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공에 흩어진 소년의 꿈
정 주영.
그는 배가 고팠다. 뱃가죽이 잔등에 달라붙도록 배가 고팠다. 그렇게 배
가 고픈데도 어느 집에 아침밥을 얻어 먹으러 들어갔다가 무안당하고 돌아
서 나온 생각을 하면 지금도 귀밑이 화끈 달아올랐다.
아직 아침 새때가 되지 않았는데도 신작로에 작열하는 팔월의 뙤약볕은
쨍하게 따가왔다.
소년 주영은 배고픈 것을 참고 그저 신작로 길바닥만 내려다보면서 수굿
이 북으로 북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가 아산리를 떠난 것은 어제 밤이다. 날이 밝으면 아버지가 들에 나가
자고 찾을 것이므로 아예 저녁밥을 먹고 웃방으로 넘어가서 어머니가 빨아
다려놓은 흰 무명바지 저고리를 꺼내 입고 슬그머니 집을 빠져나왔던 것이
다.
농사를 짓는 그의 집은 가난했다. 겨울이면 눈 속에 묻혀서 별로 할 일이
없는 농촌이었으므로 으례 아침밤을 먹으면 저녁에는 죽을 먹어야만 했다.
점심을 건너 뛰고 저녁까지 견디려니까 아침에는 밥을 먹었지만 그나마 밥
은 쌀밥이 아닌 까실까실한 조밥이었다. 그리고 저녁에는 잠자리에 들면 자
연 배고픈 것을 잊을테니까(사실은 그렇지도 않았는데)죽으로 배를 채우곤
했는데. 죽은 대개 시래기죽 아니면 콩죽이었다.
지난 봄 열여섯살에 송전보통학교를 졸업한 주영은 어떻게 하면 도회지에
나가서 일을 할 수 있을까 하고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해 왔었다.
조반석죽의 가난으로부터 해방되는 길은 오직 농촌를 떠나 도회지로 진출
하는 길뿐이라고 생각한 그는 이미 도회지에 나가서 취직하고 있는 보통학
교 동창들을 수소문해서 여러 차례 편지를 띄어 보았다. 그러나 아무한테서
도 별로 신통한 회답은 없었다.
그런 어느 날, 그는 이장집에 들러서 신문을 보는 가운데 청진 쪽에서
항만공사와 함께 철도공사가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청진 쪽에 일터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그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가벼운
흥분까지 느꼈다. 그전부터 도회지에 아무 연고가 없는 그는 자연 막노동을
할 수 있는 곳을 찾아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기 때문에 그는
청진의 항만공사나 철도공사는 마치 자신을 위해 벌려 놓은 공사판처럼 생
각되었다.
집으로 달려와서 지도책을 펼쳐 본 그는 실망했다. 그가 살고 있는 통천
에서 청진까지의 거리는 너무나도 까마득하게 멀었다.
밤새도록 그는 잠을 설쳤다. 자다가도 지도책을 몇 번이나 펼쳤는지 모른
다. 전조선을 한 장으로 나타낸 3백만분의 1지도를 펴보면 통천에서 청진까
지는 가위뼘으로 한 뼘도 못 되는데 함경남북도를 확대해서 한 장에 실은
1백 50만분의 1 지도를 펴보면 큰 뼘으로 한 뼘이 훨씬 넘었다.
며칠이 걸려야 가고 올 수 있을는지도 모르는 그 통천과 청진 사이를 그
는 밤사이에 수도 없이 왕래하면서 그때마다 기와집만 한 채씩 지었다가 허
물곤 했다.
(가자! 그래, 그래도 가야지.)
이튿날, 주영은 한동네에서 제일 깨었다고 생각하는 지 주원을 찾았다.
주원은 그보다 보통학교도 3년 선배였고 나이도 세살 더 많았다. 아무래도
그 먼길을 혼자서 떠나기보다는 누군가 의지될 만한 사람하고 같이 가는 것
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너의 아버지가 아시면 가게 하시겠니?"
주원은 마치 의사가 진맥하듯이 주영의 제일 아픈 맥을 딱 짚는 것이었
다.
"가려면 몰래 도망해야죠."
그는 이미 도망할 것을 결심하고 있었다. 언젠가도 그는 도회지에 나가고
싶다는 말을 은근히 비쳤다가 아버지에게 혼구멍이 난 적도 있다.
"이놈아, 넌 아뭇소리 말고 네 동생들을 위해서도 이 애비하고 농사를 지
어야 해."
아버지는 맏아들인 그를 논에다 아주 말뚝 박아 놓을 작정인 것 같았다.
주영의 도망 간다는 말에 주원은,
"도망을 가더라도 노자는 있어야 할 것 아냐."
하고 난색을 표했다.
(노자. 그렇다, 걸어서 가더라도 밥 사먹을 돈은 가져야 떠날 것 아닌
가.)
당장 그의 수중에는 노랑 수수동전 한닢도 없었다.
"형, 이렇게 하면 어때요?"
"어떻게?"
"이왕 농사철도 다가왔으니 모심기나 끝내 놓고 떠나요."
"아버지 농사 일을 도와드리고 떠날려구?"
"그보다도 그동안에 나무를 해다 팔아서라도 다만 얼마라도 노잣돈을 장
만해야죠."
"그러자. 어쨌든 사내는 대처로 나가야 한다."
그래서 소년 주영과 주원은 그 바쁜 농사철을 지내면서 틈틈이 나무를 해
다 판 돈47전을 들고 어젯밤 쥐도 새도 모르게 동네를 빠져나와서 밤새껏
산길을 걸어왔던 것이다.
47전은 비상금이었고, 밥은 얻어 먹으면서 청진까지 한 보름쯤 걸어갈 셈
치고 나선 길이었다.
동네 뒷산을 넘어서 산택이라는 동네를 지나 꽤 큰 영마루를 하나 넘고
패천을 건너 습곡으로 가는 길에 날이 밝아왔다.
아마 60리 길은 실하게 걸어온 성싶었다. 어젯밤 집에서 나올 때도 시래
기죽으로 채운 배였다.
"주영이 너 배 안 고파?"
"형은요?"
"난 패천을 건널 때 벌써 배가 고파서 물로 배를 채웠는데 그래두....."
"밥을 어디 가서 얻어 먹죠 형?"
"가다가 아무 집에나 들어가지 뭐!"
"신작로 가에 있는 집들은 인심이 좀 사나울 거예요. 조금 큰 길에서 들
어간 동네로 가죠 형."
"그럴까?"
두 사람은 큰길에서 한 5리쯤 들어선 동네를 찾아갔다. 이 집 저 집을 기
웃거렸지만 아직 아침 시간이 조금 일렀던지 밥 먹는 집이 없었다.
"너무 이른가 봐요 형."
하고 주영은 연자방앗간 맷돌받이에 엉덩이를 걸쳤다.
"좌우간 쉬었다가 밥이나 얻어 먹고 또 떠나자구. 이젠 집에서 우릴 찾아
나섰다고 해도 따라올 수 없을 테니까."
주원은 맷돌받이에 나란히 걸터앉았다. 이슬에 젖은 두 사람의 중의 가랑
이에서는 물이 줄줄 흘러 내리고 있었다.
이때 앞집에서,
"아버지, 진지 잡수세요."
하는 어린 아이 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의 귀가 번쩍 띄었다.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가서 밥 좀 달라고 해."
주원이 말했다. 주영은 당연히 자기가 밥을 빌어야 할 줄 알면서도 막상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니 여기서부터 그렇게 주저하면 청진가지 어떻게 얻어 먹으며 갈 거
야?"
그래도 주영은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밥은 얻어 먹으면서 가
자고 한 사람은 바로 자기였다.
"에이 내가 가서......"
하고 주원이 엉덩이를 들었다.
"아냐, 내가 갈께 형."
차마 그가 얻어다 주는 밥을 받아 먹고 있어야 할 그의 처지는 아니었다.
주영은 배짱을 돋우기 위해 아랫배에 힘을 한번 주고는 앞집 대문 안을
기웃거렸다.
마침 한 식구가 마루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주영은 어깨를 웅크리며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마루 위에서 밥을 먹던
사람들이 일제히 바라보았다. 그는 용기를 내고,
"저어, 노자가 떨어져서 그러는데 밥 좀 주십시오."
하고 깐에는 큰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그 소리는 상대방이 알아 들을까 말
까 하는 기어 들어가는 소리였다.
"뭐라구?"
쉰 남짓한 영감이 큰소리로 물었다.
"저어, 노자가 떨어졌는데요......밥 좀 주십사구요."
소년 주영은 똑같은 소리를 되풀이했다. 그제서야 영감이 말귀를 알아 듣
곤,
"아 이녀석아, 노잣돈을 떨어지지 않게 단단히 비끄러맬 일이지 어쩌다가
떨어뜨렸어?"
하는 것이었다.
주영 소년은 얼굴이 화끈해서 그냥 돌아서고 말았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
오른 그를 본 주원이 연자방아 맷돌받이에서 일어서며.
"아니, 왜 그래?"
하고 다가왔다.
"형, 가요 가! 난 굶어 죽으면 죽었지 다신 밥 얻으러 안 갈거요."
그 길로 두 사람은 동네를 빠져나와 아침을 굶고 그냥 북쪽으로 길게 뻗
은 신작로 길을 걸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형!"
하고 주영이 입을 열었다.
"나 대답할 기력도 없다."
주원도 주영만큼이나 배가 고픈 성싶었다.
"지금 생각하니까 그 영감님이 밥을 줄 생각으로 우스갯 소리를 했던 것
같애요."
"듣기 싫어. 지금 와서 그런 소릴 하면 뭐해? 사내 자식이 그만한 숫기도
없으면 어떡하니?"
주영은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그는 정말 그렇게 숫기가 없었다. 그 자신
도 이렇게 숫기가 없어가지고 객지 생활을 어떻게 해 나가나 하고 걱정했
다.
아침 새때쯤은 되었을까. 한참 뱃속에서는 쪼르륵 소리가 들리는데 멀리
한길가 집 봉노마루 상 위의 사발 얹어 놓은 것이 보였다. 봉노마루 밥상
위에 사발을 얹어 놓은 집이면 그 집은 떡 파는 집이었다.
"형, 저기 떡집 있어요."
"나도 봤어."
"배고파 죽겠어요."
"벌써부터 떡을 사 먹기 시작하면 이 47전 가지고 어떻게 청진까지 가
나?"
"돈 떨어지면 얻어 먹죠."
"죽으면 죽었지 밥은 안 얻어 먹겠다면서?"
"돈 떨어지면 설마 무슨 수가 나겠죠. 우선 한 5전어치만이라도 사서 요
기나 하고 가요."
두 사람은 비상금 가운데서 5전으로 인절미 다섯 개를 샀다. 시장한 행인
에게 요기하라고 있는 떡집이었기 때문에 떡도 보통 떡 집 것보다는 컸고
덤으로 시래기죽까지 한 사발 주었다.
두 소년은 염치 불고하고 시래기죽을 한 그릇식 더 달라고 해서 배를 채
웠다.
그리고 원산까지 백20리 길을 한숨에 걸었다. 통천에서 원산가지의 2백리
길을 하룻밤과 낮 사이에 걸어 재낀 셈이다.
원산에는 그들의 보통학교 동창인 전 우학이 있었다. 우학은 일본사람 시
계포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주영은 그전에 그에게도 일자리를 알아 봐 달라
고 편지를 낸 적이 있다.
원산 시내에 들어선 두 소년은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전 우
학을 찾아가면 최소한 오늘 밤은 거저 먹고 잘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물어 물어서 우학이 일하고 있다는 본정통의 시계포를 찾아내
곤 내심 쾌재를 올렸다.
"주영아, 우학이 있나 안에 들어가 봐!"
"있겠죠 뭐. 같이 들어가요."
주영은 혼자서 시계포 안에 들어갈 만한 비위도 없었다.
"들어가서 있으면 나오라고 해."
주원은 주영보다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항상 명령하는 입장이었다. 주영
은 마지못해 시계포 앞으로 다가가서 유리창 너머로 우학이 있나 없나를 기
웃거렸다.
마침 우학은 하오리 하까마(일본 남자옷)차림으로 기름 걸레를 가지고 시
계를 닦고 있었다.
주영은 손바닥으로 유리창을 탁탁 두드려서 신호를 보냈다. 우학이 돌아
보았다. 활짝 웃어 보이던 주영의 얼굴이 흠칫 굳어 버렸다. 자지러질 것처
럼 놀라는 우학의 얼굴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돋보기 안경을 콧잔등에
걸친 채 시계 수리를 하고 있는 일본주인을 한번 힐끗 바라보더니만 주영에
게 저리 가라는 뜻의 눈짓을 보냈다.
주원이 시무룩하게 돌아오는 주영에게 물었다.
"우학이 없어?"
"있어요. 있기는 있는데........"
"있기는 있는데?"
우학은 9시가 지나서 가게 문을 닫은 다음에야 주인의 허락을 받고 나왔
다.
(아, 남의 밥 먹기가 이렇게 어려운 것이구나.)
주영 소년은 그렇게 생각하며 오히려 일찍 나오지 못한 것을 미안해 하는
우학의 처지를 동정 해 마지 않았다. 그는 우선 원산 시내 구경을 하자는
것이었다. 주영과 주원은 배가 고팠지만 그렇다고 밥을 먼저 사 달랄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은 우학에게 이끌려 이곳저곳 돌아다녔으나 하도 배가 고파서 생
전 첨 보는 전기불만 번쩍번쩍 하는 것이 오히려 현기증만 일어났지 하나도
재미는 없었다.
"우학아, 사실 우리 아직 저녁을 못 먹었다."
우학이 어딘지 또 한 군데 가보자고 했을 때 주원이 그렇게 말했다.
"아, 그래? 식당은 벌써 문을 다 닫았을 텐테........"
"저녁이야 뭐.......그냥 자지. 너한테 잠 잘 데는 있니?"
"여관 같은 데 안 정했니?"
"우리한테 여관잠 잘 돈이 어디 있어."
"그럼 어떡하지?"
우학은 난처해 했다. 자기도 일본사람 점원들 틈에 끼어 잔다는 것이었
다. 그러면서 그는 두 사람을 부두로 데리고 갔다.
"나도 12시 전가지는 돌아가야 하는데 미안해서 어쩌지?"
"할 수 없지 뭐. 들어가 봐. 우리 때문에 괜히 주인한테 욕 먹지 말구."
주영이 그를 위로했다.
"그래, 그만 들어가. 우린 여기 아무데서나 자고 내일 새벽 일찍 떠날 테
니까."
주원도 그에 대한 기대를 깨끗이 포기하는 듯했다.
우학은 몇번씩 미안하다는 말만 뇌까리다가 돌아갔다.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시꺼먼 원산 앞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서 자지?"
주원이 힘없이 물었다.
"저쪽 부두가에 가서 아무렇게나 쭈그리고 한잠 자죠 뭐."
"그럴까?"
하고 주원은 부두가로 발길을 옮겼다.
"그냥 잘 거야 형?"
그는 따라가면서 물었다. 돈은 몽땅 주원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주영은
그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주원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내일 새벽에 떠나려면 뭘 조금 먹고 자야 할 거 아냐, 형?"
그래서 두 사람은 부두가의 좌판 노점에서 해초를 섞어 만든 수수부침으
로 허기를 채웠다.
그리고 두 소년은 방파제 쪽으로 나갔다. 설렁설렁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시원했다. 두 사람은 방파제 콘크리트 바닥 위에 팔베개를 하고 나란히 누
웠다. 자정이 가까왔는데도 하루종일 불볕에 달아올랐던 콘크리트 바닥이
아직 덜 식었는지 따근다근하게 뒷잔등에 배어 왔다.
어느덧 주원은 잠이 들어 곤한 숨소리만 거칠게 내쉬고 들이쉬곤 했다.
그러나 주영은 깍지 낀 두 손 위에 뒤통수를 받치고 멀끄러미 밤 하늘을
쳐다보았다. 통천의 별이 원산 밤 하늘에서도 빛나고 있었다.
(아, 얼마나 바라던 탈출이냐. 지금쯤 아버지와 어머니는 종적을 감춘 나
를 걱정하시느라고 잠을 못 주무시겠지? 죄송하다. 그러나 어쩌는 수 없었
다. 어떤 고생이 되더라도 꼭 돈을 벌어서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자. 그리
고 동생들도 내 손으로 공부도 시키고 장가도 보내고 세간도 내줘야지....)
초롱초롱하던 별빛이 희뿌얘졌다. 주영의 두 눈에는 눈물이 함박 고이기
시작했다.
<나 없이 농사 일을 하시려면 아버지가 고단하시겠다. 논밭에 엎드려서
손톱 발톱이 빠지도록 열심히 일하는 아버지.....남들은 일년에 두번밖에
못 치는 누에고치를 일년에 네번이나 치는 우리 어머니.....부지런하고 착
하기로는 동네에서 제일 가는 아버지 어머닌데도 왜 우리는 가난을 면치 못
하는 것일까.)
다시 밤 하늘의 별빛이 초롱초롱 빛나기 시작했다.
(어쩌면 우리 가난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가난일는지도 모른다. 길주
에서 서당 훈장까지 지낸 할아버지도 너무 가난해서 장가를 못 들다가 나이
스물여섯이 돼서야 겨우 열여섯 살 된 할머니하고 결혼했다고 하지 않았는
가. 그렇다. 나는 가난만은 물려받지 않을 테다. 가난만은 물려주지도 않을
테다!)
소년 주영은 두 주먹을 불끈 거머쥐며 콘크리트 바닥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순간 그는 멍하게 고개를 들고 쳐다보았다.
"야 야! 일어낫!"
웬 낯선 사나이가 다가와서 주원의 옆구리를 쿡쿡 찼다. 주원이 부시시
잠에서 깨어 일어났다.
"너희들 뭣하는 놈들이야?"
낯선 사나이는 원산 경찰서 형사였다. 두 소년은 청진으로 돈 벌러 가는
길인데 노자가 없어서 바깥잠을 자고 있는 중이라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래
도 형사는 두 사람을 믿을 수 없다고 경찰서로 가자는 것이었다. 두 소년은
형사를 따라 나섰다.
먼동이 트고 있었다.
"너희들 정말 돈 벌러 가는 거야?"
한참 걸어가던 형사가 발길을 세우곤 다시 한번 다그쳤다.
"네, 정말이에요 아저씨."
주영이 안타까이 대답했다. 형사는 소년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형사도
갸름하고 예쁘장하게 생긴 동안의 소년 주영이 무슨 죄를 짓고 달아나는 것
으로는 생각되지 않았던지,
"그럼 가 봐!"
하고 돌아서는 것이었다.
그 길로 두 소년은 덕원을 지나 문천으로 해서 청진을 향해 북으로 북으
로 내달았다. 둘이 고원 땅에 들어설 무렵, 해는 서산 마루에 걸려 있었다.
원산에서 고원가지 백20리 길을 잠시도 쉬지 않고 걸어온 것이다.
"형, 우리 이 고원에서 노잣돈을 벌어 가지고 청진에 가요."
"여기서 일할 데가 어디 있어?"
"신문에 고원에서 청진까지 철도를 놓는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여기 어디
에 철도 공사장이 있을 것 아녜요?"
"글쎄......."
주영과 주원은 철도 공사장을 찾아갔다. 두 사람은 다음 날부터 한바(토
공들의 합숙소)에서 먹고 자면서 손수레로 흙 나르는 일을 했다. 장정들이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들 힘에는 벅찼다. 특히 열여섯살 나이의 소년으로
서는 참으로 고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주영은 여기서 노자를 벌어야만 목적지인 청진에 갈 수 있다는 일
념 때문에 고된 줄도 몰랐다. 하지만 돈을 번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
니었다.
한달 품삯이 45전인데 한바 밥값이 35전이었다. 한달을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해야만 15전이 벌리는 것이다. 그러나 비 오는 날은 공치는 날이다. 게다
가 신발은 어찌나 빨리 닳는지 신고 온 신발이 못 신게 되어 새신발을 한
켤레 사 신었는데 그 신발값이 50전이었다. 앞으로 신발값만 벌어 갚으려
해도 꼬박 백날은 일을 해야 한다.
새벽 6시에 일터로 나가면 어두워져서야 돌아왔다. 하루 12시간이 넘는
고된 중노동이었다.
희멀끔하던 주영의 홍안은 햇볕에 타고 그을러서 새까맸으며 갸름했던 아
래턱은 아주 홀쭉하게 빠져서 뾰족하기까지 했다. 그의 마음은 비록 피곤하
지 않았는지 몰라도 몸은 피로할 수밖에 없었다. 자고 먹고 일하는 것 말고
는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부지런히 일을 해서 돌아오는 추석 명절에는 다만 얼마라도 돈을 부쳐 고
향의 아버지 어머니를 기쁘게 해 주리라던 소년의 꿈은 정말 한낱 꿈으로
그칠 것만 같았다. 이제 추석 명절도 앞으로 엿새밖에 남지 않았다. 시골에
다 돈을 부치려면 늦어도 내일까지는 부쳐야 한다.
그동안 고원 철도 공사판에서 일해 온 지도 두 달이 되었건만 주영은 신
발 한 켤레 사 신는 바람에 오히려 빚만 지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래도 그
는 몇푼 가불할 생각으로 십장이 묵고 있는 한바를 찾아갔다.
"가불은 임마, 빚도 있는 놈이 무슨 가불이야?"
투전판에 끼어 있던 십장은 거들떠 보지도 않으려고 했다.
"추석 명절이니까 고향에 조금 부쳐 주려고 그래요 아저씨."
"녀석....고향에 누가 있는데?"
"부모님이랑 동생들 여럿이 있어요."
십장은 어린 소년의 생각을 가상하게 여겼던지,
"내가 얘기해 줄 테니 내일 사무실로 가 봐."
하곤 다시 투전판으로 얼굴을 돌렸다.
주영은 십장이 고마왔다. 기뻤다. 그러나 십장 한바를 나서는 그의 얼굴
은 짙은 근심으로 흐려져 있었다.
(가불을 얼마나 해 줄는지 모르지만 가불하는 만큼 나는 이 공사판에 발
목을 잡히는 거다.........)
하는 생각을 하며 그는 고개를 떨군 채 일반 노가다 한바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
"주영아!"
하고 귀에 익은 아버지의 굵직한 소리가 목덜미에 떨어졌다.
주영은 깜짝 놀라며 얼굴을 번쩍 들었다. 아버지가 앞을 막아서고 있었
다. 그는 생시 같기도 하고 꿈을 꾸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통천에 있는
아버지가 고원 철도 공사판에 나타나다니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아버지!"
그는 반신반의하며 아버지를 불러 보았다.
"망할 녀석......이놈아! 집을 두고 이게 무슨 고생이냐 응?"
목 메어 하던 아버지는 주먹으로 아들의 머리를 세게 쥐어 박았다.
"아버지.........."
주영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왈칵 솟아 올랐다.
"이게 무슨 꼴이냐 응? 이 애비 속을 썩히구....이놈아, 내가 너를 찾느
라고 얼마를 헤맸는지 아냐? 오늘이 꼬박 두달째 다 임마......"
"아버지......."
소년은 아버지 품에 안기면서 터지려는 감격의 울음을 삼켰다.
아버지는 주영이 몰래 집을 떠난 그 다음날, 바로 아들을 찾아 나섰던 것
이다. 아버지는 청진으로 갔을는지도 모른다는 이장 딸의 말만 믿고 곧장
청진으로 내려가서 청진 바닥을 구석구석 이 잡듯이 헤매다가 추석이 다가
오자 하는 수 없이 공사판을 따라 찾아 올라오면서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길
이었다.
이장 딸 옥선이가 주영은 청진으로 갔을 것이라고 한 데는 그럴 만한 근
거가 있었다.
지난 봄, 주영은 여느 때처럼 이장집 툇마루 끝에 걸터앉아서 신문을 보
고 있을 때였다. 신문을 보던 그가 별안간 싱글싱글하며 좋아하는 것이었
다.
"왜? 무슨 좋은 소식이라도 있어?"
하고 옥선이가 다가왔을 때,
"이봐! 청진에 항만공사하고 철도공사가 벌어졌어. 청진에 가면 일할 수
있단 말야."
하고 그는 옥선이에게 출향관의 결의를 언뜻 비친 적이 있었다.
아산리 동네에서는 이장 집인 옥선네가 제일 잘 살았다. 그래서 신문을
보는 집도 아산리에서는 옥선네 한 집뿐이었다.
주영과 옥선이는 가까운 사이였다. 옥선이는 매일같이 신문을 보러 오는
그를 위해 그날 그날의 신문을 정성껏 접어 두었다가 내주곤 했으며 가끔
재미있는 잡지책 같은 것도 그에게 빌려 주곤 했었다.
고향으로 붙들려 내려온 주영은 옥선이를 원망했다.
"왜 청진으로 갔을 거라고 했냐 말야?"
"고생할 것 같으니까 그랬지 뭐."
"고진감래라는 말 있잖아. 고생 끝에 낙이 있다구. 낙은 가만히 앉아 있
는데 굴러 들어오는 것이 아니야."
"왜 그럼 나한테도 암말 안 하고 살짝 도망 갔어?"
옥선이는 새초롬해져서 방안으로 들어갔다.
(아, 옥선이가 참말 나를 좋아하는 모양이구나.)
하며 주영은 그녀가 내다 준 신문을 펼쳐 들었다. 맨 먼저 그는 연재소설
<흙>을 읽었다. 그것을 읽어 가노라면 마치 자신이 흙 속의 남주인공 허 숭
이 되고 옥선이는 그 속의 여주인공 윤 정선이 되는 착각 속에 빠지기도 했
다. 그러면서 그는 허 숭처럼 자신도 서울로 올라가서 고학을 하리라고 결
심하는 것이었다.
이번에 같이 떠났다가 고원 철도 공사판에서 함께 일하던 지 주원은 그
뒤 청진으로 갔다는 소문만 있을 뿐 자세한 소식은 알 길이 없었다.
눈코 뜰새 없이 바쁘던 가을 추수가 끝나자 어김없이 겨울이 다가왔다.
주영은 어떻게 해서라도 고향에서 빠져나갈 궁리뿐이었다. 이번에는 아랫
집에 사는 김 창녕이와 건너 마을에 사는 서 원두하고 셋이서 탈출모의를
했다.
올 겨울은 유난히도 눈이 많이 내렸다. 통천은 본래 눈이 많이 내리는 고
장이기는 했다. 한번 눈이 내리면 한길씩 쌓이는 것이 예사인데, 그 눈이
녹기 전에 또 내리곤 하기 때문에 한길 높이의 눈은 항상 쌓여 있었다. 자
고 나면 우물로 가는 길의 눈부터 쳐야 했다. 물을 길러 와야 아침 밥도 짓
고 소 여물도 쑬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즈음은 어찌나 눈이 많이 쌓였던지
밖을 내다볼라치면 숫제 사람은 안 보이고 아낙네들이 이고 가는 물동이만
치워 놓은 눈 위로 살짝살짝 보이곤 했다.
오늘도 주영과 창녕은 건너 마을 원두네 골방에서 모였다.
"눈이 이렇게 많이 쌓여서 어떡하지?"
원두가 걱정스럽게 일어서더니 창구멍을 내다보았다.
"하늘이 알고 우릴 못 가게 하려나 봐."
창녕이 자신 없는 소리를 했다.
"설마 봄 되면 녹을 테지. 그동안에 우리더러 산에 나무나 해서 팔아다
노자를 마련하라고 이렇게 눈이 오는 거야. 노자 없이 떠나면 고생할 테니
까 말야."
주영은 어려서도 같은 일이면 부정적으로 생각하면서 고민하는 것을 싫어
했다. 같은 값이면 다 좋게, 유리하게 생각하고 정 불리하다고 생각되는 일
은 잊으려고 노력했다.
"온 천지가 다 이렇게 눈으로 뒤덮였는데 어디 간다고 무슨 일을 하겠어?
그러니 노자 마련이나 하면서 봄까지 기다리자구."
하는 주영의 제의에 원두도 창녕도 찬동했다. 그래서 주영은 눈 속을 무릅
쓰고 산에 가서 나무를 해다가 집에 쌓기도 하고 십리 길이나 되는 송전 장
터에 져 내다 팔기도 하면서 한 겨울을 착실하게 보냈다.
그의 속셈을 모르는 아버니 어머니는 그가 고원 철도 공사판에서 고생을
해 보더니만 철이 난 모양이라고 기뻐했다.
손꼽아 기다리던 봄은 왔다.
주영은 또 어느날 한밤중에 창녕. 원두와 함께 몰래 동네를 빠져나왔다.
통천 읍을 지나서 벽양. 두백. 남매를 거쳐서 장전까지의 백리 길을 단숨에
걸어왔다. 이번 길은 일단 해안 신작로를 따라서 남으로 장전까지 내려왔다
가 장전에서 서쪽으로 단발령을 넘고 금화를 거쳐서 서울로 올라갈 참이었
다.
그들이 장전에 도착한 것은 저녁 새때쯤이었다. 노자를 아끼기 위해서 그
들은 일단 오늘은 장전에서 묵는 수밖에 없었다. 장전에는 창녕네 친척집이
있었기 때문이다.
친구들과 같이 외금강까지 놀러 왔다가 들렀다고 하는 창녕의 말에 친척
집 어른들이 반가이 맞아 주었다. 저녁도 잘 먹고 따끈한 방에서 잠도 잘
자고 아침까지 든든하게 먹고는 떠날 차비를 하고 인사를 차리는 참에 느닷
없이 창녕의 형이 나타났다.
그 순간 세 사람은 후닥탁 튀었다. 그러나 창녕은 결국 자기 형에게 붙들
리고 주영과 원두는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정신 없이 달아났다.
주영과 원두는 오늘 해 전에 단발령을 넘을 작정으로 부지런히 걸었다.
뒤에 누가 또 쫓아오는 것만 같아서 다리는 아파도 쉴 생각은 없었다. 그러
나 단발령 밑에 이르자 어느덧 해는 서산에 너웃너웃 기울고 있었다. 장전
에서 단발령 초입까지만도 장장 백30리 길이었다.
두 사람은 단발령 초입에 있는 여인숙에서 하룻밤을 묵고 이튿날 새벽 일
직 길을 나섰다. 그랬기 때문에 두 사람이 백리 길이 넘는 장도에 도착한
것은 저녁 새때도 채 안 됐을 때였다.
봄이라고는 하지만 산이 높고 바람이 거세서 음지에 앉아서 쉬기에는 좀
으슬으슬 추운 날씨였다.
두 소년이 양지 바른 언덕에서 잠시 쉬고 있을 때였다. 웬 양복 차림으
중년 신사 한 사람이 그들 앞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멍하게 바라보고만 있
었다.
"너희들 어디 가는 길이니?"
중년 신사가 점잖게 물어 왔다.
"서울 가요."
주영이 대답했다.
"서울은 뭣하러?"
"고학할려구요."
"고학? 핫하.....야 이놈들아, 고학을 하려면 취직을 해야 할 텐데 너희
같은 촌 무지렁이들을 누가 취직시켜 주니, 응?"
"아무데서나 막일을 할 거예요."
"그러지 말고........"
중년 신사는 그들 곁에 다가 앉더니 말을 이었다.
"난 말야, 요리산데....요리사가 뭔지 아니 너희들?"
"몰라요."
서 원두가 대답했다.
"요리사라는 것은 큰 요리집에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내는 기술잔데 말
야, 난 지금 금강산에서 제일 큰 요리집에서 와 달라고 해서 가는 길이다.
그러니 날 따라 가자. 내가 너희들을 그 요리집에 취직시켜 주지."
"정말예요, 아저씨?"
주영은 귀가 솔깃했다.
"내가 왜 거짓말을 시키겠니, 너희들 같은 어린 아이한테. 너희들이 몰라
서 그렇지 요리사라는 기술도 알고 보면 아주 훌륭한 기술이란다. 일류 요
리사가 되면 총독부 요리사로 들어갈 수도 있는 게야."
하고 그는 양복 주머니에서 권련갑을 꺼내더니 권련 한개비를 뽑아서 꼬나
물었다.
주영과 원두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하긴 우리같이 핫바지 저고리나 입은 촌놈들을 누가 취직시켜 주겠나.
이 아저씨를 따라가서 우선 돈을 벌어가지고 양복이라도 한벌씩 해 입고 서
울로 올라가자.)
하는 마음이 주영과 원두 사이에 이미 눈짓으로 통했다. 그야말로 이심전심
이었다.
두 소년은 중년 신사를 따라 나섰다. 금강산은 단발령을 넘으면 하룻길이
었다. 두 소년은 중년 신사가 시키는 대로 도중에 점심도 사고 여인숙 숙박
비도 물면서 이틀이나 걸려서야 겨우 장안사 계곡 여관촌에 당도했다.
세 사람은 우선 여인숙을 정하고 들어갔다. 이튿날 아침 중년 신사는 아
침밥 한상을 거뜬히 먹어 치우고 나서 자리를 떨며 일어섰다.
"그럼 내가 가서 주인한테 얘길 하고 너희들을 데리러 올 테니 여기서 꼼
짝 말고 있어라, 응?"
이렇게 당부하고 나간 중년 신사는 그날 하루종일 눈이 빠지게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이튿날도, 그 이튿날도 중년 신사는 영영 나타나지 않는 것이
었다.
그제서야 주영과 원두는 속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점잖은 신사가 우릴 속였을려구."
주영은 속았다고 단정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 속은 것이 사실이라면 눈앞
이 너무 캄캄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희망을 가져야지 진짜 속았다면 정말
큰일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다.
여인숙 주인 아주머니는 어제부터 밥값을 내라고 독촉하기 시작하더니만
오늘은 아예 들들 볶아대다시피 했다.
"아주머니, 오늘 하루만 더 참아 주십시오. 저녁까지는 틀림없이 사흘 전
에 우리하고 같이 이 방에서 자고 간 그 신사가 밥값을 갖고 와서 우릴 데
려갈 겁니다."
"이 화상들아, 그 사람을 맏고 있는 거여? 아 그 사람은 사흘 전부터 꼭
온닥하던 사람 아닌가 뵈여."
주영 소년은 더 변명할 여지가 없어서 잠자코 고개만 떩군 채 앉아 있었
다.
"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가진 대로 어여 내놔 봐!"
"그 신사양반하고 같이 오면서 노자 좀 갖고 있던 것을 다 써버렸어요,
아주머니."
하고 주영은 좀 봐 달라는 뜻으로 안타까이 얼굴을 들었다.
"아니. 그럼 노랑 땡전 한닢 없단 말여?"
"예!"
"뭐라구? 아이고 이 일을 어쩌지? 이런 빈털터리들을 사흘씩이나 먹이고
재웠으니.....내가 미친년이지, 내가 미쳤어."
주인 아주머니는 밥값을 떼었다고 생각했던지 가슴을 쥐어 뜯으면서 안달
복통을 하는 것이었다.
주영과 원두는 고개를 들 수도 없었다.
"아니 그럼, 보따리는 어디다 숨겨 논거여? 보따리라도 어여 꺼내 와 이
화상들아!"
"아무 보따리도 없어오."
원두가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대꾸했다.
"뭣이 어째여? 아니 그럼 입고 있는 그 중의 적삼하고, 이 다닳아 빠진
고무신짝이 다란 말여?"
하면서 주인 아주머니는 댓돌 위에 벗어 놓은 고무신짝을 집어들더니 마룻
장을 내리치는 것이었다.
그날 낮에 주영과 원두는 그 여인숙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주영아, 어떡하냐 우린?"
원두는 울상이 되었다. 주영도 속으로는 엉엉 울고 싶었다. 그러나 두 사
람 다 같이 울어서 해결 될 일은 아니었다.
"그 인간을 찾아 내자."
"어디서 어떻게 찾니?"
"요리사라고 했으니까, 요리집, 식당 할 거 없이 깡끄리 뒤져 보자구."
"하지만 그 사람이 정말 요리산지 뭔지도 모르잖아."
"하긴 그렇다. 그러나 일단은 요리사라는 그자의 말을 믿고 찾아볼 수밖
에......"
두 사람은 요리사가 있을 만한 곳이면 아무 데고 기웃거리며 찾아 다녔
다. 마침 그자가 한 요리집 주방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두 소년은 용기를
내고 주방을 향해 쳐들어갔다. 두 사람을 본 요리사는 기급할 듯이 놀라며
밖으로 뛰쳐나왔다.
"뭐예요, 아저씨?"
소년 주영은 화를 내고 한껏 두 눈을 부라렸지만 원체 눈이 별로 큰 눈이
아니라서 별로 무서워 보이지도 않았다.
"미안하다, 미안해. 아직 서울로 출장간 주인 아저씨가 안 와서 얘길 못
했는데 돌아오는 대로 얘기할 테니 가서 기다려라."
하고 요리사는 살살거리듯이 두 사람을 밀어냈다. 그러자 원두가 버티면서
큰소리로,
"아저씨 말은 믿을 수 없어요. 그동안에 우리가 아저씨 밥 사주고 잠 재
워 준 돈이나 내놔요."
하고 달려들었다.
"뭣이 어째 임마?"
요리사는 오히려 버럭 화를 내면서 팔뚝까지 걷어붙이면서 아래위로 째렸
다. 적반하장이었다.
"임마, 내가 언제 너희들더러 밥 사라고 했어?"
"아저씨가 취직시켜 준다고 했잖아요?"
"그래, 취직시켜 준다고 했지, 내가 언제 너희들한테 밥 사라고 했니? 이
자식 못쓰겠구만, 응?"
맞기는 맞는 소리다. 그가 제 입으로 밥 사라 재워 달라 하는 말은 안 했
었다. 취직을 시켜 준다고 하니까 이쪽에서 고마운 마음으로 스스로 제공한
호의였다.
주영과 원두는 어처구니 없게 당하고만 돌아섰다.
"역시 너나 내나 촌놈은 촌놈이다."
주영은 체념하고 말았다. 그편이 뱃속이 편했다.
"그나저나 서울까지 어떻게 가냐, 주영아?"
"금화까지만 가면 어떻게 될 거야."
금화에는 주영의 작은 할아버지가 살고 있었다. 할아버지 삼형제 중의 제
일 큰 할아버지는 바로 주영의 친할아버지였고 금화에 사는 할아버지는 둘
째 할아버지였다.
"여기서 금화까지 몇 리나 되는데?"
"우리 아버지가 언젠가 얘기하시는 걸 들었는데 금강산에서는 백70리밖에
안 된대."
"뭐 백70리?"
원두는 벌린 입을 한참 동안 다물지도 못하다가.
"지금 어떻게 여기서 그 금화까지 가냐?"
하고 또 울상을 지었다.
"이왕에 예까지 왔으니까 장안사 구경이나 하고 가잔 말야. 설마 절에 가
면 젯밥이라도 있겠지 굶기야 하겠니?"
굶어 죽으라는 법은 없었다. 아닌 게 아니라 장안사에는 누구의 무슨 제
인지는 몰라도 큰 제가 있어 시끌뻑적했었다.
주영과 원두도 절에서 차려 주는 젯밥을 한 상 푸짐하게 받아서 실컷 먹
고, 또 떡도 한 보따리 얻어 싸서 옆구리에 끼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은 참말 옳은 말이었다. 금강산 그늘이 관동 팔십
리라고 하더니 과연 장안사에서 발 아래로 굽어보는 내금강은 봉우리마다
웅대하고 장쾌하고 숭엄하기까지 했다.
그날 밤 두 소년은 따뜻한 승방에서 잘 자고 이튿날 첫새벽에 길을 떠났
다. 해 전에 금화까지 백70리 길을 걸어야만 했다. 두 사람은 한번도 쉬지
않고 거의 뛰다시피 걸었다. 절에서 얻어 싼 떡도 사뭇 걸어가면서 먹었다.
금화 읍내에서 조금 떨어진 두목리에 사는 주영의 작은 할아버지 집에 그
들이 닿았을 때는 마침 저녁상을 물린 다음이었다. 작은 할아버지는 잘 왔
다는 말을 몇 번이나 되뇌면서 그들 두 사람을 반겨 주었다. 새로 따뜻한
저녁까지 지어 주어서 잘 먹었다.
그러나 그 작은 할아버지 집이 함정이었다. 이미 사흘 전에 아들을 찾아
나선 주영의 아버지가 어젯밤 그곳에서 묵고 오늘 새벽 일찌기 아들을 찾아
서울로 떠났던 것이었다.
고향으로 압송되다시피 해서 돌아온 주영은 작은 할아버지 집에 들른 자
신의 어리석음을 개탄해 마지않았다. 하지만 수중에 무일푼이었던 그때의
상황으로서는 어쩌는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아예 노자를 넉넉하게 장만한
다음에 떠나리라고 다짐하면서 그는 매일같이 그 기회만을 엿보았다.
흔히 시골에서는 달걀을 팔아 모아서 아이들 보통학교를 보냈고, 돼지를
키워서는 아들 딸을 시집 장가 보냈고 소를 팔아서는 논밭뙈기를 샀다.
그 무렵, 주영네 집에서는 황소 두 마리를 키우고 있었다.
(가을 추수가 끝나면 이 소 두 마리를 내다 팔겠지.....소를 팔면 그 돈
을 훔쳐 갖고 서울로 가자.)
주영은 쇠죽을 쑤면서 그런 생각을 골똘히 하고 있었다.
시골에서는 보통 그해 가을 농사를 끝내고 나서야 땅 개비를 했다. 땅을
팔고 사고 하려면 자연 큰 목돈이 필요하기 때문에 소를 팔게 마련이다.
주영네는 이태 또는 삼년에 한 번씩은 땅을 몇 뙈기씩 장만하곤 했었다.
그런데도 가난은 면할 길이 없었다. 아버지 밑으로 있는 삼촌들을 장가 들
여서 살림을 내야 하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형제는 칠남매였다. 그 중 다섯이 삼촌이고 하나가 고모다. 아직
도 장가 들지 않은 삼촌이 둘이나 한집에 같이 살고 있었고 할아버지 할머
니도 정정했다. 그리고 그의 동생이 넷이었는데 셋은 사내였고 하나는 계집
애였다. 하지만 앞으로도 동생이 몇이나 더 늘어날지 몰랐다. 지금 현재로
도 열 식구가 넘는 대가족이었다.
그와 같은 환경에서 가난을 면하는 길은 오직 도회지로 빠져나가서 어떻게
서든지 취직하는 도리밖에는 달리 방도가 없다고 확신하는 주영이었다.
그해도 가을 추수가 끝났다. 아버지는 동네 뒤에 있는 산다랑 지의 천수
답 몇 뙈기를 흥정하는 눈치였다.
주영은 초조했다. 만약 천수답 흥정이 끝나고 나서 소를 내다 팔면 소 판
돈은 곧장 땅 판 사람 손으로 건너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천만 다행스럽게도 천수답 흥정이 끝나기 전에 아버지는 소를 쇠장에 끌
어내다 팔았다. 얼마에 팔았는지는 모르지만 황소 두 마리를 판 돈이니까
꽤 큰 돈일 것은 분명했다. 보지는 못했지만 그 돈을 어디에 숨겨 두었는지
주영은 잘 알고 있었다. 이제 그 돈을 꺼내 들고 뛰면 되는 것이다. 그 전
처럼 함께 달아날 친구를 구할 필요도 없다.
이번에는 어두운 한밤중에 달아나는 것보다 환한 대낮에 달아나는 편이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추수가 끝났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들에는 손 갈 데가 많았다. 식구들이
모두 들에 나가고 없었기 때문에 집안은 조용했다. 벼슬이 손바닥만한 붉은
장닭 한 마리가 돌담 위를 한가로이 거닐더니 힘차게 홰를 치고 목을 길게
빼면서,
"꼬꾜오......."
하고 울었다. 장닭의 울음 소리는 마치 망설이고 있는 주영에게 결단을 재
촉하는 듯이 들려왔다.
주영은 마침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어머니 장롱문을 열었다. 한 손을
깊숙이 쑤셔넣었다. 잡히는 것이 있었다. 손끝에 닿는 촉감으로도 그것이
돈이라는 것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확 끄집어 냈다. 그리고는 후딱 방을
뛰쳐나왔다.
목메인 기적 소리가 길게 울렸다. 그리고 기차는 칙칙 소리를 내뿜으며
세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삼등칸 한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던 주영은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그는 경원선을 달리는 서울행 완행 열차에 몸을 싣고 있었
다.
소 판 돈을 훔쳐 가지고 집을 뛰쳐나온 그는 패천가지 30리 길을 정신 없
이 달려와서 패천에서 원산가지는 차 삯을 내고 트럭 짐칸에 실려 왔으며,
원산에서는 큰 맘을 먹고 난생 처음으로 기차를 탔던 것이다.
그도 이번만큼은 무턱대고 집을 도망 나온 것이 아니었다 서울에 올라가
면 부기학원에 입학할 작정인 것이다.
지난 여름 이장 집으로 신문을 보러 간 그는 옥선 아버지가 평양에 갔다
가 오는 길에 뭔가를 싸온 평양 지방지 신문에서 모란 부기학원 광고를 본
적이 있었다. 부기학원 속성과 6개월을 수료하면 학원이 책임 지고 취직을
알선한다는 내용의 광고였다.
그대도 옥선이는 다 떨어진 신문에서 뭘 그렇게 열심히 읽고 있느냐고 하
면서 같이 그 광고를 들여다보았다.
주영은 기차를 타고 가면서도 그 일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이번에도
옥선이가 그 얘기를 아버지한테 이르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하지만 그
는 자신이 가고 있는 곳이 평양이 아닌 서울이었기 때문에 다소 마음은 놓
였다. 평양에 있는 그런 부기학원이 서울에는 없으랴 해서 그는 서울행을
결심한 것이었다.
기차는 신고산 역을 향하고 있었다.
(6개월! 그동안 학비랑 하숙비랑 얼마나 들까........)
그는 아직 책보에 싸서 아랫배에 차고 있는 소 판 돈이 확실히 얼마인지
몰랐다. 그 돈을 세어 볼 장소도 없었고 그만한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어쨌든 6개월 후에는 아무 회사에든 회계원으로 취직될 것이다. 회계원
이면 아무리 월급을 적게 받아도 30원은 받을 게다. 30원이면 1년에 3백 60
원.....한달에 10원짜리 하숙을 한다고 해도 1년이면 2백40원이 남는다. 2
백40원이면 쌀이 스물 네 가마가 아닌가, 쌀이 스물 네 가마라.......)
1년 내내 온 집안 식구가 몽땅 논밭뙈기에 매달려도 쌀로 치면 열 가마의
수확도 어림없는 그네 집 농사였다. 특히 아산리에는 논이 적고 밭이 많았
기 때문에 밭곡이 흔했는데, 흔한 밭곡이라고는 하지만 그 밭곡으로도 그네
집은 제철 양도를 대 먹기가 어려운 실정이었다.
주영은 열심히 부기공부를 해서 좋은 직장에 취직한 다음 적어도 1년 안
에 부모의 뜻을 거역하고 소 판 돈까지 훔쳐 내온 이 불효를 만회하리라 결
심하면서 서울역에 도착했다.
그는 수소문해서 먼저 덕수궁 옆에 있는 대경 부기전수학원을 찾아갔다.
다행히 속성과를 개강한 지가 사흘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다가 마침 빈자리가
있었기 때문에 즉석에서 입학할 수가 있었다.
입학금 5원, 한달 수업료 5원에 교재대 2원, 도합 12원을 내고 책과 학원
안내서 등의 유인물을 받아 든 그는 그날부터 먹고 잘 하숙을 구해 나섰다.
처음부터 그는 무학재 쪽 변두리로 싸구려 하숙을 구해 나섰다. 아무리
싼 하숙도 아침 저녁 두 끼 먹고 두 사람이 한방을 같이 쓰는데 12원 내지
15원은 주어야 했다.
그는 12원짜리 하숙에 들었다. 요행히 빈방이 하나 있었기 때문에 언제든
지 다른 하숙생이 들어오면 같이 방을 쓰기로 한다는 조건으로 우선은 독방
에 들 수 있었다.
그날 밤, 주영은 비로소 훔쳐 가지고 온 소 판 돈을 마음 놓고 세어 보았
다.
돈을 세어 보고 난 그는 믿어지지 않았다. 소 판 돈 치고는 너무나 적은
돈이었다. 채 백50원이 못 됐다. 적어도 그만한 황소 두 마리를 팔았으면
아무리 못 받았어도 2백 50원은 넘어야 하는 것이 상식이었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그가 훔쳐낸 돈은 이미 동네 뒷산의 산다랑지 서
너 마지기를 사기로 하고 계약금 일부를 지불하고 잔금조로 남겨 놓은 돈이
었던 것이다.
(한달 수업료가 5원, 교통비는 걸어서 다닌다 하더라도 하루 점심값 5전,
한달이면 1원 50전.......하숙비 12원. 겨울을 지내려면 옷도 한 벌 사 입
어야 한다. 고무신은 내일이라도 당장 사 신어야 할 판이다. 책가방은 차차
형편 봐 가면서 준비하고 우선은 책보에 싸 가지고 다니자.........)
아무리 절약하는 방향으로 따져 보아도 한달 기본 지출이 20원이나 되고
보니 백50원을 가지고 6개월을 견뎌 낸다는 것이 빡빡할 것 같았다. 좌우간
허리띠를 바짝 졸라메고 형편에 맞추거 지내기로 결심한 그는 부기책이며
학원 안내서 같은 것을 뒤적이다가 꼬박 날밤을 새웠다.
밥 먹고 들어 앉아서 공부만 하라고 하면 그는 언제고 일등할 자신이 있
었다. 그는 보통학교 때도 그 바쁜 농사일을 다 거들면서도 내내 일이등을
다투다가 6학년을 졸업할 때는 당당하게 수석으로 졸업했었다.
그래서 학교 선생님들이나 동네 이장 같은 이는 하나같이 주영이처럼 머
리 좋은 아이는 어떻게 해서라도 높은 학교에 보내야 한다고들 했지만 그의
아버지는 숫제 귀담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고 주영 자신도 높은 학교는 언
감생심 꿈도 꾸지 않았었다.
그는 여섯살 때부터 열살까지 서당에 다니면서 소학에서 논어. 맹자까지
뗐다. 그쯤 공부시켰으면 글눈은 떴으니까 그냥 농사나 짓게 하면 그만이
다. 그렇지만 그의 아버지는 신학문을 해야 일본 글을 배워 가지고 제 앞가
림을 할 수 있다고 해서 가세를 무릅쓰고 보통학교까지 졸업시킨 것이기 때
문에, 더 잘 살면서도 자식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은 다른 부모들을 생각하
면 주영으로서는 그나마 감지덕지해야 할 형편이었다.
학원에서는 개강한 지 사흘밖에 안 됐는데도 속성과였기 때문에 이미 부
기책에 있는 부기의 기본원리에 속하는 대차대조표와 손익계산서라든가 거
래. 계정. 장부. 시산표와 정산표. 결산 등의 이론 강의가 끝나고 나흘째부
터는 경리 실무에 속하는 계정과목 강의가 시작되었다.
주영은 그날 배운 것은 어떤 일이 있어도 그날로 머리 속에 집어 넣어서
내것을 만들었다. 그리고 미처 배우지 못한 부기의 기본원리도 책에 있는대
로 깡그리 외워 버렸다. 계정 과목에 대한 강의도 불과 열흘 동안에 끝내고
보름께는 장부 조직상의 분개장 분할방법을 강의하기 시작했다.
하루 네 시간이라는 수업시간에 비해서 진도가 너무 빠르다고 생각한 주
영은 어느날 학원 당국에다 내놓고, 아무리 속성과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개
머루 먹듯 가르치면 어떻게 하느냐고 항의했다. 그랬더니 학원측 말이, 이
론은 한달 안에 대충 끝내고 나머지 5개월 동안에 실습을 쌓게 해서 부기
전과정을 이수할 무렵에는 직장을 알선해 주어야 하므로 강의를 속성으로
진행하는 것이니 그렇게 알고 공부나 열심히 하라는 것이었다.
학원측의 그 말은 곧 공부만 잘하면 취직을 시켜 줄 테니 걱정 말라는 말
과 같았다. 공부만 잘하면 직장이 보장된다고 생각하니 그는 신이 났다. 그
는 밥을 먹으면서도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아무리 공부하는 일이 힘들
고 고되다 해도 오뉴월 뙤약볕에서 논밭의 김을 매는 일보다는 편했고 눈구
덩이 속에서 딩글며 나무를 해서 져 나르는 일보다는 편했다. 그는 일등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등을 해야만 남보다 좋은 직장에 그것도 제일 먼
저 취직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하는 공부였으므로 공부에
재미가 들려서 밤에도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오늘도 새벽같이 일어난 주영은 얼른 나가서 세수를 하고 들어와서 예습
을 하고 아침밥을 뚝딱 먹어 치우고는 부리나케 부기학원을 향해 달려갔다.
그는 전날에 배운 것을 복습하다가 모르는 것이 있으면 아침 일찍 학원으로
달려가서 수업이 시작되기 전에 선생님을 잡고 물어보곤 했었다. 오늘도 어
제 배운 것 중에 확실하게 모르는 것이 두어 군데 있었다.
서대문통을 지나서 재판소 앞을 지나 덕수궁 담 모퉁이를 돌아서던 주영
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얼어 붙었다.
시골에서 올라온 아버지와 정면으로 맞닥뜨렸던 것이다.
주영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주영아........"
아버지 목소리에는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주영은 어쩌면 좋을지 몰랐다.
그냥 엉엉 울어 버렸으면 속이 시원할 것만 같았다.
"아버지, 어떻게 또 찾아 오셨어요?"
"한길에서 이럴 게 아니다. 네가 먹구 자는 데가 어딘지 그리로 가자."
"전 지금 공부하러 가는 길이란 말예요, 아버지."
"공부? 누가 너더러 공부하랬어, 이놈아?"
"아버지........"
주영은 몹시 안타까왔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아버지와 함께 현저동 하숙
집으로 되돌아 갔다.
아버지는 그가 염려했던 그대로, 이장 딸 옥선이의 말을 듣고 평양에 있
는 부기학원을 찾아갔다가, 그곳에서 서울에도 부기학원이 있으니 거기 가
서 알아 보라는 말을 듣고 어젯밤 밤차로 평양을 떠나 오늘 아침 서울역에
도착한 것이었다.
"돈은 얼마나 남았니?"
"서울 올라오는 노자하고 학원비 낸 것하고 한달치 하숙비 낸 것 말고는
고스란히 은행에 예금해 놨어요."
"그럼 됐다. 내 아뭇소리 않을 테니 당장 그 돈 찾아 갖고 내려 가자."
"아버지! 제가 여태까지 말씀드렸잖아요, 예?"
"이놈아, 너는 맏아들이야. 너는 네 맘대로 살 수 없는 거야. 이 애비 어
미를 생각하고 네 동생들을 생각해야지 응?"
"제가 서울에 있는다고 왜 맏아들 노릇 안 한대요, 아버지? 서울에서 돈
벌어 가지고 더 훌륭한 맏아들 노릇 할께요. 아버지 예?"
"이놈아, 네가 서울에서 무슨 재주로 돈을 벌어? 아, 서울이 어떤 덴지
아냐? 눈 감으면 코 베 먹는 데가 서울이야."
"제 코 이렇게 멀쩡하잖아요."
