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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중동에서는 원칙이 중시된다. 계약관계는 쌍방의 당사자만의 권리
의무 관계가 아니다. 오히려 신을 정점으로 하는 삼각관계로 이해되어야 한
다. 이슬람이라는 어휘도 신에게 맹종함으로써 신의 뜻에 자신을 맡기고 평
화관계를 지킨다는 뜻이다. 가혹한 자연의 시련 속에서 초인적인 신의 출현
을 갈구하는 아랍인의 의식세계의 일단을 표현하는 신앙관이라고 하겠다.
중동에 있어서의 금세기 최대의 사건은 영국의 수에즈 운하 포기와 석유
시대의 개막이다. 중동에서 석유가 발견된 것은 20세기 초엽(1908년)이란에
서였다. 이라크에서 석유가 발견된 것은 1923년이었으며 바레인이 1932년,
카타르가 1940년, 그밖의 대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나 쿠웨이트를 비롯한
알제리아.리비아.아부다비.오만.두바이 등은 모두 다 2차대전 후에 본격적
인 석유개발을 시작한 나라들이다.
그러나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중동의 석유가 세계적인 붐을 타고 각광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후반부터의 일이다. 그들 나라의 개발계획도 그
무렵에 와서야 시작되었다. 그 개발계획이 73년에 단행한 원유가 인상으로
지금은 무서운 추진력을 가지고 본격화 단게에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정 주영이 그 중도의 산유국들이 합자해서 설립하는 아스리 수리조선소
건설을 위해 현대사단을 이끌고 바레인 땅을 밟은 것은 지난 9월 하순이었
다.
그들이 바레인에 도착하던 날, 그 메마른 사막 위에 30년 만의 큰비가 내
렸다. 현지의 관민들은 현대사단을 열렬히 환호했다. 30년 만에 비를 몰고
온 귀한 손님들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현대사단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들은
한국이 친미적인 나라라는 것을 알고 혹 현대건설이 미국의 CIA와 관계를
맺고 있는 회사가 아니냐고 묻기도 했으며, 직원들과 기능공들의 질서 있고
절도 있는 단체 행동을 보고서는 혹 훈련받은 게릴라들이 아니냐고도 물었
다.
그런 의심가지 하면서도 그들은 현대 사람들만 보면 자꾸만 수군거리고
웃었다. 처음에는 그래도 우리가 반가와서 그러나보다 생각했는데 며칠이
지나도 보는 사람마다 자꾸만 웃어대서 정 주영은 통역을 시켜서 왜 그렇게
웃느냐고 물어 보았다.
현대 사람들이 너무 너무 못생겨서 웃는다는 것이었다. 정 주영도 어처구
니가 없어서 같이 웃었다. 그리고 나서 현대 사람들을 다시 한번 둘러보았
더니 정말 아랍 사람들에 비하면 조금 못 생긴 것 같기도 했다. 납작납작한
코에 쬐그만 눈, 그리고 작달막한 키들.
현대건설이 인수한 조선소 부지는 네덜란드 업자가 바닷속의 모래를 그러
모아서 겨우 억지로 바다를 메워 놓은 땅이었다. 해안에서 현장까지 연결된
8킬로미터의 진입로가 있었는데 때마침 내린 큰비로 차바퀴가 푹푹 빠져서
도시 현장으로 접근할 수가 없었다.
길은 첫날 현장으로 들어가는 길부터 험난했다. 하는 수 없이 정 주영은
마른 흙을 실어다가 진입로를 닦아 가면서 현장으로 들어갔다.
사방을 둘러보면 바다뿐이었다. 실로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 지 정 주
영은 막막했다. 당장 숙소를 마련할 자리 하나도 마땅치 않았다.
"이봐, 김소장!"
정 주영은 현장소장 김 주신을 불렀다.
"우선 이쪽에다 천막을 치고 모래 바닥에 합판을 깔아서 잠자리를 마련하
도록 해."
잠자리는 춥지 않은 데니까 그렇게 해결한다지만 당장 식수문제는 현장에
서 해결하는 방법이 없었다. 물은 급수차를 이용해서 시내로부터 실어다 쓰
기로 했다. 그리고 그는 모든 작업에 우선해서 1만톤급 선박이 와서 접안할
수 있는 임시 부두시설부터 착수하도록 지시했다.
그는 이란의 반다르 압바스 항만에서의 교훈도 있었지만 그 바레인 섬에
다가 반영구적인 접안시설을 구축함으로써 그곳을 장차 사우디아라비아의
동부해안 일대에 펼쳐질 공사현장의 전진기지로 삼을 것을 구상하고 있었
다. 페르샤만 한복판에 위치한 그 바레인으로부터 사우디아라비아의 동부도
시인 다란가지는 배편으로도 약 30분 거리밖에 안 되는 거리였다.
12월에 착공할 그 공사는 아스리 수리조선소에 비하면 공기도 1년이 더
길고 공사금액도 5천여 만불이 더 많은 대형 공사였다.
그런데 관연 그 금액으로 그 큰 공사를 적자 없이 수행해 낼 수 있느냐
하는 전망은 매우 흐렸다. 입찰은 그 공사의 기술감독을 맡은 미 중동 공병
단이 주둔한 이태리의 피사에서 있었다.
현대측에서는 치열한 경쟁을 예상했었지만 막상 경쟁자는 미국의 안드리
안 몰카사 하나밖에 없었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국제입찰의 경험은 부족
하고 공사는 꼭 수주해야 한다는 의욕만 가진 현대건설 입찰팀에서는 발주
처의 예가인 2억 4천만불에도 훨씬 못 미치는 1억 8천 3백만불을 써 넣었
고, 경쟁 상대 회사인 안드리안 몰카사는 현대건설의 4배가 넘는 8억불을
써 넣었던 것이다.
입찰금액이 발주처의 예가에도 못 미쳤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공사금액이
그만큼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음을 뜻한다. 그랬지만 정 주영은 사우디아라
비아의 첫 공사라는 점을 감안해서 다소의 작자까지도 각오하고 공사계약에
응했던 것이다.
어쩌면 이번 이 두 가지 공사에서 옛날 고령교 때와 같은 시련에 직면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정 주영은 서울에 연락을 하기 위해 시내로
들어갔다.
시내에는 선발대가 와서 세를 들고 있는 한 아파트가 있었다. 아파트 앞
에 도착한 그는 멍청하게 발길을 세웠다.
취사부 이 유재 아줌마가 현관에서 찔찔 울고 서 있기 때문이었다.
"아니, 아주머니, 왜 우시오?"
"아, 아녜요."
마당 가운데에는 크고 작은 살림 보따리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저 살림 보따리는 왜 저렇게 꺼내 놨어요?"
"이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냄새 때문에 같이 못 살겠다고 하면서 죄다
저렇게 꺼내 놨어요, 회장님......"
정 주영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있음직한 일이라고 생각했
다. 된장 냄새, 고추장 냄새, 거기에다 마늘 냄새까지, 애초에 아랍 사람들
이 사는 아파트에 세든 것이 불찰이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안 그래도 천막
을 치는 대로 아파트를 내놓고 몽땅 현장으로 이사를 하려던 참이었다. 그
날로 모든 살림은 현장으로 옮겼다.
인력동원계획에 따라 매일같이 한국으로부터 기능공이 송출되어 나오기
시작했다.
쌀은 홍콩에 있는 미곡상에서 보내 온 열두 가지 각국 쌀 가운데서 호주
살을 선택했기 때문에 우리 나라의 1등미나 다름없이 밥이 차지고 맛이 좋
았는데 찬거리가 문제였다.
뭐니뭐니해도 한국 사람은 김치를 먹어야 힘을 쓸 판인데 김치는 생각도
못할 처지였다. 배추나 무우는 구경할 수도 없었고 갸베쓰라는 양배추가 더
러 있는데 그것 한 포기를 사기 위해서는 온통 시장바닥을 뒤지고 헤매야만
했었다. 그나마도 온포기를 내놓고 파는 가게는 없었다. 고작해야 반포기를
내놓고 쪼개서 근으로 달아 파는데 그 값이 우리 나라의 인삼 값하고 맞먹
었다.
그래도 그것을 사다 먹어야 했는데 어느 날은 갸베쓰가 시장에 떨어져서
영양가 높은 미제 야채 스우프 깡통을 사다가 국을 끓였더니 기능공들이 아
우성을 쳤다.
"아줌마! 우리가 돼지 새끼요? 이 따위 꿀꿀이죽을 쑤어 주게."
"우리가 이딴 죽이나 먹으려고 중동 바닥에 나온 줄 아슈?"
기능공들은 국그릇을 내동이치고서는 배 고파 일 못 한다고 숙소로 가서
드러누웠다.
그러자 정 주영은 일체의 생활필수품을 한국으로부터 갖다 쓴다는 방침을
세웠다. 음식과 의류는 물론 담배 성냥, 심지어는 이쑤시개가지도 한국에서
실어 나르기 시작했다. 그로써 현장 기능공들의 불평불만은 완전히 해소할
수 있었지만 현지 상공인들의 대단한 불만을 사게 되었다.
울산에서 바레인가지의 항해 거리는 6천 7백 50마일, 울산에서 떠난 배가
바레인에 도착하는 데는 장장 35일이라는 오랜 시일이 걸렸다.
"현대가 와서 일하는 현장에는 팔아 먹을 것도 없고 현대가 버리는 쓰레
기 속에는 개가 파먹을 것도 없다."
현지 상인들은 그렇게 투덜거리고 있었는데 나중에는 현대 사람들이 그
개까지 잡아다가 보신탕을 끓여 먹기 시작했다. 중동에는 야생하는 들개들
이 많아서 대낮에도 먹이를 찾느라고 민가를 쓸고 다녔다.
바닷가에서 보신탕을 끓이고 있던 기능공들이 힐끔힐끔 뒤돌아 보면서 뭐
라고 쑤군거리고 있었다.
정 주영이 저만치서 모래 맛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손바닥에 한
움큼 쥔 모래를 손가락 끝에 찍어서 혀 끝으로 가져가더니 그 혀 끝을 윗입
술에 굴렸다. 모래 맛은 확실히 짠 맛이 났다. 아까 맛본 지하수도 확실히
찝찔한 맛이 났었다.
당장 마실 물은 비싸더라도 하는 수 없이 돈을 주고 사다 마신다고 하지
만 작업용수까지 사다 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식수는 보통 주유소에서
기름하고 같이 팔고 있었는데 그 물 값은 휘발유 값보다 훨씬 비쌌다. 그래
서 정 주영은 중동의 석유하고 한국의 물을 바꾸자면 웃돈을 얹어 준다고
해도 안 바꾼다는 말을 했었다.
혹시 바다 밑으로 지하수가 흐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현장에서 한 3킬로
미터쯤 떨어진 지점에다 우물을 뚫었더니 요행히 60미터까지 굴착해 들어갔
을 때 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랬는데 그 물에도 염분이 많이 섞여 있어
서 그냥 식수로까지 이용할 수는 없었다.
바레인은 물이나 모래만 짠 것이 아니었다. 바람도 짰다. 사방이 바다였
기 때문에 찝질한 바닷바람이 항상 불어서 오늘 아무리 깨끗이 닦아 놓은
장비라도 하룻밤만 자고 나면 녹이 빨갛게 슬어 있기 마련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요는 보통 시멘트를 가지고는 콘크리트의 양생이 어려웠
다. 유럽의 이름 있는 회사들이 시공한 건물들도 콘크리트가 제대로 양생되
지 않는 바람에 숱한 문제점을 일으키고 있는 때였다.
정 주영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연산 20만톤 규모의 시멘트 크링카
공장을 현지에 건설하고 염분에 강한 5종 시멘트를 생산할 것을 계획했다.
실은 그 계획도 임시 부두와 마찬가지로 장차 중동 공사에 무제한으로 소요
될 시멘트를 현지 생산으로 충당하자는 그의 원대한 구상의 일단이었다.
일년 사철 뜨거운 여름만 계속되는 줄 알았던 중동 날씨는 11월 하순에
접어들자 아침 저녁으로는 제법 쌀쌀해지기 시작했다. 아무도 중동 기후가
우기인 12월과 1월에는 한국의 가을 날씨 같다는 사실을 안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거추장스러운 긴 소매를 입고 나온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정 주영은 본사에 연락해서 현대 겨울 잠바를 급히 공수할 것을 지시했
다.
아스리 조선소 건설을 위한 장비.자재 및 인원으 1단계 동원은 현지의 극
심한 부두 체하 현상에도 불구하고 한 달 남짓 걸려서 일단은 끝이 났다.
동원된 대소 장비 1백 40여 점, 임직원 및 기능공 2천여 명, 그밖의 각종
자재 2만여 톤.
정 주영은 그해 12월, 사우디의 해군기지 해상공사를 착공시키고 일단 서
울로 돌아왔다. 현지에는 세계 토목사상 최대 역사라고 알려진 사우디의 주
베일 산업항 입찰준비도 있었으나 본사에 들어가서 처리해야 할 일들도 산
적해 있을 뿐 아니라 금년 안에 완공되는 광화문의 새 사옥으로 이사도 해
야 하겠기 때문이었다.
모험은 이제 겨우 걸어 놓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벌써부터 한국의 건설
업계에서는 정 주영이 모험을 좋아하다가 종당엔 그 모험으로 망할 것이라
는 여론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손해나는 공사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남들이 안 하는 공사니까 공연히 오기로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업계
사람들은 남이 벌고 밑진 것을 어찌 그리 잘 알고 있던지, 그가 이익 낸 공
사는 젖혀 놓고 손해 본 공사만 들먹거리는 것이었다.
"동래 조폐공사, 고령교, 가창 댐, 나주 비료공장, 태국 고속도로, 알라
스카 하리케인 다리, 호주의 번버리 항 준설......"
"그뿐인가? 지금 인도네시아에서 하고 있는 자고라위 고속도로도 적자공
사를 하고 있다네."
"하기사 뭐, 울산 조선소도 아직은 빚더미 위에 올라 앉았지, 자동차 공
장은 국산 승용차를 개발한답시고 몇 해째 고전이지."
"여북 답답했으면 정 인영 사장이 그만두었을려구."
"두고 보게. 오래잖아 현대 무너지는 소리가 한번 크게 날 테니."
"워낙 큰 회사니까 무너지는 소리도 꽤 요란하게 클 걸세. 하하....."
"그래도 배짱은 좋은 영감이야."
"왜?"
"아, 광화문 네거리에 20층짜리 사옥 짓는 거 보라구. 내년 1월 1일부터
는 거기서 사무를 본다는 게야."
"광화문 사옥을 그새 다 지었나?"
입찰경쟁, 세계의 도박사들
1월 1일. 그날은 정 주영의 집안이 장마당처럼 떠들썩한 날이다. 아침 일
찍부터 아들들 내외와 손자들. 그리고 동생 내외와 조카들 내외 및 그 종손
들이 차례를 지내러 몰려들기 때문이다.
그는 자녀가 몇이냐고 물으면 8남 1녀라고 대답했지만 조카가 몇이나 되
고 친손 종손을 합해서 손자는 몇이나 되느냐고 물으면 한참 생각해야 대답
할 수 있었고, 그렇게 하는 대답도 항상 그 숫자는 늘었다 줄었다 하게 마
련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아버지도 6형제나 됐었지만 그도 형제가 8
남매(6남 2녀)였다.
어느덧 그의 나이 환갑. 자녀 8남 1녀 가운데 맏이 몽필, 둘째 몽구, 세
째 몽근, 그리고 고명딸 경희, 네째 몽우, 다섯째 몽헌이가지는 이미 짝을
지었고 그 밑으로 아직은 미국에서 유학중인 여섯째 몽준, 일곱째 몽윤, 여
덟째 몽일이는 미혼이었다. 그리고 큰 아우 인영과 둘째 아우 순영한테도
손자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그가 신설동 집을 장춘동의 적산집으로 개비했다가 다시 지금의 청운동
넓은 집으로 이사한 것도 실은 정월 초하루다 추석이다 해서 무슨 때면 온
집안 식구들이 한데 모이곤 하는데 차츰 집이 좁아져서 나중에는 식구들이
다 모이면 들어앉을 자리가 없어서였다.
오늘처럼 온 집안 식구들이 모여서 북적대는 날이면 그는 새록새록 머리
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60년대 중반에 독일로 유학을 갔다가 세
상을 떠난 네째 신영이었다.
그가 네째 신영에게 거는 기대는 각별했었다 그들 형제는 모두 머리가 좋
은 편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신영의 머리는 뛰어나게 명석했다. 대학을 졸업
하자마자 형이 회사에서 같이 일하자는 권유를 마다고 그는 동아일보에 입
사해서 기자로 활약했다.
그는 늘 형 앞에서 자기는 무관의 제왕인 신문기자임을 뽐내곤 했었다.
그가 기자의 신분으로 면학 길에 오른 독일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이었다.
그때 정 주영은 사흘을 밤낮으로 꼬박 아우의 빈소를 지키면서 얼마나 울
었는지 모른다. 손위로 한 분 있던 누님이 유명을 달리 했을 때도 그는 별
로 울지 않았었다. 일찌기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생전에 다하지 못한
자신의 효도를 뉘우치고 많이 울었었지만 아우의 죽음만큼 가슴 아파해 하
지는 않았었다.
네째 아우 신영에 대한 그의 애정이 어느 정도였는가는 그후 그가 소유하
고 있던 외부 주식의 일부를 그의 제수씨에게 양도한 것과, 80년대 초, 시
내 모 유력 일간지에서 신영의 아들이 부정한 방법으로 모 대학에 입학했다
는 악의에 찬 허위보도를 했을 때 그가 현대그룹의 자폭을 각오하면서까지
정면으로 대결해서 명예회복을 시킨 사실 등이 응변으로 말해 준다.
저녁 나절이 되자 그렇게 왁자지껄하던 집안도 조용해졌다. 온 식구가 차
례를 지내고 나서 광주의 부모님 산소를 다녀오는 길에 제각기 집으로 돌아
갔기 때문이다.
1월의 연휴기간이 정 주영에게는 일년 중 가장 한가한 때였다. 그는 그
연휴기간에 임직원이 세배하러 오는 것을 일체 금하고 있었다. 각자 집에서
차례를 지내고 세배도 다니고 일년 내내 바빠서 못 찾아 본 친지들도 만나
고 자신과의 신년인사는 1월 4일 시무식 때나 하자는 주의였다. 어제 오늘
의 일이 아니고 오랜 관례였기 때문에 정초에 그의 집을 찾는 회사 사람들
은 전혀 없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어젯밤 담 너머로 조리를 던져 놓은 복조리 장사가 조리
값을 받으러 왔었다. 부인 변여사가 대문을 열고 나갔다.
"죄송합니다. 복조리 값 때문에 왔는데요."
대학생 배지를 단 두 젊은이가 머리를 굽신했다.
"얼마나 주면 되나요?"
"정회장 사모님 안 계십니까?"
"왜요?"
"아, 이런 댁에서 좀 후하게 받아 내야죠. 들어가서 정회장 사모님한테
복조리 값 받으러 왔다고 좀 그러세요."
"내가 정회장 부인이에요."
"예?"
두 젊은이는 의아한 표정으로 서로 얼굴을 마주보는 것이었다. 그들은 변
여사를 그 집 가정부로 착각했던 것이다.
변여사의 차림새는 늘 그러했다. 회사 안에서는 아직까지 그녀가 양장한
것을 본 사람이 없었다.
그녀는 오직 부엌일밖에 몰랐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무교동 사옥 직원
식당의 주방장이었다. 그 옛날 신설동 써비스공장 시절에도 그녀는 직공들
의 밤참을 해댄 적이 있었었지만, 현대건설이 61년에 무교동 사옥을 짓고
삼화빌딩으로부터 이사한 후, 그녀는 그저 부엌에서 직원들을 잘 걷어 먹이
는 것이 일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그녀는 가을이면 김장을 담그고 초겨울에는 메주를 쑤고
겨울내 그 메주를 띄워서 봄에는 된장 고추장을 담가야 했기 때문에 세월
가는 줄 모르게 바빴다. 살림 난 며느리네 메주는 아예 회사 메주를 쑬 때
에 같이 쑤어서 봄이 되면 따로 나누어 주곤 했다.
무교동 사옥 주변에는 크고 작은 음식점이 즐비했지만 아무도 밖에 나가
서 점심을 먹는 임직원이 없었다. 음식점 음식 맛이 사옥의 구내식당만 못
했기 때문이었다.
사원들은 광화문 사옥으로 이사하면 점심을 먹을 일이 은근히 걱정이었
다. 아직은 식당 준비도 덜 된 상태인데다가 광화문 사옥으로 이사하고 나
면 회장 사모님이 식당 일에서 손을 뗄 거라는 소문 때문이었다.
그녀는 직원들에게 푸짐스럽게 해 먹이는 것을 좋아했다. 그만큼 그녀의
인심은 후했다. 부산 피난 시절, 그녀는 거리에서 포도장사를 한 적이 있었
는데 손님이 조금 더 달라는 대로 다 주다가 밑지고 돌아오는 날도 허다하
게 있었다.
그녀는 복조리 값을 받으러 온 학생들에게 5천원짜리 한 장을 내주었다.
학생들은 만족해 하며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녀는 인심이 후했다. 돈이 많아서만은 아니었다. 고령꾜에 망하고 땟거
리가 없을 때도 문전에 동냥아치가 찾아오면 저녁쌀을 떼어 동정하고 아침
쌀을 나누어 시주했다.
그녀는 독실한 불교신자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다른 종교를 배타시하지는
않았다. 바로 아랫 동서나 네째 동서는 철저한 기독교신자였지만 종교적인
문제로 동서 사이에 마찰을 일으킨 적은 아직 한번도 없었다.
그러나 정 주영은 꼭 불교신자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는 불교신자가 보
면 불교신자 같고 기독교신자가 보면 기독교신자 같은가 하면 또 아무 종교
도 믿지 않는 사람이 보면 전혀 믿지 않는 사람 같기도 했다. 이를테면 그
는 신의 존재는 긍정하지만 신앙의 형식에는 구애되지 않는 초종교주의자였
다. 그래서 그는 불사에도 헌금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지만 사원들을 위한 교
회를 짓고 이를 헌당하는 일에도 서슴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가까운 친지
가운데는 고명한 승려와 유명한 목사, 신부들도 있었다. 어쩌면 그는 한국
적인 토속종교에 더 많은 애정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가 어린시절 고향에서 보아 온 일이었다. 새벽 첫닭이 울자마자 잠을
깬 어머니는 누나를 흔들어 깨우는 것이었다. 모녀는 더운 여름이나 추운
겨울이나 날마다 첫새벽이면 그렇게 깨어 나서 옷매무새를 고치며 방을 나
갔다. 모녀는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남들잉 밟지 않은 새벽길을 걸어서 우
물로 갔다. 우물물을 길어 온 모녀는 뒤꼍으로 돌아가서 정한수를 한 대접
장독 위에 떠 올려 놓고서는 두 손을 합장하고 새벽 치성을 드렸다.
어머니의 그러한 정성은 누나가 시집 가고 나서도 계속되었으며 서울로
올라와서도 20여 년 전 고혈압으로 쓰러져 몸져 눕기 전날까지 계속됐었다.
어머니는 틀림없이 자식들이 잘되기를 빌었을 것이다.
어머니가 고혈압으로 누워 있을 때, 그는 팬츠 하나만 걸치고 알몸이 되
어 어머니가 덮고 자는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가서 한이불 속에서 어머니를
위로하며 같이 잠들곤 했다. 대소변을 받아내던 때이므로 심지어는 아내까
지도 어머님 자리에서 냄새가 난다고 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악취 같은
것은 맡을 수가 없었다. 나이 40이 넘어서도 그는 젊은 아내 옆에서 잘 때
보다 병든 어머니 곁에서 잘 때가 훨씬 마음 푸근했었다.
누가 미신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는 구천에 계시는 어머니는 지금도 자식
들을 위해 치성을 드리고 있을 것이라는 확신 같은 걸 가지고 있었다.
그는 절간에서 불공하는 사람이나 교회에서 기도하는 사람을 볼때면 그
어머니의 간절하던 얼굴을 떠올리곤 했었다. 그리고 그는 어떤 어려운 일을
당할 때면 반드시 그 어머니가 나타나서 격려하는 꿈을 꾸었다. 어머니를
꿈 속에서 보고 나면 없던 용기와 막혔던 지혜도 새로 생겨 나곤 했었다.
1월 4일. 광화문 새 사옥으로 출근한 정 주영은 아침 8시 중역 회의를 마
치고 시무식을 갖기 위해 강당으로 향했다.
현대그룹 산하의 모든 회사 직원들의 출근 시간은 남들보다 한 시간이 빠
른 아침 8시였으며 중역들은 7시 30분, 회장인 그의 출근시간은 7시였다.
집안의 머슴을 부리려면 주인이 더 부지런해야만 했다. 7시에 출근하면
그는 먼저 그날 주재할 중역회의를 준비했다. 7시 30분정각에 소집되는 중
역회의는 가능한 한 30분 이내에 마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지만 때에
다라서는 한 시간씩 걸리는 경우도 있었다.
중역회의에서는 보통 각 중역들이 담당하고 있는 업무 가운데 어제 집행
한 사항과 오늘 집행할 사항이 보고되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중역들이
사내의 전체적인 업무 동향을 파악하게 할 수 있었으며, 또 각 분야별 업무
의 유기적인 협조가 이루어지게 할 수 있었다. 매일 아침 열리는 중역회의
였기 때문에 그 분위기가 느순해질 법도 했지만 항상 긴장 속에서 진행되곤
했었다.
"별일 없읍니다."하는 식의 보고를 하는 중역이 있으면 그는,
"그 따위 게으름뱅이 보고가 어디 있어?"하고 대뜸 호통을 쳤다. 그는 하
루가 지나면 하루가 지난 만큼의 진전된 보고를 요구했다.
그리고 그는 각 중역들이 보고하는 전날의 업무집행 사항에 대해서는 마
치 군의 작전수행을 체크하듯 철저했고, 그날에 집행할 업무계획에 대해서
는 군의 작전계획처럼 치밀한 질문을 던지곤 했다. 하기 때문에 업무집행에
성과가 없거나 차질이 생긴 중역은 아침 중역회의가 두려웠으며 업무계획을
보고해야 할 중역들은 주도 면밀한 사전검토를 가해야만 했었다.
강당에는 차장급 이상의 간부사원 2백여 명만이 집합해서 시무식을 기다
리고 있었다. 그 무렵 현대건설 전체 종업원 수는 8천 5백명이 넘었으며 본
사 직원만 해도 1천 3백여 명이나 됐었기 때문에 그 많은 사람이 한곳에 모
일 만한 자리는 없었다.
국민의례가 끝나고 연단 앞에 선 그는 간단한 새해 인사와 함께 새 사옥
을 짓고 이사하기까지 애쓴 임직원들의 노고를 치하한 다음, 지난 사흘간의
연휴를 보내는 동안에 손수 초를 잡고 적어온 신년사를 하기 위해 몇 자의
메모지를 스피치 테이블 위에 펼쳐 놓았다.
"오늘 이 자리에는 우리 그룹의 간부사원인 차장급 이상이 모였읍니다.
아마 이 가운데는 입사한 지 10년 넘는 분들이 대부분일 거라고 생각합니
다. 하기 때문에 이 자리를 빌어서 오늘은 내가 그동안에 생각해 온 몇 가
지를 간추려서 여러분의 애사심에 호소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우리 현대는 그동안에 안정이냐 모험이냐 하는 진통
을 겪다가 현실에 안주할 수 없다는 결론 끝에 중동진출이라는 또하나의 큰
모험에 도전했읍니다. 따라서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몰라도 당장은 기업경
영에도 큰 시련을 당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우리가 5백 20억원을 들여서 울산에다 조선소를 건
설한지 일년 반도 채 안 됐읍니다. 그 5백 20억원 중 삼분의 이 이상은 외
국의 차관입니다.
5.16이후 2차에 걸친 경제개발게획에 힘입어 급속히 고도로 성장해 온 우
리 나라 경제와 함께 우리 기업들이 대형화되고 고도화되고 국제화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경제 신장의 사회적.경제적 반작용에 직면
해서 허덕이고 있는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입니다.
수출 주도형의 우리 경제를 주도하던 경공업 부문이 점차 국제경쟁력을
상실해 가기 시작하자 정부에서 수출의 국제경쟁력을 강화해야겠다고 강력
하게 추진하고 있는 중화학 공업은 극히 그 일부분을 제외하고는 기술 축적
의 미흡과 시행 착오의 되풀이로 아직도 정착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또한 해외지향적인 우리 경제와 기업이 세계적인 불황과 석유를 비롯한
국제 원자재 가격의 불안 등 제반 해외 여건의 악화로 예상치 않았던 갖가
지 시련을 겪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기 때문에 비단 우리 현대그룹만
이 지금 시련을 겪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여러분! 시련의 시기는 새로운 도전의 시기입니다. 작용이 있는 곳에 부
작용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부작용은 어디까지나 작용에 종속된 것이
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는 데 발전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어느 책에서 본
토인비의 말이 있읍니다. <역경은 오히려 스스로를 강하게 만들어서 새로운
발전의 원동력이 되게 한다.>역경이 오히려 스스로를 강하게 만든다는 그런
신념이야말로 긍정적이며 적극적인 사고방식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동서
고금의 위대한 일을 이루어 낸 사람이나 혹은 단체나 국가가 다 실제 그러
했고 또 그런 자세로 임하지 않았읍니까? 패전 후 일본의 기업들이 철저한
단련을 받아서 강해질 수 있었읍니다.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지는 이치와 같
습니다. 우리 현대건설이 걸어온 발자취야말로 그와 같은 적극 의지로 점철
되어 왔다고 믿기 때문에 나는 이번의 시련이 아무리 험난하다 할지라도 우
리 현대의 불굴의 투지와 막강한 추진력이 능히 이 시련을 극복하고 넘어서
우리를 번영의 길로 가게 해줄 것을 확신합니다."
좌중에서 우렁찬 박수 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그는 또다시 말을 이어 나
갔다.
"내외 악조건과 싸워서 이를 극복할 수 있는 힘, 극복하고 살아 남을 수
있는 힘은 어디에 있느냐. 그 힘은 사람이나 기업이나 단체나 국가나 다 그
내부에 존재하는 정신력입니다. 다시 말해서 극복할 수 있다는 신념입니다.
기업이 만약 스스로 변화를 선도하거나 이에 적응하는 능력을 자체 내에 가
지고 있지 못하다면 그 기업이 도태하고 말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일반
적인 이치입니다. 요컨대 오늘 우리 나라의 기업들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바와는 달리 기업의 운명을 기업 스스로가 결정할 수 있는 주도권을 쥐고
있으며 또 스스로 결정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고 나는 보는 것입니다. 우리
기업은 이제 스스로 살아 남는 길을 찾아야 할 자기 도전의 시점에 와 있으
며, 더우기 우리 기업의 존망성쇠는 우리 민족의 생존번영과 직결되어 있다
는 사명까지 떠맡고 있는 사실에 우리는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되겠읍니다.
이와 같은 당면한 과제를 해결해 나가는 데 있어서 우리 현대그룹은 가장
소중한 자산을 가지고 있읍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숫자로 표시할 수는 없
지만, 그러나 우리 현대가 분명히 지니고 있는 현대의 기질, 현대의 정신입
니다."
다시 임직원들의 열렬한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는 목소리를 한음 낮추고
다시 신년사를 이어 나갔다.
"나는 지난번 아스리 조선소 입찰팀이 기술용역회사로부터 기술회의를 하
러 오라는 통보를 받고 그 회의에 응할 것이냐 포기할 것이냐 하는 단계에
서 현대정신이 무엇이냐 하는 것으로 논쟁했었다는 말을 듣고 고무된 바가
컸읍니다.
그들은 마침내 현실에 안주하려는 것은 현대정신이 아니다, 현대정신은
끝없는 모험에의 도전이며 울산의 마포만 백사장을 세계적인 조선소로 변모
시킨 창조정신이며, 이를 위해 일년 3백 65일 돌관작업을 해낸 강인한 추진
력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기술회의에 참석해서 어려운 문제들을 모두 해결하
고 그 공사를 따내는 데 성공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현대는 남이 마련해 준 평탄대로를 걸어온 것이 아닙니
다. 창조하는 자의 각고와 개척하는 자의 용기로 절대적인 상황과 한계에
도전해서 이를 극복하고 넓혀 옴으로써 이름없이 출발한 현대토건회사를 오
늘날 이처럼 국제사회 속의 현대로 키워 온 것입니다.
발전하는 사람, 발전하는 기업, 발전하는 사회에는 반드시 그와 같이 발
전을 가능케 한 창조적 동기가 숨어 있게 마련입니다. 창조적 생명력은 주
어진 시간과 공간이라는 틀, 이른바 고정관념이라는 것을 깨고 벗어나는 데
서 태어납니다.
창조적 생명력을 가진 기업은 사회의 틀 안에서 가진 것이나 지키고 또
늘려 가는 단순한 영리행위에 안주하지 않습니다.
우리 현대는 무엇보다도 창조정신을 가진 기업입니다. 바위덩위가 아무렇
게나 딩구는 한적한 모래사장 위에 우리는 세계 제일의 단일 조선소를 건설
해 놓았읍니다.
흔히 에스키모에게 냉장고 파는 일이 상술의 극치로 인용되곤 합니다. 그
러나 우리는 조선소 부지를 찍은 사진 한 장으로 초대형 유조선을 수주해
냈읍니다. 그리고 조선소와 그 유조선을 동시에 착수해서 조선소가 완공되
기도 전에 그 배를 진수시킬 수도 있었읍니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고정적인 상식의 틀을 철저하게 부수는 하나의
혁신이었으며 또하나의 새로운 창조적 결정이었읍니다. 고정관념에서 본다
면 그것은 혹 무모하거나 혹은 저돌적인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었을 겁니
다. 그러나 상식을 초월한 곳에, 논리와 합리를 벗어난 곳에도 필연 이치는
있는 법입니다.
우리 현대건설이 다른 기업과 구별되는 특징은 바로 그와 같은 적극적이
고 긍정적인 적극 의지에 있는 것입니다."
또다시 박수가 일었다. 그의 신년사를 경청하는 사원들의 표정은 숙연하
기까지 했다.
"여러분! 나는 지금의 고려대학교 건설현장에서 돌을 져 나른 사람입니
다. 현장에서 묵묵히 일하는 기능공의 모습은 건설업의 원점인 동시에 우리
현대정신의 원점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근면하고 소박합니다. 그들은 어떤 일을 시켜도 자기가 해낼 수
있는 일이면 다 해냅니다. 그들에게는 뚜렷한 삶의 목표가 있읍니다. 뚜렷
한 삶의 목표가 없는 사람은 그 힘든 노가다 판의 일을 감당해 내지 못합니
다. 하기 때문에 그들은 강인한 인내심과 일을 해내는 강력한 추진력을 소
유하고 있읍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질은 다소 조악하고 단순합니다.
나는 그러한 건설 원점에서 싹튼 우리 현대정신을 잘 가꾸고 다듬어서 세
계 속의 현대정신으로 승화시켜서 우리 모든 임직원의 행동철학으로 삼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목표가 없는 사람이나 신념이 없는 사람은 주위의 조그만 변화에도 적절
하게 대응할 줄 모르고 곧 좌절해 버립니다. 하물며 많은 사람이 모여서 집
단을 이루고 밖에 대해서는 하나의 인격체로서 집단의지를 보여야 하는 한
기업의 경우는 더욱 그렇습니다.
특히 기업은 적자생존의 원리를 속성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명확한 목표
의식과 행동원리를 환경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입니
다. 단지 그 구성원의 생계수단으로써만 만족하는 기업이라면 그럴 필요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기업은 경쟁이라는 시장의 일반원리에 의해서 타
율적으로 규정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사회로부터 사회적 부의 창
조와 관리를 위임받았다고 하는 사명감을 갖는 기업은 그럴 수 없읍니다.
의욕적이고 진취적인 기업활동의 자발설을 토출해 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 현대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기대하는 일정한 사명을 갖고 있으며,
그 사회적 기대에 부응해야 할 의무가 있읍니다. 왜냐? 오늘날 우리 현대가
이만큼 성장해 온 것은 우리 사회라는 토양 위에서 자라 온 것이지 우리 혼
자 공중에서 자라 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컵에다 주전자를 기울여 물을 따랐다. 그리곤 목을 축인다음 다시
신년사를 계속했다.
"여러분! 우리 다같이 담담한 마음을 가집시다. 담담한 마음은 관용하는
마음이며 사사로운 이익에 치우치지 않는 마음이며 참가치를 아는 마음입니
다. 담담한 마음은 또한 어떤 상황속에서도 동요하지 않는 마음이며 모든
것을 배우려는 학구적인 마음이며 치열하게 자기 한계에 도전하는 향상심이
라고도 할 수 있읍니다.
담담한 마음이 모여야만 개인이 아닌 집단의 마음이 있을 수 있으며, 그
러한 집단의 마음이 있어야만 기업의 의사와 기업의 의지가 표출될 수 있읍
니다.
기업의지가 약한 곳에 정체된 관료주의적 폐습이 쌓이고 단지 목전의 이
익에만 급급해서 무리를 자행하고 기업의 의사가 아닌 개인의 독선이 지배
하게 되는 결과를 자초합니다. 우리는 무한히 발전해야 합니다. 개인도 발
전해야 하고 기업도 발전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향상이라는 뚜렷한
목적이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많은 일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
떤 사람은 일을 많이 한 사람의 몇 십분의 일 또는 몇 백분의 일도 못 하고
일생을 보내는 이도 있읍니다. 그러나 남보다 10배의 일을 더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더 고달프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일을 적게 하는 사람이
오히려 더 권태를 느끼고 지루해 하고 피로를 쉽게 느낄 겁니다. 모든 일에
향상심을 가지고 자기 능력을 개발해 가는 사람은 보람을 느끼기 때문에 피
곤하지 않고 지칠 줄을 모릅니다.
이와 같은 이치는 개인뿐이 아니고 어느 기업이나 단체나 국가에도 통용
되는 이치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나는 가난을 물려받지 않겠다고 열여섯살 어린 나이에 부모님 몰
래 고향을 등지고 뛰쳐나왔던 사람입니다. 우리 가난을 우리 후손에게 물려
주지 맙시다. 우리들에게는 진정한 의미의 조국근대화의 사명이 있읍니다.
내가 말하는 조국근대화는 정치적 구호가 아닙니다. 나의 간절한 염원입니
다. 조국근대화의 사명감과 책임이야말로 우리 현대정신의 근거라는 것을
나는 감히 주저하지 않고 여러분에게 말할 수 있읍니다.
여러분! 우리 다 같이 창조적인 슬기와 불타는 적극 의지와 강인한 추진
력, 그리고 근검절약하는 현대의 정신과 현대의 기풍을 크게 진작하고 드높
여서 어떠한 시련, 어떠한 변화에도 당당하게 승리하는 올해가 되도록 합심
하고 노력합시다. 감사합니다."
박수 소리가 울렸다. 더없이 열렬한 박수였다. 그리고 환호하는 박수였
다. 그는 자신의 손을 잡는 임직원들 손의 촉감에서 그들의 새로운 각오와
새로운 정열을 역력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2월 초순, 그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주베일 산업항 입찰을 직접 지휘하기
위해서 고문 변호사 문 인구와 지난 해 울산의 현대조선소 사장으로 영입한
정 문도를 동반하고 바레인으로 떠났다. 바레인에서는 2월 12일의 입찰을
앞두고 전 갑원을 팀장으로 하는 입찰팀이 연일 입찰서 만들기에 여념이 없
었다.
사실 처음에 현대건설은 주베일 산업항 입찰에 초청되지도 않았었다. 사
우디아라비아 체신청의 요청으로 입찰 참가업자를 선정하고 있던 영국의 윌
리엄 할크로우사에서는 미국.영국.네덜란드.독일 등의 9개 업체만 선정해
놓고 있었다.
아스리 수리조선소 착공을 지휘하기 위해서 바레인에 나와 있다가 그 사
실을 안 정 주영은 다급했다. 현대가 세계 토목사상 최대의 역사로 알려진
그 주베일 산업항 공사 입찰에 끼지도 못한다는 것은 바야흐로 세계 속의
현대로 도약하려는 현대 체면이 걸린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는 즉각 전화로 런던지점을 불러 내어 어떤 일이 있어도 윌리엄 할크로
우사를 설득해서 입찰 자격을 얻어내도록 하라는 긴급 지시를 내렸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런던지점에서는 윌리엄 할크로우사의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면서 집요한 설득작전을 펴 나갔다. 지난 10월에 아스리 수리조선소
를 착공한 현대가 뒤미처서 또 사우디아라비아 해군기지 해상공사를 수주함
으로써 이미 중동지역으로부터 3억 2천만불의 계약고를 올렸고, 바레인 공
사의 경우는 극심한 부두 체하현상 속에서도 단 한 달 만에 동원을 끝낸 저
력을 과시하면서 현대는 어떤 공사라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업체임을 역설
했다.
이에 윌리엄 할크로우사는 현대가 울산 조선소를 건설하던 때의 컨설턴트
회사인 애플도어사와 버클레이 은행을 통해서 정보를 수집 분석하고 현대의
시공능력을 인정, 사우디아라비아 체신청에 현대에게도 입찰 자격을 주자고
제의하기에 이르렀고, 사우디아라비아 체신청이 그 제의를 받아들임으로써
막판에 가서야 가까스로 입찰에 한몫을 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어렵게 입찰 자격을 받아놓고 나니 또 어려운 문제가 앞을 가로막
았다. 입찰 보증금을 어떻게 조달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주베일 산업항 공
사 입찰 보증금은 공사금액의 2퍼센트로 되어 있었다. 따라서 응찰가격을
10억불로 잡아도 2천만불이라는 거액의 입찰 보증금이 필요했다.
당시 국내는 외환 사정도 좋지 않았거니와 외환은행에서는 외국에 대한
입찰 보증금을 어떻게 취급한다고 하는 내규조차 마련되어 있지 않은 때였
으므로 국내로부터의 입찰 보증금 조달이란 거의 불가능한 실정이었다.
정 주영은 그전에도 태국에서 현지금융을 일으키려고 했을 때 한국은행의
지급보증제도가 없어서 애를 먹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돈이 없으면
없는 대로 꾸려 나가면서 버틸 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만약 돈이 없으면 애
써서 받아낸 입찰 자격도 소용없게 되고 입찰 현장에 나가 보지도 못하고
주저앉을 판이었다.
그는 여러 가지 방법을 궁리한 끝에 아스리 수리조선소 공사로 거래를 하
고 있는 바레인 국립은행에 지원을 요청해 보기로 결심했다. 비록 결심은
했으나 제 나라 은행에서도 잘 안 되는 일이 남의 나라 은행에서 잘될는지
는 실로 의문이었다.
그런데 바레인 국립은행에서는 뜻밖의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이었다.
아무 조건이나 담보 없이 입찰 보증금을 대주는 것은 물론이고 현대가 만약
주베일 산업항을 낙찰시키기만 한다면 차후의 공사 수행 보증금까지도 대주
겠다는 것이었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약속을 태산같이 믿고 입찰을 지휘하기 위해서 바레인에 도착한 정 주
영은 사실 당황했다. 철석 같은 바레인 국립은행의 약속이 빗나갔기 때문이
었다.
자본금이 부족하기 때문에 바레인 국립은행으로서는 2천만불이라는 큰 돈
은 보증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바레인 국립은행의
자본금 자체가 1천5백만불이었으므로 자체 자본금을 넘는 지급보증은 할 수
없었다. 대신 바레인 은행측에서는 자기네가 지원해 줄 터이니 사우디 국립
상업은행에 가서 지급보증을 받아 보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그 무렵, 아스리 조선소 현장소장 김 주신까지 합류한 입찰팀은 사우디아
라비아의 수도인 리야드의 여행자 숙박소에서 합숙을 하고 있었다. 보안을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고 해서 그들은 호텔에도 못 들어가고 우리 나라의 여
인숙 같은 데서 제록스 기계까지 구입해다 놓고 직접 서류를 복사하고 편집
하면서, 한편으로는 김 주신이 직접 타이핑을 해내고 있는 중이었다.
보안유지를 위해서 그들은 한 발짝도 밖에 내딛지 않고 밥도 식당에서 시
켜다 먹었다. 먹고 난 빈 밥그릇도 밖으로 내보내면 안 된다고 해서 먹는
대로 방안에 수북하게 쌓아 놓았다. 복이 씻겨 나가면 안 되기 때문에 목욕
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은 물론이었다. 그러자니 그 더운 방 안에 풍기는 고
약한 냄새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바레인 아스리 조선소도 그렇게 해서 따 냈고 사우디아라비아의
해군기지도 그런 식으로 해서 따 냈기 때문에 이번 역시 그렇게 해야만 따
낼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 고역을 즐겨 참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가운데서 꾸며낸 입찰 서류는 천여 페이지를 넘고 있었다. 그런 판
국에 와서 입찰 보증금 약속이 어그러졌으니 정말 사람 환장하게 만드는 일
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고 지금 와서 입찰을 포기할 수도 없고 달리 입
찰 보증금을 마련할 무슨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정 주영은 작년 12월 사우디아라비아의 해군기지 해상공사를 착공할 때,
같이 설치했던 리야드 지점을 시켜서 현지 국립상업은행과의 입찰 보증금
지급보증을 교섭하게 했다. 그런 교섭을 하라고는 하면서도 그는 소도 언덕
이 있어야 등을 비비는 법인데 자신은 언덕도 없이 등을 비비려고 한다는
무리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마침 바레인 은행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현지 은행에서는 사우디아라비아
가 바레인의 실질적인 후견인격인 특별한 외교 관계를 고려해서 바레인 은
행이 1천만불은 자기네 은행에다 예치한다는 조건이면 2천만불에 대한 지급
보증을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자, 그러니 막상 바레인 은행이 민간은행도 아닌 국립은행인데 사우디
은행 제의를 받아 주겠나?"하고 정 주영은 김 주신과 전 갑원 앞에서 낭패
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우리 나라 은행하곤 다르니까요."
전에 입찰 보증금 문제로 바레인에서 교섭해 온 김 주신이 정 회장을 안
심시키려는 듯이 한 마디 했다.
"해줄 겁니다, 회장님. 앞으로도 우리가 바레인 은행을 통해서 받아낼 공
사대금이 1억불이나 남아 있지 않습니까."
전 갑원도 그를 위로했다.
"글쎄, 해준다고 해도 앞으로 시일이 며칠 남았냐 말야. 그 사람네들도
회의하고 결재하는 시간은 있을 것 아냐?"
그 말에는 김 주신도 전 갑원도 할 말이 없었다.
"어쨌든 입찰 보증금은 내가 해결할 문제니까 당신네들은 입찰 서류나 빈
틈 없이 만들어 놔요. 그리고 공사를 구분해서 정확한 견적을 봅으라구. 지
난번 해군기지 때처럼 다른 회사를 겁먹고 덮어놓고 싸게 응찰할 생각 말고
말야."
정 주영은 입찰팀을 격려하고 문 인구와 정 문도가 같이 묵고 있는 호텔
로 돌아왔다.
만약 입찰 보증금을 마련하지 못해서 입찰에 직접 참가할 수 없게 되는
경우에도 정 주영으로서는 거기에 대한 최후의 복안은 있었다.
현대가 산업항 입찰에 참가하는 것을 꺼리고 있는 유럽의 여러 회사들은
그에게 자기네 회사의 콘소시움(연합) 멤버가 되어 줄 것을 직접 간접으로
맹렬하게 프로포우즈해 오고 있었기 때문에 최악의 경우에는 경험이 풍부한
토목분야에서 저렴한 공사비를 견적해 냄으로써 현대가 참여하는 콘소시움
대표회사로 하여금 낙찰케 한다는 배수의 진을 치고 있었다.
현대가 아스리 수리조선소와 사우디아라비아의 해군기지 공사를 수주 착
공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중동 건설시장은 선진국들의 독무대나 다름없었다.
여기에 느닷없이 뛰어든 현대라는 이름의 복병이 선진국의 금성탕지를 휘젓
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영국.서독.네덜란드 등 구미에서 손꼽히는 건설업체들은 이미 몇년
전부터 이 공사를 따 내기 위해 준비해 왔을 뿐 아니라 중동의 다른 대형공
사가 다 그러했듯이 이 공사 역시 초기의 구상 단계서부터 그들의 강력한
입김이 작용한, 소위 먹을 알이 있는 공사였다. 하기 때문에 미국의 브라운
앤드 루트사를 비롯한 영국의 코스테인사, 서독의 보스카리스사, 네덜란드
의 스티븐사, 프랑스의 스피베타놀 등 쟁쟁한 세계적인 건설회사들이 현대
의 입찰을 방해하기 위한 갖가지 회유공작을 펼쳐 오고 있었다.
그 회유책의 하나가 콘소시움 멤버로 참여해 줄 것을 제의해 오는 것이었
고, 심지어는 그들 여러 회사가 현금으로 상당한 보상을 해줄 테니 손을 떼
달라고 권해 오기도 했었다.
그들이 콘소시움 멤버로 참여해 달라는 것은 물론 단순하게 현대의 입찰
을 방해하려는 의도만은 아니었다. 토목분야에서 국제경쟁력이 강한 현대의
실력을 잘 알고 있는 그들 회사는 현대가 자기네 멤버로 참여해서 토목부문
을 싼 값으로 견적해 줌으로써 자기네 회사는 그만큼 다른 회사에 비해서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잇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 프랑스의 스피베타놀사에서는 그 무렵 파리 항로를 개척한 대한항공
의 조 중훈 사장을 통해서 정 주영에게 자기 회사의 콘소시움 멤버로 들어
와 줄 것을 적극적으로 프로포우즈해 오고 있는 중이었다. 그 무렵에는 한
진의 방계회사인 한일개발도 이미 현지에 진출해 있는 때이기도 했다. 그런
연유로 조 중훈은 정 주영을 설득하기 위해 리야드에 와서 머물고 있었다.
"정회장님, 경험도 없는 해양공사까지 맡았다가 손핼 보면 어쩌려고 그러
십니까? 어려운 해양공살랑 불란서 사람들한테 맡기고 현대에선 육지 쪽의
토목공사나 맡도록 하세요."
조 중훈이 비록 프랑스 회사의 부탁은 받았다 해도 그가 정 주영을 진심
으로 염려하고 하는 말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는 프랑스 사람들에게 얘기를
들었기 때문에 이번 공사가 자칫 잘못하면 현대그룹이 쓰러질 수도 있는 어
마어마한 공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싼 값으로 입찰한다고 해
도 15억불 이하로는 낙찰되기 어렵다는 것까지 그는 알고 있었다. 말이 하
기 쉬워서 15억불이지 현대만 하더라도 아스리 조선소의 1억불짜리 공사를
놓고 친형제간에 안정이냐 모험이냐 하고 의견을 달리하다가 마침내는 동생
이 회사를 물러나기까지 한 사실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사실들을 잘
알고 있는 그로서는 가능하면 정 주영의 무모한 모험을 설득해서 위험부담
을 덜어주는 것도 후일담이 될 수 있는 훈훈한 우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파리로부터 리야드로 날아오는 일을 사양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정 주영은 차라리 공사를 안 하면 안 했지 남하고 같이 할 생각은
없다는 것이었다. 기실 정 주영으로서는 프랑스 회사보다 서독 회사가 제의
해 오는 더 유리한 콘소시움 조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2월 12일. 입찰일을 사흘 남겨놓고 있는 오늘까지도 정 주영은 아직 입찰
보증금의 지급보증서를 발급받지 못했다. 그는 답답하고 초조해서 이틀 전
부터는 리야드 지점 직원 한 사람하고 아예 사우디 국립상업은행 텔렉스실
에 나가서 대기하고 있었다. 엊그저께부터 사우디 은행에 1천만불을 예치하
겠다고 하던 바레인 은행에서는 사흘이 자나도록 매일 앵무새 같은 소리였
다. 언제 예치하겠느냐 하는 텔렉스를 보내면 그쪽에서 보내는 회답은 번번
이 ASAP(as soon as possible:가능한 빨리)였다. 은행의 멧방석만한 벽시계
는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여태 소식이 없는 걸 보니 오늘도 글론 모양이다. 들어가자."하고 정 주
영이 일어나려는데 텔렉스 기계 소리가 울리면서 이어서 텔렉스 키이가 작
동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잔뜩 긴장해서 텔렉스 키이를 지켜보던 지점
직원이 펄쩍 뛰면서,
"됐어요, 회장님! 됐읍니다."하고 정 주영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이 은행이 요구한 미국 은행에다 예치했다는 거야?"
"예!"
"됐다!"
정 주영은 푸욱 한숨을 내쉬면서 그동안에 쌓였던 긴장을 확토해 냈다.
시일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국제간의 은행거래라는 것이 대개 그렇기는
했지만 바레인 은행이 그들의 미국의 주거래 은행을 통해서 사우디 은행이
지정하는 미국은행의 계정에다 예치시키기 위해서는 자연 복잡한 여러 과정
을 거쳐야 하게 마련이기 때문이었다.
텔렉스가 수신되고 나서 한 시간 후 정 주영은 7천 60만리 알(2천 4백 60
만불)이라는 사우디 국립상업은행 지급보증서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
즉시 조 중훈이 묵고 있는 호텔로 달려갔다.
끝내 정 주영을 설득하지 못한 그는 파리로 돌아가기 위해 프론트에서 체
크아웃을 하고 있었다. 정 주영은 로비의 소파에서 그를 기다렸다.
"어떻게 됐읍니까, 정회장님?"
