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3대 문학상 수상소설집
송기숙
백의민족.1968년
1
맹수한테 엉덩이라도 물린 돼지새끼처럼 째지는 기적소리를 지르며 기차가 역 구내로 쏠려
들었다. 수은등마저 조을조을하던 구내가 일시에 잠이 깬 듯 역원들과 지쳐빠진 승객들이
술렁거렸다. 기적소리는 구내를 날려 버릴 듯 요란했고, 기관차의 숨소리 또한 목구멍에 꺽
꺽 막혔다.
"두 시간이나 늦은 주제에 허겁은 되게 떠네."
가슴팍에 휭 구멍을 뚫고 지나가는 것 같은 기적소리에 몸을 웅크리고 나자 곁에 섰던 사
내가 누구 들으라는 듯 뇌까렸다. 고개를 돌려 웃어 주었다. 아까 대합실에서부터 괜히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말을 걸어보고 실없는 농담으로 지친 손님들의 웃음을 청하던 사내였다.
차 안은 텅텅 비어 있었다. 너무 썰렁해서 한 칸을 더 건너보았다. 마찬가지다. 한 칸에 기
껏 여남은 남짓한 승객이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그 귀하던 자리가 이건 너무 지천으로 널
려 있었다. 여기서 탔던 사람들은 괜히 자리를 기웃거리고 다닐 뿐, 얼른 앉을 생각을 안했
다. 아무리 골라보아야 삼등 완행, 더구나 험하기로 이름난, 이 호남선 야간열차에 별나게
알뜰한 자리가 있을 턱이 없겠는데, 모두들 실없이 서성거리고만 다녔다.
먼 데서 타고 온 사람들은 대부분 잠이 들어 있었다. 새우등을 하고 고양이처럼 웅크려
자고 있는 늙은이, 입을 벌리고 드르렁드르렁 코를 고는 젊은이, 젖통을 까젖힌 채 펑하게
퍼질러 누운 아낙네. 그의 가슴팍에는 어린애가 개구리처럼 엎어져 있고, 그 건너편에는 또
올망졸망한 어린애들이 강아지 새끼들처럼 서로 껴안고 있었다. 사내들은 신 신은 발을 그
대로 건너편 의자에 던져 놓기도 했고 더 극성스런 친구들은 다른 자리의 시트를 서너 장씩
뜯어다가 숫제 침대를 만들어 눕기도 했다. 이런 극성스런 친구들은, 되도록 편히 가보자는
것이라기보다, 이렇게 지천으로 비어 있는 자리를 한꺼번에 전부 향락하지 못해 속이 상한
다는 식이다. 콩나물 시루같이 숨이 막히는 속에서 두 시간, 세 시간씩 그냥 서서 끙끙 앓던
억울함을 분풀이하고 싶고, 양껏 벌충하고 싶은 것이다.
나도 좀 서성거리다가 자리를 잡아 앉았다. 막 앉아 있으려니 바로 내 앞 한 자리 건너에
한복으로 성장한 젊은 여인이 자리를 정하고 앉을 차비를 했다. 아까 같이 차를 기다렸던
여인이다. 이런 완행의 승객으로는 보기 드문, 말하자면 고급 손님이었다. 그러나 나는 여인
이 나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말고 앉아 주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다. 내 시야에 사람
이 하나 끼어드는 것이 귀찮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나도, 그 침대를 만들어 누워가는
친구들만큼이나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싶었던 것이다. 사실 이 자리가 마음에 들었던 것은
이 주위에 그만큼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여인은 저쪽으로 고개를 돌려 주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아까도 눈을 끌었던 대로 여간 품위가 있어 보이는 게 아니었다. 방금
도 자리에 앉는 자태가 꼭 논에 내리는 학이었다. 자리를 정해 놓고 조심스레 한번 주위를
둘러보고는, 몸무게를 치올리듯 치맛자락을 한쪽으로 쓸어올리며, 살포시 자리에 몸을 내려
놓았다. 학이, 앉을 자리를 어름잡아 놓고 허공을 날아 한바퀴 주위를 살피고는 조심스레 미
끄러 내리다가 날개를 활닥여 몸무게를 찔근 치올리며 모포기 사에에 다리를 내려놓듯....
기차는 들어닥쳤던 기세와는 달리 한번 멈추더니 얼른 떠날 기미가 없었다. 11시 정각, 제
대로 달려도 종착역인 목포까지는 두 시간 반, 그러니까 새벽 한 시 반에야 닿을 것인데 따
분했다.
건너편 유리창 곁에 또 누가 자리를 잡아 앉았다. 통로 저편 두 자리 건너 대각선으로 나
와 마주보는 자리다. 역시, 아까 대합실에서 같이 차를 기다렸던 사십 대의 건장한 사내였
다. 요사이는 좀 구경하기 어려운 염색한 미군잠바를 입었고, 또 그 허름한 잠바에 어울리게
땟국이 흐르는 운동모를 쓰고 있었다. 내 시야에 맞바로 끼어든 것이 달갑지 않았으나, 그는
아까 대합실에서 그랬던 것처럼 제 편에서 먼저 시야를 가려 버렸다. 의자에 등을 기대고
운동모를 벗어 그걸 무슨 뚜껑처럼 얼굴에 씌우고 잠잘 차비를 한 것이다. 자는 것인지 그
냥 그러고만 있는 것인지 팔짱을 끼고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하여간 제 편에서 먼저 시선
을 가려주니 적이 안심이었다.
한참만에 차가 움직였다.
"제밀헐 놈의 새끼들!"
건너편 사내였다. 얼굴에 얹었던 운동모를 뚜껑처럼 벗어들고, 기관차 쪽을 잔뜩 흘겼다.
기관사라도 곁에 있다면 한 대 쥐어박을 듯, 속힘이 꼬인 소리였다. 그는 흘겼던 눈을 거둬
들이고 다시 운동모를 뚜껑처럼 닫으며 '으응' 신음하듯 화를 삭혔다. 그러니까 그는 자는
것이 아니라 그 뚜껑 밑에서 울화가 끓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나도 그 몽둥이를 휘두르는 것같이 무뚝한 욕설에 속이 후련했다. 그러나 그는 누구
를 의식하고 공감을 청한 표정이나 목소리는 아니었다. 주위 사람은 도무지 안중에 없었다.
아까 대합실에서도 자고 있는 것이 아니고 저렇게 모자 밑에서 혼자였을 뿐이었던 것 같다.
나는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더구나 그 욕설로 하여 그는 나의 의식 속에 깊숙이 끼어
들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내 시야에 있어도 좋은, 말하자면 동료의식 같은 그런 것이었다.
이 세상에 떳떳하게 한자리를 차지할 만한 자격을 지녔고 그래서 어떤 때는 나 같은 사람이
못하는 일을 가로맡아 해줄 것 같은 신뢰까지도 느껴졌다.
나는 그의 사람값을 매겨보기 시작했다. 백 원, 이백 원, 오백 원, 얼른 값이 나지 않았으
나 백원 대라는 어리만은 잡혔다.
나는 걸핏하면 이렇게 사람을 놓고 그 값을 매겨보는 버릇이 있다. 이것은 도무지 귀찮은
버릇이었으나, 이제는 영 고칠 수 없는 고질이 되다시피 했다. 그런데 그 사람값이라는 것이
또 어처구니없고 황당무계한 것이어서 지금까지 누구한테도 이야기해 본 적이 없다.
저 사람이 지금 무슨 억울한 일로 죽게 되는데, 내가 아무도 모르게 온 얼마만 치러 주면
살아난다고 할 때, 내가 선뜻 치를 수 있는 금액이다. 그 당사자뿐만 아니라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심지어는 하나님까지도 모르게 말이다.
그 액수는 몇십 원이나, 혹은 일 원에서 몇십 만원, 내 가족이나 어떤 사람은 내 전재산,
전재산이라야 사십만원짜리 오막살이뿐이지만....그리고 내 명예나 직업까지도 내놓을 때가
있었다.
내 친구나 존경하는 사람, 세계적인 과학자나 예술가, 그리고 전혀 얼굴도 모르는 불량배,
죄수, 혹은 아프리카 토인이나 북극의 에스키모, 이런 수많은 사람들을 앞에 놓고 그 값을
매기기에 고심하는 것이다. 낯모르는 사람은 백 원이나 십 원, 그러나 그도 한둘이 아니고
한꺼번에 몇만명 죽는다면 십 원도 벅찼고, 일 원? 그도 수에 따라 합계가 만 원, 십만 원,
이십만 원....그러나 내가 어째서 그들의 생명에 이토록 무거운 책임을 짊어져야 하느냐고 짜
증이 나는 것이다. 그러다가 거리에라도 나가면 그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비난하고 흘겨보
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심지어는 그들이 꿈속에까지 나타나서 나를 쫓아왔다. 강도한
테 칼을 맞은 사람, 총맞고 신음하는 병사, 억울한 누명의 사형수, 공사판의 바위 밑에 깔린
노동자, 차에 치인 어린애, 호랑이한테 덜미를 물려가는 놈, 물에 빠진 놈, 불에 타는 놈, 문
둥이, 거지, 미국놈, 소련놈 할 것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팔다리가 부러지고 피가 낭자한 모
습으로 고함을 치고 애걸하고 물어뜯고 할퀴면서 쫓아오는 것이고, 나는 죽을 힘을 다해서
도망쳐 다니다가 땀을 뻘뻘 흘리며 잠에서 깨는 것이다..
언제부터 생긴 버릇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 사람값 때문에 어처구니없이 심각할 때가
있다. 요사이는 생활이 쪼들리다보니 그 액수는 차츰 내려가기만 했다. 나의 어떤 췬구가 자
기에게 매겨진 액수를 안다면 당장 내 따귀를 갈기면서 절교를 하고 말 것이다.. 나는 그들
한테 미안해서 견딜 수가 없다.
껌껌한 차창에다 망연히 눈을 대고 있는데, 누가 바로 내 앞자리에 털썩 몸뚱이를 던져
놓았다. 예쁘고, 한눈에 교양이 있어 보이는, 여대생 타입의 말쑥한 아가씨였다.
"거지 같은 새끼들!"
그는 앉자마자 책을 펴들며 욕부터 했다. 나에 대한 무례함을 그런 식으로 변명하는 모양
이다. 왜 저런 아가씨가 이 험한 밤차를 탔을까?
하여간 나는 모처럼 좀 혼자 가는가 했더니, 운동모와 또 이 아가씨가 끼어들었다. 그리고
묘하게 두사람이 다 첫마디가 욕설이었다.
그는 불안한 듯 뒤를 돌아봤다. 그 거지 같다는 새끼들이 쫓아올 모양인가? 나는 더럭 겁
이 났다. 이 아가씨가 나에게 끼어들 것 같았다. 그 새끼들이 쫓아와서 아가씨에게 수작을
걸면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 험한 야간열차에서 더구나 이 밤중까지 숫기를 피우며
놀아날 녀석들이란, 아가씨 말이 아니더라도 거지같이 지저분한 똘만이들이 아니면 촌티가
설벗은 휴가병 녀석들일 것이고, 나는 그런 녀석들을 제지할 위세도 배짱도 없다. 그래도 남
자의 그늘이라고 찾아든 것인데, 그런 깡패막이의 그늘로는 당초에 아가씨가 사람을 잘못
본 것이다. 아무래도 이건 암담한 일이었다. 저 운동모처럼 얼굴에 씌워 버릴 뚜껑도 없고,
거기다가 놈들이 한술 더 떠서, 아가씨에게 호기를 보일 배짱으로 괜히 나한테 찍자를 붙여
오는 날이면, 그러지 않아도 후줄근한 내 몰골은 도무지 참담할 것이었다. 사실 처음에는 이
아가씨를 두고, 이런 찻간에서 있음직한 신파조의 상상에 야릇한 긴장을 느끼기도 했으나,
놈들의 억센 주먹에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나가떨어질 환상이 눈앞에 어른거리자, 갑자기
아가씨가 무슨 요물처럼 끔찍하게 느껴졌다.
건너편 운동모의 우람하게 발그라진 어깨판이 새삼 부러웠다.
-쌍놈의 새끼들, 이것들은 사회의 독충이다. 돈을 채워서 된다면 그저 당장 천 원, 아니
오백 원, 그렇다, 지금 당장 탁 죽어진다면 천 원이다. 천 원!
주먹까지 불끈 쥐며 이렇게 어르다가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죽
기는커녕 그들이 이쪽으로 오고 있지 않은가? 여기 저기 두리번거리는 것이 틀림없이 그 놈
들이다. 나는차창으로 얼굴을 치워 버렸다.
"아가씨, 여기 계셨군요? 오해 마십시오. 우리는 절대로 깡패가 아닙니다. 우리 얘길 들어
보세요."
키가 작고 똥똥한 녀석이 넉살좋게 씨부리며 아가씨 곁에 앉았다. 나는 가만히 눈을 돌려,
혹 흘겨보는 눈이 되지 않도록 신경을 쓰며 그들을 살폈다. 넥타이랑 맨 것이 얼풋 깡패 같
은 인상은 아니었다. 스물두셋, 술기가 있는 것이 좀 불안했으나 자기들 말대로 깡패는 아닐
것 같았다.
"아저씨, 여기 좀 앉읍시다."
키 큰 놈이었다. 나는 우선 이만한 것이 다행이다 싶어 적이 안심이 된 다음이라, 내 엉덩
이를 한쪽으로 치워 자리를 넓게 내주며 고개까지 한번 주억거렸다. 아가씨는 새침한 표정
그대로 책에다 눈만 대고 있었다.
"우리는 지금 뭘 하나 연구중입니다. 그래 이 차에 탄 손님들을 상대로 개별 인터뷰를 하
고 다니는 참인데, 그만 이 아가씨가 오핼 했어요."
똥똥한 녀석이 아가씨의 눈치를 살피며 변명하듯 말했다.
"술 한잔 드십시오."
내 곁에 앉은 키 큰 녀석이 여행가방에서 소주병을 꺼내 잔을 권했다. 나는 초면에 이거
미안하지 않느냐고 인사치레를 하면서 잔을 받았다.
"우리 연구에 협조만 해주신다면 술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똥똥한 녀석이 오징어발을 찢어 내밀며 웃었다. 나는 출출하던 김이라 단숨에 잔을 비웠
다. 잔을 건네려 했으나 마저 한잔 더 들라고 했다.
"첫잔은 우리를 여기서 내쫓지 말아달라는 잔이고, 이 잔은 협조를 구하는 잔입니다."
똥똥한 녀석이 껄껄 웃고 나서, 아가씨 쪽을 살피며 눈을 한번 찡긋했다. 그저 틈만 보이
면 넉살좋게 말을 걸고 들어갈 판이다. 어지간히 무안을 당해도 어디 한 군데 구려질 구석
이 없을 것같이 빤드르한 얼굴이다.
나는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무슨 연굽니까?"
"좀 괴상스럽니다. 명년에 대학을 졸업하는데, 졸업 논문 주제가 '한국인의 해학적 발상'입
니다. 말하자면 우리 나라 사람의 우스갯소리의 방법이나 소재가 어떤 것이냐 하는 것이지
요."
"거 참 기발한 착상입니다."
나는 잔을 들고 턱없이 큰 소리로 탄성을 발했다.
속담, 음담패설, 소설 등을 자료로 하다가 직접 사람들을 상대로 자료를 구해보자고 나섰
다는 것이다.
"서울서부터 가능한 모든 승객을 상대로 일생 동안 직접 겪은 일이나, 남한테 들은 이야기
가운데서 가장 우스웠던 것이 무어냐 이건데, 남의 입 벌리기가 이렇게 어려운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나는 그럴 거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 녀석이 어지간히 비웟장이 좋고, 능청스러워 망정이지, 이건 도무지 문전축객이 아니라
자칫하다가는 뺨맞기 알맞겠어요."
키 큰 친구도 말을 마치며 아가씨의 눈치를 살폈다.
"아까는 미안했습니다. 이것 좀 드세요."
"괜찮아요."
아가씨는 적이 누그러진 눈치였으나 그대로 눈살을 내리깐 채였다. 얼른 감정을 풀어 놓
기가 좀 쑥스러운 모양이었다.
"이거 손이 부끄럽지 않습니까?"
그 앞에 손을 내밀고 벋대였다. 나는 사태의 진전이 좀 위태로워 눈을 피하느라고 남은
술을 꼴깍 들이켰다.
"어디 수집한 얘기나 한번 들어봅시다. 재미있는 걸로."
그때 아가씨를 건너다보고 있던 키 큰 친구의 입이 벙그러졌다. 아가씨가 빙긋 웃으며 손
을 내밀고 있었던 것이다.
"허허, 그걸 함부로 합니까?"
그제야 유쾌하게들 웃으며 내 말에 대답했다.
"그럼 아가씨하고 사과한 걸 자축할 겸 하나 해라. 그 부처님 상봉 친 이야기."
키 큰 친구의 말에 그들은 지레 한바탕 자지러지게 웃었다. 내용이 우스운 모양이었다.
"아저씨도 이따 하나 해야 합니다. 아가씨도 마찬가지예요."
이렇게 다짐을 두고 나서 똥똥한 친구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절간에 부처님 있지 않아요? 어째서 한 손은 이렇게 무얼 퉁기는 시늉을 하고 있고, 또
한 손은 무얼 내놓으라는 듯이 이렇게 내밀고 있는 줄 아세요?"
두 손을 내밀어 부처님이 하고 있는 시늉을 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란 다 옛날 이야깁니다. 하루는 예수님이 심심해서 절간으로 부처님
한테 놀러갔어요. 이 사람 여전하시군. 맨날 그렇게 근엄해 보았자 별수없네. 요새 세상놈들
이란 원체 약아빠져 놓으니 도무지 말이 먹혀 들어가야 자네나 내나 장사가 되지. 빌어먹을
것 우리도 이러지만 말고, 여가 이용삼아서 이마빡 맞기 삼봉이나 한번 치세. 이러고 화투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와, 웃음이 터졌다. 아가씨는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나는 어찌나 웃었던지 눈물
이 다 났다.
"하! 저 아저씨도 안 주무셨군!"
저 건너편 운동모가 뚜껑을 벗어 머리에 얹고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키 큰 친구가 술잔
을 들고 가서 몇 마디 건네자 운동모는 빙긋 웃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성큼 일어섰다.
"무슨 이야기가 그렇게 재밌습니까? 누가 삼봉을 쳤다고요? 그거면 나도 자신 있습니다."
키 큰 친구 곁에 비집고 앉으며 한바탕 자리를 웃겼다. 차가 어느 역에 멈췄을 때라 이야
기를 들은 모양이다. 잔이 갔다.
"술은 공짭니다만 이야기는 공짜가 아닙니다."
운동모는 소웃음같이 후후, 크게 웃으며 사양하는 기색도 없이 잔을 들이켰다.
"심심해서 부처님과 예수님이 삼봉을 쳤어요."
똥똥한 친구의 말에 운동모는 또 크게 한번 웃고 거푸 잔을 받았다.
"열전이 벌어졌는데, 예수님이 칠띠로 간단히 이겨 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부처님 이
마빼기를 사정없이 퉁겨 버렸어요. 부처님 이마에 콩만한 검은 점이 하나 있지 않아요? 그
게 그래서 생긴 거래요."
와, 웃었다.
"이번에는 부처님도 화가 나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쳤습니다. 고전 끝에 이번에는 부처
님이 이겼어요."
"옳체!"
운동모가 오징어 발을 뜯으며 장단을 맞췄다.
"네 이놈! 아까는 나를 사정없이 퉁겼겠다! 이제 맛 한번 봐라. 이렇게 어르며 손톱에 호호
독을 넣어가지고 덤비니까, 예수님이 겁이 나서 도망을 치려고 했습니다. 가만 있어, 그러지
말고 신사적으로 하자. 그럼 이마빼기를 맞겠나? 그 대신 돈을 내겠나, 둘 중에서 하나를 택
해라. 그래서 두 손을 이러고 있는 겁니다."
폭소가 터졌다.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들 웃었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빙그레 웃는 것도 다 속이 있구나!"
내 말에 또 한바탕 웃었다.
"거 참, 누가 잘 지어냈다!"
운동모가 감탄을 했다.
"하나 더 하슈. 재밌습니다."
내가 또 청했다.
"이건 다 아는 얘기겠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지
않았습니까?"
운동모가 알아듣도록 '부활'이란 말을 쓰지 않았다.
"제자들한테 가서 첫마디가 뭔 줄 아십니까?"
"뭡니까?"
"놀랐지이? 으응? 놀랐을 거다!"
와 웃었다.
"그러니까 제자 한놈이 '웃기네!' 또 한놈은 '놀란 것 좋아하네'."
나는 배가 아플 지경이었다.
"이건 한 예순 살쯤 나 보이는 노인의 경험담입니다."
잔이 오가고 아가씨는 과자를 하나씩 돌렸다.
"감사합니다. 이거 한잔?"
똥똥한 친구가 과자에 사례한다는 식으로 아가씨에게 잔을 내밀멸 장난스레 웃었다.
"웃기지 마세요."
그 동안 기차는 역을 여럿 지나 밤 들판을 부지런히 달리고 있었다. 사내들은 모두 발그
레 술기가 돌았고, 분위기도 그 술기처럼 훈훈했다.
"이 노인이 이북서 피난올 때 이야긴데, 피난민 수용소에서 담배를 피우려고 부싯돌을 찰
칵찰칵 켜고 있으려니까, 키가 껑충한 미군 한놈이 다가오더래요. 무슨 잘못이라도 있나 싶
어, 부싯돌을 슬그머니 감추며 겁먹은 얼굴로 멀뚱거리고 있는데, 이놈이 잠바 호주머니를
부시럭거리더니, 첫눈에도 썩 값져 보이는 라이터를 불쑥 내밀며 부싯돌과 바꾸자는 시늉을
하더란 겁니다. 도부지 믿기지가 않아서 그냥 멀뚱거리고만 있으려니까 이번에는 만년필까
지 쑥 빼서 덤으로 얹으며 사뭇 은근하게 나오더라는 겁니다. 그래 슬그머니 부싯돌을 내밀
었더니 땡큐를 연발하며 무슨 보물이나 얻은 듯이 그걸 쳐보며 좋아하더라는 거예요. 그 노
인은 나중에 그걸 처분해서 쌀을 두 말이나 팔았다는 횡재담인데, 이 노인 그 다음 이야기
가 걸작입니다."
그는 노인의 말투를 흉내내며 말을 이었다.
"그 녀석들 키만 떨렁 컸지 생판 빙충이들이라. 그래 온전한 놈 치고야, 보면 그 부싯돌을
모를 거여? 나도 그때 미국놈 상대로 장사나 한번 했더라며 톡톡히 한밑천 잡는 건데...."
이러면서 사뭇 애석해 하니까 같이 앉았던 다른 노인이 받았다.
"그 놈들 생기기도 안 미련하게 생겼드라고? 지까진 놈들이 부싯돌에서 불나는 이치를 알
았을 것이여? 그 놈들 우리 짚세기(짚신)를 찬찬히 디려다보더니 이걸 어디서 시작해서 어
디서 마무리를 했느냐고 탄복을 하드라여. 그 놈들 머리로야 참 귀신이 곡할 노릇이제."
이렇게 득의에 찬 표정이자, 부싯돌 노인이 또 받았다.
"하기야 감쪽같제. 왜 거 우리 수숫대 빗자루 안 있다고? 묶어논 끈을 보고 조선 사람은
기운도 시다고 쌔바닥을 널름거리드라여. 허허."
"그 그럴거라."
소주잔에 거나해진 노인들의 한국인 우월론은 끝이 없었던 모양이다.
"이제 선생님이 하나 하세요."
내 차례가 됐다. 나는 오징어 발을 뜯으며 잠깐 망설였다. 한두 가지가 있었으나 얼른 내
키지가 않아서였다.
하나는, 나의 시골 마을에서 있었던 일로, 딸 시집 보내다가 쌀 서너 가마니 색깔이(봄에
묵은 곡식을 꾸었다가 가을에 햇곡식으로 비싼 이자를 붙여 갚는 것, 편집자 주)진 것이 삼
사 년 굴러 새끼를 치고 보니 열 가마니가 넘어 버렸는데 산전 몇 마지기로는 우선 목구멍
깜냥에도 못 당하는 판이라 도무지 헤어나지를 못하고 한숨만 쉬고 있었다. 그러다가 결국
양잿물을 마시고 자살해 버린 내동양반이라 택호를 가진이의 이야기였다. 그가 양잿물을 마
실 때, 거기다가 사카린을 타서 마셨다는 것이다. 원체 가난해서 여름이면 냉수에가 사카린
을 타서 시원하게 한사발씩 마셔보기가 늘 소원이었다는데 그 소원이던 사카린을 죽을 때
양잿물에다 타서 마신 그 역설적인 감각적 호사에 짜릿한 맛이 있었으나 별로 우습지 않을
것 같았다.
또 하나는 왜정 때, 징병에 끌려가서 폭격에 한 눈을 잃고 온, 국민학교 사 학년 때 나의
담임 선생인 이야기인데, 그것은 그 분한테 좀 미안했다. 그분은 체조 시간이면 옆으로 팔펴
기 운동할 때 늘 말썽이었다. 자기는 팔을 평평하게 편다고 펴는 모양이지만, 어찌된 일인지
한쪽 팔은 훨씬 위로, 한쪽 팔은 훨씬 아래로 처졌다. 우리도 그렇게 따라 하면, 이렇게 반
듯하게 펴지 못하느냐고 그 삐딱하게 편 팔에 한껏 힘을 주어 되펴면서 호령이었다. 눈을
부라리며 사뭇 호령을 하는 바람에 제대로 폈던 놈들도 급회전하는 비행기의 날개모양 아래
위로 삐딱하게 고쳐 폈다. 지금 생각하면 부상을 당하면서 어디 신경을 한 군데 크게 다쳐
평형감각이 잘못된 때문이었던 것 같은데, 그때 우리는 그것이 늘상 심심찮은 우스갯거리였
고 그 선생의 아들가지 사뭇 놀려 주었던 것이다.
"빨리 하세요."
"네."
'다방논쟁' 이야기를 할까 했으나, 아까 이들을 깡패로 오인했던 일이 퍼뜩 떠올랐다. 그래
'다방논쟁'은 뒤로 미루기로 했다.
이 다방논쟁은 어느 해 추석이던가 역시 고향에 가서 겪은 일이다.
열너댓 살짜리들이 서울로 돈벌이를 갔다가 고향에 다니러 와서 저마다 서울 자랑이 시퍼
랬다. 잘해야 변두리 이발소 견습으로나 지내던 놈들이 그래도 서울물을 좀 마셨다고 우선
말씨부터 숫제 서울놈 행세로 아는 체였다. 그러다가 제놈들끼리 아주 맹랑한 논쟁이 벌어
져 내가 그 심판관이 됐던 일이 있었다.
"야, 임마! 다방이 똥누는 변소라고? 웃기지 마! 변소는 화장실이라고 하는 거야. 다방이
전화하는 데지 뭐 똥 누는 데? 짜식 정말 웃기네."
"저런 깡똥, 전화 좋아하네! 전화는 공중전화 있지 않아? 종로에서 말야, 어떤 신사가 변소
에 가고 싶단께는 쩌그 다방 있지 않아, 이러든디 그래?"
이런 식으로 논쟁이 치열했던 모양으로 이놈들이 나한테 우, 몰려와 다방이 용변보는 데
냐, 전화하는 데냐고 심판을 청해온 것이다. 그 가운데는 서울서 이삼 년씩이나 굴러먹은 놈
도 있었는데, 나는 다방이 뭔지 납득시키는 데 진땀을 뺐다.
다방에는 전화도 있고, 변소도 있기 때문에 누구나 그걸 사용할 수는 있지만, 원래 목적은
그것이 아니고 차를 마시며 이야기하는 곳이라고 설명했더니, 한놈이 차가 뭐냐는 것이다.
"차라고 하는 것은 일테면 숭늉과도 비슷하고 술과도 비슷한 것인데, 옳지, 저 길가에 냉차
장수 있지? 바로 그것이다."
그러자 또 한놈이,
"서울서 살아봤어요?"
서울서 살아보지도 않았으면서 어떻게 그토록 잘 아느냐고 신용이 안간다는 투다.
"이놈아! 다방은 읍내만 나가도 셋이나 있다."
놈들은 멋쩍은 듯 뒤통수를 긁으며 물러갔다.
"뭘 하고 계십니까?"
"네, 이것은 아직 아무한테도 안한 이야긴데, 나는 묘한 버릇이 하나 있어요."
먼저 사람값은 돈으로 매겨보는 버릇을 대충 설명하고, 아까 이 아가씨가 쫓겨왔을 때 잘
못하다가는 그 깡패들한테 큰 봉변을 당할 것 같아 암담했었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래서 그런 깡패들이 돈을 채워서 된다면 오백 원? 아니 지금 당장 탁 없어진다면 천 원
이다 하고 천 원을 걸었습니다."
"우하하."
모두 허리를 쥐면 웃었다. 유독 아가씨가 웃음을 걷잡지 못했다.
"잘못했더라면 이거 깨끗이 갈 뻔했구나!"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오백 원으로 할까, 천 원으로 할까 하다가 막 천원으로 결정을 했
는데, 바로 그때 그 깡패들이 나타났어요. 솔직히 말해서 간이 덜렁합디다."
폭소가 터졌다.
"내 속셈이 꼭 들킨 것 같아 더 겁이 났습니다. 그래서 얼른 얼굴을 돌리며 속으로 그 돈
걸었던 것을 슬쩍 취소해 버렸지요. 그래서 지금 이렇게들 살아 있는 겁니다."
아가씨는 몸을 비꼬며 웃었다.
한참들 웃고 나서 똥똥한 친구가,
"그럼 이번에는 우리가 아까 말씀대로 억울하게 죽게 된다면 얼마쯤 치러 주시겠습니까?"
자못 흥미를 느끼는 모양이었다.
"아직 값을 매겨보지 않았습니다."
"아니, 대충?"
"그럼 반대로 내가 죽는다면 얼마를 내주시겠어요?"
그는 잠깐 생각하더니 '글쎄요' 하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하여간 한잔 더 드시고 우리한테는 값을 좀 높이 매겨 주십시오."
키 큰 친구가 술 한 병을 다시 꺼내서 내 앞에 잔을 내밀었다.
"허허, 와이로를 쓰는구나."
운동모의 시새운 듯한 말에 모두 또 웃었다.
아가씨까지도 자기 값에 흥미를 느끼는 눈치였다. 나는 그들의 생명을 내 손아귀에 쥔 것
같은 득의를 느끼며 술잔을 기울이고 나서 엉뚱한 열변을 토했다.
"도대체 나는 인류애니 동포애니 하는 말에 신용이 안 갑니다. 남 앞에서 그 따위 무슨 애
를 찾는 놈치고 위선자 아닌 놈 없고 도적놈 아닌 놈 없습니다. 그런 놈들이야말로, 그것으
로 세상이 다 좋아진다고 해도, 남이 안 보는 데서는 제 잔털 하나 안 뽑을 놈들이에요. 또
자선냄비에 돈을 넣는 여인들의 행동은 무엇입니까? 그것으로 제가 큰 자선을 베푼다는 자
기만족과 허영일 뿐입니다. 구두닦기는 또 어떻습니까? 제놈은 변변히 먹지도 못하면서 이
천 원 삼천 원을 무슨 의연금으로 내는 놈이 있어요. 저도 남을 도와주는 위치에 놓고 싶은
눈물겨운 허영이 아니면, 무슨 진실을 행하고 있다는 감상적 허위입니다. 썩어빠진 매스컴은
또 그런 허영을 조장하고.... 솔직히 말해서 나는 내 아는 사람이 죽어간다 하더래도, 아까
말한 대로 아무도 모른다고 하면 그의 결혼식에 냈을 축하금 정도도 안 내질 것 같은 경우
가 많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의 관계를 돈으로 계산해 보는 것은 그 인류애니 우정이니 하
는 것을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기차가 어느 시골역에 멈추었다. 기차 소리가 죽자, 그 속에서 내 말소리만 유난히 크게
튀어올라 차 안을 울렸다. 나는 그때서야 턱없이 흥분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며, 달팽이가
몸뚱이를 웅크리듯 말꼬리를 숙여 이야기를 얼버무려 버렸다. 술김에 어이없이 큰 소리로
객쩍은 열변을 토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투른 연기를 하고 난 배우처럼 열쩍어 혼자 얼굴을
붉혔다. 똥똥한 친구가 잔을 디밀면서 일리 있는 말씀이라고 고개를 끄덕여 주는 바람에 거
기다 겨우 마음을 기댈 수 있었다.
앞에 앉았던 아까 그 한복으로 성장한 여인이 짐을 챙겨 들고 내리고 있었다.
"이제 얼마나 남았지요?"
"한 시간쯤 더 가면 될거예요."
키 큰 친구의 물음에 아가씨가 대답했다.
"목포는 처음입니까?"
"네."
그 사이, 운동모는 내리는 여인의 뒷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더니 그가 밖으로 사라지자 몸
을 일으켜 차창에 서린 성에를 쓱쓱 문지르고 거기 바싹 눈을 댔다. 우리들의 눈도 밖으로
쏠렸다. 두세 사람이 출찰구를 빠져 나가고 그 여인의 가족인 듯한 사람들이 나와 있다가
반갑게 맞았다.
운동모는 아까부터 이따금 여인의 자리를 심상치 않게 넘겨다보았었다.
"무얼 그렇게 보십니까?"
똥똥한 친구가 핀잔을 주듯 물었다. 운동모는 멋쩍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혹시 오십만 원짜리가 아닌가 싶어 아까부터 감시를 했는데 헛탕이구먼!"
그는 좀 비굴하게 웃으며 운동모를 벗어서 모표 붙이는 부분을 가리켰다. 거기에 새끼손
가락 드나들 요량의 구멍이 하나 뚫려 있었다. 그는 아까 의자에 고개를 기대로 누워 있을
때처럼 모자를 얼굴에 얹어 보이며, 그 구멍으로 환히 보인다는 시늉을 했다. 그는 무슨 신
기한 요술이라도 가르쳐 주는 득의의 표정이었다.
"에끼, 여보슈!"
똥똥한 친구가 흘기며 웃었다.
"그럼 끝까지 따라가 보시지?"
"아이들이 마중 나와 있지 않습니까?"
"어떤 점이 수상하게 보였습니까?"
"저런 멋진 여자가 이런 차를 탄 것이 수상했지라우."
좀 헤프게 웃었다.
"그럼 이 아가씨도?"
아가씨가 눈을 들어 운동모를 보았다. 곱지 않은 눈초리였다.
"에헤."
운동모는 어색한 모양이었다.
"이 선생님은 돈을 내고 사람을 살리려고 고민인데, 아저씨는 거꾸로 잡아서 돈을 벌 궁립
니다그려."
키 큰 친구가 웃으며 말했다.
"내가 잡는 것은 간첩인데요?"
"하긴 그렇지만...."
아저씨는 좀 시무룩한 표정이었다. 손수건 네귀를 가지런히 맞추어 반듯하게 접어가지고,
무릎 위에서 다지고 있었다.
"아가씨 차롑니다."
키 큰 친구가 심상찮은 아가씨의 감정은 넌지시 떠보았다.
"제가 왜 이 차를 탄 줄 아세요? 까닭이 있어요. 이 이야기는 아까 그 연구테마에는 맞지
않을 거예요. 물론 우습지도 않고요. 그리고 뭐 이 차를 탄 것을 변명하자는 것도 아니에
요."
아가씨는 눈을 밑으로 깐 채 말을 이었다. 그때 열차 공안원들이 저쪽으로 몰려갔다.
"대학 입학하고 얼마 안돼서 좀 앓았거든요. 집에서 요양을 하려고 내려오게 되었어요. 그
때 태극호를 탔거든요.
졸다가 목이 말라 사이다를 한병 사 마셨다는 거다.
마시고 나서 무심결에 빈 병을 창 밖으로 내던져 버렸는데, 막 던져놓고 나니 아차 하는
생각이 들어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때가 초여름이라 들판에는 벼가 파랗게 자라고
있었기 때문에 혹 논 매는 사람이 맞지 않았나 싶어서였다. 다행히 농부들은 없었지만 병이
하필 논귀퉁이에 있는 바위에 맞아 파삭 깨지더라는 것이다.
"순간 저는 아찔했어요. 농부들이 맨발로 논을 맬 게 아니에요. 유리조각이 있는 줄도 모르
고 막 휘저을 것인데, 그러면 물부은 손발이 어떻게 되겠어요? 저는 식은땀을 흘렸어요."
그는 몸서리를 쳤다.
집에 오자 병이 데쳐 오래도록 앓다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곧장 기차를 타고 거기를 찾아
나섰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벼가 키대로 자라서 팬 다음이라 그 조그마한 바위는
벼 속에 묻혔는지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거기가 어디쯤이었던
가도, 심지어는 어느 역 사이였던가도 알 수가 없었다. 어림잡아 강경과 정읍사이를 다시 한
번 왔다갔다 했으나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런데 오늘 내려오다가 그 바위 생각이 났어요."
"찾았나요?"
키 큰 친구가 성급하게 물었다.
"네, 강경 근방이 아니고 훨씬 아래 장성 역을 조금 지나서였어요. 되올라가서 논 임자를
찾았더니 아주 조그마한 오막살이이서 늙은 할머니가 나오셨어요."
그는 속죄하듯 차근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할머니 내외가 자식도 없이 살다가 할아버지는 바로 지난 달에 세상을 뜨고 지금은 할
머니 혼자 사신다더군요."
모두 숨을 죽이고 있었다.
"가지고 있던 몇 푼 안되는 돈만 쥐어 주고 집을 나와 버렸어요."
"그 상처로 죽었나요?"
키 큰 친구였다.
"그건 물론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잦아들어가는 소리였다.
"참 여성다운 미담입니다."
키 큰 친구가 감탄을 했다.
"뭐라구요? 그럼 남성들이면 어쩐단 말씀이에요."
아가씨가 발끈했다.
"아, 아닙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키 큰 친구는 손을 내저으며 당황했다.
"이것은 참 신나는 이야깁니다."
운동모는 이제 내 차례란 듯 불쑥 입을 열며, 자기 이야기에 미리 취해 빙그레 웃었다. 아
가씨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별 흥미가 없었던지 자기 차례를 그만큼 조급하게 기다리고 있었
던지, 아가씨의 날카로운 감정같은 것은 도무지 아랑곳 없는 태도였다.
"이걸 보십시오."
잠바 자크를 직 그어, 한쪽 옷섶을 크게 벌리며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잠바 앞섶 위 포켓
부분에 무슨 큼직한 훈장이 하나 매달려 있었다. 아가씨의 이야기에 좀 숙연했던 눈들이 그
리 쏠려 둥그래졌다. 비닐봉지로 한 겹, 소중히 싼 훈장을 조심스럽게 따내더니 그걸 손바닥
위에 얹어 일일이 눈앞에 갖다 댔다. 아가씨의 눈앞에까지 들이댔다. 아가씨는 건성으로 눈
길을 스쳤다.
"이것이 보통 훈장인 줄 아요? 이래봬도 화랑 무공훈장입니다. 지리산 공비 토벌 작전에서
한꺼번에 빨생이 열 놈을 생포하고 두 놈을 사살한 무공으로 탄 것입니다. 꼭 둘이 나가서
열두 놈을 잡았지라우."
그는 훈장 꼬투리를 쳐들어 보이며 한 놈을 사살했다고 할 때는 손가락으로 방아쇠까지
당겨 총 쏘는 시늉을 했다.
그러다가 손가락 총을 얼른 겨둬들이며 이야기를 딱 멈추었다. 눈들이 운동모의 놀란 눈
길을 따라갔다. 아까 몰려갔던 공안원들이 웬 사람들을 서넛 묶어서 끌고 왔다. 뒤에는 묶이
지 않은 사람이 하나 따라오며 공안원에게 무얼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아까 송정리 역에
서 기차보고 허겁떤다고 하던 친구였다.
"저 새끼들 결국 걸려들었구나."
운동모가 뇌까렸다.
"뭡니까?"
"사기도박단입니다. 저 뒤에 따라간 새끼가 털린 모양입니다. 개새끼. 씨언하다."
"아는 사람입니까?"
내가 물었다.
"저 새끼, 형제들이 군대 가서 죽는 바람에 먹고 사는 새낍니다. 육이오때 죽은 두 형님 연
금으로 먹고 살다가 이번에는 동생까지 월남 가서 죽었는디, 쌍놈의 새끼가 동생 죽어서 나
온 돈은 노름판에서 홀랑 날렸어라우. 인자 노름 않는다고 손꾸락까지 자른 새끼가 또 지랄
했구만. 장사한다고 껍죽거리더니, 지 버릇 개 못 준다고....끌끌."
그들이 사라진 쪽을 흘기고 나서, 술을 한모금 꼴깍 마셨다.
"조심하쇼!"
훈장을 만지고 있는 똥똥한 친구에게 그게 무슨 부서질 물건이나 한 듯이 한마디 주의를
주었다.
다시 빙그레 웃으며 그쳤던 이야기로 돌아갔다.
"지리산 전투가 치열할 땝니다. 둘이 척후를 나갔어요. 경상도 놈인디 그 새끼도 되게 날쌘
놈이었지라우. 살금살금 기어서 쬐깐한 능선을 하나 넘어선께는...."
눈을 부릅뜨고, 술잔 든 손까지 놀려 살금살금 기는 시늉을 했다.
"하, 요놈의 새끼들이 그 밑 골짜기에서 수십 명 우굴우굴 모여 있습디다. 무슨 지시를 하
는가 한 놈이 무얼 설명하고. 간이 덜얼합디다. 저 새끼들을 생포하자고, 둘이 눈짓을 탁 하
고는 제일 포복으로 기어서 옆으로 뽀짝 붙었지라우. 그래갖고는 번개같이 일어나서 에무왕
을 곽 들이댐시롱, 손들엇 한께는, 어어!"
'에무왕을 콱' 하다가 들고 있던 종이잔을 폭삭 쥐어 버렸다. 쏟아지는 술을 손바닥으로 받
으며 냉큼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손바닥의 술까지 핥고 나서 구겨진 잔을 거북하게 내려
다보았다. 우리는 배를 쥐고 웃었다.
"버리십시오. 여기 또 있습니다."
똥똥한 친구가 가방에서 새 잔을 꺼내 다시 술을 채웠다.
그는 다시 입을 앙다물고 총을 들이대는 시늉을 하며 이야기를 이었다. 나는 아무래도 종
이잔이 또 위태로워 조마조마했다.
"꼼작만 하면 쏜다읭, 이람시롱 대든께는 새끼들 손을 들고 야코가 팩 죽습디다. 나는 총을
들이대고 있고 갱상도 치가 전선줄을 줏어 갖고 요놈의 새끼들을 괴기두름 영끄대끼, 한 놈
씩 한 놈식 꽝꽝 때려문것지라우."
사투리는 완전히 원색으로 변했다.
"거지반 문거간디, 언뜻 본께는 한 놈의 새끼가 어느 새끼(사이에) 손 하나를 내리고 안 있
소? 겁짐에 빵 해부렀지라우. 권총을 뺀지 알았단 말이요. 그란디, 허허 나참."
어이없다는 듯 혼자 웃고 나서,
"이 새끼가 그 주제에 대장인디, 그 새기 첨부텀 손이 한나빼끼 없는 외팔이드란 말이오,
외팔이!허허허."
그는 우스워 죽겠다는 듯 고개를 쳐들고 웃었다. 모두 따라 웃긴 했으나 그의 웃음만큼
요란하지는 않았다.
"그란디, 문끄다가 본께는 전선줄은 다 됐는디, 한 놈의 새끼가 남았드란 말이요. 그냥 데
리고 갈 수는 없고, 마음은 급하고, 에라 너도 한방 묵어라, 쾅 지저대부렀지라우. 허어엉."
그의 허겁스렁 웃음 속에 아가씨의 '어머' 소리가 깔려 버렸다.
2
내가 다시 그 운동모를 만난 것은 그때부터 두어 주일 지나서였다. 방학중이라 집에 박혀
있다가 모처럼 시내를 나갔었다.
"아이구 선생님! 선생님 아니십니까? 나를 모르겠습니까?"
"아, 네, 네."
실은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슬그머니 눈길을 피하려다가 고삐를 낚아체잉듯 붙잡힌
다음이라 멋쩍게 웃으며 엉거주춤 손을 내맡겼다. 그는 내 조그마한 손을 위아래로 사뭇 요
란스럽게 흔들어대면서, 이거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다고 못내 반가워했다.
"한잔 합시다."
그는 내 사정 같은 것은 묻지도 않고 내 팔을, 그것이 무슨 강아지 목줄이기나 한 것같이,
훌쩍 잡아끌고 곁에 있는 대포집으로 들어갔다. 그는 이미 한잔 걸친 모양으로 상당히 술기
가 있었다. 나는 그에게 술을 얻어먹게 된다는 것이 미안했다. 사실 아까 그에게서 눈을 피
해 버렸던 것도, 그날 저녁 집에 와서 그에게 매긴 사람값이 너무 적었기 때문이었다.
"저희들 사람값이나 많이 매겨 주십시오."
그날 저녁, 무슨 감명 깊은 영화라도 보고 나오는 기분으로 출찰구를 빠져나와 그야말로
석별의 인사를 나누면서 이런 부탁을 했던 것이고, 나는 정말 집에 돌아오며 그들이 무고히
죽어갈 때 얼마쯤 치러 줄 것인가를 생각했었다. 아가씨와 두 청년은 선뜻 천 원 대를 넘어
서는 것이었으나 그 운동모는 백원 대에서 오르락내리락 했었다.
그런데 오늘 이 운동모한테서 내가 그에게 매겼던 사람값이 이상으로 술을 얻어먹게 된다
면 나는 그의 목숨에 대해서, 그가 나에게 베푸는 술 한자리만큼의 호의도 못 가진 셈이 되
는 것이다. 자신의 가난과 인색이 새삼 야속하게 느껴지며 씁쓸한 환멸의 비감이 들었다. 술
청 안은 자욱한 담배연기 속에 사람이 붐비고 있엇다. 잠깐 어물어물 하려니까 나가는 사람
이 있어 긴 테이블의 한쪽 끝에 맞보고 자리를 잡았다.
"여, 아주머니!"
큰 소리로 불렀다. 저쪽에서 주문을 받고 있던 주모가 고개를 돌려 알아들었다는 눈치를
해놓고는, 다시 그들과 이야기를 하려 했다.
"아주머니! 아, 아주머니!"
너무 큰 소리에 나는 주위 사람들이 미안했으나. 그는 기어코 여인의 주목을 가로챘다.
"여그 막걸리 한 되하고 저 문저리 있소?"
주모가 고개를 저었다.
"그럼 모치는? 응, 그것 뜸뿍 한 접시?"
그는 담배를 꺼내서 나한테 한 가치 권하고 성냥을 직 그어 불을 붙였다.
"선생님, 여그가 공산당 세상이요? 민주주의 세상이요?"
홍두깨 같은 소리를 들이대며 흥분부터 했다.
"지난번에 지라산에서 빨갱이 잡았다는 이야기 했었지라우."
잠바의 자크를 칙 그어 옷섶을 펼쳤다. 예의 훈장이 비닐봉지에 싸여 매달려 있었다. 곁에
앉은 사람들도 다 보라는 듯이 옷섶을 크게 펼쳐 양쪽으로 내둘렀다.
"이것이 그래 보통 훈장인지 아요?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생명을 걸고 싸운 무공으로 탄
훈장입니다."
마치 내가 그렇지 않다고나 했던 것처럼 한바탕 대들 기세였다.
술이 왔다. 잔을 벌컥벌컥 들이켠 다음, 모치 대가리에 된장을 듬뿍 찍어 와삭와삭 씹었
다.
"그란디, X할 이런 사람 환장할 일이 있소? 그때 잡은 빨갱이 한 놈의 새끼가 시방 시퍼렇
게 살아서 활개를 치고 있단 말이요. 나는 그때 그 새끼들을 담박에 드르륵드르륵 해분 줄
만 알았단 말이요."
그는 이를 앙다물고 두 손으로 드르륵 총 갈기는 시늉을 했다. 여러 놈을 한꺼번에 갈기
느라고 손가락총의 반원을 너무 크게 그리는 바람에 나는 말할 것도 없고 내 곁에 앉은 사
람들까지 빈 총일망정 사정없이 난사를 당해 버렸다. 손님들은 총부리에서 몸을 피하면서
잠깐 눈살을 찌푸렸으나 그의 부릅뜬 눈을 보자 얼른 눈길을 거둬가 버렸다.
"그란디 그중에 한 놈의 새끼를 길바닥에서 만났단 말이요. 그 새끼 요짝 볼딱지에 이만한
붉은 점이 있은께 담박 알거습디다."
엄지손가락 한 매듭을 내보였다. 나는 우리 학교 양 선생같이 붉은 점이 있었던 모양이라
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깜짝 놀랐으나 번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는 것이다. 저 새끼가 그때 튀어가지고
월북했다가 간첩으로 내려온 것이 아닐까? 그렇다. 틀림없다. 저 새끼도 나를 알아보고 놀라
는 것을 봐라. 오냐, 너는 죽었다.
"오십만 원짜리다 생각한께 워매 두 다리가 달달달 떨립디다. 솔직히 오십만 원이며 얼마
요, 응? 한 밑천 아니요, 잣것, 정말 눈에 뵈는 것이 없습디다."
신고할 것도 없이 혼자 때려잡기로 작정을 했다. 살금살금 뒤를 밟다가 생각하니, 요놈의
새끼가 틀림없이 칼이나 권총을 가졌을 것 같아 겁이 났다. 몽둥이로 댓바람에 대갈통을 까
버릴까? 그러나 시내 한복판이라 얼른 마땅한 몽둥이도 없고, 또 그러다가 영 뻗어 버리면
안될 것 같았다.
"그래서 골목을 돌아갈 때 뽀짝 뒤로 붙었습니다. 그래갖고는 왁 사정없이 더수기를 챘지
라우."
두 손을 벌리고 왁 하며 느닷없이 술상 너머로 달겨드는 바람에, 나는 찔금 상체를 제끼
다가 하마터면 뒤로 나가떨어질 뻔했다.
"그래갖고는 요놈의 새끼를 뽈깡 치껴들었습니다. 땅바닥에다 꺼꿀로 콱 박어분께 깨구락
지같이 찍 뻗음시롱 워매 합디다. 대가리를 땅바닥에 한번 더 쥐어박고는 물팍으로 등짝을
콱 한번 제게분께 영 맥 못춥디다. 파출소로 끌고 갔지라우."
그는 메어꼰지는 시늉이며 등짝을 제끼는 시늉을 반쯤 일어서서 입을 앙다물고 실연했다.
'콱' 할 때는 그의 입에서 씹던 생선조각이 튀어나와 내 이마에 붙었다. 다시 술잔을 벌컥벌
컥 들이켰다.
"요 새끼, 여그가 어딘지 알고 내려왔어?"
간첩은 깨진 이마에 피를 흘리며 왜 이러느냐고 고함을 질렀지만, 그따위 수작에는 안 속
는다고, 의기양양하게 파출소로 끌고가 간첩이라고 소리를 질렀다. 순경들은 한동안 멍했다
가 달겨들어 수갑을 채운다, 몸 수색을 한다,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그러다가 순경들은
어이없다는 듯이 허허 웃으며 간첩의 수갑을 풀어 주는 것이었다.
"허허, 이런 환장할 일이 있소? 그 새끼가 간첩이 아니고 시내 무슨 중학교 선생이라고 안
하요?"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그게 무슨 중학교냐고 물으려다가 말았다. 틀림없이 양 선생일 것
같은데, 내가 그와 같은 학교에 있다면 담박 운동모의 주먹이 날아올 것 같았다. 설마 양 선
생이야 아니겠지. 그가 그런 경력이야 가지고 있을라고? 나는 운동모가 벌컥벌컥 잔을 들이
켜는 것을 건너다보며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뭐 중학교 선생? 당신들 지금 장난하고 있소? 아니 요새끼는 분명 내가 지리산 공비 토벌
작전에서 잡은 빨갱인디 뭣이 어쩐다고?"
수갑이 풀린 간첩이 도망칠까봐 문을 막아서며 소리를 질렀다.
"이 훈장을 보시오, 이 훈장을, 엉! 내가 이 새끼를 잡아서 탄 훈장이란 말이여!"
이렇게 대드니까 자수를 했다는 것이다.
"자수라니? 아니 내가 저 새끼를 이 두 손으로 잡아가지고 왔는디 그것이 자수여?"
그 놈한테 속지 말라고 꽝꽝 고함을 치며 쥐어박을 듯이 대드니까, 그때 탈출했다가 자수
를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 그 학교 교장이라는 자가 달려오고 야단이 났는데 아무
리 보아도 결국 허탕이었다.
"허허 그때, 그 X같은 새끼들이 잡아다 준 괴기도 못 지키고 놓쳤든 것이란 말이요. 그 때
려쥑일놈의 새끼들이!"
이를 악물며 술상이 그 뭣 같다는 새끼들의 대가리기나 한 듯이 그때마다 주먹으로 꽝꽝
내리쳤다.
그런데 그 교장이라는 자가 이렇게 생사람을 조져 놯았으니 치료비를 내야 할 것 아니냐
고 사뭇 근엄하게 따지고 나섰다.
"뭐? 이 새끼. 치료비?? 이 훈장을 보라, 내가 치료비를 내?"
그러지 않아도 억울한 판에 속을 쑤셔오니 정말 환장할 지경이었다. 아나 치료비? 의자를
들어서 교장이란 자를 사정없이 갈겨 버리고, 말리는 순경들까지도 닥치는 대로 후려쳐 버
렸다.
그러고도 화가 덜 풀려 한쪽에 멍하니 서 있는 가짜 간첩까지도 몇 대 더 쥐알려 버렸다.
간첩은 날벼락을 맞고 정신이 나갔는지 때리는 대로 펑펑 얻어맞기만 했다.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고 나자 이번에는 거꾸로 이쪽 손에 수갑이 채워져 본서까지 넘겨졌다. 그러나 그 투
철한 반공정신이 좋다고 곧 풀려 나왔다고 했다. 실은, 말과는 다른 모양인지 그 부분은 말
꼬리를 흐리며, 또 벌컥벌컥 잔을 들이켰다.
"도대체 대한민국이 틀려 먹었어요. 그런 숭악한 빨갱이 새끼를 살려 준 것만도 어딘디, 중
학교 선생을 시켜요, 선생을?"
그는 다시 한 번 술상을 쳤다. 이러니 나라꼴이 잘될 게 무어며 그 밑에서 교육을 받고
있는 제 이세 국민이 불쌍하지 않느냐고, 사뭇 개탄조로 우국론 일설을 피력한 다음, 틀림없
이 그 교장놈의 새끼가 돈을 처먹고 선생으로 썼을 것이라고 단정을 했다.
"뭐? 대한민국의 따뜻한 품안으로 돌아왔은께 용서를 했다고? 염벵."
한바탕 욕을 하며 코를 씩씩거렸다.
"그 쌍놈의 새끼가 간첩이기만 했드라면...."
오십만 원의 화려했던 꿈이 깨진 것이 지금도 사뭇 애석한지 혼자 뇌까리며 남은 잔을 벌
컥벌컥 들이켰다.
예상했던 대로 간첩으로 오인되어 봉변을 당한 사람은 우리 학교 양 선생이었다. 다음날
나는 양 선생을 만난 것이다.
전근하는 어떤 선생의 송별회가 있어 선생들은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였다. 나는 일찌감치
나가 화투 치는 선생들 사이에 끼어 양 선생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다른 사람들은 그 사
건을 모르고 있는 눈치였다. 나는 그런 얘기 듣지 못했느냐고 물으려다 그만두었다. 모르고
있다면 괜한 소문을 퍼뜨리게 될 것 같아서였다.
문이 열릴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면서 항용 하는 버릇대로, 그게 양
선생이 아니었기를 돈을 걸고 바라고 있었다. 삼천원을 걸었다. 이것은 상당히 큰 액수였다.
이내 양 선생인 나타났다. 이마에 큼직한 반창고를 붙이고 있었다.
"아니, 다치셨습니까?"
누가 놀라 묻는 말에 선생들의 시선이 양 선생한테 쏠렸다.
"네, 조금."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빙긋 웃으며 상처로 잠깐 손이 갔다. 가볍게 입 언저리를 스쳐
가는 미소에는 전혀 이렇다 할 감정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 미소 밑에 담기기 쉬운 감정
의 굴곡을 놓치지 않으려 했으나, 전혀 그런 것을 붙잡을 수가 없었다. 다른 선생들은 양 선
생의 상처에 더 관심을 보이지 않고 술에 어우러졌다. 아무도 그 사건을 모르고 있는 눈치
였다.
술이 여러 순배 돌아, 모두 발그레 술기가 올랐다. 양 선생은 평소에 조용했던 대로, 그리
고 항상 웃는 얼굴인 그대로 그저 웃고 마실 뿐, 술자리의 분위기에 조금도 층이 진 구석이
없었다.
나는 그의 구겨졌을 마음의 어느 가닥에선가 한번쯤 휘뚝일 감정의 음예를 붙잡으려 했으
나 끝내 허사였다. 조금도 감정을 조작하려는 눈치도 없었고, 아무리 보아도 마음속의 감정
은 얼굴에 나타난 꼭 그만치뿐인 것 같았다. 연기라면 그것은 완벽에 가까운 연기였으나 그
렇게까지 철저하게 감정을 숨길 이유가 없었다. 여기 있는 선생들은 아무도 그 사건을 모르
는 것 같기 때문이다. 교장의 술잔이 두어 번 양 선생에게 갔을 뿐 그의 눈치를 살피고 있
는 것은 나뿐이었다.
나는 야릇한 감정의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그의 불행을 가로맡아, 돈을 치르려고 했던 내
호의가 멋없게 된 것이다. 그의 표정은 담담하게 내 호의를 거부하고 있었다. 여태 그의 표
정을 살핀 것은, 말하자면 돈을 들고, 그가 손을 내밀어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셈인데 불
과 닷새밖에 안된 일을 그는 깡그리 잊어버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봉변당한 잔본인이 그
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갈 지경이었으나 저 희귀한 붉은 점이며, 상처로 봐서 도무지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나는 여태까지 돈을 가지고 벌여온 관념의 조작에 제법 만인을 구하는 것 같은 비장한 감
개를 느껴왔던 것인데 양 선생은 그런 나를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 남의 불행에 지레 눈물
을 흘리다가 왜 이러느냐고 저편에서 되려 위안을 하며 껄걸 웃고 나올 때 느낌직한 무안을
느꼈다.
양 선생과 나는 돌아가는 길이 잠깐 같은 방향이었다. 서넛이 떠들며 걷는 속에서 나는
야릇한 낭패감과 고독감을 느끼고 있었다.
"양 선생, 어디서 그런 훈장을 달았소, 그 이마에?"
술이 곤드레가 된 친구가 농쪼로 물었다.
"하하 맞았어! 훈장이야, 훈장! 하하."
그는 한참 크게 웃었다. 티없이 유쾌한 것 같기도 하고, 공허한 적막이 서린 것 같기도 했
다.
그는 우리와 길이 갈려 환자가 되었다. 희뜩희뜩 눈발이 날리는 거리에는 <이웃에 오신
손님 간첩인가 다시 보자>는 플래카드가 바람에 나부끼고 그 밑을 조그맣게 웅크리고 가는
그의 뒷모습이 자동차의 헤드라이트에 유난히 초라하게 비쳤다. 아까 그의 담담한 표정에는
어찌 보면, 사뭇 달관한 위풍까지도 풍기는 것 같았는데, 눈을 맞으며 플래카드 밑에 웅크리
고 가는 그의 모습은 왠지, 그지없이 나약하고 초라하게만 보였다.
초식(지은이: 이제하)
세 번째 출마를 위해 부친이 채식을 시작하자 미구에, 우리 집은 예의 그 선거참모들로
또 붐비기 시작하였다. 삼촌, 숙모, 외할머니, 그리고 오촌 당숙들과 그들이 이끌고 온 친척
의 친척들이 그 사람들로서 과연 진짜 참모들이라고 할 만했으며, 집 안팎에서 부친의 선거
전의 승패에 충정으로 관심을 갖는다거나 (어리석게도) 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 같은 것을
곧이곧대로 신봉하고 있는 것도 그들뿐이었던 것이다. 장학금으로 내가 학교를 다니고 있다
는 것이 알려졌을 때, 그들 중에서는 비교적 식견이 높고 총명한 외삼촌마저 정색을 하고
정좌하면서,
"그렇다믄, 나는 그럼 문교부하고 바로 직통이제?"
라고 물어 왔을 정고였으니 말이다.
하여튼 그랬다. 그들은 나의 부친이 반년쯤의 채식으로 그 번듯한 이마가 바야흐로 소슬
해질 무렵에 한꺼번에 집에 들이닥쳐서는 있는 것 없는 것 죄 먹어치우고, 갓 도배한 씀바
귀 무늬의 벽지 귀퉁이에 '인사무정'이니 '침묵은 금'이니 하는 따위 낙서를 새겨 넣고, "서
광삼 무표!" 하는 라디오의 개표 중계를 들으며 대들보가 떠나가라 통곡을 해대고, 그리고는
부친의 유일한 유세 도구인 자전거 한 대마저 기어이 망가뜨려 놓고야 제가끔의ㅣ 시골로
뿔뿔이 흩어져 갔던 것이다. 첫 번째도 물론, 두 번째 출마 때도 그랬다. 전과가 없고 어찌
어지 자격을 같추고, 호기 있게 자신만 있으면 누구나 선량에 입후보할 수 있던 때의 얘기
다.
그들은 내 방을 길길이 차지하고 누워서는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는 둥 '날아가는 방귀
잡고 시비하는 내 아들놈'이라는 둥 상스런 욕지거리들을 낄낄대며 떠들었고, 선거결과의 예
상을 놓고 높은 소리로 다투었다. 서광삼의 당선은 틀림없으며, 이번에야 설마 3위 이상은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꼴찌로부터 세 번째라는 얘긴데 그들의 몰염치는 차지하고서라도,
그렇게만이라도 되어 준다면 성적은 과히 나쁜 편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 첫 번은 6명 중에
서 두 번째로, 둘째 번은 8명 중에서 첫 번째로, 부친을 꼬리로부터 낙선의 고배를 마시고
말았던 것이다.
"서광삼 무표....!하는 첫 개표 중계 때의 그 여아나운서의 맹맹한 비음이 아직도 내 귀에
쟁쟁하다.
그것은 내가 소학 4년 때의 었으며, 등받이를 떼어 버린 얼음 운반용 자전거에 도시락 두
개와 '서광삼 기호 1번'이란 깃발 하나를 매달고 부친은 첫 유세에 나섰던 것이다. 텅 빈 부
두의 바람받이 창고 앞 공터 저쪽을 향하여 천삼백 년 전의 이태백 같은 목소리로 부친은
시국의 절박함을 부르짖었다.
"어려운 시대요!
더러운 시대요, 여러분....!"
핸드볼을 하던 노동자의 새까만 아이들 몇이 동작을 멈추고 골똘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더
니 두 손으로 쌍욕을 해보이고 히들거리며 곧 도망치기 시작했는데, 어째서 부친이 이런 보
잘것없는 자식들을 첫 청중으로 택했는지는 너무나 명약관화했다. 부친은 자신이 속해 있으
면서 그렇게나 미워하던 한 세계가 머지않아 붕괴하리라는 희미한 예감의 공포앞에, 오로지
떨고 있었던 것이다. 체면불구하고 부친이 출마했던 것은 아마 그 때문인 듯하다. 그 멸망이
상말로 시계 무엇처럼 점차 느려져서, 설령 일곱 번이고 여덟 번이고 재출마해야 하는 그런
기우가 설마 부친에게 눈곱만큼이나 있었다고 가정한다 하더라도.
부친의 유일한 이해자는 숙당 조문제 선생이었다. 조 선생은 중학교 한문 선생으로, 두루
미처럼 비쩍 말라서 시의 언덕바지에 살고 있었는데 그 양반의 말을 빌려 보면, 부친의 망
발은 단지 젊었을 때 글깨나 좀 읽었다는 탓일 따름이고, 모든 난점은 '흐르는 세월'이 심판
해 준다는 것이다.
세월도 세월이려니와 선량에 대한 부친의 이런 엉뚱한 꿈이라든가 이를테면 그 준비라고
할 수 있는 '채식'같은 기묘한 방법은, 지금 곰곰 생각해 보니 훨씬 거슬러 올라가서 구약
[다니엘서]에서부터 그 연유가 비롯한 성싶다. '채식'에 관한 것뿐 아니라 흉흉한 난세의 여
러 조짐에 대해 그 책은 괴상한 꿈 얘기라든가 기괴한 짐승들을 무수히 등장시켜 공갈을 치
고 있는데 '그 이는 철이요, 발톱은 놋이며, 먹고 부스러뜨리고 나머지는 발로 밟았으며....'하
는 끔찍한 구절까지 있는 것이다. 학대받는 어느 민족의 이중 삼중의 설움의 메시지다. 하지
만 부친이 정말 [다니엘서]를 독파했는지는 장담할 수가 없다.
부인은 홀로 무언가 유일한 것을 믿고 있는 듯하기는 했으나, 외할머니나 모친에 대한 어
쩔 수 없는 반발 때문에 평생 절이나 교회 문턱을 피했고, 어쩌다 집 안에 종교적인 물건,
이를테면 부적이라든가 찬송, 성경책이라든가 지등 따위가 보이기라도 하면 부리나케 그것
을 어디엔가 감추어 버리곤 했으므로, 설마 당신이 밤에 몰래 숨어서 [다니엘]을 읽어 치웠
으리라고는 상상이 되지를 않는다. 하지만 [다니엘]의 그것과 똑 같은 어이없는 절규가, 허
기와 오기와 무청중에 지친 부친의 유세장에서 번번이 흘러나오는 것을 나는 들었던 것이
다.
"나를 사자 아가리에 처넣어 보시오! 펄펄 끓는 불 속에 나를 콱 던져 보시오! 내한테 어
디 평생 풀만 먹여 보시오! 끄떡도 안할 것이오, 나는. 여러분...."
그렇다. 얼음이다. 만상이 타는 듯한 열화에 기갈 들려 오직 한 개의 통풍 구멍만을 찾아
허덕이는 한여름 대낮 같은 때 홀로 자전거 등받이에 서늘한 수정과 같은 거창한 물건을 싣
고 달리면서 부친의 꿈은, 빼도박도 못하게 그 결정체 속으로 스며들었던 것임에 틀림없다.
"나 출마할란다...."한고 처음으로 입을 열었을 때의 그의 그 겸연쩍은 웃음, 우는 듯한 눈,
가족들의 경악에 찬 힐난의 시선에 이윽고 조금씩 떨리기 시작하던 입술이 그것을 증명한
다. 부친은 별식으로 모처럼 놓인 도미구이 접시를 한옆으로 슬그머니 밀어 놓고, 허탈한 얼
굴로 시금치 접시로 젓가락으로 가져갔다. 그것이 신호였다. 누이와 나는, 4년마다 오는 부
친의 그 구닥다리 같은 홍역을 또 치르게 되나 보다 하고, 부지중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우리들이 고통스러웠던 것은 '서광삼 무표'니 '서광삼 3표'니 하는, 이웃이나 학교 동료들
의 조석간의 인사가 아니다. 그것은 선거소동이 끝날 때마다 전 시의 오욕에 찬 익살맞은
조롱을 우리 집 위에만 폭삭 뒤집어씌우고도, 진실로 늠름하고 의연히 고고해서 참으로 아
름답기까지 해보이는 부친의 배짱에 있었다. 어쩐지 부친은 봄 장마가 깨진 아스팔트 틈서
리의 흙탕물을 튀기는 을씨년스런 한밤중에도 청명한 구름 속을 혼자 걷고 있는 듯했으며,
고독감에 몸을 떨며 내가 뒷간에 홀로 움치고 앉아 있을 때에도 그는 갓 벌어진 무슨 커다
란 꽃봉오리 속에 의젓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 듯했던 것이다. 서너 달의 채식으로 부친의
얼굴은 불그레해졌으며, 반백의 머리는 갈기처럼 이마 곁으로 비끼우고 눈알은 비길 데 없
이 반짝였다. 이 사람의 직업이 얼음 도매 운반인이라고 어떻게 믿으며, 도대체 누가 미친
듯이 헐떡이는 기적 속에 귀성객들을 상대로 부친이 새벽마다 역으로 유세를 달려나가지 않
으리라고 장담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모친의 태도는 애매했다. 권사라면 교회에서는 꽤 중진이었음에도, 당신의 지아비가 시대
의 공기로 자처하고 나섬에 있어 의기양양해지는커녕, 두루뭉수리로 주눅이 들어 버렸던 것
같다. 아침 일찍 자전거를 밀고 나서는 부자와 울상으로 그것을 눈흘기는 누이 틈에 서서,
모친은 난처한 표정으로 막연히 팔을 들어올려 몇 번 흔들었다.(예수를 믿느니 똥을 믿어라,
고 외할머니는 모친의 은밀한 권유가 있을 때 마다 그렇게 말씀하신다. 부처를 믿느니 똥을
믿어라, 는 것과 이 말은 흡사하지만, 외할머니로서는 아마 모친의 이런 애매한 태도가 못마
땅하셨던 게다. 부처고 예수고 똥이고 부친은 아랑곳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쨌든 그것으로 좋았다. 일요일이었고, 딴은 높게 하늘은 개어 있었으며, 우중우중 따라
나서다 부친의 부릅뜬 눈에 찔끔해서 동구 밖에 서버린 그 모든 친척 참모들의 선망어린 전
송을 받으며 우리는 출발했다. 달려라, 서광삼! 자전거 튜브에 감기는 이 좋은 날씨, 이 무
진장의 청공, 의원이여, 의원이여, 뽕 잡은 국회의원이여, 그대 이마를 감돌며 그대 귓바퀴에
속삭여 뭣 꼴리게 하는 이 한량없고 자비로운 미풍의 똥구멍이 피아노든, 올빼미든, 무더기
표든, 호박씨를 까든 개의치 말고 달려라, 서광삼!
부친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으며, 할 수 있는 한 힘껏, 멀리멀리 부친은 달아
났다. 부친은 열심히 페달을 저었고, '기호1번'의 깃발이 찢어지는 듯했고, 매달린 두 개의
도시락이 요분질을 하며 백여 개로 변해 속도에 구역질이 난 내 눈앞에 묵시처럼 아득히 떠
올라왔다.
부친이 멈춘 곳은 끝에서 끝까지 벌거벗고 통째 노출되어 거의 완벽한 한 바다의 끄트머
리였고, 거기서 우리는 내려서 망연히 물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몇 시간이고 우리는 경
치를 감상했으며, 또다시 물을 들여다보았다.
썰물 뒤의 그 바다는 바위 틈서리에 도망치지 못한 해삼새끼들을 몇 마리고 매달고 있었
다. 그 기묘한 생물들은 우리가 건드리자 있는 힘을 다하여 돌바닥에 붙어 보는 것이었으나
이내 톡톡 떨어져서, 자기는 아주 죽었다는 시늉을 번번이 하곤 했으므로 어이가 없을 지경
이었다.
"이놈 참, 굉장하구나"하고 부친이 말했다. "이놈들 참, 광장하군 그래...."
그가 힌트를 얻은 것은 거기서부터였을까? 세 번 네 번 낙선해도 결 코 굴하지 않는다는
듯한 열렬한 결의로 부친의 얼굴은 수축해서 어둡게 굳어 있었다. 부친은 그런 새끼해삼 몇
마리를 바위 귀퉁이에 늘어놓고 고개를 꼬고, 그것이 풀인지 고기인지를 곰곰 생각하는 눈
치였다. 그런 다음 우리는 도시락을 까먹었고, 다시 물을 들여다보았고, 머저리 같은 해삼들
을 도로 바다에 처넣어 버렸으며, 그제야 결연히 일어나 오염된 누리의 한복판을 향해 부친
은 천천히 걸어나갔던 것이다.
등록의 까다로움, 무소속의 굴욕, 사쿠라의 모략, 도야지 같은 관리 나부랭이들의 추잡, 유
세 기간 동안에 일어난 그 많은 하찮은 사건들을 어떻게 일일이 열거하랴. 그대들이 겪고
느낀 바 그대로다.
틈만 나면, 아니 필사적으로 틈을 붙들기만 하면 젖 먹던 힘을 다해 부친은 바다로 도망
쳤다. 한 고장에서 50여 년을 살아온 부친으로서는 물이야말로 '서광삼 무표'의 깃발과 곤욕
스런 자존심을 함께 씻어 주는 유일한 신이었으며, 칠전팔기의 용기와 그것을 다짐까지 해
주는 커다란 손이었던 것이다. 일과를 끝내고 볼이 빠져서 등 어른거리는 혼가를 터벅터벅
걸어서 돌아올 그때, 어느 누가 조국의 장래를 걱정하지 않을 사람이 있으랴. 하찮은 미미한
사건, 예컨대 자동차의 급격한 회전 마찰음이라든가 기름기 도는 너무 밝은 불빛을 보고도
그대는, 문득 나라의 경륜과 그 운명을 절감하고 전율한다. 마찬가지로, 모빌 기름투성이 해
면의 끈끈한 말없음에서 침묵 불요의 결론을 끌어내고 개인적인 자존심을 압살하고도 오히
려 넘치는 창창한 논리를 부친이 거기서 계시받았다고 한들, 그것이 어째서 파렴치한 사유
가 되겠는가.
몇 번째나 마찬가지였지만 고비로 접어들자 선거의 양상은 아연 비료를 뿌린 듯이 가열해지
고, 그리고 똥물을 뒤집어씌운 듯이 더러워졌다. 헤일 수도 없는 협잡, 수많은 중상모략, 그
리고 테러들을 낱낱이 고발할 의무를 나는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짐승-이라고 어느 누가
짖어 대도 신은 노여워하지 않으리라. 그들은 한마디로, 씹어 놓은 똥이다. 게다가 이번에는
후보가 12명이나 됐다. 날뛰는 주객전도의 광란 속에서 머지 않아 합동유세의 날이 오고, 거
기서 일어난 뜻밖의 작은 사건-부친의 최씨와의 해후-으로 이 양양하던 입후보자는 허리가
반으로 접혀, 드디어는 백팔십도 방향을 바꾸지 않으면 안되는 기묘한 사태가 벌어지고야
만다.
보따리 장수 최씨의 합동 유세장에서의 난동은, 돌아서 그랬다고 모두들 그렇게 말들을
하고 있지만 그럴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었던 것 같다. 멍게니 해삼이니 머더덕이니 하는
이 지방 특산물을 경매로 넘길 때, 어시장의 브로커들은 갈퀴로 그것들의 등을 득득득 긁어
서 (그러면 그것들은 웃음이 나올 지경으로 오줌들을 직직 갈긴다) 산더미처럼 부풀리는데,
최씨가 옷보따리를 그렇게 부풀려 놓고 나의 부친을 유혹했던 것이다.
합동유세 전에 어떻게 해서든 안심되는 한 표를 확보해 둘 양으로 미소를 띠고 그 앞에
섰던 부친은, 죽마고우를 발견하자 찔끔해서 표정이 굳어졌다. 최씨로서는 설마 부친이 이런
데까지 와서 한 표를 구걸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진짜요, 진짜! 진자 구제품이오, 임금님도 꺼내 입고 둥실둥실 춤을 추는, 자, 진짜...."
겸연쩍어서인지 최씨는 실제로 둥실둥실 춤을 추며 부친의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부침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자리를 떴다. 얼마를 부리나케 걸어가던 부친은 문득 걸음
을 멈추고 반드시 최씨의 물건을 하나 사주어야 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런 식으로 헤어질 수
는 없었던 것이다.
"이것 얼마?" 하고 도로 돌아온 부친이 그렇게 묻자, 최씨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더니 갑
자기, 여기 있는 모든 물건은 구제품이 아니며 가짜라고 우기기 시작했다. 부친은 기분이 상
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이 물건들은 틀림없이 괜찮은 구제품이며 쓸 만한 것들이라고 딱딱
한 소리로 최씨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최씨는 길길이 뛰며 거짓말이라고 부정했다. 부친은
완전히 기분이 상해서 밭은 기침 소리를 내고 홱 돌아섰다. 삽시간에 빙 둘러섰던 그 많으
구경군의 어느 누가 최씨의 뻔한 거짓말을 곧이들었겠는가. 최씨는 부친으로부터 모욕을 받
았던 것이다.
성흔(지은이: 김문수)
터미널을 빠져나온 청주행 고속버스는 곧 복닥대는 거리에 휩쓸려 마냥 주춤대고 있었다. 그런
차 속에서 나는 문득 머리 속에다 <오동자도>를 펼쳐놓곤 근 20년이나 되는 케케묵은 옛날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고등학교에 갓 입학했을 무렵의 일이었다.
어느 날 밤, 아버지는 술이 거나하세 취해서 돌아왔던 것인데 그때 아버지의 겨드랑이에는 쫙
펼쳐진 신문지 크기보다 약간 작을 까 한 직사각형의 물건이 끼어져 있었다. 그때 나는 그것을 보
며 아버지가 내개 줄 선물을 사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일년을 통틀어도 대여섯 번이
나 술이 취할까 말까 한 아버지가 그날따라 술이 거나해져서 들어온 것도 틀림없이 나 때문일 것
이라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나의 그러한 생각은 정말 터무니도 없는 것이었다. 마루에 걸
터앉아 구두를 빼며 어머니에게 들려준 아버지의 얘기로는, 그날 아버지가 술에 취한 것은 새로
전근이 되어 온 어떤 직원의 환영회식이 있었던 때문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거울집에
걸린 멋진 그림이 눈을 끌기에 방 안 장식용으로 그것을 사들고 들어왔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눈
에 우연히 발견된 '멋진 그림'이 곧 아버지의 겨드랑이에 끼어져 있던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 것을
나는 공연히 나의 고등학교 입학성적이 우수했기 때문에(그것도 도내에선 물론 전국에서도 손꼽
히는 학교를) 그것이 아버지를 기쁘게 한 나머지 술에 취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선물까지 마련하
게 했을 것이라고 그런 성급한 짐작을 했던 것이다. 나의 짐작이 그렇게 엉뚱하게 빗나가 버리자
나는 여간만 멋쩍어지지 않았다. 물론 나는 그런 짐작을 누구에게도 말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
데도 어머니나 형들 또는 동생들이 꼭 나의 그런 성급했던 속마음을 꿰뚫어본 것만 같아서 얼굴
을 붉혀야만 했다. 아버지가 방에 들어와서 앉자 어머니와 우리 형제들은 아버지 앞에 그 물건,
즉 아버지의 눈을 매혹시켜 거울집의 벽으로부터 우리 집까지 탈출해 오게 된 그림을 둘러싸고
거기에다 눈길을 모았다. 그러나 나의 시선은 우선 아버지의 얼굴 위로 먼저 올라앉았다. 아버지
의 입에서 그림 얘기가 나올 때도 다 있구나 싶어 신기하기만 했던 것이다. 내가 중학 2학년 때,
전국적으로 장려된 일인일기 교육을 위해 클럽활동이라는 게 열을 올렸었는데 그때 내가 들었던
반은 미술반이었다. 그것이 아버지에게 알려지던 날 아버지의 부기봉-그 무렵 아버지는 농업은행
중견간부였다.-은 나의 펼쳐진 손바닥 위에서 불꽃을 튀기며 춤을 추었고 나는 바로 그 다음날로
부기반으로 옮겨져 '자산의 증가는 차변, 자산의 감소는 대변....' 따위를 흥얼거리게 되었던 일도
있었다. 그런 아버지의 눈에 '멋져 보인 그림'을 보기 위해 나는 아버지의 얼굴에서 시선을 거두었
다. 나의 시선이 옮겨진 곳에서 아버지의 술취해 둔해진 손놀림에 의해 포장이 벗겨지는 그 물건
은 지금 막 알몸을 드러내려는 참이었다. 포장이 완전히 벗겨지자 과연 커다란 액자 하나가 나왔
다. 그 액자 속에는 고만고만한 어린아이들이 발가벗은 알몸으로 엎드려 있는 그림이 담겨져 있
었다. 그 그림 위의 여백에 '오동자도'라고 한자로 된 화제가 붙어 있었다. 그 그림이 눈에 들어오
는 순간 나는 하마터면 나도 모르게 요란한 웃음보를 터칠 뻔했다. 그러나 나는 다행히도 그런 경
망스런 웃음을 가까스로 참아낼 수가 있었다. 액자 속의 그림을 들여다보는 아버지의 그 아주 흐
뭇한 웃음, 그리고 더없이 만족해 하는 표정만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더라도 나는 그 웃음을 참아
낼 수가 없었을 것이다. 나는 아버지가 모처럼 만에 짓는 그 만족한 얼굴 표정을 나의 경망스런
웃음으로 흐트러놓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만일 내가 터지려는 웃음을 참아내지 못했다면 아버지
를 비롯한 모든 식구들이 나의 그런 버릇없는 웃음을 징계하기 위해 그 까닭을 실토하게 했을 것
이고 그렇게 되면 나는 언젠가 학교 옆 호떡집에서 보았던 '아버지의 눈에 멋져 보인 그림'과 조
금도 다르지 않는 <오동자도> 위에 한꺼풀 덮인 그 무수한 파리똥을 얘기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
때 나는 앞에 앉은 아이에게 '야, 저건 그림이 담긴 액자가 아니고 파리똥을 담기 위해 걸어둔 액
자 같다'고 지껄이고 낄낄대다가 호떡 속의 꿀물을 교복 앞자락에 칠갑을 했었는데, 그 이야기까
지 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쯤되면 또 나는 정색을 하여 계속 떠들어댔을 것이다. 이발소에는 이발
소에 어울리는 그림이 있고, 중국집에는 중국집에 어울리는 그림이 있듯 가정집에는 또 가정집에
어울리는 그림이 있는 법인데 아무리 벽을 장식할 마땅한 그림이 없다 해도 왜 하필 그 따위 중
국집에서나 걸어두는 그림을 골라도 붙이려느냐고.... 그러나 역시 큰형은 맏아들다운 소리를 했다.
"오동자도라! 그렇다면 이게 바로 맏아들인 나로군. 어때요? 어머니, 이 다섯놈 중에서 제일 믿음
직스럽게 생겼잖아요?"
큰형은 아버지가 <오동자도>를 사온 뜻을 누구보다도 먼저 그리고 정확하게 파악했던 것이다.
"....?"
"어때 그렇잖니?"
어머니의 입에서 냉큼 이렇다 할 대답이 떨어지지 않자 큰형은 액자속에 담긴 다섯 아이들 중
맨 오른쪽에 엎드려 있는 아이를 손가락으로 짚은 채 좌중을 한바퀴 휘둘러보며 이렇게 다시 입
을 열었다. 그제야 어머니도 큰형의 그 말에 그 그림을 사온 아버지의 뜻을 헤아렸다는 듯 아버지
보다도 한충 더 만족한 얼굴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그것은 어머니뿐만 아니었다. 작은형을 비롯
한 우리 모두가 큰형의 그 한마디로 비로소 아버지가 그 그림을 멋지게 본 까닭을 알 수가 있었
다. 그래도 나는 그 중국음식점 벽에나 걸려야 할 그림이 우리 집 안방 벽에 걸리게 된다는 건 딱
마뜩치가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모처럼 만에 만족한 표정을 지은 아버지의 그 얼굴 표정을 흐
트러저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우리 다섯 형제를 둔 아버지가 이 그림을 멋지게 보시고 사오셨군. 그렇다면 나도 한마
디 하지 않을 수가 없지. 이 아이가 바로 나란 말씀이야. 그런데 이 아이의 눈초리를 보면 아주
저 높은 곳의 무엇인가를 바라보고 있잖아? 이 눈동자는 높고 넓은 포부를 풉고 있는 나의 상징
이야, 알겠니?"
작은형이 큰형이 짚었던 바로 옆의 아이를 가리키며 나에게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에게만 들려 주는 말은 아니었다. 큰형도 또 작은형도 자기들 나름대로 한차례씩 뽐냈으
니 서열로 따지면 마땅히 셋째아들인 내가 뽐낼 차례였다. 그러나 나는 무슨 얘기로 어떻게 뽐내
야 할지 좀처럼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굳이 한마디 지껄여 본다면 아버지의 바람인 '상과대학에
진학해서 장학금으로 공부를 하고 첫손가락에 꼽히는 은행가가 되겠다'는 얘기를 그림 속의 한 중
간에 있는 아이의 표정 같은 것에 연관시켜 얘길 해야 아버지나 어머니가 흐뭇해 할 것이다. 그러
나 그림 속의 그 아이는 아무리 궁리를 해봐도 은행가와 연결시킬 만한 꼬투리가 없는 놈이었다.
이렇게 꼬투리를 잡지 못해 입을 봉한 채 멍하니 앉아 있는 내 눈앞에는 자꾸만 그 호떡집에서
보았던 파리똥을 뒤집어쓴 액자만이 어른거릴 뿐이었다. 그러고 있노라니 이윽고 아버지의 눈길이
달려와 내 얼굴 위를 쓸었다. 그러면서 '어서 너도 한마디 하렴' 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의 그런 시선을 느끼게 되자 한층 더 입이 굳어져 떨어질 줄을 몰랐다. 이런
틈을 파고들어 국민학교 3학년인 남동생이,
"그렇게 따지면 얘가 바로 나게? 이놈 대머리 벗겨진 거봐. 대머리가 벗겨지면 돈을 잘 번대. 부
자가 되면 신나게 돈을 써야지!"
이렇게 때때거려 온가족을 웃겨 놓고 오른쪽에서 네 번째 아이를 손가락질하는 것이었다. 그러
자 어머니는,
"저 녀석은 벌써부터 돈 쓸 궁리부터 하는군." 하고 넷째아들에게 곱게 눈을 흘겨 주고 나서 세
상 돌아가는 줄을 모르고 잠에 빠져 있는 네 살배기 막내아들을 대변해서, 무엇이든지 제것으로
만들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미를 가졌으니 아마도 5형제 중에서 돈은 막내가 제일 잘 벌어들일
것이라고 말하며 왼쪽 맨 가에 엎드려 무엇인가를 잔뜩 거머쥔 듯 주먹을 꼭 쥐고 있는 아이를
가리키곤 곤한 잠에 떨어져 있는 막내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러자 아버지는 이제 술취한
눈이 자꾸만 감겨내려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다는 듯,
"얘, 이제 그만 자리 좀 펴라." 하고 중학교 2학년인 여동생에게 일렀다. 그러자 여동생은 방바악
위에 놓인 액자 속의 아이들을 차례로 짚어가며,
"큰아들은 믿음직스럽고, 둘째아들은 포부가 크고, 또 넷째아들은 대머리가 벗겨져 부자가 될 거
구, 막내아들은 아무 거나 꽉 움켜쥐길 잘해 돈을 제일 잘 벌 거구....그러니까 아무런 쓸데도 없는
딸은 이불이나 펴라 이건가요?" 하고 쫑알댔다. 그러자 어머니가,
"웬, 계집애가 말이 그리 많은냐?"
이렇게 여동생을 나무라며 <오동자도>의 액자를 집어들었다. 어머니의 그런 나무람이 입에서
떨어지기가 무섭게 제 언니 곁에 바싹 붙어 앉았던 국민학교 1학년짜리 여동생은,
"칫, 엄마도 여자면서!" 하고 쌜쭉한 표정을 지어 다시 한 번 온방 안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던 것
이다. 그 <오동자도>는 그날 밤으로 당장 큰형의 손에 의해 안방 벽 높은 곳에 걸려졌던 것이다.
버스는 어느새 복닥대는 서울의 거리를 빠져 제3한강교에 다다랐고 안내양은 그 맑은 목소리를
자랑이라도 하듯 아주 열심히, 이제 서울은 날로 발전하여 국제도시로서 조금도 손색없는 면모를
갖추게 되엇다고 역설하고 있었다.
나는 좌석의 팔걸이에 달린 버튼을 눌러 의자 등받이를 뒤로 젖혀놓고 거기에 눕다시피 몸을
파묻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생각했던 대로 몸도 또 마음도 그리 편치가 않았다. 편키는커녕 웬일
인지 거북살스럽기만 했다. 마치 손에도 익지 않고 입에도 맞지 않는 서양요리를 앞에 놓고 있을
때와 같은 기분이었다.
그때였다. 나의 눈앞에 문득 회사 사무실 한귀퉁이에 자리잡고 있는 나의 의자가 떠올랐다. 스
프링이 약해져 앉기만 하면 엉덩이 부분이 쑥 빠져 버리곤 하는 그 의자였다. 그런 환상과 함께
나의 생각은,
-그 놈의 의자 신세를 언제나 면하누?
이런 것이었다.
며칠이건 몇 달이건 이렇게 차에 올라앉아 싫증이 날 때까지 여행을 계속했으면 싶었다.
나는 뒤로 밀어젖혔던 의자 등받이를 다시 바르게 고쳐놓고 반듯하게 앉아 담배를 뽑아 물었다.
그러나 막상 불을 붙이려고 주머니마다 손을 넣어 뒤져도 성냥이 냉큼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때였다. 옆자리에 앉은 신사(나보다 두세 살쯤 더 나이가 들어보였다)가,
"자, 불 붙이십시오."
어느결에 라이터를 켜서 내가 물고 있는 담배 끝에다 대어 주었다.
"감사합니다."
나는 그의 라이터로 담뱃불을 붙이고 나서 가벼운 목례와 함께 잠깐 그의 얼굴에 시선을 보냈
다. 지나치다 하리만큼 말쑥하게 차려입은 옷차림과는 달리 그는 나에게 묘한 친근감을 느끼게 했
다. 그의 얼굴에서 읽을 수 있는 친근감은 선천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다분히 후천적인 것이라고 나
는 그런 부질없는 생각을 하며 다시 한 번 그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그의 차창 밖으로 시선을 내꽂고 깊은 생각에라도 잠긴 듯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
는 나도 모르게 그가 시선을 두고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내다보았다.
버스는 어느샌가 완전히 서울의 테두리를 벗어나 고속도로를 신나게 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차
창으로 다가와서는 잠깐 부딪쳤다가 뒤로 물러나곤 하는 나무와 산과 들....거기엔 벌써 겨울이 다
가서고 있었다.
"실례이지만 속리산엘 가십니까?"
옆자리의 그 신사는 차창 밖으로 내보냈던 시선을 거두어 내 얼굴에 얹으면서 자기도 담배를
뽑아 물었다. 그가 나에게 그렇게 거의 단정적인 어투로 묻는 것은 잠바차림에 농구화를 신고 있
는 나의 행장이 산에라도 올라가는 사람의 그것처럼 보였던 때문일 것이다.
"네."
나는 그의 그런 질문을 어떻게 받을까 하고 잠시 망설이다가 엉겁결에 이렇게 대답을 주고 말
았다. 그것이 실마리가 되어 그는 속리산에 관한 여러 가지를 나에게 물었고 나는 또 그에게 실망
(?)을 주지 않기 위해 산이라면 안 올라가 본 산이 별로 없는 대단한 등산가인 양 자세하게 설명
을 해주었다.
"전 청주가 초행입니다."
그는 좌석 팔걸이에 달린 재떨이 뚜껑을 열고 담배를 꺼버리더니 잠깐 나는 바라보며 그냥 조
용히 웃어뵈며 이렇게 말했다.
"출장이시군요."
그가 조금 전, 내 옷차림새로 짐작만 하고 속리산엘 가는 길이냐고 물었듯 이번엔 내가 순전한
짐작으로만 이렇게 물었다. 그러나 나의 그런 짐작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그의 대답인즉,
아버지의 회갑을 맞는 친구가 있어 그곳을 찾아간다는 것이었는데 나는 그의 그런 얘기를 들으면
서 가슴이 철렁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사람이 혹 독심술이라도 할 줄 알아서
지금 나의 속마음을 구석구석까지 파헤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던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혹 내가 모르고 있는 큰형이나 작은형의 친구가 되는 사람으로 우리 집을 찾아가는 도중일지도
모른다고 그런 생가곧 불쑥 들었다.
사실은 그에게 속리산엘 간다고 거짓 대답을 해버린 나야말로 아버지의 회갑이기 때문에 오랜
만에 고향을 찾는 처지였다.
"청주가 초행이시면 그 집을 찾아가시기가 좀 번거로우시겠습니다."
나는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조심을 하면서 나직한 목소리로 그에게 이렇게 물어보았다. 사실
나의 이런 질문은 청주가 초행인 그가 청주 지리에 밝지 못한 것을 염려한다는 뜻에서 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 막 내 가슴을 놀래킨 두 가지의 의문을 풀기 위함이었다.
"그 친구네 집은 이 버스정류장에서 일 분도 안 걸리는 자리라니까요.... 그리고 또 그 친구가
정류장에 나와서 기다리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별 문제가 아닙니다만."
나의 입은 이렇게 지껄여대고 있었지만 생각은 엉뚱한 곳에 머물러 있었다. 이 버스가 청주에
도착되면 우리 가족 중에서 누군가가 나를 마중나와 았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아주 잠깐 동안이었을 뿐, 내 머리 속에 오래 머물러 있지는 않았다.
아무도 내가 청주에 도착되는 시간과 또 청주로 내려가기 위해 이용하는 차편을 아는 사람은 없
었던 때문이었다.
"일행은 없으신가요?"
옆자리의 신사가 다시 이렇게 물었다. 나는 그의 물음에 냉큼 대답을 주지 못하며 또 한번 나의
옷차림을 훑어보았다.
"하기야 혼자서 조용히 산을 찾아가는 멋도 있겠죠."
"그런 게 아니고.... 일행은 벌써 도착되어 있을 겁니다."
"낙오병이시군요."
"말하자면 그렇게 된 셈입니다."
우리는 아주 오랜 친구 사이이기라도 한 듯 얼굴을 마주한 채 아무런 거리낌없이 크게 벌린 입
으로 유쾌히 웃었다. 그는 자기가 꺼낸 '낙오병' 비유의 적절함에 스스로 만족했던 것이고, 나는
나대로 그에게 행해지고 있는 나의 거짓이 교묘하게 발전되고 있는 것이 유쾌했던 것이다. '일행
은 벌써 도착되었을 겁니다.' 나는 조금 전, 옆자리의 신사에게 한 거짓말을 혼자말로 중얼거리며
속으로 자꾸만 웃었다. 그렇다. 지금 나의 일행은 모두 다 대성동 육십구 번지에 도착되어 있을
것이다. 큰형도 작은형도 그리고 시집간 동생도 군에 복무중인 동생도 여자대학을 다니는 동생도
그리고 막내인 고등학생도 모두 대성동 육십구 번지에서 내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대성동 육십구 번지는 우리 7남매가 자라난 곳이다. 그곳에서 자라난 7남매중 막내만 빼놓고 모두
들 이곳 저곳에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는 것이다. 지금 그곳에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돼지 두 마
리와 닭 삼십여 수를 기르며 막내동생과 함께 살고 있을 뿐이다. 방 세 칸을 남에게 빌려 주고 받
는 방세가 그 세 식구의 유일한 수입이고 닭의 사료를 배합하는 것은 아버지의 소일거리며 집집
마다 다니며 돼지 구정물을 이어 나르는 것은 어머니의 낙이었다. 다시 나의 눈앞으론 그 대성동
육십구 번지의 안방 벽에 걸려 있는 그 <오동자도>가 가득히 펼쳐져 왔다. 아버지가 지금쯤 그
<오동자도>를 바라보며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후딱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만약 아버지가
지금쯤 그 <오동자도>를 바라보고 있다면 그 표정은 아닐 것이다. '다섯 형제 중 제일 믿음직스
럽지 않느냐'던 큰형은 농과대학을 졸업하고 실업 과목을 가르치는 교육공무원이 되어 대성동 육
십구 번지를 떠났고, '높고 넓은 포부'를 품고 법과대학을 졸업한 작은형은 고등고시 보는 것을 연
중행사로 삼던 생활을 청산하고 3년 전부터 외사촌형이 차리고 있는 회사의 방계업체인 제주도
어떤 호텔의 서무직원이 되고 말았다. '돈을 무더기로 벌어 큰 부자가 되겠다'고 떠들던 넷째아들
은 상업학교로 진학은 했으나 대학에선 응용생물학을 배우고 지금 군에 복무중이니 돈을 벌어들
이는 일은 아득하게 되었고, '무엇이든지 제것으로 만들어야 직성이 풀이는 성미'를 가져서 무언가
한몫 단단히 움켜쥘 것이라고 어머니를 기대에 차게 했던 막내아들은 이제 겨우 고등학교 모자를
쓰기 시작한 형편이다. 예술 계통으로 발을 내디뎌 보겠다고 앙탈을 부리다가 아버지의 부기봉으
로 손바닥도 꽤나 맞았으나 끝내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고 미술대학 회화과에서 공부를 하다가 학
자금 관계로 중도에서 때려치운 나는 여전히 잡지사에서 내 이름 석자 발음과 똑 같은 박봉직의
운명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의 회갑을 맞아 모처럼 고향을 찾아가는 주제꼴이
허름한 잠바에 농구화짝이어서 옆의 사람에게 산에라도 올라가는 길이냐고 오해나 사는 그런 초
라한 신세가 아닌가.
