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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라틴의 미래

by Casey,Riley 2023. 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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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틴아메리카의 미래
                           - 역사의 반복인가, 새로운 시작인가 - 



1. 서론

   경제면에서 보면 1997년은 1982년 이래 라틴아메리카 최고의 해였다. 지역 평균 
경제성장률 5.5%에 한자리수 물가상승률이라면 어디 내어 놓아도 손색이 없다. 그러
나 1997년 말 아시아를 휩쓴 금융위기는  라틴아메리카 경제의 장래에도 암운을 드
리웠고, 1998년, 우려는 현실이 되어,  위기가 러시아를 거쳐 중남미  국가들에도 닥
쳤다. 브라질은 IMF 구제금융을 요청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위기를 막기 위
한 처방은 경기를 위축시켜 지역의 성장률은 2%대로 낮아졌고, 1900년대의  마지막 
해(1999년)에는 경제성장은 기대할 수도  없고, 오히려 1980년대의  악몽이 되살아
나는 암울한 분위기이다.
   이는 같은 미주대륙 북반부의 미국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비전시(非戰時)로는 최장
의 호황이었다는  1980년대의 장기호황   기록을 경신하였고, 증권시장에서는   Dow 
Jones 지수가 연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그리고 실업률도 1970년  이래 가장 낮
은 4.6%이고, 물가는 2% 이하로  안정되어 미국의 분위기는 붐을 넘어  풍요 그 자
체이며, 미래에 대한 전망은 낙관을 넘어 자만에  이르렀다. 그 징표는 1930년대 통
계가 작성되기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민간소비가 소득을 초과해 저축이 마이너스를 
기록한 데서 찾을 수 있다. 소득이 계속 증가하리라는 기대를 반영하는 것이다.
   이같은 미국과 라틴아메리카 간의 대조적 분위기와 경제적  성취도의 차이는 비단 
오늘의 이야기만이 아니고 신대륙의 남과  북이 본격적으로 식민지로 경영되기 시작
한 이래 줄곧 보여온 현상이었다. 그리고 장기추세는 서로 간의  갭을 줄여가는 수렴
이기보다는 오히려 발산하는 양상을 보여왔다.
   신대륙에서 역사적으로 관찰되는 이같은  현상은 우리들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져 
주었고, 이 퍼즐을 풀고자 하는 시도가  라틴아메리카 연구는 빈곤, 불평등한 소득분
배, 경제의 낙후성, 민주정치의  실패, 정치적 불안  등과 같은 '문제'에  대한 연구로 
접근되어 왔다. 제3세계 모든 국가들에서  볼 수 있는 이같은 현상들이  문제로 인식
되고, 그 원인을 설명하고자 하는 연구들이 나름대로 그 존재이유가  있는 것도 라틴
아메리카 특유의 현상이라 할 수 있다.
   
   
2. 라틴아메리카 연구 : 문명사적·철학적 관점{{) 이 부분은 작고한 멕시코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옥따비오 빠스(Octavio Paz)의 NPQ 편집자 Nathan Cardels와
   의 1986년 인터뷰를 요약, 정리한 것이다.
}}

