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디의 생애와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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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머리말-13p
제 1장 영국 지배하의 인도-17p
1. 인도는 왜 영국의 식민지로 되었나?-19p
2. 영국의 식민지정책과 인도의 민족운동-27p
제2장 간디의 반생-49p
1. 학창시절-50p
2. 남아프리카 시절-57p
제 3장 간디의 사상-81p
1. 종교적 및 도덕적 이념-85p
2. 사회적 이상-102p
3. 독립 후의 인도상-114p
제4장 간디의 실천-l29p
1. 세 가지 방법-133p
2. 제 1차불복종운동-149p
3. 재준비-172p
4. 제 2차불복종운동-183p
5. 제 2차대전과 분할독립-197p
제 5장 간디 사후의 간디주의-223p
간디의 연보-237p
참고문헌-24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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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장 영국 지배하의 인도
롤라트법( * 1919년 초에 제정되어 3월에 발효된 이 법의 목적은 전시입법 (즉, 1915년의 인도
방위법)의 실효에 즈음해서 일정한 재판절차를 거치지 않고도 투옥할 수 있게 하여 정부의
민족운동 탄압력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데 있었다.)과 아므리차르 대학살!(* 롤라트법의 실시에
반대해서 전국적으로 반영운동이 일어난 데 대하여 정부는 단호한 탄압조치를 취했다. 그리하여
1919년 4 월 13일 펀잡 주의 아므리차르 시에서 대학살사건이 일어났다. 즉 다이어 장군은
비무장의 군중에 발포를 명하여 379명의 사망자와 1, 200명의 부상자를 내게 했다.) 이것이
인도가 150만의 병사와 3억 파운드의 군사비를 제공하여 1차대전 수행에 적극 협력한 데 대한
전후 영국의 보답이었다. 전후 인도에 점차로 자치정부를 허용 하리라던 몬타규 성명의 약속을
믿고 '빵'을 구하던 인도는 '돌'을 얻은 셈이었다.
어긋난 기대 속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인도 민중의 가슴속에서 북받쳐오르고, 쓰디쓴
굴욕감이 납덩어리처럼 인도 민중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우리는 전능의 괴물한테 사로잡혀
어떻게도 할 수가 없는 듯이 보였다. 수족은 마비되고 정신은 무감동이었다"(Jawaharlal Nehru,
The Discovery of India, p.310. 앞으로는 Discovery로약기함)고 네루는 그의 [인도의 발견]에서
당시를 기막힌 심정으로 회고하고 있다. 사실 오랜 세월에 걸친 가차없는 착취로 말미암아
민중의 빈곤은 날로 더해갔고, 민족의 활력은 메말라들고 있었다. 몇 세대에 걸쳐 '피와 고생과
눈물과 땀'을 몽땅 바쳐버렸기 때문에, 인도의 육체와 정신은 병들 대로 병들었고, 민중의
연대생활은 해독을 입지 않은 면이 없었다. 농민과 노동자는 가난과 기아 속에서 비굴감과
공포심의 포로로 되었고, 중산계급이나 인텔리는 절망감과 허탈의식 속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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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은 그래도 수세기 동안에 걸친 가혹한 운명 속에 체념과 인내심이 생겨 있었으므로 빈곤과
기아 속에서도 일종의 침착성을 가지고 만능의 운명에 순종하고 있었으나, 인텔리는 그렇게 될
수도 얼었으니 그들은 보기에 따라서는 농민보다도 더 비참했었다. 실망과 불만에 가득 찬 그들
인텔리는 어디로 눈을 돌려야 할지를 몰랐다. 낡은 것도 새 것도 그들에게는 희망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뚜렷한 목적도, 불타는 사명감도 가질 수가 없었다. 따지고 보면 그들은 낡은
교양을 몸에 지니고 있는 것도 아니요, 현대의 사상이 몸에 배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므로
낡은 것에 집착한다고 해서, 또는 창백한 얼치기 서양모방자로 된다고 해서 비참한 현실에서의
구원이 있을 리가 만무하여, 마치 난파된 배처럼 인도 생활의 암담한 대해를 정처없이 헤맬
수밖에 없었다. 빈곤과 패배주의, 일거에 결판을 내려는 모험주의로는 좀처럼 빠져나을 수 없는
너무나 깊은 구렁텅이요, 기만적인 엉터리 요법으로는 결코 고칠 수 없는 뿌리 깊은 질환이었다.
간디가 인도 정치무대에 등장한 것은 바로 이때였다. "그는 마치 한바탕 부는 서늘한 바람에다
비길 만하여, 우리는 가슴을 펴고 깊이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그는 어둠을 비쳐주는 한줄기
빛과도 같아 우리의 눈에 낀 안개를 닦아냈다. 그는 또한 회오리바람처럼 많은 것을
뒤집어엎었지만, 특히 민중의 마음가짐을 변화시켰다"(Discovery, p.311)고 네루는 당시의 감격을
말하고 있다. 흥분과 희망의 급작스런 물결이 인도 민중의 마음속에서 일어나 이때부터 인도의
민족운동은 새로운 양상을 지니게 되었다. 고원한 이상과 현실적인 실천을 하나로 결부시킨
간디의 영도하에 인텔리는 물론이요, 농민도 동원되어 이제는 일반 대중을 기반으로 하는 인도의
민족운동이 성난 물결처럼 인도의 지평을 휩쓸게 되었다.