아마 아버지가 지금 그 <오동자도>를 바라보고 있다면 한숨깨나 내뿜을 것이다. 이런 5형제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얼굴 표정이 만족해 있을 리는 만무였다.
"대성동 육십구, 대성동 육십구...."
나는 차창 밖으로 시선을 보내며 염불이라도 외우듯 이렇게 중얼댔다. 그 좋은 이름의 대성동에
서 자라난 형제들이 어째서 한결같이 대성은커녕 소성도 못하고 마냥 빌빌거리고 있는 것일까.
나는 이런 부질없는 생각을 물리쳐 버리고 잠이나 한숨 자서 피곤을 풀어볼 작정으로 좌석 팔
걸이에 장치된 버튼을 눌러 다시 의자 등받이를 젖혀놓고 의자에 눕다시피 몸을 파묻었다. 그때
면바로 올려다보이는 선반 위의 물건이 잠깐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아버지의 회갑선물로 산 양
복지가 싸인 나의 짐이 느닷없이 두 개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파란 실과 흰실로 꼬여진 포장
끈으로 묶은 신문지에 싸인 것이 나의 짐인데 그 옆에 또 그와 똑 그와 똑 같은 포장끈에다 또
똑 같은 신문지로 싸여 있는, 마치 쌍둥이 같은 짐이 또 한덩이 놓여 있었다. 크기가지도 비슷비
슷했다.
'그렇다면 내 짐이 어떤 것인지?'
나는 짐을 얹은 시렁 위를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며 내 짐을 확인해 보았다. 얼마 후 나는 내 짐
이 어떤 것인지를 확인할 수 있는 단서를 잡을 수 있었다.
"손님, 정말 양복지기 칼라 한번 잘 고르셨습니다."
이렇게 말하며 웃는 웃음을 바라보며 나는 그 상점 주인의 웃는 얼굴이 그가 양복천을 싸기 위
해 가져온 신문지 광고란 위에서 웃는 아랑드롱의 얼굴을 닮았다고 생각했던 게 머리에 떠올랐고
그 뒤를 이어 내 눈에는 아랑드롱의 웃는 얼굴이 들어왔던 것이다.
-아랑드롱의 웃는 얼굴.
나는 이렇게 내짐을 확인해 놓고 눈을 감아 잠을 청했다. 그러나 생각대로 그렇게 냉큼 잠이 올
것 같지도 않았다.
나는 생각을 한군데로 집중시키기로 했다. 그것은 내가 잠을 청할 때 으레 한 번씩 해보는 나의
버릇이었다. 내가 생각을 집중시킨 곳은 '웃는 얼굴'이었다.... 아랑드롱의 웃는 얼굴, 어머니의 웃
는 얼굴, 나의 웃는 얼굴, 웃는 얼굴, 웃는 얼굴. 그리너 한군데로 모였던 생각은 다시 흐트러지고
말았다. 바닥이 폭 꺼져내린 의자, 사장의 얼굴, 사장의 찌푸려진 얼굴....
-그놈의 의자 신세를 그만 져야 할 텐데....
나는 또다시 눈앞에 나타난 회사 사무실 한귀퉁이에 초라하게 자리잡고 있는 내 의자의 환영을
떨쳐 버리려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곤 다시 잠을 청해 보았다.
-대성동, 대성동, 대성동, 크게 성공한다는 대성동, 웃는 얼굴, 웃는 얼굴, 크게 성공한다는 대성
동, 대성동, 아랑드롱의 웃는 얼굴, 크게 성공하라는 대성동, 아랑드롱의 웃는 얼굴, 나의 웃는 얼
굴, 대성, 대성, 대기만성의 준말이 대성이지, 크게 성공하는 것만 대성이 아니지, 대기만성의 준말
이 대성이지, 대성, 대성, 아버지의 웃는 얼굴....
우리나라에선 유일한 내륙도이며 게다가 제주와 함께 통행금지의 제도가 없는 특수한 곳인 데
다가 양반의 고장이기도 하다고 그렇게 충청북도에 관한 소개를 늘어놓는 안내양의 마이크를 통
해 흘러나오는 낭랑한 목소리에 나는 잠이 깨고 말았다.
버스는 청주 인터체인지를 뒤로 두고 한껏 늦춘 속력으로 목적지인 청주를 향해 구르고 있었다.
잠시 후, 버스가 정류장에 닿았다. 버스 속은 이곳저곳에서 하차를 서둘러대는 승객들로 한동안
술렁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자리에 앉은 채로 멍하니 정류장 주변의 풍경들에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웬일인지 냉큼 일어나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무언가 아쉽기만 한 느낌이었다. 흡사 목
적지에 닿기도 전에 하차당하는 그런 기분이었다. 며칠이건 몇 달이건 간에 싫증이 날 때까지 이
렇게 차에 실린 채 어디론가 멀리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왜 안 내리십니까?"
옆자리의 신사가 선반 위에서 짐을 내려들더니 내 얼굴에 시선을 꽂으며 이렇게 말했다.
"네, 내려야죠."
나는 그의 얼굴을 마주 바라보며 그냥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나
는 정말 조금도 차에서 내리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넋을 놓고 앉은 채 그저 멍한 눈길로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거리를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그러
나 나에게는 그 거리가 마냥 생소하게만 느껴졌다. 아주 먼 이역에 온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내가 자랄 때와 별달리 달라진 구석이 없는 그 거리가 왜 이렇게 생소하게만 느껴지는 것인지 그
것은 나로서는 통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자아, 그럼 먼저 내리겠습니다."
"네, 먼저 내리십시오."
"그럼 다음에 또...."
"네, 안녕히 가십시오."
나는 다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아버지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다.
"아버지가 벌써 환갑을 맞다니...."
나의 머리 속에는 새삼스럽게 이런 생각이 번지고 있었다. 나는 눈을 뜨고 차창을 거울 삼아 내
얼굴을 비춰보았다. 눈꼬리와 연결된 잔주름일 몇 가닥 눈에 띄었다. 그것을 유심히 바라보는 내
귓전을 맴도는 소리가 있었다.
"야, 너 꼬마 몇이나 뒀니?"
지난 여름 국회의사당 앞에서 우연히 만났던 민이라는 친구의 목소리였다. 차창 속에 담긴 내
입가에 문득 씁쓸한 웃음이 매달렸다.
"글쎄라니? 나이가 몇 살이야! 자식 농사가 늦었는데도 글쎄야?"
차창에 담긴 나의 입에 또다시 한웅큼의 씁쓸한 웃음이 매달렸다. 그러한 나의 몰골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문득 눈을 키워야 하는 놀라움에 빠지고 말았다.
조금 전까지 나의 옆자리에 앉았던 신사의 뒷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던 때문이었다. 그는 지금
차창 밖 저만큼에서 그를 마중나온 듯한 어떤 아가씨와 조그만 여행가방을 가운데 두고 서로 다
투고 있었다. 아마도 아가씨는 아가씨대로 손님인 그의 가방을 들어 주는 게 예의라고 고집을 하
는 것일 게고, 그 신사는 또 그 사람대로 아무리 손님이라지만 연약한 여자에게 짐을 들리워서야
되겠느냐고 자기 주장을 내세우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저 신사와 저 아가씨는 어떤 관계일까?
나는 공연히 생각하지 않아도 좋은 문제를 머리에 떠올려놓고 열심히 추측을 해보았다. 나의 그
런 추측의 결과는 금방 나왔다. 내 옆자리에 앉았던 그 신사는 친구 중에 아버지 환갑을 맞는 사
람이 있어 그 집을 찾아서 청주로 내려가는 길이라고 나에겐 그렇게 말을 했지만 그것은 보나마
나 분명한 거짓말을 것이었다. 아마 약혼자의 아버지, 그러니까 멀지 않은 장래에 장인이 될 사람
의 회갑잔치가 있어 초행일 청주땅을 밟았을 것이 분명했다.
-좋은 때야!
나는 그 신사와 아가씨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는 다정한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런 생각을 하던 나는 갑자기 씁쓸한 생각에 휘감겨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어수선한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서였다.
-이제 그만 내려야지.
나는 이렇게 중얼대면서 차 속을 한바퀴 휘둘러보았다. 만원이었던 승객들이 어느 틈엔지 모두
빠져나가고 이제 대여섯 명이나 될까 한 승객들이 차의 통로에 줄지어 서서 자기의 순번을 맞아
차 속에서 빠져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제야 나는 마치 무슨 어려운 일이라도 시작하는 듯 용단
을 내려 선반 위에 얹힌 짐을 내려가지고 차의 통로로 나왔다. 잠바 주머니를 뒤져 승차권을 꺼내
들었다. 그리곤 여태껏 늑장부리던 태도와는 아주 딴판으로 발길을 서둘러 통로에 줄선 하차 승객
의 꽁무니에 가 붙어섰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승강구 밑에 붙어선 안내양의 상냥한 목소리가 나의 귓전에 와 닿았으나 나는 그 인사의 대답
대신 손목을 들어올려 시간을 보았다.
다섯 시가 채 안되는 시간이었다.
거리는 벌써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도시의 초겨울 다섯 시란 각양각색의 네온들이 찬란하게 꽃을 피우기 시작하는 시간이기도 했
다.
나는 짐꾸러미를 옆구리에 끼고 상가의 네온들이 아양을 떨고 있는 시가지의 중심가로 발길을
옮겼다. 마치 한 척의 나룻배처럼 길쭉하게 형성된 이 도시의 한가운데를 뚫고 지나간 중앙로를
가로질러야만 내가 목적하는 '대성동 육십구 번지'로 갈 수가 있는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밟아보지 못했던 이 정든 거리를 두리번거리며 한껏 늦장을 부리는 걸음으로 그
'대성동 육십구 번지'를 행해 걸었다. 그때였다. 나의 이렇게 한가한 걸음을 멈춰서게 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내 앞을 막아서듯 우뚝 버티고 선 고층건물이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무슨 관공
청의 건물이라도 신축된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그 건물을 추켜올려보던 나는 다시 한 번 놀라고
말았다.
-흠, 산부인과라....역시....
역시 뭐니뭐니 해도 병원을 차려야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속으로 이렇게 중얼
거렸다. 만일 누군가가 나의 그런 꼴을 봤더라면, 병원을 차릴 만한 의술과 재력은 있는 사람이
여태껏 착안을 못했기 때문에 돈을 벌지 못했느냐고 핀잔이라도 했을 것이다.
나는 사나운 개라도 피하듯 그렇게 그 건물을 피하여 걸음을 옮겼다. 그런 나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한 생각이 있었다.
나와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고 있는 친구가 며칠 전, 어떤 산부인과 병원에서 당했다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였다.
"임신 9개월이면 엑스레이를 찍는 거라면서? 그래 우리 마누라도 그걸 찍었다는군. 그런데 말야,
의사가 하는 말이 엑스레이 결과는 이상이 없다고 하더라는 거야. 태아의 위치도 괜찮고 또 뭐도
이상이 없고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말야. 그런데 그게 아주 멀쩡한 거짓말이었지. 알고 보니 엑스
레이 촬영이 잘못되어서 도대체 뭐가 뭔지 분간도 못할 정도로 뿌옇게 나타났기 때문에 그저 그
렇게 무책임한 얘길 한 거란 말이야.... 그래서 술상에 이마를 박고 이렇게 중얼대던 그 친구의 마
구 들먹이던 어깨를 바라보고 있던 때처럼 나의 전신에는 느닷없는 소름이 콱 돋았다.
-생명보다 돈을!
이런 보이지 않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있는 병원들이 많다는 것은 새삼스런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나는 공연히 그 신축된 병원의 고층 건물 앞을 지나면서 묘한 저항감을 느끼고 있었다.
"젠장할 뭐가 인술이냐? 인술이라구? 하기야 술은 술이지! 흡혈술도 술이니까...."
하루아침에 세 목숨을 저 세상으로 보냈다는 사무실의 그 친구 얼굴이 커다랗게 확대되며 그
산부인과 건물 위로 나타났다.
-이 조그만 도시에서 저런 정도의 고층건물을 올릴 만큼 돈을 벌었다면 그건 확실히 사람 살리
는 인술을 발휘한 게 아니고 돈을 끌어들이는 인술을 발휘한 게 틀림없어!
이런 생각을 하며 걷고 있던 나는,
"야, 임마, 너 웬일이냐?"
이런 소리에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그것은 병원건물 앞의 가등을 등지고 걸으며 나
와 엇갈리려던 두 그림자가 내 앞에 멈춰지면서 질러댄 소리였다.
"...."
"야, 이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아! 그래 형님들을 봤으며 반갑게 인사를 올려야 옳지, 그래 인사는
커녕 외면을 해야 옳으냐?"'
"...."
"요 녀석아, 뭘 그렇게 빠안히 쳐다보는 거냐?"
나는 가등을 등진 그 두 그림자의 얼굴에 불빛을 비치게 하기 위해서 몸을 돌려 내가 가등을
등지고 섰다. 그 바람에 가등의 불빛을 받고 내 눈에 들어온 두 얼굴은 정말로 오랜만에 대하게
된 고등학교 동창들이었다. 나의 옆자리에 나란히 앉았던 놈들이었다.
학년이 바뀔 적마다 반이 재편성되게 마련인데도 어찌된 영문인지 늘 같은 반에 붙어 있게 되
곤 했던 놈들이었다. 그 무렵, 출석부의 새번호를 정하기 위해 신장순으로 열을 세우면 서로들,
"아무려면 너보다야 내 키가...."
크지 않겠느냐면서 도토리 키재기를 해가며 태각댔던 그런 사이의 동창들이었다.
"요 녀석들, 자알 만났다."
"하, 이 녀석이 형님들을 보고 버릇없게끔."
"뭐, 네 녀석들이 형님이라고?"
"야 요 녀석, 오랜만에 만나니까 촌수도 잊어버렸군."
우리는 어둑신한 길가에서 같은 교모를 썼던 무렵처럼 한참 동안이나 서로지지 않고 욕지거리
를 퍼부어댔다. 그러던 끝에,
"야, 마침 잘 만났다."
"왜?"
"야, 가자 가!"
두 놈들이 미리 무슨 약속이라도 한 듯 작당이 되어 내 양쪽 옆으로 쫙 갈라서더니 양팔을 한
쪽씩 나눠 맡고 무작정 끌어대는 것이었다.
"이 녀석들아, 도대체 어딜 가자는 거야?"
"이유가 많다. 형님들이 가자면 곱게 따라나서기나 할 노릇이지."
"따라가도 어딜 가는지 알고나 따라가얄 게 아니냔 말야."
"뻔하잖아!"
"뭐가 뻔해?"
"이 자식아, 눈 딱 감고 한입 쭉 빨러가는 거야."
나는 더 이상 버티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잡힌 옷소매를 뿌리치고 그들과 발걸음을 맞춰 성큼
성큼 따라 걸었다. 그러나 한시라도 빨리 집에부터 들르고 봐야 옳다는 생각조차 까맣게 잊어버리
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옆구리에 낀 초라한 짐꾸러미를 생각해서라도 우선 집에부터 들르고 한잔
을 기울이든지 빨든지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생각과는 전혀 달리 오랜만에
만난 두 친구의 가운데 서서 그들과 발걸음을 맞추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런 자신을 나무
라지도 않았다. 그 초라한 집엘 들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은 서울에서 떠날 때부터 갖고 있던 생각
이기도 했다.
"눈 딱 감고 한입 쭉 빨러간다는 게 무슨 뜻인지나 아니? 이 서울 촌놈아."
"잘 모르시겠다. 이 청주 깍쟁아."
"잘 모를 거다."
"...."
"요즘 교육은 우선 보여 주는 게 중요하다니까 설명 대신 잠시 후 실습을 통해서 깨우쳐 주마.
그 점에 무슨 불만이라도 있니?"
"없는 걸로 안다."
우리는 계속해서 이렇게 떠들어댔고 그리고 떠들어댄 끝엔 으레 한차례씩 히히덕대며 걸었다.
이렇게 얼마 동안을 걷다가 발길을 멈춘 곳은 도립병원 근처에 있는 어떤 술집이었다.
"여기가 곧, 네 형님들의 오아시스다아, 알겠나아?"
우리 셋은 그 술집 깊숙한 곳으로 우우 몰려들어갔다.
나는 그들의 오아시스에서 낯선 여자를 옆에 앉혀놓고 정종을 홀짝이며 난생 처음으로 보고, 듣
고, 그리고 배웠다.
'눈 딱 감고 한입 쪽 빠는 것'을 견학했고 팁을 두둑하게 받아 기분이 좋아진 한 여자가 팁을 준
그 남자에게 '나 좋아해주'라는 팁의 대가를 바쳤는데 그 뜻대로 '좋아해 주고'나서 아무리 살펴보
았지만 소련 여자가 아니길래 그렇다면 이름이 그렇게 길 필요가 없으니 '나 해주'로 개명해 줬다
는 얘기를 장본인에게서 직접 들었다.
'눈 딱 감고 한입 쪽'을 견학시켜 준 친구는 청자로 끝나는 곳의 간부급 공무원으로 그리고 소련
여자도 아니면서 긴 이름을 갖고 있는 게 부당해서 '나 좋아해주'를 '나 해주'로 고쳐 준 친구는
신문기자로, 각기 이 지방에선 유망주로 바라보여진다는 것도 나는 역시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들이 '그까짓 월급'으로 치사하게 살지 않는 특별한 기술이 있다는 것도 그들의 입을 통해서 처
음으로 알았다.
'뭐니뭐니 해도 머니(돈)'를 쌓아놓아야 한다는 아주 굳건한 신념을 가진 이 두 친구들은 술잔이
거듭되자 약속이라도 한 듯 갑자기 불안해했다. 그들이 그렇게 불안해 하는 이유는 '작은 내에는
먹이도 작다'는 공통된 불안이었다.
그들은 '큰 물의 많은 먹이' 속에서 비대해질 대로 비대해진 자기들 주변 사람들을 열도 스물도
더 넘게 실례로 들며 '많은 먹이가 있는 큰 물'인 서울로 뛰어야겠다며 한결같이 자기 나름대로의
상경계획서를 술상 위에다 펼쳐놓기도 했다.
"선생님."
"네?"
"선생님도 말씀 좀 하세요."
기자 친구 옆에 앉은 '나 해주' 양의 시선이 내 얼굴에 와 꽂혔다.
"무슨 얘길 합니까?"
"아무 얘기나요? 얘길 안하고 잠자코 계시니까 꼭 안주 같아요."
"안주?"
"네."
"안주라니?"
'나 해주' 양이 대답은 않고 갑작스레 떼굴떼굴 구를 듯 웃어댔다.
"술자리에 말이 없는 건 안주뿐인가 하노라. 즉 안주는 말이 없다, 이뜻이야."
'나 해주'양의 옆에 앉았던 기자 친구의 보충설명에, 보충설명을 한 본인은 물론 '나 해주' 양도
'한 이쪼'-'한 입쪽'하고 키스하기로 되었다해서 '한 입쪽'으로 불리게 된 그녀의 이름을 기자친구
가 이렇게 개명했다고 한다- 양도, 청의 간부친구도 모두 입을 모아 술상을 두드려대며 웃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웃음에 맞춰 웃어 줄 여유가 없었다. '나 해주'양의 그 기발한 비유술을 감탄
하고 있기에만도 굉장히 바빴던 것이다. 그런 요란한 웃음 끝에 기자친구가,
"야, 너 아직 거기 그냥 나가지?"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거기라니?"
"언젠가 얘기했던 그 출판사 말야."
그가 얘기하는 것은 내가 지금 근무하고 있는 어린이 잡지사에 입사하기 바로 전에 도안사로
근무했던 그 출판사를 말하는 것이었다.
"응."
그러나 나는 이렇게 간단히 대답해 버리고 말았다. 공연히 옮긴 직장 얘기를 하면 이것저것 귀
찮은 질문이 빗발치듯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의 그런 대답이 떨어지자 그는,
"저 선생님은 서울에 있는 유명한 출판사에 계시는 분야. 너 출판사가 뭐 하는 댄 줄 알아?"
'나 해주' 양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의 그런 말은 '나 해주' 양에게 나를 소개시키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서울에서도 유명한 출판사에 근무하는 친구를 알고 있는 자기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인
지 또는 '나 해주'양이 출판사가 뭘 하는 곳이라는 걸 알고 있는지를 테스트하기 위해서 하는 소
린지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었다.
"어머, 아무리 이런 데 있지만 출판사가 뭘 하는 덴 줄 모를까 봐 그러세요?"
'나 해주'양이 입을 비쭉 내밀며 토라지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그는 그런 '나 해주'양의 태도엔
아랑곳도 없다는 듯,
"출판사는 말야. 한마디로 말하면 책 만들어내는 회사를 말하는 거야."
이렇게 계속했다. 그러자,
"책이 어떻게 나오는지는 잘 모르지만 출판사가 책 만드는 회사라는 건 저도 알고 있어요. 자,
선생님 한잔....책 만들기 어렵죠?"
'나 해주'양이 빈 술잔을 내게 권하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조금도 힘들지 않아요."
"어머, 아무려면 책 만들기가 그렇게 수월할려고요."
나는 '나 해주'양을 바라보았다.
"내가 근무하는 출판사는 책을 쉽게 만드는 데는 대한민국에서도 알아주는 데란 말야. 책 한질을
계획했다 하면 번역사들을 이십 명도 좋고 삼십 명도 좋고....여튼 그렇게 무더기로 끌어들이는 거
야. 아주 헐값으로 그래야 책 만드는 비용이 싸게 먹히고 쉽게 일할 수 있지....그러니까 공연히 우
리 나라 학자들에게 1년이나 2년이나 연구하게 해서 내는 책은 하나도 없다시피한 거야. 책 만들
어 돈을 벌려는 주제에 뭐하러 그렇게 비용도 또 시간도 많이 드는 짓을 하느냐 이거지. 적당히
쉽게 베껴서 돈을 벌면 그만인데 뭐하러 그런 골치아픈 짓을 하느냔 말이야.... 이러이러한 책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만 하면 그냥 쏙 빠져나옵니다."
"참기름을 발랐나요? 그냥 쏙 빠져나오게...."
이번에는 '한 이쪼' 양이 내 말을 붙들고 늘어졌다. 그러자 '나도 한마디 안할 수 없다'는 듯,
"난 책하고 일찌감치 담을 쌓았지만.... 가끔 신문광고에 느네 출판사에서 만든 책 소개가 천연색
으로 신문 한 장을 다 차지하고 나오더라. 야, 거 굉장히 호화판이더라."
청의 간부친구가 아주 자랑스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얘기도 책하고 담쌓았다는 걸 자
랑할 속셈인지 아니면 내가 근무하는 출판사의 책이어서 친구인 나 때문에 유의해서 봤다는 걸
자랑하려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번엔 기자하는 친구도,
"나도 봤다. 그게 무슨 전집이더라? 여튼 굉장하더군. 정치계, 언론계,예술계.... 할 것 없이 거물
이란 거물들은 모두 다 한마디씩 칭찬을 했더군."
이렇게지지 않고 한마디 보탠다.
"....그래서 말야. 그렇게 들어온 원고는 오역투성이야. 엄연히 '아껴둔 비장품'이란 뜻으로 쓰인
'도라노꼬'가 '호랑이 새끼'로, '뇌물'이란 뜻으로 쓰인 '소데노시따'가 '소매 밑으로', 심지어는 '닭'을
말하는 '니와또리'가 '뜰새' 혹은 '마당새'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이런 오욕 때문에 마치 명랑
소설을 읽는 기분이라고. 책을 아는 사람, 우리 나라의 출판계를 걱정하는 사람들로부턴 무더기로
욕을 퍼먹지만 정치계다, 언론계다, 연예계다, 할 것 없이 이렇다 하는 명사들에겐 최대의, 최고의
찬사로 엮어진 추천사를 얻어재는 비상한 재주가 있는 거야. 치사하게 월급으로 생활을 안한다는
네놈들 재주도 비상하지만 그 재주도 알아줘야 한단 말야. 그게 다 돈의 힘이긴 하지만 말야. 돈,
돈, 돈 그렇지 돈의 힘이지...."
"그래 네놈들도 눈이 있다고 그 양서 중의 양서는 눈에 띄었구나."
나는 더 이상 어떻게 말할 수가 없어 이렇게 나오는 대로 지껄였다.
"술자리에서 김새게 무슨 책 얘기가 그렇게 길어요. 노래나 불러요. 자, 내가 먼저 한 곡 할게요."
'한 이쪼' 양이 딱딱하게 굳어진 술자리의 분위기를 풀기 위해 희생곡으로 '새가 날아든다 온갖
잡새가 날아든다'를 부르기 시작했다. 젓갈짝이, 숟가락이 손바닥이 술상을 치고 주전자를 때리고
안주그릇을 두드려대고 하여 장단을 치는 바람에 방 안은 갑자기 주흥으로 가득 찼다.
얼마 동은을 그렇게 장단 맞추기에 여념이 없던 나는 장단치던 손놀림을 멈추고 말았다. 잘못
장단을 치다가 상 위에 깐 술먹은 백로지(술이 엎질러져 조금만 잘못 건드려도 후루룩 밀려 찢어
지게 되어 있었다)를 담뱃갑 크기만큼 찢었던 것인데 마침 그 찍어진 곳으로 드러난 상위의 그림
이 내 눈길을 끌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자개로 붙여 만든, 달과 그 달의 왼쪽 밑부분을 약간 가
리고 떠 있는 구름의 그림이었다. 이제는 서랍의 장식도 다 떨어져 버리고 유리도 깨어져 달아나
고 이곳저곳에 박힌 자개도 거의 다 떨어져 폐품이 다 되다시피 되어 버린 어머니의 농이었다. 그
어머니의 농에도 지금 술상 위에 나타난 그럼처럼 달과 그 달의 밑부분을 약간 가리고 떠 있는
구름, 그런 그림이 자개로 박혀져 있었다고 기억해낸 것이다. 그 농은 물론 어머니가 시집올 때
가져온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랜 세월 동안 우리들 일곱 남매의 철마다 바뀌는 옷가지들이
들락날락하는 바람에 시달릴 때로 시달려 이제는 그렇게 폐품으로 바뀌고 만 것이다.
"출판사 선생님을 왜 남이 열심히 노랠 하는데 장단도 안 맞추고 계실까?"
'나 해주' 양이 나에게 못마땅한 눈초리를 던지며 한마디 했다. 그러자, "뭐, 그렇게 건방지게 굴
었어? 너 요노옴, 네 죄를 네가 알렷다아. 그 죄값은 벌주 한 잔에 노래 한 곡조로다아."
기자 친구가 방송국에라도 나옴직한 전형적인 간신배의 간사한 목소리를 흉내내어 내게 노래를
지명하는 것이었다.
-노래고 뭐고 난 이제 집엘 들어가야겠어.... 그런데 이 자릴 어떻게 빠져나간다? 저 녀석들은 총
행금지가 없는 이곳의 편리한 제도를 이용해서 마냥 나를 붙들어 둘 것이다. 술, 달, 농.... 어머니.
"너 요노옴, 네 죄를 모른단 말이냐?"
또다시 기자하는 친구의 간신배를 흉내낸 목소리가 천장을 찌를 듯 치솟아올랐다.
"정히 부르라면 노래 한 곡쯤 못 부를 나도 아니야. 그렇지. 그 노래를 부르자."
나는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때에'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바로 내 뒤의 벽에 기대어
놓은 짐꾸러미를 한 손을 뒤로 돌려 집어서 잠바 안으로 쑤셔넣고 그 짐을 등에다 업듯 했다. 부
르고 있는 노래만 끝나면 무슨 핑계를 대서라고 이 자리를 뜰 심산이었다. 내가 잠바 속으로 집어
넣어 업듯 했던 그 짐꾸러미는 내가 노래를 다 마칠 무렵쯤 되었을 때 이미 잠바 속 왼편 겨드랑
이 밑에 꽉 끼어져 감쪽같이 숨겨지고 말았다.
노래를 마친 나는 용변이 급해진 사람처럼 서둘러대며 자리에서 일어나 방 밖으로 나왔다.
나의 노래를 이어받은 기자친구가 가지것 추켜올린 고개짓에 눈까지 스스로 내려감고 '두만강
푸른 물에 노젖는 뱃사공'을 뽑아대기 시작했고 젓갈짝을 두들겨대던 '나 해주'양은 밖으로 나와서
신발을 찾아꿰는 내 이마에다 대고,
"오른쪽으로 돌아서 곧장 가면 바로 거기가 거기예요." 하고 묻지도 않은 변소의 위치를 친절하
게 알려 주는 것이었다.
술집에서 몰래 빠져나온 나는 집을 향해 잰걸음을 놀리며 생각에 잠겼다. 집에 대한, 아버지에
대한, 가족들에 대한 생각들어었다.
상자가 즐비한 중앙통로를 접어든 나는 손목을 들어 시간을 보았다.
여덟 시 이십 분이었다.
-여덟 시 이십 분.
나는 이렇게 소리를 내어 중얼거렸다. 그리고 속으로 히죽이 웃어 버렸다. 외사촌 형의 눈이 생
각났기 때문이었다. '여덟 시 이십 분'은 내 외사촌 형의 별명이었다. 양쪽 눈꼬리가 아래로 축 처
져 있는 꼴이 꼭 여덟시 이십 분을 가리키는 시계바늘을 닮았다고 해서 그런 별명이 붙은 것이었
다. 그를 아는 사람이면 모두들 그의 착한 마음씨를 좋아했다. 친척들은 모두들 사람이 인덕 있게
생겼다고도 했고 복받을 상이라고도 했다. 사실 그는 누가 보아도 인상이 좋은 그런 얼굴이었다.
여덟 시 이십 분을 가리키는 시계바늘을 닮은 눈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인지도 몰랐다.
사실 그는 남들이 하는 얘기대로 복받을 상이어서 그런지 상당한 돈을 번 부자였다. 그 형은 서
울에서도 몇 째 안 가는 큰 호텔을 경영하고 있었다. 외국인 상대의 호텔이었다.
며칠 전, 내 귀에 들어온 풍문에 의하면 그 형이 우리 아버지의 회갑 잔칫상을 차리라고 대성동
육십구 번지로 액수미상의 돈을 송금했다고 한다. 그 외사촌 형의 눈에는, 아들만 무려 오 형제나
되고 딸까지 합치면 모두 칠 남매가 되면서 그 슬하의 자식들 힘으로 회갑 잔칫상 한번 올바로
차려받지 못하는 고모부 신세가 딱하게 보였을 것이고, 그 고모부의 아들딸들이 답답하게만 보였
을 것이다.
나는 그런 아버지의 얼굴을 눈앞에 떠올리며 걸음을 옮겼다. <오동자도> 속에 든 셋째번 아이
가 이십 연도 더 넘는 세월이 흐른 지금에야,
-아버지 죄송합니다. 하지만 어쩝니까? 이 가난을 어쩌란 말입니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심한 부끄러움 때문에 스스로 얼굴이 홧홧 달아올랐다. 일시에 술
기운이 확 퍼져오르는 듯했다. 나는 부지런을 피우며 떼놓던 발길을 늦추어 상점의 진열장 유리에
나의 얼굴을 비춰보았다. 그때,
-쟨 끼니도 제대로 못 찾아먹는 사람처럼 눈이 십 리도 더 기어들어갔구나. 쯧쯧쯧.
진열장 안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내 얼굴만 대하면 늘 이런 건강부터 걱정해
대곤 하는 어머니 앞에서처럼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려 진열장 유리에 담긴 내 얼굴과 외면을 해버
리고 말았다. 그리곤 자꾸만,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이렇게 어머니를 되풀이해 속으로만 불러댔다. 그렇게 어머니를 부르는 동안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슬픔 같은 것이 가슴속에서 딸딸 뭉쳐지며 콧날이 찡 저려짐을 느꼈다.
-또 술 마셨구나!
아버지가, 어머니가, 형들이, 동생들이 차례로 내 눈앞에 나타났다. 그들 환영은 한결같이 찌푸
린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약방을 찾으며 눈을 두리번거렸다.
약방으로 들어간 나는 술냄새 없는 약을 달라곤 했다. 약방 주인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런 약은
아직 만들어내는 곳이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런 약의 대용으로 단자가 붙은 것을 사가라고 했
다. 나는 그거라도 사먹을 수밖에 없었다.
약방에선 나온 나는 단자가 붙은 그 잔잔한 알들을 입에 가득 털어넣고 다시 걸었다.
-네 몸이 술을 먹을 몸이냐? 돈이 있으면 보약이라도 먹어야 할 몸인데.
어머니가, 아버지가, 형들이, 동생들이 눈살을 잔뜩 찌푸려 보인다.
나는 다시 또 다른 약방의 문을 밀치고 들어갔다. 술냄새 안 나게 하는 약을 달라고 했다. 그러
자 약방 주인이 픽 웃었다. 그러면서 술을 쉬 깨게 하는 약은 있어도 그런 약은 없다고 했다. 하
지만 나는 꼭 그런 약이 있을 것만 같았다.
-별의별 약을 다 만들어 팔면서 왜 그런 약은 안 만들어내는 걸까?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자 약방 주인은 술이 깨면 자연 술냄새도 안 나게 된다고 말하
며 또 한번 피익 웃는 것이었다. 나도 덩달아 웃었다. 그리고 술이 쉬 깬다는 물약을 단숨에 들이
켰다.
-청주에 내려왔으면 집에부터 들를 일이지 여태껏 어디서 무얼 하다가 이제야 기어들어오느냐
말야! 넌 뭣 때문에 내려왔니? 술 마시러 왔니, 엉?
약방을 나온 나는 이번에 잡화점으로 들어갔다. 치약과 칫솔을 샀다. 껌도 한통 샀다. 술냄새,
어떻게서든지 이 술냄새를 없애야 한다는 생각때문이었다.
나는 도청 뒷문 앞에서 발길을 돌려 대성동으로 똑바로 추켜 뻗은 비슷한 비탈길로 접어들었다.
그때 아득히 먼 곳에서 나에게 속삭여 주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것은 나의 목소리였다.
-넌, 지금 왜 그렇게 우울한가?
난 나도 잘 모르겠다고 나에게 대답해 주었다.
-네가 그렇게 우울한 건 뭐니뭐니 해도 머니가 없어서야!
-?
-그렇지만 그렇다고 우울해 있을 필욘 없어! 돈이란 우리가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될 아주 필
요한 것이라는 건 맞는 얘기야!
-그러면?
-돈이란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수단이지 살아가는 목적이 아니니까.
나는 화가 났다. 무척 화가 났다. 그래서 나는 나에게 화를 냈다. 내가 이렇게 화를 발끈 내자
또 하나의 다른 내가 화를 낸 나에게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네 녀석이 화를 내는 건 내가 세상 돌아가는 걸 모르고 지껄이는 소리라고 생각한 때문이지?
네 녀석이 정말로 화를 내야 할 데는 따로 있어! 돈의 횡포에 대해서 또 황금만능 시대에다 대고
화를 내란 말야, 이 썩어빠진 돈의 노예야!
나는 또 하나의 다른 나에게 이렇게 심한 욕설을 얻어먹은 채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겼다.
-돈이 만들어지기 전의 아득한 옛날의 생활, 배가 고프면 산이나 들에 나가 열매와 풀로 배를
채우던 그때의 인간생활. 수단과 목적....
나는 우울하지 않기로 했다. 웃기로 했다.
-웃는 얼굴, 아버지의 웃는 얼굴, 형들의 웃는 얼굴, 어머니의 웃는 얼굴, 동생들의 웃는 얼굴,
나의 웃는 얼굴, 아랑드롱의 웃는 얼굴, 웃는 얼굴, 웃는 얼굴....
나는 문득 제정신이 들었다. 급히 잠바 속 겨드랑이 밑을 확인해 보았다. 아랑드롱의 웃는 얼굴
이 박혀 있는 신문지, 그 신문지로 포장된 한벌의 양복감, 그것은 셋째 아들인 내가 환갑을 맞는
아버지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이며 또 최대의 선물이었다.
-아마 그 양복천은 아버지에게 썩 잘 어울리는 색깔일 거야.
내가 육십구 번지의 대문 앞에 도착했을 때, 부엌에서 여러 가지 음식들이 만들어지며 풍기는
냄새가 한데 어울려 나를 반겼다. 그것은 어머니의 냄새이기도 했다.
나는 서슴없이 부엌으로 뛰어들었다. 돌연히 나타난 나를 대하는 어머니가, 숙모가, 동생들이
눈을 키우며 우르르 몰려들었다.
"왜 인제 오니?"
"늦었구나."
"저녁 어떡했수?"
모두들 이렇게 한마디씩 내게로 질문의 화살을 던져댔다. 그러나 나는 그런 물음들엔 대답도 않
고 옆구리에 끼었던 짐꾸러미를 꺼내 어머니에게 건네 주면서 버스 속에서 익혔던 아랑드롱의 그
웃는 얼굴을 흉내내 보였다. 그러한 나의 얼굴을 향해 어머니는 그 동안의 서울생활에 별다른 고
생은 없었느냐고 연신 그런 질문만 해댔다. 그러나 나는 이렇다 할 대답도 없이 한 대야 찰랑찰랑
떠주는 세숫물을 받아들고 뜨락으로 갔다. 뜨락 위에 세숫대야를 올려놓은 나는 뜰밑에 구부리고
서서 세숫물에 손을 담갔다. 그러자 그 따뜻한 세숫물의 온기가 마치 어머니의 따뜻한 정처럼 손
등을 타고 나의 전신으로 파고들었다. 어머니가 나에게 받아든 짐꾸러미를 들고 부엌에서 나오더
니 급히 안방문을 열어젖혔다. 그 바람에 안방의 불빛이 일시에 나에게 쏟아져나왔다.
열려진 방문을 통해 방 안에 갇혔던 눈길들이 한꺼번에 내게로 몰려나왔다.
"봉직이냐?"
고모가 마루 끝에까지 쪼르르 달려나오며 나를 반겼다.
"네, 들어가세요. 세수만 하고 곧 들어가겠어요."
"아버진 네가 안 온다고 여태 성화였어."
"...."
"왜 이렇게 늦었니?"
"...."
"네가 안 오니까 아버진 네가 객지에서 병으로 드러누웠거나 아니면 네 신상에 무슨 변이라도
일어났을지도 모른다고 여태 성화였어!"
고모의 이런 소리가 내 눈에서 눈물을 짜내어 떨어뜨리며 세숫물에 얄따란 주름을 만들게 했다.
"문이나 닫으세요."
나는 방에서 몰려나온 그 숱한 혈육들의 시선을 더 이상 감당해낼 재주가 없어 고모에게 이렇
게 말했다.
"문은 왜 닫으라는 거니? 네가 세수하는 데 어두울까 봐 부러 열어놓고 있는 건데...."
"춥잖아요?"
"춥긴 방 안에 있는 사람이 뭐가 추워, 밖에서 여태 떨며 온 사람도 있는데."
또다시 고모의 이런 한마디가 나의 콧날을 찌잉 울렸다.
"글세 문 닫으세요."
"괜찮대두 그러는구나."
"...."
"어서 세수나 해. 방 안에 있는 사람 걱정일랑 그만하고."
나는 대야에 담그고 있던 손을 뽑아 비누질을 하기 시작했다. 손가락 사이사이, 손톱들 부근, 손
등, 손바닥을 몇 번씩이고 되풀이해서 문지르고 비벼대곤 했다. 그렇게 한 끝에 비눗기를 씻어내
고 거기에 또다시 비누칠을 하고....
"원, 애두 별나기두 하다. 무슨 놈의 세술 그렇게 오래 하니? 손을 씻는게 아니라 손을 닳아빠지
게 하는 것 같구나."
고모는 네게 줄 세수 수건을 흔들어대며 이렇게 성화를 바쳤다. 그러자, "고모, 가만두세오. 그
런다구 형이 세술 빨리 끝낼 줄 아세요? 어머니의 말씀을 빌리면 셋째형은 저렇게 세수 오래 하
는 버릇을 아버지에게 물려받았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우리 형제들 중에서 오직 유일하게 아버
지 유산을 받는 아들이 될 거라고 했어요."
이러한 막내동생의 익살인지 비꼬는 말인지가 온 방 안을 웃음바다로 만들고 말았다.
-아, 그랬구나.
나는 어릴 때부터 '세수 오래 하기'와 '변소 오래 앉아 있기'가 아버지의 그것과 꼭 같이 닮았대
서 늘 형제들의 놀림을 받고 하던 일을 기억해냈던 것이다. 그것은 까맣게 잊고 있었던 기억이었
다. 마치 잃은 지 오래된 귀중품이라고 되찾은 듯 나는 아주 흐뭇한 기분이었다. 이런 것이 곧 한
가정을 항풍처럼 맴돌고 있는 평화로움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
세수를 마치고 방에 들어서자,
"아버지께 드리는 네 선물이니까, 네 손으로 풀어서 보여드려."
어머니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며 눈짓으로 아버지의 앞에 놓인 짐꾸러미를 가리켰다.
"이게 뭐냐?"
아버지는 내가 가져온 그 신문지 속에 든 물건이 무엇일까 사뭇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아버님의 양복천이에요."
나는 아버지 앞에 꿇어앉으며 신문지로 포장된 것을 풀기 시작했다.
"양복감이라구?"
"네, 그런데 색깔이 아버님 맘에 드실지 모르겠어요."
그러자 이번엔 큰형이 나에게 한마디 던졌다.
"다른 거라면 몰라도 양복감이라면 미리 보냈어야 바느질을 시키지. 그래 인제서 갖고 오면 언제
맞춰 입으시라는 거냐?"
"...."
"너, 아버지 환갑이 언젠지 알기나 아니?"
-내일이죠!
나는 금방이라도 이렇게 튀어나올 것만 같은 말대답을 꾹 눌러 참았다. 큰 형의 이런 말은 내
준비성 없는 행위를 탓하는 것이겠지만, 실인즉 이 큰형의 이런 말은 내 준비성 없는 행위를 탓
하는 것이겠지만, 실인즉 이번의 일만은 내가 준비성이 없어서 이렇게 된 것은 정말 아니었다.
-돈으로 따지면 만 원 한 장도 못 되는 물건이지만 내가 이 선물을 마련하기 위해서 얼마나 노
력을 했는지 알기나 아세요? 차라리 내가 가난하단 걸 탓하는 게 낫지!
사실 지금 내가 나무람을 받아야 하는 것은 나의 그 준비성 없는 성격이 아니라 나 혼자의 몸
뚱이도 추단을 못하는 그런 가난이어야 했다. 나는 큰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큰형도 나를 빠안
히 지켜보고 있었다.
-뭐니뭐니 해도 머니가 있어야 한단 말야!
나를 바라보고 있는 큰형의 눈이 이렇게 얘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얘기를 그대로 받아
들일 수는 없었다.
-가난하다는 건 죄가 될 수는 없지요. 가난이란 다만 살아가는데 불편할 따름인 것 아닙니까?
나는 나를 바라보고 있는 큰형의 눈에다 이런 얘기를 던져 주었다. 그리고 방 안의 뭇 시선들이
총집중된 가운데서 나는 내가 가지고 온 짐꾸러미의 신문지 포장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 신문지
포장이 다 풀어진 순간 나는 무엇에 찔리기라도 한 듯 깜짝 놀라고 말았다. 분명히 연한 회색(어
떻게 보면 짙은 은빛)의 양복감을 끊어왔었는데 이게 어찌된 영문인지 그 내용물이 전혀 다른 것
이었다. 아버지 앞에 나타난 양복천은 원색의 짙은 초록색 천으로 둔갑해 있었다.
"얘,봉직아!"
"...."
"너 정신이 있니 없니? 네 아범이 그런 색깔을 어떻게 입으라는 거냐? 우리 여자들도 나이가 들
면 그런 색깔은 입질 못해요!"
고모의 이런 노골적인 핀잔이 내 뒷덜미에 매달렸다.
"쟤가 미쳤어!"
어머니의 이런 핀잔도 들려왔다.
나는 당황해진 손놀림으로 그 초록색 천을 후루룩 던져굴려서 방 안에 가득 차도록 펼쳐놓았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아버지에게 드리려고 사온 양복천은 아니었다. 당구대 밑에 까는 그런 천이었
다. 그것도 새것이 아니고 당구 큐 끝에 시달릴 대로 시달려 흠집투성이가 되어 버린 아주 낡디
낡은 것이었다. 아마 당구장 주인이 새 천을 끊기가 아까와 중고품인 이런 천을 서울에서 사오다
가 나의 짐과 잘못 바뀌어 버린 모양이었다. 나는 황급히 그 천을 쌌던 신문지를 집어들고 이리저
리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 신문지엔 어느 구석에도 아랑드롱의 웃는 얼굴이 나타나 주지 않았다.
확실히 누구와 짐이 바뀐 것이었다. 분명히 버스에서 나보다 먼저 내린 이 짐의 임자가 내 짐을 s
자기의 것과 혼동하고 바꿔 들고 갔을 것이다.
"짐이 바뀌었어요. 이건 내 짐이 아니에요. 난 아버지의 양복천을 끊어왔는데...."
나는 이렇게 중얼대며 방 안에 있는 얼굴들을 한바퀴 주욱 훑어보았다.
"야, 봉직아 저건 당구대 밑에 까는 천이란 말이야."
작은형이 나에게 한마디 했다.
"꼭 육십 평생을 우리들 칠 남매에게 시달릴 대로 시달린 우리 아버지의 신세를 닮았군!"
막내동생이 나의 시선과 맞부딪친 시선을 거두어 그 당구 큐 끝에 시달릴 대로 시달려 흠집투
성이가 된 진초록의 천으로 시선을 옮겨 꽂으며 이렇게 이죽거려 잔뜩 긴장된 방안의 공기를 또
한번 웃음바다로 만들어 놓았다.
고모의 시선이 아버지의 얼굴로, 숙부의 시선이 아버지의 얼굴로, 어머니의 시선이 아버지의 얼
굴로, 숙모의 시선이 아버지의 얼굴로, 형들의 시선이 아버지의 얼굴로, 동생들의 시선이 아버지의
얼굴로.... 이렇게 방 안의 모든 시선을 일시에 받는 아버지는 그 진초록색 천의 한 귀퉁이를 잡고
흔들며 갑자기 껄껄걸 굵다란 웃음을 터뜨렸다. 아버지의 그 웃음은 아주 여유가 있는 그런 웃음
이었다. 그 웃음을 앞장세운 어머니의, 고모의, 형들의, 숙모의, 숙부의, 동생들의.... 웃음이 차례차
례로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다만 웃음 때문에 사정없이 접히고 있는 아버지의 얼굴의 그 숱한 주름
살만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아버지의 웃음을 따라 모두들 웃고 있는데 나만 웃
음을 잃고 있는 것이었다. 나의 이런 굳어진 표정을 발견한 아버지는 나에게, 어서 너도 따라 웃
으라는 듯 한층 더 크고 굵은 목소리로 소리를 높여 웃어댔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의 웃음을 따라 억지로 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맨 처음엔 눈으로 그 다음
엔 입으로 그리고 그 다음엔 얼굴 전체로.... 그리고 종당엔 소리를 내어....그렇게 웃음을 발전시켜
갔다. 그러면서도 나는 아버지의 얼굴에서 시선을 거둘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저 주름투성이의 얼굴, 그렇지, 그것은 분명히 우리들 칠 남매에게 시달릴 대로 시달
린 험집이야. 이 지지리도 못난 자식들을 위해서 평생을 두고 속을 썩여온 그 흔적이란 말이야.
나는 막내동생의 얼굴로 시선을 옮겨 박았다. 그리곤,
-그래, 네 말대로 아버지는 꼭 뭇 사람들의 당구 큐 끝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 이 흠집투성이의
천과 같은 신세가 되어 버린 거야. 아버지 자신도 또 우리들도 모르는 그 사이에 말야.
이렇게 중얼거렸다.
나는 동생의 얼굴에서 거둔 시선을 다시 아버지의 얼굴에 갖다꽂았다.
-아버지의 저 주름투성이인 얼굴. 난 거기에다 성자를 붙여드리고 싶어.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며 최대의 선물이야. 그렇지 저 주름은 성흔이야, 성흔!
나는 웃으며 울었다.
나는 울면서 웃었다.
사형(지은이: 전상국)
"아부지, 빨랑 도망가래!"
박 상사가 돌아왔다는 것이다.
형기 3년을 마치기까지 내내 이를 갈며 지내더란 그 박 상사가 지금 마을 완호네 가게에서 소
주를 마시고 있다는 소식을 가지고 올라온 큰놈을 숨이 턱에 차 헉헉거렸다.
"모두 그러는데 아부질 죽일 거래."
한창 대낮, 벼농사엔 더없이 좋은 볕쬠이라지만 너무 심한 폭염이었다. 내려다보이는 아스팔트
국도 위에 '칸보이' 지프을 앞세운 군용 트럭 십여 대가 폭염에 녹은 듯 늘어서 있었고 그 운전병
들이 냇물에 벌거벗고 서서 물을 끼얹는 게 보였다.
애막골 닷 마지기 천수답에서 피사리를 하고 있던 현세는 큰놈의 질린 얼굴에 땀이 비오듯 흐
르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만 맥락이 풀렸다.
박 상사가 왔다는 그것이 두려운 게 아니었다.
저토록 처연하게 가슴에 상처가 난 큰놈의 꼬락서니가 보기 싫었다. 어찌 큰놈뿐이냐. 아내는
아내대로 얼굴에 그늘을 깔고 징징거렸고, 모친은 모친대로 자식 얼굴 피해가며 한숨 삭이던 그
지리한 나날, 더 어린 것들은 또 그것들 대로 어른들 눈치 보아가며 빌빌 기죽어 지내던 그런 가
슴 암울했던 세월이 한꺼번에 살아 올랐던 것이다.
박 상사, 제대로 하면서 그대로 부대 앞 천변에 뚝딱 집을 짓고 눌러앉아 버린 박 상사는 말하
자면 새로 생긴 마을의 개척자였다. 얼렁뚱땅 수완이 좋고 그 거구에 비해 몸이 잰 그는, 가게 보
랴, 부대 뜨물 날라다 돼지 키우랴, 마을의 궂은 일 도맡아 처리하랴, 그야말로 억세게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박 상사가 터잡아 앉은 부대 앞 마을은 꽤 살 만했다. 구멍가게가
넷, 간판은 없지만 격식은 다 갖춘 세탁소, 미용소, 군장판매소, 술 특약점까지 그런대로 흥청거렸
던 터수였다. 이곳저곳에서 모여든 뜨내기들로 이루어진 이 마을 사람들의 생활은 말할 것도 없이
부대가 그 젖줄이었다. 영외 거주하는 장교들이 급한 대로 마을의 이모저모를 이용했고, 정 홀랑
고향에 두고 온 사병들이 눈치껏 들러 팔아 주는 물건도 대단한 것이었다. 장병 면회 온 사람들까
지 이 마을을 욕심껏 이용하는가 하면 휴가 갔다 돌아오는 사병들이 부대 시간 맞추어 들어가기
위해 숨었다가 빵봉지를 한아름을 안고 들어간다든가-어떻든 마을은 그런대로 살 만했는데, 실은
그 살 만하다는 마을 사람들의 말 이면에 달리 기대하는 게 있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부대에서 무엇이든 빼내오는 그런 국물에 재미가 단단히 붙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모여 앉으면 1종계가 어떻구 2종계 녀석이 좀 빡빡하다느니, 3종계를 삶아야 할 차례라느니, 아닌
게 아니라 콩기름이니 동태 궤짝이니 척척 잘도 빼냈다. 제일 수입이 좋아 입맛이 당기는 것은 급
수반이나 수송부 선임하사를 끼고 날이 어두워 으슥한 샛길에서 받아내는 휘발유 장사였다. 이것
은 주로 박 상사가 도맡아 처리했는데, 그렇다고 그 이익을 자기 혼자 꿀떡하지는 않았다. 그것이
박 상사의 수완이었다. 그런 박 상사를 누구나 하느님처럼 생각할 지경이었다.
부대에서도 박 상사라면 알아주었다. 옛날 그 부대에서 제대를 했대서가 아니라 사람됨이 원래
사교적이어서 아무에게나 호감을 샀던 것이다. 자연 부대에 끼치는 영향력도 커 새로 부임한 고급
장교들도 그의 이름을 알아 그것이 꼭 인사차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박 상사의 가겟방에 들
러 주는 것으로 예를 삼을 지경이었다.
이것이 다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그러니까 군대가 후생사업까지 하던 자유당 말기의 얘기다.
적당히 사는 사람들에게 적당히 알맞은 세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좋은 시절이, 그 입맛 당기는 젖줄이 하룻저녁에 끊어져 버리는 날벼락이 내렸다.
군 수사기관이 들이닥쳤다. 부대가 발칵 뒤집히고, 바로 그 시간에 큰 것(휘발유 한 드럼)을 뽑
아내던 박 상사가 현장에서 제꺽 고랑을 찼다. 부대 사정은 알 수 없었지만 마을 사람들만 해도
이런저런 여죄에 걸려 완호와 현세 등 대 여섯이 잡혀갔다.
그 중에서 현세가 제일 먼저 풀려나오게 됐는데, 문제는 거기에 있었다. 현세가 마을에 돌아와
보니 그야말로 말이 아니었다. 모두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당장 굶어 죽겠다는 거였다. 부대가 옛
날의 그게 아니었다. 입을 싹 씻고 토라지듯 돌아앉은 부대에선 개미 한 마리 얼씬도 안했다. 마
을 사람들에게 모든 탓을 돌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우성을 치면서도 사람들은 박 상사가 어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돌아오
면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되돌아갈 것이라고 믿고들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 달쯤 뒤에 완호 등 박 상사를 제외한 마을 사람들이 모두 돌아왔다. 박 상사가 모든
걸 뒤집어썼다는 것이다. 사실은 그렇게 돼 있었기도 했다.
어떻든 현세보다 늦게 풀려나온 사람들은 마을에 돌아오기가 무섭게 이를 갈았다. 현세가 밀고
자라는 것이었다.
당장 때려 죽여야 한다고 서슬이 시퍼렇게 날뛰었다.
"그때 현세네 집에 왔던 작자가 거기 있었단 말이야, 분명 그 놈이더라구!"
"그렇지 않고서야 저 놈이 먼저 풀려나올 까닭이 없단 말이야!"
"죽일 놈!"
공교롭게도 모든 일이 그렇게 돼버렸기 때문에 현세로서는 할 말이 없었다. 하긴 몇 번 변명 같
은 걸 아주 안해 본 것도 아니다. 그러나 변명을 하려도 하면 할수록 마을 사람들의 심사를 건드
리는 결과가 된다는 것을 안 현세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사실 현세로서도 내심 캥기는 바가 컸기
때문이다.
그날 읍내에서 그 녀석을 만난 것이 빌미였다. 훈련소에서 한 내무반에 있었던 인연이 전방 부
대에 가서까지 계속된, 말하자면 군대 친구였다. 남쪽이 고향인 친구로 머리가 썩 좋아, 제대 무렵
엔 고향 가야 별볼일 없다며 하사관 시험을 보아 합격이 되고.... 그렇게 해서 헤어진 녀석인데 아
직 군대밥을 먹고 있다는 얘기였다. 웬 사복을 입었느냐니까 그냥 웃기에 알 만해서 그냥 넘겨 버
리고 술 한 잔을 나누며 이런저런 살아가는 얘길 했던 것이다. 그것이 현세로선 이제까지 가슴에
뭉친 결정적 실수였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수라기보다 현세는 그 당시 자신이 살고 있
는 마을의 생태에 대해서, 더는 자기 자신의 떳떳치 못한 생활에 대해서 얼마간 회의를 가지고 있
었던 것이다. 거기에다 자유당 말기의 그 문란한 군대기강에 대해서도 어느 정고 비판적인 소리를
술김에 했던 것이다.
그런 지 며칠 후 그 녀석이 마을에 찾아왔던 일과, 냇물고기가 먹고 싶다기에 고기를 잡아다가
매운탕을 해놓고 소주 두어 병을 마셨을 뿐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5.16후 세상이 달라져 부대 기강이 엄하게 잡힌 것까지 현세에게 그 책임을 얹었
다. 순 억지를 부려 현세를 괴롭혔다. 말하자면 옛날 흥청거리던 마을의 경기가 폭삭 가라앉은 데
대한 불만을 현세를 돌파구로 삼아 터뜨렸던 것이다.
현세더러 자결하라고 했다. 자고로 밀고자는 옛날의 역적과 진배 없는 것이니 스스로 목숨을 끊
어 회개하라는 것이었다. 그래도 이쪽에서 묵묵부답이니까 식칼을 들고 덤비는 아낙네도 있었다.
여기서는 이제 더 살 수가 없다며 보따리를 싸던 세탁소 집은 현세네 집에 불을 확 싸질러 놓고
가겠다며 휘발유 통을 들고 날뛰었다. 어른들뿐이 아니고 아이들까지 현세네 집 쪽으로 침을 뱉았
다. "난 죽어두 이사는 못 가. 저 놈의 집 홀딱 망해 자빠지는 꼴을 보거나 박 상사가 저 놈의 배
때길 푹 쑤셔 놓는 걸 보기 전엔...."
대개 이런 저주 담긴 악담을 자기들의 일이 잘 안 풀릴 땐 서슴없이 쏟아놓았다.
이런 현세의 입장을 내 건너 감두리 마을 사람들은 오히려 고수름하게 여겼다. 한 마을에 살다
가 불쑥 가겟방을 차리고 부대 앞 마을로 내려앉은 현세를 그들로서는 도무지 못마땅하게 생각하
던 터수였던 때문이다. 땅 파던 놈이 땅이나 팔 것이지 어줍잖게 탐심이 크더라니, 자승자박이요,
사필귀정이라 했다.
그러나 현세는 누가 무슨 소릴 해도 눈 딱 감고 날 잡아 잡수시오, 하는 심정으로 모른 척했다.
누가 칼을 배에 찔러 죽이겠다고 했어도 아마 참아냈을 것이다.
그런데 현세로선 더 이상 견딜 수 없이 괴로운 일이 발생했다. 박 상사가 언도를 받고 교도소에
넘어간 지 꼭 한 달 되던 날이었다. 마을 사람들을 따라 목욕을 나갔던 놈이 끝내 돌아오지 않았
음을, 그것도 해 다 저물어 읍내에서 돌아온 박 상사가 처가 애 이름을 부르며 마을을 헤매서야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즈음 박 상사 처는 남편 재판 때문에 정신없이 읍이나 시로 헤매던 때였다.
박 상사가 제대하면서, 결혼이고 뭐고 혈혈단신 외로운 몸끼리 만났다며 자기보다 나이가 십여
년 어린 여자 하나를 데리고 살림을 시작한, 그 여자는 항상 남편을 휘어 잡아야 속이 시원해 하
는 그런 여자였다. 거기다 바람기까지 있어 박 상사와 툭하면 싸움을 벌였다. 누님, 누님, 하고 부
대 사병들이 줄을 이어 기웃거리기가 예사였다.
박 상사 처는 물에서 건져낸 죽은 애를 안고 현세네 집으로 들이닥쳤다. 내 남편 저 꼴로 만들
어놓더니 이젠 내 새끼까지 죽었으니 속이 시원하겠다며 방바닥을 쳐대며 대성통곡을 했다. 입에
물 한 모금 안 넣고 이틀을 그렇게 현세네 안방을 차지했다. 그 통에 혼이 빠진 현세 처와 애들은
당장 이사를 가자고 징징거렸다. 철없는 아이들은 마을 사람들이 갖는 그런 저주를 현세에게 나타
내 보였다. 큰 놈이 중학교를 그만두어 버린 것도 그런 심사에서였음이 분명했다.
박 상사를 면회하고 돌아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홱홱 내저었다. 그 활달하고 마음 좋은
사람이 그렇게 무섭게 변할 수가 있느냔 거였다. 눈이 이글이글 무섭게 타오르더라고 했다.
입을 열면 현세를 죽여야 한다는 말이 쏟아지더란 얘기였다.
현세도 딱 한 번 면회를 갔었다. 그러나 재소자가 만나지 않겠다고 해서 그냥 허허하게 되돌아
섰다.
설상가상으로, 박 상사가 교도소에 들어간 지 일 년 남짓해서 박 상사처가 어떤 제대해 나가는
사람과 배가 맞아 달아나 버렸던 것이다. 박 상사 처의 그 요염한 얼굴이며 거동으로 미루어 성치
는 않으리란 마을 사람들의 짐작이었지만 그렇게 덜컥 도망을 가버리리라곤 정말 생각도 못했던
일이었다.
"독한 것이 계집이여!"
모두 혀를 찼다. 남편이 그 지경이 되고, 아들 잃고.... 무슨 경황에 그렇게 됐겠느냔 얘기였다.
더 놀라운 것은 도망갈 때 모든 것을 씻은 듯이 정리해 갔던 것이다. 가겟방 물건을 죄 넘겨 팔았
는가 하면 돼지새끼는 물론 사소한 가재도구가지 읍내 사람들이 트럭을 가져와 실어갔다. 집만 덜
그러니 남았다.
참 솜씨 있게도 챙겨 갔다.
마을 사람들이 궁금하게 여기기 시작한 것은, 애막골 현세네 논에 붙어 있는 여섯 마지기 논을
어떻게 처리했을까 하는 거였다. 고향이 북쪽이라 혈혈단신인 그는 평생 소원이 내 땅을 가져보는
것이라고 하더니, 그예 늘려오던 퇴직금으로 그가 교도소에 가기 일 년 전인가 제 논을 장만하고
야 말았던 것이다.
그 논 등기를 그 여자가 가지고 갔으니 이제는 누가 주인이라고 나설 것인지 그게 궁금하지 않
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인근 마을 사람이야 안 샀을 게고...."
"제엔장, 읍내 어떤 놈이 헐값에 땡 잡았겠지."
"천벌을 받을 것이!"
그 일로 해서 현세는 마음에 좀더 깊은 낭패의 구덩이가 파이게 되었다. 엎친 데 덮친다는 말은
바로 이런 경우이리라. 어쨌든 현세는 괴로웠다.
"할머이 지금두 가슴 아프시다구 하디?"
내려갈 생각을 않고 버티고 선 큰놈에게 아침부터 가슴이 치민다는 모친의 속앓이를 물어본 것
이다. 조금 언짢은 일만 생겨도, 심지어는 간밤 꿈자리가 좋지 않아도 속앓아기 이는 모친이었다.
소위 홧병이라는 거였다.
"어머이가 질금물 해드렸는데두 자꾸 아프다구 하던데유."
"이놈아! 그러니까 빨리 내려가 할머이 배 좀 밀어드려!"
그렇게 큰놈을 내려쫓은 다음, 현세는 잠시 일손을 놓고 땀을 씻으며 아래켠을 내려다보았다.
큰놈이 뭔가 못 미더운 듯 힐끔힐끔 뒤를 돌아다보며 찔레덩굴 덮인 골짜기를 내려가고 있었다.
그 아래 개울 건너 아스팔트 깔린 국도엔 폭염에 늘어붙었던 군용 트럭이 '칸보이'를 선두로 서서
히 움직이고 있는 게 보였다. 아스팔트가 눅진눅진 녹아나고 있을 것이다.
웬 아낙 하나가 국도를 벗어나 개울을 건너 이쪽 애막골로 허위허위 오르고 있었다. 몹시 바쁜
걸음이군-그렇게 생각하다가 현세는 그것이 자기 처라는 것을 알고 적이 놀랐다. 찔레덩굴이 시작
하는 데서 큰놈과 만나 무엇인가 얘기를 주고 받는 것 같더니 다시 허위허위 이쪽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현세 처는 검은 비닐가방까지 들고 와 논두렁에 집어던지곤 자기도 털썩 주저앉았다. 큰놈처럼
숨이 턱에 차 헉헉거렸다.
"어머니 속앓인 좀 어때?"
"어머니야 으찌됐든, 동수아버이! 왜 이래유, 글쎄!"
그네는 금방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그런 얼굴을 했다. 현세는 그네가 논두렁에 집어던진 검은
비닐가방에 눈을 주었다.
"동수아버이 옷이야유. 복골 이모댁에 가서 메칠만 있어 봐유. 어머님이 그렇게 하래유."
"왜들 법석이야? 뭐가 어떻다구. 나 이 피 다 뽑구 내려갈 거여. 어서 내려가 어머이 약이나 해
드려. 왜, 그때 양귀비 곤 거 좀 남았을 텐데...."
속병엔 아편이 잘 들었다. 난리 때 그 끔직한 일을 당하고부터 속병을 얻었다는 모친은 정 못
견디겠으며 양귀비부터 찾았다.
"어디루 내려가유?"
어지긴, 집이지 어디야!"
"글세 동수아버이, 그 오기 줌 꺾어유.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유?"
현세는 더 대꾸도 않은 채 피사리를 계속해 나갔다.
"이젠 정말 지긋지긋해유."
현세 처는 울고 있었다.
-이 놈(피)은 항상 벼보다 성장이 빠르단 말이야. 가뭄을 타길 하나, 병충해에도 끄떡없거든.
"난유, 동수아버이 맞아 죽는 게 겁이 나서 그러는게 아니야유. 죄웁는 애새끼들이 불쌍해서 그
러는 거예유."
-추운 지방에선 피농사를 지어 식량으로 쓴다고 하더라만.... 제에길, 나두 이놈의 피농사나 한번
지어볼까.
"아이구, 내 팔자야."
드디어 현세 처는 왜감을 놓아 울면서 뿌르르 일어나더니, 마을을 향해 비칠비칠 내려가기 시작
했다.
풀냄새가 후끈 열기를 타고 코를 스쳤다.
현세는 자꾸 자기네 닷 마지기 맨 끝에 붙어 있는 박 상사의 논에 신경이 쓰였다. 처음 이 애막
골로 피사리를 올라올 때 그 논까지 피사리를 하리라 작정하고 왔던 것이다.
주인 없는 논이지만 모는 내고 보자고 해서 모를 내놓긴 했어도 누구하나 신경을 쓰는 사람이
없었다. 틈틈이 논물을 댄다든가 애벌 논매기까지 현세의 공이 구석구석 스민 그런 논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저 논에 선뜻 들어설 수가 없었다.
노 임자가 왔는데, 그것이 논 임자가 될 수 없다는, 드디어는 언제고 엉뚱한 논임나가 나타날
것이란 그런 생각에 이르자 현세는 드디어 그만 가슴이 암울해졌다.
당장 마을을 떠나 훌훌 다른 곳에 가 살고 싶은 생각이 하루에도 수십번은 더 치밀었다. 더욱
잦아진 모친의 속앓이, 삽추싹뿌리 달인 걸 먹어야 소화가 되는 자기의 병든 위장, 아내의 징징거
림, 애들의 성화....
그러나 현세는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수가 없었다. 마을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한 그 밑바닥엔
오히려 결코 떠나지 않을 것이란 다짐이 서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국민학교 다닐 때였다. 학교에서 돌아와 책보를 펴다가 명지 손가락만한 크기의 아주 예쁜 주머
니칼을 발견했다. 옆자리 애의 것으로 서울서 온 친척이 주고 갔다는, 시골 학교에서는 처음 보는
귀한 것이었다. 모두가 한 번이라도 만져보고 싶어했다. 그런데 어쩐 일로 그것이 자기 책보속에
싸여 온 것이다. 그것을 손에 꼬옥 쥐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웬일인지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집에 숨겨 두고 아주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리리라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다음날 그것
을 학교에 가지고 나갔다. 주인에게 사실을 얘기하고 돌려 주기로 했던 것이다. 그런데 교실에 들
어서기가 무섭게 아이들이 덤벼들었다. 주머니칼을 찾아낸 놈들은 의기양양한 기세로 몰매를 내렸
다. 한마디 입을 열 겨를도 없었다. 끝내 변명 한 마디 못하고 반 아이들로부터 갖은 곤욕을 다
당했다. 놀이에 끼어 주지 않았다. 이쪽에서 접근하며 모두 외면 했고 돌아서면 손가락질이었다.
도둑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자하고 그들 뒤를 따라다녔다. 그러지 않고는 너무 외롭다는 생
각이 들었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죽어도 그들 곁에 있고 싶었던 것이다.
현세는 박 상사가 정말 자기를 죽일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자식 잃고 처 잃고 악을 써
모은 가산까지 날린 마당에 박 상사가 무슨 짓인들 못하겠는가. 죽이기까지는 안한다고 하더라고
그에 못지않은 위해를 어찌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현세는 지금 마음이 가벼웠다. 큰놈이 올라와 박 상사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부
터 현세의 가슴에 서렸던 암운이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마을을 뜨지 않고 견뎌낸 것이 백번 잘했다는 생각이 자랑처럼 피어올랐다.
"얘, 아범!"
현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집에서 속병을 앓고 있을 모친이 논두렁에 주저앉아 있었기 때문이
다. 육순도 안된 나이에 비해 폭삭 늙어 버린 그네의 조그마한 몸뚱이가 땀에 젖은 채 괴로워하고
있었다. 명치께를 두손으로 움켜쥐고 헉헉 숨을 몰하쉬고 있어TEk.
"아니, 아픈 이가 예까지 뭘하러 왔수?"
모친이 속병으로 설설 길 때마다 현세는 형언할 수 없는 증오로 몸을 떨곤 했다. 연민이 미움으
로 탈을 바꾸는 것이다.
"너 왜 이러냐? 이러길."
-당신은 인생을 맹목적으로 살았단 말이오. 당신 인생은 전부 헛것이었단 말입니다.
"이것아, 얼른 피해라. 제발 빌자꾸나. 박 상사가 금방 이리루 올라올게여."
-어머이, 나느 당신을 입때까지 사랑하지 않았어요. 시랑은커녕 저주해 왔단 말이오. 당신이 일
방적으로 쏟은 자식에 대한 그 맹목적 사랑이 난 싫었단 말이오.
"너 이놈, 불효막심한 것!"
현세는 일손을 멈추고 모친 쪽으로 눈을 돌렸다. 무서운 기세로 몸을 일으켜 세운 모친의 작은
몸뚱이가 춤추듯 움직였다.
"이놈, 차라리 니가 날 죽여라. 내가 이놈의 세상, 살고 싶어 산 줄 아느냐? 니놈 죽어 자빠지는
꼴 보고 싶어 입때까지 내가 살아온 줄 아느냐?"
현세 모친은 논을 가로질러 현세 있는 데까지 와 있었다. 현세는 이때까지 이렇게 큰소리치는
모친을 본 적이 없었다. 자식 앞에서까지 항상 기죽어 빌빌 눈치보며 살아온 모친어었던 것이다.
현세는 모친의 작고 거풋한 몸뚱이를 껴들어 안고 논둑으로 나와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모친
의 얼굴은 속앓이에서 오는 고통인지 몹시 일그러져 있었다.
"어머이, 집에 같이 내려갑시다."
그렇게 말하면서 현세는 지게를 벗어놓은 논두렁 한 켠에 우뚝 선 엄나무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자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져 있던 현세 모친이 뿌르르 몸을 일으키더니,
"집엘 가? 하, 이눔이 증말 에미 앞에 기맥힌 꼴 보이구 싶어 환장을 했구나. 오냐, 그래 내가 먼
저 죽으마."
그네는 분연히 몸을 돌려 마을을 행해 허둥지둥 내려가기 시작했다.
현세는 그 자리에 주저앉으며 남방 주머니에서 담배꽁초를 찾아 물었다.
현세만은 모친의 그 치욕 속에 보낸 그 역겨운 세월을 안다. 그 질욕속에 묻혀 산 추하고 끈질
긴 목숨을.
전날까지 멀쩡하게 논에 갈을 넣던 남편이 잠자리에서 일어나 보니 죽어 있었다. 남들은 복상사
라고 했다. 굿을 하니까 여자에게 살이 끼었다는 거였다. 아주 못된 악귀가 붙었다는 것이었다. 현
세가 세 살, 젊은 과부가 된 그네는 시부모의 갖은 구박과 이웃의 손가락질을 받아가며 용케도 견
뎌냈다. 그리고 현세가 열세 살 되던 해 사변이 터졌는데 마을에 들이닥친 외국병정 셋에게 그네
는 난행을 당했다. 외국병정이 물러가고 현세가 방문을 열어 젖혔을 때 그네는 사지를 흐뜨려 죽
어 있었다. 마을 친척집에 가 있던 시부모가 달려왔을 때까지도 그네는 죽어 있었다. 그러나 그네
는 살아났다. 시모가 인두를 달구어 며느리의 팔목과 장딴지를 지져댄 게 두 번이나 되었다. 머리
채를 끌어내어 사립문 밖에 내쫓은 것은 부지기수였다. 글쎄 그 세 놈하고 잠자릴 하면서 신방차
린 것처럼 조용하더래. 말 좋아하는 이웃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했다. 엉금엉금 기어 들어와 현세
를 끌어안고 소리 없이 우는 며느리 앞에 시부모는 양잿물 그릇을 내놓기도 했다.
현세는 모친이 그것은 먹고 죽어 주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네는 요지부동이
었다. 시부모가 세상을 떠난 뒤까지도 그네는 말을 잃고 한 마리 짐승처럼 일만 했다. 현세를 고
등학교까지 공부시킨 것은 전연 그네의 그 근면이었다. 그리고 수없이 많은 나날의 그 속앓이와.
-어머이, 당신은 결코 죽지 않아요.
뜨거운 햇볕 속 찔레덩굴 사이로 비칠비칠 덫에 치인 짐승처럼 내려가고 있는 그네를 내려다보
면서 현세는 담배를 깊이 빨아들였다.
박 상사가 애막골에 그 모습을 나타낸 것은 현세 모친이 내려가고 좋이 한 시간은 지나서였다.
짧게 깎은 머리로 해서 박 상사는 오히려 더 비대해 보였다. 그 거구에 혈색도 좋아 보였는데, 마
을에서 마신 술이 얼굴을 그렇게 보이게 했는지도 모른다.
마을 아이들이 아스팔트 국도변에 혹은 찔레덩굴 있는 데까지 올라와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었
다. 호기심이 더 강한 놈은 꽤 가까운 논둑까지 기어올라와 몸을 숨기고 가끔 머리를 내미는 게
보였다. 아이들은 언제나 떳떳하니까 장한 증인이 되기를 좋아했다.
박 상사는 체크무늬 있는 남방을 한 손에 벗어 들고 있었다.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며 현세가 들
어서 있는 논까지 다가왔다. 현세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어이, 현세!"
박 상사가 커다랗게 외쳤다.
더 머뭇거릴 수는 없었다. 현세는 박 상사가 서 있는 논둑으로 절벙절벙 걸어나갔다.
빡빡머리의 사내가 손을 내밀었다.
현세는 박 상사가 내민 커다란 손을 잡았다. 손 크기에 비해 손아귀의 느낌은 너무 빈약한 것이
었다.
"저게 우리 논이지?"
현세네 닷 마지기 옆으로 조닥조닥 배미진 여섯 마지기 논이 흘러내리듯 층을 이루고 있었다.
우리논. 그는 분명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현세는 몹시 당혹하기 시작한 자신을 발견했다. 이런
경우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박 상사는 그 논에 이르러 벼를 쓰어보며, 속삭이듯 겸연쩍게 말했다.
"나두 농사 지을 수 있을까?"
-박 상사, 너는 너무 잔인하군.
모처럼 개이던 현세의 가슴에 암운이 껴들었다.
"해볼 거야. 교도소에서 내내 그 생각만 했지."
박 상사는 정말 취해 있었다. 그러나 하나도 취한 사람 같지가 않았다.
"일 년 전에 재호 에미가 면회를 왔었는데 말이야, 그게 마지막 면회였지만, 그때 이 논문서(등
기)를 가지고 왔더군. 처음엔 팔아먹으려고 했는데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구 하면서 말이야. 출소
할 때 찾아가지고 왔지."
그는 뒷주머니에서 종이뭉치를 꺼내 흔들어 보였다.
쑤아아, 매미가 숲에서 여름을 식히고 있었다.
"그러면서 자기 같은 건 제발 잊어달라는 거야. 사실은 재호두 내 자식이 아니었다면서. 짐작은
했지만 막상 듣고 보니 기분 안 좋대. 현세두 아는지 모르지만 내가 원래 사내 구실을 제대루 못
했거든, 흐흐흐...."
거짓말이다.k 현세는 몸둘 바를 몰라 하면서 지금 박 상사가 농담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
니면 박 상사 처가 거짓말을 했거나.
"저놈들 많이 컸더군!"
박 상사는 꽤 멀리 떨어진 논둑에 숨어 기웃거리고 있는 마을 아이들을 가리켰다. 국도변과 찔
레덩굴 근처에 있던 아이들도 모조리 논둑까지 올라와 있었다. 꿩새끼처럼 대가리만 논둑에 숨긴
채.
"계집이란 좌우간 요물이라니깐. 글쎄, 그때 찔러넣은 게 바로 자기였다나. 하긴 하루도 몇 번씩
도망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니까 그럴 수도 있었을 게야. 그런 걸 괜히 자넬 미워한 적도 있지.
그놈에 기집 때문에...."
논둑에 숨었던 아이들이 일제히 몸을 드러냈다. 이쪽을 보는 게 아니라 모두 산그늘에 잠기기
시작한 국도 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큰놈이 이쪽 애막골을 향해 아부지이, 아부지이, 소리치며 뛰어 올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현세, 자네 같음 어떻게 하겠나? 그년 말이야...."
-어머이, 당신은 절대....
"그 년을 찾아내서 배때길 푸욱 쑤셔놓아야 속이 시원할 건지...."
아이들이 웅성웅성 다가왔다.
"아니 저놈, 자네 큰놈이 아닌가?"
마을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큰놈이 현세를 향해 울음 섞어 질러댔다.
"할머이가...."
명주실 세 꾸리가 풀린다는 예기소에 몸을 던졌다는 것이다. 할머이가.
이별의 방식(지은이: 이세기)
전화를 할까 말까. 나는 연락 없이 이곳에 도착했다. 마중 나온 사람이 있을 리 없다. 낯선사람,
낯선 사물뿐인 나의 주변. 그렇다고 딱히 낯설것도 없다. 어디를 가나 비슷비슷한 세상인걸.
나는 전화부스를 찾았다. 그리고 지난 몇 시간 동안 입 속에 외웠던 전화번호를 상기했다. 전화
를 하면 된다. 어디를 어떻게 갈 것인가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된다.
공항 대합실은 지금 마악 비행기를 내린 사람들의 웅성거림, 서성거림으로 어수선했다. 어디서
부턴가 날아온 사람들, 어디론가 떠나려는 사람들.
나처럼 갈 목적지를 잃고 막막히 서 있는 사람은 없어 보인다. 그들은 만날 사람이 있고, 갈 곳
이 있다. 생판 낯모르는 곳에서 갈 곳도 만날 사람도 없이 서먹서먹 어리둥절해 있는 사람은 나뿐
인 듯하다.
주머니 속에서 다임을 꺼냈다. 백을 바닥에 내려놓고 다이얼을 돌렸다. 따르르륵 신호가 갔고
상대편이 '짐 스피킹' 사무적으로 전화를 받았다. 나는 깜짝 놀라서 전화를 끊어 버렸다. 마치 몰
래 하려던 일을 들킨 것처럼 순간적으로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낯설다고 했지만 그가 누군인지
당장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부스를 나왔다. 더 이상 부스 속에서 망설이고 있을 순 없으니까. 어디로든지 가야겠다. 나
는 백을 둘러메고 대합실을 빠져나왔다. 날은 저물어 있었다. 그러나 깜깜한 밤은 아니었다. 오히
려 휘황찬란한 불빛들이 대낮처럼 밝았다. 건물 이마에 매달린 전광 선전판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
었다.
어디로 갈까. 호텔? 모텔? 그러나 어떤 방법으로 호텔을 찾아들어 갈 것인가. 호텔에 가본 적은
없으니까. 거리의 이편과 저편을 두리번거리면서 나는 택시를 잡자고 생각했다.
호텔 전용의 셔틀버스, 리무진 버스, 또 택시캡에는 빈차들이 줄지어서 있었다. 어떤 차를 어떻
게 타야 할지도 난감했다.
이러러면 뭣하러 왔나. 오려고 마음먹고 뛰어다닐 땐 이렇지 않았었다. 용기 있고 명쾌하게 이
러저러 하자고 플랜을 짰었다. 그런데 이게 뭐람.
그때 누군가 어깨를 탁 쳤다.
어마? 나도 모르게 소리치며 뒤돌아보았다. 드디어 낯선 땅에서 불량 배를 만났구나 하는 불길
한 예감에 더럭 겁부터 났다. 내 어깨를 친 사람은 동양인이었다. 검은 머리, 검운 눈, 평범한 생
김이 그랬다.
마중 나온 사람 없어요?
그는 한국말로 물었다. 한눈에 내가 한국 사람임을 알 수 있었던 모양이다. 반가웠으나 바로 대
꾸하진 않았다. 그 대신 이 자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긴 머리에 푸른 셔츠, 푸른 조끼. 세잔느 그
림처럼 보이쉬한 인상이지만 아직 안심할 순 없는 노릇이다.
없어요.
경계심을 버리지 않고 거리를 둔 채 대답했다.
내가 라이드해 드릴깡요?
글쎄요.
갈 곳은?
정한 곳이 없다고 하려다가 상대방에게 의심받게 될지도 몰라서 나는 얼른 '엘서리토' 해버렸다.
엘서리토라면 잘됐어요. 난 버클리로 가니까.
그는 나의 백을 받았다. 그리곤 성큼성큼 앞장 서 걸었다. 불량한 사람 같진 않았다. 고마워요,
하면서 나는 그의 뒤를 따랐다.
그는 길가에 세워둔 빨간 차의 문을 열고 백을 뒷좌석에 던졌다. 그리고 옆좌석에 나를 태웠다.
그와 내가 탄 차는 서서히 공항 구내를 빠져 나갔다. 마치 그가 나를 마중나온 격이 돼버렸다.
어디서 왔나요?
그는 차가 안전속도를 유지하자 비로소 힐끗 나를 쳐다봤다.
서울.
서울, 서울인가요? 서울이 집인가요?
나는 그래요, 서울이에요 했다. 워크, 돈워크의 표지에 따라 그는 차를 오래 몬 솜씨로 익숙하게
핸들을 꺾었다. 나는 차 속에서 처음 온 도시의 풍경을 내다보았다. 일정하게 늘어선 가로수와 귤
빛 가로등, 나지막한 고풍의 건물 앞에는 집집마다 예쁜 차들이 파킹되어 있었다. 낭만적인 인상
이었지만 낯설게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언젠가 와본 도시처럼 따뜻하고 포근했다. 불빛바람 공기
그리고 내게 차를 태워준 이 사람도.
엘서리토엔 누가?
친구.
왠지 친구라고 대답했다.
어떤? 보이프랜드? 메일프랜드?
저스트 프랜드. 남자친구든 여자친구든 아무래도 상관없다. 나는 처음 보는 그에게 아버지를 만
나러 왔다고는 말하고 싶진 않았다. 처음 보는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짐 스피킹. 그건 아버지의 목소리다. 약간 허스키하면서도 반향이 강했다. 10년 만에 들어보는
목소리, 벌써 10년이 됐구나. 내가 고1때니까.
그해 가을, 아버지는 미국에 건너갔다. 1년 간의 출장이었는데 다음다음 해까지 그는 돌아오니
않았다. 오는 대신 결혼한다는 편지. 결혼했다는 편지에 이어 빨간 머리에 눈이 푸른 미국여자와
찍은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친구는 미국 사람?
남자는 역시 물었다. 나는 또 머리만 끄덕였다. 지금의 내 기분은 착잡하거나 미묘할 것도 없었
다. 무의미한 흐느낌이 가슴 부분부분에 넘쳐 있을 뿐 나도 나의 기분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차는 세차게 한참을 달려나갔다.
이곳은 첨인가요? 거리 예쁘지요?
그 남자는 싱긋 웃으면서 엉덩이를 조금 들고 백미러를 보고 있었다. 휘딱휘딱 뒤돌아보다가 갑
자기 액설러레이터를 거세게 밟았다. 위잉 하고 차는 속도를 가했다.
프리웨이니까요. 달리지 않으면 죽어요.
죽어요란 그의 말에 쿠득 웃음이 났다. 그의 죽는다는 말 속엔 색다른 뉘앙스가 담겨 있었다.
비장하고 심각할 필요가 전혀 없는, 스피디한 속도의 감각뿐이었다. 달리지 않으면 죽여요처럼 그
의 사는 방식도 그럴 것 같아 보였다.
난 여기서 십 년쨉니다.
내 나이 또래의 이 남자, 10년 전이면 나처럼 열여섯 살. 쬐끄만 소년을 청년으로 만들어 놓았
고 빡빡 깎았던 머리를 장발로, 그리고 한국인의 티를 벗은 이국적인 구석을 갖추게 했구나. 그가
또박또박 변하지 않은 말씨를 쓰는 것만이 다만 신기했다.
다시 아버지 생각이 났다. 그 당시 아버지는 소년도 아니었고, 사십이 넘은 어른이었으니까 말
씨 같은 건 변했을 리 없다. 미국여자와 살긴 하지만 10년 정도면 이 남자처럼 옷차림이나 생활습
관이 다소 달라졌을지 모른다. 아버지가 보낸 사진 속의 그는 정말 변한 바가 없다. 변했다면 전
에 없이 은빛테의 로젠스톡을 쓴 것뿐이다. 그 곁에 빨갛고 파랗게 생긴 사치스러운 여자가 서 있
기 때문에 그 사진이 더욱 낯설게만 느껴졌다.
너희 엄마다. 평생 엄마라곤 가져본 적 없는 내게 생긴 최초의 엄마.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닮은
데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외국인일 뿐이다.
사진을 프레임해서 책상 위에 올려놓고 낯을 익히려 했으나 역시 카트리느 드뇌브보다 더 머언
얼굴이다. 영화배우가 아무리 낯익은들 평생 모를 수밖에 없는 것처럼 그녀는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한 장의 그림이다.
아빠 부인 매리쉬는 아름다운 분이에요. 좋아. 좋은 얼굴이야. 마치 햇빛을 보는 것 같아. 세련
된 그의 표정은 사람은 가까이 하지 않게 하는 한겹 막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녀 곁에 서 있기
때문에 내 눈엔 아버지 얼굴조차 차츰 생소해갔다.
처음 오는 사람 마중도 안 나오고.... 이곳 생활은 사람은 닳게 해요. 바쁘고 바쁘니까요. 쫓기고
쫓기니까요. 생활에 쫓기고 메마른 인정에 치이게 해요. 뭐랄까 겨를이 없어요.
누가 묻지도 않는데 남자는 마중나오지 않은 사람을 두둔하듯, 그리고 자신을 간접적으로 설명
이나 하듯 그랬다. 나는 웃었다.
연락을 안했어요. 그들은 내가 오는 줄 모르고 있어요.
전화는?
전화는.
이 말엔 선 듯 대답하지 못했다.
전화번호를 몰라요.
우물쭈물 얼버무리려니까 그는 주소는? 이리 주세요. 지도를 보고 찾아줄 테니까 했다. 나는 속
으로 혀를 찼다. 달갑잖은 노릇이다. 그가 집을 찾아 준다는 말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어쩔 수가 없다. 그에게 맡길 수밖에. 친구를 찾아왔다고 해놓고 다시 갈 곳이 없으니 숙소나 알
아봐 달라고 할 순 없잖나. 아무튼 되어가는 대로 놔두자 하면서도 속은 끝내 편치 못했다.
내가 데려오지 않았으면 어쩔려고 했어요?
그는 나의 조금 난감해진 표정을 눈치챘는지 그렇게 물었다.
글쎄요, 나도 모르겠어요.
그것 보세요. 내가 당장 알아본 거예요. 마중 나온 사람이 없다, 그리고 처음 온 사람이다. 한국
사람이다, 하는걸.
어떻게?
표정을 보고 알았어요. 초조함을 감추려는 얼굴빛이 그랬어요.
그의 말에 나는 얼굴에 붉혔다. 정말 마음속을 들킨 것 같아서 말할 기분을 잃고 거리 저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이민 왔나요? 배우자 초청 케이스? 여기 살게 되나요? 우리 가족은 모두 미국에 살아요. 형님
부부는 동부에 있고 누님들은 엘에이, 난 여기서 어머니와 둘이서 마켓을 하고 있어요. 어머닌 오
늘 서울 가셨어요. 배웅하러 나왔었죠. 난작년에 나갔다 왔고. 잘하면 내년 봄쯤 한 번 더 나가려
고 해요.
그는 휘딱휘딱 뒤를 돌아보며 차선을 바꿨다.
어머닌 외가에 가셨어요 10년 만에 처음. 어찌나 좋아하시는지 꼭 소풍 가는 아동처럼 들떠 계
셨어요. 그리곤 혼자말로, 우리 엄만 소녀야.
어머니 생각에 한껏 즐거워진 그가 부럽게 여겨졌다. 이 사람에겐 가족이 많구나. 전국에 가족
이 흩어져 있고, 더구나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고.
나에겐 가족이라곤 없다. 서울에도 그렇다. 이곳에 아버지가 있긴 하지만 지금으로선 말할 바가
못 된다. 어머니. 어머니라면 그 역시 사진으로만 익힌 사이다. 아버지의 옛날 결혼사진에서나 어
머니를 만난 적이 있다. 허리가 들어간 백색 드레스, 백장미를 한 아름 가슴에 안고 있는 이지적
인 모습, 지금 생각하면 그 얼굴은 매리쉬처럼 아주 낯설지만은 않았다. 그 사진을 보면 왠지 행
복해지는 기분이었으니까. 늦봄부터 이른 가을까지, 날씨가 화창한 날이면 아버지와 나는 곧잘 정
원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즐기곤 했다. 초여름 같은 때는 빨간 장미꽃잎이 한두 개 폴짝 국그릇
위로 떨어지지만 가을엔 낙엽이 눈처럼 쏟아졌다. 쓸어내고 쓸어내도 곧 낙엽은 쌓였다. 낙엽이
영화처럼 흩날리는 속에서 아버지는 노랗게 물든 은행잎을 한 개 집어들고 너희 엄마, 이랬다.
아버지하고 연애할 때, 그때 아빤 일리노이에 유학하고 있었지. 이때쯤 학교길은 낙엽에 푹푹
쌓여서 발목을 덮을 정도였어. 길을 걷는 동안 접시만큼 커다란 낙엽들이 어깨에 머리에 펄렁펄렁
내려앉는 거야. 노스탤지어에 젖어 한없이 우울해지곤 했지.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드럭스토어로
가서 주크박스에 동전을 넣고 음악을 들어요. 애인과 함께 듣던 노래. 노래가 흘러나오면 서울에
두고 온 애인 생각에 테이블에 엎드려서 편지를 쓰곤 했지.
이 얘기는 봄 여름 가을 겨울마다 언제나 비슷하다. 눈이 오거나 비가 올 때도 마찬가지다. 커
피를 후룩후룩 마시면서 아버지는 너희 엄마, 했었다.
아버지가 미국에 간 다음 나는 혼자서 정원 테이블로 식사를 날라다 먹곤 했다. 낙엽이 뚝뚝 지
는 속에서 젓가락으로 밥알을 조금씩 떼어먹고 이런 때 아빠 계셨음, 생각했다. 아빠 생각에 그곳
에 엎드려 편지를 쓰면 편지 위로 낙엽이 떨어져서 글씨를 가렸다. 나는 남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
으려고 나뭇가지 끝에 눈을 던진 채 깜빡깜빡 눈물을 삼켰다. 아버지는 나의 모든 어리광을 다 받
아 주었지만 눈물만은 용서하지 않았다. 혼자서 자라는 아이에게 눈물을 가르쳐선 안된다는 게 그
의 주장이었나보다.
아버지가 있다는 미국이 어디쯤인지 점점 더 현실감이 없어지고, 어머니가 가버린 천국이나 아
버지가 가버린 미국이나 내겐 의미가 같은 고장처럼 느껴졌다.
내 옆의 남자는 휘파람을 불었다. 씽씽씽 차를 몰면서 그는 뭔가 신바람이 나는 모양이다.
엘서리토는아직 멀었나요.
다 왔다고 할까 봐 초조했으나 그는 내 말엔 아랑곳없이 여전히 휘파람만 불어댔다.
저 다리를 건너야 해요. 굉장히 긴 다리지요. 이 속도로 달리면 아마 10분, 아니 12분, 그쯤 걸
릴 거예요.
쿵쿵쿵 다리 위로 들어서며 그는 말했다. 다리는 깊은 굴 속처럼 어둡고 아득해 보였다.
낮엔 아주 아름다워요. 바다가 보이고, 지금은 어두워서 바다는 없지만 불빛 어때요? 낭만적이
지요?
정말 멋진데요.
나의 감탄에 한층 신이 난 그는, 얼마나 아름다운지 헤어지려던 연인들이 이곳에 오면 또다시
사랑하게 된다는 바로 그 베이브릿지예요. 자랑스럽게 뻐겼다.
여기서 엘서리토는 30분 내지 30분 더 가야 해요.
나는 짐짓 안심이 되었지만 그렇게 먼가요? 했다.
멀긴, 그건 보통이에요. 이곳 사람들은 차로 한 시간쯤의 거리를 출퇴근하니까요.
어쨌든 나는 서서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들을 만나게 되는 게 열적기만 해서다. 아무래도
잘못 하는 일이나 아닐지. 이게 뭐람. 아버지가 다시 원망스러웠다. 차라리 서울에서 결혼을 했다
면 좋았을 걸 그랬다. 결혼은 중요한 것이라는데 왜 딸과 충분한 의논 한마디 없었는지 더군다나
외국여자와.... 그 여자는 어떻게 만났고 어떻게 친해졌을까? 남과 남이 어떻게 쉽게 친해지나. 도
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다. 형제나 가족없이 처음부터 혼자서 자란 내게 있어서 남과 남은 남이기
때문에 쉽게 가까워질 수 없었다. 혼자서 자란 것관 상관없다. 언제부턴가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
을 먹에 되었다. 아버지의 결혼편지를 받고 나서부터일 것이다.
처음엔 그들이 쉽게 친해진 것만큼이나 쉽게 헤어질 줄 알았다. 사람사이는 다 그렇고 그렇다니
까. 더구나 아버지는 어머니를 못 잊어 했고 나를 사랑했으니까.
그러나 결혼한 지 1년이 지났건만 그들에게선 이혼소식이 없었다. 오히려 아버지에게서 편지가
날아들었다. 네게 동생이 생겼다는 내용이었다. 동생? 동생이라, 실감되지 않았다. 생후1개월의 포
동포동하게 생긴, 역시 눈이 파랗고 피부가 흰 사내아이의 사진이 한 장, 손에 힘이 빠지고 미세
하게 손가락이 떨려왔다.
그 아이도 꽤 컸겠지. 나는 점점 우울해졌다. 그 아이를 가운데 둔 부부. 이젠 나의 아버지가 아
니라 그 애의 아빠가 된 아버지의 존재가 꽤나 멀게만 느껴졌다.
뒤늦게 그들 가정에 내가 나타나는 건 좀 난센스가 아닐까. 어떻게든 이 자리를 모면하고 싶었
다. 차는 긴 통로 같은 다리를 벗어나 툭 터진 벌판을 달렸다. 가슴이 옥죄어 왔다.
가기 싫어요, 거긴 갈 수 없어요. 하는 짜증이 목 속에서부터 솟구쳐올랐다. 갈 수 없다, 가기
싫다, 그뿐이었다.
친구가 놀라겠군요.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가면.
글쎄, 바로 그거예요. 놀랄 거예요. 나는 침을 삼켰다.
그런 게 더 반가울 수가 있겠지요. 생각지도 않은 사람을 만나면 더 반가워지는 게 아니겠어요?
하긴 그럴지도 몰라. 아버지는 내게 해마다 초청장을 보내왔으니까. 이곳의 크리스마스를 보여
주고 싶구나. 뉴이어를 함께 보내자. 또는 우리의 결혼기념일에 너를 초대한다.
그는 커브를 꺾으면서 주소를 달라고 했다. 나는 가방을 뒤져 항공엽서 한 장을 꺼냈다. 그리고
내키진 않았으나 그에게 겉봉에 적힌 주소를 건네주었다. 아버지의 이름은 제임스 한, 미국 사람
인 줄 알겠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요. 두 블록만 가면 됩니다. 그는 시내 지도를 손가락으로 짚어 보였다.
아버지를 만난다. 가슴이 뛰었다. 이 남자 때문에 만날까 말까 망설이던 아버지를 만나게 된다.
실은 아버지가 보낸 초청장을 갖고 그를 만나러 왔으면서 나는 처음부터 딴청만 했다. 만나면 기
쁠까? 반가워할까? 아버지와 그의 가족들이 어떤 얼굴로 나를 대할지. 만나고 나서 생각하자 하면
서도 나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설레었다. 몇 년 전에 진작 만났어야 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
안 만나지 못했다. 그 오랜 세월이 그와 나를 타인화 시켰던 것 같다. 그래서 내 감정은 빡빡하고
여유가 없어졌나 보다.
라디오에서 닐 다이아몬드의 '비이'. 무엇엔가 기대어 울고 싶고 나를 설명하고 싶다. 솔직하게 말
하라고 한다면 아버지가 얼마나 보고 싶은지.
나는 아버지 때문에 결혼 같은 건 생각해 본 적 없다. 한데 아버진 결혼했다. 커다란 딸까지 둔
남자가, 그 나이에 쉽게 결혼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아버지가 나를 키우고 지키면서 사는 것
처럼 나도 그 곁에서 평생 늙지 않고 평생 아빠의 귀여운 딸로만 있을 줄 알았다.
