로부터
의 질서가 무너지려는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1757년, 정성 왕후 서씨가 승하하자 영조는 1759년, 가난한 충청도 선비 김한구의 딸을 왕비로
삼았다. 이 분이 정순 왕후이다.
그러자 정순 황후의 오빠인 김귀주가 세력을 얻게 되어 세자의 장인 홍봉한과 대립하게 되었
다. 김귀주의 무리를 벽파 라 했고, 홍봉한의 무리는 시파 라 했다.
이리하여 1762년, 사도 세자가 벽파와 시파 싸움에 휘말려 뒤주 속에 갇혀 죽는 비극이 일어났
다.
한편 이 무렵, 청나라의 새로운 학문이 우리 나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보다 앞서 1603년(선
조 36), 이광정이 임진왜란 때 원병을 보내 주었다는 감사를 표하기 위해 연경에 사신으로 갔었
다.
이광정은 이 때 자명종(시계)의 소문을 들었다.
자명종이 무엇이오?
서양 사람 이마두가 우리 황제께 바친 신기한 물건인데, 시각을 알려 주는 것이오.
이광정은 자명종을 구하려고 연경을 헤매고 다녔다. 그러나 구하지 못하고 대신 세계 지도 한
권을 구해 가지고 귀국하였다.
당시의 선조 임금은 그 지도를 보고 감탄하며 말했다.
세상에는 명나라·서역·천축(인도)만 있는 줄 알았더니 서역국 말고도 많은 나라가 있구나.
귀중한 그림이니 성균관에 보내어 공부하도록 하라.
그 뒤 이광정은 연경을 세 번이나 다녀왔고, 이마두가 풀이한 천주실의 를 구하여 열심히 읽었
다. 이광정은 신앙으로서가 아닌 학문적 소개로서 천주교를 알렸다.
이어 광해군 때 유몽인과 허균은 천주교에 대해 좀더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여보게, 교산. 요즘 명나라에 대서 사람들이 와 있다는데, 그들은 우리와 다른 가르침을 따르
고 있다지요?
천주를 위하는 교라고 합니다.
그건 나도 알지만 그 가르침은 도교도, 유교도, 불교도, 선도 아니라는데 대체 무엇이오?
그게 바로 천주교라는 거지요. 먼저 천주가 이 천지를 만들었고, 사람의 넋은 짐승과는 달리
불멸이며, 자기가 생전에 한 일에 따라 천당이나 지옥으로 간다고 합니다.
그 뒤 1631년(인조 9), 정두원이 사신으로 연경에서 돌아와 천리경(만원경), 자명종, 서포(서양
식 포), 연초화(불꽃놀이용 화약)를 임금에게 바쳤다. 그에 앞서 청나라 심양에서 볼모로 있던 소
현 세자는 우리 나라로 돌아올 때, 아담 샬이라는 사람으로부터 천문책, 산학책, 지구의, 천주상
등을 선물로 받아 가지고 돌아왔다.
그러나 당시 성리학(주자학)을 받드는 학자들은 주자학 이외의 학문을 모두 사학 이라 하여 배
척했다. 서양의 것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조선조 제18대 현종 때의 사람으로 윤휴가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이 뛰어났고, 퇴계나 율
곡의 학문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 소문을 듣고 우암 송시열이 윤휴를 찾아가 토론을 벌였다.
윤휴가 공손히 말했다.
우암 선생님, 우리 나라 학문은 문이 너무 좁지 않습니까?
좁아야지. 너무 넓으면 학설이 많아져 싸우기만 하거든. 지금도 이기론 때문에 싸우고 있는데
더 싸우라고?
그렇지만 학문이 넓어야 마음대로 말할 수 있지 않습니까? 주자를 내세우는 사람이 있다면 왕
양명을 옳다고 하는 학자도 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
글세, 중국 사람들은 도량이 넓으니까 상관없겠지만, 우리 나라 사람들은 소견이 좁아 싸움질
만 할 것 같은데.
그것은 우암 선생님의 고집이십니다. 학문적 싸움은 발전을 위해 얼마든지 해도 좋은 것 아니
겠습니까?
당파로 볼 때 우암은 노론이었고, 윤휴는 남인이었다.
이 때의 학문은 우암처럼 주자학을 절대적인 것으로 받들고 지키려는 사람이 많았다.
정희도 어느덧 열다섯 살이 되었다. 그는 그 동안 전통적인 학문을 배웠다. 그러나 박제가가 지
은 북학의 를 읽고 나서부터 학문에 대한 새로운 눈을 뜨게 되었다.
아버님, 저는 이제 초정에게 글을 배우고 싶습니다.
초정이 누구냐?
네, 박제가입니다.
아니, 검서관으로 있다는 박 아무개 말이냐?
아버지 노경은 단박에 얼굴을 찌푸렸다. 정희는 어려서 백부한테 출계(양자로 갔다는 뜻)했지
만, 생부 노경과 자주 만나서 자기의 장래에 대해 의논하곤 했다.
아버님, 신분이 문제가 아닙니다. 초정은 승하하신 상감께서 몹시 신임하셨고, 그의 학문은 당
대의 으뜸이라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역시 전통적 주자학을 받드는 사람이었다.
한편, 1776년 영조가 승하하고 사도 세자의 왕자 세손이 왕위에 올랐다.
이분이 조선조 제22대 임금 정조이다. 정조는 아버지가 비명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정치에는 별
관심이 없고, 학문을 닦는 데만 몰두 했다. 그래서 대궐 안에 규장각 을 두어 대대로 내려오는 선
왕들의 저서나 글씨·그림 따위를 보관하도록 했다.
규장각 건물은 이층으로 되어 있고, 내부도 검소하게 꾸며졌다.
이 규장각을 일명 내각 이라 하여 그 곳에서 내각일기 를 쓰게 하였고, 다시 공공 기록으로 일
성록 을 기록하도록 하였다.
1779년(정조 3), 임금은 특별히 양반의 서자로 글 잘 하는 이덕무·유득공·박제가·서이수 등
4명을 검서관으로 발탁했다.
정희의 아버지 노경이 고개를 내저었던 것도 이들이 실학파의 이용후생 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었고, 사회적으로 대접을 받지 못하는 서자(첩의 자식)였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정희가 거듭 조르자 마침내 말했다.
너 좋을 대로 하려무나. 그러나 천주학인지 무엇인지 거기에만은 물들지 않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저는 학문을 배울 따름이지 딴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김정희와 박제가의 만남, 이것은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었다.
김정희는 스물네 살 때 과거에 응시하여 진사과에 합격했다.
2. 금석학
실학파는 다음의 세 가지 흐름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1) 경세치용파는 반계 유형원과 성호 이익으로 대표되는 학파로, 정치·사회·경제 등 제도의
연구와 그 개혁을 목표로 삼았다. 다산 정약용 역시 여기에 속하며, 이 학파의 학문을 집대성한
것으로 유명하다.
2) 이용후생파는 상공업과 생산 기술에 대한 연구 및 혁신을 주장했다. 이들은 당시의 불합리한
신분 차별 타파를 외쳤다. 이용후생을 주장한 사람은 연암 박지원, 담헌 홍대용, 형암 이덕무, 냉
재 유득공, 초정 박제가를 꼽을 수 있다.
3) 실사구시파로는 김정희를 들 수 있다. 정조는 학문을 사랑했지만 시파와 벽파 싸움에 늘 시
달렸다. 예를 들어, 왕은 서학(천주교)도 학문의 하나로 보고 너그럽게 대하려 했지만 뜻대로 되
지 않았다.
천주교는 그 전부터 이미 있었지만, 1783년 이승훈이 연경에 가서 세례를 받음으로써 남인 학
자들 사이에 널리 퍼졌다. 이리하여 1791년 신해교난 이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그리 심하지 않았는데,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정순 대비가 수
렴 청정 을 함으로써 대대적인 천주교 탄압이 가해졌다. 이것이 신유교난 으로 이가환·이승훈 등
이 처형되고, 정약용은 귀양을 갔다.
김정희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천주교만은 가까이하지 말라고 당부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김정희는 초정 박제가에게 학문을 배우면서 연경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초정은 김정희의 스승이었고, 나이도 훨씬 많았지만 김정희에게 꼬박꼬박 존대말을 썼다.
연경에는 청나라 대학자가 많습니다. 지금의 대학자로선 옹방강과 완원이 있지요. 우리 나라
학자들은 그런 학자를 모르고 있어요.
초정의 말은 우리 나라 학자들이 성리학에 대해선 너무도 잘 알고 있으나, 그 밖의 학문은 모
른다는 뜻이었다. 중국엔 유학 말고도 제자 백가 가 있고, 또 수·당나라 시대의 화려한 문화도
있다. 이런 것은 서로 학문적 관계가 있고, 그런 옛날의 학문을 과학적 방법으로 고증하는 연구
활동(고증학)이 활발했다.
저도 고증학을 배울 기회가 있을까요?
추사야 집안이 좋으니까 언제라도 연경에 가실 기회가 있겠지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추사의 가슴은 부풀었다.
우리들이 주자학만 신주처럼 모시고 있느라 새 학문을 접하지 못한 채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
었구나.
이윽고 추사가 바라던 기회가 찾아왔다. 1810년(순조 10), 그의 나이 스물다섯 살 때의 일이다.
황해도 장연에 사는 어부 김봉년 등이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산동 반도에 표류했다. 청나라는
이들을 보호했다가 육로로 송환해 주었다.
이런 일이 있으면 으레 사신을 보내어 감사를 표시하는 게 외교 관례였다. 마침 동지사 를 보
낼 때도 되어 정사로 예조 판서 박종래가, 부사는 이조 판서 김노경이 가게 되었다. 김정희는 이
해 10월, 사신 일행을 따라 나섰다.
떠나는 날, 많은 친지들이 모화관 까지 배웅을 나와 주었다. 초정의 모습도 보였다.
추사, 4천리나 되는 길이니 무사히 다녀오시오. 연경에 가면 그 나라 학문들도 만나 보고 책도
많이 참고하고 오시구려.
고마우신 말씀입니다. 그들과 만나서 되도록 많은 것을 배우겠습니다.
일정한 인원 제한이 있었으나 짐 나르는 인부까지 합쳐 일행은 모두 100명에 가까웠다. 그들은
질서 있게 무악재를 넘어 벽제관에서 점심을 먹은 뒤, 거기서 다시 말을 갈아 타고 파주에 이르
러 하룻밤을 쉬었다.
압록강을 건너 일행은 청나라 관리에게 수속하고, 진강성까지 들어가 하룻밤을 묵었다. 다음날
은 탕참을 지나 책문에서 쉬었는데, 이 곳은 청나라와 우리 나라 사람들이 교역을 하는 곳이라
민가도 많았다.
다시 봉황성, 송참, 진이보, 요동 벌판에 들어섰다.
벌써 눈이 내려 민가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칠백 리 벌판은 온통 눈의 세계였다.
춥구나. 털옷을 꺼내 입자.
이윽고 성경에 도착하여 며칠을 묵었다. 이 곳은 김흥경과 더불어 청나라 황실과 인연이 있는
곳으로 아주 중요하게 여겨지는 곳이었다.
여기를 떠나 변성, 거류하, 백기보, 소흑산, 소릉하, 사하, 전둔위, 고령위 등을 지나 만리 장성
의 산해관에 이르렀다.
천하 제일관 이라는 현판의 붓글씨가 유난히도 젊은 추사의 눈길을 끌었다. 추사는 한참 동안
그 글씨를 바라보느라 그 자리를 떠날 줄 몰랐다.
명필이다! 과연 나라가 크니 좋은 글씨도 있구나.
조선을 떠난 지 한 달 남짓하여 연경 40리 못미처까지 이르렀다. 거기서 역관을 보내어 조선의
사신이 이르렀음을 통지했다. 그러면 사신을 영접할 장군이 동악묘 앞까지 나온다.
정말 북경성은 크구나. 사십 리 밖에서도 보이는 걸 보니…….
그렇다네. 외성, 내성이 있고, 열두 대문이 있다네.
사관에 들자, 청나라 관아에서 쌀, 고기, 술, 차 따위를 가져왔다. 그 밖에도 사신들이 먹을 음
식을 거의 매일처럼 가져왔다.
추사는 조바심이 났다. 빨리 자유 시간을 가져 청국학자들과 만나고 싶어서였다.
어느덧 해가 바뀌었다. 가까스로 틈을 낸 추사는 먼저 조강을 만나러 갔다. 조강은 친절하게 그
를 맞아 주었고, 유리창 에 있는 오거류 책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아니, 저렇게 산더미처럼 책이 쌓여 있다니……!
추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것은 모두 고서입니다. 누구라도 살 수 있지요.
조강의 설명에 추사는 다시금 놀랐다.
아, 동방의 작은 나라에 태어난 것이 한스럽기만 하구나!