   모든 문명은 과거·현재·미래에 대한 각각 나름대로의 비젼을 가지고 있다. 라틴
아메리카와 미국은 이웃간이지만 서구문명 중에서는 극과 극을 이루고  있다. 첫째로 
남미대륙의 대서양 연안을 제외한 라틴아메리카의  핵심은 인디언이다. 이는 비유럽, 
비서구라는 말이다. 스페인 사람들이 도착했을 때,  서구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독
창적인 문명이이미 거기 있었다. 둘째,  라틴아메리카를 정복하고 식민지화한 스페인
은 카톨릭국가일 뿐 아니라, 십자군전쟁을 경험하고 16세기까지 이슬람과 싸운 국가
이다.
   16, 17세기 동안 스페인은 반동 종교개혁신앙의 수호자였다. 이 종교적 이념이 스
페인 문화와 식민 당시 정책의 중심이었으며, 라틴아메리카가 물려받은  유산이 되었
다. 그렇기 때문에  라틴아메리카는 반근대유럽(anti-modern Europe)의  반영이다. 
근대화의 부정으로부터 출현한 것이다.
   미국은 미래를 향해 달려가면서 출현되었다. 미국은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덧없
는 것인 시간 위에 세워진 미래의 나라이다. 사실 그것은 근대성의 완전한 표현이다. 
미국의 유산은 첫째로는 종교개혁으로부터 오며, 둘째로는 계몽사상에서 온다.
   미국은 근대 유럽의 극단적인 표현으로 태어난 것이다. 서로 다른 유산으로부터 서
로 다른 시간에 대한 인식이 생긴 것이다. 미국은 유럽의 새로운 출발로 시작되었다. 
미국은 구세계의 구질서와  전통적 가치를  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달러화에 씌어 
있듯이 '시대의 새 질서'를 세우기 위한 것이다.  미국은 뿌리가 없는 나라이다. 아니
면 미국의 뿌리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역사와 전통이 그들의 존재의 중심이다. 외국인들에게 가장 눈
에 띄는 것 중의 하나가  공적인 면에서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일상생활에도 어떻게 
과거가 현존하는가 하는 것이다. 이 과거가  작가와 화가들의 주제가 되었고, 지성인
들의 집념의 대상이 되었다. 꼬르떼스(Cort s)가 아직 살아 있고, 그에게 패배당하고 
죽임을 당한 아즈텍(Aztec)의 왕 과우떼목(Cuauht moc)은 살아 있다. 그리고 꼬르
떼스편 사람들과 과우떼목편 사람들 간의 싸움이 아직도 계속된다.  멕시코의 치아빠
스 내전이 그 예이다.
   정복자, 식민자로서의 스페인 카톨릭과 북미  프로테스탄트는 매우 상이한  현실을 
창출했다. 멕시코에서는  멕시코인들 사이에  토착민을 포용하는  그러한 토착민과의 
관계를 세우려 노력했다. 라틴아메리카인들과 스페인,  포르투칼 사람들에게 가장 중
요한 일은 인디언들의 노동자원을 정복하고  사용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을 카톨릭
으로 개종시키는 것이기도 했다. 이는 미국의  태도와는 매우 다른 것이었다. 미국에
서는, 토착민은 새로이 건설되는 문명의 밖에  남아 있었다. 미국인들도 토착민을 포
용할 의사가 없었다. 그래서 토착민들의  과거는 아메리카 미래의 일부가  되지 않았
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통합을 생각했다. 미국인들은 분리를 생각했다. 이  분리의 아
이디어는 미국역사에 일관성있게 나타났고 이는  미국인들의 시간에 대한 인식에 영
향을 미친다. 미국은 미래를 향한 달음박질 도중에 만나게 되는  역사를 가진 사람들
로부터 고립했다. 미국은  항상 외교정책에서도  순수, 고립의  아이디어를 좋아했다. 
그것은 미국사람들의 심리에 매우 깊게 뿌리박힌 중요한 흐름이다.
   세계의 한쪽은 마비되는데 다른 쪽에서는 역사의 가속이 있을 것이라는 전망은 역
사와 생을 시간의  속도를 통해서만  보려는 현대인의 오만이다.  시간에서 가속이란 
매우 위험한 것이다. 매우 서서히  발전하는 확립된 사회는 현대세계가  가지고 있는 
변화에 대한 미신을  갖고 있지 않았다.  이러한 사회들이 변화의  우상을 갖고 있는 
사회보다 더 잘 스스로를 보존할 수 있다. 원시사회는 수천년을 견뎠지만, 발전된 사
회는 2, 3세기 후에는 폭발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라틴아메리카에는 모호한 경향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멕시코혁명도 두 가지 경향
을 갖고 있었다.  승자들에 의해  지지되었던 국가를 개혁하고  근대화하려는 경향이 
수천년의 안정을  수호하려는 봉기(millenarist  revolt) 사빠타와  나란히 존재했다. 
그는 근대화로의 진행을 원치 않았다.  오히려 이상적 농업사회의 사회적  평등과 자
유라는 신화적 과거로 돌아가려 했다.  개인의 자유와 이성만이 가치로  인정되는 서
구전통의 눈에는 라틴아메리카는 모순일 수밖에 없다.
   