졸업이 가까웠을 때 난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었다.
아버지 없이 일곱 번째 겨울이에요. 아빠와 차를 마시던 정원 테이블엔 낙엽 대신 흰눈이 쌓였
어오. 아빠가 부르던 '트라이 투 리멤버' 생각이 나요. 이 겨울이 지나면 난 졸업이에요. 이날만은
아빠의 축하를 받고 싶어요.
그러다가 나는 써논 문장을 '엑스'자로 북북 그어 버렸다. 아버지가 꼭 와줬으며 하는 사정조가
싫었다. 아버지 맘대로다. 오고 싶으면 오고 오기 싫으면 그만이다. 편지를 받고 마지못해 오는 것
이라면 오지 않는 편이 낫다. 그러나 속으로는 혼자서 대학을 졸업하는 딸을 그가 대견하게 여겨
주길 바랬다.
아버지에게서 카드 한 장이 날아들었다.
벌써 네가 졸업이구나. 아빠 앞에서 어리광부리던 꼬마 숙녀가 아니라 정말 의젓한 숙녀구나.
이네 넌 어른이다. 행복해야 한다. 네가 그것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써 있었다.
서울에 나온다는 말을 없었다. 다만 그가 이따금 보내오는 초청장을 보내왔다. 졸업기념으로 이
곳에나 다녀가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은 무시했다. 내가 먼저 그들을 만나러 가는 건 자
존심이 몹시 상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졸업식 날 학교에 가지 않았다. 언제나 혼자였지만 남들이 모두 축하하고 축하받는 마당에
서 쭈뼛쭈뼛 한 옆에 축 처져 있는 모습일 남에게 보이기가 싫었다. 나는 노상 저 애 아빤 미국에
있다는 소리를 들으면서 자랐다. 아빠는 미국에 계셔, 미국 계셔. 마치 이미 죽고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을 있는 체 꾸민 것처럼 내게 있어서 아버지의 모습인 언제나 추상적인 존재였다.
전에도 나는 설날 추석 크리스마스와 생일이 돌아오면 혹시? 하고 아버지를 기다렸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코트와 인형, 책 같은 걸 보내왔다. '나의 사랑하는 딸아!' 하는 카드와 함께.
아버지와 나를 연결해 주는 건 우표딱지뿐이다. 우표가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 까. 우표만 더덕
더덕 붙인다면 천국에선들 편지가 못 날아올까. 편지 선물 따위란 달갑지 않았다. 아버지의 면목
이나 세워 주는 그런 것들은 모두가 형식일 뿐이다.
그까짓 아빠, 유리구슬처럼 단단히 간직되어 있던 아빠에 대한 그리움이 산산조각이 났고 깨어
진 조각들은 가슴 한복판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버렸다.
그때부터 그를 남처럼 서먹서먹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진실로 그리워할 수도 없었고, 그립지도
않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으례적인 정임을 알았다. 그의 돈으로 학교를 다닌 사실이
여간 수치스럽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그에게서 받은 모든 것을 갚아주고 그리고 그에게서 태
어난 것조차 물리고 싶었다.
취직을 하자 나는 그에게 편지를 썼다. 전처럼 '아빠' 대신 '아버지' 라고 썼다. 될수록 아버지란
호칭도 피했다.
난 한 달에 10만원 이상 벌게 됐어요. 생활비를 부쳐 주지 않아도 좋아요. 전 독립할 나이에요.
내 걱정은 마세요. 그 동안 고마웠어요.
신세를 많이 진 주인집 어른에게 하듯이 그렇게 써서 부쳤다. 절교장을 띄운 것 같아사 그제야
기분이 홀가분해졌다.
역시 그는 놀랐는지, 너를 돕고 너에게 신경을 쓰는 건 의무 때문이 아니란다. 사랑 때문이다.
넌 언제나 나의 귀여운 딸이고 또 매리쉬도 그걸 이해하고 있다고 했다.
역겨웠다. 그후엔 미국에선 일방적으로 편지가 날아들었다. 부활절을 함께 보내자. 또는 이번 여
름 산타바바라, 마이애미는 어떠니? 라고. 나는 물론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여깁니다.
어두운 수목 사이의 한 저택 앞에서 차는 파킹했다.
내가 알아보고 올게요.
남자는 차문을 쾅 닫고 집 쪽으로 향해 걸어갔다. 좀전처럼 복잡한 감정은 아니었다. 오히려
차고 냉담해지는 기분이었다.
남자가 벨을 누르자 환한 불빛과 함께 문이 열렸다. 7,8미터 저쪽에 나타난 사람, 불빛 때문에
온통 거무스레한 모습이었으나 그는 분명 아버지였다.
남자는 뭐라고 뭐라고 손짓하며 내가 탄 차를 가리켰고 그는 놀란 몸짓으로 뛰어나오고 있었다.
내 앞에 선 아버지의 얼굴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머리칼이 희끗희끗할 게 조금 늙어 보였다.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왔지? 연락을 했으면 내가 데릴러 나갈걸.
그는 나의 방문이 전혀 의왼 듯 놀라고 놀랐다. 나의 어깨를 감싸면서 많아 컸구나, 정말 어른
이 됐구나 하고 감탄하기도 했다. 그의 제스처는 미국 사람이 손님을 맞아들일 때의 그런 폼이었
다.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어쨌든 그는 나의 방문을 환영하는 빛이었다.
뒤미처 나온, 그래 그녀는 매리쉬였다. 사진에서 본 붉은 머리, 푸른 눈의 그녀는 익숙하게 나의
손을 잡으며 '하이!'했다. 나도 그녀의 손을 가볍게 마주 쥐었다. 이 사람이 나의 엄마라? 별로 그
런 실감은 일지 않았다. 나보다 열 살쯤밖에 더 먹어 보이지 않는 젊은 여자였으나 침착하고 우아
했다. 걸치거나 호들갑스럽지 않은 그의 태도가 좋았다. 우리는 늘 만나던 사이처럼 친숙하게 대
면한 것이다.
찰리는 장군 할아버지 집에 갔다. 호놀룰루에 가 있지. 그 애가 있었으면 더 좋았을 것을. 그 앤
널 보고 싶어했단다.
아버지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나와 매리쉬의 등을 두들기며 좋아! 됐어! 밑도 끝도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그럼 난 가보겠습니다.
이제까지 우리를 지켜보던 나를 바래다 준 남자가 말했다.
아참, 이 친구는 누구? 아는 사이냐?
아니, 오늘 처음 만났습니다.
네 대신 그가 대답했다. 그는 호기심에 가득 찬 눈초리로 아버지, 나, 매리쉬의 표정을 살폈다.
친구를 만난다더니 그들이 정말 친구냐 뭐냐 하는 의문이 그 속에 담겨 있었다.
커피 함께하십시다. 아버지가 권했으나 그는 거절했다.
난 마켓 때문에 가봐야 해요. 여긴 아주 리치타운이군요. 나중에 놀러오죠. 그리고 나에게 손을
내밀면서, '참 내 이름은 샘이에요. 여기서 머물게 되나요?' 했다.
나는 글쎄, 나도 잘 몰아요 하는 뜻으로 눈만 깜박거렸다. 그는 잠시 나를 지켜보다가 다음 주
말에 올게요, 오늘 만나서 반가웠어요 했다. 그리고 그의 차를 타고 곧 어둠을 뚫고 사라져갔다.
샘이 가버린 것이 서운했다. 어디에 사는 누군지 확실히 알고 싶었으나 이미 그럴 순 없는 노릇
이었다.
아버지의 집에서의 1주일. 격자 문양을 넣어 짠 베처럼 그곳에서의 생활은 거칠게 흘러갔다. 전
혀 예상치 못했던 일들이 양상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아버진 아침 7시 반에 출근, 찰리도 없는 드넓은 집안엔 매리쉬와 나만이 남는다.
이틀이 채 못 되어서 나는 왠지 아버지가 집에 없을 때가 나의 마음을 더 편케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하오 5시에서 5분 이상 지체하지 않고 귀가 시간을 지켰다. 그리고 현관에 들어서면
서 드높은 목소리로 "스윗핫 스윗핫!" 매리쉬를 찾았다.
매리쉬가 그에게 달려가면 그들은 정답게 안고 오래오래 저녁인사를 나누엉ㅆ다. 내가 그 곁에
있거나 말거나 아버지는 아랑곳없이 매리쉬의 어깨를 감싸안은 채 식당으로 가버린다. 키친 쪽에
서 웃는 소리, 또 워풀 굽는 냄새가 풍겨오고 아버지는 여전히 스윗핫, 수윗핫 하면서 그날 일어
난 일을 그녀에게 보고하기에 바빳다.
서울에서의 그의 행복에 겨운 많은 편지를 받을 때보다 더 차가운 섭섭함이 전신에 끼쳐졌다.
식탁을 차리면서 그제야 거실에다 대고 '밥 먹자' 소리쳤다. 그뿐이었다. 내게 하루종일 하는 말
은 밥 먹자, 잘 자라다. '오늘은 뭘 했니?' '매리쉬와 좀 친해졌니?' '쇼핑센터에 구경 갔었니?' 따
윈 묻지 않았다.
식탁 앞에 가 앉으면 그는 기도를 했고 '에이멘'과 함께 포크를 든다. 접시에 차려진 베이컨,달
걀, 파파야 반 개, 커피, 버터와 시럽을 잔뜩 친 워풀, 한 귀퉁이만 살짝 떼어 먹어도 달치고 목에
역했다. 이럴 때 아버지가 나에게 하는 말, 매리쉬 때문에 늘 영어밖에 쓰지 않는 그가 이때만은
'남기면 실례야' 재빨리 한국말로 말한다. 매리쉬는 한국말이 나오면 귀를 쫑긋 세우고 아버지와
나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본다. 상당히 교양 있는 체하는 그녀이지만 한국말 사용에는 거의 신경질
적이었다.
아버지는 싱긋 웃고 '원더풀!' 아주 워풀이 맛있다는 듯 그녀의 비위를 맞추기에 급급하다. 워더
포 원더포 하는 아버지의 미국식 발음이 귀에 거슬렸고, 거의는 불쌍해 보였다. 실례이거나 말거
나 나는 입을 닦고 식탁 앞에서 물러나 버린다. 매리쉬는 눈이 똥그래지고 아버지는 희극배우처럼
킬킬거리며 나는변명해 주기에 바쁘다. 그녀는 한국사람이야. 이곳 음식에는 익숙치 못해요. 하겠
지.
식사가 끝나면 그들은 탁자를 가운데 두고 체스놀이를 시작한다. 그들의 키득키득 끄악끄악 웃
는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침실이 있는 이층으로 올라온다. 아버지의 그런 꼴 때문인지 나 때문인
지 모를 슬픔이 미어질 듯 가슴에 복받친다. 아버지와 매리쉬만의 어떤 울타리, 특히 아버지 쪽에
서 그 울타리를 높고 탄탄하게 쌓고 있다. 누가 뚫고 들어오기라도 할까봐, 그는 의식적으로 묘한
긴장감을 보이며 나의 그림자를 차단하려 들었다.
빨리 서울에 가고 싶다. 아무도 없는 서울, 그러나 내 피부가 마음놓고 숨쉴 수 있는 곳이다. 지
금처럼 세포 구멍들이 빡빡하게 틀어막힌 적은 없다.
슬렁슬렁 바람 속을 걷다가 아무 다방에나 들어가고 아무나를 만나고 배고프면 조금 먹고 신문
을 읽다가 잠들곤 했다. 손발이 묶이고 입이 묶이고 행동 하나하나에 싸늘한 눈총을 받으면서 만
사에 극도로 신경을 곤두세울 만한 일은 없었다.
발을 뻗고 길게 누워서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보고 싶다. 내가 잘한 일인지. 굳이 이곳까지 뛰어
와서 냉대받는 자신을 확인한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를.
왜 내가 매리쉬보다 아버지를 더 불편하게 여겨야 하는 것일까. 그가 출근하고 매리쉬와 남아서
식사를 할 땐 오히려 자유를 느낀다. 그러나 저녁시간, 아버지가 돌아오면 보이지 않는 구속이 매
섭게 나를 휘감는다. 손놀림, 입놀림, 매리쉬가 묻는 어떤 질문에 대한 대답에도 그는 포크소리를
낸다든가 커피를 소리내어 마시는 것으로 은근히 압력을 가하고 있다. 충분히 너 좋을 대로, 너
하고 싶은 대로 말해선 안된다는 시위였다.
아버지의 집에서의 8일째, 그날은 주말이었다. 미리 말하진 않았으나 나는 다음날쯤 떠날 작
정이었다. 비행기 예약을 해야겠어요. 직장 때문에 오래 머물 수가 없군요. 그 동안 즐거웠어요.
이렇게 말해야겠다. 삐졌거나 마음 상한 티를 보여선 안된다. 이왕 떠나는 마당에 서로가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다. 나는 어차피 서울에서 살 사람이고 그들은 이곳에 살 사람이다. 내가 오지 않
았던 셈치고 조용히 떠나 주자. 사실 그들에겐 그들의 세상이 있는 것이고 나는 나대로다. 스무
살이 넘은 커다란 여자애가 유치하게 아버지니 뭐니 해서 혈연관계를 저울질하려 드는 건 우습다.
왜 낳아놨느냐고 항의하겠다고 했지만 그런 억지는 뭔가. 세상에 태어난 이상 나는 나이고 그들은
그들이다. 아버지이기 때문에, 딸이기 때문에 무엇을 어쩌자는 건가. 태어났을 뿐이고 낳았을 뿐이
다. 그 다음엔 각자의 세계가 따로따로 있는 거다. 치근덕스럽게 남에게 매달리려던 내가 치사하
다. 이럴 수 있나요란 얼마나 구차한 강요냐. 우습다, 우습다. 치사해져선 안되겠다. 아빠 잘못은
없다. 그로선 당연하다.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 봐도 그렇다. 양상은 틀리나 비슷한 얘기가 됐을
것이다.
밝은 표정을 한 채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웬일인지 아버지 혼자 식탁을 차리고 있었다. 그는 나
는 보자 '이제 해방이다. 매리쉬는 하와이에 갔다. 찰리를 데리고 모레나 글피 온다'고 했다. 새벽
에 그녀를 공항까지 바래다 주고 왔다면서 그는 콧노래를 불렀다. 그가 잘 부르던 노래. 눈물이
찔끔 났다. 그는 처음으로 10년 전의 나의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그 동안 불편했지? 자아, 아빠가 만든 로스트비프, 스튜도 내 솜씨다. 밤엔 하야트에 가자. 늙은
악사들이 켜는 '러브 스토리'를 들려주지, 이랬다.
그가 갑자기 친절해지자 나는 오히려 의아해졌다. 이곳 생활에 푹 익은 나머지 그는 그 자신이
의식할 수 없으리만치 완벽하게 변해 있어야 옳다. 끝까지 이기적이고 끝까지 냉담했으면. 그러나
저처럼 섬약한 면을 보이다니 쑥스럽기 짝없다. 그의 약점을 보는 것 같아 여간 우울하지 않았다.
"넌 나를 모르겠지만, 여기 와서 고생을 많이 했다. 이루 열거할 수 없는 참혹한 고생이었지. 그
러나 장군 딸인 매리쉬를 만나자 나의 상태는 돌변했다. 이곳 사회에서 장군 신분이면 어마어마한
차원이다. 상류사회지. 나는 운좋게도 그들 사회에 뛰어들 수 있었다. 처음엔 부작용이 많았지만
이제 나를 거부하려는 사람은 없다. 나는 장군의 가족이 된 거야."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무엇엔가 심하게 머리를 부딪친 듯 몸이 아파왔다. 마치 '나는 미국 사람
이야!'라고 안타깝게 몸부림치는 것 같았다. 그의 이마에 패인 주름살, 이 정도의 행복을 얻기 위
해 끈질기게 노력한 흔적이 아닐지. 그가 측은했다. 그러나 치밀어오르는 불쾌감, 울분, 경멸. 아
니, 이러지 말자, 나는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사실 나의 무엇으로 그를 경멸할 수 있단 말인가.
아빠를 이해할 수 있어요.
섭섭한 감정을 씻고 부드럽게 말했다. 그는 나의 반응에 한층 용기를 얻은 듯, 이루 말할 수 없
는 고생이었어. 어리석은 고생이었지. 그런 식의 고생은 하고 싶지 않아! 단호히 잘라 말했다.
매리쉬는 명문의 딸이야. 그녀와 결혼하느냐 못하느냐에 내 운명이 달려 있었다. 그녀를 놓칠
순 없었지. 그녀는 내겐 마지막 찬스였으니까. 기도하고 기도했다. 하나님, 그녀를 제게 주십시오.
저도 행복해질 권리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누리는 저 부와 지위, 사랑은 제게 베풀어 주시면
무슨 일이라도 하겠습니다. 저를 외면하지 마십시오. 나는 너 하나만 키우며 살았다. 처음엔 그것
이 내가 사는 기쁨의 전부인가 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이 세상엔 보다 좋은 행복이 얼마든지 있었
던 거야.
그의 가슴팍에서 금빛 목걸이가 차갑게 빛났다. 그가 뿜어낸 흰 담배연기가 사방으로 흩어져 날
았다. 그의 몸짓도 조금 흐트러져 있었다.
정말 그는 20여 년 전에 아내를 잃고 두 살짜리 딸을 키우며 혼자 외롭게 살았었다. 열여섯 살.
그 나이면 다 키워논 거다. 더구나 외지에 나와 어렵게 살면서도 다달이 생활비를 부쳐왔다. 나로
부터 해방되고 싶다고 했지만 그는 끝내 나에게 얽매여 있었다. 그가 나에게 미안할 일은 없다.
더더더 행복할 권리가 있을 뿐이다.
행복하셔야 해요. 매리쉬를 아껴 주시고. 난 아빠가 행복하신 게 너무 좋아요. 빈틈없이 흠간 데
없이 행복하시길 빌게요. 아빠는 그러셩야 해요.
나는 진정으로 말했다. 그러나 그는 얼굴빛이 확 달라지면서 더 행복해지라고? 따지듯 덤볐다.
더 행복하라니? 무슨 뜻이지? 난 지금 행복하다. 빈틈없이 행복하란 망은 무슨 의미지?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파란 눈길이 사납게 나를 쏘았다. 눈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
었다. 내 행복을 건드리는 자, 가만 놔두지 않을테다. 나를 침략자 취급했다.
내 행복을 누가 뭐래? 누가 다쳐? 복권에 당첨된 사람이 패스포드에 복권을 감춰 놓고도 바람
에 날아갈까 전전긍긍하는 심보다.
난 행복해, 행복해. 평생을 두고 다신 얻을 수 없는 행복이야. 왜 어디가 어때서 더 행복하라는
거냐. 흠간 데 없이 행복하라고? 어디에 어떤 흠이 있깅에?
두 팔을 활짝 펴고 그는 드넓은 실내를 휘둘러보았다. 크리스털 샹들리에와 벽에 걸린 명화들,
코너마다에 놓인 비단 등갓, 자작나무 테이블, 이조용장, 금마차 위에 장식된 조각이 화려한 술병
들, 유리벽 밖엔 팜나무숲, 왜 어디가 어때서?
행복이란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아닌가? 하는 투다. 어이가 없었다. 나는 그에게 불행해지라고
악담한 입장이 돼버렸다. 마음을 여는 상대에게 왜 마음을 여느냐고 따귀를 때리는 격이다.
아니면, 난 행복하다, 거저 얻은 행복이 아니란 말이다. 사랑하는 아내, 아들, 재산, 이곳의 모든
생활에 만족한다. 왜? 왜? 왜? 홀아비 신세로 끝끝내 네게 얽매여서 꾸벅꾸벅 나를 희생했어야만
네 속이 편했겠느냐고 윽박지르는 격이었다.
그의 얼굴은 이미 나의 아버지 얼굴이 아니라 미국에서 성공한 짐의 얼굴로 화해 있었다. 왈칵
눈물이 쏟아질 듯 섭섭했지만 울진 않았다. 그가 이럴 줄 알았었다. 공항에 내렸을 때, 아니 그 이
전, 미국에 출장가서 돌아오지 않고 그곳에서 결혼을 한다고 통고해 왔을 때부터 그는 이미 딴 사
람이 돼버린 것이다.
그와 나는 더 이상 아무런 상관도 없다. 어머니가 죽지 않았어도 마찬가지다. 아버지에겐 아버
지의 세계가 있고 나에겐 나의 세계가 있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어떤 끈으로 굳이 구성하고
연결할 건 뭔가. 더구나 그와 나 사이에 흐른 10년이란 시간은 우리 사이를 완벽하게 갈라놓고 있
다. 시간이 오랠수록 사람 사이는 변질되게 마련이 아닌가. 너와 내가 남이 돼버린 과정, 그것도
너무나 미묘한 나머지 그 사유들을 낱낱이 늘어놀 수 가 없게 된다. 10년은 결코 짧은 세월이 아
닌 것이다.
이층에 올라오자 나는 짐을 쌌다. 떠나자. 그와는 끝났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와 나는
사람들이 만들어 논 가족이라는 올가미를 진작부터 활활 벗어던지고 있었다. 예감은 아니었다. 자
연스러운 느낌이었다.. 그 느낌을 나는 잔혹한 취미로 확인하고 즐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스윗핫 웬두유플랜투리턴? 그의 전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웃음이 피식났다. 드높은 목소리에 대
조가 깃들여 있었다. 그는 미국 시민이다.
샘이 오자 나는 말했다.
나 좀 바래다 줘요.
어디로?
공항.
샘은 영문을 모른 채 나의 백을 받아들었다.
무슨 일예요?
그냥 가요, 빨리. 뒤돌아보지 말고.
나는 도망치듯 그 집을 나와 버렸다. 그때까지도 그는 그의 스윗핫의 전화에만 매달려 있었다.
밖으로 나오자 향기롭고 시원한 바람. 샘은 뒷좌석에 백을 던지고 나를 태웠다.
샘과 내가 탄 차는 이른바 아버지의 리치타운을 서서히 빠져나갔다.
그와 싸웠나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 귀엔 온통 스윗핫과 체스를 때리는 소기. 아스팔트에 가득 깔린 햇빛
에 눈이 부셨다. 차는 곧 공항을 향해 프리웨이로 접어들었다.
사실 사사로운 건 아무것도 아니다. 중요한 건 내 인생. 내가 잘 살아내는 일일 뿐.
달려요. 달리지 않으면 죽으니까.
나는 처음에 샘이 나에게 한 말을 흉내내어 말했다. 그리고 키들키들 웃었다. 샘도 따라 웃었다.
달려요. 달려요. 55마일만 유지하면 죽지 않아요. 샘은 휘파람을 불었다. 내 가슴속엔 조금씩 새로
운 빛깔의 바람이 새어들고 있었다. 아, 상쾌해라.
저 다리 보세요. 아름다운 도시지요? 연인들이 헤어지려 하다가도 이곳에 오면 도루 사랑하게
된대요.
나에겐 영원히 해당되지 않는 말이다. 샘을 외면한 채 나는 허공중에 대고 낼름 혀를 내밀었다.
서울의 달빛 0장 (지은이:김승옥)
형님한테서 전화가 왔다.
"너, 차를 샀다면서?"
이 기사한테서 들었을 게 틀림없다. 고용인으로서 몇 시간이나마 자리를 비우려면 외출
이유를 말하지 않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주문했던 차가 오늘 공장에서 나오기로 되어 있었
고 나는 형님의 운전사인 이 기사에게 인수해다 주기를 부탁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운전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아직 차가 내는 미세한 이상음을 판별할 만큼 차에 익숙해 있지
는 않았다. 나에게 운전을 가르쳐 준 이 기사는 차를 느낄 줄 알았다. 운전석에 엉덩이를 대
는 순간 타이어의 탄력을 잴 수 있었고 내게는 정상적으로 들리는 엔진 소리에서 실린더의
이상을 발견하곤 했다. "그런 것쯤은 한 차만 쭈욱 몰련 금방 알게 되니까요." 이 기사는 그
렇게 말하지만 솔직히 나는 차에 대하여 그렇게 자질구레한 신경을 쓰게 되는 것은 싫었다.
항상 완전하여 그냥 몰아대기만 하면 되는 차가 내가 바라는 차였다.
"그런 차가 어디 있겠어요? 쇠로 되고 바퀴가 달렸다 뿐이지 살아 있는 말이라고 생각해야
돼요. 좋은 사료를 먹여 주고 과로시키지 말고 병이 났나 살펴봐 주고 외양도 항상 깨끗하
게 해줘야 되고..."
이 기사는 말에다 비유하며 말하고 있었지만 나는 여자에다 비유하며 들었다. 문득, 결국
나는 여자를 필요로 하고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뚜렷이 내세울 만한 용도도 없이
어쩐지 자꾸만 차가 갖고 싶더라니, 생각하며 나는 픽 웃었다. 팔 개월 도안 내 아내였던 여
자는 우리가 살던 아파트만이라도 위자료로서 자기한테 줬으면 하고 기대하는 눈치였고, 나
역시 재산 따위 모두 처먹어라, 하고 아내에게 던져줘 버리고 싶었지만 물론 아내는 위자료
같은 걸 입 밖에 내어 요구할 처지가 아니었고, 한편 결혼선물로 그 아파트를 사준 어머니
는 내가 이혼하는 여자한테 일 원 한푼 줄까 봐 독이 오른 눈으로 감시하고 있었었다. 결혼
때 해준 패물들도 모두 돌려 받으라는 게 어머니의 고집이었지만 그것만은 나는 못 들은 체
해 버렸다. 돌려받을 수도 없었다. 아내는 벌써 그 패물들을 팔아서 이혼 후에 자기가 살 조
그만 아파트를 사놓고 있었던 것이다. 친정집으로 들어가 살 줄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나는
아파트에서 혼자 살 계획을 하고 있는 아내에 대하여, 이혼에 임박하자 나를 사로잡기 시작
한 그 여자에 대한 연민이 사라져 버리며, 이전 어느 때보다도 강한 증오, 여러 경우의 여러
증오를 모두 묶어 좋은 것보다 더 강한 증오를 느꼈다. 그 동안 나를 조롱한, 나로서는 얼굴
도 모르는 수많은 사내들이 이제부터 그 여자 혼자 살 아파트를 맘놓고 드나들 거라는 상상
때문에 나는 차라리 아내를 죽여 버리고 싶다는 충동에 시달렸다. 그러나 아내가 나에게 위
자료 청구를 할 수 없듯 내가 아내의 미개에 참견할 권리는 없는 것이었다. 가장 침착한 얼
굴로 가지고 나갈 짐을 차근차근 정리하고 있는 아내를 나는 다만 핏발 선 눈으로 바라보기
만 할 뿐이었다. 그 여자가 떠나 버린 아파트에서 혼자 살 수도 있었다. 어머니와 형수가 재
빨리 옷장이니 찬장이니 침대, 화장대 따위를 사들여 빈자리를 메워 마치 여자와 함께 살고
있는 집인 듯 꾸며 주었다. 그 가구와 집기 따위가 주로 형수의 취향과 안목에 따라 골라진
것들이었기 때문에 나는 마치 새로운 여자와 함께 살게 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새로운 도
배질. 새로운 기구들은 실내에서 아내에 대한 어떤 기억을 몰아내는 데 확실히 효과가 있었
다. 그러나 결과는 더 나빴다. 그 여자가 가장 주부다웠던 집안에서의 세세한 기억들만 몰아
내 버린 것이었다. 그 기억들은 그 여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간직해 두고
싶었던 기억들이었다. 그것들이 아내에 대한 증오를 중화시켜 주는 건 결코 아니지만 가령
길에서 스쳐 지나가는 어린이의 얼굴에서 밝은 웃음을 볼 때 얻어질 수 있는 무용한 윤기의
노릇을 나한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여자는 그야말로 그 집 밖으로 나가 버린
것이었다. 바깥에서의 그 여자란 나를 의혹과 질투와 증오, 썩은 감정의 늪 속으로 밀어넣는
요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때문에 그 아파트를 팔아 버린 것이다. 팔아서 내
마음대로 할 테다, 하는 충동으로 팔아 버렸던 것이다. 나는 모든 타일들에게 그들이 나의
타인임을 분명히 해두고 싶었다. 아니 그들이 나를 자기네의 타인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었
다. 아내는 말할 것도 없고, 어머니와 형님까지도 나로서는 타인이 아닐 수 없었다. 한 여자
와 결혼을 하면서부터 내가 그들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나는 온몸으로 느꼈다. 그들은 얼마
간의 재산과 함께 나를 자기들로부터 떼어 버린 것이었다. 결혼 이후 그들이 나에게 묻는
것은 돈과 관계된 것만이었다. 내 얼굴에 버짐이 피더라도 그건 이제 나 자신과 아내가 책
임질 일이지 어머니나 형님이 걱정해선 안될 일이었다. 내가 아내와 이혼할 결심과 그 이유
를 얘기했을 때야 나는 옛날처럼 나의 마음 세세한 움직임까지 알아두지 못해 안달하는 어
머니와 형님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찢어진 종이처럼 그들과 나를 다시 연결시킨
것은 이혼이라는 풀칠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그들과 한마디 의논도 없이 아파트
를 팔았고 그 판 돈의 일부로 작은 아파트를 샀고 자동차를 주문해고 나머지를 아내였던 여
자한테 주기 위해 예금통장으로 만들어 가지고 있었다. 내맘대로 할 테다, 라고 한 것은 결
국 어머니와 형님이 싫어하는 짓을 하겠다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자동차는 나한테 가
장 불필요한 물건들 중의 하나일 것이고 불필요한 물건을 사는 데 적지 않은 돈을 쓰는 일
은 어머니와 형님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었다. 나는 아무일도 안하기로 작정한 사람이었다.
이혼하자마자 대학의 교양학부 국어강사 자리도 집어치웠다. 어머니가 내 소유로 해준, 영등
포구에 있는 중국 음식점에서 들어오는 수입으로 생계는 충분할 것이고 그 동안 지키려고
애쓰고 있던 학문의 사명감 같은 것은 깨끗이 사라져 버렸다. 운전을 열심히 배웠던 이유는
아내를 방송국까지 태워다 주고 데리러 가고 싶다는 꿈 때문이었지 나 자신을 위해서는 아
니었다. 나한테 왜 자동차가 필요할 것인가! 그런데 이 기사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동차를
여자에 비유해 보고 있으려니, 그 구매동기를 무작정이라고 스스로 여기고 잇던 차가 실은
아내의 대체물이라고 문득 깨달아지며 내 속에 굴을 파고 둥우리를 틀어 앉아 버린 여자라
는 독충에 대하여 짓이겨 주고 싶은 혐오감이 드는 것이었다. 기껏해야 어머니와 형님이 펄
펄 뛰며 싫어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 통장건은 그렇다면 무슨
벌레가 마음의 어느 굴 속에서 나왔기 때문인가? 나는 알 수 없었다.
"너한테 차가 왜 필요하니?"
"그냥... 자동차로 지방 여행이나 다녀 볼 까 하구요."
대답하며 나는. 이 기사에게 차를 인수해다 줄 것을 부탁했을 때 무의식중에 내가 차를
산 사실을 이 기사를 통해서 형님에게 알리고 싶어했었던 것인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시골 좀 가는 데 레코드 신품이 왜 필요해, 임마, 값싸고 쓸 만한 중고차가 얼마나 많은데
하필이면 제일 비싼 차를... 너, 레코드 한 대 굴리는 데 얼마 드는지나 알아? 세금도 그렇고
기름값만 해도 다른 차 갑절은 먹혀. 네가 무슨 재벌이냐? 지방 다니려면 고속도로 통행료
만 해도 얼마나 드는지 알구 있어? 지방 갈 때는 나두 고속버스 타고 다녀 임마. 그리고 차
를 사고 싶으면 어머니한테라두 미리 상의를 해야지. 너, 어머니가 얼마나 화나신 줄 알아?
너한테 맡겨 뒀다간 엉뚱한 짓 하느라고 다 까먹겠다구 식당도 명의를 내 앞으로 바꿔 놓자
고 야단이셔."
"차는 형님 차하고 바꿔도 좋아요. 뭐 레코드리야겠는 건 아니니까..."
"임마, 나도 레코드 좋은 줄 몰라서 안 굴리는 줄 아냐? 유지비가 많이 들어서 그러는 거
야. 어차피 물릴 수는 없는 거구, 내가 임자 찾아볼 테니까 그건 팔아 치우고 꼭 차가 있어
야겠으면 중고차 중에서 쓸 만한 걸 골라줄 테니까... 그리고 어머니한테서 전화가 갈 거야.
돈도 돈이지만, 너 차 사고로 무슨 일 낼까 봐 펄펄 뛰시니까, 마음이 울적해서 샀는데 며칠
만 타보고 팔아치우겠다구 말해. 알았어?"
아닌게아니라 형님의 전화가 끝나기 무섭게 어머니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아직 점심시
간도 아닌 땐데 "갈비탕 합이 셋!" 따위의 소리가 어머니의 말 마디마디 사이로 배어나오고
있었다. 카운터에 앉아서 한 손으로는 종업원에게 전표를 떼주면서 전화를 걸고 있는 모습
이 선히 보이는 것 같았다.
"엄마 태우고 관광여행이나 다니려구요."
"넋빠진 소리 말구 오늘 당장 형한테 맡겨서 팔아치워요. 네가 운전을 언제 해봤다구... 사
람이나 덜컥 치워 놔봐라. 천천히 망하려면 아편을 하구 빨리 망하려면 차를 사라구 했어.
그리구 너 은행에 넣었다는 돈 얼마 남았니? 차 사고도 많이 남았을 텐데..."
"없어요, 한푼도."
"없다니?"
"다 써 버렸어요, 친구들하구 술 마시느라고..."
계획했던 것도 아닌데 불쑥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술보다는 지난 3개월 동안 수많은 여
자를 사는 데 돈을 쓴건 사실이지만 그 액수란 백만원 이내였고, 그것도 주로 중국음식점에
서 나온 수입으로였다. 4백만 원은 아내였던 여자에게 주기 위해 그 여자 이름으로 예금통
장을 만들어 내가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가 물어올 경우에 대비한 대답은, 물론 내가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 스스로 의심했지만, 그것은 "영숙이 줘버렸어요"라는 것이었다. 왜
줬느냐고 물으면 대답할 말을 준비하지 못한 해, 아마 "그냥요"라는 말이 내 입에서 튀어나
오리라고만 막연히 생각해 왔다. 그런데 전연 거짓말이 튀어나왔던 것이다.
"안되겠다. 너 당장 이리 좀 오너라. 내가 자리를 빌 수는 없구. 엄마한테 지금 좀 와."
"오후에 들를게요. 어젯밤 꼬박 새우고 지금 자고 있었던 거예요. 잠 좀 자구 나갈게요."
그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뭘 하느라구 밤을 새? 또 고등학교 동창생이냐?"
"예, 두수라구 나두 새카맣게 잊어버리고 있던 친군데 소식을 들었다구 전화가 와서..."
"어떤 녀석이 나발을 불고 다닌대니? 이혼이 무슨 잔치났다구 동창들한테 방을 돌리구 지
랄들이라니? 결혼식 때는 코빼기도 안 내밀던 녀석들이... 철딱서니 없는 것들... 그럼 밤새도
록 술을 마셨단 말이냐?"
"네, 그 친구 집에 가서 옛날 이야기하며..."
이건 거짓말이었다. 비어 홀이 끝나자 두수라는 녀석과 함께 술자리에서 짝이었던 호스테
스를 데리고 여관으로 갔었던 것이다.
이혼 이후, 생활은 전혀 상상도 하지 않았던 이상한 틀을 들고 나한테 덮여 나를 그 틀
속에 집어넣고 틀 모양대로 일그러뜨렸다. 상투적인 매일이었다. 이젠 이름조차 잊어가고 있
는 고등학교 동창생으로부터의 갑작스런 전화. 비어 홀. 여자 얘기 또는 돈벌이 얘기. 그리
고 여자를 사서 호텔로 간다. 또는 호텔에 가서 여자를 산다. 마치 내가 이혼하기를 사방에
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전화가 지긋지긋하게 많이 걸려왔다. 나 두수야, 생각 안나니? 하
긴 졸업하고 첨이니까. 아냐, 우리 훈련소에서 한 번 만났잖아! 벌써 팔 년이 됐구나. 자아
식, 이제 생각나니? 영진이한테서 네 소식은 자주 듣고 있지. 너 뭐 이혼했다며? 나와라, 술
한잔 살게, 그리고 호기롭게 문지기가 알아주기를 기대하며, 그쪽에서 알아 모시지 않으면
자기 쪽에서 문지기의 어깨를 두드리며, 잘 있었어? 앞장서 들어가는 술집들도, 자기네 딴에
서 마음을 써 일류로 데려가 준 때문인지 그게 그거다. 엠파이어, 월드컵, 코스모스, 오비타
운, 그리고 관광호텔들의 나이트 클럽들... 어제 저녁엔 딴 녀석과 밴드석 바로 앞자리에서
마셨는데 오늘은 이 녀석과 구석자리에서 마신다. 무대에서는 텔레비전에서 본 가수들이 무
식의 악취를 풍기며 슬픈 노래도 백치처럼 싱글싱글 웃으며 부르고 있고, 개그맨들은 어젯
밤과 똑같은 대사를 똑 같은 표정으로 씨부렁거리고 있다. 운동 부족과 영양과다로 비만증
에 걸려 있는 사내들은 넥타이 매듭과 허리띠를 헐겁게 풀어놓고 헐떡이며 맥주를 들이켜고
나서 한 손으로는 옆에 붙어 앉아 있는 호스테스의 허리를, 한 손으로는 자기의 튀어나온
배를 슬슬 어루만지고 있다. 간신히 엉덩이까지만 내려오는 원피스 유니폼을 입은 호스테스
들은 자기 사내가 술잔에서 입을 뗄 때마다 땅콩이나 북어포 조각을 사내 입에 넣어 주고,
가수의 노래가 끝날 때마다 눈은 딴 곳을 향한 채 무대 쪽으로 손만 내밀어 맥빠진 박수를
친다.
사내의 손은 탁자 밑에서 아가씨의 사타구니를 더듬고, 아이, 남들이 보잖아요, 빼재는 손
끝에 묻어오는 것은 냉증 특유의 썩은 냄새일게 틀림없다. 썩은 냄새. 썩은 음부. 아내의 사
타구니에서 풍겨 오던 부패 그 자체. 허연 거품을 떠올리는 노랗게 썩은 술. 가슴 복판에서
시작하여 독사처럼 외줄기로 목구멍까지 치달려오는 통증마저도 상투적이다. 썩은 술이 빠
르게 침투하며 상투적으로 모든 신경세포를 들쑤시고 머리, 가슴, 불알, 무릎 관절의 모든
조직을 썩힌다. 썩은 술에 의해 썩어가는 사고, 썩은 사고에 의한 썩은 감정. 상투적으로 끓
어오르는 상투적인 증오. 혈관 속의 피는 검은색으로 변하고 있으리라. 인간은 행복할 자격
이 있는가? 먹을 것이 부족하던 시절에는 생선시장의 개들처럼 꼬리를 뒷다리 사이에 감아
넣고 눈을 슬프게 치켜뜨고 다니다가 형편이 좀 나아지면 발정한 개들처럼 닥치는 대로 붙
을 자리만 찾아다닌다. 사람들이 결국 바라는 건 필요 이상의 음식, 필요 이상의 교미. 섹스
의 가수요. 부잣집 며느리 여름철에 연탄 사 모으듯. 남의 아내건 나의 아내가 될 여자건 닥
치는 대로 붙는다. 남의 사랑을 위한 빈자리를 남겨 두지 않는다. 물처럼, 공기처럼, 여력만
있으면 빈자리를 메우려 든다. 인간은 자연인가? 메우고 썩힌다. 썩은 사타구니에서 쏟아지
는 썩은 감정. 자리를 찾지 못한 자들의 증오. 평화가 만든 여유. 여유가 만든 가수요. 가수
요가 만든 부패. 부패가 만드는 증오. 부패는 이미 시작되었으며 남은 일은 증오의 누적, 그
리하여 전쟁. 전쟁은 필연적이다. 전쟁으로 모두 빼앗기고 다시 시작. 인간은 행복할 자격이
있는가? 그게 아녜요. 형편이 나아져서가 아녜요. 아내가 말한다. 그럼 뭐야? 그렇군, 형편이
더 나빠져서군. 돈 때문이니까.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건 돈이니까. 아녜요. 슬픔 때문예요.
종말에 대한 슬픔이 섹스를 만든 거예요.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를 지배하고 있는 슬픔이 우
리들의 섹스를 만들어요. 사람들은 슬퍼하고 있어요. 당신이 바라고 있는 그 전쟁 때문에요.
정부에서도 신문에서도 전쟁에 대비하라고 야단들이잖아요? 내가 얘기하는 건 그런 전쟁이
아냐. 전쟁은 다 마찬가지예요. 전쟁이 나면 아무데도 도망갈 데가 없다는 걸 어린애까지도
알고 있어요. 지난번 전쟁보다 더 끔찍하리라는 건도 모두 알고 있어요. 우리를 지배하고 잇
는 것은 자본주의도 정치권력도 아녜요. 종말에 대한 불안이에요. 적개심을 돋운다고 하지만
그건 전쟁 이후에도 살아 남을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죠. 집은 불타고 자기는 죽고 아이
들은 고아원으로 간다는 것쯤 누구나 알고 있어요. 슬픔이 적개심을 휩싸서 녹여 버려요. 우
리가 기대할 수 있는 건 적개심에 대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적들에게도 불탈집이 있고 고아
원으로 갈 아이들이 있어서 우리처럼 슬퍼하고 있는지하는 사실에 대해서뿐예요. 그렇지만
그런 희망이 얼마나 허망한 결과로 나타나는지는 정부에서 설명 안해 줘도 누구나 알고 있
어요. 그래요, 모두를 지배하고 있는 건 슬픔예요. 그 슬픔은 특히 남자들을 사로잡고 있어
요. 그 슬픔이 남자들의 윤리를 허물어뜨려요. 윤리란 미래적인 거죠. 우리에겐 미래가 없는
거예요. 그리고 허물어진 남자들이 여자를 지배하구 있어요. 그래서 모두 슬픈 거예요. 악귀
붙은 년, 악귀 붙은 미친년. 네 주둥아리를 빌어서 아는 체 떠들고 있는 도깨비는 어떤 놈이
냐? 방송극의 유치한 대사로 꽉 들어찬 네 대가리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왜 화제
를 나한테로 돌리세요? 옳아, 이제보니 그 동안 쭈욱 날 우습게 보고 있었군요? 가장 위해
주는 체하면서, 사랑하는 체하면서. 그래 우습게 보고 있었다. 그런 줄 알고, 네 몸에 미친
놈 도깨비가 붙은 줄 알아보고 우습게 보고 있었다. 누구냐? 네 입을 빌어서 떠들고 있는
놈. 그 따위 말로 널 유혹했단 말이지? 그 따위 말로 내 자리를 빼앗았단 말이지? 여자의
자물쇠는 그 따위 말로 열린단 말이지? 열리자마자 문 안으로 정액을 쏟아 넣어 그 말을 네
자궁속에 단단히 풀칠해 놓았단 말이지? 우린 이제 모두 죽게 될 테니까, 하며 슬픈 얼굴을
짓고 사내들이 다가오면 네 문은 스스로 열린단 말이지? 누구냐? 이름을 대란 말야. 네 주
둥아리를 통해서 말하고 있는 그 놈. 아직도 네 자궁 속에 살아서 까불어 대고 있는 놈. 개
같은 욕망에 시대의 구실을 붙여 널 유혹한 놈. 이름을 대. 모두 이름을 대. 몇 놈이냐? 모
두 일음을 대. 개새끼야, 미친 건 네놈이야. 이젠 싫증났으면 그냥 싫다고 해. 내가 언제 처
녀랬어? 내가 언제 결혼해 달라구 했어? 결혼하자구 찾아다닌 건 네놈이잖아! 그냥 나가 달
래도 얼마든지 나갈 수 있어. 그래, 미쳤는지도 모른다. 네 자궁속에 붙어서 아무한테나 문
을 열어 주는 도깨비한테 물려서 나도 미친 모양이다. 어서 이름만 대. 아귀는 제 읾을 부르
면 도망치는 거다. 널 쫓아내고 싶어서가 아니다. 네 몸 속의 도깨비를 쫓아내고 싶어서다.
왜 감추느냐, 왜 도깨비를 감싸고 내놓지 않느냐. 부끄러워서냐. 작은 부끄러움을 지키려고
큰 사랑을 거절하는 거냐. 널 마음대로 휘두르고 있는 건 네 몸에 붙은 도깨비야. 도깨비가
지배하고 있는 널 내가 어떻게 믿고 사랑할 수 있는냐. 토해 버려라. 도깨비를 토해 버려,
네 자궁 속의 도깨비를 입으로 토해 버려. 널 사랑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개새끼야. 진짜
로 미친 놈은 네놈이야. 없는 도깨비를 억지로 만들어서 날 쫓아내려고. 좋아 나갈게. 네놈
아니면 남자 없을 줄 알구. 개 같은 년. 허연 거품을 떠올리는 누렇게 썩은 술.
아내를 처음 알게 된 것은 결혼하기 반 년쯤 전, 4월 어느 일요일 오후, 부산에서 서울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였다. 그 전날 오후, 부산에서 고등학교 교편을 잡고 있는 대학동창의 결
혼식이 있었다. 오전에 태종대를 구경하고 그 바닷가 바위 위에서 마신 소주 때문에 아직도
새빨간 얼굴을 해가지고 비행기에 올라 자리에 앉아 있는데 어쩐지 내 옆자리에 예쁜 여자
가 앉아 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예감은 기대로 바뀌어 만일 예쁜 여자가 아닌 사람이
앉는다면 나는 몹시 불쾌해질 것 같았다. 그래서 승강구 쪽에서 내 쪽을 향해 다가오는 사
업가 차림의 사내들에게 나는 갑자기 날카로운 적의를 느끼며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리
고 있었다. 오르고 있는 여자라고는 대부분 남편동반의 기름진 중년 여인들이었고 그나마도
몇 명 되지 않았다. 잠시 후에 여자대학 배지를 옷깃에 단 아가씨 두명이 올랐으나 너무 어
려 보였고 예쁘지도 않았다. 다행히 그 두여자가 나타났다. 몸매가 가늘고 얼굴 생김이 뚜렷
한 스무서너 살로 보이는 여자였다. 옷차림이 다소 지나치게 화려해 보였으나 그건 휴일날
유원지에서라면 얼마든지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저 여자라면, 하고 기대하고 있는데 다른 사
람들 눈에도 예뻐 보이는지 그 여자가 통로를 걸어와 좌석번호를 확인하고 내 옆에 앉을 때
까지 그 여자를 보기 위해 고개를 돌리고 있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특히 중년여인들
이 그랬다. 다름 사람들도 나처럼 자기 옆자리에 예쁜 여자가 앉기를 바라고 있었구나, 생각
하며 일정한 조건 속에선 사람들의 심리가 어슷비슷하다는 바로 그 점이 사람들을 결속시키
는 것이라고 잠깐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여자 뒤로도 몇 명의 젊은 여자가 올랐으
나 그 여자만큼 예쁜 여자는 없었다. 모두가 나를 부러워하고 있는 것 같아서 나는 무표정
하려고 애써도 참을 수 없이 웃는 얼굴이 되었다. 문득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발가벗고 선 것
처럼 부끄러워서 웃음을 삼키려고 어금니를 깨물려 참 밖 풍경을 구경하는 체했다. 비행기
가 이륙하여 저녁햇살을 받아 명암이 뚜렷한 산들이 아득히 내려다보이자, 나는 그 명암이
뚜렷한 허공에 떠 있는 몇십 명의 사람이 그려진 초현실주의 화풍의 그림을 상상으로 보고
있었다. 그리고 비행기의 실종을 상상했다. 어딘가 무인도에 내려 이 비행기를 타고 있는 사
람들끼리만 한 사회를 이루고 살아야 한다면, 가만 잇자 남자가 몇이고 여자가 몇이지? 고
개를 쭉 뽑고 그래도 안되어 엉덩이까지 들어올려 기내의 남자와 여자 숫자를 눈으로 세어
보고 있는 나를 내 옆의 여자는 이상하다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남자 일곱 명에 여자 하나
의 비율이라는 계산이 나왔다. 결국 나는 이 여자를 다른 남자 여섯 명과 함께 가질 수밖에
없다. 아냐, 젊고 가장 예쁜 여자니깐 모든 남자가 다 가지고 싶어할 것이다. 물론 나는, 비
행기에서 앉았던 대로, 운명대로 짝을 지웁시다고 주장하겠지만 보아하니 비행기 안에 앉아
있는 대부분 남자들은, 넥타이를 끄르고 양복만 벗어 버리면 씨름꾼이라고 해도 정확할 만
큼 정력적으로들 생겼다. 그런 주장을 하다간 우르르 달려들어 우선 나부터 처치해 놓고 볼
인상들이다. 나는 아내에의 운명을 그때 벌써 예감하고 있었던가 보았다. 아니 만일 하나의
이미지가 그 이후의 운명을 유도한다면 그 비행기 속에서의 망령된 공상이 그 이후 아내를
대하는 나의 자세로 굳어졌던 것일 수도 있다.
스튜어디스가 통로를 지나가며 나의 여자에게 "안녕하세요?" 상냥하게 인사를 했을 때야
나는 말 붙일 구실을 잡을 수 있었다. "비행기를 자주 타시는 모양이죠?" 나의 여자는 긍정
도 부정도 아닌 미소만 지어보였다. "전 비행기 타보는 거,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작년 여
름방학 때 제주도 가면서 한 번 타보구선..." "학생이시군요?" 학생이라면 동생처럼 여기고
말상대를 해주겠다는 듯 얼굴을 풀며 말하는 그 여자의 입에서 담배냄새가 풍겨 왔다. "학
생은 아니지만 대학에 나가고 있습니다." "어머, 그럼... 교수님이신가요?" "아녜요, 아직 시
간강사예요. 헤헤..." 교수는 그만두고 전임강사도 아닌 자신이, 그리고 백치처럼 말꼬리에
싱거운 웃음을 흘리고 만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학생이세요?" 이번엔 내가 물었다. 화장이
짙은 걸로 봐서 학생은 아니다고 확신하면서 그러나, "졸업했어요" 정도의 대답은 기대하면
서. 그 여자는 누이 부신 듯 깜박이며 나를 잠깐 응시했다. 이해할 수 없는 사태나 사람과
갑자기 부딪쳤을 때 그 여자의 눈은 그렇게 떨리고 그렇게 맑아지는가 보았다. 어쨌든 속눈
썹을 떨며 내 눈을 응시하던 그 여자의 눈길은 내 운명을 결정했다. 그 순간에 나는 그 여
자를 사랑해 버린 것이었다. 마음과 마음의 가장 빠른 지름길은 마주치는 눈길이었구나 생
각하며 나의 술 마셔 붉은 얼굴은 더욱 붉어지며 이마로 진땀이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
여자의 얼굴에 갑자기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가 번지면서 "제가 대학생 같아 보이세요?" 물
어왔다. 마치 대학생 같아 보이기를 기대하는 듯. "글쎄요, 사 학년쯤... 아니 졸업하셨죠?"
가만히 손을 올려 웃는 입을 감추며 그 여자는 재빠른 시선으로 그 동안 그 여자를 곁눈질
로 훔쳐 보고 있던 통로 저쪽의 중년남자를 보고 나서, 표정을 다시 의젓하게 정리했다.
그 다음부터는 마지못해 하는 듯 내 질문에 반응했다.
"댁이 부산이세요?" "아니, 서울예요." "책 많이 읽으세요?" "...네." "주로 어떤 책을 ... 소
설 같은 거요?" "소설도 보구요..."또?" "닥치는 대로 보죠 뭐. 그렇지만 워낙 시간이 없어서
많이는 못 봐요." "뭘하시는데 시간이 없으세요? 공부하시느라고요? 역시 학생이군. 어는 학
교 다니세요?" 그 여자는 이번엔 냉담한 얼굴로 잠깐 나를 돌아보았을 뿐이였다. 나는 머쓱
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미안합니다. 실은 미인이셔서 자꾸 말이 하고 싶네요." 그제야 미
소를 띠고 얼굴을 앞을 향한 대 상반신만 내쪽으로 약간 기울려 "저 방송국에 나가고 있어
요." 남이 들을까 꺼리는 듯 속삭이는 음성이었다.
그 은근한 속삭임 때문에 나는 그 여자한테서 모든 것을 허락받은 듯한 기쁨을 느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그 여자에 대해서는 모른 채였다. 방송국에 나간다는 말을 다만 직장이
방송국이라는 뜻으로만 들었다.
"방송국에서 뭘 하세요? 아, 아나운서군요?"
"... 그 비슷한 거예요."
그때 내 앞자리의 중년여자가 의자 등받이 너머로 얼굴을 내밀고 나에게 웃음 머금은 사
투리로 말했다. "보소, 듣자듣자 하니 너무하데이. 유명한 텔레비 탈렌트 한영숙 씨도 모르
나, 이 답답한 양반아." 중년여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위에 왁 웃음이 터지는 걸로 보아
그 동안 내가 나의 여자와 주고받은 말을 그들은 흥미있게 듣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내가
목덜미까지 새빨개진 것은, 남들이 다 알고 있는 유명한 여자를 몰라봤다는 부끄러움 때문
이 아니라 우리의 은밀한 대화를 남들에게 들켰다는 창피함 때문이었다. 텔레비전이야 휴일
날 방영해 주는 외국영화나 가끔 보는 데 지나지 않아서 나는 그 여자가 텔레비전 드라마에
출연하는 여배우란 건 전연 상상도 안했었다. "공부만 열심히 하시는 모양이네요. 텔레비 같
은 건 안 보시구..." "예, 앞으론 열심히 보겠습니다."
사실 그 후 며칠 동안 나는 그 여자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 그 여자가 출연하는 드라마 시
간이 되면 텔레비전 수상기 앞에 앉곤 하였다. 역할을 위한 분장 탓인지 화면 속의 그 여자
는 내가 본 그 여자와는 다른 것 같아서 안타까움을 느꼈다. 국민학교 때 아동극에 출연한
같은 반 계집애가 야단스런 화장을 했을 때 느낀 그 서먹서먹함과 앙징스럽게 귀엽던 기억
이 났다.
비행기 안에서 그 여자를 돌아보던 사람들의 표정이 이제 보니 아동극의 소녀를 바라보던
국민학교 때의 나의 표정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관심을 갖고 보니 여배우들의 사생활에 대
한 소문도 내 귀에 많이 들어왔고, 사람들의 화제를 대부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뜻밖에도
바로 여배우들의 사생활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리고 그것은 스켄들을 취급하는
신문이나 잡지들이 사회적 존경을 유지시킬 필요가 있는 직업이나 계층의 사람들의 스켄들
을 취급할 힘을 바로 그 사람들에 의해서 빼앗기고 있고 또 그 사람들이 오직 단 하나의
문, 여배우나 가수 등 대중의 휴식에 봉사하는 계층의 스캔들을 취급할 수 있는 문만 그 여
론도구에게 열어 주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리고 사람들이 여배우의 스켄
들에 관심을 갖는 것은 그 여배우 자신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 아니라 그 여배우를 통해서나
엿볼 수 있을 것 같은 자기 시대의 감춰져 있는 부분에 대해서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
나 아무것도, 화면 속의 그 여자도 여배우들에 대한 해괴한 소문도 내 속에 들어와 박혀 잇
는 그 여자의 눈을 빼내지는 못했다. 숨결이 내 뺨에 와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어리둥
절해서 깜박이며 내 눈을 빤히 들어야 보던 그 눈. 그 눈이 어딜 가나 나를 따라다녔다. 어
느 날 나는 문득 내가 그 여자에게 결혼 신청을 해볼 수도 있다는 아주 간단한 사실을 깨달
았다. 그러자 그 여자가 승낙하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운명이니까. 지금 그
여자에게 결혼하기로 약속한 남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여자가 그 약속을 취소하고 나와
결혼할 것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운명이니까. 그런 생각이 든 다음날 나는 방송국 근처의 다
방에서 그 여자에게 전화를 했다. "녹화중이어서요." 라고 말하는 그 여자의 얼굴은 분장 때
문에 진짜 아동극의 소녀 같아서 나는 웃음이 나왔다. 그 자리에서 나는 우리 집에서 한번
저녁대접을 하고 싶다고 말하고 사흘 후에 오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우리 집이란 어머니와 가정부가 쓰고 있는 살림집을 말함이었다. 음식은 어머니가 경영하
는 식당에서 준비를 해 가지고 종업원이 차로 날라왔다. 형님 집에서 형수와 조카들이 여배
우 구경을 하러 왔다. 저녁 식사 후 내 서재에서 나는 내가 느끼고 있는 그 여자와 나와의
운명에 대해서 얘기했다. 결혼은 아직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대답이었다. 지금 자기 머리
속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여배우로서의 성공뿐이라는 것이었다. 누군가 그 여자로 하여금
한 남자만의 소유가 되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을 그 여자의 말 속에서 나는 느낄 수 있
었다. 그 누군가는 자기의 꿈이라고 그 여자는 말했지만 수녀가 되는 여자들에게도 천주에
봉사하기를 부추기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마침내 그 여자는 그것이 자기 집의 가난이라고
실토했다. 아버지, 어머니, 네 명의 동생들이 그 여자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었다. 결혼
을 해줄 수 없지만 좋은 친구는 돼주겠다고 그 여자는 말했다. 내가 그 여자에게 결혼 신청
을 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고 어머니와 형님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었다. 형수만이 그럴
수도 있는 거죠 뭐, 라고 말했다. 결국 나는 그 여자의 친구로 지낼 수밖에 없다고 각오하게
되었고, 그러나 남자와 여자 사이의 친구란 아무것도 아니란 걸 깨닫고, 이젠 방송국 근처
다방에도 그만나가겠다고 생각할 무렵 갑자기 그 여자가 결혼을 승낙했다. "욕심쟁이!" 나에
대한 그 여자의 그 말이 나와 결혼할 것을 결심한 이유라는 것이었다.
나는 무슨 뜻인 줄 몰랐다. 나는 나의 그 여자에 대한 전인격적 사랑을, 완전한 소유욕을
그 여자가 그렇게 표현한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자랑스럽게 웃었다. 다른 남자들이 그 여자
의 음부만으로 만족하고 그 여자의 나머지는 그 여자 자신의 소유로 인정해 버리는 데 비롯
된 표현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 여자가 말하는 '친구'라는 것이, 가방을 든 채 어슬렁
어슬렁 방송국 근처 방송국 근처 다방으로 가서 차를 시켜놓고 그 여자를 기다리는 동안 남
의 웃음거리나 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몰랐다. 결혼식 때까지도 나는 그 여자에게 처녀막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결혼을 안한 여자니까 처녀일 것은
당연했다. 갑자기 닥친 결혼식을 앞두고 허둥지둥 병원으로 달려가 정충검사를 해본 것은
나였다. 군대시절, 부대 근처 마을의 한 술집 아가씨와 다섯 번 성교를 했는데 그때 성병에
걸렸던 것이었다. 부대의 의무실에 입원까지 해가며 치료를 받아 완치된 줄은 알고 있지만
막상 결혼을 앞두고 보니 그 악독한 병균이 혹시 미세한 하나라도 내 몸속에 남아 있을까
봐 불안해서 견딜 수 없었다. 아내 이전에 여자 경험이라고는 병을 옮겨준 그 아가씨가 유
일한 것이었지만 그마저도 나는 아내될 여자에게 죄스러웠다. 결혼식만 치르고 나면 기회를
보아 그 일을 고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리라고 작정하고 있었다. 서귀포의 호텔에서의 첫날
밤 신부가 처녀가 아니기 때에 당황한 것은 아내가 아니라 나였다. 처녀가 아닌 점에 대해
서 아내는 한 마디 설명도 없었다. 거짓으로라도 아픈 체해 줬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아니
아픈 체해 보려고 시도는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스스로 멋쩍었던지 금방 그런 거짓 표정을 지워 버렸다. 아내와의 최초의 행위가
끝났을 때 나는 내가 신부의 비처녀를 전연 알아채지 못한 듯 구느라고 소란을 피웠다. "아
팠지? 처음엔 되게 아프다던데?" 이마, 뺨, 턱, 닥치는 대로 키스를 해대고 손으로 아내의
배를 쓸어 주고 하며 고통을 위로해 주는 듯 호들갑을 떨었다. 실제로 나는 그토록 소원했
던 여자와 알몸으로 껴안고 있게 된 기쁨에만 휩싸여 있었다. 처녀가 아니기 때문에 당황했
을 뿐이지 아직 실망하거나 화가 나지는 않았다. 호들갑을 떨고 잇는 나를 그 여자가 내가
잊을 수 없는 그 눈으로 꽤 오랫동안 보고 있었다. 어리둥절하여 깜박이며 내 눈을 빤히 들
여다보는 그 눈. 나중에야 나는 그 여자에게 고백시켜 그 여자를 정화시킬 수 있었던 기회
는 바로 그때였다고 깨닫게 되었지만 어떻든 그 눈 표정이 바뀌었을 때 그 여자의 자궁 속
에서 나갈까 말까 망설이던 도깨비는 도로 자궁 속 깊이 들어가 버린 것이었다. 그 눈앞에
서 고백을 시작한 건 오히려 나였다. 부대 근처 마을의 술집, 염소처럼 눈동자가 노랗던 아
가씨, 성병, 결혼식을 앞두고 대학병원에서 완전무결하다는 진단을 받았다는 얘기까지 했다.
성병이라는 얘기를 할 때 그 여자는 치가 떨리는 듯 몸을 웅크리며 돌아누우려 했다. 황급
히 어깨를 끌어안아 내쪽으로 돌려놓고 아내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부대 의무실에서의 치료
과정을 기억나는 한 상세하게 설명했다.
"용서해 줘, 용서해 줄 수 없어?" 용서한다는 듯 아내를 내 목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욕실
에 가서 아랫도리를 다시 씻고 오라고 했다. 욕실에서 돌아오자 나를 침대 위에 반듯이 눕
게 하고 아내를 엎드려서 나의 벌레처럼 줄어든 남성을 입에 넣고 애무하기 시작했다. 내
남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크게 발기되고 있었지만 그러나 내 몸을 적시기 시작하는 것은 관
능의 쾌감이 아니라 슬픔이었다. 아내는 아직 용서 받은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 여자는
모두 용서받는 듯이 굴고 있는 것이었다. 성기에 입을 대는 것이 성병에 걸렸던 나를 용서
한다는 의식이라고 그 여자는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나는 외국에 다녀온 친구가 언젠가 슬그
머니 보여 주던 포르노 사진의 그 비속의 극치를 기억하고 그런 대담한 행위를 첫날밤에 보
여 줌으로써 아내가 자신의 추잡한 과거를 인정하도록 나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
했다. 나는 인정할 수가 없었다. 아내가 잠든 후 나는 이불을 걷고 아내의 음부를 들어다보
았다. 난생 처음 보는 음부의 추악한 모습에 나는 구토증을 느꼈다. 그것은 악마에게 강요당
하여 아내가 할 수 없이 몸에 차고 다니는 주머니인 것만 같았다. 4박 5일의 신혼여행을 끝
내고 서울로 돌아왔을 때 나는 성기에서 이따금 찌르는 듯 스치고 가는 통증을 느꼈다. 병
원에 가보니 잡균의 침입으로 생긴 요도염이었다. 이것만은 모른 체해도 좋은 일이 아니었
다. 아내는 자신은 아무렇지 않다고 했다. 냉증은 어느 여자에게나 있는 것이라고 했다. 나
의 성병이 재발했을 것이라고 우기며 새삼스럽게 구토증을 느끼는 듯 목줄기에 손을 대고
침을 뱉아내었다. 어쨌든 아내와 나는 사이좋은 유치원 아이들처럼 나란히 병원엘 다녔다.
그렇다. 부부란 함께 병을 고치기 위해 만난 남자와 여자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변기에 앉아 핏덩어리를 쏟고 있는 아내를 병원으로 데려가, 태아의 자연유산임과 의사의
입에서 아내의 인공유산의 경험이 많음을 알고 났을 때 이제부터 아내는 나에게 도깨비들이
실컷 뜯어먹다 실증이 나서 던져 준 썩은 고깃덩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늦
지는 않았었다. 그 여자가 입으로 그 도깨비들을 토해 줬더라면. 그러나 아내는 드라큘라에
게 목덜미를 물린 여자였다. 지방에서 양조업을 하고 있는 고등학교 동창생이 오랜만에 서
울에 온 김에 친했던 몇 명의 친구를 불러 근사하게 한잔 사겠다고 간 후암동의 어는 은밀
한 방게서, 캘린더 촬영 때문에 늦겠다고 전화했던 아내가 다른 호스테스들과 함께 들어왔
을 때, 나는 이제껏 그 여자가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는 세계의 두꺼움을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거품처럼 끓어오르는 증오. 너 이런 데 왜 나왔어? 돈 때이죠. 돈은 누가 주지? 돈 가진
남자가 주지 누가 줘요. 남자는 왜 너한테 돈을 주지? 즐겁게 해줬으니까 주지 왜 줘요. 즐
겁다는 반대말은 슬프다. 역시 그런가? 갖가지 친구들의 갖가지 충고. 그러니까 일찍 일찍
하나라고 많이 주워먹는 거야. 여편네는 어차피 처녀가 아닐 테니까. 나라고 가만히 있을 수
있니? 자기가 터뜨린 처녀가 하나만 있어도 좋아. 여편네 생각하고 화가 날 때 나도 처녀
하나 먹었으니까 하면 되니까. 많이 먹을수록 좋아. 그 기억만으로 충분히 위로 받을 수 있
어. 여편네의 용도는 어차피 다른 거니까. 인간은 도대체 행복을 바라고 있기나 한가? 개새
끼들. 너희들이다, 아내의 자궁 속에 달라붙어 있는 슬픈 얼굴의 도깨비는. 다시 만나 살라
구. 이혼한 여자는 불쌍한 거야. 여자란 처녀인 체 속일 수 있는 동안 꼿꼿할 수 있는 거야.
속일 수도 없게 됐다는 점 때문에 이혼한 여자는 절망하는 거지. 여자가 한번 절망하면 얼
마나 자기를 더럽게 내돌리는지 넌 모르지? 불쌍하지도 않니? 개새끼들. 불쌍하다는 말 속
에서 축축한 욕망이 엿보인다. 그래, 이혼한 여자란 쳐녀가 아니다. 처녀가 아니니까 외설스
럽다. 길에서 내 아내였던 여자를 만나게 되면 너희들은 그 여자의 아랫배부터 볼 게 틀림
없다. 난 처음부터 그럴 줄 알았어. 네가 여배우하고 결혼했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부터 앞날
이 훤히 보이더군. 우선 여배우란 직업은 일종의 사업이야.
가정이란 것도 하나의 사업이구. 한꺼번에 두 가지 사업을 둘 다 잘 경영한다는 건 힘든
거야. 결혼할 때 그 직업은 그만두게 해야 했어. 네 와이프는 화가지? 달라, 여배우란 특수
한 직업이야. 그 육체 자체가 대중의 소유야. 여배우 자신이 그걸 잘 알고 있어. 대중의 소
유물을 너 혼자 독점하려면 대중들이 그 여자에게 줄 수 있는 것 이상을 네가 줄수 있어야
해. 대중들이 부러워할 명예라든가 어마어마한 돈이라든가 그 여자가 무슨 짓을 하든지 얼
마든지 용서할 수 있는 사랑이라든가. 비싼 창녀란 말이군. 남편은 기생의 기둥서방이 되란
거구. 여자 중위 여자란 말이지. 모든 여자란 규모가 크고 작을 뿐 다 그런 거야. 만족의 한
계가 좁달 뿐 아무리 평범한 여자도 다른 남자가 주는 것 이상을 줄 때 독점 할 수 있는
거야. 남녀관계란 근본적으로 경제적 관계야. 남자끼리의 관계만 사상적 관계지. 부자와 가
난뱅이도 같은 취미로써 친구로 지내거든. 말 잘했다. 내가 증오하는 것은 너희 남자들 그
경제구조를 엉망으로 만드는 사상구조. 아이를 빨리 만들지 그랬니? 아이란 우리들의 신이
야. 인간적인 사랑이란 삼각형의 관계 형식 속에서만 가능하다구 생각해. 한 꼭지점에는 남
자, 또 한 꼭지점엔 여자 그리고 또 한 꼭지점엔 신이 있어야 하는 거야.
남자와 여자가 함께 바라보는 신이 있을 때 추잡한 거래관계를 벗어날 수 있는 거야. 신
이 없는 두 꼭지점만의 남자와 여자의 사랑이란 이기적으로 무한히 탐욕적인 동물적인 사랑
에 지나지 않아. 어느 한편이 상대를 잡아먹고서야 끝나는 투쟁에 지나지 않아. 끝나도 괴로
운 투쟁이지. 왜냐하면 상대를 잡아먹어 버렸으니 남은 건 고독한 자기란 말야. 신이 있으면
달라. 신에게는 남자도 여자도 다 있어 줘야 한다는 걸 알고 남자와 여자는 진실로 평등하
게 상대를 존중하게 되지. 서양 사람들에는 그 신이 있지만 신이 없는 우리들에겐 자신이
그 신 노릇을 하는 거야. 물론 그 신이 불변하고 영원한 하나의 신이 아니라 변하고 일시적
이고 수많은 신이기 때문에 우리가 만드는 삼각형은 불완전한 삼각형이고 너무나 많아서 충
돌하기 쉬운 다신교라고 해야 하겠지만 어쨌든 남자와 여자 사이에 추잡한 동물적 사랑이
아닌 숭고한 인간적 사랑을 최소한이나마 가능하게 해주는 거야. 신이 인간을 구제한다면
아이들이 우리를 구제해 주고 있는 거야. 아이를 빨리 낳았더라면 네 부부가 파경을 당하진
않았을 거야. 네 부인도 달라졌을 거구. 그랬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도깨비가 붙어 있는 것
은 자궁. 유산 경험이 많으시군요. 습관성 유산입니다. 전쟁이 나면 고아원에나 가게 될 아
이, 안 낳으면 어때요? 나의 자리를 오염시킨 놈들은 누구냐. 철저히 불완전하고 위선적인
삼각형. 바로 너의 논리에 의하여 부정당해야 할 너의 주장. 아이는 신이 욀 수 없다.
아이는 언제까지나 아이로 있는 게 아니다. 아이를 갖지 않은 어른들, 아이를 잃어버린 어
른들이 된다. 내것이어야 할 아내의 처녀를 도둑질한 놈은 이십 대 미혼 청년이었고 아내를
돈으로 유혹한 놈들은 장성해버려 이젠 자식이라고 하기 어려운 자식을 가진 오십 대 사내
들이었다. 부모에겐 신이 되고 스스로는 악마인 두 가지 얼굴의 신은 신이 아니다. 탐욕적인
청춘, 이기적인 중년, 발기되는 노년들이 물처럼 공기처럼 빈자리를 메우려 드는 세계. 우리
의 삼각형은 그들 틈에 우글쭈글 뒤틀려 잠시 끼어 있을 뿐 상투적인 저녁이었다. 이름조차
잊어가고 있던 동창생으로부터 갑작스런 전화. 소문 들었다. 술 살게 나와라. 여자 얘기 또
돈벌이 얘기. 임마, 마셔, 마시고 잊어버려. 버스하구 여자는 오 분만 기다리면 오는 거야.
야, 오늘 저녁 너 이 손님 잘 모셔. 내가 왜 돈 벌려고 악착떠는 줄 아니? 이런 친구 위로해
주려구 그러는거야. 너 팁, 평생 잊지 못하도록 줄 테니까 잘 모셔야 해. 이 친구, 너무 순진
해서 여편네한테 구박받은 몸이니까 네가 인생 공부 좀 잘 시켜드려. 어머, 탈렌트 한영숙이
남편이에요? 야, 너 여편네 덕 단단히 보는구나. 나중에 이혼할망정 나두 탈렌트하구 결혼할
걸. 맙소사.
이혼 이후, 이혼의 충격으로 멍해 있을 때 생활은 엉뚱한 방향에서 이상한 틀을 가지고
나를 덮쳐 나를 그 틀 속으로 밀어 넣었다. 곡마단의 객석에서 무대 위로, 술의 늪으로, 음
모의 숲으로 나는 그것들의 부력에 나의 존재를 떠받치도록 맡기고 있었고 그래서 나라고
내가 생각하고 있던 이전의 나로부터 점점 멀어져 갔다 물론 이건 내가 아니라고 생각했지
만 그 전에도 항상 이건 내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살았었다. 이건 내가 아니고 이전의 내가
나라고 한다면 이전의 나는 그 이전의 나를, 그 이전의 나는 그 이전의 나를... 그리하여 나
는 무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건 내가 아니라고 하는 바로 내가 나임을 나는 안다. 어
느 때나 돼야만 이건 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그건 꿈속의 꿈임을 나는 안다. 나는 이전
의 나로부터 멀어져 감으로써 아내 쪽으로 가까워지리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떠내려 가도 가까워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내나 친구나 그리고 내가 알고 있던 모든
사람들과 이전의 나는 그때의 그 관계대로 어느 시점에서 영화의 정지된 화면처럼 멈춰서
지나가 버린 시간의 땅 위에 남겨진 채고 나 자신에게조차 전연 낯선 나만이 낯선 여자들과
함께 가까워질 아무 곳도 발견하지 못한 채 캄캄한 바다로 떠내려 가고 있었다. 그 어두운
바다는 전연 다른 법칙으로서 역시 상투적이었다. 타인끼리만 지키는 캄캄한 법칙의 바다였
다. 그런 바다에서 어떤 변화를 기대하거나 시도하는 것은 위험했다. 육지에서 변화를 기대
하는 자는 잠시 얕은 바다에 뛰어들면 되지만, 되돌아가고 싶은 육지도 없이 바다의 부력에
만 존재를 밭기고 떠내려 가는 자가 변화를 시도하려면 물 속 깊이 빠져 버리는 수밖에 없
다. 바다 밑에서 딴 세계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의 그것은 죽음일 것이다.
캄캄한 부력은 그런 위험한 시도로부터도 나를 떠받치고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지난 3개월 동안 60명 이상의 여자와 관계했다. 세면이 일과의 하나이듯
성교 역시 일과의 하나였다. 매번 다른 여자라는 사실은 매일 낯선 지방으로 여행하는 것과
흡사했다. 빨리 통과해 버리고 싶은 여자가 있었고 며칠이고 머물고 싶은 여자가 있었다. 그
렇다. 그것은 여행이었다. 가는 곳마다 고향과 비교해 보듯 여자마다 아내와 비교해 보곤 했
다. 그러나 모두가 고향과 닮았으나 아무데도 고향은 아니듯 모두가 아내를 닮았으나 아내
는 아니었다. 실제로 며칠이고 머물고 싶어 붙잡은 여자고 마침내는 비용만 축낼 뿐 어느
순간에선가 역시 타향이라는 깨달음만 안겨 주는 것이었다. 나의 타향을 자기의 고향으로
가진 사람들이 있듯 나에겐 타인인 그 여자들을 고향으로 갖고 있는 남자들이 있다는 사실
도 알 수 있었다. 몇 개의 마을을 지나치는 동안 배치가 다르고 가꿈이 다르고 규모가 다를
뿐 결국 모든 곳이 집과 길과 숲과 냇물 둥으로 이루어져 잊음을 알게 되듯 그 마을의 생활
속으로 들어갈수 없고 또 번해서 들어가기도 싫은 여행자에게는 여행의 시작에 느꼈던 기대
와 흥분도 이내 잃어버리고 지저분하나마 익숙한 고향 거리에 대한 향수만 짙어갈 뿐이었
다. 마침내 향수의 고통으로써 허전한 여행자는 아무리 잘 꾸민 도시에서도 지저분한 고향
의 모습과 닮은 구석을 발견했을 때만 우두커니 발길을 멈춘다. 마을마다 역사가 다르듯 살
아온 얘기가 다르고 마음마다 주민이 다르듯 사소하나 친밀한 생활을 함께 하는 사람들을
따로 갖고 잇는 그 모든 여자들과 나의 아내가 공통되는 것은 오직 음부뿐이었다. 첫날밤
아내가 잠든 후에 살그머니 들여다보고 그 부분만은 악마의 솜씨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며
구토증을 느꼈던 그 음부만이 이제는 가장 사랑스럽고 가장 소중한 고향의 모습이었다. 눈
만 뜨면 내 사고의 초점은, 강력한 모터로 움직이는 기계처럼 아무리 멎게 하려 해도 억센
침으로 내 의지를 밀쳐내 버리며 자동적으로 한 점으로만 집중하며 나를 목마르게 하는 나
날이 시작되었다.
여자의 음부로만, 오직 여자의 음부로만. 눈만 뜨면 내 앞에 마주서는 이미지는 여자의 육
체에서 떨어져 나와 혼자서 꿈틀거리고 느끼고 생각하고 울고 잠드는, 알맞은 볼륨을 가진
생명체, 음부였다. 그 이미지와 함께 있는 동안만 나는 살아 있었다. 그 밖의 모든 일과 시
간, 책을 보는 것도 친구와 만나는 것도 물건을 사는 것도 나에게는 무의미한 것이었다. 그
이미지의 실체를 만나려 나는 여자를 불렀다. 그러나 그때마다 만나는 것은 자기의 소중한
음부를 더러운 노예처럼 학대하며 사타구니에 차고 다니는 잔인할 만큼 이기적인 타인들뿐
이었다. 음부를 제거하고 나면 여자란 정말 경멸할 만큼 하잘것없는 것이다. 아아! 저 훌륭
한 생명체가 왜 여자들의 노예로서 끌려다녀야 하는 것인가! 여자가 떠나간 다음에야 그 생
명체는 서서히 여자로부터 분리되어 확대되면서, 내 앞에 마주서는 것이었고 다시 나를 안
타깝도록 목마르게 하는 것이었고 그래서 나로 하여금 또 여자를 부르게 하는 것이었다. 하
루에 여섯 명의 여자를 차례차례 데려오게 한 날도 있었다. 이젠 나는 알고 있었다. 아내가
나의 아내인 동안에 다른 사내들이 내 아내한테서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음부를 더러운 노예
처럼 학대하는 노예상인의 잔인한 얼굴뿐이었다는 것을. 또한 나는 이제 알고 있었다. 음부
란 물론 그 자체로서 소중한 것이긴 하지만 아내와는 아무런 관련이 있을 수 없는 독립된
생명체라는 것을. 음부는 아내가 아니었다. 다만 아내가 내 곁에 있을 때 항상 데리고 있으
면 충분한 그 무엇이었다. 그런데 아내는 항상 내 곁에 있었던가? 그렇다. 아내는 나를 속이
면서까지 항상 내 곁에 잊으려고 했었다. 이제 나는 물체의 세계를 들여다본다. 중요한 것은
'있다'는 것이다.
의혹과 질투의 고통은 '있지 않다'는 것에 비하면 하잘것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여자가
나의 아내로 있는 동안 '친정집을 도와주기 위하여' 나 모르게 저질렀던 매음행위는 무시해
도 좋으리라. 그것이 법률이나 사회윤리에 저촉되는 짓이라고 비난하지는 말자. 법률이나 사
회윤리 같은 건 개나 처먹어라. 그것들은 만화 속의 경찰처럼 도둑이 아니라 쫓고 있는 피
해자를 소란피운다고 쫓고 잊을 뿐이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그 여자가 내 곁
에 잇지 않았었다는 믿음이 씻어지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왜 나는 첫날밤부터 그 여
자가 내 곁에 있지 않다고 믿어 버렸던가? 내가 그 여자에게 바랐던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아무래도 가장 단순하고 가장 불가능한 것, 내가 그 여자의 최초의 남자가 아니라는
것뿐이다. 그 여자의 나와 알기 이전의 과거까지 소유하고 싶은, 불가능한 욕망 때문에, 음
부와 그 여자를 분리시켜 봐도 여전히 그 여자는 부재인 것이다. 그러나 과거를 소유한다는
것이 과연 불가능한 것일까.
결혼하는 남자와 여자가 서로 가져가는 것은 결코 가구나 패물만이 아니다. 자기들의 모
든 과거를 짊어지고 만나는 것이다. 친정 식구들마저도 그 여자의 과거로서 남편에게 가져
가는 것이다. 이미 돌아가신 할아버지 할머니마저도 얘기라는 수단으로써 짊어지고 가는 것
이다. 마땅히 아내는 과거의 연장인 처녀막을 가지고 오든지 아니면 죽은 할아버지처럼 과
거의 남자를 구화를 통해서 데려다 놔야 할 성이다. 그런데, 라고 나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밤의 파도 위에서 만난 수많은 여자들에게 나는 그 여자들이 최초의 처녀를 상실했을 때의
사정을, 상대 남자를, 때와 장소를, 그 일이 그 여자에 끼친 영향들을 묻곤했다. 그리고 망설
이면서 또는 거리낌없이 그 여자들이 묻는 대로 자세히 얘기를 할 때 나는 과연 그 여자들
이 과거를 짊어지고 나한테 왔다는 느낌이 들었던가? 오히려 반대로, 얘기를 하고 있는 동
안 그 여자들이 당당한 걸음걸이로 과거를 향해 떠나 버리는 것을 보지 않았던가! 그 여자
의 과거는 내 손에 잡았지만 그 여자 자신은 내 손에서 빠져나가 버리곤 하지 않았던가. '있
다'는 것이 중요한 물체의 세계와 과거마저 소유하고 싶은 욕망은 동시에 성취될 수 잇는
것인가? 아무래도 그것은 내 소유욕을 유발시키는 과거가 아내에게 없었어야 했고,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차가 도착한 것은 오후3시쯤이었다. 차임벨 소리에 현관문을 열어 보니 이 기사가,
"백마가 아주 늘씬합니다. 고분고분 말귀도 잘 알아듣구요."
나는 흰색으로 주문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이빨을 닦던 중이라 칫솔을 입에 문 채 나는
베란다로 나가서 차를 굽어봤다. 하얀 차체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나는 현기증을 느끼며 비
틀거렸다. 고등학생일 때 공중목욕탕에서 칸막이 사이로 우연히 눈에 뜨인 여자의 알몸을
보았을떄도 머리 속의 모든 것이 기화하여 순식간에 새어나가 버리는 듯한 현기증을 느꼈었
다.
"자, 어서 한번 밟아 보세요."
이 기사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나는 우두커니 차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니 차를 보고 있
는 게 아니라 내 앞에서 자꾸만 확대되고 이는 공간과 시간을 넋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
것은 허공처럼 무색으로 확장되며 나에게 묻고 있었다. 넌 도대체 이 차를 가지고 어쩌겠다
는 거냐? 무얼로써 이 공간과 시간을 채우겠다는 거냐?
어쩌겠다는 계획이라고는 하나밖에 없었다. 차를 가지게 돈 날 준비해뒀던 예금통장을 아
내였던 여자에게 갖다 주겠다는 것이었다. 우리의 재산을 공평하게 분배함으로써 비로소 나
는 아내였던 여자에게 마음의 빚을 갖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눠 차를 샀는데 너도
사고 싶은 거 사렴. 아파트를 위자료로서 자기한테 줬으면 하던 아내의 눈치가 항상 마음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아니다. 나는 제의하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 시험삼아서 이제부터 새로
시작해 보지 않겠어? 되면 되고 안되면 제자리지. 자, 나도 이만하면 준비가 돈 거 같은데.
이 기사를 옆에 태우고 신호가 열리는 길이면 아무데로나 닥치는 대로 차를 몰려 시운전
을 했다.
"불안할 때는 곧 길 옆으로 비켜서 차를 세우세요. 억지로 참으면 사고가 나요."
말하는 이 기사를 형님 집 근처에 내려 주고 나는 방송국으로 향했다.
내가 냄 처음 찾아갔을 때처럼 아내였던 여자는 분장한 모습으로 다방에 나왔다. 싸우고
헤어진 남편 대접을 해주기 위해 침통한 표정을 짓느라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나 차 샀어."
말하자마자 그 여자는 언제 침통했더냐는 듯이 표정을 활짝 걷어 버리고 깜짝 반가운 음
성으로,
"정말? 어디?"
보고 싶다는 듯 고개를 다방 입구 쪽으로 돌렸다. 아내만 아니라면 얼마나 사랑스러운 여
자일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태워 줄게, 시간 있으면..."
"지금은 안되고, 구경이나 해요."
우리는 주차장으로 향했다. 가는 동안 나는 팔짱을 껴주지 않는 여자를 바싹 곁에서 느껴
야 하는 고통에 시달렸다. 이따금 그 여자의 팔과 부딪치곤 하는 내 왼팔이 어깨에서 손끝
까지 마비된 듯 무거웠다. 안방에서 식탁 앞까지 가는 동안에도 팔짱을 끼곤 하던 여자였다.
애정의 몸짓이라기보다 그 여자의 버릇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내가 운전하는 차로 그 여
자를 방송국에 데려다 주고 데려오겠다고 얘기하던 시절이 안타깝도록 그리워지고 그 여자
에게 차 구경은 시킨다는 것을 잔인한 일 같았다.
"어머, 레코드네!"
내 차 앞에서 탄성을 내지르는 그 여자를 보고서야 나는 내가 가장 비싼 차를 구입한 이유
를 처음으로 알았다.
"왜 흰색으로 했어요? 안방 마님이 타는 차 같잖아요."
"나도 모르겠어 괜히 하얀 색이 좋아 보여서... 잠깐 차에 타지."
"안돼요. 일곱 시까진 계속 녹화예요. 차 태워 두고 싶으면 일곱시 반쯤 오세요."
"아니, 차 타고 어디 가지는 게 아니구 잠깐 할 얘기가 있어."
"그럼 다시 다방으로 가요. 이혼한 줄 다 아는데 차 속에 다정하게 앉아 있으면 남들이 웃
어요."
"그럼 여기서 말하지."
나는 예금통장과 그 여자의 이름을 새긴 도장을 건네줬다.
"이게 뭐에요?"
"아파트를 팔았어. 우리 둘이 나눠 갖는 거야. 난 이 차를 샀어. 내가 좀더 많이 가졌지만
받아줘."
통장을 받들고 있는 그 여자의 손이 가늘게 떨고 있었다. 진실로 침통한 표정이 그 여자
의 분장을 헤집고 새어나왔다. 고통을 참고 있는 관자놀이를 보다 나는 울부짖으며 그 뺨을
후려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잠시 후에 그 여자는 사색이 끝났다는 듯 미소를 띠고,
"위자료군요?"
이제야 이혼을 실감하겠다는 듯 말했다.
아냐, 위자료가 아냐. 너한테 위자료 같은 걸 받을 권리는 없어. 이건 유혹하기 위한 선물
이야. 이제부터 다시 시작해 보자고 유혹하는 뇌물이야.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으나 그 말
들은 지렁이 떼처럼 덩어리로 엉켜서 가슴속을 굴러다닐 뿐이었다.
"지나 놓고 보기 위자료 같은 거 안 받아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나는 나뿐 여자가 되는군요... 잘 쓰겠어요."
"저어... 나... 영숙이 아파트로 가끔 놀러가도 되겠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 여자의 눈이 깜박거리며 내 눈을 빤히 응시했다. 비행이 안에서
처럼, 비처녀를 감춰 주느라고 호들갑을 떨고 있는 나를 바라보던 첫날밤처럼. 그렇다. 이
여자가 저런 눈이 될 때마다 우리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곤 했던 것이다. 자, 무슨
일이 생길 것인가?
갑자기 그 여자의 한쪽 콧구멍에서 검붉은 피가 한 줄기 흘러내렸다. 호주머니를 뒤졌으
나 내 호주머니 속에 손수건 따위가 있을 리 없다.
"고개를 젖혀."
손을 가져가려 하자 그 여자의 음성이 쉿소리를 냈다.
"손대지 말아요."
방송극의 대사처럼 그것은 평범한 일상의 음색이 아니었다.
"잠깐 소개를 젖히고 있어."
나는 약솜을 사기 위해 주차장 건너편에 있는 약방으로 달려갔다. 그 여자를 위해서 어디
론가 마냥 달리고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달리고 있는 몸에 썩은 감정들이 달라붙을 자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약솜을 사 가지고 왔을 대 그 여자는 없었다. 찢어진 통장의 종이
조각들만 마음의 쓰라린 파편으로서 땅바닥에 널려져 있었다. 나 역시 그 여자와의 완전무
결한 별을 처음으로 실감했다. 증오의 고통도 함께 찢겨져 버린 것이다.
두고 온 사람(지은이: 유재용)
단지와 병국이가 처음 우리 집에 온 것은 왜정말, 그러니까 해방되기 바로 전 해 늦은 봄
이었다. 그 무렵 우리 집에서는 몇 해 동안 수양딸로 있으면서 부엌일을 도맡아해 오던 갓
난이가 시집을 가서 새 수양딸을 구하고 있던 참이었다.
어느 날 내가 학교에서 돌아와 점심을 먹고 있는데 대문 밖에서 찾는 소리가 들렸다. 찾
는 소리가 두서너 차례 들리고 난 뒤, 우리 집에 와서 안잠자기 노릇을 하고 있던 먼 일가
아주머니가 구석방 문을 열고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대문간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나고
아주머니가 돌아 들어와 안방 문을 열었다.
"성님, 재밑말에서 사램이 왔는데유."
아주머니는 문 안으로 얼굴만 들이민 채 말했다.
"재밑말?"
"성님이 전번에 쉬엉딸루 들어올 색시애 하나 구해달라구 하셌지유?"
"그랬지. 애 데리구 온 사램인가?"
어머니는 방문 앞으로 가 팔꿈치로 방 문지방을 짚고 앉아 문을 열어제꼈다. 대청 마루
앞 퇴방 아래 추레하고 늙수그레한 사내 하나가 엉거주춤 서 있다가 굽신 허리를 굽혔다.
"아이들을 데리구 왔는뎁쇼니까."
대문간에 쳐녀애와 총각애가 쭈삣거리며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딸이우?" 어머니가 물었다.
"딸이나 다름읎습죠니까."
"다름읎다니, 친딸이 아닌게유."
"그런 것이 이나숩쇼, 말씸올리자믄 메눌아이입죠니까."
"메눌아이?"
"잔치를 치른 건 아니굽쇼니까 민메누리루 데려다 기른 아인데 밥은커녕 죽 세 끼두 제대
루 멕일 수가 읎는 헹펜이라..."
"저 총각아이가 아들인 게유."
"예, 두 아이 다 맡아 부리시다가 나이 차믄 잔칫상이나 차레 주셌으믄 합죠니까."
"아들아이두 두구 가겠다는 기우? 허기야 둬두믄 바깥 심부름 시키구 좋긴 하지만서두, 다
큰 총각 처녀를 한지붕 밑에 뒀다가 잔치두 지내기전에 일 저지르믄 어떡하우?"
"염려마십쇼니까. 지가 아이들한테 단단히 일러두기두 했습죠만, 메눌 아이가 으젓해서 아
들아이가 함부로 굴지를 못합죠니까."
"멫살씩이나 먹었우?"
"메눌아이는 열 일곱이구, 아들아이는 열 여섯입죠니까."
"신랑이 한 살 아래구만."
어머니는 대문간에서 아직도 쭈삣거리고 서 있는 두 아이들을 웃음 담은 눈으로 쳐다보고
나서
"그럼, 아들아이두 두구 가시기우. 그리구, 동서, 쌀 둬 말 퍼다가 이 사람 들려 보내게."
아주머니한테 일렀다.
단지와 병국이는 제 나이보다 한두 살씩 어려 보였다. 단지는 키는 훌쩍 컸지만 계집아이
티를 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고, 병국이는 단지보다 키도 훨씬 작아 소학교 육 학년이라면
알맞아 보였다. 어려운 집안에서 못 먹고, 못 입고 격식차리지 못하고 자라나, 촌스러운 데
다가 삐쩍 마르고 가무잡잡한 것이 어느 한 모퉁이 찌그러졌거나 졸아든 것 같은 몰골이었
다. 그렇다고 거칠은 땅의 잡초처럼 억세 보이지도 않았고 어리숙하고 수더분하기만 했다.
"그래, 병국이하구는 은제부터 정혼한 새냐?"
우리 집에 온 지 며칠이 지나서 서먹서먹한 기색이 가셨다 싶었을 때 아주머니가 단지한
테 물었다.
"모르겄어유, 어버이끼리 증해 놨다니깐유."
단지는 별로 부끄러운 기색 없이 대답했다.
"양쪽집 으른들끼리는 퍽 가깝게 지냈던 모양이지?"
"모르겄어유. 전에 우리 할머이 말루는 우리 아버이하구 병국이 아버이하구 단짝 친구랬는
데, 지가 여덟 살되던 해 설날에 같이 술을 먹다가 우스갯소리삼아 사둔 맺자구 한 것이 증
말이 돼 버렸대나봐유."
"병국이네 집인 멫 살 때 들어갔는데?"
"열 살 때래유. 아버이가 돌아가구 어머니가 어디루 가 뻐리구 나서 들어갔대유."
"그래 어떻데? 저게 내 신랑될 사람이거니 생각하니까 마음이 어때?"
아주머니는 무슨 대답이 나오나 보자는 듯 짓궂게 물었다.
"모르겄어유. 어려서부텀 같이 산데다가 키두 나부더 쬐꼬마니깐 동생 같기만 해유."
"동생? 하, 하..."
단지는 구석방에서 아주머니와 함께 잠을 잤지만, 병국이는 길 건너 양주장 객실에서 혼
자 잠을 잤다. 장차 맺어질 사이여서 더욱 내외를 시키느라고 각각 다른 지붕 아래서 잠을
재우는 것이었지만 단지와 병국이는 장차 부부가 될 사이가 아니라 진짜 오누이 같았다. 서
로 마주 대하고서도 어색하거나 조심스러운 구석이라고는 한 군데도 없었다. 너 나, 얘 쟤,
단지야 병국아, 서로 부르면서 거침없이 이것저것 지껄여대기도 했고 틈이 날 때면 때리고
도망치고 뒤쫓고 하면서 스스럼없이 장난질을 치다가 어머니한테 야단을 맞고는 조용해지곤
했다.
병국이가 오고 나서부터 나는 밤똥을 누러 갈 때 아주머니 대신 병국이를 데리고 뒷간에
를 가곤 했다. 그 무렵 나는 낮에는 멀쩡하다가도 어떻게 돼서 밤만 되면 꼭 똥이 마려웠는
지 알 수가 없었다. 작은 뒷마당을 지나 그때는 사람이 살지 않던 뒷채의 좁고 칀 봉당을
지나 다시 큰 뒷마당을 건너 그 맨 끝 닭이우리와 돼지우리를 돌아 구석에 자리잡은 뒷간에
를 가야 하는 것은 내 하루일 가운데 그중 힘든 일이었다. 귀신이 뒷간에 숨어 있기를 좋아
한다는 얘기가 이 얘기 저 얘기 속에 흔하게 나오는 터여서 나는 소름이 끼치고 머리칼이
일어서곤 했다. 뒷간에 들어앉은 나는 뒷간 문을 활짝 열어 제끼고는 그 문 앞에 촛불을 든
병국이를 바짝 다가세워 놓고는 무슨 얘기든지 큰 소리로 쉴새없이 떠들라고 졸라대곤 했
다. 그러면 병국이는 별이 돋은 깜깜한 하늘로 얼굴을 추켜들고는 곡조도 안 맞는 노래를
소리 높여 불러대곤 했다. 한 가지 노래가 끝나면 다음 노래를 또 다음 노래를, 그러다가 노
래 밑천이 다 떨어지도록 내가 뒷간에서 나오지를 않으면, '아, 똥 냄새, 규만이 똥 냄새는
구수한 똥 냄새...' 이렇게 지어 부르기도 했다. 병국이와 뒷간에를 다닌지 얼마 안 되어 이
웃 사람들이,
"규만네 뒷마당에서는 밤마다 이상한 노랫소리가 들리니 어떻게 된 심판이에유?" 이렇게
물어와 속사정 얘기를 듣고는 우습다고 허리를 꺾곤 했다.
저녁을 먹고 나면 갑자기 무슨 일이 생기는 때를 뺴고는 병국이는 일에서 풀려나 자유의
몸이 되곤 했다. 병국이가 하는 일이라는 것이 장작을 꺼들이거나 물을 깉거나 친척집이나
동네 다른 집들에 심부름 다니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낮에는 아버지나 어머니가 즉시즉시
심부름을 보낼 수 있도록 늘 곁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그래서 밤이 되면 나도 덩달아 자유
의 몸이 되는 기분이었다. 대문 앞에 서면 비스듬히 길 건너편에 양주장이 바라보였다. 아버
지가 경영하는 우리 집 양주장이었다. 날이 어둡기 전까지는 아이들은 길에서 놀았지만, 어
두운 뒤에는 놀기가 어려웠다. 등화 관제로 불빛이 집 밖으로 새어나오지를 못해 땅이 보이
지 않을 만큼 어두웠고, 달이 뜬 날이라도 칼찬 일본 순사들이 아이들을 집 안으로 몰아넣
곤 했던 것이다. 날이 어두워진 뒤에는 초저녁이라도 아이들은 모여 놀 데가 없던 차였다.
한테 병국이가 양주장 객실에서 잠을 자게 되자 아이들은 밤이면 그리고 모여서 놀곤 했다.