그는 자기 자신이 우물 안의 개구리였음을 뼈저리게 느꼈던 것이다.
듣건대 추사는 술도 잘 마시고, 시도 잘 읊는다던데 우리 술이나 마십시다.
좋습니다.
자리를 잡고 나자 조강이 물었다.
그래, 많은 책을 보신 소감이 어떻습니까?
초정 선생님의 말씀이 옳았소. 과연 천하 으뜸의 나라라는 생각이 들어서 절로 감탄했습니다.
조강은 이 대답에 만족한 모양이었다.
먼 길을 오시느라 피로하시겠소. 우리 나라의 명물은 글뿐 아니라, 요리도 남의 나라에 뒤지지
않을 듯하니 마음껏 드시구려.
어느 음식을 먹어도 입 안에서 슬슬 녹았다.
청국 사람은 이토록 잘 먹고 지내는구나.
하고 생각하니 추사는 문득 고국의 헐벗은 백성들 생각이 났다.
황상(청국 황제)의 정치가 어떠하시오니까?
하해처럼 넓으신 폐하께선 백성을 다스리는 데도 열심히십니다.
다음 날, 추사는 법원사로 놀러 갔다. 시내에 절이 있다는 것도 조선과는 달랐다. 때마침 문인
학자들이 놀이를 하고 있어 추사를 반갑게 맞아 주며 좋은 차를 대접해 주었다.
추사는 어디를 가나 향내 나는 차를 대접받아, 차맛도 익히 알게 될 정도였다. 추사는 법원사에
서 시 한 수를 읊었다.
명문의 자제 조옥수는 가을물같이 맑고, 옥처럼 깨끗하구나.
벌써 이 때만 하여도 추사의 글씨는 독특한 글씨체를 이루었고, 특히 예서를 잘 썼다. 조강은
추사가 붓을 휘둘러 글씨를 쓰는 것을 보더니 감탄했다. 그러나 충고도 아끼지 않았다.
추사, 좋은 글씨를 쓰시는구려. 당대의 대가 옹담계(옹방강)의 글씨를 보는 것만 같소이다.
추사는 담계라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저의 글씨는 아직 서투릅니다. 그러잖아도 옹 선생을 뵙고자 했었지요. 안내를 좀 해 주십시
오.
어렵지 않습니다. 내 친구 서송이 바로 옹담계의 제자입니다.
다음 날, 추사는 조강, 서송의 안내로 옹방강의 집을 방문했다. 아침이라 날씨는 매우 차가웠다.
추사는 안내를 받아 서재로 들어갔다.
앗!
지금까지 유리창에 있는 서점에서 보았던 것보다 더 많은 서적이 쌓여 있지를 않은가. 추사는
감탄하며, 이 때 일흔여덟 살이던 옹방강에게 공손히 절을 했다. 노 선생도 일어서며 추사를 반가
이 맞아 주었다.
동방에서 오신 젊은 학자여, 나는 벌써 귀국의 박초정으로부터 그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지
요.
박제가는 편지로 추사를 소개했던 것이다.
제가 멀리 여기까지 온 것은 선생님의 높으신 이름을 듣고 직접 가르침을 받고자 해서입니다.
고맙소. 외국에서까지 알아 주시니 감사하오이다.
옹방강은 금석학(돌이나 쇠붙이에 새겨진 글을 연구하는 학문)의 대가로, 글씨도 잘 썼다. 추사
가 주위를 둘러보았더니, 여기저기 탁본이 걸려 있고, 저마다 자세한 내력이 기록되어 있었다.
담계는, 송나라(420∼479) 때 세워진 화도사·옹선사에 있는 사리탑 명을 탁본하였으며, 당나라
초기의 서도가 구양순(557∼641)이 쓴 글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틀림없는 구양순의 진필이었
다.
아, 천 수백 년이나 지난 글씨가 지금 내 눈앞에 있다니…….
김정희는 말로만 듣던 구양순의 글씨를 보는 순간, 가슴마저 떨렸다. 조선에도 구양순의 글씨체
라는 게 들어와 있었지만 그것은 두 번 세 번 복사된 것이라 진본과는 아무래도 달랐다.
이렇듯 훌륭한 것을 용하게 구하셨습니다.
아, 그것은 내가 강남 지방 향시 시관으로 갔다가 구한 것이오.
강남 지방에는 문물이 많군요.
그렇소. 강남이야말로 학자가 많이 나와 우리 중국의 문고라고 말하지요.
조선에는 영남 지방을 학자의 고장이라고 일컫고 있었으나, 그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금석학을
연구하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은 없었다. 추사는 부끄러워 얼굴이 뜨거워졌다.
해동에는 금석문이 많겠지요?
네, 있습니다.
추사는 엉겹결에 대답은 했지만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다음에 옹방강은, 소동파(1036∼1101)가 쓴 천제오운첩 을 추사 앞에 내놓았다.
마치 소동파가 살아 방금전에 글씨를 써서 놓은 것만 같았다. 좋은 종이에 쓴 글씨는 아주 선
명했다.
동파 선생이 살아 여기 계신 듯합니다.
그렇소. 예로부터 어떤 학자든지 자기가 사숙하면 그분이 꿈에까지 뵈는 법이지요.
추사는 많은 탁본을 구경했고, 몇 가지를 선물로 받기도 했다.
옹방강 집에서 나온 추사는 조선의 학자들이 성리학만 연구하는 것이 답답하게 여겨졌다.
며칠 뒤, 추사는 완원을 찾아가 보기로 하였다. 완원은 청국의 으뜸가는 고증 학자였다.
완원은 진나라(기원 전 221∼206) 태산의 잔비와 한나라(기원 전 202∼서기 8) 연희 연간에 새
긴 화산묘의 비석 등 두 비의 탁본을 얻은 뒤, 자기가 사는 연성공저에 새로이 집을 짓고 그 집
을 태화쌍비지관 이라 부르고 있었다.
연성공저 란 나라에서 공자의 후손에게 내려 준 집이라는 뜻이다. 완원의 부인이 연성공 공헌
증의 딸이라, 완원은 연경에 오면 이집에서 거처했다.
추사는 완원이 연경에 와 있다는 소문을 듣고 태화쌍비지관으로 찾아갔다. 완원은 당시 청나라
고관이어서 몹시 교만할 줄 알았는데, 만나 보니 그런 내색은 조금도 보이질 않고, 학자로서 나무
랄 데 없는 인격자였다.
해동에서 젊은 학자가 왔다는 말을 들은 지 오래요. 어서 오시오.
감사합니다.
추사가 의자에 않아 자세히 관찰하니, 완원은 매우 점잖았고, 어디로 보나 학자의 모습이 역력
했다. 이윽고 차가 나왔다. 주인이 먼저 맛을 보고 손님에게 권했다.
어서 드십시오. 이 차는 승설차라 합니다.
완원의 호는 운대로, 그는 추사에게 귀중한 고서를 보여 주었다.
귀하의 나라에선 고려 때 문선 을 간행한 적이 있는데 보신 적이 있습니까?
추사는 이 물음에 아찔했다. 왜냐 하면 조선에선 문선 을 읽지 않고, 고문진보 만 일고 있었기
때문이다. 등에서 진땀이 흘렀다. 하지만 추사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전에 고려 간행본이 있었으나, 지금은 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에서는 과거에 문선
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은 거의 잊혀져 가고 있는 형편이지요.
아, 그러시오. 귀국은 명나라 때의 법을 충실히 지키고 있군요.
그 말이 언뜻 빈정거리는 것처럼 들렸지만, 결코 그런 뜻은 아니었다. 학문은 그 시대에 맞지
않는다고 옛것을 버리거나 배척한다면 발전이 없다.
한나라,당나라 때의 경서를 연구하고 주석하는 것을 훈고학 이라 한다. 완원은 훈고학자로서의
의견을 말했을 뿐이다.
경학을 하든지 혹은 그 이외의 다른 학문을 할 대에는 우선 문자와 훈고를 잘 알아야 합니다.
추사는 거의 두 달 동안 유리창을 중심으로 많은 청나라 학자들과 교분을 맺고, 1811년 3월에
귀국했다.
추사는 박제가에게 청나라 학자들의 소식을 전해 주고, 명희,상희 두 아우에게 청나라 학계 소
식을 들려 주었다. 또 친구 권돈인,신작과 더불어 금석학과 고증학에 대해 열심히 연구를 했다.
그리고 꾸준히 청나라 학자들과 편지 왕래를 하였다.
추사는 뭐니뭐니 해도 완원의 학문을 크게 칭찬하고, 그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완당 이라는 호
를 새로이 쓰기 시작했다.
국내는 여전히 홍수와 가뭄으로 백성들은 헐벗었고, 1815년엔 경상도와 강원도 일대에서 천주
교에의 대탄압이 있었다(을해교난).
추사는 답답한 마음을 풀기 위해 동생들과 친구와 더불어 세검정으로 소풍을 나갔다.
형님, 산에라도 오르시지요?
산에 가자고?
북한산 비봉에 올랐다가 삼각산 쪽으로 가는 게 어떨까요?
비봉이란 말에 추사는 귀가 번쩍 띄었다. 비봉이란 산꼭대기에 비석이 있다고 해서 지어진 이
름이 아닐까?
그렇게 하도록 하자. 모두 함께 산에 오르자.
두 동생, 그리고 친구 김경연과 함께였다. 그들은 북한산 비봉을 향해 오르기 시작했다.
3. 실사구시
때는 음력 7월로, 산길을 올라가는데 땀이 비오듯 하였다. 승가사 가까이에 이르자, 울창한 숲
이 있어 햇볕을 가려 주니 살 것만 같았다. 승가사는 신라 때 지은 절로, 그 당시엔 꽤나 큰 절이
었다. 그 뒤, 고려 때에도 이 절은 중하게 여겨졌다. 동굴 안에는 돌부처가 온화한 얼굴로 그들을
맞았다. 동굴 앞에 비석이 있어 그것이 완당의 눈길을 끌었다.
탁본을 뜰 수 있을까?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글씨는 닳아 없어져 거의 알아 볼 수 없었다. 게다가 비석 자체가 깨져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아, 슬프구나! 옛것에 대해 우리는 너무도 소홀히 하고 있구나.
그 비석은 고려 때 이자겸이 불교를 깊이 숭상하여 세운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 들어와
불교가 탄압을 받으면서 절이나 비석 따위가 망가진 채로 방치되어 있었다.
스님, 이 근처에 비석이 있다는데, 어디로 가야 찾을 수 있습니까?
네, 바로 이 뒤에 있습니다만 다른 길을 없습니다. 소승이 길잡이를 해 드리지요.
그러나 완당은 비봉에서 발견한 비석에 더 관심이 쏠렸다. 돌에는 이끼가 끼어 바위옷이 퍼렇
게 돌아 있었다. 완당은 일일이 긁어 내며 글자 한 자 한 자를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진흥태왕급 중신등순수…… 까지 읽은 완당은 깜짝 놀라며 외쳤다.
이 비는 언제 때의 것이라고 하오니까?
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고려 때 임금께서 요기에 오셨다가 세운 비라고 하옵니다.
그래요? 어느 대 임금이라고 합디까?
자세히는 모르지만, 이자겸이 득세할 때 임금님을 모시고 승가사에 와서 시주한 뒤 기념으로
세웠다고 하기도 하고, 무학 대사의 비라고도 하옵니다.
그렇소? 사실은 이 비가 바로 신라 진흥왕께서 이곳까지 행차하여 국경을 정하신 비요!
완당은 거의 미친 사람처럼 읽고 또 읽어 겨우 86자를 알아 가지고 총총히 산을 내려갔다.
1816년(순조 16) 때의 일이었다.
이내 다시 올라가려고 했으나, 1년 남짓 지난 뒤에야 완당은 조인영과 함께 다시 그 곳에 올라
가게 되었다.
이번에는 비석을 영구히 기념하기 위해 각자장이까지 데리고 갔다.
이 비는 신라 진흥 대왕의 순수비로서, 병자년 7월에 김정희와 김경연이 와서 읽고, 정축년 6
월 김정희와 조인영이 와서 조사한 결과 86자를 남겼다.
이런 뜻의 글을 새기고, 진흥왕의 순수비 로 확정하였다. 이로써 김정희는 금석학 연구의 큰 성
과를 처음으로 세상에 발표했다. 완당은 1819년, 조인영과 하께 문과에 급제했다. 임금은 월성위
의 사손(제사를 받드는 손자)이 급제했다 하여 축하하는 뜻으로 직접 만나 보았고, 승지를 종묘에
보내어 보고하기도 했다.
완당은 설서, 검열이라는 벼슬을 거쳐 규장각 대교가 되었다.
1822년 10월, 아버지 김노경이 사신으로 청나라에 가게 되었다.
좋은 기회다. 내 대신 너희가 가서 견문을 넓히고 돌아오너라.
