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영화,리뷰,

현대 사회에서 문화의 정치

by Casey,Riley 2023. 3. 27.
반응형

VIII. 현대 사회에서 문화의 정치: 
인류학적 논의










1. 머 리 글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문화’라는 말이 범람하고 있다. 그런데 대개 그 말은 어
떤 주제에 대하여 더 깊이 들어가거나 더 확대되어야 할 논의를 막아 버리는 역할
을 한다. 예를 들어서 정치나 경제의 현안에 대한 토론회에서 보듯이 해당 분야에
서의 지식이나 방법이 해석상의 한계점에 부딪치면 ‘문화’의 탓으로 돌림으로써 
모두들 편안한 마음으로 서둘러 논쟁을 끝맺는다. 따라서 ‘문화’는 과학, 제도,
기술을 넘어서는 고도의 어?
?그러한 것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괴상하고 신비스러운 골칫거리가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가 끊임없이 중요한 주제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정
치적인 이용가치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익 정치가들은 그들이 다른 민족과는 인종
적으로 구별되며 그러한 구분은 내재한 문화적 특성의 반영이라고 강조함으로서 ‘
민족주의’를 내세우는데, 이 때 ‘문화’는 핵심적인 유용성을 부여받는다. 한편
으로 기업체의 자문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문화’를 새로운 형태의 조직원리로 취
급한다. 예를 들어 조직체에서의 위계 구조를
하거나 위계의 수준과 정도를 
낮추고 융통성 있는 작업형식을 취함으로써 직원들을 창조적이며 자율적인 운영을
하는 존재로 만든다고 할 때 이를 ‘기업문화’의 개혁이라고 한다. 이는 수직적인
커뮤니케이션에 의한 통제수단으로서의 이전의 문화에 대립되는 새로운 문화인 것
이다. 
‘문화’는 또한 발전문제와 관련되어서 거론된다. 발전 혹은 낙후가 사람들이 가
진(가지고 있다고 상상되는) ‘문화’의 성격이나 수준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믿음
으로써 발전을 위한 문화의 역할을 논하는 것이 하나이며, 윤리적으로 무장된 지식
인들
?곧 해당 사람들의 문화를 옹호할 때 가능하다는 견해를 주장한다. 
발전문제의 평가나 발전을 위한 제안서들은 모두 고전적인 인류학적 문화개념 즉,
각 집단의 고유한 문화를 존중하는 것이 정치적 권력의 경계를 넘어선 세계 공통의
윤리를 실천하는, 따라서 발전정책의 올바르고 유일한 길이라는 신념을 반복하고 

있다. 
아마도 기존의 문화개념을 가장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소비의 대상으로 혹은 상품
으로서의 문화를 규정하는 일이다. 대중문화라는 말은 단순히 엘리트 문화에 대비
되는 개념이 아니라 문화 자체를 전혀 다른 차원
末求?것이다. 오늘날 문
화는 ‘대중이 가지는’이라는 뜻도 있겠지만 오히려 전통적인 문화 항목을 넘어서
는 예술, 오락, 향락, 유행 등등으로서 일정하거나 지속적이지 않고 소비되며 자의
적으로 생산되고 변질되는 것이다. 문화산업이 유행어가 된 오늘날 ‘문화’는 이
미 생활양식이라는 고전적인 개념이 아니며 따라서 문화는 인간의 일상생활이나 규
범과는 분리되는 객관적인 사물이 된다. 그리하여 문화는 인간의 총체적 이해를 위
한 개념적 틀로서가 아니라 특정 시각에서 설명의 대상이 되는 제한된 ‘사물’이 
되어 버렸다.

訣?문화가 인간으로부터 유리된 하나의 독자적인 영역이거나 실체로서 
간주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지에 대한 재고가 요구되며, 그렇게 보이게 되는 현상 
뒤에 어떤 힘이 작용하는가에 대한 문화의 정치학적 분석이 필요하다. 


2. 새로운 문화의 의미

타일러(Tylor, 1871)는 문화를 한 사회내의 집단이 공유하는 생활양식의 총체(a 
whole way of life)로서 지식, 신앙, 예술, 도덕, 법, 관습 그리고 한 사회의 구
성원으로서의 인간에 의하여 획득된 능력과 습성을 포함하는 복합적인 전체라고 하
였다. 이는 헤르더의 낭만적인 이상 ?
 민족의 내부 집단들 또는 서로 다
른 시기의 사람들은 각각 특징적인 문화를 가지며, 그러한 각각 다른 문화는 문명
의 진화과정의 한 단계를 보여 주는 것이라는 말과 통한다. 보아스는 타일러의 사
회적 진화론적 개념을 반대하고 각 문화는 집단이 환경과 특별한 역사적 발전에 대
하여 반응한 결과로 본다. 즉 문화를 생물학적 힘이 아닌 역사 및 사회적 힘의 산
물로 취급함으로써 그는 인종결정론도 반대한다. 한편으로 말리놉스키와 그의 제자
들은 사람을 이성적 존재로 규정짓는 빅토리아 시대의 개념을 비판하고 아프리카, 
아시아,
 지역의 제 민족의 문화는 야만과 비이성적 논리로 간주될 것이 아
니라 그들 자체로 이성적이고 독특하고 합법적인 생활방식이라고 인정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즉 그들의 특출한 문화는 유럽 세력의 식민화과정에 필수적인 문명화에
저항하는 한 방식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어쨌거나 이들은 각각 다른 입장을 가진 
듯 하지만 세계란 여러 민족들로 구성되며 이들 각 민족은 서로 뚜렷이 구분되는 
생활양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믿는다는 공통성을 보인다. 
이렇게 한 민족은 한 문화를 가졌다는 민족과 문화를 단일한 세트로 보는 아이디

민주의의 핵심에 자리잡게 된다. 즉 정당하지 못한 문화(비서구 문화)에 정
당하고 이상적인 문화(서구 문화)가 간섭을 해야 한다는 신념이 강조된다. 서구 세
력은 비서구 세계의 문화와 문화의 주체를 측정하고 번역하고 재현함을 통해서 이
해할 수 있다고 여김으로써 이들 비서구 민족과 문화를 지식의 대상으로 삼게 되었
다. 이에 따라 ‘타문화’는 식민세력이라는 새로운 힘과 통제의 대상으로 위치지
어진다(Asad, 1973; Said, 1978).  민족에 따라 독특한 문화가 있다는 개념은 한때
진보적인 사상이었지만 동시에 그것은 독립된 주권
洋歐?위할 뿐만 아니라 
배타, 외국인 혐오, 폐쇄, 종족청소 등의 정치를 추구하는 극우파 민족주의자들의
퇴행적인 행위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한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하
여 경험하였다. 
기능주의자들은 ‘문화’를 경제, 정치, 사회적 제도를 통하여 조직된 소규모의 
경계지어진 전체이며 저절로 유지되며 정태적인 평형상태의 것인 양 취급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어떤 전인미답의 오지에도 이미 상인, 선교사, 식민세력의 대리인
들이 거쳐갔음을 우리는 쉽게 발견할 수 있듯이 사회란 그렇게 폐쇄되고 고립된 단