병국이는 겉모양과는 달리 무서운 얘기, 슬픈 얘기, 우스운 얘기 등 가지가지 많은 얘기를
알고 있어서 아이들은 넋을 잃고 병국이가 하는 얘기에 귀를 기울였고, 또 병국이는 방에서
할 수 잇는 놀이도 여러 가지 알고 있어서 아이들은 놀이에 정신이 팔려 밤 가는 줄 모르고
있다가 집에서 부르러와서야 할 수 없이 엉덩이를 들어올리곤 했다.
나는 병국이가 퍽 마음에 들었다. 많은 이야기나 재미있는 놀이를 알고 있대서만이 아니
었다. 나는 나보다 크고 나이 많은 사내아이와 한 집에서 살게 된 것이 마음 든든했던 것이
다. 그때 나는 소학교 삼 학년, 나는 늘 형이 많았으면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형들과 한
집에서 살고 있는 다른 아이들이 몸시 부럽게 여겨지곤 했었다. 한데 하나밖에 없는 내 형
은 공부하러 일본에 가 있어서 나는 늘 허전했던 것이다.
나는 낮에도 산 같은 데 놀러 갈 때면 어머니를 졸라 병국이를 데리고 가곤 했다. 병국이
와 같이 있으면 마음이 든든하기도 했거니와 병국이가 아이들 틈에 끼어들면 놀이가 훨씬
재미있어지기 때문이었다. 병국이는 밖에서도 저보다 나이 어린 아이들과 어울려 잘 놀아
주었고, 다람쥐를 잡는 법이나 새 알이 들어 있는 새 둥지 찾아내는 법, 그리고 시엉이나 꾀
꼬리 풀같이 먹는 풀도 많이 알고 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해 주었다. 병국이는 그물질
도 잘 했고 물고기가 많이 있는 데도 잘 알고 있어서 언젠가는 병국이와 함께 개울에 나가
서 잠깐 동안에 물고기를 한 사발이나 잡아 온 적도 있었다. 여름이 되면 미역 감으러 가는
데도 병국이를 데리고 다니리라. 나는 봄이 다 가기도 전에 벌써 그런 생각을 했다.
"병국아, 너 미역 잘 감니?"
어느 날 나는 물었다.
"잘 감지. 우리 집 근처에 큰 저수지가 있는데 난 헤엄쳐서 거길 건너갈 수 있어."
"야! 그럼 아주 잘 하는구나. 여름에 같이 미역 감으러 댕기자."
나는 병국이가 넓은 저수지를 헤엄쳐 건너가는 모습을 머리 속에 그려보며 신이 나서 말
했다.
허지만 여름은커녕 며칠 지나지 않아서 병국이를 데리고 다닐 수 없게 되었다. 학교에서
학생 한 사람 앞에 말린 고사리 한 관씩을 가져오라는 숙제를 내 주었기 때문이었다. 육 학
년에 다니는 누나와 나, 둘이 소학교에 다니는 우리 집은 말린 고사리 두 관을 해다가 바쳐
야 했던 것이다. 사람들이 앞서서 거쳐가 고사리라고는 구경도 할 수가 없다는 것이고, 천상
먼 산으로 가야 하는데 거기도 야산은 사람들이 거쳐갔거나 고사리가 쇠버려 깊은 산 속으
로 들어가야 고사리 구경을 할 수가 있다는 것이었다. 저녁때 산에서 돌아오는 병국이의 고
사리 보따리는 제법 불룩했지만 펼쳐놓고 보면 고사리보다는 삽주니 취니 하는 여느 산나물
이 더 많았다.
"산나물이 생겨서 좋긴 하구만서두 이렇게 뫄 가지구 은제 말린 고사리 두관을 해 놓니?"
어머니가 한탄 비슷하게 말했다. 고사리를 사서 보낼 생각을 해도 살수가 없다는 것이었
다. 어떤 집에서는 사람을 놓아 근처 장 서는 날 장마당마다 뒤져 봤지만 헛수고였다고 했
다. 고사리 값이 올라 산골사람들은 왼식구가 발벗고 나서서 고사리를 꺾어내리지만 장마당
은커녕 모이기가 무섭게 선돈 받은 집에 갖다 대 주기 바쁘다는 것이었다.
"아니, 고사리는 뭣 할라고 그렇게 많이 꺾어 오래나유?"
동네 부녀자들이 길에서 만나면 인사말이 되다시피 했다.
"싸움하는 병정들 반찬 해 준답니다."
"병정들이 고사리를 그렇게 좋아하나유?"
"고사리가 든든하기두 하거니와, 고사리를 먹으면 여자 생각이 덜난대유."
"시상에 별소릴 다 듣겄네."
어쨌든 병국이 혼자 힘으로 그 많은 고사리를 해 놓을 수가 없어 단지와 아주머니도 열일
제쳐 놓고 산에를 갔고, 나중에는 양주장 인부들까지 고사리를 꺾으러 산에를 가야했다. 그
렇게 해서 우리 집에서는 겨우 말린 고사리 두 관을 학교에다 바칠 수가 있었지만, 장마를
빼 놓고는 결국 여름을 그렇게 지내 버린 셈이었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되었을 때, 단지와 병국이는 사뭇 다른 모양이되어 있었다. 병국이
는 키가 크고 콧수염이 듬성듬성 돋아나고 목소리가 패어 어린아이 티를 벗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병국이는 그냥 가무잡잡하고 삐죽한 것이 어린아이 티를 벗어나서 제법 컸구나 생각
될 뿐이었다. 한테 단지는 그렇지가 않았다. 아주 딴사람이 되어 있었다. 키가 더 크고 몸집
이 불어난 것은 몰론이려니와 달덩이처럼 피어나 희멀개진 얼굴은 도무지 몇 달 전 처음 우
리 집에 왔을 때의 단지가 아니었다. 희어진 것은 얼굴뿐이 아니었다. 온몸이 껍질이라도 벗
은 듯 깨끗하게 의어져 있었다. 버짐먹은 검은 얼굴, 야윈 목줄기와 어깻죽지, 젓가락처럼
가느다란 팔과 종아리, 그 찌들고 검은 몸뚱아리에 어떻게 저토록 푹신하게 살이 오르고 희
멀개개질 수가 있는지 다시 생각해 봐도 모를 일이었다.
"이년 엉덩짝 커진 거 봐."
아주머니는 날마다 잠까지 한 방에서 자면서도 몇번이고 새삼스럽게 단지를 놀려대곤 했
다. 후릿한 키에 틈실한 몸짐, 무던하고 탁트여 보이는 잘 생긴 얼굴, 치렁치렁 허리까지 땋
아늘인 탐스런 검은 머리, 단지가 가게에라도 가려고 문밖 출입을 할 때면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지나는 사람들이 한번씩 더 쳐다보고 했다.
"부잣집 밥이 좋긴 좋구나. 처음 왔을 젠 당초에 생겨나기를 짜브러진 까막콩장으로 생겨
났나 했더이 못 얻어 먹어 그랬었구나. 느집이선 밥두 제대루 못 먹었니?"
이웃 아낙네들도 달라진 단지를 보며 물었다.
"이팝은 가을께나 쬐꼼 먹어 보구유, 겨울게는 내내 씨레기죽이구 봄에는 나물죽이나 소낭
구껍질 벳게다가 송기떡 해 먹구, 여름에는 감재나 밀갈기 밀지울이나 강냉이루 끼니를 떄
우는데 그것두 맘껏 배채워 보들 못해유."
단지는 감추는 것 없이 술술 대답했다.
그래 그런지 단지는 근심걱정 따위는 눈꼽만큼도 없이 마음이 한없이 편안하다는 듯 늘
얼굴빛이 밝았다. 힘에 겨운 일을 시켜도, 일이 서툴다고 야단을 맏아도 눈살 한번 찌푸리는
일 없이 얼굴에는 늘 환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그 푹신한 등에 업히고 싶어 하루에도 몇
하례씩 업어달라고 내가 졸라도 그때마다 단지는 환한 얼굴로 내 청을 들어주곤 했다. 하지
만 단지는 몸집따라 하는 짓도 의젓해져 있었다. 병국이와도 서로 구순하게 얘기를 했지만
전처럼 씨덕거리지는 않았고, 더군다나 건드려 놓고 도망치고 뒤쫓고 하는 따위 장난은 하
지 않았다. 단지와 병국이가 얘기하는 것을 보면 말하는 쪽은 주로 병국이었고, 단지는 병국
이가 말하는 것을 잠자코 듣고 있다가 빙긋이 웃는다든가, 이런 일은 이렇게 하라든가 저런
일은 하지 말라든가 하고 타이르는 투로 대답을 하곤 했다.
"단지는 시방이라두 시집을 보내겠는데, 병국이 녀석은 안적 아이 때를 다 못 벗었으니 단
지 너 족두리 쓰고 연지곤지 찍어 볼래믄 멫해 더 지댈려야겠다. 허긴 병국이 녀석두 이젠
커서 사내냄새가 쬐꼼씩 풍기더구나. 단지야, 오샌 병국이가 신랑 같아 뵈데?"
아주머니가 심심풀이삼아 툭 건드리듯 말을 꺼내면
"안적 동생 같애유."
단지는 웃으며 대답했다.
"병국이 녀석이 스무 살만 돼 봐라. 그땐 니 눈에두 듬직한 신랑감으루 뵐걸."
"글쎄유, 모르겄어유 지금 같애선 동생 같아만 뵈니깐유."
그래두 단지의 말투에는 병국이를 깔보는 기색 같은 것은 섞여 있지 않았다.
"병국이 아버이두 우리 친아버이 같기만 하구유, 병국이 생각을 할 젠 걔하구 나 같이 집
떠나온 오뉘거니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유."
이런 말을 할 때만은 단지의 얼굴에 따사로움과 함께 서글픔 같은 것이 지나는 구름 그림
자처럼 슬쩍 걸쳤다가 스러지곤 했다.
단지도 병국이도 저희 집에 다녀오고 싶은 생각은 그닥 없는 것 같았다. 굶주리기만 했던
집 생각이 그리움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추석 때 집에를 다녀오겠느냐
고 물었을 때도 그만두겠노라구 꾸물대지도 않고 대답했다. 그곳에는 병국이 아버지가 근본
도 모르는 헌 여자를 얻어다 살고 있을 뿐 단지네 쪽으로는 먼 일가붙이 하나 없다는 것이
었다. 하기야 병국이 아버지도 근본이 분명한 사람인 것 같지는 않았다. 병국이 아버지는 아
이 적에 떠돌이로 굴러들어와 남의 집 심부름과 머슴살이를 하다가 병국이 어머니한테 장사
를 들고는 남의 땅을 빌어 부쳐먹고 살았는데, 나의 들어 힘에 부쳐선지 땅 임자한테 잘못
보여선지 이 근래는 농사도 안 짓고, 인근 장마당을 돌아다니며 보퉁이 장사를 해 먹고 산
다고 했다. 그래도 추석 때 단지와 병국이가 다녀가기를 기다렸음인지 추석 이튿날 병국이
아버지가 찾아와 술과 점심을 대접받고 쌀 두말을 얻어 가지고 돌아갔다. 하기야 그 동안에
도 병국이 아버지는 한 달에 한 번쯤 아들 며느리가 궁금해서 왔다는 핑계로 찾아와 술과
점심을 대접받고 쌀을 얻어가지고 돌아가곤 했었다. 부자간의 상면이 그토록 서먹서먹할 수
가 없었다. 한 달 만에 만나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도통 말이 오고가지를 않았다. 잘 잇는
것을 눈으로 봤으니 됐다는 것인지, 병국이 아버지는 대청 마루 한가운데에 차려 준 밥 상
앞에 앉아 술 마시고 밥 먹기에 정신이 팔려 있었고, 병국이는 병국이대로 즈 아버지 등 뒤
쪽 마루 끝에 마지못한 듯 걸터앉았거나 댓돌 옆에 말뚝처럼 서 있다가 슬그머니 뒤란으로
들어가 버리곤 했다. 단지가 오히려 곰살궃게 굴었다.
"찬밥 많은데 더 드세유."
"장사는 잘 되세유?"
제법 며느리답게 답상머리에 붙어앉아 집안 안부 붇고 술 따르고 반찬 권하곤 했다. 병국
이 아버지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면서 밥 그릇 반찬 그릇 술 주전자 싹싹 쓸어 비우고는
트림하면서 상을 물렀다. 그러면 어머니는 단지를 시켜 쌀 뒤주에서 쌀을 퍼내 자루에 담아
가지고 병국이 아버지 옆에 놓아 주었다.
"어이구, 올 적마다 이 귀한 물건을 주세서..."
병국이 아버지는 어물어물 말끝을 흐렸다.
그렇게 추석 이튿날 다녀간 병국이 아버지가 보름 뒤 죽었다는 소식이 왔다. 병국이는 눈
이라도 가려운 듯 주먹으로 두어 번 눈을 문질렀고, 단지는 잠시 치마폭으로 얼굴을 싸고
앉았다가 일어나 수챗구멍에 코를 풀었다. 단지와 병국이는 장사를 치르려고 집에 갔다가
사흘 뒤에 돌아왔다. 그날 일본에 공부하러 가 있는 형한테서 전보가 오지 않았더라면, 병국
이 아버지 장사 지낸 일이며, 왜 그렇게 별안간 죽었는지, 남아있는 병국이 계모는 어떻게
되는지 하는 따위 궁금한 일들이 어머니나 아주머니 입에 한동안 오르내렸을 것이다. 하지
만 형한테서 전보가 온 마당에서 이미 죽어 없어진 병국이 아버지 같은 것은 하루아침에 잊
어먹은 이야기가 돼 버리고 말았다.
형이 집으로 돌아온다고 했다. 아니, 형은 벌써 일본에서 건너와 서울에 있었는데, 집에
오려고 서울에서 기차를 타기 바로 전에 전보를 쳤다는 것이었다. 16시 30분 도착. 형은 서
울에서 원산 가는 기차를 타고 오다가 철원에서 내려, 다시 금강산 들어가는 전철을 갈아타
고 집으로 올 것이다. 내 고향은 철원에서 금강산 쪽으로 이백 리 쯤 들어와 금강산에서 백
리 쯤 못 미쳐 잇는 읍만큼 큰 면 소재지였다. 할 일이 많다면서 방학 때도 다니러 오지 않
던 형이 학기중에 돌아온대서 아머니는 반가워하면서도 궁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
다. 나는 집에서 기다리고 앉아 있을 수가 없어 세 시가 되자 병국이를 데리고 역으로 나갔
다. 역은 광산 근처에 있어서 집에서 걸어 삼십 분 걸렸다. 동네 끝에서 양회다리를 건너 산
과 들 사이로 뻗은 신작로를 한참 걸어가다가 오른편으로 꺾어 들어가면 일본 사람들이 사
는 촌이 나왔는데 전철역은 그 한 끝에 있었다. 역 대합실에 들어가 시계를 보니 세 시 반,
아직도 한 시간을 기다려야 전차가 올 것이었다. 나는 그럴 줄 알고 주먹공을 가지고 왔다.
역 근처에는 광산에서 쏟아져 나온 황찌꺼기가 쌓여 학교 운동장 몇 곱절이나 되는 넓은 광
장이 생겨있었다. 사람들은 거기를 '황구덩이라고 불렀는데 축구 시합이 많이 벌어지곤 했
다. 울타리도 문도 지키는 사람도 없이 아이들이 아무때나 마음 놓고 뛰놀 수 있는 놀이터
였다. 황구덩이에는 아이들이 모여 뛰놀고 있었다. 우리 학교에 다니는 낯익은 아이들이 많
아서 나는 병국이와 함께 금세 아이들과 어울려 축구를 했다. 시간은 가는 줄 모르게 갔다.
철원에서 오는 전차가 남쪽 산모퉁이를 돌아오며, 뿌웅 하고 경적을 울려서야 아이쿠, 하고
는 역을 향해 숨이 턱에 차게 달렸다. 그래도 우리는 전차보다는 늦어서 역 대합실에 헐레
벌떡 들어섰을 때는 어느새 나온 누나가 형이 들고 있는 트렁크를 제가 받아들겠다고 승강
이질을 하고 있었다.
"성!"
나는 곧장 뛰어가 형의 한쪽 팔에 매달렸다.
"규만이로구나. 많이 컸는데."
형이 말했다.
"성, 우리 집에서 같이 사는 애야. 병국이라구,"
나는 병국이를 가리켜보았다.
"그래?" 형이 병국이를 돌아보자,
"그 짐 저 주세유."
병국이가 트렁크를 가리키며 말했다.
형은 트렁크를 병국이 손에 넘겨 주고는 양손에 누나와 내 손을 하나씩 잡고 역을 나섰
다. 우리는 내가 한 시간 반 전에 걸어왔던 그 길을 되밟아 집으로 돌아갔다.
"미국 비행기 공습이 갈수록 심해져서 제대루 공부두 할 수 없는데다가 학도병에 지원하라
구 성화를 대는 바람에 견딜 수가 있어야지요."
형은 아버지 어머니 앞에서 집으로 돌아오게 된 까닭을 이렇게 말했다.
"잘했다, 잘했어. 전쟁통에 공부가 무슨 소용이니? 그러 몸 성한 게 젤이여."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지만, 아버지는 한참이나 말없이 앉아 있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여기라구 그눔덜이 널 내베레두게씬? 핵교 공부라고 해서 왜놈의 말마디나 알아듣게 된
젊은 애덜은 여기서두 야금야금 다 끌어내 가구 있어."
"어디 짚은 산골에라두 들어가 있으믄 안 될라나?" 어머니가 겁먹은 눈을 하고 목소리를
죽여서 말했다.
"제가 집에 온 걸 저눔덜이 알 테니까 섣불리 숨었다가는 오히려 더 빨리 끌려나가게 될지
두 모르지요,"
"그럼 어쩌지?" 어머니는 풀이 죽어 말했다.
"아부지, 여기 광산에서 일하는 인부들은 징병에서 면제되지 않나요?"
형이 물었다.
"그래, 광산 인부는 징병이구 징용이구 끌려가지 않는대더라."
아버지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형은 아버지 옆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아부지, 그럼 됐어요. 저 광산 인부 자리 하나 마련해 주세요."
"뭐여? 니가 광산 인부 노릇을 하겠다구?"
어머니가 눈이 둥그레가지고 물었다.
"광산 인부야 집에서 점심밥 싸 가지구 댕기는 거잖아요? 일본 병정으루 끌려가 중국땅이
나 남양 섬에서 소식두 없이 죽어 버리는 것에 대면 얼마나 양반예요?"
"딴은 그렇구먼. 광산소장으로 있는 일본놈을 내 잘 알구 있으니까 나 말해 보마."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면에서뿐만 아니라 군을 통틀어 일등가는 부자라는 아버지와 힘은 과연 예사로 볼 것
이 아닌 모양이었다. 광산소장인 일본 사람은 아버지의 전화 한마디에,
'좋습니다. 광산 인부 자리를 꽉찼습니다만 특별히 한 자리 더 만들겠으니 자제분을 보내십
시오." 하고 선선히 대답했다는 것이다.
대학생이었던 형은 하루아침에 광산 인부가 되어 허름한 작업복에 '지까다비'를 신고, 뒤
꽁무니에는 수건을 꿰차고, '벤또'밥을 손에 들고는 날마다 새벽같이 광산으로 일하러 나가
곤 했다.
"시상두 어떻게 돼먹은 시상인지 부잣집 도령님이 광산 인부 노릇을 해야 되누?"
아주머니는 혀를 끌끌 찼고, 어머니는 날마다 형을 위해 특별히 기름진 반찬 장만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산이 깊은 탓인지 그 고장은 겨울이 빨리 왔다. 십일월 중순이면 얼음이 얼고 눈발이 날
렸다. 형이 광산에 나가기 시작한 지 한 달쯤이 되는 어느 날이었다. 아침부터 음산한 날씨
가 희끗희끗 눈발까지 날렸다. 형은 이불을 덮고 누운 채 병국이를 불렀다. 골이 아픈 듯 끈
으로 이마를 동여매고 있었다.
"병국아, 내가 몸살이 나서 오늘 광산에 못 갈 것 같으니 니가 대신 좀 가라."
형이 말했다.
"예, 근데 가기만 하믄 되나유?"
병국이가 물었다.
"내가 편지를 써 줄 테니 광산 사무실을 찾아가서 아무개를 찾아가지구 편지를 전해. 그러
면 그 사람이 잘 가르쳐 줄 게다."
형은 미리 써 놓은 듯 봉투에 넣어 봉한 편지를 병국이한테 내 주었다. 그날 아침 병국이
는 형을 대신해서 증명서와 벤또밥을 가지고 광산으로 갔다. 병국이는 형을 대신해서 정말
광산 인부 노릇까지 한 듯 날이 저물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 올바루 찾아가서 편지 전했니?"
형이 물었다.
"예, 찾기 쉽더굼유. 편지를 읽어 보더니 따라오래믄서 땅 속으로 데려다 쥐서 게서 일하다
왔는걸유."
병국이는 형의 부탁을 성심껏 이행했다는 듯 밝은 얼굴로 대답했다.
"애썼다. 낼 하루만 더 갔다와라."
형이 말했다. 이튿날도 병국이는 형을 대신해서 광산에 가 일을 하고 왔다. 그러자 형은
몸살이 다 나아 다음날부터 형이 다시 광산엘 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있을 뒤
부터 형은 며칠에 한번씩 병국이를 대신 광산에 보내고는 집에서 딩굴딩굴 쉬곤 했다. 그리
고 차츰 병국이를 대신 광산에 보내는 날이 많아져 갔다.
'그래두 되니? 고아산에서 아무 말 안 할래나?"
어머니가 걱정이 된다는 듯 물었다.
"걱정 마세요, 어무니. 제가 이렇다 할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모조리 귀삶아놨으니까
요. 병국이가 저 대신 아주 날마다 나가두 아무 일 없을 거예요."
형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어머니는 양복점에서 병국이 몸에 맞도록 작업복을 만들어 왔다. 신발은 병국이 발이 커
서 형이 신던 '지까다비'가 발에 맞았다. 그해가 다 가기 전 병국이는 형을 대신해서 아주
광산 인부가 돼 버렸다.
"병국아, 니가 광만이를 대신해서 광산에 댕기는 거 내 잊지 않구 마음속에 적어두마. 내
이담에 너한테 꼭 신세를 갚을 테니까나."
어머니가 말했다.
"뭘유. 괜찮아유."
병국이는 어머니가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벌써 받을 것은 다 받았다는 듯 오히려 황송해했
다. 어머니는 그런 병국이를 위해서 내의도 두툼한 것으로 내 주었고, 도시락 반찬도 좀더
마음을 쓰는 것 같았지만, 병국이는 당초부터 광산 인부는 제 몫이었다는 듯 꼬박꼬박 광산
엔 다녔다.
병국이한테 광산 인부 일을 떠맡겨 버리고 난 형은 방구석에 틀어박혀 차려다 주는 밥 먹
고는 답배 피우고, 책 읽고, 낮잠 자는 것이 하는 일이었다. 이웃 사람들이 혹시 형의 안부
를 물으면 어머니는,
"객지에 가서 고생을 하더니만 애가 병객이 돼가지구 왔구만유. 맥을 못 추구 밤낮 누워
있기만 해서 한 걱정이래유."
이렇게 광고를 하곤 했다. 형은 꼭 바깥에 나갈 일이 생길 때면 털모자를 깊숙하게 눌러
쓰고, 폭넓은 목도리를 목에다 친친 감고, 게다가 마스크를 해서 눈만 뺴꼼하게 내 놓고는
어꺠를 구부정하게 굽히고 기침을 쿨룩쿨룩 쏟아 놓아 마치 병원에라고 찾아가는 듯한 시늉
을 하곤 했다. 퍼뜨린 소문이나 형이 흉물떠는 내막을 뻔히 알고 있는 가까운 친척 친지들
앞에서는 형은 가면을 벗었다.
"왜놈들이 하는 전쟁에 끌려가서 대신 죽어 줄 필요가 없는 거구, 또 왜놈들 전쟁에 대 줄
물자를 내 손으로 파내구 싶지도 않아요. 결국 나 왜놈들의 전쟁에 이용당하지 않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고 있는 거예요."
이런 말을 할 때의 형은 역시 대학생이 다르구나 싶게 늠름해 보였다. 그 당시 대학생이
라면 얼마나 귀했는지 구경하기도 힘들었던 것이다. 형의 말을 들은 사람은 크게 감동한 듯
소개를 끄덕이면서
"대단하게 옳은 말이네만, 함부루 그런 소리 하믄 큰일나네. 입조심하게."
이렇게 충고를 하곤 했다. 어머니는 때로 선물을 보자기에 싸들고는 순사부장 집에나 광
산소장 집에를 슬그머니 다녀오곤 했다.
어쨌든 갇혀 지내거나 숨어 지내다시피 하는 형은 몹시 갑갑한 것 같았다. 대문을 걸어잠
슨 밤이면 형은 누나와 나와 단지를 형의 방으로 불러들여 윷놀이도 하고 화투치기도 하곤
했다. 윷놀이나 화투치기에서 진 사람은 두 손가락으로 팔뚝을 맞기로 되어 있었는데, 단지
가 질 적마다 형은 단지의 팔뚝을 겉어올리고는 있는 힘을 다해 때리곤 해서 단지의 흰 팔
뚝에 형의 손가락 자국이 빨갛게 돋아나고 나중에는 단지는 아파서 눈물을 찔끔찔끔 흘리기
까지 했다. 그래도 단지는 형의 방에서 하는 그 놀이가 재미있는 것 같았다. 밤이 와서 대문
을 걸어 잠근 뒤형이 누나와 나를 부르며 단지도 함께 건너오라고 하면 한 번도 마다 않고
놀이에끼어들곤 했다. 종일이면 종일 부엌 구석에서만 지내야 하는 단지는 속으로는 퍽 심
심했는지도 모른다. 오늘은 왼쪽 팔, 내일은 오른쪽 팔, 이렇게 두 팔뚝에 번갈아 형의 손가
락 자국이 돋아나 번번이 눈물을 찔끔거리면서도 밤이 되어 형이 놀이를 하러 건너오라고
부를 때면 단지의 얼굴에는 환하게 웃음이 피어나곤 했다. 겨울붐은 그렇게 아쉽게 까먹었
고, 어떤 날은 아주머니가 꿩고기를 얹은 냉면을 밤참으로 만들어 주기도 했다. 겨울 밤에
먹는 꿩고기 냉면 맛은 기막힌 것이었다. 우리 고향은 겨울이 유난히 춥고 눈이 많았다. 쌓
인 눈 위가 얼어 껍데기가 생기고 그 위로 썰매가 달렸다. 겨울이면 어른들은 사냥을 떠나
는 사람이 많았다. 꿩사냥, 노루 사냥, 산돼지 사냥, 그 중에도 산돼지사냥 하는 얘기는 아이
들의 사슴을 죄어들게 했다. 그래서 겨울이면 이름난 포수 얘기가 아이들이 둘러 앉은 화롯
가에 눈꽃처럼 피어나곤 했다. 눈싸움과 썰매와 화롯가의 이야기, 병국이가 끼어들지 않았어
도 아이들은 신나게 겨울 속을 뛰놀았다. 병국이가 광산에서 돌아온 밤이면 아이들은 양주
장 갯실로 병국이를 몇 번 찾아가 보기도 했지만 병국이는 졸리워서 쩔쩔매느라고 아이들과
어울리지를 못했다.
그렇게 겨울이 갔다. 산에 쌓였던 눈이 다 녹아 없어졌을 무렵, 형은 집을 떠나 깊은 산속
절간으로 들어갔다. 형이 떠나 버린 집안은 허전하기만 했다.
하지만 밖 세상은 자꾸만 뒤숭숭해져 가기만 했다. 미국 비행기가 이백 리 밖 철원에까지
날아와 기관총을 쏘아대고는 돌아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백 리라는 것은 비행기로는 이
웃집 오기나 다름없다고 해서 우리 동네에도 곧 미국 비행기가 날아와 폭탄이라도 떨어뜨릴
듯 야단법석을 했다. 밤낮으로 방공 연습이었다. 밤이면 순사들과 소방서원들이 골목골목 뒤
지고 다니며 문 틈으로 불빛이 새어나온다고 고리를 지러댔고 낮이면 주로 부녀자들이 '몸
빼'를 입고 바께스를 들고 나가 불끄는 연습을 했다. 징병으로 징용으로 끌려나가 남자가 귀
한 세상이라 집집마다 여자들이 나가서 방공 연습을 했던 것이다. 우리 집에서는 단비가 나
갔다. '몸빼'를 입고 바께스를 들고 방공 연습하러 나가는 단지를 볼 때면, 단지와 병국이가
우리 집에 오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곤 했다.
가슴이 죄게 하고, 무엇이 뒤쫓기는 듯한 생각을 일으켜 주는 공습경보 사이렌 소리, 밤낮
으로 때없이 울리던 사이렌 소리, 또 사이렌 소리... 그 봄 내내 그리고 여름 내내 사이렌 소
리가 울렸다. 하도 울려 사이렌 소리가 귓바퀴를 윙윙거리며 맴돌곤 했다.
팔월 중순에 접어든 어느 날 마침내 우리 동네 위로도 미국 비행기가 날아왔다. 하도 높
이 떠서 제비만해 보이는 그 비행기는 얼음조각처럼 흰 날개 뒤로 흰 김을 내뿜으며 소리도
없이 떠 지나갔다. 사이렌 소리가 귀가 따갑게 울어대고 순사들과 소방서원들이 아우성을
쳐대는 속에서 사람들은 방공호에 숨을 생각도 않고 행길에 나와 서서 비행기를 쳐다보고
있었다. 비행기가 까만 점이 되어 가물가물 사라져 없어질 때까지.
한데 그 비행기가 우리 동네 하늘 위를 떠 지나간 이튿날부터 신비롭게도 사이렌 소리가
울리지를 않았다. 그리고 며칠 후, 긴긴 동안 방 안전등 갓에 씌워 놓은 까만 포장 속에만
같혀 있던 전등불들이 무수한 가로등처럼 거리에 내걸렸다. 휘황한 전등불빝 아래 대낮같이
밝아진 길거리에 하얗에 쏟아져나간 사람들의 끝없는 이야기 속에서 전쟁은 끝나 있었다.
이튿날 절간으로 들어갔던 형이 집으로 돌아왔다. 단지는 이제 방공 연습하러 바께스를
들고 나가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내가 그 중 반가웠던 것은 병국이가 광산에 나가지 않
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낮에도 얼마든지 병국이를 볼 수가 잇게 된 것이다. 병국이는 키가
더 자라서 단지 머리 위로 솟아 있었다. 몸집도 불어나고 말소리도 점잖아져 제법 어른 티
가 나기도 했다. 그래도 아이들은 다시 밤이 오면 병국이를 만나려고 양주장으로 모여들었
고, 병국이는 전에는 한 적이 없었던 재미있는 이야기를 끝없이 들려주었다. 광산에 다니는
동안 새로 알게 된 이야기가 병국이 머리 속에 수없이 많이 쌓였던 것이다.
아버지는 비어 잇는 면장 자리를 지키라면서 사람들이 끌어내어 면사무소에 나가게 되었
고, 형은 치안대원이 되어 가슴 활짝 펴고 큰 걸음치며 길거리를 다녔다. 모든 아주 순조롭
게 풀려나가고 있었다. 그래 가을에는 전에 없이 풍년이 들었겠다, 만나는 사람마다 서로 정
답게 말을 주고 받고, 태평세월이 끝없이 이어질 것 같았다.
그래, 소련 군대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태평천하가 시작된 듯 온 동네가 편안하고 오붓했
다. 하지만 소련 군대가 들어오고 나서부터 다시 세상이 뒤숭숭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아버
지는 소련군 환영 군중 대회에서 연설을 잘못 하고는 면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미국놈들하고 소련놈들하고 힘을 합해 일본놈들을 몰아내 주어서 우리 나라가 해방이 되
었습니다. 삼팔선 남쪽에는 미국놈들이 들어오고, 북쪽에는 소련놈이 들어와서..." 아버지는
이렇게 연설을 했다는 것이다. 그날 밤 면서기가 집으로 찾아왔다.
"면장님 연설 속에 소련놈이라구 놈소리를 자꾸 되풀이하셔서 저 사람들이 몹시 듣기 싫어
하드굼유." 면서기가 말했다.
"내가 소련놈들한테만 놈소리를 붙였나? 미국놈들한테두 놈소리를 붙였지 않은가? 남의 나
라 사람들한테 놈소리를 붙이는 게 예사가 아닌가?"
"그래두 저 사람덜은 그렇게 생각하지를 않드굼유."
"헐 수 읎는 노릇이지. 이왕 해 논 말을 어쩌겠냐?"
면서기가 돌아갔다. 그리고 며칠 뒤부터 아버지는 면 사무소에를 나가지 않게 되었다. 형
도 그 해가 끝날 무렵 치안대원 자리에서 밀려났다. 자본가 지주 계급의 자식이라 자격이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새해에 들어서자 자본가 지주 계급에 대한 탄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우리 집은 토
지와 양주장을 몰수당하고 살림집 한 채만 차지하게 되었다. 그 살림집도 언제 빼앗기게 될
지 모를 노릇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밤중이면 은밀히 삼팔선 남쪽으로 넘어갈 일을 의
논하곤 했다. 거리로 나앉게 되기 전에 떠나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떠나는 일도 섣불리 서
둘러서는 안 되었다.
인민의 원수, 인민의 피를 빨아 잘 먹고 잘 산 놈들. 조국과 민족을 배반하는 자, 매국노,
악질 모리배를 모조리 때려죽여라!
이런 글이 거리거리 골목골목마다 나붙어 있었다. 어떤 지주는 짐을 싸가지고 떠나가려다
가 밀어닥친 사람들한테 '인민을 배반하고 떠나려는 악질 반동 분자'로 몰려 짐을 뺏긴 것은
물론이고 온 식구들이 몰매를 맞아 그 자리에서 몰살을 당하기도 했다. '비겁한 놈들은 갈
테면 가라 하지만 죄값을 치르고 가라.'눈에 핏발이 선 사람들이 이렇게 외치고 다녔다. 섣
불리 떠나려고 하다가는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모를 일이었다. '이곳에서 백리 박으로 떠나시
오.' 이런 추방 명령이 내리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 추방령만이 아무 탈 없이 고향
을 떠날 수 있는 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저들이 가장 관대하게 온정을 베풀 경우인 것이
다. 만약에 추방령이 내리지 않을 때는 제 고향에서 막바로 거지나 종으로 떨어져내려야 할
지도 모른다.
아주머니는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런 형편에서 안잠자기를 둘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단지와 병국이는 그냥 우리 식구와 함께 지내고 있었다. 단지와 병국이는 갈 속이
없었다.
하루하루가 무엇에 쫓기듯 조마조마한 나날이었다. 그러던 어는 날 밤형이 안방으로 건너
왔다.
"저 단지하구 결혼하겠어요."
형이 불쑥 말했다. 소근대듯 조용한 목소리였지만 너무 뜻밖의 일이어서 아버지와 어머니
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형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래도 아버지가 먼저
정신을 가다듬고는 입을 열었다.
"너 시방 무슨 소리 했재?"
"단지하고 결혼하겠다구요."
"단지구 항아리구 집안이 이렇게 어수선한 판국에 정신이 있는 게냐 없는 게냐?"
"아부지, 제 말씀 들으세요. 오늘 면 인민 위원회에 댕기는 경만이형을 만났어요."
"빨갱이루 날뛰는 그런 놈을 뭣 할라구 만나구 댕기냐?"
"경만이형은 사과빨갱이예요. 그 형이 슬그머니 귀뜀을 해주는데요, 팔월쯤 우리 집 몰수령
이 내릴 것 같대요."
"이 일을 어쩌지?"
어머니가 기절할 듯 물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저더러 무산 계급의 여자하구 결혼을 하라는 거예요. 그러면 얘기가
좀 달라질 수두 있다구요. 근데 시방 이런 형편에 노동자 농민 집의 어떤 여자가 우리 집에
시집을 올라구 하겠어요? 단지말구는 말이예요."
"단지는 병국이하구 정혼한 새가 아니냐?"
아버지가 물었다.
"그런 걸 가릴 형편인가요? 병국이하네 거짓말을 시켜서라두 우선 단지랑 결혼식을 해 놓
구 봐야지요."
"병국이가 말을 들을까"
"그러니까 어무니가 구스르세요. 그렇게 해야 될 사정이 있어서 남들 보기에만 결혼식을
올리는 척하는 거라구요."
"내 해보마. 길바닥에 나앉게 되지 않는다는데 무슨 짓은 못하겠니."
어머니가 눈에 불을 켜며 말했다.
병국이는 어머니 말에 너무도 순순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한데 나앉지 않을라구 거짓뿌렁으로 잔치하는 거야 열 번이믄 어떻겄어유?"
이렇게 말했다. 단지는 그 흰 얼굴이 온통 새빨갛게 물들어 가지고는 고개를 잔득 수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거짓이라도 결혼식을 올린다는 것은 어굴 뜨거워지는 일인 모양
이었다.
집에서는 결혼식을 서둘렀다. 공회당을 빌어 공의 선생님한테 주례를 부탁하고 면 인민
위원장하네도 청첩장을 보냈다. 공의 선생님을 주례로 고른 사람은 형이었다. 공의 선생님
역시 이른바 자본가 지주 계급이었지만 의사가 귀한 형편이라 박해는커녕 특별한 우대를 받
고 있었다. 그래서 공의 선생님은 우리 집과도 친한 사이였고, 공산당과도 친한 사이였다.
과연 형의 계산은 들어맞았다. 공의 선생님이 주례를 선 형의 결혼식에 면 인민 위원장도
참석해서 속마음이야 어떻든 축사를 해 주었다.
"자본자 지주 계급의 아들로서 자기 집 종노릇 한 것과 다름없는 무산계급의 딸과 부부의
연을 맺는다는 것은 과거를 벗어나 새 조국에 발맞추겠다는 뜻으로 보아 환영하는 바입니
다."
모여든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그날밤 동네 부녀자들이 모여들어 신방 문창호지에 손가락 끝으로 구멍을 뚫었다. 형에게
는 좋은 핑계였다. 단지와 한 방에서 밤을 지낼 수밖에 없도록 일이 되었으니 말이다. 형은
그날밤 단지와 진짜로 부부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튿날부터, 동네 부녀자들이 찾아오지 않
았어도 단지는 밤이면 서슴없이 형의 방으로 들어가 잠을 잤다. 불 꺼진 형의 방에서는 밤
늦도록 형과 단지가 주고받는 말소리가 오순도손 들려나오기도 했다.
병국이는 말이 없어지고 말았다. 일하다가도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곤 했다. 하지만 병국
이는 착한 아이였다. 말이 없어진 그뿐이었다.
그런 병국이를 꼬여내 간 것은 푸줏간집 아들 곰보였다. 곰보는 속속들이 빨갛다고 해서
감빨갱이로 불려지는 위인이었다. 소학교를 졸업하고는 제 아버지 푸줏간에서 일하면서 열
일고여덟 살 아이 적부터 술을 처먹고는 대낮에 행길에서 주정부리던 곰보, 주정부릴 때면
푸줏간 식칼을 겁없이 휘둘러 사람을 상해 놓고 하던 곰보, 그 망나니 곰보가 소렴 군대가
들어와 빨갱이 세상이 되자 재빨리 빨갱이 앞잡이가 되어 가지고 제 세상 만났다고 날뛰고
돌아다녔다. 곰보는 전에 잘 살던 사람들을 못살게 들볶는 일을 도맡아하고 있었다. 곰보가
공산당을 등에 업고 제멋대로 날뛰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곰보는 전에 잘 살던
사람들 집에서 하인 노릇을 했거나 소작인 노릇을 한 사람을 꾀어가지고, 옛 상전에게 학대
받은 일이거나 예 상전의 비행을 있는 것 없는 것 만들고 꾸며내어 보안서나 청년 동맹에
일러바치게 해서 옛 상전의 집을 파헤쳐 난장판을 만들어 놓기 일쑤였다. 언젠가는 전에 우
리 양주장 인부로 있던 박 서방이 찾아와, 곰보가 꼬이는 것을 듣지 않았노라는 말을 해 주
고 갔다. 우리 집 소작인이었던 사람 하나도 찾아와 박 서방과 같은 말을 해주고 돌아갔다.
"그러니깐 사람은 인심을 잃지 말아야 하는 게야."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지만 "쥑일 놈 같
으니라구." 어머니는 몸을 부를 떨었다. 동네 사람들은 곰보가 미워 속으로는 이를 갈면서도
곰보가 등에 업은 공산당이 무서워 슬슬 피하기만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제 아버지 묘지도
가 볼 겸 고향에 다녀오겠다면서 집을 떠난 병국이가 닷새가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웬
일인가 해서 궁금해하고 잇던 어느 날 병국이가 청년단의 행동 대원들이 두르는 붉은 색 완
장을 팔에 두르고 다니는 것을 보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붉은 청년단 행동대라면 곰보가
우두머리로 있는 데였다. 우리 집 식구들은 가슴이 섬짓했다. 어머니는 나를 시켜 소문이 정
말인지를 알아보고 오게 했다. 청년단 사무실은 보안서 근처, 전에 이발소가 잇던 자리였다.
나는 그 앞을 지나는 척하면서 청년단 사무실 안을 들여다보았다. 과연 그 안에 병국이가
있었다. 어머니는 병국이가 거기서 무슨 일을 하는지 알아보라고 했다. 나는 아이들과 어울
려 청년단 사무실 근처에 가서 놀며 틈틈이 병국이를 살펴보았다. 병국이는 거기서도 심부
름꾼 노릇을 하고 있었다. 청년 단원들은 무슨 일이 있으면 병국이한테 심부름을 시키곤 했
다. 병국이와 어쩌다 마주칠 때면 나는 서먹서먹하고 왠지 무섭기까지 했지만, 병국이는 나
를 못 본 척 하기만 했을 뿐 노려보거나 눈살을 찌푸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청년단 심부름
을 고분고분 도맡아 해내는 것이라든가 청년 단원들과 얘기를 하면서 웃는 얼굴을 보면 병
국이 마음이 나빠진 것 같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아이들과 어울려 놀던 옛날의 병국이는 아
니었다.
"무슨 일 벌어질 것 같구나."
어머니가 심란해하며 말했다.
"병국이 지가 어쩌겠어유?"
단지가 걱정할 것 없다는 듯 대꾸했다.
"병국이가 어쩌는 게 아니라 곰보놈이 병국이를 앞세워 일을 저지를까봐 그러지."
어머니가 걱정하는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며칠 뒤 아침 밥상을 치우고 났을 때였다. 붉
은 완장을 두른 청년단 행동 대원들이 저희 마음대로 대문을 열어 제끼고는 우를 집안으로
들이다친 것이다.
"이 집에 인민을 착취해 긁어모은 쌀이 잇다는 고발을 받고 왔소."
앞장선 곰보가 이렇게 말하고는 제 집 들어가듯 행동 대원들을 거느리고는 부엌을 거쳐
뒤란으로 밀려들어갔다. 우리 식구들은 잠자코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행동 대원들의
손에는 망치니 도끼가 들려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뒤란으로 들어가 큰 광 문 앞에서 멈춰
섰다. 광 문에는 좌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부숴라!" 곰보가 말했다. 망치와 도끼가 광문을 쳐 떨어뜨렸다. 광 안에는 쌀가마와 묵은
볏가마가 쌓여 있었다.
"져내가!" 곰보가 말했다. 청년 대원들은 곡식 가마를 져내기 시작했다. 대문밖에 져내다가
태기를 치고는 다시 들어와 져내가곤 했다. 청년 대원들은 큰 광 안에 쌓였던 곡식 가마를
모조리 져내갔다. 대문 밖 행길에는 곡식 가마들이 이리저리 내던져진 모습으로 어지럽게
쌓여있었다. 동네 사람들이 하얗게 모여들어 구경을 하고 있었다. 곰보는 들이닥칠 때와는
달리 맨 꽁무니로 우리 집을 나갔다. 곰보가 나가자 어머니는 대문을 잠갔다.
"병국이새끼 찾아가서 단단히 따지구 와야겠어유." 단지가 말했다.
"아서라. 긁어 부스럼된다. 작은관 문을 일러 주지 않은 거 보니까 병국이 짓이 아니라 곰
보 짓이여."
"곰보가 어떻게 남의 집 광 속에 곡식이 잇는 걸 알겠어유? 병국이가 일러 줬으니까 알지
유."
"곰보놈이 살살 꼬엿을 테지. 작은 광에 있는 곡식이나 어디 좀 감춰 놓자."
작은광은 큰 방 모퉁이를 돌아가 그 뒤꼍에 문이 있었다. 어머니와 단지는 작은 광의 곡
식을 퍼다가 마루 밑이나 뒤채 부엌 구석, 장작가리 밑, 하다못해 장롱 속이나 다락 속에까
지 나눠서 숨겼다. 하지만 작은광을 뒤지러 오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큰광 곡식을 가져간 것
으로 일이 끝나지는 않았다. 그래, 그것은 또 하나의 시작이었다. 그 일이 있은 며칠 뒤 보
안서에서는 아버지를 불러갔다. 왜정 때 친일파 노릇한 사실을 누군가 고발했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세 시간 뒤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하루 걸러 아버지를 불러갔다. 소작인들
을 무자비하게 착취했다는 고소장이 들어왔으니 조사를 하겠다고, 양주장 인부를 학대했다
고 누가 고발을 했으니 조사를 하겠다고, 무산 계급의 부녀자를 농락한 일이 잇다는 제보가
있으니 왔다 가라고, 또 어떠어떠한 비행을 조사해야겠다고 아버지를 불러들여 갔다 아버지
는 보통 대여섯 시간씩 어떤 날은 열 시간이나 잡혀 있다가는 기진 맥진해 가지고 돌아오곤
했다. 아버지는 별안간 폭삭 늙어 버린 듯했다.
그 사건이 일어난 것은 그렇게 지내던 얼마 뒤였다. 나는 그날 아이들과 함께 청년단 사
무실 근처에 놀러 갔다가 그 일을 내 눈으로 볼 수가 있었다. 그날도 아버지는 보안서에 불
려갔었던 모양이었다. 아버지가 보안서에서 나와 청년단 사무실 앞을 마악 지났을 지났을
때였다. 곰보가 병국이를 끌다시피 하고 사무실을 나오더니 아버지쪽을 가르키며 병국이를
떠밀었다. 병국이는 주춤거리더니 곰보의 재촉하는 눈길을 받고는 아버지를 뒤따라갔다.
"아저씨, 저, 저 품값 주세유."
병국이가 말했다.
"품값이라니." 아버지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며 물었다.
"아저씨네 집에서 이 년 동안 심부름한 품값 말이에유."
병국이는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너 요전에 사람던 보내서 광 속에 있는 곡식 가마 다 져내가구 무슨 소리냐?"
아버지가 꾸짖듯 말했다. 병국이는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듯 고개를 숙인 채 신발로 땅바
닥만 문지르고 있었다. 곰보가 아버지한테로 달려들었다.
"이 반동분자 영감아, 그 쌀이 느이 꺼야?"
곰보는 악을 쓰며 아버지를 힘껏 떠밀었다. 아버지는 땅 위로 나둥그러졌다. 곰보는 쓰러
진 아버지를 얼굴을 발로 밟았다.
"밟아 버려! 이 멍충이 새끼야, 빨리 발루 짓뭉개 노라구."
곰보는 병국이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병국이는 마지못한 듯, 발 하나를 들어, 쓰러져 있는
아버지의 넓적다리 위로 올려 놓았다. 아버지의 코와 입술이 터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이놈의새끼덜, 잡아 쥑에라!"
동네 사람들이 소리지르며 몰려온 것은 그때였다. 곰보는 골목 안으로 재빨리 도망쳐 버
리고, 아버지의 넓적다리 위에 발 한 짝을 올려 놓고 어릿어릿 서 있던 병국이를 동네 사람
들이 겹겹이 둘러쌌다. 병국이가 옷이 갈가리 찢기고 피투성이가 되어 정신을 잃고 땅바닥
에 나자빠진 것은 눈 깜짝할 사이였다.
병국이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린 것과 우리 집에 추방령이 내린 것은 사흘 뒤 같은 날이었
다.
십일 안에 백리 밖으로 떠나시오, 면 인민 위원회 위원장
"그눔새끼 뒈져 싸지." 단지는 이렇게 말했지만 손가락 끝으로 눈물을 찍어내며 코를 핑
풀었다.
"이젠 됐다." 깨어졌던 입술이 검은 딱지가 더덕더덕 앉은 입으로 아버지가 말했다.
우리는 작은광에 있는 쌀을 이웃에 싼값으로 은밀하게 팔았다.
"단지는 어떡하지유?" 어느 날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속삭이듯 물었다.
"삼팔선 넘기 전까지는 데리구 있었야지."
아버지가 대답했다.
이윽고 기한 이틀 전 우리는 고향을 떠나려고 집을 나섰다. 동네 끝 양회다리에 이르러
나는 뒤돌아보았다. 우리 집 앞길에 동네 사람들이 모여 선 채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윌
는 양회다리를 건너 산과 들 사이로 뻗은 신작로를 한참 걸어가다가 오른편으로 꺾어 들어
가 왜정 때 일본 사람들이 살던 동네 앞을 지나 역세 닿았다. 아버지가 차표를 끊는 동안
나는 역 앞에 서서 황구덩이를 건너다 보았다. 축구를 하는지 아이들이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며 뛰놀고 있었다. 우리는 곧 전차를 탔고 두 시간 뒤에 철원에 닿았다. 철원에서 하룻
밤 자고 이튿날 연천으로 갔다 연천에서 길잡이를 구해 가리고 삼팔선을 넘을 작정이었다.
우리는 연천 밥잡 건너방에 자리를 잡고 들어앉아 삼팔선 넘어갈 기회를 기다렸다. 삼팔선
경계가 심할 때가 있고 그것이 늦춰질 때가 있는데 요즘은 경계가 심할 때라서 며칠 기다려
야 한다는 것이었다.
"길잽이라구 함부루 돈 주구 사믄 큰 낭패 볼 것두 있어유. 어떤 사람은 깁잽이를 사 가지
구 길을 떠났는데 밤새두룩 길을 걷구는 이튿날 날이 샌 댐에 보니깐 길잽이는 온데간데 읎
구 자기덜은 안직 이북땅에 있더래지 뭐예유."
밥집 안주인이 말했다. 어떤 사람은 줄 뒤꽁무니를 따라가다가 앞에 가는 사람이 길을 잘
못 드는 바람에 식구들한테서 따로 떨어져 북쪽에 남게 된 일도 있다고 했다.
"인물두 잘났어라. 따님인가유?"
이튿날이 되자 밥집 안주인은 단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예, 딸이예유." 어머니가 대답했다.
"누구던지 색씨삼구 싶구 메누리삼구 싶겠어유." 밥집 안주인이 탐난다는 듯 말했다.
다음날, 단지와 누나가 장구경을 하러 나간 틈에 어머니가 밥집 안주인한테 말했다.
"데리구 넘어갔댔자 고생만 시킬 젓 같구, 어디 참한 신랑자리가 싸데려 가겠대믄 딸애를
주구 가겠어유."
"증말이세유? 장가 보낼 친정 조카가 있는데 부모 읎는 아이라서 장가두 내가 보내줘야 되
는데."
"사램만 똑똑하믄 되지뮤 뭐."
"사램은 똑똑하지유, 근데, 따님이 남아 있을라구 할래나유?"
"섭섭해할 테지유. 그러니 신장자리만 마땅하믄 슬그머니 데 놓구 가야지유."
"신랑자리는 삼팔선 넘나드는 길잽이 노릇하구 있는데 벌이가 괜찮아유."
"마침 잘됐구만유. 우리 식구 삼팔선 너머루 잘 데려다 주구는, 우리 딸애 자 데리구 살라
구 하세유."
"염려마세우. 처갓집 식구를 길바닥에다 버리겠어유?"
다음날 길잡이라는 젊은이가 와서 슬그머니 단지를 보고 갔다 연천에 오고 닷새 뒤, 이윽
고 우리 식구는 밤중이 되기를 기다려 길을 떠났다. 길잡이가 앞뒤로 둘이 딸려 있었다. 단
지는 맨 뒤꽁무니에 서서 따라왔다. 밤새 논두렁길, 밭두렁길, 산길, 숲길을 걸어 날이 새었
을 때 우리 식구들은 삼팔선을 넘어 남쪽 땅에 닿아 있었다.
"아, 이젠 살았구나."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렇게 말했다. 한데 뒤꽁부니에 서서 따라오던
단지와 길잡이 한 사람이 눈에 띄지 않았다.
"엄마, 단지 언니가 없잖아?" 누나가 큰일 났다는 듯 두리번 거리며 물었다.
"오다가 길을 잘못 든 게로구나." 어머니가 예사롭게 말했다.
"그럼, 단지 언니는 어떻게 하지?' 누나는 대뜸 눈물이 글썽해지며 다시 물었다.
"뒤따라오든가, 게서 잘 살든가 할테지."
어머니가 대답했다.
아버지와 형은 못 들은 척 아무 말도 안 하고 앉아 있었다. 나는 북쪽을 바라보았다. 먼
하늘가에 치마폭으로 얼굴을 싸고 앉아 울고 있는 단지의 모습이 떠올라왔다.
잔인한 도시(지은이: 이청준)
날씨가 제법 싸늘해지기 시작한 어느 가을날 해질녘 그 사내가 문득 교도소 길목을 조그
맣게 걸어나왔다.
그것은 여간 희한한 일이 아니었다. 근래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일이었다.
교도소는 도시의 서북쪽 일각, 벚나무와 오리나무들이 무질서하게 조림된 공원 숲의 아래
쪽에 있었다. 그리고 그 무질서한 인조림이 끝나고 있는 공원 입구께에서 2백 미터 남짓한
교도소 길목이 꺾여들고 있었다. 공원 입구에선 교도소 길목과 높고 음침스런 소내 건물들
을 제 손바닥 들여다보듯 한눈에 모두 내려다볼 수 있었다. 교도소 골목을 오르내리는 것이
면 강아지 한 마리도 움직임이 빤했다.
하지만 그 길목은 언제부턴가 사람의 눈길을 끌 만한 움직임이 끊어진지 오래였다. 교도
소와 관련하여 길목을 오르내리는 사람의 모습을 거의 볼 수가 없었다. 그것도 교도소를 새
로 들어가는 쪽보다는 몸이 풀려서 나오는 쪽이 더욱 그랬다. 아마 교도소를 새로 들어가는
쪽은 아주 끊어져 없어지지도 않았으리라. 하지만 들어가는 쪽은 언제나 철망을친 차편을
이용하는 있는 터이어서 그것마저 낌새가 분명칠 못했다. 그야 교도소 직원들이나 인근 주
민들이 길목을 지나가는 일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물론 이 길목에서 특별히 사
람의 눈길을 끌만한 움직임은 못 되었다. 이 길목에서 사람의 주위를 끌 움직임이란 역시
형기를 끝냈거나 당국의 사면으로 몸이 풀려 나오는 출감자들이 그것일 수밖에 없었다.
한데 어찌된 영문인지 이 몇해 동안 교도소 수감자들 가운데선 몸이 풀려나 그 길을 걸어
나온 사람이 없었다. 출감자를 내어보내기 위해선 교도소 문이 한 번도 열린 적이 없었다.
교도소 안엔 이미 내보낼 죄수가 아무도 없거나, 혹은 그곳엔 아예 종신형의 죄수들만이 수
감되고 있는 그런 감옥이나 아닌가 의심이 될 지경이었다. 교도소의 마지막 출감자가 언제
마지막으로 그 길을 걸어나갔던가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조차도 거의 없었다. 아마도 이 교
도소를 교도관들 가운데서조차 그들이 그 행운의 출감자를 내보내기 위하여 언제 마지막으
로 교도소의 철문을 열었었던가를 더듬어낼 수 있는 소상한 기억력의 소유자는 흔치가 않을
터이었다.
출감자의 모습이 끊어진 것만도 아니었다. 교도소를 나오는 출감자들의 발길이 뜸해지기
시작한 다음에도 길목은 한동안 재소자 면회를 찾아온 사람들의 발길로 인적이 심심치를 않
았었다. 한데 언제부턴가는 그 면회객들의 발길조차 이 길목에서 깨끗이 자취를 감추고 말
았다.
교도소길은 이제 오랜 정적 속에 망각의 길목으로 변해졌고, 그 길목을 걸어나오는 출감
자나 면회객들의 발길이 끊어지고 있는 시간만큼 교도소와 교도소 수감자들의 존재도 바깥
세상에선 기억이 까마득히 잊혀져 온 것이었다.
하지만 그 동안 교도소 교도관들의 출퇴근 행사는 어김없이 계속 되어오고 있었고, 밤이
면 높다란 감시탑들의 탐조등 불빛들도 그 확고부동한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건 이
를테면 그 깊은 세상 사람들의 망각 속에서도 교도소의 존재와 기능은 여전히 엄존하고 있
다는 가차없는 증거였다.
그러나 아닌게 아니라 이날 저녁 사내가 마침내 그 길목을 다시 걸어나온 것이다.
교도소는 과연 죄수가 없는 유령의 집으로 변해진 것이 아니었다. 종신형 수형자들만이
수감되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이날 저녁 사내가 그 길목을 걸어나온 것은 바로 그런 모
든 의문들에 대한 가장 확실한 해답인 셈이었다.
사내의 뜻하지 않은 출감은 그러니까 교도소와 교도소 길목에선 그만큼 오랜만의 일이었
고 그만큼 눈길을 끄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길을 걸어나오고 있는 사내 자신의 표정엔 막
상 어떤 새삼스런 감회나 즐거움의 빛 같은 것이 전혀 엿보이질 않고 있었다.
사내는 언젠가 그가 교도소를 들어갈 때부터 그의 전 재산이었던 낡고 작은 사물보퉁이
하나를 손에 든 채 마치 망각의 길을 헤쳐 나오듯 변화 없는 발걸음으로 교도소 길목을 천
천히 걸어나오고 있었다. 전쟁 후에 한창 유행하던 염색 야전잠바 윗도리에, 역시 낡고 색이
바랜 홍록색 당꼬바지의 차림새들이 이마 위로 아무렇게나 헝클어져 내린 그의 허옇게 센
머리털과 함께 사내의 모습을 더욱 지치고 무기력하게 만들고 있었는데, 그의 그런 차림새
나 센 머리털과 함께 사내의 모습을 더욱 지치고 무기력하게 만들고 있었는데, 그의 그런
차림새나 센 머리털의 지치고 무기력한 느낌은 사내가 쌍 사람들의 망각 속에 교도소 안에
서 훌쩍 흘려보내버린 그 무위한 세월의 두께를 말해주고 있는 것 같기도 하였다.
알다시피 사내에겐 물론 동행이 없었다. 그는 함께 출감한 동료 수감자는 물론, 그의 출감
을 맞아주는 가족이나 친지 한 사람 동행자가 없었다. 그의 출감길에 동행이 되어주고 있는
것은 오직 공원 숲 위에서 방금 낙조를 서두르고 있는 저녁 햇살이 지어 준 그 자신의 길다
란 그림자뿐이었다. 그는 마침 그 낙조를 서두르고 잇는 공원 숲 쪽의 저녁해를 향해 교도
소 길목을 걸어나오고 있었으므로 그의 그림자가 등뒤로 길게 끌리고 있었는데, 사내의 좀
구부정한 걸음걸이는 마치 사내 자신이 아니라 그 그림자를 방금 교도소로부터 끌어내어 어
께에 짊어지고 그 길을 무겁게 걸어나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더욱이나 사내는 이미 출기
가 가버린 낙조의 가을 햇살마저 눈에 그리 익숙치가 못한 듯 이따금씩 콧잔등을 가볍게 실
룩거리며 걸음을 조금씩 지체하곤 하였는데, 바로 그 눈앞을 가로막는 햇살이나 그 햇살에
대한 어떤 부끄러움 때 사내가 교도소 길목으로부터 자신의 그림자를 짊어져내는 일은 더욱
더 피곤하고 힘겨운 일처럼 보이게 하였다.
하지만 사내의 표정이나 걸음걸이에 어떤 변화가 이는 것은 오직 그풀기 잃은 저녁 햇살
이 그의 눈앞을 방해해 올 때뿐이었다. 햇빛 앞에서 자신을 망설일 때 이외엔 그의 표정이
나 발걸음에 아무런 변화도 생기지 않았다.
사내는 그런 표정, 그런 모습으로 조심스러워 보일 만큼 천천히, 그리고 그 구부정하고 변
화없는 걸음걸이로 교도소 길목을 걸어나오고 있었다.
변화 없던 사내의 얼굴에 비로소 어떤 심상찮은 표정이 떠오른 것은 그가 그 2백여 미터
남짓한 교도소 길목을 빠져나와 공원 입구께에까지 닿았을 때였다.
새들은 하늘과 숲이 그립습니다.
공원 입구의 오른쪽으로 한 작은 가겟집이 비켜 앉아 있고 그 가겟집 부근의 벚나무 가지
들에 크고 작은 새장들이 줄줄이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 벚나무 가지들 중의 몇 곳에 그
런 비슷한 광고문구가 씌인 현수막이 이리저리 내걸려 있었다.
새들에게 날을 자유를 베풉시다.
자비로운 방생은 당신의 자유로 보답받게 됩니다.
새장의 새를 사서 제 보금자리로 날려 보내게 해주는 이른바 방생의 집이었다.
사내는 비로소 긴 망각의 골목을 벗어져 나온 듯 거기서 문득 발길을 머물러 섰다. 그리
고는 어떤 깊은 반가움과 안도감에 젖으며 고개를 두어 번 끄덕여대었다. 사내의 그 마르고
지친 얼굴 위로는 잠시 어떤 희미한 미소 같은 것이 솟아 번지기까지 하였다.
사내는 이윽고 다시 고개를 돌려 그가 걸어나온 교도소 길목을 조심스럽게 한번 건너다보
고 나서는 그 방생의 집 쪽으로 길을 건너갔다.
마침 그때 그 길 건너 가겟집에서는 공원을 찾아온 중년의 사내 한 사람이 흥정을 한 건
끝내가던 참이었다.
"이제 선생님께선 이 녀석에게 하늘과 숲을 마음껏 날을 날개를 주신 겁니다. 그건 바로
이 녀석의 자유지요. 그리고 선생님께서 이 녀석의 자유를 사신 것은 바로 선생님 자신의
자유를 사신 것입니다..."
서른이 좀 넘었을까 말까, 하관이 몸시 매끈하게 빨려 내려간 얼굴 모습이 어딘지 좀 오
만스럽고 인색스런 인상을 풍긴데다가 차가운 백동테 안경알 속에서 눈알을 몹시 영민스럽
게 굴려대고 잇는 가겟집 젊은이가 방금 흥정이 끝난 새장을 그 중년의 고객에게 넘겨주고
있었다.
"자, 이제 장문을 열어 주십시오. 그리고 녀석에게 하늘을 날게 해주십시오. 선생님은 선생
님의 자유로 오늘의 자비에 충분한 보답을 받으시게 될 겁니다."
가겟집 젊은이의 그 숙달되고 자신 있는 말투에 비하면 새장을 건네받고 있는 손님쪽이
오히려 거동을 멈칫멈칫 망설이고 있었다.
길을 건너온 사내가 조심조심 두 사람 곁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출현
으로 두 사람의 일에 어떤 방해거리를 만들고 싶지가 않은 듯 거동을 몹시 신중하게 억제했
다.
그래 그런지 가겟집 젊은이나 고객 쪽도 사내의 접근에는 별 신경을 안 썼다. 이 허름한
늙은이쯤 그가 어디서 온 누구이든 상관할 바가 아니라는 듯 두 사람 다 그 쪽에는 전혀 아
랑곳을 않으려는 눈치들이었다.
사내는 결국 자신의 호기심을 숨길 수가 없어졌다. 그는 마치 어른들의 은밀스럼 비밀을
엿보려 드는 어린애처럼 신중하게, 그리고 자신의 호기심 때문에 끝내는 스스로를 억제할
수가 없어져 버린 장난꾸러기처럼 순진하게, 한 발짝 한 발짝 두 사람 곁으로 거릴 좁혀 들
어갔다. 그리고 그 흥정을 끝낸 손님이 갑자기 생각이 바뀌어 모처럼 만의 구경거리를 중단
해 버리지나 않을지 염려된 듯, 은밀하고도 조급스런 표정으로 작자의 거동을 유심히 지켜
보았다.
"자, 이 녀석아, 그럼 잘 가거라. 장을 나가 넓은 하늘을 날으면서 내 은혜나 잊지 말아라!"
그러나 이윽고 그 중년의 고객이 장 속의 새에게 자신의 선행에 관한 다짐의 말을 주고
나서 장물을 활짝 열어 젖혔다. 장 속의 새는 금세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아차릴
수가 없는 것 같았다. 장문이 열리고 나서도 녀석은 잠시 어리둥절한 눈길로 목짓만 몇차례
갸웃거리고 있더니, 뒤늦게 사정을 깨달은 눈치였다.
푸르륵
가벼운 날갯소리를 남기며 녀석이 마침내 조롱을 떠나갔다.
저녁 노을이 서서히 물들어 오기 시작한 서쪽 하늘로 새는 잠시 드높은 비상을 자랑하는
듯하다가 이내 한 개의 까만 점으로 변하여 공원 숲 그늘로 사라져가 버렸다.
"고 녀석 그래도 날으는 폼이 법이로군."
공원 숲 속으로 새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난 다음 중년의 방생자가 한 마디 만족스럽
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젠 그 자신도 어떤 눈에 보이지 않은 날개를 얻어 지닌 듯 가벼운
발길로 가게를 떠나갔다.
한데 그 중년의 방생자가 가게를 떠나간 다음에도 사내는 아직 몸을 움직일 줄 모르고 있
었다. 그는 자비로운 방생자가 이미 가게를 떠나가 버린 것도 의식하지 못한 듯 그의 거동
에는 아예 아랑곳을 않은 채 새가 사라져간 공원 쪽 하늘에 시선을 오래오래 못박고 있었
다. 새를 날려 보낸 일은 그 새를 사고 간 사람보다도 오히려 사내 쪽에 더욱더 깊은 감동
을 주고 있는 것 같았다. 새가 처음 하늘을 치솟아 오를 때 사내는 아닌게 아니라 그 어린
애같이 천진스런 즐거움과 억눌린 흥분기로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즐거움
과 흥분기는 이내 어떤 부러운 감동의 빛으로 맑게 빛나기 시작했다. 사내는 한동안 넋이
빠진 듯 그렇게 새가 사라져간 공원 쪽 하늘만 지키고 있었다. 마음속에 샘솟는 자신의 부
러움을 아무래도 쉽게 지워버릴수가 없는 듯이 그것은 아마 하늘을 날아간 새에 대한 부러
움일 수도 있었고, 그 새를 사서 날려 보낸 방생자에 대한 부러움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것이 어느 쪽이든 사내는 그 부러움을 통하여 새를 산 방생자보다 더 큰 보람과 즐거움과
그리고 길고 오랜 감동을 스스로 맛보고 있었던 것이다.
사내가 이윽고 그 하늘로부터 천천히 시선을 거두어 들였다.
그리나 아직도 뭔가 깊은 아쉬움 같은 것이 남아 있는 눈길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 사내
의 곁에는 이미 아무도 사람의 모습이 눈에 띄질 않았다. 중년의 방생자는 공원으로 들어갔
고, 가겟집 젊은이도 이젠 이미 그의 가게 안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사내는 문득 자신이 당
황스러워지고 있는 빛이었다.
그는 잠시 자신의 행동을 망설이고 있었다.
가게 앞에 혼자 남겨진 사내는 이제 거기서 더 할 일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마치 무슨
덫에라고 걸린 사람같이 좀처럼 그곳을 떠나가지 못했다. 아직도 뭔가 아쉬움이 남은 표정
으로 가게 주위를 서성거리고 있었다. 가게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서 또 한번의 거래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혹은 이번에는 그 자신이 가게 주인에게 할 일이 남아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그렇게 가게 앞을 서성대면서 할일없이 혼자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좀처럼 마지막 작정을 내리기가 어려운 듯 싶었다. 그는 갑자기 가게 쪽을
향해 발길로 다가서 오다간 이내 다시 몸을 돌이켜세워 버리기도 하였고, 반개로 가게를 멀
어져 가던 발길을 거꾸로 다시 되돌이켜 오는 식의 행동만을 몇 번씩이나 되풀이하고 있었
다.
길을 지나가던 사람들 가운데서도 새로운 흥정을 시작해 오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 마침 가겟집 젊은이가 다시 문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사내는 그 젊은이의 모습이 다시 나타난 것만으로도 금세 무슨 일이 일어날 것처
럼 초조해 있던 얼굴빛이 활짝 개이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발길을 한 걸음 젊은이 쪽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하지만 가겟집 젊은이는 도대체 이 초라하고 늙은 사내에 대해서는 조금도 관심이 없는
표정이었다. 그는 이제 가겟문을 닫을 참이었다. 젊은이가 나뭇가지에 걸린 새장들을 하나하
나 가게 안으로 떼어 들고 있는 걸 보자 사내가 다시 당황하기 시작했다.
"이제 가게를 닫으려고 그러오?"
사내는 거의 반사적인 동작으로 젊은이에게로 다급히 다가들고 있었다.
"그래요. 이젠 날이 저물었으니까요."
사내 쪽엔 거의 눈길도 스치지 않고 잇는 젊은이의 대꾸에 그는 비로소 어떤 결심이 내려
진 모양이었다.
"그럼, 저..."
잠시 중지해 주길 바라듯 사내가 재차 젊은이의 주의를 재촉하고 나섰다.
가겟집 젊은이는 그제야 겨우 새장을 떼어내려던 동작을 멈추고 사내의 얼굴 쪽을 돌아다
보았다.
"노인장께서 제게 무슨 볼일이..?"
방금 전에 이미 하루의 일을 마감지으리라 작정한 바 있는 젊은이의 말씨는 흡사 귀찮은
말참견이라도 나무라는 투였다.
젊은이의 그런 말투가 사내의 그 모처럼 만의 결심을 금세 허물어뜨리고 있었다.
"아니요, 그저... 난 그냥..."
부질없는 말 실수를 저지르고 난 사람처럼 사내의 어조가 더듬더듬 다시 움츠러들고 있었
다.
아까부터 당꼬바지 아랫주머니 깊숙이에서 뭔가를 자꾸 혼자 만지작거리고 있던 사내의
손길마저 이젠 동작이 완전히 멈춰 버리고 있었다.
가겟집 젊은이는 더 이상 사내를 관심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남은 새장들을 하나하나 가
게 안으로 떼어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작업이 모두 끝났을 때 그는 마지막으로 가게
문을 닫고 자신도 그 가게 안으로 모습을 거둬들여가 버렸다.
사내는 아직도 할 일없이 그런 젊은이의 일들을 곰곰이 지켜보고 서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제 젊은이마저 가게 안으로 모습을 감춰들어가 버리자 자신이 몹시 쓸쓸해지고 있었다.
그는 아직도 그 닫힌 가게 문을 한동안이나 쓸쓸히 바라보고 서 있다가는 이윽고 뭔가 결심
이 선 듯 그 닫힌 문 쪽을 향해 혼자서 두어 번 고개를 크게 끄덕여 보냈다. 그리고는 마치
하품이라도 한듯한 모양으로 지금 막 저녁 어둠이 내려 깔리기 시작한 공원 숲 쪽을 높이
한번 우르고 나서는 자신도 이제 그 공원 쪽 숲그림자 속으로 천천히 모습을 섞어들어가기
시작했다.
이튿날 아침.
공원 숲에 다시 해맑은 아침 햇살이 비춰들기 시작했다. 차가운 가을 냉기가 일렁이는 공
원 숲속 여기저기서 아침 새 울음소리가 낭자하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 햇살과 새 울음소리 사이로 전날의 사내가 여전히 그 작은 사물 보퉁이를 겨드랑이 밑
에 끼어 안은 채 숲속을 서성대고 있었다.
아침 산책을 나온 동네 노인처럼 구부정한 걸음걸이로 한가하게, 또는 공원 청소를 나온
늙은 관리인처럼 주위 깊게, 사내는 숲속의 산책길과 길가의 벤치들 근처를, 그리고 어린이
놀이터의 모래판 일대를 구석구석 빠짐없이 살피고 돌아갔다.
사내는 물론 아침 공원길을 산책하고 있거나 오물 청소를 나온 게 아니었다.
그는 담배꽁초를 줍고 있었다.
그리고 길바닥이나 걸상 밑 흙바닥 같은 곳에서, 때로는 어린이 놀이터의 모래판 같은 곳
에서 심심찮게 흘려진 동전닢을 주웠다.
작업중의 그의 눈길은 더없이 예민했고 동작은 그와 반대로 더없이 유연했다.
그는 발길에 밟혀 뭉개어지지 않은 꽁초는 한 개도 무심히 스치고 지나가는 일이 없었다.
뿐더러 벤치 아래나 모래터에 흘려진 동전닢들은 그것이 아무리 깊이 은폐되어지고 있는 것
이라 하더라고 그의 영민한 눈길이 그것을 놓치고 지나가는 실수가 없었다.
그는 그렇게 담배꽁초와 동전닢들을 주우면서 사람들의 내왕이 잦은 공원 저녁을 빠짐없
이 모두 훑어 내리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그가 얻은 담배꽁초들은 그의 염색한 야전잠바
의 오른쪽 주머니에, 그리고 동그라미 쇠붙이들은 왼쪽 주머니 쪽에다 따로따로 소중히 간
직해 나갔다.
한번은 뭇사람의 발길이 흙을 굳히고 지나간 벤치 밑에서 그가 그 굳은 흙 한 덩어리를
조심스럽게 파내어 들었는데, 그는 용케도 그 흙덩이 속에서마저 그의 오른편 주머니 쪽에
간직해 넣을 작은 쇠붙이를 찾아내고 있는 것이었다.
사내의 공원길 순례는 그런 식으로 차츰차츰 공원 입구께를 향해 내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사내가 마침내 공원 입구에 이르러 그의 순례를 끝냈을 때는 이미 반나절이 다 되
어간 아침 햇덩이가 동편 하늘을 하얗게 치솟아올라 있었다. 그리고 그때쯤 해서는 그 작은
쇠붙이만을 골라 담은 왼쪽 주머니 형편도 치렁치렁 제법은 듬직스런 무게가 느껴지고 있었
다.
사내는 아예 그 왼쪽 주머니 속에다 한 손을 숨겨 넣은 채 이젠 어디가서 시장기나 좀 챙
길 양으로 천천히 공원 입구를 나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공원을 나서려던 사내는 이내 그의 발길이 다시 가로막히고 말았다.
새 가게가 이미 문을 열고 있었다.
가겟문이 열렸을 뿐 아니라 젊은이는 벌써 오전 장사가 한창인 듯 보였다. 나뭇가지에 걸
린 새장들 앞에 손님들이 꽤나 붐비고 있었다.
사내의 얼굴엔 금세 짙은 호기심이 떠오르고 있었다.
아침부터 웬 손님들이 저렇게?
사내는 이미 뱃속의 시장기도 잊은 채 가게 쪽으로 슬금슬금 발길을 다가가고 있었다. 그
리고는 신기한 듯이 그 가게에서 벌어지고 있는 주객간의 흥정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새장사는 과연 아침부터 성업이었다.
가게 앞에 몰려 있는 사람들은 그저 구경꾼들이 아니었다. 정말로 새를 사고 방생을 즐기
는 사람들이었다.
새를 사는 사람들의 표정에 그닥 심각한 대목이 있어 보이진 않았다. 사람들은 그저 가벼
운 기분으로 새를 사고 잠깐의 장난거리로 새들을 날려보냈다. 임금 2백 원의 새값이 그런
놀이의 뜻을 따지기엔 너무도 헐값에 불과하기도 하였다. 새를 사고 날려 보내는 일의 즐거
움은 오히려 곁에서 그것을 조심스럽게 구경하고 있는 사내 쪽이 훨씬 더한 거 같았다.
손님들이 새장을 열어 새를 날려 보낼 때마다 사내는 마치 철부지 어린애처럼 그 부러움
때문에 넋이 빠져나간 눈길로 날아간 새를 오래오래 뒤쫓곤 하였다.
젊은이의 새장사는 갈수록 성업이었다.
때가 아직 아침나절에 불과한데도 손님이 거의 끊일 줄을 몰랐다.
길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가게로 들어와선 또 아무렇지 않게 새들을 사고 갔
다.
새들이 자주 찰리고 있으니 사내도 좀처럼 가게 앞을 떠날 수가 없었다.
그는 이제 아예 아침 요기를 단념해 버린 채 가게 건너편 나무 그늘 아래로 자리를 잡고
주저앉아 있었다.
"날개 장사가 썩 잘되누만요, 젊은이..."
한동안 줄을 잇던 손님들이 한 고비를 넘긴 듯 가게 앞이 잠시 조용해지자 사내는 자신의
야전잠바 주머니에서 꽁초 하나를 꺼내 물었다. 그리고는 가겟집 젊은이를 향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하지만 하관이 빠른 백동테 안경의 젊은이는 아직도 사내 쪽에 대해선 별반 관심이 없는
태도였다.
그는 사내의 말에 대꾸를 해오지 않았다. 말대꾸는커녕 전날의 사내가 다시 그의 가게 앞
에 나타나 있었던 사실조차도 미처 알아보질 못한 거동새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내 쪽도 그 젊은이의 반응 따위엔 짐짓 아랑곳을 않으려는 투였다.
"하지만 예전엔 저런 사람들이 이 가게의 손님은 아니었지. 날개를 사는 사람들이 지금하
곤 전혀 달랐어."
젊은이가 귀를 기울이거나 말거나 사내는 마치 독백을 하듯이 추근추근 혼자말을 이어가
고 있었다.
하니까 젊은이는 그제야 뭔가 좀 수상쩍은 낌새가 느껴져오는 모양이었다.
그가 문득 사내 쫄을 힐끗 돌아다보았다. 그리고는 비로소 그 전날 저녁의 사내가 거기
나타나 있음을 알아차린 듯 표정이 잠깐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젊은이는 그걸 알아차리게 된 게 오히려 귀찮아진 모양이었다.
"그랬지요, 예전엔 주로 교도소 면회객들이나 새를 샀지요, 하지만 요즘은 수감자 면회 오
는 사람이 있기나 해야지요."
그는 마치 가게 앞에서 사내를 내쫓아 버리고 싶기라도 한 듯 퉁명스럽게 내뱉고 있었다.
그게 어쨌든 너 따위가 다 무슨 상관이냐는 투였다.
하지만 사내는 이제 그만만한 젊은이의 반응에도 얼굴빛이 활짝 밝아지고 있었다.
"그야 고객이 어느 쪽인들 젊은이한테야 상관이 있는 일이겠소. 젊은이한테 그저 그렇게
날개나 많이 팔려 주면 그만이지. 하지만 그 날개 장사 손님이 예전엔 가막소 수감자 면회
객들이었다는 걸 아는 걸 보니 젊은이도 벌써 그 장사 시작한 지가 꽤나 되는가 보구랴. 가
막소에 면회객 발길이 끊어진 게 아마 7,8년 저쪽의 일쯤 될테니 젊은이도 그러니까 이 장
사 일엔 그만한 이력을 지녔을 테지..."
젊은이가 새삼 사내의 행색을 내리 훑었다. 그의 말투가 아무래도 좀심상치 않게 들린 모
양이었다.
"십 년 쯤 되었지요. 한데 노인장께선 어떻게 그런 걸 알고 계십니까?"
그가 다시 사내에게 물었다. 젊은이가 한차례 사내의 행색을 훑고 있는 동안 그에게선 이
미 이 늙고 초라한 사내의 정체에 대하여 재빠른 판단이 내려지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젊은이의 목소리엔 갑자기 어떤 공손하고도 신중한 경계의 빛이 어리고 있었다.
"그야 난 젊은이가 이 가게를 맡아 오기 훨씬 전부터 이곳을 자주 지나다닌 사람이니까.
젊은인 기껏 가막소 면회객들이 여길 드나들던 시절을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그보다도
먼저 이 가게를 드나들던 사람들은 실상 저 가막소를 막 풀려나온 가난한 죄수들이었다오.
그야 그 시절에도 가막소를 풀려나온 죄수들은 그리 많은 수가 못 되었으니까 날개를 사는
사람도 많지가 못했지요. 이틀에 한 사람 사흘에 한 사람, 일주일을 통틀어도 이 길을 지나
가막소를 풀려나간 사람이 잘해야 열 명쯤 되었을까 말까... 그러니 그 출감자들이나 날개를
사주는 그 시절일로 해서는 장사가 그리 잘 되어갈 린 없었지. 하지만 날개를 사주는 사람
이 많니 않은 대신 그 시절엔 그 날개값이 무척이나 비쌌다오. 날개 한번 사는 데에 아마
그 시절 가막소 노역으로 반년 일값은 좋이 되었을게요."
가겟집 젊은이는 이제 조용히 입을 다물고 사내의 이야길 듣고 있었다.
그러자 사내는 표정이나 목소리가 갈수록 의기양양 신명이 솟고 있었다.
그는 자랑스러운 듯이 이야기를 계속해 나갔다.
"하지만 그 시절 어떻게 그 가막소를 빠져나오게 된 사람들은 누구나 한 마리씩 이 가게에
서 새를 샀지요. 가막소 안에선 뼈골이 빠지게 고역에 시달리면서도 맘놓고 사식 차입 한
번 제대로 못 들여다 먹고 모은 돈으로 말이오. 더러는 출감을 맞으러 온 가족들 주머니를
털어대는 사람도 없지는 않았지만, 가막소를 나온 대개의 출감자들은 가막소 안에서 힘들게
견뎌낸 몇 달씩의 세월값을 그런 식으로 훌쩍 날려 보내곤 했어요. 그래도 그걸 후회하거나
아쉬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요."
"..."
"하지만 그렇게 옥살이를 풀려나오는 사람 수가 많지 않다 보니 그 시절엔 어쨌든 손님이
적었어요. 가게의 규모도 이렇게 크질 못했구요. 그래 처음 한동안은 바로 저 가막소를 풀려
나온 늙은이 하나가 여기 나뭇가지들에 조롱 몇 개를 걸어놓고 몇 년을 지냈지요. 그러다
얼마 뒤에 다시 열너댓 살씩 된 그 노인의 손주아이들이 여기서 스물이 넘도록 조롱을 지켰
고요. 그때까지도 물론 지금과 같이 이런 가겟집이나 광고막 같은 것은 있을 리가 없었지요.
그럴 만큼 세월이 좋질 못했으니까. 그저 여기 이렇게 나뭇가지들에다 조롱을 몇 개 걸어놓
고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었다오. 가막소의 문이 열리고 몸이 풀려 이 길목을 걸어나
을 사람들을 말이오. 그러다 언제부턴가 이 길목에 가막소를 나오는 사람들의 수가 점점 줄
어들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그 때문에 이 가게에서 날개를 사주는 사람도 가막소를 풀려나
오는 출감자에서 수감자 면회를 찾아온 면회객들 쪽으로 옮겨 갔어요."
"..."
"지금은 가막소로 면회를 오는 사람조차 끊어지고 말았으니 할말이 없지만, 젊은이가 그
면회객들이 날개를 사주던 시절이라도 기억을 하고 있다면, 그러니까 젊은인 아마 그 무렵
언젠가 여기로 왔을 게요. 그야 내가 이 가게를 마지막 보았을 무렵까지만 해도 아직 그 수
므 살이 넘도록 장성한 늙은이의 손주녀석들이 가게를 지키고 있었긴 했지만, 어쨌거나 그
때부터 젊은이가 이 가게를 지켜 왔다면 그게 아마 십 년쯤 되었다는 게 맞는 말일 게요.
그런데..."
한동안 신이 나서 지껄여대던 사내의 목소리가 문득 기가 꺾여 목구멍 안으로 기어들고
말았다. 가겟집 젊은이가 더 이상 그의 말을 듣고 있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내의 이야기에 짐짓 시들한 표정으로 호기심을 숨기고 있던 젊은이가 그새 새 손님을
한 사람 맞아들이고 있었다.
사내는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그걸로 금세 실망을 하지는 않았다.
그는 이내 다시 젊은이와 손님 간의 흥정에 새로운 관심이 쏠리기 시작했다.
손님은 이내 새 한 마리를 사서 숲으로 날려 보내고 나선 가게를 떠나갔다.
하지만 젊은이는 아제 다시 사내를 상대해 올 눈치가 안 보였다.
사내는 젊은이의 관심이 그에게로 되돌아와 주기를 끈질기게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도 이젠 아침 장사가 한 고비를 지나간 탓일까.
마지막 손님이 새를 사고 간 다음에는 한동안 다시 가게를 들어서는 사람이 없었다.
답답하고 지루한 시간만 흐르고 있었다.
가겟집 젊은이보다도 사내 쪽이 오히려 시간을 견딜 수 없는 것 같았다.
사내는 몇 차례 자신의 왼쪽 주머니 속에서 동전 개수를 되풀이 헤아려 보고 있었다. 그
리고 몇 차례의 망설임과 새로운 다짐 끝에 마침내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진 듯 가겟집
젊은이 앞으로 몸을 불쑥 내밀고 나섰다.
"자, 내게도 한 마릴 내주오."
젊은이 앞으로 내뻗어 디민 사내의 손아귀 속에 흙 묻은 동전이 한줌 가득 쥐어져 있었
다.
가겟집 젊은이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멀거니 사내를 건너다보고만 있었다.
"아마 이것도 한 마리 날개 값이 다 되진 못할게요. 하지만 20원쯤 깎아서 한 마릴 주구
려."
사내는 젊은이 앞에서 동전을 한 닢 한 닢 다른 쪽 손으로 옮겨 세고 있었다.
사내의 말대로 동전은 10원짜리 꼭 열여덟 닢이었다.
사내는 그 동전 웅큼을 가게의 돈궤 위로 쏟아놓으며 애원이라도 하듯이 젊은이를 졸라댔
다.
"자, 어서... 난 실상 어제부터 기다린 사람이오."
젊은이는 역시 대꾸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제 사내의 심중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가 말없이 새장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사내가 비로소 마음이 놓이는 얼굴로 제풀에 그 젊은이가 가리킨 새장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가 날려 보내줄 녀석과 눈익힘이라도 해 놓으려는 듯, 또는 그가 녀석을 놓아준
즐거운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아껴 갖고 싶은 듯 한동안 망설망설 장 속을 살피고 있었다.
하더니 사내는 이윽고 결심이 선 듯 새장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장속의 새는 귀엽고 작은 눈알을 몇 차례 민첩하게 굴려대고 나서는 장문을 홀짝 벗어져
나갔다.
포르륵...
가벼운 날갯소리를 남기며 공원 숲 쪽으로 조그맣게 사라져가고 있는 녀석을 바라보고 있
는 사내의 얼굴에 주름투성이의 웃음이 가득 번졌다.
새의 모습이 아주 시야에서 사라져간 다음에도 사내는 그 누런 이를 드러낸 놓은 채 웃음
기로 굳어진 입을 다물 줄을 몰랐다.
"제 짐작이 틀리지 않다면 노인장께선 아마..."
그런 사내의 행색이 젊은이에겐 아무래도 뭔가 마음에 씌어오는 게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이번에는 가겟집 젊은이 쪽에서 먼저 사내의 주의를 건드리고 나섰다.
"노인장께선 아마 이제 바로 저 교도소를 나오신 게 아니었습니까?"
젊은이가 갑자기 그렇게 말을 걸어오자 사내는 거이 자신이 송구스러워진 태도였다. 사내
는 이번에도 그 젊은이의 관심을 놓치게 되지나 않을가 싶은 듯 허겁지겁 대꾸를 서두르고
나섰다.
"그렇습지요. 난 어제, 어제 바로 저 가막소를 나온 몸이오. 가막소를 나와 이리로 곧장 건
너온 셈이지요."
그는 뭔가 자신을 증명하고 싶어하는 투로 말했다.
하지만 사내의 조급스런 어조에 비하여 가겟집 젊은이의 그것은 아직도 지극히 방관적이
고 사무적일 뿐이었다.
"어제 출감을 하셨다... 저 교도소에선 근래에 없던 일이로군요... 하니까 노인장께서도 저기
엔 꽤 계셨던 모양이지요? 한 십년 아니면 십오 년...?"
"그야 내가 저곳에서 보낸 세월은 햇수론 쉽게 셈할 수가 없을 게요. 이번엔 지내고 나온
것만도 12년은 좋이 되고 남으니까..."
"그럼 노인장께선 전에도 몇 차례나?"
"몇 사례 정도가 아니라 평생을 보내다시피 한 거요. 나오면 들어가고 나오면 다시 들어가
고, 이젠 아예 그 쪽이 내 집 같이 되어 있었다오."
젊은이가 꼬박꼬박 말대꾸를 해오니까 사내는 이제 제법 자신이 자랑스러워지기까지 한
어조였다.
"대체 무슨 일로 거긴 그렇게 자주 드나드셨나요?"
"글세, 그건 나도 잘 모르는 일이지요. 어찌어찌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그곳으로 다시 되
돌아가 있곤 했으니까. 무슨 그런 버릇이 생겼다고나 할까... 아까도 말했지만, 한동안 그런
세월을 보내다 보니 그 쪽이 외려 내 집이나 된 것처럼 편한 생각도 들고 해서... 하긴 첫
번때부터 일이 그렇지 못하게 꼬여들 기미는 있었지요. 그 첫 번 땐 아 글세 처자식 먹여
살리려고 험한 뱃길을 나갔다 돌아와 보니, 여편네라는 계집년이 그샐 못 참아서 집안에다
샛서방 놈을 들여다 재우고 있질 않겠소. 단매에 년놈의 숨통을 끊어 놓으려 했지요. 세상
천지에 계집 서방질을 눈감아줄 놈도 없겠지만, 그 샛서방놈이 하칠 일정 때 형사 앞잡이
노릇으로 위세께나 부려오던 놈이라... 한데 결과는 년놈의 숨통을 끊어놓지도 못하고 나만
어떻게 가막소 신세가 되어빌고 말았지요. 그야 이제 와서 지나간 일을 다시 들춰내 뭐하겠
소만, 어쨌거나 그렇게 시작된 가막소살이가 그새 무슨 이력이 붙었던지 나중엔 웬 덮에라
도 걸린 사람같이 가막소만 나오면 한동안 부근을 뱅뱅 맴돌다가 결국은 다시 그렇게 되어
버리곤 했구려..."
사내는 한동안 신이 나서 지껄여대고 있었다.
가겟집 젊은인 비로소 뭔가 조금 납득이 가고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 아, 그랬었군요. 그래서 노인장께서는 어제 교도소를 나오셔도 아직 이렇게?"
그가 자신의 추리를 확인하고 싶은 듯, 그러나 조금은 경계의 빛을 머금은 표정으로 사내
에게 물었다.
하지만 사내는 젊은이의 말뜻을 얼핏 알아치리질 못하고 있었다.
"아직 이렇게? 아직 이렇게라면 무얼 말이오?"
사내가 조급하게 젊은이에게 되물었다.
"노인장께서 어제 교도소를 나오셔 가지고도 아직까지 이렇게 부근을 서성거리고만 계신
이유 말씀입니다. 모처럼 만에 바깥 세상을 나오긴 분이라면 으레 마음이 무척 조급해지실
게 당연한 노릇 아니겠습니까. 집도 찾고 싶고 가족도 보고 싶고... 하지만 노인장게선 아마
기다리는 가족이나 찾아가실 집이 없으신 게 아닙니까?"
젊은이는 거의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냉랭한 어조로 단정해 버리고 있었다.
하지만 사내의 대답은 뜻밖에 완강했다.
"아니오. 찾아갈 곳이 없다니."
사내는 거이 대들기라도 하듯 젊은이의 단정을 부인하고 나섰다.
"난 찾아갈 집이 없는 것도 아니고 기다리는 가족이 없는 것도 아니오. 집도 가족도 남부
러울 게 없어요. 난 그저 내 아들을 기다리고 있는 게요."
"아드님요? 아드님을 기다리신다구요?"
"그렇소. 내개도 고향동네엔 아들이 잇소. 젊은이 못지않게 어엿한 아들놈이오. 그리고 그
놈에게 집이 있어요. 주위엔 탱자나무 울타리가 높게 둘러쳐지고 뒤꼍으론 대밭이 무성하게
우거진 규모있는 기와집이라오, 시골집이라 울안 땅도 이만저만 넓은 게 아니오. 그게 비록
아들놈의 집이긴 하지만, 아들놈 집이니 내 집이기도 한 게요."
사내의 어조는 어딘지 필사적인 것이 있었다.
하지만 가겟집 사내는 여전히 냉랭했다.
"그럼 노인장께선 어째서 당장 그 좋은 아드님 집을 찾아가시지 않고 여기서 아드님을 기
다리신다는 겁니까?"
젊은이의 입가엔 엷은 웃음기마저 스치고 있었다.
사내는 그럴수록 표정이나 목소리가 점점 더 엄숙해지고 있었다.
"녀석과 내가 길을 엇갈리지 않으려는 거라오. 녀석에겐 내가 편지로 출감 날짜를 미리 알
려 놨으니까."
"출감 날짜를 알려 준 아드님은 그럼 왜 날짜를 맞춰 노인장을 모시러 오지 않은 겁니까?"
"편지가 아마 늦게 들어간 걸 게요. 하지만 내 편지만 받으면 녀석은 즉시 이리로 달려올
게요. 그래 내가 길을 엇갈리지 않기 위해서 이러고 여기서 녀석을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니
오. 녀석이 쫓아왔다가 내가 먼저 길을 엇갈려 집으로 내려가 버린 것을 알면 얼마나 서운
하고 실망이 되겠소. 녀석이 없었으면 난 아직도 저 가막솔 나올 생각도 않았을지 모른다
오."
사내는 자신 잇게 아들의 효심을 단언했다. 하지만 젊은이는 아무래도 사내의 장담이 곧
이듣기지가 않고 있는 모양이었다.
"제 생각엔 아마 세월이 썩 오래 걸릴 것 같군요. 하지만 뭐 할 수 없는 일이겠지요. 아드
님이 언젠가 노인장을 모시러 오기만 한다면... 그걸 믿으신다면 기다리셔야겠지요."
젊은이는 이제 웃음을 참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사내는 아랑곳을 안했다.
"암, 기다려야 하구 말구. 난 며칠이라도 기다렸다가 아들놈과 함께 고향으로 갈 테니까.
그리고 난 어차피 그 동안 여기서 해야 할 일도 남아있는 처지구."
"아드님을 기다리는 일 말고 여기서 또 해야 하실 일이 남아있나요?"
젊은이가 이번엔 거의 장난기 비슷이 묻고 있었다.
"암 해야 할 일이 있구 말구. 실상은 지금 당장 아들놈이 나타난대도 그 일을 끝내기 전엔
난 이곳을 그냥 떠나버릴 수도 없는 몸이라오. 그일 때문에라도 어차피 여기서 며칠을 더
기다려야 할 형편인 바엔, 그러니까 아들 녀석이 지금 당장 나타나지 않는 게 외려 잘된 일
인지도 모른다. 이런 말이오."
"도대체 노인장께서 그 아드님을 마다하면서까지 여기서 해야 할 일이란 무언데요?"
"말해도 젊은인 알아듣질 못할 게요. 알아듣질 못할 일은 안 듣느니만도 못할 테니 그 얘
긴 아예 그만두기로 합시다. 젊은인 그저 아들 녀석 때문에 내가 며칠 더 여기서 기다리고
있느니라 여겨 두면 마음이 편할게요..."
"..."
"하지만 난 그렇게 기다릴 아들 녀석이라도 하나 두었으니 팔잔 어쨌든 괜찮은 편 아니오.
그래 저 가막소 안엔 아닌게 아니라 찾아갈 집이나 기다려 주는 일가친척 한 사람 없어 아
예 차라리 가막소 귀신으로 죽어갈 작정을 하고 주저앉아 있는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아
오. 그 딱한 위인들에 비하면 이 늙은인 그래도 팔자가 무척은 틘 편이지요. 아암 팔자가 틘
편이고 말고..."
사내는 거듭 자신의 처지를 다행스러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가겟집 젊은이는 그 사내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가게에 다시 손님 한 사람이 들어서고 있었다. 젊은이는 이미 사내를 버리고 손님을 맞으
러 그 쪽으로 주의를 돌려 버리고 말았다.
사내도 그러자 그만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이내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머리 속에서 깡
그리 망각을 해버린 듯 가게 쪽 흥정에만 정신이 홀딱 팔려들기 시작했다.
사내는 아닌게 아니라 자신의 출감을 마중하러 올 아들을 기다리고 있는 게 사실인 것처
럼 보였다.
그는 정말로 무슨 올가미 같은 것에 발목을 매인 날짐승처럼 공원 근처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발목을 매고 잇는 올가미가 있다면 그것은 그렇게 그를 공원 근처에서 기다리게 하
고 있는 아들 녀석이 분명할 터이었다.
다음날 아침도 그는 전날과 같이 공원 숲의 차가운 아침공기 속에서 잠자리를 털고 나왔
다. 그리고 역시 전날과 똑같이 숲속의 산책길과 나무걸상 아래를 하나하나 샅샅이 살피며
꽁초를 모으고 동전닢을 주웠다.