@p19
침체와 무기력, 절망감과 허탈의식 속에서 헤매던 인도 민중을 이토록 각성시켜 용기와 자신을
가지고 전진하도록 발동을 건 간디, 그는 과연 어떠한 인물이었을까 ? 그의 사상은 무엇이며, 또
그런 사상은 어떻게 실천에 옮겨졌을까 ?
원래 간디의 사상은 독서를 통해 서보다는 그 자신의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서 서서히
형성되었지만, 그런 경험은 시대적 및 사회적 배경과 동떨어져 있을 수는 없으므로, 먼저 영국
식민지 지배하의 인도의 실정부터 개관하기로 한다.
1. 인도는 왜 영국의 식민지로 되었나?
1) 유럽 세력의 진출과 인도의 영국 식민지화
15세기 말 바스코 다 가마에 의한 인도항로가 발견된 후, 포르투갈은 인도 서안의 고아를
본거지로 하여 동양무역의 독점을 꾀하게 되었다. 포르투갈이 노린 것은 통상로의 확보에
있었으므로, 인도와 그 밖의 아시아 제국의 연안 요지는 점거했으나, 그 세력을 내륙 깊숙이까지
침투시키는 일은 없었다. 16세기 말부터는 네덜란드와 영국이 아시아에 진출하더니 마침내
양국이 각각 동인도회사를 창립하여 조직적인 활동을 시작하자, 포르투갈의 세력은 점차
쇠퇴하였다. 네덜란드와 영국은 처음에는 향료 등의 생산지의 점유를 꾀하여 자바, 말래카
등지에서 대립했으나, 17세기 전반에는 네덜란드가 강했기 때문에 영국은 후퇴하여, 포르투갈
세력이 약화돼 있던 인도에 주력을 기울이게 되어, 마침내 마드라스, 봄베이, 캘커타의 3대
거점을 중심으로 하는 영국의 인도 진출이 적극화되었다.
@p20
한편 프랑스는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동인도회사를 설립했지만, 그 인도 진출은 영국과의
대립을 초래하였다. 그리하여 18세기 중엽에도 인도에서의 영불 양국의 항쟁은 계속되었는데,
처음에는 뒤플렉스가 지휘하는 프랑스가 우세했으나, 영국 측에서 클라이브가 활약하게 되자,
프랑스를 압도하고, 1757년 플래시 전투에서 그 승리는 결정적으로 되었다.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플래시 전투 후 인도의 통치기관으로 변모하여, 우선 벵골 지방을
회사령으로 하고, 그 후 남인도의 마이소르, 중인도의 마라타 동맹, 서북 인도의 시크교도 등의
권력을 차례차례로 타도하였다. 그 결과 이회사는 19세기 중엽까지에는 거의 전인도를
지배하기에 이르렀고, 1857년에서 1859년까지의 세포이의 반란을 계기로 무갈조는 완전히
멸망하고, 동인도회사에 의한 통치는 영국 정부의 직할통치로 되었다가, 1877년 새로
영령인되제국이 성립하여, 이에 인도는 역사상 처음으로 완전히 독립을 상실하고 문자 그대로
외국에 지배당하게 되고 말았다.
2) 영국 식민지화의 원인
그 면적 (오늘의 인도연방,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스리랑카의 합계)이 유럽 대륙 (소련과
핀란드 제외)의 크기가 해당되며, 그 안에 3억의 인구를 가지던 아대륙 인도가 왜 유럽 대륙
주변의 왜소한 섬나라인 영국의 식민지로 되고 말았을까? 네루는 당시를 회고하면서, "영국인이
인도의 지배에 성공한 것은 거의 우연한 일, 요행의 연속인 듯이 보인다. 여러 사태들 사이에
만일 무엇인가 약간의 변동이라도 있었더라면, 혹시 그것이 그들의 희망을 분쇄하고 그 야심을
종식시켰을지도 모른다."고 애석하게 여기고 있다
@p21
하기는 그들 영국인은 여러 차례 전투에서 패배당한 일이 있었다. 조금만 더 운이 나빴더라면,
그들은 인도에서의 발판을 잃었을지도 모르고, 또는 기껏해야 어딘가의 해안지역을 간신히
지탱하는 데 그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네루는 "더 깊이 음미해보면, 당시의 정세하에서는 그와
같은 사태진전에는 역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필연성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고 부언하고는,
무갈제국의 분열로 인한 불안정하고 무질서한 상태하에서 영국인은 제국지배를 위한 각축전에서
승리할 능력을 갖추고 있었음을 구체적으로 논증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네루는 그들 영국인이 먼
나라에서 온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누구도 그들을 인도의 패권을 다툴 진정한 상대라고는
생각하고 있지 않다가 그만 그들의 정체를 간파했을 때에는 이미 시기가 늦었었다고 통탄해 마지
않고 있다. 마치 어린애의 깜찍한 재간에 넘어간 방심하고 있던 씨름꾼처럼 졌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는 모양이다.