求?것이 아니며 먼저 식민주의에 의해서, 그리고는 국가 혹은 민족국가
에 의해서, 그리고 세계 자본주의의 지역 대리인에 의해서 지배되는 세계의 한 부
분인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간과한 채 ‘문화’를 그림으로써 ‘문화’는 자칫 
몰역사적이고 자율적인 전체로 보게 된다(Gough, 1968).
결국 ‘문화’를 동질적인 개인들로 이루어진 전체 인구가 공유하는 의미와 이념
의 세트인 것처럼 취급하는 것은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된다. 전통적 인류학자들은 
타 사회의 유니크한 ‘정통문화’(authentic culture)란 것이 있으며 그것은 그 

성원이 만장일치로 동의하며 경제나 정치와는 무관하게 자체 생산되는 ‘
본질적인 의미들’(essential meanings)의 통합체계의 형식으로 나타난다는 전제하
에 추구했던 것이다(Asad, 1979). 이는 명백히 새로운 역사 및 경제적 조건의 변화
에 따른 사회와 문화의 변동을 설명할 수 없게 만든다. ‘본질적인 의미들’이란 
한 사회내의 어떤 사람들이 본질적으로 대립되는 담론의 영역을 끊임없이 특권적
으로 선점(先占)함으로써 자기들의 권위 혹은 정당성을 추구하는 수단이 되어 왔다
. 따라서 “인류학자는 하나의 권위 있는 담론이 어떻
ㅐ?역사적 조건에 의
하여 생산되는가를 말해야 한다.”(Asad, ibid.) 이 때까지 인류학자들은 시간의 
흐름을 초월한 그리고 하나의 공통된 형식으로 공유되는 어떤 정통적인(authentic
) 문화가 있다고 여김으로써 오류를 범한 것이다. 
사실 전통적인 인류학적 문화관, 즉 동질적이며 변하지 않고 공유되는 것으로서의
문화개념은 오늘날까지도 면면히 흘러 왔다. 따라서 개론서에는 문화란 경계가 지
어진 소규모 전체, 규정된 특징, 불변의 그리고 스스로 균형을 잡는 공유된 문화를
하부체계로 삼고 정통적인 문화, 집단의 성원은 모두
?공통적이고 동질적
인 종족이라는 의미를 말한다.   
그러나 서구 식민주의의 종말과 더불어 정치 및 경제 조건들이 자본에 기반한 생
산과 교환관계의 새로운 영역으로 확대 진입하는 변화를 겪는다. 최근에는 생산과 
소비의 구체적 조직, 전지구적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 경제체계의 세계적 통합 
등이 이러한 근본적인 변화에 첨가된다. 이러한 변화들은 국가 안에서의 노동력의
이동뿐만 아니라 가난한 지역에서 부유한 지역으로, 대개 지구의 남반부에서 북반
부로의 노동력 이동을 의미한다. 
내가 아는 한 여성은 일본으로 간 부모
?일본에서 태어나서 중등교육을 
받고 영국에 가서 고등교육을 받았으며 미국에서 국제기구에서 일을 하며 주말에
는 한국어 학원에 가서 한국어를 배운다. 한국에 있는 그의 친척을 찾아가 만나기 
위해서이다. 이 여인은 바로 식민체제하에서의 노동이주(colonial labour migrati-
on), 식민지 이후 경제적인 이유로 다시 지구의 여러 곳으로의 민족 분산이동(post
-colonial economic diaspora), 그리고 ‘뿌리찾기’ 관광(‘roots’ tourism) 등
으로 점철되는 역사적 과정의 산물이다. 그것은 곧 홀(Hall, 1993: 356)이 말하는 
‘탈맥락
사와 잡종교배된 종족성’(dislocated histories and hybridised 
ethnicities)이다. 
영국의 문화연구(Cultural Studies)파는 문화적 정체성이 내재적으로 유전되는 것
이 아니며, 경계지어지거나 정태적이지도 않으며, 오히려 역동적이고 유동적이며 
특정의 시간과 공간 안에서 상황에 따라 구성되는(constructed) 것임을 강조한다.
문화적 아이덴티티의 유동성과 구성성 ─ 일정하지 않고 상황에 따라 만들어진다는
─ 은 서구의 도시뿐만 아니라 제 3 세계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현실이다. 한
작은 도시에 몰려든 부족들은 동질적인
坪潔珦슴〉?불구하고 이미 자체내
에서 계급적 층위로 나뉘어진다. 그들의 중층적인 정체성은 끊임없이 타협되는 것
이며 새로운 정체성과 계급적 적응을 위하여 그들이 뒤에 남기고 온 원래 지역의 
부족성원들과 관계의 끈을 지속하거나 발명해 낸다. 한국에서 도시로 밀려드는 이
농민들은 새로운 환경에서 각각의 계급적인 층위로 재편된다. 그들은 비록 한 종족
(宗族)의 성원이었을지라도 다중의 정체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 처
하느냐에 따라 그들은 다양한 정체의 원천을 끌어 내어 자신과 자신이 속한 세계를
규정한다
울시민으로서, 목포 사람으로서, 중산층으로서, 노동자로서, 기독
교인으로서, 체제 옹호자로서, 소외된 자로서, 저항하는 민중으로서 …. 이러한 다
중의 정체성을 위한 여러 문화적 장치들이 고안된다. 거기에는 경계가 확고하게 지
어진, 만장일치로 동의된, 정통의, 그리고 시간의 흐름을 초월한 몰역사적인 ‘문
화’란 존재하지 않는다. 문화연구, 탈구조주의 그리고 여성인류학의 이론적 발전
은 ‘문화’란 결코 자연적으로 경계지어지는 전체가 아님을 확인케 해 준다. 
사회인류학적 주제의 이러한 핵분열은 식민주의를 돌이켜 생각하
榮? 오트
너(Ortner, 1984)는 식민세력의 원초적인 이미지와 원주민의 ‘지방문화’에 영향
을 미치고 그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는 ‘인간의 희생을 요구하는 자본주의’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면서 식민주의와 원주민의 ‘지방문화’가 하나의 단일한 전체
로 이미지화 한다는 견해를 비판한다(Asad, 1993: 5). 예를 들어 18-19세기 하와이
에는 노르웨이에서부터 중국에 이르는 세계의 곳곳에서 온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
으며 따라서 그것은 ‘지방 공동체 사회’가 아니라 하나의 ‘접점’이었다. 한국
의 많은 근래에 급격히 확장된 대?
킵돕첼?도시의 재개발 지역은 결코 동일
하지 않은 다양한 사회-문화적 배경의 사람들로 채워지며 그들이 주창하는 ‘공동
체’라든가 ‘우리 동네’ 만들기는 상당한 기간 동안은 환상의 구호에 불과하다. 
이러한 경계가 없는 지역에서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은 각각의 출신지의 문화에 의
거하여 현실적인 이익을 위하여 노동력을 조직하고, 상거래를 하고, 사회적 관계를
조직한다. 경쟁은 권력의 비대칭적인 관계에 있는 사람들 간에 복합적이고 상충하
는 문화논리를 두고 다툼으로써 일어난다. 각 행위자는 예측할 수 없는 정치-경제

