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3 권
제 3 장 주장령의 음모(陰謀)
장무기와 양불회는 만 리나 되는 먼 길을 지나 서쪽으로 올 때
까지는 서로 그림자처럼 의지하며 지내왔다. 그런데 갑자기 헤어
지게 되자 몹시 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기효부가 부탁한
그녀의 여식을 실수없이 양소에게 보냈다는 생각을 하자 그런대
로 마음의 위안이 됐다. 잠깐 서 있는 동안 혹시 하태충, 반숙한
등 곤륜파 사람들과 다시 마주치게 될까 봐 즉시 산 속으로 걸어
갔다.
이렇게 십여 일을 걸어가자 팔에 입은 상처는 점차 완쾌되었다.
그러나 곤륜산에서 아무리 왔다갔다 헤매어도 산을 벗어날 길을
찾지 못했다. 이날은 계속 반나절이나 걸어 몹시 피곤하여 돌더
미에 앉아 쉬고 있었는데, 갑자기 서북쪽에서 개 짖는 소리가 요
란하게 들려왔다. 무려 십여 마리가 되는 것 같았다. 개 짖는 소
리가 재차 가까이 들리면서 마치 사나운 야수를 쫓는 것 같았다.
개 짖는 소리에 따라 한 마리의 작은 원숭이가 급히 달려오고
있었는데, 꽁무니에 화살 하나가 박혀 있었다. 그 원숭이는 수
장 밖으로 달려가더니 갑자기 땅바닥에 쓰러져 몸부림치듯 뒹굴
었다. 꽁무니에 박힌 화살 때문에 높은 나무 위로 기어오르지 못
했다. 게다가 너무 지쳐버려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장무기가 얼른 다가가 살펴보니, 원숭이의 눈에서 애절과 공포
의 빛이 서려 있었다. 순간 장무기는 묘한 생각에 잠겼다.
'내가 곤륜파 사람들에게 쫓겨 다닐 때 아직 저 원숭이와 같았
을 거야.'
그는 즉시 원숭이를 안아 조심스레 화살을 뽑아 주고 품에서 환
약을 꺼내 잘근잘근 씹어 상처 부위에 발라 주었다.
바로 이때 개 짖는 소리가 가볍게 들려왔다. 장무기는 얼른 옷
깃을 풀어서 원숭이를 품속에 숨겼다. 삽시간에 크고 사나온 사
냥개가 달려와 그를 꼼짝 못하게 포위했다. 사냥개들은 원숭이
냄새를 맡자 송곳니를 드러내 으르렁 거렸으나 금방 덮쳐오지는
않았다.
장무기는 이 사나운 개떼가 톱니 같은 이빨을 드러내 보이며 당
장 덮쳐올 자세이자 속으로 몹시 겁을 먹고 있었다. 몰론 품안에
있는 원숭이를 던져 버리면 개떼가 원숭이에게만 덮쳐갈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부친에게서 받은 교훈은, 매사
에 협의를 우선으로 하고 비록 야수 한 마리일망정 서운하게 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즉시 몸을 날려 개떼들의 머리
위를 지나서 급히 달려갔다. 순간 개떼들도 짖어대며 뒤쫓아왔
다.
사냥개가 뛰는 속도는 굉장했다. 장무기가 십여 장 밖으로 달려
갔는데 바로 뒤따라왔다. 순간 다리에 통증이 오면서 장무기는
한 마리 맹견에게 물렸다. 맹견은 죽어라 하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급히 몸을 돌려 그 사냥개의 머리통에 일장을 후려
쳤다. 이 일 장은 전력을 다해서 격출한 것이라 사냥개는 비명과
함께 몇 번 뒹굴더니 기절해 버렸다. 그러자 나머지 사냥개들은
피냄새를 맡은 이리떼처럼 달려들었다.
장무기는 주먹으로 치고 발로 차가며 사력을 다해 대항했다. 그
러나 그의 팔에 입은 상처가 아직 완쾌되지 않아 제대로 팔을 움
직일 수 없었다. 얼마 후, 움직일 수 있는 왼손마저 사나운 개에
게 물려 무방비 상태가 되자 사방에서 개떼들이 덮쳐와 마구 물
어도 속수무책이었다. 머리, 얼굴, 어깨 등 온몸이 개떼의 날카
로운 이빨에 물려 경황이 없는 찰나, 어렴풋이 가냘프면서도 앙
칼진 여인의 호통소리가 차츰 가까이 들려오는 것을 의식하며 앞
이 캄캄해지더니 기절하고 말았다.
얼마나 시간이흘렀을까. 몽롱한 의식 속에서 마치 수십 마리의
늑대, 여우 등 사나운 야수들이 몸을 마구 물어 뜯는듯한 환상에
짓눌려 그는 입을 벌려 크게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전혀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이때 한 사람의 발소리가 들렸다.
"열이 내려서 죽지는 않을 거다."
장무기가 얼른 눈을 떠보니, 희미한 등불 아래 먼저 확인한 것
은 자기가 작은 방 안에 누워 있는 것과 중년 남자 한 사람이 앞
에 서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 아저씨..... 제가 어떻게.....!"
겨우 이 몇 마디를 내뱉는 사이에 갑자기 온몸이 불에 덴 것처
럼 아픔이 몰아쳐 왔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제서야 자기가 사
나운 개떼들에게 포위당해 마구 물린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 남
자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이 녀석아, 넌 명이 길어서 죽지 않을 거다. 왜 그러느냐? 배
가 고프냐?"
그는 극심한 통증으로 인해 다시 기절하고 말았다.
잠시 후 다시 깨어나 보니 그 중년 남자는 이미 방 안에 없었
다. 장무기는 생각했다.
'난 아무리 해도 오래 살 수 없는 몸, 구태여 이렇게 시련을 겪
어야 할 필요가 있는가?'
머리를 숙여 살펴보니 가슴, 목덜미, 손, 발, 허벅지 등 상처
부위에는 약을 마르고 헝겁으로 감아놓은 걸 볼 수 있었다. 그러
나 약초의 냄새를 맡아보니 자기에게 약을 발라 준 사람은 상처
치료에 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는 것 같았다. 약물에는 형인,
마전자, 방풍, 남성 같은 약재가 들어 있는데, 이런 약재는 광견
병에 걸렸을 때 쓰는 약제들이라서 자기의 상처에는 적용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아픔만 더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힘이 없어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하는 딱한 형편인지라 하는 수 없이 날이
샐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그런데 다행하게도 잠시 후에 그 중
년 남자가 다시 그를 보러 왔다.
"아저씨, 저를 구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 남자는 싸늘하게 말했다.
"여기는 홍매산장이다. 우리의 소저께서 너를 구해 준 것이다.
배고프지 않느냐?"
말을 미친 그는 뜨거운 죽 한 그릇을 갖고 들어왔다. 장무기는
몇 모금 마셨으나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어지러워 더 이상 먹
지 못했다. 계속 여드레나 침상에 누워 있다가 그제서야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울 수가 있었다. 그러나 발밑이 둥둥 떠 있는 것
처럼 기력이 하나도 없었다. 이는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그 남자는 매일 그에게 밥을 갖다 주고
약을 바꿔 주었지만 몹시 귀찮아 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장무
기는 몹시 고맙게 생각했다. 이날도 그가 방풍과 남성 같은 약재
를 갖고 와서 절구에 찧고 있는 걸 보자 장무기는 참다 못해 한
마디 했다.
"아저씨, 그 약재들은 상처에 맞는 약제가 아닙니다. 죄송하지
만 몇 가지를 바꿔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 남자는 눈을 흘기면서 그를 한참 노려보더니 그제서야 말했
다.
"주인 나리께서 직접 처방하신 건데 틀릴 수가 있겠느냐? 이 약
이 만약 너의 상처에 맞지 않는다면 어떻게 지금과 같이 너를 사
릴 수가 있었겠느냐? 정말이지 어린 것이 엉뚱한 소리도 잘 하는
구나. 우리 마님께서 들으시면 설사 나무라지는 않더라도 얼마나
서운하시게 생각하겠느냐?"
라고 말하면서 약을 그의 상처에 발라 주었다. 장무기는 하는
수 없이 쓴웃음을 지었다. 사나이는 훈계하듯 한 마디 했다.
"내가 보기에 네 몸에 입은 상처가 많이 좋아진 것 같은데, 응
당 마님과 소저에게 가서 절을 올리고 생명을 구해 준 은혜에 진
심으로 감사를 해야 될 것 같다."
"그건 당연합니다. 아저씨 길을 좀 안내해 주시겠습니까?"
사나이는 그를 데리고 작은 방을 벗어나 긴 복도를 거쳐 다시
대청 두 곳을 지나서야 아담한 누각 앞에 도달했다. 이 때는 초
겨울로 접어들어 곤륜 일대는 벌써부터 날씨가 몹시 추웠다. 하
지만 누각 안에는 봄날처럼 따뜻했다. 어디서 군불을 지피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누각 안은 무척 휘황찬란하게 꾸며져 있고, 침
대, 의자 위에는 모두 비단으로 된 부드러운 보료와 방석이 놓여
있었다. 장무기는 평생 이처럼 부유하고 화려하며 안락한 거실을
본 적이 없었다. 자기는 누더기를 걸치고 있어 이 호화스런 누각
안의 분위기와는 너무나 대조적이라 창피하다는 생각마저 들었
다.
누각안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 남자는 몹시 공손한 표
정으로 몸을 굽혀 아뢰었다.
"그 개에게 물린 녀석이 많이 좋아져서, 마님과 소저께 고맙다
고 인사를 하러 왔습니다."
말이 끝나자 다시 몸을 꼿꼿하게 하고 서서 숨도 크게 쉬지 않
았다.
한참 후 병풍 뒤에서 십 오,육 세 정도 되는 소녀가 나오면서
장무기를 곁눈짓으로 한 번 훑어 보더니 말했다.
"교복(嬌福), 당신도 참 어쩌자고 그를 여기까지 데려왔죠? 그
의 몸에 있는 빈대와 이 같은 게 뛰어나오면 어떻게 하려는 거
죠?"
그러자 교복은 크게 당황하여 굽신거렸다.
장무기는 그렇지 않아도 거북스러워하고 있는 터에 소녀의 말을
듣자 창피해서 얼굴이 홍당무가 됐다. 그는 몸에 걸친 누더기 외
에는 갈아입을 옷이 없어 확실히 빈대와 이들이 많이 있을 것 같
았다. 그러니 소녀의 말에 뭐라고 반박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소녀의 얼굴은 거위알처럼 갸름하게 생겼고, 명주실 같은 검은
머리카락이 치렁치렁 어깨까지 늘어져 있었다. 몸에 입은 옷은
무슨 비단인지는 몰라도 반짝반짝 빛이 났다. 손목에는 금팔찌를
끼고 있었다. 이런 호화스런 차림을 한 소녀를 장무기는 여지껏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내심 생각했다.
'내가 개떼에게 공격당할 때 어렴풋이 여자의 호통소리를 들었
다. 저 교복 아저씨도 자기네 소저가 날 구해 주었다고 말했으
니, 난 당연히 소녀에게 절을 해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 된다.'
그는 곧 무릎을 꿇고 절을 하면서 말했다.
"소저께서 저를 구해 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평생 이 은혜를 잊
지 않을 것입니다."
소녀는 깜짝 놀라더니 곧이어 까르르 웃으며 호들갑을 떨듯 말
했다.
"교복, 당신이 저 미련한 녀석을 놀리셨군요? 그렇죠?"
교복은 헤벌쭉 웃으며 말했다.
"소봉(小鳳)낭자, 이 미련한 녀석이 낭자에게 절을 몇 번 한 것
이 뭐가 대수롭습니까? 이 미련한 녀석은 세상 물정이 어두워서
낭자를 보자 소저인 줄 알았던 것이오. 그것은 우리집에 있는 아
가씨의 몸종도 사실은 남의 집의 금지옥엽보다 더 존귀하게 보이
기 때문이 아니겠소?"
장무기는 깜짝 놀라 얼른 일어섰다.
'아차, 그녀는 몸종이었구나. 그녀를 소저인줄 착각했으니....'
순간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져 몹시 난감해 했다.
소봉은 킥킥 웃음을 참아가며 장무기의 아래위를 새삼스레 살펴
보았다. 그의 얼굴과 몸에 덕지덕지 묻어 있는 피와 먼지는 고사
하고, 뗏국물이 자르르 흐르는 누더기 하며 영락없는 거렁뱅이었
다. 게다가 상처 부위에는 헝겁으로 칭칭 감아져 있으니 장무기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몰골이 사나왔다. 생각 같아서는 차라리 쥐
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소봉은 소매를 들
어 올려 코를 막고 말했다.
"나리와 부인께서는 마침 볼 일이 있어 아니 계시니 절을 할 필
요가 없다. 그러니 소저나 뵈러 가라."
말을 하면서 장무기를 멀찌감치 돌아가더니 앞에서 길을 인도했
다. 행여나 그의 몸에 있는 빈대와 이들이 자기의 몸에 옳아올까
봐 겁을 내는 것 같았다. 한참을 가니 또 다른 호화스러운 대청
이 보였다. 대청 문루 위에는 영교영(靈교營)이란 세 글자가 새
겨진 현판이 걸려 있었다. 소봉이 안으로 들어가더니 잠시 후 다
시 나와 손짓하며 교복과 장무기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장무기는 대청안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깜짝 놀랐다. 삼 십여
마리나 되는 사나운 개떼가 세 줄로 나눠져 바닥에 쭈그리고 앉
아 있었고, 순백의 여우 털가죽을 입은 낭자가 호랑이 가죽으로
덮인 의자에 도도한 표정으로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그녀는 손
에 쥔 가죽채찍을 한 차례 떨치며 앙칼지게 호통쳤다.
"전장군(前將軍), 목덜미!"
그러자 맹견 한 마리가 즉시 몸을 날려서 벽 쪽에 서 있는 한
사람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소름이 오싹 끼치는 장면이었다.
장무기는 이처럼 잔인한 광경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짤막한 비
명을 질렀다. 그 개는 입에 고기덩어리를 하나 물고 땅에 쭈그린
채 맛있게 씹어 먹고 있었다. 장무기는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자
세히 보니 벽 쪽에 선 사람은 가죽으로 만든 가짜 사람이었고,
몸 군데군데 급소에는 고기덩어리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그
낭자는 다시 소리쳤다.
"차기장군(車騎將軍), 하복부!"
그러자 또 한 마리의 맹견이 쏜살같이 달려가 그 가짜 사람의
하복부를 물었다. 이 맹견들은 전부 고도의 훈련을 받아 그녀가
신호를 보내면 즉시 공격을 하며 무는 부위가 한치의 착오도 없
었다.
장무기는 순간 확연히 깨닫는 바가 있었다. 그날 산중에서 자기
를 마구 물어 댄 것은 바로 이 사나운 개들이었고, 나중에 어렴
풋이 들려온 그 여인의 호통소리도 바로 이 낭자였다. 그는 이
소저가 자기의 생명을 구해 준 줄만 알고 있었는데, 이제보니 그
반대로 자기가 그토록 많은 고통을 받은 것이 전부 그녀의 소행
임을 알았다.그러자 화가 치밀어 내심 생각했다.
'당장 혼쭐을 내주고 싶지만 사나운 개가 그녀 곁에 버티고 있
으니 어쩔 수가 없구나. 이럴 줄 알았다면 차라리 진작 야산에서
죽어 버렸지, 절대 그녀의 집에 와서 상처를 치료 받지는 않았을
걸.'
장무기는 즉시 상처를 동여맨 붕대를 풀어 발기발기 찢어 바닥
에 팽개치더니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교복이 소리쳤다.
"이봐! 왜 그러느냐? 이 분이 바로 고귀하신 우리의 아가씨다.
냉큼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리지 못하겠느냐?"
장무기는 성난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뭣 때문에 그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 합니까? 나를
이렇게 상처투성이로 만든 것도 바로 그녀가 키운 개의 소행이
아닙니까?"
푹신한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줄곧 장무기를 거들떠보지도 않던
소녀가 비로소 장무기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그가 씩씩대며
흥분해 있는 것을 보자 재미있다는 듯 가지런한 치아를 드러내
생긋이 웃었다.
"꼴에 오기는 있는 모양이군. 이리 가까이 와 봐라!"
그녀는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마치 자기가 키우고 있는 개를 부
르듯 명령투였다. 장무기의 강한 자존심을 짓뭉개는 언동이었다.
한데, 그녀의 얼굴을 마주 보는 순간 장무기는 그만 입이 딱 벌
어지며 넋을 잃고 말았다. 동시에 죄를 지은 사람처럼 가슴이 마
구 뛰었다. 백옥 같은 살결과 햇볕처럼 빛나는 눈동자, 오똑한
콧날은 상아를 정성스레 다듬어 놓은 것 같고, 불타는 듯한 앵두
빛 입술은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월궁의 선녀가 하범(下凡)한들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는 없다고 생각되었다.
장무기의 가슴에 걷잡을 수 없는 격랑이 일었다. 갑자기 등줄기
에 식은땀이 배어나고 정신이 어찔어찔했다. 그는 심장의 고동을
느끼며 크게 당황하여 얼른 고개를 숙였다. 한 순간이나마 실태
(失態)를 보인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그의 얼굴은 어느새
홍당무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소녀가 까르르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은쟁반에 옥구슬을 굴리
듯 청아했다.
"이리 가까이 오라는데, 내 말이 들리지 않는 모양이군."
장무기는 그녀를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다시
보지 않고는 못 견딜 것 같았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
의 눈방울을 보았다. 그리고 그 눈망울에 이끌려 자신의 뜻과는
관계없이 한 발 한 발 앞으로 빨려갔다.
소년은 여전히 입가에 매혹적인 미소를 띄우고 말했다.
"이봐, 나 때문에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군?"
졸지에 개떼한테 물려 온몸이 찢겨나가는 고통을 당했으니 화가
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장무기는 솔직하게 대
답할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향기로운 체취가
은은하게 풍겨왔다. 백합보다 더진한 그 향기에 장무기는 자신
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을 속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아닙니다."
소녀는 그를 주시하며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난 성이 주(朱)라고 하며 이름은 구진(九眞)인데, 그대의 이름
은 무엇이지?"
장무기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했다.
"장무기라 합니다."
"장무기라고.....? 이름은 제법 고상하군. 이름만 들으면 어느
명문의 자제분 같군. 자, 이리 앉아라."
이렇게 말하며 자기 앞쪽에 놓여 있는 의자를 발끝으로 가리켰
다. 장무기는 여지껏 살아오면서 이렇게 가슴이 설래어 본 적이
없었다. 상대방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는 순간부터 그는 완전히
자아를 상실한 노예로 변하고 있었다. 지금 심정 같아선 주구진
이 자기에게 불구덩이에 뛰어들어가라 해도 전혀 주저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하물며 그녀가 자기에게 바로 옆에 앉으라고 하자 그
기쁨을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다. 즉시 공손하게 앉았다. 소봉과
교복은 아가씨가 이 더럽고 냄새나는 녀석을 전혀 개의치 않고
옆에 앉히자 너무 뜻밖이라고 생각했다.
주구진은 다시 교성으로 개떼를 향해 호통쳤다.
"절충장군(折衝將軍), 명치!"
그러자 큰 개 한 마리가 몸을 날려 그 가짜 사람에게 덮쳐 갔
다. 그러나 그 가짜 사람의 명치에 걸어두었던 고기덩어리는 이
미 다른 개가 물어갔다. 그러자 그 개는 즉시 겨드랑이 밑에 있
는 고기덩어리를 떼어내 먹기 시작했다. 주구진은 화를 내며 소
리쳤다.
"이런 미련한 놈 같으니라고! 네놈은 말을 듣지 않을 거냐?"
그녀는 즉시 앞으로 다가가더니 채찍으로 맹견을 후려쳤다. 그
녀의 채찍에는 작은 가시가 많이 돋아 있어 채찍이 가해진 곳은
이내 시뻘건 핏자국이 나타났다. 그래도 그 맹견은 입에 물고있
는 고기덩어리를 놓지 않고 오히려 으르릉 대며 대들었다.
주구진의 눈에 한광이 번뜩였다.
"말을 듣지 않겠다 이거지!?"
말을 내뱉기 무섭게 맹견을 향해 닥치는 대로 채찍질을 가하자
그 맹견은 바닥에서 데굴데굴 구르며 삽시간에 온몸이 핏투성이
가 됐다. 그녀가 채찍질을 가하는 수법은 정확하고 신속해 그 맹
견이 어느 방향으로 도망가든 시종일관 채찍을 피하지 못했다.
결국 그 맹견은 고기덩어리를 토해 내고 바닥에 축 늘어져 움직
이지 않고 단지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으르릉 댔다. 그러나 주구
진은 여전히 쉬지 않고 마구 후려쳤다. 그러는 그녀의 얼굴에는
짜릿한 흥분마저 감돌았다. 그 개가 숨이 깔닥거리게 되자 그녀
는 비로소 채찍을 거두었다.
"교복, 끌고 가서 약을 발라 줘라!"
"네, 소저."
하고 대답하고 나서 교복은 그 만신창이가 된 맹견을 안고 밖으
로 나가 개를 키우는 사육사에게 넘겨줬다.
개들은 이같은 광경을 보자 모두 무서운 것을 아는지 납작 엎드
려 꼼짝도 하지 않았다.
주구진은 다시 의자에 앉았다.
"평구장군(平寇將軍), 좌퇴! 위원장군(威遠將軍), 오른팔! 정동
장군(征東將軍), 눈!"
그러자 맹견들은 명령이 떨어질 때마다 한 마리씩 덮쳐갔는데,
전혀 한 치의 착오없이 주구진이 원하는 부위를 물었다. 그녀가
키우는 이 수십 마리나 되는 맹견들은 모두 장군의 봉호가 붙어
져 있으며 그녀가 총지휘를 하고 있으니, 당연히 그녀 자신은 대
원수(大元帥)가 되는 셈이다.
주구진은 고개를 돌려 장무기에게 웃으며 말했다.
"그대는 저 짐승들이 불쌍하게 보이겠지만, 채찍질을 심하게 하
지 않으면 말을 듣지 않는다."
장무기는 비록 개떼에게 고통을 많이 당했지만 그 개가 맞아 비
참한 꼴을 보니 몹시 안쓰럽게 생각되었다. 주구진은 그가 말을
하지 않는 걸 보자 다시 웃으며 말했다.
"그대는 분명 나에게 화를 내지 않는다고 했는데, 어찌 내가 묻
는 말에 고분고분 대답을 하지 않느냐? 어떻게 해서 서역(西域)
까지 오게 됐으며 부모님은 어디 계시지?"
장무기는 이런 꼴로 사부와 부모의 이름을 밝히고 싶지 않았다.
"나의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셨기 때문에 혼자 중원에 몸담고 있
다가 어려워, 발길 가는대로 유랑생활을 하다 보니 여기까지 오
게 된 것이오."
주구진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화살을 맞힌 그 원숭이를 무엇 때문에 몰래 품속에 숨기
려 했느냐? 너무 굶주려 원숭이 고기라도 먹으려 했느냐? 배를
채우기 위해 하마터면 나의 개한테 찢겨 죽을 뻔 한 줄은 모르는
구나."
장무기는 얼굴을 붉히고 연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원숭이 고기를 먹으려 한 게 아닙니다."
주구진은 귀엽게 웃으며 말했다.
"감히 내 앞에서 사실을 부인하려 들지 마라!"
그녀는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물었다.
"혹시 무슨 무공을 배웠느냐? 일 장으로 나의 <좌장군>의 머리
통을 부셔 죽여 버렸으니 장력이 대단하더구나."
장무기는 자기가 그녀의 애견을 때려죽였다는 말을 듣자 왠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 때 경황이 없어 출수가 너무 지나쳤던 것 같습니다. 나는
어려서 아버님에게 건성으로 이삼 년간 권법을 배웠을 뿐 아무
무공도 할 줄 모릅니다."
주구진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소봉에게 말했다.
"데려가서 목욕을 시키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혀라!"
그러자 소봉은 입을 삐쭉거려 웃으며 대답하고 나서 그를 데리
고 밖으로 나갔다. 장무기는 왠지 섭섭해 문앞에 이르자 고개를
뒤로 돌려 그녀를 다시 한 번 쳐다보았는데, 주구진도 마침 자기
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바람에 장무기는 마치 도둑질을 하다 들
킨 사람처럼 크게 당황하여 몸둘 바를 모르다가 공교롭게도 문지
방에 걸려 그만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는 온몸이 상처투성인데다
이처럼 졸지에 넘어지게 되자 모든 상처 부위에서 한꺼번에 아픔
이 무너져왔다. 그래도 감히 소리를 지르지 못하고 얼른 몸을 일
으켜 세웠다. 그러자 소봉이 킬킬 웃으며 말했다.
"우리 아가씨를 보게 되면 누구나 넋을 잃고 멍청해진다. 그런
데 넌 아직 어린 것이 벌써부터..... 호홋.....!"
장무기는 몹시 난처해져 얼른 걸음을 떼어놓아 앞장서 갔다. 잠
시 후 소봉은 웃으며 말했다.
"부인의 방으로 들어가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을 작정이나?"
장무기는 얼른 걸음을 멈추고 앞쪽을 보니 금실로 수놓은 문발
이 걸려 있었고,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는 곳이었다. 그제서야
자기가 엉겁결에 길을 잘못 들어섰다는 것을 알았다. 장무기는
당황하여 얼굴을 붉히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소봉이 짓궂게 말했다.
"어서 나에게 "소봉 누나"라고 한 번 부르고 "제발 부탁합니다"
라고 해야지만 이곳에서 데리고 나가겠다!"
당장 이 난처한 상황에서 벗어나자면 무기로선 어쩔 도리가 없
었다.
"소봉 누나....."
그러자 소봉은 오른손 식지로 자기의 턱을 받치고 의젓하게 말
했다.
"오냐. 뭣 때문에 나를 부르느냐?"
"제발 부탁합니다. 절 데리고 나가 주십시오."
소봉은 득의양양하게 웃으며 말했다.
"진작 그래야지."
하며 그를 데리고 뜨락 밖으로 다시 나가며 교복에게 말했다.
"소저의 분부가 계시니, 그에게 목욕을 시켜 주고 깨끗한 옷으
로 갈아 입혀요."
"네, 네."
교복은 매우 공손하게 대답했다. 소봉은 비록 하인이지만 다른
하인들보다 신분이 높은 것 같았다. 대여섯 명의 남자 하인들이
한꺼번에 다가와서 소봉을 떠받들어 모셨다. 그러나 소봉은 본
체 만 체하고 엉뚱하게도 갑자기 장무기에게 포권의 예를 취했
다. 그녀의 별난 행동에 장무기는 어리둥절 했다.
"왜..... 이러십니까?"
소봉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아까 네가 나에게 절을 했으니 지금 그 답례를 하는 거다."
하고 말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교복은 장무기가 소봉을 아가씨로 착각하고 그녀에게 무릎을 꿇
고 절을 한 일을 살을 붙여 과장되게 늘어놓자, 하인들은 배꼽을
잡고 크게 웃었다. 장무기는 화를 내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오직 주구진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화사한 웃음, 고고한자태, 그녀의 일거수 일투족이 주마등처
럼 뇌리에 맴돌았다.
목욕을 서둘러 끝내고 나니 교복이 그가 갈아입을 옷을 갖고 들
어왔다. 뜻밖에도 그건 하인들의 옷이었다. 어이가 없는 장무기
는 눈살을 찌푸렸다.
"난 이 집의 하인도 아닌데, 어찌 나더러 이런 의상을 입으라
하는 거요?"
하며 자기가 원래 입던 헌 옷을 다시 입고 보니 여기저기 구멍
이 나 있어 속살이 다 보였다.
'잠시 후 아가씨가 다시 날 불러 내가 여전히 이 더럽고 낡은
옷을 입고 있는 걸 보면 필시 기분이 언짢을 거야. 설령 내가 그
녀의 하인이 된다 해도 곁에만 있을 수 있다면.....'
막상 이렇게 생각하자 그는 거침없이 하인의 옷으로 갈아 입었
다.
그러나 그날은 주구진이 그를 부르지 않았다. 그 후 계속해서
십여 일 동안 소봉마저도 한 번 만나 보지 못했으니 아가씨는 말
할 것도 없었다. 장무기는 얼빠진 사람처럼 오직 아가씨의 음성
과 웃는 모습만 생각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후원으로
달려가 멀리서나마 그녀를 한 번 보고 싶었다. 그러나 교복은 여
러 번 당부하길, 주인이 부르지 않으면 절대 중문(中門) 안으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필시 맹견에게 다시
물릴 것이라 경고했다. 장무기는 비록 아가씨 생각이 간절했으나
개떼에게 물려 고생했던 생각을 하니 감히 후원으로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다시 한 달쯤 지나자 그의 팔은 예전처럼 완쾌되고 개떼에게 물
린 상처도 모두 아물었다. 하지만 팔과 다리에 평생 지울 수 없
는 이빨 자국이 몇 개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동안 그의 몸에
응결돼 있는 한독이 여전히 며칠마다 한 번씩 발작했다. 매번 발
작할 때마다 고통이 전보다 더욱 심해졌다.
이날도 한독이 다시 발작되었다. 그는 침상에 누워 솜이불을 푹
덮고 있으면서도 온몸이 오돌오돌 떨렸다. 이때 교복이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장무기의 이러한 모습을 많이 보아와서 별로 이
상하게 여기지 않으며 태연하게 말했다.
"잠시 후 오한이 좀 가라앉게 되면 랍팔죽(臘八粥)을 좀 먹어
라. 이건 부인께서 너에게 설에 입으라고 주신 새 옷이다."
하고 말을 하며 보따리 하나를 상에 올려놓았다.
장무기는 밤새도록 오한에 시달리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한독의
침습이 천천히 감소되었다. 침상에서 일어나 봇짐을 풀어 보니,
새로 재봉한 가죽옷 한벌이 가지런히 접어진 채 들어 있었다.
그는 몹시 기뻤다. 그러나 그 가죽옷도 역시 하인의 옷처럼 만들
어진 것을 확인하자 시무룩해졌다. 이제 주가(朱家)의 하인으로
인정하는 것 같았다. 장무기는 성격이 온화하고 체념이 빨라 별
로 후회하지는 않았다.
'벌써 여기에서 한 달도 넘게 머무르다 보니 어느새 한 해가 저
물고 설날이 돌아왔구나, 호 선생님은 내가 일 년 밖에 살 수 없
다고 했으니, 이번 설이 지나면 다시는 설날을 맞이하지 못할 것
이다.'
부유한 집일수록 세모가 다가오면 한층 더 즐거운 분위기에 휩
싸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하인들은 분주하게 벽과 대문에 칠을
새로 단장하고 돼지도 잡고 닭도 잡으면서 모두들 즐거워했다.
장무기는 교복을 도와 잡일을 거들며 오직 초하루가 빨리 왔으면
하는 바램뿐이었다. 새해 첫날 필시 어르신네와 부인, 아가씨에
게 세배를 드리게 될 것이니, 자연스럽게 소저를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오매불망해 온 아가씨를 한 번만 더 뵐 수 있다
면 자기는 조용히 멀리 떠나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손수 죽을
자리를 마련할 생각이었다.
드디어 폭죽소리가 요란하게 터지는 가운데 기대했던 설날이 되
었다. 장무기는 교복을 따라 대청으로 가서 주인에게 세배를 드
렸다. 대청 한가운데는 한 상의 중년 부부가 앉아 있었으며 칠,
팔십 명이나 되는 하인들은 모두 바닥에 꿇어 앉아 있었다. 그들
부부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여러분들 모두 수고했소."
그러자 옆에 있던 청지기 두 명이 세배돈을 나누어 주었다. 장
무기도 은자 두 냥을 받았다. 그는 아가씨가 보이지 앉자 몹시
실망했다. 그는 은자를 쥐고 멍하니 있는데 갑자기 밖에서 요염
한 음성이 들려왔다.
"오빠, 올해는 꽤 일찍 오셨군요."
바로 장무기가 학수고대했던 주구진의 소리였다. 곧이어 남자의
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외삼촌, 외숙모에게 세배 드리려면 감히 늦게 올 수 있느냐?"
다시 한 여인이 까르르 웃으며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형이 이렇게 일찍 달려온 건 두 분 존장께 세배를 드리려는
것인지, 아니면 사촌 여동생이 보고 싶어서 안달이 났기 때문인
지 모르겠군요."
곧이어 대청안으로 세 사람이 들어왔다. 그러자 하인들은 급히
옆으로 비켜섰으나 장무기는 넋이 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서서 움
직이지 않았다. 교복이 황급히 그를잡아끌자 그제서야 옆으로
물러섰다.
대청안으로 들어온 세 사람 중 가운데 있는 자는 젊은 청년이었
다. 주구진은 왼쪽에서 걸어 들어왔는데, 진한 붉은색 초피(돼지
가죽)옷을 입고 있어 더욱 화사하게 보였다. 그 청년이 다른 한
쪽도 낭자였다. 주구진이 대청에 들어설 때부터 장무기의 눈빛은
한순간도 그녀의 얼굴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두 젊
은 남녀의 얼굴이 잘 생겼는지 못 생겼는지, 빨간 옷을 입었는지
노란 옷을 입었는지 알 턱이 없었다. 그 두 사람이 주인 부부에
게 어떻게 세배드리고 주객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도 그는 전혀
보지도 듣지도 않고 오로지 주구진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주인 부부는 세 젊은이하고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부인이 자상
하게 웃으며 딸애에게 말했다.
"진아, 무가(武家) 매자(妹子)를 잘 돌봐 주어라. 너희 세 사람
은 정월 초하루부터 입씨름을 해서는 안 된다."
세 젊은 남녀는 담소를 나누면서 후원을 향해 갔다. 그러자 장
무기는 자신도 모르게 멀리 떨어져 뒤를 따라갔다. 이날만은 하
인이 저마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누구도 그를 간
섭하는 사람이 없었다. 장무기는이제서야 그 남자의 용모가 준
수하며 키도 훤칠하다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비록 혹독한
겨울 날씨였지만 황색 비단도포를 입고 있는 것을 보면 내공이
심후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낭자는 검은 호피 가죽으로 된
옷을 입고 있었다. 몸매가 몹시 날씬했으며, 말씨와 일거일동 또
한 세련돼 보였다. 용모의 아름다움을 따진다면 주구진과 별차이
는 없었지만 장무기의 눈으로 볼 때는 아가씨보다는 훨씬 못했
다. 세 사람은 모두 십 칠, 팔세 정도의 나이였다.
세 사람은 재미있는 얘기를 하며 후원으로 곧장 갔다.그 낭자
가 말했다.
"진 언니, 지금쯤 일양지(一陽指)의 무공이 한층 더 심오한 단
계로 연성했을 거예요. 그러니 한 수 보여 주시겠어요?"
"아이구, 날 놀리고 있는 거냐? 설사 내가 십 년을 더 연마한다
해도, 그대 무가(武家)의 난화불혈수(蘭花拂血手)의 일부(一扶)
도 따르지 못할 텐데."
그 청년이 웃으며 말했다.
"둘 다 너무 겸손하군. 이름도 거룩한 <설령쌍매(雪嶺雙妹)>가
서로 추켜세우며 겸손해 하니 어울리지가 않아."
주구진은 눈을 곱게 흘기며 말했다.
"난 혼자 집에서 죽어라 하고 연마해도 절대로두 분 사형, 사
매가 서로 도와주며 연마하는 것에 따라갈 수 없잖아요?"
그 낭자는 주구진의 말 속에 은연히 시기하는 의미가 담겨 있는
걸 느껴 입을 삐쭉거리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는 그녀 자신도
시인한다는 것이다.
그 청년은 주구진이 화를 낼까 봐 얼른 말했다.
"그렇지만도 않지. 진매는 외숙부님과 외숙모님, 훌륭한 두 사
부님이 계시니 우리보다 유리할 텐데."
주구진이 이내 토라졌다.
"우리, 우리! 계속 우리라는 걸 강조하는군요! 사매니까 당연히
사촌동생보다 친하시겠죠. 난 청매에게 농담으로 얘기한 건데 오
빠는 자꾸만 그녀의 편만 들고 있군요."
하고 말을 하며 고개를 획 돌리면서 그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러자 청년은 억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사촌동생과 친하면 사매하고도 친하기 마련이지. 손바닥이 살
이면 손등도 살이잖소? 그러니 나로서는 절대 편견을 두지 않소.
날 구장(狗場)으로 안내해 수문대장군들을 보여 줄 수 없겠소?
여러 장군들이 그동안 더욱 사나워졌을 텐데."
그러자 주구진은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들을 데리고
영교영으로 갔다.
장무기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세 사람이 얘기하고 웃는 모습
만 보았을 뿐 무슨 말을 했는지는 듣지 못하고, 즉시 뒤따라 구
장으로 들어갔다.
주구진은 본시 주자유(朱子柳)의 후인이다. 그 무(武)가 소녀는
이름이 무청영(武靑瓔)이고, 무삼통(武三通)의 후인이며 무수문
(武修文) 계파에 속한다. 무삼통과 주자유는 모두 일등대사(一등
大師)의 제자이며 같은 무공을 지녔었다. 그러나 백여 년 동안
몇 대를 거쳐 전해 내려오는 동안 두 집안의 무공이 점차 변화가
온 것이다. 무돈유(武敦儒), 무수문 형제는 대협 곽정(大俠郭靖)
을 사부로 모셨고, 비록 <일양지>를 배웠으나 무공은 구지신개홍
칠공(九指神改洪七公)의 강맹함에 접해 있었다. 그 청년 위벽(衛
壁)은 주구진의 사촌오빠이며 용모가 준수하고 성격 또한 온순하
여 주구진과 무청영은 가슴을 설레이며 은근히 그를 사모하고 있
었다.
주,무 두낭자는 연령이 비슷하고 모두 미모를 갖춘데다가 가전
무학 또한 막상막하라서, 이삼 년 전에 이미 곤륜 일대 무림 사
람들로부터 <설령쌍매>라 일컬어져 왔다.
주구진은 개를 사육하는 하인에게 명하여 맹견을 모두 풀어 주
라 했다. 개들은 모두 명령에 따라 움직였고 한 마리도 복종하지
않는 놈이 없었다. 위벽은 쉴새없이 칭찬을 하자 주구진은 몹시
기분이 좋았다. 무청영은 입을 삐죽거리고 웃으며 말했다.
"사형, 사형은 장래 <장군>이 될 건가요? <졸병>이 될 건가요?"
위벽은 영문을 몰라 멍해졌다. 그러자 무청영이 설명하였다.
"사형이 진 언니의 말을 그토록 잘 들으니, 진 언니는 틀림없이
사형에게 <대장군> 혹은 <선봉장군> 같은 봉호를 하사할 거예요.
하지만 그녀의 채찍은 조심하야 해요."
위벽은 얼굴을 붉히며 미간에 화난 기생이 띄어졌다.
"그게 무슨 허튼소리야? 사매는 나를 개로 취급하는 건가?"
무청영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러 장군들이 미인을 가까이 모시고 꼬리를 흔들며 재롱을 부
리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어요? 그런데 뭐가 못마땅하죠?"
주구진이 눈을 흘겼다.
"오빠가 만약 개라면, 그의 사매는 뭔지 모르겠군."
장무기는 그 말을 듣자 참지 못해 픽 하며 웃어 버렸다. 순간
자신이 경솔했다는 걸 알고 급히 손으로 입을 막고 물러섰다.
무청영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그러나 주구진에게 직접
화를 낼 수 없어 엉뚱한 사람에게 화살을 돌렸다.
"주 언니네 집안의 하인은 법도가 대단하군요. 우리가 이야기하
는 걸 하인녀석이 몰래 엿듣고 킬킬거리며 웃으니 말이예요. 사
형, 난 먼저 집에 가겠어요."
주구진은 무기가 자기의 좌장군을 일격에 때려 죽인 일을 생각
해 내고 웃으며 말했다.
"무사매, 그렇게 화낼 건 없잖아. 물론 저 하인을 무시할 순 없
지만 너희 무가의 무공이 아무리 고강하다 해도 삼 초식 이내에
저 천박한 녀석을 쓰러뜨릴 수는 없을 거야. 그렇지 않다면 내가
무사매를 언니로 모시겠어."
"흥, 저런 녀석하고 겨루란 말이예요? 주 언니, 정말 그렇게 나
를 무시할 건가요? 차라리 개를 상대하는 게 낫겠어요!"
장무기는 참다못해 소리쳤다.
"무 아가씨, 나도 부모가 있어 태어난 사람인데 개와 비교하다
뇨?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사람이 아니라 신선이나 보살이라도
된단 말이오?"
무청영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위벽에게 말했다.
"사형, 내가 저런 하인녀석한테 수모를 당하고 있는데 도와주실
생각도 않는 거예요?"
위벽은 그녀의 애교어린 모습을 보자 마음이 약해졌다. 그는 이
설령쌍매 중 누구를 더 좋아하는지 생각해 본 적은 없었으나 무
사매의 아버지로부터 무공을 배우려면 사매의 환심을 사놓지 않
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는 즉시 웃으며 주구진에게 말했다.
"동생, 이 하인의 무공이 상당하다는데 내가 한 번 시험해 봐도
괜찮겠나?"
주구진은 그가 사매를 도와주려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
녀는 즉시 생각했다.
'이 장가라는 녀석이 어떤 내력을 지녔는지 알 수가 없으니, 오
빠를 시켜 그의 내력을 알아내는 것도 괜찮은 일이지.'
그녀는 대답했다.
"좋아요. 그에게 무가의 절학을 가르쳐 준다는데 나쁠 게 없죠.
그에 대해선 나도 어느 문파의 제자인지 모르고 있어요."
주구진이 무기에게 말했다.
"오빠한테 너의 사부가 누구고 어느 문파인지 말해라."
장무기는 속으로 생각했다.
'너희들이 이처럼 나를 경시하는데 내 어찌 부모의 문파를 말해
태사부와 부모들을 욕되게 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나는 무당파
의 무공을 제대로 배우지도 않았잖은가.'
무기가 말했다.
"나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강호를 유랑했소. 무공이라는 걸 배
운 적도 없습니다. 그저 어릴 적에 아버지로부터 조금 배운 것이
전부요."
주구진이 물었다.
"아버지의 이름은 무엇이지? 그리고 어떤 문파의 제자지?"
"그건 말할 수 없소."
위벽이 여유있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세 사람의 안목이면 그 정도는 알아낼 수 있지."
그는 천천히 걸어 나가며 말했다.
"꼬마야, 내 삼 초식을 받아 보아라!"
그는 말과 동시에 무청영을 항해 슬쩍 눈짓을 했다. 이 꼬마를
실컷 두들겨서 속시원하게 해주겠다는 뜻이었다. 사랑에 빠진 이
두 여자는 위벽의 말 한 마디와 행동 하나, 얼굴을 찌푸리는 것
과 웃는 것에까지도 신경을 쓰고 있었다. 위벽이 무청영에게 하
는 눈짓의 뜻을 주구진이 놓칠 리가 없었다. 그녀는 은근히 오기
가 생겨 무기를 손짓해 불렀다. 무기가 가까이 오자 그녀는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저 오빠의 무공은 아주 강하다. 이길 생각은 하지 말고 그의
공격을 세 번 받아 내기만 해. 그러면 내 체면을 세울 수 있어."
그녀는 무기의 어깨를 툭 쳤다.
무기는 자신이 위벽의 적수가 못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대결하지 않고 물러선다면 그들을 기분좋게 해줄 것이다.
그는 주구진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황홀해서 멍청해질 지경이었는
데, 그녀가 향긋한 체취를 풍기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이자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아가씨가 부탁하는 것은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목숨을 걸고
해내야 한다. 몇 대 정도야 죽지 않겠지.'
그는 위벽의 앞으로 나아가 멍청히 섰다.
위벽이 웃으며 말했다.
"꼬마야, 나의 초식을 받아 봐라!"
그 즉시 찰싹 하는 소리와 함께 무기는 따귀를 얻어 맞았다. 그
의 공격은 극히 빨라 무기가 대항하려 했으나 때는 이미 늦고 말
았다. 퉁퉁 부어오른 그의 볼에는 붉은 손자국이 선명하게 났다.
위벽은 무기가 주가의 비전무공을 배우지 않았다는 것을 알자 사
정없이 공격을 했다. 무기가 주가의 무공을 배웠다면 위벽은 외
삼촌과 외숙모의 체면을 생각해야 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내력을 크게 쓰지는 않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무기
의 이빨은 모두 부러졌을 것이다.
주구진이 소리쳤다.
"어서 반격을 해!"
무기는 아가씨의 외침소리를 듣자 정신이 번쩍 났다. 그는 힘차
게 일권을 쳐냈다. 위벽은 옆으로 슬쩍 피하며 놀려 댔다.
"꼬마가 제법이군!"
그는 무기의 등 뒤로 잽싸게 돌아갔다. 무기도 급히 몸을 돌렸
으나 위벽의 출수가 번개같이 빨랐다. 그는 무기의 목덜미를 잡
아 팔에 힘을 주어 들어올렸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무기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무기는 사손으로 부터 수년 동안 무공을 배웠으나, 그 때는 나
이가 어렸고 주로 구결을 배웠으므로 실전 경험이 없었다. 그런
그가 명문제자인 위벽과 겨룬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깨는 격
이었다. 무기는 손발을 허우적거리며 몸을 지탱하려 했으나 도무
지 중심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는 머리와 코를 땅바닥에 부딪치
며 곤두박질쳤다. 얼굴에서 이내 피가 흘러내렸다.
무청영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진 언니, 우리 무가의 무공이 어때요?"
주구진은 창피하고 분했다. 무가의 무공을 무시했다가는 위벽의
기분을 상하게 할 것 같았고 치켜올려 주자니 무청영의 콧대만
높여주는 결과가 될 것 같아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기는 엉금엉금 기어 일어나 주구진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얼
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내 목숨을 잃는 한이 있어도 아가씨의 체면을 세워야지.'
무기가 속으로 마음을 다지는데 위벽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동생, 이 꼬마는 무공을 하나도 모르잖아? 그런데 무슨 놈의
문파가 있겠어?"
이 순간 무기는 매섭게 돌진하며 발을 날려 냅다 위벽의 아랫배
를 걷어찼다.
"어림없다!"
위벽은 몸을 슬쩍 뒤로 젖히며 무기의 오른발을 왼손으로 끌어
잡고 옆으로 팽개쳤다. 그 즉시 무기는 벽 쪽으로 날아가 등이
벽에 쾅! 하고 부딪쳤다. 다행히 머리가 부딪쳐 두개골이 부서지
는 화는 가까스로 면했다. 그러나 부딪치는 순간에는 뼈마디가
으스러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무기는 다시 엉금엉금 기어 일
어났다. 그는 몸이 부서지는 듯이 아팠으나 그 와중에도 주구진
의 안색을 살폈다. 눈앞이 흐려서 잘 보이지는 않았으나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하인은 하나도 쓸모가 없군. 우리 화원에 가서 놀아요."
실망한 듯이 내뱉은 주구진의 말을 듣는 순간, 무기는 자신도
알 수 없는 힘이 몸에서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그는 질풍처럼
앞으로 나아가며 위벽을 향해 일장을 펼쳤다. 위벽은 껄껄 웃으
며 무기의 일장을 맞받아 쳤다. 그러나 팍! 하는 소리와 함께 위
벽의 몸이 비칠 뒤로 한 발자국 밀려났다.
무기의 이 일장은 왕년에 뗏목에서 부친 장취산으로부터 전수받
은 무당장권 가운데 칠성수(七星手)란 초식이었다. 무당장권(武
當掌拳)은 무당파의 입문 무공으로 권법의 초식으로 말하면 오묘
한 점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무당파의 무공은 다른 문파의 무
공과는 다른 면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이기고 약한 힘으로 센 힘을 이기는 수법이었다. 자기의 센 힘으
로 적을 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적의 경력(勁力)을 되돌려 쳐
서 상대를 이기는 방법이었다. 상대가 한 근의 힘으로 쳐오면 되
돌아가는 것도 한 근이고 백 근으로 쳐오면 되돌아 치는 반탄지
력도 백 근이었다.
이러한 수법은 옛날 각원대사가 읊은 구양진경 가운데 이유극강
(以柔克剛)의 원리를 장삼봉이 무당권법에 도입한 것이었다. 따
라서 송원교, 유연주 등의 고수는 상대의 강력한 힘에 자신의 강
력한 힘을 얹어 공격할 수 있으므로 대단한 효과를 얻게 되었다.
무기는 무당의 무공을 거의 배우지 않다시피 했지만 자기도 모르
는 사이에 이 상승무공을 펼쳐냈던 것이다.
위벽은 심한 충격에 손과 팔이 마비되고 가슴의 기혈이 끓어올
랐다. 그는 즉시 몸을 옆으로 비키며 주먹을 휘둘러 무기의 등을
쳤다. 무기는 손을 뒤로 돌리며 일조편(一條鞭)의 초식으로 응수
했다. 위벽은 그의 장세가 기이한 것을 보자 급히 옆으로 비켜섰
다. 그러나 그의 어깨는 이미 무기의 세 손가락에 쓸려 대단한
통증을 느꼈다. 주구진과 무청영이 지켜보는 앞에서 위벽은 산
수 당한 꼴이 되었다.
위벽으로선 그를 좋아하는 여자들 앞에서 이처럼 창피를 당할
수는 없었다. 그는 무기가 나이도 어리고 신분도 미천하므로 싸
워서 이긴다 해도 자랑스러울 게 없다고 생각하고 장난 삼아 무
기를 데리고 놀 생각이었다. 그것으로 무청영을 기분좋게 해주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약간의 공력만을 사용했다. 그
런데 두 차례나 창피를 당하자 그는 화가 나서 소리쳤다.
"이 녀석이 죽기로 작정한 모양이구나!"
그는 소리치며 무기의 가슴을 향해 일권을 뻗어냈다. 이 초식을
장강삼첩랑(長江三疊浪)으로 세 갈래의 장력을 연달아 뿜어내는
무공이었다. 먼저 한 차례 힘이 나간 뒤 이어 두 번째 경력이 밀
려나가고 마지막으로 강력한 힘이 거센 파도처럼 밀려나가는 초
식이었다. 무학의 고수가 아니면 죽거나 중상을 입게 마련인 무
서운 무공이었다.
무기는 상대의 초식이 사나운 것을 보자 덜컥 겁이 났으나 더
이상 생각할 겨를도 없이 부친에게서 배운 정란(井欄) 초식으로
맞받아쳤다. 이 일초는 극히 심오한 무공이었으므로 사실 무기가
그것을 제대로 알 턱이 없었다. 그러나 워낙 다급한 상황이었으
므로 반사적으로 펼쳐냈다. 그런데 위벽의 강력한 일권이 무기의
몸에 닿는 순간 넓은 바다에 빠진 듯이 아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위벽이 깜짝 놀라는 순간 그가 쳐낸 두 번째의 장력이 무서운
기세로 반탄되어 되돌아와 그의 오른팔을 쳤다. 뿌드득 하는 소
리와 함께 그의 팔뼈가 부러졌다. 다행히 위벽은 세 번째 경력을
발출하지 않았다. 이 경력까지 발출했다면 무기도 잘 모르는 정
란 초식으로 인해 두 사람은 중상을 입었을 것이다.
주구진과 무청영은 놀라 일제히 소리치며 위벽에게 달려가 그의
상처를 살폈다. 위벽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내가 잠시 실수한 탓이야."
주구진과 무청영은 그가 상처를 입자 가슴이 찢어지는 듯이 아
팠다. 둘은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팔을 휘두르며 장무기에게 덮
쳐갔다. 무기는 일초로 위벽의 팔을 부러뜨렸지만 그 자신도 넘
어져 막 일어나려는 참이었다. 한데 채 일어서지도 못한 상태에
서 두 낭자의 공격을 받아야 했다. 무기는 결국 피할 엄두도 내
지 못한 채 가슴과 어깨에 쌍장을 맞았다. 그 즉시 선혈을 토해
냈다. 그의 마음은 분함과 슬픔으로 범벅돼 상처로부터 우러나오
는 고통이 문제가 아니었다.
'내 너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워 체면을 지켜주려 했는데, 겨우
이겨 놓으니까 나를 치다니!'
위벽이 외쳤다.
"내게 맡겨라!"
두 낭자는 손을 멈추었다. 위벽은 시퍼런 얼굴로 무기를 향해
왼손바닥을 밀어쳤다. 무기는 잽싸게 옆으로 피했다.
주구진이 소리쳤다.
"오빠, 상처를 입은 몸으로 이런 꼬마와 다툴 필요가 있나요?
내가 잘못 생각했어요. 이제 그만해요!"
거만한 성품의 그녀가 남한테 잘못했다고 머리를 숙인다는건 대
단한 한 일이었다. 눈앞에서 위벽이 큰 부상을 입지 않았다면 아
무리 다급하다 해도 이렇게까지 수그러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러나 위벽으로서는 그녀의 말이 더욱 그를 화나게 만들었다. 그
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진매, 저 꼬마는 무공이 아주 고강해. 진매가 잘못 판단한 것
은 아니야. 다만 내가 승복할 수 없을 뿐이야."
그는 주구진을 옆으로 밀어내며 다시 무기에게 일권을 쳤다. 무
기는 뒤로 물러나려 했다. 그런데 뒤에 있는 무청영이 무기의 등
을 향해 쌍장을 펼쳐 냈다. 그 순간 위벽의 주먹이 무기의 콧등
을 쳤다. 금새 코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무청영은 주구진보다 심
기가 훨씬 깊었다. 그녀는 은근히 사형을 도와 체면을 세워 주어
마음 속으로 감복케 하려 했던 것이다.
이를눈치챈 주구진은 내심 못마땅했다.
'네가 사형을 도우는데 나라고 오빠를 돕지 못하겠어!'
그녀는 즉시 출수하여 위벽과 함께 무기를 협공했다. 장무기는
삽시간에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는 다시 몇 모금의 선혈을 토해
내며 머리끝까지 화가 치민 나머지 죽음을 무릅쓰며 부친이 가르
쳐 준 삼십 이 세(勢)의 무당장권을 펼쳐냈다. 그러나 공력이 부
족한 탓에 주먹과 다리를 아무리 휘둘러도 위력이 없었다. 다만
상승무공인 덕분에 쓰러지지 않고 간신히 버텨 나갔다.
주구진이 호통을 쳤다.
"어디서 굴러온 놈이 감히상전한테 이토록 무례하게 구는 거
냐!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순간 위벽이 왼손으로 무기의 왼쪽 어깨를 거칠게 쳤다. 위벽은
부러진 팔의 통증이 극렬한데다 이 꼬마와 더 이상 실랑이를 하
고 싶지 않았으므로 이 일장에 그를 죽일 작정이었다. 무기의 몸
은 무청영의 장력에 밀려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는데 사나운 경풍
이 얼굴을 쳐왔다. 그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어 두 팔을 들어올려 막았다.
이때 갑자기 위엄있는 호통소리가 들렸다.
"멈춰라!"
그리고 그림자가 번뜩 하더니 누군가가 옆에서 날아들어와 위벽
의 장력을 밀어냈다. 위벽은 급히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그가
몸을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려 하자 남포를 입을 사나이는 재빨리
가서 위벽의 어깨를 부축했다.