조 중훈은 기진맥진해 앉아 있는 정 주영 앞으로 다가오면서 물었다.
"나도 내일쯤 한국으로 돌아갈랍니다."
"역시 지급보증이....."
"글쎄, 많다면 많은 돈이기는 하지만 입찰 보증금 4천만불을 못 만들고
돌아가야 하니......"
그는 말꼬리를 흐리면서 입맛만 쩍쩍 다셨다. 조 중훈은 곁에 않으면서
그를 다시 한번 설득해 보려는 듯이,
"그러지 말고 저사람네 제의를 한번 더 생각해 보시죠."하고 또 콘소시움
얘기를 꺼냈다. 그러자 정 주영은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뭐 그렇게까진......"하고 콘소시움에는 전혀 흥미가 없다는 듯이,
"난 조사장하고 점심이나 같이할까 해서 왔더니만......그럼 우리 서울에
서 만납시다."하고 큰 손을 내밀었다.
"그러시죠, 그럼......"
조 중훈도 손을 내밀어 악수했다. 파리로 되돌아온 조 중훈은 프랑스 회
사 사람들을 만난 자리에서 현대건설이 보증금 4천만불 때문에 결국은 입찰
을 포기하는 모양이라고 전했다.
조 중훈의 말을 들은 프랑스 회사 사람들은 두 눈이 휘둥그래지면서 혀를
내두르고 놀랐다. 조 중훈은 그들이 왜 놀라는지 몰랐다.
현대가 입찰보증금 4천만불을 준비하려고 했었다는 사실은 곧 20억불에
응찰할 예정이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주베일 산업항의 입찰 보증
금은 응찰금액의 2퍼센트였다.
2월 16일. 사우디아라비아 체신청 회의실에는 오전 9시 30분을 전후해서
입찰에 초청된 10개 회사가 속속 모여들기 시작했다. 외국 입찰팀이 회의실
무니을 들어서다가는 저마다 한차례씩 꿈틀 놀라는 것이었다. 입찰을 포기
한 줄 알았던 현대건설 입찰팀이 나와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 입찰 현
장에는 정 주영을 비롯해서 정 문도.전 갑원.김 광명 네 사람이 아침 9시부
터 미리 나가서 대기하고 있었다.
사흘 전 정 주영이 조 중훈을 만난 것은 2천 4백 60만불의 지급보증서를
받아들고 나서 미처 한 시간이 못 되었을 때였다. 그런데도 그가 4천만불의
입찰 보증금 마련이 없어서 입찰을 포기하고 서울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말한 것은 그의 의도적인 하나의 입찰 전략이었다.
무엇보다도 사우디 국립상업은행으로부터 받아 낸 입찰 보증금 지급보증
서였기 때문에 그 보증금에 대한 비밀이 보장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사우디 은행 사람들을 못 믿어서라기보다는 사우디 은행의 제도 자
체가 그런 비밀을 보장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허점을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 주영이 이틀 동안 은행에 나가서 텔렉스실을 지킨 것은 사실상 그와 같
은 입찰상의 비밀이 사우디 은행을 통해서 보장될 수 있겠느냐는 사실을 점
검하기 위해서였다. 1천만불의 거액을 국제 은행간에 예치하기 위해서는 그
정도의 시일이 걸리리라는 것쯤은 벌써부터 잘 알고 있는 그였다. 만약 그
가 은행으로부터 받아낼 지급보증서 금액이 5천만불쯤 됐었다면 그는 굳이
그런 수고를 치르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오히려 그는 현대가 5천만불짜
리 지급보증서를 발급받았다는 사실을 알리고 다녔을지도 모른다. 입찰 보
증금을 얼마나 준비했느냐 하는 것은 응찰 예정가를 얼마로 잡고 있느냐 하
는 것의 척도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조 중훈을 통해서 상대방 입찰경쟁업자들에게 현대가 4천만
불의 입찰 보증금을 준비하고 있다는 역정보를 흘렸던 것이다.
어젯밤 현대 입찰팀의 합숙소인 여행자 숙박소에서 그들이 오랜 시간을
두고 숙의한 끝에 오늘 써 넣기로 한 최종 응찰가격은 겨우 10억불에서도
훨씬 못 미치는 8억 7천만불이었다.
어떤 입찰에서나 그 공사비를 산출해 내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이번 입찰에서는 OSTT(open sea tanker terminal:해상 유조선 정박시
설)견적에 여간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OSTT에 대한 공사 경험이 전혀
없었을 뿐 아니라 한국 안에는 이에 대한 지식을 가진 사람조차도 전무한
실정이었기 때문에 그 부문에 대한 공사비를 얼마나 잡아야 할지도 캄캄한
형편이었다.
OSTT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철구조물에 대해서도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국내에서 해 본 철제구조물 공사라고 해야 송전철탑 가
설이 고작이었기 때문에 처음에 산출해 낸 산업항 전체 공사실비는 5억불
정도에 불과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공사실비가 너무 싸다고 생각된 입찰팀은 OSTT에 관한
해외 문헌을 찾아 보았다. 그랬더니 OSTT부분만도 9억불 내지 10억불은 잡
아야 한다는 계산이 나왔다.
그러나 선진국과는 공사수행상의 여러 가지 여건이 다른 국내 사정으로
보아 외국문헌에 의한 정보를 어느 정도까지 받아들여야 좋을지 알 수 없었
다.
몇 사람은 공사금액을 대폭 올려야 한다는 주장을 했고 또 몇 사람은 선
진국의 독무대나 다름없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이런 공사를 수주해 내려면
그들보다는 낮은 금액으로 입찰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함으로써 많은 논
란을 거듭한 끝에 다시 뽑아 낸 전체 공사실비는 약12억불이었다.
그 12억불을 정 주영이 회장이 1차로 25센트 삭감했다가 다시 또 5퍼센트
를 더 삭감한 금액이 최종 응찰가격으로 결정된 8억 7천만불이었다.
그 응찰가격에 대해서 그동안 사뭇 입찰준비를 주관해 온 전 갑원 상무는
너무 싼 값이라 해서 불만이었다. 그래서 그는 처음 결정했던 대로 공사실
비에서 25퍼센트만 삭감한 9억 3천 1백 14만불로 응찰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는 의견을 제시했었지만, 정 주영은 입찰에서의 2등은 꼴지나 마찬가지라고
하는 말을 강조하면서 안전 제일주의로 가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이
번 공사에서 다소 얼마간 밑진다 해도 결국은 많은 기능공들이 나와서 벌어
들이게 되고 또 많은 자재를 내다 팔게 되면 국가적으로는 이익이 되고 현
대로서는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게 될 것이므로 어떻게 해서라도 꼭 낙찰시
켜야 한다고 역설했다.
응찰가격이 결정되고 나서 그는 1천여 페이지에 달하는 입찰서류에 한 장
한 장씩 일일이 정성을 들여 싸인해 놓고 호텔로 돌아갔다.
정 주영이 돌아간 다음 전 갑원은 너무 싼 값에 입찰하는 것 같다고 투덜
거리면서도 그 전에 하던 식대로 입찰서류를 방바닥 위에 쭉 펼쳐 놓았다.
그리고는 차례대로 맨발로 그 서류를 밟고 지나갔다. 그 다음에는 한 열흘
동안 목욕을 안 해서 퀴퀴한 냄새가 나는 몸으로 그 서류 위에 앉아서 뭉개
기도 하고 누워 딩굴기도 했다.
원자력발전소 기공식을 하면서 돼지머리를 삶아 놓고 거기에다 잔을 올리
고 절을 하면서 고사를 지내는 식의 넌센스 입찰 전야제 행사였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까지 그런 식으로 정설을 다해서 다른 공사들도 따 내 왔었다.
"땡땡땡......"
체신청 회의실 벽시계가 오전 10시를 알렸다. 체신청 입찰담당관과 기술
용역회사 관계직원이 회의실로 나왔다.
긴장이 감돌기 시작했다.
"5분 이내로 입찰서를 제출해 주기 바랍니다."
입찰 담당관의 말이었다. 5분은 각 입찰팀으로 하여금 최종 응찰 가격을
입찰서 위에 기입해 넣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주어지는 시간이었다.
각 입찰팀에서 한 사람식 나와서 미리 마련된 투찰실로 들어갔다. 그 투
찰실은 비밀보장을 위해 완전히 밀폐되어 있었다.
현대에서는 전 갑원 상무가 나갔다. 투찰실에 들어온 그는 크게 어깨숨을
내리쉬었다. 그리고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는 정회장이 지시한 8억 7천만
불을 그대로 쓸 것이냐, 아니면 정회장의 지시를 어기고 공사실비에서 25퍼
센트만 삭감한 9억 3천 1백 14만불을 쓸 것이냐 하는 것을 결심하기 위해서
였다.
(나는 월급장이다. 최고경영자가 지시하는 대로 하면 내게는 아무 책임이
없다. 내가 이 자리에서 입찰금액을 지시한 것보다 더 써 넣어서 이 공사가
낙찰이 된다고 해서 그 돈이 내 주머니에 들어오는 것도 아니다. 그대로 쓰
는 거다.)
그는 입찰서를 펼치고 양복 윗주머니의 볼펜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는 입
찰금액 기입란에 왼손을 얹었다 그리고는 또 한번 눈을 감았다.
(아니다, 현대는 내 회사다. 내 평생 몸 담아 있을 현대다. 다른 입찰팀
이 우리 풋나기 현대를 의식하고 10억불 이하로 써 넣지는 않을 것이다. 만
약 내가 정회장의 지시를 어긴 결과로 이 입찰에서 실패한다면 나는 걸프만
의 수중고혼이 되어 현대를 지키겠다........)
그는 죽음까지도 각오하면서 입찰금액 기입란에 정회장이 지시한 금액보
다 6천만불이나 더 많은 일금 9억 3천 1백 14만불을 기입해 나가기 시작했
다. 그의 손은 긴장으로 떨렸으며 얼굴은 흥분으로 상기되었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정 주영 일행은 초조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투
찰실에서 나왔는데 전 갑원 혼자만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고 뭘 하고
있느냐고 뛰어들어가 볼 수도 없었다. 투찰시간의 투찰실 출입은 수하를 막
론하고 엄금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5분을 1분 남겨놓은 10시 4분이 돼서야 전 갑원이 투찰실을 나왔다. 입찰
서는 곧 입찰 담당관 앞으로 제출되었다.
"입찰결과는 오후 1시 소회의실에서 발표합니다. 입찰결과를 발표하는 소
회의실에는 각 입찰팀에서 한 사람씩만 참석해 주시기 바랍니다."하는 입찰
담당관의 두 눈이 금테안경 너머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는 곧 기술
용역회사 직원과 함께 제출된 모든 입찰서를 한아름 안고 사무실 쪽으로 사
라졌다.
회의실에 모였던 입찰팀들도 회의실을 나와서 각 팀별로 헤어졋다. 현대
팀은 청내 휴게실로 자리를 옮겼다. 그때까지도 전 갑원의 가슴에는 가벼운
흥분이 일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정회장과 시선이 마주치는 것이 싫어서
뒷전에서 움직였다. 그 눈치를 채고 이상하게 생각한 정 주영이,
"왜 그래 전상무? 입찰금액을 혹 잘못 썼나?"하고 물었다.
"아닙니다."
"그런데 아깐 왜 그렇게 꾸물댔어?"
"생각 좀 하느라구요."
"생각은 뭘 생각할 게 있었어? 내가 쓰라는 대로 썼지?"
"그대로 안 썼읍니다."
"뭐?"
놀란 사람은 정 주영 한 사람이 아니었다. 한자리에 있던 정 문도도 김
광명도 똑같이 놀랐다. 지금까지 크고 작은 일은 차치하고 현대 임직원으로
서 현대 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정 주영 회장의 지시를 의도적으로 어겨
온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더더구나 이번과 같은 현대건설 사상 최대 최
고의 입찰에서 한푼을 적게 썼든 많게 썼든 간에 정회장이 지시한 입찰가격
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썼다는 사실은 경천동지 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전 갑원은 놀란 정회장을 다부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정 주영은 너무 어
이가 없는지 자신의 어깨 아래밖에 안 차는 작달막한 키의 전 갑원을 얼마
간 말 없이 내려다보다가,
"대체 얼마에 써 넣은 거야?"하고 물었다.
"염려 마십시오, 회장님! 공사실비에서 25퍼센트만 삭감했던 1차 조정금
액대로 써 넣었읍니다."
"아니 그럼 9억 3천을 써 넣었다는 거야?"
"그래 봐야 겨우 6천만불 더 써 넣은 겁니다."
"6천만불이 적엇?"
정 주영은 버럭 역정을 냈다. 지금까지 해온 국내외 공사에서 아직 현대
로서는 6천만불의 공사 수익을 올려본 역사가 없었다. 그리고 그는 어젯밤
전 갑원이 입찰금액이 너무 싸다고 불만스러워 했을 때도 당장은 다소간의
손해를 보더라도 대국적인 견지에서는 득을 보게 될 것이라고 설득하지 않
았던가. 화를 내도 소용없고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제는 입찰결과
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오후 1시. 정 주영은 입찰결과를 발표하는 소회의실에는 정 문도를 들여
보냈다. 밖에서 입찰결과를 기다리는 정 주영과 전 갑원 그리고 김 광명 세
사람은 입술이 바싹바싹 타 들어가는 것 같았다.
1시에 발표장으로 들어간 정 문도는 3시가 넘어도 나오지 않았다. 물론
다른 사람들 역시 아무도 나온 이는 없었다. 발표 현장의 출입이 통제되어
있기 때문에 발표가 왜 그렇게 지연되고 있는지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들로
서는 알 길이 없었다.
"좀 어떻게 못 알아 보나?"
정 주영이 초조하다 못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때 직원 한 사람이
소회의실로 차를 나르고 있었다. 그 바람에 소회의실 문이 빠꼼히 열리게
되었다. 그 기회에 전 갑원이 그 문 틈으로 해서 잽싸게 소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마침 입찰결과가 발표되고 있었다.
"미국 브라운앤드루트사 9억 4백 44만불......."
입찰 담당관이 발표하는 소리를 듣는 순간 전 갑원은 아찔한 현기증을 느
꼈다. 그리고는 눈앞이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었다. 그가 오전
에 써넣은 입찰금액은 9억 3천 1백 14만불이었기 때문이다.
입찰 담당관은 발표하기를 중단하고 문앞에 멍해 서 있는 전 갑원을 향해
서,
"당신은 누구십니까?"하고 물었다.
"아, 예! 혹 무슨 기술적인 질문이 있을까 해서 들어왔읍니다."
"지금은 입찰 결과만 발표하는 중이니 나가 주시오."
전 갑원은 입찰 담당관으로부터 퇴장 명령을 받고도 잠시 멍해 섰다가 다
시 퇴장 독촉을 받고서야 소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그의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백지장같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정 주영의 얼굴도 얼음장같이 싸늘하게 굳어 버리
는 것이었다. 그로서는 물어 볼 말도 없었고 할 말도 없었다. 회의실에서
나오는 전 갑원의 얼굴 표정 하나만으로도 입찰결과는 넉넉히 읽을 수가 있
었다.
전 갑원은 그길로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다. 정 주영도 일단 모든 것을 체
념하고 돌아가고 싶었지만 아직 소회의실 안에서 나오지 않고 있는 정 문도
를 기다렸다가 얘기나 들어볼 생각에 그냥 눌러 앉아 있었다. 그후로도 정
문도는 좀처럼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김 광명은 무참해진 정회장의 얼굴을 보고 있기가 민망해서 슬그머니 전
갑원을 찾으러 나간다는 핑계로 자리를 떴다. 전 갑원은 회의실 모퉁이의
나무 그늘에 주저앉아서 넋을 잃고 있었다.
"어떻게 됐기에 그래요?"하면서 김 광명이 풀이 죽어 다가왔다.
"역시 우리 회장이 귀신인데 그 말을 안 듣고 내가 그만....."
전 갑원은 입술이 너무 타서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그는 입술에 침을
바르고 나서 다시 말을 이었다.
"브라운앤드루트사가 우리보다 3천만불 싸게 써 넣었단 말야."하는 말은
거의 울음에 가까운 소리였다.
"그러니 이 일을 어떡하지?"하는 김 광명의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 그
도 현대의 입찰금액을 너무 싸다고 생각한 사람의 하나였다. 더욱 작년 해
군기지 입찰을 지휘했던 그는 그때 경쟁회사가 오직 미국의 한 회사뿐이었
는데도 그 회사보다 4배나 싼 값으로 입찰했었기 때문에 공사는 낙찰시킬
수 있었지만 결국은 쓴잔을 들어 버린 뼈 아픈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같이 마주 앉아서 서로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피차간에 위로할 수
있는 말도 없었다.
그 시간에 정 문도는 손가락으로 V자를 지어 보이면서 환한 얼굴로 소회
의실 문을 나서고 있었다. 그를 기다리던 정 주영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해
하면서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섰다.
"성공했읍니다. 회장님!"
"뭐?"
"우리가 최저가격입니다."
"아니 그게 정말이야?"
"예! 여기 이렇게 다른 회사의 응찰가격을 써 갖고 나왔읍니다. 자, 보십
시오."하고 그가 펼쳐 보이는 다른 회사의 입찰가격은 다음과 같았다.
브라운앤드루트 9억 4백 14만불(해상공사 부분), 스피베타놀 10억 1천 4
백만불(육상공사 부분), 산타페가 10억 8천 7백 54만불(육상공사 실비정산
조건), 필립홀스만 15억 2천 70만불(5개사 콘소시움)등이었다.
"아니 그런데 이 브라운앤드루트사의 9억 4백 14만불은 뭐야?"
"아, 이건 그 사람네들이 해상공사 부분에만 입찰한 금액입니다. 워낙 큰
공사다 보니까 이번 입찰은 부분입찰을 받아 줬거든요. 보십시오, 프랑스의
스피베타놀사는 육상공사 부분에만 10억 1천 4백만불에 입찰하지 않았읍니
까?"
"음......"
정 주영은 실감이 나지 않는 듯 다시 한번 각 사의 입찰가격을 훑어보았
다. 정 문도는 정 회장에게 현대가 최저가격으로 입찰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키려는 듯이,
"다섯 개 회사로 콘소시움을 구성해서 입찰한 독일의 필립홀스만도 15억
2천 70만불을 써 냈읍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우리도 처음 견적해 낸 대로
12억불을 다 써 넣어도 되는 건데 그랬읍니다, 회장님. 하하........."
"됐어, 됐어! 전상무가 써낸 9억 3천만불이라도 최저가격이기만 하면 됐
어!"
"어디 갔읍니까? 전상무하고 김이사는.........."
"그런데 전상무는 무슨 소리를 듣고 그렇게 새파랗게 질려서 나왔었지?"
그는 브라운앤드루트사의 입찰가격이 9억 4백 14만불이라는 말만 들었을
뿐이지 그것이 해상공사의 부분입찰가격이라는 발표는 듣지도 못하고 현장
에서 쫓겨 나왔던 것이다.
이때가지도 회의실 모퉁이의 나무 그늘에 퍼질러 앉은 전 갑원과 김 광명
은 낙심천만해서 파김치가 되어 있었다. 아니, 전 갑원은 어떻게 해야 걸프
만의 물귀신이 되느냐 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봐, 거기서들 뭣들 하고 있는 거야?"하는 정회장의 호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은 문득 소리나는곳을 보았다. 정회장이 함박 미소를 머
금고 다가오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얼굴만 마주 바라보았다.
"남자들이 왜 그렇게 소심해? 공사가 어디 사우디에 이 공사 하나뿐이
야?"
"죄송합니다, 회장님!"
전 갑원이 고개를 숙인 채 일어섰다. 김 광명도 얼굴을 못 들고 일어났
다.
"죄송할 것 없어. 전상무 덕에 6천만불 벌었네."
"예?"
"됐어, 9억 3천만불이 최저가격이야!"
"정말입니까, 회장님?"
"이사람이 자기가 소신껏 한 일에 왜 이렇게 자신이 없어?"
"정말입니까, 회장님?"
이번에는 김 광명이 똑같은 질문을 했다.
"자, 어서 그만 호텔로 가자구! 가서 거 몸들이나 씻으라구! 냄새가 나서
어디 데리구 다니겠어? 하하......."
그제서야 전 갑원과 김 광명은 정회장의 말을 믿고 서로 부둥켜 안으려
덩실덩실 춤을 추듯 기뻐 뛰었다.
그날 밤 정 주영은 술이 없는 사우디아라비아 땅이었기 때문에 축하 파아
티는 열 수 없었고, 이번 입찰에 수고한 모든 임직원에게 천불식의 현지 특
별 보너스를 지급했다.
난다 긴다 하는 선진국의 입찰팀들이 정 주영의 전략에 말려들어 보기 좋
게 모두 나가 떨어졌던 것이다. 입찰 보증금 4천만불을 준비했을 현대는 아
무리 적어도 16억불까지는 써 넣을 줄 알았었다는 그들의 후일담이었다.
그러나 최저가격 응찰이 곧 낙찰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경쟁은 겨우 1
라운드가 끝난 데 지나지 않았다. 최저가격 입찰에 실패한 일부 경쟁업자들
이 노골적인 방해공작을 하고 나서기 시작했다.
"써 내는 거야 1억불은 못 써 내느냐? 그 돈 가지고 공사를 해 내느냐가
문제지."
"OSTT가 무엇인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싼 값으로 응찰할 수 있었다."
"도대체 현대가 해양공사를 한 실적이 뭐 있느냐?"
그들의 방해공작은 씨가 먹혀 들어 갔다. 터무니 없는 중상모략도 아니었
다.
정 주영은 또 한번 답답한 입장에 서게 되었다. 현대가 분명한 최저가격
응찰자임에도 불구하고 발주처에서는 네고(negotiation:계약 이전의 협의)
를 언제부터 시작하자는 언질조차도 주지 않고 차일피일 질질 끌어가기만
했다. 이유는 역시 OSTT부분에 대한 현대의 시공능력이었다.
그런 판에 무기 수출상으로서 중동지역에서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다니는 아드난 카쇼기라는 위인은,
"현대가 산업항 공사를 수주하면 내 오른팔을 자르라."고 호언하면서 돌
아다녔다.
그 무렵 바레인으로 건너 온 정 주영은 힐튼호텔 로비에서 담담한 마음으
로 브라운앤드루트사의 중역들을 만나고 있었다. 브라운앤드루트사는 이번
입찰에서 OSTT 부분에만 9억 4백 14만불에 응찰했다가 고배를 마신 미국의
세계적 해양건설업체의 하나였다.
지상 최대의 현금수표
정 주영이 같은 호텔에 묵고 있다는 것을 안 브라운앤드루트사 중역들은
그를 한번 만나 보고 싶었다. 대체 어떤 위인이기에 작년부터 현대군단을
이끌고 와서 중동 건설시장을 휘젓고 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 주영은 그들과 함께 오찬을 같이하게 됐었다.
그들은 정 주영에게 여러 가지를 묻는 것이었다. 맨 먼저 그들은 현대가
아무 경험도 없이 과연 OSTT 를 해 내겠느냐고 물어왔다. 정 주영은 미소하
며 대답했다.
"어떤 일이고 요는 그 일을 해내고자 하는 결의가 문제지요. 경험이라든
가 기술이라든가 지식 같은 것들은 전문가들이 커버해 줄 테니까요. 세계
속에는 여러분과 같은 훌륭한 기술자들이 얼마든지 있지 않아요? 우리 이왕
이렇게 만난 김에 현대가 여러분의 기술 좀 삽시다. 하하하......"
점잖게 한 대 얻어맞은 그들은 현대가 이번의 주베일 산업항을 성공적으
로 수행할 자신이 있느냐고 다시 물어왔다. 역시 정 주영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월래 공부를 많이 못 했기 때문에 실패하면서 배워 온 사람이에요.
실패를 거듭하는 동안 이만큼 성공해 온 셈이지요. 실패하는 것을 겁내고
실패했을 때 좌절하는 것이 진짜 실패지, 실패했을 때 좌절하지 않으면 실
패하지 않아요. 나는 아직 실패하고 좌절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번 일에
도 꼭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을 가지고 있지요."
그들은 그의 답변에 압도된 듯 고개만 크게 끄덕였다. 감동된 중역 중의
부사장이 현대를 도와서 같이 일하고 싶은데 OSTT 부분을 자기네에게 하청
을 줄 수 없겠느냐고 물어왔다.
"우리네 전체 응찰가격이 9억 3천만불입니다. 그런데 당신네들은 OSTT 부
분에만 9억 4백만불에 응찰했어요. 그럼 OSTT 를 당신네에게 하청을 주고
나면 우리는 무슨 돈을 가지고 나머지 다른 공사를 합니까? 그러니 그러지
말고 당신네들이 가진 특수한 장비와 특수한 기술을 우리한테 싼 값에 빌려
주시오. 우리는 어차피 당신네 말대로 경험이 없기 때문에 장비와 기술을
세계 건설시장에서 빌리거나 사야 할 입장입니다."
정 주영이라는 동양의 거인에게 완전히 매혹되어 버린 브라운앤드루트의
부사장은 그 즉석에서 OSTT 공사에 필요한 모든 특수장비와 특수기술을 전
폭적으로 지원해 주마 하는 약속을 하게 되었다.
정 주영으로서는 점심 잘 얻어먹고 발주처측에서 말썽을 빚고 있는 OSTT
에 대한 현대의 시공능력을 보완하는 데 성공한 셈이었다. 그는 즉각 본사
에 연락해서 국제담당 부사장 권 기태로 하여금 미국으로 건너 가서 브라운
앤드루트사와의 기술협약을 체결하도록 지시했다.
정 주영이 주베일 산업항 입찰에 관한 모든 일을 일단락 지어 놓고 서울
로 돌아간 다음, 미국에서 해양공사 전문업체인 브라운앤드루트사와의 기술
협약을 체결한 권 기태가 사우디아라비아로 날아왔다. 그러나 발주처측에서
는 현대가 브라운앤드루트사와 기술협약을 체결한 사실을 믿으려고 하지 않
았다. 전체 공사를 9억 3천에 응찰한 현대가 어떻게 OSTT만 9억에 응찰한
브라운앤드루트사에게 하청을 줄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기술협약 자체가
일종의 하청계약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권 기태는 하는 수 없이 브라운앤드루트사의 협조를 요청, 현대와 정식으
로 기술협약을 체결한 내용을 밝히는 공문을 작성하게 하고 그 회사의 부사
장을 사우디아라비아로 불러서 함께 발주처에 들어가 설명을 했다. 그때서
야 발주처에서도 일응 안심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었다.
브라운앤드루트사의 부사장은 발주처인 사우디아라비아 체신청을 나오면
서 권 기태에게,
"내가 당신네 보스 미스터 정에게 매혹돼서 기술협약을 맺기는 했어도 9
억 3천만불에 OSTT공사까지 해 낼 수 있을지는 걱정이요. 아마 토목공사를
잘해서 거기서 버는 돈을 OSTT로 돌려야만 어떻게 겨우 수지나 맞출 수 있
을 거외다."하고 공사의 장래에 대한 우려를 표하기도 했었다.
남을지 밑질지도 모르는 공사인데 미리 커미션을 노리고 집요하게 권 기
태를 좇아 다니는 한 명물이 있었는데, 그는 바로 현대가 주베일 산업항 공
사를 절대로 네고할 수 없을 것이라고 장담하는 중동 무기상 카쇼기 밑에서
부사장으로 일하고 있는 <아다리 킴>이었다. 아다리 킴은 한일개발 부장을
지낸 적이 있는 사람으로 권 기태는 그를 괌도에서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권 기태는 에이전트 없이도 공사 수주가 가능하다는 확신이 있었
기 때문에 그를 만나 주지도 않고 발주처의 주무국장과 장관만 계속해서 접
촉했다.
그러자 아다리 킴은 정 주영 회장을 직접 만나서 에이전트 교섭을 하기
위해 서울로 날아왔다. 그는 한일개발의 부장을 지낸적이 있었으므로 먼저
한진의 조 중훈을 찾아가서 정 주영 회장과의 면담 주선을 요청했다.
아다리 킴의 얘기를 들어본즉, 카쇼기의 협력 없이는 현대가 그렇게 애를
써서 최저가격으로 입찰해 놓은 산업항의 공사계약이 거의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한 조 중훈은 즉시 정 주영과의 연락을 취했다.
때마침 정 주영은 강릉에 있는 동해 호텔에서 개최되고 있는 현대그룹 자
체 행사인 경영합리화 심포지움에 참석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울로 돌아오는
대로 세 사람이 한자리에서 만나자는 약속이 이루어졌다.
서울 본사에서는 대체 무슨 일로 카쇼기가 아다리 킴을 정회장에게 보냈
는지 궁금해서 리야드의 권 기태에게 전화를 걸었다.
권 기태는 아다리 킴이 서울에 들어와 있다는 말을 듣자 깜짝 놀랐다. 카
쇼기의 도움 없이도 낙찰은 확실하니까 쓸데없는 사람을 정회장과 만나게
해서 공연한 에이전트 커미션을 뜯기게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는 것이었
다.
그래서 결국은 3자회담이 자리도 같이 해보지 못한 채 와해되고는 말았지
만, 기실 현대는 이미 입찰 이전부터 사우디아라비아 왕자 중의 한 사람인
<나와프>와 에이젠트 계약을 맺고 있었다.
중동의 대개 나라들은 외국인업체가 자기 나라 입찰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현지인 에이전트(대리인)를 두도록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현대는 그전 바
레인의 아스리 조선소 입찰 때도 <만수라>라는 현지인을 에이전트로 정한
일이 있었다.
에이전트 계약을 맺고 나면 현지 사정에 밝은 에이전트는 여러 가지로 많
은 편의와 도움을 제공해 주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사우디아라비아의
현대 에이전트인 나와프 왕자는 손 하나 까딱안 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브라운앤드루트와의 기술제휴로 현대의 해상공사 경험부족에서 야기된 시
공능력 문제가 일단락되고 낙찰이 거의 확실시되자 정 주영은 또 공사 수행
보증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런던으로 떠나야만 했었다. 공사 수행보증금은
공사 계약금 9억 3천만불의 30퍼센트를 요구하고 있었으므로 자그마치 2억
8천만불이라는 거금이었다. 입찰 보증금 2천 4백만불을 마련하는 데도 그
애를 먹었는데 과연 국제금융시장에서 현대를 믿고 2억 8천만불이라는 거액
의 지급보증을 해 줄것이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정 주영 자신으로서도 어
떻다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우리 나라 외환은행이 있으니까 그런 데서 척척 알아서 뒷받침을 해 주었
으면 좋겠는데, 우리 외환은행에 그럴 만한 능력이 없는 것은 이미 지난번
입찰 보증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실증적으로 증명된 바 있으니 고려의 대
상이 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그는 정부기관인 외환은행에 등을 대고 비비는 수밖에 없다고 생
각했다. 그는 외환은행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돈은 없어서 못 빌려 줄 형편
이면 외국에 나가서 외환은행을 대표할 사람이나 한 사람 주선해 달라고 했
다.
그래서 그는 외환은행을 대표하는 김 용식 중역 한 사람과 업무관리담당
전무인 박 영욱을 대동하고 서울을 떠났다.
그는 외국에서 차관을 한다거나 국내 금융기관으로부터 거금을 융자하는
것이 꼭 빚을 지는 일이라고만은 생각지 않았다. 물론 자기 재정이 넉넉하
면 그런 국내외 금융기관이 소용없겠지만 자체 재정이 부족한 사람들을 위
해서 그와 같은 금융기관이 존재하고 있는 만큼 사업을 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금력을 이용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있었으며, 또한 남의 돈
을 이용할 수 있는 한계가 곧 자신의 신용의 한계라고 믿고 있었다. 그가
이번 출장에 외환은행을 대표하는 중역 한 사람을 대동한 것도 바로 현대건
설의 신용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예상했던 대로 과연 현대가 국제 금융시장에서 2억 8천만불의 지급
보증을 받아 내는 일은 결코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었다 현대는 뒤로 젖혀
놓고라도 한국의 외환은행이 책임을 진다고 나서는 데도 선뜻 응하고 나서
는 은행이 없었다.
이 은행 저 은행 교섭을 하면 으례 비싼 수수료만 내라는 것이었다. 국제
관례에 따르면 0.5퍼센트로 족한 것을 현대나 한국외환은행의 약점을 훤하
게 읽고 있는 그들은 2퍼센트 내지 2.5퍼센트까지의 비싼 수수료를 요구했
다.
수수료는 문제가 아니었다. 요는 어느 은행이 주관해서 그 지급보증을 해
줄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였다. 2억 8천만불이라는 그 많은 돈의 위험부
담을 어느 은행이고 혼자 떠맡으려는 은행은 한 은행도 없었다. 천상 어느
한 은행이 나서서 신디케이트(syndicate)를 조직하고 그 신디케이트에 참여
하는 멤버 은행별로 2억 8천만불을 적절히 분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다.
런던의 시티은행(City Bank)이 주선해 보겠다고 나섰다가 다른 은행들이
잘 호응하지 않는 바람에 손 든 지는 이미 오래 전이다. 입찰 보증금을 지
급보증한 바 있는 사우디아라비아의 국립상업은행이 간사은행이 되어 보겠
다고 나섰지만 그 은행으로서는 아직 지급보증을 위한 신디케이숀을 조직해
본 경험이 없었다.
그래서 박 영욱과 외환은행에서 나온 김 용식은 사우디 은행이 조직하는
신디케이트 멤버 은행을 알선하기 위해 무려 40일간이나 런던에서 체재해야
만 했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일은 유럽 금융시장에서 사우디아라비아 국립
상업은행이 신임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 정부가 국립상
업은행 이름으로 유럽 각 금융기관에 많은 오일달러를 예치해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사우디아라비아의 국립상업은행은 한국외환은행을 어느 정도는 신임
하고 있었다. 그 무렵만 해도 현대보다 먼저 사우디에 진출한 삼환기업.한
국건업.삼익주택.진흥기업들이 현지에서 활발한 공사활동을 전개하고 있었
기 때문이다.
정 주영은 바로 그와 같은 객관적인 여건을 생각하고 미리 외환은행 대표
를 동반했던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결국 지급보증금의 2퍼센트에 해
당하는 5백 60만불이라는 비싼 구전을 물고서라도 2억 8천만불의 공사 수행
보증금을 마련하는 데 성공할 수가 있었다.
이제는 기술적인 협의도 끝났고 공사 수행보증금도 준비되었다. 남은 일
은 계약서에 싸인이나 하고 나서 선수금을 받아 내는 일만 남았다.
정 주영이 그런 일까지는 참견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귀국을 서둘렀다.
현지의 능률적인 공사수행을 위해 본사의 강력한 지원체제도 정비해야겠고
주도면밀한 시공계획도 미리 수립해야겠기 때문이다.
그가 공항으로 가기 위해 호텔 로비를 나서는 때였다. 권 기태가 황망스
럽게 현관문을 밀고 들어왔다.
"뭐야?"
"야단났읍니다, 회장님!"
"또 무슨 야단이야?"
"이번엔 또 이스라엘 보이코트 문제로 말썽입니다."
"이스라엘 보이코트하고 우리 현대하고 무슨 상관 있어?"
"울산의 현대자동차가 미국의 포드하고 제휴하고 있다는 겁니다."
중동 여러 나라들의 이스라엘 보이코트 정책이란 자기네들과 적대관계에
있는 이스라엘을 유리하게 하고 있는 국가나 단체 또는 개인하고는 기존 협
력관계 이상의 새로운 협력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정책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에 직접 투자를 하고 있는 미국의 포드회사와 현대가 자
동차 기술을 제휴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이 표방하는 이스라엘 보이코트
정책에 명백하게 위배되는 사항이다.
미국의 포드 회사는 세계 최대의 자동차 메이커 회사이다. 그 포드 회사
와 정 주영이 손을 끊은 것은 벌써 오래 전의 일이었다. 그가 포드 회사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67년 2월에 자동차 조립 기술계약을 체결하면서부터
였다.
그보다 약 1년 앞선 66년 4월, 포드 회사에서는 한국 진출을 겨냥하고 시
장조사차 서울을 다녀간 적이 있었다.
그때 사실 현대는 포드측의 접촉대상에도 끼지 못했었다. 장차 자동차공
장을 한번 일으켜 보자는 정 주영의 열망과는 상관없이 포드측에서 본 당시
의 현대는 어디까지나 건설업체였기 때문이다.
그 무렵 한국에서는 기아산업이 일본의 혼다(본전)와 기술제휴를 하고 삼
륜차와 트럭을 조립해 내고 있었고 신진공업에서는 일본의 도요다(풍전)와
기술제휴를 해서 코로나를 조립해 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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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앞선 62년, 혁명정부에 의해서 제정 공포된 자동차공업 보호법과
자동차공업 5개년 계획에 따라 대.중형 차를 조립생산하던 시발자동차공업
과 일본의 닛산(일산)과 기술을 제휴하고 새나라 차를 조립생산하던 새나라
자동차공업은 무계획한 과잉투자로 말미암아 곧 조업을 중단하지 않을 수
없게 됏었으며, 부평에 세워진 방대한 새나라차 조립공장은 이미 신진공업
으로 넘어간 다음이었다.
포드회사에서 온 사람들이 한국의 몇몇 회사와 접촉을 마치고 돌아갔다는
얘기를 들은 정 주영은 몸이 후끈 달아 올랐었다. 그러잖아도 월남전의 특
수 부움을 타고 돈을 좀 벌어들였기 때문에 회사 재정에 여력이 생겨서 오
래 전부터 꿈 꾸어 오던 자동차공장을 세워 볼까 하는 구상을 하고 있던 그
였다.
그는 미국에 가서 있는 정 세영을 전화로 불러냈다. 때마침 정 세영은 단
양 시멘트공장 1차 확장공사를 위한 차관교섭차 현지에 나가 있었다. 그는
정 세영에게 포드측에서 한국을 다녀간 사실을 알리고 나서,
"그러니 차관이 좀 늦더라도 당장 포드 회사 사람들을 만나란 말야. 그래
서 거기서 아예 기술계약을 맺어 갖고 들어와."
"원 형님두, 아 그게 그렇게 하루아침에 쉽게 되는 일이에요?"
"해 보기나 했어? 부딪쳐 보지도 않고 쉬운지 어려운지 어떻게 알아?"
"알았어요."
<해보기나 했어?>라는 말은 그가 <병신같이>하는 말 다음으로 잘 쓰는 말
이었다. 무슨 일이고 해보지도 않고 안 된다거나 힘들거라도 할 때면 그는
으례 그런 말로 핀잔을 주었다.
정 세영은 그날부터 현대건설의 창업주가 본시 자동차 기술자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포드 회사 사람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의 설득은 주효했다.
포드측에서는 정 주영이 자동차 기술자라는 점에 많은 관심을 표시하는
것이었다.
포드 회사는 자기네가 선정한 한국측의 파트너가 될 회사들의 신용조사를
착수했다.
그때 하마터면 빠질 뻔했던 현대가 정 주영이 때를 놓치지 않고 손을 쓴
덕분에 간신히 그 조사대상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되자 그해 12
월에 그는 급히 현대자동차주식회사를 설립해 놓고 그 신용조사 결과를 기
다렸다.
포드 회사의 신용조사는 미국의 CIA를 뺨칠 정도였다. 주한 미국대사관을
위시해서 주한 미국 정보기관.주한 미국 언론기관.주한 미국 금융기관, 심
지어 한국의 생산성 본부에 이르는 모든 조사기능을 다 동원했는데 그 조사
기관이 무려 16개처나 됐었다.
그처럼 철저하게 조사한 결과, 현대건설의 신용도가 단연 1위를 차지했던
것이다. 회사의 신용도가 1위라고 해서 곧 기술계약이 체결되는 것도 아니
었다.
67년 2월, 포드 회사의 국제담당 부사장 일행이 현대의 최고 경영진과 면
담을 갖기 위해 다시 내한했다. 사흘을 예정하고 온 그들의 면담 스케줄은
단 두 시간 만에 끝나 버리고 말았다. 더 긴 얘기를 주고받을 필요가 없었
다. 정 주영은 자동차 기술자가 아니라 자동차 박사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내한한 다음 날인 2월 21일 현대와 포드 사이에는 79(미국산 부
품)대 21(국산 부품)의 1차 자동차 조립기술계약이 전격적으로 체결되었다.
뉴우스가 전해지자 자동차 업계는 한바탕 깜짝 놀랐다. 업계의 예상을 완전
히 뒤엎은 현대건설의 자동차계 진출은 업계의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어느 날, 자동차 업계는 또 한바탕 놀랐다. 현대와
포드 회사와의 합작회사 설립 교섭이 결렬되었다는 뉴우스가 전해졌기 때문
이었다.
그동안 정 주영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매달려 있느라고 정작 자동차공장
을 세우고 자동차를 생산해 내고 하는 일에는 전념할 겨를이 없었다. 그래
도 그는 틈만 나면 울산으로 달려 내려가서 자동차공장 건설현장을 감독하
고 독려했었다. 그 결과 공장을 짓기 시작하고도 3년은 걸려야 차를 생산해
낼 수 있을 것이라던 포드측의 예언을 깨고 그는 만 1년 만에 코티나를 조
립생산해서 시판하기 시작했었다.
그후 그는 계속해서 트럭과 버스 등을 생산해 내다가 69년에는 부품의 국
산화율을 높여서 포드회사와의 조립기술계약을 50대 50으로 갱신하고 기간
도 71년까지로 연장했다.
그때 그는 2차 계약기간이 만료되는 71년 이후부터는 합작회사를 설립하
고 선진 자동차공업 기술을 명실공히 국내에 정착시키기 위해서라도 모든
부품을 한국에서 생산해 내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되고 아직 울산 조선소 건립계획이 본궤도에 오르기
전의 일이었다.
정 주영은 포드 회사와의 자동차 자동차 합작회사 설립계획을 본격적으로
추진시키기로 하고 합작회사 설립의 가장 기본이 되는 투자비율을 일단 50
대 50으로 결정했다. 한국에 설립하는 합작회사의 투자비율을 반반으로 결
정했다는 사실은 그의 엄청난 양보를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내가 주인 행
세를 하기 위해서는 투자비율을 최소한 51대 49로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투자비율을 51대 49로 하고서는 포드 회사측에서 합작회사를 설립하
자는 제의에 귀도 빌리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주인 행세야 누가 하
든지 한국에 세우는 합작 자동차공장은 결국 한국의 것이라는 대국적인 생
각을 했던 것이다. 투자비율이 정해지자 합작회사 설립교섭은 순조롭게 진
행되는 성싶었다.
그때가 70년 말. 그때 현대자동차는 일대 불황을 겪고 있었다. 작년까지
만 해도 차는 못 만들어서 못 팔았었다. 68년 6백명에 불과하던 종업원이
69년 한 해 동안에 3천명으로 불어난 것 하나만 보더라도 그동안 현대자동
차가 누린 호황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종업원들은 현대자동차 작업복을 걸
치고 울산 시내에 나가기만 하면 어디에서나 최고 인기의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맥주홀 아가씨의 애교 있는 써비스도 시체말로 끝내주었고 외상술
도 얼마든지 마실 수가 있었다.
그랬는데 69년 가을에 불어닥친 태풍 사라호가 현대자동차공장을 휩쓸고
가면서 그 좋던 경기까지도 몰고 가 버렸는지 그때부터 떨어지기 시작한 자
동차의 판매실적은 70년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아주 형편 없이 저조해서 말이
아니었다.
많은 종업원들이 얼마 전에 동국제강에서 설립한 아세아자동차의 피아트
공장으로 빠져나갔는가 하면 남아있는 종업원들에게도 15일간의 장기 휴가
가 실시되었고 주.야간 2개 조로 편성되었던 모든 피아트의 작업반은 1개
조로 축소되었다. 맥주홀에서 끝내주는 아가씨들의 써비스를 받으면서 외상
술을 마시던 종업원들은 휴가 기간을 이용해서 울산 뒷산에 올라가 나무를
해다 팔아야만 하는 비참한 지경에 처하고 말았다.
단순부품조립 (semi knock-down part)생산단계를 벗어나서 완전부품조립
(complete knock-down part)생산단계를 들어선 당시의 한국 자동차 업계에
서는 신진의 코로나, 아세아의 피아트, 현대의 코티나가 좁은 소형 승용차
시장을 놓고 피나는 경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서 현대의 시장 점
유율은 20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했으니 그들이 당하는 불황은 연륜이 짧은
후발업체로서 겪어야 할 당연한 진통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자 합작회사 설립을 협의해 오던 포드 회사측에서는 현대측의 자동차
판매자금 조달능력을 문제삼고 나왔다.
본래 자동차공업은 세계 각국의 경제발전의 한 지표로 평가될이만큼 그
중요도가 매우 높은 산업이다.
자동차는 3만여 개의 각종 기계부품으로 조립 생산되는 종합적인 기계제
품이다. 따라서 자동차공업은 철강.비금속 등 기초 소재 산업으로부터 전기
공업, 기계공업, 유리, 플라스틱, 석유 등의 화학공업에 이르기까지 광범위
한 관련 기간산업을 기반으로 하는 종합공업이기 때문에 모든 산업 분야의
파급효과가 지대하다.
또한 자동차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경제성으로부터 시작해서 안정성.정밀
성.내구성.저공해성 등 현대 공업의 각종 최신 신예기술이 동원되어야만 하
는 기술집약적 산업이다.
그리고 자동차공업은 고용증대의 효과가 크다. 많은 관련산업을 거느리므
로 자연 고용유발효과도 커서 선진국의 경우 전체 취업인구 가운데서 자동
차공업이 차지하는 취업인구 비율은 미국이 7분의 1, 서독과 영국이 13분의
1, 이웃나라인 일본은 10분의 1에 달한다.
그와 같은 특성 때문에 자동차공업은 세계적으로 가장 대표적인 경기 주
도산업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미국의 경우는 자동차의 판매동향이 미국 전
체 경제의 경기 예고지표로 이용되고 있을 뿐 아니라 제너럴모터스(GM)사의
주식이 사실상 뉴욕의 증권시장을 선도하는 주력주가 되고 있다.
하기 때문에 정 주영은 하루속히 우리 나라에 선진 자동차공업 기술을 정
착시키려고 하는 것이었다. 더우기 미국의 포드 회사와 합작회사를 설립하
게 되는 날에는 우리 나라의 자동차공업의 후진성을 극복함은 물론이고 동
시에 우리 나라에서 생산되는 자동차가 포드를 등에 업고 세계 자동차 시장
으로 진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막판에 와서 포드 회사는 현대의 자동차 판매자금 조달 능력 문제
를 들고 나왔다. 어찌 보면 그것은 억지나 트집 같은 것 만은 아니었다. 자
동차공업은 자본집약적 산업이기 때문이다.
자동차공업은 모든 제조업 중에서도 자본집약도가 제일 높은 산업이다.
순 매출액을 총자본으로 나눈 주요 업종별 자본회전율 가운데서 우리 나라
의 자동차공업은 다른 제조업 평균치의 절반이 조금 넘는 60퍼센트 수준이
다. 특히 연간 자동차 판매 대수의 절반 이상이 할부판매라는 점을 고려한
다면 자동차공업은 다른 제조업에 비해서 최소한 두 배 이상의 자본금을 가
져야 한다는 결론이다. 2차대전 당시의 원자탄 개발비가 20억불이었고 아폴
로 발사 계획비가 2백 50억불인 데 반해서 미국의 3대 자동차 메이커가 오
일쇼크 이후의 연료절약형 승용차를 새로 만들어 내기 위해서 향후 8년에
걸친 기술개발비와 시설투자비를 자그마치 7백 80억불로 책정한 것 한 가지
만 보아도 자동차공업의 자본이 얼마나 큰 규모인가 하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포드측에서는 보다 많은 차를 팔기 위해서는 아주 오랜 기간의 장기 할부
판매를 해야 하는데 현대에 그와 같은 장기 할부판매를 뒷받침할 만한 판매
자금을 동원할 능력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말만 자신 있다고 해서 통할 일은 아니었다. 정 주영은 시중 은행을 동원
해서 2백억원의 자동차 판매자금 지급보증서를 받아다가 그들 앞에 내놓았
다. 그들이 요구하는 자금은 3천만불(약 1백20억원)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2백억원을 준비한 것은 현대의 자금동원 능력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과시
하기 위함이었다. 2백억원이면 자동차 한 대의 생산원가를 1백만원으로 계
산해도 2천대분이다.
그러나 정 주영이 2백억원의 지급보증서를 받아낸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포드 회사와의 합자회사 설립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 비싼 수고를
치른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그토록 어리석거나 아둔하지는 않았다. 그
는 포드 회사측의 저의를 훤하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포드 회사측에서는 근본적으로 한국 같은 좁은 시장에 발을 들여놓을 생
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합작제의에 응해 온 것은 다만 현
대하고의 기존 조립기술계약을 그대로 연장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
렇기 때문에 그들은 합작회사 교섭을 결렬시키기 위한 명분으로 현대의 판
매자본금 동원능력을 문제삼고 나왔던 것이다.
그러나 정 주영은 그들의 머리 꼭대기에 앉아 있었다. 정 세영은 정 주영
이 제시한 2백억원짜리 지급보증서를 보자 어깨에 힘을 주면서 그들에게 물
었다.
"어떻습니까? 이만하면 자금에는 이의가 없으시겠지요?"
"자금은 만족합니다. 그런데 본사에서 투자비율을 재조정하라는 지시가
왔읍니다."
"투자비율은 이미 서로 50대 50으로 양해된 사항 아닙니까?"
"그것을 60대 40으로 재조정하라는........"하는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
에 정 주영은 벌컥 화를 냈다.
"닥치시오! 한국 시장이 작아서 들어올 마음이 없으면 솔직하게 들어올
마음이 없다구 해요!"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정 세영에게 몹시 격앙된 목소리
로,
"다 집어치우고 당장 오늘부터라도 우리 나라 고유으 자동차 모델을 개발
해서 백퍼센트 국산차를 만들어 내는 방안을 모색햇!"하는 불 같은 호령을
내리고 회장실 문을 박차며 나가 버렸다.
포드 회사와의 인연은 그렇게 해서 끝이 났었다. 그 바람에 3년이라는 각
고 끝에 지난 1월 비로소 포니라는 이름의 국민차를 생산해 냄으로써 우리
나라도 겨우 세계 16번째 고유모델 승용차 보유국이 되었던 것인데, 사우디
아라비아 당국이 저간의 사정은 알지도 못하면서 지금 그 옛날의 포드 회사
와의 관계를 가지고 이스라엘 보이코트 정책 운운한다는 것은 분명히 또 어
느 경쟁회사의 모함인 것이 틀림없었다.
아뭏든 이왕에 꺼낸 자동차 얘기니 여기서 조금 더 하고 넘어가자. 아직
도 할 얘기가 너무 많이 남아서 자동차 얘기는 다시 할 기회도 없을 것 같
다.
백퍼센트 국산차를 만들라는 정 주영의 불호령이 떨어지기는 했었지만 현
대그룹 중역들은 아무도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성이 희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도 해보기나 했느냐는 핀잔을 들
을까 봐서 어렵다는 말도 못 하고 슬슬 눈치만 살피고 있는 처지들이었다.
그 무렵, 기아산업은 일본의 혼다와 아세아자동차는 이태리의 피아트와
각각 기술제휴를 하고 있었고, 중국대륙에의 진출을 위해 주사원칙을 받아
들인 일본의 도요다로부터 결별선언을 당했던 신진공업에서는 재빨리 미국
의 제너럴모터스사와 손을 잡았다.
울산 조선소 건설에 매달려 정신 없이 바쁜 중의 정 주영에게 신진공업이
지엠사와 제휴했다는 소식은 하나의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됐다면
현대자동차는 사실상 설 땅이 없는 셈이었다. 죽으나 사나 고유모델의 국산
차를 개발하는 것으로써 현대 자동차의 운명을 결판지을 수밖에 없다고 그
는 생각했다.
"뭘 여태 우물쭈물하고 있는 거야?"
그날 밤, 정 주영은 정 세영을 불러다 놓고 호통을 치고 있었다. 하도 야
단을 많이 맞아 온 정 세영은 면역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무렇지 않게 대
꾸했다.
"아, 지금 구상하고 있는 중이에요."
"구상하고 말고 할 게 뭐 있어? 자동차공장이 별거야? 엔진같은 걸 부어
내는 큰 주물공장이나 하나하고 차체 같은 걸 때려 만들 큰 대장간, 차 껍
데길 찍어 프레스공장, 그리고 나중에 페인트 칠을 할 도장공장이나 하나
있으면 되는 거지. 안 그래?"
"말로는 쉽지만........"
"해 봐! 어려울 것도 없어. 그리고 이태리에 가면 세계적인 자동차 모델
디자이너가 있다고 했지?"
"모델이나 디자인한다고 될 일이에요? 참......."
"그 담에야 우리 기술로 당장 못 만들 것은 엔진뿐이잖아."
"자동차야 엔진이 다죠 뭘."
"그럼 됐어. 엔진 문제는 내가 일본의 미쓰비시하고 해결할 테니 너는 당
장 내일이라도 이태리로 떠나!"
"당장 떠나는 게 문제가 아니고 자금도 문제 아닙니까, 형님?"
"돈은 이 세상에 얼마든지 있는 거야, 이 사람아. 이 세상에는 돈을 꾸어
쓰려는 사람도 많지만 돈을 꾸어 주려는 사람 또한 그만큼 많은 거라구. 그
많은 은행들이 다 뭐하는 데야? 요는 사업계획 자체를 돈 꾸어 줄 사람이
신뢰할 수 있을 만큼 세우느냐 못 세우느냐가 문젠 거야. 지금 이 조선소는
우리 돈으로 짓고 있어?"