서 상징과 실천의 통제권을 장악하려 한다. 상징과 사상은 페쇄적이고 완
전히 구체적인 의미의 세트를 획득하지 못한다. 상징과 이념은 다중적이고 유동적
이며 잡종교배되는 것이라는 점이 주목을 받게 된다. 곧 중요한 용어는 역사적 시
간에 따라 의미를 바꾸게 된다. 그래서 특정한 역사적 순간에 실천의 주체들 사이
에 연합이 상승하면 그들은 핵심적인 용어의 의미를 법으로 규정짓는다. 
이러한 연구는 문화가 의미 만들기라는 경쟁적 과정이라는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경쟁이란 곧 주된 용어와 개념을 둘러싸고 벌이는 것이다. 불평?
력관계에 있
는 지방, 국가, 세계에 각각 달리 위치지어진 행위자들에 의해서 이러한 개념들이 
어떻게 이용되고 경쟁되는가? 경쟁이 어떻게 암묵적인 실천과 법칙에 의해서, 또
는 행위자들이 경쟁의 일부분으로서 도전과 주장과 재해석을 하는가? 사건의 진행
에 따라 누가 정의를 내릴 권력을 행사하는가? 그들은 그러한 개념들에 대하여 자
기들과는 다른 사고방식을 어떻게 배제하는가? 어떻게 자기들의 주장과 의미를 확
립하고 제도들을 이용하여 자기들의 개념을 유용하고 권위로운 것으로 정당화하는
가? 
제도와 유행과 라이프 스타
?심지어 취향의 정당성이나 세련됨 또는 바람
직함의 정의를 둘러싸고 국가, 계급, 시민, 여성,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 벌어지
는 경쟁이 이에 속한다. 건전한 취미, 유행과 바람직한 또는 올바른 생활태도 등의
규정 역시 그러하다. 심지어 여성흡연, 동성애, 특정의 질병, 미성년 노동 등에 대
한 사회적 인식도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국가나 권력이나 자본의 맥락 속에서 경쟁
의 맥락 속에서 파악되어져야 할 문제이다. 의미의 경쟁, 핵심적인 용어와 상징은 
곧 세계에 대한 특정의 관점의 정당성에 관한 경쟁이 되기 때문이다. 푸코(Fou
t)가 18-19세기 유럽에서 정신건강, 성, 범죄 등에 대한 지식이 어떻게 형성되었
는가를 논의하면서 제시한 것은 제도적 차원에서의 실천은 곧 인식, 범주, 가치관 
그리고 행위를 결정짓는다는 점이다. 
물론 문화의 체계성이나 일정한 지속성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삶의 한 특정 부문에
서 새로운 의미를 가지는 핵심적인 용어가 다른 영역에 침투하는 단계를 주목할 필
요가 있다. 동아시아 담론, 유교적 가치관, 그리고 구조조정이라는 말은 최근 갑자
기 한국인의 모든 삶의 영역에 침투하여 마치 한국인의 문화체계가 그뿐인 것처럼 
바꾸
고 있다(김광억, 1998 참조) 
이는 이데올로기가 헤게모니적인 것으로 나타나기 시작함을 의미한다. 코마로프 
부부(Comaroff & Comaroff, 1992)가 제시하듯 헤게모니 차원에서 문화는 일관되고
체계적이며 만장일치로 동의된 것처럼 나타나게 마련이다. 그것은 간단히 말하여 
구시대의 정통문화의 개념과 같이 마치 인간의 매개(agency)를 넘어선 하나의 사
물인 것처럼 보인다. 앞서도 말했듯이 인류학자들은 이전에 헤게모니적인 이데올로
기를 정통문화로 오인하였고 문화의 특징을 결정짓는 권력의 존재를 간과한 채 그
것이 영구불변의
 취급하는 오류를 범한 것이다. 
결국 문화는 능동적인 의미생성의 과정이며 정의 내리기를 둘러싼 경쟁의 과정이
다. 사람들은 사회적 관계의 체계와 지배의 과정에 서로 다르게 위치지어지고 그래
서 그들에게 허용된 경제적 제도적 자원들을 자기들의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한 정
의 내리기에 사용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정의를 거부하고 물질적인 결과를 차지하려
는 경쟁을 벌이게 된다. 문화 영역이란 경계가 확고하게 그어진 것이 아니며 사람
들은 지방, 국가, 세계의 각 차원과 범주를 정하고 서로 관계를 맺는다. 개념들이 
형태를 갖?
방식은 역사적 과정에 의해서 특수하게 작용하며 또한 아이디어
는 절대로 폐쇄적이거나 일관된 전체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헤게모니의 
형태 속에서 문화는 일관되거나 만장일치로 동의되거나 체계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마치 구식 문화개념처럼 하나의 사물과 같이 확고하고 확실한 것으로 나
타날 뿐이다(김광억, 1991 참조). 


3. 문화인종주의

이러한 맥락에서 세계 곳곳에서 1980년대 들어서 신우파주의(New Right)의 물결이
새로운 세대 혹은 새시대의 이름을 붙이면서 등장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영국의 대

