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2 권
제 1 장 빙화도(氷火島)의 사랑
장취산은 뼈를 에이는 듯한 한기를 느끼며 급히 은구를 뽑아 빙
산에 꽂고 다시 뛰어 올랐다.
은소소가 이미 사손의 손아귀에 걸려들었을 것으로 여겼는데,
뜻밖에도 사손이 고통스런 비명을 지르며 두 눈을 감싸고 있는게
아닌가? 반면 은소소는 아무 탈 없이 빙판에 쓰러져 있었다.
장취산은 단숨에 달려가 그녀를 부축해 일으켰다.
은소소가 나직이 말했다.
"제가..... 제가 그의 눈을....."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사손이 성난 사자처럼 덮쳐왔다.
펑! 파르르르.....!
사손은 낭아봉으로 빙산을 마구 내리쳤다.
꽝! 꽝!......!
그런데 낭아봉을 내려놓더니, 백 근에 달하는 얼음 조각을 번쩍
들어 장취산과 은소소에게 던졌다.
은소소는 깜짝 놀라며 본능적으로 피하려 했다. 장취산은 급히
그녀의 등을 누르고 잠자코 있으라고 손짓했다. 그들은 빙산의
움푹 파인 곳에 몸을 숨긴 채 숨소리조차 감히 내지 못했다.
꽝! 꽈르르르.....!
얼음 덩어리는 그들이 숨어 있는 바로 앞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되어 사방으로 튕겼다.
사손은 꼼짝도 않고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두 사람의 은신처를
찾고 있는 듯했다. 그는 비록 두 눈은 멀었지만 청각이 매우 예
민하기 때문에, 조금만 소리를 내도 금방 위치를 알아내고 공격
해 올 것이었다. 다행히도 이때 파도가 치고 얼음 조각끼리 서로
부딪치는 소리에 묻혀 두 사람의 숨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사손은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풍랑소리 때문에 두 사람의 위치
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두 눈에 심한 통증이 엄습해 오
자 미친 듯이 얼음 조각을 집어던졌다.
꽝꽝꽝! 꽈르르르.....!
요동하는 듯한 굉음이 터지면서, 빙산은 삽시간에 얼음 파편으
로 뒤덮였다.
반 시간쯤 흘렀을까? 사손은 비로소 발광을 멈추었다. 이윽고
조용해진 사손이 극히 예의 바르게 말문을 열었다.
"장상공, 은낭자! 아까는 실수가 많았네. 부디 용서하기 바라
네."
말을 끝낸 그는 빙판에 앉아 회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장취산과
은소소는 섣불리 대답할 수가 없었다.
사손은 아무리 기다려도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빙판에서 일어나
한숨을 내쉬었다.
"두 분께서 굳이 내 잘못을 용서치 않겠다면 하는 수 없지."
그는 또다시 깊이 숨을 들여마셨다.
그런 사손의 태도를 살펴보던 장취산의 안색이 돌연 크게 변했
다. 얼마 전 왕반산도에서 정사파 군웅들을 정신 착란증에 빠지
도록 한 때도, 장소(長嘯)를 터뜨리기 직전에 이렇듯 한숨을 깊
이 들여마시지 않았던가? 옷깃을 찢어 귀를 틀어 막기에는 이미
때가 늦었다. 그는 한시도 지체할 수 없어 은소소를 끌어안고 냅
다 바닷물 속으로 뛰어 들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사손의 장소
가 발출되었다. 장취산은 왼손으로 은구를 꺼내 빙산에다 꽂고
오른 손으로 은소소를 안은 채, 차디찬 바닷물 속으로 잠수했다.
한참 후 두 사람은 입만 물 밖으로 내밀어 숨을 돌렸다. 몰론
귀는 계속 수중에 잠겨 있었다. 이렇게 일곱 번인가 여덟 번을
거듭하고 나서야 사손은 비로소 장소를 멈추었다.
장취산과 은소소는 살짝 빙산으로 올라 바다사자 가죽에 달린
털을 뽑아 귀를 틀어막았다. 일단은 위험을 모면한 셈이었으나,
사손과 함께 빙산에 있는 한 언제 또 무슨 위기에 처하게 될지
실로 걱정이 태산 같았다.
석양은 여전히 서쪽 하늘에 걸린 채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그
것은 북극이 반 년 동안은 낮이고, 나머지 반은 밤으로만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 신비한 우주의 조화를 모르는 두 사람은 어리
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온몸이 젖은 은소소는 추위를 견디다 못해 부르르 몸을 떨며 치
아가 서로 부딪쳤다. 사손은 이 소리를 듣고 번개처럼 낭아봉을
휘둘렀다. 길이가 일 장 남짓한 낭아봉은 그 위력이 사오 장 밖
까지 뻗쳐왔다. 장취산과 은소소는 계속 후퇴하면서 순식간에 빙
산 끝편까지 몰렸다.
장취산은 뒤편에서 자그마한 얼음 조각이 떠내려오는 것을 발견
했다. 그는 즉시 은소소를 끌어안고 허공으로 몸을 솟구쳤다. 그
리고 은구를 발출해 얼음 덩어리를 나꿔잡았다.
풍덩! 풍덩!
두 사람이 물 속에 떨어진 소리를 들은 사손은 얼음 조각을 마
구 던졌다.
장취산과 은소소가 몸을 의탁하고 있는 얼음 조각은 사손이 있
는 빙산과 점점 더 멀어져갔다. 날이 어두워질 무렵에 사손이 타
고 있는 빙산은 한 점의 은빛으로만 보일 뿐 아득히 뒤떨어졌다.
장취산과 은소소가 매달려 있는 얼음조각은 다행히도 가라앉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바닷물 속에 잠겨 있을 수만은 없었
다. 체온이 급속도로 떨어지고 있었다. 이때, 양쪽에 그리 크지
않은 빙산 하나가나타났다. 두 사람은 재빨리 그 빙산으로 올라
갔다.
장취산은 미간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이게 무슨 고생이람. 몸은 괜찮소?"
은소소는 물에 빠진 생쥐처럼 부들부들 떨었다.
"바다사자 가죽을 좀 가져올 걸 그랬어요. 당신은 어떠세요?"
그들은 서로 동문서답했다. 서로 상대방의 말을 듣지 못한것 같
았다. 그들은 잠시 서로 의아해 하다가 급히 바다사자의 솜털을
귀에서 빼냈다. 도주하는데 급급하여 귀에 솜털을 틀어막은 것조
차 잊고 있었다.
장취산은 그윽한 눈길로 은소소를 보며 말했다.
"소소, 우리가 설령 이 빙산에서 최후를 맞이한다 해도 영원히
헤어지지 맙시다."
"상공, 물어볼 말이 있어요. 숨김없이 대답해 주세요."
"뭔지 말해 보시오."
"만약에 우리가 중원에 있다 치고, 제가 당신에게 청혼을 했다
면 받아주셨을까요?"
장취산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대답했다.
"이렇게 빨리 친해지진 않았을 것이오. 그리고..... 장애도 많
았을 테고..... 우린 문파도 서로 틀리니....."
은소소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래서 당신이 첫 번째로 사손과 격전
을 벌일 떼, 은침을 발사하지 않았던 거예요."
"맞아, 그 때 왜 은침을 발사하지 않았소? 혹시 잘못 발사했다
가 내가 상처라도 입을까 봐 그랬소?"
은소소는 나직이 말했다.
"아니예요. 만약에 그 때 사손을 죽였다면 우리는 중원으로 돌
아갔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당신은 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거예요."
"소소....."
"저를 나쁜 여자라고 욕해도 좋아요. 저는 오직 당신과 함께 무
인도로 가서 오래도록 살고 싶은 마음에 그만....."
장취산은 은소소의 뜨겁고 깊은 애정에 감복했다.
"아니오. 당신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소. 내가 너무 당신의 마
음을 모른 게 잘못이었소."
은소소는 살며시 그의 품안에 안겼다.
"우리들을 같이 있게 해주신 하늘에게 감사를 드리고 싶어요.
영원히 중원으로 돌아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중원으로
돌아가게 되면 당신의 사부님은 저를 싫어할 테고, 저의 아버지
는 심지어 당신을 죽이려고 할 거예요."
"당신의 아버지?"
"저의 아버지는 백미응왕 은천정이예요. 바로 천응교를 창시한
교주시죠."
"아, 그랬었군. 하지만 걱정하지 마시오. 당신의 부친께서 아무
리 흉포하다 해도 사위를 죽이진 못할 것이오."
사위라는 말에 은소소의 두 눈이 번쩍 뜨이면서 얼굴은 홍당무
처럼 빨개졌다.
"지금 진심으로 하신 말씀이세요?"
"지금 당장 부부의 예를 올리도록 합시다."
그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마주 보며 빙산에 꿇어앉았다.
장취산은 낭랑한 어조로 말했다.
"하늘에 계신 옥황상제께 맹세합니다. 소생 장취산은 오늘 은소
소와 부부의 인연을 맺고자 하니, 이를 어여삐 여기시어 축복해
주시기 바라나이다. 어떠한 고난이 닥치더라도 절대로 오늘의 이
언약을 저버리지 않겠나이다."
은소소도 성심을 다해 기도를 올렸다.
"우리 부부가 영원히 같이 있을 수 있도록 보살펴 주시옵소서."
그녀는 잠시 숨을 돌리고 계속 이어나갔다.
"훗날 중원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개과천선하여 부군(夫君)
의 행선(行善)에 따라 절대로 무고한 사람을 살해하지 않겠나이
다."
장취산은 크게 기뻐하며 와락 그녀를 끌어안았다.
한참 후, 그들은 허기를 느꼈다. 장취산은 은구를 뽑아 고기를
잡았다. 이 일대의 고개들은 추위에 강하므로 살이 두껍고 지방
이 많아 무척 비릿했지만, 먹고 나자 힘이 용솟음치는 것 같았
다.
낮이 길고 밤은 짧아 도무지 날짜를 계산할 수 없었다. 그들은
그저 빙산이 이끄는 대로 정처없이 흘러만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이었다. 은소소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돌연 정북쪽에서 한 줄기
검은 연기가 솟아 오르는 것을 목격하고 대경실색했다.
"여보, 저것 좀 보세요!"
"이런 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단 말인가?"
검은 연기는 바로 앞에서 피어오르고 있는 것 같았으나 사실은
거리가 무척 멀었다. 원인을 알아낼 수가 없었다. 검은 연기는
점점 더 짙게 피어오르더니 나중에는 연기 속에 불꽃까지 섞여
있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저게 뭐죠?"
은소소의 질문에 장취산은 고개를 저였다.
"나도 잘 모르겠소."
은소소는 안색이 변하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저건 틀림없이 지옥문의 입구일 거예요. 우리도 이제
는 끝장이예요."
장취산도 놀라긴 마찬가지였으나 부드럽게 안심시켰다.
"아마도 산불이 난 모양이오."
"산불의 불기둥이 저렇게 높이 치솟을 수 있어요?"
장취산은 절로 한숨이 나왔다.
"모든 것은 운명에 맡깁시다."
두 사람이 타고 있는 빙산은 마치 강력한 흡인력에 빨려가듯 그
불기둥이 솟는 곳으로 표류해 갔다. 그것은 북극 부근에 있는 활
화산에서 분출된 화염이 산 가까이 있는 바닷물을 뜨겁게 만들기
때문에 복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다. 빙산은 하루를 더 표류해서
야 활화산 기슭까지 이르렀다. 섬의 서쪽은 화산에서 뿜어져 나
온 용암으로 인해 기암괴석들이 우뚝 우뚝 솟아 있었다. 섬의 동
쪽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었다. 이곳
은 북극 가까이 위치해 있었으나 화산에서 사시사철 화염을 뿜고
있어 장백산이나 흑룡강 일대처럼 고산(高山)에는 만년 빙설이
쌓여 있고, 평야에는 항상 푸르른 녹음방초와 기화이수(奇花異
樹)가 자라고 있었다.
한참 동안 섬을 둘러보던 은소소는 펄쩍 뛰면서 장취산의 목을
끌어안았다.
"우리는 신선도에 도착한 거예요. 맞죠?"
장취산도 넘치는 기쁨에 말이 나오지 않았다. 때마침 평야에는
꽃사슴들이 떼를 지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이때 빙산은 섬 가까이 흐르다가 갑자기 뜨거운 물에 밀려 다시
멀리 떠내려갔다.
은소소는 깜짝 놀라며 급히 외쳤다.
"앗! 빙산이 다시 밀려 나가고 있어요."
두 사람은 재빨리 물 속으로 뛰어들어 헤엄쳐 섬에 올랐다. 꽃
사슴들은 그들을 보고도 겁내기는커녕 오히려 신기한 듯 커다란
눈망울을 껌벅거리며 쳐다보고 있었다.
은소소는 살며시 다가가 꽃사슴의 등을 쓰다듬었다.
"선학(仙鶴) 몇 마리만 있다면, 그야말로 남국의 선경(仙境)이
나 다를 바 없겠어요."
은소소는 갑자기 비틀거리더니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소소!"
장취산은 깜짝 놀라며 급히 달려갔다. 그러나 그도 비틀거리더
니 쓰러지고 말았다.
우르르르! 우르르르!
화산이 다시 화염을 뿜으면서 섬 전체가 요동했다. 그들은 빙산
에 몸을 싣고 망망대해에서 수십 일을 표류하다가 육지에 올라서
자 발에 힘이 빠졌다. 지면이 약간 흔들렸을 뿐인데도 중심 잡기
가 힘들어 쓰러지고 만 것이다.
"하하.....!"
"호호.....!"
그들은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날은 너무나 피곤하여 그냥
땅바닥에 누워 잠이 들어 버렸다. 그들이 깨어났을 때에도 해는
아직 기울지 않았다.
장취산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이 살고 있지 않나 한 번 둘러 봅시다."
은소소는 옷매무새를 단정히 고치고 장검을 집었다. 장취산은
만일을 대비하기 위해 단단한 나뭇 가지 하나를 꺽어 들었다. 그
들은 경공술을 전개해 단숨에 십여 리를 달렸다. 그 동안 가끔
이름 모를 큰 새와 작은 짐승들이 놀라 뛰쳐나올 뿐 주위는 온통
기화이초가 만발했다.
이윽고, 그들은 울창한 숲을 끼고 있는 돌산 앞에 이르렀다. 돌
산 기슭에 석굴이 하나 뚫려 있었다.
은소소는 환호를 지르며 무작정 앞으로 달려나갔다.
"앗! 조심.....!"
장취산의 경고가 채 끝나기도 전에 캭! 하는 괴음과 함께 흰 그
림자가 번뜩이더니, 동굴에서 거대한 흰곰이 덮쳐왔다. 흰곰은
사람처럼 몸을 일으켜 거대한 앞발로 은소소의 머리를 내리쳤다.
깜짝 놀란 은소소는 장검을 뽑아 곰의 어깨를 찔렀다. 그녀의 일
검은 정확하게 곰의 어깨를 찔렀지만 경미한 상처만 입혔다. 그
녀는 오랫 동안 바다를 표류한 탓으로 몸이 허약해져 힘이 없었
기 때문이다.
흰곰은 괴성을 지르며 은소소의 장검을 후려쳤다. 은소소는 힘
없이 장검을 놓치고 말았다. 순간 장취산이 번개처럼 몸을 날려,
나뭇 가지로 흰곰의 왼쪽 무릎을 후려쳤다.
팍! 우드득!
나뭇 가지가 꺾어지면서 곰의 왼발도 여지없이 절단되었다.
"크아앙.......!"
중상을 입은 곰은 천지가 진동하는 괴성을 지르며 장취산에게
덮쳐왔다. 장취산은 재빨리 허공으로 몸을 날려 은구를 발출했
다. 은구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곰의 태양혈에 찍혔다.
"크아앙! 캭......!"
흰곰은 미친 듯이 발광했다. 그 힘이 어찌나 센지 장취산도 은
구를 놓치고 말았다. 곰은 고통스럽게 땅바닥을 뒹굴다가 끝내
사지를 쭉 뻗고 숨을 거두었다.
은소소는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정말 기가 막힌 경공술과 구법(鉤法)이었어요."
순간, 장취산이 황급히 외쳤다.
"빨리 이쪽으로 피하시오!"
은소소는 흠칫하며 쏜살같이 장취산의 품안으로 뛰어들었다. 어
느새 또 한 마리 곰이 그녀의 뒤에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장취
산은 무기가 없었다. 그는 급히 은소소를 끌어안고 뒤에 있는 소
나무로 솟구쳐 올랐다. 곰은 나무 밑에서 빙빙 돌며 미친 듯이
괴성을 질러 댔다.
장취산은 소나무 가지를 꺾어 곰의 오른쪽 눈을 향해 힘껏 격출
했다.
푹!
나뭇 가지가 정확하게 곰의 눈 속으로 파고들었다. 곰은 오른쪽
눈을 감싼 채 나무 위로 뛰어오르려 했다. 이때를 놓칠세라 장취
산은 은소소의 장검으로 곰의 머리를 향해 힘껏 내리찍었다. 곰
은 모골이 송연해지는 괴성을 지르며 천천히 쓰러졌다.
죽음을 확인한 장취산은 혹시나 동굴에 또 다른 적이 있을까
봐, 우선 돌 몇 개를 집어 동굴 안으로 던졌다. 아무런 기척이
없자 장취산이 앞장서서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에는 곰이 먹다 남은 음식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비
린내가 코를 찔렀다.
은소소는 코를 막았다.
"동굴은 넓고 좋은데 냄새가 너무 심해요."
"매일같이 깨끗하게 청소하면 차차 나아질 거요."
은소소는 앞으로 이 섬에서 장취산과 오래도록 살 일을 생각하
니 더없이 행복했다. 장취산은 나뭇 가지로 큰 빗자루를 엮어 와
서는 청소를 시작했다. 동굴은곧 깨끗해 졌으나 냄새만은 여전
했다.
"근처에 개울만 있으면 깨끗하게 씻고 닦을 수 있을 텐데....."
"내게 묘안이 있소."
장취산은 말을 끝내자마자 밖으로 뛰쳐나가 거대한 얼음조각 몇
개를 운반해 왔다. 그리고는 얼음 조각을 동굴 높은 암석 위에
올려놓았다.
은소소는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정말 좋은 생각이예요."
얼음조각이 천천히 녹으면서 물이 되어 동굴 밖으로 흘러 나갔
다. 자연히 동굴은 물로 청소한 듯이 깨끗해졌다.
은소소는 장검으로 곰의 가죽을 벗기고 살코기를 몇 동강으로
나눈 뒤 얼음으로 그것을 재어놓았다.
은소소는 아쉬운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불만 있으면 맛있는 곰요리를 먹을 수 있을텐데......"
장취산은 화산에서 분출되는 화염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불은 있지만 화염이 너무 커서 안 되겠고, 어쨌든 천천히 생각
해 봅시다."
이튿날, 은소소는 향긋한 내음에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급히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멀지 않은 곳에 잡초더미가 있고 그 사이
사이에 이름을 알 수 없는 꽃들이 활짝 피어 있었다.
"정말 너무나도 향긋해요."
"그것보다 더 기쁜 일이 있소."
"더 기쁜 일이라뇨?"
"저 화산의 화염을 이용해서 불을 가져올 수 있을 것 같소."
"어떻게요?"
"화산의 화염이 너무 강렬해서 아마 수십 장 안으로만 접근해도
사람이 타 버리고 말 것이오. 그래서 나무 껍질로 긴 줄을 만들
어......"
은소소는 알았다는 듯 손뼉을 쳤다.
"그 긴 줄에 돌을 달아 화산 분화구에 던져, 화염이 줄을 타고
오도록 하려는 거죠?"
그들은 이틀에 걸쳐 백여 장에 달하는 긴 밧줄을 만든 후 화산
으로 향했다. 화산과의 거리는 사십여 리나 되었다. 화산에 접근
해 갈수록 목은 바싹바싹 말라가고 온몸에 비오듯 땀이 흘러내렸
다. 주위에는 나무는커녕 화초도 보이지 않고 오직 검은 암석뿐
이었다. 은소소는 화산의 열기 때문에 온몸이 축 늘어져 애처로
움마저 느끼게 했다.
장취산은 보다못해 말했다.
"당신은 여기서 기다리도록 하오. 나 혼자 올라갔다 오겠소."
"또 한번 그런 말을 하면 다시는 당신과 말도 하지 않겠어요."
은소소가 이렇게 말하며 토라지자 장취산은 아무 말 없이 빙그
레 웃기만 했다.
일 리 남짓 더 접근해 가자 내공이 심후한 장취산이었지만 눈앞
에 별똥이 튕기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더 이상 접근할 수가 없었
다.
"우리 여기서 줄을 던져 봅시다. 만약에 여기서도 불씨를 얻지
못한다면....."
"생고기와 선혈만 빨아멱는 야만인이 되겠죠."
은소소는 온몸이 타버릴 것 같은 열기 때문에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 그녀는 급히 장취산의 어깨를 잡고 간신히 중심을 잡았
다. 장취산은 그녀를 부축해서 앉혔다. 그리고는 땅에서 돌을 주
워 밧줄 끝에 묶어 놓고 전력을 다해 던졌다. 밧줄은 시위를 벗
어난 화살처럼 백여 장에 달하는 밧줄이 전부 날아갔다. 그래도
분화구와는 굉장한 거리가 남아 있었다. 도무지 불씨를 끌어들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장취산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다른 방도를 강구해야 될 것 같소."
"원시인처럼 돌로 불꽃을 일으켜 불씨를 만들어 보는 게 어떻겠
어요?"
"그렇게 한 번 해봅시다."
장취산은 밧줄을 끌어당겼다. 밧줄은 화산의 열기로 인해 바싹
말라 있었다. 조그만 불씨만 있어도 금방 타 버릴 것 같았다. 화
산 부근에는 숫돌이 천지였다. 그는 숫돌 하나를 주워 장검으로
내리쳤다. 그 순간 불꽃이 튕기면서 밧줄에 닿았다. 그는 쉬지
않고 계속해서 내리쳤다. 마침내 밧줄에 불씨가 달라붙었다.
"야호! 야호.....!"
그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좋아서 어쩔 줄 몰랐다. 그들은 찌는
듯한 더위도 잊은 채 단숨에 석굴로 달려왔다. 은소소는 즉시 장
작과 풀을 준비하여 불을 피우고는 곰고기를 나무 꼬챙이에다 꽂
아놓고 불에 구웠다. 얼마만에 먹어보는 익은 음식인가!
이날 밤, 동굴엔 꽃향기가 그윽했고 모닥불을 피워 포근한 분위
기였다. 장취산과 은소소는 부부의 연(緣)을 맺은 이래 처음으로
환희의 순간을 맞이했다.
화촉동방.
그들은 태고의 모습으로 돌아가 무지개빛 나락으로 그들의 영혼
과 육신을 불태웠다.
다음날 새벽, 장취산은 동굴에서 나와 마음껏 기지개를 펴며 멀
리 해변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의 두 눈이 한 곳에 쏠리었다.
멀리 해변 암석 위에 당당한 체격을 가진 자가 버티고 서 있는게
아닌가!
그 자는 다름아닌 사손이었다. 장취산은 온몸이 목석처럼 빳빳
하게 굳어버렸다. 감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사손은 장님이 된
후, 여지껏 굶어왔는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몇 걸음 걷지 못하고 휘청하더니 고목처럼 앞으로 꼬꾸라졌다.
장취산은 급히 동굴로 들어가 은소소에게 외쳤다.
"사손도 이 섬에 올라왔소!"
은소소는 일순 심장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당신을 봤나요?"
그녀는 곧 사손이 장님이란 것을 연상하고 마음이 약간 놓였다.
그들은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헝겊으로 귀를 틀어막고 사손에
게로 갔다. 사손과 열 장의 간격을 유지한 채 장취산이 낭랑하게
외쳤다.
"사 선배님, 뭘 좀 드시겠습니까?"
사손은 사람의 목소리를 듣자,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그러나,
곧 장취산의 음성임을 알아차리고 암울한 표정을 지었다. 한참만
에야 그는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장취산은 어젯밤 먹다 남은 곰고기를 가져와 멀리서 던져 주었
다.
"받으십시오!"
사손은 예민한 청각을 이용해서 곰고기를 받아들고 천천히 먹었
다. 용호처럼 날고 뛰던 사손이 이렇듯 허약하게 전락해 버릴 줄
이야!
장취산은 동정심이 일었다. 이와 반대로 은소소는 엉뚱한 생각
을 하고 있었다.
'그냥 굶어 죽게 만들지 왜 먹을 것을 갖다 주고 그럴까? 나중
에 오히려 우리들이 그의 손에 죽게 될지도 모르는데.....'
사손은 곰고기를 반 쪽만 먹고 땅바닥에 엎어져 그대로 잠이 들
었다. 장취산은 그의 곁에 모닥불을 피워 주었다.
한 시간쯤 지나자 사손은 깨어났다.
"여기가 어딘가?"
장취산이 대답했다.
"이곳은 북극의 무인도요."
"그럼 중원으로 돌아가기가 힘들겠군."
"그건 하늘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겠죠."
"망할 놈의 하늘, 빌어먹을 하늘!"
실컷 하늘을 향해 욕설을 퍼붓고 난 사손은 다시 곰고기를 뜯기
시작했다.
"자네들은 나를 어떻게 할 셈인가?"
장취산은 잠시 망설였다.
"사 선배님, 우리 부부는....."
"뭐라고? 부부가 됐다고?"
"선배님을 장님으로 만든 것만큼은 뭐라고 사과의 말씀을 드려
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중원으로 돌아가기도 힘들것 같으
니, 앞으로 평생토록 선배님을 성심껏 모시고자 합니다."
사손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지었다.
"그토록 나를 생각해 주다니 정말 고맙군."
장취산은 사손에게 이 섬의 이름을 지어 달라고 했다.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사손이 입을 열었다.
"이 섬에 만년빙설과 영원불멸의 화산이 있다면, 빙화도(氷火
島)라고 부르지."
장취산 부부가 기거하고 있는 동굴과 약 반 리 가량 떨어진 곳
에 작은 동굴이 하나 더 있었다. 장취산 부부는 그 동굴을 깨끗
이 청소해서 사손에게 내주었다. 그리고 사냥을 하고 남은 시간
은 일상용품을 만드는데 전념했다. 사손은 종일토록 동굴에 틀어
박혀 오직 도룡도의 비밀을 캐기에 여념이 없었다.
세월은 유수같이 흘렀다.
어느 날 장취산 부부는 섬 북쪽으로 나들이를 떠났다. 섬은 생
각보다 굉장히 컸다. 이십여 리쯤 가자 울창한 숲이 나타났다.
장취산은 숲속에 뭐가 있는지 호기심이 생겼다.
"숲속에 괴물이 살고 있을지도 모르니 그냥 돌아가요."
은소소의 말에 장취산은 약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요사이 왜 만사에 흥미를 잃어 가는 걸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는 돌연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혹시 어디 불편한 게 아니오?"
은소소는 뜻밖에도 얼굴을 붉혔다.
"아니예요."
장취산은 더욱 이상한 생각이 들어 제차 캐묻자 은소소는 마지
못해 대답했다.
"우리가 너무 적적해 하니까 삼신할머니가 한 사람을 더 점지해
주셨어요."
장취산은 약간 어리둥절해 하더니 곧 뛸 듯이 환호했다.
"임신을 했단 말이오?"
"쉿! 조용히 하세요.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요?"
"우리 둘밖에 없는데 듣기는 누가 듣는단 말이오?"
그들은 함께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은소소는 날이 갈수록 몸이 점점 무거워져 아무 일도 할 수 없
었다. 만삭이 된 어느 날 밤, 장취산 부부는 동굴에 모닥불을 피
워놓고 예기를 나누고 있었다.
"여보, 우리 애가 사내였으면 좋겠어요. 계집애였으면 좋겠어
요?"
"사내면 어떻고 계집애면 어떻소?"
"아니예요. 저는 기필코 당신을 닮은 사내애를 낳고 말겠어요.
이름은 뭘로 지을까요?"
장취산은 건성으로 고개만 끄덕일 뿐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당신 도대체 요새 왜 그래요? 무슨 걱정이라도 있나요?"
"아.....아니오. 곧 아버지가 된다는 게 실감나지 않아서 그렇
소."
"거짓말 마세요. 제 눈은 절대로 속일 수 없어요."
장취산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공연한 노파심 때문인지 몰라도, 며칠 전부터 사 선배님의 행
동이나 표정이 약간씩 변하고 있는 것 같소."
"아! 맞아요. 표정이 점점 흉악해지고 있었어요. 아무래도 또
발광할 것만 같아요,"
"혹시 도룡보도의 비밀을 캐내지 못해서 그런 게 아니오?"
은소소는 난데없이 눈물을 글썽거렸다.
장취산은 그녀의 어깨를 감싸주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우리 애한테는 아무 탈도 없을 것이오.
만약에 그가 발광을 하면 그 때는 죽이는 수밖에 없소."
은소소는 전신에 경미한 진동이 일었다.
"꼭 죽일 필요는 없잖아요?"
"물론 발광만 하지 않으면 죽일 필요가 없겠지. 하지만 만사는
유비무환이라고 하지 않았소?"
"무슨 좋은 방법이라고 있나요?"
"내일부터는 동굴 안쪽에 가서 생활하고, 동굴 입구에 깊은 함
정을 파 놓읍시다."
"좋은 방법이긴 하나, 당신은 매일같이 사냥을 나가야 하는데
그가 만약 밖에서 당신을 노리면 어떡하죠?"
"험준한 절벽을 타고 도주하면 되오. 장님인 그가 설마 절벽까
지 쫓아오진 못할 거요."
이튿날 새벽부터 장취산은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삽이나 곡
괭이가 없이 나무로 파헤치자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사손은
점점 더 상식에 벗어난 행동만 일삼았다. 때로는 도룡보도를 미
친 듯이 휘둘러 댔다.
장취산은 구덩이를 오 장 깊이로 파놓고 밑바닥에 날카로운 나
무를 박은 후 사손이 구덩이에 빠졌을 때 투석(投石)을 하기 위
해 많은 돌까지도 준비해 놓을 계획이었다.
이날 오후, 사손은 동굴 밖에서 왔다갔다 하며 배회했다. 장취
산은 사손이 무슨 소리를 들을까 봐 감히 구덩이를 파지 못했다.
사냥도 못 가고 그저 동굴을 지키며 그의 동정을 살폈다. 사손은
자꾸 무엇인가 중얼거리고 있었다. 귀를 기울여 보니, 하늘에서
부터 시작하여 역대(歷代) 황제, 소림사의 달마대사 등 닥치는
대로 욕을 퍼부어 댔다. 나중에는 무당파의 개산조사(開山祖師)
장삼봉까지도 그의 욕설의 대상이 되었다. 장취산은 은근히 부아
가 치밀어 올랐다.
사손은 돌연 큰 소리로 외쳤다.
"장삼봉이 도둑놈인데 그의 제자인 장취산은 오죽하랴! 절대로
살려둘 수 없다."
사손은 다짜고짜 장취산을 스쳐 지나 동굴 안으로 돌진해 들어
갔다. 장취산은 급히 뒤따라 들어갔으나 사손은 이미 함정에 빠
진 후였다. 함정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던지라, 사손은 약간 놀랐
을 뿐 전혀 상처를 입지 않았다. 사손은 함정에 떨어지기가 무섭
게 위로 솟구쳐 올랐다. 장취산은 다급한 나머지 함정을 파는데
썼던 나뭇 가지를 집어 사손의 머리를 내리쳤다. 사손은 나뭇 가
지의 파공음을 듣고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나뭇 가지를 나꿔챘
다. 그 바람에 사손은 다시 함정에 빠졌다.
이때, 은소소는 거의 해산할 때가 다 되어 반나절을 통증으로
시달려 왔었다. 그러나 사손이 갑작스레 발광을 하자, 뒤틀리는
복통을 참고 장취산에게 장검을 던져 주었다. 장취산은 장검을
받아들고신속하게 생각을 굴렸다.
'장님임에도 불구하고 내 무기를 뺐을 수 있었던 것은, 파공음
을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때 사손이 다시 솟구쳐 올라왔다. 장취산은 사손의 머리를 겨
냥해서 검끝을 꼿꼿하게 밑으로 내렸다. 아무 파공음도 일지 않
았다. 사손은 자기 스스로 검끝을 향해 머리를 쳐박으러 오고 있
었다. 다음 순간 푹! 하는 소리와 함께 사손의 입에서 비명이 터
져 나왔다.
"악!"
장검은 이미 그의 머리를 한 치 남짓 파고들었다. 하지만 그의
임기웅변이 빨랐다. 검끝이 머리에 찔리자마자 뒤로 젖히면서 구
덩이로 내려섰다. 간신히 목숨을 건졌으나 중상이었다. 얼굴은
온통 선혈이 낭자했고, 장검은 그의 머리에 꽂힌 채 파르르 떨고
있었다.
사손은 장검을 뽑고 옷자락으로 상처를 감쌌다.정신이 혼미했
다. 결코 경미한 상처가 아님을 그 자신도 직감했다. 그는 즉시
도룡보도를 뽑아 머리 위에다가 일장의 검막(劍幕)을 전개하고
재차 솟구쳐 올랐다. 함정에서 뛰쳐나온 사손은 더욱 살기등등하
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장취산은 한 발 한 발 물러섰다. 사손은
혹시라도 장취산 부부가 자기 옆으로 슬쩍 빠져 나갈까 봐 도룡
보도를 마구 휘둘렀다. 도무지 빠져 나갈 틈이 없었다.
일촉 즉발의 순간!
"으앙! 으앙.....!"
동굴 안쪽에서 돌연 갓난애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사손은 크
게 놀라며 즉시 걸음을 멈추었다. 갓난애의 울음소리는 끊임없이
들려왔다. 장취산 부부는 생사존망의 위기에 쳐해 있었으나 오히
려 침착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갓난애에게 집중되었다. 사내
애였다. 손발을 마구 내저으며 큰 소리로 울어 대고 있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갓난애가 울음을 터뜨리는 순
간, 사손의 광기가 씻은 듯이 사라지며 제정신을 차린 것이다.
사손은 급히 물었다.
"사내앤가, 계집앤가?"
장취산은 약간 어리둥절했으나 급히 대답했다.
"사내입니다."
"그래? 태(胎)는 잘랐나?"
"태를 잘라야 하나요? 아 참, 내 정신 좀 봐, 깜빡 잊었군."
사손이 장검을 내밀자 장취산은 장검을 받아 태를 잘랐다. 사손
은 가까이 다가왔지만, 전혀 공격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장취
산은 의아한 나머지 고개를 돌려 사손을 쳐다보았다. 사손은 무
척 근심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은소소는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어디 좀 안아 봐야겠어요."
장취산은 갓난애를 안아 그녀의 품에 안겨 주었다.
사손이 다시 물었다.
"갓난애를 씻기려면 더운 물이 있어야 되는데 준비됐나?"
"아 참, 아무것도 준비된 게 없으니 이를 어쩐담!"
말을 끝낸 장취산은 곧장 달려나가려 했다. 사손은 갑자기 철탑
(鐵塔)처럼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자네는 여기 있게. 내가 가서 물을 끓여 오겠네."
그는 즉시 동굴 밖으로 몸을 날렸다.
얼마 후, 사손은 끓인 물을 들고 들어와 장취산과 함께 갓난애
를 깨끗이 씻겨 주었다.
"으앙! 으앙.....!"
울음소리가 우렁찼다. 사손은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엄마를 닮았나? 아버지를 닮았나?"
"아무래도 엄마 쪽을 닮은 것 같습니다."
사손은 갑자기 한숨을 내쉬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 애의 앞날에 행복만이 깃들어야 할 텐데....."
은소소는 은근히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사 선배님, 혹시 이 애의 관상이 좋지 않아서 그러세요?"
"아니네, 애가 그대를 닮았으면 너무 예쁘기 때문에, 나중에 쓸
데없이 여색에 빠지지나 않을까 해서 그렇다네."
장취산은 호탕하게 웃었다.
"그건 너무 지나친 노파심이 아닐까요? 우리는 영원히 여기서
살게 될 텐데."
은소소가 급히 끼어들었다.
"안 돼요. 우리는 돌아가지 않아도 되지만, 이 애만은 절대로
이 무인도에서 한평생 지내게 할 수 없어요. 몇십 년 후, 우리들
이 모두 죽고나면 혼자 남게 될 것이고, 또 어디서 아내를 맞아
들이죠?"
이 지극한 모성애에 사손도 감복하여 한 마디 내뱉었다.
"장 부인의 말이 맞네. 우린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애를 중원
으로 보내야 할 책임이 있네."
은소소는 크게 기뻐하며 억지로 일어났다. 장취산은 급히 그녀
를 부축했다.
"이게 무슨 짓이오? 어서 눕도록 하시오."
"아니예요. 사 선배님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려야겠어요."
사손은 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닐세. 그럴 필요없네. 그런데 애의 이름은 지어 놨나?"
"아직 못 지었습니다. 선배님께서 이름을 좀 지어 주십시오."
"음..... 어디 한 번 생각해 보세."
은소소는 나름대로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 자가 우리 애를 그렇게 좋아한다면, 아예 이 애를 자기의
친자식처럼 여기게 해야겠군. 그러면 나중에 설령 광기가 재발작
해도 이 애만은 무사할 수 있을 거야.'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녀는 즉시 실천에 옮겼다.
"사 선배님, 이 애를 위해서 한 가지 부탁드릴 게 있는데 들어
주시겠어요?"
"뭔가?"
"이 애를 양자로 삼아 주세요. 애가 성장하고 나면 선배님을 친
아버지처럼 모시게 하겠어요. 여보, 당신의 생각은 어떠세요?"
장취산은 은소소의 고충을 짐작하고도 남았다.
"정말 좋은 생각이오. 사 선배님, 우리 부부의 간절한 부탁을
들어 주십시오."
사손은 처절하리 만큼 장탄식을 토했다.
"내 친자식이 어떻게 죽었는지 아나?"
사손의 어조에 다시 풍기(風紀)가 감도는 듯했다.
"만약에 내 아들이 살아 있었다면, 올해 나이 십팔 세가 되었을
걸세. 그리고 무공 역시 내 진전(眞傳)을 이어 받아 무당칠협에
못지 않았을 걸세."
그의 음성에는 울적함과 강한 자만심이 섞여 있었다.
장취산과 은소소는 은근히 후회가 생기기도 했다.
'애당초 그의 눈을 멀게 하지 않았던들 넷이서 아무 걱정 없이
이 섬에서 평화스럽게 살아갈 수 있었을 텐데.....'
세 사람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장취산이었다.
"사 선배님, 이 애를 양자로 삼겠다면, 선배님의 성을 따라 사
(謝)로 바꾸겠습니다."
사손은 뛸 듯이 기뻐하며 행여나 장취산의 마음이 달라질까 봐
다짐을 받듯 얼른 입을 열었다.
"그게 정말이라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네. 나의 죽은 아들은
사무기(謝無忌)라고 했네"
장취산은 진지한 표정으로 그의 말을 받았다.
"만약 선배님이 원한다면 이 애의 이름을 사무기라 짓겠습니
다."
사손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 애가 정말 나의 성을 따르면 자네들은 어떻게 하나?"
"애의 성이 사가 되는 장이 되든 우린 변함없이 사랑할 겁니다.
나중에 그가 성장하여 낳아준 부모에게 효도하고 의부를 존경하
고 사랑하면, 그보다 더 흐뭇하고 보람있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
까? 소소, 내 말이 맞지 않소?"
은소소는 약간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말이 맞아요. 한 사람이라도 이 애를 더 사랑해 줄 수
있다면 이 애에겐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사손은 갑자기 그 자리에서 허리를 꺽어 큰절을 올렸다.
"우선 자네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전하네. 내 눈을 실명
시킨 원한도 말끔히 지워버리겠네. 나는 비록 친자식을 잃었지만
새로이 양자를 얻었으니 이보다 더 뜻깊은 일은 없을 걸세. 나중
에 사무기가 만천하에 명성을 떨치게 되면, 부모가 장취산과 은
소소이고, 의부가 금모사왕 사손이라는 것도 자연히 알려지게 될
걸세."
은소소는 사무기라는 이름이 다소 못마땅했으나, 아들의 장래를
위해 사소한 일은 문제삼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아기를 토닥거리며 말했다.
"애를 직접 안아 보시겠어요?"
어린애를 받아 안은 사손의 팔이 떨리고 있었다. 그는 너무나
기뻐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러나 곧 어린애를 건네주었다.
"자..... 어서 엄마가 안게. 내 흉칙한 꼴을 보고 놀라면 어떻
게 하나?"
사실 갓난애가 그의 모습을 알아볼 리 만무했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말투에는 아기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들어 있었다.
은소소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선배님이 좋으시다면 좀더 안으세요. 나중에 걷게 되면 매일
데리고 놀도록 하세요."
"좋지. 좋고 말고....."
이때 어린애가 울음을 터뜨리자, 사손은 당황해 했다.
"애가 배가 고픈 모양이네. 어서 젖을 물리게. 난 밖으로 나가
겠네."
장취산은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사 선배님......"
"우린 이제 한집안 식구가 됐는데 선배 후배를 따져서야 되겠
나? 참, 이렇게 하는 게 어떻겠나? 우린 지금부터 결의형제를 맺
는 걸세. 그러면 나중에 애한테도 좋을 게 아니겠는가?"
장취산은 그의 간곡한 청을 거절할 수 없어 은소소의 산후 처리
가 끝나는 대로 결의형제와 의부(義父)를 섬기는 의식을 정식으
로 행하기로 했다.
이로부터-----
세 사람은 온갖 정성을 쏟아 어린애를 키웠다. 무기가 다섯 번
째 생일을 맞았을 때 장취산은 사손에게 한 가지 제의를 했다.
"형님, 애도 이제부터 무공을 배울 때가 됐으니, 형님께서 가리
치도록 하십시오."
사손은 뜻밖에도 고개를 내둘렀다.
"그건 안 돼네. 내 무공은 워낙 바탕이 깊어 어린애는 깨우칠
수가 없네. 역시 자네가 무당의 심법(心法)을 가르쳐주게. 그가
여덟 살이 되면 내가 가르치겠네. 약 이 년쯤 배우고 나서 자네
들은 돌아가야 할 게 아닌가?"
은소소는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우리가 돌아가다뇨? 중원으로 돌아간단 말입니까?"
사손이 진지하게 말했다.
"요 몇 년 동안 난 하루도 빠짐없이 이 섬의 풍향과 물살을 살
펴왔네. 매년 밤이 가장 길 때 언제나 북풍이 수십 일 쉬지 않고
불어왔네. 커다란 뗏목을 만들어 돛을 달고 그 북풍을 이용한다
면 계속해서 남쪽으로 갈 수 있을 걸세. 하늘이 방해하지 않는
한 자네들은 중원으로 돌아가게 될 걸세."
은소소는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자네들이라뇨! 그럼 아주머님은 우리와 함께 가지 않겠다는 뜻
인가요?"
"난 두 눈이 멀었는데 중원으로 돌아가 무엇을 하겠는가?'
"그럼 우리도 가지 않겠어요. 무기도 의부를 이곳에 남겨 두고
는 절대 떠나려 하지 않을 거예요."
"그 때가 되면 내가 무기를 십 년 간 보살펴 온 셈이니 그걸로
충분하네. 빌어먹을 하늘은 언젠가는 또다시 나에게 액운을 내릴
걸세. 그러니 이 애도 나하고 오랫 동안 함께 있으면 액운의 영
향을 받게 될 걸세."
이 말에 은소소는 소름이 오싹 끼쳤으나, 사손의 신세타령이려
니생각하고 별로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무기가 여덟 살이 되자, 사손은 정말 그에게 자신의 무공을 전
수해 주기 시작했다.
어느새 또 일 년이 지났다. 무기가 태어난 후로부터, 사손은 더
이상 도룡도를 거들떠 보지 않았었다.
헌데-----
이날 밤, 장취산이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다가 밖으로 나가 보
니, 달빛 아래 사손이 넓은 바위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그 도
룡도를 받쳐들고 뭔가 깊은 사색에 잠겨 있었다. 장취산이 흠칫
놀라 비키려는데 사손은 이미 그의 발걸음소리를 듣고 입을 열었
다.
"오제(五第), 이 <무림지존 도룡보도>라는 여덟 글자는 아무래
도 터무니 없는 낭설인 것 같네."
장취산은 그에게 가까이 갔다.
"무림에서는 황당무계한 소문이 많기 마련입니다. 형님께선 지
혜가 깊으신데 왜 한사코 그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지 이해가 가
지 않습니다."
사손은 길게 숨을 들이키고 나서 심각한 음성으로 말했다.
"자네가 몰라서 그러네. 사실 난 소림파의 고승인 공견대사(空
見大師)로부터 이 얘기를 전해 들었네."
장취산은 다소 의아해 했다.
"앗! 공견대사라면 소림 장문인 공문대사(空聞大師)의 사형으로
서 이미 세상을 떠난 지 오래 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네. 공견은 이미 죽었지. 내가 그를 때려 죽인 걸세."
장취산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강호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는 것이 퍼뜩 뇌리에 떠올랐다.
----- 소림신승(少林神僧), 견문지성(見聞智性)! -----
그것은 당금 소림에서 무학이 가장 뛰어난 네 명의 고승을 가리
키는 말이었다. 바로 공견, 공문, 공지(空智), 공성(空性). 오래
전에 공견대사는 병을 앓아 세상을 떠났다고 들었는데, 사손이
그를 죽였을 줄이야.....
사손은 탄식하면서 말했다.
"공견대사는 어찌나 왕고집인지 내가 때려도 시종 반격을 하지
않다가 결국 십 삼 장(掌)을 맞고 숨이 끊어졌네."
장취산은 더욱 놀랐다.
웬만한 고수도 사손의 일장을 맞으면 목숨을 잃게 될 것이었다.
그런데 공견대사는 십 삼 장을 맞고서야 숨이 끊어졌으니, 그의
몸은 금강불괴(金剛不壞)에 가까왔다는 게 아닌가!
사손의 안색이 울적하게 변하며 매우 후회스러워 하는 것 같았
다. 아마도 그와 공견 사이에 범상치 않은 사연이 있는것 같았
다. 장취산은 궁금했으나 감히 묻지를 못했다.
사손이 짧은 침묵 끝에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평생 동안 가장 존경해 온 분이 바로 공견대사였네. 당시
그가 나에게 반격을 전개했다면 난 오늘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
도 없었을 걸세."
"그 고승의 무학이 형님보다 더 심후했다는 뜻입니까?"