문제는 이러한 견해의 옳고 그름보다도 그러한 견해에서 그 편린을 엿볼 수 있는 자기 조국
인도에 대한 네루의 떳떳한 긍지에 있다. 원래 민족운동에 뛰어든 것은 "개인적 및 민족적인
자존심"때문이라고 주장하는 네루이지만, 유럽을 먼저 알고 난 후에 인도를 발견하게 된 네루가
인도에서 발견한 강점은 그에게 무한한 긍지를 갖게 하였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찬란하게 꽃피던 고대문화, 힘차게 밖으로 뻗어 나가던 강성한 제국, 더구나
성쇄한 변천의 기나긴 역사를 통해서 "그 근본적인 동일성을 유지하는 데 성공케" 한
"인도문명의 비상한 지속력과 적응성"은 비단 네루뿐 아니라 인도인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떳떳한 민족적 긍지를 가지게 할 것이다. 이러한 위대한 과거,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류
문화의 발상의 하나인 인더스문명은 놔두고라도 기원전 1, 2천년간에 걸쳐서, 종교, 철학, 문학,
법전, 예술을 비롯하여 천문학, 수학 (* 수학에 있어서 고대 인도인은 몇 가지 획기적인 발견을
했다. 특히 영의 기호, 십진법, 마이너스 기호의 사용, 대수에서 미지수를 표시하기 위한 알파벳
문자의 사용이 그것이다. 또한 인도인은 수에 대한 감각이 극히 예민하여 몹시 거대한 수(가령
10의 8승)와 반대로 극히 미세한 수 (가령 시간의 최소 단위는 대체로 17분의 1초였고, 또 최소의
척도는 대체로 1.3 * 7의 음수10승 인치에 해당하는 것이었다)를 다루고 있었다.), 의학 등 고도의
문화와 발달된 경제생활을 누리며 이미 기원전 4세기 말에는 거의 전인도에 걸친 최초의
통일제국을 건설했던 인도, 특히 정력에 넘치고 약동하는 정신을 가지던 시대인 서기 최초의
1천년간에는 그 문화와 세력이 동남아 일대에 미쳐, 각지에 식민지가 산재하고, 이란, 중국,
그리스 및 중앙아시아와 활발한 접촉을 가지던 인도, 16세기에는 이슬람정권이나마 무갈족
밑에서 전국이 거의 재통일되었던 그 인도가 왜 19세기에 와서 영국의 식민지로 되고 말았을까?
@p22
18세기 초엽에 무갈제국의 중앙집권체제가 붕괴하자, 많은 지방적 세력이 대두하였으나
18세기를 통해서 인도의 패권을 다투던 진정한 경쟁세력은 영, 불의 두 외국세력과 마라타동맹
및 마이소르의 두 국내세력이었다. 18세기 말에 접어들자, 결국 이 쟁패전은 마라타와 영국의
양자로 줄어들었지만, 마라타의 수장들 사이의 불화로 인하여 영국인에게 각각 격파당하고
말았다.
이 쟁패전의 과정을 피상적으로 관찰한다면, 영국인의 승리는 우연과 요행의 연속인 듯이
보일지도 모른다. 또한 영국인은 언제나 존재가 희미하게 되어 있던 무갈황제의 대리인으로서
행동한 데다가 그들의 벵골에서의 약탈과 특수한 교역방법은 결국 약탈을 한 다음 고국으로
돌아갈 외국인으로 보이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말 그렇게 보았다면 그것은 당시 인도의
패권을 다투던 각 세련의 지도자들이 얼마나 국제정세에 어두워 세계적 안목을 갖지 못했는가를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데 불과하다. 실로 인도인은 당시 근대적인 의미에서 민족감정을 갖지
못하여 그 들의 충성심은 그 토지의 수장에게 바쳐지고 있었다. 따라서 외국인에 대한 반감은
가지면서도 위기에 처하여 상호협력을 할 수 업었다. 이에 반하여 영국인은 극히 유능한 지도자
밑에 긴밀하게 결속된 고도의 정치적, 군사적 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상대방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정보에 통해 있어 인도인 세력의 분열과 대림을 남김없이 이용할 수 있었다. 이러한
영국인의 조직력은 기술적 진보에서 나왔고, 그런 기술적 진보의 배후에는 과학정신과 발랄한
생활감정이 있었다.
@p23
일찍이 십자군의 원정을 계기로 싹트기 시작한 유럽의 새 정신은 마침내 문예부흥을 일으켰다.
문예부흥은 기존 권위뿐 아니라 추상과 사변에도 도전하는 객관적 탐구의 새 정신을 앙양하여
안으로는 자연과학을 일으키고 밖으로는 대양 저편으로 모험의 손길을 뻗치게 하였다. 그 결과
신대륙과 신항로가 발견되었고, 이를 계기로 유럽은 종교개혁, 시민혁명, 산업혁명 등의 일련의
과정을 밟으면서 발전하여, 드디어 온 세계를 제패하기에 이르렀다. 세계를 제패하는 데 무엇보다
직접적으로 이바지한 것은 다름 아닌 해군력이었다. 인도의 해군력은 13세기에 남부의
촐라왕국의 몰락을 계기로 쇠퇴하여 15세기에는 아랍인이 인도양 전역을 지배했지만, 그들은
16세기에는 포르투갈을 선두로 하는 유럽 세력에게 구축당했고, 결국 인도양의 제해권은 영국의
수중으로 들어가게 되고 말았다. 바다의 제패는 그들 영국인에게 안전한 기지와 기회를 주었다.