rism)이나 일본의 우익보수세력의 공공연한 도전이나 선진국에서 자
국의 이익을 보호하고 자민족의 아이덴티티를 재건하자는 웅변들이 그렇다. 여기서
‘차별성’, ‘민족’, ‘인종’, ‘문화’ 등의 용어와 개념이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서 나타난다. 엘리어트(Eliot, 1948)가 거론한 대로 민족의 명절과 풍습, 축
제, 예절의 항목, 경기, 조미료와 조리법과 음식, 색상과 의상, 건축, 문화적인 영
웅, 예술가들과 그들의 주요 작품들이 새삼 강조되고 발굴되고 재평가되고 심지어 
발명되기 시작한다. 정치지도자는 영광스럽고 탁월한 민족?
족역사의 재건을
부르짖고, 밀려드는 외래문화의 물결 속에 민족의 정체성과 문화의 순수성이 함몰
되어 버릴 것이라는 공포감을 강조하는 한편 자신들이 곧 그러한 풍전등화와 같은 
민족운명을 건질 길을 찾을 수 있다고 자랑한다. 여기서 노골적이고 때로는 공격
적인 ‘민족’ 문화가 강화된다. 나라마다 자기 나라 혹은 민족의 정체성을 추구하
는, 즉 ‘중국적인 것’, ‘미국적인 것’, ‘일본적인 것’, ‘한국적인 것’ 등
의 정체를 규명하고 만들고 퍼뜨리는 문화정책을 개발한다. 고고학, 박물관, 민속
학 그리고 소위 민족예술이?
??장르는 그러한 민족의 문화적 아이덴티티를
찾는 ‘애국적’ 정신과 기술을 생산하는 특수목적을 가진 학문으로 각광을 받는다
. 바로 이 점에서 인류학은 자칫 코너로 몰리게 된다. 민족의 특수성이 자부심으로
치장되고 강조될 것이 요구되는 그 순간에 인류학은 배타적 차별성을 강조하는 민
족문화론의 허구성을 경계하고 문화의 보편성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우파의 득세는
정치의 민주나 법, 행정, 지식, 과학까지도 모두 배타적으로 자기의 소유로 하는 
것을 조장한다. 곧 정치의 이상적인 측면은 모두 영국의 특유한 것이고 경제의
성은 미국의 특허품인 양 말하는 것이다.
문화라는 용어로 민족을 배타적으로 재형성하는 이러한 방식은 인종주의적 발상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점을 교묘히 은폐하고 있다. 인종주의란 생물학적인 특
징을 차등화하여 인간 집단을 모자이크화하는 것으로서 결국 어떤 특정의 범주의 
사람들을 윤리적이고 고상한 족속이라고 여기고 그에 대한 충성심을 바치는 것이
다. 자기들의 ‘문화’를 다른 문화의 사람들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한다는 것은 곧 
자기방어의 합리화인 것이다. 결국 이는 희생자만 비난받는 것과 같다. 문화민족
주의?
颯聆풔?정치와 교육의 영역에서 고려될 중요한 문제점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국가제도와 전통적인 가치관은 공교육을 통하여 방어되어야 할 ‘문화’
의 핵심이 된다. 
문화다원주의자들과 반(反)인종주의자들은 국가 제도나 법의 작용을 모든 시민에
게 공평하게 적용되는 방향으로 향하도록 방안을 강구한다. 이 때 그들은 문화에 
의하여 정의된 민족성과 정치적 권리에 의하여 정의된 민족성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즉, ‘영국인’과 영국 여권을 소지한 ‘외국인’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
는다. 그러므로 우파에게 반인종주의자들
다. 그들은 반인종주의자를 국가의
제도와 가치관을 공격하고 국가의 질서를 뒤엎으려 한다는 이유를 들어 분열주의자
라고 낙인찍는다. ‘우리’와 ‘우리들의’라는 말로써 국가나 민족을 규정하는 행
위는 사회 구성원 가운데 인종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주변부화된 특정 범주의 사
람들과 반인종주의자들을 한 편으로 몰아세우고 그들로부터 지배계급으로 나눔으로
써 국가 공동체 안에서의 명백한 분리를 추구한다. 그러므로 지배세력은 인종주의
를 부정하면서도 ‘우리의 문화’라는 말로써 민족주의의 틀을 짜는 것이다. 그리
고 그러
리의 문화’를 지지대로 하여 ‘소수민족’에 대한 정책을 수립한다
. 완전한 동화의 요구 혹은 정책적 유도, 외국 고용 노동자에 대한 반격, 추방을 
통한 제거 등은 곧 인종주의의 다른 표현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여 신우파는 문화연구, 반-인종주의, 그리고 정도는 약하지만 사
회인류학 등으로부터 ‘문화’의 새로운 아이디어를 전유하여 ‘문화’, ‘민족’,
‘인종’, ‘차별’ 등의 의미를 바꾸고 경쟁하는 과정에 뛰어드는 것이다. 그들은
배제 혹은 배타를 강화하기 위하여 ‘문화’를 동원하며 그럼으로써 인종주의의 재
생을
?은폐하면서 공공정책과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중요한 함의를 지우는 
것이다(Kahn, 1995: 6).