"어찌 나하고 비교가 되겠는가. 차이가 너무 많았네. 한마디로
말해 하늘과 땅이었네."
여지껏 어떠한 무림 인물을 거론해도 일소에 부쳤던 사손의 입
에서 이렇나 말이 나오자, 장취산은 의아해졌다.
사손은 그의 마음을 꿰뚫어 보았다.
"내 말을 믿지 않는 모양이군. 좋네, 가서 무기를 불러오게. 오
늘 그 녀석에게 한 가지 옛날 이야기를 들려 줘야겠네."
장취산은 형님의 말을 감히 거역할 수 없어 곧 동굴로 들어가
아들을 깨웠다.
무기는 의부가 옛날 이야기를 해주겠다는 말을 듣자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했다. 그 바람에 은소소까지 깨어나 세 사람이 함께
나와 사손 곁에 둘러앉았다.
달빛 아래 사손의 모습은 마치 불상(佛像)처럼 진지했다. 그는
우선 무기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애야, 머지 않아 넌 중원으로 돌아가게 될것이다."
무기는 어리둥절했다.
"중원이라뇨? 그게 무슨 말이죠?"
"우리가 엮은뗏목이 바다에 가라앉거나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
지만 않는다면, 틀림없이 중원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지금부
터 내가 하는 말을 명심해 두어라. 만약 중원으로 돌아가게 되
면, 부모님을 제외하곤 아무도 믿지 말아야 한다.내가 네 나이
만했을 때 이런 말을 해 주는 사람이 있었더라도....."
그는 말끝을 흐리더니 다시 이어갔다.
"내가 열 살이 되던 해에, 우연히 무공이 고강한 사람을 스승으
로 모시게 되었다. 나의 스승은 내 자질이 뛰어나다면서 심혈을
기울여 모든 무학을 전수해 주었다. 자연히 우린 부자이상으로
정이 두터웠다. 나는 스물 세 살이 되던 해에 사문을 떠나 멀리
서역으로 갔다. 그곳에서 좋은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지....."
여기까지 말한 그는 은소소에게 고개를 돌렸다.
"오매(五妹), 영존 백미응왕도 당시 서역에서 사귄 친구 중에
한 사람이라네. 나중에 난 아내를 맞이해 자식을 낳아 행복한 삶
을 누렸었네....."
사손은 당시를 회상하듯 주름진 얼굴에 환한 빛이 스쳐갔다. 그
는 무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계속했다.
"내가 스물 여덟 살이 되었을 때, 스승님이 찾아와 집에서 며칠
머물기로 했네. 나는 어린애처럼 기뻐하며 아내와 함께 모든 정
성을 기울여 스승을 대접했네. 한데, 그 스승이 인면수심(人面獸
心)일 줄이야. 어느 날 그는 술에 취해 갑자기 내 아내에게...."
장취산과 은소소는 동시에 놀란 외침을 토했다.
"앗! 그럴 수가....."
스승이 제자의 아내를 겁탈한 일은 무림에서 그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천인공노할 대악사(大惡事)였다.
사손의 눈가에 가벼운 경련이 일었다.
"나의 아내가 비명을 지르자 부친께서 그녀의 방으로 달려갔네.
스승은 추행이 발각되자 나의 부친을 죽이고 어머니도 죽였고,
심지어 돌도 채 안 지난 아들 사무기까지도....."
무기는 자기의 이름이 거론되자 고개를 갸우뚱했다.
"사무기요?"
장취산이 얼른 호통을 쳤다.
"의부께서 말씀하시는데 왜 끼어드느냐?"
사손은 무기의 머리를 다시 쓰다듬어 주었다.
"그렇다. 내 친아들도 너와 똑같이 이름이 사무기였단다. 나의
스승은 그를 집어 던져 아예 핏덩어리로 만들었단다!"
무기가 다시 물었다.
"그럼..... 살아나지 못했겠네요?"
사손은 처연히 고개를 내둘렀다.
"살아나지 못했어! 살아날 수가 없었어....."
은소소는 얼른 아들에게 손짓을 하여 더 이상 의부에게 아무 말
도 묻지 말라고 했다.
사손은 다시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말을 이었다.
"당시 난 그 광경을 보고 어찌 할 바를 몰랐네. 그 때, 내가 그
렇게도 존경해 오던 스승이 난데없이 나의 가슴을 강타했네. 난
피할 생각도 못하고 그의 일격을 맞아 그 자리에서 정신을 내가
다시 깨어났을 때 스승은 온데간데 없었네. 주위는 온통 시체로
덮여 있었지. 부모님과 아내 그리고 동생들, 하인들까지 모두 살
수를 당했네. 스승은 내가 일격을 맞고 죽은 줄 알고 더 이상의
독수를 전개하지 않았네."
장취산과 은소소는 이 불가사의한 비화(秘話)에 그저 넋을 잃을
뿐이었다.
"그 후 나는 피나는 노력을 기울여 새로운 무공을 연마했네. 삼
년 뒤에 난 스승을 찾아가 겨루었지만 도저히 그의 적수가 될 수
없었네. 나는 다시 심산유곡을 찾아다니며 오직 스승을 꺾을 수
있는 무공을 연마하는데 전념했네. 한데, 스승의 공력도 훨씬 고
강해서 두 번째의 복수도 상처만 입은 채 수포로 돌아갔네......
난 상처를 치료한 지 얼마 후에 칠상장(七傷掌)의 비법을 얻게
됐네. 그 장법은 위력이 대단했네. 나는 다시 그 장법을 파고드
는데 이 년이란 세월을 허비했네. 난 천하에 제일가는 고수라도
능히 물리칠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겨 스승을 찾아갔네. 그런데 세
번째로 그를 찾아 갔을 때, 그는 이미 어디론가 사라진 뒤였
네......"
사손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 그렇다고 해서 난 포기할 수 업었네. 난 격분한 나머지
도처에서 살인방화를 저질렀네. 그 때마다 난 그 현장에다 스승
의 이름을 남겼네."
"앗!"
"그럼....."
여기까지 들은 장취산과 은소소는 불현듯 생각나는 것이 있어
놀란 외침을 토했다.
"이쯤하면 나의 스승이 누군지 알겠나?"
은소소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혼원벽력수(混元霹靂手)가 아닌가요?!"
한때, 무림에 갑자기 무서운 살겁의 회오리가 일었었다.
요동(僚東)에서 시작하여 영남(嶺南)까지 불과 반 년 사이에 연
속으로 삼십여 건(件)의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많은 무림의 고
수들이 영문도 모르게 피살되었다. 그리고 그 현장에는 언제나
<혼원벽력수>라는 이름이 남아 있었다. 피살된 자들 중에는 같은
문파의 장문인도 있었고, 강호에서 이름이 알려진 노영웅도 적지
않았다. 자연히 한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연루되
었다. 한 가지 사건만으로도 충분히 무림을 떠들썩하게 만들 수
있었는데 연달아 삼 십여 건이 터졌으니 강호는 그야말로 벌집을
쑤셔 놓은 꼴이었다.
잠시 무당칠협도 스승님의 명을 받들고 하산하여 이 사건의 진
상을 조사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아무런 단서도 찾아내지 못했
다. 강호인들은 누가 혼원벽력수의 이름을 빌어 저지른 사건이라
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혼원벽력수는 강호에서 덕망
이 놓은 인물인데다가, 피살자 중에는 그의 절친한 친구도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연히, 무림인들은 흉수를 찾아 내지 못하자 그를 찾아나섰다.
그를 찾아 내야지만 이 사건의 실마리를 풀 수 있을거라 판단했
기 때문이다. 그러나 혼원벽력수마저 연기처럼 사라졌다. 지금,
사손이 스스로 진상을 실토하지 않았다면, 장취산도 그 사건의
진상을 몰랐을 것이다.
사손은 아랫 입술을 깨물며 침통하게 말했다.
"내가 그의 이름을 앞세워 그 엄청난 일들을 저지른 것은, 그가
스스로 나서서 변명하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의 힘을 빌어서라도
그의 행방을 찾아내는데 목적이 있었네."
너무나 엄청난 충격에 할 말을 잃고 있던 은소소가 입을 열었
다.
"그럼 나중에라도 혼원벽력수 성곤(成崑)을 찾아 냈습니까?"
사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찾아 내지 못했네. 나중에 난 낙양에서 송원교를 만나게 됐
지."
장취산은 흠칫 놀랐다.
"저의 대사형 송원교 말입니까?"
"그렇다네. 바로 무당칠협의 맏이인 송원교지. 당시 나는 보다
놀랄 만한 일을 저질러야겠다는 생각에 그날 밤 송원교를 죽이기
로 계획했네."
사손은 장취산을 잠시 바라보다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날 밤, 나는 저녁 식사를 마친 후 객점에서 운공조식을 했
네. 송원교가 무당칠협 중에 맏이니만큼 무공이 상당한 경지에
도달해 있을 걸로 생각했네. 만약 일격에 그를 죽이지 못하고 달
아나게 한다면 내 정체가 탄로나기 때문에 각별히 신중을 기했
네. 일단 내 정체가 탄로나면 스승을 강호로 끌어낼 계획이 수포
로 돌아갈 뿐 아니라, 모든 무림인의 공격 표적이 되어 원수도
갚기 전에 죽게 될 게 뻔했기 때문일세."
장취산은 눈살을 가볍게 찌푸리며 물었다.
"나의 대사형과 겨룬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저는 어째서
대사형께서 그 얘기를 거론하는걸 한 번도 듣지 못했을까요?"
"송원교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네. 아마 금모사왕 사손이
란 여섯 글자조차 들어본 적이 없을 걸세. 난 결국 그를 찾아가
지 않았기 때문이네."
장취산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늘에 감사를 드려야겠군요."
은소소가 빙긋이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빌어먹을 하늘에게 감사할 게 아니라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사
대가에게 감사를 드려야 옳죠."
장취산과 무기는 그녀의 퉁명스러운 말에 모두 웃음을 터뜨렸
다.
밤은 계속 깊어만 갔다.
----- 제 2 권 1 장 끝 -----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2 권
제 2 장 십 년 만에 다시 중원(中原)으로
사손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날 저녁, 나는 객점 방 안에 앉아서 암중에 진기를 돋구며
칠상권을 하고 있었네. 자네는 나의 칠상권을 한 번도 보지 못했
지? 한 번 구경해 보고 싶지 않나?"
장취산이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은소소가 먼저 말을 받았다.
"그것은 필히 신묘무비(神妙無比)하며 위맹절륜(威猛竊倫)할 거
예요. 그런 절예를 지녔으면서 왜 송대협을 찾아가지 않으셨어
요?"
사손은 은소소의 의중을 간파하고 빙긋이 웃었다.
"내가 칠상권을 시험하는 도중 자네의 남편을 다치게 할것이 염
려되는 모양이군. 이 권력(拳力)을 마음먹은 대로 조절하지 못한
다면 어떻게 칠상권이라 할 수 있겠느냐?"
말을 마친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한 그루 고목 옆으로 다가
갔다. 곧이어 외마디 기합소리와 함께 나무줄기를 향해 일권(一
拳)을 뻗어냈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고목은 손상을 입기는
커녕 나무 껍질조차도 파손되지 않았다.
'섬에서 구년 간 거주하는 동안 무공이 완전히 황폐되어 버렸구
나. 하기야 나는 그가 연공(鍊功)하는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
으니.....'
은소소는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그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 큰 소리로 갈채를 보냈다.
사손은 또 빙긋이 웃으며 은소소를 바라보았다.
"오매(五妹)는 마음에도 없는 갈채를 보내는 걸 보니, 나의 무
공이 옛날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군."
"이런 궁핍하고 황량한 섬에 왕래하는 사람이라곤 우리 세 사람
뿐인데, 무슨 무공을 연마할 수 있겠어요?"
"오제는 내가 발출한 일권의 오묘함을 간파했는가?"
장취산은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형님께서 격출한 일권은 위세가 무척 위맹한 것 같은데, 나뭇
잎조차 흔들리지 않았으니 소제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형님이
아닌 무기가 일권을 뻗어냈어도 나뭇 가지 정도는 흔들렸을 텐
데......"
"사흘 후면 나뭇잎이 모두 시들어 떨어지고 보름 후면 고목 전
체가 말라 죽을 것이네. 나의 이 일권에 고목은 맥락(脈絡)이 끊
어졌다네."
장취산과 은소소는 그의 말을 듣고 내심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사손은 말을 끝낸 후 도룡보도를 뽑아들더니 고목 줄기를 향해
한 차례 휘둘렀다. 순간 요란한 굉음과 함께 고목은 힘없이 바닥
에 쓰러졌다. 장취산 등 세 사람이 잘려진 고목 곁으로 나가가
살펴보니, 과연 물을 운반하는 나무의 근맥(筋脈)이 대부분 끊어
졌으며, 어떤 것은 비틀어지고 어떤 것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
을 정도로 가루로 변해 있었다.
장취산은 크게 탄복하며 입을 열었다.
"형님, 소제는 오늘 정말 좋은 구경을 했습니다."
사손은 만면에 득의의 빛을 가득 떠올렸다.
"나의 이 일권에는 일곱 줄기의 경력이 함유되어 있다네. 강맹
(剛猛), 음유(陰柔), 강중유유(剛中有柔), 유중유강(柔中有剛),
횡출(橫出), 직송(直送), 내축(內縮) 등의 경력이지. 적은 첫째
줄기의 경력은 감당해도 둘째 줄기의 경력은 막아내지 못하며,
설령 둘째 줄기의 경력까지는 감당해 낸다 해도 세째 줄기의 경
력을 막아내지 못한다네. 칠상권이란 이름도 여기서 유래된 것이
지. 오제, 그날 자네와 내가 장력을 겨루었을 때 내가 칠상권을
시전했다면, 자네도 막아내지 못했을 것일세."
"그랬겠군요."
무기는 무슨 까닭으로 의부(義父)와 아버지가 장력을 겨루었는
지 묻고 싶었으나, 은소소가 고개를 저으며 제지하는지라 사손에
게 시선을 돌렸다.
"의부님, 칠상권을 내게도 가르쳐 주시지 않겠습니까?"
사손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안 돼!"
무기가 크게 실망하여 다시 사정하려 하자 은소소가 웃으며 말
을 받았다.
"무기야, 바보 같은 소리 그만 해. 너의 의부께서 익힌 무공은
너무 정묘하여 상승내공(上乘內功)을 지니지 않고선 익힐 수 없
어."
"그렇다면 상승내공부터 익힌 후 다시 의부께 부탁해야겠군요."
사손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 칠상권은 배우지 않는 것이 좋아. 사람의 체내에는 음양이
기(陰陽二氣)와 금목수화토(金木水火土) 오행(五行)이 있지. 심
(心) 즉 마음은 화(火)에 속하고 폐는 금(金)에 속하며 신장은
수(水)에 속한다. 그리고 허파와 간은 목(木)에 속하지. 이 칠상
권의 권공은 한 번씩 익힐 때마다 내장이 한 번의 손상을 입게
돼. 소위 칠상(七傷)이란 먼저 자신부터 해친 다음 적을 해친다
는 뜻이야. 내가 칠상권을 연마할 때 심맥(心脈)을 다치지 않았
다면, 때때로 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광성(狂性) 발작을 일으키
지도 않지."
장취산과 은소소는 이 말을 듣고서야 그가 때때로 광성이 발작
되는 이유를 알았다.
사손이 가볍게 탄식하며 말을 이었다.
"나의 내공이 공견대사나 무당 장진인(張眞人) 정도로 심후하고
견실해진 후에 이 칠상권을 연마했다면, 심맥이 이렇게 손상되지
는 않았을 걸세. 당시 나는 오직 복수를 해야겠다는 조급한 마음
에 온갖 심기(心機)를 다 동원하여 공동파의 수중에서 칠상권보
를 탈취하는데 성공했네. 그리고 권공을 연성하기도 전에 사부가
죽어 복수를 하지 못할 것이 염려되어, 서둘러 연공을 시작했지.
그 후 내장이 크게 손상되었음을 알았을 때는 이미 구제할 수 없
는 상황이었네. 오매는 칠상권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겠나?"
은소소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알 것 같아요. 아주버님의 사부가 익혔다는 무공과 비슷한 모
양이지요?"
"그렇다네. 내 사부의 혼원벽력수(混元霹靂手)라는 별명이 말해
주듯이 그의 장력에는 풍뢰(風雷)가 함유되어 있어 위력이 극히
놀랍지. 내가 그와 칠상권공으로 대적하여 권력이 그의 몸에 닿
는 순간,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피하려 할 때는 이미 때가 늦게
되지. 오제, 자네는 나의 심성이 음침하다고 꾸짖지 말게. 내 사
부는 비록 겉으로 보기엔 소박하지만 천하의 어느 누구보다 심계
(心計)가 뛰어난독랄한 사람이네. 그런 사람에겐 똑같이 음험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면 원수를 갚을 길이 없네. 그날 저녁 나는
칠상권공을 시험해 본 후 송원교를 찾아가려고 담을 뛰어넘었지.
바닥에 닿기도 전에 갑자기 어떤 사람이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
리는 바람에 나는 대경실색했네. 나는 즉시 손을 뒤로 휘저었지
만, 바람만 잡았을 뿐이었고 일권을 반격한 것도 허사였었네. 그
래서 왼발을 바닥에 내딛기 무섭게 몸을 돌렸는데, 그 때 뒤에서
어떤 사람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고해(苦海)는 끝이 없고 고
개를 돌리는 곳이 바로 항구라고 말하더군."
무기는 크게 흥미를 느끼며 말했다.
"의부, 그 사람은 의부에게 장난을 친 모양이군요."
그러나 장취산과 은소소는 그 사람이 바로 공견대사임을 짐작했
다.
사손이 말을 이었다.
"당시 나는 너무 놀라 전신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지. 그런 강
한 무공으로 나를 죽이는 것은 간단한 일이었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나는 놀람과 농락을 당한 분노가 범벅이 된
채 재차 몸을 돌려 보니, 약 사장 밖에 한 분의 백의승인(白衣僧
人)이 서 있더군. 내가 몸을 돌리기 직전가지만 해도 그는 내 등
뒤에서 불과 두세 자 거리에 있었는데, 눈깜짝할 사이에 사장 밖
으로 물러났으니 그 신법이 얼마나 놀라운가! 내가 몸을 돌리자
그 백의승인은 자기가 공견이라고 말하더군. 나는 공견이라는 법
호(法號)를 듣는 순간, 강호에 널리 알려진 소림신승(少林神僧),
견문지성(見聞智性)이라는 말을 생각해 냈지. 그리고 그는 사대
신승(四大神僧) 중에서도 첫째이니, 무공이 이렇게 고강한 것도
무리가 아님을 알았네."
장취산은 그 후 공견대사가 사손의 십삼 권을 맞아 죽었음을 생
각하고, 마음 속으로 은근히 불안을 금치 못했다.
"당시 나와 그분과의 대화와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난 일은 대략
이러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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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림사의 공견신승(空見神僧)이신가요?"
"신승이란 호칭은 감당하기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소림의 공견
임은 틀림없습니다."
"불초는 대사와 생면부지인데, 대사께선 어째서 불초를 희롱하
시는지요?"
"거사께선 오늘 밤 무당파의 송원교 대협을 죽이러 갈 생각이지
요?"
속셈을 간파당한 사손은 내심 크게 놀랐다.
공견대사는 사손이 대답을 하지 않자 다시 입을 열었다.
"거사께서는 또 한 차례 천하무림을 발칵 뒤집어 놓을 생각이지
요? 그래서 혼원벽력수 성곤으로 하여금 모습을 나타나게 하여,
당신의 일문(一門)을 살해한 원수를 갚을 생각이지요?"
그가 사부의 이름을 들먹이자 사손의 놀라움은 한층 더했다. 사
손은 혼원벽력수 성곤이 그의 일문을 몰살한 일을 아무에게도 말
하지 않았다. 또한 그의 사부 성곤도 이 일을 은폐하기에 급급해
다른 사람에게 말할 리가 만무했다.
사손은 마음을 진정시키고 공견대사를 주시했다.
"대사께서 그의 소재를 알려 주신다면 이 사손은 평생 동안 대
사를 위해 몸을 바치겠습니다."
공견대사는 가볍게 탄식했다.
"성곤이 저지른 죄가 용서받기 어려울 정도로 지대한 것은 사실
입니다. 그러나 거사께서 격노한 나머지 이렇게 많은 무림인들을
살해한 죄악도 결코 작지는 않습니다."
사손은 그가 보인 무공이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고강했고, 또
지금은 그에게 부탁하는 입장인지라 분노를 꼭 참았다.
"그것은 성곤이 종적도 남기지 않고 어디론가 깊숙이 숨어 버렸
으니, 도저히 찾을 길이 없어....."
"나도 당신의 가슴속에 맺힌 원한을 이해는 합니다. 그러나 송
대협은 무당파 장진인의 수제자(首弟子)이므로, 장신이 그를 해
친다는 것은 큰 화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나의 의도는 화를 저지르기 위함입니다. 저지르는 일이 클수록
성곤으로 하여금 모습을 나타내게 할 확률이 높으니까요."
"사 거사, 당신이 송대협을 죽인다면 당신이 바라던 대로 성곤
이 나서는 것은 틀림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성곤은 지난
날의 성곤이 아닙니다. 당신의 무공 실력으로는 그의 적수가 되
지 못하므로 원한을 갚는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합니다."
"성곤은 나의 사부입니다. 때문에 그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는
내가 대사보다 더 잘 압니다."
"그는 다시 뛰어난 고수를 사부로 모셨기 때문에, 무공이 크게
진전되었습니다. 당신이 아무리 공동파의 칠상권을 연성했어도
여전히 그를 당해 내지는 못합니다."
사손의 놀라움은 매우 컸다.
사손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공견을 주시했다.
"대사께서는 그 일을 어떻게 아셨지요?"
"성곤이 내게 말해 주었습니다."
사손의 놀라움은 극에 달했다.
"그럼 그는 또 어떻게 알았지요?"
"최근 몇 년 동안 그는 시종 당신 곁을 따라다녔습니다. 다만
수시로 변장을 했기 때문에 당신이 그를 알아보지 못했을 뿐이지
요."
"흥! 내가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구요? 설령 그가 재로 변한다
해도 나는 그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사 거사, 당신은 오직 한시바삐 절예를 연성하여 복수를 하겠
다는 일념뿐이었는지라, 주위의 일을 마음 속에 두지 않았습니
다. 그래서 당신은 밝은 곳에 노출되어 있고 그는 어두운 곳에서
당신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당신은 그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암암리에 나를 죽였으면 후환을 제거할 수 있
었을 텐데....."
"그가 당신을 해칠 마음이 있었다면, 아마 당신은 오래 전에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사 거사, 당신은 지난날에 두
차례나 그를 찾아가 복수하려 했지만 두 차례 모두 패했습니다.
그가 당신의 목숨을 뺏을 생각이 있었다면 그 때 왜 당신을 죽이
지 않았겠습니까? 그리고 당신이 칠상권보를 탈취하러 갔을 때
당신은 공동파의 삼대고수(三大高手)와 내공을 겨루었죠? 당시
공동오로중의 나머지 이로가 당신을 포위 공격하지 않았는지 아
십니까?"
사실상, 그 때 그는 공동 삼로에게 부상을 입힌 후 나머지 이로
도 중상을 입고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이 괴이한 일은
지금까지도 의문으로 남아 있는 터였다.
그는 공견대사가 이렇게 말하자 내심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그럼 공동파의 나머지 이로는 성곤에게 중상을 당했단 말입니
까?"
"공동 이로가 어떤 수법으로 부상을 당했는지 사 거사는 직접
살펴보지 않았습니까? 당시 그 두 사람의 얼굴빛이 어땠습니까?"
"대사의 말을 들어 보니, 당시 공동 이로는 성곤에게 부상을 당
한 것이 분명하군요."
당시 공동 이로의 얼굴엔 온통 붉은 반점이 얼룩져 있었다. 그
것은 혼원공의 음경(陰勁)에 의해 부상을 당했거나, 이질, 장티
푸스 등 악성 전염병에 걸렸을 때만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렇다
면 공동 이로는 혼원공의 공격을 당했음이 분명했다. 또 당금 천
하에서 혼원공을 연성한 사람은 사부 성곤과 그 자신 두 사람뿐
인 것이다.
공견대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탄식했다.
"당신의 사부는 취중에 당신의 일문을 몰살한 것을 얼마나 후회
했는지 모릅니다. 때문에 당신이 복수를 하기 위해 두 차례나 그
를 찾아왔지만 당신을 죽이지 않은 것입니다. 심지어는 당신에게
부상을 입히는 것도 원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두 차례 모
두 미친 듯이 그에게 덤벼들었습니다. 그는 당신에게 부상을 입
히지 않고서는 도저히 당신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갈 수가 없었지
요. 그 이후부터 그는 줄곧 당신의 뒤를 따라다니며 당신이 위기
를 당할 때마다 암암리에 당신을 구해 주었습니다."
사손이 곰곰이 생각해 보니 공동 오로와 싸운 일 외에도 세 건
의 수수께끼 같은 일이 있었음이 분명했다. 극도로 위급한 상황
에 처했을 때마다 적의 공세가 갑자기 느슨해지곤 했던 것이다.
공견대사가 또 가볍게 탄식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는 자기가 저지른 죄가 너무나 엄청난 것임을 잘 아는 지라,
당신에게 용서조차 빌 수 없어 당신이 그 일을 잊기만 바랬습니
다. 그런데 당신은 그 일을 잊기는커녕 오히려 일을 더욱 크게
벌렸습니다. 이런 마당에 이제 또 송원교 송대협을 살해한다면,
이 일은 도저히 수습할 수 없게 되어 버립니다."
"그렇다면, 대사께서 나의 사부님을 만나게 해주십시오."
"당신 사부는 당신을 만날 면목이 없고 또 당신을 만날 용기도
없습니다. 그리고당신은 그를 만난다 해도 아무 소용 없습니
다."
"대사, 어떻게 나의 피맺힌 원한을 이렇게 쉽게 포기하라는 말
입니까?"
"사 거사의 참혹한 심정을 저도 충분히 이해하고 마음 아픕니
다. 그러나 당신의 사부는 취중에 이성을 잃은 것이지 본래의 뜻
이 아니었습니다. 하물며 지금 그는 깊이 뉘우치고 있으니, 사
거사께선 지난날의 사제지정(師弟之情)을 생각하여 한 번만 너그
럽게 용서해 주십시오."
사손은 주먹을 불끈 쥐며 고함을 질렀다.
"비록 그의 일장에 맞아 죽는 한이 있어도, 피맺힌 이 원한을
꼭 복수하고야 말겠습니다."
공견대사는 무엇인가 한참 동안 깊이 생각하더니 사손을 바라보
았다.
"사 거사, 영사(令師)의 무공은 지난날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고강해졌습니다. 제 말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직접 저에
게 몇 권(拳)을 시험해 보십시오."
"대사와는 아무 원한도 없는데 어찌 대사를 해치겠습니까? 불초
의 무공은 비록 보잘것 없지만 칠상권은 아무나 쉽게 막아낼 수
있는 무공이 아닙니다."
"사 거사, 영사께서 당신의 일가족 열 세 명의 목숨을 살해 했
으니, 당신도 내게 십 삼 권을 공격하십시오. 그래서 제게 상처
를 입힌다면 저는 이 일에 더 이상 간섭하지 않을 것이며, 영사
께서도 스스로 모습을 나타내어 당신을 만날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이 원한을 없었던 것으로 하십시오."
이 말에 사손은 얼른 대답하지 않고 속으로 생각을 굴렸다.
'공견대사의 무공은 매우 고강하니, 칠상권이 아무리 위맹하다
해도 만약 그를 다치게 하지 못한다면 원수를 갚지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공견대사는 그가 대답을 하지 않자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이 일에 개입한 이상 당신이 무고한 생명을 해치는 것을
더 이상수수방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선량한 마음으로
고쳐 먹고 여기서 손을 깨끗이 씻는다면 지난일도 없었던 것으로
하고 문제삼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계속 복수를 고집한다면, 당
신에게 살해된 사람의 자제나 그 제자들도 당신에게 복수하려 한
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좋습니다. 내가 십 삼 권을 공격할 테니 감당하기 어려우면 즉
시 손을 멈추라고 말하십시오. 그대신 당신은 약속대로 나의 사
부를 만나게 해줘야 합니다."
공견대사는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손은 삼성(三成)의 공력만 돋구어 제일권을 그의 가슴에 가
격했다. 둔탁한 음향과 함께 공견대사는 몸을 휘청거리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내가 삼성의 공력만 사용했는데도 뒤로 한 걸음 밀려났으니,
칠상권을 펼쳐낸다면 삼 권만 가해도 극락객이 되어 버리겠군.'
사손은 이렇게 생각하며 제 이권에는 공력을 약간 증가시켰다.
그러나 공견대사는 이번에도 몸을 휘청거리며 뒤로 한 걸음 물러
섰다. 제 삼권에는 칠성의 공력을 돋구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
다. 사손은 그를 쓰러뜨리려면 전력을 다해야 함을 알았지만, 그
가 죽을 것이 염려되었다. 사손은 비록 지금까지 많은 악행을 저
질렀지만, 공견대사의 그 자비로운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존경심
이 일었다.
"대사, 당신은 얻어맞기만 하고 반격은 가하지 않으니 더 이상
공격하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이 나의 삼 장을 받아냈으니 나도
송원교를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하겠습니다."
"그럼 성곤과의 원한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사손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계속했다.
"대사께서 이 일을 간섭하고 나섰으니, 나는 대사를 존경하는
뜻에서 앞으로 성곤과 그의 가족에게만 복수할 뿐 이 일과 관계
없는 무림인은 한 명도 해치지 않겠습니다."
"아미타불! 사 거사께서 그런 결심을 하셨다니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소승은 이 원한을 완전히 화해시키기로 결심했으니, 사
거사께선 나머지 십 권도 마저 공격하십시오."
'대사가 끝까지 고집을 피우니, 성곤을 끌어내려면 부득불 칠상
권을 사용하는 도리밖에 없겠군.'
여기까지 생각을 굴린 사손은 더 이상 양보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무례를 범하겠습니다."
하며 제 사권을 격출했다. 그는 이번에는 칠상권으로 공격했다.
일 권이 공견대사의 몸에 적중되자 가슴이 안으로 약간 들어가는
가 싶더니, 지금까지와는 반대로 이번에는 앞으로 한 걸음 내딛
었다. 공견대사는 소림파의 금강불괴체신공(金剛不壞體神功)을
운기했던 것이다.
사손은 갑자기 한 줄기 반탄지력(反彈之力)에 의해 내심 크게
놀라며 오권을 음유지력(陰柔之力)으로 공격했다. 하지만 공견대
사는 이번에도 앞으로 한 걸음 내딛으며 사손의 공격을 막았다.
공견대사가 백미(白眉)를 약간 치켜올렸다.
"사 거사의 칠상권 위력이 이토록 고강할 줄은 미처 생각지 못
했습니다. 제가 공력을 되돌려보내지 않았다면, 당신의 칠상권을
감당해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손은 단숨에 나머지 칠상권을 연달아 공격했다. 그러나 공견
대사는 광풍 폭우와 같은 사 권을 차례차례 몸으로 받아냈으며
그 때마다 앞으로 한 걸음씩 내딛었다. 사손은 외마디 함성과 함
께 제 십권을 격출했다. 순간 공견대사는 고개를 약간 끄덕이더
니 권력이 몸에 닿기도 전에 재빨리 기선을 제압해 버렸다.
순식간에 안색이 백지장처럼 창백하게 변했다.
"제 십일권은 서둘러 공격하지 말고, 우선 마음부터 진정시킴
후 발출하십시오."
사손은 비록 호승심(好勝心)이 강한 사람이었지만,한동안은 제
십일권을 공격할 수가 없었다.
'아직 삼 권이 남았지만 이 대사는 사람됨이 인자하고 도량이
넓은데 이분에게 부상을 입힐 수는 없다. 하지만 사부를 나오게
하여 피맺힌 원한을 갚으려면 모험을 하지 않을 수 없지.....'
마음을 진정시킨 사손은 체내의 공력을 최대한으로 모아서 제
십일권을 공격했다. 그런데 공견대사가 몸을 공중으로 피했기 때
문에, 그의 가슴에 적중되어야 할 일 권이 아랫배에 적중되었다.
순간 공견대사는 미간을 찌푸리며 몹시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
다. 공견대사는 가슴으로 일 권을 받아내면 반탄력이 너무 강해
사손이 감당해 내지 못할 것이 염려되어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아랫배로 일 권을 받아낸 것이다.
사손은 놀람과 동시에 감격이 범벅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
다.
"나의 사부는 용서받지 못할 죄를 범했으니 죽어 마땅한데, 대
사께서는 어찌하여 금옥지체(金玉之體)로 그의 재앙을 막으려 하
십니까?"
공견대사는 한참 동안 호흡을 조절하더니 씁쓸하게 웃었다.
"이제 이 장만 더 받아내면 이 원한을 완만히 해결할 수 있게
되겠군요."
그가 말을 하는 동안은 호흡이 조절되지 않음을 발견한 사손은
급히 생각을 굴렸다.
'음, 금강불괴체신공을 운기할 때는 말을 하면 안 되는 모양이
구나. 그렇다면 나는 그에게 말을 시키면서 갑자기 일권을 공격
해야지.'
이렇게 생각한 사손은 겉으론 조금도 내색을 하지 않고 또 입을
열었다.
"만약 내가 십 삼 권 이내에 당신에게 부상을 입힌다면, 당신은
정말 사부를 만나게 해주시겠습니까?"
"그건 그가 직접 내게 한 말이므로....."
사손은 바로 이때다 싶어 재빨리 그의 아랫배를 향해 일권을 공
격했다. 이 일권은 너무나 빨랐고 또 아랫배를 공격하기 때문에
공견대사로서는 호체신공(護體神功)을 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불문신공(佛門神功)은 생각만 해도 자연히 운기되는 지라
사손의 권경이 그의 아랫배에 닿는 순간, 그는 이미 신공을 돋구
어 전신을 보호했다. 순간, 사손은 하늘과 땅이 빙글빙글 돌고
심장이 파열되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여덟 걸음이나 후퇴하여 고
목에 부딪친 뒤에야 간신히 몸을 지탱할 수 있었다.
사손은 자신을 잃은 상태에서 갑자기 독랄한 생각이 떠올라 고
의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 피맺힌 원한을 복수하긴 틀렸으니 이 세상에 살아 있을 가
치도 없게 되었습니다."
하고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천령개를 향해 힘껏 내리쳤다. 그는
천령개를 내리쳐 자살을 기도할 때, 공견대사가 달려와 제지시키
면 그 틈을 이용해 독수를 펼칠 계획이었다. 사손은 자신도 목숨
을 건 모험이었다. 만약 공견대사가 그의 속셈을 간파하여 제지
시키지 않는다면, 어렵게 생각해 낸 계획이 수포가 되는 것이었
다.
"안 됩니다. 사 거사.....!"
사손의 갑작스러운 행위에 공견대사는 깜짝 놀라 고함을 지르며
덮쳐와 그의 오른쪽 손목을 붙잡았다. 사손은 이 절호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좌권에 전력을 운기하여 공견대사의 명치를 공격했
다. 완전 무방비 상태에서 일 권을 맞은 공견대사는 신공을 운기
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순식간에 공견대사는 내장이 파열되어
바닥에 쓰러졌다. 일 권을 성공시킨 사손은 공견대사가 살아날
가망이 없음을 알고 갑자기 양심의 가책을 느껴 그의 몸 위에 엎
드려 대성통곡했다. 공견대사는 그가 통곡을 하자 빙긋이 웃으며
오히려 그를 위로했다.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는 죽기 마련이니 사 거사께선 너무 슬퍼
하지 마십시오. 그것보다 당신의 사부가 곧 나타날 테니, 당신은
마음을 진정시켜 다음 일에 대비하십시오."
이 말에 사손은 자기가 십 삼 권을 공걍扁쩜밗크게 소
모시켰으므로 강적이 나타날 시기에 통곡만 하고 있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기조식을 하기 시작했
다. 하지만 긴 시간이 지나도 성곤은 모습을 나타낼 기미조차 보
이지 않았다. 그가 의혹의 눈빛으로 공견대사를 내려다보자, 공
견대사는 간신히 말을 이었다.
"그.....그는 약.....약속을 어길 사람이 아닌데..... 어떤 사
람에게 갑자기 길을 제지당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군요."
사손은 대노하여 고함을 질렀다.
"나를 감쪽같이 속였군요. 그래서 당신을 죽이게 했으며....."
"사 거사, 결코 당신을 속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당신을 속인
결과가 되고 말았으니 정말 미안합니다."
사손은 격노한 나머지 또 그를 나무라려다 말고 생각을 굴렸다.
'그가 나를 속여 자신을 죽이게 할 하등의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리고 오히려 그가 내게 사과하고 있으니.....'
사손은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생겨 그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았
다.
"대사, 소원이 있으면 말씀해 보십시오. 불초가 힘 닿는데까지
노력하겠습니다."
공견대사는 비단 무공만 고결할 뿐 아니라 대지대혜(大智大慧)
하고 대자대비(大慈大悲)하여 사손의 심중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사손은 공견대사의 숨결이 점점 약해지자 손바닥을 그의 영대혈
에 올려 내력(內力)으로 그의 생명을 조금이라도 더 연장시키려
고 안간힘을 썼다.
공견대사가 갑자기 숨을 길게 들이키며 물었다.
"당신의 사부는 아직도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네!"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았다면 오지 않을 것입니다."
"대사, 염려하지 마십시오. 나는 앞으로 다시는 무고한 살생으
로 그를 나타나게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하늘 끝까지 가서라
도 그를 찾아 내고 말 것입니다."
"하.....하지만 다.....당신의 무공으로는 그의 적수가 되지 못
합니다. 혹.....혹시....."
공견대사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사손이 귀를 그의 입가에
바짝 갖다 대자, 그는 다시 실날 같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혹.....혹시 도룡도(屠龍刀)를 찾아 칼 속의 비........"
공견대사는 결국 말을 끝맺지 못하고 숨을 거두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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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견대사와 있었던 일의경과를 모두 이야기한 사손은 장취산을
바라보았다.
"오제, 그날 선상에서 자네가 나와 장력을 겨룰 때 내가 자네
의 목숨을 뺏지 않은 것은, 갑자기 공견대사의 말이 생각났기 때
문이었네."
장취산은 자기의 목숨을 구해 준 사람이 공견대사임을 알고 고
승에 대한 존경심이 더욱 깊어졌다. 또한 사손이 도룡도의 비밀
을 알아내려고 온갖 심혈을 기울이는 이유와, 평소에는 그렇게
온순하고 예의바른 그가 광성(狂性)이 발작하면 야수처럼 변하는
까닭, 그리고 절세무공을 지녔으면서도 항상 수심이 가득한 이유
를 모두알게 되었다.
사손이 또 긴 한 숨을 내쉬었다.
"그 후 나는 도룡도의 소식을 듣고 왕반산도(王盤山島)로 칼을
탈취하러 달려갔었지. 오매 영존과 나는 죽마고우로 무척 절친했
으며, 응왕사왕(鷹王獅王)이라는 명호로 당세에 위명을 떨쳤지만
나중에는 서로 원수가 되었지. 그 가운데는 다른 사람이 개입되
었지만 말할 수는 없네. 나는 칼을 획득하기 전에는 성곤을 찾으
려고 혈안이 되었었지만, 도룡도를 획득하고부터는 오히려 그가
나를 찾아올 것을 두려워했지. 그래서 은밀한 장소를 찾아 칼 속
에 숨겨진 비밀을 찾아내기 시작했으며, 자네들이 나의 행적을
누설할 것이 염려되어 함께 이곳으로 데려온 게야. 그러나 십년
이 지난 오늘 날까지 아무 소득도 없으니....."
"공견대사께서 임종 전에 남긴 도룡도를 찾아 그 속의 비......
뭐라고 한 말은 다른 뜻이 있는 게 아닐까요?"
"지난 십년동안 그 비밀을 알아내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네. 칼
속에 큰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은 틀림없으나, 그 비림이 무엇인
지 알아낼 방도가 없으니....."
그날 밤의 긴 이야기가 있은 이후로 사손은 이 일을 두 번 다시
거론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기를 독려하여 무공을 연마시키는 일
에는 한창 더 엄격해졌다. 무기는 이제 겨우 아홉 살밖에 되지
않았는지라, 아무리 총명하다 해도 단기간에 사손의 절세 무공을
깨닫기란 불가능했다. 그런데도 사손은 그를 때리고 꾸짖으며 휴
식을 취할 시간을 조금도 주지 않았다.
보다못한 은소소가 어느 날 사손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주버님, 아주버님의 개세신공을 무기가 짧은 기간에 어떻게
모두 익힐 수 있겠어요? 시간은 얼마든지 있으니 천천히 가르치
세요."
"나는 그에게 무공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모두 머리 속에 기
억하게 만드는 거야."
"그럼 지금까지 무기에게 무공을 가르치지 않았단 말인가요?"
"흠! 일초일식(一招一式)씩 가르쳐 언제 다 배울 수 있겠느냐?
나는 다만 그에게 머리 속에 영원히 잊지 않도록 기억시켜 주고
있을 뿐이다."
은소소는 그의 의도를 알 수 없었지만, 그가 하는 일에는 언제
나 남다른 데가 있는지라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오히려 무기는 나이에 비해 영특하고 사리 판단을 잘하는 지라
모친을 위로했다.
"어머니, 의부께선 다 나를 위해 그러시는 거예요. 그분이 아프
게 매질을 할수록 나는 더욱 잘 기억할 수 있어요."
어느 날 아침, 사손이 갑자기 장취산 부부를 불렀다.
"오제, 오매, 앞으로 넉 달만 지나면 바람이 남쪽으로 불테니
오늘부터 뗏목을 만들자."
장취산은 크게 기뻐하며 물었다.
"뗏목을 만들어 중원으로 돌아갈 생각이십니까?"
"그것은 하늘에 달린 일이야."
처음에 은소소는 모험을 하면서까지 중원으로 돌아갈 것이 아니
라, 아무에게도 구속받지 않는 섬에서 그냥 살자고 주장했다. 그
러나 무기의 장래를 생각해서 생각을 바꾸었다.
뗏목을 만들면서도 사손은 무기를 곁에 앉히고, 그간 배운 무공
에 대해 질문하고 또 새로운 것을 엄하게 가르쳤다. 심지어 사손
은 무기에게 각종 도법과 검법까지도 마치 사서삼경을 외우듯 머
리로 기억하게 했다. 사손이 무기에게 해석은 한 마디도 해주지
않고 각종 무공을 머리로만 기억하게 하자, 은소소는 무기가 불
쌍하게 생각되었다.
뗏목은 두 달이 걸려서야 가까스로 완성이 되었다. 그리고 돛대
를 세우는데 또 반 달이 걸렸다. 그 다음에는 짐승의 고기를 소
금에 절여 말리고 가죽으로 물주머니를 만들었다. 어렵게 어렵게
모든 준비를 끝냈으나 바람은 아직도 남쪽으로 불지 않았다. 그
들은 해변에 간단한 움막을 만들어 그곳에서 거주하면서 바람이
남쪽으로 불 때를 기다렸다.
어느 날 새벽, 드디어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북쪽에서 남쪽으로
불고 있었다.
장취산 부부는 뛸 듯이 기뻐하며 필요한 물건들을 챙기기 시작
했다. 모든 준비를 끝낸 세 사람은 뗏목을 바다로 밀어 놓은 후
무기와 은소소가 먼저 뗏목 위로 뛰어올랐다. 이어 장취산이 사
손의 손을 잡았다.
"형님, 여기서 뗏목까지의 거리는 여섯 자밖에 되지 않으니, 손
을 잡고 함께 뛰어 오릅시다."
"오제, 우리는 이제 영원히 작별하게 되었네. 부디 몸조심 하
게."
장취산은 영원한 작별이라는 말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형.....형님은 지금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형님은 우리와
함께 가지 않을 작정입니까?"
장취산은 불현듯 몇 년 전 사손이 자기 혼자 섬을 떠나지 않고
남겠다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러나 그 이후 이 일에 대해서는
두 번 다시 거론하지 않았기 때문에 장취산 부부도 잊고 있었던
것이다. 뗏목을 만드는 동안에도 사손은 전혀 그런 뜻을 비추지
않았었다.
"헝님 혼자 이 섬에 계시면 적적해서 견디기 어려울 테니, 함께
중원으로 돌아갑시다."
장취산이 이렇게 말하며 힘껏 당겼으나, 사손의 몸은 마치 거대
한 바위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장취산은 마음이 조급해진 나
머지 은소소를 불렀다.
"여보, 형님께서 우리와 함께 가지 않으시겠다는구료!"
이 말을 들은 은소소와 무기는 깜짝 놀라며 동시에 뗏목에서 뛰
어내렸다. 무기가 사손 곁으로 다가와 어리광을 부리듯 말했다.
"의부께선 왜 함께 가지 않으려고 하십니까? 의부께서 안 가시
면 저도 떠나지 않겠습니다."
사실 사손도 이들 세 사람과 헤어지기가 싫었다. 왜냐하면, 이
번에 헤어지면 다시 만날 기약도 없거니와 황량한 섬에 혼자 산
다는 것은 차라리 죽는 것보다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장
취산, 은소소와 결의형제를 맺은 후부터는 그들을 자기 자신보다
더 이끼고 사랑했으며 의자(義子) 무기에 대한 사랑은 친자식을
능가할 정도였다. 하지만 자신은 일신에 많은 피빛을 지고 있는
지라, 강호의명문정파의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하물며 도룡도까지 이미 그의
수중에 있으므로, 그가 만인의 표적이 되어 있음은 의심할 여지
가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지금은 눈까지 멀어서 원수들의 포
위 공격을 막아낼 자신이 없었다. 그가 중원에 나가 원수들의 포
위 공격을 받게 되면 장취산 부부가 수수방관할 리 만무하며, 그
렇게 되면 분쟁이 일어나 네 사람 모두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은
뻔한 일일 것이다 .사손은 이런 것들을 생각해서 혼자 이곳에 남
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는 무기를 와락 끌어안으며 말했다.
"무기야, 너는 착한 아이이니 의부의 말을 잘 듣겠지? 의부는
나이도 많고 눈까지 멀었기 때문에 중원에 가면 습관이 되지 않
아 여기보다 오히려 더 불편하단다."
"중원에 돌아가면 제가 항상 의부님 곁에서 시중을 들어드리겠
어요."