   
3. 라틴아메리카 연구와 라티노의 발전이데올로기{{) 이 부분과 관련된 자세한 논의는 Hirschman[1961]과 Black[1984]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이스빠뇰라 등 카리브 지역에서의 식민활동을 제외하더라도, 꼬르떼스가 멕시코대
육에 발을   디딘 1518년에서   메이훌아워호가 플리머스항을  떠나  미국에  도착한 
1620년까지는 100년이란 격차가 있다. 또 스페인과  포르투칼의 정복자들은 유럽이 
필요로 하는 열대작물을 공급할  수 있는 당시로는  경제적으로 가장 유리한  지역을 
차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라틴아메리카제국은 오늘 미국과 같은 경제적 번영
을 구가하지 못하고  빈곤과 외채와 물가고에  시달려 왔어야 했는가?  정치면에서도 
똑같은 수수께끼가 제기된다.
   19세기 초 라틴아메리카제국의 독립은 아메리카혁명과 프랑스대혁명의 연장선상에
서 이해되어야 하는  사건이었다. 프랑스대혁명의  자유·평등·박애정신이 신생공화
국들의 이념적 기초가  되었고, 이들  신생국들의 헌법은 미합중국의  헌법을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 그런데도  왜 라틴아메리카에서는  군부에 의한  정치개입과 헌정(憲
政)중단이 반복되어야 했는가?
   이같은 문제의 뿌리와 원인에 대한 시각은 중남미인들 사이에서도 시대에 따라 변
천되어 왔다. 우리는 그러한 노력들을 두 가지 기본입장으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나의 탓, 우리들의 잘못, 즉 안에서 원인을 찾고 현상을 설명하고 나아가서
는 대책을 제시하는  입장이다. 엘리트그룹의  독점요구, 중산층의  기업가정신 결여, 
일반대중의 무기력 등을 원인으로 지적하는, 더 나가서는 숙명론적인  자기비하의 시
각 등에 그것이다.
   둘째로는 그것이 누구이든 간에, 남의 탓으로 원인을 돌리는 입장이다.  그것이 스
페인과 포르투칼의 정복자들일 때,  그들의 수탈로 신대륙식민지에서는  재투자가 제
대로 이루어지지 못했으며, 그들이  이베이라반도에서 수입한 제도와  형태와 문화적 
유산이 오늘의 라틴아메리카 낙후성의  원인이 된다. 만일 그것이  '미국 제국주의자'
들이라면, 모든 문제의 근원은 그들에 의해  수호, 지배되는 자본주의체제의 탓이 된
다.
   
   ⑴ '내 탓이오' : 독립에서 제1차 세계대전까지
   19세기 중 이미 중남미제국은 공업화와 전반적인 경제성장면에서 북미합중국에 비
해 낙후되기 시작하였으나, 20세기로 접어들기까지는 라틴아메리카 발전문제의 본질
에 관한 문제제기나 본격적 연구가  시도되지는 않았다. 이는 아마도  독립이후 계속
된 신생공화국들 간의 정치적 분쟁이  일반뿐만 아니라 학자, 지식인들의  관심을 경
제문제보다는 정치문제로 집중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라틴아메리카 발전문제의 설명에서 무시할 수  없는 비경제적 요인의 하나인 정치적 
불안은 중남미인들이 줄곧 함께 살아온 현실이다.
   정치적 불안의 핵심은 이론과 현실의 괴리이며, 위선과 거짓이 체질화된 정치에 기
인하는 것이었다. 신생공화국들의 이념적 기초인  "자유민주주의 이데올로기는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적 상황의  구체적인 표현이 아니라  그것을 호도하는  것"{{) Octavio  Paz, La  Laberinto de  la Soledad,  2d ed.  Mexico :  Fondo de   Cultura Economica, 1959. 
   (Paz[1985], p.122)
}}이