주구진은 놀라 소리쳤다.
"아버지!"
무청영도 기겁을 했다.
위벽은 숨을 헐떡이다가 가까스로 말했다.
"외삼촌!"
그 사람은 바로 주구진의 아버지 주장령이었다. 위벽의 팔뼈가
부러진 것을 본 개 시중꾼이 주인에게 알려 그가 황급히 달려와
보니 셋이 합세하여 무기를 협공하고 있었다. 그는 그 광경을 지
켜보면서 소년이 무당파의 무공을 펼치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기
고 있었다. 그러다가 위벽이 살수를 쓰자 무기를 구하려 뛰어든
것이었다.
주장령은 주구진과 위벽, 무청영을 쏘아보며 얼굴에 노기를 띠
더니 냅다 딸의 뺨을 후려쳤다.
"주가의 자손이 이런 짓을 하다니! 내가 이 따위 딸을 낳았단
말인가! 저승에 가서 조상을 뵐 면목이 없구나!"
주구진은 어릴 때부터 부모의 총애만 받고 자랐으므로 지금까지
엄한 꾸중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사람들 앞에서 부친
에게 뺨을 얻어맞자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주장령이 호통을 쳤다.
"그치지 못해! 어디서 우는 거냐!"
대들보의 먼지가 분분히 날려 떨어질 정도로 크게 소리쳤으므로
주구진은 덜컥 겁이 나서 즉시 울음을 그쳤다.
주장령이 말했다.
"우리 주가는 대를 이어 오면서 의를 목숨처럼 중시했다. 너의
고조부는 일등대사를 보좌해 대리국에서 재상을 지내셨고 나중에
양양성을 지키며 명성을 천하에 날리셨다. 얼마나 훌륭하신 분이
냐! 그런데 자손이 불초하여 내 대(代)에 와서 이런 아이를 갖게
되다니..... 그래, 세 사람이 한 소년을 협공해 생명을 빼앗아
어찌할 셈이냐? 부끄럽지도 않으냐?"
그가 딸을 질책하기는 했으나 위벽과 무청영의 귀에도 그 꾸중
이 칼날처럼 찔러왔다. 실로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무기
는 통증 때문에 기절할 것만 같았지만 혼신의 힘을 다해 이를 악
물고 가까스로 버티고 서 있었다. 그는 주장령이 하는 말을 또렷
이 들었으므로 마음속으로 깊이 탄복했다.
'사리가 분명한 것을 보니, 이 분은 정말로 의협심이 있는 사람
이구나.'
주장령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 정도로 노기충천하여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위벽 등 세 사람은 땅만 내려다 보며 감
히 그를 마주 바라보지 못했다. 무기가 보니 주구진은 아버지에
게 얻어맞은 뺨이 발갛게 부어 있었다. 그녀가 두려워하는 모습
은 정말 가련할 정도였다.
무기가 말했다.
"어르신네, 이건 아가씨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는 입을 열었다가 기겁을 하고 놀랐다. 목이 찢어지는 듯이
아프면서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위벽에게 목덜
미를 세게 얻어 맞았기 때문이었다.
주장령이 말했다.
"내가 보니 이 소년은 제대로 무예를 배우지 못한 게 틀림없다.
의지 하나로 목숨을 걸고 저항하는 모습이 훌륭했다. 너희들 셋
이 이처럼 무공을 모르는 사람을 공격한 것은 평소에 스승의 말
을 한 귀절도 마음에 새기지 않은 탓이다!'
그의 이 날카로운 질책에 오히려 무기가 황송하고 민망할 정도
였다.
주장령은 무기가 어떻게 하여 여기에 왔으며 어째서 하인의 옷
차림을 하고 있는지 물었다. 그리고 사람을 시켜 약을 가져오게
해 위벽의 상처를 보살펴 주었다. 주구진은 부친의 엄한 물음에
감히 속이지 못하고 무기가 원숭이를 품에 숨긴 것에서부터 개에
물린 일, 그리고 자신이 그를 구해 준 일들을 자세히 이야기했
다.
주장령은 미간을 찌푸린 채 그녀의 설명을 듣고 있다가 또 한
번 호통을 쳤다.
"이 소년은 원숭이를 구하려는 마음을 지녔는데 너는 그를 하인
으로 만들었구나. 차후에 이 이야기가 강호에 전해지면 이 겅천
일필(驚天一筆) 주장령이 몰인정한 사람이라고 모두 비웃겠구나.
네가 개를 키우는 것은 단순히 즐기라고 허락해 준 것인데 어찌
사람을 물게 내버려 두었느냐? 내 오늘 너를 없애지 않으면 앞으
로 무슨 면목으로 무림에서 행세를 하겠느냐?"
주구진은 부친이 크게 노하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용서를 빌었
다.
"아버님,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그래도 주장령이 여전히 화를 내자 위벽과 무청영도 함께 무릎
을 꿇고 애걸했다. 무기가 입을 뗐다.
"어르신네....."
주장령이 급히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소형제, 어찌 나를 보고 어르신네라 부르는가! 내 자네보다 나
이를 조금 더 먹은 것밖에 없으니 구태여 대우를 하겠다면 선배
라고 불러주면 족하네."
"예, 그러면 주 선배님이라 부르겠습니다. 이번 일은 아가씨 때
문이 아닙니다. 아가씨는 관계가 없는 일입니다."
"자네는 어린 사람이 그토록 도량이 크구먼. 오늘은 새해 첫날
이고 또 무소저는 손님이니 화를 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이번 일
은 우리 무림인으로서는 정말 수치스런 일이기에 화를 낸 것일
세. 소형제가 이렇게 부탁을 하니 모두들 일어나게."
위벽 등 세 사람은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하며 일어났다.
주장령은 개를 기르는 사육사에게 말했다.
"그 나쁜 개들을 모두 풀어놓아라."
개 사육사가 응답하고 개를 풀어놓았다. 주구진은 부친이 왜 그
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버님....."
주장령이 차갑게 대답했다.
"너는 이 나쁜 개들을 길러서 사람을 상하게 하지 않았느냐! 이
제 저 개들에게 나를 물라고 해보아라!"
주구진이 울먹이며 말했다.
"제가 잘못했어요."
주장령은 코웃음을 치고는 개들 사이로 뛰어들어 쌍장을 휘둘렀
다. 일순간에 네 마리의 개가 두개골이 터져 죽어 넘어졌다. 아
무도 감히 뭐라고 말을 하지 못하고 주장령을 쳐다볼 뿐이었다.
삽시간에 삼십여 마리의 개가 모두 격살되어 있었다. 위벽, 무청
영, 무기 등은 놀라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바라보았다.
주장령은 장무기를 안아 자기의 방으로 데려가서 직접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 조금 후에 부인과 주구진이 달려와 탕약을 달여
준다. 어쩐다 하며 부산을 떨었다. 무기는 개에게 물려 피를 많
이 흘린 뒤로 몸이 많이 쇠약해져 있었는데 이번에 또 상처를 크
게 입었으므로, 며칠 동안 혼미한 상태로 누워 있어야 했다. 그
는 깨어난 후 자신이 처방한 약을 먹으며 차츰 회복해 갔다. 주
장령은 그가 훌륭하게 약처방을 하는 것을 보고 놀랍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처를 치료받는 이십여 일 동안 주구진은 자주 장무기의 침실
로 찾아와 노래를 불러주고 재미있는 수수께끼도 하며 옛날 얘기
도 해주었다. 마치 큰 누나가 동생의 병을 간호해 주는 것처럼
세심하고 따뜻하게 보살펴 주었다. 장무기는 상처가 완쾌되어 침
상에서 일어났는데도 주구진은 여전히 매일 반나절은 그와 같이
지냈다. 그녀가 부친에게 무공을 배울 때도 장무기에게 숨기려
하지 않고 항상 그더러 옆에서 참관하라 했다. 게다가 주장령은
두 번씩이나 그를 제자로 삼아 무공을 전수해 주겠다고 했다. 그
러나 장무기가 대답을 하지 않자 다시는 그 일을 들먹이지 않았
다. 그래도 그를 친자식처럼 대해 주었다. 주가의 무공은 서법
(書法)과 관계가 있었다. 주구진은 매일 글쎄 쓰는걸 연습했고,
장무기에게도 자기의 말동무가 되어 함께 글공부를 하자고 했다.
장무기는 빙화도를 떠나 중원땅에 온 후부터 계속 유랑생활을 해
왔다. 그로선 이처럼 안락하고 즐거운 생활은 꿈에도 생각해 보
지 못했다.
눈깜짝할 사이에 이 월 중순이 되었다. 이날 장무기와 주구진은
작은 서재에서 임첩상대(臨帖相對)를 하고 있었는데, 몸종 소봉
이 들어와 아뢰었다.
"아가씨, 요숙부님께서 중원에서 돌아왔습니다."
주구진은 몹시 기뻐했다. 그녀는 붓을 던지며 소리쳤다.
"난 반 년도 넘게 기다렸는데 이제서야 오셨군."
그녀는 장무기의 손을 잡고 말했다.
"무기 동생, 같이 가보지. 요이숙부께서 내가 부탁한 선물을 다
사 오셨는지 모르겠어."
둘은 손을 잡고 대청으로 갔다. 무기가 물었다.
"요이숙부가 누굽니까?"
"우리 아버지와 의형제를 맺은 분이셔. 천리추풍(天里追風) 요
청천(姚淸泉)이란 분이지. 지난 해 아버지의 부탁으로 중원에 예
물을 갖고 가셨거든. 나는 항주의 유명한 연지와 분가루, 그리고
비단과 붓, 먹, 서예책도 사오라고 했는데 다 사오셨는지 모르겠
어."
그녀는 주가장(朱家莊)이 서역 곤륜산에 있으므로좋은 물건들
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설명했다. 그래서 중원으로 가는 사람이
있으면 그에게 물건을 부탁한다고 했다.
둘이 함께 대청앞에 이르자 오열하며 곡하는 소리가 들렸다. 깜
짝 놀라 대청안으로 들어가 보니 주장령이 비쩍 마르고 키가 큰
중년 남자를 끌어안고 울고 있었다. 그 사나이는 하얀 상복을 입
고 허리에 새끼끈을 매고 있었다. 주구진이 가까이 다가갔다.
"요숙부님!"
주장령이 방성대곡하며 말했다.
"진아야! 우리들의 은인인 장어른께서..... 그만 돌아가셨다는
구나!"
주구진이 놀라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아셨나요? 장공은 십 사 년 전에 실종됐었잖아요?
그분이 언제 돌아오셨었나요?"
요청천이 오열하며 말했다.
"우리들이 이렇게 외진 곳에 살아 소식을 듣지 못한 거야. 장공
은 사 년 전에 부인과 함께 자결하셨다는 구나..... 무당산에 가
기 전 협서성에서 그 소식을 듣고 무당산에 가서 송대협과 유이
협을 만나 사정을 들었단다. 그분들을 뵐 면목이 있구나!"
장무기는 들을수록 내심 크게 놀랐다. 그들이 말하는 장공은 자
기의 부친임에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주장령과 요청천이 애절하
게 우는 걸 보자 주구진도 덩달아 눈물을 흘렸다. 장무기는 참다
못해 자신의 신분을 고백하고 싶었으나 나름대로 망설였다.
'난 지금까지 신분을 감초고 있었는데, 설사 지금 솔직히 얘기
해 준다 해도 주백부와 진누나는 믿어주지 않을 거다. 오히려 내
가 은인의 자손이라는 것을 내세워 그들에게 뭔가 바라는 듯한
오해를 줄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날 우습게 볼 것이고....'
잠시 후 내당에서도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주부인은 몸종의
부축을 받으며 대청으로 들어와서 울먹이며 요청천에게 물었다.
요청천은 비통한 나머지 의형수에게 인사하는 것도 잊은 채 즉시
장취산이 자결한 경위를 설명해 주었다. 비록 장무기는 울음을
억지로 참으며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있었으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 있었다. 대청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소리를 내
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기에 아무도 그를 눈여겨 보지 못했다.
주장령이 갑자기 일장을 후려쳐 앞에 놓여 있는 팔선탁을 부셔
버리며 말했다.
"둘째 아우, 나에게 자세히 말해 주게.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무당산에 가서 은공 부부를 살해했단 말인가?"
"제가 소식을 들은 즉시 당연히 큰형님께 곧바로 보고를 해드렸
어야 하는 건데, 원수의 이름을 알아내기 위해서 좀 지체된 것입
니다. 우선 무당산에 가서 은공을 죽게 한 자들이 소림파의 삼대
신승 이하 많은 무림인이었다는 것을 알아내고 이렇게 서둘러 돌
아온 것입니다."
하며 소림, 공동, 곤륜, 아미 각파와 해사, 거경, 신권, 무산
등 방파에 속해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전부 얘기해 주었다. 주장
령은 처연하게 말했다.
"둘째 아우, 그 사람들은 모두 현 무림에서 명성이 널리 알려진
고수들이다. 우리는 그들 중에 한 사람도 당해 낼 수는 없지만,
장오야에게 태산 같은 은혜를 입었으니 설사 몸이 가루가 되고
뼈가 부서진다 해도 그분의 은혜를 갚기 위해 기필코 복수를 해
야 하네."
요청천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형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장어른이 우리의 목숨을 구해 주신
덕분으로 그 동안 십 여 년을 살았으니, 장어른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게 마땅한 일이지요. 제가 가장 섭섭하게 생각한 일은 장
어른의 아드님을 뵙지 못한 일입니다. 그분을 뵈었으면 형님의
뜻도 전하고 이곳으로 모셔 와 평생 동안 모시면 좋을 텐데."
주부인은 장공자에 대해 자세히 물었다. 요청천은 그가 중상을
입고 어딘가로 치료하려 떠났으며 올해 십여 세쯤 되었을 것이라
고 말했다. 앞으로 장삼봉 어른의 절세무공을 전수 받는다면 장
래에 무당파의 장문이 될 것이라고도 했다. 주장령 부부는 무릎
을 꿇고 은인이 자손을 두었음을 하늘에 감사했다.
요청천이 말했다.
"형님이 장어른께 드리라고 주신 천 년 인삼, 천산의 설련 등
선물은 모두 무당산에 남겨 두었습니다. 나중에 장공자에게 드리
라고 송대협에게 부탁해 놓았습니다."
"아주 잘했네, 잘했어."
그는 딸을 보고 말했다.
"우리 집안이 장어른으로부터 은혜를 입은 일을 장형제에게 이
야기해 드려라."
주구진은 무기의 손을 잡고 부친의 서재로 데리고 가서 벽에 걸
려 있는 한 폭의 큰 그림을 보여 주었다. 그림에는 <장공취산은
덕도(張公翠山恩德圖)>라는 제호가 적혀 있었다.
장무기는 주장령의 서재에서 부친의 이름을 대하자 눈앞이 흐려
지며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림엔 영준한 소년 무사가 왼손에 은
구를, 오른손에 철필을 들고 광야에서 다섯 명의 적과 싸우는 모
습이 그려져 있었다. 이 소년 무사가 자기의 아버지인 모양인데
눈썹 주위만이 아버지를 닮았을 분 오히려 자기의 얼굴과 비슷했
다. 땅에 두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바로 주장령과 요청천이었
다. 이들 말고 머리와 몸이 따로따로 떨어진 시체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왼쪽 귀퉁이에는 두려움에 몸을 떨고 있는 주부인이 그
려져 있었다. 그녀의 품에는 어린 여자 아이가 안겨 있었다. 여
자 아이의 입가에 검은 점이 있는 것을 보니 주구진인 모양이었
다. 그림은 누렇게 변해 있어 그린 지가 십 년이 넘었음을 짐작
할 수 있었다.
주구진은 그림을 가리키며 그에게 설명해 주었다. 당시 주구진
은 출생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주장령은 무서운 원수를 피하기
위해 가족을 데리고 서쪽으로 가는 도중에 끝내 원수들이 추격해
온 것이었다. 사제 두 명은 적에게 살해되고그와 요청천도 부상
을 입고 쓰러진 상태에서 적이 독수를 가하려는 찰나, 마침 장취
산이 이 길을 지나가다가 상황을 접하게 된 것이다. 그는 의협심
을 앞세워 적을 격퇴하고 주장령 일가족의 목숨을 구해 준 것이
다. 그것은 장취산이 빙화도로 가기 전의 일이었다.
주구진은 설명하고 나서 암담한 얼굴을 하며 말했다.
"우리는 중원과 외진 곳에 살고 있기 때문에 장은공께서 실종되
신 후 다시 중원으로 돌아오셨다는 소식을 작년에서야 알게 된
것이야. 아버님께서는 중원에 다시는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는 맹
세를 스스로 하셨기에 하는 수 없이 요숙부님께 부탁해 귀중한
예물을 갖고 무당산으로 가게 한 것이지. 그런데....."
여기까지 얘기했을 때 사동 한 명이 들어와 영당(靈堂)으로 가
서 장은공에 배를 올리라고 했다. 주구진은 급해 자기의 방으로
돌아가 깨끗한 소복으로 갈아입고 장무기와 후당으로 갔다. 후당
에는 이미 위패 두 개가 마련되었고 촛불이 밝혀져 있었다. 왼쪽
위패에는 <은공장대협위취산영위(恩公張大俠偉翠山英位)>라고 적
혀 있었다. 다른 위패에는 <장부인은씨지영위(張夫人殷氏之英
位)>라고 적혀 있었다. 주장령 부부와 요청천은 무릎을 굻고 몹
시 서글피 울고 있었다. 장무기도 주구진을 따라 함께 무릎을 꿇
고 절을 했다.
"소형제, 잘했네, 잘했어. 자네는 이분 장대협을 알지도 못하고
친척지간도 아니지만, 그분에게 절을 해도 당연하다고 생각하
네."
장무기는 이런 상황에서 자기가 바로 장은공의 아들이라고 밝히
는 것이 더욱 난처해졌다.
갑자기 요청천의 소리가 들렸다.
"형님, 그 사야란 분은....."
그러자 주장령이 얼른 헛기침을 한 번 하며 그에게 눈짓을 하자
요청천은 금방 알아차린 듯 말했다.
"그 사의(謝儀)를 어찌 했으면 좋겠습니까?"
주장령이 간단하게 말했다.
"자네가 알아서 하게."
장무기는 생각에 잠겼다.
'그는 분명히 사야(謝爺)라고 말했는데, 어찌 갑자기 말을 바꾸
었을까? 사야.....? 사야라면 혹시 나의 의부를 말하는 게 아닐
까?'
이날 밤, 그는 돌아가신 부모와 극북한도(極北寒島)에서 고생을
하며 여생을 보내고 있는 의부 생각 때문에 마음이 심란해 뒤척
이기만 할 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다음날 아침 가벼운 발걸음소리가 들리면서 여자 특유의 향기로
운 체취가 사르르 풍겨오더니, 주구진이 세수물을 들고 방 안으
로 들어왔다. 장무기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진 누나, 어찌..... 어찌 누나가 직접 나의.....?"
"하인과 몸종들이 모두 떠나갔어. 내가 동생의 시중을 좀 들기
로서니 뭐가 그리도 놀랍다는 거지?"
장무기는 더욱 의아하여 물었다.
"무엇..... 무엇 때문에 모두 가버렸습니까?"
"나의 아버님께서 어젯밤에 그들을 모두 보낸 것이야. 모두에게
은자를 주면서 각자의 고향으로 가라고 했어. 여기에 있으면 위
험하기 때문이라고 하시면서....."
그녀는 잠시 멈칫하더니 말했다.
"아버지께서 너에게 하실 말씀이 계신가 봐."
장무기는 대충 세수를 끝냈다. 주구진은 그의 머리를 빗겨 주고
나서 무기를 데리고 주장령의 서재로 갔다. 원래 이 큰 저택에서
는 칠, 팔십 명의 하인들이 있었는데 갑자기 한 명도 보이지 않
아 몹시 썰렁하게 느껴졌다.
주장령은 두 사람이 들어오자 말을 꺼냈다.
"장형제, 난 자네의 의협심과 영웅기개에 반해 이 집에 오래 머
물도록 하려 했는데, 갑자기 변고가 생겨 할 수 없이 자네와 이
별을 해야 하네. 소형제는 절대 오해하지 마시게."
라고 말하며 쟁반하나를 들어 올렸다. 그 쟁반에는 열 두개의
황금과 백은 그리고 호신용 단검이 한 자루 놓여 있었다.
"이건 우리 부부와 딸의 작은 뜻일세. 소형제는 이를 받아 두시
게. 우리가 살아난다면 다시 만날 날이 있겠지."
말을 하는 그의 목소리가 오열하며 작아졌다.
무기는 몸을 옆으로 비키며 말했다.
"주 아저씨, 제가 비록 재주는 없으나 죽음을 두려워하는 소인
배는 아닙니다. 댁에 위난이 있는데 어찌 저만 피해 떠나겠습니
까? 아저씨와 누님을 돕지는 못하다 해도 죽음을 같이 할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주장령이 몇 번이나 떠나라고 권했으나 무기는 듣지 않았다.
주장령이 한탄하며 말했다.
"아, 소년영웅은 위험을 모른다더니..... 그럼 자네에게 진상을
말해 주겠네. 다만 먼저 맹세를 하게 다른 사람들에게 누설하지
않는다고 말일세."
무기는 무릎을 꿇고 낭랑하게 말했다.
"천지신명께 맹세합니다. 주 아저씨가 제게 말씀하시는 것을 누
설한다면 제 몸은 난도질 당하게 될 것이며 날벼락을 맞을 것입
니다."
주장령은 그를 부축해 일으킨 뒤 창 밖을 내다보더니 높은 나무
위로 올라가 사방을 살폈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그는
다시 서재로 돌아와 무기의 귀에 대고 나직하게 말했다.
"내가 자네에게 말하는 것은 가슴에만 새겨 두게. 벽에도 귀가
있다는 말이 있잖은가?"
무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장령이 다시 속삭였다.
"어제 요아우가 장은공이 돌아가신 소식을 갖고 돌아왔을 때 한
사람을 데리고 왔네. 그 사람의 이름은 사손인데 별호가 금모사
왕이라네....."
순간, 장무기는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한 차례 부르르 떨었다.
너무나 뜻밖이었다.
주장령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분 사대협은 장은공과 의형제지간이고 지금 천하 각 문파의
호걸들과 깊은 원한 관계가 있네. 장은공 부부가 자결하게 된 원
인도 의형의 거처를 발설하지 않기 위함이었네. 사대협께서 뭣
때문에 중토에 다시 돌아왔는지 모르지만 장은공의 원수를 갚기
위해 다시 많은 사람들을 죽였네. 결국 그 자신도 중과부적으로
중상을 입고 말았지 요아우란 사람은 몹시 기지가 있어 그를 구
해 여기까지 피신시켜 왔지만 그의 원수들이 잠시 후면 들어닥칠
것이네. 상대방은 인원수가 많고 세력이 막강하여 우린 절대 막
아낼 수가 없다네. 나는 장은공의 은혜를 갚기 위해 목숨을 버려
도 무방하지만, 자네는그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데 구태여 여기
서 목숨을 버릴 필요가 있겠는가? 소형제, 내 말을 이것뿐이니
어서 빨리 떠나가게. 적이오게 되면 그 때는 이미 때가 늦은 것
이네."
장무기는 그의 말을 듣지 몹시 놀라면서도 한편으로 기뻐했다.
그는 의부가 여기에 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당장 의부를
만나고 싶은 심정이 다급해 물었다.
"그분은 지금 어디에.....?"
하고 말을 내뱉기 무섭게 주장령은 오른손으로 그의 입을 막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말을 해서는 안 되네. 적들은 신통광대(神通光大)하여 한 마디
라도 조심하지 않으면 사대협의 목숨이 그만큼 더 위험해질 것일
세. 아까 한 맹세를 벌써 잊었는가?"
장무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를 믿고 모든 걸 솔직히 말씀해 주셔서 전 더욱 떠날수가 없
습니다."
주장령은 잠시 망설이다가 단호하게 말했다.
"좋아, 앞으로 우리는 공생공사하기로 하고 다른 건 더 이상 얘
기하지 않기로 하세. 이제 때가 됐으니 서둘러야겠네."
그는 즉시 주구진과 장무기와 함께 대문 밖으로 뛰어나갔다. 대
문을 나서자 주부인과 주구진, 요청천이 이미 문 밖에서 기다리
고 있었다. 그들은 보따리를 몇 개씩 꿰어차고 멀리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무기는 사방을 살펴보았으나 큰아버지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주장령이 황급히 부싯돌을 꺼내 불을 씔여 곳곳
에 불을 질렀다. 순식간에 집 전체에 불이 붙었다. 미리 수백 칸
되는 방마다 기름을 부어 불이 잘 붙게 해놓았던 것이다.
무기는 활활 타들어가는 집과 나무들을 보며 마음 깊이 감격했
다.
'주 아저씨가 심혈을 기울여 모은 재산이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되는구나. 이건 모두 아버지와 큰아버지을 위해서가 아니가? 이
렇게 의로운 사람은 세상에 다시 없을 것이다.'
이날 밤 주장령 부부, 주구진 무기 네사람은 가까운 동굴에서
하룻밤을 잤다. 요청천과 주장령의 다섯 제자는 병기를 들고 동
굴 밖에서 경계를 섰다. 저낵을 사흘 동안이나 타 들어갔다. 다
행히 적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사흘째 되는 날 밤, 주장령은 처자와 제자, 오청천, 부기를 데
리고 동굴을 떠났다. 그들은 어두운 지하실로 들어갔다. 지하실
엔 식량과 물 등 필요한 물품들이 고루 준비되어 있었다. 그런데
왠지 무척 더웠다.
주구진은 무기가 끊임없이 땀을 닦아내는 것을 보고 웃으며 물
었다.
"동생, 여기가 왜 이렇게 더운지 알아맞춰 봐. 우리가 어디에
있을까?"
무기는 무언가 타는 냄새를 맡으며 언뜻 머리에 스치는 것이 있
었다.
"아니, 우리는 바로 원래의 장원 밑에 와 있군요?"
주구진은 웃으며 말했다.
"동생은 정말 총명하군."
장무기는 주장령의 치밀한 계획에 더욱 감탄했다. 적이 대거 공
격해 올 때 주장령의 집이 잿더미로 변한 걸 보게 되면 자연히
먼곳으로 추격해 갈 것이다. 그들은 절대로 사손이 화장(火場)밑
에 숨어 있는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할 것이다. 그는 반대편 한
곳에철문이 굳게 닫혀져 있는 걸 보자 의부가 그 안에 숨어 있
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의부를 만나 그동안 지내온 일들을 얘기
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주장령이 그에게 절대 철문 안으로 가지
말라고 당부한 걸 보면 필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자기가
어떻게 그런 경거망동을 할 수 있겠는가? 만약 큰일을 그르치게
돼 자기가 죽게 되는 건 관계가 없지만, 의부와 주가 일가족의
생명마저 지장을 준다면 엄청난 죄를 범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지하 석실에서 반나절을 지내자 후덥지근한 열기가 차츰 감소됐
다. 작자 침낭을 펴서 취침하려는 찰나 갑자기 급히 달려오는 말
굽소리가 한 차례 " "리서 들려오더니, 바로 머리 위에서 멎었
다. 그러자 굵은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 말했다.
"주장령, 그 늙은 도적놈은 필시 사손을 보호한 채 도망갔을 것
이다. 빨리 뒤쫓자!"
장무기 일행은 비록 지하에 있었지만 위에서 나는 소리를 똑똑
히 들을 수 있었다. 이는 지하로부터 철관(鐵管)이 지면으로 통
해 있어 위에서 나는 소리가 철관을 통해 밑으로 쉽게 전달되기
때문이었다. 곧이어 말굽소리가 요란하게 나더니 점점 멀어져 갔
다.
이날 밤머리 위를 지나간 추적자들은 선후로 모두 다섯패나 되
었다. 군륜파도 있고, 공동파, 거경방, 그리고 나머지 두 패는
대화만 듣고서는 어떤 문파의 인물인지 알 수 없었다. 인원수가
작은 패는 칠, 팔 명 됐고, 많은 건 십여 명이 되었다. 병기가
부딪치는 소리며 준마의 울음소리 하며 한결같이 욕지거리를 해
대며 떠들어대는 기세로 보아 몹시 살기등등해 졌다. 장무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만약 나의 의부께서 두 눈이 실명되지 않고 중상을 입지 않았
더라면, 너희들 같은 것쯤이야 염두에 두지도 않을 것이다.'
다섯 번째로 나타난 인마들이 멀어져 가는 걸 기다렸다가 요청
천은 나무마개롤 철판 구멍을 다시 막았다. 이는 지하 밀실에 있
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혹시 밖으로 새어나갈까 봐 염려스러워서
였다. 그래도 요청천은 여전히 음성을 낮추어서 말했다.
"사대협의 상처가 어떤지 좀 가봐야겠소."
주장령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자 요청천은 손을 내밀어 철
문의 옆에 있는 장치를 움직이자 철문이 천천히 열렸다. 그는 유
등을 하나 들고 철문 안으로 들어갔다.
이때, 장무기느 더 이상 궁금함을 참지 못하여 일어나서 요청천
의 등 뒤에서 철문 안을 살펴보았다. 몸집이 우람한 남자가 안쪽
을 항해서 누워 있었다. 장무기는 의부의 뒷모습을 보자 뜨거운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이때 요청천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사대협님, 좀 괜찮으십니까? 물을 드릴까요?"
바로 이 순간이었다. 갑자기 경풍이 불면서 요청천의 수중에 있
는 등불이 바람에 꺼져 버렸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요청천이
사손의 일장에 철문을 뚫고 밖으로 뛰어나가 땅에 무겁게 떨어졌
다.
그러자 사손의 오침이 들려왔다.
"소림, 곤륜, 공동 세 파의 무리들아! 오너라, 나 금모사왕 사
손이 너희들을 두려워할 줄 아느냐!"
주장령은 중얼거렸다.
"큰일났군. 사대협이 정신 나갔군."
그는 급히 문쪽으로 걸어가 말했다.
"사대협, 우린 당신의 친구이지 적이 아닙니다."
사손은 냉소를 지음 차갑게 말했다.
"흥, 그런 말로 나를 속일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는 큰걸음으로 철문을 나가 주장령의 가슴을 항해 다짜고짜
장풍을 뻗쳤다. 이 일장의 위력은 정말 날카로왔다. 실내의 유등
(油燈)마저도 요란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주장령은 감히 막지를
못하고 몸을 피했다. 사손은 다시 왼손을뻗어 그의 얼굴을 향해
일권을 내리쳤다. 주장령은 어쩔 줄 몰라 팔로 막았으나 몹시 심
하게 휘청거리며 뒤로 밀려났다. 장무기도 이 돌연한 변화에 그
만 멍청히 서 있기만 했다. 또다시 사손의 공격이 뻗쳐왔다. 그
의 주먹과 장력은 비수와 같이 날카로왔다. 주장령은 대항하지
못하고 그저 피하기만 했다. 사손의 이장이 주장령을 맞추지 못
하고 벽에 부딪치자 돌가루가 휘날렸다. 만약 그의 몸에 맞았다
면 치명상이 될 것은 뻔했다.
사손의 장발을 어깨까지 치렁치렁했고 두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얼굴은 피범벅이 되어 숨을 거칠게 물아쉬며 장세가 더
맹렬해져 갔다. 주부인과 주구진은 겁에 질려 구석에 숨어 있었
다. 주장령은 다시 그의 장력이 뻗쳐오자 할수 없이 옆에 있는
탁자로 막았다. 그 즉시 퍽! 퍽!하고 사손의 주먹이 탁자를 가루
로 만들었다.
장무기는 어쩔 줄 몰라 입을 딱 벌리고 멍청히 서서 생각했다.
눈앞에 있는 사손은 자기의 의부 금모사왕 사손이 아니었다. 자
기의 의부 금모사왕은 눈이 멀었는데, 눈앞의 이 사람은 두 눈을
시뻘것게 뜨고 있지 않은가! 이 순간 그가 또다시 일장을 뻗자
주장령은 벽에기대고 있어서 더 이상 몸을 피할 곳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손을 뻗어 막지를 않고 외쳤다.
"사대협, 나는 당신의 적이 아니라서 반격을 하지 못하겠소!"
그 거인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의 가슴을 내리쳤다. 주장령은
매우 고통스러운 표정을 하며 외쳤다.
"사대협, 이젠 나를 믿겠소?"
대한(大漢)이 외쳤다.
"개 같은 놈! 내 일권을 다시 받아라!"
그러면서 또 일권을 뻗었다.
주장령은 울컥울컥 선혈을 토하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은 나의 은공(恩功)의 형입니다. 난 절대로 반격하지 않겠
소."
대한은 광소를 터뜨리며 팔을 쳐들었다.
"그럼 더욱 좋지. 너를 때려 죽일 것이다."
하면서 오른손과 왼손을 모두 그의 가슴에 맞추었다. 주장령은
윽! 하고 비명을 지르며 서서히 쓰러졌다.
그 대한은 여전히 사정을 두지 않고 주먹을 뻗었다. 이때 장무
기가 얼른 앞으로 나서 두 팔을 벌려 막았다. 대한의 경력은 정
말 대단했다. 장무기도 그의 장력에 숨이 막히는 듯 했다. 그는
목숨을 내걸고 외쳤다.
"당신은 사손이 아니야! 당신은.....!"
대한은 노기띤 음성으로 말했다.
"조그만 녀석이 뭘 아느냐?"
그러면서 장무기를 향해 거세게 걷어찼다. 장무기도 재빨리 피
하며 외쳤다.
"당신은 금모사왕으로 거장하고 우릴 속였군. 당신은 가짜야!"
주장령은 땅에 쓰러져 있었으나 장무기의 말을 듣자 억지로 기
어 일어서며 대한을 가리켰다.
"네가 나를 속였구나. 너는.....!"
그러면서 갑자기 대한의 얼굴에 선혈을 내뿜었다. 동시에 몸이
앞으로 쓰러지며 손을 뻗듯이 그의 어른쪽 가슴의 신봉혈(神封
穴)을 찍었다. 주장령은 중상을 입은 몸이라 대한의 적수가 되진
못했지만, 피를 토하고 쓰러지면서 그가 방심한 틈을 타 그의 비
기인 일양지 수법으로 그의 대혈을 찌른 것이다. 주장령은 다시
그의 허리와 늑골을 향해 지풍을 뻗은 후 자기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그만 기절해 버렸다. 주구진과 장무기는 재빨리 뛰어가
그를 부축했다.
잠시 후, 주장령은 정신이 드는지 눈을 가늘게 뜨고 장무기에게
물었다.
"그 자는.....?"
장무기는 고개를 숙였다.
"주 아저씨, 이젠 더 이상 속이지 못하겠습니다. 당신이 말한
은공은 바로 가부(家父)이시고 금모사왕은 나의 의부이십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의부를 잘못 알고 있겠어요."
주장령은 고개를 저으며 도무지 못 믿겠다는 표정이었다.
장무기는 단호하게 말했다.
"저의 의부께선 오래전에 두 눈이 멀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
은 저렇게 멀쩡하지 않습니까? 그게 바로 증거입니다. 저의 의부
께선 해외에서 실명하셨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이 사실을
전혀 모릅니다. 이 자도 그걸 모르고 저의 의부인 척한 겁니다."
주구진이 기뻐하며 소리쳤다.
"무기 동생, 네가 진짜 우리 대은공의 아들이라니 정말 기쁘구
나."
주장령은 그래도 미심쩍은 표정이었다. 장무기는 할 수 없이 어
떻게 해서 곤륜에 오게 된 것인지를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
러자 요청천이 참지 못하고 나서서 무당산에서 있었던 일과 장취
산 부부가 자살한 일 등을 물었다. 장무기는 서슴치않고 대답했
다. 그제서야 이들은 장무기의 말을 믿었으나 주장령은 여전히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만약 이 애의 말이 조금이라도 사실과 다르다면 우리는 사대협
에게 죄를 짓게 되는데, 이 일을 어쩌면 좋지?"
요청천은 비수를 꺼내 대한의 눈을 노리며 말했다.
"어이 친구! 금모사왕은 눈을 실명했다는데, 네가 그 사람으로
흉내내려면 좀 그럴듯하게 해야겠지. 이 소형제가 아니었더라면
너의 속임수에 넘어가서 두 형님의 목숨을 그냥 허무하게 잃을
뻔하지 않았느냐?"
그러면서 비수끝으로 대한의 눈을 찔렀다.
"네놈은 도대체 누구냐? 왜 금모사왕인 척했지?"
대한은 음험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용기가 있으면 나를 단칼에 죽여라! 개비수 호표(開碑手胡豹)
가 너희들에게 입을 열 줄 아느냐?"
주장령이 엇! 하고 소리치더니 말했다.
"개비수 호표라고? 너는 공동파가 아니냐?"
호표는 눈을 부라리며 외쳤다.
"천하의 무림인이라면 주장령이 장취산의 원수를 갚으려고 하는
것을 다 알고 있다. 속담에 먼저 선수를 치는 자가 강자란 말도
모르느냐?"
요청천이 외쳤다.
"악독한 놈!"
그는 비수로 그의 가슴을 내리찍었다. 주장령이 잽싸게 왼 손을
내밀어 그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이제(二弟), 잠깐! 만약 이 사람이 진짜 사대협이라면 우리들
은 만 번 죽어도 속죄할 길이 없을 걸세."
"아닙니다. 장형제가 이미 사실을 말하지 않았습니까? 형님께서
도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또 어떤 어려움이 있
을지 모릅니다."
주장령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장은공이 털끝 하나라도 건
드려선 안 된다."
장무기가 앞으로 나섰다.
"주 아저씨! 이 사람은 절대로 저의 의부가 아닙니다. 저의 의
부께선 별호가 금모사왕인 것처럼 머리카락이 노랗습니다. 그런
데 이 사람은 검지 않습니까?"
주장령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장무기의 손을 잡았
다.
"소형제! 나를 따라오게."
주장령은 통로를 통해 석실 밖으로 나와 언덕 뒤에 있는 절벽까
지 갔다. 두 사람은 어깨를 맞대고 바위 위에 앉았다.
주장령이 입을 열었다.
"소형제! 만약 저 사람이 사대협이 아니라면 우린 물론 저자를
죽여야 하네. 하지만 그 전에 내 마음속의 의문을 완전히 풀어야
될 것 같군."
장무기는 수긍했다.
"무슨 실수를 저지를까 봐 그러시는군요. 물론 그러셔야죠. 그
러나 저 사람은 절대로 저의 의부가 아니니 안심하십시요."
주장령이 탄식하듯 말했다.
"내가 젊었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속임을 당했는지 아느
냐? 내가 오늘 반격하지 않은 것은 한 번 실수하며 다시는 돌이
킬 수 없는 중대한 문제였기 때문이지. 내 자신이 죽더라도 너와
사대협은 절대로 보호해야 하기 때문이야. 사실 나는 너한테 사
대협이 지금 어디 계신지 물어보고 싶은데....."
장무기는 감동하며 말했다.
"주 아저씨, 당신께선 저의 부친과 의부 때문에 백만가산을 다
버리시고 또 몸에 이런 중상까지 입으셨는데, 그래도 제가 아저
씨를 못 믿겠습니까? 저의 의부에 대해서 묻지 않으셔도 저는 알
려드리겠습니다."
그리하여 장무기는 부모님과 사손이 어떻게 빙화도까지 표류해
가서 십 년이란 세월을 지냈으며, 다시 돌아오게 됐는지 자세히
설명했다.
주장령은 세세속속 자세히 캐물었다. 장무기가 빙화도에서 무공
을 어떻게 배웠고 양불회는 어떻게서쪽으로 왔으며, 곤륜삼성이
조난을 당한 사정 등을 일일이 물어보고 나서, 장무기의 대답이
조금도 틀림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그제서야 그를 믿고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하늘을 쳐다보며 외쳤다.
"은공! 개대해 주십시오. 주장령은 힘을 다해 무기 형제를 훌륭
하게 키우겠습니다. 다만 내 무공이 미천해 사악한 무리들을 다
벌할 수 있을지..... 그러나 기필코 원수를 갚겠습니다. 은공의
가호가 있기를 빕니다."
그러면서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해 절을 했다. 장무기는 슬프면
서도 감격했다. 그도 따라 무릎을 꿇었다.
주장령은 희열에 찬 음성으로 말했다.
"지금 난 모든 의혹이 풀렸다. 소림, 아미, 곤륜, 공동 어느 파
나 세력이 강하지만, 이 늙은이는 목숨을 걸고 영존의 원수를 갚
기로 결심했네. 그러나 눈앞의 일이 더 시급하니 복수는 나중 일
일세. 이 넓은 천지에 어딜 가서 대난을 피하지? 이런 외진 곳에
있는 내 거처까지 놈들이 찾아 냈으니 여기보다 더 안전한 곳이
어디 있을까?"
"사대협께선 몇 년을 혼자 빙화도에서 지내셨으니 얼마나 외로
우실까. 사대협께 은공은수(恩公恩嫂)에게 그렇게 의리를 지키셨
다니 한 번 만나 뵈었으면 죽어도 한이 없겠구나."
장무기는 의부께서 외롭게 지내신다는 주장령의 말에 우울해 졌
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올라 말했다.
"주 아저씨! 우리 같이 빙화도로 가요. 섬에서 살 땐 정말 즐거
웠었는데, 중토(中土)에 와서부터는 그저 피비린내 나는 살인뿐
이었습니다. 저는 정말 무섭습니다."
주장령은 장무기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장무기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시무룩했다. 자기는 이미 오래 못
사는 처지라 빙화도까지 갈 시간이 없을테니, 주장령 일행만 위
험을 겪게 될 것이다. 오랜 항해에서 거센파도라도 만나면 물귀
신이 되기 십상이었다.
이때 주장령은 그의 두 손을 꼭 잡으며 미소를 지었다.
"소형제, 자넨 남이 아니야.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솔직히 해
라. 빙화도에 가고 싶으냐?"
그의 말투는 매우 진지했다.
장무기는 사실 험악한 강호 인심에 질려 죽기 전에 의부를 만나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의부의 품속에서 죽을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주장령 앞에서 자기의 생각을 속이고
싶지는 않아 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주장령은 더 이상 아무 말도 않고 장무기를 데리고 석실로 돌아
왔다. 그리고는 요청천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그놈은 첩자가 틀림없어!"
요청천은 그제서야 비장한 각오를 하면서 비수를 들고 밀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개비수호표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렸고. 요
청천이 밀실에서 나왔다. 그의 비수엔 선혈이 묻어 있었다. 그는
피를 신발바닥으로 닦았다.
주장령이 먼저 입을 열었다.
"놈이 우리침실까지 잠입했으니 우리의 종적도 탄로날 모양이
야. 이젠 여기서 지체할 수가 없네."
일행은 주장령을 선두로 석동에서 나와 약 이십 리 길을 걸었
다. 산을 넘고 계곡을 끼고 돌아가자 커다란 나무 한 그루 밑에
작은 오두막집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느덧 새벽이 가까왔다. 주
장령은 서슴치않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장무기도 따라 들어갔
다. 집 안에는 낫이며, 괭이 같은 농기구가 있었고 취사 도구와
양식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보아하니 주장령이 근처에 피난할 곳
을 많이 안배해 둔 것 같았다. 주장령은 중상을 입은 몸이라 침
대에 눕히자 일어나지를 못했다. 주부인은 광목으로 된 장삼, 짚
신, 머리띠 등을 꺼내 그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갈아입게 했다.
잠시 후, 그들은 부잣집의 부인과 아씨에서 농촌 부녀자로 변했
다. 말씨나 행동은 다소 어색했으나 그래도 가까이 접근하지 않
으면 식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며칠이 지나갔다. 주장령은 다행히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운남상
약(雲南傷藥)이 있어 그걸 복용하고 나선 상처가 빨리 치유되어
갔다.
장무기가 한가로이 그들을 지켜보니, 요청천은 매일 소식을 정
탐하러 나가고 주부인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행낭을 챙기고 있었
다. 멀리 떠날 채비가 분명했다. 그렇다면, 주장령이 일단 원수
를 피해 빙화도로 가려는 계획이리라. 장무기는 내심 무척 기뻤
다.
이날 장무기는 침대에 누워, 만약 자기가 다행히 죽지 않고 빙
화도에 도착하여 평생 이 선녀와 같이 아름다운 주구진과 함께
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또 주 아저씨, 그리고 요이숙이
의부와 만나 서로 좋은 친구가 된다면, 몽고놈들의 잔악한 압박
도 받지 않고 무림의 원수들이 기습해 올 걱정도 없으니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장무기는 자기가 몸에 한독을 입어 얼마 살
지 못하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이런 달콤한 생각을 하며 막
잠이 들려고 하는데 살며시 나무문이 열렸다. 그리고는 곧 그림
자 하나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장무기는 순간 은은한 향기를 맡
고 있었다. 바로 그 향기는 주구진이 평상시 자주 옷에 뿌리는
소경화향(素경花香)이었다. 장무기는 갑자기 얼굴이 홍당무가 되
며 얼른 일어날 수가 없었다.
주구진은 조용히 침대 가까이 와 낮은 소리로 물었다.
"무기 동생, 잠들었어?"
장무기는 대답할 용기가 없었다. 그는 눈을 꼭 감고 잠이 든 척
하고 있었다. 그러자 부드럽고 향기로운 손이 그의 얼굴 위에 살
포시 날아와 앉았다. 장무기는 놀랍고 기쁘고 부끄럽고 겁이 나
는 감정을 한꺼번에 느끼면서 오직 그녀가 빨리 이 방에서 나가
주기만 바랐다. 그의 마음 속은 주구진을 존경할 뿐 장래에 그녀
를 아내로 맞이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그녀가 갑자기 야
밤에 왔으니, 어찌 당황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한편
이런 생각도 들었다.
'혹시 진 누나가 무슨 급한 용무가 있어서 온 게 아닐까?'
바로 이때, 갑자기 흉구에 있는 담중혈(膽中穴)이 마비되면서
연이어 견정(肩貞), 신장(神臟), 곡지(曲池), 환조(環조) 등 혈
도가 차례로 찍히고 말았다.
너무나 뜻밖의 일이었다. 주구진이 왜 심야에 찾아와 자기의 혈
도를 찍은 것일까? 장무기는 후회가 되었다.
'진 누나는 내가 잠들어 있을 때 경각심이 있는지 시험하는 것
이 틀림없다. 내일 그녀가 혈도를 풀어 주면서 나를 비웃을 것이
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녀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서 일어
나 그녀를 놀라게 해줬을 텐데.....'
이때 주구진은 살며시 창문을 열고 몸을 날려서 밖으로 나갔다.
장무기는 재빨리 생각했다.
'빨리 혈도를 풀어 그녀의 뒤를 따라가서 놀라게 해야겠다.'
그는 즉시 사손에게 배운 혈도 푸는 법을 썼다. 주가의 가전인
<일양지>무공은 과연 대단했다. 그는 반 시간이 넘어서야 찍힌
혈도를 풀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주구진의 공력이 부족한 탓도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혈해법(穴解法)이 제아무리 교묘해
도 혈도를 풀지 못할 것이다. 재빨리 옷을 입고 창 밖으로 날아
가 보니 사방은 쥐죽은 듯이 조용했고 어디에도 주구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장무기는 맥이 탁 풀렸다.
'진 누나는 아제 나를 쓸모 없다고 생각하겠지. 하기야 구태여
그녀를 이기려 할 필요는 없겠지. 평상시 내가 그녀에게 기쁨이
될 수 없을 바에야, 내가 그녀를 따라간다 해도 그녀는화를 냈
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자 그는 마음이 편해졌다. 문득 초봄의 밤바람에
실려 풍겨오는 들꽃 향기가 심신을 상쾌하게 해주었다. 그는 금
방 잠이 올 것 같지도 않아, 작은 시냇물을 따라 걸어갔다. 산비
탈에는 채 녹지 않은 눈이 히끗히끗 보였고 눈 녹은 물이 시냇물
을 이루어 흐르고 있었다. 심호흡을 하며 걸음을 옮기려는데, 갑
자기 좌측 숲 속에서 깔깔 대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주구
진의 웃음소리였다.
장무기는 흠칫 멈춰섰다.
"진 누나가 나를 본 것일까?"
이때 그녀가 낮은 소리로 호통을 쳤다.
"사촌오빠! 허튼 짓하며 따귀를 때릴 거예요."
그러자 이번에는 남자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놀랍게도
바로 위벽이었다.
장무기는 가슴이 덜컥했다. 하마터면 울음을 터뜨려 버릴 뻔했
다. 반나절이나 꾼 아름다운 꿈들은 삽시간에 물거품이 되었다.
'진 누나는 나의 혈도를 찍은 것은 바로 심야에 사촌오빠와 만
나는 걸 내가 알까 봐 한 짓이구나!'
하고 생각하자 갑자기 손이 저려오고 다리에 힘이 쭉 빠지는 것
같았다.
'나는 집도 절도 없는 가난뱅이고 학문이나 무공이나 인품, 용
모, 어느 한가지도 위상공을 따를 수 없다. 더구나 그녀와 그는
사촌지간이나 두 사람은 너무도 잘 맞는 한 쌍이야.'
장무기는 자기 나름대로 판단을 내리며 한숨을 쉬었다. 이때 경
미한 발자국소리가 났다. 장무기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앞을 내다
보았다. 그러나 주구진과 위벽은 아무것도 모른 채 다정하게 소
근거리며 손을 맞잡고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왔다. 다음 순간
주구진의 겁먹은 목소리가 들렸다.
"아버님이 어떻게.....!"
나타난 사람은 바로 주장령이었다.
주장령은 딸이 야밤에 외조카와 밀회하는 걸 보자 몹시 화가 난
것 같았다. 주장령의 꾸중이 들려왔다.
"너희들은 여기서 뭘 하는 거냐?"
주구진은 아무렇지도 않은 양 웃으며 말했다.
"아버님, 사실 사촌오빠와 오랫 동안 만나지 못했는데 오늘 어
렵게 만났기에 그냥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중이예요."
"너는 그래도 할 말이 있는 게로구나. 만약 무기가 알게되
면....."
주구진이 말을 가로챘다.
"제가 살짝 그의 혈도를 다섯 곳이나 찍어 버려서 지금쯤 깊은
잠에 빠져 있을 것입니다. 이따가 가서 그의 혈도를 풀어주면 아
무 일도 없을 거예요.'
장무기는 흠칫 놀랐다.
'주 백부께서도 내가 그녀를 좋아하는 줄 눈치채셨구나. 나의
아버님에게 은헤를 입은 것 때문에 내가 상심하고 실망하는 걸
막기 위해서..... 백부님, 비록 진 누나를 좋아하고는 있지만 절
대로 다른 마음은 먹고 있지 않습니다. 당신은 너무도 날 따뜻하
게 대해 주시는군요.'
이때 주장령의 말소리가 들렸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만약 그에게 조
금이라도 빈틈을 보이면 모든 공은 수포로 돌아간다."
주구진은 웃으며 말했다.
"소녀 명심하겠습니다."
"외숙부님, 진매와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사부님이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주장령이 말을 받았다.
"그렇다면, 나도 가서 너의 사부님을 만나야겠다. 이번에 우리
가 북해의 빙화도에 가는 일은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하고 한치의
착오도 있어서는 안 된다."
말을 하면서 세 사람은 일제히 서쪽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장무기는 몹시 이상하다고 느꼈다. 위벽의 사부는 무열이고 무
청영이 아버지인데, 주장령의 말투를 보면 주가 부녀와 위벽 모
두 빙화도에 갈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왜 사전에 나에게 말해 주
지 않았을까? 이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이많아지면 비밀이 누설될
가능성이 많은데, 그렇게 되면 의부에게 화를 끼칠지 모른다.
여기까지 생각한 그는 갑자기 주장령이,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만약 그에게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이면
모든 공은 수포로 돌아간다."
라고 한 말이 생각났다. 무슨 빈틈이 있단 말인가?
<빈틈>이란 두 글자가 그의 뇌리에 맴돌았다. 그러자 갑자기 모
든 것이 선명하게 나타났다. 바로 <장취산은덕도>란 그림에는 다
른 사람들은 용모가 비슷한데, 그의 부친만은 턱이 뾰죽한 얼굴
이 넓적하게 그려졌었다. 다만 부친의 미간은 비슷했다. 그래 그
것은 자신의 미간이 아버지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는 미간만
아버지를 닮았을 뿐 다른 곳은 닮지 않은 것이다.
주장령의 말에 의하면, 이 그림은 십여 년 전에 그가 친필로 그
렸다고 했다. 설사 그의 그림 솜씨가 좋지 못하다 해도 어찌 대
은공의 얼굴을 전혀 닮지 않게 그릴 수가 있겠는가! 그림에 있는
장취산은 장무기가 성장한 모습과 같았다. 그리고 이상한 점이
또 한가지 있었다. 아버님이 사용했던 철필은 붓과 같이 뾰족했
다. 그날 대륙에 돌아왔을 때 벙기포에서 판관필 한 자루를 사시
면서, 무게와길이는 쓸 만한데 단지 철수 같은 것이 한 짝이어
서 보기에 흉하다고 하셨다. 그래서 아버님이 생활이 안정되면
다시 주조(鑄造)해 주신다고 하셨다. 하지만 그림에 있는 아버님
은 보통 판관필을 갖고 계셨고, 쇠를 주조하는 사람 손에는 철필
을 한 자루 쥐고 있었다. 주장령 자신은 판관필을 사용하는 전문
가인데, 어찌 아버님께서 사용했던 판관필마저도 틀리게 그릴 수
가 있단 말인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그는 보이지 않는 공포의 그림자가 엄습
해 왔다. 그는 자신이 제시한 의문과 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
나 그 답은 너무나 가공스러운 것이라 깊이 생각하기조차 두려웠
다.
그는 스스로를 위로했다.
'난 지금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주 백부님이 날
그렇게 잘 대해 주시는데 오히려 의심을 하다니, 천벌을 받을 짓
이지..... 어서 가서 잠을 청해야겠다. 내가 한밤중에 나온 것을
알면 그 땐 정말 목숨을 잃게 될지도 모르지.....'
목숨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겁이 덜컥 났다. 예
전에는 전혀 느껴보지 못한 공포감이었다. 그 자신도 왜 이러한
두려움에 사로잡혀야 하는지 까닭을 알 수 없었다.
그는 잠시 넋을 잃고 있다가 자석에 이끌리듯 절로 주장령 부녀
가 갔던 방향으로 걸음이 옮겨갔다. 숲 속에 희미한 달빛이 새어
나왔다. 외딴 집이었다. 장무기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는 죄진
사람처럼 살금살금 그 불빛이 새어 나오는 곳으로 다가갔다. 소
리나지 않게 집 뒤로 돌아간 그는 창문틈으로 집 안을 엿보았다.