사내가 그 숲길을 돌아 어린이 놀이터의 모래밭으로 해서 공원 입구까지 도착한 것 역시
전날과 다름없이 아침해가 동편 하늘을 하얗게 치솟아오른 다음이었다.
이제 그는 새가게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데에도 전날과 같이 주저하는 빛이 별로 없었다.
그는 공원 입구를 벗어져 나오자 곧바로 새가게 쪽으로 발걸음을 옮겨 갔다.
가게는 물론 일찍부터 문이 열려 있었고, 젊은이는 이날도 아침나절부터 때없이 밀려든
손님들로 일손이 한찬 바빠 있었다. 가게 앞에 다시 나타난 사내에 대해선 눈길조차 보내
올 틈이 없는 거 같았다.
사내도 별로 서두를 일이란 없었다.
그는 차분히 가게 한쪽 나무 곁으로 자리를 잡고 주저앉아 손님들의 흥정을 구경하기 시
작했다. 그는 그 손님들의 흥정이 한 건씩 끝날 때마다 새를 산 사람보다도 더 감동스런 눈
길로 오래오래 새를 뒤쫓곤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오정 때가 가까워지면서 한동안 손님의 발길이 뜸해질 기미가 보이자 그는
그 모든 손님들의 즐거움 대신 진짜 자신의 즐거움을 만들고 싶어진 듯, 그리고 그 즐거움
을 아끼고 싶은 시간을 더 이상 참고 기다릴 수가 없어진 듯 이번에도 그 고원 흙바닥에서
주워 모은 동전닢으로 자신의 새를 사러 나섰다.
"예. 있소. 내게도 한 마리 내어 주시오. 오늘도 날개값은 좀 모자란 것같소마는..."
동전 웅큼을 내밀고 나서는 사내의 표정은 이제 흡사 약값이 모자란 아편중독자의 그것처
럼 뻔뻔스럽고도 간절한 애원기 같은 것이 어려 있었다.
가겟집 젊은이는 아무래도 좀 어이가 없어진 듯 사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사내는 그 젊은이 앞에 16개의 동전을 또박또박 정확히 세어 건네주고나서 일방적으로 혼
자 흥정을 끝내 버렸다. 그리고 젊은이가 말없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새장을 끌어내려 신
중하고도 알뜰한 동작으로 안엣 녀석을 내보냈다.
한데 사내가 새를 내보내 놓고 나서도 뭔가 아직 아쉬움 같은 것이 남은 눈길로 새가 사
라져간 공원 숲 쪽을 응시하고 있을 때였다.
"노인장은 도대체..."
사내의 모습을 못내 딱해 하는 눈초리로 바라보던 젊은이가 갑자기 새장수답지 않은 소리
를 해오고 있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부질없는 짓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사내는 그러자 비로소 젊은이 쪽으로 몸을 돌이키며 무슨 변변치 못한 짓이라도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쑥스럽게 웃어 보였다.
"그야, 내가 그렇게 하고 싶으니까... 난 가막소 나올 땐 언제나 그랬다오..."
"하지만 노인장은 어제도 새를 한 마리 사 보내 주지 않았습니까."
공손한 말투와는 다르게 젊은이는 분명 어떤 경멸 기를 숨기고 있음에 틀리없는 소리로
사내를 계속 추궁해 오고 있었다.
하지만 사내는 젊은이가 그런 식으로나마 그를 상대해 주고 잇는 것이 반가울 수밖에 없
었다.
그는 점점 더 말씨가 의기양양해지고 있었다.
"그야 어저께도 물론 한 마릴 내보내 주긴 했지요. 하지만 그건 내 몫이었으니까. 오늘 사
준 건 내 몫이 아니라오. 오늘은 내 새가 아니라 송면장 대신 그의 새를 한 마리 사준 거라
오."
"송 면장이라뇨?"
"아 한 방에 있던 내 친구 말이오. 예전에 저곳을 들어오기 전에 자기 고을 면장을 지낸
작자로 지금도 그 시절 얘길 자주 자랑하곤 하는 위인이죠. 가막소만 나가면 지금도 누구
부럽지 않게 살아갈 집과 재산이 있노라..."
"그런데 노인장이 어째서 그 분의 새를 대신 삽니까?"
"그야 그치가 누구보다 몹시 날개를 사고 싶어했으니까. 가막소에 있는 위인들은 누구나
그렇게 한 번씩 날개를 사고 싶어한다오. 그러면서는 위인들은 누구나 그렇게 한 번씩 날개
를 사고 싶어한다오. 그러면서 그 날개를 사게 될 날만을 기다리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꼴들이지요. 그 중에도 그 송면장이란 영감태긴 유난히 더 그걸 기다렸어요. 하지만 처
지가 어디 그렇게 됩니까. 그래 내가 영감태기 대신 새를 한 마리 사주는 거라요."
"안에선 아직들 새 이야길 하십니까?"
"하다마다요. 우린 대개 날개를 한 번씩 사본 경험들이 잇는 위인들이니까. 누구나 새 이야
길 하면서 새를 사게 될 날들을 기다리고 있지요. 안에선 바로 새를 산다고 하지 않고 언제
부터선가 그저 날개를 산다고들 하지만 말이오..."
"새를 사고 싶은 사람은 그토록 많은데, 그렇다 교도솔 나오는 사람들은 어째서 전혀 볼
수가 없지요" 왜 그분들은 노인장처럼 이렇게 교도솔 나오지 못하고 있지요?"
젊은이는 문득 앞뒤가 안 맞는 소리를 사내에게 묻고 있었다. 수감자들이 감옥을 나오지
못하는 것이 마치 그 수감자들의 책임이라도 되는 것처럼. 또는 그 수감자들이 원하기만 한
다면, 감옥이란 언제나 문을 열고 나올 수가 있는 그런 곳이라도 되는 것처럼.
하지만 사내는 경우가 뒤바뀐 젊은이의 물음에 조금도 기분을 상하지 않았다.
"그건 아마도..."
사내는 마치 자신이 그 이유를 알고 있는 것처럼 진지한 표정이 되고 있었다.
"그건 아마도 연락들이 잘 닿질 않아서 그리 된 걸 거외다. 편지들이 영 집까지 들어가질
못한 모양들이에요. 우린 누구나 자기 형기의 반 이상을 넘긴 사람들이라오. 그리고 그 형기
의 반을 넘길 무렵이 되면서부터 우리는 누구나 열심히 편지들을 쓰기 시작하지요. 알다시
피 우리는 모두 고향이 있고 가족이 있는 몸들이니까. 글쎄, 젊은인 우리가 저 안에서 자기
고향과 가족들을 얼마나 서로 자랑들을 하고 지내는지 알기나 하겠소. 날 맞아가다우... 난
이제 형기가 거의 끝나가고 있으니 날 맞아갈 준비를 서둘러다구... 우리들 가운데 누군가가
그런 편지를 쓰게 되면 우리는 참으로 얼마나 그를 부러워했으며, 당사자는 또 얼마나 그걸
자랑스러워했는지..."
"그럼, 집에서들도 곧 연락이 오나요?"
모처럼 한 마디를 던져오는 젊은이의 물음에 사내는 비로소 뭔가 기가 좀 꺾이면서 천천
히 가로젓고 있었다.
"그건 모르지요."
"모른다니요?"
"결과에 대해선 별로 생각들을 안하니까. 결과에 관심을 가지고 그걸 알아보려는 위인도
없구요."
"가족 중에 누가 서둘러 주어서 가석방 같은 걸 얻어 나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나요?"
"없었소."
"하지만 면회를 와준다거나 편지 연락 같은 거라도 닿은 일은 있었을거 아닙니까?"
"그런 일도 없었어요. 가족이 누가 면회를 와준 일도, 편지 답장이 있었던 일도... 하지만
우리는 말을 않는다오. 우리가 저 안에서 생각하고 행하는 일들이란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
든 그걸 거짓말이라고 여기여 드는 사람은 없어요.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그걸
말할 필요도 없는 거요."
"..."
"하지만 우리도 한 가지는 알고 있다오. 우리가 보낸 편지가 번번이 고향에 잇는 가족들의
손에까지 들어갈 수가 없다는 걸 말이오. 젊은인 잘 이해가 안 가겠지만 우리가 쓴 편지는
한 번도 고향의 가족에게 제대로 닿아본 일이 없었다오. 그래 일이 그리 된 겝니다... 편지
연락이 안 닿으니 가족들도 우릴 잊어버리고들 있는 거지요."
"그래 노인장께서도 아드님에게 편지를 쓰셨나요? 그리고 노인장께선 용케도 그 아드님과
연락이 닿아서 이렇게 출옥을 해 나오신 건가요?"
젊은이는 그때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모처럼 목소리가 부드러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사내는 갈수록 점점 기가 죽어가고 있었다.
그는 힘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그야 나도 아들놈에게 편지를 자주 쓰기는 했지만... 내 소식도 역시 아들놈에게까
진 아직 닿질 못하고 있는 것 같구려."
"그럼 아드님하고 연락이 닿기도 전에 노인장은 형기가 끝나 버린 겁니까?"
"아니, 형기가 다 끝난 건 아니오. 아들놈의 소식만 기다리고 있을 수가 없어 내 힘으로 어
떻게 가석방 특사를 얻어 나온 거라오. 하지만 그것도 따지고 보면 다 아들 녀석 덕분인 게
지요. 아들놈과 그 아들놈의 고향집이 없더라면 난 이렇게 나올 수가 없었을 게요. 아들놈과
손주놈들이 모고 싶고, 집이 그리워지고... 난 한동안 아들놈과 아들놈의 집에 대한 꿈만 꾸
었다오. 탱자나무 울타리가 우거지고 집터가 시원하게 트이고 게다가 햇볕고 깊고... 그래 난
아들놈과 소식이 안 닿더라도 내가 먼저 녀석을 찾아 나서기로 작정을 한 거라오..."
아들과 고향집 이야기가 시작되자 사내의 목소리엔 점차 다시 생기가 되살아나고 있었다.
사내는 마음속으로 잠시 그 고향집과 아들 생각에 젖어드는 듯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야기
를 계속했다.
"결국은 그 아들놈에 대한 믿음이 내게 저 가막소를 나오게 한 것이지요. 다른 녀석들은
아마 나처럼 아들놈에 대한 믿음이나 고향집에 대한 그리움들이 작았을 게요. 그리고는 감
히 가막소를 나올 엄두들이 날 수가 없지요. 하지만 나 어쨌거나 이제 아들놈을 보게 됐어
요. 녀석은 아마 이런 식으로 아비가 가막소를 나오게 만든 걸 몹시도 가슴이 아파하겠지만
서두..."
"그럼 아드님은 아직 노인장의 출옥 소식도 모르고 있는데 노인장께선 여기 이렇게 무작정
그 아드님만을 기다리고 계실 참인신가요?"
젊은이의 얼굴엔 서서히 다시 전날과 같은 차가운 조롱기 같은 것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야 나도 언제까지나 여기 이러고 녀석을 기다리고 있을 순 없앴지요. 아들 녀석이 끝내
나타나지 않는다면 내 발로 녀석을 찾아 나서야지... 하지만 아직은 좀더 기다려 봐야지요.
여태까지 소식이 닿지 못했더라도 금명간에 편지가 닿을 수도 있겠구. 녀석이 혹 소식을 맏
고 달여왔다가 길이라도 엇갈리는 날이면 녀석의 낭패가 얼마나 하겠소."
"그래 노인장께선 그럼 가막소 친구분들을 위해서 앞으로도 계속 새를 사실 참이신가요?"
젊은이는 이제 거의 사내를 놀려대고 있는 듯한 어조였다. 그의 그 매끈한 얼굴에 노골적
인 비웃음기가 번지고 있었다.
사내 쪽도 이젠 대꾸가 몹시 궁색스런 처지로 몰리고 있었다. 그는 젊은이의 말에 얼핏
대꾸를 못하고 쩔쩔매고 있었다. 하다간 이윽고 기가 휠씬 꺾여든 목소리로 어물어물 말끝
을 흐리고 있었다.
"그야 살 수 있는 형편만 된다면... 녀석들은 그토록 날개를 사고들 싶어했으니까..."
가겟집 젊은이는 이제 그런 사내의 횡설수설 따윈 귀담이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잔인스
럽게 비웃고 있었다.
"그러시겠지요, 아마... 노인장의 그 효성스런 아드님이 노인장을 모시러 나타날 때까지
는..."
사내는 결국 입을 다물고 말았다.
무슨 일로 해선 진 모르지만, 젊은이가 아무래도 화를 내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사내는 그 젊은이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이 마치 자기 탓이기라고 한 것처럼 민망스런 눈길
로 한동안 그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하지만 사내는 아무래도 자신의 힘으로는 젊은이의 기분을 돌려놓을 방고가 떠오르질 않
는 것 같았다.
그는 마침내 시간을 마련해 주는 도리밖에 없다고 여긴 듯 맥없이 혼자 가게를 떠나갔다.
사내가 다시 근처로 젊은이를 찾아 나타난 것은 이날도 또 하루 해가 설핏이 기울어든 저
녁 참이었다.
사내의 얼굴은 아깟번에 맥이 빠져서 가게를 떠나갈 때와는 달리 생기가 훨씬 돌고 있었
다.
그는 이날 따라 공원 숲 일대를 한차례 더 훑고 온 참이었다. 그의 왼쪽 주머니엔 다음날
아침 수입거리를 미리 거둬 온 동전닢들로 무게가 제법 얹히고 있었다. 사내는 그것으로 젊
은이의 기분을 되돌려줄 사진이 생긴 듯 한쪽 손을 넌지시 주머니 속으로 숨겨 쥐고 있었
다.
새를 살 작정인 것이다.
그야 그는 그의 감방 동료들을 위해서 계속해서 새를 사겠노라 젊은이에게 몇번씩 다짐을
했으니까. 그리고 사내로선 또 새를 사 주는 일 이상으로 새장수인 젊은이를 기쁘게 해줄
일도 있을 리가 없으니까.
사내는 바로 그 젊은이가 맘에 들어 할 일을 눈치로 미리 마련해 온 것이었다.
하지만 사내가 젊은이를 찾아 가게로 온 것은 하필이면 사정이 그리 좋은 때가 못 되었
다.
사내가 가게로 돌아왔을 때 마침 가게 안으로 새를 사러 들어온 신사한 사람과 가겟집 젊
은이 사이에 심심찮은 시비가 오가고 있었다.
"전 선생님께 이 새의 소유권을 통째로 판 게 아닙니다. 그 점을 선생님은 분명히 알아두
셔야 합니다. 전 선생님께 이 새를 숲으로 날려보낼 방생의 권리를 팔았을 뿐이란 말입니다.
선생님께서 이 새를 댁을 가져가실 수는 절대로 없습니다."
젊은이가 신사에게 열심히 설명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젊은이의 주장엔 상대 쪽 손님도 그에 못지 않게 만만찮은 어조로 맞서고 있
었다.
"나도 물론 새를 통째로 샀다고는 말하지 않았소. 그리고 나 역시 이런 참새 나부랑이를
기를 생각은 없어요. 난 그저 이 새를 집까지 가져가서 아이들과 함께 날려보내고 싶은 것
뿐이란 말요. 그런데 그게 대한테 무슨 상관이 되는 일이오. 여기서 놓아주든 집에 가서 놓
아두든 새가 일단 장문을 나가게 되면 댁하곤 이미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 아니오."
시비의 사연인즉, 새를 산 손님은 굳이 새를 집으로 가지고 가서 놓아주겠다는 것이었고,
젊은이는 또 젊은이대로 집으로는 절대 새를 가져가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젊은이와 손님 사이의 시비는 그런 식으로 아직 한동안이나 더 계속 되어 나가고 있었다.
"선생님이 새를 사신 이상 그걸 어디서 날려 보내시든 그렇게만 해주시면 전 물론 상관이
없지요. 하지만 전 믿을 수가 없어요. 선생님이 이 새를 댁으로 가져가셔서 그걸 정말로 날
려보내 주실지 어떻지 그걸 말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선생님께서 이 새를 날려보내시지
않고 기를 생각을 하실 수도 있습니다."
젊은이가 얄밉도록 자신 있게 단정하고 나서자 신사 쪽은 어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진
것 같았다.
"젊은 친구가 말이 너무 심하구만. 아까도 말했지만 내가 그래 이 따위 참새 나부랑일 집
에서 기를 사람으로 보여? 그리고 내가 일단 새를 산 이상에야 이 새를 내가 날려보내 주
든, 집에서 기를 작정을 하든 당신이 나서야 할 이유가 무어요."
그는 함부로 반말짓거릴 섞어대고 있을 만큼 자신의 흥분기를 감추지 못했다. 가겟집 젊
은이는 오히려 그걸 기다리고 있었기라고 하듯 그럴수록 어조가 차분해지며 정중하고 여유
있게 말의 조리를 세워나가고 있었다.
"그건 그렇지 않아유."
"그렇지가 않다니?"
"전 손님들에게 새의 방생권을 파는 것이지 구속을 팔고 있는 건 아니니까요. 전 그만큼은
제 새의 자유를 지켜 줄 줄 알고 있습니다."
"새의 자유라... 그거 참 새장수치고는 기특한 말이군 그래 당신은 그 새의 자유를 지켜주
기 위해서 이렇게 장 속에 새들을 가둬 두고 있구려."
"그러나 그것은 새들로 인하여 우리 인간들이 보다 크고 보람스런 자유를 누릴 수가 있으
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그 우리 인간들의 자유를 위하여 끝끝내 새들을 구속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새는 여기서 놓아 보내야 합니다."
"그거 참 감동한 만한 얘기로군."
신사는 차라리 감탄스럽다는 표정으로 젊은이를 향해 내뱉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물론 젊은이의 이야기에 설복이 되었거나 감동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젊은이를 요량껏 비웃고 있는 중이었다.
사내는 마침내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엉뚱한 시비로 인하여 사내는 이제 젊은이에 대
한 자신의 호감과 우의를 증명해 보일 절호의 기회를 얻은 것이었다.
"맞습니다."
사내는 그냥 참고 볼 수가 없다는 듯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고 나섰다.
"이 젊은이 말이 맞아요. 아마 난 상관하고 나설 일이 아닐는지 모르지만 사리는 결국 옳
게 판가름이 나야 할 듯싶어 얘기요."
손님과 젊은이는 사내의 갑작스런 참견에 잠시 입을 다문 채 사내의 거동을 지켜보고 있
었다.
그는 조급히 말을 이어 나갔다.
"세상엔 아닌게 아니라 새를 제 갈곳으로 놓아 보내 주기보담은 장 속에 가두고 기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아니, 이건 뭐 선생님이 반드시 그렇다는 건 아닙니다. 보아
하니 아마 선생님께는 그 점 믿어도 좋겠어요. 하지만 이 젊은이로 말하면 자기 일을 좀더
분명히 해둬야 할 필요가 있겠지요. 이 젊은인 자기 새들에게 날개를 얻어 주는 일을 하니
까요. 젊은이가 자기 눈앞에서 새들이 날개를 얻어 하늘을 날아가는 것을 지켜주고 싶은 것
은 열번 백번 당연한 노릇일 겝니다. 그리고 젊은이가 그 일을 분명히 하자면 새를 사가는
사람을 믿고 안 믿고보다도 처음부터 새를 내주지 않는 것이 현명한 일이지요."
사내는 짐짓 엄숙한 표정으로 신사를 은근히 나무라고 있었다.
손님은 차라리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가겟집 젊은이도 이제 일이 그렇게 되고 보니 더 이상 할말이 없는 듯 멍청스레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쳇! 공연한 장난거리에 끌려들어 별 해괴한 연설을 다 듣게 되는구만... 좋고, 그럼!"
당신은 도대체 뭐길래 그러고 나서냐는 듯 곱잖은 눈초리로 사내를 훑고 있던 손님이 끝
내는 간단히 후퇴를 하고 말 낌새였다.
"내 새를 안 사면 그만일 게 아니오. 안 그렇소, 젊은이? 내 새는 안 가져갈 테니 새값이나
그냥 돌려 주구려."
손님은 이제 차라리 장난기가 완연한 몸짓으로 젊은이의 어깨를 가볍게 건드렸다.
하니까 젊은이 쪽도 이제 손님과는 쉽사리 의기가 투합해 버린 듯 허물없는 웃음으로 손
님을 응대했다.
"그럼 차라리 그렇게 하시죠. 선생님께서 그걸 섭섭히 여기지만 않으신다면..."
그는 선선히 새값 2백 원을 되돌려 주었고, 신사는 오히려 그것으로 그의 놀이를 즐긴 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가게를 떠나갔다.
둘이서 아웅다웅 다투고 있을 대의 형세에 비해서는 뜻밖에 결말이 싱거운 싸움이었다.
하지만 사내는 어쨌든 그것으로 만족이였다. 한두 번 개운찮은 눈총을 쏘이긴 했어도 싸
움이 그렇게 쉽게 끝난 것은 분명히 그의 참견의 덕분이라 할 수 있었다.
젊은이가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그는 아마 그걸로 충분히 기분을 돌리게 될 것이었다.
사내는 속으로 그렇게 기대했다. 그리고 젊은인 이제부터 그걸로 사람을 대해 오는 태도도
조금은 달라지게 될 수 있으리라.
사내는 그러자 공연히 자기 기분까지 들뜨기 시작했다.
미진한 일이 있다면 다만 손님이 끝끝내 고집을 꺾지 않고 새값을 되찾아 돌아간 일뿐이
었다.
하지만 사내는 그것도 그리 문제가 될 게 없다고 생각했다. 손님을 대신하여 자신이 새를
사주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사내는 젊은이에 대한 자신의 우의를 결정적으로 증명
해 보일 생각이었다.
그는 곧 그렇게 했다.
그는 새값도 미처 치르기 전에 손님이 방금 되돌려 주고 간 새장문을 열어젖치고 바란 듯
이 녀석을 숲으로 내보냈다.
"이건 삐줄이 네놈 몫이다. 삐줄이 네놈한테도 내 오늘 이렇게 네놈 몫의 새를 사줬으니
더 이상 삐질 생각일랑 말아라."
그리고 그 새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난 다음에야 그는 그 오후의 소득으로 당당히
새값을 치러보이고 있었다.
한데 바로 다음이 또 잘못이었다.
기분이 너무 들뜬 탓이었을까.
의기양양 새값은 치르고 난 김에 사내가 그만 실수를 한 가지 저지르고 말았다. 그건 별
로 큰 실수는 아니었다. 사내도 미처 그게 자신의 실수가 될 줄은 생각을 못했으니까. 그리
고 그것이 자신의 실수가 되어 버린 걸 알고도 어째서 잘못이 되고 있는지가 얼핏 머리 속
에 헤아려지질 않았으니까.
"그런데 젊은인 도무지 이 많은 새들을 다 어디서 구해 들이고 있는 겐가?"
사내의 실수는 다만 그 한마디 뿐이었다. 한데 다소간 거침이 없는 듯한 사내의 소리에
가겟집 젊은이가 모처럼 만에 천천히 그를 돌아다보았다.
사내는 무심코 그 젊은이의 눈길을 받다가 표정이 갑자기 움츠러들었다.
젊은이가 왠지 그의 백동테 안경알 뒤에서 사내를 이윽히 쏘아보고 있었다. 사내가 그에
게 눈길을 비키고 난 다음에도 젊은이의 시선은 좀처럼 사내를 떠날 줄 모르고 있었다.
그의 시선 속엔 차갑고 무거운 위협기가 숨어 있었다. 그는 화를 내고있는 게 분명했다.
사내는 비로소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자신의 말 가운데에 젊은이의 맘에 들지 않는 대
목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는 자신의 경솔히 새삼 후회스러워지도 있었다.
"아, 그야 이런 일을 하자면 어디선가 자꾸 새를 새로 구해 들여야 하는 게 당연한 노릇이
긴 하겠지요. 난 그저 그 새들을 어떻게 구해 오는 지 그게 좀 궁금해서... 그야 뭐 굳이 내
가 알아야 할 일도 아니겠지만서두..."
사내는 자신의 실수를 변명하듯 젊은이의 눈치를 살펴가며 제풀에 횡설수설 더듬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사내는 진심으로 새를 구해 들이는 방법을 자기가 굳이 알아야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그걸 알고 싶어한 것이 젊은이의 비위를 건드리게 된 것인지 어떤지는 아직
도 분명치가 않았지만, 어쨌더나 소용 닿을 데가 없는 일로 해서 그를 화나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쉽게 화가 풀리질 않는 얼굴이었다. 그는 한 마디 말도 없이 당황해 어
쩔 줄 모르고 있는 사내에게 시선을 계속 못박고있었다. 사내가 마침내는 더 이상 변명을
늘어놓을 수도 없을 만큼 까 죽어버릴 때까지. 그리고 끝내는 그 젊은이에게 더 이상 화를
내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제풀에 슬금슬금 가게 앞을 떠나가 버릴 때까지.
젊은이의 기분을 돌려 놓으려던 사내의 노력이 오히려 너무 지나친 탓이었다. 그리고 그
때 사내의 기분이 분별없이 너무 들뜬 탓이었다.
사내로선 그만 다 된 밥에다 재를 뿌리고 만 기분이었다.
갈수록 태산으로 사내는 이날 밤 또 한 가지 실수를 거듭 저지르고 말았다.
이날밤 공원 숲 속에선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사내는 이날 밤도 공원 숲 속의 한 나무걸상 위에다 옹색한 잠자리를 마련하고 있었다.
한데 자정이 지난 지도 한식경이 지난 새벽 두 세 시쯤 되어서였을까. 숲 속의 어디쯤에
선가 심상찮는 인기척 같은 것이 들려오고 있었다.
사내는 그 소리에 어슴푸레 잠결에서 깨어나 머리 위에 뒤집어쓰고 있던 야전잠바 자락을
밀어냈다.
한밤중에 웬 전깃불의 환한 빛줄기가 어두운 숲 속을 장대처럼 이리저리 훑고 있었다. 빛
줄기는 때로 나뭇가지들의 한 곳에서 곧게 고정되고 한 사내의 그림자가 그때마다 나무 위
로 올라가 빛줄기의 끝에서 열매를 따듯 잠든 새들을 집어내렸다. 잠결에 빛을 받은 새들은
눈먼 장님처럼 옴짝달싹을 못했다. 날개를 처들여 날아 보는 새들도 방향을 못잡고 좌충우
돌하였다. 나뭇가지에 부딪쳐 떨어지는 놈도 있었고 제물에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쳐 내리는
놈도 있었다.
그림자는 끊임없이 빛줄기를 들이대며 잠든 새들을 사냥하고 있었다.
기이하게 손쉬운 새의 사냥법이었다.
녀석들이 그렇게 다시들 돌아오게 하였군.
사내는 저절로 탄성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 손쉬운 사냥법에 대한 사내의 감탄은 그리 긴 시간 계속될 수가 없었다.
조용한 어둠 속에 빛줄기가 너무 세찼지 때문이었을까. 한동안 숨을 죽인 채 어둠 속으로
그런 광경을 숨어 보고 있던 사내는 자기도 모르게 문득 가슴이 몹시 떨려오기 시작했다.
빛줄기가 까닭없이 두렵고, 빛줄기를 조종하고 있는 사내의 그림자가 무턱대고 무서워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안 볼 것을 엿보고 있는 듯 사지마저 조그맣게 움츠러들고 있었다. 게다가
그 빗줄기는 이제 사내 쪽으로 자꾸만 가까이 거리를 조금씩 좁혀들고 있었다.
이유 같은 건 알 수 없었지만, 사내는 아무래도 그 빛의 임자에게 그의 사냥이 들키고 있
다는 걸 알게 해서는 안될 것 같았다.
그는 갈수록 두렵고 초조해졌다. 불빛이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들수록 사내의 머리는 자꾸
만 야전잠바 옷깃 속으로 깊이 움츠려 숨어들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전깃불의 눈길은 실수가 없었다. 빛줄기가 끝내는 사내의 머리통을 맞혀잡고 말았
다. 동시에 사내의 머리통도 이젠 완전히 야전잠바 깃속으로 모습을 숨겨들고 말았다.
하지만 한번 사내를 붙잡은 전깃불의 빛줄기는 그를 쉽사리 떠나려 하질 않았다. 그릴 쏘
아 맞춘 빛줄기는 사내가 둘러쓴 잠바자락을 뚫고 점점 세차게 젖어들고 있었다.
사내는 숫제 잠바자락 속에서 눈을 감아 버리고 있었으나, 감은 눈꺼풀위로도 빛은 충분
히 스며들고 있었다.
이윽고 굵다란 발자국 소리가 천천히 그의 곁으로 다가들고 있었다. 발자국 소리는 몇 걸
음 저쪽에서 문득 소리를 죽인 채 한동안 밝은 빛줄기만 조용히 쏘아붙이고 있었다.
사내는 잠바자락 속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무서운 빛줄기의 세례를 견디고 있었
다.
빛줄기는 잠바자락 속의 사내를 거의 질식 상태로 짓눌러 놓은 다음에야 간신히 그에게서
걷혀져 나갔다. 그리고 곧 발자국 소리가 방향을 바꾸며 그에게서 천천히 멀어져가고 있었
다.
하지만 사내는 이미 뱀의 눈빛에 쐬어 버린 개구리 한가지였다.
사내는 이제 발자국 소리와 함께 천천히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는 사냥꾼의 뒷 모습
나마 한번 더 몰래 엿보아 두고 싶어졌지만, 실제론 그렇게 몸은 움직여 나설 엄두가 생겨
나질 않았다.
그는 그냥 그대로 야전잠바 옷자락 속에 눈을 감은 채 발자국 소리가 그의 귓가에서 멀리
사라져 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잠을 깨고 일어났을 때 사내는 그 간밤의 일이 꿈이 아니었나 싶어졌다. 하
지만 그건 분명 꿈이 아니었다. 그게 꿈이 아니라면 그는 가겟집 젊은이를 화나게 만들 또
하나의 허물을 지녀 버린 것이었다. 사내에겐 어쩐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건 물론 고의는 아니었다. 그리고 간밤에는 그의 주위가 제법 용의주도하였기 때문에
사내가 그를 엿보고 있었다는 확증을 붙잡힌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사내는 그것으로 젊은이를 안심해 버릴 수는 없었다.
사내는 이날 따라 아침 일을 서둘렀다. 그리고 일을 훨씬 서두른 바람에 여느 날보다는
거의 한 시간 가량이나 일찍 가게로 내려갔다.
가겟집 젊은이는 짐작대로 간밤의 일에 대해선 아무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가게에는 이날도 아침부터 손님이 붐벼댔기 때문에 젊은이는 미처 그를 괘념할 여가가 전
혀 없었을 수도 있었다.
젊은이는 오전 장사가 한 고비를 넘기고 나서도 좀처럼 별다른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사내는 차라리 그게 더욱 수상하고 불안스러웠다. 사내는 그럴수록 자기 쪽에서 먼저 젊
은이의 심사를 다스려 놓는 게 좋으리라 생각했다.
"내 감방 친구 가운데에 꼼장어란 별명을 가진 늙은이가 하나 있었는데, 그 친군 사실 나
보다도 훨씬 이 가겔 잊지 못해 했었다오."
사내는 우선 젊은이가 맘에 들어할 소리로 그의 새장사 일을 부추기기 시작했다.
"그 작잔 허구한 날 언제나 이 가게에서 새를 사게 될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 날을 위해 끊임없이 편지를 쓰고 자식놈의 면회를 기다렸지요. 가막소 안 사람들이 누구
나 다 그렇긴 하지만 그 늙은이야말로 정말로 이 가게에서 날개를 한 번 사보는 것이 누구
보다도 큰 소망이었으니까. 그런 가엾은 늙은이들에겐 젊은이의 가게가 바로 가장 소중스런
꿈이요 희망이지 뭐겠소."
사내의 칭송에도 젊은이는 아직 대꾸를 보내 올 기미가 안 보였다.
사내는 젊은이의 대꾸가 있거나 말거나 참을성 좋게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해 나갔다.
"아마 난 언젠가는 그 늙은이 몫으로도 새를 한 마리 사줘야 할 게라요. 늙은인 그렇게 새
를 사고 싶어했는데도 그 소망을 끝내 이뤄볼 수가 없게 되고 말았지 않았겠소. 염감쟁이가
글세 운도 없이 2년 전에 벌써 저 가막솔 죽어 나가고 말았지 뭐겠소. 죽은 넋이나마 늙은
일 위해서 내가 대신 새를 한 마리 사줘야 도리일 것 같아요... 하니까 죽은 사람 남은 사람
해서 아직도 좋이 열 마리는 더 사줘야 할 겐가... 하지만 이제 뭐 가막솔 풀려 나온 몸이
그만 수고쯤은 대신해 줘야지. 암, 그만 수고쯤 대신해 줄 수가 있어야구 말구..."
새를 사준다는 건 뭐니 뭐니 해도 젊은이에겐 가장 맘에 들 소리임이 분명했다.
사내는 그 젊은이 앞에서 지혜를 다해 그를 꼬드겼다.
젊은이는 아직도 역시 아무 반응이 없었다. 사내의 지껄임은 도대체 들은 체도 않고 이는
얼굴이었다.
가끔 가다 히뜩히뜩 사내 쪽을 흘겨보고 있는 눈길엔 그리 보아 그런지 아무래도 어떤 심
상찮은 경계심 같은 것이 숨겨져 있는 것 같기도 하였다.
그런 낌새나 어림짐작만으로 젊은이가 간밤의 일을 되새기고 있다곤 할 수 없었지만, 사
내는 전날의 허물도 있고 해서 이날따라 젊은이가 끝끝내 입을 다물어 버리고 있는 것이 못
내 불안하고 꺼림칙스러웠다.
사내는 다시 기가 꺾여 한동안 궁리에 부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다 사내는 마침내 한 가지 자신의 불찰이 머리 속에떠올랐다.
그러면 그렇지. 내가 오늘은 어째서 여태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질 못했을꼬...
사내는 여태까지 새를 사지 않고 있었던 일이 생각난 것이었다. 사내는 그 사실뿐만 아니
라 그의 가막소 친구들을 위해서까지 새를 사겠노라 몇 번씩 맹세를 해 보였으면서도 이날
따라 정작 젊은이에게서 새를 사준 것은 한 마리도 없었다.
사내는 그런 자신이 조금은 이상했다.
그는 이날따라 새를 한 마리도 사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런 자신을 깨닫고 나서도 여
느 날처럼 그 새를 사는 일에 도무지 신명이 나질 않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내는 이제 자신의 기분 따위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그 말이 없는 젊은이 앞에 스스로 자신을 위압당하고 있었다. 자신의 기분이야 어찌
되었든 그는 이제 젊은일 위해서라도 새를 사줘야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사내는 그럴수록 더욱 기분이 무거웠다.
하지만 그는 곧 자신을 위로했다.
하지만 이건 녀석들을 휘하는 노릇이기도 하니까. 아암, 내가 언제 젊은일 위해서 새를 샀
던가. 이건 모두가 녀석들을 위하고 새를 위해서 하는 일이지.
사내는 마침내 결심을 하고 주머니 속에서 동전닢을 세었다. 그리고는 곧 가게 안 금고
위에다 그것을 쏟아놓았다. 이날은 사정이 새값을 깎을 형편도 못 되었지만 용케도 동전닢
이 스무 개를 넘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그 지독한 왕릉지기 염감이 되겠군.:
사내는 머리 속에 차례를 정해 둔 대로 잠시동안 그 왕릉도굴을 일삼다 들어왔다는 남도
사투리의 늙은이를 생각했다. 그리고는 어느 때보다도 간절한 심경으로 조롱문을 열어 새를
내보냈다.
그래도 젊은이는 도무지 아무런 참견이 없었다. 사내가 새를 사겠노라 동전을 건넬 때도
젊은이는 그저 남의 일을 대신하듯 냉랭한 눈길뿐 표정이 조금도 달라지질 않고 있었다.
사내는 새를 사고 나서도 기분이 조금도 나이지질 못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가게에서 버티내고 있을 기력이 없었다. 가게에 할 일이 남아있는 것
도 아니었고, 더 이상 무슨 소릴 지껄려댈 마음도 없었다.
그는 이윽고 그 얼음장 같은 젊은이의 침묵을 뒤로 한 채 가게를 떠갔다.
가게를 떠나가는 발걸음이 유난히 지치고 무겁게 느껴졌다.
사내는 이날 밤도 그 공원 숯 잠자리에서 밤새도록 불빛에 쫓기고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을 장대처럼 빛줄기가 곧게 뻗히고, 그 빛줄기를 얻어맞은 새들이 나
뭇가지들 위에서 낙엽처럼 우수수 땅 위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 빛줄기는 사내의 잠자리를 찾아 밤새도록 이리저리 숯 속을 헤매었다.
사내는 안타깝고 초조했다. 그리고 두렵고 조급했다. 빛줄기는 때로 그의 야전 잠바 옷자
락 위로 사정없이 그를 찌르고 드는가 하면, 때로는 또 엉뚱스럽게 그를 놓치고 부근 숲 속
을 미친 듯이 헤쳐다니곤 하였다.
그는 쪽지다가 붙잡히고 붙잡혔다간 다시 쫓기고 하는 악몽 속에서 날을 훤히 밝히고 말
았다.
사내는 그러니까 실제로 그 전기불의 불빛을 본 건 아니었다. 그는 그 빛줄기의 꿈을 꾼
것이었다.
이튿날 아침 잠자리를 일어났을 때 사내는 머리 속이 온통 남의 것처럼 멍멍했다. 그는
자리를 일어나고 나서도 날마다 계속해 온 아픔 일은 생각조차 해보질 않았다. 아침 일 생
각이 났다 하더라도 그럴 만한 기력이 남아 있질 못했다.
그는 그저 넋이 나간 사람처럼 우연히 한동안 아침 숲 속만 지키고 앉아있었다. 이 날사
말고 그 흔한 새소리조차 귀에 들려오지가 않은 것 같았다.
사내는 아침 햇덩이가 동편 하늘을 하얗게 치솟아오른 다음에야 간신히 몸을 움직이기 시
작했다. 그러나 그는 이날 아픔 끝끝내 그 동정 줍기를 단념해 버린 채 그 길로 허정허정
가게 쪽으로 내려갔다.
가게는 이미 문이 열려 있었고, 여느 때 못지않게 손님도 붐볐다.
하지만 사내는 이제 새를 사지 않았다. 동전을 줍지 않았으니 새를 살수도 없었지만, 그는
그걸 별로 아쉬워하지도 않았다. 그는 이제 젊은이의 눈치를 살펴가며 그에게 굳이 말수작
을 건네 보려는 기미도 안 보였다.
그는 그저 그렇게 가게 맞은 편에 우연히 주저앉아 붐비는 손님들만 구경하고 있었다. 그
리고 한 낮이 가까워 오면서부터 손님들의 왕래가 한 고비를 넘기자 사내는 자신도 가게 앞
을 떠나갔다. 그가 그 가게 앞을 찾아올 때와 똑같이 지치고 무거운 걸음걸이로. 그리고 그
것으로 사내는 이날 저녁 어스름이 공원 일대를 뒤덮어올 때까지도 그의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사내가 다시 젊은이의 새 가게 앞에 지치고 남루한 모습을 나타낸 것은 이튿날 아침 그
맘 때쯤 해서였다.
하지만 그는 이날도 새를 사지 않았다. 젊은이의 눈치를 살펴가며 말수작을 건네오는 일
도 없었다. 그는 일날도 그저 전날처럼 그렇게 할 일없이 손님들의 거래를 구경하고 있다가
오정이 지나고 가게가 좀 한가해지는 기미가 보이자 그 길로 그만 다시 자리를 일어서버렸
다.
사내의 거동은 며칠 동안이나 계속 그런 식이었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그 가게를 찾아올
때와 똑같이 지치고 피곤한 모습으로 말없이 가게를 떠나가곤 하였다.
하니까 이번에는 오히려 가겟집 젊은이 쪽에서 뜻밖의 태도로 나오기 시작했다.
"노인장을 모시러 올 아드님은 아마 찻길이 막혔거나 길을 거꾸로 돌아서 버렸거나 한 모
양이지요."
어느 날 아침 가게가 잠깐 조용해진 틈을 타서 가겟집 젊은이가 문득 사내에게 말했다.
"제 기억으론 노인장이 가막소를 나온 지도 벌써 한 주일은 넘은 줄 아는데, 아드님은 어
째서 여태도 소식이 감감하지요?"
할일없이 날마다 가게 부근을 서성대며 장사 거래만 지켜보고 잇는 사내의 거동이 젊은이
에겐 그렇게 신경이 쓰이고 있었을까. 아니면 젊은이는 이제 새도 사주지 않는 사내의 존재
로 하여 자기의 상사에 실제로 어떤 곤란을 겪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젊은이는 이날부터 갑자기 작전을 바꾸어 사내를 비웃기 시작한 것이다. 그건 보나마나
그의 가게 근처에서 사내를 멀리 쫓아버리기 위한 음흉스런 계교가 분명했다.
"뭣하면 다시 편지를 한 장 써볼 수도 잇지 않겠어요. 아마 노인장의 편지가 아직도 아드
님께 닿질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니까 말입니다. 주소가 어떻게 되세요. 아드님의 시골집 주
소가..."
젊은이는 사내가 새를 사주지 않는 데 대한 원망의 기색은 손톱만큼도 나타내지 않았다.
그는 될수록 사내가 난처해질 수리들만을 골라서 그를 괴롭게 몰아붙이는 것이었다. 그리하
여 결국은 사내 스스로가 견디질 못하고 가게를 떠나가게 하려는 것이었다.
아드님을 기다리신답니다. 아드님이 시골에 궁전을 지어놓고 염감님을 모시러 오시는 중
이랍니다.
그는 때론 새를 사러 들어온 손님을 상대로 해서까지 그렇게 무참스럽게 사내는 비웃고
무안을 주었다.
어디 만큼 왔나, 고개만큼 왔지... 영감님은 날마다 효자 꿈에 행복하시지요.
사내는 그러나 그런 젊은이의 비웃음을 아랑곳하려는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그는 젊은이
의 공박에 할말이 전혀 없는 사람처럼 주위를 짐짓외면해 버리곤 하였다. 젊은이가 정 그를
못견디게 매도하고 들 때면 차라리 그 젊은이의 얕은 소갈머리가 가엾어 죽겠다는 듯 슬픈
눈길로 그를 한참씩 건너다보고 있다가는 조용히 혼자 한숨을 짓고 말 뿐이었다.
하면서도 사내는 좀처럼 젊은이의 새 가게를 떠날 생각을 않고 있었다. 아니 그는 젊은이
의 그런 버릇 없는 공박 따위로 가게를 아주 떠나 버릴 처지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에겐 아직도 할 일이 남아있었다.
"녀석들에게 모두 새를 사야... 그래도 녀석들에게 빠짐없이 모두 한 마리씩은 새를 살 수
가 있어야... 사내는 혼자 속으로 중얼거리곤 하였다. 그는 아직도 가막소안에 남아 있는 친
구들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 가엾은 친구들을 위해 새를 사지 않고 혼자
서 이곳을 떠날 수는 없다고 몇 번씩 자신의 결심이 다짐했다. 그는 그저 지금 당장은 새를
사는 일이 달갑게 여겨지지가 않고 있을 뿐이었다. 새를 사더라도 전날처럼 즐겁거나 기분
이 가벼워지질 못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사내는 그것도 그저 그 빌어먹을 잠자리의 악몽 때문일 거라 자신을 변명했다. 밤
마다 그를 괴롭혀대고 잇는 빛줄기의 꿈만 꾸지 않게 되면 그는 다시 기분이 회복되어 새를
즐겁게 살 수 있으리라 자신을 기다렸다. 도대체가 새들이 낙엽처럼 빛을 맞고 떨어져내리
는 악몽이 계속되는 동안은, 그리고 그 빌어먹을 새들이 어째서 이 공원 숲을 떠나지 못하
고 자꾸만 다시 조롱 속으로 붙잡혀 돌아오는지, 그런 사연을 석연히 이해하지 못하고는 새
를 다시 사고 싶은 생각이 일어오질 않았다. 그건 마치 어린애들 숨바꼭질과도 같은 어리석
은 장난일 뿐이었다.
한데 그러던 어느 날, 사내에겐 또 한 가지 이상스런 일이 일어났다.
사내는 이날 밤도 그 고원 숲 벤치 위에서 추운 새우잠을 견디고 있었는데, 자정을 한 시
간쯤이나 지난 무렵이었을까, 예의 전기불빝이 다시 공원 숲 속을 훑어대기 시작했다.
이번엔 물론 꿈이 아니었다. 실제로 빛줄기를 앞세운 밤새 사냥이 시작된 것이었다.
사내는 벌써부터 까닭을 알 수 없는 두려움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사지가 움츠러들고 있
었다.
하지만 이번엔 다행스럽게도 전번날 밤과는 사정이 훨씬 달랐다.
빛줄기가 아직 사내를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이날 밤은 그 밤새 사냥꾼이 제 편
에서 미리 사내의 잠자리를 피해 주고 있었는지도 알수 없는 노릇이었다.
불빛은 좀처럼 사내 쪽으로 다가들 기미를 안 보이고 있었다. 사내와는 한참 거리가 떨어
진 숲들만 이리저리 분주하게 휘저어대고 있었다. 불빛을 맞은 밤새들이 낙엽처럼 어둠 속
을 휘날리고 있을 뿐이었다.
불빛은 거의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거 같았다.
하지만 이미 졸음기가 말끔 달아나 버린 사내는 모른 체하고 다시 잠을 청할수도 없었다.
그는 이윽고 야전잠바 옷깃을 들추고 천천히 벤치 위로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리고는 차
분한 손짓으로 야전잠바 주머니 속을 뒤져 꽁초 한 대를 찾아 물었다.
사내가 그 야전잠바 옷깃으로 불빛을 기라며 입에 문 꽁초에다 막 성냥불을 그어 붙이려
던 순간이었다.
후루루!
어둠 속 어느 방향으로가부터 느닷없이 사내의 잠바깃 속으로 날아와 박혀드는 것이 있었
다. 답뱃불을 붙이려다 말고 사내는 자신도 모르게 흠칫 놀라 손에 든 성냥불부터 날썌게
꺼 없앴다. 그리고는 그의 가슴께 잠바 깃 속으로 박혀든 물체를 재빨리 더듬어냈다.
사내는 이내 물체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다름아니라 그것은 방금 숲속의 불빛에 쫓겨
온 한 마리의 새었다. 부드럽고 따스한 감촉이 손에 닿을 때부터 사내는 벌써 그것을 알 수
있었다. 옷깃 밖으로 끌려나온 새는 두려움 때문이지 가슴이 몹시 팔딱거리고 있었다. 사내
가 담뱃불을 붙이기 위해 옷자락에 성냥불을 켰을 때 녀석은 그 불빛을 보고 달려든 게 분
명했다.
"빛에 쫓긴 녀석이 외려 또 불빛을 보고 덤벼들다니... 역시 새 짐승이란..."
사내는 분별없는 행동이 희한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였다.
하지만 사내의 그런 생각이 오히려 오해였는지도 알 수 없었다.
사내는 잠시 녀석을 어떻게 해주어야 좋을지를 생각해 보았다. 녀석을 금세 그냥 그대로
놓아 보낼 수는 없었다. 녀석은 몹시 겁을 먹고 있었다. 빛줄기에 쫓긴 녀석이 사내에게서
또 한번 놀라고 있었다. 놀란 녀석을 무작정 다시 어둠 속으로 달아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는 녀석에게 좀 안심을 시켜서 놓아 주기로 작정했다.
그는 조심조심 녀석을 한쪽 손바닥 위로 올려놓고 다른 손으로 가볍게 녀석의 등덜미를
누르고 있었다. 사내는 그렇게 한동안 숨소리마저 죽인 채 녀석의 동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녀석은 별반 사내의 손아귀로부터 몸을 빼내려는 움직임이 없었다. 사내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녀석은 한동안 그 손아귀 속에서 가슴을 조용히 팔딱거리고 있었다.
하더니 녀석은 이윽고 그 움직임이 전혀 없는 사내라 안심이 되어 버리기라도 한 듯 작은
부리로 손바닥을 콕콕 쪼아대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는 두 손바닥 사이로 조
그만 머리를 내밀고는 갸웃갸웃 조심스럽게 어둠 속을 살피기 시작했다.
사내는 이제 안심이 되었다. 이젠 녀석을 보내 주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녀석이 놀
라지 않도록 위쪽을 누르고 잇던 손바닥을 가만히 떼어내렸다.
한데 이 때 도 한번 희한스런 일이 일어났다.
녀석이 사내의 손바닥 위에서 달아날 생각을 않고 있는 것이었다. 녀석은 마치 등뒤를 누
르고 있던 손이 걷혀져 간 것도 알지 못한 듯 고갯짓만 계속 갸웃거리고 있었다.
사내는 갈수록 기이한 생각이 더해갔다. 사정이 그쯤 되고 보니 사내는 더욱 거동이 조심
스러워졌다. 좀더 녀석을 보는 수밖엔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는 무작정 녀석을 기다렸다. 녀석이 좀더 안심이 될떄까지 사내는 끈질기게 자신을 견
디었다. 조마조마하면서도 기이한 생각이 그를 그렇게 견딜 수 잇게 하였다.
녀석은 마침내 완전히 안심이었다. 사내의 손바닥을 녀석은 마치 나뭇잎쯤으로나 여기는
모양이었다. 손바닥을 콕콕 쪼아대기도 하고 사내를 갸웃갸웃 건너다보기도 하면서, 손바닥
을 떠날 생각은 조금도 없는 놈 같았다.
안되겠다 싶었다. 사내는 한번 더 녀석을 시험해 보기로 작정했다. 사내는 녀석이 너무 놀
라지 않도록 조심스런 잔기침 소리로 주위를 잠깐 건드려 보았다.
하지만 녀석의 반응은 사내를 더욱더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사내의 그 잔기침 소리에
녀석은 아닌게 아니라 잠깐 동안 주의가 쓰이는 듯 꽁지를 간들간득 깐닥거리고 잇더니, 이
번에는 숫제 사내의 무릎께로 자리를 홀짝 내려앉아 버리는 게 아닌가.
사내는 차라리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사내는 이제 그것으로 그간에 일어난 모든 일들의 사연을 알 것 같았다. 녀석도
필시 사내와 미리부터 낯이 익어 있었던 놈이 분명한 것이었다. 그는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녀석은 처음부터 사내를 알아보고 그를 찾아든 게 분명한 것이었다.
"그래, 이 녀석아, 이제 알겠다... 네놈은 필시 나한테서 날갤 얻어 숲으로 돌아온 녀석이
분명하였다..."
사내는 다시 두 손으로 천천히 녀석을 곱게 싸안아 들었다. 그리고는 마치 녀석 쪽에서도
그의 말뜻을 아이들을 수 있는 듯 중얼중얼 혼자서 속삭이고 있었다.
"나 네놈의 믿음을 안다. 그래 우리는 이렇게 서로를 믿으며 한 가족이 되는 게지. 넌 어떻
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저 아래 가겟집 젊은이 그 사람도 그렇겠구. 글세, 너 같은 야생의
날짐승도 이렇게 숲을 떠나지 못하는 간단한 이치조차 깨우치질 못했구나..."
숲 속을 휘저어 대고 있던 빛줄기는 어느새 산을 내려가고 말았는지 주위가 온통 잠잠해
져 있었다.
사내는 이윽고 다시 벤치 위로 천천히 몸을 뻗어 누우면서 녀석을 싸안은 그의 두 손을
소중스럽게 가슴위로 얹었다. 그리고는 조용히 눈을 감은 채 손바닥 안에서 따뜻한 깃털을
부드럽게 꼼지락 거리고 잇는 녀석에게 귓속말을 하듯 낮게 속삭였다.
"넌 오늘 밤 나하고 여기서 이렇게 함께 지내는 게 좋겠구나. 숨길이 좀 답답하긴 하겠지
만, 그 대신 내가 춥게는 안할 테다. 그야 내가 잠이 든 담에는 너 좋은 대로 하겠지만 말이
다..."
이튿날 아침 사내가 잠이 깨였을 때 새는 물론 자취가 없었다.
하지만 사내는 이날 아침 어느 날보다도 기분이 가벼웠다. 꿈을 꾸지 않은 밤잠이 어느
날보다도 편했던 것 같았다. 숲속을 쏟아져내리는 낭자한 새소리들도 새삼 유쾌하게 들리고
있었다.
그는 마치 간밤의 새소리를 찾아 가려내고 있기라도 하듯 아침 한기도 잊어버린 채 한동
안 그 새 울음소리에만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어다.
그러다 그는 뒤늦게 기동을 서두르며 자리를 벌떡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모처럼 만에
동전 줍기를 다시 시작한 사내는 공원 앞의 그 새가 가게 젊은이에 대해서도 종래의 호감을
완전히 회복하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여기서 이렇게 한 하늘을 머리 위에 이고 사는 우리는 어차피 모두가 한 가
족이나 다름이 없는 것 같구랴."
여느 때와 다름없이 오전 장사에 한창 정신을 빼앗기고 있던 젊은이가 잠시 숨을 돌릴 만
한 짬이 나는 듯하자 사내는 이때라 싶은 듯 젊은이에 대한 자신의 이해와 호감을 넌지시
다짐하고 나섰다.
"아, 글세 새를 다루는 젊은이의 일에 사람의 정분이 깃들지 않을 수 없는 바에야 젊은이
에게 그 날개를 얻어 날아가는 새짐승들 또한 젊은이의 인정이 안 통할 리 없겠지. 그래 그
게 사람과 새짐승들 사이의 일이라 하더라도 그런 정분이 오가다 보면 서로가 어느새 한 가
족이 되어갈게 당연한 이칠 게요. 젊은이나 새들은, 그래 결국 그런 정분의 끈으로 이어져서
이 공원 안에 함께 살고 있는 한 가족들이란 말이 될 게요..."
가겟집 젊은이는 그러나 사내의 돌변한 태도가 오히려 수상쩍게 느껴진 듯 이날도 좀처럼
그를 응대해 올 기미가 없었다.
사내는 좀더 노골적으로 젊은이에게 매달리고 들었다.
"아, 그러니까 이건 다른 얘기가 아니오. 생각하기에 따라선 때가 좀 너무 늦은 감도 있지
만, 이 늙은이도 이젠 댁들과 같이 이 공원 가족이 되자는 거외다. 아니 어떻게 생각하면 이
늙은이도 이젠 실상 젊은이나 새들과는 한 가족이 되어 버린 건지도 모를 일이라오. 난 다
만 젊은이도 이제 좀 아량을 가지고 그걸 알아주었으면 한다는 그런 얘기요. 일테면 젊은이
나 젊은이의 새들에 대한 나의 정분이랄까 이해랄까 그런 내 마음을 말이오."
가겟집 젊은이는 그러나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사내는 그 젊은이 앞에 자신의 의사를 좀
더 분명하게 증명해 보이고 싶은 어조로 자신 있게 말했다.
"그래, 난 오늘부터 다시 새를 살 요량을 세웠다오. 그야 그런 일은 아직도 저 가막소 안에
남아있는 위인들에 대한 내 마음의 빚값으로 하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게 다 뉘 좋고 매부
좋고 한다는 일 아니겠소. 젊은인 새를 팔아 좋고 난 위인들의 소망을 풀어주어 좋고, 새들
은 날개를 얻어 좋고. 거기다 그렇게 서로가 진심을 익히다 보면 우린 모두가 함께 너나없
는 한 가족이 될 수 있게 되어 좋고..."
그러고 나서 사내는 다시 젊은이를 안심시키듯 혼자서 계속 지껄여대었다.
"하지만 뭐 한 가족이다 뭐다 하니까 내게 무슨 딴 궁리가 있어서 그러나 의심을 한 건덕
진 없어요. 그야 솔직하게 말하면 난 그 동안 내 아들 녀석이 날 정말로 잊어버리고 있는
거나 아닌가 의심이 들기도 했었다오. 녀석이 정말 제 애빌 잊고 언제까지나 이런 곳을 헤
매게 버려둘 참인가 싶어 은근히 혼자 낙담스런 생각이 솟기도 했었단 말이외다..."
"..."
"하기야 어찌 생각해 보면 지금까진 그 편이 오히려 다행이었는지도 모르지요. 내 언젠가
이곳을 쉬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녀석을 기다리는 일밖에 다른 일 한 가지가 있노라 말한
적이 있지만, 그 일이 아직도 끝나질 않았거든. 젊은이도 이젠 대략 짐작이 가리라 믿어 하
는 말이지만, 그게 바로 내가 가막소 위인들의 새를 사주는 일 아니었겠소. 녀석들에게 새를
다 사주기 전에는 아들놈을 만나도 난 이곳을 떠날 수가 없어요. 그 아들놈이 나타나지 않
는 건 그런대로 다행이라 말할 수가 있어요. 하지만 그거야 물론 내 쪽 사정인 게구, 녀석이
아직 날 찾으러 와주지 않은 건 제일을 제가 외면하는 격 아니겠소. 난 그게 섭섭했던 게요.
은근히 마음이 조급해지기도 했었구..."
"..."
"하지만 이 늙은이의 주책없는 생각도 사실은 모두가 어제까지 뿐이었다오. 오늘은 생각이
달라지고 말았어요. 젊은인 아마 이해하기가 어렵겠지만 오늘 생각이 달라지고 말았어요. 젊
은인 아마 이해하기가 어렵겠지만 오늘 아침부턴 모든 게 안심이 되는구료. 녀석이 머지않
아 날 찾아 나타날 것 같아요. 그것도 물론 이 늙은이의 막연한 기대나 느낌에 불과한 것인
진 모르지만 난 그런 내 바램을 믿고 살아온 늙은이었으니까. 제 바램을 믿고 사는 수밖엔
다른 도리가 없었던 위인이었으니까. 그게 내가 가막소에서 늦도록 깨달아 얻은 마지막 지
혜거든. 내 아들놈은 필시 날 찾아 나타날 거외다. 그리고 제 애빌 고향 집으로 데려갈 것외
다..."
"..."
"내 젊은이에게 바램이 있다면 다만 젊은이도 아까 말대로 내 한 가족이 되어서 그 한 가
족이 된 사람의 정분으로 그걸 조그만 믿어 줬으면 하는 것뿐이라오. 내게도 그럴 아들 녀
석이 있고, 그 아들 녀석이 미구에 제 애빌 찾아 나타날 일을 말이오..."
젊은이는 끝끝내 대꾸가 없었다.
가게에 다시 손님들이 밀려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젊은이는 그러자 사내를 버려 둔 채 가
게 일로 냉큼 돌아가 버렸다.
사내는 다시 기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이제 어차피 새를 사겠노라 보기 좋게 다짐을 하고 난 처지였다. 가만히 앉
아서 시간만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당당하게 새장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다른 손님들 사이에 섞여 자신의 새를 고르
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내의 그런 거동은 대체로 금세 새를 골라 사려는 쪽은 아니었다.
그는 신중하고 차분한 눈길로 새장을 하나하나 훒어나가고 있었다. 때로는 금세 새를 사
버릴 것처럼 조롱 속으로 유독히 유심히 들여다보기도 하고 때로는 조롱 속으로 손가락까지
뻗어 넣으면서 녀석들의 주위를 끌어 보기도 하였다. 하지만 사내는 그때마다 녀석들에 대
한 자신의 충동을 잘 견뎌내고 있었다.
이를테면 그는 그런 식으로 자신의 충동을 참아가면서 단 한 마리의 새를 사 날려보낼 자
신의 기회를 오래오래 아끼고 즐기는 것이었다. 아니. 사내는 그렇게 자신을 즐기면서 끈질
기게 무언가를 찾아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건 다만 손님들이 그 방생의 집을 모두 떠
나가고 가게 안에 젊은이와 자신만이 남게 될 시간일 수도 있었고, 혹은 그가 날개를 사줄
녀석을 위한 어떤 특별한 인연에의 기다림 같은 것일 수도 있었다.
어쨌거나 그는 그렇게 좀처럼 새를 살 기미를 안 보였다.
이윽고 가게 안을 붐벼대던 손님들이 거의 다 놀이를 끝내고 빠져나간 다음에도 사내는
여전히 그렇게 시간만 기다리고 있었다.
젊은이는 다시 가게 안쪽에 숨겨 놓은 비밀 집합사에서 새 새들을 꺼내다가 비워진 장들
을 채워 넣고 있었다. 사내로선 물론 가게 안에 차려진 집합사에 새들이 몇 마리쯤 숨겨져
있는 질 들여다볼 기회가 한 번두 없었지만, 젊은이는 아마도 그 비밀 집합사에 새가 바닥
이 나게 버려 두는 일이 한 번도 없는 것 같았다. 특히나 오전 동아네 젊은이가 그 바깥 새
장을 비워 두는 일이란 절대로 없었다. 가게 안 비밀 집합사엔 언제나 여분의 새들이 얼마
든지 비워진 장을 채우게 될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젊은이가 비밀 잡합사를 들
어갔다 나오면 두 마리고 세 마리고 그의 손아귀엔 언제나 그가 필요한 수만큼의 새들이 움
켜져 나왔다.
이 날도 젊은이는 벌써 스무 개 이상의 빈 새장을 채워넣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한 새장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사내가 무슨 버릇처럼 한 새장문을 손가락 끝으로 톡톡 건드리자 장속의 새가 포르륵 날
개를 퍼득여 그의 손가락 쪽으로 날아와 붙은 것이었다.
사내가 손가락을 좀더 깊숙이 장 속으로 디밀었다. 그러자 다시 장 속의 새는 녀석의 조
그만 부리로 사내의 손가락 끝을 조심스럽게 한두 번 콕콕 쪼아대는 시늉이더니 나중에는
겁도 없이 홀짝 그 손가락 위로 몸을 날려 내려앉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 녀석은 꽁지를
가볍게 간들거리면서 조그만 눈망울로 말똥말똥 앞에 선 사내의 표정을 건너다보고 있었다.
사내는 한동안 거의 넋을 잃은 듯한 얼굴로 장 속의 새 앞에 못박혀 서 있었다. 사내의
초라한 입가에 이윽고 누런 웃음이 번지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그 사내의 오랜 기다림이
끝났다.
"그래, 나도 이젠 네 놈을 알아볼 수가 있구 말구..."
사내는 혼자말처럼 낮게 중얼거리고 나서, 다시 가겟집 젊은이를 향해 자랑스럽게 말했다.
"내 오늘은 이 녀석을 사주겠소."
그는 곧 야전잠바 주머니를 뒤져 동전 스무 닢을 세어 내놓고 나서, 이젠 젊은이의 응낙
을 기다릴 것도 없이 스스로 새장 문을 따기 시작했다. 그는 열려진 장문 사이로 손을 디밀
어 녀석을 조심스럽게 손바닥에 싸안았다. 그리고 무슨 소중스런 물건이라도 다루듯 자신의
코앞까지 녀석을 높이 쳐올려 들고는 사람에게 하듯이 중얼중얼 말했다.
"하지만 이젠 알아두거라. 여긴 네 놈들에게 그리 즐겨할 곳이 못 된다는 걸 말이다. 그래
나도 이게 네 놈한테 마지막일 테니, 이번엔 좀 날개가 저리도록 멀찌감치 하늘을 날아가
보거라..."
손안에 든 새가 사내의 재촉하듯 날개를 두어 번 퍼득대고 있었다. 그러자 사내도 이젠
그만 녀석을 놓아줄 자세를 취했다. 퍼득여대는 녀석의 양날개 밑으로 손끝을 집어넣어 녀
석을 높이 받쳐 올렸다. 그리고 그는 뭔가 혼자말 같은 것을 입속으로 중얼대며 녀석을 막
놓아주려던 참이었다.
사내는 금세 뭐가 이상해졌는지 숲으로 놓아 주려던 녀석을 다시 가슴 팍 밑으로 끌어내
리고 말았다. 그리고는 녀석의 날개를 들추고 벌려진 날갯죽지 밑을 유심히 살폈다.
사내가 들춰낸 녀석의 양 쪽 날개 밑에는 무슨 가위 같은 물건으로 속깃이 잘라낸 자국이
역력했다.
사내는 일순 그것이 도대체 무엇을 뜻하며 어째서 그런 일이 생기게 됐는지가 짐작이 안
가는 듯 멍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동안 조용히 잘려나간 녀석의 속날개깃 자국을 들여다보고 있던 사내의 눈길에 이윽고
어떤 세찬 분노의 불길이 일기 시작했다.
그는 새를 거머쥔 손에 으스러지도록 힘을 주며 말없이 그의 거동만 훔쳐보고 있는 젊은
이를 정면으로 쏘아보았다. 그 세찬 분노의 불길이 이글거리고 있는 사내의 눈길은 사람까
지가 온통 달라 보이게 하였다. 그는 자신의 분노 때문에 손과 입술까지 마구 떨리고 있었
다.
하지만 사내는 자신을 참는 데 너무도 깊이 길이 들여진 인간이었다. 그는 끝끝내 한 마
디 말도 없이 자신의 분노를 견뎌 버리고 있었다. 분노와 증오심에 불타던 사내의 눈길에서
이윽고 그 세찬 열기가 서서히 다시 가라앉아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분노와 증오의 빛 대
신 사내의 눈길엔 어느새 조용한 슬픔의 응어리 같은 것이 맺혀들고 있었다.
그는 문득 가겟집 젊은이로부터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그 높고 푸른 가을 하늘을 간
절한 모습으로 우러르고 있었다.
가겟집 젊은이는 그러나 여전히 남의 일을 구경하듯 거동이 태연스러웠다.
처음 한동안은 그도 역시 사내의 심상찮은 기세에 눌려 여느 때처럼은 거동을 못했다. 사
내의 행동을 함부로 간섭하고 들지도 못했고, 거꾸로 사내를 깡그리 무시해 버린 채 그 앞
에서 금세 등을 돌리고 돌아서지도 못했다. 그리고 사내가 마침내 새의 날개 밑을 들춰내
버리자 그는 무슨 몹쓸 비밀을 들키고 난 사람처럼 엉거주춤한 자세로, 그러나 될수록 자신
을 잃지 않으려는 듯이 조금은 뻔뻔스럽고 무관심한 표정으로 끝끝내 그 사내의 눈길만 맞
받고 있었다. 그게 사내의 눈길에 붙잡힌 젊은이의 거동 새였다.
하지만 사내는 마침내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자신을 다스려 주었다. 젊은이는 이제 그걸
로 그만이었다.
그는 순식간에 다시 자신을 되찾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하늘을 우러러 얼굴을 쳐들고 서
있는 사내를 향해 까닭 모를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이윽고 사내가 그 하늘로부터 조용히 눈길을 끌어내려 그를 다시 돌아다보았을 때도 그는
계속 그 비웃음과 연민기 같은 것이 한데 뒤섞인 기묘한 웃음기 속에서 유유히 사내를 구경
하고 있었다.
도시를 빠져나온 신작로길이 가을날 저녁 햇살 속을 남쪽으로 하얗게 뻗어나가고 있었다.
가을 해는 중천을 비켜서면 풀기가 꺾이게 마련이었다. 사내는 야전잠바 목깃을 꼭꼭 여
며 잠그며 그 신작로 길을 따라 지친 발길을 끈질기게 남쪽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바람막이
삼아 앞단추를 열고 가슴께로 숨겨진 사내의 오른쪽 손아귀 속에서 아직도 방생의 집 새 한
마리가 발톱과 부리를 쉴새없이 꼼지락대고 있었다.
"답답하더라도 조금만 참거라."
사내는 마치 길동무에게라도 말하듯 옷깃 속에서 몸을 꼼지락대고 있는 녀석에게 낮게 중
얼댔다.
"나도 몹시 다리가 아프지만 그래도 아직 해가 있을 때 마을을 만나야하니까 말이다. 앞으
로도 며칠을 더 이렇게 걸어야 할지 모른는 길인데. 첫날서부터 아무데서나 한데 잠을 잘
수는 없지 않겠냐."
그는 계속해서 남쪽으로 걸었다. 그리고 그의 등뒤로 멀어져 가고 있는 도시의 하늘에서
자신의 지친 발걸음을 재촉할 구실을 구하듯 때때로 고개를 뒤로 돌아보곤 하였다.
그는 그때마다 가슴속 녀석에게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래 어쨌거나 우리가 녀석을 떠나온 건 백번 천번 잘한 일이었을 게다. 게다가 이제부터
도시엔 겨울 추위가 몰아닥치게 되거든. 너 같은 건 절대로 그 도시의 추위를 견디지 못한
다. 작자도 아마 그걸 알았을 게다. 글세, 네놈도 그 작자가 암말 못하고 멍하게 날 바라보
고만 있는 꼴을 봐뒀겠지. 내가 네놈을 데리고 떠나려 할 때... 아, 그야 나도 물론 작자한테
그만한 값을 치르긴 했지만 말이다."
맞은 편 산굽이께로부터 도시를 향해 길을 거꾸로 들어가고 있는 사람들의 한패가 사내의
곁을 시끌적하게 떠들고 지나갔다.
사내는 잠시 말을 끊고 그 도시로 들어가는 사람들의 일행을 스쳐보냈다. 그리고 그들의
말소리가 등뒤로 멀리 사라져간 다음 사내는 다시 말을 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반해 분만이라도 내 그 노역의 품삯을 한사코 주머니속에 깊이 아껴뒀던 게 천만
다행이었지. 널 데려올 수 있었던 건 순전히 그 돈 덕분인 줄이나 알아라. 하기야 그건 내가
정말로 집엔 닿는 날까지 기어코 안 쓰고 지나려던 거였지만... 하지만 난 후횐 않는다. 암
후횐하지 않구 말구. 그까짓 돈이야 몇푼이나 된다구... 이런 몰골을 하고 빈손으로 고향길을
찾기는 좀 뭣할지 모르지만, 그런다고 어디 사람까지 변했나... 아니. 아니 내 아들 녀석도
물론 그런 놈은 아니구."
사내는 제풀에 고개를 한번 세차게 흔들었다.
가슴속 녀석이 응답을 해오듯 발가락을 몇 차례 꼼지락 거렸다. 그 바람에 잠시 발길을
멈추고 녀석의 발짓을 느끼고 있던 사내의 얼굴엔 만족스런 웃음기가 번지고 있었다.
"그래 어쨌든 잘했지. 떠나온 건 잘했어."
사내는 다시 발길을 떼 옮기며 말하기 시작했다.
"녀석도 아마 잘했다고 할 게야. 글쎄, 이렇게 내가 제발로 녀석을 찾아나섰기가 망정이지
하마터면 우리도 거기서 겨울을 지낼 뻔했질 않았나 말이다."
그리고 사내는 뭔가 더욱 은밀하고 소중스런 자신만의 비밀을 즐기듯 몽롱스런 눈길로 중
얼거리고 있었다.
"너도 곧 알게 될 게다. 우리가 함께 남쪽으로 길을 나서길 얼마나 잘 했는가를 말이다. 남
쪽은 훨씬 북쪽하곤 다르다. 겨울에도 대숲이 푸른 곳이니까. 넌 아마 대숲이 잇는 곳이면
겨울도 그만일 테지. 내 너를 그런 대숲이 있는 곳으로 데려다 줄 테다. 녀석의 집 뒤꼍에도
그런 대숩은 얼마든지 많을 테니까. 암 대숲이야 많구 말구... 넌 그럼 그 대숲으로 가거라.
그리고 거기서 겨울 나려무나..."
사내의 얼굴은 이제 황홀한 꿈속을 헤매고 있는 사람의 그것처럼 밝고 행복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계속해서 걸으며 중얼대고 있었다.
"넌 아마 그래야 할 게다. 가엾게도 작은 것이 날개를 너무 상했으니까. 이 겨울은 그 대숲
에서 날개가 다시 길어나기를 기다려야 할 게야. 내년에 다시 날이 풀리면 네 하늘을 맘껏
날을 수가 있을 때 까진 말이다. 그야 너만 좋다면 녀석의 집에서 이 겨울을 너와 함께 지
내 줄 수도 있지만, 그건 아무래도 네 맘은 아닐 테니까..."
석양의 햇발이 점점 더 풀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구불구불 남쪽으로 뻗어나가고 있는 하얀 신작로길도 먼 곳에서부터 차츰 윤곽이 아득히
흐려져 오고 있었다.
하지만 사내에겐 아직도 한 줄기 햇볕이 등줄기에 그토록 따스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한줄기 햇살이 꺼지지 않는 한 그의 눈앞에서 남쪽으로 남쪾으로 뻗어나가고 잇는 좁은 신
작로길이 그토록 따뜻하고 맑게 빛나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건 차라리 사내의 가습속을 끝없이 비춰주는 영혼의 빛줄기와도 같은 것이었다.
사내는 아직도 지침이 없이 그 따스하고 행복스런 빛줄기를 쫓으며 품속에서 가끔 발짓을
꿈지락거리고 잇는 녀석에게 쉴새없이 혼자 중얼대고 있었다.
"하지만 네놈도 조금은 명념해 봐야 한다. 탱자나무 울타리와 붉은 색 벽돌 굴뚝이 높은
기와집, 게다가 텃밭이 넓고 뒤쪽 언덕에 푸른 대숲이 우거져내린 집... 그런 집이 있는 동네
가 나서는 걸 말이다. 그야 언젠간 너도 알겠지만, 그게 바로 우리가 찾아가는 남쪽 동네란
다. 생각처럼 그렇게 쉽게 찾기는 어려운 속이지. 하지만... 글쎄, 그 남쪽 동네가 얼마나 따
뜻한 곳인지 네가 어떻게 알기나 할는지..."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지은이:조세희)
사람들은 아버지를 난쟁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옳게 보았다. 아버지는 난쟁이였다. 불행
하게도 사람들은 아버지를 보는 것 하나만 옳았다. 그 밖의 것들은 하나도 옳지 않았다. 나
는 아버지, 어머니, 영호, 영희, 그리고 나를 포함한 다섯 식구의 모든 것을 걸고 그들이 옳
지 않다는 것을 언제나 말할 수 있다. 나의 ' 모든 것 ' 이라는 표현에는 ' 다섯 식구의 목
숨 '이 포함되어 있다.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 단 하루라도 천국을 생각해 보지 않은 날이 없다.
하루하루의 생활이 지겨웠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활은 전쟁과 같았다. 우리는 그 전쟁에서
날마다 지기만 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모든 것을 잘 참았다. 그러나 그날 아침 일만은 참
이 어려웠던 것 같다.
"통장이 이걸 가져왔어요."
내가 말했다. 어머니는 조각 마구 끝에 앉아 아침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게 뭐냐?"
"철거 계고장이예요."
"기어코 왔구나!"
어머니가 말했다.
"그러니까 집을 헐라는 거지? 우리가 꼭 받아야 할 것 중의 하나가 이제 나온 셈이구나!"
어머니는 식사를 중단했다. 나는 어머니의 밥상을 내려다보았다. 보리밥에 까만 된장, 그
리고 시든 고추 두어 개와 조린 감자.
나는 어머니를 위해 철거 계고장을 천천히 읽었다.
낙원구
주택: 444. 1- 197x .9. 10
수신: 서울특별시 낙원구 46번지의 1839김불이 귀하
제목: 재개발 사업 구역 및 고지대 건물 철거 지시
귀하의 소유 아래 표시 건물은 주택 개량 촉진에 관한 임시 조치법에 따라 행복 3구역 재
개발 지구로 지정되어 서울 특별시 주택 개량 재개발 사업 시행 조례 제15조. 건축법 제 5
조 및 동법 제 42조의 규정에 의하여 197x. 9. 30까지 자진 철거할 것을 명합니다. 만일 위
기일까지 자진 철거하지 않을 경우에는 행정 대집행법의 정하는 바에 의하여 강제 철거하고
그 비용은 귀하로부터 징수하겠습니다.
철거 대상 건물 표지
서울 특별시 낙원구 행복동 46번지의 1839
끝
낙원구청장
어머니는 조각마루 끝에 앉아 말이 없었다. 벽돌 공장의 높은 굴뚝 그림자가 시멘트 담에
서 꺾어지면서 좁은 마당을 덮었다. 동네 사람들이 골목으로 나와 뭐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통장은 그들 사이를 비집고 나와 방죽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머니는 식사를 끝내지 않은
밥상을 들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두 무릎을 곧추세우고 앉았다. 그리고 손을 들어
부엌 바닥을 한 번 치고 가슴을 한 번 쳤다. 나는 동사무소로 갔다. 행복동 주민들이 잔뜩
몰려들어 자기의 의견들을 큰 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들을 사람은 두셋밖에 안되는데 수십
명이 거의 동시에 떠들어대고 있었다. 쓸데없는 짓이었다. 떠든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
다.
나는 바깥 게시판에 적혀 있는 공고문을 읽었다. 거기에는 아파트 입주절차와 아파트 입
주를 포기할 경울 탈 수 있는 이주 보조금 액수 등이 적혀 있었다. 동사무소 주위는 시장바
닥과 같았다 주민들과 아파트 거간꾼들이 한데 뒤엉켜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고 했다. 나는
거기서 아버지와 두 동생을 만났다. 아버지는 도장포 앞에 앉아 있었다. 영호는 내가 방금
물러선 게시판 앞으로 갔다. 영희는 골목 입구에 세워 놓은 검정색 승용차 옆에 서 있었다.
아침 일찍 일들을 찾아 나섰다가 철거 계고장이 나왔다는 소리를 듣고 돌아온 것이었다. 누
군들 이런 날 일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아버지 옆으로 가 아버지의 공구들이 들어 잇는 부
대를 둘러 메었다. 영호가 다가오더니 나의 어깨에서 그 부대를 내려 옮겨 메었다. 나는 아
주 자연스럽게 그것을 넘겨 주면서 이쪽으로 걸어오는 영희를 보았다. 영희의 얼굴은 발갛
게 상기되어 있었다. 몇 사람의 거간꾼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아파트 입주권을 팔라고 했다.
아버지가 책을 읽고 있었다. 우리는 아버지가 책을 읽는 것을 처음 보았다. 표지를 쌌기 때
문에 무슨 책을 읽는지도 알 수 없었다. 영희가 허리를 굽혀 아버지의 손을 잡아 끌었다. 아
버지는 우리들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 난쟁이가 간다 '고
처음 보는 사람들이 말했다.
어머니는 대문 기둥에 붙어 잇는 알루미늄 표랑을 떼기 위해 식칼로 못을 뽑고 있었다.
내가 식칼을 받아 반대쪽 못을 뽑았다. 영호는 어머니와 내가 하는 일이 못마땅한 모양이었
다. 그러나 마음에 드는 일이 나에게 일어나 주기를 바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머니는 무
허가 건물 번호가 새겨진 알루미늄 표찰을 빨리 떼어 간직하지 않으면 나중에 괴로운 일이
생길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손바닥에 놓인 표찰을 말없이 들여다보았다. 영희가 이번에는 어머니의 손을 잡
아 끌었다.
"너희들이 놀게 되지만 않았어도 난 별 걱정을 안했을 거다."
어머니가 말했다.
"스무날 안에 무슨 뽀족한 수가 생기겠니. 이제 하나하나 정리를 해야지."
"입주권을 팔려고 그래요?"
영희가 물었다.
"팔긴 왜 팔아!"
영호가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럼 아파트 입주할 돈이 있어야지."
"아파트로도 안 가."
"그럼 어떻게 할 거야?"
"여기서 그냥 사는 거야. 이건 우리 집이다."
영호는 성큼성큼 돌계단을 올라가 아버지의 부대를 마루 밑에 놓았다.
"한 달 전만 해도 그런 이야길 하는 사람이 있었다."
아버지가 말했다. 어머니가 내 준 철거 계고장을 막 읽고 난 참이었다.
"시에서 아파트를 지어 놨다니까 얘긴 그걸로 끝난 거다."
"그건 우릴 위해서 지은 게 아녜요."
영호가 말했다.
"돈도 많이 있어야 되잖아요?"
영희는 마당가 팬지 꽃 앞에 서 있었다.
"우린 못 떠나. 갈 곳이 없어. 그렇지 큰 오빠?"
"어떤 놈이든 집을 헐러 오는 놈은 그냥 놔두지 않을 테야."
영호가 말했다.
"그만둬."
내가 말했다.
"그들 옆엔 법이 있다."
아버지 말대로 모든 이야기는 끝나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마당가 팬지꽃 앞에 서 있
던 영희가 고개를 돌렸다. 영희는 울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영희는 잘 울었다. 그때 나는
말했다.
"울지마, 영희야."
"자꾸 울음이 나와."
"그럼 소리를 내고 말고 울어."
"응."
그러나 풀밭에서 영희는 소리를 내어 울었다. 나는 손으로 영희의 입을 막았다. 영희의 몸
에서는 풀 냄새가 났다. 개천 건너 주택가 골목에서는 고기 굽는 냄새가 났다. 나는 그것이
고기 굽는 냄새인 줄 알면서도 어머니에게 묻고는 했다.
"엄마, 이게 무슨 냄새야?"
어머니는 말없이 걸었다. 나는 다시 물었다.
"엄마, 이게 무슨 냄새지?"
어머니는 나의 손을 잡았다. 어머니는 걸음을 빨리하면서 말했다.
"고기 굽는 냄새란다. 우리도 나중에 해 먹자."
"나중에 언제?"
"자, 빨리 가자."
어머니는 말했다.
"너도 공부를 열심히 하면 좋은 집에 살 수 있고, 고기도 날마다 먹을 수 있단다."
"거짓말!"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면서 내가 말했다.
'아버지는 나쁜 사람야."
어머니가 우뚝 섰다.
'너 방금 뭐라고 했니?"
"우리 아버지는 나쁜 사람야."
"너 매 좀 맞아야 겠구나. 아버지는 좋은 분이다."
"나도 주머니가 달린 옷을 입고 싶어."
"빨리 가자."
"엄마는 왜 우리들 옷에 주머니를 안 달아 주지? 돈도 넣어 주지 못하고, 먹을 것도 넣어
줄 게 없어서 그러지?"
"아버지에 대해 말을 막 하면 너 매맞을 줄 알아라."
"아버지는 악당도 못 돼. 악당은 돈이나 많지."
"아버지는 좋은 분이다."
"알아."
나는 말했다.
"수백번도 더 들었어. 그렇지만 이젠 속지 않아."
"엄마, 큰 오빠는 말을 안 들어."
영희는 부엌문 앞에 서서 말했다.
"엄마 몰래 또 고기 냄새 맡으러 갔었대. 나는 안 갔어."
어머니는 말이 없었다. 나는 영희를 흘겨보았다. 영희는 또 말했다.
"엄마, 큰 오빠가 고기 냄새 맡으러 갔었다고 말했더니 때리려고 그래."
영희는 좀처럼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나는 영희의 입에서 손을 떼었다. 영희를 풀밭으로
끌고 들어간 것이 잘못이었다. 영희를 때려주고 나는 후회했다. 귀여운 영희의 얼굴은 눈물
로 젖었다. 우리는 그때 주머니 없는 옷을 입고 있었다.
아버지는 철거 계고장을 마루 끝에 놓고 책을 읽었다. 우리는 아버지에게서 무엇을 바라
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그 동안 충분히 일했다. 고생도 충분히 했다. 어버지만 고생을 한 것
이 아니다. 아버지의 아버지, 아버지의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할아버지,
또 대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들은 아버지보다 더 심한 고생을 했을 수도 잇다. 나는 공장
에서 이상한 매매 문서가 든 원고를 조판한 적이 있다. 그 내용의 일부를 짜기 위해 나는
열심히 손을 놀렸다.
나는 그때 이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 판을 짜고 다음 판을 짜 나가다 겨우 알았다. 노비
매매 문서의 한 부분이었다. 나는 열흘 동안 같은 책을 조판했다. 그 열흘 동안 나는 아버지
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하고도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의 어머니, 어
머니의 할머니, 할머니의 어머니, 그 어머니의 할머니들이 최하층의 천인으로서 무슨 일을
해왔는지 알고 있었다. 어머니라고 달라진 것은 없었다. 마음 편할 날 없고, 몸으로 치러야
하는 노역은 같았다. 우리의 조상은 세습하여 신역을 바쳤다. 우리의 조상은 상속 매매 기증
공출의 대상이었다. 어느 날 어머니는 나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엄마를 잘못두어 이 고생이다. 어버지하고는 상관이 없단다."
어머니는 장남인 나에게만 말했다. 외할머니에게서 들은 말을 나에게 전한 것이었다. 천년
은 두고 우리의 조상은 자손들에게 이 말을 남겼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아버지도 씨
종의 자식이었다. 할아버지의 아버지대에 노비제는 사라졌다. 증조부 내외분은 아무것도 몰
랐다. 나중에서야 해방을 맞았다는 것을 알았으나 두분이 한 말은 오히려 "저희들을 내쫓지
마십시오."였다. 할아버지는 달랐다. 할아버지는 유습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늙은 주인은 할
아버지에게 집과 땅을 주었다. 그러나 쓸데없는 일이었다. 모르는 면에서는 할아버지나 증조
부나 같았다. 증조부대까지는 선조들이 살아 온 경험이 도움이 되었으나 할아버지대에는 그
것이 도움을 주지 못했다. 할아버지에게는 어떤 교육도 없었고 경험도 없었다. 할아버지는
집과 땅을 잃었다.
"할아버지도 난쟁이였어?"
언젠가 영호가 물었다.
나는 영호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좀 큰 영호는 말했다.
"왜 지난 일처럼 쉬쉬하는 거야? 변한 것이 없는데 우습지도 않아?"
나는 가만 있었다.
영희는 손수건을 꺼내 두 눈에 대었다 떼었다. 아버지는 계속 책을 읽었다. 어머니는 뒷집
명희 어머니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얼마에 파셨어요?"
"칠십만 원 받았어요."
"그럼 시에서 주겠다는 이주 보조금보다 얼마 더 받은 셈이죠?"
"이만 원 더 받았어요. 영희네도 어차피 아파트로 못 갈 거 아녜요?"
"무슨 돈이 있다구!"
"분양 아파트는 오십팔만 원이구 임대 아파트는 삼십만 원이래요. 거기다 어느 쪽으로 가
든 매달 만오천 원씩 내야 된대요."
"그래 입주권을 다들 팔고 있나요?"
"영희네도 서두르세요."
어머니는 괴로운 얼굴로 서 있었다. 어머니를 명희 어머니가 다그쳤다.
"저희는 내일이라도 떠날 준비가 돼 있어요, 영희네가 돈을 해 준다면. 집이야 도끼질 몇번
이면 무너질 테구."
영희의 눈에 다시 눈물이 괴었다. 커도 마찬가지였다. 계집애들은 잘 울었다. 내가 영희
옆으로 다가갔을 때 영희는 장독대 바닥을 가리켰다. 장독대 시멘트 바닥에 '명희 언니는 큰
오빠를 좋아한다'고 씌어 있었다. 집을 지을 때 남긴 낙서였다. 영희가 웃었다. 우리에게는
그때가 제일 행복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도랑에서 돌을 져왔다. 그것으로 계단을 만들고,
벽에는 시멘트를 쳤다. 우리는 아직 어려 힘드는 일을 못했다. 그래도 할 일이 많았다. 우리
는 며칠 동안 학교에 가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 하루에도 몇
차례씩 떼를 지어 동네를 돌았다. 그때만은 더러운 옷을 입은 어린 아이들도 울음을 그쳤다.
윽박 지르는 주인의 기세에 눌린 개들도 짖기를 멈추고 뒤로 물러 섰다. 온 동네가 조용해
졌다. 갑자기 평화스러워져 어안이 벙벙할 정도였다. 나는 우리 동네에서 풍기는 냄새가 창
피했다. 그들은 아버지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그들과 악수할 때 아버지는 발뒤꿈치를
들었다. 아버지가 어떤 자세를 취했건 상관이 없었다. 난쟁이 아버지가 우리들에게는 거인
처럼 보였다.
"너 봤지?"
내가 물었다.
영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봤어."
영희가 말했다.
그때 아버지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한 사람은 개천에 다리를 놓고 도로를 포장하고, 우리
동네 건물을 양성화시켜 주겠다고 말했다. 우리는 어른들을 따라 크게크게 손뼉을 쳤다. 다
음 사람은 먼저 사람이 다리를 놓고, 도로를 포장하겠다고 하니 구청장으로 밴고, 자기는 이
러이러한 나라 일을 하겠으니 그 일을 하게 해 달라고 말했다. 어른들은 또 손뼉을 쳤다. 우
리도 따라 쳤다. 커서까지 나는 그때 일을 종종 생각하고는 했다. 두 사람의 인상은 아주 진
하게 나의 머리속에 남았다. 나는 그들을 증오했다. 그들은 거짓말쟁이였다. 그들은 엉뚱하
게도 계획을 내세웠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계획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많은 계획을 내놓았었다. 그런데도 달라진 것을 없었다. 설혹 무엇을 이룬다고 해도 그것은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의 고통을 알아주고
그 고통을 함께 져 줄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또 있겠니!"
어머니가 말했다.
"누구 말씀이세요?"
영호가 물었다.
"명희 엄마 말이다. 얼마나 고마우냐. 십오만 원을 대 줘 건너방 전세돈을 빼 줬잖니."
"영희 엄마."
명희 엄마는 담 너머에서 말했다.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그럼요."
어머니가 말했다.
"어떻게든 해드릴 테니 걱정 말세요."
"그 돈이 보통 돈이우."
"알고 있어요. 명희 생각을 하면 가슴이 메어져요."
나도 마찬가지였다.
"명희 언니."
영희가 소리쳐 불렀었다.
"놀러 와. 우리 집에 놀러 와."
"세집이라 좋지?"
"응."
"네가 장독대에 써 놓은 거 지우기 않으면 너희 집에 놀러가지 않을 거야."
"지울 수가 없어."
"왜?"
"세멘이 굳어져서 못 지워."
"그럼 난 안가."
영희는 몹시 실망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나는 명희를 만났다. 그때는 방죽 오른쪽은 숲이
었다. 거기 앉아 있으면 숲 사이로 인쇄공장의 불빛이 보였다. 그곳 공원들은 밤중에도 일을
했다.
"네가 약속하면 허락할 테야."
명희가 말했다.
"무슨 약속?"
내가 물었다.
"넌 저 공장에 나가면 안돼."
"미쳤어? 난 저 따위 공장엔 안 나가."
"정말이다? 약속했어."
"그래, 약속했어."
"그럼 만져 봐."
명희는 나에게 가슴을 맡겼다. 아주 작은 가슴이었다.
"네가 처음야."
명희가 말했다.
"내 가슴을 만져 본 사람은 너밖에 없어."
나는 왼팔로 명희의 어깨를 안고 오른손으로 그애의 가슴을 만졌다. 동그스름한 가슴이
따뜻했다.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돼."
명희가 속삭이듯 말했다. 그애의 입김이 귀 밑에 느껴졌다.
"말 안할게."
"동셍들한테도 말하지마."
"말 안해."
"네가 비밀을 지키고, 아까 한 약속을 지키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줄 테야."
"정말이지?"
"정말야."
"지금 다른 데 만지면 안되니?"
그런데 명희는 만날 때마다 힘이 없어 보였다. 어떤 때는 정신없이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왜 그러니?"
나는 걱정이 되었다.
"너 어디 아프니?"
"아니."
"그럼 왜 그래?"
"우리 집 밥은 먹기가 싫어."
"왜?"
"질렸어."
"그럼 넌 죽어."
"죽고 싶어."
"명희야, 난 저 따위 공장엔 안 나갈 거야. 공부를 해서 큰 회사에 나갈테야. 약속해."
"배가 고파."
작은 명희가 웃으며 말했다.
"뭐가 먹고 싶니?"
내가 물었다.
명희는 나의 손을 잡았다. 그애는 나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말했다.
"사이다, 포도, 라면, 빵 사과, 계란, 고기, 쌀밥, 김."
명희는 나의 손가락 하나를 마저 짚지 못했다. 그때의 명희에게는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
지 않았을 것이다. 그 명희가 자라면서 다방 종업원이 되고, 고속버스 안내양이 되고, 골프
장 캐디가 되었다. 그애가 어느 날 핼쑥해진 얼굴로 집에 돌아왔다. 그애로서는 마지막 인사
였다. 어머니는 명희가 집에 올 때마다 배가 불러 있었다고 나중에 말했다. 명희는 음독 자
살 예방 센터에서 숨을 거두었다. "싫어! 엄마! 싫어!" 동약 기운에 빠져 명희는 소리쳤다.
성장한 명희는 마지막 순간에 어렸을 적 일들 속을 헤매었을 것이다. 그 애가 남긴 예금 통
장에 십구만 원이 들어 있었다.
'십 오만 원예요."
명희 어머니가 말했다.
"우선 건너방 사람들을 내보내세요."
어머니는 돈을 받아들었다. 아무 말도 못했다.
"헐릴 집이라는 걸 알면서 세 들어올 사람이 있겠어요?"
"그래서 그래요."
"모진 소리 더 듣지 말고 우선 나가겠다는 사람은 내보내세요."
"이게 어떤 돈인데!"
"명희 언니는 큰 오빠를 좋아했어."
영희가 말했다.
"큰 오빠도 알았지?"
"그만둬."
영희가 기타를 쳤다. 나는 벽돌 공장 굴뚝 위에 떠 있는 달을 보았다. 나의 라디오는 고장
이 났다. 며칠 동안 나는 방송통신고교의 강의를 받지 못했다.
나는 명희와의 약속을 지킬 수 없었다. 중학교 3학년 초에 학교를 그만두었다. 더 이상 나
갈 수 없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내가 공부를 계속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밀어 줄 힘이 없
었다. 자세히 보면 아버지는 같은 또래의 사람들보다 많이 늙어 보였다. 우리 식구들밖에 모
르는 일이었다. 아버지의 신장은 백십칠 센티미터, 체중은 삼십이 킬로그램이었다. 사람들은
이 신체적 결함이 주는 선입관에 사로잡혀 아버지가 늙는 것을 몰랐다. 아버지는 스스로 황
혼기에 접어들었다는 체념과 우울에 빠졌다. 실제로 이가 망가져 잠을 못 이루는 밤이 많았
다. 눈도 어두워지고 머리의 숱도 많이 빠졌다. 의욕은 물론 주위력과 판단력도 줄었다. 아
버지가 평생을 통해 해온 일은 다섯가지이다. 채권 매매, 칼 갈기, 고층 건물 유리 닦기, 펀
프 설치하기, 수도 고치기이다. 이 일들만 해온 아버지가 갑자기 다른 일을 하겠다고 했다.
서커스단의 일이었다. 아버지는 처음 보는 곱추 한 사람을 데리고 와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다. 처음 얼마 동안은 그의 조수로 일하면 된다고 했다. 두 사람은 자기들이 무대 위에서
해야 할 연기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자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대들었다. 우리들도 아버지를
성토했다. 아버지는 힘 없이 물러섰다. 꼽추는 멍하니 앉아 우리를 보았다. 꼽추는 눈물이
핑 돌아 돌아갔다. 그의 뒷 모습은 아주 쓸쓸해 보였다. 아버지의 꿈은 깨어졌다. 아버지는
무거운 부대를 메고 일을 찾아 나갔다. 그날 저녁이었다.
"애들아!"
어머니가 우리를 불렀다.
"아버지의 음성이 이상해지셨어."
"왜 그러세요?"
내가 물었다. 아버지는 아무 말 안했다.
'약방엘 다녀와야겠다."
어머니가 본당으로 내려섰다.
"백반을 사와."
아버지가 말했다. 아버지의 목소리 같지 않았다. 아주 짧은 혀가 안으로 말려드는 소리를
냈다. 어버니가 히비탄 트로키라는 약을 사왔다.
"백반은 안 나오고 이게 더 좋은 약이래요. 이걸 빨아 잡수세요."
아버지는 말없이 약을 받아 입에 넣었다. 아버지는 그 일 이후 말을 자 안했다. 혀가 안으
로 말려든다고만 했다. 잠을 잘 때는 혀를 이로 물었다.
"아버지가 너무 지치셨다."
어머니가 말했다.
"알겠니? 이젠 아버지를 믿지 마라. 너희들이 아버지 대신 일해야 한다."
어머니가 울었다. 어머니는 인쇄소 제본 공장에 나가 접지 일을 했다. 고무 골무를 끼고
인쇄물을 접었다. 나는 겁이 났다. 나는 인쇄소 공무부 조역으로 출발했다. 땀을 흘리지 않
고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명희는 나를 만나 주지 않았다. 아주 쌀
쌀했다. 영호와 영희도 몇 달 간격을 두고 학교를 그만두었다. 마음이 차라리 편해졌다. 우
리를 해치는 사람은 없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보호를 받고 있었다. 남아프리카의 어느 원
주민들이 일정한 구역 안에서 보호를 받듯이 우리도 이질 집단으로서 보호를 받았다. 나는
우리가 이 구역 안에서 한 걸음도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조역 공목
약물 해판의 과정을 거쳐 정판에서 일했다. 영호는 인쇄에서 일했다. 나는 우리가 한 공장에
서 일하는 것이 싫었다. 영호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영호는 먼저 철공소 조수로 들어가 잔
심부름을 했다. 가구 공장에서도 일했다. 그 공장엘 가 일하는 영호를 보았다. 뽀얀 톱밥 먼
지와 소음 속에 서 있는 작은 영호를 보고 나는 그만두라고 했다. 인쇄공장의 소음도 무서
운 것이었으나 그곳에는 톱밥 먼지가 없었다. 우리는 죽어라 하고 일했다. 우리의 팔목은 공
장 안에서 굵어갔다. 영희는 그때 큰 길가 슈퍼마켓 한쪽에 자리잡은 빵집에서 일했다. 우리
가 고맙게 생각한 것은 환경이 깨끗하다는 것 하나뿐이었다. 영희는 하늘색 빵집 제복을 입
고 일했다. 영호와 나는 유리창 밖에서 영희가 일하는 것을 보았다. 영희는 예뻤다. 사람들
은 영희가 난쟁이 의 딸이라는 것을 믿지 않으려고 했다. 우리는 무슨 일이 있든 공부를 해
야 한다고 생각했다. 공부를 하지 않고는 우리 구역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세상
은 공부를 한 자와 못한 자로 엄격하게 나뉘어져 있었다. 끔찍할 정도로 미개한 사회였다.