. 이론과 실천, 말과 행동, 내용과 형식 사이의 끊임없는 상충이 라틴아메리카의  특징이 되어 버렸으며, 그것의 도덕적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것이었다.
   라틴아메리카의 지식인들은 발전의 기본조건인  법과 질서조차도  제공할 수 없는 
정치체제의 무능에 실망했다. 한편 유럽과 미국에서의 눈부신 발전으로  자신들과 이
미 격차가 크게 벌어진 현실에  자극되어 자기반성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
들에게 별 도움이 되지 못한  환상적인 혁명의 이상과 꿈에서  깨어났다. 멕시코에서
의 뽀르휘리오 디아스(Porfirio  D as) 독재정권(1884∼1911)에 대한  교육자와 지
식인들의 지지는 이같은 사고변화의 특이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혼돈과 침체를 질서와 번영으로 대체하기 위해서는 부패를 척결하고, 소모적인 정
쟁을 중단시키고, 근대화를 효율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선의의  독재자'가 필요하다
는 또 다른 꿈의 반영이었다. 교육자들과 지식인들의 결론은  라틴아메리카가 필요로 
하는 것은 자신들과 사회 자체의  완전한 변혁뿐이라는 것이었다. 이는  중산층의 형
성과 교육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는 매우 긴 시간을 요하는 변화이다.
   이같은 생각은 당시 중남미인들 사이에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20세기 초 라
틴아메리카인들 사이에서 가장 널리 읽혀진 자신들과 그들 사회에 관한 책들은 그들
의 결점과 실패를 끊임없이 그리고 냉혹하게 서술하는 것들이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붕헤(Bunge)의 <우리들의 아메리카>(Nuestra Am rica)와  봉휭(Bomfim)의 <사
회적 기생과 진화>(O Parasitismo social e Evolu  o)를 들 수 있다. 당시  유행했
던 인종주의적 결정론에 강한  영향을 받은 이들은  거의 라틴아메리카의 구제할  길 
없는 인종적 열등성과  점진적 퇴보를  선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봉헤의 모든 
분석은 라킨아메리카 사회성격의  기본적 구성요인이  게으름과 비관적 사고  그리고 
오만의 세 가지라는 명제에 근거하고 있다. 이들과 같은 범주에서  특히 경제를 다룬 
흥미로운 책은 칠레의 역사가 엥시나(Fracisco Encina)가  쓴 <우리의 경제 열등 : 
그 원인과 분석>(Nuestra inferiordad econ mica : Sus causas, sus consecue- 
ncias, Santiago, 1912)이다. 그의 견해로는 칠레경제가 제대로 발전하지 못하는 원
인은, 첫째 창의력과  인내심 그리고 도덕심의  결여, 둘째 협동능력의  부족, 그리고 
마지막으로 잘난체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같은 특징들은 유전적 요인과  잘못된 교육
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이 '병든 대륙과 그 주민'들을 어떻게 고칠 것인가? 19세기 중반과 말에, 아르헨티
나의 지식인 사르미엔토(Domingo Faustino Sarmiento)와 알베르디(J. B. Alberdi)
는 각각 미국을 배우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사회·경제분야의 저술가들  사이에 널리 
보급된 경제신념은 영국의 자유무역과 불간섭주의로부터 더 많은 영향을  받았다. 또
한 후르따도(Celso Furtado)가 지적하듯이, 19세기 라틴아메리카 저술가들은 그들의 
사회적 뿌리가 대지주와 노예소유주에 있었기  때문에 공업발전에는 별 관심을 보이
지 않은 것 같다.
   
   ⑵ '너의 탓' : 이베리아 반도인들의 탓
   자기비하가 19세기를 관류하는 전반적인 흐름이기는 하지만, 그런  중에도 문제의 
책임을 남에게 돌리는 태도가 싹트고 있었으며, 비난의 대상은  이베리아반도의 식민
종주국이었다. 사르미엔토와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그의 동료지식인, 정치지도자들은 
그들의 신생독립국들이 겪는 무질서와 독재의 반복이 히스파닉 영향때문이라고 비난
의 방향을 바꾸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라틴아메리카 문제의 근원을 이베리아반도에서 찾으려는 학자
들은 오늘날까지도 많이 있다. 특히 그들의 문제에  역사/문화적 접근을 하는 연구들
은 중세 이베리아반도의 특징이었던  행태와 제도, 사회관계들이  오늘의 라틴아메리
카에 지속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 견해에 의하면, 스페인 정복자들, 정부관리
들, 카톨릭 선교사들은 엘리트주의, 권위주의, 군국주의에 기초한 사회체제를 신대륙
에 이식했다. 포르투칼인들의 유산은  스페인의 것에 비해서는  인종적·문화적 다양
성에 보다 관대한 편이지만,  스페인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포르투칼인들도  그들의 신
대륙후손들에게 사회·정치·문화적 계급제도의  엄격한 관념을  심어주었다. 이베리
아반도의 군주제도로부터 파생되는 가부장적 사고는 문화와 개성은 교육의 함수이기 
때문에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은 지배정치문화에 참여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고 간
주한다. 그들은 그들의 사회적 신분을 하느님이 세우신 계급질서에서  자신의 역할로 
받아들이게 되어 있었다. 대신 그들은  자신들의 복지에 대해 책임지지  않고 그것은 
지배계층의 몫이었다. 공공도덕성이 정치문화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구조상 계급적
이며, 이념적으로 절대주의이고, 현실적으로는  권위주의적인 카톨릭교회는 정치·도
덕질서 유지의 책임을 정부와 나누어 갖고 있었다.
   이베리아반도와의 관계를 강조하는 또 다른  학자들은 조합주의 모형을  제시한다. 
중세 카톨릭사상에서 그 원류를 찾을  수 있으며,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과 살라자르 
치하의 포르투칼에서 관찰되는 조합주의 모형이 근대화 발전이론에 근거한 모형들보
다는 오히려 라틴아메리카 현대정치를 잘 설명한다는 주장이다.
   조합주의 모형은 수직적 조직경향을 보이는 라틴아메리카 정치집단들의 행태에 주
목한다. 조합주의체제하에서, 그런 집단들은 권위주의적  정부에 의해 통제되고 조정
되어서, 권력과 의사전달체계는 위로부터 아래로  수직적이다. 조합주의적 조직은 많
은 라틴아메리카국가들에서 쉽게 확인되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도 이 중세 이베리아
반도로부터의 족적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20세기 라틴아메리카제국에서의 사
회과학을 지배해 온 추세는 맑시안 테마인 계급갈등과 제국주의의 변형이었다.
   