그곳에는 주장령 부녀와 위벽이 창 쪽을 마주 본 채 앉아 있었
고, 창을 등지고 앉아 있는 사람은 둘인데 얼굴을 확인할 수 없
었다. 그러나 장무기는 그 중 한 소녀가 설령쌍매 중의 하나인
무청영이라는 것을 알았다. 다른 한 사람은 몸집이 우람한 남자
였다. 주장령은 어떻게 객상으로 위장해 산동 일대에서 출해할
것인가에 대해 소상히 늘어놓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조용히
그의 옆에서 귀를 기울일 뿐이었다.
장무기는 공연히 자책감을 느꼈다.
'하늘이 무너질까 봐 밤잠을 설친다더니, 내가 바로 그 짝이군.
저 무청영 곁에 앉아 있는 사람은 십중팔구 무열일 것이다. 주
백부는 그와 친분이 두터우니 함께 빙화도에 가지고 청한 건 인
지상정이거늘 내가 공연히 의심을 하다니.....'
이때 무청영의 음성이 들려왔다.
"아버님, 우리가 망망대해에서 그 작은 섬을 찾아내지 못하고
돌아올 길마저 잃으면 어떻게 하죠?"
장무기의 생각이 맞았다.
이번에는 무열이 입을 열었다.
"두려운 생각을 갖고 있다면 넌 가지 않아도 된다. 세상 이치가
모두 마찬가지이듯이 고난을 겪지 않고 안락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무청영은 응석을 부리듯 쏘아붙였다.
"저는 그저 여쭤본 것뿐인데 당장 훈계를 할 게 뭐예요?"
무열은 껄껄 웃었다.
"이번 일은 주사위놀음과 다를 바 없다. 운이 좋으면 우린 빙화
도에 상륙할 수 있을 것이다.사손의 무공이 제아무리 높다 해
도, 외톨이인데다가 눈먼 봉사이니 우리의 적수가 되지 못할 것
이다....."
여기까지 들은 장무기는 싸늘한 한기가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려
오싹 몸을 움츠렸다.
무열의 음성이 계속 들려왔다.
"그 도룡도만 우리 손에 들어오면 호령천하를 하게 될 게 아니
겠느냐? 다시 말해 나하고 너의 주 백부님은 어깨를 나란히 하며
무림지존으로 군림하게 된단 말이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는 설령 바다에서 죽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감수해야지."
위벽이 그의 말을 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금모사왕은 무공이 탁월하여 왕반산도에서 사
자후로 수십명의 강호 고수들을 일제히 죽였다고 합니다. 제자의
의견으로선 일단 빙화도를 찾아 내면 그와 정면대결을 피하고 음
식물에다 독을 풀어놓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설령 그가 앞 못
보는 장님이 아니라 하더라도 수양아들이 데려온 사람들이 자기
를 해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할 겁니다."
무열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구진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거렸다.
"진아야....."
그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약간 옆으로 돌렸다. 순간, 장무기는
그의 얼굴을 똑똑히 확인하며 자지러지게 놀랐다. 이 자는 바로
의부로 위장했던 개비수 호표였다. 주장령에게 중상을 입히고 요
청천에 의해 단칼에 죽음을 당한 것 등등은 모두 속임수였다. 모
든 것이 연극에 불과했던 것이다.
무열이 주구진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앞으로도 우린 철저하게 해야 한다. 사손을 없애고 도룡보도를
수중에 넣을 때까지 마각이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주구진이 말했다.
"아버지, 한 가지 부탁드릴 게 있어요."
"뭔데?"
"그 녀석을 시중드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몰라요. 빙화도에 가
서 사손을 죽일 때까지는 참겠지만 아무래도 내가 무슨 죄를 졌
나 봐. 아무튼 도룡도를 얻은 뒤엔 내가 직접 그 녀석을 죽일 수
있게 해 주세요."
장무기는 그녀의 말을 듣자 눈앞이 캄캄해지며 기절할 것만 같
았다. 주장령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우리가 교묘한 계략으로 그를 속여 금모사왕의 소재를 알아내
는 건 사실 옳은 일이 아니다. 그 녀석은 나쁜 사람은 아니니까,
사손을 죽이고 도룡도를 얻은 뒤엔 그의 눈을 멀게 하여 빙화도
에 남겨두는 게 좋겠다."
무열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주 형님의 어진 마음은 과연 협의도의 풍도를 잃지 않고 있군
요."
주장령이 한숨을 쉬었다.
"이 일은 이제 시작일 뿐이네, 아우, 우리가 먼저 바다에 나가
면 자네들 배는 멀리서 우리를 따르되 너무 가까이 오면 안 되
네. 꼬마의 의심을 사면 안 되니까 말이야. 그러나 너무 멀리 있
다가는 연락이 두절될 염려도 있지. 사공들을 잘 물색하게."
"알았습니다. 형님은 역시 주도면밀하십니다."
장무기는 머릿속이 혼란해졌다.
'내가 스스로 신분을 밝히지 않았는데 저들이 어떻게 알았을까?
음..... 내가 위벽과 두 여자에게 저항할 때 무당파 무공을 전개
했는데 그 때 견식이 넓은 주장령이 나의 내력을 알아냈구나. 그
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결을 하면서까지 의부의 소재를 말하지
않은 걸 알고 억지로 내 입을 열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게 틀림
없어. 그래서 가짜 그림을 그리고 저택을 불사르며 나를 감동케
한 수, 내가 스스로 빙화도에 가고 싶다고 말하게끔 유도한 거
야. 저자의 간계는 정말 너무 악랄하구나.'
이때 주장령과 무열은 출해할 준비와 계획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었다. 장무기는 더 이상 들을 것 없이 물러나기로 했다. 그는
숨을 죽이고 발걸음을 내딛었다. 한 발자국을 내디디고 반응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 다시 한 발자국을 내딛었다. 그는 주장령
과 무열의 무공이 강해 자칫 실수하여 낙엽이라도 밟게 되면 들
킬 게 뻔하므로 조심하는 것이다. 삼십여 걸음을 조심스럽게 걷
자 십여 장쯤 벗어났다. 무기는 그제야 빨리 걷기 시작했다.
그는 길로 가지 않고 숲 속으로 달려갔다. 그는 멈추지 않고 숨
을 헐떡이며 계속 뛰었다. 밤새 달렸는지 하늘이 훤히 밝아오기
시작했다. 주위를 살펴보니 그는 눈 덮인 숲 속에 있었다. 그는
주장령 등이 쫓아오지 않나 산 밑을 내려다보다 자신도 모르게
놀라 소리를 질렀다. 눈 위에 자신의 발자국이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때는 이미 봄철이었으나 산중턱에 쌓인 눈은 아직 녹지
않고 있었다. 그는 황급히 도망하느라 산 위로 오르기만 했지 자
기의 발자국이 눈 위에 남는 것은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이때 멀리서 이리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처절하고 무서운 울음
소리였다. 무기는 벼랑에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앞산 언
덕에 여러 마리의 잿빛 이리가 머리를 들고 으르렁거리고 있었
다. 굶주려 있는 모양이었으나 산과 산 사이에 엄청나게 깊은 협
곡이 가로질러 있어서 이쪽으로 건너올 수가 없었다. 그는 뒤를
돌아다보고 가슴이 철렁했다. 아래 산언덕에 다섯 개의 검은 점
이 빠른 속도로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주장령 일행임이 분명했
다. 아직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저렇게 빨리 달려온다면 한 시진
도 갈리지 않아 추격해 올게 틀림없었다.
장무기는 정신을 차리고 생각해 보았다.
'이리들의 밥이 될망정 저들의 수중에 잡혀서는 안 된다.'
사모했던 주구진이 아름다운 얼굴 속에 사갈 같은 마음을 지닌
걸 생각하니, 한때나마 그녀를 연모했던 자기가 한없이 부끄럽기
도 하고 상심이 되어 무턱대고 밀림 속으로 달려갔다. 밀림에는
길풀들이 허리까지 나 있어서 눈이 쌓였다 해도 발자국을 찾기
가 쉽지 않았다. 그는 지친데다가 체내의 음독이 발작해 두 다리
를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어, 풀이 무성한 곳에 기어들어가 날
카로운 돌맹이 하나를 왼손에 쥐었다. 주장령이 자기를 발견하고
가까이 오면 스스로 돌로 태양혈을 치고 죽을 심산이었다.
그는 이 두 달 동안 주가장에서 있었던 일들을 되새기며 마음이
서글펐다.
'공동파, 화산파, 곤륜파 사람들이 은혜를 원수로 갚아도 별 신
경을 쓰지 않았는데, 진 낭자마저 인면수심일 줄은 정말 몰랐다.
아,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내게 해주신 말을 왜 잊고 있었단 말
인가?'
모친이 죽을 때 그에게 들려 준 몇 마디가 새삼스레 또렷이 그
의 귓전을 때렸다.
----- 얘야, 이 다음에 여인을 조심해라. 여자는 예쁘면 예쁠수
록 잘 속인단다. -----
그는 눈물이 괴어 눈 앞이 흐릿해졌다.
'이 말을 할 때 어머니는 비수가 가슴에 꽂혀 그렇게 아픈 중에
도 고통을 참으며 내게 신신당부하신 것이다. 이 피어린 어머니
의 말씀을 어찌 지금까지 마음에 새기지 않았단 말인가! 혈도를
푸는 법을 몰랐다면 주장령의 음모를 지금까지도 모른 채 결국
그의 주도면밀한 계략에 빠져 그들을 데리고 빙화도에 가서 의부
의 생명을 해쳤을 거야.'
그는 입술을 깨물며 마음을 정하자 금방 머리가 맑아졌다. 주장
령 부녀의 음모는 처음부터 너무나 완벽했다. 주장령은 자기가
장취산의 아들이라는 걸 알자 개들을 죽이고 딸을 때리면서까지
자기의 신임을 얻은 것이다. 그 넓은 저택을 불사르는 게 아깝긴
했지만 무림지존인 도룡보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주
장령이 일을 처리하는 신속함과 과단성을 실로 놀랍고 무서웠다.
그는 다시 생각했다.
'섬에 있을 때, 의부께서는 칼을 안은 채 매일 멍하니 앉아 있
곤 했다. 그런데도 십 년이 지나도록 그 도룡도의 비밀을 알아내
지 못했다. 의부는 비록 총명하긴 하지만 주장령의 간교한 기지
와 계략을 따르지 못한다. 의부께서는 도룡도의 비밀을 생각해
내지 못했지만, 그 보도가 주장령의 손아귀에 들어갈 때쯤이면
거의 생각해 낼 것이다.'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며 온갖 상념에 빠져들고 있는데 발걸음소
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주장령과 무열 두 사람이 먼저 수풀 사
이로 들어온 것이다.
무열이 말했다.
"그 꼬마가 이 숲에 숨어 있을 겁니다. 더는 도망....."
주장령이 그의 말을 막으며 이야기했다.
"진아가 아마 그에게 뭔가 잘못을 한 모양이야. 걱정이 되는구
먼. 어린 나이에 이 눈 덮인 산에서 자칫 변이라도 당하면 은인
께 면목이 없네."
그의 말은 무기를 걱정하고 있었다.
장무기는 그 말을 듣자 끔찍한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이 나뭇 가지로 덤불숲을 헤치는 소리가 들렸다. 장무기
는 몸을 웅크리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다행히 수풀은 굉장히 넓
어 일일이 다 헤치면서 확인할 수는 없었다. 잠시 후에 위벽과
주구진, 무청영도 도착했다. 다섯 사람은 수풍을 거의 반나절이
나 뒤졌으나 장무기를 찾아내지 못했다. 그들은 모두 펑퍼짐한
바윗돌 위에 앉아 쉬었다. 그들이 있는 곳과 무기가 숨어 있는
곳은 겨우 삼 장 거리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풀이 무성했으므
로 그의 몸이 가려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주장령이 잠시 생각하다가 돌연 큰 소리로 물었다.
"진아야, 넌 도대체 무기에게 무슨 잘못을 했길래 그가 말 한
마디 없이 한밤중에 떠나가게 만들었느냐?"
주구진이 놀라 쳐다보자 주장령은 얼른 그녀를 향해 눈짓을해
보였다. 장무기는 풀숲에 숨어서도 그들이 하는 짓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주구진은 금방 눈치를 채고 큰 소리로 대답했다.
"제가 장난삼아 그의 혈도를 찍었거든요. 그런데 그걸 진짜로
받아들일 줄은 몰랐어요."
그녀는 이어 소리쳐 불렀다.
"무기! 무기! 어디에 있지? 내가 잘못했어!"
목소리에 교태가 어려 유혹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아무
리 불러도 무기가 나타나지 않자 갑자기 울면서 소리쳤다.
"아이구..... 아버님! 제발 저를 때리지 마세요. 전 나쁜 뜻으
로 무기 동생에게 장난을 친 건 아니예요."
주장령은 손을 들어 자신의 허벅지를 세차게 치며 입으로 호통
을 쳤다. 주구진은 연신 비명소리를 지르며 정말로 부친에게 맞
는 것처럼 흉내냈다. 무열, 위벽, 무청영은 옆에서 지켜보며 배
시시 웃고 있었다.
무기는 두 부녀가 하는 연극을 보며 소름이 돋았다.
'내가 보았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아마 그녀의 비명소
리를 듣고 뛰쳐나갔을 거야.'
주씨 부녀는 무기가 필시 이 숲 속에 숨어 있으리라 믿고 하나
는 호통을 치고 하나는 애걸을 하며 가증스럽게 능청을 부렸다.
장무기는 두 손으로 귀를 막았으나 그 소리는 여전히 귓속으로
파고 들었다. 그는 온몸에 소름이 끼쳐 더 이상은 참지 못하고
앞으로 뛰쳐나가 소리쳤다.
"지금 뭐하는 거냐? 그렇게 한다고 내가 속을 것 같으냐?"
그들 일행은 일제히 탄성을 질렀다.
"여기에 있었군!"
장무기가 소리쳐 말했다.
"이젠 모든 것이 끝장이에요!"
그는 수풀을 뚫고 미친듯이 달렸다. 주장령과 무열이 몸을 날려
그를 추격했다. 장무기는 죽기로 작정했으므로 주저하지 않고 만
길 협곡을 향해 달려갔다. 주장령의 경공은 그보다 훨씬 빨랐으
므로 그가 협곡에 닿기도 전에 거의 쫓아왔다. 그는 손을 뻗어
장무기의 등을 나꿔잡았다. 장무기가 멈칫하는 순간 주장령은 오
른손으로 그의 허리를 꽉 잡았다. 무기의 한쪽 발은 이미 허공을
내딛고 있었다. 나머지 한쪽발마저 앞으로 내딛는 순간 그의 몸
이 돌덩어리처럼 앞으로 기울어졌다.
주장령은 그가 정말로 계곡으로 뛰어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무기를 잡고 있던 그도 덩달아 앞으로 같이 기울었다. 그는 질겁
을 했다. 만약 그가 즉시 손을 놓고 반대쪽으로 몸을 날리면 위
기를 모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손을놓으면 무림지
존인 도룡보도는 영원히 그와 인연이 끊어지게 된다. 두 달 동안
고심해서 세운 계획과 초토가 된 대저택이 그가 손을 놓음으로
해서 물거품이 되는 것이다. 그가 머뭇거리는 사이에 떨어지는
속도는 더욱 가속되었다.
결국 두 사람은 함께 가파른 절벽 밑으로 떨어졌다. 그 아래는
만장이나 되는 심연이었다. 무열과 주구진 등이 놀라 외치는 소
리가 귓전에 들려왔다. 그러나 그 소리도 곧 들리지 않았다. 둘
은 계곡에 꽉 들어찬 구름과 안개를 뚫고 곧바로 아래로 떨어져
내려갔다.
여지껏 갈아 오면서 숱한 풍랑을 겪은 주장령은 위기에 처해도
여간해서는 당황하지 않았다. 칼날 같은 바람소리를 들으며 몸이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지만, 벼랑가에 나뭇 가지가 군데군데 뻗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나뭇 가지를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그
러나 몇 자 차이로 잡을 수가 없었다. 몸이 계속 떨어져 내리며
가까스로 마지막 가지 하나를 잡았다. 그러나 두 사람이 떨어지
는 힘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나뭇 가지가 버티지 못하고 뿌지직
부러지고 말았다. 그 덕분에 떨어지는 속도가 원만해졌고, 주장
령은 이 틈을 타 두발을 앞으로 차서 절벽에 바싹 기대며 오룡
교주(烏龍絞柱) 초식으로 그 소나무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그는
무기를 나무 위에 올려놓았다. 장무기가 죽으려고 뛰어내릴까 봐
팔을 놓지 않았다.
장무기는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수 없자 한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흥! 나를 아무리 괴롭혀도 난 당신을 데리고 의부를 찾으러 가
진 않을 것이오. 그러니 그런 끔은 버리는 게 좋을 것이오."
주장령은 나뭇가지에 올라앉으며 위를 쳐다보았다. 사람의 그림
자도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생각을 하니
주장령도 가슴이 두근거리며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가 정신을 차리고 읏으며 말했다.
"장형제,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가? 한 마디도 못 알아 듣겠
네. 쓸데없는 생각일랑 하지 말게."
무기가 대꾸했다.
"난 이미 당신의 속셈을 알아냈으니 이젠 소용이 없어요! 강제
로 나를 빙화도로 데려간다 해도 내가 동서남북 아무 방향이나
엉터리로 가리키면 모두 바다에서 죽고 말 거요!"
주장령은 그 말을 듣고 보니 사실 그럴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
은 그와 싸울 때가 아니었다. 위로 올라가기는 불가능했다. 그리
고 아래는 밑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계곡이니 아래로 내려
가는 길도 없었다. 유일한 방법은 절벽을 따라 천천히 기어오르
는 것이었다.
주장령이 무기를 향해 말했다.
"이봐, 쓸데없이 의심을 하지 마라. 난 너를 괴롭혀서 사대협을
찾을 생각은 없다. 만일 그런 일이 있다면 나는 수 만개의 화살
에 맞아 묻힐 곳도 없이 죽을 것이다."
그가 이처럼 굳게 맹세하는 것은 헛소리가 아니었다. 그는 무기
가 자결하려고 계곡으로 뛰어든 것을 보고 아무리 그를 괴롭혀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의 마음을 감
동시켜 스스로 가자고 하기 전에는 안 될 일이었다. 무기는 그가
맹세하는 걸 보자 마음이 조금 너그러워졌다.
주장령이 말했다.
"우리 여기서 천천히 기어 올라가자. 절대 뛰어내리면 안 된다.
알았냐?"
"당신이 괴롭히지 않는다면 내가 죽을 필요가 있겠소?"
주장령은 고개를 끄덕이며 단도를 꺼내 나무껍질을 잘라 그 껍
질을 가는 줄로 엮어 만들어 자기와 무기의 허리를 연결해서 동
여맸다.
두 사람은 눈 덮인 절벽을 비스듬히 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손과 발로 바위 틈을 짚으며 계속 위로 기어 올라갔다. 절벽은
상당히 가파른데다 얼음이 얼어 있어 미끄러웠다. 장무기는 두
번이나 미끄러졌으나 주장령이 잡아 주어 아래로 떨어지는 걸 면
했다.
반나절을 기어 올라가자, 손과 발꿈치, 무릎 등이 날카로운 얼
음 모서리에 찢겨 선혈이 낭자했다. 그들은 험한 절벽을 한 걸음
한 걸음 온 힘을 다해 기어갔다. 병풍처럼 생긴 큰 산맥을 돌아
가자 주장령은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찌푸렸다. 도대체 얼마나
높고 깊은 절벽인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엔 구름바다가 망망하
게 펼쳐져 있었고 더는 갈 길이 없었다. 그들은 절벽에 삐쭉 튀
어나온 평평한 곳에 겨우 몸을 기댈 수 있었다. 둥그스름한 평지
는 공중에 떠 있는 듯 걸려 있어 더 이상 위로 올라갈 수도, 아
래로 내려 갈 수도 없는 그야말로 죽는 길밖에 없는 셈이었다.
하얀 눈뿐 나무는 물론 짐승 한 마리도 없었다.
장무기는 오히려 재미있었다.
"이젠 당신도 끝장났어요. 이렇게 되었으니 도룡보도가 있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주장령이 화가 나서 소리쳤다.
"쓸데없는 소리 마라!"
그는 무릎을 꿇고 앉아 눈을 뭉쳐 삼키고는 한동안 우기조식을
하며생각했다.
'지금은 피곤하기는 해도 아직 힘이 남아 있지만, 만약 하루를
더 굶었다간 이 곤경에서 벗어나기 어렵겠다.'
그는 일어나며 무기에게 말했다.
"여기서는 더 갈 길이 없으니 우리 되돌아가서 출로를 찾아 보
자."
무기가 대답했다.
"나는 여기가 좋은데, 무엇 때문에 돌아가겠소?"
주장령이 노해서 소리쳤다.
"여기는 먹을 것이 전혀 없는데 멍청히 앉아서 뭘 하겠단 말이
냐?"
무기는 피식 웃었다.
"사람으로 구차하게 살 생각 마시고, 차라리 신선의 길을 수련
하시는 게 어떻겠소?"
주장령은 크게 화가 났으나 함부로 대했다간 또 몸을 날려 죽으
려 할까 봐 참았다.
"그럼 너는 여기서 쉬고 있어라. 내가 출로를 찾은 뒤에 너를
데리러 오겠다."
"나의 생사존망에 어찌 그리 괘념하시오? 당신은 아직도 나를
데리고 빙화도에 갈 꿈을 꾸고 계시는 모양인데, 제발 그런 생각
은 하지 마세요."
주장령은 대답하지 않고 온 길로 되돌아갔다. 그는 아까의 큰
소나무가 있는 곳으로 와서 왼쪽으로 갈 길이 있는지 살펴보았
다. 이 산벽은 지세가 험했으나 혼자서는 꽤 빨리 움직일 수가
있었다. 그는 기고 걸으면서 반 시진을 더듬었으나 절벽에서 벗
어날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주장령은 벼랑에 기대어 한탄하다
가 돌아왔다.
장무기는 아무 말 없이 그의 얼굴색을 살폈다. 길을 못 찾았다
는 걸 알 수 있었다.
'내 몸의 음독은 제거할 수가 없다. 이제 곧 수명이 다할 것이
다. 어디서 죽은들 나야 마찬가지지. 그런데 저 사람은 있는 복
을 누리지 않고 무림지존이 된다는 망상 때문에 이 얼음 천지 속
에서 굶어 죽게 되었으니 불쌍하구나.....'
주장령의 계략을 알았을 때는 몹시 증오했으나, 절벽에서 떨어
진 뒤 계속 말로 비고고 나니 사기가 꺾여 고개를 푹 숙이고 있
는 그를 보자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오히려 따뜻하게 위
로했다.
"당신은 살 만큼 살았고 모든 영화와 쾌락한 생활을 누리셨으
니, 지금 죽어도 무슨 한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주장령이 무기를 구해 준 것은 그를 끝까지 속여 감동시켜서 빙
화도로 함께 가려는 속셈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살 길이 없
고 이런 지경을 당한 것도 모두 장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원
망스러운 마음이 일었다. 그는 분노와 함께 눈을 부릅뜨고 무기
를 노려보았다. 무기는 그 동안 자상하고 온후했던 사나이가 갑
자기 야수처럼 변하는 걸 보자 뒷걸음질을 했다.
"도망갈 길이 있을 것 같으냐?"
그는 팔을 뻗어 무기를 잡으려 했다. 그에게 온갖 고통을 준 뒤
서서히 죽일 작정이었다. 드디어 본성이 드러난 것이다.
장무기는 미끄러지며 뒤로 스러졌다. 순간 왼쪽 산벽에 컴컴한
동굴이 보였다. 그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곳으로 비집고 들어
갔다. 찍! 하는 소리와 함께 바지 가랑이가 찢겨 나갔다. 주장령
이 잡아당긴 것이다. 무기는 계속 동굴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돌연 쿵하며 머리가 돌과 부딪쳤다. 눈앞에 별이 왔다갔다 했다.
그는 주장령이 자기를 해치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럴수록 허겁
지겁 동굴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이 캄캄한 동굴로 들어가면 위
험에 빠질지 상대의 손아귀에 잡히게 될지 생각할 여유도 없었
다. 주장령이 계속 뒤쫓아왔다. 다행히 그 구멍은 갈수록 좁아져
십여 장을 기어 들어가자 덩치가 큰 주장령은 더 이상 들어오지
못했다. 장무기가 몇 장을 더 기어가 방향을 꺾자 밝은 빛이 보
였다. 그는 너무나 기뻐 빨리 기어갔다.
뒤에서 주장령이 외쳤다.
"너를 해치지 않을 테니 이리 나와라!"
주장령은 내력을 운용하여 동굴 석벽에다 일장을 쳤다. 그러나
석벽이 견고하기 이를데 없어 그의 손바닥만 은은히 저려올 뿐이
었다.
그는 단도를 꺼내 구멍을 파내려고 했다. 몇 번 파자 쨍그렁 하
는 소리와 함께 단도가 부러졌다. 주장령은 화가 머리끝까지 솟
구쳐 있는 힘을 다해 앞으로 한 자 정도 나아갔다. 그러나 그 이
상은 나아갈 수가 없었다. 단단한 석벽이 그의 몸뚱이를 꽉 조인
것이다. 그는 질식할 것 같아 뒤로 물러나려 했다. 그러나 앞으
로도 뒤로도 움직일 수가없었다. 그는 혼비백산하여 젖먹던 힘까
지 짜내 두 팔로 돌을 밀었다. 비로소 몸이 겨우 한 자 정도 뒤
로 물러났다. 가슴에 극렬한 통증을 느끼는 사이에 늑골 하나가
부러졌다.
----- 제 3 권 3 장 끝 -----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3 권
제 4 장 장무기(張無忌)와 의문의 소녀
장무기는 좁은 굴 속에서 기다시피 해서 수장을 걸어오자 눈앞
이 점점 밝아졌다. 조금은 더 가자 갑자기 눈이 부셨다.
그는 눈을 감고 잠시 정신을 차리고 나서 다시 눈을 떠 보니,
꽃덩굴이 우거진 취곡(翠谷)이었다. 파란 잎사이로 빨간 꽃이 엇
갈려 서로 빛을 발하는 것이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그는 환호성을 터뜨리며 굴 속에서 기어나왔다. 깊은 굴속에 있
었지만 그는 가볍게 껑충 뛰어 올라왔다. 그가 밟고 있는 곳은
연한 풀잎이었다. 그의 코 속으로 꽃향기가 다가왔다. 산새들이
지저귀며 나뭇 가지에는 먹음직스런 과일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
었다. 어두컴컴한 굴 속을 빠져 나오자 이런 아름다운 곳이 있다
니 정말 꿈만 같았다. 그는 상처의 아픔마저도 잊은 채 앞으로
달려나갔다. 단숨에 약 이 리 길을 달려오자 눈앞에 큰 산봉우리
가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사방을 둘러보니 이 취곡은 사방이 산
으로 둘러싸여 한 번도 인적이 닿지 않았던 것 같았다. 사방엔
높은 산봉우리들이 구름을 찌르고 하늘로 치솟아 있었다. 이 험
준한 산세 때문에 그 누구도 도저히 산을 넘어 여기까지 들어올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장무기는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풀밭에는 산양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그를 보고도 놀라거나 도망치지도 않았다. 나
뭇 가지엔 원숭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하늘이 나를 박하게 대하진 않는구나. 내가 죽을 곳을 이런 선
경(仙境)으로 택해 주다니....."
그는 서서히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동굴 저쪽에서 주장령의 목
청이 들려왔다.
"소형제, 빨라 나오게! 굴 속에서 숨이 막히지도 않는가!"
장무기는 크게 웃으며 소리쳤다.
"여긴 참 좋은데요!"
그는 낮은 나뭇 가지 위에서 이름 모를 과일을 몇 개 땄다. 과
일의 향기가 코를 찔렀다. 한 입을 깨물자 맛은 정말 기가 막혔
다. 그는 과일 하나를 굴 속으로 던지며 외쳤다.
"받으세요! 맛이 기막힌 겁니다."
과일은 굴 속을 지나 절벽에 부딪치며 부서졌다. 주장령은 씨까
지도 먹어치웠다. 씹을수록 배가 더 고파왔다. 그는 다시 외쳤
다.
"소형제, 몇 알 더 던지시오!"
"당신은 굶어 죽어도 싸요! 먹고 싶으면 직접 이리로 오시요."
장무기가 이렇게 말하자 주장령이 다시 소리쳤다.
"내 몸집이 너무 커 굴 속으로 빠져나갈 수 없네!"
"몸을 두 쪽으로 가르면 되지 않소?"
그 말에 주장령은 자신의 음모가 탄로났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장무기가 자기를 굶어죽게 해서 복수하려고 하는 것으로 알고 가
슴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큰 소리로 욕설을 퍼부었다.
"이 죽일 놈아! 이 굴 속의 과일이 너를 평생 먹여 살릴 것 같
으냐? 나도 굶어 죽겠지만, 너도 곧 굶어 죽을 것이다."
장무기는 그를 거들떠 보지도 않고 몇 알을 더 먹자 배가 불렀
다.
반나절이 지나자 갑자기 짙은 연기가 굴 속을 지나 안으로 들어
왔다. 그것은 주장령이 밖에서 소나무 가지를 태워 연기를 내어
장무기를 굴 속에서 나오게 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수십
수백단의 나뭇 가지를 태워도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
는 생각할수록 웃음이 나와 거짓으로 기침소리를 냈다.
주장령이 외쳤다.
"소형제, 빨리 나와! 절대로 해치지 않겠다.!"
장무기는 일부러 소리를 질러 기절한 척하고 입구에서 다른 데
로 걸어갔다. 서쪽으로 약 이 리(二里) 길을 걸어가자 절벽에서
폭포수가 힘차게 아래로 떨어졌다. 그것은 눈이 녹아 생긴 폭포
였다. 햇빛이 비친 폭포는 거대한 용과 같았다. 정말 장관이었
다.
폭포는 청철벽록(淸澈壁錄)의 깊은 연못에 떨어지고 있었다. 연
못에 물이 가득 차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따로 물이 흐르는 곳
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한참을 감상하고 난 후 고개를 숙였다. 손은 온통 흙먼지
와 가시에 찔려 핏자국이 나 있었다. 그는 물가로 가 모자와 양
말을 벗어 발을 씻었다.
얼마 뒤, 갑자기 파다닥하는 소리와 함께 한 자가 넘는 흰 물고
기가 뛰어 올랐다. 장무기가 잽싸게 고기를 잡으려고 했으나, 허
사였다. 그는 자세히 물 속을 들여다보니 십여 마리의 흰 대어가
노닐고 있었다. 그는 어렸을 때 빙화도(氷火島)에서 고기잡는 법
을 익혔었다. 그는 나뭇 가지를 꺾어 끝을 뾰쪽하게 깍은 후, 조
용히 지켜보다가 물고기가 물 위로 떠 오르자 잽싸게 찔러 어김
없이 물고기를 낚았다.
그는 환호성을 지르며 날카로운 나뭇 가지로 배를 갈라 창자를
씻어 낸 후, 마른 가지를 주워 모으고 품 속에서 화도화석화용
(火刀火石火용)을 꺼내 불을 붙이고 물고기를 구었다. 그 향긋한
냄새는 정말 기막혔다. 다 익자 그는 순식간에 한 마리의 물고기
를 해치웠다. 정말 평생 이런 맛은 처음 느껴 본 것 같았다.
다음날 정오 그는 다시 물가로 가 물고기를 잡아 구어 먹었다.
그는 앞으로 살아가려면 불씨를 남겨놔야겠다고 생각했다. 빙화
도에선 모든 도구를 자신이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그는 별 불편
을 느끼지 않았다. 그는 풀을 모아 침대를 만들고 다른 필요한
도구를 만들었다.
저녁 때까지 일하고 난 그는 주장령이 굶어죽을까 염려되어 싱
싱한 과일을 한 아름 따 굴 저편으로 던졌다. 그는 주장령이 생
선을 먹고 나면 힘이 늘어나 굴 속으로 쳐들어 올까봐 구운 물고
기를 주지 않았던 것이다.
나흘째 되는 날, 그는 흙으로 가마솥을 만들고 있을 때였다. 갑
자기 나무 위의 원숭이들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매
우 긴박한 듯했다. 그가 조심조심 달려가 보니, 절벽 밑에 한 원
숭이가 땅에 떨어져 있는데, 뒷다리를 큰 돌덩이에 눌려 꼼짝도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절벽에서 실족하여 떨어진 것으로
생각했다. 원숭이를 일으키자 원숭이의 다리는 이미 부러져 고통
스러워하고 있었다.
장무기는 재빨리 나뭇 가지를 두 개 꺾어 다리 양쪽에다 그것을
대고 꽁꽁 묶고 나서 약초를 상처에발라 줬다. 이 계곡에서 거
기에 맞는 약초를 찾긴 힘들었지만 그의 접골 솜씨로서 부러진
다리는 고쳐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원숭이는 뜻밖에도 은혜를 갚을 줄 알고 이튿날 많은 과일을
따 그에게 가져왔다. 십여 일이 지나자, 과연 부러진 다리는 완
치되었다.
계곡 속엔 오랫 동안 아무 일도 없었다. 그는 그저 원숭이들과
놀며 지냈다. 만약 몸의 한독(寒毒)이 가끔씩 발작하지만 않는다
면, 계곡 속의 생활은 정말 즐거웠다. 어느 땐 산양이 지나가는
것을 보자 잡아서 먹을 생각도 했으나, 산양들이 너무 유순하고
사랑스러워 정말 건드릴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과일과 물고기가
많아 먹을 것은 큰 걱정없었다. 며칠 뒤엔 꿩을 잡아 포식하기도
했다.
이런 생활도 어느덧 한 달이 흘러갔다.
어느 날 아침, 그는 단잠에 빠져 아직 일어나지 않았는데, 갑자
기 털이 숭숭한 큰 손이 자기의 얼굴을 가볍게 쓰다듬는 듯한 느
낌이 들었다. 그는 깜짝 놀라 급히 일어나 보니, 흰 고릴라 한
마리가 자기의 옆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품에는 자기와 매일같
이 놀던 원숭이를 안고 있었다. 그 원숭이는 찍찍하고 계속 외쳐
댔다. 손은 대백원(大白猿)의 흰 배를 가리키고 있었다.
장무기는 문득 썩는 냄새를 맡았다. 대백원의 배를 보니 피가
범벅이 되어 있었다. 큰 종기가 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좋아, 알았어 이제 보니 내가 환자를 데리고 왔구나."
대백원은 왼손에 갖고 있던 주먹만한 복숭아를 공손하게 그에게
바쳤다. 장무기는 싱싱하고 큰 복숭아를 보자 마음속으로,
'어머님께서 옛날 얘기를 해주실 때, 곤륜산에서 어느 여선왕모
(女仙王母)께서는 생일을 맞은 때마다 큰 복숭아를 차려놓고 군
선들을 초청했다고 하셨는데, 서왕모란 사람은 진짜 인물인지 아
닌지 몰라도 곤륜산에 큰 반도(蟠桃)가 난다는 것은 사실일 거
야.'
하고 생각하면서 웃으며 반도를 받았다.
"이런 걸 안 가져와도 내 병을 고쳐 줄 텐데."
장무기는 가볍게 그의 배를 들쳐보자 그만 깜짝 놀랐다. 그 종
기는 너무나 클 뿐만 아니라 너무나 딱딱한 것이었다. 그는 의서
에서 이런 지독한 종기는 본 적이 없었다. 만약 이 딱딱한 것이
곪으면 정말 불치의 종기가 될 것 같았다. 고릴라의 진맥을 짚어
보니 별로 심해 보이진 않았다. 그는 배의 털을 제치고 다시 보
니 그 자라는 네모반듯한 모양으로 불쑥 튀어나왔으며 사방에
실로 꿰맨 자국이 있었다. 사람의 손을 거친 것이 틀림없었다.
고릴라가 아무리 영리하다 해도 어찌 실과 바늘을 쓸 줄 알겠는
가! 그는 그 불쑥 튀어나온 것이 혈맥의 운행을 방해해서 살이
썩게 된 것이라 생각하고, 이 종기를 고치려면 뱃속에 있는 물건
을 꺼내야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수술이라 하면 그는 호청우에게 배워 훌륭한 솜씨를 가지고 있
지만, 여긴 예리한 칼도 없고 가위도 없지 않은가. 그리고 약도
없고 정말 난처했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큰 돌을하나 주워
다른 큰 바위에다 던졌다. 깨진 돌조각에서 예리하게 깨진 것을
골라 천천히 대백원의 실로 꿰맨 곳을 잘랐다. 그 흰 원숭이는
나이가 들어 매우 영특하였다. 장무기가 자기의 병을 고쳐주려는
것을 알고 그 극렬한 통증을 꾹 참고 있었다.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장무기는 그의 실밥을 잘라내자 그의 뱃속에 유포(油布)
로 된 작은 보따리가 보였다. 그는 괴이하다고 느끼면서도 보따
리를 풀어 보지 않고 다시 백원의 배를 꿰매었다. 생선뼈를 바늘
삼아 나무껍질로 실을 삼아 억지고 꿰매었던 것이다. 상처에 약
도 발랐다. 반나절이 지나서야 일을 마칠 수 있었다. 백원은 매
우 고통스러워 보였으나 움직이지도 않고 누워 있었다.
장무기는 손을 씻고 유포의 핏자국을 닦아낸 후 풀어 보았다.
그 안에는 얇은 네 권의 경서가 있었다. 유포로 워낙 단단히 싸
매어 있었기 때문에, 백원의 뱃속에 오래 들어 있었지만 조금도
상하지 않았다. 겉장엔 꼬불꼬불한 글자 몇 자가 적혀 있었지만
그는 한 자도 알아보지 못했다. 안을 제쳐 보니 네 권이 모두 그
런 괴상한 글씨였다. 그러나 행간마다 깨알만한 글자가 한문(漢
文)으로 씌어져 있었다.
그는 정신을 차리고 다시 처음부터 살펴보니, 그것은 연기운공
(練氣運功)이라는 비결이었다. 그는 천천히 읽어내려 가자 정신
이 번쩍 들었다. 자기가 기억하고 있던 세 줄의 글씨가 보인 것
이다. 그것은 바로 태사부님과 유이백께서 전수하시던 무당 구양
공이었다. 그는 또 아무렇게나 다음 장을 넘겨 보니 다시 무당구
양공의 문구가 보였다. 그러나 어느 곳은 태사부님과 유이백님께
서 전수하시던 것과 큰 차이가 있었다.
그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는 책을 덮고 조용히 생각했다.
'이건 도대체 무슨 경서이지? 어째서 무당구양공의 문구가 들어
있지? 그런데 또 왜 무당 본문에서 전수한 것과 틀리지? 태사부
의 부인이신 각원대사께서 구양진경의 경문을 읽으실 때 태사부,
곽양 여협, 소림파 무색대사 세 분이 각기 일부를 기억하셔서 뒤
에 무당, 아미, 소림 삼 파의 무공이 크게 진보하여 수 십 년 서
로 어깨를 나란히 하며 무림에 이름을 떨치지 않았는가!그 구양
진경은 능가경의 가운데마다 적혀있다고 하셨다. 이 꼬불꼬불한
문자는 필시 범문(梵文)으로 된 능가경일 거야. 그런데 어떻게
고릴라의 뱃속에 들어 있을까?
이 경서는 정말 그 구양진경이었다. 그러나 어째서 고릴라의 뱃
속에 들어 있는지 그것은 세상에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것은 구 십여 년전, 소상자와 윤극서가 소림사 장경각에서 이
경서를 훔친 후 각원대사에게 쫓겨 화산 꼭대기까지 왔었다. 그
들은 더 이상 몸을 피할 수 없자 마침 옆에 어린 고릴라가 있는
것을 보고 의논 끝에 고릴라의 배를 갈라 거기에 숨긴 것이었다.
뒤에 각원, 장삼봉, 양과 셋이서 소상자와 윤극서를 아무리 뒤져
도 경서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구양진경의 종적은 근 백
년 동안 무림의 일대 의혹이 된 것이다.
그 후 소상자와 윤극서는 고릴라를 데리고 멀리 서역까지가 누
가 먼저 경서의 무공을 익히고 자기를 죽일까 하고 견제하며 누
구도 고릴라 뱃속의 경서를 꺼내지 못했다. 뒤에 두 사람은 곤륜
산 경신봉(警神峯)에 와 서로 암습하여 양패구상을 당한 것이다.
그 후 경서는 영원히 고릴라의 뱃속에 있게 된 것이다.
소상자의 무공은 원래 윤극서보다는 한 수 위였으나, 그가 화산
에서 각원대사에게 일 권을 친 것이 그 반동의 진력으로 인해 중
상을 입어 윤극서와의 싸움에서 먼저 죽게 된 것이었다. 윤극서
는 죽기 직전에 곤륜삼성 하족도를 만나 양심의 가책을 받고 그
에게 소림사 각원대사에게 그 경서가 고릴라의 뱃속에 있다고 전
해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그런데 그가 기력을 잃고 숨이 넘어가
면서 희미하게 한 말소리라 경재후중(經在후中)을 하족도는 금재
유중(金在油中)으로 들었던 것이다. 하족도는 약속을 지키려고
중원에 와 금재유중이란 말을 각원대사에게 전했던 것이다. 각원
은 그 말뜻을 알 수 없었고 그가 설명하기도 전에 일장의 거대한
풍파를 일으켰던 것이다. 그로부터 무림에는 무당파 아미파라는
두 파가 더생겨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원(猿)은 매우 다행스럽게도 곤륜산에서 선도(仙桃)
를 따먹으면서 천지의 영기(靈氣)를 받아 구십 여년을 살면서 여
전히 날으는 듯이 뛰어다니면서 살아온 것이다. 그의 몸에 털은
점점 흰 색으로 변해 한 마리의 백원으로 된 것이다. 그러나 뱃
속에 경서가 들어 있어서 위와 장을 꽉눌러 가끔씩 배에 통증이
오곤했다. 배에 종기도 어느 땐 괜찮다가 어느 땐 다시 생겨나곤
했다. 오늘 비로소 장무기를 만나 뱃속의 경서를 꺼내니 백원으
로선 정말 구십 년 묵은 체증이 가시는 듯하며 심복대환(心腹大
患)을 도려낸 것이다.
이 기구한 곡절을 장무기보다 수십 배 더 총명한 사람이라 할지
라도 어떻게 알 수가 있겠는가!
장무기는 한참 동안 멍청히 있다가 백원이 준 대반도(大蟠桃)를
한 입 물었다. 그러자 싱싱하고 달콤한 과즙이 서서히 목으로 흘
러들어갔다. 계곡의 무명 과실들과는 또 다른 맛이 느껴졌다.
장무기는 반도를 다 먹고 나서 다시 생각을 이었다.
'태사부께서 전에 만약 내가 소림, 무당, 아미 삼파의 구양신공
을 터득하면 혹시 몸 속의 음독을 제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시
지 않았던가? 이 삼파의 구양공은 모두 구양진경에서 생겨난 것
인데, 만약 이 경서가 진짜 구양진경이라면 삼파의 구양공을 나
눠 배우는 것보다 훨씬 뛰어나지 않겠는가! 이 계곡에서 할일도
없으니 이 경서를 따라 연습이나 해야지. 설령 구양진경이 아니
라 할지라도 배워서 나쁘진 않겠지, 또한 아무 소용도 없고 배워
서 해를 입는다 해도 기껏해야 죽기밖에 더 하겠는가!'
그는 아무 생각도 없이 세 권을 양지 바른 곳을 골라 마른 풀로
덮고 나서 돌덩어리 세 개를 그 위에다 눌러놨다. 원숭이들이 그
것을 갖고 장난치다가 찢어 버릴까 봐 그렇게 한 것이었다.
그는 한 권만 들고 먼저 몇 번 읽고 나서 다시 연구하며 차근차
근 터득해 나갔다.
그는 마음속으로 내가 만약 진짜 구양진경을 익히고 체내 음독
을 제거한다 해도, 이 높은 산으로 막힌 계곡을 어떻게 빠져나가
겠는가? 오늘 터득해도 좋고 내일도 좋다. 그것을 하나도 연마하
지 못한다 해도 무료한 날을 보내긴 안성마춤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런 느긋한 마음을 먹자 정말 이상하리 만치 진전이 빨랐
다. 그 짧은 넉 달 동안에 이미 한 권의 경서에 적힌 공부를 모
두 깨우치고 거기에 따라 연마를 달성한 것이다.
한 권을 끝내고 계산해 보니, 호청우가 독이 퍼져 죽을 것이라
는 날짜가 이미 지났던 것이다. 게다가 그는 몸도 가벼웠고 전신
에 진기가 유동하는 것을 느끼며 조금도 병색이 보이지 않았다.
전에는 시시각각으로 한독이 엄습해 오는 것으로 느꼈었는데, 지
금은 한 달 넘어 가끔 한 번씩 가볍게 느꼈다. 얼마 후, 그는 이
권의 경문에서 이런 구절을 발견했다.
"호세구양(乎세九陽) 포일함원(包一含元). 이 책의 이름은 구양
진경이니라."
그제서야 그는 태사부께서 잊지 못하시는 바로 구양진경이라는
것을 알고 기뻐하였다. 그 대백원은 자기의 병을 고쳐 준 은덕을
알고 가끔 대반도를 갖다 주었다. 그것도 원기를 북돋아 주는 것
이었다. 제 이 권의 삼분의 일 정도를 터득하자, 체내의 음독은
언제 어디로 사라졌는지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매일 구양진경을 터득하는 일 외엔 그저 원숭이들과 장난
치며 지냈다. 그가 딴 과일은 언제나 반은 주장령에게 나눠 주었
다. 그는 아무 걱정도 없이 정말 자유자재였다. 그러나 주장령이
있는 곳은 좁은 평대(平坮) 뒤라 정말 하루가 일 년 같았다. 겨
울이 되면 사방이 눈과 얼음에 덮여 한풍이 뼈까지 스며드는 듯
했다. 정말 그 고초는 형용할 수가 없었다.
장무기는 제 이 권을 끝내자 이미 그는 추위도 타지 않았다. 그
러나 배워 갈수록 더욱 어렵고 오묘해서 진전이 점점 느려졌다.
제 삼 권은 꼭 일 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마지막 권은 더더욱 어
려워 삼 년이나 걸렸다.
그는 이 조용한 계곡에서 오 년을 지내 온 것이다. 그는 어린애
에서 어느새 몸집이 우람한 청년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마지막
이 년은 원숭이들과 산벽을 타고 올라가 멀리를 내다보며 놀기도
했다. 지금의 그의 공력으로 산봉우리에 올라 계곡을 벗어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세상 인심이 음험
하고 악독한 것을 생각하자 그만 자기도 모르게 치를 떨었다. 그
는 밖에 나가 걱정을 사서하며, 제 발로 속으로 들어갈 필요가
없다고 느꼈고, 이 아름다운 계곡에서 늙어 죽는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하고 생각했다.
그는 네 권의 경서를 다시 한 번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며 마지
막 장을 넘기면서 다시 한 번 크게 기뻐했다. 그러나 어딘가 허
무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굴속 왼쪽 벽에 다섯 자나 되는 구멍
을팠다. 그리고는 네 권의 경서와 호청우의 의경, 그리고 또 왕
난고의 독경 모두를 백원 뱃속에서 꺼낸 유포에다 싸서 안에 넣
고는 흙으로 덮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백원한테서 경서를 얻은 것은 정말 기막힌 인연이다. 훗
날 백 년이고 천 년이고 누가 다시 우연히 이곳에 와 이 세 경서
를 얻을지 모르겠군.'
그는 뾰쪽한 돌을 주워 벽에다 <장무기 매경서(張無忌埋經書)>
라고 여섯 자를 새겼다.
그는 무공을 연마할 땐 내일 과제가 있어 무료함을 몰랐는데,
이날 모든 것을 끝내고 나자 허전함을 어쩔 수가 없었다. 거기다
신공을 터득하고 나자 담력도 커졌다. 그는 마음속으로 이런 생
각을 하게 되었다. 지금 만약 주장령이 나를 해치러 온다고 해도
이젠 두렵지 않으니, 심심한데 저 자와 말이나 건네 봐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허리를 굽혀 굴 속으로 들어갔다. 그가 들어올 때는 나이
가 십 오 세로 몸이 왜소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십 세가 되어
성인이 되었기 때문에 이 좁은 굴을 빠져 나갈 수 없었다. 그는
숨을 들여 마시고 축골공(縮骨功)을 운기하자 전신의 뼈가 한데
로 모이며 뼈와 뼈 사이가 좁아져구멍이 좁다 해도 간단히 빠져
나갔다.
주장령은 돌벽에 기대어 단잠에 빠져 있었다. 그는 무척이나 즐
거운 꿈을 꾸고 있는지 표정이 행복해 보였다. 그런데 갑자기 누
가 어깨를 두드리는 느낌이 들자 깜짝 놀라 깨어났다. 눈앞에 우
람한 그림자가 서 있는 것이었다. 주장령은 벌떡 일어나 정신도
제대로 차리지 못하고 외쳤다.
"너..... 너는.....!"
장무기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주 아저씨, 장무기예요."
그는 주장령이 반갑기도 하고 밉기도 하고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는 찬찬히 쳐다 보고 나서 입을 열었다.
"네가 이렇게 컸구나. 흥, 왜 한 번도 나와서 나하고 말을 건네
지 않았지? 내가 그렇게 애걸복걸해도 거들떠보지도 않다니!"
"나를 골탕 먹일까 봐 그랬죠."
주장령은 갑자기 오른손을 뻗어 금나(檎拿)법을 시전하여 그의
어깨를 움켜쥐며 날카롭게 외쳤다.
"왜 오늘은 두렵지 않느냐?"
그러자 갑자기 장심이 뜨거워 자가도 모르게 팔을 움츠리며 손
을 놨다. 가슴에 은은하게 통증이 왔다. 그는 겁에 질려 세 걸음
물러나며 멍청하게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
"너... 너 이게 무슨 무공이냐?"
장무기는 구양진경을 터득하고 난 후 처음으로 무공을 시험해
본 것이다. 이런 무서운 위력이 있다니, 스스로도 깜짝 놀랐다.
주장령은 일류 고수였다. 그런데 그의 신공에 튕겨져 손을 안
놓을 수 없었다니 장무기는 주장령이 놀라면서도 이상한 눈초리
를 하자 득의양양하며 웃으며 말했다.
"그 무공을 아직도 쓸 수 있소?"
주장령은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하고 물었다.
"그게 무슨 무공이냐?"
"구양신공이요."
주장령은 크게 놀라며 다시 물었다.
"어떻게 터득한 것이지?"
장무기는 그를 속이지 않고 모든 경위를 일일이 설명해 주었다.
주장령은 그 말에 질투도 나고 화도 치밀었다. 그는 속으로 투
덜거렸다.
"난 이 절봉 위에서 오 년이란 세월을 고생했는데, 이놈은 여기
서 그 오묘한 신공을 익히다니....."
그는 자기가 그를 해치려다가 그런 고생을 하게 된 것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장무기가 오 년 동안이나 거르지 않고
과일을 따 줘서 살아 남을 수 있었다는 것도 고마와 하지 않았
다. 그는 그저 장무기는 행운아이고 자기는 너무 재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뿐이었다. 그는 화를 꼭 참고 교활하게 웃으며 말했
다.
"그 구양진경을 나에게 좀 보여 줄 수 없나?"
장무기는 재빨리 생각을 굴렸다.
'당신한텐 보여 줘도 별 탈이 없을 거야. 그가 잠깐 동안에 그
걸 다 기억할 수가 있을려구.....'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미 굴 속에 다 묻어 버렸소. 내일 보여드리죠."
주장령이 말했다.
"넌 이미 이렇게 컸는데 어떻게 저 굴을 빠져 나올 수 있었지?"
장무기가 말했다.
"저 굴은 그렇게 좁지만은 않소. 몸을 움츠리고 안으로 쑤셔서
나온 거요."
주장령이 물었다.
"나도 그렇게 들어갈 수 있을까?"
장무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같이 한 번 실험해 보죠. 안은 무척 넓은데, 여기 평대에
서 지내시느라 보통 고생이 아니었겠습니다."
그는 자기가 그의 어깨와 가슴, 둔부의 뼈를 누르면 그도 그 굴
속을 드나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주장령이 웃으며 말했다.
"소형제, 자네는 정말 참 착하군. 군자란 지난 일은 따지지 않
는 거야. 전에 내가 자네에게 못되게 한 것은 모두 용서해 주
게."
그는 허리를 깊숙이 굽혀 읍을 올렸다.
장무기는 얼른 답례를 하며 말했다.
"주 아저씨, 그럴 필요 없습니다. 내일 여길 빠져나갈 방법이나
생각해 봅시다."
주장령은 크게 기뻐하며 물었다.
"여기를 빠져 나갈 수 있을까?"
"원숭이나 고릴라들이 마음대로 들어갔다 나갔다 하는데, 우리
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왜 넌 여기를 벌써 빠져 나가지 않았지?"
장무기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전엔 난 여기서 나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에게 당할까
봐서요. 지금은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나의 태사부,
사백, 사숙님들도 보고 싶구요."
주장령은 크게 웃으며 손뼉을 치더니,
"좋아, 좋아."
하고 외치며 뒤로 두 발짝을 물러섰다. 그러자 갑자기 휘청거리
며 앗! 하고 소리치더니 허공을 딛고 절벽 밑으로 떨어져 버렸
다.
낙극생비(樂極生悲). 기쁨이 넘치면 슬픔이 닥치는 법인가! 갑
자기 이런 변고가 생기자 장무기는 크게 놀라 몸을 수그려 밑을
보며 외쳤다.
"주 아저씨, 괜찮습니까?"
밑에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몇 장 안 되는 거리 같았다.
"다행히 밑으로 떨어지진 않았군. 다치진 않았는지....."
이렇게 중얼거리며 절벽 밑을 살펴보니, 절벽에 마침 소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주장령의 몸이 그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다.
장무기는 형세를 보아 자기의 공력으로 뛰어내려 주장령을 안고
절벽 위로 다시 올라온다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긴숨을 들이 마시고 난 후 팔처럼 뻗은 나뭇가지를 조준
하고 가볍게 뛰어내렸다.
그의 발끝이 나뭇 가지와 반 자도 안 되는 거리에 닿자 갑자기
나뭇 가지는 꺾어지고 말았다. 그러더니 장무기는 공중에서 조금
도 힘을 빌릴 곳이 없었다. 그가 절정의 신공을 익혔다 해도 그
는 필시 날으는 새는 아니지 않는가? 갑자기 어떤 생각이 그의
뇌리를 번개처럼 스쳤다. 그것은 주장령이 자기를 죽이려고 한
짓이었다. 그는 나뭇 가지를 꺾어 손에 쥐고 있다가 장무기가 내
려 가지에 닿으려는 순간, 나뭇 가지를 떨어뜨린 것이다.
주장령이 통쾌하게 웃어 대며,
"오늘에서야 이놈을 가루로 만들어 버렸구나. 오 년 동안의 한
을 이제서야 풀었구나. 전번에 이 동굴을 빠져 나가지 못한 것
은, 너무 서둘러서 갈비뼈가 부러진 탓이다. 그놈은 나보다 더
몸집이 컸는데도 빠져나올 수 있었는데, 나라고 못 빠져 나갈려
구. 내가 구양진경을 얻으면 신공을 연마해서 천하의 무적이 돼
야지. 정말 기분좋구나. 하하하.....!"