완당은 동생 김명희와 김선신, 오창렬 등 자기의 고증학을 잘 아는 제자들을 딸려 보냈다.
완당은 북한산 비봉에 있는 진흥왕 순수비를 발견했을 때 이 비에 새겨져 있는 진흥 이라는 칭
호가 진흥왕의 죽은 뒤의 시호 가 아니라 살아 있을 적의 칭호였다는 것과, 그 비를 세운 때가
진흥왕 29년, 즉 남천주(지금의 이천)의 설치 이후라는 것도 연구 결과 알아냈다. 또 그는 함흥
황초령에 있는 황초령비 에 대해서도 널리 기록을 고증하고 비문을 해석했다.
이미 그는 추사체 로 알려진 글씨의 대가로, 청나라 서도의 대가와 교류가 있었다.
앞서 완당이 서른 일곱 살 때, 김노경이 청국에 가게 되었다. 김노경은 두 번째로 가는 길이라
청국 길이 전혀 생소하지 않았다. 더욱이 작은 아들 명희를 데리고 가게 되어 더욱 마음 든든했
다. 연경에 도착하자, 명희는 완당과 편지 왕래가 있던 이월정을 먼저 찾았다. 그는 광둥 포정사
까지 지낸 사람으로 명희를 반갑게 맞아 선무문 밖 장춘사에서 연회를 베풀고, 여러 친구들을 소
개하며 시와 술로써 하루를 즐겁게 놀았다.
장부 의기를 존중히 하여
사해의 사람과 교류하도다.
그대와는 비록 다른 나라라 하지만
조금도 그런 눈치 없이 친하게 지내네.
김명희, 김선신, 오창렬은 중국 학자들과 서로 시를 교환했다. 또 그들은 틈나는 대로 유리창에
가서 중국의 서적을 샀다.
해외에서 오셨으니 그냥 드려야 마땅하나 원가만 받겠습니다.
주인은 값을 싸게 해 주며 친절히 대해 주었다.
이 때 김노경은 세종 때의 음악가 박난계(박연)가 지은 난계유고 의 발문을 쓰고 출판까지 했
는데, 그것을 이월정, 섭동경, 등수지에게 한 부씩 기증했다.
등수지는 당시 청나라 전서 의 대가였다. 그는 답례로 자기가 친필로 쓴 글을 노경에게 주었는
데, 이것이 완당에게 전해져 글씨를 쓰는 데 참고가 되었다.
1823년, 완당의 나이 서른 여덟 살이었다. 이 해 7월, 진하사 박종훈이 청나라에 갈 때 수행원
으로 완당의 제자 이상적이 따라 갔다. 이상적은 이 때부터 시작하여 열두 번이나 연경을 내왕했
다. 김정희는 그를 통해 청국학자들과 편지 내왕을 하였으며, 자기 글씨를 완원에게 보냈다. 완원
은 추사의 글씨를 보고 크게 칭찬하였다.
과연, 신필이다! 해동 수천 년에 이만한 대가는 없으리라.
추사의 글씨는 부드럽고 고운 것이기보다 기운차고 씩씩했다. 그는 귀양 가서도 글씨를 썼고,
그 곳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마음을 달랬다. 그런 것이 글씨에 그대로 나타났다.
추사는 또한 난초도 잘 쳤다. 난초를 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단번에 죽 치는 것이기 때
문이다.
추사는 또 매화 그림도 좋아했다. 그는 매화를 사랑하여 호를 매화구주 라고도 하였다. 그는 매
화 그림이 있는 병풍을 치고, 매화 그림 앞에서 매화 차를 마시며 매화에 대한 100여 편의 시를
지었다.
4. 불안한 세상
1827년, 순조 임금은 신하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말을 하였다.
세자 나이 이미 열아홉 살이니, 이제 세자에게 정사를 맡기고 과인은 뒤로 물러나 있겠소.
순조는 이 때 서른여덟 살로 결코 은퇴할 마한 나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천재 지변이 잇따라
일어나자 왕위를 내놓고 싶은 생각을 가졌던 것이다. 이리하여 효명 세자가 대리 청정 을 하게
되었는데, 불행하게도 세자는 1830년 5월, 스물두 살의 나이로 병사했다.
효명 세자가 대리 청정을 하던 기간에는 김로, 홍기섭, 김노경 이 세 사람이 조정의 실권을 잡
고 있었다. 그러나 세자가 죽자 반대파들이 이들을 공격하고 나섰다.
물론 모두가 모함이었다. 한 번 반대당이 들고 일어나자 여기저기서 덩달아 따르는 무리들이
생겨났다.
김로, 홍기섭, 이인부, 김노경은 간신이니 엄중히 쳐단하시옵소서.
또 오위의 부사과 윤상도 역시 박종훈, 신위, 유상량같은 사람들을 공격했다.
이래서 김노경은 남해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뒤에 전라도 강진 고금도로 옮겨졌다.
완당은 이 때 마흔다섯 살이었다. 억울하다고 상소하여 윤상도 등이 귀양을 갔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풀려나지 않았다.
나라가 작은데도 오히려 청국보다도 싸움이 더 잦다. 성현의 가르침을 배웠다고는 하지만 모
두가 잘못 배웠구나.
1834년 11월에 순조가 승하했고, 세손(헌종)이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헌종은 이 때 여덟 살밖에 되지 않아 대궐의 가장 어른이던 순원 대비 김씨가 수렴 청
정을 하였다. 이 때문에 안동 김씨의 세력은 다시 커졌고, 김정희의 아버지 김노경의 석방은 더욱
어려워졌다. 김노경이 귀양 간 것도 안동 김씨와 경주 김씨의 집안 싸움 때문이었다.
이 무렵, 완당은 병조 참판을 거쳐 형조 참판으로 있었는데 그것마저 그만 두었다.
완당 김정희는 일생 동안 귀양을 열세 번이나 갔다. 쉰여섯 살 때인 1840년에는 멀리 제주도로
유배가기도 했다.
1840년(헌종 6), 앞서 대신들을 모함했다는 죄목으로 추자도에 유배된 윤상도가 이번에는 반역
죄를 꾸몄다하여 서울에 끌려 올라와 아들과 함께 능지처참 을 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 때 대
사헌 김홍근이 상소했다.
이번 사건에는 김노경도 관계되어 있다 합니다. 그도 처단하옵소서.
이래서 이미 고금도에 귀양 가 있던 김노경에겐 사약이 내려지고, 완당도 제주도로 귀양을 가
게 되었던 것이다.
한 번 가면 살아서 돌아오기가 어려운 곳이 탐라국이라든가.
완당은 하늘을 우러러보며 탄식했다. 권세가 무엇이고 부귀가 무엇인데, 왜 이렇듯 세상은 불의
로 가득 차 있는 것일까!
완당은 제주도에서 9년 동안 유배 생활을 보냈다. 유배자는 그 곳 관리의 감시 아래 보통 사람
과 비슷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한양에서 학문이 높으신 분이 오셨다는군. 그분에게 우리 자식들 공부나 시키세.
그 곳 사람들은 완당에게 자식들의 글공부를 부탁하는 대신 보리쌀이나 해산물을 가져다 주었
다. 완당은 그 아이들을 가르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면서도 학문에 대한 열의만은 식지 않
았다. 옛날처럼 청국 학자들과 편지를 주고 받지는 못했지만, 인편이 있는 대로 책을 보내달라고
동생에게 부탁했다.
제주도에 유배된 지 4년째 되던 해에 부인이 세상을 떠났다는 슬픈 소식을 전해 들었다.
1849년, 완당은 예순 네 살의 나이를 기해 기나긴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고향인 예산으로 돌아
갔다. 이 때, 조정에선 헌종이 승하하고, 강화도에서 나무꾼으로 살아가는 원범을 데려다가 왕위
에 앉혔다. 이 당시 많은 왕족들이 보통 서민보다도 못한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원인을 알자면, 멀리 영조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영조는 무슨 까닭에서인지 뒤
주 속에 가두어 굶어 죽게 한 사도 세자를 끝내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리하여 사도 세자의 네 아
들, 정조,은신군,은언군,은전군 역시 돌보지 않아 생활마저 어려운 형편이었다.
이들의 외조부 홍봉한은 왕손들의 처지가 너무나 가엾어서 여러 상인들에게 은밀히 일러 쌀이
나 옷감을 가져다 주도록 했다.
언젠가 빛을 볼 날이 있겠지.
그런데 영조가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크게 화를 내며 상인들을 잡아다가 곤장을 내리쳤다.
다시는 물건을 대 주거나 먹을 것을 대 주지 마라.
이 때문에 왕손 가운데 은신군과 은언군은 제주도로 보내졌고, 홍봉한은 벼슬에서 쫓겨났다. 이
무렵부터 벽파와 시파의 싸움이 심해졌다.
그 후, 영조는 자신의 아들 사도 세자를 죽인 것을 후회하며, 세손을 진종(사도 세자의 형님, 일
찍 죽었음)의 양자로 삼고, 장차 왕위를 물려주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좌의정 홍인한에게 물었다.
과인이 즉위한 지 벌써 51년이 되었소. 이제 세손에게 대리 청정을 시킬까 하오.
인한은 봉한의 아우로 세손에겐 종조부가 되었다. 그러나 정후겸 등과 손잡고 세손을 없애려고
했던 인물이었다.
전하, 아직 이릅니다. 동궁이신 세손은 조정의 일을 잘 모르옵니다.
인한의 반대에 영의정 한익모도 찬성했다. 이 때, 서명선이 상소했다.
전하, 세손에게 대리케 하는 일은 공명 정대한 일입니다. 영상이나 좌상은 동궁에게 많은 죄를
지은 탓으로 이를 막으려 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을 엄하게 다스리시옵소서.
영조도 이 건의를 받아들여 세손에게 대리 청정을 시켰다.
그 뒤, 정조는 왕위에 오르자 홍인한 등에게 사약을 내렸고, 일당인 홍술해는 흑산도로 귀양을
보냈다. 그러자 홍술해의 아들 홍상범이 역모를 꾸몄다. 홍상범은 일가 아저씨뻘인 홍필해를 찾아
가 말하였다.
아저씨도 알다시피 정세가 바뀌니, 우리 홍씨 집안만 쑥밭이 되고 말았습니다.
음.
지금 세손이 왕위를 이었지만, 본래는 은신군이 보위에 오르셔도 되지 않습니까?
그렇지. 똑똑한 분이셨는데 쓸데없이 김귀주가 내세우는 바람에 비명에 가셨네.
그렇습니다. 달리 마땅한 분이 없을까요?
있기야 있지. 은전군이 있지 않은가!
이렇게 역적 모의는 이루어졌다. 홍필해는 1776년 8월, 부하 몇 사람과 함께 대궐로 침입하여
정조를 시해할 계획을 꾸몄다. 그리고 실제로 대궐 담을 뛰어넘었으나 군졸들에게 잡히고 말았다.
임금은 사건이 워낙 중대한고로 친히 심문했다.
누구를 추대코자 하였더냐?
은전군이 영특한 줄로 아오.
정조는 왕손이 또 역모에 걸려든 것을 알고 한탄했다.
역적의 우두머리는 처치해야 하옵니다!
신하들이 매일처럼 조르는 바람에 정조도 할 수 없이 은전군에게 사약을 내렸다.
한편, 은언군도 무사할 수 없었다. 그는 상계군,풍계군,전계군 세 아들을 두었는데, 상계군이 독
약을 먹고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자 벽파는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인 왕대비를 움직여 은언
군마저 죽이라고 아우성이었다. 1786년(정조 10)에 있었던 일이다. 임금은 하나 남은 동생마저 죽
일 수 없어 강화도에 집을 마련하고 귀양 보내는 형식으로 그 곳으로 보냈다.
1789년 (정조 13), 강화 유수 윤승렬은 슬그머니 은언군을 풀어주었다. 이것을 알게 된 정순 대
비는 펄쩍 뛰었다.
겨우 3년 전, 역적 인(은언군)을 강화로 보냈는데, 누가 그를 한양으로 오게 했단 말인가? 대
신들은 임금께 상주하여 죄인을 즉시 처단케 하라.
1851년 완당의 나이 예순여섯 살이었다. 그런데 엉뚱한 불똥이 그에게 튀었다.
헌종의 3년상이 지나고, 종묘로 신주를 모실 때 문제가 생겼다. 종묘 제도로 오묘 라는 게 있
다. 즉 헌종부터 따져 차례로 다섯 분만 종묘 정전에 모시고, 나머지 윗대 신주는 영녕전으로 옮
겨 보통의 기제사는 지내지 않고, 1년에 한두 번 시제만 올리게 되어 있다.
이 때 영부사 정원용이 주장했다.
오묘의 제도는 시조와 4친만 제사 지내는 것으로, 지금 진종,정조,순조,익조,헌종의 5대가 내려
왔으나 진종은 마땅히 조천 해야 하오.