   ⑶ '너의 탓' : 미국 탓과 반제국주의
   20세기 초 제1차 세계대전까지, 잠정적 자기비판과 선진공업국에서와 같은 자유방
임적 사회·경제체제를 옹호하는 저술들이 지배적이었으나 다음 단계에서 우리는 이
들의 발전관의 급격한 선회를  보게 된다. 자신들에게서보다는  바깥세상에서 잘못을 
찾으려는 경향이 본격화되었다. 같은 맥락에서 경제분야의 문제에 대한  구체적 라틴
아메리카식 해결도 모색하기 시작한다. 중미지역에서의 미국의 개입주의,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한 유럽세의 약화, 러시아  및 멕시코혁명 등 국제여건변화와  경험이 이
같은 변화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사회·경제변혁의 일관된 이론이  당장 출현한 
것은 아니다. 라틴아메리카사회에 대한 혁명적 이론정립의 가장 야심적  시도가 오늘
날까지도 가장 사회변화를 이루지 못한 페루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페루인 아야 데 라 또레(Haya de la Torre)의 사상은  10월혁명이 지식인사회의
분위기를 지배하던 1920년대 초에  형성되었다. 그는 공산주의와 자신의  사상을 구
분할 필요성을 느꼈고, 라틴아메리카문제의 특이성에  초점을 맞추었다. 레닌에 따르
면 제국주의는 자본주의의 최후의 단계이지만, 중남미인들에게는  그것은 자본주의와
의 최초의 만남이었다. 그렇게 때문에 라틴아메리카에서 혁명은 약하고  가난에 허덕
이는 프롤레타리아보다는 유럽에서보다 투쟁의식이  강한 지식인들과 중산층에 의존
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이러한 여건  하에서는, 투쟁은 반자본주의가 아니라 반
제국주의 깃발아래에서 수행되어야 한다.
   그의 반제국주의 투쟁프로그램에서 발견되는 흥미로운 점은 그가 외국자본의 필요
성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국가들에서는 자본수출은 꼭  해야되는 것
이기 때문에  라틴아메리카국가들이 자본유치경쟁을  멈추고 반제연합으로  뭉친다면 
훨씬 유리한 조건으로 자본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경제사상의 기초는 다음 네 가지로 요약된다. 라틴아메리카 후진성의 원인은 
제국주의 착취이며, 경제발전은 국가에 의해  주도되어야 하며, 서구자본주의 발전초
기단계에서 두드러졌던 부작용이 극복되어야 하며, 라틴아메리카의  모든 이익공동체
의 협력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 또 그의 사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인디오와 라
틴아메리카의 원시적 과거에서, 지켜야 될 가치뿐만 아니라 보다  나은 경제사회질서
를 건설하는 데 사용될 수 있는 요소들을 찾는 것이다.  그는 페루경제의 이중구조를 
지적하고, 인디오경제의 집단주의전통을 지키고  그 위에 새로운  농업사회를 건설한 
필요성을 강조했다. 또레와 같은 부류로  분류될 수 있는 동시대  지식인으로는 호세 
까를로스 마리아떼기(Jos  Carlos Mari tigui) 등을 들 수 있다.
   