이튿날 정 세영은 기술자 몇 사람을 대동하고 이태리로 떠났다.
그는 먼저 이태리 굴지의 자동차 메이커인 트리노 자동차공장을 세밀하게
둘러보았다. 과연 정 주영의 말대로 자동차공장도 별 것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대개의 부품들은 조그만 회사에서 만든 것들을 가져다가 조립
하고 있었으며 심지어는 엔진까지도 다른 엔진 공장에서 만든 것을 쓰고 있
었다.
정 세영은 트리노 자동차공장을 견학하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도 국산차를
만들 수 있다는 자신을 얻게 되었다. 그는 곧장 이태리의 자동차 전문 설계
용역회사인 이탈 디자인(Ital Design)사를 찾아가서 스타일링 및 설계용역
을 1백 20만불에 계약한 다음 유럽 자동차계의 톱 스타일리스트인 지우지아
로를 방문하고 한국형 국민차의 모델 디자인을 의뢰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영국으로 건너갔다. 앞으로 자동차공장을 실제로 건설
하고 경영하는 데 필요한 자동차 전문인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때마침 BLNC(British Leylanol Motor Corporation)의 부사장인 죠지 턴블
이 신형차 개발문제로 그 회사 회장과의 의견이 서로 안 맞았기 때문에 회
사를 그만두고 집에서 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절호의 찬스라고 생각했
다. 밑져 봐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그는 감히 대BLMC 부사장을 지낸 죠지 턴
블을 찾아가서 현대자동차의 부사장으로 와서 일해 보지 않겠느냐고 제의했
다. 그는 첫마디에 거절을 당했다. 그도 한번 찾아가서 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죠지 턴블이라는 이름과 체면이 있고 자존심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시 찾아갔다. 죠지 턴블은 한국의 자동차공업 수준이 어느 정도나 되는
지 한번 직접 가 봤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는 기꺼이 죠지 턴블을 한국으로
초청했다. 한국에 나와서 울산의 자동차공장을 둘러본 그는 돌아가서 자기
부인과 상의해 보고 부인이 동의한다면 나와서 돕겠다고 했다. 단 한국에서
고유모델에 의한 새차가 생산되는 그날까지라고 하는 조건을 달았다.
그가 그와 같은 조건을 다는 것은 신형차 개발문제로 의견을 달리했던
BLMC회장에 대한 감정을 작용한 때문인지도 몰랐다.
때를 같이 해서 정 주영은 일본의 미쓰비시 자동차회사와 엔진.액술.트랜
스믹션 등의 중요부품 제작에 관한 기술계약을 체결했다.
74년 7월, 지난 달에 조선소 1단계 준공식과 함께 26만톤급 유조선 1.2호
의 명명식을 거행한 정 주영은 1단계 조선소 건설비 6천 3백만불을 훨씬 초
과하는 1억불을 들여서 연산 5만 6천대 규모의 국산 종합자동차공장을 착공
했다.
1억불 중의 외자 7천 2백만불은 영국.프랑스.일본 등으로부터 차관해 들
인 돈이었다. 그의 말대로 이 세상에는 정말 돈을 꾸어 주려고 하는 사람도
돈을 꾸어 쓰려는 사람만큼이나 많은 모양이었다.
한편 작년 1월 박대통령이 중화학공업정책을 선언할 때 80년대초의 자동
차 연산 생산체제를 50만대 선으로 확대할 것을 발표하고 다시 9월에는 75
년 말까지 자동차의 완전 국산화를 달성할 수 있도록 하라는 지시를 관계부
처에 내린 바 있어, 상공부가 81년도의 자동차 수출 목표액을 1억 5천만불
로 결정한 장기 자동차공업 진흥계획을 수립하는 등의 일련의 정부시책이
현대자동차의 국산화 계획을 뒷받침해 준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정 주영의 조선소 건설계획 때도 그러했듯이
이번의 자동차 국산화 계획도 정부의 그와 같은 시책이 발표되기 이전에 이
미 추진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하기 때문에 일반 국민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정 주영이 정부시책에 편승
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매번 정부가 정 주영의 사업계획을 뒷받침하는 셈
이 돼서 한때 사계의 많은 식자들이 그의 사업가적 안목에 놀라고 나중에는
그가 이번에는 또 어떤 사업을 구상하고 있나 하고 그의 활동을 주시하기도
했었다.
영국으로 돌아가서 부인을 설득하고, <한국이라는 나라에 가서 자동차를
만들자>는 신문광고를 통해서 선발한 일급 기술진 6명을 거느리고 내한한
죠지 턴블은 주야를 가리지 않는 현대 일군들의 열성에 고무되어 헌신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탄생할 국민차의 이름이 <포니(조랑말)>로 결정되었다. 광고를 통해서 모
집한 이름은 아리랑.도라지.무궁화.현대 등으로 수도 없이 많았었다.정 주
영은 이들 현대자동차에 근무하는 여사무원들의 투표에 붙였다. 발랄하고
꽃다운 처녀들이 좋아하는 이름이면 누구나가 좋아할 수 있는 이름이 될 것
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투표 결과 포니라는 이름이 압도적 다수표로 가
결되었고, 포니라는 이름으로 응모해 온 많은 엽서 가운데서는 충주시의 현
대양복점 직공이 보낸 엽서가 당첨의 영예를 차지했었다.
76년 1월, 그렇게 해서 첫 포니를 탄생시킨 현대자동차공장이 오늘날에는
연산 30만대의 양산체제를 갖추었으며 오늘도 한국의 조랑말 포니는 세계의
구석구석을 누비고 달린다.
자동차는 반드시 국적을 물어 보는 상품이다. 하기 때문에 외국에 나가
있는 많은 우리 나라 수출상사 직원들은 고객들에 대한 메이드 인 코리아의
신용도를 높이기 위해 조랑말을 즐겨 운전하고 다닌다. 하물며 외국 거리를
거닐다가 달리는 포니를 보면 정 주영이 발길을 우뚝 세우고 반색하는 것이
랴. 그는 외국 거리를 달리는 포니를 볼 때마다 시집 간 딸을 보는 것만큼
이나 기쁘고 반가왔다.
이스라엘 보이코트 정책으로 인한 사우디아라비아 체신청의 시비는 간단
하게 해결될 수 있었다. 현대는 자동차공장 초기에 포드 회사와의 기술제휴
를 한 적이 있었을 뿐 그 뒤로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들어 그들을
쉽게 납득시켰던 것이다.
마침내 여러 가지로 어려웠던 몇 고비를 넘기고 주베일 산업항의 공사계
약이 체결되었다. 이제부터 우선해서 해야 할 일은 선수금을 하루라도 빨리
받아 내야 하는 것이었다.
그때 사우디아라비아의 발주처에서 선수금이나 기성금을 수령해 내는 기
간은 보통 서류를 제출해 놓고 30일 내지 40일 걸리는 것이 예사였고, 특히
선수금 같은 경우에는 공사수행보증금 지급보증서를 발주처에 제출해 놓고
도 50일 정도는 기다리고 있어야만 했었다.
공사수행보증금 지급보증서를 제출한 후 김 주신은 관청이 문을 여는 오
전 7시부터 문을 닫는 오후 2시까지 선수금을 받아내기 위해 매일같이 발주
처 사무실에 가서 살았다. 발주처 관리들은 선수금 금액이 사우디 사상 최
고금액인 2억불이나 되었기 때문에 선수금 지급서류에 서명하는 것을 고의
적으로 주저하는 눈치 같았다. 그들은 사무실에서 사무실로 전달되는 모든
서류는 반드시 사환을 시켜서 들고 다니게 하고 있었는데 사환들마저도 고
액 수표권을 보고서는 일부러 딴전을 부리기가 일쑤였다.
김 주신은 가만히 계산해 보았다. 서류가 거쳐 가야 할 사무실만 해도 30
여 군데, 서명해야 할 사람이 50여 명, 그냥 가만히 앉아서 선수금을 받아
낸다는 것은 부지하세월이었다. 그는 관리들을 붙들고 애원도 하고 위협도
하고 또 어떤 관리에게는 감언이설로 구슬리기도 했다.
그는 사우디아라비아 공사 발주사상 공사 선수금 수령기간 7일이라는 최
단기록을 세우고 인류사상 최고액면인 일금 7억 리알(미화 2억불 상당)짜리
단일 현금수표를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튿날 아침, 정 주영은 외환은행장으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정회장님! 수고하셨읍니다. 오늘이 우리 나라 건국 이래 최고의 외환보
유고를 기록한 날입니다."
정 주영은 이미 리야드 지점으로부터 텔렉스 연락을 받은 뒤였기 때문에
무슨 말인지 바로 알아 들을 수 있었다.
"다 행장님께서 밀어 주신 덕택입니다."
"아이 부끄럽습니다. 입찰 보증금 때도 그렇구 이번 공사 수행 보증금 때
도........."
"아녜요, 그래도 다 뒤엔 우리 외환은행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이루어
진 거예요."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또 언제 나가시게 되나요?"
"글쎄요, 당분간은 아마 서울에서 일을 좀 봐야 할 것 같아요."
서울에 돌아온 정 주영은 그동안 본사의 중동 공사를 위한 지원체제를 정
비하는 데 바빴다.
이번 주베일 산업항 공사야말로 국제 경쟁사회 속에서의 현대그룹의 존망
을 건 초대형공사였으므로 그는 공사주관 중역 전 갑원을 정점으로 하는 각
부서장 중심의 분야별 기술직과 관리직을 총망라해서 철저한 시공계획을 수
립하도록 지시해 놓고 다음의 몇 가지 기본방침을 정해 주고 있었다.
첫째, 인력 및 자재 송출은 다른 모든 공사에 우선한다.
둘째, 물자의 적기투입을 위해서 국내외의 수송 및 구매선을 재점검한다.
세째, 철구조물 및 해상장비의 적기투입을 위해서 현대조선과의 긴밀한
협조체계를 확립한다.
네째, 계약공기는 76년 7월에 착공해서 79년 12월에 완료하도록 되어 있
으나 공사 입찰당시 발주처에 제시한 대로 유조선 정박시설(OSTT)은 79년 2
월까지, 그밖의 공사는 79년 6월까지 공기를 앞당겨 완공시킨다.
정 주영은 또한 시공계획을 세우는 과정에서 현대그룹 산하의 각 관련회
사 중역진 대부분과 앞으로 공사에 참가할 전직원을 참여케 함으로써 공사
수행에 대한 윤곽을 누구나가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한편, 모든 시방서는
영어가 서툰 사람도 잘 알아볼 수 있도록 한글로 번역해서 공사에 참가할
직원들에게 미리 배포하고 자기가 맡은 파아트만은 머리 속에 외워서 자신
을 가지고 현장에 임하게 했다.
현장 소장에는 해외토목기술담당 이사 김 용재가 임명되었다. 이미 2년
전 부산항 5부두 건설현장 소장을 역임한 경험이 있는 그도 막상 소요장비
와 인력 물량 등을 뽑아 놓고는 숫자들이 너무나 어마어마해서 도대체 공사
규모가 어느만큼이나 큰 것인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주베일 산업항 건설 선발대가 김포공항을 떠나던 날, 정 주영은 사우디아
라비아 왕자 중의 한 사람인 나와프로부터 공한 한장을 접수했다. 공한 내
용인즉, 산업항 계약이 끝나고 선금도 수령하고 했으니 에이전트료를 지불
하라는 것이었다.
(나 원.......이런 사람도 있나...........)
그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가 입찰 전에 나와프 왕자와 에이전트 계약을
맺은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는 입찰과정에서도 계약과정에서도 발주처
에 전화 한번 걸어 준 일이 없었을 뿐 아니라 입찰이나 계약과정에서 어떤
요령 한 가지 가르쳐 준 일이 없었다. 그러나 정 주영은 왕자라는 상대방의
체면도 있고 또 그가 에이전트로서 일을 도와 주었든 안 도와 주었든 그의
말대로 공사 선수금도 받고 했으니 한 돈 백만불 정도는 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와프의 주장은 그렇지 않았다. 도움을 준 게 있든 없든 현대의
편의상 일단 에이전트 계약을 맺었고 또 자기네 땅에 와서 하는 일이니만큼
의당 에이전트에 대한 커미션은 내놔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내놓으
라는 커미션은 자그마치 다른 업체들이 지불하고 있는 관례대로 공사계약금
액의 5퍼센트를 요구하고 나왔다.
공사계약금액의 5퍼센트면 4천 5백만 불이 넘는 돈이다. 그러자 정 주영
은 한푼도 줄 수 없다고 버텼다. 그는 그전부터 1원의 피해를 본 사람에게
2원을 보상하는 데는 인색하지 않았다. 그러나 1원의 피해를 본 사람이 10
원의 보상을 요구할 때는 법에 호소하는 한이 있더라도 1원밖에는 보상하지
않았다. 하기 때문에 이번과 같은 경우는 나와프의 피해라고는 한푼어치도
없기 때문에 주지 않아도 된다고 그는 생각했다.
정 주영이 한푼도 못 주겠다고 해서 그냥 체념하고 말아 버릴 나와프도
아니었다. 그는 프랑스의 국제중재소에까지 이 문제를 제소하기에 이르렀으
며, 동 중재소에서는 현대측에게 2퍼센트의 커미션을 지불하라는 중재안을
제시하고 나왔다. 이번 일 하나로써 중동 공사가 끝나는 것이 아니었기 때
문에 정 주영으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눈을 뻔히 뜨고서 1천 8백만불이라
는 돈을 그저 날치기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커미션 사건과는 관계 없이 현장의 예비공사는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선발대가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부딪친 첫번째 애로는 숙소 문제였다. 주
베일은 사우디아라비아 동부의 다란 공항으로부터 남쪽으로 약 1백 50킬로
미터나 떨어진 곳으로서 주변 사방에는 유전이 깔려 있는 조그만 한 어항이
기 때문에 숙소로 이용할 만한 건물이 하나도 없었다.
발주처에서 숙소를 지으라고 내준 곳은 땅이 아닌 수심이 얕은 바다였다.
그 바다를 메워서 숙소를 지으려면 상당한 시일이 걸려야 할 것 같아서 현
장소장 김 용재는 우선 근처 모래땅 위에 창고를 때려짓고 모두 그 안으로
들어갔다.
내년 1월부터는 본공사에 들어가야 했으므로 모든 예비공사는 금년 안에
끝내야만 했었다. 예비공사란 본공사의 효율적인 진행을 위해 어떤 공사에
서나 꼭 선행되어야 하는 작업이었다. 그런데 이번 산업항 공사의 경우는
공사규모 자체가 워낙 크기 때문에 예비공사만 해도 웬만한 공사의 본공사
만큼이나 엄청났다.
먼저 자재창고 4동을 지어야 하고 1만킬로와트짜리 화력발전소, 1천 6백
여 종에 달하는 각종 장비의 수리 유지를 위한 육상 중기 공장과 해상 중기
공장, 40만톤 규모의 시멘트 크링카 공장, 철구조물 작업에 쓸 20만톤 규모
의 산소공장, 콘크리트를 생산해 낼 배처플랜트 2기, 연간 1백만톤을 처리
할 수 있는 임시부두 시설, 그밖에도 2천 5백명을 수용할 수 있는 기능공
숙소와 식당 및 후생시설 등을 갖추는 일이 다 예비공사에 포함되어 있었
다.
그와 같은 예비공사가 진행되고 있던 9월, 정 주영은 또하나의 대형공사
인 해군기지 해상공사의 연속공사인 육상공사를 수주하는 데 성공한다. 공
사 내용은 55만평 대지 위에 해군 시설물들을 시공하는 건축공사가 주된 공
사였는데, 공사계약금액이 5억 3천 1백만불인 것을 보면 얼마나 큰 공사인
가를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이 육상공사는 건축공사였기 때문에 현대로서
는 그동안 축적해 온 건축기술이 있었으므로 시공상에 별 어려움이 없는 공
사다.
설령 작년 12월에 착공한 해상공사에서 다소의 손해를 본다 해도 이번 공
사는 그 정도의 적자쯤은 넉넉하게 커버하고도 남길 수 있는 공사였다. 그
랬는데 해상공사도 공사 전망이 흑자 국면으로 돌아서자 정 주영은 이미 지
난달에 현장 직원들의 특별수당을 소급해서 지급하도록 지시한 바가 있었
다.
해상공사는 낙찰가격 자체도 발주처의 예가보다 형편없이 쌌었지만 특히
공사 초기의 준설작업 과정에서 예상치 않은 암반이 출현하는 바람에 애를
먹게 되자 현지의 한국대사관에서는 물론 국내에서까지도 현대가 망하게 됐
다는 소문을 낳게까지 한 공사이기도 했었다.
안정이냐 모험이냐 해서 정 인영 사장을 퇴진하게까지 했던 바레인의 아
스리 조선소 건설은 일요일도 낮과 밤도 없는 돌관작업 끝에 30퍼센트 이상
의 공사수익을 내다보게 하는 밝은 국면에서 어려운 공정을 거의 끝내 가고
있는 중이었다.
만나기만 하면 한국사람의 성실성과 현대의 시공능력을 감탄해 하던 바레
인 국립은행 총재가 하루는 김 주신 현장소장을 점심에 초대했다. 바레인
국립은행은 현대가 주베일 산업항 입찰 보증금을 마련하는 데 결정적인 역
할을 담당했던 은행이다.
점심 식사가 끝난 후, 바레인 국립은행 총재는,
"우리가 은행을 새로 하나 잘 지어 보려고 합니다. 현대에서 설계해 가지
고 공사비가 얼마나 들는지 말해 줄 수 있겠읍니까?"하고 물었다.
김 주신은 그 즉석에서 간단한 스케치를 해 보이면서,
"이 정도의 빌딩이면 한 5백만불 정도 들 것 같습니다."
"좋아요. 어쨌든 현대가 우리 은행 좀 지어 주시오."해서, 지난 7월에는
바레인 국립은행 신축공사를 수의계약으로 착공하기까지 했다. 뿐만 아니라
아스리 조선소 건설이 계기가 되어 한국과 바레인 간에는 국교가 수립되고
지난 6월에는 현지에 한국대사관이 개설되기도 했다.
한편 중동의 처녀진출 작품인 이란의 반다르 압바스 동원훈련 조선소가
12월에 완공을 봄으로써 내년에 발주할 예정인 반다르 압바스의 본조선소와
같은 지역의 철강단지 및 가치시란 유전기역 가스 주입시설 공사 등에 대한
입찰의 발판을 굳혀 놓았다.
아무리 아스리 조선소 공사에서 흑자를 내고 해군기지 해상.육상공사에서
수지를 맞춘다고 해도 역시 현대그룹의 흥망의 운명은 주베일 산업항에 달
려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주베일 산업항 공사의 전망은 아직 불투명한 가운데 76년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그해 말 현대그룹의 총매출액은 1천억을 껑충 뛰어 넘은 1천 2백 61억원
을 기록했다. 바로 전년도인 75년의 총매출액이 5백 45억원이었던 것을 비
교한다면 현대그룹은 중동진출을 계기로 한 해 사이에 2배 이상의 비약적
신장을 한 셈이었다. 68년 처음으로 총 매출액 1백억원 선을 돌파한 이래 8
년 만에 일대 장거였다.
현대그룹이 미국에서 간행되는 경제 전문지 <포춘>에 의해서 처음 세계 5
백대 기업으로 랭크되기 시작한 것도 올해 주베일 산업항을 착공한 다음 달
인 지난 8월의 일이었다.
다시 밝은 새날의 아침
77년 1월, 정 주영은 정 인영과의 약속대로 1년 동안이나 비워 놓았던 해
외담당 사장 자리에 시공 및 기술담당 부사장 이 춘림을 승진 발령했다.
한편 정 인영이 물러나고 나서 그 뒤를 이어 곧 퇴사한 조 성근 국내담당
사장 자리에는 관리 및 업무담당 부사장 이 명박을 승진 발령했다.
이 춘림은 57년에 입사한 정 주영 친구의 아들로서 50년대의 최대 미군공
사였던 인천 제1도크 복구공사에 참여한 이후로는 부산의 감천 화력발전소
를 비롯, 영월.군산.인천 등 주로 화력발전소 건설공사를 지휘 감독해 옴으
로써 현대건설의 기전시공능력을 크게 향상시키는 데 기여해 왔었다.
65년 태국 파견사원 공채시험을 통해서 입사한 이 명박은 그동안 중기사
업소를 거쳐서 입사 5년 만에 공무담당 이사로 승진, 다시 1년 만에 상무
로, 3년 후에 전무, 1년 후 다시 부사장, 부사장에서 또 2년 만에 사장으로
승진.
입사한 지 12년 만에 사장 자리에 앉은 그는 냉철한 판단력과 패기에 찬
추진력을 겸비하고 있는 30대의 탁월한 전문경영인이었다.
국제담당 부사장이던 권 기태가 국내공사담당으로 전보되고 박 영욱이 관
리담당 부사장으로 승진되었으며, 김 주신이 전무로 승진되면서 중동본부장
에 임명되고 그보다 먼저 전무로 특진한 공사주관중역 전 갑원이 해외토목
담당으로 전보되는 한편 박 재면이 전무로 승진되면서 해외건축담당으로 보
직되었다.
주베일 산업항의 예비공사를 대충 마무리 지으면서 본공사를 착수한 지도
벌써 두달째 접어든다.
본공사는 호안공사와 방파제공사.안벽공사.해상 유조선 정박시설 등으로
대별할 수 있다.
호안공사란 산업항 진입로와 방파제가 서로 만나는 지점까지 약 8킬로미
터 구간에다 콘크리트 블록을 쌓아올려 가지고 파도의 분쇄력을 상쇄시켜
줌으로써 해안도로를 보호하기 위한 공사인데 이를 위해서는 스타비트
(stabit)라고 해서 파도의 힘을 분쇄하기 위한 사람 인자 모양의 이형쇄파
블록이라고 하는 시멘트 구조물 7톤 내지 5톤짜리를 자그마치 7만 2천여 개
를 제작 투입해야만 한다.
방파제공사는 진입로 끝에서 평균 수심 3미터 바다 속에다가 1천 7백여
미터 길이의 방파제를 외항 쪽으로 쌓아올려 나가는 공사다. 이를 위해서는
2톤 내지 6톤짜리 바위를 무려 몇백만 입방미터나 투입해야 하는데 사우디
아라비아의 동부지방에서 석산을 구하는 일은 우리 나라에서 탄광을 구하는
만큼이나 힘드는 일이었다.
앞서 말한 호안공사에 들어가야 할 1톤 내지 4톤짜리 돌을 합하면 최소한
이 공사에 4백만 입방미터의 돌이 들어가야 할 판인데 국내 최대규모라고
했던 부산 신항 건설에 투입된 돌이 34만 입방미터였던 것을 알고 있는 현
지 중역들은 장차 그 많은 돌을 어디 가서 깨와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적절한 석산을 확보하는 일은 이 공사를 흑자공사로 수행하기 위한 필수
적인 요건의 하나였다. 인근 공사장의 유럽회사들이 1백 50킬로미터나 떨어
진 다란 지방에서 돌을 실어 나르느라고 막대한 경비와 시간을 소모하고 있
는 것을 보면서 현지 중역들은 어디서 석산을 확보할 것인가를 걱정하고 있
었다.
그런 어느 날, 현지에서 사귄 사우디인 이느가 현장소장 김 용재를 찾아
와서 자기가 석산 있는 곳을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20킬로미터밖에
안 되는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이었다. 믿고 안 믿고 따질 겨를도 없이 그
는 직원 몇 사람과 함께 차를 몰고 이느를 따라 나섰다.
길이 따로 없는 사막이었기 때문에 차바퀴가 모래 속에 처박히는 일은 예
사였고 나중에는 샌드스톰(sand storm)을 만나는 바람에 한동안은 방향까지
잃고 헤매야만 했었다. 천신만고 끝에 이느가 가르쳐 주는 곳에 도착한 그
는 울화가 치미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이느는 멀쩡한 모래 바닥을 가리키면서 거기가 석산이라는 것이었다. 그
는 어처구니 없이 이느를 바라보았다. 이느는 모래 바닥을 파 보라고 하는
것이었다. 거기까지 왓다가 그저 돌아가기는 오느라고 고생한 것이 억울해
서 그는 직원들과 함께 모래 바닥을 파 보기로 했다.
3미터, 4미터.......그렇게 파 내려가도 역시 모래뿐이었다. 이느도 이상
하다는 듯이 삽자루를 놓고 고개만 갸웃거렸다. 그 표정이 일부러 누구를
속이려는 장난 같지는 않았다. 김 용재가 다시 삽자루를 잡고 직원들과 함
께 더 파 내려갔다. 5미터쯤 파 내려갔을 때였다.
"소장님! 삽이 안 들어갑니다!"
한 직원이 외쳤다.
"돌입니다, 돌이에요!"
또 한 직원이 환성을 올렸다. 김 용재도 잡고 있던 자기 삽등을 한번 푹
밟았다. 삽날 끝에 닿는 딱딱한 감촉이 전류처럼 전신에 찌릿하도록 느껴왔
다. 그는 미친 듯이 두 손으로 모래를 파헤쳤다. 과연 돌이었다.
돌이었다. 그는 두 손을 번쩍 들며 만세를 외쳤다. 함께 모래를 파던 직
원들도 만세를 불렀다. 이느는 보라는 듯이 함빡 미소를 머금고 그들을 바
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돌은 돌인데 문제가 있었다. 사우디 돌이었기 때문
이다. 사우디 돌은 말이 돌이지 대부분 우리 나라의 석회석처럼 푸석푸석하
는 돌이어서 과연 강도 시험에 통과될는지가 의문이었다.
강도 시험 결과는 다행히 공사에 써도 좋다는 결론이었다. 그후 이느는
80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의 석산을 또 하나 가르쳐 주었다. 그로써 산업항
공사의 석재 공급 문제는 해결할 수 있었으며 사우디인 이느는 우리에게 알
려지지 않은 현대의 숨은 공신의 한 사람으로 기록되었다.
안벽공사는 진입로 약 6킬로미터 지점에서 내항 쪽에다가 1만톤급 선박 6
척의 접안 능력을 갖춘 수심 6미터의 안벽 5백 50미터와 5만톤급 선박 6척
이 동시에 정박할 수 있는 수심 14미터 안벽 2천 3백 50미터의 공사로서 준
설작업이 끝나면 바다 바닥에 돌을 깔고 그 돌의 표면정리를 고르게 한 다
음 4.5만톤짜리 블록을 7단으로 설치하게 되는데 아주 정확한 시공을 요구
하는 까다로운 작업이다. 파도가 치는 바다 가운데서의 작업임에도 허용된
오차한계는 2밀리미터 이내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런 공사들은 규모는 컸지만 이미 국내공사인 진해항 부두건설,
삼일항 부두건설, 부산항의 5부두, 국제여객 부두, 연안여객부두 축조공사
등을 통해서 축적해 온 항만기술이 있었기 때문에 별로 큰 문제가 되지 않
았다.
문제는 해상 유조선 정박시설(OSTT:open sea tanker terminal)공사를 어
떻게 시공해 내느냐 하는 데 있었다. 그야말로 경험도 없고 지식도 없고 이
론도 충분하지 못했다.
하긴 그랬기 때문에 산업항 공사를 수주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건설업
계에서는 언제부턴지 <실수해야 낙찰시킬 수 있다>는 말이 생겨났다. 너무
잘 알고 있으면 아는 대로 값을 다 따져서 입찰하기 때문에 더러는 모른 ㄴ
부분이 있거나 설령 잘 알아도 실수를 해도 값을 싸게 써 넣어야 최저가격
으로 입찰해서 낙찰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현대가 산업항을 입찰했을 때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만약 OSTT공사 내용
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면 현대도 15억불 이상을 써 넣었을지도 모
를 일이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이번의 OSTT는 해안선으로부터 12킬로미터나 떨어진 바다 가운데
다가, 그것도 깊이가 30미터나 되는 곳에 30만톤급 유조선 4척이 동시에 정
박할 수 있는 길이 3.48킬로미터짜리 세계 최대 규모의 해상 터미널 시설을
해 내야 하는 공사이다.
설계상에 나타난 자켓이라는 철구조물 하나만 보더라도 무게는 5백 50톤
에 가로가 18미터, 세로 20미터, 높이 36미터로 나와 있으니 제작비는 무려
5억원이 들겠고, 다 만들어 놓은 그 크기는 웬만한 10층 빌딩에 맞먹을 성
싶었다.
그 자켓의 기둥 굵기는 보통 직경이 2미터요, 그 기둥을 지탱하게 하기
위해서 기둥 속으로 해서 바다 밑 땅 속으로 때려 박아야 할 파일이라는 쇠
기둥 하나가 또 그와 비슷한 굵기에다 길이는 55미터가 넘어야만 했다.
그래서 미국의 해양공사 전문업체인 브라운앤드루트사의 특수장비를 빌리
고 그쪽 기술자들을 데려다 쓰기로는 했지만 그래도 우리측에서는 최소한
그들을 감독할 수 있는 사람이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었다.
그런 어느 날, 중동에서 돌아온 전 갑원이 회장시리을 노크하고 들어와서
주베일에서 만난 김 영덕이라는 사람 이야기를 꺼냈다.
김 영덕은 일찌기 카나다로 유학을 가서 토질 및 암석역학을 전공하고 62
년에 박사가 되어 지금은 미국측의 기술요원으로서 아람코(ARAMCO:Arabian
American Oil Company)에 근무하고 있었다.
아람코란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는 석유회사로서 미국의 스탠다아드 석유
사, 캘리포니아 및 뉴저지 주가 각 10퍼센트식 30퍼센트 텍사스 주가 30퍼
센트, 소고니 모빌 석유사가 10퍼센트씩 출자해서 설립한 회사이다. 아람코
는 1933년에 사우디아라비아로부터 66년간의 석유 채굴권을 획득, 45년에
라스 다누라 항의 원유 채굴 시설과 정유공장을 완성하고 비약적으로 대량
의 석유를 생산해 내면서 50년에는 지중해 연안의 레바논 돈 항까지 원유를
수송하는 트란스 아라비아 파이프 라인 (TAP Line)을 완성함으로써 중동 최
대의 석유회사로 성장했다. 그후 63년 아람코는 채굴권을 가지고 있던 토지
의 64퍼센트를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에 반환했지만 그리고도 현재 해저 및
중립 지대를 포함해서 약 1백 70평방 마일에 달하는 토지의 채굴권을 가지
고 있으면서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제는 물론 정치.사회.문화에 이르기까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 아람코에서 김 영덕이 담당하고 있는 업무가 바로 해양구조물 기초 분
야였다. 아람코에 오기 전에도 그는 73년까지 미국에서 광산개발.유전개발.
교량.댐 등 기초 분야의 기술용역 및 시공회사인 뉴욕 미스터 더블유 앤드
제이(Newyork Mr.W and J)사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해
양 구조물 설치 공사에는 엑스퍼어트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어느 날, 아람코 친구로부터 한국의 현대라는 회사를 아느냐는 질문
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는 현대에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그런 회사
가 사우디아라비아에 나와서 어디선가 토목공사를 하고 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안다고 대답했었다.
"현대라는 회사가 주베일 산업항의 OSTT공사를 수주했다는 거요."
"그래요?"
그는 기뻤다. 한국에도 그런 해양공사를 해낼 수 있는 건설회사가 있다는
데 대해서 마음 든든하기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과연 현대라는 한국 회사가
자기도 들어서 대강 알고 있는 그 엄청난 OSTT공사를 제대로 해 낼 수 있을
까 하는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제가 혹 도와드릴 일은 없을까 하고 찾아왔읍니다만......"
주베일 현장을 찾아온 김 영덕이 때마침 라스 알가르 항만 건설 입찰을
지휘하기 위해 나와 있던 전 갑원을 만나서 얘기하고 있었다. 전 갑원은
백만 우군을 만난 듯이 기뻤다.
"고맙습니다, 김박사님! 안그래도 지금 OSTT생각만 하면 눈앞이 깜깜할
지경입니다."
"제가 그동안에 공부해 온 것이 이런 기회에 한번 조국을 위해 기여할 수
있으면 좋겠군요."
"감사합니다. 한국사람 가운데도 김박사님 같은 분이 계시다는 걸 모르구
여태껏.....김박사님! 아람코를 그만두시고 아주 우리 현대로 와 주시죠?"
"하하........그럴 수는 없어요. 가족이 다 미국에 살고 있으니까요."
"그러지 마시고 저하고 서울로 가셔서 우리 회장님을 한번 뵙시다. 아마
김박사님도 우리 회장님을 만나 뵈면 우리 현대라는 회사가 어떤 회사라는
걸 대번에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여기서 김박사님한테 백번 우리 회사
를 설명하는 것보다 우리 회장님을 직접 한번 만나 뵙는 것이 낫습니다."
"회장님을 뵙든 안 뵙든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돕는데까지 돕겠
읍니다."
"이왕 그렇게 마음을 먹으셨으면 아예 우리 회사로 오셔서 좀 도와 주십
시오. 우리 회사가 어떤 회사라는 것을 아셔야만 오실 마음이 생기실 것 아
니겠읍니까? 아람코만은 못해도 한국에선 우리 현대가 좌우간 제일 큰 회사
인 것만은 틀림 없읍니다."
"조선소도 가지고 있다지요?"
"조선소뿐 아닙니다. 자동차 공장도 있구요.......아뭏든 저하고 내일이
라도 한국으로 들어갑시다."
"저도 내일은 미국엘 좀 다녀와야 합니다."
그래서 전 갑원은 그를 동행하지 못한 채 혼자서 돌아왔던 것이다.
"당장 중동본부에 연락해서 그 김박사가 미국에서 돌아오는 즉시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한국에 들여 보내도록 하라고 해."
정 주영도 그런 위인이라면 하루속히 만나 보고 싶었다. 그리고 어떻게
설득을 해서라도 자기 사람을 만들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는 다른 욕심
보다도 사람에 대한 하나는 대단했다. 그전에도 자신에게 꼭 필요하다고 생
각되는 사람이면 그는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반드시 자기 사람을 만들
곤 해 왔었다.
"그리고 이번에 낙찰시킨 라스 알가로 항만공사는 공기가 너무 짧아서 어
떡하지?"
"돌격부대를 따로 하나 편성해야 할 겁니다, 회장님."
"돌격부대?"
사우디아라비아 주택성이 발주한 이 공사는 공사 자체에는 별 까다로운
것이 없었는데 2억 6천만불 규모의 대형 공사를 1년 안에 끝내야 한다는 계
약공기가 문제였다. 게다가 계약공기를 넘기면 하루에 3천불씩의 벌금을 내
야 한다는 조건가지 붙어 있었다.
라스 알가르 항만공사는 주베일 지역의 주택건설용 자재를 하역하기 위한
전용 항구 건설공사이다. 사우디 정부는 주베일과 젯다.얀부 등 3개 지역에
대단위 공업단지를 건설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자 갑자기 몰려들기 시작
한 기능공들을 비롯한 그들의 가족, 그들을 상대로 하는 상인들 때문에 주
택 부족 현상이 심각할 정도에 이르렀다. 이에 사우디 당국에서는 부랴부랴
공단 주변에 대규모의 주택단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주택건설용
자재를 들여올 항구 사정은 말이 아니었다. 그 지역에는 주베일 항과 담맘
항 등 두개의 항구가 있었지만 화물선뿐 아니라 유조선가지도 수시로 드나
들기 때문에 하역을 하려면 보통 한달 이상은 기다려야만 했다. 한달 동안
을 기다리자면 배는 배대로 항구는 항구대로 비싼 사용료를 꼬박 물어야 했
고 주택사업은 또 그만큼 지연되므로 그와 같은 항구 체하현상을 시급히 해
결하기 위해 발주된 공사였으므로 그 공기도 그처럼 짧았던 것이다.
별 어려움도 없는 이 공사를 외국의 다른 여러 업체들이 마다고 외면한
이유는 바로 1년이라는 그 짧은 계약공기를 지킬 자신들이 없었기 때문이었
다. 그것을 현대가 해 낸다고 따 낸 것이다.
"돌격부대 대장은 누가 좋지?"
정 주영이 전 갑원에게 물었다.
"양상무가 적임잡니다."
"양 상서?"
조그만 채구에 다부진 얼굴을 한 양 상서의 얼굴이 정 주영 머리 속에 떠
올랐다. 그는 일찌기 준설선 현대 1호를 몰고 사지의 월남 메콩강에서, 그
리고 이질적인 풍토 호주의 번버리 항에서 실력을 발휘했던 담차고 박력 있
는 일선 소장 경력 보유자였다.
"좋아! 그리고 당장 우리 회사 안의 ROTC 출신 사원들을 몽땅 라스 알가
르 현장으로 배치시키도록 해."
"예?"
"돌격부대 부대장이 있으면 소대장들이 있어야 할 것 아냐?"
"하지만 ROTC 출신들이 현장 일을 알아야죠."
"이번 일은 준설선도 그렇고 육상공사도 그렇고, 기술이 문제 아니고 팀
웍이 문제야. ROTC 출신이면 통솔력은 있을 거야."
78년 3월 25일, 계약공기가 만료되는 날 양 상서 현장 소장은 현장 감독
관들과 함께 발주처인 주택성을 찾아가서 공사가 끝났음을 알렸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자기네들이 1년 공기로 발주하기는
했지만 공기 내에 완공되리라는 것은 상상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밤, 주택성 관계자들이 현장에 나타났다. 정말로 공사가 끝났는가
하는 것을 불시에 확인하러 왔던 것이다. 이틀 후에는 사우디아라비아 왕의
동생인 주택성 장관이 직접 시찰을 나왔다. 현장을 둘러보고 난 그는,
"이것은 사람이 한 일이 아니다. 알라신께서 하신 일이다."하고 감탄해
마지 않았다.
ROTC 출신이 한국 건설업계의 각광을 받고 연일 신문에 모집 광고가 쏟아
졌던 것은 바로 그 무렵이었다.
정 주영이 ROTC 출신 사원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여러분들이 실력을 발휘할 때는 바로 이번 기회예요. 여러분은 여러분이
맡는 근로자들의 지휘관으로 군림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여러분이 맡는
근로자들의 봉사자가 되는 거예요. 근로자들의 때묻은 발을 씻겨 주어서라
도 앞으로 돌관작업이 아닌 돌격작업에 임하는 근로자들을 위로하고 독려해
서 그들이 지치지 않고 이 공사를 계약공기 내에 수행해 낼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 바로 여러분에게 부가된 임무라는 것을 명심하기 바랍니다."하는
일장 훈시를 하고 나서 그들을 현지로 떠나 보내던 날, 사우딩아라비아로부
터 고대하던 아람코의 김 영덕 박사가 내한했었다.
그날 마침 정 주영은 어제 내한한 사우디아라비아 공업전력성 장관하고의
선약이 있었기 때문에,
"우선 전전무가 오늘 김박사님을 모시고 울산으로 내려가지? 울산에 가셔
서 우리 조선소 구경이나 좀 하시고........난 오늘 저녁에 손님들 만나 보
고 내일 아침 일찍 헬리콥터편으로 내려갈 테니까."
그때 이미 현대에는 공사용 대형 헬리콥터 한 대와 업무용 소형 헬리콥터
한 대가 있었기 때문에 울산과 서울을 보통 한 시간 반 사이에 왕래하고 있
었다.
전 갑원은 김 영덕과 함께 울산으로 떠나고 정 주영은 사우디 공업전력성
장관을 만나러 그가 투숙하고 있는 조선호텔로 갔다.
그가 내한한 목적은 사우디아라비아 전역의 전력공급체계를 통합하기 위
한 계획의 일환으로서의 아시르, 바하, 지잔, 알하르지 등 4개 지역 전화
프로젝트를 추진하려는 데 있었다.
처음 사우디 공업전력성은 그 4개 지역 전화사업계획이 높은 수준을 요구
하는 기술공사라는 점을 감안해서 미국.영국.서독.일본 등의 선진국 기업들
만 입찰에 초청했었다. 그랬는데 그들 선진국 기업들이 공사 입찰을 놓고
소위 당고(담합)행위를 자행함으로써 입찰 예가의 3배가 높은 12억불을 제
시했던 것이다.
사우디 당국은 그 입찰담합 사건을 중시하고 입찰을 취소하는 한편 블랙
리스트를 작성하고 새로운 입찰규제법을 제정하는 등 광범위한 대책을 세우
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사우디 당국은 한국.인도.파키스탄.대만 등 4개 개
발도상국에 그 공사를 맡기기로 하고 선진국 기업들이 제시한 절반 값으로
정부 베이스에 의한 수의계약을 체결했었다.
따라서 현대는 그전에 일본 미쓰비시와의 조인트벤쳐(joint venture:동
업)을 위해 현지를 답사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아시르 지역의 전화사업을
수주할 수 있었다.
계약금액 1억 9천만불. 돈도 돈이었지만 고도의 기술수준이 요구되는 전
화공사를 완전 턴키베이스(turn key base)로 수주했다는 점에서 자못 의의
가 큰 것이었다. 이에 앞서 이란의 반다르 압바스 동원훈련 조선소를 턴키
베이스로 수주 시공한 일이 있었지만 기술적으로나 그 규모로나 별게 아니
었고 보면 역시 이번 전화사업이 본격적인 최초의 턴키공사라고 볼 수 있었
다.
발전소, 변전소, 수용가에 이른 송배전 공사 일체를 설계, 제작, 공급,
설치, 시험, 시운전, 유지, 보수관계 일체를 일괄적으로 맡아 수행해야 하
는 것이다.
공사는 어느 공사를 막론하고 일괄 수주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뒤에
얘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공사수익을 보다 높일 수 있고 기
술도 보다 많이 축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 주영이 지금 만나고 있는 사우디 공업전력성 장관은 그런 의미에서의
귀중한 고객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손님 대접하기를 사업 못지 않게 열심히 해 오는 편이었다. 본래 음
식을 가리지 않는 그는 손님이 좋아하는 음식이면 뭐든지 다라서 먹었고 술
도 막걸리로부터 시작해서 양주에 이르기까지 손님이 먹었고 술도 막걸리로
부터 시작해서 양주에 이르기까지 손님이 좋아하는 술이면 닥치는 대로 마
셨으며 술자리도 손님의 기호대로 대폿집 방석집 맥주홀 쌀롱 나이트클럽,
아무 데나 좋았다. 춤을 춰야 할 자리면 한국의 막춤부터 시작해서 디스코
고고 지루박 불루스, 밴드의 반주에 맞춰서 어떤 춤이라도 추었으며 노래해
야 할 자리에서는 한번 마이크를 잡았다 하면 구성진 한 오백년으로부터 시
작해서 최신 유행가요에 이르기까지 분위기에 따라서 못 하는 노래 없이 십
분도 좋고 삼십분도 좋고 신나게 불러 제꼈다.
사실상 그는 선천적으로는 음치에 가까왔다. 보통학교 시절에는 창가를
못 불러서 1등을 못 하는 때가 많았다. 그렇게 노래 소질이 없던 그가 오늘
날 그만큼 못 부르는 노래 없이 잘 부르는 데는 그 나름대로의 눈물 나는
고생을 했기 때문이다.
오래 전 얘기다. 그의 사업이 번창해지면서부터 그가 주재하는 술자리도
자연 자주 있게 마련이었다. 그런데 술자리를 주재하는 자신이 노래를 못하
고 춤을 못 추니까 그 술자리를 저절로 시사할 수밖에 없엉ㅆ다. 그래서 대
접을 하는 자신은 물론 대접을 받는 손님들도 푸짐하다는 만족감을 가질 수
가 없었다.
그때부터 그는 노래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새삼스럽게 악보를 공
부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또 음악학원엘 다니거나 음악교사를 초빙해다가
노래공부를 할 입장도 아니었다. 자동차 안에 소형 녹음기를 가지고 다녔
다. 요즘 같으면 차 안에 텔레비젼도 달고 다닐 수 있지만 그 무렵에는 카
셋트 시설도 없는 때였다.
그는 차만 타면 가수들의 노래를 수록한 녹음 테이프를 틀었다. 그리고는
노상 따라서 흥얼거렸다.
어떤 날은 차를 함께 타고 가던 중역이,
"사장님, 그만 테이프 좀 바꾸시죠."하고 정색을 했다.
"왜?"
"이제 이 노래 지겹지도 않습니까? 한 댓달째 되셨죠?"
그때가지도 그는 그 노래를 다 외우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하
나하나씩 배운 노래였다. 그후부터 그는 자신이 주재하는 술자리면 으례 자
기가 먼저 마이크를 잡고 일어나서 그 자리의 분위기를 리드하기에 인색하
지 않았다. 그러면서부터 그는 직원들이 잘 때 열심히 안 자면 야단 치던
식으로 놀 때 열심히 안 놀면 열심히 안 논다고 야단치기 시작했었다.
사우디 공업전력성 장관이 만족해서 퍼지도록 식사 대접을 한 정 주영은
11시가 넘어서 또 한군데를 들러야만 했었다. 전경련 김 용완 회장을 만나
기 위해서다. 밤 늦게 실례가 되는 줄은 알았지만 내일은 아침 일찍 울산으
로 김 영덕 박사를 설득하러 내려가야 하기 때문에 부득이한 일이었다.
다행히 김 용완 회장은 잠자리에 들기 전이었다.
"회장님, 제발 저를 한번만 봐 수십시오. 이번 한번만 봐 주시면 이담엔
회장님께서 하라는 대로 하겠읍니다."
정 주영은 무릎만 꿇지 않았지 애원하듯 통사정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지 말고 정회장이 나를 좀 봐 주시오."
김 용완도 양보할 뜻을 보이지 않았다.
"저는 지금 중동에다 잔뜩 공사를 벌여 놓고......."
"우리 전경련에 안 바쁜 사람 누구요?"
"아, 그리고 제가 뭘 알아야 할 것 아니겠읍니까? 회장님이 아시다시피
전 보통학교밖에 못 다녔읍니다."
"그런 사람이 우리 나라에서 제일 큰 현대그룹을 어떻게 끌고 가시오, 하
하........."
돌아오는 3월 말로써 임기가 끝나는 김 용완 회장이 후임 회장으로 정 주
영을 천거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기 때문엠 정 주영으로서는 김 용완 회장
을 번의시켜서 연임하게 하지 못하면 꼼짝 없이 마음에도 없는 전경련 회장
감투를 뒤집어쓸 판이었다.
그는 지금가지도 감투 쓰는 일이라면 의식적으로 피해 왔다. 그래도 무슨
협회다, 무슨 연맹 이사다 하는 감투를 여러 개 쓰고는 있었지만 그는 그런
단체의 이사회에는 별로 참석한 일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런 데 적극적으
로 참여할 시간이 없었고, 그리고 그런 데에 얼굴 내놓는 일을 별로 좋아하
지 않았다. 그는 기업인 정 주영이라는 명예 이외의 어떤 명예도 바라지 않
았다. 또 그런 것은 자신의 분수에도 넘치는 일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랬는데 자칫 잘못하면 난데없는 전경련 회장이라는 벼락감투를 써야 할
궁지에 몰릴 판이었다. 김 용완 회장의 천거로 경제계에서는 이미 그가 후
임 회장으로 결정된 것처럼 설왕설래하고 있는 중이었다.
"어쨌든 전 못 할 테니 그리 알아 주십시오."
"글쎄, 내 맘대로 하는 전경련도 아니고 그때 가서 투표해 봅시다. 투표
해 봐서 표가 안 나오면 다행이고 표가 많이 나오면 해야지 어쩌겠소. 그런
게 민주주의 아니요? 하하......."
이튿날, 정 주영은 조선소 영빈관 일실에서 김 영덕 박사를 맞이하고 있
었다. 조선소 경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도록 전망이 아주 훌륭한 해안
의 자그만 동산 위에 자리잡고 있는 이 영빈관은 외국에서 배를 주문하러
오는 선주들을 접대하기 위한 최고급 숙박시설이다.
"OSTT공사에 쓰일 철구조물은 이 조선소에서 만들어 가지고 갈 작정이
죠."하고 정 주영은 넌지시 OSTT에 관한 얘기를 꺼냈다.
"아니, 여기서 사우디가 어디라구.......자켓 하나만 해도 웬만한 빌딩만
할 텐데 그걸 어떻게 운반하시겠읍니까?"
김 영덕은 무모한 계획이라는 듯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전전무, 여기서 거기까지 6천 7백 50마일이라구 했지?"
"예, 1항차 편도 일수는 약 35일 걸립니다."
"우린 이미 바레인 조선소에 몇차례 국내 자재를 실어 날라 봤어요."
"그렇습니까?"
김 영덕은 또 한번 놀란 표정을 짓더니,
"여기서 거길 가려면 저어 남쪽으로 내려가서 말라카 해협으로 해서 인도
남해로, 그리고 호르무즈 해협을 거쳐서 걸프만으로 들어가야 할 텐데, 어
이구...........대단하십니다."하고 감탄했다.
"첫째 그래야만 공비절감이 되잖아요? 우리 포항제철에서 생산되는 철강
제도 수출되고 또 우리 손으로 여기서 직접 만드니까 아무래도 싸게 먹혀
요."
"그렇겠습니다."
"전전무, 거 브라운앤드루트에서 빌리는 6백톤짜리 해상 크레인 한 대가
하루 얼마라구 했지?"
"우리 돈으로 4천만원입니다."
"하루 4천만원짜리 장비를 빌려다 써야 하는 공사예요. 우리 기술자들이
그런 기계를 구경이나 했어야 만들든지 어떡하든지 하죠. 그래서 그 크레인
이 주베일에 도착하면 우리도 보고 당장 그만한 기계를 만들려고 합니다."
"그런 해상 장비를 여기서 만들 수 있겠읍니까?"
"만들어요. 한국 기술자들 머리도 좋고 눈썰미도 있어요. 한국 사람 가운
데 이렇게 훌륭한 공부를 하신 김박사님 같은 분도 있잖아요?"
"아이, 송구스럽습니다."
김 영덕은 민망스러운 듯이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김박사님......."
정 주영의 목소리가 한 음정 내려 앉았다. 김 영덕은 정 주영을 주시햇
다.
"나하고 같이 일 좀 합시다. 우리가 돈만 바라보고 일하는 거 아니잖아
요? 나, 죽어도 관 속에 넣어 가려고 이처럼 어렵게 돈 벌려고 하는 거 아
녜요. 우리도 한번 잘 사는 나라를 만들어 보자 이겁니다. 내가 그 많은 돈
을 벌어서 무슨 재주로 그 돈을 다 혼자 잘 먹고 잘 사는데 씁니까? 그 돈
으로 또 다른 공장 같은 걸 하나 세우면 그 공장에서 수천명이 붙어서 먹고
살 수 있잖아요? 내 얘길 좀 들으셨는지 모르지만 난 가난한 농삿군 아들이
예요. 가난은 내 스승이자 내 용기였지요. 솔직하게 말해서 난 첨엔 나만
잘 살면 내가 행복해질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렇지 않아요. 행복은 이 전
화 같은 거예요."
그는 탁자 위에 놓인 전화 수화기를 한번 들었다. 놓으며 다시 말을 이었
다.
"이 전화, 내 혼자 가지고 있으면 뭘합니까? 또 나하고 김박사님하고 단
둘이서만 가지고 있으면 뭐해요? 여러 사람이 가지고 있어야 서로 연락도
하고 재미있는 얘기도 나누고 할 수 있잖아요? 서로 다같이 잘 사는 나라를
만들자고 해서 우리 정부에서 요즘 조국근대화라는 구호를 내걸고 있잖아
요? 난 가끔 우리 사원들에게 얘기하지만 조국근대화가 정치하는 사람들에
겐 하나의 정치적 구호인지 몰라도 내게는 가난을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주
고 싶지 않은 절실한 염원이에요."
김 영덕은 시선을 떨어뜨리고 정 주영의 얘기를 경청했다.
"김 박사님, 우리 같이 보람 있는 일을 합시다. 김박사님이 지금 하시는
일이 보람이 없다는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같은 값이면 한국을 위해서
일하자는 얘기죠. 지금 김박사님이 아람코에서 어떤 대우를 받고 계신지는
모르지만 나도 같은 대우를 하겠어요. 더 나은 대우를 할 수도 있읍니다.
그러나 더 나은 대우를 하겠다는 조건으로 김박사님을 회유하고 싶진 않아
요. 김박사님은 현대건설이라는 회사가 그런 어려운 공사를 맡았다고 해서
혹 도와 줄 일은 없을까 하고 현장을 찾아왔던 분입니다. 현대라는 회사가
한국 회사가 아닌 인도나 대만 회사라면 김박사님이 찾아왔었겠읍니까?"
"그야 그렇습죠."
"그것은 곧 김박사님 몸에 흐르는 피가 한국의 피라는 증거예요. 거창하
게 구태여 애국심이란 말을 끌어 붙이지 않더라도 김박사님 마음 속에는 조
국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읍니다. 나는 지금 김박사님의 그 마음에 호소하고
있는 겁니다. 아람코에서 대우하는 것만큼 대우하겠으니 나하고 같이 일합
시다. 그래서 한국사람들 손으로도 OSTT를 문제 없이 해 내더라는 자랑을
온 세상에 한번 알립시다."
"좋습니다.!"
김 영덕은 완전히 감동하고 말았다. 만약 정 주영이 그에게 아람코보다
더 좋은 대우를 하겠다는 조건을 내세웠다면 그는 더 여러 가지 생각을 했
을는지 몰랐다. 정 주영의 간곡한 설득이 그의 마음 한구석에서 잠자던 애
국심을 불러 깨운 것이었다. 그는 정 주영과 굳은 악수를 나누었다.