그러자 영의정 권돈인이 반대했다.
안 될 말씀이오. 진종, 정조, 순조, 익종, 헌종 5대를 내려와 조천하는 것은 마땅히 옳은 일이나
지금의 상감으로선 진종이 증조뻘이오. 즉 진종, 은언군, 전계군, 상감마마, 이렇게 되면 증조부를
조천하는 것이 되오. 예로부터 고조까지는 제사를 지내는 것이 옳지 않소?
그러나 권돈인의 주장이 패하고 말았다. 그래서 영의정은 파직되고 조정에서 쫓겨났다. 이 때
홍문관 교리 김회명이 일을 더욱 크게 만들었다.
권돈인은 김정희의 파로 이번 일에도 그가 배후에 있소. 마땅히 벌 주어야 하오.
이래서 완당은 또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귀양 갔다. 남쪽 끝 제주도에서 돌아오자, 이번엔 북쪽
끝이라고 할 수 있는 곳으로 보내진 것이다.
이 때, 동생 명희와 상희도 각각 관직에서 파직되고, 고향 예산으로 유배되었다.
아우들은 형이 떠나는 동대문 밖까지 쫓아와서 소리내어 울었다. 그러자 완당은 그들을 꾸짖었
다.
선비로 5백 년을 두고 이런 일을 당한 사람이 얼마나 많았느냐! 눈물을 거두어라.
북청에는 1년밖에 있지 않았다. 귀양이 풀려 돌아오자 완당은 과천의 관악산 기슭에 집을 짓고
살았다. 그는 1856년 10월 10일, 일흔한 살로 세상을 떠났지만, 만년에는 불경에 눈을 돌려 인생
무상을 되씹었다.
제목: 주시경(1876∼1914)
국어의 연구와 운동을 통하여 일제 침략에 항거한 국어학자로서 일명 한힌샘,백천이라고도 한
다. 황해도 봉산에서 태어나 어려서는 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우다가 양아버지를 따라 상경한 뒤에
배재 학당에 입학하였다. 1896년 4월 <독립신문>을 창간한 서재필에게 발탁되어 순한글 신문 제
작에 종사하게 되면서 국어 연구에 힘을 쏟았다. 계몽운동,국어운동,국어연구에 정성을 다하며 바
쁘게 활동하였다. 주시경의 학문과 주장은 학교와 강습소에서 길러낸 수많은 제자들에게 이어지
고 크게 영향을 미쳤다.
1. 가난 속에서
어머니, 배 고파요.
어머니 이씨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팠다.
옛날에는 모두들 가난했으므로 조반 석죽 이란 말이 있었다. 아침에는 밥을 먹고, 저녁에는 죽
을 먹는다. 는 뜻으로 몹시 가난한 살림을 이르는 말이다.
아침에 밥을 먹는 것은 그 날 하루 일을 하기 위해서였고, 저녁엔 죽을 먹어 좀 배가 허전하더
라도 잠자리니까 참고 견딜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릉골은 깊은 산골로, 가까이에 역사상 유명한
자비령 이 있다. 따라서 논이 적고 밭이 많았는데, 올해는 봄부터 가뭄이 들어 예년에 볼 수 없는
흉년이 들었다.
더구나 상호의 집은 너무도 가난하여 아침에도 나물이나 시내기죽으로 끼니를 때워야 했다.
어머니, 배가 고프다 못해 속이 쓰려요.
상호야, 사내 대장부는 배가 고파도 그런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거란다. 아버님을 보렴.
상호는 이 말에 입을 다물었다.
주시경은 1876년 11월 7일, 황해도 봉산의 무릉골(쌍산면 무릉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이름
은 주면석이고, 어머니는 전주 이씨였다.
아버지는 선비로, 농사를 짓는 대신 조그마한 서당에서 훈장을 하고 있었다.그러므로 흉년이 들
면 다른 농가보다도 더 식량이 부족하게 마련이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가난에 대해 걱정하는 말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상호야, 양반은 얼어 죽어도 짚불을 쬐지 않는다고 했다. 그것은 양반이 체면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상호는 아버지의 말을 공손히 듣고는 있었지만 아무래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체면? 그 체면이란 게 무엇일까?
이런 생각을 하며 마을 어귀로 나가자, 개구쟁이 아이들이 상호를 불렀다.
상호야, 함께 놀자.
오디 따 먹으러 가자.
배가 너무 고파서 꼼짝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오디란 말에 상호는 귀가 번쩍 띄었다.
어머니, 아이들과 함께 놀아도 돼요?
어머니는 잠깐 생각하더니 승낙했다.
그래. 하지만 너무 오래 있으면 안 된다. 이 나물로 맛있게 죽을 쑤어 놓을 테니 곧 돌아오너
라.
네.
상호는 대답을 하기가 바쁘게 벌써 저만큼 뛰어가고 있었다.
산기슭에는 뽕밭이 있었다. 오디는 뽕나무 열매로 여름이면 까맣게 익는다. 상호와 아이들은 저
마다 나무 하나씩을 붙잡고 오디를 따 먹는 데 정신이 없었다.
한참 뒤, 아이들이 말했다.
상호야, 네 입이 시꺼멓다.
정말?
응, 꼭 사람 잡아먹은 것처럼 이까지 시꺼멓다.
상호는 그제야 정신없이 오디를 따 먹고 있었던 자신이 조금 부끄러웠다. 아버지의 말이 생각
났기 때문이다.
우리 가문은 칠원 주씨로 대대로 학자 가문이었음을 명심해야 한다.
칠원은 경상도 밀양과 함안, 또는 창원과 영산 중간에 있는 고을 이름이다.
이를테면 신재 할아버지께선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셨고, 풍기 군수로 계실 때 학자인 안향을
모시는 백운동 서원 을 세우셨으며, 또 황해 감사로 계시면서 문헌공 최충의 사당을 세우셨다.
신재란 바로 조선 중종 때의 대학자인 주세붕(1495∼1554)의 호이다. 신재는 어려서 무릉산 을
보며 자랐고, 그의 저서 가운데 무릉집 도 있다.
그리고요, 아버지?
또 국담 할아버지도 계셨다. 이분은 거가요범 같은 책을 짓기도 했지. 거가요범 에는 집에서
지켜야 할 여러 가지 행동 규범에 관해 적혀 있단다. 국담 할아버지는 무신 난리 때에 의병장으
로 의병을 이끌고 대구에 이르러 반역의 무리를 진압했다.
국담은 주재성(1681∼1743)의 호로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초야에 묻혀 오로지 학문 연구에 전
심하였다. 그러나 1728년(영조 4), 이인좌가 청주에서 난을 일으켜 수원 근처까지 쳐올라오는 등
나라가 크게 흔들리자 의병을 일으켜 난을 평정했다. 그 뒤 박문수가 경상 감사로 내려와 국담의
창의(국난을 맞아 의병을 일으키는 것) 소식을 듣고 조정에 공적을 알렸으나 무시되었다.
국담은 이에 조금도 실망하지 않고 하관정 이란 정자를 짓고 주위에 대나무와 소나무, 그리고
국화를 심어 가꾸며 후진을 가르치는 데에만 힘을 쏟았다. 그가 죽자 영남의 선비들은 그의 덕을
기리며 기양에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받들엇다.
그 후, 상호의 할아버지 때 집안이 몰락하여 황해도 평산의 차돌개로 옮겼다가 봉산 무릉골로
다시 이사하게 된 것이다.
아이들은 상호가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머쓱히 있자 놀리기 시작했다.
상호는 사람을 잡아먹었대요.
뭐라고?
상호는 두 주먹을 불끈 쥐더니, 갑자기 이마를 짚으며 뒤로 쓰러졌다.
놀란 아이들은 걱정스런 듯이 물었다. 아무래도 이상했던 것이다.
왜 그러니, 상호야?
아이들은 가까이 와서 보고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상호가 죽었다. 우리 때문에 죽었어.
갑자기 현기증이 생겨 정신을 잃었던 것인데, 아이들은 자기들 탓으로 알고 굵은 눈물 방울을
떨어뜨렸다.
네가 상호를 너무 놀렸기 때문이야!
아니야, 너도 함께 놀렸잖아.
상호 어머니가 달려왔다. 정신을 잃은 아들을 보고는 와락 끌어안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상호야, 상호야! 정신 차려라! 제대로 먹지 못해서 배가 고파 까무러쳤구나.
그러나 다행히도 상호는 한참 만에 깨어났다. 그리고 옆에서 울고 있는 어머니를 보더니 말했
다.
어머니, 울지 마세요. 난 아무렇지도 않아요.
이 당시의 가난은 지금의 우리로선 도저히 상상하지 못할 정도였다.
아버지 주면석은 글공부밖에 모르는 선비였다. 농사따위는 지을 줄 몰랐고, 수입이란 고작 글방
을 차려 몇몇 아이를 가르친 대가로 받는 봄,가을의 곡식 약간이 전부였다.
따라서 가난한 집안 살림은 어머니 이씨가 삯바느질을 하며 꾸려 나갔다.
새댁, 이 두루마기 좀 지어 주세요. 우리 아들이 혼례식 때 입을 옷이니까 빨리 지어 주셔야
해요.
그리고 덧붙여 이런 말을 했다.
새댁이 늘 바느질만 하면서 고생하는 것을 보면 정말 딱해요.
이씨 부인은 그런 동정 어린 말에는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런 바느질감이라도 많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씨 부인은 오로지 그렇게 바랄 뿐이었다. 이 때, 이씨 부인은 상호를 임신하고 있었는데, 꿈
에 백발 노인이 나타나 연한 진줏빛 연적(벼룻물을 담는 그릇)을 이씨에게 건네 주며 말했다.
네 남편이 연적을 찾고 있으니, 이것을 가져다 주도록 해라.
이런 태몽을 꾼 후에 상호를 낳았던 것이다. 그런 상호를 훌륭한 학자로 키우기 위해서라도 삯
바느질을 많이 맡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은 희망과는 다르게 극심한 가난은 계속되었다.
이씨 부인은 제대로 먹지를 못하여 젖이 잘 나오지 않았다. 어렸을 때 상호는 빈 젖을 빨다가
지쳐서 까무러친 일도 여러 번 있었다. 더욱이 상호의 형제는 무려 여섯이나 되었다. 상호는 그
둘째였던 것이다.
상호는 열두 살 되던 1887년 봄이었다. 한양 사는 큰 아버지 주면진이 봉산에 내려왔다. 상호는
사랑에서 잠을 자다가 밤중에 오줌이 마려워 잠이 깼다. 오줌을 누고 나서 다시 자리에 누우려
하는데, 도란도란 말 소리가 들려 귀를 기울였다.
말 소리는 미닫이 하나를 사이에 둔 아랫방에서 들려왔다.
그럼, 자네의 둘째는 내가 데려가겠네.
큰아버지의 목소리였다. 상호는 자기에 관한 문제라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야 형님께서 바라시는 일이니 저는 반대하지는 않습니다만…….
주면진은 한양 남문 시장에서 해륙 물산 객주업을 하고 있었다. 이것은 지금의 도매상 비슷한
것으로 지방에서 물건을 가져오면 맡아 팔아 주거나 다른 상인에게 중개해 주는 직업이었다.
이 사람아, 한 번 결정하면 되었지, 어째서 말끝을 흐리나?
형님, 상호는 제 자식 놈이지만 어려서부터 영악하고 매우 똑똑합니다. 형님이 데려가시더라도
글공부는 계속 시켜주셔야 합니다.
원래 면진은 슬하에 아들딸이 있었으나, 얼마 전 괴질(이 때는 원인모를 괴상한 병으로 알려졌
으나, 지금의 콜레라)로 모두 죽었다. 그래서 상호를 양자로 데려가기 위해서 찾아왔던 것이다.
알았네. 공부는 시키겠다고 약속하겠네. 하지만 자네처럼 일생을 두고 가난하게 살 그런 학문
은 시키지 않을 작정일세.
면석은 일생의 목표를 과거에 두고 학문을 닦았지만 번번이 낙방한 터였다.
이제 시대는 점점 바뀌고 있네. 양반, 상놈을 찾던 시대는 지나갔단 말일세.
이렇게 큰아버지와 아버지의 주고받는 말 소리는 오래 계속되었다.
한참 후에 아랫방은 조용해졌다. 상호는 자리에 누웠으나 잠이 쉽게 오지 않았다. 한양에 간다
생각하니 가슴이 설레기도 했지만, 부모 형제와 헤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자 섭섭하여 눈물이 나
왔다.
2. 개화 물결
상호는 이 무렵에 시경이라고 이름을 고쳤다. 시경은 여섯 살 때부터 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웠
지만, 한양에 와서도 한문 공부를 계속했다. 그래서 야조개 근처 글방에 다니게 되었다.
그런데 이 글방은 남문 시장에서 장사하는 집안의 아이들이 다니는 곳으로 썩 훌륭한 배움터라
고는 할 수 없었다.