4. 기업과 문화

1980년대에 들어서 ‘문화’는 또한 경영학 분야에서 아주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딜과 케네디(Deal & Kennedy, 1982)는 ‘기업문화’라는 것을 발견했고 피터스와 
워터만(Peters & Waterman, 1986)은 뛰어난 회사란 곧 ‘강한’ 문화를 가진 회사
라고 주장하였다. 곧 기업문화는 일종의 선교적인 언술처럼 어떤 조직체에서도 모
두 말하는 유행어가 되어 버렸다. 이들은 문화를 인류학적 개념에서 따오며 기어쯔
(Geertz,
?Turner, V., 1974), 베이트슨(Bateson, 1972), 더글라스(Dou-
glas, 1987) 등이 가장 자주 인용되는 인류학자들이다. 조직연구가들과 실제 경영 
담당자들은 모두 인류학의 ‘문화’에 대한 아이디어를 ‘탈현대적’인 정치-경제
에서 새로운 조직의 형식으로 본다. 조직에 대한 학문연구와 실제 경영자의 사고방
식 사이에 긴밀한 관계가 형성되면서 조직연구가들은 조직을 ‘만드는 데’ 핵심적
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Calas and Smircich, 1992: 223). 학계와 실무진 사이의 상
호 작용은 1990년대에 들어서 경영자들이 연구자들에게 조직?
는 ‘훈련’을 
제공해 줄 것을 요청하기에 이르도록 증가하였다. 경영자들은 조직 혹은 기업을 
연구하는 인류학자들에게 자기들의 경영방식의 메타포를 위한 레퍼터(Martin, 199
4)를 요구하고 간부들은 그러한 훈련과정을 통해서 습득한 인류학적 아이디어를 말
하게 되었다.
회사들은 경영의 수단으로서 전통적인 문화개념과 새로운 문화개념을 모두 이용한
다. 전통적으로 경영자들은 회사를 그 환경과는 대립되는 경계선을 가진 아주 명확
히 구분되는 전체로 간주하고, 그 회사의 문화를 구성하는 행동의 항목들을 가지고
있는 특별히
 사람들의 집단으로서 하나의 체계에 의해 조직되는 것으로 
본다. 한경구(1994)의 일본 회사의 서술, 자넬리(Janelli, 1993)의 한국 재벌기업
의 분석, 그리고 외국인 노동자들이 한국 기업체에서 겪는 문화적 갈등에 관한 이
욱정(1994), 유명기(1995), 김현미(1996) 등의 연구가 모두 이러한 전통에서 이루
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어떤 회사에서는 새로운 문화개념을 조직화의 새로운 형식으로 본다. 특히
신제품을 디자인하여 만들고 전세계의 다양한 나라에 분배하고 시장에 판매하는 회
사일수록 새로운 조직문화를 채택하는 ?
?求? 경쟁력을 갖추기 위하여 제
품은 끊임없이 재개발되어야 하며 생산지와 직공들, 그리고 그들 사이의 관계는 언
제나 바뀌는 것이다. 하비(Harvey, 1996)에 의하면 이제 새로운 유형의 회사가 출
현하는 바, 그것은 물질적인 측면에서는 다만 몇 개의 계약서류 박스만 갖추고 있
으며 직원의 숫자는 잠정적인 것으로서 특정한 사업의 진행기간에만 적용될 뿐, 그
리고 여러 사람들로부터 특정의 프로젝트를 위한 투자를 받아서 그들에게 균등하게
부와 권력을 창출해 주는 네트워크를 가진, 끊임없이 그 크기와 모양과 주체가 바
뀌는 그
직체이다. 여기에는 엄밀히 말하여 조직이란 것이 없다. 그 회사를 
상징하는 어떤 장식이나 기념탑이나 조형물도 없으며 작업은 팀이나 몇몇 전문가
들의 연합으로 이루어지고 경계를 넘어서 그리고 즉각 즉각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
여 변하면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유형의 회사에서는 끊임없이 기술을 혁신하고 새
로운 상황이나 위험에 대응하기 위하여 ‘개인적인 재발명’을 하며 다양한 항목에
관한 경험을 획득하고 한 직업에서 다른 직업으로 탁탁 뛰어 건너는 순발력과 적응
력을 갖춘 사람을 스태프로 고용하게 된다. 이는 흔히 직책
나 경력 구조 없
이 단기로 계약을 하는 것이며 일정한 기간마다 스스로 고도의 스트레스를 자비로 
해결하는 것이다. 직원의 지식을 이용하기 위하여 경영자는 간부와 직원의 혼성팀
속에 참여하도록 힘을 줌으로써 제품이나 생산과정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게 된다
.            
이러한 맥락에서 상이하게 위치지어진 행위자가 의미 형성과정에 능동적인 참가자
가 된다는 아이디어가 ─ 즉 새로운 문화개념 ─ 경영간부에게 매력적으로 비치게 
된다. 이는 직원들에게 힘(권력)을 준다는 수사(레토릭) 속에서 직공과 간부는 모
든 사람의
고려함으로써 팀에서 결정을 하도록 ‘훈련’되어진다. 그들은 
그들에게 부여된 권력이 가시적이고 투명한 의사결정의 과정을 가지게 되면 동시
에 조직의 해체가 야기되지 않을 것인가 하는 점에 주목하게 된다. 직원과 관리자
는 흔히 이중적인 태도를 지니며 권력이 주어지는 것을 좋아하면서도 기업에서 내
놓는 멋진 수사와 동시에 위에서 아래로 지시되는 ‘정리해고’나 ‘직급차별 폐지
’ 그리고 ‘인력 재배치’ 등의 잦은 재조직 사이의 갭을 인식한다. 즉, ‘문화로
서의 조직’이라는 수사가 직공들의 참여와 권력 보장을 강조하?
공들 자신은
여전히 그늘 속에 가려져 있다는 현실을 간파하는 것이다. 따라서 조직적 경영에서
의 ‘문화’의 사용은 부분적으로만 영향을 줄 뿐이다. 국내의 한 대기업체가 개인
의 능력과 경쟁을 직원관리의 원칙으로 삼음으로써 인간관계에 의존하던 기존의 관
행을 극복하고 새로운 기업문화를 창출한다는 레토릭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새로운 
문화를 위에서 아래로 지시하고 감독함으로써 개개인의 개별성을 무시하는 모순을
낳으며(장정아, 1995), 정보시스템 개발 팀내 젊은 사람들의 새로운 시도와 창의성
을 고참 간부급 직원들이 서
?혼란이 오면 조직체의 존재가 위험해진다는 
이유에서 차단하는 현실(김자영, 1996)을 볼 수 있다. 
전면에 드러나는 지방수준의 참여와 완전히 가리워 있지는 않지만 그 배후에 숨어
있는 정치-경제적인 힘 사이의 관계는 경영학의 문장에서 메아리친다. 가장 ‘문화
로서의 기업’이라는 말을 하는 경영학자들(예컨대 Schein, 1991; Smircich, 1983)
도 의미 형성의 과정이라는 새로운 문화개념으로부터 은근히 하나의 사물로서의 문
화라는 구식개념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을 본다. 즉 그들 경영자는 어느 새 위
에서 아래로 내려다 보
에서 지휘와 통제의 제도로서 문화를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기어쯔(1973)는 유태 상인, 베르베르 부족원 그리고 프랑스 식민관리 사이에는 거
래를 추진하면서도 명예를 지키고 지배력을 확립하는 세 가지 관계가 성립되는 것
을 발견한다. 이들 셋은 서로 다른 권력의 관계에 위치지어 있고 같은 일에 대하여
의미를 부여하는 데 있어서 다른 개인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결국 서로 다
른 상호 작용을 보는 것이다. 이는 곧 기업문화란 위에서 아래로 즉, 관리자가 고
용인을 다루는 입장에서만 정의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보여 준
5. 발전 문제와 문화

문화는 전혀 새로운 영역으로 들어가는 데 발전 문제를 다루는 경우이다. 그 첫째
로서 유네스코(UNESCO, 1995)의 “Our Creative Diversity”를 들 수 있다. 이 보
고서는 유엔이 지정한 ‘문화와 발전을 위한 10년’을 마무리하는 작업으로서 새로
운 윤리적 세계질서의 비젼을 위하여 문화의 특수성으로 이루어진 문화지도를 만들
고 있으며 ‘문화’에 대한 두 가지 논점을 제공하고 있다. 첫째, 발전인류학자들
이 제기하는 바의 ‘문화’는 단순히 삶의 한 영역(경제, 정치, 종교 등)에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니며 ?
전을 포함하는 삶의 ‘구축되며(constructive), 구성되
며(constitutive), 창조되는(creative)’ 모든 측면에 관계된다는 점이다. 둘째, 
세계는 각각 특수한 문화와 사람들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첫 번째 의미에서의 
‘문화’가 두 번째 의미에서의 ‘문화들’ 안에서 간과되면 발전의 시도는 실패
하는 것이다(ibid., 1995: 7). 이러한 부정적인 현상은 소위 지구촌화(혹은 세계화
)와 양극체제의 몰락에 의하여 더욱 가중되어, 부족한 자원을 두고 편협한 집단 아
이덴티티들 사이에 대결과 폭력이 조작된다(ibid., 1995: 16). 따라서 실?