   ⑷ '너의 탓'의 정교화 : 종속이론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제국주의이론이 왜 그리고 어떻게 선진자본주의국가의 지배계
층이 그들의  착취영역과 정치통제를  확장하는가를 설명하고자  한다면, 종속이론은 
이 불평등한 흥정과 여러단계의  착취관계가 피지배국가의 피지배계층에게는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연구한다. 즉 제국주의이론은  위로부터의 조망인 데  반해 종속이론은 
아래로부터의 조망이다.
   종속논리의 핵심은 쁘레비쉬와 그의 UN 라틴아메리카 경제위원회(CEPAL)의  동
료들의 연구로부터 파생되었다. 그들은 제3세계  국가들이 경험한 1차산품의 교역조
건 악화로 야기되는 문제를 부각시켰으며,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서의  보호주의와 공
업화정책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들의 논리는 중심/주변부 간의 관계의 비대칭성에 초점을 맞추었다. 첫번째 비대
칭성은 국제무역으로부터의 이익의 분배에 관한 것이다. 무역의 이익이  공평하게 분
배되기보다는 교역조건의 악화를 통해 1차산품  생산 주변부로부터 중심부로 소득이 
이전되는 경로로 사용되었다는 주장이다. 두번째 비대칭성은 중심/주변국간의 수입수
요의 소득탄력성의 차이이다. 이것이 교역조건 악화와  주변부국가들의 국제수지문제
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세번째 비대칭성은  산업보호정책의 효과면에서 나타난다. 보
호정책이 선진국에서는 최적자원배분을  왜곡시키지만, 전통부문에  위장실업과 잉여
노동력이 무한히 존재하는 주변부국가에서는  자원의 효율적 배분이라는 시각에서도 
보호정책이 정당화된다.
   수입대체적 공업화, 라틴아메리카의 경제통합 등 CEPAL이 제시한 경제정책의 실
패는 그들에게는 경제적 착취와 종속성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는  것이었다. 까르
도조, 도스 싼토스, 쑨켈  등 많은 라틴아메리카의 정치학자,  사회학자들은 사회계층
구조의 패턴을 설명하고, 종속국에서의 자본주의적 발전과정에서  필연적인 구조변화
를 예측하기 위한 연구에 다시 몰두했다. 새로운 초점은 착취관계의  양상은 항상 가
변적이라는 사실과 다국적 기업을 매개로  한 주변국에서의 공업화의 결과가 기존의 
이론에 의해 적절히 다루어지지 못했다는 인식에서 파생된 것이다.
   종속이론이 근거하고 있는 주요 가정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국내 및 국제 무대에
서 권력과 지위의 분배는 궁극적으로 경제적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둘째, 저발전의 
원인은 국내체제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패권국가들과  종속국들 간의 
경제적 관계의 유형에서 찾아야만 하는 것이다. 종속국 내에서의  불평등구조의 영속
화는, 기능상 식민지 공식지배기구의 현대판이라 할 수 있는 종속국의  한 계층에 의
해 관리된다. 셋째, 국내적으로나 국가 간에서나 자유방임적 시장은 기존의 불평등을 
완화하기보다는 더욱 악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지배외세는 종속국  내의 지배계층은 
다른 계층의 희생위에서 혜택을 보는 것이다. 이들 가정은 근대적 사고와 행태, 기술
의 확산을 통한 경제발전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이며,  그 정책결론은 CEPAL의 구
조론자들과 마찬가지로  시장을 대신하는  정부의 소득재분배,  불평등한 자유무역을 
대신하는 국내산업보호를 강조한다.
   마리아떼기의 반제국주의이론에서 구조론, 종속이론으로 이어지는 반자유주의적 경
제발전관은 20세기를 통해 중남미인들을 지배해 온 이데올로기였다. 1980년대 중남
미에 불어닥친 민주화의 물결로 등장한  민간정부들의 인기에 영합하는 경제적 대중
주의 강령과 공약들도 이들  이론에서 뒷받침을 찾았다. 1990년대에  경제개방과 시
장질서의 회복을 통해 중남미경제를 회생시키고자  하는 정치인들이 싸워야 하는 대
상도 이들이었다.
   