귀한 시간을 들여 공부하는데, 나도 훌륭한 선생님을 모시고 공부했으면…….
그렇게 생각하던 어느 날, 글방에 다녀오던 시경은 남대문 근처 어느 기와집 솟을대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 집에서 아이들의 글 읽는 소리가 들려 왔던 것이다.
이 서당은 당시 장안에서 이름 높던 이회종이라는 진사가 가르치고 있었다. 대문 밖에서 서성
거리는 주 소년의 행동은 하인을 통해 이회종에게 알려졌다.
나리, 웬 아이가 대문 밖에서 기웃거리는 것이 벌써 한 달째나 되었습니다.
음, 몹시 공부를 하고 싶어하는 아이로구나. 그 아이가 또 나타나거든 나한테로 데려오너라.
이래서 시경은 이회종을 만나게 되었다. 회종은 몇 마디 질문을 해 보더니, 시경이 꽤나 높은
학문을 가졌음을 알아차렸다.
음, 네가 춘추 를 알고 있는 것을 보니 글을 많이 읽었구나. 어떠냐, 나한테 와서 배울 생각이
없느냐?
네? 정말이십니까?
이 때의 기쁨은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다음날부터 시경은 이회종 진사에게 춘추
는 물론이고, 논어 , 중용 같은 어려운 학문을 배웠다.
시경이 소년 시절을 보낸 이 무렵은 사회 변화가 크게 일고 있었다. 먼저 1875년의 운요 호 사
건 을 계기로 일본 세력이 밀려왔다. 그래서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이 부딪쳐 마찰을 일으켰다.
왜놈들은 자꾸 항구를 열라고 떼를 쓰고 있지만 안될 말이지!
아버지 면진은 일본 상인들이 몰려와 판을 치는 바람에 장사도 잘 안 된다며 흥분했다. 1879년,
일본을 통해 들어온 콜레라가 전국에 퍼져 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렇지만 우두법 이 일본에서 들어와 많은 아이들이 천연두로부터 목숨을 건지기도 하지 않습
니까?
지석영이 최초로 우두 접종을 한 것은 1879년 겨울이었다.
송촌 지석영은 1855년, 한양 탑골공원 뒤에서 태어났다. 운요 호 사건으로 강화도 조약이 맺어
졌고, 첫 번째 수신사로 김기수가 일본에 갔다. 그 수행원 가운데 박영선이란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이 도쿄의 순천당 의원에서 종두법을 배운 뒤 종두귀감이란 책을 가지고 귀국했다. 석
영은 영선에게서 종두법을 배웠지만 실제 응용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다.
마마로 해마다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죽어 가고 있는가? 종두법이라는 예방법이 있는데, 그것
을 실제로 쓰는 방법을 모르니 얼마나 안타까운 노릇인가.
그래서 지석영은 1879년 10월, 부산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 곳의 일본인 병원에서 두 달 동안
일해 주며 종두법을 배웠고, 10여 개의 두묘 와 종두침을 얻었다.
이 때만 하여도 마마에 걸리면 저절로 낫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석영은 한양으로 오는 도중 처가집이 있는 충주 덕산에 들렀다. 때마침 마을에는 마마가 유행
되고 있었다.
이 우두법을 쓰면 병을 가볍게 치르고 낫게 됩니다. 죽거나 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지석영의 말을 믿어 주지 않았다. 그러자 지석영은 자기 아들에게 우두를 놓아
주고 그 시범을 보였다.
1881년 홍영식,박정양 등이 신사유람단 으로 일본의 문물 제도를 시찰했다. 또 이 무렵에 별기
군 이 창설되어 일본인 장교의 지도하에 군사 훈련을 받았다.
그러나 이런 개화의 움직임을 반대하는 유림의 상소가 꼬리를 물었다. 그러한 척사(서양이나
왜국의 새 학문을 사학이라 하고, 이를 배척하는 것)를 달래기 위해 임금은 척사 윤음 을 발표하
기도 했다.
세상은 많이 바뀌었네그려.
뭐가 말인가?
임금님이 내리신 척사 윤음을 읽어 보았겠지. 우리같은 서민이나 부녀자도 읽을 수 있도록 한
문과 언문으로 씌어 있잖은가!
1882년에는 임오군란 이 일어났다. 봉급을 받지 못한 군졸들이 별기군만 대우해 주고, 자기들은
괄시한다며 들고 일어났다. 여기에 서민들도 가담하여 큰 폭동이 일어났다.
이 때문에 청국군과 일본군이 각각 서울에 들어와 주둔하게 되었고, 장안의 공기는 자못 살벌
했다.
임오군란으로 청국의 세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 무렵, 명성 황후가 정권을 잡고 있던 조
정에서는 청국의 제도를 많이 본받았다. 독일 사람인 묄렌도르프를 외교고문으로 초청했고, 통리
아문,통리 내무아문 같은 청나라 정부 제도를 도입했다.
세상이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일까? 청국의 힘에 눌려 왜놈이 기도 못 펴는 것은 깨소금 맛
이긴 하네만, 이번에는 중국 비단 장수들이 꼴불견 아닌가!
암, 그보다 통리 내무아문에 가 보게나. 그 곳 담벼락에 매일처럼 새로운 방문이 나붙고 있네.
어떤 방이던가?
양반도 장사를 할 수 있고, 상민의 자식도 학교에 입학을 할 수 있다는 것일세.
이것은 혁명적 개화 정책이었다. 양반은 학문의 목적을 과거 급제에만 두고, 10년이든 20년이든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 글공부를 했다. 그러나 벼슬자리는 제한되어 있고, 급제자보다 낙방하는 사
람의 수가 더 많았다. 이런 사람들은 아무런 생활 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일생을 가난 속에서 살
아야만 했다.
양반은 스스로의 체면도 있었지만, 상업 행위는 천한 것으로 금지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농사는
장사나 공장보다는 낫게 여겨 선비 다음으로는 농부였다.
그런데 그런 신분 차별이 아주 없어진 것은 아니었으나 상민에게도 교육의 기회를 준 것만도
큰 진보가 아닐수 없었다. 1884년 7월, 선교사 겸 의사인 알렌이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이 때는
미국 공사를 비롯한 각국 공사들도 잇따라 서울에 와 있어, 기독교가 조금씩 뿌리를 내리기 시작
했다.
그런데 이 해 10월, 갑신정변 이 일어났다. 시경은 이 때 시골에 있었기 때문에 직접 보지는 못
했지만, 청나라와 일본의 군대가 부딪쳐 총 소리가 요란했다.
그러나 병력이 압도적으로 많았던 청나라 군대에 일본군은 쫓겨 달아났고, 개화파는 일본으로
망명하거나 죽임을 당했다.
이 때, 우정 총국의 피로연에서 개화파 사람의 칼을 맞은 수구 사대당의 우두머리 민영익의 상
처를 치료해준 의사가 바로 알렌이었다. 알렌은 이 때문에 고종과 왕비의 신임을 얻었고, 최초의
현대식 병원 광혜원을 설치하여 환자를 받기 시작했다. 또 이 때(1885년)를 전후하여 장로교의 언
더우드와 감리교의 아펜젤러도 입국하여 선교 활동을 벌였다.
특히 아펜젤러는, 1885년 8월 정동에 학교를 세웠는데 이것이 배재 학당의 전신이다.
또 감리교에서도 이듬해 이화 학당의 문을 열었고, 조정에서도 육영공원을 설립, 각국어와 양학
을 가르쳤다.
시경도 이제 열일곱 살이 되어 있었다. 이 무렵, 이회종 진사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한문 공부도 중단하고 있었다.
소문에는 이제 과거 제도도 없어진다는구나. 한문 공부는 그쯤 해 두고 집안일이나 슬슬 도와
다오.
양부모 면진과 권씨 부인도 이젠 늙어 시경이 집안일을 돌보아 줄 것을 바랐다.
저도 한문 공부보다는 신학문을 배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아직은 좀더 공부할 기회를
주십시오.
이 무렵, 그는 배재 학당의 선생이던 박세양과 정인덕을 알게 되었고, 그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
다.
자네 같은 젊은이는 마땅히 신학문을 배워야 하네. 그래야만 우리 나라도 일어날 수 있네.
시경은 이들을 통해 산술,만국 지지,역사 등을 배울수 있었다.
박세양,정인덕 선생의 말처럼 우리 나라에서도 근대적 역사,지리학은 물론, 농업,수산,의학,천문,
그리고 언어학에 이르기까지 온갖 학문이 연구되고 있었던 것이다.
선생님, 저도 배재 학당에서 공부하고 싶습니다.
잘 생각했네. 그런데 배재 학당에 들어오려면 그 길게 땋은 머리를 잘라 버려야 하네.
시경이 봉산에서 한양으로 올라왔던 1887년 3월, 전보 총국이 문을 열고, 총판에 홍철주가 임명
되었다. 그리고 4월과 9월에는 각각 정동 교회와 새문안 교회가 세워졌다. 또 연무공원 이란 것을
만들어 미국인 교관을 초빙하여 새로운 군사 교육도 실시했다. 따라서 당시 한양엔 외국인의 모
습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외국인에 대한 엉뚱한 오해도 있었다.
아버님, 저는 배재 학당에 들어가 신문학을 배우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 학교에 들어가려면 머
리를 잘라야 합니다. 학비는 공부만 잘 하면 무료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머니 권씨가 반대했다.
하필이면 서양 사람의 학교냐? 그들은 늘 고기를 먹는데 갓난애를 사다가 익혀 먹는다고 하더
라.
어머님, 그것은 헛소문입니다.
사실 1888년 5월, 외국인이 갓난애를 사다가 잡아먹는다는 소문이 나서 민심이 크게 동요된 일
이 있었다.
아무튼 그런 것은 헛소문입니다. 지금은 한양에 앉아서 부산까지도 눈 깜짝할 사이에 소식을
전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닙니까.
이 때, 시경은 열아홉 살로 머리를 깎고 배재 학당에 입학했다. 시경의 이력서를 보면, 1896년
배재 학당의 만국 지지 특별과를 졸업하고, 다시 1900년에 보통과를 졸업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계속해서 학교를 다닌 것이 아니고 그 동안에 정부에서 학비를 대 주는 관비생으로 뽑혀, 인천에
있는 이운 학교 에 들어가 1년간 항해술을 배웠는가 하면, 서울의 흥화 학교 야간반에서 측량술
을 7개월 배우기도 했다.
생활 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에 배재 학당을 졸업하기까지는 남보다 많은 세월이 걸렸다.
미국에 망명했던 서재필은 1896년 1월, 12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 때의 총리 대신 김홍
집과 내무대신 유길준은 서재필에게 외무 대신이 되어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재필은 거절했다.
여러분, 외국에 나가면 누구라도 애국자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조국에 있을 때에는 조국의
고마움을 모르고 살다가 외국에 나가 살면 비로소 그 고마움을 알게 되는 까닭입니다. 알다시피
저는 갑신정변 때 역적으로 몰려 부모 형제는 물론, 일가 친척에 이르기까지 모두 잃고 말았습니
다. 그런데도 지난 12년 동안 하루에도 몇 차례씩 고국 산천과 동포가 그리워서 애타게 눈물짓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마음으로, 우리는 첫째로 자기 나
라를 사랑하는 국민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는 그런 우리 나라를 알뜰히 가꾸고 행복한 나라로 만
들어야 합니다. 그러자면 무엇보다도 남에게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는, 진짜 독립된 나라를 건설해
야 합니다.
서재필은 미국식 민주주의 신봉자였다. 그는 자주 독립의 첫 단계로 국민의 계몽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유길준을 찾아가 신문 발행의 원조를 청했다. 유길준도 미국에서 공부한
사람으로, 개화 사상을 가져 서유견문 이란 책을 펴냈을 정도였다.
좋습니다. 신문 발행에 협력을 아끼지 않겠소.
그런데 뜻하지 않은 사건이 발생했다. 1895년 을미사변 이 일어난 것이다. 이것은 대원군과 일
본 공사 미우라가 공모하여 왕비를 시해한 사건이다. 이 때문에 여론이 나빠지자, 일본 정부도 미
우라를 소환하여 재판에 회부했고, 그 뒤를 이어 고무라 주타로를 신임 공사로 보내 왔다.
이 때, 총리였던 김홍집은 1895년 11월 단발령 을 선포했다.고종은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몸소
상투를 잘랐다. 그런데 1896년 1월, 전국에서 대규모의 의병이 일어났다.
3. 독립 정신
왜놈이 우리 국모까지 죽였는데, 그런 왜놈이 시킨다고 상투까지 자르라고 해!
그 당시 사람들은 머리칼 한 올이라도 부모님이 주신것이니, 이것을 함부로 자른다는 건 불효
라는 유교적 사상이 깊이 뿌리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판에 임금의 갑작스런 아관 파천 이
있었다.