하는 말이 나올려고 하는 것을 주영은 꾹 참았다. 그리고 그는 별의 별 사
정을 다하면서 죽어도 안 가겠다고 버텼다.
그러자 나중에는 아버지가 아들을 잡고 통사정을 하면서 울었다.
"주영아 이놈아, 맏아들인 네가.....나는 너 하날 믿고 있었는데 네가 끝
내 정신 못 차리고 이러다간 이제 우리 집안에 떼거지 난다 떼거지
나......주영아, 너 어쩔려고 이러니 응? 주영아......."
아버지가 집안에 떼거지가 난다고 하면서 우는 데는 그로서도 더 이상 어
쩌는 수 없었다. 1년 3백 60원 벌이의 푸른 꿈은 산산이 깨어져서 허공에
흩어졌다.
주영은 그날 오후 아버지와 함께 은행으로 가서 예금했던 돈을 도로 찾아
가지고 서울역으로 향했다.
하숙집을 나온 뒤로는 부자간에 말 한 마디 오고 가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렇게 안 가겠다고 하던 아들을 데리고 가는 것이 마음에 언짢았던지,
"주영아, 너 서울 구경했냐?"
하고 말 머리를 꺼냈다.
"안 했어요."
"아무데두?"
"예!"
"창경원 동물원에도?"
"예."
"그렇거든 우리 창경원의 동물원 구경이나 하고 밤차로 내려가자. 이제
가면 우리 같은 촌사람이 뭔 일로 또 서울에 올라올 일이 있겠냐?"
그래서 부자는 발길을 창경원 쪽으로 돌려 세웠다.
창경원 입장료는 대인 10전 소인 5전이었다.
"자, 얼른 들어가서 구경하고 나오자."
"표를 사야죠."
"표를 사다니. 짐승 구경하는 데도 돈 받냐?"
"그럼요."
"그래 얼마냐?"
"어른은 10전이고 애들은 5전이에요."
"옛다!"
아버지는 5전짜리 동전 한닢을 선뜻 내놓았다.
"이거 뭐 하라구요?"
"넌 아직 애들이잖아. 너나 구경하고 나오너라. 나는 호랑이도 보고, 시
골에서 볼 만한 짐승은 다 봤으니까."
주영은 10전이 아까와서 창경원 문 앞에까지 왔다가 그저 돌아가겠다는
아버지가 측은하도록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에라. 아버지를 위해서 살자. 이렇게까지 순박하고 불쌍하신 아버지 마
음을 아프게 하고 내가 돈은 벌어 무엇 하나. 죽이면 죽, 밥이면 밥, 아버
지 자시는 대로 같이 먹으면서 죽으나 사나 부지런히 일해서 동생들 세간이
나 내주고 하는 것이 바로 맏아들인 내가 할 짓 아니냐.)
그렇게 체념한 주영은 동물원 구경도 포기하고 아버지를 따라서 또다시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 후로 그는 다시는 도망갈 궁리를 하지 않고 농사 일
에만 열중했다.
그랬는데 그 이듬해, 주영의 나이 열아홉살 때였다. 흉년이 들었다. 그가
철 든 이후로 처음 겪는 대흉년이었다. 가을 추수는 했지만 거둬 들인 알
곡이 없었다. 농사철에 그토록 가물었던 것이다. 그해 겨울로 받아 놓았던
네재 삼촌의 혼인 날도 내년으로 물렸다.
주영네는 세끼 밥 먹기도 어려웠다. 조반석죽은 옛말이고 아침에도 죽,
저녁에도 죽이었다. 보릿고개가 닥치면서 동네 사람들은 산나물로 연명해
갔다. 굶기를 밥 먹듯 해온 동네 사람들 얼굴은 이미 누렇게 붓고 떠 있었
다. 부황병이라는 것이었다.
정 주영은 다시 아산리 마을에서 20리쯤 들어간 안골이라는 산골에 사는
오 인보와 함게 서울로 올라왔다. 오 인보는 정 주영보다 나이는 세살이나
위였지만 보통학교는 동기동창이었고, 그네 집 가세는 정 주영네보다 훨씬
잘 사는 편이었다.
서울역에 내린 정 주영과 오 인보는 서로 헤어지기로 했다. 어차피 아무
데나 가서 닥치는 대로 막일을 할 판인데, 둘이서 같이 있으면 서로 불편할
테니 차라리 안 보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 길로 정 주영은 인천으로 내려갔다. 부두에서 할 수 있는 노동 일은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해냈다. 그러다가 이왕에 막일을 할 바에는 서울이
좀 낫지 않을까 싶어서 그는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그는 오류동에서 농사 품팔이도 했었다.
서울에 올라오니 마침 안암동에서 보성전문학교 도서관 신축공사가 벌어
지고 있었다. 막 기초공사를 끝내고 벽을 쌓아 올리고 있었다. 정 주영은
공사장 한바에서 먹고 자며 돌을 져 날랐다.
그렇게 뼈 빠지는 중노동이었지만 하루 노임은 1원, 열흘을 일해야만 쌀
한 말 값을 벌 수 있었다. 그나마 비오는 날은 공치는 날이다.
정 주영은 비 오는 날이면 좀더 나은 일자리는 없을까 해서 거리를 헤매
고 다녔다. 두어달 후의 어느 비 오는 날, 삼각지를 걸어가던 정 주영은<견
습공 모집>이라고 써 붙인 종이가 비바람에 젖어 펄럭거리고 있는 것을 보
았다.
견습공 모집 광고를 보고 그가 찾아간 곳은 석유시설을 제작하는 철공소
였다. 그는 일공 50전을 받기로 하고 그렇게도 목마르게 바라던 취직을 했
다.
일공 50전이면 공사판 일공 1원의 절반이었지만 철공소에서 일하게 되면
무엇보다도 기술을 배울 수 있다는 잇점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일요일을
빼놓고는 계속해서 일할 수 있는 잇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주어진 일은 파이프를 묶어 내는 것이었다. 한 달이 가도 두 달이
가도 그 일밖에는 시키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때가 되면 기술을 익힐 수
있는 일을 시키겠거니 하며 묵묵히 참고 주어진 일에 열성을 다했다. 그렇
게 일년이 돼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비로소 이 철공장은 내가 몸 담고 일할
만한 곳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정 주영은 다시 일요일이면 보다 나은 직장을 찾아서 거리를 헤맸다. 그
러나 어디에도 그를 기다리고 있는 보다 나은 직장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신당동에 있는 쌀 도매상회의 배달원으로 직장을 옮겼다. 상
회 이름은 복흥상회. 월급 18원.
정 주영은 네번씩이나 집을 뛰쳐나오는 끈질긴 집념과 여기저기서 아무
일이거나 닥치는 대로 막노동을 하는 오랜 각고 끝에 드디어 대망의 월급장
이로 정착했다.
쓴잔의 교훈
정 주영이 쌀가게에 취직한 다음 날이었다. 아침부터 늦 봄비가 부슬부
슬 내리고 있었다.
그는 시골에서 올려 온 기름콩을 풍구질하고 있었다.
"주영아, 주영아!"
하는 주인영감의 걸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하고 그는 얼른 사무실로 뛰어갔다.
"너, 쌀 한 가마니하고 팥 한 말만 배달하고 오너라."
"예, 어딘데요?"
주인영감은 대강 약도를 그려 주면서 배달해다 줄 집을 대충 설명했다.
정 주영은 너무 튼튼해서 육중하기까지 한 배달 자전거를 가게 앞에 끌어
내다 받침틀을 받쳐 세워 놓고는 쌀 한 가마니를 번쩍 안아다가 짐판 위에
거뜬히 얹어 놓았다. 그리고는 팥 자루도 쌀 가마니 위에 얹어 놓았다.
"땅 진데 넘어지지 않게 조심해라."
"염려 마세요."
하고 대답은 크게 했지만 그는 은근히 걱정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는 자
전거를 간신히 탈 수 있는 정도의 실력밖에는 없었다. 어제 그가 쌀 배달을
하겠다고 찾아왔을 때 주인영감은,
"자전거 탈 줄 아나?"
하고 물었었다. 그때 그는 우물쭈물하면서,
"타기는 타는데 잘은 못 타요."
하고 자신없는 대답을 했다. 그리고 그는 혼자 속으로 틀렸구나 실망했었
다. 그랬는데 주인영감은 정 주영을 아래위로 슬쩍 훑어보더니,
"음, 가랑이는 길구나."
하곤 설령 자전거를 좀 잘 못 타더라도 다리가 길엇 넘어지지는 않겠다고
하면서 일해 보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의 나이 스물이었지만 기골이 워낙 장대해서 누가 보아도 단번에 힘깨
나 쓸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어느 힘드는 노동판에 가서도 신체적
조건 때문에 퇴박을 당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기실 그는 통천 바닥이 알아주는 씨름군이기도 했다. 그는 이미 열일곱살
에 통천군 씨름대회에 나가서 황송아지를 탄 경력까지 있었다. 2년 전에 천
수답을 사느라고 판 황소 두 마리 중의 한 마리는 그가 씨름대회에서 탄 황
송아지였던 것이다. 하기 때문에 그는 그 소 판 돈을 그렇게 거리낌 없이
훔쳐 낼 수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씨름에는 자신이 있어도 자전거에는 자신이 없는 그가 자전거를
탄 것은 보통학교 6학년 때, 학교 자전거를 넓은 운동장에서 몇 번 타본 것
이 전부였다. 그것도 빈 몸으로 탔을 뿐 자전거에 짐을 싣고 타본 경험은
전혀 없었다.
그는 왼손으로 자전거 핸들을 잡고 바른 손으로는 쌀 가마니를 잡고 받침
틀을 젖히면서 자전거를 앞으로 밀어 냈다. 그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자전
거 전체가 휘청하면서 앞바퀴가 번쩍 들렸다. 그러나 당황하지 않고 핸들을
잡은 왼손에 힘을 주고 자전거 앞바퀴를 땅에 밀착시키면서 바른판에 힘을
주어 쌀 가마니를 밀었다.
자전거는 서서히 구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좀처럼 중심이 잡히지 않는 자
전거는 미구에 넘어질 것만 같았다. 그는 넘어지더라도 제발 주인영감이 안
보는 데 가서 넘어지기를 마음 속으로 빌며 조심조심 가게 앞으로부터 멀어
져 갔다.
그러는 사이에 자전거의 중심은 곧 잡히고 말았다. 쌀 한 가마니 정도 실
은 자전거를 끌고 가는 것은 원체 힘이 좋은 그로서는 별로 어려운 일이 아
니었다.
모퉁이를 돌아서니까 곧게 뻗친 큰 골목길이었다.
(여기선 넘어져도 주인영감이 안 볼 테지.)
하고 생각한 정 주영은 일단 자전거를 세운 다음 중심을 잡고 나서 바른쪽
다리를 번쩍 들어 안장 너머로 넘겨 놓았다. 그리곤 엉덩이를 안장에 붙이
고 바른발로 페달을 밟았다. 자전거가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는 얼른 왼발
도 페달 위에 얹어 놓았다. 그 순간 자전거가 기우뚱하더니 짐판 위의 팥자
루와 쌀 가마니가 진땅 위로 툭 떨어졌다. 다행히 땅은 쌀 가마니가 젖을
정도로 질지는 앉았다. 그는 다시 쌀 가마니와 팥자루를 짐판 위에 얹어 놓
고 자전거를 끌었다.
또 한 모퉁이를 돌아서니까 이번에는 약간 경사진 길이 나왔다. 그는 다
시 안장 위에 올라 앉고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경사진 길이었기 때문에 발
은 페달 위에 얹어 놓기만 하면 됐고 브레이크를 잡으면서 핸들만 잘 조정
하면 그만이었다. 한참 신나게 달려 내려가던 그는 깜짝 놀라면서 핸들을
홱 꺾었다. 그 바람에 그는 자전거와 함께 나가 떨어지고 쌀 가마니는 쌀
가마니대로 팥자루는 팥자루대로 진창 속에 처박히고 말았다.
골목 안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어린 아이를 피하려다가 일으킨 전복사고였
다. 정 주영은 먼저 황급하게 진창에 처박힌 쌀 가마니와 팥자루를 건져서
마른 땅으로 옮겨 놓았다.
자전거는 핸들이 휘었다. 까진 정갱이에서는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아픈 것은 뒷전이었다. 자전거 핸들이 휜 것도 문제가 아니었다. 진창에 빠
진 쌀을 배달할 일이 난감했다. 그냥 배달할 수도 없고 도로 싣고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야말고 진퇴유곡이었다.
천만 다행스럽게도 그가 배달한 쌀은 배달 즉시로 물에 담구어야 할 떡쌀
이어서 난감한 처지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날밤, 그는 한숨도 자지 않고 밤새껏 자전거에 쌀 가마니 싣고 타는 연
습을 했다. 다음날 밤에도, 도 그 다음날 밤에도 그는 한두 시간씩만 자고
같은 연습을 되풀이했다. 그렇게 노력한 결과 두어달 후에는 자전거에 쌀을
두 가마니씩 싣고 배달할 수 있는 사람이 복흥사회 안에는 정 주영 한 사람
밖에 없을 정도로 발군의 실력을 자랑하게 되었다.
또 그는 매일 새벽, 남보다 일찍 일어나서 쌀가게 앞을 깨끗이 쓸고 물가
지 뿌렸다. 그리고 창고 안에 아무렇게나 막 쌓아 둔 곡식 가마니들을 쌀은
쌀대로, 보리쌀은 보리쌀대로, 잡곡은 또 잡곡 종류별로 분류해서 차곡차곡
새로 쌓기도 했다.
누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니었다. 새벽 일찍 일어나서 가게 앞을 청소하고
나면 그는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배달하고 남은 시간에 우두커니 앉아 있
기보다 창고 안에 들어가서 곡식 가마니를 정리하는 편이 재미있었다.
그러자 주인영감은 아주 여간 좋아하지 않았다. 주인영감은 그에게 새 자
전거까지 한 대 사 주는 것이었다. 주인영감의 신임이 두터워지자 그는 하
는 일에 더 재미가 나서 더 열심히 했다.
가게에는 그와 동갑 나이의 주인 아들이 한 사람 같이 일하고 있었다. 그
런데 그는 어찌나 게으른지 장부 하나도 제대로 기장해 놓지 않는 것이었
다.
곡간에 무슨 곡식이 얼마만큼의 재고가 쌓였는지도 몰랐고 외상값도 얼마
를 받아들여서 얼마가 남았는지를 몰랐다.
쌀가게 장부는 그날 그날의 재고하고 현금하고 외상판매의 수지가 딱 맞
아 떨어져야 하는 것인데 그게 하나도 안 맞고 엉망이었다.
그래서 그는 창고를 다시 정리해서 모든 곡식을 열 가마니씩 줄을 지어서
쌓았다. 쌀은 얼마 있다, 참깨는 얼마다 하는 식으로 한눈에 척 봐서 재고
량이 완전히 파악될 수 있도록 해 놓았던 것이다. 그리고 장부도 원장과 분
개장을 고루 갖추어서 누가 언제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해놓았다.
그와 같은 정 주영의 성실한 열성을 신용하는 사람은 비단 주인 영감뿐이
아니었다. 1년이 지나고 2년이 가는 사이에 주 거래선인 삼창 정미소를 비
롯한 서울 여상 기숙사, 배화고녀 기숙사 등 모든 고객들가지도 그를 신용
하게 되었다.
그가 취직할 당시에 10원 하던 쌀값은 12원으로 올랐다. 그러나 그의 월
급은 여전히 18원이었다. 그래도 그는 조금도 불평불만을 하지 않았다. 연
말에 가서 타는 1년 치 월급은 자그마치 쌀로 열 여덟 가마니가 고스란히
남는 셈이었다. 시골에서 농사 짓는 일에 비하면 월등히 나은 수입인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지난 늦가을에 추수를 끝내고 올라왔던 그의 아버지도,
"너 혼자 버는 것이 시골에서 우리 식구가 다 달라붙어서 농사 진 것보다
낫구나."
하곤, 이번에는 같이 내려가자는 말 없이 그냥 돌아갔었다.
다시 일년이 흘러갔다.
게으름을 피우던 주인 아들은 난봉을 부리기 시작하더니만 근래에 와선는
온갖 나쁜 지시을 다하면서 가게 돈을 뭉청뭉청 들어내 가곤 하는 것이었
다.
심화병이 난 주인영감은 마침내 가게문을 닫고 복흥상회 간판을 내려 버
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동안에 여러 고객들로부터 신용을 얻어 온 정 주영은 가게 간판
을 내린 그 자리에서도 쌀 장사를 계속할 수가 있었다. 그는 가게 신용을
지키기 위해서 삼창 정미소로부터 좋은 쌀을 갖다 놓고 팔았다. 한편 가게
이름을 복흥상회로부터 경일상회로 바꾸고 서울여상 기숙사와 배화고녀 기
숙사에도 계속해서 쌀을 대주며 장사를 해갔다.
결국 복흥상회 주인 아들의 난봉이 정 주영에게는 오히려 그의 오랜 막노
동과 고용살이에 종지부를 찍게 하고 하나의 독자적인 사업가로 전환할 수
있는 절호의 계기를 마련해 준 셈이 되었던 것이다.
그때 그의 나이 스물셋.
일본이 1930년대의 경제공황을 타개할 심산으로 중일전쟁을 일으킨 지기
후(1937년 7월)였다. 일제는 이미 오랜 전부터 자국의 경제를 전시체제로
개편하는 동시에 식민지 한국을 병참기지로 만들기 위해서 식량을 비롯한
제반 군수물자의 생산, 유통, 소비에 이르는 전과정을 철저하게 통제해 오
고 있었다.
1939년 2월, 일제는 한국 쌀의 만주. 중국 등지로의 반출을 제한하고 8월
에는 미곡 최고판매가격제를 실시하더니 그해 12월말에 가서는 급기야 쌀의
자유판매를 전면금지하고 배급제를 실시했다.
따라서 정 주영은 경일상회 간판을 내건 지 3년이 못 돼서 다시 폐업의
쓴잔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짧은 기간에 수월찮은 돈을 벌어
서 고향에다 논 30마지기를 장만했는가 하면 송전면 면장댁 규수인 변씨와
결혼하기에 이르렀다.
경일상회는 그동안의 곡가의 전시 앙등으로 인한 호경기를 짭짤하게 누릴
수 있었다. 쌀값이 자꾸 오르기 시작하자 정 주영은 삼창 정미소 쌀만 받아
다 파는 데 만족하지 않고 황해도 연백 등의 각 산지로부터 쌀을 직접 반입
해다가 팖으로써 그 유통 마진의 폭을 넓혔던 것이다.
쌀가게를 정리한 정 주영 수중에는 천원이라는 돈이 남아 있었다. 전문학
교를 졸업하고 중앙은행에 취직하는 사람의 월급이 70원하던 때이고 보면
천원이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그러나 막상 천원을 가지고 무슨 일을 해
보려고 하니가 손에 잡히는 마땅한 일이 없었다.
그런 어느날 그는 쌀가게 단골이었던 이 을학을 만났다. 이 을학은 당시
서울 장안에서 제일 큰 경성 써비스공장의 엔진 기술자였다.
"자동차 수리업이 괜찮아요. 시작하는데 돈도 얼마 안 들고 수지 맞아
요."
하고 이 을학은 그에게 자동차 써비스공장을 해보라고 권하는 것이었다.
"얼마나 가져야 할 수 있는 건데요?"
그는 돈이 얼마 안 든다는 이 을학의 말에 호기심이 당겼다.
"북아현동 고개에 사까모도라는 일본사람이 하고 있는 조그만 아도(아프
터)서비스공장이 하나 있는데, 집은 함석 목조건물이지만 시설은 그런대로
괜찮거든요. 내놓기는 4천원에 내놨지만 흥정만 잘하면 아마 한 3천 5백원
이면 인수할 수 있을 거요."
하지만 정 주영 수중에는 당장 천원밖에 없었다. 그래도 이왕에 꺼낸 이
야기라 그는 한마디 더 물어 보았다.
"3천 5백원에 공장만 인수한다고 해서 되겠어요? 공장을 돌리려면
또......."
"넉넉 잡고 5천원이면 될 거요."
(5천원........)
그에게는 턱도 없는 소리였다. 그러나 틀림없이 수지가 맞는 일이라면 시
골에 사 놓은 논을 팔아 올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는 구체적으로 물어 보
기 시작했다.
"사까모도라는 일본 사람은 왜 그 써비스 공장을 내놓았읍니까?"
"빚이 많아요. 빚이........."
"수지 맞는 사업이라면서요?"
"아무리 수지가 맞으면 뭐해요? 부리는 사람이 알아야죠. 직공들 좋은 일
이나 시켰지.........:"
"그렇다면 나도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쌀장사 해먹던 내가 자동차 수리공
장을 어떻게 한단 말예요?"
"정형이 하겟다면 나도 같이 할 용의가 있어요."
"글쎄............"
"내 친구 김 명현이도 끌고 나올 수 있어요."
"그럼 이형하고 그 김 명현씨도 다소간 투자를 하십쇼. 그래서 두 분이
약조를 해주면 나도 한번 생각해 보지요."
정 주영은 틀림없이 수지 맞는 일이라면 그들이 현재 다니고 있는 경성
써비스공장을 그만두고 나와서 투자를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기술자는 저절로 확보되는 것이고 따라서 그들이 알고 있는
손님들도 끌어오게 될 것이므로 안심하고 투자할 만한 사업이라고 생각했
다.
며칠 후, 정 주영을 찾아온 이 을학은 자신과 김 명현이 자본금의 10분의
1인 5백원을 투자할 터이니 북아현동의 아도 써비스 공장을 인수하자고 하
는 것이었다.
그날 밤 정 주영은 궁리 끝에 삼창 정미소 사장 오 윤근 영감을 찾아갔
다.
"3천원이라......3천원이면 제법 큰돈인 걸. 그래 무슨 사업을 하려고 그
렇게 큰돈을 빌리려는 건가?"
오 윤근 영감은 약간 난색을 지으면서 그렇게 물었다. 정 주영은 3천원이
필요한 사정을 소상하게 설명했다. 설명을 듣고 난 오 윤근 영감은 두 말
없이,
"돈이 필요한 때 언제든지 오게!"
하는 것이었다.
그는 기뻤다. 돈 3천원을 빌렸다는 사실보다도 오 윤근 영감으로부터 자
신의 신용을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가슴 벅차도록 기뻤다.
오 윤근 영감은 정미소를 경영하면서 돈놀이도 하고 있었지만 담보물을
잡고 돈을 빌려 주는 일은 없었다. 그는 상대방의 신용 하나만 믿고 돈을
빌려 줫다. 그러나 그는 한번도 돈 빌려 주였다가 떼 먹힌 적이 없는 것을
늘 자랑으로 삼아 오고 있었다.
정 주영의 주머니 속을 환하게 들여다보고 있는 그 오 윤근 영감이 일금
3천원을 선뜻 빌려 주겠다는 것은 그를 그만큼 신용하기 때문이었다.
훗날 정 주영이 즐겨 쓰는 <신용이 곧 재산이다. 신용만 있으면 돈은 얼
마든지 있다>고 하는 말은 바로 그때 그가 체득한 금언이기도 하다.
정 주영은 당당하게 북아현동에 있는 아도 써비스공장을 흥정하는 한편,
6년 전 서울로 같이 올라왔다가 지금은 다시 고향에 내려가 있는 오 인보에
게 5백원을 빌려서 자본금 5천원의 아귀를 맞추었다.
그해 3월 1일, 그는 예정했던 대로 3천 5백원에 북아현동 아도써비스공장
을 계약하고 새로 허가를 내는 동시에 막바로 작업에 착수했다.
일거리는 예상보다도 순조롭게 들어오기 시작했다. 맨 먼저 일진질소광업
의 트럭 두 대를 수리해 내자 임진강에 빠졌던 개인 트럭 한 대가 들어왔
고, 당대의 세도가인 윤 덕영의 올수 모빌 승용차 한 대를 공장 안에 집어
넣고 수리 중이었으며 길가에도 트럭 두 대를 세워 둔 채 고치고 있는 중이
었다. 공장에서 일하는 종업원들도 50명이나 됐었다.
3월 20일에는 계약 잔금 1천 5백원도 마저 치렀다. 잘만 하면 반년 안에
들어간 밑천이 빠질 것 같기도 했다.
일은 물론 힘들었다. 기술이 없는 정 주영은 주로 외부일을 보았지만 공
장 안에 있을 때는 자연 궂은 일을 도맡아 할 수밖에 없었다. 아침에는 남
보다 먼저 일곱시에 출근하고 밤에는 거의 자정이 가까와서야 퇴근하곤 했
었다. 정주영은 그의 말대로 하늘에서 제일 가까운 집에 살고 있었다. 서울
에서는 가장 높은 현저동은 그가 세번째로 고향을 빠져나와서 부기전수학원
을 다닐 때에 하숙하던 동네다. 그는 결혼하고 나서도 신접살이를 현저동에
서 시작했었다.
제일 싼 세방에서 조금씩 나은 집으로 이사를 다니다가 그가 지금 사는
초가집을 산 것은 얼마전 경일상회의 가게 문을 닫기 직전의 일이었다.
그때 전차 삯이 5전했지만 그는 아무리 먼 거리도 전차를 타고 다니는 일
이 없었다. 현저동 집에서 신당동 가게까지, 영천에서 전차를 타고 황금정
6정목에서 내리면 편할 출근 길도, 그는 새벽 일찍 일어나서 가파른 비탈길
에 물지게를 지고 아랫동네 공동수도까지 내려가서 물을 두어 지게 져 올려
놓고는 걸어서 출근했다. 그러자니 구두창이 너무 잘 닳아서 그는 징을 박
아 신고 저벅거리며 다녔다.
그렇게 살면서도 정 주영은 자신이 불행하다거나 또는 주위 환경에 대한
불평 같은 것을 별로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조금씩 나아지는 생활의 변화
가 더 없는 즐거움이었고 보람이었다.
하루하루가 그에게는 기쁨의 연속이었으며 희망과 기대에 찬 나날이었다.
확실히 그는 희열과 흥분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그날에 할 일을 생각하
곤 마치 소풍가는 국민학교 아이들이 소풍 전날에 흥분하듯 그런 흥분으로
마음을 설레다가 새벽잠에서 깨어나곤 했었다.
그러나 정 주영에게도 언제나 좋은 날만 계속되지는 않았다. 써비스공장
의 인수 잔금을 치른 지 닷새째 되는날 아침이었다. 북아현동 쪽을 바라보
고 걸어가던 정 주영의 발길이 우뚝 멎었다 그는 자기 눈을 의심했다 써비
스공장 함석 지붕이 안 보였다. 물론 건물 기둥도 보이지 않았다. 뽀얀 잿
가루만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써비스공장이 하룻밤 사이에 완전히 잿더미
로 변했던 것이다.
그는 하루아침에 빚더미에 올라 앉고 말았다. 일터도 일거리도 모두 재로
날려 버린 그는 초저녁에 일찌감치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태연한 얼굴이었
지만 그의 아내 변씨는 당황했다. 신접살림을 시작한지 일년이 넘도록 그렇
게 빨리 돌아오는 남편을 대한적이 없는 그녀였었다.
[여보, 웬일이세요?]
아내는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그는 아내를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공장을 좀 놀려야 할 것 같애.]
하고 둘러댔다. 왜 공장을 놀려야 하느냐는 말에 그는, 일거리는 많이 들어
오는데 장소가 협소해서 공장을 늘려야 한다고 했다.
실제로 정 주영의 마음은 그렇게 담담했다. 인간의 행복이나 불행은 생각
과 의지에 따라서 좌우되는 것이라고 그는 믿고 있었다. 비록 병 들어 몸져
누워 있는 가난한 환자라 할지라도 환자 자신이 행복한 마음을 가지고 누워
있다면 그 환자는 불행하지 않으며, 제아무리 건강하고 돈 많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 마음속에 불만과 불평, 증오와 의혹과 실망이 가득차 있
다면 그 사람은 행복할 수 없다고 생각해 왔다.
============================= 02
잘 되는 일을 추진하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어려운 일, 골치
아픈 일을 열심히 연구하고 노력해서 해결해 냈을 때의 성취감이 잘 되는
일을 성취했을 때의 기쁨이나 보람보다 몇배 더 큰 것임을 그는 그동안에도
수없이 체험해 왔다.
그리고 오늘날까지의 정 주영의 시련의 시기는 새로운 도전의 시기이기도
했다.
그는 새로운 용기를 내고 다시 오 윤근 영감을 찾아갔다. 이번에는 5천원
을 빌려 줄 것을 요청했다. 오 윤근 영감은 이번에도 두 말 없이 5천원을
대출해 주는 것이었다. 그 5천원도 물론 신용대출이었다.
그는 불 탄 그 자리에 다시 써비스공장 허가를 내려고 했으나 당국에서는
여러 가지 이유를 내세우고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써비스공장
허가 내는 일이 여간 까다롭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그는 50명 종업원을
거느리고 신설동 대로변의 3백50평짜리 빈터를 얻어가지고 나가서 허가도
없이 다시 써비스공장을 시작했다.
그때 서울에 승용차라고는 몇몇 귀족과 조선총독부 국장급이 타는 10여
대와 도지사가 한 대, 경무부장 그리고 일본군 제20사단 사령부의 사단장과
참모장이 가지고 있었고, 조선은행 두취 등 큰 은행과 큰 일본회사 몇 군데
서 가지고 있는 정도였다. 그밖에 택시가 좀 있었지만 그것은 불과 몇 대
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차가 고장 나면 그 고관대작들의 발이 묶여서 꼼짝
을 못 했다. 빨리 고쳐 주는 것이 제일이었다.
하지만 다른 써비스공장에서는 고치는데 여러 날이 걸린다고 해서 많은
돈을 받아내는 것이었다. 그는 그것을 역이용했다. 다른 데서 열흘이 걸리
는 것이면 사흘에 고쳐주고 그 대신에 수리비를 더 많이 요구했다.
그러자 서울 장안의 승용차라는 승용차는 전부 신설동 써비스 공장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공장 종업우언이 50명에서 60명으로 늘어났다.
그때 서울에는 황금정 6정목에 경성 써비스공장이 있었고 혜화동 로터리
에 경성공업사, 종로 5정목의 일진공작소 같은 비교적 큰 규모의 자동차 수
리공장들이 있었지만 일거리는 신설동 무허가 써비스공장이 제일 많았다.
그러자 파출소 순사들이 허가증을 보자고 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파출소
순사들은 어떻게 적당히 겨우 겨우 피해갈 수가 있었는데, 동대문 경찰서의
보안계장이 허구한 날 찾아와서는 잡아넣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가는 것이었
다.
보안계장은 일본인 곤도오 경부였다. 요샛말로 빽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정 주영으로는 참으로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고 허가를 내주는 것
도 아니었다.
정 주영은 매일 아침마다 곤도오 경부 집을 찾아가서 통사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첫날은 과자를 사 들고 갔다. 그러나 곤도오 경부는 안 받는 것이
었다. 그냥 들고 나오다 그는 뒤통수가 부끄러워서 얼른 그 집앞 쓰레기통
에 처넣고 말았다. 다음부터는 매일 아침 빈 손으로 찾아가서 손이 발이 되
도록 봐 달라는 사정만 했다.
그러기를 한달여. 작대기도 세워 놓고 정성을 들이면 응감한다는 옛말은
맞는 말이었다.
"내가 졌다. 너는 내가 벌써 구속했어야 할 사람이다. 그러나 매일 아침
마다 찾아오는 너를 차마 구속할 수 없었다. 네 말대로 네가 법은 어기고
있지만 나쁜 짓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단속하는 경찰의 체
면을 생각하라."하고 곤도오 경부는 대로변에서 안 보이도록 판자로 울타리
를 막고 숨어서 하는 척이라도 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감사하다는 소리를
수없이 되풀이하면서 곤도오 경부 집을 나왔다.
그는 <진실과 성실은 모든 것을 초월해서 이길 수 있다>고 하는 신념을
얻었다.
그후 신설동 써비스공장은 날로 번창해 갔다.
그 무렵, 정 주영은 현저동 산꼭대기 집을 팔고 신설동 공장 가까운 곳에
집을 사서 이사하는 한편 시골에 있는 둘째 동생 순영과 그 아래 누이동생
을 서울로 불러 올렸다.
그의 바로 아래 동생인 인영은 일찌기 서울로 올라와서 인쇄소에 취직하
고 있다가 몇해 전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지금은 청산학원 영문과에 재학 중
이었다.
공장은 밤을 새워 일해야 할 때가 많았다. 공장이 밤샘을 할 때면 정 주
영은 집에서 종업원들의 밤참을 해 내다 먹였다. 실은 그 때문에 시골의 누
이동생도 불러 올렸던 것이다.
"여보, 그 김씨 있잖아요?"
어느 날, 저녁 밥상 머리에서 밑도 끝도 없이 꺼낸 정 주영 아내의 말이
었다.
"어느 김씨말야?"
"아이, 공장에 자주 오는 다꾸시(택시)운전사 김씨말예요."
"아아 김 영주, 왜?"
"오늘 낮에도 목이 마르다고 하면서 집에 들어와서 물을 달라지 않겠어
요?"
"그래서?"
"아가씨가 물을 한 대접 떠다 줬어요."
"거, 뭐 대단한 일이라구......"
순간 그는 불현듯이 지난날의 이장 딸 옥선이를 머리 속에 떠올리면서 아
내의 말 속에 다른 뜻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전에 정 주영이 매일 한차례씩 신문을 보기 위해 이장 집을 들렀을 때,
그는 어쩌다가 옥선이가 집에 없어서 못 본 날에는 공연히 물 생각도 없으
면서 목이 마르다는 핑계를 대고 옥선이를 보기 위해 이장 집을 다시 들르
곤 한 일이 있었다.
그를 좋아했기 때문에 두번씩이나 그의 행방을 고자질한 옥선이었다. 그
러나 옥선이는 그가 쌀가게에 취직하던 다음 해에 소식 없는 그를 야속해
하며 다른 사람에게로 시집을 가고 말았었다.
정 주영이 고향에다 논 30마지기를 사 놓고 올라오던 해, 갑자기 아버지
한테서 장가 들러 내려오라는 기별이 왔었다. 본인들의 의사와는 아무 상관
없이 이미 어른들 사이에 정해진 혼인이었다. 그래도 색시 감을 한번 보기
는 해야 할 것 아니냐고 해서 그때 본 규수가 바로 송전면 면사무소 강당에
서 야학을 가르치던 지그미의 아내 변씨였다.
그렇게 든 장가였지만 그는 아내에 대한 불만은 조금도 없었다. 아내는
어디에 내놔도 남의 축에 빠지지 않을 만큼 예뻤고 건강했고 착했으며 바느
질 솜씨며 음식 솜씨 또한 빼어나게 훌륭했다. 특히 그녀의 음식 솜씨는,
공장에 밤일이 있는 날이면 종업원들이 맛있는 밤참을 기대하고 저녁밥을
조금만 먹어 둘 정도로 알려져 있었다.
아내는 다시 택시 운전사 김씨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었다.
"여보, 김씨 총각이에요?"
"총각이면 어떡허고 총각 아니면 어쩔 거야?"
그는 볼멘 소리를 했다.
"아가씨 나이도 열여덟이에요. 좀......"하고 미소하는 그녀도 열여덟살
에 그와 결혼했었다.
장안에 몇 대밖에 없는 택시 운전사 직업은 인기 직업이었다. 또 김 영주
라는 청년은 평소에 말이 없고 건실했다. 정 주영은 그만하면 매제를 삼아
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아. 아직 제 위로 장가 안 든 오라비가 둘이
나 있어. 어림도 없는 소리......"하는 핀잔을 놓고 공장으로 나갔다.
정 주영은 밖에 나가서 주문을 받고 돈을 받고 하는 시간 외에는 언제나
공장 안에서 모든 종업원들과 똑같이 일해 왔다. 분해하고 조립하고 하는
사이에 그는 온갖 기계원리가 포함되어 있는 자동차 엔진의 구조를 완벽하
게 터득했다.
얼마 안 되는 대부분의 산업시설이 일본 사람들에 의해 독점되다시피 해
서 한국 사람으로서는 좀처럼 현대 기계문명에 접할 기회가 드문 그때에 그
가 메카닉의 원리를 체득했다는 것은 훗날의 현대 창업사에 중대한 의의를
갖는다.
정 주영의 말대로 그는 사장이 아닌 돈 많은 노동자가 되었다. 공장은 날
로 번창해 갔다.
그러나 시국은 또 한차례 정 주영을 폐업의 수렁으로 쓸어 넣었다. 1941
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그 이듬해에 기업정비령을 공포했다. 일제
는 힘 겨운 전쟁을 수행하느라고 민가에서 받아 먹는 놋그릇 놋수저까지도
걷어 들이는 판국이었다.
1943년 초, 신설동 써비스공장은 종로의 일진공작소와 합병되었다. 합병
이라기보다는 흡수되었다고 하는 표현이 정확할지도 모른다. 합병될 때 동
업자였던 이 을학.김 명현은 손을 뗐고 정 주영도 합병 후 얼마 뒤에 손을
떼고 말았다.
정 주영은 이미 가난뱅이가 아니었다. 그는 새트럭 20여 대와 헌트럭 10
여 대를 사고도 기만원의 돈이 수중에 남아 있었다. 그가 트럭을 산 것은
보광광업주식회사로부터 광석 운반의 하청을 받기 위해서였다.
보광광업주식회사는 당시의 식산은행 두취 아들 하나오까가 하는 회사였
는데, 황해도 수안군에 홀동금광을 가지고 있었다.
정 주영은 그해 5월, 보증금 3만원을 걸고 홀동금광의 광석을 평양 선교
리까지 실어내는 하청 운반계약을 체결했다. 홀동금광에서 평양 선교리까지
운송 거리는 장장 1백30킬로미터가 넘는 먼 거리였다. 먼 길이기도 했지만
원체 노면이 험했기 때문에 하루에 두 탕을 뛰는데도 빡빡했다.
그런대로 트럭이 30여 대나 돼서 벌이는 쏠쏠하게 괜찮은 편이었는데 최
근에 와서는 회사측 잔소리가 어찌나 심해졌는지 머리가 지끈지끈하도록 아
팠다. 많이 실었다, 적게 실었다, 왜 금덩이나 다름없는 광석을 싣고 가다
가 길바닥에 흘리느냐는 등.
돈벌이라고는 하지만 회사측 잔소리를 들을 때면 당장 때려 치우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다. 그렇다고 당장 그만둘 수 있는 일도 아니었고 또 당장
에 그만두면 징용에 끌려 나갈 염려도 있고 해서 그는 꾹꾹 참고 지냈다.
정 주영은 오늘도 광업소 사무실로 불려 가서 한바탕 잔소리를 듣고 나오
는 길이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리세요 형님."하고 누군가가 뒤에서 따라
왔다. 정 주영은 돌아보지 않아도 그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김 영주다. 그는 서울에서 하던 택시 운전을 그만두고 정 주영을 따라 와
서 일하고 있었다. 그는 운전만 잘하는 것이 아니었다. 기계박사였다. 자동
차 엔진 소리만 듣고도 어디가 고장인지를 알아냈으며 달리는 차 속에 앉아
서도 어디가 고장인지를 대번에 알아냈다.
정 주영에게는 그런 기계박사인 김 영주가 꼭 필요했었다. 자그마치 트럭
이 30여 대고 보면 고장이 나기 전에 매일같이 트럭을 점검해야 할 일류 정
비사가 필요했던 것이다. 고장난 차를 뜯어 고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고장이 나기 전에 어느 부분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을 미리 알
고 정비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김 영주는 무엇보다도 책임감이 투철하고 성실했다. 새벽이면 으례 남보
다 먼저 일어나서 세워 놓은 트럭 운전대에 일일이 올라가서 시동을 걸어보
고 또 트럭 밑으로 기어 들어가서 차체를 망치로 두드리며 점검해 보곤 하
는 것이었다. 그래도 고장은 났지만 김 영주가 아니었더면 하루에도 몇 대
씩 써비스공장에 들여 놓고 고쳐야 하는 사태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아무도 장담하지 못했다. 그렇게 철저한 정비를 하는데도 원체 운송거리가
먼데다가 길이 험했기 때문에 고장도 그만큼 자주 생겼다. 그러나 다행한
것은 기계박사인 김 영주 덕분에 아직까지는 하루종일 세워 놓고 고쳐야 할
이만큼 크게 고장난 트럭은 한 대도 없었다.
김 영주는 월급을 더 많이 준다고 해서 정 주영을 따라 왔다. 하지만 그
는 월급을 덜 준다고 해도 따라 나섰을 것이다. 그가 그토록 성실한 것은
천성이나 다름없는 그의 성품 탓이기는 했지만 실상 그의 속셈은 아무쪼록
정 주영에게 잘 보여서 그의 매제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꽉 차 있었기 때문
에 더욱 그런 열성을 보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정 주영네 가족이 홀동으로 이사와서 있었으므로 그 집에서 같이 생
활했다. 그의 가족은 자신의 내외와 남동생 여동생 넷이었는데 그동안에 한
식구가 늘어서 지금은 다섯이었다. 그 한 식구는 작년에 득남한 몽필이었
다. 몽필이는 장손이자 장남인 셈이다.
어린 몽필이는 고모와 김 영주의 관계가 자연스럽게 가까와지도록 하는
데에 단단한 한몫을 차지했다. 고모와 김 영주는 몽필이를 업어주고 받아주
고 하는 사이에 손과 손이 맞닿을 때면 마음과 마음도 짜릿하게 하나로 이
어져 갔다.
그런 눈치를 오래 전부터 채고 있던 정 주영은 어느날 그와 함께 고장난
트럭을 고치러 평양까지 나갔다가 같은 여관방에 들었을 때,
"내 누이동생을 부탁하네."하는 말로 그들의 혼인을 승낙했었다.
그날부터 김 영주는 정 주영을 형님이라고 불러왔다.
"형님! 자요, 한잔하고 확 잊어버리세요."
정 주영과 함께 대폿집에 들른 김 영주는 한되들이 술주전자를 대접에 기
울이며 그를 위로했다.
"정말 아니꼬와 못해 먹겠어. 이번 계약이 끝나면 그만두든지 어쩌든지
해야지."
"그만두면 저 많은 트럭들은 다 어떡허구요?"
"누군가 한 사람이 서울에서 이걸 해보겠다고 본사에 드나드는 친구가 있
는 모양이야."
"그래요?"
김 영주는 금시초문이었다. 사실은 그래서 현지 광업소 소장이 정 주영으
로 하여금 광석운송에서 손을 떼게 하려고 일부러 트집을 잡고 있는지도 모
를 일이었다.
이듬해 봄, 정 주영은 서울에 있는 본사로 올라가서 광석운송을 하겠다고
나선 사람을 만나 트럭 전부를 인수한다는 조건하에 하청계약을 그 사람 이
름으로 갱신하고 계약 보증금을 챙긴 다음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때가 1945년 5월 15일. 그로부터 만 3개월 만에 일제가 패망하자 홀동
금광도 폐광하고 말았다. 자칫하면 정 주영은 기십만원이라는 막대한 돈을
하루아침에 날릴 뻔했었다. 그는 스스로 운이 좋았었다고 생각했다.
좌절과 시련의 뒤안길
고향에서 8.15해방을 맞은 정 주영은 한달 후에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그의 고향은 38선 이북이었지만 그때가지만 해도 38선에 전혀 구애되지 않
고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었다.
서울에 올라온 그는 마냥 놀고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조선제당이라
는 적산회사에 취직하고 있으면서 독자적인 사업을 할 생각으로 기회를 엿
보았다.
일본이 패망한 다음 38선 이남에진주한 미군이 군정을 선포하고 나서 일
부 적산(일본인 명의의 재산)을 불하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는 중구 초동 106번지의 대지 백여 평을 불하받았다. 그 지역이 원래는
주택가였으나 전쟁 말기에 집들을 헐어 냈었기 때문에 그가 불하받은 땅은
빈 공터였다.
1946년 4월, 정 주영은 불하받은 그 땅에다 자동차 수리공장을 짓고 현대
자동차공업사라고 하는 간판을 내걸었다. 그전의 아도 써비스공장 경험을
되살려 보자는 의도에서였다.
다시 그의 동생 순영과 매제 김 영주가 와서 일을 하기 시작했고, 홀동
광산에서 사귄 최 기호와 고향 친구 오 인보도 와서 일했다. 오 인보는 신
설동 써비스공장 시절에도 같이 일하면서 경리 일을 맡아본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미군 병기창에 가서 엔진을 바꾸어 간다든가 하는 자동차 수리
를 청부했었다. 그러다가 한 일년쯤 지나면서부터는 낡아 빠진 일제 차들을
개조하기 시작했다. 1톤 반짜리 트럭 차체의 중간 부분을 이어 내서 2톤 반
짜리 트럭으로 만들기도 하고, 휘발유가 귀한 때였으므로 연료공급장치를
목탄이나 카바이트로 개조하는 등의 작업이었다.
한두 사람씩 늘어나기 시작한 종업원이 어느덧 30여 명을 헤아리게 되었
다. 한편 자동차의 수요는 날로 급격하게 증대되어 갔다. 해방 당시 전국의
4천 5백대에 불과하던 자동차 대수가 1947년 3월에는 그 배인 9천대로 증가
했다. 그 중에서도 8할로 추산되는 6천3백여 대의 차량이 서울을 중심으로
붐볐다. 일제 때 생활근거를 잃고 국외로 이주했던 동포들의 대부분이 서울
로 몰려 들었으며 크고 작은 장삿군들의 도시에로의 집중 현상은 비단 우
리 나라에서만의 일은 아니었다. 따라서 서울로의 인적 물적 유입량은 크게
불어났지만 생필품을 비롯한 제반 물자의 수급 고갈은 물가를 자극했으며
이에 편승한 유통 마진을 노리는 상인들의 절실한 기동성의 욕구는 교통량
을 증대시키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 서울 부산간을 잇는 1호 국도에는 화
물자동차의 홍수사태를 빚어내기까지 했다.
그와 같은 시대적 배경을 업고 정 주영의 현대자동차공업사는 날로 번창
해 갔다. 일년 만에 30명이던 종업원이 80명으로 불어났다. 자동차 수리 관
계로 관청출입을 자주 하던 그는 47년 5월 25일 드디어 현대토건사라는 또
하나의 간판을 내걸게 되었다.
그것은 정 주영에게 건설업을 할 만한 자본금이 비축되었다는 사실을 뜻
하는 것이기도 했다.
정 주영이 건설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는 간단했다. 관청에다 견
적서를 넣고 계약을 하고 일을 끝낸 다음에 돈 받기는 마찬가지인데, 돈 받
을 때 보면 자동차 수리업을 하는 자신은 30만원이나 40만원을 받는 데 반
해서 건설업을 하는 사람들이 받는 돈은 보통 천만원 단위였다. 그럴 바에
야 나도 큰일을 맡아서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 주영이 막상 토건업 간판을 내 걸려고 했을 때 그의 측근들은
만류했었다.
"형님, 토건업은 첫째 자기 자본도 넉넉해야 하지만 경험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자동차나 만지던 우리가 어떻게 토건업을 합니까?"
매제 김 영주의 반대였다.
"그리고 토목이나 건축공사라는 게 한두 달에 끝나는 게 아니잖은가. 어
떤 공사는 일년도 걸리고 이년도 걸리는데.......물가는 자고 새면 오르니
잘못 공사를 맡았다간 망하네 망해."
경리를 맡고 있는 친구 오 인보의 반대 의견이었다.
하지만 토건업이 정 주영 자신으로서는 아주 생소한 분야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그는 토목 공사판에서도 일해 본 경험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의 토
건업이라는 것이 대개가 수리 영선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견적서 넣고 계약
하고 일해 주고 돈 받기는 자동차 수리업이나 진배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당시의 우리 나라 토건업계는 미군 시설관계의 긴급공사가 대량으로 발주
되고 있었기 때문에 자못 활기를 띠고 있었다. 미군은 국내 토건업계의 유
일한 조직기관인 조선토건협회에 업자추천을 의뢰했고, 협회에서는 소위 일
류업자라는 사람 15명을 추천해서 그들로 하여금 미군 공사를 감당케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날로 증가하는 미군공사는 그들 소수업자만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그와 같은 현상은 일반업계에 큰 충동을 주어 기존
업자는 물론 수많은 속성업자가 우후죽순처럼 난립하기 시작해서 한때는 서
울에만도 3천여 업체들이 미군공사를 수주하기 위한 피 나는 싸움을 하게
했다.
그래도 큰 공사는 역시 그 당시 건설업계에 <제너컨>으로 군림하던 신건
공영.광진토건.삼환기업 드으이 베스트 쓰리 업체와 오공무소.삼강기업.해
신토건.마공구점 등이 사전 당고를 통해서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제너컨>이란 말은 제너럴 컨드랙터라고 해서 일괄 수주업자 또는 종합건
설업자라는 뜻이었는데, 사실상 그때의 제너컨은 명색만 제너컨이었지 그
시공능력은 보잘 것이 없었다.
그래도 어쨌든 다른 군소업체들은 그 제너컨의 하청업자들로서 도토리 키
재기로 올망졸망해서 수니위도 알 수 없는 정도였는데 정 주영의 현대 토건
사 역시 그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그처럼 일류업자들에 의해서 분할 점령되고 있는 건설시장 틈바구니에 끼
어서 그나마 현대토건이 창사 초년도에 1천 5백 30만원의 게약고를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정 주영의 수완으로 미 군정청 관리들과의 교섭에서
이것 저것 잡다한 영선 수리 공사 등을 따낸 덕분이었다.
현대토건은 처음 초동 현대자동차공업사에 더부살이로 내 걸었던 간판을
떼어서 이듬해에는 광화문에 있는 평화신문사 빌딩에 다 따로 방 두 개를
세 내어 사무실을 차리고 옮겨 달았는데, 기술자라고는 겨우 공업학교 교사
출신인 송 상술이라는 한 사람이 있었으며 기능공도 10여 명 정도가 들락날
락하고 있을 뿐이었다.
정 주영은 한 일년 경험하고 나서 토건업은 해볼 만한 사업이라고 생각했
다. 공사를 따 내기가 좀 어려워서 그렇지 일단 시작하면 수지는 맞았다.
그는 현대토건이 공사를 따는데 힘 드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토건업도 자동차 수리업과 같이 하나씩 하나씩 차근차근 신용을 쌓아 올리
면 일 거리는 저절로 생길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48년에도 49년에
도 47년도의 계약고를 유지하면서 착실하게 기반을 굳혀 나갔다.
9150년 1월, 정 주영은 토건업에 박차를 가할 생각으로 현대토건사와 현
대자동차공업사를 합병해서 현대건설주식회사를 설립했다. 공칭자본금을 3
천만원으로 하는 현대건설은 1월 10일에 설립등기를 필함으로써 법인체로서
의욕적인 출발을 했었지만 공사다운 공사는 한번 제대로 해보지도 못한 채
6.25동란의 와중에 휘말리고 말았다.
그 무렵, 현대건설은 돈암동 전차 종점에다 승무원 대기소를 짓고 있었
다. 미아리 고개에서 피난민들이 물밀 듯이 밀려 넘어 오고 포성이 찌렁찌
렁 울려오는 6월 28일까지도 미련할이만큼 충직한 그는 현장공사를 지휘하
고 있었다. 큰 동생 정 인영이가 초동의 써비스공장엘 들렀다가 돈암동 현
장으로 찾아온 것은 오정이 조금 지나서였다.
일본의 청산학원 영문과 출신인 정 인영은 영어에 능통했다. 그래서 미군
정 시절에는 미소공동위원회 미국측 통역관으로 활약하면서 많은 미군들과
인연을 맺어 오다가 49년에 미군이 남한으로 부터 철수한 후로는 언론계에
종사해 오고 있었다.
"형님,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예요?"
현장 일에 정신 없는 형을 본 인영은 답답하고 안타까왔다.
"왜? 여긴 웬일이냐?"하고 돌아보는 형을 인영은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
보다가,
"형님, 지금 공산군이 바로 이 고개 너머까지 쳐들어왔어요."하며 미아리
고개를 가리켰다.
"뭐라구? 그럼 이 공사를 어떡하지?"
피난 가자고 찾아온 동생 앞에서 그는 중단될 공사 걱정만 하고 있었다.
인영은 상황이 절박하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제서야 정 주영은 현장 소
장으로 있던 최 기호와 인영과 함께 은행으로 가서 예금 전액을 인출해 가
지고 피난길을 나섰다.
가족이 그전 신설동 집에 살고 있었지만 정 주영은 들여다볼 겨를도 없었
다. 며칠 후에는 되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의 피난길은 그냥 부
산까지 밀리고 말았다.
그때 정 주영이 부산까지 밀려갔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그가 그대로 서울
에 주저앉아 있었다면 오늘날의 현대건설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현대건설이 건설업자로서의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바로 6.25를 통
해서였다. 그의 말대로 건설업자란 평화로운 때에는 평화를 건설하고 전쟁
이 일어나면 전쟁에 따르는 공사를 해야 하게 마련이어서, 평화시에도 전시
에도 공사는 언제 어디서나 있었다.
7월 7일,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국제평화를 수호하기 위해서 유엔의 이
름으로 한국동란에 참전할 것을 결의했다.
부산에는 한꺼번에 10만이 넘는 미군이 밀어 닥쳤다. 하지만 부산에는 별
안간 몰려오는 미군을 수용할 만한 숙박시설의 마련이 전혀 없었다. 학교
교실을 임시 숙박시설로 이용했지만 학교 교실만 가지고는 태부족이었다.
운동장에도 마루를 깔고 천막을 치고 하는 북새를 떨어야 했다.
정 주영은 그와 같은 미군 공병단의 공사를 도맡아서 해냈다. 그의 동생
인영이 미8군 공병감실에서 군속으로 근무하게 됐었기 때문이다.
한편 정 주영은 교통부, 외자청, 현대건설 삼자간의 외자보관 창고건설
및 창고보관업대행 계약을 체결하고 부산 제2부두에다 연건평 2천 백67평에
이르는 3동의 외자보관 창고 신축을 착수했다.
현대건설이 정부지원금으로 외자창고를 신축하고 그 창고의 보관업무를
대행하는 조건으로 월 2백만원의 고정 보관료를 받는 이외에 물품의 출입고
에 따르는 상 하역비와 그 물품의 관리비는 따로 계산해 받는다는 내용의
계약이었다.
보관창고가 미처 다 지어지기도 전에 미국이 제공하는 각종 구호물품과
원조물자는 산더미처럼 쌓이기 시작했다.
그는 따로 현대상운주식회사를 설립하고 30톤 내지 70톤 급의 소형선박
세 척을 구입하고 이를 연안해운업에 투입했다.
부산은 수많은 피난민들이 몰려든데다가 정부가 이전해 오고, 전방에 투
입될 유엔군 및 국민방위군 등의 보충병력이 집결하는 등으로 정치.경제.군
사의 중심지로 일변했기 때문에 물동량의 유출입이 포화상태를 이루고 있는
때였다.
그와 같은 상황을 배경으로 현대상운은 제주.진해 등지를 내왕하면서 소
금 식료품 양곡 등의 필수물자를 수송해 날름으로써 전시 경기 하의 유통
마진을 톡톡히 누렸다.