   ⑸ '잘못된 정책 탓' : 자유시장경제로의 전환
   1980년대의 소위 '잃어버린 10년'의 경험에서  중남미인들이 얻은 귀중한  교훈은 
20세기를 통해 그들을 지배해 온  반자유주의적 발전이데올로기, '남의 탓'으로는 라
틴아메리카가 직면하고 있는 경제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깨달음이었다. 제2차  세
계대전 이후 1980년대까지 중남미경제의 트레이드마크는  보호주의, 수입대체, 인플
레인션이었고, 정치에서는 군사독재, 마르크시즘, 포퓰리즘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이르러 중남미 각국은 건전한 재정·금융정책으로 경제안정화
를 이루어 인플레이션을 잠재웠고,  보호주의적 무역장벽은 대부분  철폐되어 대외시
장 개방이 이루어졌다. 자유무역협정 체결로 역내공산품 교역도 크게 증대되었다. 경
제적 민족주의는 외국인 투자유치 열기에 자리를 내주었고, 라틴아메리카  경제를 국
가자본주의로 불리게 했던 국영기업체들도 거의 모두 민영화되고 있다.  군인들은 군
막사로 돌아갔고, 마르크시즘도 동구의 몰락과  함께 유행에서 밀려났다. 포퓰리스트
들은 신자유주의자로 변신했다.
   
   
4. Convergence - 새로운 추세인가
   
   1990년대의 라틴아메리카의 시장경제로의 전환은  대륙의 역사적  추세에서 보면 
중대한 의미를 갖는 거대한 변화임에  틀림없다. 이는 단순한 정책의  변화가 아니라 
독립 이후 줄곧 라틴아메리카를 지배해  온 사고의 틀을 바꾸는  정치·경제의식의 일
대변혁을 의미한다. "역사를 상황의 구체적 표현이  아니라 그것을 호도하던" 자유민
주주의 이데올로기가 실천되는 제도로  자리잡아 가고 있으며,  국가자본주의로 불리
던 왜곡된 시장경제가 경쟁논리에 근거한 자유시장경제로 변화한 것이다.
   이는 인류보편적 가치이면서도 가장 미국적 가치라 할 수 있는 민주주의와 시장경
제에 대한 신념의 라틴아메리카로의 확산을  의미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부와 소
득, 경제수준에서만 점점 격차가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존중하는 가치가  달라 지향
하는 미래의 방향도 다르던 미주대츅의 남과  북이 같은 가치를 존중하는 같은 체제
로 수렴하는 지난 10년이었던 것이다.
   1998년 4월 말 칠레 산티아고에서 열린 미주정상회담을  앞두고 연초에, 미주 월
스트리트 저널과 16개 라틴아메리카 신문사들이 공동으로 행한 "아메리카의 거울"이
란 조사보고에서도 남북미간의 수렴현상은 확인되고 있다.  미주자유무역협정 제안에 
대한 지지가 라틴아메리카에서 절대적인 반면 미국에서는  유보적이었으며, 외국자본
에 대한 거부감이 라틴아메리카에서 현저하게 줄어든 반면 미국에서 오히려 그 반대
경향이 나타나고 있는 등 일견 역설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하는 결과를 보였다.
   민주주의도 라틴아메리카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에콰도르와 파
라과이를 제외하고는 권위주의정권 지지는 일부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반미감정 혹
은 미국에 대한 불신도 거의  사라진 것으로 나타났다. 콜롬비아를  제외하고는 미국
의 마약생산국에 대한 제재조치를 지지했으며, 이를 위해 미군이 2000년  이후 파나
마에서 계속 주둔하는 것도 찬성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아메리카의 거울"은 미국
과 라틴아메리카 14개국에서, 미국에서는 전화로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직접 인터뷰로 
1만4천 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이다.
   이 조사결과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가장 중요한 가치관에서 남북미인들의 의
식의 수렴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나 아직도 이들 간에 상당한 갭
이 있음도 깨우쳐 준다. 30%  정도의 라티노가 권위주의정권을 선호하고 있다는  사
실이다. 또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들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대한  지지가 정
부 및 공공부문에 대한 불신에서 온다는 점이다. 국회, 사법부, 경찰 모두 국민의 사
분의 일 정도의 신뢰만 얻고  있을 뿐이다. 민간기업들이 훨씬 높은  신뢰를 얻고 있
었고, 특히 중소기업은 55%의 신뢰로 공공부문의 배를 넘었다.  민간부문에 대한 신
뢰가 정부부문에 대한 신뢰에 비해 높은  한 시장경제에 대한 지지는 계속될 것이라
는 추론이 가능하다. 이미 자유무역에 대한 중남미인들의 지지는  미국에서와 차이가 
없다.
   