"아냐, 나는 아무래도 여기 남아 있는 게 편할 것 같아."
무기가 장취산과 은소소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어머니, 아버지! 우리 모두 여기서 의부님과 함께 살아요."
은소소가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아주버님에게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으면 우리 함께 대책을 세
워요.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는 아주버님만 여기에 남겨 두고 떠
날 수는 없었요."
사손은 급히 생각을 굴렸다.
'이들은 나와 깊이 정이 들어 절대 나를 두고 그들만 가지는 않
을 모양인데, 무슨 방법으로 그들을 떠나게 하지?'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장취산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형님은 적이 너무 많기 때문에 우리에게 누가 될 것을 염려하
시지요? 우리가 중원에 돌아가도 은밀한 장소를 찾아 외부와 왕
래를 하지 않으면 걱정할 게 없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 무당산에
은둔하면 금모사왕이 무당산에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
할 것입니다."
사손이 얼굴에 오만한 빛을 떠올렸다.
"흥! 내가 아무리 눈이 멀고 쓸모없는 패물이 되었어도, 아직은
너의 사부 장진인의 비호를 받을 정도로 무능하진 않아."
장취산은 자기의 실언을 후회하며 얼른 말머리를 돌렸다.
"형님의 무공은 가사(家師)에 비해 조금도 뒤지지 않는데, 그
분의 비호를 받을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회강서장(回彊西藏),
관외대막(關外大漠) 등 우리 네 사람이 은거할 정소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은밀한 장소로 말하자면 천하에서 여기를 능가하는 곳이 없다.
너희들은 도대체 떠날 작정이냐, 떠나지 않을 작정이야?"
"형님께서 함께 가시지 않는다면 우리도 가지 않겠습니다."
은소소와 무기도 장취산의 말에 찬성했다.
사손이 가벼운 탄식을 했다.
"좋다. 모두 여기 남아 있다가 내가 죽은 다음에 떠나도록 해
라."
"예, 형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여기서 이미 십 년을 살았는데,
서둘러 중원으로 돌아가야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사손이 갑자기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내가 죽고 나면 너희들은 이곳에 아무런 미련이 없겠지?"
하며 도룡도를 뽑아들더니 자기의 목을 베려 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사태에 장취산은 대경실색했다.
장취산은 사손의 고집을 꺾을 수 없음을 알고 울먹이며 말했다.
"형님의 결심이 그러하시다면, 소제는 이만 작별의 인사를 올리
겠습니다."
하고 사손에게 작별의 인사를 올렸다.
그러나 어린 무기는 여전히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의부께서 가시지 않는다면 저도 가지 않겠습니다. 의부께서 자
진하면 저도 자진하겠습니다. 사나이 대장부는 한 번 한다면 합
니다. 의부께서 칼로 목을 베면 저도 칼로 목을 베겠습니다."
"이놈아, 무슨 당치도 않은 말을 지껄이느냐!"
사손은 고함을 지르며 무기의 뒷덜미를 붙잡아 뗏목 위로 던졌
다. 이어 장취산과 은소소마저 모두 뗏목 위로 던졌다.
"오제, 오매, 그리고 무기야, 아무쪼록 무사히 중원에 도착하기
를 빌겠다."
하고 무기에게 특별히 한 마디 더 당부했다.
"무기야, 중원에 돌아가서는 장무기라는 이름을 써야 한다. 사
무기 석 자는 마음 속에만 두어야지 절대 입 밖으로 발설해선 안
된다. 알겠느냐?"
무기가 울면서 외쳤다.
"의부.....! 의부.....!"
사손이 도룡도를 옆으로 비켜들며 고함을 질렀다.
"너희들이 또 이리로 내려오면 나는 우리들의 결의지정(結義之
情)을 단절해 버리겠다."
장취산과 은소소는 사손의 결심을 도저히 되돌리게 할 수 없음
을 알고 눈물을 뿌리며 작별을 고했다. 뗏목이 물결과 바람을 따
라 해변에서 점점 멀어지자 사손의 모습도 점점 작아졌다. 무기
는 모친의 품에 쓰러져 지칠 때까지 울더니 가까스로 잠이 들었
다.
바람이 줄곧 같은 방향으로만 불고 파도도 심하지 않아 뗏목은
순조롭게 남행을 계속했다. 한 가지 답답한 것은 망망대해에서
방향을 분별하기가 어려운 점이었다. 그들은 해가 뜨고 지는 것
으로 방향을 구별하며 밤낮없이 남으로 남으로 항해를 계속했다.
항해를 한 지 한 달이 지났지만 육지는 고사하고 지나가는 배
한 척도 보이지 않았다. 항해를 하는 동안 장취산은 무기에게 무
당파의 권법과 장법의 입문 공부를 가르쳤다. 그의 무공 전수 방
법은 사손보다 훨씬 고명했고 또 무당파 무공 기초가 어렵지 않
아 무기는 쉽게 익혔다. 끝없는 항해는 몇 달이 계속되었다. 이
날도 파도는 잔잔했으며, 뗏목의 크고 작은 두 개의 돛은 바람을
가득 안은 채 쏜살같이 물을 가르며 질주했다.
은소소가 이 광경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주버님은 비단 무공만 고절할 뿐 아니라 지리 풍수에도 깊은
조예를 지녔으니, 정말 기재(奇才) 중의 기재예요."
무기가 이때 느닷없는 말을 했다.
"바람이 반 년은 남쪽으로 불고 반 년은 북쪽으로 분다면, 우리
는 명년에 의부를 뵈러 빙화도로 갈 수 있겠군요."
이때 은소소가 갑자기 남쪽을 가리키며 외쳤다.
"저게 뭐죠?"
장취산이 고개를 돌려 보니, 멀리 하늘과 바다가 맞닿는 곳에서
두 개의 흑점이 희미하게 보였다.
"고래인 모양인데 우리 뗏목을 받으면 야단이군요."
은소소가 자세히 살펴보더니 고개를 고개를 저었다.
"고래는 아니예요. 등에서 물을 뿜어내지 않는걸요."
세 사람은 잔뜩 긴장된 채 두 개의 흑점을 뚫어지게 주시했다.
한 시간 가량이 지나 쌍방의 거리가 가까와지자 은소소가 환호성
을 질렀다.
"아. 배예요!"
해가 서쪽으로 기울 무렵 두 척의 거대한 배가 똑똑히 보았다.
은소소는 가까와지고 있는 두 척의 배를 한참 동안 살피더니, 갑
자기 얼굴빛이 크게 변하며 몸을 바르르 떨었다.
무기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어머니, 왜 그러세요?"
은소소는 입술만 몇 번 움직였을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장취
산이 걱정스러운 듯 그녀의 손을 쥐어 주었다.
은소소가 가볍게 탄식했다.
"중원에 돌아오자마자 만나게 되었군요."
"뭘 말입니까?"
"저 배의 돛을 자세히 보세요."
장취산이 고개를 들어 살펴보니, 왼쪽의 범선 돛에 한 마리의
검은 독수리가 날개요. 우리 아버지의 천응교 깃발이예요."
이 순간 장취산의 마음 속에는 만감이 교차했다.
'소소의 부친은 천응교 교주이며 이 사교(邪敎)는 온갖 악행을
자행하는 집단인데, 장인을 만나면 어떻게 대처하지? 그리고 은
사께서는 나의 혼사에 대해 뭐라고 말씀하실까?'
이때 장취산은 자기의 손 속에서 은소소의 손도 가늘게 떨고 있
음을 느끼고, 그녀 역시 많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았다.
"여보, 우리 아이가 이렇게 컸으며 우리는 백년해로를 약속했는
데 무엇을 염려하오?"
"나로 인해 당신이 난처하게 될 것이 염려되어 그래요. 여보,
설사 불미스러운 일이 있더라도 무기를 생각해서 참으세요."
뗏목과 두 척의 배는 거리가 점점 좁혀졌다.
장취산이 잠시 망설이다 나직이 물었다.
"배에 탄 사람을 불러 당신 부친의 안부를 물어보는 게 어떻겠
소?"
"그럴 필요 없어요. 중원에 도착한 후 우리 세 식구가 함께 아
버지를 만나러 가요."
"그렇게 하는 게 좋겠구료."
그들이 두 척의 범선을 그냥 지나치려 할 때, 한 척의 선상에서
도광이 번뜩이며 너댓 명의 장한이 싸우고 있는 것 같았다. 은소
소가 배 위를 쳐다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도 저기 계신지 모르겠군요."
"여기서 당신의 부친 배를 만났으니 가까이 가 봅시다."
그들은 돛의 방향을 약간 바꾸어 두 척의 배를 향해 천천히 접
근했다. 가까이 접근했을 때 천응교 선상에서 한 사내가 고개를
내밀며 고함을 질렀다.
"우리는 지금 정당한 대결을 하고 있는 중이니 이곳을 피해 가
시오!"
상대방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은소소가 선상을 향해 외쳤다.
"여기는 총타(總舵) 당주에요. 어느 단(壇)이 향을 피우고 횃불
을 들고 있나요?"
그녀는 천응교 사람들 사이에만 통하는 말을 했다. 그러자 선상
에 있던 사람의 태도가 갑자기 공손해졌다.
"천시당(天市堂) 이당주(李堂主)께서 청룡단(靑龍壇) 정단주(程
壇主), 신사단(神蛇壇) 봉단주(封壇主)와 함께 여기 계십니다.
천미당(天微堂) 은당주(殷堂主)께서 행차하셨습니까?"
"자미당(紫微堂) 당주예요."
자미당 당주라는 말이 떨어지자 선상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지더
니 잠시 후 십여 명의 장한들이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은 낭자께서 돌아오셨다! 은 낭자께서 돌아오셨다!"
장취산은 은소소와 결혼한 지 십 년이 되었지만 그녀가 천응교
에 관한 일을 말하는 것을 한 번도 듣지 못했으며, 그도 묻지 않
아 천응교의 내막에 대해 거의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대
화에서 장취산은 은소소가 천응교의 자미당 당주이며, 당주의 지
위가 단주보다 높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왕반산에서 현무와 주
작단 단주의 무공 실력을 친히 시험했기에 그들의 무공이 은소소
보다 고강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도 은소소의 직위가 높은
것은 교주의 딸이기 때문이 분명했다.
잠시 후 맞은편 배의 선상에서 맑은 음성이 전해왔다.
"폐교 교주의 천금(千金) 은 낭자께서 돌아오셨다니, 싸움을 잠
시 멈추는 게 어떻겠소?"
이어 우렁찬 목소리가 대답했다.
"좋소이다. 모두 손을 멈추시오!"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멎고 쌍방의사
람들이 분분히 뒤로 물러섰다. 장취산은 맑고 우렁찬 목소리가
매우 귀에 익었음을 느끼고, 잠시 생각을 굴린 후 큰 소리로 물
었다.
"혹시 유연주(兪蓮舟) 유사형이 아니십니까?"
저쪽 배 선상의 맑고 우렁찬 목소리의 주인이 뗏목 쪽으로 고개
를 내밀었다.
"그렇소. 내가 바로 유연주..... 아니, 너.....너는.....!"
"소제 장취산입니다!"
그는 너무나 반가운 나머지 뗏목과 범선 간의 거리가 십 장 가
량 되자, 뗏목 위에서 나무 토막을 주워 공중으로 던지며 몸을
솟구쳐 상대방의 뱃머리에 사뿐히 내려섰다.
"둘째 사형!"
"오제!"
두 사람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서로 손을 맞잡으며 기쁨
의 눈물만 흘렸다.
한편 저쪽 천응교 사람들도 은소소를 영접하느라 정신이 없었
다. 천응교 교주 백미응왕 은천정의 밑으로 내삼당(內三堂)과 외
오단(外五壇)으로 나뉘어져 각로(各路)의 교도들을 통괄하고 있
었다. 그리고 또 내삼당은 천미, 자미, 천서 삼당으로 나뉘어지
고 외오단은 청룡, 백호, 현무, 주작, 신사 등 오단으로 나뉘어
져 있다. 천미당 당주는 은천정의 장남 은야왕(殷野王)이고, 자
미당 당주는 은소소이며 천시당 당주는 은천정의 사제 이천환(李
天桓)이다.
이천환은 은소소가 남루한 옷을 입고 어린 아이까지 데리고 있
음을 보자 처음에는 약간 의아스럽다는 표정을 짓더니, 곧 만면
에 웃음을 가득 머금었다.
"내가 돌아오다니 정말 기쁘구나. 지난 십 년 동안 내 아버지가
너를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아느냐?"
은소소는 이천환에게 큰절을 했다.
"사숙, 그간 별고 없으셨어요?"
하고 무기를 둘아 보았다.
"빨리 사숙조님께 절을 해야지."
무기는 꿇어 엎드려 절을 하면서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이천
환과 천응교도들을 쳐다보았다.
은소소는 두 범선의 갑판에 시체가 나뒹굴며 선혈이 낭자해 있
음을 보고 나직이 물었다.
"저들은 누구며 왜 싸웠나요?"
무당파와 곤륜파 사람들이요."
은소소는 남편 장취산이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며 상대방 배 위
로 뛰어올라가 어떤 사람과 포옹하는 것을 보고 상대방 가운데
무당파의 사람이 있음을 짐작하고 있었다.
"사숙, 가능하면 싸우지 말고 좋게 해결하세요."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이천환은 비록 그녀의 사숙이지만 천응교 직위로 말하자면 아래
였다.
이때 장취산이 맞은편 배의 갑판에서 큰 소리로 불렀다.
"여보, 빨리 무기를 데리고 이리로 건너와 나의 사형에게 인사
올리시오!"
은소소는 무기의 손을 잡고 상대방 배의 갑판으로 걸어갔다. 이
천환과 두 단주는 그녀의 뒤를 바짝 따르며 그녀를 경호했다. 상
대방 배의 갑판에는 칠팔 명의 장한이 있었으며, 그 중 마흔 살
남짓된 몸집이 깡마르고 키가 큰 남자가 장취산과 손을 맞잡은
채 서 있었다.
"여보, 이 분이 바로 내가 항상 말하던 유연주 둘째 사형이오.
형님, 이쪽은 형님의 제수와 조카 무기입니다."
유연주와 이천환은 이 말을 듣고 모두 크게 놀랐다. 지금 천응
교와 무당파는 목숨을 건 악투를 벌이고 있는데, 쌍방의 중요한
인물 한 사람이 서로 부부가 되었을 뿐 아니라 자식까지 낳았으
니 어찌 놀라운 일이 아니겠는가!
곤륜파의 서화자(西華子)가 대뜸 도전적인 어조로 물었다.
"장오협(張五俠), 그 늙은 악적 사손이 지금 어디 있는지 당신
은 알지요?"
장취산은 중원에 도착하기도 전에 두 가지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었다. 첫째는 무당이 천응교 사람들과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이고, 둘째는 곤륜파의 서화자가 첫마디에 사손의
행적을 묻는 점이었다. 그는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다.
서화자는 장취산이 자기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자 눈썹을 치켜올
리며 고함을 질렀다.
"당신은 내가 물은 말을 못 들었소? 사손 그 늙은 악적이 지금
어디 있소?"
천응교 신사단의 봉단주는 사람됨이 음침하고 간교한 인물이다.
좀전의 싸움에서 두 명이 서화자의 검에 목숨을 잃어, 그렇지 않
아도 서화자에 대해 이를 갈고 있던 터라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차갑게 말을 받았다.
"장오협은 우리 교주의 사위이니 말 조심하십시오!"
"흥! 사교(邪敎)의 요녀가 어떻게 명문정파의 자재와 혼인을 할
수 있단 말이오. 이 혼사에는 필시 무슨 비밀이 있음이 분명하
오."
"우리 은교주께선 외손자까지 보았는데, 당신은 무슨 미친 소리
를 지껄이고 있는 거요?"
"이 요녀가.....!"
위사랑은 봉단주의 속셈이 곤륜과 무당 양파의 교분을 이간질시
키고, 이 기회에 장취산과 은소소에게 아첨하려는 의도임을 간파
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녀는 서화자가 그의 술수에 말려 더욱 듣
기 거북한 말을 할 것이 염려되어 급히 제지시켰다.
"사형, 이런 쓸데없는 자와 말다툼을 할 게 아니라, 유이협(兪
二俠)의 의견이나 듣기로 해요."
"유연주는 장취산과 은소소의 얼굴을 보며 잠시 망설이더니, 드
디어 입을 열었다.
"여러분,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선실로 들어가 의논합
시다."
여기선 천응교가 손님이었고, 현재 직위가 제일 높은 사람은 자
미당 당주인 은소소였다. 때문에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무기의
손을 잡고 앞장서서 선실로 들어갔다. 봉단주가 뒤를 이어 선실
로 들어가려고 발을 내딛는 순간, 그는 한 줄기 미풍이 옆구리를
엄습함을 느꼈다. 그는 비단 경험이 풍부할 뿐 아니라 음험하기
짝이 없는지라, 단번에 서화자의 짓임을 간파하고 막아내지 않은
채 앞으로 쓰러지며 비명을 질렀다.
"아앗! 비열하게 기습을 가하다니.....!"
그의 비명소리에 서화자는 흠칫하며 잽싸게 자신의 삼음수(三陰
手)를 회수했지만,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위사
랑이 나무라는 눈빛으로 사형을 쏘아보니, 서화자의 얼굴빛은 수
치심으로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서화자가 손님에게 기습을 가한 것은 명문정파의 고수 신분을
스스로 실추시킨 것이다.
일행은 선실에서 주인과 손님의 신분으로 분류하여 자리에 앉았
다. 자연 장취산과 은소소 부부도 서로 적대적인 자리에 앉게 되
었다.
모두 자리에 앉자 유연주는 속으로 생각을 굴렸다.
'오제는 실종된 후 십 년 동안에 천응교 교주의 딸과 부부가 되
었구나. 그러나 대중들 앞에서 신문할 것 같으면 입장이 난처해
내가 처리를 잘 해야겠구나.'
여기까지 생각을 굴린 유연주는 목청을 가다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림, 곤륜, 아미, 공동, 무당 오파와 신권(神拳), 오봉도(五
鳳刀)등 구문 해사(海沙), 거경(巨鯨) 등 칠방 도합 이십 일 개
문파방회(門波幇會)는 금모사왕 사손, 천응교 은 낭자, 그리고
불초의 사제 장취산 등 세 사람의 행방을 찾는 과정에서 천응교
와 오해가 발생했으며, 불행하게도 쌍방에 사상자까지 발생하여
십 년 동안 무림이 불안한 가운데 지났으나....."
그는 잠시 숨을 돌린 후 말을 이었다.
"다행히 은 낭자와 장사제가 이렇게 모습을 나타냈으니, 지금까
지 있었던 많은 의문의 진상이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다만, 십
년 동안 발생한 사건들이 너무 많으므로 짧은 시간에 모두 설명
하기는 어렵소. 그러니 우선 모두 함께 중원으로 돌아가 은 낭자
는 귀교 교주에게 그간의 자초지종을 아뢰고, 장사제도 무당에
돌아가 가사께 아뢴 후 쌍방이 다시 시간과 장소를 정해 만나 시
비를 가리는 게 좋겠습니다. 그래서 오해가 풀려 피차의 관계가
원만해진다면 더 바랄 것이 없는 일이며....."
이때 서화자가 갑자기 고함을 질러 유연주의 말을 중단시켰다.
"그 늙은 악적 사손은 어디 있소? 우리가 찾는 사람은 사손 그
늙은 악적이오!"
장취산은 중원 무림의 이십 이 개 문파방회가 자기들 세 사람을
찾기 위해 십 년 동안 싸웠으며, 또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말을 듣고 몹시 불안해 하고 있었다. 그런데 서화자가 사손의 행
방까지 추궁하니 처지가 매우 난처했다. 만약 사손의 행방을 말
한다면, 많은 무림 고수들이 복수를 하기 위해 빙화도로 찾아갈
것이 뻔한 일이고, 말을 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가만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가 난처해 하며 주저하고 있을 때, 은소소가 느닷없
이 말문을 열었다.
"온갖 만행을 자행하고 살인을 밥먹듯이 한 악적 사손은 이미
구 년 전에 죽었어요."
유연주, 서화자, 위사랑 등은 깜짝 놀라며 이구동성으로 외쳤
다.
"사손이 죽었다구요?"
"내가 이 아이를 분만하던 날 악적 사손은 광성이 발작하여 나
와 나의 남편을 죽이려 했으나,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더니 심병
(心病)이 발생하여 죽었어요."
장취산은 여기까지 듣고서야 은소소의 말뜻을 깨달았다. 사실
사손은 무기의 첫 번째 울음소리를 듣고 양심을 되찾아 개과천선
했다. 그리고 장취산 등 세 사람을 강제로 섬을 떠나게 한 행위
는 어느 누구도 쉽게 흉내낼 수 없는 자기 희생이었다. 그러므로
악행을 일삼고 살인을 밥먹듯이 하던 악적 사손이 이미 구 년 전
에 죽었다는 말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니었다.
무기는여기 있는 가람들이 말끝마다 의부를 악적 사손이라 욕
하고 심지어 부친과 모친은 의부를 죽었다고까지 말하자, 치미는
화를 참을 수 없었다. 그는 비록 총명하지만 강호에 얽히고 설킨
일들을 알 까닭이 없었다.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
뜨리며 외쳤다.
"의부는 악적이 아니예요. 의부는 죽지 않았어요!"
그의 갑작스러운 외침소리에 선실 안의 사람들은 일제히 그에게
시선을 집중시켰다.
은소소는 다급한 나머지 무기의 따귀를 후려쳤다.
"닥쳐!"
"어머니는 왜 의부가 죽었다고 말씀하십니까. 그분은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지 않습니까?"
은소소가 성난 목소리로 무기를 꾸짖었다.
"어른들이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아이가 버릇없이 끼어들다니!
우리는 악적 사손을 욕하고 있을 뿐, 네 의부를 헐뜯은 게 아
냐!"
무기는 어머니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곤혹스러워 했지만 감
히 더 이상 입은 열지 않았다.
서화자가 냉랭히 웃으며 무기에게 물었다.
"얘야, 사손은 네 의부지? 그는 지금 어디있느냐?"
무기는 부모의 얼굴빛에서 그들이 지금까지 나눈 대화가 매우
중요한 일임을 눈치채고 서화자의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말하지 않겠어요."
그러나 그의 이 말은 사손이 죽지 않았음을 증명해 주는 결과나
다름 없었다.
서화자가 장취산을 노려보며 물었다.
"장오협, 이분 천응교의 은 낭자는 정말 당신의 부인입니까?"
"그렇소. 그녀는 나의 부인이오."
"그렇다면 우리 곤륜파의 제자 두 명이 당신 부인의 독수에 의
해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는데, 이 빚은 어떻게 청산
하겠소?"
은소소가 그의 말을 듣고 눈썹을 높이 치켜올렸다.
"당치도 않는 소리 하지 마세요!"
장취산도 은근히 화가 났지만, 역시 수양이 깊은 무당제자인지
라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당신은 오해를 하고 있군요. 우리 부부는 십 년 동안 중원에
발을 들여 놓지 않았는데, 어떻게 귀파의 제자를 해칠 수 있었겠
소?"
"십 년 전이 일이라면 어쩌겠소? 고칙성(高則成)과 장도(張濤)
가 피해를 입은 것도 이미 십 년이 지났군요."
은소소가 미간을 찌푸렸다.
"고칙성과 장도가 누구지요?"
"부인은 그 두 사람을 벌써 잊었소? 하기야 당신은 사람을 무수
히 해쳤으니 그들을 기억하고 있을 리 만무하지요."
"그 두 사람이 어떻게 되었다는 거예요? 그리고당산은 무슨 근
거로 내가 그들을 해쳤다고 억지를 부리세요?"
"내가 억지를 부린다구? 그들 두 사람이 비록 백치로 변했지만
한 가지 일은 기억하고 있으며 한 사람의 이름은 말 할 수 있소.
그리고 그들을 그렇게 만든 사람은 은소소라는 것도 잘 알고 있
소."
서화자의 말투와 눈빛에는 독기가 가득 서려 있었다.
이때 지금까지 그들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천응교 봉단주가 끼
어들었다.
"본교 자미당 당주의 존명(尊名)을 당신 같은 출가한 노도가 함
부로 부르도록 지은 것인 줄 아시오? 무림의 계율조차 지키지 않
는 늙은이가 무림 선배 행세를 하는 걸 보면 구역질이 난다니까!
정현제, 자네는 세상의 부끄러운 일 중에 이보다 더한 일이 있다
고 생각하는가?"
정단주가 그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대답했다.
"없지요. 명문 정파에서 이런 미친 도배가 나오다니 정말 우스
운 일이군요."
서화자는 치미는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고 고함을 질렀다.
"너희 둘은 누가 몰염치하고 우습다고 비웃고 있는 거냐?"
봉단주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계속해서 서화자의 화기를 돋
구었다.
봉단주와 정단주가 서화자를 격노시킨 것은 은소소를 궁지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 외에 그들은 또 장취산과 은소소
가 부부가 된 이상 무당파와 천응교의 관계도 크게 달라졌으므로
유연주와 장취산이 천응교는 도울지언정 곤륜파는 도우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므로 천응교의 현재 인원으로 몇 명 되지
않는 곤륜파 사람을 제압하기는 식은죽 먹기나 마찬가지라고 계
산하고 있었다.
위사랑도 그들의 속셈을 간파하고 은근한 말로 서화자의 경솔한
행위를 제지했다.
"사형, 우리 배에 올라온 이상 그들은 손님이예요. 그러니 서두
르지 말고 유이협의 분부에 따르기로 해요."
그러나 멍청한 서화자는 그 의도를 눈치채지 못하고 고함을 질
렀다.
"무당파는 이미 천응교와 사돈 관계를 맺어 한통속이 되었는데,
그의 입에서 공정한 말이 나올 것 같으나?"
유연주는 생각이 깊은 사람이라 감정을 얼굴에 쉽게 나타내지
않았다. 때문에 서화자의 말을 듣고도 침묵만 지켰다.
위사랑은 내심 몹시 안타까워 하며 서화자를 나무랐다.
"사형은 무슨 그런 당치도 않은 말을 하세요. 무당파는 우리 곤
륜파와 같은 뜻을 지니고 십 년 간 함께 적과 맞서 싸웠을 뿐 아
니라, 유이협은 장부 중의 장부로 강호에 영명이 자자하며 존경
하지 않는 사람이 없어요. 그런 사람이 편견을 가지고 일을 처리
할 것 같으세요?"
"편견을 가지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도 없지."
위사랑은 자기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형의 우둔함에 속이
탔다.
"사형이 아무 이유도 없이 자꾸 무당오협을 헐뜯으니, 나중에
사부님과 장문사숙께서 문책하시면 나는 사형을 두둔하지 않을
거예요."
서화자는 그녀가 사부와 장문사숙을 들먹이자 비로소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유연주는 구제서야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이것은 천하 무림의 모든 문파방회와 관련된 일이므로 덕이 없
고 무능한 불초로서는 혼자 결정지을 수 없습니다. 이 일은 이미
십 년 간이나 강호를 시끄럽게 만들었으니, 뒤로 조금 더 미루어
해결하다 해도 아무도 반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불초는
우선 장사제와 함께 무당으로 돌아가 은사님과 대사형께 자초지
종을 아뢴 후 은사님의 뜻에 따를 생각입니다."
서화자가 비웃는 투로 말했다.
"직접적인 답변을 피하고 얼버무리는 유이협의 실력은 천하의
어느 누구보다 고명하시군요."
수양이 깊고 인내심이 강한 유연주였지만, 대중들 앞에서 노골
적인 수모를 당하자 눈에서 신광을 발산하며 서화자를 노려보았
다. 그러나 역시 강호의 명문 정파 제자인지라 곧 신광을 거두고
침착해졌다.
유연주는 신광을 회수한 후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서화도형에게 고견이 있으면 불초도 귀를 씻고 들을 테니 말씀
해 보시오."
유연주의 예리한 눈빛에 이미 기가 꺾인 서화자는 더 이상 감히
오만하게 굴지 못하고 위사랑을 돌아보았다.
"사매,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본문의 제자 두 명의 빚을 이
대로 포기할 생각은 아니겠지?"
위사랑은 미처 대답을 하기 전에, 갑자기 남쪽 해상에서 긴 호
각소리가 울리며 뒤이어 곤륜파 제자 한 명이 선실로 뛰어들어와
아뢰었다.
"공동파와 아미파가 우리를 도우러 왔습니다."
서화자와 위사랑의 얼굴에 기쁨의 빛이 떠올랐다. 위사랑이 유
연주에게 말했다.
"유이협, 아무래도 우리가 결정을 내리기는 어려울 것 같으니,
공동파와 아미파의 고견을 듣기로 합시다."
천응교의 이천환과 정단주, 봉단주는 서로 시선을 교환하더니
모두 얼굴빛이 조금씩 변했다.
장취산은 재빨리 생각을 굴렸다.
'아미파는 크게 걱정할 바는 아니지만 공동파는 형님과 갚은 원
한을 맺었다. 형님은 공동 오로에게 중상을 입히고 공동파의 칠
상권보까지 탈취했으니, 그들이 가만히 있을 리 만무하지.'
은소소도 장취산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무기가 아까 말참견만 하지 않았어도 일을 훨씬 쉽게 처리할
수 있었는데..... 하지만 무기는 거짓말을 못하고 사손에 대한
정이 깊기 때문이니 이 아이를 나무랄 수가 없는 노릇이지.'
이렇게 생각하며 맞은 뺨이 빨갛게 부어 오른 무기를 꼭 끌어않
았다. 무기는 아직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입을 모친의 귓가에
대고 나직이 말했다.
"어머니, 의부께서 죽지 않았지요?"
은소소도 그의 귓가에 입을 가져가 조그맣게 대답했다.
"죽지 않았어. 나는 그들에게 거짓말을 한 거야. 이들은 모두
너의 의부를 해치려 하고 있어."
무기는 그제야 영문을 알았다는 듯이 사람들의 얼굴을 차례로
노려보았다.
그는 모친에게 맞아 빨갛게 부어오른 뺨을 어루만지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일 장은 비록 어머니가 때렸지만, 실제로 눈앞의 악당들이
때린 것이나 다름 없어.....'
----- 제 2 권 2 장 끝 -----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2 권
제 3 장 장취산(張翠山) 부자(父子)의 고초(苦楚)
아미파 공동 양파의 사람들이 선실로 들어와 유연주, 서화자,
위사랑 등과 인사를 나누었다. 공동파의 우두머리는 비쩍 말라
뼈만 앙상한 갈의노인이었으며, 아미파의 우두머리는 중년 니고
(中年尼姑)였다. 그들은 천응교의 이천환등이 선실에 앉아 있는
것을 보더니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이 자리에 앉자마자 서화자가 큰 소리로 외쳤다.
"당삼야(唐三耶), 정허사태(靜虛師太), 무당파는 천응교와 손을
잡았소. 이번에 우리는 큰 피해를 입게 되었소."
키가 작고 깡마른 갈의 노인 당문량(唐文亮)은 공동 오로 중의
한 사람이며, 중년 니고 정허사태는 아미파의 제 사대 수제자로
모두 무림에서 명망이 제법 높은 고수였다. 두 사람은 서화자의
말을 듣고 다소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정호사태는 마음이 세
심하고 서화자의 평소 성격을 잘 아는지라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당문량은 눈알을 뒤집으며 유연주를 노려보았다.
"유이협, 그 말이 사실이오?"
유연주가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서화자가 또 고함을 질렀다.
"무당파는 이미 천응교와 사돈 관계를 맺었소. 장취산이 은천정
의 사위가 되었지요."
당문량이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서화자를 돌아보았다.
"실종된 지 십 년이 지난 장오협이 모습을 나타냈단 말입니까?"
유연주가 장취산을 가리켰다.
"이 사람은 나의 오제 장취산이고, 이분은 공동파의 선배 고인
당문량 당삼야이시네."
서화자가 또 입을 열었다.
"장취산과 그의 마누라는 금모사왕 사손의 행방을 알고 있으면
서 사실을 말하지 않고 있소."
당문량은 금모사왕 사손의 이름을 듣는 순간, 눈에서 무서운 살
염을발산했다.
"그는 지금 어디 있소?"
장취산이 침착한 어조로 대답했다.
"이 일은 가사께 먼저 아뢰어야 하니 말씀드리지 못하는 고충을
용서해 주십시오."
당문량은 눈에서 불이라도 뿜어낼 듯하며 고함을 질렀다.
"그 늙은 악적 사손은 지금 어디 있소? 그가 있는 곳을 말하지
않겠소?"
그의 마지막 몇 마디는 거의 협박에 가까왔으며, 예의라곤 조금
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은소소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차갑게 말을 받았다.
"보아하니 귀하는 공동파에서 나이만 몇 살 많은 인물에 불과한
것 같은데, 무슨 자격으로 장오협을 이렇게 다그칩니까? 당신이
무림지존이라도 됩니까? 아니면 무당파의 장문 장진인이라도 됩
니까?"
당문량은 대노하여 열 손가락을 벌려 은소소를 덮치려 했다.
그러나 곧 무림에서의 자신의 위명을 생각하고 치미는 노기를 억
지로 참으며 장취산에게 물었다.
"이분은 누굽니까?"
"불초의 부인입니다."
서화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얼른 끼어들었다.
"또한 천응교 은교주의 딸이기도 하지요. 흥! 사교의 요녀치고
사람다운 사람이 있겠소?"
백미응왕 은천정의 무공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정심(精深)
하여, 오늘날까지 그와 실력을 겨룬 무림 고수 중 그의 십초 이
상을 받아낸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당문량은 면전의 젊은 부인
이 은천정의 딸이라는 말을 듣자, 감히 더 이상 무례한 언동을
하지 못했다.
이때 줄곧 침묵만 지키고 있던 정허사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 일의 자초지종이 어떤 것인지 유이협께서 설명해 주십시
오."
"이 일은 관련된 범위가 넓고 또 십 년이란 긴 시간 동안 끌어
왔는지라 한두 마디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석 달 후 폐
파가 무창의 황학루에 연회석을 마련하여, 이 일과 관련이 있는
각 문파방회를 모두 초청한 가운데 시비곡절을 분명히 밝히겠습
니다. 여러분의 의향은 어떠십니까?"
정허사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문량이 말을 받았다.
"시비곡절은 석 달 후에 거론해도 무방하지만, 사손 그 늙은 악
적이 어디 숨어 있는지는 장오협이 지금 말해 주시오."
장취산은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미안하지만 지금은 말할 수 없소."
당문량은 비록 못마땅했지만 무당파가 천응교와 손을 잡은 이상
섣불리 건드릴 수 없음을 알고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의 예를 올
렸다.
"그렇다면, 석 달 후에 다시 만나기로 하고 먼저 실례하겠습니
다."
서화자가 얼른 뒤따라 일어섰다.
"당삼야, 우리도 당신의 배를 타고 가도 괜찮겠습니까?"
"좋을 대로 하시구려."
"사매, 우리도 돌아가지."
서화자 일행은 본래 유연주의 배를 타고 왔었는데 갑자기 공동
파의 배로 돌아가겠다는 것은, 무당파를 적으로 간주하겠다는 뜻
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유연주는 조금도 불쾌한 내색을 하지
않고 친히 뱃머리까지 나와 전송했다.
"우리는 무당에 돌아가 사존께 아뢴 후, 여러분에게 영웅연의
청첩장을 보내겠습니다."
서화자가 막 선실 밖으로 나가려 할 때 은소소가 갑자기 불러세
웠다.
"서화도장에게 한 가지 물어볼 말이 있어요."
서화자는 밖으로 나가려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냐?"
"도장께선 말끝마다 나를 사교 요녀라 했는데, 무슨 요녀짓을
했는지 분명히 밝히고 가세요."
"사마외도(邪魔外道)와 호미요음(狐媚妖陰)하면 그것으로 충분
할 텐데, 내가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어디 있느냐? 그렇지 않고
서야 명문 정파인 무당의 장오협이 너의 꾐에 빠질 리 만무하지.
흐흐흐.....!"
"알려줘서 고마와요."
서화자는 자기의 모욕적인 언사에도 그녀가 아무 대꾸를 하지
못하자 득의만면하여 선실에서 나가 공동파의 선상으로 건너가기
위해 널빤지 위에 올라섰다.
은소소는 그의 무례한 언동이 괘씸하여, 다른 사람이 공동파의
선상으로 건너갈 때 정단주와 봉단주에게 계략을 꾸며 두라고 분
부해서 널빤지를 부러뜨려 서화자를 바닷물에 빠지게 했다. 순간
천응교의 선상에서 갈채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려와 서화자를 더욱
화나게 만들었다. 분노가 극에 달한 서화자는 위사랑의 허리춤에
서 장검을 뽑아들고 덮쳐가 사생결단을 내려 했다. 그러나두 범
선의 거리가 이미 꽤 멀어졌는지라, 손가락질을 하며 욕설을 퍼
붓는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은소소가 서화자를 농락하는 장면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 본
유연주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이 여자는 정말 성격이 요사하여 오제의 배필로는 적당하지 못
하군.'
그는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조금도 내색하지 않았다.
"수고스럽지만, 은당주와 이당주께서 은교주에게 석 달 후의 무
창 황학루 연회에 꼭 참석해 주셨으면 고맙겠다고 전해 주십시
오. 그럼 오늘은 이만 작별을 고하겠습니다. 오제는 나와 함께
은사를 뵈러 가겠지?"
"네!"
은소소는 유연주가 자기 부부를 떼어놓으려는 의도를 지녔음을
알고 갑자기 표정이 침울하게 변했다. 장취산도 아내와 자식을
떼어놓고 혼자서는 무당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유연주에게 동
의를 구했다.
"둘째 사형, 나는 부인과 아이를 데리고 가 먼저 은사님을 만나
그 어른의 승낙을 받고 싶습니다. 그 다음에 장인 어른을 뵈러
갔으면 하는데,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유연주는 거절하고 싶었지만, 부부와 부자 간에 생이별 하라는
말이 차마 나오지않아 고개를 끄덕였다.
"좋도록 하려무나."
은소소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쉬며 이천환에게 당부했
다.
"사숙, 수고스럽지만 아버님을 만나면 불효 여식이 수일 내로
총타에 돌아가 아버님께 문안 여쭙겠다고 전해 주세요."
"그러마, 교주님께 아뢰고 너희 두 부부가 오기를 손꼽아 기다
리고 있을 테니 가능하면 빨리 와야 한다."
그들은 서로 포권의 예를 취한 후 작별을 고했다.
장취산은 천응교 교도들이 떠나자마자 즉시 유연주에게 물었다.
"둘째 사형, 세째 사형의 상세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유연주는 한참 동안 허공만 쳐다보더니 고개를 저으며 장탄식을
했다.
"세째는 아직 살아 있지만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네. 수족도 움
직이지 못하는 폐인이 되었으니..... 유대암 유삼협이란 이름은
강호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거나 진배없네."
장취산은 세째 사형이 살아 있다니 다소 위안이 되긴 했지만,
영풍협골(英風俠骨)의 사형이 이런 비참한 처지가 된 것을 생각
하니 절로 눈물이 쏟아졌다.
"그를 해친 원수가 누군지 알아냈습니까?"
유연주는 장취산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갑자기 눈에서 예
리한 섬광을 발산하며 은소소를 쏘아보았다.
"은 낭자는 나의 유삼제를 해친 사람이 누군지 압니까?"
은소소는 그의 예리한 눈빛에 흠칫했다.
"유삼협의 수족 근골은 소림파의 금강지력(金剛指力)에 의해 끊
어졌다고 들었어요."
"그렇소. 은 낭자는 금강지력을 펼친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
소?"
"몰라요."
유연주는 은소소를 더 이상 상대하지 않고 장취산을 돌아보았
다.
"오제, 소림파에서는 네가 임안부(臨安府) 용문표국(龍門標局)
의 사람을 몰살하고 또 몇 명의 소림 화상까지 사살했다는데 그
게 사실이냐?"
"그...그건.....!"
장취산이 말을 더듬거리자 은소소가 끼어들었다.
"이 일은 그와 아무 상관 없어요. 모두 내가 살해했어요."
유연주는 또 그녀를 힐끗 바라보며 눈에서 살기어린 원한의 빛
을 발산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으며 다시 원래의 평온한
표정을 회복했다.
"나는 오제가 무모한 살인을 하지 않았다고 믿고 있었지. 이 일
때문에 소림사에서는 세 차례나 무당산으로 사람을 보내어 따졌
었네. 하지만 오제가 갑자기 실종된 사실은 천하가 아는 일인지
라 대질할 사람이 없어 지금까지 결론을 짓지 못했네. 당시 우리
들은 소림파에서 세째를 해쳤다고 주장했고, 소림파는 오제가 그
들 사람을 수십 명이나 죽였다고 고집을 부리더군. 다행히 소림
파 장문인 공문대사는 사람됨이 신중하고 은사님을 존경하기 때
문에, 문하 제자들이 더 이상 일을 저지르지 못하게 엄격히 단속
한 탓으로 십 년 동안 큰 사고는 발생하지 않았네."
은소소가 가볍게 한숨을 내뿜었다.
"모두 당시 내가 어린 탓으로 철이 없어 그런 일을 저질렸으나,
지금은 무척 후회하고 있어요.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우리
들의 소행이 아니라고 잡아떼는 도리밖에 없어요."
유연주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장취산을 힐끔 돌아보
았다.
'장오제가 어떻게 이런 여자를 아내로 맞이했는지 모르겠구나.'
은소소는 유연주가 시종 자기를 차갑게 대하고 호칭도 제수씨라
칭하지 않고 은 낭자라고만 부르므로 오래전부터 화가 치밀어 있
었다.
"자기가 한 일은 자기가 감당해야 한다는 말이 있듯이 이 일로
절대 당신들 무당파에 누를 끼치지 않을 테니, 소림파더러 천응
교에 찾아와 따지라고 말하세요."
"강호에선 무슨 일이든지 이치를 벗어날 순 없소. 무슨 일이든
원리 원칙에 입각하여 일을 처리해야지 세력을믿고 괴롭혀선 안
되오."
은소소는 그의 말에 화가 치밀었지만, 남편인 장취산이 유연주
에게 시종 공손히 대하는지라 남편의 사형에게 감히 무례한 행동
을 할 수 없었다.
'내게는 그런 인의도덕(仁義道德)이 먹히지 않아, 하지만 내가
대들면 남편의 입장이 난처해지기 때문에 양보하는 도리밖에 없
군.'
이렇게 생각하며 그녀는 무기의 손을 잡고 선미(船尾) 쪽으로
나갔다.
"무기야, 이렇게 큰 배를 한 번도 보지 못했을 테니 내가 이 배
의 구석구석을 구경시켜 주마."
은소소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진 다음에야장취산은 비로소 조
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둘째 사형, 지난 십 년 동안 소제는....."
유년주가 손을 저어 그의 말을 제지시켰다.
"오제, 우리 두 사람의 우에는 친형제를 능가하므로, 네가 아무
리 큰 사고를 저질렀다 해도 나는 너와 생사를 같이 하겠다. 그
러니 네 부부의 일은 여기서 내게 말할 것이 아니라, 무당에 돌
아가 은사님의 분부를 기다리기로 하자. 그래서 만약 은사님께서
질책을 하시면 우리 칠형제가 모두 꿇어앉아 그분께 사정하겠네.
아이가 이렇게 컸는데 사부님이 너희 부부와 부자를 떼어놓기야
하시겠느냐?"
장취산은 크게 기뻐하며 유연주의 손을 덥석 잡았다.
"고맙습니다. 둘째 사형."
유연주는 내유외강(內柔外剛)하여 무당칠협 중에서 제일 농담을
싫어하고 엄격한지라 사제들은 큰사형 송원교보다 오히려 그를
더 두려워했다. 그러나 사형제들에 대한 정은 누구보다 깊고 두
터워, 장취산이 갑자기 실종되자 더없이 가슴 아파하며 그의 행
방을 찾기 위해 방방곡곡 돌아다니지 않은 데가 없었다. 그가 제
일 염려되는 것은 은소소가 많은 소림 제자를 사살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기의 생명을 희생시키는 한이 있어도 사제 일가의
평안과 행복을 보호하리라 결심하고 있었다.
장취산이 또 물었다.
"둘째 사형, 우리가 천응교와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도 소제 부
부 때문입니까? 그들과 싸우는 것을 보니 소제는 무척 불안합니
다."
유연주는 대답하기 전에 먼저 반문했다.
"오제, 왕반산지회(王盤山之會)는 도대체 어찌된 일이냐?"
장취산은 임안에서 심야에 용문표국에 가서 천응교가 무위(無
威)를 떨치는 데 참여한 일, 그리고 금모사왕 사손이 일대 도륙
을 벌이고 도룡도를 탈취한 일, 은소소와 자기가 사손에게 섬으
로 끌려간 일들을 숨김없이 모두 얘기했다.
"그랬었구나. 네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복잡하게 얽힌 은밀한
일들은 영원히 밝혀지지 않았을 거야."
"그렇군요. 둘째 사형, 사손은 원래 흉악무도한 사람이 아니었
습니다. 그가 그렇게 변한 것은 엄청난 참사를 당했기 때문이었
습니다. 소제는 이미 그와 결의형제를 맺었습니다."
유연주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은 암담하기 짝이 없었다.
'이 또한 매우 골치 아픈 일이구나.'
장취산이 말을 이었다.
"나의 의형이 질러낸 한 차례 사자후(獅子吼)에 왕반산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신지(神智)를 상실했습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 사람들은 죽지 않았으면 모두 백치가 될 거라고 했습니다. 그
렇게 한 것은, 그가 도룡도를 취득한 비밀이 누설되는 것을 방지
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사손의 행위는 악랄하기 짝이 없지만 기남자(奇男子)임에는 틀
림없어. 하지만, 그는 모든 일을 철저하게 처리했지만 한 사람을
잊었던 게 실수였다."
"그 사람이 누굽니까?"
"백구수(白龜壽)야."
"천응교의 현무단 단주 말입니까?"
"그렇네. 당시 왕반산에 있었던 사람 중 백구수의 내공이 제일
심후했지. 그는 사손의 주전(酒箭)에 맞아 기절했으며, 사손은
그 다음에 사자후를 외쳤지. 그 때 백구수가 기절하지 않았다면,
그 역시 사손의 사자후를 감당해 내지 못했을 거야."
"그렇습니다. 그 무렵 백구수는 기절하여 깨어나지 않아 사손의
사자후를 듣지 못했으므로 신지를 상실하지 않았습니다. 나의 의
형은 비록 세심한 사람이지만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군
요."