우리가 학교안에서 배운 것과는 정반대로 움직였다. 나는 무슨 책이든 손에 잡히는 대로 읽
었다. 정판에서 식자로 올라간 다음에는 일을 하다 말고 원고를 읽는 버릇까지 생겼다. 동생
들에게 필요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판을 들고 가 몇 벌씩 교저왜를 내기도 했다. 영호와 영
희는 내 말을 잘 들었다. 내가 가져다 준 교정쇄를 동생들은 열심히 읽었다. 실제로 우리가
이 노력으로 잃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고입 검정고시를 거쳐 방송통신고교에 입학했
다.
그해 늦가을 밤 아버지는 나를 작은 나무배에 태우고 방죽 안으로 들어갔다. 아버지는 말
없이 노만 저었다.
"돌아와요."
영희가 마당에서 소리쳤다.
"그배 위험해요."
그러나 아버지는 방죽 한가운데로 노를 저어 갔다. 손을 흔드는 영희의 모습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나는 방죽의 물이 별빛을 받아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배 안으로 물이 스며들고
있었다. 우리는 언덕 위에 교회를 지을 때 나무 넘 빤지를 훔쳐왔다. 영호와 나는 한밤중에
꺠어 널빤지를 훔쳐왔다. 영희는 잠자리에 들 전에 철조망 안으로 기어 들어가 널빤지를 훔
쳐왔다. 교회 건물은 말짱했다. 그런데 우리의 배는 망가져 물이 스며들었다. 영희는 아버지
를 걱정했다. 나는 수영을 할 줄 알았다. 아버지는 방죽 한가운데서 노를 세웠다. 스며든 물
이 우리의 발목을 너머 찼다. 나는 신발을 벗어서 물을 퍼냈다. 아버지가 내 신발을 빼앗았
다. 아버지는 웃고 있었다.
"영수야."
아버지가 말했다.
"어제 왔던 꼽추 아저씨 생각나니?"
"언제요?"
"어제."
나는 다른 신발을 벗어서 또 물을 퍼냈다. 아버지가 다시 내 손을 막았다.
"전 모르겠어요."
내가 말했다.
"모르는 척해도 쓸데없다. 난 다 안다."
"뭘 아신단 말씀예요?"
어제가 아니라 이미 삼 년 반 전의 일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꼽추였다. 그런데 아버지는
말했다.
"그 아저씨와 전에도 일을 했었어. 아주 큰 바퀴를 탔었다."
"아버지. 무슴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그런 일이 언제 있었어요?"
'너는 장남이야. 장남인 네가 믿지 않으니까 두 동생도 믿질 않아."
"어머니도 모르시는 일야요."
"얘야."
어버지가 말했다.
"너만은 알고 있어야 한다. 너희 어머니는 병야. 어제 왔던 꼽추 아저씨가 또 올 거다. 나
를 막지 마. 다른 일은 이제 침이 들어 못하겠다. 너는 내가 언제까지나 수도 파이프를 갈아
잇고, 펌프 머리를 들어 달 수 있을 거라고 믿니? 높은 건물에서 줄을 타고 내려오는 일도
할 수가 없어. 이젠 안돼."
"아버지는 일을 안하셔도 돼요. 저희들이 일을 하잖아요."
"누가 너희더러 일하라고 했니?"
아버지는 말했다.
"너희들은 학교에만 나가면 돼. 그게 너희들이 할 일이다."
"알았어요, 아버지."
내가 말했다.
"이제 그 신발을 주세요."
아버지는 나를 쳐다보다가 신발을 주었다. 나는 물을 퍼냈다.
'어제 꼽추 아저씨는 나를 도와 줄 생각으로 왔었어. 내일 또 올거다. 너희들이 그 아저씨
를 처음본다는 건 말도 안돼. 우리는 함께 일했었다. 생각나지 않니? 아예, 힘으로 나를 윽
박지를 생각은 하지 마라."
"그 아저씨가 왔던 게 언제라구요?"
"어제."
"그 노를 주세요."
아버지는 세워 들고 있던 노를 나에게 주었다. 나는 말할 수 없었다. 처음 본 꼽추였다고
해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어제가 아니라 삼 년 반전의 일이라고 해도 아버지는 믿지 않았
을 것이다. 어제가 아니라 삼 년 반전의 일이라고 해도 아버지는 믿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조심스럽게 노를 저었다. 물가에 닿기 전에 배는 가라앉았다. 나는 아버지를 안고 수초사이
를 헤쳐 나갔다. 우리는 물에 젖어 온몸을 떨고 있는 아버지를 어머니에게 맡겼다. 아버지를
어머니 이상으로 간호할 사람은 이 세상에 없었다.
"아버지는 병이세요."
내가 말했다.
"닥쳐라!"
어머니가 말했다.
"언제나 알아듣겠니! 아버지는 지치셔서 그런거야."
그해 겨울은 아버지는 방안에서 났다. 나는 배를 끄어내 말뚝에다 매었다. 날이 추워지자
울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날 밤 방죽이 얼었다.
밤에 명희 어머니가 또 왔다.
"영희 엄마."
명희 어머니가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 보세요. 입주권이 자꾸 올라요. 아침에 심칠만 원 했던게 십팔만오천 원으
로 뛰었어요. 우리는 괜히 먼저 팔아가지고 손해만 봤어요."
"저런!"
"만오천원이나!"
어머니는 낮에 떼어놓았던 알루미늄 표찰을 종이로 쌌다. 그것을 철거 계고장과 함께 옷
장 안에 넣었다.
"영희야."
어머니가 불렀다.
"아버지 어디 가셨니?"
"모르겠어요."
"영호야."
"아까 아무 말씀 없이 나가셨어요."
"영희야, 큰 오빠는 어디 있니?"
"방에 있어요."
"아버지가 어딜 가셨을까?"
어머니의 목소리가 불안해졌다.
"애들아, 아버지를 찾아 봐라."
나는 아버지가 놓고 간 책을 읽고 있었다. 그것은 일만 년 후의 세계라는 책이었다. 영희
는 온종일 팬지꽃 앞에 앉아 줄 끊어진 기타를 쳤다. '최후의 시장'에서 사온 기타였다. 내가
방송통신고교의 강의를 받기 위해 라디오를 사러갈 때 영희가 따라왔었다. 쓸 만한 라디오
가 있었다. 그런데 영희가 먼지 속에 놓인 기타를 들어 퉁겨 보는 거이었다. 영희는 고개를
약간 숙이고 기타를 쳤다. 긴 머리에 반쯤 가려진 옆 얼굴이 아주 예뼜다. 영희가 치는 기타
소리는 영희에게 아주 잘 어울렸다. 나는 먼저 골랐던 라디오를 살 수 없었다. 좀더 싼 것으
로 바꾸면서 영희가 든 기타를 가리켰다. 그 라디오가 고장이 나고 기타는 줄이 하나 끊어
졌다. 줄 끊어진 기타를 영희는 쳤다. 나는 아버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
다. 일만 년 후의 세계라는 책을 아버지는 개천 건너 주택가에 사는 젊은이에게서 빌었다.
그의 이름은 지섭이었다. 지섭은 밝고 깨끗한 주택가 삼층집에서 살았다. 지섭은 그 집 가정
교사였다. 아버지와 그는 서로 통하는 데가 있었다. 지섭이 하는 말을 나는 들었었다. 그는
이 땅에서 우리가 기대할 것은 이제 없다고 말했다.
"왜?"
아버지가 물었다.
지섭은 말했다.
"사람들은 사랑이 없는 욕망만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단 한 사람도 남을 위해 눈물을 흘
릴 줄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만 사는 땅은 죽은 땅입니다."
"하긴!"
"아저씨는 평생 동안 아무 일도 안하셨습니까?"
"일을 안하다니? 일을 했지. 열심히 했어. 우리 식구 모두가 열심히 일했네."
"그럼 무슨 나쁜 짓을 하신 적은 없으십니까? 법을 어긴 적 없으세요?"
"없어."
"그렇다면 기도를 드리지 않으셨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지 않으셨어요."
"기도를 올렸지."
"그런데 이게 뭡니까? 뭐가 잘못된 게 분명하죠? 불공편하지 않으세요? 이제 이 죽은 땅을
떠나야 됩니다."
"떠나다니? 어디로?"
"달나라로!"
"얘들아!"
어머니의 불안한 음성이 높아졌다. 나는 책장을 덮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영호와 영희는
엉뚱한 곳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나는 방죽가로 나가 곧장 하늘을 쳐다보았다. 벽돌 공장의
높은 굴뚝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그 맨 꼭대기에 아버지가 서 있었다. 바로 한 걸음 정도 앞
에 달이 걸려 있었다. 아버지는 피뢰침을 잡고 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 자세로 아버지는
종이 비행기를 날렸다.
나는 방죽가 풀섶에 엎드려 있었다. 온몸이 이슬에 젖어 축축했다. 조금만 움직이면 잡초
에 맺힌 이슬방울이 나의 몸에 떨어졌다. 한밤을 나는 방죽가 풀섶에 엎드려 새웠다. 아무것
도 볼 수 없었다. 어둠이 조금씩 뒷걸음질쳐 가기 시작했다. 마지막 밤을 ' 우리의 집 '에서
보내지 못했다는 아픔이 목을 타고 올라왔다. 동네는 아직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비행접시를 타고 온 외계인들이 영희를 태워 갔다는
소문은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나는 처음부터 그 소문을 믿지 않았다.
"얘들아!"
어머니가 말했다.
"이러고만 있으면 어떻게 할 거냐?"
"찾아봐도 없는 걸 어떻게 해요."
내가 말했다. 나는 헐어 버린 이발관집 공터에서 주정뱅이를 만났다.
"찾아봐야 쓸데없는 일야."
"정말 보셨어요?"
"암, 봤다니까."
주정뱅이는 말을 잘 못했다. 그는 심하게 딸꾹질을 해댔다.
"영희를 보았다는 사람은 아저씨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자세히 좀 말씀해 주세요."
"너희 아버지는 알고 있어."
"아버지도 모르세요."
"그럴 리가 없다 너희 아버지가 신호를 보내서 비행접시가 왔던 거야."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곳에 서 있었다.
"굉장히 큰 접시였지. 그 밑에서 나온 괴물들이 영희를 끌어올렸어, 순식간에. 나중에 알아
보았더니, 그게 비행접시라는구나."
주정뱅이는 계속 딸꾹질을 해댔다.
"그만 두세요."
내가 말했다.
"그럼 찾아 보렴."
주정뱅이가 말했다.
"네 동생이 어디 있나 찾아봐. 있을 턱이 없지. 나는 목이 말라 잠을 깼었어. 그 시간에 잠
을 깬 사람은 나밖에 없다. 그들은 영희를 태우고 순식간에 날아갔어. 머리가 몹시 크고 다
리는 아주 가늘었다."
"안녕히 가세요."
내가 말했다.
"나는 아직 안간다."
주정뱅이가 말했다.
"이것들을 마셔 버리고 가야지."
그는 구들돌 위에 쌓인 놓은 여섯짝의 창문과 두 짝의 대문을 가리켰다. 그는 전날 지붕
에서 걷어내린 기왓장과 펌프머리, 그리고 장독 두 개를 팔아 모두 마셔버렸다. 우리 동네
주민들의 삼분의 이 이상이 이미 집을 헐어 버리고 떠났다. 나는 풀섶에서 몸을 일으켰다.
방죽 위 하늘의 별빛이 흐려 보였다. 날이 서서히 밝기 시작했다. 어린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풀어지지도 않은 신발끈을 고쳐 매고 몇 번 껑충껑충 뛰었다. 대문을 열고 나
온 형이 방죽길을 따라 걸어왔다. 두 어깨가 축 늘어져 있었다.
"힘을 내. 형."
내가 말했었다.
"이건 힘으로 할 일이 아니다."
형이 말했다.
"그럼 뭐야? 용기야?"
형은 점심시간에 식사를 하지 않고 나를 찾아왔다. 우리는 기계실 뒤에 쪼그리고 앉아 이
야기했다.
"우리가 말을 할 줄 몰라서 그렇지, 이것은 일종의 싸움이다."
형이 말했다. 형은 말을 근사하게 했다.
"우리는 우리가 받아야 할 최소한도의 대우를 위해 싸워야 돼. 싸움은 언제나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이 부딪쳐 일어나는 거야. 우리가 어느 쪽인가 생각해 봐."
"알아."
형은 점심을 굶었다. 점심시간이 삼십 분밖에 안되었다. 우리는 한 공장에서 일했지만 격
리된 생활을 했다. 공원들 모두가 격리된 상태에서 일만 했다. 회사 사람들은 우리의 일 양
과 성분을 하나하나 조사해 기록했다. 그들은 점심시간으로 삼십분을 주면서 십 분 동안 식
사하고 남은 이십 분 동안은 공을 차라고 했다. 우리 공원들은 좁은 마당에 나가 죽어라 공
만 찼다. 서로 어울리지 못하고 간격을 둔 채 땀만 뻘뻘 흘렸다. 우리는 제대로 쉬지도 못하
고 일했다. 공장은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원하기만 했다. 탁한 공기와 소음 속에서 밤중까지
일을 했다. 무론 우리가 금방 죽어가는 상태는 아니었다. 그러나 작업 환경의 악조건과 흘린
땀에 못 미치는 보수가 우리의 신경을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그래서 자랄 나이에 제대로 자
라지 못하는 발육 보조 현상을 우리는 나타냈다. 회사 사람들과 우리의 이해는 늘 상반되었
다. 사장은 종종 불황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와 그의 참모들은 우리에게 쓰는 여러 형태의
억압을 감추기 위해 불황이라는 말을 이용하고는 했다. 그렇지 않을 때는 힘껏 일한 다음
자기와 공원들이 함께 누리게 될 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희망은 우리에
게 아무 의미를 주지 못했다. 우리는 그 희망 대신 간이 알맞은 무말랭이가 우리의 공장 식
탁에 오르기를 더 원했다. 변화는 없었다. 나빠질 뿐이었다. 한 해에 두 번 있던 승급이 한
번으로 줄었다. 야간 작업 수당도 많이 줄었다. 공원들도 줄였다. 일 양은 많아지고, 작업 시
간은 늘었다. 돈을 받는 날 우리 공원들은 더욱 말조심을 했다. 옆에 있는 동료도 믿기 어려
웠다. 부당한 처사에 대해 말한 자는 아무도 모르게 밀려났다. 공장 규모는 반대로 커 갔다.
활판 윤전기를 들여오고, 자동 접지 기계를 들여오고, 옵셋 윤전기를 들여왔다. 사장은 회사
가 당면한 위기를 말했다. 적대 회사들과의 경쟁에서 지면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것은 우리 공원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말이었다. 사장과 그의 참모들은 그것을 알고 있었
다.
그것은 생각만 해도 무서운 일이었다. 큰 공장이 문을 닫으면 수많은 공원들은 갈 곳이
없었다. 작은 공장들이 채용할 인원은 한정이 되어 있다. 나는 돈도 못 벌고 놀게 될지도 모
른다. 새로운 일터를 찾는다고 해도 낯선 곳이다. 작은 공장이라 작업장은 더 나쁘고 돈도
오르지 않은 채 받는 액수보다 훨씬 적을 수가 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공원들 대
부분이 어린 나이에 들어와 중요한 성장기의 삼사년을 이 공장에서 보냈다. 익힌 기술을 빼
놓으면 성장의 기반이랄 것이 없다. 우리 공원들은 우리가 아는 것만큼 밖에는 사물을 이해
하지 못했다. 아무도 땀으로 다진 기반을 잃고 싶어하지 않았다. 회사 사람들은 우리가 생각
하는 것을 싫어했다. 공원들은 일만했다. 무엇하나 일깨워 줄 사람도 없었다. 어른들도 자기
들의 경험을 들려 줄 것이 없었다. 마음속에서는 옳은 것이 실제에서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
여지는 것만을 그들은 보았었다. 우리는 너무나 모르는 것이 많았다. 상장에게는 다행한 일
이었다. 그 집 식구들은 정원 잔디를 기계로 밀어서 깎았다. 그 집 정원에서는 손질이 잘 된
나무들이 밝은 햇빛을 받아 무럭무럭 자랐다. 그 집 나무들은 '나무 종합 병원'에서 나온 나
무 의사들이 돌보았다. 나도 나무 병원 앞을 지나가 본 적이 있다. 간판에 귀댁의 나무는 건
강합니까? 라고 씌어 있었다. 그 밑에는 작은 글씨로 병충해 구제 진다 생리적 피해 진단
외과수술 건강유지 관리 라고 씌어 있었다. 함께 지나던 어린 조역이 말했다. "우리 집에는
나무가 없습니다. 나는 건강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허리를 잡고 웃었다. 무엇이 그렇게 우
스웠는지 모른다. 어린 조역은 그때 거의 날마다 코피를 흘렸다.
형은 웃옷을 벗어 나의 등에 덮어 주었다. 풀섶으로 들어선 형의 바짓 가랑이도 이슬에
젖었다.
"영희를 보았다는 사람은 주정뱅이 아저씨밖에 없었어."
변명하듯 내가 말했다.
"비행접시가 내렸다는 곳이 여기야."
"그래 밤새도록 뭘 봤니?"
"형은 내가 그 아저씨 말을 믿어던 것 같아?"
"아니."
"찾아 나설 데가 있어야지."
"그만 들어가자."
"형은 영희가 왜 집을 나간 것 같아?"
"너희들 때문이야."
어머니는 말했다.
"너희들이 핑핑 놀고 있기 때문에 나갔어. 돈도 없고, 집도 없고, 모든게 너희들 책임이야.
다른 아이들은 멀쩡하게 남아서 일을 하는데 너희들은 왜 쫓겨났니?"
"어딜 가면 꼭 말을 하고 나갔었잖아? 나는 영희가 집을 나간 이유를 알 수가 없어."
"참을 수가 없었겠지."
형이 말했다.
형은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형은 언제나 나보다 생각이 싶었다. 아는 것도 많았다. 학교
를 그만두자 더 많은 책을 읽었다. 아버지가 난쟁이만 아니었다면 형은 학자가 될 사람이었
다. 형은 틈만 있으면 책을 읽었다. 나는 형을 위해 기계에서 돌아 나오는 인쇄물을 접어다
주고는 했다. 아주 어려운 것도 형은 참고 읽었다. 돈을 타면 헌책방에 가서 사다 읽기도 했
다. 책은 형에게 무엇이든 주었다. 형은 고민하는 사나이의 표정을 종종 지어 보이고는 했
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공책에 옮겨 적기도 했다. 형의 공책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
도 적혀 있었다.
폭력이란 무엇인가? 총탄이나 경찰 곤봉이나 주먹만이 폭력이 아니다. 우리의 도시 한 귀
퉁이에서 젖먹이 아이들이 굶주리는 것을 내버려두는 것도 폭력이다. 반대 의견을 가진 사
람이 없는 나라는 재난의 나라이다. 누가 감히 폭력에 의해 질서를 세우려는가? 십칠세기
스웨덴의 수상이었던 악셀 옥센스티르나는 자기 아들에게 말했다. "얘야, 세계가 얼마나 지
혜롭지 않게 통치되고 있는지 아느냐?" 사태는 옥센스티르나의 시대 이래 별로 개선되지 않
았다. 지도자가 넉넉한 생활을 하게 되면 인간의 고통을 잊어버리게 된다. 따라서 그들의 희
생이라는 말은 전혀 위선으로 변한다. 나는 과거의 착취와 야만이 오히려 정직하였다고 생
각한다. 햄릿을 읽고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는(교육받은) 사람들이 이웃집
에서 받고 있는 인간적 절망에 대해 눈물짓는 능력은 마비당하고 또 상실당한 것은 아닐까?
세대와 세기가 우리에게는 쓸모도 없이 지나갔다. 세계로부터 고립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세
계에 무엇 하나 주지 못했고, 가르치지도 못했다. 우리는 인류의 사상에 아무것도 첨가하지
못했고... 남의 사상으로부터는 오직 기만적인 겉껍질과 쓸모없는 가장자리 장식만을 취했을
뿐이다. 지배한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할 일을 준다는 것,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문
명을 받아들이게 할 수 있는 일, 그들이 목적 없이 공허하고 황량한 삶의 주위를 방황하지
않게 할 어떤 일을 준다는 것이다.
나는 형을 알 수가 없었다. 내가 공책을 읽는 동안 형은 고민하나 사나이의 표정을 지었
다. 그야말로 의젓한, 고민하는 사나이의 얼굴이었다. 나는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
았다. 형은 나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비웃었을 것이다.
"도대체 이걸로 뭘 하겠다는 거야?"
내가 물었다.
"영호야."
아버지가 말했다.
"너도 형처럼 책을 읽어라."
"뭘하겠다는 게 아냐."
형이 말했다.
"나는 책을 통해 나 자신을 알아보는 거야."
"이제 알겠어."
나중에 나는 말했다.
"형은 이상주의자야."
말을 하고 나는 아주 기분이 좋았다. 나도 형만큼 자랐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다른
아이들과 달리 어려운 말을 할 수 있을 만큼 자랐다는 것을 알려 주고 싶었다. 나는 고민하
는 이상주의자의 얼굴을 펴다보았다. 기대는 어그러졌다. 형은 화가 나 있었다. 나는 그때형
이 화를 내야 하는 까닭을 알 수 없었다. 나는 나의 어리석음을 스스로 인정했다. 우리는 난
쟁이의 아들이었다. 형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풀섶에서 나갔다. 나는 돌멩이를 집어 방죽
을 향해 던졌다. 소리 없이 물방울만 올랐다. 마당에서 나는 계속 돌멩이를 던졌다.
"영호야."
어머니가 말했다.
"그 돌멩이질은 그만두고 동회 앞에나 나가 봐라."
"가 보나마나예요. 한 시간 전에 이십이만 이나 했는데 또 올랐겠어요?"
"그래도 가 봐. 이십오만 원이면 팔겠다고 그래."
나는 다시 돌멩이를 집어 방죽을 향해 던졌다. 동사무소 앞에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승용
차도 몇 대 서 있었다. 그곳에는 두 부류의 사람밖에 없었다. 입주권을 팔려는 사람과 사려
는 사람이었다. 팔려는 사람들은 초조한 얼굴로 거간꾼들의 눈치만 보았다. 한결같이 영양이
나쁜 얼굴들이었다. 거기서는 눈물 냄새가 났다. 나는 눈물 냄새를 가슴으로 맡았다. 누가
나의 팔을 끼었다. 영희였다. 영희는 햇볕에 발갛게 탄 얼굴을 옆으로 저어 보였다. 잠실까
지 갔다 오는 길이었다. 아파트를 짓고 잇는 현장 근처의 복덕방 시세도 이십이만 원이라고
했다. 이젠 더 이상 버틸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작은 오빠, 엄마더러 그만 팔자고 그래."
영희가 말했다.
"갑자기 내려가면 어쩌려고 그러지?"
"저에게 파세요."
왠 여자가 말했다.
"소개업자가 아녜요. 직접 입주하지 그래요. 명의 변경이 가능한 건가요?"
"물론 가능한 거죠."
내가 말했다.
"우린 표찰이 있어요."
"그 표찰이란 거 어떻게 생긴 거예요?"
"작은 알루미늄판입니다. 무허가 건물 번호가 새겨져 있어요."
"무찰은 또 뭔가요? 무찰은 값이 싸던데."
"표찰이 없는 집을 무찰이라고 그래요. 몇 년 전 무허가 건물 일제 조사때 시에서 잘못 빠
뜨렸던가, 사유지 건물로 판단 무허가 건물등록 대장에서 빠진 겁니다."
여자는 땀을 흘리고 서 있었다. 손수건으로 땀을 찍어내며 게시판을 가리켰다. 무허가 건
물 명의 변경 신청 양식이 붙어 있었다. 그 밑에는 갖추어야 할 구비 서류가 적혀 있었다.
'신청서 1통, 매도자 인감 1통, 매매 계약서 사본 1통, 인우 보증서 1통' 하고 여자가 읽었다.
"매매 계약서 한 통만 쓰면 됩니다."
"철거 계고장이 나온 날짜보다 한두 달 앞서 산 거로 하면 돼요."
"그럼 정말 안전한가요?"
"아주머니 이름으로 바뀌어진다니까요. 아파트에 아주머니 이름으로 입주하게 돼요."
"그건 불법 아녜요?"
여자는 빳빳한 자세로 서서 땀을 찍어냈다.
"동회에 들어가서 건설계 직원에게 물어 보세요."
나는 말했다.
"왜 불법적인 일을 처리하느냐고 따져 보세요."
"이십이만원은 바싸요. 만 원만 깍아 줄래요?"
"아주머니."
내가 말했다.
"헐릴 저희 집 같은 걸 새로 지으려면 백삼십만 원은 있어야 됩니다. 저희 아버지가 평생
을 일해 지은 집예요. 우린 그걸 이십이만 원과 바꾸어야 될 입장예요. 거기서 전세 주었던
돈 십오만 원을 제하고 나면 칠만 원이 남습니다."
"어쨌든 이십일만 원에는 안되겠다는 얘기 아녜요?"
나는 말하지 않았다. 여자가 돌아섰다. 영희가 작은 주먹으로 나의 등을 쳤다. 잠시 후에
또 한번 쳤다. 영희는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영희에게는 청바지고 잘 어울렸다. 나는 영희
의 얼굴을 보지 않고 돌아서 걸었다.
"팔지 말고 기다려요."
승용차 안에서 한 사나이가 말했다.
"내가 사겠소."
"얼마예요?"
"이십오만원."
"좋아요. 저녁에 가죠. 이웃에 팔 사람이 또 있으면 싸게 팔지 말고 기다리라고 그래요."
"조금만 더 기다려라."
아버지가 말했었다.
"진실을 말하고 묻혀 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너희들이 그 꼴이 되었구나."
우리는 개천 위에 놓은 시멘트 다리 위에 서 있었다. 아버지는 난간 사이에 두 다리를 내
리고 앉아 술을 마셨다. 아버지가 술을 다 마실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다리 저쪽 끝에서는
곯아 떨어진 주정뱅이가 코를 골았다. 아버지의 주량은 그의 반의 반도 안되었다. 그날 밤
아버지는 주정뱅이 주량의 반을 마셨다. 밤이 늦어 동네 사람들은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었
다. 두 집만 깨어 있었다. 주정뱅이네 집과 우리 집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술에 취에 돌아갈
것 같았다. 형도 아버지가 든 술병을 빼앗아 버리지 못했다. 나는 아버지가 마지막 눈을 감
는 날의 일을 생각했다. 죽음은 모듬 것의 끝이다. 언덕 위 교회의 목사는 달랐다. 그는 인
간의 숭고함 고통 구원을 말했다. 나는 인간이 죽은 다음에 또 다른 생을 기작한다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에게는 숭고함도 없었고, 구원도 있을 리 없었다. 고통만 있
었다. 나는 형이 조판한 노비 매매 문서를 본 적이 있다. 확실히 아버지만 고생을 한 것이
아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식들이 전혀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첫 번째 싸움에서 져버렸다.
나는 내가 마지막 눈을 감는 날의 일도 생각했다. 나는 아버지만도 못할 것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버지, 아버지의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할아버지들은 그들
시대의 성격을 가졌다. 나의 몸은 아버지보다도 작게 느껴졌다. 나는 작은 어릿광대로 눈을
감을 것이다.
아무도 우리에게 할 일을 주려고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우리가 공장 안으로 들어가려는
것을 막았다. 사장과 그의 참모들은 회의실 창가에 서서 우리를 내다보았다. 그들이 우리의
일을 뺴앗앗다.
"그러니까, 다시 얘길 해 보자."
아버지가 말했다.
"너희 둘만 남았었다 이거지? 처음엔 함께 일손을 놓고 사장을 만나 담판하기로 했던 아이
들이 너희들을 배반해 너희 둘만 남았었다. 이거아냐?"
"술은 그만 드세요. 아버지."
내가 말했다.
"잘했어."
아버지는 다시 병을 기울여 술을 마셨다.
"너희도 잘했고, 그 아이들도 잘했다."
"저희들 먼저 들어갈래요."
"그래, 들어가라. 들어가서 너희 엄마를 내보내."
"그럴 필요없어요."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주정뱅이의 몸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잘한다.!"
어머니가 말했다.
"둘이서 아버지도 제대로 못 모시는구나."
"가만있어."
아버지는 빈 술병을 다리 밑으로 던졌다.
"애들이 오늘 훌륭한 일을 했어. 사장을 만나 얘기를 했대. 회사가 잘 되려면 몇 사람의 목
이 필요하다고 말야. 그리고 사장에게 당신이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을 공원들에게 강요하지
말라고 한 거야. 이 말 뜻을 엄마가 알까? 응?"
"아버지 그게 아녜요."
내가 말했다.
"우리는 아무도 만날 수 없었어요. 얘기가 먼저 새 버려 그냥 쫓겨났을 뿐예요."
"마찬가지야!"
아버지가 큰 소리로 말했다.
"사장을 만났으면 그런 말을 했을 거 아냐? 그렇지? 대답해 봐."
"네."
작은 목소리로 내가 대답했다.
"들었지? 엄마 들었어?"
"걱정할 거 없어요."
어머니가 말했다.
"얘들은 이제 일류 기술자예요. 어느 공장에 가든 돈을 벌 수 있어요."
"모르는 소리하지마."
"모르는 소리는 왜 모르는 소리예요? 공장도 옮겨 보는 게 좋아요."
"그게 안된다니까. 벌써 공장끼리 연락이 돼 있어. 똑같은 공장들이야. 얘들을 받아 줄 공
장이 없어. 얘들이 오늘 무슨 일을 했는지 당신이 알아야 돼."
"그만 두세요. 애들이 무슨 반역죄라도 지은 것처럼 야단예요."
"뭐라고?"
"가자."
형은 시멘트 다리를 성큼성큼 걸어 건넜다. 그 끝에서 곯아떨어진 주정뱅이를 일으켜 업
었다. 다리를 휘청거리면서도 넘어지지 않았다. 형은 지난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지 못했다.
잠도 잘 못 잤다. 혓바늘이 돋고 입맛을 잃었다. 밤에도 머리가 맑아져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제 그 보상을 받기 시작했다. 형은 주정뱅이네 마루에다 주정뱅이를 내려놓았다. 어린 딸
이 눈을 비비며 나와 아버지를 받아 눕혔다. 우리는 골목을 나와 밤공기를 크게 들이마셨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업고 가는 것이 보였다. 형은 돌아서면서 두 손으로 머리를 눌렀다.
공원들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좁은 마당에 나와 공을 찼다. 그들은 우리 쪽으로 고개를
돌리려고 하지 않았다. 이십 분이 지나자 땀을 뻘뻘 흘리며 작업장으로 몰려 들어갔다.
"이게 뭐람!"
혼자말처럼 형이 중얼거렸다.
"저녁에 다른 이야길 하면 안됩니다."
승용차 안의 사나이가 말했다.
"이십오만 원이면 아무 말 안해요."
내가 말했다. 그날 밤 승용차 안의 사나이가 우리 동네의 나머지 입주권을 모두 사 버렸
다. 그는 다른 투기업자들이 이십이만 원에 사는 것을 이십오만 원씩 주고 모두 사 버렸다.
그날 밤에도 영희는 팬지 꽃 앞에 앉아 기타를 쳤다. 영희는 팬지꽃 두 송이를 따 하나는
기타에 꽂고 하나는 머리에 꽂았어. 그리고 꼼짝도 하지 않고 기타만 쳤다. 사나이가 아버지
에게 담배를 권했다.
"이십오만 원이 분명하죠?"
어머니가 물었다. 사나이를 따라온 나이 든 사람이 검은 가방을 열러 돈을 보여 주었다.
그는 마루에 앉아 매매 계약서를 썼다. 어머니가 방으로 들어가 서류가 든 봉투와 도장을
가지고 나왔다. 아버지는 계약서 매도자란에 심불이라고 쓰고 도장을 눌렀다. 나이 든 사람
은 아버지의 이름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 아버지 이름이 갖는 아픈 바람의 뜻을 그가 알리
없었다. 어머니는 소중하게 싸두었던 것들을 하나하나 넘겨 주었다. 식칼 자국이 난 표찰,
아침 수저를 놓고 가슴에 세 번 치게한 철거 계고장, 집이 헐값에 버리기 위해 생전 처음
내 본 인감증명 두통, 미리 서명해 두었던 명의 변경 신청서, 힘 하나 없는 식구들의 이름과
나이가 차례대로 적혀 있는 주민등록등본 두 통. 마당가 팬지꽃 앞에 앉아 있던 영희가 고
개를 숙였다. 사나이가 돈을 내밀었다. 어머니는 머리를 저으며 뒤로 물러앉았다. 아버지가
그것을 꼭 삼 초 동안 들고 있다가 어머니에게 넘겨 주었다. 어머니는 두 손으로 돈을 받
아들었다.
다음날 아침, 명희 어머니는 사람들을 시켜서 집을 헐었다. 어머니가 십오만 원을 갚았다.
두 부인은 손을 마주잡은 채 아무 말도 못했다. 용달차가 좁은 골목을뚫고 들어와 명희네
짐을 실었다. 명희 어머니가 치마를 올려 눈물을 닦았다.
"에유, 정이란 게 뭔지!"
명희 어머니가 말했다.
"정이란 게 이렇게 더러운 게라우."
그 말이 우리의 눈에 고춧가루를 뿌렸다. 용달차가 집 앞을 지나갔다. 아버지는 오른손을
반쯤 올렸다. 내렸다. 왼손에는 책이 들려 있었다. 지섭의 책에 아버지의 손때가 까맣게 묻
었다. 아버지와 지섭은 우리에게 대기권 밖을 날아 다니는 사람들로 보였다. 두 사람은 하루
에도 몇 번씩 달을 왕복했다.
"살기가 너무 힘들다."
아버지가 말했었다.
"그래서 달에 가 천문대 일을 보기로 했다. 내가 할 일은 망원 렌즈를 지키는 일야. 달에는
먼지가 없기 때문에 렌즈 소제 같은 것도 할 필요가 없지 그래도 렌즈를 지켜야 할 사람은
필요하다."
"아버지, 도대체 그런 일이 가능할 것 같아요?"
내가 말했다.
"넌 이때까지 뭘 배웠니?"
아버지가 말했다.
"뉴턴이 그 중요한 법칙을 발표하고 삼 세기가 지났어. 너도 그걸 배웠지? 국민학교 때부
터 배웠어. 그런데 우주에 관한 기본 법칙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말하는 구나."
"그런데 누가 아버지를 달에 모시고 가겠대요?"
"지섭이 미국 휴스턴에 있는 존슨 우주센터에 편지를 냈다. 그곳 관리인 로스씨가 답장을
보내올 거야. 후년에 우주 계획 전문가들과 함께 달에 가게 되 거다."
"그 책을 돌려 주세요."
내가 말했다.
"그리고 그 사람 말을 믿지 마세요. 그는 미쳤어요."
"이 책의 사진을 봐라. 이 사람은 프란시스 베이컨이고, 이 사람은 로버트 고다드다. 당시
사람들이 미치광이로 지목했던 인물들이야. 이 미친 사람들이 어떤 업적을 남겼는지 아니?"
"몰라요."
"넌 학교에서 죽은 교육을 받았어."
"어쨌든 그 책을 돌려 주세요."
"너희들은 내가 이땅에서 끝까지 고생하다 바짝 마른 몰골로 죽기를 바라고 있지? 힘든 일
에 눌려 허위적 거리다 숨을 거두기를 바라고 있는 것 아니냐?"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너희들은 왜 지섭에게 아무것도 배울 생각을 하지 않니?"
"도대체 뭘 배우라는 말씀이예요?"
"로스씨의 편지를 받기 전에 보여 줄 것이 잇다. 지섭에게 말해서 쇠공을 쏘아 올려 보여
주마."
"없지?"
"네."
"찾지도 못하면서 밤새도록 어디 가 있었니?"
나는 돌멩이를 집어 다시 방죽을 향해 던졌다. 어머니도 기진해 다른 말을 못했다. 형이
어머니의 등을 밀면서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조용한 아침이었다. 백여 채의 집이 헐리고 남
은 것은 몇 채 안되었다. 우리도 영희만 집을 나가지 않았다면 전날 떠났을 것이다. 철거일
을 어겨야 할 다른 이유는 없었다.
행복동 생활의 마지막 며칠은 우리에게 악몽과 같았다. 우리는 영희를 찾아 헤매였다. 영
희를 본 사람은 없었다. 영희는 가방도 들지 않고 집을 나갔다. 갖고 나간 것은 줄 끊어진
기타와 팬지꽃 두 송이 뿐이었다. 나는 좀 큰 돌멩이를 집어 던졌다. 이번에도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잔물결이 수초 사이로 밀려 왔다. 지섭이 이발관집 공터를 자나 곧장 걸어오고
있었다. 그의 손에 쇠고기가 들려 있었다. 대문 앞까지 나온 아버지가 그의 손을 잡고 들어
갔다. 아버지가 쇠고기를 부엌 안 어머니에게 넘겨 주었다. 부엌 안에 연기가 자욱했다. 형
이 안쪽 아궁이 앞에 엎드려 불을 피우고 있었다. 형은 눈물을 씻으면서 일어나 아궁이에
나무를 넣었다. 어머니는 밖으로 나와 눈물을 씻었다. 우리는 며칠동안 명희네 집에서 나온
나무를 쪼개 때었다. 형은 명희네 안방 문설주를 쪼개 아궁이에 넣고 나왔다. 형의 몸에서
연기 냄새가 났다. 아버지가 밭은 기침을 했다. 아버지와 지섭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
섭은 아버지에게 빌려 준 책을 읽었다. 아버지는 그가 감옥 살이를 했다고 말했었다. 아버지
에 의하면 그는 잘못한 것도 없이 감옥에 갔었다. 그는 마루에 걸터앉아 책을 읽었다. 형과
나는 시멘트 담 앞에 서서 밖을 내다보았다. 집들이 다 헐려 곧바로 동사무소가 보였다. 그
너머로 밝고 깨끗한 주택가가 보였다. 그 바른 쪽은 슈퍼마켓이 잇는 큰길이다. 영희가 한때
일한 빵집이 보였다. 형과 내가 유리창 밖에서 본 영희는 정말 예뻤다. 아무도 영희가 난쟁
이 의 딸이라는 것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우리는 끝내 영희를 찾지 못했다.
부엌에서 고기국 끊는 냄새가 낫다. 고기 굽는 냄새도 났다. 어머니가 상을 내려 행주질을
했다. 동사무소 앞에 사람들이 서 있었다. 쇠망치를 든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헐어 버린 집
들 공터를 가로질러 우리 집을 향해 오고 있었다. 내가 대문을 잠갔다. 어머니가 밥상을 차
렸다. 형이 상을 들어다 마루에 놓았다. 형은 나를 걱정했다. 괜한 걱정이었다. 그들이 쇠망
치로 머리를 내리친다고 해도 나는 가만히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먼저 수저를 들었다. 그
옆자리에서 지섭이 수저를 들었다. 어머니는 마루 끝에 낮아 국을 마셨다. 형과 나는 밥을
국에 말았다.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꼼짝도 하지 않고 식사를 했다. 영희
가 이 시간에 어디서 어떤 식탁을 대하고 있을지 우리는 알 수 없었다. 우리의 밥상에 우리
선조들 때부터 묶어 흘려 보낸 시간들이 올라앉았다. 그것을 잡아 칼날로 눌렀다면 피와 눈
물, 그리고 힘없는 웃음 소리와 밭은기침 소리가 그 마디마디에서 흘러 떨어졌을 것이다. 대
문을 두드리던 사람들이 집을 싸고 돌았다. 그들이 우리의 시멘트 담을 쳐 부수었다. 먼저
구멍이 뚫리더니 담은 내려앉았다. 먼지가 올랐다. 어머니가 우리들 쪽으로 돌아앉았다. 우
리는 말없이 식사를 계속했다. 아버지가 구운 쇠고기를 형과 나의 밥 그릇에 넣어주었다. 그
들은 뿌연 시멘트 먼지 저쪽에 서서 우리를 지켜 보았다. 그들은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대로 서서 우리의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어머니가 부엌으로 들어가 숭늉을 떠왔다.
아버지와 지섭이 숭늉을 마셨다. 숭늉을 다 마시자 어머니가 밥상을 들었다. 내가 먼저 내려
가 잠겼던 대문을 열었다. 어머니는 밥상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형이 이불과 옷가지를 싼
보따리를 메고 뒤따라 나갔다. 쇠망치를 든 사람들은 무너진 담 저쪽에서 말없이 지켜 보
고 있었다. 우리는 어머니가 싸놓은 짐을 하나하나 밖으로 끌어냈다. 어머니가 부엌으로 들
어가 조리 식칼 도마들을 들고 나오셨다. 마지막으로 아버지가 나왔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공구들이 들어 있는 부대를 메고 나왔다. 쇠망치를 든 사람들 앞에 쇠망치 대신 종이와 불
펜을 든 사나이가 서 있었다. 그가 아버지를 보았다. 아버지가 바른 손을 들어 집을 가리키
고 돌아섰다. 쇠망치를 든 사람들이 집을 쳐부스기 시작했다. 한꺼번에 달라붙어 집을 쳐부
수었다. 어머니는 돌아앉아 무너지는 소리만 들었다. 북쪽 벽을 치자 지붕이 내려앉았다. 지
붕이 내려 앉을 때 먼지가 올랐다. 뒤로 물러섰던 사람들이 나머지 벽에 달라 붙었다. 아주
쉽게 끝났다. 그들은 쇠망치를 놓고 깜을 씻었다. 사나이가 종이에 무엇인가 써 넣었다. 지
섭이 들고 잇던 책을 아버지에게 주었다. 그는 사나이를 향해 걸어갔다.
"방금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지섭이 물었다. 사나이는 몇 초 후에야 지섭의 말을 알아들었다.
그가 말했다.
"삼십 일까지 철거를 하게 돼 있었죠? 시한이 지났어요. 행정대집행법에 따라 철거 작업을
했습니다. 더 이상 할 이야기도 없습니다."
사나이가 돌아서려고 했다.
지섭이 재빨리 말했다.
"지금 선생이 무슨 일을 지휘했는지 아십니까? 편의상 오백 년이라고 하겠습니다. 천 연도
더 될 수 있지만. 방금 선생은 오백 년이 걸려 지은 집을 헐어 버렸습니다. 오 년이 아니라
오백 년입니다."
"그 오백 년이란 게 도대체 붭니까?"
사나이가 물었다.
"모르시겠어요?"
지섭이 되물었다.
"그만 비켜요."
"당신이 덫을 놓았습니다. 당신이 아니라면 당신 상부에서. 백여 세대이상이 여기다 생활
터전을 잡는 것을 몰랐어요? 덫을 놓은 게아닙니까? 가서 말해요, 내가 치더라구."
설마 하고 서 있던 사나이는 고개도 돌리지 못했다. 지섭의 주먹이 사나이의 안면에 정통
으로 들어갔다. 사나이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상체를 수그렸다. 두 손 사이로 피가 흘
러내렸다. 수그린 사나이를 지섭이 또 쳤다. 사나이는 앞으로 푹 쓰러졌다. 우리가 말릴 사
이도 없었다. 쇠망치를 든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뒤늦게 몰려와 지섭에게 달려들었
다.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치고, 받고, 밟았다. 형과 내가 나설 차례였다. 그런데 아버지가
우리의 팔을 잡아 끌었다.
"놔둬라."
아버지가 말했다.
"아는 사람이 말하게 해라."
형과 나는 아버지에게 팔을 잡힌 채 보았다. 일은 간단히 끝났다. 사나이는 일어나고 지섭
은 땅에 죽은 듯 쓰러져 있었다. 사람들이 지섭을 일으켜 세웠다. 어머니가 갑자기 몸을 떨
면서 울었다. 지섭의 얼굴은 피에 젖었다. 피는 머리에서 얼굴로 흘러내렸다. 그들이 지섭을
끌고 갔다. 그들은 올 때처럼 곧바로 공터를 가로질러 갔다. 동사무소를 지나 큰길 쪽으로
나가는 것이 보였다. 아버지가 돌아서더니 들고 있던 책을 형에게 주었다. 아버지가 그들을
향해 걸어갔다. 아버지의 작은 그림자가 아버지를 따라 갔다. 나는 더 이산 견딜 수가 없었
다. 잠이 나를 눌러왔다. 나는 부서진 대문 한 짝을 끌어내 그 위에 엎드렸다. 햇살을 등에
느끼며 나는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우리 식구와 지섭을 제외하고 세계는 모두 이상했다.
아니다. 아버지와 지섭이마저 좀 이사했다. 나는 햇살 속에서 꿈을 꾸었다. 영희가 팬지꽃
두 송이를 공장 폐수 속에 던져 넣고 있었다.
거실에 걸려 있는 부엉이가 네 번을 울었다. 이렇게 긴 밤을 새워 보기는 처음이다. 한밤
에 비하면 지금까지의 나의 열 일곱 해는 얼마나 긴 것인가. 그러나 큰 오빠가 셈해본, 우리
선조 대대로의 세월에 비하면 열 일곱 해는 아무것도 아니다. 선조 대대로의 세월도 마찬가
지다. 아버지는 달에 가서 천문대 일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달에서는 머리카락죄도 선
명하게 볼 수 있다. 지섭의 책에 의하면 머리카락좌의 성운은 오십억 광년 저쪽에 있다. 오
십억 광년에 나의 열 입곱해를 대보일 수는 없다. 천 년이라고 해야 모래 몇 알이 될지 모
른다. 오십억 광년이라면 나에게는 영원이다. 나의 영원을 어떻게 느낄 수 없다. 영원이 죽
음과 어떤 관련이 있다면 나는 죽음을 통해 그것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른다.
내가 죽음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사막으로 이어지는 지평선이다. 어둠녁에
모래 섞인 바람이 분다. 선 하나로 표시될 그 지평선 끝에 내가 알몸으로 서 있다. 다리를
야간 벌리고 팔을 안으로 끌어들였다. 머리도 반쯤 숙여 나의 머리카락이 나의 사슴을 덮었
다. 눈을 감고 열을 세면 나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다. 바람부는 회색의 지평선만이 남는다.
이것이 내가 아는 죽음이다. 이러한 죽음이 영원과 무관할 리 없다. 우리의 생활은 회색이
다. 집을 나온 다음에야 나는 밖에서 우리의 집을 들여다볼 수 잇다. 회색에 감싸인 집과 식
구들은 축소된 모습을 나에게 드러냈다. 식구들은 이마를 맞댄 채 식사하고, 이마를 맞대고
이야기했다. 작은 목소리라 나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아버지의 실제 모습보다도 작게 축소
된 어머니가 부엌으로 들어가다 말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늘까지 회색이다. 나는 나 자신
의 독립을 꿈꾸고 집을 뛰쳐나온 것이 아니다. 집을 나온다고 내가 자유로와질 수는 없었다.
밖에서 나는 우리집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끔찍했다. 두 오빠와 마찬가지로 나도 학교를 그
만 두었다. 그 직전에 읽은 부독본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었다. 물, 물, 어디를 보다 물뿐,
그러나 한 방울도 마실 수 없다. 배를 잃은 늙은 수부가 바다에 떠있었다. 물 가운데서 그는
목말라했다. 밖에서 회색에 싸인 축소된 집과 축소된 식구들을 들여다보고 늙은 수부를 생
각했다. 그와 똑같았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침대가 흔들렸으나 나는 걱정하지 않았다. 그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나는 만약을 위해 한번 더 약병의 뚜껑을 열고 수건을 대어 흔들었다. 그 수건으로
그의 입과 코를 가볍게 누르고 속으로 열을 세었다. 처음 일이 떠올랐다. 그는 나이든 사람
이 매매 계약서를 쓰는 동안 내 옆에 서 있었다. 아버지가 이름을 쓰고 도장을 누를 때도
내 옆에 서 있었다. 철거 계고장이 나온 날 내가 동사무소 앞으로 달려갔을 때부터 그는 나
를 보았다. 어머니가 두 손으로 돈을 받아들고 있었다. 내가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나
는 방죽가 골목길을 빠져 동사무소 앞으로 갔다. 낮에 그렇게 붐비던 사람들이 하나도 없었
다. 그의 승용차는 게시판 앞에 세워져 있었다. 나는 승용차 앞에 서서 그를 기다렸다. 그는
그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큰 소리로 이야기하며 내려왔다. 나를 보자 우뚝 섰다. 나이든 사
람이 검은 가방을 넘겨주었다. 그는 그의 사람들을 돌려보내고 나를 향해 걸어왔다.
"나를 기다렸나?"
그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우리 것도 그 안에 있어요?"
내가 검은 가방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 안에 있겠지."
"그걸 따라 나왔어요."
"어떻게 하려구?"
나는 할말이 없었다.
"어떻게 할 테야? 난 가야 하는데."
"그건 우리집예요."
겨우 내가 말했다. 그는 나를 내려다보았다.
"이젠 아니지."
그가 말했다.
"내가 돈을 주고 샀어."
그는 열쇠를 꺼내 승요차의 문을 열었다. 검은 가방을 넣고 그는 차에 올라탔다. 내가 손
바닥으로 유리문을 두드렸다. 그가 반대쪽 문을 열었다. 나는 그의 차에 올라탈 때에서야 기
타를 들고 나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기타를 받아서 뒷자리에 놓아 주었다. 그는 동사무소
앞에서 차를 돌려 나갔다. 나는 자리에 비스듬히 누워 몸을 숨겼다.
"바로 앉아."
그가 말했다. 차는 행복동을 떠나 낙원구를 벗어나고 있었다. 그는 운전을 하면서 나의 얼
굴을 보았다. 차가 빨간 신호를 받자 나의 머리에서 팬지 꽃을 가져다 냄새를 맡았다. 그는
작은 꽃송이를 왼쪽 윗주머니에 꽂았다.
"우리집은 영동이야."
그가 말했다.
"조금 가다 내려줄 테니까 집으로 돌아가."
"싫어요."
내가 말했다.
"돌아갈 집이 없어졌어요."
"그럼,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이 가방을 강탈해갈 셈야?"
"생각중예요."
"좋아."
그가 말했다.
"네가 할 일을 주지. 말을 자 들어야 돼. 그렇지 않으면 내쫓을 테야. 사실은 전부터 너를
봤어. 예뻐서. 그렇지만 어떤 경우에든 '안돼요' 하는 말을 내 앞에서는 쓸수 없다는 걸 알아
야 돼. 그러면 나는 너에게 내가 고용한 어떤 사람보다 많은 돈을 줄 용의가 있어. 잘 생각
해 보고 결정해."
나로서는 생각해 볼 것도 없었다. 큰 오빠는 우리집을 짓는 데 천 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말했다. 나는 그 말뜻을 잘 몰랐었다. 큰 오빠의 말에는 물론 과장도 섞여 있었다. 그러나
거짓은 아니었다. 어머니는 내가 열일곱 살이 되자 여자가 가져야 할 가족과 가정에 대한
그 전통적 의무가 어떤 것인가를 은연중에 가르치려고 했다. 순결도 입이 닳게 강조하는 것
중 하나였다. 어머니는 내가 어둠 속에서 남자를 생각하는 것도 용서할수 없다는 입장을 취
했다. 내가 집을 나와 한 생활을 알았다면 어머니는 목을 매었을 것이다. 그는 나에게 친절
하게 해주었다. 제일 먼저 옷을 맞추어 주었다. 한꺼번에 여러벌을 맞추어 주었다. 나는 그
를 위해서 나를 치장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의 아파트는 영동에 있었다. 사무실도 영도에
있었다. 나는 그의 사무실에서 주택에 관한 신문 기사를 오려 스크랩북에 옮겨 붙였다. 날마
다 같은 일만 했다. 주택에 관한 기사가 없을 때는 일반 가시를 읽으며 소일했다. 그의 광고
도 신문에 날마다 났다. '잠실은 우리 모두의 관심입니다. 잠실 아파트에 대해 상담하실 분
은 지금 곧 전화를 하세요. 은아는 당신의 성실한 부동산 안내자입니다. 은아부동산.' 주택분
양 광고도 났다. '신천호대교, 잠실지구, 강남1로에 붙은 급속도 발전 지역. 꿈이 깃든 주택
을 염가 분양중이오니 이 기화를 이용하십시오. 은아주택' 그는 무서운 사람이었다. 스물 아
홉에 못하는 일이 없었다. 우리 동네에서 사온 아파트 입주권은 오히려 적은 편이었다. 그는
재개발지구의 표를 거의 몰아 사들이다시피 했다. 영동 일대에 잡아 놓은 땅도 많았다.
그는 집은 부자였다. 지금 자기가 하는 일은 작은 훈련에 지나지 않는다고 나에게도 말했
었다. 그는 아버지 회사로 들어가 더 큰일을 해야 할 사람이었다. 밤에 아파트로 돌아오면
집으로 전화를 하곤 했다. 그 전화선 저쪽 끝에 그의 아버지가 앉아 있었다. 그는 아버지에
게 자기가 한 일을 보고하고 자문도 구했다. 그는 거의 차렷자세로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
다. 전화가 끝나면 그의 고용인들이 정리한 대장을 하나하나 검토했다. 그는 우리 동네에서
사온 아파트 입주권을 사십오만원에 팔았다. 그 아하로는 팔지 않았다. 상상도 못했던 일이
다. 나는 미리 사두었다가 일이만 원 정도 더 받고 넘기겠지 했었다. 그가 거실에 앉아 일을
하는 동안 가정부는 음식을 차려 놓고 그가 식탁 앞에 앉기를 기다렸다. 그의 어머니가 보
내준 가정부였다. 그는 가정부에게 별도의 돈을 주었다. 집 식구들에게 나의 관한 일을 보고
하면 안되다는 조치였다. 가정부는 내가 온 다음부터 잠을 나가서 잤다. 나는 처음 약속대로
'안돼요.'라는 말을 그에게 하지 못했다. 나는 전혀 다른 세상 사람들과 생활하고 있었다. 우
리는 출생부터 달랐다. 나의 첫울음은 비명으로 들렸다고 어머니는 말했다. 나의 첫호흡이
지옥의 불길처럼 뜨거웠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모태에서 충분한 영양을 보급받지 못했다.
그의 출생은 따뜻한 것이었다. 나의 첫호흡은 상처난 곳에 산을 흘려넣는 아픔이었지만 그
의 첫호흡은 편안하고 달콤한 것이었다. 성장 기반도 달랐다. 그에게는 선택할 것이 많았다
나나 두 오빠는 주어지는 이와의 것을 가져 본 경험이 없다. 어머니는 주머니가 없는 옷을
우리들에게 입혔다. 그는 자라면서 더욱 강해졌지만 우리는 자라면서 반대로 약해졌다. 그가
나를 원했다. 그는 원하고 또 원했다. 나는 밤마다 알몸으로 잠을 잤다. 나는 밤마다 꿈을
꾸었다. 꿈곳에서 오빠들은 다른 공장의 취직이 되어 일을 나갔다 아버지는 하루에도 몇 번
씩 달을 왕복했다. 잠이 든 듯한 상태에서 나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곤 했다.
"영희야, 넌 집을 나가 뭘 하고 있는 거냐?"
그러며 나는 대답했다.
"그의 금고 속에 우리 아파트 입주권이 들어있어요. 그걸 맨 밑으로 내려놨어요. 아직 팔리
지 않았아어요. 팔리기 전에 그걸 꺼내가지고 갈래요. 그의 금고 번호를 알아놨어요."
"누가 너더러 그런 짓을 하라고 했니? 빨리 일어나 옷을 입어라."
"안돼요. 엄마."
"우린 성남으로 가기로 했다. 빨리 일어나라."
"안돼요."
"너의 증조할머니 도앵 한 분이 알몸 시체로 수리조합 봇물에 막혀 있었단다. 왜 그랬는지
아니? 주인서방과 잠자리를 함께했기 떄문야. 주인여자가 증조할머니 동생을 사매질해 숨지
게 했단다."
"엄마, 전 달라요."
"같아."
"달라요."
"같아."
"달라요."
"넌 이제 그것 때문에 망한다. 어린 게 그것을 좋아해."
"그래요. 전 좋아해요."
"망할 것!"
몸부림치다 눈을 떠보면 밤중이었다. 그는 깊은 잠에 빠져 깨어날 줄 몰랐다. 나의 몸에서
는 그의 정액 냄새가 났다. 그는 나를 좋아했다. 그는 어린 나를 좋아했다. 그는 완전하게
나를 좋아했다. 그래서 나는 도덕적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나는 그의 금고에서 우리의 것을 꺼냈다. 그의 금고 속에는 돈과 권총과 칼이 함께 들어
있었다. 나는 돈과 칼도 꺼냈다. 나는 달 천문대 밑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상상했다. 아버지는 이미 오십억 광년 저쪽에 있는 머리카락좌의 성운을 보았는지 모른다.
오십억 광년이라면 나에게는 영원이다. 영원에 대해서 나는 별로 할말이 없다. 한 밤이 나에
게는 너무나 길었다. 나는 그의 얼굴에서 수건을 떼고 약병의 뚜껑을 닫았다. 나에게 더 없
이 고마운 약이었다. 첫날 그 약이 괴로워하는 나의 몸을 마취시켜 잠속으로 말아넣었다. 그
래서 나는 그의 첫 표정을 볼 수 없었다. 나는 손가방을 열어 그 안의 것들을 확인했다. 모
두 가지런히 넣어져 있었다. 나는 옷을 입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
갔다.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내가 가지고 가야 할 것은 이제 없었다. 집을 나올 때 입었던
옷, 뒷굽이 닳은 신발, 큰 오빠가 사준 줄 끊어진 기타는 이미 그 집에 없었다. 나는 심호흡
을 하고 현관문을 열었다. 밖으로 나가 반대로 밀었다. 문을 닫히면서 스스로 잠겼다.
날이 밝으려면 아직 멀었다. 나는 아파트 앞에서 택시를 기다려 탔다. 택시는 불을 켜고
빈 영동거리를 달렸다. 어지러워 눈을 감았다. 제3한강교를 건널 때 나는 차를 세웠다. 문을
열고 나가자 시원한 공기가 몽롱한 정신을 일깨워 주었다. 나는 난간을 짚고 이제 희뿌연
빛을 반사하며 흘러가는 강물을 내려다보았다. 운전기사가 따라나와 난간에 기대어섰다. 그
자세로 담배를 피우며 나를 보았다. 날이 밝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누워 난 한겨울 동안 어
머니는 취로장에 나가 일했다. 어머니가 집을 나설 때마다 맞았던 그 새벽의 빛깔을 이제
알았다. 자갈 채취선에서 날카로운 금속성이 들려왔다. 내가 탄 택시는 남산 터널을 빠져 시
내를 가로질러 달렸다. 죄인들은 아직 잠자고 있었다. 이 거리에서 구할 자비는 없었다. 나
는 낙원구에서 내렸다. 나는 낙원구의 거리와 골목을 걸으며 시간을 보냈다. 마지막으로 다
방에 들어가 차를 마시면서 아버지의 도장이 찍힌 매매증서를 꺼내 찢었다. 우리가 어렸을
때 이일대는 채마밭이었다. 나는 차를 마시고 채마밭 위에 깔아 놓은 포장도로를 따라 걸었
다. 이제 더 이상 헤맬 필요가 없었다. 나는 곧장 행복동 사무소를 향해 갔다. 동사무소는
아침부터 붐볐다. 내가 줄 뒤에 가서 서는 것을 건설계원이 흘끗 보았다. 그는 일을 하다 말
고 뚫어지게 나를 보았다.
"난장이 딸 아냐?"
직원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나에게까지 들렸다. 나는 똑바로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도장
찍는 소리, 표찰 떨어지는 소리,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우리집 표찰을 꺼내 들었다. 어머
니가 남긴 식칼 자국이 손 끝에 느껴졌다. 나의 차례가 되었다.
"어쩐 일이지?"
건설계원이 물었다.
"집 이사간 건 알아?"
"네."
나는 말했다.
"철거 확인증이 필요해서 왔어요."
"철거 확인증은 왜?"
그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입주권을 팔았잖아? 팔아 버리고 무슨 필요로 그러는 거야?"
"그 세단차 사나이가 사갔지."
옆 사나이가 말했다. 나는 몇초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아저씨는 어느 편예요?"
내가 말했다.
"아파트에 들어가야 할 사람은 저희예요."
"딴은 그래."
계원이 옆 사나이를 보았다. 그들은 어깨만 들었다 놓았다.
"서류를 갖고 있어?"
"서류는 무슨 서류야? 당사자 입주인데. 계고장과 표찰만 있으면 돼. 그걸 갖고 있다면 우
리가 할 말은 없어."
"여기 있어요."
나는 표찰과 철거 계고장을 내 주었다. 두사람이 그걸 받아 대장과 비교해 보았다. 옆 사
나이가 표찰이 들어 있었다. 우리 표찰이 가벼운 생철 소리를 내며 그것들 위에 떨어졌다.
건설계원이 용지를 내주었다. 나는 거기에 써넣었다.
번호 458 기존 무허가 건물 철거 확인원 처리기간 ,즉시
신청인 성명 김불이 주민등록번호 123456-123456 생년월일 1929년 3월 11일
주소 서울 특별시 낙원구 행복동 46번지의 1839
본적 경기도 낙원군 행복면 행복리 276번지
철거된 건물 위치 서울 특별시 낙원구 행복동 46번지의 1839
구분 가옥주(0) 세입자( )
철거 일시 197x년 월 일 무허가건물 발생년도 196x년 5월 8일
용도 아파트 입주 신청용
위 사실을 확인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197x년 10월 7일
신청인 김 불 이
위 사실을 확인함.
197x년 10월 7일
낙원구 행복 제1동장
아버지의 이름, 주민등록 번호, 생년월일, 무허가 건물 발생년도를 써넣으며 나는 손을 떨
었다. 글씨가 제대로 써지지 않았다. 몸이 약해져서 그래, 나는 생각했다. 큰오빠의 말대로
나는 어렸을 때부터 잘 울었다. 눈물이 앞을 가려 잠시 멈추었다가 썼다. 철거 확인 원을 건
설계원 앞으로 밀어 놓았다.
"철거 일시를 모르겠어요."
내가 말했다. 계원은 나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어디 가 있었어?"
나는 말하지 않았다. 그는 197x년 10월 1일이라고 써넣었다.
"이사간 곳도 모르지?"
"네."
"아무 이야기도 못 들었어?"
나는 다리의 힘까지 빠지는 것을 느끼며 책상 모서리를 짚고 섰다. 옆 사나이가 건설계원
을 쿡 찔렀다. 계원 직원은 '위 사실을 확인함' 옆에 작은 도장을 찍고 그것을 안쪽 사무장
에게 넘겼다. 나는 줄 밖으로 나서며 이마를 짚었다. 가벼운 미열이 전신에 일었다. 안쪽에
서 사무장이 일어서며 나를 손짓해 불렀다. 그는 행복 제1동장 위에 직인을 찍었다. 그것을
내주기 전에 나를 창가로 데리고 갔다. 사무장은 큰길 건너 포도밭 아랫동네를 가리켰다.
"위에서 세 번째 집야."
그가 말했다.
"그 댁 아주머니를 찾아가. 백신애 아주머니. 전부터 아버지를 잘 아시는 분야. 하루에도
몇 번씩 여기까지 오셨었어. 너를 찾느라구."
"저도 전에 뵌 적이 있어요."
내가 말했다.
"구청에 들렀다 주택공사로 가야 돼요. 일을 끝내고 갈께요."
"그 아주머니가 다 말씀해 주실거다."
사무장이 말했다.
"친절하신 아주머니야." "고맙습니다."
인사를 남기고 밖으로 나왔다. 사무장과 이야기하는 동안 직원들이 나를 보고 있었다. 그
들은 무언가 나에게 말하고 싶어했다. 잠시도 그곳에 서 있을 수 없었다.
큰길로 나가 택시를 잡았다. 슈퍼마켓 앞을 지날 때 빵집이 보였다. 다른 아이들이 내가
했던 일을 하고 있었다. 거기서 고개를 돌렸다면 우리 동네를 한눈에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참았다. 나는 참았다. 차마 고개를 돌려 볼 수없었다. 구청일은 좀 쉽게 끝났다. 나는
주택과로 가서 철거 확인증을 내주고 입주 신청을 했다. 구청 층계를 내려오면서 심한 어지
러움을 느꼈다. 몇 년을 밖에서 산 것 같았다.
그가 나를 더욱 약하게 만들었다. 나는 집을 나온 다음 편한 잠을 이루어 본 적이 없다.
나는 모태에서뿐만 아니라 출생 후에도 충분한 영양을 보급받지 못했다. 집을 나온 다음 그
와 대한 식탁은 늘 풍성했다. 그 영양은 축적이 되지 않아다. 내가 받는 정신적 압박 때문만
은 아니었다. 나에게 맛있는 음식을 제공한 그가 거기서 취한 열량을 다시 뺴앗아갔다. 마지
막 밤을 꼬박 새운 것도 영향을 주었다. 아무데나 눕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빨리 일을 끝내
고 신애 아주머니를 찾아가야지. 그 아주머니가 나를 식구들 옆으로 보내 줄 것이다.
나는 새벽에 왔던 길을 되밟아갔다. 남산 터널을 빠져 제3한강교를 건넜다. 벌판에 서 잇
는 그의 아파트가 보였다. 나는 가방을 열고 안에 들어 있는 그의 칼을 만져 보았다. 상아로
만든 칼자루 윗부분에 작은 구슬만한 쇠가 붙어 있었다. 그것을 누르면 칼날이 튀어나온다
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주택공사 입구에서 차를 세웠다. 많은 사람들이 공사 정문을 향
해 걸어갔다. 나는 서둘러 그들속으로 들어갔다. 가만히 서 있어도 앞으로 밀려갔다 나는 사
람들에게 밀려 마당 안으로 들어갔다. 하얀 건물이 햇빛을 반사해 눈이 부셨다. 잔치날 같았
다. 몇 군데 차일까지 쳐져 있었다. 나는 신청용지를 타는 곳에 가섰다. 차례가 되자 직원이
시 접수증을 보자고 했다. 그 직원이 신청용지를 내주었다. 나는 줄 밖으로 나서며 아파트
임대 신청서의 내용을 쭉 읽었다. 그 임대 조건 중 '신청자와 입주자는 동일인이어야 하며
제삼자에게 전대하거나 임차권을 채권의 담보로 제공할 수 없음' 이라는 것도 있었다. 죽어
버린 조문이 었다. 그 조문이 든 신청서에 아버지의 이름, 주소, 주민등록 번호를 적어넣었
다. 다시 손이 떨렸다. 다리의 힘도 빠져 주저앉을 것 같았다. 신청서를 써가지고 다음 줄에
가 섰다. 내가 선 줄에 재개발지구의 주민은 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줄 앞 책상의 직원은
모든 사람들에게 묻고 있었다.
"산 거죠?"
알면서 묻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 물음에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산 거죠?"
그 직원이 나에게도 물었다.
"네, 샀아요.!"
아프지만 않았다면 나는 대답했을 것이다. 불친절하고 기분나쁜 사나이였다. 나는 아팠다.
나는 아팠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직원은 신청용지, 시 접수증, 주민등록등본을
철박이로 눌렀다. 그 위에 접수 도장을 쿡 찍었다. 그것을 받아 돌아서다 말고 나는 몸을 숨
겼다. 줄 반대쪽으로 들어가 건물 바로 앞쪽을 살폈다. 바로 그가 그의 승용차 앞에 서 있었
다. 그는 건강한 몸으로 서 있었다. 나는 아픈 몸을 숨기고 그가 나가기를 기다렸다. 그와
마주친다면 나는 그를 죽일 생각이었다. 그는 아직까지 한 번도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이 없을 것이다. 인간이 갖는 고통에 대해서도 그는 아는 것이 없다. 절망에 대해서도 모를
것이다. 빈 식기들이 맞부딪치는 소리, 손과 발, 무릎, 그리고 이가 추위에 견디지 못해 맞부
딪치는 소리를 그는 들어 본적이 없을 것이다. 그는 벌겋게 달군 쇠로 인간에게 낙인을 찎
는 사람들 편이었다. 나는 가방을 열어 칼을 만져 보았다. 그가 손을 흔드는 것이 보였다.
건물 안에서 한 사나이가 나왔다. 그가 사나이를 맞아 악수하고 함께 차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승용차는 사람들을 옆으로 밀치면서 주택공사 마당에서 나갔다. 눈물이 또 나의 눈에
내배었다. 그는 가진 것이 너무 많았다.
나는 사람들을 따라 업무과로 들어갔다. 그 안에서도 줄을 섰다. 손으로 이마를 짚고 차례
를 기다렸다.
"어디 아파요?" 나의 차례가 되었을 때 직원이 물었다.
"괜찮아요."
나는 말하며 들고 있던 것들을 넘겨 주었다. 직원은 나의 서류를 확인해 받고 영수증 용
지에 신청 번호를 적어 주며 경리과에 가서 돈을 내라고 했다. 한 아주머니가 물을 받아다
주었다. 나는 물을 마셨다. 경리과 사람들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들은 돈 액수를 확인
한 다음 영수증에 도장을 찍어 내주었다.
"이제 됐어!"
내가 말했다.
사람들이 나를 보았다.
그들은 알았을까?
나는 주택공사 건물을 등지고 나왔다. 거리에 쓰러지지 않고 센애 아주머니 집까지 갔다.
아주머니네 집 초인종을 누르고 우리 동네를 보았다. 우리집이 , 이웃 집들이, 온 동네의 집
들이 보이지 않았다. 방죽도 없어지고, 벽돌 공장의 굴뚝도 없어지고, 언덕길도 없어졌다. 난
쟁이 와 난쟁이 의 부인, 난쟁이 의 두 아들, 그리고 난쟁이 의 딸이 살아간 흔적은 거기에
없었다. 넓은 공터만 있었다. 신애 아주머니가 딸의 이름을 큰 소리로 부르며 나와 나의 몸
을 부축해 안았다. '안녕하세요?' 하는 인사도 제대로 못했다. 신애 아주머니는 전에도 다친
아버지를 이렇게 부축해 안아 일으켰었다. 아주머니와 아주머니의 딸이 나를 방으로 안아다
눕혔다. 딸이 물수건을 해오고 아주머니는 나의 옷을 풀어헤쳤다. 아주머니는 아머니처럼 나
에게 해주었다.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주고, 손과 발을 닦아주고 푹신한 이불을 내려서 덮
어 주었다.
"고맙습니다, 아주머니."
내가 말했다.
나는 겨우 눈을 떴다.
"자, 아무 말도 하지 마라."
아주머니가 말했다.
"의사선생님을 모셔오마. 오늘은 아무 얘기도 하지 말자."
"괜찮아요."
내가 말했다. 저절로 눈이 감겼다.
"잠을 못 잤을 뿐예요. 잠이 와서 그래요."
"그럼, 잠을 자라. 한잠 푹 자."
"빼앗겼던 걸 찾아왔어요."
"잘했다."
"수속까지 끝냈어요."
"잘했어."
"이사간 델 아시죠?"
"암, 알잖구."
"사주장님을 만났어요."
잠이 들듯말듯한 상태에서 나는 말했다.
"아주머니가 다 말씀해 주실 거라고 했어요."
"다른 말은 없었지?"
"무슨 일이 있었나요?"
"한잠 자라. 자구 나서 우리 얘기하자."
"말씀을 듣기 전엔 못 잘 것 같아요."
내가 다시 눈을 떴다. 아주머니의 딸이 마루로 나갔다. 이네 대문 소리가 들렸다. 병원으
로 의사를 데리러 가는 길이었다.
아주머니가 말했다.
"네가 집을 나가구 식구들이 얼마나 찾았는지 아니? 이 방 창문에서도 보이지. 어머니가
헐린 집터에 서 계셨었다. 너는 둘째치구 이번엔 아버지가 어딜 가셨는지 모르게 됐었단다.
성남으로 가야 하는데 아버지가 안 계셨어. 길게 얘길 해 뭘하겠니, 아버지는 돌아가셨어.
벽돌 공장 굴뚝을 허는 날 알았단다. 굴뚝 속으로 떨어져 돌아가신 아버지를 철거반 사람들
이 발견했어."
그런데 . 나는 일어날 수가 없었다. 눈을 감을 채 가만히 누워 있었다. 다친 벌레처럼 모
로 누워 있었다. 숨을 쉴 수 없었다. 나는 두 손으로 가슴을 쳤다. 헐린 집 앞에 아버지가
서 있었다. 아버지는 키가 작았다. 어머니가 다친 아버지를 업고 골목을 돌아 들어왔다. 아
버지의 몸에서 피가 뚝뚝 흘렀다. 내가 큰 소리로 오빠들을 불렀다. 오빠들이 뛰어나왔다.
우리들은 마당에 서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까만 쇠공이 머리 위 하늘을 일직선으로 가르며
날아갔다. 아버지가 벽돌공장 굴뚝 위에 서서 손을 들어 보였다. 어머니가 조각마루 끝에 밥
상을 올려놓았다. 의사가 대문을 들어서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머니가 나의 손을 잡았다. 아
아아아아아아아 하는 울음이 느리게 나의 목을 타고 올라왔다.
"울지 마, 영희야."
큰 오빠가 말했었다.
"제발 울지 마. 누가 듣겠어."
나는 울음을 그칠 수 없었다.
"큰 오빠는 화도 안나?"
"그치라니깐."
"아버지를 난쟁이 라고 부르는 악당은 죽여버려."
"그래, 죽여 버릴게."
"꼭 죽여."
"그래,꼭."
"꼭."
저녁의 게임(지은이:오정희)
꼭 내장까지 들여다보이는 것 같잖아. 밥물이 끓어 넘친 자국을 처음에는 젖은 행주로, 다음에
는 마른 행주로 꼼꼼히 문지르며 나는 새삼 마루와 부엌을 훤히 튼, 소위 입식 구조라는 것을 원
망하는 시늉으로 등을 보이는 불안을 무마하려 애썼다. 그래도 가스렌지 주변의 점점이 뿌려진
몇 점의 얼룩은 여전히 희미한 자국으로 남았다. 아마 지난 겨울 아버지가 약을 끓이다가 부주의
로 흘린 자국일 것이다. 승검초의 뿌리와 비단개구리, 검은콩과 두꺼비 기름을 넣고 불 위에 얹어
갈색의 거품이 끓어오를 즈음 꿀을 넣고 천천히 휘저어 검은 묵처럼 만든 그것을 겨우내 장복하
며 아버지는, 피가 맑아지고 변비가 없어진단다라고 말했었다. 실내의 바람으로 군용 항고에 콜타
르처럼 꺼멓게 엉기는 액체를 긴 나무젓가락으로 휘젓고 있는 아버지는 영락없이 중세의 연금술
사였다.
약을 달이는 동안 내내 누릿하고 매움한 냄새는 집안 곳곳에 스며들고 비단개구리의 살과 뼈는
독한 연기로 피어올라 마침내 낙진처럼 무겁고 끈끈하게 내려앉았다. 나는 빈혈증과 구역질로 헐
떡이며 건성의 피부에 더럽게 피어나는 버짐과 잔주름으로 거울 앞에 매달렸다. 얼룩은 변질된
스테인리스로 기억보다 독하고 오래 남아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은 어제와 다름없이 잘 되었다. 부엌 선반의 시계는 다섯 시 반을 가리키고 밥은 한참
뜸이 들어 가는 중이고 노릇노릇 구워진 생선에서는 비늘 타는 연기가 희미하게 피어올랐다.
서향의 창으로 비껴 든 햇빛은 젖은 도마의 잘게 파인 홈마다 낀 찌끼를 뒤져 내고 칼빛을 죽
이며 개수대의 물에 굴절되어 물 속의 뿌연 앙금을 떠올렸다.
가로로 길게 낸 부엌창을 통해, 사역을 마치고 빈터를 가로질러 돌아가는 소년원생들의 행렬이
보이는 것도 여느 날과 다름없었다.
칠팔십 명 정도는 좋이 될 그들은 한결같이 바랜 듯한 회색 작업복에 같은 색 모자를 쓰고 있
었는데 수의라는 이쪽의 선입견이 작용한 탓일까, 아니면 빈터에 흐름직한 바람을 짐작한 탓일까,
나는 늘상 헐겁게 걸친 작업복 아래 소름이 돋은 깔깔한 맨살을 만지는 듯한 쓸쓸함을 느끼곤 했
다. 귀가 맞지 않게 잘라진 낡은 천조각처럼 펄럭이며 느리게 움직이는 그 행렬은 거대한 수레바
퀴가 느리고 둔중하게 굴러가는 모습이나 어쩌면 길고 긴 라단조의 휘파람 소리 같기도 했다.
행렬의 앞과 뒤에는 각각 한 걸음 정도 떨어져 감시원인 듯한, 점퍼 차림의 사내가 호위하고
있었다.
그들을 가까이에서 본 적이 없다면 나는 부근 어딘가에 아마 군인들의 막사가 있는 모양이라고
무심히 보아 넘길 뿐 낮고 음울한 휘파람 소리나 인과의 보이지 않는 순에 의해 한없이 돌아가는
지옥의 연자맷돌 따위 어린아이와 같은 공상으로 하염없이 바라보는 일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언젠가 나는 개를 끌고 저녁 산책에 나갔다가 그들을 처음 만났다. 문득 멀지 않은 야산을 끼
고 돌아앉은 소년원을 떠올리며, 아, 뜻 모를 탄성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본능적인 수치심으로
개줄을 팽팽히 끌어 당기며 외면을 했다. 행렬의 가운데에서 깜짝 놀랄 만큼 앳된 얼굴의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소년의 눈빛은 선연하도록 맑았다. 단지 제복에서 문득
느껴지는 청신함 때문이었을까, 두근 볼에 떠오른 차가운 핏기에서 문득 자각되어진 자신의 노추
에 대한 의식 때문이었을까.
소년은 곧 한떼의 무리로 뒤섞여 내 곁을 지나쳤다. 나는 그애의 얼굴을 전혀 떠올릴 수가 없
었다. 만약 그들 전체를 한 줄로 세워 놓고 살핀대도 나는 그애를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도 선연하도록 맑은 눈빛은 하나의 느낌으로 남아 매일 그 시간이면 부엌 창문을 통해, 그애가
있음직한 위치를 어림해 보는 헛된 노력을 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들판을 거의 다 지날 무렵 무리의 중간쯤에서 조그만 동요가 생겼다. 한 소년이 벗겨진
신발이라도 고쳐 신는 시늉으로 엎드린 것이다. 소년의 뒤로 갑자기 행렬이 주춤하고 곧 뒤에서
따라가던 점퍼 차림의 사내가 다가갔다. 나는 무언가 반짝이는 것을 그 소년이 집어올려 소매 속
에 재빨리 집어넣었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신발 속에 감추었을지도. 소년은 사내가 다가가자 허리
를 펴고 손바닥을 털었다. 그들은 더 무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으나 이곳에서는 마치 수화를
하고 있는 듯 보였다.
사내는 다시금 제자리로 돌아가고 그들은 잠시 벌어졌던 거리를 메우느라 조금 빠르게 움직였
다. 역시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햇빛이 스러진 들판에 반짝거릴 무엇이 있을 것인가.
들판이 끝나는 산등성이, 드문드문 이미 공사가 반쯤 되었거나 추위가 오기 전 마지막 손질을
서두르는 집들이 서 있던 택지를 끼고 그들은 시계에서 사라졌다. 길고 긴 휘파람 소리도, 둔중한
수레바퀴도 사라졌다.
나는 개수대 마개를 뽑았다. 그리고 부글부글 거품을 만들며 소용돌이쳐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물을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렇다. 막힌 구멍은 낮에 수선공이 와서 뚫었다. 개수대 구멍에서
는 물이 빠지지 않아 늘 썩은 냄새가 났었다. 깔때기 모양의 압축기로 몇 번 펌프질을 하자 끌어
올려진 것은 섬유질만 남은 야채 줄기와 뒤엉킨 머리칼 뭉치였다. 어느새 등 뒤에 온 아버지는
거 봐라 하는 표정으로 그것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여섯 시가 되어 가고 있었다. 부엌의 한쪽 벽에 붙여 놓은 식탁에 습관적으로 세 벌의 수저를
놓다가 깜짝 놀라 한 벌을 다시 수저통에 넣었다. 수선을 떨 건 없어, 오빠는 오늘도 들어오지 않
으리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면서도 손은 관성의 법칙을 이행한 것뿐이니까.
"얘야, 까치가 어느 쪽을 보고 우니?"
아버지의 물음에 나는 소년원생들이 사라진 빈터의 키 높은 포플러를 올려다보았다. 누릿누릿
물들기 시작한 이파리 사이, 나무의 우듬지 끝에서 까치가 울고 있었다.
"렌즈를 빼버렸어요."
나는 그릇 소리를 내며 대답했다. 콘택트 렌즈가 없으면 장님이나 다를바 없다는 것을 알면서
도 아버지는 고집스럽게 되풀이했다.
"까치가 우는 쪽으로 침을 뱉어라. 저녁 까치는 재수가 없단다."
"잘 안 보인다니까요."
"렌즈를 어쨌니, 또 잃어버렸구나. 그러길래 안 쓸 때는 꼭 물에 담가 두랬잖니?"
렌즈를 빼버렸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동공에 정확히 부착된 렌즈를 통해 나는 우듬지 끝에 앉
아 이편을 보고 우는 까치의 기름이 묻은 듯 검게 빛나는 깃털이며 강철처럼 단단해 뵈는 날개를
터는 모습까지 확연히 보고 있는 것이다.
나는 햇빛이 물러가 어둑신한 마루의 의자에 등을 파묻고 앉아 있는 아버지를 잠깐 눈살을 찌
푸려 바라보다가 선반에 올려놓은 녹음기의 작동 스위치를 눌렀다. 낮에 들었던 코다이의 관현악
서주부가 귀에 뱅뱅 돌았다. 스륵스륵 테이프 돌아가는 소리가 느리고 약하게 들려 왔다. 녹음이
안된 걸까 의아해하는데 느닷없이 연주가 시작되었다.
아마 희망 음악 시간이었나 보았다. 라디오에서 귀에 익은 곡이 나오자 나는 갑자기 그것을 녹
음해 볼 생각이 났다. 녹음기는 구형 소니였는데 오빠의 것이었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고 처박
아 둔 그것을 찾아내어 먼지를 털고 서랍을 뒤져 빈 테이프를 찾아 걸었을 때는 이미 서주부가
끝났을 때였다. 오래된 음반인지 원음보다 잡음이 더 많았다. 중간에 끄지 않은 건 순전히 귀찮기
때문이었다.
십 분쯤 듣다가 스위치를 눌러 끄고 나는 조금 딱딱한 음성을 만들어 말했다.
"저녁 준비 됐어요."
귀를 후비던 새끼손가락의 손톱을 엄지손가락과 맞부딪쳐 탁탁 털고난 뒤 의자에서 힘겹게 몸
을 일으키는 아버지의 모습은 기척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화장실에서 쏴아 물 트는 소리, 물이 내려가는 소리를 한 겹 벽 너머로 들으며 나는 말끔히 닦
인 식탁을 다시 행주로 문질렀다.
"수건 있니?"
아버지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손을 휙휙 뿌리며 부엌으로 들어왔다.
"목욕탕에 있는 걸 쓰시지 그래요."
"더럽고 축축하더라."
그건 거짓말이다. 낮에 개수대를 뚫은 수선공이 쓴 수건을 새 수건으로 바꿔 걸었던 것이다.
까치는 여전히 포플러 꼭대기에서 울어 대고 있었다.
아버지는 종내 그 소리가 마음에 걸리는지 창으로 눈길을 주며,
"아무래도 부엌이 잘못 앉았어. 저녁해가 드는 게 좋지 않아."
라고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버지는 이태 전 위장을 반 넘게 잘라 낸 뒤로 식사시간이 길어졌다. 나는 되도록 느릿느릿
먹기에 신경을 써도 언제나 아버지가 식사를 반도 하기 전에 숟가락을 놓게 되곤 했다.
햇빛은 점점 물러가 어느새 문께에 한 줄기 엷은 금으로 남았다. 그것마저 곧 스미듯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다.
음식을 씹을 때마다 완강히 드러나는 턱뼈와 무력하게 늘어진 목덜미의 주름이 눅눅하게 그늘
속에 잠기는 것을 나는 왠지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가을해는 짧아 저무는가 싶으면 이내 어둠이 온다.
"불을 켤까요?"
나는 가시를 바른 생선을 아버지 앞에 밀어 놓으며 물었다.
"국이 식었어."
나는 가스를 틀어 국 냄비를 얹었다. 새파란 불꽃으로 타오르는 가스불은 늘 마법의 불을 연상
시킨다.
아버지의 얼굴은 어둠 때문에 좀 침통해 보였고 끝이 조금 처진 콧날은 더욱 길게 늘어져 보였
다. 내 얼굴도 역시 그렇게 보일 것이라는 것이 나를 까닭없이 초조하게 만들었다.
데워진 국 냄비를 식탁에 놓고 나는 우정 그러하듯 조용히 일어나 녹음기의 스위치를 눌렀다.
첼로와 바이올린의 다투듯 소란스런 선율에 아버지는 잠깐 고개를 들었다 놓았다. 안단테의 3악
장이 시작되었다. 아버지는 새김질을 하듯 천천히 씹고 조금씩 국을 떠 마셨다.
음악이 끝나고 빈 테이프가 돌아갔다. 한 시간용의 테이프는 곧 끊기고 멈춤 스위치가 올라갈
것이다.
"물을 다오."
식사를 마친 아버지가 트림을 하며 컵을 내밀었다.
컵에 물을 따르다가 나는 흠칠 손을 멈추었고 아버지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마루를 바라보았
다.
인기척도 없이 누군가 성큼 부엌 안으로 들어섰다. 탁하게 갈앉은, 밤새의 끽연으로 갈라진 목
소리...
...이렇다 할 취미나 재미와는 담을 쌓고 살아온 그의 유일한 도락은 권총에 있었다. 만물이 잠
들기를 기다려 벌거벗고 5연발의 총알이 장전된 총을 귀밑에 들이대는 것은 단순히 절대적 긴박
감과 자유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아니 자유가 아니라 유희일 것이다.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고 혹
누군가 불시에 문을 연다면, 혹 어디선가 엿보는 눈을 발견한다면, 혹 뜻하지 않게 등허리 부근을
모기에게 물린다면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거의 반사적인 행동으로 방아쇠를 당겨 버릴지도
모른다는 데 생각이 이르면 머리의 혈관은 수만 볼트의 전류로 충전되고...
방문객은 갑자기 사라졌다. 아버지와 나는 동시에 3인용 식탁의 비어있는 자리를 바라보았다.
빈 테이프는 다시금 스륵스륵 돌아갔다. 나는 컵에 마저 물을 따랐다.
그것이 오빠의 목소리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재생되어지는 소리는 다 그런 걸까. 오빠의 목소리는 마치 망자의 혼백처럼 먼 곳에서부터, 그
러나 이상한 절박감으로 우리에게 찾아왔다.
오빠는 종종 자신이 쓴 글을 녹음해서 들어 보는 버릇이 있었다. 그러나 뒤처리는 항상 깨끗했
기에 미처 지우지 못하고 남긴 부분이 있으리라는 생각은 할 수 없었다.
"불을 켤까요?"
스륵스륵 돌아가던 테이프가 다 감기고 털거덕 멈춤 스위치가 튕겨오르자 나는 갑작스런 어둠
에 눈을 껌벅이며 한결 조심스러운 어투로 아버지에게 물었다.
불을 켜자 남포 모양의 갓을 씌운 전등불빛으로 식탁은 느닷없이 튀어오르고 냉장고, 그릇장,
갈포를 바른 벽은 마치 암전된 무대의 소도구들처럼 갓그늘 뒤로 사라졌다.
아버지는 물로 우우 입가심을 한 뒤 방에 들어가 화투를 들고 나왔다. 그러고는 내가 식탁을
치우는 동안을 참지 못해 탁탁 신경질적으로 화투를 치기 시작했다.
둥근 불빛 아래 부얼부얼한 털 스웨터에 싸인 두꺼운 어깨가 벽에 거대한 그림자를 만들었다.
"다 저물었는데 물 하러 재수패는 떼어요?"
와락와락 그릇을 씻으며 나는 물었다.
"저물었대도 끝난 건 아니잖느냐."
끝나지 않다니요! 무엇이요! 속으로 반문하면서도 예사로운 말투에서 예사롭지 않은 암시를 캐
내려는 이쪽의 과민성이 우스워졌다.
씻은 그릇을 찬장에 넣고 앞치마를 벗으며 돌아서자 아버지는 늘어놓았던 화투패를 모두었다.
"뭐가 떨어졌어요?"
"손님이야."
아버지는 심드렁하게 내뱉었다.
"과일을 깎을까요?"
"커피를 마시겠어."
아버지의 치켜뜬 눈에서 조바심이 번뜩였다. 어서 내가 앉기를 바라는 것이다. 나는 찻물을 불
에 얹고 마주앉았다.
"너부텀 하랴?"
"어딜요, 선을 봐야죠."
나는 아버지가 쌓아 놓은 화투를 듬뿍 떼었다. 매화 다섯 끗이 나왔다. 아버지가 흑싸리 껍질을
들어 보이며 내게 화투를 밀어 놓았다. 이미 두껍게 부풀어오른 마흔여덟 장의 화투는 한손 가득
잡혔다. 낡을 대로 낡아 처음의 그 차르륵 쏟아지는 신선한 감촉은 없이 눅눅하고 끈끈하게 손바
닥에 달라붙었다.
"고루 쳐야 한다. 재수를 봤으니 한 덩어리로 뭉쳐 있을 게야... 그만쳐, 또 너무 치면 도로 제
자리로 가버린다니깐."
나는 우선 아버지와 내 앞에 한 장씩 차례로 나눠놓는 것으로 쓸데없는 껍데기가 겹쳐 들어올
것을 겁내는 아버지의 조바심을 풀었다.
"물이 끓는다."
아버지는 자신의 몫인 열 장이 다 모일 때까지 뒤집혀진 채로의 화투에 손을 대지 않는다.
주전자 주둥이로 쉭쉭 물이 넘쳤다.
나는 화투장을 놓고 준비해 둔 두 개의 찻잔에 물을 부었다. 스푼으로 젓는 동안 아버지는 뒤
집혀진 내 패를 훔쳐 보고 있을 것이다.
"내겐 사카린을 넣어라."
"알고 있어요."
아버지는 그러한 주의를 주지 않더라도 내가 설탕을 넣지 않으리라는 것을 물론 알고 있다. 단
지 내 것을 훔쳐보는 손의 움직임을 은폐하려는 시늉일 뿐이었다.
아버지는 정기적으로 인슐린을 주사해야 하는 중증의 당뇨병 환자이다. 고유의 처방으로 비약
을 장복해도 아침마다 변기에는 누렇게 거품 이는 당질의 소변이 괴어 있었고 아버지는 그곳에
우울한 얼굴로 검사용 테이프의 끝을 담그곤 했다.
찻잔을 들고 식탁에 돌아와 내 몫의 화투를 거둬 쥐는 것을 보고야 아버지는 자신의 것을 모두
어 쥐고 낡은 부채를 펴듯 조심스럽게 한 장씩 펴나갔다. 아버지의 입가로 만족한 웃음이 지나갔
다. 식탁에는 여덟 장의 화투가 현란하게 깔려 있다.
"낙양은 꽃밭이로고. 밭이 암만 걸어도 뿌릴 씨가 없으니 어쩐다?"
아버지가 곁눈질로 내 패를 흘깃거렸다. 나도 화투장을 움켜쥔 채 단단히 진을 친 아버지의 것
을 넘겨다보았다. 굳이 넘겨다볼 것까지도 없었다. 뒷면만을 보아도 무슨 패인지 환하게 알 수 있
는 것이다. 아버지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가로로 비스듬히 금이 가 있는 것은 난초 다섯 끗,
왼쪽 귀퉁이가 둥글게 닳은 것은 목단 껍질, 오른쪽 모서리가 갈라진 것은 멧돼지가 그려진 붉은
싸리 열 끗이다. 뒤집에 들고 있는 것보다 그림이 그려진 앞면을 서로 상대방에게 보이는 것이
속임수가 가능할만큼 아버지와 나는 화투장의 뒷면에 익숙해져 있는 것이다.
"단, 약, 칠띠, 사광 모두 보기다."
"물론이죠."
청띠를 두른 목단 다섯 끗도 단풍 열 끗도 쥐고 있는 아버지의 눈이 머물고 있는 것은 깔려 있
는 팔공단 스무 끗이다. 그리고 얌전히 엎어져 들춰 줄 것을 기다리는 것은 역시 공산 껍질이다.
댓바람에 스무 끗을 내놓고 껍질을 뒤집어 맞춰 쓸어 가기가 민망해서 음흉을 부리고 있는 것이
다. 아버지는 늘 그랬다. 한참 궁리 끝에 정말 이렇게 팔 수밖에 없다는 듯 억울한 얼굴로 공산
스무 끗을 내놓고 뒷장을 맞춰 쓸어 갔다.
"벌써 스무 끗이네. 아버진 배짱이 좋으셔, 사광을 하실래요?"
나는 염치를 배짱으로 바꿔 말했다. 아버지가 어린아이처럼 입을 벌리고 천진하게 웃었다.
나는 풀썩 던지듯 붉은 싸리 다섯 끗을 먹었다.
"칠띠를 하겠구나."
"이제 하난 걸요. 어디 맘대로 되나요. 든 게 없는 걸요."
하지만 단풍을 깨뜨리고 아버지가 들고 있는 목단 청띠를 내놓게 해야지, 그런대로 삼약을 깨
든가 아니면 해야 한다는 계산으로 머리 속은 바빴다.
"천 끗 내기를 하랴?"
"좋지요."
가을이 깊어지고 밤이 길어지면 천 끗 내기 정도로야 어림도 없을 것이다.
머리 위에서 자박자박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칭얼대는 아이의 울음소리와 그것을 달래는 여
자의 웅얼거리듯 낮은 자장가 소리가 들려 왔다.
창은 먹지를 댄 듯 새카맣고 불빛아래 아버지와 나는 어둠 속으로 한없이 가라앉고 있다는 느
낌이 들었다. 우리는 마치 먼 옛날부터 이렇게 식탁을 마주하고 앉아 화투놀이를 해왔던 것 같다.
그 이전의 기억은 마치 유년 시절의 꿈처럼 현실과 공상이 뒤섞여 멀고 아리송했다. 패가 막히거
나 제대로 풀리지 않으면 일단 변소를 다녀오는 노름꾼의 풍속대로 오빠는 자기의 패를 점쳐 보
기 위해 슬그머니 자리를 뜬 것이나 아닐까.
"밤에 우는 건 나뻐. 애들이 극성을 떨면 꼭 집안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기거든."
"저도 몹시 울었다면서요?"
수국 껍질을 모아들이며 나는 아버지의 말을 받았다.
잘 자라, 내 아기 밤새 편히 쉬고 아침이 창 앞에 다가올 때까지.
"네 에민 목청이 좋았었지."
그건 사실이었다. 유치원 보모였다는 어머니는 퍽 많은 노래를 알고 있었고 목소리가 고왔던
만큼 노래 부르기를 즐겨했다.
자장자장 우리 아가, 금자동아 은자동아 구슬 같은 눈을 감고 별빛 같은 눈을 감고 꿈나라로
가거라.
"네 차례다."
아버지도 역시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 듯 문득 짜증스럽게 말했다. 지붕 위에서 여
자는 결코 서두르는 법 없이 메트로놈의 움직임처럼 정확하게 베란다의 한쪽 난간에서 다른 한쪽
난간 사이를 오가고 있었다.
넉 달 전인가 새로 이층에 세를 들어온 그 여자를 본 것은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바깥쪽으로 나 있고 또 세를 든 사람은 샛문을 이용하게 되어 있기 때
문에 부딪칠 일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잠투정이 심한 아이는 초저녁부터 울어 대기 시작
하고 우리가 화투를 하고 있는 동안 밤이 깊을 때까지 그 여자는 낮고 단조로운 노래로 우는 아
이를 달래며 이층의 베란다, 우리들의 머리 위에서 발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손 안에 남은 석 장의 화투를 차례로 더듬다가 아버지가 들고 있는 홑끗짜리 오동을 흘겨보며
오동 열 끗을 팽개치듯 내놓았다. 기다렸다는 듯 얼른 그것을 가져가며 아버지는 희희낙락 엉구
렁을 떨었다.
"첫끗발이 개끗발이라더니..."
"첫술에 배부를까요."
"불빛이 흐리구나, 트랜스를 써야 할까 부다."