그때 이미 현대건설은 건설업체 중에서 유일하게 미8군에 군납 건설업자
로 등록되어 있었다. 따라서 정 주영은 미8군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으
며 8군이 발주하는 공사는 거의 독점할 수가 있었다.
정 주영은 9.28수복 때 미군과 함께 서울에 들어왔다.
가족은 다행하게 모두 무사했다.
그는 평화신문사 빌딩에 있는 현대건설 사무실을 초동의 자동차 수리공장
으로 옮기고 흩어졌던 종업원들을 다시 모아 주로 군용차량을 대상으로 하
는 수리업을 재개시켜 놓은 다음 바로 공사 수주활동에 나섰다.
먼저 수주한 공사는 서울대학교 법대와 문리대 건물을 개조해서 미8군 전
방기지 사령부 본부막사를 설치하는 일이었다.
다음으로 수주한 것은 역시 미8군의 휘하 부대인 8029부대가 발주한 부평
조병창 보충부대 막사 신축공사였다. 그 공사는 바닥에 마루를 깔고 트러스
로 천정을 만드는 비교적 간단한 일로 1.4후퇴 직전까지 계속되었는데, 그
때까지 3백여 채를 지었다.
한 채당 실행예산은 24만환꼴이었지만 실제 공사이익은 실행예산의 5.6백
를 거두었으니 참말 돈을 갈퀴로 그러모은 공사였다.
그러나 공사마다 그렇게 돈이 벌리는 것은 아니었다. 수원 공군기지 복구
공사는 그가 처음으로 큰 적자를 본 공사였다.
유엔군이 북진을 계속하고 있을 때, 미구니은 수원 비행장의 복구공사를
정 주영에게 맡겼던 것이다. 그는 곧 복구공사에 쓸 목재를 비롯한 각종 자
재를 실어다 놓고 작업에 들어갔다. 그랬는데 난데 없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공사를 중단한 채 부산으로 피난하게 되었다. 서울이 다시 수복된 후, 그는
미군과의 종전 계약대로 그 공사를 마무리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에 쌓
아 재어놨던 자재는 다 분실되고 물가는 곱으로 뛰어 올랐던 것이다.
다시 부산으로 피난한 정 주영은 제1부두 앞에 있는 제일운수 빌딩에 사
무실을 세 내어 현대건설과 현대상운의 간판을 내걸었다.
이번 피난 길에는 가족과 종업원들도 다 함께 내려왔었다.
이보다 앞서 정 주영은 유엔군이 원산.함흥까지 북진했을 때 38선 이북인
고향으로 달려가서 공산 치하에서 고생하는 아버지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을
몽땅 서울로 모셔다 놓고 있었다. 그는 46년에도 38선을 넘어 가서 아버지
의 회갑잔치를 차려 드리고 오는 일을 잊지 않았다.
정 주영은 초량에다 자동차 수리공장을 차리는 한편 미군 공사를 계속했
다.
부산 수산대학과 영도국민학교 건물 내부를 개조해서 미8군 후방기지 사
령부의 보충병 수용막사를 만든 다음, 그는 그 막사를 유지 관리하는 용역
사업가지도 맡았다.
난방으로부터 청소에 이르기까지 모든 용역을 청부 맡게 되자 현대 종업
원들은 미8군 마아크가 붙은 군복을 입고 미군 부대를 자유롭게 출입했다.
그처럼 미8군과 현대건설과의 관계는 자못 긴밀했다. 유엔군이 평양을 점
령한 작년 12월 중순경, 미8군이 정 주영에게 비행기편까지 제공해서 평양
의 군납공사를 맡기려 했다가 1.4후퇴로 그 계획이 취소되었던 것을 미루어
보아도 미군과 현대건설 사이가 얼머나 밀접했던가를 잘 알 수 있다.
1952년 12월 미국의 아이젠하워가 자신이 대통령에 당선되면 한국전선을
직접 시찰하고 나서 한국전쟁을 평화적으로 종결짓겠다고 한 선거공약을 실
천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게 된 때의 일이었다.
미8군은 아이젠하워가 한국에 와서 머무는 동안의 숙소를 운현궁으로 정
했다. 그러나 운현궁의 외관은 나무랄 데가 없으나 그가 기거할 만한 내부
시설이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그가 있을 방에 보일러 시설도 해야 하
고 화장실도 드리고 내부 단장도 해야 하는데 시간은 15일밖에 여유가 없었
다.
미8군은 고심하던 끝에 정 주영을 불렀다. 관계관의 설명을 듣고 난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시오. 자신 없어요?"
관계관이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글쎄올시다. 좌우간 한번 해봅시다. 그러나 이렇게 발등에 불이 떨어지
는 일을 하고 나면 뭐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하다 못해 일군들 수고했
다고 막걸리 사발이라도 사 먹이려면 보너스가 있든지......"
관계관이 미군들과 뭐라고 수군거리는 것이었다. 이때도 정 주영은 자꾸
만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이었다.
"정사장, 이렇게 합시다."
"어떻게요?"
"만약 공사를 기일 내에 해내지 못하면 공사비를 못 받는 것은 물론이고
거꾸로 정사장이 공사비 백퍼센트의 페널티를 물고, 그 대신 기일 안에 해
내면 이쪽에서 공사비의 백퍼센트를 보너스로 내놓지요."
"좋습니다."
정 주영은 흔쾌히 계약서에 싸인을 하고 나오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생전 양변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아까
부터 양변기 생각을 하느라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사돈과 뒷
간은 멀수록 좋다고 했는데 변소를 방안에 드려야 한다는 말도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아서 궁리 중이었다.
공사비는 아예 몇 배 넉넉히 잡고 계약하기는 했지만 그런 재료를 어디
가서 구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는 우선 초량 자동차 수리공장의 기계박사 김 영주를 올라오라고 연락
하는 한편 일군들을 데리고 용산 쪽으로 나가서 주인이 피난 가고 없는 빈
집을 뒤졌다. 그래서 보일러 파이프 가티은 것을 무조건 뜯어서 실어 냈다.
그리고는 아무개가 며칠날 무엇을 얼만큼 가져 갔다 하는 식으로 일출증 비
슷한 것을 방 벽에다 써 붙여 놓았다.
부족한 자료는 그런 식으로 큰 빈 집을 뒤져 뜯어오게 하면서 한쪽으로는
그야말로 24시간의 돌관작업을 강행시켰다.
공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그는 화장실 문을 열었다 닫으면서,
"역시 변소가 방에 붙어 있으니까 편리하군."하고 한 마디 하는 것이었
다. 그때 한 일군이,
"사장님, 사장님!"하고 황망히 뛰어 들어왔다.
"왜 그래, 왜?"
"보일러가 터졌어요. 사장님."
"뭐라구? 보일러가 터져? 병신 같은 것들........"
정 주영은 급히 보일러실로 달려갔다.
시꺼먼 보일러 통에서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 오르고 물은 쭐쭐 흘러 내리
고 .....기가 차서 그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아직 한 댓새 기한이 남아 있기에 망정이지 아이젠하워가 와서 자고 있
을 때 이런 변을 당했으면.......)하는 생각을 하니 그는 등골이 오싹해 오
는 듯했다.
이미 글렀다고 생각하면 정 주영은 아무 말 안했다. 그러나 이 경우는 화
도 내고 욕도 하고 잔소리도 했다. 그러니 가능성이 내다보였던 모양이다.
무슨 일에 겁을 내는 부하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일처럼 말해서 될 수 있
다는 신념을 심어 주고 자신만만하게 덤벙대는 부하에게는 그 일에 따르는
위험부담을 일깨워 줌으로써 신중을 기하게 하는 것이 곧 그가 화를 내고
욕을 하고 잔소리를 하는 기준이었다.
터진 보일러는 이틀 만에 뜯어 고칠 수 있었다. 약속된 날짜보다 사흘이
나 먼저 모든 공사를 깨끗이 마무리 지었다.
정 주영은 어깨를 활짝 펴고 공사 대금을 받기 위해 8군에 들어갔다. 그
를 보는 미군마다 엄지 손가락을 세워 보이며 현다이 넘버원이라는 것이었
다.
거기까지는 어깨가 으쓱하고 기분이 좋았다. 두툼한 보너스를 탈 때까지
도 좋았다. 그 다음 순간 그는 아찔했다.
때를 같이 해서 부산에서는 현대건설이 유엔군묘지 단장공사를 하고 있었
다. 그때까지도 유엔군묘지는 전시라서 그럴 경황이 없었겠지만 뗏장 한 입
히지 못한 채 맨흙 바닥 그대로 방치되다시피 해서 황량하기 짝이 없었다.
그 유엔군묘지를 아이젠하워가 참배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부랴사랴 시작한
단장공사였던 것이다.
그 유엔군묘지를 당장 어떻게 파랗게 단장해 줄 수 없느냐는 것이었다. 8
군에서는 정 주영이라는 사람은 무엇이든지 한다면 해내는 사람으로 알고
있는 때였다.
답답한 노릇이었다. 상대방이 자신을 믿고 부탁하는 말인데 첫마디에,
"이 한 겨울에 무슨 재주로 유엔군묘지를 파랗게 단장한단 말이요? 미친
소리 하지 마시오!"하고 내뱉을 수도 없는 일이고, 그렇다고 아무 복안도
없이 해보겠다고 대답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시간이나 넉넉하면 산에 가서 소나무를 캐다 심든지, 남쪽 나라
에 가서 뗏장을 떠다 덮는다고 하지만 이 한 겨울에.......그것도 앞으로
아이젠하워가 부산에 내려갈 날은 닷새밖에 안남았는데.......)
무엇인가를 생각하던 그의 두 눈이 번쩍하고 빛났다. 초조하게 정 주영의
입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던 8군 관계관들도 문득 긴장했다.
"당장 파랗게 풀이 나게 하면 되는 거요?"
정 주영은 자신 있게 물었다. 그렇다는 것이었다.
"그럼 좋습니다. 돈만 내 놓으시오!"
"정말이요?"
"이 정 주영이가 언제 허튼 소리 하는 것 들었읍니까?"
"어떻게 할 건지 그 방법을 말해 보시오."
"아이디어만 제공하고 돈을 못 받으면 난 어떡합니까? 핫하."하고 너털웃
음을 웃자 영문을 모르는 8군 관계관들도 따라 웃고는 돈은 얼마든지 내겠
다는 것이었다.
"정확하게 얼마를 주겠다는 싸인을 합시다."
"얼마면 되겠읍니까?"
"아이디어값이 있으니까 실비의 3배는 받아야겠읍니다."
"좋습니다. 어서 실비를 계산해 내시오."
그래서 정 주영은 대강 생각 나는 대로 넉넉한 실비를 계산해 내고 한 겨
울에 실비 3배의 유엔군묘지 녹화공사라는 기상천외한 계약을 체결하고 미8
군을 나왔다.
그는 즉시로 운현궁 공사로 서울에 올라와 있는 김 영주를 만났다.
"자넨 이길로 부산에 내려가서 무조건 트럭 30대만 대절해서 김해 군청
앞으로 끌고 오게."
"트럭을 30대씩 뭘 하게요?"
"유엔군묘지에 잔디를 입히기로 했어."
"잔디를요?"
"응."
"이 겨울에 잔디가 어디 있읍니까, 형님?"
"김해 벌판의 보리를 캐다 심으면 돼."
"예? 보리를요?"
"아 높은 사람이 쭉 차 타고 와서 헌화나 하고 돌아가면 그만인데 그 사
람들이 보린지 잔딘지 들여다보고 확인할 거야?"
컬럼버스의 달걀이었다. 그렇게 해서 파랗게 단장된 유엔군묘지를 참배한
아이젠하워는 원더풀을 연발하고 돌아갔다.
그후부터 미군 공사는 정 주영이 손가락질만 하면 뭐든지 다 주다시피 했
으며 값은 그가 써 내는 것이 값이었다.
군납공사는 확실히 단단히 수지 맞는 사업이었다. 공사는 대부분이 수의
계약이었으며 공사비는 담당관의 싸인 하나로 결정되는 때였다. 공사비는
현대건설이 미리 알아서 넉넉히 써내는 데도 불구하고 때로는 8군 공병감실
담당관이 더 늘려 주기도 했었다.
게다가 미군 공사는 미화로 계약되었기 때문에 기성분을 받을 때쯤이면
환율이 엄청나게 뛰어 올라서 그 환차에서 오는 수익 또한 막대한 금액이었
다. 50년도에 1,800대 1하던 환율이 51년도에는 2,500대 1로 다시 52년 12
월에는 무려 6.000대 1로 급등했던 것이다.
정 주영이 전쟁기간 중 미군 공사만을 한 것은 아니다. 정부가 발주하는
긴급 복구공사에도 활발하게 참여했다.
휴전회담이 진행되고 전국이 소강상태에 접어들면서 정부는 많은 전략물
자의 수송과 군의 원활한 작전 수행을 도모하기 위해 폭격으로 파괴된 교량
들을 복구하기 시작했으며 또 한편으로는 민생 안정을 위한 전재 공공시설
에 대한 복구공사도 발주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현대건설이 시공한 주요공사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상주와 삼천포를 잇는 상현교 복구공사, 동해선 상의 월천교, 흥만교 복
구공사, 논산대교, 부산의 적포교 복구공사와 노량진 및 광장리의 수원지
복구공사.
53년 2월, 내무부 토목국에서는 고령고 복구공사를 발주했다.
고령교는 대구와 거창을 연결하는 교량으로서 그때 정부는 지리산 공비토
벌을 위해 시급히 복구해야 할 입장에 있었다. 하지만 아직 미국의 부흥원
조가 본격적으로 개시되기 전이었으므로 국내에는 전재복구를 위한 자재가
전무한 실정이었다.
때마침 내무부 토목국장을 지낸 바 있는 최 경렬이 교통부가 보유하고 있
는 헌 레일에 착안하고 이를 이용해서 교량의 트러스와 거더(교체:다리교
몸체)를 제작하는 특허권을 얻어 냈던 것이다.
정 주영은 그 최 경렬을 회사 고문으로 초빙했다. 관례상 모든 공사는 특
허권 소유자에게 시공자격의 우선권을 부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수의계약으로 고령교 복구공사를 따 낼 수가 있었
다.
이보다 앞선 작년 10월, 조폐공사가 발주한 동래사무실 및 건조실 신축공
사를 너무 싸게 수주한 바 있는 그는 이의 적자를 예견하고 만회하기 위한
수단으로 적극적인 수주활동에 나서, 지난 3월에는 대한수리조합 연합회가
발주한 신화 수리조합 공사와 진명염전 축조공사를 착수했었다.
고령교 복구공사는 지금까지의 정부 발주공사로서는 최대 규모의 것이었
다.
공기 24개월, 계약금액 5천 4백 78만원. 계약금만 해도 현대건설이 그해
에 수주한 다른 전체 공사계약금보다도 훨씬 많은 거액이었다.
정 주영이 그 고령교 복구공사에 각별한 기대를 걸었음은 물론이었다. 그
는 공사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일제 때에 경성고등공업학교 토목과를
졸업하고 기요미스 건설 조선지점에서 근무하는 동안 수많은 교량공사를 시
공한 경험을 가지고 해방 후에는 거창에서 교편 생활을 하고 있던 김 영필
을 삼고초려 끝에 상무로 초빙하여 현지 사무소 소장에 임명하는 한편 일본
의 와세다 고등공업학교 토목과를 졸업한 전문적인 교량 기술자 이연술을
기술주임에 임명하고 현대건설 본사의 경리책임을 맡고 있던 오 인보를 현
지 경리책으로 임명하는 등 공사 관리에 만전을 기했다.
공사는 1경간 60미터짜리 교체 두 개와 수심 10미터 계곡에 열세 개의 교
각을 설치하는 난공사였다.
교량의 상부구조는 모두 파괴된 상태이고 하부구조인 교각도 기초만 남아
있는 형편이어서 말이 복구공사지 실제로는 신설공사나 마찬가지였다. 오히
려 파괴된 상부 콘크리트 구조물이 물 속에 잠겨 있어서 작업상의 장애 요
인이 많았다.
낙동강은 계절에 따라 수심의 변동이 심했다. 겨울에는 모래가 쌓여서 수
심이 얕아졌다가 여름이 돼서 물이 불어나면 수심이 겨울철의 몇배로 깊어
지는 바람에 기초공사를 하기가 더더욱 어려웠다.
현장에 투입된 장비라고는 20톤짜리 크레인 한 대, 믹서기 한 대, 고정식
콤프레서 한 대가 고작이었다. 그만큼 큰 공사를 해본 경험이 없어서 장비
개념이 부족한 탓도 있었지만 국내에 보유하고 있는 건설장비라는 것 자체
가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20톤짜리 크레인이라는 것도 동란 전 내무부가 시공 중이던 남강 댐 공사
에 투입했다가 그대로 공사장에 방치해 버린 바람에 녹이 슬고 다 고장안
것을 수리한 낡은 것이었다.
다라서 대부분의 작업을 인력에 의존하는 원시적 방법으로 시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 여름 홍수 때는 시공 중이던 교각이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
가기도 했다.
일년이 지났다. 일년이 지났지만 아직 열세 개의 교각도 다 세우지 못했
다. 그동안에 물가는 곱절로 뛰었다. 기대를 걸었던 고령교 복구공사에도
암운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동래에서 시공 중이던 조페공사 신축공사는 7천만환이라는 막대한 적자공
사(낙찰금액 3천만환, 시공금액 1억환)끝에 지난 3월에 준공을 시켰다. 그
동안 미군 공사에서 번 돈을 조폐공사 신축공사에 다 털어넣다시피 했으니
이만저만한 아이러니가 아니었다.
작년 7월 휴전협정이 체결되자 많은 미군이 일본으로 철수하고, 그렇게
수지 맞던 미군 공사도 뜸해진 지 오래였다. 부산 피난 시절에 정 주영과
함께 훌륭한 콤비를 이루고 회사를 이끌어 오던 정 인영은 미군 공사가 한
물 가면서부터는 <모던 타임스>라는 잡지 제작에만 매달려서 회사 운영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작년 9월, 현대건설도 환도하는 정부를 따라서 서울로 올라와서 다시 초
동에 있는 자동차수리공장 자리에다 사무실을 차렸다. 부산에는 부산 사무
소를 설치하고 정 순영으로 하여금 현대상운의 창고보관업무와 연안운수업
을 계속 관장케 했다.
현대건설은 환도 전에 부산의 부전교회와 인하공대의 기계공학관 신축공
사를 착공했었다. 그러나 그런 공사는 속된 말로 새발의 피였다.
54년에 들어서면서 물가는 천정부지로 뛰어 올랐다. 고령교 착공 당시에
설계상 7백환으로 책정했던 기름단가가 지금은 2천 3백환이니 앞으로 공사
가 끝날 때까지는 얼마나 더 비싸질는지 모를 일이었다. 모든 자재 값도 노
임도 걷잡을 수 없이 뛰어 오르고 있었다.
"정 주영이 계약을 잘못했어. 공기가 2년이나 되는 장기공사를 글쎄 전시
인플레이션에서 오는 리스크는 전혀 생각 안 하고 일괄계약을 해 버렸으
니....."
"소학교밖에 안 나온 친군데 인플레가 뭔지 알기나 하나?"
"이년 동안이면 그동안에 물가가 오른다는 것쯤은 세살 먹은 어린애들도
알았을 것 아닌가."
"잘됐지 뭐. 그동안 미군공사에서 잘해 먹었는데 손해 좀 봐도 끄덕 없을
걸."
"조폐공사 짓는데도 손해를 많이 봤을 거야."
"아뭏든 요즘 내무부 문턱이 닳도록 드나드는 모양이더군."
"왜 또?"
"자재값 올라서 손해 보는 거 보전해 달라구 통사정을 하는 모이야."
"그런다구 한번 계약한 걸 내무부에서 다시 분할 계약해 줄까?"
그동안 현대건설이 잘 되는 것을 배 아파하던 업자들이 빈정대는 소리였
다. 딴은 다 옳은 말이고 맞는 말이었다. 정 주영의 속을 모르는 사람은 현
대건설 사원 가운데서도 그런 말을 하곤 했다. 그러나 정 주영이 물가가 오
르는 데서 오는 손해를 계산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계약 당시만 해도 그
는 넉넉잡고 일년 반이면 공사를 끝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일년 반
동안에 물가가 아무리 오른다고 해도 2배 이상은 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
했었다. 다만 한가지 그 자신이 전문기술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경험이 부
족했기 때문에 우리 나라의 건설장비가 그 정도의 교량조차도 시공하기 어
렵도록 부실하고 빈약하다는 것을 미처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지금도
만약 장비만 좋았었다면 그까짓 정도의 지형상의 악조건은 문제될 것도 없
었고 자신이 생각한 대로 공기를 단축해서 그동안에 오른 물가를 커버하고
도 이익을 낼 수 있었던 공사라고 생각했다.
정 주영은 지금 자신은 엄청나게 비싼 수업료를 지불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현지 자금조달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다녔다. 그는 길을 걷다가
도 이미 고인이 된 삼창 정미소의 오윤근 영감 생각이 문득문득 떠오르곤
했다.
8월, 정 주영은 회사경상비를 줄이기 위해서 현대건설 사무실을 초동 자
동차 수리공장 자리에서 소공동에 있는 삼화빌딩으로 방 두 개를 세 내어
옮겼다.
11월, 부전교회 신축공사를 끝으로 작년에 수주 착공했던 공사는 모두 끝
나고 신화수리조합 공사만이 발주처의 자금 사정으로 지지부진한 상태에 놓
여 있었다.
정 주영을 비롯한 모든 회사 간부들은 오직 고령교 복구공사에 총력을 기
울였다. 그랬지만 공사 현장에는<돈표>라는 것이 나돌기 시작했다. 돈표란
일명 <딱지>라고도 하는데, 시공자가 노임을 지불해야 할 시기에 가서 현찰
을 지불할 능력이 없는 경우에 발행하는 일종의 노임 지불각서와도 같은 것
이었다. 돈표에는 노임 액면이 적혀 있어서 현장 인부들은 보통 그 돈표를
할인해 썼는데, 대개의 공사현장에는 돈표를 노리고 와서 있는 사람이 하나
둘은 있었다. 돈표는 발행자의 신용상태와 지불기일에 따라서 9할에도 팔리
고 8할에도 팔렸다.
돈표는 조금만 크다는 공사 현장이면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었
다. 그러나 현대건설 현장에 돈표가 나돈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현장 인
부들의 사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돈표 발행하는 걸 보니 현대건설도 이제 다 됐군."
"딱지나마 바꾸어 먹을 수 있을 때까진 괜찮어."
"설마 현대건설 체면이 있는데 딱지야 부도 낼려구?"
"말 말게. 서울에 있는 본사 사무실도 팔아먹구 요샌 무슨 남의 빌딩에
쪼그만 방 한칸 얻어 가지고 있다는 거여. 그리구 정사장은 빚 얻으러 다니
느라구 정신 없대여."
"그래서 사흘이 멀다 하고 현장에 내려오던 양반이 요샌 통 안 내려오는
감?"
현장 인부들은 마치 남의 일 이야기하듯 하고 있었다.
회사의 재정은 이미 바닥이 나 있었다. 매달 외자창고 보관업무 대행료
일부와 초량 자동차 수리공장과 현대상운 소속의 똑딱선 세 척에서 얼마씩
벌어 들이고는 있었지만 그 돈으로서는 고령교 복구의 막대한 공사자금을
도저히 충당해 낼 수 없었다.
마침내는 공사현장의 돈표가 부도가 나기 시작했다. 9할이면 바꿔 쓰던
돈표가 7할에도 바뀌지 않았다.
공사장 인부들은 파업을 일으켰다. 어떻게 어떻게 해서 가까스로 부도난
돈표를 회수하고 나면 다시 발행하는 돈표가 8할에도 바뀌고 7할에도 바뀌
어서 현장 파업은 수습되곤 했다. 파업은 꼭 결정적인 작업과정에서 일어나
곤 했었다. 가뜩이나 부진한 공사는 자꾸만 하루하루 지연돼 갔다.
신용을 사업하는 사람의 재산이라고 생각하는 정 주영은 손해는 기왕에
본 손해였고 어떻게 해서든지 공사나 계약공기 안에 끝마쳐야 한다는 생각
으로 매일 자금 마련을 위해 고심했다.
오늘도 정 주영은 돈 때문에 아는 사람을 찾아 나섰다.
본사 직원들의 월급도 밀리고 있었다. 미국에 유학 중인 세째 동생 세영
의 학비를 못 보내고 있는지도 석달이 지났다. 고작 한달에 100불 내지 150
불 보내는 학비였다.
그는 맏형이라는 책임도 있었지만 자신이 공부하지 못한 한을 동생들을
통해서 풀려고 했다. 하기 때문에 그는 동생들이 공부하는 데 필요한 돈이
라면 아끼지 않았다. 세영이가 고려대학에 합격했을 때에는 자신의 일로 착
각하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세영이가 고대 정치학회 회장을 지내면서 모
의국회 의장 노릇을 할때면 그는 세상 없이 바빠도 그 모의국회를 방청하고
는 세영이 친구들을 데리고 나와서 불고기 파티를 열어 주었다. 실상 그 모
의국회를 여는 비용도 그가 댔었다.
세영이가 유학 길에 오르던 날,
"학비 걱정은 조금도 말고 공부만 열심히 해. 그래서 박사가 돼서 돌아
와. 건강에 조심하고, 알았지?"하고 동생을 격려한 정 주영이었다.
(그 학비를 못 보내다니......어디 가서 굶지나 않는지.......)
동생 생각을 하는 그의 눈에는 수정 같은 이슬이 맺혔다.
빚더미에 올라 앉은 회사는 이미 파탄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도 공사현장에서는 인부들이 밀린 노임 때문에 일을 안 한다는 소식
이었다.
사무실에는 빚장이들이 몰려와서 있었다. 빚을 받으려고 사무실에 와서
기다리는 사람들도 괴롭겠지만 그들을 기다리게 하는 정 주영은 더 괴로왔
다. 빚은 받아야 하는 쪽보다 못 갚는 쪽이 확실히 더 괴로운 것이라고 생
각하면서 그는 사직동 쪽을 걷고 있었다.
그 다음 그는 또 누구를 찾아 돈을 빌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
하느라고 잠시 발을 멈추고 사직공원 벤치에 허리를 걸쳤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태는 심각했다. 아니, 심각의 도를 넘어서 절망적이었
다. 그러나 정 주영은 절망에 익숙해 있었다. 그전에도 그는 여러번 절망에
빠졌지만 절망이 그에게는 곧 출발점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만은
아무런 방도가 서지 않았다. 참으로 답답하고 안타까왔다. 도망 가서 될 일
이면 도망이라도 가고 싶었고 죽어서 책임이 면해진다면 죽어 버리고도 싶
었다.
마침 건너편 벤치에 누워 있던 젊은 거지 하나가 졸리운 눈으로 일어나더
니 주위를 한번 돌아보고는 다시 비시시 눕는 것이었다. 그것은 인간이라기
보다는 넝마 조각 같은 것이었다. 거짓말을 할 기력조차 없어 보이는 사나
이였다.
그 젊은 거지를 보는 동안 정 주영은 새로운 용기가 솟아났다.
(그래, 나는 아직 살아 있지 않느냐. 내게는 아직 걸을 수 있는 힘이 있
고 남을 설득할 수 있는 진실이 있지 않느냐. 여기서 주저앉으면 나는 일생
을 주저앉은 채 살아야 한다. 기운을 내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다.)
그날 밤, 정 주영은 부사장 최 기호를 비롯해서 정 인영.정 순영 두 동생
과 매제 김 영주를 신설동 집으로 불러 모았다. 그 자리에서 그는 초량의
자동차 수리공장과 현대상운 소속의 선박 세척을 처분하는 데 대한 의논을
했다.
"형님, 자동차 수리공장하고 그 배 세 척이 현대건설의 유일한 수입원인
데 그것을 팔아 버리면 앞으로 이 여러 식구가 어떻게 살아갈 겁니까?"
큰동생 정 인영이 반대하고 나섰다.
"그래도 외자창고가 남으니까......"
"외자창고는 우리 게 아녜요 형님."
"하지만 보관업무를 계속할 테니까 대행료는 나올 거 아니겠니."
"그 창고 관리가 언제 누구 손으로 넘어갈지 그걸 어떻게 압니까?"
다른 사람들은 그저 침통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고령교를 제대로 내 처박아 놓을 수도 없는 일 아니냐?"
그 말에는 정 인영도 유구무언이었다.
"고령교를 저대로 방치한다면 결국 회사는 회사대로 망하고 이 정 주영이
도 인간으로서 망한다. 사업은 망하면 다시 흥할 수도 있겠지만 인간은 한
번 망하면 그만 아니겠니?"
정 주영은 큰아우 정 인영을 설득하는 것이었다. 정 순영이나 김 영주는
그가 뭐라고 한마디 하기만 하면 꼼짝도 못했다. 그리고 황해도 홀동광산에
서부터 인연을 맺은 이래 오늘날가지 줄곧 함께 일해 오는 최 기호도 정 주
영 말에는 항상 이의가 없었다.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내 몸을 파는 한이 있더라도 고령교는 꼭 공기 내에 완공을 시켜야 한
다. 우리가 망하더라도 신용은 잃지 말고 지켜야 한다. 정부에서 일하는 관
리들도 사람인데, 고령교를 복구해 놓고 우리가 망하면 설마 잘 망했다고
영 외면하기야 하겠니? 반드시 또 한번의 기회는 올 거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당장은 좀 서운하더라도 초량의 자동차 수리공장하고......."
"형님!"
정 인영이 형의 말을 가로막았다.
정 주영은 말을 중단하고 아우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형님, 그러지 말고 이렇게 합시다."
"어떻게?"
"내가 살고 있는 집을 팔지요."
"뭐, 네 집을?"
"순영이 네집도 팔아."
정 인영은 아래 동생 순영을 바라보면서 명령하듯이 말했다.
"좋아요 난."
정 순영은 두 말 안 했다.
"내 집도 내놓겠읍니다."
매제 김 영주도 한 마디 했다. 그러자 최 기호도 자기 집을 팔겠다고 했
다.
정 주영은 그러는 동생들이나 매제나 친구가 감격스럽도록 고마웠다.
"그럼 이 집도 내놓자."
"이 집까지 팔면 어떡합니까?"하고 정 인영은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너희들이 다 집을 팔고 최형까지도 집을 내놓겠다는데 내 혼자 어떻게
이 집을 쓰고 앉았니?"
"조상 차례 지낼 집은 있어야 하잖아요."
정 주영은 말문이 막혔다. 그는 거기까지 생각해 주는 큰아우가 고마왔
다. 그 대신 정 주영은 초동 자동차 수리공장 자리를 내놓기로 했다.
정 인영.정 순영.김 영주.최 기호 네 사람의 살림집은 곧 팔렸다. 그러나
초동 땅은 잘 팔리지 않았다.
55년 1월, 네 사람의 집 판 돈 9천 9백 70만환을 자본금으로 불입함으로
써 현대건설은 총자본금을 1억환(기존 자본금 30만환, 설립 당시의 3천만
원)으로 증자했다.
잡지 제작에만 몰두했던 정 인영이 다시 회사로 돌아왔다. 형제들의 단합
으로 현대건설은 누란의 위기를 극복하고 나섰다.
침체의 늪에서 허덕이던 고령교 복구공사 현장도 활기를 되찾았다.
55년 5월, 마침내 고령교는 불리한 계약, 장비의 부족, 자재값의 앙등,
지형상의 악조건, 노무관리의 실패 등 최악의 상황 속에서 당초의 계약공기
보다는 2개월이 늦게, 그것도 배보다 배꼽이 더 큰 6천 5백여 만환(계약금
액 5천 4백 78만환)이라는 어마어마한 적자를 내고 역사적인 준공을 보았
다.
소용돌이, 일렁이는 세파
고령교 복구공사를 끝낸 현대건설 사무실에는 아침 저녁으로 빚장이만 몰
려왔다. 끝내 초량의 자동차 수리공장과 현대상운 소속의 선박 세 척을 처
분해서 빚잔치를 벌였다.
회사가 그 지경에 이르자 기술자도 떠나고 직원들도 떠나고 남은 사람은
임원진과 죽으나 사나 현대건설에 붙어 있을 수밖에 없는 몇몇 사원들뿐이
었다.
과연 신용은 재산이었으몀 진실과 성실은 모든 것을 초월하여 승리할 수
있었다. 공든 탑은 결코 무너지지 않았다.
내무부는 현대건설이 막대한 적자를 감수하면서 고령교 복구공사를 성실
하게 마무리 지어 준 것을 높이 평가하고 정부가 발주하는 공사에서 특전을
부여했다.
때마침 정부는 54년도부터 본격적으로 개시한 미국의 전후 복구 사업 계
획에 따라 활발한 공사 발주를 전개하고 있는 때였다.
정 주영은 55년 5월에 고령교 복구공사를 끝내고 나서 그해 후반에만도
가창 댐 확장공사를 필두로 낙동강 우곡제 개수 공사 1.2차분, 강구교 공
사, 호포교 공사, 내무부 중기공장 신축공사, 부산항 제4부두 신축공사 등
약 3억 4천여 만환의 수주 실적을 거두었으몀 이듬해인 56년에는 옥산교 공
사를 비롯해서 가창 댐 확장 2.3차 공사, 강구교 2.3.4차 공사, 안성교 1.2
차 공사, 낙동강 우곡제 3차 공사, 남산 육교 가설공사, 전매청 의주로 공
장 복구공사 등 약 5억4천여 만환의 수주 실적을 올렸다.
그처럼 서서히 회복하기 시작한 정 주영은 56년 후반에 가서야 겨우 한숨
돌릴 수가 있었다. 그는 작년까지만 해도 1할 2부 내지 1할 5부 하는 사체
를 써야 했고 급할 때는 3할짜리 달러 빚도 얻어 썼었다.
그러는 동안에 회사에는 많은 사람들이 들어오고 나가고 했다. 정 주영
친구의 아들이자 그의 네째 동생 신영의 친구인 이 춘림이 서울공대를 졸업
하고 입사해서 건축부에서 일하고 있었으며, 해방 이후 실질적인 정 주영의
동업자로서 줄곧 현대건설을 함께 끌어 온 최 기호가 독자적으로 사업을 해
보겠다고 해서 얼마 전에 퇴사했다.
57년 5월, 정 주영은 초동 자동차 수리공장 자리에다 중기공장을 차리고
기계박사 김 영주를 중기 담당 상무로 임명, 장비관리에 큰 비중을 두었다.
고령교 복구공사에서 장비 부족으로 결정적인 타격을 받은 바 있는 정 주
영은 자다가도 장비 생각을 하면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장비에 대한 한이 많
았다.
건설업에서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는 장비에 달려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사무실이 없으면 아무 데나 천막이라도 치면 되고 사람은 공사를 따냈다 하
면 모여들기 마련이었지만 필요한 장비는 맘대로 구할 수도 없거니와 설사
세를 내고 얻어 쓰는 경우에는 결국 장비 가진 사람 좋은 일만 시키고 남는
것이 없었다. 건설 업체의 경쟁력은 전적으로 장비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정 주영이었다.
그런 이유로 그는 국내 건설업체로서는 유일하게 미8군 장비불하처에 업
자 등록을 하고 자유롭게 드나들면서 미군 부대가 폐기 처분하는 헌 장비들
을 사 내왔다.
8군 장비불하처에서는 매주 한번씩 불하장비의 목록이 나왔다. 정 주영은
그 목록만 보아도 어떤 장비가 필요한 것인지를 척 알아낼 수 있었다. 불하
장비는 대개 그 자신이 직접 8군에 들어가서 보고 어떻게 못 쓰게 된 것인
지를 확인한 후에 사곤 했는데, 그 고장난 부분만 싹 고쳐 놓으면 말이 불
하장비지 시중에 나도는 장비들에 비하면 그야말로 신품이었다.
그렇게 불하받은 장비들을 새로 고쳐서 쓰기도 하고 팔기도 하고 빌려주
기도 하면서 장비의 관리체제를 철저하게 세워 나갔다.
57년 무더운 한여름, 국내 건설업체는 충격적인 뉴우스로 경악을 금치 못
했다. 전후 단일 공사로는 최대규모의 공사인 한강 인도교 복구공사가 한때
망했다고 떠들썩하던 정 주영 앞으로 떨어졌다는 것이었다.
공기8개월, 공사금액 2억 3천여 만환. 노가다 판에서 밥개나 먹었다는 사
람이면 누구든지 수지 맞는 공사라는 것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런 노다지 같은 공사를 정 주영이 당시의 국내 건설업계를 주름잡던 대
동공업.극동건설.대림산업.삼부토건.중앙산업 등을 제치고 내무부 입찰에서
당당히 일번 낙찰자가 됐던 것이다.
그것은 정 주영이 잘나서가 아니었다. 그가 고령교에서 쌓아올린 성실과
신용 때문이었다.
아직까지도 정 주영이 벗지 못하고 있는 고령교에서 망한 때를 이번 기회
에 말끔히 벗겨 주자 해서 내무부 관계자들이 웃사람들의 양해를 구하고 지
명입찰을 하게 해서 아예 정 주영의 라이벌이 될 만한 건설회사는 한강 인
도교 복구공사 입찰에 참가할 기회를 주지 않았던 것이다.
한강 인도교의 2번 3번 5번 견간을 복구하는 공사였다. 교폭 20미터, 교
체 연장 63.35미터. 당시 미국 원조기관에서는 한국건설업체가 감당하기 어
려운 공사라고 해서 국제입찰에 붙이자고 제의했던 난공사였다.
그러나 고령교 복구공사에서 한번 쓴 잔을 든 바 있는 정 주영은 그때의
경험을 거울삼아 중첩되는 여러 난관을 극복하고 동공사를 계약공기 내에
훌륭하게 완공해 낼 수 있었다.
58년 5월, 한강 인도교를 개통하던 날, 개통식에 참석한 이대통령은 치사
에서 현대건설의 기술을 높이 치하하고 그간의 노고를 위로했다.
개통식 광경이 전국에 중계 방송되었다. 현대건설이 세간에 알려지기 시
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현대건설은 한강 인도교 복구공사를 통해서 경영면에서나 기술면에서나
회사 발전의 일대 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공사 수익률이 계약금액의 40
퍼센트에 달함으로써 현대건설을 문자 그대로 성장의 반석 위에 올려 놓았
고, 교량 건설의 중요한 기술을 축적함으로써 그후 계속되는 제2.제3한강
교.서울대교.잠실대교.성산대교 등 우리 나라 장대교 건설의 선두주자가 되
었다.
현대건설의 57년도 국내공사 도급액은 10억 9천여 만환에 달했으며 58년
도에는 19억 3천 8백여 만환을 기록했다. 한편 미군 공사에서도 현대건설은
57년도에 백71만불의 수주 실적을 올렸으며 58년도에는 96만불의 다시 59년
에는 2백 81만불이라는 놀라운 수주실적을 기록했다.
휴전 후 한동안 저조했던 미군 공사는 55년 7월에 미 극동 지상군 사령부
와 8군 사령부가 동경으로부터 서울로 이동해 오고 57년 7월부터는 주한 미
군의 핵무장화 등 일련의 주한 미군 증강정책이 실시됨에 따라서 반영구적
인 각종 군사시설을 위한 대형 공사를 발주하기 시작하자 다시 활기를 띠었
던 것이다.
59년 6월, 정 주영은 또 한차례 미군공사의 황금기를 맞았다. 미 극동군
공병단이 발주한 건국 이래의 최대공사인 인천 제1도크 복구공사를 수주한
것이었다.
공기 20개월, 공사 계약금액 백19만불. 이번엔 외화표시 공사였기 때문에
아무리 물가가 오른다 해도 고령교 복구공사 때와 같은 인플레이션 리스크
의 염려는 없었다. 물가가 오르는 만큼 미불도 오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
고 정부에서는 이미 전후 인플레를 억제하기 위해서 긴축재정을 집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몇해 전과 같은 양상이 또 일어날 염려는 없었다.
이보다 앞선 작년 10월 정 주영은 한강 인도교 복구공사에서 번 돈으로
충북 단양군 매포면 어상천리 일대의 석회광 5개 광구(매장량 8천 2백만톤)
를 1억 3천 4백만환에 사들였다. 건설업체로서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자체 시멘트공장을 차리자는 심산이었다. 각종 공사를 하다 보니 시멘트는
건설업자의 필수품이었다. 그런데 필수품인 그 시멘트를 맘대로 살 수가 없
었다.
그때 국내에는 문경의 대한양회 시멘트공장과 삼척의 동양 시멘트공장밖
에는 없었는데, 그 두 공장에서 나오는 연산 40만톤으로는 국내 수요를 충
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무렵 회사에는 정 주영의 세째 동생인 정 세영이 미국 유학을 마치고
와서 기획업무를 맡아 보고 있었다. 기실 미국에서 국제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 정 세영은 모 대학의 강사로 나가기로 내정되어 있었다. 그는
대학 교수가 되는 것이 꿈이었고 대학 교편을 잡는 동안에 형님이 바라는
박사 학위를 얻는 것이 목표였다. 그래서 귀국하자마자 형이 무엇을 할 거
냐고 물었을 때 그는 서슴지 않고,
"대학에 나가서 강의를 하기로 돼 있읍니다."하고 대답했었다. 그랬더니
정 주영은 대뜸,
"강의는 해서 뭘해?"하고 되묻는 것이었다.
"교수가 되렵니다."
"교수, 배 고파."
"그래야 형님이 바라는 박사도 되지요."
"석사면 됐어."
"예?"
"나하고 일이나 같이 해."
"전 국제정치학을 전공했는데, 형님하고 무슨 일을 같이 합니까?"
"영어는 잘할 거 아냐?"
"그야....."
"그럼 됐어. 내일부터 회사로 나와."
정 주영은 그런 식으로 세영을 기획담당 자리에 붙들어 매고는 단양 시멘
트공장 건설계획을 추진하라고 떠맡겼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정 주영은 작년에 연산 20만톤 규모의 시멘트공장 건설계획
을 세워 가지고 상공부에다 DLF(미국 정부개발 차관기금)자금 사용신청을
제출했었다. 그러나 상공부는 기존 공장만으로도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다
고 하는 이유로 보류 처리하고 말았다. 사실은 국내 시멘트 시장의 독과점
체제가 무너지는 것을 꺼린 기존 시멘트 업자들이 정부에 압력을 가해서 현
대건설의 시도를 좌절케 한 것이었다.
그 무렵, 정 주영은 건설업계에서도 정치적으로는 별 혜택을 누리지 못하
고 있었다.
당시의 자유당 국회의원이자 대동공업 사장이던 이용범이 이끄는 5인조에
서도 한몫 끼어 주지 않았다. 그때의 사세나 능력으로 보아서는 현대건설도
그들 틈에 끼일 자격은 충분했었다.
5인조란 한마디로 말해서 일종의 공급 카르텔이었는데, 그 기본 목적은
자유경쟁에 의한 덤핑 입찰을 사전에 배제하고 확실한 공사이익을 보장하려
는 데 있었다. 5인조의 멤버는 대동공업을 위시해서 중앙산업.극동건설.대
림산업.삼부토건이었는데, 아뭏든 정부가 발주하는 대부분의 큼직큼직한 공
사는 그들이 차례로 도급을 맡아서 재미 보고 있었다.
그런 판세였지만 정 주영은 그들과 악착같이 경쟁해서 인천항 돌제물양장
축조공사, 경부간 국도 포장공사, 방산시장 앞 청계천 복개공사, 상진대교
건설공사 등을 따내서 시공했었다.
그러나 아무리 5인조라 해도 미군공사에서는 정 주영를 당해내는 재간이
없었다. 현대건설은 미군공사 발주처가 지명하는 입찰자 명단에서 빠지는
일이 없었고, 입찰경쟁에서의 최후 낙찰자가 되기 위한 견적능력은 어느 업
체도 따르지 못했다.
미군공사 입찰에서의 견적능력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의 정부 입
찰방식은 전체 공사금액만 제시하는 최저가격 낙찰제를 채택하고 있었기 때
문에 덤핑 입찰이 가능했지만, 미군공사의 경우는 입찰할 때 이미 전체 공
사금액을 뒷받침하는 견적서를 첨부해서 응찰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
었기 때문에 견적능력이 곧 낙찰 여부를 좌우하는 관건이 되었던 것이다.
하기 때문에 현대건설이 건국 이래의 최대공사인 인천 제 1도크 복구공사
를 수주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6.25때 파손된 도크 안에 부두를 신축하는 것을 비롯해서 수문을 수리하
고 도그 안의 일정 수심을 유지하게 하기 위해 쌓인 흙.모래.탄알 등을 준
설하는 것이 주된 공사 내용이었다.
공사를 수주하는 재주까지는 좋았는데 공사를 수행하는 기술이 문제였다.
현대건설이 그동안 많은 미군공사를 해온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까지 해온
일은 거의가 솔직히 말해서 다 적당히 파헤치고 쌓고 두들겨 맞추고 때려
짓는 일이었고, 좀 어렵다는 공사는 미국인 감독이 일일이 통역관의 입을
통해서 지시를 해왔기 때문에 시키는 대로만 했었다.
그러나 이번 도크 복구공사만은 상황이 달랐다. 공사가 큰 만큼 돈도 많
았고, 돈이 많은 만큼 일도 만만찮았다. 이번 일만큼은 현대건설이 직접 미
국의 연방 시방서, 그것도 까다롭기로 제일 유명한 미군 공병단 시방서에
의한 공사를 발주처가 파견하는 미국 기술자 감독 하에 시공해야만 하는 것
이었다.
그래서 아예 미군측에서는 한국 건설회사의 시공능력을 인정하지 않고 계
약 조항에다가 시공자는 두 사람의 미국인 기술고문을 초빙 고용해야 한다
고 못을 박아 놓기까지 했었다.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었다. 견적능력이 어떻구 하면서 큰 소리를 치고 공
사를 따 낸 현대건설이었지만 막상 시방서를 받아다 놓고 나니 눈앞이 캄캄
했다. 아무도 그 시방서를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현대건설 안에는 임 내노라고 뽐내는 현장 소장들이 여러 사람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일제 때 교육을 받은 세대들이어서 현장 경험은 풍부했으나 이
론에는 약했다. 영어를 잘한다는 정 인영.정 세영 형제가 있었지만 정치학
박사에게 원자공학 책을 읽고 강의하라는 격이었다.
모두들 산더미만한 영문 시방서를 앞에 하고 멍하니 바라보고만 앉아 있
었다. 정 주영으로서도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정말 숨막힐 일이었
다.
"이봐, 모두들 종이 쌓아 놓은 거 구경하고 있는 거야?"
정 주영은 같이 바라보고만 있을 수가 없어서 한마디 했지만 아무도 대꾸
하지 않자,
(그럼 어쩔 거야.)하고 마음 속으로 자답했다. 그때 저 끝에 앉았던 자그
만 친구가 일어서더니,
"사장님! 일단 영어하는 사람들에게 번역을 시켜 보시지요."하는 것이었
다. 그는 작년에 입사한 공채 1기생인 박 영욱이었다.
정 주영은 이런 상황이 미구에 닥칠 것을 예상하고 혈연 지연에 의한 전
근대적인 사원 충원 방법을 지양하고 작년부터 정규대학 졸업자를 대상으로
하는 기술직 및 관리직 사원의 공개채용제도를 도입 실시해 오고는 있었지
만 새삼스럽도록 만시지탄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잘못 한마디 했다가 욕이나 얻어 먹지 않을까 해서 모두들 숫제 입을 다
물고 있는 판인데 그래도 공채 사원이 좀 달라서 겁없이 배짱 좋게 숨구멍
을 터놓았던 것이다.
"그래, 그럼 일단 영어하는 사람을 데려다가 번역시켜 봐! 그리고 오산
비행장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 중에서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은 죄다 인천
으로 불러 올려!"하고 정 주영은 횅하니 나가 버렸다.
현대건설에서는 작년 6월부터 오산 공군기지 활주로 공사도 해오고 있었
는데 여기서도 콘크리트의 배합, 기층부의 다짐 밀도 등의 엄격한 품질 관
리를 받고 있기 때문에 이만저만한 고통을 겪는 것이 아니었다.
근래의 미군공사는 거의 다 반영구적인 것이었으므로 전시 중의 날림 미
군공사하고는 근본적으로 성질이 달랐다.
영문 시방서는 워낙 여러 사람이 나누어 번역했기 때문에 단시일에 번역
을 끝낼 수 있었다. 번역된 우리 말 시방서는 곧 영문 시방서와 함께 현장
으로 보내졌다.
그로부터 며칠 후, 정 주영은 현장을 둘러보기 위해 인천으로 떠났다.
그는 찝차를 타고 다녔는데 여간한 일로는 혼자 타고 현장에 가는 일이
거의 없었다. 으례 현장 갈 사람이 있으면 같이 가자고 해서 많을 때는 그
조그만 차 안에 열한사람까지 타고 갈 때도 있었다. 오늘도 찝차가 터지도
록 타고 갔다.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정 주영은 화를 벌컥 냈다.
이니부들은 넙죽 누웠거나 앉아서 놀고 있고 현장 책임자라는 이 연술은
통역관을 사이에 두고 미국인 기술고문하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것이었
다.
"아니, 일은 안 하고 왜 쌈질들이야?"하는 일갈에 놀고 있던 인부들이 벌
떡벌떡 일어났다. 인부들이 일어나기는 일어났는데 우물쭈물하고 서 있는
것을 보니 할 일이 없는 눈치였다.
"내려오셨읍니까, 사장님. 지금 서로 말이 안 통해서 이러고 있읍니다."
"시방서에 적혀 있는 대로 하면 되는 거지 병신같이 말은 무슨 말이 필요
해?"
"시방서를 잘 몰라서....."
"병신같이.......번역해다 준 우리 말 시방서는 어쩌고 알지도 못하는 영
어 시방서를 들구 그러나 응?"
"우리 말 시방서는 영어보다도 더 어려운 걸입쇼."
"뭐, 뭣이 어째?"
그 정도의 엉터리 번역이었다. 그렇거든 통역이나 똑똑해야 할 텐데, 통
역한다는 친구도 슈샤인보이(구두닦기)출신이거나 하우스보이 출신이었으니
말이 통할 리 만무했다.
정 주영은 기가 차서 그 자리를 피하고 말았다. 그는 지난 57년에 착공해
서 아직도 공사가 한창인 인천항 돌제물 양장공사 현장을 한 바퀴 돌아보고
나서 제1도크 숙사 쪽으로 갔다.
그는 남 달리 현장 직원들의 숙식에 관해서는 관심이 컸다. 가능한 한 잘
먹이고 잘 재우자는 주의였다. 그래야 무슨 힘든 일이라도 요구할 수 있다
고 생각했는지도 몰랐다. 아뭏든 자야 할 시간에 자지 않고 딴짓을 하다가
그에게 발각되는 날에는 경을 쳤다.
"임마, 병신같이 잘 시간에 잠 안 자구 뭣해? 열심히 자야 열심히 일도
할 것 아냐? 어서 열심히 잣!"
<병신같이>는 그의 말 버릇이었다. 그는 기분이 좋아도 병신이고 기분이
언짢아도 병신이었다. 그래서 현대건설 안에는 그가 병신이라고 한다고 해
서 기분 나빠 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병신같이 여기서 뭣들 하는 거야?"
정 주영이 버럭 소리 쳤다. 아까 미국인 기술고문하고 실랑이를 하던 이
연술이 숙소에서 시방서를 뒤적거리며 뭔가를 정신없이 찾고 있었기 때문이
다.
"영문 시방서가 몇 장 떨어져 나가서요."
"시방서가 없어지면 공사를 어떻게 할려구 그래? 어디다 뒀는지 빨리 찾
아 봐!"
"여기다 이렇게 쌓아 놨는데........"간밤에 설사병을 만난 친구 하나가
뒤지에 쓰려고 뜯어 갔던 것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공사는 진행되고 있었다.
미군측 감독이 까다롭게 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현대건설에
서 비싼 월급을 주고 데려다 놓은 미국인 기술고문이 까다롭게 구는 데는
배알이 고여서 보고 있을 수 없었다.
그로브라고 하는 사람하고 찰리라는 두 미국인 기술고문이 있었다. 그 중
의 찰리라는 친구는 어찌나 까다롭던지 네피아라는 미군측 감독가지도 못마
땅해서 혀를 찰 정도였다.
그런 어느 날, 부두를 쌓기 위해 바다 속에 때려 박은 콘크리트 파일 문
제로 말썽을 빚고 있을 때, 정 주영이 현장에 나타났다.
시방서에는 직경 0.5미터 길이 27미터의 모든 콘크리트 파일을 수면에서
4미터 이상 나오게 박으면 안 되게 되어 있었다. 수심이 10미터였으므로 바
다 밑바닥에서 암반까지의 깊이는 13미터가 되는 셈이었다. 그러나 암반 자
체가 들쭉날쭉한 데가 있었기 때문에 때려 박는 파일 가운데는 수면에서 4
미터 이상 6미터 또는 8미터까지 나오는 것도 있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현대건설 기술진은 이미 미군측 감독과 협의한 끝에 안전도를 시
험해서 이상이 없으면 수면에서 4미터 이상 나온 파일은 미터 길이로 잘라
내기로 합의해 놓고 있었다.
그런데 찰리라는 현대건설측 기술고문이 오히려 부득부득 시방서에 적혀
있는 대로 모든 파일을 수면에서 4미터 높이만 남을 때까지 박아야 한다고
우겨 대는 것이었다. 그러나 파일 끝이 이미 암반 위에 닿았기 때문에 아무
리 때려 박아도 파일은 그 이상 들어갈 수 없었다.
정 주영은 말썽만 빚어 내는 찰리 기술고문을 즉석에서 해고했다. 현대건
설 기술진은 쾌재를 올렸다. 아무리 미국 사람들의 신세는 지고 있을망정
경우에 어긋나는 일을 보고는 참지 못해 하는 정 주영이었다.
그때 정 주영은 말로만 들어오던 콘크리트 톱을 처음으로 구경했다. 그가
처음 구경하는 장비는 비단 그것만이 아니었다. 철구조물에 페인트를 칠하
기 위해서 녹을 제거하는데 쓰이는 샌드 브레싱(모래 분사기)도 처음 보는
장비였고, 바다 밑바닥을 쳐내는 준설선, 바다 위에 띄워 놓은 플로우팅 크
레인 등 낯선 장비 빛깔 천지였다.
그래서 그는 다른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유능한 사원들을 몽땅 인천으로
불러 들였다. 이 기회에 기술도 배우게 하고 미국식 시방서에 의한 공사가
어떤 공사라는 것도 경험하게 하자는 생각에서였다.
공사가 종반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수문에다 110톤짜리 미터 게이트를 달
아야 할 단계인데 그때만 해도 110톤을 들어 옮길 만한 크레인 한 대가 없
었다. 하는 수 없이 60톤짜리 크레인 두 대로 들어 옮겨야 할 형편이었다.
정 주영은 어느 공사나 그 공사의 고비를 이루는 작업현장에는 반드시 나
타나서 직접 현장지휘를 하곤 해왔다. 현장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한 방법이
었다. 그날도 그는 몸소 손짓을 하고 호각을 불고 하면서 두 대의 크레인을
지휘했다.