그는 생각할수록 마음이 급해 재빨리 소나무 옆의 등나무 줄기
를 잡고 절벽 위로 뛰어올라 동굴 속으로 들어 갔지만 마음대로
되지가 않았다.
'그 녀석은 나보다 더 큰데도 빠져 나갔는데, 왜 나는 못 빠져
나갈까?'
그는 장무기가 이미 구양신공 중에 축골법을 익힌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는 다시 한 번 마음을 안정시키고 그 좁은 굴 속으로
조금씩 기어나갔다. 그러나 곧 아무리 몸부림쳐도 더 이상은 앞
으로 기어갈 수 없었다.
그는 정신을 다시 차리고 안으로 긴 숨을 들이마시자 폐가 오그
라들며 조금 더 앞으로 기어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폐에 더
이상 공기가 없어 점점 답답해오며 가슴이 북을 치듯이 두근두근
거렸다. 그는 우선 밖으로 나가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겠다고 생
각했다. 그러나 들어갈 땐 두 발을 울퉁불퉁한 벽에 의지하고 타
고 들어갔지만, 나올 땐 힘을 빌릴 곳이 없었다. 들어갈 땐 두
팔을 머리 위로 치켜들어 어깨의 넓이를 줄였지만, 지금은 두 팔
이 머리 위로 한 채 암석에 끼어 어찌 할 수가 없었다. 전혀 힘
을 쓸 수가 없었다.
무공이 상승에 달하고 총명과 기지로 따져 일류의 고수라 할 수
있는 주장령도 이 좁은 굴 속에서 들어가지도 나오지도 못하게
되고 말았다.
장무기는 주장령의 간계에 속아 절벽 밑으로 떨어지는 순간, 자
기 자신이 무척 원망스러웠다.
'장무기야, 너야말로 쓸모없는 인간이구나. 주장령이란 인간의
간교함을 알면서도 또 당하다니 죽어도 싸다. 싸!'
하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발버둥치며 체내의 진기를 유동시켜 힘
껏 위로 솟아오르려고 애썼다. 그의 귓가에 바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순간, 그의 두 눈이 따끔했다. 땅 위의 흰 눈빛이 그의
눈에 비춰온 것이다.
그는 몇 장 아래에 눈더미가 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공중에서 재빨리 몸을 세 번 돌리며 그 눈더미쪽으로 향했
다. 그의 몸은 비스듬히 반원을 그리며 왼쪽 발끝이 눈더미에 닿
으면서 몸 전체가 이미 눈더미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장무기는
바로 이 순간, 오 년이나 수련한 구양신공의 위력을 발휘하려 했
다. 그러나 만 장이나 넘는 절벽에서 떨어진 그 기세는 얼마나
위력적인 것인가! 그는 다리에 통증을 느꼈다. 두 다리뼈가 부러
진 것이었다.
그는 중상을 입었으나 정신은 멀쩡했다. 마른 풀이 날리는 것이
보였다. 알고보니 눈더미는 농가에서 쌓아놓은 풀더미였다.
그는 두 팔에 함을 주고 천천히 풀더미에서 기어나와 눈속으로
굴러내려 부러진 다리를 살피고, 긴 호흡을 하고 나서 접골을 했
다. 그는 걱정이 앞섰다.
'누워서 꼼짝하지 않아도 최소한 한 달은 지나야 걸을 수 있는
데, 어떡하지? 여기서 굶어죽을 수는 없지 않는가. 이 풀더미는
농가에서 만든 것이다. 근처에 분명 인가가 있을 것이야.'
그는 소리쳐 구원을 청하려 했으나, 세상엔 악인들이너무 많다
고 생각하며 차라리 혼자 여기 누워 있는 게 나을 것이라고 생각
했다.
그렇게 삼 일을 누워 있자 너무 배가 고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부러진 뼈를 접골하고 나서 처음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일그러진다면 평생 절름발이
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대로 버티며 조금도 움직이지 않
았다. 굶주림을 못 참을 땐 눈을 집어 삼켰다. 그는 다시 한 번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오늘부터 절대로 조심해야 돼. 절대로 악인의 간계에 넘어가선
안 돼. 이번만 잘 견뎌내면 앞으로 큰일이 닥쳐도 죽음만큼은 면
할 수 있을 거야.'
사흘째 밤, 그는 조용히 운공을 하니 가슴이 맑고 온몸이 편안
해졌다. 다리에 중상을 입었다고 하나 자신의 신공은 더 진전이
있는 것 같았다. 죽은 듯이 조용한 적막에서 갑자기 멀리서 개짖
는 소리가 들려왔다. 점점 접근해왔다. 몇 마리의 맹견이 어떤
짐승을 쫓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장무기는 내심 놀라며 생각했
다.
'혹시 주구진 누나가 기른 악견들이 아닐까? 그 맹견들은 주백
이 이미 다 때려 죽였는데, 몇 년이 지난 지금 그녀가 또다시 길
렀단 말인가?'
그가 살펴보니 어느 한 사람이 날으는 듯이 달려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뒤엔 세 마리의 큰 개가 미친 듯이 짖어 대며 쫓고
있었다.
그 사람은 이미 기진맥진하여 휘청거리며 몇 발짝 못 가 자꾸
스러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악견(惡犬)들에게 물릴까 두려워 온
힘을 다해 뛰고 있었다. 장무기는 자기도 수년 전 개떼들에게 쫓
기던 생각이 떠올라 가슴의 피가 들끓어 올랐다.
그는 그 자를 돕고 싶었으나 마음만 앞설 뿐이었다. 갑자기 비
명이 들리며 그 자는 쓰러지고 말았다. 개들은 그 자의 몸을 짓
밟으며 막 물어뜯었다.
장무기는 화가 치밀어 외쳤다.
"미친 개들아, 이쪽으로 와라!"
그 세 마리의 개들은 사람소리가 들리자 날으는 듯이 달려와 코
를 킁킁 대며, 미친 듯 몇 번 짖더니 마구 물었다. 장무기는 손
가락을 뻗어 한 놈씩 코에다 튕기자 세 마리의 개는 즉시 쓰러지
며 당장 뻗어 버렸다.
그는 손가락을 튕기자 세 마리의 큰 개가 즉사할 줄은 정말 뜻
밖이었다. 그는 구양신공의 위력에 내심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
다.
그 자의 신음소리가 무척 희미하게 들리자, 그는 물었다.
"형씨, 개들한테 심하게 물렸습니까?"
그 사람이 대답했다.
"난..... 이미 끝장났소! 난... 난..."
장무기가 말했다.
"난 두 다리가 부러져 걸을 수가 없으니, 힘이 들더라도 이쪽으
로 기어오세요. 상처를 좀 봅시다."
"알았소."
그 자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장무기와 일 장쯤 되는 거
리까지 오더니 윽! 하고 소리지르며 쓰러졌다. 그리곤 다시는 움
직이지 않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거리는 비록 가까왔지만 한 사
람은 다리가 부러져 가지 못하고, 한 사람은 이쪽으로 오지를 못
하는 처지가 됐다. 장무기가 입을 열었다.
"형씨, 어디를 다쳤소?"
"가슴이요. 그리고 배를 개에게 물려 창자가 튀어나왔습니다."
장무기가 크게 놀랐다. 창자가 튀어나왔다면 살기는 힘들었다.
그는 다시 물었다.
"그 개들이 왜 당신을 쫓았습니까?"
그 자가 대답했다.
"밤에... 산돼지를... 농사를 망쳐 놓을까 봐 쫓으러 나왔다가
주가의 큰 소리가..... 어느 공자와 나무 밑에서 말하는 것을 보
고 가까이 가서 볼려고..... 윽.....!"
그는 비명을 지르더니 다시는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는 말을 끝맺지는 못했지만, 장무기는 다 들은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것은 분명 주구진과 위벽이 밤에 몰래 만나다 농부에
게 들키자 주구진이 개를 풀어 죽이려 한 것이 분명했다.
그는 울화가 치밀었다. 불현듯 말발굽소리가 들려왔다. 누군지
연신 휘파람을 불어댔다. 그는 바로 주구진이었다. 개떼를 부르
고 있는 것이었다. 말발굽소리가 점점 가까와지며 두 필의 말이
달려오고 있었다. 말에는 두 남녀가 타고 있었다. 여자가 갑자기
소리쳐 말했다.
"아니, 어째 평서장군(平西將軍)들이 다 죽어 있지?"
그녀는 바로 주구진이었다. 그녀는 기르는 개들에게 여전히 장
군 이름을 붙이고 있었다. 전과 다름이 없었다. 그녀와 같이 달
려온 사람은 바로 위벽이었다. 그는 말에서 뛰어내리며 말했다.
"여기 두 사람의 시체가 있는데?"
장무기는 속으로 단단히 준비하고 있었다.
'너희들이 만약 이쪽으로 와 나를 해치려고 하면 어쩔 수 없이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주구진은 농부의 창자가 튀어나오고 죽은 모습이 공포스럽고,
장무기는 옷이 떨어지고 남루하며 머리는 산발인데다 온 얼굴에
수염이 나 있고 꼼짝도 하지 않자, 개에게 물려서 죽어 있는 줄
알았다. 그녀는 위벽과 정담을 나누기 바빠 여기서 더 이상 지체
하기 싫었다.
"오빠, 가세요! 이 두 놈이 죽으면서 발버둥치느라 내 세 장군
과 같이 죽은 모양이에요."
라고 말하며 말머리를 돌려 서쪽으로 향해 달려갔다. 위벽은 개
세 마리가 다 죽은 것을 보고 이상하다고 느꼈으나 주구진이 멀
리 달려가자 자세히 살피지 않고 말에 올라 뒤따라 달려갔다.
장무기는 주구진의 교소(矯笑)가 멀리서 들려 오는 것을 듣고
정말 화가 치밀었다. 오 년 전 그는 그녀를 하늘과 같이 받들었
었다. 그저 그녀가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자기는 칼끝이나 기
름솥이라도 뛰어 들어 갔었다. 그러나 오늘 밤 보니 왠지 모르게
그녀에 대한 매력이 모두 종적을 감추고 찾아볼 수 없었다.
장무기가 그녀를 향했던 열정은 뜨겁기도 빨랐지만 식기도 빠른
것이었다. 훗날 자기의 지나간 일을 생각하면 아연 실소를 할 그
런 것이었다.
그는 너무나 굶주려 뱃속에서 꼬르륵 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
다. 그저 죽은 개 다리라도 뜯어서 먹고 싶었다. 그러나 주구진
과 위벽이 다시 돌아오면 자기가 아직 죽지 않은 것을 발견할 것
이고, 또 자기의 대장들을 뜯어먹은 것을 보면 자기를 죽일 것이
두려웠다. 다리가 부러졌으니 그들을 상대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이튿날 아침, 독수리 한 마리가 시체와 죽은 개들을 발견하고
공중에서 몇 바퀴 돌더니 내려왔다. 그런데 이 독수리는 시체와
죽은 개를 뜯지 않고 묘하게도 목을 무기의 얼굴을 덮치는 것이
었다. 장무기는 손을 뻗어 독수리의 목을 잡아 간단히 비틀어 죽
였다. 그는 너무나 기뻐서 중얼거렸다.
"하늘에서 이런 아침 식사가 내려올 줄이야....."
그는 독수리의 털을 뽑아 버리고 다리를 찢어 씹기 시작했다.
날것이긴 했지만 삼 일을 굶었으니 꿀맛이었다.
독수리로 굶주린 배를 채운 장무기는 눈 위에 누워 조용히 상처
가 낫기를 기다렸다. 그의 옆에는 세 마리의 죽은 개와 시체 한
구가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한 겨울이라 시체가 썩지 않았다.
그는 고독한 생활을 오래 해 왔기 때문에 별로 고생스럽게 느껴
지지도 않았다.
그날 오후, 그는 내공을 한 번 운공해 보았다. 독수리 두 마리
가 공중에서 회전하며 한참이 지나도 내려오지를 않았다. 그러자
한 마리가 밑으로 쏜살같이 내려오더니, 그와 약 석 장되는 거리
에서 갑자기 다시 위로 날으는 것이었다. 독수리의 몸집이 방향
을 돌릴 때의 자세는 정말 아름답고도 오묘했다. 그는 갑자기 떠
오르는 것이 있었다.
"저렇게 갑자기 자세를 돌리는 것을 무공에다 사용할 수 있다
면, 적이 감히 방비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만약 일격을 명중시키
지 못하더라도, 가볍게 멀리 떨어질 수도 있으니 적이 반격하기
도 어렵겠구나."
그가 연마한 구양진경은 순전히 내공과 무학의 경지에 속한 것
이었다. 공방(攻防)의 초수(招數)는 하나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당년 각원대사가 이 신공을 익혔지만, 소상자와 하족도의
공격을 받았을 때 어쩔 줄을 몰랐던 것이다. 조금도 방어할 줄
몰라서 장삼봉은 그 자리에서 양과에게 사초(四招)를 전수받고
윤극서와 대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장무기는 어려서부터 무공을 배워서 기초가 각원이나 장삼봉보
다 뛰어났지만, 사손이 그에게 전수한 것은 순전히 권술의 결규
이었다. 실용적인 일초일식의 법문이 아니었다.
장무기는 이제서야 의부(義父)의 고심을 알 수 있었다. 의부의
무공은 너무 넓고 깊어 만약 순서대로 조금씩 점진적으로 해석하
며 전수한다면, 이십 년이 걸려도 다 배울 수 없는 것이었다. 그
는 같이 있을 날이 얼마되지 않을 것을 알고, 그저 상승 무술의
요결만 꼭 기억하게 하고 나중에 자신이 터득하라고 할 생각이었
던 것이다. 장무기가 배운 권술은 단지 부친이 뗏목위에서 전수
해 준 삼십이세(三十二勢) 무당장권(武當掌拳)뿐이었다. 그가 바
라는 것은 지금부터 계속 구양진공을 연습하고 더 정진하는 것과
자기가 연마한 상승 내공을 어떻게 해서 사손이 가르쳐 준 무술
에 융합시킬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낙엽이 떨어
지는 것이나 나무가 하늘로 치솟는 것이나 초수의 움직임, 심지
어 풍운의 변화까지 모두 무공의 초수로 생각하고 연구하였다.
이때 하늘의 그 독수리는 내려오다말다 올라갔다 하여 별의 별
자태를 나타내, 장무기는 넋을 잃고 쳐다보고 있었다. 바로 그
때 멀리서 사람이 눈 위를 걸어오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발걸음
이 아기자기한 것이 여자인 듯 하였다.
그가 고개를 돌려보니 한 여자가 대바구니를 팔에 끼고 빠른 걸
음으로 가까이 오고 있었다. 그녀는 눈 위에 시체와 죽은 개들을
보자, 앗! 하고 놀라며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다.
장무기가 자세히 살펴보니 실 칠팔 세 가량된 소녀였다. 차림새
를 봐 농촌의 빈녀(貧女)였다. 얼굴이 까맣고 안면이 부어 올라
울퉁불퉁한 것이 매우 추한 모습이었다. 그래도 얼굴 모양은 꽤
예뻐 보였고 몸매도 매우 날씬했다.
그녀는 가까이 와 장무기가 쳐다보는 것으로 보고 약간 놀라면
서 말했다.
"아직 안 죽었어요?"
"아직 안 죽은 것 같소."
장무기가 말했다.
이상한 물음에 둘은 서로 잠시 생각하더니 그만 웃음을 터뜨렸
다. 소녀도 웃으며 말했다.
"죽지 않았다면 왜 여기 누워 꼼짝도 하지 않죠? 깜짝 놀라게."
장무기가 대답했다.
"난 산 위에서 떨어져 두 다리가 부러져서 어쩔 수 없이 여기에
누어 있는 겁니다."
소녀가 다시 물었다.
"이 사람은 당신과 일행입니까? 왜 또 개 세 마리가 죽어 있
죠?"
"이 개들은 정말 악랄한 놈들이요. 이 형씨를 물어 죽였소. 결
국 자기들도 죽었지만."
소녀가 다시 물었다.
"여기 누워 있으면 어떻게 해요? 배가 고프지 않으세요?"
"물론 고프지만 어찌 합니까? 하늘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는 것
아닙니까?"
소녀는 미소를 지으며 바구니에서 보리떡을 두 개 꺼내어 장무
기에게 건네주었다.
"감사합니다, 아가씨."
하고 대답하며 그것을 얼른 받았지만 먹지는 않았다.
소녀가 물었다.
"거기에 독이 들었을까 봐 그러세요? 왜 안 먹는 거죠?"
장무기는 오 년이란 세월 동안 주장령과 가끔 동굴 사이로 말을
몇 마디 나눈 것이 고작일 뿐, 누구와도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지금 비록 추악한 소녀였지만 서로 대화를 나누자 매우 기분이
좋았다.
"아가씨가 준 것이라 아까워서 안 먹는 거요."
그의 말엔 어느 정도 희롱의 뜻이 들어 있었다. 그는 항상 성실
하고 중후해서 절대로 말로 누구에게 까불리지 않았다. 그러나
소녀 앞이고 마음이 가벼워 자기도 모르게 이런 말이 튀어나온
것이다.
소녀는 이 말을 듣자 갑자기 노기를 보이며 코웃음을 쳤다. 장
무기는 즉시 후회스러웠다. 그는 얼른 보리떡을 들어 입에 물었
다. 너무 급하게 먹어 사래가 들어 기침을 쿨룩쿨룩 했다.
소녀는 다시 재미있어 하며 입을 열었다.
"하느님 고맙습니다. 이 사람을 사래가 들어 죽게 해주세요. 당
신처럼 못생기고 추악한 사람은 필시 좋은 사람이 아닐 거야. 그
래서 하늘이 벌을 내린 거야. 왜 다른 사람의 다리를 부러뜨리지
않고 하필 이런 당신의 다리를 부러뜨렸을까요?"
장무기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오 년 동안 머리손질도 하지 않고 얼굴을 깨끗이 씻지도
않았으니, 당연히 추악해졌겠지. 그러나 너도 별로 예쁘진 않아.
우리 둘을 서로 반반이야. 누가 누굴 나무랄 수 없어.'
그는 자세를 똑바로 하고 말했다.
"난 이미 여기서 구 일 동안이나 누워있었소. 다행히 아가씨를
만나 나에게 먹을 것을 주시니 정말 고맙습니다."
그녀는 입을 삐쭉거리며 말했다.
"내가 물었잖아요. 왜 다른 사람의 다리가 부러지지 않고 당신
의 다리가 부러졌느냐고? 대답 안 하면 먹을 것을 다시 뺏어가겠
어요."
장무기는 그녀가 웃는 모습을 보니 눈에 교활한 빛이 보여 내심
놀라며 생각했다.
'이 소녀의 눈빛이 왜 어머니를 닮았을까? 어머니께서 돌아가시
기 전 그 소림사의 노화상을 속일 때 바로 이런 눈빛이었어.'
그렇게 생각하지 그만 뜨거운 눈물이 쏟아져나와 울고 말았다.
소녀는 픽하고 소리내더니 말했다.
"안 뺏으면 그만이지. 울기는 왜 울어요? 이제보니 아무 쓸모
없는 바보였군요."
"당신의 보리떡이 탐나서가 아니에요. 어떤 한 가지 일이 떠올
라서였소."
소녀는 돌아서서 두 걸음쯤 걷고 있었는데 그 말을 듣자 고개를
돌려 물었다.
"무슨 생각이예요? 당신 같이 멍청한 사람도 생각할 게 있나
요?"
장무기는 탄식을 하며 말했다.
"어머니가 생각난 거요.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가 말이요."
"보리떡을 만들어 주셨나요?"
"그랬었긴 하지만 그것이 생각난 게 아니라, 당신이 웃을 때 꼭
우리 어머니를 닮은 것 같아서였었소."
소녀는 화를 버럭 내며 말했다.
"미친 놈? 내가 그렇게 늙었단 말인가요?"
그러면서 마른 나뭇 가지를 주워 장무기의 몸을 두 번 후려쳤
다. 장무기가 그녀 손의 나뭇가지를 뺏는 것은 무척 쉬운 노릇이
었다. 그러나 그도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저 소녀는 우리 어머니가 얼마나 아름다우셨었는지 몰라. 그러
나처럼 이렇게 못 생긴 줄로만 알고 저 Ь게 화를 내는구나.'
장무기는 아무 반항 없이 두 대를 맞으면서 말했다.
"우리 어머님이 돌아가실 때만 해도 무척 아름다우셨소."
소녀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내가 못 생겼다고 놀리는 거예요? 살기 싫은 모양이지? 다리를
잡아 당길까봐."
그리고 허리를 굽혀 그의 다리를 잡아당길 자세였다. 장무기는
깜짝 놀랐다. 다리가 이제 다 완치되려고 하는데, 만일 이 소녀
가 잡아 당기면 큰일이 아닌가? 그는 잽싸게 눈뭉치를 움켜 쥐었
다. 만약 소녀가 자기의 다리를 잡아당기면 즉시 그녀의 매심혈
을 내리쳐 기절시킬 생각이었다.
다행히도 그 소녀는 자기를 겁네 주려고 한 것뿐이었다.
"겁에 질린 모습 좀 봐. 왜 나를 놀리려고 하죠?"
"내가 만약 아가씨를 놀릴 생각이었다면, 이 다리가 다 낳고 난
후에 그랬을 거요. 다시 부러진다면 평생 절름발이가 될거요."
소녀가 웃으며 말했다.
"그렇겠군요."
그러면서 그의 옆에 앉았다.
"당신 어머니가 미인이었다면, 왜 나하고 비교하죠?그럼 나도
아름답다는 말씀이예요?"
장무기가 대답했다.
"나도 무슨 연유인지 모르지만, 그저 아가씨가 우리 어머니를
닮은 것 같소. 아가씨는 우리 어머니보다 예쁘진 않지만, 그래도
난 아가씨를 좋아하오."
소녀는 손가락으로 가볍게 장무기의 이마를 튕기며 웃었다.
"착한 아들, 그럼 나를 엄마라고 부르시지?"
그 말을 하고 난 소녀는 자기도 말이 좀 이상했다고 느꼈는지
입을 막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여전히 참지 못하고 그녀는 웃
음을 터뜨렸다.
장무기는 그녀의 이런 모습을 보자 빙화도에서 자랄 때, 어머니
와 아버지가 항상 이렇게 활발하게 지내셨던 기억이 나, 갑자기
이 추하게 생긴 소녀가 청아하고 풍치가 있어 보이며 전혀 추하
게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만 멍청히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
다.
소녀는 고개를 돌려 장무기의 멍청한 모습을 보자, 웃으며 말했
다.
"왜 나를 좋아하는 거죠?"
장무기는 한참 멍청히 있다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무르겠소. 그저 아가씨를 쳐다볼 때마다 마음이 편안하고, 아
가씨가 무조건 나한테 잘해 줄 것 같고, 나를 못학게 굴지 않을
것 같소."
"하하... 그건 잘못된 생각이에요. 나는 평생 사람을 해치는 걸
제일 즐거워하는 사람이에요."
소녀는 이렇게 말하더니, 갑자기 나뭇 가지를 들더니 그의 부러
진 다리를 두 번 때렸다. 그러면서 재빨리 일어나 뛰어가는 것이
었다. 공교롭게도 아무런 방비도 하지 않고 있다가 부러진 부위
를 낮고 장무기는 그만 고통을 참지 못해 소리쳤다. 소녀는 깔깔
웃으며 고개를 돌려 입을 삐죽거리며 그를 놀렸다.
장무기는 그녀가 점점 멀어짐과 동시에 자기의 통증도 점점 참
기 어렵게 아파오자 내심 생각을 굴렸다.
'여자들은 모두 사람을 해치는 여우들이야. 아름다운 여자들이
사람을 해치기를 좋아한다더니 못 생긴 것도 이렇게 골탕을 먹이
다니.....'
그는 이날 밤 몇번이고 그 소녀의 꿈을 꾸었다. 그리고 몇번이
고 어머니의 꿈을 꾸었다. 여러차레 엇갈려 꿈에 나타나니 누가
어머니인지 소녀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는 꿈 속의 그 얼굴
이 아름다왔던 것인지 추한 것인지도 분별할 수 없었다. 그저 자
상하고도 교활한 눈초리가 자기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어렸을
때 어머니가 자기와 장난하던 것도 꿈꾸었다. 어머니는 자주 자
기를 넘어뜨리고, 자기가 넘넝져 울면 다시 끌어안고 입맞춤을
해주었다.
그는 갑자기 깨어나 여지껏 한 번도 생각 못했던 의혹이 떠올랐
다.
'어머니는 왜 그렇게 남이 고통받는 것을 좋아했지? 의부의 눈
도 어머니가 멀게 했고, 유사백께선 그녀의 손에 불구가 되셨고,
임안부 용문표국 사람들을 모두 몰살한 것도 어머니였으니, 어머
니는 도대체 좋은 사람인가 나쁜 사람이었는가?'
그는 반짝거리는 별들을 쳐다보며 탄식을 하며 입을 열었다.
'나쁜 사람이든 좋은 사람이든 그 분은 나의 어머니야.'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어머니가 살아 계시다면, 난 정말 그분을 무척 사랑해 드
릴 텐데.'
그는 그 소녀가 왜 아무 이유 없이 자기의 부러진 다리를 때렸
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난 그녀한테 잘못한 게 없는데, 내가 아퍼서 소리치는 것을 보
고서 기뻐했지. 그렇다면, 그녀는 정말 사람 해치기를 좋아한단
말인가?'
그녀가 다시 오기를 기대했으나, 또 한편으론어떻게 자기를 골
탕먹일까 하고 겁이 났다.
그는 옆에 반 샬 먹다남은 보리떡을 들자 그 소녀가 말하던 것이
생각났다.
<어머니가 아름답다면, 왜 나와 비교하시죠? 나도 아름다운가
요?>
그는 그 말을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그래, 아름다워, 네가 보고싶구나."
그는 그렇게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또 이틀을 보냈다. 그 소녀
는 오지 않았다. 그러나 삼 일째 되는 오후, 그 소녀는 바구니를
끼고 언덕을 내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못 생긴 사람, 아직도 안 죽었나?"
장무기는 웃으며 대답했다.
"반은 굶어 죽었소. 나머지 반만 살아 있소."
소녀는 히히 웃으며 장무기의 옆에 앉더니, 갑자기 부러진 다리
를 걷어찼다.
"이 반쪽은 죽은 쪽인가요. 산 쪽인가요?"
장무기는 외마디 비명을 외쳤다.
"아가씨는 왜 그리 양심이 없소?"
"무슨 양심? 왜 당신을 잘 대해 주지 않느냐 이 말인가요?"
"아가씨는 삼 일전 나를 아프게 했지만, 난 조금도 미워하지 않
았소. 매일 아가씨 생각만 했소."
소녀의 얼굴이 빨개지며 화를 내려고 했다.
"누가 당신처럼 못생긴 남자에게 나를 생각해 달라고 했나요?
나를 생각했다면 좋은 일이 아닐 거야. 아마 나를 추하고 악랄하
다고 욕했을 거야."
장무기가 말했다.
"당신은 추하게 생기지 않았소. 그런데 왜 남의 골탕먹는 것을
보면 좋아합니까?"
소녀는 깔깔 웃으며 말했다.
"난 골탕을 먹이는 것이 제일 재미있어요."
소녀는 장무기가 못마땅해 하는 모습과 아직도 반쯤 남아 있는
보리떡을 보며 말을 건넸다.
"왜 맛이 없나요. 아직도 남아 있으니."
장무기가 말했다.
"아가씨께서 준 것이라 아까워서 다 안 먹었소."
그가 삼 일 전에 이 말을 할 땐 조금은 희롱조가 있었는데, 지
금은 솔직한 심정이었다.
소녀는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수줍어했다.
"신선한 보리떡을 가져왔어요."
그러면서 바구니에서 먹을 것을 많이 꺼내왔다. 보리떡 외에도
닭고기, 그리고 구운 양고기까지 있었다.
장무기는 매우 기뻤다. 비린내나는 날독수리만 먹다가 향기가
코를 찌르는 맛있는 음식을 보자 뜨거운 것도 아랑곳없이 마구
먹어댔다.
소녀는 그가 정말 맛있게 먹는 것을 보자 웃으며 말했다.
"추남자, 당신이 맛있게 먹는 것을 보니 내 기분도 좋은데요?"
장무기가 말했다.
"남이 즐거워하는 거슬 보고 당신도 즐거워하는 게 바로 진정한
즐거움이요."
소녀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흥, 지금은 기뻐서 당신을 해치지 않지만, 언젠가는 또 당신을
골탕먹이러 올 거예요."
장무기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난 어렸을 때부터 남에게 골탕만 먹고 살아왔기 때문에, 골탕
먹을수록 더 견고해지는 사람이요."
소녀는 냉소를 지었다.
"말로만 그러지 말고 앞으로 두고봐요!"
장무기는 내심 미소를 지었다.
"내 다리만 다 나으면 멀리 떠나갈 것인데, 나를 골탕먹이고 해
칠려고 해도 그 땐 나를 찾지 못할걸?"
"그럼 지금 다시 다리를 부러뜨려, 아주 평생 여길 못 떠나게
해 버릴까요?"
장무기는 그녀의 차가운 음성에 자기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그녀의 말을 절대 거짓이 아니었다. 절대로 농담으로 하는 말 같
지가 않았다.
소녀는 장무기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안색이 변하며 말했다.
"당신같이 추남도 나한테 어울리나요?"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 그가 아직 다 먹지도 않은 음식을 뺏어
멀리 던져 버리고, 장무기를 향해 침을 툇하고 뱉었다.
장무기는 그저 그녀를 올려다 볼 뿐이었다. 순간 그는 그녀가
절대로 화를 내는 것이 아니고 절대 자기를 천시하는 것도 아니
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의 처참한 모습에서 말 못할 고통을
삼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몇 마디 위안
의 말을 해주고 싶었으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소녀는 장무기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외쳤다.
"이 추남아, 뭘 생각하고 있는 거야?"
장무기가 물었다.
"아가씨, 왜 그리 우울해 하는지 나한테 말하면 안 되겠소?"
소녀는 그가 부드럽게 말을 꺼내자 갑자기 그의 옆에 주저 앉더
니, 얼굴을 감싸고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장무기는 그녀가 어깨를 들썩거리며 흐느끼자, 그 모습이 너무
가련해 낮은 소리로 물었다.
"누가 못살게 굴었나요?"
소녀는 얼마를 울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못살게 한 사람은 없어요. 내 팔자가 원래 사나워서 그런거죠.
내 자신이 못난 것을 알면서도 어느 한 사람을 잊지 못하고 마음
속에 두다니....."
장무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틀림없이 어느 젊은 남자죠? 아가씨한테 못되게 굴었죠?"
"그래요. 그 사람은 아주 영준합니다. 그러나 아주 오만해요.
난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하게 해서 평생 같이 있고 싶은데, 그 사
람은 끝까지 싫대요. 그것도 모자라 나를 욕하고 때리고 나를 돕
기까지 했어요."
장무기는 노기띤 음성으로 물었다.
"그 자가 그렇게 야만스럽다면, 아가씨는 이제 그 자를 다시는
아는 척하지 말아요."
소녀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그렇지만, 내 마음에서 그 사람이 지워지지 않아요. 그는 나를
피해 멀리 떠났지만, 난 사방으로 그 사람을 찾아다니고 있어
요."
장무기는 내심 생각했다.
'남녀 간의 애정이란 인력으로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아가씨
는 좀 못생기긴 했지만 마음만은 일편단심인 것 같다. 이 소녀의
성격이 괴팍한 것도 너무나 마음의 상처를 입고 실망이 너무 커
서 그런 것이다. 그 남자는 과연 누굴까?'
"아가씨, 그렇게 상심할 것 없소. 세상에 좋은 남자는 많죠. 하
필이면 양심없는 악한을 그렇게 못 잊어 하시요?"
소녀는 긴 한숨을 쉬고 나서 멍청히 먼 곳만 쳐다보고 있었다.
장무기는 그녀가 시종 그 남자를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을 알고 다
시 말을 건넸다.
"그 남자는 그저 아가씨를 욕하고 때리기만 했지만, 내가 겪은
고통은 아가씨에 비하면 열 배는 넘을 거요."
소녀는 의아스러운 눈으로 물었다.
"왜죠? 당신도 아름다운 여자에게 속은 적이 있어요?"
".....사실 원래는, 그녀가 나를 속인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혼자서 멍청하게 그녀의 아름다움에 홀려 그녀를 바라보곤 했소.
사실 난 그녀에게 어울리지도 않아요. 그런데, 그녀와 그녀의 아
버지가 몰래 독계(毒計)를 써서 나를 아주 비참하게 만들어 버렸
소."
그러면서 그는 옷소매를 걷어 팔뚝의 상처 자국을 보여 주었다.
"이 이빨 자국이 모두 그녀가 기른 개들에게 물린 거요."
그녀는 상처 자국을 보자 갑자기 화를 내며 물었다.
"혹시 주구진, 그 천한 년의 짓이 아닌가요?"
장무기는 깜짝 놀라며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아시요?"
".....그 천한 년이 개를 키우는 것은 수백 리 안에 사는 사람
은 모르는 이가 없지요."
장무기는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렇소. 주구진 낭자요. 그러나 지금은 상처가 다 나았으니 아
프지도 않고, 다행히 죽지도 않았으니 이젠 그녀를 미워할 필요
도 없습니다."
소녀는 장무기를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장무기의 얼굴이 담담
하고 평화스러워 보이자 그녀는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그에게 물
었다.
"이름이 뭐예요? 어디서 왔죠?"
장무기는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중토(中土)에 오자 나를 만나는 사람마다 의부의 소식을
알기 위해 나를 핍박하고 기만하는 등 별별 수단을 다 동원해 나
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는데, 오늘부터 장무기란 사람은 이미 죽
고 세상에 없다고 치자. 그리고 이 세상엔 누구도 금모사왕 사손
의 소재를 아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자. 이제부터 주장령보다
열 배가 더 악독한 사람을 만난다 해도, 이젠 더 이상 그 수에
말리지 않을 거야. 그리하여 나도 모르게 내 의부를 해치게 하는
일은 다시는 없게 할 테다.'
그는 소녀에게 말했다.
"이름은 아우(阿牛)라고 하오."
소녀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성은요?"
장무기는 마음 속으로 다시 생각했다.
'성이 장,은,사 모두 안돼. 장(張)과 은(殷) 두 글자 사이의 발
음인 증(曾)으로 해야겠구나."
이렇게 생각한 무기는 얼른 대답했다.
"증(曾)가 올시다. 소녀의 성은 무엇이오?"
소녀는 당황해 하며 대답했다.
"난 성이 없어요. 내 친아버지는 나를 버렸을 뿐 아니라, 나만
보면 죽이려고 하는데 내가 어떻게 아버지의 성을 따르겠어요?
우리 어머니는 제가 돌아가시게 했어요. 그러니 그 분의 성도 따
를 수도 없잖아요. 내가 생김새가 못났으니, 나를 추(醜)낭자라
고 부르세요."
장무기는 깜짝 놀라며 물었다.
"당신이 당신의 어머니를 죽였다구요? 어떻게 그럴 수가.....?"
소녀는 탄식을 하며 말을 이었다.
"이 사연을 말하자면 너무 길어요. 사실 나를 낳은 친어머니는
아버지의 정실이었어요. 그런데 애기를 낳지 못해 아버지는 다시
둘째 부인을 얻었어요. 그분은 나의 두 오빠를 낳았죠.자연히
아버지는 그 어머니만 사랑했어요. 그분은 아버지의 사랑을 얻고
우리 어머니를 못살게 괴롭혔어요. 그런데 후에 어머니가 나를
낳으셨어요. 그런데 딸이 태어난 거죠. 그 둘째 부인과 두 오빠
는 더욱더 우리 어머니를 괴롭혔어요. 하지만 어머니는 그저 눈
물만 흘리셨어요."
장무기가 말을 받았다.
"당신의 아버지는 공정하게 일을 처리했어야 하는데....."
"바로 그거예요. 아버지가 둘째 부인만 사랑하는 것에 화가 치
밀어 제가 단칼에 둘째 엄마를 죽여 버리게 된 거예요."
장무기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림에서는 싸움이나 살인
은 보통 있는 일이지만, 이런 농촌 소녀까지도 살인을 하다니 정
말 뜻밖이었다.
소녀가 말을 이었다.
"어머니는 내가 큰일을 저지르자 나를 데리고 즉시 도망을 쳤으
나, 두 오빠가 쫓아와 나를 잡아가려고 했어요. 그러자 어머니는
나를 살리기 위해 그만 자살을 한 겁니다. 그게 바로 내가 어머
니를 죽인 것이 아니고 뭐예요. 아직도 우리 아버지는 나를 보면
죽이려고 해요."
장무기는 가슴은 방망이질을 하고 있었다. 그는 속으로 중얼거
렸다.
'나의 부모가 다 돌아가셨지만, 살아계셨을 때 나를 얼마나 사
랑해 주셨던가! 이 소녀의 경우와 비교하면 난 정말 천 배 만 배
나 행운아였구나.'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는 소녀에 대한 동정심이 일어 부드러
운 음성을 물었다.
"집을 나온 지 오래 됐소? 지금까지 혼자서 지내왔소?"
소녀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소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나도 모르겠어요. 세상이 이렇게 넓으니 동쪽이나 서쪽, 아무
데나 가보는 거지요. 그저 우리 오빠를 만나지 않으면 돼요."
장무기는 갑자기 동병상린의 생각이 들었다.
"내 다리가 다 나으면 내가 아가씨와 같이 낭자가 잊지 못하는
남자를 찾아다니겠소. 그래서 도대체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봐 주겠소."
장무기가 이렇게 말하자 소녀가 말을 받았다.
"만약, 그가 또 나를 욕하고 때리면 어떻게 하죠?"
장무기는 앙연한 태도로 말했다.
"흥! 가만 두지 않겠소."
"만약 그가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말 한 마디도 건네지 않는
다면은요?"
장무기는 아연실색해져서 할 말이 없었다. 한참 멍청히 생각하
고 나서 입을 열었다.
"힘 닿는 데까지 해보리다."
소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깔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추남자, 그 사람이 당신의 말을 순순히 들어 줄 것 같아요? 그
리고 내가 아무리 찾아도 도저히 생사를 알 수 없는데, 당신도
별수 없을 거예요. 하하하.....?"
장무기는 그녀의 웃음소리에 그만 얼굴이 붉어져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소녀는 그가 주춤주춤하는 모습을 보자 웃음을
멈추고 물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죠?"
장무기는 자못 불쾌한 어조로 투덜거렸다.
"나를 비웃는 것은 그만 하시오."
소녀는 냉랭한 음성으로 말했다.
"흥! 기껏해야 한 번 더 웃은 것뿐인데, 그까짓 웃음으로 사람
을 죽이는 사람도 있나요?"
장무기는 큰 소리로 외쳤다.
"난 당신한테 호의를 베풀려고 한 것인데, 그렇게 비웃을 수 있
단 말이오?"
"다시 묻겠는데, 나한테 뭐라고 말하려고 그랬죠?"
"당신이 고독하고 갈 곳이 없는 것이 나와 처지가 같소. 나한테
는 부모형제 아무도 없소. 그 나쁜 남자가 만약 당신을 거들떠
보지도 않으면, 내가 당신의 친구가 되어 주겠다는 말을 하려고
했소. 서로 외로움을 달랠 수도 있으니 말이오. 그런데 내가 당
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니 더 이상 말하지 않겠소."
소녀는 벌컥 화를 냈다.
"물론 어울리지 않아요. 그 악한은 당신보다 백 배나 더 미남이
고, 백 배나 더 총명해요. 내가 여기서 당신과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다니, 정말 재수가 없군."
그러면서 땅에 떨어진 음식을 아무렇게나 발로 걷어차더니, 얼
굴을 가리면서 쏜살같이 뛰어 나갔다.
장무기는 무안을 당했지만 왠지 화가 나지 않았다.
"정말 불쌍한 아가씨로군. 마음이 아플거야. 그녀를 나무랄 수
도 없지."
갑자기 소녀가 다시 뛰어오더니 이를 악물고 외쳤다.
"이 추남아, 내 말이 거슬리지? 나처럼 못 생긴 여자가 당신을
우습게 본다고.그렇지?"
장무기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아가씨의 얼굴은 별로 예쁘지 않지만, 그래서 첫눈에
반했소. 만약 아가씨가 추하게 변하지 않았다면, 여전히 옛날과
같이....."
소녀는 깜짝 놀라며 다시 외쳤다.
"당신이 어떻게 내가 그 전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알죠?"
장무기가 대답했다.
"오늘 아가씨의 얼굴은 내가 처음봤을 때보다 더 무섭게 부어
올랐습니다. 피부색도 더 까맣게 변했구요. 태어날 때부터 그렇
지는 않았을 것이 아니요?"
소녀는 더욱 더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요 며칠 거울을 볼 용기가 없었는데, 그럼 내가 더 보기 흉해
졌단 말인가요?"
장무기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사람이란 그저 마음만 착하면 되지. 용모가 무슨 상관 있소.
우리 어머님이 말씀하시기를 아름다운 여자일수록 마음이 더 고
약하고, 더 사람을 잘 속이니 항상 조심하라고 하셨소."
소녀는 그의 어머니의 말을 들을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조급하
게 물었다.
"처음 나를 봤을 때는 이렇게까지 추하게 변하지 않았었나요?"
장무기는 그렇다고 대답하면서 그녀가 분명 상심할 것이라 생각
하고 멍청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마음에 동정과 연민이 충
만해 있었다.
소녀는 그의 얼굴 표정에서 미리 그가 대답할 말을 짐작한 듯
얼굴을 가리고 울기 시작하더니,
"추남자, 당신이 미워! 밉단 말이에요!"
라고 소리치며 미친듯이 달려갔다. 그리고는 다시 돌아오지 않
았다. 장무기는 또 이틀을 누어 지냈다. 밤이 되자 늑대 한 마리
가 냄새를 맡고 가까이 왔다. 장무기는 한 주먹에 늑대를 죽여
버렸다. 이 늑대는 먹을 것을 찾다 오히려 남의 먹이가 된 것이
다.
며칠이 지나자 그의 다리도 많이 완치되었다. 이제 약 십 여일
만 지나면 일어나 걸을 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내심
그 촌녀(村女)가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 섭섭했고 이름을 알아
두지 못한 것이 안타까왔다.
그리고 왜 점점 그녀가 추하게 변해 가는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어 뒤척이다가 이내 잠이 들어 버렸다.
얼마나 밤이 깊었을까. 잠결에 멀리서 누군가 눈 위로 걸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즉시 일어나 앉아 발걸음이 나는 쪽을 바
라보았다. 희미한 달빛 아래 어렴풋이 일곱 명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맨 앞의 사람은 바로 그 촌녀였다. 그런데 그녀 뒤의 여
섯 명은 부채꼴 모양으로 서서 그녀가 행여나 도망갈까 봐 방비
하는 태세인 것 같았다. 장무기는 흠칫 놀라며 내심 생각을 굴렸
다.
'혹시 그 소녀가 자기 오빠들에게 잡힌 게 아닌가?'
그 소녀와 여섯 명이 이미 가까이 왔다. 순간 장무기는 너무도
놀란 나머지 하마터면 외마디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 여섯 명은
바로 무청영(武靑瓔), 무열(武烈), 위벽, 하태충(何太忠), 반숙
한 부부, 그리고 맨 오른쪽엔 중년 여자가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바로 아미파의 정민군(丁敏君)이었다.
장무기는 정말 이상하다고 느꼈다.
'이 소녀가 어떻게 이런 사람들과 아는 사이지? 그렇다면, 이
소녀는 무림인인가? 나의 원래 모습을 알아 보고 이들을 데리고
나를 붙잡으러 왔단 말인가! 내 의부의 행방을 알려고?'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는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어 그만
화가 치밀고 말았다.
그는 곰곰이 생각을 굴렸다.
'지금은 내가 다리를 다쳐서 꼼짝달싹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여
섯 명은 모두 고강한 무공을 갖고 있고, 어쩌면 이 촌녀도 무공
이 무서운 소녀일지도 모른다. 일단 그들에게 굴복하고 의부를
찾아 주겠다고 한 다음 다리가 완치된 후 일일이 복수를 해야
지.'
만약 오 년 전이라면, 그는 목숨을 아끼지 않고 상대가 어떤 강
압과 핍박을 해도 이를 악물고 버틸 수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나이가 들어 머리를 쓸 줄 알았고. 거기다 구양진경의 신공을 익
혀 마음을 진정시킬 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 촌녀가 자기를 팔 줄은 정말 천만의 뜻밖이었다. 그
는 크게 분개하며 그만 마음이 슬퍼왔다. 그는 아예 누워 팔을
베개삼고 일곱 명을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소녀는 그에게 가까이 걸어와 조용히 그를 쳐다보더니, 얼마 후
다시 되돌아갔다.
장무기는 그녀의 탄식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다. 매우 낮은 소리
였으나, 애상이 가득 차 있었다. 장무기는 내심 냉소를 지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무슨 악독한 계략을 꾸미길래, 갑자기 나를 가련하게 생
각하는 거지?'
순간, 위벽이 수중의 장검을 쳐들더니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가 죽기 전에 꼭 만나보고 싶다는 얼굴이 저놈이냐? 행여나
잘 생긴 영준한 소년인 줄 알았더니, 이렇듯 몰골이 추악한 놈이
었구나. 하하하! 정말 웃기는군. 이놈은 정말 너하곤 천생의 배
필감이구나!"
촌녀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고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그렇다. 죽기 전에 저 사람을 한 번 보고 싶었다. 왜냐하면,
저 사람에게 한 마디 묻고 싶어서였다. 대답을 듣기 전에는 죽어
도 눈을 감을 것 같지가 않았다."
장무기는 너무나 의아스러웠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바로 이때, 촌녀의 말이 들려왔다.
"한 마디 묻겠는데, 사실 대로 대답해 주세요."
장무기가 말했다.
"나에 관한 일이라면, 물론 내가 아는 대로 대답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의 일이라면 모르겠소."
그는 이 촌녀가 의부의 소재를 물을 것이라 지레 짐작하고 그렇
게 대답했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그날 당신이 나한테 말하기를 내가 돌아
갈 집도 없으니 나의 반려가 되고 싶다고 한 말이 진심이었냐는
것이에요."
장무기는 정말 뜻밖이었다. 그는 얼른 일어나 앉았다. 그녀의
눈빛에 애상이 가득해 보였다. 장무기가 말했다.
"진심이요."
촌녀가 다그쳤다.
"정말 내 이 추한 모습이 실지 않단 말인가요? 그렇다면 평생
나와 지낼 수 있나요?"
장무기는 깜짝 놀랐다. 평생이라니! 그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나올 것 같은 처
절한 모습에 그만 안타까워 입을 열었다.
"추하고 아름다운 것에 나는 조금도 개의치 않소. 만약 당신이
나를 이상히 생각치 않고 평생 같이 대화하고 웃으며 지낸다면야
나야 물론 좋소. 그러나 나를 속이고 내 입에서....."
촌녀는 떨리는 음성으로 다시 다그쳤다.
"그럼 나를 아내로 맞아들인다 이거죠?"
장무기는 더욱 당황해 하며 한참 후에야 더듬더듬 말했다.
"난..... 한 번도 결혼할 생각을 한 적....."
하태충 등 여섯 명은 모두 크게 웃었다.
위벽이 웃으며 말했다.
"이런 못 생긴 촌놈도 너를 맞아 들이려고 하지 않는데, 우리가
너를 죽이지 않는다 해도 이 세상에 살아서 무슨 재미가 있겠느
냐? 일찌감치 바위에 부딪쳐 죽는 게 나을 거다."
장무기가 여섯 명의 놀림과 위벽의 말을 듣고, 이 촌녀가 이 여
섯 명과 한패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들은 소녀를 죽
이려고 하는 것 같았다. 소녀가 자기를 해치려고 사람들을 데리
고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자, 그는 마음에 따듯한 느낌이 들
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장무기는 그런 비참한 그녀의 모습이 안스러워 갑자기 마음이
크게 움직였다. 자기도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 떠돌아다니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시달림을 받아왔는가! 이 약한 소녀는 나
이도 자기보다 어리고 신세도 자기보다 더 불행하다. 이 소녀를
상심시키고 굴욕을 당하게 할 수 있겠는가! 또 이 소녀가 그렇게
물을 때는 자기 자신을 꺾고 솔직한 태도였는데, 내 일생에서 부
모, 의부, 태사부, 그리고 사백, 사숙 외엔 누가 나를 이렇게 관
심있게 대해 주었던가! 서로 잘 대해 주고 목숨을 같이 의지하는
게 무엇이 나쁘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을 하고 소녀를 보니, 소
녀는 몸을 떨며 돌아서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장무기는 얼른 왼
손을 뻗어 그녀의 오른손을 움켜잡고 큰 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진심으로 당신을 신부로 맞아들이겠소! 다만 내가 어
울리지 않는다고 하지 마시오!"
소녀는 그 말을 듣자, 금방 눈에서 밝은 빛을 내며 낮은 소리로
물었다.
"아우 오빠, 그 말이 사실입니까?"
"물론이오. 오늘부터 나도 당신을 정말 사랑하고 보살필거요.
어느 누가 당신을 괴롭힌다면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당신을 안전
하게 보호할 것이요. 당신이 옛날의 고통을 잊을 수 있도록 편안
하고 기쁘게 해 줄 것이오."
소녀는 그의 옆에 앉아 그의 몸에 기대어 나머지 한쪽 손을 잡
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정말 기뻐요."
소녀는 눈을 감으며 다시 말했다.
"다시 한 번 말해 주세요. 한 자 한 자 모두 꼭 기억하게요. 나
를 어떻게 대한다고 하셨죠?"
장무기는 그녀가 너무 좋아하는 것을 보자 자신도 기뻐하며 그
녀의 두 손을 움켜잡았다. 부드럽고 따뜻한 감촉이 전해졌다.
"당신을 평생 즐겁게 해줄 것이오. 지금의 고통을 모두 잊어 버
리고 누가 괴롭힌다면 내 목숨을 바쳐 당신을 안전하게 보호해
줄 것이오."
소녀는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그의 가슴에 기대어 부
드러운 음성으로 속삭였다.
"전에는 나를 욕하고 때리고 물어뜯더니 이제 와서 나한테 그런
말을 하니 정말 기뻐요."
장무기는 그 말을 듣자 가슴이 싸늘해졌다.
장무기를 자기의 정인으로 착각하고 환상에 젖이 있었던 것이
다. 그녀는 장무기의 갑작스런 태도에 직감적으로 깜짝 놀라 눈
을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에 싸늘한 빛이 감돌았다.
실망과 분개함을 감출 수 없었지만 이내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아우 오빠, 나같이 못 생긴 여자를 신부로 맞이한다니 정말 감
격했어요. 그러나 벌써 몇 년 전에 내 마음은 다른 사람의 것이
됐어요. 그 때 그는 나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는데, 지금 내 이
꼴을 보면 더욱 나를 모른 척할 거예요."
무청영이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너를 아내로 맞이 하겠다고 했고 정담도 나눴으니, 이제
그만 일어나거라."
그 촌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아우 오빠, 난 이제 곧 죽을 몸이에요. 내가 죽지 않는다 해도
절대로 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어요.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가끔씩 저를 생각해 주세요."
그녀의 이 몇 마디는 부드럽고도 달콤했다. 장무기는 가슴에 찡
해 오는 것을 느꼈다.
이때 반숙한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
"우린 이제 너의 소원대로 이 사람과 만나게 해 주었으니, 너도
신용을 지켜 저 자의 정체를 밝혀라!"
촌녀가 대답했다.
"좋아요. 난 언젠가 이 사람 집에 숨었던 적이 있어요."
그러면서 손가락으로 무열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무열은 안색이 확 변하며 소리쳤다.
"헛소리마라!"
위벽이 벌컥 화를 냈다.
"사실대로 말해라! 누구의 지시를 받고 내 누이 동생을 죽였는
지!"
장무기는 정말 크게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떨리는 음
성으로 물었다.
"아니, 주구진 낭자가 죽었단 말인가요?"
위벽이 장무기를 노려보며 이를 갈더니 말했다.
"너도 주구진 낭자를 아느냐?"
장무기가 대답했다.
"설령쌍매(雪嶺雙妹) 하면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무청영이 입가에 엷은 웃음을 띠며 촌녀를 향해 큰 소리로 다그
쳤다.
"도대체 누구의 지시를 받았느냐?"
촌녀가 냉랭하게 대답했다.
"나에게 지시를 내린 사람은 곤륜파의 하태충 부부와 아미파의
멸절사태입니다."
무열이 일성대갈했다.
"이간질을 시키지 마라! 그래도 소용없다!"
그러면서 팍! 하고 촌녀를 향해 일장을 뻗었다. 그의 우렁찬 소
리와 동시에 뻗은 일장은 위력이 상당했다. 순간, 촌녀는 기묘한
신법으로 그의 장풍을 잽싸게 피했다.
장무기는 마음이 착잡했다.
'이 소녀는 진정 무인이었구나. 그녀가 주구진 낭자를 죽인 것
은 내가 그녀에게 속고, 또한 그녀가 키우는 개한테 물렸다는 말
을 듣고 한 짓이 분명해. 그렇지만, 내가 언제 죽이라고 시켰던
가! 그녀의 용모가 추하고 집안의 변고가 있어 성격이 괴팍하다
는 것은 알지만, 그렇다고 주구진 낭자를 죽이다니.....!"
위벽과 무청영은 장검을 들고 좌우로 그녀를 협공했다. 그 촌녀
는 몸을 이쪽저쪽으로 비틀어 빠져 다니면서 그들을 피했다. 무
열의 웅후한 장력도 피했다. 그러자 그녀는 갑자기 버들가지 같
은 허리를 옆으로 돌리더니, 무청영의 옆으로 다가가 팍! 하고
그녀의 뺨을 나서 잽싸게 왼손으로 그녀의 장검을 빼앗았다.
무열과 위벽은 크게 당황하며 그녀를 도우려고 접근했다. 촌녀
는 장검을 휘두르며 싹! 하는 소리와 이미 무청영의 얼굴에 핏자
국을 그렸다. 무청영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쓰러졌다. 사실 가벼
운 상처였으나 용모를 아끼는 심정에 얼굴이 따끔하자 지레 겁을
먹은 것이다.
무열은 촌녀를 향해 장풍을 휘둘렀다. 촌녀는 몸을 피하며 요란
한 금속성을 내며 위벽의 장검을 상대했다. 바로 이때 무열의 식
지(食指)가 움직이며 그녀의 왼쪽 다리의 복토(伏兎), 풍시(風
市) 양현을 찔렀다. 촌녀는 가벼운 신음소리와 함께 다리에 힘이
풀리며 장무기의 몸에 쓰러졌다.그녀는 이제 더 이상 힘을쓸 수
가 없었다.
무청영은 장검을 치켜들고 이를 갈며 소리쳤다.