"시력이 나빠지신 탓일 거예요."
아버지와 나는 낡고 너덜너덜해진 각본으로 끊임없이 연극을 하고 있었다.
"여태 뭘 하고 있었담. 밑천은커녕 약값도 못 대겠어."
나는 팔을 뻗어 아버지가 벌어 놓은 끗수를 헤아렸다. 아버지가 질겁을 하며 손을 치웠다.
"끝나기도 전에 남의 밥을 보는 법이 어디 있니. 나도 한 게 아무것도 없다."
"파장인데 어때요. 난 손 털었어요."
마지막 패를 내밀자 아버지는 사쿠라 열 끗을 호기롭게 던지며 판을 쓸었다.
"손에 든 게 없으면 선도 말짱 헛거라니까요. 뒷장도 이렇게 안 맞을까."
나는 종이에 끗수를 적어 놓고 화투장을 모아 아버지 앞에 밀어 놓았다. 그리고 아버지가 화투
를 섞는 동안 마루에 놓인 텔레비전을 틀었다. 화면은 연기가 낀 듯 흐릿하고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림자처럼 잠깐 머뭇거리다가 화면에서 사라졌다.
"전압이 낮아서 제대로 나오지 않는 거야. 대체 또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거냐."
"영아원에 불이 났대요, 어린애들이 죽었다는군요."
"죽일놈들, 오래 사는 게 욕이야."
아버지의 목소리에 생기가 돌았다.
"그게 어디 우리 탓인가요?"
나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억누르듯 잇사이로 낮게 말했다. 정말 그게 우리 탓인가. 아가 아가 우
리 아가, 금자동아, 은자동아, 어머니는 꽃핀을 꽂고 노래를 불렀다. 네 엄마에게 다산은 무리였
어. 아주 조그만 여자였거든.
"보세요, 화투가 끼었잖아요?"
비닐막이 반 넘게 갈라진 틈에 낀 또 하나의 화투장을 가리키며 나는 조금 날카롭게 말했다.
"너무 오래 썼거든. 새 걸로 바꿔야겠어."
아버지가 화투를 빼내며 히죽 웃었다. 동자혼이 씐 거라더군. 말도 안되는 소리예요. 그 엉터리
기도원에 두는 게 아니었어요. 전도사도 박수도 아닌 사내는 어머니를 복숭아 가지로 후려쳤다.
살려 줘, 아가 날 살려 줘, 집에 돌아와서도 어머니는 복숭아 가지의 공포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네 아버지의 생활이 문란해서 그런 거야. 머리통이 물주머니처럼 무르고 크게 부풀어오른 갓난
아기를 가리키며 어머니는 조숙한 중학생이었던 오빠에게 노래하듯 말했다. 책가방의 끈이 끊어
져 퉁퉁 골이 나서 집에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햇빛이 드는 창가에 거울을 놓고 앉아 머리를 빗
고 있었다. 아기는? 내가 묻자 어머니는 고드름처럼 차가운 손가락을 목덜미에 얹으며 말했다. 인
형을 사줄게. 병원에서 호송차가 왔을 때 어머니는 식탁 아래로 기어들었다. 아가, 난 싫어. 무서
워. 날 데려가지 못하게 해줘. 호송인들에게 반짝 어깨를 들리워 나가며 내가 안 보일 때까지 고
개를 비틀어 돌아보면서 소리쳤다. 왜 웃어, 왜 웃어. 심한 짓을 했다고 생각지 않으세요? 모르는
소리야, 달리 무슨 수가 있었겠니. 넌 아직 어렸고 네 엄마는 또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랐어. 갓
난애도 그렇게 없애지 않았니? 넌 마치 네 엄마가 그렇게 된 게 모두 내 탓이라는 투로구나. 잘
보살펴 드릴 수도 있었어요. 외려 네 엄마에겐 그곳이 편한 곳이야. 친구들도 있고 가족이란 생각
하듯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야. 너부터도 내심 네 엄마를 가까이서 보지 않아도 된다는 걸 다행
스럽게 생각하고 있지 않니? 그전에 번번히 네 혼담이 깨지던 것도 에미 탓이라고 원망했을걸.
나는 이마를 찡그렸다. 아버지는 화투장 뒷면의 가로질린 금을 손톱으로 긁어 지우려는 헛된 노
력을 하고 있었다.
"어서 나누세요."
"그러자꾸나."
아버지가 한 장씩 화투를 나누었다.
그럴 기미는 너를 낳을 때부터 보였지. 온전했던 건 네 오빠 때뿐이었어.
"뭐 좀 할 만하니?"
비 스무 끗을 젖혀 맞히며 아버지가 나를 건너다보았다.
"고름이 살 되겠어요?"
송학을 집에 오며 나는 문득 귀를 기울였다. 들판 건너에서 휘파람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어쩌
면 바람결에 묻어 오는 마른 꽃 냄새가 코 끝에서 감지되는 듯도 했다. 그럴 리가 없어. 나는 고
개를 가로저었다.
"왜, 영 신통치가 않니?"
"천만에요."
그애가 휘파람 소리로 나를 찾아오던 것이 십 년 전의 일인가 아니면 그보다 더 오랜 꿈 속의
일인가. 늦은 밤 들판을 가로질러 오는 휘파람 소리에 문을 열고 나가면 그애는 마른 꽃 냄새를
풍기며 서 있었다. 그애가 오지 않게 되면서부터 나는 종종 자운영이 핀 논둑길을 열아홉 살 그
애와 나란히 걷는 꿈을 꾸었다. 대개 잠옷 차림에 머리에는 붉은 리본을 묶고 있었는데 늘 바람
이 불고 어디선가 흐릿한 꽃냄새가 풍기었다. 벗은 채로인 발바닥 아래에서 부드러운 흙이 갯지
렁이처럼 미끄럽게 꿈틀거렸다. 종달새 소리가 자욱이 눈 위로 덮이어 그애는 눈을 껌벅이며 내
게 말했다. 리본이 안 어울려요. 그래 나는 붉은 리본을 묶기에는 너무 나이를 먹었어. 어린애처
럼 커다란 리본을 다는 것은 미치광이나 창부뿐이지. 나는 아버지의 손가락 사이에서 팔랑개비처
럼 돌아가는 사쿠라를 보았다.
"굳은자를 가져가는 거야."
"그렇게 사정없이 몰아 가면 전 뭘 먹으란 말이예요?"
오빠는 어딜 가 있을까요. 그 녀석 얘기는 꺼내지도 마라. 아버지는 버럭 화를 내었다. 그 녀석
이 생기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어. 아버지는 둘이서 하는 화투놀이가 셋이서 하는 것보
다 재미가 덜하다는 것 때문에 오빠의 부재를 노여워하는 걸까. 더러운 게임이야. 오빠가 어느날
갑자기 식탁을 떨치고 일어나 팽팽하게 당겨진 줄의 한끝을 놓아 버렸을 때 삼각의 구도는 깨지
고 아버지와 나는 균형을 잃은 힘의 반동으로 형편없이 비틀거렸다.
나도 오빠처럼 훌쩍 나가 버릴 수가 있을까. 침몰하는 선체에서 구명조끼를 입고 결사적으로
탈출하듯 그렇게 달아나 버릴 수 있을까. 나는 매조를 먹을까 칠띠를 깨뜨릴까에 긴장되어 있는
아버지의 얼굴을 새삼스럽게 바라보았다. 좁고 긴 얼굴, 매처럼 구부러진 코끝은 볼의 살이 빠짐
에 따라 더욱 길게 늘어져 보였다. 아가, 날 데려가 다오. 여긴 무섭고 쓸쓸하단다. 그러나 어디나
마찬가지예요. 화투는 아버지의 손에서 내손으로 옮겨 갔다.
"개발에 땀날 때가 있구나."
거푸 두 판을 이기자 아버지는 심술난 얼굴로 야비하게 이죽거렸다.
나는 되도록 화투장에 눅눅히 배어 있는 온기를 의식치 않으려고 빨리 빨리 손을 놀렸다. 아버
지의 손에서는 늘 땀이 질척거렸다.
마지막 패인 국진 껍데기를 맥없이 내던지자 아버지는 호기롭게 화투장을 그러모았다.
"옜다, 사광이다. 넌 뭘 하고 있었니."
나는 종이에 아버지의 득점을, 그 무의미한 숫자를 기입했다. 텔레비전에서 열 시 '행복의 쇼'
프로가 시작되었다. 아버지의 끗수가 천을 넘자 나는 화투판을 거두었다.
"약을 잡수셔야죠."
나는 탁자 모서리를 잡고 비틀거렸다.
"왜 그러니?"
화투장을 놓은 아버지는 한층 더 늙고 음울해 보였다.
"좀 어지러워서 그래요."
먼 데서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싸르륵싸르륵 머리 속의 혈관이 텅텅 비어 가는 듯한 악성 빈
혈의 한 증상이라는 환청은 늘 휘파람 소리였다.
"어느 몹쓸놈이 밤중에 휘파람을 부나. 망할 세상이야. 어서 집들이 들어서야지. 온갖 뜨내기
불량배들이 득시글거리니..."
아버지의 손이 버릇처럼 화투에 가닿았다. 그러다가 문득 손에 가닿는 내 눈길을 의식하며 슬
그머니 움츠려 주머니에서 힘겹게 종이조각을 내놓았다.
"이걸 봐라, 벌써 며칠째나 우편함에 있던 거다. 제 날짜에 안 내면 괜한 돈을 더 물게 된다는
걸 알잖니. 일이란 그때그때 처리해야 뒤탈이 없는 거야. 웬 전기세가 이렇게 많이 나왔는지 모르
겠다. 전기는 쓰기에 따라 얼마든지 절약할 수도 있어."
아버지는 언젠가 전기세 가산료를 물었던 것을 또 들추어 내는 것이다.
"냉장고는 벌써부터 안 돌리잖아요."
괜한 짓이다, 생각하면서도 나는 화가 나서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전기세 고지서가 며칠째 우편함에서 자고 있었다는 건 아버지의 억지다. 아버지는 최소한 하루
에 열 번쯤은 우편함을 열어 보는 것이었다. 한 달에 한 번씩 날아오는 전기나 수도세 고지서 외
에는 결코 어떠한 편지도 담겨 본 적이 없는, 늘 배고픈 듯 텅텅 입을 벌리고 있는 우편함 앞에
서 공연한 손짓으로 서성이는 아버지를 나는 공범끼리의 적의와 친밀감으로, 그리고 언제든 준비
되어 있는 배반감으로 몰래 지켜보지 않았던가.
아버지는 고지서를 식탁의 모서리에 던져 놓고 당당히 화투를 잡았다. 그러고는 피라미드형으
로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는 맞은편에 턱을 받치고 앉아 늘어놓는 화투장을 하나씩 젖혀 가는 아
버지의 손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화투 하나를 가지고 혼자서 할 수 있는 온갖 게임을 다 알고
있다.
"뭐가 떨어졌어요?"
"님이 떨어지고 산보가 떨어졌다."
아버지가 문득 다정하게, 그러나 음침하게 빛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어지럽니? 피곤해 뵈는구나. 들어가 자거라."
빈 들을 질러 오는 휘파람 소리는 어둠을 뚫고 더욱 명료하게 들려 왔다. 아무래도 화투를 새
걸로 한 벌 장만해야지, 패를 알고 있는 게임은 재미가 없어.
자박자박 여자의 발소리는 머리 위에서 잠시 머물다가 멀어져 갔다.
"밤새 업고 재울 모양이군. 버릇이 고약하게 들었어."
나는 커다랗게 하품을 하며 눈을 비볐다.
"먼저 들어가겠어요. 너무 늦게 계시지 마세요. 약은 여기 있어요. 문단속은 제가 할 테니까."
나는 쿵쿵 발소리를 내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물을 세차게 틀어 오래오래 손을 씻었다. 그리고
는 아버지가 뒤를 돌아보거나 하는 일이 결코 없으리라는 것은 알면서도 부엌에서 내비치는 불빛
을 피해 발소리를 죽이며 벽에 몸을 붙이고 걸었다.
현관 문은 소리 없이 열렸다. 몇 개의 디딤돌을 하나씩 건너뛰며 대문을 나왔다. 아직도 자장가
를 웅얼거리며 이층의 베란다를 서성거릴 여자의 눈길이 어디쯤 가 있을까에 조바심을 치며 담을
끼고 걸었다.
들판이 끝나는 곳, 밋밋한 언덕바지의 주택 공사장에서는 밤 일을 하는지 군데군데 화톳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겨울이 오기 전 마쳐야 할 공사를 서두르고 있는 걸까.
나는 되도록 화톳불과 쓸쓸하게 매달린 알전구의 불빛을 멀찌감치 피해가며 걸음을 재촉했다.
반쯤 지어진 집의 곁, 머리 높이까지 쌓여진 시멘트 벽돌과 모랫더미 사이에 그는 서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지. 좀 늦었군."
먼발치에서부터 나를 보고 있었던 듯 그는 쳐다보지도 않고 발 부리로 모랫더미를 쑤셔 대며
말했다.
"어제와 마찬가진걸."
나는 마치 베일 속에서 말하듯 낮게 소곤거렸다.
"올 것 같아 일부러 일을 일찍 끝냈지."
그의 목소리에는 술기가 묻어 있었다. 이슬이 내리는 걸까. 이내 축축한 한기가 배어들었다. 그
가 잠시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는 듯 손을 잡았다. 손의 안쪽 마디마다 박힌 못이 쇳조각처럼 딱
딱했다. 크고 단단한 손이었다. 낮이라면 아마 대단히 더럽고 거칠게 보이는 손일 것이다.
"여긴 춥다구. 집이 비어 있어. 야방은 한참 술집에서 노닥거리는 중이다."
술기에도 불구하고 흥분 때문인지 그는 떨고 있었다.
그의 손바닥에는 축축히 땀이 차기 시작했다. 나는 손을 잡힌 채 깨진 시멘트 벽돌과 각목 토
막들을 밟으며 집으로 들어갔다. 제기랄, 그는 상스럽게 내뱉었다.
"뭐가?"
"배선 공사가 안됐어."
그러나 안은 두 벽에 반 넘게 차지한, 틀만 짜넣은 창문과 뚫린 지붕으로 그닥 어둡지 않았다.
그가 대팻밥과 각목 토막들을 발로 지익지익 밑어 치워 자리를 내었다.
딱딱한 손이 스웨터 소매로 파고들었다. 그는 떨고 있었다. 그리고 그 흥분을 부끄러워하듯 몹
시 성급하게 서둘렀다. 두 개째의 스웨터 단추를 벗기는 데 실패하자 그는 거칠게 목까지 스웨터
를 걷어 오렸다. 나는 숨을 죽이고 있었지만 다리 안쪽에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겨드랑이까지 드
러난 맨살에 시멘트 바닥이 아프도록 차가워 등을 움츠렸다. 그가 작업복 윗도리를 벗어 등에 받
쳤다. 뚫린 하늘에서 크고 맑은 별들이 눈 위로 내려앉았다. 밤의 어둠 속에서는 늘 마른 꽃 냄새
가 났다. 안드로메다, 오리온, 카시오페이아, 큰곰. 너는 무슨 별자리니, 전갈좌. 당신은 벽이 두껍
고 조그만 창문이 있는 주택을 갖게 되며 카섹스를 즐깁니다. 수줍고 내성적이나 항상 로맨틱한
사랑을 꿈꿉니다. 꽃이 안 어울려요. 그래 꽃을 꽂기에는 너무 늙었어. 미친 여자나 창부가 아니
면 머리에 꽃을 꽂지 않지.
"날이 추워지는군. 더 추워지면 한데서는 안돼. 공사가 끝나려면 보름은 더 있어야 해. 허지만
뭐 그때까진 그닥 춥지 않겠지."
그가 으레 그래야 할 것처럼 내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추운 건 싫어."
나는 킥킥 웃었다.
"다른 건 좋고? 당신 바람난 과부 아냐?"
그도 키들키들 웃었다.
멀리서부터 여럿이 어울려 되는 대로 불러대는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이제들 오는군."
그가 일어나 등에 받쳤던 윗도리를 탁탁 털어 걸쳤다.
"내일 또 오겠어?"
시멘트 벽돌과 모랫더미 사이에 서서 그가 물었다.
"돈이 좀 있으면 줘."
그가 멈칫했다. 나는 내처 말했다.
"몸이 좋지 않아서 약을 먹어야 돼, 많이 달라곤 안해."
그가 이 사이로 찌익 침을 뱉으며 낮게, 빌어먹을이라고 중얼거렸다.
"어째 첨부터 순순히 굴더라니. 세금 안 내는 장사니 좀 싸겠지."
그가 부시럭대며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이는 시늉으로 성냥을 그어 길게 오는 불꽃을
내 얼굴 가까이 대었다. 나는 불꽃을 보며 길게 입을 벌려 웃어 보였다.
"제기랄, 철 지난 장사로군. 오늘은 없어. 모래가 간조니 생각 있으면 그때 와."
그는 몹시 기분이 상한 듯 함부로 침을 뱉었다. 나는 걸음을 빨리 했다. 술 취한 한떼의 노무자
들이 어깨를 부딪치며 엇비껴 지나갔다.
대문은 열린 채였다. 이층의 여자는 여태껏 칭얼대는 아이에게 자장가를 웅얼거리며 베란다에
서 서성이고 있었다. 살그머니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며 나는 몸에 배인 찬공기를 손바닥으로 훑
었다. 아버지는 여전히 식탁에 앉아서 재수패를 떼고 있었다.
"뭐가 떨어졌어요?"
"님이다. 어서 자거라."
아버지는 돌아보지도 않으며 투덕투덕 화투를 쳤다.
방에 들어와 전기 스위치를 올리고 나는 잠시 어쩔 줄을 몰라 멍청히 전등을 올려다보았다. 그
리고는 생각난 듯 책상 서랍을 열었다.
아가, 날 데려가 줘, 여긴 무섭고 쓸쓸하단다. 어머니는 막 글을 배우기 시작한 아이들처럼 크
고 비뚤비뚤한 글씨로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여백마다 동체는 없이 공처럼 둥근 머리와 나뭇가
지같이 뻗은 팔 다리로 물구나무 선 사람들을 그려 넣었다. 나는 종이뭉치를 코에 대고 그 흐릿
하게 피어나는 마른 꽃 냄새를 들이마셨다. 장식 없는 펜던트의 뚜껑을 열면 희끗희끗한 잿빛 머
리털에서도 역시 마른 꽃 냄새가 풍기었다. 우리가 도착하자 기다렸다는 듯 관뚜껑에 못질이 시
작되었다. 시취를 풍기기 시작한 어머니에게서는 역시 연기처럼 매움한 꽃 냄새가 났다. 뙤년들보
다 더 더러웠지. 죽자고 목욕을 안해도 향수는 꼭 뿌리곤 했어. 워낙 사치하고 허영심이 많았거
든. 훗날 아버지는 말했다. 그렇다면 살비듬내와 뒤섞인 향수 냄새일까.
나는 찬 방바닥에 몸을 뉘었다. 아버지가 아직 방에 들어가는 기척이 없다는 걸 떠올리며 나는
빈 집에서처럼 스커트를 끌어 올리고 스웨터도 겨드랑이까지 걷어 올렸다. 자박자박 여전히 아이
를 재우는 여자의 발소리는 머리 위에서 들려 왔다. 금자동아 은자동아 세상에서 귀한 아기. 나는
누운 채 손을 뻗어 스위치를 내렸다. 방은 조용한 어둠 속에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윽고 집 전체
가 수렁 같은 어둠 속으로 삐그덕거리며 서서히 잠겨들기 시작했다. 여자는 침몰하는 배의 마스
트에 꽂힌, 구조를 청하는 낡은 헝겊 쪼가리처럼 밤새 헛되고 헛되이 펄럭일 것이다. 나는 내리누
르는 수압으로 자신이 산신이 해체되어 가는 절박감에 입을 벌리고 가쁜 숨을 내쉬며 문득 사내
의 성냥 불빛 앞에서처럼 입을 길게 벌리고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우리들의 날개(지은이:전상국)
내가 국민학교 2학년 때 두호가 태어났다. 여덟 살 터울의 동생을 본 것이다. 두호의 출생은 우
리 식구들뿐만 아니라 가깝고 먼 친척은 물론 이웃 사람들까지 떠들썩하게 했다. 7대 독자 집안
에 사내아이가 또 하나 태어난 이 경사야말로 결코 예삿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뜻하
지 않은 기쁨 뒤에는 으레 그 기쁨이 무엇엔가에 의해 허물어져 내릴 것 같은 의구심이 일게 마
련이다. 두려움은 두려움을 낳게 마련이고 드디어는 그 두려움의 뿌리를 뽑아 버리기 위해 신경
을 곤두세우다 보면 처음의 그 기쁨이 형체도 없이 사라진 뒤기 예사다.
우리 집의 경우가 꼭 그랬다. 그때 아직 정정한 모습으로 살아 계셨던 할머니는 둘째 손자를
본 기쁨으로 동네 노인들 앞에서 덩실덩실 춤까지 추어 보였다. 하루도 수십 번씩 안방을 들랑거
리며 두호에 대한 할머니의 정성은 너무 극성스러울 정도였다. 부정을 탄 사람, 이를테면 초상집
에 다녀오는 사람이 우리 대문 근처만 얼씬거려도 야단이 났다. 내가 태어났을 때 그랬던 것처럼
두호도 석 달 열흘 간이나 안방 문지방을 넘지 못했다. 정수박이를 만지면 단명한다고 해서 3년
간 그곳에 쇠딱지를 한 번도 씻어내지 않았다. 삼신풀이굿을 위해 무당이 집안을 들랑거렸다. 두
호가 베는 베개를 가지고 장난을 하다가 할머니한테 호된 매도 맞았다. 매를 맞고 내가 서럽게
울 때마다 할머니가 말했다.
"너두 이 할미가 다 그렇게 키웠단다."
내가 태어났을 때는 두호의 몇 갑절이나 되는 정성을 쏟았다는 얘기다.
"니가 다 복이 많으려니까 동생을 본 게야."
그러면서, 아무리 내리사랑이라고는 하지만 그 대견한 거야 맏손자에 비할 거냐고 남들 앞에서
내 자랑을 늘어놓던 할머니였다.
그런데 할머니한테 이때껏 안하던 소리를 가끔 구시렁거리는 버릇이 생겼다. 조상 귀신들을 들
먹여 입에 올리는 일이었다.
"망할 영감태기 같으니라구. 몇 해만 더 살다가 갈 것이지..."
두호가 세상에 태어난 기쁨을 혼자 누리는 죄스러움을 몇 해 전 타향에서 객사한 할아버지에
대한 원망 섞인 그런 푸념으로 나타냈다. 5대 독자였던 할아버지는 당신의 아들이 장가를 가 손
자를 낳기까지 안절부절 못하고 공연히 집안 여자들만 들볶았다는 것이다. 딸 하나를 낳고 꼭 10
년 만에 아들을 낳았는데 그때 할아버지 나이 서른 여덟이었다. 이러다간 손자도 못 보고 죽겠다
며 투덜거리더니 결국 아버지를 열일곱 살에 장가를 들였던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가 나를 스물
둘에 낳았다. 그런데 집안에 대가 끊길 것을 염려해 안절부절 못하던 할아버지가 나를 낳은 뒤로
사람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육순이 지난 이가 늦바람이 난 것이다. 여자라곤 할머니밖에 모르던
할아버지가 이웃 마을에 살던 과부와 눈이 맞아 어디론가 종적을 감췄다. "귀신이 덧들인 거지."
그 일을 두고 할머니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고 했다. 딸 하나만 낳고 아들을 낳지 못한 할머니
가 시앗이라도 봐 자식을 보라고 했을 때는 무슨 소리냐고 펄쩍 뛰던 이가 어쩌자고 그 어려운
손자까지 본 뒤에 그런 바람이 불었는지 정말 모를 일이었다. 할머니가 점을 쳐봤다. 당신에게 어
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복채를 싸들고 점쟁이를 찾아다닌 할머니였다. 그럴 때마다 점괘가 신통
하게도 잘 맞아떨어졌다. 10년 만에 아들을 낳을 해까지 알아맞힌 점쟁이도 있었다. 이번의 경우
할아버지가 늦바람이 나 이웃 마을 과부와 달아난 일을 점쟁이가 말했다.
"집 나갈 팔자구먼!" 그 소경 점쟁이가 다시 말했다. "내버려 둬, 잘 나간 거니까. 억지루 잡아
뒀다간 자식 잃을 수여." 요는 집안에 살이 낀 두 사람이 한 지붕 밑에 살게 되면 결국 한쪽 기
가 꺾여야 집안이 태평한 법인데 그렇게 되자면 한 사람이 죽는 길밖에는 없다고 했다. 할머니는
그 점쟁이 말을 고스란히 믿었다. 집 나간 할아버지를 원망하거나 자신의 팔자 푸념을 할 줄 모
르는 할머니였다.
"니가 하라버이 대신이여!"
할머니가 내 등을 긁어주며 가끔 그런 뜻의 말을 했다. 할아버지가 집을 나갔기 때문에 우리
집의 손이 끊기지 않게 됐다는 뜻이었다.
집 나간 할아버지가 돌아온 것은 내 나이 여섯 살 때였다. 거적주검이 돼 돌아왔다. 할아버지와
함께 도망쳤던 그 과부가 아편쟁이였던 것이다. 논 몇 마지기 팔아가지고 나간 뒤 그 돈이 다 떨
어지자 그대로 거지가 되어 여기저기 떠돌아다녔다. 끝내 집에 돌아오지 않은 채 객지에서 거적
주검이 된 할아버지 소식을 처음 듣던 날 할머니는 젖을 더듬는 내 손을 무섭게 뿌리쳤다. 그때
나를 쏘아보던 할머니의 그 눈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지극히 짧은 순간이었지만 할머니의 눈에
는 적의 같은 게 번쩍였던 것이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장사를 치르고 이태 만에 엄마가 아이를
배자 할머니는 점쟁이부터 찾아갔다.
"아들을 낳겠구먼." 점쟁이가 다시 말했다. "허지만 아들이라고 다 좋은 건 아니여."
입맛을 쩝쩝 다시며 그랬다. 할머니가 무슨 얘기냐고 다그쳐도 점쟁이는 속시원한 말을 해주지
않았다. 다만 아기를 낳거든 그 출생 일자를 맞춰 다시 한 번 와보라고만 했다. 그러나 두호를 낳
기가 무섭게 그 점쟁이를 찾아갔을 때는 이미 그는 서울 어디론가 이사를 가버리고 만 뒤였다.
다른 점쟁이들을 찾아다녔지만 별 신통한 소리를 듣지 못한 채 할머니는 오직 얼마 전의 그 점쟁
이 말만을 마음에 새록새록 되새길 수밖에 없었다.
두호가 세 살 때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나는 엄마와 함께 할머니의 임종을 지켜보았다. 아버지
는 그때 군대에 들어가 집에 없었던 것이다.
할머니는 숨을 몰아쉬면서도 방 안을 두리번거렸다.
"두호는 밖에 나갔어요, 어머니."
엄마가 큰 소리로 말했다. 할머니는 앓아 누우면서부터 두호를 싫어했다. 싫어한다기보다 차라
리 무서워하는 것 같았다. 당신 곁에 두호가 얼씬도 못하게 했다.
"우리 어머니가 왜 저런대?"
서울서 내려온, 아버지보다 열 살 위인 고모가 엄마한테 물었다. 엄마가 고모 곁으로 바싹 다가
앉으며 말했다.
"내가 형님한테 묻고 싶은 얘기예요. 글쎄 어머님이 서울 가셨다 온 뒤로 저렇게 두호를 미워
하신단 말씀예요."
고모가 뭔가 생각을 짚어내려는 듯 눈을 껌벅이다가,
"맞아. 어머니가 우리 집에 오셨을 때 여기 읍에 살던 그 점쟁이를 서울서 만나 보셨대. 어머니
말로는 아주 용한 점쟁이라고 하데."
"그래, 그 점쟁이가 우리 두호를 미워하라고 했대요?"
"설마 그럴 리가! 다만 그 점쟁이를 만나고 나서 부랴부랴 집으로 내려 가셨거든. 하긴 이런 말
씀은 하시데. 두호 쟤가 자식이 아니라 사라고."
"아마 그건 그때 쟤 아버지가 제 고집대로 군대엘 들어간 일 때문에 그랬을 거예요."
엄마가 말했다.
사실 아버지는 6대 독자기 때문에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되었다. 그런 걸 아버지 스스로가 지원
해서 들어갔던 것이다. 할머니가 머리를 싸매고 누워 식음을 전폐하면서 말려도 아버지는 막무가
내였다. 그 즉시로 서울 고모네 집으로 내려갔던 할머니였다.
"도대체 그 점쟁이가 뭐라고 했을까요?"
"그걸 누가 알겠나, 어머니밖에!"
그 비밀을 끝내 입 밖에 내지 않은 채 할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할머니의 마지막 숨을 거두는
모습이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다. 나는 밖으로 뛰어나갔다. 두호가 마당에 앉아 흙장난을 하고
있다가 내게 말했다.
"성아, 함무니 듀겄나?"
두호는 얼굴에 온통 흙을 묻힌 채 반들거리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더럭 무섬증이 났
다. 할머니의 마지막 숨 거두는 순간의 그 무서움과는 또 다른, 살아 있는 사람의 교활한 눈에서
찾을 수 있는 그런 무서움이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군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는 즉시 조상 대대로 물려오는 논밭을
처분했다. 그리고 서울 망우리 근처로 이사를 했다.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살아 계신다면 어림도
없었을 일을 아버지는 손바닥 뒤짚듯 쉽게 해버렸다. 누가 말리고 어쩌고 할 여유도 주지 않고
척척 팔아 버린 다음 서울로 이사를 한 뒤 오막살이 같은 집 하나를 사고 남은 돈으로 화물 트럭
을 샀다. 농사나 지어먹던 농사꾼이 이처럼 생활환경을 바꾼 일은 아무래도 예삿일이 아니었다.
엄마는 귀신에 홀린 것처럼 아버지가 하자는 대로 따라 하면서도 가끔 아버지한테 대어들었다.
"한호 아버지, 정말 이래도 되는 거예요?"
그러나 아버지는 어깨에 바람을 일으킬 뿐 엄마 말 같은 건 들은 척도 안했다.
아버지가 이처럼 사람이 바뀐 것은 군대 생활 3년, 거기서 배운 운전기술 때문이라고 할 수 있
었다. 아버지는 군대에 들어가면서 곧 운전 교육대에서 자동차 운전을 배우게 되었던 것이다. 운
전대를 잡는 그 첫날 아버지는 이것이야말로 자기가 바란 새로운 세계의 열림이라는 강한 느낌을
받았다. 한마디로 자동차 운전이 아버지의 적성에 맞았던 것이다. 그 고되다는 군대생활이 아버지
에게는 마냥 신바람이 났을 뿐이다. 아버지는 운전 미치광이가 됐다. 그는 시간만 있으면 자기가
운전할 차에 달라붙어 그 차의 내부를 속속들이 알려고 했다. 그리고 운전대를 잡고 칸보이 지프
를 따라 국도를 달려나갈 때 그는 어금니를 비집고 올라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 커다
란 괴물을 움직여 나가고 있는 자신의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
버지는 당신이 배속되어 있던 수송 중대에서 가장 모범적인 운전병으로 인정을 받았다. 그런데
어느 날 수송 책임을 맡은 선임하사가 운전병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어젯밤 내 꿈자리 되게 안
좋았데이. 느덜 중에 말이다. 내 꿈자리 액땜에 자신 있는 사람은 나서 보레이!" 평소 농담을 모
르던 그가 그런 농담 비슷한 말을 하자 모두 어리둥절했다. "임마들아, 내사 3대 독잔 기라." 그가
약간 멋쩍게 웃으면서 계속했다. "내사 아직 아들도 하나 못맨들었는 기라. 우리 집 와이프 뱃속
에 지금 하나 삐약삐약하고 있다만... 이런 차제에 내 죽을 수 있노?" 요는 꿈자리가 나쁜 자기를
누가 태우고 가겠느냔 얘기였다. 운전병들은 서로 눈치만 살폈다. 운전하는 사람들 마음속에 자신
도 모르게 깃드는 금기 때문이었다. "임마들아, 그라믄 내사 하나 물어 보겠데이, 느덜 중에 외아
들이 아무도 없나?" 선임하사가 운전병들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그때
아버지는 비로소 자신이 6대 독자라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니, 나 태우고 갈 자신 있나?" 손
을 쳐든 아버지를 향해 선임하사가 물었다. "자신 있습니다!" 아버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렇게 소리쳤다. 그러나 그날 아버지가 사고를 낸 것이다. 국도를 달리면서 옆에 앉은 선임하사가
출발 전에 한 말이 계속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흉몽, 애기, 더 이상한 일은 선임하사가 말
한 그의 고향에 있는 아내의 뱃속에 들어있을 아이의 모습이었다. 문득 그것이 두호의 모습으로
겹쳐 나타나기도 했다. 산모롱이 비탈길을 달려가고 있었다. 여름 한낮 쨍쨍한 햇볕에 아스팔트가
눅진눅진 녹아났다. 한없이 무료감에 빠져드는 그런 시간이었다. 이런 때 운전하는 사람들은 가끔
눈을 뜬 채 졸기도 한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바로 그랬다. 깜박했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길 한가운
데에 아이 하나가 서 있었다. 아버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핸들을 잡아 꺾었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깨어 보니 낭떠러지에 처박힌 차 속에 선임하사가 죽어 있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몸이 상
채기 하나 없이 말짱하다는 걸 알았다. "그래, 그 길 가운데 있던 아인 어떻게 됐나?" 아버지 얘
기를 듣던 사람 하나가 물었다. "글쎄 그게 묘하다니까, 나는 분명 아이를 보았는데 내 차 뒤를
따라온 운전병들에 의하면 그런 아이는 거기 없었다는 거야, 결국 내가 헛것을 본 셈이었지."
말하자면 아버지가 농사를 집어치우고 논밭을 팔아 서울로 올라온 즉시 화물 트럭을 산 것은
군대에서 선임하사를 죽게 했던 그 사건이 아버지 가슴에 오기처럼 뻗쳐 올랐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것은 죄의식하고는 거리가 먼 생각이었다. 비록 사람은 죽었을 망정 그날의 비현실
적인 여러 요소가 아버지의 호기심에 불을 당긴 것이다. 선임하사의 꿈, 선임하사의 고향, 그의
아내 뱃속에 든 아이, 그리고 길 한가운데 서 있음으로 해서 자동차를 둘러엎었던 그 헛보여진
아이... 이 모든 것은 아버지의 뜻과는 무관하게 일어났고 아버지의 의지로써는 어쩔 수 없는 그
런 일들이었던 것이다. 이제까지 아버지는 그 커다란 괴물을 자신의 힘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기
꺼움으로 운전대를 잡아 왔지만 그 사고 이후부터 그는 운전대에 앉은 새로운 세계를 체험하는
기분이었다. 그것은 어떤 알 수 없는 힘과의 싸움을 의미했다. 제대를 하자 아버지는 기꺼이 그
싸움을 시작하기로 했던 것이다.
아버지는 화물트럭을 몰고 무슨 일이든 맡아서 했다. 답십리 고모네가 커다란 싸전을 했기 때
문에 아버지는 처음 그 싸전에 넣을 곡식을 모으기 위해 시골로 차를 몰고 다녔다. 그 다음은 이
삿짐을 나르는 일도 하고 집 짓는 데 쓰는 자재를 나르는가 하면 자갈 채취장에서 그 하청을 맡
아 하는 등 그야말로 닥치는 대로 뛰었다. 아버지는 항상 신바람이 났다. 몸도 보기 좋게 불고 얼
굴도 피둥피둥 폈다. "야, 한호야. 느네 형 간다." 내 친구들이 그렇게 놀려대기도 했을 정도로 아
버지는 젊었다. 그러나 엄마는 아버지와 달랐다. 아버지처럼 그렇게 젊지 않았다. 아버지 보다 두
살 위이긴 했어도 요즘같이 그렇게 팍삭 늙은 엄마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그닥 기분이 좋은 일은
아니었다.
그것은 아버지가 차 운전을 하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옛날 시골서 할머니가 하던 것과 똑같이
점쟁이를 찾아 다녔다. 아버지가 차를 처음 끌고 나가던 날은 무당까지 집에 들여 굿을 했다. 굿
떡을 마을에 돌리면서 엄마는 아버지의 무사를 빌었다. 아버지가 늦게 돌아오는 날은 골목까지
나가 아버지를 마중하느라 늘 잠을 설쳤다. 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엄마도 늘 구시렁거렸다. 엊
저녁 꿈자리가 뒤숭숭하니 오늘은 그냥 집에서 쉬는 데 어떠냐며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곤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엄마 말을 귓전으로 흘렸다. 그런 날은 하루 내내 엄마 얼굴에 그늘이 깔렸다.
아버지가 차를 가지고 나간 뒤 우리 형제가 조금 싸움을 해도, 하찮은 소리로 입바를 말을 해도
엄마는 언성을 높였다. 우리는 길에서 돌멩이도 마음대로 주워들일 수 없었고 집안의 물건을 함
부로 옮겨 놓아도 안되었다. 아버지가 운전을 하기 때문에 우리 집에는 그렇게 금기가 많았던 것
이다.
그러나 당사자인 아버지는 엄마와는 사뭇 달랐다. 엄마가 벌이는 그런 뒤숭숭한 일을 나무라지
는 않았지만 대개 무관심하게 웃고 넘어갔다.
"꿈자리가 너무 나빠요!" 엄마가 이렇게 말하면 아버지는, "당신 꿈은 나빴는지 몰라두 내 꿈은
되게 좋았다구!" 이렇게 웃어넘겼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엄마의 하는 일을 전연 무시하는 것은 아
니었다.
"두호 엄마가 그렇게 집에서 빌어 주니까 내가 무사한 거 내가 다 안다구." 이런 식으로 엄마를
위로했다. 엄마는 그 말 한마디가 고마워 눈물을 질금거렸다. 그리고 다음날이면 또 용하다는 점
쟁이를 찾아 나섰다. 아버지에 대한 점괘가 늘 좋지 않게 나온다고 엄마가 답십리 고모한테 얘기
하는 걸 여러 번 들었다. 엄마는 그 좋지 않은 점괘를 액막이하느라 사람들 눈을 피해 별의별 이
상한 일을 벌이곤 했다. 소반 위에 쌀을 서른세 줌 받아놓고 그 위에 칼을 세워놓는가 하면 실을
일곱 발 반을 재서 끊은 다음 그 실로 이상한 매듭을 만들어 천장 속에 넣기도 했다. 그리고 아
버지의 구두 속이나 베개 속에는 언제나 부적이 들어가 있었다. 그러한 엄마의 액막이 놀음에 훼
방꾼이 하나 있었다. 여섯 살이 된 두호가 바로 그 훼방꾼이었다. 두호는 엄마의 그러한 액막이
짓을 몰래 숨어서 보고 있다가 엄마가 자리를 뜨면 이내 달려가 소반 위에 놓인 칼을 집에 마루
에 꽂는가 하면 엄마가 천장 위에 감춘 실 매듭을 목에 감고 다니기가 예사였다. 아버지 구두 속
혹은 베개나 옷 속의 부적도 늘 두호의 주머니에서 나왔다. 그 일로 해서 엄마는 무섭게 화를 냈
다. 두호에게 매질을 하는 엄마의 눈에서 나는 살의를 보았다. 엄마는 부들부들 치를 떨면서 사정
없이 두호를 패댔다. 그러나 두호의 그런 짓궂은 버릇이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엄마
가 하는 일에 훼방을 놀았다.
한 번은 엄마가 두호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너 죽고 나 죽자던 때가 있었다. 아버지가 트럭을
사서 운전한 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그 사고가 나기 바로 이틀 전이었다. 엄마가 좀 심한 액막
이를 했었다. 그날 밤 나는 고양이 우는 소리를 듣고 밖으로 나가 봤다. 엄마가 우리 집 고양이
목에 노끈을 감으면서 뭔가 중얼거리고 있었다. 뭔가 숫자를 세는 것 같기도 했다. 엄마는 고양이
목에 노끈을 꽤 여러 번 감았다. 고양이가 발버둥치고 있었다. 답십리 고모네 싸전에 있던 고양이
중의 하나를 두호가 얻어다 기르는, 꽤 큰 고양이었다. 두호의 것이었다. 엄마가 그 고양이 목에
노끈을 감아쥐고 집 뒤꼍으로 돌아갔다. 뒤꼍에 연탄을 넣어두는 창고가 있었다. 엄마는 그 연탄
창고 서까래에다 고양이 목을 매달았다. 고양이는 허공중에서 버둥대며 짧고 절박한 울음소리를
냈다. 엄마가 그 고양이를 가운데 놓고 정확히 서른여덟 바퀴를 맴돌았다. 서른여덟은 아버지 나
이였다. 아버지는 그때 자갈 채취장에서 묵어가며 차를 굴리고 있었다. 내일모레면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는 날이었다. 나는 엄마에게 들킬세라 내 방으로 돌아왔다. 두호는 안방에서 잠을 자고 있
었다. 나는 숨을 죽이며 엄마가 안방으로 들어가는 소리를 들었고 그리고 오래오래 계속되는 고
양이의 비명을 듣다가 제풀에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도 나는 계속 고양이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나는 꿈 속의 그 고양이 울음소리 때문에 결굴 잠이 깨고 말았다. 그러나 이미 그때 고양이 울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무서움을 참고 잠자리에서 일어나 살금살금 뒤꼍으로 돌아갔다. 달빛
이 연탄창고까지 비껴들고 있었다. 거기 고양이가 추욱 늘어진 채 매달려 있었다. 죽었구나- 생각
하면서 나는 방에서 가지고 간 면도칼을 꺼내 고양이가 매달린 노끈 중간쯤을 끊었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을 만큼 놀랐다. 툭 둔탁한 음향을 내며 땅바닥에 떨어질 걸로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나는 아무 소리도 못 들었던 것이다. 고양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 땅에
떨어졌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놈은 냐아옹- 아주 길고 암팡지게 한 번 운 다음 나는 듯이 내 눈앞
에서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누가 고양일 살려 줬니?"
아침에 엄마가 두호와 나를 불러 놓고 아주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의 얼굴은 차고
매서웠다. 눈에 팔팔 살기 같은 게 날렸다. 두호가 코를 훌쩍 들이마시며 내 얼굴을 쳐다봤다. 나
는 두호의 얼굴을 마주볼 수가 없어 얼른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려 버렸다.
"한호야, 니가 그랬니?" 엄마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찼다. 나는 부르르 몸서릴 쳤다.
"내가 뭘 그랬단 말예요?" 나는 짐짓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럼, 이번에도 또 니가 그랬구나?" 엄마가 두호의 멱살을 잡았다. 두호가 멱살을 잡힌 채 엄
마의 얼굴을 그 큰 눈으로 빤히 치어다보며, "그거 내 고양인데..." 멱살을 죄인 채 불분명한 발음
으로 입엣소릴 하다가 내 쪽으로 힐끗 눈을 주었다. 나는 흠칫 몸을 떨었다.
"요 망할 놈의 새끼!" 엄마가 두호의 멱살을 더 다부지게 추켜들었다.
"너 죽고 나 죽자!" 두호를 질질 끌고 엄마는 부엌까지 가 식칼을 찾아 두호의 목에 댔다. 두호
가 엄마한테 몸을 내맡긴 채 눈을 감았다. 엄마가 두호의 멱살을 풀면서 뒤로 밀어던졌다. 두호의
몸이 부엌 시멘트 바닥에 나둥그러지며 머리가 계단 모서리에 둔탁한 소리로 부딪혔다. 처음 몇
분 동안 두호는 울지도 않았다. 엄마가 부둥켜 안고 흔들어도 얼굴을 약간 찡그릴 뿐 아무 소리
도 내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후에 두호는 아주 가냘픈 소리로 칭칭 울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고양이 울음소리처럼 여리면서도 절박한 느낌을 주는 그런 것이었다. 두호는 낮에 한 차례 토했
다. 그리고 골이 아프다고 누워 일어나지를 않았다. 엄마가 두호를 안고 울음을 터뜨리다가 드디
어는 가까운 병원으로 갔다. 그 병원에서는 종합병원에 가 진찰을 해보라고 했다. 종합병원은 이
미 외래객을 받지 않는 시간이었다.
다음날 오전 수업 중인데 담임이 나를 불러냈다. 집에 빨리 가보란 얘기였다. 엄마가 나를 기다
리고 있었다. 두호는 일어나 앉아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나는 우선 숨을 내쉬었다.
"뭐야 엄마, 엄마가 학교에 전화한 거야?"
엄마가 나들이 옷을 챙겨 입고 나서며 말했다.
"두호하고 집 좀 보고 있거라. 아버지가 다치셨단다."
엄마 눈에 주렁주렁 눈물이었다.
아버지가 운전하던 트럭이 사람을 치이면서 산비탈에 넘어진 것이다. 아버지는 이마에 유리 파
편이 하나 박혔을 뿐 다른 데는 멀쩡했다. 문제는 아버지 차에 치인 사람이었다. 병원에서 완치 6
개월의 진단이 떨어진 중상이었다. 완치라고는 하지만 다리 하나를 절단해야 할 판이었다. 그 중
상당한 사람의 가족들이 다음날 우리 집에 몰려와 난장판을 벌였다. 아버지는 병원에 있었고 엄
마는 몸을 피했다.
두호는 그날도 배를 움켜쥐고 설설 기더니 아침에 먹은 걸 토해냈다. 아버지가 입원한 병원을
대라, 아버지 말고 다른 식구를 내놓아라- 몰려온 사람들은 아우성이었다. 나는 참담한 심정으로
그네들을 맡아야 했다. 하루 내내 버티던 사람들이 저녁에 물러가자 나는 긴장을 풀고 깜박 잠
속으로 떨어졌다. 꿈속에서 고양이 울음소리를 들었다. 그날 밤 나를 속여 도망친 뒤 한 번도 모
습을 나타내지 않던 그 고양이가 나타나 목에 감긴 노끈을 풀어 달라며 냐아옹 냐아옹 울었다.
아버지 차에 치인 그 사람의 치료를 위해서 우리는 집을 내놓아야 했다. 부서진 아버지의 그
헌 트럭은 아무런 보탬도 못 되었다. 머리에 붕대를 맨 채 아버지는 엄마와 함께 얼굴이 새까맣
게 죽어 이리 뛰고 저리 뛰어다녔다. 우리는 남의 집에 방 한 칸을 빌어 살았다. 아버지는 그 젊
고 싱싱하던 얼굴을 잃고 추욱 어깨를 늘어뜨린 채 방 안에 숨어 살았다. 집을 팔아 해결을 보았
기 때문에 교도소에 안 간 것만도 다행이라고 엄마가 말하곤 했다.
엄마가 대신 벌이를 나갔다. 아동복을 이고 행상을 나선 것이다. 방을 지키는 것은 아버지와 두
호였다. 물론 두호는 그날 부엌 바닥에 머리를 부딪친 뒤 몇 번 토하고 머리통을 감싸며 꼭 죽을
것처럼 누워 있더니 아버지가 사고를 낸 그 경황 속에서 우리 식구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버렸
던 것이다. 더 큰 탈이 생기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물론 아버지는 두호가 그렇게 머리를
다쳤다는 얘기를 엄마한테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셋방 구석에서 아버지는 바보처럼 멍청한
눈으로 집안 식구 누구의 일에도 관심을 갖지 않는 것 같았다.
엄마가 평화시장에서 떼어 온 옷가지를 싸들고 얼굴이 새까맣게 그을도록 돌아다녀도 별 얘기
가 없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패배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운전대를 잡고 자신의
힘으로 불가사의한 어떤 힘과의 대결에서 능히 이겨낼 수 있다고 자신했던 그만큼 그의 패배의
후유증은 컸다. 그는 깊은 실의의 늪에 빠져 허덕였다. 운전대를 잡지 못한 아버지는 송장과 다름
없이 보였다. 내 학교 성적이 급격하게 떨어져도 별 관심이 없었으며 두호가 얼굴에 핏기를 잃은
채 빼빼 말라가고 있어도 매한가지였다.
나는 밤마다 꿈에 고양이를 보았다. 고양이 목에 노끈이 칭칭 감겨 있었다. 나는 고양이 목에서
그 노끈을 풀어내고 싶었다. 숨이 답답하고 오줌이 마려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고양이는 좀
해 잡히지 않았다. 겨우겨우 잡았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예외없이 두호였다. 나는 늘 두호의 목을
다. 나는 늘 두호의 목을 다잡아 쥔 채 눈을 뜨곤 했다. 눈을 뜨고도 나는 한참씩 고양이와 두호
를 혼동하고 있었다.
"엄마, 두호 병원에 좀 데리고 가봐요."
나는 어느 날 엄마한테 말했다. 엄마가 행상을 쉬고 집에서 묵은 빨래를 하는 날이었다. 아버지
는 밖에 나가고 없었다.
"두호가 왜?"
엄마가 마당 한구석에 앉아 흙장난을 하고 있는 두호를 힐끔 쳐다보며 물었다. 그러나 나는 대
답하지 않았다. 나는 두호가 정상적인 발육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핏기 없는 해쓱한 얼굴, 점점 커보이는 눈과 항상 불안하게 움직이는 눈동자- 그리고 두호는 뼈
만 앙상하게 메말라가고 있었던 것이다. 더 무서운 것은 두호가 하루 내내 거의 한 마디도 입을
떼지 않는다는 것이다. 두호는 안집 아이들과 결코 어울려 놀지 않았다. 늘 외톨박이로 마당 한구
석에서 흙장난이었다. 손으로 마당에 구멍을 팠다. 그리고 그 구멍에 오줌을 누었다. 때로는 똥을
누어 흙으로 덮었다. 안집 여자가 질색을 했지만 두호가 집에서 하루 내내 하는 장난이란 결국
그 한가지뿐이었다.
두호에 대한 내 경고를 무시한 채 엄마는 여전히 보따리 장사에만 신경을 쏟았다. 입에 풀칠하
는 것, 그것 이상의 중요한 일이 있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여전히 폐인이었다.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를 이처럼 낭패의 늪으로 떨어뜨린 그 힘을 무엇일까. 아버지는 그날 사고 당시의
정황 같은 걸 한 번도 얘기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군대 수송 중대에 있었던 그 당시 선임하사를
죽이던 그 날의 정황을 얘기하듯 뭔가 아버지의 입을 통해서 나올 법한 얘기가 예상 외로 단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실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칩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시들었던 풀포기에 다시 물이 오르듯 그렇게 아
버지가 싱싱하게 살아오르기 시작한 날이 왔다. 답십리 고모가 우리 집에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뒤숭숭한 일을 벌이고부터였다. 답십리 고모가 집에 오는 날은 엄마도 장사를 쉬었다. 그리고 고
모와 함께 부엌 뒤에서 뭔가 숭숭거리며 얘기를 나눴다. 그네들은 깊은 한숨을 몰아쉬기도 하고
때로는 고개를 크게 주억거려 어떤 사실에 대해 깊은 긍정을 보이기도 했다. 나는 이러한 어둡고
으스스한 집안 분위기를 내 어린 시절 기억에서 찾아올렸다. 그랬다. 할머니가 살아 있던 시절,
시골에서 무당과 점쟁이가 집안을 드나들던 그 때의 그 귀기에 찬 냄새였던 것이다. 아니나다를
까, 우리가 세들어 사는 그 집에 무당이 나타나 굿판을 벌였다. 그 굿판은 교회에 나가는 주인집
의 완강한 저지에도 불구하고 강행되었다. 마당에서는 차마 벌이지 못하고 우리의 좁은 그 단칸
방에서 법석을 떨었다. 나는 귀를 막아 쥐고 골목을 빠져나가 그 창피한 현장으로부터 도망쳤다.
그날 밤 나는 멀리 떨어진 도봉산 중턱까지 올라가 산 속을 헤맸다.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나는
다만 두호를 생각했을 뿐이다. 두호를 산 속에 데리고 오지 못한 아쉬움이 가슴을 눌렀다. 그 숲
에서 나는 두호 앞에 무릎이라도 꿇고 싶었던 것이다. 사실을 말해야 한다. 두호야, 형이 그때 그
고양일 살려준 거다. 두호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그리고 고집스런 목소리로 말한다. "그거
내 고양이야." 그래, 네 고양일 형이 살려준 거야. 살려준 거라구. 그러나 내 목소리는 힘이 없다.
나는 아무것도 살려주지 않았다. 나는 비겁할 뿐이다. "그거 내 고양이야." 두호가 다시 고집스레
말한다. 나는 두호와의 눈싸움에서 지고 만다. 나쁜 새끼. 살의가 손끝으로 뻗친다. 나는 두호의
멱살을 잡는다. 갈참나무 가지를 붙잡고 몸을 떨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제야 나는 두호를 산
에 데리고 오지 않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그날 저녁 그 굿판 이후 우리 집에 묘한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첫 번째 번화는 아버지가
다시 운전대를 잡게 된 일이다. 단 며칠 새에 싱싱하게 물이 오른 아버지는 그의 새로운 생활을
위해 일어섰다. 이번에는 관광버스를 끌었다. 주로 외국인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규모가 괜찮은
관광버스 회사였다. 거짓말같이 며칠 전과는 전혀 다른 얼굴을 보인 아버지였다. 엄마도 물론 보
따리 장사를 집어치웠다.
더 놀라운 변화는 그네들의 관심 밖으로 던져졌던 두호에 대한 문제였다. 소나기 같은 사랑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것은 결코 정상적인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이라고 생각할 성질의 것이 아
니었다. 그네들은 이제까지 자기들이 보였던 자식에 대한 그 미온적인 사랑에 대해 참회라도 하
듯 광적인 사랑을 퍼붓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대상은 물론 두호였다.
나는 열외자가 되어 그네들의 그 비정상적인 변화를 적의 깊게 바라보았다. 그렇다. 나는 다분
히 적의를 품지 않을 수 없었다. 두호와 나는 비록 여덟 살 차이기는 했지만 아직은 그네들 품
속의 어린 새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나는 혼자 내던져지는 걸 무서워했다. 나는 솔직히 그네들의
편애에 대해서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모닥불 피우듯 가슴에 담아가지고 있었다.
두호에게 좋은 옷을 사다가 입혔다. 안집 아이들도 갖지 못한 장난감들이 주어졌다. 어느 날 나
는 두호의 주머니에서 어린이대공원 입장권 세장을 발견했다.
"두호야, 너 어린이대공원 갔었구나?"
내가 물었다.
두호가 내 눈을 빤히 쳐다보다가 내가 짐짓 웃어 주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덧붙였다.
"형아한테 얘기하지 말랬쪄!"
나는 코웃음쳤다. 뭔가 이해하기 어려운 음모가 우리 집안에 깔려 있었다. 그날 나는 월중고사
를 보고 집에 일찍 돌아왔다. 방문을 열어졎혔다.
두호가 컴컴한 방에 혼자 앉아서 뭔가 먹고 있었다. 주먹보다 조금 큰 통닭구이었다. 나는 놀랬
다. 아직 우리 집이 통닭구이를 먹을 만큼 형편이 펴이질 못한 걸 나는 알고 있었다. 통닭뿐이 아
니었다. 나는 두호가 몰래 숨어서 먹는 여러 가지를 확인했다. 얼음과자, 비싼 과일, 그리고 두호
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 넥타 등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물론 나한테도 그 일부분이 돌아오긴
했어도 어째서 내가 이런 걸 먹어야 하나- 하는 마음의 부담 때문에 나는 그것들을 입에 즐길 수
가 없었다.
두호가 안집 마당에 서서 바나나를 먹고 있었다. 아직 바나나 철이 되지 않아 엄청나게 비싼
때였다. 안집 아이들이 두호를 둘러싸고 서서 바나나 껍질을 벗기고 있는 두호를 쳐다보고 있었
다.
"두호야, 그거 이리 내!"
내가 두호를 노려보며 말했다. 두호가 그 바나나를 뒤로 감췄다. 나는 그것을 뺏기 위해 두호의
목덜미를 잡았다. 너무 거쁜하게 잡혀들어 기분이 안 좋았다. 그러나 나는 그예 그 바나나를 뺏아
담 밖으로 집어던졌다. 두호가 울었다. 그의 거쁜한 몸무게만큼 두호는 아직 어린애였다. 땅바닥
에 주저앉아 발버둥치며 울어댔다.
"한호야!"
째지듯 암팡지게 내 이름을 부르며 부엌에서 달려온 엄마가 미친 듯이 내 온몸을 쥐어뜯기 시
작했다. 평소 엄마한테서 볼 수 없었던 발작이었다. 무섭게 쥐어뜯으며 등판을 후려치던 엄마가
두호를 끌어안으며 느닷없이 울음을 터뜨렸다.
납득이 안 가는 이런 우스운 짓거리는 계속되었다. 아버지는 관광객들을 태우고 관광지에 갔다
가 손님들로부터 팁을 받은 날은 꼭꼭 두호의 장난감을 사오곤 했다. 두호는 그 장난감들을 안집
마당에 여기저기 벌여놓고 놀았다. 안집 아이들이 침을 흘리며 두호 곁을 배돌았다. 그러나 두호
는 대단한 고집통이었다. 안집 아이들과 전혀 어울려 놀지 않는 것은 물론 제 장난감에 손만 조
금 대어도 땅바닥에 주저앉아 발버둥치며 울어댔다. 더 우스운 것은 그러한 두호를 편드는 엄마
의 짓거리였다. 땅바닥에 주저앉아 우는 두호를 끌어안으며 두호의 장난감에 손을 댄 안집 아이
들을 향해 욕을 퍼대는 것이었다.
"두호 엄마, 정말 왜 이래요?"
안집 여자와 엄마가 다투는 일이 잦아졌다.
"그래, 우리 애들 보란 듯이 이렇게 많은 장난감을 사다 주는 거예요? 잘 멕이는 거야 애가 약
해서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건 도대체 어린애들도 아니고 뭐예요?"
안집 여자가 마당에 그득한 장난감을 가리켜 보이며 입가에 비웃음을 머금었다.
"아니, 내 애 내 돈으로 이런 거 사주는 게 뭐 잘못이나요?"
"잘못이라는 게 아니라, 도무지 눈 뜨고 볼 수가 없어서 그래요."
"눈 뜨고 못 보다니요?"
"우리 애들 교육상 나빠서 그래요. 부잣집 애들도 그렇게 버릇없인 안 키울 거예요."
"알겠다구요. 셋방살이 주제에 장난감이 다 뭐냐 그 말씀이신데, 이거 집 못 가진 사람 어디 서
러워서 살겠나!"
그렇게 푸념삼아 맞서던 엄마가 나중에는 두호를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리기가 일쑤였다. 그렇
게 어처구니없게 울고불고 하는가 하면 나중에는, "예수쟁이들 맘 좋다고 하는 건 새빨간 거짓말
이라구. 못 사는 사람 괄시하는 것들이 뭔 천당엘 가겠다구..."
이처럼 억지를 부리고 나서는 엄마를 향해 안집 여자가 끌끌 혀를 찬다.
"이 여자가 정말 미쳤나? 맨날 무당만 찾아 다니더니 귀신이 붙었는가 봐."
"그래, 나 미쳤다. 이 예수쟁이야!"
"두호 엄마, 정말 요새 왜 이래?"
"왜 그러다니, 몰라서 그래? 나 미쳤어, 내 새끼가 죽는다는데 안 미칠년 있어?"
엄마가 입에 게거품까지 물며 언성을 높였다.
"두호 엄마!" 엄마와는 달리 안집 여자의 목소리는 낮다. 정말 딱하다는 그런 얼굴로 엄마를 부
른다.
"두호 엄마, 낼 당장 나하고 교회 좀 같이 가요. 난 정말 두호 엄마가 딱해서 죽겠어요. 그래
그 무당 점쟁이들 말을 그대로 믿는 거예요?"
이번에는 엄마 쪽에서 금세 풀죽은 얼굴이 됐다. 한참만에 엄마가 한숨 섞어 말했다.
"물론 이해가 안 갈 거예요. 그런 건 직접 겪어 본 사람이 아니고선 아무도 모른다구요. 난 무
서워요."
엄마가 두호 옷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몸서리쳤다. 싸움은 끝났다. 엄마나 안집 여자는 그 이상
더 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네들은 그 정도로 화해가 된 듯 평상으로 돌아갔다. 엄마의 두호에 대
한 비정상적인 사랑이 그런 대로 묵인된 셈이다.
엄마나 아버지의 두호에 대한 그 이해할 수 없는 편애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나는 물론 알
고 있었다. 두호가 하루하루 시간이 흘러갈수록 살이 빠지고 멍청한 애로 바뀌어 간다는 것을. 나
는 더 참지 못하고 따졌던 것이다.
"왜 두호를 병원에 안 데리고 가는 거예요?"
아버지를 향해 내가 말했다.
"병원엘 안 데리고 가다니?"
"두호가 어디 아픈 줄도 모르고 계시잖아요!"
"야, 너, 엄마한테서 아무 얘기도 못 들었냐!"
"무슨 얘길요?"
"한호야!" 엄마가 부엌에서 밥을 짓다 말고 허둥지둥 방에 들어섰다.
"넌 아무것도 모르면 잠자코 있기나 해! 왜 내가 두호를 병원에 안 데리고 간 것 같니?"
"그럼 병원에 갔었단 말이야?"
"한두 번 간 게 아니란 말이야. 병원에 갈 때마다 그러더라. 두호한테 아무 병도 없다고."
나는 엄마가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알았다. 두호는 단 한 번도 병원에 간 일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애가 왜 저렇게 빌빌한대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아니?"
엄마가 딴전을 피웠다. 아버지는 이미 이불을 머리까지 덮어쓰고 돌아 누운 뒤였다.
그네들의 그 납득하기 어려운 두호에 대한 편애의 비밀이 밝혀진 것은 답십리 고모를 통해서였
다. 내가 우정 고모를 찾아갔던 것이다.
"고모, 그 점쟁이가 그렇게도 용해요?"
나는 짐짓 넘겨짚고 있었다.
"용하다니, 누가?"
"난 다 알고 있다고요. 고모 괜히 시치미 뗄 필요 없어요."
순간 오십이 가까운 고모의 얼굴에는 당황하는 빛이 역력했다.
"엄마가 그 얘길 해주디?"
"무슨 얘길?"
내가 다그쳤다. 어렸을 적부터 고모는 내 말을 잘 들어 주었다. 나는 고모에게서 그네들 비밀의
그 끈정끈정한 것의 정체를 캐내고 말 심산이었던 것이다. 돌아가신 할머니를 꼭 빼닮은 고모가
내 다그침에 견디다 못해 입을 열었다.
"이건 너두 알고 있어야 할 거라고 생각은 했다만..."
오십이 가까운 고모는 열네 살 조카한테 그네들이 숨겨온 그 끈정끈정한 비밀의 정체를 털어놓
기 시작했다.
"네 동생 걔, 살아야 몇 달 더 못 산다."
고모가 들려 준 얘기의 핵심은 두호가 얼마 더 살지 못할 것이란 것이었다. 실로 어처구니없는
얘기였다. 일의 빌미는 아버지가 자갈 채취장에서 자갈을 실어 나르다가 사고를 낸 데서부터였다.
말하자면 엄마는 아버지가 그런 사고를 낼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다. 엄마가 그처럼 찾아다
니던 점쟁이들의 점괘가 그렇게 나왔다. 엄마가 찾아간 점쟁이들은 한결같이 아버지의 운수가 좋
지 않다고 말했다. 할머니가 그렇게 말리는 군대를 기어코 자원해서 들어간 것이며, 군대에서 운
전 사고를 내 사람을 죽인 일 그리고 조상 대대로 물려내려온 논밭을 팔아치운 일에서부터 지금
까지 서울에 올라와 그토록 풀리지 않던 갖가지 일이 모두 점쟁이 말대로였던 것이다. 물론 엄마
는 점쟁이들이 시키는 대로 그 액땜이란 걸 부지런히 했다. 그러나 집안에 깃든 사기가 너무 커
엄마의 정성이 들어 먹히지 못했다는 것이다. 엄마와 고모는 집안의 그 사기를 눌러 줄 어떤 힘
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어떤 점쟁이도 그것을 제대로 일러 주지는 못했다. 얘기가 제각각 달랐
다. 어떤 점쟁이는 몇 대조 할아버지 산소를 잘못 써 그렇다면서 면례장사를 귀띔해 주기도 했고,
어떤 이는 쪽집게로 집어내듯 집을 나가 객사한 할아버지의 원귀를 들춰내기도 했다. 그러나 아
무도 그런 액기를 꺽을 만한 뾰족한 방법을 내놓지는 못했다.
"그런데 느 엄마가 그 점쟁일 서울서 다시 만난 거다."
고모가 말하는 그 점쟁이란 옛날 시골에 살 때 할머니가 단골로 가던 그 용하다는 사람이었다.
할머니가 서울에 올라왔을 때 그 점쟁이를 다시 만나 무슨 얘긴가 들은 뒤로 두호를 미워하기 시
작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할머니가 그네의 임종 바로 직전까지 두호를 얼씬도 못하게 하던
생각이 났다.
엄마가 그 점쟁이를 다시 만난 것은 아버지가 사고를 내고 폐인처럼 멍청한 얼굴로 방구석에
박혔던 몇 달 전, 먹고 살기 위해 옷보따리를 들고 돌아다닐 때였다. 물론 엄마가 먼저 그 할머니
의 단골 점쟁이를 알아봤다. 그 점쟁이 역시 엄마를 알아봤다. 그리고 옛날 시골서 우리 집 내력
을 떠르르 꿰뚫어 알고 있었다. 엄마가 그 점장일 붙들고 늘어졌다.
아무 날 아무 시에 난 애기 잘 크나? 점쟁이가 그렇게 물었다. 잘 큰다고 엄마가 대답했다. 그
렇겠지! 점쟁이가 딴전을 피웠다. 엄마가 한 달동안 장사한 돈을 복채로 놓았다.
문제는 두호였다. 두호가 사라는 것이었다. 한 집안에 살이 낀 사람이 둘 있으면 그렇게 안 좋
다는 얘기였다. 손이 귀한 집안일수록 그런 일이 흔하다고 했다.
"느 아버지하고 두호가 바로 상극이란 거여!"
고모가 말했다.
"그럼 액땜을 하면 될 거 아냐?"
내가 비꼬는 투로 묻자 고모가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딴 방법은 없대드라. 두 사람 중에 하나가 죽는 수밖에..." 그 말을 어렵잖이 해내는 고모의 얼
굴에 개기름이 번지르르했다.
"그래서 두호가 죽을 거란 말예요?"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소리쳤다. 고모가 내 입을 막으면서 말했다. "그 점쟁이 말로는 두호
가 명을 짧게 태어났다고 하더란다. 그 대신 일평생을 산 사람만큼 제 기를 써 먹고 죽을 거란
얘기였다."
몇 달 전 아버지의 운전 사고 때 두호가 길 한가운데 나타났었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군대시절
그 사고 때처럼 느닷없이 한 아이가 길 한가운데 나타나 두 손을 번쩍 들더란 것이다. 그 아이를
피하려고 운전대를 튼 순간 사고가 났다는 얘기였다.
"우리 아버지도 두호가 죽을 거란 걸 알고 있어요?"
"느 아버지한테야 얘기 안할 수가 없더라. 그러나 두호가 느 아버지 대신 죽는다고야 어디 말
하겠디? 그래 느 엄마랑 짜구설랑 두호가 몹쓸병에 걸렸다고 거짓말을 했던 거다."
"아버지가 그걸 믿을 것 같아요?"
"믿든 안 믿든 어쩌겠냐?"
나는 내 마음속에서 뭔가 허물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실망이었다. 나는
적어도 아버지만은 우리 집안 구석구석에 밴 그 미신적인 냄새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던 때문이다. 뭔가 확실히는 알 수 없지만 아버지가 집안의 그 뒤숭숭하고 요령부득의 어떤 힘
과 맞서서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기대해 왔던 것이다. 나는 아버지가 며칠 만에 집에 돌아올 적
마다 두호의 장난감을 한아름씩 사오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벼엉신. 나는 입 속으로 신음처
럼 중얼거렸다.
"내가 느 아버지랑 엄마한테 그랬다. 기왕 죽을 자식, 죽은 뒤에 포원이나 없게 잘 해주라구."
"두호가 죽은 뒤, 산 사람이나 마음 덜 괴로울려고 그렇게들 열심히군요?"
나는 뒤틀리는 심사대로 한 마디 쏘아붙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네들의 생각과는 달리 두호는 더 오래 버텨냈다. 눈은 더욱 퀭하게 들어가고 팔다리는 배배
꼬여갔지만 아직 그렇게 쉽게 꺼질 것 같지는 않았다. 잘 먹고 잘 입고 잘 놀았다. 장난감이 안집
마당을 가득 채웠다. 이제 안집 아이들이 그 장난감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아도 두호는 울지 않았
다.
두호의 취학 통지서가 나왔다.
"몸은 약해도 이놈이 공분 잘할 거야."
아버지가 말했다. 엄마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대꾸했다.
"공연히 애 고생시킬 것 없이 집에서 편히 놀게 하는 게 어때요?"
"당신 정말 미쳤군!"
아버지가 언성을 높였다. 두호 문제를 놓고 그들이 얘기를 나눌 때 아버지는 늘 이처럼 엄마를
나무랐다. 아버지의 마음속에서 싸움이 일고 있다는 뜻이다. 그는 점쟁이와 엄마의 말을 쉽게 밭
아들이지 않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돈만 있으면 두호를 위해서 뭔가 하고 싶어
안달을 했다.
아버지의 일이 잘 풀리면 풀릴수록 두호에게 쏟는 정이 각별했다. 말하자면 두호가 그렇게 빼
빼 메말라가고 있는 대신 자신의 운이 펴인다는 생각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떻든 아버지의
수입이 괜찮아졌다.
"이놈들아, 일 년만 참아라."
일 년 후에는 집을 살 계획을 할 만큼 아버지의 수입은 좋았다. 엄마는 답십리 고모가 하는 계
에 3번과 20번을 들었다. 얼굴에 화색이 돌고 안하던 화장까지 하면서 엄마는 싱싱해졌다. 그러나
엄마가 두호의 불길한 그 일까지 잊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 집 형편이 펴이면 펴일수록, 두
호에 대한 엄마의 편애는 심해갔다. 엄마는 아버지와는 달리 노골적이다. 어쩌면 그것은 자식으로
부터 지레 정을 끊으려던 엄마의 통곡이었는지도 모른다.
"애 죽은 뒤에 애통해 해야 소용없어요."
두호는 엄마가 생각한 것처럼 그렇게 쉽게 죽지 않았다. 엄마의 그러한 몰지각한 생각을 비웃
는 듯 방구석이나 안집 마당에서 소리 없이 혼자 놀았다. 어떤 때는 아침에 나간 애가 저녁 때가
되어 돌아오곤 했다. 두호가 그렇게 밖에 나가 돌아오지 않을 때마다 엄마는 드디어 올 것이 왔
구나 하는 얼굴로 허둥거렸다. 그러나 두호는 제발로 집을 잘 찾아들었다.
"이놈의 새끼야, 너 어디 갔었니?"
엄마가 자신의 예감을 부끄러워하면서 그 부끄러움을 오히려 두호에 대한 매질로 나타냈다.
"엄마 속 이렇게 썩힐려면 어서 칵 죽어 버려!"
매를 맞은 뒤 두호는 허겁지겁 밥을 퍼먹고 그 자리에 쓰러져 잠들곤 했다.
"너 어디 갔었냐?"
어느 날 내가 살살 달래면서 물어 보았다.
"산에 갔어!"
"산에 뭣하러!"
"새 잡으러."
"새?"
"산에 새 많어!"
두호가 새를 좋아한 것은 사실이었다. 안집에서 십자매 한 쌍을 키웠을 때 두호는 몇 시간이고
그 새장 앞에 웅크려 앉아 있곤 했다. 그 십자매가 비를 맞아 죽었을 때 두호는 독감을 앓고 있
었다. 독감을 앓고 나서도 두호는 그 빈 새장 앞에 오랫동안 웅크려 앉아 있곤 했다. 엄마가 두호
를 밖에 나가지 못하게 했다. 두호는 밖에 나가는 대신 집안에서 불장난을 했다.
안집 여자가 얼굴이 파랗게 질려 펄펄 뛰었다. 엄마가 집안의 성냥을 모두 두호 눈에 띄지 않
는 곳에 감춰 놓았다. 그러나 그예 두호가 그 불장난으로 일을 저지른 것이다. 그렇게 깨끗하게
타버릴 수가 없었다. 안집은 물론 우리 집 세간살이까지 몽땅 타버렸다. 처음에 두호까지 죽은 줄
알고 엄마는 땅을 치고 울었다. 두호가 발견된 것은 다음날 아침 이웃집 지하실에서 였다.
"네가 불장난을 했지?"
사람들이 다그쳤다. 두호가 대답 대신 울음을 터뜨렸다. 우리는 거지 신세가 되었다. 엄마는 경
찰서에 스무 번도 넘게 불러다녔다. 아버지가 회사에서 돈을 꾸어다가 안집에 넘겨주었다. 엄마와
아버지가 교도소에 가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우리는 산 밑 동네에 방 하나를 얻어 들었다. 밥을 해 먹는 양은솥에서부터 숟가락까지 모두
새로 사야 했다. 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나는 학교를 당분간 쉬어야 했다.
"이 웬수놈의 새끼!"
엄마는 두호한테 매질을 했다. 분에 복받쳐 매질을 하다간 제풀에 지쳐 두호를 끌어안고 울음
을 터뜨렸다.
두호는 장난감 없이 놀았다. 집에 붙어 있는 시간보다 밖에 나가 노는 시간이 더 많았다. 밖에
서 아이들하고 어울려 노는 게 아니라 혼자서 산에 올라가길 좋아했다. 산에 새가 많아. 그러나
두호는 늘 빈 손으로 돌아와 엄마의 눈치를 보며 밥을 먹은 다음 그 자리에 쓰러져 잠들어 버리
곤 했다.
아버지가 월급을 타 오기가 무섭게 엄마는 점쟁이를 찾아 나섰다. 집안 구석구석이 으스스 귀
기를 띠고 다시 그 이상한 부적들이 나붙기 시작했다. 이제 철이 든 두호는 엄마가 싫어하는 일
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엄마는 두호에 대한 경계를 결코 풀지 않았다.
그런데 또 일이 터졌다. 정말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오히려 깨끗하게 됐어요."
아버지 소식을 가지고 온 회사 사람이 엄마한테 말했다. 아버지가 운전하는 차에 치인 사람이
그 현장에서 죽었다는 것이다. 크게 다쳐 입원을 한 뒤 두고두고 골치 아픈 일이 생기는 것에 비
하면 회사측으로서는 정말 잘 된 일이란 것이었다.
그 사고로 해서 아버지는 삼백 리 떨어진 지방 도시의 경찰서 유치장에 있었다. 엄마가 이틀에
한 번씩 아버지 면회를 갔다. 새벽에 나간 엄마는 밤 12시가 되어서야 돌아왔다. 엄마는 지쳐 있
었다. 내가 라면을 끓여다 놓았지만 엄마는 이미 인사불성으로 잠이 든 뒤였다. 그렇게 옷을 입은
채 쓰러져 잠을 잔 엄마는 다시 새벽 3시쯤 눈을 떠 묵은 빨래를 하고 아침밥을 지어 놓은 다음
집을 나갔다. 엄마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우리 형제 같은 건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그날 밤도 엄마는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우리가 세들어 사는 안집에서는 텔레비전 소리
가 몹시 높게 들려왔다. 온 식구가 박수를 치며 떠들썩했다. 권투중계였다. 우리 나라 선수가 세
계 타이틀을 놓고 싸우고 있을 것이었다.
나는 입술을 악문 채 참았다. 라면을 끓이는 냄비에 덴 손가락이 벌겋게 부풀어 올랐다. 안집
텔레비전이 와와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케이오 펀치가 터진 모양이었다. 우리 방에는 그 흔해빠
진 라디오 하나 없었다.
"혀엉, 라면 다 끓었나?"
두호가 목을 길게 빼들고 부엌을 내다보았다.
두호는 제 몫의 라면 한 그릇을 눈 깜짝할 사이에 먹어치웠다. 우리들은 그날 점심을 굶었던
것이다.
"혀엉, 나 무울!"
내가 부엌으로 물을 뜨러 나갔고, 그 사이에 두호가 내 라면그릇을 차지하고 앉아 콧물을 길게
빼문 채 아귀아귀 먹어대고 있었다. 와아와아 안집 텔레비전이 아우성치고 있었다.
"이 쌍놈에 새끼!"
나는 부드득 이를 갈았다. 두호가 힐끗 나를 치어다보았다. 아아- 나는 두호의 그 걸신들린 눈
을 보자 소름이 끼쳤다. 두호가 이처럼 무서워 보이기는 처음이었다. 고양이 사건이 있던 그날 아
침 엄마한테 목을 죄인 채 나를 쳐다보던 그런 눈이었다.
"두호야, 나하고 산에 가자!"
나는 서둘러 옷을 입으며 말했다. 실로 순간적인 결단이었다.
"..."
"내가 저 뒷산에 새집을 맡아놨다. 밤에 가면 잡을 수 있다."
나는 두호의 그 퀭한 눈이 번쩍 빛을 내는 걸 보았다.
우리는 뛰다시피 산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산의 큰 길을 버리고 우정 샛길을 찾아 숲이 무성한
산 속으로 들었다. 후둑후둑, 산새가 자리를 바꿔 앉느라 부산할 뿐 등산객들이 다 하산한 밤의
산 속은 죽음처럼 조용했다.
"혀엉!"
두호가 내 뒤에서 헐떡이고 있었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돼!"
나는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생각보다 두호의 걸음은 빨랐다. 내가 아무리 빨리 걸어도 두호는
내 뒤에서 헉헉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계속 걸음을 빨리 했다.
"형아, 같이 가자."
드디어 두호가 울음 섞어 질러댔다. 산 속의 그 휘휘한 밤공기가 우리들의 발짝소리에 의해 조
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발 끝에 채인 돌이 비탈을 굴러내렸다. 그럴 때마다 나는 온몸으로 소름이
끼치도록 무서웠다.
"귀신이닷 귀신!"
대여섯 걸음 뒤처진 두호를 향해 내가 느닷없이 부르짖었다. 귀신이닷, 귀신- 밤의 산 속 메아
리는 그 울림이 더욱 쟁쟁하다. 소리질러 놓고 나는 더욱 빨리 뛰었다. 마치 두호에게 잡히기만
하면 죽기라도 하는 양 그렇게 필사적으로 뛰었다.
"혀엉!"
상당히 뒤떨어진 데서 두호가 울부짖고 있었다. 우와우와- 산 전체가 울음소릴 냈다. 나는 문득
뒤돌아보았다. 산 아래 동네의 불빛이 전혀 보이지 않는 위치에까지 이르러 있음을 알게 됐다. 이
제 단 한 발짝 앞도 분간하기 어려운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린 산 속이었다.
나는 길 옆 바위 뒤에 가만히 몸을 숨겼다. 그리고 숨을 죽인 채 두호가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
다렸다. 두호가 징징 울면서 다가오는 기척이 있었다. 두호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나는 가슴이 죄
어들었다. 두호가 무서웠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도망치지 않고 기다렸다. 드디어 두호가 내 곁
까지 이른 순간 나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나는 벌떡 몸을 일으키며 벼락치듯 소리쳤다.
"귀신이닷!"
두호가 악- 소릴 지른 다음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나는 얼결에 다시 산을 치뛰기 시작했다. 온
통 내 발짝 소리뿐이었다. 그 발짝 소리에 질려 그만 걸음을 멈췄다. 정적이 쏴아 밀려 왔다. 다
시 온몸으로 소름이 끼쳤다. 두호의 기척은 어디에고 없었다.
나는 상반된 기대 속에 두호의 소재를 파악하고 싶었다.
"두호야!"
나는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불러 보았다. 그러나 내 목소리는 어둠 속에서 매우 큰 울림이 되
어되돌아왔다. 내가 내 목소리를 의식하는 그런 묘한 두려움이 머리 끝으로 쭈볏쭈볏 뻗쳤다. 나
는 무서움을 느꼈다. 그러나 두호를 버리려는 내 결심이 흔들리는 건 아니었다. 두호는 이미 버려
졌다. 그는 대답할 수 없어야 한다.
"두호야!"
나는 서슴서슴 산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오를 때는 전연 몰랐는데 경사가 급한 돌밭이었다.
발을 조심조심 디뎠다. 두호의 기척을 놓쳐서는 안된다. 두호는 살아 있을 것이다. 살아 있어야
한다. 탁. 나는 발을 헛디뎌 하마터면 비탈길을 굴러내릴 뻔하였다. 내가 발을 헛딛는 순간 돌 하
나가 굴러내리기 시작했다. 비탈을 굴러 골짜기 그 아래로 쏟아져 내리는 돌덩이들의 우당탕거리
는 소리가 산 속의 그 정적을 여지없이 깨고 있었다. 나는 귀를 막았다. 돌덩이 속에 휘말려 굴러
내리는 두호의 비명때문이었다. 두호 혼자 산에 갔어요. 엄마는 내 말을 믿으리라. 걘 죽을애였어
요. 엄마가 사람들을 설득할 것이다. 그러나 귀에서 손을 떼었을 때 이미 돌 구르는 소리는 그친
뒤였다. 그 소리보다 더 무서운 정적이 쏴아 밀려왔다.
"두호야."
나는 계속 두호를 부르면서 서슴서슴 비탈길을 내려서고 있었다. 마치 술래잡기에서 숨은 아이
를 찾는 술래처럼 조심조심 두호의 기척을 살폈다. 그러나 두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문득 소름이
쫙 끼쳤다. 아마 그 돌덩이들의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생각했을 것이다.
"두호야!"
나는 더럭 외로움 같은 걸 느꼈다. 그것은 무서움과는 또 다른 떨림이었다. 나는 부들부들 몸을
떨기 시작했다.
엄마의 실신한 얼굴이 보였다. 네가 두홀 죽였지? 엄마가 내 목덜미를 낚아채며 소리친다. 아득
한 절망이 가슴 밑마닥에서 피어 오른다.
"두호야."
나는 차라리 울고 싶었다. 그러나 몸이 심하게 떨려 쉽게 울어질 것 같지가 않았다.
문득 눈앞에 희끔한 것이 보였다.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혀엉!"
느닷없이 덮쳐든 것은 두호의 작은 몸뚱이었다. 나는 겨우 주저앉는 것만은 면했다. 내 가슴에
서 파닥이며 숨을 할딱이는 작은 새 한 마리. 두호는 내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그 깡마른 두 손
으로 내 몸을 다잡아 쥐고 발발 떨었다. 마치 절벽 끝에 매달린 사람이 필사의 힘으로 바위를 그
러쥐듯 그렇게 내 몸을 그러쥐고 있었다. 나는 두호의 심장 뛰는 소리를 들었다. 어쩌면 그것은
내 심장 소리였는지도 모른다. 두호의 작은 손에서 따스한 체온이 내게 전해졌다.
"임마, 왜 대답 안한 거야?"
내 물음에 두호가 아직은 겁먹은 목소리로,
"형아가 나 내뻐리구 갈려구 그랬지?"
나는 더 견디지 못하고 그 작은 몸뚱이를 와락 껴안았다. 비로소 내 눈에서 뜨거운 것이 줄줄
쏟아졌다. 두호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나는 두호를 등에 업고 어둠 속의 그 산길을 내려오면서 다
시 보이기 시작한 산 아래 마을의 그 휘황한 불빛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불빛이
있는 산 아래 마을에 대한 적의 같은 것은 씻은 듯 가신 뒤였다.
나는 겅둥겅둥 뛰다시피 산길을 걸었다. 내 등에서 두호가 간지럼을 타는 듯 키들키들 웃었다.
"두호야!"
"으응, 혀엉?"
"우린 지금 새처럼 날아서 내려가는 거야."
우리는 사실 어둠의 산에서 그 아래 불빛을 향해 훨훨 날아내리는 기분이었다.
나는 이제 눈물 같은 건 흘리지 않았다. 뱃속 그 깊은 데서 위로 뿌듯하게 치밀어오르는 어떤
힘 같은 걸 느낄 수 있었을 뿐이다.
그것은 날개 꺾인 이 어린 새의 어깻죽지에 새 살이 돋을 때까지 내가 그의 날개가 되어 퍼덕
여 주리라- 그런 마음 다짐이 어금니에 씹힌 때문이었다.
산행(지은이: 김용운)
산과 바다- 둘 중에서, 나는 어느 편이냐 하면 처음부터 산 쪽이었다. 여러 산들 가운데서도 설
악산, 그중에서도 외설악을 더욱 좋아하지만, 어쨌거나 그 설악산에 홀딱 반해 버린 녀석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산악부의 일원으로서 설악산에 다녀온 이후로 그 산에 홀랑 미치다시피 한 나
는 오늘날 까지 20여 년 간, 그 산에다가 나의 순정을 다 바쳐 왔다. 주말이 오면 이미 꾸려진 배
낭을 등에 업고 산으로 줄행랑을 쳤으며, 이래서 누나의 결혼식 날은 물론 할아버지의 장례식에
도 참석을 못했던 녀석이었다.
이쯤 되고 보니, 주위 사람들은 나를 가리켜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았다. 산에 미친 놈이니,
산귀신이니, 설악산 처녀귀신한테 넋 나간 녀석이라는 둥 빈정거림이 대단했지만, 그래도 나는 눈
썹 하나 까딱거리지 않았다. 빈정거림에 흔들리기는커녕, 나는 장차 설악산과 결혼하겠다, 그네의
품속에서 죽을 수만 있다면 보다 더한 기쁨이 없겠노라- 엄숙히 선언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세월이 감에 따라 나의 그처럼 한 선언을 말짱 거짓말이 되어 버렸다. 왜냐하면 나는
그새 결혼을 했으니까. 그리고 먹고 살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어 다니다 보니까 산에다가 나
눠 줄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3년 전까지만 해도, 한 해에 서너 차례씩은 그래도 설악산엘 다녀왔었다. 그러던 것이, 그놈의
작은 기업체를 벌인 재작년부터 그놈의 공장이 거의 거덜이 나 버린 작년말까지 2년 동안은 산행
한 번 못했었다. 설악산은커녕, 가까운 산에도 오를 틈이 없었던 터다.
공장은 아직 문만 닫지 않았지 망한 거나 다름없었다. 처음엔 열다섯명이나 되던 직공 녀석들
이 슬금슬금 다 빠져나가 버리고, 지금은 경리사원 하나와 그 여직원의 사촌동생이라는 어리벙벙
한 사내녀석- 그렇게 둘뿐이었다. 그나마 사내녀석도 엉덩이가 들썩들썩 내일이라도 슬그머니 딴
공장으로 떠나 버릴 눈치였다.
이러니 되겠는가. 애당초 그놈의 공장을 인수한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그러잖아도 망해 가는 공
장을 내 딴엔 소생시킬 자신이 있다 여기며 떠맡은 것인데 그게 아니었다.
녀석은 그 공장을 내게 떠맡기기 위해 얼마나 고생을 했었던가. 척척 뽑은 계산서의 숫자들을
손가락 끝으로 콕콕 짚어가며 "전망이 썩 좋은 사업이라네!" "자네라면 자신 있을 걸세. 연줄연줄
아는 사람(큰 기업체의 간부)들도 많겠구 말씀이야." "조금만 더 밀고 나가면 쇼부(승산)가 나겠
는데, 더는 자금이 딸리니 어쩌겠나." 이래서 "좋다!" 고 결단을 내린 나였다.
그러나 막상 부딪쳐 보니 산 너머 산이었다. 모든 것이 계산서대로 움직여 주질 않았다. 20여
년 동안 산을 타다가 보니, 그런 생활 속에서 사귄 굵직한 사람들도 전혀 없진 않았다. 그러나 그
런 사람들은 단 한 사람 찾아가 만나 보지도 않았었다. 산에서는 내 나름대로 왕- 이었었는데, 구
질구질하게 그들을 찾아가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한다니 말도 되지 않았다.
알고 보면 녀석의 꼬임수에 말려들었던 나였다. 세상 물정에 눈 어두운 친구에게 거적을 씌우
다니, 생각할수록 괘씸한 녀석이었다. 처음엔 녀석을 향해 혼자서 욕설도 퍼붓고 원망도 늘어놨었
지만, 더는 그만두기로 했다. 그래 봤자 내 입만 아팠다. 그 대신에 나는 얻은 것이 한 가지 있었
다. 사람을 믿지 말라, 가까운 친구일수록 더욱 믿지 말라 이거였다. 산 생활과는 정반대의 결론
이었다.
공장이 망해 버린 것- 뒷정리 때문에 아직은 문을 열고 있지만- 은 그렇다 치자. 경험 없고 기
질에 맞지 않다 보면 그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2년 동안 손해봐 가며 직사하게 고생만 한
내게 돌아온 대가가 겨우 인간 불신이란 떨떠름한 매듭이란 말인가. 어느 무엇보다도 그게 서글
펐다.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지. 이제 와서 더 생각하면 뭘 하겠나. 내겐 마누라와 두 명의 어린 자식
들이 매달려 있다. 그들을 위해서라도 나는 힘을 내야 했다. 지친 머리를 달래가며 새로운 용기를
얻어 내기 위해 이윽고 나는 산행을 결심했다.
겨울 날씨답지 않게 포근한 오후였다.
관광버스는 아스팔트 도로 위를 기분 좋게 내달리고 있었다. 1월 1일, 3일간의 신정연휴를 즐기
기 위한 42명의 관광객들을 실은 관광버스가 지금 오른편에 강을 낀 채, 강변도로 위를 신나게
달리고 있는 것이다.
실로 오랜만에 나선 산행이었다. 전 같았으면 마장동 시외버스 정류장에서 속초행 일반버스를
탔을 것이다. 그렇데 나는 지금 관광버스 위에 앉아 있다. 어딘가 격에 어울리지 않게 머쓱한 기
분이었다. 그러나 느닷없이 결심해 버린 산행이고 보니 이것저것 계획할 겨를이 없었다. 그새 벽
장 속에 처박혀진 채 한동안 버림을 당해 온 등산장비들은 녹슬고 곰팡이가 앉은 정도였다. 그놈
들을 끌고 산행을 나서다니 말도 안되었다. 그래서 이번 산행은 그 동안 굳어졌을 관절들을 풀
겸 그저 몸풀이를 위해 나서기로 했고, 이곳저곳 관광회사로 연락해 본 결과 이 버스를 타게 되
었다. 오후 1시에 서울을 출발한 관광버스는 양평-홍천-인제-원통을 거쳐 진부령을 넘어 속초로,
어두워져서야 설악동을 찾아들 것이다.
어쨌든 지금 나의 기분은 그만이었다. 좋아하던 술을 오랫동안 끊고 있던 술꾼이 모처럼 한 잔
술을 마시고 났을 때의 고 짜릿한 맛-바로 그런 기분이었다. 더구나 목적지가 설악산이 아니냐.
오늘 밤엔 설악의 산 그림자를 밟게 되며, 그네의 품에 안겨 잊었던 정을 되새길 수가 있다. 어찌
흥분하지 않겠는가!
나의 자리는 맨 뒤였다. 좌석 배정이 그리 되었다. 뒷좌석의 남은 공간에는 여느 관광버스가 다
그렇듯이 승객들의 덩치 큰 짐들로 치쌓여져 있었다. 그래서 몇몇 우리들 뒷좌석의 승객들은 짐
속에 들어앉아 있는 느낌이었다. 뭐 그까짓 것쯤이야. 포장되어 있지 않은 도로 위에서 버스는 자
주 털렁거렸고, 그럴 적마다 뒷좌석의 우리는 덩달아서 털렁털렁 앉은뱅이춤을 추어야 했다. 그래
도 괜찮았다. 그까짓 것도 문제삼을 게 못 되었다.
관광객들은 왁자지껄 시끌거렸다. 하나같이 씹고, 마시며, 떠들어댔다. 눈치로 보아 그들은 단일
팀이 아니고, 이 직장 저 직장, 이 모임, 저 모임들이 모여들어서 이룬, 말하자면 급조된 관광단이
었다.
그들은 아직은 자기네 친지들끼리 어울려 어쩌구저쩌구 낄낄거렸고, 그런가 하면 어느새 이웃
팀의 사람들과 사귀어 넉살좋게 껄껄대는 자도 더러는 눈에 띄었다. 어쨌든 나만 홀로인 듯싶었
다.
그러나 나는 개의치 않았다. 전에 거의 혼자서 산을 뒤지며 떠돌아 다니지 않았었나. 어찌 보면
그 편이 훨씬 낫다. 신경을 쓰게 거치적거리는 자들과 동행을 하다 보면, 산의 맛을 오롯이 느껴
볼 틈이 없었다. 나는 지금 혼자였다. 누굴 따라 나서지도, 나를 따라 나선 자도 없었다. 아주 홀
가분했다.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내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내 양쪽 옆에 앉아 있는 사내들과는 버스가 처
음 떠날 때쯤 서로서로 눈인사를 가볍게 나누었을 뿐이었다. 그건 그저 형식적인 인사였었다. "알
고 보니 일행이시로군요." 아니면, "일행이 돼서 기쁩니다."
이후로 나의 입은 벙어리가 되어 버렸다. 나는 산행에서 늘 그랬었다. 산은 항시 말이 없고, 나
도 어느새 그 체질을 닮아 버린 탓이었다. 나 혼자서일 때는 말할 것도 없고, 동행이 있었을 때도
꼭 필요한 말 외엔 입 밖에 내질 않았었다. 산이 가까워질수록 산 속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그것
이 차츰 버릇으로 굳어져 버린 것이었다.
달리는 버스 안엔 아까부터 흥겨운 유행가의 가락이 계속 울려 퍼지고 있었다. 경음악이었다.
관광객들은 흥얼흥얼 따라 부르기도 했고, 쿵쿵대며 발장단을 맞추기도 했다. 어떤 자는 꽥꽥 큰
소리로 노래를 뽑으면서 으스대기도 했다. 저 유행가는 내 18번이라는 듯이.
갑자기 음악이 뚝 그쳤다. 마이크 소리가 대신에 울려 나왔다. "에에, 여러분-" "에에, 여러분-"
똑 같은 소리가 두 번 반복되더니,
"이미 관광객 여러분께 말씀 올린 대로, 그러나 다시 한 번 거듭 안내의 말씀과 당부의 말씀을
올리는 바입니다. 저희 관광버스는 오후 7시쯤 설악동에 도착, 이미 내정된 호텔에서 오늘 밤 여
정을 풀 계획이며, 내일 아침 6시에 호텔을 떠나 산에 오를 것입니다. 점심은 산에서 약수로 각자
맛나게 지어 잡수시고, 오후에 하산, 다시 그곳에서 일박, 모레는 설악동을 떠나 낙산사, 의상대
등 명승지를 답사, 속초 부둣가에 들러 싱싱한 생선회를 즐기시고, 다시 경포대로..."
그는 우리들을 인솔하기 위해 관광회사로부터 파견된 총무였다. "당부의 말씀으로는..." 그가 거
기까지 말했을 때 "잘 들어두시라요, 모두들!" 하고 버스의 중간쯤에서 누가 고개를 휘둘러대며
크게 소리쳤다. 진작부터 말수가 많던, 콧구멍이 말코처럼 벌렁한 40대의 우둥퉁한 중년 사내였
다.
"당부의 말씀으로는, 여러분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여기 서 있는 본인의 지시에 따라 주십사
이겁니다. 산에서는 뜻 않던 사고가 자주 발생합니다. 더구나 산이 산이고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저희가 지금 찾아가고 있는 설악산은 우리 나라의 수많은 산들 중
에서도..."
"아암, 명산이고 말고! 무얼로 보나 산 중의 산-이지!"
그렇게 말코의 사내가 말을 덧붙였다.
"예,예, 그렇습니다! 그러니 만치, 여러분께서는 각자를 위하여 몸조심 해 주시고, 또 우린 어디
까지나 단체인 만큼 단체행동에 적극 협조하여, 특히 시간관념에 철저를 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총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말코의 중년 사내가 좌석에서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더니 마이크
소리는 저리 가라 싶게 큰소리로 왁왁 씨부려댔다.
"총무님 말씀이 옳습니다. 이번 우리 관광단을 쭉 살펴보니까 설악산에 초행이신 분들도 꽤나
많으신 것 같은데, 과거부터 산을 즐겼고, 설악산만도 십여 차례 다녀온 바 있는 본인은 그런 의
미에서 주제넘게 한 말씀 덧붙이고 싶어..."
그때부터 말코의 사내는 아주 진지해진 음성으로 산에 대해, 특히 설악산에 관하여 요모조모
소개의 말들을 늘어놨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는 설악산 하면 자기, 제 손바닥 들여다보듯 구석구석 환하다, 그러니 앞
으로는 나의 의견, 나아가 지시도 우습게 여기지 말아다오 이거였다.
아니나다를까, 저 앞쪽에 서 있던 총무가 마이크에다가 대고 얼른 한 마디 했다.
"든든한 안내자를 모시게 돼서 기쁩니다. 감사합니다."
진심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그는 말끝마다 '감사합니다' 소리를 내뱉았다.