중전이 살해된 경복궁에선 하루도 무서워서 살 수가 없구나.
고종은 궁녀 몇 사람만 데리고 아라사(러시아)공사관으로 들어가 버렸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나라는 발칵 뒤집혔다. 총리 김홍집은 광화문에서 친러파의 부추김을 받은 폭도들
에게 맞아 죽었고, 탁지부(재무부) 대신 어윤중은 고향 보은으로 가다가 용인에서 피살되었다. 내
각이 무너졌으므로 서재필의 신문 발행은 바랄수 없게 되었다.
시경은 스물한 살 때 김해 김씨와 결혼했다. 이보다 앞서 배재 학당에는 학생들 모임인 협성
회 라는 단체가 있었는데, 회보를 발행하고 있었다.
시경은 그 회보의 편집과 교정 보는 일에 누구보다 열을 올리고 있었다. 이 때부터 그는 우리
글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연구하기 시작했다.
세계 여러 나라는 저마다 자기 나라의 글이 있고, 우리에게도 훈민정음이 있는데, 흔히 배웠다
는 사람들이 한문만을 귀하게 여기고, 우리 글은 우습게 여기니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 아닌가.
익히 알다시피 세종 대왕은 1443년에 훈민정음 28자를 제정했다. 그리고 이것을 널리 쓰게 하
고자 용비어천가 를 편찬케 했고, 1446년에는 훈민정음을 반포했다.
그러자 이 때, 최만리,정창손 등이 몇 가지 이유를 들어 이를 맹렬히 반대했다. 그러나 세종은
이들을 꾸짖고, 동국정운 , 석보상절 , 월인천강지곡 을 비롯하여 농업 관계 책들을 국역시켰다. 하
지만 우리 글로 한자음을 통일하려던 한자음 개혁 만은 임금의 승하로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학자들의 반대가 있었다고는 하나 훈민정음은 황실에 의해 꾸준히 보호되었다. 세조는 1461년
간경도감 을 두고 불경을 국역시켰다. 또 이 무렵, 김수온을 비롯한 여러 학자들에 의해 사서 삼
경 의 토가 정해졌다.
또 성종 때에는 두시언해 를 비롯한 여러 시집과 삼강행실도 , 향약집성방 등이 서거정,노사신,
허종 같은 사람들에 의해 국역되었다.
한편, 음운학 에 관한 연구로는 중종 때 최세진(1473∼1542)의 훈몽자회 가 나왔을 뿐, 그 뒤에
는 거의 200년이 지나는 동안, 뚜렷하게 음운학을 연구하는 학자나 연구 업적이 나오지 않았다.
다만 국문의 보급에 있어선 중종 때 김정국 등이 소학 을 국역했고, 김안국은 이륜행실도 를 언
해했다.
왜 우리 글이 왕실의 꾸준한 보호에도 불구하고 널리 보급되지 못하고, 언문(한글을 속되게 이
르던 말) 이라 하여 괄시를 받으며 겨우 명맥만을 이어왔던 것일까?
시경은 이러한 옛날의 일들을 알았을 때 분노심마저 느꼈다. 박세양은 이런 시경에게 말했다.
그 까닭은 당시의 지식층이 훈민정음이 아니라도 한문으로 자기들 의사를 표시할 수 있었기
때문일세. 그래서 당시의 유학자들은 훈민정음을 단지 한자음을 바르게 표기할 수 있는 주음 문
자로, 즉 한자 학습상의 보조 글자쯤으로만 알았던 것이라네. 또 훈민정음을 불경 국역에 사용함
으로써 유학자들의 반발을 샀다는 것도 한 이유가 되겠지.
하지만 선생님, 우리 글이 얼마나 우수한지 저는 요즘 들어서 새삼 감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글을 언문이라 하지 않고, 크고 바르다는 뜻으로 한글 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이 말에 박세양은 무릎을 치며 감탄했다.
그것 참 좋은 생각일세.
한편, 김홍집의 피살로 신문 발행이 어렵게 되었지만, 유길준은 관직에서 물러나면서도 약속한
보조금을 지불하도록 수속을 밟아 주었다.
서재필은 그 돈 5천 원을 받자, 곧 신문 발행을 준비했다. 그리고 주시경을 불러 협력을 부탁했
다.
나는 이번에 우리 글과 영어 혼용의 독립 신문 을 발간할 계획일세. 박 선생의 말에 의하면
자네는 우리 한글에 대해 대단한 열성을 가졌다더군.
네, 지금 세계의 부강한 나라들은 모두 자기 나라의 글을 쓰고 있다는데, 그 편리함이 매우 크
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도 강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글을 다시 찾아야 합니다.
그것은 내 생각과 똑같네. 독립 신문사에 와서 회계와 교정 보는 일을 도와 주게나.
시경으로서는 바라던 일이었다. 독립 신문은 1896년 4월 7일에 창간호를 내놓았다. 한문은 일체
쓰지 않고, 순전히 우리 한글과 영문 혼용으로 발행하였다.
특히 영문을 쓴 이유는, 우리 한국의 사정을 널리 세계 각국에 소개하여, 우리 한국 사람도 이
런 문자로 이렇게 신문을 발행하는 문명인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한글판 독립 신문은 처음에 3백 부를 찍었는데, 차츰 늘어 5백 부, 3천 부까지 부수가 늘어났
다. 값은 한부에 한 푼했는데, 신문은 4면이나 되는 꽤 중량의 것이었다. 이 때의 인쇄 직공은 8
명이었고, 일 주일에 세 번씩, 화,목,토요일에 발행되었다.
시경은 독립 신문의 일을 맡아 보면서 한글 연구를 계속했다. 우리 나라도 17세기에 들어와서
는 한글을 사용하는 시가나 소설이 크게 발달했다. 정철의 가사나 윤선도의 시조, 허균의 홍길동
전 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한글 소설은 그 뒤 김만중의 구운몽 , 사씨남정기 를 비롯하여 작가 미
상의 심청전 , 흥부전 , 춘향전 등이 나타나 일반에게 많이 읽혀졌다.
이 무렵, 주시경은 신문사 안에 국문동식회 라는 모임을 만들고 있었다. 이것은 한글 연구를 위
한 우리 나라 최초의 단체였다.
우리 글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한글에 관계되는 책을 빠짐없이 구하여
읽고 분석하여 좀더 시대에 맞는 것을 만들어야 한다.
한편, 서재필의 염원은 청나라에 의지하는 사대당을 몰아 내고, 청나라 간섭을 받지 않는 자주
독립의 완전한 국가 건설이었다.
치욕적인 사대주의 유물을 없애야 한다.
서대문 밖에 있는 영은문 은 본디 명나라 황제의 사신이 오면 우리 나라 임금이 무악재 아래까
지 마중을 나가기 위해 생긴 문이다. 처음엔 이 곳에 홍살문을 세우고 영은문이라 불렀다.
그리고 1536년 (중종 31), 김안로의 상주로 홍살문을 헐고 그 위에 지붕을 만들어 청기와를 입
히고 문 이름을 영조문 이라 하였다. 영조문이란 글자 그대로 황제의 조서를 맞아들인다는 뜻이
다.
그 뒤, 영조문은 다시 영은문이라 고쳐졌고, 그대로 조선 말기까지 내려오다가 서재필이 귀국하
기 전인 1896년 2월, 김홍집 등에 의해 헐리고 빈터만 남게 되었다.
이 때, 아라사 공사 베베르는 서재필과 친하게 지냈고, 우리 민족에게 매우 호의적이었다. 그래
서 미국 공사와 짜고 정동 구락부 에 자주 드나들던 이상재,윤치호,이완용,이윤용,이채연 등을 미
국 공사관에 숨어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
서재필은 이런 사람들과 손을 잡고 독립 협회를 만들었다. 1896년 7월의 일로서 회장은 안경수
였고, 서재필은 고문이 되었다. 이 독립 협회의 발기로 독립문이 기공되었고, 1897년 11월 20일 1
년 만에야 준공되었다.
독립문이 완성되기 전인 3월에 모화관 자리에 독립 협회 간판을 달았고, 그 동안 회원도 많이
늘었다. 주시경은 이 때 배제 학당 학생이면서 독립 협회의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모화관 역시 중국 사신이 오면 그들에게 잔치를 베풀던 곳으로, 이런 곳에 독립 협회 간판을
달았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1897년에도 사건이 많았다. 임금이 1년 남짓의 아라사 공사관 생활을 청산하고, 2월 경운궁(덕
수궁)으로 돌아왔다. 3월에는 경인 철도 기공식이 인천에서 있었고, 7월엔 목포와 진남포가 또다
시 개항되었고, 8월에는 그동안 말썽이 많았던 단발령이 취소되었다.
그리고 10월에는, 황제 즉위식이 원구단(지금의 조선호텔)에서 거행되었으며, 대한 제국이 탄생
되었다.
시경은 이 무렵, 국어,국문 관계의 책을 구하여 연구하는 데 힘을 쏟았다. 게다가 독립 협회의
일까지 보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의 연구의 열의가 얼마나 컸던지, 길을 걷다가 전봇대에 머리를 받아 다치는가 하면, 맞은편
에서 오던 사람과 부딪쳐 욕을 얻어 먹기도 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다녀!
죄송합니다.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독립 협회에는 배재 학당 학생들이 많이 참여하고 있었다.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시경도 그 당
시에 배재 학당 학생이었다.
독립 협회에서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토론하였다. 나중에는 이 회를 일반인에게도 개방하여 토
론회와 연설회, 정치 강연을 갖기도 했다. 이런 자리가 마련될 때마다 서재필은 즐 말했다.
토론회나 연설회는 민주주의를 배우는 데 매우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 방법부터 알고 따
르도록 훈련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남의 의견도 받아들이고, 내 의견도 당당히 주장하는 것입니
다.
토론회는 먼저 어떤 문제를 토론하느냐 하는 것부터 정한 다음에 그 문제에 관한 열띤 토론을
벌였다.
여러분, 오늘의 토론은 머리를 깎는 것이 과연 옳은지에 대한 것입니다.
사회자의 말이 끝나자, 한 사람이 단상에 올라가 자기 이름을 밝히고 말했다.
저는 상투는 잘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 하면 상투를 깎지 않으면 서캐가 생겨 비위생적
일 뿐만 아니라, 매일 아침마다 머리를 감고 빗질하는 데 시간을 빼앗겨 시간 낭비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회자가 묻는다.
지금의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반대하는 분은 단 위로 올라와 그 까닭을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자 반대자가 단상에 올라와 연설한다.
저는 단발에 반대합니다. 상투를 트는 것은 수백 년을 두고 내려온 우리의 전통이며, 단발은
성현의 가르침에도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고칠 점이 있다면 서서히 고쳐 나가는 게
좋겠지요.
이런 토론회는 보통 토요일과 일요일에 있었다. 차츰 말솜씨가 늘자, 국가 정치에 대한 비판도
나타났다.
이 무렵, 독립 협회는 종로에서 만민 공동회 라는 것을 열어 외국 세력을 규탄하기에 이르렀다.
1898년 2월, 만민 공동회에서는 한러 은행 설치 및 러시아인 재정 고문과 군사 교관 초빙을 반
대하는 집회가 열렸다. 3월에는 러시아의 절영도 석탄 저장소 설치를 반대한다는 상소문이 황제
에게 올려지기도 했다.
독립 협회라는 것이 무엇하는 자들의 모임이냐?
고종 황제는 독립 협회를 귀찮게 여겼다. 아니 당시에는 독립 이라는 말의 뜻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서재필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야만 했고, 독립 협회는 윤치호 회장의 주관 아래 새
로운 단계를 맞게 되었다.
서재필은 1898년 5월 미국으로 떠났다. 이 해 7월, 남궁억,장지연 등은 전부터 발간해 오던 대
한 황성 신문 을 황성 신문 으로 이름을 고쳐 발행하기 시작했다.
1898년 10월, 독립 협회 주최로 만민 공동회가 종로에서 열렸다. 이 때, 독립 협회는 선진국처
럼 대한 제국에도 의회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하였다.
한편, 정부는 협회의 격렬한 운동을 막으려고, 황국협회 라는 것을 만들엇다. 이것은 이유인,홍
종우 일파등이 만든 것으로 회원은 보부상 들이었다.
보부상이란, 봇짐장수와 등짐장수를 말한다. 이들은 옛날부터 특별한 조직을 가지고 있어서 정
부에서도 활용도가 높았다. 그래서 이들을 시켜 독립 협회의 만민 공동회를 습격하게 하였던 것
이다.
때려부수어라!
죽여라! 저 놈들은 모두 황제께 불충하는 무리다!
황국 협회의 보부상들이 몽둥이를 휘두르며 몰려오자 연설회장은 순식간에 수라장이 되고 말았
다. 이 때, 정부에선 이상재,남궁억,방한덕 등 17명을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었다. 윤치호에게도 체
포 명령이 내려졌으나 그는 정동에서 구세 병원을 경영하는 외국 사람 집에 피신하여 위기를 모
면하였다.