그들은 일시적인 패배를 당해도 곧 회복하여 다시 공세를 취한 수가 있었다. 게다가 플래시의
승전으로 인한 벵골의 영유는 전비를 충당할 수 있는 거대한 부를 그들에게 주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들은 발달한 스파이 제도와 교묘한 오열 조종으로 대개의 전쟁에서는 실제의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이미 승리하고 있었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영국인의 인도 지배는 거의 필연적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물론
제국지배를 위한 각축전의 과정에서 영국인은 많은 요행을 가졌지만, 영국인은 그런 요행을
충분히 이용하여 승리할 능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관계는 비단 영국과 인도의
경우뿐 아니라, 널리 유럽과 아시아의 경우에도 해당된다. 여태까지 많은 면에서 뒤져 있던
유럽에서는 발랄한 새 정신이 일어나 새 기술을 발달시켜 자연력을 개발, 이용한 데 대하여,
아시아는 지난날의 노력에 지쳐서 거의 혼수상태에 빠진 채 인력에 의거하는 전통적인
생산방식에 매달려 있었다.
@p24
왜 이렇게 되었을까? 원래 문명은 외부의 공격보다는 내부적인 결함 때문에 쇠퇴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그 문명을 담당하는 국민이 지치거나 질이 저하된다는 인간적인 요인이 주가 되는
경우도 있고, 사회제도가 새로운 전진을 가로막는다는 제도적인 요인이 주가 되는 경우도 있다.
인도의 경우를 보면 후자일 것 같다. 인도문명의 쇠퇴는 13세기의 이슬람교도들의 침입 이전에
이미 역연한 바가 있었다. 생기와 활력, 창의와 탐구심에 차 있던 인도, 기술(*)과 경제생활이
고도로 발달해 있던 그 인도도 대체로 서기 1000년을 전후하여 서서히 쇠퇴과정에 들어섰다.
약동하던 생명력은 점차 약화되고 창조적 재능은 고갈되어갔다. 모험에의 충동은 자취를 감추고
탐구의 합리성은 과거의 맹목적인 우상숭배에 길을 비켰다. 이리하여 인도의 생활은 변화 없는
정체상태로 빠져들어갔다.
* 예를 들면 고대 인도에서는 제철업이 상당히 발달하고 있었다. 델리 근처에 거대한 철주가
있는데, 그 산화작용을 막아온 제련법을 현대 과학자들도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 이
철주에 새긴 명문은 서기 4세기에서 7세기간에 사용된 굴타 문자로 씌어 있다. 그러나 일부
학자는 철주 그 자체는 이 명문보다 훨씬 더 오래 된 것이며, 명문은 후에 새겨 넣은 것이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이슬람, 특히 무갈의 지배는 인도의 생활에 변화를 일으켜 새로운 자극에 의한 예술, 건축, 그
밖의 문화양식에 생기를 돌게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본래의 활력과 창조적인 생기를 잃은
낡은 두 세계의 접촉의 결과였던만큼, 인도의 생활에는 기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지는 못하고
지난날의 침체상태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이러한 침체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그 근본적인 원인은 카스트제도(*)를 근간으로 하는 인도
사회구조의 점점 더해가는 엄격성과 배타성에 있었다고 네루는 말하고 있다(Discovery, p. 188).
배타의 정신은 창조력을 약화시키고 집단적 편견을 조장시켰다. 인도의 생활은 기정의 틀로
세분화되고, 그 안에서 각 개인의 일은 항구적으로 고정되어 타인과는 거의 관계를 갖지 않았다.
국방은 크샤트리아의 일이며, 무역과 상업은 브라만과 크샤트리아가 천시하는 직업인이었다.
교육과 발전의 기회는 하층 카스트에 속하는 이들에게는 개방되지 않았다. 도시의 경제와 산업은
상당히 발달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기구는 대체로 봉건적이었다.
@p25
* 카스트 제도: 인도에 침입한 아리안 민족이 선주민족인 드라비다인을 정복하는 과정에 생겨난
제도이다. 고대에는 피 정복자를 근절시키거나 노예로 만들거나 했지만, 아리아인은 그런
방법을 쓰지 않고, 오래도록 자신의 우월한 지위를 보전하기 위하여 일종의 복합사회적인
국가를 만들었다. 이 국가에서는 일정한 한계 안에서, 또는 일반적인 규범에 따라, 각 집단에게는
특정한 직업에 종사하며 각자의 관습과 희망에 따라 자기의 생활을 영위하는 자유가 부여되었다.
다른 집단에 간섭하거나 서로 싸우거나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사실상의 유일한 금제였다.
당초에는 이 제도는 융통성이 있는 진보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신래자나 낡은 집단 안에서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은 충분한 인원만 있으면, 언제라도 새 집단을 형성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각기의 집단 안에는 평등과 민주주의가 존재하여 선거에 의해 선출된 지도자들이
지휘하고, 무슨 중대한 문제가 일어나면 언제나 집단 전체와 협의했다. 요컨대, 카스트는 직무,
직능에 기초를 두는 하나의 집단제도였다. 그것은 공통된 교의 없이 각 집단에 완전한 자유를
인정하면서 모두를 포섭하려는 하나의 질서였다. 이 카스트는 기본적으로 브라만(승려계급),
크샤트리아(무사계급), 바이샤(상인계급), 수드라(노동계급)의 넷으로 나누어지나, 각 카스트는
수많은 아카스트로 다시 나누어져 있다. 그리고 이 카스트에 속하지 못하는 가장 낮은 신분의
사람들은 불가촉천민 (untouchables)이라고 불린다. 이런 카스트제도는 처음에는 사회의 질서와
안정을 목표로 서서히 완성 되었지만, 그것이 고정되어 융통성이 없어지자, 많은 불편과 폐해를
낳아 인도의 발전을 저해하는 질곡으로 되었다.