이란 ‘사람들’의 문화적 아이덴티티의 파괴를 낳는 것이며 성공적인 발전은 문화
의 활성화, 창조성, 그리고 진보를 가져오는 것이다. 
이러한 논쟁은 문화의 다양성에 대한 특수한 견해에 바탕을 둔 것이다. 살린즈는 
문화를 “사람이나 사회의 전체적이고 뚜렷이 구분되는 삶의 방식”으로 정의한다
(Sahlins, 1994; UNESCO, 1995: 21 재인용). 이러한 문화의 기존 개념은 레비-스트
로스에 의해서 지지된다(원래 1952년에 유네스코에 기고한 글에서 밝힌 것이며 197
3년에 수정됨). 그는 나아가서 세계를 군도(群島)로 보는 견해를 끌
? 즉 
세계는 각각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독특한 ‘문화’를 가진 ‘사람’들로 이루어
졌으며 여러 섬들이 실로 꿰듯이 나란히 널려 있는 군도와 같다는 뜻이다. 이러한 
논의는 사람을 곧 하나의 나라로 간주한다. 그런데 보고서는 이 세계가 200개의 
국가에 10,000개의 서로 다른 사회로 이루어져 있음을 언급하면서도 유감스럽게도
사람들이 이전에는 없었던 국경으로 규정된 공간 안에 서로 혼재하고 있다는 사실
을 주목하지 않고 있다. 그 대신 그들의 구별성을 격려하고 사람들이 서로 다른 문
화를 건너다 봄으로써 삶의 대안을 발?
?것이라는 낙관론에 의존하고 있다.

결국 이 보고서는 1930년대의 사회인류학의 잔재로서 문화의 평면적인 세계지도를
제공할 뿐, ‘문화’가 조직을 규정하는 힘을 둘러싼 경쟁의 과정이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이 다원화되고 복합적인 세계에서 민족-국가는 전국차원의 
문화적 동질성을 창조하기보다는 그 영토 안에서 종족의 다양성을 격려해야 하며 
공유된 가치관에 입각한 시민사회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세계의 문
화적 다양성은 전지구적인 윤리에 의하여 보호되어야 한다고 한다. 유네스코 보고
서는 지구의 모?
 간에 만장일치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확신에 기반하여 ‘
관용적인 가치’를 가진 문화만이(누구의 관용인가?) 존중받을 것이며 전지구적 윤
리 코드에 의하여 보호될 것이라고 한다. 물론 반항적인 문화 실천들은 비난되어야
한다. 비서구 사회의 가치관에는 낯선 개인주의를 확산하는 인권에 대한 비판에 대
하여 유네스코의 보고서는 “인권이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을 동등하게
간주하는 적절한 방법”이라고 한다. 다원화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하여 유네
스코가 말하는 전지구적 윤리 코드는 모든 문화적 가치를 존중해야
?자세와 
받아들일 만한 다양성과 받아들일 수 없는 다양성을 판단하는 가치 사이의 이율배
반적인 것을 드러내고 있다.
발전에 대한 인류학적 반응은 종종 ‘고유’, ‘전통’, ‘토착’ 문화의 낭만화
를 추구하는 입장을 반영한다. 사회나 기술체계의 변화 이전에 실천되었던 문화는 
일단 정당성의 기준이 된다. 문화는 경험을 통하여 축적된 합리성의 실천양식이라
는 전제에 따라 원래의 문화는 생태환경의 적응과 이용면에서, 사회-심리적 기능면
에서도 합리적인 것으로 취급된다. 이제 현대 사회로 이행하면서 새로운 기술의 개
발?
운 사회적 제도의 유입은 이전의 문화체계를 왜곡하고 파괴하고 그 안
에 담긴 지혜를 상실시켰다는 비난을 받게 된다. 소위 사라지는 ‘전통’에 대하여
향수와 슬픈 충성을 표시하고 그것을 사라지게 하는 현재의 ‘발전’에 대한 적개
심을 강화한다. 그렇다면 ‘현대적인’ 것은 과연 인류의 적인가? 아이러니는 그러
한 한탄을 하는 인류학자 자신이 현대의 첨단 기술과 물질적 편안함의 혜택을 누리
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현재의 성취에 대한 부정적인 자세와 과거(현대에 
의해 상실된)에 대한 정당화의 사고의 틀에 쉽게 빠져듦
 지식인으로서의 윤
리를 확인하고자 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과연 “과거로 돌아가자!”라는 구호
만을 외쳐야 할 것인가? 많은 인류학자들이 이 점에 대해서 명백한 입장을 유보한
다. 
인류학에서 논의되어야 할 문제는 하나의 기술체계와 이를 대체하는 새로운 기술
체계를 평면적으로 대비하는 일이 아니다. 새로운 발전이 누구의 힘에 의해서, 어
떤 매개를 통하여 실천되며 그러한 실천이 가지고 오는 궁극적인 정치-경제적, 그
리고 문화적 의미 혹은 변화가 무엇인가를 규명하는 일이다. 새로운 것은 과거의 
것에 비하여 더 나?
풔?과거의 체계가 주지 못했던 새로운 의미체계를 가
져다 줄 수도 있는 것이다. 심지어 과거라든가, 전통 그리고 전통의 재생이 어떤 
정치-경제적 힘에 의하여 만들어진다는 의미에서 허구의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발전 문제를 취급함에 있어서 인류학은 보다 더 넒은 시각을 갖춤으로써 전통과 
새로운 변화가 지니는 ‘허구성’의 의미와 유용성을 분석해야 할 것이다. 
발전 문제와 관련된 또 하나의 문화논의는 제 3 세계의 부족이나 주변화된 원주민
들이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요구하는 운동을 벌이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 그들