정 주영은 그날로 되짚어서 다시 서울로 올라와야만 했었다. 내일은 서울
시민회관에서 개최될 중동파견 근로자 가족위안회 행사에 참석해야 하기 때
문이었다.
현대가 그때까지 중동에 파견한 근로자 수는 이미 만명 선을 훨씬 넘고
있었다. 주베일 산업항의 약 3천명을 비롯해서 해군기지 해상공사에 약 2천
명, 육상공사에 약 2천 5백명, 아스리 조선소에 약 2천명.
일류 연예인이 총동원되다시피 한 그날의 위안공연은 사랑하는 아들을 또
는 남편을 머나먼 열사의 나라 중동 땅에 떠나보낸 부모와 아내들의 하룻밤
시름을 달래 주기에 족했다. 위안회에 참석한 모든 가족들에게는 기념타우
멀과 자그만 정성이 깃든 선물도 주어졌으며 지방에 살고 있기 때문에 위안
회에 참석하지 못한 가족들에게도 기념선물을 일일이 우편으로 전해 주었
다.
위안회 행사의 효과는 정 주영이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컸다. 그 소식
이 중동에 전해지자 많은 현지 근로자들이 자기네 가족들에 대한 회사측의
고마운 배려에 고무되어 그전보다 일을 더 열심히 한다는 현장으로부터의
보고였다.
그와 같은 보고를 받는 정 주영의 마음도 흐뭇했다. 그는 적어도 석달에
한번씩은 그런 위안회 행사를 가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홍보담당 이사를 불러 다음번 위안회 행사를 더 잘하도록 구상해 보라는 지
시를 내린 날이었다.
국내담당 사장 이 명박이 헐레벌떡거리고 뛰어 올라와서 숨을 몰아쉬며
회장실을 노크하고 들어서는 것이었다.
"왜 그래? 어디서 난리가 쳐들어와?"
"난리났읍니다. 회장님!"
"난리라니?"
"주베일 산업항 근로자들이 난동을 일으켰읍니다."
"뭣이?"
그는 믿어지지 않았다. 가족 위안의 밤에 고무되어 일을 더 열심히 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지가 아직 며칠 되지 않은 때였다.
"사태는 매우 심각합니다. 외무부에서까지 야단입니다."
외무부에서까지 야단이라면 사태는 확실히 심상치 않은 모양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이 명박은 긴장을 풀지 못하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현장하고는 일체의 교신이 두절된 상탭니다. 근로자들이 사무실을 점거
하고 기물을 마구 파괴한 것 같습니다. 사건은 전혀 우발적으로 발생한 모
양입니다만 현장의 근로자가 거의 다 난동에 가담했다는 겁니다."
정 주영의 얼굴은 침통하게 굳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는 지그시 눈을 감
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명박은 상황 설명을 계속했다.
"해군기지 현장하고 전화연락을 했더니 산업항 간부 직원들은 대부분 그
쪽으로 피신해 와서 있는 모양입니다. 해군기지 현장에서는 산업항의 여파
가 그쪽 현장 근로자들에게 파급될 것을 크게 우려하고 있읍니다. 현재 해
군기지 현장 분위기도 험악하다는 겁니다."
".............."
지금까지 온갖 애로를 극복하고 쌓아올린 중동 탑이 어쩌면 하루아침에
허물어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침통하도록 굳어진 정 주영의 얼굴이 괴롭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는 원
인이 무엇일까 하는 것을 생각했다.
기질이 거친 노동판에서 인부들의 사소한 난동은 그전부터 흔히 있어 오
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기질이 거친 만큼 단순했기 때문에 잘만 다스
리면 양떼처럼 순한 일면도 지닌 사람들이었다.
정 주영은 일찌기 규모가 크지 않은 미군공사를 맡아 하던 시절에는 가끔
현장 인부들과 같이 삽자루를 잡고 땅을 파면서 막걸리 내기나 돼지 잡아
내기를 곧잘 걸곤 했었다. 가령 하루 반이 걸려야 할 일에는 오늘 중에 끝
내면 막걸리 몇 말을 사겠다든가, 사흘이 걸릴 일을 이틀 만에 끝내면 돼지
를 한 마리 잡겠다든가 하는 식의 내기를 하곤 했다. 그러면 그들은 신바람
이 나서 도저히 하루나 이틀에 못해 낼 일도 하루이틀에 거뜬히 해내곤 했
었다.
그는 자신이 직접 노동판에서 일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아픈 데, 가려운 데를 구석구석 너무나 잘 알암ㅆ다. 그래서 그는 현장 인
부들의 아픈 데는 어루만져 주기도 하고 가려운 데는 긁어 주기도 하면서
그들을 어르고 구스르기는 할망정 그들을 정면으로 대해 놓고 욕을 하거나
야단 치는 일은 드물었다.
울산 조선소를 지을 때 이야기다. 어느 날, 공사현장을 지나던 그는 작업
시간에 일손을 놓고 담배를 피우면서 노닥거리고 있는 현장 인부들을 목격
했다. 그는 자동차길에 떨어진 돌을 주워서 길밖으로 던지면서,
"이봐, 한 대 피웠으면 그만 일어나지?"라고 한 마디 했다. 그랬더니 인
부들이,
"영감은 정 주영이 사돈이야? 왜 그래?"
"찻길에 돌 주워 내다고 품삯 더 줄 줄 알어?"
"영감, 이리 와서 쉬었다. 해!"하고 큰소리를 치는 것이었다.
"품삯 더 받으려는 게 아니구 정 주영이 애쓰고 다니는 게 보기 불쌍해서
그런다네. 차 다니는 길에 이런 돌이 굴러 다니면 차가 빨리빨리 다닐 수
없잖아? 안 그래?"하면서 그는 길바닥에 떨어져 있던 돌을 마저 주워 던지
고 허리를 폈다. 그 순간 그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방금까지 노닥거리던
인부들이 어느새 전부 아뭇소리 없이 일자리에 붙어서 열을 내고 있었기 때
문이다.
인부들 가운데 누군가가 그를 정 주영으로 알아차린 사람이 있는 모양 같
았다. 그후 조선소 현장 인부들 사이에는,
"이봐, 한 대 피웠으면 그만 일어나지."하는 말이 하나의 유행어가 되었
으며 작업시간에 어물거리는 인부들의 모습이 사라졌었다.
정 주영은 지금도 역시 현장 인부들이나 말단 사원에게는 항상 관대했다.
하기 때문에 현장 인부들이나 말단 사원들은 자기 조직 안에서는 호랑이라
고 하는 별명을 듣는 정 주영 회장을 별로 그렇게 무섭다고 실감하는 사람
이 없었다. 그 대신 그룹 안에서 직위가 높으면 높은 사람일수록 그를 무서
워했다. 특히 조석으로 그를 대하는 중역들은 꼼짝 못했다. 그가 호랑이 짓
을 하기 때문도 아니며 또 그가 최고 인사권을 행사하는 그룹 총수라는 이
유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었다. 또 자주 야단을 치기 때문에 그런 것은 더
더욱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모든 일에 대한 그의 발상이 기상천외하고 기발한 것이어서
중역들하고는 근본적으로 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일을 구상하고 계
획하는 방식도 중역들이 그를 당해 내지 못했다. 심지어는 일을 추진해 나
가는 체력에서조차 젊은 중역들이 그를 이겨 낼 수 없기 때문이었다.
"회장님! 어떻게 했으면 좋겠읍니까?"
지금 산업항 현장 근로자들이 난리를 피우고 있다는 데도 아무말 없이 눈
만 감고 있는 정회장을 바라보고 있던 이 명박은 답답했다.
"뭘 어떻게?"
"수습을 해야 하지 않겠읍니까."
"수습해야지."
"만약 산업항의 난동이 다른 현장에 파급되면 큰일입니다. 회장님!"
"괜찮아! 충돌 뒤에는 생산적인 대책이 마려니되게 돼 있어. 사람 죽이는
충돌만 아니면 충돌이 전혀 무의미한 것만은 아냐."
그는 마치 남의 일을 얘기하듯 하고 있었다.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그는 3
년 전 9월에 발생했던 울산 조선소 기능공들의 난동사건을 머리 속에 떠올
리고 있었다.
세칭 현대조선 노사분규사건의 직접적인 발단은 조선소측에서 추진하려던
위임관리제에 대한 기능공들의 불만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73년 7월가지만 해도 그는 선박 건조작업을 직영제로 운영해 왔었다. 직
영제 아래서의 모든 선박 기능공들은 사원 대우의 신분보장을 받고 있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그런 조건으로 채용됐었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애초의
고용조건을 무시하고 그가 직영제를 폐지하고 위임관리제를 도입한 것은 크
게 늘어난 기능공들의 인력관리를 효율화하고 작업관리를 능률화하기 위한
조처였다.
다른 선진 조선국에서는 대개 직영제보다 계열별 도급제를 채택하고 있었
다. 하지만 우리 나라의 경우는 기술적 객관적 여건이 선진 조선국과 같은
완전도급방식을 실시하기에는 아직 미숙했다. 그래서 그는 궁극적으로는 계
열별 도급제를 지향하되 과도기적 형태로서 직영제와 계열별 도급제의 중간
형태인 위임관리제를 채택했었다.
그러나 그는 그와 같은 제도의 변화에서 오는 부작용을 최소화 하기 위해
서 조선소의 전 기능공을 일시에 하청 기능공으로 전환시키는 방법을 피하
고 단계적인 조치를 취해 나갔다. 그동안에 용접.조립 등 16개 분야의 기능
공들을 서서히 하청 기능공으로 전환시키고 마지막으로 정리공의 하청 기능
공 전환만을 남겨 놓고 있을 때였다.
따지고 볼 때 위임관리제는 사실상 기능공들 입장으로서는 바람직한 제도
가 아니었다. 위임관리제란 쉽게 말해서 회사가 어느 개인이나 작은 업자에
게 하청을 주면 그 하청업자가 다시 기능공들에게 도급을 주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능공들은 사원으로서 누리던 승급이나 승진의 기회를 잃게 되고
보너스나 퇴직금의 혜택도 받지 못하게 될 뿐 아니라 언제 일자리를 잃을지
모르는 불안가지 따르기 마련이었다.
그와 같은 불안과 불만 때문에 기능공들은 작업장에 나와서도 그전처럼
열심히 일을 안 했다. 일거리가 손에 잘 안 잡혔다. 그들은 작업시간에도
삼삼오오 모여 앉아 수군거리기가 일쑤였다.
9월 19일 오전 8시경, 출근한 건조장의 정리공들이 일은 하지 않고 옹기
종기 모여서 수군덕거리고 있었다.
"야, 뭐들 하는 거야. 왜 일들 안 하고 그렇게 모여 있어?"
작업 독려차 나온 한 간부직원이 큰소리를 쳤다.
"왜 반말이야?"
한 기능공이 반항조로 대꾸했다.
"뭣이?"
"지금 우리 심경에 일하게 됐어요?"
또 한 기능공이 퉁명스럽게 내뱉았다.
"아니......."
"도급제도 좋은 데 말입니다. 어째서 회사가 우리한테 직접 도급을 줄 것
이지 다른 사람한테 하청을 주어 가지고 그걸 다시 우리가 도급받게 하느냐
이겁니다."
"외국에서도 능률을 올리기 위해서 다 그렇게 하고 있어."
아무것도 모르면 가만 있으라는 식의 간부직원의 말투였다.
"외국식으로 부려먹으려면 대우도 외국식으로 해야 할 것 아니요?"
한 기능공이 흥분하고 나섰다. 그러자 다른 기능공들도 일제히 흥분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선박 건조장의 다른 16개 분야의 모든 기능공들이 일제히
합세하는 바람에 삽시간에 6백여 명의 기능공들이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기능공들은 위임관리제를 철폐하라, 사원과 기능공과의 차별 대우를 폐지
하라, 시간당 임금을 백퍼센트 인상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에 들어
갔다. 시위 기능공들은 급히 출동한 경찰관 1백 50여 명에 의해 두 시간 만
에 해산되었다. 그러나 그 시위에서 경찰에 항거하는 기능공들의 투석전으
로 사무실 유리창이 깨졌다.
경찰에 의해 시위를 중단한 기능공들은 13개 항목에 달하는 요구조건을
내걸고 오후 5시, 대표를 뽑아 조선소측과의 노사협의에 임했다. 그러나 기
능공들의 요구조건은 일축되고 노사협의는 결렬되고 말았다.
노사협의가 결렬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오후 4시에 출근한 야간작업조
기능공 3천여 명이 합세함으로서 조선소는 기능공들이 외쳐 대는 구호로 일
대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고 말았다.
기능공들의 소요사태를 저지하기 위한 경찰병력이 대폭 증강되었다. 경남
도내 각 경찰서는 물론 부산시경, 경북도경 관내의 경주.영천 등지의 경찰
서에서 무려 1천 2백여 명의 경찰관이 동원되었다. 경찰은 시위 기능공들의
외부진출을 막기 위해서 정문에 저지선을 구축하는 한편 19일 밤 11시부터
20일 오전 10시까지 울산.방어진 간의 버스운행도 중지시켰다.
그처럼 경찰의 경계가 삼엄해지자 같은 날 밤, 10시 20분경부터 기능공들
의 시위는 폭력화하기 시작했다. 기능공들은 다섯 평짜리 정문 경비실에 불
을 지르고 구내식당과 5층 본관 건물로 몰려가서 2백여 장의 유리창을 깨고
건물 안의 집기 비품을 닥치는 대로 막 때려 부쉇다.
다시 기능공들은 불을 끄려고 출동한 울산소방서 소방차 3대를 돌로 때려
파손시키고 코티나 승용차, 공장 찝차 2대, 영업용 택시 한 대 등을 불태웠
다. 기능공들은 정문의 경찰 저지선을 뚫고 나가 맞은 편 외국인 숙소로 몰
려가서 식당 휴게실 등의 기물과 유리창을 마구 때려 부쉈다. 그 바람에 숙
소에서 자고 있던 외국인근 50명이 자다가 놀라 깨어 팬츠 바람으로 피신하
는 촌극이 일어났는가 하면, 그 시위대열 속에 잡범들이 끼어 들어 외국인
숙소의 TV수상기.녹음기.라디오.양복 등을 싹 쓸어 가기도 했었다.
기능공들의 시위는 20일 새벽 1시쯤에 경찰에 의해 간신히 진압되었다.
그 시위로 현장에서 진압경찰을 지휘하던 이 광수 경남도경국장이 이마에
돌을 맞고 다치는 등 경찰관 30여 명과 기능공 5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
으나 다행히 그 소란 속에서도 인명 피해는 없었다.
그러자 그날 밤, 서울로부터 현장에 내려와 있던 정 주영은 기능공들의
또다른 동요를 막기 위해 직접 육성으로,
"오늘 현재까지 계약돼 있는 하청작업이 끝난 후부터는 위임관리를 하지
않겠으며, 여러분의 13개 요구사항도 수락하겠다."는 내용의 마이크 방송을
했다.
시위가 완전히 가라앉은 21일 밤 11시부터 22일 새벽 1시 30분까지 사태
수습을 위한 노사협의가 진행되었다. 회의에는 김 영주를 수석대표로 하는
사용자측 대표 9명, 하청 기능공측 대표 8명, 위임관리자측 대표 3명이 각
각 참석하고 회의는 노동청에서 파견한 이 상륜 근로기준관이 주재했다.
협의의 가장 중요한 쟁점은 역시 시위의 초점이었던 위임관리제의 존폐여
부였다. 사용자측은 작업과 인력관리상 능률적인 위임관리제를 계속 추진하
겠다는 주장이었고 노동자측은 신분보장과 처우상의 불안요소를 들어 강경
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결국 노동청의 중재로 회사측이 하청 기능공을 직영기능과 똑같은 신분보
장을 하며 똑같은 처우를 한다는 조건부 위임관리제의 존속안을 기능공측에
서 받아들였다. 그밖의 임금인상 문제는 10월부터 기량위주로 조정인상한다
는 데 합의함으로써 19일에 시작된 소요는 만 3일 만에 일단락을 지었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 사건은 노동3권을 제약한 국가
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엄연히 존재하는 상황 속에서 벌어졌다는 점에서
정계와 사회에 큰 충격을 던져주었다. 신민당은 김 수한 의원을 반장으로
하는 <현대조선 노사분규 조사반>을 구성, 현지에 파견했다.
이 광수 경남도경국장은 신민당 조사반에 대해서 분규원인을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기능공들의 위임관리제 반대에 원인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어
떤 주모자나 배후 조정자가 없는 단순한 우발적인 것이었다."
25일, 신민당 조사반은 기자회견을 통해서 이번 사건은 <노사 시간에 대
화가 단절된 본보기>라고 지적하고 이번 사건을 계기로 신민당은 노동3권이
유보된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과 외국인 투자기업에 대한 특별법을 폐
지하도록 국회에서 강력히 투쟁하겠다고 선언함으로써 정치문제로까지 비화
할 조짐을 보였다.
이보다 앞서 한국노총도 노동기본권의 장기적인 규제와 노사간의 힘의 균
형을 파괴하고 음성적인 대립을 격화시켜 현대조선 사건과 같은 사고가 발
생했다고 주장하면서 노동3권을 시급히 정상화시켜 줄 것을 호소하는 성명
을 발표했다.
사회 여론이 비등하자 노동청에서는 24일, 산하 28개 사무소로 하여금 지
역단위 노사협의 기구와 사업장별 노사협의회를 설치하고 노사분규를 예방
하도록 할 것을 시달하는 한편, 최 두열 노동청장은 이번 사건은 노사간의
대화기구가 없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분석하고 시.군 관계 기관장들로
노동관계협의회를 구성 운영하게 하며 대규모 기업 및 공업단지 안에 근로
감독관을 보강 배치해서 예방 감독을 강화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노동청은 또 이번 사건을 계기로 2백명 이상이 근무하는 사업장에는 건의
함을 설치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그런 지시가 있기 전에 정 주영은 사건
발생 직후 각 작업장마다 <고충처리 담당관>을 배치하고 기능공들의 작업상
의 고충은 물론 사사로운 고충까지도 들어서 해결하는 데 인색하지 말라는
강력한 지시를 내린 다음 앞으로 만약 어떤 작업에서든지 말썽이 야기되는
경우는 고충 처리 담당관을 엄중히 문책할 것임을 분명히 해 두었다.
그리고 25일, 그는 도하 각 신문에 현대조선소 노사분규에 대한 해명서를
통해서 이번 사태가 비록 회사측에서 노동계약을 위반했거나 노동조건을 준
수하지 않은 데서 기인한 것은 아니라 할 지라도 회사가 미리 기능공들에게
위임관리제에 대한 특징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점과 그들의 고충을 십분
이해하지 못한 불찰을 국민 앞에 정중히 사과하고 그들의 요구를 진지하게
검토해서 정당한 요구는 과감하게 받아들이겠다고 밝혔다.
아뭏든 사회적으로 큰 파문을 일으킨 사건이었다. 관련 기능공들이 구속
되고 현대의 이미지가 큰 손상을 입은 불행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 사건
이 현대만의 사건은 아니었다. 70년대 한국경제가 안고 있는 어두운 한 단
면을 표출시킨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지도 모른다.
정 주영의 말과 같이 충돌이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 사건은 정부
의 노동정책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한 계기가 되었다. 정부는 마침내 노조
결성을 허용하고 정부가 지도하는 노사간의 대화체제를 강화했으며, 현대조
선은 그후 고충처리 담당관제를 철저히 이행함으로써 기능공들의 노동의욕
을 고취시킬 수 있었고 단 한 건의 노사분규 없이 오늘에 이를 수가 있었
다. 그와 같은 뼈저린 경험을 한 정 주영이었기 때문에 지난 3월 초, 해외
토목담당 전무 전 갑원이 쿠웨이트의 슈아이바 항만건설공사를 입찰하러 떠
날 때도 입찰이 끝나는 즉시 주베일 산업항 현장과 해군기지 현장에 들러서
하루속히 노사협의기구를 설치하고 철저한 노무관리를 하도록 하라고 지시
한 바가 있었는데 미처 손 쓸 겨를도 없이, 그것도 더구나 남의 나라에서
터진 사건이었다.
"제가 저녁 비행기편에 현지로 떠날까 생각합니다."
이 명박은 사태수습을 위한 대책의 시급성을 정 주영 회장에게 간접적으
로 시사했다.
"가서 뭘 해?"
"가서 원인과 그들의 요구가 무엇인지 들어 보구........"
"거, 병신 같은 소리 좀 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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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불이 났으면 불부터 꺼야지, 원인을 알아 보고 얘길 들어 보구 불은 언
제 꺼?"
".........."
"리야드의 이 춘림 사장하고 연락하라구. 이사장 말은 흥분한 기능공들이
무슨 말을 해도 안 믿을지 모르니까 젯다에 있는 유 양수 대사를 모시고 같
이 현장으로 가라고 해. 가서 그들이 요구하는 조건은 무조건 다 들어 준다
고 약속하라구 해."
"하지만 그들의 요구조건이 뭔지........."
"불부터 꺼야 할 것 아냐? 설마 그들이 사우디에다 현대건설 팔아먹자는
요구는 안 했을 것 아냐? 그리구 나서 차근히 원인도 알아 보고 그들의 요
구도 검토해 보구 해도 안 늦어."
정 주영은 다만 이번 사태로 인명피해만 없어 주기를 바랐다. 그런다면
이번 사태가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것을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전부터 노동판 사람들이란 욱하는 기질 때문에 흥분했을 때는 이것저것
막 요구조건을 내세웠다가도 흥분이 가시고 냉정을 되찾았을 때 조근조근
따져서 알아 듣게 얘기하면 해결되지 않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하기 때문
에 공사 현장의 노동쟁의는 노임체불로 인한 것이 아닌 이상, 일반공장의
직공이나 월급장이드르이 쟁의처럼 오래 끄는 법이 없이 길어야 이삼일이면
끝이 나곤 하는 것이었다.
그는 공사현장의 인부들이야말로 건설의 원점이라고 생각해 오고 있었다.
그 원점의 인부들을 착취해 가면서까지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은 그에게
는 추호만큼도 없었다. 회사가 손해를 보지 않는 한에서는 가능한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자는 것이 평소의 그의 마음이었다. 하기는 또 가끔 가다가
별안간 하루아침에 임금을 50퍼센트 올려라 백퍼센트 올려라 하는 요구를
빼놓으면 못 들어 줄 만한 그들의 요구도 없었다.
정 주영은 산업항의 불이 해군기지로 옮겨 붙지 않기를 바라면서 초조한
마음으로 현지의 사태 추이를 관망했다.
해외생활이라는 막연한 동경심과 지나치게 부푼 꿈을 안고 고국을 떠나
온 대부분의 기능공들은 대개가 현장에 도착하는 그 시각부터 환멸을 느끼
거나 실망하기 마련이었다.
도착하자마자 그들에게는 군번 아닌 직번이 주어졌으며 내무반에 배치되
면 관물함이 아닌 사물함이 주어졌고, 그들은 바로 군기보다 세다는 민기가
난무하는 가운데 강압적이고 획일적인 통솔방법에 의한 노무관리를 받아야
만 했다.
사원과 기능공 사이에는 입는 옷에서 머리에 쓰는 헬멋부터 차별이 있었
지만 급여는 말할 것도 업고 먹는 음식 잠자리까지도 엄격한 차별이 있었으
며 사원들은 으례 나이 따위는 아무 상관 없이 기능공들을 향해 <해라> 하
는 식의 반말로 일괄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한다면 그 변명이 거짓은 아니었다. 업자들은
공사 따 내기에 바빳고 근로자는 우선 비행기부터 타고 보자는 마음으로 바
빳고 정부는 그 뒷바라지하기에 바빴으니 노무관리에까지 세심한 관심을 기
울일 겨를이 사실 없었다.
정 주영이 거느리는 현대건설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세칭
<3.13사건>으로 불리우는 현대건설 주베일 산업항의 취업 기능공 3천여 명
이 일으킨 폭동에 가까운 노사분규는 중동의 어느업자의 어느 공사현장에선
가는 반드시 꼭 한번 겪고 넘어가야 할 홍역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울산 조선소의 경우처럼 우발적인 것이었다. 노사분규의
성격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처음부터 뚜렷한 요구조건이 있어서 그 요구조건
을 관철시키기 위해 일어난 사건이 아니고 그동안에 누적되어 온 제반 근로
조건에 대한 불만이 한꺼번에 폭발한 폭력사태였다.
77년 3월 13일, 산업항 방파제 공사현장과 제1호 석산을 연결하는 도로
20킬로미터 구간에는 돌을 실어 나르는 덤프트럭의 행렬이 그칠 사이 없었
다.
10시 20분경, 산업항 중기공장을 향해 가던 문부장이 문득 발길을 세웠
다. 돌을 실러 가는 빈 덤프트럭 한 대가 슬슬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덤프트럭은 시속 50킬로미터의 안전속도를 유지하면서 달려오고 있었지만
문부장 눈에는 유난히 느린 속도로 달리는 것같이 보였다.
석산구역 내에서는 규정상 시속 50킬로미터의 안전속도를 유지하도록 되
어 있었지만 평소 운전기능공들은 운행회수를 늘리기 위해 칠팔십킬로미터
속도로 운전하는 것이 상례였고 또 회사측으로서도 그렇게 빨리 운전할 것
을 독려하고 있었다.
기본 회수 이외의 몇번을 더 뛰느냐에 따라서 능률급이 지급되기 때문에
어떤 운전기능공들은 시속 백킬로미터로 달리는 사람도 있었다. 줄곧 그런
덤프트럭만 눈에 익혀 온 문부장으로서는 시속 50킬로미터로 달려오는 그
덤프트럭이 느리다고 생각된 것은 당연했다. 그는 트럭을 세웠다.
운전사는 40세 전후의 김 영길이었다. 그에 비하면 문부장은 훨씬 젊은
편이었다.
"야 임마, 왜 그렇게 굼벵이모양 기어 가는 거야?"
문부장은 그가 태업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간주했다.
"시속 50킬로예요."
김 영길은 안전속도대로 운행하고 있었으므로 당당하게 대답했다.
"임마, 시속 50킬로로 뛰어서 하루에 몇탕 뛸 거야?"
"기본 탕수만 뛰면 될 것 아닙니까?"
"뭐이 어째? 내려와 임마!"
"거 좀 좋은 말로 하슈."
"이자식잇!"
문부장은 대뜸 김 영길의 멱살을 잡고 운전대에서 끌어 내렸다. 그리고는
그를 끌고 중기공장 사무실로 갔다. 그 사이에 오다가다가 덤프트럭을 세워
놓고 그들을 지켜보던 다른 운전기능공들도 우우 뒤따라 갔다.
문부장은 뒤따라 온 다른 운전기능공들에게 본때도 보일 겸 자기 말에 말
대꾸한 김 영길의 따귀를 몇 차례 갈겨 주었다.
따귀를 벌겋게 얻어맞은 김 영길은 마침 점심시간이어서 식당으로 갔지만
너무 서럽고 분하고 억울해서 눈물이 자꾸만 쏟아지는 바람에 식사도 못 하
고 내무반으로 가서 엎드려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서럽고 분하고 억울한 사람은 그뿐이 아니었다. 그가 따귀를 맞고 식당에
서, 숙소에서 우는 것을 쭉 지켜본 다른 덤프트럭 운전기능공 40여명도 독
같이 서럽고 분하고 억울했다. 마침내 그들이 터진 울분이 3.13사건의 도화
선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들은 중기공장 사무실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고 기물을 부쉈다. 그
광경을 보고 합세한 기능공들이 담박에 2백명으로 불어났다. 그들은 일단
투석을 멈추고 속소로 돌아가서 대책을 논의한 끝에 김 영길을 구타한 문부
장의 공개사과를 요구하기로 했다.
문부장을 찾기 위해 그들은 직원 사무실과 숙소로 몰려갔다. 그러나 문부
장은 어디로 숨어 버리고 없었다. 그들은 다시 만만한 유리창을 깨고 기물
을 부쉈다. 그러는 사이에 호응하는 기능공들이 9백명으로 불어났다. 삽시
간의 일이었다.
숫자가 불어나자 사태는 더욱 폭력화해서 마침내 그들은 자동차에 불을
지르고 눈에 띄는 직원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다가 후려 갈기고 짓밟고 하기
시작했다. 사태가 점차 악화되어 가자 산업항 현장 사원 1백 30여 명이 몽
땅 피신을 했다. 더러는 인근의 미륭건설.동아건설.대림산업.극동건설 등
다른 우리 나라 업체로 대피하고 더러는 인근의 해군기지 공사현장으로 달
아났다.
사태는 산업항 현장에 국한되지 않고 같이 시공 중이던 해군기지 공사현
장 일부와 제1호 석산에까지 번져서 그곳 기능공들도 산업항 현장 운동장으
로 집결하기 시작해서 시위에 동조하는 기능공 수는 3천명 선을 넘어 섰다.
산업항 현장 운동장에 집결한 3천여 명의 기능공들은 애국가를 제창하고
스스로 질서유지를 외치며 요구조건을 제시하기 위한 자체 수습위원회를 구
성했다. 수습위원회는 전기능공을 대표하는 각 분야별 기능공 2명이 참가하
는 20명으로 구성되었고, 그들은 그날 밤 우선 대통령각하께 보내는 메시지
와 16개 항목에 달하는 요구조건을 담은 결의문을 채택하고 그 요구조건이
관철될때까지 투쟁할 것을 다짐하는 한편, 거듭 질서를 유지하고 모든 파괴
행위를 즉각 중지할 것도 아울러 결의했다. 그러나 군중심리는 쉽사리 가라
앉을 줄 몰랐다.
때마침 전 갑원이 쿠웨이트의 슈아이바 항만공사 입찰을 마치고 현지에
도착했었다. 해군기지 공사현장에 들른 그는 산업항의 난동사건을 보고받고
이의 수습을 위해 주위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산업항 현장으로 달려갔
다. 막상 현장에 와서 보니 기능공들의 격앙된 분위기 때문에 쉽게 접근하
기가 어려웠다.
그는 찝차에 마이크와 스피커를 설치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서울을 떠
나 올 때 정 주영 회장으로부터 현장 노사협의회 설치에 관한 권한을 위임
받은 해외 토목담당 전무임을 알리고,
"여러분의 대표와 만나서 사태를 원만히 수습하고저 합니다. 대표되시는
분은 본부 사무실로 와 주십시오!"하는 방송을 되풀이하면서 군중 속으로
차를 몰고 들어갔다. 와 몰려오는 군중으로 차는 더 전진할 수 없었다. 한
기능공이 운전사를 확 낚아채 내렸다. 그 순간 전 갑원은 눈앞에 번쩍 하는
섬광을 보았다. 그리고 그가 정신을 차릴 곳은 알코바의 어느 병원이었다.
"내가 여기 언제 왔지?"
전 갑원은 머리맡에서 간호하고 있던 한 직원에게 물어 보았다.
"이제 정신이 드세요, 전무님?"
"음........"
"아 병원으로 오신 지 이틀 되셨어요."
그는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었다. 그는 산업항에서 이미 초죽음을 당했었
다. 얼마나 당했는지는 몰라도 정신을 차린 그때까지도 온몸을 옴싹달싹할
수 없었다. 다행히 현장 기능공 가운데 몇 사람이 현장 간부도 아닌 사람을
죽게 내버려 두면 어떻게 하느냐고 해서 해군기지까지 업어다 놓는 바람에
요행히 목숨을 부지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14일,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산업항의 난동사태를 중시, 비상경계령을
선포하고 해군병력과 경찰대를 현장에출동시켜서 기능공들의 농성현장과 외
부와의 일체 교통을 차단했다.
한편 서울의 정 주영 회장으로부터 급한 불부터 끄라는 긴급지시를 받은
리야드의 이 춘림은 젯다에 주재하고 있는 유 양수 대사에게 산업항의 난동
사태를 수습하는 데 협조해 줄 것을 요청, 그들이 리야드에 주둔하고 있는
미공병단이 주선한 특별기편을 이용해서 산업항 현장에 도착한 것은 14일
새벽 3시 30분이었다.
유대사는 도착 즉시 농성 중인 기능공들에게 질서를 회복하고 각자 원위
치에 복귀할 것을 종용하고, 대사관 직원과 회사 대표와 기능공 대표 20명
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수습회의를 주재했다. 수습회의에 제시한 기능공들
의 요구조건 가운데 주요한 골자는 대략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1) 이번 사태와 관련해서 회사측의 보복 등으로 인한 근로자들의 희생이
없도록 할 것.
2) 근로자에 대한 구타행위를 금할 것.
3) 현재의 관리직원 전원을 교체할 것.
4) 사원과 기능공과의 차별대우를 시정할 것.
5) 복지후생시설을 개선할 것.
6) 현행 근로계약 기간 2년을 1년으로 단축하고 연장근무를 희망하는 자
에게는 연 3회의 유급휴가를 실시할 것.
7) 국경일 휴무 및 주 휴무를 철저히 실시할 것.
8) 주 48시간 급여제를 실시하고 임금을 백퍼센트 인상할 것.
9) 상여금을 연 3백퍼센트 지급할 것.
10) 동일 직종의 임금수준을 평준화할 것.
11) 근로자의 귀책사유로 인한 차량 파손의 경우에도 변상조치하지 말
것.
12) 모든 상해는 공상으로 처리할 것.
13) 이미 체결된 근로계약서를 개선되는 조건에 맞도록 갱신해서 재체결
할 것.
요구하는 측에서는 통하지 않을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유리한 입장에서
흥정하기 위해 억지를 내세우는 때가 많았다. 이번 요구조건에도 그런 무리
가 다분히 포함되어 있었다. 그와 같은 그들의 요구조건에 대해서 서울의
정 주영은 다음과 같이 수락할 것을 긴급히 현지에 지시했다.
1) 상호간에 희생자가 없도록 한다.
2) 앞으로 절대 없도록 한다.
3) 구타한 직원에 한해서 교체한다.
4) 조속히 시정한다.
5) 최선을 다한다.
6) 계약기간은 종전과 같이 2년으로 하되 1년 이상 근속한 자에 한해서
유급휴가를 실시한다.
7) 국경일 휴무는 다른 회사와 보조를 맞추어 실시하고 주 휴무는 월 2회
를 원칙으로 실시한다.
8) 주 48시간 급여제를 실시하되 임금수준은 다른 회사 수준에 준하도록
3월 중에 상향조정해서 4월부터 실시한다.
9) 상여금은 지급할 수 없다.
10) 임금인상 시에 조정하겠다.
11) 근로자의 개인과실로 인한 파손은 변상함을 원칙으로 한다.
12) 산재보험 등 관계법규에 따라 합법적으로 처리한다.
13) 3월 중에 조정해서 4월 중에 재체결한다.
흥분한 그들을 어떻게 협상테이블로 끌어내느냐 하는 것이 어려웠지 일단
마주 앉기만 하면 그들을 설득하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유대사 주재로 열린 수습회의는 채 두 시간도 안 돼서 끝이 나고 5시 30
분부터는 기능공들이 농성을 풀고 현장으로 복귀하기 시작했으며 7시부터는
정상작업에 들어갔다.
이로서 3.13사건은 서울 본사와 사우디아라비아의 한국대사관과 주베일
현장을 연결하는 긴밀하고도 민첩한 삼각협조로 사건 발생 33시간 만에 일
단락을 지었다. 그 소요 가운데도 단 한 명의 인명피해가 없었던 것은 참으
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사건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사건이 사우디아라비아 국내
에서 발생한 사건인 만큼 그 나라의 법적 처리가 남게 되어 급기야는 한.사
우디 간의 외교문제로 등장했다.
사우디아라비아 내무성은 사건 발발 직후 매우 강경한 입장을 취했었다.
사건을 주동한 기능공들을 색출해서 자기네 국법에 따라 처벌함은 물론 이
와 관련된 직원을 문책 귀국조치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내무성 당국은 특별
조사위원회를 구성해서 엄격한 조사에 착수했다. 그러나 정부 및 현지 대사
관과 현대측의 적극적인 외교노력으로 내무성 당국의 당초 처리방침은 대폭
적으로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19일, 내무성 특별조사위원회는 마침내 다음과 같은 내용의 최종 결정을
내렸다.
"금번 소요에 신속하고 기민하게 대처한 현지 한국대사의 노고를 치하하
며 금번 소요가 한.사우디 간의 우호관계를 보다 증진시키는 계기가 될 것
으로 확신하고 양국간의 지속적인 협력체계를 공고히 하는 뜻에서 일체의
제재를 가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의 그와 같은 결정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부에서는 사
건의 재발요인을 제거하기 위해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의 양해를 구하고 지난
소요사태에서 과격하게 행동한 기능공 21명과 근로자들의 불평대상이 되었
던 직원 5명을 3월 31일자로 본국에 송환했다.
그렇게 해서 3.13사건은 완전히 매듭지어졌으며 그 사건은 중동에 진출한
국내업체 및 정부의 노무관리정책에 결정적인 전환을 가져오게 했었다. 정
부는 중동 진출 각 건설업체에 대해 노사협의회를 설치, 운영할 것을 강력
히 권고했다.
사건 직후 박대통령은 주베일 산업항의 난동사태가 인근의 다른 공사현장
으로 확대될 것을 우려하고 또 앞으로의 해외건설 수주활동에 끼칠 나쁜 영
향을 고려해서 유대사 앞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의 공한을 보낸 바도 있었
다.
"앞으로 이같은 사태가 재발하는 경우 당해업체의 해외진출을 금지할 것
은 물론 국내적으로도 강력한 제재조치를 취할 방침이니 같은 사건이 재발
하지 않도록 진출업체 및 관계기관과의 긴밀한 협조를 통해서 사전 대비책
을 강구하는 데 만전을 기하기 바란다."
한편 정부는 3월 15일 부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사건처리에 대처했으며 대책위원회는 주베일에 근로감독관 한 명을 파견 상
주시키기로 하고 건설부로 하여금 중동진출 업체 대표자 회의를 개최해서
업계 지도를 하는 등의 종합적인 사후대책을 수립케 했다.
중동진출 초기에도 새마을상담실이라는 것이 설치되어 노무관리를 전담하
고는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부서에 지나지 않았으며, 초기
의 노무관리정책은 노동자의 인간적 측면이 전혀 무시된 채 경제적.기술적
측면만 중시됐었다.
하기 때문에 노무관리의 대상이 사람이라는 점보다는 기업이 요구하는 물
자 생산수단의 하나인 단순한 노동력이라는 관점에서 노무관리를 이해하고
취급해 온 것이 사실이었다. 노무관리가 그와 같은 이해에 기초하고 있었으
니 마치 노사간의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해줄 만한 매개 시스템이 없는 것은
당연했다.
더구나 주베일 산업항 공사와 같이 매일 3천여 명이 동원되는 현장에 노
사간의 대화기구가 없었다는 것은 이미 내부적으로 사건의 불씨를 키우고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결국 3.13사건은 회사 경영에 반영되어야 할 근로자
들의 여론이 표현될 제도적 장치가 없었기 때문에 내연만을 거듭하다가 폭
력적으로 폭발한 것이라고 분석할 수 있었다.
이에 정 주영은 이미 설치된 새마을상담실을 조선소의 고충처리담당실과
같이 활성화시킬 것을 중동 각 현장에 지시하고 아울러 모든 주재 사원에게
자신이 직접 기초한 인력관리에 관한 지침을 강력하게 시달했다. 그가 기초
한 지침서 내용은 이러했다.
1) 모든 근로자에게 인격적으로 대우하고 고운 말을 쓸 것.
2) 근로자이기 이전에 나와 똑같은 기분과 감정을 가진 인간이라는 점을
유의해서 인간적인 이질성을 가지지 말 것.
3) 인간에게는 누구나 자기 발전과 자기 실현의 욕구가 있음을 인식하고
명령 일변도의 작업진행보다는 작업의욕을 자극해서 인간적 동기부여에 힘
써서 자율적으로 작업 이 진행되도록 할 것.
4) 항상 근로자와의 성실한 대화를 통해서 그들의 생활에 관심을 표하고
근로자로 하여금 마음으로부터의 감명과 복종을 유발하도록 할 것.
5) 작업과정에 있어서는 관리자 스스로가 집행당하는 심정으로 지도하고
근로자 자신도 가치 있는 일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해서 인식시킬
것.
6) 관리자 자신의 인격적 결함이 작업장의 분위기를 크게 좌우한다는 점
을 깊이 명심하고 자기 개발에 노력할 것.
7) 관리자는 권위의식을 버리고 공평한 자세에서 대화와 설득을 통해 인
내심을 가지고 책임을 다하는 모범적 행동을 보일 것.
현대그룹 총수 정 주영 회장의 인력관리에 관한 지침은 3.13사건 이후 의
기소침해 하던 현지 근로자들의 사기를 북돋우기에 충분했다. 현장 게시판
에 나붙은 지침을 본 근로자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올렸다. 어느 기능
공은 자기네를 인간적으로 취급해 주는 정회장이 고맙다고 하면서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사원과 근로자 사이에 쌓였던 높디 높은 장벽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
다. 손바닥만했던 새마을상담실 간판이 문짝만하게 커지고 평사원이던 상담
역은 과장급으로 바뀌었으며 한산하던 상담실은 날로 붐비기 시작했다.
난무하던 험악한 욕설이 줄어 들면서 사원과 근로자 사이에는 정다운 인
사가 오고갔다.
작업능률이 3.13사건 이전보다 향상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금세기 최대의 역사
그해 4월, 정 주영은 끈질긴 자신의 낙선공작에도 불구하고 투표도 없이
전체 회원이 보내는 만장일치의 박수갈채 속에 제13대 전국경제인연합회 회
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취임인사를 통해서 경제인으로서의 자신의 소신을 다음과 같이 피력
했다.
"50년대 60년대의 우리 나라 경제계는 국내 정치를 비롯한 제반 국내외의
경제외적 변화와 여건에 따라 크게 좌우되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7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대형화하고 고도화하고 국제화한 오늘날 우리 경
제계에게는 그와 같은 종래의 폐습이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적
용될 수 없다고 저는 봅니다.
오늘날 우리 경제계는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바와는 달리 자기 운명을 자
기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이니셔티브를 쥐고 있으며 또한 자기 운명을 스
스로가 결정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경제계는 스스로 잔
존에의 길을 찾아 나가야 하는 자기 도전의 시점에 와 있으며 더우기 우리
경제계의 잔존과 번영은 민족의 생존번영과도 그대로 집결되어 있다는 사실
에 우리는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되겠읍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앞으로의 한국경제는 오늘의 경제, 오늘의 기업의 난국
까지를 포함해서 우리 경제인의 손에 달렸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닙니다.
여러분! 세계 속의 한국경제가 처해 있는 오늘의 현실을 우리 다같이 냉철
하게 직시하면서 우리 경제인들 자신이 우리 나라 경제계의 이니셔티브를
쥐고 온 국민이 잘 사는 내일의 새나라 건설에 매진합시다."
이상과 같은 내용의 그의 취임사는 관주도형의 정부 경제정책을 간접적으
로 비난한 것이라고 해서 한때 말썽을 빚기도 했었다. 그러나 경쟁을 경제
활동의 바탕으로 하고 있는 자유주의 경제체제 하에서의 정부 경제정책은
당연히 민간주도형이어야 한다는 것은 그의 변함없는 신념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일찌기 조선소도 자동차공장도 정부 눈치 같은 건 볼 것 없이
자신의 소신대로 정부 정책이 마련되기도 전에 과감하게 착수해 낼 수가 있
었던 것이다.
그의 나이 예순둘. 강원도 두메 산골에서 태어나 가난을 벗하고 자라온
그가 열여섯 어린 나이에 잘 살아 보겠다는 의욕 하나만 가지고 한밤중에
빈손으로 고향집을 뛰쳐나와 인생의 밑바닥 고생이란 고생을 다 이겨내고
급기야는 개발도상국의 한국경제계를 대표하는 위인으로 대성한 것이다.
항간의 철부지 아이들의 농담이 바뀌어 가고 있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어
린 아이들이 '내가 갑부집 아들이냐'하는 뜻으로 '내가 이 공공 아들이냐'
하더니만 요즘에 와서는 '내가 정 주영이 아들이냐'하기가 일쑤였다.
애들 말이 빈말이 아니었다. 그해 현대건설은 1백 41억원을 납세함으로써
명실공히 한국 제1의 기업으로 부상했다.
우리 나라가 수출 백억불 목표를 달성한 것도 같은 해인 77년의 일이었
다.
그해 7월, 정 주영은 창사 30주년을 맞아 아산사회복지사업재단을 설립했
다. 재단 자본금 50억원, 재단 목적 병원건설사업, 사회복지단체지원사업,
연구개발지원사업, 장학금지급사업 등.
정 주영은 며칠 전, 주베일 산업항 현장 직원들에게 1년분 현지 특별수당
을 한꺼번에 지급했다. 공사 초기단계에서는 공사의 성패 여부가 매우 불투
명했었기 때문에 최대한의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서 직원들의 현지 특별수당
을 지급하는 일까지도 유보해 왔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는 5억자리 철구
조물을 해상으로 운반하는 데 따른 위험을 무릅쓰며 이에 대한 보험가입도
하지 않는 모험까지 감행했었다. 따라서 현장의 자금사정이 쪼들렸던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던 공사진행이 안정세를 나타내면서 흑자 국면으로 접어들자 비로소
자금을 풀기 시작, 그동안 유보해 오던 현지 직원들의 일년치 특별수당을
일시에 지급했던 것이다. 갑자기 많은 돈이 쏟아져 나오게 되자 산업항 현
장은 풍요를 구가했다. 직원들이 다투어 고급 카세트 라디오를 사는 바람에
사우디아라비아 안에 있는 라디오가 바닥이 날이만큼 현장은 흥청거렸다.
한편 정 주영은 국내공사에도 관심을 돌려 지난 2월에는 도급액 4백 50억
원짜리 대청 다목적 댐을 수주 착공했으며 4월에는 국내 최대규모의 위용을
자랑하게 될 한강의 성산대교를 1백 57억원에 수주 착공했다. 또한 5월에는
고리 원자력 2호기를 착공했는데, 고리 1호기 때만 해도 그 공사 참여 폭이
단순노무 공급 정도에 불과했지만 이번에는 1호기에서 쌓은 경험을 토대로
현장설계와 품질관리 및 기술관리 일부를 책임지기도 했다.
작년 현대가 착공한 국내공사는 남산 3호터널과 외환은행 신축, 포항종합
제철 3기 공사뿐이었는데, 국내공사 수주활동이 그처럼 부진했던 것은 작년
한해 동안 회사의 총력을 중동공사에 총집중시켰기 때문이다.
정 주영은 기업이 값싸고 품질 좋은 상품을 생산해서 소비자를 보호하고
기업의 부를 사회에 환원해서 사회복지를 증진하는 데 기여하는 것은 기업
이 가지는 본래의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아산재단은 그와 같은 정 주영의 기업철학을 바탕으로 하고 출범한 재단
이었다. 그것은 현대건설이 국내 제일기업으로 성장했다는 실증이었으며 또
한 현대건설이 기업 본래의 책임을 적극적으로 이행해야 할 시기에 도달했
음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의 정부시책과 사회여론과도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었다. 정
부는 73년 1월 기업공개 촉진법을 제정 공포했지만 많은 기업인들은 그 법
을 외면한 채 자기네 기업을 공개하려 하지 않았다. 이에 정부에서는 기업
의 공개념을 하루속히 정착시키고자 75년 10월, 기업공개 대상업체 105개를
선정 발표하고 이의 공개를 촉구하기에 이르렀으며 사회여론이 또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물으면서 모든 대기업은 마땅히 공개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강력하게 내세웠다.
그래도 역시 많은 기업인들은 기업을 공개함으로써 입게 되는 여러 가지
개인적 불이익 때문에 자기네 기업을 공개하지 않았다. 현대건설도 그런 기
업 가운데 하나였다. 그 가운데서도 현대건설은 성공적인 중동진출로 가장
수익력이 높은 업체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사회에 참된 도움을 주는 기업에 대한 정 주영의 견해는 일반여론
과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그는 현대건설을 공개하는 경우 과연 현대건설의
주식을 사는 사람이 누구냐 하는 것을 생각했다.
가난한 일반 국민들이 살 것은 물론 아니었다. 질량면에서 단연 우수한
현대건설 주식이 궁극에 가서는 증권 투자가들의 투자대상이 될 것은 불문
가지의 일이었다. 그렇게 되는 경우 현대건설의 주식 이윤은 소수의 가진
사람들이 차지하게 되고 기업 이윤의 사회환원이라는 대의는 허상이 될 가
능성이 컸다.
그래서 정 주영은 현대건설 주식을 공개해서 파느니보다 차라리 재단을
설립해서 사회복지사업을 추진하는 것이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불우한
계층을 실질적으로 도울 수 있는 길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아산재단의 자본금 50억원은 당시의 현대건설 총발행주식 50퍼센트에 해
당하는 것으로서 현대건설의 매년 이익금 가운데서 50퍼센트의 주식 지분에
돌아가는 배당금을 재단운영의 수입금으로 삼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아산재단을 미국의 록펠러재단이나 포드재단에 버금 가는 재단으로
성장 발전시켜 나갈 작정이었다. 그래서 그는 아산재단이 단일목적을 위한
재단이 아닌 사회복지사업 전분야에 참여하는 종합적 복지재단으로 발족시
켰던 것이다.
보다 많은 사람에게 보다 많은 혜택을 주자는 것이 곧 그의 재단설립의
목적이었다. 그는 특히 그 가운데서도 의료시혜사업과 신체장애자 및 정신
박약아와 노약자들을 위한 복지사업에 중점을 두기도 했다. 그는 무엇보다
도 건강은 만본의 근원이라고 믿고 있었다.
아산. 아산은 그가 가장 사랑하며 그리워하는 아름답고 순박하고 가난한
그의 고향 이름이며 또한 그의 아호이기도 하다. 비록 자신은 죽어서 이 세
상을 떠날지라도 길이 살아남을 재단이기에 그는 목숨보다 소중한 아산이라
는 명예를 걸고 재단 이름을 아산으로 결정한 것이다.
그는 아산재단의 설립이야말로 영리 추구에만 급급한 한국기업 일반에 대
한 국민의 불신을 해소하고 기업이윤의 사회환원이라는 이른바 기업의 사회
적 책임과 일치되는 쾌거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한 가지 걱정이 ㄴ것은 현
대건설이 언제 어떤 불황에 직면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아산재
단의 운영이 위축될 것은 물론이다. 재단 수입을 재단 지분주식의 이익배당
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경우가 올 때에는 그룹의 다른 방계회
사 수익을 투입해서라도 재단 하나만은 이 나라의 어느 재단 못지 않게 훌
륭하게 키워 나가리라고 결심하는 정 주영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아산재단을 그렇게 선의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지
난날 우리 국민들은 일부 재벌들이 소위 복지재단이라는 것을 설립한 뒤에
는 그냥 유명무실하게 간판이나 걸어 놓기가 일쑤였고 그렇잖으면 그 복지
재단을 다른 영리수단의 하나로 전락시켜 온 사례를 많이 보아 왔기 때문이
었다.
그런 사례가 있었기 때문에 정 주영은 재단설립을 발표하면서 앞으로 3년
이내에 의료 취약지역으로 알려진 정읍.보성.인제.보령.영덕 등 5개 지역에
현대식 종합병원을 건립하고 이를 통한 의료시혜사업을 펴 나갈 것이라고
못박아 밝힌 바 있었다.
그랬는데도 많은 국민들이 아산재단의 설립은 정 주영이 기업공개라는 정
부방침을 회피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라고 말했다.
정 주영은 섭섭했다. 그러나 언젠가 국민들에게 자신의 진의가 전달되는
날이 있을 것을 확신하고 그는 그해 9월에 정읍에다, 그리고 11월에는 영덕
에다 각각 초현대식 종합병원을 착공했다.
현대건설을 공개하지 않겠다는 정 주영이도 아니었다. 현대건설을 공개해
서 그 주식을 사는 사람들의 절대이익이 지속적으로 보장될 수 있을이만큼
내외 여건이 성숙되면 공개하겠다는 것이었다.
한국의 건설업체는 무엇보다도 다른 기업과는 달리 일정한 시장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항상 기복이 심하다. 오늘 일거리가 쏟아졌다가도 내일은
놀아야 할 경우가 허다하다. 하기 때문에 건설업이라는 것은 간판을 걸어
놓을 사무실 하나만 가지고 있으면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사업이다. 장비나
인력은 공사 규모에 따라서 그때 그때 동원하면 되는 것이다.
현대건설이 지금은 중동에서 여러 공사를 성공리에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수익을 올리고 있지만 중동의 건설 붐이 앞으로 10년, 20년 계속된다
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현대건설이 주식을 맘놓고 공개할 수 있는 시기를 적어도 향후 10년
으로 보고 있었다. 왜냐. 밖으로 현대건설이 각종 해외공사를 통해서 고도
의 기술을 축적한 다음 어떤 어려운 공사라도 일괄수주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안으로는 한국경제가 세계 선진국 수준에 도달해서 한국의 건설업체
들이 한국의 값싼 노임에 의지하지 않고도 국제경쟁력을 가질 수 있어야 한
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내외 여건이 그처럼 성숙되기 이전에는 현대건설이 언제 어떤 불황에 직
면할는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일이다. 하기 때문에 그는 그와 같은 불안
요소를 안고 있는 현대건설을 당장에 주식을 공개한다는 것은 오히려 사회
적으로 무책임한 짓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주식을 공개해도 자신이 있다고 생각되는 금강 스레트나 현대 자동차의
경우는 이미 삼사년 전에 공개한 정 주영이었다. 그리고 현대종합상사와 현
대자동차 써비스 주식도 자신이 있기 때문에 금년 안으로 공개할 생각이었
다.