@p26
그러므로 새로운 발전을 위해서는 그런 기구를 변혁하여 재능의 새 원천을 해방해야 했지만
카스트제도는 그와 같은 변혁을 완강하게 가로막고 있었다.
카스트제도와 촌락자치제(*) 및 합동가족(joint family)(**)을 3대 지주로 삼는 인도의
사회구조는 인도 사회에 질서와 안정을 주는 데는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힘과 단결은 주었으나, 팽창과 보다 큰 단결에는 장애로 되었다. 그것은 일정한 범위
안에서는 다소의 자유를 주었으나, 보다 큰 자유의 발달을 회생시키고, 방대한 수의
사람들에게서 그 발전의 기회를 빼앗는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러한 사회기구는
발전과 팽창에의 길을 제공하고 있는 동안은 진보적이었으나 일단 팽창의 한계에 달하면
정체적이 되고, 그 후에는 필연적으로 퇴보적이 되고 말았다.
* 촌락자치제: 먼 옛날부터 자급자족의 생활을 영위해온 특별한 사회조직인 촌락공동체는
광범한 자치제가 허용되어, 중앙 정부는 부과된 세금이 납부되는 한 거의 간섭하지 않았다.
관습법은 강한 힘을 가졌고, 정치적 내지 군사적인 권력도 관습법에 의거하는 권리에는
간섭하는 일이 좀처럼 없었다. 그리하여 이 공동체의 경계가 변경되는 일은 거의 없었고,
심지어 전쟁과 흉작 또는 질병으로 촌락 그 자체가 파괴되는 경우에도, 같은 명칭, 경계,
이해, 같은 가족이 수세기에 걸쳐 그대로 남았다. 그것은 정체적이며, 카스트제도에
오염되어 때로 야만적인 자연숭배와 미신의 소굴로 되었다.
**: 인도사회의 단위는 개인이 아니라 합동가족이다. 이른바 대가족의 동거생활이며,
가족 구성원은 제사를 같이하고, 식사를 같이하며 재산을 공유한다. 극히 일부의 지방(아삼
및 케랄라 주)을 제외하면, 대개 가부장제이며, 가부장의 권위에 종속함으로써,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생활이 보장된다. 합동가족의 장점으로서, 개인의 이기주의가 억제되고,
사유재산의 폐해를 수정하며, 양로, 실업의 면에서는 사회복지의 기능을 가진다고 강조하는
사람도 있지만, 반면 개인의 확립이 제약당하고 있음을 간과할 수는 없다. 가족의 범위를
넘어서 해방된 개인을 단위로 하는 사회 내지 사회집단을 인정할 수 없는 점에서 인도에서
근대화가 뒤진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다만 합동가족이 재산의 공유와 그 연대책임제라는
경제적 기능을 가지고 있으므로, 자본과 사업경영의 면에서 가족 성원에 의한 합명, 합자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 적지 않다는 사실은, 합동가족이 몇 개 모여서 그대로 일종의
아카스트를 형성하고 있는 사실과 더불어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이런 가족제도는 현재는
급속도로 붕괴되고 있다.
그 결과 인도생활은 온갖 면에서 쇠퇴의 길을 걷게 되고, 또한 지방적, 봉건적인 감정이
발달하게 되어 전체로서의 인도의 발전을 가로막게 되었던 것이다.
@p27
2. 영국의 식민지정책과 인도의 민족운동
1) 영국지배의 의의와 그 모순
영국의 인도 지배는 인도로서는 역사상 처음 겪는 외국에 의한 지배였다. 인도는 이전에도
이슬람의 침략자들에게 정복당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중앙아시아의 침략자들은
히르지건 투글라크건 혹은 무갈(모두 인도에 침입한 이슬람왕조)이건간에, 다 같이 인도의
국경 안에 정착하고, 침략자의 2세부터는 인도의 생활에 동화, 융합되어 인도인으로서 그
영토를 지배하였다. 또한 그들은 서방의 이슬람제국과는 거의 또는 전연 교섭을 갖지
않았다(K.M.Panikkar, A survey of Indian History, 제 2판 서문). 인도는 일찍이 중력의
중심이 그 국토 밖에 있는 정치적, 경제적 체제 속에 끌어넣어진 일은 한 번도 없었고,
기원과 성격에 있어서 이국적이며, 게다가 영원히 융합할 수 없는 지배계급에게 예속당한
일은 없었다. 인도의 역사상 처음으로 정치적 지배가 외부에 의해서 행해지고, 그 경제는 멀리
떨어진 곳에 의해서 좌우되었으며, 또한 인도에 동화되려고 하거나 융합되려고 한 적이 없이
언제나 주의 깊게 이국적이었던 지배계급한테 통치당하게 되었다.
@p28
영국의 지배는 인도 사회에 심대한 변화를 일으켰다. 그것은 인도로서는 여태까지의
어떠한 침략이나 정치적, 경제적 변화와는 비교가 안될 만큼 전혀 새로운 현상이었다.