"왕반산에서 생환한 사람 중 신지를 상실하지 않은 사람은 아마
백구수 한 명뿐일 거야. 곤륜파의 내공은 비록 독특한 점이 있지
만 고칙성과 장도는공력이 심후하지 못해 그날 이후 폐인이 되
었지. 사람들이 그들에게 누구의 짓이냐고 물으면 장도는 고개만
저을 뿐 대답하지 않는데, 고칙성은 물을 때마다, 은소소의 이름
만 되풀이했지."
유연주는 가볍게 탄식하며 말을 이었다.
"이제야 나는 그 이유를 알았네. 원래 고칙성은 제수씨를 잊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야. 흥! 서화자가 다음에 또 불손한 말을 함
부로 지껄이면 내가 따끔한 맛을 보여 주겠어. 그의 곤륜 제자들
이 행실을 단정히 하지 않고선 남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다
니....."
"백구수가 신지를 상실하지 않았다면 그는 모든 내막을 잘 알고
있을 게 아닙니까?"
"하지만 그는 끝까지 말하려 하지 않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느냐?"
장취산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알겠습니다. 도룡도를 탈취하려 했던 비밀을 보존하려면
왕반산의 일을 말하지 않는 방법밖에 없군요."
"오늘날의 무림 분쟁은 그 일로 인해 발생했지. 곤륜파는 은소
소가 고칙성과 장도를 폐인으로 만들었다고 말했고, 우리 사형제
도 네가 천응교의 독수에 죽음을 당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지."
"소제가 왕반산에 간 일은 백구수가 말했습니까?"
"아니야.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나와 사제(四弟), 육제
(六弟)가 함께 왕반산에 답사차 갔다가 네가 철필로 산벽에 적어
둔 글을 보고 알았지. 우리 세 사람은 왕반산에서의 너의 행적을
찾지 못해 백구수에게 물어 보려고 갔었다. 하지만 불손한 언동
때문에 싸움이 벌어졌고 나의 일장에 그는 부상을 당했지.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곤륜파에서도 백구수를 찾아갔으나, 오히려 천
응교 교도에게 두명이 살해되었어. 그 때부터 십 년이라는 세월
이 흐르는 동안 쌍방의 원한은 점점 깊어졌어."
"소제 부부 때문에 무림의 각 문파 제자들이 무고하게 희생되었
다니, 무림 동도들을 대할 면목이 없습니다. 소제는 은사님을 뵌
후 각 문파를 찾아가 그 간의 오해를 해명하고 기꺼이 죄의 댓가
를 받겠습니다."
"이것은 처음부터 우연히 발생한 것이므로 너를 탓할 수 없다.
그날 나와 칠제(七弟)는 사부님의 분부를 받아 용문표국을 보호
하기 위해 임안으로 떠났지만, 강서(江西)에서 한 가지 불의한
일을 목격하여 십여 명의 무고한 생명을 구하느라 며칠간 늦었
지. 우리가 임안에 도착해 보니 용문표국의 사건은 이미 발생했
더군. 그리고 너희들 부부 두 사람 때문에 발생한 문제도 곤륜파
무당파, 천응교 간의 분쟁일 뿐 타파와는 관계가 없어. 그러나
천응교는 도룡도를 탈취할 목적으로 사손의 이름을 입 밖에도 내
지 않아, 거경방, 해사파, 신권문 등의 방화문파는 방주와 장문
인의 피맺힌 원한을 천응교에게 씻으려 했고, 결국 천응교는 각
방화문파의 표적이 되었지."
"도룡도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대단하지도 않는데, 나의
장인께선 왜 그렇게 차지하려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너의 장인 어른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그가 천응
교 교도들을 인솔하여 천하 군웅들과 맞서 싸우는 박력과 기개에
는 탄복하고 있지."
"소림, 아미, 공동 등의 문파는 왕반산지회에 참여하지 않았는
데, 어째서 그들도 천응교와 원한을 맺게 되었습니까?"
"그건 너의 의형 사손 때문이지. 천응교는 도룡도를 획득하기
위해 수십 차례나 배를 타고 각처의 섬을 돌아다니며 사손의 행
방을 수소문했지. 속담에 종이는 불을 싸지 못한다고, 백구수의
입이 제아무리 무거워도 이 소식은 결국 누설되고 말았지. 지난
날 너의 의형이 혼원벽력수 성곤이라 행세하며 주로 남북에서 삼
십여 차례나 사건을 일으켰으며, 각문각파의 고수들이 그의 손에
수없이 살해된 일을 너도 알고 있느냐?"
장취산은 고개를 끄덕이며 긴 탄식을 했다.
"무림 군웅들은 그것이 그의 소행임을 결국 알아냈군요."
"그는 매번 살인을 할 때마다 벽에 혼원벽력수 성곤이라는 이름
을 남겼었지. 당시 우리는 사명(師命)을 받아 사건을 조사했지만
진짜 흉수가 누군지 알아내지 못했으며, 성곤도 끝까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지. 그러나 천응교가 사손의 행방을 알아냈다는 소
문이 펴지자 각문각파의 지모(智謀)가 뛰어난 사람들은, 사손이
본래는 성곤의 유일한 제자였던 사실과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
르지만 그들 두 사제가 원수로 변한 사실을 생각해 내고 성곤의
이름을 빌어 살인을 자행하는 사람은 사손일 가능성이 많다고 단
정지었지. 사손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네. 소림파의 공견대사까지 그의 손에 살해
되었으니 그를 미워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나의 의형은 비록 이미 개과천선했지만, 양손에 그렇게 많은
피를 묻혔으니..... 둘째 사형, 이 일은 소제도 어떻게 해야 좋
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사형제는 너 때문에 천응교를 찾아갔고, 곤륜파는 고칙성
과 장도 때문에 천응교를 찾아갔지. 그리고 거경방 등은 그들의
방주가 참살당한 복수를 하기 위해 천응교를 찾아갔고, 소림파를
비롯한 흑백양도의 많은 인물들은 사손의 행방을 알려고 천응교
를 찾아갔었다. 그 동안 쌍방의 조그만 싸움은 헤아릴 수도 없고
큰 싸움만도 다섯 번이나 치루었어. 천응교는 비록 매번 싸울 때
마다 열세에 몰렸지만, 너의 장인 어른은 군웅들의 포위 공격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쓰러지지 않고 버텼으니 대단한 인물이라 아
니할 수 없지. 물론 소림, 무당, 아미 등 명문 정파는 사건의 진
상이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았고 천응교가 진짜 흉수가 아닌 것
같기에 싸울 때마다 상대방에게 후퇴할 여지를 남겨 주었지만,
일반 강호 인물들은 인정사정없이 처음부터 살수를 펼치지. 이번
에도 우리는 천응교의 천시당 이당주가 배를 타고 사손의 행방을
찾아나선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몰래 그들을 미행했던 거야. 그러
나 이당주가 그것을 눈치채고 따라오지 못하게 하여 곤륜파와 싸
움이 벌어진 거지. 만약 너희들 부부의 뗏목이 그 때 나타나지
않았다면, 쌍방의 고수가 또 얼마나 희생되었을지 모르지."
장취산은 십 년 사이에 유연주의 모습이 많이 늙었음을 발견하
고 콧잔등이 시큰해졌다.
"둘째 사형, 그 동안 나 때문에 고생이 많았군요. 소제는 구사
일생하여 사형을 다시 만나 뵐 수 있게는 되었지만....."
유연주는 그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음을 보고 그의 어깨를 가볍
게 두드려 주었다.
"무당칠협이 다시 한자리에 모이게 된 것은 더없이 기쁜일이야.
세째가 부상을 당하고 또 내가 실종되고부터 강호상에선 우리를
무당오협이라 바꾸어 불렀는데, 오늘부터 칠협이 다시 위명을 떨
치게 되었으니....."
여기까지 말한 그는 유대암을 생각했다. 비록 칠협이 한 자리에
모였지만, 지난날처럼 함께 강호를 행협(行俠)할 수 없음을 생각
하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일행은 십수일의 향해 끝에 양자강 입구에 도착하여 배를 바꾸
어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장취산 부부가 남루한 가죽옷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입으니, 준
수하고 아름다운 용모는 십 년 전에 비해 조금도 감소되지 않았
다. 무기도 새 옷으로 갈아입히고 머리를 땋아 붉은 천으로 묶어
주니 더 없이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유연주는 무기를 장취산보다
더 귀여워했다. 다만 그는 성격이 엄숙하고 말수가 적어 곁으로
차갑게 보일 뿐이었다. 무기는 황량한 섬에서 태어나 그곳에서만
자랐기 때문에 육지의 사물은 무엇이든 신기하게 느껴졌다. 유연
주는 조금도 귀찮아하지 않고 그와 함께 뱃머리에 앉아 강변의
풍물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이날 저녁 무렵, 배는 안위(安衛) 동릉(銅陵)의 동관산(銅官山)
기슭의 조그만 마을에 정박했다. 선주는 술과 고기를 사기 위해
뭍으로 올라가고 장취산 부부와 유연주는 선실에서 차를 마시며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뱃머리에서 혼자 놀던 무기는, 강변에서 웬 늙은 거지가 땅바닥
에 앉아 뱀을 다루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거지는 목에 청사(靑
蛇)를 한 마리 감고 손으로는 검은 바탕에 흰 점이 박힌 흑사(黑
蛇)를 다루고 있었다. 흑사는 거지의 머리 위로 올라가 또아리를
트는가하면 다시 등을 타고 내려와 혀를 날름거리며 허리를 감기
도 했다. 무기는 빙화도에서 뱀을 본 적이 없는지라 넋을 잃고
구경했다. 늙은 거지는 그를 보더니 빙긋이 웃으며 손가락을 가
볍게 튕겼다. 그러자 뱀은 공궁으로 치솟아 허공에서 두어 바퀴
회전한 다음 아래로 떨어져 늙은 거지의 목과 가슴을 칭칭 감았
다. 무기는 뱀의 묘기에 도취되어 그것에만 온정신을 집중시켰
다.
늙은 거지가 그에게 손짓을 하고 또 뱀을 가리켰다. 그것은 무
기가 강변으로 내려오면 여러 가지 재미있는 것을 보여 주겠다는
뜻이었다. 천진난만한 무기는 크게 기뻐하며 널빤지를 밟고 강변
으로 내려갔다. 늙은 거지는 무기가 가까이 오자 등에서 포대를
하나 꺼내더니 주둥이를 벌리며 말했다.
"이 속에 재미있는 물건이 많으니 이리 와 보아라."
"무슨 물건인데요?"
무기가 고개를 내밀고 포대안을 살폈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
아 똑똑히 보려고 목을 더 길게 뺐다. 이때 늙은 거지는 번개처
럼 포대로 무기의 머리를 뒤집어씌웠다.
"악!"
무기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자 늙은 거지는 잽싸게 손으로 그의
입을 틀어막고 번쩍 들어올렸다.
무기의 비명은 포대 속에서 지른 것이기 때문에 소리가 작았다.
하지만 유연주와 장취산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선
실에 있으면서도 그 비명소리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갑판 위로
달려나갔다. 무기가 늙은 거지에게 붙잡힌 것을 보고 두 사람은
막 몸을 솟구쳐 강변으로 날아가려 한 순간, 늙은 거지가 날카롭
게 외쳤다.
"이 아이의 목숨을 보존하고 싶으면 꼼짝하지 마시오!"
하고 무기의 등 뒤 옷을 찢더니, 뱀머리를 그의 배심(背心)에
갖다 댔다.
이때 은소소도 갑판으로 뛰어나와 아들이 잡혀 있는 것을 보고
다급한 나머지 멀리서 은침을 던지려 했다. 유연주가 이 광경을
보고 깜짝 놀라며 급히 제지시켰다.
"안 됩니다!"
유연주는 감히 경거망동하지 못하고 짙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
었다.
"귀하가 이 어린 아이를 붙잡아 위협하는 저의가 뭐요?"
"선주에게 닻을 올리고 배를 강변에서 육 장(六丈) 가량 떨어지
게 하라고 하시오. 그런 다음 나의 목적을 말해 주겠소."
유연주는 배를 강변에서 멀리 떨어지게 하면 무기를 구출하기
더욱 어렵다는 것을 알았지만, 무기가 상대방의 손에 붙잡혀 있
는지라 상대방의 요구대로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닻
줄을 잡아 팔을 가볍게 떨쳤다. 순간, 무게가 오 십 근이 넘는
닻은 마치 무 뽑히듯 수면 위로 끌려 올라왔다.
늙은 거지는 유연주의 심후한 공력을 보더니 두려움으로 얼굴빛
이 약간 변했다. 이어 장취산이 대나무 장대로 배를 강물중앙으
로 밀었다.
"좀더 멀리 떨어지시오."
"당신이 강변에서 육 장 가량만 떨어지라고 하지 않았소?"
"유이협이 닻을 끌어올리는 무공을 보니, 육 장 정도의 거리로
도 불초는 마음을 놓을 수 없소."
장취산은 하는 수 없이 배를 강물 중앙으로 몇 장 더 물렸다.
유연주가 포권의 예를 올리며 물었다.
"귀하의 존성대명(尊姓大名)은 무엇이요?"
"불초는 개방의 무명 소졸이므로, 이름을 밝혀 유이협의 귀가
더러워질 것이 염려되는구료."
유연주가 자세히 살펴보니 늙은 거지의 찢어진 옷자락에 여섯
개의 매듭이 묶여져 있었다.
'이 사람은 개방의 육결제자(六結弟子)이구나. 육결제자라면 매
우 높은 신분인데 어째서 이런 비열한 짓을 하지? 하물며 개방은
협의(俠義)만 행하며 방주 사화룡(史火龍)은 장부 중의 장부인
데, 이건 정말 이상한 일이구나.'
이렇게 생각을 굴리고 있을 때 은소소가 갑자기 외쳤다.
"동천(東川)의 무산방(巫山幇)이 개방에 합병되었나요? 내가 알
기에 개방에는 귀하 같은 인물이 없는데....."
늙은 거지가 깜짝 놀라며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은소소가 말을
이었다.
"하노삼(賀老三),당신은 지금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는 거예요?
당신이 내 아들의 머리카락 하나라도 다치게 하는 날이면, 나는
당신들의 매석견(梅石堅)을 폐허로 만들어 버릴 테니 내 말을 잘
기억해 두세요."
늙은 거지는 재차 깜짝 놀라며 얼굴빛이 크게 변했다.
"나 하노삼을 첫눈에 알아보다니 은 낭자의 안력(眼力)은 과연
대단하군요. 사실 불초는 매방주(梅幇主)의 심부름으로 아드님을
모시려 왔습니다."
은소소가 주먹을 불끈 쥐며 노성을 질렀다.
"빨리 독사를 치우세요! 일개 조그만 방회에 불과한 무산방이
겁도 없이 천응교에 시비를 걸어오다니....."
"은 낭자께서 한 마디만 대답해 주시면 나 하노삼은 당장 아드
님을 되돌려 드릴 뿐 아니라, 수일 내로 매방주께서 친히 방문하
여 오늘의 무례함을 사죄드릴 것입니다."
"나더러 무슨 말을 하라는 거예요?"
"우리 매방주의 독자가 사손의 손에 살해된 사실은 은 낭자도
오래 전에 소문을 들어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매 방주께서 장
오협과 은 낭자.....아니 장부인에게 특별히 부탁드리고자 하는
것은, 악적 사손의 행방을 말씀해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은소소는 눈썹을 치켜뜨며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우린 몰라요."
"그렇다면 두 분에게 그 악적의 행방을 수소문해 달라고 부탁드
리는 길밖에 없군요. 물론 그 동안 아드님은 우리가 잘 돌볼 테
니, 사손의 행방을 알아내는 대로 연락을 주십시오."
은소소는 독사의 예리한 이빨이 사랑하는 아들의 배심에서 한
치도 되지 않는 거리에 있음을 보고, 빙화도의 위치를 말할까 하
다 남편을 돌아보았다. 그는 얼굴에 굳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는 장취산과 십 년간 부부생활을 하면서 남편이 무엇보다 의
리를 중시한다는 것을 잘 알았다. 만약 자식을 구하고자 하는마
음에 사손의 행방을 말하여 사손이 죽음을 당하면, 부부관계도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았다. 은소소는 입 밖으로
나오려던 말을 다시 꿀꺽 삼켰다.
장취산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장부로 태어나 어떻게 친구를 배반할 수 있겠소. 단신은 우
리 무당칠협을 너무 과소 평가했소. 내 아들을 데려 가려면 마음
대로 데려 가시오."
하노삼은 무기만 인질로 붙잡으면 장취산 부부가 사손의 행방을
말하지 않고 못 배길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의외로 장취산이
단호하게 거절하자 한동안 어찌할 바를 몰라 안절부절 못하더니,
가까스로 유연주에게 시선을 돌렸다.
"유이협, 사손이 백 번 죽어 마땅하다는 것을 유이협도 잘 알고
계실 테니 당신이 두 분을 타일러 주십시오."
"이 일에 대해서는 무당에 돌아가 은사께 아뢴 후, 그 분의 뜻
에 따라 처리할 생각이오. 무창 황학루의 영웅연에 귀방 방주와
귀하도 참석하시면, 그 때 시비곡절을 분명히 밝힐 태니, 이제
그 아이를 내려놓으시오."
유연주는 강변에서 칠 장이나 떨어진 거리에서 진기(眞氣)도 운
기하지않고 말했는데, 하노삼의 귀에는 이마를 맞대고 얘기하는
것처럼 똑똑히 들렸다.
'무당칠협이 천하에 위명을 떨친 것은 역시 허풍이 아니었구
나. 이번에 우리 무산방이 무당파와 천응교에게 어떤 일을 저지
른 것은 큰 불찰인지는 모르겠으나, 방주의 독자가 살해된 원한
을 복수하지 않을 수 없으니.....'
여기까지 생각한 하노삼은 허리를 굽혔다.
"그렇다면 소인은 죄가 되는 줄 알지만, 아드님을 동천으로 모
셔가는 도리밖에 없습니다."
이때 은소소가 갑자기 뱃머리에 서 있는 한 선원의 등을 밀치고
발길로 다른 한 명을 걷어찼다. 두 선원은 무방비 상태에서 기습
을 당하자 비명을 지르며 물 속으로 떨어졌다.
이어 은소소가 고함을 질렀다.
"아얏! 여보, 왜 나를 때리세요?"
하고 뱃머리에서 이리저리 뛰며 난동을 부렸다. 유연주와 장취
산은 그녀가 갑자기 왜 이러는지 몰라, 한동안 어리둥절했다. 강
변의 하노삼 역시 무슨 일인지 몰라 곤혹스러운 눈빛으로 물끄러
미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나 유연주는 곧 은소소의 의도를 깨닫고, 하노삼이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틈을 이용하여 장검을 뽑아 힘껏 던졌다. 한
차례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유연주가 던진 장검은 칠리성
독사의 목을 베었을 뿐 아니라 독사를 쥐고 있던 하노삼의 손가
락 네 개까지 싹뚝 잘라 버렸다. 유연주가 장검을 던지는 순간,
장취산은 바닥을 힘껏 굴러 강변의 허공에 떠올라 왼손을 뻗어
하노삼을 삼 장 밖으로 날려보내고, 오른손으로는 무기를 붙잡
아, 품 속에 안았다. 등에 일 장을 가격당한 하노삼은 땅바닥에
쓰러진 채 일어나질 못했다.
강변으로 헤엄쳐 나간 두 명의 선원은 은소소가 왜 격노했는지
이유를 몰라 감히 배로 돌아가지 못하고 눈치만 살폈다.
은소소가 웃음을 가득 머금으며 그들을 불렀다.
"두 분께선 두려워 말고 이리로 올라오세요. 방금 무례를 범한
죄의 보상을 두 분께 은자 한 냥씩 드리겠어요."
그들의 탄 배는 다시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이날 따라 바람이
맞은 편에서 불어 속도는 거북이 걸음보다 느렸다. 장취산은 사
부를 비롯한 사형제들과 조금이라도 빨리 만나고 싶은 마음에 안
경(安慶)에 도착한 후 육로(陸路)를 이용하자고 제의했다. 그러
나 유연주는 그의 의견에 반대했다.
"오제, 배를 이용하는 것이 좋아. 물론 시간상으로는 며칠이 더
걸리겠지만, 선실에 앉아 있으면 불필요한 충돌을 피할 수 있지.
지금 강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네 의형의 행방을 찾기 위
해....."
은소소가 얼른 말을 가로챘다.
"우리가 둘째 사형과 동행하는데도 감히 길을 가로막는 자가 있
단 말인가요?"
"우리 사형제 일곱 사람이 연합한다면 아무도 우리를 당해 내지
못하겠지만, 나와 오제 두 사람만으로는 끊임없이 몰려오는 고수
들을 당해 내기 어렵소. 그리고 이 일을 원만히 해결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니, 쓸데없이 강호인들과 원한을 맺을 필요가 없지
요."
장취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드디어 호북성(湖北省)의 무혈(武穴)에 들어섰다. 이날 저녁 무
렵, 부지구(富池口)에 도착하여 밤을 지내기 위해 강변의 부두에
정박했다. 유연주는 갑작스러운 말발굽소리를 듣고 창문을 통해
강변을 내다보았다. 두 필의 말이 짙은 먼지를 일으키며 마을 쪽
으로 질주하고 있었다. 마상의 인물은 등만 보였지만 옷차림과
날렵한 행동으로 보아 무림인이 분명한 것 같았다. 유연주는 걱
정스러운 표정을 장취산을 돌아보았다.
"여기 머물었다간 시비가 벌어질 것 같으니, 저녁 식사를 끝내
는 대로 떠나는 게 좋겠다."
최근 들어 유연주의 위명은 더욱 자자해져 곤륜과 공동등 명문
정파 장문인의 명성도 그를 따르지 못했다. 그런 그가 두 무명
소졸의 뒷모습을 보고 부지구에 오래 머물지 않으려고 한 것은,
모두 사제 장취산 일가족 세 식구를 위해서였다.
이날 밤따라 달이 유난히 밝고 바람도 잔잔했다. 무기가 잠이
들자 유연주와 장취산 부부는 뱃머리에 앉아 달구경을 하며 술잔
을 기울였다.
장취산이 감개무량한 어조로 먼저 입을 열었다.
"은사님의 백 주년 생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소제가 참석할
수 있음을 생각하니 기쁘기 한량 없습니다."
은소소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그렇지만, 상황이 급박하여 그 어른의 생일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으니 어쩌죠?"
유연주가 은소소를 돌아보며 물었다.
"제수씨는 우리 은사님이 일곱 명의 제자 중 누굴 제일 좋아하
시는지 압니까?"
"그야 물론 무당파의 명성을 위해 헌신하신 둘째 아주버님이겠
지요."
"제수씨는 알고 있으면서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을 하는군요. 사
부님께서 항상 마음에 두고 계시는 제자는 바로 영준하기 짝이
없는 제수씨의 부군입니다."
은소소는 날아갈 듯이 기뻤지만 장취산은 너무 감격한 나머지
눈시울이 촉촉하게 젖었다.
"그러나 이제 오제가 무사히 돌아왔으니 은사님의 생일 선물치
고 이보다 더 좋은 선물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기까지 말했을 때 갑자기 강변 쪽에서 말발굽소리가 들려왔
다. 깊은 야밤에 네 필의 말이 질주해 오는 것은 십중팔구 그들
세 사람과 관련이 있음이 분명했다. 그들은 말발굽소리를 개의하
지 않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번에 내가 하산할 때은사님께선 폐관청수(閉關청修) 중이셨
는데, 우리가 도착할 무렵에는 그 어른께서 폐관청수를 끝냈으면
좋으련만....."
은소소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가친께서 식년에 내게 말씀하시길, 일생 중 진정으로 존경하는
사람은 두 분뿐인데, 한 분은 이미 작고하신 명교(明敎)의 양교
주(陽敎主)이고, 다른 한 분은 영사이신 장진인이라 했어요. 소
림사의 견문지성(見聞智性) 사대고승(四大高僧)까지도 가친께선
별로 존경하지 않았어요. 장진인은 올해 백세 고령으로 수양이
깊으심은 당대에선 필적할 사람이 없을 텐데 아직도 폐관을 하신
다니, 혹시 장생불로지술(長生不老之術)을 수련하시는 게 아니세
요?"
"아닙니다. 은사께서는 무공을 연구 중이십니다."
은소소가 다소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 어른의 무공은 이미 가늠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을 텐데,
또 무슨 무공을 연구하신다는 거예요? 당금 무림에 그 어른의 적
수라도 있단 말인가요?"
"은사께선 아흔 다섯 살 때부터 매년 구 개월 씩 폐관하셨습니
다. 그 어른의 말씀에 의하면 우리 무당파의 무공은 대부분 구양
진경(九陽眞經)에서 얻은 것이라더군요. 그러나 은사님이 각원조
사(覺遠祖師)에게서 진경을 전수받을 때는 나이가 너무 어려 무
공을 전혀 모른 탓도 있지만, 각원조사 또한 꼭 전수하겠다는 마
음도 없어 그저 마음내킬 때만 조금씩 가르쳤기 때문에, 지금의
본문 무공에 결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각원조사께선 구양진경이
달마노조(達摩老祖)때부터 물려내려온 것이라 했지만, 은사께선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의 첫째는, 진
경에 기록된 비기(秘技)가 소림파 무공과는 크게 다르며 오히려
중원의 도가무학(道家武學)에 가깝고, 둘째, 구양진경은 범문(梵
文)이 아니고 중국 문자가 범문으로 된 약가경의 행간에 적혀 있
다는 점입니다. 달마노조께서 아무리 선리(禪理)를 참오(參悟)하
시고 무학이 깊으시다 하지만, 천축(天竺)에서 오신 분이므로 중
국 문자는 정통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심오한 무
경(武經)을 저술하시려면, 깨달은 깨끗한 종이에 기록하지 않고
약가경의 행간에 적었겠습니까?"
장취산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렇다면 은사님께선 구양진경을 만든 사람이 누구라고 추측하
고 계십니까?"
"은사님께서도 정확하게는 단정지으시지 못하고,어쩌면 소림파
후세의 어떤 고승께서 지으시고 달마노조께서 만드신 것처럼 꾸
몄을지도 모른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은사님께서는 구양진경에
기록된 무학이 완전하지 못한 것을, 당신더러 보충하라는 뜻이
아닌가 생각하시고 새로운 무학을 창조해 내기 위해 매년 폐관하
시는 거란다."
장취산과 은소소는 이 말을 듣고 사부님의 지칠 줄 모르는 노익
장과 탐구 정신에 숙연히 고개가 숙여졌다.
"당시 각원조사에게서 구양진경을 전수받은 사람은 모두 세 분
이었지. 한 분은 은사님이고 한 분은 소림파의 무색대사이며, 또
한 분 은 여잔데, 바로 아미파의 창파조사(創波祖師) 곽양 곽여
협이다."
은소소가 눈썹을 악간 치켜올렸다.
"지난날 가친께 들은 말인데, 곽대협은 쟁쟁한 가문에서 태어난
인물로 부친은 곽정(郭靖) 곽대협이고 모친은 개방의 황방주 황
용(黃蓉)인데, 두 분 모두 당시 양양성이 함락될 때 함께 순직하
셨다더군요."
"그렇습니다. 우리 은사님께선 오래 전 화산 절정에서 곽대협
부부를 한 번 만난 적이 있는데, 그들 두 분의 국가와 민족을 위
한 인풍협골(仁風俠骨)을 무예를 연마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귀감
으로 삼고그분들의 뜻을 이어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유연주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말을 이었다.
"당시 구양진경을 전수받은 세 분은 오성(悟性)이 제각기 다르
고, 무학의 기초도 많은 차이가 있었지. 무공은 무색대사가 제일
고강했고, 곽여협은 곽대협과 황방주의 따님인지라 배운 것이 제
일 많았으며, 은사님께서는 무공 기초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지.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은사님은 제일 정순(精純)한 무공을 배울
수 있었지. 그 결과 소림, 아미, 무당 삼파 중 하나는 무공의 고
강함을, 하나는 무공의 광범위함을, 하나는 무공의 정순함을 물
려받아 제각기 장점을 하나씩 지니게 되었지만 또한 제각기 단점
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지."
"그렇다면, 각원조사의 무공은 천하에 적수가 없을 정도로 고절
했겠군요."
"아닙니다. 각원조사께선 무공을 못했습니다. 그 어른은 소림사
장경각에서 장경을 감독하는 동안 읽지 않은 경서(經書)가 없고
달달 외지 못하는 경서가 없었습니다. 그 어른께선 우연한 기회
에 구양진경을 발견하여 마치 금당경, 법화경을 익히듯이 머리
속에 한 자도 빠뜨리지 않고 모두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기재된 정심박대(精深博大)한 무학은 그 어른도 깨닫기는 했지
만, 익힌 것은 내공뿐이며 무술은 조금도 못했습니다."
이어 유연주는 구양진경을 분실하게 된 경위를 은소소에게 자세
히 들려 주었다.
은소소는 크게 흥미를 느끼며 물었다.
"이제 보니 아미파의 사조와 무당파 사이에는 이런 관계가 있었
군요. 그렇다면, 곽양 곽여협은 왜 장진인과 결합하지 않았지
요?"
장취산이 웃으며 은소소를 꾸짖었다.
"은사님은 곽여협과 소실산 아래에서 헤어진 후 한 번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은사님의 말씀에 의하면, 곽여협이 마음 속에 두고
있는 사람은 양양성 밖에서 비석(碑石)을 던져 몽고군을 때려 죽
인 신조대협(神조大俠) 양과(楊過)입니다. 곽여협은 방방곡곡을
샅샅이 뒤져도 양대협을 찾지 못하자 마흔 살에 출가하여 니고
(尼姑)가 되었으며, 그 후 아미파를 창설했지요."
은소소는 곽양의 오직 한 사람에게만 향한 진실된 마음에 존경
과 함께 연민을 느끼며 장취산을 힐끔 돌아보았다. 장취산도 그
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유연주는 은소소와 십여 일을 함께 지내는 동안, 그녀의 본성은
나쁘지 않음을 발견했다. 그래서 유연주는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의 좋지 않던 인상이 점차 사라지고, 그녀의 솔직하고 진심된
마음은 명문 정파의 위선을 가장한 몇몇 인사들보다 훨씬 뛰어났
음을 알았다.
이때 동쪽 강변에서 또 말발굽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는가 싶더
니, 그들이 탄 배 앞을 지나 서쪽으로 질주했다. 장취산은 말발
굽소리엔 개의하지 않고 유연주를 바라보며 말했다.
"둘째 사형, 은사님께서 소림과 아미 양파의 고수들을 초빙하여
함께 연구 토론하면, 삼 파의 무공이 모두 진보할 게 아닙니까?"
유연주는 손바닥으로 허벅지를 탁 쳤다.
"그렇구나! 사부님께서 바로 네가 앞으로 그 어른의 의발을 이
어받을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
이구나."
"은사님께선 소제가 곁에 있지 않아 보고 싶어 그런 말씀을 하
신 것뿐입니다. 그것은 어머니가 곁에서 효성을 다하는 자식보다
오랫 동안 집을 떠나 멀리 있는 아들을 더 보고 싶어하는 이치와
똑같은 것이지요. 사실 지금의 소제는 모든 면에서 큰 사형, 둘
째 사형, 네째 사형은 말할 것도 없고 여섯째, 일곱째 사제보다
훨씬 못합니다."
유연주가 고개를 설래설래 저었다.
"그렇지 않아. 무공만 논할 것 같으면 네가 나를 따르지 못하는
건 사실이야. 그러나 은사님의 의발전인은 무학을 널리 발전 보
급시키는 막중한 임무를 짊어져야 해. 때때로 은사님께선 혼잣말
로 천하는 끝없이 넓으니, 무당일파의 영욕(榮辱)은 마음에 둘
바 아니지만 정인군자의 무공은 사악한 소인배가 평생을 공부해
도 익히지 못하므로 신중을 기해 의발전인을 선택해야 한다고 하
셨어, 그러므로 은사님의 의발전인은 심술(心術)과 오성(悟性)을
두루 갖춘 사람이라야 되지. 심술면에 있어선 우리 칠형제가 모
두 비슷하지만, 오성면을 말하자면 네가 제일이라고 은사님께서
말씀하셨지."
"그건 은사님께서 소제를 너무 보고 싶어한 나머지 사실과 다르
게 말씀하셨을 뿐입니다. 그리고 설사 은사님께서 정말 그런 뜻
을 지니고 계신다 해도 소제는 감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유연주가 빙긋이 웃으며 은소소에게 화제를 바꾸어 말했다.
"제수씨는 사셔서 무기가 놀라지 않게 보호하십시오. 바깥일은
나와 오제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은소소가 주위를 살펴보았으나 아무런 기미도 보이지 않아 망설
이고 있을 때 유연주가 또 입을 열었다.
"강변의 관목과 갈대밭 속에서 도광이 번뜩이는 것으로 보아,
적이 매복해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사방은 쥐죽은 듯이 조용하기만 했다.
유연주는 술을 한 잔 들이킨 후, 어두운 허공을 향해 낭랑한 목
소리로 외쳤다.
"무당산의 유이(兪二)와 장오(張五)가 당신들의 구역을 지나면
서 인사를 드리지 못해 미안하오. 어느 분이든지 흥미가 있으면
이리로 올라와 함께 술잔을 기울이면 어떻겠소?"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전면의 갈대밭 속에서 물을 가르는 소
리가 일며, 여섯 척의 소선(小船)이 강물 중앙으로 나와 한 줄로
배열했다. 이어 한 척의 소선에서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일으키
며 향전(響箭)을 발사하자 남쪽 강변의 관목 속에서 십여 명의
장한들이 나왔다. 그들은 하나같이 흑의를 입고 손에는 병장기를
들었으며 얼굴은 흑건으로 복면을 하고 있었다.
은소소는 적이 모습을 나타내자 유연주의 예리한 이목(耳目)에
감탄하며 급히 선실로 들어가 보니 무기도 놀라 깨어 있었다. 그
녀는 무기에게 옷을 입히며 나직이 말했다.
"무기야, 조금도 무서워할 것 없다."
이때 유연주가 또 고함을 질렀다.
"전면의 친구 중 어느 분이 우두머리요?"
그러나 여섯 척의 소선에선 각각 한 명씩 선미에서 노만 젓고
있을 뿐, 아무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으며 답변하는 사람도 없
었다.
'아차!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군.'
유연주는 갑자기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물
가에서 자랐기 때문에 헤엄을 물고기보다 잘 쳤다. 물 속에 잠수
하여 살펴보니 네 명의 장한이 각각 손에 뾰족한 창을 쥔 채 이
쪽으로 헤엄쳐 오고 있었다. 그들은 배 밑창에 구멍을 뚫어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을 생포할 의도인 것 같았다.
유연주는 배 옆에 몸을 바짝 붙인 채그들이 다가오기를 기다렸
다. 연달아 손가락을 튕겨 두 사람의 혈도를 제압하고, 세 번째
사람은 발길질로 허리의 지실혈(志室穴)을 찍었다. 네 번째 사람
이 이 광경을 보고 깜짝 놀라 도주하려 하자 유연주는 왼손으로
그 사람의 발목을 붙잡아 배 위로 던졌다. 이어 그는 혈도를 찍
힌 세 사람을 그대로 두면 익사할 것 같아 한 병씩 붙잡아 배 위
로 던진 후 자기도 뒤따라 올라갔다.
맨 먼저 배 위로 던져진 장한은 갑판 위에서 몇 바퀴 뒹굴더니
벌떡 일어나 창끝으로 장취산의 가슴을 찔러왔다. 장취산은 상대
방의 무공이 평범한 것을 보고 피하지 않고 기다렸다가 갑자기
왼손을 뻗어 상대방의 손목을 붙잡아 당기며 오른팔 팔꿈치로 그
의 앞가슴 혈도를 가격하자, 그 장한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바
닥에 고꾸라졌다.
유연주가 장취산에게 나직이 말했다.
"강변에는 고수가 몇 명 있는 모양이다. 우리가 취할 도리는 다
했으니 상관하지 말고 계속 앞으로 나가자."
장취산은 고개를 끄덕이고 선주에게 계속 노를 저으라고 분부했
다. 여섯 척의 소선 가까이 접근했을 때, 유연주는 네 장한의 혈
도를 풀어 준 다음, 한 명씩 소선 위로 던졌다. 그러나 이상하게
도 상대방 소선에선 여전히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으며, 강변의
흑의인 십여 명도 마치 벙어리가 된 것처럼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유연주 일행이 탄 배가 여섯 척의 소선 옆을 막 지나치려 할
때, 그 중 노를 젓던 한 명이 오른손을 휘젓자 요란한 폭음이 울
리며 나무 조각이 사방으로 날았다. 유연주가 고개를 돌려 보니,
이미 선미의 선타(船舵)가 산산조각나고 선체는 방향을 잃어 강
물 위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그 장한이 던진 것은 어부가
물고기를 잡을 때 사용하는 어포(漁泡)였으나, 화약을 많이 넣어
특별히 제작했기 때문에 위력이 매우 강했던 것이다.
유연주는 아무 내색을 하지 않고 가볍게 몸을 솟구쳐 상대방의
소선에 내려섰다. 그 소선의 장한은 앞을 바라보며 노만 저을
뿐, 이쪽으로 건너 온 유연주를 본 체도 하지 않았다.
"어포를 던진 자가 누구요?"
유연주가 고함을 질렀지만 그 장한은 여전히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유연주가 선실로 들어가 보니 그곳에는 두 명의 장한이
마주 보며 앉아 있었다. 그들 역시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적을 상대할 태도도 취하지 않았다. 유연주는 그 중 한
명의 뒷덜미를 잡아 들어올리며 고함을 질렀다.
"당신들의 두목은 어디 있소?"
그 장한은 대답대신 눈을 감아 버렸다. 유연주는 무림의 일류
고수 신분으로 그들에게 무력을 사용하고 싶지 않아 그 장한을
바닥에 내려놓고 밖으로 나갔다. 어느새 장취산과 은소소도 무기
를 안고 소선으로 건너와 있었다.
유연주가 상대방의 손에서 노를 빼앗아 상류를 향해 저어나가려
할 때, 은소소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악적들이 배 밑창에 구멍을 뚫었어요."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배 밑바닥에서 강물이 솟아올랐
다. 유연주가 옆의 소선으로 건너가 보았지만 거기도 마찬가지였
다.
"오제, 우리들이 뭍으로 올라가지 않는 한 그들도 포위하지 않
을 모양인, 그렇다면 올라가 그들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아보세."
세 사람은 무기를 안고 뭍으로 뛰어올라갔다.
강변에는 복면을 한 십여 명의 장한이 반원형으로 그들 네 사람
을 포위했다. 이들이 소지하고 있는 병장기는 대부분 장검이었으
나 쌍도(雙刀)와 연편(軟鞭)을 든 사람도 몇 명 있었다.
유연주는 팔짱을 끼고 선 채 복면의 흑의 장한들을 왼쪽에서 오
른쪽으로둘러보기만 했을 뿐 말을 하지 않았다. 그들 중 한 명
이 손짓을 하자 그들은 양옆으로 갈라지더니 병장기 끝을 아래를
향하게 한 채, 포권의 예를 올리며 길을 터주었다. 유연주도 포
권의 답례를 하고 그들 앞을 지나갔다. 그들은 유연주가 지나가
자 다시 길을 막고 장취산등 세 사람을 포위하더니 일제히 병장
기를 들어올렸다.
장취산이 이 광경을 보고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이제 보니 당신들은 이 장취산을 영접하러 왔군요. 하지만 나
는 결코 당신들의 이런 진세(陳勢)를 두려워할 졸부가 아니오."
중앙에 있던흑의인이 잠시 주저하더니 검끝을 아래로 내리며
다시 길을 터주었다.
장취산이 은소소에게 나직이 말했다.
"여보, 당신이 먼저 가시오."
은소소가 무기를 안고 막 그들 앞을 지나가려는 순간,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세차게 울리며 다섯 자루의 장검이 일제히 무기를
겨냥했다. 은소소가 깜짝 놀라며 황급히 뒤로 물러섰으나, 다섯
명의 흑의인이 따라와 여전히 검끝으로 무기의 전신요혈을 겨냥
했다. 이 광경을 본 유연주가 발끝으로 땅을 굴러 그들의 머리
위를 뛰어넘어 포위망 안으로 날아들어와 양손을 번개같이 휘둘
렀다. 그러자 무기를 겨냥하고 있던 다섯 자루 장검 중 네 자루
가 허공으로 날아갔다. 그의 동작이 얼마나 빨랐던지 장검 네 자
루가 마치 동시에 날아가는 것 같았다. 이어 그는 왼손을 뒤집어
금나술(檎拿術)로 다섯 번째 사람의 장검을 쥔 손목을 움켜쥐며
중지(中指)로 그 사람의 손목 혈도를 찍었다.
다섯 명이 장검을 놓치고 뒤로 물러서자, 달빛 아래에 섬광이
번뜩이며 또 두 자루의 장검이 다가왔다. 그들은 검날을 눕혀 좌
우를 향하게 하여 똑같이 대막평사(大漠平沙) 초식을 펼쳤지만,
검세가 예리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사람을 해칠 뜻은 없는 것 같
았다.
'곤륜검법! 이제 보니 이들은 곤륜파 제자였구나.'
유연주는 이렇게 생각을 굴리며 검 끝이 가슴 앞 세 치 거리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가슴을 안으로 오므리고 양팔로 동그라미를
그리며 좌우 양손의 식지로 동시에 두 자루 장검의 검면(劍面)을
찍었다. 그 순간, 검면에서 한 줄기 유연한 경기(經氣)가 발출하
여 그의 지력(指力)을 절반이나 감소시켰을 뿐 아니라 상대방은
장검을 놓치지도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결국 그의 지력을 감
당해 내지 못하고 세 걸음이나 후퇴하더니 한 명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또 한 명은 비명을 지르며 입에서 선혈을 한모금 토해
냈다. 그 비명소리는 밝고 부드러운 여자의 음성이었다. 중앙의
그 흑의인이 왼손으로 신호를 하자, 십여 명의 흑의인은 눈 깜짝
할 사이에 관목 속으로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그러나 그들의 몸
매가 하나같이 가냘픈 것으로 보아 남장을 한 여자들임이 분명했
다. 유연주가 낭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유이, 장오 두 사형제는 기회가 있으면 철금선생(鐵琴先生)을
친히 찾아 뵙고, 오늘의 무례함을 시죄드린다고 전해 주시오!"
흑의인들은 대답대신 가볍게 웃기만 했는데, 그 또한 여자의 목
소리였다.
은소소는 무기를 땅에 내려놓고 손을 꼭 쥐었다.
"그들은 대부분 여자였어요. 아주버님, 그녀들은 모두 곤륜파
제자인가요?"
"아닙니다. 아미파 제자들입니다."
"아미파 제자라구요? 그런데 아주버님께선 왜 철금선생을 찾아
뵙는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들이 시종일관 소리를 내지 않고 또 얼굴을 흑건으로 가린
것은 정체를 밝히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아까 다섯 자루의 장검
이 무기를 겨냥한 것은 곤륜파의 한매검진(寒梅劍陣)이었으며,
두 사람이 검으로 나를 찌른 것도 곤륜파의 대막평사 초식이었습
니다. 그녀들이 곤륜파 제자 행세를 하기에, 나도 그들의 신분을
간파하고 싶지 않아 곤륜파 장문인 철금선생 하태곤(何太坤)의
이름을 들먹였을 뿐입니다."
"둘째 아주버님은 그녀들이 아미파의 제자라는 것을 어떻게 아
셨어요?"
"그녀들의 공격이 깊지 않은 것으로 보아, 당금의 아미파 장문
인 멸절사태(滅絶師太)의 도손(徒孫)이든지 아니면 소제자(小弟
子)들일 것으로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녀들이 부드러운
무공으로 나의 지력을 약화시킨 것은 아미 심법이 분명했습니다.
다른 문파의 초식과 진식을 배우는 건 어렵지 않지만, 내경(內
經)은 아무도 쉽게 흉내내지 못하지요."
장취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둘째 사형께서 지력으로 검신을 가격했을 때 즉시 그녀들이 검
을 철회했다면 가벼운 내상도 입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미파의
내공은 매우 심후하지만, 상당한 경지에 이르기 전에 섣불리 사
용하면 큰 봉변을 당할 우려가 있지요. 둘째 사형께서 그녀들을
정말 적으로 간주했다면, 그 두 여자는 지금쯤 싸늘한 시체가 되
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둘째 사형께선 그녀들에게 왜 따끔한 맛
을 보여 주지 않고 자비를 베풀었습니까?"
"은사님께서 소년 시절에 아미파의 개파조사(開波祖師) 곽양 여
협의 신세를 진 일이 있기 때문이네. 그 어른께선 기회 있을 때
마다 우리들에게 아미파 제자를 만나면 가능한 한 양보하라고 당
부하셨지. 아까 내가 지력으로 검을 가격했을 때 상대방의 내공
이 심후하지 못함을 발견하고 철회하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
아 두 사람을 다치게 했지. 비록 실수이긴 하지만 은사님의 훈시
를 어겨 마음이 몹시 걸리는 구나."
은소소가 웃으며 유연주를 위로했다.
"그러나 아주버님께선 마지막에 철금선생에게 사죄드린다고 말
씀하셨으니, 직접적으로 아미파에 죄를 범한 것은 아니예요,"
이 무렵 그들이 타고 왔던 배는 이미 하류로 돌아가 종적도 보
이지 않았다. 여섯 척의 소선 역시 모두 침몰하여 노를 젓던 사
람들은 전신이 젖은 체 강변으로 기어올라오고 있었다.
은소소가 나직이 물었다.
"저들도 모두 아미파의 제자들인가요?"
"아닙니다."
은소소가 아미파 제자들이 떨어뜨리고 간 장검을 주워 살펴보려
하자, 유연주가 제지했다.
"그녀들의 병장기에 손대지 마십시오. 검에 이름이라도 새겨 두
었다면 후일 우리는 몰랐다고 잡아뗄 수 없게 됩니다."
은소소는 유연주의 세심함에 내심 탄복을 금치 못하며, 무기의
손을 잡고 강변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관목이 울창한 수림을 막
지났을 때, 거대한 버드나무 가지에 세 필의 말이 매어져 있었
다. 무기가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저기 말이 있어요,"
네 사람이 가까이 다가가 보니, 나무줄기에 종이쪽지가 한 장
꽂혀 있었다.
<배를 파손시킨 죄로 말을 세 필 드립니다.>
탄필(炭筆)로 적은 글씨는 시간에 쫓긴 탓인지 갈겨 썼지만 여
자의 필체임이 틀림없었다. 은소소가 웃으며 말했다.