涌“?타인들이 가했던 전략을 그들을 주변부화했던 과정에 도전하기 위하여
전략적 자원으로 사용하는 것을 터득하게 된 것이다. 
위에서 아래로 주어지는 경계지어진 문화들의 복합성(다원성)을 위한 고상하고 거
창한 계획과 대조적으로 원주민의 손에는 그들의 규정이 아주 다르게 이루어진다. 
인류학자의 현지조사 자체가 사람들의 문화를 ‘발명’하는 행위가 된다. 인류학
자는 자기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 속으로 뛰어들어가는 것이며 이에 대응하기 위하
여 그는 문화를 ‘사물’로서 대하며 그 사물들의 작동을 이해하려 한다. 원주?
러한 인류학자의 행위로부터 자기 자신을 깊이 들여다 볼 수 있는 계기와 방법을
배우게 된다. 그리하여 처음으로 자신의 일상생활을 유형화된 방식으로 작동하는 
하나의 사물로 객관화하여 바라보게 되고 이렇게 관찰되어지는 것이 곧 ‘문화’
라고 여기도록 ‘훈련’된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이 이 때까지 자신에게 깊이 스며
든 생활양식으로서 경험해 왔던 것들이 이제 대상화되고 언어로 설명되는 것이 된
다. 즉, ‘문화’로서 발명되는 것이다.
터너(Turner, Terence)가 25년 전에 처음 연구하였을 때 카야포 인디언들의 한 분
파는 8
 700명이 질병으로 죽었다. 선교사들은 원주민들이 서양의 옷을 입고
, 새로 낸 도로를 따라서 촌락을 재구성하고 고유한 의례와 의식을 포기하는 대가
로 의료봉사와 약품을 제공하였다. 국가라는 조직이 그들의 외부세계와의 거래와 
커뮤니케이션을 통제 관리하였고 밤 수확으로 인한 현금수익으로 그들을 현혹시켰
다. 마침내 카야포 인디언들은 자주적인 입장을 상실하고 의존적이 되었으며 자신
의 의지와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그러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터너(1991)는 인류학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부식(腐蝕)하는 표피층의 밑에 ?
ㅕ育?사회적, 문화적 체계를 밝혀 내는 일”이라 규정한다. 그는 진짜 문화란 
카야포인을 도덕적인 우주 속에서 하나의 사회적 존재로서 재생산하는 사회적이고
의식적인 의례에 있다고 여긴다. 물론 카야포인들 자신은 그러한 생각이 없다. 그
들에게 의례란 원래부터 그렇게 하는 것일 뿐이다. 그들은 자기의 일상생활을 대상
화하고 문화라는 상표를 붙이는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한 개념은 그들이 
처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 필요로 하게 된다. 즉 그들은 자신을 다른 원주민들
과 구분하고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여러 종족으로
沮?국가 사회에 대면하여 
자신을 구별하기 위해서 비로소 문화라는 것을 개념화한다.  
지난 25년간 많은 인류학자들이 이들을 방문하였는바, 인류학자들은 자기들이 현
지조사를 하면서 카야포인들을 관찰하고 ‘문화’를 기록하는 행위 자체가 그들에
게 어떤 정치적인 의미를 주는지를 의식하지 못했다. 원주민들은 선교사와 국가 행
정관리들이 지배와 착취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비판하고 부정하던 그들의 문화가 이
제 서양인들에 의해 오히려 높이 평가받을 수 있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문화?
??이제 지배적인 사회와 공존하기
협상의 자원으로 등장하게 된 것
이다. 
“사라지는 세계”라는 영국의 BBC 다큐멘타리가 제작된 후 카야포인들은 다큐멘
터리 자체를 서구 및 그들의 정부와 협상하는 정치적 자원이 된다는 것으로 인식하
였다. 알타미라 댐 건설을 반대하는 운동을 조직하면서 그들은 서구의 동정과 지지
를 받아서 브라질 정부에 압력을 행사하기 위하여 민족 무용을 고안하여 다큐멘터
리를 만들었다. 선교사들을 즐겁게 해 주었던 반바지, 티 셔츠, 헤어컷트가 사라지
고, 대신에 남자들은 가슴을 드러내고 온몸에 장식을 달고 긴 행렬로 춤을 춤으로

자신의 ‘문화’를 국가에 대한 그들의 저항을 증대시키는 데 사용하였
던 것이다. 
카야포인들은 이제 비디오 카메라로 스스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기술진을 훈련
하고 기금을 확보하였으며, 생존을 확보할 충분한 인구증가를 이룩하였고 외부 세
력에 대항할 만큼의 경제적, 물리적 힘을 갖추었다. 그들은 라디오, 의약품, 자동
차, 기계 기술자, 그들의 땅을 정찰할 비행기, 심지어 원주민 선교사까지 모두 갖
추게 되었다. 이 때까지 종속과 관계된 제도와 조직에 의하여 지지받아 왔던 현실
주의적인 정치가들은 그들의 일상생활을 ‘?
 대상화하는 것을 배웠고, 그것
을 정부를 포함한 외부세력과 협상하는 자원으로 활용하게 되었다. 
카야포 정치인들은 그들의 ‘문화’가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을 잘 안다. 그들
은 그러한 ‘문화’로서 외부세력 또는 이웃 부족들과의 경쟁을 하고, 내부적인 권
력의 불평등을 은폐하며, 서구 다큐멘터리 작성 기술을 배워서 리얼리즘과 정통성
(authenticiry)을 만들어 낸다. 이 만들어진 정통문화 밑에는 누가 정통성을 만들
어 내며, 누가 정의와 규정의 권위와 권력을 갖는가, 누가 중심이고 누가 주변적이
고 소외되는가 하는 문제?
홱? 누구의 목소리가 정당한 것으로 되는지에 대
해서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 ‘문화’를 규정하고 외부세계와의 관
계에서 그것을 이용하는 것이다. 지난 40년간의 역사를 통하여 선교사, 정부관리, 
카야포인, 인류학자, 국제관계자, 다국적 기업가, 비정부(NGO)의 대리인(agent) 
등등이 모두 ‘문화’의 규정권을 놓고 경쟁을 벌여 왔다. 선교사와 정부관리가 
먼저 그 권리를 독점함으로써 원주민을 무력하게 만들고 종속시켰다. 원주민들이 
이에 대립하여 자기들만의 문화 정의를 만들어 낸 것은 스스로의 아이덴티티를 ?
가 아니라 물리적, 경제적, 정치적인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이러한 정치적 자원으로서 문화의 재평가와 발명이 이루어진 사례는 한국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지난 40여 년 동안 ‘전통문화’는 유교적 엘리트 문화이건 농민
의 민속이건 모두 낙후성의 상징이자 현대화를 가로막는 수치스러운 것으로 공식적
인 매도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러나 1980년대의 민중문화운동의 전개를 통한 문화
와 정치의 치열한 싸움 그리고 탈현대주의의 세계적 동향의 한 영향으로 인하여 자
신을 다시 보기를 통하여 이런 것들은 긍정적인 재조명을 받게
(김광억, 199
1). 이는 현대화과정에 대한 지식인의 비판적 성찰의 결과이자 동시에 국가권력의 
정당화를 위하여 국가에서 문화민족주의의 열기를 조장하는 것과도 연관된다. 소
위 민중이라는 이름을 이용하여 자기들이, 이전에 공식적인 권위에 의하여 부정당
하고 소외되었던 전통문화를 국가 권위를 상대로 하여 벌이는 싸움에서 정치적 자
원으로 활용하게 된 것이다. 민중의 승리는, 정부의 공식적인 힘이 민속이라는 민
간영역을 지지하게 만들었고 이에 따라 정치가들은 주변부화되었던 이전의 민간전
통이나 지방문화의 잔재를 자신?
?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음을 터득하게 된
다. 
정치가들은 향토문화, 민족문화, 민중전통의 활성화를 정치공약으로 내세움으로써
지방민의 지지를 확보하려 하며 대규모 지역적 혹은 국제적 행사를 조직하며 이를 
위한 중앙정부로부터의 재정적 지원을 확보한다. 지방자치제의 실시는 더욱 지방
의 문화 혹은 주변부화되었던 지방전통을 지방이 중앙과 경쟁을 하기 위한 자원으
로 만드는 것을 촉진하게 되었다. 전통문화 보존지역의 설치 계획과 지역경제 활성
론의 대립, 고대 역사도시를 재현하거나 유적 보존지구로 지정함으로써 재개발?
하는 정책과 이에 대한 주민의 반발, 고대의 특정 국가의 문화권의 재발명과 
이를 위한 정부차원의 대대적인 지원의 요구 등은 중앙정부와 지방의 관계를 둘러
싼 지방 정치가의 정치적 권력의 재생산의 원천으로 작용한다. 지방수준의 정치에
서 유력자들은 이러한 중앙에서 기안하는 지방문화 정책에 대하여 그들의 지방사회
의 요구를 ‘조직’함으로써 중앙의 정부나 집권당과 협상을 벌일 수 있다. 사람들
은 자기 지방 사회에 대한 정부의 경제적 지원이나 행정적 지위의 승격을 협상의 
조건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종종 지방의 유력자?
앙의 정부나 당 지도부에
게 지방의 지지확보에 대한 가능성을 담보로 하여 압력을 행사하거나 타협하거나 
경쟁과 대립을 조직한다. 이러한 움직임은 또한 중앙정부가 지방에 대한 지지와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지방 사람들의 반응은 간단히 낙
후된 사고방식이나 국가의식을 결여한 지역이기주의의 표현으로 설명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지방에 기초한 사람들의 문화적 아이덴티티의 추구와 그들의 정치적
지위와 고용창출이나 경기 활성화 등 경제적 부대효과의 증대와 연결되는 것이다(
특정의 전통을 정치자?
 위하여 의도적으로 지방의 문화 공동체를 재발명되
는 것에 대하여 김광억, 1994, 1996 참조).