이보다 앞선 지난 2월, 그는 자신의 불우했던 지난날과 연관해서 항상 깊
은 관심을 갖고 있던 육영사업에도 의욕적인 참여를 하기 위해 학교법인 울
산공대 이사장에 취임하는 한편 내년 신학기 개교를 목표로 하는 별도의 학
교법인 울산 중고등학교도 설립했었다.
그해 10월, 그는 74년에 설립된 한.영 경제협력위원회 한국측 위원장으로
취임한 이래 한.영 양국 경제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영국 제국훈장 코멘더장
을 수훈했다.
그는 영국에서 돌아오는 길에 바레인에 들렀다. 안정이냐 모험이냐 해서
20여 년간 한회사에서 몸 담아 일해 오던 정 주영.정 인영 형제를 갈라 세
운 아스리 수리조선소는 30퍼센트라는 막대한 공사수익을 올리고 지난달에
완공되어 지금은 포르투갈 기술진 손에 넘겨져서 조업 중에 있었다.
조선소 공사를 위해 현지 생산을 감행했던 5종 시멘트는 그 품질이 우수
해서 다른 나라 업자들도 사다 쓰더니만 나중에는 바레인 당국에서 공사가
끝나더라도 계속 생산해서 바레인의 시멘트 수요를 충당해 주도록 요청해
왔었기 때문에 요즘도 시멘트공장은 잠시도 쉴 새 없이 24시간 가동하고 있
었다.
시판되고 있는 시멘트의 상표도 호랑이표는 한국과 같은 호랑이표였지만
바레인 메이드였다. 메이드인 코리아 호랑이가 메이드인 바레인 호랑이로
둔갑한 까닭은 바레인 당국의 요청에 의한 것이기도 했었지만 현지인들의
친근감을 불러 일으키게 하자는 정 주영의 판매전략이었다.
조금 전에 다녀간 바레인 지점장의 보고에 의하면 내년도의 현지 시멘트
판매수익이 1억불짜리 공사를 2년에 걸려서 올리는 수익과 맞먹는 것이라고
했다.
그때 가설한 부두도 긴 안목으로 반영구적인 시설을 했었기 때문에 지금
은 사우디아라비아의 각 공사현장 지원을 위한 전진기지로서의 한몫을 단단
히 해내고 있었다. 부두에 대기하고 있는 대소 장비만 해도 3백여 점이 넘
었으며 오늘도 오전에 각종 장비를 실은 배 한 척이 현지 요청에 의해 주베
일로 떠났다는 지점장의 보고였다.
그리고 그 부두와 함께 2천 5백여 명에 달했던 기능공들의 숙사를 짓느라
고 자비를 들여 바다를 메운 매립지는 바레인 정부로부터 25년간 무료로 조
차받았다. 지금 정 주영이 들어 있는 영빈관도 바로 그 땅 위에 세워진 가
건물이다.
현대건설의 대소 공사현장에는 반드시 영빈관이 있었다. 손님 대접하기를
사업만큼이나 열심히 하는 정 주영이었기에 공사현장을 찾아오는 손님들을
편히 모시자는 배려에서였다. 가건물인데도 그 영빈관이 어느 정도로 멋장
이냐 하면 외국어에 불편을 겪는 국회의원들이 혹 현지에 다른 볼일로 나왔
다가도 현대 공사현장이 어디냐고 해서 일부러 찾아와 묵고 갈 정도였다.
바레인 현장 숙사에는 아직도 직원 50여 명과 기능공 4백여 명이 남아 있
었다. 작년 주베일 산업항과 거의 같은 시기에 착공한 바레인 국립은행 건
물이 준공을 한두 달 남겨 놓고 있었고 계속해서 수주 착공한 2천만불짜리
왕자궁으로부터 시작해서 17만불짜리 사냥매 사육장에 이르는 크고 작은 공
사현장이 댓군데나 됏었다.
아스리 조선소 공사의 성공적인 수행으로 현대는 중동 진출에의 발판을
확고하게 굳혔다고 해도 좋았다. 그 공사를 통해서 아스리 조선회사 출자국
인 사우디아라비아.쿠웨이트.아랍토후국연방.카타르.이라크.리비아.바레인
등 중동 각 나라에 현대건설의 존재를 강하게 부각시킴으로써 바레인 내의
후속공사는 물론 중동 각 지역에서의 대형공사를 수주할 수 있었기 때문이
다.
정 주영은 피곤을 풀기 위해 잠시 침대에 누웠지만 여러 가지 감회로 설
레여서 눈을 감아도 잠이 오지 않았다. 그는 안 오는 잠을 억지로 자려고
하지 않았다.
자고 싶다고 실컷 자는 사람은 바보요, 안 오는 잠을 억지로 자는 사람
또한 어리석다고 여기는 그였다. 하루 다섯 시간 이상을 자면 일생을 살아
가는데 그만큼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는 그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아무리 고
단해도 몸져 눕기 전에는 하루 다섯 시간 이상 자는 법이 없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다. 아무리 더운 날도 저녁나절 해거름이
되면 그곳은 바다 가운데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들선들한 바닷바람이
불어 와서 시원하곤 했다. 물론 한낮에 내려쪼이는 불볕 더위는 세상없는
장사라도 당해 내기 어렵다. 그래서 현지 기능공들도 아침 6시부터 11시까
지 일을 하고 나서 11시부터 오후 2시까지는 내무반에서 대개 낮잠을 자고
난 다음 다시 2시부터 7시까지 일을 하곤 했다.
밖으로 나온 정 주영은 이게 웬일인가 싶어서 어리둥절해 했다. 공항 쪽
으로부터 이쪽 조선소를 향해서 바다 한복판으로 곧게 뻗은 8차선 아스팔트
도로 한쪽에 수백대나 될 것 같은 승용차들이 쫙 한 줄로 늘어 서 있기 때
문이었다.
그는 아마 무슨 행사가 있거니 하고 부두 쪽을 둘러보기 위해 뒤꼍으로
발길을 옮기는데,
"회장님......."하는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뜩 소리나는 곳을 돌아
본 정 주영은 흠짓 긴장했다.
"아니, 이게 누구요?"
"안녕하셨어요, 회장님?"하고 밝게 미소하며 다가오는 여인은 2년 전, 바
레인 시내 아랍인 아파트에서 냄새를 피운다고 쫓겨났던 요리사 이 유재 아
줌마였다.
"아니 여태 안 들어갔어요?"
"지난달에 휴가를 줘서 한번 들어갔다 나왔어요, 회장님."
"그래요? 그럼 지금은 어디서 일해요?"
"그전 그 자리죠 뭐. 회장님 오셨다는 말씀을 듣고......."
"나 어젯밤에 왔어요. 그래, 가족들은 다 무고하구요?"
"네."
"아 참, 고등학교에 다니는 따님이 하나 있다구 했었죠?"
"네, 올해 대학에 갔어요."
"장하십니다."
"다 회장님 덕분이죠, 뭐. 한국에서 식모살이를 했으면 저 같은 게 어떻
게 딸을 대학에 보냈겠어요. 그리고 이번에 조그만 집도 한칸 장만했어요."
"그래요?"
그는 기뻤다. 그 옛날 자신이 현저동 산꼭대기에다 초가집 한채를 장만하
고 너무 기뻐서 밤잠을 설치던 생각을 떠올렸다. 그는 오히려 그때가 더 행
복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5전짜리 음식을 먹다가 10전짜리를 먹게
되고, 전차 삯 5전을 아끼느라고 걸어다니던 길을 타고 다니게 되고, 산꼭
대기 하꼬방 셋집에서 조금씩 나은 집으로 이사를 하던 그런 생활의 변화가
모두 그에게는 더없는 기쁨이고 즐거움이었다.
이 유재 아줌마의 얼굴은 행복해 보였다. 중동에 나와서 피땀흘려 일하는
모든 기능공들의 얼굴이 그녀의 얼굴처럼 행복해지기를 그는 간절히 소망했
다.
그 억센 남자들 틈바구니에서 더구나 현지 총각, 현지 홀아비라는 그들의
유혹을 물리치고 한결같이 절개를 지켜 오는 것도 그녀의 칭찬할 만한 점이
라고 생각하는 그는 그녀의 소중한 행복이 행여 다치는 일이 없도록 기능공
주방으로부터 그녀를 영빈관 주방으로 옮겨 주리라 마음 먹었다.
"그래, 이 중동엔 언제까지 있을 작정이요, 아줌마?"
"현대가 있는 날까진 저도 같이 있을 거예요."
"하하.......그래요?"
"국내에서야 저한테 이만한 월급을 주는 데가 있겠어요. 회장님? 설사 같
은 월급을 준다고 해도 국내에 있으면 써야죠 먹어야죠, 여기서야 돈 쓸 일
이 있어야죠."
"여기 나와 있는 기능공들이 다 아줌마처럼만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는
데......"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남자들도 서로 이쪽으로
나오려고 애쓰잖아요, 회장님?"
"그렇다면 고맙지만......"
"저 지금은 아랍말도 조금 해요, 회장님. 호호....."
"아 그래요?"
"그리구 지금은 여기 사람들도 우리 한국 사람들을 그전처럼 업신여기지
않아요. 회장님. 저기 좀 보셔요."하고 그녀는 8차선 도로로 길게 늘어선
승용차들을 가리켰다.
"참, 왜 저렇게들 나와 있는 거요?"
"이 도로가 바레인의 새 명물이에요, 회장님."
"명물이라뇨?"
"이맘때면 저렇게 여자는 여자들대로, 남자는 남자들대로 차를 타고 나와
서 저녁 바람을 쏘이면서 아베크를 즐기는 거예요, 회장님."
"여자들은 없잖아요."
"호호.....회장님, 여긴 중동이잖아요."
"?"
"여자들은 죄다 얼굴에 후두라를 쓰고 차 안에 들어 앉아서 지나 다니는
남자를 보는 거예요. 호호....."
"하하......."
이튿날 정 주영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주베일 현장에 들렀다. 장관이었다.
수백대의 30톤짜리 벤츠 덤프트럭이 종횡으로 질주하는 가운데 초대형 건설
장비들이 지상에서 해상에서 귀를 멍하게 하는 굉음을 울리면서 끊임없는
작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정 주영은 그 장엄한 현장을 바라보면서 장비작전을 지휘한 김 영주의 일
화를 머리 속에 떠올렸다.
그 많은 장비를 전부 신품으로 사들일 형편은 아니었다. 만약 현장에 소
요되는 장비 일체를 신품으로만 구매할 경우에는 공사 계약금액의 절반이
장비 값으로 달아날 판이었기 때문에 그는 부득이 김 영주로 하여금 덤프트
럭을 제외한 모든 장비는 가능한 범위 안에서 중고품을 사들이도록 지시했
었다.
김 영주는 중고 장비를 사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어디에 가면 헌 장
비를 살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언제 어디서 치열한 입찰경쟁이 있었느냐 하
는 입찰격전지만 더듬으면 대번에 알아 낼 수 있는 일이었지만 우선은 그
무렵 플로리다 주에서 끝난 디즈니랜드공사 장비가 목표였다. 거기서 장비
가 넉넉지 못하면 카나다의 몬트리올 올림픽 공사 장비를 구매할 예정이었
다.
미국에서는 대개 한 공사가 끝나고 나면 그 공사에 투입되었던 장비는 일
단 그 현장에서 싼 값에 팔아 버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미 공사계약금 속
에 포함된 장비들이기도 하지만 그 헌 장비를 쓰는 경우에 소요되는 간접비
및 작업능률 등을 따져서 새 장비를 새 현장에서 구매하는 편이 훨씬 이익
이 된다는 결론 때문이다.
그 헌 장비들을 우리는 사 와야 하는 것이다. 말만 헌 장비지 3백톤 크레
인 하나 값이 3백만불이다. 하기 때문에 서울의 청계천 가게에 나가서 중고
품 기게를 하나 둘 사는 경우하고는 비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먼저 플로리다 현장에 도착한 김 영주가 장비 하나하나를 점검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기계부속 같은 것을 뜯어 보거나 엔진 뚜껑을 열어
보는 일은 없었다. 모든 엔진은 소리로 판단했고, 모든 장비의 성능은 직접
운전대에 올라 앉아서 한두 번 작동해 봄으로써 끝났다.
그러면서도 그는 귀신같이 쓸 만한 장비만 골라 냈다. 입회한 미국인 엔
지니어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서,
"저 사람이 점장이냐 기술자냐?"하고 동행한 현대 직원들에게 묻더라는
것이었다.
(그가 만약 미국 같은 나라에 태어나서 공부를 제대로 했더라면 세계적인
과학자가 됐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며 정 주영은 유솜 공사현장
의 배처플랜트를 겉모양만 보고도 만들어 내던 그의 명석한 두뇌를 아까와
했다.
공사의 성패는 그 현장에 적절한 장비를 적기에 공급할 수 있느냐 없느냐
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스리 조선소의 성공적인 준공도, 현재의 해군기지 해상.육상공사의 순
탄한 공사 진행도 실은 김 영주가 지휘하는 장비전략이 차질 없이 수행됐기
때문이었다.
아스리 조선소 때 미국의 필라델피아에서 1천킬로와트짜리 발전기 한 대
를 사서 온 데크(on deck:갑판 위)에 선적한 것이 중도 기항지인 뉴욕에서
선원들의 실수로 배 안으로 옮겨지는 바람에 바레인에서 제때에 하역할 수
없게 됨으로써 전체 공기를 무려 한달이나 지연케 한 사실 하나만 봐도 장
비의 적기 공급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응변으로 증명한다.
자동차만은 새것을 사는 편이 훨씬 싸게 먹혔다. 중고차를 잘 못 사는 날
이면 굴리는 시간보다 세워 놓는 시간이 더 많은 것을 정 주영은 일찌기 태
국 고속도로 현장에서 실증적으로 체험한 바가 있었다.
그래서 지금 현장을 질주하는 덤프트럭들은 런던에서 구매한 30톤 60톤짜
리 벤츠였는데, 우리 나라 보통 트럭이 3,4톤자리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
덤프트럭의 크기가 상상될는지 모르지만, 아뭏든 찻바퀴 하나의 높이만도
어른의 큰 키만큼이나 높은 차들이었다.
토목공사를 영어로는 시빌 워크(civil works)라고 해서 문명을 일으키는
일이라고 했지만, 정 주영은 토목공사란 창조주가 미처 완성하지 못한 부분
들을 인간들이 마무리 짓는 작업이라고 했다.
과연 주베일 산업항 건설이야말로 20세기 문명을 집대성하는 창조작업이
었으며 신의 손이 미치지 못했던 걸프만 해안에 거대한 인공항구를 구축하
는 세기적인 대역사였다.
앞서도 얘기했듯이 이 주베일 산업항 공사는 기술적으로도 어려움이 많았
을 뿐 아니라 현대가 수주한 최초의 초대형 공사인데다가 사우디아라비아라
는 지역의 특수 사정으로 인한 애로사항도 적지 않았으며 현대 기술진에 대
한 발주처나 감독청의 불신이 또 하나의 큰 장애요인이 됐었다. 또 현대보
다 훨씬 먼저 진출해 있던 유럽 회사들의 텃세에다 전혀 시공경험이 없는
분야까지 포함된 공사였던 만큼 그 불리한 환경 속에서 공사를 수행해 오는
과정에서 겪은 고생은 이루 다 말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현대의 시공 과정을 지켜보는 동안 아랍인을 포함한 모
든 외국인들은 세 번이나 놀랐었다. 첫번째는 무모한 공사수행계획, 두번째
는 기상천외한 아이디어의 속출, 세번째는 한국인의 근면성 때문이다.
OSTT공사에 쓰일 철구조물을 울산에서 제작해 가지고 실어 오겠다고 했을
때 발주처측에서는 그런 무모한 짓이 어디 있느냐고 하면서 그들은 철구조
무리의 안전 운반이 보장될 수 없다는 이유로 반대했었다.
현대가 제시한 운반방법은 1만 5천톤급 바아지(barge:거롯배)와 5천 5백
톤급 바아지 두 대를 연결해서 그 위에 10층자리 빌딩만한 철구조물을 실은
다음 1만마력짜리 터그보우트(tugboat:예인선)로 끌어오겠다는 것이었다.
그와 같은 해상 수송방법은 여태까지 해운사상 있어 본 유례도 없었거니
와 일찌기 들어 본 일도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울산으로부터 주베일까지
오려면 파도가 심한 인도양을 거쳐야만 하는데 그 위험부담을 어떻게 커버
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현대조선에서는 바아지 항해에 필요한 컴퓨터 프로그램을 개발했
다. 항해할 때의 바아지 움직이는 모양과 그 바아지의 움직임이 철구조물에
미치는 영향 등을 분석 체크하는 것으로서 그와 같은 컴퓨터에 프로그램 또
한 해운사상 처음 시도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컴퓨터에 의한 항해, 편도 1항차 소요일수 35일간의 항해
를 19항차에 걸쳐 별다른 큰 사고 없이 수행해 낼 수 있었다. 몇 차례 위험
한 일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한번은 대만 앞바다를 지나다가 폭풍을 만
나는 바람에 바아지가 대만 해안의 백사장에 좌초해서 이를 다시 바다로 끌
어내야 하는 고역을 치르기도 했고, 또 한번은 싱가폴 해역에서 화물선과
충돌하는 사고도 있었다. 그때는 철구조물 일부가 찌그러져서 그것을 울산
으로 되돌려 끌고 가느냐 그냥 현장으로 끌고 가느냐 하고 논란을 벌이다가
결국은 현장으로 끌고 가서 수리 사용하기도 했었다.
방파제와 호안공사에 쓰일 스타비트 16만개를 만드는 일은 생각만 해도
엄청난 일이었다. 하루 2백개씩의 스타비트를 생산해 내느라고 믹서트럭이
싣고 온 콘크리트를 스타비트 거푸집에 퍼붓기 위해 1백 50톤 크레인 다섯
대가 동원되어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 광경을 돌아보던 정 주영이 현장 감독에게 물어 보았다.
"왜 저 믹서트럭으 콘크리트를 직접 이 스타비트 거푸집에 솓아 붓지 않
고 이렇게 크레인 버겟으로 퍼붓고 있나?"
"믹서트럭의 콘크리트 토출구가 이 거푸집보다 얕기 때문에 직접 타설할
수 없읍니다."
그의 말대로 믹서트럭의 콘크리트를 쏟아 내는 구멍이 스타비트 거푸집
높이보다 반 자 정도는 얕게 붙어 있었다. 정 주영은 속으로,
(어이구, 빈대만도 못한 녀석들 같으니........) 하고 혀를 끌끌 찼다.
그리고는 현장 감독에게 다시 물었다.
"앞으로 이런 스타비트를 몇 개 더 만들어야 해?"
"전부 16만개를 만들어야 하는데 아직 7천개밖에 못 만들었읍니다."
"그럼 앞으로 15만개도 이런 식으로 만들 건가?"
".........."
"믹서트럭의 콘크리트 쏟아 내는 구멍을 이 스타비트 높이로 개조하면 될
것 아냐? 그러면 이렇게 번거로운 크레인을 안 써도 되고, 시간도 인력도
다 줄일 수 있지 않겠어?"
스타비트 제조현장의 아무도 그 간단한 방법 하나를 생각해 내지 못했던
것이다. 몯 믹서트럭은 개조할 수 없는 완제품이라는 고정관념에 묶여 있었
기 때문이었다.
그날로 믹서트럭의 토출구는 현장 중기공장에서 스타비트 거푸집 높이로
개조되었으며 그 믹서트럭에 실려 온 콘크리트는 직접 거푸집에 쏟아 부을
수 있게 됨으로써 불필요한 많은 경비를 절감하고서도 하루의 생산량을 2백
개에서 3백 50개로 제고시킬 수 있었다.
OSTT공사는 현장 공사 고문으로 초빙된 김 영덕 박사 지휘 아래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 OSTT공사는 브라운앤드루트사와의 기술계약에 따라 미국
기술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었는데 계약 자체에 불리한 점이 많았었다. 일
기불순으로 인한 작업불능 시간은 물론 직원들까지도 작업수행에 부적하다
고 인정되면 그들 마음대로 하선을 명할 수 있었다.
계약조건이 그렇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장비 자체가 우리 기능공들에게는
생소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들이 주도하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게
다가 그들은 비싼 장비가 망가진다는 이유로 작업을 서두르려고 하지 않았
다. 작업을 하든지 안 하든지 그들은 해상크레인 한 대에 대한 대여료만 해
도 하루에 꼬박꼬박 8만불씩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일을 오
래 끌면 끌수록 그들로서는 이익이었다.
특히 현장을 지휘하는 김 영덕이 없으면 그들은 노골적으로 사보타지했
다. 하기 때문에 김 영덕은 파아티에 참석해야 할 때도 현장과의 연락을 위
해서 워키토키를 차고 다녀야만 했었다. 하루는 그가 아람코 창사 기념 파
아티에 참석하고 있을 때였다. OSTT현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자켓 파일을 바다 밑 땅 속으로 박는 데는 보통 한 피이트당 스팀해머로
파일 윗부분을 2백번 내지 3백번을 때려야만 들어가는 데 2백번만 때리고는
파일이 안 들어가기 때문에 더 때릴 수 없다고 해서 항타작업을 중단하고
있다는 연락이었다.
"파일이 움직이는지 안 움직이는지 한번 더 때려 봐라, 오바."
그는 파아티장에서 워키토키로 현장지휘를 했다. 이윽고 현장으로부터 다
시 연락이 왔다.
"때리면 파일이 움직이기는 움직인다, 오바."
"파일이 움직이면 들어갈 때가지 천번이고 때려라, 오바."
"장비관리규칙상 2백번 이상은 때릴 수 없다."
정말 파일이 안 들어가는 날이면 보통 일이 아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서
는 자켓설치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 영덕은 암석학을 전공했
기 때문에 현장 해저의 암석 강도가 파일을 받지 않을 만큼 딴딴하지 않다
는 것을 이미 테스트를 통해서 알고 있었다.
그는 파아티 도중에 현장으로 달려갔다. 스팀해머 조정실의 미국인 기사
는 느긋하게 쉬고 있었다. 김 영덕은 벽력같이 소리쳤다.
"왜 들어갈 때까지 때리라는데 안 때리는가?"
"장비관리상........"
"닥쳐라. 내려와라."
미국인 기사가 조정실에서 나왔다. 김 영덕은 한국 기사에게 지시했다.
"어서 올라가 때려요."
"하지만 잘못하다가......"
"잘못된 책임은 내가 질 테니 걱정 말고 시키는 대로 해요."
한국 기사가 조정실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스팀해머를 내려치기 시작했
다. 그러나 파일은 들어가지 않았다. 현장에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
이 감돌기 시작했다.
김 영덕은 파일이 꼭 박혀 들어갈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만약 파일이
미동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리 때려 박아도 안 들어간다. 하지만 파
일이 움직이는 한 파일이 박혀 들어갈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스팀해머가
아무리 내려쳐도 육안으로 보는 파일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게이지
상으로는 분명히 움직이고 있었다.
김 영덕은 계속 때릴 것을 명했다. 파일은 드디어 2백 80번 만에야 비로
소 박혀 들어가기 시작했다. 현장에는 환성이 터졌다. 물론 한국 기능공들
만이 터뜨린 환성이었다.
이튿날, 김 영덕은 브라운앤드루트측과 협상을 벌인 끝에 장비 임대료를
계약금액의 배에 가까운 5천만불을 지불하는 대신에 모든 해상장비의 운용
은 한국 기능공에게 맡기기로 한다는 데 합의를 보았다. 장비 파손에 대한
일체의 책임을 현대측에서 진다는 조건이 붙은 것은 물론이었다.
설령 장비 임대료를 더 지불한다 하더라도 해상장비 일체를 우리 기능공
들이 운용할 경우 그만큼 공기를 단축시킬 수 있다는 잇점이 있었기 때문이
다.
그동안 채 석달이 못 되었지만 눈썰미 빠른 한국 기능공들은 이미 해상장
비의 운용방법을 완전히 체득하고 있었으며, 이미 울산에서는 남의 비싼 장
비를 언제까지나 빌려 쓸 수만은 없었기 때문에 세계에 하나나 둘밖에 없다
는 1천 6백톤자리 해상크레인을 4천만불이라는 막대한 예산으로 제작 착수
하고 있는 때였다.
발주처나 감독청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경험 없는 현대건설의 정확한 시
공이었다.
설계상에는 자켓을 연결하는 빔(beam)의 길이가 20미터로 되어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켓 설치가 완벽할 경ㅇ우에나 들어맞을 길이였다. 사
실상 수심 30미터나 되는 바다에서 그것도 심한 파도에 흔들리면서 4백톤
무게의 자켓을 한계오차인 5센티미터 이내에서 꼭 20미터 간격으로 자켓을
설치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므로 외국 선진기술회사들의 경우는 대개 자
켓 설치를 끝내고 나서 그 간격에 맞는 빔을 제작해서 자켓을 연결시켜 오
곤 했었다.
그런데 울산에서 제작해 온 빔의 길이는 정직하게 설계대로 20미터였다.
그것을 본 감독관이나 외국 기술자들은 참으로 무모한 짓을 한다고 비웃었
지만 현대는 한 치의 실수 없이 89개에 이르는 자켓을 착착 연결시켜 나가
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잘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전혀 경험 없는 공
사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시행착오도 많았고 위험한 순간들도 많았었다.
실수는 파일을 박으려는 첫 항타 때부터 시작됐었다. 자켓의 리프팅 아이
(Lifting eye)위치와 각도가 맞지 않아서 샤클(shackle:고리)을 끼울 수 없
었기 때문에 대부분 잘라서 다시 용접을 해야 했으며, 유조선 접안대의 파
일을 박기 위한 항타 가이드와 파일의 높이가 맞지 않는가 하면 임시 파일
간격 유지대는 경사파일 쪽과 수직파일 쪽을 바꾸어 설치함으로써 외국인들
의 비웃음을 산 적도 있다.
착암 작업 중에 착암기의 날이 바위 속으로 뚫고 들어가다가 날을 연결하
는 축이 부러지는 사고가 났을 때였다. 그 날을 꺼내야만 했는데, 날을 꺼
내기 위해서는 직경 2미터나 되는 파일속에 잠수부들이 직접 들어가서 꺼낼
수밖에 없었다. 수심 45미터나 되는 파일 속으로 내려가서 그 날을 찾아 꺼
내 올리는 데는 자그마치 25일이라는 오랜 시일이 걸려야 했으며, 목숨을
내건 한국 잠수부들의 그 용맹성과 집요한 투지에는 모든 외국인들이 혀를
내두르며 경탄을 금치 못해 했다.
해상 작업 중에 강풍을 만나면 예인선이나 운반선의 방향을 제대로 잡을
수가 없어서 장비 작동의 실수를 범하게 되어 큰 피해를 볼 뻔한 순간들도
숱하게 있었다.
어떠한 악조건과 어떠한 난관에도 굴할 줄 모르는 한국의 중동 건설 역군
들은 오늘도 지칠 줄 모르면서 불야성을 이룬 조명등 아래 돌관작업에 여념
이 없었다.
정 주영은 김 영덕의 안내로 OSTT현장을 둘러보고 있었다.
"회장님!" 하고 김 영덕이 한 파일 앞에서 발을 멈추었다. 정 주영도 따
라서 발길을 세우고 김 영덕을 바라보았다. 그는 조금 주저하더니 결심한
듯이 입을 열었다.
"파일 테스트를 한번 해 봤으면 합니다."
"어느 정도의 시험을 해야 하죠?"
정 주영은 전에 2백톤 내지 3백톤의 육상파일 시험을 해 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김 영덕의 말을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압축(compression test)2천톤, 인장(tension test)1천톤의 시험을 해야
합니다."
"해야 한다면 해야죠."
"하지만 아직 세계적으로 그와 같은 대규모의 파일시험을 한적은 없거든
요."
"그럼......"
"이 테스트를 하려면 레이저 광선을 이용한 특수 시험기계를 따로 주문해
야 하는데 그 기계 값이 워낙 비싸서요."
"비싸도 꼭 해야 하는 시험이라면 해야죠."
"꼭 해야 한다기보다는...... 여태껏 해양공사의 세계 제1인자라고 하는
브라운앤드루트에서도 못해 본 시험이거든요. 이 기회에 우리가 그런 시험
을 해낸다면 아마 우리 현대의 해양공사에 대한 시공능력을 단번에 세계수
준으로 끌어 올려 놓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브라운앤드루트 같은 회사에선 왜 여태 그런 시험을 안 한 거
요?"
"시험비가 원체 어마어마하거든요."
"얼마나 드는데 그래요?"
"시험장비만도 5백만불 이상은 듭니다."
"5백만불?"
시험장비 값 치고는 과연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 실제 시험비가 백만불은 더 들 겁니다."
"그럼 6백만불.......시험장비를 발주하시오, 김박사."
"예?"
"우리 현대의 시공능력을 세계 수준으로 끌어 올릴 수 있다면 천만불이
들어도 해야지. 어디 공사가 앞으로 이 공사 하나로 끝나오?"
정 주영의 그와 같은 과단성 있는 기술투자 결정은 마침내 아람코
(ARAMCO)가 발주하는 사우디아라비아 서부(홍해)의 얀부항 액화 가스 터미
널 공사 지명입찰에 세계적인 미국의 브라운앤드루트사나 일본의 미쓰비시
사 등과 함께 나란히 초청되어 당당하게 선진국 회사들을 물리치고 낙찰 수
주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뒤를 이어서 아람코 발주 공사인 걸프만으 주르프
및 마아잔 등 2개 지여기의 해상 정유시설공사를 현대의 오랜 숙원인 턴키
베이스로 수주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개화한다.
바야흐로 정 주영이 이끄는 현대그룹은 촌보의 양보 없이 권모술수가 난
무하는 치열한 국제경쟁 무대에서 착실한 발전을 거듭해 나가고 있었다.
오해, 음모, 그리고 애환
78년은 현대의 황금시기라고 할 수 있었다. 워싱턴 포스트지가 발표한 바
에의하면 그해 현대건설의 대외계약고는 무려 19억불에 달했고 이는 곧 세
계 제4위를 마아크하는 실적이라고 했다. 바로 2년 전에 현대를 세계5백대
기업 가운데 하나로 끼워 주던 미국의 경제 전문지 포춘이 현대를 일약 세
계 백대 기업 가운데서 90위로 랭크한 것도 그해였다.
그리고 타임지나 뉴스위크지에 버금 가는 프랑스의 렉스프레스지가 공업
한국을 소개하는 기사에서 울산시를 현대시로 잘못 표기한 지도를 싣는 오
류를 범했던 것도 바로 그해에 있었던 일이다.
정 주영이 한국산업은행 관리업체인 인천제철주식회사와 대한알루미늄공
업주식회사를 인수한 것도 78년 그해였다.
그는 인천제철이나 대한알루미늄을 인수할 때 실은 무척 망설였었다. 그
당시 대기업들이 문어발식의 기업이라고 해서 많은 비난을 받아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현대그룹 산하의 모든 기업은 마치 농삿군이 팔 밭뙈
기를 하나하나 일궈서 옥토로 가꾸듯이 공장 말뚝부터 시작해서 굴뚝에 이
르기까지 손수 일으켜 온 기업들이지, 남이 경영해 오는 기업을 인수한 것
은 단한 업체도 없었다.
물론 인천제철이나 대한알루미늄을 인수하는 것은 일반 사회에서 비난하
는 문어발식하고는 근본적으로 그 성격을 달리하고 있었다.
인천제철의 전신은 일제시대의 조선이연금속주식회사 인천공장이다. 이를
모체로 해서 53년에 정부가 당시의 황무지에 가까운 제철공업 육성을 위해
설립한 것이 대한 중공업공사였으며, 그후 인천중공업주식회사로 상호변경
이 되었다가 66년에 일단 민영화됐었지만 무모한 확장공사와 전기로의 사고
등으로 극심한 경영난에 빠지게 되자 정부는 이를 64년에 별도 법인으로 설
립했던 인천제철주식회사에 합병시키는 한편 조업을 정상화시키기 위해 한
국산업은행으로 하여금 그 경영을 담당케 했던 것으로서 현대가 인수할 때
의 자본금은 1백 47억원이었다.
대한알루미늄도 73년에 산업은행이 프랑스의 페치니사와 공동으로 설립한
산은 관리업체였는데 역시 경영부실로 허덕이고 있는 것을 산은 주식지분
20억 7천만원에 인수한 것이었다.
인천제철이나 대한알루미늄을 인수한다는 것은 정부의 공기업 민영화 방
침에 의한 것이었으며 또한 현대로서는 조선을 비롯한 각종 국내외 공사에
상당량의 철강제와 알루미늄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고 있는 실질적인 실수요
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정 주영이 그 두 업체의 인수를 망설인 것은 날로 비약적 성
장을 거듭하는 현대에 대한 국민들의 오해를 인식한 까닭이었다. 그는 그전
부터 현대가 마치 정치권력과 무슨 결탁을 해서 성장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일부 국민들의 오해를 심히 유감스럽게 여겨 오고 있었다. 물론 그는 현대
가 정부의 아무 도움도 없이 독불장군으로 성장해 온 것이라고는 주장하지
않는다.
한국경제의 성장발달 과정에서 한몫을 담당해 오는 현대가 누리는 혜택은
전체 국민이 누리는 혜택과 같은 기업 전반에 미친 일반적인 혜택일 뿐 어
떤 특혜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정 주영은 그해 사우디아라비아 주택성에서 발주한 공공주택단지공사 수
주활동에서도 당시 건설부의 오해로 얼마나 곤경에 처했었는지 모른다.
사우디아라비아 주택성은 그해 5월에 알코바.리야드.젯다 등 사우디 3대
도시에 대한 대단위 아파트단지 건설공사를 턴키베이스로 동시에 발주했었
다. 입찰에는 프랑스.서독 등의 선진국을 비롯한 세계 유수의 20여 건설업
체들이 참가해서 치열한 경쟁을 벌였었다.
그 결과 알코바 단지와 젯다 단지를 현대가 수주하고 나머지 리야드 단지
도 다른 한국업자 손에 떨어졌던 것이다. 그런데 국내에서는 주택단지 공사
의 수주활동에 대해서 현대가 덤핑 응찰을 했다고 해서 많은 물의를 빚어낸
바 있었다.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아시르 전화사업 입찰 당시에 있었던 선진국 업자
들의 담합사건을 계기로 가능한 자국의 모든 공사를 저렴한 가격으로 성실
하게 시공해 줄 개발도상국 업자들을 물색하기에 이르렀으며 그런 과정에서
그들 눈에는 한국업체들이 가장 적격한 업체로 비쳤던 것이다.
그래서 그해 초, 사우디 주택성 장관이 한국을 직접 방문해서 한국 건설
부 장관에게 업자 추천을 의뢰한 바가 있었고 이에 현대가 여러 시공자 중
의 하나로 추천됐었다.
그때 정주영은 사우디 왕자이자 주택성 장관인 그를 정성껏 접대한 적이
있었다. 현대의 시공능력을 보다 잘 알리기 위해서 그는 주택성 장관으로
하여금 현대가 작년에 준공해 놓은 압구정동 아파트단지까지도 시찰케 하는
열성을 보였다.
그것은 평소에도 손님 접대하기를 사업만큼이나 열심히 해오는 그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주택성 장관은 정 주영의 그와 같은 융숭한 접대를 진심
으로 고맙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이미 본국에서 정 주영에 대한 얘기를
들은 바가 있었기 때문에 매우 호의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정 주영이 사우디 왕자 중의 한 사람인 나와프의 초청을 받고 갔을 때의
일이었다. 그 무렵 나와프는 현대건설의 에이전트로 있었다. 그를 에이전트
로 소개한 사람한 사우디 한국대사관으 공사로 재직하는 동안에 열렬한 모
슬렘교도가 되어 버린 이 영진이었다. 사우디에 진출해 있던 진흥기업이나
삼익주택도 나와프를 에이전트로 하고 있을 때였다.
그 이 영진 공사가 앞으로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에서 많은 대형 공사를 발
주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현대건설과 나와프를 연결시켜 합작회사인
사우디.코리아 건설회사 (Saudi.Korea Construction Co.)설립을 추진한 일
이 있었는데, 한때 그 계획이 자못 구체화되어 간 적이 있었다.
장차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발주되는 모든 공사를 그 합작회사에서 독점계
약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회사는 주주로는 나와프 왕자를 비롯한 그의 형
제들로서 각료직에 있는 주택성 장관, 민병대 장관, 야마니 석유상 등 사우
디 정부 요직에 있는 사람들이 대거 참여하게 될 것으로 알려졌다.
정 주영은 그 합작회사 이름으로 공사를 따 낸 다음 현대건설이 하청을
받는 식으로 공사에 참여하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그와 같은 제의를 수락하
고 이를 추진했다. 그래서 정 주영은 정 문도 현대조선 사장과 권 기태 부
사장을 대동하고 사우디 왕실에 들어가서 직접 왕을 알현하기도 했고 사우
디 신문들은 연일 대서특필로 합작회사 설립에 관한 기사를 보도하곤 했다.
그뿐 아니라 나와프 왕자의 심복인 살라우딘이 정 주영과 정 문도.권 기
태 세 사람을 야마니 석유상 집으로 초대하고 오찬을 같이하는 자리에서 야
마니는 자신도 사우디.코리아 콘스트럭션 컴퍼니의 멤버가 될 것이라는 것
을 시사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사우디.코리아 합작회사 설립계획은 그 무렵에 신임 사우디 대사
로 부임한 유 양수의 반대로 와해되고 말았다. 유 양수 대사가 무엇 때문에
반대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정 주영으로서는 확실히 손아귀에 들어온
대어를 놓친 결과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정 주영이 나와프에게 억울한 에이전트료 1천 8백여 만불을 지불하지 않
으면 안 되었던 것은 그 뒤의 일이다.
주택성 장관이 정 주영에 대해서 들은 얘기 가운데는 그런 얘기도 있었겠
지만 그가 호감을 갖고 있다는 얘기는 정작 그런 얘기가 아니다.
그때 정 주영은 왕자의 정식 초청을 받고 갔었기 때문에 공항에서부터 왕
실 귀빈으로 영접되었다.
정 주영은 나와프 왕자가 보낸 왕자 전용차를 타고 곧장 왕실을 향해 떠
났다. 중도에서 그를 태운 승용차가 아무 예고도 없이 멎는 것이었다. 운전
사가 부대 조각 같은 것을 꺼내 들고 차 밖으로 나갔다. 뒤에 따라오던 차
들도 모두 멎고 왕실에서 영접 나온 아랍 사람들은 다 내렸다.
(손님을 태우고 가다가 이게 무슨 짓들이지..............) 하고 시계를
보니 오후 3시였다. 그제서야 정 주영도 퍼뜩 알아 차리고 차에서 내렸다.
싸라(메카 궁 요배)시간이었다.
차에서 내린 모든 아랍인들이 일제ㅗ히 메카 궁전 쪽을 향해 엎드려 절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정 주영은 전에도 그들의 싸라 시간을 보아 온 적
이 있었지만 절을 하는 법식이 퍽이나 까다로왔다.
정 주영의 승용차를 몰고 오던 운전사도 아스팔트 위에 깐 부대 조각 위
에서 열심히 절을 하고 있었다. 정 주영도 얼른 그 운전사 옆에서 같이 넙
죽이 절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는 부대 조각이 없었기 때문에 숨막히게
단내가 확확 치솟는 아스팔트 바닥위에서 절하는 수밖에 없었다.
뒤차 안에서 그 정회장을 내다보는 정 문도와 권 기태는 답답하고 안타깝
기도 하고 한편 부끄럽고 창피한 생각까지 들기도 했다. 정회장은 아랍 사
람들의 절이 다 끝났는데도 한두 번 더 절을 하는 것이었다. 절을 끝내고
돌아서는 그의 얼굴은 아스팔트에서 묻은 검은 칠로 얼룩이 지고 그 얼룩진
얼굴에 땀이 줄줄 흘러내려서 한 마디로 엉망이었다.
"어이 회장님두, 뭣하러 저렇게....."
앞차를 다라서 떠나는 뒤차 안의 정 문도가 민망한 듯이 한 마디 중얼거
렸다.
"다 무슨 생각이 있으셔서 그러신 모양인데......"
20년 가까이 같이 지내 오는 권 기태는 정회장이 하는 일이면 어떤 일이
고 예사로 보아 넘기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회장이 왜 그 뜨거운 아스팔
트 바닥에서 그들과 같이 메카 궁을 향해 절을 했는지는 아무리 생각해 봐
도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이삼일 지난 후에야 비로소 그 이유를 알고 또 한
번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왕실로 들어가서 국왕을 배알할 때였다. 파이잘 왕은 정 주영에게 어떤
종교를 믿느냐고 물었다.
"특별히 따로 믿는 종교는 없읍니다. 그러나 저는 이 우주만물을 창조한
신의 존재를 확신하며 그 신은 전지전능하고 무한 자비한 신이므로 그 신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저의 신앙입니다." 하고 그는 대답했다. 파이
잘 왕은 만면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그 신이 바로 알라신이요." 하는 것이었다.
"그 신을 가리켜 우리 나라 사람들은 하느님이라고 하고 중국 사람들은
천주님이라고도 하고 서양에서는 여호와라고도 하는 모양인데, 그 창조신을
호칭할 만한 합당한 낱말을 저는 아직 이 땅 위에서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
에 무어라고 부를 수 없지만 감히 인간들이 그 신의 이름을 지어 부르는 것
은 마치 노아의 홍수 이후 시날 평지에 살던 인간들이 바벨탑을 쌓아 올리
고 하늘 꼭대기에 오르려던 하나의 교만과 같은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
다."
그 말에 경탄한 파이잘 왕은 정 주영에게 다시 물었다.
"그럼 당신은 공항에서 왕실로 오는 도중에 우리 아랍 사람들과 같이 싸
라 시간에 메카 궁을 향해서 절을 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이
요?"
"신의 이름이 다르고 믿는 방법이 다를 뿐, 아랍 사람들이 믿는 알라신이
나 내가 믿는 신은 같은 신입니다. 남들이 그 신을 경배하는 시간에 한자리
에 있으면서 보고만 있다는 것은 신에 대한 인간의 취할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실이 그랬다. 그는 교회에 가면 신도들과 함께 경건한 마음으로 같이
예배를 드렸고 절에 가면 부처 앞에 겸허한 마음으로 공양을 드려 왔었다.
파이잘 국왕은 고개만 크게 끄덕이고는 더이상 아무 말도 묻지 않았다.
이틀 전에 정 주영이 탔던 승용차 운전사는 싸라 시간에 그가 아스팔트 위
에 엎드려서 절하던 얘기를 나와프 왕자에게 전했고 왕자는 그 사실을 주변
사람들에게 얘기함으로써 이미 왕실 안에는 한국에서 온 정 주영은 남의 종
교를 존귀하게 여길 줄 아는 덕성 높은 위인으로 평판이 자자한 때였다.
싸라 시간에 그가 아랍 사람들과 같이 큰절 몇차례 한 영향은 참으로 컸
다. 사우디.코리아 합작회사 설립계획이 그토록 급속하게 진전되면서 야마
니 석유상 같은 왕자의 관심을 모으고 현지 신문들이 그처럼 연일 대서특필
로 보도한 것도 사실은 정 주영이 싸라 시간에 큰절 몇번 한 영향과 전혀
무관한 일은 아니었다.
정 주영이 과연 그런 일들을 이미 예상하고 그렇게 큰절을 했었는지는 아
무도 모른다. 그러나 권 기태만은 예상치 않았던 아스팔트 길에서 일어난
순간적인 일이기는 했지만 정회장은 능히 자신의 행동이 미칠 앞으로의 영
향을 십분 계산하고 한 싸라였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주택성 장관이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바로 정 주영의 그와 같은 일
련의 에피소우드로 인한 그의 덕성 때문이었다.
알코바 및 젯다 공공주택단지 입찰 때 현대는 두 지역으로 나뉘어진 알코
바의 제2지역과 젯다 지역에만 입찰하기로 하고 그에 따른 준비를 하기 시
작했었다.
턴키;베이스로 발주된 공사였기 때문에 발주처에서는 설계안을 제출해서
1차 심사를 받도록 요구했다. 발주처 요구대로 설계안을 제출했더니 다른
것은 다 좋은데 외관에서 좀더 아랍적인 분위기를 살리도록 수정해 달라는
것이었다. 현대는 발주처 요구대로 다시 설계를 변경해서 입찰에 응했다.
입찰 후, 세계은행(World Bank)에서 파견한 기술진과 네고를 하게 되었
다. 발주처측에서 그 일을 세계은행에 의뢰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세계은
행에서 파견한 기술자들은 현대가 제출한 설계안에 대해서 반대로 아랍적인
외관은 낡은 구식이니만큼 패션어블한 스타일로 바꾸는 것이 좋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랬다저랬다 해서 속은 상했지만 별수 없이 설계를 또다시 변경하는 도
리밖에 없었다. 일정이 짧았기 때문에 서울에 있는 설계팀의 협조를 요청할
형편이 아니어서, 입찰팀을 지휘하기 위해 현장에 나가 있던 박 재면 건축
담당 부사장이 직접 현지 직원들과 함께 설계변경을 강행했다.
새 설계안을 다시 제출하고 난 어느 날, 주택성 장관이 박 재면을 집으로
부르는 것이었다. 주택성 장관 집에는 차관을 비롯한 주택성 관계자들이 모
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 현대건설 입찰가격은 너무 비쌉니다."
주택성 장관이 박 재면에게 던지는 첫마디였다. 박 재면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주택성 장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알코바 제1지역에 입찰한 한국의 Y회사 응찰가격은 제2지역의 현대 응찰
가격보다 훨씬 낮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1지역 2지역으로 나누어서 입찰은
했다 하지만 같은 알코바 지역에서 현대에게 다른 업자보다 비싼 값으로 공
사를 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옳은 말이었다. 박 재면으로서는 유구무언이었다.
(그래서 알코바 제1지역 입찰을 포기시키기 위해서 나를 부른거구나.) 하
고 박 재면이 바싹 긴장해 있는데 주택성 장관은 공사금액을 깎을 수 없느
냐고 물어 왔다.
(살았구나.)
박 재면은 얼마나 깎았으면 좋겠냐고 반문했다.
"10퍼센트 싸게 하시오."
그는 10퍼센트나 깍으라는 것은 좀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꼭 10퍼센트를
깎아야 한다면 굳이 못 깎을 것도 없었지만 그렇게 깎아 주고 나면 별로 남
는 것이 없을 것 같아서 망설이고 있는데,
"가부를 이 자리에서 대답하시오." 하고 주택성 장관은 즉석 결단을 요구
했다. 사우디아라비아 관례상 왕자가 요구하는 답변에 대해서 나중에 생각
해 보고 대답하겠다는 식의 태도는 용납되지 않았다. 주택성 장관은 파이잘
왕의 동생인 왕자 신분인 것이다.
박 재면은 중대한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될 궁지에 몰린 셈이었다. 몇
군데 설계변경을 해서 시공한다면 깎아 주는 10퍼센트의 일부는 커버될 것
같기도 했다. 그 순간 그의 귓전에는 해외공사 수주활동과 관련해서 항상
역설해 오는 정 주영 회장의 말이 생생하게 울려 왔다.
"이제 현대건설 하면 세계 제일의 인적.물적 동원능력을 가진 회사라고
자타가 공인하잖아? 그 배경에는 현대중공업이라는 막강한 해외건설 지원기
지가 있다 이런 얘기야. 또 반대로 우리가 해외에서 발전소와 석유화학시설
같은 세계 최첨단 선진 기술 사양 아래서 일을 해나가고 있는데 그런 기술
이 그대로 현대 중공업의 기술로 축적돼서 우리 중공업 향상에 크게 기여하
고 있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현대의 해외 건설은 조금 밑져도 밑지는 만
큼 기술을 버는 셈이니까 다른 회사의 해외건설과는 달라요. 이를테면 현대
의 해외건설은 우리 중공업에 자생능력을 부여해 주는 중요한 활로라구. 물
론 많은 이익을 낼 수 있는 공사를 수주한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 없는 일
이지만 회사가 손해 안 보는 공사라면 안 남아도 좋으니 과감하게 수주하도
록 해요. 현대에게는 이익이 없더라도 결과적으로는 국가에 이익이 되는 일
이다 이거야. 많은 우리 기능공들이 나가서 벌어들이게 되고 또 공사에 소
요되는 우리 자재를 내다 팔게 될 거 아냐?"
"좋습니다! 그 대신 우리 쪽에서도 한 가지 부탁이 있읍니다." 하는 박
재면의 얼굴에는 자신이 넘치고 있었다.
"무슨 부탁이요?"
"공사금액을 10퍼센트 싸게 하는 대신 공사 선수금을 20퍼센트로 올려서
지급해 주시기 바랍니다."
주택성 장관은 박 재면의 요구를 쾌히 받아들였다. 그리고는 그 단가에
준해서 알코바의 제1지역은 물론 리야드의 공공주택단지까지도 몽땅 현대가
맡으라는 것이었다.
박 재면은 그제서야 주택성 장관이 현대건설에게 호의를 베풀려는 뜻이
숨어 있음을 간파할 수 있었다. 그는 처음 주택성 장관으로부터 그와 같은
제의를 받았을 때는 어안이 벙벙하도록 기뻤었다.
그러나 알코바 제1지역과 리야드 지역은 입찰에도 참여하지 않은 공사인
데다가 이미 다른 한국업체들이 응찰한 공사였기 때문에 그럴 수는 없는 일
이었다. 우리 나라에는 도급허가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은 지역에서는 입찰도 할 수 없게끔 되어 있었다.
박 재면은 그런 이유 때문에 알코바의 제1지역이나 리야드 지역의 주택공
사는 맡을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하고 주택성 장관의 호의를 정중히 거절했
다. 그러자 주택성 장관은 그렇다면 알코바 제1지역과 젯다지역 공사도 현
대에게 줄 수 없다는 식으로 나왔다.
리야드로부터 박 재면의 그와 같은 연락은 정 주영을 적이 당황하게 했
다. 다른 업자가 이미 입찰한 알코바 제1지역과 리야드 지역은 그만두더라
도 현대가 처음부터 뜸들여 온 알코바 제2지역과 젯다지역 공사는 놓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다른 업자들이 손을 댄 지역까지 맡지 않을 경우에
는 그 공사조차도 주지 않겠다는 으름장이고 보면 난처한 일이 아닐 수 없
었다.
정 주영으로서는 당초에 입찰한 두 지역 공사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도 부
득이 건설부 당국에 다른 두 지역의 공사에 대해서도 도급허가를 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자 업계에는 현대건설이 사우디에서 발주한 주택공사를 다른 한국업
체 것까지 뺏으려고 덤핑입찰을 했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었으며 건설부는
건설부대로 알코바 제1지역과 리야드지역의 새 도급허가는 고사하고 오히려
현대가 다른 한국업자들보다 더 낮은 가격으로 입찰한 것을 힐책하고 나섰
다. 건설부 당국자는 적정가격으로 응찰한 것을 힐책하고 나섰다. 건설부
당국자는 적정가격으로 응찰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익을 손상시켰다는 것이
었다. 그러나 건설부 당국자의 그와 같은 주장은 정 주영의 해외공사 수주
정신에 비추어 거리가 좀 있었다. 정 주영은 오히려 회사에는 득이 안 되더
라도 국가적으로 이익이 되는 공사라면 싼 값에라도 수주하라는 입장이었
다. 더구나 이번 주택공사는 턴키공사인 만큼 고도의 설계능력과 견적능력
을 발휘해서 시방이 요구하는 최저선을 충족시키는 범위 안에서 공사 단가
를 낮출 수도 있을 뿐 아니라 알코바나 젯다 두 현장은 가까운 항만을 끼고
있었기 때문에 자재수송상의 잇점을 안고 있는 점 등을 감안해서 상당한 공
사수익을 내다보고 응찰한 가격이었다. 반대로 얘기해서 현대보다 높은 가
격으로 응찰한 업자들은 입찰과정에서 턴키공사 성격을 잘 이해하지 못했거
나 턴키공사가 갖는 특성이나 유리한 조건을 충분히 반영시키지 못했다는
결론이다.
현대건설은 월남전의 특수경기가 사라지던 지난 70년, 캄란 소도시 건설
에 투입했던 대부분의 장비와 기술인력을 국내로 철수하지 않고 괌도에 재
투입하여 현지에서 주택건설 판매사업을 전개해 오는 동안 높은 수준의 주
택 시공능력을 쌓아 왔으며 그 시공능력을 바탕으로 이미 국내에서의 압구
정동 대단위 아파트 공사를 통해서 풍부한 시공 경험을 갖고 있는 때였다.
그런데 정 주영은 안팎으로 곤란한 처지에 빠졌다. 사우디 발주처측에서
는 계속해서 주택공사 전부를 맡으라는 독촉이 빗발치듯했고 건설부 당국자
는 거꾸로 이 명박 사장을 불러 들여서 현대가 당초에 응찰한 두 지역 공사
를 일정액 이하로는 계약하지 않겠다는 요지의 각서를 쓰도록 강요하는 한
편 사우디 주택성에 대해서는 다른 업체를 적극 추천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사우디 주택성의 입장은 이미 확고한 것이었기 때문에 우리 건설부의 얘기
는 씨가 먹혀 들어가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정 주영 스스로 중재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사우디 주
택성에 대해서는 알코바 제1지역공사까지는 같은 알코바 지역 내의 공사니
만큼 현대가 이미 제시한 가격으로 시공하게 해주는 대신 알코바 제1지역에
입찰했던 다른 업자에게는 리야드 지역 공사를 맡겨 줄 것을 요청하고 한국
건설부에 대해서는 사우디 주택성이 그와 같은 현대의 요청을 들어 주는 경
우 알코바 제1지역 공사의 도급허가를 해주도록 제의했다.