"이 추녀야, 너를 속시원하게 죽일 것 같으냐? 네 두 팔과 두
다리를 잘라 늑대 밥이 되게 만들겠다!"
이렇게 말하며 촌녀의 오른팔을 향해 검을 내리치려고 했다. 순
간 무열이 입을 열었다.
"잠깐만 기다려라! 누가 지시했는지 입을 열면 너를 속시원히
죽여 주겠다. 그렇지 않으면 팔과 다리가 잘려서 눈위로 뒹구는
모습이 볼 만할 것이다!"
촌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할수 없지. 주구진 낭자가 어느 남자에게 시집 가려
고 하는데 어떤 아리따운 낭자께서도 그 남자에게 시집 가려했
지. 바로 그 여자가 나에게 은 오백 냥을 주고 주구진 낭자를 죽
이라고 부탁한 거야. 이 일은 내가 비밀을 지켜야 하는건데...."
그녀가 말을 계속 이어가려고 하자, 무청영은 이미 화가 치밀어
안색이 변하며 검을 뻗쳐 촌녀의 가슴을 향해 찌르고 말았다. 그
촌녀는 이미 무청영과 위벽, 그리고 주구진 세 사람의 관계를 알
고 있었던 것이다. 자기가 이렇게 무청영을 격노시킨 이유는 바
로 속시원하게 자기를 죽이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 순간, 갑자기 어느 무성무식(無聲無息)의 힘이 날아와 검과
부딪치며 팍! 하는 소리와 함께 장검은 십여 장이나 날아가 떨어
졌다. 어두컴컴한 곳에서 누구도 검이 어떻게 해서 그녀의 손에
서 떨어졌는지 본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무청영 혼자서 내던져
다 해도 절대로 그렇게 멀리 내던질 수가 없었다. 촌녀에게 강한
후원자가 나타난 것이 틀림없었다.
여섯 명은 모두 놀라 뒤로 물러서며 사방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근처엔 바위나 나무들도 없어 몸을 숨길 곳이 없었다. 그 어떤
그림자도 보이지 않자 그들은 서로 마주보며 의혹에 차 있을뿐
이었다.
무열이 낮은 소리로 입을 열었다.
"청아야, 왜 그러느냐?"
무청영은 황급히 말했다.
"어떤 무서운 아미가 내 검을 튕겨나가게 한 것 같아요."
무열은 사방을 둘러봐도 사람이라곤 보이지 않자, 촌녀를 향해
외쳤다.
"흥! 이 계집애가 한 짓이다!"
그러나 그는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다.
'분명 나의 일양지(一陽指)를 맞았는데, 무슨 힘이 아직 남아
있지? 이 계집아이의 무공은 정말 알 수 없군.'
그는 앞으로 나서며 손을 쳐들어 촌녀의 어깨를 향해 내리쳤다.
경력이 매우 웅맹한 일 장이었다. 그는 촌녀의 어깨를 으스러뜨
려 자기 딸이 마음대로 할 수 있게 하려고 한 행동이었다.
촌녀의 어깨가 으스러지려는 순간, 갑자기 촌녀의 손이 번쩍 들
렸다. 쌍장이 부딪치자 무열의 가슴이 뜨거워지며 촌녀의 장력은
마치 광풍노도와 같아 실로 감당할 수가 없었다.
앗! 하는 비명과 함께 몸이 날리더니 퍽! 소리를 내며 멀리 나
가 떨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의 무공은 대단해 땅에 떨어지는
즉시 뛰어 일어났다. 그러나 가슴에 뜨거운 피가 들끓으며 머리
가 어지러워, 몸을 세우고 나자마자 제대로 호흡을 근절할 수 없
어 휘청거리다가 다시 쓰러지고 말았다.
위벽과 무청영은 크게 놀라 얼른 달려가 그를 부축했다. 그러자
갑자기 하태충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냥 내버려 둬!"
그 말에 무청영이 고개를 돌리며 노기띤 음성으로 외쳤다.
"뭐라고? 사부님이 암습을 당하셨는데, 넌 오히려 즐거워하며
놀리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하태충이 말했다.
"기혈이 솟구쳤을 땐 조용히 누워 있는 게 좋아요."
위벽은 그제서야 말뜻을 알아차리고 사부를 가볍게 내려놓았다.
하태충과 반숙한 부부는 영문을 알 수 없어 서로 쳐다만 볼 뿐
이었다. 두 사람은 모두 이 촌녀와 상대한 적이 있어 그녀의 초
술이 절묘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무열에게 뻗은 일 장은 정
말 천하에 보기 드문 내력이었다.
한편, 촌녀는 이들보다 더욱 큰 의혹에 쌓여 있었다. 자신은 분
명 무열의 점혈에 당한 후 장무기의 가슴에 쓰러져 조금도 움직
일 수가 없어서 무청영이 찌르는 검에 당할 수밖에 없었다.그런
데 갑자기 무엇인가가 날아와 검을 튕겨내며 불덩이 같은 열기를
끊임없이 현종혈(懸鐘穴)을 통해 체내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
녀는 너무나 빠른 변화에 생각할 틈도 없었다. 곧이어 무열의 장
풍이 내리쳐 엉겁결에 어깨 뼈가 으스러지지 않게 뻗은 것뿐인
데, 웬일이지 서로 장풍이 부딪치자 무열이 그 일 장에 저렇게
밀려 나가 떨어진 것이다.
그녀는 어리벙벙해 하며 내심 생각을 굴렸다.
'그렇다면, 이 추한 남자가 무공이 상당한 대고수란 말인가?'
하태충은 더 이상 촌녀와 장력으로 맞설 용기가 없어 검을 뽑으
며 말했다.
"내가 낭자의 검법의 가르침을 받아보지."
촌녀가 웃으며 말했다.
"나에겐 검이 없는데요?"
위벽이 그녀의 말을 받았다.
"좋아, 내가 빌려주지."
그러면서 장검을 들어 검 끝으로 촌녀의 가슴을 조준하고 힘껏
던졌다. 촌녀는 팔을 내둘러 그의 검을 낚아채고 웃으며 말했다.
"네 무공이 너무 미천해 아직 나를 찔러 죽이지 못하는군."
하태충은 일파의 장문인인지라 체면을 생각해서 얼른 입을 열었
다.
"자, 공격해 봐라. 삼 초를 양보하고 나서 반격할 테니."
촌녀는 그의 중궁(中宮)을 향해 장검을 내찔렀다.
하태충은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후배가 무례하군."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검을 펼치자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두
검이 모두 부러지고 말았다. 하태충의 안색이 크게 변하며 몸이
번뜩이더니, 어느새 뒤로 반 장이나 물러섰다. 그것은 바로 무기
의 구양신공이 그녀의 체내에 전도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신공의 위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해 두 검이 모두 부러진 것이
었다. 만약 운력을 하고 적을 대했더라면 부러진 것은 상대의 검
뿐이고, 자신의 검은 아무 이상도 없었을 것이다.
반숙한은 어안이 벙벙해져서 낮은 소리로 물었다.
"왜 그래요?"
하태충은 팔이 저려오는 것을 느끼며 의아한 표정을 지을 뿐이
었다.
반숙한이 장검을 뽑아 정색을 하며 소리쳤다.
"내가 한 번 가르침을 받아 보겠다."
촌녀도 두 손을 벌려 보였다. 쓸 만한 검이 없다는 뜻이었다.
반숙한은 그녀의 오만한 태도에 대노하여 선배의 신분 같은 것
은 아랑곳없이 검을 휘둘러 촌녀의 목을 향했다. 촌녀는 검을 들
어 막았지만, 반숙한의 검법이 매우 날렵하여 벌써 방향을 바꾸
어 촌녀의 왼쪽 어깨를 찌르려고 했다. 촌녀가 잽싸게 검을 뒤집
어 방어하자 반숙한은 어느새 촌녀의 오른쪽 늑골을 찌르려고 했
다. 이렇게 여덟 번을 바람처럼 연속으로 공격했지만, 시종촌녀
의 검과 서로 부딪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검법의 장기를 발휘
하며 상대가 내공을 시전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하지만 곧 그녀
는 위험에 빠지고 말았다. 본시 촌녀의 검법은 반숙한을 따를 수
가 없었다. 거기다 또 부러진 검을 들고 있고, 두 다리를 움직이
지 못했기 때문에 그저 공격을 모하고 수세에만 몰려 있었다. 또
다시 수 초가 지나자 반숙한의 검 끝이 닿으면서 찍! 하는 소리
와 촌녀의 왼쪽 팔뚝에 칼자국이 나고 말았다. 곤륜파의 검법은
기회를 포착하면 상대가 잠시도 숨쉴 틈을 주지 않는 것이었다.
반숙한의 계속되는 공격에 촌녀는 앗! 하는 소리와 함께 어깨를
찔리고 말았다. 이때 촌녀가 날카롭게 외쳤다.
"나를 돕지 않고 눈뜨고 내가 죽어가는 것을 보기만 할 것인가
요?"
반숙한은 검으로 가슴을 막으며 뒤로 물러서며 사방을 살펴보았
다.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검을 조금씩 떨며 검 끝에서
한기를 뿜으며 다시 촌녀를 공격해 왔다.
촌녀가 재빨리 부러진 검을 휘둘러 상대의 삼검(三劍)을 막아내
자, 상대의 검초는 점점 기괴해지는 것이었다. 자신도 번개와 같
이 막아 내고 있었다. 정말 머리카락 하나 빠져 나갈 틈도 없을
정도였다.
반숙한이 외쳤다.
"계집애, 네 수법도 제법 빠르군."
촌녀도 즉시 욕설을 뱉었다.
"이 우라질 여편네야, 너도 별로 느리진 않구나."
그러나 반숙한은 일대 명가의 검술이 아닌가! 그의 수 십년의
수양은 입으로 말을 하면서 손놀림은 조금도 늦추지 않게 했다.
반면 촌녀는 십 칠팔세의 나이가 아닌가! 명사의 가르침을 받았
다해도 반숙한과 같은 풍범(風範)을 어찌 배울수 있었겠는가! 반
숙한에게 욕설을 하며 잠깐 정신을 판 틈에 그만 손목에 짜릿한
느낌이 들면서 부러진검이 손을 벗어나고 말았다. 촌녀가 앗!
하고 비명을 지르는 사이에 반숙한의 제 이 검이 그녀의 늑골을
공격해왔다.
이때 여태까지 옆에서 수수방관하고 있던 정민군은 이쪽의 우세
를 보고 검을 뽑았다. 그리고 추창망월의 초식으로 촌녀의 등을
향해 공격해 왔다. 동시에 무청영도 몸을 날려 촌녀의 오른쪽 허
리를 걷어찼다. 촌녀는 겁에 질려 가슴이 철렁했다. 그러나 바로
그 때, 온몸이 불 속에 빠진 것처럼 뜨거워졌다. 그녀는 손가락
을 내밀어 반숙한의 장검에 대고 튕겼다. 그런데 바로 이 순간,
등에 장풍을 맞고 허리를 걷어차이고 말았다. 그녀가 고통을 못
이겨 아야! 앗! 하는 두 마디의 비명을 지름과 동시에 정민군과
무청영의 몸이 뒤로 나가 떨어지며 반숙한의 검이 두 동강이 난
것이다.
이것은 정세가 소녀에게 매우 위급해지자 장무기가 재빨리 전신
의 진기를 촌녀의 체내에 주입시킨 것이다. 그는 이미 구양진경
의 삼사성(三四成) 공력을 연마한 터라, 보통 위력이 아니었다.
그래서 반숙한의 장검이 부러지고 정민군의 두 손목과 무청영의
오른쪽 발목이 모두 부러진 것이었다.
하태충, 무열, 위벽 모두는 놀라 입을 딱 벌렸다. 반숙한은 부
러진 검을 땅에 팽개치며 분통을 터뜨렸다.
이제 그만 가지고 하면서 남편을 향해 화가 난 눈으로 쳐다보았
다. 남편에게 울화통을 발산하려는 듯하였다. 하태충과 반숙한은
벌써 멀리 달려가고 있었다. 곤륜파의 경공은 참으로 훌륭했다.
가히 무림의 일절(一絶)이라고 할 수 있었다.
위벽은 한 손으로 사부를 부축하고 한 손으로 사매를 부축하면
서 천천히 떠났다. 세 사람은 촌녀가 추격해올까 몹시 두려웠지
만, 그렇다고 하태충 부부와 같이 날으는 듯이 달아날 수도 없고
그저 한 걸음 한 걸음씩 떼어놓으며 불안해 하고 있었다. 정민군
은 손목이 부러졌지만, 다리는 멀쩡해 이를 악물며 혼자 떠났다.
촌녀는 득의양양해 하며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이.....!"
순간 갑자기 숨이 탁 막히며 그만 기절해 버리고 말았다. 그것
은 장무기가 여섯명이 모두 떠나가자 그녀의 발목에서 손을 거두
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체내에 충만해 있던 구양진기가 빠져
나가자, 전신이 허탈해지며 사지에 힘이 빠진 것이다. 장무기는
깜짝 놀라 재빨리 두 손의 엄지손가락을 그녀의 눈썹 양 옆 끝
즉사공혈(竹絲空穴)에 대고 신공을 약간 운공했다. 그러자 촌녀
는 서서히 깨어났다.
그녀는 눈을 뜨고 자기가 장무기의 품안에 안겨 있는 것을 알고
는 수줍어 하며 재빨리 쳐다보더니, 갑자기 장무기의 왼쪽 귀를
잡아 당기며 외쳤다.
"이 추남아, 나를 속이다니! 그런 무서운 무공을 지니고 있으면
서, 왜 나한테 말 한 마디 없었죠?"
장무기는 귀가 아파 소리쳤다.
"아야! 무슨 짓이오!"
촌녀가 크게 웃으며 다그쳤다.
"왜 나를 속였죠?"
"언제 당신을 속였단 말이오? 무공을 할 줄 모른다고 하지도 않
았지만, 할 줄 안다고 하지도 않았잖소?"
"좋아요! 나를 도와준 정을 생각해 한 번만 용서해 주겠어요.
이젠 걸을 수 있나요?"
"아직은 걷지 못하오,"
그녀는 탄식을 하며 말했다.
"착한 일을 했으니 좋은 업보가 있을 거예요. 만약 내가 걱정이
돼서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면, 나를 도울 수도 없었겠지만....."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나보다 재주가 좋은 줄 미리 알았다면, 내가 대신 주구진 낭자
를 죽일 필요는 없었는데....."
장무기가 물었다.
"내가 그녀를 죽이라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왜 그녀를죽였소?"
"뭐라구요! 그럼 아직도 낭자를 잊지 않고 있단 말인가요? 오히
려 내가 나쁜 사람이 됐군요. 당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죽였으
니....."
장무기는 당황해 하며 급히 말을 막았다.
"주구진은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아니오. 그녀가 아무리 예쁘다
해도 나하곤 아무 상관이 없소."
촌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음! 그것 참 이상하군요. 그렇다면, 당신을 이렇게 골탕먹인
그녀를 대신 죽였는데도 좋지 않단 말인가요?"
장무기는 담담하게 말했다.
"나를 골탕먹인 사람은 너무나 많아, 만약 일일이 다 죽인다면
그 많은 사람들을 다 죽일 수도 없소. 어떤 사람은 나를 죽이려
고 했지만 그들도 사실 불쌍한 사람들이었소. 주구진 낭자만 해
도 그녀는 매우 불안해 하며 지냈소. 위벽이 자기와 결혼하지 않
고 무낭자와 결혼할까 봐. 그러니 어떻게 즐겁게 지낼수가 있었
겠소?"
촌녀는 노기띤 음성으로 쏘아 붙였다.
"나를 비꼬는 건가요?"
장무기는 어리둥절했다. 주구진 낭자의 얘기를 하면서 이 촌녀
의 비위를 거슬리고 만 것이다. 그는 재빨리 말머리를 돌렸다.
"아니, 그게 아니라 누구나 다 자기 나름대로불행이 있다는 거
요. 자기에게 잘못했다고 모두 죽여야 한다는 것은 나쁜 생각이
라 이 말이오."
촌녀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당신은 사람을 죽이려고 무공을 배운 것이 아니라면서,
뭐하러 무공을 배웠죠?"
장무기는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무공을 배우는 것은 나쁜 사람이 해치려고 할 때 방어하자는
목적이 있는 것이오."
그녀가 정감어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말 훌륭하군요. 이제보니 당신은 정인군자였었군요. 정말 좋
은 사람이었어요."
촌녀가 고개를 치켜올리며 물었다.
"뭘 보는 거죠?"
장무기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우리 어머니께서 항상 아버지에게 말씀하시기를, 속도 없이 마
음만 좋으니 연약한 서생과 같다고 말씀하시곤 하셨는데, 어머니
가 말씀하실 때 그 입 모양이 당신과 똑같아서 보는 거요."
촌녀는 얼굴이 빨개지며 나무랐다.
"픽! 또 나를 놀리려고 그래요? 내가 당신 어머니를 닮았다면,
그럼 당신은 당신 아버님을 닮았겠군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녀의 눈엔 웃음이 넘치고 있었다.
장무기가 말했다.
"하늘을 두고 맹세하겠소. 내가 당신을 놀렸다면 하늘이 무너지
고 땅이 꺼질 것이라고!"
촌녀가 눈을 살짝 흘기며 웃었다.
"나를 놀렸다고 무슨 큰일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뭣하러 그건
맹세까지 하는 거죠?"
바로 그 때, 갑자기 동북쪽에서 휘파람소리가 들려왔다. 휘파람
소리는 맑고도 길게 들려왔는데, 여자의 소리였다. 그러자 또 누
군가가 휘파람소리로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바로 아직 멀리
떠나지 않았던 정민군이었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서 있었다.
----- 제 3 권 4 장 끝 -----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3 권
제 5 장 아미파의 결의(決議)
장무기와 촌녀가 동북방을 바라보니, 어스름하게 여명이 밝아오
는 가운데 녹색 옷을 입은 사람 모습이 눈덮힌 벌판을 가로질러
바람처럼 질주해 오는 것이 보였다. 쌍방의 간격이 좁혀지자 녹
색 경장 차림의 여인임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우선 정민군과 몇 마디 나누며 장무기와 천녀를 힐끗 쳐
다보더니 곧 가까이 다가왔다. 보복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옷자
락을 표표히 날리며 접근해 오는 신법이 여간 날렵한 것이 아니
었다.
장무기는 비로소 그녀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나이는
어림잡아 열 일곱, 청아하면서도 빼어난 미모의 소유자였다. 장
무기는 다소 의아해 했다. 앞서 그녀가 전개한 신법과 웅후한 진
력이 깃들인 장소(長嘯)로 미루어 필시 정민군보다 나이가 많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 추측이 빗나간 것이다.
그녀는 정민군에게 얘기를 들어 장무기에게 적의를 품고 있을
텐데도 불구하고, 허리에 찬 검을 뽑아 들지 않은 체 빈손으로
다가왔다.
"주 사매, 조심해. 이 귀신 같은 계집은 사악한 무공을 쓴다."
정민군이경고를 한 마디 던지자 그녀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
덕이더니, 걸음을 멈추고 온화한 음성으로 물었다.
"두 분의 존함이 어찌 되시는지요? 무슨 일로 저희 정 사저에게
부상을 입혀 하셨습니까?"
그녀가 다가올 때부터 장무기는 줄곧 낯이 익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는데, 지금 목소리를 듣자 이내 짚이는 사람이 있었다.
'그렇구나! 바로 그 여자야. 육칠 년 전 한수(漢水)에서 몽고군
에게 쫓기던 상우춘 형님과 같이 배에 타고 있었던 뱃사공의 딸
이 주지약이 틀림없다. 태사부님께서 무당산으로 데려가셨을 텐
데, 어째서 아미파 제자가 되었을까?'
그 때 일을 생각하니 가슴 뭉클한 감회가 일었다. 아울러 태사
부 장삼봉의 안부도 궁금해졌다. 그러나 장무기는 이내 생각을
돌렸다.
'장무기는 이미 죽고 없는 몸, 지금의 나는 한낱 촌부에 불과하
다. 여기서 그리움이나 감상에 빠져 신분이 노출되는 날이면 결
국 풍파가 꼬리를 물고 밀어닥칠 것이고, 큰아버지인 금모사왕에
게도 해가 미칠 것이다. 그러면 억울한 죽음을 당하신 부모님의
뜻이 헛되고 말리라.'
촌녀는 주지약을 쏘아보면서 차갑게 웃었다.
"당신의 사저는 쌍장으로 내등을 공격하다가 제풀에 손목이 부
러졌는데, 나더러 책임지라는 말인가요? 직접 물어 보세요. 내가
손을 쓴 적이 있느냐?"
이 말을 듣고 주지약은 정민군을 돌아 보았다. 그게 사실인지
묻는 눈치였다. 정민군은 당황을 감추기 위해서 화를 발칵 냈다.
"너는 저 두 연놈을 잡아다가 사부님의 처분에 맡기기만 하면
돼!"
"제 생각에는 두 분이 언니께 의도적으로 실례를 범한 게 아니
라면, 그냥 웃어넘기는 것이 좋겠군요."
"아니 뭐라고? 넌 지금 적을 돕겠단 말이냐?"
정민군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얼굴에 서리가 맺혔다. 장무기는
언젠가 호접곡 부근 숲 속에서 오늘과 똑같이 표독스러운 정민군
을 본 적이 있었다. 팽화상을 공격할 때, 기효부가 팽화상의 역
성을 들다가 정민군과 언쟁 끝에 대판 싸움을 벌였었다. 장무기
는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사저랍시고 정민군이 다시 사나운 심
통을 부린다면, 기효부보다 어린 주지약은 도리없이 당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주지약은 기효부와는 달리 그녀에게 순순히 복종
했다.
"그럼 분부에 따르겠습니다."
"좋다. 우선 저 못 생기고 더러운 계집부터 무릎을 꿇리고 손목
을 끊어 버려라!"
"알겠습니다. 언니도 저를 도와 주세요."
주지약은 촌녀에게로 돌아왔다.
"그럼 실례를 범하겠어요. 그대의 고명한 솜씨를 좀 배울까 하
는데....."
"웬 잔소리가 그리도 그리도 많으냐? 어디 덤벼 봐라!"
촌녀는 냉소를 터뜨리며 몸을 솟구치더니 번개처럼 연거푸 삼
장을 후려쳤다. 그러자 주지약은 몸을 비스듬히 해서 그 장력안
으로 파고들었다. 왼손으로 금나수법을 써서 상대방의 팔을 움켜
잡았다. 이는 수비를 위한 공격 수법이었다.
장무기의 내공력은 막강하나 무술의 초식은 아직 터득치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지약과 천녀는 서로 신속한 타법을 구사했다.
주지약의 아미면장은 경쾌하고 신속한 반면에, 촌녀의 장법은 전
혀 짐작도 못할 정도로 기괴망측하였다. 장무기는 내심 감탄했
다. 아울러 어느 쪽도 다치거나 이기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십여 초를 주고 받는 동안에 두 여자는 저마다 몇 차례씩 위
기에 처했지만 절묘한 신법으로 역습을 가해 상대방의 공격을 무
마시켰다.
"받아랏!"
갑자기 촌녀는 고함을 지르면서 왼손으로 주지약의 어깨를 후려
쳤다. 순간 찌익 하는 소리와 함께 주지약은 손을 되돌려서 접근
해 곧 촌녀의 옷자락을 찢어 버렸다.
두 여인은 약속한 듯이 몸을 튕기며 뒤로 물러섰다. 모두 얼굴
이 불그스레 상기되었다.
'아, 대단한 금나수법이군!'
촌녀는 감탄을 하면서 다시 덮여들려는데 주지약이 갑자기 양미
간을 잔뜩 찌푸리면서 자신의 가슴을 움켜쥔 채 쓰러질 듯 휘청
거렸다.
"주..... 주 소저.....!"
장무기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쳤다. 얼굴에는 걱정스런 빛이
감돌았다. 주지약은 그 긴 수염에 장발을 늘어뜨린 남자가 자기
를 몹시 걱정해 주는 것을 이상히 여겼다.
"사매, 어찌 된 거냐?"
정민군이 곁으로 다가가자 주지약은 왼손을 그녀의 어깨에 걸치
면서 고개를 저었다. 정민군도 촌녀에게 혼줄이 난 터라 그녀의
예리함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주지약을 윽박질러서 싸움을
걸게 한 것은 순전히 그녀의 질투심 때문이었다. 스승인 멸절사
태는 항상 이 어린 사매를 칭찬했다. 남다르게 깨우침이 빨라 장
차 아미파의 명성을 빛낼 사람도 그녀라고 자신있게 공언하곤 했
다. 그러기 때문에 스스로를 사문의 계승자라 믿고 있던 정민군
은 항상 불만에 가득 차 있었다.
과연 주지약의 무공은 자기보다 훨씬 월등했다. 자기는 단 일
초도 제대로 공격하지 못하고 손목이 꺽였는데, 그녀는 이십 초
나 겨루고서야 패색을 보인 것이다. 정민군은 수치심과 질투심이
불길처럼 솟구쳐 전신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러나 자기 어깨에
걸쳐 있는 주지약의 팔에는 전혀 기력이 없었다. 그제서야 그녀
가 중상을 입은 것을 알아챘다. 정민군은 다시 그 촌녀가 덤벼들
까 봐 급히 발길을 재촉하면서 말했다.
"우선 이곳을 떠나자!"
정민군은 주지약을 부축하면서 동북방쪽으로 떠났다. 그 촌녀는
장무기의 얼굴 표정을 살펴보더니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흥! 그 몰골을 해 가지고 아리따운 아가씨를 보더니 혼비백산
하였군!"
장무기는 주지약과 한수에서 만났던 이야기를 하려다 입을 다물
었다. 지난 얘기를 들려 주어 보았자 이해할 리도 없으니 차라리
정체를 밝히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저 여자가 밉든 예쁘든 나와 무슨 관계가 있소? 난 저 아가씨
가 혹시 다치지나 않았나 해서....."
"그게 정말인가요?"
"내가 그대를 속여 뭣하겠소? 그런데 아미파 제자 중에 저토록
젊은 낭자가 일류 고수에 못지 않는 무공을 지녔다니 정말 놀라
운 일이오."
"사실이예요. 정말 대단했어요."
장무기의 눈길은 주지약의 됫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 올
때는 날렵하던 걸음걸이가, 이제는 비틀거리며 질질 끌려가고 있
었다. 한수 나룻배 안에서 투정을 부리는 자기에게 밥과 반찬을
떠 먹이던 깜찍한 소녀, 작별을 하면서 눈물을 닦아 주고 손수건
을 주던 그 소녀가 바로 저 처녀였다. 제발 상처가 깊지 않기를
그는 진심으로 바랬다.
"걱정할 것 없어요. 그녀는 조금도 부상을 입지 않았어요. 내가
대단하다고 말한 건 그녀의 무공이 아니라, 저토록 어린 나이에
마음 씀씀이가 깊고 넓다는 것이예요."
"그녀가 다치지 않았다고?"
"틀림없어요. 내 일 장이 그녀의 어깨를 후려치는 찰라, 그녀의
어깨에서 내공력이 솟아나와 내 손을 튕겨 버렸어요. 그녀는 이
미구양공을 수련했기 때문에 오히려 반탄지력에 의해 충격을 받
은 것뿐이예요."
장무기의 암울하던 얼굴이 단번에 활짝 펴졌다.
'주 소저가 멸절사태의 눈에 들어서 아미파의 진파비학(鎭派秘
學)인 아미구양공을 전수받았구나!'
이때 촌녀가 갑자기 손등을 뒤집더니 난데없이 그의 뺨을 철썩
후려쳤다. 너머나 갑작스런 일이라, 장무기는 전혀 무방비 상태
에서 얼굴 한쪽이 단번에 벌겋게 부어올랐다.
"이게 무슨 짓이오?"
"그 처녀의 미색에 넋이 다 빠져, 그녀가 부상일 입지 않았다니
까 그렇게도 좋은가요?"
촌녀는 몹시 화를 내며 말했다. 장무기도 오기가 뻗쳤다.
"내가 좋아했다고 해서 안 될 건 또 뭐요?"
그러자 촌녀는 다시 일 장을 후려쳤다. 이번에는 장무기가 고개
를 살짝 속여서 피해 버렸다. 촌녀는 화를 벌컥 내며 소리를 질
렀다.
"내게 아내가 되어 달라고 했잖아요! 그 말을 한 지 반나절도
안 됐는데 벌써 딴 마음을 품고 남의 낭자를 넘볼 수가 있는 건
가요?"
"그건 어거지요! 아까는 내가 그대의 짝이 될 수 없다고 했지
않았소? 게다가 그대는 이미 마음 속으로 정해놓은 남자가 있다
며 나한테 시집올 수 없다고 했잖소?"
"그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당신아 나에게 약속을 한 것도 사실
이잖아요! 평생 동안 날 사랑하고 돌보아 주겠다고 말이에요!"
"내가 한 약속은 물론 절대로 지킬 것이오!"
"그렇다면, 당신은 어째서 그녀의 미모에 넋을 빼앗겨 날 약을
올리는 거죠?"
"난 넋이 빠진 적이 없소!"
"난 절대로 당신이 그녀를 좋아하도록허락할 수가 없어요. 그
리고 생각하는 것도 절대로 안 돼요!"
"내 언제 그녀를 좋아한다고 했소? 그런데 어찌 당신은 그녀를
꺼리고 마음에 두는지 알 수가 없소. 그리고 그대는 오매불망 그
남자만 생각하고 있는데 그렇게도 잊어 버리지 못하겠소?"
"난 그 사람을 먼저 알았어요. 만약에 당신을 먼저 알았다면 일
생을 두고 당신을 섬겼을 거에요. 절대로 다른 남자를 염두에 두
지 않아요. 이걸 종일이종(從一二終) 즉, 일부종사라 하지요. 만
약에 두 마음을 품는다면 하늘도 용납하지 않을 거에요!"
장무기는 촌녀의 푸념을 듣자 마음이 착잡했다. "내가 주 소저
를 안 것은 당신보다 훨씬 먼저였소."라고 생각을 했지만, 그 말
은 안 나오고 엉뚱한 말이 나왔다.
"만약에 그대가 나 한 사람만 좋아한다면, 나 역시 당신만을 사
랑하겠소. 그러나 당신이 마음속에 다른 사람을 생각하면 나도
다른 여자를 생각할 수 밖에 없소!"
그러자 촌녀는 한참 동안 깊은 생각에 잠겼다. 몇 차례 입을 열
려고 망설이더니 갑자기 눈에 눈물이 핑그르 돌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리고는 장무기가 안 보는 틈을 타서 소매자락으로 눈
물을 닦았다. 장무기가안스러운 생각이 들어 살며시 그녀의 손
을 잡으며 말했다.
"우리 이제 공연한 말다툼을 그만 하는 게 어떻소? 며칠만 더
지나면 내 다리가 완쾌될 것이오. 그 때 함께 천하 명산 대천을
두루 유람이나 다니는 게 어떠하겠소?"
그러자 촌녀는 고개를 바로 돌렸다. 얼굴에는 여전히 수심이 가
득한 채 입을 열었다.
"저.....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듣고 화내지 말아요."
"무슨 일이오? 내 힘 닿는 데까지 도와드리겠소."
그래도 촌녀는 한동안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입으로는 화를 내지 않는다고 했지만, 속으로는 화를 낼지도
모르잖아요?"
"알겠소. 마음 속으로도 화를 내지 않겠소!"
장무기에게 거듭 다짐을 받고서 이번에는 반대로 촌녀가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
"사실..... 내가 중원에서 머나먼 이곳 서역까지 만리 길을 달
려온 것을 그분을 찾기 위해서였어요. 얼마 전에는 그분의 종적
을 들었었는데, 여기와서는 그분의 소식을 다시는 듣지 못했어
요. 당신의 다리가 완쾌되면 날 도와서 그분을 찾아 주세요. 그
분을 만나보고 나서 당신하고 같이 유람을 다니겠어요. 어때요?"
"흥!"
장무기는 불쾌한 기분을 억제하지 못하고 콧방귀를 터뜨렸다.
"방금 화내지 않기로 약속했는데, 이건 화를 내는 게 아닌가
요?"
그러자 장무기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좋소. 내 그 사람을 찾도록 도와 주겠소."
"당신은 정말 좋은 사람이예요."
촌녀는 몹시 기뻐했다.멀리 지평선에 눈길을 던진 채 흥분을 감
추지 못하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우리가 그 사람을 찾고 나면 이토록 오매불망 찾아다녔다고 말
해 줘야지. 그래야만 날 미워하지 않을 거야..... 그 분이 뭐라
고 말하든 그대로 따를 거고, 그분을 위하는 일이라면 무슨 짓이
라도 할 거야....."
"도대체 당신의 그 사람은 어디가 좋아서 그토록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이오?"
그러자 촌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분이 어떻게 좋은지 그걸 어떻게 말로 설명해요? 우리가 과
연 그분을 찾아낼 수 있을까요? 그분이 날 만나면 또 때리고 욕
을 할까요?"
장무기는 그녀의 멍청스런 표정을 보자,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달래 주었다.
"그러지는 않을 것이오. 그는 절대로 당신을 때리거나 욕을 하
지 않을 것이오."
그러자 촌녀는 앵두같은 입술을 깨물면서 곧 쏟아질 듯한 눈물
을 억지로 참았다.
"그래요. 그분은 날 사랑하고 아껴 주었어요. 다신 날 때리거나
욕을 하지 않을 거예요."
장무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만약에 이 세상 어디엔가 이 낭자처럼 내게 마음을 주고 애틋
하게 연모를 바치는 여인이 있다면, 이제껏 겪은 것보다 더 무서
운 고통과 난관이 닥쳐오더라도 행복할 것 같다.'
그는 눈 덮힌 들판에 찍힌 주지약과 정민군의 발자국을 따라보
면서 다시 생각에 잠겼다.
'만약에 정민군의 발자국이 내 것이라면, 지금쯤 나는 주소저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고 있겠지.....'
갑자기 촌녀가 큰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장무기는 무지개빛 환
상 속에서 깨어났다.
"무슨 일이오?"
"그 아미파 소녀는 나하고 사생 결단을 내기 싫어서 부상을 가
장하고 돌아갔지만, 그 정민군은 말끝마다 우리를 잡아다 그녀의
사부에게 데려간다고 한 걸 보면 멸절사태는 필시 부근 어디엔가
있어요. 그 늙은 비구니는 호승심(好勝心)이 강해 정민군의 얘기
를 듣고 안 올리가 있겠어요?"
장무기는 기효부를 일장에 쳐죽인 그 잔혹스러운 광경을 생각하
자 가슴이 철렁했다.
"그 늙은 비구니의 무공이 워낙 뛰어나서 우리는 도저히 그의
상대도 안 돼요."
"당신은 그녀를 본 적이 있어요?"
"아미파의 장문인인데 절세 무공을 지닌 게 당연하지 않겠소.
난 걸을 수가 없으니 당신이나 달아나시오."
"흥, 내 어찌 당신을 버리고 혼자 달아나서 살 수 있겠어요? 내
양심이 그렇게 나쁜 줄 알았나요?"
그 촌녀는 화를 내면서 그에게 한바탕 면박을 주더니 이맛살을
약간 찌푸리고 잠시 궁리를 했다. 그런 다음 장작더미에서 굵직
한 장작을 골라 내고는 다시 부드러운 나뭇 가지를 모아서 껍질
을 벗겨 밧줄로 꼬은 다음에 그것으로 썰매를 만들었다. 썰매의
이음새를 단단히 묶어 놓더니 장무기를 덥석 안아서 썰매 위에
눕히고 다리를 뻗게 한 다음, 썰매를 끌고 서북방 쪽으로 달려갔
다.
장무기는 그녀의 뒷모습이 마치 새벽 바람에 흔들리는 연꽃처럼
아름다웠다. 그녀는 썰매를 끌고 바람처럼 눈 덮힌 들판을 가로
질려 갔다.
그녀는 쉬지 않고 삼, 사십리를 치달렸다. 장무기는 미안한 마
음이 들어서 입을 열었다.
"이봐요, 좀 쉬었다 갑시다!"
그러자 촌녀는 눈을 흘기며 말했다.
"이봐요가 뭐예요? 난 이름도 없나요?"
"당신이 말을 안 해주니 내가 알 도리가 있소? 추주량이라고 가
르쳐 줬지만 난 그대가 아름다운 것 같소."
그 촌녀는 픽하고 웃음을 터뜨리더니 치닫던 걸음을 멈춰 버렸
다. 그녀는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좋아요. 당신한테 말해 주지 못할 것도 없죠. 내 이름은 주아
요."
"주아, 주아..... 진주 보배의 주(珠)자겠군?"
"진주의 주 자가 아니라 독거미의 주(蛛)예요."
장무기는 깜짝 놀랐다.
"세상에, 어디 그 주자를 이름에다 쓰는 사람이 있겠소?"
"내 이름이 바로 그 주(蛛)자이니 당신이 부르기에 꺼림직하면
부르지 않아도 좋아요."
"당신 아버님께서 지어 주신 거요."
"흥! 만약에 아버님이 지어 주셨다면 나는 사용하지도 않을 거
예요. 엄마는 나한테 천주만독수(千蛛萬毒手)를 수련하게 해주었
거든요. 그래서 이 이름을 쓰라고 했던 거죠."
장무기는 <천주만독수>란 다섯 글자를 듣자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주야가 다시 말했다.
"난 어릴때부터 수련을 했지만 아직도 높은 수준에 이르지 못했
어요. 만약에 내가 천주만독수만 터득하면 멸절사태, 그 늙은 비
구니도 겁날 것 없어요. 거미를 한번 볼래요."
주아는 품속에서 금빛이 찬란한 금합(金盒)을 한 개 꺼내 뚜껑
을 열자 엄지손가락만한 거미 두 마리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거
미의 등판에는 얼룩 무늬가 선명하게 찍혀 번들번들 빛이 났다.
'거미의 몸뚱이에 얼룩무늬가 선명하면 극독(劇毒)을 지니고 있
다. 사람이 물리기만 하면 치료하기가 극히 어렵다.'
"당신은 내 이 보물덩어리 거미가 얼마나 좋은지 모르죠? 잠깐
만 기다려요."
주아는 말을 마치자 마자 몸을 날려 커다란 나무 위로 올라가
사방을 둘러 본 다음 다시 땅으로 내려와 말했다.
"우린 갈 길이 바쁘니 거미 얘기는 나중에 천천히 하죠."
썰매를 끌고 다시 칠, 팔 리쯤 달려가자 산 아래 계곡으로 접어
들었다. 주아는 장무기를 썰매에서 안아 내리더니, 썰매에 바윗
돌 몇 개를 얹어서 다시 끌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절벽 끝
까지 달려가더니 갑자기 발을 멈추고 바윗돌이 담긴 썰매를 절벽
아래로 밀었다. 우르르, 꽝! 하며 소리는 한참 동안 끊이지 않았
다. 장무기가 왔던 길을 뒤돌아보니, 눈 덮힌 지면에는 두 줄기
썰매 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었다. 그제서야 그녀의 의도를 깨달
았다. 만약에 멸절사태가 따라 온다면 틀림없이 썰매자국만 따라
올 것이다. 여기까지 와서는 굴러 떨어진 썰매를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썰매와 함께 우리도 떨어졌다고 생각할 것이다. 과연 주
아는 세심한 여자였다.
주아가 쪼그리고 앉아서 말했다.
"내 등에 업혀요."
"날 업고 가려면 너무 힘들 텐데....."
"힘이 드는지 안 드는지 내가 모르는 줄 알아요?"
주아는 눈을 흘겼다. 장무기는 더 이상 말을 못 붙이고 그녀의
등에 업혔다. 그리고 살며시 그녀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내가 숨막혀 죽을까 봐 그래요? 그렇게 살며시 끌어안으니 간
지러워 죽겠어요."
그러자 장무기는 조금 더 세게 힘주어 그녀의 목덜미를 감싸안
았다. 돌연 주아는 몸을 솟구쳐 그를 업은 채 나무 위로 올라갔
다. 그 나무 숲은 곧바로 서쪽 방향으로 펼쳐져 있었다. 주아는
껑충껑충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뛰어 올라갔다. 그녀는 체격이
큰 장무기를 업고서도 날렵한 보법(步法)으로 칠, 팔십 그루를
건너뛰어도 전혀 힘든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숲 가까이 보이는
산기슭 아래 이르러 비로소 뛰어내리더니 그를 살며시 땅에다 내
려놓았다.
"여기에다 외양간을 하나 만들면 어떨까요?"
"외양간.....? 외양간을 지어 뭘 하려고?"
주아는 어리둥절한 장무기를 바라보면서 깔깔 웃었다.
"송아지 집을 만드는 거죠. 당신의 이름이 아우(阿牛), 즉 송아
지란 뜻이 아닌가요?"
"그럴 필요는 없는 것 같소. 사, 오 일만 지나면 부러진 뼈도
완전히 굳어질 거요. 사실 지금 억지로 걷자면 걸어갈 수도 있
소."
"흥! 억지로 걷는다구요? 이미 추팔괴가 되었는데, 다시 절름발
이 송아지가 되면 참 볼 만하겠군요!"
주야는 말을 하면서 나뭇 가지를 하나 꺾어서 바위 옆에 쌓인
눈을 쓸어 버렸다. 그런 다음 그녀는 커다란 바위 틈에 지붕을
엮어 얹었다. 이윽고 바위 틈에는 하늘이 가려지고 방이 한 칸
마련되었다. 주아는 다시 눈을 큼직한 덩어리로 몇 개 만들어서
출입구만 남겨 두고 모두 막아 버렸다. 그제서야 그녀는 손수건
을 꺼내 얼굴에 땀을 닦았다.
"여기서 기다리세요. 난 먹을 걸 찾아 올 테니."
"난 별로 시장하지 않소. 당신 너무 힘들지 않소? 좀 쉬었다가
가시구료."
"내 걱정을 해 주시면 진심으로 하세요! 공연히 입에 발린 말로
만 하지 말고....."
주아는 잽싼 걸음으로 숲 속으로 들어갔다.
장무기는 바위 벽에 기대앉아서 주아의 가냘픈 몸매며 부드럽고
도 교태어린 음성을 생각하지 한결같이 절세미녀의 품범(風範)이
었다. 한가지 흠이라면 추하게 생긴 그 얼굴 하나뿐이었다. 그는
임종할 무렵의 어머니 말씀이 떠올랐다.
"예쁜 여자일수록 더욱 잘 속이니, 넌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주아는 얼굴이 아름답지는 않으나 얼마나 날 위해 주는가? 일
생을 함께 지내고 싶다. 그렇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다른 남자
가 차지하고 있으니, 나는 그 틈에 도저히 끼어들 수 없다.'
그가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주아는 어느새 설계(雪
鷄) 두 마를 들고 돌아왔다. 그녀는 불을 지피고 그것을 구웠다.
장무기는 설계 한 마리를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주아는 그가
입맛을 다시는 모습이 우스운지, 입가에 빙긋 웃음이 감돌더니
제 몫으로 남긴 닭다리 두 개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장무기는 미
안하여 사양했다. 그러자 주아는 발칵 화를 냈다.
"먹든지 말든지 맘대로 해요. 공연히 위하는 척 위선을 떠는 사
람은 내 단칼에 새 구멍을 뚫어 버리고 말 거예요!"
그 말에 장무기는 잠자코 닭다리를 먹어 치웠다. 그는 기름 투
성이가 된 입술을 쓱쓱 문질렀다. 주아가 고개를 돌려서 한참 동
안 장무기의 얼굴을 쳐다보자, 장무기는 여간 멋적지가 않았다.
"내 얼굴에 뭐가 묻었소?"
"당신 몇 살이나 됐죠?"
"스물 하나."
"아하! 나보다 겨우 세 살 위네요? 그런데 웬 수염을 그렇게 길
게 길렀죠?"
"몇 년 동안 깊은 산 속에서 혼자 살았소. 만날 사람도 없는데
수염을 깎을 필요가 있었겠소?"
주아는 허리띠에 찬 비수를 꺼내서 그의 얼굴을 누르며 천천히
수염을 깎아 주었다. 칼날이 예리해서 장무기는 전혀 아픔을 느
끼지 않았다. 그녀의 매끈하고 따사로운 손끝이 양쪽 뺨을 더듬
어가자 그의 심장은 마구 뛰었다. 그 비수가 그의목덜미까지 내
려오자 주아는 웃으면서 엄포를 놓았다.
"내가 조금만 힘을 주면 어떻게 될까요? 무섭지 않아요?"
그러자 장무기도 웃으며 말했다.
"낭자의 옥 같은 손에 죽는다면, 귀신이 되어도 즐거울 것이
오."
"그럼 즐거운 귀신이 되어 봐요!"
주아는 칼날을 뒤집더니 칼등으로 그의 목덜미를 쓰윽 그었다.
장무기는 깜짝 놀랬다. 피할 틈도 없이 칼등이 목을 스치고 지나
가자, 체내에 잠재한 구양신공(九陽神功)이 반탄력을 발했다. 순
간, 주아의 손에서 비수가 튕겨 날았다. 그제야 장무기는 그녀가
칼등으로 장난을 했음을 깨달았다. 주아는 손목이 시큰해져서 자
기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더니 금새 활짝 웃었다.
"즐거운가요!"
장무기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아는 말끔하게 다듬어진
그의 얼굴을 한참 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더니, 갑자기 장탄식을
했다.
"웬 한숨이오?"
주아는 대답도 하지 않고 그의 머리칼을 다듬기 시작했다. 머리
를 ㄼ게 다듬어서 위로 틀어올린 다음 나뭇 가지를 깎아서 비녀
대신 꽂아 주었다. 비록 옷은 더럽기 짝이 없고 또 너무나 작았
지만 타고난 모습은 변함이 없이 훌륭했다. 추팔괴가 다시 준수
한 청년으로 둔갑한 것이다. 주아는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의 본래 모습이 이럴 줄 정말 몰랐어요."
장무기는 그녀의 마음을 꿰뚫어 보았다. 자신의 추악한 용모를
한탄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본바탕은 외모에 나타나는 게 아니오. 세상에 있는 아
름다운 사물 중에 독을 품은 것이 얼마나 많소. 깃털이 화려한
공작새도 그 쓸개에는 맹독이 들어있고, 선학(仙鶴)의 붉은 벼슬
에도 무서운 맹독을 품었소. 뱀이나 전갈 따위의 곤충도 색깔이
화려할수록 그 독성도 강렬할 것이오. 당신이 품고 다니는 독거
미는 얼마나 아름답소? 사람도 마찬가지요. 아무리 천하일색인
미녀라도 심성이 선량치 못하다면 무엇에다 쓰겠소?"
"그럼 심성이 착한 사람은 어디다 쓰는지 말해 줄래요?"
주아는 웃으며 되물었다. 장무기는 말문이 막혀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잠시 생각하더니 그제서야 말했다.
"마음이 선량하면 남을 해치지 않소!"
"남을 해치지 않는 것은 또 뭐가 좋은 거죠?"
"당신이 남을 해치지 않으면 자신의 마음이 편안해지고 하는 일
마다 떳떳할 거고."
"난 남을 해치지 않으면 속이 시원치 않는걸요. 곁에 있는 사람
의 말도 못하게 참혹한 꼴을 당하면 내 마음도 편안해지고, 하는
일마다 잘 풀리더군요."
그러자 장무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 말은 억지소리요."
"내가 남을 해치지 않겠다면, 이 천주만독수를 수련해서 무엇에
쓰겠어요? 내 자신이 받는 고통은 세상에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걸요. 그런데 장난삼아 겪는 줄 아세요?"
주아는 말을 끝내자 다리를 틀고 앉아서 체내의 내공을 일주천
(一周天) 시키더니, 품에서 금합(金盒)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양손의 손가락을 두 개씩 펴서 합 안에 집어넣었다.
합 안에 있는 얼룩거미 두 마리가 슬슬 기어오더니 그녀의 손가
락을 하나씩 물고 있었다. 그녀는 심호흡을 한 모금 들여마시고
양팔을 살며시 떨면서 내력으로 거미의 독과 대항했다. 얼룩거미
는 그녀의 손가락에서 피를 빨았다. 그녀 역시 혈맥(血脈)을 운
전(運轉)하여 얼룩거미의 독액을 피에 섞어서 끌어냈다.
주아의 얼굴에는 엄숙한 기색이 감돌았다. 동시에 이마 한 가운
데의 양쪽 태양혈 위에 은은하게 검은 기운이 둘러싸는 순간, 이
를 악물고 혼신의 힘을 다 쏟아 고통을 참았다. 얼마쯤 지나자
그녀의 콧잔등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히기 시작했다. 그녀가 이
무공을 반시간쯤 수련하자, 거미 두 마리는 배가 불룩해져서 마
치 둥근 공처럼 되더니, 그제야 합 안에 들어가 갚은 잠에 빠져
들었다.
주아는 다시 운공을 했다. 얼마 후 얼굴의 흑기(黑氣)가 점점
흐려지면서 혈색이 다시 감돌기 시작하자, 숨을 한 모금 토해냈
다. 그 냄새를 맡은 장무기는 달콤한 향기를 느끼면서 즉시 현기
증이 일어났다. 그녀가 뱉어낸 숨결 속에도 맹독이 섞여 있는 것
같았다. 주아는 눈을 뜨면서 살짝 미소를 지었다.
"얼마나 수련해야 극치에 도달하는 거요?"
"그 얼룩거미의 몸뚱이가 얼룩빛에서 검정으로, 다시 검정에서
흰색으로 변해야만 독이 없어지고 죽는 거예요. 그 때 가서는 거
의 몸에 있던 독액이 모두 다 손가락으로 온 것이예요. 최소한
백 마리는 거쳐야 기본이 완성되죠. 진짜 고수가 되려면 일, 이
천마리도 많은 건 아니예요."
장무기는 그녀의 말을 듣자 머리칼이 곤두섰다.
"그 많은 얼룩거미를 어디서 구하오?"
"본인들이 직접 기르면 이놈들이 새끼를 치거든요. 그래도 모자
라면 산지로 가서 잡기도 하지요."
"천하에 무공이 얼마나 많소? 그런데 하필이면 이 독공(毒功)을
수련하는 것이오? 이 거미독은 극렬하기 때문에 체내에 흡수되면
아무래도 좋지 못할 것 같소."
"천하의 무공이 많기는 하지만 어느 무공이 이 천주만독수보다
월등하겠어요? 당신도 내공이 대단하다고 거만 떨지 말아요. 내
가 이 무공만 연성(鍊成)되면 아마 내 손가락 하나도 당해내지
못할 거예요."
주아는 말을 하면서 내공을 손가락에 응집시키고는, 곁에 있는
나무 한 그루를 찍어 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공력은 아직 미숙하
여 겨우 반 치 남짓밖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자 장무기가 또 물었다.
"당신의 어머니는 무엇 때문에 당신에게 이 무공을 수련하라고
했소? 그분은 연성했나요?"
갑자기 주아의 눈이 사납고 독살스럽게 번쩍이더니 원한에 사무
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천주만독수는 얼룩거미 이 십마리 이상 수련하면 체내에 쌓
인 독질이 얼굴 모습을 변하게 만들고, 천 마리를 수련한 경지에
이르면 더욱 흉악스럽게 변해요. 우리 엄마는 하필이면 일백 마
리까지 수련하던 도중에 아버지를 만나게 되자, 자기의 얼굴이
추악하게 되면 아빠가 싫어할까 봐 일생 동안 수련한 공력을 모
조리허물어 버렸어요. 결국은 닭 잡을 힘도 없는 평범한 여자가
되고 말았어요. 엄마는 비록 아름다움을 되찾았지만, 둘째 엄마
와 나의 두 오빠들에게 모진 학대와 멸시를 당했어요. 그러나 이
미 공력을 잃은 상태라서 당하기만 하다가 끝내 목숨마저 잃은
거예요. 흥! 얼굴만 예쁘면 무슨 소용이 있어요? 우리 엄마는 아
주 곱고 아름다운 미녀였지만, 나이가 많고 아들이 없어서 아버
지는 다시 첩을 얻게 되었고....."
장무기는 그녀의 얼굴을 다시 훑어보더니 낮은 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보니, 당신도 그 무공을 익히느라고....."
"그래요, 나는 무공을 연마하기 위해서 얼굴이 이 모양이 된 거
예요. 흥! 그 매정한 사람이 날 쳐다보지도 않는다면 내가 천주
만독수를 연성한 후에 그를 찾아 갈 거예요. 만약에 그 남자 곁
에 딴 여자가 있다면....."
"당신은 그 남자하고 혼인한 사이도 아니고, 백년해로하기로 약
속도 하지 않았을 텐데, 그런데도....."
"솔직하게 말하세요. 당신 생각은 나 혼자 짝사랑하는 게 아니
냐 이거죠? 짝사랑하면 어때요?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데, 그 사람이 날 박정하게 대한다면, 내 이 <천주만독수>의 맛
을 보여 주고 말 거예요."
장무기는 그저 미소만 지을 뿐 더 이상 그녀하고 변설(辨說)하
지 않았다.
주아의 성격은 매우 괴팍했다. 좋기 시작하면 한없이 좋다가도,
흉포하기 시작하면 막무가네였다. 장무기는 문득 태사부와 태사
백, 둘째 사백들이 늘 말하던 것이 생각났다. 그것은 무림에 있
는 정(正)과 사(邪)의 분별이었다. 그 말씀대로 보자면, 그녀가
수련하는 <천주만독수>는 극히 악독한 사파(邪派)의 무공이다.
그녀의 어머니도 역시 요사(妖邪)의 제일일 것이다. 생각이 여기
까지 미치자 은근히 그녀에 대해 경계심과 두려움이 우러났다.
주아는 그의 생각을 눈치채지 못하고 방 안을 들락날락하면서
온통 들꽃으로 장식했다. 장무기는 그녀가 하는 짓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문득 애처로운 생각이 들었다.
"주아, 내 다리가 다 나으면 좋은 약초를 캐어다가 당신 얼굴의
독종(毒腫)을 치료해 주겠소."
주아는 그 말을 듣더니 대뜸 안색이 변하면서 두려운 빛을 띠었
다.
"안 돼요. 절대로 안 돼요! 내가 얼마나 고통을 겪고 겨우 오늘
의 수준에 이르렀는데, 당신은 나의 천주만독공을 흐트려 놓으려
하는 거예요?"
"우리 둘이서 연구하면 공력도 흐트려 지지 않고 당신 얼굴의
독종만 치료할 수 있을 것이오."
"그건 불가능해요. 그런 방법이 있었다면 우리 엄마가 왜 몰랐
겠어요. 천하의 접곡의선 호청우 한 사람만이 그런 놀라운 재주
를 갖고 있을 거예요. 그렇지만 그는..... 그는 벌써 여러 해 전
에 죽었어요."
"당신도 호청우를 알고 있소?"
"뭐라고요?! 무엇이 이상하다는 거죠? 접곡의선의 이름은 강호
에 널리 퍼져 있어서 어느 누구나 다 알고 있어요."
주아는 장무기에게 눈을 한 번 흘기고 나서 다시 한숨을 내쉬었
다.
"설사 아직 살아 있다 해도 그 사람은 죽는 것을 보아도 구하지
않는다고 하니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그러자 장무기는 속으로 생각했다.