"아미파 낭자들은 눈썹을 그리는 탄필로 무당대협에게 쪽지를
남겼군요."
그들은 나뭇 가지에서 말을 풀어 한 필씩 나누어 탔다. 무기는
은소소 앞에 앉아 무척 좋아했다.
장취산이 말등에 올라타며 입을 열었다.
"둘째 사형, 우리들은 어차피 행적이 노출되었으니 배를 타나
말을 타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렇군. 무당산까지 도착하는 동안 여러 차례 파문이 일 거야.
그러나 만부득이하지 않는 이상 살수를 펼쳐 내선 안 된다."
유연주는 본의 아니게 아미파 제자에게 상처를 입힌 것이 아무
래도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둘째 아주버님은 다만 상대방을 물러나게 하려다 본의 아니게
상처를 입혔는데도 이렇게 후회하고 불안해 하는데, 지난날 나는
일시적인 감정으로 소림 제자를 그렇게 많이 죽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으니..... 앞으로는 둘째 아주버님을 번거롭게 만
들지 말아야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녀는 유연주를 돌아보았다.
"둘째 아주버님, 지금까지 나타난 사람들은 모두 우리 부부를
목적으로 삼았을 뿐 둘째 아주버님에게는 무척 공손했어요. 만약
앞으로 또 제지를 당하면 제가 해결할 테니, 아주버님은 개입하
지 마세요."
"그 무슨 서운한 말입니까? 형제라면 마땅히 살아도 함께 살고
죽어도 함께 죽어야지, 동생의 어려움을 보고 모른체 한다면 그
건 금수보다 못한 짓입니다."
은소소는 유연주가 이렇게 말하자 더 이상 언급하지 않고 화제
를 바꾸어 물었다.
"그들은 둘째 아주버님이 우리 부부와 함께 있다는 것을 잘 알
고 있을 텐데, 왜 경험도 부족한 어린 제자들만 파견 했을까요?"
"시간에 쫓겨 고수들을 파견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겠죠."
장취산은 아까 아미파 제자들의 행위로 보아 그녀들의 목적도
사손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한 것이라 짐작했다.
"둘째 사형, 의형은 아미파와도 원한을 맺은 모양이군요. 하지
만 아미파와 원한을 맺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는데....."
"아미파는 규칙이 엄격하고 또 제자들이 대부분 여자인지라 멸
절사태는 제자들이 강호를 주행하는 것을 엄격히 규제하고 있지.
그런 아미파도 천응교를 적대시하기에 처음에는 무슨 까닭인지
몰라 의아스러워했는데, 최근에 와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지.
원래 하남성 난봉(蘭封)의 금조추(金爪錘) 방평(方評) 방노영웅
이 어느 날 갑자기 살해되고 벽에 혼원벽력수 성곤의 소행이라는
혈서가 적혀 있었지."
은소소가 곤혹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방평은 아미파 사람인가요?"
"아닙니다. 멸절사태의 속가(俗家)로 성이 방씨이며, 방노영웅
은 바로 멸절사태의 친오빠이지요."
장취산과 은소소는 그제야 아미파가 사손의 행방을 찾으려는 이
유를 알고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무기가 갑자기 유연주에게 물었다.
"둘째 사백, 방노영웅은 좋은 사람인가요, 나쁜 사람인가요?"
"방노영웅은 주경야독(晝耕夜讀)하며 아무와도 왕래하지 않았으
니 나쁜 사람이라 할 수 없지."
"의부께서 선악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살인을 자행한 건
정말 옳지 않아요."
유연주는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은소소의 품에서 무기를
안아 받아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무기야, 네가 함부로 살인하면 안 되는 것을 알다니 매우 기특
하구나. 사람은 한 번 죽으면 다시 살아나지 못하므로 아무리 죄
가 많고 극악무도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죽일 것이 아니라 개과천
선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알겠느냐?"
"명심하겠습니다. 참! 둘째 사백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
다."
"무슨 부탁이냐?"
"설령 그들이 의부를 찾아 낸다 해도 둘째 사백께서 그들이 의
부를 죽이지 못하게 해주세요. 의부는 앞을 보지 못해 그들을 당
해내지 못해요."
유연주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 부탁은 승낙할 수 없구나. 하지만 나는 절대 그를 죽이지
않는다고 약속하겠다."
무기는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숙였다.
날이 밝을 무렵, 그들은 조그만 마을에 도착했다. 객점에서 잠
깐 휴식을 취한 후 다시 길을 재촉했다.
며칠간의 여행끝에 무한(武漢)을 지나 이날 오후 안륙(安陸)에
거의 도착했은 때, 갑자기 앞에서 십여 명의 상인들이 허겁지겁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유연주 일행 곁을 지나치며 조
급한 어조로 외쳤다.
"빨리 되돌아가시오! 저쪽 앞에서 달자병(達子兵:몽고병)들이
살인 약탈을 자행하고 있소."
또 한 사람은 은소소에게 손짓을 했다.
"당신같이 젊고 아름다운 부인이 달자병에게 잡히면 어떻게 되
는지 아시오?"
"달자병의 수가 얼마나 됩니까?"
"십여 명인데 하나같이 흉악하기가 늑대 같아요."
그들은 말을 끝내기 무섭게 동쪽으로 도망쳐 갔다.
무당칠협이 제일 미워하는 것은 선량한 백성을 해치는 원병(元
兵)이었다. 장삼봉도 평소에 문인들을 엄격히 다스려 싸움질을
하면 추호도 용서하지 않았지만, 원병이 만행을 저지르는 것을
보면 가차없이 살수를 펼쳤다.
약 삼 리 가량 달려나아갔을 때 처절한 비명이 들려오기 시작했
다. 장취산이 앞장서서 달려가 보니 십여 명의 원병이 손에 손에
강도장모(鋼刀長矛)를 휘두르며 수십 명의 백성들에게 대살육을
자행하고 있었으며 선혈이 낭자한 바닥에는 이미 목없는 시체가
여기저기 뒹굴고 있었다. 이때 한 명의 원병이 이제 겨우 서너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아이를 잡아채더니 발길질로 공중 높이
차올렸다. 어린 아이가 허공에서 비명을 지르며 떨어지자 이번에
는 다른 원병이 발길질을 했다.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장취산은
말에서 곧장 몸을 뽑아올려 발끝이 땅에 닿기도 전에 일권으로
한 원병의 가슴을 가격했다. 그 원병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고
꾸라지자 다른 한 명의 원병이 장모를 휘두르며 장취산의 배심
(背心)을 찌르려 했다.
무기가 이 광경을 보고 깜짝 놀라며 고함을 질렀다.
"아버지, 조심하세요!"
장취산은 뒤로 돌아서며 빙긋이 웃었다.
"무기야, 이 아비가 달자병을 어떻게 요리하는지 잘 보아 두거
라."
장모가 가슴 앞 반 치 거리에 도착했을 때 장취산은 왼손을 교
묘하게 뒤집어 장모를 붙잡아 앞으로 힘껏 밀쳤다. 장모의 손잡
이 끝이 그 원병의 명치에 정확하게 적중하였다.
"으악!"
그 원병은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스러져 몇 번 바둥거
리더니 곧 잠잠해졌다. 이 광경을 목격한 나머지 십여 명의 원병
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장취산을 포위 공격했다. 뒤따라 도착
한 은소소가 말에서 뛰어내려 원병의 손에서 장도(長刀)를 빼앗
아 두 명을 살해했다. 나머지 원병들은 정세가 불리함을 깨닫고
사방으로 흩어져 도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워낙 흉악한
지라 도주하면서도 칼을 휘둘러 백성을 살육했다. 유연주가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달자병을 한 놈도 놓치지 말고 모두 제거해라!"
하며 서쪽으로 몸을 날려 도주하는 네 명의 원병을 붙잡았다.
장취산과 은소소도 좌우로 흩어져 원병을 뒤쫓았다. 장취산 등은
원병이 비록 흉악하지만 무공은 보잘 것 없으며 오히려 무기가
그들보다 고강하다고 생각하고는 무기를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았
다.
무기는 말등에서 뛰어내려 유연주와 부모가 원병들을 제거하는
것을 보고 손뼉을 치며 응원했다. 이때 좀전에 장취산이 되찌른
장모의 손잡이 끝에 명치를 맞아 쓰러졌던 원병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무기의 허리를 덥석 안고 말에 뛰어올라 쏜살같이 질
주했다.
유연주와 장취산 부부는 대경실색하며 거의 동시에 그 원병을
추격했다. 유연주는 몇 번 몸을 솟구치지 않아 바로 뒤까지 추격
하여 왼손을 뻗어 그 원병의 배심을 향해 일장을 가격했다. 그러
나 그 원병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만 뒤집어 일장을 반격했다.
경미한 음향과 함께 쌍방의 손바닥이 부딪치는 순간, 유연주는
상대방의 장력에 비틀거리며 뒤로 세걸음 밀려났다. 하지만 그
원병이 타고 있던 말은 유연주가 뻗어낸 일장의 위력을 감당해
내지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 원병은 말이 쓰러지자 무기
를 안은 채 이 장 밖으로 몸을 날리더니 경신술(經身術)을 시전
하여 순식간에 십여 장 밖까지 날아갔다. 장취산이 도착해 보니
유연주는 엄중한 내상을 입고 얼굴빛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져 있
었다.
한편 은소소는 사랑하는 아들의 안위가 걱정되어 사력을 다해
뒤쫓았지만, 그 원병의 경신술이 워낙 뛰어나 쌍방의 거리가 점
점 멀어져 결국 그 원병의 모습을 놓치고 말았다. 하지만 은소소
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미친 듯이 뒤쫓았다. 그녀는 그 원병이
유연주까지 격상시킨 것으로 보아 설사 상대방을 붙잡는다 해도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함을 알지만 그런 것을 따질 계제가 아니었
다.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무기만은 구하고 말겠다.'
유연주가 숨을 가늘게 몰아쉬며 간신히 말했다.
"빨리 제수씨를 불러 차분히 계획을 세우자."
장취산은 장모를 뻗어 또 두 명의 원병을 찔러 죽인 후 물었다.
"상세가 엄중합니까?"
"걱정할 정도는 아니니 빨.....빨리 제수씨부터 돌아오라고 해
라."
장취산은 자기가 없는 사이에 나머지 원병들이 유연주를 해칠것
이 염려되어 한 명씩 추격하여 모두 제가한 후 말등에 뛰어올라
은소소가 사라진 방향으로 치달렸다.
얼마를 달리니 은소소가 앞에서 혼자 미친 듯이 질주하고 있었
으나 이미 기진맥진하여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장취산이
그녀를 안아 말등에 앉히자 그녀는 울면서 앞을 가리켰다.
"그 놈이 보이지 않아요. 이제 다 틀렸어요."
라고 말을 마치자마자 기절해 버렸다.
장취산은 무기보다 유연주의 안위가 더욱 걱정되었다.
'먼저 둘째 사형부터 보살핀 다음 무기를 찾을 방도를 강구해야
겠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말머리를 돌려 돌아와 보니, 유연주는 땅바닥
에서 가부좌를 하고 앉아 눈을 감은 채 운기조식을 하고 있었다.
한참 후 정신을 차린 은소소가 또 미친 사람처럼 외쳤다.
"무기야.....! 무기야.....!"
유연주의 창백했던 얼굴에 점차 홍조가 감돌며 눈을 떴다.
"대단한 장력이구나!"
장취산은 유연주가 입을 열자 생명에는 지장이 없음을 알고 다
소 마음을 놓았다.
"둘째 아주버님. 이.....이제 어떡하면 좋죠?"
"제수씨, 무기에게 별다른 일은 없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
시오. 그 사람은 무공이 무척 고강했으니 절대 어린 아이는 해치
지 않을 것입니다."
"하.....하지만 그.....그는 무기를 납치해 갔어요."
유연주는 고개를 끄덕이고 왼손으로 장취산의 어깨를 붙잡고 눈
을 감은 채 한참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가볍게 탄식했다.
"그 사람이 어느 문파의 제자인지 모르겠으니, 무당에 돌아가
은사님께 여쭈어 보자."
은소소는 이 말을 듣고 몹시 조급해 했다.
"둘째 아주버님, 어떤 수를 써서라도 무기부터 먼저 구해야지
요. 그 사람이어느 문파의 제자인지는 천천히 여쭈어 보아도 늦
지 않잖아요."
유연주가 고개를 설레설레 젓자 장취산이 은소소를 타일렀다.
"여보, 지금 둘째 사형께선 중상을 입었고, 또 그 사람의 무공
이 상당히 고강하므로 그를 찾는다 해도 속수무책이오."
"그.....그러면 무기를 포기하잔 말인가요?"
"우리가 그 사람을 찾아가지 않아도 그 사람이 우리를 찾아올
것이오."
은소소는 남편의 말을 듣고 다시 이성을 회복했다. 그 사람의
무공이 유연주까지 일장에 중상을 입힐 정도로 고강한 것을 보아
진짜 원병이 아니라 원병으로 변장한 것이 분명했다. 그가 유연
주에게 중상을 입힌 후 장취산 부부를 살해할 마음만 먹었다면,
지금쯤 두 사람은 싸늘한 시체로 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
은 무기만 납치해 갔으니, 그 의도는 사손의 행방을 말하게 하려
는 것임이 분명했다. 장취산은 유연주를 안아 말등에 앉히고 자
기도 말등에 올라탄 후 천천히 말을 몰았다.
안륙에 도착한 후 조그만 적객에 투숙한 장취산은 또 원병을 남
나 시비가 벌어질 것이 염려되어 밖으로 나가지 않고 식사도 방
안에서 했다. 유연주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내공을 운기하여 전
신 혈도로 유전(流轉)시키며 상세를 치료했다. 자정이 되었을 무
렵 유연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제, 나는 일생을 통해 은사님을 제외하고는 그 같은 고수를
만나기는 이번이 처음이야."
은소소의 마음 속에는 오직 무기 생각뿐이었다.
"그 사람이 무기를 납치한 목적은 의형의 행방을 묻기 위한 것
이 분명한데, 무기가 말을 하지 않을까 모르겠군요."
장취산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무기가 만약 순순히 말한다면 우리들의 자식이라 할 수 있겠
소?"
"그래요. 절대 말하지 않을 거예요."
말을 마친 은소소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갑자기 왜 그러오?"
"무기가 순순히 말하지 않으면 그 악적이 무기에게 독형(毒刑)
을 가할지도 몰라요."
"구슬도 깎아야 보배가 되듯이 그 아이도 어려움을 겪어야지만
진정한 장부로 성장할 수 있소."
장취산은 입으론 비록 이렇게 말했지만 사랑하는 자식이 고문을
당하고 있음을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무기가 편안히 잠들어 있다면 그것은 사손의 행방을 말했음을 증
명하는 것인, 이런 배은망덕한 행위는 무기가 독형을 당하는 것
보다 더욱 장취산의 마음을 아프게 만드는 것이었다.
'나는 그 아이가 당장 죽음을 당하는 한이 있어도 배은망덕한
소인이 되는 것은 원치 않아.'
장취산이 이렇게 생각하며 은소소를 돌아보니 그녀는 만면에 애
원의 빛을 가득 띄고 있었다.
그는 마음 속으로 은근히 걱정하며 유연주에게 물었다.
"둘째 사형, 상세는 좀 어떻습니까?"
유연주는 그들 부부의 얼굴 표정에서 장취산의 의도를 간파했
다.
"그래.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한시라도 빨리 무당에 도
착하자."
세 사람은 어둠을 이용하여 황량하고 인적이 없는 길만 택해 걸
었다. 그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그 사람이 뒤 쫓아와 그들을
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보는 앞에서 참혹하고 잔인한 수
법으로 무기에게 고문을 가하는 것이었다.
----- 제 2 권 3 장 끝 -----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2 권
제 4 장 무당칠협(武當七俠)의 재회(再會)
그들은 낮에는 쉬고 밤에만 길을 떠났다. 은소소는 밤낮없이 아
들 걱정만 하고, 거기다 밤이슬과 밤바람을 쐰 탓인지 병이 났
다. 장취산은 마차를 한 대 빌려 유연주와 은소소를 마차에 태우
고 자기는 말을 타고 갔다. 이날 그들은 양양을 지나 태평점(太
平店)의 객점에 투숙했다.
장취산이 유연주의 잠자리를 보살펴주고 막 자기 방으로 돌아가
려 할 때였다. 갑자기 웬 사내 하나가 주렴(竹廉)을 들치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이 장한은 청포단삼을 입고 손에는 채찍을 들
어 차림새로 보아 마차를 모는 마부 같았다. 그는 방 안에 들어
와 유연주와 장취산을 향해 차가운 코웃음을 치고는 곧 밖으로
나갔다. 장취산은 그 장한이 밖으로 나가는 순간, 내공을 주입시
켜 왼손으로 주렴을 나꿔채어 던졌다. 난데없이 기습을 당한 그
장한은 머리를 쳐박으며 앞으로 고꾸라지더니 간신히 일어나 고
함을 질렀다.
"무당파 도배야, 죽음이 눈앞에 이르렀는데도 행패를 부리느
냐?"
이렇게 말한 그는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고 밖으로 도망치듯 나
갔다.
유연주는 이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불안해진 장취산은 유연주에게 제의했다.
"둘째 사형, 지금 떠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아니야, 오늘 밤은 여기서 쉬고 내일 새벽에 떠나기로 하자."
장취산은 유연주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를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
다.
"그렇군요. 여기서 무당산까지는 이틀 거리밖에 되지 않으니,
우리 사형제가 아무리 무능하다 해도 사문의 위명을 실추시킬 순
없지요. 무당산 기슭에서조차 낮엔 숨고 야밤을 이용해 도망치듯
길을 간대서야 말이 아니지요."
"어차피 행적은 이미 노출되었으니, 어디 두고 보자꾸나."
두 사람은 장취산의 방으로 옮겨 나란히 앉아 함께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이날 밤, 창문 밖과 지붕 위에서 칠팔 명에 가까운 장
한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방 안을 기웃거렸지만 감히 안으로 난입
하진 못했다.
다음날 아침, 그들은 식사를 끝내자마자 떠날 준비를 했다. 마
차에 올라앉은 유연주는 마부에게 마차에 둘러쳐진 포장을 모두
걷으라고 분부했다.태평점 마을을 나와 오리 가량 왔을 때, 동쪽
에서 세 필의 기마가 나타나더니 마차와 십여 장의 거리를 두고
따라왔다. 또 얼마를 가자 길옆에서 말을 탄 네 명의 장한이 기
다리고 있었다. 유연주 일행이 그곳을 지나가자 그들은 처음 세
사람과 합류하여 마차의 뒤를 따랐다. 얼마를 더 달려 다시 오후
가 되자 그들의 인원은 스물 한 명으로 늘어났다. 개중에 몇 명
은 채찍을 휘두르며 가까이 접근하기도 했지만, 삼 장 이내로 들
어오지는 않았다. 유연주는 마차에 앉아 눈을 감고 운기 조식을
할 뿐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저녁 무렵, 맞은편에서 두 필의 기마가 달려왔다. 그 중 한 명
의 말에는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이 타고 있었는데 병장기는 지
니지 않은 것 같았다. 또 한 필의 말에는 요염하게 옷을 차려 입
은 젊은 부인이 왼손에 한 쌍의 쌍도(雙刀)를 들고 있었다. 두
필의 기마는 대로 중앙에 멈추어 길을 막아섰다.
장취산은 치솟는 분노를 억제하며 말등에 앉은 채 포권의 예를
올렸다.
"무당산의 유이, 장오가 인사드립니다. 귀하의 존성대명(尊姓大
名)은 어떻게 되시는지요?"
그 노인은 장취산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기분 나쁘게 웃었
다.
"금모사왕 사손은 어디 있소? 당신이 그의 은신처를 말한다면
우리는절대 당신들을 괴롭히지 않겠소."
"이 일은 불초 혼자 결정할 수 없으며 은사님의 뜻을 먼저 여쭈
어 봐야 합니다."
"유이는 부상을 당해 장오는 외톨이가 되었소. 당신 혼자서는
이렇게 많은 우리들의 적수가 되지 못하오."
하며 노인은 허리춤에서 한 쌍의 판관필을 꺼내었다. 그 판관필
끝은 뱀머리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었다.
은구철획(銀鉤鐵劃)이라는 장취산의 별명이 말해 주듯이, 그는
오른손으로 판관필을 사용하므로 무림에서 판관필을 사영하는 점
혈명가(點穴名家)중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한 쌍의
뱀머리 판관필을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언젠가 사
부는 고려(高麗)에 판관필을 전문적으로 사용하는 문파가 있다는
말을 했다. 판관필 끝을 뱀머리 모양으로 조각하여 초식과 점혈
수법이 중원 인사와 크게 다를 뿐 아니라, 독사의 음유하면서 독
랄한 성격을 본받아 미끄럽고 매섭기 짝이 없다는 말을 들은 적
이 있었다. 그 문파의 이름은 청룡파(靑龍波)이며 우두머리의 성
이 천(泉)가라는 것만 알 뿐 이름이 무엇인지는 사부도 모른다고
했었다. 장취산은 재차 포권의 예를 올렸다.
"선배님은 고려 청룡파 사람이십니까? 천노야(泉老爺)와는 어떤
관계이신지요?"
노인은 내심 흠칫 놀랐다.
'이 젊은이는 나이가 서른도 채 안 된 것 같은데 나의 내력을
알고 있다니 견문이 매우 넓구나.'
이 노인이 바로 고려 청룡파의 장문인 천건남(泉建男)이었다.
그는 영남(嶺南) 삼강방(三江幇) 방주 비사(鼻詞)의 특별 초청을
받아 중원에 온 것이다. 하지만 그는 중원에 도착한 후 한 번도
솜씨를 펼쳐보인 적이 없는데, 의외로 장취산이 첫대면에 출신
내력을 알아보자 사두쌍필(蛇頭雙筆)을 가슴 앞으로 들어올렸다.
"노부가 바로 천건남이오."
"고려의 청룡방은 중원 무림과 왕래가 없는 줄 알고 있는데, 우
리 무당파가 천노영웅에게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분명히 말씀
해 주십시오."
천건남이 또 기분 나쁜 웃음을 지었다.
"노부는 귀하와 아무 원한이 없소. 우리 고려 사람도 중원에 무
당파라는 문파가 있고, 무당칠협은 협의심이 강한 대장부들이라
는 것을 익히 알고 있소. 노부는 귀하에게 한 마디만 묻겠는데,
금모사왕 사손은 지금 어디 숨어 있소?"
그의 이 말은 비록 무례하진 않지만 강요하는 의미가 충분했다.
그가 판관필을 가슴 앞까지 들어올리자 마차 뒤를 따라왔던 장한
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마차를 포위했다. 그들의 이런 태도는 만
약 사손의 행방을 분명하게 밝히지 않는다면 무력을 사용하겠다
는 뜻이었다.
장취산이 짙은 눈썹을 높이 치켜올렸다.
"만약 불초가 말을 하지 않는다면 어떡하겠소?"
"장오협은 무예가 대단하니, 우리는 비록 인원수가 많지만 당신
을 어떻게 하지는 못하오. 그러나 유이협은 부상을 당했으며 영
부인도 병중이오. 우리는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들
두 분을 머물게 할 테니, 장오협은 혼자 돌아가시오."
장취산은 상대방이 위기에 처한 기회를 이용하겠다고 노골적으
로 말하자, 화가 왈칵 치밀었다.
"좋소. 그렇다면 불초는 고려의 무학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직접
가르침을 받아보겠소. 그러나 천노영웅께서 실수를 하여 불초에
게 패하시게 되면 어떻게 하시겠소?"
"만약 내가 패한다면 여기 있는 사람이 일제히 덤빌 것이오. 우
리는 원래부터 강호의 규칙 같은 것은 따지지 않소. 그러니 당신
도 가능한 다수의 힘을 이용하시요. 옛날 중국의 수양제, 당태
종, 당고종 등이 우리 고려를 침략할 때도 언제나 수십만 대군으
로 우리를 공격했지요. 예나 지금이나 싸움에는 인원수가 많은
쪽이 유리하지요."
장취산은 지금의 상황에서는 천건남을 생포하여 그의 부하들에
게 경거망동하지 못하게 위협하는 방법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고 판단했다. 그는 뛰어내리기 무섭게 왼손에는 난은호두구(欄銀
虎頭鉤) 오른손에는 빈철판관필(빈鐵判官筆)을 뽑아들었다.
"당신은 손님이니 당신이 먼저 공격하시오."
천건남도 말에서 뛰어내리더니 우필(右筆)로 허공을 찍고 좌필
(左筆)은 내밀지도 않은 채 번개처럼 장취산의 좌측으로 돌아갔
다.
'오늘 나는 의형의 안전을 위해 싸우기 때문에 설사 목숨을 잃
는다 해도 그만이지만, 둘째 사형은 의형과 알지도 못하는 관계
이다. 의형 때문에 둘째 사형에게 치욕을 당하게 해선 절대 안
되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장취산은, 천건남이 오른손의 사두필로
찍어오자 이성(二成)의 공격만 사용하여 호두구를 휘둘러 막아냈
다. 쌍방의 병장기가 부딪치는 순간 그는 상체를 약간 휘청거렸
다. 이 광경을 보고 용기백배한 천건남은 뒤이어 좌필로 연달아
삼초를 공격했다. 장취산은 우구좌필(右鉤左筆)로 반격을 가했지
만 그 역시 무력하기 짝이 없었다.
'오늘 내가 무당칠협중의 장오협만 요리하면, 중원무림에 일약
명성을 떨칠 수 있겠구나.'
천건남은 중원에서 명성을 떨치겠다는 욕심에 쌍필을 난무하며
장취산의 치명 요혈만 골라 공격했다.
장취산은 빈틈없이 엄중히 전신 요혈을 모호한 채 상대방의 초
식을 자세히 관찰했다. 천건남의 초식을 가볍고 날렵하면서도 상
당한 위력이 내포되어 있었다. 상대방의 공격 수법을 완전히 간
파한 장취산은 은구철획을 상하로 휘둘렀지만 그것은 속임수에
불과했다. 사실은 독맥의 여러 혈도와 족소양담경제혈만 보호할
뿐 다른 혈도는 상관하지 않았다. 천건남은 싸울수록 사기 충천
하여 기합까지 넣어가며 맹공을 퍼부었다.
장취산은 갑자기 왼손의 은고로 용자결(龍字訣) 중의 일구(一
鉤)를 시전하여 천건남의 오른쪽 다리 풍시혈(風市穴)을 긁었다.
순간 천건남이 비명을 지르며 오른쪽 무릎을 꿇자, 장취산은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우필로 전광석화처럼 그의 영대혈(靈大穴)
에서부터 아래로 찍어내리기 시작하여, 마지막에는 봉자결(鋒字
訣)의 일필(一筆)로 장강혈(長强穴)을 찍었다. 순식간에 독맥의
여러 혈도를 제압당한 천건남은 마치 굳어 버린 석상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장취산이 찍은 혈도는 천건남이 평생을 두고 연구
하여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고 있던 혈도인지
라, 그는 자신의 무공에 대해 회의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장취산은 은구 끝으로 천건남의 인후혈(咽喉穴)을 겨냥한 채 고
함을 질렀다.
"모두들 물러 서시요! 불초는 천노영웅을 무당산 기슭까지 데려
간 후 혈도를 풀고 석방해 주겠소!"
그는 이들이 천건남의 부하인 이상 천건남만 제압하며 감히 경
거망동하지 못하고 순순히 물러나리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의외
로 이때 염장소부(艶裝少婦)가 쌍도를 높이 치켜들며 외쳤다.
"모두 덤벼 마차를 압류해라!"
장취산은 깜짝 놀라며 외쳤다.
"누구든지 움직이기만 하면 이 사람부터 먼저 죽여 버리겠소."
"빨리 포위 공격하지 않고 무엇들 하느냐!"
염장소부의 호령에 장한들은 천건남의 생사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고 말을 탄 채 칼을 휘두르며 덮쳐왔다. 원래 이 염장소부는
삼강방의 타주이며 그들이 이번에 대거 출동한 목적은 유연주와
은소소를 생포하여 사손의 행방을 말하게 하는 것이었다. 천건남
은 삼강방이 초청한 손님에 불과한지라 삼강방에 도움이 되지 않
는 이상 상대방의 손에 죽든 말든 그들은 상관하지 않았다.
이때 육칠 명의 장한은 은소소를 포위하고 다른 육칠 명은 유연
주를 포위했다. 나머지 몇 명의 염장소부와 함께 장취산을 둘러
쌌다.
'내가 천건남을 죽인다 해도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는데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 뻔한 일이니 어떡하면 좋을까?'
장취산이 망설이고 있을 때, 유연주가 갑자기 낭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육제(六弟), 빨리 나와 이들을 수습하지 않고 뭘 하느냐!"
장취산이 어리둥절하여 유연주를 돌아보았다.
'둘째 사형께선 공성지계(空城之計)를 사용하시나?'
그가 미처 생각을 끝내기도 전에 허공에서 맑은 외침소리가 대
답했다.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다섯째 사형, 무사하셨군요. 소제는
다섯째 사형이 미치도록 보고 싶었습니다."
말소리와 함께 나뭇잎이 울창한 오 장 밖의 고목 위에서 하나의
그림자가 뛰어내리더니 장검을 흔들며 앞으로 걸어왔다. 장취산
이 고개를 돌려 보니, 그 사람은 육협 은이정이 틀림없었다.
"육제, 그 동안 잘 있었나?"
이때 삼강방의 장한 몇 명이 쏜살같이 달려가 은이정을 포위했
다. 그러나 그들은 미처 전세를 가다듬지도 못하고 비명을 지르
며 차례로 병장기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들은 이미 모두 은이
정의 장검에 손목의 신문혈(神門穴)을 적중당한 것이다. 신문혈
은 손바닥 바로 상단에 위치해 있어 적중 당하기만 하면 손바닥
은 힘을 쓰지 못하게 된다. 은이정은 천천히 걸어오며 상대방이
덮쳐와 제지하면 장검으로 상대방의 신문혈을 찔러 병장기를 떨
어뜨려 버렸다.
이 광경을 본 염장소부는 놀람과 두려움으로 얼굴빛이 하얗게
변했다.
"당신은 무당.....!"
그러나 그녀 역시 들고 있던 쌍도를 힘없이 바닥에 떨어뜨렸다.
장취산은 크게 기뻐하며 고함을 질렀다.
"사부님께선 드디어 신문십삼검(神門十三劍)을 연창(硏創)해 내
셨구나!"
원래 이 신문십삼검은 모두 십삼 초로 매 초식마다 성질이 각각
다르지만, 찌르는 위치는 모두 상대방 손목의 신문혈이다. 장취
산이 십 년 전 무당산을 떠날 때 장삼봉은 신문십삼검을 연창해
야겠다는 뜻을 품고 제자들과 몇 차례 상의했지만, 여러 가지 어
려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 뒤로 미루어 두었던 것이다. 그 절
예를 은이정이 펼쳐냈으니 삼강방 제자들이 막아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사실 은이정이 찔러낸 검초는 하나같이 정묘절륜(精妙
絶倫)하여 신문십삼검을 절반도 시전하지 않아 삼강방 제자들은
십여 명이나 손목을 찔리고 병장기를 놓쳐버렸다.
염장소부가 손목을 움켜쥔 채 고함을 질렀다.
"모두 철수하라!"
삼강방 제자들은 명령이 떨어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분분히 삼십
육계 줄행랑을 쳤다. 장취산은 천건남의 혈도를 풀고 사두쌍필을
주워 그의 허리춤에 꽂아주었다. 천건남은 수치심으로 얼굴을 일
그러뜨린 채 도주했지만 삼강방 제자들과 동행하진 않았다.
은이정이 장검을 검집에 꽂고 장취산의 손을 덥석 잡았다.
"다섯째 사형, 정말 보고 싶었습니다."
"여섯째, 그 동안 많이 컸구나."
그들이 헤어질 무렵 은이정은 열 여덟 살에 불과했는데, 십 년
사이에 그는 훤칠하고 영준한 청년으로 변모해 있었다. 장취산은
은이정의 손을 잡은 채 아내 은소소를 소개했다.
은소소는 병중인지라 거동이 불편하여 마차에 비스듬히 기댄 채
고개만 약간 끄덕여 보였다.
"여섯째 도련님, 만나게 되어 반가와요."
"다섯째 형수님도 성이 은가라니 잘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비
단 나의 형수님일 뿐 아니라 나의 누님도 되기 때문이지요."
장취산이 감탄의 눈빛으로 유연주를 돌아보았다.
"둘째 사형은 역시 대단하셔. 네가 고목 위에 숨어 있는 것을
나는 눈치도 채지 못했는데, 둘째 사형은 처음부터 알고 계셨으
니 말이야. 육제, 너는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을 어떻게 알았느
냐?"
은이정은 이곳으로 마중오게 된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며칠 전 사협 장송계가 사부의 생신 백 주년 잔치 때 사용할 음
식을 장만하려고 하산했다가, 행동이 수상쩍은 두 명의 강호 인
물을 만나 암암리에 미행하던 중 그들의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그래서 행방불명이 되었던 장취산이 돌아와 유연주를 만났다는
것과 삼강방과 오봉도(五鳳刀) 무리들이 그들을 제지하여 사손의
행방을 알아내려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장송계는 크게 기뻐하며
총총히 돌아갔다. 그리고 혼자 있던 은이정과 함께 유연주 일행
을 찾아나섰다. 그들은 유연주와 장취산의 무공을 염려해서가 아
니라 한시라도 빨리 장취산과 만나고 싶어 하산했을 뿐이었다.
당시 유연주가 부상을 당한 사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아 정송
계는 오봉도 문중에서 파견한 두 고수를 쫓으러 갔고, 은이정은
삼강방 제자들을 쫓기 위해 이곳으로 달려온 것이다.
전후 경위를 들은 유연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네째가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면, 우리 무당파는 큰 망
신을 당할 뻔했구나."
장취산도 부끄러움을 금치 못했다.
"소제 혼자의 힘으론 사실 둘째 사형을 보호할 수 없었습니다.
십 년간 사부님 곁을 떠나 있었으므로 무공이 여러 사형과 사제
들에 비해 훨씬 뒤떨어졌음을 이번에 절실히 느꼈습니다."
은이정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다섯째 사형께선 겸손을 부리는 버릇이 여전하시군요. 소제가
출수하지 않아도 삼강방 도배들 정도는 다섯째 사형 혼자서도 충
분히 요리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둘째 사형과 다섯째 형수님의
안위를 염려하여 출수를 망설였을 뿐입니다. 아까 고려국의 늙은
이를 제압하던 무공도 사부님께선 다섯째 사형에게만 전수하셨는
걸요. 이번에 돌아가면 사부님께선 너무 기쁜 나머지 다섯째 사
형에게 정묘한 무예를 수없이 전수해 주실 것입니다."
그들 사형제는 원래부터 우애가 두터운지라, 나란히 걸으면서
잠시도 입을 쉬지 않았다.
그날 밤 네 사람은 선인도(仙人渡) 객점에 투숙하였다. 은이정
과 장취산은 한침대에서 잤다. 장취산은 옛날부터 은이정을 남달
리 좋아했는지라 지금은 청년으로 성장했는데도 여전히 어린 아
이처럼 느껴졌다.
유연주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오제는 육제를 십 년 전과 마찬가지로 어린애 취급하면 안 된
다. 왜냐하면, 이번에 사부님의 생신술을 마신 후 뒤이어 육제의
혼례술을 마시게 되기 때문이다."
장취산은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소제가 이 시기에 돌아오길 정말 잘했군요. 신부는 어느 명문
의 규수입니까?"
은이정은 얼굴을 붉힌 채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했다.
유연주가 수줍어하는 은이정을 바라보며 말했다.
"신부감은 한양금편(漢陽金鞭) 기노영웅(紀老英雄)의 따님이
야."
장취산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혀를 내돌렀다.
"육제는 사위 노릇을 잘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금편이 네 머리
위에 떨어질 거야."
유연주가 빙긋이 웃으며 화제를 바꾸었다.
"기 낭자가 그날 강변의 복면 여자 중에 없었던 것은 정말 다행
이야."
"아니, 그렇다면 기 낭자는 아미파 제자란 말입니까?"
유연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문 밖에서 점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이협, 몇 분의 나으리께서 유이협을 뵙고자 합니다."
"누구라고 하더냐?"
"모두 여섯 분인데, 오봉도 문하제자들이라 했습니다."
유연주 등 사형제 세 사람은 모두 바짝 긴장했다.
'장송계가 오봉도 사람들을 쫓으러 갔는데, 어째서 그들이 여기
까지 우리를 찾아왔지? 혹시 장송계에게 무슨 불행이라도.....'
장취산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제가 그들을 만나보겠습니다."
그는 상세가 완쾌되지 않은 유연주의 안위가 걱정되어 싸우더라
도 밖에서 싸울 작정이었다. 그러나 유연주가 손을 저어 제지하
고 문 밖의 점원에게 분부했다.
"그들을 이리로 모셔오너라."
잠시 후 다섯 명의 장한과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젊은 부인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장취산과 은이정은 유연주의 좌우에서 만약
의 사태에 대비했다. 이들 여섯 사람은 하나같이 기가 죽어 있었
으며, 병장기도 지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시비를 걸려고 찾아온
것 같지는 않았다. 그들의 우두머리인 듯한 자가 공손히 포권의
예를 올렸다.
"세 분은 무당의 유이협, 장오협, 은육협이시지요? 불초 오봉도
의 문하제자 맹정홍(孟正鴻)이 세 분께 인사올립니다."
유연주 등 세 사람은 포권의 답례를 하면서도 마음 속으로 몹시
의아해 했다.
"맹대협, 그리고 여러분, 이쪽으로 앉으십시오."
맹정홍은 앉지 않고 선 채로 말했다.
"저희들 문파는 하동(河東)에 협소하게 자리잡고 있으면서 무당
산의 장진인과 칠협의 위명을 귀가 따갑도록 듣기만 했을 뿐, 직
접 배알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어렵게 무당산 기슭
까지 오게 되어 마땅히 장진인을 찾아 뵙고 문안 여쭙는 것이 도
리인 줄 알지만, 장진인께선 백 세 고령으로 조용한 것을 좋아하
신다기에 우리 같은 소인들이 그 어른의 청정(淸淨)을 방해하는
것은 예의가 아닌지라, 여기서 걸음을 멈출까 합니다. 그러니 세
분께선 돌아가시면 산서 오봉도 문하제자가 그 어른의 만수무강
을 기원하더라고 전해 주십시오."
유연주는 상세가 완쾌되지 않아 의자에 앉아 있었으나, 상대방
이 사부에 대해 언급하자 얼른 은이정의 어깨를 붙잡고 일어섰
다.
"그렇게까지 가사의 건강을 염려해 주시니 뭐라고 감사의 말씀
을 드려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맹정홍이 말을 계속했다.
"산간벽지에 사는 저희들은 우물 안 개구리인지라 견문도 좁은
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감히 귀파의 영역을 침범 했습니다. 오
늘 무당대협들의 넓으신 도량에 용서를 받았을 뿐 아니라 위험에
서 구출받는 은혜까지 입어 감사도 드리고 사과도 할 겸 이렇게
찾아왔으니, 세 분 대인께서는 소인의 잘못을 마음에 두시지 않
길 바랍니다."
하며 바닥에 꿇어 엎드려 큰절을 하려 했다.
"맹대협께선 이러시지 않아도 됩니다."
맹정홍이 무슨 말인가 하려 했지만 감히 입을 열지 못하자 유연
주가 물었다.
"맹대협께선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습니까?"
"유이협께서 저희들을 탓하지 않겠다고 한 마디만 해주시면, 저
희들도 안심하고 돌아가겠습니다."
"여러분께서 멀리 산서에서 여기까지 오신 것은 금모사왕 사손
의 행방을 수소문하기 위해서인 것 같은데, 귀파는 금모사왕과
무슨 원한이 있으신지요?"
"가형 맹정붕(孟正鵬)이 사손의 손에 살해되었습니다."
유연주는 매우 유감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저희들은 부득이한 사정이 있어 금모사왕의 행방을 말씀드리지
못하니, 이 점 맹대협께서 너그럽게 양해해 주십시오. 그리고 여
러분이 여기까지 오신 일에 대해선 불문에 부칠 테니, 조금도 걱
정하지 마십시오."
"그렇다면 불초 등은 안심하고 돌아가겠습니다. 혹시 차후에 무
당파에서 저희들에게 분부를 내리실 일이 있으면, 오봉도 문하제
자들은 무슨 일이든 기꺼이 뛰어들 테니 연락만 주십시오."
하고 나머지 다섯 사람과 함께 포권의 예를 올린 후 밖으로 나
갔다.
그들 중 젊은 부인이 나가다 말고 갑자기 되돌아와 바닥에 무릎
을 꿇었다.
"미흡한 여인이 청절(淸節)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무당대
협의 도움 덕분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하례와 같은 은혜를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유연주 등은 내막을 몰라 궁금해 했지만 그녀가 부녀자의 청절
에 대해 언급하는지라 질문하기가 곤란하여 얼버무렸다. 젊은 여
인은 절을 열 번 더 하고서야 밖으로 나갔다.
오봉도 문인들이 막 돌아갔을 때, 방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들
어오더니 번개같이 덮쳐와 장취산을 와락 끌어안았다.
"네째 사형!"
방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다름아닌 장송계였다. 장취산도 장송
계를 얼싸안았다.
"네째사형께서 오봉도 문하를 친구로 만든 지략은 정말 대단하
십니다."
"그것은 공교롭게 기연이 닿았기 때문일 뿐이지, 내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네."
장송계는 그간에 있었던 일을 유연주 등에게 들려 주었다.
그 미모의 젊은 부인은 성이 오(烏)가며 오봉도 장문인의 둘째
딸리자 맹정홍의 아내였다. 이번에 여섯 사람은 사손의 행방을
탐문하기 위해 산서에서 멀리 호북(湖北)까지 오는 도중, 삼강방
의 타주(舵主)를 만나 그에게서 무당파 장취산이 사손의 행방을
알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자 오씨 부인이 흉계를 꾸며 장취
산을 생포하여 사손의 행방을 알아내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는
무당 제자들의 무공은 하나같이 고강하니까, 우선 깎듯이 예의를
지키며 도움을 요청했다가 상대방이 거절하면 다른 대책을 강구
하자고 했다. 그러자 오씨 부인이 버럭 화를 내며 고함을 질렀
다.
"기회란 항상 있는 것이 아니예요. 만약 장취산이 무당으로 돌
아가 그들 사형제가 합류해 버리면 장삼봉까지 곁에 있는데 어떻
게 그를 생포하여 사손의 행방을 알아낼 수 있겠어요?"
두 사람은 의견이 맞지 않아 다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무엇이
든 양보하던 남편 맹정홍이 끝까지 고집을 부리자 오씨 부인의
노화가 드디어 폭발했다.
"이 겁장이야, 당신 형님의 복수를 하려는 것이지 내 오빠의 한
을 풀어드리자는 건가요? 흥! 그래도 사나이 대장부라 할 수 있
으세요? 차라리 그것을 떼어 버리세요. 당신 같은 담력이라면 장
취산이 사손의 행방을 알려줘도 아마 그를 찾아갈 용기가 없을
거예요. 당신 같은 겁장이에게 시집온 내 팔자도 뻔해요!"
맹정홍은 아내에게 양보하는 것이 버릇이 되었는지라 이번에도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남편이 고분고분해지자 오씨 부
인은 객점에 투숙한 장취산 부부에게 마취제를 사용하자고 했다.
다른 방법이면 몰라도 이런 비열한 방법은 절대 사용할 수 없다
고 맹정홍이 완강히 반대했다. 이에 또 격노한 오씨 부인은 심야
에 남편이 잠든 틈을 이용하여 몰래 빠져 나갔다.
그녀는 혼자서 자기의 계획대로 진행하여 사손의 행방을 알아내
어 남편의 콧대를 꺾어 놓을 심산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삼강방의 타주가 처음부터 끝까지 암중에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
다. 그는 오씨 부인의 미모에 흑심이 발생하여 그녀의 뒤를 몰래
따라갔다. 그리하여 장취산 부부에게 마취약을 사용하려 했던 그
녀는 오히려 자기가 마취약에 당하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바로 그 때, 줄곧 오보도 문인들의 동정을 감시하고 있던 장송
계는 재빨리 모습을 나타내어 그녀를 위험에서 구하고 삼강방 타
주를 혼내어 쫓아버렸다. 그런 다음 장송계는 자기의 이름을 밝
히지 않고 다만 무당파 무당제자라고만 말했다. 오씨 부인은 놀
람과 부끄러움을 안은 채 객점으로 돌아와 남편에게 그간의 경위
를 이야기했다. 이로 말미암아 무당파는 그들의 은인이 되었으
며, 그들은 유연주 등을 찾아와 고마움을 표시하기에 이르렀다.
장송계가 그들이 돌아간 후 나타난 것은 오씨 부인에게 수치심을
안겨주기 싫어서였다.
이야기를 다 들은 장취산은 존경어린 눈빛으로 장송계를 바라보
았다.
이날 밤 사형제 네 사람은 날이 새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 꽃을
피웠다. 장송계는 비록 기지가 출중하고 견문이 넓지만, 원병으
로 변장하여 무기를 납치하고 유연주에게 중상을 입힌 고수의 내
력에 대해서는 아무런 단서도 알아내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 장송계와 은소소가 상견례를 하고 다섯 사람은 곧
길을 떠났다. 하룻밤을 더 객점 신세를 진 다음에야 무당산에 도
착할 수 있었다. 십 년 만에 무당산으로 돌아온 장취산은, 비록
자식과 생이별하고 아내마저 병이 들었지만 사부를 비롯하여 큰
사형, 세째 사형, 막내 사제 등과 만난다는 생각을 하니 다소 위
안이 되었다.
산문 입구에 도착해 보니, 한쪽 앞의 나뭇 가지에 여덟 필의 말
이 묶여 있었다. 안장이 화려한 것으로 보아 무당의 마필이 아님
이 분명했다. 장취산은 은소소를 부축하여 쪽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관중(觀中)의 도인들과 일꾼들은 장취산이 무사히 돌
아오자 서로 부둥켜 안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장취산은 한시
바삐 사부를 만나뵙고 싶었지만 아직도 폐관 중이라는 도동의 말
에 어쩔 수없이 사부가 폐관하는 문 밖에서 절만하고 세째 사형
유대암을 만나러 갔다.