그것은 정 주영의 자구책이었다. 사태는 결국 그런 방법으로 해결되기는
했지만 현대가 덤핑입찰을 했다고 아우성치던 Y업체는 현대보다도 더 낮은
가격으로 리야드 지역 주택공사를 계약함으로써 현대건설의 덤핑입찰이라는
국내의 오해와 잡음을 일소시킬 수가 있었다.
그런 곡절 끝에 현대가 계약한 알코바.젯다 두 지역의 주택단지 공사금액
은 금세기 최대 역사로 일컬어지던 주베일 산업항 공사비를 훨씬 상회하는
11억 4천 5백만불의 거금이었다.
같은 해 현대는 사우디아라비아 담수청에서 발주한 알코바 담수화 플랜트
공사도 수주했다. 서독의 크라프트워크유니온사가 리드하는 컨소시움에서
토목 분야와 담수시설 분야를 담당한 현대의 공사금액은 전체 공사계약금 8
억 5천만불 중에서 절반이 넘는 4억 3천만불이나 됐었다.
담수화 플랜트라 함은 문자 그대로 바닷물을 민물로 만드는 물공장이다.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중동 각국에는 수자원의 절대량이 부족한 데 반해
서 석유자원은 풍부하므로 그들 나라에서는 에너지원을 이용, 바닷물을 담
수화함으로써 부족한 용수량을 충당해 오고 있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우는 정부기구 안에 담수청이라는 독립기구를 설치해 놓고 담수관리를 점
당하고 있는데, 그 나라에서 갖는 담수청의 비중은 우리 나라의 동력자원부
와 맞먹는다.
이미 사우디아라비아의 대규모 토목공사에서, 대규모 건축공사에서 또다
시 대규모 플랜트 공사에서까지, 20세기 건설업계의 복병 현대건설이 난데
없이 출현함으로 하루아침에 경쟁력을 잃고 설 땅을 잃게 된 선진국 건설업
자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상 현대건설이 발을 내딛기 이전까지의 중동은 서방 선진국 건설업자
들의 황금탕지였다. 그것은 현대가 선진국 업자들의 4분의 1가격으로 낙찰
시킨 해군기지 해상공사에서도 흑자공사를 수행해 낼 수 있었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명백하게 드러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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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되자 서방 선진국 건설업자들은 현대건설에 대해서 무모한 짓이니
덤핑입찰이니 하는 비방과 불평을 늘어놓으면서도 고도의 정밀 기술을 요하
는 플랜트 공사만은 감히 현대가 도전할 수 없는 자기네 아성이라고 믿어
왔던 것이다. 일부 서방업자들 가운데는 현대가 알코바 담수화 플랜트까지
도 수주했다는 사실에 자극되어 현대를 중동으로부터 몰아 내야 한다는 폭
언을 서슴없이 하고 다녔다.
현대는 같은 해에 다른 중동국가인 아랍토후국에서는 아부다비 하수처리
설비와 듀바이 발전소 공사를 수주했고 쿠웨이트에서는 작년 슈아이바 항만
공사에 이어 두번째로 쿠웨이트 시내의 하수처리 설비공사를 수주했는가 하
면 한국업체의 진출이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졌던 친소 중립노선을 지
향하는 사회주의국가인 이라크에서 8천만불 규모의 바스라 지역 하수처리
설비공사를 수주하는 개가를 올렸다.
특히 이란에서는 반다르 압바스 동원훈련 조선소 건설에서 얻은 신용을
바탕으로 그해에 페루시안 걸프 조선공사에서 발주한 반다르 압바스 본 조
선소 건설공사를 비롯해서 국립철강회사에서 발주한 반다르 압바스 철강단
지 해상공사, 가치샤란 가스 주입 시설공사 등의 세 가지 공사를 거의 같은
시기에 수주함으로써 장차 이란 건설시장에의 발판을 확고하게 굳혀 놓기도
했다.
한편 국내에서는 총공사비 3천 3백 70억이 소요되는 충주 다목적 댐과 영
산강 하구언공사, 고리 원자력 5.6호기 공사등의 초대형 공사들을 착공했
다.
또한 정 주영은 작년에 설립한 학교법인 울산 중고등학교를 지난 3월에
개교했으며, 작년에 발족한 아산복지재단 사업의 일환인 종합병원 건립도
이미 정읍.보성.인제.보령 등의 4개 병원을 개원한 데 이어 영덕 병원의 개
원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79년, 정 주영은 초조와 긴장 속에서 새해 아침을 맞았다. 작년 여름부터
가열되기 시작한 이란의 회교혁명의 열기는 해가 바뀌면서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가고 있었다. 뉴우스는 연일 최악의 상태를 보도하면
서 외국인의 철수상황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정 주영으로서도 중대한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될 시각이 임박해 오고
있었다. 이란에는 작년에 현대가 착공한 3개 공사현장이 있었다.
1월 7일 아침 8시, 그날 아침에도 여느때나 다름없이 광화문 현대 사옥
14층 대회의실에서는 정 주영 회장이 주재하는 중동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중동회의는 75년 8월, 현대의 이란 진출을 계기로 중동공사가 본격화됨에
따라 종전의 해외사업부서를 확대 통합개편한 정회장 직속 기구인 중동사업
본부가 매일 아침 8시에 주관하는 회의이다. 회의 성격은 종전의 아침 중역
회의와 같은 것이었지만, 회의 내용이 중동 사업에 그만큼 비중을 두고 있
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 회의장에 이란의 가치샤란 가스 주입시설 공사현장으로부터 한 장의
긴급 텔렉스가 날아 든 것은 회의가 거의 끝나가는 8시 20분경이었다.
가스 주입시설이란 유전 땅 속에 매장되어 있는 원유가 땅 밖으로 솟아
나오는 것을 쉽게 하기 위해 이미 원유가 뽑혀 나옴으로써 생겨진 공간에
외부로부터 가스를 주입시켜 압력을 가해 주는 기계시설을 말한다. 따라서
그 공사현장은 이란의 다른 조선소 공사현장이나 철강단지 해상공사 현장과
는 달리 해안이 아닌 내륙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호메니 옹이 이끄는 회교혁명이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는 이란의 그 현
장으로부터 날아 온 긴급 텔렉스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금일 새벽 02시 40분 발주처 및 기술회사로부터 금일 06시 30분 이전까
지 긴급히 현장을 포기하고 호람샤르로 철수한 후, 가능한 한 빠른 수단으
로 이란 영내를 떠나라는 공식지시를 접수함. 현장 철수 도중 07시 30분,
짙은 안개로 인한 차량 전복 사고로 말미암아 사망 5명 중상자 20명 발생,
방금 호람샤르에 도착했으나 마땅한 수송편이 없기 때문에 즉시 이란을 떠
날 수 없는 실정에 놓여 있음. 수송편이 마련될 때까지 일단 호람샤르에서
대기할 예정이며 진전 사항 수시로 보고하겠음. 본사의 지시를 요망함."
전문 내용을 보고받은 정 주영의 얼굴은 한발 늦은 자신의 결단을 후회하
는 듯 창백하게 굳어지고 있었다.
작년에 착공한 이 공사는 2천만불도 채 안 되는 작은 규모의 공사이긴 했
지만 보기 드문 석유 관계 플랜트 공사인데다가 이란의 중추적 유전지대인
후제스탄 지역의 원유 생산능력 증대를 목표로 하는 일련의 계획공사 중의
하나였던 만큼 정 주영으로서는 후속공사 추가 수주에 중요한 계기가 될 것
이라는 점에서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공사였다.
하지만 이 공사를 계약할 당시 이란 국내에는 이미 몇 해 전부터 무르익
어 오던 혁명의 분위기가 한층 고조되어 가고 있었다.
이란 국왕 팔레비는 막강한 석유자본을 배경으로 공업화정책에 중점을 둔
경제개발계획에 과욕적으로 투자하는 한편 석유 수익의 불균등한 분배로 인
한 빈부의 극심한 격차 등으로 국민 대다수의 불만을 사고 있었다. 불만에
싸여 있던 이란 국민들이 전통적인 회교적 종교관과 윤리관 위에서 프랑스
에 망명 중이던 종교 지도자 호메니 옹을 중심으로 팔레비 왕정에 반기를
들고 궐기한 것이었다.
특히 팔레비 국왕의 서구화 내지 공업화정책의 강력한 추진은 이란 국민
의 전통적인 가치관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었다. 이란 국민의 서구문명에
대한 피해의식은 곧바로 외국인에 대한 적대감과 직결되어 과격한 외국인
배척운동과 외국인에 대한 테러행위로 표출되었다.
그 중에서도 현대가 가스 주입시설을 공사하고 있는 가치샤란 지역을 포
함한 이란 중서부의 후제스탄 일대는 페르샤 소수민족이 뿌리를 내리고 있
는 곳으로서 외국인에 대한 적대감정이 극도로 심화된 지역이기도 했다.
이란 혁명의 여파가 가치샤란 현장에 미치기 시작한 것은 작년 가을부터
였다. 수도 테헤란을 위시한 각 주요도시에서는 민중과 팔레비 군대와의 충
돌이 격화되어 하루에도 수십 혹은 수백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있었으며 이
에 항의하는 근로자들의 파업은 종식될 줄 몰랐다.
교통과 통신이 두절되고 원유생산이 중단되고 식료품의 품귀현상이 일어
났으며 공사 현장의 공업용 유류난이 닥치고 고국과의 가정통신마저 끊어지
자 근로자들은 술렁거리기 시작했고 드디어는 공사수행마저도 순조로울 수
가 없었다.
그런 판국에 1월 2일, KBS 한국어 중동방송은 테헤란 주재 한국교민의 철
수와 테헤란 공항의 폐쇄 소식을 전했다. 그 방송을 들은 현장 근로자들은
이란이 전쟁상태에 빠진 것으로 판단하고 불안과 공포에 동요되기 시작했
다. 게다가 기술담당회사였던 영국의 호스터휠러사의 엔지니어들은 이미 지
난 연말부터 한두 명씩 빠져나가 대부분이 귀국하고 남아 있는 10여 명의
기술자들도 일단 유사시를 대비해서 여섯 대의 헬리콥터를 대기시켜 놓는
등 대피 준비에 만전을 기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현장소장 남 성우는 1월 6일 새벽 2시 40분, 기술회사
측의 안전감독 매니저로부터 발주처의 긴급 현장 철수 메시지를 전해 받았
던 것이다.
이와 같은 사태를 대비해서 남 성우가 그동안 공구장들과 함께 면밀한 철
수계획을 미리 세워 놓았던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현장에는 기능공
4백 13명과 직원 35명, 모두 4백 50여 명이 일하고 있었다. 그들은 각 공구
장 지휘하에 주요 서류와 개인 소지품을 트럭과 픽업, 트레일러 등 40대의
차에 나누어 싣고 새벽 6시, 3백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호람샤르를 향해
현장을 떠났다.
텔렉스 이용은 공사현장의 자재 통관 및 구매를 위해 설치 운용되고 있는
호람샤르 연락사무소에서나 가능했기 때문에 본사의 사전 철수 승인은 받을
겨를도 없이 단행된 철수작전이었다. 그러나 남 성우는 이런 사태가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작년 말, 연말공정 중간보고서 및 발주처의 귀책사유로 인
한 공사지연에 따른 배상 신청서를 발주처와 기술회사측에 제출해 놓고 있
었기 때문에 호람샤르에 가서 발주처 관계관인 카달라로부터 서면 철수 지
시서만 받아내면 앞으로 다시 공사수행을 해나가는 데는 별 애로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최종적으로 현장을 둘러본 다음 전원 철수를 확인하고 먼저 출
발한 철수대열을 뒤쫓아 차를 달렸다.
남 성우는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맞은편에서 달려오고 있는 중기공장 공
장장 차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 차 역시 급정거했다.
"남소장님! 사곱니다......" 하고 차에서 내린 공장장은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는 것이었다. 그 순간 남 성우도 전신에 흐르던 피가 일시에 정지하
는 듯한 전율을 느꼈다.
안개 속을 헤쳐 나가던 2톤 트럭 한 대가 상향 경사의 굽이길에서 달려
내려오는 현지 버스를 급히 피하려다가 한쪽 앞바퀴가 빠지는 바람에 5미터
비탈길에서 전복했다는 것이었다.
그 교통사고로 25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현지로부터의 보고였다. 회의
장 분위기는 침통하고 무거운 긴장 속에 잠겼다.
"박상무!" 하고 정 주영이 긴장을 깨뜨렸다.
"예!"
해외공사 관리본부장 박 규직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즉시 현장으로 떠날 준비를 해요. 가서 사망자의 유해와 부상자들을 먼
저 안전한 곳에 대피시키고 현지 사정을 정확하게 파악해서 남은 인원을 신
속하게, 그리고 무사히 철수시키도록 하시오."
그날의 중동회의는 그로써 끝났다. 회장실로 돌아온 정 주영은 소파에 몸
을 던지듯 푹 파묻혀 앉고 눈을 감았다. 산 설고 물 설은 이국 산천에서 잘
살아 보겠다는 일념으로 피땀 흘려 일하던 이름 모를 형제들이 또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것이다. 그는 잠시 눈을 감은 채 그들의 명복을 빌었
다.
오늘날까지 그가 시공해 온 그 숱한 크고 작은 공사에서 한두 번의 사고
로 한두 사람 죽어 간 것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그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은 죽어 간 사람의 처자식들이었다. 그는 그런 사고를 당하고 나면 으례
죽은 사람의 가족사항부터 물어 보았다. 죽은 사람은 기왕에 불행하게 죽었
거니와 그의 죽음으로 해서 유족이 불행해지는 일은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
서였다.
그는 사망자의 사후처리가 장례비나 지급하고 산재보험에 의한 보험금 이
외에 유족과의 합의된 위자료 지급이나 하는 등으로 끝나는 것이라고는 생
각지 않았다. 하기 때문에 그 유족들에게는 항상 현대그룹 산하 각 기업에
우선적으로 취업할 수 있는 특권이 부여되기도 했다.
얼마 전의 일이었다. 울산의 미포만 수리조선소에서 고철로 해체하던 선
박 한 척이 바다 속에 침몰하는 사고로 그 배에서 작업하던 인부 한 명이
실종됐었다. 마침 그가 조선소에 내려갔을 때 현장에서는 실종된 인부의 시
체 수색을 중단하고 그 유족들을 상대로 위자료에 관한 협의를 하고 있었
다. 그 현장을 목격한 그는 벼락을 내렸다.
"이 병신 같은 사람들아, 당신네 아들이나 당신네 형제가 죽었다고 생각
해 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시체를 먼저 찾아 놓고 봐야지 위자료가 문제
야? 당장 어떤 방법으로든지 시체를 찾도록 햇!"
그래서 조선소 경내의 모든 써치라이트를 총동원해서 밤을 새워 익사한
인부의 시체를 건져 올리게 한 일이 있었다.
이란의 호람샤르에 고립된 현대건설의 직원들과 근로자들을 구출해 오라
는 정 주영 회장의 특명을 받은 박 규직 상무는 해외공사 관리본부 소속 직
원 2명을 대동하고 그날 밤 KAL편을 이용, 우선 파리로 날아 갔다. 이란의
모든 국제공항이 폐쇄된 때였으므로 이란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내
야만 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란으로부터 철수하는 외국인들을 위한 항로
로서 영국의 런던과 이란 중서부에 위치한 도시 시리즈 사이를 유일하게 영
국 항공회사에 의해 운항되고 있었다. 박 규직 일행은 파리로부터 영국으로
건너가서 다시 이란행 비행기를 탔다.
이란행 비행기를 탑승한 외국인은 박규직 일행 세 사람뿐이었다. 모든 외
국인이 이란으로부터 탈출하지 못해 아우성인 그때에 그들 세 사람은 동료
들을 구출해 내기 위해 거꾸로 사지를 향해 날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시리즈에서 공사현장인 가치샤란까지는 5백킬로미터, 거기서 다시 3백킬
로미터를 달려야만 호람샤르에 도착할 수 있는 것이다. 시리즈 공항에 도착
한 박 규직 일행은 이란 군인들이 주선해 주는 택시 한 대를 겨우 대절할
수 있었다. 그들은 호람샤르까지 오는 도중에 몇 차례나 차를 세워야 했는
지 모른다 모든 상거래가 중단된 상태였기 때문에 지나가는 차들을 세우고
사정사정해서 휘발유 동냥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느라고 그들이 호람샤르에 도착한 것은 이튿날 새벽 4시 40분경이었
다.
박 규직 상무를 만난 남 성우 소장은 너무나 반갑고 기쁘고 고마와서 엉
엉 소리 내어 울었다.
지난 1월 7일, 남 성우가 사고현장을 수습해서 호람샤르에 도착한 것은
중도의 짧은 겨울 해가 서쪽으로 기우는 오후 3시경이었다. 좁은 연락사무
실에는 4백여 명이 들어설 자리도 없었다. 4백여 명이나 되는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들이닥치자 호람샤르 시민들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무슨 비상이
라도 걸린 듯이 부산한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한 시민들의 움직임은 가뜩이
나 교통사고로 위축된 직원이나 근로자들을 공포의 분위기로 몰아넣었다.
남 성우는 우선 환자와 기타 인원을 연락사무소 및 근처 발주처측의 숙소
와 현지인 숙소에 분산 투숙시키게 하고 임시 주차장을 빌려 차량을 주차시
키게 한 다음 시내 발주처 사무소로 차를 몰았다. 발주처 사무실에 도착한
그는 깜짝 놀랐다. 그곳에서 철수문제를 공식적으로 의논하고 대책을 세우
자던 발주처 관계관 카달라는 이미 그리이스로 줄행랑을 친 다음이었다.
남 성우는 허탈한 모습으로 빈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서면 철수지시를
못 받았으니 앞으로의 대발주처 기술회사 문제처리도 암담했을 뿐 아니라
한국까지, 아니 최소한 이란 국경을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마저도 막막했
다. 자기만 믿고 있을 4백여 명의 근로자와 직원들의 얼굴이 주마등같이 머
리 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가 연락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주차 및 숙소 배정은 어느 정도 완료됐
었으나 사망자의 유해와 부상자는 그대로 방치되다시피한 상태였다. 부상자
들은 그를 보자마자 비명에 가까운 신음소리와 함께,
"우릴 죽일 거요, 살릴 거요?" 하고 고함을 치며 악을 썼다.
그는 그 길로 환자들과 사망자의 유해를 싣고 인근에 있는 아바단 시 병
원으로 가서 인도적인 선처를 호소했다. 아무리 난세중이고 외국인을 미워
하는 그들이었지만 인도정신만은 외면하지 않았다.
다섯 구의 유해를 안치시키고 20명의 중상자를 입원시킨 그는 곧장 연락
사무실로 돌아와서 긴급 공구장회의를 소집하고 대책을 협의했다.
"그럼 우린 언제까지 여기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겁니까?"
"본사에서 곧 무슨 대책이 있겠지."
"우리가 가지고 온 라면도 앞으로 한 사오일밖엔 못 먹습니다."
"은행문을 닫았으니 예금을 찾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테헤란 지점에다
돈을 보내랄 수도 없고..........."
경리담당 직원이 큰일이라는 뜻으로 하는 말이었다.
"그런 것보다도 이쪽 사람들이 우릴 가만 두느냐가 문젭니다. 만약 한밤
중에 작당해서 쳐들어오면 어떡합니까, 소장님?"
"그럴 리는 없어. 우리 한국인에 대한 감정이 그렇게까지 나쁘진 않으니
가. 조금도 불안해 하지 말고 각자 자기 숙소로 돌아가서 데리고 있는 직원
이나 기능공들하고 같이 생활하면서 그들이 동요되지 않게끔 잘 격려하고
감독하도록 하라구. 나는 텔렉스를 통해서 본사 지시를 받도록 할 테니까."
그날로부터 텔렉스 교신마저 두절된 채 일주일이 지난 오늘에야 박 규직
상무가 도착한 것이었다.
"박상무님, 지금 제일 시급한 문제는 식량을 확보하는 일과 소요 직전에
있는 근로자들을 어떻게 안정시키느냐 하는 문젭니다."
남 성우 소장의 보고를 받으면서 박 규직은 그밖에도 몇 가지 긴급히 처
리해야 할 일들을 정리해 보았다. 무엇보다도 우선 해야 할 일은 정회장 지
시대로 다섯 구의 유해를 한국으로 운구하는 것과 중상자를 급히 치료함으
로써 또 다른 인명의 희생을 막고 남은 부상자들도 하루속히 한국으로 후송
해서 다른 근로자들을 심리적으로 안정케 하는 일이었다. 그 다음은 공사
수행과 관련된 회사의 거취 문제를 결정하는 일이었다. 다시 현장으로 복귀
해서 현장을 지킬 것이냐, 아니면 철수명령을 받고 나온 이상 계속 한국으
로까지 철수할 것이냐 하는 것을 판단 결정해야 한다. 철수할 경우에는 대
발주처와 기술회사 문제를 완벽하게 처리해 놓음으로써 차후의 계약상의 회
사 위치를 유리하게 하고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어 놓아야
만 했다.
그날 아침 일찍 박 규직은 각 숙소에 묵고 있는 근로자들을 만나보기 위
해 남 성우를 앞세우고 먼저 일부 경상자들이 투숙한 연락사무실 이층으로
올라갔다.
빽빽하도록 질펀히 누워 있던 육칠십 명의 근로자들이 박 규직을 보는 순
간 일제히 일어나 앉으면서 욕설과 함께 불평을 터뜨렸다.
"뭐야? 당신이 본사에서 온 사람야?"
"죽거나 말거나 내버려 두지 뭣하러 왔어?"
"왔으면 먹을 거나 내놔!"
"우린 언제 떠나는 겁니까?"
박 규직은 이런 상황 속에서 자신의 말 한 마디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를 생각하며 침착하게 말문을 열었다.
"여러분! 흥분하지 말고 제 말을 들어 주십시오. 저는 여러분들의 안전을
위해서 회사와 정부, 그리고 고국에서 여러분의 안부를 걱정하고 계시는 여
러분의 가족들을 대표해서 모든 권한을 위임받고 여러분과 생사를 같이하기
위해 다른 외국인들은 서로 앞다투어 빠져나가는 이 이란 땅에 달려온 본사
의 해외공사 관리본부 본부장 박 규직 상뭅니다."
근로자들이 흥분을 자제하는 성 싶었다. 박 규직은 계속 말을 이었다.
"제가 여기까지 온 이상 이제부터는 무엇보다도 여러분들이 저를 믿고 회
사를 믿고 제 말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절대 필요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같
이 죽느냐 같이 탈출하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여러분이 제 말을 따르느냐
안 따르느냐에 달려 있읍니다."
근로자들은 움푹 들어간 눈들을 크게 뜨고 귀를 기울였다. 박 규직은 주
변의 불안한 정세와 외국인들의 집단 주거와 행동에 대한 데모 군중들의 경
계심 등을 설명한 다음 먼저 질서를 지켜 줄 것을 당부했다. 그리고는 세
관.항만.공항 등의 모든 관공서 업무가 마비된 현재 상황 속에서 정상적인
방법에 의한 이란 출국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납득시킨 후, 제일 급한 식
량문제부터 해결하고 사태의 변화에 따라서 적절한 방법으로 귀국할 수 있
도록 하겠다는 것을 약속했다.
그처럼 각 숙소를 돌며 일단 근로자들을 납득시키고 그들의 동요를 가라
앉힌 박 규직은 우선 현지인 운전사를 반다르 압바스의 조선소 공사현장과
해상 철강단지 공사현장에 보내 식량을 실어오게 했다. 그리고 테헤란 지점
에도 직원을 보내서 필요한 자금을 가져 오도록 조처했다.
모든 현지의 여건을 종합 분석해 본 결과 역시 조속한 철수만이 상책이라
는 결론을 얻은 박 규직은 안전한 철수대책을 강구하는 한편, 이미 바뀌어
버린 발주처 관계관과 기술회사측 공사감독을 만나서 서면 철수지시를 받아
내려고 했다.
그러나 발주처나 기술회사측에서는 서면철수 지시서를 발급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기술회사는 발주처측에 밀고 발주처는 기술회사측에 밀면서 서로
가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철수 지시서를 받지 않고 공사현장을
떠난다는 것은 지금까지 시공해온 공사를 포기하는 것은 물론 그밖의 발주
처로부터의 손해배상 청구가지도 부담해야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
에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냥은 철수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박 규직은 끈질긴 노력 끝에 철수지시서를 발주처에서도 받아 내고 기술
회사에서도 받아냈다. 그리고는 사방팔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아바단 시에
있는 민간항공회사에 캡틴 김을 만나는 데 성공했다. 한국 사람을 만난 그
도 찾아간 사람 못지 않게 기뻐하는 것이었다.
공군 파일럿트였던 그는 월남전에서 철수할 때 곧장 이란으로 입국해서
처음에는 이란 조선소에서 기술자로 근무하다가 조종사 능력을 인정받게 되
어 이란 민간항공회사에 입사, 이란 영공을 날으는 한국인 파일럿트로 기반
을 굳히면서 이란 사람들과도 친숙하게 지내고 있는 터였다.
박 규직은 그 캡틴 김을 통해서 이란 민항 사장을 접촉, 전세기를 띄워
보려는 방향으로 일을 추진했다. 현지인이나 다름없는 캡틴 김의 성의 있는
설득으로 마침내 민항 사장은 전세기 한 대를 허락했다. 물론 돈이 없었기
때문에 외상이었다. 돈은 바레인에 도착하면 바레인 현대건설 지점에서 갖
다 준다는 조건이었다.
비행기는 30명밖에 탈 수 없는 쌍발여객기인데 가야 할 사람은 4백명이
넘으니 서로 먼저 가겠다고 나서면 그것도 큰일이고, 자칫하면 가까스로 안
정된 근로자들의 분위기를 흩뜨려서 다시 혼란에 빠질 염려가 있었다.
"여러분! 그동안 질서를 지키고 협조해 주신 데 대해서 진심으로 감사합
니다."
박 규직은 근로자들의 분위기를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그동안 여러분이 적극적으로 협력한 덕택에 이제 우리는 제일차로 30명
을 귀국시킬 수 있게 되었읍니다. 누구나가 먼저 가고 싶겠지만 서로 양보
해서 이번 비행기편에는 급한 대로 사망자와 부상자만 먼저 보내도록 합시
다."
근로자들은 자기네들도 갈 수 있다는 기대가 작용했던지 모두들 박 규직
의 제의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1월 21일 12시 정각. 아바단 공항에는 쌍발여객기 한 대가 조심스레 움직
이고 있었다. 아바단 병원에 안치되었던 사망자 유해 다섯 구와 부상자 20
명, 의사 간호원 등이 탑승했다.
그들의 탑승을 지휘하던 박 규직과 남 성우의 가슴은 조마조마했다.
(혹시 혁명데모 군중들이 쳐들어오지나 않을까, 무장군인들이 이륙을 저
지시키지는 않을까.........)
설상가상으로 여객기를 띄우는 데 필수적인 컨트럴 타워의 사용은 불가능
했다. 물론 이란정부의 공식 출국허가도 없는 상황이었다.
스튜어디스에 부조종사 역할까지 하느라고 캡틴 김의 움직임이 부산했다.
이윽고 조종석에 앉은 캡틴 김이 안심하라는 듯 손을 흔들어 보이곤 시동을
걸었다.
쌍발여객기의 바퀴가 서서히 활주로를 미끄러져 가기 시작했다. 동체가
땅에서 뜬 뒤에도 비행기는 저공으로 날고 있었다. 아마도 주위의 군인들
시각을 의식하고 멀리 벗어나려는 배려인 것 같았다.
지평선 멀리 날아간 비행기가 서서히 고도를 높이기 시작하자 배웅하러
나온 여러 근로자들과 직원들 얼굴의 긴장이 풀리면서 그 얼굴 얼굴에는 감
격의 눈물이 흘렀다.
사망자와 부상자들이 이란 민항의 전세기편으로 바레인 공항에 무사히 도
착했다는 현지로부터의 보고를 받은 정 주영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
면서 긴장했던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성한 사람들이야 설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빠져나올 테지.)
신문은 연일 이란 정정을 대서특필로 보도하고 있었다. 이란 도처에서 친
팔레비 정부군과 반정부군 사이에는 총격전이 벌어지고 데모군중을 향한 정
부군의 무차별 사격은 수백 수천의 사상자를 내고 있다는 보도 내용들이었
다.
이란에 나가 있는 근로자와 직원 가족들은 매일같이 광화문 사옥으로 몰
려 와서 불안에 떨면서 그들이 언제 돌아올 수 있느냐고 발을 동동 굴렀다.
그 즈음에 이란 현지에서는 밤에 데모군중들이 한 숙소를 쳐들어와서 돌
을 던지고 불을 놓고 하는 바람에 그 숙소에 묵고 있던 근로자들이 혼비백
산해서 다른 숙소로 대피하는 소동을 빚었다. 그러자 근로자들은 다시 웅성
거리기 시작했다. 무조건 빨리 집으로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박 규직은 아바단 어미들과 교섭해서 칠팝십 명이 탈 수 있는 배 <따우>
네 척을 엄청난 값에 임대했다. 아바단으로부터 쿠웨이트까지는 따우로 8시
간이면 갈 수 있다고 했다. 그 다음은 이란 영해를 벗어나기 위해 출국허가
를 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이민국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영
향력이 있는 현지 고용인을 시켜서 비공식적으로 출국 스탬프를 받아내는
도리밖에 없었다.
이란 혁명은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었다. 외출하는 모든 차량은 팔레비
사진과 호메니 사진 두 장을 시트 밑에 감추고 다녀야만 했다. 친팔레비 군
대를 만나면 얼른 팔레비 사진을 꺼내 보이고 친호메니 데모대를 만나면 호
메니 사진을 꺼내 보이면서 호메니 만세를 외치기 위해서였다.
1월 29일, 드디어 박 규직은 4백여 명의 근로자 및 직원들을 네 척의 따
우에 분승시키고 호람샤르를 떠나 쿠웨이트로 향하게 되었다. 남 성우 현장
소장과 몇몇 공구장급 직원들은 시공업체로서 현장을 끝가지 지킨다는 자세
를 보여주기 위해 계속해서 현장에 남아 있기로 했다.
남게 되는 직원들의 전송을 받으며 뱃전에 튀기는 바닷물을 바라보는 박
규직 눈에는 많은 감회가 어리고 있었다. 그러나 어렵게 이루어진 탈출작전
은 끝까지 순탄하지 못했다. 외항 검문소에 걸린 따우는 억류명령을 받았
다.
차가운 겨울 바닷바람과 허기에 맞서야 하는 싸움의 연속이었다. 추위에
견디다 못한 한 근로자가 갑판 위에 기름을 붓고 불을 피웠다. 배 준인은
말할 것도 없고 동료 근로자들까지도 기겁을 하고 소리를 지르며 불 피운
근로자에게 덤벼들었다.
"야 이 새기야, 검문소 군인들이 불을 목표로 하고 사격을 해오면 어떡헐
래, 응?"
"죽여 죽여!"
"그 새끼 간첩 아냐?"
박 규직은 그들을 제지했다. 밤 바다에서 떠드는 소리는 십리 밖에서도
들린다는 거짓말로 그들을 위협했다. 그 말을 들은 근로자들은 그 뒤 기침
도 크게 안 했다. 그러한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삶에 대한 애착이 그 추위와
허기를 견뎌 내게 하는 것 같았다.
박 규직은 자신도 허기가 전신에 엄습해 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고맙
게도 곁에 있던 한 근로자가 마지막으로 한 개 남은 삶은 달걀을 꺼내 주면
서 먹으라고 했다. 박 규직은 떨리는 손끝으로 달걀 껍질을 벗기는 동안에
그 근로자는 짐 속을 뒤지더니 소금을 찾았다고 하면서 흰 가루를 한움큼
내밀었다.
박 규직은 달걀에 소금을 뭉턱 찍어서 한 입에 꿀컥 삼켜 버렸다. 그만해
도 허기가 좀 가시는 듯했다. 조금 지나니까 웬일로 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
작하더니 나중에는 속이 쓰리고 아파 왔다. 알고 보니 소금을 찍어 먹은 것
이 아니라 하이타이 가루를 찍어 먹었던 것이다.
24시간 만에 억류명령이 해제된 따우는 이란과 이라크의 분쟁 지역인 알
아람 수로를 거쳐서 쿠웨이트에 도착했다.
쿠웨이트 공항에는 정 주영 회장이 보낸 대한항공 특별기가 그들을 기다
리고 있었다. 대한항공 특별기를 본 근로자들과 직원들은 그간의 역경과 고
생, 허기와 추위도 다 잊어버리고 만세를 소리 높이 외치면서 기쁨에 넘쳐
서로 얼싸안고 춤을 추며 울었다.
박 규직도 이제는 살았다는 안도감과 정회장의 특명을 무사히 완수했다는
기쁨을 안고 호람샤르에 떨어뜨린 남 성우 소장과 몇몇 직원들의 안전을 기
원하며 귀국 길에 올랐다.
이 값비싼 이란 철수의 경험이 없었더라면 현대는 사우디아라비아에 맞먹
는 이라크의 건설시장을 벌써 포기했을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80년 9월,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한 이래 수없이 거듭되는 격전 속에서
도 현대가 끄덕하지 않고 20억불이 넘는 이라크 건설 시장을 계속 확보하고
있는 것은 이란 철수 때의 경험을 토대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만반의 철
수계획을 철통같이 수립해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해 2월, 현대건설을 일약 세계 백대 기업으로 올라서게 한 주베일 산업
항 공사가 선진국 건설업체들의 예상을 뒤엎고 계약공기 40개월을 8개월이
나 앞당긴 32개월 만에 성공적인 준공을 보았다.
따라서 현대의 모든 역량은 다시 알코바와 젯다 공공단지 건설 공사로 집
중되었다. 계약금액 자체도 주베일 산업항보다는 컸지만 공사규모 또한 주
베일 산업항에 못지 않았다. 작년 7월에 착공한 알코바 지역에는 이미 세계
최대의 PC(precast concrete panel)공장이 들어서고 있었으며, 앞으로 이
현장에 동원될 연인원만도 3백 14만명으로 예상되고 있었다.
그 무렵 국내에서는 율산그룹이 도산한 데 이어 원진 레이온이 도산하는
가 하면 미국의 민간 대외원조협회가 한국에서 철수하고 OPEC가 기준 원유
가를 59퍼센트나 인상하는 바람에 국내 석유류 값이 그만큼 폭등하는 등,
날로 팽창하는 인플레 속에서 한국경제의 장래는 아무도 점칠 수 없는 누란
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때를 같이해서 터진 것이 현대의 맨숀아파트 부정분양사건이었다. 태산이
무너질 듯 요란한 소리를 낸 사건이었지만 결국은 대법원 판결에서 무죄라
는 결론으로 막은 내렸으나 그 사건은 잠시나마 경제위기에 쏠린 국민의 불
안한 관심을 잊게 한 사건이었다.
그해 6월에는 작년 11월에 낙찰을 본 알코바의 담수화 플랜트를 착공했
다. 이 공사의 가장 큰 난관은 5개국 6개 회사가 국제 컨소시움에 의해서
같이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공사 수행상의 통일성이 없는 점이었다.
이질적인 여러 멤버들이 함께 일하고 있는 만큼 설계 및 현장 작업에서
협조할 사항은 많은 데도 불구하고 각사의 이해관계가 얽히는 바람에 협조
는 고사하고 논쟁이 그칠 날이 없었다 논쟁의 초점이 되는 것은 항상 계약
지분의 범위에 관한 문제였다.
계약 후에도 계약내용이 여러 차례 변경되었는데 그때마다 각사에서는 자
기 회사측에 유리하도록 내용을 바꿈으로써 소속이 분명치 않은 공사가 많
이 나타나게 되었다. 또한 현장에서는 각 회사마다 서로 자사가 맡은 부분
의 일을 진행할 수 있도록 토목공사를 먼저 해달라고 떼를 쓰는 통에 일의
혼선을 빚기가 일쑤였다. 현대의 경우는 토목과 기계공사를 같이 맡고 있었
지만 각기 다른 회사와 합작해서 별도의 컨소시움에 참여하고 있는 식이어
서 같은 현대끼리도 토목부와 기계부 간에 혼선이 일어나는 수도 있었다.
해외공사 관리본부장 박 규직으로부터 그와 같은 내용을 보고 받은 정 주
영은 한참 동안이나 그를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봐!"
"예?"
"이란 철수 때 쓰던 머린 어디 갔어?"
"........."
"아, 그렇거든 컨소시움 멤버들을 몽땅 서울로 불러 들여서 합동회의를
열도록 하면 될 것 아냐?"
"그럴러면 비용이......"
"비용이 들면 10만불이 드나 백만불이 드나? 8억불 공사에서 우리가 4억
불어치를 맡고 있잖나. 그러니 합동회의를 하자고 해서 그들을 전부 서울로
불러서 그 사람네 기분을 맞춰 줘 가면서 하나하나 합의해 가면 일이 얼마
나 수월하게 풀릴 거냐 말야."
그래서 열리게 된 서울 컨소시움 합동회의 (Seoul consortium joint
meeting) 에는 5개국 회사 실무직원 23명을 비롯한 감독회사측 실무책임자
6명과 토목 구조물 감독회사측 직원 6명 등 35명의 외국인과 현대 직원 1백
50명이 회동하게 되었다. 그 모임에서 컨소시움 멤버 간의 이견이 조정되고
감독회사측의 설계 승인 문제 등이 순조롭게 해결됨으로써 지지 부진했던
공사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음은 당연했다.
<양질의 공사를 최단시일 안에 최저의 비용으로>는 정 주영이 중동 수주
활동에 내세운 슬로건이었다. 그는 대리인 수수료라는 명목으로 커미션을
지불하느니 차라리 저렴한 가격으로 공사를 수행하는 편이 현지 정부에 대
한 진정한 의미의 우호적인 협조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정 주영의 그와 같은 진의에 바탕을 둔 수주활동의 슬로건은 호소
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우는 막대한 석유수입으로 재정
이 풍부했기 때문에 절약보다는 왕족 개개인에게 돌아오는 혜택을 더 중시
하고 있었고 외국의 경쟁업체들은 현대의 가공할 만한 경쟁력을 두려워한
나머지 현대의 수주활동을 어떤 방법으로 저지할 것인가에 부심하며 골몰하
고 있었다.
그해 7월, 현대건설은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로부터 수주제한조치라는 충격
적인 제동에 걸린다. 향후 2년간 사우디 아라비아 국내에서의 일체의 공사
에 수주할 수 없다는 일종의 징계조치였다.
현대가 그와 같은 징계를 당하게 된 배경에는 앞서 얘기한 바와 같은 매
우 복합적이고도 복잡한 사정들이 얽혀 있었지만 그 직접적인 계기는 2년
전에 있었던 아시르 전화사업 공사 당시의 뇌물공여 혐의로 거슬러 올라간
다.
앞에서 얘기한 바 있듯이 아시르 지역을 포함한 사우디 당국의 4개 지역
전화사업에는 당초 미.영.일.독 등 4개 선진국 업체들만이 입찰에 초청됐었
으나 그들의 담합행위로 입찰이 파기되고 대신에 한국.파키스탄.대만.인도
등 4개 개발도상국에게 절반 가격으로 정부 베이스에 의해 발주됐었다.
그렇게 되자 당초 입찰을 주관했던 사우디 전력청 부청장의 입장이 난처
해졌음은 물론이다. 어느 날 그 부청장이 리야드에 있는 현대건설 중동본부
에 자기가 영국으로 휴가 여행을 떠난다고 하는 사실을 거듭 알리면서 런던
에서 묵게 될 호텔 이름까지 대주는 것이었다.
이에 중동본부에 주재하는 해외담당 사장 이 춘림은 런던지점에 연락해서
전력청 부청장이 런던에 도착하거든 그에게 좋은 그림을 한 폭 선물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그는 런던지점에서 가지고 간 그림을 거절하고 현
금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 사실을 런던지점으로부터 보고받은 이 춘림은 그가 귀국하면 이쪽에서
적절히 처리할 테니 내버려 두라고 했다. 며칠 후에 귀국한 그는 자신의 귀
국 사실을 현대건설 중앙본부에 알려 왔다. 그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연락이
었다. 그가 그러는 데는 중동 본부로서도 내내 모르는 척할 수가 없었다.
리야드 지점의 오 진영 차장이 현금을 가지고 그의 집을 찾아 갔을 때였
다. 미리 잠복하고 있던 비밀경찰 세 사람이 나타나서 오차장을 덮쳤다.
그 사건으로 중동본부에 주재하던 이 춘림 사장과 오 진영 차장이 뇌물공
여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어 이사장은 징역 1년 3월, 오차장은 징역 8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로부터 2년 후, 리야드 지점장 박 세용 상무가 또 똑같은 뇌물공여 혐
의로 재판에 회부되어 실형을 선고받았던 것이다.
그런 일이 있기 훨씬 전에 사우디아라비아의 국방성 공사 발주를 관장하
고 있는 사루와 육군 소장이 한 레바논인을 앞세우고 현대에 접근해 온 일
이 있었다. 국방성 발주 공사에 직접 입찰할 수 있는 자격을 주겠다는 것이
었다. 아직 현대가 국방성 발주공사에는 입찰자격을 얻지 못하고 있는 때였
다.
그후 그는 실제로 두세 차례 현대에게 국방성 발주공사에 대한 입찰자격
을 부여해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대는 입찰에 한번도 성공하지는 못했었
다. 사루와 소장은 그때마다 돈을 요구해 왔다.
시장개척 업무를 관장하고 있는 리야드 지점으로서는 그쪽에서 정면으로
요구해 오는 것을 거절할 입장이 못 됐었다. 그래서 처음 그를 소개한 레바
논인을 통해서 그의 요구에 응해 왔었다. 그러자 그는 현대에서 주는 돈과
레바논인이 가져오는 돈에 차이가 있는 것 같다고 하면서 앞으로는 돈을 직
접 집으로 가져와 달라는 것이었다.
사루와 소장이 이번에 달라는 돈은 얼마 전에 있었던 국방성 발주공사인
타부지역 군사시설공사 입찰 때 입찰자격을 준 데 대한 대가를 요구하는 것
이었다.
현대가 견적한 것으로는 4억불 규모의 공사였으나 사루와 소장과 친분이
두터운 네덜란드의 군사시설 전문업체인 필립홀츠만사에서 자기네가 7억불
에 낙찰을 시킨 다음 현대에 5억불에 하청을 줄 테니 입찰에 참여하지 말
것을 종용하는 바람에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편이 실질적으로 유리하다고
판단되어 현대로서는 입찰자격이 있었으나 실은 응찰을 포기했었다.
그러나 필립홀츠만사는 낙착을 시킨 후 여러 가지 변명을 하면서 하청을
주지 않으려고 했다. 화가 난 리야드 지점장 박 세용 상무는 사우디 당국에
고발을 하겠다고 필립홀츠만사를 위협했다.
그런 판인데 사루와 소장은 다시 전화를 해서 왜 돈을 가져오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박 세용은 2년 전 사건도 있고 해서 망설이고 있었는데 또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 안심하고 돈을 직접 자기 사무실로 가져오라는 것이었
다.
박 세용은 마음은 내키지 않았지만 뒷일을 생각해서 얼마간의 돈을 마련
한 뒤 국방성을 향해 차를 몰았다. 그가 국방성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이
번에도 미리 잠복해 있던 비밀경찰들이 기습해 왔었다. 필립홀츠만사가 쳐
놓은 올가미에 걸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들이 선수를 쳤던 것이다.
사건 경위야 어쨌든 그 두 사건은 사우디아라비아 내에서의 현대의 명성
에 치명적인 먹칠을 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현대가 같은 사건으로 두 차례
나 물의를 일으키자 처음에는 사우디 정부 일각에서 현대를 완전히 추방해
야 한다는 강경론이 대두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현대가 사우디 내에서 진행
중인 공사도 많았거니와 그동안의 실적이 감안되어 2년간 수주제한조치를
내리는 선에서 사태가 수습됐던 것이다.
아뭏든 수주제한조치로 사우디아라비아 내에서의 신규 수주가 불가능해짐
에 따라 정 주영은 쿠웨이트.아랍토후국.카타르.오람 등 인접 중동 각국을
대상으로 새로운 시장개척을 추진하는 한편 80년에는 건설 잠재력이 큰 새
건설시장으로 등장한 이라크와 리비아 진출에 박차를 가했다.
한편 국내는 국내대로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어수선하고 불안했다. 중소
기업이 잇달아 도산하는 가운데 YH무역 여공백여 명이 신민당 당사에서 회
사 폐업을 반대하고 농성을 벌이는가 했더니, 국회에서는 신민당 총재 김
영삼 의원을 제명하고 마침내는 부마사태를 몰고 왔으며 10월 26일에는 박
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 재규에 의해서 살해되는 비운의 참사를 빚
어내고야 말았다.
정 주영이 박대통령의 비보에 접한 것은 7시 출근길의 엘리베이터 안에서
였다. 그의 표정은 담담했다. 그러나 그가 받은 충격은 바못 컸었다. 그와
박대통령 사이에는 피차 가난한 농삿군의 아들이라는 면에서 남들이 모르는
친분도 있었으며, 특히 우리 후손에게 가난한 조국을 물려주지 말자는 염원
은 두 사람의 공통된 소망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박대통령의 지나친
장기집권에는 늘 일말의 회의를 품어오는 터였다. 하기 때문에 그는 그토록
충격적인 비보에 접하고도 담담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그날도 그는 여느날과 다름없이 중동회의를 주재하고 하루종일 침통하게
회장실에 들어 앉아서 사태의 추이만을 관망했다. 그러면서 그는 오늘의 한
국경제를 이 정도까지 끌어올린 박대통령의 업적에 대해서 경의를 표했다.
현대가 오늘날 이만큼 성장해 온 것도 그동안 발전해 온 한국 경제 덕분
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박대통령과의 친분이 있었다고 해서 그로부
터 개인적인 혜택을 받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현대야말로 창사 이래 모든 경쟁에서 이기면서 발전해 왔지 어떤 세
력과 결탁해서 경쟁입찰 없이 정부의 재산을 불하받았다거나 또는 어떠한
힘을 업고 불로소득을 한 사실이 전혀 없다는 것을 모든 국민이나 국가에
대해서 또 세계 경제 속에서 얼마든지 큰소리 치고 일할 수 있는 기업이라
고 자신했다.
현대가 이란에서 철수하고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수주제한조치를 당한데다
가 청와대에서 봐주기 때문에 현대가 돈을 버는 줄 아는 일부 국민들 가운
데는 박대통령이 죽고 나자 현대는 앞으로 망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도 많았다.
그러나 한국경제의 성장률이 마이너스 5.7퍼센트로 위축되던 80년도에 오
히려 현대는 79년의 총매출액 6천 66억에서 껑충 조대를 뛰어넘는 1조 5백
6억을 기록함으로써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입을 벌리고 놀라게 했다.
경쟁력은 기업의 생명
정 주영이 시장 다변화 방침을 강화한 것은 비단 사우디아라비아로부터
수주제한조치를 당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란의 회교혁명을 전후해서 이
미 진행 중이던 공사를 중단하고 철수한 바 있는 그는 한 나라에 공사가 집
중되면 위험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와 같은 컨트리 리스크(country risk)를
분산시킬 대책을 강구하고 있던 참이었다.
수주제한조치 이후 사우디아라비아 인접국들과 리비아 동남아 지역 등에
서 맹렬한 수주활동을 전개한 정 주영은 그해 10월에 말레이지아 빈툴루 심
해항 준설공사를 수주한 것을 필두로 캐냐르 댐, 이라크의 바그다드 슈퍼마
켓, 바그다드 병원단지, 바스라 하수처리설비, 아랍토후국의 알 아인 하수
처리설비, 오만의 정유공장, 리비아의 라스라누프 항만공사 등을 80년 말까
지 수주해 냈다.
한편 국내 주요공사로는 작년 2월에 착공한 포항종합제철 제4기 공사를
비롯해서 정부 제2청사, 삼랑진 양수발전소, 삼천포 화력발전 1.2호기 등에
이은 금년의 영광 원자력 7.8호기와 서울 지하철 3.4호선, 진도 연육교 등
을 꼽을 수 있다.
80년 현재 정 주영이 거느리는 그룹사는 현대조선중공업을 위시해서 현대
자동차.현대차량.현대시멘트.현대중전기.현대엔진.현대정공.현대종합목재.
현대종합상사.인천제철.동서산업.경일산업.고려화학.아세아상선 등 무려 26
개 업체나 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세계 10위로 부상한 현대조선 중공업에서 원전 설비제작에
대한 미국 기술자협회의 품질인정을 획득해 낸 것을 위시해서 아세아상선이
중남미 항로를 개설했으며 현대자동차는 포니 5만대 수출을 기록했고 현대
정공에서는 컨테이너 생산 10만대를 돌파하는가 하면 현대종합상사가 10억
불 수출탑을 수상하는 등, 실로 괄목할 만한 발전상을 보였다.
현대그룹 기업의 그와 같은 발전은 평온과 안정 속에서 이룩된 것들이 아
니었다.
경제적으로는 1월에 59.43퍼센트나 인상했던 유가를 8월에 다시 12.65퍼
센트 인상하더니 또다시 11월에는 11.32퍼센트를 인상했는가 하면 5월에는
석탄값도 41.92퍼센트나 인상한 바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작년 12.12사태
(정 승화 계엄사령관 체포)이후 제10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최 규하 대통령
이 2월에 들어와서 박정권에 희생된 정치범 6백 87명을 복권조치함으로써
정국은 바야흐로 민주화 시대를 맞는가 했지만 차기 집권을 겨냥하는 3김씨
(김 종필.김 대중.김 영삼)의 과열경쟁 속에 5월에는 마침내 10만여 명의
대학생들이 4.19혁명을 방불케 하는 민주회복시위를 감행, 비상계엄이 전국
에 확대되고 김 대중 등이 구속되는 가운데 광주사태라고 불리우는 불상사
가 발발했으며, 박대통령의 시해범 김 재규가 처형되고 국가보위대책위원회
가 구성되면서 석달 후에는 최대통령이 하야하고 제11대 대통령으로 전 두
환 대통령이 취임하기까지 혼미 속에 혼미를 거듭해 온 격동기였다.
그뿐 아니라 8월에는 국보위가 1차로 중화학공업투자 조정에 나섰고 9월
에는 국보위 업무가 정부로 이관됨에 따라서 정부는 20개 대재벌기업의 계
열업체 정리를 골자로 하는 기업 체질 강화대책을 발표하고 10월에 들어와
서 제2차로 중화학공업투자에 대한 직권조정에 나섰다.
이보다 앞선 6월, 정 주영은 전경련 경제정책 운용기조를 관주도형으로
민간주도형으로 전환할 것을 주장하고 나섰다. 한국의 경제정책은 민간주도
형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는 이미 77년 전경련 제13대 회장 취임사
에서도 간접적으로 시사한 바가 있었다.
정 주영은 그해 12월, 지난 6월 개원한 현대인력개발원 1차 수료식이 끝
난 후 원생들과 다과를 나누는 자리에서 민간주도형 경제와 관련해서 지난
8월과 10월 1.2차에 걸쳐서 단행되었던 중화학공업투자조정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다음과 같이 토로한 바 있었다.
"73년 초에 정부가 중화학공업선언을 했읍니다. 그 당시로서는 정부도 상
당히 힘에 부치는 일을 시작한 거지요. 그런데 그쪽에 집중투자하게 되어서
다른 산업에 많은 주름살을 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고도 산업
국가를 지향하는 마당에 그것은 일찍 시작했든 늦게 시작했든 잘 시작한 것
이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문제가 있다면 기업의 체질이랄까, 논리적인 근거 없이 모든 기업이 한꺼
번에 달려들었다는 데 문제가 있읍니다. 이를테면 섬유를 하는 사람은 섬유
산업을 계속 발전시키는 데 역점을 둬야 하고, 또 정부도 그렇게 유도했어
야 했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읍니다. 특히 기계공업 쪽으로 달려들어서 자
기 본래의 모기업 자체가 부실해지는 사태까지 빚는 큰 부작용을 낳았어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지난 중화학공업 조정 때 우리 그룹은 자동차와 발전
설비가 중복 과잉투자다 해서 대상이 됐었읍니다. 중공업은 수출지향산업이
기 때문에 국내 시장만 볼 땐 중복투자다 과잉투자다 할 수도 있겠지만 우
리가 시장을 세계로 내다볼 때 기업이 전문화되어 있는 이상 중복 과잉투자
란 것이 문제 될 수 없읍니다. 문제는 국제경쟁력입니다. 경쟁력이 없는데
국내 시장을 보고 정부에 기대서 억지로 해나갈 때 과잉투자다 중복투자다
하는 말이 적용될 수 있읍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경쟁의 원리에요. 과잉투자다 중복투자다 그러지만
처음부터 철저하게 경쟁원칙이 서 있었다면 국제경쟁에 자신 없는 사람이
섣불리 덤벼들지 못했을 것 아니겠어요? 또 나중에 정부에서 조정 같은 걸
안 해도 스스로 도태가 된다이거지요. 물론 현실적으로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가 많지만 조정을 하는데 있어서도 경쟁력 시장경제의 원칙을 밑에 깔
고 나갔어야 한다고 보는 거죠.