이렇듯 영국 지배가 인도 사회에 예전과는 전혀 다른 충격을 준 이유는 영국이 새로운
기계문명의 선구자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세계를 변혁시키려는 새로운 역사적 세력을
대표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 점을 자각하지는 못했어도, 변화와 변혁의 선구자이며
대표자였다. 그러나 그들은 변화가 자기들의 지위를 공고화하는 데 필요하거나, 자기들의 이
익을 위해 인도의 인적, 물적 자원을 개발, 착취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경우를 제외하면, 온갖
수단을 다하여 변화를 저지시키려고 애썼다. 그것은 그들이 진보적인 변화가 인도 민중의
힘을 강화하여 결국 자기들의 입장을 약화시킬까봐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화는
일어났다. 진보적인 방향에서의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유럽문명의 새로운 충격은
너무나 강하여, "영국의 정책에도 불구하고" (Discovery, p.269) 그런 변화는 일어나고야
말았다. 그런데 그런 변화는 인도 민중을 각성시켰고, 각성한 인도 민중은 민족적 자각을
갖게 되어 영국의 지배에 반기를 들게 되었다.
2) 세포이의 반란과 신식민지정책의 기조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대규모의 민족운동은 1857년에서 1859년까지의 세포이의
반란에서 시작된다. 세포이의 반란은 영국 산업자본의 지배와 수탈의 강화에 조응하는
것이다.
영국의 인도 지배는 1600년의 동인도회사의 설립에서 시작되지만, 전기적 상업자본의
독점적 무역기관이었던 동인도회사는 주로 약탈적 무역에 종사해왔으나, 1757년의 플래시
전투를 계기로 통치권력으로 등장하여 인도 농민의 직접적 수탈을 주요 사업으로 삼기에
이르렀다.
@p29
이 때문에 인도의 부의 유출이 심하여, 인도 특히 벵골의 빈곤화가 초래되었지만, 이
벵골에서 수탈해간 부가 자본으로 되어 영국의 산업혁명을 일으키는 데 커다란 원동력이
되었다.
그런데 동인도회사를 통한 인도의 수탈을 발판으로 해서 성장한 영국 산업자본은,
산업혁명의 진전과 더불어 동인도회사의 무궤도한 수탈과 무역독점에 반대하고, 인도를
영국의 상품시장과 원료기지로 만들도록 요구하게 되어 그 한계 안에서 수탈의 합리화를 그
정책으로 삼게 되었다. 그런 정책의 집약적 표현이 18세기 말에서 19세기에 걸친 토지제도
의 설정(*)과 1813년 이래의 무역독점 해제요, 또한 농업원료품의 강제재배와
재식기업의 장려정책이었다. 이런 정책에 따라 영국 상품은 인도에 쇄도하여 자급자족적인
촌락공동체를 파괴하고, 인도의 농촌을 세계 자본주의의 물결 속에 강제로 끌어넣게 되었다.
인도의 직물공업은 파멸되고, 수많은 수공업자는 직업을 잃고 몰락했다.
* 토지제도의 설정: 영국인의 인도 지배가 확립됐을 무렵, 인도의 농촌에는 토지소유권이
국가에 있는지, 농민에 있는지 또는 촌락공동체에 있는지 확실치 않았기 때문에, 무갈의 세력이
약화됨에 따라 농민과 국가 사이에 있던 징세청부인인 자민다리의 수가 느는 동시에
사실상의 소유자로 되어 있었다. 그들은 대개 오래된 귀족출신은 아니고, 사기나 폭력에
의해서 명의상의 소유자로 되어 있었던 것인데, 벵골, 비하르 연합, 북마드라스의 각 주에서
영국인은 그들을 영국법적인 의미에서의 지주로 결정했다. 영국인이 자민다리를 지주로
오인했는지 또는 알고 있으면서도 의식적으로 그렇게 했는지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다.
아무튼 이 영대차지제도(permanentsettlement)의 설정으로 인도 농촌사회의 전통인 농민의
일종의 자립적인 권리의 관습은 부인되고, 영국은 새로운 지주계급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게 되었다. 동시에 여태까지 자급자족적 이었던 인도의 농촌에는 투기적인
상인이나 부재지주가 속출하는 한편 엄격한 지세 징수와 차금의 저당으로써 토지를 분할,
매도하는 일이 성행하여 토지소유의 영세화를 촉진하게 되었다.
@p30
그런데 이런 영대차지제도(즉 자민다리제) 아래서는 지세는 고정되어 증액할 수가 없었으므로
영국인에게는 불리하다는 것이 점차 명백해졌다. 그래서 인도의 다른 지방에서는 새로운
토지제도를 도입하였는데 그것은 일정 기간에 한해서 지주로 인정하고 경우에 따라 지세의
증액도 행해지는 제도였다. 그리고 촌락공동체적 구성이 지방에서는 직접 소농을 대상으로
하는 일종의 자작농소유(라이오트와리제)가 설정되었다. 그 방식은 어떻든, 그 결과 이른바
근대적 토지소유(지세징수) 제도가 강제로 도입되게 된 인도 농촌사회는 그 관습적
신분기관, 지주보유, 자치제의 전통적 제도가 은 타격을 입는 동시에 폐쇄적인 촌락사회가
자본주의 앞에 개방당하게 되고 말았다.