어떻게 어떻게 해서 가까스로 들어 옮긴다고 옮긴 것이 정위치에 놓지 못
했다. 그 다음은 지형 조건이 여의치 않아서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었다.
낭패다. 낭패였다. 그때 한 젊은 사원이,
"사장님!"하고 앞으로 나왔다. 그는 오산 비행장 활주로 공사에서 일하다
가 온 공채 2기 사원 권 기태였다.
"뭐야?"
신입사원이었지만 정 주영은 그를 알고 있었다. 10여 명이 입사했던 공채
1기 사원 가운데도 영어 시방서를 우리말로 번역시키자던 박 영욱 하나가
남아 있었지만 공채 2기 사원 역시 10명 입사한 가운데서 권 기태 하나가
남아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정도로 건설업체는 노가다라고 해서 인기 없는 직종이기도 했다. 그런
데다가 월급도 제대로 안 주고 부려먹는 수가 흔했다.
권 기태만 해도 입사하자마자 오산 비행장 현장으로 발령이 났었는데 3개
월 수습기간이 지났는데도 월급을 안 주는 것이었다. 은근히 화가 난 그는
회사를 그만둘 작정으로 왜 공일만 시켜 먹느냐고 현장 사무실에 강력하게
항의했다. 그랬더니 사무실 경리 담당 직원의 하는 말이,
"당신, 임시야 정식이야?"하는 것이었다. 그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현대
건설의 경우는 회사가 급작스럽게 커진 이유도 있었겠지만 그때까지도 공채
사원의 초봉도 결정해 놓지 않은데다가 행정 체계 하나 제대로 서 있지 않
은 때였다.
그가 밀린 월급을 챙기고 오산에서 인천 현장으로 옮겨 온 지도 벌써 반
년이 지났다. 그는 그동안 본인 스스로 별로 회사에 보탬이 되는 일 없이
월급만 축내고 있다는 생각을 해 왔었다. 그런데 모처럼 월급 몫을 할 기회
가 왔다고 생각해서 사장을 부르며 앞으로 나왔던 것이다.
"사장님, 부력을 이용하지요."
"부력?"
"기다렸다가 만조가 돼서 바닷물이 빠질 때 이 미터게이트를 저 월미도
쪽으로 끌고 나가는 겁니다. 그랬다가 만조 때 끌고 와서 다시 제자리에 설
치하는 겁니다."
결국 그런 식으로 부력을 이용해서 미터게이트를 재설치할 수는 있었으
나, 당시의 국내 건설의 기계화 단계가 얼마나 유치했던가를 응변으로 입증
하는 좋은 에피소우드의 하나이다.
아뭏든 정 주영이 이끄는 현대건설은 그와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각종 미
군공사를 시공하는 사이에 미국과 같은 선진국의 공사 관리 기법을 배우고
기술을 축적하며 최신장비를 확보하는 한편 회사의 경영수지를 크게 개선해
나갔다.
결국 인천 제1도크 복구공사에서도 정 주영은 30퍼센트의 공사수익을 올
렸다. 도크 복구공사가 끝날 무렵 57년 9월에 착공했던 경부간 국도 포장공
사가 3년 만에 완공을 보았고, 55년 8월에 대구시청으로부터 수주 착공했던
가창 댐 공사는 장장 5개년에 걸친 연차적 확장공사 끝에 서서히 마무리 단
계 작업에 들어가고 있었다.
그밖에는 57년 초에 착공한 인천항 돌제물 양장 축조공사가 아직 계속 중
에 있었고, 작년 10월에 착공한 호남비료 나주공장 건설공사가 본궤도에 오
르고 있었는데, 이 공사는 현대건설이 처음으로 시공하는 플랜트 공사라는
데 의의가 컸다. 60년에 들어서면서 현대건설은 수주실적이 거의 없었다.
3.15부정선거에 항거하는 학생들의 4.19의거로 자유당 정권이 붕괴되고
허 정 과도정권이 들어서면서 모든 정부공사 발주를 일시 중단함으로써 건
설업계는 자연 슬럼프에 빠지는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다 6.10선거를 통해서 집권한 민주당 정부에서는 9월1일 1차 부정
축재자 조사결과 탈세 사실이 드러난 46개 업체에 대해서 추징금과 벌과금
을 국고에 환원하라는 통고를 내렸다.
그때 현대건설이 국고환원통고를 받은 금액은 탈세 추징금 1천3백만환과
벌과금 4백만환, 계 1천 7백만환으로서 이는 국고환원통고를 받은 46개 업
체 가운데서 제일 적은 액수였다.
건설업계에서 국고환원통고를 받은 업체는 이 용범이 이끄는 대동공업을
필두로 중앙산업.삼부토건.극동건설.흥아공작소.대림산업, 그리고 정 주영
이 이끄는 현대건설 등 자유당 시대에 건설업계를 지배하던 상위권 업체들
이었다.
53년 11월, 정 주영이 고령교 복구공사의 자금난으로 초동에 있던 사무실
을 삼화빌딩 세방으로 옮겼을 때의 현대건설 종업원은 20명도 안 됐었는데
지금은 1백 20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정 주영은 사옥을 하나 짓기로 작정했다. 공사거리가 없는 이때에 사옥이
라도 하나 지어서 나도 쓰고 세도 놓고 하자는 계산이었다. 그는 무교동 중
부 소방서 옆의 2백 54평짜리 대지를 1억 5천 5백만원에 사들이고 그해 11
월, 지하 1층 지상 7층(연건평 9백10평)의 사옥 신축공사를 착공했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내 맘대로 짓는 집이기는 했지만 7층짜리 철근
콘크리트 빌딩을 착공한 지 3개월 만에 완공, 부산 피난 시절부터 시작한
10년 세방살이를 청산하고 창사 14년만에 정 주영은 비로소 사장실이라는
독방을 차렸다.
============================= 03
같은 해에 정 주영은 원효로 4가에 6천 4백만환을 주고 대지 3천 2백평을
매입, 초동에 있는 중기공장을 이전했다. 공사의 기계화 시공이 점차 보편
화됨에 따라 장비관리 체제를 더욱 정비하지 않으면 안 될 시대적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조처였다.
정국은 민주당의 신구파 싸움으로 혼미를 거듭하고 있었다. 작년 10월 혁
명재판의 성격을 띤 3.15부정선거 원흉,데모대에 대한 발포 주범, 부정축재
공무원 등에 대한 1심 판결에 국민의 불만이 비등하자 민주당 정부는 헌법
부칙을 개정해서 4.19의거 처리 조항을 삽입하고 지난 3월에는 이른바 소급
입법인 부정축재 특별처리법안을 국회에 회부하면서 이미 작년 9월에 조치
한 바 있는 부정축재처리는 백지화하고 부정축재 문제는 앞으로 제정되는
특별법에 새로 엄중하게 다루어질 것이라고 하는 담화문을 발표하기에 이르
렀다. 각종 데모는 날이 갈수록 극심해 갔다. 사회질서가 언제쯤 안정을 되
찾게 될는지 아득했다.
그런 슬럼프를 헤치고 정 주영은 오랜만에 미 제5공군단이 발주하는 군산
공군기지 활주로 포장공사를 따 냈다.
시방서는 배처플랜트(batcher plant:콘크리트 혼합설비)사용을 요구하고
있었다. 콘크리트의 체적비 혼합이 중량비 혼합으로 바뀐 것이었다.
오산 비행장 활주로를 포장할 때만 해도 배처플랜트 없이 믹서(혼합기)
를 높은 받침틀 위에 올려 놓고 콘크리트를 비벼서 화물 자동차에 실어다가
쏟아서 깔면 그만이었다.
다시 말해서 인력에만 의존하던 원시적 공사시대는 지나간 것이었다. 그
런데 배처플랜트라는 설비가 있다는 말은 더러 들어왔지만 정 주영 자신은
아직까지 배처플랜트가 어떻게 생겼는지조차도 구경해 본 일이 없었다. 어
쨌든 배처플랜트가 있어야 공사는 시작할 수 있는 모양이니 만들어 내는 도
리밖에 없었다. 그는 원효로 중기공장 담당상무인 김 영주를 불렀다.
"사장님, 불렀읍니까?"하고 매제 김 영주가 사장실을 들어섰다.
"응, 김상무 배처플랜트 하나 만들어."
"예?"
"배처플랜트말야."
"배차......."
"배차가 아니구 배처야. 배처플랜트!"
"배처플랜트가 뭐하는 겁니까?"
"아, 콘크리트 비비는 기계말야."
"믹서기 말구요?"
"믹서하고 배처는 이름부터 다르잖아."
"빨리 한 대 만들어. 그게 있어야 군산 비행장 활주로 포장을 시작할 수
있는 모양이야."
"그 기계가 어떻게 생겼읍니까?"
"내가 어떻게 생겼다고 설명하면 자네가 알아? 자네가 직접 가서 봐야
지."
"그야 그렇죠. 어디 있읍니까 그런 기계가?"
"서울 시내 어디 있겠지. 나가서 알아 봐!"하고 정 주영은 얼른 자리를
피해 나갔다. 어려운 일일수록 대수롭지 않게 얘기하는 것은 그가 부하직원
에게 일을 시킬 때의 한 방법이기도 했다.
처남의 그런 뱃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김 영주는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는 아래층 토목부로 내려갔다.
"아이구, 어서 오십시오. 김 상무님!"
문 앞에 앉아 있던 권 기태 기사가 반색하고 일어섰다.
"아니, 자네 언제 왔나?"
"며칠 안 됐읍니다."
"그래, 잘 왔군. 사장님이 자네 얘길 몇 번 하시던데."
인천 제1도크 복구공사 때 부력을 이용해서 잘못 설치한 미터게이트를 재
설치케 한 바 있던 권 기태는 그동안 회사를 그만두고 어느 공고에 가서 교
편을 잡고 있었다. 괴리된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실망한 그는 훌륭한 토목
기사가 되어 낙후한 이 땅에 위대한 문명을 건설하리라던 꿈을 버리고 차라
리 학생들이나 가르치자는 생각을 했었던 것이다. 그랬는데 얼마 전부터 정
주영 사장이 세번씩이나 사람을 보내서 회사로 돌아와 달라고 간청하는 바
람에 다시 애초의 꿈을 실현시켜 보려고 복직한 권 기태였다. 그 역시 조금
전에 사장실로 불려 올라가서 생전 보지도 못한 배처플랜트를 설계하라는
명령을 받고 내려와서 당혹해 하고 있는 때였다.
"배처플랜트라는 기계, 어디 가면 구경할 수 있는지 아는 사람 없어?"
김 영주가 물었다.
"예?"하고 놀라는 권 기태의 얼굴에 미소가 활짝 폈다.
"왜 그래?"
"김상무님도 사장님한테 불려 가셨었군요?"
"........"
"글쎄, 사장실에서 부른다고 해서 아까 올라갔더니 생전 보지도 못한 배
처플랜트를 설계해 내라지 않겠어요?"
"잘됐군. 나더러도 그 기계를 만들라고 하시던데, 설계만 해 와. 만드는
건 내 어떻게서든지 만들어 낼 테니."
그때 마침 세종로에 있는 유솜(USOM)빌딩을 미국의 빈넬이라는 회사가 짓
고 있었다. 국내에서 배처플랜트를 구경할 수 있는데는 그곳뿐이었다. 그런
데 담장을 너무 높였기 때문에 그나마 밖에서는 볼 수도 없었다. 담장 위를
잡고 껑충 뛰어서 매달려야만 잠깐 훔쳐볼 수 있었다. 몇번 그렇게 훔쳐보
니까 대강 어떤 기계라는 짐작은 할 수 있었다.
양쪽에 있는 둥근 큰 통이 콘크리트를 혼합하는 데 같고, 가운데 있는 것
이 기계 조작실 같은데 그 밑으로 쑥 나온 구멍에서 쏟아져 나오는 콘크리
트를 둥그런 큰 통이 달린 차(레미콘 트럭)가 받아 내가고 있는 것이었다.
권 기태는 대강 본 대로 스케치해서 들고 원효로 중기공장의 김 영주를
찾아가서 설명을 했다.
"아니, 지금 이 그림을 보고 나더러 배차플랜튼지 배처플랜튼지 하는 걸
만들라는 건가?"
"그럼 상무님이 한번 직접 가서 보세요."
"맘대로 들어가 볼 수도 없다면서?"
"그러니까......."
"그러니까, 담너머로 훔쳐보라는 거야 뭐야?"
"전들 어떡합니까 상무님."
"그 안에서 일하고 있는 한국 사람이 있을 거 아니냐 말야. 그러니,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 술을 사 주든 뭘 하든 해서, 날 그 안에 더도 말고 두
번만 들어갔다 나오게 해!"
그후 빈넬사에 근무하는 계장 한 사람을 교제한 권 기태는 김 영주에게
두 차례 현품을 구경시켰다. 과연 김 영주는 기계 겉만 보고도 기계 속을
아는 기계박사였다. 그는 마침내 미국 시방서에서 요구하는 배처플랜트를
제작, 군산 비행장 활주로 공사를 착공하게 했다.
그 사이에 5.16군사혁명이 일어났다. 그바람에 민주당 정부가 새로 제정
하는 특별법에 따라 처리하려던 부정축재 문제는 다시 백지로 돌아가고 말
았다. 부정축재처리법이 참의원을 통과한 것은 4월, 동법 시행령이 5월 10
일에 공포되고 16일에 군사혁명이 일어났던 것이다. 군사정부는 6월에 다시
새 부정축재처리법을 제정 공포했다. 동법의 적용기간은 53년 7월 1일부터
혁명 전일인 61년 5월 15일까지. 건설업체에 해당되는 처벌규정은 동 기간
중에 2억환 이상의 공공공사에서 부당이익을 취한 자.
군사정부는 법에 따라 부정축재처리위원회를 설치하고 58개 업체에 일제
히 조사단을 파견했다. 조사관은 혈기에 넘치는 젊은 군인장교들이었다. 취
조받는 테이블 위에 뽑아 놓은 권총은 공포감과 위압감을 조성하기에 족했
다.
"난 5인조에도 끼워 주지 않아서 해먹은 것도 없는데 억울하게 당하는 겁
니다. 단양에다 시멘트공장을 세우겠다고 하는 계획도 몇번씩 퇴짜 맞고 괄
시를 당해 왔어요. 정부 공사에서 돈 번거는 고령교 복구공사에서 망했다고
한강 다리 고칠 때 좀 봐줘서 그때 번 것밖에 없는데 그것도 공사대금 전부
가 2억 3천만환이었어요. 내가 돈 좀 번 것은 미군공사 덕을 본 겁니다. 미
군공사요."
정 주영은 저간의 돈 번 경위를 탁 털어 놓았다. 서슬이 퍼렇던 조사관들
도 나중에는 정 주영의 꾸밈없는 소탈한 인간성에 호의를 나타냈다.
그러나 부정축재처리위원회 조사단의 조사는 집요하고도 철저했다. 그때
경리부에서 일하고 있던 공채 1기 사원 박 영욱은 한달 내내 아침에 출근해
서 저녁 늦게 퇴근할 때까지 조사단의 조사받는 일로 하루 해를 보냈다.
부정축재처리위원회는 그해 12월 31일 최종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건설업
계에서는 대동공업.대림산업.중앙산업 등 3개사만이 국고환원통고를 받고
현대건설을 비롯한 나머지 업체들은 국고환원통고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현대.삼부.극동.흥아 등이 군사정부의 부정축재 조사에서 무사할 수 있었
던 것은 첫째로 그들 업체가 비록 50년대의 국내 건설업계를 지배하고는 있
었지만 정권과의 정치적 밀착도가 상대적으로 약했기 때문이며, 둘째 집권
후 국토건설사업에 최대의 역점을 두었던 군사정부로서는 유능한 건설업체
를 보육육성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뭏든 부정축재처리 결과는 국내 건설업계에 상당한 영향을 마침으로써
5인조의 선두를 달리던 대동공업과 중앙산업이 몰락하고 현대건설을 정점으
로 하는 대림.동아.삼부 등 세칭 4대업자가 국내 건설업계를 리드하는 60년
대의 새 장이 열렸다.
그해 9월 현대건설은 군사정부가 발주한 춘천 댐 공사에 대림산업.삼부토
건과 함께 동참했으며 10월에는 신광토건.삼부토건.신양사.건설산업 등과
함께 아파트 시대의 막을 여는 마포 아파트 신축공사에 동참하는 한편 삼척
화력발전기 2호 증설공사를 착수했다.
그보다 앞선 6월, 군사정부는 능력 없는 건설업체들이 과대한 공사 수주
를 하게 됨으로써 입찰과정에서는 무모한 덤핑 입찰을 자행하고 공사과정에
서는 부실공사를 할 수밖에 없는 폐단을 방지하기 위해 소위 도급한도액 제
도를 도입, 각 건설 업체의 영업세 납부액 공사도급실적 등을 기준으로 해
서 도급액 한도 순위를 정했는데, 이는 확실히 큰 건설업체일수록 유리한
제도였다. 그 순위를 정하는 기준이 자주 변경되기도 했지만 그 기준이 어
떻게 변하던 그때 이미 정 주영이 이끄는 현대건설은 도급한도액 1위에 올
라 있었으며, 그후 2.3위의 변동은 잦았어도 현대건설의 1위는 단 한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따라서 현대건설은 어떤 공사에도 입찰자격이 있을 뿐만 아니라 도급영역
에 관한 한 어떤 법적인 제약도 받지 않게 되었다.
그와 같은 공사 입찰자격을 제한하는 도급한도액 제도와 함께 정부의 에
산회계법상의 공사 계약제도 역시 중소업체보다는 대업체에 유리하게 운용
되었다. 공사계약제도는 자유경쟁입찰에 의한 최저가격 낙찰제를 원칙으로
하고 있었지만 지명입찰이라든가 제한경쟁입찰, 수의계약 등의 예외규정도
그전과 마찬가지로 존속하고 있었다.
그런 예외규정은 대부분 대규모의 특수공사나 계속공사에 적용됨으로써
큰 업체에 유리했으며, 또 그런 대규모 공사의 도급액은 정부가 발주하는
전체 도급액 가운데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기 때문에 큰 업체가 물량을 확
보하는 데에는 그만큼 용이했다.
거기에다가 군사정부는 민주당 정부가 수립했던 국토건설사업 계획을 의
욕적으로 추진하는 한편 62년에는 제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확정하고
대형 공사를 속속 발주하기 시작했다.
그와 같은 일련의 정부 시책에 힘입은 현대건설은 급속도로 성장 기반을
구축해 나갔다. 61년 총매출액이 3억 6천만원이던 것이 64년에는 무려 15억
7천여 만원의 매출고를 올림으로써 현대건설은 불과 3년 동안에 5배에 가까
운 경이적 신장세를 보였다.
그간에 현대건설이 수주한 대형공사로는 62년의 영월의 제2화력발전소와
제2한강교, 63년의 영주 철도공사, 부산 감천 화력발전소, 그리고 64년의
거제교, 초량 전화국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동안에 끝난 공사도 있었지만 아직도 큰 공사장이 제2한강교 현장을 비
롯해서 춘천 댐 현장, 영월 발전소 현장, 초량 전화국 현장, 거제교 현장
등 다섯 군데나 되었다.
모두가 중요한 현장이었다. 그러나 정 주영에게는 그 다섯 현장보다 더
중요한 현장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62년 7월에 착공한 단양 시멘트공장 건
설 현장이었다.
군사정부는 사회 간접자본 확충에 정책적인 역점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그로 인한 건설 붐으로 시멘트의 수요가 급격히 늘어났었다. 61년도 시멘트
수입 의존도만 해도 13퍼센트였는데 63년의 수입 의존도는 무려 26퍼센트로
증대될 전망이었다. 이에 군사정부는 1차 경제개발 기간 중, 현재의 국내
시멘트 총생산능력 72만톤을 백72만톤으로 확충한다는 계획 아래 쌍용(40만
톤). 한일(40만톤). 현대(20만톤)등 3개 공장을 건설하기로 했던 것이다.
정부는 차관 도입 선을 AID(미국개발처)로 정했고, AID측이 단양의 석회
석 매장량 등의 타당성 조사를 끝내고 연산 20만톤 규모의 단양 시멘트공장
건설차관 자금 4백25만불을 제공한다는 미 국무성의 승인을 받음으로써 한
국정부와 현대건설과 AID3자간에는 차관협정이 조인되게 되었다.
앞으로 이 글 속에서 자주 거론될 차관에 관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
해 참고로 그때(62년 8월)국가재건 최고회의에서 비준 동의한 동 차관 내용
을 부연하면 다음과 같다.
한국정부는 차관의 실수요자인 현대건설의 원리금 상환을 AID측에 보증하
되, 현대건설은 2년 후에 연리 6.75퍼센트를 붙여서 10년 분할로 정부에 상
환하면 정부는 이를 10년 후에 연 0.75퍼센트의 수수료만 붙여서 AID측에
상환한다는 조건이다.
물론 그와 같은 상황조건은 단기 차관이나 일반 상업차관에 비하면 굉장
히 유리한 편이었다.
시공은 현대건설 자체가 맡아 했지만 설계와 기술 감독은 기술 용역계약
을 맺은 미국의 죠지 에이 펄러(George A. Fuller)사가 담당하고 있었으며
기계 시설 일체는 63년 구매입찰에서 낙찰한 미국의 알리스 찰머스(Allis
Chalmers)사가 공급하기로 되어 있었다.
차관을 비롯한 모든 국제관계 업무는 그동안 상무로 승진해서 시멘트 및
외국공사를 담당하고 있는 정 세영의 소관이었다. 오늘도 정 세영은 큰형
정 주영과 함께 중앙선 기차를 타고 현장으로 내려가는 중이었다. 정 주영
은 으례 토요일이면 새벽차를 타고 현장에 내려갔다가 일요일 밤차로 다시
올라오곤 했었다. 정 세영은 본사에 일이 있어서 올라왔다가 내려가는 길이
었다. 한 회사에 있으면서도 형제가 그처럼 나란히 한자리에 앉아서 여행할
수 있는 기회란 여간해선 얻기 어려운 일이었다. 사실 정 세영에겐 그동안
에 쌓인 얘기가 많았다. 일에 대한 애로도 있었고 형에 대한 불만 같은 것
도 있었다. 그래서 현장까지 가는 사이에 푸념 겸 하소연 겸 얘기를 하려고
잔뜩 벼르고 있었는데 형은 기차가 청량리 역을 떠나서 덕소 역을 지나기도
전에 코를 고는 것이었다.
정 주영은 자동차를 타도 기차를 타도 심지어 비행기를 타도 아무거나 타
기만 하면 자는 버릇이 있었다. 아니, 버릇이라기보다 그는 그만큼 고단할
수밖에 없었다. 12시 전에 자는 날이 없고 새벽 5시에 안 일어난 날이 없으
니 그의 몸이 무쇠라도 못 당해 낼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주로 타고 다니
는 시간에 쌓인 피로를 풀곤 하는 것이 어느덧 그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의
습관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정 세영은 아까부터 정신 없이 자고 있는 형이 은근히 미웠다. 그렇다고
자는 형을 깨울 수도 없어서 그도 잠을 청하는데 쿨쿨 자고 있던 형이 깜짝
놀라 깨면서 밑도 끝도 없이,
"정상무, 어떻게 됐지?"하고 묻는 것이었다.
"뭘 말예요?"
"호랑이말야."
"호랑이라뇨?"
"우리 공사장 뒷산에서 나온다는 호랑이말야."
"형님, 자다가 호랑이 꿈을 꾸셨군요? 하하......."
"응! 그런데 호랑이가 말을 하잖겠니."
"호랑이가 무슨 말을 해요?"
"거기서 나오는 시멘트 이름을 제 이름으로 하라는 거야."
"에이, 형님이 그런 생각을 하고 계셨던 게죠."
"아냐, 난 시멘트도 현대표 시멘트라고 하려고 했었어."
"호랑이표 시멘트......그것도 괜찮은데요."
"호랑이표라......"
정 주영은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현장은 그렇게 산골이었다. 현장 진입로가 없었기 때문에 삼곡 역에서 불
도저로 길을 닦으면서 들어간 산골이었다. 석회 산 뒤로 우거진 갑산에서는
호랑이도 나올 만했다. 어쨌든 최근에는 현장 경비요원 가운데 호랑이를 직
접 보았다는 사람이 생겨서 밤이면 서로 경비를 안 서려고 해서 애를 먹었
다. 그래서 김 영주가 며칠 전부터 원효로 중기공장에서 경비견과 함께 경
비원을 데려다 놓고 있었다. 그랬는데 어느 날 밤, 순찰차 끌고 나간 경비
견이 오금을 못 쓰고 주저앉아 오줌만 줄줄 싸는 것이었다. 개가 호랑이 앞
에서 맥을 출 리 없었다. 경비견을 끌고 나갔던 경비원은 개를 버려 둔 채
혼비백산해서 숙소로 돌아왔다. 경비견도 무사히 돌아오기는 했었지만 그런
일이 있은 후, 서울에서 내려왔던 경비원들은 도로 올라가 버리고 지금은
현장에 야간 경비를 하지 않아도 누구 하나 얼씬거리는 사람이 없었다.
단양이라고는 하지만 행정구역상 단양군에 속에 있을 뿐이지 단양은 현장
에서 60리이고 제천은 30리, 삼곡은 가까운 10리였다. 그렇기 때문에 서울
을 왕래할 때는 모두 삼곡역을 이용하고 있었다.
정 주영 형제가 탄 기차는 제천 역을 지나서 삼곡 역을 향해 달리고 있었
다. 형제는 똑같이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기차가 덜컹 움직이는 바람에 정 주영이 눈을 번쩍 떴을 때는 기차가 이
미 삼곡 역에 멎었다가 떠나는 때였다.
"정상무, 내리자."
정 주영은 동생을 툭 쳐서 깨우면서 출입문 쪽으로 뛰어 나갔다. 놀라 깨
어난 정 세영은 얼른 형 뒤를 따랐다. 출입문을 나선 그는 크게 놀라 소리
쳤다.
"형님, 위험해요!"
그 순간에 정 주영은 달리는 기차에서 몸을 날렸다.
"앗, 형님!"
정 세영은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며 외마디 비명을 올렸다. 그는 순간적으
로 참혹한 상상을 하면서 방금 형이 승강대에서 떨어진 지점을 내다보았다.
언덕 밑으로 굴러 떨어졌던 정 주영은 벌떡 일어서더니 기차 승강대에 매
달려서 내다보며 멀어지고 있는 동생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정 세영은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혀를 내둘렀다.
(형님 나이 내일 모레면 쉰인데.....)
삼곡 역에서 현장까지는 십리 길이었지만 정 주영은 아무리 늦어도 30분
이면 걸어서 왔다갔다 했다.
"저런 병신들......"하고 정 주영은 발길을 세웠다.
진창 속에 빠진 불도저 한 대가 엔진 소리만 요란하게 내면서 꼼짝 못 하
고 있었다. 공사현장의 땅이 대부분 점토질이었기 때문에 기초공사를 하기
위해서는 암반까지 30미터 또는 40미터씩 파 내려가야 하는 경우가 흔했다.
"저리 비켜 임마!"
정 주영은 불도저 위로 뛰어 올라가서 운전기사를 떠밀어 냈다. 그리곤
자신이 운전석을 차지했다. 그러자 주변에서 일하던 많은 인부들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큰 소리 치고 운전석에 앉기는 했는데 막상 그도 불도저를 진창에서 못
끌어 내는 때는 당시의 유행어대로 스타일을 꾸길 판이었다.
어느 공사현장에서나 가끔 이유없이 불도저가 고장을 일으키는 수가 있었
다. 운전기사가 심통이 나거나 일이 하기 싫으면 고장을 핑계로 멀쩡한 불
도저를 세워 놓는 것이었다. 현장 토목책임자들이야 불도저 기계 속을 모르
니 그래도 별 도리 없었다.
그러나 어떤 기계 운전공이고 정 주영 앞에서는 꼼짝 못 했다. 그는 자동
차 수리를 하는 사이에 기계의 모든 기능을 거의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가 고장이냐, 왜 고장이 났느냐, 베어링이 부서졌다, 제때에
기름을 주입하지 않아서 열에 탄 것이 아니냐 하는 식으로 고장 원인을 따
지고, 고치는 데는 몇 시간이 걸린다는 것까지 그는 훤하게 알고 있었다.
정 주영은 불도저 전진에 방해가 되지 삽날을 높이 들어올린 다음 1단 기
어를 넣고 전진 레바를 서서히 잡아당겼다.
박수가 터져 나왔다.
불도저는 거뜬히 진창을 빠져 나왔다. 상황은 달랐지만 이번에도 예외 아
닌 운전공의 사보타아지였다. 정 주영은 운전공의 기능이 미숙하다는 이유
를 들어 즉석에서 현장 책임자에게 감봉조치할 것을 명했다. 그는 회사 직
원이 잘못하면 좌천시키고 감봉시키고 욕을 할망정 회사를 그만두게 하는
일은 없었다.
두메 산골에다 짓는 공장이었기 때문에 애로가 많았다. 3천여평의 공장
건물을 짓는 이외도 그 공장에 와서 일할 사람들의 사택 2천6백여 평(84동)
과 독신자 숙소 7백50여 평을 지어야 했다. 제천 변전소로부터 현장까지 동
력을 끌어 들이기 위해서는 12킬로미터 구간에 37개의 철탑을 세워야 했고
삼곡 역에서 현장까지 3.7킬로미터의 철도를 부설하기 위해서는 2백미터 길
이의 터널도 뚫어야만 했다.
그런 건설 과정을 거치는 사이에 64년 7월, 화입식과 함께 가동을 개시한
현대시멘트 단양공장은 마침내 65년 9월에는 선발 시멘트업체를 젖히고 국
내 시멘트 업계의 최초의 KS표시허가를 획득, 그해 12월에는 <호랑이표 시
멘트> 40만 부대를 월남으로 수출했다.
정부의 제1차 경제개발계획 최종 연도인 66년도의 현대건설 총매출액은
40억 6천여 만원이었다. 불과 2년 전인 64년의 총매출이 15억7천만원이었던
사실을 상기한다면 실로 놀라운 발전이 아닐 수 없다.
그 2년 사이에 현대건설은 춘천 댐을 비롯한 영월 발전소, 초량 전화국,
제2한강교 등의 계속 공사를 준공하고 특히 제2한강교를 준공하던 64년 1월
에는 국내 토목계의 원로 2백여 명을 무교동 사옥 7층에 초청하여 대대적인
준공 파아티를 갖기도 했다.
제2한강교는 최초로 설계에서 시공까지 우리 기술만으로 완공해낸 장대교
라는 데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새로 착공한 공사로는 65년의 군산 화력발전소와 강화교, 66년의 제3한강
교, 낙동강 상수도 굴착터널, 울산 가스 터어빈, 노량진 전화국 등을 꼽을
수 있었고 계속공사로는 64년에 착공한 거제교 건설공사가 본궤도에 오르고
있었다.
현대건설은 그처럼 1차 5개년계획 기간 중 정부공사에 주력하는 한편 미
군공사도 계속해서 수주 시공해 왔다.
그러나 6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미군공사에는 계약과정에서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미국은 58년 이후 계속되어 오는 자국의 국제수지 역조현
상을 개선하기 위해서 61년부터 이른바 바이 아메리칸 정책(buy American
policy)을 채택하게 되었는데 그 여파가 한국의 미군공사에까지 밀어닥쳤던
것이다.
바이 아메리칸 정책에 따른 미군공사의 계약 조건은 첫째, 공사에 필요한
물자를 최대한 미국으로부터 구입해야 하며 둘째, 미국으로부터 일정액 이
상의 물자도입 실적이 있어야만 입찰자격을 얻을 수 있으며 셋째, 일정액
이상의 대형공사에는 반드시 미국 건설업자와 동업해야 한다는 것 등이었
다.
설상가상 격으로 국내 건설업계는 업계대로 미군공사 수주를 둘러싸고 많
은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었다. 소액공사에는 정실이 개재되기 일쑤였고 대
형공사에는 입찰경쟁을 방해하려는 깡패가 동원되어 유혈극을 빚어 내기까
지 해서 정부당국의 종용으로 한국군납조합이라는 자율기구가 생기기도 했
지만 나중에는 그 기구마저 자율성을 잃게 되자 관계기관이 입찰과정에 개
입하는 사례를 자초하기도 했다.
공사수익 폭도 바이 아메리칸 정책의 영향으로 50년대에 비하면 훨씬 줄
어 들었다. 그렇기는 해도 미군공사는 여전히 달러화 공사인 만큼 그 수익
폭이 컸다.
현대건설의 경우 65년도의 원화공사 수익률이 13.1퍼센트인데 비해 미군
공사 수익률은 31.8퍼센트를 기록했다. 수입액에 있어서도 미군공사 수입은
전체 수입고의 40.86퍼센트였지만 이익면에서는 미군공사 이익이 전체 이익
의 76.6퍼센트라는 절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는 단적으로 미군공
사가 현대건설 수지개선에 얼마나 결정적인 포지션을 점하고 있는가를 입증
하는 것이었다.
그 기간에 현대건설이 시공한 주요 미군공사는 군산을 비롯한 수원.춘천.
대구.광주 등지의 공군기지 활주로 포장공사와 대전 등지의 탄약고 공사,
각 부대의 병사 및 상하수도 시설 등을 들 수 있었다.
미국이 월남전에 본격적으로 개입하면서부터 바이 아메리칸 정책에 묶인
국내 미군공사마저도 그 발주량이 현저하게 줄어 들기 시작했다. 그 반면에
정부는 국내경제의 고도성장을 목표로 일본 자본에 대한 문호를 개방하는
한편, 미국과 서구 선진제국으로부터의 외자도입을 촉진하기 위한 <차관에
대한 지불보증에 대한 법률> 등을 제정 실시함으로써 국내 건설시장은 점차
로 확대될 전망이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 주영은 공사수익이 적은 국내 공사만 쳐다보고 안주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63년 7월, 5백만불 규모의 월남 사이공 상수도 시설 공사 국제입찰
에 참가함으로써 최초의 해외진출을 시도했었다. 그러나 국제입찰에 관한
경험도 부족했고 견적능력도 미숙해서 결국 낙찰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정상무, 이번 입찰에 실패한 친구들 한국으로 돌아오지 말고 태국으로
가라고 해."
정 주영은 외국공사를 담당하고 있는 정 세영에게 말했다.
"태국에요?"
"태국에 주둔하고 있는 미해군 시설처에다 우리 현대건설 이름으로 업자
등록을 해놓고 들어오라고 해."
정 주영이 태국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인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당
시 태국은 미국이 월남전을 수행하는 데 필요로 하는 전략기지를 제공하는
반대급부로 많은 경제원조를 제공받아서 사회 간접자본을 정비하기 시작했
던 것이다. 따라서 태국 내에는 미군 기지로서의 비행장 항만 등의 건설공
사가 발주되기 시작했으며 또한 태국정부 자체의 건설수요도 날로 급증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태국 건설시장에 진출하는 일은 용이하지 않았다. 태국내의 미군
공사 역시 바이 아메리칸 정책이라는 두꺼운 벽에 가리워져 있었으며, 태국
정부가 발주하는 공사의 경우도 차관이나 원조를 제공하는 나라의 건설업자
들이 독과점 체제를 형성하고 제3국의 건설업자들이 발 붙일 자리를 내어
주려 하지 않았다.
다만 국제금융기관 차관공사는 사정이 다소 달라서 제3국의 건설업자에게
도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었다. 그런 연유로 현대건설이 태국에서
처음으로 국제입찰에 참가할 수 있었던 것은 65년 8월의 푸케트라는 교량공
사의 턴키(일관 수주)입찰이었지만 응찰가격을 최저 낙찰자와의 가격보다
무려 1백 50퍼센트나 비싸게 써넣는 바람에 완전히 실패하고, 두번째로 하
자이 비행장 건설ㅓ공사에도 입찰했었지만 역시 실패했다. 세번째는 정 주
영이 직접 태국으로 가서 IBRD(국제부흥개발은행)차관으로 태국 건설성이
발주한 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 국제입찰에 참가했었다.
그 국제입찰에서 정 주영은 서독.일본.네덜란드.프랑스.이탈리아 등의 16
개국 29개 업체와 겨루었었다. 현대건설이 그 국제 입찰에 참가자격을 인정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간에 국내에서 시공해 온 미 공군기지 활주로 공사
실적 덕분이었다.
"이봐! 입찰은 운동경기가 아냐. 1등 못 하면 2등은 꼴치와 같은 거야."
정 주영은 수행한 직원들을 격려하며 입찰장인 건설성 토목국으로 나갔
다. 숨막히는 긴장이 연속되었다. 최저가격 낙찰자가 발표되었다. 정 주영
을 수행했던 직원들이 일제히 환성을 올렸다.
마침내 정 주영은 현대건설의 해외진출 시대의 서막을 올리는 동시에 우
리 나라 건설업체의 해외진출이라는 역사적인 전기를 마련해 놓았던 것이
다.
그러나 그 태국 고속도로 공사가 정 주영을 또 한번 큰 시련의 벼랑으로
몰고 가리라고는 아무도 미처 생각지 않았었다.
해외진출, 그 역사의 현장
65년이 저물어 가는 12월의 어느날. 김포 국제공항 출발 로비는 태국으로
떠나는 현대건설 기술진과 노무자들로 일대 혼잡을 이루고 있었다. 정작 떠
나는 사람들은 2백여 명이었지만 그들을 전송하러 나온 사람들 때문에 공항
대합실에는 발 들여 놓을 틈도 없었다. 게다가 KBS가 그들의 출발 실황을
중계방송하는 바람에 혼잡은 더했다.
"아, 마침 정 주영 사장께서도 여기 나와 계시는군요. 그럼 정사장께 직
접 몇 마디 여쭈워 보도록 하겠읍니다."하고 아나운서는 마이크를 정 주영
의 턱 밑으로 가져 가며 질문을 시작했다.
"정사장님! 먼저 우리가 태국에 나가서 해야 하는 공사 내용부터 좀 말씀
해 주시겠읍니까?"
"그러죠. 태국 남쪽의 말레이지아 국경 가까이에 있는 파타니라는 도시와
나라티왓이라는 도시를 연결하는 길이 98킬로미터의 2차선 고속도로를 건설
하는 일입니다. 우리 나라로 치면 부산하고 대구 사이에 고속도로를 건설하
는 거죠. 그 구간 안에는 우리 한강 다리만한 다리를 세개 놔야 하고 그밖
의 조그마한 다리를 서른 다섯 개나 놔야 하는 큰 공삽니다."
"그런데 아직 우리 나라 건설업자로서는 고속도로를 건설해 본 경험도 없
고 또 이렇게 해외에 우리 기술진이 직접 진출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 아니
겠읍니까?"
"그렇죠. 고속도로를 직접 건설해 보지는 않았지만 발주처인 태국정부에
서 현대건설은 그동안 한국에서 많은 비행장 활주로 공사를 했으니 고속도
로를 시공할 만한 자격이 있다고 해서 우리한테 공사를 맡긴 겁니다. 그리
고 온 국민이 수출 제일주의로 외화획득을 위해서 총매진하고 있는 이때에
우리 건설업계도 밖에 나가서 외화를 좀 벌어 와야 하지 않겠어요?"
"그렇습니다. 그 공사에서 벌어들일 외화는 얼마나 되는지요?"
"공사금액이 미화로 5백 22만불이니까 우리 돈으로 따지면 한 15억 정도
되지요."
"꽤 많은 돈이군요. 작년도 우리 나라 전체 수출액이 1억 2천만불 아니었
읍니까? 5백만불이라고 해도 작년도 우리 나라 전체 수출액의 24분의 1이
되는군요."
"그렇게 되나요? 좌우간 우리 나라에서는 아직까지 그런 큰 공사를 한 적
이 없읍니다."
"공사기간은 몇 년이나 됩니까?"
"30개월이에요."
"앞으로 예상되는 애로사항 같은 것은 어떤 것이 있겠읍니까?"
"우물 안의 개구리가 이제 우물 밖 나들이를 가는 거죠. 애로 사항이야
현지에 나가 부딪쳐 봐야 알지 않겠어요?"
"그렇겠읍니다. 그럼 다음은 현지로 떠나는 노무자 한 분에게 몇 마디 소
감을 들어보도록 하겠읍니다......"
KBS가 공항의 출국 실황을 중계할이만큼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
를 현대가 시공하게 됐다는 사실은 마치 국가적인 경사나 되는 것처럼 여겨
졌다. 수출입국을 지향하는 우리 나라 건설용역의 해외진출을 알리는 첫 신
호였기 때문이다.
정 주영으로서는 사운을 걸고 도전한 공사였다. 하기 때문에 그는 그 공
사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정 세영을 방콕지점장으로 임명하고 김 영
주와 권 기태를 현지 주재 중역으로, 그리고 원 세창을 현지 소장으로 각각
임명하는 등, 회사 내의 최고 간부진과 최고 기술진을 동원하는 한편, 최근
태국 파견요원으로 모집한 이 명박 등의 쟁쟁한 엘리트 사원 10여 명을 보
강했다.
그랬는데도 노무자들이 공사현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선발대로 나가 있는
기술진들로부터 정 주영의 속 뒤집히는 보고만 해 오는 것이었다. 그가 공
항 인터뷰에서 아나운서가 앞으로의 애로사항을 물었을 때 우물 안의 개구
리를 비유하면서 부딪쳐 봐야 알 게 아니냐던 말은 속이 있어서 한 말이었
다.
이미 장비전략에서 큰 차질을 빚고 있었다. 그 무렵 국내에서는 외국에서
새 장비를 도입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에 대부분 미군부대에서
불하한 장비를 수리해서 써 오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번 공사는 공사 자체
가 해외공사일 뿐 아니라 혀나대건설로서는 미군공사에서 번 달러가 은행
외환계정에 적립되어 있을 때였으므로 해외에서 새 장비를 구입할 수 있는
형편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종전부터 젖어온 안이한 생각에 그전 방식을 답습
했던 것이다.
공사가 낙찰되자 현대건설 자재부에서는 미군부대 불하처를 돌아다니면서
폐품이나 다름없는 장비들을 수집하는 한편 현장에서 쓰일 트럭은 일본에서
다 떨어진 중고품 트럭을 대당 1백 50불씩 주고 사다가 수리 조립한 것을
현지로 수송하는 바람에 운반비를 백불이나 들이는 바보스런 짓을 하고 있
었다.
차들이 방콕 부두에 도착했을 때는 모두 녹이 슬어서 시동조차 안 걸리게
되어 크레인으로 들어서 내려야 했고, 그렇게 해서 다시 고친 차는 세워 놓
고 고쳐야 하는 시간이 더 많았으니 기동력을 생명으로 하는 현장관리는 말
이 아니었다.
다른 장비는 더 말할 나위 없었다. 근본적으로 그만한 규모의 공사를 해
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장비에 대한 능률 판단이 서 있지 않았었다.
현장에 투입된 장비는 대부분 국내 도로공사에서 사용하던 재래식 비능률
적인 것들이었는데 그나마 노면을 고르게 하고 노면을 다지는 포설 및 전압
장비는 갖추지도 못한 형편이었다.
결국 공사 도중에 최신식 장비를 구입하거나 대여해 쓰기는 했지만 거기
에도 많은 문제가 있었다. 기능공들이 최신장비의 사용방법을 몰랐기 때문
에 석달이 안 가서 새 장비는 모조리 고장이 나고 말았다. 불도저 한가지만
해도 국내에서 쓰던 것은 삽날을 케이블로 매달아서 움직이게 하는 것이 고
작이었는데 최신 불도저는 유압식이었으니 기능공들이 잘 모르는 것을 탓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새 장비가 고장난 다음에 일어나는 일이 더 한심스러웠다. 국내에서 불하
받은 장비만 수리해서 쓰던 습관임 있어서 고장이 나면 규격에 안 맞아도
그저 비슷한 부속품을 적당히 끼워 맞춰서 고치기가 일쑤였다. 그렇게 고쳐
서 쓰다가 또 고장이 나서 뜯어 보면 먼저 갈아 낀 엉터리 부속품 때문에
다른 부분에 무리가 가서 나중엔 손도 댈 수 없을 정도의 큰 고장을 일으키
곤 했었다. 회사 기술진의 전근대적인 장비 개념은 돈과 시간만 낭비케 했
다. 장비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시공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시방서대로 공사를 하면 공기도 더 길어지고 비용도 더 많이 든다는 이유
로 주먹구구식 공법에 집착한 회사 기술진은 구태의연하게 적당주의로 시공
해 나가기 시작했다.
국내 각종 미군공사에서 철저한 감리 감독을 받아 온 경험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전문 기술자가 아닌 군인감독관들의 감리 감독에
불과했었다.
예를 들면 성토공사는 모터 그레이더로 포설한 후에 전압해야 하는데 그
저 흙만 쌓으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불도저로 밀어 붙이기가 일쑤였고
전압장비 대신에 포장공사에 사용하는 구식 롤러를 투입했고, 토목공사에서
벤칭(benching:절토)도 하지 않은 채 덤프트럭으로 흙을 한꺼번에 쏟아 부
은 다음에는 그 윗층만 롤러를 굴려 다지는 식의 어처구니 없는 공사를 했
다.
그런 날림 성토작업이 감독의 다짐 밀도검사에 합격할 리 만무했고 설사
그냥 넘어간다고 해도 온전할 수가 없었다. 폭우가 한번 쏟아지면 성토해
놓은 흙이 빗물엠 다 떠내려가거나 떡떡 갈라지는 것이 예사였다.
현대건설의 전근대적 공사관리 체제의 취약성과 기술적 낙후성은 공사 초
기부터 여지없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우물 안의 개구리가 햇볕 속
에 나들이를 나갔다가 홍역을 앓는 격이었다.
결국 66년 첫해에 계획공사비는 70퍼센트를 썼지만 공사는 계획 공정의
30퍼센트밖에 진척시키지 못했다.
그렇게 되자 밖으로는 기술감독을 맡은 미국의 디루 캐터사가 현대건설의
기술자들을 불신했고, 안으로는 시방서대로 공사를 진행하는 편이 경제적이
라고 하는 정규대학 출신의 이론파 신진 기술자들과 시방서대로 하는 공사
가 어디 있느냐고 하는 경험파 기존 기술자들 간에 반목과 압력이 날로 심
화되어 갔다.
신진들의 누적된 불만과 갈등은 67년 6월 마침내 스트라이크로 발전하고
말았다. 그들의 주장 가운데는 처우개선도 포함됭ㄴㄴㄴ어 있었다.
그때 국내 기능공 임금은 월 50불에 불과했다. 그러나 <월남에 의해 허가
되는 범위 안에서 한국의 청부업자들이 미국정부와 미국 청부업자들이 월남
에서 실시하는 건설사업에 참가하고 한국인 민간기술자 고용을 포함한 그밖
의 용역을 제공할 수 있는 기회를 얻도록 한다>고 하는 한국 건설업자의 월
남 건설공사 참여에 관한 조항이 들어 있는 브라운 각서(66년 3월 4일, 주
한 미 대사 윈드롭 브라운이 이 동원 외무장관에게 수교한 각서)에 따라 한
국의 건설 기능공들은 월남 러시를 이루고 있을 때였으므로 파월기능공 가
운데는 월 2백불의 임금을 받는 사람까지도 있었다.
거기에 반해서 태국 고속도로 현장 기능공들의 임금액은 월평균 백 20불
이었는데 회사 직원인 신진 기사드리의 급여는 기능공들의 임금액을 20퍼센
트 이상이나 밑돌고 있었다. 기사들도 기능공들과 같이 밤 늦도록 일하기는
매한가지였는데 기능공들의 급여는 시간급이고 기사들의 급여는 월급이었기
때문이다.
젊은 기사들이 파업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접한 정 주영은 즉각 현지로 날
아갔다. 현지에 도착한 그는 그날 밤새도록 그들 젊은 사원들과 기탄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현지 직원들의 대우가 좋지 않다는 데 대해서는 솔직히 시인했다.
적자 공사라는 데만 너무 신경을 쓴 나머지 그간 사원들의 대우를 소홀히
한 점에 대해서는 정직하게 유감의 뜻을 표하고 난 후 적절한 대우를 하기
로 약속했지만, 그 다음으로 내 건 그들의 요구조건에는 정 주영으로서도
쉽게 승복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모든 공사를 시방서대로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정 주영
자신도 공사를 시방서대로 했다가는 공기만 더디고 비용만 더 든다고 하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을 때였다.
정 주영은 착공 이래 한달이면 보통 일주일은 현지에 와서 살다시피 하고
있었다. 공사가 부진했기 때문에 그는 현장에만 나타나면 불호령을 내렸다.
그 바람에 현장 직원들은 기를 못 펴고 쩔쩔맸다.
그리고 그는 작업 현장에서 직접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는 작업지시
를 내렸다. 시방서를 무시한 작업지시였기 때문에 자연 작업진도가 빨랐다.
다른 때는 시방서에 맞춰서 시공할 것을 요구하던 감독들도 정 주영이 나서
서 직접 작업지시를 할 때면 그냥 모르는 척하고 내버려 두는 것이었다.
정 주영을 무서워한 현장 책임자와 미국인 감독 사이에는 그가 와서 일을
시킬 때는 일단 시키는 대로 했다가 그가 돌아간 다음에 다시 손질해 준다
는 일종의 묵계가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가 시켜서 한 일
은 거의 모두 새로 하다시피 하는 때가 많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정 주영과 미국인 감독 사이에 번번이 싸움이 일어날
것은 물론, 그 여파가 자연 현장 책임을 맡고 있는 자신들에게 돌아올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런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정 주영은 현장 기술자들이 약해서 미국인 감
독에게 질질 끌려 다니며 그 까다로운 시방서대로 일을 하기 때문에 공사가
늦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기 때문에 그는 젊은 기사들이 시방
서대로 공사를 해야 한다는 데에는 승복하려고 하지 않았다.
스트라이크를 일으킨 용감한 젊은 기사들 가운데도 그런 얘기할 만한 진
짜 용기 있는 기사는 없었다. 젊은 기사들은 계속 시방서대로 일하는 것이
훨씬 일도 빠르고 경제적이라는 이론만 내세웠다.
정 주영이 화장실을 가기 위해 자리를 떴다. 그때 이 명박이 일어나서 그
를 따라 나가는 것이었다. 모든 젊은 사원들이 못마땅한 얼굴로 그를 노려
보았다.
공채 7기로 65년에 입사한 이 명박은 방콕지점에서 경리 자재를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스트라이크에는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고 있었다.
동료들은 그가 틀임없이 어떤 고자질을 하기 위해서 정 주영을 따라 나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얼마 후, 그가 정 주영과 함께 다시 들어왔다. 정 주영
의 얼굴은 침통했다. 한동안 말이 없었다. 젊은 사원들은 긴장했다. 이윽고
정 주영이 씩 미소하며 입을 열었다.
"내가 병신이란 말을 너무 자주 쓰다보니 내 자신이 그동안 병신 짓을 좀
해온 모양인데......"
사원들은 정 주영잉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몰라서 그대로 긴장하고 있
었다.
"앞으로는 여러분들 주장대로 모든 공사가 시방서가 요구하는 대로 하자
구........"
사원들은 조금 전까지도 시방서대로 하는 공사가 어디 있느냐고 완강히
버티던 정 주영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자 영문을 몰라하며 서로 얼굴만
마주 보았다.
기실 정 주영은 화장실에 갔다가 이 명박으로부터 그간에 자신이 시켜서
한 일들은 모두 헛일이었다는 얘기를 들었던 것이다.
정 주영은 부하 직원의 충언을 소화시킬 줄 아는 상사였다. 그는 그때 이
명박을 장차 크게 키워서 쓸 재목으로 마음 속에 치부해 놓았었다.
신진 기사들의 스트라이크는 현대건설의 전근대적 사고방식을 혁신시키는
하나의 기폭제가 되었다. 그후로는 현장 책임자나 기존 기술자들이 시방서
가 요구하는 기술적 우위와 경제성을 인정하고 시방서에 의한 공사를 진행
시켜 나갔다.
그러나 이미 적자는 만회할 길이 없는 공사였다. 태국 고속도로에서의 적
자 현상은 국내 공사장에도 영향을 미쳐 65년에 착공한 강화교 공사 현장에
는 고령교의 망령과도 같은 돈표까지 나돌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적당히 해치울 수 있는 태국 고속도로가 아니었다. 만약 그 공
사에서 현대건설이 신용을 잃는다면 그것은 국제사회에서 신용을 잃는 결과
가 될 것이고, 그렇게 되는 날에는 앞으로도 계속될 IBRD차관에 의한 국제
입찰에는 명함도 내놓을 수 없게 된다.
본사 자금 사정이 여의치 않기 때문에 정 주영은 현지금융을 지휘하는 수
밖에 없었다.
"이대리, 방콕은행에서 대출하기로 한 돈은 어떻게 된 거야?"
방콕지점 사무실에 들른 정 주영은 들어서자마자 경리 책임을 맡고 있는
이 명박 대리에게 물었다.
"방금 본사 박부장님하고 연락했는데 아직 한은에서 지보를 받지 못했답
니다."
현지은행에서 금융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한국에 있는 은행이 지급보증을
해야만 했는데, 한국 업체가 해외에서 현지금융을 일으키는 케이스도 이번
이 처음 있는 일이기도 했지만 금년 초에 발족한 한국외환은행으로서는 아
직 그런 경우에는 어떤 절차에 따라 지급보증을 한다는 내규조차 마련돼 있
지 않고 있는 때였다.
그래서 본사 경리부장인 박 영욱은 새벽이면 당시의 금융통화 위원인 홍
성하의 집을 찾아가서 지급보증서를 해 달라고 통사정을 하고 다녔다.
그 무렵 현대건설에서도 월남에 준설선 두 척을 보내서 항만 준설공사에
투입해 놓고는 있었지만 아직 이렇다 할 큰 돈은 못 벌어 들이고 있는 형편
이었다.
고속도로공사나 마찬가지로 준설공사 역시 현대건설로서는 처음으로 진출
한 분야였다.
정 주영이 미해군 시설처로 캄란만 준설공사를 수주한 것은 66년 1월. 그
래도 정 주영이 그와 같은 준설공사를 수주할 수 있었던 것은 59년 인천 제
1도크 복구공사 때의 손바닥만한 준설작업 실적이라도 있었기 때문이다.
정 주영은 우선 일본으로부터 2천 2백 50마력급 준설선 한 대를 2억 8백
만원에 구입했다. 그리고는 인천.부산 등지에서 선원과 기능공을 긴급 모집
했다. 본사 기술자 가운데는 준설선에 관해서 아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
었다. 사원 이력서를 들추어서 겨우 수산대학 출신인 백 충기 한 사람을 찾
아 냈다. 그는 62년에 5기 공채로 입사해서 단양 시멘트공장에서 일하고 있
었다.
정 주영은 백 충기를 불러 올려서 그에게 무조건 준설선 현대1호로 명명
한 2천 2백 50마력급 준설선을 일본에 가서 인수해 가지고 월남의 캄란만으
로 들어갈 것을 명했다. 그렇게 해서 준설선 현대1호가 캄란만에서 가동을
개시한 것이 그해 3월. 그때 이미 캄란만에서는 미국.호주.일본 등 7개국
21척의 준설선이 준설 작업을 하고 있었다.