우리는 시장경제의 원리를 무시해선 안 됩ㄴ지다. 60년대 70년대는 정부
가 주도해서 한국경제가 잘되어 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70년대
후반에 들어오면서부터 경제의 규모도 커졌고 또 폭도 무척 넓어졌어요. 수
치와 이론만 가지고 책상에 앉아서 처리하기엔 너무 큰 거죠. 근본적으로
이 때문에 정부주도가 많은 차질을 빚기 시작한 거예요.
이를테면 공업입지의 선택도 기업이 주체성이 없고, 정부가 창원에 공업
단지를 만든다. 거기에 들어가라, 거기에 들어가지 않으면 여러 가지 지원
정책을 안 해준다. 이런 것에서부터 물의가 야기되기 시작하는 거지요. 정
부의 투자도 커지고 민간의 부담도 커지면서 비효율적이고 비경제적인 면이
나온 거죠. 또 정부가 피상적인 숫자와 이론만 가지고 일일이 기업의 방향
까지 지시를 했고 또 기업하는 사람들이 거기에 사전 사후에 편승을 해서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킨 거죠. 그래서 민간주도형 경제는 정부가 기업의
자율성을 제고시키면서 산업정책의 윤곽만을 잡아가면 기업은 그 윤곽을 실
물로써 채워 나가는 이런 역할의 부담이 바람직하다, 또 그것이 우리가 80
년대 고도산업 복지사회로 나가는 데 필연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보는 거죠.
한 가지 예를 들면 한국의 조선공업은 관계 기관들의 부정적인 반응 속에
서 출발했지만 행정규제를 받지 않고 각종 선박유형이 자유경쟁 형태로 생
산되어 세계의 조선업계와 경쟁해서 강력한 국제경쟁력을 갖고 있어요. 반
면에 자동차공업은 한국의 기계공업이 유년기였던 시기에 출발해서 그렇기
도 하고 국내의 시장을 찾아 출발했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지만 행정관여가
깊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주요 자동차 부품이 정부의 허가제로 보호육성의
대상이 되는데 이런 정책은 비록 좋은 뜻에서 출발은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
면 기업 생산업종을 이권화시켜서 기업의 시설과 장기 기술개선을 게을리하
게 만들었어요.
정부는 산업정책의 방향을 제시하고 그 성과를 주의 깊게 분석해서 다시
이를 보완하는 데 그쳐야지 필요 이상으로 기업을 보호육성하는 것은 바람
직하지 못하다고 말할 수 있읍니다.
투자조정 문제를 중심으로 우리 회사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또 오해도
있었읍니다만 결국 기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재무구조 아닙니까? 새 정부
가 의욕을 가지고 기업사회의 모든 문제들을 조사하는데, 계열기업문제, 비
업무용 부동산문제, 또 기업의 재무구조, 이런 모든 것을 조사해 보니까 우
리 회사가 대한민국 안에서는 재무구조가 제일 건실한 회사라는 것이 밝혀
져서 그 대차대조표가 모든 것을 설명해 준 셈이죠. 그래서 신뢰를 받게 됐
던 겁니다.
중화학공업 조정 때 정 주영은 수원에 있는 새마을연수원에 입원해 버리
고 말았었다. 실은 강릉에서 실시되는 80년도 신입사원 하계훈련에 참가할
예정이었다.
아침 일찍 회장실로 상공부에서 전화가 걸려 왔었다. 중화학공업 조정회
의가 있으니 8시 50분까지 상공부 회의실로 나와 달라는 것이었다. 정 주영
은 이 명박.정 세영.박 영욱 세 사람을 대신 상공부에 들여 보냈다. 세 사
람은 12시가 넘어서 돌아왔다.
상황은 예상한 것보다 심각한 것 같았다. 자동차냐 발전설비냐를 택일하
는 일에 그치는 일이 아닌 성싶었다.
1시가 되자 그룹 산하의 각사 사장들이 모여 들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시
작된 사장단 회의는 밤 9시까지 계속되었다.
현대그룹 사장단 회의는 매주 월요일 아침 8시에 정례적으로 개최되어 오
고 있었는데 그처럼 이례적인 긴급 사장단 회의가 소집된 일도 처음이었지
만 사장단 회의가 그토록 장시간 계속된 적도 일찌기 없었다. 그 사장단 회
의에서 어떤 말이 오고갔는지는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아
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
정 주영이 신입사원 하계훈련 참가계획을 취소하고 그 이튿날 새마을연수
원에 입원한 사실로 미루어 봐서도 상황이 어느 만큼 심각한가는 가히 짐작
할 만했다. 그는 머리 아픈 일은 도대체 잊어 버리려는 주의였다. 일에는
머리를 썩혀서 해결될 일이 있고 아무리 머리를 썩혀도 해결되지 않을 일이
있었다. 그는 머리를 써서 해결될 일이라면 밤샘을 하면서라도 연구했지만
머리를 써도 해결되지 않을 일에는 아예 깨끗이 잊어버리고 그 해결을 시간
에 맡겨 버렸다.
그는 새마을연수원으로 떠나기에 앞서서 정 세영 사장을 불렀다. 그리고
는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우리 손으로 키워 온 자동차를 고수하도록 하
라고 당부했다.
정 주영은 새마을연수원 생활에 재미를 붙였다. 그래야만 모든 것을 잊고
열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늘 들어 오는 강의였지만 새롭고 흥미롭게, 그
리고 유익하게 들으려고 메모까지 하면서 들었다.
그는 해마다 실시되는 신입사원 하계훈련에는 빠지지 않고 참가했었다.
일주일 동안 실시되는 이 신입사원 하계훈련의 목적은 신입사원 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하며 심신을 단련하고 자질을 향상하는 등의 일반적인 목적이
있었지만 그보다 근본적인 취지는 <현대기질>과 <현대정신>을 체득케 하려
는 데 있는 만큼 어느 의미에서는 창업주인 그가 참석치 않는 하계훈련은
김 빠진 맥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창업주 정 주영이 곧
<현대기질>과 <현대정신>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신입사원 여러분! 오늘 이렇게 직장을 떠나 동해바다에 와서 여러분을
만나게 되니 더욱 반갑습니다. 사실 그동안 만날 기회가 적어서 여러분께서
는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고, 나 또한 여러분을 잘 이해하고 있
다고 할 수 없읍니다. 오늘은 우리가 모처럼 시간을 냈으니 여러분과 나,
나와 여러분이 서로 생각하는 바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서 앞으로 우리가
보다 한 마음으로 회사에서 일을 하고 또 우리의 장래를 함께 설정해 나가
도록 합시다.
먼저 나를 여러분에게 알리기 위해서 나 자신, 이를테면 회장은 어떻게
성장을 해서 현재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느냐 하는 것을 간추려서 이야기하
겠읍니다." 하고 정 주영은 자신의 생애와 철학을 기탄없이 털어 놓곤 했었
다. 이어서 신입사원들과 회장 사이에는 그야말로 허심탄회하게 무제한의
토론이 전개되곤 했다.
심지어는 회장의 사생활로부터 회사에 대한 일반 국민의 오해나 비난은
물론 회사의 진로와 국가의 장래까지도 거론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어떤 질
문에도 정 주영은 시종 미소하며 솔직하고 진지하게 사실 그대로, 생각한
그대로를 성의있게 답변하는 것이었다.
휴식시간이면 그는 해변 백사장에 나가서 신입사원들과 함께 씨름으로 친
목을 다졌다. 씨름은 사나이와 사나이가 알몸으로 맞부딪쳐서 힘을 겨루고
기교를 부려서 넘어뜨리는 극히 단순하고도 명쾌한 경기이며 동시에 사나이
의 의기가 투합하는 운동이다.
그래서 정 주영은 소년 시절부터 씨름을 즐겼으며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기회만 있으면 사원들을 상대로 맞붙어 겨루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재작
년까지만 해도 신입사원 하계훈련에서 그를 당하는 사원이 없더니 작년에는
한 신입사원이 그를 보기 좋게 매꽂았다.
그의 나이 예순 넷. 그러나 자신의 나이를 의식하지 않는 그는 젊은 사원
에게 졌다는 것이 싫어서 한사코 사양하는 그 사원과 5판 3승의 재대결을
했었다. 첫판은 이기고 두판 세판을 내리 지고 네판째 이기고 다섯판 결승
때였다. 백사장은 회장을 응원하는 신입사원들의 함성으로 떠나갈 듯했다.
아니 회장에 대한 응원이 아니고 노인에 대한 응원이었다.
정 주영은 그의 특기인 배지기를 뜨려고 허리를 틀면서 신입사원을 번쩍
들어 올렸지만 워낙 힘이 장사인 신입사원은 끄떡도 않고 오히려 그가 허리
를 틀면서 힘을 쓰는 순간에 그의 바깥다리를 후렸다. 그 바람에 정 주영은
결국 무릎을 꿇고 말았다. 기교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부치는 힘은 그로서도
어쩌는 수 없었다. 그는 졌지만 신입사원들의 열띤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는 신입사원들의 박수를 받고 겉으로는 웃었지만 속으로는 씁쓸했다.
나이 탓이라고 돌려 버리면 그만일 테지만 어떤 일에고 그는 어려서부터 지
기를 싫어하는 성미였다. 내기를 하든 시합을 하든 심지어 주먹쌈을 하더라
도 지고 나면 밤잠을 못 자고 분해 했었다.
그가 보통학교 3학년 때 일이다. 어느 날, 5학년에 다니는 최 경태라는
학생하고 송전에서 평양이 더 가까우냐 서울이 더 가까우냐 하는 문제로 입
싸움을 하다가 마침내는 주먹 싸움을 하게 됐었다. 정 주영은 서울이 더 가
깝다고 하고 최 경태는 평양이 더 가깝다고 했다. 아무도 정확한 거리는 알
지 못했지만 정 주영은 이미 어느 쪽이 더 가까운가를 알아 보기 위해서 여
러 차례 지도책을 펼쳐 놓고 송전으로부터의 서울과 평양의 직선 거리를 삼
각자로 재본 적이 있었다. 그때부터도 그의 마음 속에는 도회지를 동경하는
마음이 늘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 경태는 알지도 못하면서 덮어놓고 평양이 더 가깝다는 바람에
싸움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정 주영은 최 경태의 상대가 아니었다. 학
년도 2학년이나 높았지만 그는 나이도 열여덟살인데다가 장가를 가서 아들
가지 둔 어른이었다. 나이로 따지자면 열셋하고 열여덟, 다섯살 차이였지만
싸움은 장닭이 햇병아리를 데리고 싸우는 거나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결국엔 햇병아리가 장닭을 이겨내고야 말았던 것이다 한차례 싸움
에서 매를 맞은 정 주영은 공부시간이 끝나기만 하면 5학년 교실 앞으로 달
려가서 교실에서 나오는 최 경태를 기다렸다가 싸우자고 덤비는 것이었다.
서너 너덧대를 맞고서야 겨우 한대 때릴지 말지 하면서도 악착같이 싸우자
는 것이었다. 학교 공부가 다 끝나고서도 정 주영은 집에도 돌아가지 않고
기다리면서 싸우자는 것이었다. 나중엔 최 경태가 질려서 잘못했다고 빌었
다. 그래도 빌 것 없다면서 당당하게 싸우자는 것이었다. 최 경태는 하는
수 없이 싸우는 척하면서 정 주영의 직성이 풀릴 때까지 맞아 줄 수밖에 없
었다. 그런 일이 있은 뒤 최 경태는 6학년 졸업을 할 때까지 먼발치에서도
정 주영을 보기만 하면 얼른 피해 달아나곤 했었다.
"올해도 다 이겼나, 정회장?"
호텔 스카이 라운지에서 쉬고 있던 정 주영의 고향 친구들이 모래를 묻히
고 들어오는 그에게 물었다.
"아냐, 올핸 황소 같은 녀석이 하나 있어."
"큰소리 치더니만 진 게로군."
"졌어!"
"이사람아, 자네 나이가 몇인가? 아까 하던 이 무슨 사장 얘기나 하라
구."
친구들이 와짝 큰소리로 웃었다. 그 자리에 모인 친구들은 송전보통학교
동창인 최 인진.김 민학.김 종상.박 연철.오 인보 등이었다.
강릉 경포대의 긴 백사장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고 뻗어 나온 암산 위에
망향루인 양 높다랗게 세워진 그 동해호텔은 현대그룹사의 하나인 금강개발
주식회사가 지난 71년에 지은 A급 관광호텔이었다.
그곳에서 바다를 끼고 쭉 올라가면 속초.화진포.고성.통천읍이 있으며,
그 바로 위가 해금강.관동팔경 가운데서도 첫째로 꼽히는 해금강 총석정이
있고, 그 다음이 바로 그의 고향인 송전의 해수욕장이다. 송전 해수욕장 백
사장에는 아름드리 노송이 우거져 있고 그 우거진 노송 사이에 피는 빨간
해당화는 원산의 명사십리 해당화가 시샘을 할이만큼 찬란했으며 아산 산기
슭에 피는 진달래는 황홀하도록 무성했다. 동해호텔 스카이 라운지의 정 주
영 친구들은 그 그리운 고향 하늘을 바다 멀리 바라보면서 고향에서의 옛일
을 이야기하고 있는 중이었다.
"내려가서 해수욕들이나 하지 여기 앉아서 뭣들 하는 거야?"
정 주영도 몸에 묻은 모래를 떨면서 의자를 당겨 앉았다.
"지금 자네 아버지가 도둑으로 몰리던 얘기를 하고 있었어."
부산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박 연철이 말했다.
"원 싱겁긴. 아 그렇게 할 얘기가 없어?"
"자네가 구장 딸하고 연애하던 얘기도 했지."
서울에서 자그만 기업을 경영하고 있는 최 인진 사장 말에 친구들은 또
한바탕 웃었다.
"구장 딸이 외지에 나갔다 돌아올 때면 자넨 으례 정거장으로 마중을 나
갔었다며?"
"그때야 책이 귀한 때니까 책을 사 오나 해서 나갔었지."
"그래 손목이나 한번 잡아 봤나?"
아들들을 잘 둬서 서울에서 걱정 없이 살고 있는 김 민학이 묻는 말에 또
한번 웃음꽃이 폈다.
"그런 얘긴 오감사가 꺼냈어?" 하고 정 주영은 오 인보를 돌아보았다.
"아, 아녜요. 얘기하다 보니까...."
"아니 오 인보는 왜 이런 자리에서도 이렇게 질질 매나? 아 제가 회장이
면 회사 안에서나 회장이지 친구기리 모인 데서도 회장이야?"
"맞아 맞아."
그러나 오 인보는 정 주영보다 나이도 많았지만 공사를 막론하고 깍듯이
그를 상사로 받들었다. 여태껏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있는 김 종상도 친구
정 주영 덕분에 걱정 없이 지내고 있는 처지였다. 그는 조선소 영선계 관리
인으로 근무하고 있었지만 회사안에서는 정회장의 친구라는 사실 하나만으
로도 남들이 부러워하는 많은 혜택을 누리고 있었다. 조금 전 그가 얘기한
정 주영 선친이 도둑 누명을 썼던 사연은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농촌에서 소가 재산목록 중의 큰 몫을 차지하는 것은 에나 지금이나 매한
가지다. 시골에서는 가을 추수가 끝나면 대개 소를 개비하기 마련이었다.
큰 소를 팔아서 줄이거나 농토를 장만하거나 또 작은 소를 팔아서 다음 해
농우로 쓸 만한 큰 소로 바꾸거나 하기 때문이다.
정 주영이 보통학교 6학년 때다. 어느 날, 그의 선친 정영감이 건넛마을
에 사는 지영감 집에 놀러간 일이 있었다. 그날 지영감이 송전 쇠전에 소를
내다 팔았다는 얘기를 듣고 소값을 알아 보기 위해서였다. 마침 그도 소를
개비할 마음을 먹고 있는 터였다. 그는 이 얘기 저 얘기 하는 사이에 밤이
깊어지고 눈까지 내리는 바람에 그날 밤을 지영감과 한방에서 자게 되었다.
새벽녘에 잠을 깬 지영감이 소 판 돈 80원이 없어졌다면서 정영감에게 내
놓으라는 것이었다. 소 판 돈을 구경도 못 한 정영감이었지만 계제는 꼭 오
해하기 좋을 만큼 되어 있었다. 지영감은 그날 소 판 돈을 건사할 만한 곳
이 마땅찮아서 그냥 전대를 배에 찬 채 잠을 잤는데 그 전대가 없어졌다는
것이었다.
그 시절만 해도 뜨끈뜨끈한 맨방바닥에 옷 입은 채로 누워서 이불 한자락
만 덮고 자는 것이 예사였다. 그러니 한이불 속에서 같이 잔 정영감이 속절
없이 누명을 뒤집어쓰게 되었던 것이다.
정영감은 하는 수 없이 집에서 먹이던 소를 팔아서 그 80원을 갚아 주었
다. 단돈 십전이 아까와서 창경원의 동물원 구경도 포기할 정도의 정영감이
고 보면 심화병으로 몸져 누운 것쯤은 당연한 일이었다.
정 주영은 동생들을 불러 놓고 진짜 도둑놈을 잡아서 돈 80원도 도로 찾
고 아버지의 누명도 벗겨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동네 어떤 사람이 분수에 넘
게 돈을 쓰는가 하는 것을 잘 살펴보도록 하라고 일렀다.
그로부터 1년 후, 지영감 옆집에 사는 장영감이 소를 샀다. 그 사실을 안
정 주영이 장영감을 찾아갔다. 그는 장영감이 일년 전 지영감의 소 판 돈을
훔친 장본인이라고 단정했던 것이다. 지영감에게는 근본적으로 소를 살 만
한 돈의 수입원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 주영은 장영감을 회유했다. 솔직하게 털어 놓으면 지난 일을 불문에
붙이겠지만 만약 거짓말을 할 경우에는 경찰에 고발할 것이라고 했다. 처음
에는 펄쩍 뛰던 장영감도 어디서 난 돈으로 소를 샀느냐고 추궁하자 마침내
는 진실을 고백하고야 말았다.
1년전 그날 밤, 변소에 갔던 장영감이 그 전대를 주웠던 것이다. 사돈하
고 뒷간하고는 멀수록 좋다고 해서 시골에는 으례 변소가 멀리 떨어져 있게
마련이었다. 더구나 울도 담도 없는 경우에는 변소가 텃밭 가까이에 있었
다. 장영감이 새벽녘에 변소를 가는데 눈속에서 툭 채는 것이 있어 주워 들
고 방에 돌아와 보니 전대였더라는 것이다. 그것은 소를 판 지영감이 장터
에서 기분으로 막걸리 한 사발에 안 주 한 점 먹은 것이 배탈을 만나는 바
람에 변소를 다녀 오다가 눈 속에 떨어뜨린 전대였던 것이다.
"이봐 정회장, 이사장 얘기 계속해."
"아 그래서 목욕탕을 하나 지어 줬지 뭘."
"그래서 어떻게 됐어?"
"어떻겐 뭘 어떻게? 잘 지냈겠지."
정 주영이 신입사원들과 씨름하러 가기 전에 한 이사장 이야기란 이런 것
이었다.
자유당 말기에 우리 나라 토건업계를 한손에 쥐고 흔들던 이모씨에 관한
얘기였다. 그 무렵 토건업계엔 5인조가 있어서 정부가 발주하는 큰 공사는
대개 그들이 나눠 먹기 식으로 도급을 맡아 왔었다 그때만 해도 현대는 그
5인조에 끼지 못할 때였으므로 정부 발주공사가 있다 하면 악착같이 경쟁을
하자고 끝까지 덤벼서 겨우 어떻게 한 몫을 얻곤 했다.
그 5인조의 두목격이던 이사장이 5.16이후에 된서리를 맞고 형무소를 다
녀 나와서 하루는 정 주영을 부르는 것이었다. 그는 그 동안에 정치를 하느
라고 선거빚도 남아 있는데다가 부정축재 처리 때 거의 모든 재산이 국고로
환원도다시피 해서 초라한 한 시정배로 몰락한 때였다.
정 주영은 얼마 전까지도 사사건건 경쟁을 하자고 그를 쫓아 다니면서 괴
롭히던 생각을 해서라도, 더구나 불우한 처지에 빠진 그가 보자는데 안 가
볼 수 없었다. 이사장을 만난 정 주영은 반가왔다. 겉으로 보기에는 풍모도
여전했고 말에도 여유가 있어보였다.
"정사장을 보자고 한 건 다른 게 아니고 좀 봐달라는 얘길 하려구 그래
요."
"봐드릴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봐드려야죠."
"정사장은 그때 우리 5인조에 안 끼길 잘했어. 이번 부정축재에 안 걸린
사람 정사장 하나밖에 더 있어요?"
"그땐 그래도 이사장님이 섭섭했읍니다. 나한테도 잘 봐줄테니 가만 있으
라고 하시구선......."
"잘 봐주려고 했었어요. 그런데 그만 세상이 이렇게 뒤집혔지."
하기는 그런 세월이 더 오래 계속됐었으면 그가 봐줬을는지도 모를 일이
었다. 그는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정사장, 나 좀 먹고 살게 해 줘야겠어."
"그러십시다. 먹고 사는 거야 뭐 어렵겠읍니까?"
"난 최소한 하루 아침저녁으로 목욕은 한탕씩 해야 사는 사람이요. 그리
구 목욕 한탕 하고 나면 맥주 한병씩은 마셔야겠구 말야. 그리고 또 난 여
자가 없으면 심심해서 못 살아요."
(이 영감이 팔자 좋은 소리도 하는구나......)
"그러니 정사장이 몇 사람과 의논해서 내가 그렇게만 지낼 수 있게 해 줘
요."
"어덯게 해야 그렇게 지낼 수 있겠어요?"
"간단하지 뭘."
"?"
"나 목욕탕이나 하나 지어 줘요. 그러면 목욕은 공짜로 하고 맥주는 목욕
탕에서 버는 돈으로 마시고 여자는 매일 목욕하러 오는 여자들을 보면 될
것 아니요?"
그래서 정 주영은 그가 요구하는 대로 몇몇 사람들과 의논해서 내자동에
다 멋있는 목욕탕을 지어 준 일이 있었다.
"최사장, 자네 집 있는 데가 내자동이지?"
부산의 박사장이 물었다.
"왜?"
"자네 부인 혹 내자동 그 목욕탕에 다니지 않았어?"
"핫하....."
좌중엔 또 한바탕 폭소가 터졌다. 그들의 농담은 끊이지 않았다.
그들은 매년 한번씩 추석이면 광주에 있는 정 주영 부모님 산소에서 모이
곤 했다. 다 같은 실향민들이었기 때문에 따로 찾아볼 산소가 없었으므로
그날을 기해서 동창회 모임을 갖는 것이었다.
처음 만났을때 <자네>가 술 한잔 들어가서 얼근해지면 <너>로, <너>가 취
하면 <자식>이 돼서 서로 욕을 주고받아도 낯 한 붉힐 일이 없는 문자 그대
로의 죽마고우들이었다.
현대그룹은 결국 지난 10월 정부의 중화학공업 직권조정에서 전자교환기,
중전기기, 디젤엔진, 동제련 등 4개 분야를 조정당하는 것으로써 일단락을
지었다.
81년 2월, 대통령 임기 7년 단임제를 골간으로 하는 제5공화국 헌법절차
에 따라 전 두환 대통령이 제12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부터 10.26사태 이
후 혼미를 거듭하던 전국은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고 침체와 혼란의 늪에서
허덕이던 경제질서가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했다.
이보다 앞선 1월 초, 정 주영은 현대건설 매출액 1조원 돌파를 자축하는
뜻에서 주한 외국인사 초청 리셉션을 개최한 바 있었다. 롯데호텔 에머럴드
룸에서 개최된 동 리셉션에는 주한 각국 대사를 비롯한 각 대사관의 상무관
들을 비롯해서 금융계.실업계 등 각계에서 5백여 명이나 참석하는 대성황을
이루어 과연 국제사회속에서 현대가 차지하는 비중을 눈으로 실감할 수 있
게 했었다.
81년에도 그는 강력한 수주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싱가폴 국방성이 발주하
는 플라우테콩 섬 매립공사를 2억 3천만불에 수주하는 한편, 친중공 사회주
의국가인 버어마에 진출, 1억불 규모의 나웅제트 다목적 댐 공사를 수주하
기도 하고 그해 12월에는 마침내 이라크에서 8억 2천만불 규모의 사마라 및
팔루자 주택공사를 수주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사우디아라비아의 수주제한조
치 이후 최대 건설시장의 기반을 이라크에 굳힐 수 있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대규모의 공사를 하루아침에 따 낼 수 있었던 것은 아
니었다.
정 주영이 이라크 건설시장 진출을 시도한 것은 76년부터였다. 그때는 사
우디아라비아로부터 수주제한조치를 당하기 이전이었지만 이라크의 건설시
장 잠재력에 관심을 가진 그는 해외공사부 이사 하 오문에게 이라크 진출을
모색해 보라고 지시했었다.
정회장의 특별지시를 받고 리야드에 있는 중동본부로 나간 하오문은 백방
으로 수소문한 끝에 이라크에 가서 공사를 따게 해주겠다는 현지인의 안내
를 받고 비자도 없이 입국했다가 바그다드 공항에서 입국을 거절당하고 차
에 실려 국경 밖으로 추방되는 봉변을 당하고 말았다.
그때 이라크는 북한과의 외교관계를 중시하고 미수교국인 한국인의 입국
을 전적으로 거부하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이라크 건
설시장은 주로 프랑스.이태리.서독.오스트리아.핀란드.벨기에.그리이스 등
의 유럽 업체들과 일본 업체들이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정 주영은 하 오문이 국경 밖으로 추방되는 우세를 당하고 나서도 이라크
진출에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사우디아라비아의 영향력 있는 인사들을 동원
해서 꾸준히 이라크 건설당국자를 설득했다. 그 결과로 78년 3월 현대건설
이 이라크의 제2도시인 바스라 하수처리시설 1단계공사 공개경쟁입찰에 처
음으로 초청되었다.
정 주영은 중동본부에 다시 특별지시를 내렸다. 이번 바스라 하수처리시
설공사 입찰의 최대목적은 이라크 건설시장에 진출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
는 데 있으므로 채산성을 고려하지 말고 응찰해서 필히 낙찰시키도록 하라
는 것이었다.
결국 최저가격인 4천 1백 30만불로 낙찰되어 그해 6월에 계약하고 7월에
착공함으로써 현대는 친소 사회주의국가이며 미수교국인 이라크에 첫발을
내디뎠던 것이다.
그후 현대는 몇 차례 입찰을 시도했지만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현대
의 시공능력이나 성실성을 인정받기에는 시기가 너무 일렀었다. 이라크 당
국은 그후에도 북한과의 외교관계를 의식했음인지 입찰자격을 주는 데 인색
했었고 관리들은 현대 사람을 만나는 일조차 꺼려했었다.
바스라 하수처리시설 공사에서 현대가 성실한 태도로 열심히 일을 해내자
이라크 당국의 태도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같은 신뢰를 바탕으로 80년 2
월에는 바스라 하수처리시설 2단계 공사도 손쉽게 수주할 수 있었다. 2단계
공사 역시 공개경쟁입찰로 발주되어 현대는 다소 높은 가격으로 응찰했었기
때문에 3위로 처졌는데도 발주처측에서는 현대가 적정업체라고 해서 1.2위
를 젖히고 계약해 주는 것이었다.
그 다음으로 수주한 것이 바그다드 슈퍼마켓 공사였다. 이라크의 수도인
바그다드 시내 5개 지역에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의 시장건물을 짓는 공사
인데, 79년 11월 현대를 비롯한 서독.프랑스.인도 등 10개 업체가 치열한
경합을 벌인 끝에 6천 5백만불로 현대가 낙찰을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현대가 이라크 진출의 본격적인 궤도에 오른 것은 80년 7월, 이라
크 건설청이 발주한 3억 4백만불 규모의 바그다드 병원 단지를 수주한 것에
서 비롯한다. 바그다드 병원단지는 이라크 3차 개발계획 일환사업의 하나인
종합 의료단지를 건립하는 것으로서 이는 2005년까지 추진할 예정사업이었
기 때문에 <2005 프로젝트>라고 일컬어지는 야심적인 대사업이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현대가 이라크 진출에는 성공했지만 대형공사를 수주하
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하는 것이 국내외의 지배적 여론이었다. 하기
때문에 정 주영도 아예 먼 훗날을 내다보고 처음부터 현지 현장 소장에게
성실한 시공자세로 신용을 쌓기에 노력하는 한편, 현지 정부나 일반 민간인
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심어 주는 데 최선의 노력을 다하라는 각별한 지시를
내려 놓고 있었다.
회장의 지시에 따라 바스라 현장소장 허 호는 대민봉사활동을 하기 위해
하루는 전직원과 근로자들을 동원해서 우리 나라에서 하던 식으로 새마을청
소를 하러 나섰다가 현지인들의 큰 오해를 산 일까지 있었다.
각자 청소도구를 총대처럼 어깨에 메고 3열종대로 대오를 맞추어 번호까
지 붙이며 걸어가는 근로자들의 일사불란한 모습을 본 현지인들의 눈들이
휘둥그래지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자기네 골목이나 집앞 청소를 거부했다.
그들은 한국 근로자들을 보고 미국의 CIA 훈련을 받은 게릴라 부대라고
쑤군거리는 것이었다. 그런 일이 있은 뒤부터는 현지에서 대민봉사를 하러
나갈 때면 근로자들이 일부러 대열을 짓지 않고 패잔병들처럼 비실거리고
걸어다녔었다.
80년 9월, 이란.이라크전쟁은 현대에 대한 이라크 당국의 신뢰를 더욱 높
이는 계기가 되었다. 9월 22일, 전쟁이 발발하자 이라크에 진출했던 외국업
체들은 거의 모두 철수해 버렸다. 당시 현대가 공사를 벌이고 있던 곳은 바
스라시와 바그다드시였다. 특히 바스라시는 이란에서 직선거리로 35킬로미
터밖에 안 떨어져 있는 데다가 그 일대에는 아바단 정유공장과 미사일 기지
등 공격목표가 많았기 때문에 매우 위험한 현장이었다.
현장팀은 공사를 중단하고 사무요원만 평시 근무를 계속하면서 모든 전시
상황을 체크해 갔다. 25일부터는 미사일 전쟁으로 확대되어 바스라시 근처
에서도 미사일이 발사되는 등 전쟁이 더욱 치열해지자 현장 근로자들은 중
동본부 지시에 따라 일단 쿠웨이트를 철수했다. 그러나 현장의 직원 및 근
로자 8백여 명 중 70여 명은 그대로 남아서 대피시설을 갖추고 현장을 지켰
다.
한편 바그다드 현장의 경우에는 3백 50여 명 중 절반은 남아서 작업을 계
속했다. 바그다드시 교외에 산발적으로 포탄이 날아와 터지고 있는 때였다.
그러나 21개월이라는 계약공기가 너무 촉박했기 때문에 그 정도의 위험으로
공사를 중단할 처지는 못 됐었다. 물론 계약서상에는 천재지변이나 전쟁 기
타 불가항력적인 사정에 의해서 공사를 할 수 없거나 자재.장비.인명에 피
해가 있을 경우에는 발주처에서 보상해 주기로 명시되어 있었다. 따라서 현
대로서는 공사를 중단하고 현장을 떠난다고 해도 책임질 일은 아무것도 없
었다.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미 작년의 이란 철수경험을 가진 현대로서는
일단 유사시에는 언제든지 24시간 이내에 철수할 수 있는 만반의 태세를 항
상 갖추어 놓고 있었다.
그런 어느 날, 현장에 나타난 바그다드 경찰은 언제 포탄이 날아올지 모
르는데 대피하지 않고 무슨 작업을 하느냐고 호통을 치는 것이었다. 마침
현장에 나와 있던 바그다드 지점장 이 종순이 당신네들을 위해서 하는 일인
데 왜 와서 잔소리를 하느냐고 도리어 야단을 쳤다.
잠시 후, 바그다드 경찰의 보고를 받은 건설청 장관이 현장에 달려 나왔
다. 경찰의 보고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건설청 장관은 물었다.
"다른 나라 회사들은 다 철수했는데 왜 현대는 여태 남아서 일을 하고 있
는가?"
"우리도 철수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본사의 보스(정회장)가 그대로 남으
라고 해서 남아 있는 거다."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물론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보스의 말이 친구가 곤란한 경우에
처했을 때 도와 주는 친구가 진정한 친구 아니겠느냐고 했다."
건설청 장관은 이 종순 지점장의 두 손을 잡으면서,
"슈그란, 슈그란(고맙다)......." 하고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그뒤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도 어느 공개석상에서,
"전쟁 중에도 이라크에 남아서 공사를 계속한 외국업체를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라고 선언한 적이 있었다.
그런 차에 외채에 시달려 오던 북한이 이란측에다 무기를 수출하는 바람
에 바그다드의 북한 대사관이 폐쇄되고 한국을 대표하는 현대건설이 이라크
의 전폭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건설시장에서의 강력한 경쟁업체로 부상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현대건설은 8억 2천만불 규모의 대단위 주택공사에 이어 82년 7월에는 이
라크 철도청이 발주하는 9억 6천만불 규모의 북부 철도공사를 수주하는 개
가를 올렸다.
82년 정 주영은 리비아에서도 5억 7천만불 규모의 탈염담수화 플랜트공사
와 3억 8천만불 규모의 화전설비를 수주했다.
현대가 리비아에 처음 진출한 것은 79년 말경이었다. 리비아에서는 그전
에 이미 건설붐이 일어나 유럽에서는 프랑스.이태리 등이 진출해 있었으며
국내업체 가운데서도 삼성.대우 등이 진출해서 주택공사를 수주 시공하고
있었다.
정부는 미수교국 진출에 대해서는 1국 2개 업체만 지정 진출시킨다는 방
침이어서 리비아의 경우는 이미 진출한 삼성.대우 이외의 업체 진출을 금하
고 있었다. 그러던 중 현대가 79년 말 리비아 당국으로부터 라스라누프 항
만공사 PQ입찰 초청을 받았었다. 그러자 우리 정부측에서도 공사규모가 큰
데다가 항만공사에 관한 한 시공 경험이 풍부한 현대의 경쟁력을 따를 만한
국내업체가 없었기 때문에 그 공사에 한해서 종전의 1국 2개 업체 규제 방
침을 완화하고 현대로 하여금 응찰해도 좋다는 허가를 내주었던 것이다. 그
래서 현대가 그 공사 입찰에 참가해서 미국의 레이몬드 인터내셔널, 서독의
버어핑거, 필립 홀츠만, 네덜란드의 볼커스테븐 등 4개 업체를 젖히고 그해
12월에 2억 9천 5백만불로 낙찰시켰던 것이다.
그후 정부에서는 해외건설 수주목표액 달성 지원책의 일환으로 종전의 미
수교국 진출규제를 대폭 완화해서 1국 5개 업체로 늘림에 따라 현대는 그대
로 눌러 앉아서 80년 10월에는 다시 플랜트 턴키공사인 벵거지 정유시설 공
사를 수주하고 같은 해 12월에는 데르나 도로공사를 수주 시공함으로써 완
전한 기반을 굳혀 왔던 것이다.
또한 82년 사우디아라비아의 2년간이라는 수주제한조치가 경과됨에 따라
정 주영은 다시 과감한 수주활동을 전개해서 얀부의 오일포트 공사(3억 8천
만불)를 비롯 리야드의 종합병원 공사(1억 3천만불), 담수청의 송수관 시설
공사(1억 2천만불)등을 수주하는 한편, 말레이지아에서는 2억 3천 5백만불
규모의 세계 3대 장대교의하나인 7천 9백 58미터 길이의 패낭교를 수주했
다. 또 싱가폴의 마리너센터 건물(2억 7천만불)과 케냐의 철강압연공장 건
설(1억 2천만불)공사 등을 수주함으로써 66년 태국 고속도로로 해외에 진출
한 이래 최고 최대의 공사 수주실적을 기록했다.
정 주영이 야심을 갖고 도전하는 20세기 첨단과학의 총아 반도체 생산단
지를 이천에 착공한 것도 82년이며 그의 꿈이자 숙원인 국토확장사업을 위
해 서산 간척 B지구 방조제의 최종 물막이 공사를 끝낸 것도 금년이었다.
그리고 정 주영은 지난 5월, 미국의 죠지 와싱턴 대학에서 명예 경영학박
사 학위를 수여받았으며 (이미 75년 경희대학에서 명예 공학박사 학위를 수
여받은 바 있음) 작년 9월 말 한국 재계를 대표하는 대표단의 일원으로 바
덴바덴에서 개최된 83차 국제올림픽총회에 참석해서 88올림픽을 서울로 유
치하는 데 비상한 수완을 발휘하더니 11월에는 88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 부
위원장에 피선되고 금년 7월에는 또 대한체육회 회장에 피선되기도 했다.
그러나 82년은 정 주영 생애에 지울 수 없는 가장 비통한 상처를 안겨 준
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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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 또 끝없는 전진
82년 초 정 주영이 작년과 마찬가지로 롯데호텔 에머럴드 룸에서 주한 외
국인 신년 리셉션을 주최한 다음 1월 9일 그룹 산하의 사장단 20명을 거느
리고 세일즈차 일본.미주.유럽 등지를 순회하는 동안 이라크 바그다드에 들
러서 제1차 해외사업회의를 주재하고 돌아와서 43월 28일, 다시 두번째로
미국 출장을 갔을 때의 일이다.
로스앤젤리스 다운타운에 있는 힐튼호텔에 여장을 푼 그는 5월 10일로 예
정된 국제경영인대회에서 행할 스피치 원고를 꺼내 들고 있었다. 이윽고 노
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요."
도어 소리가 났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스피치 원고만 들여다 보고 있었
다. 방안에 들어선 이 병규 비서는 그냥 참혹한 얼굴을 하고 서서 두 다리
만 후들후들 떨고 있었다.
그의 출장에 비서가 수행하는 일은 여간해서 드문 일이다. 그는 지금 나
이에도 국내에서는 물론 외국 출장에 비서를 데리고 다니는 일이 거의 없었
다.
새벽 대여섯시 사이에 그가 현대연수원(전 서울중고등학교 자리)운동장에
마련된 테니스 코트에서 공을 칠 때면 그를 상대하는 젊은 사원들이 오히려
먼저 지쳐서 헐떡거렸다. 노익장이란 말은 그를 두고 하는 말 같았다.
그런데 이번 출장에 이비서가 수행한 것은 그의 출장목적이 말해 주듯이
몇 가지 의전절차를 차려야 할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5월 15일에 귀국할
예정인 그의 체미 스케쥴을 보면 미국 보잉 항공사와의 항공기 부품 국내제
작에 관한 협의와 원자력설비 생산에 관한 디트로이트 회의에 참가, 씨리콘
베리의 전자산업단지 시찰, 그리고 앞서 얘기한 국제경영인대회에서의 스피
치와 죠지 와싱턴 대학으로부터의 명예 경영학박사 학위 수여식 등등이었
다.
정 주영은 도어 소리가 났는데도 아무 기척이 없어서 스피치 원고를 보다
말고 얼굴을 들었다.
"아니, 왜 그러구 섰어?"
"회장님......." 하는 이비서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의 얼굴은 아까보다
도 더 창백했다.
"무슨 일야?"
"저어 이거......지점에서 보내 온 메모입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메모지 한 장을 정 주영에게 건넸다. 메모지를 받아
보는 순간 그의 얼굴은 전류 같은 경련이 스쳤다. 그리고 이비서를 쳐다본
채 입을 열면서도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때가 4월 29일 현지 시간으로 하오 3시.
"이게 정말이야?"
정 주영의 목소리도 떨리는 듯했다.
"서울로 전화를 해 보시죠."
"음, 걸어 봐." 하곤 소파 등에 고개를 젖히는 그의 얼굴은 전신의 피가
역류하는 듯 벌겋게 달아 오르고 있었다.
장남 몽필의 사망을 전하는 비보였다.
(어제 공항에 나와서 아버지 안녕히 다녀오십시오 하던 몽필이가 죽다
니..........)
그의 눈에 흥건히 고였던 눈물이 주룩 귀쪽으로 흘러 내렸다.
사실 그동안 정 주영과 장남 몽필은 부자간이면서도 다소 소원한 사이였
다. 그 이유는 솔직히 말해서 아버지 정 주영의 자식들에 대한 수업관이 지
나칠이만큼 냉엄한 데 원인이 있었다.
그의 아들 8형제 가운데 매를 맞지 않고 자란 아들은 한 사람도 없었다.
누구네 집 자식은 매 안 맞고 자란 자식이 있을까만, 그들이 맞는 매는 여
느 집 자식들이 맞는 회초리가 아닌 몽둥이였다.
남들은 하기 좋은 말로 내가 갑부집 자식이냐고 하는 말을 '내가 정 주영
이 아들이냐'고 하지만 정작 갑부집 자식들인 정 주영의 아들들은 그 흔해
빠진 자가용차 한번 타고 등교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밖에 대 놓고 큰소리를 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언
젠가 그는 <정 주영회장과 100인의 대학생>이라는 KBS TV 대담프로그램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 기업이 건전한 기업인지 아닌지는 기업주나 기업주 가족의 사생활을
보면 알 수 있어요. 그들의 생활이 건전하면 그 기업도 건전할 것이고 또
반대로 그들의 생활이 건전하지 못하면 기업 또한 건전하지 못할 거예요."
그는 돈 많은 집 자식들의 탈선행위를 많이 보아 왔다. 그때마다 비등하
는 사회의 비난의 소리도 많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자식들만은 그
런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게 하겠다고, 좀 심하지 않느냐는 주변 사람들의
충고를 들으면서도 자식들을 가혹할이만큼 억압해 왔었다. 그 중에서도 특
히 몽필에게는 더 엄격했었다. 자신의 대를 이을 장남인 동시에 많은 동생
들의 본이 될 큰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진의를 납득하지 않는 몽필의 불만은 날로 쌓여만 갔다.
나이가 들면서부터는 아예 무서운 아버지 앞에는 잘 나타나려고도 하지 않
았다. 그가 현대건설 이사로 선임된 것은 75년. 하지만 그는 아버지가 바라
는 만큼 회사 일에 열중하지 않았다.
그런 아들의 근무자세를 그냥 보아 넘기는 아버지도 아니었다. 한바탕 야
단을 치고 나면 아들은 며칠씩 나타나지도 않았다. 자신이 성장해 온 과정
만 생각하고 자식들 역시 자신처럼 성실해 주기를 바라는 아버지 마음은 안
타까왔다. 그는 입버릇처럼 개탄해 마지 않았다.
"배가 고파 보지 못해서 그 모양이야. 배를 곯아 봤어야 배 부른 행복이
뭔지를 알지? 호강에 지쳐서 그 모양이야." 하고 아들에 대한 불평을 할 양
이면 옆에서 듣고 있던 그의 아내는 으례 이렇게 변명하곤 했었다.
"요즘 아이들 다 그렇지 뭘 그러세요. 어떻게 자식이 당신 같기를 바라세
요?"
"임자가 싸고 도니까 몽필이가 그 모양이라구."
하지만 사실은 아내도 그에 못지 않게 자식들에게는 엄격했다.
그래서 아들들의 아버지에 대한 불평이나 불만이 어머니 앞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은 아버지에 대한 불만이나 아버지에 대한 특별
한 요구가 있을 때면 으례 고모를 찾아가서 하소연하곤 했었다. 어머니 말
보다는 고모 말을 더 잘 받아들이는 아버지였다.
특히 몽필의 경우는 고모 잔등에 업혀서 자랐다. 고모는 일찌기 아버지가
자동차 써비스공장을 할 때부터 한집에서 살아 왔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또
그만큼 고모를 끔찍하게 사랑했었다. 어머니가 아프다면 약이나 사다 먹으
라는 아버지였지만 고모가 아프다면 병원에 가라는 아버지였다.
몽필이가 아버지한테 혼나고 나서 회사에도 안 나오고 집에도 안 들어오
는 날이면 그는 으례 고모집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것이 고작이었지만 몽필
로서는 그러는 것이 아버지에 대한 최대의 데먼스트레이션이었다. 다른 부
자집 자식들처럼 낭비벽이 심하다거나 여자관계가 복잡하다거나 한 것은 아
니었다. 무엇보다도 일에 열성을 내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결점이었고 그
결점을 아버지는 늘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던 몽필이가 아버지를 이해하고 일에 성의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현
대종합상사 사장에 취임하면서부터였다.
그가 사장으로 취임하던 77년에 현대종합상사는 3억불의 수출실적을 올렸
는가 하면 이어 3년 후인 80년 현대건설이 매출고 1조원을 올렸을 때 현대
종합상사는 10억불의 수출기록을 수립함으로써 우리 나라 전체 종합상사 중
에서 1위의 영예를 차지했었다.
81년, 인천제철 사장으로 전임된 몽필은 어느덧 아버지 스타일을 닮아가
고 있었다. 그해 2월 인천제철은 H형강공장을 짓기 시작했었다. 새벽 6시
돌관작업 현장에 나타난 몽필은 12시가 다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가곤 했었
다.
아버지도 장남의 열성을 알아주게 되었다. 아버지와 장남은 가끔 새벽 5
시 30분에 인력개발원 테니스장에서 만나곤 했다. 부자간에 때려 넘기는 공
소리가 새벽 공기를 가르며 울렸다. 테니스를 끝내고 샤워장에서 땀을 씻어
내며 그날에 해야 할 일을 얘기하는 부자는 언제나 훈훈한 정감에 넘쳐 흘
렀다.
그 아들이, 그 몽필이가 죽었다는 것이었다. 정 주영은 허탈했다. 아들의
죽음을 실감할 수가 없었다.
"회장님, 서울 전화 나왔읍니다."
이비서가 전화통과 수화기를 들고 정 주영 앞으로 다가왔다.
"누구야?"
"마침 자동차의 정사장님이 청운동에 와서 계시는군요."
정 주영은 이비서가 건네 주는 수화기를 귀에 대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야." 하고 말문을 열었다.
"접니다, 형님......."
정 세영의 목소리도 저음이었다.
"몽필이 죽었다는 게 사실야?"
"........"
"어떻게서 죽은 거야?"
그것은 운명의 아이러니였다. 미국으로 떠나는 아버지를 전송하고 난 몽
필은 그 길로 곧장 울산으로 내려갔었다. 그동안 H형강공장 짓는 일로 시간
이 없어서 너무 오래도록 고모를 찾아뵙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고모는 현대
건설 수석 부사장으로서 영남지사와 해외공사지원부를 관장하고 있는 고모
부 김 영주와 함께 울산에서 살고 있었다.
고모를 만난 몽필은 그동안에 쌓였던 얘기를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몰랐었
다. 밤 12시가 넘어서야 몽필은 올라가야 한다고 자리를 떴다. 고모는 내일
아침 일찍 올라가라고 말렸다. 그러나 몽필은 내일 새벽 일찍 공사장에 나
가 봐야 하기 때문에 차 안에서 자면서라도 꼭 올라가야 한다고 고집했다.
고모는 몇해 전가지만 해도 늘 오라버니 속을 썩혀 주던 큰조카가 그토록
착실해진 것을 내심 대견하게 여기면서 굳이 올라가야 한다기에 잡지 않았
다.
그날 새벽녘, 경부고속도로 상행선을 달리던 몽필의 승용차를 하행선 쪽
으로 달려오던 트럭 한 대가 중앙 분리대를 넘어서면서 정면으로 들이받았
다. 그 충돌사고로 몽필과 운전사가 현장에서 즉사한 것이었다. 몽필의 승
용차를 들이받은 트럭은 철강재를 싣고 울산 조선소를 향해 달리던 인천제
철 소속의 화물차였다.
"그럼 사고현장에는 누가 가 있어?"
"매부하고 몽준이가 나가 있읍니다."
몽준은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콜럼비아대학 경
영대학원에서 수학한 다음 MIT 경영대학원을 졸업하고 나서 지난 80년에 귀
국, 지금은 현대건설 종합기획실에서 업무관리를 담당하고 있는 그의 6남이
다.
"언제 돌아오시겠읍니가, 형님?"
"내가 간다고 죽은 사람이 살아 올 것도 아니구...........네가 뒤처리를
잘해."
"하지만 형님이 돌아오셔야........."
"장사 치르구 나면 들어가지. 장지는 우리 사원 휴양지가 있는 풍덕 쪽이
좋을 거야."
"알겠읍니다."
"그리고 몽준이한테 어머니를 잘 위로하라고 해. 운전사의 장사도 후하게
지내라고 이르구......."
"형님...."
정 세영의 목메어 우는 소리가 수화기에서 흘러 나왔다.
"울긴......네가 울면 어떻게? 그만 끊는다."
수화기를 내려놓는 정 주영의 얼굴은 오히려 모든 것을 체념한 듯 담담하
기까지 했다.
"이군!"
"예?"
"이 사실을 누구누구 알고 있나?"
"지점 사람 몇밖에 모를 겁니다."
"그럼, 지점 사람들에게 가서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말라고 일러 놔."
"예."
그러나 이비서는 정회장을 방에 혼자 두고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어서 나가 봐."
그제서야 이비서는 방을 나섰다. 정 주영은 한꺼번에 몰아닥치는 심신의
피로를 감당할 길이 없었다. 그는 침대로 가서 누웠다.
오후 5시. 치과에 가기로 약속된 시간이었다. 이비서는 회장을 모시고 치
과를 다녀왔다. 회장은 가면서도 오면서도 아무 말 없었다.
6시 30분, 그는 호텔에서 지점장 및 그를 수행한 업무관련 사장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그때도 그는 말 한 마디 없었다.
이튿날 아침 일찍 보잉항공회사측에서는 정회장의 오늘 스케쥴이 예정대
로 진행되겠느냐는 연락이 왔다. 그들은 이미 현지 보도를 통해서 그 불행
한 사건을 알고 있었다. 현지에서 발행되는 한국 신문들은 조간에서 이미
그 사실을 사회면 3단기사로 크게 보도하고 있었다.
정회장의 예정된 스케쥴에는 변동이 없다는 이비서의 통보를 받자 보잉항
공회사측에는 부사장이 직접 미리 호텔을 방문해서 정회장에게 조의를 표하
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해 왔다. 이비서는 정회장으로서는 그와 같은 자신의
불행이 알려지는 것조차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하고 보잉항공회사 부사
장의 제의를 정중히 사절했다.
다만 한 가지 토요일 오후에 LA에서 항공회사측 중역들과 골프를 치기로
했던 일정이 현지의 현대가구조립공장 시찰로 바뀐 것 이외에는 정회장의
여정은 예정대로 차질 없이 진행됐었다.
5월 18일, 정 주영은 창사기념 35주년을 맞아 유공 사원에 대한 감사장과
부상을 수여하는 한편 그룹사 회장제를 신설하고 대폭적인 승진인사를 단행
했다.
정 주영은 유공 사원 감사장 수여와 승진인사에 즈음하여 자신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우선 회장인 나 자신이 기업 하나하나에 대해서는 해야 할 일을 다 못한
것 같습니다. 외국의 예를 보면 회장이 많은 일거리를 모아서 영업실적을
올리고 있던데 나는 실제로 영업활동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생각
합니다. 따라서 부사장이란 명함을 가지고 상대방 회사의 사장을 만나는 것
보다 사장이라는 직함으로 사장을 만나는 것이 수주활동에 보탬이 되리라는
생각에서 이번에 부분적으로 체제를 개선하게 됐읍니다.
그리고 이건 내 집안 애기지만 이번에 몽필이가 비명에 타개한 후 반성한
일이 많습니다. 그동안 대기업의 자녀들이 많은 사회문제를 일으켜 오는 것
을 보고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내 형제나 자식들을 지나치게 억압해 왔기
때문에 이 기업 안에서 사실은 많은 일을 하고 있는데도 회사 안에서 적격
하게 대우를 받지 못하게 하지 않았나 하는 감회도 느꼈어요. 지나치게 억
압을 해서 사내에서 위축되게 할 것도 없고 지나치게 위해서 필요없이 외형
상으로 우상적인 존대를 받아 다른 사람들의 눈살을 찌프리게 할 것도 없다
는 거죠.
또 나 혼자서 이 현대그룹을 세운 것이 아니고 현대를 영원한 직장으로
믿고 일해 온 여러 중역들의 오랜 헌신적 노력에 힘입어 우리 현대가 오늘
이만큼 발전한 겁니다. 내가 미국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얻게 된 것도 여러
분들의 덕택이라는 생각에서 이번 승진인사와 감사장 수여를 하게 된 것입
니다.
전체적으로 감사의 뜻을 표하자면 회사에서 오랫동안 일해 왔던 말단 기
능공과 정비공, 공원에서부터 간부사원에 이르기까지 모든 임직원 한 사람
도 뺄 수가 없읍니다. 그러자면 그 수가 한이 없기 때문에 회사의 중추적인
역할을 해 왔던 몇몇 경영층에게만 감사장을 주기로 했읍니다.
오늘날 한국경제에는 많은 문제가 있지만 우리 현대그룹의 영업 및 수주
활동은 순조로운 편입니다. 유가파동, 인플레, 고금리 등으로 인한 여러 가
지 어려움과 불경기도 우리는 인화로써 충분히 극복할 수 있었읍니다. 앞으
로도 그룹 각사 임직원들이 일치단결해서 보다 더 분발해 줄 것을 당부해
마지 않습니다."