한편 영국에 의해서 창출된 지주, 즉 자민다리(zamindari: 회교도 지주)와
타르쿠다르(tarqudar: 힌두교도 지주)는 봉건적인 공납과 부역을 농민에게 부과하여, 농민의
토지 생산물의 50퍼센트 또는 60퍼센트가 그들 지주 또는 정부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영국은
전통적인 경제제도를 파괴하면서 봉건적인 지주를 창출, 옹호하고, 자본주의를 인도에
도입하면서도 근대 공업의 발달은 극력 저지했다. 즉 영국은 한편으로는 농민층의 분해를
촉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 노동력을 흡수할 공업의 발달을 억제했다. 실로
동인도회사는 영국 상품과 경쟁할 공업제품에는 국내관세를 부과함으로써 영국 상품과
대항할 수 없게 하고, 또한 영국 정부도 인도의 공업제품에 대해서 금지적인 수입관세를
부과하였다. 이 때문에 인도의 산업자본은 그 발달이 저해되어 인도는 1820년대에
공업제품의 수출국에서 수입 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게다가 인도의 농촌에는 공업의
저해로 인한 도시에서의 인구역류도 있고 하여, 가난한 농민들이 넘쳐 토지소유의 명세화가
촉진되는 동시에 영국과 결탁한 지주나 고리대금업자에게 토지를 빼앗기고, 소작인이
아니면 농노적인 농업노동자로 되는 자가 늘어 농업생산력이 저하되었다. 또한 영국은
예로부터 아시아의 군주의 중요 임무였던 관개시설의 신설, 유지를 전적으로 무시했으므로,
인도와 생활의 파괴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기근의 빈도와 그 재해의 정도(*)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더욱 증대해 갔다.
* : 1769년에서 1800년 사이에는 대기근이 4회, 1802년에서 1838년 사이에는 12회,
1854년에서 1908년 사이에는 35회나 되었다. 그리고 1891년에서 1900년 사이의 10년간에는
무려 1, 900만 명이 아사했다.
@p31
이렇듯 산업자본이 우세해 짐에 따라 인도의 경제는 식민지적 상품, 원료 시장으로 재편성
당하게 되었거니와 이는 공공연한 약탈보다도 오히려 실제로는 훨씬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온
합법적인 수탈방식이었다. 영국의 인도 정복이 완성에 가까워지던 때요, 또한 산업자본이
영국에서 패권을 확립하던 무렵인 19세기 중엽에는 영국의 인도 지배도 그 모순이 명백히
드러나게 되었다. 구매력의 감소로 인하여 영국 상품의 수입액은 격감되는 한편 인도인의
저항은 증대하여 인도의 재정은 파탄되고 말았다. 이를 구출하는 동시에 산업자본의 상품,
원료시장의 확대 요구에 대응하기 위하여 정복전쟁과 영토연합정책이 강력히 추진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1856년까지에는 전체 면적의 약 60퍼센트, 전체 인구의 약 70퍼센트는
동인도회사의 직할령으로서 직접 영국의 영토가 되고, 나머지 지역은 대소 500여의 번왕국으로서,
조약에 따라 영국의 종주권 밑에 놓이게 되고 말았다. 이 정복전쟁은 그 전비가 인도인의
부담으로, 세포이 (Sepoy)라고 불리는 인도인 용병을 주로 고용함으로써 단행되었지만, 그 정복의
완성과 정복 후의 주민의 곤경은 세포이에게도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세포이의 반란 전후에는 인도 사회의 각층 즉 영지를 잃은 구번왕, 기타의 구지배자를
비롯하여, 부당한 대우에 고민하던 지식인, 정복전쟁이 끝나자 대우가 나빠진 세포이,
실직한 수공업자, 영국이 도입한 토지제도 때문에 고생하던 농민 등 영국인 지배자의
앞잡이로 되어 있던 일부의 계층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계층에 속하는 사랑들간의 불만이
충만되고 있었다. 각처에서 농민폭동이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났다.
@p32
이런 불만이 점차 응집하여, 세포이에게 종교적 계율에 어긋난다고 생각되는 명령(*)을
내렸다는 극히 사소한 자극으로 전인도의 3분의 2를 정분 세포이의 반란이 폭발했다.
* : 1857년 초부터 새 탄약통에 이슬람교도가 싫어하는 돼지기름과 힌두교도가
신성시하는 소의 기름을 발라서 세포이에게 사용케 했다.
1857년 5월 10일, 미루트의 세포이 3개 연대가 봉기하여 영국인 사관을 죽이고 병사를
태우고 정치범을 석방하고는 델리로 진군했다. 미루트의 시민과 델리의 군대 및 시민도
이에 합류했는데, 이때 그들이 옹립하는 이는 무갈황제였다. 당시 유폐의 몸이었던
무갈황제는 무갈제국의 부활을 선언하고, 힌두교도, 이슬람교도의 구별 없이 모두 단결하여
영국인을 축출하라고 호소했다. 반란은 곧 서북주의 펀잡, 아우드, 라지푸타나, 봄베이,
하이데라바드에 까지 파급됐다. 그러나 이 반란도 본국의 원군과 구르카 및 시크, 그리고
일부 번왕과 대지주의 후원을 얻은 영국 신예 군대의 무자비한 반격으로 마침내 1859년
7월에는 완전히 진압당하고 말았다.