총무로부터 그처럼 부추김을 받자, 말코의 사내는 더 의기양양해졌고, 그 이후부터는 차라리 자
기가 인솔자인 양 어쩌구저쩌구 그때마다 행세를 했다.
"여러분, 창 밖 좀 내다보시라요. 저 맑은 산골물, 저 잘생긴 자연석들, 그 얼마나 아름답습네
까! 여기가 막바로 진부령의 진입로, 차는 지금 그 고갯길을 오르고 있는 중이올시다요. 네."
그러면서 말코의 사내는 바로 옆 자리의 여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까지 죽 그의 짝이
되어 나란히 자리를 해 온, 등산모에 파커 차림의 그 여인은 이미 유리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는
데, '말코 녀석, 퍽 예쁜 마누라를 두었군!' 싶을 정도로 여인의 옆 얼굴은 얼핏 봐도 꽤나 미녀였
다.
관광버스는 구불구불 산길을 감돌아 오르고 있었다. 창 밖이 차츰 침침해졌다. 아직은 이르지
만, 곧 어둠이 내릴 시각이었다. 그러나 그 때문만도 아니었다. 갑자기, 정말 갑자기 밀어닥친 안
개 때문이었다. 우유빛 안개였다. 저처럼 농도 짙은 새뽀얀 안개가 어디에 숨어 있다가 이처럼 갑
자기 짓쳐 내려오고 있단 말인가! 안개는 그새 건너편 산은 물론 계곡까지 삼켜 버렸고, 산길을
그리고 차마저 뒤덮어 버렸다. 이제 유리창 밖은 온통 뽀오얀 잿빛의 안개뿐이었다. 안개로 시야
를 차단당한 승객들은 "이런 안개는 난생 처음인걸!" "어쩜!" 감탄사들을 내뿜어 댔고, 그들을 태
운 관광버스는 헤드라이트에 의지한 채 안개에 묻힌 비좁은 산길을 숨가쁘게 오르고 있었다.
이윽고 차가 고개 마루턱에 다다르자, 총무가 얼른 차에서 뛰어내리더니 안개 속으로 사라져
갔다.
"여러분들은 차 밖으로 나가지 말고 가만 자리에 앉아들 있으라요. 총무는 곧 올아온다구요."
말코의 사내가 씨부렁대자,
"왜... 지체를 하죠, 여기서?"
누가 그렇게 물어봤다.
"여기서부터 진부령의 내리막길이라요. 그런데 이 길은 1차선이기 때문에, 산밑의 군인초소에
차 한 대 올라간다는 연락이 오면, 이곳 초소에서는 그 차가 다올라올 때까지 내려갈 차들을 꽉
잡아둔다 이거외다. 아시겠어요?"
"말하자면 외길통행이로군요?"
"맞아요. 아까도 보지 않았습네까? 우리가 방금 올라온 저 아래 진입로에도 초소가 서 있었다
구요. 그게 다..."
그때, 군인초소를 찾아갔던 총무가 차로 되돌아왔다. 그가 차 안으로 올라오자 말코의 사내가
대뜸 말꼬리를 돌려 물어왔다.
"어떻게 됐소, 총무?"
"일이 난처하게 됐습니다! 어쩌죠?"
총무가 울상을 지어 보였다.
"뭐가 어떻게 됐다는 거요, 도대체?"
"운행이 중단됐습니다."
"왜?"
"저놈의 안개 때문이죠!"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이보슈, 운전수 양반! 당신은 운전에 자신있겠지? 거뜬히 길을 내려갈
수 있겠지?"
말코의 사내가 운전수를 향해 소리치자, 총무가 얼른 말을 가로 맡았다.
"그렇더라도 안됩니다!"
"뭐가 안된단 말요?"
"초병들 조장이 딱 잘라 말했다 이겁니다. 왜 잘 아시잖아요, 그들의 임무를? 그들은 이 진부령
고갯길의 안전을 책임맡고 있다 이겁니다. 그는, 혹 무리를 했다가 사고라도 발생하면 어쩌시렵니
까? 누군 보내고 싶지 않아서 운행정지를 시킨 줄 아십니까? 누구보다도 잘 아실만한 분들이 이
러시면 곤란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관광버스 안내원 양반? 하고 나를 타일렀다 이겁니다. 그러니
어쩌겠습니까, 낸들?"
"다시 한 번 갔다 오구려."
"헛수고입니다."
"내가 가서 타협해 볼까?"
"누가 가도 안될 겝니다. 그들의 직속상관인 장군이 명령하기 전엔."
"거 참!"
"그러니 어쩌겠습니까, 이제?"
총무가 입맛을 쩝쩝 다셨다. 그가 이쯤 되자 난처해진 건 버스 안에 타고 있던 관광객들이었다.
"이 근처에 여관은 없소?"
누가 물어봤다.
"없습니다."
힘없는 목소리로 총무가 대꾸했다.
"민박할 데는 없을까?"
"이 많은 숫자를... 아마 어려울 겝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우릴 도대체 어떻게 할 생각이오, 엉? 날씨가 아무리 푸근하기로소니 명색이
겨울밤 아니오. 버스 안에서 오들오들 밤을 새울 수도 없구, 더구나 야영은 어림도 없겠구 말씀
야!"
"글쎄요, 어쨌든 조금만 기다려 주십쇼. 제가 나가서 이리저리 알아보고 올 테니까요."
"나가 봤자야!"
이윽고 말코의 사내가 나서서 말했다.
"여러분, 진정들 하시라요. 이런 때일수록 우린 냉정을 되찾아야 될 줄로 믿습네다."
"네, 그렇습니다!"
총무가 얼른 맞장구를 쳤다. 말코의 사내는 음성을 가다듬어 말을 이었다.
"여기서 남쪽으로 고개 하나를 넘으면 거기에 산장이 있다구요. 에에, 내가 전에 한 번 들른 적
이 있었는데... 거기 가면 우리 모두가 잠잘 수 있다 이겁네다. 어떠슈, 여러분들?"
"얼마나 먼가요, 여기서부터?"
여인 하나가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물어봤다.
"2킬로미터쯤 될 거외다."
"5리 길이로군요."
"아따, 등산하겠다고 떠나오신 양반이 그까짓 5리쯤!"
"맞아요, 맞아!"
사내 하나가 소리를 내질렀다.
그러자 말코의 사내가 더는 들어 볼 필요가 없다는 듯 성급하게 매듭을 지었다.
"내가 그 산장으로 가는 길을 알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자아, 가고 싶은 분들은 나를 따르시라
요!"
이미 어둠이 내린 밤길이었다.
안개는 여전했다.
관광버스는 그 마루턱에 그냥 머무르기로 했다. 산장까지 가자면 가파른 고개를 넘어야 하는데,
안개 속의 운행은 역시 위험하고, 더구나 고갯길이 질퍽한 감탕밭이라 놔서 자칫 헛바퀴질로 미
끄러져 벼랑 아래로 추락한다면 어쩔 것이냐고, 42명의 생명을 움켜쥐고 있는 운전수가 완강히
버텼기 때문이었다.
버스에서 내린 관광객들은 무리무리 고갯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안개 때문에 더욱 어두운 밤이
었지만, 그러나 뽀얗게 빛 바랜 어둠이기도 했다.
나도 그들의 뒤를 따라 고갯길을 올라가고 있었다. 등에 진 배낭이 제법 묵지룩하게 느껴졌다.
그 속엔 갖가지 물건들이 들어 있다. 비록 털이 빠져 낡긴 했지만, 관록을 자랑하는 누런 군용 담
요 한 장, 두툼한 털셔츠, 쌀 외에 비상 식량(라면), 코펠(취사용 그릇), 의약품 주머니, 스베어(버
너) 하며...
그 버너는 스웨덴 제품으로 성능이 썩 좋았다. 소형은 흔히 눈에 띄지만 내 것은 대형이었고,
그때만 해도 국내에서는 그 소유자가 몇 명 정도에 그쳤던 걸로 알고 있다. 나는 고1 시절, 쓸 만
한 등산장비들을 구입하기 위해 틈만 있으면 남대문 시장의 '도깨비' 골목을 뒤지며 싸돌아 다녔
었다. 거기서 이놈을 만났고, 이미 예약돼 있다는 것을 빼앗듯 가로채 왔다. 당시의 가격으로 쌀
한 가마니 값이었다.
나는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해 아주 혼났었다. 나는 물론 누나- 슬슬 구슬려서 내 계획에 억지로
가담시켰다- 의 수업료까지 아버지로부터 앞당겨 받아내야 했고, 그래도 액수가 모자라서 장롱
속을 뒤져 어머니 몰래 돈을 슬쩍해 냈었다. 나중에 모든 사실이 드러나자 어머니는 펄쩍 뛰셨고,
아버지는 싱긋이 웃고 말았지만, 어쨌든 그놈 스베어 때문에 나는 난생 처음으로 도둑질까지 한
셈이다.
그놈 버너가 내 손에 들어오던 날 밤, 나는 녀석을 이불 속으로 끌고 들어가 품 속에 꼭 품고
잤다. 이후로 나의 등산 회수는 더욱 잦아졌다. 등산 때마다 버너를 자랑했다. 그 당시 나는 등산
을 위해 버너를 가지고 다닌 게 아니라, 버너를 자랑하기 위해 등산을 나다녔던 게 아닌가 싶다.
나는 안개 속을 걷고 있었다. 시계는 겨우 2,3미터쯤, 눈앞에 사람의 뒷모습이 어른거렸다.
서둘러야 될 어떤 이유도 없었기 때문에, 버스에서 맨 끝으로 내렸던 나는 역시 맨 뒤에서 일
행을 쫓고 있었다. 그렇다면 앞의 저이도 일행의 선두로부터 썩 뒤처진 사람이다. 타박타박 걷고
있는 모습이 좀은 힘겨워 보였다.
나는 몇 걸음 빨리해 앞으로 다가갔고, 넌지시 말을 건넸다.
"무거우시면 배낭을 벗어 주시죠."
"괜찮아요, 아직은."
여인의 음성이었다. 등산모에 파커 차림인, 버스 안에서 말코의 사내 곁에 앉아 오던 바로 그
여인이었다.
무료하던 참에 잘됐다 싶어, 나는 얼른 벼랑 쪽으로 나서서 여인과 자리의 위치를 바꾼 다음,
나란히 걸으면서 중얼댔다.
"밤길엔 되도록 산 밑자락을 끼고 걸으셔야 안전합니다, 지금처럼."
그러자 여인인 맑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의미 있는 말씀이군요. 허지만 벼랑의 위험 대신에, 이쪽은 산에서 돌이라도 굴러내리면..."
"그럴 위험은 없습니다, 이 길은."
"이 길, 초행이 아니신 모양이죠?"
"네, 서너 번..."
"그런데 아깐 왜 시침을 뚝 따고 아무 말도 않으셨에요?"
"아까라뇨?"
"그가 산장으로 가는 길을 저 혼자서만 아는 양, 마냥 생색을 내던 그때 말이죠."
여인이 말코의 사내를 두고 하는 소리였다.
"댁의 바깥양반이 아니셨던가요?"
"누가요?"
"곁자리에 나란히 앉아 오시던 그분...?"
"아녜요."
"그럼?"
"난 혼자예요."
여인이 쿡쿡 가볍게 몇 번인가 웃어댔다.
순간, 나는 야릇하게도 기분이 썩 좋아짐을 느꼈다. 여인이 말코 녀석의 아내가 아니라는 점에
퍽 안심이 되었고, 그래서 좀은 감격한 것이다. 어쩐지 아까부터 이상하다 싶었다. 호젓한 밤길에
아내를 뒤처지게 내버려 두고 혼자서만 쓱쓱 내빼 버린 말코의 사내는 얼마나 비정한 녀석이란
말인가 여겼었으니까. 말코 녀석, 그러고 보면 어쩌다가 이 여인의 곁에 자리한 행운아(?)였었구
나. 넨장할!
"아직도 먼가요, 산장까지?"
곁에서 여인이 물어봤다.
"조금만 더 가면 고개 마루턱, 그 너머에 마을이 있죠. 거기에 있습니다, 산장도."
"고개 마루턱에서 또 내려가야겠네요, 올라온 만큼?"
"피곤하시죠, 이젠?"
"네, 조금."
"배낭, 이리 주세요."
"미안해서..."
여인이 배낭을 벗었다. 조그맣게 꾸려진 배낭이었다. 그걸 받아 한쪽 어깨에 걸어메며 나는 다
시 걷기 시작했다.
여인은 한결 가벼워진 걸음걸이였다. 질퍽한 진흙길이었기 때문에, 여인은 이따금 몸의 중심을
잃고 기우뚱거렸다. 그럴 때마다, 곁에서 내가 여인의 한쪽 팔을 잡아 주었다.
여인은 그런 나의 도움을 굳이 마다하지 않았다. 어느 때는 먼저 손을 뻗쳐 나의 팔을 잡기도
했다. 이번엔 엉겁결에 나의 손목을 꽉 쥐었다가 슬며시 놓으며 물어봤다.
"집을 자주 나다니시는 모양이죠?"
"어떻게 아셨죠?"
"밤길에 익숙하다든가... 어쨌든 그렇게 느껴지는군요."
"전엔..."
"요즘엔 틈이 없으시다 이건가요?"
"그렇습니다."
"왜요?"
"손바닥만한 공장 하나를 꾸려나가다 보니 시간이 있어야 말이죠."
"공장은 잘 되나요?"
"잘 되는 게 뭡니까!"
"그럼?"
"망해 버렸답니다."
"호호홋!"
여인이 갑자기 웃어댔다.
"왜 웃으셨습니까?"
"미안해요. 웃음이 절로 나왔어요. 요즘 세상엔 없어도 있는 체하잖아요? 그런데 댁은 귀여울
정도로 고지식하셔서 그만..."
"허헛!"
나도 웃어대자 여인이 불쑥 물어봤다.
"무슨 공장였게요?"
"쉽게 말씀드려서... 포장용 비닐봉투를 만들어 냈었죠."
"실크 인쇄-는요?"
"그런 전문용어까지 어떻게 알고 계시죠?"
내가 좀은 놀라며 묻자, 대꾸는 하지 않고 여인이 엉뚱하게 또 물어봤다.
"직공들이 몇 명이나 되었나요?"
"열댓."
"큰 회사에다가 제품을 납품시켰겠군요?"
"맞아요."
"한 달의 외형 거래액은요?"
"작아요. 그저 사오백만 원쯤..."
"자금 회전이 잘 안되던가요?"
"그래서 두 손 번쩍 들고 만세 부르게 된 거죠. 때로는 비싼 금리로 빚 얻어다가 재료를 사서
제품을 만들어 납품시켜 놓으면..."
"상대방 회사에서는 몇 달 뒤에 현금이 될 그런 어음으로 대금을 치뤄준다 이거죠?"
"맞았습니다. 헌데 댁은 어떻게 그런 걸 훤히..."
"공장문은 완전히 닫았나요?"
"아직... 여기저기 수금할 게 좀 남아서..."
"그럼 내일이라도 튼튼한 납품처를 만나면 다시 문을 열 생각이신가요?"
"그런 회사를 만나기가 어디 쉬운가요. 경쟁이 워낙 치열해 놔서..."
거기서 여인이 얼른 화제를 바꿨다.
"밤경치가 참 아름답네요!"
"마을이 가깝군요."
저만큼 마을의 윤곽이 드러나 보였다. 안개와 뒤범벅이 된 어둠 속에 50여 채의 집들이 옹기종
기 모여 앉아 있었다. 집집마다 들창에 불빛이 화안했다. 울타리 너머로 불빛 번지는 들창들이 마
냥 평화로웠다. 마을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런 데 와서 살았으면 좋겠네요!"
"수금이 되는 대로 아내에게 맡기고 난 배낭지고 전처럼 산으로 떠돌아 다닐까 해요."
"그러면 되나요. 그 돈으로 다시 밑천을 삼으셔야죠. 안 그래요?"
"고맙게도 이번엔 아내가 나서 보겠대요. 학교 근처로 가서 조그만 문방구점을 차리겠다나요?"
"그럼 댁은?"
"당신은 무능하니까, 그저 산에나 다니며 한세상 살다가 가라는군요, 젠장!"
"호호홋!"
"이번엔 왜 웃으셨습니까?"
"너무너무 귀여워서요."
"누가요?"
"댁이!"
산장이 가까웠다. 여인이 손을 뻗쳐 내게로부터 자기의 배낭을 건네 받고는 웃으며 말했다.
"처음 만난 여자 앞에서 자신을 무능하다고 평가하는 남자는 드물어요. 그리고 흔히 총각 행세
를 한다든가, 아니면 자기의 아내는 멋대가리가 없다느니 애써 가며 깎아내리는 게 사내들의 상
식인데..."
그새 우리는 산장의 앞마당으로 들어섰다. 산장은 멀끔한 2층 건물이었다. 외등과 방들의 유리
창으로부터 흘러 나오는 전등 불빛 때문에 마당은 화안했고, 한 켠엔 통나무 장작들이 무더기로
치쌓여져 있었다.
나도 남들처럼 마당을 서성대면서 저쪽 허름한 별채를 지켜봤다. 산장에 딸린 단층집으로서, 별
채는 방들이 여섯 개쯤 되었었다. 흔히 본채엔 휴양객들이, 별채엔 뜨내기 산꾼들이 묵어 가기 일
쑤였는데, 나도 몇 밤을 신세진 적이 있었다. 어쩌면 우린 오늘 밤을 저곳에서 보내게 될는지도
모른다. 이맘때쯤, 산장의 본채는 늘 만원이었었으니까.
이윽고 산장의 사무실을 찾아갔던 두 사내가 돌아왔다. 어깨를 으쓱이며 다가온 말코의 사내가
총무를 제쳐놓고 나서서 말했다.
"자칫했으면 얼어죽을 뻔했다구요. 에에, 이쪽엔 빈 방들이 없구, 저켠 별채로 가자구요, 모두
들. 다행히 별채는 비어 있었다구요. 정말이지 아슬아슬했지. 이 산장을 알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꼼짝없이 얼어죽는 건데. 안 그렇소, 여러분?"
산골의 날씨는 변덕이 잦다.
흐렸는가 싶다간 활짝 개고, 그러다간 느닷없이 비나 눈, 아니면 짙은 안개가 끼고... 산이 깊을
수록 변화도 심하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새벽부터 희끗희끗 눈발이 비치더니, 아침나절이 되자 아예 펑펑 쏟아져 내렸다. 눈송이들은 이
따금씩 불어대는 바람에 쓸려 이리저리 휘이휘이 흩날리곤 했다.
별채의 주위는 고요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마을은 1백여 미터나 저 아래 떨어져 있고, 산장의 본채도 50여 미터나 멀었
다.
더구나 지금 별채는 방마다 텅 비어 있다. 간밤을 별채에서 보낸 일행인 관광객들은 새벽에 일
어나 말코의 사내를 뒤따라 내설악으로 떠나 버렸다.
안개와 감탕밭 때문에 진부령 고개 마루터기에서 밤잠을 잔 관광버스는, 새벽이 되자 안개도
걷히고 진흙길도 약간 얼어붙어서 산장 아래 마을까지 찾아들었다.
이에 용기를 얻은 관광객들은 그러잖아도 어쩌니저쩌니 불평들이 많던 참에 잘 됐다 싶어, 본
전도 뽑을 겸 부랴부랴 아침밥을 지어먹고 별채를 떠났다. 그들을 태운 관광버스는 다시 그 마루
턱을 향해 진작 이곳을 떠나갔다.
아마 그 관광버스는 마루터기에서 산길을 내려 '원통'으로 되돌아갔을게다. 눈이 이쯤 내렸고
보면, 동해안 쪽의 내림길은 여전히 운행이 금지 될 테지만, 엊저녁에 올라왔던 그 길은 주행거리
가 보다 짧고, 경사도 급하지 않아 운행에 별 지장이 없을 것이었다.
관광버스는 원통을 거쳐 장수대까지밖에 더는 못 나아가리라. 그들은 거기서 버스에서 내려 그
때부터 걸어서 산을 오르기 시작할 게고, 한계령-귀때기 청봉-대청봉, 그러나 설악산의 주봉인 대
청봉까진 어림도 없을 게다. 기껏 귀때기 청봉, 아니 거기까지도 못 가보고 도중에서 하산하리라.
왜냐하면 부녀자도 낀 풋나기 산꾼들인 데다가, 돌아올 시간까지 계산에 넣어야 하니까. 말코 녀
석이 잘 알아서 인도할 테지.
나는 그들과 더불어 떠나지 않았다. 간밤에 나는 총무랑 말코 녀석, 그리고 다른 세 병과 함께
한 방에 들었었다. 여섯 명이 잠자기에 방이 너무 비접은 데다가, 슬며시 밖으로 나간 말코의 사
내는 저켠 앞마당으로 가서 마른 장작 한 아름을 더 안아다가 우리 방 아궁이 속으로 쓸어 놓었
기 때문에 방은 엉덩이가 탈 정도로 쩔쩔 끓었고, 그래서 더위에 약한 나는 온통 밤을 설쳐야 했
다.
그뿐인가. 말코의 사내는 남들도 못 자게 지분거려 가며 밤 늦도록 술타령에 따로 화투판까지
벌였었다. 인생이 어쩌고, 산은 어쩌고 낚시, 계집, 술, 노름... 또 내일의 계획에 대해서 씨부렁거
릴 적마다 총무는 한 곁에서 '감사합니다' 소리를 빠뜨리지 않았었다.
이래저래 잠을 설친 나는 새벽녘이 되자 그만 머리 속이 찌푸둥했고, 두 눈꺼풀이 뺏뺏해졌다.
그때쯤 모두가 일어나서는 밥을 짓는다, 찌개를 끓인다 소란을 피웠는데, 나는 그때 마음을 굳혔
었다. 뭐 산삼을 캐러 가는 것도 아닌데, 여기 남아서 잠이나 실컷 자자고. 총무, 아니 말코 녀석
이 다 알아서 할 테지. 그랬더니 아니나다를까, 말코 녀석 떠나면서 하는 말이 "남아서 짐들 좀
지켜 주슈." 히죽이 웃어댔었다.
까악- 까악-
들창 밖에서 까마귀가 울어댔다.
얼추 12시에 가까웠다. 나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앉았다. 방 안을 어수선했다. 그들의 배낭들
때문이었다. 점심식사는 산에 올라 할 테니까, 그에 필요한 장비만 달랑 백 속에 담아 들고 떠난
것이다.
어쨌거나 나도 요기를 해 두어야 했다. 아침 겸 점심식사가 될 것이다. 앉은뱅이 걸음으로 나의
배낭을 찾아 끌어다 놓고, 그 속에서 쌀과 그릇, 버너를 끄집어 냈다.
까악- 까악-
쌀이 담긴 그릇을 들고 나는 방문을 밀치며 밖으로 나섰다.
고요했다.
눈송이들이 펄펄 날리고 있었다.
마당가에 우뚝 박힌 펌프 주위는 물론 그 뒤의 겨울밭, 마을의 집들, 건너편 산, 산줄기는 이미
하얗게 눈을 뒤집어쓰고 있었고, 그 너머 하늘은 눈발에 가려 가물가물 했다.
나는 문득 시선을 돌려 별채를 죽 살펴봤다. 기역자로 지어진 슬레이트 지붕의 낡은 집이었다.
저켠 방문 앞에 신발 한 켤레가 놓여져 있었다. 등산화였다. 나 혼자만 남아 있는 줄 알았는데,
또 누가... 생각하며 나는 그리로 다가갔다.
방문을 노크하자,
"누구세요?"
좀은 겁먹은 여자의 음성이 방 안에서 흘러나왔다.
두 번째 노크를 하고, 내가 누구라는 것을 알리자 비로소 잠겨졌던 방문이 열렸는데, 그넨 뜻밖
에 어젯밤 더불어서 밤길을 걸어왔던 바로 그 여인이었다.
"웬일이십니까?"
내가 묻자,
"네, 그렇게 됐어요."
조금 야릇한 웃음을 보이며 여인이 말을 이었다.
"어젯밤에 화장실을 다녀오다가 발을 삐끗했는데, 아침이 되니까 걷기에 힘들지 뭐예요. 그래서
남게 됐는데... 잘 됐네요, 뭐."
"아주 심하게 다치셨습니까?"
"그런 정도는 아녜요."
"식사는?"
"한 방을 쓰던 사람들이 같이 먹자고 했지만, 뭐 별로 생각이 없어서..."
"마침 나도 식사 준비를 하려던 길이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나는 곧 우리 방으로 되돌아왔다. 쌀을 더 꺼내 펌프물에 씻어다가 버너 불 위에 앉혔다. 그리
고 이것저것 집어넣고 김치찌개도 끓일 준비를 했다.
얼마 후에, 나는 여인을 데리러 그 방으로 갔다. 바지에 스웨터를 걸친 여인은 방문 밖으로 나
왔다. 심한 부상은 아니었다. 내가 한쪽 팔을 잡고 거들어 주자, 삐끗해서 질린 발을 조금씩 끌며
이쪽 방까지 왔다.
방 안으로 들어선 여인은 아랫목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방바닥 위에 씌워 놓은 담요 밑으로 두
손바닥을 쓱 밀어넣어 보더니,
"어머! 여긴 아직까지도 따뜻하네!"
웃음을 비쳤다.
"말코의 사내 덕분이죠."
"말코... 그게 누군데요?"
"있습니다, 그런 녀석. 덤벙거리는..."
"알겠네요, 누군지. 그가 나무를 도둑질해다가 이 방에만 더 땐 모양이죠?"
여인이 쿡쿡 몇 번인가 웃어댔다.
우리는 곧 식사를 시작했다. 밥 맛이랑 찌개 맛이랑 짐짓 내 솜씨를 칭찬하고 난 여인이,
"자주 산에 와야겠네."
넌지시 말을 던졌다.
"왜요?"
"지어주는 밥 앉아서 받아 먹게."
"그때마다 어딜 다치셔야죠."
"호홋, 그런가요?"
"실례지만..."
"몇 살이냐 이거죠? 밉네요, 조금! 아무래도 내쪽이 대여섯쯤 연상일 것 같은데?"
"그럴 것 같군요."
"헌데... 어젯밤 그거, 생각해 봤어요?"
"뭘요?"
"공장 문제."
"더는 미련을 갖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취직을 해볼까 생각중입니다."
"쉽게 구해질까요?"
"찾아보면 있겠죠, 어디엔가."
"자신 만만하군요?"
"아직은!"
"속담에 이런 말 있죠? 새벽 뭣 서지 않는 녀석에겐 빚도 주지 말라구. 호호홋!... 의욕이 없으
면 무력해지고, 무력한 자는 무능해진다는 말인데, 알고 보니 댁은 무능한 분이 아녜요. 아주 유
능한 사람이라구요. 의욕이 살았으니까요!"
"점수를 후하게 주시는군요."
담배를 피워 물으며 내가 웃자, 여인도 식사를 끝내고 거늑해진 기분으로,
"산에 자주 와야 되겠어요, 정말."
살짝 웃어댔다. 어찌 보면 나이보다 훨씬 앳돼 보이는, 음성이나 용모가 상냥스런 여인이었다.
나는 식사를 하느라고 널브러져 있는 방 안을 대충 치웠다. 그릇들을 챙겨가지고 밖으로 나왔
다.
눈발은 성글었으나 그치지는 않았다.
저쪽 눈밭 위에서 동네 개 두 마리가 뛰놀고 있었다.
참새떼가 후룩후룩 허공을 지나가고 있었다.
펌프로 물을 뽑아내가며 그릇들을 씻어 들고 나는 다시 방 안으로 들어왔다. 마른 수건으로 손
을 문지른 후, 나는 또 담배개비를 입에 물었고, 라이터 불을 일으키며 얼핏 생각했다. 이제부터
나는 할 일이 없다. 일감을 찾자. 없으면 일거리를 만들자.
방의 창가에 서 있는 나를 빤히 올려다보며 여인이 저쪽에서 중얼댔다.
"왜요, 어딜 가려구요?"
"네."
"어딜...?"
"지팡이를 하나 만들어다 드리려구요."
"괜찮아요. 그 대신에 이리 와서 얘기나 해요. 심심한데!"
"그럴까요?"
나는 그네의 곁으로 가서 앉았다. 여인과 나란히, 방구석에 놓인 배낭에다가 등을 기대고서,
"밖에 눈이 내리나요, 지금도?"
"네."
"고요해요, 너무! 원시림 속이 이렇겠죠?"
"글쎄요."
"아님 무인도 에라도 온 듯해요, 둘이. ... 안 그래요?"
까악- 까악-
까마귀가 울고 있었다. 펌프장 뒤에 눈밭에서 들려오는가 싶다.
후룩후룩 새떼의 날갯짓 소리가 일어났다. 느낌으로 보아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다. 펌프장? 그
렇지. 그 주위엔 쌀알들이 자자분히 흩어져 있었으니까. 그곳에 내려 낱알들을 쪼다가 제풀에 놀
란 참새떼가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소리일 게다.
우리는 일을 끝냈다. 여인도 나도 쑥스러워하지는 않았다. 나보다도 여인이 더 훈감한 표정이었
다.
오후에, 우린 또 한차례의 그 일을 치뤘다.
버스가 서울에 도착하자, 차에서 내린 여인은 내게 전호번호를 일러 준후 밤거리로 멀어져 갔
다.
그러나 나는 여인에게 전화를 걸지 않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리고 집에 가서도 아내에게 그 산
장 별채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 입을 다물기로 했다.
관계(지은이: 유재용)
나만큼 일자리를 많이 옮겨 다닌 사람도 드물 것이다. 열 손가락과 열 발가락을 합해 가지고도
그 수를 다 헤아릴 수가 없을 지경이니 말이다. 그러자니 이상한 일, 어처구니없는 일, 엉뚱한 일
을 적지 않게 겪어 보았다. 장현삼 씨 집에 들어가서 겪은 일만 해도 그랬다.
그해 여름 또 일자리를 잃고 빈들거리는 내 꼬락서니가 보기에 딱했던지 동네 복덕방 영감님이
손가락을 까딱까딱해 나를 불렀다.
"만복이, 자네 놀구 먹느니 다문 며칠 밥 얻어먹을 자리라두 들어가 보려나?"
"식구들이 피서 여행 떠나서 비어 있는 집 봐주는 일인가요?"
"지레짐작으루 아는 척 말구 생각 있는지 없는지나 말하게."
나는 며칠 동안 밥 얻어먹을 자리라도 들어가 보겠노라고 대답했다.
"들어가겠다니 말이네만, 그렇다구 해서 며칠 동안이라구 날짜가 딱 정해져 있는 건 아니야. 상
전 비위만 맞출 줄 알면 몇 해 동안이라두 붙어 있을 수 있는 자리란 말일세."
두 다리 못 쓰는 사람 시중들어 주는 일이라고 했다. 한데 일을 하겠다며 그 집으로 들어간 사
람은 오래 붙어 있지 못하고 뛰쳐나오곤 한다는 것이었다.
"먹여 주구 재워 주기만 하는 게 아니라 월급두 넉넉하게 준다는데, 상전 비위 맞추면서 진득
이 붙지 못하구 왜들 그렇게 서둘러 뛰어나오는지 영문을 모르겠구만."
사람을 구해 보내고 나서 며칠이 지나기가 바쁘게 사람이 나갔으니 새 사람 구해 달라고 전갈
이 온다는 것이었다. 공장이니 공사판이니 해서 일자리가 여기저기 쉽사리 굴러 다니는 판이라
개인집 심부름 따윈 눈에차게 여기지 않기 때문일 것이라고 짐작해 보기도 했다.
"저두 남 비위 맞추는 데는 젬병인데요."
나는 남의 가려운 곳 눈치로 알아내 가지고 살살 긁어 주는 일에는 별로 자신이 없었다.
"비위 맞춘다는 게 별난 짓하는 게 아니야. 시키는 일 고분고분 따라하면서 좀 언짢거나 고까
운 일 생기더라두 꾹 참구 견디구 하는 게 바루 비위 맞추는 게지."
그런 것이라면 나두 누구 못지않게 해낼 자신이 있다는 생각이었다. 건강한 몸과 참을성이야말
로 내가 지닌 재산의 전부인 것이다.
"어쨌든 들어가서 시중들어 보다가 정 못하겠거든 훌쩍 뛰쳐나와 버리게나. 자네두 훌쩍 뛰쳐
나오는 데는 선수 아닌가?"
그것은 잘 모르고 하는 소리였다. 바로 말하면 수없이 많은 일자리를 옮겨 다녔지만 내가 먼저
일자리를 박차고 나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상전의 노여움을 사서 쫓겨난 일도 없었다. 부득이한
일, 나를 부리던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든가, 이민을 갔다든가, 파산을 했다든가, 아니면 그 일자리
가 처음부터 기한부의 것이었다든가 했을 뿐이었던 것이다.
장현삼 씨를 처음 대했을 때 이 사람이 이제부터 내가 섬겨야 할 상전이라는 실감이 생겨나지
않았다. 진짜 상전이 어디서 나타나 "현삼이는 내 아들인데 앞으루 잘 돌봐 주게" 이렇게 말할 것
같았다.
장현삼 씨는 조그맣고 가냘픈 모습으로 안락의자 속에 푹 파묻혀 있었다. 더위로 드러내놓은
목줄기와 팔다리가 보기에 딱할 만큼 창백하고 가느다랬다. 안락의자에 편안히 기대고 앉아 있기
에도 힘들어 하는 것이 아닐까 의심이 들 만큼 연약해 보였다.
"이만복 씨, 참 외우기 쉬운 이름이군요. 허지만 우리 집에 며칠 동안이나 머무르다가 떠나가시
려나?"
겉보기와는 달리 장현삼 씨의 말소리는 탄탄하게 힘이 배어 있었고 의젓했다. 나는 자리를 고
쳐 앉았다. 말소리를 들으니 장현삼 씨가 상전노릇을 제법 해낼 수가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
다. 상전이란 이왕이면 넘보이는 쪽보다 우러러보이는 쪽이 나은 것이다.
"선생님이 필요 없으니 떠나 달라구 말씀하실 때까지 있겠습니다."
나는 공손하게 머리를 숙여 보이며 말했다. 물그늘처럼 아스무레한 미소가 장현삼 씨의 입꼬리
와 눈꼬리에 잠시 머물렀다가 흩어졌다. 미소가 걷힌 눈꼬리에서 서릿발같이 싸늘한 빛이 뿜어나
왔다.
"복덕방 영감님한테 소개비 얼마나 줬나요?"
장현삼 씨가 여담이라는 듯 물었다.
"첫 월급 받으면 대포값이나 드리기로 했는데요."
"월급이라, 물론 월급 지급하지요. 오늘이 칠월 십오일이니까 팔월 십오일에 첫 월급 지급해 드
리지요. 두구 보시오. 절대루 섭섭치 않을 만한 액수가 될 테니까요. 헌데 이만복 씨가 첫 월급
손에 쥐어 보두룩 붙어 있을래나 모르지."
장현삼 씨의 눈빛은 내 가슴속을 헤쳐 보려는 듯 날이 서 있었다. 장현삼 씨에게 탄탄하고 의
젓한 말소리 말고도 싸늘하게 날선 눈빛이 있었다.
"제가 쓸 만한 인간이라구 선생님이 생각해 주신다면..."
나는 나도 모르게 말꼬리를 감췄다. 장현삼 씨의 날선 눈빛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보다 앞서서
이 집에 며칠씩 머무르다가 떠나가 버렸다는 사람들을 떠올려 보았다. 스스로 뛰쳐나간 것일까,
쫓겨난 것일까.
"어디 두구 봅시다. 이만복 씨가 첫 월급을 손에 쥐게 되나 못 되나?"
장현삼 씨의 입꼬리와 눈꼬리에 다시 물그늘 같은 미소가 살짝 엉겼다가 흩어졌다. 미소가 걷
힌 눈꼬리에서 서릿발 같은 빛이 뿜어나왔다.
장현삼 씨와 나 말고 박씨 성 가진 오십 줄의 가정부가 한 사람 있었다. 부엌일만 열심히 할
뿐 그림자처럼 조용히 움직이며 말이 별로 없는 사람이었다. 신경에 거슬르지를 않았다.
내가 맡은 역할은 미리 알고 넘어온 대로 장현삼 씨의 손발, 팔다리 노릇을 하는 것이었다. 장
현삼 씨가 쓰지 못하는 것은 두 다리뿐이었지만 성한 손팔도 덩달아 묶여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다리에 힘이 없으면 대신 팔심이 세어진다고 하지만 장현삼 씨는 팔심도 별로 세지 못했다. 장현
삼 씨가 아침에 잠을 깨면서부터 밤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나는 대용 팔다리로서 장현삼 씨 곁에
붙어 있어야 했다.
장현삼 씨는 새벽잠이 없었다. 삼십도 안된 젊은 사람인데 이상할 만큼 새벽잠이 없었다. 나로
말하면 줄곧 남의 밑에서 일해 주며 살아온 터여서 아침 여섯 시면 습관적으로 잠을 깨곤 했는데
장현삼 씨는 나보다도 한 시간 앞서 잠을 깼다. 내 방에 설치된 부저가 요란하게 소리를 질러대
깜짝 놀라 일어나 보면 네 시 오십 분에서 다섯 시 사이였다.
나는 허겁지겁 옷을 주워 입고는 까고 잔 요 밑어 넣어 두었던 옆방문 열쇠를 찾아들고 방을
나간다. 장현삼 씨의 침실문은 열쇠로 열어야 열린다. 방에는 환하게 불이 켜져 있다. 장현삼 씨
의 침대 머리맡 벽에는 몇 개의 스위치가 장치되어 있다. 나는 침대 곁에 가 서서 지시를 기다린
다. 장현삼 씨의 방광이 팅팅 부풀어 있을 것이다.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지만 나
는 지시를 기다린다.
"오줌."
장현삼 씨가 말한다. 나는 요강 뚜껑을 열어 놓고, 장현삼 씨의 잠옷바지를 까내리고 장현삼 씨
를 안아다가 요강에 앉히고, 배설이 끝나기를 기다려 침대위로 다시 옮겨다 눕히고, 요강 뚜껑을
닫고는 침대 곁 먼저 자리로 돌아가 선다. 정원을 산책한 차례였다. 그래도 나는 다음 지시를 기
다리며 묵묵히 서 있는다.
"정해진 순서나 다름없는데두 내가 말을 해야 움직이오?"
언젠가 장현삼 씨가 짜증스럽게 물었다.
"죄송합니다."
나는 그대로 버티고 선 채 대답했다.
"마치 기계 같으시구만. 철저하게 기계가 될 수 있다면 그것두 좋지. 정원에 나가서 새벽 공기
를 마실 차례요."
장현삼 씨는 내 가슴속을 헤쳐 보듯 날선 눈초리로 쏘아보며 말했다. 나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
게 다가가 장현삼 씨의 몸에서 잠옷을 벗기고 평상복으로 갈아입힌 뒤 바퀴의자로 옮겨 앉힌다.
장현삼 씨의 몸은 이불 홑껍데기처럼 얇고 가뿐하다. 그 가뿐한 몸을 안아 올릴 때면 장현삼 씨
의 말소리와 눈초리가 일으켜 주는 존경심과 두려움이 조금은 묽어지는 느낌이기도 하다. 장현삼
씨는 바퀴의자의 바퀴를 제 손으로 굴려 방을 나가 마루를 풍뎅이가 기어가듯 움직여간다. 현관
못미처에서 바퀴의자가 멎는다. 나는 장현삼 씨를 안아 올려 현관에서 대기하고 있는 옥외용 바
퀴의자로 옮겨 앉힌다. 현관과 정원 사이에는 층계가 있다. 나는 장현삼 씨는 태운 채 바퀴의자를
번쩍 들어올려 층계 밑에다 옮겨 놓는다. 날이 비로소 밝아오기 시작한다. 정원의 화초와 수목들
이 잠을 깨어 하품하며 기지개 펴듯 모습을 드러내 놓는다. 장현삼 씨는 바퀴를 굴러 정원을 느
릿느릿 움직여 다니고, 두 마리의 셰퍼드가 그 옆을 따르고 나는 정원에 물을 뿌리고 청소를 시
작한다.
장현삼 씨가 식전에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을 한 시간 반쯤 된다. 나는 장현삼 씨를 집안으로
옮겨 놓고 세면장으로 데리고 간다. 커다란 타월을 이발할 때처럼 두르고 세면대 앞으로 바퀴의
자를 바짝 다가 놓는다. 세면대는 장현삼 씨가 바퀴의자에 앉아서 사용하기 알맞는 높이이다. 그
래도 얼굴을 씻고 나면 타월을 펑 젖는다. 나는 세수를 끝낸 장현삼 씨를 안아다가 식탁의자에
앉힌다. 식사를 하며 몸을 앞으로 구부릴 때 의지가 되고 손도 짚으라고 나무판자를 가슴 앞에
가로지르도록 장치된 의자다. 제 능력만으로 제 몸을 추스릴 수 없는 장현삼 씨가 살아가기에 편
리하도록 구석구석 손질이 되어 있다. 장현삼 씨가 식사하는 모습은 고양이 같다. 요것조것 가려
내고 들춰내며 깨지락거린다. 부과된 의무를 완수하기 위해서라는 듯 억지로 밥 한 공기를 비워
내는 꼴이다. 아침식사를 끝마치기가 바쁘게 장현삼 씨는 변의를 느끼게 되는 모양이다.
"관장합시다."
장현삼 씨가 말한다. 나는 약장에서 관장약을 꺼내온다. 관장약은 애초에 주사기 속에 들어 있
다. 나는 주사기를 장현삼 씨의 항문 속에 찔러넣고 관장액을 천천히 주사하고는 장현삼 씨를 안
아다가 화장실 변기 위에 앉힌다. 물을 그렇게 많이 먹는데도 변은 몹시 되다랗다. 장현삼 씨는
늘 물을 목구멍 속으로 넘기는 빛이다. 믹서가 항시 윙윙 소리를 내고 돌아가며 당근물을 만들어
내기도 하고, 딸기물을, 토마토물을, 때로는 인삼물을 만들어낸다. 장현삼 씨가 일을 마친 뒤 장현
삼 씨의 항문을 들여다보며 휴지로 닦아 주는 것도 내게 할당된 일이다. 장현삼 씨는 변기 위에
서 마루 창가의 안락의자로 옮겨진다. 등의자는 시원하긴 하지만 배긴다며 싫어한다. 여름용 등받
이와 깔개가 부착된 안락의자에 푹 파묻히듯 기대앉아 장현삼 씨는 여름이 무성한 정원을 멀거니
내다본다. 배설을 하고 난 뒤여서 그런지 얼굴빛이 평화로워 보인다. 이때를 틈타 가정부 박씨가
내게 일을 시키거나 심부름을 시킨다.
"이씨, 나 조금만 거들어 주겠수?"
박씨는 이런 식으로 나를 부려먹는다. 박씨는 부려먹지만 미안해 하면서 부려먹는다. 나는 기꺼
이 일을 거들어 준다. 점심 때가 된다. 점심을 먹고나서 한 시간쯤 지나면 장현삼 씨는 목욕을 한
다. 나는 미지근하게 데워진 목욕물 속에 장현삼 씨의 알몸을 담근다. 장현삼 씨는 이 더위에도
찬물이 몸에 닿으면 질색을 한다. 투덕한 데라고는 한구석 없이 바싹 마른 몸뚱이가 가엾다는 생
각을 일으켜 준다. 변성기의 소년처럼 불두덩에 음모가 삐죽삐죽 솟아 있었지만 성기는 어린애의
고추처럼 왜소하다. 나는 그것이 발기한 모습을 본 일이 없다. 목욕을 끝낸 장현삼 씨는 다시 마
루 창가의 안락의자에 파묻히듯 앉아 느릿느릿 흘러가는 오후속으로 잠겨들어간다. 책을 보다가
생각에 잠기다가 하는 장현삼 씨 곁에서 나는 일이나 심부름을 시켜줄 때를 기다린다. 가정부 박
씨가 틈틈이 나를 부려먹는다. 어느덧 해가 기울고 저녁 산들바람이 정원의 나뭇잎을 쓰다듬는다.
장현삼 씨는 새벽잠이 없는 대신 초저녁잠이 많다. 저녁을 먹고 나서 한 시간쯤 정원에 나가
있다가 곧바로 잠자리에 들어간다. 나는 잠을 잘때는 장현삼 씨와 다른 방을 쓴다. 그렇다고 내게
자유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내 방에는 굉장하게 요란한 소리를 내지르는 부저가 장치되어 있
었다. 장현삼 씨가 그의 방 침대에 누운 채 머리맡 벽에 설치된 단추를 누르면 내 방의 부저가
요란한 소리를 내질러 내 잠을 풍비 박산 깨부수도록 되어 있다. 장현삼 씨는 온 세상이 곤히 잠
든 깊은 밤중에도 몇 차례씩 나를 호출한다. 장현삼 씨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물 마시는 버릇이
있다. 장현삼 씨는 믹서가 윙윙 소리내며 만들어낸 물을 맥주컵으로 두 컵이나 마시고 잠자리에
들어간다. 장현삼 씨는 자면서 땀을 많이 흘린다. 그처럼 몸이 바싹 여윈 사람이 땀을 많이 흘리
면 탈수현상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고, 탈수현상이 일어나면 혼수상태에 빠지게 되기까지 한댄다.
한밤중 홀로 잠든 사이에 혼수상태에 빠진다는 것은 죽음을 뜻할 수도 있다. 장현삼 씨는 그런
사태에 대비해서 예방으로 수분을 충분히 섭취해 두는 것이라고 했다. 그를 이을 후계자도 마련
되지 않은 상태에서 섣불리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게 섭취한 수분이 두세 시간뒤면 땀으로
빠져나가고도 장현삼 씨의 방광을 팅팅하게 부풀려 놓는다. 장현삼 씨는 머리맡을 더듬어 단추를
누른다. 내 방 부저가 잠꼬대하듯 요란하게 소리를 지른다. 나는 화들짝 놀라 깨어 요 밑에서 열
쇠를 찾아들고 방을 나간다. 옆방문을 열쇠로 따고 들어간다.
"오줌."
장현삼 씨가 말한다. 나는 장현삼 씨를 안아 들고 요강에 옮겨 앉힌다. 뒤에서 장현삼 씨의 상
체가 넘어가지 않도록 부축하고 서서 오줌이 요강 속으로 쏟아져 들어가는 소리를 하품을 깨물며
듣는다. 소리가 멈추어 오줌방울마저 떨어져 내렸다 싶을 즈음 장현삼 씨를 안아올려 침대에 눕
힌다.
"요강 부셔다 놉시다."
장현삼 씨가 말한다. 나는 요강을 들어내다가 변기에 쏟아 버리고 부셔다 놓는다.
"손 씻으셨소?"
장현삼 씨가 말한다. 나는 목욕탕에 가서 소독비누로 손을 씻고 온다.
"물."
장현삼 씨가 내 손을 살펴보며 말한다. 나는 냉장고 속에서 주스병을 꺼내 빈 컵에 가득 따라
놓고는 장현삼 씨를 부축해 앉힌다. 장현삼 씨는 컵을 들어올려 주스를 목구멍 속으로 넘긴다. 땀
으로 오줌으로 몸 속의 수분을 뽑아냈으니 새로 보충을 해야 하는 것이다. 수분을 충분히 재공곱
했다고 생각되면,
"고만 가서 자게. 문 잠그구 나가게."
비로소 나를 놓아준다. 자다가 깨면 한두 시간을 엎치락뒤치락해야 다시 잠이 드는 사람이거나
아주 잠을 설치고 마는 사람은 못할 노릇이다. 다행히 나는 내 방에 돌아와 누우면 그 길로 다시
잠을 잘 수가 있었다. 이런저런 상전들 밑으로 옮겨다니며 살아오는 동안 내 몸에 틀잡힌 적응력
이라고나 할까.
두세 시간 후면 장현삼 씨의 방광이 다시 팅팅하게 부풀어오르고, 장현삼 씨는 머리맡의 단추
를 눌러 내 방 부저가 악몽에 놀라 비명을 지르듯 요란하게 외치도록 할 것이다. 나는 깜짝 놀라
잠을 깨고 허겁지겁 옆방으로 달려가 장현삼 씨의 잠옷바지를 까내리고, 요강에 앉혀 오줌을 누
이고, 다시 침대에 눕히고, 요강을 부셔 오고, 손을 소독비누로 씻고, 냉장고에서 주스병을 꺼내
컵에 따르고, 주스가 장현삼 씨의 목구멍 속으로 넘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섰다가 내 방에 돌아
와 세 번째 잠을 청해갈 것이다.
나는 하룻밤에 두세 번씩 부저 소리에 잠을 깨가지고 그 짓을 치러내곤 했다. 나보다 앞서 이
집에 들어왔다가 며칠 버티지 못하고 뛰쳐나간 사람들 중에는 밤중에 울려대는 부저 소리를 견뎌
내지 못한 사람도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혹은 날마다 장현삼 씨의 항문 속에 관장기를 꽂
아 넣어야 하는 일을 참아내지 못한 사람도 끼어 있을지 모른다. 가정부 박씨가 슬금슬금 새치기
로 부려먹는 것에 화를 내고 나간 사람도 있었을까.
"만복씨, 다시 봐야겠는걸."
첫 달치 월급봉투를 내 손에 넘겨 주며 장현삼 씨가 말했다.
"그 동안 선생님 눈에 거슬르는 짓을 과히 많이 저지르지는 않았습니까?"
나는 공손하게 물었다.
"천만에요. 내 팔다리 노릇을 썩 잘해 주었소. 헌데 이만복 씨가 내게서 두 번째 월급두 탈 수
가 있을래나?"
아무래도 미덥지가 않다는 듯 장현삼 씨가 말했다.
"선생님 입으루 필요 없으니 떠나 달라구 말씀하실 때까지는 떠나지 않겠다구 말씀드린 그대룹
니다."
"그렇다면 만복 씨한테 다달이 월급 주는 대신 내가 만복씨 이름으루 적금을 들어 주는 게 어
떻겠소? 만복씨는 아직 홀몸이기두 하구 말이오?"
장현삼 씨는 떠보듯 물었다.
"좋습니다."
나는 월급봉투를 되돌려주며 선선히 대답했다. 장현삼 씨의 입꼬리와 눈꼬리에 물그늘같이 아
스무레한 미소가 어렸다. 하지만 미소가 지워진 뒤에도 서릿발처럼 싸늘한 눈빛은 뿜어나오지 않
았다.
장현삼 씨는 내게 한결 다정하게 굴었다. 일을 시키며 하는 말 이외에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와
더불어 나누었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언젠가 장현삼 씨가 이런 말을 했다.
"만복씨와 내가 이렇게 한 지붕 밑에서 살게 된 걸 보면 우리 두 사람은 전생에서 무슨 인연을
맺었던 것 같소. 전생에서는 만복씨가 두 다리 못쓰는 처지였구 나는 만복씨한테 월급을 받으면
서 만복씨 시중드는 일을 했는지두 모르지."
장현삼 씨는 내 튼튼한 다리를 쓸어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전생에서는 만복씨가 내 튼튼하구 싱싱한 다리를 부러워하면서 이렇게 손으로 자꾸 쓰다듬었
는지두 모르지. 정말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가는걸. 안 그렇소? 만복씨."
"글쎄요. 그랬을지두 모르지요."
나는 건성으로 대꾸했다.
"아니, 우리는 전생에서 한 사람이었는지두 모르지. 한 사람 속에 들어있던 두 마음이 따루따루
몸을 지니구 태어났는지두 모르지. 안 그렇소?"
장현삼 씨의 눈은 꿈을 꾸듯 몽롱했다.
"그랬을지두 모르지요."
두 번째 월급이 적금통장 속으로 들어갈 무렵에는 제법 밤이 서늘했다. 장현삼 씨가 땀을 덜
흘려서인지 밤중에 울리는 부저 소리는 두세 번에서 한두 번으로 줄어들더니 시월에 접어들면서
부터는 한 번으로 굳어 버렸다. 장현삼 씨는 여전히 식은땀을 흘리기는 해서 한 번쯤은 부저를
울려야 했고, 나는 땀에 펑 젖은 장현삼 씨의 내복을 갈아입히고, 빠져나간 수분을 공급해 주어야
했다.
그 무렵부터 나는 장현삼 씨와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 어느 날 억세게 퍼먹어대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장현삼 씨가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내게두 저렇게 식욕이 왕성한 때가 있었을 거야."
이튿날 장현삼 씨는 닭고기가 먹고 싶은 것 같다면서 닭 한 마리를 사다가 푹 고아 놓으라고
일렀다. 늘 별로 먹고 싶은 것이 없다면서 깨지락대던 장현삼 씨에게도 가을이 되어 입맛이 돌아
왔나 보다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가정부 박씨가 닭 한 마리를 고아가지고 통째로 식탁 위에 턱
올려 놓으니까 장현삼 씨는 고기 두어 점을 뜯어 입에 넣고 우물거려 보더니 젓가락을 내려놓아
버렸다. 그리고는,
"만복씨는 닭 한 마리를 앉은 자리에서 먹어 치울 자신 있소?"
하고 물었다.
"닭 한 마리라는 게 뼈 빼면 얼마 됩니까?"
나는 자신만만하게 대꾸했다.
"그럼 먹어 보시오. 못 먹으면 닭 한 마리 값 물어내기요."
장현삼 씨가 부추기듯 말했다. 없어 못 먹을 판이었다. 닭고기가 입 안에서 슬슬 녹았다. 큼직
한 닭 한 마리가 눈결에 내 뱃속으로 녹아 들어가 버렸다.
"오래간만에 닭고기 한 번 먹은가 싶게 먹은 것 같은걸."
장현삼 씨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잡수시지두 않구서 잘 잡수셨다구 하세요?"
나는 농담 받아넘기듯 말했다.
"농담이 아니오. 만복씨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까 꼭 내가 먹구 있다는 느낌이
들더란 말이오. 맛두 느껴지구 배두 불러오는 느낌이더란 말이오."
나는 빙긋 웃어보이고 말았다.
하지만 그 뒤로 장현삼 씨는 먹고 싶다면서 별식을 집에서 만들게 하거나 음식점에서 시켜오게
해가지고, 자기는 깨지락거리다가 수저를 놓아 버리고 나더러 먹어 보라고 했다. 아니, 한 그릇에
서 함께 먹자며 자기는 숟갈질 젓갈질 흉내만 내고는 나 혼자 먹도록 했다. 내가 맛있게 먹음직
스럽게 먹는 모습을 침을 삼키며 지켜보고 있다가 음식이 내 뱃속으로 모두 들어가 버리고 나면,
"아, 맛있게 잘 먹었다. 뱃속이 든든한걸."
트림이라도 하듯 말했다.
"저 먹는 걸 지켜보시기만 하구서요?"
"나두 이상해. 만복씨가 먹구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내 몸이 만복씨 몸속으로 슬며시
빨려들어가 만복씨와 한몸이 돼 버리는 것 같은 생각이 들거든. 만복씨와 한몸이 돼 가지구 음식
을 내 입 속으루 퍼넣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단 말이오."
음식뿐만이 아니었다. 언젠가 장현삼 씨는 텔레비전에서 자전거 경주하는 모습을 보고 있다가
자기도 자건거를 타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튿날 장현삼 씨는 내게 자전거를 사오게 해서 타고 다
니도록 했다. 또 언젠가는 자동차 학원에 다니며 자동차 운전을 배우기도 했다.
그렇게 해가 가고 새봄이 돌아와 무르익어가는 어느 날 장현삼 씨가 불쑥 말을 꺼내 놓았다.
"만복씨, 여자 선 한 번 봐주시오."
"네?"
나는 어리둥절해서 되물었다.
"내 아내 될 사람 선을 봐야겠는데 내 대신 만복씨가 그 자리에 나가주시오."
"선생님께서 저더러 꼭 나가 앉으라구 하신다면 나가 앉아 있긴 하겠습니다만."
다른 일과 달라 나는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서 말끝을 흐렸다.
"자, 그럼 우리두 준비를 서두릅시다."
장현삼 씨는 이야기가 끝났다는 듯 말했다. 장현삼 씨와 나는 바퀴의자를 택시에 싣고 시내로
나갔다. 나는 시내 중심가의 일류 양복점에 들어가 장현삼 씨가 바퀴의자에 앉아 지켜보는 앞에
서 최고급으로 양복을 맞췄고, 양복점에 들러 와이셔츠니 넥타이니 혁대 따위를 제일 좋은 것으
로 골라 사가지고 돌아왔다.
이윽고 새 양복에 새 구두에 새 넥타이를 매고는 선을 보러 나갔다. 장현삼 씨도 뒤따라와 저
만큼 떨어진 자리에서 내가 선보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신부감은 꽤 예쁘고 탐스러웠다. 하
기야 예쁘건 밉건 나로서는 상관할 바 아니었다. 저만큼 떨어져 앉은 장현삼 씨가 판가름할 일이
니까 말이다. 나는 장현삼 씨의 이름과 나이와 신분으로 신부 쪽에 소개가 되었지만 이러다가 사
실이 탄로나면 어쩌나 한다든가 일이 이상한 쪽으로 꼬여들면 어쩌나 하는 근심 따위는 마음에
담지도 않았다.
일이 여기서 더 복잡해지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선을 보고 난 지 한 달 만에 약혼식을 치르게 되었을 때 나는 좀 겁이 나기 시작했다.
"제가 약혼식에두 신랑으로 나가게 되면 일이 복잡해지지 않겠습니까?"
나는 근심스럽게 물었다.
"아니지. 만복씨가 약혼식에 나가지 않을 때 일이 더 복잡해질 게요."
장현삼 씨의 대답이었다. 할 수 없이 나는 약혼식에도 신랑으로 참석했다. 장현삼 씨도 신랑 쪽
의 친척인 양 참석했는데 신랑과 신부가 선물을 교환할 때 사진이 찰칵찰칵 찍히는 소리를 들으
며 나는 수렁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약혼식에서 돌아와 신부에게서 약혼선물로 받은 시계를 장현삼 씨 앞에 내놓았더니,
"만복씨가 받은 거니 만복씨가 차구 있으시오."
장현삼 씨는 시계를 내 앞으로 되밀어 놓으며 말했다.
"이러다가 탄로가 나면 어떻게 합니까?"
내 목소리는 떨려 나왔다.
"그렇게 겁낼 것 없어요. 만복씨 마음속으루 나는 이만복이가 아니라 장현삼이다. 이렇게만 생
각하시오. 약혼식을 하든 결혼식을 하든 그보다 더한 것을 하든 이만복이가 아니라 장현삼이가
하구 있는 거라구 생각하시오. 장현삼이가 이만복이 몸속에 들어와 하구 있는 것이라구 말이오.
자 내 눈을 보시오."
장현삼 씨가 내 눈을 뚫어져라 쏘아보며 말했다. 나도 그 눈을 맞받아 바라보았다.
문득 내 몸이 장현삼 씨의 눈 속으로 빨려들어가 장현삼 씨의 몸과 하나로 합치는 것 같은 느
낌을 받았다. 나는 눈을 감았다.
한 달 뒤에 나는 그 여자와 결혼식을 올렸다. 신혼여행을 떠나서 첫날밤 그 여자의 알몸을 끌
어안고 그 여자와 살을 섞었다. 나는 장현삼이다, 이만복이가 아니라 장현삼이다, 하는 말을 마음
속으로 끊임없이 뇌이면서.
나의 그 이상한 결혼생활은 일년이나 계속 되었다. 아들을 하나 낳았다. 아이의 성은 장현삼 씨
를 따라 장씨였고 아이의 이름도 장현삼 씨가 지어 주었다. 호적에는 장현삼 씨와 내 아내가 부
부로 올라 내 아들은 장현삼 씨와 내 아내 사이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었다.
아이를 낳은 지 석달 만에 아이 엄마가 죽었다. 산후 처리를 잘못한 탓이었다. 죽은 사람에게는
안된 얘기지만 여자가 죽고 그 슬픔이 어지간히 가라앉게 되자 나는 잃어버렸던 나를 비로소 다
시 찾은 기분이었다.
그 동안 깊은 감옥 속에 갇혀 있던 나를 여자가 죽어 구해줬다는 느낌이기도 했다.
어느 날 장현삼 씨가 말했다.
"시골에 있는 우리 선산을 돌아봐 주었으면 하오."
돌아오는 길에 관광여행을 하고 오라며 한 달 동안의 휴가를 주었다. 내 아들에게는 유모가 달
려 있었고 내가 여행을 다녀올 동안 장현삼 씨를 돌봐줄 사람도 구해 놓았다. 나는 가벼운 마음
으로 여행을 떠났다.
한 달 뒤에 돌아와 보니 장현삼 씨네 일가족은 이사를 하고 없었다. 그동안 내 월급으로 부어
가던 적금통장과 이 집을 내 앞으로 등기 이전했다는 편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울컥 외로움
이 치밀어 올랐다. 그 외로움 속에서 내 아들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이 내 몸을 휘감아 잡았다. 이
사한 곳쯤 쉽사리 찾아낼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마루 창가 장현삼 씨가 앉아 정원을 내다보곤 하던 안락의자에 몸을 파묻으며 떠
나간 사람들을 찾아나서고 싶은 생각을 눌러 앉혔다. 정원에는 여름이 무르익고 있었다.
새롭게 읽어보는 70년대 소설
전영태(중앙대 교수, 문학평론가)
1. 70년대 소설 다시 읽기
21세기로 넘어가는 마지막 문턱에서 70년대 소설을 다시 읽는 것은 회고적인 독서 행위임에 틀
림없다. 이 시점에서 지나온 30년의 세월을 생각해 보자. 사회구조, 인간심리, 거주환경, 과학문명,
정보통신, 영상문화, 이 모든 방면에서 70년대와 오늘은 까마득한 거리가 있다. 사회구조는 놀랍
게 팽창했고, 인간심리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해졌으며, 거주환경은 상전벽해처럼 바뀌었
다. 컴퓨터가 지배하는 세상으로 대변되는 오늘의 과학문명, 분초를 다투는 정보의 범람과 통신의
발달, 문학문화를 압도하는 영상문화의 군림 등, 70년대는 이 시점에서 인류문화의 원시기로 느껴
질 정도로 아득한 세월로 생각된다. 30년이라고 하면 흔히 말하는 1세대의 상거밖에 안되는데 70
년대가 그렇게 먼 옛날로 기억되는 것이다. 인류문화의 변화와 발전의 속도가 상대성원리의 공식
처럼 그 속도를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가속화되고 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70년대 소설을 다시 읽어보면, 다른 분야와 달리 문학, 그것도 소설은 그
변화의 속도와 양상이 완만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70년대 소설은 오늘의 소설의 기본 특성을
제시하고 있고, 70년대 이후의 소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리키고 있으며, 앞으로의 한국소설이
계속해서 다루어야 할 주제의 윤곽을 확정짓고 있다. 80년대나 90년대의 소설이 70년대의 그것과
아무리 다르다고 해도 그 기본 속성은 70년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오늘의 한국사회를 가
능하게 한 근대화와 산업화의 구도가 70년대에 짜여지기 시작했고 해방후 우리말과 한글을 제대
로 공부한 작가들이 우리말의 문학적 운용을 본격적으로 가동한 시기가 70년대라는 사실을 상기
한다면, 8,90년대의 소설이 70년대 소설에 아직도 큰 빚을 짊어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 글에서 다루려는 송기속을 비롯해서 오정희에 이르기까지의 12명의 작가들의 연령 분포는
30년대 중반에서 40년대 중반에 이르는, 70년대 당시에 30대 후반에서 40대 중반에 위치한 연령
에 집중되어 있다. 이것은 이들이 수상한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의 수상 작가 선
정 경향과 관련이 있다. '현대문학상'은 '신인작가상'이라는 타이틀 아래 문단 진출 후 10년 안팍
의 중견작가에게 이 상을 수여했고, '동인문학상'은 '사상계' 잡지의 폐간 이래 한동안 중단되었다
가 다시 이 상을 수여하면서 원로 작가의 수상을 지양하고 문단 경력이 그렇게 오래되지 않은,
소위 중고 신인들에게 상을 수여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리고 '이상문학상' 역시 1회 수상자로 김
승옥이라는 60년대에 전성기를 보냈던 작가가 오랜 침묵 끝에 내놓은 작품을 수상작으로 선정한
이래 오정희, 유재용 등 중견 작가들의 작품을 수상작으로 뽑았다. 이것은 90년대의 '이상문학상'
이 등단후 2,3년의 신인급 작가에게 상을 수여하는 경향과 대조적인 현상이다. 이들 수상작가는
김승옥, 이세기 등의 작가를 예외로 오늘날에도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는 중견작가들이
다.
이 글의 대상인 수상작들을 일별하면 이제하의 '초식', 김승옥의 '서울의 달빛0장', 조세희의 '난
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오정희의 '저녁의 게임', 유재용의 '관계' 등을 제외하면 우리에게 낯선
작품들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이세기의 '이별의 방식'은 작가도 작품도 낯선 금
시초견인 듯한 작품이다. 문학사 속에서 살아 남기의 경쟁에서 이미 탈락한 작품을 다시 끄집어
내어 다루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의문이 떠오르는 대목인데, 그런 작품들을 다시 추스
려서 살펴보는 작업이야말로 문학사의 정밀한 의미망 구축을 위해서 바람직스러운 일이라고 생각
한다. 이미 잘 알려진 작품만을 대상으로 문학사를 전개한다면, 그 의미망의 성긴 그물코 때문에
실제로 대단한 가치를 지닌 문학 작품이 본의 아니게 빠져나갈 위험이 있다. 그런 차원에서 이들
낯선 작품을 읽는 일은 상당한 의미를 가지며, 낯선 만큼 그만큼 더 신선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그 당시에는 상당한 평가를 받던 작품이 왜 오늘날 그 성가를 상실했는가, 잊혀진 작품으로 여겨
진 작품이 오늘의 관점에서 중요하게 평가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 당시 시대 상황에 밀착되어
있던 작품이 상황이 바뀐 오늘에는 아무런 의미를 획득하지 못하는 동기는 어떤 것인가 등의 문
제를 제기하면서 이들 낯선 작품을 찬찬이 음미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이들 수상작이 수상작가들
의 문학적 커리어에서 어떤 위치를 점하는가를 따져 보아야겠고, 수상작가들의 작품 경향이 수상
을 계기로 또는 수상과 상관 없이 어떻게 바뀌었는가를 곱씹어 보아야겠다.
2. 전쟁의 흔적
1970년대는 1953년 휴전협정 조인후 20여 년이 경과한 시대이지만, 그래도 전쟁의 흔적을 완전
히 지우지 못한 시대였다. 냉전 논리가 상존하고 안보를 내세워 개발독재의 군사정권을 지속시킨
박정희 시대가 유신헌법과 긴급조치라는 법률의 시퍼런 칼날을 번득이던 시절이라서 어떤 작가도
그것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박양호나 한수산 같은 사회적 저항운동과 거리가 먼 작가들조차
본의 아니게 반공법에 문제가 될 구절을 한두 군데 썼다고 해서 수사기관에 끌려가 고초를 당해
야 하는 어려운 시절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어려웠기 때문에 이 시기의 작가들은 분단 상황과 사
회적 현실에 대한 접근을 조심스럽게 전개할 수밖에 없었다.
송기숙의 '백의민족. 1968년'은 그러한 정황을 풍자의 차원에서 혹시 오해를 받지 않을까 주의
를 거듭하면서 접근한 작품이다. 일제 시대의 소작 쟁의를 다룬 장편소설 '암태도'를 발간한 이래
대하 장편소설 '녹두장군'에 이르기까지 반체제적 경향의 작품 활동을 전개한 작가의 문학적 저항
의 시작이 어떤 식으로 풀려 나갔는지를 알려주는 작품이 이 작품이다.
목포행 야간 열차에 탄 나는 평소의 습관대로 사람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는 일에 몰두해 있
다가 '한국인의 해학적 발상'이라는 논문의 자료를 취재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말을 건네는 청년
일행과 만난다. 돌아 가면서 웃기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는데, 그런 이야기를 작가 자신은 해학
적인 소화라고 소개하고 있지만 90년대 감각으로 보면 속된 말로 썰렁한 이야기일 따름이다. 70
년대에는 이런 썰렁한 이야기에 웃음의 반응을 보였는지 모르지만 지금의 감각으로는 촌스러운
이야기로 받아들여질 따름이다. 이런 것을 보면 해학이나 기지는 시대의 추이에 따라 그 기준이
달라짐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썰렁하고도 촌스러운 이야기가 펼쳐진 끝마무리에 지리산 공비 토
벌 때 12명의 공비를 생포 또는 사살애서 화랑무공훈장을 타게 되었다고 자랑하는 운동모를 쓴
사나이의 썰렁하다 못해 으시시한 이야기가 나온다. 생포된 공비를 다 묶을 전선줄이 없어 망설
이고 있는데, 한 사내가 한 손을 내리기에 총을 쏘아 사살했는데 알고 보니까 그 사내가 원래 외
팔이였다면서 웃음을 터트리자 사람들은 마지못해 따라 웃는다. 게다가 아무 이유없이 곁에 서
있던 공비도 쏴 죽였다는 말에 옆자리의 아가씨는 '어머' 소리를 내지른다. 작가는 이런 스토리를
전개하면서 불신시대에 사람을 신뢰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고 반공제일주의 시대에 공산
당 활동을 한 사람은 사람으로 취급되지 않는 현실을 조심스럽게 묘사한다. 공산당 활동을 한 공
비의 목숨은 개만도 못하다는 사실을 으시시한 웃기는 이야기로 소개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전개되는 이야기는 운동모의 사내가 그때 생포했던 공비가 길거리를 돌아다니다가
그와 마주치게 되어서 그를 구타하고 파출소에 끌고 가 간첩으로 신고하고 경찰서에서 난동을 부
린다는 내용이다. 나는 간첩으로 지목된 인물이 같은 학교에 근무하는 양 선생이라는 사실을 짐
작하지만, 얼굴에 상처를 입은 양 선생은 시치미를 떼고, 나는 '이웃에 오신 손님 간첩인가 다시
보자' 라는 플래카드 밑을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걸어가는 양 선생의 모습을 보면서 착잡한
감정에 빠진다. 전쟁이 남긴 상처는 될 수 있는 한 노출하지 않는 것이 삶의 지혜라고 생각하는
양 선생 같은 인물과 아직도 전쟁과 분단의 논리에 젖어서 사는 운동모의 사내를 대조시켜 편향
적 반공 논리의 위험성을 은근히 지적한 것이 이 작품이다. 이 작품은 구성적인 면에서 엉성한
데가 많니만 작가 자신의 저항논리를 교묘하게 표출시키기 위해서 외곽에서 바람을 잡는 식의 이
야기를 전개하다 보니까 그렇게 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당시의 사회상황은 그런 엉터리짓을
부려야 할 만큼 살벌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전상국의 '사형'은 전쟁으로 인해서 커다란 상처를 입은 현세의 어머니가 그때는 이를 악물고
참았는데, 아들이 받는 의심에 못 견뎌서 자살로 스스로를 처벌하는 충격적인 사건을 담고 있다.
현세의 어머니는 전쟁의 와중에서 외국병정 셋에게 난행을 당하고, 그 죄 아닌 죄과로 시모에게
인두질을 당하기도 하고, 사립문 밖으로 내쫓기면서도, 그리고 양잿물 먹고 죽기를 강요당하면서
도 끝끝내 살아 남아 현세를 키운 비운의 여성이다. 그녀는 시부모의 그런 행악은 견뎌냈지만,
'글쎄 그 세놈하고 잠자릴 하면서 신방차린 것처럼 조용하더래' 라고 수군대는 이웃 사람의 손가
락질을 참지 못해 속앓이를 하던 인고의 화신 같은 여인이다. 그런 그녀가 부대 물건을 빼내서
파는 일로 동네 인심을 얻고 있는 박 상사를 그녀의 아들인 현세가 밀고해서 감옥에 가게 했다는
사람들의 모함에 대해서는 참지 못하고, 박 상사가 돌아와 자신의 아들을 해치면 어쩌나 하는 걱
정에 예기소에 몸을 던져 죽은 것이다. 전쟁으로 인해서 얻은 피해 심리가 아들한테 이어지는 것
을 못견딘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마는 어머니의 행동에서 전쟁으로 인한 심리적 상흔은 아
무리 시간이 경과되어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전쟁은 알베르토 모라비아의 '두 여인'이라는 장편소설에서 그러했듯 여인에게는 강간이라는 폭
력으로 표상된다. 자신의 의지와 감정과는 관계 없이 강제로 당하는 폭력에 기존의 질서와 윤리
체계는 한꺼번에 무너진다. 강간당한 여인의 심리는 폭탄 투하로 조각난 건물과 살륙된 시체로
어지럽혀진 파괴된 세계보다 더 참혹한 것이다. '사형'의 현세 어머니는 그 파괴된 심리적 세계
속에서 아들이라는 존재를 보존하기 위해서 속앓이를 해가면서 악착같이 견뎌냈지만, 그런 심리
가 아들에게까지 유전되는 모습은 보기 싫었고, 그런 생각이 그녀를 스스로 자살로 처벌하는 결
말로 몰고 간 것이다. 이것은 결국 전쟁이 그녀에게 가한 사형이다. 쉽게 아물지 못하는 전쟁 상
흔의 끊질긴 재발을 극적으로 조명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전상국의 작가적 이력에서뿐만 아니
라 문학사적 차원에서 그 가치를 되묻고 싶은 작품이다.
이 작가의 '우리들의 날개'는 '사형'과 다른 차원의 작품이지만 인간 심리의 음영을 입체적으로
포착하고 있다는 점에서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재난을 겪으면서 삶의 고비를 넘기다 보면 사람
에 대한 원인 모를 미움에 휩싸이고, 그것을 액운에 연결시키기도 하지만 인간 관계의 복원은 서
로에 대한 애정의 확인으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제시하고 있다.
유재용의 '두고 온 사람'은 한국전쟁을 정면으로 다룬 작품은 아니지만 분단상황으로 인해서 심
리적으로 분단되고 현실적으로 갈라지고 마는 가족사적 사연을 해방 전 해에서 전쟁 전까지의 시
간 속에서 조명하고 있는 작품이다. 단지와 병국이라는 부모님이 서로 약속을 해서 짝을 지워진
예비 부부가 우리 집에 와서 가족처럼 적응해가는 과정이 이야기꾼의 자연스러운 말솜씨로 능숙
하게 전개되어서, 그냥 재미있는 이야기이로구나 라는 반응을 보이려는 대목에서, 일본 유학을 중
단하고 돌아온 형의 출현으로 긴장감이 조성되는 다른 이야기로 변환한다. 식민지 시대에는 전쟁
에 끌려가기 싫어서 광부를 지망한 형 대신에 병국이 광부 일을 하고, 해방 이후에는 공산당의
눈총을 받을까 염려되어서 단지와 결혼식을 올리고 그녀와 잠자리를 함께하는 형은 결과적으로
단지와 병국의 관계를 완전히 파괴한다. 이런 피해를 입은 병국이 상전과 하인의 관계를 청산하
고 나의 집안을 파괴하려는 것은 당연한 사건 전개의 양상이다. 그래서 우리 집안은 이남으로 도
주하게 되었는데, 그 도상에서 걸리적거리는 단지르 그녀에게 눈독을 들이는 청년에게 넘겨주고
만다. 단지와 병국은 그렇게 우리 가족에게서 떨어져 나가고, 우리는 그들을 북에 두고 온 사람이
되고 말았다. 상전에게 존재의 모든 것을 약탈당한 이들 젊은 남녀에 대한 동정도 배려도 그 어
떤 것도 없이 담담하고 차분한 어조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작가의 태도가 오히려 이 작품이 담고
있는 역사적 의미를 캐묻게 한다. 이 점이 바로 유재용 소설의 개성이고, 그 개성을 다른 말로 표
현하면 작가의 시치미 떼기라고 할 수 있다. 심각한 주제를 건성건성 이야기하듯 딴전을 보면서
할 말은 다하는 것이 이 작가의 독특한 서술 방법이다.
전쟁의 흔적이라는 주제와는 다소 동떨어져 있지만, '두고 온 사람'의 연장으로 같은 작가의 '관
계'를 읽어 보자. 이 작품은 '두고 온 사람'과 마찬가지로 상전과 그 밑에 사람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두고 온 사람'의 등장인물인 나의 형이 단지와 병국이를 그들의 운명과 상관없이
마음대로 다룬 것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의 장현삼 씨는 만복이라고 불리우는 나의 운명을 자의로
바꿔 놓는다. 이러한 상전의 태도에 대해서 만복은 아무런 항의도 제기하지 않고 거의 맹목적으
로 순종한다. 그래서 장현삼 씨의 제의로 여자를 얻어 결혼을 하고 아이까지 낳게 되는데, 나의
아내가 죽자 주인인 장현삼 씨는 나에게 재산을 남기고 아이를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진다는 이야
기이다. 이 지극히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유재용이라는 작가가 거침없이 말하기 시작하면 독자는
그의 말솜씨에 이끌려 끌고 가는 대로 따라갈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왜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일까? 독자는 작가가 설정한 현실 같은 가상현실의 세계에 들어서는 순
간 주인의 절대적 권위에 무조건적으로 순종하는 작중인물처럼 작가에게 복종하기 시작하여 가상
현실을 현실로 여기는 작가의 인식에 철저하게 동화되는 것이다. 유재용의 문학적 출발이 동화로
시작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동화를 읽는 아동들이 동화 작가가 설정해 놓은 환상작인 상황에
대해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것처럼 그의 작품에 눈길을 주는 순간부터 독자는 철저하게 작가의
서술에 순치된다는 사실을 이상하게 여길 필요가 없다.
상전과 피지배자의 관계가 자연스러운 것처럼 작가와 독자의 상하 관계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들이게 하는 작가의 탁월한 능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천부적인 이야기꾼이 아니라면 이런 능
력은 쉽게 발휘할 수 없다. 힘찬 목소리로 떠들썩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조용하지만 듣는
사람의 신경을 그 이야기에 집중시키고야 마는 강력한 주의집중력을 발산하는 이야기꾼의 면모를
'관계' 같은 작품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작가는 전쟁의 상흔을 이야
기하면서도 그 피비린내 나는 현장보다 그 현장에서 벌어지는 인간성 넘치는 사연들을 침착한 어
조로 조근조근 펼칠 것이다. 분단 상황을 묘사한 유재용의 다른 작품들을 여전히 주목해야 할 까
닭이 여기에 있다.
김원일의 '바라암'은 전쟁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을 하지 않은 작품이지만, 악연의 고리가 전쟁
으로 고아가 된 점례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전쟁의 후유증으로 인해 일그러진 인생ㅇ르 그린
작품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전쟁으로 고아가 된 점례가 법담스님이 주석하는 바라암에 머물
기 십여 년, 그녀는 귀래천의 사공 장사공과 불륜의 관계를 맺고 바라암을 떠났다가, 혼혈아를 싸
들고 절에 다시 찾아온다. 그 아이는 지수라 불리우고 그 지수가 장사공의 외동딸 봉녀와 관계를
맺고 지수는 절을 떠나고, 장사공은 비탄에 젖은 세월을 보내다 역시 혼혈아를 나은 봉녀를 범아
재비와 결혼을 시킨다. 이러한 줄거리에서 전쟁으로 한 번 일그러진 삶은 바로 잡기가 어렵고 그
악연의 고리가 대를 이어 유전되는 것을 이 작품은 보여주고 있다.
3. 근대화.산업화의 그늘
'근대화'는 70년대라는 시대 전체를 풍미한 구호였다. '100억불 수출 1000불 소득'이라는 구체적
인 목표를 세우고 자본의 토대 구축과 소득향상에 진력한 경제부흥 지상주의의 시대였다. 따라서
부의 평등 분배, 품위 있는 삶의 질의 확립, 인권에 제도적 보호, 정치적 민주주의의 정립 등은
근대화라는 미명이 지닌 권위적인 위력에 눌러 숨통조차 트지 못하던 시적이기도 했다. 이 시기
의 소설이 '근대화'의 주제에 억눌린 문제들에 관심을 돌리고 '산업화'로 인해서 오히려 피해를 보
아야 하는 사람들의 삶에 주목한 것은, 그 사회의 어두운 면에 대한 고찰을 통해서 사회의 총체
성을 회복하려는 소설의 사회에 대한 진지한 반격으로 간주된다.
김승옥의 '서울의 달빛0장'은 그의 60년대 대표작 '서울, 1964년 겨울' 과 비교해서 읽어볼 만한
작품이다. '서울, 1964년 겨울'이 60년대의 서울을 그 안에서 살고 있는 룸펜 프롤레타리아의 여러
등장인물의 의식의 대비를 통해 입체적으로 기술한 작품이라면, '서울의 달빛0장'은 룸펜이기는
마찬가지이지만 부르주아적 삶을 살고 있는 내가 여자 탤런트와 결혼하고 파경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통해 느끼는 삶에 대한 배신감을 그리고 있다. '60년대의 서울'과 '70년대의 서울'에 대한
접근 방법이 계급적인 면에서, 등장인물이 더 개인화되었다는 점에서, 관찰의 범위가 축소되었다
는 점에서 달라진 것이다.
작가가 이 작품에서 주제의 초점으로 떠올리는 것은 탤런트와의 결혼과 파경의 과정에서 느끼
는 물질만능의 풍토 때문에 찢겨진 인간성과 문란해진 성풍속도이다. 식당을 경영하는 어머니 덕
택에 물질적 부족감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온 나는, 비행기 안에서 우연히 나중에 결혼을 할 탤런
트를 만나고, 자신의 친정을 위해서 비밀 요정을 출입하는 아내의 부정을 목격하고 이혼한다. 그
리고 집을 팔아 자동차를 새로 뽑고, 60여 명에 이르는 유흥가의 여성과 잠자리를 함께하고, 나머
지 돈을 위자료 명목으로 아내에게 건네다가 실패로 그치고 만다. 결혼 초야에 아내가 첫경험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염려에 살뜰한 배려를 할 정도로 쑥맥인 나는 아내의 문란한 사생활에 대해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못한다. 이 점에서 이 작품은 이상의 '날개'에서 역시 그런 식으로 아내에
게 대처했던 나를 연상시킨다. 다른 점은 이상의 나는 그런 아내에게서 탈피하기 위해 나름대로
적극적 초월을 시도했던 것에 반해, 이 작품의 나는 시종일관 무기력한 태도를 보인다는 점이다.
아내의 부정에 대한 반발로 직업 여성과 무수한 성관계를 가지면서도 스스로가 성의 노예가 되어
그것에 탐닉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이 사회의 일반적인 성풍속도에 대해 노골적인 불만을
터트린다.
... 먹을 것이 부족하던 시절에는 생선시장의 개들처럼 꼬리를 뒷다리 사이에 감아넣고 눈을 슬
프게 치켜뜨고 다니다가 형편이 좀 나아지면 발정한 개들처럼 닥치는 대로 붙을 자리만 찾아 다
닌다. 사람들이 결국 바라는 건 필요 이상의 음식, 필요 이상의 교미, 섹스의 가수요, 부잣집 며느
리 여름철에 연탄 사모으듯, 남의 아내건 나의 아내가 될 여자건 닥치는 대로 붙는다. 남의 사랑
을 위한 빈자리를 남겨 두지 않는다. 물처럼, 공기처럼, 여력만 있으면 빈자리를 메우려 든다. 인
간은 자연인가? 메우고 썩힌다. 썩은 사타구니에서 쏟아지는 썩은 감정. 자리를 찾지 못한 자들의
증오. 평화가 만든 여유. 여유가 만든 가수요. 가수요가 만든 부패. 부패가 만드는 증오. 부패는
이미 시작되었으며 남은 일은 증오의 누적, 그리하여 전쟁. 전쟁은 필연적이다...
김승옥 특유의 요설체의 이 글에서 70년대의 문란한 성생활 풍속에 대한 작가의 신랄한 힐난을
간파할 수 있다. 근대화가 이룩한 물질적 풍요를 바탕으로 술집과 매춘업, 러브 호텔이 번성하고,
간통의 풍조가 이 사회를 풍미하는 것에 대한 작가 자신의 노골적인 반발이다. TV가 대중의 생
활과 정서를 지배하기 시작했고 TV의 총아, 탤런트의 일거수 일투족이 대중에게 어필하는 그러
한 세태가 70년대에서부터 비롯되었던 것이다. 작가는 이러한 세태를 고발하기 위해 이런 수필조
의 글을 소설에 삽입한 것인데, 주인공인 내가 역시 그러한 풍조에 물들은 인물이라서 그 고발의
강도가 단단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재 묻은 개의 똥 묻은 개 나무라기 식의 비난은 설득력을 결
핍하게 마련이다. 이 작가의 60년대의 빛나던 감수성은 인용한 문장에서 확인되듯 여전히 현란하
지만, 소설의 구도에 대한 단단한 응집력은 세월의 경과에 따라 희석화된 느낌을 준다. 작가 역시
그 시대를 살아 가는 대중의 일원으로 대중의 감각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 아닌가 라는
안타까움을 자아내게 한다. 비판 대상과 비판자의 거리가 너무 밀착되어 있었던 까닭에 그런 아
쉬움이 남는 것이리라.
김문수의 '성흔'은 그의 '증묘'나 '미로학습'에 비해서 그 수준이 좀 떨어지는 작품이다. 발표하
는 작품마다 걸작을 산출할 수 없지만, 언제나 일정한 수준의 작품을 발표하는 이 작가의 이 작
품이 수상작이 된 까닭은 아마도 전작들의 무게를 유추한 심사 기준 때문일 것이다. 가난한 샐러
리맨이 그의 고향인 청주를 아버지의 환갑을 맞아 찾으면서 벌어지는 자잘한 사건을 약간의 애수
를 섞어 묘사한 작품이 '성흔'이다. 아버지에게 드릴 선물이 바뀐 것도 모르고 친구들과 술을 마
시고, 집에 들어가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당황하면서, 아버지의 주름진 얼굴에서 성흔을 느낀다는
잔잔한 감동을 제공하는 소설이다. 70년대적 샐러리맨의 고난에 찬 생활과 그 삶 속에서의 애수,
이런 것을 가식 없이 펼치고 있다.
김용운의 '산행'도 김문수의 작품처럼 도시인의 애환에 대해서 소박한 감성으로 진솔하게 이야
기를 전개하고 있는 작품이다. 거창한 주제의식이나 요란스러운 표현에 매달리지 않고 사업에 실
패한 사내의 허전한 마음을 자연스럽게 표출하고 있다.
이청준의 '잔인한 도시'는 오늘의 시점에서 읽어도 70년대의 시점에서 읽어도 두루 그 작품적
의미를 간파할 수 있는 상징적 특질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다. 시대를 초월하는 이런 작품이 산출
되는 배경에는 자유스러운 상상력을 제어하는 70년대의 엄혹한 정치 논리에 대해 정면 대응을 피
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깔려 있다. 유신 정치 말기에 정치적인 이유로 투옥되었던 수많은 양심수
들은 이 도시를 거대한 감옥으로 생각하게 만들었고 그 감옥에서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은 상징적
인 암시 외에 달리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청준은 이런 상황에 상징적 관념으로 대응한
것인데, 이런 방법은 현실적 구체성은 결여되지만 관념적 추상성으로 다른 차원의 사실성을 획득
하게 한다. 이것이 이청준이 취할 수 있었던 70년대의 현실에 대한 최대한의 저항 양상이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또한 이청준의 소극적 저항 양상과 그 궤를 같이 한다.
이청준이 택한 방법이 관념소설의 그것이었다면 조세희는 우화와 모더니즘의 수법으로 현실의 모
순을 우회적으로 돌파하는 방법을 선택한다. 혹자는 조세희의 '난.쏘.공'을 70년대의 대표적인 저
항소설로 인식하기도 하지만, 이 작가의 주안점은 저항이 아니라, 현실의 모순을 극단적으로 위축
된 인간을 통해서 확장시키는 소설적 방법의 구축에 있다. 소설이 전달하려는 내용보다는 그 형
식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이 소설이 정치적 독법으로 읽히는 것을 방지했던 것이다. 이런 내용의
소설로 인해서 야기되는 정치적 오해를 피하기 위한 방법을 구사한 셈이다.
'난.쏘.공' 연작의 첫 번째 작품인 이 작품은 근대화나 산업화의 재앙상을 원경으로 설정하고 그
변두리에서 살고 있는 난쟁이 일가의 생활을 전면에 부각시켜 그들의 삶의 왜소함을 강조한다.
엄밀하게 생각하면 이 난장이 일가의 삶은 근대화나 산업화 때문에 왜소해진 것이 아니라 난장이
가장의 환경적 유전적 불우함 때문에 초라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근대화난 산업화가 시작되
지 않았다고 해도 그들은 가난하고 초라하게 살았을 것이고, 그 삶의 질이 나아질 전망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가족이 근대화가 시작되면서 더욱 초라한 삶을 강요당한다는 것이 이 작품
의 요체이다. 불행한 사람의 삶을 더욱 불행하게 만드는 근대화,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더 가난하
게 만드는 산업화.근대화와 산업화가 그런 것을 초래하는 것이라면 근대화, 산업화가 무슨 의미를
지니는 것이냐고 작가는 반문한다.
근대화, 산업화는 필연적으로 도시화를 촉발하고 도시화는 변두리 판자촌 주민의 급증르 초해
한다. 도시의 발전 과정에서 판자촌 철거의 문제가 발생하고 신도시 이주로 인한 갈등이 조성된
다. 윤홍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도 이 맥락의 작품으로 성남 신도시 건설의 문제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윤홍길이 이 문제를 사실주의의 정공법으로 대처했다고 한다면, 조세희는 환
상과 우화와 그로테스크가 섞인 모더니즘의 기법으로 우원한 경로로 그 근원을 노출시키고자 했
다. 따라서 작품이 던지는 충격의 강도에서 윤홍길이 직접적이라면 조세희는 간접이기는 하지만
그 지속 시간이 긴 강도를 조성한다. 사실 이 작품에서 제시하고 있는 근대화나 산업화의 문제는
암시의 차원에 머무르는 지극히 피상적인 인식의 수준이다. 난장이 일가의 삶이 근대화에 의해서
어떻게 더 초라하게 되었는지 작가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다는 태도를 보인다. 사회구조적인 면에서 작가는 무식하게 마련이고, 그 이유야 어떻건 간에
디들은 더 불행해진 것이 아니냐 라는 점만 강조한다. 이 점이 '난.쏘.공'이 지닌 인식의 취약점이
다. 사회구조에 대한 거시적 안목이 결여된 상태에서 미시적 구도를 지루할 정도로 자세하게 펼
침으로써 이 사회가 근대화로 인해서 겪게되는 홍역의 정체를 모호하게 파악할 수밖에 없도록 만
드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70년대를 대표하는 수작으로 꼽는 것은 70년대식 상
징의 기법이 아직까지 통용될 수 있다는 점, 70년대라는 모호한 시대를 모호하게 표현하는 데 이
작품이 성공했다는 것, 상징과 우화가 지닌 긴 생명력 등의 이유가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4. 새로운 표현 방법의 탐구
시대와 사회가 달라짐에 따라 감수성이 변화되고 서설의 문체나 표현 방식이 바뀌는 것은 지극
히 자연스러운 문학사적 현상이다. 70년대는 산업화로 인해서 더 복잡 미묘해진 인간 심리를 복
잡 미묘한 문체와 표현 방식으로 묘사하는 방법을 개발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사회구조의 복잡성
에 대응하는 문체는 이전 시기의 그것과 달리 그 구조가 다단화되고 전통적인 표현 방식에 대해
서 의도적인 일탈을 시도하는 양상을 나타난다.
이제하의 '초식'은 문체의 추상성과 복잡성으로 주목을 받는 이 작가의 70년대 대표작이다. 선
거에 나가 번번이 떨어지는 서광삼 씨라는 아버지를 둔 나의 가족들의 문제와 아버지를 둘러싼
인물들을 그리고 있는 이 소설에서 줄거리가 던지는 감동을 기대하는 것은 애당초부터 잘못된 것
이다. 사건과 형상을 추상화시키는 탁월한 조형 능력을 파악하기 위해서 이 소설의 문장부터 살
펴볼 필요가 있다.
5월이거나 그 어느 때고 남쪽의 작은 항도를 기차로 지나면서, 아직 춥기도 하고 잠자기도 담
배 피우기도 귀찮아져서, 불현 듯 마음 속의 사람에게 한 표나 던져 볼까 하는 의문이 일거든, 유
권자여, 유권자여, 이미 유명을 달리한 나의 부친의, 그렇게도 도저한 믿음이었던 유권자여, 그런
망상을 떨쳐 버리고 그냥 귀를 기울이라. 그대가 매일같이 신물나게 듣는 그 우국지정의 똑 같은
연설이 거기서도 들려오고, 새삼 차창 밖을 내다보지 않더라도 아무데서나 자고 아무데서나 먹으
며 일년 열두 달을 공중에 대고 떠들어대기만 하는 한 사나이가, 돌아선 채 역 앞 광장에 버티고
서 있음을 느낄 것이다. 도수장 주인인 그 사내는 우리 시의 명물이다.
어떤 작가도 그 흉내를 낼 수 없는 이 독특한 문체를 이제하는 60년대의 개성의 발아 기간을
거쳐 70년대에 개화시켰던 것이다. 아버지와 그를 둘러싼 인물을 이해하는 심리적 복잡성이 이
간단하지 않은 문장의 구조 속에 응축되어 있다.
이세기라는 작가는 신인 작가만큼이나 낯선 이름이다. 그러나 70년대에 '바람과 놀며', '그 다음
은 침묵' 등의 창작집을 상재할 정도로 활발한 작품활동을 벌인 작가이다. 그녀의 '이별의 방식'을
읽으면 오늘날 한국소설을 주름잡고 있는 여류 소설가들의 작품의 원류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를 알 수 있다. 미묘한 감정의 교류의 섬세한 포착, 까닭을 확실히 규명하기 어려운 외로움과 낯
설음의 정서에 대한 집요한 집착, 심정의 응어리까지 낱낱이 묘사하려는 다양한 뉘앙스가 풍기는
문장, 이런 90년대 여류 소설가들의 특징을 이세기의 소설은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70년대라는 공간에 여류 작가로서 남성 작가들이 도저히 다루기 어려운 문학적 제재를 깊이 있
게 천착하여 그만의 독특한 문학적 세계를 구축한 작가로 우리는 오정희를 자신 있게 내세울 수
있다. 90년대 작가 신경숙은 그녀의 문학수업으로 오정희의 소설을 통째로 베끼는 작업으로 대신
했다는 고백을 한 적이 있다. 오정희의 어휘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 소설 작법의 세세한 면을 체
득하기 위해서 우직하지만 그런 수공업적인 작업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오정희는 비단 그 영향력
이 신경숙에 국한되어 미친 작가가 아니라 오늘날 여성 소설의 전법적인 작품을 제시하여 거의
대다수의 여류 작가들의 대모 역할을 하고 있는 작가이다.
오정희의 '저녁의 게임'은 소설의 분위기부터 독특하다. 늙은 아버지와 글 쓰는 오빠와 함께 살
고 있는 과년한 처녀, 도시 변두리의 어둡고 침침한 저녁의 주거 공간에서 부녀는 저녁마다 화투
를 치고 화투가 끝나면 처녀는 남자를 만나러 바깥으로 나가 건축 공사장의 비어 있는 공간에서
황급한 정사를 벌인다. 이 기괴한 분위기를 채우는 것은 산다는 것에 대한 쓸쓸함, 공허함, 진정
한 인간 관계는 존재하지 않으며 서로가 서로에 대한 소외감을 가지고 살고 있을 따름이라는 것,
미래에 대한 전망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으며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어두운 안개 속에 암중모색
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는 것, 이성에 대한 신뢰를 부여할수 없는 믿을 수 없는 감정의 지배에
대한 당혹감 등 실로 복잡미묘한 요소들이다. 소설의 분위기가 작중인물의 성격을 압도하는 분위
기 위주의 소설을 오정희는 그 형식과 내용의 세부까지 70년대에 이미 완성시켰던 것이다. 역사.
사회.정치 이런 것이 그 분위기에 녹아 있든 말든 그런 것은 이 작가의 관심밖에 두어져 있다. 중
요한 것은 작가가 형성하려는 소설적인 분위기이며, 분위기 묘사를 위해서는 디테일에 대한 철저
한 설계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미시 서사의 방법적 전형을 오정희는 70년대에 체득했고
그 전토은 80년대, 90년대의 여성 소설가들에 의해 소중하게 지속되고 있다.
5. 한국 현대소설에 문 열어 주기
70년대 소설은 이상의 작품에서 살펴보았듯이 근대성의 갈등을 본격적인 소설의 주제로 삼아
그 주제를 다양한 표현의 형식으로 형상화함으로써 한국 현대소설의 기본 형식을 갖추게 하였다.
이것은 작가들의 노력이라기 보다 70년대가 강요하는 소설의 형식을 작가들이 그 요구의 종류에
따라 충실하게 완성시킨 결과이다. 바꿔 말해서 70년대의 한국 사회가 한국소설을 그런 형식을
형성하도록 이끌고 나갈 정도로 사회적 구속력이 강했다는 말이다.
한국소설의 스펙트럼이 다기화되고 그 진로가 다양화되고 그 성격이 보다 복잡해진 시기가 70
년대하는 사실을 상기하면 지금까지 언급한 작품들의 의미가 문학사적으로도 심각한 의의를 획득
하고 있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70년대 소설은 한국 현대소설의 현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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