방문 앞에 이르자, 유대암을 시중 드는 도동이 나직이 말했다.
"세째 사백께선 방금 잠이 드셨는데 깨울까요?"
장취산은 손을 가로젓고 소리없이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
다. 잠이 든 유대암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했으며, 양볼이 움
푹 들어가 십 년 전 용맹스럽고 건장하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
다. 이런 세째 사형을 보고 있자니 장취산은 너무나 안스러워 눈
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는 유대암의 뼈만 앙상한 몰골을 더 이상
볼 수 없어 눈물을 닦고 밖으로 나와 어린 도동에게 물었다.
"너의 큰 사백과 막내 사숙은 어디 계시느냐?"
"대청(大廳)에서 손님을 만나고 계십니다."
장취산은 후당(後堂)으로 나가 큰 사형과 막내 사제를 기다렸
다. 그러나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손님은 도무지 돌아갈 기미
가 보이지 않았다. 장취산은 참다못해 차를 나르는 도인에게 물
었다.
"어떤 손님이냐?"
"표물을 호송하는 사람들인 것 같았습니다."
장취산과 떨어지기 싫어 다시 찾아왔다가 손님의 내력을 묻는
소리를 들은 은이정이 대신 대답했다.
"세 명의 총표두인데, 금릉(金陵) 호거표국(虎踞標局)의 총표두
기천표(祁天彪), 태원(太原) 진양표국(晋陽標局)의 총표두 운학
(雲鶴), 그리고 경사(京師) 연운표국(然雲標局)의 총표두 궁구가
(宮九佳)입니다."
장취산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무슨 중대한 일이 있기에 세 사람이 함께 찾아왔지?"
장취산은 어질고 착한 큰사형의 모습이 그간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하여 당장 보고 싶었다.
"육제, 병풍 뒤로 가서 큰사형과 칠사제의 모습을 보는 것은 실
례가 되지 않겠지?"
하고 병풍 뒤로 다가가 대청 안을 몰래 살펴보았다.
대청 안에서 송원교와 막성곡이 나란히 앉아 손님과 얘기를 나
누고 있었다. 송원교는 도장(道裝)을 했는데, 어질고 평화로운
얼굴 모습은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었다. 다만 귓
가에 흰 머리가 희끗희끗 보이고 중년의 나이 탓으로 살이 좀 찐
것 같았다. 송원교는 출가(出家)하진 않았으나 사부가 도사이고
또 도관에서 생활하는 까닭에, 무당산에 있을 때는 도가 차림을
즐겨하고 하산할 때만 속세의 차림으로 바꾸었다. 막성곡은 이미
기골이 장대해졌으며, 겨우 스무 살 남짓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얼굴이 온통 수염으로 뒤덮여 장취산보다 나이가 많은 것 같았
다.
이때 막성곡이 목청을 돋구었다.
"우리 큰사형이 하나라면 하나고 둘이라면 둘이오. 송원교 이름
석 자만으로도 세 분은 믿지 못하겠단 말입니까?"
장취산은 대청 안을 기웃거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칠제의 호방하면서 난폭한 성격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구나. 그
런데 무슨 일로 저렇게 다투고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며 막성곡의 맞은편에 앉은 세 사람을 살펴보았
다. 나이는 모두 오십 남짓 되어 보였으나 한 명은 기도(氣度)가
위맹하고 한 명은 깡마른 몸집에 키가 커 보였고 뒤에 앉아 있는
사람은 마치 병자 같았다. 그들 뒤로 제자인 듯한 다섯 명이 부
동자세로 서 있었다. 체격이 깡마른 사람이 입을 열었다.
"송대협이 이렇게 말한 이상 우리가 어찌 믿지 않겠소. 그건 그
렇고 장오협이 언제쯤 돌아오는지 정확한 날짜를 알려 주면 고맙
겠소."
장취산은 내심 흠칫 놀랐다.
'이들은 나를 만나러 왔구나. 이들도 의형의 행방을.....'
미처 생각을 끝내기도 전에 막성곡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울 사형제 일곱 사람은 비록무공이 보잘것없지만 정의를 위한
일이라면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소. 그 결과 우리는 이미 무
당칠협이란 명호를 얻었고, 또 위로는 은사님의 엄격한 훈시가
계셨는지라 어떤 일이든 한치의 착오도 범하지 않소. 장취산은
우리 무당 칠형제 중의 한 사람이며 우리 칠형제 중에서도 성격
이 제일 온순하고 인내심이 많은 분이오. 그런 분이 용문표국의
모든 사람들을 살해했다고 억지를 부리는 것은, 시비를 걸기 위
한 구실에 불과하오."
장취산은 가슴이 철렁했다.
기도가 위맹한 장한이 마을 받았다.
"무당칠협의명성을 무림에서 우러러보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소. 막칠협이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오래 전부터 귀가 따갑도
록 들어왔소."
막성곡은 그의 조롱섞인 말투에 얼굴빛이 확 변했다.
"기 총표두의 저의가 무엇인지 이 자리에서 분명히 밝히시오."
바로 이 기도가 위맹한 장한이 바로 호기표국의 총표두 기천표
였다.
"무당칠협의 말만 하나면 하나고 소림파 고승들은 거짓말만 한
단 말이오? 소림 화상들은 임안 용문표국의 상하대소 모두가 장
오협의 손에 살해되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고 말했소."
그는 장오협의 협자를 일부러 길게 뽑아 경멸하고 있음을 표시
했다. 은이정은 그가 장취산을 모독하자 치솟는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고 주먹을 불끈 쥐며 대청 안으로 뛰쳐 들어가려 했다. 이에
장취산이 급히 그의 팔을 붙잡아 제지했다.
막성곡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고함을 질렀다.
"나의 다섯째 사형께서 아직 돌아오시지 않았지만, 설사 이미
돌아오셨다 해도 할 말은 이것뿐이오. 나는 장취산과 생사를 같
이 할 것이며 그분의 일은 곧 내 일이오. 세 분은 흑백을 분명히
구분하지도 않고 나의 다섯째 사형에게 용문표국 사람을 살해한
죄를 뒤집어씌우는데, 그렇다면 좋소! 그 모든 일은 나 막성곡이
한 것으로 할 테니, 세 분이 용문표국의 복수를 할 의향이 있으
면 내게 하시오. 나의 다섯째 사형이 여기 없는 이상 나 막성곡
이 곧 장취산이고 장취산이 곧 막성곡이오. 한 가지 분명한 사실
은, 무공이나 지략면에 있어서 나 막성곡이 다섯째 사형을 따라
가려면 십 년은 더 배워야 하오. 그러므로 당신들이 나를 찾아온
것은 당신들의 운이 좋은 셈이오."
기천표도 대노하여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나 기천표가 오늘 무당산에 가서 소란을 피울 것이라 하니, 무
림 동도들은 모두 내가 하룻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뛴다
고 비웃었소. 하지만 도대금 도형제의 일가가 몰살당한 지 십 년
이 되도록 원한을 갚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나는 도저
히 울분을 참을 수 없었소. 무당파는 이미 용문표국 칠십여 명의
목숨을 살해했으니, 기천표 한 사람을 더 죽인다고 해서 죄의식
을 느낄 리 만무하며, 금릉 호거표국의 구십여 인명을 더 죽인다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이오. 나 기천표가 오늘 무당산에
서 피를 뿌리고 죽음을 당한다면, 더없이 좋은 명당자리를 선택
했다고 생각하오. 우리는 무당산으로 올라올 때 장진인의 높은
덕망을 존중하여 병장기를 휴대하지 않았으므로 막칠협의 권각
(拳脚)에 나 피천표는 죽음을 당하고 싶소."
하고는 대청 중앙으로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줄곧 침묵만 지키고 있던 송원교는, 두 사람이 무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자 손을 뻗어 막성곡을 제지하며 빙긋이 웃었다.
"세 분은 이곳에 찾아와서부터 지금까지 계속 불초의 다섯째 사
제가 임안 용문표국의 칠십여 인명을 살해했다고 고집을 부리는
데, 그가 돌아오면 모든 사실이 백일하에 밝혀질 테니 잠시만 더
참고 기다렸다 그를 만나 시비를 가리는 게 어떻겠소?"
그러자 마치 병자처럼 생긴 연운표국 총표두 궁구가가 말을 받
았다.
"기 총표두, 흥분하지 말고 앉으시오. 장오협이 돌아오지 않은
이상 이 일은 쉽게 해결될 것 같지 않으니, 차라리 장진인을 배
견하여 그 어른의 의견을 들어봅시다. 장진인은 당금 무림의 태
산북두이고 천하의 영웅호걸이라 존경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데,
설마 그런 어른이 흑백을 분별하지 못하고 제자만 두둔할 리는
없겠지요."
그의 몇 마디는 비록 겸손했지만, 그 속에 내포된 뜻은 무당파
전체를 모독하는 것이었다. 그의 의도를 알아듣지 못할 막성곡이
아닌지라 짙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차갑게 대꾸했다.
가사께서는 지금 폐관정수 중이오. 그리고 최근들어 우리 무당
문중의 일은 모두 큰사형께서 처리하고 있소. 때문에 무림의 진
정한 고인이 아니면 가사께선 접견하지 않소."
이 말은 그들의 신분으로는 장진인을 접견할 자격이 없다는 뜻
이었다. 체격이 깡마르고 키가 큰 진양표국 총표두 운학이 차갑
게 코웃음을 쳤다.
"흥! 우리가 도착하자 장진인이 폐관에 들어갔다니 세상에는 정
말 공교로운 일도 많군요. 그러나 분명히 밝혀 두겠는데, 용문표
국 칠십여 인명을 폐관한다고 해서 모면할 수 있는 일이 아니
오."
막성곡은 치솟는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고 고함을 질렀다.
"당신의 말은 가사께선 일이 두려워 폐관하셨다는 뜻이오?"
운학은 냉랭히 웃기만 할 뿐 아무 대꾸를 하지 않았다.
송원교도 비록 수양은 깊은 사람이었지만, 상대방이 은사를 모
독하자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무당칠협 면전에서 장삼봉에게
불경한 언사를 쓴 것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그는
다소 격앙된 어조로 천천히 말했다.
"세 분은 손님이니 우리는 더 이상 다투고 싶지 않소. 그러니
이만 돌아가 주시오."
하고소맷자락을 가볍게 휘젓자 한 줄기 질풍이 몰아쳤다. 그러
자 기천표, 운학, 궁구가 등 세 사람의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찻
잔이 갑자기 바람에 휘말려 날아오르더니 송원교의 탁자 위에 떨
어졌다. 그러나 찻잔이 바람에 말려 올라 탁자 위에 떨어질 때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한 방울의 차도 쏟아지지
않았다.
기천표 등 세 사람은 송원교가 소맷자락을 휘두를 때 발출된 강
맹무비한 바람에 의해 숨이 막혀 질식할 것 같아 황급히 내공을
운기하여 대항하려 했다. 그러나 소맷바람이 소리없이 왔다가 소
리없이 사라져 내공을 돋구느라 헛고생만 한 결과가 되고 말았
다. 만약 이때 송원교가 왼쪽 소맷자락으로 두 번째 바람을 일으
켜 그들이 운기한 내공을 역행시켰다면, 그들은 중상을 면치 못
했을 것이다. 이렇게 되자 세 명의 총표두는 비로소 면전의 겸손
하고 온화한 송원교가, 실제로는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후한
절예를 지녔음을 깨달았다. 병풍 뒤의 장취산도 은소소가 용문표
국의 칠십여 인명을 살해한 일을 생각하고 무척이나 난감해 하던
중, 송원교가 소맷자락으로 시전한 심후한 공력을 보고 경악과
탄복을 금치 못했다.
이때 기천표가 포권의 예를 올리며 작별을 고했다. 송원교와 막
성곡은 그들을 적수첨(適水詹:처마밑)까지 전소해 주었다. 기천
표는 송원교가 절세 무공을 지녔으면서도 교만한 언동을 조금도
취하지 않자, 마음 깊이 감동되어 처음 찾아왔을 때 지녔던 나쁜
감정이 크게 누그러졌다.
그 때 문 밖에서 몸집이 작달막하지만 단단하고 만면에 영기(英
氣)가 충만한 중년 장한이 총총걸음으로 들어왔다. 송원교가 그
사람에게 기천표 등을 가리켰다.
"네째 사제, 이리 와서 세 분 대협에 인사드려라."
기천표 등과 인사를 나눈 장송계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세 분께선 마침 잘 오셨습니다. 불초는 여러분에게 드릴 물건
이 있습니다."
하고 세 사람에게 각각 조그만 보따리를 하나씩 건네주었다. 기
천표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이게 뭡니까?"
"여기서 풀어 보면 난처하니 하산하신 후에 풀어보십시오."
사형제 세 사람은 그들을 관문 밖까지 전송해 주었다. 그들이
돌아가기 무섭게 막성곡이 장송계에게 물었다.
"네째 사형, 다섯째 사형께선 도착하셨습니까?"
장송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들어가 오제를 만나보아라. 나는 큰사형과 함께 대청에서
방금 그 사람들이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겠다."
"다섯째 사형이 안에 계십니까? 그들 세 사람이 무슨 일로 되돌
아옵니까?"
막성곡은 이렇게 물었지만 빨리 장취산과 만나고 싶어 장송계의
대답도 듣지 않고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막성곡이 내당으로 막
들어갔을 때 예측한 대로 기천표 등 세 사람이 총총히 되돌아와
송원교와 장송계 앞에 엎드려 큰절을 했다. 두 사람이 급히 답례
하자 운학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무당파의 하해와 같은 은덕을 불초는 지금에야 알았습니다. 좀
전의 불초의 소행을 용서해 주십시오."
하며 양손바닥으로 자기의 양볼을 퉁퉁 붓도록 때렸다. 송원교
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얼른 손을 내밀어 제지했다.
장송계가 존경의 눈빛으로 운학을 바라보았다.
"운 총표두야말로 의지가 대단하신 진짜 장부입니다. 적을 쫓아
내고 우리의 강산을 되찾고 싶어하는 소원은 한민족이라면 누구
나 지니고 있지요. 불초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니 운
총표두께선 조금도 고마와하실 것 없습니다."
"불초의 일가족 목숨은 무당파 대협들께서 새로이 내려 주신 거
나 다름없는데, 불초는 멍청하게 그 사실을 오 년 동안이나 모르
고 있었습니다. 아까의 불손한 언동에 대해 두 분께서 불초를 호
되게 매질함으로 다소나마 죄를 씻을까 합니다."
"이미 지나간 일은 더 이상 거론하지 않기로 합시다. 운 총표두
가 하신 말씀을 설사 가사께서 친히 들으셨다 해도 운 총표두의
행적을 아신다면 결코 마음에 두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운학은 자신의 불찰을 꾸짖으며 계속 용서를 빌었다. 송
원교는 내막을 자세히 몰라 몇 마디 겸손의 말로 상황을 얼버무
렸다. 그들이 돌아간 후 장송계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 세 사람은 비록 우리들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지만, 용
문표국 사견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거론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은혜는 은혜고 원한은 원한이라는 생각을 품고 있음이 분명합니
다."
송원교가 그들이 다시 찾아와 고마와하는 연유를 물으려할 때
장취산이 내당에서 달려나와 바닥에 꿇어 엎드렸다.
"큰사형, 그간 별고 없으셨습니까?"
송원교는 만면에 기쁨의 빛을 가득 떠올리며 그의 팔을 붙잡아
일으켰다.
"오제, 무사히 돌아와 주었구나!"
장취산이 사형제들과 헤어진 후 있었던 일을 간단히 설명하자,
성격이 급한 막성곡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다섯째 사형, 아까 그 세 사람은 다섯째 사형이 임안 용문표국
의 칠십여 인명을 살해했다고 떼를 썼습니다. 왜 나오셔서 그들
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 버릇을 고쳐 주지 않았습니까?"
장취산은 참담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거기에 얽힌 우여곡절은 한 마디로 말할 수 없구나. 당시의 상
황을 상세히 보고한 후 사형과 사제에게 좋은 대책을 부탁할 생
각이다."
은이정이 옆에서 낭랑한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다섯째 사형께선 조금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용문표국이 호송
을 제대로 못했기 때문에 세째 사형께서 불구의 몸이 되었으므
로, 설사 다섯째 사형이 정말 용문표국의 칠십여 인명을 살해했
다 해도 그것은 형제지간의 우애가 너무 깊어 일시적인 의분을
참지 못해........"
유연주가 눈을 부릅뜨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육제, 그 무슨 당치 않는 소리냐? 그 말을 은사님께서 들아셨
으면 너는 한 달 동안 독방 신세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일가의
남녀노소를 몰살하는 잔인한 짓을 무림의 정의를 위한다는 우리
가 할 수 있단 말이야?"
장취산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용문표국의 사람을 나는 한 명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나는 은
사님의 교훈을 잠시도 잊지 않았으며 사형제의 성덕에 누를 끼치
는 것도 원치 않는데, 어떻게 그런 엄청난 일을 저지를 수 있겠
습니까?"
송원교 등은 이제야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들은 물론
장취산이 그런 잔인하고 악랄한 일을 저지를 사람이라고 믿지 않
았다. 하지만 소림파 화상들이 이구동성으로 그의 소행이라 말했
을 뿐 아니라 직접 목격했다고 했고, 세 명의 총표두가 따지러
왔을 때도 그는 시종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는지라 얼마간의 의혹
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사형제들은 용문
표국의 문제를 더 이상 거론하지 않았다. 막성곡은 한 가지 의문
이 풀리자 이번에는 기천표 등 세 사람이 되돌아온 이유를 물었
다.
"네째 사형, 그들은 무슨 일로 되돌아왔습니까?"
장송계는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아까 그 세 사람 중 무례한 언동을 거침없이 해댄 운학의 인품
이 제일 좋지. 그는 진섬일대(晋陝一帶)에서 명망이 매우 높으며
암암리에 산서(山西), 섬서(陝西) 지역의 호걸들과 혈맹을 맺어
몽고 달자병에게 반항하는 거사를 일으키려 했었지."
"그 사람이 보기와 달리 그런 개개를 지녔다니 정말 존경 받아
마땅한 인물이군요. 네째 사형, 소제는 잠깐 다녀올 데가 있으니
그 때까지 이야기를 보류해 주십시오."
막성곡은 말을 끝내기 무섭게 질풍처럼 밖으로 달려나갔다.
장송계는 막성곡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장취산에게 빙
화도의 풍물에 대해 물었다. 장취산이 빙화도의 여러 가지 기이
한 현상과 사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때 막성곡이 돌아왔다.
"운 총표두를 뒤쫓아가 아까 나의 무례함을 사과하고 그의 장부
다운 기질을 존경한다고 말해 주고 왔습니다."
은이정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칠제, 너는 무엇이든 마음 속에 간직해 두지 못하는 성격이 탈
이야. 네째 사형께선 너를 기다리느라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다섯째 사형이 더 재미있는 빙화도의 여러가지 괴사를 들려 주셨
다."
"그게 사실입니까? 그렇다면 빙화도의 괴사를 제게도 들려 주셔
야지요."
막성곡은 장취산에게서 빙화도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서야 장송
계에게 재촉했다.
"운학은 모든 준비를 끝내고 약속한 날짜에 태원(太原), 대동
(大同), 분양(分陽) 등 세 지역에서 동시에 거사를 일으키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혈맹에 가입한 사람 중 배반자가 나타나,
거사 사흘 전에 가맹한 사람들의 명단과 운학이 만든 거사 계획
서를 훔쳐 몽고병에게 밀고해 버렸지."
막성곡이 여기까지 듣고 이를 부드득 갈았다.
"공교롭게도 바로 그 무렵 나는 태원에 있었지."
"네째 형님이 무슨 일로 그곳에.....?"
"어떤 일로 태원부 부윤(府尹)에게 화풀이할 일이 있어 그날 밤
몰래 태원부에 잠입했다가, 부윤과 그 배반자가 조정에 보고하는
방법과 원병을 파견하여 거사를 일으킨 사람들을 일망타진하는
방법 등을 상의하는 장면을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지. 당시 나는
잠시도 시간을 지체할 수 없음을 알고 안으로 뛰어들어가 부윤과
그 배반자를 샬해하고 명단과 거사 계획서를 탈취하여 남방(南
方)으로 돌아갔지. 한편, 운학 등은 거사가 탄로나자 자기들이
멸문의 화를 당하는 것은 어쩔 도리 없지만, 다른 지역의 인의지
사(仁義之士)들까지 피해를 입을 것을 가슴 아파하며 체포되기만
기다렸지. 하지만 가슴을 죄며 며칠을 기다렸으나 아무도 체포하
러 오지 않았고 결국 그 사건은 흐지부지 되었지. 그 후 운학 등
은 배반자가 태원부에서 부윤과 함께 살해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누군가가 그들을 도왔음을 알았지만, 그 사람이 나라는 것을 꿈
에도 생각지 못했지."
"아까 네째 형님이 그에게 건네준 물건이 바로 가맹한 사람의
명단과 거사 계획서였습니까?"
"그렇다네."
"네째 형님, 그럼 궁구가에게는 무엇을 도와주셨습니까?"
"궁구가는 무공은 고강하지만 인품면에선 운 총표두와 비교조차
할 수 없지. 육 년 전 그는 표물을 운남(雲南)까지 호송했다가
곤명(昆明)에서 어떤 보석상의 부탁을 받고 많은 양의 보석을 암
암리에 대도시로 운반하게 되었지. 그러나 파양호 호반에서 파양
사의 삼의에게 보석을 모두 탈취당하고 말았다. 궁지에 몰린 궁
구가는 객점에 누워 머리를 싸매고 방법을 강구했으나 뾰족한 수
가 생각나지 않자, 결국 자진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심
하기에 이르렀어."
사형제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
가 한참이 지나도록 입을 열지 않자 막성곡이 또 큰 소리로 물었
다.
"파양사의는 녹림대도(綠林大盜)가 아닌데, 무슨 까닭으로 그
보석을 탈취했습니까?"
"파양사의 중의 첫째가 사고를 저질러 남창부(南昌府)의 사형수
감옥에 수감되어 곧 처형당할 입장이었지. 삼의가 그간 두 차례
나 그를 탈옥시키려고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파양삼
의는 궁리끝에 관리들이 재물에 약하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보석
을 탈취하여 관리에게 뇌물로 주어 첫째의 죄를 탕감시킬 생각을
하게 되었지. 나는 파양사의의 깊은 우애에 감동되어 내가 첫째
를 구출해 낼 테니 보석을 궁구가에게 되돌려 주라고 했던 거
지."
언제나 궁금증이 많은 막성곡이 또 물었다.
"네째 사형이 기천표에게 건네 준 물건은 무엇입니까?"
"그건 아홉 개의 단혼오공표(斷魂蜈蚣標)야."
다섯 사람은 단혼오공표라는 말에 다소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
다. 왜냐하면, 그것은 강호상에 제법 명성을 떨친 양주대호(凉州
大豪) 오일망의 암기(暗器)이기 때문이다.
"그 일은 내가 너무 겁없이 덤볐었지. 당시 기천표는 표물을 호
송하며 동관(憧關)을 지나던 중, 본의 아니게 오일망의 제자에게
잘못을 저질러 두 사람이 싸우게 되었는데 기천표가 그 사람에게
장력으로 중상을 입혔지. 기천표는 상대방에게 중상을 입힌 다음
에야 큰일을 저질렀음을 깨달았으나 이미 늦고 말았어. 그가 호
송을 끝내고 막 낙양(洛陽)에 도착하자 오일망이 뒤쫓아와 두 사
람은 다음날 낙양 서문 밖에서 무예를 겨루기로 약속하게 되었
지."
"오일망의 무공은 무척 고강한데, 기천표가 어떻게 그를 당해
낼 수 있습니까?"
"물론 기천표 자신도 자기의 실력으로는 오일망의 일표(一標)도
막아낼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지. 그래서 그는 궁리끝에 암기의
명수인 낙양의 교씨 형제(喬氏兄弟)에게 도움을 청했네. 그런데
이튿날 아침 기천표가 적을 무찌를 방법을 상의하기 위해 교씨
형제를 찾아갔더니, 그들 형제는 갑자기 급히 해결해야 할 일이
발생하여 강남(江南)에 갔다지 뭔가. 기천표는 배은망덕하게도
교씨 형제가 입으로만 승낙하고 도주해 버리자 처지가 난감하게
되었지. 오일망의 수법이 악랄하다는 사실은 잘 알지만 약속을
어길 형편도 못 되어 기천표는 생각다 못해 객점에서 후사를 부
탁한다는 유서를 한 통 적어 표사에게 맡기고 혼자서 약속 장소
로 향했네."
장송계는 목이 마른지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말을 이었다.
"마침 그날 나는 거지로 변장하여 서문 밖의 고목 아래에 누워
쉬고 있었는데, 마침 오일망과 기천표가 싸움을 시작하더군. 두
사람은 몇 번을 주고 받는가 싶더니 오일망이 갑자기 단혼오공표
를 던졌지. 기천표가 피하지 못하고 당황하기에 나는 보고 있을
수만 없어 잽싸게 몸을 날려 단혼오공표를 손으로 받았지. 그러
자 놀란 오일망이 단숨에 단혼오공표를 여덟 개나 던지더군. 비
록 모두 받아내긴 했지만 그의 성명암기(成明暗器)는 역시 위력
이 대단하여 하마터면 일곱 번째 독표에 적중당할 뻔했지. 오일
망은그제야 강적을 만났음을 깨닫고 수치와 분노를 억제하지 못
한 채 양주로 돌아가 지금까지도 두문불출하고 있지."
막성곡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네째 사형, 물론 오일망도 선량한 도배가 아니지만 기천표 역
시 정도(正道)의 인물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런 기천표를 도우
려고 모험을 한 것은 아무 가치 없는 짓입니다."
"칠제, 그런 소리 하지 마라. 너도 그런 상황에 처했으면 가만
히 구경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묵묵히 듣고 있던 장취산은 먼 앞을 내다보는 그의 긴 안목에
내심 고마움과 탄복을 금치 못했다. 장송계가 그렇듯 위험을 무
릅쓰고 기천표를 도운 목적은, 용문표국의 일문을 몰살한 원한을
해소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는 호거표국이 강남 일대의 모든 표국
을 지배하고 하북, 산동 지역의 표국 우두머리는 연운표국이며
서북 각성은 진양표국이 관할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용문
표국의 일이 문제가 되면 이들 세 표국이 앞장서서 복수를 하려
는 것도 뻔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사전에 그들에게 은혜를 한
가지씩 베풀었던 것이다. 이 세 가지 일이 보기에는 우연한 것
같지만 사실은 장송계가 이런 기회를 기다리느라 얼마나 많은 심
혈과 시간을 소모했는지 모른다.
장취산은 너무 감격하여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째 사형, 우리는 동심일체나 다름 없는 사형제이므로 고맙다
는 말은 생략하겠습니다. 그 사건은 당시 소제의 안 사람이 성격
이 과격한 탓으로 저지른 일입니다."
이어 그는 은소소가 자기의 모습으로 변장하고 용문표국에 침입
하여 칠십여 인명을 살해한 경위를 설명했다.
"네째 사형,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으면 좋을지 수습책을 강
구해 주십시오."
장송계는 한참 동안 심사숙고하더니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이 일은 일단 은사님께 아뢰어 그 어른의 분부에 따를 도리밖
에 없다. 하지만 내가 생각컨대 사람은 한 번 죽으면 살아날 수
없다. 또 제수씨도 이미 개과천선하여 지난 날의 제수씨가 아니
다.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는 일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느
냐? 큰사형, 그렇지 않습니까?"
송원교가 수십명의 인명과 관계되는 이 일을 쉽게 결정짓지 못
하고 머뭇거리자, 유연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신 대답했다.
"네째 사형의 말이 옳네."
은이정은 여러 사형 중에서도 제일 엄격한 둘째 사형인 유연주
가 장송계의 말에 동의하자 뛸 듯이 기뻐했다.
"그렇습니다. 소제도 네째 사형의 말씀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이 물으면 다섯째 사형께선 그들을 죽이지 않았
다고만 말씀하십시오."
송원교가 못마땅한 눈빛으로 은이정을 쏘아보았다.
"그런 식으로 잡아떼기만 한다면, 오제의 마음이 어찌 편할 수
있으며 또 협명(俠名)을 지니고 있다는 우리들의 마음이 어떻게
편하겠느냐?"
"그렇지 않고는 다른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내 생각으로는, 사부님의 백 주년 생신 연회를 치룬 후 오제의
자식부터 먼저 찾고 황학루 영웅연에서 금모사왕 사손의 일을 처
리한 다음, 우리 사형제 여섯 사람과 다섯째 제수씨가 함께 강남
으로 내려가 삼 년 안으로 한 사람당 의로운 일을 열 가지씩 행
하는 것이다."
장송계가 손뼉을 치며 찬성했다.
"그건 정말 좋은 생각입니다. 용문표국의 칠십여 인명이 억울하
게 죽었지만, 우리가 각자 의로운 일을 열 가지씩 행한다면 죄값
을 치루게 되는 셈입니다."
유연주도 동의했다.
"큰사형의 적절한 의견에 은사님께서도 틀림없이 승낙하실 것입
니다. 그렇지 않고 칠십여 인명을 죽인 죄로 다섯째 제수씨의 목
숨을 뺏어보았자, 귀중한 목숨만 하나 더 잃을 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장취산은 이 일로 줄곧 번민하고 있었는데, 큰사형 송원교가 이
렇게 제안하자 천근같이 무겁던 마음이 날아갈 듯 가벼워졌다.
"소제는 당장 가서 그녀에게 전하겠습니다."
하고 은소소의 방으로 달려가 송원교가 제시한 의견을 전해 주
었다.
은소소는 남편의 말을 듣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아픈 몸도
씻은 듯이 낫는 것 같았다. 무당육협의 명성이나 무공 실력으로
무기를 찾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는 일처럼 쉽기 때문이었다.
장취산은 아내의 방에서 나와 세째 사형 유대암을 만나려 갔다.
----- 제 2 권 4 장 끝 -----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2 권
제 5 장 무당산(武當山)의 검은 구름
며칠이 지나고, 사월 초파일의 아침이 밝았다.
장삼봉은 다음날이 자기의 백세대수(百歲大壽)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비록 유대암이 불구의 몸이 되었고, 장취산이 실종되어
옥의 티라 느꼈지만 이날을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동시에 그가
폐관하여 몰두해 오던 태극공(太極功)도 완성 단계에 이르러 있
었다. 앞으로 태극공을 바탕으로 하여 무당은 소림에 못지않는
빛을 무림에 길이 남기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여, 이날 아
침 폐관을 종식하고 모습을 드러냈다.
장삼봉의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다름이 아닌, 십 년 동
안 못내 그리워해 오던 장취산이었다. 장삼봉은 혹시 잘못 본 게
아닌가 해서 눈을 비비고 다시 확인했다. 순간, 장취산이 그의
품안으로 뛰어들어 오열을 했다.
"사부님!"
그는 너무나 격동한 나머지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리는 것까지
잊었다.
송원교 등의 입에서 일제히 환호성이 터졌다.
"스승님, 크게 기뻐해 주십시오. 오사제가 돌아왔습니다."
백 세 고령의 거인 장삼봉! 팔십 년 동안 무도를 닦아온 그는
삼라만상을 보는 마음이 거울처럼 공명(空明)했다. 그러나 뜻하
지 않게 장취산을 대하게 되자 끓어오르는 기쁨을 감출 수 없어
노안(老眼)에 이슬이 맺혔다.
잠시 후.
장삼봉은 제자들의 시중을 받아가며 목욕을 마치고 새 옷으로
말쑥하게 갈아 입었다. 장취산은 이 뜻깊은 날을 맞아 스승님의
심기를 어지럽힐 수지가 있는 일은 감히 입밖에 내지 못했다. 그
저 빙화도의 신기한 경물을 위주로 들려주었다. 장삼봉은 그가
이미 아내를 맞아했다는 말에 더욱 기뻐했다.
"그럼 네 아내는 어디에 있느냐? 어서 불러오너라."
장취산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스승님, 허락도 없이 아내를 맞이한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장삼봉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껄껄 웃었다.
"너는 빙화도에서 십 년 동안이나 머물렀는데 무슨 수로 나한테
알렸겠느냐? 용서를 빌 필요가 없으니 어서 일어나거라. 장삼봉
의 제자가 그렇게 소견이 좁아서야 쓰겠느냐?"
장취산은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제자의 아내는 출신 내력이 바르지 못합니다. 그녀는
.....천응교 은교주의 딸입니다."
장삼봉은 다시 수염을 쓰다듬으며 껄껄 웃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이야? 색시의 인품이 그릇되지 않다면
그걸로써 충분하지 않느냐? 설령 인품이 좋지 않다 해도 이곳에
서 생활하다 보면 자연히 우리한테 감화될 것이 아니겠느냐? 천
응교면 어떻느냐? 취산아, 사람은 무엇보다 도량이 좁아선 아니
되느니라. 그리고 명문 정파로 자처하며 다른 문파의 사람을 과
소 평가하는 것도 금물이다. 정(正)과 사(邪)는 본디 애매한 것
으로서 정파의 제자라 할지라도 그 마음가짐이 옳지 못하면 사도
(邪徒)라 할수 있고, 사파의 인물 중에서 선을 추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또한 정인군자가 아니겠느냐?"
장취산은 뛸 듯이 기뻐했다. 십 년 동안 혼자서 감당해 온 마음
의 부담이 스승님의 이 몇 마디로 인해 안개처럼 걷혔다.
장삼봉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너의 장인 어른이 되시는 은 교주는 나하고 오래 전에 교분을
맺은 바가 있다. 나는 그의 뛰어난 무공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는 당당한 기남아(奇男兒)임에 분명하다. 비록 성품이 다소 편
파적이며 일을 행함에 있어 편법을 많이 쓰지만, 비겁한 소인배
는 절대 아니다. 우린 얼마든지 그를 친구로 맞아들일 수가 있
다."
그가 여기까지 말했을 때 종자 하나가 들어와 아뢰었다.
"천응교 은 교주께서 사람을 시켜 장오사숙께 예물을 보내왔습
니다."
"장인 어른이 혼수감을 보내온 모양이구나. 취산아, 어서 가서
손님을 영접하도록 해라."
장취산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네, 스승님."
객청에 두 노인이 숙연하게 서 있었다. 그들은 모두 하인의 차
림새를 하고 있었다. 장취산이 들어서는 것을 보자 일제히 앞으
로 몇 걸음 나서며 무릎을 꿇었다.
"문안 올리옵니다. 소인들은 은무복(殷無福)과 은무록(殷無綠)
이라 합니다."
장취산은 읍을 하여답례했다.
"어서들 일어나시오."
그는 내심 이상하게 생각되는 것이 있었다.
'이 두 사람의 이름은 이상하군. 집에서 부리는 하인배라면 이
름이 평안(平安)이라든가 길복(吉福), 경희(慶喜) 같은 상스러운
것이 대부분인데, 어째서 무복과 무록이라 이름을 지었을까?'
두 사람을 살펴보니 모두 얼굴에 긴 칼자국이 나 있었다. 특히
무록은 얼굴이 헐었고, 두 사람 모두 추하게 생겼다. 그들의 나
이는 오십 줄로 보였다.
장취산은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빙장, 빙모님도 편안하시죠? 그렇지 않아도 며칠 후에 아내와
함께 두 어르신네를 찾아뵐 생각이었는데, 먼저 이렇게 사람을
보내 주시니 그저 황공할 따름이외다. 두 분은 먼길을 오느라고
고생이 많았을 텐데 어서 자리에 편히 앉으시오."
은무복과 은무록은 감히 자리에 앉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공손
하게 예단을 올렸다.
"이것은 저희 집 나리께서 보내신 조그마한 예물이니 받아주십
시오."
장취산은 거절할 수 없었다.
"고맙소."
예단을 받아 살펴본 그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십여 장 이나 되
는 금색 바탕의 예단에 모두 이백 가지가 넘는 예품이 적혀 있는
게 아닌가!
첫 번째로 나열된 것은 한 쌍의 벽옥사자(碧玉獅子)이고, 두 번
째는 한 쌍의 비취봉황(翡翠鳳凰)이었다. 그리고 무수한 주보(珠
寶)에 특품 자색 늑대털로 만든 붓 백 자루, 당조(唐朝)때 공품
(貢品)으로 쓰였던 먹(墨) 이십 개, 최고급 쌍지 백 뭉치, 벼루
여덟 개도 적혀 있었다.
천응교주는 이 새로 맞은 사위가 서법(書法)에 능통하다는 말을
전해 듣고 최상품의 문방사우(文房四友)를 구입해 보내온 것이
다. 그 외에도 옷과 일상용품이 골고루 적혀 있었다.
은무복이 곧 밖으로 나가 잠시 후 건장한 인부 이십 명을 데리
고 들어왔다. 그들은 모두 틀가락으로 무거운 짐을 옮겨와 차례
로 객청에 차곡차곡 내려 놓았다.
장취산은 웬지 마음이 부담스러웠다.
'나는 어릴 적부터 산 속에서 청빈하게 생활해 왔는데 이런 진
귀한 물건들을 어디에다 쓴단 말인가? 하지만 빙장 어른의 후사
이니 사양할 수도 없고.....'
그는 다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예물을 받았다.
"아내는 긴 여로에 지쳐 지금 누워 있으니 두 분은 이곳에서 며
칠 간 머물며 그녀를 천천히 만나보도록 하시오."
은무복이 그의 말을 받았다.
"저희 어르신네께서는 아가씨의 안부를 하루속히 듣고 싶어하시
기 때문에 소인들은 곧 돌아가야 합니다. 허락만 해주신다면 아
가씨를 잠깐만 뵙고 떠나겠습니다."
장취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녕 그렇다면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는 방으로 돌아가 아내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은소소는
크게 기뻐하며 간단하게 치장을 하고 나서 무복과 무록을 만나
부모님과 가족들의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두 사람에게 간단한
주반(酒飯)을 대접했다.
은무록과 은무복은 식사를 마치자마자 작별을 고했다.
장취산은 내심 생각했다.
'빙장, 빙모께서 이렇게 후한 예물을 보내 주셨으니 이 두 사람
에게 거기에 알맞는 후사를 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이곳에 있
는 은자를 다 모아도 성의 표시와는 거리가 멀으니.....'
그는 성격이 활달하여 별로 개의치 않고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
다.
"빙장, 빙모님께서 가난한 사위를 얻어 두 분께도 변변한 사의
를 표하지 못하니 이 점 널리 양해해 주시오."
은무복이 진지하게 그의 말을 받았다.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무당오협을 이렇게 가까이 뵈온 것만
으로도 천금을 시사받은 것보다 더 기쁨으로 생각합니다."
장취산은 이들의 언동에서 예사 하인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그는 직접 중문(中門)까지 전송해 주었다.
은무복은 황송해 하며 몸을 깊숙이 숙였다.
"소인들을 여기서 작별을 고하겠습니다. 아가씨께서 하루속히
집으로 오셔서 어르신네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렸으면 합니다. 본
교의 모든 사람들이 장야(張爺)의 늠름한 모습을 뵙기를 학수고
대하고 있을 겁니다."
장취산은 빙긋이 웃어 주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말수가 적은 은무록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
다.
"한 가지 작은 일을 보고드리겠습니다. 소인들이 이곳까지 오는
도중 양양 각산에서 우연히 표객 세 사람을 만났는데 공교롭게도
그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며 장야에 관하여 거론하는 것을 들었습
니다."
"음, 그들이 뭐라고 합디까?"
"그 중 한 사람이, 무당칠협은 비록 우리에게 은혜를 베푼 바가
있지만 용문표국의 일은 절대 덮어둘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들
은 개봉부(開封府)로 가서 신창진팔방(神愴震八方) 담(譚) 노영
웅을 모셔내 장야께 죄를 문책하겠다고 했습니다."
장취산은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 아무런 의사 표시도 하지 않았
다.
은무록은 갑자기 품 속에서 작은 깃발 세 개를 꺼내 두 손으로
장취산에게 건네주었다.
"소인 형제들은 그 세 사람이 감히 하룻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려는 것을 알고, 그 화살을 천응교에게 돌리게끔 조
치를 해놓았습니다."
장취산은 세 개의 깃발을 확인하자 흠칫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첫 번째 깃발에는 포효하는 맹호가 새겨져 있었는데, 바로 호거
표국을 상징하는 표기였고, 두 번째 깃발에는 구름을 뚫고 비상
하는 백학의 모습이 생생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그것은 진양표국
의 깃발이며, 운중백학은 총표두인 운학을 상징한 것이다. 세 번
째 깃발에는 아홉 마리의 금빛 제비가 수놓아져 있으며, 연운표
국의 머리글자 연(燕)자와 총표두 궁구가의 이름에서 따온 아홉
구(九)자가 합쳐져 있는 깃발이었다.
장취산은 의아한 눈빛으로 그들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들의 깃발을 어떻게 갖고 왔소?"
"그들이 감히 장야께 무례한 행동을 하지 못하게끔 하기 위해,
저희 형제가 약간 손을 봐주고 표국의 깃발을 갖고 온 것입니
다."
장취산은 다시 한 번 놀랐다. 궁구가 등 세 사람은 비록 무림의
최고봉 고수는 아니지만, 제각기 절예를 지니고 있는 것만은 부
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빙장 어른이 거느리고 있는 하
인이 그들을 제압하고 표국의 상징인 표기까지 갖고 온 것은 쉽
게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혹시 이들이 미혼약, 독약 따위의 비겁한 수단을 전개한 것이
아닌가 해서 장취산은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이 깃발을 수중에 넣게 된 경위를 얘기해 주겠소?"
은무복은 여전히 담담하게 말했다.
"당시 우리 형제 셋은 그들에게 정식으로 도전하여 양양 남문
밖에서 무예를 겨루기로 했습니다. 사전에, 만약 그들이 패하며
스스로 한 쪽 팔을자르고 표기를 남긴 채 다시는 호북성 안에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고 약조를 받았습니다."
장취산은 들을수록 이들이 예사 하인배가 아님을 깨달았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소?"
"시간은 오래 걸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표기를 내놓
고 각자 자기의 왼쪽팔을 잘랐습니다. 그리고 평생 호북성 안으
로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고 약조를 했습니다."
장취산은 내심 섬뜩함을 느꼈다.
'이 천응교의 인물들은 과연 수단이 악랄하군.'
그는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은무록은 그것을 보자 얼른 입을 열었다.
"소인들의 처사가 너무 가벼웠다고 생각되신다면 당장 그들을
쫓아가 죽여 버리겠습니다."
장취산은 얼른 손을 내저었다.
"아니오! 그 정도면 상당히 무거운 벌을 내린 셈이오."
은무복이 그의 말을 받았다.
"소인들은 이번에 장야께 예물을 보내는 큰 경사를 맞아 인명을
죽이는 일만큼은 피하고 싶었습니다."
"잘 했소. 조금 전에 형제가 셋이라고 한 것 같은데, 또 한 분
은 어찌 오지 않았소?"
"막내인 은무수(殷無壽)는 행여나 신창 담노인이 소식을 전해
듣고 장야를 찾아와 귀찮게 굴까 봐 개봉부로 달려갔습니다. 소
인이 막내를 대신해 장야께 큰절을 올리겠습니다."
이렇게 말한 은무복은 무릎을 꿇고 넙죽 큰절을 올렸다.
장취산은 읍으로 답례했다.
"자, 어서 일어나시오."
그는 내심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신창진팔방 담서래(譚瑞來)는
이미 사십 년 전에 위명을 떨친 노영웅이었다. 은무수가 자기로
인하여 그를 찾아갔으니 쌍방 어느 쪽이 손상을 입어도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
"신창진팔방 담 노영웅은 협명을 떨쳐온 정인군자이니, 두 분은
속히 개봉부로 달려가 불상사가 생기지 않도록 일을 선처해 주었
으면 고맙겠소."
은무록이 담담하게 웃었다.
"그 일에 대해선 아무 염려 마십시오. 그 담 영감태기는 감히
저희 막내에게 무력을 행사할 엄두도 내지 못할 겁니다. 막내가
그더러 얌전히 있으라고 한 마디만 전하면 그는 절대 경거망동을
하지 못할 겁니다."
장취산은 반신반의했다.
"그게 사실이오?"
은무록은 그의 마음을 읽었는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 담 영감태기는 이십 년 전에 이미 막내에게 패한 적이 있습
니다. 그리고 우린 그의 큰 약점을 쥐고 있으니 아무 염려 마십
시오."
두 사람은 다시 작별의 인사를 하고 떠나갔다.
장취산은 깃발 세개를 손에 쥔 채 잠시 그 자리에 넋을 잃고 있
었다. 그는 두 사람에게 무기의 행방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할까
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끝내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공연히 이
사형의 위명이 손상될까 봐 신중을 기한 것이다.
그는 곧 천천히 자기의 침실로 돌아왔다. 은소소는 예단을 보고
나서 부모님의 두터운 정에 감격했다. 그리고 무기의 생사 안위
가 생각나자 마음이 한없이 초조했다.
그녀는 남편이 심각한 표정으로 돌아온 것을 보자 얼른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장취산은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 무복 형제들은 어떤 내력을 지니고 있소?"
은소소는 남편과 혼례를 올린 지 십 년이 되었지만 그가 천응교
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자기 집안에 대해 줄곧
언급을 하지 않았었다. 장취산도 그녀의 집안에 대해 물은 적이
없었다. 지금 남편의 물음을 받자 비로소 간단하게 설명을 해 주
었다.
"그 세 사람은 이십 년 전만 해도 서남(西南) 일대를 휩쓸고 다
니는 대도(大盜)였대요. 하루는 많은 무림 고수들에게 협공을 당
해 죽을 위기에 놓이게 됐는데, 저의 아버님이 우연히 그곳을 지
나다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의 남자다운 기백을 가상히
여겨 나서서 도와주었대요. 세 사람은 원래 성이 같지 않았어요.
물론 친형제도 아니었죠. 한데 저의 아버님의 구명지은에 보답하
기 위해 평생을 하인으로서 받들겠다면서 예전의 성과 이름을 버
리고 은무복, 은무록, 은무수로 개명한 거예요. 저는 어렸을 적
부터 그들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어요. 아버님의 말에 따르면 무
림에서 혁혁한 명성을 날리고 있는 인물들도 그들 세 사람과 비
교하면 무공이 뒤떨어진다고 하셨어요."
장취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었군."
이어 그들 세 사람이 표기를 빼앗아 온 경위를 얘기해 주었다.
은소소는 그의 말을 듣고 나서 이마를 찌푸렸다.