이 반란이 실패한 이유로서는, #1 자본주의의 미발달로 인하여 중산계급이 성장해 있지
못했기 때문에 이 반란은 봉건적 지배자와 농민을 중심으로 하는, 말하자면 본능적인
배외반란이었고, 반란을 통일적, 조직적으로 지도할 짜여진 지도세력이 없었다는 점,
#2 지도권을 장악한 봉건적 지배자에게는 국민을 분기시킬 이상도 정책도 업었고, 그
지배자층과 농민 사이의 이해관계의 대립이 반란도중에 표면화하여 나중에는 그들 지배자가
영국의 회유에 넘어갔다는 점, #3 영국이 정치, 경제적으로 가장 강성하던 시기인데다가
국제정세가 19세기 중 영국에게 가장 유리하던 때였는 데 반하여, 인도의 민족운동에는
이를 원조할 국제세력이 없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Discovery, p.279)
@p33
요컨대 이 반란은 불리한 국제정세하에서 일어난 본질적으로 봉건적인 봉기였다. 그러나
이 반란은 단순한 봉건적인 정치운동과는 달라 인종, 종교, 카스트 등의 구별 없이 광범한
계층을 동원하여 공통의 정복자를 축출한다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 규합시킨 최초의
반영반란이었다는 점에서 인도의 해방운동사상 극히 중대한 의의를 가진다. 이 반란은
영국의 조야를 진감시켜, 그 후의 인도 통치정책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온 동시에, 이
반란에서 나타난 인도 민중의 용기와 영국의 잔학한 토벌의 기억은 그 후의 인도해방운동에
참가하는 사람들에게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반란은 또한 영국의 세계정책을 근본적으로
동요시켜, 동아시아 여러 나라의 영국령화를 간접적으로 방지하는 구실도 했던 것이다.
세포이의 반란 후, 영국인은 인도를 정부의 직접통치하에 두고, 통치기구의 정비와 군대 및
경찰의 재편에 의하여 직접적으로 지배력의 강화를 꾀하는 한편 다음과 같은 인도 지배의
수법을 사용하게 되었는데, 이런 수법은 2차대전 후 인도가 독립할 때까지 본질적으로는
그대로 지속되었다.
(1) 영국 지배와 밀착하는 특권계급 및 새 계급의 창출과 보호
#1 번왕-영국은 번왕을 점진적으로 배제하여 영국의 직접 통치를 확립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있었으나 세포이의 반란은 그런 정책을 일변시켰다. 왜냐하면 이미 영지를 빼앗긴
예전의 번왕들은 반란에 적극 참가한 데 반하여, 아직 번왕으로 남아 있는 이들은 반란에
가담하기를 꺼리거나 혹은 영국측에 가담하여 적극적으로 원조했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
을 통해서 영국은 그들 번왕으로 하여금 민중을 통제케 하는 편이 효과적이라는 점을
발견했으므로 그들은 그대로 존치하고 배후에서 조종하기로 했다.
#2 지주-토지제도를 설정함으로써 유럽식 지주를 영국이 창출했다함은 전술한 바이다. 그들
지주 중에는 반란에 참가한 이들도 적지 않았으나 약간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그들의
반역에도 불구하고 '충성과 봉사'를 조건으로 다시 지주의 지위를 회복케 하여 그들을 계속
영국 지배의 지주의 하나로 삼았다.
@p34
#3 관리-번왕과 지주는 이렇게 해서 온존된 기본적인 특권층이거나, 이제는 영국 지배화
보다 밀착된 새로운 계층인 대규모의 인도인 관리층이 창출되게 되었다. 이전에는 인도인의
고용은 부득이한 경우 이외에는 회피되었지만, 반란의 경험을 통해서 그들 인도인은 영국의
통치에 의존하는 분자이기 때문에 신용할 수 있고, 영국 지배의 대행인으로서 대우 할 수
있다는 점이 드러났다. 그래서 이른바, '인도 통치의 인도화'라는 행정개혁의 단행을 보게
되었다. 이에 새 교육을 받은 인도인이 하급관리로서 정부기관에 등용되었다. 그들은 대체로
영국 권력에는 아부하고 인도 민중에게는 존대한 중간적 매개자의 역할을 했지만, 관리로
취직한다는 희망과 예상이, 달리 취직할 길이 열려 있지 않던 많은 인도 지식인에게 널리
영향을 미쳐 도의를 타락시켰다. 요컨대 새로운 관리층의 창출은 식민지지배를 강화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 되었다.
(2) 분할통치정책의 강화
세포이 반란의 경험은 영국 식민지통치상의 원칙인 분할통치의 효용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그러므로 영국은 카스트, 종교, 인종의 차이를 지나치게 존중하고, 특히 위에서 말한 번왕과
지주의 권리를 보호하는 한편, 신관리에는 주로 힌두교도 (세포이 반란의 직접 목표가
무갈왕조의 복위에 있었으므로)를 등용함으로써 통일적인 반영세력의 결집을 막았고,
19세기 말부터는 반대로 회교도를 옹호하여 회교, 힌두교 양교도 사이의 대립을 조장시켰다.
이렇듯 영국은 분할통치 정책을 채택함으로써 한편으로는 봉건성&n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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