1입방미터에 1불이라는 단가계약이었기 때문에 준설능력이 큰 준설선이
요구되었다. 그래서 정 주영은 다시 일본으로부터 4천 마력급 현대 2호 준
설선을 3억 1천만원에 사서 막 며칠 전에 미토항 준설공사에 투입해 놓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지난 5월에는 캄란에서 15킬로미터 떨어진 방오이라는 곳에 주택
도시 건설을 착공했었다. 미군이 그 인근지역에다 여러 가지 군사시설을 하
게 됨에 따라서 그 지역에 살던 원주민들을 이주시키기 위한 새도시를 건설
하는 공사였다.
그 무렵, 정 주영은 월남에다 세탁소도 차려 놓고 있었다. 그는 1억원 이
상을 들여서 자동세탁기 16대, 디젤발전기 6대, 스팀 보일러 2대 등, 일체
설비를 사다가 나트랑에 2개소, 퀴논에 3개소, 캄란에 2개소, 모두 7개소의
세탁공장을 세웠던 것이다.
미구에 월남에서 달려가 쏟아져 들어올 판이기는 하지만 아직은 태국 고
속도로 공사 때문에 허리를 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작년 4월에 이미 AID와
단양 시멘트 1차 확장공사(20톤)를 위한 차관계약을 체결해 놓고도 내자조
달에 자신이 없어서 공사를 내년으로 미루어 놓고 있는 실정이었다.
정 주영이 예상했던 대로 국내는 국내대로 건설수요가 부쩍 늘어나는 바
람에 67년 말 현재, 현대건설의 굵직한 공사현장만도 무려 열일곱 군데나
됐었다. 그런데도 회사가 돈 때문에 절절 매는 이유는 외상 공사가 많았기
때문이다.
외상 공사는 대부분 정부가 발주한 공사였는데 정부는 정부대로 벅찬 조
국 근대화사업을 전개하느라고 그만큼 재정 사정이 핍박했었다. 그래서 현
대건설로서는 공사를 많이하면 많이 하는 만큼 자금사정이 어려워지기 때문
에 계획된 공사량을 오히려 훨씬 하향 조정하는 고육지책을 써야만 하는 지
경이었다.
열일곱 가지 공사 중에 정부 공사가 아닌 것은 힐탑 외인 아파트.세운상
가 아파트.문화방송 사옥 등 3개뿐이었고 금년 들어 착공한 소양강 다목적
댐 공사를 위시해서 울산에 있는 선암 정수장 및 배수지 축조, 욕지항 방파
제, 낙동강 다목적 댐 수문 제작 설치, 화천 수력발전 4호기 증설, 3.1고가
도로, 조선호텔 등 7개 공사와 계속 공사인 거제교, 제3한강교, 강화교, 군
산 화력발전소, 제천역 조차장, 노량진 전화국, 울산 발전소 가스 터어빈
등 7개 공사는 모두 정부 발주 공사였다.
공사가 그만큼 늘어나자 먹여 살려야 할 식구도 자연 그만큼 불어나게 마
련이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8백 50명이 채 안 되던 식구가 금년에 와서는 1
천 7백 50명이 넘게 불어났다.
그래도 일할 사람이 부족한 형편이었다. 그렇다고 당장 데려다가 일을 시
킬 수 있는 그런 알맞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신입사원을 뽑고 경력
사원을 뽑아도 그들이 회사 일에 익숙해지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걸렸다.
한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몇해 전만 해도 노가다라고 해서 대학출신들이 업
신여기던 건설업이 다른 업종에 비해서 유망한 업종으로 각광을 받기 시작
했기 때문에 유능한 고급인력을 쉽게 흡수할 수 있게 된 일이었다.
적자를 내면서도 태국 고속도로 건설 현장은 활기를 되찾고 정상 궤도에
서 일치단결된 모습으로 최신식 공법에 의한 공사를 착착 진행해 나가고 있
었다.
그동안 월남의 빈롱 항만과 미토 항만에 투입되었던 준설선 현대 1.2호는
다시 봉타우 항만에 투입되어 예상 밖으로 많은 외화를 벌어들이기 시자가
했다. 일곱 군데나 되는 세탁소 수입도 만만찮아서 그간 백만불에 가까운
외화를 벌어들였다.
그와 같은 월남에서의 외화수입은 태국 고속도로의 적자를 커버하고도 남
아서 국내 외상공사로 인한 본사의 자금압박을 덜어 주기 시작했다. 그해
말, 정 주영은 자금 사정 때문에 뒤로 미뤄놨던 단양 시멘트공장 제1차 확
장공사를 해동하는 내년 2월에 착공하도록 지시하는 한편, 그의 오랜 숙원
사업이던 자동차공장을 세울 계획으로 울산에다 공장부지 10여 만평을 매입
하고 자본금을 5천만원으로 하는 현대자동차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자동차공업은 제조업 가운데서도 자본의 집약도가 가장 높은 산업이다.
자동차공업은 순 매출액을 총자본금으로 나누는 자본 회전율이 50퍼센트에
도 못 미친다. 따라서 자동차공업은 다른 일반 제조업에 비하면 최소한 배
이상의 자본금을 필요로 했다.
정 주영이 그와 같은 자동차공업에 손을 대겠다는 것은 그만한 자본을 동
원할 능력이 생겼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때 정부는 2차 5개년 경제개발계획을 수행하고 있었지만 공업화의 수준
은 매우 저급한 단계에 머물러 있어서 자동차공업 역시 수입 부품을 조립
생산하는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도 기존 설비로서는 날로
급증하는 차량 수요를 감당할 수도 없었고, 또한 정부의 적극적인 자동차공
업 육성시책에도 불구하고 기존회사들의 외환 사정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에
조업을 중단하는 등 자동차업계는 난항을 거듭하고 있었다.
무엇이든지 한번 한다면 하고야 마는 정 주영, 한번 시작하면 끝자아을
내고야 마는 그가 자동차공장을 건설한다는 뉴우스는 업계의 큰 충격이 아
닐 수 없었다. 더구나 업계에서는 정 주영이 자동차 수리업으로 입신한 위
인인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 주영은 자동차공장에 전념할 입장이 못 되었다. 자동차공장 건
설은 일단 관리담당 전무인 정 세영에게 맡기고 그는 국가적 소명에 따라
전적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매달리게 되었다. 1차 5개년 계획이 마무리
되면서 수송화물의 양적 증대 및 대형화에 따른 효과적인 수송체계의 확립
은 시급한 과제로 제기 되었다. 그때 우리 나라는 후진국의 일반적인 현상
처럼 자동차 교통이 분담해야 할 중 단거리 수송까지도 철도에만 의존해야
했다. 따라서 수송난이 심화되고 수송의 비능률성과 비탄력성은 일반 물가
에 상승작용을 일으키게 함으로써 경제성장을 저해하는 하나의 중요한 요인
이 되어왔던 것이다.
그러한 저해요인을 근본적으로 제거하기 위해서는 물자와 인원의 유통을
원활히 해서 원료생산지와 공장과 시장, 그리고 농어촌과 도시와의 거리를
시간적으로 단축시키는 현대적인 새 도로를 건설하고 새 수송체계를 확립하
는 일이 절실하게 요청되었다.
고속도로를 건설한다는 정부는 계획은 64년, 박대통령이 서독을 방문했을
때 그곳의 고속도로에 감명을 받은 데서 비롯되었다. 그후 정부의 의뢰를
받은 국제부흥은행 교통조사단이 66년 6월에 한국의 현대적 도로건설이 시
급하다는 내용의 건의를 하게 되자 정부는 경부고속도로를 비롯한 호남.영
동.동해.남해 등의 6개 고속도로 건설을 구체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67년 4월, 박대통령이 대통령 선거공약에서 제2차 경제개발 5개
년 계획기간 중에 대국도개발계획 사업의 일환으로 경부간 고속도로를 건설
하겠다고 선언한 것이 계기가 되어 이의 건설계획이 본격적으로 착수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당시의 고속도로 건설계획은 다분히 정치성을 띠고 있을 뿐 아니라, 당해
년도 정부예산의 23.6퍼센트라는 엄청난 건설비용으로 인한 인플레이션 우
려 때문에 그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가계에서 강력한 반대의견을 제기했
다.
어떻게 하면 적은 돈으로 국민에게 공약한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할 수 있
을까 하고 고심하던 박대통령은 어느 날, 태국에서 고속도로 공사를 한다는
정 주영을 청와대로 불러 들였다.
박대통령과 정 주영의 만남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박대통령은 멀리
단양 시멘트공장 시업식에까지도 몸소 참석해서 치사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
으며, 그밖의 제2한강교 준공을 비롯한 각종 건설공사 준공 현자아에서도
두 사람은 자주 대할 기회가 있었다.
특히 박대통령은 국민학교밖에 졸업하지 않은 정 주영이 누구보다도 박식
하고 부호답지 않고 농삿군처럼 소박하고 정직한 그의 인간성에 깊은 호의
를 가지고 있었다. 어느 날 우연한 자리에서 박대통령이,
"정사장은 어떻게 해서 그렇게 많은 돈을 벌었읍니까?" 하고 물었을 때
그는,
"세끼 밥 먹고 살기가 어려워서 잘 먹고 잘 살아 보려고 남보다 열심히
일해 온 것뿐이지 처음부터 부자가 된다는 생각은 안 해봤읍니다."하고 대
답했다.
"국민학교밖에 안 나오셨는데 쟁쟁한 대학출신들을 일시키려면 힘들지 않
아요?"
박대통령은 다시 물었다.
"저는 신문대학을 나오지 않았읍니까."
"신문대학을요?"
"예! 저는 매일 신문 머릿기사서부터 광고까지 하나도 빼놓지 않고 읽습
니다. 일반 대학출신들이야 몇몇 한정된 교수님한테서 배웠겠지만 저는 무
수한 교수님들이, 그것도 일류 교수님들이 신문을 통해서 가르쳐 주는 것을
배웠으니까요."
"핫하.....지금도 그렇게 신문을 읽으십니까?"
"자고 나면 제 머리캍에는 그날 조간신문이 있고 잠자리에 들때면 그날
석간이 머리맡에 있곤 하지요."
박대통령도 가난한 농삿군의 아들이었다. 가난한 농삿군의 아들과 아들은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나이는 박대통령이 한 살 위였다.
"정사장, 이번 태국 공사에서는 손해 좀 보는 모양이죠?"
정 주영을 맞은 박대통령은 저녁식사를 같이하면서 이렇게 서두를 꺼냈
다.
"손해라기보다는 수업료 치고는 좀 비싼 수업료를 치른 셈입니다. 내년 3
월쯤 지금 하는 공사가 끝나면 미리 따논 탁 토엔 고속도로 공사가 있으니
까 바로 뒤미처서 그 공사를 하게 됩니다. 지금 공사에서 낸 수업료를 찾게
되겠죠."
"제발 태국에서 밑진 것은 태국에서 찾도록 해요."
"태국에까지 나갔다가 밑지고 돌아올 수야 있읍니까. 어떻게서든지 벌어
가지고 와야지요."
"그 대신 우리 고속도로는 좀 본전에 건설해 주시오."
"예?"
정 주영은 박대통령의 말을 얼른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벌써 고속도로 공사가 발주할 단계에 와 있단 말인가?)
"정사장이 한번 경부고속도로의 건설에 필요한 최저 소요경비 좀 산출해
봐 주시오. 비서실에서 수집한 외국의 고속도로 건설비를 보면 우리 나라
재정능력하고는 너무 크게 차이가 나서 엄두도 낼 수 없어요. 오늘이 3일이
죠?"
"예!"
"앞으로 20일 안에 대강 게산해서 나한테 직접 갖다 주시오."
일년이 걸려도 될지 말지한 일을 20일 안에 해 내라는 긴박한 분부였다.
그날부터 정 주영은 토목담당 중역들과 함께 서울과 부산 사이를 찝차로
도는 헬리콥터로 내왕하면서 고속도로 공사비를 산출해 내기에 밤낮이 없었
다.
그때 이미 박대통령은 경제기획원.건설부.재무부.서울특별시.육군공병감
실에도 똑같은 고속도로 건설계획안을 제출하도록 지시해 놓고 있었다. 11
월 23일에 제출된 각 건설계획안에 의한 건설비 산출액은 현대건설 2백 80
억, 다른 개발도상 국가들의 킬로미터당 도로건설비를 기준해서 산출해 낸
건설부가 6백 50억, 재무부 3백 30억, 시내 도로 감각으로 산출해 낸 서울
특별시가 백 80억, 육군공병감실 4백 90억이었고 경제기획원에서는 건설계
획안을 내놓지도 못했었다. 그와 같이 기관에 따라 건설비 산정에 엄청난
차이를 보이자 박대통령은 고속도로 건설에 경험이 있는 현대건설안에 가까
운 3백억원으로 정하고 10퍼센트의 예비비를 추가함으로써 총건설비는 일단
3백 30억원으로 책정됐었다.
그러나 총건설비는 결국 예정보다 약 백억원이 더 많은 4백 29억원이 투
입되었는데 그것은 2차선으로 계획한 당초의 대전.대구 구간을 4차선으로
변경한 데 따른 용지 매수대금과 그로 인한 물량 증가에 따른 추가 비용,
그리고 그간의 물가상승 때문이었고, 처음 정 주영이 지휘한 태국 고속도로
건설 경험을 가진 현대건설 전문 기술진이 산출한 공사비가 거의 자로 잰
듯이 정확했었다.
아뭏든 그와 같은 경위를 거쳐서 건설부는 68년 1월 말경, 시공 업무를
전담할 서울.부산간 고속도로건설 사무소의 조직편성을 끝냈고 경부간의 전
체 노선도 아직 확정되지 않은 채 경부고속도로는 그해 2월 1일 현대건설에
의해 착공됨으로써 박대통령이 선거공약을 발표한 지 9개월 만에 조국근대
화의 또하나의 기틀이 되는 거족적 대역사의 막이 올랐다.
박대통령은 착공식 격려사에서 경부고속도로는 우리의 기술, 우리의 자
본, 우리의 노력으로 이룩될 조국근대화의 지름길이 될 것임을 강조했다.
정부는 정 주영이 이끄는 현대건설의 태국 고속도로 건설 경험을 신뢰하
고 경부간의 첫 공구인 서울.오산간의 시범 공구를 수의계약으로 맡겼다.
현대건설의 산출가격으로는 시공이 어렵다는 관계자들의 주장도 있었고 또
다른 업자들에게 고속도로 공사에는 어떤 장비를 어떻게 써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는 시범 공구였다. 현대건설은 노선을 측량해 가면서 순조롭
게 공사를 진행시켜 나갔다. 그러자 다른 업자들도 자신을 가지고 참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있어 정부가 정 주영에게 거는 기대는 자못 컸다.
박대통령이 국내의 많은 건설업자 중에서 유독 정 주영을 불러 최저건설비
를 산출해 줄 것을 요청하지 않았던가. 도급 순위로 보나 실제 사세로 보나
단연 국내 건설업계의 제1인자인 정 주영 자신도 경부고속도로 건설에는 하
나의 건설업자라는 차원을 넘어선 시대적 소명감에 불타고 있었다.
그는 경부고속도로를 착공한 뒤로는 시간만 있으면 땀에 젖은 양말을 벗
고 회의실 긴 테이블 위에 올라 앉아 살았다. 테이블 위에는 20만분의 1남
한 전지도가 붙여져 있었다.
그때까지도 고속도로 노선이 확정되지 않은 때였으므로 그는 노선을 어떻
게 내야만 공사비가 덜 먹히고 공기도 단축시키느냐 하는 것을 연구하는 것
이었다.
"아, 여기서 일루, 이렇게 곧장 길을 내지 왜 이렇게 빙 둘러서 줄을 그
어 놨어요?"
마침 태국 고속도로 현장에서 돌아온 김 영주가 옆에서 보고 있다가 손가
락으로 지도를 가리키면서 한마디 했다.
"누군 이렇게 곧장 가면 가까운 줄 몰라? 이렇게 곧장 가려면 이 산 때문
에 적어도 6백미터짜리 굴을 뚫어야 해. 터널 공살 하려면 공사비만 해도
두배 반이나 더 든단 말야, 이 딱한 사람아."
그해 3월 마침내 태국의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는 3백여 만불이
라는 막대한 적자를 내고 준공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그 준공식은 현대건설
의 성인식과도 같은 값진 준공식이었다. 온갖 가혹한 시련과 무수한 시행착
오를 거치는 동안에 현대건설이 비로소 국제적인 건설업체로 탈바꿈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 주영은 그 준공식에 부치는 메시지에서 이렇게 술회했다.
"기후 풍토가 다르고 언어 풍습이 다른 태국에서 수많은 애로와 고통과
싸우며 견인불굴의 감투정신과 불면불휴의 노력은 우리의 미경험에서 오는
모든 결함을 보완하고, 성공적인 완공으로 우리의 성실한 노력은 태국정부
나 건설계는 물론 모든 국제적인 업자들에게 절찬을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비록 해외 건설시장 개척의 초기 단계에서 물질의 결손은 있었으
나 장차는 아시아 전역에서 중동지역까지의 건설시장을 확보하게 될 것을
나는 확신합니다....."
현대건설은 그 공사에서 사실상 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하는 동안 여러 가
지 귀중한 경험을 쌓았다. 국제규격의 시방서 적용, 장비운영, 아스콘 생산
방법, 타국의 기후.풍토.습관 등에 대한 대응방법, 인력관리 방법 등.
정 주영은 태국 현장에서 일하던 기술자들 가운데서 곧 이어 착공될 붑부
의 탁 토엔 고속도로 공사에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인원만을 남게 하고
나머지 인원은 전원 불러 들여서 경부고속도로 현장에 배치했다.
특히 방콕 지점에서 경리 자재를 담당하고 있던 이 명박을 부장으로 승진
시켜서 원효로 중기공자의 관리책임자로 발령했다. 경부고속도로를 성공리
에 마치느냐 못 마치느냐 하는 것도 역시 장비가 좌우할 것이라고 생각한
정 주영은 이미 원효로 중기공장을 옮겨서 시설을 확충할 게획으로 서빙고
에다 6천 5백여 평의 대지를 확보해 놓고 있었으며, 이 명박을 중기공장으
로 돌린 것은 그로 하여금 모든 건설장비를 파악하게 하는 한편 노동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다루기 어려운 중장비 기술자들 틈에서 사람 다루는 법을
배우게 하자는 속셈에서였다.
정 주영에게는 특별히 필요로 하는 사원을 훈련시키는 일종의 트레닌 코
오스가 있었다. 대개 그 코오스는 군대의 하사관학교 코오스 못지 않게 고
달프고 힘들었다. 그래서 더러는 그 고달프고 힘든 기간을 이겨 내지 못하
고 중도에서 탈락하는 사원들도 있었다. 그것은 정주영 혼자서만 알고 본인
자신들은 모르고 트레닝을 받기 때문이었다. 그 트레닌 코오스에는 예외없
이 난공사로 알려진 공사의 현장 소장이거나 공장 현장마다 부설되는 중기
공장 공장장 자리를 거치게 마련이었다.
정 주영은 건설업이 모든 사업 중에서 가장 어려운 사업이라고 믿고 있었
다. 공사 한 건을 수주해서 완공해 낸다는 것은 한 기업을 탄생시키는 것만
큼 어려운 일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치열한 수주 경쟁에서 이겨내야 하고 이윤을 내면서 경험과 기술을 축적
하고 다시 다음 공사로 옮아가는 과정은 일반 제조업과 비교가 안 될 만큼
어려운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는 어느 해 신입 사원 연수교육 때에 현장소장
이라는 직책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 적이
있었다.
"어떤 현장 일을 성공적으로 마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에요. 특
히 모든 생리가 다르고 습관이 다르고 언어가 다른 해외 발주처나 기술회사
같은 서로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숙소를 짓기 시작해
서 공사에 따르는 모든 자재와 기술문제를 해결하는 한편, 자연이라는 갖은
악조건 아래서 더구나 장래의 희망을 회사에 건 사람들이 아니고 일이 끝나
면 뿔뿔이 흩어지는 그런 기능공들을 지휘해서 의욕을 불어넣어 가며 노동
쟁의도 없이 공사를 성공리에 끝낸다는 것은 굉장한 능력이다 이겁니다. 거
기에 비해서 공장은 얼마나 안정적입니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일할 수 있
잖아요. 그래서 나는 현장 일을 성공적으로 치른 사람은 어떠한 일을 맡겨
도 다 성공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우리 회사의 사장들이 대부분 다 건설
현장을 거쳐 온 사람들이에요......"
정 주영은 매일 새벽 6시면 고속도로 공사현장에 나와서 살았다. 언제부
터인가 그에게는 <현장 사나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었다. 그의 찝차만 번쩍
해도 현장 인부들은,
"야, 현장 사나이 나타나셨다!"하곤 긴장했다.
그러느라고 정 주영은 그 야심적인 자동차공장 건설에는 깊이 관여할 시
간이 없었다. 그렇지만 지난 2월에는 세계 최대의 자동차 메이커인 미국의
포드 회사와 조립기술계약을 체결하고 얼마전 3월에는 코티나 승용차와 버
스 및 트럭 조립공장을 짓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난 2월에는 단양 시멘트공장 확장공사도 시작했었다. 거의 때를
같이 해서 서울대교와 인천 화력발전소 부지 정지가 착공되고 경인고속도로
공사를 인수 착공했다.
경인고속도로는 작년 3월에 삼안산업이라는 회사가 착공했던 것인데 경험
이 부족해서 질질 끌고 있던 판에 건설부가 용지매입과 토공을 노선 경유지
인 서울시, 부천군, 인천시 등에 위임함으로써 공사가 중단된 것을 그때의
공사 도급순위 1.2.3위 회사인 현대.대림.삼부 3사가 12억 6천만원을 출자
해서 경인고속도로 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인수한 공사였다.
현대건설은 작년의 게속공사했던 세운상가 아파트와 제천역 조차장, 울산
선암 정수장 및 배수지, 욕지항 방파제 등 네 가지 공사를 완공한 대신 금
년 들어서 벌써 앞에 열거한 다섯 가지 공사를 착공하는 바람에 큰 국내 건
설현장은 오히려 작년보다도 한 군데가 더 는 열여덟 군데였다.
어느 공사나 중요하지 않는 공사가 없었지만 그 가운데서도 정 주영의 관
심이 집중되고 있는 공사는 뭐니뭐니 해도 경부고속도로 말고는 자체 공사
인 자동차공장 건설과 단양 시멘트공장 확장이었다.
그러나 요즘 며칠 사이에 자동차공장 건설과 단양 시멘트공장 확장이 관
심권 밖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작년 3월에 착공한 소양강 다목적 댐 때문이
었다.
아직가지는 가건물을 짓고 진입로를 닦는 등의 준비공사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댐으로서는 국내 최대규모의 댐공사인 이 소양강 다목적 댐의 본공사를
과연 앞으로 누가 따 낼 것이냐 하는 데에 업계는 비상한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다.
소양강 다목적 댐은 64년에 성안된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속에 들어
있는 4대 강(한강.낙동강.금강.영산강)유역 개발사업의 하나이며 또한 수자
원개발 10개년 계획에 포함한 공사이기도 했다. 댐 건설의 타당성 조사는
이미 62년에 한국토목학회에 의해서 실시된 바 있었고, 그 뒤 바로 세계적
인 댐 건설회사로 알려진 니혼고오에이가 상세한 현지조사를 끝내고 설계를
해오는 중에 있었다.
그 니혼고오에이가 얼마 전 1백 25미터의 콘크리트 중력식(concrete
gravity)댐을 건설하는 동시에 20만킬로와트짜리 발전시설을 설치한다는 내
용의 기본설계를 작성 제출했다.
거기에 따라 건설부가 실시한 경쟁입찰에서 정 주영은 최저가격으로 응
찰, 그 공사를 따 내는 데 성공했었다.
막상 공사를 얻어 내고 보니 그 큰 댐을 콘크리트로 건설한다는 것은 예
삿일이 아니었다.
첫째, 시멘트와 철근이 국내 수요를 따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근
본적으로 우리 나라의 시멘트 생산 시설 용량 자체가 그와 같은 대규모의
토목공사를 감당하기에는 태부족이었다. 그리고 그 많은 물량을 그 산간벽
지까지 운반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닐 것 같았다. 게다가 자재값은 하루가
다르게 뛰어올랐다. 잘못했다가는 고령교 짝이 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오늘도 은근히 고민하면서 경부고속도로 현장을 달리고 있는 정 주영 머
리 속에 불현듯 한 가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작년에 태국에서 국제입찰에 참가했다가 실패한 파손 댐 생각이 났다. 그
파손 댐은 콘크리트 댐이 아닌 사력 댐(zone fill type dam)이었다. 그때
들은 말이기는 하지만 2차대전 이후로는 백미터 넘는 댐은 대개 흙과 바위
를 채워 넣는 사력 댐으로 공사를 해온다고 했었다.
"이봐, 차 돌려!"
"예?"
"소양강 댐 공사장에 좀 가 보자구."
정 주영은 고속도로 현장으로 달리던 차를 춘천 쪽으로 돌렸다. 소양강
댐 현장은 춘천 동북방 13킬로미터 지점에 있었다.
현장을 둘러보는 정 주영 얼굴에는 회심의 미소가 감돌았다. 흙은 말할
것도 없고 현장에는 돌 천지였다. 강 우안도 돌산이요, 좌안도 돌산이었다.
저 풍부한 흙과 돌의 천연자원을 버려두고 구태여 귀한 시멘트와 철근을 써
야 하는 콘크리트 댐을 쌓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그는 단정했다. 현장에서
돌아온 정 주영은 부리나케 토목담당 상무 권 기태를 불러 올렸다.
"권상무, 소양강 댐 공사에 대한 대안을 만들어요."
"대안이라뇨?"
"대안이 대안이지, 대안도 몰라."
(또 이 어른이 무슨 기상천외한 말씀을 하려는 걸까.....)
하도 여러번 뜻하지 않은 일을 당해오는 권 기태는 숫제 잠자코 있었다.
지금까지 정부가 발주한 공사에 업자가 대안이라는 것을 내본 적도 없었거
니와 공사현장에서도 대개는 건설부에서 파견하는 기술감독이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일이나 해 왔는데. 더구나 댐 건설로는 세계가 알아주는 니혼고오
에이가 낸 안에 대안을 낸다는 것은 언감생심 생각도 못 할 일이었다.
"당장 사력 댐으로 바꿔요."
"예?"
"권상무도 태국에서 파손 댐 입찰할 때 같이 참견했잖아."
"하지만 입찰한 경험만 가지고서야......"
"우리가 언제 경험 있는 일만 해 왔나?"
"이미 니혼고오에이 기본계획은 수자원개발공사에서 심사를 끝내고 건설
부가 승인까지 했읍니다."
"그러니까 대안을 내라는 것 아냐."
"그리고 이번 일은 공사비 중의 일부를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충당하게 되
어 있기 때문에 어차피 기술이나 자재나 다 일본사람들이 하자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공삽니다."
"여러 말 말구 권상무는 콘크리트 댐을 사력 댐으로 바꾸는 대안이나 내
놓아요."
그렇게 해서 작성해 낸 사력 댐 대안은 권 기태가 예상한 대로 건설부나
수자원개발공사의 관계자들을 발끈 화나게 만들었다. 대안을 검토하기도 전
에 그들은 한마디로 일개 청부업자의 건방진 수작이라는 것이었다.
당시의 건설업계 풍토로 보아서는 확실히 관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해서
그들이 반감을 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들은 아예 대안을 들여다볼
생각도 안 했다. 또 니혼고오에이는 그들대로 현대건설이 언제 댐다운 댐
공사를 해 본 일이 있느냐면서 말도 안 되는 대안이라고 했다.
모처럼 큰 마음을 먹고 제출한 대안이 그 지경에 이르자 정 주영은 어느
안이 더 현실적이고 경제적인가 하는 것을 검토하기 위해 3자(현대.닛고오.
건설부 및 수개공)연석회의를 갖자고 제의했다. 건설부나 수자원개발공사도
그 제의마저 외면할 수는 없었다.
수자원개발공사 회의실에서 3자 연석회의가 열렸다. 현대건설측에서는 정
주영 자신과 권 기태 상무와 전 갑원 기사가 참석하고 니혼고오에이측에서
는 일본의 동대를 나온 하시모도 부사장이 몇몇 기술진과 참석하고 건설부
및 수자원개발공사에서는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회의는 벽두부터 현대건설측에 불리했다. 현대건설 기술지니으로 참석한
권 기태나 전 갑원은 새파란 30대 청년인데 반해서 기술진은 모두 머리가
희끗희끗한 원로들이었다. 말하자면 권이나 전의 대선배격이었다. 그래서
권이나 전은 사력 댐이 콘크리트 댐보다 우월하다는 정론을 펴면서도 상대
편 기술진에서 눈만 한번 크게 부라려도 기를 못 쓰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론인즉 권이나 전의 말이 옳았다. 이론에 몰리게 되자 니혼고오
에이의 하시모도 부사장이 발끈 화를 내곤 정 주영에게 손가락질까지 하면
서,
"도대체 정사장 전공이 뭐요?"하고 묻는 것이었다.
전공은 고사하고 보통학교밖에 못 나온 정 주영으로서는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상대방은 자신보다 나이도 많아 보였다. 그러자 건설부의 한 관계자
가 핏대를 올리고 권과 전에게,
"그나저나 당신네들이 토목계에 언제 들어와서 뭘 안다고 아무것도 모르
는 정사장을 부추겨서 이렇게 쓸데없는 불란을 일으키는 거요 응?"하고 면
박을 주고 윽박지르는 것이었다.
그래도 정 주영은 끈기 있게 그들을 설득해 보았지만 결론은 현대건설의
대안을 믿고 공사할 수 없다는 관계자들의 말이었다.
그날 따라 정 주영은 심한 배탈이 나서 병원으로 가서 드러눕고 말았다.
속이 타고 울화가 치미는 것을 참느라고 회의를 하는 동안 내내 얼음물만
들이켰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니혼고오에이 구보다 사장과 하십모도 부사장이 병원으로 문병을
오겠다는 연락이 왔다. 정 주영은 아직도 화가 가시지 않은 때라,
"문병은 왜? 누가 죽게 됐어?"하고 그들의 문병 제의를 한마디로 거절했
다. 그럼에도 부득부득 문병을 온 그들 두 사람이 지금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거, 참 이상한 사람들이군......)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병실 문이 열
리고 구보다 사장과 하시모도 부사장이 코가 땅에 닿도록 허리를 굽신거리
며 기어 들어왔다.
"어서 오십시오, 대단치도 않은데 이렇게 문병을 와 주시니 고맙습니다."
"대단치 않으시니 다행입니다."하곤 구보다 사장도 하시모도 부사장에게,
"하시모도군, 정사장한테 사과하시오!"하는 것이었다. 일본 사람들은 상
사가 부하를 부를 때면 머리가 허연 늙은이한테도 곧잘<군>이라고 부르곤
했다.
"하! 어제는 매우 실례했읍니다."하고 그렇게 도도하던 하시모도 부사장
이 깍듯이 허리를 굽히는 것이었다.
정 주영은 무슨 통속인지 몰라서 뭐라고 인사를 받아야 할지 몰랐다. 구
보다 사장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실은 어제 정사장이 사력 댐 대안을 제시하셨다는 얘기를 듣고 오늘 아
침에 제가 현장을 다녀왔읍니다."
"아 그렇습니까?"
"정사장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공사비가 30퍼센트까지는 싸지지 않겠지만
다소 얼마가 싸도 쌀 것만은 틀림없었으므로 본인이 우리 기술진에게 기본
설계를 사력 댐으로 바꾸는 것을 연구하라고 지시했읍니다."
"그래요? 고맙습니다."
그러나 정 주영으로서는 그들의 태도가 어떻게 해서 하루 아침에 그처럼
돌변했는지를 알 수 없었다.
사실은 주 원 건설부 장관이 어제 청와대에 들어가서 소양강 댐 공사에
대한 업무보고를 하는 자리에서 정 주영의 대안을 설명할 때 만약 흙댐을
쌓다가 큰 홍수라도 나는 날이면 그 막대한 수량이 춘천을 휩쓸고 잘못하면
서울의 반이 물에 잠기게 된다고 했는데, 거기에 대한 박대통령의 견해가
달랐던 것이다.
그 자리에서 박대통령은 흙으로도 그만한 댐을 쌓을 수 있다면 건설비가
다소 더 들더라도 정 주영의 대안을 진지하게 검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군인 출신이었던 박대통령은 군사적인 측면에서 콘크리트 댐보다는 사력
댐이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콘크리트 댐이 만약 만수가 된 후에 적으로부터 폭격을 당하는 날에는 어
떻게 되겠느냐? 더 큰일이 아니겠느냐? 흙댐이라면 웬만큼 폭격을 당해도
들썩 들렸다가 다시 내려앉을 것이니 댐이 깨질 염려는 없지 않느냐, 그리
고 콘크리트는 수백년이 지나면 풍화 하지만 흙이야 자연 그대로 아니냐.
그런 곡절 끝에 소양강 댐은 결국 당초의 예산을 30퍼센트 줄여서 콘크리
트 댐 기본설계를 사력 댐으로 바꾸어서 공사에 들어갔다.
그해 후반에도 현대건설은 우리 나라 최초의 현수교(suspension bridge)
일 뿐 아니라 규모면에서도 동양에서는 가장 큰 교량(건설 당시)인 남해대
교를 착공한 것을 비롯해서 포항 신항 준설, 도오규우 호텔, 광주, 수원,
대구 등지의 미군 공군기지 활주로, 현충사 성역화 공사 등을 착공했다.
그중 현충사 성역화 공사는 66년 6월에 확정된 <현충사 성역화 종합계획>
에 따라 어느 지방업자가 시공하고 있던 것을 68년 가을에 박대통령이 정
주영을 청와대로 불러서,
"2년 전에 지방업자한테 시킨 일이 글쎄 공사가 아직도 장 그 타령이지
뭡니까. 그러니 정사장이 맡아서 내년 봄 충무공 탄신기념일 전에 화끈하게
좀 끝내 주시오."
이렇게 해서 예산조치도 안 된 대통령 특명공사를 떠맡아 가지고 그야말
고 화끈하게 끝낸 공사였다.
한편 완공을 본 공사로는 65년에 착공했던 군산 화력발전소를 위시해서
낙동강 상수도 굴착터널, 울산 발전소 개스터빈, 화천 수력발전소 4호기 증
설, 남강 다목적 댐 수문 설치, 힐탑 외인아파트, 경인고속도로, 단양 시멘
트공장 확장공사 등이 있었고, 11월에는 자동차공장 일부가 준공되어 코티
나 승용차를 생산해 내기 시작했다.
바로 2년 전인 66년까지만 해도 총매출액이 40억에 지나지 않던 현대건설
은 그해 말에는 창사 이래 최대 기록인 백억원을 훨씬 넘는 1백 24억원의
총매출액을 올리기도 했다. 직원 수도 한해 동안에 5백명 이상이 늘어서 작
년의 1천 7백 50명이 2천 3백여 명으로 불어났다.
그러나 그 시기에 한국경제는 이미 절실한 위기를 맞고 있었다. 2차 5개
년 경제개발 기간 중에 무원칙하게 마구 도입해 들인 민간 차관은 광범한
부실기업을 낳고 말았다.
69년 부실차관기업을 정비할 때 정부는 외자기업 중 85개 업체가 은행관
리로 넘어가고 1백 23개 업체가 경영부실에 빠져 있다고 발표하기에 이르렀
다. 부실차관기업의 영향은 곧 지불보증을 한 금융계에 파급되었고, 전량
수출 조건으로 설립된 외자기업들은 국제경쟁력을 잃고 내수 시장에 눈을
돌림으로써 많은 중소기업을 도산의 수렁으로 몰아넣기 시작했다.
정 주영은 그때 오히려 사세가 걷잡을 수 없도록 신장해서 창업주 1인 체
제가 한계의 벽에 부딪쳤다.
그는 마침내 회사를 보다 합리적으로 경영하기 위한 방법으로 현대건설을
모기업으로 하는 현대자동차 단양 시멘트 등의 방계기업을 사장 중심 경영
체제로 전환하고 그룹의 경영 전반을 회장이 총괄하는 새로운 시스템을 도
입하고 경영의 일대 개혁을 단행했다.
자신이 회장 직에 취임한 정 주영은 큰아우 정 인영을 사장으로 승진 발
령했다. 정 인영은 형이 고령교 복구공사를 마치고 위기에 처했을 때, 살고
있던 집까지 팔고 회사로 복귀한 이래 줄곧 부사장 자리를 지키면서 형을
보필해 왔었다.
그리고 관리담당 부사장에 정 순영, 중기담당 부사장에 김 영주와 이 춘
림 두 사람을, 토목담당 부사장에 권 기태를 각각 임명했는데, 특히 중기담
당 부사장을 두 사람이나 둔 것은 그가 장비를 얼마나 중요시하고 있는가를
말하는 것으로서 그때 이미 원효로 중기공장은 서빙고로 이전하고 독립채산
제에 의해서 경영되고 있었다.
그밖의 공채 1기 사원으로서 현대건설의 돈주머니를 맡아 오던 박 영욱이
경리담당 상무로 승진하고 공채 6기 사원인 양 상서가 그동안 준설선 현대
1호 선장으로 근무하면서 베트공의 구정공세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월남 항
만 준설공사를 통해서 많은 공사 수익을 올린 데 대한 공로로 외공관리 이
사로 승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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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자리는 회사 초창기부터 오 인보가 맡아 놓고 있었다. 그는 정 주영
의 보통학교 동기동창인 동시에 그와 같이 출향관해서 일제시대 아도 써비
스공장을 하던 시절부터 오늘까지 그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사업 반려자
이기도 하다.
이번 인사 중의 또 하나의 특징은 그의 세째 아우인 정 세영을 독립법인
으로 발족해서 막 가동하기 시작한 현대자동차공업주식회사 사장에 기용한
것인데, 업계에서는 그것을 자동차 산업에 대한 정 주영의 강력한 의지의
표현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69년은 국내 건설 경기가 절정을 이룬 반면 월남전의 특수 경기가 고개를
숙이기 시작한 해다.
현대건설이 올해 착공한 국내 주요 공사는 용산에 있는 미군 121후송병원
신축, 인천 화력발전소 1.2호기 설치, 남산 제1터널, 언양 울산간 고속도
로, 국회의사당, 김포 국제공항 확장, 남산 타워, 코리아나 호텔 등이었고,
완공을 본 주요 국내 공사는 현충사 성역화, 3.1고가도로, 도오뀨우 호텔,
문화방송 사옥, 인천 화력발전소 부지 정지, 강화교, 제3한강교 등이었다.
한편 울산 자동차공장에서는 연초부터 7.5톤자리 트럭을 생산하기 시작했
고 9월부터는 버스를 생산할 계획이었으며 이미 그전에 생산하기 시작한 코
티나 승용차는 오는 11월까지 5천대의 생산기록을 무난히 돌파할 전망이었
다.
정 주영이 최대 관심을 쏟고 있는 경부고속도로 공사나 소양강 댐 공사도
아직까지는 별 차질 없이 순탄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작년에 착공한 태국의 탁 토엔 고속도로 공사는 이번에도 적자를
낼 것이 거의 확실해졌다. 기술적인 문제를 극복하고 나니까 이번에는 40년
만에 겪는다는 대홍수로 예정 공기가 3개월이나 늦어지고 있었다.
그보다 큰 정 주영의 걱정거리는 월남전이었다. 내 돈벌이 때문에 남의
나라 전쟁이 무턱대고 오래 계속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미국이 월남에서 슬슬 꽁무니를 빼려는 눈치 같았기 때문이다.
그도 월남전에서 한몫 잡은 사람 중의 하나였다. 경험도 없이 뛰어든 준
설공사에서 자동차공장을 건설할 만한 큰 돈을 벌고 또 지금은 현대건설이
국제적인 준설업체로까지 부상하지 않았는가. 남들이 우습게 아는 세탁업
하나에서만도 그동안 8억원이라는 순익을 올렸다.
월남의 특수 붐이 퇴조 국면에 접어들기 시작한 것은 미국의 닉슨 행정부
가 들어서면서부터였다. 그 여파는 맨 먼저 항만 준설공사에 미쳤다. 월남
에서는 모든 항만 준설공사는 오는 9월로서 일단 모두 끝날 예정이었다.
그래서 정 주영은 준설선 현대 2호는 월남에서의 일을 끝내는 대로 작년
에 착공한 포항의 신항 준설공사에 투입할 계획이었고 남은 준설선 현대 1
호는 국내에 마땅한 일거리가 없었기 때문에 싱가폴 항만 준설공사 입찰이
언제 있는지 알아 봐 가지고 싸게라도 입찰해서 준설선을 놀리지 않게 하라
는 지시를 사이공 지점에 해놓고 있었다.
괌도는 1950년에 미국 영토로 편입된 섬인데 크기는 우리 나라의 강화도
만 하다. 그런데 섬의 크기에 비해서 군사시설 및 관광 시설에 대한 건설
수요는 적지 않았다. 닉슨 대통령의 <괌 독트린>으로 유명한 미국의 전략기
지이자 항공 및 항해의 주요 기항지이며 또한 관광지였기 때문이다.
괌도에서 돌아온 정 주영은 사이공 지점장 김 주신에게 즉각 괌도로 들어
가서 수주활동을 벌이는 동시에 현지에다 지점을 설치하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김 주신은 미국 회사인 백텔에서 일하다가 64년에 현대건설로 온
특채 사원이었다. 그는 영어 실력이 뛰어나서 사이공 지점장으로 발령되기
이전에도 줄 곧 외국관계 업무에 종사해 왔었다.
괌에 들어간 김 주신으로부터 현지 법률상 공사를 수주하거나 시공하기
위해서는 현지법인을 설립해야만 한다는 제1신이 날아 들어왔다.
정 주영은 즉각 자본금을 50만불로 하는 현지법인 현대아메리카주식회사
(Hyundai Amerca Corporation)설립을 지시했다.
그렇게 해서 7월에 현지법인을 설립하면서 따 낸 첫공사가 4백 피이트 높
이의 안테나 설립공사였다.
아무 공사나 우선 하나 맡고 보자는 성급한 마음에 어떤 공사 내용인지조
차 정확히 모르면서 따 낸 공사였다. 공사를 하다 보니 모조리 특수자재로
된 기기들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공사였다. 특히 많은 부분에 특수 절
연처리가 되어 있는 자재를 써야 했는데, 대나무로 만든 그 자재를 제작하
는 회사를 알아낼 길이 없었다. 간신히 한 회사를 알아내고 이젠 자재를 확
보했구나 해서 한숨을 돌리는 사이에 그 회사가 파산해 버리고 말았다.
그런 식의 공사였다. 결국 첫공사는 적자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정 주
영은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월남에서 잃은 해외건설 시장을 괌도에 개척해
낼 수 있었다.
산 넘어 산이었다.
69년이 저무는 12월, 해외시장을 개척해야 한다는 의욕에 앞선 정 주영은
기온의 연교차가 섭씨 75도나 되는 알라스카의 하리케인 교량(Hurricane
Gulch Bridge)을 수주했다.
그 공사는 현지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미국의 국내업자들도 서로 맡기를
꺼리고 있을 만큼 조건이 나쁜 공사였다. 1백미터나 되는 협곡에 다리를 놓
는다는 일 하나만도 상당한 위험을 수반하는 일이었는데 그밖에도 기후, 지
형, 현지의 노동법규 등 상상밖의 숱한 악조건이 도사리고 있었다.
한편 국내에서는 지금까지 많은 애로를 겪으면서도 예정된 공기대로는 진
행되어 오던 경부고속도로 공사가 준공기간을 반년도 안 남기고 당재 터널
공사가 암초에 부딪쳤다.
하행선 서울 쪽 입구 20미터쯤 되는 지점에서 상단의 H빔을 철거하기 위
해 파 들어가다가 우측 벽면의 암석이 무너져 내려 앉았던 것이다.
2백입방미터나 되는 암석 속에 사람이 깔려서 세 명이 즉사하고 한 명이
중상했다. 시체를 수용해야 하고 사후처리를 해야 하는 등 현장은 아우성이
었다. 그바람에 공사진행에 2개월이라는 차질을 가져왔다.
암석의 질이 좋지 못해서 공사의 진도는 늦어지는데 D데이는 바득바득 다
가오고, 농번기가 닥쳐 와서 노임을 평상시의 배를 준다고 해도 동원할 인
부가 없었다.
정 주영은 몸이 달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자기만큼
몸 단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만 같았다.
당재 터널을 충북 옥천군 이원면 우산리와 옥천군 청성면 묘금리간을 상.
하행선으로 분리해서 건설하는 길이 1천 1백 20미터(상행 5백 90미터 하행
5백 30미터)의 곡선형 터널로서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가장 어려운 마지막
공구이기도 했다.
첫째, 공사현장에 투입할 공사용 장비의 진입로가 없었다. 기존 도로로
유일한 지방도로가 있었지만 노폭이 너무 좁아서 사용 불가능이었다. 더구
나 지방도로에서 벗어난 서울 쪽 터널 입구까지의 약 1킬로키터 구간에는
아예 길이 없는 30퍼센트의 구배로 이루어진 구릉지대였다. 거기에 지방도
로를 확충해서 진입로를 닦았지만 그나마 비가 한번 오고 나면 교통이 두절
되는 형편이었다.
둘째, 터널의 서울 쪽 입구 전면에서는 높이 10미터 내지 20미터, 길이 1
백미터나 되는 절토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에 공기를 맞추기 위해 부득이 다
른 방향에서 굴을 뚫고 들어가서 작업을 시작해야만 했다.
셋째, 일반적으로 지질은 표토.연암.경암의 순으로 나타나는 것이 보통인
데 당재 터널 구간은 퇴적암층으로서 편마암.절암 및 활암이 혼합된 여러
암맥이 가로질러 있어서 공사의 어려움을 더하게 했다.
무려 13회에 걸친 낙반 사고와 많은 인명 피해를 냈으면서도 아직 공기
내의 완공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낙동강교를 준공함으로써 경부고속도로 전구간이 거의 완공단계에 들어서
자 박대통령은 조속한 완공을 강력히 희망하게 되었고, 이 한림 건설부 장
관은 6월 25일을 준공 목표일로 정하고 전 구간을 누비면서 불 같은 성화를
하고 다녔다.
그러나 경부고속도로 전노선이 기한 내에 완전 개통을 보느냐 못 보느냐
하는 열쇠는 당재 터널의 준공 여하에 달려 있었다.
정 주영이 당재 터널공사 현장에만 투입한 중장비만도 무려 6백여 대, 트
럭은 수를 헤아릴 수도 없었다. 전력을 집중하고 있는 만큼 실제로 해내는
공사량도 컸지만 겉으로 나타날 정도로 눈에 띄지는 않았다. 그래서 한 달
에 이틀씩 보내던 현장 직원들의 휴가제를 취소한 지도 두 달이 지났다.
사실 한 달에 이틀이라는 휴가는 집이 서울인 경우의 현지 직원에게는 거
리가 워낙 멀었기 때문에 무의미한 것이기는 했었다. 대개 독신 직원들은
왔다갔다 하느니 차라리 잠이나 실컷 잔다고 숙소에 처박혀서 자는 것이 휴
가였다.
어느 독신 직원 말대로 공사장에서 한창 일하다가 날이 더워서 옷을 갈아
입으면 여름이었고 또 정신없이 일을 하다가 추워서 하늘을 쳐다보면 눈이
내렸다.
직원 중에 신혼 중인 몇 사람은 옥천 시내에 세방을 얻고 있었는데 며칠
씩 집에 못 들어가게 되자 나중에는 부인들이 찾아나와 현장 사무실 밖에서
데모 아닌 데모를 벌이는 일도 있었다.
정 주영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밤새도록 차를 타고 터널 속을
왔다갔다 하면서 현장 일을 독려했다. 헤드라이트 옆에 달린 붉은 라이트만
번쩍번쩍해도 현장 인부들은 <현장 호랑이 온다>고 긴장해서 힘을 냈다. 얼
머나 호랑이 짓을 했던지 현장 사나이가 어느덧 현장 호랑이로 둔갑해 있었
다.
어느 날, 이 한림 장관이 우리 나라에서는 터널공사의 일인자라고 하는
이 문옥이라는 사람을 데리고 현장에 나타났다. 이 공사가 언제쯤 정확하게
완공될 수 있는지를 진단케 하기 위해서였다.
"제가 보기에는 12월까지 완공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하는 이 문옥 대
답에 이 한림 장관은,
"뭐 어쩌구 어째?"하고 역정을 냈다. 6월25일을 준공 목표일로 잡고 있는
이 한림으로서는 역정을 낼 만도 했다. 이 문옥은 다시 고개를 한참 갸웃거
리다가,
"무리를 해도 9월 말까지는 잡아야 합니다. 장관님."하는 것이었다. 그러
자 이 한림은 화가 나서 같이 태워 왔던 이 문옥을 내버려 두고 자기 혼자
차를 타고 횅하니 가 버렸다.
그날이었다. 아침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현장 직원들
은 모두 비옷에 장화를 신고 일하고 있었다. 정 주영도 비옷도 입고 있었지
만 장화가 없었기 때문에 운동화를 신은 채 돌아다니느라고 바지까지 흥건
하게 젖어 있었다.
전공구 소장 양 봉웅이 따라 다니고 있었다. 그는 현대건설이 66년에 제3
한강교를 착공할 때 교량 기술자로 입사한 특채 사원이었다. 그는 물이 질
척질척하는 운동화를 신고 다니는 정 주영을 따라 다니기가 민망해서 직원
한 사람을 불러서 대전에 나가서 장화 한 켤레를 사 오라고 시켰다.
그러나 정 주영 발에 맞는 장화는 대전 바닥에도 없었다. 그의 발은 대한
민국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만큼 컸다. 11문 7이었다.
정 주영은 운동화를 벗어 들고 찝차 문을 열어 주면서 양 봉웅 소장에게
먼저 타라고 했다. 그는 차를 타거나 내릴 때 운전사가 일일이 문을 열어
주고 닫아 주는 것을 싫어했다. 아직 그만한 기력이 없는 것도 아닌데 운전
사가 그런 일까지 해야 하느냐고 반문했다. 운전사는 운전이나 잘하면 되는
거라고 했다. 하기 때문에 그는 어디를 가거나 가방을 들고 따라 다니는 소
위 수행비서라는 것이 없었다. 들고 갈 것이 있으면 자기 손으로 들고 다녔
고, 가서 써야 할 일이 있으면 자기 손으로 직접 썼다.
양 봉웅 소장이 먼저 뒷칸에 오르자 정 주영이 앞자리에 탔다.
"어디로 가시겠읍니까, 회장님?"
운전사가 물었다.
"어디 가는 게 아냐. 비가 와서 얘기 좀 하려고 들어왔는데, 너 좀 나가
있어."
운전사가 내리자 정 주영은 뒷자리의 양 봉웅을 돌아보았다. 양 봉웅은
그가 무슨 말을 할지 몰라서 바싹 긴장했다.
"양소장!"
"예?"
"무슨 수가 없겠어?"
"무슨......"
"이 터널을 유월 안에 해낼 수 있는 무슨 비상수단이 없을까?"
"있읍니다."
양 송웅 소장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
"말해 봐."
"문제는 채산을 맞추느냐, 주판을 엎어놓고 할 것이냐에 달려 있읍니다.
회장님께서 주판을 엎어놓고 하겠다 하면 됩니다."
"양소장, 돈 벌어서 죽어서 갈 때 거적 속에 싸 짊어지고 갈 거야? 여기
서 밑지면 딴 데서 벌지. 난 처음부터 이 고속도로에서 돈 벌 생각 안 했
어."
"하지만 회사에서 녹을 받아먹고 있는 저희들 입장에서야 회장님께 밑져
가면서 공사를 하십시오 할 수는 없는 일 아닙니가?"
"양소장 마음은 알겠어. 하지만 난 손해를 보더라도 이 공사를 꼭 기한
안에 해내고 싶은데."
"단양공장에 말씀하셔서 조강 시멘트만 만들어다 주십시오!"
그때 우리 나라에서 조강 시멘트를 생산할 수 있는 데는 단양 시멘트공장
한 곳뿐이었다. 보통 시멘트가 완전히 굳는 데는 아무리 빨라도 3주야가 걸
렸지만 조강 시멘트는 12시간 안에 굳었다.
정 주영은 즉각 현장 사무소에서 무선통신으로 단양 시멘트공장을 불러
냈다. 그는 당장 조업과정을 완전히 개편해서 오늘부터 조강 시멘트 생산에
만 총력을 집중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공사에 관한 정 주영의 지시는 곧 군의 작전명령과도 같은 것이었다. 한
번 지시가 떨어지면 거기에는 이유도 불만도 항의도 있을 수 없었다. 그것
은 지상명령이었다.
"99퍼센트까지 안 되는 일은 해라!"
단 1퍼센트의 가능성만 있더라도 그 가능성에 도전하라는 말은 황무지에
서 사업을 일으켜 온 그의 좌우명의 하나이기도 했다.
단양 시멘트공장에서는 조강 시멘트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시멘트를 실어 낼 철도 수송력이 달렸다.
기왕에 주판은 엎어놓은 공사였다. 정 주영은 현대건설이 보유하고 있는
모든 트럭에 비상동원령을 내렸다. 단양 공장에서 당재 터널 현장까지 장장
백 90여 킬로미터. 배보다는 배꼽이 더 컸다. 시멘트 한 포 값의 운임이 70
퍼센트를 차지했던 것이다.
이미 하행선 터널은 완전히 뚫려서 제법 부드러운 곡선이 수은등에 비쳐
그 모습을 나타냈지만 상행선의 하단 굴착은 좀처럼 진전이 없어 속을 태웠
다.
6월 12일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뚫어 내라는 정 주영의 추상 같은 지상
명령이 떨어져서 모두들 생난리 통인데 나머지 3백여 미터의 암은 마치 적
군의 최후의 보루인 양 막강하게 저항해 왔다.
한쪽에서는 조강 시멘트에 의한 콘크리트 옹벽이 부쩍부쩍 쳐들어 오기
시작했다.
부족한 인부나 기술자는 서울에서 보통 임금의 두배를 주고 데려왔다.
문자 그대로의 돌관작업이었다. 3개월이 소요되는 공사가 25일 만에 끝났
다. 70년 6월 27일 밤 11시, 당재 터널이 준공됨으로써 마침내 경부고속도
로 전장 4백 28킬로미터가 완전하게 개통되었다.
7월 17일 12시. 제헌절을 기해서 착공한 지 만 2년 5개월 만에 박대통령
이 참석한 가운데 대구에서 성대한 개통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그 무렵 일
본에서는 고오메이(신명)고속도로를 건설 중이었는데 총연장은 경부고속도
로가 10킬로미터 더 길었고 공사도 6개월쯤 늦게 시작했지만 6개월 먼저 완
공했고 총공사비도 고오메이 고속도로의 8분의 1밖에 안 들었다. 물론 우리
나라 재력이 약했기 때문에 기초도 고오메이보다는 약하게 시공했고 조경도
그만은 못했지만 당시의 한국경제 수준에는 최상의 도로였다.