'주아는 접곡의선이 그의 의술을 모두 내게 전수해 준 것을 모
르고 있다. 훗날 내가 치료법을 알아내서 그녀 얼굴의 독종을 치
료해 준 후에 그녀를 한 번 놀라게 해줄 것이다.'
어느덧 밤이 되었다. 두 사람은 석벽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한
밤중이 되자 장무기는 꿈결에 갑자기 훌쩍거리는 소리를 듣고 잠
에서 깨어났다. 정신을 가다듬고 보니 주아가 울고 있었다. 그는
그녀 옆으로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토닥거려 주면서 달랬다.
"주아, 상심할 것 없소."
그 위로의 말에 감동되었는지, 주아는 그의 어깨에 엎드려서 목
을 놓아 통곡했다.
"주아, 무슨 일이오? 어머니 생각이 나서 그러오?"
"엄마는 죽었어요! 내가 외톨이가 되니깐 아무도 날 반겨 주지
않고 어느 누구도 나와 같이 어울려 주지 않아요!"
장무기는 옷자락을 끌어올려서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면서 다정
하게 말했다.
"난 당신을 좋아해요. 난 당신을 잘 대해 줄 수 있소."
"당신은 필요없어요. 내 마음 속에는 오직 한 사람만 있을 뿐이
예요. 그 사람은 날 거들떠보지도 않고, 때리고 욕설을 하고, 게
다가 물기까지 했어요."
"그런 무정한 남자는 잊어 버려요. 내가 당신을 아내로 맞아 평
생 동안 잘 대해 주겠소."
장무기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주아는 큰 소리로 외쳤다.
"안 돼요, 안 돼! 난 그 사람을 잊을 수 없어요. 또다시 내게
그 사람을 잊어 버리라고 하면 난 영원히 당신을 거들떠보지도
않겠어요!"
장무기는 수치심으로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다행히 어둠 속
이라서 주아가 그의 시뻘건 얼굴과 난감한 모습을 보지 못했다.
한참 동안 두 사람은 말을 하지 않았다.
"아우 오빠! 나 때문에 화가 났지요?"
"아니오, 나 혼자 화가 났을 뿐이오. 당신에게 하지 말아야 하
는 말을 한 것 같소."
"아니예요! 아내로 맞이하겠다는 그 말이 얼마나 듣기 좋은지
몰라요. 한 번만 더 해주겠어요?"
"당신이 그 남자를 잊지 못하고 있는데 내 어찌 다시 말하겠
소!"
장무기는 화를 내며 말했다. 그러자 주아는 손을 내밀어서 그의
손을 꼭 잡고는 부드럽게 달랬다.
"아우 오빠, 화내지 말아요. 내가 잘못했어요. 당신이 정말로
날 아내로 맞아들인다면, 난 당신 눈을 찔러 장님으로 만들어 죽
이고 말 거예요."
"당신 뭐라 했소?"
"당신이 장님이 되어야 내 흉칙한 모양을 볼 수 없고, 또 아미
파의 주 낭자를 찾아갈 수 없지 않겠어요? 만약에 그래도 그녀를
잊지 못한다면 난 당신을 죽이고, 또 아미파의 주 낭자도 죽인
다음에 자결하겠어요."
그녀는 이처럼 괴상한 말을 하면서도 음성은 뜻밖에 자연스러웠
다.
장무기는 그녀의 악독한 말을 듣자 심장이 덜컥 멎어 버리는 듯
했다. 바로 이때, 갑자기 멀리서 늙은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
다.
"아미파의 주 낭자가 너희들을 어떻게 했다는 거냐?"
주아는 펄쩍 뛸 듯이 놀라며 소리를 낮추어서 말했다.
"멸절사태예요."
"틀림없다! 바로 멸절사태다!"
그녀는 소근거리며 말했는데도 밖에 있는 그 사람은 분명하게
들은 모양이었다. 첫 번째 음성은 먼 거리에서 들렸지만 두 번째
소리는 이미 오두막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주아는 일이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아차리자 이미 장무기를 안고 달아나지는 늦었다고
생각하고, 그저 숨을 죽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오너라! 평생 그 속에서 숨어 있을 작정이냐?"
바깥에서 냉랭한 외침이 들리자, 주아는 장무기의 손을 잡고 밖
으로 걸어나갔다. 이때 오두막집에서 이 장 거리 밖에는 백발이
성성한 늙은 비구니가 서 있었다. 바로 아미파의 장문인 멸절사
태였다. 그녀 뒤에는 수십 명이 세 줄로 나뉘어 이쪽으로 달려오
고 있었다. 그 안에는 태반이 비구니고 나머지는 남자와 여자였
다.
정민군과 주지약도 그 안에 있었다. 남자들은 제일 뒤쪽에서 있
었다. 멸절사태는 남제자들을 좋아하지 않아서 아미파의 상승무
공(上乘無功)은 전수받을 수 없었고, 지위도 여제자보다 낮았다.
멸절사태는 싸늘하게 주아를 아래 위로 살피더니 한동안 말을 하
지 않았다.
장무기도 가슴을 조이며 주아의 등 뒤에 숨어 있었다. 그는 마
음속으로 단단히 결심하고 있었다. 만약 그가 주아를 조금이라도
공격하려는 기미가 있으면, 자기는 분명 상대의 적수가 되지 못
한다 하더라도 전력을 다해 상대와 맞싸울 것이라고.
멸절사태는 흥하고 콧소리를 내면서 뒤돌아 정민군에게 물었다.
"바로 이 계집아이냐?"
"네!"
정민군은 공손히 대답했다.
순간 갑자기 우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주아는 탁 하는 소리를
내면서 몸이 이미 삼장 밖으로 날아가 떨어졌다. 두 손목의 뼈가
모두 부러져 눈밭에 쓰러져 기절해 버린 것이다. 장무기는 회색
그림자가 번뜩인 것만 봤을 뿐인데, 멸절사태는 이미 주아의 앞
에 와서 손목을 부러뜨리고 팽개친 것이었다.
그는 실로 번개와 같이 공격하고 제자리에 돌아간 것이다. 우뚝
서 있는 자세는 한 그루의 큰 고목과도 같았다.
장무기는 그의 출수를 하나하나 모두 자세히 보았지만, 실로 불
가사의하게 동작이 빨랐다. 그는 그 무서운 수법에 놀라 자기가
하려고 한 행동에 대해 용기를 잃고 말았다.
멸절사태는 가슴을 싸늘하게 하는 눈초리로 장무기를 노려 보고
있었다.
"이리 나오지 못하겠느냐?"
주지약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사부님, 이 사람은 두 다리가 부러져 걷지를 못합니다."
"그렇다면, 썰매를 두 개 만들어 모두 끌고 가자!"
제자들은 일제히 대답했다. 십여 명의 남자 제자들이 부산을 떨
고 나더니 썰매 두 개를 만들어 냈다. 두 여제자가 주아를 끌어
안고 두 남자 제자는 장무기를 부축하여 각기 썰매에 눕혔다. 그
들은 썰매를 끌고 멸절사태의 뒤를 따랐다.
장무기는 정신을 차리고 주아의 동정을 살폈다. 그녀의 상처가
어느 정도인지알 수가 없었다. 몇 리 길을 달려오자 그제서야
주아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장무기는 큰 소리로 물었다.
"주아, 상처가 어느 정도요? 내상은 입지 않았소?"
"두 손목뼈가 부러졌어요. 가슴과 배는 다치지 않은 것 같아
요."
"내장을 안 다쳤다니 다행이요. 왼손 팔꿈치로 오른쪽 어깨 밑
에 삼촌오분(三寸五分) 밑을 쳐요. 그리고 나서 다시 오른손 팔
꿈치로 왼쪽 어깨 밑의 삼촌오분 되는 부위를 치시요. 그럼 고통
이 좀 덜할 겁니다."
주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멸절사태가 그들의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려 장무기를 노려보았기 때문이다.
"이 녀석은 그래도 의술에 대해 꽤 정통한데 네 이름이 뭐냐?"
"소인의 성은 증(曾)가고 이름은 아우(兒牛)입니다."
"사부가 누구냐?"
"제 사부님은 어느 작은 촌마을에 이름없는 의사입니다. 말씀드
려도 모를 겁니다."
멸절사태도 흥! 하고 콧방귀를 날리고는 더 이상 그를 거들떠보
지도 않았다.
그들은 날이 밝아서야 걸음을 멈추고는 쉬면서 간단히 요기를
채웠다.
주지약은 차디찬 빵 몇개를 갖고 주아와 장무기에게도 나누어
주었다. 그녀는 빵을 장무기에게 건네주면서 그에게 눈짓을 보내
고 고개를 돌렸다. 장무기는 고마운 마음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한수주중(漢水舟中)에서 저에게 밥을 먹여 준 은덕, 정말 잊지
못할 겁니다."
그 말에 주지약은 깜짝 놀랐다. 다시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
았다. 한참을 쳐다본 그녀는 갑자기 아! 하고 소리치더니, 놀라
고도 반가운 기색을 하며 말했다.
"당신은.....! 당신은.....!"
장무기는 그녀가 드디어 자기를 알아 보았구나 하고 생각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주지약이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몸 속의 한독은이제 다 나았습니까?"
장무기도 역시 낮은 소리로 말했다.
"이미 다 고쳤습니다."
주지약의 얼굴에 홍조가 떠오르며 일행 쪽으로 걸어갔다.
"지금 저 여자와 무슨 말을 했죠?"
주아가 갑자기 물어 왔다. 주아는 장무기의 뒤편에 누워 있으면
서 주지약의 표정을 모두 보고 있었던 것이다.
장무기는 얼굴이 빨개지며 말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소."
주아는 노기띤 음성으로 말했다.
"앞에 두고 거짓말을 하다니!"
그들은 세 시간 남짓 쉬고 나서 다시 길을 재촉했다. 그들은 서
쪽을 향해 급하게 삼 일을 또 달려갔다. 필시 무슨 급한 일이 있
는 것이 분명했다.
그들은 쉴 때나 걸을 때나 필요없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
다. 모두 벙어리처럼 묵묵히 길만 재촉하였다.
장무기도 이때 다리가 다 나아 언제든지 자기가 걷고 싶으면 걸
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내색을 하지 않았다. 어느
땐 일부러 신음소리까지 냈다. 멸절사태나 그 제자들이 자기에
대한 경계심을 풀게 하려고 한 것이다. 기회만 오며 주아를 데리
고 도망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들이 달리고 있는 곳은 망
망한 평야라 도망쳐 봤자 멀리가지 못하고 즉시 그들에게 붙잡힐
것이 뻔했기 때문에 섣불리 행동을 취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
다.
장무기가 주아의 손목뼈를 접골해 주자, 멸절사태는 차가운 눈
으로 그를 노려 보았으나 다른 간섭을 하지 않았다.
낮에 쉬거나 밤에 잠을 잘 때나 장무기는 항상 주지약을 쳐다보
곤 했다. 그러나 그녀는 한 번도 자기의 근처에 오지를 않았다.
다시 이틀이 지났다. 이날 그들은 오후가 되자 큰 사막에까지
이르렀다. 눈은 이미 다 녹아 그들의 썰매는 모래 위를 달리고
있었다. 한참을 달리자 갑자기 서쪽에서 말굽소리가 들려왔다.
멸절사태가 손짓을 하자 제자들은 즉시 엎드려 몸을 숨겼다.
두 사람이 검으로 장무기와 주아의 등을 노리고 있었다. 그것은
아미파에서 적을 습격하려고 할 때, 장무기가 소리쳐 적에게 알
리기라도 하면 즉시 목숨을 앗아 버리려는 것이 분명하다.
말발굽소리는 급하게 들려왔으나 한참을 지나서야 가까이 접근
해 왔다. 말에 탄 사람이 갑자기 모래 위의 발자국을 보자 말을
세우고 자세히 살펴 보았다.
이때 기다렸던 아미파는 정현이 신호를 하자 수십 명의 제자들
이 뛰쳐나와 그들을 포위했다. 네 필의 말안장에 앉은 자들은 모
두 백포를 입고 있었고, 그들의 가슴엔 붉은 불꽃이 새겨져 있었
다.
"마교의 무리구나! 한 놈도 놓치지 마라!"
정현이 소리를 쳤다.
네 사람은 갑작스레 포위를 당하자 병기를 뽑아들고 함성을 지
르면서 동북쪽으로 뚫고 나가려 했다. 아미파는 그들보다 훨씬
많았지만 이다제승(而多制勝)의 비겁한 짓은 하지 않았다. 정현
의 손짓에 네 명의 남녀 제자가 그들을 막고 나섰다.
그 네 명의 마교인은 칼등이 굽어진 관도(寬刀)를 휘두르며 사
납게 포위망을 뚫고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장문인을 따라 멀리
서역까지 온 제자들은 모두 멸절사태가 고르고 고른 정예들이 아
닌가! 단 삼 회합(三會合)도 지나지 않아 세 명의 마교인은 칼에
찔려 모래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머지 한 명은 정말 놀라울 정도로 대단한 도법을 구사하고 있
었다. 그는 자기와 상대하는 아미파 남제자의 어깨를 찔러 쓰러
뜨리고, 구멍이 뚫리자 쏜살같이 달아나는 것이었다. 그는 이미
십여장을 달아났으나, 아미파에서 서열로 세째가는 정허사태의
보법은 정말 날렵했다. 그는 어느새 그 자의 뒤까지 쫓아가 불진
을 뻗어 그 자의 왼쪽다리를 잡으며 외쳤다.
"내려오지 못하겠느냐!"
그 자가 고개를 돌려 방어 자세를 취하자, 갑자기 불진의 방향
이 바뀌면서 싹! 하는 소리와 동시에 그 자의 뒤통수를 후려쳤
다.
그는 일 초에 급소를 맞은 것이다. 불진수엔 웅후한 내력이 들
어 있었다. 그는 즉시 말에서 떨어졌다. 그러나 그 자는 무척 억
셌다. 중상을 입고도 적과 같이 죽을 각오를 하고 두 팔을 벌려
잽싸게 정허를 덮쳤다. 정허는 가볍게 몸을 피하며 불진으로 다
시 그 자의 가슴을 명중시켰다.
바로 이때, 그 자의 말안장 앞에 걸려 있던 세장에서 세 마리의
흰 비둘기가 날개를 펼치며 날았다.
"무슨 수작이냐?"
하고 정현이 소리치며 옷소매를 털자 세 개의 철연자(철蓮子)가
각기 세 마리의 비둘기를 향해 날아가자 두 마리의 비둘기가 즉
시 떨어졌다. 그러나 한 개는 백포교인이 던진 암기를 맞아 방향
을 잃었다. 나머지 흰 비둘기 한 마리는 구름을 향해 날아가는
것이었다. 아미 제자들은 서로 다투어 암기를 발사했으나 맞추지
못하고 흰 비둘기는 동북쪽 하늘로 날아가고 말았다. 정현이 손
짓을 하자 남자 제자들이 네 명의 백포객(白袍客)을 그녀의 앞에
끌어와 세웠다.
멸절사태는 그저 당당한 자세로 시종 구경만 하고 있었다.
장무기는 내심 생각했다.
'멸절사태가 직접 주아에게 공격을 한 것을 보면, 주아를 무척
높이 본 것이다. 아마 정민군의 팔이 부러진 탓도 있겠지. 그러
나 이 늙은 여승이 저 흰 비둘기를 맞추는 것은 조금도 힘들지
않을 텐데. 어째서 꼼짝도 하지 않고 제자들이 처리하는 것을 보
고만 있을까? 마교의 네 명을 상대하는 것에 멸절사태 자신이 다
시 나서는 것은 체면이 허락하지 않은 모양이지?'
여제자 한 명이 땅에 떨어진 비둘기 두 마리를 부위 비둘기다
리에 매달린 죽통(竹筒)에서 도르르 말린 쪽지를 꺼내어 정현에
게 바쳤다.
정현이 종이를 풀어 보며 말했다.
"사부님, 마교에서 이미 우리가 광명정을 위공한다는 것을 알고
천응교에 연락을 하는 쪽지입니다."
그녀는 또 하나의 쪽지를 보며 다시 말했다.
"똑같은 겁니다. 그런데 안타깝게 한 마리를 놓쳤군요."
멸절사태가 냉랭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니다. 군마들이 모두 모였으니 일격에 섬멸하는 것이 더욱
통쾌할 거야. 우리가 귀찮게 사방으로 찾아다닐 필요가 없을 테
니."
"네, 그렇습니다."
장무기는 천응교에 연락을 하는 것이라는 말에 내심 놀랐다.
'천응교주는 바로 내 외할아버지인데, 그분도 오실지 모르겠군.
흥, 이 늙은 여승아. 그렇게 자신만만해 하지만 내 외할아버지의
적수가 되지는 못할 걸!'
그는 기회를 노려 주아를 데리고 도망칠 생각이었지만, 좋은 구
경거리가 있을 것 같아 달아날 생각을 고쳐 먹었다.
정현이 네 명의 백포인을 항해 외쳤다.
"또 어떤 사람들을 불러들였느냐? 어떻게 육대파가 공격한다는
소식을 알았지?"
백포인들은 앙천참소(仰天慘笑)를 하더니 갑자기 일시에 땅에
쓰러지며꼼짝도 하지 않았다. 모두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
다. 두 남제자가 살펴보니, 그들의 얼굴엔 괴이한 웃음이 지어져
있고 숨은 이미 끊어져 있었다.
"앗! 네 명 모두 죽었습니다!"
정현이 노기 띤 음성을 말했다.
"이 요인들이 독을 삼키고 자진했구나. 무슨 독약인데 이렇게
빨리 발작을 했지?"
정허가 입을 열었다.
"몸 수색을 해봐라!"
"옛!"
네 명의 제자가 각기 시체의 주머니를 뒤졌다.
주지약이 갑자기 외쳤다.
"여러 사형들, 조심 하세요! 어쩌면 주머니에 독이 숨겨져 있을
지도 몰라요!"
네 명은깜짝 놀라 병기를 꺼내 시체의 옷주머니를 찢었다. 과
연 주머니가 꿈틀거리더니 시체마다 주머니에 작은 독사 두 마리
씩이 숨겨져 있었다. 주머니를 뒤졌다간 즉시 독사에 물렸을 것
이다. 그들은 깜짝 놀라 마교 교도들의 악독함에 치를 떨었다.
멸절사태가 냉랭하게 말했다.
"우린 중토에서 서쪽으로 떠난 날부터 오늘 처음 마교도들과 부
딪쳤는데, 이 네 명은 무명 소졸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이렇게
악랄한데 그들의 주인들은 어떠 하겠느냐? 정허야, 네 나이도 이
젠 젊지 않은데, 일처리를 하는 게 어찌 그 모양이냐? 지약보다
도 섬세하지 못하고!"
정현은 얼굴이 빨개지며 허리 굽혀 그의 꾸지람을 들었다.
장무기도 정현의 육대문파라는 말을 되새기면서 무당파도 안에
끼었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이경이 되자 갑자기 땡그랑땡그랑 하는 낙타소리가 들려오더니,
낙타 한 마리가 멀리서 달려오고 있었다. 잠이 들어 있었으나 그
소리에 모두 깨어났다. 그런데, 땡그랑소리는 서남쪽에서 들려왔
는데, 갑자기 남쪽에서 북쪽으로 다시 동북쪽에서 들려와 귀신에
홀린 듯했다. 아무리 빠른 낙타라 할지라도 갑자기 동쪽, 서쪽
북쪽,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절대로 사
방에 낙타가 있어 차례로 방울을 울리는 소리처럼 들리지는 않았
다. 방울소리가 점점 멀어지면서 점점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러
자 갑자기 동쪽에서 방울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꼭 그 낙타가 새
와 같이 날아간 듯했다. 아미파 사람들은 한 번도 사막에 온 적
이 없어 괴이한 방울소리에 모두 겁에 질려 있었다.
멸절사태가 큰 소리로 말했다.
"어느 곳의 고인(高人)이신지 몸을 나타내지 않고 이렇게 귀신
같은 행동을 하다니, 체통이 서지 않는군요!"
그의 말소리는 멀리까지 퍼져 나갔다. 그러자 낙타의 방울소리
는 다시 울리지 않았다. 멸절사태가 두려워 감히 그런것을 더 이
상 할 용기가 없는 듯했다. 이튿 날까지도 아무 일이 생기지 않
았다. 그런데 밤이 되자 방울소리는 다시 울렸다. 여전히 동쪽이
나 서쪽 멀리인 듯 했지만, 멸절사태가 다시 질책을 해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가볍고도 힘차게 울렸다. 어느 땐 낙타가 갑자
기 성을 내고 달려 온 듯하다가는 갑자기 또 조용히 사라지고,
또 얼마나 시끄럽게 하는지 모두 머리가 띵할 정도였다.
장무기는 주아와 서로 마주 보며 웃음을 나누었다. 낙타의 방울
소리가 어떻게 이렇게 울리는지 알 수는 없었으나 마교의 고수인
것만은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아미파에서 속수무책 정신
을 못 차리게 되다니 웃음이 나왔다.
멸절사태가 손을 휘두르자 제자들은 모두 잠을 청하고, 더 이상
종소리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종소리는 별짓을 다하며 울리더
니, 아미파 제자들이 거들떠 보지도 않자 그들도 이내 조용해지
고 말았다. 멸절사태의 처변불경(處變不驚)의 방법이 효력을 본
것 같았다.
다음날 아침, 모두 옷과 담요를 정리하고 나서 길을 떠나려고
하자, 갑자기 두 남제자가 약속이나 한듯이 놀라 소리를 치는 것
이었다. 바로 옆에 한 사람이 누워 드르릉거리며 코를 골고 잠을
자고 있는 것이 아닌가! 머리에서 발끝까지 지저분한 담요 한 장
을 감싸고 있었다. 몸은 조금도 보이지 않고 엉덩이를 높이 쳐들
고 코를 요란스럽게 골고 있는 것이었다.
아미파의 다른 제자들도 모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젯밤
차례로 보초를 서 왔는데, 언제 사람이 들어왔단 말인가! 멸절사
태의 신공은 또 어떠한가! 풀잎 움직이는 소리마저도 그의 귀를
빠져나갈 수 없지 않은가! 그런데 갑자기 한 사람이 늘어난 것을
이제서야 알다니, 모두들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두 제자가 검을
들고 그 자의 옆으로 가 외쳤다.
"넌 누구냐! 무슨 잔재주를 부리는 거냐?"
그 자는 여전히 코를 골며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 중 한 명이
검으로 담요를 재쳐 보자, 안에는 청색 줄무늬에 백색장포를 입
은 남자가 모래에 엎드려 잠을 자고 있는 것이었다.
정허는 이 자가 감히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것은 분명 상당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
"당신은 뉘시요? 무슨 일로 여기에 오셨소?"
그 자는 벼락을 치는 듯이 코를 더 심하게 골면서 여전히 잠을
자고 있었다.
정허는 이 자의 무례함에 울화가 치밀어 불진을 휘둘러 높이 치
켜들고는, 그 자의 엉덩이를 향해 내리쳤다. 그러자 갑자기 획!
하는 소리와 동시에 어느새 정허의 불진이 꼿꼿이 하늘로 향해
날으는 것이었다. 십여 장 높이로 날았다. 모두들 자기도 모르게
하늘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다.
멸절사태가 큰 소리로 외쳤다.
"정허야, 조심해라!"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 자는 이미 수장 밖을 달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두 팔엔 정허가 안겨 있는 것이었다. 정현
과 또 한 명의 장여제자(長女弟子) 소몽청(笑夢淸)이 병기를 들
고 진기를 모아 뒤를 쫓았다. 그러나 그 남자의 신법이 얼마나
빠른지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러자 멸절사태가 휘파람소
리를 내며 의천보검을 들고 뒤를 쫓았다.
아미파 제자들은 정허가 그 자에게 잡힌 것을 보고 죽은 듯이
움직이지도 못하고 서 있었다. 아미 장문의 신수(身手)는 과연
보통 사람과는 달랐다. 그는 순식간에 정현과 소몽청을 제치고
청광이 번뜩이는 검을 뽑아 그 자의 등을 찔렀다. 그러나 그 자
의 빠른 신법에 그를 찌르지 못했다. 그 남자는 정허를 안고 있
었으나 그의 속도는 조금도 멸절사태에게 뒤떨어지지 않았다. 그
는 자기의 무공을 자랑하려고 하는지 멀리 도망가지 않고 여럿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멸절사태도 계속 그 자를 찔렀으나, 한
번도 그를 명중시키지는 못했다. 이때 팍! 소리와 동시에 정허의
불진이 땅에 떨어졌다. 뒤쫓아간 정현과 소몽청은 발걸음을 멈추
고 숨을 몰아쉬며 수십 장 거리나 되는 곳에서 두 고수의 추격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사막이었으나 두 사람이 달려도 조금도 먼지가 날리지 않았다.
아미파 제자들은 정허가 그 자에게 잡힌 것에 놀라 꼼짝하지도
않고 있었지만, 그 자를 앞에서 막고 싶었으나 사부의 위명(威
名)을 생각해서 누구도 감히 돕지는 못했다. 여럿이 한 명을 상
대했다는 소문이 퍼지면, 그것은 큰 웃음거리가 아닌가! 그들은
마음을 졸이며 누구도 감히 나서지 못했다. 그저 사부님이 한 발
만 더 빨리 가서 그 자의 등을 찌르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잠깐 사이에 그들은 벌써 세 바퀴나 돌았다. 그러나 멸절사태가
한 발만 더 앞서면 그 자를 찌를 수 있는데, 시종 그 한 발짝이
차이가 났다. 그 자가 물론 먼저 뛰었다. 하지만 그 자는 한 사
람을 안고 있어 무개가 백여 근이나 도 무겁지 않은가! 두 사람
의 경공이 막상막하라 할지라도 누가 뭐라고 해도 멸절사태는 그
자에게 이미 한 수 지고 있었다. 네 바퀴 째 돌려고 했을 때, 그
자는 갑자기 몸을 돌려 정허를 멸절사태를 향해 내팽개쳤다. 멸
절사태는 광풍이 자기 앞으로 몰아치는 느낌이 들었다. 그 자의
힘은 정말 당당했다. 멸절사태는 어쩔 수 없이 두 다리에 힘을
주고 멈춰서 가볍게 정허를 받았다.
"하하하! 육대문파에서 광명정을 위공한다지만, 아마 그렇게 쉽
지 않을걸!"
그러면서 북쪽으로 쏜살같이 달려가는 것이었다. 처음에 멸절사
태와 대결을 벌일 땐 먼지가 날리지 않았지만, 지금은 황사가 사
방으로 휘날리며 바람을 타고 북쪽으로 날렸다. 그 위맹한 성세
는 꼭 수십 장 길이나 되는 큰 황용과도 같아, 즉시 그의 그림자
를 막아 버리는 것이었다.
이미 제자들이 사부 옆으로 달려가 보니, 멸절사태의 얼굴은 잿
빛이 되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허의 얼굴은 누런 초와 같았고, 그의 목에는 두 개의 이빨자
국이 나 있었으며, 피로 물든 채 숨이 끊겨 있었다. 바로 그 자
에게 물려 죽은 것이었다. 여제자들은 모두 울음을 터뜨리고 말
았다.
멸절사태가 크게 외쳤다.
"뭘 우느냐! 매장하지 않고!"
모두는 울음을 그치고 바로 그 자리에 구덩이를 파자 정현이 조
심스럽게 물었다.
"사부님, 이 요인은 도대체 누굽니까? 꼭 기억했다가 원수를 갚
게 해주십시오!"
멸절사태는 냉랭한 음성으로 말한다.
"사람의 피를 빨아 먹는 잔인한 행동으로 봐 마교 사왕(四王)
중 나인 청익복왕(靑翌福王)이 틀림없어. 그의 경공이 천하무쌍
이라는 소문은 익히 들어왔지만,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이군.
나보다도 훨씬 뛰어나."
장무기는 멸절사태에게 통한스러운 마음을 품고 있었지만, 지금
그녀가 큰 변을 당하고 나서도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고 여전히
침착하게 적을 칭찬하자, 역시 일파의 장문다운 풍범이라고 생각
하며 내심 그에게 탄복했다.
정민군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그 자가 사부님과 맞상대하지 못하고 그저 도망만 쳤는데, 어
찌 영웅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짝! 갑자기 멸절사태는 정민군의 뺨을 때리며 노기띤 음성으로
말했다.
"이 사부가 그를 따라잡지 못하고 정허를 구해 내지 못한 것이
바로 그 자에게 진 것이다! 승부란 척 보면 아는 것이야. 그래,
영웅이란 칭호는 자기가 자기에게 부르는 것인 줄 아느냐?"
정민군은 한쪽 얼굴이 금방 붉게 부어오르며 허리 굽혀 대답했
다.
"제자가 잘못했습니다. 사부님의 교훈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내심 투덜거렸다.
'상대를 제압하지 못하고 공연히 나한테 분풀이를 하다니! 재수
가 없군.'
"사부님, 청익복왕이라는 자는 도대체 누굽니까?"
멸절사태는 손을 저으며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혼자 앞으로
걸어갔다. 제자들은 대사저가 무안을 당한 것을 보고 감히 누구
도 더 이상 묻지를 못했다. 일행은 아무 말도 없이 밤이 될 때까
지 걸어와 불을 피우고 모래 언덕에서 잠을 청했다.
멸절사태는 불꽃을 바라보며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자
세도 꼭 석상(石像)과 같았다. 제자들은 사부님이 잠을 자지 않
자 누구도 잠에 들지 못했다. 그렇게 멍하니 한 시간 정도 앉아
있던 멸절사태는 갑자기 쌍장을 뻗었다. 순간 맹렬한 경풍이 덮
치며 활활 타오르던 불이 모두 꺼지고 말았다. 차가운 달빛이 머
리에 비치고 있었다.
장무기도 마음 속으로 연민의 정이 우러났다.
'위세가 당당한 아미파가 과연 서역에까지 와서 일패도지(一敗
塗地)를 당하고 모두 섬멸당할 것이란 말인가! 주 낭자는 내가
꼭 구해 내야해. 그렇지만 마교 인물들이 이렇게 무서운 인물들
인데, 내가 무슨 재주로 그녀를 구출하지?'
갑자기 멸절사태의 외침이 들려왔다.
"요화(妖火)를 끌고 이 마화(魔火)를 멸망시키리라!"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다시 제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마교에서는 불을 성(聖)으로 알고 불을 신을 섬기듯 모시고 있
지. 그런데 마교의 삼십 삼대(三十三代) 교주 양정천(陽頂天)이
죽은 후론 교주가 없는데, 좌우(左右) 광명사자(光明使者) 사대
호교법왕 오산인(五散人), 그리고 금, 목, 화, 수, 토 오기장기
사 모두 교주의 자를 탐내고 자기네들끼리 살상을 했다. 그 때부
터 마교는 쇠퇴해지기 시작한 거야. 그리고 육대문파가 흥하기
시작했지. 그건 바로 요사수(妖邪守)가 멸망할 때가 온 징조야.
그러나 마교 안에서 내분이 일지 않는한 그 요사한 무리들을 멸
망시키긴 사실 쉬운 일이 아니야."
장무기는 어려서부터 마교란 이름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기의 부모들은 마교와 무슨 연관이 있는지 그가 물어 볼 때마
다 부모님들은 좋아하지 않았었다. 의부님께 물어봐도 멍청히 입
다물고 있지 않으면 갑자기 화를 내곤 했다. 그래서 그는 마교가
도대체 뭔지 알지를 못했다. 태사부 장삼봉과 같이 살면서도 태
사부께서도 마교를 매우 미워하며 절대로 마교와 인연을 맺어서
는 안 된다고 누누이 훈계를 했었다. 그러나 나중에 장무기가 만
난 호청우, 왕난고, 상우춘, 서달, 주원장은 모두 호기있는 대장
부들이었고, 그들은 모두 마교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의를 지
키며 악해를 저지르지도 않았다. 다만 그들의 행동이 괴상한 것
이 다른 사람들과 약간 다른 것뿐이었다.
지금 멸절사태가 마교에 대해서 얘기를 하자 그는 신경을 곤두
세우고 듣고 있었다.
"마교의 역대 교주들은 모두 성화령을 대를 물려 신물(信物)로
삼았지. 그런데 삼십 일 대 교주의 수중에 들어오자 하늘이 노하
여서인지 성화령을 그만 잃어 버린 거야. 그러니 삼십 이대 , 삼
십 삼 대 교주들은 권력은 있지만 성화령이 없으니 교주 노릇을
하기가 얼마나 힘들었겠느냐? 양정천이 갑자기 죽은 것도 사실
독살당한 것인지 누구에게 암살을 당한 것인지 모르지만, 후계자
를 정하지 못한 거야. 그런데, 마교에는 교주 자리에 오를 자격
이 있는 쟁쟁한 실력자들이 많았지. 그들은 서로 암투를 벌여 그
만 내분이 터진 거야. 그 때까지도 교주를 추대하지 못한 거지.
우리가 오늘 만난자도 바로 교주 자리를 노리던 자이지. 바로 사
대호교법왕 중의 하나인 청익복왕 위일소(偉一笑)란 자야."
아미파 제자들은 누구도 청익복왕 위일소란 이름을 들어 보지
못했으나, 누구도 묻지를 않았다.
멸절사태는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이 사람은 절대로 중원에 발을 들여 놓지 않거니와 그의 행동
은 또 귀신과 같아, 그 자의 무공은 매우 고강하지만 중원에선
조금도 이름을 날리지 못한 거야. 그러나 백미응왕(白眉應王) 은
천정이나 금모사왕 사손은 너희들이 모를 리가 없을 거다."
장무기는 내심 뜨끔했으나 주아는 가볍게 놀라고 있었다.
"백미응왕, 자삼용왕, 금모사왕 청익복왕 등 네 사람이 바로 마
교 사왕이지. 청익복왕의 서열이 맨 나중이지만 그의 실력은 오
늘 너희들이 직접 봤으니 알 거야. 그러니 그 자삼, 백미, 금모
그 자들은 보지 못했어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금모사왕은 크
게 상심하고 그만 미치광이가 되어 이십여 년 전 갑자기 나타나
무고한 인명을 마구 살상하더니 끝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지금은 그것이 무림의 일대 수수께끼가 되어 버렸다. 은
천정은 교주에 오르지 못하자 그만 울화가 치밀어 따로 천응교를
창건하여 교주의 자리에 오른 거야. 그러나 내가 알기론 은천정
이 마교를 배반하고 광명정과 갈라섰지만, 광명정이 위험에 닥칠
때면 여전히 천응교에 도움을 청했지."
잠시 후 다시 멸절사태가 말했다.
"우리 육대문파에서 이번에 광명정을 공격하는 일은 꼭 성공을
거두어야 해. 요사들이 모두 합심을 한다 해도 절대로 두려울 것
이 없어. 그러나 쌍방이 부딪치면 많은 사상자가 생길 것이니,
모두 미리 죽을 각오를 하고 요행을 바라거나 겁을 먹지 말아라.
절대로 아미파의 위명을 시추시켜서는 안된다."
제자들이 모두 일어나 허리를 굽혀 대답했다.
"그리고 무공의 강약은 천부적인 자질과 기회로 인하여 얻어지
는 법! 절대로 억지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정허는 비록 조금
도 힘써 보지도 못하고 기습에 말려 흡혈귀에게 당했지만, 누구
도 그를 비웃진 않을 것이야. 우리가 평소 무공을 익혀온 것이
무엇 때문이냐? 바로 약자를 돕고 요사를 소멸시키려고 한것이
아니더냐? 오늘 제일 먼저 정허가 죽었지만 두 번째는 어쩌면 이
사부가 될지도 몰라. 소림, 무당, 아미, 곤륜, 공동, 화산 육대
파에서, 이번 마교를 소멸하는 일에 있어서 우리 아미파에선 길
흉화복(吉凶禍福) 그 따위는 잊어버린 지 벌써 오래다."
다시 멸절사태가 말했다.
"속담에 문 밖으로 천 개의 광이 나간 집안은 꼭 흥할 것이란
말이 있다. 그리고 아버지가 자식보다 먼저 죽는 법이요. 손자가
생기면 할아버지는 죽는 것이 이치가 아니냐? 자손들만 남아 있
으면 그 집에 천 명, 백 명이 죽는다 해도 여전히 흥할 수 있을
것이며, 제일 두려운 것은 너희들이 모두 죽고 늙은 중인 나 혼
자만 외롭게 살아 남는 것이야."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된다 해도 애석할 것은 없다. 백 년 전만 해도
이 세상에 아미파란 것이 있었느냐? 그러니 우리 모두 훌륭하게
전사하여 아미파가 전부 멸망한다 해도 무슨 애석함이 있겠느
냐?"
아미파 제자들은 모두 가슴에 뜨거운 피가 용솟음치는 듯 했다.
그들은 병기를 뽑아 들고 큰소리로 외쳤다.
"제자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요마사도와 싸울 것입니다."
멸절사태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훌륭하구나! 이제 그만 쉬어라."
장무기는 내심 느끼는 것이 있었다.
'아미파 제자들 대부분이 연약한 여자들인데도 목숨을 내 던지
고 영풍호기(英風豪氣)를 나타내며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으니,
아미파가 육대문파에 속할 수 있는 것은 우연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다. 무공으로 이길 수 있는 것뿐이 아니라, 지금 이들의 모
습을 보니 옛날 정가가 진나라를 치러 가던 기개와도 같구나!'
멸절사태는 다시 말했다.
"청익복왕이 왔다면 백미응왕과 금모사왕도 필시 올 것이고, 자
심용왕과 오산인, 그리고 오기장기사도 물론 올 것이다. 우리는
원래 육대파의 힘을 모아 먼저 광명정의 좌사 양소를 물리치고
나서 나머지 요사들을 소탕하려고 한 것인데, 화산파의 신기선생
(神璣先生) 선우(鮮于) 장문께서 이번 일을 잘못 예상하고 완전
히 판단 착오를 일으킬 줄이야!"
정현이 물었다.
"그 자심용왕은 또 어떤 악독한 마두입니까?"
멸절사태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자심용왕의 악적(惡跡)은 벌로 없어서 나도 그저 그의 이름을
소문에 들은 것뿐이야. 듣자 하니 그 사람은 교주가 되지 못하자
마교와 내왕을 끊고 해외로 떠났다는 것 같더군. 이번에 그가 참
전하지 못한다면 정말 천만다행이야.마교 사왕 중에서 그 자가
우두머리 격이지. 두말할 필요없이 상대하기 어렵다는 것이 뻔하
지 않느냐? 마교엔 광명사자 양소 외에 또 한 명이 있지. 역대
마교가 전해 오면서 필시 좌우 광명사자가 있을 것이야. 그들의
지위는 사대법왕보다 위에 있지. 그러나 무림에서 아무도 그 자
를 몰라. 소림 공지대사와 무당의 송원교, 송대협 같은분들도
대단한 박문광견(博聞廣見) 지사들이지만 그 두 분도 모르고 있
지. 우리가 양소와 전면으로 맞서 싸우는 것이야. 무공으로 승부
가 판가름날 것이니 벌것 아니지만, 그러나 만약 그 광명우사가
숨어서 암기를 쓴다면 정말 큰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지."
아미파 제자들은 모골이 송연해져 자기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곤
했다. 갑자기 광명우사나 자심용왕이 몰래 뒤에 와서 기습을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차가운 달빛에 비친 그들의 얼굴은 모두
창백해져 있었다.
멸절사태가 다시 말했다.
"양소가 너희 고홍자(孤鴻子) 사백을 죽였고, 다시 기효부를 죽
였고, 위일소는 정허를 죽였으니, 아미파와 마교의 이 원한은 어
느 한 쪽이 쓰러지지 않고서는 풀지를 못할 것이다. 본파는 곽조
사(郭祖師)께서 창파하신 이후로 장문직은 여자가 맡는 것은 관
례로 해왔었다. 남자에게만 그런 자격이 없을 뿐아니라 시집갔던
여자도 절대로 장문직을 맡을 자격이 없다. 그러나 오늘 분파에
이런 존망(存亡)의 위기가 닥쳐 왔는데, 어떻게 그런 관례만 지
켜 가겠느냐! 이번 싸움에서 누구든 큰 공을 세우는 자라면 그가
남자든 결혼한 여자든 모두 그럴 자격이 있을 것이다."
제자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사부께서 뒷일을 걱정하시고 문파
를 이어나갈 후계자까지 말씀하자, 이번 싸움에서 중원으로 살아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모두들 불길한 예감마저 가
졌다.
하! 하! 하!.....!
멸절사태의 긴 웃음 소리가 멀리 퍼져 나가자, 제자들은 모두
서로 마주 보고 놀라며 마음속으로 섬 쓺하는 느낌이 들었다.
멸절사태는 옷소매를 흔들며 외쳤다.
"이제 모두 자거라!"
정현은 평소와 같이 제자들을 골라 보초를 서게 했다.
멸절사태가 말했다.
"보초를 세울 필요없다!"
정현은 어리둥절했으나, 이내 뜻을 알아차렸다. 만약 청익복왕
같은 고수가 기습해 온다면, 제자들이 어떻게 발각하겠는가. 보
초를 세워 봤자 헛수고가 아닌가!
그날 밤 아미파의 방비는 겉으로는 허술한 것 같았으나 속으로
는 긴밀해, 뜻밖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 제 3 권 5 장 끝 -----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3 권
제 6 장 육대문파와 마교(魔敎)의 혈전(血戰)
이튿날도 행군은 계속되었다. 서쪽으로 백 리를 벗어나자 어느
덧 정오가 되었다. 엄동설한인데도 해가 중천에서 내리쬐자 후덥
지근한 느낌을 주었다. 이때 서북방에서 병기가 부딪치는 금속성
이 어렴풋이 들려왔다. 간간이 고함소리와 기합소리도 섞여 있었
다. 정현사태가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제자들은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속력을 내어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질주해 갔다.
얼마 후, 한창 어우려져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몇몇 사람
의 모습이 시야에 잡혔다. 흰 도포를 입은 도인 셋이 무기를 휘
두르며 한 중년 사나이를 협공하고 있었다. 세 도인의 소매자락
에 모두 붉은 불길이 수놓아져 있는 것으로 미루어 마교의 인물
임이 분명했다. 중년 사나이는 민첩한 신법을 바탕으로 하여 눈
부신 검광을 뿌리며 제법 여유있게 세 도인의 협공을 막아내고
있었다.
장무기는 다리의 상처가 이미 완쾌되었지만, 여전히 걷지를 못
하는 척하고 썰매에 앉아 있었다. 그것은 아미파에서 자기한테
신경쓰지 않는 틈을 노려 주아를 데리고 도망치려고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 앞에 아미파의 제자 한 명이 앞으로 가로막고 있어, 장무
기는 몸을 옆으로 비스듬히 돌려 한창 벌어지고 있는 혈투를 보
고 있었다. 중년 남자의 칼놀림은 점점 더 날카로워졌다. 중년
남자가 갑자기 잽싸게 몸을 돌리며 소리를 외치자 동시에 팍! 하
는 소리와 그의 검은 이미 마교인의 흉부를 관통시킨 것이다. 너
무나 순식간의 일이었다. 아미파 제자들은 모두 갈채를 보냈다.
장무기는 자신도 모르게 앗! 하고 경악의 소리가 튀어나왔다. 이
순수추주(順手推舟)의 초식은 무당검법의 절수가 아니던가! 이
중년 남자는 무당육협 은이정이었던 것이다.
아미파 제자들은 모두 멀리서 관전만 하면서 그 누구도 그들과
대적하려고 나서지를 않았다. 두 마교도는 동료 중 한 명이 이미
쓰러지고 거기다 상대에게는 후원자까지 오게 되자 내심 겁을 먹
고 휙! 하고 휘파람소리를 내더니 각기 남북 방향으로 갈라져 도
망치는 것이었다. 은이정은 날으는 듯 남쪽으로 달아나는 놈을
쫓았다. 그는 어느새 마교도의 뒤를 바짝 달라붙게 됐다. 그의
신법은 정말 번개와 같았다. 달아나던 마교도는 그가 바싹 달라
붙자, 몸을 돌려 미친듯이 칼을 휘둘렀다. 죽을 각오를 무릅쓰고
덤벼드는 듯 싶었다.
아미파 제자들은 은이정이 달아난 두 마교인을 모두 처치하진
못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반대 방향으로 달아난 마교인의 무
공도 무시 못하거니와 도망치는 그 자의 신법도 점점 빨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은이정이 앞의 적을 해치우고 나서 다시
그 자를 쫓아갈 수 있으리라고는 누구도 믿지 않았다. 아미파와
마교는 서로 앙숙지간이었지만 아미제자들은 정현사태가 명령을
내리기 전에 감히 누구도 달아나는 마교인을 쫓아가려고 하지 않
았다.
아미파의 여제자들은 모두 기효부와는 절친한 사이들이었다. 그
들은 모두 마교의 양소가 애당초 기효부에게 간악한 짓을 저지르
지 않았더라면, 이 무당육협은 이미 아미파의 사위가 되었을 것
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은이정을 돕고 싶은
마음을 품고 있었다. 사실 정현사태도 그를 도와 달아나는 놈을
잡고 싶었으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다. 무당육협하면
무림에서 누구나 다 존경하고 있는 분이 아닌가! 그가 무림에서
차지하고 있는 지위를 보아 그의 허락도 없이 돕는다는 것은 그
에게 무례를 저지르는 것일지도 몰랐다. 정현사태는 내심 저 마
교인을 달아나게 하더라도 무당육협에게 무례를 저지르는 일은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아무 명령도 하지 않았다.
바로 이때 갑자기 눈앞에 청광이 번뜩이더니, 달아나던 마교인
이 갑자기 몸을 비틀거리며 앞으로 몇 발짝 더 달아나지 못하고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그 자의 십여 장 앞에 은이정의
장검이 모래에 꽂히는 것이었다. 은이정은 자기앞의 마교인과 싸
우면서 어느새 반대쪽으로 달아나는 마교인을 향해 검을 날렸던
것이다. 그런데 그걸 보던 아미파 제자들이 다시 은이정을 쳐다
봤을 때는 나머지 마교인마저 쓰러져 있었다. 누구도 그가 무슨
수법으로 그 자를 해치웠는지 보지를 못했다. 아미파 제자들은
모두 박수를 치며 갈채를 보냈다. 멸절사태마저도 고개를 끄덕이
며 탄식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의 탄식은 아마 무당파엔 저렇게
훌륭한 제자가 있는데, 아미파엔 그럴 만한 자 하나 없다는 탄식
인 것 같았다. 또한 효부(曉芙) 그녀가 너무 박복하다고 느끼는
것일까? 저런 훌륭한 사람과 인연을 맺지 못하고 마교의 음도들
에게 당하다니, 애석함에 탄식하는지도 몰랐다. 멸절사태는 기효
부가 절대로 자신이 자살한 것이 아니라 양소에게 당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장무기는 입에서 육사숙이라는 외침이 튀어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고 있었다. 사백, 사숙 중에서도 육사숙은 자기 부친과 제일
친하게 지내지 않았던가! 육사숙과 떨어진 지 구 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그 동안 육사숙의 얼굴도 많이 창로해 보였다. 기효부
의 일로 많은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장무기는 육사숙을 불러 인
사를 드리려고 했으나 이내 거두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기
의 신분을 노출시켰다가 뒤에 무슨 후환이 생길지도 모를 일이었
다. 주지약만큼은 자기의 신분을 알고 있었으나, 아직 누구한테
도 말을 한 것 같진 않았다.
은이정은 멸절사태를 향해 허리를 굽혀 공손히 절을 하며 말을
했다.
"저희 대사형님께서 사제들, 그리고 제 삼 대 제자들까지 해서
모두 설흔 두 명을 인솔하시고 일선협(一線協)으로 떠나셨습니
다. 후배는 대사형님의 명령을 받고 귀파를 영접하러 여기까지
오게 된 겁니다."
멸절사태가 다시 말했다.
"고맙습니다. 무당파가 먼저 도착했군요. 그런데 그 요인들과
무슨 접전이라도 있지 않았습니까?"
"마교의 목, 화(木,火) 양기와 세 번이나 부딪쳐 그놈들 몇몇을
죽이긴 했으나, 저의 칠사제 막성곡이 그만 조금 다쳤습니다."
멸절사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무당오협들의 실력으로 마
교의 장기사를 죽이지 못하고 오히려 칠협 막성곡이 다쳤다면,
과연 그 싸움이 얼마나 치열하고 잔혹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
다.
"귀파에선 광명정에 있는 적의 확실한 세력을 알고 있습니까?"
"소문에 의하면 천응교와 모든 지파가 광명정으로 갔다고 합니
다. 그리고 자삼용왕, 청익복왕도 거기에 왔다는 소문은 들었습
니다."
멸절사태는 그 말에 크게 놀라는 듯했다.
"자삼용왕까지도?"
두 사람은 무슨 이야긴가를 나누면서 앞으로 걸어갔으나, 뒤에
따라가던 제자들은 누구도 감히 앞으로 가 들으려고 하지 못했
다.
한참 후, 은이정이 손을 들어 화산파와 연락을 취하기 위해 떠
나려고 인사를 하자 정현사태가 말을 건넸다.
"은육협님, 정신없이 뛰어다니시느라 배도 고프실 텐데, 우리와
음식을 좀 드시고 떠나시지요?"
"그러시다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아미파 제자들은 모두 행낭에서 먹을것을 꺼내고 모래 위에다
솥을 거는 등 부산을 떨었다. 아미파 제자들은 사실 식사나 모든
면에서 매우 검소했다. 그러나 기효부를 생각해서인지 은이정을
대접하는 것에 매우 친절했다.
아무 말 없이 구경만 하고 있던 주아가 갑자기 말했다.
"은육협님, 어느 한 사람의 소식을 좀 알려고 하는데, 물어 봐
도 괜찮겠습니까?"
은이정은 국그릇을 안은 채 고개를 돌려 대답했다.
"무엇을 알려고 하는지는 몰라도, 내가 아는 것이라면 알려드리
겠소."
무척 자상하고도 겸손한 태도였다.
"저는 사실 아미파 제자가 아니고 이들에게 붙들려 온 사람이예
요."
사실 은이정은 그녀를 아미파 제자로 알고 있었는데, 그 말을
듣자 당황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즉시 매우 솔직한 아가씨라
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마교에 속하는 아가씨입니까?"
"아닙니다. 그 반대쪽입니다."
은이정은 아미파를 존중하는 뜻에서 그녀에게 자세히 묻지 않고
정현사태에게 눈짓을 했다.
"은육협에게 무엇을 알려고 하는 거지?"
"저는 그저 은육협님의 사형이신 장취산 장오협께서도 일선협에
가셨는지 알려고 하는 겁니다."
그 물음에 은이정과 장무기 모두는 크게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
다.
은이정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가씨께선 무슨 이유로 우리 사형의 소식을 알려고 합니까?"
주아는 얼굴에 약간 홍조를 띠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저는 사실 그분의 자제분이신 장무기 공자님께서도 거기에 가
셨는지 알려고 하는 것입니다."
장무기는 정말 크게 놀랐다. 주아가 이미 자기의 신분을 알고
지금 그것을 폭로하려고 하는 줄만 알았다.
은이정은 다그쳤다.
"아가씨, 그게 무슨 말이오? 장취산 사형님께서는 이미 십여 년
전에 돌아가셨는데, 아가씨께선 그것도 모르고 있었소?"
그 말에 주아는 몸을 일으키며 탄식을 했다.
"그럼 그 자제분은 이미 고아가 된 지 오래 됐겠군요?"
"아가씨, 내 조카 장무기를 잘 아시오?"
"오 년 전 접곡의선(蝶谷醫仙) 호청우(胡靑牛)의 집에서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통 소식을 알 수가 없군요."
"나도 가사(家師)님의 분부를 받고 접곡에 수색을 간 적이 있는
데, 그 땐 이미 의선 호청우 부부가 살해된 뒤라 무기가 어떻게
됐는지 알 수가 없었지요. 아무리 수소문해도 알 수가 없었습니
다."
그러면서 그는 에잇! 하고 탄식을 하며 말했다.
"그렇게 될 줄이야!"
그 말에 주아는 궁금해 급하게 물었다.
"왜 그러세요? 무슨 나쁜 소식이라도 있나요?"
"낭자께선 어째서 내 조카에게 그렇게 관심이 많습니까? 무기와
는 은인 관계요, 아니면 원수지간이요?"
주아는 한참 동안 먼곳만 바라보더니,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저는 사실 그와 영사도(靈蛇島)로 가려고 했어요."
은이정이 그녀의 말을 가로막고 다시 물었다.
"영사도? 그렇다면 금화파파(金花婆婆)와 은엽선생(銀葉先生)은
아가씨와 무슨 사이요?"
주아는 그 말에 대답은 하지 않고 자기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
다.
"같이 가는 것은 고사하고 나를 때리고 욕하고, 그것도 모자라
내 손마저 깨물어 피가 줄줄 흐르게까지 했어요."
그녀는 자기의 손을 어루만지며 다시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난 아직 그를 잊지 못하고 있어요. 나는 오로지 그
를 영사도로 데리고 가서 파파께 그가 당한 현명신장(玄冥神掌)
의 음독을 제거해 주게 하려고 한 것인데, 내 호의를 모르고 자
기를 해치려는 줄 알고 오해를 하다니.....!"
장무기의 심정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이 착잡했다. 이제서야 장무
기는 접곡에서 자기를 붙잡았던 아리 아가씨가 바로 눈앞의 주아
였었던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주아가 매일 잊지 못하던 그 정인
이 바로 자기였다니!
장무기는 고개를 비스듬히 해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얼굴이 부
어서 옛날 그 아름다운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
나 그의 얼굴형, 그리고 그녀의 눈동자만큼은 옛날의 그 모습과
여전했다.
옆에 있던 멸절사태가 냉랭한 소리로 입을 열었다.
"금화파파 그 사람은 마교와 앙숙지간인 것은 틀림없지만, 그러
나 금화파파도 사실 정파 인물이라고는 할 수 없지. 그러나 지금
우리의 사정으로는 더 이상 원수를 만들어서는 안돼. 그러니 이
애를 잠시 붙잡아 두기만 하자."
은이정이 입을 열었다.
"음 그랬었군요. 아가씨가 무기에게 그런 고마운 마음씨를 지니
고 있었군요. 무기는 너무 복이 없는 녀석이야. 며칠 전 연환장
(蓮環莊)의 장수 무열을 만났었는데, 무기가 이미 오년 전에 만
장(萬丈)이나 되는 깊은 계곡 위에서 그만 실족을 하고 떨어져
죽었다는 거야. 시체를 찾아 내지도 못했다더군. 나와 무기의 부
친은 친형제나 다름없이 지냈었는데..... 하늘도 무심하지, 그의
하나뿐인 핏줄마저도 남겨 주지않다니."
주아는 그 말에 그만 기절하고 쓰러져 버렸다. 주지약이 잽싸게
그녀를 부축하여 가슴을 주물러 주자 주아는 천천히 깨어났다.