"그들은 당신에 대한 호의로 그런 일을 저질렀는데, 오히려 당
신에게 누를 끼치는 결과가 됐군요. 그들의 생각과 행동은 명문
정파와 완전히 달라요. 이.....이 일을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모
르겠군요."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다음 말을 이었다.
"무기만 찾으면 우리 다시 빙화도로 돌아가요."
이때 밖에서 은이정의 외침소리가 들렸다.
"오사형! 어서 나와서 스승님의 백 회 수연을 축하하는 글을 몇
줄 써주셔야겠어요!"
그는 낭랑하게 웃고 나서 다시 소리쳤다.
"형수님, 제가 오사형을 데려간다고 나무라지 마십시오. 오사형
이 철필은구(鐵筆銀鉤)이니 낸들 어떻게 합니까?"
이날 오후, 사형제 여섯 명은 화공도인(火工道人)과 도동들을
이끌고 자소궁을 말끔히 청소하고, 대청 곳곳에 장취산이 쓴 수
련(壽聯)을 붙었다. 모처럼 무당산 자소궁이 화기애애한 축하 분
위기에 싸였다. 송원교 등은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분주하
게 움직였다.
다음날 아침.
송원교 등은 말끔하게 차려입고 유대암을 부축해 함께 스승님께
배수(拜壽)를 하러 가려는데, 도동 하나가 뛰어들어와 명첩을 내
밀었다. 송원교가 명첩을 받았다. 그러나 장송계의 눈이 빨라 그
명첩에 적힌 글을 먼저 읽었다.
----- 곤륜 후학(後學) 하태충(河太沖)과 문하제자가 장진인의
만수무강을 공축합니다. -----
장송계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곤륜 장문인께서 스승님의 수연을 축하하기 위해 직접 오셨다.
그가 언제 중원으로 들어왔는지....."
막성곡이 얼른 물었다.
"하부인께선 오시지 않았습니까?"
하태충의 부인 반숙연은 원래 그의 동문 사저(師姐)로서 무공이
곤륜 장문인에 못지 않다고 했다.
장송계는 고개를 내둘렀다.
"명첩에는 하부인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네."
송원교가 심각하게 말했다.
"우리로선 굉장한 귀빈이니 스승님께 알려 친히 영접토록 해야
겠다."
그는 즉시 이 사실을 장삼봉에게 알렸다.
장삼봉은 다소 뜻밖이란 표정을 지었다.
"철금선생이 좀처럼 중원에 발을 들여놓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이 늙은이의 생일을 알고 찾아왔을까?"
그는 곧 제자 여섯을 이끌고 영접을 했다.
철금선생 하태충은 생각보다 늙지 않았다. 그는 황색 장삼을 입
고 있었으며 청수한 용모와 더불어 고상한 분위기가 풍겨, 과연
명문 정파의 일대종사(一代宗師)다운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
의 뒤에는 여덟 명의 남녀 제자가 따르고 있었는데 서화자와 위
사랑의 모습도 보였다. 하태충은 장삼봉에게 공손히 축하 인사를
올렸고, 장삼봉은 고맙다는 말과 함께 공수로서 답례했다. 송원
교 등이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리자 하태충도 무릎을 꿇은 채 답
례했다.
장삼봉은 하태충을 대청으로 안내해 차를 대접했다. 이때 도동
이 다시 명첩을 들고 들어와 송원교에게 전해 주었다.
이번에 온 사람들은 공동오로였다.
당금 무림에서 소림과 무당의 명성이 가장 두드러졌고 그 다음
이 곤륜 아미이며, 공동은 그보다 한 차원이 낮았다. 그러나 장
삼봉은 매우 겸허하여 친히 그들을 맞이하게로 했다.
"공동오로가 왔으니 하형은 잠시 앉아 계십시오. 그들을 이리
모셔오겠소."
하태충은 내심 투덜거렸다.
'공동오로 정도면 제자를 시켜 영접해도 될 텐데.....'
잠시 후 공동오로가 제자들을 이끌고 모습을 나타냈다. 이어 신
권문, 해사파, 거경방, 무산방 등등 많은 문파방회의 수뇌 인물
들이 수연을 축하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장삼봉은 이렇게 떠들썩한 분위기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칠십
회, 팔십 회, 구십 회 생일을 맞았을 때도 절대 외부에 알리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신신당부를 했었다. 그런데 백 회 생일을 맞
아 이렇게 많은 무림 귀빈들이 운집하게 될 줄이야 그 역시 뜻밖
이 아닐 수 없었다. 계속 몰려오는 축하객으로 인해 이젠 손님에
게 권할 의자조차 없었다.
송원교는 사람을 시켜 적당한 바위돌을 주위와 대청에 즐비하게
늘어놓게 했다. 각파의 장문인과 각 방의 방주는 의자를 차지할
수 있었지만, 문인, 제자들은 바위에 앉는 도리밖에 없었다. 찻
잔도 부족해 결국 밥그릇으로 대신하는 촌극까지 벌여야 했다.
한참 분주한 가운데 장송계가 갑자기 장취산을 조용한 곳으로
불렀다.
"오제, 뭔가 이상한 기미를 눈치채지 못했나?"
장취산은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글쎄요..... 저들은 마치 사전에 뭔가 약속을 하고 이곳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서로 회심의 미소를
주고 받기도 했습니다."
"맞았어. 그들은 진심으로 스승님께 축하를 드리기 위해 온 것
이 아닐세."
"그럼 그 명목을 빌려 용문표국의 일을.....!"
"용문표국에 관한 일이라면 철금선생 하태충까지 동원할 리가
없네."
"음... 그렇다면 금모사왕 사손 때문에 온 것이겠군요!"
장송계는 고개를 끄덕이며 냉소를 날렸다.
"그들은 우리 무당파를 너무 과소 평가하고 있는 거야. 그들이
제아무리 많은 인원수를 앞세워 밀어부친다 해도 무당제자가 어
찌 친구를 배신할 리가 있겠는가? 오제, 그 사손이 설령 잔악무
도한 대도라 할지라도 자네의 의형인 이상 절대 저들에게 그의
행적을 노출시켜선 아니 되네."
장취산의 표정은 무거웠다.
"사사형의 말에 따르겠습니다. 그럼 우린 어떻게 해야 되죠?"
장송계는 잠시 생각을 굴리고 나서 입을 열었다.
"지금으로선 상황에 따라 신중을 기하는 도리밖에 없네. 우리
형제 일곱이 힘을 합치면 제아무리 큰 풍파가 몰아닥친다 해도
두려울 것이 없네."
유대암은 비록 불구가 되었지만 이들은 여전히 무당칠협으로 자
처했다.
한편, 대청안에서 손님을접대하고 있는 송원교, 유연주, 은이
정 세 사람도 심상치 않은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이때 도동이 다시 들어와 보고했다.
"아미파의 제자 정현사태(靜玄師太)가 동문 다섯 분과 함께 사
조의 수연을 경축하기 위해 당도해 있습니다."
송원교와 유연주는 일제히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은이정을 쳐다
보았다. 곧이어 막성곡이 팔, 구 명의 손님을 안내해 들어왔고,
장취산, 장송계도 내당에서 걸어나와 아미파이 제자가 왔다는 소
식을 듣고, 역시 은이정을 향해 미소를 보냈다. 은이정은 얼굴이
붉어지면 매우 어색해 했다.
장취산이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
"자, 우리 함께 귀빈을 맞으러 가세."
두 사람은 곧 밖으로 나갔다.
정현사태는 나이가 사십 줄이며, 비록 여자지만 보통 나자보다
키가 한 뼘 정도 더 클 정도로 몸집이 우람했다. 그녀의 뒤에는
다섯 명의 사매와 사제가 따르고 있었다. 한 사람은 설흔 살 가
량의 깡마른 남자며, 둘은 여승으로서 그 중 하나는 장취산이 배
에서 본 적이 있는 정허사태였다. 나머지 둘은 모두 스무 살 정
도의 낭자인데, 한 사람은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띄우고 있고,
한 사람은 피부가 백설 같으며 용모와 몸집이 빼어난 데다가 시
종 고개를 숙인채 옷자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으니, 그녀가 바로
은이정과 혼약을 정한 기효부(紀曉夫) 낭자였다. 장취산이 앞으
로 나서 서로 인사를 나누고 여섯 명을 안으로 안내했다. 은이정
은 매우 쑥스러워하며 기효부에게 감히 눈길도 주지 못했다. 일
행이 복도 아래 이르자 그는 맨 뒤로 쳐져 비로소 슬며시 기효부
를 쳐다보았다. 마침 기효부도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그에게 눈
길을 주는 바람에 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쳤다.
장송계는 줄곧 상황 분석을 하고 있었다. 그는 아미파의 제자들
이 당도한 것을 알고 다소 마음이 놓였다.
'기 낭자는 육사제와 혼약을 한 사이이니, 나중에 상황이 악화
돼 싸움이 벌어지게 되면 아미파는 우리를 도와줄 수도 있을 것
이다.'
각처에서 손님이 계속 몰려드는 가운데 어느덧 정오가 되었다.
자소궁 쪽은 아무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아 군호들에게 주연을 베
풀 수가 없었다. 무당의 여섯 제자는 군호들에게 일일이 사과를
했다. 그런데 군호들은 식사를 하면서 계속 대청 밖을 힐끔힐끔
쳐다 보았다. 누가 오기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송원교는 이미 모든 사람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각 문파, 각 방
회의 수뇌 인물들은 자신의 신분을 고려해 무기를 지니지 않았지
만, 문하제자들은 대부분 허리가 불룩한 것이 무기를 숨기고 있
는 게 분명했다. 단지 아미, 곤륜, 공동 삼파의 제자만이 전부
빈손일 뿐이었다.
송원교 등은 내심 분노를 금치 못했다.
'스승님께 축수를 하러 온 자들이 무기를 몸에 숨기고 있다
니..... 진작 이럴 줄 알았다면 우리와 인연을 맺은 고수들을 초
청하는 건데.....'
사실, 송원교 등은 스승님의 수연을 조용히 마친 후 영웅첩을
띄워 무창(武昌) 황학루(黃鶴樓)에서 영웅대연(英雄大宴)을 개최
할 계획이었다. 그 자리를 빌어 장취산이 친구를 배신할 수 없는
고충을 털어놓으면, 의(義)를 중요시하는 무림인들이라 더 이상
장취산을 몰아부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설령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자가 있다 해도 그 자리엔 무당과 교분이 두터운 고수
들이 많이 참석할 것이므로 쉽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
다. 한데, 군호들은 그러한 기미를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스승님
의 백 회 수연을 명분삼아 느닷없이 몰려들었으니.....
장송계가 나직이 말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전력을 다해 한판 승부를 거는 수밖에 없
을 겁니다."
무당칠협 중에 장송계의 계략이 가장 뛰어났다. 매번 어려운 일
에 봉착되면 그가 절묘한 수를 생각해 내 위기를 모면하곤 했다.
유연주가 암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사제마저 속수무책이라면 오늘 무당산에 일대 혈전이 물가피
한 모양이군."
만약 일 대 일의 상황이라면 지금 이곳을 찾아온 군호중에 아무
도 무당육협의 적수가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이십 대 일, 심지어 삼,사십 대 일이 아닌가! 장송계는 유연주의
소매를 잡아 끌어 뒷청으로 들어갔다.
장송계는 주위를 한 번 살피고 나서 입을 열었다.
"이사형, 아무래도 오늘의 일전은 피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유연주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싸움이 벌어지면 무엇보다도 삼제를 보호하는 게 중요하
네. 그 일은 자네가 맡게. 그리고 오사매의 몸도 불편하니 오제
더러 그녀를 보살피라고 하게. 적을 상대하는 일은 우리 넷이 맡
겠네."
장송계는 그의 의견을 반대하지 않았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말끝을 흐리는 듯하더니 조심스럽게 이었다.
"한 가지 비상수단이 있는데 다소 위험 부담이 따를 겁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위험 부담을 안는 게 대수겠나? 무슨 묘책
인지 어서 말해 보게."
"우리가 각자 상대를 한 사람씩 골라 단 일초식에 제압하는 겁
니다. 물론 고수를 택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상대방의 기를 꺾
어 감히 경거망동하지 못하게끔 기선을 잡을 수가 있습니다."
"만약 일초에 제압하지 못하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일제히 덤
벼들 텐데..... 그것도 고수를 단 일초에....."
"그래서 호조절호수를 사용하자는 겁니다!"
유연주는 이 말을 듣자 전신에 한 차례경련이 일었다.
"뭣이? 호조절연수!? 오늘은 스승님의 수연을 축하하는 뜻깊은
날인데 어떻게 그런 악랄한 살수를....."
무당파에는 한 가지 무서운 금나수법이 있었다.
호조수(虎爪手)!
유연주는 스승님으로부터 이 호조수를 전수받은 후 그것을 바탕
으로 하여 스스로 열 두 가지 새로운 초식을 만들어 냈다. 장삼
봉은 제자들에게 무공을 전수하기 앞서 우선 자질, 품행, 성격,
오성(悟性) 등을 분석하여 거기에 알맞는 지도를 했다. 그리하여
그의 제자들은 모두 대기(大器)로 성장할 수 있었고, 비단 스승
님의 무학을 전수받았을 뿐 아니라 스스로의 창의력으로 새로운
초식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러니 유연주가 호조수로 새로운
초식을 변화시킨 것은 별로 특이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장삼봉은 그가 새로운 초식을 펼쳐 보인 후에 단지 고개
만 끄덕일 뿐 아무런 평도 하지 않았다. 유연주는 스승님의 태도
에서 필시 이 초식에 하자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심혈을 기
울였다. 몇 달 후에 그는 다시 스승님께 초식을 펼쳐 보였다.
장삼봉은 비로소 한숨을 내쉬며 입을 떼었다.
"연주야, 이 열 두 초식의 호조수는 내가 가르친 것보다 훨씬
더 위력적이다. 하지만 초식마다 상대의 요안혈(腰眼穴)을 노리
고 있어 누구를 막론하고 이 초식에 당하게 되며 음호(陰戶)가
손상되어 대가 끊이게 될 것이다. 내가 가르쳐 준 정대광명한 무
학이 부족하다고 느껴졌느냐? 구태여 남의 대를 끊이게 하는 이
런 초식을 만들어 낼 필요가 있겠느냐?"
유연주는 스승님의 훈계를 듣자 비록 엄동설한이었지만 등줄기
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는 곧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
서를 빌었다.
며칠 뒤에 장삼봉은 일곱 명의 제자를 모두 가까이 불러 이 일
에 관해 얘기해 주고 나서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연주가 만들어 낸 이 열 두 가지 초식을 명실공히 절학(絶學)
임에는 분명하다. 만약 내 한마디로 인해 영원히 폐기된다면 아
까운 일이니 모두들 연주에게 배우도록 해라. 단지 생사 위기가
아닌 이상 절대 경솔하게 사용하지 말아라. 그런 의미에서 "호
조" 두 글자 아래 절호(絶戶)라는 두 글자를 더 붙일 테니 이 무
공이 상대방의 대를 끊게 하는 멸문절호(滅門絶戶)의 살수라는
것을 명심해야 하느니라."
당시 일곱 제자는 스승님의 분부를 받들겠다고 대답했으며 유연
주로부터 그 호조절호수를 전수받았다. 물론 그들은 스승님의 분
부에 따라 여지껏 그 살수를 한 번도 전개한 적이 없었다. 한데
오늘 긴박한 상황을 맞아 장송계가 제의를 하니 유연주가 선뜻
승락을 하지 못하고 망설여지게 된 것이다.
장송계는 그의 표정을 살피며 차분하게 말했다.
"이 호조절호수를 전개하면 상대방으로 하여금 영원히 생육을
못하게 할 우려가 있으니 우린 화상이나 도인, 아니면 칠, 팔십
세 된 노인을 상대로 택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유연주도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과연 자네의 생각은 빈틈이 없군. 화상과 도인이라면 생육을
하지 못하게 되도 상관이 없겠지."
두 사람은 결정을 내리고 나서 곧 이 계획을 송원교 등에게 알
렸다.
그들은 제각기 상대를 한 명씩 정했다. 장송계가 짤막한 외침으
로 신호하면 동시에 호조절호수를 전개해 상대방을 제압하기로
약속했다. 유연주가 선택한 상대는 공동오로중에 나이가 제일 많
은 관능(關能)이고 장취산이 선택한 상대는 곤륜파의 서화자였
다.
손님들이 식사를 마치자 화공도인들은 뒷치닥거리를 하느라고
분주했다.
이때 장송계가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여러 선배님, 그리고 여러 친구들, 오늘 저희 스승님의 백 회
수연을 맞아 이렇게 불원천리 찾아와 축하해 주신데 대하여 뭐라
고 감사를 드려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준비가 소홀해 여러분들
을 융숭히 대접하지 못한 점을 사과드리겠습니다. 차후에 무창
황학루에서 여러분들을 다시 모시고 오늘의 불찰을 보충할까 합
니다.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저의 오사제인 장취산은 중원을 떠난
지 십 년 만에 돌아왔습니다. 그 십 년 동안 겪은 일을 아직 스
승님께도 소상히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더우기 오늘은 스승님
의 뜻 깊은 날이니 만큼 무림의 은원에 관해선 언급을 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이렇게 모처럼 무당을 찾아주신 여러분들이니
저희들이 모시고 사채를 구경시켜 드리겠습니다."
장송계는 우선 말로서 군호들의 행동을 묶어둘 생각이었다.
주위는 금시에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군호들은 아미파
를 제외하고 모두 금모사왕의 행방을 추궁할 목적으로 이곳에 모
인 것이다. 그들은 이미 일전도 불사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
러나 막상 장송계의 조리정연한 발언에 선수를 빼앗기자 서로 마
주 보며 누가 먼저 선뜻 나서는 자가 없었다. 침묵은 결코 오래
가지 않았다. 곤륜파의 서화자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다.
"장사협,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우린 이곳에 온 목적을 확실히
밝히지 않을 수가 없구료.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장진인의 수연
을 축하하기 위함이지만, 아울러 사손의 행방을 묻는 것도 우리
에겐 중요한 일이외다!"
막성곡은 여지껏 참고 있다가 그의 말에 대뜸 냉소를 날렸다.
"흥! 역시 그랬었군! 어쩐지....."
서화자는 이내 눈을 부라렸다.
"뭐가 어쨌다는 건가?"
막성곡은 즉시 쏘아부쳤다.
"여러분들이 수연을 축하하려 오면서 암암이레 무기를 숨기고
있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처음부터 서로
작당하여 혈풍(血風)을 일으키기 위해 온 것이로군!"
서화자는 그 자리에서 허리띠를 풀며 싸늘하게 외쳤다.
"막칠협 똑똑히 보게! 그 나이에 벌써부터 생사람을 잡으려 하
다니..... 우리가 무기를 숨기고 있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았단
말인가?"
막성곡은 냉소를 날렸다.
"흥! 그렇군요! 과연 무기를 숨기지 않았군요!"
이 말을 내뱉기 무섭게 그의 곁에 있는 두 사람을 향해 지풍을
날렸다. 그의 출수는 전광석화처럼 빨랐다.
챙!
금속성이 들리며 두 자루의 단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막성곡이
튕겨낸 지풍이 두 사람의 허리춤을 절단시켰으며 그 즉시 옷 속
에 숨겨둔 무기가 떨어진 것이다.
이렇게 되자 주위 사람들은 모두 안색이 급변했다. 자연히 분위
기가 긴장되고 서화자는 발악을 하듯 소리쳤다.
"그래! 만약 장오협이 사손의 행방을 솔직히 실토하지 않는다면
일장 혈전도 불가피할 것이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장송계는 공격 신호를 보내려 했다. 한데
난데없이 문 밖에서 불호(佛號)가 들려왔다.
"아미타불!"
이 소리는 멀리서 바람결에 실려오는 것 같기도 하고, 바로 가
까이서 들려온 것 같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 소리에 고막이 진동
되었다.
줄곧 침묵을 지키고 있던 장삼봉이 잔잔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
다.
"이제 보니 소림의 공문선사가 오셨군. 어서 영접해라!"
문 밖에서 그 웅후한 내력이 담긴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소림사 주지 공문이 사제 공지, 공성과 함께 문하제자들을 이
끌고 장진인의 천추장락(千秋長樂)을 공축하려 왔소이다."
소림의 사대신승(四大神僧) 중에 공견대사는 이미 죽였고, 나머
지 삼승이 전부 무당에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장송계의 놀라움은 컸다. 그는 공격 신호를 미처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소림의 절정고수가 무당에 나타난 이상 설령 자기네들의
호조절호수로 곤륜, 공동 등의 고수를 제압해도 대국(大局)에 도
움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곤륜파의 장문인 하태충이 모처럼 입을 열었다.
"소림신승의 청명(淸名)을 오래 전부터 들어왔는데, 오늘 이렇
게 만나뵙게 되어 실로 광영이로소이다."
문 밖에서 이내 회음(回音)이 들려왔다.
"곤륜 장문인 하선생이구료. 만나뵙게 되어 반갑소이다. 장진
인, 빈승들이 늦게 당도한 것을 너그러이 양해해 주십시오."
장삼봉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띄운 채 말했다.
"오늘 세 분 신승의 축하까지 받게 되니 백 년 동안 헛되게 살
아온 것이 새삼 부끄러워지는구료."
이들 몇 사람은 수십 장의 간격을 두고 서로 내력으로써 문답을
하여, 마치 얼굴을 마주 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미파의 정현
사태, 정허사태, 공동오로 등은 공력이 미치지 못해 감히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저 놀라
고 감탄할 뿐이었다.
장삼봉은 곧 제자들을 이끌고 마중나갔다. 소림사의 삼신승이
아홉 명의 승인을 이끌고 천천히 자소궁 앞으로 걸어오고 있었
다. 공문대사는 백미가 눈을 가려 마치 장미나한(長眉羅漢) 같았
다. 공성대사는 몸집이 우람하고 용모 또한 위맹스러웠다. 한편,
공지대사는 입술이 아래로 축 쳐져 고상(苦相)이었다.
송원교는 내심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는 풍수지리와 관상에도
일가견을 갖고 있었다.
'상례로 보아 공지대사 같은 고상은 단명이라 하는데, 장수를
누리고 있을 뿐아니라 무림의 존경을 받는 종사(宗師)이니 관상
학도 역시 한계가 있는 모양이군.'
장삼봉과 공문대사 등은 모두 무림의 대종사였다. 그러나 서로
직접 대면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이로 논한다면 장삼봉은
그들보다 삼, 사십 년 연상이었다. 그는 소림 출신으로서 만약
스승인 각원대사의 배분으로 배열한다면, 공문보다 두 배분이 높
았다. 하지만 장삼봉은 소림에서 수계(受戒)하여 승적에 오른 일
도 없으며, 정식으로 소림 승려에게 무학을 배운 적도 없기 때문
에 서로 평배로서 상견례를 올렸다. 자연히 송원교 등은 한 배분
아래가 되었다.
장삼봉은 공문 등을 대 Ц아로 안내했다. 공문 등은 하태충, 정
현사태, 공동오로 등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었다. 군호들의 수가
워낙 많아 인사를 나누는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공문 등은 자리에 앉아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공문이 넌지
시 입을 열었다.
"장진인, 빈승 등은 나이로 보나 배분으로 보나 모두 장진인의
후배로소이다. 오늘 이렇게 뜻깊은 날을 맞아 다른 얘기를 거론
하지 않는 게 예의인지 알면서도, 빈승은 소림의 장문인으로서
장진인께 허심탄회하게 몇 마디 가르침을 받고자 하니 넓은 아량
으로 양해해 주십시오."
장삼봉은 성품이 호상(豪爽)하여 단도직입적으로 반문했다.
"세 분 고승은 혹시 나의 다섯째 제자 장취산 때문에 온 것이
아닙니까?"
장취산은 스승님이 자신의 이름을 거론하자 황급히 자리에서 일
어났다.
공문대사도 더 이상 말을 돌리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장오협에게 두 가지 일을 묻고자 합니다. 첫째,
장오협이 우리 소림의 용문표국 일흔 한 명의 목숨과 문중제자
육인을 살해한 행위를 어떻게 책임질 것인지 묻고 싶소이다. 둘
째, 빈승의 사형이신 공격내사는 평생을 자비와 덕으로 일관해
오며 누구와도 다툼이 없으셨는데 금모사왕 사손에게 죽음을 당
했습니다. 소문에 의하면 장오협이 사손의 행방을 알고 있다 하
니 솔직히 밝혀주길 바라는 바입니다."
장삼봉이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장취산이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공문대사, 용문표국과 소림 승인의 죽음은 후배와 무관합니다.
나 장취산은 스승님의 엄한 가르침을 받아 비록 우둔하지만 여지
껏 거짓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일흔 일곱 명의 목숨
을 앗아간 자가 누구인지도 알고 있지만 밝힐수가 없습니다. 이
상은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이고, 두 번째로 공견대사께서 원
적(圓寂)하신 것에 대해 후배도 무림인의 한 사람으로서 비통을
금치 못했습니다. 다만 그 금모사왕 사손은 후배와 결의형제를
맺은 사이입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려 그가 있는 곳을 알고 있습
니다. 그러나 우리 무림인의 의(義)를 중요시하는 만큼 나 장취
산은 목이 잘라져 피를 뿌리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의형의 행방
을 절대 입 밖에 내지 않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은사님과 동문들은 이번일과 무관하니 모든 것을저에게만
문책해 주십시오. 여러분들이 정녕 나 장취산으로 하여금 불의
(不義)를 저지르게끔 궁지로 몰아넣겠다면 죽음을 불사하겠습니
다."
이렇게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으며 장취산의 얼굴은 정기(正氣)
로 충만돼 있었다.
공문은 나직이 불호를 읊었다.
"아미타불....."
그는 장취산의 언동에서 그의 말이 사실임을 알 수 있었기에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옳을지 몰랐다.
바로 이때였다. 장취산의 귓전에 어렴풋이 들려오는 소리가 있
었다.
"아버님!"
그 외침소리는 지극히 미약했지만 분명 대청 앞쪽 창 밖에서 들
려온 것 같았다. 장취산의 전신에 한 차례의 경련이 일었다. 그
는 놀라움과 반가움이 교차되어 즉시 큰 소리로 외쳤다.
"무기야, 네가 돌아왔느냐?"
그는 곧장 대청 밖으로 뛰쳐나갔다.
무산파와 신권문의 제자 중에 몇몇이 대청 입구에 서 있었는데,
장취산이 도망가려는 줄 알고 일제히 소리쳤다.
"달아날 생각 말아라!"
그들은 잽싸게 장취산에게 금나수법을 전개했다. 장취산은 아들
의 안위가 급해 그들 몇몇을 좌우로 밀어붙이며 대청 밖으로 뛰
쳐나갔다. 그러나 대청 밖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소리 높여 외쳤다.
"무기야! 무기야!"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대청 안에 있던 십여 명이 그의 뒤를 쫓아왔으나 그가 달아날
것 같지 않아 더 이상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한쪽에서 감
시만 했다.
장취산은 다시 목을 놓아 소리쳤다.
"무기야! 무기야!"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은소소는 이때 몸이 어느 정도 완쾌되어 후당에 있었는데, 남편
의 외침소리를 듣자 황급히 달려와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무기가 돌아왔나요?"
"분명히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려 달려와 보니 아무도 보이지 않
는구료."
은소소는 크게 실망하며 울적하게 말했다.
"그 애 생각에 집착하다 보니 잘못 들은 모양이예요."
장취산은 잠시 넋을 잃고 있다가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중얼거
렸다.
"분명히 들었는데....."
그는 행여나 아내로 인해 일이 더욱 복잡해질까 봐 넌지시 등을
밀었다.
"당신은 후당에 가 있도록 하시오."
그는 다시 대청 안으로 돌아와 공문에게 몸을 숙였다.
"후배는 아들 생각에 본의 아니게 추태를 보였으니 용서해 주십
시오."
공지대사가 그의 말을 받았다.
"천지만물의 이치는 같은 것! 장오협이 자식 생각으로 인해 가
슴 아파한다면 그 사손에게 살해된 많은 사람들의 부모 형제의
마음도 헤아려 줘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나?"
그의 몸집은 깡말랐지만 음성은 큰 종소리 같아 듣는 이의 고막
을 진동시켰다.
공문대사가 직접 장삼봉에게 물었다.
"장진인, 오늘의 일을 어떻게 매듭지어야 좋을지 가르침을 주시
겠습니까?"
장삼봉의 표정은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나의 제자는 비록 두드러진 게 없지만 감히 스승을 기만하거나
세 분 고승 앞에서 거짓말을 입 밖에 내진 못할 것이오. 용문표
국의 인명과 귀파 제자의 죽음은 그의 소행이 아닌 것 같소. 그
리고 사손의 행방에 대해선 결코 언급을 하지 않을 모양이외다."
공지대사가 냉소를 날렸다.
"장오협이 본문 제자를 살해하는 것을 직접 목격한 자가 있는
데, 그럼 무당파의 제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고 소림파의 승인은
거짓말을 한다는 뜻이 아닙니까?"
그의 손짓에 따라 즉시 세 명의 중년 승인이 앞으로 걸어 나왔
다. 그들은 모두 오른쪽 눈을 잃었으니 바로 십 년 전 서호변에
서 은소소에게 은침 세례를 받았던 원광, 원음, 원업이었다. 장
취산은 이들이 공문대사를 따라온 것을 벌써 보았으며, 이러한
상황이 벌어지리라는 것도 예측하고 있었다.
장취산은 괴로왔다. 당시 서호변에서 살수를 전개한 것은 자기
가 아니지만 그 흉수는 이미 자기의 아내가 되어 있지 않은가!
아내의 행위를 감싸주자니 영락없이 자기가 누명을 뒤집어쓸 것
이고, 사실을 털어놓자니 아내에게 화가 미칠 게 명약관화한 사
실이다.
원자 배분 삼 승려 중에 원업의 성질이 예전부터 가장 거칠었는
데 지금도 변함이 없었다. 그는 즉시 장취산에게 삿대질을 하며
우악스럽게 소리를 질렀다.
"장취산, 네가 임안 서호변에서 독침으로 본문 제자를 죽이는
것을 이 눈으로 똑똑히 보았는데, 이제 와서 부인 할 작정이냐?
우리 세 사람의 눈은 바로 네가 전개한 독침에 이 모양이 됐는데
도 잡아뗄 생각이란 말이냐?"
장취산은 최선을 다해 변명하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 무당파에서 사용하는 암기는 비록 종류가 적지 않지만 모
두가 강표 혹은 수리전(袖裡箭) 같은 모양이 큰 것이오. 그리고
우리 사형제들이 여지껏 강호에서 활동하며 금침을 알기로 사용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소? 더군다나 독을 묻힌 금침은 아예 상상
조차 할 수 없소!"
무당칠협의 광명정대함을 모르는 강호인은 없었다. 그러므로 장
취산이 독침으로 누구를 기습했다는 것은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일
이었다.
원업은 울화가 치밀어 안색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래도 억지 변명을 하겠다는 거냐? 그날 분명히 네가 독침을
전개하는 것을 보았는데, 만약 네가 아니라면 그게 누구란 말이
냐?"
장취산은 원업보다 입심이 좋았다.
"귀하의 제자가 독침을 맞은 일을 갖고 무당 제자더러 가해자를
밝히라고 억지를 쓰니, 세상에 이런 법도도 있단 말이오?"
원업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제하지 못해 갈수록 말이 뒤죽박죽
되었다. 본디 소림파가 정정당당하게 따져야 할 일을 갖고 나중
에는 억지를 부리는 꼴이 되고 만 것이다.
이때 장송계가 끼어들었다.
"원업대사, 도대체 몇 명의 소림제자가 누구에게 암습을 당했는
지 우리로선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본인의 사형인 유대암이 소림
파 금강지력에 중상을 입은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외다. 그렇지
않아도 그 금강지력으로 본인의 삼사형을 암습한 자가 누구인지
묻고 싶었는데 마침 잘 오셨소이다."
원업은 어이가 없는지 입이 딱 벌어졌다.
"나는 아니오!"
장송계는 코웃음을 쳤다.
"원업대사가 아니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소이다. 그 정도의 실
력을 아직 쌓지 못했을 테니까!"
그는 말끝은 멈칫하더니 다시 이었다.
"만약 본인의 삼사형이 온전한 몸으로 귀파의 고수와 겨루어 금
강지력에 당했다면, 실력이 부족한 탓이니 설령 목숨을 잃었다
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오. 하지만 삼사형은 이미 중상을 입어
몸을 전혀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는데도 불구하고, 귀파의 제자
는 금강지력으로서 사지를 절단시켜가며 도룡도의 행방을 추궁했
소이다....."
여기까지 말한 그는 음성을 높였다.
"소림파의 무학이 천하 으뜸이니 일찍이 무림지존으로 군림했을
텐데, 왜 구태여 그 도룡도까지 욕심을 부리는지 이해가 가지 않
소이다. 게다가 본인의 삼사형은 그 도룡도를 단 한 번만 보았을
뿐인데, 귀파의 제자가 그런 잔인한 수단을 전개했으니 너무 지
나쳤다고 생각되지 않소이까? 십 년 전만 해도 유대암이란 이름
석자는 그런대로 강호에 알려져 있었으며 평생을 협의도의 본분
을 살려 무림을 위해 이바지해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불구의
몸이 되어 십 년 동안 병상에 누워 있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세
분 신승께서 어떻게 답변을 하실 것인지 듣고 싶습니다."
유대암의 부상과 용문표국의 멸문지화로 인해 그 동안 소림과
무당은 설권을 숱하게 벌였었다. 그러나 장취산의 실종으로 인해
차츰 흐지부지되었는데, 오늘 원업이 기세등등하게 나오자 장송
계도 지난일을 끄집어 낸 것이다.
공문대사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이 일에 대하여 전에도 언급했듯이 본문의 제자를 일일이 불러
문책했지만, 어느 누구도 유삼협을 가해하지 않았다는 게 밝혀졌
네."
장송계는 품안에서 그 금강지가 찍힌 금덩어리를 꺼내 주위를
둘러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
"천하의 영웅들은 똑똑히 보십시오. 나의 삼사형을 가해한 자는
바로 이 금덩어리에 금강지력을 남긴 소림제자입니다. 소림의 금
강지력을 제외하고 어느 문파의 무학으로 이런 금덩어리에 손자
국을 남길 수 있겠습니까?"
원업 등이 장취산을 흉수로 몰아붙이는 것은 일방적인 증언에
불과했다. 그러나 장송계는 확고한 물증을 제시했으니 군호들에
게 주는 호소력이 훨씬 강했다.
공문의 눈가에 보이지 않게 미미한 경련이 일었다.
"아미타불..... 본문에서 금강지력을 연성한 자는 빈승 사형제
셋을 제외하고는 세 분의 선배 장노뿐인데, 그 분들은 소림에서
두문불출한 지 이미 삼,사십 년이 되었는데 어떻게 유삼협을 가
해할 수 있단 말인가?"
막성곡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대사께선 저의 오사형의 말을 믿지 않으시고 일방적인 변명으
로 단정지으셨는데, 대사께서 하신 말씀이 일방적인 변명이 아니
라고 어떻게 증명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공문대사는 역시 수양이 깊었다. 막성곡의 언동이 다소 불경하
다고 느껴졌지만 화를 내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막칠협이 노승의 말을 믿지 않는다면 어쩔 수가 없네."
막성곡은 얼른 그의 말을 받았다.
"후배가 어찌 감히 대사의 말을 믿지 않겠습니까? 단지 세상사
가 천변만화하여 왕왕 허허실실을 종잡을 수 없음을 말씀드리고
싶은 것뿐입니다. 귀파는 문중제자가 저의 오사형에게 살상당했
다고 생각하고, 우린 삼사형이 소림 고수에게 가해되었다고 믿고
있으니 어쩌면 쌍방이 모두 미처 발견하지 못한 곡절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릅니다. 후배의 의견으론 좀더 오랜 시간을 갖고 이
일을 처리해 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소림과 무당의 화기
(和氣)가 손상되지 않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만
약 경솔하게 단정을 지었다가 나중에 진상이 밝혀진다면 후회해
도 소용이 없을 겁니다."
"막칠협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공지가 싸늘하게 외쳤다.
"그럼 공견사형의 혈해지원(血海之怨)은 어떻게 할 건가? 장오
협, 용문표국의 일은 일단 덮어두기로 하겠지만 그 잔악무도한
사손의 행방만은 어떠한 경우에도 밝혀야 할 걸세!"
유연주는 줄곧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분위기가 다시 긴장되자
낭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만약 그 도룡도가 사손의 수중에 없다 해도 대사께선 이런 강
압적인 방법으로 그의 행방을 추궁하시겠습니까?"
그는 단 두 마디를 내뱉었을 뿐인데도 상당한 의미가 내포돼 있
었다. 다시 말해, 공지가 도룡도를 탐내고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
로 지적한 것이다.
공지대사는 발끈하여 냅다 탁자를 내리쳤다.
퍽! 우지끈!
탁자의 다리가 일제히 부러지면서 산산조각났다. 실로 대단한
장력이었다. 곧이어 그의 노기에 찬 음성이 대청안을 진동시켰
다.
"진인의 무학이 노화순청(爐火純靑)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얘기
를 오래 전부터 전해 듣고 흠모해 왔소이다. 과연 그 말이 사실
인지 오늘 천하의 영웅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빈승이 한 수 가르
침을 받고자 합니다."
그의 입에서 이러한 말이 내뱉어지자 대청 안에 모인 군호들은
웅성거렸다. 장삼봉은 칠십 년 전에 이미 강호에 명성을 떨쳤었
다. 왕년에 그와 무학을 겨루었던 인물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그의 무학이 어느 정도인지, 일곱 제자를 제외하고는 아
는 자가 없었다. 단지 전설에 가까운 여러 가지 소문이 강호에
전해지고 있을 뿐이었다.
군호들은 자연히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과연 장삼봉이 공지의
도전을 받아줄지, 모두들 기대에 찬 눈으로 장삼봉을 주시했다.
그러나 장삼봉은 입가에 담담한 미소를 흘릴 뿐 이렇다 할 반응
을 보이지 않았다.
공지대사는 그의 여유있는 모습에 기가 꺾였는지 얼른 다음 말
을 이었다.
"장진인의 무학이 천하무적이라는 것을 모르는 자가 없습니다.
우리 소림 삼승은 장진인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함께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겁니다."
군호들은 이 말에 내심 혀를 내찼다.
'그럼 그렇지! 공지 혼자서 장삼봉에게 도전한다는 것은 계란으
로 바위를 깨는 격이지.....'
어쨌든 소림 삼승이 장삼봉과 자웅을 겨루는 것도 흥미진진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때 유연주가 나왔다.
"오늘은 스승님의 백 세 수연인데 어찌 하객과 무학을 겨룰 수
있겠습니까.....?"
"무당이 감히 소림의 도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군....."
그러나 유연주가 이은 다음 말에 군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
다.
"하지만 소림의 도전을 피하지는 않겠습니다. 우리 무당 칠 제
자가 무림 십 이 고승의 절학을 직접 가르침 받겠습니다."
군호들은 다시 웅성거렸다.
공문, 공성, 공지 삼신승이 제자 아홉 명을 이끌고 왔으니 모두
열 두 명이었다. 그 반면 유연주는 무당칠제라 했지만 유대암이
이미 불구가 됐다는 것을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여섯 명에 불과했
다. 그렇다면 여섯 명이 열 두 소림 고수를 상대하겠다는 뜻이
아닌가?
군호들의 생각으로는 무당육협 쪽에 승산이 없을 것 같았다. 그
러나 유연주는 그 나름대로 깊이 생각한 연후에 내린 결정이었
다. 그는 소림 삼신승의 공력이 상당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
다.
"정녕 장진인께서 가르침을 주시지 않겠다면, 우리 사형제 셋이
무당육협 중에 셋과 겨루어 승부를 판가름 짓겠소!"
장송계가 얼른 나섰다.
"기어이 대사께서 우리와 싸움을 원한다면 기꺼이 받아 들이겠
습니다. 그대신 우리 무당칠제자 중에 소림제자에게 독수를 당해
병상에 누워 있는 삼사형을 제외하고 나머지 여섯은 어느 누구도
뒷전으로 물러서고 싶은 생각이 없으니, 여섯 판을 겨루어 승부
를 결정짓도록 합시다."
막성곡이 맞장구를 쳤다.
"그렇습니다. 무당 육제자가 소림의 여섯 고승을 상대하여 여섯
판 중에 네 판을 이기는 쪽이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 무
당이 패하면 오사형께서 금모사왕의 행방을 소림 장문인께 밝힐
것이며, 만약 소림이 양보를 하게 될 경우에는 수고스럽지만 삼
신승께서 축하를 핑계삼아 평지풍파를 일으키려는 친구들을 이끌
고 함께 하산해 주시길 바랍니다."
장송계가 제의한 대전 방법은 당연히 무당 쪽에 유리했다. 대사
형과 이사형의 무공은 승과 비슷할 것이고 나머지 소림승은 세
판을 패할 게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공지는 고개를 내둘렀다.
"그 방법은 적합하지 않소. 그러나 어째서 적합하지 않은지는
설명하기가 곤란합니다."
이때,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던 공문대사가 송원교를 향해 입
을 열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우리 소림 육승이 무당육협을 상대해서
한판으로 승부를 결정짓는 것이 어떻겠소?"
송원교는 잽싸게 머리 속으로 생각을 굴리며 대답했다.
"무당육협이 아니라 무당칠협입니다."
공지는 이 말에 흠칫 놀랐다.
"그럼 영사 장진인께서도 출장하시겠다는 뜻이오?"
송원교는 입가에 잔잔한 웃음을 떠올리며 말했다.
"대사의 그 말은 당치도 않습니다. 스승님과 겨룰 수 있는 사람
은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의 삼사제는 비록 중상
을 입어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지만 본문의 생사영욕(生死榮
辱)이 달린 이 일전에 수수방관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설령
자신이 직접 출전하지 못할 망정 대신 할 수 있는 사람을 내세울
겁니다.
공문은 잠시 생각을 굴렸다.
'무당에는 장삼봉과 일곱 제자 외에 다른 고수가 있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무당칠협을 강조하는 것으로 미루어 다른 문파
의 고수를 끌어들이진 않겠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소림칠승이 무당칠협의 가르침을 받겠소!"
유연주, 장송계 등은 송원교의 뜻을 잘 알고 있었다.
장삼봉이 창안해 낸 무공 중에 진무태극칠성진(眞武太極七星陣)
이란 절학이 있었다. 무당파는 진무대제(眞武大帝)를 공봉(供奉)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장삼봉은 진무대제 신상(神像)앞에 있는 구사이장(龜
蛇二將)을 보고 두 갈래의 물줄기가 모이는 곳에 사산(蛇山)과
구산(龜山)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뱀(蛇)은 듬직하여 정
(靜)을 상징하니 즉, 태극(太極)의 음양과 일맥상통되었다.
장삼봉은 그 길로 밤을 세워 한양(漢陽)으로 달려가 사산과 구
산을 유심히 살폈다. 보름 가량 살핀 결과, 사산의 끝없이 이어
진 굴곡지세(屈曲之勢)와 구산의 은중지형(隱重之形)을 참작하여
한 가지 절묘한 무공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한 가지 난관에 봉
착되었다. 사산과 구산의 천변만화한 기상과 산세에 바탕을 두어
무공을 만들어 내니 삼라만상이 집대성되어 한 사람의 힘으로선
도저히 그 무학을 동시에 펼칠 재간이 없었다.
장삼봉이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양자강과 한수가 굽어보이는 절
벽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불음불식불면(不飮不食不眠)하며 꼬
박 삼주야를 심사했지만 여전히 이 난제에 대한 열쇠를 얻지 못
했다. 나흘째 되는 날, 동녘 하늘에 먼동이 터오자 금빛 찬란한
햇살이 수면에 반사되어 무수한 금파(金波)를 형성했다. 순간 장
삼봉은 불현듯 깨달음을 얻어 일진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그는 즉시 무당산으로 돌아가 일곱 제자를 가까이 불러 각자에
게 한 가지씩의 무공을 전수해 주었다. 이 일곱 가지 무공을 개
별적으로 펼쳐도 그 나름대로의 오묘함이 있지만 만약 두 사람이
상부상조하여 공수 겸비한 상태에서 시전하면 그 위력이 배로 증
가된다. 세 사람이 동시에 펼칠 시에는 두 사람이 협력하는 것보
다 위력이 다시 배가된다. 넷이서 연수하면 여덟 고수의 위력과
맞먹고 다섯이면 열 여섯에 상당하며, 여섯일 경우에는 서른 두
명의 몫을 해낼 수 있었다. 자연히 일곱 명이 동시에 시전하게
되면 육십 사 명의 당세 일류 고수가 동시에 출수하는 것과 마찬
가지였다.
무당칠협은 강호 출도 이래 제아무리 무서운 강자를 만나도 둘
내지 셋이 연수를 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 정도로서 충분히 강적
을 퇴치시킬 수 있었으므로이 진무태극칠성진을 한 번도 정식으
로 펼친 적이 없었다.
지금 송원교는 상황을 판단하여 소림 삼신승을 꺾기 위해선 부
득이 이 무당의 진산지학(鎭山之學)인 진무태극칠성진을 선보이
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는 공문대사가 승락을 하자 곧 포권의 예를 취했다.
"여러분들 잠깐만 기다려주십시오. 가서 삼사제로 하여금 일시
로 한 사람을 내세우게 하여 무당칠제자의 수를 보충 하고자 합
니다."
이어 유연주 등에게 눈짓을 보내고 일제히 장삼봉에 인사를 올
리고 나서 내당으로 들어갔다.
사형제들만의 자리를 갖게 되자 막성곡이 먼저 입을 열었다.
"대사형, 오늘 진무태극칠성진을 펼쳐야 하는데 누구를 내세워
삼사형을 대신케 할 생각입니까?"
송원교는 사제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 일은 다수의 의견으로 결정지어야 하니, 각자 손바닥에다
이름을 적어 동시에 펼쳐 보이는 게 어떻겠는가?"
막성곡은 즉시 붓을 갖고 와 대사형께 건네주었다. 송원교는 손
바닥에다 이름 하나를 적고 나서 주먹을 쥐며 붓을 유연주에게
돌렸다. 이렇게 하여 각자 이름을 적고 나서 동시에 손을 폈다.
송원교, 유연주, 장송계 세 사람은 모두 <오사매>라고 적었다.