당재 터널 현장에서는 양 봉웅 소장 이하 전직원이 새벽부터 나와서 몇
시간 후에 이 터널을 시주하며 기뻐할 박대통령 각하의 얼굴을 연상하면서
포장한 아스팔트 바닥을 비로 쓸기도 하고 콘크리트 벽에 묻은 검은 칠을
닦아내는 등 마지막 정성을 기울였다. 대통령이 지나갈 때는 우렁찬 박수로
환영하리라고 생각하는 그들이었다. 그러느라고 그들은 점심시간이 지나가
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오후 1시. 앞으로 약 한시간 안에 대통령께서 이곳을 통과하신다고 하면
서 한 경찰관이 와서 한 사람도 현장에 남아 있지 말고 몽땅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 있으라는 것이었다.
(누구 손으로 만든 고속도로인데, 어떻게 뚫어 낸 터널인데......)
양 봉웅 소장 눈에서 눈물이 솟았다.
(애지중지 길러 온 딸 시집 가는 걸 보지 말라니.....)
그는 직원들이 자기를 볼 것 같아서 얼른 얼굴을 돌렸다.
그리고 몇 십분 뒤, 대통령 차를 선두로 시주 행렬이 당재 터널을 빠져나
와 서울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현장 사무실 안에 갇힌 직원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우울하고 침통하고 허
탈했다. 이윽고 한 직원이 중얼대듯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정 주영은 그날 개통식 식전에서 경부고속도로 건설 공로로 대한민국 동
탑 산업훈장을 수여받았다.
험난한 재벌에의 길
정 주영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참여했던 전직원을 그 참여도에 따라서
한 계급씩 특진시키거나 호봉을 올려 주는 은전인사를 단행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전공구 소장직을 맡았던 양 봉웅은 토목이사로 승진되
고 그동안 중기공장에서 장비지원에 헌신해 온 이 명박이 관리담당 이사로
승진되어 본사로 들어오기도 했다.
이보다 훨씬 앞선 금년 정월에는 조선호텔이 준공되고 8월에는 서울대교,
남산 1호 터널이 잇달아 준공되었다.
남산 1호 터널은 한신부동산주식회사가 발주한 것을 현대건설이 수의계약
으로 수주한 것인데, 노선을 결정해서 설계를 하고 시공하는 일체를 10억원
에 맡은 공사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터널 공사라고 해야 철도 터널 공사나 해봤지 도로 터널
을 공사해 본 사람은 아무도 없을 때였으므로 10억이라는 공사 금액은 그저
막연하게 그 정도면 넉넉하겠지 하고 생각한 액수였다. 그러나 막상 일을
하다 보니 10억원에 맞춰서 시공할 경우, 터널 속의 조명은 빌딩 안에 촛불
을 켜놓는 격이 되고 환기장치 하나 제대로 설치할 형편이 못되어서 다시
발주처와 상의한 끝에 공사금액을 12억 4천만원으로 조정해서 완공했다.
정 주영이 직접 결정한 노선 하나는 지금도 황금노선으로 꼽히고 있지만
완공된 터널 자체에는 흠도 많았다. 터널을 뚫어 놓은 다음 콘크리트 타설
을 하고 나서야 뒤늦게 벽에서 물이 줄줄 새는 것을 보고 방수공사를 했지
만 이미 작업순서가 뒤바뀌어서 누수를 완전하게 방지할 수는 없었다. 그래
서 완공 후에 자동차의 통행이 어려워지자 하는 수 없이 좌우측에 내벽을
쌓아 누수를 막았고, 그바람에 터널 폭은 3차선에서 2차선으로 줄어 든데다
가 빛을 좌우로 보내서 터널 속의 자동차 매연 때문에 되돌아오는 빛의 반
사율에 따라서 매연량을 측정하고 그 매연량에 따라 송풍기의 가동률이 조
정되도록 되어 있는 자동연무조정기를 설치했지만 터널의 중간 부분이 높고
양쪽 출입구까지 하향 구배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구조적으로 매연 배출이
심히 어려운 터널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정 주영은 2년 후에 이 남산에다 1천 5백 30미터짜리 긴 굴을 뚫
었다는 실적을 가지고 신생국 파푸아 뉴기니아의 라무 지하 수력발전소를
계약해 내는 데 성공한다. 지하 수력발전소는 지하에 수로를 뚫는 터널 공
사가 주된 공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9월에는 월남의 캄란에서 공사 중이던 소도시 건설이 끝나고 태국
의 탁 토엔 고속도로 공사도 끝났다. 예상했던 대로 태국 공사에서는 이번
에도 2천만원 가까이 손해를 보았다. 하지만 정 주영은 어떻게 해서라도 태
국에서 본전을 건지고 발을 빼야 한다는 생각으로 지난 4월에는 이미 돈부
리 팍토 고속도로 공사를 수주 착공시킨 바 있었다. 그는 22억 2천만원에
따낸 그 공사에서 드디어 1억 2천만원의 공사 이익을 올리고야 말았다. 그
공사가 끝난 것은 73년 1월. 65년 태국에 진출한 이래 장장 8년이라는 각고
끝에 적자 공사의 한을 푼 셈이었다. 그러나 아직 본전을 건지려면 멀었다.
그는 다시 73년 5월과 8월에 수판부리 차이낫 고속도로(수주액 5억 7천만
원)와 랑수왕 파타룽 고속도로(수주액 2억 7천만원)공사를 수주 시공했지만
결국은 또 3억 3천만원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큰 손해를 보고 말았다. 때마
침 몰아닥친 1차 오일쇼크를 겪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정 주영은 결국 태국에서 10년간에 63억원어치의 공사 물량을 소화하고도
끝내는 4억 4천여 만원의 적자를 낸 채 눈물을 머금고 70년대 중반, 중동진
출을 전후해서 태국 내의 모든 공사를 깨끗이 종결 짓고 철수했다.
광주.수원.대구 등지의 미공군기지 활주로 공사도 끝났다. 어쩌면 미군공
사는 그것이 마지막 공사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난 5월에는 미국정부의 최종 대한 무상원조협정(1천만불 규모)이 체결
되는가 했더니 6월에는 주한 미군을 감축할 것이라는 통보를 해 왔었다.
울산의 자동차 생산 종합공장도 일단은 준공을 보았다. 자동차 생산의 국
산화율을 높여야 한다는 것은 우리 나라 자동차업계가 당면하고 있는 앞으
로의 과제이고, 우선은 조립공장일망정 승용차.버스.트럭 등 연산 2만 6천
대의 생산시설을 갖추어 놓았다.
10월에는 남산의 서울 타워가 준공되었는데도, 서울의 명물이 될 것이라
고 정성을 들인 전망대는 웬일인지 일반에게 개방하지 않는다고 했다.
월남의 항만 준설이 끝나고 한동안 놀고 있던 준설선 현대 1호는 지난 7
월, 호주 서남단에 위치한 번버리 항에 투입되었다. 이 번버리 항 준설공사
는 비싼 준설선을 그저 놀려 둘 수가 없어서 싱가폴 항 준설공사에 다소 싼
값으로 입찰하는 한이 있더라도 일거리를 따 내라고 했는데도 그 응찰에 실
패했던 실무진들이 이번에도 낙찰을 못 시키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으로 너
무 싸게 수주한 공사였다. 게다가 바다 밑바닥이 현무암 층이라서 앞으로
바위를 깨 내는 쇄암 준설선도 한 척 구입해서 투입해야만 하는 다소의 위
험부담이 있는 현장이었다.
그밖의 금년 들어 착공한 국내 주요공사로는 포항의 종합제철소(1기)와
금년말에 준공할 예정인 대전 전주간의 호남 고속도로(2차선), 고리 원자력
발전소 부지 정지, 불국사 복원공사 등에 불과했다. 국내 건설 경기가 침체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사실을 여실히 말해 준다.
60년대 후반의 세계 자본주의 경제권의 불황돌입, 미국의 월남전 축소정
책, 대한 무상원조의 종결, 주한 미군의 감축 등 대외 경제여건이 악화되자
외자주도, 수출주도, 경공업 편중 등으로 특징 지어진 한국경제는 그 구조
적 취약성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수출문화, 투자부진, 국제수지의 악화, 부실기업의 속출 등 한국경제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정부는 그와 같은 대내외적인 경제여건에 대처해 나가기 위해 안전기반을
구축하고자 종합대책을 마련하고 총수요의 억제, 통화의 억제, 투자의 억제
를 기초로 하는 전면적인 긴축 재정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한편 정부는 종전의 경공업 편중의 수출구조를 중화학공업 중심구조로 전
환한다는 기본방침 아래 지난 6월 중공업 종합육성책을 마련 공표했다.
그동안 우리 나라 경제는 1.2차 5개년 경제개발계획에 따라 고도의 양적
성장은 실현했으나 제반 산업 및 수출구조 면에서는 여전히 심각한 취약성
을 지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60년대에 이룩된 외형적인 고도성장은 대규모의 차관과 저렴하고 풍부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한 경공업품 위주의 수출 드라이브 정책에 의해 주도되
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69년 말을 기점으로 세계 경제는 장기 호황이 종식되고 스태그 플레이숀
의 국면으로 전환했다. 미국.일본.서유럽 등 주요 선진국들은 재정 긴축정
책과 보호무역정책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그와 같은 선진국들의 정책 전환
은 그들 선진국에 대한 무역 의존도가 높은 한국경제에 타격을 주면서 경제
정책상의 일대 전환을 강요했다. 수출주도의 경제정책을 근본적으로 수정하
지 않고 지속적인 고도성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제반 산업의 양적 확대와
함께 구조적 개선 및 질적 향상을 통한 산업체질의 강화가 절실하게 요구되
고 있는 때였다.
정부의 중공업 육성책이 발표되기 전인 작년 1월, 정 주영은 이미 일본의
미쓰비시 중공업과 조선 산업의 합작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은 내외 여건이 맞지 않아서 미쓰비시중공업과의 합작은 결렬
되고 다시 계속해서 미국.카나다.유럽 등지의 조선업계와의 합작을 모색해
왔으나 별 성과 없이 우선 지난 3월 현대건설 안에 조선사업부를 설치했다.
그리하여 지금 부지선정 등의 기초작업을 하고 있는 중에 정부의 중공업 육
성책이 발표된 것이었다.
정부의 중공업 육성책에 의하면 조선공업의 경우, 4차 5개년 계획기를 조
선공업의 수출산업화 완성의 시기를 잡고 3차 5개년 계획 기간에는 수출기
반의 구축을 위한 준비단계로 설정해 놓고 있었다.
정 주영은 정부의 중공업 육성정책이라는 것에 별 기대를 걸지 않았다.
지금 그의 생각은 당장 어디다 도크를 파면서 한쪽으로는 배를 한 척 주
문해다가 때려 짓고 싶은데, 정부가 내놓은 육성책은 5년 내지 10년을 내다
본 계획이니 그로는 기댈 만한 것이 못되었다.
그가 조선소를 해야겠다는 발상을 한 것은 해외공사를 하면서부터였다.
해외공사를 하는 동안에 겪는 고생은 말로 다할 수가 없었다. 말이 통하기
를 하나, 음식이 입에 맞기를 하나, 기후가 좋기를 하나. 그런데다가 미국
이나 호주 같은 데는 우리 노동자들이 들어갈 수 없어서 마땅한 일거리도
없었다.
지금 공사 중인 알라스카의 하리케인 교량공사도 그렇고 호주의 번버리
항 준설만 해도 우리 현장 책임자들이 현지 노동자들을 부리면서 일하느라
고 죽을 지경이었다.
알라스카 주는 미국 내의 다른 어느 주보다도 노동법이 엄격해서 법규상
일체의 한국 근로자는 고용할 수 없었고, 심지어 책임자 이외는 행정 담당
자는 물론 기술자까지도 현지인을 고용하도록 종용했으며 현지인에게 전체
공사금액의 50퍼센트 이상 하청을 주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노동자의 기본급은 최저임금(minimum wage)외에 통상임금(prevailing
wage)을 지급해야 하게 되어 있다. 그뿐 아니라 고용주가 노동조합비, 실직
수당, 산재보험료, 숙식비 등을 지불하게 되어 있고, 거기에다 특근수당
(pvertime allowance)을 가산하면 통상임금의 2배 정도가 되는 것이 보통이
다.
그것까지도 좋다. 노동자들의 식사 차림표(menu)가 시방서에 자세히 명기
되어 있는가 하면 인부들 간의 인종차별 문제 조정, 노동조건, 즉 노동자의
안전관계 및 숙소제공 조건가지도 일일이 까다롭게 명시해 놓고 있었다.
그곳의 노동자들을 가리켜 스노우 버드(snow bird)라고 했다. 겨울 철새
라는 뜻인데, 그곳 노동자들은 연중 길어야 6개월 정도 일하고 나머지 6개
월은 미국의 남부 지방으로 가거나 아니면 아예 겨울잠을 잤다. 6개월 일해
서 6개월을 살아야 하므로 시간외 작업(overtime)조건이 부여되지 않으면
누구 하나 일하러 모여들지 않았다.
교량 건설 지점인 계곡을 로프를 타고 짐을 지고 왔다갔다 하는 것이 힘
들다는 노동자들의 항의 때문에 하청자는 소형 헬리콥터를 전세 내지 않을
수 없었다.
캠프의 세탁기가 고장 나서 세탁을 할 수 없다고 세탁기를 고칠 때까지
노동자들이 철수하는 일도 있었다. 거기에다 특근 기회가 적다고 철수하는
노동자들도 있었다.
그들을 다시 동원하려면 기차로 편도 여섯 시간 정도가 걸리는 데 그 여
섯 시간 동안의 임금(travel time)이 한 시간 정도 걸리는 비행기 요금보다
비싸서 차라리 비행기로 모셔야 했다.
감독이라는 자는 공사진행을 기술적으로 직접 진두지휘하는 것을 피했다.
나중에 뭐가 잘못되면 하청자가 클레임을 제기할 것을 걱정하는 것이다. 또
실제로 하청자는 어떤 이유를 붙여서든지 클레임을 제기할 기회만 노리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 지방은 4월 중순까지도 눈이 3미터 정도는 쌓여 있다가 6월이나 돼야
그 눈이 완전히 녹고, 가을이면 또 9월 초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래
서 공사하기에 적절한 시기는 4개월 정도인데 그 4개월 동안에도 사흘이면
이틀씩은 비가 왔다.
여름이면 최고 기온이 섭씨 25도가지 올라갔고 겨울이 되면 영하 50도로
뚝 떨어졌다. 그래서 알라스카 주정부의 설계대로 시공하는데도 그 심한 온
도 차이 때문에 신축이음 사이가 잘 맞아 들어가지 않았다.
처음 하류측 아아치를 연결할 때는 부슬비가 내리는 오후 3시경이었는데
25밀리의 여유를 예상하고 가설한 것이 20밀리 정도가 되어 별 문제가 없었
다. 그랬는데 다음날 상류측 아아치를 연결할 때도 똑같은 오후 3시였지만
쾌청한 날씨로 온도가 섭씨 25도까지 올라가는 바람에 전혀 1밀리의 여유도
안 생겨서 작업을 중단했다가 서늘한 새벽 5시에 다시 작업을 시작해서 간
신히 맞출 수 있었다. 아무리 여름이라도 비가 오는 날이면 코우트나 잠바
를 입고 다녀야 할 정도로 갑자기 서늘한 날씨로 변했다.
다만 한 가지, 여름이면 낮이 길어서 한밤중이라고 해도 해가 넘어간 직
후처럼 날이 밝았고 똑같은 영하 25도라고는 해도 체감 온도는 한국의 영하
15도 정도밖에 안 돼서 다행이었다.
현장을 돌아본 정 주영이 오죽했으면 현지 소장에게 좀처럼 하지 않던 부
드러운 말씨로,
"내, 다른 책임은 절대로 묻지 않을 테니까 현대의 명예와 신용만 지켜.
그러기 위해서는 손해가 아무리 나더라도 기술적으로 완전무결한 교량을 건
설해 놔야 하는 거야. 알겠지?"하고 격려했다.
마침내 알라스카의 북부 유전과 풍부한 지하자원을 개발하기 위한 산업용
교량이 북미에서 가장 높다는 맥킨리 산(높이 6천 1백 90미터)협곡에 하리
케인교가 준공은 되었지만 현대건설은 1백 22만불짜리 이 공사에서 40여 만
불의 손해를 보았다.
호주의 번버리 항 준설공사에서도 상황은 비슷했다.
호주는 인종에 대한 편견이 심한 나라다. 하기 때문에 외국인이 자국 내
에서 취업하는 것을 무척 꺼려했다. 입찰이 끝나고 계약하는 과정에서 호주
당국은 준설선만 끌고 와서 호주인 선원들을 고용하라는 것이었다.
호주에도 자국의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규가 있었고 또 영국을 본따
서 정부에다 대고 큰소리 치는 노조가 뒤에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현대건
설로서는 공사를 제대로 해내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말 잘 듣고 부지런하고
착한 우리 선원들이 꼭 필요했다. 그래서 호주의 노조측과 협상의 협상을
벌인 끝에 호주인 25명과 한국인 25명을 쓰기로 했던 것이다.
막상 한국인 호주인이 반반씩 한배에 타고 보니 어려운 일은 하나 둘이
아니었다. 서로 말이 다르고, 생활풍습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고, 사람의
기질까지 딴판이라서 처음에는 입으로 싸우더니 나중엔 기어이 주먹질이 오
고갔다.
호주인들은 작업환경이 어떠니 거주환경이 어떠니 하고 항의를 해오기 시
작했다. 준설선을 산 뒤에 선실 내부를 한국인에게 편리하게끔 개조했는데
그것이 불편하니 다시 서양식으로 고치라는 것이었다. 그러니 뒤에서 버티
고 있는 강력한 노조 때문에 그들의 불평이나 요구를 그냥 묵살해 버릴 수
도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 번버리 항에서 작업 중인 바로 이 준설선 현대 1호가 월남의 메콩
강에 투입되었을 때, 마침 정 주영이 사이공 지점에서 들은 이야기다.
67년 빈롱에서 베트공의 구정공세를 만났다. 메콩 강변에 위치한 빈롱은
곡창지대로서 원래부터 격전지였다. 구정을 이용한 베트공의 대대적인 공격
으로 준설선 현대 1호는 그 베트공과 사이공 정부군과의 중간 지점에 들어
가게 되었다.
어느 쪽이 정부군이고 어느 쪽이 베트공인지도 분간할 수 없었고, 포화가
너무 심했기 때문에 빠져나갈 수도 없고 해서 일주일 동안을 생사의 기로에
선 채로 그 부근을 표류할 수밖에 없었다.
간판에만 나가면 머리 위로 날아 가는 실탄 소리로 소란하기만 했다. 현
대 1호의 선체에는 바로 그때의 유탄이 지금도 숱하게 박혀 있다.
선장 겸 현장 소장인 양 상서는 선원들이 선실 밖으로 못 나가게 할 생각
으로 선원 한 사람 앞에 월남 돈 5백 피아스터씩을 나누어 주고 노름을 시
켰다. 한 사람만 교대로 망을 보게 하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선실에서 노름
을 하게 했는데, 생사가 오락가락하는 판국에 노름이 될 리 없었다.
밤새도록 노름을 하면서도 불안에 떨던 선원들은 날이 밝아 오자 준설선
을 버린 채 예인선만 타고 사이공으로 탈출하자는 모의를 했다.
"양소장은 어떡하지?"
한 선원이 동료 선원들에게 물었다.
"양소장은 배를 버리고 가자면 틀림없이 안 간다고 할 거야."
"그럼 할 수 없지 뭐. 우리끼리라도 달아나야지 여기서 양소장하고 같이
죽을 순 없잖아."
"야 임마, 아무리 죽는 마당이라도 의리가 있지, 어떻게 지금까지 한배를
타고 있다가 양소장은 죽으라고 내버리고 우리끼리만 가니?"
한 선원이 방금 말한 선원에게 핀잔을 주었다.
"그럼 어쩔 거야?"
"뭘로 뒤통수를 내리쳐서 기절을 시키는 거야. 그래서 업고 가자구."
"좋아, 좋아!"
체격이 좋은 몇 사람이 자고 있는 양 상서를 때려 눕혀 가지고 업어서 내
오기로 했다. 양 상서는 깡다구는 세었지만 체격은 원체 왜소한 편이었다.
소장실 문을 열고 들어간 선원들은 어처구니 없어 해 하면서 서로 얼굴만
쳐다보다가 되돌아 나와 버리고 말았다. 자고 있어야 할 양 상서가 잠옷 바
람으로 일어나 앉아서 천하태평하게 책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양 상서는 무언가 수상한 기미를 느끼고 살그머니 그들을 따라가 보았다.
선원들의 의견이 분분했다.
"아 골통을 까고 업고 나와야지 그냥 나오면 어떡해?"
"임마, 눈깔을 새까맣게 뜨고 있는데 어떻게 골통을 까니?"
"그러지 말구 공갈 협박을 해서 이 배를 그냥 몰구 가자구."
"야, 양소장이 우리 공갈 협박에 떨어질 사람이냐?"
"그럼 여기서 이러구 죽치고 앉았다가 그냥 죽을 거니?"하고 선원들이 수
군거리는 판에,
"뭐야 뭐?"하면서 양 상서가 끼어 들었다. 선원들은 일제히 함구해 버렸
다. 양 상서는 선원들을 야단도 치고 달래기도 하면서 설득하기 시작했다.
사실 메콩 강은 급류가 많은데다가 사이공가지는 거리도 너무 멀기 때문
에 그런 상황 속에서 섣불리 움직인다는 것은 오히려 더 위험할 수도 있었
다.
선원들의 동요는 간신히 막을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식량이 떨어졌다. 다
들 이제는,
"꼼짝 없이 굶어 죽는구나."하고 절망 상태에 빠져들게 되었다. 무작정
구원의 손이 뻗쳐 올때만을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용감한 직원 두 사
람이 작은 터그 보우트를 타고 다섯 시간 동안의 험난한 항해 끝에 메콩강
하류 미토에서 작업 중인 다른 회사의 준설 현장에 닿았다. 두 직원은 그곳
에서 미공병단을 찾았다. 사태의 절박성을 설명한 그들은 미군 C레이숀 5백
상자를 터그 보우트에 싣고 다시 준설선으로 돌아왔다.
터그 보우트가 돌아왔을 때의 감격은 말할 것 없다. 그 C레이숀으로 연명
하는 동안에 어느 정도 포화가 가시자 구사일생으로 적진에서 탈출해 온 준
설선 현대 1호였다.
캄란에 세운다는 소도시 건설공사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공사는 현
대건설 창립 이래의 최대 규모의 공사였으므로 정 주영을 비롯한 회사 간부
진들이 입찰 때부터 총력을 기울여 왔던 터라 공사 낙찰 소식이 전해지자
회사 전체는 축제의 분위기로 휩싸이기까지 했었다.
주월 한국군 사령부에서까지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공사현장의 안전을 지키
기 위해 캄란과 반오이 중간 지점에 주둔하고 있던 백마부대 30연대에서 1
개 소대의 병력을 파견해 주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차례에 걸친
베트공의 기습으로 모든 직원과 기능공들은 불안의 나날을 보내야만 했었
다.
현장의 부식 공급은 주로 반오이 시에서 2백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나트
랑 시에서 조달하고 있었는데 부식 공급차가 도중에서 베트공의 습격을 받
는 일은 다반사였다.
68년 구정공세 때였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전간부 직원들은 현장 캠프
안에 있는 휴게실에 모여 앉아서 내일 일을 진행시키기 위한 공정회의를 하
고 있었다.
별안간 포탄이 작렬하는 소리가 쨍 했다. 총 소리가 빗발쳤다. 한 순간의
일이었다. 두 귀가 멍멍한 가운데 간부 직원들이 휴게실을 뛰쳐 나갔다.
베트공이 쏜 박격포 포탄이 기능공 숙소를 때렸던 것이다. 피투성이가 된
두 명의 기능공이 앰블런스에 실리어 후송되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정 주영은 발주처의 무성의로 늦어진 공기를 따라 잡
기 위해 미국으로부터 하루에 1만 1천 5백장의 블록을 찍어낼 수 있는 최신
블록제작기계를 도입해다가 현장에 설치하고 가장 우수한 작업반을 직접 편
성해서 투입했다.
그때 미국에서 도입했던 블록제작기계를 국내에 들여다가 결국은 훗날 건
재 생산업체로 발전한 동서산업의 전신인 벽제 콘크리트 주식회사를 설립하
기는 했지만, 좌우간 남들이 쉽게 번 돈이라고 생각하는 월남에서조차도 그
와 같은 피의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정 주영은 그런 갖가지 고생과 수모를 당하지 않고 해외에서 일하
는 만큼의 큰일을 국내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하고 오래 전부터 곰곰
이 생각해 오고 있었다.
그러다가 생각해 낸 것이 배 만드는 일이었다. 그는 배 만드는 것을 외국
에서는 건조(Shipbuilding)한다고 하는 말에 착안했다. 건조와 건축이 비슷
하듯이 배를 만드는 일이나 집을 짓는 일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렇다! 일은 국내에서 하고 외국에 내다 팔아서 큰 이익을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선박이다!)
그는 다른 산업플랜트도 생각해 보았지만 아직 우리 기술이 약하니까 단
일 품목인 선박이 제일 낫겠다고 생각했다.
(선채라는 것은 정유공장 탱크를 만들 때처럼 도면대로 구부려 가지고 용
접하면 되는 것이고 그 속에 들어가는 기계도 모두 생산해 내야만 하는 것
이 아니고, 빌딩을 지을 때 냉 온방장치나 엘리베이터 같은 것을 따로 사다
넣듯이 선박 속에 들어가는 기계들도 사다가 도면대로 제자리에 설치해서
끼우면 되는 거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그는 자신이 생겼다. 선박하고 빌딩하고의 차이
점이 있다면 그것은 다만 선박은 움직이는 물체고 빌딩은 고정되어 있는 물
체라는 데까지 착안한 것이다.
그는 처음부터 빌딩만한 몇 십만톤짜리, 몇 천만불짜리 선박을 건조할 생
각이었다.
빌딩만한 선박이 움직인다는 것은 그 큰 선박 안에 조그만 발전소가 하나
있기 때문인데, 발전소라면 그동안 나주 비료공장의 자가발전시설(2만 5천
킬로와트)을 비롯해서 부산의 감천 화력.삼척 화력.영월 제2화력.군산 화력
발전소 등을 시공해 왔고 또 그 시공을 통해서 양성된 기술자가 강전.약전
어떤 계통에든지 다 있었다.
호남비료 나주공장이 착수되던 59년만 해도 우리 나라에는 이렇다 할 공
업시설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따라서 기계설비의 제작은 물론 시공기술까지
도 보잘 것 없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당시 기술회사였던 서독의 루루기
열 공업주식회사의 파견 기술자들은 한국의 용접 기술까지도 믿지 못해서
가스 탱크를 용접하는 데 하루에 18미터 이상은 못 하게 했었다.
태국 고속도로 공사 때는 마카담 롤러라고 하는 손바닥으로 땅을 다지는
식의 장난감 같은 기계를 가지고 나갔다가 유럽 사람들이 진동식 자동 롤러
기계를 쓰는 것을 보고 한 대만 견본으로 사다가 뜯어보고는 부품들을 구입
해서 우리 손으로 만들어 쓰지 않았는가. 콤프레서도 믹서도 필요할 땐 우
리가 우리 힘으로 만들어서라도 써 왔다.
정 주영은 배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확신이 섰다. 그러나 당장은 무엇보
다도 자본도 없고 기술도 없었다. 그래서 정 주영은 차관도 얻어 들이고 또
배를 같이 만들 사람을 찾아서 일본으로 건너갔었다.
그때가 69년 1월. 일본의 조선업계를 쫓아다니다가 미쓰비시 중공업에서
흥미를 느끼게 되자 그는 곧 귀국해서 부랴사랴 구체적 안을 작성해 가지고
다시 배를 만들게 된다는 부푼 꿈을 안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때마침 일본은 중공과의 국교정상화 기본원칙인 주사원칙에 묶여 있는 때
였으므로 미쓰비시는 큰 중국 시장에 눈을 돌린 채 정 주영의 조선소 건설
안은 아예 거들떠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정 주영은 하는 수 없이 일본 정부에 지원을 요청해 보았다. 그러자 일본
정부에서는 통상성의 관계관을 한국에 파견해서 타당성을 조사시켰다.
조사결과는 한국의 기술수준과 시장성을 감안할 때 최고 조선 능력은 5만
톤에 불과하므로 그 이상의 대형 선박을 건조하는 것은 사업 타당성이 없다
는 결론이었다. 하지만 정 주영이 처음부터 겨우 5만톤짜리 배나 만들자는
생각으로 조선소 건설을 발상하거나 구상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알고 있는
세계의 선박시장 전망은 매우 밝았다.
영국의 램버트 시장조사기구에서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세계적인 에너지
수요의 확대에 따른 유류 이동량의 급증 추세로 세계의 신규 선박 수요량은
70년과 75년 사이에 7천 6백만톤, 75년과 80년 사이에 9천 5백만톤, 80년과
85년 사이에는 1억 1천 9백만톤으로 증대될 것이라는 예측이었다.
그러나 세계의 기존 조선 능력으로는 그와 같이 격증하는 선박의 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영국과 서독 같은 선진국에서는 극심한
노동력 부족과 노임 상승으로 계속적인 선박 수요의 증가 추세에도 불구하
고 조선업은 사양산업화 경향을 나타내고 있었다. 따라서 유럽 지역에서는
저렴하고 유능한 노동력을 풍부히 보유하고 있는 스페인.유고 같은 나라가
신흥 조선국으로 등장하고 있었다.
우리 나라 역시 적응력이 뛰어나고 저렴한 노동력이 풍부했다. 정 주영은
외국의 기존 선진 조선소와 제휴하고 그곳의 관리자들과 기술자들을 초빙해
서 초기 단계의 미경험만 보완한다면 오래잖아 한국은 세계 조선 시장에서
가장 강력한 경쟁력을 갖춘 조선국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69년 10월, 정 주영은 이스라엘의 팬 마리타임 회사와 노르웨이의 아커
그룹과 함께 합작으로 투자할 것을 계획하고 카나다의 에이커스 기술회사에
타당성 조사를 의뢰했다.
팬 마리타임 회사는 이스라엘 국회의원을 지낸 바 있는 메리도가 경영하
는 해운회사였다. 그 메리도가 첫번째 선박 수주상담자로 나타났다. 노르웨
이의 조선회사인 아커 그룹의 시엠과 같이 한국을 방문한 메리도는 50대 50
의 비율로 조선소를 설립하자고 제의했다. 그 제의와 함께 그는 기술을 자
기네가 제공하고 3천만불짜리 유조선 30척을 자신이 책임 지고 팔아서 한
척에 1백만불식의 순익을 정 주영에게 보장하겠지만 조선소의 운영권은 자
기네들이 장악한다는 조건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그때 국제 선박시장 정세에 어두웠던 정부 당국자는 그보다 더 나은 조건
이 어디 있겠느냐고 하면서 정 주영으로 하여금 메리도의 제의를 받아들이
도록 종용했다. 그렇지만 정 주영은 그 제의를 점잖게 거부했다. 돈 벌어서
죽을 때 짊어지고 갈 것도 아닌 데 운영권을 남에게, 그것도 외국인에게 맡
기는 그런 사업은 안하면 안 했지 하고 싶지 않았다.
그후 정 주영은 당초의 합작투자 방침을 포기하고 장기 저리 차관을 도입
해다가 독자적으로 조선소를 설립한다는 방향으로 방침을 바꾸고 그에 따른
차관과 기술도입 선을 유럽 쪽에서 구해 보기로 했다.
차관도입에 의한 조선소 설립으로 방향을 바꾼 정 주영이, 그래서 지난 3
월의 조선사업부를 설치하고 여름에는 울산 내항 내의 염포리에다 부지 25
만평을 사들였던 것이다. 그래 놓고 정 주영은 지난 12월에, 그러니까 조선
사업부를 설치한 지 10개월 만에 차관도입선과 기술도입선을 찾아보기 위해
서 부사장 권 기태를 대동하고 유럽 여행 길에 올랐던 것이다.
그가 조선소를 지으려고 한다는 소문은 이미 관계는 물론 경제계에도 널
리 퍼져 있었다.
"조선소를 한두 푼 갖고 짓는 건가?"
"자동차 공장을 하나 짓더니만 배 공장을 짓겠다고 나서니, 또 비행기 공
장 짓는다고 안 하겠어. 하하......"
"아냐, 그래도 정회장, 그양반 해 낸다면 해 내더라구."
"허기야 뭐, 또 어디 가서 차관이나 얻어 오면 안 될 것도 없겠지."
"하여간 알아 줘야 할 양반이야. 정부가 중공업을 육성한다 하니까, 보라
구. 날쌔게 차관선을 찾으러 나선 거."
경제계 일각에서까지도 정 주영이 하는 사업이라면 으례 정부 시책과 연
관을 지어 생각하기가 일쑤였다.
"차관은 누가 그렇게 맘대로 준대? 정회장 조선소 짓는다는 얘기는 재작
년부터 해왔어."
"조선소는 몇 백만불 정도 갖곤 안 되겠지?"
"단양 시멘트공장도 4백 몇 십만불인가 들었어."
"그럼 이번엔 몇 천만불 가져야 하게?"
"정회장 의욕은 좋지만 잘 안 될 걸."
"조선소 질 땅은 어디다 사 놨는가?"
"땅만 있으면 뭘 하나? 돈이 있어, 기술이 있어?"
"하긴 지금 하고 있는 조선공사도 잘 안 되는 판인데....."
경제기획원의 관계자들도 정 주영이 조선소를 건설한다는 데 대해서는 회
의적이었다.
"현대건설, 저희들이 토목공사나 하고 빌딩이나 지었지 배를 어떻게 만들
어?"
"정부에서 조선공업을 육성한다니까 이제 토목쟁이들까지 한몫끼자고 하
니......."
"종이배도 하나 만들어 본 일이 없는 친구들이 원....."
"아, 만들기야 만들겠지."
"만들긴 어떻게 만드나?"
"만들기야 어떻게 두들겨 만들면 만들겠지만 그 만든 배가 뜨느냐 가라앉
느냐가 문제 아니겠어? 하하......"
조선업계의 반응이었다.
"정말 조선소는 왜 하려고 그러시는지 모르겠단 말야. 그냥 자동차 공장
이나 잘 키워 나가면 편하실 텐데 말야."
"그 어른이 언제는 편한 생각하시는 분이야? 일하는 재미로 산다는 어른
인데."
정 주영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일을 하나의 재미로 알고 해 오고 있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면 어떤 것이든지 누구한테나 크든 작든 항상 재미로 묻
고 배웠다. 그러기 때문에 그의 생각은 나이를 먹어 가면서도 계속 발전해
가고 있었다.
"우리 회장은 옛날부터 일을 꾸미고, 안 되는 일은 되게끔 풀어 나가고
하는 게 취미라구."
"그게 바로 우리 회장님의 도전력이고 개척정신이라는 겁니다."
"하긴 뭐 우리 회장님한테서 그런 박력 빼 놓으면 사실 아무것도 없지."
"하지만 될 만한 일에 도전을 하셔야지. 이번 일은 좀......"
"99퍼센트가 불가능할 땐 해 내라구 하셨어."
"우리 회장님이 무슨 나폴레옹인감?"
회사 내부에서도 이번 일이 꼭 이루어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
다.
그 시간에 정 주영은 권 기태와 함께 북해 연안에 위치한 노르웨이의 아
커 그룹의 조선소를 방문하러 가는 길이었다.
아커 그룹과의 합작투자 얘기는 작년에 끝난 일이지만 대체 유럽의 조선
소는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이나 한번 하자는 것이었다. 일본 조선소는 더러
돌아보았지만 아직 그는 유럽 쪽 조선소는 보지 못했었다.
내일 모레가 크리스마스라고 해서 전유럽이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들떠 있
는 때였다. 때가 때니 만큼 조선소에 일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을 테니까 그
는 대충 겉만 훑어보고 나서 바로 다음 행선지인 서독으로 날아갈 작정이었
다.
몹시 춥고 바람이 부는 날이었다.
현장에 도착한 정 주영은 큰 감명을 받았다. 한산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조선소는 활기에 넘치고 있었으며 그 추운 날씨는 밤일까지 하는 기능공들
의 뜨거운 열기로 오히려 훈훈했다.
벌크(bulk)선을 만드는데 다른 조선소에서 블록을 제작해다가 조립하고
있는 중이었다.
각자 맡은 자리에서 일을 하고 있는 기능공들의 모습은 크리스마스에 들
뜬 바깥 분위기와는 딴판으로 진지하고 숙연하기까지 했다.
바로 그 순간 정 주영은 강력하게 밀어붙이면 한국에서도 틀림없이 해낼
수 있다는 확신을 아주 굳혀 버렸다.
그는 세계에서 한국 사람처럼 착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
게 바탕이 착하고 천성이 곱고 부지런하고 재주 있는 한국 사람이 못 살아
야 할 이유가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한국 사람은 잘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 잘살 수 있다고 믿었
다. 지금까지는 한국 사람의 잠재능력을 체계적으로 개발해 오지 못했기 때
문에 여태껏 세계 선진국 대열에 끼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한국
의 발전이 늦는다고 통탄하면서 애타하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두메 산골에서 세 끼 밥 먹고 살기가 어려워서 집을 뛰쳐나왔던 소년 정
주영이 어느덧 50고개를 넘어서면서부터는 못 사는 나라와 민족을 걱정하게
되었다.
아직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젊은 시절의 정 주영은 몸만 건강하면 행
복은 내 마음 속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그는 심지어 몸져 누
워 있는 환자라 할지라도 본인 스스로가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불행하지 않은 것이라고까지 생각했었다.
그랬던 그의 행복관이 변해서 지금은 내가 행복하려면 내 주위 사람하고
다 같이 행복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언젠가 어느 여성잡지 살롱의 여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행복관
을 다음과 같이 피력한 적이 있었다.
"사람은 자기 혼자서는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읍니다. 자기 혼자 아무리
좋은 일이 있더라도 주변이 불만으로 가득 차 있으면 행복할 수가 없읍니
다. 가정에서도 남편이 설령 출세를 하고 돈을 벌었다고 해도 아내나 자녀
들이 불만에 꽉 차 있다면 행복할 수 없지요? 가정이나 사회나, 어디나 불
만과 불평, 증오와 의혹이 가득 차 있을 때는 불행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행복하게 살아 나가는 길은 자신은 물론, 주변의 불평 불만이 없어지도록
노력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위 사람들을 어떻게 기쁘게 해줄 수
있는냐가 행복의 열쇠지요."
이미 지금의 정 주영은 나 혼자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던 청년 정 주영
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 그가 경영하는 사업도 자기 혼자 마음대로 하고
싶으면 하고 내키지 않으면 그만둘 수 있었던 쌀가게나 자동차 써비스공장
같은 것이 아니었다. 이제는 소홀히 하거나 자칫 그릇 판단하거나 해서 만
약 현대그룹이 도산이라도 하는 날에는 그의 선친의 말대로 지금은 정말 하
루 아침에 수천 수만의 떼거지가 날 것은 물론이고 나라의 경제 질서가 흔
들릴 판국이었다.
하기 때문에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익을 생각하기 전에 공익을 생
각하게 되었고 사업을 생각할 때는 기업을 생각하게 되었으며, 그러는 사이
에 자신의 기업이 민족 장래와 국가발전에 중대한 연관성을 갖는다는 생각
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일찌기 애국자가 된다거나 자본주가 된다는 생각은 해본 일이 없었
다. 다만 복흥상회에서 쌀 배달을 하던 시절, 시골에서 읽은 신문 연재소설
<흙>속의 주인공인 허 숭처럼 불쌍하고 가난하고 억울한 농민들을 위해서
변호사가 되어 보겠다는 가당찮은 생각을 하고 법정통신 강의록으로 열심히
공부를 하면서 변호사 예비시험을 쳤다가 떨어진 일은 한번 있었다.
그 일 말고는 오직 남보다 잘 살아 보겠다는 일념만으로 일해 온 그였다.
최근에 어느 대학생이,
"정회장님은 어떻게 해서 대한민국의 제일 재벌이 되셨읍니까?"하고 물었
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었다.
"등산하듯 한 거예요. 등산을 하려면 좁은 길, 벼랑길, 험한 계곡......
여러 가지 길이 있잖아요? 그 길을 따라서 열심히 올라간 거예요. 남을 돌
아볼 시간도 없었고 뒤 돌아볼 시간도 없었던 거지요. 그렇게 부지런히 발
밑만 바라보고 올라가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정상까지 올라오게 된 거
지요."
어느 대학생은 정 주영을 만나보고 나서 재벌 같은 냄새는 하나도 안 나
더라고 하면서,
"남대문 시장에 데려다가 리어카 옆에 앉혀 놓으면 틀림 없는 리어카군
같더라."고도 했다. 사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는 양복 바지도 잘 다려 입으
려고 하지 않았다. 구두도 잘 닦아 신지 않았다. 지금도 강원도 산골에서
물리도록 먹었던 감자떡과 옥수수를 제일 좋아했다.
어느 여류 작가는 그를 가리켜 겉으로 보기에는 영락없는 촌영감이지만
대화를 나누노라면 사나이의 미학을 느끼게 하는 위인이라고도 했다.
그는 자신이 거느리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어느 계층의 어느 부류의 사
람들에게도 따뜻하고 친절하고 겸손했다. 이솝의 우화 중에서 행인의 옷을
벗긴 것은 강풍이 아닌 따스한 태양이었음을 그는 어려서부터 잘 알고 있었
다.
서독에 가서 정 주영이 처음 접촉한 회사는 아베게서 조선소였다. 아베게
서 조선소는 선박 도면과 용역비조로 5백 80만불을 요구하고 다시 선박 한
척당 판매 수수료로 선가의 5퍼센트를 요구했다. 이에 대해 정 주영은 용역
비가 비싼 대신 현대가 만드는 배에다 아베게서 조선소의 상표를 사용해서
판매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서독측은 자기네 조선소의 권위를 실추시킬
염려가 있다고 거절하는 것이었다.
"권부사장은 어떻게 생각하나?"
"판매수수료 5퍼센트는 터무니 없이 비쌉니다."
"그렇지? 우리 나라 기업들의 평균 매출 이익률이 겨우 5퍼센트 안팎 아
냐?"
"이왕 나오신 김에 다른 데를 좀더 접촉해 보시죠, 회장님."
"그래, 영국 쪽으로 한번 건너가 보자구."
정 주영과 권 기태는 영국의 애플도어사를 찾아갔다. 현관 문에는 회사
이름을 상징하는 사과가 그려져 있었다. 애플도어사는 실내 도크를 갖추고
특수 선박만을 건조하는 유명한 조선기술회사였다. 애플도어사는 일반 선박
건조회사인 스코트리스고우사를 소개했다. 스코트리스고우사는 매달 1만 5
천톤급 선박 한 척씩을 건조해서 팔고 있는 유력한 회사였다.
그 무렵 영국이나 독일은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지역에 적극적인 경제진
출을 꾀하고 있는 시기였다. 그때 마침 현대건설에서는 고리 원자력발전소
를 착공한 때였으므로 어디 가서든지 원자력발전소를 시공하고 있는 현대건
설이라고 하면 상대방은 머리를 굽신거릴 정도로 알아 주었다.
사실 알고 보면 고리 원자력 1호기 공사의 주 계약자는 미국의 웨스팅 하
우스사였고 그 밑에 하청계약자인 영국 회사가 둘 있었는데 그 중의 한 회
사는 2차계통 기기공급 및 설치공사를 맡은 잉글리시 이렉토릭사였고 다른
한 회사는 토목공사를 담당하고 있는 죠지 윔피사였다.
거기에 현대는 단지 그들 외국 기술회사에 노무를 제공하는 노임 하청 형
태로 참여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속사정까지야 알리 없는 영국 사람들은 아마 현대도 자기 나라의 잉
글리시 이렉토릭사나 죠지 윔피사처럼 동격으로 원자력발전소 건설에 참여
하고 있는 줄 알았으리라.
사실상 현대는 모든 분야에서 그와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기술을 축적해
왔었다.
해방 후, 북한의 단전 조치로 서울 일원의 당면한 전력난을 해소하기 위
해 정부가 당인리 화력발전소를 미국의 벡텔사에다 턴 키 베이스(turn key
base)로 발주했을 때였다. 그때는 미국 사람들이 용접공까지도 제 나라 사
람들을 데려 왔기 때문에 노임 하청조차도 받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어떻게 기능 인력을 제공할 기회가 닿아서 용접을 하게 되었다.
자동차 수리공장에서 땜질을 하던 용접공들이었기 때문에 싼값으로 일을 잘
해 낼 수 있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다음의 감천 화력 때는 하청을 받다가 영월 화력에서
는 주 계약자가 되고 군산.인천 등 그동안에 건설된 주요 화력발전소에 참
여해서 국내 건설업체 중 가장 많은 발전소 시공실적을 쌓게 됨으로써 그나
마의 고리 원자력발전소 공사에서도 다른 경쟁업자들을 물리치고 노임 하청
이라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한몫 얻어 낀 원자력발전소 공사에서 현대 기술진은 말할 수 없는
기술 후진국의 서러움을 겪는다. 그러나 그들은 좌절하지 않고 기술자립이
라는 사명감과 불굴의 개척정신으로 원전 건설 기술을 꾸준히 축적함으로써
70년대 후반에 이르러는 고리2, 월성3, 고리5.6, 영광7.8호기 등의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주도해 간다.
어쨌든 정 주영은 조선사업을 발상한 지 3년 만에 영국의 애플도어사 및
스코트리스고우의 조선소와 기술, 판매협조 계약을 체결하는 데 성공했다.
그 계약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1. 조선소 설계 레이 아웃(lay out)및 설계도면 등 모든 기술 사항을 제
공하는 기술 용역비는 1백 70만불로 한다.
2. 애플도어사는 울산 조선소에서 건조하는 12호 선박가지의 판매 또는
판매 융자 알선을 담당하며, 현대는 그들 선박에 애플도어 또는 스코트리스
고우사 중 현대가 선택하는 상표를 사용하되 선박 1척당 수수료는 선박 제
조 원가의 0.5퍼센트를 지불한다.
3. 현대는 애플도어사와 스코트리스고우사는 연수 협정에 따라 현대가 파
견되는 전문 기술직 및 관리직 요원 약 60명에게 조선기술 및 관리능력을
습득케 한다.
4. 애플도어사는 생산계획, 원가계산 등 조선소 운영에 관한 자문을 제공
한다.
5. 일정기간 외국인 관리직 및 전문 경영자와 전문 기술자를 제공한다는
것들이었다.
이러한 조건은 당시의 국제관례상 파격적인 것이었다. 더구나 애플도어사
측은 기술 용역비 1백 70만불을 일시불로 내라는 것이 아니고 배 12척을 건
조 판매할 때까지 분할 지불하도록 배려를 해주었던 것이다.
그해 여름부터 애플도어 기술진이 한국에 나와서 정 주영이 작년에 매입
한 울산 내항 염포리 일대의 조선소 부지 조사를 시작했다.
조선소를 짓기에 적당한 지역인지 아닌지 하는 것을 과학적으로 진단하는
작업이었다. 영국에서 내한한 기술진에는 조선사업부의 건설담당 과장인 전
갑원이 붙어 있었다.
전 갑원은 정 주영이 소양강의 콘크리트 댐 계획을 사력 댐으로 바꿀 때
권 기태와 함께 설계를 담당한 바 있었던 공채 7기 사원으로서 지금은 본사
의 관리담당 이사로 있는 이 명박의 동기이기도 하다.
그는 입사하자마자 군산 화력발전소에 배치됐었다. 그가 회사내에서 일약
유명하게 알려진 것은 바로 그 현장에서였다.
공장 굴뚝의 용역설계를 검토하는 중 설계상의 큰 오류를 발견해 냈던 것
이다. 굴뚝의 하중에 비해서 기초의 파일(말뚝)설계가 약하게 잘못 설계되
어 있었다.
그 사실을 현장 감독에게 지적하고 다시 설계를 하게 함으로써 공사 수주
액을 배로 늘려 놓았었다.
그후, 그는 월남으로 나가 준설선 현대 2호에서 근무하다가 69년에 귀국,
김포 국제공항 확장공사 현장을 거쳐 지금은 본사의 조선사업부 일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
전 갑원은 속이 끓었다. 정회장에게 벼락 맞을 생각을 하면 입술이 바짝
바짝 탔다.
볼링을 해서 기초 암반을 조사해 본 결과 조선소 부지로서는 부적당하다
는 판정을 나왔던 것이다.
전 갑원은 애플도어 기술진에게 몇 군데 더 볼링해 보자고 애원 하다시피
매달렸다.
끝내 조선 부지로서의 부적 판정이 나는 날에는 누구한테 욕 얻어 먹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진짜 큰일이었다. 기 쓰고 사 놓은 그 25만평이나 되는
넓은 땅을, 그것도 농토도 아닌 쓸모없는 개펄을 장차 뭐에 이용할 것인가
하는 것이 더 큰 걱정이었다.
전 갑원이 너무 사정하는 바람에 애플도어 기술진은 다시 해 보나마나 한
볼링을 또 두서너 군데 더 해 보았다. 역시 결론은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다.
애플도어 기술진은 볼링 시설을 철거하기 시작했다. 전 갑원으로서는 어
쩔 수 없었다. 남은 일은 본사에 보고하는 일밖에 없는 데 차마 뭐라고 보
고할 수가 없었다.
처음 볼링 결과를 보고했을 때도 정회장은 어떤 일이 있어도 영국 기술진
을 납득시켜서 그 자리에다 꼭 조선소를 짓게 하라는 엄명이 있었다. 그러
면서 정회장은 대한민국 안엔 조선소 자리로 염포리만한 곳이 없다고 했었
다.
그런 정회장에게 전 갑원으로서는 도저히 틀렸다는 보고를 할 용기가 없
었다.
(에잇! 죽기 아니면 까무라치기다!)하고 그는 본사에 전화를 걸기 위해
현대자동차 사무실로 갔다.
조선소 부지로 매입한 땅은 바로 현대자동차 공장에 붙은 땅이었다.
그가 자동차공장 정문을 들어서려는데 찍하고 승용차 멎는 소리가 뒤에서
났다. 문득 뒤돌아본 그는 아찔했다. 정회장이 타고 다니는 코티나 승용차
였다.
정 주영은 그때 현대자동차 공장에서 나온 코티나 승용차를 타고 다녔다.
"이리 탓!"
어디서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 정회장의 목소리는 벌써 첫마디부터 화가
나 있었다. 전 갑원은 얼른 앞칸에 올라 탔다.
"뭣하러 가는 거야?"
"사무실에 전화 좀......"
"병신같이......나가 죽든지, 집에 가서 농사나 짓든지 해! 아 그까짓 영
국 기술진 하날 납득시키지 못해?"
그런 때는 그저 날 죽이시오 하고 잠자코 있는 것이 장땡이라는 것을 현
대 사원들은 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내내 욕만 얻어 먹으면서 서울로 올
라오고 있는 것이었다. 욕이라고 해 봤자 자주 들어오는 병신 소리였다.
"이봐, 전과장.....왜 뒤도 한번 안 돌아 봐, 병신같이!"
그렇게 욕을 얻어 먹으면서도 뒤 한번 안 돌아보니까 이젠 왜 돌아보지도
않느냐고 욕이었다. 차만 타면 잠을 자던 정회장이 오늘은 잠도 안 자고 욕
이었다. 어쩌다가 좀 잠잠해서 전 갑원이 힐끔 돌아볼라치면 그는 자다가도
눈을 번쩍 뜨고 욕이었다.
정 주영은 그만큼 낭패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 6천 3백만불이
라는 내외자를 어디서 어떤 방법으로 동원해야 할지 막막한 판국에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 모아서 사놓은 부지조차 글렀다면 정녕 일은 글른 성싶었
다.
(에라, 잠이나 자자......빌어먹을..........)
정 주영은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앞 시트 사이로 다리 하나를 쭉 뻗고 등
을 뒤 시트로 젖혔다.
그러고도 그는 바로 오늘 아침에 확정한 조선소 창업자금을 어떤 방법으
로 동원할 것인가를 생각하느라고 쉽게 잠 들 수가 없었다.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고 했는데 정 주영의 이번 조선소 설립계획은
각계(관계.재계.경제계)의 여론대로 확실히 무모한 시도에 그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유무상통을 수없이 체험해 온 정 주영은 유는 무에서 창출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슬기와 지혜의 거인
정 주영은 조선소 창업자금을 6천 3백만불로 확정하고 그 가운데 4천 3백
만불은 현금 및 자재 차관 등의 외자로 충당하고 나머지 2천만불을 내자로
조달할 게획이었다. 내자 2천만불 가운데 1천만불은 현대 자체 자금으로 충
당하고 나머지 1천만불은 정부의 지원 융자금을 신청할 작정이었다.
외국에서 빚을 얻겠다는 4천 3백만불은 당시의 공정환율인 3백 99대 1로
따져도 우리 나라 돈 1백 72억원이었다. 그 1백 72억원은 그때 현대의 총재
산 1백 36억원을 훨씬 넘는 돈이다.
하기야 정 주영은 일찌기 수중에 1천원을 가졌을 때 남의 빚으로 5천원짜
리 아도 써비스공장을 인수한 일도 있었다. 그때는 다행히 삼창 정미소의
오 윤근이 그를 신용했기 때문에 가능했지만, 과연 이번에는 한국정부가 믿
느냐 하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외국의 은행이나 관계회사들이 정 주영을 신
용할 것인가 하는 것이 차관도입을 성공시키느냐 못 시키느냐의 열쇠였다.
그는 이미 71년 초에 설치한 런던 지점을 통해서 몇 달 전부터 차관도입
교섭을 추천해 오고 있었다. 그러나 한 나라에서 민간 베이스로 몇 천만불
을 한꺼번에 기채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거의 불가능한 일
이었다.
그래서 정 주영은 조선소 건설에 필요한 각종 기자재를 생산하는 나라부
터 조사케 하고, 그 생산국 별로 차관도입 선을 다변화 시킬 것을 런더 ㄴ
지점에 지시했다.
영국.프랑스.서독.스페인 등의 차관도입 선이 구체적으로 떠 오르기 시작
했다.
그런데 정 주영은 그 차관을 장기.저리.분할 상환 조건으로 도입할 생각
이었다. 이를테면 차관의 원리금은 배를 만들어서 팔아 가지고 거기에서 남
는 이익으로 갚아 가겠다는 배짱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대꼬바리 마음이지 엿장수 마음은 아니었다. 아까도 말했
지만 4천 3백만불이라는 막대한 돈을 한낱 후진국의 민간기업이 국제금융시
장에서 빚내 온다는 것은 꿈 같은 이야기다.
그래서 정 주영은 런던 지점을 통해서 영국의 버클에이 은행을 간사은행
으로 하고 프랑스의 엥도 수에즈 은행, 스페인의 코페이사, 서독의 프란츠
키르히펠트사 등을 끌어 들이는 컨소시엄(차관단:consortium)을 만들려고
공작했다.