은이정, 주아 모두가 자기때문에 이렇게 슬퍼하는 모습을 본 장
무기는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그러면서 주지약을 쳐
다보니, 주지약이 자기를 주시하고 있는 것이었다. 주지약은 주
아가 왜 장무기를 알아보지 못하는지 이상하다는 눈빛이었다. 장
무기는 몇 년 동안 얼굴이나 체구 등 변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자기가 먼저 한수(漢水)의 배 안에서의 일을 얘기하지 않았다면,
주지약도 사실 그를 알아 보지 못했었을 것이다.
주아는 분개하여 이를 갈며 물었다.
"은육협님, 장무기를 죽인 자가 도대체 어떤 자입니까?"
"무열에 의하면 누가 살해한 것이 아니라, 무기 자신이 실수하
여 계곡 밑으로 떨어졌다더군. 무열 자신이 직접 목격했다는데,
무열의 의형제 주장령도 그 때 같이 떨어져 죽었다네."
그 말을 들은 주아는 긴 탄식을 하며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
다.
"그런 아가씨의 성함은 어떻게 됩니까?"
주아는 그 말에 대답을 하지 않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갑
자기 모래 위에 엎어져 눈물을 쏟으며 방성대곡을 하는 것이었
다.
은이정은 그녀를 위로해 주었다.
"아가씨, 너무 슬퍼하지 말아요. 무기가 계곡에 떨어져 죽지 않
았다 해도 이미 온몸에 독이 퍼져 살아 있지는 못했을거요. 오히
려 오랫 동안 고통을 받지 않고 죽은 것이 더 다행이 아니요?"
멸절사태는 갑자기 말했다.
"장무기, 그런 잡놈은 일찍 죽은 것이 오히려 다행이야. 그렇지
않고 살았다면 분명 세상에 해를 끼칠 화근이 됐을 것이야."
그 말에 주아는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었다.
"이 늙은 중대가리가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아미 제자들은 주아가 감히 사존을 모욕하는데, 참을 수가 없었
다. 몇 명은 벌써 병기를 그녀의 가슴과 등에 갖다대고 있었다.
주아는 조금도 겁은 내는 기색도 없이 욕설을 마구 퍼부었다.
"이 늙은 여자 중대가리야. 장무기의 부친은 이 은육협님의 사
형이시다. 그 분의 혈기는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인데, 그런 말을
하다니!"
멸절사태는 그저 냉소를 지으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정현사태가 입을 열었다.
"말 조심하지 못하겠느냐! 장무기의 부친께선 물론 명문정파의
제자이시지만, 그의 어머니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아느냐? 마교의
요녀가 난 자식이 잡놈이 아니구 뭣이냐?"
"그의 어머니가 누군데 마교의 요녀라니?"
그 물음에 아미파 제자들은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주지약만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은이정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장무기는 얼굴이 빨개지며 눈물이 글썽글썽해졌다. 그는 자기의
신분을 꼭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면, 그는 벌써 벌떡 일어나 어머
님을 위해 변명을 했었을 것이다.
아미파 제자들 중 정현사태는 매우 중후한 인품의 소유자였다.
그는 주아를 보며 입을 열었다.
"장오협의 부인이며 장무기의 어머니는 바로 천응교 교주 은천
정의 딸이야. 이름은 은소소라고 하지."
"아!"
하고 주아는 탄식을 하며 안색이 크게 변하였다.
"장오협께서 바로 그 요녀와 결혼했기 때문에 패가망신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가 무당산에서 자살을 하게 된 거지. 이 일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 아가씨는 어째서 그걸 모
르고 있었지?"
"저는 멀리 영사도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중원 무림의 일을 전
혀 모릅니다."
"우리 사부님께 무례를 저질렀으니, 어서사죄해라!"
정현이 큰 소리로 말했다.
주아는 대꾸도 하지 않고 다시 물었다.
"그럼 은소소 그분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그 때 장오협과 같이 자살을 했네."
정허가 대답해 주었다.
그 말에 주아는 몸을 부르르 떨며 혼자 중얼거렸다.
"그의 어머니마저도 자살을 했습니까?"
그 물음에 정현이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왜 은소소와 아는 사이냐?"
바로 그 때, 동쪽 하늘에 파란 불꽃이 높이 치솟았다.
"앗! 내 조카 청서(靑書)가 포위당했군."
은이정은 멸절사태에게 인사를 하고 나서 아미파 제자들에게 읍
을 하고 불꽃이 보이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 정현이 그의 뒤를
따라가며 팔을 흔들자 아미파 제자들도 모두 뒤따라 갔다. 그들
이 가까이 달려가 보니 또 세 사람이 한 사람을 협공하고 있는
것이었다. 세 사람은 모두 밀짚모자를 쓰고 있었으며 차림새는
모두 하인 같았다. 그들은 단칼을 들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하
인 차림새였지만 그 악랄한 수법만큼은 절대 일류 고수 못지않은
듯 싶었다. 은이정에게 당한 세 도인보다는 무공이 훨씬 앞질러
있었다. 세 사람은 한 청년서생(靑年書生)을 포위하고 그의 주위
를 맴돌며 공격을 하고 있었다. 그 서생은 이미 열세에 처해 있
었지만, 그의 장검은 여전히 예리한 공격을 막으며 조금도 빈틈
을 주지 않고 있었다. 싸우고 있는 그들 뒤에는 황포(黃袍)를 입
은 남자 여섯명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의 황포에는 모두 빨간
불꽃이 수놓아 있었다. 물론 그들은 마교의 인물들이었다. 그들
은 멀리 서서 구경하며 싸움에 끼어들지 않고 있었다.
은이정과 아미파 제자들이 달려오자 여섯 명 중에서 키가 제일
작고 몸집이 뚱뚱한 자가 큰 소리로 외쳤다.
"은가 형제들, 이제 다 틀렸어. 빨리 줄행랑이나 치게. 우리가
뒤를 막아 줄 테니!"
"후토기(厚土旗), 너희들이 더 느리지 않느냐? 안가야, 너나 먼
저 도망가거라!"
밀짚모자를 쓴 한 명이 대꾸를 했다.
정현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했다.
"이놈들, 죽음이 바로 앞에 닥쳐온 것도 모르고 자기네들끼리
말싸움을 하다니!"
"사저님, 이 자들은 누굽니까?"
하고 주지약이 물었다.
"밀짚모자를 쓴 자들은 바로 은천정의 하인들이야. 바로 은무복
(殷無複), 은무록(殷無綠), 은무수(殷無壽)라고 하는 세 사람이
야."
"하인들의 무공이 이렇게 놀랍다니!"
주지약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자들은 원래 흑도(黑道)에서 유명했던 대도(大盜)들이라 보
통 사람들이 이니었지. 그리고 황포를 입은 자들은 바로 후토기
밑의 요인들이야. 저 키가 제일 작고 몸집이 작은 자가 아마 장
기사 안원(顔垣)인 모양이군. 사부님의 말씀에 의하면, 마교 오
기장기사(五旗掌旗使)와 천응교 교주는 마교의 교주 자리를 탐내
느라 불목을 하고 있다 하셨는데....."
어느새 서생은 이미 위험에 처해 있었다. 찍! 하는 소리와 함께
서생의 옷 소매자락이 은무수의 칼에 찢겨져 나갔다.
은이정은 잽싸게 장검을 뽑아 은무록을 공격했다. 쨍그랑! 하고
두 사람의 병기가 부딪쳤다. 그러나 은이정의 내공은 얼마나 심
후한가! 쨍그랑소리와 동시에 은무록의 칼이 활처럼 휘어져 버린
것이다. 깜짝 놀란 은무록이 잽싸게 뒤로 세 발짝이나 물러났다.
바로 그 때 주아가 뛰쳐나가 오른손 중지(中指)로 은무록의 목덜
미를 찌르고 잽싸게 제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은무록의 무공도 실은 보통이 아니었다. 그러나 은이정과 서로
내공을 부딪치고 나서 그 충격에 뒤로 물러나 휘청거리고 있는
이때, 갑자기 주아의 일지공(一指功)을 받자 그만 심한 고통을
못이겨 신음소리를 내며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은무복, 은
무수 두 사람은 크게 당황해하며 청년을 더 이상 공격하지 못하
고 잽싸게 은무록에게 달려가 그를 부축했다. 그러나 은무록은
여전히 몸을 어찌할 바를 모르고 비틀거리며 입에서 거품을 토했
다.심한 중상을 입은 것이 분명했다.
두 사람은 주아를 노려보더니 갑자기 경악의 눈빛을 보였다.
"아니, 세째 아가씨였군."
"흥! 아직도 나를 기억하고 있구나!"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아미파 제자들은 두 사람이 주아를 절
대 그냥 놔두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싸움은 커녕 은무록
을 팔에 안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달아나는 것이었다. 이 뜻
밖의 장면에 모두는 입을 딱 벌리고 그저 의아해 할 뿐이었다.
이때 황포를 입은 그 땅딸보가 갑자기 손을 쳐들자, 그의 손엔
큰 황색 깃발이 펄럭였다. 그러자 나머지 다섯 명도 일제히 황색
깃발을 꺼내 휘둘렀다. 여섯 명이긴 하지만 그들이 휘두르는 깃
발에서 펄럭이는 바람소리와 그들의 위세는 당당했다. 그들은 천
천히 복쪽 방향으로 퇴각을 했다.
아미파 일행은 그들의 이상한 기진(旗陣)에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자 남자 제자 두 명이 용기를 내어 그들을 뒤쫓기 시작했다.
은이정이 재빨리 움직여 어느새 두 사람의 앞을 가로 막았다. 그
들은 갑자기 은이정의 가로막음에 밀려 뒤로 물러서며 얼굴을 붉
힌 채 정현사태를 쳐다보았다.
"두 사제는 즉시 돌아오거라! 은육협께서 호의로 그러시는 것이
야. 후토기를 쫓아선 안 돼."
은이정은 미안해 하며 사정을 설명했다.
"며칠 전, 저와 막칠제(莫七弟)가 열화기를 뒤쫓다 크게 당했습
니다. 막칠제는 눈썹과 머리카락을 반이나 태웠답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의 옷소매를 걷어 올려 보였다. 그의 팔뚝은
온통 시뻘겋게 데어 있었다. 두 남자 제자들은 그것을 보자 질겁
을 했다.
이때 멸절사태는 싸늘한 눈초리로 주아를 노려보며 물었다.
"네가 조금 전에 은무록을 암습한 지공이 바로 천주만독수(天蛛
萬毒手)렸다!"
"아직 완전히 연마하지는 못했는걸요."
"그래, 완전히 연마했었다면 큰일 날 뻔했겠구나. 그런데 왜 그
자를 해치려고 했지?"
"흥, 오히려 당장에 죽이지 못한 게 유감이에요."
"어째서?"
"그건 어디까지나 나의 사사로운 일이예요. 상관하지 마세요."
주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멸절사태의 몸이 꿈틀한 듯 싶더
니 어느새 정현의 검을 빼앗아 휘둘렀다. 주아는 잽싸게 뒤로 피
하긴 했지만 그녀의 얼굴은 백지장과 같았다. 멸절사태는 주아의
오른손 중지를 자른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눈살을 찌푸리지 않
을 수가 없었다. 주아는 부러진 손목이 다 낫지 않았고, 거기다
천주만독수를 아직 다 익히지 못해 은무록을 공격할 때 손가락에
강철로 만든 골무를 끼었던 것이다. 멸절사태가 의천검을 휘두른
것이 아니고 보통 무쇠검이었기 때문에 주아의 손가락이 잘려나
갈 리가 없었던 것이다.
멸절사태는 검을 정현에게 던져 주며 코웃음을 쳤다.
"흥, 이번에 너무 운이 좋았다. 다음에 또 이런 사악한 무공을
쓸 땐 네 손은 남아 있지 않을 거야."
그런 악독하고 잔인한 무공은 무가의 금기인 터라 은이정도 천
주만독수라는 말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녀가 자기를 도
우려고 한 것인 것 같았고, 또한 죽은 자기 조카에 대한 연모의
정이 있어 멸절사태가 다시 그녀에게 출수(出手)를 할까 봐 걱정
이 되었다.
"멸절 사숙님, 이 어린 것이 무공을 잘못 배운 것 같습니다. 나
중에 좋은 스승을 만나 정통 무공을 배우도록 하게 하면 어떻습
니까? 음! 혹시 아마파에서....."
은이정은 아미파에서 제자로 거둬들인다면 그것보다 좋은 방법
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인데, 조금 전에 이 철없는 주아가 멸절사
태를 향해, 늙은 중대가리라고 욕설을 했기 때문에, 은이정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한 것이다.
그는 다시 서생을 부르더니 말을 이었다.
"청서야, 어서 사태님과 여러 사백, 사숙에게 인사드려라."
서생은 성큼 다가와 멸절사태에게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그
리고 나서 정현에게 절을 하자 모두는 사양을 하며 같은 예로 답
례했다.
장삼봉의 나이가 이미 백 세가 넘지 않았는가. 나이로 따지면
장삼봉은 멸절사태보다 몇 대 위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은이정이
멸절사태의 제자 기효부와 약혼을 한 적이 있어 멸절사태보다 항
렬이 낮아진 것이다. 그러나 장삼봉과 아미파 조사 곽양과 같은
항렬이라고 할 땐, 오히려 은이정이 멸절사태의 사숙뻘이 될 수
있었다. 다행히 무당과 아마파는 서로 문호가 달라 배분을 따지
지 않고 나에 따라 적당히 칭호해 온 것이다. 그러니, 정현과 여
러 제자들이 서생의 칭호에 사양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미파 제자들은 조금 전에 서생이 세 사람에게 협공당하는 것
을 보았다. 열세에 몰렸으면서도 초식이 정기하고 법도가 어긋남
이 없으며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는 것을 보고 정말 명문 정파의
자재다운 풍범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가까이서 대하고
보니 인물 또한 준수하고 영준한 소년이었다. 어딘가 모르게 대
장부다운 풍모가 풍기고 누구라도 그에게 제압당하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이 애는 저의 대사형님의 외아들입니다. 이름은 청서(靑書)라
고 합니다."
소개를 하고 나자 정현이 감탄을 하듯이 말했다.
"근래에 옥면맹상(玉面孟嘗)의 협명이 강호에 자자하더니, 오늘
이렇게 뵙게 되니 정말 큰 행운입니다."
제자들은 서로 소근거리며 그를 칭찬하는 얘기를 나누고 있었
다. 주아는 곁에 있는 장무기에게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저 사람은 오빠보다 더잘 생겼는데요.....!"
"물론. 그걸 말이라고 하오?"
"질투가 나세요?"
"내가 무슨 질투를 한단 말이요?"
"저 사람이 아무래도 오빠가 좋아하는 주 소저를 마음에 둔 모
양인데, 질투나지 않으세요?"
장무기가 송청서를 슬쩍 쳐다보니, 과연 그는 주아 말대로 주지
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장무기는 관심이 없는 듯이 다시
눈길을 돌렸다. 장무기는 접곡에서 자기를 완력으로 영사도로 끌
고가려고 한 아리가 바로 주아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부터 지금
까지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주아는 완력으로
자기를 끌고가려고 해 끝내 그녀의 손을 물어 뜯었지만, 그녀는
아직까지도 자기를 가슴 속에 새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을
알게 된 장무기는 크게 감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청서야, 우린 이제 그만 떠나자."
"네, 사숙님. 그런데 공동파가 오늘 정오까지 이 부근에 오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는데,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으니 혹 무슨 변고
라도 생긴 게 아닐까요?"
"무척 걱정이 되는구나."
"사숙님, 차라리 아미파와 같이 서쪽으로 가는 게 어떻겠습니
까?"
"그것도 괜찮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멸절사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몇 년 전부터 장삼봉 진인은 이미 속무에서 손을 떼고 실은 송
원교가 장문직을 맡아오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데, 아마 제 삼
대 장문은 이 송소협이 이을 것이 분명해. 그래서 은이정이 사숙
이면서도 조카의 말에 순순히 응하는군. 정말 훌륭한 집안이야.'
일행이 서쪽으로 약 십 사오 리 길을 가자 눈앞에 모래언덕이
보였다. 정현사태는 송청서가 빠른 걸음으로 모래언덕으로 뛰어
올라가자 얼른 제자 두 명을 송청서의 뒤를 따르게 했다. 만약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아미파가 무당파에 뒤떨어져서는 안 된다
는 생각에서였다.
모래언덕 위로 올라간 세 사람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그것은
언덕 아래 서쪽에 칠, 팔 구의 시체가 널려 있었던 것이다. 일행
이 세 사람의 외침을 듣고 달려올라가 보니, 시체들의 몰골이 처
참하기 짝이 없었다. 한결같이 골이 깨져 터져 나오지 않으면 갈
비뼈가 으스러져 가슴이 움푹 패여 있었다. 검이나 칼에 당한 것
이 아니라 육중한 목곤(木棍)에 당한 것이 한눈에도 분명했다.
견문이 넓은 은이정이 그들의 차림새를 보곤 신분을 알아냈다.
"강서성(江西省)의 파양방(播陽幇)이 전멸했군요. 시체를 보니,
마교의 거목기에 당한 것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멸절사태는 기분이 언짢은 듯 눈살을 찌푸렸다.
"파양방도 여기에 오다니, 귀파에서 초청한 겁니까?"
"아닙니다. 파양방의 유방주는 공동파의 기명제자(汽名弟子)입
니다. 그래서 육대문파에서 광명정을 토벌하러 나선다는 말을 듣
고 사문을 위해 자진해서 온 것일 겁니다."
무림의 명문정파에서는 사실 다른 방회(幇會)에 대해서 별로 달
갑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멸절사태는 그들과 어울리기 싫어서
였다.
아미파 일행은 파양방 시체들을 묻고 모래무덤을 만들어 주었
다. 그리고 일행이 막 길을 떠나려고 하는데, 갑자기 서쪽 맨 끝
에 있는 무덤에서 팍! 하는 소리가 나더니 가운데가 갈라지며 무
덤 속에서 사람이 튀어나오며 남자 제자 한 명을 낚아채고 쏜살
같이 달아나는 것이었다. 이 광경에 아미파 제자들은 모두 혼비
백산하였고 여제자들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틈엔
가 멸절사태, 은이정, 송청서, 정현사태 네 사람은 모래를 박차
고 그의 뒤를 쫓아나섰다. 아미파 제자들은 한참 뒤에서야 그 자
가 바로 청익복왕 위일소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청익복왕 위일소
는 파양방의 옷을 입고 시체 속에 섞여 호흡을 멈추고 있다가,
아미파 제자들이 시체를 모두 매장하고 잠깐 방심을 하는 사이에
모래 무덤을 박차고 나온 것이었다.
장무기, 은이정, 송청서, 정현 네 사람은 처음엔 똑같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달렸으나 점점 경공의 강과 약이 나타나 반 바퀴를
돌아올 땐 두 패로 갈라지게 됐다. 몰론 멸절사태와 은이정이 앞
장서게 됐고, 송청서와 정현사태가 뒤를 따라가게 됐다.
청익복왕의 경공술을 과히 천하무쌍이라 할 수 있었다. 그는 무
거운 남자의 몸뚱아리를 안고 뛰었지만 멸절사태 일행은 그를 도
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다. 위일소는 멀리 달아나지 않고 원을 그
리며 뛰고 있었다. 두 번째 원을 그리고 아미파 제자들에게 가까
이 접근했을 때, 송청서가 갑자기 추적에서 이탈하고 멈춰서며
외쳤다.
"조영주(趙靈珠) 사숙은 패금의(貝錦儀) 사숙과 같이 팔괘(八
卦) 중의 이위 방향에 가 서시요! 그리고 정민군 사숙과 이명하
사숙 두 분께선 진위를 차단하십시오!"
송청서가 소리를 외치자 삽시간에 아미파 제자 삼십여 명은 팔
괘진을 쳤다. 아미파 제자들은 잠시 지휘자를 잃고 있다가 송청
서의 위엄 있는 명령을 듣자 자신도 모르게 귀신에 홀린 듯이 그
의 명령에 순순히 응했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위일소느 더 이상 원을 그리며 달릴 수 없었다. 그
는 갑자기 날카로운 웃음을 웃어 젖히더니 안고 있던 남자를 공
중으로 내팽기치고 쏜살같이 달아났다. 멸절사태가 잽사게 공중
에서 떨어지는 제자를 받자, 멀리서 청익복왕 위일소의 웃음소리
가 들려왔다.
"하하하! 아미파에 그런 인재가 있다니, 멸절사태도 알아줘야겠
군."
그의 감탄은 몰론 송청서를 두고 한 것이다.
멸절사태는 안고 있던 제자를 본 순간, 그만 얼굴이 험해졌다.
아직도 목덜미에서는 선혈이 뿜어졌고 이빨자국 두 개가 또렷이
나 있었다. 숨은 이미 끊겨 있었다. 무도는 그를 둘러싸며 침울
한 표정들을 지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자 은이정이 입을 열었다.
"소문에 청익복왕은 한 번 무공을 시전하고 난 후엔 꼭 산 사람
의 뜨거운 피를 빨아 먹어야 한다고 들었는데, 과연 소문대로군.
이 사제께서 희생당하다니 정말 애석하군."
멸절사태는 부끄러움과 분통을 느꼈다. 자신이 장문직을 이어받
은 후 이렇게 큰 좌절을 당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연거푸
두 제자가 피를 빨리며 죽어 갔는데도 아직 상대의 얼굴조차 자
세히 보지를 못했다니! 그는 한참 동안 멍청하게 허공을 바라보
더니, 갑자기 고개를 돌려 송청서에게 물었다.
"송소협은 어떻게 내 제자들의 이름을 다 알고 있소?"
"조금 전에 정현사숙께서 소개해 주셨습니다."
"아! 한 번만 듣고서도 모두 기억하고 있다니, 우리 아미파엔
언제 이런 인재가 나타날까!"
그날 밤 그들은 모두 야영을 했다. 송청사가 갑자기 멸절사태에
게 걸어가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선배님,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라는 것을 알지만, 후배가 한 가
지 청할 일이 있습니다."
"법도에 어긋난 것이라면 아예 부탁하지 말게나."
"네, 죄송합니다."
송청서는 다시 공손히 인사드리고 조용히 은이정 옆으로 돌아왔
다. 아미파 제자들은 송청서가 사부님에게 청을 드렸다가 단 한
마디에 거절당하자 모두들 무슨 부탁을 드렸었는지 몹시 궁금했
다.
정민군이 참지 못하고 궁금중을 풀기 위해 송청서의 곁으로 갔
다.
"송소형, 우리 사부님께 무슨 부탁을 드렸었습니까?"
"저의 부친께서 검법을 전수하시면서 하시던 말씀이 있습니다.
당대의 검법에 있어서 일신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분문의 사조
(師祖)님이고, 그 다음이 바로 아미파의 멸절사태님이시라고 하
셨습니다. 그러나 무당과 아미 양파의 검법에는 서로 장단점이
있는데, 예를 들어 본문의 수휘오현(手揮五弦) 초식은 검끝에 경
력이 너무 들어가 아미파의 경라소선(經羅小扇)보다는 자유자재
로 구사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후배는 사태님에게 이
번 기회에 한 번 보여 주셨으면....."
그러면서 그는 장검을 뽑아 자기가 아는 대로 경라소선의 초식
을 흉내냈다.
"그렇게 하는 게 아닙니다."
정민군은 송청서의 흉내가 우습다는듯이 그의 손에서 장검을 받
아들고 한바탕 시연해 보였다.
그러자 송청서는 탄복했다.
"저의 부친께서 항상 자신은 운이 없어 귀파 존사(尊師)님의 검
술을 볼 기회가 없었던 것을 무척 애석해 하셨는데, 오늘 밤 후
배는 정사숙의 경라소선을 보고 안목을 넓혔으니 정말 큰 영광입
니다. 조금 전에 후배가 품고 있던 검술의 의혹을 풀기 위해 멸
절사태님께 몇 수 가르침을 받을까 하고 청을 드렸었던 것인데,
생각해 보니 후배는 귀파의 제자가 아닌데 처음부터 그런 부탁을
드리려고 한 제가 잘못이었던 것 같습니다."
멸절사태는 멀찌감치 앉아 있었지만 그의 말을 모두 듣고 있었
다. 멸절사태는 무당파의 대제자이자 앞으로 장문인에 오를 송원
교가 자기를 검술에 있어서 제 이 인(第二人)자라고 칭찬한 말에
매우 기분이 좋았다. 장삼봉 하면 당대 무술의 태산북두(泰山北
斗)이며 모든 무림의 존경을 받는 자라, 멸절사태는 감히 고금에
보기 드문 무학의 대종사를 능가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
데 무당의 대제자가 검술에 있어서 장삼봉 외엔 자기를 꼽다니,
그녀는 정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조금 전에 정민군이 시연한 경라소선은 경력이 삼사성
(三四成)의 경지밖에 이르지 못해 속으로 중얼거렸다.
'천하에 명성을 떨치는 아미 검법이 고작 그 정도더냐?'
그는 몸을 일으켜 세우고 정민군 앞으로 걸어가 아무 말 없이
정민군의 장검을 빼앗아 들고는, 자세를 가다듬고 서서히 검을
뻗으며 휘둘렀다. 좌에서 우로, 다시 우에서 좌로 그는 연거푸
아홉 번을 휘둘려 댔다. 그의 동작은 기이할 만큼 빨랐지만, 그
러나 한 동작 한 동작을 모두 또렸하게 볼 수 있었다.
"정말 훌륭하고 오묘한 검법이로구나!"
은이정이 탄성을 질렀다.
송청서는 숨을 죽이고 정신을 집중시켜 멸절사태의 검법을 유심
히 살펴보며 내심 정말 뜻밖이라고 생각했다. 자기가 멸절사태에
게 잘 보일 셈으로 슬쩍 아미파의 검법을 치켜세운 것인데, 멸절
사태가 직접 시전(施展)해 보인 것이 천만 뜻밖이었다.
송청서는 진정 그의 가르침을 바랬다. 그녀는 송청서가 묻는 대
로 서슴치 않고 자세히 설명해 주며 초식을 직접 시전해 보였다.
자신의 문하제자들에게 가르칠 때보다도 더 열성적이었다. 송청
서의 무학이 높고 총명한 터라 그가 묻는 질문은 모두 신법이나
검법에 있어서 모두 요점뿐이었다. 아미파 제자들은 양쪽으로 나
눠 둘러앉아, 사부님이 펼치는 하나같이 정교하고 오묘한 검법을
구경하고 있었다. 사실 어떤 제자는 십여 년 간을 따라다녔지만
스승의 신기(神技)를 보긴 이번이 처음이었다.
장무기와 주아는 아미파 제자들이 둘러앉은 울타리 밖에 떨어져
앉아 있었다. 그들은 아미파의 검법을 훔쳐 보고 싶지 않았다.
주아는 갑자기 장무기에게 엉뚱한 말을 건넸다.
"오빠, 내가 만약 청익복왕과 같은 무공을 익힌다면 죽어도 여
한이 없겠어요."
"그 따위 사악한 무공을 배워서 뭐 할려구? 은육협의 말을 못
들었소? 청익복왕은 무공을 한 차례 쓰고 날 때마다 산 사람의
피를 빨아 먹어야 한다고 하는데 그게 어디 사람이오? 귀신이
지."
"그의 무공이 높아 아미파 제자들을 마음대로 죽일 수 있는 거
예요. 만약 그의 무공이 보잘것 없었다면 벌써 저 늙은 여승에게
잡혀 죽었을 거예요. 다만 피를 빨려 죽지 않을 뿐이지 죽기는
마찬가지죠. 그러니까 명문정파나 사파(邪派)나 사람 죽이긴 마
찬가지지 다른 게 뭐가 있어요?"
장무기는 잠시 대꾸할 말을 잊었다. 순간 갑자기 아미파 제자들
울타리 속에서 청광(靑光)이 번뜩이며 장검 한 자루가 어둠에 싸
인 공중으로 치솟아 올랐다. 그것은 송청서와 멸절사태가 서로
대련을 하면서 송청서의 검이 멸절사태의 흑소영호(黑沼靈狐)의
초식에 걸려 공중으로 튕겨져나간 것이었다.
흑소영호 초식은 아미파 조사(祖師), 곽양(郭養)이 왕년에 신조
대협 양과와 같이 흑소에 가서 영호를 잡던 때를 기념하기 위해
창안해 낸 검법이었다. 모두들 공중으로 튕겨져나간 검을 바라보
고 있던 그 순간, 갑자기 동북방 십여 리 떨어진 곳에서 황색 불
꽃이 치솟아 오르는 것이었다.
"아, 공동파에 위험이 닥쳤군! 빨리 도우러 갑시다!"
은이정이 외쳤다.
이것은 육대문파에서 이번 서역까지 와 마교를 섬멸하는 행동을
은폐하기 위해 여섯 갈래의 방향으로 나뉘어 오면서, 서로의 연
락 방법을 취하기 위하여 각파에 따라 여섯 가지 불꽃을 정했던
것이다. 그 중 황색 불꽃은 공동파의 신호였다. 모두 불꽃의 방
향으로 달려갔다. 가까이 접근할수록 비명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
왔다. 가까이 접근한 모두는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차마 눈뜨고
볼수없었다. 그것은 싸움이 아니라 차라리 도살장이라고 할 수밖
에 없었다. 칼날이 번뜩이며 모두 죽기 아니면 살기로 악전 고투
를 벌이고 있었다.
----- 제 3 권 6 장 끝 -----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3 권 끝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4 권
제 1 장 건곤일기대(乾坤一氣袋) 속의 장무기
장무기는 그 광경을 보며 어느 쪽이든 이기는 것을 바라지 않았
다. 한쪽은 아버지 쪽이고 한쪽은 어머니 쪽이 아닌가! 그는 그
들이 죽지 않으려고 버티다가 한 명씩 쓰러져 나갈 때마다 마음
이 찢어지는 듯 괴로왔다.
은이정이 상황을 살펴보고 입을 열었다.
"적은 예금(銳金), 홍수(洪水), 열화(烈火) 삼기(三旗)로구나.
청서야, 이쪽은 공동파가 맞서고 있고. 화산, 곤륜에서도 당도했
으니 우리도 가세하자."
그러면서 장검을 허공에다 휘두르자 검에서 윙! 윙! 예리한 바
람소리가 들렸다. 송청서가 즉시 입을 열었다.
"육숙님, 잠깐 저길 좀 보세요. 저쪽에도 많은 적들이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장무기는 슬쩍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쳐다보니, 과연 싸움터 밖
수십 장 되는 거리에 사람들이 까맣게 깔려 있었다. 삼대(三隊)
의 인마가 질서 정연하게 배치돼 있었던 것이다. 일 열의 숫자는
적어도 백 명은 넘어 보였다.지금은 삼파와 삼기의 세력이 서로
균등하지만, 이 삼 열의 인마들은 시종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멸절사태와 은이정은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은이정이 청
서에게 물었다.
"저 자들이 왜 꼼짝 않고 구경만 하고 있지?"
송청서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옆에 있던 주아가 갑자기 그들의 대화에 끼어 소리쳤다.
"척하면 삼천리지, 그것도 모르세요?"
그 말에 송청서는 아무 대답도 않고 얼굴만 붉혔다.
은이정이 주아에게 다시 물었다.
"낭자의 가르침을 받고 싶소!"
"저 삼대인마(三隊人馬)는 천응교입니다. 천응교도 사실 명교의
지파(支派)나 다름 없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오행기(五行旗)와
뜻이 맞지 않아 서로 불목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만약 당신네들
이 오행기를 모두 처치하면 천응교에선 오히려 속으로 좋아할 거
예요. 그렇게 되면 은천정이 명교의 교주가 될 수 있을 터이니까
요."
모두는 그제서야 그들이 움직이지 않고 있는 영문을 알게 됐다.
"낭자의 가르침, 정말 고맙소."
하고 은이정이 인사를 하자, 멸절사태는 그녀를 노려보고 나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금화파파의 무공이 심오하니 과연 그의 어린 제자마저도 대단
하군."
정현이 송청서에게 물었다.
"송소협, 포진(佈陣)이라면 누구도 소협을 따를 자가 없소. 우
리 모두 소협의 호령에 따를 것이니, 사양치 말고 어서 적을 퇴
치할 수 있는 분부를 내리세요!"
"육숙님, 이 조카가 어떻게 감히 명령을 합니까?"
멸절사태가 입을 열었다.
"지금같이 위급한 처지에 무슨 겉치레를 따지느냐. 어서 명령을
내리게!"
송청서는 지금 전체가 급박하다는 것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곤륜파 예금기와 맞서 약간 우세를 보이고 있었고, 화산파는 홍
수기를 맞아 막상막하로 우열을 가리기 어렵지만, 공동파는 점점
위험에 빠져들고 있었다. 열화기에 포위당한 체 처참하게 죽어가
고 있었다.
"세 방향으로 갈라져 공격합시다. 모두 예금기를 겨냥해 집중적
으로 공격하는 겁니다. 사태님께선 동쪽으로, 육숙님은 서쪽, 그
리고 저와 정현사숙은 남쪽으로 공격하는 겁니다."
그의 명령에 정현은 의구심이 생겨 물었다.
"곤륜파는 별로 위급한 상황이 아니지만 공동파는 당장 위급한
처지에 놓여 있지 않소!"
"네, 그렇습니다. 곤륜파에서 우세를 보이고 있을 때 우린 전력
을 다해 일시에 예금기를 섬멸해 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남은 열
화, 홍수 양기는 그만 기가 죽을 것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고 공
동파를 도우러 갔다가는 일시에 그들의 위세를 꺾지 못하고 시간
을 끌게 되면, 천응교만 어부지리를 얻게 될 겁니다. 그렇게 되
면 낭패가 아닙니까?"
정현은 그의 설명에 탄복을 했다.
"송소협의 말씀을 듣고 나니 그렇군요."
그들은 송청서의 명령에 따라 세 곳으로 나눠 쳐들어갔다.
주아는 장무기의 팔을 잡아 당기며 말했다.
"오빠, 우린 여기서 더 지체해 봤자 아무 이득도 없으니 그만
여길 떠나요."
그녀는 말을 끝내자마자 바로 몸을 돌려 떠나려고 했다. 그러자
갑자기 송청서가 달려와 검으로 그녀를 가로막았다.
"낭자, 잠깐!"
"아니, 왜 저를 막는 겁니까?"
"아가씨의 내력이 의심스러워 그것을 알기 전엔 여길 떠나게 할
수 없소?"
주아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 내력이 이상하건 말건 무슨 상관이죠?"
멸절사태는 당장이라도 쳐들어가 마교를 모두 죽이고 싶은 이
때, 송청서가 주아와 입씨름하고 있는 것을 보자 어느새 달려와
주아의 등, 허리, 다리 세 곳의 혈도를 찍었다. 그녀가 어찌 멸
절사태의 초수(招手)를 막아낼 수 있을 것인가? 그녀는 그만 무
릎의 힘이 풀리면서 쓰러져 버렸다.
멸절사태는 장검을 휘두르며 외쳤다.
"오늘 이 사악한 무리들을 모두 섬멸시켜 버릴 것이다!"
그들은 각기 제자들을 거느리고 예금기를 향해 쳐들어갔다.
곤륜파의 하태충과 반숙한 부부는 예금기를 맞아 싸우면서 승리
를 눈앞에 두고 있었는데, 무당과 아미파에서 가세를 하자 성세
(聲勢)가 더욱 대성하였다.
멸절사태의 검법은 얼마나 예리한가! 명교의 제자들은 누구든
그의 삼 초식을 받아내지 못했다. 그녀의 훤칠한 몸집이 동서 할
것없이 사람들 사이를 종횡무진으로 휘젓고 다녔다. 삽시간에 일
곱 명이나 그녀의 검에 목숨을 바쳤다.
예금기의 장기사 장정은 전세가 완전히 불리해지자 직접 낭아봉
을 쳐들고 달려가 멸절사태와 맞부딪쳤다. 둘은 눈깜짝할 사이에
십여 초를 주고 받았다. 멸절사태의 아미검법은 점점 예리해지면
그에게 쉴새없이 공격을 가했지만, 장정의 뛰어난 무공도 만만치
않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두 사람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은이정, 정현, 송청서, 하태충, 반숙한, 그들도 모두 종횡무진
으로 검을 휘두르고 다녔다. 예금기에도 무예가 뛰어난 고수들이
많지만 그들이 어찌 무당, 아미, 곤륜 삼 파의 협공을 막아내겠
는가? 순식간에 살상자는 늘어만 갔다.
이때 펑! 펑! 펑! 하고 장정이 온 힘을 다해 낭아봉을 내리치
자, 멸절사태는 뒤로 한 발짝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장정은
그녀에게 숨돌릴 겨를도 주지 않고 다시 낭아봉을 내리쳤다. 위
세가 당당했다.
멸절사태는 잽싸게 몸을 피하는 동시에 검으로 순수추주(順水推
舟)의 초식을 그의 낭아봉을 겨냥해 밀쳐냈다. 그러나 장정은 명
교에서나 무림에서나 손꼽히는 고수였다. 그는 천부적으로 뚝심
이 강했고 내공이나 외공이 모두 상승에 도달해 있었다. 그는 낭
아봉을 통해 상대의 내력을 느끼자 놀란 기합과 동시에 정면으로
검을 후려치자, 멸절사태의 검은 그만 세 동강으로 부러져 버렸
다. 멸절사태는 팔에 약간의 통증이 오는 것을 느꼈으나 조금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잽싸게 팔을 뒤로 젖히며 의천검을 뽑아들었
다. 순간 그녀의 검에서 한기와 더불어 싸늘한 검빛이 번쩍이는
데 흡사 번개와 같았다. 멸절사태는 철쇄횡강(鐵鎖橫江)의 초식
으로 검을 휘두르며 밀고 나가자, 장정은 손에 쥔 낭아봉이 갑자
기 가뿐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가시가 울퉁불퉁 튀어나온 낭아봉
끝이 싹뚝 하고 잘려 나간 것이었다. 동시에 그의 목도 의천검에
의해 절단되었다.
예금기 부하들은 장기사 장정이 죽음을 당하게 되자 일제히 소
리를 질러 대며 죽음을 각오하고 덤벼들었다. 그 바람에 삼 파의
제자들이 몇 명 희생당하고 말았다.
홍수가 진중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우리의 장기사께서 순교(殉敎)를 했다! 우리 홍수기가 뒤를 받
을 테니 예금, 열화 양기는 후퇴하시오!"
그러자 열화기진의 깃발이 바뀌며 그 말대로 서쪽으로 퇴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금기에선 한 명도 물러서는 자가 없었다. 그
들은 더욱 맹렬하게 덤벼들고 있었다.
홍수기에서 다시 큰 소리가 들려왔다.
"홍수기 장기사의 명령이요! 전세가 불리하니 예금기도 일단 후
퇴하고 다음에 복수할 기회를 노립시다!"
이번엔 예금기에서 몇 명이 이구동성으로 소리쳤다.
"홍수기에서 먼저 후퇴하시오! 그리고 훗날 꼭 우리 대신 복수
를 해주시오. 우리는 장기사처럼 목숨을 바쳐 싸우겠소!"
그러자 홍수기 진중의 깃발이 검은색으로 바뀌면서 누군가 벼락
같이 외쳤다.
"예금기 형제들, 걱정마시오! 우리 홍수기가 꼭 복수를 해드릴
테니!"
그러면서 그들도 서쪽으로 퇴각하는 것이었다.
"당기사, 고맙소."
하늘을 찌르는 듯이 예금기의 제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쳐댔다.
화산, 공동 두 파에서는 적들이 질서 정연하게 퇴각하면서 십여
명이 손에 금빛이 번쩍이는 둥그런 원통(圓筒)을 휘두르는 것을
보자, 도대체 무슨 병기인지 이상해 더 이상 그들을 뒤쫓지 않고
모두 방향을 바꿔 예금기를 향해 집중 공격해 갔다. 싸움은 이미
판가름이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무당파에서만 두 명이 왔을 뿐 나머지 네 파에선 모두 정예들만
뽑아 오지 않았는가! 그 반면에 예금기 쪽에서는 장기사가 이미
죽었으니 지휘자를 잃고 우왕좌왕 하여 도저히 적수가 될 수 없
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그들은 의리를 지켜 죽음을 무릅쓰고
장기사의 뒤를 따라 순교할 결의가 되어 있었다.
은이정은 몇 명을 쓰러뜨리고 나자 사실 더 싸울 흥을 잃었다.
"마교의 무리들은 듣거라! 너희들은 지금 죽음밖에 남지 않았
다. 그러니 병기를 버리고 항복하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그러자 예금기의 부장기사가 광소를 날렸다.
"하하핫.....! 너희 눈엔 명교가 그렇게 우습게 보이느냐? 우리
는 장사형께서 전사하셨는데 어찌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겠느
냐?"
은이정이 다시 소리쳤다.
"아미, 곤륜, 화산, 공동파 친구들은 마교 무리들이 항복을 하
게끔 뒤로 십보(十步)를 물러나시오!"
그 말에 모두 뒤로 물러났으나 멸절사태만이 검을 휘두르며 미
친 듯이 계속 죽이고 또 죽이고 있었다. 그녀는 마교에게 뼈속
깊이 한이 맺혀 있었다. 그의 의천검(倚天劍)이 부딪치는 곳이면
검이고 칼이고 성해 남지 못하고 모두 부러져 나갔다. 팔, 다리,
머리 할것없이 사방에 피를 뿌리며 떨어져 나갔다.
아미파 제자들은 스승이 혼자서 싸우고 있자 다시 앞으로 쳐들
어가 병기를 휘둘렀다. 이렇게 되니 아미파에서만 예금기와 싸우
게 된 것이다.
명교 예금기엔 아직도 육십여 명이 살아 버티고 있었고, 그 중
에는 무공이 뛰어난 이십여 명도 끼어 있었다. 그들은 모두 부장
기사 오경초(吳勁草)의 지휘 아래 아미파 제자 삼십여 명과 이
대 일로 싸우며 버티었다. 사실 인원수로 보아 우세를 차지할 수
있었는데, 멸절사태의 의천검이 너무나도 예리했다. 그리고 그녀
의 검초 또한 얼마나 날카로운가! 그녀의 의천검 앞엔 그저 모조
리 쓰러지는 것뿐이었다. 예금기에서는 또 순식간에 칠, 팔 명이
나 되는 목숨을 일고 말았다.
장무기는 더 이상 처참한 꼴을 보고 싶지 앓아 주아에게 말했
다.
"이제 그만 떠나자."
그러면서 해혈수법으로 그녀의 혈도를 풀어 주려 했으나, 웬일
인지 몇 번이고 그녀의 등과 허리를 주물렀는데도 주아는 다만
마비되는 느낌만 더 할 뿐 좀처럼 혈도가 풀리지를 않았다. 멸절
사태의 내력이 워낙 심후해서 가볍게 점혈(点穴)했는데도 혈도
깊숙이 찍혀, 쉽게 풀리지 않았던 것이다.
장무기는 장탄식을 하며 다시 고개를 돌려 싸움을 살펴보니 예
금기 부하들의 손에 들은 병기는 모두 부러져 있었고, 화산, 곤
륜, 공동파에게 사방으로 포위당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추호
도 도망칠 생각을 하지 않고 맨손으로도 아미 제자들과 맞서고
있었다.
멸절사태는 아무리 마교와 뼈에 사무치는 원한을 갖고 있다 해
도 일파의 장문으로서 병기를 잃고 적수공권으로 버티고 있는 적
들을 죽일 수 없었다. 멸절사태는 갑자기 날으는 듯이 적진을 휘
젓고 다니더니 어느새 오십여 명이나 되는 마교인들의 혈도를 모
두 봉(封)해 버렸다. 그러자 마교인들은 모두 움직이지도 못하고
말뚝처럼 서 있게된 것이다. 그녀의 이런 상승 점혈수법에 모두
갈채를 보냈다.
이때 동쪽에서 동이 트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천응교의 삼
대인마(三隊人馬)가 동쪽, 남쪽, 북쪽 세 방향으로 나뉘어져 접
근해 오는 것이었다. 그들은 순식간에 십여 장쯤 떨어진 곳까지
접근해 왔다. 그러나 역시 구경만 하고 공격을 취하지 않았다.
주아가 갑자기 장무기에게 말했다.
"오빠, 만약 천응교의 손에 잡히는 날이면 큰일이예요. 우린 빨
리 여기를 떠나요."
장무기는 사실 자기도 모르게 천응교에게 친근감을 갖고 있었
다. 천응교는 바로 자기 어머니의 교파가 아닌가. 장무기는 어머
니가 비록 세상을 떠나 다시는 볼 수 없지만 언제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을 한 번 만나 뵐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곤 했었다. 그는
천응교의 인마가 가까이 접근해 오자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을 보
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해져 떠나고 싶지 않았다.
송청서는 멸절사태의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
"선배님, 예금기를 빨리 처치하고 나서 다시 천응교를 상대해야
합니다. 그래야 후환이 없게 됩니다."
멸절사태는 아무 말도 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동쪽 하늘에 해가 떠오르자 몽롱한 햇살이 멸절사태의 큰키를
비추어 그림자를 길게 드리웠다. 그녀가 침묵을 지키며 우뚝 서
있는 자세는 왠지 처절하기도 하고 보는 이로 하여금 공포감마저
들게 하였다. 그녀는 마교인들을 그렇게 쉽게 죽이고 싶지 않았
다. 그녀는 곧 싸늘하게 외쳤다.
"마교인들은 들어라! 누구든 살고 싶으면 무릎을 꿇고 빌어라.
그럼 살려줄 것이다."
그러나 예금기 부하들은 모두 광소를 터뜨릴 뿐이었다. 많은 사
람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리자 그 소리는 산야를 진동시켰다.
멸절사태는 울화가 치밀었다.
"무엇 때문에 웃느냐?"
오경초가 큰 소리로 대꾸했다.
"우린 모두 장기사를 따를 각오가 돼 있다. 어서 우리를 죽여
라!"
"흥, 좋다! 너희들이 죽기 일보 직전인데도 가증스럽게 영웅호
걸인 척하는구나. 그렇게 쉽게 너희들을 죽일 줄 아느냐!"
그는 장검을 휘둘러 야멸차게 오경초의 오른팔을 잘라 버렸다.
즉시 시뻘건 핏줄기가 뻗쳤다.
오경초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태연자약하게 외쳤다.
"우리 명교는 하늘의 뜻에 따라 제세구민(濟世救民)하며 만인에
게 봉사하는 교파다! 죽음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으니 이 늙은
계집중아, 우리를 항복시킬 생각은 절대 하지 말아라!"
멸절사태는 더욱 분노가 치밀었다. 다시 세 명의 팔을 잘라 버
리고 나서 살기띤 음성으로 다음 사람에게 다그쳤다.
"이래도 넌 살려달라고 빌지 않겠느냐?"
명교의 제자는 대뜸 욕설을 터뜨렸다.
"이 늙은 도적승아! 개소리 마라!"
어느새 정현이 앞으로 나서 그 자의 오른팔을 잘라 버렸다.
"사부님, 제자가 이놈들을 모두 처치하겠습니다."
그녀가 물어봐도 살려달라고 하는 자가 한 명도 없었다. 정현사
태도 칼을 휘둘러 몇 명의 팔을 절단시켰으나 반항할 힘을 잃은
저들에게 더 이상 잔인한 수단을 전개할 수 없었다.
"사부님, 이놈들은 정말 고집이 대단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정현의 눈빛은 사부에게 용서해 주자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멸절사태는 그녀의 말을 들은 척도 않고 다시 말했다.
"먼저 이놈들의 오른팔을 모조리 잘라 버려라! 그러고도 버티면
다시 왼팔을 잘라 버릴 것이다."
장무기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어느새 몸을 날려 정
현의 앞을 가로막으며 외쳤다.
"잠깐 멈추시오!"
그 바람에 정현이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장무기는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
"이런 잔인무도한 짓을 하다니 하늘이 무섭지도 않소!"
아미파의 제자들은 그의 너무나 당당한 기세에 눌려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일순간 주위는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다른
문파의 제자들도 갑작스레 남루한 옷차림의 소년이 나타난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곧이어 정현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누구나 죽이고 싶어하는 사악한 놈들을 처치하는데, 무엇이 잔
인무도하다는 거냐?"
"이 사람들은 모두 의리를 지키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으
로 봐 영웅호걸임에 분명한데, 어째서 사악한 무리들이라는 거
죠?"
"이놈들이 사마외도(邪魔外道)의 무리들이 아니란 말이냐? 그래
네 눈으로 청익복왕 위일소가 나의 사제, 사매의 피를 빨아 죽인
것을 직접 보고도 요사가 아니란 말이냐? 그럼 뭣이 사악한 놈들
이냐?"
"그 청익복왕은 두 사람만 죽였지만 당신네들은 벌써 그 열 배
나 더 죽였습니다. 그리고 위일소가 이빨로 사람의 피를 빨아먹
어 죽이는 거나, 당신의 사부께서 의천검으로 사람을 죽이는 거
나 사람을 죽이는 건 마찬가지가 아니요?"
정현은 화를 벌컥 냈다.
"네 놈이 감히 내 사부님을 요사들과 같이비교하다니!"
팍! 하고 정현은 그의 얼굴을 향해 다짜고짜 일장을 뻗었다. 장
무기는 재빨리 피했으나 정현은 아미파에서 사문진전(師門眞傳)
을 전수받은 대제자가 아닌가! 도저히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
가 장무기의 얼굴을 향해 뻗은 일장은 사실 허식(虛飾)이었다.
장무기가 잽싸게 피하는 바로 그 순간 힘껏 장무기의 가슴을 걷
어찬 것이다. 그러나 웬일인지 뿌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오히려
정현의 몸이 뒤로 수 장 밖이나 튕겨져 나뒹굴며 왼쪽 다리가 부
러졌다.
사실 장무기는 가슴을 차였지만, 상대방의 발이 가슴에 와 닿는
동시 체내의 구양신공이 자발적으로 저항력을 일으켜 그녀를 진
퇴(進退)시킨 것이다. 다시 말해 정현이 스스로 자신을 걷어찬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다행히도 그녀는 장무기를 죽이려고 한 것
이 아니라 그저 오성(五成)의 내공만 발휘했기 때문에 다리만 부
러지고 내상은 입지 않았다.
"아! 정말 죄송합니다."
장무기는 재빨리 뛰어가 그를 부축했다.
정현사태는 눈을 부라리며 다시 화를 버럭 냈다.
"비켜라!"
장무기는 아무 말도 않고 뒤로 물러섰다. 아미 제자들이 뛰어가
정현을 부축했다.
주위에 있는 군호들은 한결같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남루한
차림의 소년이 단 일격에 아미파의 고수인 정현사태를 격퇴시킨
일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멸절사태도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소년의 신분은 도대체 뭐지? 며칠을 데리고 다니면서도 이
소년이 이런 상승 무공을 지녔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데, 그
렇다면 이 소년은 겉으로 나타나지 않는 절정고수란 말인가? 나
자신도 정현을 반탄지력으로 저렇게 멀리 진퇴시키기 힘든
데.....'
멸절사태는 나이가 들어 갈수록 더 고집스러워졌다. 그녀는 물
론 장무기를 가벼운 상대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두
려운 존재로는 더욱 생각지 않았다. 그녀는 장무기의 아래위를
유심히 훑어보고 있었다.
장무기는 예금기 사람들의 상처를 돌보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그는 잘라진 팔에서 피가 흐르지 않게 혈도를 봉하고 붕대를 감
았다. 그의 수법은 매우 숙련돼 보였다.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 중에도 물론 상처를 치료할 때 쓰는 점혈수법(点穴手法)
에 능통한 호수(好手)들이 많았지만, 그들은 모두 자기의 수법이
장무기의 수법에 비할 바가 못 된다고 느끼고 있었다. 더욱이 그
가 점혈한 부위는 거의 상식에서 벗어난 것이므로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상처를 치료받고 있는 오경초가 정중하게 말했다.
"소협의 의협심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소협의 존함을 알고 싶습
니다."
"소인은 증아우라고 합니다."
이때 갑자기 멸절사태의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이 녀석아, 이리 가까이 와서 나의 검식(劍式)을 세 번 받아
보겠느냐?"
"사태님, 죄송하지만 지금은 상처를 치료해 주는 게 더 급하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요."
장무기는 여전히 상처를 치료하며 마지막 한 명까지 붕대를 갈
아 주고 비로소 몸을 돌려 포권의 예를 올렸다.
"멸절사태님, 소인은 사태님의 적수가 되지 못합니다. 그리고
싸우고 싶지도 않습니다. 저는 다만 쌍방이 모두 원한을 씻어 버
리고 싸움을 멈추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가 말하는 쌍방은 사실 자기 부모나 다름없었다. 소위 명문정
파는 자기 아버지 쪽인 무당이고, 사마외도라 불리워지는 천응교
는 자기 어머니쪽이 아니던가!
"네까짓 놈이 감히 싸움을 멈추라 말라 하다니, 하핫! 네가 무
림지존이냐?"
"무림지존이 무슨 별것입니까?"
"만약 네가 도룡도를 갖고 있다고 해도 나의 의천검과 겨뤄 이
겨야만 무림지존이라 할 수 있다. 그 때 가서 명령을 내린다면
또 모를 일이지!"
하! 하! 핫! 하고 모두들 장무기를 비웃었다. 장무기도 물론 자
기의 나이나 신분으로 싸움을 말릴 처지가 못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모두 자기를 조롱하듯 웃자 그만 화가 치밀었다.
"무엇 때문에 이 많은 사람들을 죽이려고 합니까? 이들은 모두
처자식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을 죽이면 이들의
식구들은 어떡합니까? 사태님께선 속세를 떠난 사람이니 자비심
을 베풀어 이 사람들을 살려보내 주십시오."
멸절사태는 아무 표정도 짓지 않고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네놈이 심후한 내력(內力)을 믿고 여기서 큰 소리치는 모양인
데, 좋다. 네놈이 나의 삼장(三掌)받아낼 수 있다면 모두 살려보
내 주겠다!"
"소생은 귀파 제자의 일장도 감당해 낼 수가 없는데, 어떻게 사
태님의 삼장을 받아낼 수 있겠습니까? 겨뤄 볼 엄두조차 나지 않
습니다. 오직 바라옵건데, 자비심을 베풀어 이 사람들을 살려 주
십시오."
오경초가 큰 소리로 외쳤다.
"증상공, 이 늙은 도적승과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
린 죽으면 죽었지 그의 거짓된 자비심을 받고 싶지 않습니다."
멸절사태는 장무기를 노려보며 물었다.
"너의 스승은 누구냐?"
장무기는 아버지나 의부한테 무공을 배운 적은 있지만 그들을
자기의 스승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저의 스승은 없습니다."
뜻밖의 대답에 모두들 놀라는 표정이었다. 그들은 장무기가 정
현사태를 진퇴시킨 것을 보고 필시 어느 고인의 제자라고 생각했
던 것이다.
사실 무림에서는 사도(師道)를 제일 존중한다. 가끔 자기의 스
승 이름을 밝히지 않는 피치 못할 경우도 있지만, 있는 스승을
없다고는 절대 하지 않는다. 그래서 장무기가 스승이 없다고 하
니, 그것은 분명한 사실일 것이라고 믿었다.