주시경은 한탄했다.
이래 가지고선 나라 꼴이 어떻게 될 것인가?
보부상들은 계속 날뛰었다. 독립 협회 회원이라면 마구 몽둥이로 후려쳤고, 몽둥이에 맞아 피투
성이가 된 회원들을 포졸들은 그저 못 본 체했다.
너도 시골로 잠시 피신하여라. 저들은 미친 개나 다름 없으니 물린 사람만 손해다.
어른들의 말씀대로 시경은 황해도 봉산에 있는 매부집으로 피신했다. 이 때, 생가로 가고 싶은
생각도 있었으나 관헌의 손이 그 곳까지 미칠까 염려되어 매부집으로 갔던 것이다.
그는 시골에서 석 달 동안을 숨어 지냈다. 시골에 있으면서 그는 곰곰이 생각했다.
내 나이 이제 스물세 살이다. 무엇이든지 한 가지를 목표삼아 전념해야 하지 않겠는가.
역시 국어,국문에 대한 연구가 그가 할 일이었다. 서울에서 시골로 내려갈 때 그는 한 권의 책
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유희(1773∼1837)의 언문지 였다.
시경은 이 책을 읽고 또 읽었다. 자나깨나 한글에 대해 연구, 조사했다.
우리 글도 영어처럼 자음과 모음이 합쳐져서 이루어져 있구나.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시경으로서는 큰 발견이었다.
한자는 뜻글이고, 한글은 소리글이다. 전혀 구조가 다르다. 지금은 초등 학생들도 이런 것쯤은
상식으로 이미 다 아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수백년 동안 그런 간단한 이치를 모르고 한자만을 사용했다. 세종 대왕
의 훈민정음 제정 이래 학자들은, 한자 발음을 어떻게 하면 우리 글로 나타낼 수 있을까 오로지
그것만을 마음 써 왔다.
최세진의 훈몽자회 는 3360자의 한자에 음과 뜻을 달아 해석한 책이다.
왜냐 하면 한자는 간단한 뜻글자라고 했지만, 그 가운데는 소리글도 있으며, 총 수는 5만이 넘
고 실제로 사용되는 글자만도 1만이 넘는다. 이런 것을 정리한 것이 훈몽 자회였다.
오라버니는 밤낮없이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세요? 여기는 산골이니 안심하고 밖에 나
오셔도 괜찮아요.
친절한 누이는 시경의 건강을 염려해서 하는 말이다. 시경은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생각에 몰두해 있었구먼.
그러면서도 이내 또 깊은 생각에 잠기는 게 그의 버릇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누이동생이 편지를 가져왔다. 이런 시골까지 편지가 배달되는 게 신기했던지
누이동생은 대문 밖부터 외치며 들어왔다.
서울에서 오라버님께 편지가 왔어요. 반가운 소식인 게 틀림없어요.
그것은 배재 학당 친구 유일선에게서 온 것이었다. 동급생이지만 시경보다 나이가 어려서 형님
처럼 따르던 터였다.
이제 무사하게 되었으니 서울로 올라오십시오. 정부에서 독립 협회 회원들에게 특사령을 내렸
습니다.
이래서 시경은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 올라와보니 너무도 많은 일들이 변한 것처럼 느
껴졌다.
독립 협회도, 독립 신문 도 모두 없어졌군. 송재(서재필) 선생이 귀국하여 이룩한 일들이 모두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리고 남은 것이라곤 독립문뿐인가!
그러나 언제까지 실의에 빠져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1900년 배재 학당 보통과를 졸업하면서
장안의 거의 모든 학교에서 강사로 나가느라 바삐 뛰어다녔다.
우리 글을 배웁시다. 우리 글을 배움으로써 한문보다 10배, 아니 20배의 학문 진도가 있을 것
입니다.
이것은 그의 신념이었다.
주시경이 한글에 뜻을 둔 것은 한문 서당에서 이회종 선생께 배울 때부터였다. 선생은 한자 문
구를 읽고, 그것을 우리말로 풀어 설명해 주었다.
그 때, 시경은 문득 생각했던 것이다.
한자를 일일이 풀어 가며 뜻을 배우고 있으니, 얼마나 시간 낭비인가! 직접 우리 글로 사물을
대하며 배운다면 쉬울 텐데…….
시경은 낮뿐 아니라 밤에는 야학반, 일요일이나 방학때에는 국어 강습소를 열어 국어 국문에
대하여 새로운 지식을 보급했다.
언제나 큰 보따리에 유인물 등을 싸 가지고 이리저리 뛰어 다녔다. 당시의 학생들은 그를 주
보따리 라고 불렀다.
이 때, 인력거라는 것이 있었으나 보통 사람은 삯이 비싸 좀처럼 타지 못했다. 시경은 가난하면
서도 야학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인력거를 이용하는 때도 있었다.
4. 한글 문법
주시경은 일찍부터 국문 동식회 라는 것을 조직하고 있었다. 국문 동식회는 우리 글의 동식법
(맞춤법)을 연구하는 모임이었다.
그는 거의 한글 연구에 정신을 빼앗기다시피 했다. 한글 관계의 서적이나 연구자가 있다면 어
디든지 찾아가서 토론도 하고, 겸허하게 배우기도 하였다. 친구들은 그런 시경을 잘 이해하지 못
했다.
영락없는 미친 사람이 아닌가?
아니지, 학자라면 그만큼 미칠 필요도 있어.
하지만 국어,국문이란, 인기도 없는 학문일세. 그런 것을 구태여 고생해 가면서 배울 필요가
있겠는가?
1899년 3월, 관립 의학교가 설립되고, 교장으로 지석영이 취임했다.
송촌 지석영에 대해선 앞에서 잠깐 소개한 일이 있다. 송촌은 1880년 5월에 김홍집이 제2차 수
신사로 일본에 갈 때 수행원으로 따라가 우두묘의 제조법 등을 배워가지고 왔다. 그러나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송촌도 친일파라 하여 폭도들이 그의 종두장을 불질러 버렸다.
그 뒤, 정국이 안정되자 종두장을 다시 복구했고, 전주와 공주에 각각 우두국을 설치하여 사람
들에게 우두법을 가르쳤다. 그리고 1883년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의 전적과 사헌부의 지평
을 역임했다.
1885년에는 그 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우두신설 이라는 책을 폈다. 이어 1887년 사헌부의 장
령으로 있을 때, 우두를 구실삼아 개화파와 손잡고 일본 세력을 끌어들인다는 모함을 받아 전라
도 강진의 신지도로 유배되었다가 1891년, 5년만에 귀양에서 풀려났다.
1892년 봄부터 서울 교동에, 우두 보영당을 설립하고 무료로 아이들에게 우두 접종을 해 주었
으며, 1894년에는 다시 형조 참의,승지,한성 부윤을 역임했다.
1899년 4월, 중학교 관제가 공표되었다. 5월에는 서울 서대문∼청량리 간의 전차가 개통되었는
데, 장안의 인력거꾼들이 장사에 방해가 된다며 전차를 불질러 버리는 소동도 있었다. 9월에는 경
인선이 노량진까지 개통되어 영업을 시작했다. 또 12월에는 인천에 궐련 공장이 생겨 담배가 폭
발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했다.
시경이 배재 학당을 졸업했을 때 나이 스물다섯 살이었다. 그는 일본인이 세운 일어 학교에도
다녔고, 이화학당의 영국인 의사에게 영어와 의학을 배우면서 우리말을 가르쳤다.
주시경의 이름은 이제 장안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서울에 있는 학교들이 국어 시간을 둔 것
도 이 무렵인데, 국어를 가르칠 만한 실력을 가진 사람이 따로 없어 그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
게 뛰어다녀야만 했다.
이를테면 청년 학원,공옥 학교,이화 학당,명신 학교,흥화 학교,기호 학회,숙명 학교,진명 학교,보
성 학교,휘문 학교,중앙 학교,사범 강습소,협성 학교,경신 학교,외국인 연구소 등 자그마치 스무 군
데가 넘었다.
주시경의 몸은 나날이 쇠약해져 갔다. 너무나 고단하여 코피를 쏟는 일도 있었다. 그래도 그는
쉬지 않았다.
우리는 지금 다른 나라보다 모든 방면에서 뒤떨어져 잇다. 그러므로 학문의 기본이 되는 우리
글을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더 빨리 가르쳐야 한다. 내 한몸의 편함을 돌볼 겨를이 없다.
주시경은 국어만 가르친 게 아니었다. 그는 지리와 역사, 때로는 영어와 수학도 가르쳤다. 당시
그의 제자였던 가람 이병기(1891∼1968)는 이렇게 회상했다.
교실에는 거의 빈 자리가 없을 만큼 학생들이 꽉 들어차 주 선생의 강의를 들었다. 한눈을 팔
거나 하품을 하거나 장난치는 학생은 이 교실에서 애당초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다만 선생의
자상하신 목소리와 종이위를 달리는 연필 소리만이 들렸다.
시경은 좀 갸름한 얼굴에 이마가 넓고 언제나 엄숙하면서도 정다운 빛이 있었다. 좀처럼 웃는
것을 보지 못했지만 또 여간해서 성을 내는 일도 없었다. 체격은 큰 편이었고, 눈에는 총기가 가
득 차 있었다.
주시경은 강의할 때 큰 목소리로 웅변하듯 말하는 일이 없다. 또한 물 흐르듯 매끄럽게 말할
줄도 모른다.
그러나 어느 때 어떤 문제를 가지고 물어도 적당히 대답하는 일은 없었다. 선생과 학생이 그
문제를 진지하게 토론하듯 다루었기 때문에 그 학새으로선 틀림없이 머릿속에 기억되었다.
또한, 그는 학생들이 공부에 싫증을 내지 않도록 가르쳤다. 어느 여름날, 점심을 먹고 난 첫시
간이라 나른함에 꾸벅꾸벅 조는 학생들이 많았다.주시경은 마침 몽고지방의 지리를 가르치고 있
었다.
여기는 고비 사막입니다. 날씨는 더운데 가도가도 사막뿐입니다. 대상들은 낙타를 몰고 묵묵히
걸었습니다. 이런 상인들도 목표한 오아시스의 우물이 다 말라있을 때는 그만 주저앉아 목놓아
울었습니다. 그래서 그 곳 땅 이름을 울가 라고 했지요.
이 말에 학생들은 소리내어 웃었다. 그러자 졸음도 모두 달아나 버렸다.
1902년, 서울∼인천간의 첫 전화 업무가 개시되었다. 또 삼개(마포)에서 경의선 철도 기공식이
치러졌고, 먼저 삼개와 개성을 잇는 선로가 부설되어 나갔다. 이 무렵, 서울∼개성간도 전화가 개
통되었다. 그리고 12월에는 ㅇ제 1차 하와이 이민 100여명이 출발했다.
1903년 3월에는, 일본에서 사들인 군함 양무 호가 인천항에 들어와 사람들을 기쁘게 했다. 그러
나 5월에는 러시아가 압록강 하구의 용암포를 멋대로 점령하고 근처의 삼림을 마구 벌채해 갔다.
그러자 이에 질세라 일본도 울릉도의 나무를 베어 갔다.
주시경은 이런 민족의 울분을 지리 시간에 쏟아 놓았다. 나라의 자주 정신과 국어에 대해 강의
할 때에는 눈에서 광채가 뿜어 나왔다.
여러분, 백두산의 산림을 짓밟고 아름드리 통나무를 뚝뚝 잘라 내어 동청 철도 로 부지런히
실어 나르는 자는 그 누구입니까?
네, 아라사 사람입니다.
그러면 울릉도의 울창한 숲을 황폐하게 만드는 자는, 그 누구입니까?
일본인입니다.
맞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주시경은 지휘봉으로 칠판을 힘껏 두들기며 우리 나라의 현 실정을 한탄했다.
시경은 기독교를 믿게 되면서부터 미국인 여자 선교사 터틀과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그는 터
틀에게 우리말을 가르쳐 주고 대신 영어를 배웠다.
터틀은 시경의 맏딸 솔메를 귀여워하여 수양딸로 삼고 싶다면서 이런 말을 했다.
솔메도 소학교를 졸업했으니, 이화 학당에 입학시켜 공부를 가르치고, 장차 미국 유학을 보내
겠어요.
그러자 주시경은 큰 목소리로 말했다.
안 됩니다!
터틀은 깜짝 놀랐다. 평소 점잖기만 하던 시경이 소리를 지르는 게 아닌가. 솔메는 터틀을 따르
던 터인지라 이화 학당에 가고 싶다며 훌쩍훌쩍 울었다.
주 선생, 안 된다니 무슨 말입니까?
이 아이는 조선 아이라 먼저 조선부터 배워야 하기 때문이오. 그래서 명신 학교로 보낼 작정
이오.