차관단을 만들려는 그의 공작은 곧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그러자 그는
급히 런던으로 날아갔다. 그때가지도 차관도입 선에서는 그가 제출한 조선
사업계획서는 들여다보지 않고 있었다.
현대건설은 고사하고 도대체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배를 만들어 낸 실적이
있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정 주영으로서는 대답에 궁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까지 한국이 건조해
낸 선박으로는 대한조선공사가 미국의 주문을 받고 만든 1만 7천톤짜리가
최대규모의 것이었다. 물론 현대건설은 한국 조선업계 말대로 아직 종이배
도 만들어 본 실적이 없다. 그런 주제에 그는 뱃심 좋게 25만톤급 이상의
대형선박까지도 건조하겠다는 계획서를 내놓고 있는 것이었다.
미스터 정의 사업의욕은 좋지만 한국의 조선 능력으로 보아서 그런 대형
유조선을 만들 만한 기술인력이나 중간 관리직이 없잖습니까. 그러니 미스
터 정이 제출한 이 사업계획서는 근본적으로 타당성이 없읍니다.
그래서 검토할 가치가 없기 때문에 사업계획서는 들춰 보지도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영국을 비롯한 서독.프랑스 등의 차관 교섭 대상국
정부에서는 이미 주한 자국 대사관의 상무관들을 통해서 현대건설의 선박
건조 능력에 대한 조회를 마쳐 놓고 있었는데, 그 조회 보고서 내용은 모두
하나같이 부정적인 것들이었다.
일단 호텔로 돌아온 정 주영은,
"이거 큰일 났지?"하곤 동행한 백 충기를 바라보았다.
백 충기는 그전에 해양대학을 나왔다고 해서 66년에 정 주영이 일본에서
구입한 중고 준설선 가네시로마루(금성환:현대 1호)를 월남으로 몰고 가서
거기서 항만 준설공사를 한 적이 있는데 66년에는 다시 그 현대 1호를 포항
으로 몰고 와서 포항 신항 준설 공사를 하다가 조선사업부에 발탁된 중견사
원이었다.
그는 조선사업부로 옮기자마자 정 주영과 함께 조선소 부지를 보러 다녔
는데, 울산항 내 염포리 일대의 집반이 약하다는 것가지는 모르고 바람이
없어서 방파제를 쌓을 필요가 없겠다고 해서 정 주영이 그 개펄을 사자고
했을 때 그저 덮어놓고,
"좋습니다!"하고 한마디 한 죄로 지금도 가끔 병신 소리를 듣는 처지였
다.
정 주영은 부하 직원들에게 무슨 일을 시켰을 때 안 된다고 하는 말을 제
일 싫어했지만 자기 의견에 대해서 덮어 놓고 좋다는 식의 지당한 말씀주의
자들도 싫어했다. 그는 부하 사원들이 무슨 일에든지 애로사항은 솔직히 말
하되 수행해 주기를 바랐다. 맹종이 아닌 비판적인 입장에서 순종하기를 바
랐다.
말로는 큰일 났다고 하면서도 정 주영의 얼굴은 조금도 큰일 난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옷을 훌훌 벗어던지도 목욕할 준비를 했다. 백 충기는 재빨리
욕조에 더운 물을 틀어 놓았다.
정 주영은 해외출장을 할 때도 비서가 수행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때
그때 출장 목적에 따라서 필요한 사원들을 데리고 다녔다. 호텔 방도 독방
은 쓰지 않았다. 그는 여행하는 동안에 호텔에서 비싼 잠을 자야 하는 것을
제일 억울해 했다.
다음 날부터 정 주영은 열렬한 설득작전을 전개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는 일찌기 신설동에서 무허가 써비스공장을 하던 시절에 유치장에 잡아
넣겠다고 공갈하는 일본 순사도 설복한 일이 있었다. 그때 이미 그는 진실
과 성실은 모든 것을 초월해서 이길 수 있다는 신념을 체득한 바 있었다.
그의 끈질긴 설득은 주로 그가 차관단의 간사은행으로 지목했던 버클레이
은행 관계자들에게 집중되었다.
첫날은 현대건설의 성공적인 해외건설 실적을 들어 설득했다. 다음 날은
외국 차관으로 건설된 단양의 시멘트공장이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사실
을 들어 설득했다. 또 다음 날은 고급 기술 인력을 요하는 화력발전소 건설
실적을 비롯한 각종 플랜트 건설실적을 들어 설득했다. 그리고 또 다음 날
은 우수하고 저렴하고 풍부한 한국의 노동력을 들어 설득했다.
정 주영의 열성적인 설득으로 부정적이고 소극적이던 버클레이 은행 관계
자들이 차츰 적극적인 관심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어느 날 버클레이 은행 관계자는 정 주영에게 현대건설 10년간의 대차대
조표를 제출해 달라고 요구해 왔다. 현대건설이 그간에 어떻게 성장해 온
기업인가를 알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때가 한국에서는 영국의 애플도어사 기술진에 의해서 새로 매입한 울산
외항의 조선소 부지 조사를 막 끝낸 다음이었다.
울산 내항에 사 놓았던 염포리 일대의 개펄이 조선소 부지로서 부적격하
다는 판정이 내리자 회장한테 욕만 잔뜩 얻어먹고 서울로 올라왔던 전 갑원
은 애플도어 기술진을 철수시키기 위해 다시 울산으로 내려갔었다.
애플도어 기술자들은 경주 불국사 관광을 가고 호텔에 없었다.
"딱한 친구들이군. 지금 가 봐야 한참 공사 중일 텐데 뭘 볼 게 있다
구......."
전 갑원은 혼자 중얼거리면서 작년 5월에 착공된 불국사 복원공사 현장에
있다가 온 한 동료 사원의 고충담을 머리 속에 떠올렸다.
고건축물을 복원하는 공사니만큼 그곳에는 오히려 현대장비가 소용없다고
했었다. 지름 1.5미터 길이 10미터짜리 대형 원목을 찾아 내느라고 석달 동
안이나 전국 산판을 누비다가 강원도 양양 지방의 깊은 산중에서 간신히 구
하기는 구했는데 그것을 잘라내 가지고 차가 들어갈 수 있는 데까지 끌어
내리는 데 만도 한달이 걸렸고, 의정부 뒷산에서 지름 2.4미터 길이 8미터
짜리 석재를 채취해서 현장까지 운반하는 데는 두달 반이나 걸렸다고 했었
다.
현대건설 안에 편하게 놀고 먹을 자리는 한 군데도 없었다. 그래도 현대
건설 직원들은 어떤 환경에서나 자기에게 맡겨지는 임무에 철저하게 충실했
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현대건설 직원들을 보고,
"너희들은 다 정 주영이 사위들이냐?"하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또한 정 주영은 가끔 외부 사람들로부터 현대건설 직원은 정말 똑똑하고
영악스럽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럴 때면 그는,
"난 신입사원 뽑을 땐 남자 사원은 내 사위감을 고르듯 하고 여자 사원은
며느리감을 고르듯 했지요."하고 응수하곤 했었다. 사주와 사원간의 그와
같은 정신적 유대감이 없었던들 오늘의 현대건설로 성장할 수 없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전 갑원은 호텔 프론트에다 불국사에 간 그들이 돌아오거든 서울로 올라
갈 준비를 하게 해 달라는 부탁을 한 다음 같이 내려온 동료 사원들과 함께
방어진으로 나갔다.
그대로 철수하고 올라가야만 한다는 생각을 하니 허탈하기도 했고 또 정
회장한테 야단 맞은 생각을 하면 아직 화도 나고 해서 방어진의 명물인 고
래회에다 소주라도 한잔 하고 싶어서였다.
거나하게 한잔 하고 나오는데 울산 외항의 전하만.미포만.일산만이 연접
된 해안에는 해송이 한껏 멋을 부리는 천해의 해수욕장과 올망졸망하게 아
늑한 어촌들이 마치 한폭의 풍경화인 양 한눈에 클로즈업되는 것이었다. 구
체적으로 어떻다고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내항의 염포리 개펄에 비하면 조
선소 부지로서는 그곳이 바로 명당이라는 생각이 번개처럼 스쳤다.
전 갑원은 즉시 울산으로 나와서 서울로 철수시키려던 애플도어 기술진을
방어진으로 끌고 나갔다. 그리고 이튿날부터는 그들로 하여금 미포만 일대
의 지질과 기초 암반을 조사케 하는 한편 그는 해도를 구해다가 해안의 입
지 조건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물론 본사하고는 아무런 협의도 거치지 않은
그의 독단적인 행동이었다.
회사를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잘못될 경우의 책임 같은 것은
별로 심각하게 생각지 않았다.
기초 암반만 튼튼하다면 해도상으로만 봐도 염포리 개펄보다는 산에 둘러
싸인 포구였기 때문에 바람도 적을 것 같았고, 외항이기 대문에 조선소의
해상 여건도 내항보다는 단연 나을 것 같았다. 지금 건설 중인 포항의 종합
제철소와의 거리도 염포리보다는 가깝고, 그리고 이쪽은 낮은 해안이므로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이 무한대라고 그는 판단했었다.
사흘 동안 계속된 조사 결과는 암반도 양호하고 토질도 좋다는 결론이었
다. 좋다는 결론이 내리자 그는 슬그머니 겁이 나기 시작했다. 올라가서 회
장한테 보고를 했다가 시키지 않은 짓을 왜 했느냐고 또 야단이나 맞지 않
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보고를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회장실을 노크하고 들어가서 경과보고를 했다.
보고를 듣고 난 정 주영은 벌컥 화를 냈다.
"병신같이 그럼 그냥 올라오면 어떡해?"
"예?"
전 갑원은 어리둥절해 했다.
"그럼 그대로 거기 눌러 앉아서 땅을 흥정하고 사 들여야 할 거 아니냐
말야. 이런 병신같이........하하....."
버클레이 은행 관계자는 현대건설이 매년 착실하게 성장해 온 기업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조선업을 착수하더라도 성공할 가능성이 있는 업체라고 인정
하게 되었다. 때마침 한국에서 조선소 부지 조사를 마치고 돌아온 애플도어
기술진이 그동안에 돌아본 현대그룹 산하의 각 기업실태와 그 기업들이 이
룩한 각종 공사실적을 토대로 현대건설은 선박을 건조할 수 있는 충분한 기
술과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뒷받침하고 나섰다.
그 어느 날이었다. 버클레이 은행의 해외담당 부총재가 내일 점심식사를
같이 하고 싶다는 연락을 해 왔다.
(이번엔 높은 양반이 만나자는 걸 보니 또 무슨 문제가 있군.)하고 생각
하면서 그는 점심 약속을 했다.
그쪽 사람들은 어떤 일이고 대개 큰일은 최종적인 결정을 내리기 전에 으
례 면접시험과 같은 인터뷰를 요청해 오는 것을 그도 몇 번 겪은 일이 있었
다.
다음 날, 정 주영은 영국의 전통을 자랑하는 한 레스토랑에 초대되었다.
그는 그동안에 하도 많은 손님들을 접대해 왔기 때문에 어떤 자리에 가서도
테이블 매너 하나는 영국 신사 뺨칠 만큼 일품이었다. 그리고 그는 연설에
는 조금 서툴렀지만 좌담에는 누구보다도 뛰어난 재치와 유우머가 있었다.
점심식사 분위기는 아주 화기애애했다.
식사가 진행되는 동안 버클레이 은행 부총재는 몇 가지 미심쩍은 일을 물
어 보기도 했다. 그의 질문에는 기술적인 측면도 있었고 경영적인 측면도
있었다.
정 주영은 기술사의 질문은 기술적으로, 경영상의 질문은 경영적인 면에
서 막힐 것 없이 척척 대답해 주었다.
상대방이 질문을 해 오면 그의 질문이 끝나기 전에 정 주영의 머리 속에
서는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이 마치 컴퓨터처럼 착착 떠오르곤 했었다. 컴퓨
터 못지않게 조선에 관한 한 뜨르르 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별안간 그가 미처 컴퓨터에 암기시켜 놓지 않은 질문을 던지는 것
이었다.
"정회장님의 전공분야는 이공계통입니까, 경영학입니까?"
정 주영은 순간 고장난 컴퓨터처럼 깜빡 했다. 그 순간엔 아찔하기까지
했다. 바로 그 순간에 그의 머리 속에는 어제 옥스포드 대학에 가서 본 졸
업식 광경이 떠올랐다.
그는 어제 낮에 머리도 식힐 겸 세계적으로 그렇게 유명한 옥스포드 대학
은 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이나 한번 해볼 생각으로 런던에서 한 시간
반 거리에 떨어져 있는 옥스포드 시를 방문했었다.
그 무렵 현대건설에서는 서울대학교 관악 캠퍼스를 착공한 지 오래지 않
은 때였다.
옥스포드 대학은 그가 지금까지 관념적으로 생각해 온 그런 대학이 아니
고 어마어마한 하나의 궁성 같은 모습이었다. 수백년이라는 대학의 찬란한
전통을 말해 주는 듯 건물 돌벽에 낀 거뭇거뭇한 이끼는 대학의 장중한 멋
을 한결 더 돋구었다.
그런 반면 졸업식은 조촐했다. 졸업생 수가 원체 적다 보니까 우리 나라
의 대학 졸업식처럼 야단 뻑쩍지근할 것이 없었다. 졸업생 가운데는 외국인
도 더러 있었지만 한국학생은 한 사람도 없었다. 까만 가운에 학사모를 쓴
영국인 졸업생들 얼굴 얼굴에는 대영제국의 엘리트로서의 긍지가 철철 흘러
넘치는 것 같았다. 머리가 허연 노인이 박사학위를 수여받기도 했다.
(저 노인은 박사가 되려고 노력했다기보다는 자기가 하는 일에 몰두해서
열심히 일해 오는 사이에 오늘 저렇게 박사가 되었나 보다.)
정 주영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보통학교밖에 졸업할 수 없었던 지난날 자
신의 가난했던 처지를 회상하기도 했었다.
"내가 당신네 은행에 제출한 사업계획서는 보셨읍니까?"
정 주영은 동문서답을 했다.
부총재는 잘 보았다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어제 내가 옥스포드 대학 졸업식엘 갔더니만 그 사업계획서를 보고 경영
학 박사학위를 주더군요."
좌중에는 활짝 웃음이 터졌다.
"하긴 옥스포드 대학에서도 그만한 사업계획서는 못 만들어 낼 겁니다 하
하....."
버클레이 은행 부총재는 유쾌하게 웃었다.
버클레이 은행 부총재와의 인터뷰는 그렇게 한바탕 웃고 넘어 갔는데, 그
에게는 또 하나의 넘기 힘든 크나큰 산이 앞을 가로 막고 나타났다.
영국에서는 은행이 외국에 차관을 줄 때는 영국수출신용보험국의 보증을
받아야 하게끔 되어 있었다. 만약 차관해 간 나라의 상환능력이 없는 경우
에는 은행의 손해를 정부가 책임을 지고 보상하는 제도였다. 하기 때문에
차관을 주었다가 잘못되는 일이 있어도 은행이 손해 볼 염려는 전혀 없었
다.
따라서 버클레이 은행은 정 주영이 제출한 조선사업 계획서를 심사해서
이에 대한 차관 공여 승인을 수출신용보험국에 신청했는데, 하루는 그 보험
국의 담당 국장이 그를 만나자고 연락해 왔던 것이다.
담당 국장의 말을 듣는 동안 정 주영 얼굴에는 시종 가벼운 미소가 감돌
고 있었지만 그의 잔등에서는 식은땀이 쭉쭉 흐르고 있었다. 담당 국장이
말하는 요지는 대강 이러했다.
"우리 영국의 일류 기술회사가 기술적으로 가능하다고 했고 버클레이 은
행에서 충분한 검토를 했으니까 나로서는 이의가 없다. 그러나 나는 한 가
지 의문이 있다. 이제부터 큰 조선소를 지어서 큰 배를 만들어 가지고 그
배를 팔아서 남는 이익금으로 원리금을 상환한다 이런 얘긴데, 만약 배를
주문할 선주가 없으면 어떻게 하느냐. 내가 만약 선주라면 세계의 그 많은
조선소를 놔 두고 하필이면 선박 건조 경험이 없는 한국 같은 나라에 배를
주문하지 않는다. 설사 주문 없이 배를 만든다고 할 경우 누가 그 배를 사
갈 사람이 있겠느냐. 그렇게 되는 날, 우리는 돈을 어디 가서 받느냐? 그러
니 나로 하여금 배를 살 사람이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해 주기 바란다. 그전
에는 이 차관공여 신청을 승인할 수 없겠다."
다음 날부터 정 주영은 20세기 신판 봉이 김 선달이 아닌 정 선달이 돼서
시작도 안 한 배를 팔러 다녔다.
그의 수중에는 울산의 미포만 백사장을 찍은 사진 한 장하고 스코트리스
고우 회사에서 빌린 26만톤짜리 유조선 도면 한 장밖에 없었다. 그 사진 한
장, 도면 한 장을 들고 배를 팔러 선주들을 만나러 다니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는 사업을 하는 데 있어서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성심 성의껏
최선을 다하노라면 이쪽의 진실은 반드시 상대방에게 전달될 수 있는 것이
라고 하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신념이 없었다면 그가 그 마당에 배
를 팔겠다고 나서지는 못했으리라.
"당신이 이와 같은 배를 산다면 영국 차관으로 이 백사장에다 조선소를
지어서 여기서 이 배를 만들어 주겠다."
정 주영은 기술제휴 회사인 애플도어사가 소개한 그리이스의 대 선주 리
바노스를 찾아가서 설득하고 있었다.
"배 값은 다른 조선소보다 싸게 해 주겠다. 만약 게약을 해서 배의 납기
를 어기거나 배에 하자가 있을 때는 배를 인수 하지 않아도 좋다."
아까부터 의자 등에 엇비슷이 기대 앉아서 정 주영의 말을 귓전으로 흘리
던 리바노스가 다소 흥미를 느끼는 듯 자세를 바로 고쳐 앉았다.
정 주영은 비장의 마지막 카아드를 제시했다.
"만약 우리가 만든 배가 당신 마음에 안 들거나 납기를 어길 때에는 계약
금의 원금은 물론 원금에 대한 이자까지도 보상하는 은행지불보증을 해 주
겠다."
리바노스는 스위스의 섬머리에 있는 자기네 별장에서 다시 만나자는 것이
었다.
그것은 곧 스위스로 가서 계약을 맺자는 말이었다. 그리이스에서 계약을
하게 되면 막대한 세금을 물어야 하기 때문이다. 세금 때문에 골치를 앓는
것은 고금이나 동서나 같은 모양이었다.
그해 여름, 정 주영은 마침내 스위스의 리바노스 별장에서 25만톤급 유조
선 두 척을 척당 3천 95만불에 건조 인도한다는 계약을 체결하고 계약 보증
금으로 3백여 만불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가 게약한 선가는 국제 시세에 비해서 약 16퍼센트 정도가 싼 값이었
다. 그러나 정 주영은 리바노스로부터 그와 같이 유조선 두 척을 수주함으
로써 미포만 백사장 위에다 조선소를 짓기 위한 차관도입에 따르는 모든 난
제를 일단락 지을 수가 있었다.
1972년 3월 23일, 국내의 관심을 집중시킨 가운데 역사적인 울산 조선소
기공식이 거행되었다.
정 주영은 박대통령을 비롯한 내외 귀빈이 다수 참석한 기공식 석상에서
식사를 통하여 당초의 계획이 확대 변경됨으로써 이 조선소를 완공하기 위
해서는 8천만불이라는 막대한 자금이 요구되고 있으나 현대는 모든 지혜와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당초의 계획 예산인 6천 3백만불 이내에서 공사를 마
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어서 연간 1천 5백명을 양성할 수 있는 조선 기능
공 전문 양성소를 운영하겠으며, 조선소는 73년 6월까지 완성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 기공식 준비를 위해 정 주영은 이미 작년 12월에 김 영주를 현장 총책
임자로 임명했었다. 김 영주는 그때 통일로 고속화 도로공사 현장에서 일하
고 있었다.
============================= 05
통일로는 서울과 판문점을 잇는 40킬로미터 구간의 중앙분리대가 없는 4
차선 도로이다. 72년 초에 개최키로 예정된 남북 적십자회담을 앞두고 71년
10월 23일에 착공해서 불과 45일 만인 12월 5일에 준공을 본 번갯불 공사였
다. 그래서 통일로는 우리 나라 도로 건설사상 가장 최단시일 안에 닦은 도
로로 기록되기도 했지만 통일로라는 도로의 이름이 말해 주듯이 국토 분단
이후 처음으로 서울에서 열리게 되는 남북회담을 위해 우리 민족의 통일의
염원을 실현시켜 줄 길로서 온 국민의 부푼 기대 속에 건설된 역사적 도로
이기도 했다.
알고 보면 조선소 기공식을 하루아침에 거행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김 영주가 현장 총책임자로 부임하던 작년 12월까지만 해도 주민들이 이사
를 하지 않고 애를 먹이는 바람에 작업을 진행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새로운 집터도 마련해 주고 보상비도 지급해 주었지만 주민들은 추
운 겨울이나 나고 따뜻한 봄에 떠나겠다고 했다.
정 주영은 김 영주가 울산 현장으로 내려갈 때 이런 말을 했었다.
"주민들한테 제발 딱딱거리지 말구 성심 성의껏 설득하도록 해요. 그리고
우리 공사 때문에 주민들이 입는 피해가 있을 것 아냐? 1원짜리 피해에 대
해서 1원 50전을 내라고 하거든 즉석에서 지불해 주고, 만약 1원짜리 피해
에 10원을 내라고 하거든 싸우지 말고 조용히 법대로 해결하라구."
정 주영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간부 사원들에게 현대그룹은 국민 모두에
게서 사랑받는 회사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었다. 그리고 그는 세간의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우리 회사의 팬을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심지
어 입사시험에서 낙방하는 학생들한테까지라도 회사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갖고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연구하라고 했었다.
그와 같은 사주의 방침에 따라 현장책임을 맡은 김 영주는 새벽부터 집집
마다 찾아 다니면서 이사해 줄 것을 설득하고, 이사비용은 물론이고 인력에
서 차량까지 지원했다.
그리고 어촌에는 굴이나 조개가 서식하는 해변가의 큰 바위들이 있었는
데, 그 바위를 마치 농촌의 농토처럼 어민 개개인이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
에 나중에는 법적으로는 아무 권리도 보장되어 있지 않은 바위 값까지 치러
줘야만 했었다.
그래도 주민들 가운데는 대대로 살아온 정든 집을 버리고 떠나는 것을 못
내 아쉬워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과는 저녁이면 같이 소주잔을 기울이
면서 함께 서운한 정을 나누기도 했다.
마침내 주민들한테도 진실은 전달되었는가, 12월 말부터 시작된 이사는 1
월까지 계속되었다.
그렇게 이사한 주민들이 나중에는 세 번씩이나 연거푸 이사를 해야만 했
었다. 여기까지는 공사에 포함되지 않겠지 하고 옮기고 나면 공장 설계가
더 크게 변경되는 바람에 또 옮기고 또 옮기곤 했었다.
조선소 전체 규모에 대한 레이아웃은 고사하고 부분 부분 작성되는 레이
아웃조차도 얼마나 자주 변경되었는가를 짐작할 만한 일이었다. 30만평 정
도면 넉넉하리라던 부지가 나중에는 바다를 메운 매립지를 합해서 60여 만
평으로 늘어났으니 말할 것도 없었다.
기공식이 끝나면서부터는 모든 공사가 한꺼번에 진행되었다. 안벽매립,
강재하치장, 선각공장, 본관공사 등에 동원되는 작업 인원은 연일 1천 2백
명 선을 넘었다.
공사는 공정별로 진행되었다. 전체 공사를 총괄하는 부서가 따로 없었다.
1도크 2도크의 시공담당자가 다르기 때문에 투입되는 장비 또한 달랐고 같
은 내용의 공사를 수행하면서도 공법이 서로 달랐다.
요는 시공담당자가 보다 효과적인 방법에 착안하면 그 즉석에서 그방법을
채택하고 공사만 완벽하게, 그리고 빠르게 진행시키면 그만이었다. 그래서
안벽 공사의 경우는 시공담당자의 소신에 따라서 중력식.잔교식.블록식(옹
벽)등이 사용되기도 했다.
"여러분 각자가 사장이라는 생각으로 일에 임해 주기를 바랍니다."
사주 정 주영이 기공식 직후 시공담당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당부한 말이
었다.
정 주영은 <경비절감, 공기 단축, 최량의 품질>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사원 가운데 가장 우수한 기술인력을 대거 투입하는 한편, 보유장비의 대부
분을 동원해서 주야 24시간의 작업을 강행시켰다. 공사가 진척됨에 따라 그
날 그날 동원되는 현장 작업인부가 불어나서 2천명 선을 넘어서고 있었다.
작업장은 총과 실탄만 없는 전쟁터였다. 매일같이 계속되는 24시간 돌관
작업으로 신발 끈을 맨 채로 자는 수가 허다했다. 새벽이면 일어나서 여기
저기 웅덩이에 고인 빗물로 눈썹에 붙은 눈꼽이나 대강 떨어내고 세수한 셈
쳤다.
정 주영 자신도 첫새벽에 일어나서 준비하고 앉았다가 통행금지 시간만
해제되면 즉시 집을 나서서 울산으로 향했다.
이른 새벽, 그는 남대문을 지나노라면 숱한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 가운
데는 그날 팔 채마를 받아 가지고 리어카에 잔뜩 실은 부부가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면서 시장 골목을 나오기도 했다.
그는 그런 사람들 모습에서 존경에 가까운 연민의 정을 느끼며, 또한 연
대감 같은 것을 느끼면서 우리도 꼭 잘살 수 있다는 확신과 함께 힘을 얻곤
했었다.
현장에서는 임직원 모두가 일체감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처음하는 일들이었기 때문에 시행착오도 많았지만 모든 사원들은 사명
감에 불타고 있었다. 무엇으로 계량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정신력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었다. 공사는 숫자를 가지고는 설명할 수 없을이만큼 하루가 다
르게 부쩍부쩍 진척되어 나가고 있었다.
정 주영은 조선소의 성패는 차치하고 전사원이 한덩어리가 되어 그토록
뜨거운 열기 속에서 자기 희생을 감수하며 일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
로도 흡족했다. 아니, 그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울 것을 굳게 믿었
다.
그는 현대그룹의 모든 역량을 조선소 건설에 총집결시키기 위해서 지난 1
월에 착공한 남해 고속도로 공사를 끝으로 이미 일체의 국내 공사 수주활동
을 중단시키고 있었다. 그는 국내의 모든 미군공사도 일단 작년 말로써 종
결 지은 바 있었다.
작년에 착공한 신규공사도 서울대학교 관악 캠퍼스, 충주 비료 공장, 서
울 지하철 1호선(서울역.청량리 구간), 그리고 이미 작년 말에 준공을 본
영동고속도로(신갈.새말 구간)공사 정도였다.
그래도 현대건설이 계속해 오고 있는 국내외 공사현장은 괌도의 주택건설
및 호주의 번버리 항만 준설 등을 비롯해서 소양강 다목적 댐, 남해대교,
인천 화력발전소, 국회의사당, 고리 원자력발전소 등 여전히 20여 개소가
넘고 있었다.
73년 3월, 예정대로 조선소의 일부가 일부가 완공되자 정 주영은 그리이
스의 리바노스로부터 수주한 유조선 1.2호의 건조를 착수했다.
처음 공정계획을 세울 때 미리 조선소 건설과 선박 건조작업을 병행할 수
있도록 짰기 때문에 실은 선박 건조를 위한 소조립은 이미 수개월 전부터
진행되어 오고 있었다.
리바노스와의 계약이 25만 9천톤짜리 유조선 두 척을 74년 7월과 같은 해
12월에 각각 인도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 주영으로서는 조선소의 완
공을 기다릴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선박 건조를 위해 1년 전부터 이미 방계 회사 내의 경력사원
과 유사계통의 고급 기술 인력을 대거 울산 조선소로 전임시키는 한편, 해
당 분야의 군 전역자 및 학교 졸업자를 신규로 모집하고 그들 백여 명을 영
국의 스코트리스고우 조선소와 일본의 가와사끼 조선소 등에 파견, 훈련시
켜 오고 있었다.
또한 6개월 전부터는 조선소 내에 기능공 훈련소를 설립하고 4백명을 입
소시킨 다음 전.후기 12개월 과정의 전기용접, 의장, 제조 등 10개 분야에
걸친 기초지식과 최신시설 이용방법을 중심으로 하는 기능교육을 실시하고
있었다.
그와 같은 연수교육을 계획할 당시만 해도 현대그룹 안에는 이미 구입해
온 선박 설계도면을 번역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단 한명도 없었으
며 보다 구체적인 부문에 들어가서는 읽을 수 있는 사람조차도 없는 실정이
었다.
지금 26만톤급 유조선을 만든다고는 하지만 26만톤짜리 배가 얼마나 큰
배라고 하는 것을 설명할 만한 사람도 없었다. 제일 크다는 배를 본 것이
조선공사에서 만든 1만 7천톤짜리가 고작이기 때문이다.
그런 형편이었으니 자재를 발주하는데 공정이나 작업이나 작업 순서를 미
처 생각지 못한 것은 오히려 당연했다.
그래서 차츰차츰 일년 후에 들여와도 될 자재까지도 왕창 한꺼번에 들여
오는 바람에 전체 야아드는 온갖 자재에 뒤덮여서 트럭이 다니기도 힘들 정
도였다. 더구나 한쪽에서는 도크 공사가 병행 중이었기 때문에 그 복잡한
것은 말로 형언할 수가 없었다. 거기까진 그럴 수 있었다고 하자. 1.2호선
의 국산화율은 거의 제로에 가까와서 국내에서 조달할 수 있는 자재는 극히
제한되어 있기도 했었지만 자재 발주 담당자는 선박 바닥에 깔아서 일정한
무게를 주는 작은 자갈과 조선에 사용되는 소금가지도 외국에서 사들였으니
정말로 한심한 지경이었다.
그래도 정 주영은 담당자의 열성과 의욕이 저지른 실수였기 때문에 혼자
서 속으로만,
(병신들......병신같이.......)하고 끙끙 앓기만 하고 직접 대해 놓고 나
무라지는 않았다.
그렇게 들여온 비싼 돌인데, 이번에는 로이드 선급협회에서 마모율이 높
아서 쓸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우리 돌로 쓰기는 했지만, 그처
럼 잔돌 하나를 쓰는 데까지도 일일이 검사를 거쳐야 하는 로이드 선급협회
의 감독은 짜증이 날이만큼 사사건건 철저하고 엄격했다.
도크 공사도 급했지만 선박 건조도 똑같이 급했으므로 야아드 안에 어디
손바닥만한 빈터라도 있으면 있으면 그 자리는 누구든지 먼저 차지하고 앉
아서 일하는 사람이 임자였다.
야아드에 잔뜩 쌓인 철판이고 철관이고, 자재관리도 미숙해서 손에 잡히
는 대로 필요한 사람이 먼저 갖다 쓰면 그만이었다.
배 바닥에 철골을 세우는 부분에는 여러 개의 쇳조각이 소요되는데 얼핏
보면 그 크기가 모두 똑같았다. 담당 기사도 눈어림대로 그런 줄 알고 철판
을 한꺼번에 똑같이 많이 잘라 놓은 다음 실제 작업을 시작해 보니 실상 쇳
조각의 크기는 하나하나가 다 달라서 쓸 수 없었다.
설계하는데도 절단기를 사용해서 줄을 그을 줄도 몰랐고 톱니형 줄 긋기
는 더욱 어려워서 쓸 줄 몰랐다.
현대그룹 자체의 실력이 없었다기보다는 국내의 조선기술이 아직 그런 정
도의 기초 분야까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때였음을 말해 주는 실
례들이었다.
기술자나 전문직 관리자들은 대개가 전체를 보지 못하거나 또 자기가 맡
은 일에만 전념한 나머지 전문가로서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일이 좀체로
어려웠다. 그래서 보통 ㄸ대는 능력이 있던 사람도 어떤 난관이나 위기에
부딪치면 아주 약해지게 마련이었다.
정 주영은 건설업을 해오는 동안에 그런 일을 많이 보아 왔고 또 그때마
다 그런 기술자들의 결점을 수없이 시정해 왔기 때문에 그는 자신을 가리켜
기술자를 고치는 기술자라고 자처해 오고 있었다.
기술자가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정 주영이 깨우쳐 준 일화
가운데는 이런 유명한 이야기도 있다.
전경련 빌딩을 설계할 단계의 일이었다.
정 주영은 한 중역에게 전경련 빌딩을 20층으로 설계할 것을 지시했다.
지시를 받은 중역은 건축계에 수십년 몸담아 온 일급 기사요, 또한 유능한
관리자였다.
전경련 빌딩은 도저히 20층으로 설계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지금의 전경련 빌딩 자리(회현동)에 20층 빌딩을 건축하는 경우는 남산을
향해 설치해 놓은 모처의 고사포 포대의 사계를 가리기 때문이다.
남산 상공은 서울의 심장부를 방위하기 위한 모든 항공기의 놏제구역인
것이다. 당시만 해도 남산 서울타워의 전망대조차 일반 국민에게 공개하지
않는 때였고, 태평로 일대에 고층빌딩을 지으려고 해도 벽의 창문 하나 맘
대로 못 내게 하는 때였다.
그런 때에 회현동에 20층 빌딩을 세움으로써 남산 상공을 24시간 경계해
야 하는 고사포의 사계를 막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일단 정회장이 한번 지시한 일을 어설프게 안 된다고 했다가는 병
신 소리나 듣고 속된 말로 작살이 날 판이었다. 하기 때문에 안 된다는 보
고를 하기 위해서는 철두철미하게 안 된다는 입증자료를 들고 들어가서 그
를 꼼짝 못하게 할 자신이 있을 때라야만 가능했다. 그럴 자신이 없으면 아
예 그저 하라는 대로 군말 없이 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또 사실상 아직까지 현대그룹 중역들은 정회장이 지시한 대로 해서 안 되
는 일은 별로 보지 못했고 또 지시대로 해서 잘못되는 일도 거의 없었기 때
문에 대개의 경우는 그가 지시하면 복종하는 것이 옳은 것으로 받아들여지
고 있었다.
그래서 정회장이 중역들에게 어던 프로젝트를 내주면서 연구해 보라고 지
시하면 거의 모든 중역들이 즉시 실시계획에 들어갔지 누구도 연구해 보니
까 이렇습니다 하고 보고하는 중역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가 연구해 보라
는 말은 특별한 단서가 붙어 있지 않는 한 모든 중역들에게는 곧 시작하라
는 뜻으로 통용되고 있었다.
전경련 빌딩 설계 지시를 받은 중역은 각 관련기관인 당시의 청와대를 비
롯한 내무부.국방부.중앙정보부.수도경비 사령부 등으로부터 그와 같은 사
유로 그 위치에 20층 빌딩의 건축이 불가하다는 내용의 회신을 서면으로 받
아냈다.
그리고 담당 중역은 자신만만하게 회장실로 들어갔다.
"전경련 빌딩 설계 어떻게 됐어?"
정회장이 다짜고짜 물어 왔다.
"20층 설계는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왜?"
담당 중역은 관계기관으로부터 받아낸 문서를 펼쳐 놓고 안 되는 이유를
당당하게 설명했다. 설명을 끝낸 그는 마음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정회장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는 깜짝 놀랐다. 펼쳐 놨던 문서가 확 얼
굴로 날아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회장의 화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병신같이! 어째서 대가리가 빈대만도 못하나, 응?"
"예?"
정회장 입에서 빈대만도 못하다는 말이 나왔을 때는 일이 잘못되도 보통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정 주영은 빈대라는 놈을 아주 머리가 좋은 미물의 하나로 생각하고 있었
다.
그가 서울 장안에서는 하늘하고 제일 가까운 현저동 산꼭대기에 살던 때
의 일이다. 그 시절엔 콜레라.장티푸스 같은 무서운 전염병도 자주 만연했
지만 가난한 서민들은 겨울이면 이 등쌀에 시달렸고 여름이면 빈대 등쌀에
시달리기가 일쑤였다. 특히 여름에는 빈대하고 싸우느라고 잠을 설치는 날
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그의 집이라고 해서 그 빈대가 없을 리 없었다.
오죽이나 빈대들이 극설을 피웠으면 <초가삼간이 다 타도 빈대 죽는 맛이
고소하다>는 속담이 생겼겠는가.
그는 그때나 지금이나 내일 일을 위해서 밤에 잘 때는 열심히 자야 하는
성미였다. 그런데 빈대 성화에 잘 수가 없었다. 그는 궁리한 끝에 한 가지
묘안을 생각해 냈다.
널판대기를 짜고 네 군데에 다리를 붙여서 시체말로 나무침대라는 것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물을 담은 네 개의 놋주발 속에 침대 다리를 각각 들여
놓았다.
과연 명안이었다. 그는 편한 잠을 잘 수 있었다. 빈대라는 놈들이 사람
냄새를 맡고 나무 침대 위로 기어 올라오다가는 몽땅 놋주발 속의 물에 빠
져 죽는 것이었다. 그는 마음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렇게 사흘 밤을 잘 자소 났는데 나흘째 되는 날 밤부터는 또 무엇이 뜨
끔뜨끔 물어 뜯기 시작했다.
(이상하다.....빈대란 놈이 물 리는 없고......)
그는 자다가 일어나서 천정에 매달린 전기불을 켜놓고 살펴보았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놋주발 속에 까맣게 빠져 죽어 있어야 할 빈대가 한 마리
도 빠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옳지, 이놈들이 한 사흘 동안에 몰살을 당한 모양이구나.)하고 다시 전
기불을 끄려고 천정을 올려다본 그는 깜짝 놀랐다. 빈대라는 놈들이 몽땅
천정에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도 그는 빈대들이 왜 천정에 붙어
있는지를 몰랐다. 그는 가만히 빈대들의 거동을 살펴 보았다.
이윽고 그는
(아하, 내 머리는 빈대만도 못하구나.)하고 탄식했다.
나흘째 되던 날부터는 빈대들이 천정으로 기어 올라갔다가 그 천정에서
침대를 향해 떨어져 내려와서 뜯어 먹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빈대만도 못한 놈>이라는 말을 자주 써오고는 있지
만 실상 그가 왜 그런 말을 써 오게 됐는지 그 내력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그가 빈대만도 못하다고 말할 때는 사태가 심상치 않
음을 뜻하는 것만은 명백했다.
바싹 얼어붙은 설계담당 중역은 자기 얼굴로 날아왔던 서류를 주섬주섬
챙기면서 정회장 얼굴을 힐끔 쳐다보았다.
"머리는 모양으로 달고 다녀?"
"........."
"고사포 포대를 옮겨 준다고 하면 될 것 아냐, 고사포 포대를 .......
포대를 더 좋은 자리에다 더 잘 만들어 주는데도 사계에 걸려? 이 빈대만
도 못한 친구야."
관련기관에서도 더 좋은 위치에다 더 좋은 포대를 옮겨 준다는 데는 이의
가 없었다. 오히려 고맙다고 환영하는 것이었다. 초라한 10층 빌딩이 될 뻔
했던 전경련 빌딩은 그렇게 해서 20층의 당당한 위용을 뽐낼 수 있게 되었
던 것이다.
이 일화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많은 엔지니어들이 그 범주를 벗어나서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을 한 가지 예로 든 것에 불과하다. 그와 같은 일은
비일비재했다.
지금 배를 만드는 과정에서도 그와 같은 현상이 생겨서 일을 할 수 있느
니 못 하느니 하고 있었다.
도크가 아직 완성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골리아스 크레인(대형 자동 이동
크레인)이 설치되지 않았었다. 그래서 모든 부품 운반은 거의 인력으로 해
결하고 소조립품을 12미터 깊이나 되는 도크 바닥으로 옮길 때는 특수 트레
일러를 동원해서 해결해오곤 했었다.
그런데 1호선 선수 부분의 조립이 끝나서 그것을 도크로 운반하기 위해서
는 워낙 무게도 크고 부피도 커서 골리아스 크레인을 설치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 기술자들의 결론이었다. 이론인즉 교과서에 적혀 있는
대로니까 기술자들의 말이 옳았다.
그러나 골리아스 크레인이 설치되려면 앞으로도 석달은 기다려야 할 형편
이니, 그렇게 해서는 시간적으로 공기를 단축하기는 커녕 공기 안에 배가
만들어질 것 같지도 않았다.
보다 못한 정 주영이 답답한 나머지 기술자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선수 블록을 트레일러에 싣고 불도저가 뒤에서 당겨 속도를 줄여 가면서
저 도크의 경사를 내려가게 하는 것이 이론적으로 가능한 거야, 불가능한
거야?"
"그야 불도저가 뒤에서 끌어당기니가 가능하긴 가능하겠지요."
"그럼 그렇게 하면 될 것 아냐."
그런 식으로 1호 선수 블록은 아주 쉽게 도크 바닥가지 운반할 수 있었
다. 그렇게 간단한 일가지도 기술자들은 책에 이런 것은 이런 크레인으로
이렇게 들어 옮겨야 한다고 적혀 있으면 꼭 그렇게 해야만 되는 줄로 생각
하게 마련이었다.
"우리가 지금 자본이 넉넉한 선진국에서 공장을 짓는 게 아녜요. 많은 것
을 희생하면서 오늘 어렵더라도 내일부터 잘 살기 위해서 있는 힘을 다 한
곳에 모아서 일을 하고 있느니만큼 우리 나름대로의 사명감이 있어야 하고,
또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의 우리 방식이 있어야 한다 이거예요."
조립공장 설계를 하고 있었다. 정 주영은 담당자에게 공장 기둥을 좀더
약하게, 그리고 경제적으로 설계해 보라고 지시했다.
"이 울산 지역의 최대 풍속은 태풍이 불 땐 60미터가지 강해집니다. 그래
서 이 기둥 설계는 초속 60미터 강풍에 견딜 수 있도록 게산된 겁니다."
"그래?"
"기둥이 이 정도는 돼야 어떤 태풍에도......."
"이봐!"
정 주영은 한심하다는 듯이 담당자를 쳐다보았다.
"공장 벽은 뭘로 하지?"
"회장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슬레이트로......"
"그럼, 슬레이트 벽은 풍속 몇 미터 바람에까지 견뎌 낼 수 있나?"
"슬레이트라면 20미터 정도의 바람만 불어도 모두 날아 갈 겁니다."
"그담엔 기둥만 남게 되겠지?"
"예......."
"기둥만 남게 되는데도 풍속 60미터 태풍에 견디려면 꼭 이렇게 굵직하게
아주 튼튼히 세워야만 할 이유가 어디 있나."
담당자는 얼굴을 시뻘겋게 하고 뒤통수만 긁적거리고 서 있었다.
공구별 담당자의 결단으로 공사가 진행되었으므로 일은 빨랐지만 현장 전
체를 통괄하는 부서가 없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폐단도 많았다. 그 한 예로
장마철에 대비하지 않고 도크를 깊게만 파내려 갔을 때, 하루는 큰비가 쏟
아져서 현장의 모든 빗물이 바로 바다로 빠지지 못하고 몽땅 파 놓은 도크
안으로 몰려드는 바람에 양수기를 동원해서 그 빗물을 빼내는 데만도 꼬박
사흘 밤낮을 허비한 일이 있었다.
그렇게 되자 정 주영은 이미 전체 공정도 80퍼센트 가까이나 진척된 때였
으므로 전체 공사를 종합적으로 진행시키기 위해 공구별 공정계획을 일부
수정하는 한편, 각 분야의 각 부분 공사마다 서로의 연관관계를 생각해 가
며 공사를 진행하도록 조정하기 시작했다. 그러느라고 그는 며칠째 계속해
서 현장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 11월의 어느 날 비바람이 몰아치는 새벽 3시경이었다. 그는 그전처
럼 잠바 바람으로 차를 몰고 숙소를 떠나 현장으로 달렸다. 몹시 휘몰아치
는 비바람으로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노상 다녀서 익숙해진 길이
었으므로 그는 그냥 달렸다.
별안간 난데없는 큰 바윗덩이들이 시야를 가렸다. 그는 피해갈 생각으로
얼른 브레이크를 밟으면서 핸들을 껶었다. 그 순간 차는 한 바퀴 훌렁 재주
를 넘듯이 뒤집히면서 안벽 아래로 떨어졌다. 차는 그대로 수심 12미터의
바다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그의 시야를 가렸던 장애물은 어제 준설작업을 하느라고 바다속에서 꺼내
올려 놓은 바위 덩어리였다.
그는 바다 속으로 빠져 들어가면서도 그렇게 큰 걱정은 안 했다. 해안의
위치에서 바다의 깊이에 이르기가지 현장 앞바다는 집안의 앞마당만큼이나
훤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오히려 빠져 들어가면서도 그냥 낭떠러
지에 떨어지지 않는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물 속으로 빠져 들어
가고 있기에 망정이지 땅위에 떨어졌으면 벌써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막다른
데까지 생각했다.
적어도 차가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 동안가지는 그 정도의 여유가 그에게
있었다. 그러나 차가 완전히 바다 밑바닥에 가라앉자 그는 당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압 때문에 차 문이 열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한쪽 문에 등을 대고
한쪽 문을 두 발로 있는 힘을 다해 밀어냈다. 문짝이 떨어져 나갔다. 바닷
물이 확 밀려 들어왔다. 바닷물은 코로 입으로 마구 쏟아져 들어왔다. 어떻
게 차 속을 빠져 나왔는지 몰랐다. 수면 위로 솟아오르는 순간에 막혔던 숨
통이 터졌다.
(살았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눈을 떴다. 백사장까지는 한 8백미터가 좀
넘을 것 같았다. 그는 가까운 안벽으로 헤엄쳐 갔다. 바닷물을 먹은 탓인지
조금 숨이 찼다.
바닷물을 들이키지 않았다고 해도 그의 나이 이미 쉰 여덟살. 내일 모레
가 환갑이었지만 그는 언제나 자신의 나이는 의식하지 않고 마냥 청년인 것
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요행히 안벽 쪽으로 철근 한 가닥이 삐죽이 나와 있었다. 그는 철근을 잡
고 매달려서,
"사람 살려어......사람 살려......"하고 고함을 쳤다. 하지만 비바람 소
리와 파도 소리에 짓눌려서 사람 살리라는 그의 절규는 멀리 퍼져 나가지도
못했다. 그리고 그 시간에는 근처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없을 때였다.
파도가 높게 치고 있었기 때문에 철근에 매달려 있는 것도 여간 힘든 일
이 아니었다. 날이 샐 때가지 그렇게 매달려 있어야 할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그래도 혹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들으라고 그는 연신 사람 살
리라고 고함을 쳤다. 마침 야근하던 경비원이 고함 소리를 듣고 달려왔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항상 새벽이면 그가 현장을 돌고 있었기 때문에 경
비원은 그날도 정신을 차리고 있다가 차가 달려오는 헤드라이트 불빛은 보
고 엔진 소리는 들었는데 한참 기다리고 있어도 차가 나타나지 않더라는 것
이다. 이상하게 여기고 있는데 마침 사람의 고함 소리 같은 것이 들려와서
웬일인가 하고 와 봤다는 것이었다.
경비원이 안벽 밑으로 고개를 내밀면서 느굿하게,
"누구요?"하고 물었다.
"누군진 알아 뭘해 임마? 빨리 사람 살려!"
그는 버럭 고함을 쳤다.
"아이구 회장님......잠깐 기다리십시오. 제가 빨리 로프를 가져오겠읍니
다."
경비원도 당황하는 눈치였다. 잠깐 기다리라고 해놓고 사라진 경비원은
무얼 꾸물거리고 있는지 빨리 나타나지 않았다. 파도는 더 거칠고 시간은
자꾸만 흘러갔다. 기진맥진해서 파도에 휩쓸릴 것만 같았다.
거의 한 시간은 걸리는 성싶었다. 경비원이 여러 임직원들을 데리고 와서
밧줄을 내려 주었다. 그는 밧줄로 허리를 맸다. 여러 사람이 밧줄을 끌어
올렸다.
간신히 안벽 위로 기어 올라온 그는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서 곧 주저
앉을 것만 같았다.
"회장님, 어디 다치신 데는 없습니까?"
여러 사람이 우 둘러쌌다. 그들 앞에서 주저앉을 수도 없고 화 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괜찮아, 괜찮아......"
그는 둘러 싼 사람들을 헤치고 걸었다. 마침 순찰차가 달려왔다. 그는 순
찰차에 오르면서 불안한 얼굴을 하고 서 있는 여러 임직원들의 얼굴을 보는
순간 퍼뜩 그들을 안심시킬 필요를 느꼈다. 자칫하면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
원했다는 헛소문이라도 나서 공사 진행에 지장을 가져올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걱정할 것들 없어. 차 타고 수영 좀 한 것뿐야. 바닷물 속이 아주 시원
하더라구, 핫하......"
여러 임직원들도 따라서 활짝 웃었다.
그는 원래 겁이 없고 담이 컸다. 그래서 그는 어릴 적부터 담큰 짓을 자
주 해왔다. 그는 가난으로부터 해방되려고 일찌기 열여섯 나이에 집을 뛰쳐
나와 철도공사판에서 일을 했고, 부기 공부를 해서 취직을 해야겠다고 소
판 돈을 훔쳐 내 갖고 서울로 도망쳐 올라오기도 했다. 또 천원을 가지고
오천원짜리 아도 써비스 공장을 차렸는가 하면 이왕 돈벌이를 할 바에야 큰
돈벌이를 하자고 해서 생판 경험도 없는 토목사업에 도전했고, 토목계에 투
신한 뒤에는 남들이 꺼려하는 난공사에 도전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며, 그
러다가 국내공사만으로는 간에 차지 않았기 때문에 해외 건설시장으로 진출
했고, 어려움이 많은 그 해외 건설시장을 국내로 끌어 들이기 위해 지금은
배 만드는 일을 빌딩 짓는 일로 간단하게 생각하고, 막말로 가진 거라고는
머리하고 열성밖에 없으면서 단일규모로는 세계에서 제일 크다는 백만톤짜
리 도크를 파제껴 놓고 있다가 하마터면 속절없는 수중고혼이 될 뻔했던 것
이다.
울산 조선소는 사실상 우리 나라 산업계가 처음으로 경험하는 최신식 초
대형 공장의 시발이었다. 그러나 여기에 임하는 임직워?이나 모든 기능공
들의 의식구조는 토목공사에서의 태국 고속도로 때처럼 전근대적인 것이었
다.
용접공은 용접을 하다가 싫증이 나면 적당히 용접해 버렸다. 배관공은 배
관을 하다가 설계대로 잘 안 되면 또한 적당히 이어 버렸다. 청소부가지도
스레기를 멀리 내다 버리기 귀찮으면 아무데나 큰 파이프 구멍 같은 데 처
넣는 것이었다.
그런 식의 적당주의가 로이드선급협회 검사에 넘어갈 리 만무했다. 그래
서 한번에 끝날 일도 두세 번씩 고쳐 해야만 하는 사례는 이루 헤아릴 수도
없었다.
그런 실수를 거듭하는 가운데 드디어 1호선의 모든 도크 안에서의 작업이
끝나고 74년 3월, 배를 물에 띄워야 하는 소위 진수 단계에 이르렀다.
내일 오전 10시면 배는 도크 밖으로 빠져 나오는데 아직 그때까지도 도크
밖의 바다 속은 준설도 안 된 상태였다. 26만톤이 넘는 배가 나오다가 만약
그 배 밑바닥이 도크 밖에서 좌초하는 날에는 큰일도 큰일이려니와 그것은
국제망신도 이만저만한 국제망신이 아니다.
밤새 새워 준설작업이 진행되었다. 바다 속을 쳐내는 일쯤은 그 동안 포
항의 신항 준설공사를 끝낸 준설선 현대 2호도 공사현장에 와서 일하고 있
었으므로 문제될 것이 없었는데, 막상 대한민국 안에는 26만톤짜리 배를 끌
만한 선장이 없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가지는 그렇게 큰 배가 우리 나라 연안에
와서 닿아 본 적도 없었으니까. 하는 수 없이 1호선을 도크에서 바다로 끌
어댈 선장을 외국에서 초빙해 오는 도리밖에 없었다.
그런 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외국에서 모셔 온 선장이 엔진을 시동하기
전에 배를 옮긴다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그 큰 배가 빠져 나가기에
는 도크의 폭이 너무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우리 나라 항만청에서도 엔진 시동 전에 배를 움직인다는 것은 항
해규칙이 위반이 되기 때문에 배를 진수시킬 수 없다고 나왔다.
그러나 정 주영으로서는 1호선을 하루빨리 도크 안에서 뽑아 내야 할 형
편이었다. 그때 이미 정 주영은 작년 4월에 일본의 재팬 라인(Japan Line)
으로부터 수주한 23만톤급 유조선 두 척을 야아드 한쪽에서 조립시키고 있
는 때였다.
5만톤급 선박 건조능력이 고작이라고 생각한 한국이 울산에서 조선소를
완공하기도 전에 26만톤급 유조선을 건조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일본
의 조선업계는 물론 세계 선박 관련업계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그
것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정 주영은 바로 지난 달에도 아일랜드의 네비게이션
선박회사가 발주한 23만톤급 유조선 한 척을 착공한데다가 일본의 가와사끼
선박회사로부터도 23만톤짜리 유조선 두 척을 주문받고 있는 때였다.
그와 같은 대형 유조선의 주문이 아직 조선소도 완공되지 않은 울산으로
그처럼 쇄도한 데는 물론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67년 이스라엘과 이집트간에 발발했던 그 유명한 7일전쟁에서 수에즈 운
하의 동안을 제압한 이스라엘은 수에즈 운하를 재개함으로써 초래되는 자국
의 불이익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무력도 불사한다는 애초의 방침을 그때까지
도 굽히지 않고 있었다. 연간 2만 1천 2백 50여 척의 대소 선박이 이용하는
수에즈 운하의 막대한 통행료는 이집트 정부의 주요한 수입원이었기 때문이
다.
수에즈 운하는 1869년에 개통을 본 이래 쭉 프랑스계 주주 및 영국 정부
가 지배해 오는 만국 수에즈 운하 회사에 의해서 관리 운영되고 있던 것을
1956년에 이집트 정부가 일방적인 국유화를 단행한 것이었다.
따라서 아랍 제국으로부터 원유를 수송하는 모든 유조선이 아프리카 남단
을 돌아서 항해해야 했기 때문에 유조선의 대형화는 불가피한 실정이었다.
거기에다 갓출발한 울산 조선소의 선가는 국제시세에 비추어 평균 15퍼센트
내외가 싸다는 잇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반면에 울산 조선소로서는 외국의 조선업계 평균임금의 3분의 1이라고
하는 저임금을 바탕으로 한 강력한 국제 경쟁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뭏든 일거리가 주체할 수 없을이만큼 뒤에 처밀려 있어서 정 주영으로
서는 1호선을 꼭 도크에서 빼 내야 할 입장이었다. 엔진을 비롯한 1호선을
꼭 도크에서 빼 내야 할 입장이었다. 엔진을 비롯한 1호선의 남은 작업은
배를 진수시켜 놓고도 얼마든지 진행시킬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판에 항만청에서 항해규칙의 명문 위반이므로 배를 옮겨서는 안 된
다고 하니 정 주영으로서는 울화가 치밀었다.