"자, 내 초식을 받아라!"
멸절사태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가볍게 일장을 떨
쳐냈다.
장무기는 도저히 그의 장풍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정
신을 바짝 차리고 두 손을 내밀어 정면으로 그의 장풍을 막았다.
그러나 자기를 향해 뻗쳐오던 멸절사태의 손이 갑자기 밑으로 미
끄러지며 마치 물고기처럼 장무기의 두 손 사이로 빠져나가 탁!
하고 가슴을 후려치는 것이었다.
장무기는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기의 체내의 구양진공
이 자연적으로 멸절사태의 장풍과 부딪치려는 찰나 갑자기 멸절
사태의 손이 밑으로 빠져나가자 어떻게 할 줄 몰라 멈칫거리는
순간, 쇠망치와 같은 엄청난 힘이 자기의 가슴을 후려친 것이다.
장무기는 벌렁 뒤로 나동그라지며 입에서 선혈을 토했다.
멸절사태도 장력을 자유자재로 뻗고 거두고 했던 것이다. 그녀
는 일단 상대의 내력을 유도해 내고 나서 그 빈틈을 타 다서 내
력을 뻗은 것이다. 실로 내가(內家) 무학 중에서도 제일 오묘한
수법이었다.
그의 그런 묘수에 모두는 갈채를 보냈다. 주아는 크게 놀라며
뛰어가 장무기를 부축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무릎이 마비되며 쓰
러지고 말았다. 그녀는 장무기가 당하는 것을 보자 마음이 급해
뛰쳐나갔지만 아직 혈도가 완전히 풀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아우 오빠.....!"
장무기는 가슴으로부터 뜨거운 피가 거꾸로 솟구쳐 오르는 느낌
이었다. 그러나 그는 주아를 향해 손을 휘젓휘젓 흔들었다.
"난 괜찮아. 죽을 정도는 아니니까!"
그러면서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이 남은 요인들의 오른팔을 모두 잘라 버려라!"
하는 멸절사태의 소리가 들려왔다. 장무기는 다급하게 소리쳤
다.
"당신의 장풍을 세 번 받아내면 이 사람들을 모두 살려 주겠다
고 약속하지 않았소!? 아직 두 번 남았소이다!"
멸절사태는 일장을 뻗고 나서 예측한 대로 장무기의 내력이 심
후한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장무기가 절대로 이 요사들과
한패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심지어 이 소년의 내력이 자기가
배운 것과 비슷하다는 느낌마저도 들었다. 그것은 실로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었다. 멸절사태는 장무기를 무섭게 쏘아보았다.
"너하고 상관없는 일에 끼어들지 말아라. 넌 비록 나이가 어리
지만 옳고 그릇된 것은 분별해야 할 게 아니냐? 방금 전개한 일
장은 단지 삼성(三成)의 공력밖에 사용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아느냐?"
장무기는 가가 한 문파의 장문인으로서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
을 것이라 믿고 있었다. 처음 일장에 삼 성의 공력을 사용했으니
두 번째는 그보다 더 웅후한 공력을 전개할 게 뻔했다. 그로서는
도저히 감당해 낼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순순히 물러날
장무기가 아니었다. 예금기의 사람들이 제대로 반항도 못한 채
난도질 당하는 것을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장무기는 이를 악물
었다.
"분수를 모르는 놈이라 비웃어도 좋으니, 다시..... 다시 사태
님의 장력을 받아 보겠습니다!"
다급해진 것을 오히려 오경초였다. 그는 황급히 소리쳤다.
"증상공! 우린 상공의 은덕에 깊이 감사를 하고 있소. 그 의협
심에 탄복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오. 그러니 더 이상 무모한
행동을 하지 말아 주시오!"
한편, 멸절사태는 주아가 장무기 옆에 쓰러져 있는 것을 보자
눈에 거슬리는지 왼쪽 소매를 살짝 떨쳤다. 그 즉시 주아의 몸이
그의 소매에 말려 뒤쪽으로 날아갔다. 주지약이 얼른 앞으로 한
걸음 내딛어 그녀의 몸을 받아 천천히 땅에 내려놓았다.
주지약이라는 것을 확인한 주아가 급해 소리쳤다.
"주 언니, 그가 무모한 짓을 못하게끔 말려 주세요. 언니가 만
류하면 틀림없이 들을 거예요!"
주지약은 멍해졌다.
"그가 왜 내 말을 듣는다는 거죠?"
"그는 마음 속으로 언니를 좋아하고 있기 때문이예요. 언니는
그것을 모르고 있나요?""
주지약은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그럴 리가 없어요."
이때 멸절사태의 냉랭한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네가 정녕 영웅호걸의 흉내를 내겠다면, 스스로 죽음을 재촉하
는 것과 다를 바 없으니 저승에 가서라도 날 원망하지 말아라!"
말을 내뱉기 무섭게 그녀의 오른손이 허공에 떨쳐졌다. 거기에
따라 날카로운 바람소리가 일며 한 갈래의 무지막지한 힘줄기가
장무기의 가슴팍으로 향해 휘몰아쳐 갔다.
장무기는 이번에 감히 정면으로 맞설 엄두를 내지 못하고 옆으
로 미끄러지면서 그녀의 장풍을 피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뜻대
로 될 리가 만무했다. 멸절사태의 오른팔이 곡선을 그리며 급회
전되더니 도저히 불가능한 각도에서 가로 뻗쳐왔다. 팍! 그녀의
장풍이 정확하게 장무기의 등줄기를 강타했다. 순간, 장무기의
몸뚱아리는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처럼 허공을 붕 떠올라 급속도
로 땅에 떨어졌다. 모래밭에 묻히듯이 쓰러진 장무기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숨이 끊어진 것 같았다.
멸절사태가 전개한 이 초식은 절묘하기 이를데 없어 주위에서
갈채가 터져나와야 마땅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장무기의 협의지
심에 내심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는 터라 그가 불행을 당하자 놀
란 외침을 토하거나 탄식을 할 뿐 좋다고 법석을 떠는 자는 없었
다.
가장 안타까와하는 것은 역시 주아였다.
"주 언니, 제발 부탁이예요. 지금 죽어가고 있을지도 모르니 어
서 가서 보살펴 주세요!"
그렇지 않아도 주지약은 가슴이 철렁했다. 더욱이 주아의 간곡
한 부탁을 듣자 당장 달려가고 싶었다. 그러나 많은 눈이 지켜보
는 가운데 다 큰 처녀가 한 젊은이의 상세를 보살펴 준다는 것은
쑥스러운 일이었다. 게다가 자기 스승님에 의해 젊은이가 부상을
당했으니, 달려나간다면 설령 사문에 대한 배반 행위가 아니라
해도 스승님에 대한 불경임에 틀림없는 일이었다. 하여, 그녀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 내딛다가 다시 움츠렸다.
이 즈음, 날이 환하게 밝아와 눈부신 햇살이 사장(沙場)에 뿌려
졌다. 그 찬란한 햇살 아래 장무기가 쓰러져 있었다. 향 반 자루
가 타는 시간이 경과되자 장무기의 몸이 꿈지락거리더니 곧 안간
힘을 쓰며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그러나 팔로 몸을 버티는 순간
울컥 한 모금의 선혈을 토하며 다시 스러졌다. 그는 의식이 흐릿
했다. 사지를 축 늘어뜨린 채 그냥 누워 있고만 싶었다. 그러나
아직 일장을 더 받아내야 예금기의 사람들을 살릴 수 있다는 생
각만은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마지막 한 모금의 숨이 남아 있는 한 그는 버텨야만 했다. 그는
길에 숨을 들이키며 끝내 몸을 일으켜 앉았다. 하지만 고주망태
가 된 것처럼 상체가 흐느적거리며 언제라도 다시 고꾸라질 것만
같았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숨을 죽인 채 그를 주시했
다. 주위엔 수백 명이 서 있었지만 바늘이 떨어져도 그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시간마저 정지된 듯한 이 조용한 순간에 장무기는 불현듯 구양
진경에 적혀 있는 몇 마디가 뇌리에 떠올랐다.
----- 강하면 강한 대로 내버려 둘지어다. 바람은 산을 훑고 지
나가느니라, 사나우면 사나운 대로 내버려 둘지어다. 달빛이 강
을 어루만지느니라. -----
골짜기에 있을 당시엔 이 몇 마디에 담긴 참뜻을 이해할 수 없
었다. 한데 이 생사의 갈림길에서 불현듯 깨달은 것이다. 멸절사
태는 강하고 사나워 자기로선 도저히 적수가 될 수 없었다. 그런
데 구양진경에 수록된 그 참뜻은 상대가 제 아무리 강하고 사나
워도 산을 훑고 가는 바람과 강을 어루만지는 달빛으로 생각하라
는 것이다. 아무리 절대적인 힘이라 할지라도 단지 스쳐갈 뿐 파
괴를 하진 못할 것이다.
장무기는 경문의 다음 귀절을 떠올렸다.
----- 상대가 아무리 강해도 나는 한 모금의 진기로 대항할지어
다. -----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막힌 강둑이 터지듯 지혜의 물결이 그의
온몸을 휘감았다. 그는 단정히 가부좌를 틀고 앉아 경문에 수록
된 방법에 따라 운공조식(運功調息)하자, 단전으로 부터 훈훈한
기운이 용트림하며 삽시간에 사지백해로 번져 나갔다. 구양진경
의 진정한 위력이 비로소 그 진면목을 드러낸 것이다. 그는 피를
토할 정도로 심한 외상을 입었지만 내력과 진기는 전혀 손상을
입지 않았다.
멸절사태는 그가 스스로 운공료상(運功療傷)하는 것을 보자 과
연 범상치 않은 소년이라 생각하며 내심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가 처음 전개한 일장은 표설천운장의 한 초식이며, 두 번째로 전
개한 것은 절수구식(截手九式) 중에 제 삼식으로써, 모두 아미파
장법의 정예였다.
첫 번째 출수에는 삼 성의 공력밖에 사용하지 않았지만 두 번째
는 공력을 칠 성으로 끌어올려 설령 장무기를 죽이지 못한다 해
도 전신의 뼈마디가 으스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이라 믿었
다. 그런데 지금 버젓이 책상다리를 한 채 운공조식을 하고 있으
니 뜻밖이 아닐 수 없었다.
이때 정민군이 큰 소리로 외쳤다.
"이봐, 증가야! 나의 스승님의 세 번째 장력을 받을 자신이 없
으면 일찌감치 멀리 꺼져 버려라! 네가 거기 쪼그리고 앉아 평생
토록 운공조식을 한다면 우리도 평생토록 기다려야 한단 말이
냐?"
주지약이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나직이 말했다.
"조금 더 쉬도록 내버려 둬도 상관 없잖아요?"
정민군은 대뜸 눈을 부라렸다.
"뭐라고? 네가 우리의 적을 감싸다니 혹시 저 녀석에게....."
그녀는 원래 모독적인 말을 내뱉으려 했다. 그러나 주위에 많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의식해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주위 사
람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그녀의 말뜻을 알아차리지 못할 리 없
었다.
주지약은 부끄럽고 당황해져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한데, 그
녀는 변명을 하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소매는 단지 본문과 사존의 위명을 생각해 다른 사람들의 입에
서 쓸데없는 말이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 한 말씀 드린것 뿐이예
요."
정민군은 아연해졌다.
"쓸데없는 말이라니?"
주지약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분문의 무학은 이미 천하에 그 명성을 날리고 있어요. 게다가
스승님은 당세에서 으뜸을 다투는 선배고인이시니, 저런 젊은 후
배에게 출수하는 것조차 위신에 손상될 거예요. 단지 그가 워낙
건방지고 겁없이 날뛰는 바람에 윗어른으로서 훈계를 하려는 것
이지 정말 그의 목숨을 앗아가겠어요? 본문의 협의지도(俠義之
道)는 이미 백 년을 이어왔으며, 스승님의 너그러움 또한 모르는
자가 없어요. 저 젊은이는 한낱 촛불에 불과하니 어찌 일월(日
月)과 같으신 스승님과 비교가 되겠어요? 그가 설령 앞으로 백
년 동안 무공을 연마한다 해도 역시 우리 스승님의 적수가 되지
못할 거예요. 그러니 운공조식을 조금 더 한들 무슨 상관이 있겠
어요?"
그녀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것
같았다. 멸절사태는 더욱이 기뻐했다. 이 작은 제자가 각파의 고
수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본문을 널리 빛낸 것이라 생각했다.
체내에 진기가 유전(流轉)하자 장무기는 이내 정신이 맑아졌다.
그는 주지약의 말을 한 마디도 빠짐없이 귀담아 들을 수가 있었
다. 그녀가 자기를 위해 스승님으로 하여금 살수를 전개하지 못
하도록 미리 말로서 묶어놓은 것이다. 장무기는 내심 감격하며
곧 몸을 일으켰다.
"사태님, 소생은 끝내 군자를 흉내내야겠으니 마지막 남은 일장
을 마저 전개해 주시오."
멸절사태는 그가 짧은 시간 동안 운공조식을 하여 멀쩡하게 회
복되자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이 녀석의 내력은 정말 불가사의하군. 대관절 어디서 저런 내
력을 쌓은 것일까?'
"넌 왜 나한테 공격을 하지 않느냐?"
장무기는 고개를 내둘렀다.
"소생의 이 쥐꼬리만한 무공으로는 사태의 옷자락조차 건드리지
못할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반격을 할 수 있겠습니까?"
멸절사태는 냉소를 날렸다.
"네 주재를 안다면 일찌감치 떠나야 할 게 아니냐? 내 손아귀에
서 살아남은 사람이 없다만, 오늘 만큼은 너의 그 젊은 패기를
높이 평가해 파격적으로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장무기는 예의를 잃지 않았다. 그는 정중하게 몸을 숙였다.
"호의에 우선 감사를 드립니다. 이 예금기의 사람들에게도 자비
를 베푸시는 겁니까?"
멸절사태의 축 늘어진 눈썹이 더욱 아래로 처졌다. 그는 엉뚱한
질문을 했다.
"나의 법명이 무엇인지 알고 있느냐?"
"선배님의 법명은 '멸'자, '절'자로 알고 있습니다."
"그걸 알면 됐다. 사악한 무리들을 멸절시키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다. 그렇지 못한다면 멸절이란 법명을 벌써 바꾸었을 것
이다."
장무기는 더 이상 말해 보았자 시간 낭비임을 알았다.
"정녕 그러하시다면 어서 세 번째 장풍을 발출하십시오."
멸절사태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녀
로선 여지껏 이렇게 완고한 젊은이를 본 적이 없었다. 항상 마음
이 얼음장처럼 차가운 그녀지만 문득 연민의 정을 느꼈다.
'내가 세 번째 장풍을 격출하면 틀림없이 죽게 될 것이다. 보아
하니 사악한 무리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 같은데, 젊은 나이
에 이대로 죽는다면 너무 아까운 일이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한 가지 결정을 내렸다. 세 번째 출수
는 장무기의 단전 요혈(要穴)을 노릴 작정이었다. 내력을 적당하
게 전개해 그의 단전을 격타하면 즉시 숨이 막혀 정신을 잃게 될
것이다. 물론 생명에는 지장이 없으므로 마교 예금기의 무리들을
전부 처치한 후에 다시 정신이 들게 할 심산이었던 것이다.
그녀가 왼쪽 소매를 떨치며 막 출수를 하려는데 홀연 이상한 외
침이 들려왔다.
"멸절사태, 잠깐만 손을 거두시오!"
이 음성은 흡사 뾰족한 바늘처럼 듣는이의 고막을 찔렀다. 꼬집
어 이유를 말할 수 없지만 모두들 꺼림직했다.
여럿의 시선이 집중돼 있는 가운데 서북쪽으로부터 흰 장삼을
입은 남자가 손에 쥘부채를 흔들며 느긋하게 걸어나왔다. 걸음을
내딛음에 있어 먼지 한 점 일지 않고 마치 구름에 달가듯 하였
다. 이 백의인의 옷깃 왼쪽에 날개를 활짝 편 작은 검은 독수리
가 수놓아져 있었다. 그것만 보아도 천응교의 지위가 높은 인물
이라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알고보니, 천응교도의 복장은
명교와 같이 흰 장삼이었다. 단지 명교도의 장삼에 붉은 불길이
수놓아져 있는데 반해 천응교는 한 마리의 검은 독수리가 수놓아
져 있었다.
백의인은 멸절사태와 삼 장의 간격을 두고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운 채 공수의 예를 취했다.
"사태, 공연히 끼어들어 미안하오만 그 세 번째 장풍을 이 몸이
대신 받으면 어떻겠소?"
멸절사태는 자질구레한 말을 늘어놓지 않았다.
"그렇게 말하는 그대는 대관절 누구요?"
백의인의 대답도 간단했다.
"성은 은(殷), 자는 야왕(野王)이라 하외다."
은야왕! 군호들은 이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명성이 강호
에 알려진 것은 이미 이십 년 전의 일이었다. 무림인들은 그의
무공이 부친인 백미응왕 은천정과 거의 비슷하다고들 말했다. 그
는 천응교 천마당의 당주로서 바로 교주 다음가는 권좌였다.
멸절사태는 날카롭게 그를 훑어보았다. 나이는 줄잡아 사십, 눈
에서 쏟아지는 정광만 보아도 내공이 상당한 수준에 달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멸절사태는 그를 감히 얕잡아볼 수 없었
다. 더군다나 그의 명성을 익히 들었던 터라 냉랭하게 물었다.
"이 녀석이 당신과 무슨 관계가 있다고 대신 일장을 받겠다는
거요!"
장무기는 속으로 외쳤다.
'그는 나의 외삼촌이요! 외삼촌! 혹시 그가 날 알아본게 아닐
까!'
은야왕은 한바탕 웃음을 터뜨리고 나서 말했다.
"난 그와 생면부지요. 그러나 그가 젊은 나이에 그 협의지심을
내세워 온갖 추잡한 짓을 자행하는 작자들과는 달리 진정한 장부
의 기개를 지녔기에 도와주려는 것뿐이오. 그리고 사태의 공력이
어느 정도인지도 한 번 확인해 보고 싶었소."
그의 마지막 한 마디는 실로 당돌하며 멸절사태를 안중에 두지
않는 것 같았다.
멸절사태는 별로 화를 내지 않고 장무기에게 말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몇 년 더 살고 싶으면 어서 떠나거
라!"
장무기의 태도는 너무나 단호했다.
"소생은 죽음 따위가 두려워 의리를 저버리진 않습니다!"
멸절사태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나서 이번에는 은야왕에게
말했다.
"이 녀석은 아직 나에게 일장을 빚진 것이 있소. 우선 이 쪽 빚
을 청산하고 나서 귀하를 실망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하겠소."
은야왕의 입가에 묘한 웃음이 스쳐지나갔다.
"멸절사태, 그렇게도 자신의 실력을 과시하고 싶으면 이 소년을
죽여도 좋소. 그 대신 만약 이 소년이 죽으면 아미파의 사람도
모조리 이곳에 뼈를 묻히게 될 것이오!"
말을 끝낸 그는 즉시 표연히 뒤로 물러나 짤막하게 외쳤다.
"나와라!"
그의 외침을 신호로 하여 돌연 모래를 뚫고 무수한 사람머리가
솟아나왔다. 그들은 각자 방패 하나를 앞에다 세우고 시위에 화
살을 걸어 군호들을 겨냥했다. 천응교의 제자들은 모래 속에 땅
굴을 뚫어 벌써 군호들을 겹겹이 포위하고 있었던 것이다.
군호들은 멸절사태와 장무기의 장풍 대결에 정신이 팔려 다른데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송청서 등 조심성이 많은 사람들도 단
지 천응교도들의 기습에만 대비했을 뿐 그들이 부드러운 사토(沙
土)를 이용해 삽시간에 땅굴을 뚫으리라곤 미처 생각지 못했다.
이렇게 되자 군호들은 모두 안색이 변했다. 화살 촉이 햇볕 아
래 파르스름한 빛을 발하는 것으로 미루어 맹독이 묻어 있는 게
분명했다. 이런 상황하에서 만약 은야왕이 공격 명령을 내린다면
각 문파의 무공이 고절한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생명을 잃을 위험이 있을 것이다.
멸절사태의 성격은 매우 고집스러운데다가 오기 또한 대단했다.
그는 눈앞의 상황이 불리하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장무기에게 독살스럽게 말했다.
"이놈! 저승에 가서라도 날 원망 말아라!"
갑자기 그녀의 몸에서 으드득 하는 소리가 연거푸 들리며 마치
전신의 뼈마디가 모조리 으스러지는 것 같았다. 그 소리가 들리
는 가운데 오른손을 장무기의 가슴을 향해 격출해냈다. 이 일장
은 바로 아미파의 절학으로서 불광보조(佛光普照)였다.
어떠한 장법, 혹은 검법이라 할지라도 여러 개의 동작이 이어짐
으로서 하나의 완벽한 형태가 이루어진다. 많은 것은 수백 초식
에 이르며, 최소한 서너 초식은 갖추고 있기 마련이다. 게다가
매 초식마다 변화가 숨겨져 있어 그 세세함을 따진다면 최소한
십여 개의 동작을 주시해야만 한다.
그러나 불광보조의 장법은 오직 한 초식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
한 초식은 별다른 변화도 없었다. 일 초식을 쭉 뻗어내 상대방의
가슴팍을 노리든, 등줄기를 노리든, 아니면 어깨 혹은 면상을 노
리든 간에 초식 자체는 평범할 뿐 기교는 전혀 담겨져 있지 않
다. 하지만 그 위력은 아미구양공에 바탕을 둔 것이니 만치 불가
사의했다.
일단 일장을 전개하면 적은 도저히 막을 수도 없고, 피할 재간
도 없게 된다. 다시 말해, 어떠한 상황하에서도 그 위력의 테두
리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당금 아미파에서도 멸절사태를 제
외하고 이 초식을 구사할 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멸절사태는 본디 장무기의 단전을 공격해 잠시 그로 하여금 정
신을 잃게끔 만들려 했다. 그러나 은야왕이 나서서 노골적인 위
협을 하는 바람에, 오기로 뭉쳐진 멸절사태는 생각을 달리하게
된 것이다.
그녀의 성깔로선 당연한 일이었다. 만약 처음 생각대로 장무기
에게 관대함을 베푼다면 은야왕의 위협에 굴복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일장을 장무기의 목숨을 거두기로 작정한
것이다.
한편, 장무기는 그녀의 전신 뼈마디가 으스러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자 본능적으로 자신이 생사존망의 기로에 놓이게 된 사실을
감지했다. 바로 이 순간 경문의 한 귀절을 다시 뇌리에 떠올렸
다.
----- 상대가 아무리 강해도 나는 한 모금의 진기로 대항할지어
다. -----
그의 생각은 곧장 행동으로 옮겨갔다. 그는 피하거나 정면으로
맞설 생각을 않고 한 갈래의 진기를 흉복(胸腹)으로 끌어모았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펑!
하는 굉음이 터지며 멸절사태의 일장이 정확하게 장무기의 가슴
팍을 강타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일제히 놀란 외침을 토했다. 장무기는 영
락없이 전신의 뼈마디가 산산조각으로 으스러지거나, 아니면 몸
뚱아리가 사분오열될 것이라 생각했다. 한데 모든 사람의 생각이
빗나가고 말았다. 장무기는 비록 만면에 의아한 빛이 역력했지만
멀쩡하게 서 있었고, 오히려 멸절사태의 안색이 죽은 송장의 낯
가죽처럼 잿빛으로 변해 있는 게 아닌가! 게다가 허공에 들어올
린 그 오른손마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알고보면 이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멸절사태의 불광보조 초식
이 아미구양공에 바탕을 둔 것에 반해, 장무기가 연마한 것은 그
뿌리가 되는 구양신공이 아닌가!
아미구양공은 왕년에 곽양이 각원대사가 읊조린 구양진경의 귀
절을 주어 들어 나름대로 편성한 것이니 진정한 구양신공과 비교
해 위력이 판이하게 달랐다. 물론 당사자의 내공에 따라 위력의
높낮음이 있겠지만 본질은 같았다. 아미구양공이 구양진공과 맞
부딪치게 되자 흡사 강물이 바다로 유입되듯 이내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멸절사태가 앞서 전개한 표설천운장과 절수구식은 구양신공에
속한 무학이 아니므로 장무기로 하여금 부상을 입고 피를 토하게
한 것이다.
이것은 당연한 이치인데도 불구하고 지금 그것을 깨닫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장무기는 물론 망연자실했고 멸절사태 역시 상대
방의 내력이 워낙 심후하여 부상을 입지 않은 것이라 단정할 수
밖에 없었다.
주위에 있는 수백 명은 나름대로 더욱 합리적으로 생각했다. 멸
절사태가 젊은 인재에 대해 연민의 정을 느꼈으며 오파의 사람들
이 천응교의 독화살에 희생되는 것을 원치 않아 취한 행동이라고
풀이했다. 물론 일부분의 사람은 멸절사태가 겁을 집어먹고 은야
왕의 위협에 굴복한 것이라 생각하기도 했다.
장무기는 몸을 숙여 읍을 했다.
"사태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신데 대하여 사의를 표합니다."
멸절사태는 어색한 입장을 감추려는 듯 연방 냉소를 날렸다. 그
녀는 장무기에게 다시 공격을 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대로 순순히 천응교에게 굴복하기에는 심사가 뒤틀렸다.
그녀가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주춤하는 사이에 은야왕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역시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하는 자가 현명한 자요. 멸절사태는
과연 소문에 듣던 대로 당세의 고인이구료."
그는 즉시 명령을 내렸다.
"활을 거두어라!"
천응교의 교도들은 즉각 몸을 굴리며 뒤로 물러났다. 거기에 따
라 방패와 즐비한 활이 질서정연하게 이동되었다. 은야왕은 병법
(兵法)에 대하여 깊은 조예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멸절사태는 어느 때보다도 입장이 난처했다. 자기가 일부러 장
무기에게 자비를 베푼 것이 아니라고 변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
다. 설령 침을 튀기며 변명한다 해도 군호들은 믿지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의 고지식한 성깔로 누구에게 변명 따위를 할 수도
없었다. 그는 장무기를 한 차례 무섭게 쏘아 보고 나서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은야왕! 정녕 내 장력을 시험해 보고 싶다면 당장 앞으로 나오
시오!"
은야왕은 입가에 미소를 걸고 공수의 예를 취했다.
"오늘은 사태께서 나의 체면을 살려 주셨는데 어찌 무례한 행동
을 할 수 있겠소. 다음에 필시 기회가 있을 것이외다."
멸절사태는 손을 획 내두르더니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제자들을
이끌고 서쪽을 향해 떠나갔다. 곤륜, 화산, 공동 각 문파의 사람
들과 은이정, 송청서도 곧 뒤를 따랐다.
주아는 아직 혈도가 풀리지 않아 걸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다
급히 장무기에게 외쳤다.
"어서 날 데리고 이곳을 떠나세요!"
그녀는 은야왕과의 대면을 피하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장무기
는 은야왕과 그냥 헤어질 수가 없었다.
"잠깐만 기다려요."
그는 곧 은야왕에게 다가갔다.
"선배님, 도움을 주신 은혜를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은야왕은 그의 손을 잡고 유심히 살피며 물었다.
"너의 성이 증이냐?"
장무기는 당장 그의 품안으로 뛰어들어 '삼촌!'하고 외치고 싶
었다. 그러나 끝내 자신의 감정을 억제했다. 그러자니 눈시울만
붉어졌다. 외숙을 대하기를 어머니같이 하라는 말이 있다. 무기
는 부모를 잃은 후 은야왕이야말로 십 년 만에 처음 대하는 혈육
이었다. 북받치는 감정을 억제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은야왕도 그의 격앙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도
와준데에 대한 고마워하는 감정이려니 생각했다. 그의 눈빛은 장
무기로부터 땅에 누워 있는 주아에게로 옮겨지더니 빙긋이 웃으
며 말했다.
"아리야. 그 동안 잘 있었느냐?"
번쩍 고개를 쳐드는 주아의 눈엔 원독(怨毒)이 가득했다. 그러
나 곧 고개를 힘없이 떨구어 잠시 동안 입술을 움직이더니 나직
하게 불렀다..
"아버지!"
그 한 마디를 듣는 순간 장무기는 쇠뭉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멍해졌다. 그의 뇌리엔 여러 가지 생각이 한데 어우러져 주마
등처럼 돌아갔다. 그러자 먹장구름을 뚫고 햇볕이 쨍 하고 비치
듯 일순간에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제 보니 주아는 외삼촌의 딸이었군. 그렇다면 나의 사촌동생
이 되는 셈이고..... 그녀는 작은 어머니를 죽였고 생모마저 죽
게 만들었으며, 아버지가 자기만 보면 죽이려 한다는 것도.....
맞아! 그녀는 천주만독수를 전개해 은무록에게 부상을 입혔다.
그들 형제는 주인의 뜻에 따라야 하니 주아 모녀에게 푸대접을
한 모양이군. 은무복과 은무수는 비록 그녀에 대한 미운 감정이
끓어올랐지만 직접 손을 쓸 수는 없었겠지. 그래서 '셋째 아가씨
였군' 하는 말을 남긴 채 은무록을 안고 떠나갔던 거야.....!'
그는 새삼 주아를 유심히 살피며 다시 깨닫는 바가 있었다.
'어쩐지 그의 거동이 어머니를 닮았다고 느꼈는데 역시 나하고
는 한 핏줄이며, 나의 어머니가 바로 그의 친고모가 되는 셈이
군.'
이때 은야왕의 냉소가 들려왔다.
"넌 아직도 날 애비라 생각하고 있느냐? 흠! 난 네가 금화파파
를 따라간 후로부터 애비와 천응교를 완전히 잊은 줄로만 알았
다. 못된 것 같으니라고, 네 어미와 어쩌면 그렇게도 닮았느냐?
그 무슨 천주만독수를 연마한다고? 흥! 거울이 있으면 너의 꼬락
서니 좀 비쳐보아라. 그 꼴이 뭐냐? 우리 은씨 집안엔 너 같은
못난이가 없다."
주아는 원래 겁을 집어먹고 벌벌 떨었으나 갑자기 고개를 쳐들
어 똑바로 부친을 응시하며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아버님이 지난 일을 언급하시지 않았다면 저도 들춰내지 않을
거예요. 이왕지사 얘기가 나온 김에 한 가지 분명히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왜 버젓이 어머님을 아내로 맞았으면서도 다시 작은
어머니를 끌어들였죠?"
은야왕은 대뜸 눈을 부라리며 발끈했다.
"이런..... 이런..... 죽일 년이 있나? 사내 대장부 치고 삼처
사첩(三妻四妾)을 거느리지 않는 놈이 어디 있느냐? 너는 천륜을
거역하는 불효를 저질렀으면서도 뉘우치기는 커녕 오히려 어른들
이 하는 일에 미주알고주알 하니 이젠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
그는 즉시 손을 휘둘러 은무록, 은무수에게 명했다.
"이 계집을 데려가라!"
장무기는 얼른 주아의 앞을 가로막았다.
"잠깐만요! 은..... 선배님, 은 낭자를 어떻게 하실 생각이죠?"
은야왕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었다.
"저 계집은 내 친딸이지만 서모를 살해하고 생모마저 죽게 만들
었으니, 저런 짐승만도 못한 것을 어찌 살려 둘 수가 있겠는가?"
장무기가 얼른 주아를 위해 변명을 해 주었다.
"그 당시 은낭자는 나이가 어려 철이 없는 탓으로, 모친이 푸대
접을 받는다는 단순한 생각에 그만 엄청난 일을 저지른 것 같으
니 선배님께선 부녀의 정분을 생각하셔 가벼운 벌로 다스려 주십
시오."
은야왕은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하하핫..... 넌 대관절 뭐하는 녀석인데 모든 일에 참견을 하
려는 거냐? 이것은 엄연히 우리 집안 일이야. 네가 정말 모든 일
에 관여할 자격이 있는 무림지존이라도 된단 말이냐?"
장무기의 마음이 다시 격동되었다.
---- 저는 남이 아니예요! 저는 바로 당신의 생질입니다! ----
장무기는 목이 터져라 소리치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은야왕이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말했다.
"이놈아, 넌 오늘 목숨을 그냥 주워온 거나 다름없다. 앞으로도
계속 강호의 일에 끼어들어 참견을 한다면 모가지가 열 개 있어
도 모자랄 것이다."
이렇게 말하며 다시 손을 떨쳐보이자 은무복과 은무수가 주아를
번쩍 들어올려 은야왕의 등 뒤로 데려갔다.
장무기는 다급해졌다. 주아가 이런 상태로 잡혀간다면 십중팔구
요행을 바라지 못할 것이다. 장무기는 자세히 생각할 겨를도 없
이 앞으로 뛰쳐나갔다. 오직 주아를 빼앗아 와야겠다는 일념뿐이
었다. 은야왕은 대뜸 눈살을 찌푸리며 왼손을 쭉 뻗어내 그의 멱
살을 잡고 살짝 밖으로 던져냈다. 거기에 따라 장무기의 몸이 포
물선을 그리며 날아가 모래사장에 떨어졌다. 그는 구양신공으로
몸을 호위하고 있으므로 부상을 입지 않았지만 눈, 코, 입, 귀에
모래가 들어가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
나 다시 앞으로 달려왔다.
은야왕은 코웃음을 쳤다.
"이놈아, 첫번이라 사정을 봐 줬지만 다시 시건방지게 남의 집
안일을 참견한다면 용서치 않을 것이다!"
장무기는 애원을 했다.
"그녀는..... 선배님의 딸이 아닙니까? 그녀가 어렸을 때 선배
님은 안아도 주고 몹시 귀여워했을 겁니다. 제발 그녀를 용서해
주십시오."
은야왕은 그의 말에 마음이 동요됐는지 짤막하게 숨을 들이키며
다시 주아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러나 그녀의 푸르퉁퉁하게 부어
오른 얼굴을 보자 절로 혐오감이 생겨 차갑게 소리쳤다.
"저리 비켜라!"
장무기는 오히려 앞으로 한 걸음 내딛으며 제자 주아를 빼앗아
오려 했다. 이번에는 주아가 그의 도움을 거절했다.
"아우 오빠, 날 내버려 두세요. 오빠가 날 잘 대해 준 것은 잊
지 않을 거예요. 어서 떠나세요. 오빠는 나의 아버님의 적수가
되지 못해요!"
바로 이때였다. 황사 속에서 느닷없이 한 사람이 치솟아 올라
다짜고짜 은무복과 은무수의 목덜미를 잡아 냅다 박치기를 시켜
버렸다. 전혀 예측하지 못한 변화였다. 은무복 형제같은 내노라
하는 고수들도 아예 손 한 번 못 써보고 서로 머리를 부딪쳐 그
자리에서 기절해 버렸다.
갑작스러운 변화는 그것으로서 끝나지 않았다. 불현듯 나타난
자는 잽싸게 주아를 안아 올리더니 질풍처럼 달아났다.
은야왕은 즉시 성난 음성으로 외쳤다.
"위복왕! 너도 남의 집안일에 참견할 작정이냐?"
청익복왕 위일소는 광소를 날리며 주아를 안은 채 계속 앞으로
질주해 갔다. 그의 이름은 일소(一笑)지만 결코 그의 웃음은 일
소(一笑)로 끝나지 않았다. 그의 광소는 계속 이어지며 메아리쳐
퍼졌다.
은야왕과 장무기는 일제히 신법을 전개해 뒤쫓아갔다.
그러자 위일소는 일부러 원을 그리며 돌지 않고 곧장 서쪽을 향
해 날을 듯이 달려갔다. 그의 신속무비한 신법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은야왕은 내력(內力)이 심후하여 경공 또한 뛰어났다. 그리고
장무기는 체내에 구양진기가 흐르고 있어 달릴수록 그 속도가 빨
라졌다. 하지만 속도로 따진다면 역시 위일소가 한 수 위였다.
처음에 쌍방의 간격은 서너 장에 불과했지만 갈수록 멀어져 나중
에는 이십 장, 삼십 장으로 벌어지더니 끝내 그림자마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은야왕은 화가 치밀어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는 장무기가 자기
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달리며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자 내심 놀
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는 도저히 위일소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장무기의 경공을 시험해 볼 생각으로 내력을 끌어
올렸다. 그러자 그의 몸은 시위에서 벗어난 화살처럼 튕겨져 나
갔다. 그런데도 장무기는 시종 그림자처럼 그의 보조를 나란히
했다. 달리는 도중에 홀연 장무기가 입을 열었다.
"은 선배님, 청익복왕의 경공술이 뛰어났다 해도 오래 버티는
뚝심은 그렇지 않을지도 몰라요. 그러니 우리가 끝까지 쫓아간다
면 틀림없이 따라잡을 수 있을 겁니다."
은야왕은 흠칫 놀라 즉시 걸음을 멈추고 내심 중얼거렸다.
'나는 평생 동안 쌓아올린 내공을 끌어올려 경공을 전개했기 때
문에 입을 열어 말을 하는 것은 고사하고 숨을 다시 들이킬 수도
없었는데, 이 녀석은 날 따라오면서도 태연하게 말을 하니 이게
대관절 무슨 무공이란 말인가?'
그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는 바람에 장무기는 몇 장 밖으로 미끄
러져 나가서야 얼른 고개를 돌려 다시 은야왕 곁으로 되돌아왔
다.
은야왕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좀전과는 달리 말을 약간 높여 물
었다.
"증형제, 자네의 사부님은 어느 고인인가?"
장무기는 황급히 두 손을 내두르며 당치도 않다는 표정을 지었
다.
"아..... 안 됩니다. 절대 저를 형제라 부르지 마십시오. 저는
어디까지나 후배입니다. 얼마 전에 멸절사태에게도 말했지만 저
에게는 스승이 없습니다."
바로 이때 멀리서 갑자기 날카로운 호각소리가 들려왔다. 은야
왕은 이내 안색이 변했다. 호각소리는 바로 천응교에 비상 사태
가 생겼다는 신호였다.
'틀림없이 홍수, 열화기의 녀석들이 내가 예금기를 도와주지 않
았다고 트집을 잡아 한바탕 벌인 모양이군. 이 녀석을 살려두면
나중에 우리에게 화근이 될 텐데..... 그렇다고 해서 지금 당장
죽이기엔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고..... 그래! 녀석이 혼자서
위일소를 쫓아가면 자연히 죽게 되겠지.....'
그는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천응교가 강적을 만난 모양이니 난 속히 돌아가 봐야겠네. 자
네 혼자서 위일소를 쫓아가게. 그 사람은 흉악하기 이를데 없으
니 일단 따라잡으면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먼저 공격을 해야 하
네."
장무기는 멋적은 표정으로 말했다.
"저의 실력으로서 어떻게 그를 당해 낼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강적이라면 대관절 누구죠?"
은야왕은 계속 들려오는 호각소리에 잠시 귀를 기울이더니 고개
를 끄덕이며 말했다.
"과연 생각했던 대로 명교의 홍수, 열화, 후토 삼기가 모두 출
동했군."
장무기는 진지하게 말했다.
"모두 명교의 일맥인데 왜 서로 아웅다웅하며 싸워야 하죠?"
은야왕은 즉시 차가운 표정으로 변해 쏘아붙였다.
"조그만한 녀석이 뭘 안다고 그러느냐? 또 그 못된 버릇이 발작
해 남의 일에 참견하려 드는구나!"
그는 이내 몸을 돌려 오던 길로 달려갔다.
장무기는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며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장무기는 내심 생각을 굴렸다.
'주아가 대악마 위일소의 손아귀에 들어갔으니 큰일이구나. 만
약 목의 피라도 빨려먹는다면 도저히 살아날 수 없을텐데.....'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크게 당황해졌다. 그는 곧 한 모금의 진
기를 끌어올려 있는 힘을 다해 달려나갔다. 위일소는 경공술이
빼어난 인물이지만 주아를 안고 있기 때문에 사막에 발자국을 남
기지 않을 수 없었다. 장무기에게는 다행한 일이었다. 그는 마음
을 굳게 다졌다.
'네가 휴식을 취하는 동안 난 쉬지 않을 것이며 네가 잠자는 동
안에도 난 계속 뒤를 쫓을 것이다. 그렇게만 하면 사흘이내에 따
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뜨거운 뙤약볕 아래 쉬지 않고 사막을 달린다는 것은 결
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저녁 무렵이 되자 입술이 바싹 바싹 마
르고 비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한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다
리가 뻑적지근한 느낌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었다. 수년 동안 축
적된 구양신공이 조금씩 발휘되어 힘을 쓸수록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그는 샘을 찾아 뱃속에 물을 잔뜩 채우고 나서 계속
위일소의 발자국을 따라 질주했다.
어느덧 밤이 깊어갔다. 중천에 떠 있는 초승달의 희뿌연 달빛이
오히려 차갑게 느껴졌다. 장무기는 왠지 으시시한 느낌이 들었
다. 피를 발려 앙상한 피골만 남은 주아의 시체가 곧 눈앞에 나
타날 것만 같은 불길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바로 이때
등 뒤에서 발자국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아 황급히 고개를 둘려보
니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지체할 수 없어 다시 앞을 향해
달려나갔다. 그 즉시 등 뒤에서 발자국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장무기는 이상하게 생각하며 두 번째로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사람의 그림자라곤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자세히 살펴본 결과
사막에 세 사람의 발자국이 찍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하나
는 위일소, 하나는 자기의 발자국임에 분명한데 나머지 하나는
누가 남긴 발자국이란 말인가?! 장무기는 반사적으로 다시 고개
를 돌려 앞쪽을 살펴보니 위일소의 발자국뿐이었다.
그는 곧 상황이 확연해졌다. 누가 자기를 뒤쫓아오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 뒤돌아볼 때마다 아무도 보이지 않으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 아닌가?
장무기는 풀 수 없는 수수께끼를 안고 다시 걸음을 날렸다. 영
락없이 등 뒤에서 그 기분 나쁜 발자국소리가 다시 따라다녔다.
장무기는 견딜 수가 없었다.
"누구나?"
그가 다그치자 뒤에서도 똑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냐?"
"대관절 귀신이냐, 사람이냐?!"
역시 반응이 똑같았다.
"대관절 귀신이냐, 사람이냐?!"
장무기는 계속 앞으로 달리다가 느닷없이 몸을 돌렸다. 이번에
는 한 줄기의 그림자가 연기처럼 어른거리는 것을 보았다. 그는
비로소 상대방이 불가사의할 정도로 빠른 신법을 전개해 이미 자
기의 등 뒤로 돌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기가 몸을 돌린다
면 상대방도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듯 신법을 전개할 게 뻔했다.
장무기는 구태여 조롱을 사서 당할 필요가 없었다.
"왜 나를 따라오는 거요?"
이번에는 상대방이 그의 말투를 그대로 흉내내지 않았다.
"내가 왜 널 따라가겠느냐?"
장무기는 어처구니 없게 웃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소? 그래서 묻는 게 아니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냐? 그래서 너에게 묻는 게 아니냐?"
장무기는 상대방이 자기에게 악의를 품고 있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여지껏 쫓아오는 동안에 언제든지 자기의
목숨을 취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이오?"
"설불득(說不得) 이다."(* 說不得은 말로해서 안 된다는 말로서
즉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
장무기는 그의 말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어째서 말할 수 없다는 거죠?"
"설불득이면 설불득인 줄 알고 말할 수 없다면 말할 수 없는 줄
알지. 꼬치꼬치 따질 게 뭐가 있느냐? 너의 이름은 뭐냐?"
"나는..... 증아우라 하오."
상대방이 다시 물었다.
"오밤중에 무엇 하려고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쏘다니느냐?"
장무기는 이 사람이 절세무공을 지닌 기인이라는 것을 알고 솔
직하게 대답했다.
"청익복왕이 내 친구를 잡아갔기에 구하려 가는 길이오."
"그렇다면 일찌감치 포기해라. 구해 내지 못할 거다."
"어째서....."
"청익복왕의 무공은 너보다 고강해 넌 그의 적수가 못 된다."
"적수가 못 돼도 싸울 생각이오!"
"좋아. 제법 패기만만하군. 내가 구하려는 친구가 혹시 낭자가
아니냐?"
"그렇소. 그걸 어떻게 알았소?"
"낭자가 아니라면 새파랗게 젊은 네가 목숨까지 걸고 구하려 하
겠느냐? 아주 예쁘게 생긴 낭자인가 보지?"
"그 반대로 아주 못 생겼소."
"그 낭자는 무공을 배웠느냐?"
"그렇소. 바로 천응교 은야왕의 딸이며 영사도의 금화파파로부
터 무공을 배웠소."
"그게 사실이라면 더욱 뒤쫓는 걸 포기하는 게 낫겠군. 위일소
가 그녀를 잡았으니 절대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어째서 그렇소?"
상대방은 코웃음을 날렸다.
"너는 아우라는 이름처럼 정말 황소같이 미련하구나. 머리를 쓰
지 않으면 녹슨다는 것을 명심해라. 은야왕과 은천정은 어떤 사
이냐?"
장무기는 시종 그에게 등을 돌린 채 얘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부자지간이 아니오!"
"백미응왕 은천정과 청익복왕 위일소 두 사람 중에 누구의 무공
이 높다고 생각하느냐?"
"모르겠소. 혹시 알고 있으면 가르침을 주시오."
"각자 장점을 지니고 있지. 두 사람 중에 누구의 세력이 큰지는
말할 수 있느냐?"
"백미응왕은 천응교의 교주이니 비교적 세력이 크겠죠."
"맞았다. 그러니 위일소는 은천정의 손녀를 순순히 내주지 않을
것이란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녀를 미끼로 삼아 은천정을 굴복
시키려 할 게 뻔하다."
장무기는 고개를 내둘렀다.
"아미 그의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오. 은야왕 선배님께선 한사
코 자기의 딸을 죽이려 하고 있소."
이번에는 상대방이 장무기의 말에 의문을 느꼈다.
"어째서 그러지?"
장무기는 주아가 아버지의 애첩을 죽이고 생모마저 지쳐 죽게끔
만든 경위를 대충 얘기해 주었다.
상대방은 그의 말을 듣고 나서 혀를 차며 칭찬을 했다.
"훌륭해, 정말 대단해. 잘만 키우면 큰일을 해낼 수 있겠어. 아
주 좋은 재목이야."
"뭐가 좋은 재목이라는 거요?"
"어린 나이에 직접 서모를 죽이고 생모마저 죽게 만든데다가 영
서도에서 금화파파의 고약한 성깔을 모조리 배웠을 테니,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처질 정도로 호감이 가는구나. 그런 훌륭한 재목
이라면 위일소가 제자로 삼으려 할 게 틀림없다."
"어떻게 그것을 장담할 수 있소?"
"위일소는 나의 절친한 친구야. 난 그의 생각을 손금보듯이 잘
알고 있다."
장무기는 눈빛이 변했다.
"맙소사! 그렇다면 큰일났군!"
그는 냅다 위일소의 발자국을 따라 달려갔다. 상대방은 여전히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장무기는 달리면서 물었다.
"왜 자꾸만 날 따라오는 거요?"
"그야 호기심 때문이지. 심심하기도 하고..... 그런데 계속 위
일소를 쫓아갈 생각이냐?"
장무기는 성난 음성으로 말했다.
"주아는 그렇지 않아도 요사스러운 면이 있는데, 위일소를 스승
으로 모셔 다시 사람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로 변한다면 난 도
저히 견딜 수 없을 것이오!"
"너는 주아를 몹시 좋아하는 모양이구나? 왜 그녀에 대해서 그
렇게 관심을 갖느냐?"
장무기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녀를 좋아하는 건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소.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녀가 나의 어머님을 좀 닮았다는 사실이
오."
"음..... 이제보니 너의 어머니는 저팔계처럼 못 생겼구나!"
장무기는 얼른 변명을 했다.
"당치도 않은 말이오! 우리 어머님은 정말 잘 생기셨소."
상대방은 혀를 끌끌 내찼다.
"아깝다, 아까와.....!"
"뭐가 아깝다는 거요?"
"너는 젊은 패기에다 뜨거운 가슴까지 갖고 있어 장래가 기대되
는데, 아깝게도 머지 않아 체내의 피가 몽땅 빨린 송장으로 변할
테니 말이다."
장무기는 그의 말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맞는 말이다. 설령 위일소를 따라붙는다 해도 무슨 수로 주아
를 구한단 말인가? 나까지 개죽음을 당할 게 뻔할 텐데.....'
그는 넌지시 물었다.
"당신이 날 도와줄 수 없겠소?"
"안 된다. 위일소는 나의 절친한 친구라는 것은 고사하고 난 그
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위일소가 당신의 친구라면 잔인한 짓을 못하게끔 왜 타이르지
를 못하죠?"
상대방은 대답에 앞서 한숨부터 푹 내쉬었다.
"아무리 타일러도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위일소 자신도 흡혈귀
노릇을 하고 싶어서 사람의 피를 빨아먹는 게 아니라 어쩔 수 없
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자신인들 어찌 괴롭지 않겠느냐?"
장무기는 납득이 가지 않았다.
"어쩔 수 없기 때문이라뇨?
"위일소는 내공을 연마하다가 주화입마되어 그 후로부터 매번
내력을 끌어올릴 때마다 사람의 피를 빨아먹게 되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온몸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변해 동사할 것이다."
장무기는 잠시 생각을 굴리는 듯 하더니 불쑥 물었다.
"혹시 삼음맥락(三陰脈絡)에 손상을 입은 게 아니오?"
상대방은 의아해 했다.
"아니..... 네가 그것을 어떻게 알았지?"
"단지 추측일 뿐 맞는지 모르겠소?"
"난 불두꺼비를 잡아 그의 병을 치료해 주기 위해 세 번이나 장
백산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세 번 다 헛수고였다. 첫 번째는 그
래도 운이 좋아 불두꺼비를 발견했는데 놓치고 말았다. 두 번째
와 세 번째는 아예 불두꺼비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다. 이번 눈앞
에 닥친 난관만 넘긴다면 다시 장백산으로 들어가 볼 생각이다."
"나도 함께 가고 싶은데 되겠소?"
"음..... 너의 내력은 충분하지만 경공술이 형편없으니..... 그
때 가서 다시 논하기로 하자. 참 그런데 불두꺼비를 잡는일에 돕
겠다고 나서는 이유가 무엇이냐?"
"불두꺼비를 잡는다면 위일소의 병을 치료하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위일소가 다시는 사람의 피를 빨아먹지 않아도 되니 많
은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죠. 아! 선배님, 그가 이
렇게 오랫 동안 달렸으니 내력이 많이 소비되어 어쩌면 주아의
피를 빨아 먹을지도 모르겠군요?"
상대방은 약간 주춤하더니 입을 열었다.
"꼭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 물론 상황이 다급하면 설령 자기의
친딸이라 해도 피를 빨아먹겠지만....."
장무기는 생각할수록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는 죽을 힘을 다해
달려나갔다. 그 때 상대방이 별안간 놀란 음성으로 소리쳤다.
"아니?! 너의 뒤에 있는 게 뭐냐?"
장무기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확인하려 했다. 그 순간 돌연
눈앞이 캄캄해지며 온몸이 커다란 주머니에 씌워져 허공으로 번
쩍 들어올려졌다. 장무기는 당황하여 주머니를 찢으려 했으나 도
저히 불가능했다. 그 주머니는 비단도 아니고 가죽도 아닌 것이
매우 질겼다. 손에 닿는 축감은 포대 같았으나 도무지 찢어지지
가 않았다.
상대방은 들어올렸던 포대를 땅에다 팽개치며 껄껄 웃었다.
"네가 그 포대속을 뚫고 나온다면 네 재주를 진짜 인정해주마."
장무기는 내력을 끌어올려 두 손으로 힘껏 밀었으나 포대자체가
부드럽고 탄력이 있어 도무지 힘을 받지 않았다. 그는 다시 발로
걷어찼으나 마대가 약간 바깥쪽으로 불룩해졌을 뿐 결과는 마찬
가지였다. 그가 제아무리 밀고 당기고 뒹굴어도 헛수고였다.
상대방이 낄낄 웃으며 한 마디 던졌다.
"자, 그만 하면 굴복하겠느냐?"
장무기는 별 수 없었다.
"완전히 두 손 들었소!"
상대방은 포대속에 들어 있는 장무기의 엉덩이를 걷어차며 또
낄낄 웃었다.
"이놈아, 얌전히 내 건곤일기대(乾坤一氣袋) 속에 있어라. 널
데리고 좋은 데로 가겠다. 네가 쓸데없이 입을 열어 다른 사람한
테 발각되는 날엔 내 능력으로 널 살리진 못할 것이다."
"대관절 날 어디로 데려갈 작정입니까?"
"더 이상 묻지 말아라. 넌 내 건곤일기대 속에 들어 있으니 목
숨을 나한테 내준 거나 다름이 없다. 얌전히 입 다물고 있으면
절대 너한테 손해볼 게 없다."
장무기는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더 이상 버둥거
리지 않았다.
상대방은 제법 우쭐대며 말했다.
"네가 내 포대 속에 들어간 것도 따지고 보면 사실은 복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포대를 번쩍 어깨에 짊어지더니 신법을 전개해 달리기 시
작했다.
장무기는 자신보다도 주아가 더 염려되었다.
"주아는 어떻게 되는 거죠?"
"네가 어떻게 알겠느냐? 다시 잔소리를 늘어놓는다면 당장 포대
에서 꺼내 팽개쳐 버리겠다!"
장무기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포대 속에서 꺼내 팽개쳐 주기만 한다면 오죽 좋으련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생각일 뿐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상
대방의 달리는 속도는 갈수록 빨라졌다. 얼마나 달렸을까. 장무
기의 느낌으로 몇 시진이 지난 것 같았다. 포대안은 찌는 듯이
무더웠다. 햇볕이 내리쬐는 대낮이려니 생각했다. 아마도 산 위
로 오르는 듯 싶었다. 산에 오르는 데만 다시 두 시진 가량이 경
과되었다. 한낮의 무더위와는 반대로 장무기는 차츰 추위를 느끼
기 시작했다. 아직 눈이 녹지 않은 높은 산 위에 오른 것이라 추
측되었다. 순간 그의 몸이 갑자기 허공으로 붕 날아올랐다. 장무
기는 흠칫 놀라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의 몸이 곧 사뿐이 착지했다. 그는 상대방이 절벽 같은 곳을
뛰어오른 것이라 짐작했다. 피부로 느끼는 차가운 기운으로 미루
어 주위엔 필시 빙설이 깔려 미끄러울 텐데, 만약 상대방이 자기
를 짊어진 체 약간만 실수하여 발을 헛딛는다면 영락없이 분신쇄
골될 게 아니겠는가? 생각만 해도 오싹했다. 상대방은 그의 노파
심 따위는 아랑곳 않고 계속 몸을 날렸다. 장무기는 포대 안에서
바깥 상황을 전혀 알 수 없었다. 단지 지세가 갑자기 높아졌다가
갑자기 낮아지며 그런 상황이 부단히 이어지고 있다는 것만 추측
할 수 있을 뿐이었다.
장무기는 그저 갑갑하기만 했다. 상대방은 대관절 자기를 어디
로 데려가는 것일까?
----- 제 4 권 1 장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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