6. 맺 음 말

결국 ‘문화’란 누가 규정을 내리는 일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의의와 효과는 달
라진다. 중심세력의 세계관, 인간관, 사고방식, 행위양식, 관습, 규범, 그리고 미
적 기준들에 의하면 주변부화된 사람들의 문화는 문화로서 의미를 인정받을 수 없
다. 물론 사회내의 구성집단이나 세력 혹은 계급 사이에 비록 상이한 문화가 있다 
하더라도 공통의 것이 있으며 심지어는 동일한 문화체계를 실천하는 방식이 그들
의 사?
結?따라 다를 뿐이라는 가설도 가능하다. 어쨌건 문화는 자
율적이며 그 자체 정당성을 지닌다는 시각과 문화의 힘은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입
장의 차이는 되새겨 볼 만한 중요한 논쟁거리이다. 유네스코의 보고서는 원주민의 
자율적인 문화 정의에 대하여 긍정적인 자세를 보이지만 그러한 입장에서는 ‘문
화’의 활력과 연결된 창조성의 흐름이란 결국 지방, 국가, 국제적 행위자들을 포
함하는 정치적 과정에서 권력을 둘러싼 끊임없는 경쟁의 결과라는 사실을 간과하게
된다. 의미 만들기의 정치적 과정을 카야포 정치인들은 잘 알고 있?
네스코는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주변적이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하여 인류학자들이 ‘문화’의 정치적 이용에
영향을 주려는 노력은 그리 효과적이지 않다. 우리가 만약 지방, 국가, 세계를 연
결하는 관계의 성격을 규명하고 그 안에서 특정 지역사회나 집단의 변화(발전이라
는 이름의)를 문화의 차원에서 공정하게 평가하자고 할 때 즉각적인 저항에 부딪치
게 된다. 그 저항의 원천은 국가의 권력과 자본의 힘이다. 오늘날 문화는 이전에 
비하여 더욱 직접적으로 국가권력과 자본의 힘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부와
관리, 기업
?그리고 문화산업 종사자가 모두 그러한 힘의 매개자 혹은 대
리인이 된다. 그들에게 엘리트와 민중의 구분은 별 유용성을 갖지 않는다. 오히려 
생산자와 소비자의 관계가 의미를 가질 뿐이다. 문화연구가들은 문화의 막강한 힘
을 말하고 그 앞에서 명령에 따라 소비를 하는 수동적 존재로서의 대중을 관찰하거
나 대중의 저항의식이 문화소비로 표출되는 것을 분석하지만 그들을 동일한 소비자
로 범주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오늘날의 문화논의는 궁극적으로는 문화의 두 차원을 만들어 내고 있다. 어느 정
도 지속적인 제도와 체계화된
로서의 소위 전통적인 개념의 문화와, 일상의 
소비생활의 영역에서 언술과 감각의 대상으로서의 문화로 나누는 것이다. 문화적 
차이란 대개 제도화되고 관습화되고 체계화된 행위양식과 사고방식을 의미하게 마
련이다. 그러나 오늘날 탈현대주의의 경향 속에서 문화산업, 라이프 스타일, 감각
과 취향 등이 문화논의의 중심적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한다. 물론 탈현대주의적 지
식인들은 문화와 인간의 특수한 관계에 착안하고 있다. 그러나 예를 들어 가족과 
친족제도의 논의에도 보듯이 그들은 해체주의에 기반하여 있어서 구조로서 혹은 

서 존재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마침내 문화는 아무런 기능을 할 수
없으며 실체가 없는 담론 현상에 불과한 것으로 만든다. 문화에 대한 인류학적 정
의가 문화논의에서 기본적인 개념과 틀을 제공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문화연구와 문
화정책의 영역에서 인류학적 연구와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하지 않는 것은 문화를 감
각과 경험의 차원에서만 취급하거나 심지어 예술까지도 일상의 생활과 유리된 특수
영역으로 보는 한국의 학계의 왜곡된 문화개념에 기인한다. 예술과 철학은 문화의 
한 영역이지만 그것은 일상의 세계와 유리되는 것
玖?그 자체 권력과 자본
과 역사의 힘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 주위에서는 순수하게 예술의 장르를 
설정하고 그것이 곧 문화의 정수인 양 다루는 사람들이 문화에 대한 언술과 정책 
분야를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문화논의 그 자체가 헤게모니 현상인 
것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