"어째서 이것이 배냐? 물 위에 뜨기만 하면 배냐? 이 배는 아직도 만드는
중에 있으니까, 배를 다 만들어서 선주한테 인도하기 전가지는 완전한 배가
아니므로 제조공정에서는 항해규칙 따위가 적용될 수 없다."하고 선언한 그
는 배 위로 올라가서 1호선의 진수를 직접 지휘하는 것이었다.
모든 임직원은 간을 졸이면서 그의 지시에 따랐다. 보는 이들은 손에 손
에 땀을 쥐었다.
1호선은 한 20분 만에 아무 사고 없이 무사히 바다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
가기 시작했다.
환성이 울렸다. 구경하던 사람들은 땀이 흥건하게 밴 손바닥이 아프도록
박수를 쳤다. 바다도 그의 지휘에 화합하는 듯 호수처럼 잔잔한 초봄의 어
느 날 일이었다.
선박을 건조하는 작업은 한 마디로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1호선 하나를
건조하는 데만도 크고 작은 시행착오를 백네 건이나 범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때마다 슬기와 지혜를 모아 그 많은 난관들을 극복해 가면서 마침내는 무
게로 따지자면 서울시 인구를 다 태우고도 남는 25만 9천톤의 대형 유조선
1.2호를 탄생시키고야 말았다.
74년 6월 28일.
30개월 전 미포만 백사장 사진 한 장과 스코트리스고우 조선소에서 빌린
선박 도면 한 장을 들고 다니면서 옛날의 봉이 김 선달을 무색하게 배를 팔
던 정 주영은 급기야 현대조선소 준공식과 함께 초대형 유조선 1.2호의 명
명식을 거행하기에 이르렀다.
준공식 식장에는 박대통령 내외와 선주인 그리이스의 리바노스, 1호선을
용선한 미국 셀 석유회사의 회장 멕파젠을 비롯한 내외 저명인사 다수가 참
석했으며, 그날 현대조선소가 최초로 건조한 유조선 1.2호는 영부인 육 영
수 여사에 의하여 <어틀랜틱 배런>호와 <어틀랜틱 배러니스>호로 각각 명명
되었다.
울산 조선소는 기공식을 가진 지 2년 3개월 만에 26만톤급 유조선 두 척
을 건조해 내는 데 성공한 셈인데, 이는 선진국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가장 능률적이고 빠른 건설이었다. 선진국의 경우는 대개 울산 조선소
만한 규모의 조선소 자체만 건설하려고 해도 3년은 걸리는 것이 상식이었
다. 그렇게 조선소를 먼저 건설하고 나서 선박 건조를 착수하는 것이 선진
국의 일반적인 통례였지만, 정 주영은 그 통념을 깨뜨리고 조선소 건설과
선박 건조를 병행해서 동시에 착수했던 것이다.
그가 그와 같이 조선소 건설과 선박 건조를 동시에 착수할 수 있었던 것
은 바로 그 자신이 선박 건조를 단순한 하나의 빌딩건축으로 보았다는 데에
있다. 그가 만약 선박을 건조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선박을 건좋는 것이다
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그는 당연히 조선소를 먼저 건설해 놓
고 난 다음에 선박 건조를 착수했을 것이다.
얼른 생각하면 전경련 빌딩을 20층으로 설계할 때에 고사포 포대를 옮긴
식의 컬럼버스의 달걀일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정 주영의 그와 같은 비
범한 착상을 빼놓고서는 오늘의 현대그룹을 얘기할 수 없다.
울산 조선소만 하더라도 그의 회고담과 같이 그때 조선소를 다 짓고 난
다음에 배를 주문받아 만들려고 했었다면 그는 그 막대한 투자를 감당할 길
이 없어서 조선소를 짓다가 쓰러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현대건설이 72년도에 국내외를 통틀어 새로 착공한 공사는 오직 파푸아
뉴기니아의 라무 지하 수력발전소 하나뿐이었다. 그것도 71년도 말에 국제
입찰에서 따 낸 공사였기 때문에 포기할 수 없어서 시작한 공사였다.
그 사실 한 가지만 미루어 봐도 정 주영이 조선소 건설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던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73년 초반을 넘기면서 조선소 건설현장에 여력이 생기기 시작하자 정 주
영은 5월 말경 단양 시멘트공장 2차 확장공사를 착공시켰다.
2차 확장공사는 기존 생산능력(연산 40만톤)을 배가시켜서 연간 생산능력
을 1백 20만톤으로 증대하는 대공사였다. 이에 소요되는 외자(미 수출입은
행 차관)만도 1천 64만불에다 내자가 31억 3천만원이나 됐었다.
이어서 7월에는 서빙고 중기공장 부지에다 현대아파트를 짓기 시작했다.
쾌적하고 편리한 주거환경을 건설해서 시민들과의 유대를 맺어 나가자는 정
주영 구상의 일단이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그의 구상은 어제 오늘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7
년 전인 67년에 소양강 댐 공사를 착수할 때부터 압구정동 일대의 상습 수
몰지역의 땅을 헐값으로 사들이고 있었다. 장차 소양강 댐이 완공되는 날에
는 그 상습 수몰지역이 훌륭한 택지로 이용될 것을 그는 미리부터 예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정 주영이 압구정동 일대의 수몰지역 당을 사라고 했을 때 그 지시
를 받은 회사 담당 중역은 왜 그런 쓸모없는 당을 사라고 하는지도 모르고
덮어놓고 시키는 대로 사들였을 뿐이었다.
한편 정 주영은 같은 해 후반부터는 일시 중단했던 국내공사 수주활동도
다시 전개해서 한국 카프로락탐 울산공장, 제7비료공장, 포항종합제철 2기
건설, 담양 댐 공사 등을 착공했다.
74년에도 정 주영은 조선소 건설 여력을 계속해서 국내공사로 확산해 나
갔다. 3월에 착공한 영동고속도로(새말.강능)공사를 비롯해서 여수 중화학
공업단지의 삼일항, 제7비료공장 부두, 인천 화력발전소3.4호기, 부산항 종
합개발 1단계 공사, 어린이 회관, 삼성의 죽도 조선소, 현대자동차공장 증
설공사 등을 착공했으며, 외국공사로는 때마침 몰아닥친 오일쇼크로 결손이
거의 확실한 인도네시아의 자로라위 고속도로 공사를 국제 신의상 할 수 없
이 착공하기도 했다.
그동안 완공을 본 주요공사로는 67년부터 시작해 온 소양강 다목적 댐을
위시해서 서울 지하철 1호선, 인천 화력발전소1.2호기 설치, 거제교, 남해
대교, 남해고속도로 등을 꼽을 수 있다.
정 주영이 울산 조선소를 기공하던 72년에서 조선소를 완공한 74년까지의
3년간은 국내외의 많은 정치적.경제적 충격을 가져 다 준 일대 격변이기도
했다.
정치적으로는 72년 초, 2차대전 후 최초로 북경에서 미.중공 정상회담이
개최됐는가 하면 그해 7월에는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그해 12월에는 박대통령이 유신헌법에 따라 4선되었고 73년 초
에는 미국이 월남전의 전면 정지를 선언하기에 이르렀으며 8월에는 김 대중
납치사건으로 한일관계가 유착상태에 빠졌다. 74년 초에는 긴급조치 1.2.3
호(개헌 논의 금지 등)가 선포되고 8.15광복절 기념식전에서는 문 세광의
박대통령 저격사건이 발생하여 결국은 영부인 육 영수 여사가 사망하는가
하면, 같은 달 미국에서는 닉슨 대통령이 워터 게이트 사건으로 여론에 굴
복하고 백악관을 떠났다.
한편 경제적으로는 72년 8월, 경제 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명령 제15호
(8.3조치)가 선포되어 모든 기업의 사채가 동결되고 물가는 8.3선에 묶이고
대미화환율은 4백대 1로 고정되었다.
그때 현대건설의 타인 자본은 울산 조선소 건설을 위한 막대한 외국 차관
과 국내 차입금 등으로 무려 7백 47억 7천 2백만원에 달했으나 장기채로 전
환할 수 있는 사채는 불과 9억 6백 41만원밖에 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총
타인 자본은 자체 자본금의 90퍼센트를 넘는 것으로서 당시 현대건설의 영
업 이익이 그 금리 부담을 하회하는 실정이었고 보면 확실히 정 주영의 조
선소 건설은 자신의 운명과 함께 사운을 건 도전이 아닐 수 없었다.
73년 4월, 반사회적 기업인 73명의 명단이 정부에 의하여 공개된 가운데
같은 달 개최된 전국 경제인대회에서 정 주영은 기업인 최대의 영예인 금탑
산업훈장을 수훈했다.
그해 10월과 12월.
제4차 중동전쟁이 발발하면서부터 아랍권의 대의 명분을 내걸고 이스라엘
을 지지하는 나라들에 대해서 석유를 금수하는 조치를 취하여 세계 경제를
충격 속으로 몰아넣은 아랍석유수출기구(OPEC)는 마침내 10월과 12월, 두
차례에 걸쳐서 석유 공시가격을 대폭 인상함으로써 석유 가격은 배럴당 3불
로부터 11불 65센트로 일거에 4배나 껑충 폭등했다.
그와 같은 석유 가격의 폭등은 장기적 성장 추세하에서 생산과 소비가 모
두 석유 의존형으로 정착한 우리 나라 경제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게 되었
다.
정부는 즉각 11월에 에너지대책위원회를 구성했고 12월에는 유가를 대폭
인상하고 74년 1월에는 한일대륙붕협정을 서둘러 체결하는 한편 종래의 주
유종타의 에너지정책을 주탄종유로 전환했다.
이어서 2월에는 한.사우디협력위원회를 발족시키고 다시 석유류가격 평균
82퍼센트, 전력요금 30퍼센트, 철도요금 50퍼센트, 택시요금 60퍼센트, 대
중교통요금 20퍼센트씩을 각각 인상했다. 모든 생필품 가격과 전 공산품 가
격이 잇달아 올랐음은 말할 나위 없다.
11월, 8.3조치로 4백대 1에 묶였던 환율이 4백 80대 1로 뛰었고 유류값은
또다시 31퍼센트가 인상되었다.
현대군단 참모들
오일쇼크에 휘말린 75년의 우리 나라 경제는 인플레로 날이 밝고 인플레
로 해가 졌다.
중소기업은 도산하기 시작했으며 도산 직전에 처한 모든 중소기업들도 40
퍼센트 이상이 조업을 단축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정부는 파탄에 직면한 한국경제를 구출해 내기 위한 비상수단으로 모든
현금차관을 무제한으로 허용했다.
도처에서 생활필수품의 매점매석 행위가 자행되고 있었다. 가정주부들은
휴지를 사들이기 위해서 슈퍼마켓으로 달려나갔다.
20세기가 낳은 경제학자 케인즈의 말대로 통화가치를 타락시키는 것만큼
사회의 토대를 전복시키는 데 정교하고 확실한 방법은 없었다.
아파트 한 채의 프리미엄이 몇천만원씩 하는 것을 보고는 아무도 땀 흘려
일하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할 사람임 없었다. 사람들은 일확천금에 혈안이
된 채 저마다 초조와 불안에 쫓기고 있었다.
기업은 기업대로 경영합리화 따위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닥치는 대로
만들어 팔아 버리면 그만이었다. 기술개발, 품질관리는 차라리 귀찮은 일이
되고 말았다. 그러고는 싶어도 인플레가 가로막기 때문에 어쩌는 수 없었
다.
무서운 병마와도 같은 인플레는 사람들로부터 창의와 성실을 앗아갔고 사
회질서와 생활양식과 가치관을 모두 무너뜨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인심은 날로 사나와지고 기업은 무기력해지고 사회 구석구석에는 좌절감
만이 팽배해 가고 있었다.
그런 살벌한 상황 속에서도 울산 사람이 소위 <현대 공화국>이라고 일컫
는 조선소에는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울산 조선소의 선박 주문량은 계속해서 쇄도하고 있었다. 세계적인 선박
대형화 추세도 과거의 모든 예상을 초월해서 20만톤급 내지 30만톤급의 초
대형으로부터 40만톤급 50만톤급의 극대형으로 급속히 이행되어 가고 있었
다.
그와 같은 세계의 선박 극대형화 추세에 따라 정 주영은 이미 작년부터
조선소의 확장공사를 진행시켜 오고 있었다. 이 확장공사를 위해 그는 작년
초에 내자 3천 1백 51만불, 외자 2천 9백 20만불, 도합 6천 70만불의 자금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작년 6월에 수리 조선소 설립계획을 수립하고 일본의 가
와사끼 중공업과 합자투자계약(현대 80%.가와사기 20%)을 체결, 전하만에
선박 수리만을 전문으로 하는 국제규모의 도크 건설을 지난 3월에 착공시켰
다.
조선소의 1차 확장공사는 5월에 완료되는데, 그로써 조선소 총공사비는 1
억 2천 9백여 만불, 우리 돈으로는 약 5백 20억원으로서 이는 경부고속도로
총공사비의 1.2배가 넘는 실로 방대한 규모의 투자였다.
정부가 발주하는 신규공사는 거의 없는 때였다. 그렇다고 현대 건설의 건
설 여력을 쉬게 할 수는 없는 정 주영이었다. 서빙고에 짓고 있는 아파트가
완공되기 전이었지만 그는 물 한방울 나오는 데가 없고 전기줄 한가닥 끌어
다 쓸 데가 없는 황량한 압구정동 벌판에 대단위 아파트 건설공사를 진행시
켰다.
오일쇼크의 영향은 현대건설의 해외공사현장에도 파급되었다.
73년 5월에는 태국의 랑수앙 파티룽과 수판부리 차이낫 두 고속도로를 낙
찰시켰으나 그후에 밀어닥친 오일쇼크 때문에 낙찰가격으로써는 도저히 그
공사를 수행할 수 없어서 태국정부 당국과 공사비의 제조정을 위한 협상을
벌이다가 끝내는 성공하지 못하고 애써 따 낸 공사를 포기하기까지 했었다.
그동안 주택건설판매 사업을 통해서 많은 수익을 올려 온 괌도에서는 미
연방정부가 오일쇼크를 극복하기 위한 정책수단의 일환으로 그동안에 저소
득층을 상대로 해서 지급해 오던 주택 보조금을 일시에 중단함으로써 이미
계약된 아파트를 해약하는 사태까지 발생하는 바람에 지금까지 누려온 주택
경기는 찬물을 뒤집어쓰고 걷잡을 수 없는 불황 국면으로 곤두박질치고 있
었다.
인도네시아의 수도 자카르타와 중부도시 보고르와 찌와이를 연결하는 자
고라위 고속도로 공사 역시 오일쇼크 이전인 73년 7월에 따 낸 공사로서 적
자요인을 안은 채 국제간의 신의와 인도네시아에의 첫진출이라는 점을 감안
해서 그해 12월에 착공하고 현재 그동안 엄청나게 등귀한 물가를 내세워 추
가비용을 받아 내기 위한 끈질긴 교섭을 인도네시아 정부당국과 계속하고는
있지만 그 결론이 어떻게 내려질지는 아직 불투명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단 한군데, 정 주영이 조선소 설립에 정신없이 바쁘던 72년, 국제담당 부
사장 권 기태가 뉴기니아의 무슨 발전소를 입찰하겠다고해서 자세히 물어
볼 겨를도 없이 꼭 따 내도록 하라고 해서 시작한 라무 지하 수력발전소 공
사가 지금은 마무리 단계에 있었는데 도급액 1천 2백만불에서 30퍼센트라는
높은 공사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수력발전소는 일반적으로 댐을 높이 쌓아 올려서 그 낙차로 발전을 하는
것이지만 지하 수력발전소는 지하로 수직터널을 뚫어서 그 낙차로 발전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하 수력발전소의 경우는 저수용량이 적어도 가능하며 수
몰면적이 적다는 잇점이 있는데, 수직터널의 높이가 높을수록 발전능력을
증대시킬 수 있기 때문에 그 수직터널과 수직터널까지에 이르는 수로터널
공사가 곧 지하 수력발전소의 주요 공정이다.
라무 지하 수력발전소의 수직터널 길이는 2백미터였다. 하지만 현대건설
로서는 그렇게 긴 수직터널을 뚫어 본 경험이 없었다. 낙찰 후 계약과정에
서 수직터널 공사에 관한 실적이 문제가 돼서 회사 기술진들이 골치를 앓을
때였다.
"이봐, 남산의 1천 5백미터가 넘는 굴도 뚫었는데 그까짓 2백미터 굴 뚫
는 걸 가지고 뭘 그래?"
정 주영은 수직터널이라면 수직터널 그것만을 생각하는 기술진들을 답답
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수평터널과 수직터널을 뚫는 데는 다소의 차이가 있
겠지만 요는 굴을 뚫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결국은 그의
주장대로 남산터널을 시공한 실적을 우겨서 계약해 낸 공사였다.
그래서 어느 국제 건설잡지에서는 현대건설이 과연 그 공사를 해낼 수 있
을 건인지 우려된다고 하는 기사를 싣기까지 했었으나 현장 기술진의 주도
면밀한 사전계획과 철저한 시공관리 끝에 계약공기를 2개월이나 앞당겨서
완공해 냄으로써 동 공사는 현대건설이 그때까지 시공한 어느 해외공사보다
도 가장 성공적으로 수행한 공사로 기록되었다.
그 공사의 현장소장이었던 김 주신이 이사로 승진되어 본사로 들어왔다.
그가 귀국할 무렵, 본사에서는 울산 조선소 건설에 기여한 공로로 이사가
된 전 갑원이 중심임 되어 국제담당 부사장 권 기태 지휘 아래 중동진출을
위한 이란의 반다르 압바스 동원훈련 조선소 건설 준비에 부산했다.
그때 이미 한국에서는 삼환기업이 사우디아라비아의 서부 도시인 젯다 시
에서 조경공사를 맡아 하고 있었으며 그 뒤를 이어 한국건업이 같은 지역에
서 도로공사를 맡아 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현대건설은 중동진출에 이미 한발 늦고 있었다. 현대건설이 중
동진출에 늑장을 부린 것은 국제담당 사장 정 인영의 신중론 때문이었다.
현대건설은 그전에도 쿠웨이트로부터 몇 가지 공사에 입찰을 초청받은 방
있었으나 정 인영은 중동에 나가서 수지를 맞추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하며
그 입찰 초청을 전적으로 외면해 버렸다. 첫째 사람 살 곳이 못 되는 곳에
가서 어떻게 일을 하느냐는 것이었다.
그와는 반대로 정 주영은 조선소 일로 울산에 내려가 있을 때가 많았으면
서도 하루가 멀다 하고 국제담당 부사장인 권 기태를 전화로 불러서 중동에
한번 나가 보라고 성화를 했다.
그래서 권 기태가 정 인영에게 가서 중동에 좀 나가야겠다고 하면 그는
절대로 나가서는 안 된다고 호통을 쳤다. 중간에 끼어서 입장이 곤란한 권
기태는 그대로 주저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루는 본사에 올라온 정 주영은 권 기태가 그때까지 서울에 있는 것을
보고는 왜 중동에 빨리 안 나가고 여태가지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노발대발
했다.
권 기태는 하는 수 없이 무작정 비행기표를 사 가지고 우선 동경으로 날
았다. 그가 일본의 하네다 공항에 내렸을 때는 이미 정 인영의 연락을 받은
동경지점 직원 한 사람이 텔렉스 용지를 한움큼 쥐고 마중 나와 있었다.
그는 떠날 때 정 인영에게는 떠난다는 인사도 없이 떠났던 것이다. 텔렉
스 내용은 중동에 가더라도 공사 수주에 신중을 기하라는 것과 동경에 도착
하는 즉시로 꼭 본사로 전화를 하라는 것이었다.
"공사를 절대로 성급하게 맡지 말란 말야, 알겠지?"
권 기태의 전화를 받은 정 인영은 첫마디에 그렇게 말했다. 공사를 성급
하게 맡지 말라는 그의 말은 가능하면 맡지 말라는 말과 같은 뜻이었다. 정
인영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수화기에 울렸다.
"그리고 중동에 가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반드시 내게 직접 보고하라구.
그러면 회장한테는 내가 판단해서 보고할 테니까 말야, 알겠어?"
정회장에게 먼저 보고되는 날이면 곧바로 행동에 옮겨질 것을 염려한 정
인영이 안전판을 박는 것이었다.
조선소 건설이라는 엄청난 모험을 치른 정 인영은 또 다른 모험에 도전할
필요 없이 이대로 회사의 안정기반을 착실히 굳혀 나가야 한다는 입장이었
다.
72년 6월, 정 주영은 현대건설의 기구를 또 한차례 개편했었다. 해외공사
를 비롯한 대외차관업무와 울산 조선소 건설 등 늘어나는 사업규모와 함께
조직이 자꾸만 팽창해짐에 따라 이를 통제 관리해야 할 최고 경영진의 업무
가 급격히 불어났기 때문이었다. 더우기 그 자신은 울산 조선소 건설에 거
의 전념하다시피 하고 있을 때였고 정 인영은 해외업무에 주력하고 있었으
므로 사장의 업무를 국제담당과 국내담당으로 분담케 하고 국제담당 사장에
는 정 인영을, 국내담당 사장으로는 건설부장관과 경남기업 사장을 역임한
바 있는 조 성근을 영입해 들였던 것이다.
그때 상무로 승진한 이 명박은 74년 1월에 단행된 인사에서 다시 전무로
승진되고 75년 1월에는 또다시 부사장으로 승진되기까지 했다.
그래서 오늘 현재의 현대건설의 최고 경영진인 사장단은 정 주영 회장을
정점으로 정 인영 국제담당 사장이 있고 조 성근 국내담당 사장이 있으며,
국제담당 사장 밑에는 권 기태 부사장이 있고 국내담당 사장 밑에는 이 춘
림을 비롯한 정 순영.이 명박.김 영주 등의 네 부사장이 포진하고 있었다.
그 중 이 춘림은 시공 및 기술담당이고 정 순영은 단양 시멘트공장 담당,
김 영주는 울산사무소 주재, 이 명박이 관리 및 업무담당이었기 때문에 그
때 이미 이 명박은 현대건설의 제2인자로 부상하기 시작했으며 또한 사내에
서의 그의 영향력은 막강했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역시 누구누구 해도 아직까지는 정 인영이 단연 현대
건설의 당당한 제2인자요 실력자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회장의 결정도 사장
인 정 인영에 의해서 번복되는 수가 더러 있었다. 권 기태가 중동으로 떠나
라는 회장의 출장명령을 받고도 사장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쳐 못 떠나고 있
었다는 사실이 바로 그 경우를 말해 주는 일단의 예이기도 했다.
그러나 정 인영이 회장의 결정을 반대하거나 회장과 의견을 달리하는 것
은 단지 그때 그때의 견해 차이에 의한 것일뿐, 맏형인 회장을 위하고 반평
생을 몸 담아 오는 현대건설을 위하는 충정에는 결코 회장에 못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그는 회장이 하는 일에 많은 반대를 해왔었다. 어떤 때는 한
번 한다고 맘 먹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곧 돌격형으로 행동에 옮기는 회
장의 과격한 추진력에 제동을 걸기 위해서 옳은 일인 줄 알면서도 일부러
반대를 위한 반대도 했었다. 사내에서는 회장이 하는 일에 감히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설 수 있는 사람이 자기 혼자뿐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
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그가 중동진출을 반대하고 있는 것은 그런 반대를 위한 반대
가 아니었다. 이미 작년부터 중동에 진출한 삼환기업이나 한국건업이 고전
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현대건설
이 해외공사에서 재미 본 공사는 월남의 특수붐을 탄 전시공사 말고는 뉴기
니아의 지하 수력발전소 정도에서 얼마간의 공사수익을 올렸을 뿐 나머지
공사에서는 별 재미를 못 보아 왔다는 데도 그 이유가 있었다.
회장인 정 주영의 견해는 달랐다. 중동의 선발 업체가 고전을 하는 것은
현대건설이 10년 전 태국에 진출했을 때처럼 경험 부족에서 오는 일시적인
시련이라는 것이며, 각종 해외공사에서 재미를 못 본 것은 사실이지만 그
대신 현대건설은 그동안에 그만큼 축적해 온 기술과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
번 중동진출에서는 꼭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정 주영은 아랍 산유국이 원유가를 2차로 인상하던 73년 12월에
이미 중동관계 전문가들 몇 사람을 만나서 앞으로의 중동 경제가 어떤 양상
으로 발전할 것인가에 대해서 솔직하게 물어 본 적이 있었다.
아랍 산유국들은 원유가를 인상하기 전에 무려 3천 4백억불이라는 규모의
중동개발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다. 무조건 원유가를 올려서 세계 오일달러
가 아랍으로 집중된 채 그대로 장기간 사장되는 날에는 결국 세계 경제가
파탄에 직면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석유 에너지의 의존도가 높은 서방세계의 공업국가들은 오일달러
의 환류메카니즘에 자국의 경제활동을 여하히 연결시키느냐에 그 사활이 걸
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에 정부로서는 한국경제발전계획에 가장 큰 타격을 주고 있는 막대한
원유대금의 부담을 어떤 방법으로 흡수하느냐 하는 것이 최대의 당면과제가
아닐 수 없었다.
60년대의 우리 나라 석유 수입액은 총수입액의 5퍼센트 미만이던 것이 1
차 석유 위기가 몰아닥친 74년도에는 일거에 15퍼센트를 넘게 되어, 금액으
로 보면 1억 7천 3백불에 지나지 않던 것이 9억 6천 5백만불로 늘어났던 것
이다.
정부는 74년 초, 상공부장관을 단장으로 하는 경제사절단을 사우디아라비
아에 파견하고 <한국.사우디아라비아 경제 통상 및 기술협정>을 체결하는
한편 민간 경제협력기구인 한국.사우디아라비아 경제협력위원회를 발족시켰
으며 또 최근에 와서는 해외건설 촉진법 시안을 만들고 검토하는 단계에 있
었다.
현대건설은 마침내 안정을 추구하는 정 인영 사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중동을 미지의 달라박스라고 생각하며 이에 모험을 걸려는 정 주영 회장의
강렬한 도전의지에 따라 중동진출의 첫공사로서 이란의 반다르 압바스 동원
훈련 조선소를 8백만불에 수의계약을 했었던 것이다.
계약은 국제담당 사장 정 인영에 의해서 직접 현지에서 체결됐었다. 중동
진출을 그렇게 반대했던 정 인영도 공사계약서에 서명하고 나서는,
"8백만불을 호주머니 속에 넣으니 호주머니가 뜨끈뜨끈하군."하고 흐뭇해
했었다.
동원훈련 조선소 건설이란 장차 이란정부가 계획하고 있는 50만톤급 규모
의 대형 조선소 건설을 대비하기 위한 조선 기능공의 훈련과 소형 선박의
수리시설을 위해 만드는 소형 조선소였다.
중동에의 첫진출이니만큼 기후.풍습.지리 등에서 오는 애로는 있었으나
이미 울산 조선소를 건설한 경험이 있는 현대건설 기술진으로서는 별다른
공사상의 애로는 없었다.
다만 페르샤만 안의 모든 항구가 그러했듯이 반다르 압바스 항만시설도
형편이 없었기 때문에 장비나 자재를 실은 선박이 도착하면 으례 외항에서
보통 3개월 이상을 기다려야만 하는 애로가 공사진행에 막대한 지장을 주었
다.
마침 그 공사를 위해 태국 고속도로 공사에서 쓰던 장비들이 배에 실려
보내 왔었다. 역시 그 배도 항만 사정 때문에 3개월 이상 외항에 묶여서 하
역 순번을 기다리고 있어야만 했다.
태국에서 실려 보낼 때도 장비를 깨끗이 닦고 기름질 친 것은 아니었지만
백일 이상을 뜨거운 태양 아래 그대로 방치하다시피 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장비가 녹이 슬 대로 슬고 더러는 삭아 버린 부분까지 있어서 나중에 하역
을 하고 보니 트럭의 경우는 20대 중에서 제 힘으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 1
대밖에 없을 정도였다.
그와 같은 웃지 못할 경험은 훗날 현대건설이 중도에서의 대형공사를 시
공함에 있어 어느 현장에서나 선박의 접안시설을 먼저 갖춤으로써 모든 공
사의 공기를 단축케 하는 산 교훈이 되었다. 이란의 동원훈련 조선소가 착
공되고 나서 얼마 안 있다가 런던지점으로부터 텔렉스 한 장이 날아 들어왔
다. 바레인에 건설하는 아랍 수리조선소 입찰이 있으므로 PQ(입찰자격신청
서:pre-qualification)를 지급 송신하라는 내용이었다.
사실 그런 텔렉스를 런던 지점에서 쳤을 때는 이미 입찰자격 신청이 마감
된 다음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중동 사정에 어두운 한국에서는 중동에 그
런 공사가 있을 것이라는 정보조차도 가지고 있지 않았었다.
며칠 전 런던 지점에서 근무하는 음 용기가 일본 주재상사 직원한 사람과
같이 점심식사를 하고 있을 때였다. 그 자리에서 그는 일본인이 무심코 흘
리는 말에서 중동의 여러 산유국들이 자금을 모아서 바레인에다 수리조선소
를 세우기로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본인이 무심히 한 말이라고는
하지만 그때는 이미 PQ신청이 마감된 다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지나간 일이라고 체념하지 않았다. 그런 정보를 미리 알지
못했던 것을 후회하고 안타까와하면서 평소에 안면을 익혀 온 사람들을 찾
아 다니며 그 공사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유력인사를 소개해 달라고 부
탁했다.
찾으면 길은 있게 마련이었다. 요행히 유력인사를 쉽게 소개받을 수 있었
다. 그는 그 유력인사를 찾아가서 현대건설은 세계 굴지의 울산 조선소를
건설한 회사이며 또한 현재도 이란에서 조선소를 건설하고 있는 조선소 건
설의 베테랑임을 역설하고 현대건설의 PQ를 받아줄 것을 간청했다.
그 유력인사는 바로 아랍 수리조선소의 건설과 함께 그 운영을 위임맡고
있는 포르투갈의 디스나브사 담당 중역이었다. 그는 이틀 안으로 PQ를 제출
할 수 있으면 제출해 보라는 것이었다.
사태가 그처럼 촉박하다는 사실을 보고받은 정 주영 회장은 즉각 모든 기
동력을 발휘해서 PQ자료를 런던지점으로 보내도록 지시했다. 그때 정 인영
사장은 중동에 출장 중이었다.
한밤중에 급전을 보내는 현대건설 본사의 텔렉스 머신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같은 시각이었지만 런던은 아침이었다. 런던지점의 텔렉스 머신도 동시에
작동하고 있었다.
현대건설의 규모, 자본금, 보유장비, 동원인력, 지금까지 수행해 온 주요
공사 실적 등 텔렉스를 받는 시간만도 30분이 넘었으며 찍혀 나온 텔렉스
용지의 길이는 2미터가 넘었다.
런던지점에서는 그날 낮밤을 꼬박 새우며 텔렉스 내용에 의한 PQ서류를
완벽하게 작성해서 이튿날 아침 포르투갈의 리스나브사에 제출했다.
그로부터 한달 후 현대건설은 바레인에서 있을 아랍 수리조선소 건설 입
찰에 초청되었다. 그때까지도 정 인영은 중동에서 머물고 있었다.
정 주영은 즉각 전 갑원을 중심으로 하는 견적팀을 편성하고 나서 그들에
게,
"이번 공사는 어떤 일이 있어도 꼭 따 내야 해."하고 꼭 따 내야 할 이유
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는 것이었다.
"이번 공사를 우리가 따서 잘만 해낸다면 OPEC회원국들 눈에 들것 아니냐
말야. 그리 되면 앞으로 그들이 발주하는 다른 공사를 얻기가 쉬워요."
아랍 수리조선소는 72년 OPEC총회에서 결의된 그들의 첫 공동사업이었다.
즉 OPEC의 10개 가맹국이 공동 출자한 3억불로 바레인에다 아랍수리조선회
사(ABRY:Arab Shipbuilding and Repair Yard)를 세우기로 했던 것이다.
세계의 유명 건설회사들이 그 공사에 서로 눈독을 들이고 있는 것도 그
공사가 갖는 그와 같은 성격 때문이었다. 하물며 이제 막 중동진출을 시작
한 정 주영의 입장에서 그 공사에 크나큰 매력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
다.
정 주영은 견적팀을 현지로 출발시키고, 이란에 출장 중인 김 주신과 사
우디아라비아에 출장 중인 정 인영에게 즉시 바레인으로 입국해서 전 갑원
이 이끄는 견적팀에 합류할 것을 지시했다.
김 주신은 지시를 받자마자 바레인으로 들어갔으나 정 인영은 그 지시에
불응했다. 그는 아직까지도 현대건설이 섣불리 중동에 진출해서는 안 된다
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치열한 국제경쟁입찰에서
현대건설이 이겨 낸다는 생각이 안 들었기 때문이다.
전 갑원이 이끄는 견적팀은 바레인의 문 프라자 호텔에서 4일 밤낮을 묵
으면서 열심히 입찰서를 작성해 냈다.
입찰은 기술용역회사인 깁 프로파브릴사가 있는 런던에서 실시하기로 되
어 있었다. 깁 프로파브릴사는 영국.포르투갈.그리이스의 3국 합자회사였
다.
김 주신과 전 갑원이 입찰에 참가하기 위해 런던행 비행기를 탔다. 입찰
을 하러 가면서도 그들은 걱정이 태산 같았다. 그들 입장에서는 낙찰이 돼
도 걱정이고 낙찰이 안 돼도 걱정이었다.
그들은 바레인을 출발하기 전에 울산과 젯다로부터 각기 판이한 내용의
지시를 받았었다.
"덮어놓고 많이 써 내지 말고 조금 손해본다는 생각으로 써 내서 이번 공
사는 꼭 따 내라구. 원래 공사 입찰은 어떤 공사구 손해본다는 각오로 써
내야 딸 수 있어. 알았지?"
울산 조선소에 내려와 있는 정회장의 간곡한 전화 내용이었다.
"한국에 돌아가면 모든 책임은 내가 질 테니 적당히 써 낼 생각말구 한 3
억불쯤 잔뜩 써 내구 여기 젯다로 와서 나하고 같이 돌아가자구. 괜히 실수
해서 이번 공사를 낙찰시키는 날에는 현대건설 망하는 책임을 당신네들이
져야 해. 알았어?"
사우디아라비아의 젯다 시에 와서 묵고 있는 정사장의 위협적인 전화 내
용이었다.
김 주신과 전 갑원의 마음은 착잡했다. 그야말로 은혜냐 사랑이냐, 사랑
이냐 스승이냐의 갈림길을 가고 있는 심정이었다. 두 사람은 비행기가 이륙
하자마자 서로 자는 척하고 눈만 감고 있었다.
상냥한 브리티쉬 에어웨이 스튜어디스들이 음료수를 써비스하고 다녔다.
스튜어디스가 김 주신 앞으로 다가와서 무엇을 들겠냐고 물었다.
"스캇치!"
"아이 해브 더 세임(같은 것을 주시오.)"
전 갑원은 한마디 내뱉듯 하고 나서 한숨을 푹 내쉬고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전이사, 정사장 시키는 대로 아무렇게나 확 비싸게 써 넣을까?"
"그럴려면 이 비싼 비행기 타고 런던가지 갈 것 없잖아."
김 주신도 동감이었다. 답답해서 해본 말이었다.
"어쨌든 입찰에 최선을 다하자구. 낙찰이 되고 나서도 공사를 포기할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테니까."
"좋아! 우리는 주어진 임무에 최선을 다하면 그만이야. 그 뒤는 최고 경
영진에서 알아서 할 일이구."
입찰 결과, 본 입찰에서는 현대건설이 최저가격을 써 넣음으로써 1번 입
찰자가 되었고 2번은 영국의 유명한 죤 빅토리사가 차지했으며, 대안입찰에
서는 거꾸로 영국의 죤 빅토리사가 1번 입찰자가 된 반면에 현대건설은 그
들보다 5백만불을 더 비사게 써 넣음으로써 2번으로 밀려났다.
입찰을 마치고 바레인으로 돌아온 김 주신과 전 갑원은 불안하고 초조했
다. 대안입찰에서 1번을 차지한 죤 빅토리사는 이미 바레인에 진출한 지가
오래였기 때문에 대소 공사를 통해서 이름이 널리 알려진 회사일 뿐 아니라
입찰을 주관한 기술회사가 영국회사였기 때문에 현대건설이 낙찰자로 결정
된다는 보장은 매우 희박했었다.
며칠 후, 런던의 깁 프로파브릴사로부터 기술회의를 하겠으니 회의준비를
하고 오라는 연락이 날아왔다. 바레인 문 프라자 호텔에서 묵고 있던 김 주
신.전 갑원 일행은 환성을 올렸다. 그러나 환성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들
의 얼굴은 다시 긴장에 휩싸였다.
기술회의를 갖자는 통보가 곧 낙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기술회의란
일단 최저가격으로 입찰한 회사이므로 과연 그 회사가 공사를 수행할 만한
기술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을 확인하는 하나의 계약과정에 불과하다. 아
무리 최저가격으로 입찰했다 할지라도 만약 기술용역을 담당하고 있는 회사
가 그 회사의 기술을 인정할 수 없을 경우에는 얼마든지 2번 입찰자를 낙찰
자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다. 더구나 이번 입찰의 경우는 대안 입찰에서 1
번을 한 영국으 죤 빅토리사가 뒤에서 도사리고 있는 판이다.
하지만 김 주신이나 전 갑원이 기술회의를 갖자는 통보를 받고 긴장한 것
은 그런 기술회의상의 어려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미 울산 조선소를 건설
해 낸 경험을 가진 그들로서는 기술회의에서 상대방을 설득시킬 만한 자신
은 갖고 있었다. 그보다는 과연 이 공사를 할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결정
을 그들 스스로가 내려야만 할 단계에 직면했기 때문이었다. 이 공사가 낙
찰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기술회의에 참석하는 그들이 공사
를 하느냐 마느냐 하는 결심에 달려 있는 것이었다.
"애썼다. 계속 노력해서 꼭 낙찰을 시켜라. 현대가 세계 속의 현대로 웅
비하느냐 못 하느냐 하는 것은 당신들 손에 달렸다."고 하는 정 회장의 고
무적인 격려의 메시지와,
"기술회의고 뭐고 당장 철수해라. 너희들이 현대건설을 망쳐 버릴 생각이
냐? 언제 우리 현대건설이 1억불짜리 해외공사를 한 경험이 있었느냐? 인도
네시아에서 지금 적자공사를 하고 있는 것을 너희들도 잘 알고 있지 않느
냐? 그 공사를 맡는 날에는 현대는 망한다."고 하는 정사장의 결사적인 만
류의 메시지가 호텔 텔렉스를 통하여 서울과 젯다 사이에서 빗발치듯 날아
오고 있었다.
회장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회장 눈 밖에 나나 사장 눈 밖에나나 회사
안에서 찬밥 먹기는 매일반이었다. 회장의 개척정신과 도전력도 높이 평가
되어야 했지만 사장의 탁월한 관리능력과 명석한 정세판단과 위기에 임기응
변하는 대처능력도 평가할 만했다.
안정을 추구하려는 사장의 지시를 따를 것이냐 모험에 도전하려는 회장의
지시를 따를 것이냐 하는 문제로 그들간에도 일대 논쟁이 일어났다. 격렬한
논쟁은 이틀간이나 계속되었으며 그들의 논쟁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서울과
젯다에서는 서로 상반되는 메시지가 계속해서 날아 들어왔다.
그들의 논쟁은 어느덧 <현대정신>이 무엇이냐 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 나
가고 있었다.
그들은 울산 조선소같이 무에서 유를 창출해 내는 창조정신이 곧 현대정
신이라고 했다. 지금까지 그처럼 숱한 모험에 도전해 온 적극 의지가 곧 현
대정신이라고도 했다. 한번 한다고 나서면 죽든 살든 밀로 나가서 끝장을
보고야 마는 추진력도 현대정신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미지의
세계에 뛰어들면서 끝없이 개척해 온 개척정신도 현대정신의 하나라고 했
다. 결론은 현실에 안주하려는 정 인영 사장의 생각은 현대정신에 위배된다
는 것이었다.
마침내 그들은 창업주 정 주영의 지시대로 현대정신에 입각해서 나중에는
현대가 망하든지 흥하든지 이번 공사만큼은 꼭 낙찰시키도록 노력한다는 그
들대로의 독자적인 판단 아래 런던행 비행기를 탔다.
그때가 밤 2시, 이튿날 런던에 도착한 것은 현지 시간 오전 6시. 그들은
호텔을 잡고 여장을 풀 시간도 없이 세수만 한 채 곧장 기술용역회사인 깁
프로파브릴사 회의실로 향했다.
기술회의는 장장 25일을 끌었다. 그들 만대로 한번 한다고 나서면 죽든
살든 밀고 나가서 끝장을 보고야 마는 현대정신이 아니었더면 본사 최고 경
영진의 갈등도 있고 하던 때니만큼 중도에서 포기해 버리고 말았을지도 모
를 일이었다.
울산 조선소를 건설한 경험이 있었고, 또 상대방도 그 실적은 인정했지만
그들에게는 영국식 시방서에 의한 시공경험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바레인
에 관해 너무나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장비를 어떻게 동원하고 공사는 어
떻게 진행할 것이냐에 관해서도 그들은 사실상 백지상태였다.
그러나 그들은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정직하게 시인하고 그날 돌아와서는
밤을 새워서라도 연구해 가지고 나가서 다음 날은 그들이 만족할 만한 해답
을 해주곤 했다.
그들의 성실한 자세는 마침내 기술용역회사 담당자를 감동케 했다. 기술
용역회사 담당자들은 그 정도로 진지한 한국 기술자들의 자세라면 어떤 공
사라도 능히 차질 없이 수행해 낼 수 있다는 판정을 내리고 현대건설을 최
종 낙찰자로 결정했다.
공사기간 2년, 공사금액 1억 3천만불, 공사내용은 바레인의 무하라크 섬
에서 남쪽으로 8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매립지에 50만톤급 유조선을 건조 수
리할 수 있는 드라이 도크를 비롯해서 각종 공장과 건물을 건설하는 것으로
서 토목.건축.기계.전기 등 각 분야가 종합적으로 요구되는 대형 공사였다.
기술회의까지 성공적으로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온 김 주신.전 갑원 일행
은 탈진한 사람들처럼 허탈해지고 말았다. 정 인영 사장한테 된서리를 맞을
것이라고 각오한 그들이었기에 더욱 허탈할 수밖에 없었다.
끝내 안정을 주장하던 정 인영 국제담당 사장이 물러나고 그와 뜻을 같이
하는 국내담당 사장 조 성근도 곧 퇴진할 것이라는 얘기였다.
인사차 회장실에 들른 그들은 시름에 찬 정회장의 얼굴을 보는 순간 아
무 말도 못 하고 죄인처럼 돌아서 나오고 말았다.
정 주영은 큰아우 정 인영의 퇴진을 무척 가슴 아파해 하고 있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회사 안에서나 밖에서나 공사간에 그만큼 자기를 아끼고 위하
는 사람이 없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또한 그는 모든 일을
믿고 그에게 맡길 수도 있었다.
정 인영이가 없는 오늘의 현대그룹은 있을 수 없다고 하는 항간에 떠도는
말에도 그는 굳이 아니라고 인색한 부정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부산 피난
시절에 미군공사의 길을 터 준 것도 정 인영이요, 고령교의 위기를 구해 준
것도 정 인영이요, 많은 공사 수익을 본 인천의 제1도크공사를 따 내게 한
것도 정 인영이었다.
회사 안에도 정 인영의 명철한 두뇌 덕분에 회사가 오늘날 이렇게 발전해
왔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결국 그런 사람들은 나중에 다 그를 따라서
회사를 떠났다.
정 주영은 이삼일 전에도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아우를 잡고 간곡하게 만
류했었다.
"그전에도 우리는 서로 의견을 달리하면서도 잘 조화를 이루어 오지 않았
니? 아무리 형제라도 큰 사업을 하다가 보면 얼마든지 견해가 다를 순 있는
게야. 그러니 공연한 소리 하지 말고 전처럼 같이 일을 해 나가자."
"저도 이 기회에 현대양행을 한번 독자적으로 키워 보려고 그럽니다."
정 인영에게는 60년대 중반부터 현대그룹의 방계회사 형식으로 자영해 오
는 현대양행이 있었다.
"회사에 그냥 있으면서 현대양행 일을 더 열심히 하면 되잖아."
"현대양행을 통해서 형님하고 한번 선의의 경쟁을 해 보고 싶습니다. 하
하......"
"그래? 하지만 남들은 네가 회사를 그만두고 나가면 형제간에 무슨 큰 싸
움이라도 하고 나간 걸로 알 것 아니냐."
"그런 소문이 나지 않게끔 형님이 좀 많이 도와 주십시오."
"아 그야 도와 주고 말고. 남들도 도와 줄 판에......아뭏든 네가 회사를
ㄸ더나더라도 사장 자리는 앞으로 일년 동안 비워 둘테니 그동안에 나오고
싶으면 언제라도 나와. 그리고 일년이 지나면 네가 걱정하는 아랍 수리조선
소도 적자공사가 될지 흑자공사가 될지 대강 판단이 날 거 아니니?"
"형님! 이번 바레인 공사에는 아마 형님이 직접 현장에 나가서 사셔야 할
겁니다."
"그러게 네가 회사에 붙어 있어야만 내가 맘 놓고 현장에 나가 있을 것
아니냐. 울산 조선소 지을 때처럼 말야."
"제가 아니래도 지금이야 회사에 일군들 많은데요 뭐."
정 인영은 끝내 퇴사의 의사를 굽히지 않았다. 정 주영은 아우가 술을 안
하기 때문에 따 놓은 위스키 한 병을 혼자서 다 마셔 치웠다. 어젯밤에도
그는 혼자서 술을 마셨다.
회사에 나와 앉았어도 동생이 회사를 그만두었다는 생각을 하면 웬일인지
회사 한구석이 텅 빈 것처럼 허전했다. 그는 시선을 멀리 광화문 쪽으로 돌
렸다.
광화문 네거리에서는 지난 이른 봄에 착공한 지하 4층 지상 16층의 새 사
옥을 짓고 있는 중이었다. 그새 골조공사가 끝나고 내장 공사가 한창이었
다. 내년 시무식은 광화문 사옥에서 거행한다는 목표를 세워 놓고 진행하는
공사였기 때문에 공기를 맞추기 위한 현장에는 밤낮이 없었다.
광화문 사옥은 정 주영 자신이 설계하고 시공하고 감독하는 공사였다. 실
제 설계 과정에서도 직원들은 그가 시키는 대로 도면만 그렸었다. 그렇기
때문에 정 주영은 출근 길에는 으례 공사현장에 들러서 지하 4층으로부터
지상 16층까지 구석구석 둘러보며 작업을 지시하기도 하고 잘못된 곳을 고
쳐 짓게 해 오고 있었다.
정 주영은 그 현장에도 어제 오늘은 들르지 않았다. 당장은 정 인영 한
사람이 떠난 자리였지만 그 빈자리는 너무도 큰 것처럼 느껴졌다. 국제담당
사장을 따로 임명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누군가로 하여금 정 인영이 하던
일을 대신 시키기는 해야 할 텐데 그를 대신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를
대신할 사람이 없다는 것은 곧 그동안 그 혼자서 모든 일을 도맡아 해 왔었
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국제담당 부사장 권 기태가 있었지만 그는 어디까지 훌륭한 엔지니어일
뿐 관리자로서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관리담당 이 명박을 국제관리
담당 부사장으로 전임 발령하고 싶었지만 국내담당 사장으로 있는 조 성근
도 오래잖아 회사를 그만둘 것 같은 눈치고 보면 그럴 형편도 못 되었다.
울산의 자동차 공장을 맡고 있는 정 세영이 적임자이기는 하지만 그는 현
재 국산 승용차 개발에 여념이 없을 뿐 아니라, 만약 그를 뽑아올릴 경우는
또 그를 대신할 사람이 없는 실정이었다.
자연 회사 임직원들의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그는 이런 때일수록 모든 임
직원들에게 중동진출에 관한 자신의 의연한 결의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
했다. 그는 이 명박 부사장을 회장실로 불러 올렸다.
"이번 아스리 조선소 입찰에서 수고한 김 주신.전 갑원 두 이사를 상무로
승진 발명하시오! 그리고 김 주신 상무를 현지소장에 임명해요!"
그는 다시 권 기태 부사장을 불러 올렸다.
"이번 아스리 조선소 건설은 우리 현대가 국제사회 속의 현대로 발전하느
냐 못 하느냐 하는 사운을 내건 공사요. 부사장 자신이 회사의 사운을 두
어깨에 짊어졌다고 생각하고 회사의 전역량을 동원해서 공사 수행에 차질이
없도록 만전을 기해 주기 바라오."
중동. 정 주영은 아직 그 중동 땅을 밟아 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미
중동 전문가들로부터 많은 얘기를 들어 왔기 때문에 중동에 관한 역사.지
리.풍속.정치.경제.사회.문화에 이르기까지 알 만큼은 알고 있었다.
중동(Middle East)이라는 어휘는 2차 세계대전 중에 사용된 영국의 작전
용어였다고 한다. 그 중동이 2차대전 후, 석유의 중요성이 높아지면서 동서
로는 아프카니스탄.이란에서 모로코가지, 남북으로는 북의 터어키에서 남의
아라비아 반도.리비아.알제리아에 이르기까지 널리 퍼져 있는 이슬람의 아
랍 인종 세계가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강력한 발언권을 가지면서 국제 정
치 경제 무대에 화려한 두각을 나타낸 것이었다.
중동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아라비아 반도의 역사는 예맨 지방의 향료
와 걸프만의 천연 진주에서 시작했다.
사막과 바다 사이에 위치했기 때문에 충분한 물의 혜택을 받으면서 아랍
유목민들이 일찍부터 정착생활을 시작한 에맨 지방은 고대 로마와 남아라비
아.인도를 연결하는 동서 교역의 거점이기도 했다. 유럽 사람들이 <행복한
아라비아>라고 불렀던 고장이 바로 거기이며, 바레인을 중심으로 한 진주
채취기록은 기원 전2천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7세기, 그 고장에 마호메트에 의하여 이슬람이 창시되었다. 그러나 이슬
람 문명은 오히려 아라비아 반도 이외의 지방에서 개화했으며 정작 반도는
그 문명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
내륙지방의 아랍인들이 걸프 연안으로 이동해서 정착한 것은 18세기에 들
어와서의 일이다. 17세기부터 인도에 진출한 영국의 중상주의는 영국에서
인도에 이르는 길목의 걸프와 아라비아해와 홍해의 안정지배를 국책으로 내
세웠다.
걸프와 인도와의 교역은 오랫동안 <다우리>라고 불리우는 독특한 범선을
가진 아랍인에 의해서 이루어졌었으나 15세기 말에 희망봉 루트가 발견되면
서부터는 포르투갈.네덜란드.영국.프랑스가 서로 주도권을 다투게 되었다.
그 무렵 유럽의 상선에 대한 아랍인들의 습격이 빈번했었다.
그래서 영국은 바레인을 기점으로 하는 걸프 남단까지를 해적해안이라고
일컬었다. 지금도 아랍인들은 그때의 해적행위에 대해서 힘을 배경으로 한
침입자에게 아랍인이 적의를 품고 있었음은 당연했다고 하는 정당성을 부여
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영국은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에 걸쳐서 아랍의 전 토후들과 평화조약
내지는 독점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해적행위를 종식시키는 한편 영국에 의한
방위와 외교권의 대행을 인정받는 데 성공한다. 그 뒤 영국은 해적해안이라
는 종래의 명칭을 휴전해안으로 고쳐 불렀다.
1930년대가지만 해도 성가를 누렸던 진주 채취도 그후 급격한 쇠퇴기에
빠지고 말았다. 세계적인 경제공황으로 인한 수요의 감퇴와 일본의 양식진
주 때문이었다. 그처럼 바다를 배경으로 하는 열강과 걸프와의 최초의 만남
은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도식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한편 내륙의 사막에서는 비교나 경쟁의 대상이 있을 수 없었으며 시간마
저도 비교대상 밖의 것이었다 정형화된 가치관이 생겨날 수 없었다.
아라비아 반도 남단의 <러브 알 카리>사막은 아랍 말로 공백이라는 뜻이
다 한번 사풍이 불면 모든 것이 바람에 날리고 모래에 묻힌다. 사풍이 지난
자리에는 바람 무늬만 남을 뿐 인간의 자취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 의미에서의 중동은 정체사회였다. 그러나 중도의 사회.문화의 저류
는 상업적이었고 동적인 것이었다. 마호메트도 상인 출신이었다. 아라비안
나이트의 무대 또한 도시였다 베드윈 유목민들은 귀한 물과 녹지대를 찾아
서 가축이라는 재산을 안고 이동하며 정착민과의 사이에 가축의 일부와 식
료와 의류를 교환하는 이동상인들이었다.
중동의 문화가 동적이라는 사실은 세계사에 미친 이슬람의 공헌에서 명백
히 드러난다. 고대 그리이스와 로마제국의 문명이 중세유럽의 암흑시대로
이어지면서 기독교의 폭거로 자멸의 위기에 놓였을 때, 이를 수용해서 새로
운 모습으로 발전할 수 있게 한 곳이 바로 이슬람의 세계였다.
유럽이 암흑시대를 벗어나면서 종교.예술.산업 등 모든 분야에서 보다 성
숙해진 그 문명을 환류시켜 르네상스의 문을 열었다. 현대문명도 고대 그리
이스와 로마에서 발아하여 이슬람의 토양 위에서 배양된 과학기술의 개가라
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동에는 세계의 모든 문제가 그대로 응축되어 있다. 중동은 알렉산더와
시이저, 그리고 나폴레옹 등이 정치생명을 걸었던 곳이며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의 주요한 전쟁터이기도 했다. 중동의 문제는 바로 세계의 문제임
을 실증하는 역사적 사실들이다.
오늘날 중동은 또 다른 의미에서 문명의 십자로 위에 서 있다. 전통문화
와 근대화 수요와의 갈등이라는 개발도상국 일반의 고민을 가장 명백한 모
습으로 드러내 놓고 있는 곳이 바로 중동이다. 또 팔레스타인 문제와 에너
지 문제는 현대사의 흐름을 바꿀지도 모를 변수로서 그 비중은 말할 수 없
이 크다
종교적 측면에서도 중동은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북아프리카는
물론 동남아 일대의 무슬림들은 매일 메카 궁전을 향해서 예배한다. 이를테
면 말레이지아.인도네시아 등의 정치는 중동의 동향과 밀접한 연결을 갖는
다.
중동의 상관행도 최근에 와서는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각종
거래에 있어서 지리할이만큼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둔다. 그 사실은 상품
자체에 가격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간의 관계, 즉 흥정에 의해
서 가격이 결정된다는 믿음과 함께 인간으로서의 주체성을 보여주는 것이기
도 하다.
2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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