당시 박동에 있던 명신 학교는 황실에서 세운 학교였고, 이화 학당은 미국 선교사 스트랜턴이
세운 기독교 학교였다. 터틀은 시경의 설명을 듣고는 납득하는 태도였으나, 표정은 모처럼의 친절
을 무시당한 불쾌감을 나타내고 있었다. 시경이 친구에게 말했다.
우리 것을 먼저 튼튼히 한 다음에 남의 것을 받아들여야 틀림이 없는 것일세.
한반도에서는 러일 양국이 자기들의 이권을 위해 서로 으르렁거렸다. 1904년 2월, 마침내 러일
양국은 국교를 단절했고, 일본의 대부대가 인천과 원산에 상륙했다. 그리고 선전 포고도 없이 인
천에 있던 러시아 군함을 격침시켰다.
청일 전쟁 때처럼 이번에도 남의 나라에서 러일 양군이 멋대로 싸울 참이로구나.
모든 게 우리 나라가 힘이 없는 탓일세.
그런데 뜻밖에도 일본은 연전 연승하여 러시아군을 한국에서 몰아냈고, 전장은 만주로 옮겨졌
다. 이와 동시에 친일의 무리들이 날뛰었다.
송병준이 유신회 라는 것을 만들자, 이용구는 동학교도를 모아 진보회 를 조직했다. 이 유신회
와 진보회를 합쳐서 일진회 를 조직했다. 일진회 가 조직되면서 나라와 겨레를 팔아먹는 데 앞장
을 섰던 것이다.
1904년 12월 경부선이 개통되었고, 이듬해 1월에는 서울과 근교의 경찰 치안권이 일본 헌병대
로 넘어갔다. 그리고 3월에는 일본군이 왕궁을 포위하여 고종을 협박하기 시작했고, 면암 최익현
(1833∼1906)을 체포하여 정산(충청도 청양)으로 강제 추방을 시켰다. 이어 일본은 을사조약을 강
요하여 한국을 집어 삼키려는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장지연은 황성 신문 에 이 날 소리
내어 크게 통곡하노라. 하는 사설을 썼고, 민영환,조병세,홍만식은 일본의 침략에 항의하며 자결하
고 말았다.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지만, 1906년 2월 일본은 강압적으로 우리 나라에 통감부 를 설치했고,
초대 통감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부임해 왔다.
하루는 통감부의 고급 관리가 주시경의 집을 찾아왔다. 시경은 지금의 남대문 상동 교회 옆에
서 살았는데, 방이 비좁아 다리를 쭉 펴고 누울 수가 없었고, 햇볕도 들지 않아 낮에도 등불을 켜
야 책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누추하게 살았다. 일본인 관리는 방을 둘러보더니, 몹시 놀라는 표
정을 지었다.
선생처럼 고명하신 분이 이렇게 누추한 곳에서 사시다니 될 법이나 합니까?
시경은 잠자코 있었다. 가난은 자랑할 것은 못 되지만 부끄러울 것은 없다고 여기고 있었던 것
이다.
선생님, 지금 통감부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선생께서 협력만 해 주신다면 생활도 나아질 것이
고, 훌륭한 큰집에서 사실 수도 있습니다.
마침내 시경의 분노가 폭발하였다.
닥쳐라, 이놈! 나는 우리의 국어 연구를 하늘이 주신일로 알고 하며, 비록 가난하게 살지만 적
국의 종이 되기는 싫다. 당장 물러가라!
이런 주시경을 지석영이 만나자고 했다. 첫인사가 끝나자 송촌 지석영은 말했다.
주 선생의 소문은 일찍부터 들어 알고 있지요. 나는 며칠 뒤 상감을 배알하게 되면 우리 백성
을 살리고 외국의 멸시를 받지 않는 길은 오로지 교육의 힘밖에 없다고 말씀드릴 계획입니다. 주
선생의 계획이 있다면 말씀해 주시구려.
시경은 반가웠다. 오랜만에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을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정말 고마운 말씀입니다. 굳이 말씀드리자면 국어,국문을 연구하는 기관이 필요합니다. 상감을
뵙게 되면 꼭 말씀드려 주시면 참으로 고맙겠습니다.
5. 선구자
송촌 지석영은 고종에게 교육 제민 의 필요성을 여러번 건의했다. 그리하여 서양의 학문적 지
식 보급에 갖가지로 힘썼는데, 의학교 안에 국문연구회 를 두고 한힌샘(주시경의 호)에게 모든 것
을 맡기다시피 했다. 한힌샘이 국어 문전음학 , 국어문법 , 말의 소리 등을 저술, 발표할 수 있었던
것도 국문연구회를 통해 어는 정도 생활의 안정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1907년 9월에는 학부 안에 국문연구소 가 설립되고 한힌샘은 그 전문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물론, 앞에서 말한 저술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한힌샘은 열아홉 살 때
배재 학당에 입학할 무렵에 벌써 ㅇ 는 아 와 오 의 중간음이라는 연구는 국어학에 관계되는 것
으로, 한힌샘으로서 가장 큰 업적으로 꼽힌다.
한힌샘의 국어문법 은 일본에 의한 국권 강탈이 일어나기 몇 달 전에 간행되었다. 그 책의 서
문에 보면, 1898년에 초고가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그것을 덜고 더하고 또한 다듬어 책으로 내놓
은 것이다.
국권 강탈이 일어나자 많은 의병이 일어났다. 면암 최익현도 을사조약에 반대하고 의병을 일으
켜 1906년 6월에 일본군에 체포되었다. 무자비한 일본군도 면암만은 죽일 수 없었던지 일본 쓰시
마 섬으로 귀양 보냈다. 면암은 이 해 12월 쓰시마 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 죽음을 추도하는 모
임이 탑골 승방에서 있었다. 한힌샘도 몇몇 동지와 함께 추도회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에 갑자
기 부르짖었다.
목사님, 저는 지금 이 순간부터 기독교를 버리고 대종교 로 개종하겠습니다.
함께 길을 걷던 상동 교회 전덕기 목사는 깜짝 놀랐다. 전덕기 목사 역시 열렬한 애국 독립투
사로, 역사에 그 이름이 많이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전 목사도 대종교 라는 말에 아무런 질문도 던지지 않았다. 대종교는 1909년 음
력 정월 보름에 나철(1863∼1916)이란 사람이 처음으로 문을 연 교파이다. 대종교는 단군을 받드
는 종교 단체로 그 뒤 만주에서 벌어진 독립군 활동에도 많이 가담했다. 한힌샘의 생각은 기독교
보다도 대종교에 들어가 일제와 싸우려 결심했던 게 틀림없었다.
한힌샘은 한 번도 양복을 입은 적이 없었고, 무명옷에 짚신을 신고 다녔다. 외출복으로는 두루
마기를 걸쳤을 뿐이었다. 이것도 그의 강한 개성과 자주 독립심을 엿볼수 있는 한 가지 좋은 보
기였다.
한힌샘은 자기의 호뿐만 아니라 말본(문법), 이름씨(명사), 느낌씨(감탄사) 등 학문 용어를 순우
리말로 바꾸었던 것이다.
한힌샘은 우리 글을 연구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얼마나 한글에 정성을 쏟고 알뜰하게 여겼
던지 자식들 이름을 모두 순우리말로 고쳤다.
맏딸 송산은 솔메, 맏아들 삼산은 세메, 둘째 아들 백산은 흰메, 둘째 딸 춘산은 봄메, 셋째 아
들 왕산은 임메, 그리고 자기 자시의 이름도 힌샘으로 고쳤던 것이다.
이름을 고치고 성은 한문이니 어색하여 한참 동안 곰곰이 생각한 끝에 그는 외쳤다.
그렇다, 한힌샘이라고 하면 될 거시 아닌가. 한이란, 우리말로 크다, 바르다, 첫째간다는 뜻으로
우리 나라를 옛날에는 한이라 부르지 않았던가!
그 뒤로 한힌샘은 한문 낱말을 쉽고 고운 우리말로 찾아 고쳐 쓰는 데 힘썼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 때 벌써 가로쓰기를 하고 있었다. 이것은 그가 영어를 배운 데서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또 독립 신문 의 교정원으로 있으면서 가로쓰기가 세로쓰기보다 인쇄하는 데나
읽는 데도 편리함을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국어강습회에서 가로쓰기를 강조했고, 국어강습회 졸업식 때에는 순우리말로 된 가로쓰
기 수료증이 주어졌다.
1909년 10월,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되었고, 12월엔 이
완용이 명현 교회에서 이재명 의사의 칼에 찔려 중상을 입었다.
그러나 190년 8월 29일, 마침내 국권 강탈이 일어나고, 대한 제국은 지도에서 사라지는 비극을
맞았다. 시경은 이 때 땅을 치고 몇날 며칠을 슬피 울었다.
이 무렵, 육당 최남선은 조선 광문회 라는 단체를 결성했다. 광문회는 일본의 침략으로 강탈되
어 없어지는 옛날의 문헌을 보존하여 민족의 영광을 길이 빛내자는 민족 문화 운동을 전개했다.
주 선생, 지금 왜인(일본인)들은 우리의 고문서와 절의 탑까지 뜯어 저희 나라로 가져가는 판
입니다. 그러니 그런 것들을 후손에게 남기기 위해서는 영인본이라도 만들어 두는 것이 시급합니
다.
그거 좋은 생각이오. 하지만 나로선 도울 수 없는 일이구려.
아니, 선생님이 꼭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오?
조선어 사전 입니다.
이리하여 한힌샘은 광문회에 나가 사전 만드는 일에 협력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울에 청나라
의 사상가 양계초(1873∼1928)가 왔다. 양계초는 변법 운동(옛날부터의 법을 고친다는 뜻으로 개
혁이나 같음) 의 지도자로 우리 나라에도 잘 알려져 있었다. 한힌샘은 그를 만나 그에게서 안남
망국사 라는 책을 기증받아 읽게 되었다.
안남은 오늘날의 베트남으로 우리 나라와 처지가 너무나 비슷했다. 즉 안남은 독립된 왕조가
있었지만 오랫동안 중국에 조공을 바쳤다. 그러다가 1884년에 청불 전쟁 이 일어난 뒤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어 버려 그 왕조는 멸망했다.
한힌샘은 그것을 번역했다. 그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이 책은 번역되지 않았을 것
이다. 그리고 이 책은 당시의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1910년 12월, 105인 사건 이 일어나 윤치호,양기탁,이승훈 같은 민족 지도자들이 체포되었다. 이
사건은 글자 그대로 105명이나 기소된 것으로, 데라우치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는 터무니없는 죄
를 뒤집어씌워 우리 민족의 지도자들을 모두 없애려 했던 것이다.
죄없는 사람도 잡아 감옥에 보내고 고문하니 장차 또 어떤 짓을 할까?
사실 총독부는 우리 민족에게 갖가지 탄압을 하였다. 1912년에는 태형령 을 시행했다. 이것은
조선조 시대에 있었던 형벌로, 매로 죄인의 볼기를 때리는 형벌이다. 그런 것을 이제 와 다시 하
겠다니 그들이 우리 민족을 얼마나 얕보았는지 알 만하다.
또 모든 관리에게 무관 복장을 시키고 칼을 차게 하였다. 지금의 국민 학교 선생마적도 칼을
차고 아이들을 가르쳤던 것이다.
만주로 가자. 지금 북간도에는 중광단 이 조직되어 왜적과 싸우고 있다고 하지 않는가.
중광단은 대종교의 서일(1881∼1921)이 조직한 독립운동 단체이다.
1914년 서른아홉 살이 된 한힌샘은 고향에 내려가 부모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고 올라왔
다. 그리고 가족에게도 부탁했다.
내가 떠나면 집을 팔아 작은 집으로 이사하고, 남은 돈으로 살아가시오. 당신과 아이들에게는
정말로 미안하나 나로선 이 길밖에 없소.
그런데 한힌샘은 망명 아닌 영원한 길을 떠나게 되고 말았다. 점심을 먹고 체한 것이 원인이
되어 며칠을 앓다가 7월 27일 눈을 감고 말았다.
정말 너무도 짧고 아까운 일생이었다. 하지만 한힌샘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한글은 그 뒤에도
계속 지켜져 왔다.
1921년 12월에 조선어연구회(뒤에 조선어학회) 가 만들어졌고, 한글 맞춤법 통일안 을 제정하기
로 결의했다. 이에 1930년 12월, 권덕규, 김윤경, 박현식, 신명균,이극로, 이병기, 이윤재, 이희승,
장지영, 정열모, 정인섭, 최현배등 열두 명이 2년간 심의한 끝에 맞춤법 원안이 작성되었다.
그러다가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 이 발생하여 우리 글이 아주 없어질 뻔했으나, 해방과 함께
되살아나 우수 민족으로서의 긍지를 심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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