장취산은 <내자>라는 두 글자를 썼다. 결국 동일 인물이었다. 한
데, 은이정은 주먹을 꼭 쥔 채 얼굴만 붉히고 있을 뿐 좀처럼 손
을 펴려 하지 않았다.
막성곡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앗, 이상한데요. 갑자기 손아귀에 보물 단지를 숨겨 놓았습니
까?"
그는 억지로 은이정의 주먹을 폈다. 그곳에 <기 낭자>라는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장취산은 심히 감격하며 그의 손을 잡았다.
"육제!"
장취산 등은 은이정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은소소가
병상에서 갓 일어났기 때문에 치열한 싸움을 하기에는 아직 무리
라고 생각돼 자기와 혼약이 있는 기효부의 이름을 적은 것이다.
막성곡이 짖 돎은 표정을 짓는 것으로 미루어 육사형을 놀려 주
려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장취산이 눈짓으로 그의 장난기를 제
지했다.
송원교는 장취산에게 말했다.
"오제! 가서 제수씨를 모셔오게."
장취산은 침실로 달려가 대청에서 벌어진 상황을 대충 얘기해
주었다. 은소소는 그의 말을 듣고 나서 아랫 입술을 지긋이 깨물
었다. 그녀는 내당으로 나와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용문표국의 사람들과 소림승을 죽인것은 저예요. 당시 당
신은 저와 남남이었으니 이 일로 인해 무당에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요. 제가 나서서 모든 것을 밝히고 천응교를 찾아가라고 할
께요."
장송계가 그녀의 말을 받았다.
"제수씨,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무당과 천응교를 따로 논할 순
없습니다. 더군다나 저들이 본문을 찾아온 것은 용문표국의 일보
다도 사손의 행방을 찾는데 주목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손을
찾는 것은 복수보다는 도룡도를 빼앗는 일에 더 중점을 두고 있
습니다."
막성곡이 그의 말을 이었다.
"맞습니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바로 도룡도입니다."
장취산도 한 마디 거들었다.
"왕년에 공견대사는 나의 의형에게 도룡도 속에 천하무적의 무
학이 숨겨져 있다고 언급한 바가 있소. 그것으로 미루어 볼 때
공문, 공지, 공성도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게 분명하오."
은소소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녕 그렇다면 모든 것을 대사형께 맡기겠어요. 단지 소매의
무예가 얕아 이렇게 짧은 시간 내에 진무태극칠성진의 오묘함을
깨우칠 수 있을지....."
"사실 우리 사형제 여섯이 힘을 합쳐도 소림칠승을 상대하여 이
길 수 있소. 하지만 제수씨가 삼제를 대신해 우리와 보조를 맞춘
다면 삼제는 심적인 위안을 갖게 될 것이요."
"좋아요. 그럼 제가 가서 삼사형께 직접 가르침을 받겠어요."
이들 일곱 명은 곧 유대암의 침실로 몰려갔다. 장취산은 문중으
로 돌아온 후 유대암과 여러 번 만나 많은 얘기를 나누었지만,
은소소는 와병 중이었으므로 이제서야 첫대면을 하는 것이다.
유대암은 그녀의 용모가 빼어나고 태도가 다소곳하여 호감을 느
꼈다. 이어 송원교로부터 자기 대신 은소소를 내세워 진무태극칠
성진을 펼쳐 소림칠승을 상대할 것이란 얘기를 전해 듣자 내심
처량함을 느꼈다. 그러나 병상에 누운지 십 년이 되어 자신의 감
정을 억제할 줄 알았다. 그는 겉으로 전혀 내색하지 않고 오히려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오사매를 만나면 선물할 게 마땅치않아 고민이
었는데 마침 잘 됐소. 이 자리에서 진무태극칠성진의 방위(方位)
를 밟는 보법(步法)을 선물로 대신 하겠소."
은소소는 크게 기뻐하며 활짝 웃었다.
"고마와요, 유삼가(兪三歌)."
유대암으로선 처음으로 듣는 그녀의 음성이었다. 그런데 <고마
와요, 유삼가>라는 일곱 글자를 듣는 순간, 갑자기 얼굴에 심한
경련이 일며 휘둥그래진 눈으로 그녀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장취산은 흠칫했다.
"삼사형, 어디가 불편합니까?"
유대암은 대답은 않고 계속 은소소를 응시했다. 차츰 그의 눈동
자에 이상한 광채가 띠었다. 그것은 고통과 원한의 빛깔이었다.
장취산은 얼른 고개를 돌려 아내를 바라보았다. 뜻밖에 그녀 역
시 안색이 크게 변한 채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았다. 송원
교, 유연주 등은 유대암과 은소소를 번갈아 바라보았지만 영문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불길한 예감이 뇌리
를 스쳐갔다.일순 주위는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져 각자의 심
장이 뛰는 소리마저 들리는 것 같았다. 유대암의 숨소리가 갈수
록 거칠어지더니 창백하던 얼굴에 홍조가 떠올랐다.
드디어 그의 입에서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오사매, 가까이 오시오. 좀더 자세히 보고 싶소."
은소소는 몸이 바르르 떨리며 감히 앞으로 다가가지 못하고 남
편의 손을 꼭 쥐었다.
다시 숨막히는 침묵이 흐른 후에 유대암이 장탄식을 토했다.
"가까이 오지 않아도 상관없소. 그날 난 얼굴을 보지 못했으
니..... 오사매, 이 몇 마디를 직접 말해 주시겠소? <첫째 도총
표두가 직접 호송을 맡아야 해요. 둘째, 임안부에서 호북 양양부
까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길을 재촉해 열흘 이내에 무사히 넘겨
줘야 해요. 만약 한 치의 오차라도 생길시엔 총표두의 생명은 물
론이거니와 용문표국은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할 거예요!.>"
유대암이 한 자 한 자 천천히 내뱉는 동안 주위에 있는 사람들
은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유삼가, 저의 음성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니 정말 대단해요.
그날 용문표국에서 도대금에게 유삼가를 호송해 달라고 청탁한
장본인이 바로 소매예요."
유대암은 담담하게 그녀의 말을 받았다.
"그 호의는 정말 고마왔소."
은소소는 비장한 각오를 하듯 다시 한 번 입술을 깨물었다.
"나중에 용문표국의 불찰로 유삼가가 이렇게 되자 소매가 그들
을 멸문시킨 거예요."
여기에서 유대암의 표정과 음성이 갑자기 얼음장처럼 차갑게 변
했다.
"나를 위해 그런 일을 저지른 이유가 무엇이오?"
은소소는 안색이 암울하게 변해 고개를 떨구었다.
"유삼가, 이렇게 된 이상 모든 것을 솔직하게 털어놓겠어요. 그
전에 밝혀 둘 것이 있어요. 남편에게 숨겨 왔어요. 행여나.....
행여나 그가 알면 저를..... 저를 저버릴까 봐 두려웠어요."
유대암은 다시 차분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됐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마시오. 난 이미 이렇게 불구가
되었는데 지난 일을 들추어낸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이제 모두
들 나가 주시오. 무당육협이 소림고승을 상대해도 충분한 승산이
있을 것이니 될 것입니다."
유대암은 천성이 강인하고 자존심이 남달리 강해 부상을 당한
이래 여지껏 한 번도 누구를 원망하거나 자신을 비관하는 연약한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지난 일에 대해서도 일언반구조차
언급한 바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입에서 비통에 찬 말이
내뱉어지자 사형제들은 모두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특히
은이정은 심성이 약해 흐느끼며 눈물을 뿌렸다.
은소소는 모든 것을 더 이상 숨길 수 없음을 알았다.
"유삼가도 사실은 이미 모든 것을 예측하고 있었을 거예요. 단
지 저의 남편과의 의리를 생각해 내색을 하지 않았을 뿐이겠죠.
맞아요. 그날 전당강 선창 속에 숨어 문수침(蚊鬚針)으로 유삼가
를 상하게 한 것이 바로 소매였어요.....!"
장취산의 얼굴에 서릿발이 깔리며 대뜸 소리쳤다.
"소소! 그게 정말이오? 왜.....왜 진작 얘기하지 않았소?"
은소소의 양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당신의 삼사형을 이 지경으로 만든 원흉이 바로 당신의 아내인
데, 제가 어찌 감히 그 말을 입 밖에 낼 수 있었겠어요."
그녀는 다시 유대암에게 고개를 돌렸다.
"유삼가, 나중에 칠성정(七星釘)으로 유삼가를 상하게 하고 도
룡도를 빼앗아 간 사람은 바로 저의 친오빠인 은야왕(殷野王)이
에요. 우리 천응교는 무당파와 아무런 원한도 없기 때문에, 도룡
도를 이미 수중에 넣었고 또한 유삼가의 군자다움에 탄복해 비로
소 용문표국을 시켜 유삼가를 문중으로 호송해 주도록 조치한 거
예요. 그 후 무당산 아래서 생긴 풍파는 실로 예측치 못했던 거
예요."
장취산은 온몸이 후들후들 떨렸다.
그의 눈에선 짙은 분노의 불길이 솟구치고 있었다.
"이.....!"
그는 은소소에게 삿대질을 하며 당장 목을 조일 듯한 기세였으
나, 너무나 격동된 나머지 말을 제대로 내뱉지 못했다.
순간,
"앗!"
유대암의 입에서 비명에 가까운 처절한 일성이 터지며 몸이 붕
떠올랐다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침상에 떨어지는 동시에
정신을 잃고 말았다.
은소소는 역시 강인한 여자였다. 그녀는 눈물을 삼키며 검을 뽑
아 검자루를 돌려 장취산에게 건네주었다.
"여보! 십 년 동안 당신은 진심으로 저를 사랑해 주셨어요. 당
신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을 하늘에 한없이 감사를 드렸어요.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단지 당신 손에 죽어 무당칠협의 의리를
보존케 하는 것이 저의 마지막 소원이에요."
장취산은 검을 받아 즉시 그녀의 가슴을 겨냥해 찌르려 했다.
그러나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누가 뭐래도 십 년간 정을 붙이
고 살아온 부부가 아닌가! 일순간, 그의 뇌리에 은소소와 행복했
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그 달콤했던 밀어와
부드럽던 눈길, 그리고 뜨거웠던 순간들.....
검을 움켜쥔 장취산의 손이 심하게 떨렸다.
홀연 -------
그는 상처투성이의 야수가 포효하듯 소리치며 밖으로 뛰쳐나갔
다. 은소소와 송원교 등은 그가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라 황급히
뒤쫓아나갔다.
장취산은 곧장 대청으로 달려가 장삼봉 앞에 무릎을 꿇었다.
"스승님! 제자가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저질렀습니다. 부디 제
자의 한 가지 부탁을 들어 주십시오."
장삼봉은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부드럽게 말했다.
"무슨 일인지 말해 보아라. 이 스승이 책임지고일을 해결해 주
겠다."
장취산은 큰절을 세 번 올렸다.
"스승님의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제자에게 어린 자식이 있는
데 사악한 자의 수중에 들어갔습니다. 그를 마장(魔掌)에서 구해
주어 성인이 될 때까지 보살펴 주십시오!"
이렇게 말하고 나서 몸을 일으켜 앞으로 몇 걸음 걸어나가더니,
공문대사, 철금선생, 하태충, 공동오로 등을 향해 낭랑한 음성으
로 외쳤다.
"모든 죄과는 본인 장취산으로 인해 비롯된 것이니, 대장부로서
여러분들이 만족할 수 있는 책임을 지겠소이다!"
말을 끝내기 무섭게 장검을 뽑아 자신의 목을 그었다. 그 즉시
선혈이 뿌려지며 숨이 끊어졌다. 장취산은 이미 죽을 각오가 되
어 있기 때문에 스승님과 사형제들이 행여나 제지할까 봐 번개처
럼 출수를 한 것이다. 장삼봉과 유연주, 장송계, 은이정 네 사람
은 일제히 놀란 외침을 토하며 달려들었다. 순간 요란한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칠, 팔 명이 사방으로 튕겨나갔다. 그들은 모두
장취산 가까이 서 있던 사람들이었는데 장삼봉의 장력에 밀려난
것이다.
그러나 역시 한 발 늦고 말았다.
바로 이때 창 밖에서 어린애의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 아버지!"
두 번째 외침은 미약했다. 누구에 의해 입이 틀어막혀진 게 분
명했다.
장삼봉은 한 줄기 연기처럼 창 밖으로 옮겨 갔다. 그곳에 몽고
병사 차림의 사나이가 팔,구 세 가량의 사내애를 안고 있었다.
사내애는 입이 틀어막힌 채 몸부림쳤다. 장삼봉은 제자의 참사를
지켜보았으므로 칼로 에리는 듯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근 백 년
동안 쌓아올린 수양으로 결코 심기가 흩어지지는 않았다.
그는 나직하게 호통을 쳤다.
"들어가라!"
사나이는 발끝으로 살짝 지면을 찍으며 어린애를 안은 채 지붕
위로 몸을 날리려했다. 그 순간 어깨에 내리눌리는 힘을 느끼며
발이 땅에 뿌리박힌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어느새 장삼봉이
소리없이 그에게 다가와 왼손으로 살짝 어깨를 누른 것이다. 사
나이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장삼봉이 내력을 뻗어내면 영락없이
중상을 입거나 목숨을 잃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순순히 대청 안으로 들어갔다.
어린애는 바로 장취산의 아들 장무기였다. 무기는 사나이에 의
해 입이 틀어막혔지만 창 밖에서 부친이 자결하는 광경을 보자
사력을 다해 몸부림치며 끝내 소리를 칠 수 있었던 것이다.
은소소는 남편이 자기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직후 아들이
무사히 돌아온 것을 보자, 큰 슬픔에 이어 큰 기쁨을 얻게 된 셈
이다.
"애야, 의부의 행방을 말하지 않았겠지?"
장무기는 의연하게 말했다.
"나를 때려 죽인다 해도 말하지 않을 거예요."
장삼봉이 명령투로 말했다.
"어린애를 그녀에게 돌려줘라!"
사나이는 전신이 제압당해 고분고분 무기를 은소소에게 돌려주
었다.
무기는 어머니의 품안으로 뛰어들며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 저들이 왜 아버지를 죽게 했어? 아버지를 죽게 한 사람
이 누구야?"
은소소도 울먹이는 소리로 말했다.
"이곳에 모여 있는 많은 사람들이다. 그들이 너의 아버지를 죽
음으로 몰아넣었다."
무기는 좌우를 노려보았다. 그는 비록 나이가 어리지만 모든 사
람은 그의 눈빛과 마주치자 가슴이 철렁하는 한기를 느꼈다.
은소소가 다시 입을 열었다.
"무기야, 나의 부탁을 한 가지 들어주겠느냐?"
"엄마, 말해 보세요."
"너는 서둘러 복수할 생각 말아라. 천천히 기다렸다가 한 명도
놓쳐서는 안 된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그녀의 말을 듣자 모두 등골이 오싹해졌
다.
무기의 울음섞인 외침이 들려왔다.
"엄마! 난 복수하지 않을래요! 아버지만 살아나면 돼요!"
"사람은 한 번 죽으면 영원히 살아날 수 없단다."
그녀는 아랫 입술을 깨물더니 다음 말을 이었다.
"애야, 너의 아버지가 죽었으니 우린 어쩔 수 없이 의부의 행방
을 이들에게 밝혀야겠다."
그녀의 돌변한 태도는 실로 뜻밖이었다.
무기는 도리질을 하며 소리쳤다.
"싫어! 말하면 안 돼요!"
은소소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공문대사에게 얼굴을 돌렸다.
"공문대사, 난 당신에게만 말해 줄 테니 이리 귀를 가까이 대세
요."
이 또한 뜻밖인지라모두들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공문은 조용히 합장을 했다.
"아미타불..... 여시주께서 조금만 일찍 생각을 바꾸었다면 장
오협은 목숨을 잃지 않았을 것이오."
그는 은소소에게 다가가 귀를 갖다 댔다.
은소소는 그의 귀에 대고 입술만 계속 움직일 뿐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뭐라고 했소?"
은소소는 나직하게 말했다.
"금모사왕이 숨어 있는 곳은 바로....."
그 다음 말을 흐릿하여 무슨 뜻인지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공문은 다시 반문했다.
"뭐라고 했소?"
은소소는 힘주어 말했다.
"바로 그곳이니 소림파만 알고 스스로 그곳을 찾아가세요."
공문은 다급해졌다.
"난 자세히 듣지 못했소!"
이렇게 말하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은소소의 음성이 차갑게 변했다.
"그 이상은 말할 수 없어요. 그곳에 가면 자연히 금모사왕을 만
날 수 있을 거예요."
이어 그녀는 무기를 안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애야, 네가 성장한 다음에 여자의 속임수를 경계해야 한다. 아
름다운 여자일수록 속임수에 능하다는 걸 명심해라."
그녀는 무기의 귀에 입을 바싹 붙이고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난 화상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를 속인 거야. 이..... 엄마가
얼마나 사람을 잘 속이는지 이젠 알았겠지?"
그녀는 태연하게 웃으며 갑자기 비스듬히 쓰러졌다. 그녀의 가
슴에 한 자루의 비수가 꽂혀 있었다. 무기를 껴안는 순간 이미
암암리에 비수로 자신의 가슴을 찌른 것이다. 그녀는 무기의 몸
으로 은폐했기 때문에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무기는 어머니 몸에 엎어지면서 소리쳤다.
"어머니! 어머니!"
그러나 은소소는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무기는 엄청난 슬픔
으로 인해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는 무섭게 공문대사를 노
려보며 물었다.
"당신이 나의 어머님을 죽였나요? 무엇 때문에 나의 어머님을
죽였죠?!"
공문대사는 이런 참변을 목격하자 비록 당세에서 첫손 꼽는 무
학종파의 장문인이지만 역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지금 무기가
자기를 겨냥해 다그치자 절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손을 내둘
렀다.
"아니야, 내가 아니다. 그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거다."
무기의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거렸지만 흘러내리지는 않았
다.
"난 울지 않을 거야! 절대 울지 않아! 저 나쁜 사람들 앞에서
절대 울지 않을 거야!"
공문대사는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장진인, 이런 변고는..... 음..... 실로 뜻밖입니다. 장오협
부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니, 그..... 지난 일은 일체 거론하
지 않기로 하고 우린 이만 작별을 고하겠습니다."
장삼봉은 답례를 하며 담담하게 말했다.
"멀리 전송을 하지 않겠소."
소림 승려들은 일제히 일어나 떠나려 했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은이정의 성난 고함이 터졌다.
"당신네들은..... 나의 오사형을 죽음의 궁지로 몰아넣고 이대
로....."
그는 다음 말을 더 이상 잇지 못했다.
사실 오사형의 자결은 삼사형에 대한 죄책감이 주원인이었지,
소림과는 상관이 없었다.
은이정은 그대로 장취산의 시신 위에 쓰러져 대성통곡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입장이 난처해졌다. 그들은 일제히
장삼봉에게 작별의 인사를 했다. 그리고 가슴 한 구석에 불안한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을 지울 수 없었다.
---- 이번 일로 인해 매듭이 더욱 커졌다. 무당파는 절대 이것
으로서 은원을 종결짓지 않을 것이니 후환이 무궁할 것이다.----
송원교만이 눈물을 글썽이며 손님들을 관문 밖까지 전송해 주었
다. 손님이 떠나는 즉시 그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이때 대
청 안은 울음바다로 변해 있었다.
아미파의 제자들이 맨 마지막으로 작별을 고했다. 기효부는 은
이정이 슬퍼 우는 것을 보자 역시 눈시울이 붉어지며 가까이 다
가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육가(六哥), 저는 이만 가겠어요. 부디..... 몸 보존하세요."
은이정은 흐느끼면서 고개를 쳐들었다.
"아미파도..... 역시..... 나의 오사형을 곤경으로 몰아놓기 위
해 온 것이오?"
기효부가 얼른 고개를 내둘렀다.
"아니예요. 스승님께서는 단지 사손의 행방을 여쭈어보라고 하
셨을 뿐이예요."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아랫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다시 떨리
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을 때 입술 아래에 이빨자국이 뚜렷이 패
어 있었다.
"육가, 저는,.... 죄스러울 뿐이예요. 모든 것을 너그럽게 이해
해 주세요. 저는..... 내세(來世)에나 육가를....."
그녀는 걱정으로 인해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은이정은 그녀가 엉뚱한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다소 당황했다.
"이것은 낭자와 상관없는 일이니 우린 낭자를 원망하지 않을 것
이오."
기효부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 그게 아니라....."
그녀는 더 이상 은이정과 얘기할 용기가 없는지 무기에게 고개
를 돌렸다.
"얘야, 우린..... 모두 너를 잘 보살펴 줄 거야."
그녀는 목에 걸려 있는 금목걸이를 뜯어 무기의 목에 걸어 주려
고 하며 부드럽게 말했다.
"이것을 너에게....."
무기는 목을 뒤로 젖히며 소리쳤다.
"싫어요!"
기효부의 입장이 매우 난처해졌다. 그녀는 목걸이를 손에 들고
어찌 할 바를 몰랐다. 눈에 그렁하던 눈물이 끝내 양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정현사태가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기사매, 어린애와 여러 소리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자, 어
서 떠나자."
무기는 한참 동안 울음을 억제하고 있었다. 정현사태등이 대청
을 나서자 그는 목놓아 울음을 터뜨리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숨이 막혀오며 쿵 하고 그 자라에 쓰러졌다.
유연주가 얼른 그를 안아 일으켰다. 너무나 엄청난 슬픔을 견뎌
내지 못하고 까무라친 것이라 생각했다.
"얘야, 이젠 실컷 울어라."
그는 무기의 가슴을 주무르며 곧 깨어나리라 생각했는데 뜻밖에
도 무기의 몸이 차갑고 단지 코로 미약하게 숨을 내쉴 뿐이었다.
유연주는 계속하여 공력을 이용해 안마를 했으나 깨어날 줄 몰랐
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안색이 크게 변했다. 무기마저 곧 숨
이 끊어질 것만 같았다.
장삼봉이 황급히 그의 등 뒤에 있는 영대혈(靈坮穴)에 손을 붙
이고 한 갈래의 웅후한 내력을 주입시켰다. 장삼봉의 공력으로
제아무리 심한 부상을 입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내력을 주입시키
면 호전시킬 수가 있었다. 그런데 내력을 체내에 주입시키자 무
기의 창백한 안색이 푸르스름하게 변하더니 이내 푸르죽죽하게
바뀌어갔다. 게다가 몸이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장삼봉은 흠칫 놀라 그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얼음장이었다. 다
시 손을 옷 속으로 집어넣어 등심을 만져보니 불길처럼 뜨거웠
다. 그리고 그 주위는 뼈를 에일 듯한 한기에 싸여 있었다. 장삼
봉의 안색이 어느 때보다도 심각하게 변했다.
"원교, 이 애를 안고 온 몽고 병사가 어디에 있는지 어서 찾아
와라!"
송원교는 즉시 대답을 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유연주는 그 몽
고인과 장력 대결을 하여 부상을 입은 바가 있으므로 대사형도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두 사람은 대청 밖으로 뛰쳐나갔다.
장삼봉은 무기의 옷을 찢었다. 야들야들한 그의 등에 벽녹색의
장인(掌印)이 뚜렷하게 찍혀 있었다. 그 부위가 불길처럼 뜨거웠
던 것이다. 무기가 이러한 부상을 입고도 버틴 것은 실로 상상하
기가 어려웠다.
잠시 후 송원교와 유연주가 대청 안으로 뛰쳐들어왔다.
"아무도 보이지 않습니다."
장삼봉이 몽고인을 데리고 대청 안으로 들어왔을 때 장취산은
이미 목숨을 끊었고, 곧 이어 은소소마저 부군을 따라 자결하는
바람에 모두 비통에 잠겨 그 몽고인을 주의하는 자가 없었다. 그
사이에 몽고인은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두 사람도 무기의 등에 찍혀 있는 이상한 손자국을 보고 크게
놀랐다.
장삼봉은 눈살을 찌푸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삼십 년 전에 백손도인(百損道人)이 죽은 후로부터 이 악랄무
비한 현명패천장(玄冥覇天掌)이 영원히 실전(失傳)된 줄 알았는
데, 아직도 이 무학을 지닌 사람이 있을 줄이야....."
송원교는 이 말에 크게 놀랐다.
"이 애가 당한 것이 현명패천장이란 말입니까?"
그는 칠제자 중에 나이가 가장 많아 현명패천장이란 이름을 들
어본 기억이 있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했
다.
장삼봉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는
두 손으로 무기를 안은 체, 주름진 얼굴에 눈물을 흘리며 장취산
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취산아, 취산아! 너는 이 못난 스승을 믿고 죽음으로써 부탁을
했는데도 난 너의 독생자를 지켜주지 못하니 백 세를 살아온들
무슨 소용이 있으며, 무당이 천하에 명성을 떨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차라리 너를 따라 죽고 싶구나!"
주위에 있는 제자들은 대경실색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스승님
은 하늘이 무너져도 태연자약할 수양의 소유자인데, 이렇게 침통
한 말을 할 줄이야 생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은이정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스승님, 이 애를..... 정말..... 살릴 수 없습니까?"
장삼봉은 소매로 눈물을 훔치더니 무기를 안고 대청 안을 잠시
배회했다.
"한 가지 방법이 있다면 나의 스승이신 각원대사가 소생하여,
구양진경의 전부를 다시 나에게 전수해 주는 것뿐이다."
제자들은 가슴이 철렁했다. 스승님의 이 말은 무기의 상세를 도
저히 치료할 수 없다는 뜻과 상통되기 때문이었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흐른 후에 유연주가 입을 열었다.
"스승님! 그날 제자는 그 자와 장력을 직접 겨루어 부상을 입었
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완쾌되어 공력을 운용하는데 아무런 지장
이 없습니다."
"그것은 무당칠협이란 이름이 강호에 크게 알려진 덕분이다. 현
명패천장으로 장력 대결을 벌려 만약 상대방의 내력이 더 강하면
반탄지력에 의해 현명패천장을 전개한 자가 오히려 화를 당하게
된다. 앞으로 그 자를 만나면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유연주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네!"
그는 내심 섬뜩함을 금치 못했다.
'이제 보니 그 자는 나를 높이 평가해 행여나 자기보다 내공이
강할까 봐 진력으로그 현명패천장을 전개하지 않았군. 그렇지
않았다면 난 벌써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르지..... 나중에 다시
만나게 되면 필시 전력을 기하겠군."
송원교가 심각하게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 언뜻 보기에, 그 자는 나이가 오십 세 사략이며 콧
날이 높고 눈이 움푹 패인 것으로 미루어 서역(西域) 사람 같았
습니다."
막성곡이 그의 말을 받았다.
"그 자는 무기를 잡아간 후에 왜 다시 이곳으로 데려왔을까요?"
거기에 대한 대답을 장송계가 했다.
"그 자는 무기에게 금모사왕의 행방을 추궁하다가 뜻이 이루어
지지 않자, 현명패천장을 전개해 고통을 주어 오사제 부부를 위
협할 생각으로 이것에 나타난 것이 분명하네."
막성곡은 발끈했다.
"감히 무당산에 나타나 행패를 부리려 하다니, 그놈은 정말 간
도 크군요!"
"무당산에 나타나 행패를 부린 것이 어디 그 자뿐이었는가? 그
자는 무기를 인질로 잡고 있었으니 더욱 자신만만했던 것뿐이
네."
대청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모두들 속수무책이었다. 분위기가
갈수록 무거워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무기가 갑자기 눈을 뜨며 소리쳤다.
"아버지 아파요. 아파 죽겠어요!"
그는 장삼봉을 꼭 껴안으며 품 속으로 파고 들었다.
유연주가 힘주어 말했다.
"무기야, 너의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너라도 이를 악물
고 살아서 무공을 배워 복수를 해야 한다."
"싫어요! 복수하지 않을래요 아버지와 어머니만 살아나면 돼요.
그 나쁜 사람들을 용서해 주고 모두 아버지와 어머니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봐요!"
장삼봉은 어린애의 이 말에 다시 눈물을 흘렸다.
"우린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 진인사대천명이라 했으니 하
늘의 자비를 바라는 수밖에....."
이어 장취산의 시신을 향해 눈물을 뿌리며 음성이 격양되었다.
"취산아, 취산아! 이 불쌍한 놈.....!"
그는 무기를 나고 자기의 방으로 들어가 손가락을 연거푸 튕겨
열 여덟 군데 혈도를 찍었다. 혈도가 찍힌 무기는 더 이상 떨지
않고 얼굴에 푸르죽죽한 기운이 더욱 짙어갔다. 그 기운이 거무
스름하게 변하면 더 이상 구제할 길이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
고 있는 장삼봉인지라, 무기의 옷을 완전히 벗기고 자신도 도포
를 풀어 가슴을 그의 등에 붙였다. 무기의 한독을 풀려고 같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장삼봉은 구양신공을
연마하는 방법과 구결을 무기에게전수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세월은 빨랐다.
붐이 가고 가을이 오고.....
꽃이 피고 다시 지니.....
무기가 구양진경을 연마한지도 어느덧 이 년이 지났다.
이제 단전에 인온자기가 어느 정도 모이게 되었으니, 체내의 한
독이 경략백맥(經略百脈) 속에 응결되어 제거할 수 없을 뿐더러
오히려 날이 갈수록 얼굴의 녹기(綠氣)가 심해져 갔다. 아울러,
한독이 발작할 때마다 무기가 겪어야 할 고통은 날이 갈수록 격
심해졌다.
그간 이 년 동안 장삼봉은 무기의 내공 연마를 돕는데 진력을
쏟아왔고, 송원교 등은 영단묘약을 찾아 천하 방방곡곡을 헤맸
다. 백 년 이상 된 야산인삼(野山人蔘) 등 진귀한 영물을 수없이
먹었지만, 결과는 바다 속에 돌을 던진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무
기가 하루 하루 빼빼 말라가는 것을 지켜보며 모두들 안타깝기만
했다. 장취산이 남긴 유일한 혈육을 도저히 보존시필 자신이 없
었다. 무당파가 무기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전력투구하는 바람
에, 유대암을 암습한 원수와 무기에게 현명패천장을 전개한 원흉
을 찾는 일에는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그 동안 천응교의 교주 은천정(殷天正)은 여러 차례에 걸쳐 사
람을 보내 외손자의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매년 적지 않은 선물
을 보내왔다. 하지만 무당의 제자들은 유대암과 장취산의 변고가
모두 천응교로 인해 비롯되었다는 생각을 좀처럼 버리지 못했다.
그래서 매번 천응사자를 쫓아버리고 선물도 일절 받지 않았다.
심지어 한 번은 막성곡이 천응사자를 호되게 두들겨 팬 일도 있
어 그 후로 은천정도 더 이상 사람을 보내지 않았다.
이날은 중추가절이었다.
무당제자들은 장삼봉을 모시고 모처럼 아침 식사를 하려는데 무
기가 갑자기 발병하여 얼굴의 녹기가 짙게 일며 사시나무 떨 듯
떨었다. 그러나 무기는 이를 악물고 참았다. 사람들의 흥을 깨지
않기 위해서였다. 은이정이 얼른 그를 침실로 데려가 이불을 덮
어 주고 화로불을 피워 주었다.
장삼봉은 한참 동안 심각하게 생각을 굴리다가 모종을 결정을
내린 듯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내일 무기를 데리고 숭산 소림에 갔다 와야겠다."
중인은 스승님의 심정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소림의 장문인 공
문대사를 찾아가 구양신공의 부족한 점을 가르침 받아 무기의 목
숨을 살리려는 것이다.
이 년 전 무당과 소림은 이미 거북한 관계가 되었다. 그런데 장
삼봉이 일대종사의 신분으로서 백여 세의 고령인데도 불구하고
소림을 찾아가 도움을 청 한다는 것은 체면에 크게 손상되는 일
이 아닐 수 없었다. 모두는 이러한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장취산
과의 정의를 생각해 허명(虛名) 따위를 저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원래 아미파에도 구양진경의 일부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장문인 멸절사태(滅絶師太)의 성품이 괴팍하여, 장삼봉이
은이정을 시켜 여러 차례 서찰을 보냈지만 멸절사태는 서찰을 뜯
어보지도 않은 채 다시 되돌려보내곤 했다.
물론, 송원교가 무기를 소림으로 데려가면 무당의 체면이 한결
유지되겠지만, 공문대사가 거절할 것은 불 구경하듯 뻔한 사실이
었다.
모두는 장삼봉의 결정에 모두 기분이 울적해져 술을 몇 잔 나눈
뒤 곧 상을 치웠다.
다음날 아침 장삼봉은 무기를 데리고 길을 떠났다.
다섯 제자는 원래 수행할 생각이었지만 장삼봉이 거절했다.
"우리가 떼지어 몰려가면 소림의 의심을 살 우려가 있으니 나
혼자서 무기를 데려가는 게 가장 좋을 것 같다."
두 사람은 제각기 나귀를 타고 곧장 북쪽으로 향했다. 소림과
무당의 거리는 별로 멀지 않았다. 호북의 무당산에서 화남 숭산
까지 불과 며칠의 여정이었다. 장삼봉과 무기는 노하구에서 한수
를 건너 남양에 당도해 다시 북쪽으로 여주(如州)를 지나 서쪽으
로 방향을 꺾자 숭산에 당도할 수 있었다. 소실산에 오른 두 사
람은 나무에 나귀를 묶어두고 걸어서 올라갔다. 장삼봉으로선 어
릴 적 추억이 어려 있는 곳이기도 했다.
팔십 년 전, 사부이신 각원대사가 철통 속에 곽양과 자기를 담
고 하산한 것이 눈앞에 선한데 이제와 돌이켜보니 격세지감을 느
끼지 않을 수 없었다. 장삼봉은 무기의 손을 잡고 천천히 산 위
로 올랐다. 오봉(五峰)도 여전한데, 각원대사와 곽양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석정에 당도하니 소림사가 멀리 시야에 들어왔다. 이
때 승려 둘이 담소를 하면서 걸어오기에 장삼봉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수고스럽지만 무당의 장삼봉이 방장대사를 뵈러 왔다고 전해
주게."
두 승인은 장삼봉이란 세 글자를 듣자 깜짝 놀라며 그를 유심히
살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몸집이 유난히 장대하고 흰 수염에
비해 안색이 불그스름한 것 이외에 빼어난 데가 없다고 느껴졌
다. 게다가 열 살이 갓 넘은 깡마른 어린애를 데리고 있어 한 승
인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당신이 정말 무당산의 장...장진인입니까?"
장삼봉은 담담하게 웃었다.
"틀림없는 진품이라네."
다른 한 승려가 그의 장난기 섞인 듯한 말투에 더욱 의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혹시 농담하는 게 아닙니까?"
장삼봉은 이번엔 껄껄 웃었다.
"장삼봉이 뭐가 대수롭다고 공연히 그의 행세를 하려고 하겠는
가?"
두 승려는 반신반의하며 달려가 보고를 했다.
한참 후에 사문(寺門)이 활짝 여리며 공문대사가 동문사제인공
지, 공성을 대동한 채 걸어나왔다. 세 사람 뒤에는 십 여 명의
황색 승포를 입은 노화상들이 따르고 있었다.
장삼봉은 그들이 달마원의 장노들로서 어쩌면 배분이 공문보다
더 높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사내에서 무학을 참수하
며 바깥일을 관여하지 않는데, 아마 무당 장문인이 찾아왔다는
전갈에 비로소 장문인을 보러 모습을 드러낸 모양이다.
장삼봉은 얼른 앞으로 나서 공수의 예를 취했다.
"방장대사와 여러 대사들의 참수를 방해하게 되어 실로 송구스
럽소이다."
공문대사 등도 일제히 합장으로서 답례하고 나서 공문이 입을
열었다.
"장진인께서 이렇게 먼길을 오신 것은 실로 뜻밖입니다. 무슨
가르침이 있으신지요?"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어 찾아왔소이다."
"우선 자리에 앉읍시다."
장삼봉이 정자 안에 앉자 승인이 향차를 대접했다.
장삼봉은 내심 불쾌했다.
'내 비록 보잘것없는 존재지만 한 문파의 종사임에 분명한데,
배분으로 논해도 노희들의 선배이거늘 사내로 안내하지 않고 산
중턱에 앉게 하다니..... 보통 손님이 찾아와도 이렇게 예의가
허수룩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장삼봉은 천성이 호탕하여 불쾌한 생각을 곧 지워 버렸
다.
공문대사가 그를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
"장진인께서 본문을 찾아주셨으니 사내로 모셔야 당연하겠지만
장진인께서 소시 적에 임의로 소림을 떠났기 때문에..... 잘 아
시다시피, 본사를 저버린 반도는 영원히 사내로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엄한 문규가 있으니 이 점 널리 양해하시길 바랍니다."
장삼봉은 껄껄 웃어 젖혔다.
"그랬었구료. 빈도는 비록 소시 적에 소림에서 각원대사를 모시
며 청소와 차를 끓이는 잡일을 해 왔지만 제도(制度)를 한 바도
없고, 스승을 모신 적도 없으니 소림제자라 할 수 없지 않겠소?"
공지가 냉랭하게 그의 말을 받았다.
"그러나 장진인은 엄연히 소림에서 무공을 훔쳐 배우지 않았습
니까?"
장삼봉은 화가 치밀었으나 한편으론 일리가 있는 말이라 느껴졌
다.
'무당의 무학은 내가 스스로 창안한 것이지만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각원대사가 구양진경을 전수해 주었고 곽여협이 한 쌍
의 소림철나한을 주었기 때문에, 그 바탕이 소림에서 비롯되었다
고 해도 과언은 아니지.....'
그는 곧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힐 수있었다.
"빈도가 오늘 찾아온 것도 바로 그것 때문이오."
공문과 공지는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대관절 무엇 때문에 온 것일까? 십중팔구는 장취산의 일로 찾
아온 모양인데.....'
공문이 심각하게 말했다.
"상세한 말을 듣고 싶소이다."
장삼봉은 차분하게 입을 떼었다.
"방금 공지대사가 언급했듯이 빈도의 무공은 소림에 뿌리를 두
고 있소이다. 빈도가 소시 적에 각원대사의 은혜를 입어 구양진
경을 전수받게 되었으니 말이오. 그 경서에 수록된 무학의 정수
는 방대하고 오묘하여 당시 빈도의 어린 나이로선깨우치지 못한
게 태반이었소. 그 후 각원대사가 황산에서 숨을 거두기 전에 그
경전을 읊었는데, 다행하게도 세 사람이 곁에서 들을 수가 있었
소. 한 분은 아미파의 시조이신 곽여협이고, 한 분은 귀파의 무
색선사였으며, 나머지 한 명이 바로 빈도였소. 빈도는 나이가 어
리고 자질도 가장 뒤떨어질 뿐 아니라 무학의 기초가 없었으므로
세 사람 중에 얻은 것이 가장 적었다고 할 수 있소."
공지가 다시 냉랭하게 그의 말을 받았다.
"꼭 그렇다고만 생각되지 않소이다. 장진인께서는 몇 년 동안
각원을 곁에서 모셨는데, 그가 어찌 암암리에 전수해 주지 않을
리가 있겠소이까? 오늘날 무당이 강호에 명성을 떨치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그 각원의 공이외다."
각원은 공지보다 세 배분이 높아 엄격하게 따지면 태사숙조(太
師宿祖)가 된다. 그러나 각원은 소림의 반도로 낙인찍혀 문중에
서 제명되었기 때문에 공지의 말투가 불손할 수 이었던 것이다.
장삼봉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하게 말했다.
"빈도는 선사의 은덕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소."
소림사승 중에 공견이 가장 자비로왔는데 애석하게도 일찍 세상
을 떠났다. 공문은 심계가 깊어 희로애락을 겉으로 내색하지 않
았다. 공성은 천진난만할 정도로 세상물정에 어두워 심지어 흐리
멍텅한 일면도 없지 않았다. 그리고 공지는 도량이 가장 좁았다.
그는 장삼봉이 소림에서 무공을 훔쳐가 무당파를 창건한 것이라
고 늘 생각해 왔으며, 이번에도 장삼봉이 장취산의 일로 복수하
기 위해 찾아온 것이라 단정지었다. 그렇지 않아도 소림은 은소
소가 죽기 직전에 꾸며낸 이화강동지계(移禍江東之計)로 인해 그
동안 편할 날이 없었다. 사흘이 멀다 하고 무림인들이 찾아와 소
란을 피웠다. 그들은 강압적인 태도로 나오기도 하고, 통사정을
하기도 하며 끈질기게 사손의 행방을 캐물었다. 공문대사는 사손
의 행방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고 맹세까지 했지만, 무당산에서
수백 명이 은소소가 직접 공문에게 귓속말로 일러주는 것을 보았
기 때문에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자연히 싸움이
벌어지게 되었고, 찾아온 무림인들도 많이 사상당했지만, 소림도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다. 그 근원을 따지고 보면 역시 무당에서
뿌린 화근이 아니겠는가! 사내의 승려들은 이 년 동안 시달려 오
다가 오늘 장삼봉이 직접 찾아오자 수모를 줌으로써 보복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했다.
공지가 다시 거만하게 입을 열었다.
"장진인께서는 소시적에 소림에서 무공을 훔쳐 배웠다고 시인했
는데, 그 사실을 온 강호에 알릴 용의가 있습니까?"
장삼봉은 길게 숨을 들이켰다.
"천하의 무학은 본디 뿌리가 하나이며, 천 백 년간 서로 단점을
보안해 보다 높은 경지를 추구해 온 것이 다를 뿐이라 생각하오.
그러나 소림이 수백 년 동안 무림을 이끌어 온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외다. 빈도가 오늘 이곳을 찾아온 것도 귀파의 무학
을 흠모하여 여러 대사께 가르침을 받고자 함이오."
공문 등은 가르침을 받고자 한다는 말을 도전의 뜻으로 듣고 일
제히 안색이 변했다. 그들은 장삼봉의 무학이 고심막측하다는 것
을 잘 알고 있었다. 당금 무림에 그의 적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
런데도 그가 단신 홀몸으로 소림을 찾아와 도전을 하는 이상 틀
림없이 믿는 바가 있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순간, 삼승은 섣불리
대답할 수 침묵을 지켰다.
공성이 분연히 입을 열었다.
"이제 보니 우리와 정면 대결을 벌이려 왔구료. 나 공성은 결코
싸움을 피하지 않을 것이오. 장진인의 무학이 제아무리 천하무적
이라 해도 소림사의 천 명을 헤아리는 제자를 모조리 죽이지는
못할 것이오!"
그는 일단 싸움이 벌어지면 소림제자가 한꺼번에 덤빌 수 있다
는 포석을 깔아놓았다.
장삼봉은 얼른 그의 말을 받았다.
"여러 대사는 오해하지 마시오. 빈도가 방금 말한 것은 진짜 가
르침을 받겠다는 뜻이외다. 빈도는 비록 구양진경을 배웠지만 결
함이 많은데다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적지 않소. 소림고승들
은 필시 빈도보다 수위(修爲)가 깊은 터이니, 가르침을 주신다면
그 은혜 잊지 않을 것이오."
이렇게 말하며 정중하게 몸을 숙였다. 소림사 쪽에서 볼때 그의
말과 행동은 실로 뜻밖이 아닐 수 없었다. 문파를 창건한 지 팔
십여 년이 자났고 무림에서 무학으로 보나 명성으로 보나 그를
따라갈 자가 없는데, 오늘 소림에 나타나 가르침을 받길 원하니
어찌 뜻밖이 아닐 수 있겠는가!
공문은 얼른 답례를 했다.
"장진인..... 우리들 같은 무학에게 가르침을 받겠다는 것은 당
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장삼봉은 상대방이 눈꼽만치도 의혹을 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
했다. 그래서 무기가 어떻게 하여 현명패천장에 당했으며, 그 동
안 체내의 한독을 치료해 온 경위, 또한 장취산의 유일한 혈육이
니 어떠한 일이 있어도 살려야 된다는 자신의 각오를 진지하게
얘기해 주었다. 그리고 현재로선 구양진경을 완전히 익혀야만 무
기를 살릴 수 있다면서, 자기가 알고 있는 구양진경을 전부 소림
파에 알려줄 것이니 소림도 역시 아는 부분을 제시해 쌍방이 서
로 연구하여 결함을 보완하자고 간청했다.
공문대사는 그의 말을 듣고 나서 한참 생각을 굴리다가 입을 열
었다.
"본문은 천 백 년 이래 일흔 두 가지의 절예를 십이 성(成)까지
연성한인물이 전혀 없었소. 그만큼 역대 조사들께서 남기신 무
학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십분지 일을 연성하기도 쉬운 일이 아
니외다. 물론 장진인께서 한 가지 신공(神功)을 제시해 본문과
교환하자는 뜻은 이해 못하는 바가 아니지만, 본문의 입장에서
볼 때는 불필요한 사족(蛇足)에 불과하오."
여기에서 말끝을 멈칫하더니 다시 말했다.
"게다가 무당의 무학은 그 근본이 소림이거늘, 오늘 서로 무학
을 교환했다는 게 강호에 전해지면 진상을 모르는 사람들은 소림
과 무당의 무학을 동격으로 생각할 게 아니겠습니까? 소승은 소
림의 장문으로서 그런 유언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장삼봉은 내심 탄식을 했다.
'무당 제일 문파의 장문인이며 명색이 사대신승 중에 한 사람인
데, 어찌 흉금이 이다지도 좁은지.....'
그는 부탁을 드리는 약자 입장이므로 상대방을 나무랄 수 없었
다.
"세 분은 당세의 신승으로서 누구보다도 자비를 근본으로 삼고
있는 줄 알고 있소. 이 어린 것의 생명이 조석지간에 있으니 부
처님의 구세구인(救世救人)의 가르침을 생각해서라도 빈도의 소
청을 들어주셨으며 고맙겠소."
그러나 장삼봉이 제아무리 혀가 닳도록 간청을 해도 삼승은 적
당한 구실을 내걸어 정중히 거절했다.
마지막으로 공문대사가 단호하게 말했다.
"분부를 받들지 못하는 것을 너무 나무라지 말기를 바랍니다."
이어 한쪽에 서 있는 승인에게 명했다.
"가서 상등 공양을 준비하여 이곳에서 장진인을 대접하도록 일
러라!"
승인은 즉시 대답하고 물러갔다.
장삼봉의 표정은 암울했다.
"정녕 그렇다면 빈도가 공연히 대사들의 귀중한 시간만 낭비하
고 실례를 범한 것 같소. 성찬은 감히 받을 수 없으니 이만 작별
을 고할까 하오."
그는 공수의 예를 취하고 나서 무기의 손을 잡고 표연히 떠나갔
다.
----- 제 2 권 5 장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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