그날 발표된 승진인사 내용과 감사장 수여 대상자는 다음과 같다. 먼저
현대중공업과 현대엔진에 회장제를 신설하고 이 춘림을 현대중공업 회장으
로, 그리고 김 영주를 현대엔진 회장으로 각각 승진 임명하는 한편, 현대중
공업 사장에는 종합계획실 업무관리 담당상무 정 몽준을, 현대엔진 사장에
는 이 형벽 부사장을 각각 승진 임명했다. 그리골 현대미포조선의 백 충기
부사장과 현대중전기 지 현주 부사장을 각각 사장으로 승진시키고 동서산업
사장에는 이 영복 진주공장 공장장을 임명하는 등 그밖에도 많은 전무.상무
들을 부사장으로 또는 전무로 승진 발령했다.
감사장과 부상을 수여한 사람은 김 영주를 비롯해서 정 세영.이 춘림.이
명박.박 영욱.백 충기.지 현주.양 봉웅.김 형벽.권 기태.김 주신.전 갑원.
박 재면.김 용재.박 규직 외 30여 명이나 되었다.
이에 앞서 지난 15일에 귀국한 정 주영은 김포공항에 도착하는 즉시로 6
남 몽준의 안내로 순원 근처 풍덕에 마련된 장남의 묘소를 다녀와서 그날
밤 가족회의를 가진 바 있었다. 그 자리에서 매부 김 영주는 정회장의 지금
가지의 아들들에 대한 수업관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그 아들들에게도 그룹사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대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게 할 것을 강력하게 건의
했다. 이튿날 정 주영은 주요 그룹사 사장단 회의를 소집한 자리에서 자신
의 구상을 밝히고 특히 동서산업 사장에 진주공장 공장장 이 영복을 임명하
고자 하는 것은 그가 죽은 몽필의 처남이라는 점을 들어 양해를 구했으며,
또한 6남 몽준을 현대중공업 사장에 임명하고자 하는 것은 유능한 이 춘림
회장 밑에서 경영자로서의 자질을 쌓게 하려는 것임을 설명하고 나서 그룹
산하의 각 사장들의 각별한 협조를 요청한 바 있었다.
현대그룹 사원들 사이에는 정회장의 장남 사망과 6남의 현대중공업 사장
취임을 계기로 갑자기 현대그룹 후계자 논의가 일기 시작했다. 사원들은 이
구동성으로 6남의 현대중공업 사장 취임을 가리켜 그것은 장차 그가 현대그
룹의 후계자임을 시사하는 것이라고들 했다. 그룹사 가운데서도 현대중공업
이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었다.
정작 30대의 젊은 사장을 맞게 된 울산의 현대중공업 중역진은 누가 현대
그룹의 후계자냐 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새파란 젊은 사장 밑에서 일
을 해야 하는 그들의 심경은 착잡하기만 했다.
"거 젊은 친구가 내려와서 사장입네 하고 설치고 다니면 어떡허지?"
"할 수 없지 뭐, 사장은 사장인데."
"더구나 회장 아들이니.........."
"김부사장은 머리에 물이나 들이시오. 그 허연 머릴 들고 어떻게 젊은 사
장이 버티고 있는 사장실을 드나들 거요?"
"내 머리 허연 걱정 말고 이부사장은 내일이라도 병원에 입원이나 하시
오."
"병원은 왜요?"
"그 얼굴의 쭈그럭 살은 어떡허겠소?"
"핫하하......."
특히 나이 많은 부사장들은 농반 진반 얘기하면서도 은근히 젊은 사장 밑
에서 일할 것이 걱정이었다.
그러나 젊은 사장 정 몽준은 소리 소문도 없이 사장으로 취임했다. 취임
첫날 그는 일일이 나이 많은 중역들의 집무실을 찾아 다니면서,
"제가 공부하러 내려온 정 몽준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읍니다." 하
고 인사를 다녔다. 그후로도 그는 나이 많은 중역들을 사장실에 앉아서 부
르는 일이 없었다. 결재를 하다가도 잘 모르는 것이 있으면 그 서류를 들고
직접 담당 중역을 찾아가서 물어 보곤 했다.
그리고 그는 시간만 있으면 공장 구석 구석을 돌아 보면서 현장 기능공들
의 애로사항을 살폈다. 사장용 고급 승용차가 따로 있었지만 그는 포니를
직접 몰고 출퇴근했다.
그가 사장으로 취임한 지 채 석 달이 안 돼서 현대중공업 중역 들간에는,
"과연 우리 사장이 현대그룹의 후계자 감은 후계자 감이야."
"머리도 보통 머리가 아니던데."
"아 서울대학에 미국 엠 아이 티 출신이란 걸 알아야지."
"체구로 봐서도 형제들 가운데 제일 크잖아?"
"키도 아마 회장님보다 더 클 걸?"
"운동도 못 하는 운동이 없다는 거야."
"어릴 적엔 무척 개구장이였다더군. 양쪽 팔다리 하나도 성한 데가 없었
다는 게야."
"왜?"
"다 운동하다가 한번씩은 부러뜨린 모양이야."
"그런데 언제부터 그렇게 으젓해졌지?"
"아뭏든 다행이지 뭔가. 젊은 사장 밑에서 늘그막에 된 시집살이 한번 하
나부다 했는데......."
"다 회장님이 사장 재목이 될 만하니까 사장으로 임명했지, 그 양반이 누
군데 사장재목이 못되는데도 괜히 우리들한테 굽 잡힐려고 당신 아들이라고
해서 덮어놓고 사장 임명을 했겠어?"
"그건 맞는 말야. 회장님이 옛날부터 사람 하나는 귀신같이 보시거든. 이
를테면 지금 후계자 훈련을 시키시는 거겠지."
그러나 장본인인 정 몽준은 자신을 가리켜 후계자 운운하는 소리를 들으
면 정색을 하고 언짢아해 했다. 어느 날 몽준은 고모한테 놀러 갔다가,
"얘 몽준아, 회사 사람들이 너를 칭찬하는 소릴 들으니 이 고모도 정말
기분이 좋더라. 글쎄 네가 현대의 후계자 감이라고들 하지 않겠니?" 하는
말을 듣고 그는 이렇게 대답한 적이 있었다.
"고모님까지 그런 말씀을 하시면 어떡합니까? 제 위로도 형님이 네 분이
나 계시잖아요? 그리고 전 아버님이 내려가서 공부하라고 하셔서 내려오기
는 했지만 사실 이런 큰 회사 사장 노릇하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어요."
그는 학자나 대학교수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하기 때문에 그는 미국에서
돌아오자마자 <기업경영이념>이라는 저서를 집필 발간했으며 울산으로 내려
와서는 시간강사로 울산공대에 나가 경영학을 강의하기도 했다.
83년 늦은 봄. 월요일 사장단 회의에서 정 몽준은 돌아오는 주말을 전후
해서 <기업과 문단의 대화>라는 주제로 울산에서 문인들의 모임을 가지고자
한다는 보고를 하는 것이었다.
"네가 뭘 안다고 문인들을 불러다 놓고 어떡하겠다는 거야?"
정 주영은 아들한테 응당 그전 같으면 그런 식으로 핀잔을 주었을 것이지
만 지금은 변해서 그 자리에서는,
"잘 해 봐."
그리고는 몽준을 따로 회장실로 불러서 조용히 물었다.
"뭐 어떤 계획이야?"
"우리 문단에는 우리 나라 기업을 부정적인 측면에서 보는 문인들이 많거
든요. 그래서 그런 분들을 초청해서 기업의 실상을 보여주고 또 대화를 통
해서 그런 분들의 이해와 협조를 구하려구요."
"음........"
"기업을 국민들에게 좋게 소개할 수 있는 분들도 그분들이고 나쁘게 소개
할 수 있는 분들도 그분들이 아니겠읍니까, 아버님?"
"하긴 그렇지."
"그런데도 우리 나라 기업에서는 그분들과의 관계가 좀 소원한 것 같습니
다."
정 주영은 몽준의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것을 마음 속으로 대견하게 여겼
다. 그러나 그와 같은 중대한 행사를 몽준에게만 일임한다는 것을 불안하게
생각한 그는 자신이 직접 그 행사를 주재하기 위해 울산으로 내려갔다.
조선소 영빈관에서 개최된 대화의 모임에는 문예진흥원 원장 송지영을 비
롯한 구 상.조 병화.최 정희.손 소희.김 남조 등의 원로 남녀 문인들을 포
함해서 70여 명이 참석했다.첫날밤 파아티에는 정 주영을 위시한 울산의 그
룹사 사장단이 호스트가 되어 문인들을 성대하게 접대했다. 워낙 많은 외국
인들을 접대해 오는 호스트로서의 그룹사 사장단의 매너는 자존심 하나로
버티고 사는 문인들의 기분을 흡족케 하기에 족했다.
그날도 정 주영은 젊은 문인들에게 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노래하며 춤을
추었다. 정 몽준의 노래도 앵콜 청을 받았다. 그도 아버지가 쉬는 시간에는
여류 문인들과 함께 플로어로 나가서 춤을 추었다.
일단 공식 파아티가 끝난 다음 정 몽준은 젊은 문인들과 함께 그들이 투
숙한 다이어먼드 호텔로 왔다.
다이어먼드 호텔은 울산의 그룹사를 방문하는 외국 손님 또는 선박건조
관계로 와서 장기체재하는 외국 기술자들을 위해 그룹사의 하나인 금강개발
이 지은 A급 호텔이었다.
젊은 문인들과 정 몽준은 호텔 지하 바아에서 다시 술을 한 잔 나누게 되
었다. 그들 사이에는 격의없는 대화가 오고갔다.
어린 시절 얘기가 나오자 정 몽준은 집앞 비탈길에서 대나무 썰매를 타다
가 팔을 부러뜨린 얘기며 나중에 커서는 대관령 스키장에 갔다가 어깨 뼈를
부러뜨리고 전신에 멍이 드는 바람에 소의 쓸개만 먹던 얘기와 덧붙여서,
"나는 많은 형제 틈에서 자라느라고 그랬는지 모르지만 어릴적엔 점심을
굶는 때가 가끔 있었어요. 노는데 정신 팔다 보면 점심때를 잊는 수가 많잖
아요? 좀 늦게 들어가서 밥 달라면 어머니가 제때에 와서 안 먹었다고 안
주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어릴 적에 집에서 밥 먹으라고 데리러 나오는 아
이들을 보면 이상하고 또 그게 그렇게 부러웠어요. 그때만 해도 우리가 살
고 있던 장충동 집에는 이따금 곡괭이 부대들이 쳐들어올 때였거든요. 지금
생각해 보니까 그때 아마 공사장 노임이 더러 밀리곤 했었나 봐요. 이 사람
들이 몰려와서 돈 내놓으라고 곡괭이로 막 기둥을 탕탕 찍는 거예요. 하
하......" 하고 동석한 문인들을 마냥 즐겨 주고 있었다.
같은 시간에 정 주영은 영빈관에서 같이 묵기로 한 원로문인들과 함께 술
자리를 벌여 놓고 있었다. 그에게는 평소 가까이 지내는 문인들이 많았다.
지금 동석한 송 지영.구 상.조 병화 등도 오랜 친교를 맺어 오는 사이들이
었다.
"이봐, 재지들 말라구. 나도 왕년엔 이 광수씨의 <흙>도 읽었고 방 인근
씨의 <마도의 향불>도 읽었어."
"하하.......세계 명작을 안 읽었기에 망정이지 이거 우릴 문인 대접 안
할 뻔했구나, 응?" 하고 구 상이 정 주영의 농담을 받았다.
"세계 명작도 <삼국지>, <죄와 벌>, <전쟁과 평화> 같은 건 다 읽었다."
"드럽사가 사람 잡는군."
"드럽사가 아냐, 이 사람아. 정말 읽었어."
"드럽사는 뭐야?" 하고 송 지영이 물었다.
"드럽사는 이 정회장이 창작해 낸 말이지."
"무슨 뜻인데, 그게?"
"몇 마디 귀동냥하구 아는 체한다는 말야."
"하하......드럽사리......그럴 듯하군."
영빈관 소속의 한 호스티스가 술안주를 날라 왔다. 구 상이 정 주영에게
물었다.
"어째 오늘은 고수레 아가씨가 안 보이나?"
"글쎄....."
"아가씨, 고수레 아가씬 그만뒀소?"
구상이 호스티스에게 물었다. 호스티스는 누구 얘기인지 몰라서 어리둥절
해 했다. 그러자 정 주영이,
"미스 최말야."
"아 네에, 집에 무슨 일이 있어서 조금 전에 들어갔어요."
"성이 최가고 이름이 고수렌가? 최 고수레?"
"아냐, 정회장이 지은 별명인데 아주 예쁘게 잘생긴 한 아가씨가 여기 있
어요."
"정회장 애인이야?"
"그럴지도 모르지. 하하........"
"예끼 사람, 내 손녀들도 그애보다 크다."
"그런데 왜 이름이 고수레야?"
오래 된 얘기다. 문화계 중진들이 조선소를 시찰하러 왔을 때의 일이었
다. 그때도 영빈관에서 만찬이 있었다. 그 만찬석상에서 시중을 들던 호스
티스 미스 최가 정 주영 앞의 맥주 컵을 넘어 뜨리는 바람에 옷이 함빡 젖
게 됐었다. 미스 최가 당황해 얼어 붙은 것은 물론 동석했던 문화계 인사들
도 일순간 긴장했다. 그때 정 주영이<고수레!>하곤 만장의 긴장을 풀어 놓
았다.
"이거 고수레를 안 하고 먹을랬더니 네가 고수레를 시키는구나, 하
하......자아, 고수레를 했으니 모두들 드시죠." 하고 정 주영은 젖은 옷을
입은 채 만찬을 마친 일이 있었고 그때부터 미스 최의 별명은 고수레가 되
었던 것이다.
이튿날 새벽 6시, 영빈관 복도에는 어젯밤 파아티에 호스트로 나왔던 그
룹사 사장들이 결재서류를 들고 부산하게 모여들기 시작했다. 정 주영에게
는 결재시간이 따로 없고 결재장소가 따로 없었다. 회사에서 시간 약속 때
문에 자리를 떠야 할 경우에는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결재하고 차를 타고 가
면서도 결재했다. 문인들과의 스케쥴이 있는 것을 아는 각 사장들은 결재받
을 시간이 새벽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 앞을 다투어 몰
려 왔던 것이다.
오전 10시, 대화의 시간이었다. 먼저 한 기업을 경영하는 일이 아무리 어
렵다고 해도 생사를 건 전쟁보다는 쉽다는 것을 전제하고 그동안 현대가 겪
어 온 어려움과 신용이 곧 기업의 자산이며 경쟁력이 곧 기업의 생명이라는
요지의 정 주영의 간략한 기조연설이 있은 후 바로 자유토론에 들어가서 한
젊은 문인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방금 정회장님께서 칠팔년 전만 해도 현대가 국제금융시장에서 2천만불
의 입찰 보증금을 마련할 수가 없어서 쩔쩔맸다고 하셨는데 정회장님께서
기업의 자산이라고 생각하시는 오늘날의 국제사회에서의 현대의 신용도는
어느 정도나 된다고 보시는지요?"
"글쎄요, 그때 2천만불도 국제금융가에서는 우리 현대 하나만을 믿고서는
안 줬어요. 한국정부가 보증을 서야 했읍니다. 그러나 지금은 정부 보증 없
이도 어느 국제금융가에 가서든지 우리 현대의 수형 한 장만 가지고도 미화
로 10억불은 꿀 수 있읍니다."
장내에는 탄성에 가까운 소리가 새어나왔다. 기회를 포착했다는 듯이 한
문인이 일어섰다. 그는 모임을 취재하기 위해서 따라온 D일보 문화부 기자
이자 시인이었다.
"현대하면 자타가 공인하는 우리 나라 제일의 재벌입니다. 저는 이 기회
에 정회장님에게 이런 제안을 하나 하고 싶습니다."
문인들 사이에는 사전에 어떡 약속이라도 있은 듯 모두들 회심의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여러 나라에 여러 가지 문학상이 있읍니다만 역시 뭐니 뭐니 해도 우리
는 노벨 문학상을 세계적인 대표적 문학상으로 들 수 있읍니다. 정회장님께
서도 아시다시피 노벨 문학상 상금은 예년 20만불 내욉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문학이 노벨상에 접근하기에는 외국어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것 때문에
그 벽이 매우 두껍습니다. 정회장님께서는 한국의 제일 재벌로서 이미 아산
재단 같은 것도 설립하시고 많은 복지활동을 전개하고 계시는 줄 알고 있읍
니다만 이런 기회에 현대 문학재단 같은 것을 설립하셔서 상금도 50만불 정
도로 하는, 노벨상에 버금 가는 그런 세계적인 문학상을 하나 제정할 의사
가 없으신지요. 그렇게 된다면 외국 문인들이 그 문학상을 타기 위해서 자
국의 문학작품을 우리 말로 번역도 하게 되고 따라서 한국문학의 국제적 지
위도 보다 더 향상되리라고 생각하는데 이에 대한 정회장님의 의향은 어떠
신지 말씀해 주셨으면 감사하겠읍니다."
장내에서 열렬한 박수 갈채가 터져 나왔다. 정 주영은 답변하기 위해 싱
긋 미소하면서 일어섰다. 다시 뜨거운 박수가 일었다.
배석한 정 몽준의 마음은 조마조마했다. 설령 기자의 질문 취지에 찬동한
다고 해도 그 즉석에서 그렇게 하겠다고 답변할 아버지는 아니었지만 그렇
다고 구구한 변명을 해서 모처럼 모인 문인들에게 인색할 재벌이라는 인상
을 주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정말 좋은 생각입니다. 얼마든지 그럴 용의가 있읍니다." 하고 정 주영
이 말문을 열자 문인들 얼굴에는 화색이 감돌기 시작했다.
"내가 가끔 하는 말입니다만, 나 죽어서 관 속에 넣어 가려고 버는 돈 아
닙니다. 50만불짜리 문학상이 아니고 백만불자리 문학상이라도 제정할 용의
가 있읍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있어요."
문인들이 긴장된 얼굴로 정 주영을 주목했다.
"이 지구상에는 큰 개선문이 두 개 있읍니다. 하나는 파리에 있고 하나는
평양에 있읍니다. 어느 쪽 개선문이 더 크냐. 파리에 있는 개선문보다는 평
양에 있는 개선문이 훨씬 더 큽니다. 파리에 있는 개선문은 옛날에 진 거고
평양에 있는 개선문은 6.25사변 후에 진 것이기 때문에 모양도 파리 것보다
는 평양 것이 낫다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파리의 개선문을 알아
줬지 아무도 평양의 개선문을 알아 주는 사람은 없읍니다."
장내는 물을 뿌린 듯이 조용했다. 정 주영은 담담하게 답변을 이어 나갔
다.
"내가 상금 백만불짜리 현대문학상을 제정했다고 가정합시다. 세계의 문
학하는 분들이 현대문학상을 쳐다보지도 않고 비록 상금은 적지만 노벨 문
학상만 타겠다고 그쪽으로만 쏠리게 되면 어떻게 되죠?"
문인들은 숨을 죽이고 있었다. 질문을 했던 기자는 민망한 얼굴을 어쩔
줄 모르다가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 밖으로 나가 버렸다. 정 주영은 다음과
같이 답변을 맺았다.
"만약 여러분이 내가 제정하는 문학상을 노벨 문학상만큼 빛내주고 지켜
줄 것을 책임지겠다고 한다면 당장 내일이라도 이 조선소 전체를 기금으로
하는 문학상을 제정하겠읍니다."
행사를 마친 정 주영은 헬리콥터편으로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잠시 서산
간척공사 현장에 들렀다. 헬리콥터에서 내리자마자 그는 작년 10월에 방조
제공사를 끝낸 B지구에 가둔 바닷물을 손끝에 찍어서 맛을 보았다. 여전히
찝찔한 맛 그대로였다. 가둔 바닷물의 염분이 완전히 가시고 그 물로 농사
를 짓기까지는 아직 5년을 기다려야만 하는 것이다. 농촌에서 자라고 농사
를 지어 본 그는 언제나 농촌의 정서에 한없는 즐거움과 기쁨을 느꼈다. 서
울에서 울산까지 가는 도중에도 골짜기와 들판에서 벼 자라는 풍경이 그에
게는 그 어떤 아름다운 경치보다도 환희를 느끼게 하곤 했다. 늦가울에 벼
를 베어 쌓아 놓은 시골 논둑만 보면 그렇게 마음의 위로가 되고 행복감을
느끼게 할 수가 없었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자라는 것이 그렇게 즐거
울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농촌에서 자랐다는 그 자체에 대해서 더없는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 가난했던 농촌 시절을 돌이켜 생각
할 때마다 고마운 감회에 젖곤 했었다. 가난한 지난 날이 있었기에 한국 제
일 재벌이라는 오늘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간척사업을 구상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그는 어릴 적
에도 나중에 돈을 많이 벌면 농사를 한번 크게 지어 보리라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도 그는 외국 출장 길에서 끝없이 넓은 들판에서 트랙터를 모
는 농부의 모습을 보면 그것이 그지없이 부러웠다. 가능하면 그는 자신도
말년에는 그렇게 고요하고 평화로운 전원에서 정직한 자연을 벗삼아 인생을
사색하며 조용한 여생을 누리고 싶어했다.
늘 그런 생각을 해 오던 78년 여름, 한국에서도 정부의 부동산 투기 종합
대책이 발표되고 토지개발공사가 설립되는 한편 국토개발 연구원이 개원되
는 등 제한된 좁은 국토로 인한 개발도상국가로서의 진통이 일기 시작했다.
그 무렵 정 주영은 국토를 늘리는 한 방법으로서 서해안 일대에 방조제를
쌓아 올림으로써 대대적인 간척사업을 전개하자는 생각을 구체화하기 시작
했다. 더구나 그 무렵에는 대기업들이 공업단지 등으로 많은 국토를 점유한
데다가 대단위의 비업무용 토지를 보유하고 있어서 국민의 비난의 소리를
듣고 있는 때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현대로서는 비업무용 토지를 가져 본
적이 없었지만, 그는 그런 기회에 대기업들이 국토를 점유한 만큼 국토를
늘리기도 한다는 사실을 국민에게 보여주고도 싶었다.
그래서 그가 서산군 서산읍 고북면 해미면 인지면으로 둘러싸인 공유수면
9천 6백 60헥타아르(1헥타아르: 1만평방미터)와 서산군 태안읍 부석면 남면
으로 둘러 싸인 공유수면 5천 9백 30헥타아르에 대한 간척농지개발사업 승
인 신청을 농수산부에 제출한 것은 그해 9월의 일이었다.
그럼 과연 정 주영이 바다를 막아서 농토로 만들려고 하는 땅이 어느만큼
이나 되느냐. 4천 2백만평이 넘는데 쉽게 얘기하면 우리 국민 한 사람 앞에
한 평씩의 땅이 돌아가고도 남는 땅이다. 공사비가 몇 천억원이 들는지는
모르지만 그것을 현대의 자체 자금으로 해 내겠다는 계획이었다. 더구나 그
지역은 조석 간만의 차가 심할 뿐더러 특히 썰물 때 오리가 헤엄을 치다가
는 그 물살이 너무 세서 오리발이 부러진다는 곳으로서 방조제공사는 거의
불가능한 지역으로 알려진 자리였다.
사업 승인 신청을 접수한 농수산부는 물론 회사 중역들도 회의적이었다.
개략적인 공비예산을 산출해 본 결과 그 공사에 들일 돈이면 다른 데 가서
당장 내년부터라도 개간을 해서 씨를 뿌리고 거둘 수 있는 땅을 그만큼 사
고도 남는 예산이었다.
기업으로서는 전혀 채산성이 없는 사업이었다. 그런 사업을 왜 굳이 하려
고 하는지 회사 중역들은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정면으로 반대하
고 나서지 못하는 것은 한번 한다면 하고야마는 정회장의 고집(?)과 자기네
생각이 미치지 못한 정회장의 어떤 공사상의 비방의 공법이 있는지도 모를
일이라서 섣불리 안된다고 했다가는 또 해보기나 했느냐고 당할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방조제공사에는 간척공사 사상 유례가 없는 기상천외
한 <정주영 공법>이 속출했다.
방조제공사는 A.B지구로 나누어 시작되었는데 먼저 착수할 B지구 공사가
본격화한 것은 82년 4월부터였다. 그동안에는 제반 기초조사와 병행해서 일
터인 바다를 잃게 될 인근 어민들의 보상문제를 해결하고 토취장과 석산을
매입하는 한편 중동의 일부 유휴장비를 현장으로 수송해 오기 위해서 현장
해안에 임시 부두를 가설하는 등의 예비공사를 진행시켜 왔었다.
B지구 방조제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부터 등장한 대표적인 정 주영
공법은 <망태기공법>과 <매트리스포장공법>이었다. 방조제공사의 가장 큰
난점은 밀물과 썰물 때의 유실을 어떻게 최소한으로 줄이느냐 하는 데 있었
다. 그것이 곧 공사비를 절감하고 공기를 단축시키는 요체였다. 그래서 정
주영이 고안해 낸 공법이 이른바 망태기공법이요, 매트리스포장공법이었다.
망태기공법이란 잔돌의 유실을 막기 위해서 큰 와이어 망태기를 만들어서
그 망태기 속에다 잔돌을 담아서 방조제 축조 지점인 바다 속에 던져 넣는
방법이다. 아주 간단한 아이디어였지만 여태껏 어떤 간척공사장에서도 사용
된 적이 없는 백퍼센트 유실방지공법이었다.
매트리스포장공법이란 양쪽에서 쌓아 오는 방조제 길이가 길어지고 바닷
물의 유푝이 좁아짐에 따라 차츰 유속이 빨라지면서 사용된 방법으로서 이
때는 바위도 최소한 무게가 8톤 내지 10톤은 돼야 떠내려가지 않고 견딜 수
있을 때이므로 그렇게 큰 바위를 전부 충당해 낼 길이 없어서 고안해 낸 공
법인데, 큰 매트리스로 작은 바위와 잔돌, 흙까지 몽땅 싸서 꿰맨 다음에
10톤 내지 15톤짜리 매트리스를 2백톤 바아지선에 싣고 가서 방조제 축조
지점에 던져 넣는 방법이다. 이 역시 간단한 아이디어였지만 이제껏 간척공
사에서 사용되지 않던 신공법의 하나였다.
84년 3월, A지구 방조제 최종 물막이 공사 때 시도되어 세계 간척사에 획
기적인 신기원을 이룩해 놓은 유조선공법은 바로 정 주영이 그때부터 이미
구상한 새 공법이었다.
저수된 바닷물 맛을 보고 난 정 주영은 해안에 무성하게 자란 남언재(해
초 이름) 한 잎을 뜯어 씹어 보았다. 처음 그가 현장 답사를 했을 때 맛본
남언재 잎 맛보다는 짭짤한 맛이 사뭇 덜한 것 같기도 했다. 그때는 바닷물
에 잠겼다 솟았다 하면서 자랐었지만 지금은 바닷물에 잠기는 일 없이 자라
기 때문인 성싶었다.
바다 한복판을 가로질러 멀리 태안반도 끝으로 곧게 뻗은 B지구 방조제
길이는 1,239미터. 간척지가 얼마나 넓은질 방조제 한 가운데 서 있노라면
아직은 어느 쪽이 바다이고 어느 쪽이 뭍인지 분간할 수 없다.
방조제 끝을 내다보는 정 주영 뇌리에는 작년 10월 26일, 최종 물막이 공
사 때의 광경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떠올랐다. 그때는 울산에서 올라온 김
영주가 현장을 지휘하고 있었다. 오늘이 고비가 될 것이라는 현장 소식을
전해 들은 정 주영은 헬리콥터로 현장을 향해 날았다.
양쪽에서 쌓아 온 방조제 끝과 끝 사이는 50미터. 그 사이로 흘러 나가는
썰물의 유속은 보기만 해도 현기증이 날 만큼 무섭도록 맹렬한 것이었다.
물막이 공사는 간만의 차가 덜 심한 12월에서 3월 사이에 하는 것이 보통
상례였는데도 정 주영은 앞으로 있을 더 큰 규모의 A지구 물막이 공사를 예
상하고 미리 경험과 훈련을 쌓는다는 뜻에서 10월 물막이 공사를 강행시켰
던 것이다.
방조제 최종 물막이 공사는 한번 실패하면 그로써 끝장이다. 한번 실패한
지점에서는 두번 다시 방조제를 구축할 수 없다는 것은 간척공사의 상식이
다. 따라서 방조제 최종 물막이 공사는 죽느냐 사느냐를 가름하는 전쟁과도
같은 것이었다.
"아니 뭣들 하고 있어? 물 구경 왔어? 접시물밖에 구경 못했나? 이까짓
물을 가지고 뭐 그런 얼굴들을 하고 있는 거야?"
현장에 도착한 정 주영은 언제나처럼 별일 아니라는 어투로 직접 현장지
휘를 하기 시작했다. 현장 일군들이 무서워할 때 최고 지휘자인 자신마저도
같이 무서워하는 날이면 일은 끝장인 것이다. 하기 때문에 그는 일군들이
자신 없어 할 때면 쉬운 일처럼 격려했고 그들이 자신에 차 있을 때면 위험
이 따를 수도 있다는 경계심을 일깨워 주곤 했었다.
그는 돌을 실어 나르는 백여 대의 덤프트럭을 일일이 따라 다니며 현장지
휘를 했다. 이에 격려된 현장 일군들은 썰물의 무서움도 잊고 혼연일체가
되어 최종 물막이에 총력을 쏟았다.
양쪽 방조제 끝 사이가 차츰 좁혀지기 시작했다. 40미터, 30미터, 20미
터. 썰물의 유속은 50미터 간격을 고비로 서서히 그 기세가 꺾이기 시작했
다. 드디어 10미터, 5미터. 양쪽 방조제 끝과 끝이 맞닿는 순간, 만세의 환
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 현장에는 회장도 없고 사원도 없고 기능공도 없었
다. 서로가 얼싸안고 모두들 만세를 부르며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그때 일을 생각하는 정 주영 얼굴에는 회심의 미소가 어렸다. 그는 눈을
들어 멀리 부연 먼지를 일구며 달리는 A지구 공사현장을 바라다보면서 내년
3월로 예정된 A지구 최종 물막이 공사에 동원될 30만톤급 유조선을 머리 속
에 그려 보았다.
그리고 그는 선친이 논을 일구어 내던 아득한 옛 기억을 더듬었다. 땅을
고르고 돌을 추려 내고, 도랑을 파서 물을 대고 객토를 져 나르시던 아버
지. 여기저기서 삼태기로 거름을 옮겨 와서는 그 논 한 뙈기를 일궈 놓으시
고 흐뭇해 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그의 머리 속에 아른아른 피어 올랐다.
(그래, 나도 5년 후에는 저 들판에서 트랙터를 운전하는 농부로 돌아가
자.)
그해 10월, 현대는 광화문 사옥 시대의 장을 닫고 계동에 있는 그전 휘문
중고등학교 자리에 신축한 지하 3층 지상 12층의 맘모스 사옥으로 이전, 바
야흐로 약진하는 계동 사옥 시대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83년은 현대가 또 한번의 비약적 성장을 이룩한 해였다. 총매출고 1조원
을 기록한 지 불과 3년 만에 현대는 또 다시 우리 정부 1년 예산에 육박하
는 10조원의 매출고를 올림으로써 한국경제계의 또 하나의 신화적 기록을
수립해 놓았던 것이다.
84년, 연초 연휴를 맞은 정 주영은 1월 9일 현대인력개발원 84년도 개원
식에서 행할 연설문을 기초하고 있었다. 이번 개원식에는 현대그룹 산하 각
사의 주요 간부들이 참석하게 되어 있으므로 그는 이 기회에 평소 생각해
오던 자신의 경영철학의 일단을 피력할 생각이었다.
"여러분!" 하고 정 주영은 일단 생각 나는 대로 쭉 적어 나가기 시작했
다.
우리 인력개발원은 지난 80년 6월에 그룹 경영전력의 총력화를 기하자는
의미에서 발족해서 그동안 영어교육을 비롯한 여러 가지 경영교육을 해 왔
읍니다.
교육도 미래를 내다보고 하는 이를테면 인간자본의 육성을 위한 투자인
만큼 기업의 다른 투자와 다를 바가 없읍니다. 미리 미리 기업 내부의 필요
나 기업 환경의 변화를 예측해 가지고 기업활동을 앞질러 가는 그런 교육을
해야 할 줄 압니다.
오늘 이 자리에는 우리 그룹의 간부, 부장.차장이 참석했는데 대학을 졸
업하고 입사한지 10년이 넘는 분들이 대부분일 겁니다.
우리가 생활해 나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여
러 가지 이야기가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능력이 어
느 정도 향상되고 있는가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직장에 근무하
면서 봉급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봉급을 위해서 산다, 이렇게 생
각한다면 비참할 것이고 또 굉장히 일이 지루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 기업을 이끌어 가고 있지만 기업의 이익만을 목적으로 한다면 굉
장히 피곤할 겁니다. 우리가 현대건설을 비롯해서 산하에 여러 회사가 있는
데, 하는 일에 관심과 흥미를 가지고 좋은 일은 좋은 일대로, 어려운 일은
어려운 일대로 해결해 나가는 데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기업의 목적이 없었
다고 한다면 피곤해서 사업을 해 나갈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또 만약 그런
기업이라면 크게 성장할 수도 없읍니다. 기업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경영의 목표가 있고 이념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기업에 고용되어 있는 사람
역시 급료의 인상이나 승진만이 목표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몹시 피곤하고
지루할 것이며, 또 그런 사람이 어느 정도 자기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는
지조차 의심스러운 것입니다.
우리는 당연히 자기의 능력이 어느 정도 향상되고 있는가, 여기에 중점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께서는 현대건설에서 10년 이상 일을 하고 있는데, 현대건설 안
에서 자기 능력이 어느 정도냐 하는 것은 물론이고, 기술직이건 관리직이건
자기 분야에서 어느 수준으로 발전했느냐, 또 같은 분야의 다른 회사 사원
들과 비교해서 어느 수준에 있느냐?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미국.독일 등 선
진공업국과 우리와 비슷한 나라의 같은 분야에 속하는 기술자면 기술자, 관
리자면 관리자로서 어느 수준에 있느냐? 우리가 이런 면에 관심을 가지고
전진적인 자세로 자기를 향상시키고 발전시켜 나가야만 비로소 진정한 보람
을 찾을 수 있을 것이며 당당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살 수 있을 것이라
고 나는 생각하고 있읍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생활에 어떤 목적, 자기
향상이라는 목표가 있어야 한다고 나는 확신합니다.
생각하면 우리 인생이라는 것은 매우 짧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생각하면
허송세월하지 않고 일을 많이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인생이 굉장히 길고 가
치 있는 시간이라고도 얘기할 수가 있읍니다.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살다 보면 봄이 가고 여름이 오고 가을이 가고 겨
울이 와서 1년이 가고, 그렇게 흐지부지하다 보니 30대, 40대, 50대, 60대
가 됩니다. 가정이나 자녀들한테 안정된 기반도 닦아 주지 못한 채 친구들
과의 소중한 유대감도 없기 때문에 늙어서는 친구 하나 없이 고독해지는 것
입니다. 우리가 생활하는데 가정생활에서도 그렇고 직장생활에서도, 또 친
구들 간에도 항상 생각하면서 행동하면 우리의 생활은 고독하지 않고 항상
진취적인 전진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내 생활을 보더라도 아침에 일찍 회사에 나옵니다. 회사에 나와서 밤 늦
게까지 일하지만 아무 생각 없이 나와서 일을 할 적에는 그날 하루는 하나
도 한 일이 없는 것 같습니다. 물론 결재도 하고 만나자는 사람 만나서 얘
기하곤 했지만 성과로 나타난 사실이 없다는 겁니다. 회사에 일찍 나와서
보라는 서류도 다 결재했고 만나자는 사람 다 만나서 얘기한 그것이 바로
성과지 그 이상 바랄 수 없지 않느냐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렇게 생
각하지 않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회사에 나와 앉아서 서류 결재나 했다고 성과가 있는 것
은 아닙니다. 왜? 밑의 사람드리의 서류를 보고 거기에 좀더 향상될 수 있
는 지시를 해야 가치가 있는 것이고, 또 불성실한 점이 있나 없나 그것을
검토해서 불성실한 점이 있으면 그 점을 시정하도록 어떤 문제점을 제시하
지 않으면 하나도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웃사람으로 앉아서 결재를 했으니까 그날 일을 다했다. 나는 그렇게 생각
지 않습니다. 웃사람이라는 것은 밑의 사람보다 사회경험과 전문분야의 경
험이 있으니까 좀더 나은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서 결재하는 것이지 밑의 사
람에게 어떤 부정이 있나 감독하기 위해 결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재는 두 가지 뜻이 있읍니다. 밑의 사람들이 어떤 온당치 못한 생각으
로 잘못이 개재되어 있나 하는 것을 찾아 내는 것과 또 밑의 사람들이 성실
하게는 했지만 웃사람으로서 보다 더 나은 것을 제시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
니다.
그리고 또 기업이면 기업의 장으로, 부서면 부서의 책임자로 그 기업의
발전을 위해서 지니취적인 사고로 오늘 시간이 있으면 어떤 분야 사람들을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해야겠다. 또는 어떠한 거래의 고객을 찾아서 무엇을
해야겠다는 등의 능동적인 태도로 일과 사람을 찾아 다녀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런 식으로 회사의 회장이나 사장, 부장 등 책임자들이 일을 하지 않
는다고 하면 그 회사는 기울어져 가는 회사라고 나는 봅니다.
기업의 기본은 뭐냐? 경쟁에서 이기는 겁니다. 다른 모든 동업의 생산공
장보다 좀더 싸고 경쟁적인 가격으로 제품을 생산해서 국민에게 제공하는
데에 기업으로서의 존재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계속 발전을 거듭해
서 고용을 확대하고 또 이익을 내서 국가의 재원을 적극적으로 부담해 나가
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기업상이며, 이런 기업이 되어야만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앉아서 독점을 해 가지고 국제경쟁가격보다 비싼 제품을 내놓는다면 아무
리 봉사활동을 하고 선전을 해도 그 기업은 자기의 고객을 수탈하는 것이고
국민을 수탈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용을 확대해 나가면서 국민에게 골
고루 혜택을 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을 해야 합니다.
건설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정부의 모든 공사는 경쟁입찰에 의해서 싸
게 따서 나라의 예산을 절감시키고 싸게 제공해야 하는 것이고 민간공사도
고객들에게 그 일을 싸고 착실하게 해줌으로써 우리 경제사회에서 나와 남
이 모두 균형 있게 혜택을 배분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로는 쉬운데 행동으로, 모든 기업활동의 과정과 결과로서 나타
나지 않으면 안 되는 데에 어려움이 있읍니다. 기술개발이나 혁신의 어려움
이 있고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미래를 올바로 예측해야 하는 어려움이 또 있
읍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가장 훌륭하게 극복한다고 해도 어려움은 여전히
남습니다. 현실이기 때문에 어려움이 있는 겁니다. 기업은 교회의 목사님들
이 하나님께 자기 앞에 모여 있는 교인들에게 복을 내려 주십사고 하듯이
해서 끝날 수가 없읍니다.
기업은 사회의 모든 생산을 담당하는 경제주체로서 실질적으로 사회 어느
분야보다 직접 간접으로 국민에게 많은 헤택을 주지만 그만큼 사회에서 중
요하고 기대가 크기 때문에 비판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전근대적인 요소가 많이 남아 있읍니다. 사농공상이
라 해서 기업을 하는 것,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가치 있게 보지 않으며 국
내외에서 그 많은 고생을 하는 기업활동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한편으로 우리의 근대적인 기업이 불과 20년 동안에 급진적으로 성장을
했기 때문에 무리도 있고 해서 우리 사회에서는 기업의 공이 사회에서 제자
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있으면서 과에만 화제와 주목이 따르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난 20년간 조선을 위시한 중공업과 해외건설에서 세계경
제사회를 대상으로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해서 다른 모든 세계
의 경쟁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위치에 있읍니다. 우리의 이런 모든 과
거의 체험은 우리에게 아주 굳건한 자기 확신과 또 긍지를 주었다고 생각합
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와 같은 자기 확신과 긍지를 살려서 투철한 사명감을 가
지고 사회가 우리 기업에 부과한 책임, 그것이 생산 활동에 있어서의 책임
이든 다른 사회분야와 협력 협조하는 책임이든 모든 책임을 솔선해서 다함
으로써 우리 사회의 발전을 이끌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기업은 엄연히 나라에서 첫째로 소중하고 둘째로도 소중한 것입니다. 사
회의 모든 정치.경제.문화생활에 있어서 경제는 확실히 모든 발저니의 출발
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우리 개개인이 자기의 발전을 위해서 아
무 생각 없이 살지 말고 조그만 일에서 큰일까지,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자기의 일상생활의 발전을 위해서 생각을 하고 살면 한국경제는 무한하게
발전할 것으로 믿습니다. 또 우리가 제2의 경제도약을 해야만 남북이 대치
하고 있는 지금의 실정에서 살아 남을 수 있고 또 번영할 수 있는 겁니다.
발전할 수 있는 근거는 뭐냐? 자원은 없지만 모든 국민이 교육에 열의를
갖고 있읍니다. 이것은 잘 살겠다는 의지력과 직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국 사람들은 균형된 교육을 받고 있기 때문에 80년대에 고도성장을 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 우리는 선진공업사회에 비해서 상당히 부지런하게 일을 하고
있읍니다. 또 우리가 부지런한 것은 과거에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그 가난
을 탈피하기 위해서 모든 근로자들이 열심히 일하면서 호응해 주었기 때문
입니다.
선진공업국이 1주일에 5일을 일하고 또 하루 8시간 일하는데 우리는 정부
의 관리든 기업의 노무자든 모든 사람들이 1주일에 6일을 하루 10시간씩 일
하면서도 그것을 아무도 거부하지 않고 있읍니다. 한국의 발전요인은 두뇌
가 있는 노동자들이 10시간 일하는 데 잘 호응해 주고 있기 때문에 발전하
고 있는 겁니다.
여기 모이신 분들은 대부분 전공학부를 마쳤기 때문에 회사에서도 부장.
차장으로 모든 관리직에 최고 간부로 일하고 있읍니다 한 회사가 건전하게
계속 발전하느냐 발전하지 못하느냐 하는 것은 차장.부장급이 어느 정도로
건전하고 진취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에 달려 있읍니다. 차장.
부장 등 중역들이 실제 실무자들과 한방에 있으면서도 실무자들한테 진취적
인 사고와 전진적인 자세를 불러 일으키지 못하고 그냥 그대로 방치하면서
모든 사원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면 그 회사는 진
취적으로 발전할 수 없다. 난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확실히 부.차장되는 사람은 어느 정도 조그만 기업의 최고 책임자, 최고
경영자와 똑같다고 봐야 합니다. 부장이 가령 자기 밑에 대학출신을 10명
이상 데리고 있다고 하면 어느 중소기업이 대학출신을 10명 이상 거느리고
있겠느냐, 모든 면에서 볼 때 최소한도 건실한 중소기업의 사장들 위치에서
전문지식을 가진 부하와 또 많은 노동자들을 통솔해 나가고 있다. 이렇게
봐야 합니다.
사장이 진취적이 아닌데 부.차장이 진취적일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장은 항상 몇 해만큼씩 갈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누가 가든지 간
에 진취적인 자세로 중심을 이루고 있는 사람은 부.차장급이니까 부.차장급
이 건전하면 중역은 아무리 갈려도 지장이 없읍니다. 어떻게 보면 직장에서
나 공장에서나 현장에서나 밑의 사람들이 더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읍니
다.
확실히 똑똑한 부.차장이 있으면 아래위로 전부 영향을 줄 수 있읍니다.
지도를 해도 마음대로 할 수 있고, 중역들은 몇 개의 부를 맡고 있기 때문
에 부장이 좀더 생각하고 좋은 안을 내놓으면 아래위가 다 부.차장이 마음
대로 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이것은 내가 과거에 조그만 정미소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사람은 어느 위
치에서든지 간에 생각을 하는 성실한 사람의 제안은 어떤 웃사람도 거기에
따라 오는 것이지, 웃사람이 어떻기 때문에 자기가 일을 하기가 곤란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내 경험을 통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과연 진취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느냐? 이것이 기업의
장래를 좌우할 겁니다. 여러분께서 모든 행동면에 있어서나 사고면에 있어
서 진취적인 사고로 모든 부하의 능력을 향상시켜 주고 자기 밑의 모든 부
하가 어느 누구 밑에 있는 사람보다도 똑같은 세월을 보내는 동안 발전하는
데 깊은 관심을 가지고 능력이 있는 인간이 되게 하는데 노력을 하면 자기
자신도 능력이 있는 고급 관리자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직장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또하나 중요한 것은 주인의식입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가 속하는 나라, 우리가 속하는 직장의 주인이라는 생각,
또 자기가 하는 일 자체의 주인이라는 생각을 가져야만 자신과 기업과 국가
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읍니다.
패배의식과 소외감, 나태와 태만 대신에 우리는 우리의 모든 생활에서 주
인의식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국가나 직장에
대해서 <나는 주인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일을 한다고 하면 우리는 유럽
에서 가장 높은 능률을 낸다고 하는 독일 사람이나 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능률을 낸다는 일본 사람 이상의 능률을 낼 수가 있읍니다.
어떤 분야에서 뒤져 있다고 해서 일본 사람과 똑같이 일을 해도 뒤지는
것이 당연하다는 식의 논리에 지나치게 빠지는 패배의식을 가져서는 안 되
겠읍니다. 그 사람들보다 경험이나 기술이 모자란다고 한다면 그 사람들이
하루 8시간 일하면 우리는 10시간 일해서 쫓아간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한 것
입니다.
우리가 직장에서 주인의식을 철저히 가졌다고 하면 우선 그 직장에 부정
이 발생될 수가 없다고 봅니다. 자기가 주인인데 부정을 할 리가 없읍니다.
국민으로서도 그렇습니다. 자기가 국가의 주인인데 우리가 어떠한 부정을
할 것이며, 그러므로 모든 발전 대열에서 낙오될 수도 없고 방관할 수도 없
읍니다. 그것이 위대한 사회를 건설할 수 있고 위대한 국가를 건설할 수 있
는 요체입니다.
정부에서 설사 어떤 정책이 잘못되어도 오불관언 한다면 그것은 민주주의
를 할 의식을 가진 용기 있는 시민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기가 주인의식을
가지고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떳떳하게 개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직장에서도 그렇습니다. 회장이 잘못하든, 사장이 잘못하든, 자기의 중역
이 잘못하든 내가 주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당당하게 올바른 방향으로 이
끌고 나갈 수 있는 성의를 가져야 합니다. 주인의식이 없기 때문에 자기의
상사인 부장과 중역이 옳지 않은 일을 해도 동의하는 사태가 생기는 겁니
다. 주인의식이 철저하다면 그런 동조가 있을 수 없읍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 주인의식이 철저하지 못하기 때문에 중역이나 사장
가운데도 회장의 호감이나 사서 적당히 지내려고 하는 것을 가끔 볼 수가
있읍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기업의 사장이 있는 한 그 기업은 발전할 수 없
읍니다.
우리는 위에서 회장이 얘기하든 사장이 얘기하든 누가 얘기하든 각자가
철저한 주인의식을 가지고 올바른 방향으로 모든 일을 이끌어 나가야 합니
다. 오늘날 우리 국민이 올바른 주인의식을 가지고 열심히 각자 자기 분야
에 향상되려고 노력한다면 우리 나라는 10년 안에 경제적으로 일본을 능가
한다고까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 일본을 따를 수는 있다고 나는 확신을 가지
고 있읍니다.
우리가 몇 가지 분야에서는 불과 10년 안팎의 역사를 가지고도 일본과의
경쟁에서 이긴 것을 우리의 여러 기업에서 찾아 볼 수가 있읍니다. 현대그
룹이 하고 있는 중요한 기업에서도 많이 볼 수 있읍니다. 현대중공업이 오
늘날 10년의 일천한 조선사를 가지고도 일본과 대등한 경쟁력을 가지고 있
읍니다.
그러나 만약 주인의식이 쇠퇴하고 그 일을 맡은 사장이든 임원이든 부장
이 회장에게만 적당히 보이면서 회사를 끌고 나간다고 하면 빨리 늙어지고
정체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강대한 로마제국도 건전한 건국정신을 잃고 국
방조차도 용병에게 맡기고 사치와 향락과 부패를 일삼다가 패망했으며, 모
든 역사가 그러했읍니다.
반면에 온 국민이 그 시대에 살면서 각자의 가정에, 직장에, 국가에 주인
의식이 철저한 경우는 불과 10년 전후로 눈부시게 발전해서 일어나는 것입
니다. 우리는 1차대전 후에 독일이 그렇게 일어났었고 2차대전 후에 일본과
독일이 그렇게 일어났었고, 또는 패망했던 프랑스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높은 문화를 유지하면서 그 기술이나 경제로 세계를 앞서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읍니다. 과거에 그렇게 훌륭했던 영국 사람들이 게을러져서 오늘날 영
국병이다, 이런 소리를 듣는 경우도 있읍니다.
그래서 오늘 이렇게 우리 그룹의 간부 여러분을 모아 놓고 얘기하고자 하
는 것은 우리가 진심으로 주인의식을 가지고 우리가 몸담고 있는 직장을 세
계의 어느 직장보다 경쟁력 있는 직장으로 만들고 또 더욱 창의적이고 더욱
자유스럽고 더욱 발전할 수 있는 직장으로 만들려고 하는 데 그 참뜻이 있
는 것입니다.
우리 현대는 저 자신부터 부족한 점이 많지만 많은 노력을 해서 이 나라
에서 모범적인 기업이 되었읍니다. 우리가 만드는 모든 제품은 국제경쟁력
을 갖추고 있어서 국민에게 공급하는데도 떳떳하고 또 세계시장에 판매하는
데도 떳떳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떠한 세력과 결탁했다거나 부정과 결탁
해서 어떤 과실을 저지른 것은 없읍니다. 여기 모여 있는 오랜 중역들은 알
지만 많은 정치의 변화 속에서, 정치의 폭풍 속에 휩쓸려 오면서도 우리가
부정한 것은 하나도 없읍니다. 우리 현대를 이만큼 이끌어 오면서 국내외에
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고, 또 개인적으로는 사사로운 실수도 더러 해
왔지만 기본적으로는 모든 사람들이 성실했기 때문에 오늘을 이룬 것입니
다. 우리 현대가 세계적인 경쟁을 할 수 있는 기업을 이룬 기본원리는 바로
나 자신에서부터 기업의 중추를 이루는 모든 사람들이 다 성실했기 때문입
니다.
지난 80년에 우리 경제가 6퍼센트 마이너스 성장을 했지만 현대는 50퍼센
트나 더 매상을 올리고 현대의 종업원도 거기에 상응하여 2천명이 늘어났읍
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작년에는 우리 나라 예산과 거의 맞먹는 10조원
의 매상을 올렸고 또 우리 현대에서 일하는 종업원 수도 15만명 선을 돌파
했읍니다.
우리가 과거 4.19혁명이 일어났을 때도 전진했고 5.16혁명 때나 10.26사
태 이후, 또 80년의 불경기 속에서도 전진에 전진을 거듭해 온 것은 오로지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어떠한 정치적 변화에도 당당하게 모든 일을 이끌어
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비록 성경책처럼 완벽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사회에서, 사회윤리
에 의해서 당당한 입장에서 모든 것을 이끌어 나가고 있기 때문에 어떠한
변화 속에서도 후퇴 없는 전진을 계속할 수가 있는 겁니다.
우리는 앞으로도 주인의식을 가지고 당당하게 사내에서나 해외에서나 성
실하게 자기 향상에 노력하면 10년 안에 어떠한 선진국과도 경쟁할 수 있는
기업으로 확고한 자리를 굳히게 될 것입니다. 경제뿐만 아니라 경제에서 우
러나는 정치와 문화 모든 면에서 우리가 크게 국가에 기여할 수 있을 것입
니다.
우리가 선진 고도기술산업국가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모든 분야의 경쟁에서 이겨야만 합니다. 이같은 경쟁의 주요한 장소가 직장
입니다. 기업은 그 나라의 모든 물질적 향상의 핵심이요 심장입니다. 우리
가 경제활동을 해서 많은 세금을 내거나 수출을 많이 해서 정부의 재원을
지원한다는 뜻에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에 앞서 사회생활의 기초가 기
업입니다. 기업이라는 집단, 큰 사업집단은 그 나라 국민의 핵이 되는 모든
가정에 행복과 평화를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직장은 나라와 문화의 근본을
이끌고 있는 가정을 향상시키는 추진력입니다.
우리는 또 긴 시간을 직장에 나와서 보내고 있읍니다. 직장은 기술과 관
리 등 모든 사회조직생활과 그 속에서의 인간형성의 터전입니다. 물론 우리
는 학교에서 기초를 배웠다고 하지만 사회인으로서의 인격의 형성과 발전,
그리고 전체로서 문화의 진보에 대해서 매일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고 노력
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업을 단순히 돈벌이하는 집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은 아
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것은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이며 오늘날 기업이 사
회에서 하고 있는 역할에 대해서 너무 유치하게 인식하고 있는 겁니다.
직장이 올바른 방향으로 향상 발전하지 못하면 정치가들이 아무리 좋은
말과 구호를 외쳐댄다 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읍니다. 이런 의미에서 기업
은 돈벌이 집단이 아니라 사회의 물질적.정신적 자원을 창출하여 복합적으
로 모든 역할을 해 내는 인간 향상의 터전입니다. 하기 때문에 우리는 자기
직장에 대해서, 자신이 하고 있는 역할에 대해서 소홀히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높은 긍지를 가지고 정진하여 글자 그대로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는
데 힘을 모아 끝없이 전진해야 하겠읍니다. 감사합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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