   
5. 90년대의 붐과 위기 - 과거로의 복귀인가
   
   아시아의 금융위기는 1년만에 러시아를  거쳐 남미로  파급되어, 브라질로  하여금 
다시 한번 IMF를 찾게 만들었다. 역시 세계금융위기에서  라틴아메리카는 빼놓을 수 
없는 존재이다. 불과 4년전에 멕시코에서 '21세기 최초의 금융위기'로 불리는 사태가 
벌어졌고 그보다 12년전에  바로 거기에서 1980년대의  세계채무위기가 시작되었었
다. 이들은 우리들이 직접  목격했던 근년의 위기들이었을 뿐이고,  19세기 스페인과 
포르투칼로부터 독립한 이래  라틴아메리카는 세계금융위기  때마다 그 중심에  있었
다.
   1820년대 이들 신생독립국 정부의 재원을 조달하기 위해 발행한 채권이 1825∼6
년의 유럽금융위기를 맞아 지불불능이 되면서 이에 투자했던 영국투자자들의 번영의 
환상은 산산이 깨어졌다. 다시 1860년대에서 70년대 초 그리고 1880년대에 라틴아
메리카 정부와 철도회사들이 대량으로 발행했던 채권들은 각각 1873년과 1890년의 
위기를 맞아 채무불이행, 리스케줄링의  수순을 밟아야 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자
본공급원과  그   용도는 바뀌었어도   라틴아메리카의  대외채무위기는   반복되었다. 
1920년대에는 라틴아메리카의 도시현대화 프로젝트를  미국의 은행들이 화이난스했
고, 1929년 시작된 대공황으로 다시 한번 1931년부터 채무불이행, 리스케줄링이 공
식은 이어졌다. 그 이후 1970년대의 페트로 달러와 1990년대  미국투신사들의 주식
과 채권투자가 불러온 1980년대와 1995년 위기는 이미 언급한 대로 우리가 경험한 
위기들이다.
   붐과 파국의 반복이 지난 200년  가까이 계속된  것이라면 앞으로도 계속될  것은 
아닌지, 그래서 지난 10여년간 중남미제국이 보여준 변화가 일시적 현상으로 끝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라틴아메리카의 과거로의  회귀를 우려하게 
만드는 현상들도  보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많은  라틴아메리카인들에게 개혁의 
혜택은 이미 잊혀지고 있는 반면 그 비용이 크게 보이기 시작하여 정치적 지지가 얼
마나 오래 계속될지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세법, 노동법, 연금법,  상법 등 제도와 관
행은 개혁을 기다리는 데  개혁의 속도는 오히려 느려지고  있다. 또한 마약의 확산, 
폭력과 부패의 만연 등은 저소득계층으로  하여금 민주주의의 이상보다는 치안을 유
지해 주는 독재정권을 선호하게 만들고  있는 것도 우려되는 현상이다.  최근의 외환
위기공포는 경제정책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고, 자유주의  시장경제와 개방정책을 
비판해 온 많은 이해집단이 세 확산의 기회로 생각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외환위기가 정부로 하여금 과감한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과거와 다를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을 뒷받침할 
만한 몇 가지  이유도 발견된다. 그  첫째는 베네주엘라의 경우와  같은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라틴아메리카가  경제안정과 개방경제의 이득을,  정도의 차이
는 있지만, 체험했다는 점으로 그것은  지속적 개혁을 국민들이 표로  지원하는 정치
적 성숙으로 표출되고 있다. 둘째는 그간의 개방으로 외국인투자자들이  중요한 국내
시장의 참여자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개혁과 개방을 돌이키기 어려운  현실로 만
들었다.  셋째로는   역내  자유무역,   공동대외무역정책,  공통관세   등을  포함하는 
Mercosur와 같은 '열린 지역주의'를 지향하는 장기적 안목의 통합프로젝트도 라틴아
메리카가 과거로의 회귀와는 다른  방향을 지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끝으로 그간의 고도성장과  아울러 저축증대, 생산적 투자,  효율적 금융산업의 
신장 등을 한 세대 내에 이루어낸 칠레의 경험이 여타 국가들에게도 좋은 본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과거의 전형과는 달리, 라틴아메리카가 포퓰리즘과 보호주의로의 회귀를 거부하고 
있다. 아직은 과거의 실수에서 얻은  교훈이 가장 큰 자산이  라틴아메리카에서 그렇
게도 큰 대가를 치르고 얻은 자유시장과 개방의 이득을 그리 쉽게 포기할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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